삼국지1권
김홍신
제 1권 도원에 피는 봄
날뛰는 황건적 누상촌의 효자 유비
예로부터 천하 대세란 나눠진 지 오래 되면 합해지고 합하면 반드시 나누어지
게 마련이라고 한다.
850여 년을 이어 내려온 주나라의 국운이 기울면서 드넓은 대륙에는 황사의 전
운이 어둡게 휘몰아 쳤다.천하는 마침내 바둑판처럼 1백여의 크고 작은 나라로
갈라져 이전투구하더닌 차츰 일곱나라 -진.초.연.제.조.위.한-의 세력 다툼으로 압
축되고 있었다.그 일곱나라 가운데 가장 강력한 진나라가 천하를 통일한 것은
기원전 221년 ,그러나 스스로를 황제라 일컬으며 절대 권력으로 군림했던 진시
황이 죽자,진나라도 초와 한으로 나뉘어 다투다가 한의 유방에게 병합되고 말았
다.굼실굼실 유구히 흐르는 황하를 보고 덧없이 흐러가는 세월을 유수와 같다고
했던가!어느덧 한 고조 유방이 한나라를 일으킨지도 2백여년이 흘러갔다.그사이
한나라는 차츰 쇠락의 길을 걷더니 결국 왕망에 의해 무너지고 말았다.
왕망은 잠깐 천하를 얻어 나라이름을 신이라 했으나, 처음부터 강압 정치로 백
성들을 억눌렀기 때문에 민심을 얻지 못했다.나라 구석구석에서 반란이 끊일 새
없이 일어나더니 ,결굴 신나라는 한 고조 유방의 9대손인 유수에게 나라를 넘겨
주고 말았다.유수는 한나라의 황통을 이어 새롭게 황제의 자리에 올랐다.그가 마
로 후한의 초대 황제인 광무제다.
광무제는 백성들에게 조세를 감면해 주고 형을 가벽게 하는 등의 선행을 베풀어
민심을 끌어들임으로써 나라를 중흥시켰다.그러나 후한의 가장 큰 골칫거리는
외척들이 득세하여 권세를 희롱하는 것이었다.그들은 후한 초기부터 고개를 들
기 시작하더니 몇대를 거치면서 권력을 맘대로 휘드르며 정사를 어지럽혔다.이
대로 간다면 황실은 그야말로 실권없는 허수아비에 불과할 것이 뻔했다.
황제는 궁리 끝에 외척을 몰아내기 위해서는 자신의 직속이라고 할 수 있는 궁
내관의 힘을 빌려야 한다고 생각했다.궁내관은 대다수가 내시라고 하는 환관들
이었다.이 환관이란 본디 궁녀들을 감독 관리하는 직무로서 거세된 자들이었다.
그러나 권력의 중심부에 있었기 때문에 과거 춘추 전국시대부터 조정에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했으며 광무제 때부터는 정사어ㅔ도 관여하고 있었다.
황제는 자기의 결심을 항상 환관의 우두머리인 조절과 의논했다.조절을 제 9대
황제인 순제가 황세자이던 때에 같이 공부를 한 인연으로 11대 환제에 이르기까
지 3제를 섬겨 오고 있었다.더구나 환제가 황제의 자리에 오르는 데에도 남달리
고이 컸다.그런 조절이고 보니 황제로서도 믿을 수 있는 인물이었다.
조절도 외척의 득세를 눈엣가시처럼 여기고 있던 터였다.황제의 의중을 알게 된
조절은 곧 선초.조관등을 비롯한 다섯 명의 환관들을 계책에 끌여들여 외척을
몰아 내는 데 성공했다.세상은 금세 환관들의 세상으로 변하고 말았다.공적을 세
운 환관들은 열후에 봉해졌고 ,조정의 고과에서부터 지방관에 이르기까지 환관
가 연줄이 닿는 사람들로 채워졌다.
모름지기 권력이란 하나의 집단이 장기간 독점하게 되면 부정과 부패가 세균처
럼 만연되게 마련이다.특히 아무런 비전도 없는 모리배들이 자기의 욕심만을 위
해 권력을 휘두를 때는 더욱 악랄해진다.환관들은 성 불능자이면서도 양가의 부
녀자들을 마음대로 빼앗아 처첩으로 삼는 것을 예사로 여겼을 뿐만아니라 먹고
살 만한 백성에게는 터무니없는 죄를 씌워 그 재산을 빼앗곤 했다.
이토록 환관들의 행패가 갈수록 극심해지자 그래도 양심 있는 관료나 태학생들
이 불만을 터뜨리기 시작했다.환관들은 점점 더 횡포해져 불만자들에게 혹독한
탄압을 가하거나 가차없이 처형을 자행했다.그러다 보니 누구 하나 바른말을 하
기는커녕 숨마저 제대로 쉴 수 없는 지겨이이었다.
제 세상을 만난 환관들의 사치와 낭비는 극에 달했다.그로 인해 궁중의 제정은
말이 아니었고 매관 매직이 온 천하에 성행했다.늑대를 피하려다 범에게 무린
꼴이었다.원인을 따져 보면 어진 신하를 가두어 버리고 환관들ㅇ르 총애한 환제
에게 있었다.마침내 환제가 죽고 영제가 즉위했다.대장군 두무와 태부 진번이 여
제를 보좌하며 나름대로 정치를 ㄹ바로잡으려고 노력했지만 조절의 거대해진 세
력을 꺾을 수는 없었다.참다못해 두무와 진번은 조절을 제거하기 위한 계교를
꾸몄다그러나 그 계교가 사전에 누설되는 바람에 오히려 그들은 환관들에게 죽
임을 당하고 말았다.뿐만 아니라 환관들은 두 번의 당고를 일으켜 사족들까지도
조정에서 쫓아 냈다.
영제는 이름난 황제였지 완전히 환관들의 꼭두각시로 전락했다.환관들은 더욱
방자해져 매관 매직으로 긁어모은 재물을 별궁 서원의 만금당에 쌓아두고 주지
육림의 세월을 보냈다.일이 이쯤되자 관리들의 악랄한 수탈에 지친 백성들의 생
활은 날이 갈수록 피폐해졌다.거기에다 전염병까지 창궐했다.병들어 죽거나 굶어
죽은 기체가 길가에 즐비했지만 누구하나 거들떠보지도 않았다.민심은 천심이라
고 했던가 환관들의 학정에 하늘마저 노한 듯 천재지변과 괴변이 ㄲㄴㅎ일 새
없었다.
건녕 2년 ,지금으로부처 1800여 년 전 4월이었다.영제가 온덕전에 나아가 옥좌
에 앉으려 할 때였다.별안간 회오리바람이 휘몰아치더니 커다란 푸른 구렁이 한
마리가 천장에서 옥좌로 떨어졌다.이를 본 영제는 소스라쳐 정신을 잃고 말았다.
곁에 있던 신하들이 허둥대며 영제를 부축하여 내전으로 들어갔고 늘어섰던 문
무백관 궁녀들은 혼비백산하여 달아났다.밖에 있던 무관들이 이 소동에 놀라 황
망히 달려와 푸른 뱀을 잡으려 하였으나 어느 겨를에 그 뱀은 사라지고 없었다.
뒤이어 뇌성벽력이 천지를 뒤흔들며 벼락을 때리더니 태풍이 몰아쳤다.그리고
비와 우박이 억수같이 쏟아지면서 수백체의 집들이 한꺼번에 무너져내렸다.그로
부처 2녀이 지난 2월에는 또 서울인 낙야에 심한 지진이 일어났으며 바다에는
해일이 일어 그 부군의 수많은 백성들이 파도에 휩ㅆ르려 목숨을 잃기도 햇다.
광화 원년에는 암탉이 수탉으로 면했으며 ,6월에는 10여 길이나 되는 검은 구름
이 온덕전을 어둡게 휩쌌다.7월에는 푸른 무지개가 궁녀들이 기거하는 옥당에까
지 뻗쳤으며 ,오원이란 곳에서는 산이 무너져내리기도 했다.
이처럼 나라안에 괴변이 끊이지 않자 영제는 근심이 태산 같았다.영제는 문무백
관을 모으고 이 같은 괴변이 일어나는 까닭을 물었다.신하 중에 글 잘하기로 이
름난 의랑(황제의 고문관) 채옹이 좋은 기회라 생가하고 붓을 들어 상소문을 올
렸다.구렁이가 옥좌에 떨어지고 암탉이 수탉으로 변하는 등의 변괴는 궁녀와 환
관들이 주제넘게 정사에 참여하여 나라를 어지럽히므로 이로 인해 나라가 망할
것을 계시한 것이라며,그러한 무리들을 즉시 처단해야 한다는 내용이었다.
이 상소문을 읽고 난 영제의 입에서 자기도 모른 사이에 긴 탄식이 흘러 나왔
다.
황제의 행동에서 심상치 않음을 느낀 조절은 황제 몰래 그 상소문을 훔쳐보고는
소스라치게 놀랐다.그는 즉시 무리들을 불러 채옹을 모함하는 계략을 꾸몄다.
"폐하께 고하옵나이다.채옹리란 자는 진번에게 뇌물을 주고 벼슬을 산 자로서 역
적들과 한패였사옵나이다."
환관들이 번갈아 가며 채옹을 모함하자 귀가 엷은 영제는 결국 그들의 말을 믿
게 되었다.
"채옹을 삭탈 관직하여 당장 내쫓아라."
마침내 영제의 입에서 명이 떨어졌다.파직당한 채옹은 시골로 쫓겨나고 말았다.
그일이 있은 후로 환관들은 더욱 극성스럽게 국권을 농락했다.영제는 조절을 위
시한 장양.조충.봉서.단규.후남.건석.정광.하운.곽승등 열명의 환관들에게 둘러싸인
허수아비에 불가했다.세상사람들은 이 열 명의 환관들을 가리켜 '십상시'라 불렀
으며 그들을 마치 전갈을 보듯 두려워했다.영제는 심지어 가장 나이 많은 장양
을 '아부'라고까지 부를 지경이었다.
조정이 이꼴이니 나라사정인들 어떠했겠는가?백성들은 도탄에 빠져 허덕이고 ,
곳곳에서는 도적의 무리가 날뛰었다.
이 무렵 장가.장보.장량이라는 삼형제가 거록군에 살고 있었다.장각은 한때 관
리가 되고자 과거까지 보았으나 낙방한 후 산에서 약초를 캐며 살아가고 있었
다.어느날 장각이 약초를 캐기 위해 산속을 헤매고 있을 때였다.백발노인 한 사
람이 홀연히 나타났다.그 노인의 눈에는 푸른빛의 광채가 서렸고 얼굴은 미소년
처럼 ㅂ었으며 손에는 긴 지팡이를 짚고 있었다.
노인은 장각을 불러 동굴 속으로 데려가더니 책 세권을 주며 말했다.
"이 책은 [태평요술]이라는 것으로 하늘이 내린 천서이다.이 책을 잘 읽어 하늘
의 뜻을 새겨 세상을 바로잡아 도탄에 빠진 백성들을 널리 구하도록 하라.만약
사사로운 욕심에 사로잡혀 하늘의 뜻을 그르친다면 큰 벌을 내릴 것이니 명심하
도록 하여라."
장각은 황망한 중에 노인 앞에 엎드렸다.
"어르신의 존송 대며응ㄴ 어찌 되시오니까?"
장각의 목소리는 사뭇 떨렸다.
"나는 남화노선인 이니라."
책을 받은 장각이 다시 엎드려 공손히 절을 하고 얼굴을 드니 노인은 바람같이
사라지고 보이지 않았다.장각은 천서를 얻은 뒤 밤잦을 가리지 안혹 열심히 책
을 읽었다.천서에는 비바람을 마음대로 부리는 신통력과 사람의 병을 고치고 부
적을 만드는 방법등 온갖 조화술의 비법이 적혀 있었다.장각이 책과 씨름한지 1
년이 지났다.마침내 책속에 있는 내용을 어느 정도 몸에 익힐 수 있게 된 장각
은 스스로를 태평도인 이라 칭했다.태평도는 원시 도교 태평청령도의 일파였는
데 장각은 스스로그 교조가 된 것이었다.
중평 원년(A.D.184) 정월. 그 무렵 전국 각지에 전염병이 창궐했다.장각은 병자
들에게 부수를 나누어 주어 병을 낫게 했다.그리고 그들에게 자기를 '대현양사'
라고 존칭해 부르게 했다.신통력을 가진 장각의 소문은 삽시간에 고을과 고을로
퍼져 나갔다.그러자 그를 따르는 제자가 금방 수백명에 이르렀다.그는 제자들을
거느리고 여러 고을을 돌며 병을 고쳐주었다.제자들의 수도 눈덩이처럼 불어나
1년뒤에는 얼추 수만명이 되었다.제자들이 많아지고 백성들이 그를 따르자 장각
의 생각은 차츰 달라지기 시작하였다.부적이나 만들어 주고 기도나 해 주는 정
도의 고리타분한 수단만으로는 백성들을 근본적으로 구제할 수 없다고 생각한
것이다.그보다는 천하를 '태평도'가 목적하는 세상으로 만들자는 야심이 싹트기
시작했다.
장각은 그 야망을 실현하기 위하여 먼저 각 지방을 나눠 36방으로 만들고 대방
에는 1만여명 ,소방에는 6,7천여명의 제자를 두었으며 ,각 방에는 거사라는 우두
머리를 세워 지도자로 삼았다.그런 후에 장각으 ㄴ전국에 있는 제자들에게 참요
를 널리 퍼뜨리게 했다.
푸른 하늘은 이미 죽었으니
바야흐로 누런 세상이 이루어지리.
갑자년에 이르면
천하는 좋아지리.
그 노래는 순식간에 퍼져 나갔다.
여기에서 푸른 하늘의 죽음이란 임금의 옥좌에 떨어진 푸른 뱀이 죽음을 빗댄
것이었고, 누런 세상이 이루어진다는 것은 앞으로황건을 쓴 장각 자신이 일어나
나라를 세운다는 것을 의미하고 있었다.그래서 갑자년에 이르면 더한 나위 없이
살기 좋은 세상이 된다는 것이었다.장각의 무리들은 집집마다 대문에 휜 흙으로
'갑자'라는 두 글자를 쓰도록 했다.또한 ,중국의 여덟 고을 청주.유주.서주.기주.형
주.양주.연주.예주의 모든 집들은 '애현양사 장각'이라는 명패를 달고 장각을 하
늘처럼 받들어 모시라고 했다.
장가근 자기의 야망을 이루기 위해서는 조정에도 내통할 자가 있어야 한다고 생
각했다.그래서 부하인 마원의를 서울인 낙양으로 보내 금과 비단을 환관인 봉서
에게 뇌물로 바쳐 그를 자기네 편으로 끌어들였다.그런 후에 장각은 두 아우를
불렀다.
"얻기 어려운 것이 바로 천하의 민심이다.그러나 이제 천하의 민심이 나를 따르
니 이 기회에 천하를 얻지 못하면 어찌 애석한 일이 아니겠는가.우리 형제가 군
사를 일으킬 때다."
"지당한 말씀입니다.하늘이 준 이 기회를 놓쳐서는 안 됩니다."
아우들은 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장각은 황색기를 깃발로 정하고 거사에 따른 만반의 준비를 해나갔다.그리고 제
자인 당주를 은밀히 불러 조정에서 자기들과 내통하기로 약속된 환관 봉서에게
거사일을 알리는 편지를 주어 떠나보냈다.그러나 낙양으로 가는 도중에 당주의
마음은 변하고 말았다.아무래도 장각의 거사가 성공할 것 같지 않았던 것이다.그
렇게 되면 자신도 반역으로 몰려 죽을 것은 뻔했다.그럴 바에야 이 반역 모의를
고발하여 두둑이 받게 될 상금으로 팔자나 고치자는 속셈이었다.당주는 곧바로
금부에 들어가 장각의 반역을 고발하고 말았다.
"장각 형제들이 마원의란 자를 시켜 내시 봉서와 내통한 후 군사를 일으켜 반역
을 도모하려 하옵니다."
이 말을 전해 들은 영제는 소스라치게 놀라 대장군 하진에게 즉시 봉서를 잡아
들여 문초토록 했다.결국 반역의 전모가 드러났고 낙양에 사는 장각의 무리 1천
여명도 봉서와 함께 참형을 당했다.장각은 거사 계획이 탄로나자 급히 서둘러 2
월에 군사를 일으켰다.장각은 자신을 천공장군,바로 아래 아우 장보를 지공장군,
다음 아우 장량을 인공장군으로 삼아 군대를 편성했다.
이제 한나라는 그 운이 다하였다.드디어 하늘에서 내린 성인이 나오시니 모든
백성들은 하늘의 명에 순응하고 복종하여 바른길을 좇으라.그리하면 태평세월을
누리리라.
장각은 이러한 격문을 방방고곡에 붙여 백성들을 선동했다.그렇지 않아도 무능
과 부패로 썩어빠진 조종과 수탈을 일삼는 벼슬아치들에 대한 원환이 머리끝까
지 치밀었던 백성들이었다.그들에게 장각의 선동은 메마른 땅을 적시는 단비 같
았다.그 악귀와 같은 벼슬아치들을 쳐없애고 모두가 잘 살게 되는 채평시대를
열겠다니 이 얼마나 신명나는 일이겠는가.그래서 백성들은 너나 할 것 없이 멀
리에 누런 수건을 두르고 무작정 장각의 황색 깃발아래 모여들었다.
머리에 두른 누런 수건은 푸른 하늘(한나라)를 멸망시키고 새로 누런 하늘을 연
다는 것을 의미했다.장각의 편이 아닌 자들은 이들을 '황건적'이라 불렀다.
날이 갈수록 장각 편에 가담하는 사람이 늘어 그 수가 곧 4,50만을 에아렸다.
황건적의 세력이 이토록 커지자 사기가 떨어진 관군들은 아예 맞서 싸우려고도
하지 않았다.한번 기세가 꺾이기 시작한 관군은 황건적이 공격해 오는 곳마다
제대로 한번 싸워 보지도 못하고 풍비박산이 되었다.장각의 무리들은 각지의 관
청을 습격하여 지방 관속들을 죽이 후 곡창을 열고 양곡을 강탈하여 주린 배를
채웠다. 관군들은 이제 황건적이 온다는 말만 들어도 도망치기에 바빴다.그러자
조종도 서울인 낙양을 버리고 천도하자는 의견이 분분했다. 그리고 각 처에 조
칙을 내려 황건적 도당을 쳐서 공을 세우도록 격려하기에 급급했다. 대장군 하
진은 우선 급한대로 전국에 조칙을 내려 적도의 세력을 막아 공을 세우게 한후,
가장 신임하는 중랑장 노식,황보숭,주전에게 명하여 세곳으로 나누어 장각을 에
워싸고 공격하도록 하였다.
그 무렵 장각의 한 무리가 유주땅을 공격해 오고 있었다. 그 보고를 듣고 놀란
태수 유언은 추정을 불러 대책을 물렀다. 유언은 강하의 경릉사람으로 한나라의
노공왕의 후손이었다.
"장각이 유주를 공격해오니 어찌하면 좋겠는가?"
유언의 물음에 추정은 한동안 골똘히 생각하다가 입을 열었다.
"얼마 안 되는 우리의 군사를 가지고 황건적의 무리를 맞아 싸우기는 힘듭니다.
그러니 의병을 모집하여 싸우는 도리밖에 없을 듯합니다."
유언은 추정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즉시 추정의 진언에 따라 경내 곳
곳에 방문을 붙이고 널리 군사를 모집하게 하였다.
유 태수가 내걸게 한 방문은 탁군의 탁현에도 나붙었다. 사람들이 담벽에 붙은
방문을 보며 웅성거렸다.
그 가운데 한 젊은이가 방문을 유심히 지켜보고 있었다. 큰 키는 8척이요, 얼굴
은 관옥처럼 흰데 길게 찢어진 눈은 자신의 귀를 볼 수 있고 붉은 입술은 기름
을 바른 듯 윤이 났다. 팔이 길어 무릎에 닿을 듯 했으며 유난히 큰 귀는 귓볼
이 턱에까지 쳐져 있었다.
그는 성품이 온화한데다 과묵하여 좀처럼 속마음을 얼굴에 드러내지 않았다. 평
소 글읽기를 즐겨하지 않았으나 마음 속에는 크 뜻을 품고 있어 마을의 호걸들
과 사귀기를 좋아했다.
그 젊은이가 바로 성은 유요 ,이름은 비,자는 현덕이란 사람이었다. 유비는 중산
정왕 유승의 핏줄로 경제의 현손이었다.유비가 탁현에 갈게 된 것은 그의 선대
인 유승의 아들 유정이 한 무제때 이곳 탁현의 탁록정후의 벼슬을 제수받았기
때문이었다. 그뒤 유정은 천작게 탈당하게 되자 그 후손은 탁현에 자리잡고 살
게 되었다. 유지의 조분는 유웅,아버지는 유홍이다. 유홍은 평소 효성이 지극하
고 글익기를 즐겨하며 성품이 어질어 효렴에 뽑혀 벼슬을 지냈으나 일찍 세상을
떠났다. 어려서 아버지를 여읜 유비는 가세가 기울자 짚신을 삼고 돗자리를 짜
생계를 꾸려가야 했다. 살림은 이처럼 궁색했으나 홀어머니에 대한 효성은 지극
하여 소문이 자자할 정도였다. 유비의 집은 탁현의 투ㅏㅇ촌에 있었다. 집 앞에
는 다섯 길이난 되는 커다란 뽕나무 한 그루가 하늘을 찌를 듯이 높이 솟아 있
었다. 이 뽕나무를 멀리서 보년 마치 임금의 행차 때 수레 위에 씌우는 거개 같
았다. 언젠가 유비의 집 앞을 지나던 가상(집 모양으로 운수를 보는 사람)이 그
뽕나무를 보고는 걸음을 멈췄다.
"이 집에서 장차 귀인이 태어나리라."
가상의 입에서 자기도 모른 사이에 흘러 나온 감탄의 소리였다. 마을 노인들은
이 뽕나무가 무성할 때는 푸른 다락처럼 보인다고 하여 마을 이름이 '누상촌'으
로 불리워지게 되었다고 했다. 유비가 어렸을 때 ,그 뽕나무 아래서 놀던 유비가
천자의 거개 같은 뽕나무를 바라보며 소리쳤다.
"나는 장차 천자가 되어 이 나무 같은 수레를 탈 테다."
어린 아이답지 않은 엉뚱한 소리에 어른들은 유비를 꾸짖었으나 종숙뻘 되는 유
원만은 그 말을 그냥 들어넘기지 않았다.
'저 아이는 보통 아이가 아니다. 장차 큰 인물이 될 것이다.'
이렇게 생각한 유원은 가난한 유비의 집에 양식을 보내 주기도 하며 항상 돌보
아 주는 것을 잊지 않았다. 윱의 나이 열다섯이 되자 숙부 유원은 자기 아들 유
덕연과 문무를 겸한 이름난 선비인 노식.정현에게 학문을 배울 수 있는 길을 터
주었다. 노싯의 자는 자간이라 하며 탁현 출신이었다. 그는 어려서부터 당대의
석학인 마융의 문하에서 훗날 역시 문명을 떨치던 정현 등과 수학했으며 ,후에
구강태수가 되어 남쪽 오랑캐의 난을 평정하기도 했다.
유비는 이 두 스승의 문하에서 공손찬 같은 훗날의 영웅을 학형으로 가깝게 사
귈 수 있었다. 탁현에 유주태수 유언의 방이 나붙은 겉은 유비의 나이 스물여덟
의 건장한 청년이 되었을 때였다. 유비는 황건의 무리를 토벌하기 위해 널리 의
병을 모집한다는 방을 유심히 노려보다 어지러운 천하를 생각하며 자신도 모르
게 탄식했다.
그때였다. 문득 등 뒤에서 유비를 꾸짖는 우렁찬 목소리가 들려 왔다.
"대장부가 나라를 위해 몸을 던질 생각은 하지 않고 어째서 한숨만 쉬고 있다는
말이오?"
그 소리에 놀라 뒤를 돌아다보았다. 그 사람을 보니 키는 8척이나 되어 보이는
장한이었다. 시커먼 수염이 사방으로 뻗쳐 있는 제비턱에 머리는 표범 같은데
부릅뜬 고리눈에 목소리는 우레 같고, 우람한 체구에서 내뿜는 기상이 마치 내
닫는 말고 같은 대장부가 태산처럼 우뚝 서 있었다. 유비는 그의 풍모가 범상치
않음을 보고 목소리를 가다듬어 물었다.
"존성 대명은 어찌 되시는지요?"
"내 성은 장이요, 이름은 비, 자는 익덕이라 하오. 누대에 걸쳐 탁군에 살면서 약
간의 전답을 가지고 술과 함께 돼지를 잡아 팔고 있소이다. 그러나 그까짓 장사
보다 천하의 호걸과 사귀기를 더 좋아하오. 그런데 방금 그애가 방문을 보고 한
숨을 쉬며 한탄을 하기에 한 마디 했소이다."
유비이 물음이 채 끝나기도 전에 마치 질그릇이 깨지는 듯한 거친 목소리로 서
슴없이 대답했다.
"나는 본시 한나라 황실의 종친으로서 성은 유, 이름은 비라 하오. 이제 황건적
이 난을 일으켜 백성을 괴롭히고 있는데 그 역도의 무리들을 무찔러 백성을 구
해야 한다는 생각으 ㄴ간절하나 제게 그럴 힘이 없으니 답답한 마음에 한숨을
쉰 것이오."
유비가 공손히 손을 모아 예를 갖춰 말했다. 그 목소리는 부드러우면서도 위엄
이 깔려 있었다.
"그러시오? 그렇다면 나에게 약간의 재물이 있으니 우리가 이 고을에서 뜻을 함
께할 의인들을 모아 대사를 도모해 보는 것이 어떻소?"
유비는 그의 말소리가 투박하고 거칠었으나 솔직담백하고 가식이 없다는 걸 알
았다. 그래서 유비는 주위를 둘러보며 말했다.
"그렇다면 자리를 옮겨 주막에라도 가서 얘기를 계속하는 것이 어떻겠소?"
"바로 내가 바라던 바요."
그리하여 두 사람은 가까운 마을 주막으로 들어가 술과 고기를 청하고 자리에
마주 앉았다. 두 사람이 술과 고기가 나오자 술을 잔에 따라 권하고 있을 무렵
이었다. 주막집 앞에 구레가 구르는 소리가 멎더니 한 사나이가 성큼성큼 주막
안로 들어왔다.
"주인장 술 한 동이 빨리 주시오. 얼른 한 잔 마시고 초모에 응하러 가야겠소."
그 사나이가 우렁찬 목소리로 술을 청했다.
"아니 관 공이 아니시오? 그렇지 않아도 내 관 공으 ㄹ찾아갈 작정이었소."
그 사나이를 본 유비 앞자리의 장비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반가운 억굴로 달
려갔다.
"아니 장공이 아니시오? 여기는 어쩐 일이오.?"
그 사나이는 놀라면서도 반가운 얼굴이었다. 장비가 그의 소매를 있끌어 유비의
맞은편 자리를 권했다. 유비가 그 사람을 보니, 길쭉한 얼굴이 무르익은 대춧빛
에다 삼각 수염이 길게 늘어져 가슴을 덮고 있었는데 그 가슴이 들판처럼 넓었
다. 눈은 봉의 눈에 짙은 눈썹에다 입술은 붉게 윤이 나는데 키가 9척이나 되어
보이는 위풍이 늘름한 체구였다.
범상치 않은 그 풍모를 보고 유비는 몸을 일으켜 자리를 권하며 자신을 소개한
후에 성명을 물었다.
"내 성은 관이라 하며 이름은 우, 자는 수장이었으나 지금은 운장이라 고쳤소.
원래 하동 혜량태생이나 그곳 토호놈이 자기 세력만 믿고 양민을 괴롭히기에 때
려 눕히고 도망쳐 4,5년을 강호를 떠돌다 도적 떼들을 치기 위한 의병을 모집한
다기에 응하러 왔소."
관우의 말에 유비가 정중하게 답례를 보내며 말을 받았다.
"저는 오랫동안 누상촌에서 돗자리를 팔며 살아 온 한낱 필부나 일찍부터 관 공
의 존성 대명을 들은 바 있습니다. 오늘 이렇게 뵙게 되니 실로 큰 영광입니다."
관우도 부드러우면서 범할 수 없는 위엄이 서린 듯한 유비에게 엄숙한 얼굴로
예를 갖추었다.
두사람의 인사가 그토록 정겹자 마음속으로 기뻐한 건 장비였다. 기실 장비는
유비와 술자리를 벌여 그의 속 마음을 떠본 후에 뒷날 관우와 자리를 함께할 심
산이었다. 그러나 뜻밖에도 관우가 주막에 나타나자 그를 자리에 청해 앉혔던
것이다.
관우는 원래 혜량현이 고향이었으나 강호를 떠돌다 이곳 탁현에서 몸을 숨기고
있은 것은 그가 말한 바대로 고향에서 그곳 벼슬아치를 죽여 봔부의 쫓김을 받
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어려서 공.맹학을 배워 고서에도 밝았으나, 본디 무관의
가문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무예에 대한 조예가 깊었다. 글과 무예를 통한 것도
그렇지만 무엇보다 그의 장대하고 늠름한 풍모가 보는 사람마다 감탄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들었다.
장비가 관우를 만나게 된 것은 관우가 각지를 떠돌다 이곳 탁현 가까운 해량촌
에서 어린 아이들에게 글을 가르치며 머물게 된 이후였다.
어느 날, 산돼지 사냥을 나갔던 장비가 인근 산 속을 헤매며 산돼지 한 마리를
잡아 어깨에 들러메고 들판을 걸어오고 있을 때였다.
"이놈 게 섰거라!"
불현 듯 맞은편 산에서 머리에 누런 수건을 동여맨 무리 6,70여 명이 달려와 장
비를 가로막았다. 그들은 두말 할 것도 없이 녹림패거리로서 지나 다니는 행인
들에게 약탈을 일삼는 도적 떼들이었다.
"네 이놈, 여기가 어딘 줄 알고 삼히 사냥을 하고 다니느냐? 그 산돼지를 이리
내놓지 못할까?"
패거리 중에 한 놈이 장비를 향해 창을 들이대며 소리쳤다. 그들이 황건적임을
알자 장비의 눈꼬리가 치켜 올라가더니 눈빛이 무섭게 번뜩이기 시작했다.
"뭣이 어쩌고 어째? 산돼지를 내놓으라고? 이 들쥐 같은 놈들아. 오냐 잘 만났
다. 내 오늘 네놈들 목을 비틀어 줄 테다."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장비는 등에 멘 산돼지를 창을 겨눈 자를 향해 냅다 패
대기쳤다. 그와 동시에 주위를 둘러싼 황건적들을 바위 같은 주먹으로 후려치기
시작했다. 그것도 모자라 장비는 황건적의 창 하나를 빼앗더니 그 창으로 마치
멍석에 널린 콩짚에 도리깨질하듯 황건적들을 두들겨 팼다. 여기저기서 울부짖
는 소리와 비명 소리가 일었다. 황건적들은 일이 이쯤되자 죽기로 작정학 덤벼
들었다. 그때였다. 저쪽 들판에서 인마일체가 되어 뭉게뭉게 먼지를 일으키며 나
는 듯이 달려오는 사람이 있었다.
"양민을 괴롭히는 도적의 무리들아, 이 칼을 받아라!"
들판을 쩌렁쩌렁 울리는 우렁찬 목소리였다. 삽시간에 장비 쪽으로 달려온 사람
은 길이가 일장이나 되고, 무게가 다섯관이나 됨직한 청룡도를 치켜들고 있었다.
그의 손에 쥐어진 청룡도가 위로 번뜩이는가 싶더니 한군간에 7,8명이나 되는
황건적의 몸은 두 동강이 나고 말았다. 실로 무서운 기세요, 번개같이 날랜 솜씨
였다. 장비는 이때 손에 쥐었던 창이 부러져나가자 다시 맨주먹으로 닥치는 대
로 도적들을 후려치고 있었다. 청룡도에 목이 달아난 자가 무려 30여명을 헤아
렸다. 처음에는 상대가 한 사람뿐이라고 깔보고 덤볐던 황건적들이었다. 그러나
뜻밖의 상대가 나타나 순식간에 풀을 베듯 그들을 휩쓸자 남은 네댓놈이 꽁무니
를 뺏다.
"이 놈들 게 서지 못할까?"
큰 복소리로 호령하며 말을 달려온 장부가 한달음에 그들을 뒤쫓아 베어 버렸
다. 순식간에 70여명이나 되던 황건적이 모조리 죽고 말았다. 주위에는 목이 부
러지거나 피를 토하고 나자빠진 시체, 목이 떨어진 시체가 즐비했다. 그때서야
장비는 불의에 나타난 사람을 시덥지 않은 눈으로 바라보았다. 붉은 얼굴에 두
자길이의 수염을 휘날리며 키는 9척이나 되어 보이는 기골이 장대하고 늠름한
호걸이었다. 장비가 그를 보며 퉁명스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당신은 뉘신데 남의 싸움에 끼여들었소?"
말 위의 사람도 내려 장비 앞으로 걸어오며 대답했다.
"나는 하동 해량촌에 사는 관우, 자는 운장이라는 사람이오. 누구신지 모르겠으
나 혼자서 그 많은 도적의 무리를 때려 잡으시는 솜씨는 정말 통쾌했소. 평소
황건적은 한 놈도 남기지 않고 없애야 한다고 여기던 터라 주제넘게 그만 싸움
에 끼여들었소. 너그러운 마음으로 양해해 주시기 바라오."
관우가 정중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러자 장비가 갑자기 얼굴에 기쁜 빛을 띠
며 말했다.
"아니? 선생이 바로 관운장이시오? 그 동안 이름은 많이 들었습니다. 그렇지 않
아도 한번 찾아가 볼 참이었는데, 이렇게 만나게 되어 반갑소이다. 나의 이름은
장비, 자는 익덕이오."
장비의 말이 세련되지 못하고 투박했으나 솔직담백하고 가식이 없으며 뜻이 서
로 같으므로 관우도 빙그레 웃었다.
"장 공은 나를 어떻게 알고 만나려고 하셨소?"
관우가 다시 장비를 살펴보며 물었다.
황건적 30여 명을 맨손으로 때려 잡은 괴력, 8척의 키에 가슴이 들판처럼 넓은
체격, 수염이 모질게 생긴 표범같은 얼굴..., 한눈에도 범상치 않은 풍모였다. 관
우는 이제야 장수다운 장수를 만난 듯했다.
"나는 언젠가는 세상을 어지럽히는 황건의 무리를 쓸어 없애기 위해 사방으로
쓸 만한 사람을 찾는 중이오. 듣자하니 해량촌에 관운장이라는 사람이 쓸 만하
다기에 한번 찾아볼 생각이었소. 그런데 어찌하여 이곳에 오시게 되었소?"
"이 관우가 변변치 않은 무예나마 녹슬게 하지 않으려고 가끔 산 속으로 들어가
조련하고 있소이다. 오늘도 산으로 가던 중 문득 싸우는 소리가 들려 살펴보니,
한사람을 여럿의 도둑이 공격하고 있는 것을 보게 되었소. 그들 무리가 황건적
임을 보고 불문곡직하고 달려왔던 것이오. 장 공을 만나게 되었으니 이렇게 달
려온 것이 헛되지 않았다는 생각이 드는구려. 실은 나도 뜻을 같이할 사람을 찾
고 있던 주이었으니 우리 함께 대사를 도모함이 어떻겠소?"
장비가 하고 싶던 말이었다. 장비는 기쁨을 감추지 못하여 관우의 손부터 덥석
잡으며 말했다.
"좋소이다. 우리 읍내로 가 술이나 한 잔 나누며 얘기하는 것이 어떻겠소?"
"좋은 말씀이오. 장 공 같은 장수를 만났는데 그냥 헤어질 순 없는 일이오."
두 사람은 이내 가까운 주막에 들어갔다.
"오늘 오래간만에 울적하던 가슴이 탁 트이는 것 같소."
"나 역시 같은 마음이오."
관우.장비는 이렇게 말하며 술잔을 들고 호쾌하게 웃었다. 이로써 두 사람은 그
날 이후 십년지기처럼 가까운 사이가 되어 온 터였다.
죽음을 각오한 결의형제
세 호걸이 한 자리에 모이자 서로 서로 몇 마디 주고받지 않았으나 이미 그
뜻이 가슴으로 통했다. 술이 몇 순배 돌고 난 후 장비가 말했다.
"우리 집 뒤의 넓은 도원이 있는데 지금 꽃이 만발하였소. 내일 그곳에서 천지신
명께 제사를 지내고 의형제를 맺은 후 이곳의 용사들을 모아 한번 큰 일을 도모
하는 게 어떻겠소?"
"그것 참 좋소이다."
유현덕 ,관운장도 한 목소리로 찬동했다. 다음날 세 사람은 도원에 모여 제단을
만들고 그 둘레에는 대나무를 세우고 깨끗한 줄을 두른 다음, 검은 소와 흰말을
제물로 마련했다.
세 사람은 제사 준비가 끝나자 제단 앞의 돗자리에 무릎을 꿇었다.
"잠깐만 기다리시오."
그 때 관우가 불쑥 입을 열었다. 유비와 장비가 영문을 몰라 관우의 얼굴을 유
심히 바라보자 관우가 말을 이었다.
"무릇 일에는 근본이 있게 마련이오. 장비나 제가 오늘날까지 초야에 숨어서 때
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은, 아까 말한 그 군주가 나타나지 않았기 때문이오. 그런
차에 유비 현덕이라는 혈통이 바른 분을 만난 것이 우리가 의맹을 맺기로 한 계
기가 되었으므로, 바로 이 자리에서 유비 현덕님을 우리들의 어진 군주로 받들
어 모시려는데, 장비의 생각은 어떻소?"
관우가 그렇게 말하며 장비를 바라보자 말이 끝나기도 전에 장비가 외쳤다.
"당연하신 말씀입니다. 지금 이 자리에서 천지신명께 맹세를 합시다."
그러나 유비는 눈을 감고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입을 열었다.
"내가 한나라 종실의 후손인 것만은 틀림없으나, 오랫동안 초야에 묻혀 돗자리나
짜고 지앴소. 아직 남 위에 서서 주군이 될 만한 수양도 덕도 쌓지 못했소. 군주
가 되는 것은, 실제로 덕을 쌓고 몸을 닦아 군주로서 나나 두 분이 그 자질으
ㄹ확인한 후에 약속을 하여도 늦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아닙니다. 우리느 ㄴ주군될 인물임을 확인하였습니다."
"르러나 나는 이 자리에서 결정을 내릴 수가 없소. 그러나 우선 의형제의 약속만
은 하도록 합시다. 비록 군주와 신하의 사이가 된 뒤에도 우리 세 사람은 영원
한 의형제임을 약속하는 것이 더욱 뜻이 있는 일이라 생가되오."
관우는 긴 수염을 쓰다듬으며,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좋습니다. 익덕, 자네의 의견은 ?"
"나도 대찬성이오."
장비가 쾌히 찬동하자 관우가 입을 열었다.
"우리가 형제의 의를 맺으니 형과 아우의 서열이 분명해야 됨은 앞서 말한 바와
같소. 나이로만 따지면 내가 가장 맏이기는 하지만 유 공은 한나라 종실의 후손
으로 어진 바와 슬기로움을 두루 갖춘 분이니 이제부터 우리 의군의 주장이며
형제로서는 맏형이 되어야 하오."
"옳은 말씀이오. 나도 그 말에 찬동하오."
장비도 즉석에서 큰 소리로 찬성하였다.
이리하여 삼 형제의 서열은 유비.관우.장비의 순서로 결정되었다.
이렇게 세 사람은 제단에다 소의 피와 술을 붓고, 천지신명께 맹세하였다.
저희 세 사람은 비록 성은 다르나, 의를 맺어 형제가 되었습니다.
마음을 함께하고 힘을 합치어 어려울 때는 서로 구하고 위태로울 때는 도우며
위로는 나라의 은덕에 보답하고, 아래로는 창생을 편아케 하고자 합니다. 비록
같은 해 같은날에 태어나지는 못했으되 죽기만은 같은 해 같은 날이기를 원합니
다. 만일 우리 중 의리를 저버리거나 은혜를 잊는 자 있다면 하늘과 사람이 함
께 그를 죽여주소서.
세사람은 형제의 예로 먼저 관우와 장비가 유비에게 나란히 절을 올렸다.이어
장비가 관우에게 절을 올려 형을 대하는 예를 갖추었다. 세 사람은 마주보고 앉
아 장래의 이상을 주고받으며 굳은 맹세를 한 후, 단을 내려와 복숭아나무 및의
탁자에 둘러앉아 축배를 들었다. 유비.관우.장비 세 사람은 형제의 의를 맺고 한
마음으로 뭉쳐 그들의 젊음을 다하여 장차 큰 뜻을 이룰 것을 맹세했다. 그러나
천하를 세우려면 마음만 가지고는 되지 않는 법. 거기에는 우선 군사도 필요하
고, 무기와 군량도 있어야 한다. '적수공권'이란 바로 이 세 사람을 가리켜 한 말
일 것이다. 술이 몇 순배 돌자 유비가 무겁게 입을 열었다.
"우리 세 사람이 힘을 합하면 반드시 대사를 이룰 날이 있을 것이오만, 군사가
없으니 먼저 군사를 모집하기로 합시다."
"말이나 무기, 돈도 한푼 없는데, 모병한다고 모여들까요?"
관우의 근심을 유비가 웃으며 안심시켰다.
"그거 나에게 맡기시오. 실은 이 누상촌에도 평소 눈여겨보아 온, 우리와 뜻을
같이하는 젊은이들이 얼마쯤 있소. 그들에게 우리의 뜻을 알리면 울분을 품고
있는 사람들이 적지 않으므로 틀림없이 하나 둘 모여 들 거요."
세 사람은 그 날로 소를 잡고 술자리를 마련해 마을의 용사들을 불러 모았다.
유현덕.관운장.장익덕이 널리 의군을 무집한다는 소문이 나자 우국충저오가 의협
심에 불타는 고을의 젊은이들이 모여 그 수가 3백이나 되었다. 과연 관우의 격
문은 상당한 명문이었다.
그 다음 날도 가까운 고을에서 소문을 듣고 찾아온 젊은이들이 많았다. 이렇게
몰려든 젊은이들이 놀랍게도 4,5잭 명이나 되었다. 유비.관우.장비는 기쁨에 차
그들을 군사로 만들기 위해 훈련을 시켰다. 그러나 갑자기 군사가 늘어나고 보
니, 가장 곤란한 문제가 군량이었다. 군량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황건적에게 괴로
움을 겪고이쓴 지방에서 황건적을 토벌한 후 세금과 곡식을 받는 길밖에 없었
다. 그러기 위해서는 당장 말과 무기가 필요했다.
"자, 이제 어떻게 해야 할까?"
유비.관우.장비는 궁리를 해 보았으나 뾰족한 수가 생각나지 않았다. 그런 어느
날, 부하 한 명이 헐레벌떡 숨을 헐떡이며 달려와 고했다.
"웬 나그네 두사람이 하인을 데리고 여러 가지 물건을 수십 필의 말에 싣고 이
리로 오고 있습니다."
유비가 그 말을 듣자 귀가 번쩍 띄어 소리쳤다.
"하늘이 우리를 도우시는구나."
유비.관우.장비는 급히 그들을 맞으러 나갔다. 과연 그 곳에는 말 장사 두사람이
4,50필의 말을 끌고 대문 쪽으로 오고 있었다. 두 사람의 말 장사는 중산 고을의
호상인 소쌍과 장세평이었다. 유비는 그들을 만나 자기들 세 사람이 의거를 일
으키게 된 내막과 우국충정을 설명하고 안으로 맞아들여 후히 대접했다.
"이제라도 누군가가 천하를 도탄에서 구하지 않는다면 이 세상은 돌이킬 수 없
는 암흑에 묻히고 말 것입니다."
유비는 만약 지금 자기네의 뜻에 찬동하고 도움을 베푼다면 그 은혜를 절대로
잊지 않겠노라고 간곡하게 호소하였다. 유비의 말을 듣고 있던 장세평과 소쌍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대로 가다간 천하는 황건덕의 발굽에 짓밟혀 쑥밭이 ㄷ고 말 것 이오. 그렇게
되면 백성들의 재산을 모조리 빼앗기게 됨은 물론, 이 나라도 오랑캐들에게 정
복되고 말 것이오."
장세평과 소쌍은 유비.관우.장비의 늠름한 위풍과 웅지를 담은 성실한 열변에 감
탄하였다. 두 사람은 나지막하게 속삭이더니 입을 열었다.
"잘 알겠습니다. 여기 있는 50여 필의 말이 천하 대사에 사용된다면 더없는 영광
이ㅗ. 기쁜 마음으로 드리겠습니다."
너무나 선선한 대답에 유비는 오히려 어리둥절하였다.
"허허 ..., 정말 고맙습니다. 이렇게 일언지하에 승낙해 주시니...., 실례이오만, 이
익을 도모하는 상인으로서 어찌하여 돈 한푼 받지 않고 이 많은 말을 넘겨 주시
는 겁니까?"
목적이 이루어졌지만, 너무 궁금한 나머지 쓸데없는 말인 줄 알면서도 유비가
물었다. 그러자 장세평이 큰 소리로 웃으며 대답했다.
"너무 쉽게 승낙하니 도리어 믿어지지가 않는 모양이군요. 그럴 법도 합니다. 그
러나 거기에 ㄴ그럴 만한 이유가 있습니다. 첫째, 우리는 장군님의 올바른 인품
을 믿기 때문입니다. 둘째로, 황건적을 토벌하는 데는 지금이 가장 적절한 시기
이기 때문입니다. 셋ㅉ는 장군께서 우리들의 한을 풀어 주신다니 그 이상 고마
운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한을 푸신다니? 그건 무슨 말씀이오?"
"황건적 장각 일당의 폭정에 대한 원한입니다. 저희는 이전에 중산에서 둘째가라
면 서러울 만큼 화상이란 소리를 들었습니다. 그러나 아시겠지만 그 지방도 황
건적들에게 짓밟혀 이젠 말이 아닙니다. 재산은 다 약탈당했고 이젠 거리에서
젊은 여자들은 구경도 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물론 가게 물건도 이제는 하나도
남김없이 몰수되었습죠. 여기 있는 내 조카 소쌍은 그놈들에게 아내와 딸까지
빼았겼습니다. 그래서 조카인 소쌍과 더불어 천한 말장사꾼이 되어 북쪽지방으
로 말을 팔러 가는 참이었습니다. 그런데 소문에 북방의 산 속에도 황건적들이
있다는군요. 그들은 길 가는 사람의 재물을 뺏소는 마구 학살을 한다니 하는 수
없이 말을 끌고 도로 돌아가는 길이었습니다. 남쪽이나 북쪽, 온통 황건적 천지
이니, 언제 어디서 말을 빼앗기고 목숨을 잃을지 모를 일입니다. 언제 빼앗길지
도 모르는 말인데 오히려 황건적을 토벌하는 데 쓰시겠다니 어찌 우리가 장군님
의 부탁을 거절할 수가 있겠습니까? 기꺼이 말을 드리겠습니다."
장세평과 소쌍의 말을 듣고 보니 유비는 그들이 선뜻 말을 내놓은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이제야 알겠소. 두 분의 높은 뜻을 가슴에 새겨 언젠가는 그 은의에 보답하겠습
니다."
유비가 진심으로 고마움을 표했다.
장세평은 유비를 만나 본 후에, 말등에 실었던 무쇠 1천근과 50필의 말, 그리고
금은 5백냥 등 그의 전재산을 군비로 헌납했다.
장세평고 소쌍이 중산으로 돌아가자 장비는 즉각 이웃 마을에 있는 대장장이를
불러 유비에게는 쌍고검을, 자신에게는 일 장이 넘는 장팔점강모를 만들어 달라
고 주문하였다. 관우는 무게가 80근이나 되는 청룡언월도를 만들게 하였다.
장정들도 갑옷, 투구, 창, 칼을 만들기 시작하여, 며칠후에는 무기가 모두 만들어
졌다. 또 해와 달이 그려진 기와 말 안장, 화살 등 군대의 장비도 어느 정도 갖
추게 되었다. 워낙 급히 편성한 작은 군대에 지나지 않지만 장비의 교련고 ㅏ관
운장의 군율, 유비의 덕망으로 장졸들은 날이 갈수록 점차 군사로서의 면모를
갖추어 가고 있었다. 장정들은 이제 어디로 보아도 사기가 왕성하고 질서정연한
군사들로 변했다. 그러던 어느 날 유비는 날을 잡아 무장을 갖춘 후 5백 의군을
거느리고 유주성으로 달려갔다.
이 무렵 유주탁현으로 정원지가 이끄는 5만여 명의 황건적이 성난 파도처럼 몰
려오고 있었다. 황건적들은 탁현 각 고을을 단숨에 그들의 천하로 만들겠다는
듯 거침없는 기세였다. 다습해진 태수 유언은 사태의 위급함을 깨닫고 급히 의
병을 모집하는 각문을 붙였다. 한편 유비는 군사를 이끌로 누상촌을 떠나기 한
발 앞서, 관우에게 서찰을 주어, 의병을 모집하고 있는 유주태수 유언에게 보냈
다. 서찰에는 자기의 의군이 유 태수의 휘하로 들어가 황건적을 토벌하고자 하
니, 유 태수의 관군과 합류하기를 원한다는 내용이 적혀 있었다. 관우는 태수 유
언에게 예를 올린 다음 우렁찬 목소리로 진언하였다.
"천하는 황건적에게 유린당해 온 지 이미 오래 됩니다. 관군은 해를 거듭할수록
패전만으 거듭한다고 들었습니다. 각지의 창고는 황건적의 노략질로 바닥이 났
고 백성들도 모두 적도들의 횡포에 울고 있다고 들었소이다."
태수 유언은 관우의 위풍당당한 모습을 보고 한눈에 범상치 않은 인물임을 알아
차렸다.
"우리는 태수의 영지에서 오랫동안 은혜를 받은 몸입니다. 이 위기를 그냥 보아
넘길 수 없어 유현덕을 맹주로 모시고 군사를 일으켰습니다. 이제 태수의 휘하
에 들어가 나라에 보답코저 합니다. 태수께서는 우리들 의병을 휘하에 거두어
주시기 바랍니다."
관우는 거침없이 한굼에 말을 끝내고는 유비의 서찰을 꺼내 태수에게 전했다.
관우의 말을 들으며 유비의 서찰을 읽고 난 유언은 몹시 기뻐 승낙했다. 황건적
이 질풍노도처럼 밀려오고 있는 터라 탁군은 실로 바람 앞의 등불처럼 위급한
지경에 놓여 있었다. 이러한 때에 스스로 의병을 이끌고 도우러 오겠다는 호걸
을 보니 어찌 기쁘지 않겠는가. 이윽고 유비.관우.장비의 의군이 탁군의 군부에
도착했다. 태수 유언은 친히 나아가 유비를 비롯한 게 장수와 그들의 군대를 맞
았다. 그날 밤에는 태수의 관저에서 환영 잔치까지 베풀었다. 태수 유언은 유현
덕의 신중한 말씨며 거동을 보고 어딘지 큰 그릇다운 풍모를 짐작하게 되었다.
또한 혈통이며 집안내력을 알고 보니, 다 같은 한나라의 종실로 항렬을 헤아리
니 유비가 조카뻘이라 더욱 반갑게 환대하였다. 그로부토 며칠 뒤 태수 유언은
교위 추정에게, 유비 등 세사람의 장수와 함께 군사를 거느리고 출진토록 했다.
명령을 받은 유현덕은 관우, 장비 두 아우와 5백 의군을 이끌고 황건적을 맞으
러 말을 달리니 그 의기는 당장 하늘을 찌를 듯하였다. 유비가 말을 달려 대흥
산 기슭에 이르자 이때 이미 황건적이 그곳까지 몰려오고 있었다. 황건적들은
모두 풀어헤쳐 산발한 머리에 황색 천을 이마에 동여매고 있었다. 황건적의 무
리는 5만의 대군이었으나 유비의 군사는 5백에 지나지 않았다. 양군이 서로 맞
서자 유비가 말을 박차며 나서니, 왼편은 긴 수염을 날리며 관운장이, 오른쪽은
고리눈을 부릅뜬 장비가 호위했다. 유비가 채찍을 들어 황건의 무리를 가리키며
목소리를 높여 구짖었다.
"나라를 거스른 역적아, 네놈들은 어찌하여 빨리 항복하지 않는가?"
이때 황건적의 부장 등무라는 자가 유비가 5백여 명의 군사를 이끌고 오는 것을
보고 가소롭다는 듯 큰 소리로 지껄였다.
"하하하! 저토록 적은 군사로 우리를 대적하겠다니 저놈들이 정신 빠진 놈이 아
닌가! 거기다 아무릴 보아도 관군 같지도 않다. 필경 어디서 끌어모은 오합지졸
일 것이다."
유비군을 얕잡아 본 등무는 스스로 선두에 나서며 유비군을 향해 짓쳐왔다. 이
때 장비가 기다렸다는 듯이 한 길 8자나 되는 장팔사모를 휘두르며 튀어나오더
니 벼락치듯 고함을 질렀다.
"요, 들쥐놈아!"
장비의 호통과 함께 장팔사모가 한 번 번뜩이자 등무는 제대로 손 한번 쓰지 못
한 채 외마디 비명을 지르고는 말에서 곤두박질치며 나가떨어졌다. 이것을 본
정원지는 이를 부드득 갈고 쌍검을 휘두르며 달려나왔다.
"저놈의 목은 제가 맡겠습니다."
이번에는 관운장이 무게 80근의 청룡도를 비껴들고 정원지를 향해 비호같이 달
려나갔다. 장비를 향해 돌진하더 ㄴ정원지가 난데없이 관운장이 달려나오는 것
을 보고 주춤했다. 그때 관운장의 청룡도가 휘파람 소리를 내며 번뜩이자 정원
지는 비명 소리 한번 내지르지 못한 채 두 동강이 나고 말았다. 두 장수가 제대
로 창칼을 맞대 보지도 못한 채 목이 달아나고만 것이다. 실로 눈깜짝할 사이의
일이었다. 뒷날 사람들이 이 싸움에서의 관우와 장비의 용맹을 노래했다.
이 아침 영웅들이 제 본색 드러내니
한 장수는 창, 한 장수는 칼을 썼네.
첫 싸움에서 장수들의 용맹 떨치니
그 이름 천하 삼분에 표해 놓네.
어느 날 청주성으로 몰려오는 황건적을 치기 위해 급히 원군을 보내 달라는 급
보가 유비에게 날아들었다. 유언은 즉시 통첩문을 유비에게 내보이며 또 한 번
원군이 되어 둘 것을 청했다. 이제 유비는 통첩문을 두 아우에게 읽힌 뒤 선뜻
유언에게 대답하였다.
"우리 삼 형제가 가서 청주를 구원하겠습니다."
태수 유언은 매우 기뻐하며 교위 추정에게 명령했다.
"병마 5천을 거느리고 유 장군을 선봉으로 하여 청주를 구하고 오라."
유비.관우.장비 삼 형제는 승전의 기쁨을 맛볼 새도 없이 5백 명의 군사를 이끌
고 청주로 달려갔다. 그 뒤를 교위가 5천 군사를 이끌고 뒤따라 갔다. 청주성을
철통같이 에워싸고 있던 황건적들은 원군이 오는 것을 보고 군사 1만을 출동시
켜 그들을 맞아 싸울 태세를 갖추었다. 적의 군사가 1만여 명인데 비해 이쪽의
군사는 5백여 명과 5천 명이 더한 것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나 같은 군사로 유
주의 첫 싸움에서 수만명을 무찌른 뒤라 장비가 호승심에 복받쳐 나섰다.
"수가 낳아도 그들은 하찮은 오합지졸에 지나지 않습니다. 우리 군사는 일당 백
의 기세로 사기가 충천합니다."
장비가 유비.관우를 향해 군사를 내몰 것을 재촉하였다. 이에 유비와 관우는 한
번 맞서 싸우기로 하고 군사를 이끌었다. 그러나 적장은 유주에서의 싸움과는
달리 이번에는 뒤에서 군사만 부렸지 선봉에 나서지는 않았다. 졸개들만 벌떼처
럼 몰려올 뿐이었다. 유.관.장 삼 형제는 그들을 맞아 칼로 베고 창으로 찔러 수
많은 군사를 죽였다. 5백여 명의 유비 군사가 용감히 싸웠으나 이쪽도 희생된
군사가 많기는 마찬가지였다. 유주 싸움에서는 적장 정원지와 등무의 목을 베자
그 부하들이 겁을 먹고 흩어지는 바람에 그 여세를 몰아 쉽게 이길 수가 있었
다. 그러나 졸개들만 앞장 세우니 아무리 그들을 베고 찔러도 적은 꺾이지 않고
사방에서 함성을 지르며 몰려왔다. 결국 유비군은 숫자가 많음을 앞세운 적의
전법에 밀려 마침내 30여 리나 물러났다. 유비는 관우.장비 두 아우를 불렀다.
"적군은 많고 우리 군사는 적으니 계교를 써서 기병으로 맞서지 않으면 이길 수
가 없을 걸세."
유비는 사람을 보내 추정에게 응원군 2천을 요청했다. 응원군은 오래지 않아 당
도했다. 유비는 관우.장비 두 아우에게 일렀다.
"운장은 군사 1천을 거느리고 산 오른편에 매복하고, 장비는 1천을 거느려 왼편
에 매복하게. 날이 밝으면 나는 나머지 군사를 이끌어 적의 정면으로 나아가 싸
우다 쫓겨올 테니 징 소리가 울리면 좌우에서 나와 협공해 주게."
관우와 장비에게 계교를 일러 준 뒤, 유비는 날이 밝자 북을 치고 함성을 지르
며 도적의 무리를 향해 정면으로 달려들었다. 도적의 무리들은 적의 수효가 여
전히 5백여 명에 지나지 않음을 보고 일거에 섬멸해 버릴 작정인 듯 어제보다
몇 배의 대군으로 진군해 왔다. 유비가 그들을 맞아 싸우다 기력이 다한 듯 말
멀리를 돌려 달아나기 시작했다.
"저놈들이 퇴각한다. 한 놈도 남기지 말고 모조리 죽여라!"
기세가 오른 도적들은 아우성을 치며 유비를 뒤쫓았다. 단숨에 깨뜨릴듯한 기세
로 도적의 대군은 진형도 무시한 채 제각기 뒤쫓기에만 바빴다. 양쪽 군사들이
쫓고 쫓기어 산허리를 지날 때엿다. 유비는 관우와 장비에게 일러 준 대로 급히
징을 울리며 말머리를 돌려 마주 오는 적에게 역습을 가하였다. 이어 요란한 징
소리와 함께 산 좌우에서 관우.장비의 복병이 소나기 구름처럼 천지를 뒤흔들
듯한 함성을 지르며 달려나와 길을 끊었다. 좌우 양군이 무서운 기세로 맹렬히
공격해 오자 황건적들은 갑자기 당한 일이라 우왕좌왕하며 갈피를 잡지 못했다.
"한 놈도 놓치지 말고 쳐라!"
유.관.장 세 장수는 도망치는 적의 무리를 추격하여 그대로 청주성의 성벽 아래
까지 몰아붙였다. 청주성의 태수 공경은 원군이 황건적을 쳐부수며 성문 아래까
지 몰아 붙이는 것을 보자 성문을 활짝 열고 마주 달려와 그들을 무찔렀다. 앞
뒤 좌우로 적군에 둘러싸인 황건적들은 독 안의 쥐 꼴이 되어 수없이 목이 달아
나거나 말발굽에 무리져 짓밟혔다. 청주성을 버리고 목숨을 건져 달아난 자의
수는 겨우 헤아릴 정도였다. 후세 사람들이 이때 유현덕이 세운 공을 기렸다.
묘한 계교로 신공을 세움은
두 호랑이 한 용을 보필했음이네.
첫 싸움에서 큰 공을 세우니
외로운 신세로 한나를 세우네.
청주태수 공경은 유.관.장 세 사람을 불러 크게 치하하였다. 공경은 세 장수에
게 후한 상을 내리고 술과 고기로 군사들을 배불리 대접했다. 그날 유비는 개선
을 축하하는 잔치자리에서 뜻밖에도 스승이었던 노식선생의 소식을 듣게 되었
다. 지금은 중랑장이란 벼슬 자리에 올라 광종 땅에서 황건적의 괴수 장각과 싸
우고 있다는 것이다. 원래 의리를 중히 여기는 유비가 아닌가. 이 소식을 듣고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다. 교위 추정이 유주성으로 돌아가려 하자, 유비가 말했
다.
"중랑장 노식 장군이 광종에서 황건적의 수령 장각과 싸우고 있다고 들었습니다.
그 분은 비가 지난날 가르침을 받았던 스승이십니다. 휘하 군졸과 더불어 그곳
에 가 옛 스승을 도와 드리고 싶습니다."
유현덕의 말에 추정도 고개를 끄덕였다.
"장군의 뜻이 그러시다니 말릴 수가 없구려. 부디 큰 공을 세우기 바라오. 이곳
에 있는 군량과 소용되는 물건이 있다면 마음대로 가져가시길 바라오."
그리하여 교위 추정은 5천 인마를 거느리고 유주로 돌아가자 유비는 관우.장비
두 아우에게도 의견을 물었다. 유비는 관우.장비와 함께 거느린 5백 의군을 이끌
고 쉴새없이 광종으로 향했다. 광종에 당도하자마자 유비는 노식의 진중을 찾아
가 옛 스승에게 뵙기를 청했다.
"유비 현덕이라고 말씀하시며 장군을 뵙겠다고 하옵니다."
시종 한 사람이 노식에게 고했다.
"유..현덕?"
"예, 탁현 누상촌 사람으로 장군께서 그곳에 은둔해 계실 때 가르침을 받았다고
하였습니다."
"오오! 그렇구나. 돗자리를 짜던 유비로구나. 벌써 10녀의 세월이 흘렀으니 이제
는 어엿한 젊은이가 되었겠지."
노식도 옛 제자를 잊지 않고 있었다. 노식은 유비를 군막 안으로 들게 했다.
"역시 유비 그대였구나. 홍안의 소년이던 그대가 이젠 어엿한 대장부가 되었다
니."
"스승님께서는 그 후 낙양 일대에 무명이 혁혁하시어 멀리서나마 기뻐하고 있었
습니다."
유비는 몇 걸음 뒤로 물러나서 세 번 절하여 제자의 예를 갖추었다. 이어 유비
가 의군을 일으키게 된 내력과 유주.청주의 싸움에 이어 소문을 듣고 급히 달려
온 뜻을 아뢰었다. 유비의 말을 듣자 노식은 몹시 기뻐했다. 유비는 관우.장비를
불러 노식을 뵙게 했다. 노식은 두 호걸을 보자 더욱 기쁜 마음으로 유비에게
말했다.
"옛 스승을 도우러 먼길을 왔다니 이렇게 과마울 덱 어디 있겠나. 역시 내 뜻을
저버리지 않았군. 앞으로 나를 도와 황건적을 무찌르는 데 큰 공을 세우도록 하
라."
이때 장각의 군사는 15난이요, 노식의 군사는 5만이었다. 노식은 세배나 많은 대
군을 선뜻 대항해 싸울 형편도 못 되어 아직은 서로 대치만 하고 있는 중이었
다. 그러던 어느 날 노식이 유비를 조용히 불러 일렀다.
"이 지방은 지세가 험준하여 진을 치고 있는 적에게 이롭게 되어 있네. 적을 단
숨에 섬멸하려다간 자칫 막대한 손상을 입게 될 우려가 있어 본의 아니게 장기
전을 치르게 될 것 같네. 지금은 이곳보다 영천이 더 위급한 지경에 빠졌네. 영
천에는 황보숭과 주전 두 장군이 장각의 아우 장보.장량과 맞서고 있는데 관군
의 형세가 매우 불리한 모양일세. 내가 군사 1천을 줄 터이니 그곳으로 가 황건
적을 소탕하도록 하게."
은사 노식의 간곡한 당부였다. 유비는 스승의 명대로 그날로 5백 의군에다 관군
1천 명을 더하여 영천으로 진군하였다.
한편 영천에서는 황보숭고 주전이 적과 교전을 벌이고 있었다. 적은 싸움의 형
세가 불리해지자 장사로 들어가 잡풀이 무성한 곳에 진채를 내렸다. 황보숭은
적이 풀밭에 진을 치는 걸 보고 주전에게 한 계책을 내었다.
"적이 풀밭에 진을 쳤으니 화공을 베푸는 것이 어떻겠나?"
이에 주전은 모든 군사들에게 영을 내려 각기 마른 풀이나 짚단을 한묶음씩 마
련하라 명하고 어둠 속에서 매복토록 했다. 밤 이경이 되자 황보숭과 주전을 모
든 군사를 거느리고 적이 있는 풀밭 쪽으로 다가 갔다. 그날 밤 따라 거센 바람
이 일었다.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관군이 바싹 적진에 접근해 가자 황보숭과
주전이 명을 내렸다.
"마른 풀에 불을 붙여라."
명령에 따라 군사들은 마른 풀과 짚단에 불을 당겼다. 관군은 함성과 함께 불이
붙은 짚단을 적진을 향해 던졌다. 때마침 불어 오는 거센 바람을 타고 황건적의
진영이 불덩이로 뒤덮혔다. 때를 놓치지 않고 황보숭과 주전이 적의 진영을 향
해 일제이 기습 공격을 가하였다. 적의 무라들은 밤이 깊자 경계도 하지 않고
곤히 자고 있었다. 때마침 불어오는 바람에 불길이 크게 번져 진지에 화염이 충
천하자 황건적들은 우왕좌왕하며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었다. 거기다가 황보숭
과 주전이 군사를 이끌고 진을 덮치지 말에다 안장을 얹을 겨를도 없었다. 병사
에도 불이 붙고, 이리 뛰고 저리 뛰는 황건적들의 군복에도 불길이 번졌다. 허둥
대는 적들은 관군의 창칼에 수없이 목이 떨어지거나 불에 타 숨졌다. 창칼조차
제대로 챙기지 못한 황건적의 무리는 제대로 반격 한번 해보지 못하고 저마다
살길을 찾아 달아나기에 바빴다. 황건적의 우두머리 장보와 장량은 간신히 말을
타고 도망가는 도적들틈에 끼여 산길을 달렸다. 어느 새 날이 훤히 밝아오고 있
었다. 장보와 장량이 정신을 차리고 뒤따르는 무리를 보니 절반도 못 되는 숫자
였다. 장보와 장량이 패잔병을 이끌고 허겁지겁 말을 몰며 패주하고 있을 때 였
다. 돌연 질풍같이 한 떼의 인마가 달려와 도망치는 도적의 길을 끊었다. 붉은
깃발을 바람에 나부끼며 달려오는 군사들의 맨 앞에 서 있는 장수는 붉은 말에
붉은 투구에 붉은 갑옷을 갖추어 멀리서 보면 마치 타오르는 한덩어리의 불길
같았다. 말 위의 장수를 보니 아직 어려 보였으나 키가 7척은 됨 직했다. 몸은
약간 여윈 편이었고 흰 살갗에 가늘고 길게 찢어진 날카로운 두 눈에서는 헤아
리기 어려운 예리한 지모가 번뜩이고 있는 듯 했다. 엷은 입술 위로 검고 긴 수
염을 기르고 있었다. 그는 패국, 초군 태생인 조조였다. 이번에 기도위가 되어 5
천의 마보군을 거느리고 황보숭 장군의 후진이 되어 장보.장량을 치러 온 것이
었다. 조조의 자는 맹덕, 별명은 길리였으며, 어릴 때의 이름은 아만이라고 했다.
조조가 태어난 곳은 화중평야의 중심을 이루는 서주였다. 이 부근을 하나라 시
대에는 패현이라고 불렀다. 지금도 비옥한 땅이 많아 농업이 성하지만 한나라
시대에는 한 왕조의 고조 유방이 태어난 곳이었다. 고조가 죽은 다음에도 패현
에서는 한 왕실을 좌우할 만한 정치가와 장군이 많이 나왔다. 그래서 조조가 태
어난 패현 사람들은 다른 지방 사람들과는 달리 출신지에 대한 우월감을 가지고
있었다. 후한 순제때, 권세를 크게 누린 조등이란 환관이 있었다. 조등은 한왕조
초창기의 공신 조참의 자손이었는데 한왕조에서 가장 뛰어난 신하라는 의미로
'해내의 명사'라고 불리었다. 이 조등의 손자가 바로 조조였다. 조조의 나이 열두
살부터 스물이 될 때까지 어느 때는 병서와 무예에, 그리고 싸움에 몰두하기도
하고 또 어떤 때에는 사부와 여자, 그리고 춤과 노래에 깊이 파묻히기도 했다.
달리는 말에 채찍을 가하며 사냥을 한답시고 산과 들을 헤메는가 하면 꾀를 내
어 사람들을 골탕먹이는 일도 비일비재하였다. 조조에게는 엄한 숙부가 있었다.
그 숙부는 조조의 잘못이 있을 때마다 형인 조승에게 일러바쳐 아버지로부터 심
한 꾸중을 듣게 하였다. 조조는 그것을 매우 못마땅하게 여기고 숙부와 아버지
를 갈라놓을 꾀를 생각하고 있었다. 어느 날, 숙부가 집 안으로 들어서는 것을
본 조조는 별안간 땅바닥에 쓰러졌다. 그리고는 간질병 환자의 흉내를 내어 눈
을 까뒤집고 입에 거품을 물고 사지를 뒤틀며 바둥거렸다. 숙부가 깜짝 놀라 형
에게 달려가 그 사실을 알렸다. 아버지 조승이 놀라 급히 달려와 보니, 조조는
단정한 자세로 앉아 열심히 글을 읽고 있는 것이 아닌가.
"아니 도대체 어찌 된 일이냐? 네가 간질병을 앓는다니?"
아버지의 물음에 조조가 의아스러운 표정으로 침착하게 되물었다.
"아니,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제가 간질병을 앓는다니요? 누가 그런 말을 하
던가요?"
"네?..... 숙부님이 저를 항상 못마땅히 여기시더니 그런 말까지 지어낸 모양이로
군요."
조조는 계교를 부려 아버지를 속였고. 조숭은 그 이후로 아들에게 관한 아우의
충고를 믿지 않게 되었다. 조조의 친구 중에는 뒷날 관동의 여러 호족의 맹주가
된 원소가 있었다. 원소는 4대에 걸쳐 5공을 지낸 명문의 후예로 스물도 채 안
된 나이에 낭이 되어 조정에 출사한 인물이었다. 명문의 후예인 원소와 내시 집
안의 출신이지만 귀공자로 자란 조조는 젊은 시절 곧잘 짓궂은 장난을 일삼는
놀이친구이기도 했다. 조조의 나이 열여덟 때였다. 어느 날 시집가는 색시의 가
마를 보게 된 두 사람은 또 짓궂은 장난기가 발동했다. 조조와 원소는 밤에 혼
례식을 올리고 있는 집에 몰래 들어가 짚더미에 불을 지른 뒤 소리쳤다.
"도적이다. 대량산 도적 떼다!"
대량산 도적이란 당시 그 지방에서 악명을 떨치던 산적들이었다. 치솟는 불길과
함께 도적 떼들이 몰려온다는 고함 소리에 사람들은 놀라 밖으로 뛰어나갔다.
그 틈에 조조는 놀라 기절한 신부를 업고 원소와 함께 달아나기 시작했다. 원소
가 가시덩굴을 헤치고 나오려 했으나 가시덩굴이 사방을 뒤덮고 있어 쩔쩔매게
되었다.
"큰일났네. 마을 사람들이 칼을 들고 몰려오고 있네. 잡히면 꼼짝없이 비적으로
몰려 죽을 판일세."
조조는 이렇게 원소에게 겁을 잔뜩 준 다음 마을 사람들 쪽을 향해서도 고함쳤
다
"도둑은 여기 있다. 이 가시덩굴 웅덩이에 빠졌다!"
이 소리에 누구보다도 기겁을 하고 놀란 건 원소였다. 다급해진 원소는 아픔도
잊고 필사적으로 가시덩굴을 헤치고 구덩이를 빠져 나왔다. 마치 고슴도치마냥
수많은 가시가 촘촘히 박힌 채 말이다. 이렇게 잔 꾀로 원소도 살리고 자기도
위기를 모면하는 기지를 발휘했던 것이다.
조조는 열여덟에 조정에 출사하여 낭에 부임했다. 때는 한나라 영제 희평 3년이
었다. 젊고 야심에 찬 그는 이 요직을 하늘이 주신 기회로 삼아 법령을 어긴 사
람은 권문세가를 막론하고 엄하게 다스려 낙양 일대에 명성을 널리 떨치게 되었
다. 조조가 기도위로 황보숭을 도와 황건적을 토벌하라는 명을 받은 것은 바로
이 무렵이었다. 조조가 이날 관군의 화공을 받고 도망치는 도적들을 맞받아쳐
거둔 전과는 대단했다. 적 1만 명의 목을 베고 빼앗은 기치와 마필 또한 수만이
었다. 유비가 관우.장비와 더불어 군사 1천 5백을 거느리고 나타났을 때는 조조
가 잔당들의 소탕을 끝낸 무렵이었다. 본군의 총대장 황보숭은 시큰둥한 얼굴로
유비에게 말했다.
"위태로운 것은 우리가 아니라 광종의 노식 장군이오. 그대는 군사를 거느리고
노식 장군을 도와 주는 것이 좋겠소."
유비는 적이 낙담이 되었으나 휘하의 군사를 이끌고 광종을 향해 말머리를 돌릴
수밖에 없었다.
황건적은 소탕되고 오군의 영걸 손견
유비가 광종을 향해 말을 몰아 달려가고 있을 때였다. 저편으로부터 한 떼의
군마가 함거(죄수를 가두어 호송하는 수레) 한 대를 호위하며 마주 오고 있었다.
관군이었다. 함거의 앞뒤에는 약 3백여 명의 관군들이 호위하고 있었다.
"전쟁터에서 웬 함거일까?"
유비.관우.장비는 함거를 지켜 보았다. 그런데 놀랍게도 함거 속에 갇혀 있는 사
람은 바로 중랑장 노식이 아닌가. 유비가 소스라치게 놀라 말에서 굴러 떨어지
듯 뛰어내려 함거 있는 쪽으로 황급히 뛰어갔다.
"스승님? 이게 대체 어찌 된 일이옵니까?"
"오오! 유현덕 아닌가? 자네에게 이런 꼴을 보여서 미안하네!"
노식은 입술을 열더니, 한숨을 내쉬며 대답했다.
"나는 몇 차례 장각의 본거지를 에워싸고 쳐부수려 했네. 그러나 장각이 요술을
부려 얼른 이기지 못했네. 그때 조정에서는 어찌하여 빨리 황건적을 소탕하지
못하고 있느냐고, 황문시랑의 좌풍이란 내시를 칙사로 전선에 내려보냈네. 그런
데 그 자는 전선의 형세를 살필 생각도 않고 내게 은근히 뇌물을 바치라는 거였
네. 나는 군량도 부족한 판에 그 자에게 바칠 뇌물이 어디 있겠느냐고 정색을
하고 거절했네. 그랬더니 좌풍이 이에 앙심을 품고 돌아가더니, 나를 모함한 모
양일세."
"도대체, 무슨 죄목으로 이렇게 끌려가시는 것인지요?"
"조정에 돌아간 좌풍이 노식은 진지에 틀어박힌 채 싸움은 하지 않고 몸을 사리
기만 하여 병사들의 사기가 떨어졌다고 보고했다네. 천자께서는 크게 진노하시
어, 중랑장 동탁으로 하여금 나를 대신케 하고 나는 낙양으로 압송되어 가는 중
이네. 아마 낙양에 가면 죄를 물어 벌을 받게 될 것 같네. 내가 처벌을 받는 것
은 그렇다치고, 장차 이 나라의 앞날이 어떻게 될 것인지 걱정이네."
노식은 일신의 불행보다 나라의 장래를 더욱 걱정하며 길게 한숨을 쉬었다. 유
비는 기가 막혀 위로의 말도 잊은 채, 창살 너머로 노식의 손을 움켜 잡았다. 두
사람의 얘기를 듣고 있던 장비는 화가 불길처럼 치솟아 얼굴이 시뻘개지더니 장
팔사모를 번쩍 들며 소리쳤다.
"큰 형님! 이런 기막힌 일이 어디있소? 죄 없는 은사께서 옥으로 끌려가는 것을
이대로 지켜 보고만 있을 작정입니까? 관병들을 싹 쓸어 버리고 노식 장군을 ㄱ
출합시다."
유비는 그런 장비를 향해 호통을 쳤다.
"장비, 무슨 말이냐? 사제의 정을 생각한다면 나도 견디기 어렵지만, 감히 천자
의 명을 거역할 수는 없지 않은가. 조정에도 공론이 있을 터인즉, 방자한 짓을
삼가거라."
유비의 추상 같은 호령에 장비는 멈칫거렸다. 일찍이 보지 못한 유비의 무서운
얼굴이었다. 그제서야 장비도 장팔사모를 거두었다. 호송하던 관군들도 장비의
서슬에 겁을 먹은 듯 황급히 함거를 호송하여 떠났다. 유비는 망연자실하여 말
위에 앉아 떠나가는 함거를 한동안 지켜보고 있을 뿐이었다.
"....그만 가시지요."
관우가 함거를 바라보고 있는 유비에게 말했다. 유.관.장 세 사람은 산골짜기를
지나 두 주의 갈림길에 이르렀다. 관우가 먼저 말을 멈추었다.
"여기에서 남쪽으로 가면 광종 땅이고, 북쪽으로 가면 탁현 방면입니다. 그런데
지금 광종으로 가면 무얼합니까? 이제는 동탁이라는 새로운 중랑장이 부임했다
지 않습니까. 차라리 탁현으로 돌아가 앞날을 도모하는게 어떻습니까?"
유비로서는 아직 이렇다 할 공명도 세우지 못하고 돌아가는 것이 선뜻 내키지
않았다. 그러나 지금 광종으로 가는 것도 의미가 없긴 마찬가지, 유비는 관우의
말이 옳다고 여겼다.
"운장의 말이 옳다. 군사를 돌려 북쪽을 향하게 하라."
세 사람은 다시 군사를 거느리고 북쪽으로 향해 묵묵히 말을 몰았다. 장비가 입
이 찢어져라 크게 하품을 하며 투덜거렸다.
"도대체 우리가 무엇 때문에 싸운 건지 알 수가 없는 노릇이군. 차라리 이럴 바
에야 탁현의 장터 바닥에서 돼지다리 뜯으며 술이나 먹는 편이 나았을걸...."
이 소리에 관우가 언짢은 기색으로 핀잔을 주었다.
"이 사람아. 군졸들에게 부끄럽지 않은가? 자네는 장수로서 어찌 그리 옹졸한
생각을 하는가?"
"아무리 장수라도 사실이 그렇지 않습니까?"
"자네가 그런 소리를 하면 군기가 저하되니 그렇다네."
"군기가 저하되는 것이 어디 내 탓인가요? 관군 이라면 무조건 쩔쩔매니 그렇게
될 수 밖에요."
장비가 시큰둥한 목소리로 말대꾸를 하였다. 유비를 비꼬아 하는 말이었다. 그러
나 유비는 장비의 그 불만스런 심정을 이해하고 있었다. 유비는 못 들은 체 행
군을 계속하면서도 혼자 깊은 수심에 잠겨 있었다. 고향에서 의병을 일으켜 떠
난 지 여러 달 만에 이렇다 할 공훈도 이루지 못한 채 어머니를 뵙게 되는 것이
면목이 없어 몹시 서글펐다.
유.관.장 삼 형제가 수하를 거느리고 탁현을 향해 행군을 시작한 지 이틀째 되는
날이었다. 홀연 산너머에서 요란한 함성이 들려 왔다.
"이게 무슨 고함 소리인가?"
유비가 놀라 급히 높은 곳으로 말을 달려 올라가 보니, 한떼의 관군이 패주하고
있었다. 관군의 뒤편에는 머리에 누런 수건을 동여맨 황건적들이 산과 들을 가
득 메운 채 뒤쫓고 있었다. 선두에는 '천공장군'이란 깃발이 펄럭이고 있는 것으
로 보아 황건적의 괴수 장각이 직접 관군을 추격하고 있는 듯했다.
"필시 광종의 관군은 황건적의 무리들에게 참패한 것임에 틀림없네. 노식 장군이
붙들려 가는 사이에 황건적들이 그 틈을 노려 기습을 가한 모양일세."
유비가 관군을 뒤쫓는 황건적을 노려보며 관우.장비에게 말했다.
"형님, 어떻게 하시렵니까?"
"우리는 원래 황건적들을 토벌하려고 일어선 의군이 아닌가. 관군이 궤멸당하는
것을 보고 수수방관할 수는 없다."
유비는 그 말과 함께 군사들을 향하여 긴급히 명령을 내렸다.
"전군은 즉시 전투 태세를 갖추어 진격하라."
유비가 산이 떠나갈 듯이 큰 소리로 명을 내리며 몸소 앞장 서 말을 몰았다. 관
우가 청룡언월고를 치켜들고 뒤를 따랐고 장비도 질세라 장팔사모를 휘두르며
나는 듯이 말을 달렸다. 적군이 관군을 바싹 뒤쫓아 달려오고 있는 가운데 '천공
장군'이라고 쓴 깃발을 가리키며 유비가 소리쳤다.
"앗, 저놈이 도적의 괴수 장각이다. 저놈을 한칼에 쳐라."
유비가 칼을 빼들고 선두에서 적도들을 향해 돌진하였다. 관우.장비도 유비를 중
심으로 장팔사모와 청룡도를 휘두르며 적진 속으로 뛰어들었다. 유비의 쌍검이
번쩍였고, 청룡도와 사모창이 춤을 추었다. 북 소리, 징 소리, 비명 소리가 들판
을 메우는 가운데 도적의 무리가 여기저기 무밭 갈아엎듯 거꾸러졌다. 그 때 장
각은 동탁의 관군을 무너뜨리고 그 기세를 몰아 궁지에 빠진 동탁군을 맹렬하게
추격하고 있던 중이었다. 그러다 느닷없이 나타난 유비.관우.장비와 그 수하 5백
용사가 기습을 해오니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선봉대가 세 장수에게 덜컥 무
너지니 뒤를 따르던 부대들의 대오도 우왕좌왕하며 뿔뿔히 흩어졌다. 그때 패주
하던 관군도 뜻밖의 응원군이 나타나 황건적들을 무찌르자 말머리를 돌려 유비
군과 합세했다. 장각은 기습해 온 무리들의 기세가 강하고 날랜 것을 보자 사태
가 위급함을 느껴 싸울 뜻을 잃고 말았다. 그들은 추격을 멈추고 멀리 50리나
달아나 버렸다. 유비.관우.장비는 그제서야 무기를 거두며 하마터면 목숨을 잃을
뻔한 관군의 대장을 만났다. 광종에서 패주해 온 관군의 대장은 노식의 후임인
동탁이었다. 동탁은 광종의 중랑장 노식의 후임으로 왔으므로 아직 이곳 사정에
어두웠다. 멋모르고 성급히 군사를 이끌고 황건적을 섬멸하기 위해 진격한 나머
지 크게 패한 채 도주하던 중 뜻밖에도 유비군의 도움을 받게 된 것이었다. 가
까스로 참혹한 패배를 면했을 뿐 아니라 오히려 황건적을 격퇴시킨 동탁을 안도
의 한숨을 내쉬며 유비에게 물었다.
"낙양의 왕군에 그대들고 같은 용장이 있다는 말을 일찍이 들어 보지 못했는데
대채 그대들은 어떤 관직을 가지고 있는가?"
"저희들은 탁군에서 온 의군으로서 백신(평민)입니다."
유비의 대답에 동탁은 얼굴빛이 달라졌다.
"뭐. 관직이 없다고?.... 그러면 시골의 사군, 즉 잡군이란 말이군?"
동탁은 콧방귀를 뀌며 노골적으로 경멸하는 기색을 보였다.
"알았네. 물러가게. 그대들의 노고에 대한 보상은 차후 생각해 보답하겠네."
동탁은 하잘것없는 유비군에게 구원을 받은 것이 체면에 손상된다는 듯이 말을
마치고 군막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동탁의 자는 중영으로, 농서군 임조땅 태생으로 젊어서는 호걸과 사귀기를 좋아
했다. 환제말에 양가의 자제로 황제를 호위하는 우림군을 뽑을 때 동탁은 뛰어
난 무예로 군사마에 천거되었다. 이어 병주의 민란을 토벌하여 낭중이 되었다.
동탁은 태어날 때부터 성격이 거칠고 난폭했으나 억센 힘을 가진 장사였다. 완
력이 세어 활통을 양쪽 어깨에 메달고 달리면서 좌우 어느 쪽 팔로도 활을 쏠
수가 있었다. 그가 쏜 화살은 백발백중이어서 싸움터에서 종종 그런 아슬아슬한
재주를 보여 적군의 간담을 서늘하게 하였다.
낭중이 된지 얼마 되지 않아 광무의 영이 되었다가 뒷날 하동태수가 되었다. 동
탁이 세운 전공은 주로 강.호등 오랑캐와의 싸움에서 세운 것으로, 젊었을 때 그
곳을 드나들며 지형이나 생태를 잘 익혀 둔 결과였다.동탁은 부하들에게만은 아
낌없이 베푸는 배포를 가지고 있었다. 그는 언젠가는 전공을 세워 상으로 받은
비단 9천 필을 모조리 장졸들에게 나누어 준 적도 있었다. 그러나 동탁은 하동
태수가 된 이후 오만하고 방자해졌을 뿐 아니라 가슴에 새로운 야심을 품기 시
작했다.
유비.관우.장비는 관군을 대신해 큰 공을 세우고 동탁의 목숨을 구해준 생명의
은인이 아닌가. 그럼에도 유비에게 이렇게 무례하게 굴자 마침내 장비가 이를
부드득 갈았다.
"저런 배은 망덕한 놈! 제놈을 살려 준 사람이 누군데 상을 내리지는 못할망정
우리를 홀대한다는 말이오? 내 당장 저놈의 목을 쳐죽이겠소."
유비는 황급히 장비의 앞을 가로막았다.
"또 버릇이 나오는구나. 익덕, 참아야 하네."
유비와 관우는 장비의 분을 가라앉히기 위해 그를 달랬다.
"어쨌든, 동탁은 황실의 무관이다. 함부로 죽이면 천자의 명을 거역하는 것이 되
지 않겠나?"
"그렇다면 나더러 저 녀석의 명령에 따르라는 거요? 난 싫소. 형님들이나 여기
있겠으면 편안히 있으시오. 나는 다른 데로 떠나겠소."
장비는 분을 삭이지 못해 투덜댔다. 유비는 그 말에 장비를 얼싸안은 채 간곡히
말했다.
"우리 셋은 의형제가 되어 한날 죽기로 천지신명께 맹세하지 않았던가? 이까짓
일로 자네와 헤어질 수는 없는 것. 자네만 가고 우리둘은 남으라니 당치않네. 떠
나려면 함께 떠나세."
유비가 그렇게 말하자, 그때서야 장비도 화를 누그러뜨리며 말했다.
"그렇다면 잘 알겠소. 떠나려면 어서 함께 떠나시지요. 이놈의 군막에 잠시도 머
물고 싶지 않소."
유비는 수하의 5백 장졸을 이끌고 서둘러 동탁의 진영을 떠났다. 유.관.장 세 사
람의 방랑이 다시 시작되었다. 몇 번씩이나 관군을 도와 혁혁한 전공을 세우면
서도 이토록 아무런 공명도 얻지 못한 채 정처 없이 방랑하는 신세가 된 처지였
다. 세 사람은 탁군으로 돌아갈까 하다가 마음을 돌려 일단 영천의 주전 장군의
진지를 들러 보기로 했다. 이때 대장군 황보숭은 조조와 함께 황건적을 추격하
여 멀리 하남의 곡양과 완성쪽으로 군사를 이끌고 간 터라 영천에는 주전만이
머무르고 있었다. 한편 곡양에는 황보숭의 선봉인 조조가 장각의 아우 자량을
상대로 싸움을 벌이고 있었다. 주전은 황보숭과 나뉘어져 싸우는 바람에 군사가
줄어들었다. 주전을 적의 대군과 싸우기에는 군사가 너무 모자라 크게 근심하고
있던 터에 유비가 군사를 이끌어 오자 몹시 기뻐하며 그들을 정중히 맞아들였
다.
"정말 잘 와 주었소. 지금 적의 무리와 힘겨운 싸움을 하고 있으니 세 분은 나를
도와 주어야겠소. 우선 오랜 행군에 피곤하실 테니 오늘은 푹 쉬시도록 하시오."
주전은 소와 돼지를 잡고 술을 내어 유비군을 융숭히 대접했다. 다음 날 주전은
유비를 막사에 청했다.
"현덕이 이번에도 함께 온 군사 5백으로 선봉을 맡아 주시오. 군사가 모자란다면
관군 1천명을 합세시키시오. 군량고 병장기도 얼마든지 나누어 드리겠소."
주전이 유비군을 반갑게 맞아들인 후 정중히 대하자 이에 감격한 유비가 힘찬
목소리로 대답했다.
"예, 힘닿는 데까지 장군님을 보필하여 드리겠습니다."
장보는 8,9만명의 병력을 이끌고 험준한 산기슭에 진을 치고 있었다. 장보는 주
전의 군사가 몇만 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진지를 구축한 채 공격해 오기를 기
다리고 있던 중이었다. 주전이 유비군을 선봉으로 삼고 공격해 오자 장보는 부
장 고승을 앞장 세웠다. 유비가 장비에게 일렀다.
"익덕, 네가 저 자를 쓰러뜨려라."
오랫동안 장팔사모를 휘둘러 보지 못해 온몸이 욱신거리던 장비였다. 장비는 유
비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사모창을 비껴들고 말을 달려나가 고승과 맞부디
쳤다. 창검과 장창이 번쩍이며 어우러졌다. 그러나 어찌 고승 따위가 장비의 적
수가 되랴. 서로 어울려 싸우기를 2,3합, 외마디 비명 소리와 함께 고승은 장비
의 창에 찔려 말 아래로 굴러 떨어지고 말았다. 유비가 때를 놓치지 않고 군사
를 이끌어 나아가며 외쳤다.
"이때다. 모두 나아가 적을 섬멸하라!"
이어 관우.장비가 청룡도와 장팔사모를 휘두르며 말을 달려나가자 적의 무리들
은 뿔뿔히 흩어졌다. 전세는 완전히 유비군 쪽으로 기울기 시작했다. 유비는 숨
돌림 틈도 주지 않고 황건 도당들을 뒤쫓았다. 하지만 그날은 날씨도 좋지 않고,
적이 주둔하고 있는 곳의 지세가 관군에게 불리했다. 높고 험준한 산봉우리가
길 양쪽에 이어지고 있었다. 그곳을 돌파해야지만 적의 본진으로 쳐들어갈 수
있었다. 그러나 주전의 군졸들은 지금까지의 기세와는 달리 산봉우리만 쳐다볼
뿐 진격을 하지 않았다. 주전군의 장구 한 사람이 유비에게 다가와 말했다.
"이곳 계곡을 지나기 전에 언제나 아군은 크게 패하기만 했습니다. 무모한 전진
을 중단하는 것이 좋을 듯 합니다."
유비가 놀라며 까닭을 물었다.
"그게 무슨 말인가? 자세히 말해 보라."
"적의 대장 장보가 술법을 쓰기 때문입니다."
"뭐라고? 술법을 쓰다니 그게 대체 무슨 말이냐?"
"네. 마른 하늘에서 갑자기 비가 내리고 수많은 인마가 쏟아져 내려옵니다."
옆에서 이를 듣고 있던 장비가 불같이 화를 내며 소리쳤다.
"형님. 이 자의 말을 어떻게 믿소. 그건 겁쟁이나 하는 말이오."
유비도 이곳까지 진격해온 이상 말머리를 돌릴 수는 없었다. 주전의 군대가 공
연한 헛소문에 미리 겁을 먹고 있다고 여겼다.
"헛소문에 동요되지 말라. 진격하라.!"
유비가 칼을 빼들자 장비도 장팔사모를 번쩍 치켜들었다.
"겁먹지 말라. 앞으로 나아가지 않는 자는 군율에 의해 이 장비가 참하겠다."
장비가 장팔사모를 들고 눈을 부라리며 독려하자 주전의 군사들도 어쩔 수 없이
적진을 향해 진격하기 시작했다. 유비군은 계곡으로 짓쳐 들어갔다. 그때였다.
갑자기 산골짜기에서 사나운 회오리바람이 일더니 검은 안개가 하늘을 뒤덮었
다. 이때 주전 수하의 병졸 하나가 외쳤다.
"적군의 대장 장보가 또 요술을 부려 우리를 몰살할 모양이다. 다들 사나우 바람
에 날아가지 않도록 나뭇가지나 바위를 붙들었다."
주전의 관병은 그 소리를 듣자 벌벌 떨기만 하고 좀처럼 움직이려 들지 않았다.
관우가 말을 달려나오며 우렁찬 목소리로 소리쳤다.
"무슨 헛소리냐. 요술이 무슨 말라죽은 요술이냐. 무인이 요술 따위를 겁내어 나
뭇가지나 붙들고 있다니 말이 되느냐. 현혹돠지 말아라. 이 관우가 나서 요기를
물리치겠다. 나를 따르라!"
관우가 말을 달려나가자 마지못해 군사들이 뒤를 따랐다. 완만한 경사를 이룬
자갈 언덕을 기어가듯 나아가 계곡의 입구로 진격하고 있었다. 그러자 홀연 계
곡에는 때아닌 천둥이 울리더니 바람이 천지를 징동시켰다. .회오리발람은 모랬
바람으로 변했고, 인마까지 하늘로 날려 버릴듯한 기세였다. 그와 동시에 한쪽
봉우리에서 북 소리, 징 소리와 함께 황건적들이 계곡이 떠나갈 듯 함성을 질러
댔다. 유비가 크게 놀라 군사를 멈추게 하고 소리나는 산봉우리를 쳐다보았다.
산봉우리에는 머릴 풀어 헤친 장보가 검은 옷을 입고 칼을 든채 입으로 무어라
고 주문을 외고 있었다. 장보가 형인 장각에세서 배운 요사스런 술법을 쓰고 있
는 모양이었다. 천둥번개와 바람이 한결 더 거세어졌다. 그와 동시에 검은 하늘
에서는 한 떼의 군마와 요괴의 모양을 한 빨강, 노랑의 종이가 마치 다섯 빛깔
의 불덩이처럼 쏟아져 내려왔다.
"아이구, 요괴가 왔다!"
주전의 관병들은 겁에 질려 이렇게 외치며 우왕좌왕 허둥대고 있었다. 이제는
관우.장비의 독려도 효과가 없었다. 하는 수 없이 유비는 황급히 군사를 물릴 수
밖에 없었다. 그런 다음 대열을 수습하여 군사를 점고해 보니 반 이상이 보이지
않았다. 패군을 이끌고 주전의 진영에 돌아온 유비가 그 동안의 일을 말했다. 그
러자 주전이 유비에게 계책을 일러 주었다.
"그 자가 요술을 부린 것이오. 이쪽에서 돼지.양.개들을 잡아 그 피를 산꼭대기에
서 뿌리도록 하시오. 군사들을 산등성이에 매복시켰다가 적이 뒤쫓거든 일시에
뿌린다면 요술도 깨뜨릴 수 없을 것이오."
이에 유비는 즉시 군사들에게 명을 내렸다.
"지금부터 그대들은 양과 돼지, 개의 피와 오물들을 미리 마련하도록 하라."
다음 날 유비는 주전의 군사 중 약 반수의 병력은 수백 개의 깃발을 들게 하고
징이며 꽹가리, 북을 울리며 계곡을 향해 진군하는 것처럼 보이게 했다. 다른 한
편으로는 관우.장비에게 각각 군사 1천을 주고 양이나 개, 돼지의 피와 오물을
마련해 언덕 위에 매복케 했다. 관우.장비는 북쪽 절벽으로 은밀히 다가가 험준
한 절벽을 사력을 다해 기어올라가 매복했다. 적은 전날의 승리로 기세가 오른
터라 께곡 쪽으로 유비군이 다가오자 군사를 거느리고 의기양양하게 싸움을 걸
어 왔다. 유비는 출진하는 적을 맞아 일진을 부딪쳐 갔다. 장보의 장졸들은 한동
안 싸우는 체하다 전날의 그 골짜기로 다시 도망쳐 가기 시작했다. 유비군이 뒤
쫓자 장보는 어제의 그 산봉우리 위에서 다시 요술을 부리기 시작했다. 하늘에
서 검은 안개가 일고 천둥벽력이 울리고 모랫바람이 거칠게 이는 가운데 하늘에
서 무수한 인마가 쏟아져 내렸다.
"두려워 마라. 관우.장비가 저 요사스런 요술을 깨칠 것이다."
유비가 군사들에게 소리치며 말머리를 돌렸다. 군사들은 동요 없이 대오를 갖추
어 유비의 뒤를 따라 계곡을 빠져 달아나기 시작했다. 황건적들은 기고만장하여
군사를 휘몰아 유비군을 뒤쫓아 나와 추격하기 시작했다. 유비가 막 계곡을 빠
져 나갈 때였다. 꽹가리, 북 소리가 함께 울리며 불시에 계곡 위에 매복해 있던
관우.장비의 군대가 돌진해 오자 황건적들은 자기들의 눈을 의심할 지경이었다.
관우.장비 군은 유비군을 뒤쫓는 황건적들의 머리 위로 피와 오물들을 쏟았다.
그러자 하늘로부터 떨어지던 요괴와 인마들이 종이와 짚단으로 만든 말이 되어
땅바닥에 떨어졌다. 뿐만 아니라 한바탕 휘몰아치던 바람도 기운이 점점 약해지
더니 검은 구름이 걷히기 시작하고 이어 하늘도 청명하게 개이는 것이 아닌가.
황건적들은 크게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토록 신통력을 발휘하던 대장의 요
술이 깨어졌을 뿐 아니라, 관우.장비의 군사가 절벽 위에서 공격해 왔기 때문이
다. 거기다가 도망치던 체하던 유비군들도 말머리를 돌려 공격해 오니 황건적들
은 우왕좌왕하며 자기들끼리 부딪치며 쓰러졌다. 유비군은 관우.장비 주전의 군
대와 협공을 가해 수많은 황건적들을 베거나 사로잡았다. 장보는 술법이 깨어지
자 급히 말머리를 돌려 달아나려 했다. 유비의 뒤를 관우.장비가 말을 박차며 뒤
쫓아왔다. 유비가 말을 달려 장보와의 거리가 웬만큼 좁혀지자 활에다 화살을
재어 수위를 당겼다. 시위를 떠난 화살은 바람을 가르며 장보의 왼쪽 팔뚝에 푹
박혔다. 장보는 화살을 뽑을 틈도 없이 양성으로 달아나 성문을 굳게 닫은 채
다시는 나오지 않았다. 주전은 군사를 이끌어 양성을 에워싸고 공격하는 한편
사람을 보내 황보숭의 소식을 알아보게 했다. 곡양으로 황보숭의 소식을 탐지하
러 갔던 전령이 와 소식을 전했다.
"황보숭 장군은 싸울 때마다 크게 이기고 동탁은 싸울 때마다 패해 천자께서는
동탁을 물러나게 하시고 그 자리에 황 장군을 임명하셨습니다. 황보숭 장군이
동탁군을 함께 이끌고 적의 본거지로 공격해 갔을 때는 이미 장각은 병들어 죽
은 뒤였습니다. 아우 장량이 형을 대신하여 무리들을 이끌고 관군과 맞서고 있
었습니다. 황보숭 장군은 조조를 선봉으로 삼아 일곱 차례나 싸워 이긴 후, 마침
내 장량의 목을 베어 장량의 무덤을 파헤쳐 육시에 처하고 목은 잘라 효수케 했
습니다. 두목을 잃은 나머지 도적들은 모두 항복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이에 천자
께서는 황보숭 장군을 거기장군겸 기주목으로 삼았습니다. 또 황보숭 장군이 노
식 장군은 공은 있으되 죄가 없다고 조정에 아뢰어 다시 중랑장으로 복직되었다
고 합니다."
주전은 이 보고를 접하자 심사가 몹시 언짢았다. 황보숭과 함께 나란히 조정의
명을 받고 출전했지만 자기는 아직 양성에서 뚜렷한 전공도 없이 장보와 대치만
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주전은 이에 군사들을 독려하여 힘을 다해 양성을 공
격하기 시작했다. 적군으로 하여금 눈도 붙이지 못하도록 들이치니 양성은 크게
위태로와 졌다. 그런데 뜻하지 않은 일이 일어났다. 성 안에는 엄정이라는 적장
이 있었다. 엄정은 대세가 이미 기울었음을 알고, 두목 장보의 목을 벤 후 그 목
을 들고와 목숨을 애걸하며 항복했다. 주전은 엄정의 항복을 받아들이고 양성에
입성하니 주전에게 항복하지 않은 황건적들은 뿔뿔히 흗어져 달아났다. 주전은
여세를 몰아 여러 고을의 잔당들은 소탕한 후 조정에 표를 올려 승전을 알렸다.
장각.장량.장보 삼 형제는 이렇듯 관군에게 격퇴당하여 목이 떨어졌으나 그렇다
고 황건적이 완전히 자취를 감춘 것은 아니었다. 황건적의 괴수 장각의 막하에
있다가 관군의 공격을 피한 잔당들이 아직도 수만의 무리를 거느리고 여러 고을
을 괴롭히고 있었다. 조홍.한충.손중이 거느리는 잔당들은 아직도 장각의 원수를
갚겠다며 졸개들을 완성으로 집결시키고 있었다. 조정에서는 주전에게 이들 황
건 잔당들을 소탕하라고 명해ㅆ. 그리하여 조정의 명을 받들고 주전은 군사를
몰아 완성으로 쳐들어갔다. 주전이 군사를 이끌고 오자 황건적의 잔당 조홍은
한충을 내보내 싸우게 했다. 주전은 유.관.장 세 사람에게 완성의 서남문쪽 성문
을 치게 했다. 그것을 알리 없는 한충은 정병을 이끌고 서쪽 성문으로 달려오다
가 유.관.장 셋을 보고 크게 놀라 말머리를 돌렸다. 유비가 기회를 놓치지 않고
그 뒤를 쫓으며 적도들을 공격했다. 이때 주전은 스스로 철기 2천을 거느리고
동북쪽으로 달려가 공격했다. 갈피를 잡지 못하던 한충의 병사들은 유비.관우.장
비의 말발굽에 쓰러져갔다. 다급해진 한충은 자칫 성마저 함락당할 판이라 성안
으로 말을 몰아 퇴각했다. 뒤따라온 주전의 군사가 성을 철통같이 에워쌌다.
"적은 원군도 없고, 머지않아 군량도 떨어질 것이다."
주전은 성 주위를 물샐틈 없이 경계하도록 한 후 적의 동채를 살폈다. 잔당들을
무턱대고 받아들였으므로 군량마저 얼마 가지 않아 바닥이 나고 말았다. 게다가
조홍.손중도 서로 연락이 끊긴 채여서 한중은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목숨마은
살려 달라고 항사를 보냈다. 그러나 주전은 크게 노하며, 항사의 목을 베어 버렸
다.
"죽게 되면 항복을 하고, 힘이 있을 때는 모반을 하는 너희놈들을 어떻게 살려
준다는 말아냐. 필요없다!"
유비는 주전이 사자의 목을 베자 의아스럽게 여겨 물었다.
"옛날 한 고조께서 천하를 얻으신 것은 적에게 항복을 권하고 투항한 적을 너그
러이 받아들였기 때문입니다. 장군은 어찌하여 한충의 항복을 받아들이지 않으
십니까?"
유비의 말에 주전이 고개를 좌우로 흔들며 그 까닭을 말했다.
"그 때와 지금은 시대가 다르오. 옛날 진나라와 항우때에는 천하가 어지러워 백
성들에겐 주인이 없었소. 그래서 적군이라도 항복해오면 상을 내리고 백성으로
삼아 민심을 수습하고 힘을 길렀던 것이오. 그러나 오늘날에는 천하가 통일되었
고 오직 황건적들만이 모반을 일으켰소. 지금 그들의 항복을 받아들인다면 어떻
게 악한 것을 징계할 수 있겠소. 그것은 저들이 유리하면 날뛰고, 형편이 나빠지
면 항복하면 그만이라고 생각하게 할 것이오. 그 결과는 도적들의 나쁜 마음을
키우는 것으로밖에 볼 수 없으니 어찌 양책이라고 할 수 있겠소."
주전은 잘라 말했다. 유비는 그 말을 듣고 웃으며 말했다.
"듣고 보니 지당한 말씀입니다. 그러나 사방에서 철통같이 에워싸고 있으면서 항
복을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적은 죽기로 작정하고 싸울 것입니다. 1만 명이 한마
음으로 뭉쳐 죽기로 싸운대도 당하기 어려운대도 당하기 어려운데 수만의 군사
들이 대항한다면 이쪽도 크게 피해를 입을 것은 자명한 이치가 아닙니까? 어떻
겠습니까? 동문과 서문은 터놓은 채 남문과 북문으로 공격하면 적은 반드시 성
을 버리고 달아나게 될 것입니다. 이때 한충을 사로 잡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음-, 그거 좋은 생각이오."
주전은 유비의 말을 좇아 동문과 서문을 터놓은 채 남문과 북문으로 일제히 공
격해 들어갔다. 과연 얼마 지나지 않아 한충은 군사를 거느리고 성을 빠져 나가
기 위해 동문으로 달아나고 있었다. 유비.관우.장비는 군사를 몰아 그를 뒤쫓았
다. 한충은 난전 속에서 화살을 등에 맞고 말 아래로 떨어졌다. 대장이 말 위에
서 떨어지자 적은 어찌할 바를 모르고 사방으로 흩어졌다. 관군은 추격을 멈추
지 않고 그들을 뒤따라 섬멸했다. 이때 조홍.손중이 한충을 돕기 위해 수만명의
군사를 이끌고 밀어닥쳤다.
조흥.손중은 완성을 지키던 한충의 목이 떨어진 것을 알고 크게 노하여 주전의
군대를 덮쳤다. 갑자기 밀어닥친 조흥.손중의 군사들 앞에서 한충의 목을 베어
승리감에 도취해 있던 주전의 군대는 동요하기 시작했다. 거기다가 조흥.손중의
군대는 죽기를 각오하고 결사적으로 덤벼들었으므로 멈칫하지 않을 수 없었다.
주전은 잠깐 물러서기로 하고 자기의 진중을 향해 말을 달렸다. 적은 주전의 군
대를 뒤쫓아 마구 베고, 찔러 댔다. 조흥과 손중은 주전군을 본진으로 쫓은 후
다시 완성을 되찾고는 성문을 굳게 닫았다. 주전과 유비는 10리쯤 떨어진 곳에
진을 치고 다시 완성을 탈환할 계획을 짜고 있었다. 그때였다. 돌연 한 떼의 군
사가 그들 앞에 밀어닥쳤다. 얼핏 보아 1천 5백쯤 되는 군사였다. 대오도 정연하
고 보무도 당당하게 달려왔다. 대오의 맨 선두에 청려(수려한 말)를 몰며 위풍도
당당히 들어서는 장수가 있었다. 흰 얼굴에 번듯하게 넓은 이마, 입술은 주홍빛
같이 붉고, 눈썹이 반달처럼 치솟아 있었다. 몸은 호랑이처럼 날래 보였지만, 허
리는 곰처럼 단단해 보이는 것이 위엄은 있으나 사나워 보이지 않는 범상치 않
은 풍모를 갖추고 있었다. 유비.관우.장비 삼 형제가 모두 처음 대하는 얼굴이었
다. 주전이 앞에 나서서 물었다.
"젊은 장수는 어디서 온 누구인가?"
"저는 오군 부춘에 사는 손견으로 자는 문대라고 합니다. 군사 1천 5백을 거느리
고 장군을 도우러 왔습니다."
맑고 우렁찬 목소리였다. 손견은 혈통으로 보면 전국시대의 [손자]라는 병법서를
쓴 손무자의 후손이다. 조상들은 대대로 오국에서 벼슬을 하며 부춘에서 살았다.
손견은 어릴 때부터 용모가 비범하고 기개가 남달랐다. 나이 열일곱 살 때의 일
이었다. 아버지를 따라 전단강을 여행한 적이 있었다. 때마침 해적들이 지나가는
배를 털어 가익슭에서 약탈한 물건을 나누고 있었다. 육지로 가는 사람들이나
물 위에 뜬 배는 해적들이 무서워서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있었다. 그것을 보
고 손견이 일어나 아버지에게 말했다.
"도적들을 제가 물리치겠으니 허락해 주십시오."
"그만두어라. 네가 감당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두고 보십시오."
그렇게 말한 손견은 긴 칼을 빼들고 언덕 위로 올라가서,
"여기다! 빨리 와서 이 도적들을 잡아라!"
하고 호통치며 마치 등 뒤에 수백의 군사를 매복시킨 양 긴 칼로 지휘를 하는
시늉을 해 보였다. 그 모양은 마치 수많은 관군이 산개하여 해적들을 포위하고
있기라도 한 것처럼 보였다.
"이거 위험하다. 관군이 온 것 같다."
멀리서 손건의 이런 모습을 본 해적들은 당황하여 재물도 버려 둔 채 뿔뿔히 흩
어져 달아나 버렸다. 손견은 그 중의 한 사람을 추격하여 목을 쳤다. 부친도 아
들의 뛰어난 지략과 담량에 크게 놀랐다. 이 일로 손견의 이름은 이 지방에 널
리 알려졌으며, 그는 현의 교위로 임명되었다. 그 무렵, 회계에는 허창이란 자가
반란을 일으켜 스스로 '양명황제'라 칭하여 그 아들 허소를 시켜 여러 고을을 선
동하니 그를 따르는 무리가 수만 명에 달했다. 손견은 1만여 명의 민병을 모아
고을의 사마와 합세하여 이들 도둑들을 토벌하고 허창과 그 아들 허소의 목을
베었다. 그 뒤로 '강남에는 뛰어난 장수 손견이 있다'라는 말을 듣게 되었다. 회
계자사 장민이 손견의 공로를 상주하자, 조정에서는 그에게 염독현 현승으로 승
진시키고 후에 우이승현승, 하비승을 제수하였다. 황건의 난이 일어나자 이제 스
물여덟이 된 손견도 역도들을 치라는 조정의 말을 받들게 되었다. 이에 손견은
황건적을 토벌하기 위해 회수.사수의 젊은이들 1천 5백여명을 이끌고 주전의 군
대에 합세하러 달려오는 길이었다. 황건의 난이 일어나자 이제 스물엷이 된 손
견도 역도들을 치라는 조정의 명을 받들게 되었다. 이에 손견은 황건적을 토벌
하기 위해 회수.사수의 젊은이들 1천 5백여 명을 이끌고 주전의 군대에 합세하
러 달려오는 길이었다. 주전은 손견이 군사를 이끌고 자기를 도우러 왔다는 말
을 듣고 기뻐하며 손견은 완성의 남문을, 유비는 북문을 공격하게 했다. 주전은
서문을 치되, 동문만은 적군이 달아날 수 있도록 퇴로로 터놓아 밖으로 나오면
무찌를 작정이었다. 손견은 수하 장졸들보다 앞서 순식간에 남문을 향해 말을
달려 단신으로 성벽을 기어올랐다.
"오군의 손견이 예 왔다. 도적들은 내 칼을 받아라."
적병 속에 뛰어든 손견의 칼이 춤을 추었다. 순식간에 적병 20여명의 목이 달아
났다. 이를 본 적장 조흥이 대로했다.
"오군에서 온 촌놈아. 감이 뉘 앞이라고 날뛰느냐? 내가 네놈의 목을 베어 주겠
다."
조흥이 창을 치켜들고 손견 앞으로 달려갔다. 그러나 조흥이 어찌 손견의 상대
가 되랴. 손견은 성 위에서 몸을 날려 잽싸게 조흥의 창을 빼앗아 그를 찔러 말
아래로 떨어뜨렸다. 손견은 조흥의 말을 빼앗아 타고 좌충우돌하며 도적들을 무
찔렀다. 그걸 본 또 한사람의 적장 손중은 북문에서 싸울 생각을 잃고 혈로를
뚫어 달아날 길만 찾았다. 때맞춰 유비가 달아나는 손중을 향해 쏜 화살이 막
동문을 빠져 나가는 손중의 목을 꿰뚫었다.
"악!"
손중은 외마디 비명 소리와 함께 몸을 뒤집으며 말위에서 굴러 떨어지고 말았
다. 주전이 유비.손견과 힘을 합쳐 일시에 완성을 공격하자 황건적 수만명은 목
을 베이고 나머지 수만명은 항복하였다. 드디어 완성을 되찾고 남양 일대의 10
여 고을은 모두 평정되어 황건적은 자취를 감추었다. 그런데 황건적의 난은 천
하의 초민들사이에서 저절로 일어난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그 화근은 낮은 민
초보다도 높은 묘당(조정)에 있었다. 상탁하부정이란 말이 있듯이 윗물이 흐리면
아랫물도 흐리다는 이치 그대로였다. 그러나 부패한 자일수록 자기 자신의 썩은
냄새를 깨닫지 못한다. 또한 시류의 움직임에 눈이 어두워진다. 황건의 무리가
천하를 어지럽히고 백성들을 괴롭힌 것은 그들의 힘이 강해서라기보다는 권세를
잡은 자들이 부패했기 때문이었다. 어쨌거나 주전은 황건의 무리를 깨끗이 소탕
하고 손견.유비와 함께 낙양으로 개선했다. 조정에서는 주전의 공을 크게 치하하
여 거기장군에 봉하고 하남윤을 제수하였다. 이때 주전은 "이번 싸움에 손견과
유비의 공이 큽니다."하고 상주하였다. 그러나 조정에 연줄이 닿아 있고 상하에
인심을 쓴 손견은 별군사마가 되었으나, 유비는 여러 날이 지나갔음에도 아무런
벼슬도 제수받지 못했다. 황건의 난을 일어나게 했던 조정의 부패는 황건의 난
이 끝나도 여전히 근절되지 않고 더욱 기승을 부리고 있었다. 천자는 환관들에
게 기울어져 그들의 말만 들었다. 세상이 바로 잡히려면 아직도 요원할 뿐이었
다. 환관들은 자기들 마음대로 대사를 주무르니 그들과 선이 닿지 않는 사람들
은 언제나 소외되어 있었다. 황건적 토벌에 대해 상을 베푸는 일도 그럴 수밖에
없었다. 주전은 원래 조정에서 명한 장수라 거기장군에다 하남윤이 되었다. 손견
또한 별군사마가 되었다. 그러나 주전이 유비의 공을 표를 올려 상주하였으나
유비에게는 벼슬은커녕 한 마디 치하도 없었다. 유비 일행은 음울한 마음으로
하릴없이 세월만을 흐려 보내고 있었다. 그런 어느 날, 일행은 우울한 마음을 이
기지 못해 거리에 나가 거닐고 있었다.
"유공! ... 거기 가는 분은 유공이 아니신가?"
수레 위에서 큰 소리로 유비를 부르는 사람이 있었다. 유비가 돌아다보니, 그 사
람은 낭중(천자의 근시 차관급) 장균이었다. 장균은 궁중으로 들어가는 모양이어
서 많은 시종을 거느리고 있었다. 지난날 황제의 칙사로 장균은 전쟁터를 시찰
나온 적이 있었다. 그때 유비의 전공을 보고 크게 치하한 적이 있던 사람이었다.
유비는 장균의 수레 앞에 가서 허리를 굽혀 인사를 하였다. 장균은 부하를 거느
리지 않고 초라한 행색으로 거닐고 있는 유비를 보고 의아스런 듯이 물었다.
"생각지 않은 곳에서 만나게 되었군 그래. 그런데 지금은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
는가?"
장균은 유비의 행색을 살피며 물었다. 유비는 장균에게 낙양으로 오게된 경위와
이전에 있었던 일을 낱낱히 이야기하였다.
"음-, 그랬었군."
장균은 유비의 말을 듣고 놀라며 물었다.
"그럼, 아직 관직도 얻지 못하였고 상도 받지 못했다는 말인가?"
장균은 놀란 얼굴로 다시 물었다.
"예, 작은 공으로 나라의 보답을 바라는 것같습니다만 저 자신보다도 부하 장병
들에게 이 초겨울에 따뜻한 전복이나 입혔으면 하여 주장군을 뵈올까 하던 참이
었습니다."
"허 ...., 사정이 그러한지 나도 모르고 있었소. 손견같은 사람도 별무사마의 관직
에 앉아 있는데 유 공의 공을 모르고 있다니.... 아니 이번 황건적 소탕전에서 가
장 큰 공을 세운 군대는 유 공의 의군일 것이오. 그런데도 조정의 환관놈들이
유 공의 공을 어뚱한 자가 가로채도록 수작을 부린 게로군."
낭중 장균은 그 말을 남기고 수레를 타고 결연한 얼굴로 대궐로 들어 갔다. 장
균은 황제를 배알하고 아뢰었다.
"지난날 황건적이 난을 일으킨 것은 모두 십상시들이 매관 매직을 일삼아 천하
가 어지러워졌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십상시들의 목을 베시소, 황건적 토벌에 공
이 있는 사람에게 벼슬을 내리시겠다고 포고하십시오. 그래야만 사해가 맑고 평
안해질 것입니다."
장균의 말에 십상시들은 크게 놀랐다. 십상시 중의 하나가 나이 어린 영제에게
아뢰었다.
"장균이란 자는 황제 폐하께 거짓말을 고하고 있습니다."
이미 십상시들에게 둘러싸여 정사를 처리해온 영제였다. 장균의 말에 귀도 기울
이지 않은 채 십상시들의 말을 좇아 무사들을 시켜 장균을 궐문 밖으로 내던졌
다. 그 일이 있자, 십상시들도 불아했는지 저희끼리 가만히 의논을 했다.
"이번 일은 황건의 난에 약간의 공을 세우고도 벼슬을 얻지 못한 자들 중에서
원망의 소리가 나왔기 때문에 장균이 그 일을 아뢴 것이오. 지금부터라도 그런
자들의 불평을 없애기 위해 낮은 벼슬자리라도 나누어 주는 것이 현명한 일인
듯하오."
십상시들은 이렇게 의견을 모으고 대책을 마련했다. 십상시들은 영제에게 진언
하여 추가로 은상을 베풀게 한 후, 선정이라도 베풀 듯 몇몇 훈공자를 가려내어
벼슬을 제수했다. 그리하여 유비는 중산부 안희현의 현위가 되어 부임하게 되었
다. 유비는 보잘것 없는 지방의 관직을 얻은 터라 많은 병력을 거느릴 수 없었
다. 누상촌에서 함께 출발했던 5백여 의병들에게 노잣돈을 후히 주어 각기 고햐
으로 돌아가게 하고, 관우.장비와 함께 20여 명의 군사들만 거느리고 안희현에
부임했다. 그가 현위로 부임한 지 불과 한 달이 지나지 않았으나 안희현은 크게
달라졌다. 부임하는 날부터 백성들을 위해 선정을 베풀었으므로 백성들은 모두
그를 우러르고 따랐다. 강도.절도 등 도적의 무리가 자취를 감추었고, 고을 사람
들은 태평성대를 맞이하여 편안한 나날을 보낼 수 있었다. 백성들은 한결같이
유비의 선정을 칭송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유비는 항상 관우.장비와 함께 한
상에서 식사를 하고 한 침상에서 잠자리를 같이했다. 유비가 마을 일을 보기 위
해 여러사람이 있는 자리에 나갈 때는 관우.장비는 유비의 좌우에서 종일토록
시립했으나 피곤한 빛이 전혀 없었다. 유비가 부임한 지 넉달이 되자 조정에서
는 각 고을에 황제의 조칙을 내렸다. 유비에게도 황제가 내린 조칙이 전해졌다.
지난날 황건의 난을 평정하였을 때 거짓으로 군공이 있다고 조정을 속여 관직
을 받은 자가 있다. 또한 공이 있노라 사칭하여 여러 고을에서 위세를 떨치며
백성들을 괴롭히는 자가 많다고 하므로 이를 살펴 옳고 그름을 바로잡으려 하노
라.
충신은 죽어 나가고 풍운에 휩싸인 황실
황제의 조칙을 받은 지 며칠이 지나지 않아 안희현에도 칙사의 임무를 띠고
독우란 자가 내려왔다. 유비 이하 현청의 벼슬아치들은 큰길로 나가 독우의 행
렬을 맞았다. 독우는 말위에 앉은 채 거만스럽게 말채찍을 약간 들어 보이는 것
으로 답례를 대신했다. 옆에서 이 꼴을 보고 있던 관우.장비는 화가 치솟아 얼굴
이 시뻘게졌다. 일행이 역관에 이르자 유비는 의관을 정제하고 독우 앞에 나아
가 두 손을 모으고 허리를 굽혔다. 독우는 좌우에 수행원들을 시립시키고 남쪽
을 향한 높은 자리에 앉고 유비는 뜰 아래 서 있었다. 한동안 유비를 내려다보
고 있던 독우가 불쑥 물었다.
"유현위는 어느 고장 출신인가?"
"유비 이 몸은 중산정왕의 후예로서 이번 황건적이 난을 일으킨 이래 탁현에서
의병을 모아 30여 회를 싸운 작은 공이 있다 하여 이 현위를 제수받았습니다."
"뭐? 중산정왕의 후예라고.... 닥치거라!"
그러자 독우는 별안간 호통을 쳤다.
"황제께서 각처 각지를 순찰하게 명하신 것은 그대와 같이 공이 있다고 사칭하
거나, 천자의 종친을 사칭하는 벼슬아치들이 횡행한다는 소문 때문이다. 이와 같
은 불경은 즉시 황제께 상주하여 장차 합당한 처벌을 내릴 것이다. 썩 물러가
라."
유비에게 마른 하늘에 날벼락이었다. 척사가 저토록 위세를 부리며 트집을 잡는
까닭을 알 수 없었다. 유비는 할 말을 찾지 못해 입을 다물고 있다가 그 자리를
물러났다. 유비는 현청에 돌아와 현리들을 불러 들였다.
"독우께서 저토록 억지를 부리는 까닭이 무엇이오."
수행원이 입가에 야릇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현위께선 차 답답하시군요. 독우 칙사가 위세를 부리시는 것은 바로 뇌물을 바
라시기 때문입니다."
유비는 그 소리를 듣자 어처구니가 없어 한탄해 마지않았다.
"내가 이곳에 부임한 이래 추호도 백성들을 괴롭힌 적이 없다. 또한 백성들에게
한푼도 거둔 것이 없는데 무슨 재물이 있어 뇌물을 바친단 말인가?"
백성들은 조석이 어려울 지경으로 모두들 가나했다. 거기다가 일정한 조세는 징
수하여 모두 중앙으로 보내야만 했다. 그렇다고 달리 백성들에게 거둔 것이 있
을 리가 없었다. 유비는 별수 없이 독우의 처분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다음 날도
유비에게서 뇌물을 가져올 기미가 보이지 않자 독우는 관원들을 모아 놓고 유비
가 부리고 있는 현리부터 불러들이라고 불호령을 내렸다. 그리하여 현리가 급히
달려와 머리를 조아렸다. 독우는 엄한 목소리로 현리에게 명을 내렸다.
"이 고을의 위 유비는 일개 천민의 몸으로 천자의 종친이니 어쩌니 사칭하고 있
다. 또한 이곳 백성들의 학정에 시달려 못살겠다는 원망의 소리도 내 귀에 들려
온 바 있다. 이런 못된 벼슬아치를 감찰하라고 황제께서는 나를 칙사로 내려 보
내신 것이다. 내가 낙양에 올라가 황제께 상주하여 당장 파지토록 할 테니 너희
들은 나의 뜻을 받들어 상소문을 올려라."
현리들은 평소에 유비의 덕망에 감복하고 있는 터라, 그저 독우의 불호령에 아
무런 대답을 못하고 두려워 떨기만 했다. 유비가 죄 없는 현리를 변호하러 찾아
갔으나 문지기가 가로막고 들여보내지 않았다. 이때 장비는 칙사 독우의 하는
꼴이 못마땅해 홧김에 몇 잔의 술을 들이키고 독우가 있는 역관 앞을 지나가게
되었다. 그 중에는 고개를 떨구고 눈물을 흘리는 노인도 있었다. 장비가 그들을
보고 의아한 얼굴로 까닭을 물었다. 눈물을 흘리더 늙은이 한 명이 장비의 물음
에 대답했다.
"독우 칙사께서 현리를 문초하며 유 공을 모해하려 하시기에 우리들이 간청이라
도 하려고 이곳에 왔습니다. 그러나 우리들을 들여보내 주지 않고 매질만 했습
니다. 이런 억울한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렇지 않아도 화를 참고 있던 장비였다. 그 소리를 듣자 대뜸 송충이 같은 누
썹을 치켜올리며 온몸을 부르르 떨더니 말 위에서 뛰어내렸다. 그리고는 굳게
닫힌 역관의 대문을 무섭게 노려보았다. 장비는 역관의 문이 부서져라 주먹으로
치며 소리쳤다.
"이놈들아! 문을 열어라. 열지 않으면 부숴 버리겠다."
그 소리에 칙사의 수졸이 문틈으로 내려다보았다. 문 밖에는 호랑이 털 같은 수
염을 곤두세우고 얼굴이 대추처럼 붉은 거한이 사나운 기세로 문을 두드리고 있
지 않은가.
"문을 열지 말라. 열어 주면 안된다."
장비의 사나운 기세에 겁에 질린 독우의 수졸들은 대문을 걸어잠근 채 몇 겹으
로 열을 지어 대문을 지켰다. 그러나 수졸들이 어찌 장비를 감당해 낼 수 있겠
는가. 장비는 더욱 노기가 뻗쳐 한 주먹으로 대문을 부수고는 수졸 몇을 손에
잡히는 대로 때려 눕힌 후 곧장 후당으로 뛰어들었다.
"백성을 해치는 도둑놈아. 내가 누구인지 모르겠느냐?"
장비가 이를 부드득 갈며 고리눈을 부릅뜨고 독우를 노려보며 벽력치듯 소리쳤
다.
"아니, 무 , 무슨 짓이냐? 감히 나에게 이 무슨 짓이냐?"
독우는 갑자기 들이닥친 성난 호랑이 같은 장비를 보고 간이 콩알만해졌으나 주
위의 수졸들을 곁눈질해 보며 짐짓 호통을 쳤다.
"네놈이 아직 정신을 못 차렸구나."
장비는 독우를 덮칠 듯 대뜸 머리채를 거머쥐더니 역관 밖으로 끌고 나왔다. 독
우가 그제서야 얼굴이 파랗게 질린 채 부들부들 몸을 떨며 장비에게 용서를 빌
었다. 그러나 독우의 애원이 장비의 귀에 둘어올 리가 없었다. 장비는 역관 밖으
로 나와 사방을 휘둘러 보더니 말뚝이 눈에 띄자 그곳에다 독우를 묵었다. 그리
곤 말뚝 곁에 버드나무 가지를 우지끈 꺾더니 독우를 향해 사정 없이 매질을 시
작했다. 장비가 그 억센 힘으로 후려치니 나뭇가지는 금세 산산이 부러져 나갔
다. 장비는 나뭇가지가 부러지면 다시 꺾어 독우의 몸을 후려쳤다. 독우는 이제
체면이고 뭐고를 차릴 여유도 없이 비명을 지르며 애원했다.
"아이구, 장군님 잘못했습니다. 뭐든 시키는 대로 할 테니 살려 주십시오."
"어림도 없다. 네놈은 실컷 매를 맞아 봐야 한다."
10여 개의 버드나무 가지가 부러졌다. 군데군데 찢겨 나간 독우의 바지에서는
붉은 피가 배어 있었으나 장비는 매질을 멈추지 않았다.
이날 유비는 칙사의 횡포에 분노를 느껴 아예 인수를 독우에게 넘기고 벼슬을
내 주리라 작정하고 있던 참이었다. 그때 요란하게 문을 두드리더니 네댓 명의
고을 사람들이 헐레벌떡 뛰어왔다.
"현위님, 큰일났습니다. 지금 장비 어른이 술김에 칙사 나리를 말뚝에 묶어 놓고
매질을 하고 있습니다."
유비가 크게 놀라 급히 달려가 보니, 독우는 바짓가랑이가 너덜너덜 찢겨진 채
말뚝에 묶여 장비에게 매를 맞고 있었다. 며칠 전 그 오만불손하던 독우와는 너
무나 다른 처량하기 짝이 없는 몰골이었다. 종아리는 피로 얼룩져 있었고, 얼굴
은 시퍼렇게 멍이 들어 있었다. 유비가 급히 달려 들어 장비의 손목을 움켜잡으
며 큰 소리로 꾸짖었다.
"장비, 이게 무슨 짓이냐?"
그러나 장비는 아랑곳하지 않고 씨근대며 말했다.
"말리지 마십시오. 백성들에게 해독을 끼치는 이런 놈을 내 오늘 매로 숨통을 끊
어 놓을 작정이오."
독우가 유비를 보자, 눈물을 흘리며 떨리는 목소리로 애원했다.
"현덕 공! 나 좀 구해주시오."
칙사의 비굴한 애걸을 듣자 유비는 더욱 기가 막혔다. 그러나 유비의 성품은 원
래 모질지 못하고 너그러웠기에 잠시 망설였다. 거기다가 독우의 행위야 어쨌든
황제의 명을 받고 내려온 칙사가 아닌가.
"장비! 그만두지 못할까."
유비는 매서운 소리로 장비를 꾸짖으며 엄한 눈으로 가만히 그를 쳐다 보았다.
뒤쫓아 달려온 관우가 마지못해 장비를 제지시켰다. 유비는 새끼줄을 풀고 독우
를 땅에 내려놓았다. 관우가 유비에게 다가와 말했다.
"형님! 우리가 황건의 큰 공을 세웠음에도 고작 현위라는 미관말직에 지나지 않
았는데, 그나마도 관직이라고 지키다가 이런 놈에게까지 모욕을 당한 게 아닙니
까? 원래 '가시덤불에는 봉황이 깃들이지 않는다'라는 옛말이 있습니다. 형님, 원
래 우리는 여기가 머물 곳이 못 되는 것 같습니다. 차라리 저 탐관오리를 죽여
없앤 뒤 오늘이라도 이곳을 떠나 따로이 원대한 앞날의 계획을 세워 보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관우는 나지막한 목소리로 단숨에 말을 이어갔다. 관우가 이곳을 떠나자고 한
것은 독우 때문만은 아닌 듯했다. 유비도 이미 벼슬을 내주기로 작정한 터였던
것이다. 게다가 장비가 이미 저지른 일도 가볍게 넘어갈 일은 아니었다. 유비는
이윽고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알았네. 아우의 말이 지당하네. 나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네."
유비는 가슴에 걸고 있던 현위의 인수를 풀어 독우에게 주며 엄한 목소리로 말
했다.
"관직을 빙자하여 네놈처럼 백성들을 괴롭히는 놈은 죽여 없애는 것이 마땅하나
인명을 귀하게 여김이 덕이라 목숨만은 살려 준다. 차후에 오늘을 거울삼아 추
호도 백성을 못살게 굴지 말라. 이제 네게 인수를 돌려 주겠으니 너는 이것을
가지고 가라."
목이 붙어 있는 것만을 다행히 여긴 독우는 제몸도 제대로 가누지 못하다 수졸
들에게 부축을 받고서야 겨우 정신을 차렸다. 그러나 칙사 독우는 목숨을 부지
하게 되자 제 잘못을 뉘우치기는커녕 오히려 정주태수에게 달려가 장비에게 당
한 봉변을 낱낱히 일러 바쳤다. 정주태수는 독우의 말만 믿고 여러 고을에 유.
관.장 삼 형제를 잡아들이라는 통문을 돌리고, 당장에 군사를 풀어 유비 일행을
잡으러 나서게 했다. 한편 안희현을 떠난 유비 일행은 당장 갈 곳이 마땅치 않
았다. 쫓기는 몸으로 탁현의 누상촌으로 갈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그리하여 추
격군을 피해 밤이면 숲에서 노숙을 하며 산길을 따라 며칠을 걸려 대주태수 유
희를 찾아갔다. 대주태수도 이미 유비의 이름을 들어 알고 있는데다 자신과 같
은 한의 종실이라 반갑게 맞아들였다. 그리고서는 유비 삼형제를 더 이상 쫓기
는 몸이 되지 않도록 숨겨 주었다. 조정에서는 황건적의 난이 평정되자 그때까
지 숨을 죽이고 있던 십상시들이 다시 위세를 떨치기 시작했다. 십상시들에게
영제는 바로 맹제일 뿐이었다. 눈뜬 장님이요, 꼭두각시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
니 이런 장님을 둘러싸고 있는 십상시들의 약점을 헤아리자면 끝이 없었다. 다
시 권세를 쥐기 시작한 십상시들은 저희들의 말에 따르지 않는 사람은 벼슬자리
에서 내쫓기거나 죽여 없애자고 뜻을 모았다. 특히 장양과 조충은 황건의 난에
공을 세워 은상을 베푼 장군들이나 훈공자들에게 사람을 보내 뇌물을 강요했다.
"공들의 군공을 주장하여, 공들은 각기 막대한 봉록과 은전을 받지 않았던가. 그
럼에도 주상한 사람에게는 이렇다 할 인사가 없으니 도리에 어긋나는 일이 아닌
가?"
권세가 막강한 이들의 엄포에 많은 벼슬아치들이 너도나도 뇌물을 갖다 바쳤다.
그러나 강직한 황보숭과 주전등 두 장군은 십상시의 말을 듣지 않았다.
"원래 거기장군 황보숭과 주전은 부하 장수들의 군공을 가로채 높은 벼슬과 상
을 받은 자들이옵니다. 거기다가 벼슬이 오른 후로 나라일은 게을리하고 사리사
욕만 채운다 합니다. 그들의 벼슬을 거두어들여 본보기를 보여야 합니다."
십상시들은 영제를 싸고돌며 기회 있을 때마다 참소하니 이윽고 영제도 그들의
참소를 받아들여 두 사람의 관직을 박탈하고 대신 내시인 조충을 거기장군에 임
명했다. 또한 장양을 비롯한 다른 내관 열 명을 열후에 봉하고, 사공이라는 말직
에 있던 장온을 태위에 봉했다. 궁정의 이런 문란과 부패로 말미암아 백성들은
폭정과 착취에 신음하고 있었으며 그 원성 또한 높아만 갔다. 장사 땅에는 구성
이란 사람이, 어양 땅에는 장순.장거 형제가 무리를 모아 반란을 일으켜 노략질
을 일삼았다. 장거는 스스로를 천자로 칭하고 장순은 대장군이라 칭하며 백성들
을 선동하자 앞뒤를 가리지 않고 모여들어 그 기세가 자못 드높았다. 각 처의
태수들은 도적들의 기세와 위급함을 조정에 장계와 표문으로 보고하였다. 그러
나 십상시들은 그런 사실을 모두 비밀에 붙이고 황제에게는 난리가 일어난 것조
차 알리지 않았다. 어느 날 영제는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십상시들과 후원에서
연희를 벌이고 술을 마시고 있었다. 그러자 간의대부(황제의 고문관) 유도가 달
려나와 황제 앞에 엎드려 슬피 통곡하는 것이었다.
"어찌하여 그대는 그토록 슬피 우는가?"
영제는 그 까닭을 물었다.
"나라의 존망이 오늘 내일을 다투고 있는 이때, 폐하께서는 간사한 무리들과 어
울려 잔치만 즐기시니 이 어찌 가슴아픈 일이 아니겠습니까?"
한창 흥에 겨워 술잔을 기울이던 영제는 유도의 말이 무슨 뜻인지 알수 없다는
얼굴로 물었다.
"만백성이 짐의 위세에 심복하여 천하가 태평세월인데, 무엇이 그다지도 위태롭
다는 말인가?"
"도처에 도적 떼들이 일어나 차례로 주군을 침범하여 노략질을 일삼고 있사옵니
다. 각지의 태수들로부터 위급을 알리는 표문이 빗발치고 있사오나 저 십상시들
이 그것마저 폐하께 숨기고 있사옵니다. 이는 모두 저들이 매관 매직을 일삼아
폐하의 눈을 흐리게 하고 어진 이들을 모두 조정에서 쫓아낸 데서부터 비롯되었
습니다. 이 어찌 위급하지 않고 슬프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워낙 술수에 밝은 십상시들이었다. 옆에서 유도의 말을 듣고 얼굴빛이
달려지더니 다음 순간 십상시들이 관을 벗고 일제히 황제 앞에 꿇어 엎드렸다.
"대신들로부터 이러한 비난을 듣고서야 어찌 살 수가 있겠습니까? 신들을 향리
로 돌아가도록 윤허하여 주시옵소서. 그리고 신들의 모든 재산을 다 바치겠사오
니 군비에 보태 쓰도록 해 주시옵소서."
십상시들이 짐짓 충성어린 말로 눈물을 흘리며 고했다. 영제는 십상시들이 눈물
을 흘리며 애절한 목소리로 호소하자 그들의 거짓 충성에 속아 금세 마음이 흔
들렸다.
"그대의 집에도 가까이 시중드는 사람이 있을진대 어찌하여 짐의 근신들은 용납
하지 않는단 말인가?"
영제는 크게 노하여 유도를 꾸짖고는 무사들에게 명을 내렸다.
"여봐라. 저 자를 끌어 내 목을 베라!"
영제의 분부에 땅을 치며 한탄했다.
"내 한 몸 죽는 거야 애석할 리 없다만 슬프도다! 4백년 한실이 기울어져 가니
이것이 한스러울 뿐이다."
영제의 명을 받은 무사들이 유도를 끌어 내려 할 때였다.
"무사들은 유 대부에게 손을 대지 마라. 내가 폐하께 간하겠으니 기다려라!"
난데없이 한 대신이 후언으로 뛰어들며 무사들을 꾸짖었다. 그는 사도 진탐이었
다. 진탐은 어전에 나아가 꿇어 엎드렸다.
"무슨 죄로 간의대부 유도를 주살하라 하셨습니까?"
"근신을 비방했을 뿐만 아니라 짐을 모독한 죄이니라."
황제의 말에 소리 높여 고했다.
"십상시들에 대한 원성이 하늘을 찌를 듯하고 모든 백성들이 그들의 육신을 갈
기갈기 씹고자 합니다. 그런데 어찌하여 폐하께서는 백성들을 생각치 않으시고
한낱 저들을 부모처럼 공경하시며, 아무런 공을 이룬 적 없는 이들을 후작에 봉
하셨습니까? 지난번 황건의 난 때 십상시 봉서등은 뇌물을 받고 황건적과 결탁
하여 내란을 일으키려 한 적도 있사옵니다. 이제 폐하께서 이를 경계하고 살피
지 않으신다면 시로 머지않아 한의 종묘사직은 그 종말이 눈앞에 있다 할 것입
니다."
"무엄하다. 봉서가 난을 일으켰다는 것은 아직 뚜렷이 밝혀진 바 없다. 또한 그
일로 십상시들을 모두 간적으로 비난하는 건 부당한 일이다. 그들 중 어찌 충신
한두 명이야 없겠는가?"
영제는 이렇게 말하며 끝내 진탐의 말에 귀를 기울이려 하지 않았다. 원통함을
이기지 못한 진탐은 머리를 댓돌에 찧으니 터진 머리에서 흐른 피가 조복을 흥
건하게 적셨다. 영제는 피를 흘리며 간하는 진탐의 충성심을 오히려 자신을 거
스르는 것이라 여겨 진노하여 진탐까지 옥에 가두게 했다. 그날 밤, 십상시들은
몰래 사람을 보내 옥에 갇힌 유도와 진탐을 죽여 버렸다. 다음 날 십상시들은
때늦게 장사의 구성과 어양의 장거.장순 형제를 칠 일을 의논한 후 건석의 주장
대로 손견을 장사 태수로 삼아 구성을 치게 했다. 또 한의 유우를 유주목으로
삼아 장거 형제를 치게 했다. 손견을 황개.한당.정보.조무 등 범 같은 네 장수를
거느리고 장사태수가 되어 싸움을 시작한 지 채 50일이 못 되어 구성을 쳐죽이
고 반군을 평정했다. 이에 조정에서는 손견을 오정후에 봉하고 그의 공을 치하
했다. 한편 어양의 장거 형제를 치던 유주목 유으는 싸움이 뜻대로 되지 않자
같은 한실의 종친이요, 가장 가까운 고을에 있던 대주태수 유회에게 도움을 청
했다. 유우의 급보를 받은 유회는 때마침 자기의 신세를 지고 있는 유비에게 좋
은 기회라고 여겨 유우에게 천거했다. 이에 유우는 크게 기뻐하고 유비 일행을
환영해 맞으며 도위로 삼아 군사 3천을 주어 즉시 장거 형제를 치게 했다. 유비
는 대주병과 함께 며칠 숨돌릴 사이도 없이 장거.장순의 본거지를 에워싸고 몰
아치니 도적들은 기가 꺾여 흩어지기 시작했다. 유비군의 공격에 눌려 세가 불
리함을 깨닫고 장순에게 원한을 품었던 장수 하나가 장순의 목을 베어 부하들을
거느리고 목숨을 빌며 투항하고 말았다. 원래 장순은 성정이 포악한 자였다. 한
편 장거는 장순이 죽임을 당하고 그 무리들이 유비에게 항복한 것을 알자 스스
로 제 목숨을 끊으니 이로써 어양 일대도 모두 평정되었다. 이에 유우가 조정에
표를 올려 유비의 훈공을 아뢰니, 조정에서는 독우를 구타한 죄를 용서했을 뿐
만 아니라 고당위(지금의 경찰서장)라는 벼슬을 내렸다. 이때 지난날 스승 노식
의 문하에서 함께 수학했던 공손찬도 천자께 아뢰었다.
"유비는 지난날 황건의 난에 고향 탁군에서 의군을 일으켜 혁혁한 군공을 세웠
습니다. 두 아우 관우.장비는 싸움에 나아가 패한 적이 없는 용맹한 장수들로 한
실을 위해 이들을 중용함이 좋을 둣하옵니다."
그리하여 조정에서는 유비를 다시 평원현령으로 봉했다. 유비는 관우.장비 그리
고 가솔들을 이끌고 임지인 평원으로 갔다. 평원은 기름지고 곡식도 관고에 가
득했다.
"하늘은 비로서 나에게 병마를 주셨도다."
유비의 가슴에는 새로운 용기와 포부가 용솟음치고 있었다. 유.관.장 세 사람에
게 평원은 앞을 향해 한걸음 나아갈 수 있는 터전이 되었다. 평원 땅에서 세 사
람은 매일 군사를 조련하며 때가 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때는 중평 6년 4월이었다. 병으로 몸져누워 있는 영제에게는 근심이 끊이지 않
는 복잡한 사정이 있었다. 즉 영제에게는 하후외에 후궁 왕미인이 있었으며 그
왕미인에게서 황자 협이 태어났다. 이렇게 되자 원래부터 질투심이 강한 하후에
게는 왕미인이 눈엣가시 같은 존재가 되고 말았다. 하후 스스로 황후 송씨를 내
쫓고 황후의 자리에 오른 터라 불안해지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하여 하후는 마
침내 짐독을 써서 왕미인을 독살하여 버렸다. 왕미인을 독살한 하후는 황자 협
을 영제의 모후인 동 태후로 하여 거두게 했다. 원래 동태후는 해독정후 유장의
아내였으나 아들이 환제의 양자가 되어 제위를 잇자 태후가 되었다. 동 태후는
황자 협을 거두어 기르며 영특한 협을 총애했다. 그래서 영제에게 협을 황태자
로 봉하도록 권한 일이 있었다. 영제 또한 어미를 여의 협 황자가 가여워서인지
대장군 하진의 누이동생 하후가 낳은 변 황자보다 더욱 애지중지했다. 십상시들
쪽에서 보면 언제나 위협이 되는 것이 외척들이었다. 거기다가 하 황후 소생인
변이 제위를 잇는 날에는 하진이 더욱 득세할 것을 염려했다. 영제가 위독하자,
중상시 건석은 그러한 눈치를 재빨리 간파하고, 이따금 황제의 병상에 나가 은
밀히 속닥거렸다.
"황자 협을 태자로 책봉하실 뜻이 계시면 먼저 하진을 주살해야 될 줄로 아룁니
다. 만약 그렇지 못하면 반드시 후환이 있을 것입니다."
"음-."
영제는 창백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영제는 자기의 병세가 깊음을 알고 있
었다. 그렇기 띠문에 한시바삐 자기가 죽기 전에 후사만은 매듭을 지어 놓고 싶
었다. 영제는 지체하지 않고 서둘러 영을 내렸다.
"대장군 하진은 즉시 입궁토록 하라!"
하진은 본디 소와 돼지를 도살하며 살아가는 백정의 아들이었다. 워낙 천한 신
분이었지만 누이동생이 낙양에서 드물게 보는 미인이어서 궁녀가 되어 대궐에
들어가 황제의 총애를 받으면서 하진도 벼슬자리에 오르게 되었다. 하진의 누이
는 영제의 총애를 받다가 황자 변을 낳았다. 변 황자를 낳은 하진의 누이동생은
황후 송씨를 몰아 내고 황후의 자리에 올랐을 뿐만 아니라 황후가 되고부터는
하후란 칭호로 불리고 있었다. 이에 하진도 제실의 외척으로 벼슬이 올라가 마
침내 천하를 호령하는 대장군이 된 것이다. 한편 급히 입궁하라는 어명을 받고
하진은 부랴부랴 대궐로 향했다. 하진이 중문을 지나려 하자 심복인 사마(경호대
장) 반은이 황급히 앞을 가로막았다.
"장군님! 지금 궁에 들어가셔서는 아니 됩니다. 건석이 장군님을 모살하려고 황
제를 충동질해 입궐토록 한 것입니다."
하진은 그 소리를 듣고 깜짝 놀라 말머리를 돌렸다. 일이 이쯤되자 사저로 돌아
온 하진을 크게 분노하여 조정의 여러 대신들을 불러모았다.
"십상시들이 나를 해치고 협 황자를 황태자로 세우려고 술책을 부리고 있소. 참
으로 괘씸한 일이 아닐 수 없소. 그렇지 않아도 온 천하가 십상시놈들의 작폐에
백성들의 원성이 드높은데 이 기회에 놈들을 모조리 주살할까 하오. 공들의 의
견들은 어떠하오?"
"...."
하진의 물음에 선뜻 누구 한 사람 입을 열지 않았다. 사태가 너무 엄청나 함부
로 입을 열어 경솔하게 논할 일이 아니었다. 모두들 서로 얼굴만 마주볼 뿐이었
다. 그때 한 구석 말석자리에 앉아 있던 젊은 벼슬아치가 가만히 몸을 일으키며
말했다.
"지당하신 말씀입니다. 그러나 십상시의 세력은 궁중에서 수십 년동안 뿌리를 뻗
고 자라왔습니다. 그러므로 한꺼번에 그들을 주살한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라 여
겨집니다. 또한 자칫 기밀이 흘러간다면 도리어 멸족의 화를 면하기 어려울 것
입니다."
뭇람의 시선이 그에게로 쏠렸다. 그는 진군교위(경비대장) 조조였다. 하진의 신
분에서 보면 미미하기 그지없는 한 장교에 불과했다. 또한 그는 환관의 후손이
아닌가. 하진은 노기 띤 얼굴로 크게 소리쳐 꾸짖었다.
"닥쳐라! 너 같은 풋내기 말직이 조정의 대사를 어찌 안다고 입을 함부로 놀리
느냐!"
하진이 노하자 좌중의 분위기가 더욱 무거워졌다.
이때 반은이 급히 달려와 알렸다.
"방금 황제께서 승하하셨습니다. 건석 등 환관들이 십상시와 의논하여 황제께서
승하하심을 극비에 붙이고 조서로 장군을 궁으로 불러들여 죽여 후환을 없애려
하고 있습니다. 그런 다음 황자 협을 황제로 삼으려는 모의를 꾸미고 있습니다."
반은의 말에 하진은 크게 노했다.
"쥐 같은 무리들이 감히 나를 해치려 하다니...."
이때 궁중에서 칙사가 와 황제의 명을 전했다. 물론 그 칙사는 십상시들이 보낸
거짓 칙사였다.
"천자께서 명이 경각에 달려 있소이다. 장군을 베갯머리에 불러 한실의 뒷일을
부탁하시겠다 하오. 대장군께서는 지체없이 입궐토록 하시오."
그러나 십상시들의 계략을 이미 알고 있는 하진은 사자를 부릅뜬 눈으로 바라보
다 반은에게 명했다.
"먼저 이놈부터 참하라."
하진은 조정에서 보낸 사자부터 목을 베게 한 다음 대신들을 둘러보며 다시 한
번 큰소리로 말했다.
"이제 더 이상 시간을 지체할 수 없다. 누구 나와 함께 역적들을 토벌할 사람은
없는가?"
여러 대신들이 입을 다물고 있는 가운데, 조금 전 하진으로부터 꾸짖음을 받았
던 조조가 다시 일어서더니 말했다.
"먼저 새로운 천자를 옹립한 후에 도적을 쳐도 늦지 않을 줄 아뢰옵니다."
조조를 크게 질책했던 하진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이치에 맞는 말이었다. 거사
에는 명분이 필요하다. 명분이 없으면 한낱 도적의 반란과 무엇이 다르겠는가?
하진은 고개를 끄적이더니, 좌중을 둘러보며 말했다.
"맹덕의 말이 백 번 옳다. 누구 새 천자를 옹립한 후 나를 도와 역적들을 토벌할
사람은 없는가?"
"사례교위 원소가 여기 있소이다."
문득 우렁찬 목소리와 함께 자리에서 벌떡 몸을 일으키는 젊은이가 있었다.
"바라건데 나에게 정병 5천만 주십시오. 즉시 금문에 들어가 새황제를 옹립한 뒤
나라를 어지럽히는 환관놈들을 모조리 주살하여 조정을 일신하고 종묘사직을 바
르게 세우겠습니다."
모든 사람들의 시선이 일제히 그 젊은이에게 쏠렸다. 준수한 용모와 두껍고 넓
은 가슴과 딱 벌어진 어깨 하며 그 체구가 위풍당당하여 한눈에도 무예가 뛰어
난 용장임을 엿보게 했다. 원소는 사도 벼슬을 지낸 원봉의 아들로 자는 본초였
다. 4대에 걸쳐 3공(재상)을 배출한 여남의 여양의 명문 출신으로 사례교위(낙양
의 군정장관)를 지내고 있었다. 하진은 크게 기뻐하여 원소에게 출지토록 했다.
"사례교위 원본초가 나선다니 내 맘이 든든하기 짝이 없네. 즉시 출진토록 하
게."
하진의 이 한마디로 낙양은 일시에 전운이 감돌기 시작했다. 원소는 갑주로 몸
을 감싼 후 어림군(궁전을 지키는 군사) 5천을 이끌고 궁전으로 달려갔다. 하진
은 하옹.순유.정태 등 30여 명의 대신과 함께 원소의 뒤를 따랐다. 원소는 왕성
의 여덟 개 문과 시중의 위문을 봉쇄한 후 자기의 허락 없이는 한 사람도 출입
을 하지 못하도록 엄명을 내렸다. 원소를 뒤따라온 하진은 대신들과 함께 영제
의재궁(관)앞에 나아가 하후의 소생인 변을 옹립하고 새 황제의 즉위를 만 천하
에 선포하였다.
"황제 폐하 만세!"
하진은 백관들과 함께 새 황제께 배례드리고 소리 높여 만세를 불렀다. 이때 황
태자 변을 황제로 책립하는 의식은 실로 벼락같이 거행되었다. 어림군을 지휘하
던 원소는 새 황제가 등극하자 장검을 빼들고 외쳤다.
"반역의 수괴 건석의 목을 베어 혈제를 올리리라."
그러자 아첨과 권모술수에 능한 십상시들은 무기라고는 손에 만져 본 적이 없는
그들이었으니 원소가 군대를 이끌고 오자 어쩔 줄 모르고 제 한 몸 보전하기에
급급했다. 원소는 직접 장검을 빼든 채 궁중을 수색하기 시작했다. 이때 십상시
의 우두머리 건석은 황망한 가운데 궁궐의 정원 꽃밭에 몸을 숨기고 있었다. 건
석이 꽃밭에 몸을 숨긴 것을 발견한 자는 다름아닌 중상시 가운데 하나인 건서
과 함께 하진을 죽이려던 곽승이었다. 곽승은 건석을 죽여 자기만이라고 위태로
움에서 벗어나기로 작정했다. 건석에게 다가간 곽승은 칼을 빼들어 건석을 찔러
죽인 후 대장군 하진에게 투항해 버렸다.이에 건석이 거느리던 금군들도 대세가
하진에게 기울자 무두 그에게 귀순해 버렸다. 그때 원소가 하진에게 진언했다.
"장군, 환관은 원래 함께 무리를 지어 나라를 어지럽히던 자들입니다. 오늘 내친
김에 뿌리를 뽑아야 합니다. 한 놈도 남김 없이 죽여야만 후환이 두렵지 않습니
다."
"하진은 원소의 말에 묵묵부답이었다.우두머리 건석을 죽인 마당인지라 다른 내
시들은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있었다.거기다가 옛날 자기의 누이를 황후로까지
이끈 환관들의 은혜도 돌이켜졌다. 결단을 내리지 못하고 망설이는 상이에 시간
은 흘러갔다. 한편 장양을 위시하여 살아남은 십상시의 무리들은 생명의 위급함
을 느끼며 몸을 떨다 하진과 원소의 대화를 엿듣고 곧장 하진의 누이동생 하 태
후에게 달려가, 황후인 하 태후의 발 아래 꿇어 엎드려 눈물로 호소하였다.
"처음부터 하 장군의 목숨을 노린 것은 건석이란 놈이었습니다. 저희들은 모르는
일이옵고, 가담하지도 않았습니다.그런데도 대장군께서는 원소의 말만 듣고 저희
모두를 죽이려고 하십니다. 황후 폐하, 부디 지난 날의 정분을 생각해서라도 저
희들 목숨만은 살려 주십시오."
하 태후는 한때 자신들의 은인이랄 수 있는 장양이 늙은 몸을 엎드려 눈물로 애
원하자 측은한 생각이 들었다.
"알았다. 너희들은 너무 걱정하지 말라. 내가 너희들을 지켜 주리라."
하 태후는 즉시 오라비인 하진을 불러들여 타이르듯 말했다.
"우리 남매는 원래 미천한 신분으로 오늘날고 같이 부귀영화를 누리게 된 것은
모두 십상시인 장양이 도와 준 덕분이 아닙니까? 비록 건석이 흉측한 뜻을 품고
우리를 해치고자 하였으나 이미 건석은 죽임을 당했습니다. 오라버니는 어찌 다
른 사람의 말만 믿고 죄가 없는 환관들까지 모조리 죽이려 하십니까? 그렇게까
지 할 필요가 어디 있나요?" 누이동생 하 태후의 말을 들은 하진은 옛날 소.돼
지를 도살하던 시절의 가난했던 자기의 모습이 생각났다. 원래 아둔하고 결단성
이 없는 ㄴ하진인지라, 하 태후의 말에 고개를 끄덕인 채 내궁에서 물러나왔다.
"건석은 날르 해치려 했으니 마땅히 그 일족을 멸해 본보기로 삼을 것이로되 그
나머지는 함부로 죽이지 말라."
하진은 내관들을 몰살하자고 권유하는 원소와 관원들에게 말했다. 하진의 말에
원소가 깜짝 놀라 피묻은 칼을 든채 다시 권했다.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이제와서 그들을 살려 준다면 잡초만 베고 뿌리를 뽑지
않은 것과 무엇이 다르겠습니까? 이대로 두면 후일 반드시 후회할 날이 있을 것
입니다."
"잘 알겠네. 그러나 조정의 분란이 낙양으로 번지고, 낙양의 불길이 천하로 파급
되어 간다면 그건 더욱 큰일이 아닌가. 내 뜻은 이미 결정되었으니 더 이상 원
본초는 권하지 말게."
우유부단한 하진은 끝내 원소의 말을 물리치고 말았다. 여러 관원들도 속으로만
탄식할 뿐 더 이상 입을 열지 않았다. 십상시 건석이 죽고 난 후 모든 환관들의
무리들은 숨을 죽였다. 그래서 궁궐은 한동안 폭풍 뒤의 바다처럼 평온했다. 이
튿날 하 태후는 하진에게 녹상서사를 겸하게 하고 다른 대신들에게도 합당한 벼
슬을 높여 주었다. 한편 하진이 건석을 죽이고 하 태후의 변을 천자로 옹립하자
동 태후는 은밀히 장양등 십상시의 무리를 궁으로 불러들였다.
"하진의 누이는 지난날 내가 천거했으나 이제 제 아들을 제위에 올린 후 그 방
자함과 오만함이 가히 눈뜨고 볼 수 없다. 또한 안팎 신하들이 저들의 잘못됨을
바로잡기는커녕 오히려 모두 그의 심복이 되어 위엄과 권세를 농락하니 나는 장
차 어찌하면 좋단 말이오?"
동 태후가 근심스런 얼굴로 묻자 연못에 빠진 지푸라기라도 붙들 듯 장양이 아
뢰었다.
"태후마마께서는 조회 때 나아가 주렴을 드리우시고 뒤에 앉아 정사에 관여하십
시오. 또한 황자 협을 왕으로 책봉하시고 국구(황제의 장인) 동중에게 큰 벼슬을
내려 병권을 장악하게 하시며 대소사는 신에게 맡기시면 가히 큰 일을 도모하실
수 있으실 것입니다."
동 태후는 그 말을 듣자 기쁘기 한량없었다. 다음 날 아침, 동 태후는 조정에 나
아가 칙지를 내려 황자 협을 진류왕에 봉하고 동중에게는 표기장군의 벼슬을 내
린 후 장양 등 십상시들에게도 다시 요직을 주어 정사를 돌보게 했다. 하 태후
는 이 사실을 알게 되자 크게 놀랐다. 그러나 동 태후는 영제의 모후가 아닌가?
함부로 대할 처지도 아니었다. 생각다 못해 동 태후를 달래 보려는 생각으로 궁
중에 잔치를 베풀고 동 태후를 청했다. 동 태후가 잔치 자리에 좌정하자 하 태
후가 동 태후를 향하여 두 번 절하고 술잔을 올리며 은근한 목소리로 말했다.
"마마께 아룁니다. 우리는 모두 부녀자인지라 나라의 정사에 참여하는 것은 온당
치 않은 일인 줄로 압니다. 지난날 여후(한 고조의 황후)께서 나라의 대권을 움
켜쥐었다가 오히려 그것이 화가 되어 그 종족 1천여명이 끝내 죽음에 이르지 않
았습니까? 조정의 일은 애신들과 원군들에게 맡겨 처결하게 한다면 나라를 위해
매우 다행스러운 일이 될 것입니다. 바라건대 마마께서는 부디 제 말씀을 들어
주십시오."
하 태후의 말을 듣고 난 동 태후는 대번에 안색이 달라졌다. 벌컥 화를 내며 큰
소리로 외쳤다.
"너는 왕미인을 질투하여 독살하고, 네 아들을 황제로 옹립했다. 이제 네 오라비
하진이 대장군이라 하여 그 세력을 믿고 함부로 방자한 말까지 서슴치 않는구
나. 그러나 나도 표기장군 동중에게 칙지를 내려 네 오라비의 목을 무 밑동 도
리듯 할수도 있다. 그 말에 하 태후도 가만 있지 않았다.
"저는 좋은 뜻으로 말씀드렸는데 어찌하여 그처럼 역정을 내십니까?"
동 태후는 그 동안 참았던 울분을 한꺼번에 토해내듯 더욱 모진 말로 하 태후의
아픈 데를 건드리며 끄짖었다.
"너희는 백정질이나 하고 술이나 팔던 것들로 일찍이 내 천거가 아니었다면 어
찌 오늘이 있었겠느냐? 감히 무얼 안다고 나서느냐?"
시어머니와 며느리 사이인 두 태후가 이렇게 큰 소리로 다투자 장양은 동 태후
에게 권하여 내전에 들게 했다. 이날 밤 하 태후는 하진을 불러 낮에 있었던 일
을 소상히 들려 주었다. 하진은 이 일을 원소 등 삼공을 불러 의논한 후 계략을
꾸몄다. 그들은 동 태후가 정궁이 아니라는 이유를 들어 궁 밖인 하간군으로 쫓
아 내 버리고 말았다. 이어 금군을 보내 표기장군 동중의 집을 에워싸고 인뒤웅
이까지 빼앗으니 이에 동중은 모든 일이 수포로 돌아간 것을 알고 스스로 목을
찔러 자결하고 말았따. 이에 당황한 것은 장양.단규 등 십상시의 무리들이었다.
이들은 하진의 아우 하묘와 그의 어미 무양군에게 급히 달려가 수많은 금은보화
를 갖다 바쳤다. 그런 후 두 모자가 하 태후와 하진을 좋은 말로 달래 그들을
감싸도록 했다. 지난날 옹색하게 살던 두 모자는 수많은 금은보화에 넋이 팔려
장양.단규의 말대로 하 태후와 하진을 달랬다. 그리하여 십상시들은 조정에서 무
사히 지낼 수가 있었다. 그러나 하 태후와 하진은 동 태후를 시골로 쫓아 내긴
했지만 마음이 놓이지 않았다. 하진은 은밀히 사람을 보내 동 태후에게 독을 먹
여 독살한 후 시신을 하간으로부터 낙양으로 옮겨 장사지내게 했다. 그러나 하
지은 병을 핑계삼아 동 태후의 장례식에도 참석지 않고 일체 문 밖 출입을 하지
않았다. 그는 자기 일문의 영화를 위해서라면 극악무도한 것도 서슴치 않는 것
처럼 보였으나 소심한 성격에서 오는 두려움과 자책에 시달렸다. 미천한 몸으로
어쩌다 만민의 위에 서게 되었지만 뱃심 있는 야망가도 또한 철저한 악인도 못
되었다. 그저 누이동생 덕에 뒤집어 쓰고 있는 감투가 너무 무겁고 힘에 겨워
좌고우면, 안절부절 못하는 그런 위인이었다. 그런 하진에게 원소가 찾아왔다.
"지금 백성들의 입과 입에는 동 태후의 죽음을 두고 그릇된 소문이 파다하게 퍼
지고 있습니다."
"소문이라니 무슨 소문이란 말인가?"
"동 태후를 짐독으로 죽인 자는 장군이라고 장양.단규 등이 유언비어를 퍼뜨리며
흉계를 꾸미고 있다 합니다.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스니 그들의 뿌리를 뽑아 후
환을 제거해야 합니다. 지난날 두무는 그들을 죽이려다 사전에 기밀이 누설되어
죽임을 당했으나 대감의 형제분과 휘하 장수들은 다 빼어난 인물이니 힘을 다해
그들을 친다면 손쉽게 일을 이루실 것입니다. 이는 하늘이 주신 호기이니 놓쳐
서는 안됩니다."
"알았네. 생각해 보기로 하겠네."
그러나 원소의 진언은 하진의 좌우에 진을 치고 있던 간교한 환관들의 끄나풀에
의해 즉시 장양등에게 밀고했다. 이 소식을 들은 환관들은 크게 당황하였다. 그
러나 위험이 닥치면 소화전과 같이 편리한 방법이 있었다. 그들은 다시 하진의
누이동생 하 태후에게 달려가 눈물로 호소하며 매달렸다.
"알았다. 너무 염려 말라."
하 태후는 환관들의 손끝에서 노는 내궁의 꼭두각시였지만 오라비에 대해서는
절대적인 권위를 갖고 있었다. 하 태후는 다시 하진을 불러 말했다.
"오라버니, 오라버니는 고약한 무리들의 농간에 놀아나 궁중의 화평을 깨뜨리는
엉뚱한 생각을 하시지는 않으시겠지요? 본디 궁궐 안의 일을 환관이 관장하는
것은 전통이 아니던가요? 그것을 못마땅히 여기시어 그들을 해하려 하신다면 이
는 곧 종묘의 전통을 거스르는 일이 됩니다."
하진은 태후의 간곡한 말을 듣자 또 마음이 변하여,
"알았습니다. 알겠습니다."
하며 머리를 조아리다 몰러나왔다. 원소는 하진이 하 태후의 부름을 받고 입궐
하였다는 말을 듣고 하진이 궁궐에서 나오기를 기다려 그르 찾아가 물었다.
"장군께서는 혹시 태후마마와 환관 문제로 은밀한 말씀이 오고가지 않았습니까?
그렇다면 어찌할 작정이십니까?"
원소의 말에 하진은 망설이다 힘없는 말로 물었다.
"태후께서 허락을 아니 하시니 이를 어찌하겠소?"
"아니 됩니다. 환관들은 장군님을 모함하기 위해 백성들에게 못된 소문까지 퍼뜨
리지 않았습니까? 그 후환이 몹시 두려워서 태후께 매달려 울며불며 호소했을
것은 뻔한 이치입니다. 환관의 말을 물리치지 못하시는 태후와 태후의 말씀을
거역하시지 못하는 장군님의 약점을 꽤뚫어보고 하는 그들의 농간에 넘어가서는
안 됩니다."
"듣고 보니 그렇소만, 그렇다면 이 일을 어찌하면 좋겠소?"
하진에게도 짚이는 바가 있어 고개를 끄덕이며 원소에게 물었다.
"급히 지방에 있는 장수들에게 격문을 보내어, 그들로 하여금 환관을 몰살하라고
은밀히 명하십시오. 그러면 장수들이 한 짓이라 장군님도 태후에게 할 말은 있
으실 것이 아니옵니까?"
원소의 말을 듣고 보니 딴은 그러했다. 하진은 무릎을 치며 감탄했다.
"음-, 좋은 생각이오."
이ㄸ 두 사람의 밀담을 나무 그늘에서 엿듣고 있는 사람이 있었다. 그는 전군교
위 조조였다. 조조는 홀로 냉소를 띠었다.
"바보 같은 선동을 하고 있군. 암은 온몸에 생기는 것이 아니거니와 환관을 다스
리기 위해선 원흉을 잡아 처벌하면 그만 아닌가. 그 한놈을 잡아 감옥에 가둔
뒤, 형리를 시켜 그들의 손으로 목을 베게하면 일은 해결될 것인데 사방에 격문
을 보내면 조정의 분란을 만천하에 알리는 꼴이 된다. 그렇게 되면 지방의 군웅
이나 어중이떠중이 야심가들이 대권을 잡고자 혈안이 되어 날뛸 것이 아닌가.
그렇게 되면 또 하나의 화를 자초하는 대란속에 빠질 것이거늘 ....스스로 묘혈을
파고 있구나!"
조조는 발걸음을 돌리면서 홀로 중얼거렸다.
"고양이를 내쫓기 위해 호랑이를 마당으로 들이다니....어리석은 하진이 곧 화를
자초하리라."
하진은 원소의 말을 듣고 주부(문서담당 책임자) 진림으로하여 각처에 공문을
보내도록 하였다. 진림이 하진의 명을 받고 깜짝 놀라 간했다.
"장군님! 이것은 아니 될 일인 줄로 아옵니다. 이 일은 국가 대사에 관한 일로
서, 신중을 기하지 않으면 안 될 것입니다.옛말에 이르기를 자기 눈을 가리고 새
를 잡으려 하는 자는 바로 자기 자신을 속이는 것과 같다 하였습니다. 작은 미
물을 잡는 데에도 속임수로는 뜻대로 되기 어렵거늘 하물며 국가 대사야 이를
말씀입니까. 더욱이 장군께서는 황제의 위엄에 의지하여 천자를 보위하시고 천
하의 병권을 장악하고 계신 만큼 환관을 처치하는 것쯤은 불에다 머리카락 하나
를 태우는 것같이 쉬운 일이 아니옵니까! 그럼에도 격문을 돌려 지방의 장수들
을 조정으로 불러들이시겠다니 좋지 않은 방법입니다. 여러 장수들은 제각기 생
각이 다른 자들로 딴 마음을 품게 될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마치 창을 거꾸로
잡고, 창자루는 그들에게 쥐어 주는 것과 같은 격이 됩니다. 더욱이 여러 지방에
서 많은 장군들이 모여들면 성공 여부는 둘째치고 큰 혼란이 일어날 것입니다.
참으로 또 다른 화가 일어날까 두렵사오니 이를 잘 살피시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하진은 진림의 간곡한 충언을 듣고도,
"무릇 대사를 노함에 어찌 위험을 두려워할까 보냐."
하며 그의 말을 일소에 붙이고 심복 부하들에게 황제의 조서를 주어 밀사를 은
밀히 사방으로 보냈다. 원래 한 왕조의 불이 꺼질 때는 그 종말을 재촉하는 사
건이 일어나게 마련이다. 그리고 그 사건을 평정하기 위해 초야에서 현인영걸이
출몰하는 법이다. 그 사건이 그들의 손에서 평정되지만 이로 인해 공적이 있었
던 영웅들이 기성 정권을 쓰러뜨리는 혁명가가 되는 것이다. 이것이 역사의 흐
흠이 아니겠는가.
서량자사 동탁 잃어버린전국옥새
서량땅에 있는 자사 동탁에게 낙양으로 온 밀사에 의해 한 통의 격문이 전해
졌다. 동탁은 황건적을 토벌할 때 아무런 군공도 없을 뿐 아니라, 그의 행실 또
한 매우 좋지 않다는 평판이어서 조정으로부터 문책을 당해야 할 형편이었다.
그러나 동탁은 내관인 십상시 일파에게 많은 뇌물을 바치고 벼슬이 높아지기까
지 하였다. 십상시들이 동탁을 자기들의 심복으로 만들 속셈으로 오히려 현관의
지위에 봉해 20만의 병력까지 거르린 자사가 되게 한 것이다.
조정 내의 폐단은 이제 극에 달하였도다.모름지기 의로운 인사들은 공명의 깃
발을 앞세우고 구름처럼 모여서 밝은 일월하에 만대의 혁정을 함께 공론하라.
이 격문을 본 동탁은 무릎을 치며 기뻐하였다. '이제야 천하를 내손에 넣을 수
있는 기회가 제발로 걸어왔도다. 이 천재일우의 기회를 놓치면 후회하리라.'
서량에서 20만 대군을 거느리게 된데다 늘 마음 속에 야심을 품고 있던 동탁은
당대의 재사인 이유를 사위로 맞이하고, 호시탐탐 천하를 꿈꾸며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근거지인 섬서에는 또 한 명의 사위인 중랑장 우보를 두어 지키게 하고
동탁 자신은 이각.곽사.장제.번조 등 모든 장수들을 총동원하여 거느리고 낙양으
로 향하였다. 이때 모사 이유가 동탁에게 간했다.
"비록 밀조는 받았다고 하나 , 그 내용이 명확하지 않고 모호하니 우선 천자께ㅠ
표문을 올리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표를 올려 이번 출진이 천자의 명에 의한
것임을 널리 알리고, 장군의 충정을 내세우면 대의명분이 서게 됩니다. 그래야만
만인에게 의심을 받지 않고 대사를 꾀할 수 있습니다."
지방의 여러 장수들도 조정의 밀조는 받았으나 모두 동탁처럼 군사를 일으키지
는 않았다. 밀조의 내용이 환관들을 척결하자는 뜻 같았으나 또한 외척의 세력
이 아니었던가. 외척과 환관들의 다툼에 섣불리 끼여드느니 좀더 형세를 지켜보
며 세력이나 키워 두자는 생각들이었다. 동탁 또한 이 점이 꺼림직했던 터였다.
동탁은 이유의 말에 찬동하여 당장 표문을 올리게 하였다.
생각건대 역적들이 난동하여 근절되지 않는 것은, 십상시 장양 등의 무리가
하늘의 뜻을 어기고, 질서를 어지럽힌 결과라고 여겨집니다. 끓는 물을 식히기
위해서는 불지른 나무섶을 없애 버려야 하고, 그름이 든 종기를 짜내는 일은 고
통스럽긴 하나 터뜨리는 것이 독을 기르는 것보다 낫다고 하였사옵니다. 이에
신이 군사를 거느려 징과 북을 울리며 낙양으로 가는 것은, 천자께서 장양의 무
리를 척결하시도록 청원하기 위함이니 이를 살펴 주시기 바랍니다.
하진은 동탁이 올린 이 표문을 받아들이고 여러 대신들에게 보도록 했다. 그러
자 시어사 정태가 이 표문을 보고 깜짝 놀라 입을 열었다.
"그를 가리켜 시랑(승냥이) 같은 사람이라고 모두들 말하고 있습니다. 낙양에 승
냥이를 끌어들이면 반드시 무고한 사람도 해치게 될 것입니다."
정태의 말이 끝나자마자 한 늙은 장수가 일어섰다. 중랑장 노식이었다. 중랑장
조식은 황건적의 난 때 모함을 받아 한 차례 옥에 감금당했으나, 그를 모함한
좌풍이 밀려나 형벌을 모면하고 다시 중랑장에 복직되었던 것이다.
"저도 동탁의 사람됨을 잘 아는 바입니다. 그는 겉과 속이 다른 사람입니다. 그
가 비록 표문을 그럴 듯하게 지어 올렸다고는 하나, 마음 속엔 검은 야심을 품
고 있을 것임에 틀림없습니다. 그런 인물을 낙양에 끌어 들인다면 장차 어떤 환
난이 닥칠지 모르옵니다."
노식이 하진에게 진언하였다. 그러나 이미 마음을 정한 하진은 노식의 말에 귀
를 기울일 생각도 하지 않은 채 잘라 말했다.
"그대들처럼 매사를 의심한다면 어찌 천하의 영웅들을 우리 쪽으로 끌어들이겠
소? 그대들과 대사를 도모하려니 답답할 뿐이오."
노식과 정태는 하진의 말에 실망하여 관직을 버리고 물러났다. 생각이 있는 많
은 조신들도 노식과 정태의 뒤를 따라 관직을 버리고 하진을 떠났다.
"동탁 장군의 병마는 이미 면지에 와서 주둔하고 있다 하옵니다."
하진은 수하로부터 보고를 받았다.
"거기까지 왔으면 즉시 입락해야지 왜 꾸물거리고 있는 건가? 시급히 들라 하
라"
하진은 동탁에게 사신을 보내며 그의 입궐을 재촉하나 동탁은 면지에 군사를 멈
춘 채 이리저리 핑계를 대며 움직이려 하지 않았다.
"먼길을 달려왔으므로 병사들이 심히 지쳐 있소. 이곳에서 잠시 휴식을 취한 후
다음 낙양으로 들겠소."
그는 하진의 독촉에 이렇게 말하고 승냥이의 눈을 번뜩이며, 은밀히 낙양의 형
세를 살피고 있었다. 당장 군사를 이끌고 궁궐에 들어가 환관들을 죽이느니 이
미 불붙기 시작한 외척과 환관들의 싸움을 지켜 보자는 속셈이었다. 그런 연후
에 일시에 밀어닥쳐 궁궐을 휩쓸어 버리는 것이 훨씬 이롭다는 생각이었다. 한
편, 십상시들도 하진이 사방에 밀조를 보내 동탁이 낙양과 그다지 멀지 않은 곳
에 머무르고 있다는 것을 모를 리가 없었다. 자신들이 먼저 손을 써 하진을 죽
이지 않으면 반드시 멸족의 화를 면키 어려울 것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장양을 비롯한 내관들은 서로 의논하여 계책을 꾸몄다. 먼저 칼과, 도끼등의 무
기로 무장한 50여 명의 자객을 장락궁 가덕문안에 매복케 한 후 하 태후에게 달
려갔다.
"대장군께서 허위 밀조를 만들어 지방의 군사를 낙양으로 끌어들여 신들을 죽이
려 합니다. 바라옵건데, 제발 저희 무리를 어여삐 여겨 목숨만을 보전토록 해 주
시옵소서."
하 태후는 오라비가 지방의 군사까지 동원하는 것으로 보아 이전처럼 자기의 말
을 호락호락 들을 것 같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진의 결심이 굳은 것은 짐
작이 가나 환관들의 애처로운 애원을 듣자 하 태후는 마지못해 말했다.
"이번에는 너희들이 직접 대장군을 찾아가 사죄하도록 하라."
그러자 장양이 펄쩍 뛰며 대답했다.
"만약 저희들이 대장군을 찾아갔다가는 뼈도 추리지 못할 것입니다. 그보다 먼저
태후 마마께서 대장군을 부르시어 분부를 내려 주시옵소서. 그런 연후에 저희들
이 사죄하는 것이 순서이옵니다. 만약 그때도 여의치 않으면 저희는 차라리 태
후마마 앞에서 죽기를 바랄 뿐입니다."
환관들의 흉계를 알 리 없는 태후는 환관들이 눈물을 흘리며 감언이설로 애걸하
자 다시 전지를 내려 하진을 태후궁으로 불렀다. 태후의 친서를 받은 하진이 호
로 궁중으로 들어갈 채비를 차렸다. 주부 진림이 하진을 만류하며 간했다.
"태후의 친서라 할지라도 십상시들이 태후마마께 애걸하여 내린 친서가 틀림없
을 것입니다. 그 친서를 너무 믿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따라서 마마의 부르심
뒤에는 저들의 흉계가 반드시 숨어 있을진대 입궐하지 마십시오. 화를 당하실까
염려되옵니다."
"태후께서 나를 부르시는 터에 무슨 화를 당한단 말이가?"
하진의 알 수 없다는 얼굴로 반문하니 옆에 있던 원소 또한 진립을 거들었다.
"이미 지방의 군사를 불러 저들을 죽이려는 우리의 계책이 새어나가 환관들도
다 알고 있을 터이데 어찌 홀로 입궁하려 하십니까?"
옆에 있던 조조도 원소를 거들어 한 마디 했다.
"장군께서 정히 입궐하시려거든 십상시들을 먼저 궁 밖으로 불러 낸 후에 입궐
하십시오."
그 소리에 하진이 짐짓 큰 소리로 웃었다.
"무슨 소리인가? 궁중의 병폐를 다스려 천하를 바로잡으려 하는 터에, 십상시들
따위를 두려워하여 입궐하지 않는다면 이 또한 웃음거리가 아닌가? 천하의 병권
을 휘두르고 있는 내가 아닌가?"
원소가 다시 입을 열었다.
"대장군께서 굳이 입궐하시겠다면 저희들이 무장한 군사를 이끌고 호위하겠습니
다. 행여 예측하지 못한 변을 막고자 함입니다."
그리하여 원소와 조조는 각기 자기들이 거느린 정예병 5백 명씩을 뽑아 호분중
랑장인 원소의 아우 원술에게 이끌도록 하였다. 하진이 원소.조조 등과 함께 청
쇄문에 이르자 위병들이 가로 막았다.
"병마는 궐 안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문 밖에서 기다리시오."
하진이 할 수 없이 원소와 조조등 종자 몇 명만 거느리고 장락궁 궁문으로 들어
서려는 때였다.
"태후마마께서는 대장군 외에는 아무도 들이지 말라고 전교를 내리셨습니다."
궁문을 지키던 환관들이 원소와 조조의 앞을 막으니 둘은 어쩔 수 없이 장락궁
궁문 밖에서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하진은 그날따라 유별나게 허세를 부리며
큰소리를 쳤다.
"그리하게. 태후마마께서 은밀히 하실 말씀이 있는 모양일세."
하진은 이렇게 말하며 거리낌없이 가슴을 펴고 보무당당하게 궁 안으로 들어갔
다. 하진이 가덕전 문턱에 이르렀을 때였다.
"이 돼지 백정놈아. 게 섰거라!"
갑자기 고함 소리가 들리며 장양과 단규가 한 떼의 환관들을 이끌고 불쑥 하진
앞에 나타났다. 하진은 움찔하며 놀라 주위를 둘러보는 순간, 십상시의 병졸들이
우르르 좌우로 몰려들었다. 장양은 기세 등등하게 외쳤다.
"하진, 이 놈 듣거라. 너는 동 태후께 무슨 죄가 있다고 감히 독으로 독살하였으
며 어찌하여 동 태후 국상 때는 칭병하고 참석지 않았느냐? 너는 원래 낙양의
뒷골목에서 소.돼지를 도살하여 가까스로 잎에 풀칠하며 살던 미천한 신세가 아
니었더냐? 그런데 네가 오늘날까지 부귀영화를 누린 것은 대체 누구의 덕분이라
생각하느냐? 우리가 천자께 천거하여 돕지 않았으면 오늘날과 같은 영달을 꿈에
라도 꿀 수 있었겠느냐? 그런 네가 은혜를 갚기는커녕 우리를 해치려 들다니 그
것은 무슨 연유인가? 듣자하니 너는 우리를 가리켜 매양 썩은 무리라 하였다는
데 그럼 너는 대체 어떤 놈이란 말이냐?"
장양의 호된 고함 소리에 하진은 얼굴이 새파랗게 질렸다.
"아뿔사!"
하진이 깜짝 놀라 달아날 길을 찾았으나 이미 사방의 궁문이란 궁문은 모두 굳
게 닫힌 뒤였다. 환관들이 매복시킨 자객들이 일제히 달려 나왔다. 하지이 칼을
ㅃ들고 그들과 맞서 보았으나 중과부적이니 어찌하랴. 칼 한번 제대로 써보지
못하고 하진은 목이 떨어지고 말았다. 뒷날 사람들은 이를 두고 노래를 지어 한
탄했다.
한실이 기울어 천수가 다하니
어리석은 하진이 3공이 되었구나.
충신들의 간언을 물리친 지 몇 번인가.
이윽고 궁에서 칼날을 피하지 못했네.
청쇄문 밖에서 하진이 이미 장양 등에게 죽임을 당한 줄도 모르고 기다리던
원소와 조조는 오래도록 하진이 나오지 않자 궁문 밖에서 큰 소리로 외쳤다.
"대장군께서는 이제 그만 나오셔서 수레에 오르십시오."
그러자 성문 위에서 무장한 궁병하나가 무엇인가 보자기에 싼 것을 던지며 소리
쳤다.
"시끄럽다. 입닥쳐라. 너희들의 주인인 하진은 모반죄로 참형을 당했다. 그러니
이거나 수레에 싣고 돌아가라."
하진의 호위병이 급히 주워 들고 보니 입술을 깨문 채 눈을 부릅뜨고 있는 하진
의 머리가 아닌가. 뒤이어 시종을 거느린 장양 등은 문루에 나타나 미리 준비한
황제의 칙령을 전했다.
"하진은 모반을 도모한 역적이므로 목을 벤 것이다. 그 자의 명을 받아 따르던
자들이 있을 것이나 남은 무리들은 특별히 은전을 베풀어 더 이상 죄를 묻지 않
겠으니 이후부터 자중하라."
이 뜻밖의 사태에 망연자실하던 원소가 크게 격노하여 부르짖었다.
"환관놈들이 대장군을 모살하였다. 모든 군사는 나를 따라 놈들을 주살하라.!"
하진의 부장 오광이 이를 부드득 갈며 5백의 정병을 지휘하여 청쇄문에 불을 질
렀다. 궁문이 허물어지자 원술은 궁 안으로 쳐들어가 환관들을 닥치는 대로 죽
였다. 원소와 조조도 노기충천하여 칼을 빼들고 궁중 깊은 내전으로 군사를 몰
아 짓쳐들어가 조충.정광.하운.곽승 등을 취하루에서 잡아 목을 베어 높이 매달
았다. 궁궐은 순식간에 폭도로 돌변한 장졸들에 의해 여지없이 짓밟혔다. 타오르
는 불길과 검은 연기, 여기저기 고함 소리와 고함 소리와 궁녀들의 비명 등 문
자 그대로 피에 물든 아비규환이었다.
"네놈도 환관이렸다!"
"어디로 도망치느냐!"
장졸들은 늙은 환관이나 젊은 환관 할 것 없이 닥치는 대로 죽였다. 궁중 깊숙
이 살던 십상시의 무리를 한눈에 구별할 수 없어 수염이 없거나 좋은 옷을 입은
내관은 모두 환관으로 간주하여 목을 자르니 실로 억울한 죽음도 많았다. 이런
혼란 속에서도 장양.단규.조절.우람 등 십상시들의 우두머리들은 5백정병이 휘두
르는 살육의 칼날을 용케 피해 장락궁을 빠져 나와 어린 황제와 진류왕 협, 그
리고 하 태후를 협박해 화염 속을 뚫고 나왔다. 그들이 가까스로 북궁으로 나가
도망치려 할 때였다. 갑주로 온몸을 감싼 한 ㄴ은 장수가 급히 말을 몰아 달려
왔다. 비록 벼슬은 떠났으나 궁궐에 불길이 치솟는 것을 보자 말을 달려온 중랑
장 노식이었다. 때마침 단규가 하 태후를 협박하여 전각 아래로 끌어내려 하고
있었다.
"섯거라, 역적 단규야. 네 어찌 감히 태후마마를 겁박하려 드느냐?"
창을 움켜진 노식의 고함소리에 깜짝 놀란 잔규는 하 태후를 단념하고 진류왕이
타고 있는 거마에 급히 채찍을 가하여 도망쳐 버렸다. 그 틈에 하 태후는 거마
에서 뛰어내렸다. 노식이 하 태후를 모시고 궁중으로 들어가다가 ㄸ마침 장졸을
지휘하여 불을 끄던 조조와 마주쳤다. 두 사람은 하 태후에게 청했다.
"황제께서 귀궁하실 때까지 조정을 맡아 주십시오."
이때 오광은 눈에 불을 켜고 환관을 찾아 내정으로 뛰어가는데 마침 하진의 동
생 하묘가 칼을 들고 나오자 큰 소리로 호령했다.
"이놈은 내시들과 공모하여 제 형 하진 장군을 해쳤으니 죽여 마땅하다!"
군사들에게 둘러싸인 하묘는 오광의 호령 한 마디에 칼 한 번 써 보지 못하고
군사들의 수 없는 창칼에 찔려 다진 고기가 되고 말았다. 원소는 병력을 나누어
궁중을 샅샅히 뒤져 십상시의 가족은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눈에 띄는 대로
베게 했다. 조조는 수하의 군사들 일부에게는 궁궐의 불을 끄게 하고 참혹한 살
육의 대열에서 빠져나와 장양.단규가 핍박하여 끌고 간 황제와 진류왕을 찾도록
하였다. 이 무렵, 장양과 단규는 황제와 진류왕을 강제로 모시고 이끌며 불길과
어둠 속을 달려 성문 밖 교외에까지 도망쳤다. 되돌아보니, 대궐의 불길은 밤 하
늘을 찌를 듯이 붉게 물들어 있었다. 쉬지 않고 도망친 장양과 단규가 북망산에
이르렀을 때였다. 칠흑 같은 어둠속에서 말발굽 소리도 요란하게 한 무리의 군
마가 추격하여 왔다. 앞선 장수는 하남의 중부연사 민공이었다.
"역적은 어디로 달아나려는가. 꼼짝 말라!"
민공이 호통을 치며 달려들자 장양은 스스로 강물에 몸을 던져 자결하고 단규는
황제와 진류왕도 버린 채 어둠속으로 자취를 감추어 버렸다. 황제와 진류왕은
강변의 풀숲에 서로 의지한 채 사태의 귀추를 알 수 없어 서로 손을 꼭 잡고 몸
을 숨기고 있었다. 민공은 군사를 풀어 황제와 진류왕을 찾게 했으나 찾지 못한
채 군사를 거두어 돌아갔다. 밤이 깊어 졌다. 황제와 진류왕은 사경(새벽 2시경)
이 넘도록 이슬을 맞으며 덤불속에 꼼짝 않고 엎드려 있었다. 추위와 배고픔이
온몸을 엄습했다. 어린 이복형제는 서로 부둥켜안고 행여 누가 들을까 무서워
소리도 없이 흐느끼고 있었다. 황제의 아우 진류왕은 어린 나이였지만 매몰찬
데가 있었다.
"이런 풀숲에서 밤을 세울 수 없습니다. 벌써 밤이슬이 내리니, 자칫 몸을 해칠
지도 모릅니다.... 자 힘을 내십시오. 달리 살아날 길을 찾도록 해 봅시다."
진류왕이 오히려 황제를 달래며 손을 잡고 이끌었다. 황제는 말없이 진류왕의
뒤를 따랐다. 두 사람은 옷자락과 옷고름을 서로 잡아매어 떨어지지 않도록 하
고 강기슭을 기어올라 칠흑 같은 어둠속을 무턱대고 걸었다. 어디로 가야 할지
방향을 몰라 막연하기만 했다. 가시에 찔리고 돌부리에 채이기도 하였다. 황제도
진류왕도 난생 처음 겪는 일이었다. 그런데 홀연 수천 마리의 반딧불이 한데 엉
클어지고 무리지어 날아와 길을 환하게 비춰 주었다.
"이는 하늘이 우리 형제를 도우심입니다."
어린 진류왕은 황제의 손을 이끌고 반딧불을 따라 걷기 시작했다. 어느덧 동녘
이 뿌옇게 밝아오고 있었다. 이젠 허기와 피로로 더 이상 걸을 수도 없었다. 황
제와 진류왕은 비틀거리며 쉴 곳을 찾다가 산기슭에 쌓여 있는 풀더미 위에 쓰
러지듯 드러누웠다. 어린 황제와 진류왕은 서로 꼭 부둥켜안은 채 피로와 허기
에 지쳐 깊은 잠에 빠져 버렸다. 어둠 속이라 잘 보이지 않았으나 거기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해묵은 장원 하나가 있었다. 그 집 주인은 지난 밤에 두 개의
붉은 해가 자기 집 뒤로 떨어지는 꿈을 꾸었다. 꿈을 깨어 일어나 보니 아무래
도 예사꿈 같지 않았다. 주인은 급히 옷을 입고 나가 사방을 살펴보니 집 뒤에
쌓아둔 풀더미에서 한 줄기 붉은 빛이 하늘을 향해 치솟고 있었다. 주인이 놀라
서둘러 그곳으로 가 보니 두 소년이 풀더미 위에 누워 잠을 자고 있는 것이 아
닌가. 주인이 깜짝 놀라 자세히 살펴보니 행색이나 생김새가 여느집 아이와는
달라 보였다.
"대체 두 분 도령은 어느 댁 자제들이시오?"
집 주인이 흔들어 깨우며 공손히 물었다. 그 소리에 진류왕이 겨우 눈을 떠 황
제를 가리키며 대답했다.
"이 분은 황제 폐하시오. 십상시의 난으로 궁궐을 빠져 나오다 보니 이곳까지 왔
소. 나는 폐하의 아우 진류왕이오."
진류왕이 여기까지 말하자 집 주인은 무릎을 꿇고 엎드려 절을 한 후에 황제와
진류왕을 부축하여 장원으로 모신 후 급히 밥상을 차려 올리며 공손히 말했다.
"경황이 없어 여쭙지 못했습니다. 저는 선조에 벼슬을 지낸 사도 최열의 아우로,
최의라고 하옵니다. 십상시들이 관직을 사고 파는 등 횡포가 심하여 벼슬살이가
싫어져 이곳에 은거하고 있사옵니다."
최의는 정식으로 예를 올린 후 황제와 진류왕을 융숭히 모셨다. 한편, 민공은 황
제를 찾아 헤매던 중 산기슭에 숨어 있던 단규를 잡아 황제의 소식을 물었다.
그러나 단규는 경황 없이 달아나던 도중에 황제와 헤어진 터라 그 역시 황제의
행방을 알 수 없었다. 민공은 단규가 도중에서 헤어져 어디에 계시는지 모르겠
다고 하자 목을 베어 죽여 버렸다. 단규의 목을 안장에 맨 민공은 군사들에게
명을 내렸다.
"이 놈이 이 부근을 배회하는 것을 보니 황제께서 혹시 이 근처에 계실지도 모
르겠으니 샅샅히 찾아보라."
그런데 천자를 찾으며 산기슭을 헤매던 민공이 우연히 최의의 장원에 이르게 되
었다. 말발굽 소리에 놀란 최의가 시치미를 떼고 민공을 바라보고 물었다.
"공의 말안장에 매단 목은 누구의 목이오?"
최의는 민공의 말에 매달린 피묻은 목과 민공을 번갈아 보았다.
"이 목은 십상시 장양 등과 함께 조정에서 온갖 해악을 끼치던 단규의 목이오."
"옛? 그렇다면 귀공은 누구십니까?"
"하남의 연사 민공이오. 장양, 단규 놈들이 강제로 이끌고 간 황제 폐하의 행방
을 알 수 없어 밤을 새워 찾고 있는 중이오."
"아니? 황제 폐하를 찾으신다구요?"
"그렇소."
민공은 최의에게 지난밤 낙양에서 일어났던 사실들을 소상히 들려 주었다. 최의
는 민공의 이야기를 듣고 고개를 끄덕였다. 전후 사실을 알게 된 최의는 그제서
야 입을 열었다.
"황제 폐하 형제분들은 저희 집에 계십니다."
최의는 민공을 방으로 들게 하여 천자를 뵙게 했다. 민공은 천자를 배알하고 목
놓아 통곡하며 아뢰었다.
"얼마나 괴로움이 많으셨습니까? 어서 궁궐로 돌아가시옵소서. 단 하루라도 나
라에는 천자께서 계시지 않으시면 아니 되옵니다."
최의가 자기 집 마구간에서 한 마리의 여윈 말을 끌고 와서 황제께 바쳤다.
민공은 최의가 황제께 드린 여윈 말에 황제를 태우고 진류왕과 함께 자신의 말
위에 올라 장원을 떠났다. 이전부터 낙양의 어린 소년들은 곧잘 이런 노래를 불
렀다. 하늘은 이런 동요로 아이들 입을 빌어 오늘의 일을 예언했는지 모를 일이
었다.
황제가 황제도 아니고
왕이 왕 노릇을 못 하네
천 수레 만 기병이
북망산으로 달려가네.
민공이 황제 형제분을 모시고 최의의 집을 떠난 지 얼마 안 되어 사도 왕윤,
태위 양표. 좌군교위 순우경, 우군교위 조명, 후군교위 포신, 중군교위 원소 등
황제를 찾아나선 수백 명의 일행과 만났다. 황제를 영접하기 위해 달려온 인마
였다.
"오오, 폐하께서 무사하셨군요."
황제를 영접하러 나온 대신들은 먼저 단규의 목을 낙양에 보내 성문에 효수케
했다. 황제 일행이 긴 행렬을 이루며 낙양으로 행군하고 있을 때였다. 홀연 저편
언덕 너머에서 먼지를 뿌옇게 일으키며 무수한 깃발이 해를 가릴 듯한 기세로,
한떼의 인마가 밀어닥쳤다. 어가를 수행하던 장졸과 백관들이 모두 놀라고 황제
도 낯빛이 변했다. 말발굽 소리가 요란하게 점점 가까이 다가왔다. 그러자 원소
가 황제의 행렬 앞으로 말을 몰고 나가며 외쳤다.
"멈춰라! 거기 오는 그대들은 누가 이끄는 군사들인가?"
펄럭이는 수많은 깃발, 금빛으로 수놓은 번기가 물결이 갈라지듯 양쪽으로 갈라
졌다. 그 사이로 준마에 몸을 실은 대장부가 원소 앞으로 다가왔다. 피둥피둥 기
름살이 찐 육중한 몸이었으나 가냘프게 찢어진 눈에서 쏘는 간사하고 사나워 보
이는 눈빛은 바늘처럼 사람을 찌르고 있었다. 원소 따위는 안중에도 없다는 듯
노부(임금의 행렬) 가까이까지 다가오며 오히려 되물었다.
"황제께서는 어디 계신가?"
황제는 두려움에 떨고만 있었고 백관들도 기가 질려 숨소리를 죽였다.
"지금 황제 폐하께서 환궁하고 계신데 길을 막다니 불경이 아니오?"
원소까지도 낯선 이 장수의 용모며 태도가 위풍당당하여 목소리를 낮추었다. 그
러나 그 장수는 원소의 물음을 끝내 묵살하며 행렬을 쏘아보기만 할 뿔 안하무
인의 태도였다. 그러자 황제의 어가 바로 뒤편에서,
"그대는 누구인데, 감히 황제의 앞길을 막느냐?"
황제보다 나이가 어린 홍안의 소년 진류왕이 앞으로 썩 나서며 또렷하면서도 당
차고 준엄하게 질책했다.
"서량자사 동탁이옵니다."
"나는 천자의 아우 진류왕이다. 그대 동탁은 무엇하러 예까지 왔는가. 황제의 어
가를 보호하러 왔는가, 아니면 겁가하러 왔는가?"
진류왕의 날카로운 질책에 동탁은 한결 공손하게 대답했다.
"옛? 황송하옵니다. 어가를 호위하러 왔습니다."
동탁은 그제서야 마상에서 예를 올렸다.
"어가를 호위하러 왔다면 황제께서 여기 계신데 어찌하여 말에서 내리지도 않는
무례를 범하는가?"
체구는 작지만 진류왕의 음성은 참으로 준열하고 야멸찼다. 동탁은 그제서야 황
망히 말에서 내린 후 길 왼편에 비켜서서 황제의 어가를 향하여 엎드려 절을 올
렸다. 진류왕은 황제를 대신하여 동탁을 좋은 말로 위로하였다. 동탁은 행렬을
뒤따르며 내심 감탄하고 있었다. 아홉 살의 어린 나이로는 믿어지지 않는 영특
함과 위풍이 아닌가. '차라리 황제를 폐하고 진류왕을 옹립해야겠다.' 진류왕을
처음 만났지만 동탁의 엉뚱한 생각은 어쩌면 이때부터 그의 가슴에 자리잡기 시
작했는지 모를 일이었다. 황제와 진류왕은 무사히 궁으로 돌아왔다. 하 태후는
황제를 맞아 얼싸안은 채 흐느껴 울었다. 흩어진 궁중을 정돈하고 모든 물건을
조사해 보니 그만 안타깝게도 이번 난리통에 황제의 권위를 상징하는 전국옥새
가 없어져 어디에서도 찾을 수가 없었다. 한편 동탁이 어가를 낙양으로 호위한
이후의 일이었다. 동탁은 면지에 주둔시켰던 군사를 낙양성 부근에 끌고 와 성
문밖에 주둔시키고 그 자신은 날마다 1천여명의 철갑병을 거느리고 성 안에 들
어와 낙양 시내를 제 세상인 양 활보하고 다녔다. 뿐만 아니라 궁궐을 마음대로
출입하며 조금도 거리낌이 없었다. 백성들은 동탁의 군대를 볼 때마다 두려워하
며 길을 비켜 주었다. 후군교위 포신이 동탁의 오만불손함을 보다못해 어느날
원소를 찾아가 걱정을 하였다.
"동탁은 분명 엉뚱한 생각을 품고 있는 것 같소. 그 자를 그냥 두어서는 안 되
오."
그러나 원소는 모호한 말로 포신의 말에 대답했다.
"이제 겨우 궁궐의 안팎이 평온을 되찾아 가고 있는 터요. 경솔한 행동은 삼가야
할 것이오."
포신은 또 사도 왕윤에게도 그의 근심과 울분을 털어놓았다. 그러나 사법관 왕
윤도 상대가 워낙 대군을 이끌고 있는 터라 당장 신통한 방법이 없었다.
"동감이오. 그러나 손을 쓸 방도가 없지 않소?"
왕윤은 앙상한 손으로 수염을 쓰다듬으며 중얼거릴 뿐이었다. 포신은 어지러운
조정에 싫증이 날 뿐만 아니라 자신이 한 일을 동탁이 알게 될 것이 두렵기도
했다. 얼마 후 포신은 일족만을 이끌고 멀리 태산 깊숙이 피신하고 말았다. 동탁
은 하진 형제의 병마까지 모두 자기 휘하에 넣은 후 사위인 모사 이유을 불러
은밀히 속삭였다.
"나는 이제 황제를 폐하고 , 진류왕을 새 황제로 옹립할 생각이네. 자네 의견은
어떤가?"
진류왕을 황제에 옹립하여 궁정을 자신의 수중에 넣겠다는 커다란 야망이었다.
"지금 조정은 주인 없이 비어있는 것과 같습니다. 일을 실행하기에는 더없이 좋
은 기회입니다. 내일 온명원으로 대신들을 모아 폐립을 선언하시되 반대하는 자
가 있거든 즉석에서 목을 베십시오. 이제부터 주공의 위엄과 뜻을 펼칠 만합니
다."
동탁은 이유의 말에 크게 만족하여 고개를 끄덕였다. 다음 날 온명원에 대신들
을 초치하여 크게 잔치를 베푸니 대신들은 모두 동탁을 두려워하여 참석치 않는
사람이 없었다.
"다 참석하셨습니다."
시종의 전갈을 받고야 동탁은 거드름을 피우며 천천히 나타나 원문 앞에서 말을
내렸다. 그는 허리에 보석으로 치장한 긴 칼을 차고 호위병을 거느린 채였다. 풍
악이 자지러지고 술이 몇 순배 돈 뒤, 동탁은 자리에서 몸을 일으켜 대신들을
굽어보며 입을 열었다.
"오늘 잔치에 참석하신 여러 제공께 이 동탁이 한 마디 드릴 말씀이 있소이다."
모든 사람들은 술잔을 놓고 그를 지켜 보았다. 동탁은 비대한 몸을 한껏 뒤로
젖혔다.
"천자는 만백성의 주인입니다. 하늘에서 타고난 구슬 같은 자질이 없어서는 안
되는 법이외다. 만백성의 숭앙을 한몸에 받기에 족한 위엄을 갖춘 분이어야 종
묘사직을 굳건히 지킬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하거늘 불해히도 금상께서는
의지가 약하고 성품 또한 나약하기 그지없소. 그렇기 때문에 한실을 위하여 우
리들 신민이 항상 근심하는 바이오."
그렇지 않아도 동탁이 오늘 자기들을 부른 이유에 대해 궁금히 여기고 있던 대
신들이었다. 동탁의 말을 듣자 드디어 올 것이 왔다는 생각이었다. 모두 술기운
이 한꺼번에 확 달아나는 듯하였다. 동탁은 정적에 싸인 좌중을 둘러보며 왼쪽
손은 칼을 매단 요대에 대며 오른손을 힘차게 흔들었다
"나는 감히 말씀드리겠소. 다행히도 황제 진류왕이야말로 호학하고 총명하며 타
고난 자질이 맑은 구슬과 같소. 가히 천자의 그릇이라 아니할 수 없소. 천하가
변화무쌍한 이때, 나는 이제 금상을 폐하고 진류왕을 새 황제로 받들고자 하는
데 제공들의 의견을 어떠하오?"
연희장에는 기침소리 하나 들리지 않았다. 대신들은 아닌 밤중에 홍두깨격으로
그저 망연자실하고 있었다. 동탁은 드디어 거리낌없이 자신의 속마음을 드러내
고 있었다. 동탁은 칼로써 반역을 선언하며 좌중을 둘러보았다. 그때였다. 대신
중의 한 사람이 벌떡 일어났다.
"안될 말이다. 대체 그대가 누구이기에 감히 폐립을 논한단 말이오?"
모든 사람이 놀라보니 형주자사 정원이었다. 동탁은 눈을 부릅뜨고 정원을 노려
보며 호통쳤다.
"무엇 때문에 반대하는지 그 이유를 말해 보라."
"천자의 자리는 오직 천자의 뜻에 달려 있을 뿐이오. 신하들이 감히 왈가왈부 의
논하는 자리가 아니오."
"사사로이 의논하는게 아니지 않느냐? 그렇기 때문에 여러 대신들과 함께 공론
에 붙이고 있지 않는가?"
"선제의 정통 적자인 현 황제에 어떤 하자가 있소? 또 어떤 잘못이 있소? 이런
곳에서 제위의 폐립을 왈가왈부하다니 말이 되지 않소. 찬탈을 꾀하는 자가 아
니고서는 그런 폭언은 입에 담지 못할 것이오."
"닥쳐라! 나에게 거역하는 자는 죽음이 있을 뿐이다!"
동탁은 비단 장포의 소매를 걷어올리고 장검의 손잡에 손을 얹은 채 정원에게
다가갔다. 그러나 전혀 두려워하는 기색 없이 동탁을 쏘아보았다. 이때 동탁의
모사 이유가 저원을 보니 그의 등 뒤에는 우람한 체격의 위풍당당한 한 대장부
가 떡 버티고 서 있었다. 손에는 방천화극을 움켜잡은 채 동탁을 노려보고 있었
다. 한눈에도 예사 인물이 아님을 알 수 있었다. 동탁과 오늘의 자치를 모의했던
이유는 널른 주공의 소매를 잡아당겼다. 여차하다간 오히려 동탁이 그 대장부의
손에 목이 떨어질지도 모를 일이었다. 이유가 황급히 나서며 동탁을 만류했다.
"오늘은 모처럼 마련하신 잔칫날입니다. 내일 도당(정책을 논하는 기구)에서 공
론에 붙여도 늦지 않으실 것입니다."
"음-."
동탁도 느끼는 바가 없지 않았던지 칼자루에서 손을 떼고 물러났다. 정원의 등
뒤에 방천화극을 들고 서 있는 그 사나이가 마음에 거렸기 때문이었다. 정원이
크게 노하여 나가 버린 후 또다시 몇 순배의 술잔이 오가자 동탁은 슬며시 그
일을 다시 러론했다.
"오늘 내가 한 말이 천하의 공도라 여기고 있는데 공들의 의견은 어떠하오."
그러자 중랑장 노식이 말했다.
"당치 않은 말씀이오. 옛날 은나라 임금 태갑이 어리석어 재상 이윤이 그를 동중
으로 몰아 냈습니다. 또한 한나라에서도 창읍왕이 제위에 오른 지 27일 만에 죄
가 3천가지나 돼 정승 곽광이 태묘에 고하고 폐위시킨 바는 있소이다. 그러나
금상 폐하께서는 태갑이나 창읍왕의 허물이 없소. 아직 어리시나 총명하시고 인
자하사 추호도 허물이 없으시거늘 어찌 폐위를 논한단 말씀이오? 거기다가 공은
한낱 지방의 자사일 뿐 정사에 관여한 경륜이나 권한도 없지 않소. 이윤이나 곽
광만한 자격도 갖추지 못한 터에 어찌 감히 폐립을 운위한단 말이오. 곗 성현께
서도 말씀하시길 이윤과 같은 뜻을 가졌다면 임금을 폐할 수도 있지만 그런 뜻
이 없는 자가 그런 일을 행하려 함은 다만 역적일 뿐이라 하였소."
노식이 학자답게 고사까지 인용하며 폐위의 부당함을 밝히는데 사리가 분명하고
거침이 없었다. 동탁은 역적이란 말을 듣자, 벽력같이 화를 내며 칼을 들어 노식
을 죽이려 하였다. 그러자 의랑 팽백이 급히 나서며 동탁을 제지했다.
"노상서는 해내에 명망이 높은 분입니다. 이런분을 해치신다면 천하의 공론이 좋
지 않을 것입니다. 결코 이익이 되지 않는 일입니다."
"그렇다면 저 자의 벼슬을 빼앗고 내쫓아라."
동탁이 씨근덕거리며 부르짖었다. 노식은 그 자리에서 쫓겨났다. 이날 이후 그는
시골에 숨어 살면서 다시는 세상에 그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폐립과 같은 대사는 주연 끝에 논할 성질이 아닙니다. 다른 날 다시 의논하기로
합시다."
사도 왕윤의 제의에 대신들은 도망치듯 황망히 돌아섰다. 동탁이 원문에 다다를
무렵, 옆구리에 방천화극을 낀 채 검은 말을 타고 문 밖을 지키고 있는 한 장수
가 눈에 띄었다. 동탁은 옆에 있는 이유에게 물었다.
"저 자는 누구인가?"
"정원의 양자로 성은 여이고, 이름은 포, 자는 봉선입니다. 오원군 태생으로 힘과
무예에 있어서는 천하에 비길 자가 없다는 정평입니다. 저런 자와 시비라도 생
기면 좋지 않으니 잠시 피하시는 것이 상책입니다."
이유의 말에 동탁도 두려운 마음이 들어 온명원으로 들고 말았다. 그 다음 날이
었다. 형주자사 정원은 찬역의 마음을 품은 동탁을 죽이기로 결심하고 군사를
거느리고 성으로 달려가 동탁에게 싸움을 걸었다.
"이놈, 역적을 도모하는 동탁은 나와서 천벌을 받아라!"
동탁은 대로하여 서둘러 무자을 단단히 하고 이유와 함께 군사를 거느리고 성밖
에 나아가 진두에 나섰다. 정원은 여포와 나란히 진문 앞에 나와 싸움을 돋우웠
다. 여포는 묶은 머리에 금관을 쓰고 백화전포 위에 보석으로 치장한 갑옷과 허
리에는 사자머리가 새겨져 있는 띠를 두르고 한 자루의 방천화극을 풍차 돌리듯
하며 싸우는 솜씨가 가히 종횡무진이었다. 원래 여포는 오원군 구원 태생으로
창극.도검.궁마 등 뛰어나지 않은 무예가 없으나 그 중 방천화극이란 가지 있는
창을 다루는 솜씨는 그를 따를 자가 없었다. 일찍부터 정원의 휘하에 들어가 총
애를 받아온 여포는 정원의 은혜에 감사하고 있었다. 여포는 그런 정원을 주인
으로 섬기기보다 아버지처럼 받들었다. 정원은 하진의 밀조를 받고 낙양으로 들
어올 때 여포를 집금오의 벼슬에 올렸다. 그리고 십상시의 난이 평정되자 잠시
낙양에 머무르로 있던 중 동탁의 반역을 보게 된 것이다.
황제 폐위 여포 적토마를 얻다.
여포의 용맹을 본 군졸들은 감히 대적할 생각을 하지 못했다. 섣불리 대적하
던 자는 순식간에 방천화극의 이슬로 사라졌다. 정원도 사방으로 말을 달리며
동탁군을 괴롭혔다 그는 동탁의 모습을 발견하자 채찍으로 동탁을 가리키며 큰
소리로 꾸짖었다.
"나라가 어지러워지자 환관들이 권세를 희롱하며 만백성을 도탄에 빠뜨리더니
이제 너는 양주의 일개 자사에 불과한 몸으로 한 치의 공훈도 세우지 못한 주제
에 함부로 천자의 폐립을 들고 나오니, 그 행위는 분수를 모르는 역적질이라 아
니할 수 없다. 이제 네놈의 목을 쳐 저잣거리에 효수하여 만백성의 본보기로 삼
으리라."
동탁이 무어라고 대꾸하기도 전에 여포가 방천화극을 휘두르며 동탁을 향해 마
치 무인지경을 달리듯 군사들을 베며 나는 듯이 달려왔다. 여포의 무술과 용맹
은 시로 절륜하여 당할 자가 없었다. 동탁은 크게 패하여 30리 밖으로 쫓겨 달
아났다. 이날 밤, 동탁은 본진으로 부장들을 불러모은 후 탄식하였다.
"정원이란 놈은 두려울 것이 없다. 그러나 그놈의 양자 여포가 있는 이상 승산이
없다. 여포를 나의 휘하에 둘 수만 있다면 내 천하를 얻는 데 무엇을 염려하겠
는가?"
"제게 한 가지 계책이 있사오니 주공께서는 염려하실 것 없습니다."
동탁이 놀라서 쳐다보니 그는 호분 중랑장 이숙이었다.
"그래 어떤 좋은 계책이 있단 말이냐?"
"저에게 하루에 천리를 달린다는 애마 적토마와 한 주머니의 금은옥주만 주십시
오. 저는 여포와는 고향이 같아 그의 성품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의 용맹은 비
길 데 없으나, 결코 현명한 자는 아니어서, 저에게 이로우면 앞뒤를 돌보지 않고
의를 잊는 사람입니다. 적토마와 재물을 가지고 좋은 말로 그를 달래어 보겠습
니다."
"음-. 과연 여포를 달랠 수 있겠는가?"
욕심이라면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는 동탁인데다가 더욱이 적토마는 그가 워낙
아끼는 말이었다. 기쁜 가운데도 믿을 수 없다는 듯 선뜻 마음을 정하지 못하고
있던 동탁은 옆에 있는 이유에게 의견을 물었다.
"어떻게 하는 게 좋을까? 이숙은 저렇게 장담하고 있지만...."
"주공께서는 천하를 얻는 일에 어찌 말 한 필을 아끼려 하십니까?"
이유의 말에 동탁은 고개를 끄덕였다. 동탁은 이유의 계책을 받아들여 비장의
명마 적토마와 황금 천 냥, 명주 수십 필, 그리고 옥대하나를 주었다. 적토마는
하루에 능히 천 리를 달린다는 희대의 명마로, 온몸이 타오르는 듯한 새빨간 털
을 가진 말이었다. 바람을 가르고 달릴 때는 그 갈기가 불길이 흐르는 듯이 보
였다. 목에서 꼬리까지의 길이는 1장이요, 발굽에서 목까지의 높이가 여덟 자이
며, 울부짖을 ㄸ는 하늘로 치솟으며, 바다로 뛰어드는 듯 했다. 사람들은 적토마
를 보고 이렇게 노래했다.
천리를 치달을 때 이는 자욱한 먼지,
물 건너고 산 오를 때 안개도 열리네.
매여 있는 줄 끊고 옥고삐를 흔드니
용이 불을 뿜으며 날아내리는 듯하네.
다음 날 밤, 이숙이 은밀히 여포의 진영을 방문했다. 그러나 정원의 군사가 이
숙을 막으며 들여보내지 않았다. 이숙은 태연히 입을 열었다.
"여 장군께 고향 친구가 찾아와 뵙기를 청한다고 전해 주시오."
여포는 부하의 보고를 받고 별 생각 없이 들여보내도록 허락하였다.
"헤어진 지 오래 되어, 알아뵈기나 하겠나?"
이숙이 웃으며 인사를 건내자 여포 또한 이숙을 한동안 바라보았다.
"어이구, 참 오래간만이오. 지금은 무엇을 하고 지냅니까?"
"나는 지금 호분 중랑장으로 있네. 듣자하니 이번에 아우가 나라를 위해 큰 일을
한다기에, 내 기쁜 마음으로 좋은 말 한 필을 끌고 왔네."
"이 말은 하루에 천리를 달린다는 적토마라는 명마네. 물을 건너고 산을 오르는
데도 평지오 같네. 자네 같은 용장이 이런 명마를 탄다면 호랑이가 날개를 다는
격이 되지 않겠나."
이숙의 말에 여포가 말을 끌어오게 하여 살펴보니, 온몸이 이글거리는 숯부러처
럼 붉은데 잡털이라고는 한 올도 없으며 울부짖는 기세가 금세 하늘로 치솟을
듯했다. 여포는 적토마를 보고 기뻐 입이 딱 벌어졌다. 여포는 진중이지만 주연
을 베풀어 이 숙에게 잔을 권하며 말했다.
"형님께서 이토록 귀한 선물을 주시는데 나는 무엇으로 보답해야 할지 모르겠
소."
"나는 다만 의기를 위해 왔을 뿐인데 자네에게 무슨 보답을 바라겠나?"
이숙도 여포에게 잔을 권하며 은근한 목소리로 말했다. 술이 몇 순배 돌고 난
뒤 이숙은 슬슬 얘기를 꺼내기 시작했다.
"내가 이렇게 자네에게 선물한 말이지만 워낙 알려진 명마라 자네 부친도 이 말
에 대해 잘 알고 계실 터인즉 혹시 자네한테서 이 말을 빼앗지 않으실까 그것이
염려되네."
"나의 부친이 말을 빼앗다니? 대체 그게 무슨 소리요?"
"왜? 내가 실수라도 하였나?"
"형님이 좀 취하셨군요. 나의 부친은 돌아가신 지 오래인데 어찌 말을 빼앗는다
고 하시오?"
"아니, 내가 말하는 것은 자네의 친부가 아니고 양부인 정원 자사를 말하는 걸
세."
"아, 양부 말이오?"
여포는 양부 정원의 이야기가 나오자 표정이 다소 어두워졌다. 여포는 평소에도
시골에서 일생을 썩히고 싶지는 않았다. 그러나 당장 자기의 뜻을 알아 주는 사
람이 없어 항상 가슴이 답답하던 터였다. 이숙은 이런 여포의 속마음을 꿰뚫어
보고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생각해 보면 하늘을 떠받치고 바다라도 걸머질 만한 무용과 지략을 지닌 그대
를 흠모하고 아끼지 않을 사람이 어디 있겠나? 그대의 마음가짐에 따라 주머니
속의 물건을 꺼내듯 부귀와 공명을 손쉽게 얻을 수 있음을 아직도 모르니 안타
까울 뿐이네."
"나도 젊은 나이인데도 어찌 사나이로서 큰 뜻이 없겠소? 내가 정원 양부의 막
하에 있으나 세상에서 보는 바와 같이 좋아서가 아니라 달리 뾰족한 길이 없기
때문이오."
이숙이 여포의 마음을 어루만지며 능숙한 말로 달래자 여포도 불쑥 속 마음을
털어놓고 말했다.
"옛말에 좋은 새는 나무를 가려서 깃들고 어진 선비는 그 주인을 골라서 섬김다
고 하지 않던가? 세월은 화살이 날 듯 빨리 지나가네. 기회가 왔을 때 행동하지
않으면 다음 날 후회해도 소용 없다네."
이쯤되니 정원 따위는 이미 여포의 심중에서 새까맣게 사라졌다.
"음-. 그럼 형님께서는 지금 조정의 대신 중 당대의 영웅은 누구라고 생각하시
오?"
이숙은 짐짓 생각에 잠긴 표정으로 입을 다물었다. 한동안 뜸을 들인 후 말했다.
"글세...., 아무래도 동탁 장군만한 영웅이 있겠나. 어진 이를 공경하고, 어진 선비
를 예로 대하며 상과 벌이 명확하고 덕망까지 겸비한 영걸이니 반드시 큰 일을
이룩할 걸세."
"동탁이 그렇게 뛰어난 영걸인 줄은 몰랐소. 그러나 정원 장군과 서로 창칼을 맞
대고 있으니 참으로 답답할 뿐이오."
이숙은 여포의 말이 끝나자 기회를 놓치지 않고 이번에는 가지고 온 황금과 보
석을 꺼냈다. 눈이 부신 보석과 찬란한 옥대를 보자 여포가 눈을 크게 떴다. 생
전 처음 보는 휘황찬란한 보석들이었다.
"아니 이게 대체 웬거요?"
이숙은 대답대신 좌우 사람들부터 물러나게 한 후 목소리를 낮추어 말했다.
"실은 이것은 동 공께서 자네에게 예물로 보낸 물건이네. 자네를 사모하여 보낸
것일세."
"아니, 동 공께서 나를 사모하여?"
"적토마도 그 분의 애마인데 성하나를 주어도 바꾸지 않겠다고 말한 만큼 아끼
는 말이라네. 그러나 자네의 용맹을 흠모하여 끌고 가라는 고마운 말씀이었네."
그 말에 여포는 감복한 얼굴이 되어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동 공께서 그토록 이 여포에게 큰 사랑을 베푸시는데, 나는 무엇으로 보답해야
한단 말이오?"
"나처럼 재주없는 사람도 중랑장이라는 벼슬을 제수해 주셨는데, 자네 같은 용장
을 어찌 나와 비교하겠나? 어떤가? 나와 함께 동 장군한테로 가지 않겠나?"
"음-."
여포는 이숙을 조금도 의심하지 않았나. 여포는 그저 적토마와 금은보화에 정신
을 빼앗신 나머지 이숙의 꾀에 걸려들었다. 이때 여포가 다시 입을 열었다.
"내가 지금 동 공께 간다고 하더라도 아무런 공이 없는데 어찌 후한 대접을 받
겠소?"
이숙은 내심 회심의 미소를 머금었다.
"공을 세울 길이야 주머니 속의 물건을 꺼낵보다 쉽지만 자네의 결심이 문제일
세."
여포는 한동안 생각에 잠기다가 불쑥 입을 열었다.
"내가 정원을 죽이고 군사를 이끌고 동 공께 간다면 어떻겠소?"
"그거야말로 다시 없는 공훈이 되네. 다만 좋은 일이란 서두를수록 좋다고 생각
하네. 결심이 섰으면 지체없이 실행에 옮기게. 내 동 공께 아뢰고 기다리고 있겠
네."
이숙은 여포의 마음이 흔들리지 않도록 채근한 뒤에 다시 한 번 못을 밖고 헤어
졌다. 그날 밤 이경 때쯤이었다. 여포는 칼을 차고 정원의 장막 안으로 들어갔
다.병서를 읽고 있다가 들어오는 여포를 보자 물었다.
"아니, 이 밤중에 무슨 일로 나를 찾아왔느냐?"
"닥치시오. 대장부가 어찌 범상한 늙은이의 아들이 되어 한세상르 뜻 없이 보내
겠소!"
"무엇이? 봉선! 네가 마음이 변했구나. 무슨 연유로 그리 되었느냐?"
정원이 놀라며 몸을 일으키자 여포는 성큼 다가가 한칼에 정원을 베어 죽였다.
워낙 갑작스럽게 일어난 일이라 정원은 손 한번 쓰지 못하고 쓰러져 죽고 말았
다. 장막을 열어젖히고 밖으로 아온 여포는 정원의 목을 높이들고 군사들에게
소리쳤다.
"모두 듣거라! 정원은 어질지 못하므로 나 여포가 이를 참하였다. 너희들 중에
뜻이 있는 자는 나와 함께 여기에 남고 그렇지 않은 자는 이곳을 떠나라!"
정원의 군사들은 한동안 술렁이다가 태반이나 여포를 버리고 흩어지고 말았다.
이튿날 여포가 정원의 목을 들고 이숙을 찾아가자 기다리고 있던 이숙은 여포를
동탁에게 안내했다. 동탁은 크게 잔치를 베풀어 술잔을 여포에게 권하며 지금까
지의 교만함을 버리고 먼저 일어서서 절했다.
"대업을 앞두고 오늘 이 동탁이 천하의 여 장군을 맞게 되었으니 마치 가뭄에
단비를 만난 듯 하오."
여포는 황망히 일어나 동탁에게 엎드려 두 번 절하며 말했다.
"하찮은 몸, 이토록 환대해 주시니 실로 큰 광영이옵니다. 옛말에 사람은 자기를
알아 주는 주인을 위해 죽는다고 하였습니다. 하락하신다면 의부로 모시고 싶습
니다."
동탁은 여포의 손을 잡아 일으키고 연회석으로 맞아들였다. 동탁이 여포에게 황
금갑옷과 비단전포를 내리니 여포는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여포는 이제야 제
세상을 만났다는 얼굴이었다. 출중한 무예를 지니고도 목전의 욕망에 현혹되어
사리를 구별하지 못하는 여포였다. 여포를 얻은 동탁의 위세는 더욱 가관이었다.
동탁은 스스로 전군을 거느리는 영전군사가 되고 아우인 동민을 좌장군에, 여포
를 기도위 중랑장 도정후에 봉했다. 마음만 먹으면 무엇이든 가능했다. 문자 그
대로 무소불위였다. 그러나 아직도 남아 있는 문제가 있었다. 황제의 폐립이었
다. 이유는 동탁에게 황제의 폐립을 입이 닳도록 충동질했다.
"알았네. 이번에는 아주 결말을 내버리겠네."
동탁은 궁중에 큰 잔치를 베풀고 다시 여러 대신들을 초청토록 하였다. 이때 여
포에게 명하여 갑사 1천여명을 거느리고 연회장 좌우에 시립케 하여 대신들에게
잔뜩 겁을 주었다. 몇 순배의 술잔이 오고간 후였다. 동탁은 칼을 빼들고 위엄이
담긴 어조로 입을 열었다.
"금상께서는 암약하시어, 종묘와 사직을 받들기 어려우므로 내 이윤과 곽광의 고
사를 본받아 황제를 폐하고 홍농왕으로 모시고 진류왕을 황제로 추대하고자 하
오. 오늘 또 이를 거역하는 자는 목을 벨 것이요."
동탁의 위세에 눌려 감히 숨도 제대로 못 쉬는 대신들 중에서 중군교위 원소가
자리를 박차고 일어섰다.
"안 될 말씀이오. 금상폐하께서 제위데 오르신 지 오래지 않았고, 덕을 잃은 잘
못이 없으신데 공은 어찌 적자를 폐하고 서자를 세우려 하시오? 그것은 곧 반역
이 아니고 무엇이오?"
동탁은 원소가 나서 또 일을 그르치려 하자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올랐다.
"닥쳐라! 천하가 이미 나에게 기울어졌거늘 네가 감히 나를 거역하겠다는 거냐?
너의 눈에는 이 칼날이 보이지도 않느냐?"
동탁은 빼든 칼을 든 채 원소에게로 다가갔다.
"그대의 칼에만 날이 서 있는 줄 아는가? 내 칼의 날도 무디지 않음을 보여 주
겠다!"
원소도 지지 않고 칼을 빼들며 고함쳤다. 동탁과 원소가 칼을 빼들고 맞서니 연
회장은 순식간에 수라장이 되고 말았다. 그때 이유가 급히 달려가 동탁을 말렸
다.
"일이 성사되기도 전에 사람부터 죽여서는 안됩니다. 부디 고정하십시오."
모사 이유가 말리자 동탁은 숨을 몰아쉬며 노기를 가라앉혔다. 원소 또한 기백
을 앞세워 동탁과 맞섰으나 사태가 자기에게 불리함을 모를 리 없었다. 정원이
의를 부르짖다 이미 목숨을 잃었으며, 이젠 여포마저 동탁에게 가세하여 군사를
거느리고 연회장을 지키고 있지 않은가. 차라리 자리를 피해 기회를 엿보는 것
이 훨씬 현명한 일이라는 생각이었다. 동탁이 칼을 거두고 다시 자리로 돌아가
자 원소는 칼을 든 채 한마디 했다.
"이런 불충한 자리에 더 이상 있고 싶지 않소."
원소는 문부백관에게 작별을 고한 후 자리를 박차고 뛰쳐나갔다.
'내가 하진에게 외병을 끌어들이자고 하여 공연히 화를 자초하였구나.'
원소는 길게 한탄하며 가솔들을 거느리고 멀리 원씨들의 근거지인 기주로 떠나
갔다. 원소가 떠나가자 동탁은 좌중의 한 곳을 손가락질하며 원소의 숙부 태부
원외에게 물었다.
"그대의 조카 원소가 나에게 무례하기 그자없는 언동을 서슴지 않았다. 내 그대
의 목을 베려 하나 그에 앞서 한 가지 묻겠으니 마음에 품은 바를 거짓없이 고
하라."
"...."
"그대는 황제 폐립에 관한 일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가?"
"장군의 말씀이 지당한 줄로 아뢰오."
동탁의 위협에 생명의 위협을 느낀 원외가 겨우 들릴락말락한 소리고 대답하자
동탁은 득의만만하여 대신들을 한 바퀴 쭉 둘러본 후 큰 소리로 외쳤다.
"음-. 그렇다면 그대의 목숨을 보전하리라. 자 들으시오! 공들의 의견은 어떠하
오?"
만좌한 대신들은 두려움에 떨며 입을 모아 대답했다.
"동 공의 말씀이 지당하오."
동탁은 칼로써 대신들을 승복시키니, 천자 폐립은 이렇게 하여 성사되었다. 동탁
은 이어 시중 주비, 교위 오경, 의랑 하우에게 명을 내렸다.
"나를 거역한 원소는 오늘 밤 중으로 제 고향 기주로 도망치려 할 것이다. 그놈
에게도 병력이 있으니 방심하지 말고, 즉시 정병을 이끌고 그를 뒤쫓아 주살하
라!"
그러자 시중 주비가 동탁에게 고했다.
"말씀 올리기 황송합니다만 지금 내리신 명은 결코 상책이 아닌 듯하옵니다."
"주비 이놈, 네가 나를 거역할 생각이냐?"
"아닙니다. 원소의 목 하나를 취하려 하시다가 엉뚱한 변란이 일어날까 염려되어
아룁니다. 그의 가문은 4대에 걸쳐 널리 덕을 베풀어 그 문하생으로 벼슬길에
오른 자가 천하에 널려 있고, 재물 또한 적지 않습니다. 만약 원소가 무리를 모
아 반기를 든다면 산동 일대는 결코 대감의 다스림이 미치지 못할 것입니다. 원
소의 세력을 두려워해서가 아니라 지금 조정에서 천자 폐립의 문제를 매듭짓기
도 전에 외방의 군사와 다툴 때가 아니라는 생각에서입니다. 차라리 그를 용서
하시고 태수자리 하나쯤 내리심이 그를 급히 다그치는 것보다 나을 것입니다.
그리하면 그는 죄를 벗는 것만이 기뻐 후환을 만들지 않을 것입니다."
주비의 말을 듣자 동탁은 고개를 끄덕였다. 오경도 주비의 말을 거들었다.
"옳으신 말씀입니다. 원소는 본디 생각이 깊은 사람처럼 보이나 결단과 실천이
약합니다. 거기다가 천하의 세를 가볍게 여기고 일시 분노에 사로잡혀 자리를
떠났지만 그것은 장군님을 거역한 일을 두려워했기 때문입니다. 이럴 때 오히려
너그러움을 베풀며 도량을 보이시여 민심을 수습하는 편이 낫습니다."
동탁도 그 말에 동의하여 원소를 발해군 태수로 제소했다. 그 일이 있은 뒤 9월
보름이 되자 동탁은 출사하지 않는 자는 참수하겠노라고 엄포를 놓으며 모든 문
무백관들을 불러보으고 황제를 가덕전에 모셨다. 동탁은 수천 갑사들로 하여금
주위를 삼엄하게 호위케 하고 어전앞에도 장검을 뽑아들고 이유에게 명했다.
"천자께서 암우하시어 종묘사직에 근심이 떠나지 않는 바요. 여기 책문이 있으니
읽어 백관들에게 들려 주시오."
이유가 책문을 펼쳐 들고 큰 소리로 읽기 시작했다. 이유가 책문을 펼쳐 들고
큰 소리로 읽기 시작했다.
효령(영제) 황제께서 일찍이 세상을 떠나시자 그 뒤를 이어 금상이 제위를 계
승함에 모든 백성들이 다 우러러보며 기개하였도다. 그러나 금상은 천성이 경박
하여 위의가 없었으며 상중에도 법도를 어기고 제왕의 자리를 더럽혔으니 천자
의 그릇이 아님이로다. 하 태후 또한 어머니로서의 가르침이 없는지라 나라일이
더욱 어지럽고 문란해졌도다. 더욱이 동 태후를 독살하니 삼강의 도와 천하의
기강이 모두 무너진 지 오래도다. 반면에 진류왕 협께서는 성덕이 높고 법도가
엄하여 상중에도 효성을 다하였으며 요사스런 말은 입에 담지도 않았도다. 이러
한 그의 높은 덕과 고매한 천품은 마땅하 나라를 이어받아 만세까지 전할지라.
이제 금상을 폐하여 홍농왕으로 삼고 진류왕을 받들어 제위에 모시고 하 태후는
정사에 참여 못하도록 하오니 하늘과 땅은 굽어 살피소서.
이유가 목청을 한껏 돋우어 읽자 백관들은 실색하였고, 옥좌의 황제는 부들부
들 떨기 시작했다. 가덕전의 전각은 마치 무덤처럼 적막했다. 황제의 옆에 앉아
있던 하 태후가 오열을 하며 황제의 옷자락을 부여 잡았다.
"누가 뭐라 하여도 한실의 황제는 폐하십니다. 옥좌에서 내려오시면 아니 되옵니
다."
동탁이 격노하여 좌우 군사를 보며 외쳤다.
"저 여인을 빨리 어전에서 끌어내려라!"
하 태후가 군사들에게 끌려가자 동탁은 칼을 든 채 말했다.
"방금 읽은 책문과 같이 황제는 어리석고 경박하며, 태후는 어머니로서의 덕이
없소. 따라서 오늘로서 황제를 홍농왕이라 부르며 태후는 영안궁에 유폐할 것이
오. 이제부터 진류왕을 새 황제로 받들어 모실 것이오."
동탁은 이렇게 말을 마친 후 황제를 옥좌에서 끌어낼도록 한 후 옥쇄와 인수를
끄르게 할 뿐만 아니라 황제를 북면하여 꿇어앉게 했다. 조정의 법도상 황제는
남면하여 앉고 신하는 북면하는 법이라. 황제는 동탁에 이끌려 신하의 반열에
앉게 된 것이었다. 동탁은 하 태후에게 다가갔다. 아직도 통곡하고 있는 하 태후
의 후의(태후의 복장)를 벗겨 평복으로 갈아입게 했다. 황제와 태후는 서로 부여
안고 통곡하였다. 모든 백관들은 너무나 엄청난 사태를 차마 눈을 뜨고 보지 못
해 아예 고개를 돌려버렸다. 그때였다.
"기다려라 이 역적놈아! 네 어찌 하늘을 속이고 사사로이 천자를 폐하려 하느냐.
내 하늘을 대신하여 너를 벌하리라!"
큰 소리로 꾸짖으며 들고 있던 상아 토막으로 동탁을 후려치는 사람이 있었다.
바로 상서 정관이었다. 동탁은 쓰러질 듯 몸을 옆으로 비껴서면서 가까스로 정
관을 피하였다. 그 순간, 정관의 옆으로 달려간 이유가 번개같이 칼을 뽑아 정관
의 목을 쳤다. 이와 함께 시위하던 무사들의 칼끝이 정관의 몸으로 어지러히 날
아들었다. 가덕전은 정관의 선혈로 붉게 물들었다. 뒷 날, 사람들은 정관의 충절
을 시로써 기렸다.
동탁이 황제를 폐하려 하니
한나라 종묘사직이 폐허가 되겠구나.
만조의 신하들은 말 없이 입 다물었는데
정 공 호로 장부임을 보이도다.
찬역을 꾀한 동탁은 마침내 자기가 뜻한 바를 이루었다. 진류왕은 천자의 보
위에 올랐고, 백관들 또한 동탁의 포악한 위세에 눌려 만세를 합창했다. 새로 보
위에 오른 진류왕 협의 자는 백화요, 영제의 둘째 아들로 하 태후에게 독살당한
왕미인의 아들이니 그가 바로 후한의 마지막 황제인 헌제인 것이다. 이때 그의
나이 겨우 아홉이었다. 그러나 가엾게도 이 어린 황제는 4월에 즉위하였다가 9
월에 폐위되어 겨우 다섯 달 동안만 보위에 있게 되었다. 동탁은 연호를 초평
원년이라 고치고 스스로 상국의 지위에 올라 양표를 사도에 , 황완을 태위에 ,
순상을 사공에 앉혔다. 동탁은 조정의 벼슬자리는 물론 지방관도 모두 자신의
심복들로 앉혀 놓고 나라 안팎의 대권을 마음대로 주물렀다. 동탁은 황제를 배
알할 때 자기 이름을 부르지 않게 하고 조회 때에도 허리를 굽히지 않을 뿐만
아니라, 어전에서도 신을 신은 채 칼을 차고 전위로 올랐으니 그의 위세는 천하
에 비길 바가 없었다. 하루는 이유가 동탁에게 권했다.
"이제 덕망 높은 사람을 등용하여 민심을 수습할 때입니다. 천하 문장가 채옹이
란 사람이 있사온데 우선 그 사람을 부르십시오."
동탁은 즉시 사람을 보내어 채옹을 불렀으나 채옹이 응하지 않았다. 동탁은 크
게 노하여 오지 않으면 일족을 멸하겠다고 협박하니 채옹은 어쩔 수 없이 동탁
의 부름에 응했다. 동탁은 채옹의 자리를 한 달 동안 세 번이나 높여 시중에 제
수시키고 두텁게 예우했다. 폐위된 황제 홍농왕은 밤낮을 눈물로 지새우는 어머
니 하태후와 함께 영안궁 깊숙이 유폐된 몸이 되고 말았다. 동탁은 영안궁에 음
식이나 의복까지도 제대로 보내 주지 않았다. 그리고 영안궁의 위병에게 엄명을
내렸다.
"감시를 게을리 하지 마라. 허락 없이 누구도 만나게 해서는 안 된다. 그리고 폐
제와 하 태후의 수상한 거동은 모두 나에게 보고하도록 하라."
홍농왕 역시 아직 열세 살밖에 되지 않은 어린 나이였다. 이제까지 한 나라의
황제였으나 영안궁 깊이 갇혀버린 홍농왕은 슬픔과 공포속에서 괴로운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어느 날, 뜰에 두 마리의 제비가 날아든 것을 보고 자신의 슬픔
과 울분을 달래려 노래를 지어 불렀다.
파란 새싹이 연기처럼 서리고
자유롭게 날아드는 쌍제비 갸냘퍼라.
한 줄기 푸른 물 맴돌아 흐르고
언덕 위 사람들 경치를 즐기는구나.
아득한 흰 구름 깊은 저 곳에
내가 살던 옛 궁전일세.
그 누가 충의로 풀어 줄까.
가슴에 맺힌 이 원한을.
영안궁을 지키던 위병이 문득 이 노래를 듣자 그 노래말을 글로 옮긴 후 동탁
에게 전했다.
"승상! 홍농왕이 이런 시를 지어 노래로 부르고 있습니다."
동탁은 시를 보더니 즉시 모사 이유를 불렀다. 노래가 충신들의 충의에 호소하
는 내용을 담고 있자, 동탁은 그대로 둘 수 없다고 여겼다.
"이것을 보라. 나를 원망하며 충신들에게 호소하고 있다. 살려 둔다면 반드시 해
가 되리라. 네가 무사를 이끌고 가서 하 태후와 폐제를 없애야겠다."
이유는 즉시 10여명의 무사를 이끌고 영안궁으로 갔다. 홍농왕과 하 태후 그리
고 당비는 슬픔에 잠긴 채 누각에 앉아 있다가 이유가 나타나자 깜짝 놀랐다.
"무슨 일로 여기까지 왔는가?"
폐제가 겁먹은 얼굴로 묻자 이유는 징글맞게 웃으며 말했다.
"전하! 놀라실 것 없습니다. 봄날이 화창하여 흥취나 돋우시라고 상국께서 술을
보내셨습니다. 이 술은 마시면 백년을 산다는 연수주라는 명주입니다."
이유는 지니고 온 단지를 내밀었다.
"이, 이것은 독주가 아니냐?"
홍농왕이 입술을 떨며 물었다. 하 태후는 두려움으로 얼굴이 시퍼렇게 질렸으나
다음 순간 이유를 매섭게 노려보며 말했다.
"상국이 우리 모자에게 연수주를 보낼 리 없다. 이유, 이것이 독주가 아니라면
네가 먼저 마셔 보아라."
이유는 눈을 부라리며 호통을 쳤다.
"술을 못하시겠다면 둘 중 하나를 택하시오."
이유는 무사들이 가지고 온 비단 띠와 단도를 내밀었다. 목을 매어 죽든가, 아니
면 자결을 하라는 뜻이었다. 이 때 폐제의 아내 당비가 나서며 이유에게 애원했
다.
"첩이 두 분을 대신하여 술을 마시겠나이다. 천자와 태후마마의 목숨만은 보전토
록 해 주십시오."
그러나 이유에게 그 말이 용납될 리 없었다.
"비켜라! 네가 나설 데가 아니다."
이유는 당비를 꾸짖고 나서 술을 들어 하 태후에게 내밀며 다그쳤다.
"당신부터 마시시오."
홍농왕은 운명이 다하였음을 깨달았다.
"어머니와 작별할 시간을 주시오."
어린 폐제는 하 태후의 손을 잡고 통곡한 뒤 구슬픈 목소리로 노래를 부르기 시
작했다.
하늘과 땅이 바뀌고 해와 달이 뒤집혔네.
천자 자리 버리고 왕 되어 물러앉으니
신하의 핍박받아 명 또한 길지 않구나.
대세는 기울었는데 부질없이 눈물만 넘치는구나.
폐제의 아내 당비도 그 노래를 듣도 옆에서 목이 매어 울다 눈물을 머금고 노
래를 지어 답했다.
하늘이 무너지고 땅조차 꺼지는구나
황제의 아내 되어 따라가지 못해 한이로세.
죽음과 삶의 길이 다르니 이제는 이별뿐.
애끓는 이내 심사 누구에게 호소하랴.
노래를 마친 뒤 서로 얼싸안고 통곡을 하자 그 슬픈 정경에 무사들도 고개를
돌렸다. 이어 하 태후는 이유를 노려보며 울부짖었다.
"역적 동탁은 우리 모자를 핍박하고 너희들은 그 앞잡이가 되어 악해을 서슴지
않으니 필시 멸망할 날도 오래지 않을 것이다.... 아아 오라비의 어리석음 때문에
동탁같은 짐승의 무리가 낙양에 들어오게 되었구나." 머리끝까지 화가 난 이유는
하 태후의 목덜미를 잡아 누각 아래로 내동댕이쳤다. 이유가 눈짓을 하자 무사
들이 달려들어 폐제의 입을 억지로 벌리고 독주를 쏟아부어 죽인 다음 당비는
흰 비단천으로 목졸라 죽였다. 동탁은 그때 궁녀들을 희롱하며 술을 마시고 있
었는데 이유가 두 개의 인두를 들고 와 소제와 하 태후, 당비를 죽였다고 고했
다. 이유의 보고를 받자 동탁은 소제와하 태후, 당비의 시신을 성밖에 아무렇게
나 묻어 버리게 했다. 하 태후와 소제, 당비를 죽인 이후부터 동탁의 무도함은
극에 달했다. 매일 밤 궁에 들어가 궁녀들을 번갈아 욕을 보이는 가하면 무엄하
게도 용상에 올라 잠을 잤다. 조정 대신들을 하인 부리듯 하는가 하면 백성들을
벌레나 짐승보다 못하게 여겼다. 2월 어느 날의 일이었다. 동탁은 그날도 술에
취해 궁녀들을 수레에 싣고 도성을 지나가 낙양성 교외로 나섰다. 때마침 꽃이
활짝 피어나는 이른 봄날로 마을의 축제일이기도 했다. 몸단장을 곱게 한 마을
사람들이 삼삼오오 떼지어 축제를 즐기고 있었다. 동탁은 그들을 보자 공연히
심사가 되틀렸다.
"저런 괘씸한.... 농사철에 일은 하지 않고 몸단장이나 하고 놀러 다니다니.... 일
벌 백계로 처벌할 것이니 저것들을 모조리 붙잡아 오라!"
동탁의 명을 받은 군사들은 무료하던 중에 신명나는 소일거리라도 만난 듯 마을
사람들을 붙들어 왔다. 그 마을뿐만 아니라 이웃 마을까지 휩쓸었다. 반반한 부
녀자와 재물을 약탈하여 수레에 싣고 나머지 마을 사람들은 모두 목을 베었다.
날이 어두워지자 끌고 간 수레에는 1천여개의 목이 매달렸다. 약탈한 부녀자와
재물을 가득 실은 수레를 이끌고 낙양으로 돌아온 동탁은 군사들에게 거짓 소문
을 퍼뜨리게 했다. "오늘은 성밖에서 도적 떼를 만나 그들의 목을 베고 재물까지
빼앗아 왔다."
동탁은 베어온 목을 성문 밖에서 불사르게 하고 노략질한 재물과 부녀자들을 군
사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동탁이 멀쩡한 거짓말로 백성들을 속였으나 그 내막은
며칠이 가지않아 백성들의 입과 입으로 전해졌다. 백성들은 동탁을 욕하며 저주
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자가 덕유 월기교위 오부는 일찍부터 동탁의 잔인무도
한 횡포에 항상 울분을 참지 못하고 있었다. 오부는 조복속에 짧은 갑주를 입고
단도를 품은 채 동탁을 죽일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며칠 후 오부가 궁궐에 있
는데 동탁이 호위 없이 홀로 입궐하는 것이 보였다. 오부는 하늘이 내린 기회라
여기고 영접하는 체하며 동탁에게 다가가 날쌔게 단도를 뽑아 찔렀다. 그러나
비대한 체구였지만 힘이 세고 무예가 뛰어난 동탁이었다. 몸을 슬쩍 피하여 오
부의 단도를 쥔 손을 한 손으로 치니 오부는 그만 단도를 떨어뜨리고 말았다.
이때 뒤따라온 여포가 오부의 몸을 꼼짝 못하게 결박했다.
"이놈, 누구의 지시를 받았느냐? 필경 반역을 꾀한 무리가 있으렷다. 어서 말하
라."
동탁이 결박당한 오부를 노려보며 물었다. 그러나 오부는 두려워하는 기색 없이
결연한 어조로 외쳤다.
"반역이란 신하가 임금에 거역함을 이른다. 이놈아! 너는 내 임금이 아니고 나는
너 같은 놈의 신하가 아닌데 어찌 반역이라 하는가! 네놈의 죄상은 이미 하늘을
채우고도 남을 지경이라 사람마다 네놈을 죽이려 하지 않는 이가 없다. 너를 찢
어 죽여 천하의 법도를 밝히지 못함이 원통할 뿐이다."
오부의 말을 듣고 동탁은 크게 노했다.
"이놈을 끌어내 찢어 죽여라!"
오부는 참형을 당하면서 목숨이 붙어 있는 동안 동탁을 꾸짖는 욕설을 멈추지
않았다. 뒷날 사람들이 그의 충절을 시로 지어 기렸다.
한 말의 충신으로 오부가 있었네.
하늘을 찌를 듯한 기상 세상에 비길 자가 없네.
조당에서 역적을 찔러 그 이름 드높이니
대장부의 그 이름 만고에 전하리라.
이 일이 있은 후부터 동탁은 나들이할 때마다 항상 무장한 군사들의 호위를
받았다. 한편 원소는 발해태수로 있으면서 소제와 하 태후등을 독살하는 등 잔
인무도한 동탁의 소식을 전해 듣고 도저히 마음에 불이 일어 참을 수가 없었다.
가만히 밀서 한 통을 사도 왕윤에게 보냈다.
역적 동탁이 하늘 두려운 줄 모르고 황제를 폐하더니 이어 사람으로선 차마
못할 짓을 자행하고 있음에도 사람들은 그가 두려워 입을 열지 못하고 있습니
다. 공께서는 이를 알고도 모른 체하시니 어찌 나라를 위하고 임금께 충성하는
신하라 할 수 있겠습니까? 이 원소는 황실의 체통을 바로잡고 군사를 조련하며
왕실의 역도들을 깨끗이 쓸어내려 기회를 엿보고 있는지라 공께서 나와 뜻을 함
께 하신다면 나는 공의 명을 기꺼이 받들어 언제든지 군사를 일으키겠습니다.
왕윤은 원소의 밀서를 받고 깊이 생각해 보았으나 마땅한 묘책이 떠오르지 않
았다.
'무슨 묘책이 없을까?'
어느 날, 궁중의 별당에 들어선 왕윤은 모여 있는 백관들을 찬찬히 둘러보았다.
마침 동탁의 사람들은 보이지 않고 모두 구신들 뿐이었다. 왕윤은 구신들과 의
논이라도 한 번 해보리라고 작정하고 목소리를 낮추어 말하였다.
"오늘이 바로 나의 생일이오. 해진 뒤 저희 집에서 여러분들을 모시고 술이라도
한잔 나눌까 하는데 여러분들의 의향은 어떠하시오?"
"어찌 거절하겠습니까? 다들 가서 축수를 드리겠습니다."
모두를 흔쾌히 승낙하였다. 왕윤은 집으로 돌아와 후당에 술자리를 마련했다. 날
이 어두워지자 전조의 구관들이 하나둘씩 모여들었다. 이윽고 술이 몇 순배 돌
자 왕윤은 싸늘하게 식은 술잔을 내려다보며 얼굴을 소매로 가리고 흐느껴 울었
다. 모든 대신들은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다.
"대감께서는 이 기쁜 생신날 왜 그다지 슬피 우십니까?"
왕윤은 울음을 그치고 눈물을 닦으며 추연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실은 오늘은 나의 생일이 아니오. 오래 전부터 여러분들과 한 자리에 모여 가슴
속의 울분을 풀어보고 싶었소. 그러나 동탁의 의심을 살까봐 거짓말로 꾸며낸
것이오. 이제 동탁이 임금을 속이고 권세를 희롱하니 나라가 위태로울 뿐입니다.
고조께서 천하통일을 이룩한 지 4백년, 오늘날 그 사직이 동탁의 손에 넘어갈
줄 뉘라서 알았겠소? 하도 통탄스러워 눈물을 흘렸소이다."
왕윤의 말에 모인 사람들은 일제히 목을 놓아 통곡했다. 그 때 좌석의 맨 아래
쪽에서 박장대소하는 사람이 있었다. 백관들이 깜짝 놀라 그곳을 바라보니 그가
바로 효기교위 조조였다. 왕윤이 언성을 높여 꾸짖었다.
"무례한 자가 누구인가 했더니 교위 조조가 아닌가? 상국 조참의 후손으로 대대
로 한실의 은혜를 받아온 터에 나라가 이 지경이 괴었는데 웃음이 나오느냐? 우
리들의 우국충정이 그렇게도 우습단 말이냐?"
왕윤의 꾸짖음에 조조는 그제서야 정색을 하고 대답했다.
"갑자기 소란스럽게 웃어 죄송합니다. 조정의 여러 공경대부께서는 밤낮을 가리
지 않고 울고만 계시지 않습니까? 이러니 천하 만민도 울며 살 수 밖에요. 이렇
게 많은 공경대부 중에 동탁을 물리칠 계책이 없는 것이 우스웠을 뿐입니다."
왕윤은 조조의 말에 다그쳐 물었다.
"그럼 동탁을 죽일 계책이라고 있다는 말인가?"
"어찌 없겠습니까?"
조조는 호기 있게 말하더니 다시 말을 이었다.
"소생에게 맡겨만 주신다면 동탁의 목을 베어 낙양 성문에 내걸겠습니다."
왕윤은 자리를 고쳐 앉더니 반색하며 재우쳐 물었다.
"만일 지금 한 말이 거짓이나 허세가 아니라면 하늘이 의인을 내려 만백성의 고
통을 구하려 하심이다. 대체 어떤 계책이 있는가?"
"이 조가 요즈음 동탁에게 몸을 굽혀 가까이 섬기는 것은 실로 그를 한칼에 없
앨 기회를 엿보기 위함이었습니다. 이제는 동탁도 저를 믿어 저는 언제든지 그
르 가까이 할 수 있습니다."
"아니, 맹덕은 벌써부터 그러한 결심을 하고 있었단 말이오?"
"그렇지 않다면 어찌 공경대부들 앞에서 경망스럽게 웃고 큰소리를 칠수가 있겠
습니까?"
왕윤은 기쁨을 참을 수가 없었다. 백관들 또한 하나같이 희색이 만면하였다. 그
러자 조조는 왕윤을 향해 정색을 하고 허리를 굽히면서 말했다.
"이 일을 단행하는 데는 왕 공께 한 가지 청이 있습니다. 대감의 가문에는 옛날
부터 칠보를 아로새긴 명검이 전하여 온다는 소문을 들었습니다. 원컨대 그 명
검을 잠시 빌려 주시면 승상부로 들어가 동탁을 찔러 죽이겠습니다. 만일 실패
하여 제가 죽는다 해도 여한이 없겠습니다."
"맹덕이 그렇게만 해 준다면 천하를 위해 그 이상 다행한 일이 어디있겠소. 어찌
한 자루의 칼을 아끼겠소."
조조와 진궁 여백사의 억울한 죽음
왕윤은 친히 술잔을 따라 조조에게 권한 뒤 가신에게 명하여 칠보검을 가져오
게 하여 조조에게 주었다. 조조가 칼을 품 안에 간직하자 백관들도 술잔을 따라
성공을 빌며 축배를 들었다. 조조는 왕윤의 잔을 받아 단숨에 들이킨 후 하늘을
우러러 굳은 맹세를 하며 작별을 고했다. 다음 날 조조는 왕윤에게 받은 칠보검
을 차고 여느 때와 같이 승상부에 등청하였다.
"승상께서는 어디 계시느냐?"
조조는 승상부의 시종에게 넌저시 물었다.
"저편 소각의 서원에서 쉬고 계십니다."
조조는 즉시 서원으로 가서 동탁에게 문안 인사를 올렸다. 동탁은 와상위에 비
스듬히 누워 쉬고 있고, 곁에는 여포가 칼을 찬 채 시립해 있었다.
"맹덕은 오늘 어째 이렇게 등청이 늦었는가?" 동탁은 조조의 얼굴을 보자 나무
라듯 물었다. 조조는 이날 점심이 되서야 등청했던 것이다.
"죄송스럽습니다. 제가 타고 다니는 말이 워낙 늙어서 달리지를 못해 늦었습니
다."
그러자 동탁은 고개를 돌려 여포를 불렀다.
"봉선이 네가 마구간에 가서 서량에서 진상한 말중에서 좋은 말 한 필을 골라
맹덕에게 주도록 하라."
여포가 동탁의 분부를 받고 밖으로 나갔다. 조조는 여포가 자리를 뜨자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이 역적놈이 오늘 내 손에 죽게 되었구나.'
조조는 바로 칼을 뽑아 찌르고 싶었으나 동탁의 무예와 힘을 아는지라 급한 마
음을 억누르며 기회를 엿보는데 곧 좋은 기회가 왔다. 몹시 비만한 동탁이 같은
자세로 오래 누워 있기가 거북한 듯 반대편 벽을 향해 돌아 눕는 것이 아닌가!
'지금이 절호의 기회다.'
조조는 재빨리 칠보검을 뽑아 들고 동탁에게 다가가려 했다. 그러자 검의 광채
가 동탁의 돌아누운 벽에 걸린 거울로 반사되어 아지랑이처럼 반짝 빛났다. 동
탁이 거울로 그걸 보고 깜짝 놀라 급히 몸을 돌리며 날카로운 눈으로 조조를 쏘
아 보며 물었다.
"맹덕, 지금 무얼 하는가?"
그때 소각 밖에서 여포가 말을 끌고 들어오는 기척이 났다. 그 자리에 여포까지
나타난다면 이미 때가 늦어버린 셈이었다. 실로 안타까운 순간이었다. 조조는 칼
을 칼집에 넣을 겨를도 없이 엉겁결에 무릎을 꿇었다. 내심 크게 당황했으나 마
음을 가다듬고 태연한 얼굴로 칼을 동탁에게 바쳐 올리며 말했다.
"제가 며칠 전 드물게 보는 명검을 한 자루 그했습니다. 승상께서는 항상 소인을
아껴 주시어 작은 정성이오나 이 검을 바치오니 받아주시기 바랍니다."
참으로 조조다운 눈부신 기지가 아닐 수 없었다.
"음-."
동탁이 칼을 들어 들여다보고 있는데 여포가 들어왔다. 칼은 길이가 한 자가 넘
었다. 칼자루에는 일곱 가지 보석으로 장식하여 눈이 부셨다. 칼날도 심히 날카
로운 것이 보기 드문 보도임에 틀림없었다.
"과연 명검이군. 봉선, 잘 보관해 두어라."
동탁은 조조를 데리고 말을 매어 둔 곳으로 갔다.
"정말 훌륭한 말입니다. 승상의 두터우신 은혜 결초보은하겠습니다."
조조는 동탁에게 감사의 뜻을 표한 뒤 다시 천연덕스럽게 청했다.
"상국께서 친히 보시는 앞에서 시험삼아 한번 타 보았으면 합니다."
"그렇게 하게."
조조가 자기가 준 말에 흡족해 하자 동탁도 기뻐하며 말고삐에 안장을 얹어 주
게 했다. 말 등에 훌쩍 오른 조조는 동탁이 보는 앞에서 천천히 말을 몰아 승상
부 밖으로 나왔다. 그러나 승상부 밖으로 나온 조조는 갑자기 말 등에 채찍을
가하여 나는 듯이 동남쪽으로 달아났다. 조조가 말을 몰아 나간 지 한 식경이
지나도 돌아오지 않자 동탁은 이상하게 생각하며 중얼거렸다.
"시험삼아 타본다는 조조가 아직도 돌아오지않으니, 대체 어디까지 갔단 말이
냐?"
이때 여포가 입을 열었다.
"승상, 조조가 아무래도 수상쩍습니다. 소생이 말을 끌고 돌아오면서보니 검을
헌상할 때의 태도에 아무래도 이상한 구석이 있었습니다. 칼을 헌상하는 자세가
아니었습니다. 소생이 말을 끌고 들어오니 갑자기 무릎을 꿇는 듯 했습니다."
"하긴, 좀 이상한 데가 있다고 여겼다."
그때 동탁의 모사 이유가 들어왔다. 이유는 동탁으로부터 조금 전에 있었던 일
을 소상히 전해 들었다. 이유는 조금 생각해 보는 듯하더니 천천히 입을 열었다.
"불찰이었습니다. 표범을 우리 밖으로 내놓은 격입니다. 그는 처자 권속을 이미
낙향시키고 홀로 와 있는 처지입니다. 상국의 목숨을 노렸음이 분명합니다."
"이 괘씸한 놈. 이유, 어찌해야 좋겠는가?"
"한시 바삐 그의 집에 사람을 보내 보십시오. 다른 마음이 없다면 부름에 응하여
달려오겠지만 그렇지 않다면 부름에 응하지 않을 것입니다. 아마 그는 집으로
가지 않았을 것이라 여겨집니다만...."
동탁은 급히 군졸 네 명을 조조의 집으로 보냈다. 얼마 되지 않아 군졸들이 돌
아왔다.
"조조는 자기 처소로 돌아오지 않았다고 합니다. 동문으로 나갔다기에 수문장에
게도 물어 보았습니다. 그랬더니 승상의 급명을 받들어 나간다고 하기에 문을
열어 주었다고 합니다."
"내가 속았구나. 잔재간이 있어 보여 그토록 어여삐 여겼거늘, 은혜를 배신으로
보답하다니 찢어 죽여도 속이 풀리지 않겠다. 그의 얼굴 생김생김이며 복장 등
을 자세히 그린 화상을 방방곡곡에 배포하라. 그리고 방문을 붙여 조조를 사로
잡는 자는 천금의 상에 만호후에 봉하고 그 목을 벤 자에게는 천금의 상을 내린
다고 덧붙여라."
동탁의 말이 끝나기를 기다려 이유가 다시 입을 열었다.
"이번 일은 생각건대 조조 한 사람만의 소행이 아닐 것입니다. 공모한 일당이 있
을 것으로 여겨집니다."
"사실이 그렇다면 그놈들은 그냥 놔둘 수가 없다. 조조를 추격하는 한편 낙양의
공모자들을 이 잡듯이 뒤져 붙잡아 고문하라."
이유는 즉시 포수청 관리들을 소집하여 동탁의 명을 엄중히 지시했다. 낙양을
뒤로한 채 밤낮을 가리지 않고 준마에 채찍을 가한 조조가 초군의 중모현에 이
르렀을 때였다. 조조를 잡으라는 동탁의 명이 벌써 이곳까지 당도한 줄을 모르
고 한달음에 관을 빠져나가려던 조조는 관문을 지키는 군사에게 제대로 손한번
써보지 못한 채 어이없게도 사로잡혔다. 관문의 군사들은 조조를 묶어 현령에게
로 끌고 갔다. 조조는 현령에게 끌려가자 거짓말로 꾸며댔다.
"소인은 천하를 떠돌아 다니는 장사꾼으로 성은 황보라 합니다. 어찌하여 저를
사로잡고 결박짓는지 까닭을 알 수 없습니다."
그러자 현령은 조조를 유심히 살피다가 말했다.
"이 자는 조조가 틀림없다. 나는 지난날 낙양에서 벼슬자리를 구하고자 머물렀을
때에 이 자의 얼굴을 본 적이 있다. 어찌 나를 속이려 드느냐? 사로잡은 이 자
를 동승상께 바치면 상을 내리실 것이다. 너희들에게도 상금을 나누어 줄 테니
오늘 밤은 술과 음식을 마음껏 먹도록 하여라."
군사들은 조조를 함거에 가둔 후, 그날 밤 술항아리를 열어둔 채 술을 마셔댔다.
해가 넘어가고 어두워지자 군사들은 관문을 닫아걸고 모두 숙소로 돌아갔다. 조
조는 현령이 자신의 얼굴을 알아보자 체념하고 있었다. 큰 뜻을 품은 지 몇 해
이던가. 그 뜻을 이루지도 못하고 이제 동탁의 손에 참형을 당하고 마는 것인가.
그는 함거에 기대 앉아 밤 하늘에 무수히 빛나고 있는 별들을 바라보며 탄식했
다. 야반이 거의 되어갈 즈음이었다. 누구인지는 알 수는 없으나 조조가 갇힌 함
거로 다가오는 발자국 소리가 들렸다. 조조가 고개를 들어보니 낮에 자신을 한
눈에 알아본 바로 그 현령이었다. 현령이 조조에게 다가와 물었다.
"그대는 동상국의 총애를 받아 중용되었다고 들었는데 어찌하여 스스로 화를 자
초했느냐?"
현령의 말에 조조는 소리내어 웃으며 말했다.
"제비나 참새 따위가 어찌 봉황의 뜻을 알겠나. 너는 이미 나를 사로잡지 않았는
가. 어서 동탁에게 끌고가 상금이나 받으라."
"조 공, 나를 너무 가벼이 보지 마시오. 나 역시 하늘에 뻗치는 큰 뜻을 품고 있
으나 천하를 걱정하며 뜻을 나눌 동지를 얻지 못했음을 뿐이외다. 이제까지 섬
길 만한 주인을 못 만나 허송 세월하는 것이 한탄스러울 따름이오."
조조는 행여 현령이 꾸며서 하는 말은 아닐까 하고 어둠속에서나마 그의 안색을
보니 현령의 태도는 사뭇 진지해 보였다. 그제서야 조조는 앉음새를 고쳐 앉으
며 정중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귀공이 그런 뜻을 품고 있는 줄은 몰랐소. 나도 마음 속에 품고 있는 뜻을 털어
놓겠소. 내가 동탁의 총애를 받고 있었던 것은 사실이오. 그러나 나의 조상들은
대를 이어 한실의 녹을 먹고 살아왔소. 조상의 피를 이어받은 내가 어찌 근본이
비천하고 포악한 도적인 동탁에게 허리를 굽히고 있었겠소. 내가 몸을 굽혀 동
탁을 받든 것은 오로지 기회를 잡아 동적을 죽여, 위로는 나라를 위하고, 아래로
는 조상의 가르침에 따르려 함이었소. 그러나 나에겐 아직 천운이 없음인지 이
렇게 사로잡히는 몸이 되었으니 이제와서 한탄한들 무엇하겠소."
현령이 그 말을 듣더니 조조에게 물었다.
"만약 조공께서 이곳을 벗어나면 어디로 갈 작정이었소?"
"고향인 초군으로 돌아가 천하의 제후들을 모으려던 참이었소. 그들과 힘을 모아
군사를 일으켜 천하의 역적 동탁을 주살할 계획이었소."
그러자 현령은 손수 함거의 자물쇠를 열고 조조의 결박을 풀어 준 후 상좌에 앉
게 하고 넙죽 절을 올렸다.
"공이야말로 진정한 충의지사이시오. 오늘 이 자리에서 공과 같은 지사를 뵙게
되어 참으로 기쁘오."
"저의 성은 진이며, 이름은 궁, 자를 공대라고 합니다. 조 공의 충의에 감복하여
따르고자 하니 부디 물리치지 마십시오."
조조는 사지에서 벗어났을 뿐만 아니라 뜻하지 않은 곳에서 동지를 얻으니 기쁨
을 감출 길이 없었다. 그날 밤 진궁은 약간의 노자를 챙긴 후 사람들이 알아볼
수 없도록 옷을 바꿔입고 각기 칼 한자루씩을 등에 진채 조조와 함께 나는 듯이
말을 몰았다. 밤낮으로 쉬지 않고 달린 두 사람은 사흘째 되는 날 해질 무렵쯤
성고라는 고을로 들어섰다.
'마을이 보이는구나. 여기가 대체 어디일까?'
진궁이 말고삐를 늦추며 혼자말처럼 중얼거렸다. 그거자 조조가 채찍으로 숲을
기리키며 말했다.
"여긴 성고라는 곳이오. 이 마을에 성은 여, 이름은 백사라는 분이 계시는데 선
친과는 형제처럼 가깝게 지내온 분이오. 오늘 밤은 그 댁으로 가 집안 소식도
들을 겸 묵도록 합시다.
"그것 참 잘됐군요."
진궁이 찬성하자 조조는 여백사의 집을 찾았다. 주인 여백사는 뜻밖의 손님에
놀라면서 두 사람을 반갑게 맞아들였다.
"조정에서 마을마다 널리 파발을 보내 너를 잡아들이려 한다는 얘기를 듣고 있
다. 너의 부친께서는 진류땅으로 이미 몸을 피해 가셨다만 너는 용케 이곳으로
왔구나."
"여기 함께 오신 진 현령이 아니었다면 이 몸은 이미 동탁에게 끌려 목이 달아
났을 것입니다."
조조는 여백사에게 그간의 사정을 자세히 전했다. 조조의 얘기를 듣고 난 여백
사는 진궁에게 진정으로 고마움을 표하기위해 무릎을 꿇고 절을 하며 치하했다.
"만일 진 현령께서 돕지 않았다면 조조 일가일문은 멸문지화를 면치 못했을 것
입니다. 누추하나마 오늘 밤을 여기서 편안히 묵으십시오."
여백사는 조조와 진궁을 방으로 들여 쉬게 한 후 안채로 들어갔다가 한참만에
나오더니
"마침 집안에 좋은 술이 없네. 내 서촌으로 가서, 좋은 술을 사올 테니 잠시만
기다리게."
하고 말을 마치자 여백사는 나귀를 타고 총총히 집을 나갔다. 조조와 진궁은 여
장을 풀고 쉬고 있었다. 그러나 술을 사러간 주인은 한참을 기다려도 돌아오는
기척이 없었다. 숨가쁘게 쫓겨다니던 몸인지라 조조는 여백사가 좀처럼 돌아오
지 않자 은근히 신경이 곤두서졌다. 진궁도 걱정이 되는지 말 없이 문 밖으로
시선을 돌리고 있었다. 조조는 초조해지기 시작하였다. 시간이 흘러 초경쯤이 되
었을까.... 어디선가 이상한 소리가 들려 왔다. 귀를 기울이자 써억 썩, 집 뒤에서
숫돌에 칼 가는 소리가 들려왔다.
'음, 저건 칼을 가는 소리가 아닌가. 술을 사러 간다는 핑계를 대고 관가에 밀고
하여 상을 받으려는 속셈이 아닐까?'
조조는 눈을 번뜩였다. 그리고 방문을 반쯤 연 뒤 귀를 기울이며 가만히 속삭였
다.
"진 공, 여백사는 우리 아버지와 아무리 형제처럼 지낸다 하나 핏줄이 닿은 터는
아니오. 이토록 늦게까지 돌아오지 않는 것이 이상하고 떠날 때도 수상한 점이
있었소. 내가 몰래 알아보고 오겠소."
진궁 역시 긴장한 낯빛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조조는 살며시 뒤뜰 쪽으로 가 몸
을 숨기고 귀를 기울였다.
"죽이자면 묶는 편이 좋겠지요?"
문득 낮은 목소리로 주고받는 말소리가 들려 왔다.
"놓치지 않으려면 묶어야지."
다른 목소리가 묻는 말에 대답하는 듯이 들렸다.
'오냐. 우리들을 이 방에 가두어 두고 해치려는 계획이구나. 그렇다면 우리가 선
수를 쓰자.'
조조는 진궁에게 사태의 위급함을 알렸다. 진궁이 낯빛이 변한 채 물었다.
"어떻게 하는 것이 좋겠습니까?"
조조는 칼자루를 움켜잡으며 말했다.
"우리가 먼저 손을 쓰지 않으면 목숨이 위험하오."
진궁이 고개를 끄덕였다. 두 사람은 칼을 빼들고 갑자기 방에서 뛰쳐 나갔다. 놀
라는 가족과 하인들을 닥치는 대로 치니, 그들은 말 한 마디 할 틈도 없이 죽어
갔다. 조조는 여백사의 아내와 두 딸들까지도 베어 죽였다. 모두 여덟 명이나 순
식간에 참살당한 것이었다. 눈 깜짝할 사이에 일어난 일이었다. 조조는 또 숨어
있는 사람이 없나 하여 부엌을 들여다 보았다. 그런데 그곳에는 돼지 한 마리가
묶여 있는 것이 아닌가! 손님 접대를 하기 위함이었다.
"아뿔사!"
조조는 묶인 채 버둥거리고 있는 돼지를 보며 탄식했다. 돼지를 잡으려고 칼을
갈고 있던 사람을 의심한 나머지 모두 죽여 버린 것이었다.
"의심이 지나쳐 우리를 대접하려던 사람을 베었구려. 이 일을 어찌하면 좋겠소."
진궁은 기가 막혔다. 공연히 죄 없는 사람을 여덟 명씩이나 죽여 버렸으니 마음
이 천근처럼 무겁고 괴로웠다. 조조도 어이가 없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지금
후회해 본들 대책이 있을 리 없었다.
"이미 엎질러진 물이오. 이곳에서 더 이상 지체할 수 없으니 빨리 길을 떠납시
다."
두 사람은 서둘러 말을 타고 여백사의 집을 떠났다. 그들이 말을 달려 두어 마
장쯤 갔을 때였다. 술을 사러갔던 여백사가 나귀를 타고 이쪽으로 다가오고 있
는 것이 보였다. 나귀 안장 양쪽으로 술단지 두 개가 얹혀 있고, 손에는 과일과
채소가 들려 있었다. 여백사는 두 사람을 보자 깜짝 놀라며 물었다.
"아니, 조카와 진 현령이 아닌가. 이 밤중에 무슨 일로 그리 급히 떠나려 하는
가?"
조조는 내심 당황했으나 시치미를 뚝 떼고 대답했다.
"쫓기는 몸이라 오래 머물면 폐를 끼칠까 둘렵습니다."
"가족들에게 돼지를 잡으라 일러놓았고, 또 이렇게 좋은 술과 안주까지 구해오지
않았는가! 하룻밤도 묵어가지 않겠다니 말도 안 되네. 자어서 내 집으로 가세."
"그럼 저기 잠깐 볼 일을 보고 돌아오겠습니다."
"오, 그런가? 꼭 오도록 하게. 기다리겠네."
조조는 이렇게 얼버무리고 여백사와 헤어졌다. 얼마쯤 가다 말고 조조는 말을
세우더니 저만치 가는 여백사를 향해 말을 몰았다. 조조가 다시 말머리를 돌려
오자 여백사는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보았다. 조조가 채찍으로 여백사의 뒤쪽을
가리키며 말했다.
"저기 오는 사람이 누굽니까?"
조조의 말에 여백사는 무심코 뒤를 돌아보았다. 그때였다. 조조는 재빨리 칼을
뽑아 여백사를 내리쳤다. 여백사는 비명소리도 내지 못한 채 말 등에서 굴러 떨
어졌다. 이 광경을 멀찍이 바라보던 진궁이 놀라 소리쳤다.
"조 공, 아니 이게 무슨 짓이오? 조금 전 엉뚱한 오해로 죄 없는 사람을 죽이고
이제 또 여백사마저 해치다니...."
"생각해 보시오. 여백사가 돌아가 가족들이 몰살을 당한 것을 본다면 아무리 착
한 사람이라도 원한을 품지 않을 수 없을 것이오. 그렇게 되면 틀림없이 사람을
풀어 우리를 뒤쫓을 것이오."
"그러나 죄 없는 사람마저 죽이는 것은 의에도 어긋나는 일이 아니오."
진궁이 아직도 조조를 못마땅히 여겨 꾸짖었다. 그러나 조조는 말에 채찍을 가
하며 짧게 대답했다.
"차라리 내가 저버릴지언정, 세상 사람들이 나를 버리게 할 수는 없소."
결코 남에게 배반당하지 않겠다는 조조의 차가운 대답에 진궁은 할 말을 잃고
말았다. 조조가 내뱉은 이 말은 그가 피도 눈물도 없는 비정한 사람이란 말을
듣게 되는 원인의 하나가 된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매사에 투철한 그의 정
신세계, 철두철미한 그의 본심을 그대로 나타낸 말이기도 하다. 그 당시의 시대
상황은 권모술수와 비정함이 불가결한 전국시대였다. 그 난세는 항상 물고 뜯는
투쟁의 연속이었으며 서로 속고 속이며, 교만과 시기, 비정이 횡행하던 시대였
다. 그런 시대의 정치세계에서는 분명 배신을 할지언정 자신이 배신당해서는 안
되기 때문이었다. 한 번 배신을 당하면 목숨까지도 위태롭기 때문에 어쩌면 어
정쩡한 인도주의가 최선이 아닐 수도 있는 터였다.
'무슨 일이든 할 바에는 철저히 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것이 조조가 보여 준 의식세계의 본령이었던가. 진궁은 아무리 대의를 품고
있을지언정 그처럼 인도에 어긋나는 짓을 서슴지 않고 행하는 조조의 냉혹함을
보자 크게 당황하였다.
'이 사람은 천하 만민의 고통을 구원하려는 사람이 아니라, 오히려 천하를 빼앗
으려는 야망에 불타는 사람이었구나!'
진궁은 목숨을 걸고 그와 동반자가 된 것이 커다란 실수였음을 뼈저리게 느꼈
다. 그러나 이미 내친 걸음이 되고 말았다. 벼슬과 처자까지 버리고 가시밭길을
각와하고 함께 떠난 길이 아니었던가. 한참 말을 달려가니 달빛 아래 주막집이
보였다. 두 사람은 그 주막집에서 쉬어 가기로 하고 말에서 내렸다. 저녁을 먹은
뒤 말도 배불리 먹이자 조조는 이미 코를 골며 깊은 잠에 빠져 있었다. 진궁은
잠이 든 조조를 바라보며 심한 번뇌에 싸였다. 순식간에 죄 없는 사람 아홉 명
을 베고도 태연히 자고 있는 조조를 보며 심한 자책감에 빠져들었다. 조조는 그
가 생각하던 참다운 충신은 아니었다. 천하를 얻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이리와 같은 야심가나 간웅이 아닌가. 진궁은 그 또한 동탁과 같은 폭군이
될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지금은 내가 조조를 찔러 죽일 수도 있다. 만일 살려 두면 후일 반드시 천하에
재앙을 주는 간악한 자가 될 것이다. 하늘을 대신하여 죽여야만 한다.'
진궁은 칼자루에 손을 댔다. 죽음이 진궁의 칼자루에 달려 있는 줄도 모르는 조
조는 여전히 코를 골고 잠들어 있었다. 그러나 진궁은 잠시 망설였다.
'내가 나라를 구하겠다는 일념으로 조조를 따르며 짧은 시간이나마 주인으로 섬
기려고도 했는데 이 자를 죽이면 그것 또한 불의를 저지르는 일이다. 거기다가
지금과 같은 난세에 이러한 간웅을 세상에 나오게 만든 것은 어쩌면 하늘의 뜻
인지도 모른다. 차라리 내가 이 자 곁을 떠나자.'
진궁은 다시 마음을 돌이켜 칼을 칼집에 다시 넣고 동군을 향해 말을 몰았다.
조조가 잠에서 깨어나보니 진궁이 보이지 않았다.
'진궁은 내가 여백사를 죽이는 것을 보고 의롭지 못하다고 여겨 날 떠난 게로구
나. 하하.... 그러나 언젠가는 나의 뜻을 알게 될 날이 있을 것을....'
조조는 여기서 더 이상 머뭇거리다가는 위험한 지경에 빠질지도 모를 일이라고
생각하고 고향 진류 땅을 향해 힘껏 말에 채찍을 가했다. 밤낮을 가리지 않고
말을 달린 조조는 며칠 후 고향인 하남 진류땅에 당도했다. 조조는 부친을 만나
자, 지금까지의 일을 소상히 고한 후 가슴에 품은 뜻을 밝혔다.
"기울어져 가는 한실을 일으키고 역적 동탁을 몰아 내기 위해 의로운 깃발을 올
리고자 의병을 모으려고 하니 아버님이 저를 도와 주셔야 하겠습니다."
부친 조숭은 근심스런 얼굴로 잠시 생각에 잠겨 있다 입을 열었다.
"너의 뜻은 가상하다. 그러나 우리집 가재를 다팔아도 군사 몇 사람조차 거늘리
지 못할 처지가 아니냐? 군비가 적으면 일을 이루기 어려운데 어찌하면 좋겠느
냐?"
"그럼 아버님께서 사람을 소개해 주십시오. 우리 가문이 지금은 재산이 적으나
멀리는 하우의 혈통을 이었고, 한실의 정승 조참의 후손으로 세상이 다아는 명
문 거족이 아닙니까? 평소 알고 지내시는 부호들에게 이야기하면 모금은 의외로
쉽게 될지도 모르지 않습니까?"
"그러면 효렴 위홍에게 한번 의논해 보기로 하자. 그는 이 하남 땅에서 둘째가라
면 서러워할 만큼 거부이나 재물보다 의를 중히 여기고 인품 또한 중후한 사람
이다. 너의 뜻이 대의를 받드니 한번 의논해 봄직하다."
조조는 곧 술과 음식을 차리게 하여 위홍을 초청했다. 위홍도 이미 조조의 이름
을 널리 듣고 있었던 터라 초청에 순순히 응했다. 조조는 위홍을 상좌에 앉히고
배례한 후 입을 열었다.
"한 나라의 황실이 기울어진 틈을 타 동탁이 권세를 휘어잡고 있습니다. 위로는
임금과 아래로는 백성들을 속이며 핍박하니 그를 저주하지 않는 이가 없습니다.
이 조가 다시 국권을 바로 세우기 위해 일어나려 하나 아직 힘이 미약합니다.
그리하여 체면을 무릅쓰고 대의를 중히 여기시는 공께 도움을 청하고자 합니다.
부디 물리치지 말아 주십시오."
만약, 청을 거절하면 죽여 버릴 결심으로 올린 자못 정중한 부탁이었다. 조용하
지만 무게 있는 말소리에 귀를 기울이던 위홍이 입을 열었다.
"그대의 충의가 가상스럽소. 나 역시 어지러운 천하를 한탄한 지 오래이나 아직
뜻을 함께할 영웅을 만나지 못했던 터요. 이제 맹덕께서 뜻을 같이 하자 하니
힘닿는 데까지 돕겠소."
조조는 위홍이 흔쾌히 승낙하자 몹시 기뻤다. 조조는 위홍으로부터 크게 힘을
얻게 되자 바로 의병을 모집하기 시작했다. 그는 먼저 의로운 뜻을 가진 사람들
의 궐기를 촉구하는 거짓 조서를 만들어 각 고을마다 띄웠다. 빠른 시일 안에
많은 의병을 모으고 천하에 널리 민심의 호응을 얻을 수 있다면 거짓 조서도 서
슴지 않았다. 또한 기장이 길고 폭이 좁은 백기에다 '충의'라고 쓴 깃발을 세우
고 의병을 모집했다. 지금은 지방의 토호로 낙향해 있지만 원래 조씨 집안은 명
문이 아니던가. 또한 조조의 뛰어난 용맹과 지모는 이곳 하남 땅에서 소문이 자
자하던 터였다.
'조정의 밀명을 받고 조조가 내려왔다.'
이런 소문이 퍼지자 인근 마을 장정들과 불우한 향사들이 꾸역꾸역 몰려들었다.
조조는 그가 아는 뜻있는 동지들에게 사람을 보내 함께 의거를 일으킬 때가 왔
다고 전하게 했다. 조조에게 맨 먼저 달려온 사람은 양평 위국사람 악진이었다.
자를 문겸이라 쓰는데 때를 기다리고 있던 차에 조조의 부름을 받고 1천여명의
인마를 이끌고 온 것이었다. 이어 산양의 거록사람 이전이 달려왔다. 조조는 악
진을 사마로 삼았고, 이전을 장전리로 삼아 서무를 보게 했다. 뒤이어 조조와는
남남이 아닌 패국초군의 하후돈 하후연 형제가 군사 3천 명을 이끌고 왔다. 하
후돈 형제는 조조 집안의 양자였던 터라 피붙이와 다름없었다. 조조는 재회의
기쁨을 나누며 그들을 반갑게 맞았다. 하후돈은 어려서부터 창을 쓰는 솜씨가
뛰어났다. 그의 나이 열넷이 되었을 때부터 스승을 따라 무술을 익혔는데, 어느
날 어떤 사람이 스승을 모욕하자 의분을 참지 못해 그 사람을 죽이고 몸을 피해
외방으로 달아났다가 조조가 의병을 모집한다는 말을 듣고 그의 종제 하후연과
함께 군사를 이끌고 달려온 것이었다. 조조와는 친가의 사촌뻘이 되는 조인.조홍
이 각기 군사 1천여명을 이끌고 왔다. 조인의 자는 자효, 조홍의 자는 자렴이었
는데 무술이 뛰어난 장수였다. 이들 외에 매일같이 군적부에 이름을 기록하는
자가 헤아릴 수 없을 지경이었다. 서주의 자사 도겸, 서량의 태수 마등, 북평의
태수 공손찬, 북해의 태수 공융등의 거물급 인물들이 각기 몇천, 몇만 명의 군사
를 이끌고 달려왔다. 조조는 이렇게 모여든 군사의 무기며 양식을 위홍으로부터
공급되는 군자금으로 충당하고 있었다.
"저와 같이 군자금이 풍부한 것을 보니 그의 격문은 알맹이도 없는 엄포가 아닌
것 같다. 정말 조정의 밀명을 받았는지 모른다."
형세를 관망하며 태도를 정하지 못하던 사람들까지도 대규모의 진용을 보고 앞
을 다투어 의병의 깃발 아래 모였다. 위홍도 재산을 아낌없이 바쳤다. 뿐만 아니
라 조조의 의군이 이토록 어마어마한 진용을 이루자 군비를 조달해 주겠다는 부
호들이 자진하여 나타났다. 이로 인해 조조의 위세는 더욱 커져만 갔다. 조조는
하후돈을 비장으로, 하후연을 별무사마로, 조인.조홍을 각각 사마로 삼아 군사의
조련에 힘쓰게 했다. 한편 동탁의 횡포에 분개하여 낙양을 떠났던 발해태수 원
소에게도 조조의 조서가 전달되었다.
"조조가 군사를 일으킨다는 조서에 대해 어떻게 대답해야 좋겠는가?"
원소는 심복을 모아놓고 대책 회의를 열었다. 그의 휘하에는 백전노장의 용맹을
자랑하는 나이 맣은 용장과 기백이 넘치는 젊은 장수들이 조화를 이루고 있었
다. 전풍.저수.허수.안량을 비롯 심배.곽도.문추 등 이름난 장수와 인재들이 그들
이었다. 안량이 자리에서 일어나 큰 소리로 조서를 읽기 시작했다.
조조 등은 삼가 대의를 받들어 천하에 고하고저 한다. 동탁은 하늘을 속이고
땅을 어둡게 하여 임금을 시역하고 나라를 위태롭게 했다. 그는 궁금을 더럽히
고 어지럽히며 사납고 어질지 못한 죄악은 날이 갈수록 쌓이기만 한다. 지금 천
자의 밀조를 받들어 의병을 크게 일으켜 천하를 소탕하고 모든 흉적을 무찌르려
한다. 원컨대 인의 군을 이끌고 충렬로 맹세한 진영에 이르러 위로는 황실을 아
래로는 만백성을 구제하라. 이 밀조를 받는 즉시 지체없이 봉행하라.
안량이 조서를 읽고 나자 심복 장수들이 입을 모았다.
"무엇을 망설이십니까? 마땅히 조조와 힘을 합칠 때입니다. 이날이 오기를 기다
리지 않았습니까?"
원소가 생각에 잠기다 말했다.
"조조가 밀조를 받았다니, 그게 좀 이상하지 않은가?"
"밀조를 받고 안 받고는 별 문제가 될 것이 없다고 봅니다. 대의를 좇아 일어나
는 것이 우리의 뜻이 아니던가요?"
"그 말이 지당하다."
원소는 마침내 결심을 하였다. 원소는 출진을 결정하자, 명문 출신인데 이곳에서
쌓았던 인망이 커 어렵지 않게 3만여 병력을 수습할 수 있었다. 말을 달려 진류
땅에 도착한 원소는 의병의 진용에 놀라움을 금할 수 없었다. 원소는 군박에 도
착순으로 적혀 있는 명단을 죽 훑어 보았다.
제 1진 후장군 남양 태수 원술, 제 2진 기주자사 한복, 제3진 예주 자사 공주,
제 4진 연주 자사 공주, 제 5진 하내 태수 왕광, 제 6진 진류 태수 장막, 제 7진
동군 태수 교모, 제 8진 산양 태수 원유, 제 9진, 제북상 포신, 제10진 북해 태수
공융, 제 11진 광릉 태수 장초, 제 12진 서주 자사 도겸, 제 13진 서량 태수 마
등, 제 14진 북평 태수 공손찬, 제 15진 상당 태수 장양, 제 16진 오정후 장사
태수 손견, 제 17진 기향후 발해 태수 원소
그야말로 천하의 명장, 호걸들이 구름처럼 모여 있었다. 원소군은 도착순이라 하
여 제 17진에 배치되었다. 원소는 새삼 급류와 같은 시대의 흐름에 놀라고 있었
다. 제 1진에서 17진까지의 장수는 모두 하나같이 1만 이상의 군사를 거느리고
있었다 이들이 거느린 구사 중에도 또 어떤 영웅과 인물이 숨어 있는지 알 수
없는 일이었다. 그보다 조금 앞서 14진의 대장 북평태수 공손찬이 조조의 조서
를 받고 군사 1만 5천을 거느려 평원현에 당도했을 때였다.
"잠시 기다려 주시오."
길가의 뽕나무 숲 속에서 황색 깃발을 펄럭이며 그를 맞는 한 떼의 군마가 있었
다. 공손찬이 맨 앞의 장수를 자세히 보니 평원현령 유비였다.
"아니 현덕이 아닌가? 어찌 알고 예까지 왔는가?"
공손찬이 유비를 반기며 말했다.
"아우는 낙양에서 형의 덕택으로 평원현령이 된 이래 지금까지 이곳을 지키고
있었습니다. 마침 형께서 동탁을 치기 위해 군사를 거느려 이곳을 지나신다기에
달려왔다. 잠깐 성 안에서 쉬어 가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공손찬과 일찍이 노식 스승의 동무이었을 뿐 아니라 평원현령이 된 것도 그가
힘써 준 덕택이었다. 또한 마필이며 군자에 이르기까지 공손찬의 도움을 적지
않게 받아온 터였다. 원래 평원성은 기름진 옥토였다. 유비는 이곳에서 현위에
소속된 갑사를 포함한 마을 의용군을 합쳐 병마 수천 명을 조련하고 있었다. 군
사의 조련은 관우와 장비가 맡았다. 관우는 마궁수요, 장비는 보궁수였다. 아직
하급 관리에 지나지 않는 보잘겻 없는 직위였으나 관우.장비는 유비와 한상에서
밥을 멈고, 한 방에서 잠을 자며 관직 따위는 염두에 두지도 않았다. 삼형제는
이곳 평원의 땅이 기름지고 사람과 물산이 풍부해 군사를 기르는데 별 어려움
없는 점을 흡족히 여겼다. 또한 이곳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유일한 후원자
공손찬의 근거지인 북평이 있다는 것도 이들을 든든하게 해주었다. 어럴 즈음,
조조에게서 온 밀조를 받게 된 유비였다. 유비는 그 밀조를 받고 작은 군사나마
일으켜 천하를 위해 출진을 할 것을 서두르고 있던 중 이었다. 유비는 공손찬을
평원성으로 안내했다. 공손찬은 군사들을 성밖에 머물게 한 뒤 성 안으로 들어
갔다. 유비는 술자리를 베풀어 공손찬을 대접했다. 술자리에 앉아 오랜만에 쌓인
회포를 풀던 공손찬은 문득 유비 뒤에 시립해 있는 관우와 장비를 가리키며 물
었다.
"저 사람들은 누구인가?"
"이 사람들은 바로 제 의제 관우와 장비올시다."
유비는 두 아우를 공손찬에게 소개해 올렸다.
"현덕이 황건적을 토벌할 때 용맹을 떨쳤다는 바로 그 장수들인가?"
"예, 모두가 일기당천의 맹장들입니다."
"두 사람의 관직은 무엇인가?"
"예, 관우는 마궁수, 장비는 보궁수로 있습니다."
유비도 공손찬이 관우.장비의 관직을 묻자 잠시 얼굴이 어두워졌다.
"음-. 마궁수는 말을 타고 활을 쏘는 군관이요, 보궁수는 보병을 거느리고 활을
쏘는 군관이 아닌가? 기가 막히네 그려. 아우는 천하의 영웅들을 초야에 묻어
두고 있네. 지금 동탁을 치기 위해 천하의 제후들이 일어나고 있으니 나와 함께
가세. 비록 자네의 벼슬이 낮다 하나 그래도 한실의 종친이 아닌가. 어떤가, 그
하찮은 벼슬을 떨쳐버리고 나와 함께 역적 동탁을 쳐 한실을 구하지 않겠나?"
"형께서 그렇게 말씀하시니 감격스럽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역신 동탁을 치는 데
미력한 힘을 보태고 싶었습니다."
"그렇다면 더욱 고마운 일이네."
장비가 이때 이를 갈며 입을 열었다.
"거 보시오. 황건적을 칠 때 내가 동탁놈을 죽이려고 했더니 형님께선 왜 말렸
소. 그때 그놈을 죽여 없앴던들 오늘과 같은 일은 없었을 것 아닙니까."
관우가 그런 장비의 옷소매를 잡으며 조용히 타일렀다.
"장비, 그보다 병마를 급히 수습하여 떠날 채비를 서두르세."
다음 날 유비 일행은 그 동안 조련했던 군사를 이끌고 공손찬을 따라 조조의 의
군에 가담하게 되었다.
18제후들의 회맹 강동의 호랑이 손견
조조는 각처에서 몰려든 제후를 맞으며 진영을 배치하니 길게 줄을 이은 대열
은 3백리나 이어졌다. 전국에서 모여든 제후들은 18개국에 이르고 군사가 20만
이었다. 조조는 좋은 날을 잡아 단을 쌓고 소와 양을 잡아 제를 올렸다. 그리고
제후들을 청해 크게 잔치를 열어 진군할 계책을 구체적으로 의논했다.
"우리가 어떻게 낙양으로 쳐들어가면 좋겠소.?"
그러자 하내 태수 왕광이 먼저 나섰다.
"이제 대의를 받들어 진군할 때가 왔소. 그러나 군사들의 지휘자가 제각각 다르
니 힘을 합치기가 어렵소. 그러므로 우선 맹주를 세워 기강을 바로하고 그 명에
따라 일치단결하여 일사분란한 행동으로 진군해야만 단합된 힘을 이룰 수가 있
을 것이오."
"옳은 말씀이오."
제후들은 이구동성으로 찬동하였다.
"그럼 어느 분을 맹주로 세우시겠소?"
"...."
제후들은 잠시 서로 얼굴만 쳐다볼 뿐 선뜻 입을 열지 않았다. 오랜 침묵속에
조조가 나섰다.
"제가 여러분들을 이 자리에 모신 것도 그 때문입니다. 여기 원소 장군은 본디
명장의 후예에다 4대에 걸쳐 삼공을 지낸 가문입니다. 문중에는 사방에 훌륭한
관리들이 많을 뿐만 아니라 그 명망이나 가문으로 보아 우리들이 맹주로 받들어
도 조금도 모자람이 없을 듯하오."
조조가 말을 끝내자 원소가 입을 열었다.
"그렇지 않소이다. 여러 제후께서는 나보다 더 훌륭하시며 나느 그런 그릇이 되
지 못하오."
원소는 황급히 사양하였으나 모든 제후들이 재삼 간청하자 원소도 끝내 맹주가
되기를 수락했다. 다음 날 삼층으로 단을 쌓고 단의 주변 다섯 방향에 청,황,적,
백,흑으로 오색 깃발을 세우고, 단 위로는 백모, 황월을 세운 후 아래로는 병부
등을 벌여 놓은 뒤에 모든 제후들은 원소를 단 위에 오르도록 청했다. 원소는
의관을 정제한 후 칼을 차고 제후들이 늘어선 가운데 의연히 단상에 올라 엄숙
한 얼굴로 맹약의 글을 읽었다.
불행하게도 한나라 황실이 기강과 법통을 잃으니 그 틈을 기회로 삼아 역적
동탁이 지존까지 핍박하고 나라를 거스르니 그 화가 미치지 않은 곳이 없고 백
성을 학대한 지 이미 오래되었도다. 이에 원소 등은 나라가 망하는 것을 보고만
있을 수 없어 의군을 모아 함께 나라를 구하고자 하도다. 이제 우리들 동맹군은
한 마음 한 뜻으로 신하된 자의 절의를 지키되 결코 딴 뜻을 품지 않을 것이다.
이 맹세를 저버리는 자는 살아 남지 못할 것이며 그 자손 또한 끊어질지라. 황
천 후토와 조종의 밝으신 영이시여! 우리의 뜻을 굽어 살피소서!
원소가 비분강개한 어조로 맹세하는 글을 읽은 후 하늘을 우러러 배례하고 백
마의 피를 뿌려 맹세하니 여러 제후들이 감격의 눈물을 흘리며 외쳤다.
"이제 천하의 여명이 왔도다."
"머지않아 낙양의 역적을 이 땅위에서 쓸어내고 말리라!"
모든 제후들도 이같이 맹세하고 단에서 내려온 원소를 부축하여 장막 윗자리에
앉게 하고 벼슬과 나이에 따라 두줄로 앉았다.
"나는 원래 맹주가 될 그릇도 아니고 재주 또한 미약한 바이나 공들에 의해 맹
주로 추대되었소. 그러나 자리에 오른 이상 마땅히 맹주로서 해야 할 도리를 다
하는 것이 여러분들에 대한 보답이라고 생각하오. 앞으로 공이 있는 자는 상을
내릴 것이며 죄가 있는 자는 반드시 벌을 내리겠소. 나라에는 법이 있고 군에는
군율이 있으니 어기고 범하는 자는 용납하지 않을 것이오."
원소가 맹주로서 의젓하고 당당하게 제후들에게 내린 첫마디였다.
"맹주의 명대로 따르겠습니다."
모든 제후들이 맹주 원소의 말에 따라 한소리로 대답했다. 원소가 다시 입을 열
었다.
"아우 원술이 오늘부터 양초의 총관에 임명할 터인즉 원술은 항상 병참의 수송
과 보급을 때에 맞추어 늘 부족함이 없도록 하라."
"삼가 명을 받들겠습니다."
원술이 머리를 숙이며 영을 받들자 원소는 다시 말을 이었다.
"우리 군은 즉시 낙양으로 진군할 것이오. 제후들 중 선봉을 맡아 사수관의 관문
을 격파할 분이 있소?"
원소의 물음이 채 끝나기도 전이었다.
"원컨대 나를 선봉으로 보내 주십시오."
제후들 중에서 깃발을 들어 올리며 외치는 사람이 있었다. 장사 태수 손견이었
다. 이미 그 무용이 널리 알려진 손견이 나서자 원소는 기뻐하며 허락했다.
"문대(손견의 자)는 용맹스러우니 능히 선봉을 맡을 만하오.즉시 사수관을 격파
하도록 하시오."
대장군 원소로부터 명을 받은 손견이 본부 군마를 거느리고 사수관을 향하여 출
동하자 그곳을 지키고 있던 동탁 휘하의 부장은 이 사실을 급히 낙양의 승상부
로 알렸다. 그 급보를 받은 승상부는 이른 아침부터 술렁대고 있었다. 손견을 선
봉장으로 하는 18로 제후들의 20여 만 대군이 낙양으로 진군하고 있다는 급보는
동탁의 귀에도 전해졌다. 동탁은 권세를 욺켜쥔 뒤, 날마다 잔치를 열어 술을 마
시며 그 동안 세월 가는 줄 몰랐다. 이유로부터 원소와 조조 등 전국의 제후들
이 군사를 일으켜 낙양으로 밀고 들어온다는 급보를 전해 들은 동탁은 그때서야
남아 있던 취기가 싹 가시는 듯했다. 급히 이유에게 장수들을 불러모으게 했다.
휘하 장수들이 급한 전갈을 받고 궁에 들자 동탁이 반군에 대한 대책을 물었다.
그 자리에서 여포가 어깨를 펴며 말했다.
"아버님께서는 제가 있다는 것을 잊고 계십니까? 그까짓 조조나 원소 따위의 군
대는 제게는 한갓 허수아비일 따름입니다. 이럴 때 저를 쓰지 않으시고 언제 쓰
시렵니까? 역도에 가담한 제후들의 목을 모조리 베어 도성 문에 높이 매달겠습
니다."
양부 정원을 목베고 동탁에게 온 이래 내세울 만한 공도 없이 동탁의 총애만 받
으며 지내온 여포였다. 이때야말로 새로운 양부 앞에서 공을 세울 좋은 기회라
고 여긴 여포가 다른 장수들보다 더 열을 냈다. 여포의 말에 동탁은 크게 기뻐
하며 껄걸 웃었다.
"봉선, 내 어찌 너를 잊을 리 있겠는가. 봉선이 있기에 내가 베개를 높이고 편안
히 잠을 잘 수 있지 않았는가."
그때였다. 장수들 중에 한 사람이 나서며 우렁찬 목소리로 외치는 자가 있었다.
"온후께서는 잠깐만 기다려 주십시오. 그까짓 닭을 잡는데 어찌 소 잡는 칼을 쓰
겠습니까? 제가 가서 주머니 속의 물건을 꺼내듯 제후들의 목을 베어 오겠사오
니 온후께서는 잠깐 구경만 하십시오."
모든 사람들의 시선이 그에게로 집중되었다. 키가 9척이요, 호랑이 같은 우람한
어깨에다 이리의 허리, 표범의 머리에 원숭이의 팔을 지닌 장수였다. 관서 태생
으로 이름을 화웅이라 했다.
"오오, 화웅인가? 장한지고, 네가 먼저 사수관으로 내려가서 제후들을 응징하여
낙양을 편안케 하라."
동탁은 화웅의 의기를 보고 흔쾌히 승낙했다. 그의 벼슬을 효기교위로 높이고 5
만의 병력을 주어 사수관으로 출진토록 했다. 화웅은 이숙.호진.조잠을 부하 장
수로 삼고 위풍당당히 사수관을 향해 나갔다.
"낙양군이 내려온다!"
화웅의 군대가 의병을 치러 온다는 급보는 곧 원소.조조군에게도 날아들었다. 선
봉을 맡은 손견은 그 소식을 듣고 군사를 독려하여 만반의 태세를 갖추었다. 이
때 선봉인 손견군의 후진에는 제북 상인 포신이 진을 치고 있었다. 그는 지난날
후군교위로 원소와 왕윤에게 동탁을 죽이자고 나섰으나 두 사람의 호응이 없자
태산으로 몸을 숨겼었다. 그는 손견이 의병의 선봉장이 되자, 공을 빼앗기게 된
것을 못마땅히 여기고 있던 중 동탁군이 내려오고 있다는 보고를 접하고는, 은
밀히 아우인 포충을 불렀다.
"장사의 손견이 재빨리 선봉을 맡아 버렸다. 이대로 멍하니 구경만 하고 있다간
공은 그가 차지하고 우리는 뒷북만 치는 꼴이 되기 십상이다. 네게 군사 3천을
줄 터이니 사잇길로 먼저 가 사수관의 적을 기습해 먼저 공을 세우도록 하라."
"저 역시 형님과 같은 생각입니다."
"그럼, 어서 나아가라. 관내로 쳐들어가게 되면 불을 놓아라. 연기가 피어오르면
나도 군사를 내어 일거에 공격하겠다."
평탄한 길을 피해 험준한 산을 타고 내려가 기습하겠다는 계획으로 포충은 그날
밤중에 3천 명의 정예병을 이끌어 나아갔다. 그러나 이 사실은 적장 화웅이 배
치한 척후들에 의해 알려졌다. 이런 줄도 모르고 적진 깊숙이 들어간 포충은 매
복군에 의해 순식간에 포위되고 말았다. 화웅은 몸소 싸움터로 뛰어들어 포충을
한칼에 베어 죽이니, 이미 적에게 에워싸인 3천 명의 군살들도 화웅의 군에 의
해 몰살당하고 말았다. 화웅은 일진을 크게 이기고 포충의 목을 잘라 낙양으로
보내자 동탁으로부터 크게 기뻐하는 글과 보검 한 자루가 상으로 내려졌다. 손
견의 공을 가로채려던 포충은 그 목을 적에게 베임으로써 적의 사기만 크게 올
려 준 결과를 낳고 말았다. 한편 손견은 이 사실도 모른 채 정공법을 펴 곧장
사수관의 정면으로 밀고 들어갔다. 손견은 사수관으로 올 때 날랜 네 사람의 장
수를 앞세우고 왔다. 정보는 자를 덕모라 했는데 칠척사모를 잘 썼으며, 황개는
자가 공복으로 영릉사람인데 철채찍을 다루는 솜씨가 뛰어났다. 한당의 자는 의
공인에, 요서 영지 사람으로 큰 칼을 잘 썼으며, 조무는 오군 부춘 사람이며 자
는 태영으로 쌍칼을 잘 썼다. 손견은 번쩍이는 은빛 갑옷 차림으로 머리에는 붉
은 두건을 두른 후 은빛 투구를 쓰고 허리에 한 자루 고정도를 빗겨 찬 채 화려
한 안장을 한 말위에 앉아 있었다. 이러한 그의 자태는 보는 이로 하여금 위압
감을 느끼게 했다.
"역신을 돕는 필부야. 어찌 백기를 들고 항복을 청하지 않느냐? 나는 의군의 선
봉장 손견이다. 너희들의 어둡고 어리석은 눈에는 대세가 시시각각 바뀌어 가고
있음이 보이지도 않느냐?"
손견이 큰 소리로 외치는 것을 본 화웅은 껄껄 웃으며 응답했다.
"하하, 남방의 조무래기가 잠꼬대를 하는구나. 누구 저놈의 목을 베어 으뜸가는
공을 세울 자는 없느냐?"
그러자 부장 호진이 성큼 나섰다. 호진은 화웅으로부터 5천의 병사를 받아 즉시
관을 내려갔다. 이미 첫 싸움에서 포충의 목을 벤 터라 사기가 오른 화웅군이었
다. 호진이 군사를 이끌고 가자, 화웅은 마음이 놓이지 않았던지 자신이 직접 군
사 1만을 거느리고 뒤따랐다. 관 아래에서는 이미 격전이 벌어지고 있었다. 손견
이 창을 들고 말을 달렸다.
"거기 나타난 놈이 호진인가 보구나. 어서 덤벼라!"
호진 또한 큰 소리로 외치며 창을 들고 말을 몰아 덮치듯 다가왔다. 그때 손견
을 가까이서 호위하던 정보가 나섰다.
"우리 주군께서 몸소 대적하실 것도 없다. 이거나 받아라."
정보가 옆에서 힘껏 창을 던졌다. 창은 바람을 가르며 호진의 목을 꿰뚫었다. 호
진이 말에서 떨어지자 손견은 군사를 휘몰아쳐 들어갔다. 장수 호진을 잃은 군
사 5천은 극도의 혼란 속에 빠졌다.
"후퇴하라. 후퇴하라."
화웅은 일단 사수관의 관 안으로 군사를 물린 후 관의 문이란 문은 전부 닫아
버렸다. 뒤이어 손견의 군사가 관으로 덮쳐들자 문루에서 돌.철궁.불화살 등을
빗발치듯 퍼부었다. 제아무리 강동의 맹장이라곤 하나 어찌해 볼 도리가 없었다.
손견은 높고 견고한 관의 성벽을 쉽게 넘을 수 없음을 알자 신속히 병력을 수습
하여 군사를 물렸다. 양동이란 마을까지 물러난 손견은 날랜 군사를 시켜 원소
의 본진에 호진의 목을 보냈다. 손견이 군사를 물린 후 양 진영은 한동안 대치
상태가 지속되었다. 손견의 군사가 만만치 않음을 본 화웅이 관문을 굳게 닫고
좀처럼 나오지 않았다. 손견 또한 군사를 움직여 성을 공격할 때마다 성문 위에
서 퍼붓는 불화살에 번번이 군사만 잃으니 무턱대고 공격만 할 수도 없었다. 대
치 상태에서 하루 이틀, 시일을 끌게 되자 어느덧 가지고 온 군량미와 마초가
바닥이 났다. 손견은 원술에게 양초를 보급해 줄 것을 요청했다. 그런데 손견에
게 원한을 품고 있던 원술의 심복 중 한 사람이 원술에게 속닥거렸다.
"손견은 강동의 호랑이입니다. 그를 선봉으로 삼아 낙양을 함락시키고 동탁을 제
거한다 하더라도 그것은 이리를 쫓은 다음 호랑이를 맞아들이는 꼴이 될지도 모
릅니다. 그가 공을 세우려고 서둘러대고 있음을 보더라도 그의 검은 속셈을 짐
작할 수 있습니다. 군량이 바닥이 났다면 좋은 기회입니다. 이 기회를 기화로 군
량을 보급하지 말고, 그로 인해 그의 군사들이 사기가 저하되어 저절로 흩어지
길 기다려야 합니다.
"음-. 듣고 보니 그렇군."
원술 또한 손견이 선봉으로 공을 세우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동탁을 치기 위해
여러 주에서 제후들이 비록 한 뜻으로 모이기는 했지만 마음 속으론 제각각 딴
생각을 품고 서로 경쟁과 견제를 함께하기도 했다. 원술은 적당히 핑계를 대며
양초를 끝내 보내지 않았다. 원술이 양초를 보내 주지 않자 손견의 군사들은 며
칠이 안 가 끼니를 잇지 못하게 되었다. 끼니마저 거르게 되자 군사들은 사기가
떨어지고 불평과 불만이 쌓였다. 한편 화웅이 거느린 동탁군은 염탐꾼을 풀어
손견군의 동정을 살피도록 하였다. 어느 날, 밀정이 부장 이숙에게 보고했다.
"요즘 손견의 진영이 좀 수상한 듯 싶습니다. 병참부에서 밥짓는 연기가 오르지
않습니다. 하루 종일 지켜 보았는데 때가 되어도 연기를 볼 수 없었습니다."
이 말을 들은 이숙은 다음 날 다른 곳에 파견시켰던 염탐꾼 두 사람을 불러 자
세한 것을 알아봤다.
"요즘 손견군의 후방에는 평소와 다른 점이 없더냐. 그리고 적군의 양도는 어떤
상태인가?"
"바로 그 점을 말씀드리고 싶었습니다. 지난 달포 동안에 양차가 지나간 일이 없
었습니다."
이숙은 그들을 돌려 보낸 후 화웅에게 다가가 하나의 계책을 건의했다.
"손견을 사로잡을 시기가 온 것 같습니다. 제가 알아본 바에 의하면 무슨 까닭인
지 본진으로부터 병량 수송이 끊어진 지 달포나 되고 하루종일 밥짓는 연기가
오르지 않는다니 이는 필시 군량이 떨어진 징조입니다. 오늘 밤 저는 야음을 틈
타 한 떼의 군사를 이끌고 사잇길로 돌아가 적의 후방을 기습하겠습니다. 장군
께서는 제가 불빛으로 신호를 하면 영채 정면을 공격하십시오. 반드시 손견을
사로잡을 수 있을 것입니다."
화웅은 이숙의 계교에 따라 군사들을 배불리 먹인 다음 밤이 되자, 이숙이 먼저
한 무리의 기병을 이끌고 소리 없이 관문을 빠져 나갔다. 그날 밤은 달이 밝고
바람 또한 시원했다. 손견은 수목이 우거지 산간 사잇길에 있는 양동 마을에 본
진을 치고 있었다. 이숙은 숲으로 들어가 손견군의 후방으로 돌아가 돌연 북을
치고 함성을 지르며 기습을 했다.
"와아, 와아!"
이숙이 사방에 불화살을 쏘아대니 손견의 진영 여기저기에서 불길이 치솟기 시
작했다. 양동 쪽의 하늘만 바라보던 화웅은 손견의 영채 쪽에서 불길이 치솟자
사수관의 문을 활짝 열고 앞장 서 말을 달렸다. 전면엔 화웅이, 후방에는 이숙이
불을 지르며 일시에 짓쳐드니 미처 적의 공격에 대비치 못한 손견군은 큰 혼란
에 빠졌다. 손견은 급히 갑옷과 투구를 꿰입고 군사들을 독려했다.
"물러나지 말라. 죽기를 작정하고 싸워라!"
손견은 몰려오는 적을 맞아 정신 없이 싸웠다. 그러나 손견의 군사는 도무지 맥
을 추지 못했다. 후바으로부터 군량미의 수송이 끊긴 지 한 달이나 되어 군사들
은 날이 갈수록 불평이 거세졌고 군기도 문란해져 있던 터였다. 또한 사람이고
말이고 모두 굶주림에 지쳐 있었다. 제대로 싸울 생각도 못하고 허둥대며 달아
나기에 바빴다. 분하기 그지 없었으나 손견도 어찌 손을 쓸 방도가 없었다. 부하
장수 정보와 황개 등도 난전 속에서 뿔뿔히 흩어져 보이지 않았다. 손견은 처참
한 패전의 진지에서 말을 채찍질하여 도주하였다. 다만 조무만이 손견의 곁을
떠나지 않고 뒤따르고 있었다. 기세가 오른 화웅이 손견의 뒤를 따르며 외쳤다.
"손견은 도망가지 말고 게 섰거라!"
손견은 말을 달리며 얼른 화살을 손에 잡았다. 두 번이나 화살을 쏘았으나 모두
화웅이 뭄을 피했다. 다급해진 손견은 세 번째 화살을 시위에 먹이고 당겼으나
너무 세게 당겼는지 활이 두 동강 나며 뚝 부러졌다. 손견은 부러진 화살을 버
리고 말머리를 돌려 달아날 수밖에 없었다. 뒤따라오던 조무가 손견에게 말했다.
"주공! 투구를 벗으십시오. 주공의 주금 투구는 너무 붉어 눈에 띄기 쉽습니다.
적이 그 툭구를 목표삼아 추격할 것입니다. 제가 대신 쓰겠습니다. 손견은 조무
의 말대로 재빨리 그가 주는 투구를 썼다. 조무는 손견의 붉은 투구를 대신 쓰
고 서로 다른 길로 달아났다. 화웅의 군사들은 조무가 쓰고 가는 붉은 투구만을
뒤쫓았다. 손견은 이 틈을 타 추격하던 화웅의 군사들을 무사히 따돌릴 수 있었
다. 달아나던 조무는 쉴새없이 화살이 날아오자 위급함을 느꼈다. 조무가 말을
달리다 보니 한 군데 불에 탄 민가가 보였다. 조무는 다급한 김에 불에 타다 만
나무기둥에 손견의 투구를 걸어 놓고 가까운 숲으로 달아났다. 뒤쫓던 화웅의
군사들이 바라보니 으스름한 달빛 아래 손견이 붉은 투구를 쓰고 서 있는 것이
아닌가. 화웅의 군사들은 손견의 용맹이 두려워 선뜻 접근하지 못하고 멀찍이
서서 활만 쏘아댔다. 그러나 아무리 쏘고 쏘아도 손견이 아닌 붉은 투구는 달빛
을 받아 더욱 빛날 뿐 꼼짝하지 않았다. 화웅의 궁수들은 괴이하게 여겨 가까이
다가가 보고서야 자신들이 속았음을 알았다.
"이건 손견이 아니구나. 손견이 우리를 속이고 도망쳤다. 멀리 못 갔을 테니 찾
아보자."
황웅의 군사들은 화웅의 진두 지휘 아래 물고기 떼가 헤엄치듯 숲 속을 이리저
리 헤매며 손견을 찾고 있었다. 조무는 나무 뒤에 몸을 숨기고 있던 중 문득 군
사들 사이로 화웅의 모습이 보이자 번개같이 뛰쳐나갔다.
"이 역적의 앞잡이 놈아. 내 칼을 받아라."
조무는 화웅의 군사들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자신이 싸울 동안 손견이 조금이라
도 더 멀리 달아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였다. 화웅이 조무를 보자 우레와 같은
호통을 치며 달려갔다.
"패잔병의 졸개야. 내 칼을 받아라."
화웅의 칼이 달빛을 받아 번뜩였다. 조무가 싸칼을 들어 화웅의 칼을 막으려 했
으나 이미 졸개들과의 싸움으로 기진맥진해 있는 몸이었다. 조무는 화웅의 칼에
맞아 말에서 떨어져 나뒹굴었다. 화웅은 조무의 목을 벤 다음에도 먼동이 틀 때
까지 손견의 패잔병들을 추격하다가 군사를 이끌어 사수관으로 돌아갔다. 한편
화웅의 군대가 사라진 뒤 손견은 주위를 휘둘러보며 관목 덤불을 헤치고 나왔
다.
"아아, 조무여. 내 언젠가 너의 원수를 갚아 주마!"
손견은 가슴이 에는 듯한 슬픔에 하늘을 우러러보며 탄식했다. 그러나 비통해하
고 있을 수만은 없었다. 손견이 부상당한 몸으로 20리 쯤 길을 갔을 때야 겨우
정보.황개.한당 등의 휘하 장졸들을 만날 수 있었다. 정보.황개.한당도 그 휘하
군졸들과 함께 화웅의군사에게 기습을 당해 각기 흩어져 싸우다 날이 밝자 군사
를 수습하여 손견을 찾던 중이었다. 정보.황개.한당도 조무가 죽었다는 말을 듣
고 슬픔을 이기지 못해 목놓아 울었다. 손견이 그때까지 뒤따른 휘하 군졸들을
점고해 보니 남은 군사는 처음 거느렸던 군사의 10분의 1도 되지 않았다. 실로
참담한 패배였다. 한편 후방의 본진에서는 원소는 연이어 날아드는 패전 소식에
크게 당황하고 있었다.
"선봉군인 손견의 부대가 전멸했다."
"적은 대군을 이끌고 물밀 듯이 밀려오고 있다."
후방의 본진에는 패전 소식과 적의 군사가 밀려온다는 소식에 적지않은 동요가
일고 있었다. 원소는 제후들을 불러모으고 침통하게 말했다.
"먼저는 포신 장군의 아우가 공훈에 눈이 어두워 함부로 군사를 움직이다가 많
은 군사를 죽였소. 이번에는 또 손견이 화웅에게 패하여 군사의 사기를 떨어뜨
리니 이를 어떻게 하면 좋겠소?"
그러나 제후들은 아무도 선뜻 입을 열지 않았다. 기세등등한 적군의 위세와 적
장 화웅의 만부부당한 용맹에 눌렸음인지 제후들은 모두 꿀먹은 벙어리였다. 답
답한 마음으로 좌중을 둘러보던 원소는 문득 공손찬에게서 눈길을 멈췄다. 공손
찬의 등 뒤에 서있는 세 사람의 풍채가 범상치 않았기 때문이었다. 더욱 괴이쩍
은 것은 그들이 모두 입가에 영문 모를 냉소를 머금고 있다는 점이었다.
"공손 태수, 등 뒤에 시립해 있는 이들은 뉘시오?"
원소가 못마땅해하는 어조로 물었다. 공손찬은 유현덕 삼 형제를 뒤돌아보며 말
했다.
"이 사람은 탁현 누상촌 출신으로 어릴 적 저와 한 스승 밑에서 동문수학한 유
비 현덕입니다. 평원 현령을 지냈소이다. 나머지 두 사람은 유비의 의제올시다."
이때 유비를 바라보던 조조가 그를 알아보고 놀라며 입을 열었다.
"그러시다면 황건적의 난 때 광종 땅과 영천 지방에서 용맹을 떨친 유현덕이 아
니시오?"
"그렇소이다."
공손찬은 유비를 앞으로 불러내어 여러 제후들에게 인사를 올리도록 했다. 유비
는 맹주 원소와 여러 제후들에게 허리를 굽혀 인사를 올렸다. 공손찬은 유비가
황건적 토벌 때 세웠던 공과 그의 출신등을 자세히 소개했다. 원소도 비로소 조
금전 냉소를 머금던 그들을 못마땅히 여긴 마음을 다소 누그러뜨리고 입을 열었
다.
"누상촌에 명문의 자손이 있다는 소문을 들은 듯하오. 그 현덕 공이라면 한실의
종친이오. 자, 자리에 앉으시오."
원소의 말에 한 장군이 자리를 양보하자, 유비는 비로소 입을 열었다.
"아닙니다. 저는 여러 장군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 작은 현령입니다. 신분이 다른
데 어찌 나란히 앉을 수가 있겠습니까. 이대로 서 있겠습니다."
유비가 사양하며 공손찬의 등 뒤에 시립하였다. 원소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사양하실 것 없소이다. 그대의 관작으로 자리를 권하는 게 아니오. 그대 조상은
전한의 황실이며 나라를 위한 공적도 있으므로 그에 경의를 표하는 것이오. 앉
으시오."
공손찬도 유비에게 말했다.
"저렇게까지 말씀하시니 사양치 마시오!"
유비는 여러 제후에게 감사의 뜻을 표한 후 말석에 가서 앉았다. 관우와 장비도
걸음을 옮겨 유비의 등 뒤에 시립하였다. 이때 홀연 전령이 급히 뛰어와 아뢰었
다.
"화웅이 철기군을 거느리고 사수관 아래로 내려와 손견 장군의 붉은 투구를 꿴
기다란 장대를 흔들며 싸움을 걸어오고 있습니다."
화웅군은 사기가 크게 올라 막가당의 기세였다. 북 소리는 구름에 사무치고 함
성은 산천을 뒤흔들었다. 그들의 선봉은 어느 사이엔가 원소군의 본진까지 육박
해 오고 있었다. 맹주 원소를 비롯한 여러 제후들은 모두 근심스런 얼굴이었다.
이 광경을 바라보던 조조가 문득 시립해 있는 부하들에게 술을 가져오라 일렀
다.
"마음이 앞서 허둥댄다고 대세가 만회되는 것은 아니오. 이럴 때일수록 정신을
바짝 차리고 의기를 돋우어야 할 것이오."
곧 이어 그의 탁자 위에는 술병과 술잔이 놓였다. 다른 제후들 앞에도 술잔이
놓였다. 조조는 술을 따라 마셨다. 또다시 피에 얼룩진 전령 하나가 당하에 이르
러 고했다.
"아군의 중군이 적의 철기병에 무너졌습니다. 본진의 수비도 걱정되옵니다."
원소가 좌중을 둘러 보며 말했다.
"누가 저들을 막을 자가 없소? 누가 한번 싸워보겠소?"
"소생이 한번 가보겠습니다."
돌연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포효하듯 외치더니 칼자루를 움켜잡는 장수가 있었
다. 원술이 총애하는, 용맹이 뛰어난 장수 유섭이었다. 원소가 기뻐하며 그에게
술을 내렸다. 유섭은 단숨에 술을 들이킨 후 말을 몰아 달려나갔다. 그러나 잠시
후 군사 하나가 숨을 몰아쉬며 달려와 고했다.
"유섭 장군은 화웅과 겨룬 지 겨우 3합도 못 되어 그의 칼에 목숨을 잃었습니
다."
제후들은 모두 눈이 휘둥그래졌다. 원소 또한 큰 충격이 아닐 수 없었다. 잠시
침통한 표정으로 말을 잃고 있는 데 태수 한복이 나섰다.
"내 휘하에 반보이라는 장수가 있소. 아직 싸움에서 패한 적이 없으니 그가 나선
다면 화웅의 목을 벨 수 있을 것입니다."
원소가 얼굴에 밝은 빛을 띠며 재촉했다.
"그 장수는 어디있소. 즉시 그를 불러 나아가게 하시오."
한복의 부름을 받고 반봉은 검은 말을 타고 달려왔다. 손에는 커다란 화염부 도
끼를 움켜잡은 채 눈을 부릅뜨고 있었다.
"보기만 해도 믿음직스런 호걸이로다. 즉시 달려가 적장 화웅의 목을 베어 오
라."
"염려하지 마십시오. 꼭 화웅의 목을 가져오겠습니다."
반봉이 성난 사자처럼 적진을 향해 달려간 지 시일이 얼마 되지 않아 또다시 급
한 전갈이 왔다.
"반 장군도 화웅의 칼에 당하고 말았습니다."
제후들은 이번에는 적의 기세를 꺾을 수 있으리라 기대했다가 그 소리를 듣자
낯빛이 흙빛으로 변했다.
"이럴 수가...."
화웅이 손견의 선봉을 꺾었을 때만 해도 그를 두렵게 여기지는 않았다. 양초가
떨어진 손견군에게 야음을 틈타 기습을 감행함으로써 승운이 그를 따랐기 때문
이라고 여겼던 것이다. 그러나 용맹을 떨친다던 두 장수의 목을 힘들이지 않고
간단히 해치우는 것을 보자 두려움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원소가 크게 한탄
하며 말했다.
"아아, 분하도다. 이럴 줄 알았다면 내 상장 안량과 문추를 데리고 오는 것을....
둘 중 하나만 있었어도 화웅 따위는 두려워하지 않았을 텐데...."
원소의 한탄 섞인 질타가 이어졌다.
"이 자리에 모인 이 많은 제후들의 신하 중에서 화웅을 칠 만한 장수 한 사람이
없다니.... 천하의 웃음거리가 아니겠소. 후세까지 치욕을 남기는 일이 될 것이
오."
그때였다.
"바라건데 소장에게 명을 내려 주십시오. 화웅의 목을 베어 당하에 바치오리다.!"
모두 놀라 목소리를 좇아 좌석의 맨 끝으로 고개를 돌려보았다. 키가 아홉 자가
넘었고 수염은 허리까지 늘어졌는데 봉의 눈에 누에 같은 눈썹이 꿈틀거리는 듯
하고, 얼굴은 잘 익은 대춧빛같이 붉으며 목소리는 마치 큰 종소리 같은 장수였
다.
"저 장수는 누구인가?"
원소가 의아스런 얼굴로 묻자, 공손찬이 대답했다.
"여기 있는 유현덕의 아우로, 관우라고 합니다."
"지금 어떤 벼슬을 지내고 있소?"
"유현덕 휘하의 마궁수로 있습니다."
이 말을 듣자 원소의 아우 원술이 벌컥 화를 냈다.
"공손 태수께서는 우리 장군들을 어찌 보고 하시는 말씀이오?"
원술은 이어 관운장을 내려다보며 크게 꾸짖었다.
"일개 마궁수 따위가 어찌 제후들 앞에서 큰 소리를 치느냐, 썩 물러나지 못하겠
느냐!"
원술이 여러 제후들 앞에서 크게 꾸짖자 관우의 대춧빛 얼굴이 노기로 더욱 붉
어졌다. 이때 조조가 원술을 가로막고 나섰다.
"잠깐 기다리시오. 우리끼리 화를 내고 꾸짖고 할 때가 아니오. 저 사람이 이 자
리에서 큰소리 칠 때에는 결코 허튼소리로 그러지는 않을 것이오. 한번 나아가
싸우라고 해봅시다. 만일 패하여 돌아오면 그때 벌을 내려도 늦지 않을 것이오."
그러나 원소는 선뜻 마음이 움직이지 않는 듯했다.
"일개 마궁수까지 나가서 싸우게 한다면 화웅의 웃음만 살 뿐이오. 그런 소문은
멀리 낙양에까지 퍼질 것이오."
조조가 다시 말했다.
"이 사람이 마궁수에 지나지 않으나 범상치 않은 체구와 용모를 거졌소. 화웅이
어찌 그를 한낱 마궁수로 보겠소. 때를 놓치면 이 본진도 위급한 상황이 될 테
니 내보내 봅시다."
조조가 이렇게 말했으나 원소가 머뭇거리자 관우는 다시 입을 열었다.
"만약에 나가서 화웅의 목을 베지 못한다면 내 목을 바치겠소."
관우가 이같이 말하자 원소는 더 이상 그를 물리칠 수가 없었다. 제후들도 속으
로 관우에게 한가닥 기대를 걸었다. 관우가 말을 타려하자 조조가 뜨거운 술을
한잔 가득 부어 권하였다.
"이 술을 한 잔 마시고 가시오."
그러나 관우는 그 술잔을 받지 않은 채 말하였다.
"그 술은 화웅의 목을 베고 와 마시기로 하겠습니다. 술이 식기 전에 돌아오겠습
니다."
관우는 청룡언월도를 비껴들고 몸을 날려 말에 올랐다. 제후들은 관우의 위풍당
당함에 놀라며 그의 얼굴을 다시 한 번 쳐다보았다. 북 소리와 함성이 울리는
가운데 관우는 칠흑 같은 수염을 얼굴 양쪽을 휘날리며 바람을 일으켰다. 그의
모습은 순식간에 휘뿌연 먼지가 이는 싸움터로 치닫는 듯하더니 자취를 감추었
다. 관우는 적진 속을 돌진했다. 그의 청룡언월도가 춤을 추자 군사들의 목이 떨
어지며 순식간에 땅을 핏빛으로 물들였다.
"화웅은 이 관우의 칼을 받으라!"
호랑이가 양떼 속에서 날뛰듯 관우가 소리치며 내닫자 수만의 적군은 물결치듯
흐트러졌다. 난군 속에서 관우의 고함 소리를 들은 화웅은 관우를 맞는 듯 마는
듯 했으나, 어느 새 화웅의 목이 관우의 한칼에 날아가 버렸다. 화웅의용맹에 기
가 죽었던 군사들은 일제히 북과 징을 울리며 함성을 지르니 하늘과 땅이 온통
무너지는 듯했다. 여러 제후들이 숨소리를 죽이고 군사들의 함성에 귀를 기울이
고 있을 때였다. 말방울 소리가 절렁절렁 울리더니 말 한 필이 들어서고 있었다.
그 위에는 관우가 타고 있었다. 관우는 화웅의 목을 땅 위에 내팽개치며 말했다.
"화웅의 목을 잘라 왔소."
여러 제후들과 군사들의 입에서 경탄의 소리가 터져 나왔다. 이어 떠나갈 듯한
만세 소리가 이어졌다. 관우는 조조 앞에 뚜벅뚜벅 나아가 조조가 따라 놓았던
술잔을 들었다.
"그럼 이 술을 마시겠습니다."
술은 아직 식지 않고 따뜻했다. 후세 사람이 당시의 감격을 이렇게 노래했다.
천지를 뒤흔들며 첫 번째 공을 세우고
승전고 울리며 개선문 들어섰네.
관운장은 술잔 받아 마시지 않고 나아가
그 술 식기 전에 화웅의 목을 베었네.
관우가 적장 화웅의 목을 베어 오자 조조는 뛸 듯이 기뻐했다.
"정말 장한 일이오."
조조가 관우에게 몇 번이고 치하했다. 그러자 유비의 등 뒤에서 장비가 나섰다.
"우리 형님께서 화웅을 베었으니, 기회를 놓치지 말고 사수관을 친 후 낙양으로
가 역적 동탁을 사로잡아야 할 것이오."
관우가 화웅의 목을 베며 용맹을 떨치자 그렇지 않아도 근질거리던 장비가 힘이
뻗쳐 나선 것이다. 1장 8척의 사모를 곧추세우며 장비가 나서자 도량이 좁고 시
기심이 많은 원소의 동생 아우 원술이 화를 벌컥 내며 말했다.
"공연한 호언장담을 말라. 여러 제후와 각국의 명장들이 모두 겸손하게 있는데
너는 일개 현령의 부하로서 분수도 가리지 못하느냐. 건방진 놈, 입을 닥쳐라!"
그런 원술을 조조가 옆에서 부드럽게 구슬렸다.
"공을 세우는 자에게 상을 내리는 것이 이치이며 싸우고자 하는 자에게 싸우도
록 하는 것이거늘, 여기서 지위 고하를 들먹여 무엇하겠소?"
그렇지 않아도 관우를 지나치게 높이는 듯한 조조에게 심술이 나 있던 원술이었
다. 그는 좌우를 돌아보며 노기에 찬 목소리로 한 마디 덧붙였다.
"일개 현령의 졸개를 그렇게 중히 여기며 우리와 같이 대하려 한다면 나는 고향
으로 돌아가겠소."
숨을 씨근덕거리며 화를 내는 것으로 보아 심상치 않았다.
"대사를 앞두고 하찮은 일로 큰일을 그르칠 수야 없지 않소?"
조조가 원술을 달래는 한편 공손찬에게 눈짓을 하여 유.관.장 세 사람을 자리에
서 물러나게 했다. 밤이 되자 조조는 유비에게 은밀히 술과 고기를 보내어 위로
했다.
여포와 장비 호뢰관의 3전
한편 화웅 휘하의 패잔병들이 사수관으로 뿔뿔히 흩어져 도망쳐 오자 이
숙이 소스라치게 놀라 이 사실을 동탁에게 글로 써 자세히 알렸다. 이숙의
보고를 받은 동탁은 대경실색하여 여포와 이유를 불러 대책을 상의했다.
모사 이유가 동탁에게 권했다.
"이제 화웅이 죽었으니 적의 사기는 올라가고 우리 군사의 사기는 크게 떨
어질 것입니다. 승상께서도 아시는 바와 같이 원소의 숙부 원외는 지금 태
부로 있습니다. 만약 원외와 원소가 안팎에서 서로 내통이라도 하는 날에
는 어찌하시겠습니까? 먼저 태부의 원외를 죽여 군사들의 사기를 북돋우시
고 승상께서 친히 군사를 거느려 나가신다면 쉽게 제후들을 깨칠 수 있을
것입니다."
동탁은 이유의 말에 따라 태부 원외 집에 승상부의 군사 5백을 보내 에워
쌌다. 그들은 원외의 집 안팎에 불을 놓은 후, 밖으로 빠져나오는 사람들을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모조리 죽였다. 동탁은 원외의 목을 베어 사수관에
높이 매달게 한 후, 20만 대군을 일으켜 두 갈래로 나누어 출동시켰다. 이
각.곽사에게는 군사 5만을 주어 한 발 앞서 진군케 하여 동탁이 도착할 때
까지 나가 싸우지 말고 사수관을 지키기만 하라는 엄명을 내렸다. 그리고
동탁은 스스로 이유.여포.번주.장제 등과 15만의 대군을 거느리고 낙양에서
남쪽 50여 리 떨어진 호뢰관으로 나아갔다. 여포에게는 따로이 군사 3만을
주어 관 앞에 대채를 세워 지키도록 하고 동탁 자신은 호뢰관에 주둔키로
했다. 호뢰관은 중요한 관문으로 그곳만 지키면 적의 통로가 완전히 막히
는 천하의 요해지였다. 동탁의 동정은 염탐꾼에 의해 즉시 원소에게 전해
졌다. 원소는 모든 제후들을 모아 상의하니 이번에도 역시 조조가 먼저 의
견을 냈다.
"동탁이 호뢰관에 군사를 주둔시킨 것은 우리들의 뒤를 끊으려는 수작일진
대 우리도 마땅히 군사를 둘로 나누어 진격해야 합니다."
조조의 계교에 따라 원소는 하내태수 왕광, 동군태수 교모, 산양태수 원유,
북해태수 공융, 상당태수 장양, 서주자사 도겸, 북평태수 공손찬, 등 8로 제
후들을 호뢰관으로 보내고 나머지 제후들에게는 그대로 사수관을 공격케
하였다. 조조는 응원군이 되어 양군을 형세에 따라 적절히 돕기로 하였다.
하내태수 왕광이 제일 먼저 호뢰관에 당도하여 급히 진을 벌인 다음 문기
아래 나아가 바라보니 호뢰관밖에 영채를 세우고 있던 여포가 나는 듯이
말을 달려왔다. 몸에는 서천 붉은 비단에다 백화전포를 걸친 위에 짐승 얼
굴을 수놓은 보석고리를 연결한 갑주를 입고 있었다. 세 갈래로 땋아 묶어
올린 머리에는 자금관을 쓰고 허리에는 사만대란 띠를 두르고 있었으며,
어깨에는 활과 전통을 매고 한 자루의 방천화극을 치켜들고 적토마위에 높
이 앉은 여포는 보는 이로 하여금 간담을 서늘케 할 만큼 위풍당당하였다.
"누가 나가서 여포의 목을 칠 텐가?"
왕광의 독전에 등 뒤에서 한 장수가 창을 치켜들고 말을 달려갔다. 하내의
명장 방열이었다. 방열이 창을 들어 여포를 향해 달려들었으나 채 5합도
견디지 못하고 방천화극에 찔려 그만 목이 떨어지고 말았다. 태수 왕광은
아끼던 장수 방열이 죽자,
"이놈 여포 게 섰거라!"
하고 외치며 스스로 반월창을 휘두르며 덤벼들었으나 그보다 먼저 부하 장
수들이 앞질러 여포에게 달려갔다. 그러나 그 장수들마저 여포의 방천화극
에 추풍낙엽처럼 목이 떨어지는 것을 보자 왕광은 간담이 서늘해져 급히
말머리를 돌려 달아나고 말았다. 여포는 철기군 3천을 거느리고 그 기세를
몰아 방천화극을 휘두르며 마치 무인지경을 달리듯 왕광의 진지를 유린했
다. 달아나던 왕광은 다행히 동군태수 교모와 산양태수 원유의 구원병을
만나 겨우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 간신히 여포의 추격에서 벗어난 3로의
제후들은 많은 군사를 잃고 30리나 물러나 영채를 세우고 군사를 수습했
다. 뒤미쳐 도착한 5로의 제후들과 함께 8로의 제후들이 머리를 맞대고 상
의했으나 여포의 용맹에 찬탄만 할 뿐 뾰족한 수가 없었다. 그때 다시 여
포가 싸움을 걸어 왔다. 깜짝 놀란 8로의 제후들이 일제히 말에 올라 각기
군사를 이끌고 높은 언덕 위에서 바라보니, 여포가 대장기를 펄럭이며 앞
장 서서 제후들의 진지를 짓밟고 질풍같이 달려오고 있었다. 상당태수 장
양의 부장 목순이 한껏 의기를 돗우며 창을 치켜들고 짓쳐나가 여포를 맞
았으나, 여포의 화극이 한번 번쩍하는 듯하자 어이없이 목이 떨어지고 말
았다. 8로 제후들은 언덕 위에서 이 광경을 보고 기겁을 하여 손과 발이
따로 노는 듯했다. 이번에는 북해태수 공융의 부장 무안국이 50근이나 되
는 철퇴를 휘두르며 여포를 가로막았으나, 그 역시 겨우 10여 합을 버텼을
뿐이었다. 여포가 방천화극을 휘둘러 왼팔을 자르자 철퇴를 떨어뜨린 채
달아났다. 이에 8로의 제후들이 죽을 힘을 다해 일제히 달려나가자 군사가
적은 여포는 그제야 무안국을 뒤쫓지 않고 군사를 거두었다. 이제 여포에
게는 감히 나서서 대적할 만한 장수가 없었다. 그가 향하는 곳에는 8주의
맹장과 용사도 낯빛이 변했고, 그가 달리는 곳엔 8주의 태수도 말머리를
돌려 도망치기에 바빴다. 원소도 어찌할 바를 몰라 조조에게 그 대책을 묻
기에 이르렀다. 조조는 생각에 잠기며 한참을 궁리하던 끝에 무겁게 입을
열었다.
"여포의 용맹은 실로 만부부당이오. 아마 정공으로 맞서 싸운다면 그르 당
할 자는 천하에 없을 듯 하오. 그러니 8로의 제후가 하나로 뭉쳐 싸우는
방법밖에 도리가 없을 듯같소. 그를 빈틈없이 에워싸 일제히 공격하여 사
로잡는 대책을 강구해야 할 것이오.
"그렇소, 나 역시 그렇게 생각하였소."
원소는 사수관에 진을 치고 있는 10개국의 제후들에게 각기 전령을 띄워
여포를 포위할 계획을 세웠다. 그러나 전령을 보내기도 전에 다급한 전갈
이 왔다.
"여포가 와서 싸움을 겁니다!"
이어 군사들이 마치 썰물처럼 본진으로 밀려들고 있는 북새통속에서 여포
의 우렁찬 목소리가 울렸다.
"나 여포가 여기 왔다. 원소는 어디 갔느냐. 썩 나와 목을 바쳐라."
여포는 질풍과 같이 제후들의 진지를 짓밟으며 돌진해 왔다. 여포가 제후
들의 진영을 헤치고 들어오다 공손찬의 진영에 이르자, 그 깃발을 보고 좌
우를 둘러보며 소리쳤다.
"공손찬은 어디 있느냐? 썩 나와 나의 창을 받으라."
공손찬은 난전 속에서 여포의 호통을 듣자 분을 이기지 못해 창을 들고 여
포를 맞았으나 당하지 못하고 달아났다. 여포가 하루에 천리를 달린다는
적토마를 채찍질하여 쏜살같이 달려 공손찬의 등 뒤까지 다가가 화극으로
찌르려는 찰나였다. 한 장수가 눈을 부릅뜨고 호랑이 수염을 사납게 곤두
세운 채 1장 8척 장팔사모를 치켜들고 여포를 가로막으며 벽력같이 호통쳤
다.
"아비를 세 번씩이나 바꾼 쓸개 빠진 종자놈아! 연인 장비가 여기 있다. 먼
저 네놈의 목부터 내놓아라!"
여포는 적토마를 세우며 고개를 돌려 소리친 장수를 바라보았다. 호랑이
수염이 알알이 곤두세우고 모란꽃 같은 입을 벌려 호령하며, 장팔사모로
당장 자기를 내리칠 듯한 기세였다. 그러나 험상궂고 사나운 외모와는 달
리 그 갑주나 마장을 보니 빈약하기 이를 데 없어 장수가 아닌, 일개 하급
관리의 신분임을 알 수 있었다.
"저리 버켜라. 네놈 따위의 졸개가 나설 자리가 아니다."
그런 하급 관리와 일대 일로 맞서 싸운다는 것이 내키지 않는 듯, 여포는
호통만 치고 앞으로 내달으려 하였다. 여포의 그 말이 장비의 노기를 더욱
부채질했다. 장비는 대뜸 여포의 앞을 가로막으며 소리쳤다.
"쓰잘데 없는 잔소리는 집어치우고 이리 와라. 종놈의 새끼야!"
호통 소리와 함께 장비의 장팔사모가 적토마의 갈리를 '획'하고 스쳤다. 그
순간 여표는 눈을 부릅떴다.
"하룻강아지 범 무서운 줄 모른다더니 바로 너 같은 놈을 두고 이른 말이
구나."
여포가 방천극으로 장비를 후려쳤다. 그러나 장비가 재빨리 피하더니 바람
을 일으키며 다시 장팔사모를 휘둘렀다. 여포가 순간 찔끔했다. 지금까지
자기가 대적했던 어느 장수와는 달랐기 때문이다. 장비도 여포가 어느 장
수와 다르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래서 정신을 가다듬고 힘을 다해 여포와
맞섰다. 이 싸움터에서 천하의 영웅으로 이름을 떨치고 있는 여포와 겨루
게 되었다는 것은 장비에게는 천재일우의 기회라 아니할 수 없는 일이었
다. 그가 뜻을 세우고 싸움터에 몸을 던진 이래 처음으로 맞는 기회였기
때무이다. 그러나 여포는 보통 적수가 아니었다. 여포가 휘두르는 화극은
마치 못 속의 용이 큰 바람을 만난 듯 우렁찼다. 장비도 쉽사리 이길 수
있는 상대가 아니었다. 두 영웅은 불꽃을 튀기며 싸웠다. 장팔사모와 방천
화극이 일진일퇴를 거듭하며 어우러졌다. 장비도 싸우면서 속으로 혀를
내둘렀다.
'이런 호걸도 세상에 있구나.'
여포 또한
'이렇게 대단한 사나이가 어찌 군졸로 있는가?'
하며 속으로 놀라고 있었다. 장비가 전광처럼 두 눈을 부릅뜨고 휘두르는
장팔사모는 몇 번이나 자금관이며 연환 철갑을 아슬아슬하게 스쳤고, 여포
의 방천화극 또한 장비의 코끝과 손목 언저리를 스쳤다. 당장 어느 한쪽이
거꾸러질 듯 보이면서도 싸움은 좀처럼 끝이 나지 않았다. 싸움은 50여 합
을 넘겼다. 그들이 타고 있는 말이 비 오듯 땀을 흘리며 재갈을 씹었다. 말
은 지쳐도 말 위의 싸움은 지치지 않는 듯했다. 너무나도 처절한 싸움에
양 진영의 군사들은 손에 땀을 쥐며 바라보기만 했다. 이윽고 싸움의 양상
은 차츰 한쪽으로 기우는 듯했다. 여포는 싸우면 싸울수록 기세가 올랐다.
반면 장비의 말은 점점 뒤뚱거렸다. 장비가 타고 있는 말이 어찌 적토마에
비할 수 있으랴! 멀리서 두 사람의 싸움을 지켜 보고 있던 원소.조조와 제
후들은 순간 얼굴빛이 달라졌다. 그때 관운장이 말에 채찍질을 가해 말을
몰았다. 80근 청룡언월도를 서릿발처럼 휘두르며 전포자락을 휘날렬 내달
은 관우는 여포를 협공했다. 사람 세, 말 셋이 어우러져 서로 내리치고 받
으며 싸우기를 30여 합이나 하였다. 놀라운 것은 여포였다. 아무리 명마인
적토마를 타고 있더 하여도 그의 무예는 역시 절륜하였다. 이때 유비도 마
치 하늘이라고 가를 듯 쌍고검을 위두르며 여포를 향해 달려갔다.
"나는 유비 현덕이다. 여호, 내 칼을 받아라."
여포는 유.관.장 세 형제의 협공을 받게 되었다. 세 방향에서 서로 다른 무
기가 엇바뀌어 부딪치며 불꽃을 튀겼다. 여포의 화사한 방천화극은 관우의
청룡언월도, 장비의 사모창, 유비의 쌍고검을 번개같이 막아내었다. 칼과
창이 맞부딪치는 소리가 흰 무지개를 그리며 뽀얀 먼지 속에 번쩍이고 있
었다. 제후들은 치고 빠지며 다시 부딪는 용호쌍박의 대결을 취한 듯이 바
라보고만 있었다. 마치 용이 싸우고 호랑이가 서로 치는 듯했다. 여포가 아
무리 천하의 용장이고 하여도 이제는 이들 세 형제의 공격을 모면할 길이
없어 보였다. 금세 피를 뿌리며 말에서 굴러 떨어질 듯이 보였다. 그러나
여포의 기세는 조금도 꺾이지 않았다. 창과 칼이 섬광을 뿌리던 중 여포의
일격이 현덕의 머리 위로 떨어지려는 찰나였다. 한쪽에서 관우가, 또 한쪽
에선 장비가 마치 두 마리의 용이 하나의 구슬을 다투듯 가운데의 여포를
찌르고 들어갔다. 여포의 말 안장과 관우의 말 안장이 맞닿을 정도였다. 적
토마는 땅을 '쿵쿵'밟으며 뒷걸음질쳤다. 이어 여포가 비특거렸다. 아무리
천하의 여포라지만 그렇게 되자 더 이상 버티지를 못했다.
"뒷날 다시 만나 싸우자!"
여포는 가까스로 몸을 빼어 자신의 공격을 피한 유비를 뒤로 하고 말머리
를 돌려 방천화극을 휘두르며 나는 듯이 호뢰관 쪽으로 달아났다. 도망가
는 여포의 갑옷이 번쩍거렸다. 세 사람은 놓칠세라 말을 채찍질하며 뒤따
랐다. 그러자 여포는 마상에서 몸을 돌려 활을 쏘았다. 화살은 유비의 머리
위로 '쌩'하는 소리를 내며 날아갔다. 여포는 두 발의 화살을 더 쏘며 세사
람의 추격을 더디게 한 뒤 순식간에 호뢰관 안으로 들어가 버리고 말았다.
유비.관우.장비는 눈앞에서 여포를 놓치고 만 것이 분했지만 어쩔 수 없었
다. 여포의 적토마를 따라잡을 수 없었던 것이다. 여포가 호뢰관 안으로 도
망가자 지금까지 밀리기만 하던 제후들의 연합군은 사기가 크게 올랐다.
이 기회를 놓칠세라 총공격을 가했고, 호뢰관을 향해 진격하는 군사들의
함성은 천지를 뒤흔들었다. 여포의 군대는 태반이 관내로 들어가지 못했던
터라, 그들은 모두 8로의 제후군들에 의해 목숨을 잃고 말았다. 연합군은
밀물처럼 관문으로 쇄도하였다. 그러나 호뢰관의 철문은 굳게 닫혀 있었고,
관문 좌우는 깎아지른 듯한 절벽이 솟아 있었다. 가히 난공불락의 요새라
아니할 수 없었다. 유비.관우.장비 세 사람이 호뢰관의 관문 부근에 접근하
여 올려다보니 관문의 문루에는 무수한 기치가 바람에 펄럭이고, 그 가운
데 푸른 비단 일산이 서풍에 휘날리고 있었다. 장비가 일산을 올려다보며,
"저기에 일산이 있는 것을 보니 반드시 동탁이 있을 것이오. 여포를 잡는
것도 좋지만 동탁을 잡는 것만 못하리다. 먼저 동탁을 잡아 적의 뿌리를
뽑아버리는 것이 상책일 것이오."
하고 외치며 관문 앞까지 말을 몰았다. 그러자 관문 위에서 화살이 날아오
고, 절벽 위에서는 통나무와 암석이 비 오듯 쏟아지는 것이었다. 장비는 하
는 수 없이 뒤로 물러났다. 후일 세상에서는 이날의 싸움을 '호뢰관의 삼
전'이라 전하고 있었다. 8로의 제후들은 유비.관우.장비의 공로를 치하한 다
음 파발을 원소의 대채로 보내어 모처럼의 승리를 보고했다. 원소는 모처
럼 승전고를 듣자 손견에게 다시 사수관을 공격토록 격문을 보냈다. 이에
손견은 출진에 앞서 황개.정보와 함께 원술의 영채를 찾아갔다. 손견이 화
웅에게 패하여 아끼던 조무까지 잃게 만들었던 사수관 싸움때 자기에게 군
량과 양초를 보내지 않은 까닭을 따지고자 함이었다. 손견은 원술을 대하
자 발로 땅을 구르며 성난 기색으로 힐난했다.
"동탁과 나는 본디 아무런 원한도 없었소. 그러나 내가 시석을 무릅쓰고
몸을 아끼지 않으며 죽기를 결심하고 싸운 것은 위로는 나라를 위해 역적
을 주살코자 함이오, 아래로는 함께 맹세한 모든 제후들과의 의리 때문이
었소. 그런데 장군은 간사한 무리의 참소만을 믿고 군량미 공급을 중단하
는 바람에 내가 싸움에 패하여 많은 군사를 잃었을 뿐만 아니라 아끼던 장
수 조무까지 잃게 만들었으니 이제 장군은 어찌하실 작정이오?"
손견의 사람됨을 일찍부터 알고 있는 원술이었다. 과격한 성품에다 성미까
지 급한 남방출신이 아닌가. 그런 그가 눈을 부릅뜨고 따지듯 묻자 원술은
크게 두려움을 느끼고 모든 잘못을 애매한 부하에게 뒤집어 씌웠다.
"진정하시오. 손장군. 사실 나도 그 후에 나의 어리석음을 질책해 왔소. 아
무튼 그놈이 공연히 장군을 중상모략하여 일을 그르치게 하였소. 그 자의
목을 베어 나의 어리석음을 사죄하겠소."
원술은 짐짓 미안한 표정을 지으며,
"바로 이놈이오. 이놈이 장군을 헐뜻은 놈이오. 이 자리에서 목을 벨테니
울분을 푸시오."
하고 말하더니 좌우의 군사들에게 명하여 그 부장의 목을 베게 했다. 이런
소인을 상대로 따져봤자 얻을 것이 없다고 여겼음은지, 손견은 쓴웃음만
흘리고 진영으로 돌아왔다. 진영으로 돌아와 막 잠을 청하려고 하는데 정
보.황개가 손견을 찾았다.
"무슨 일인가?"
하고 손견이 묻자, 정보가 손견에게 귀엣말로 소곤거렸다.
"이 심야에 진문을 두드리는 자가 있었습니다. 누군가 했더니 적군이 보낸
밀사로 태수를 은밀히 뵙고 싶다는 것이었습니다."
"동탁이 밀사를 보냈다는 말이가?"
그는 동탁이 아끼는 장수인 이각이었다.
"네가 무슨 일로 나를 찾아왔는가?"
손견이 괴상한 일이라 생각하여 이각을 노려보며 물었다.
"승상께서는 평소부터 장군을 깊이 경모해 오셨습니다. 그래서 저를 특사
로 보내신 것입니다."
이각은 손견이 잠시 입을 다물고 자기의 말에 귀를 기울이자 속셈을 털어
놓았다.
"동승상께서는 귀여운 따님이 한 분 계십니다. 장군의 자제분과 혼약을 맺
자는 말씀을 전하러 온 것입니다. 혼약을 맺게 되면 장군의 자제 전원은
군수나 자사에 봉하고 ...."
이각의 말이 미처 끝나기도 전에,
"닥쳐라 이놈!"
하는 손견의 호통이 터졌다. 이각에게는 전혀 예상치 않은 소리였다.
"동탁은 하늘을 거스르로, 황실을 뒤엎은 놈이다. 나는 역적 동탁을 쳐 그
놈의 9족을 멸해서, 낙양의 장터에 효수하려는 터이다. 그런 나에게 어찌
나의 아들을 사위로 달라는 말을 하느냐. 너의 몸이 성할 때 빨리 돌아가
나의 말을 전하라!"
이각은 목을 어루만지며 쥐새끼가 달아나듯 동탁에게 돌아가 손견의 말을
소상히 전했다. 동탁은 이각의 말을 듣자 몹시 화가 났다. 아니 그보다 화
를 삭이지 못해 씨근덕대다 모사 이유를 불러 물었다.
"어찌했으면 좋겠는가?"
"지금은 온후께서도 패하여 아군의 사기가 크게 저하되었습니다. 이때를
기해 장래를 멀리 보는 눈을 가지고 대전기를 기함이 좋을 듯하옵니다."
"그건 무슨 뜻이냐?"
"적의 세력이 강성하여 낙양을 지켜내기가 어려울 것 같으니 낙양을 버리
고 도읍을 장안으로 옮기시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천도하란 말이냐?"
"그렇습니다. 이곳에서 일단 병사를 거두고, 낙양으로 돌아가 천자를 장안
에 이어케 하셨다가 시기를 보아 다시 싸우는 것이 현명할 것입니다. 더구
나 요즘 거리에서 아이들의 입으로 심상치 않은 노랫소리가 떠돌고 있습니
다."
서쪽에 한 개의 한나라
동쪽에도 한 개의 한나라가 있네.
사슴이 장안으로 들어가면
난리가 나지 않네.
"노래말을 생각컨데 서쪽 한 개의 한나라는 한 고조를 가리키는 말로 장
안 12대의 태평을 뜻합니다. 동ㅉㄱ에 한 개의 한나라는 광무제께서 장안
의 동쪽 낙양에 도읍을 정한 이래 동한을 건국하셔서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역시 12대를 전해 내려오시는 것을 일러 하는 말입니다. 사슴이 장안에 들
어간다는 것은 곧 천운이 이제 다시 장안으로 되돌아왔다는 뜻입니다. 이
제 승상께서 장안으로 도읍을 옮기심은 곧 하늘의 뜻을 따르는 것으로써
이에 모든 근심이 없어지리라는 뜻입니다."
천운니 자기한테로 돌아왔다는 이유의 설명을 듣자 동탁은 무릎을 치며 기
뻐했다.
"그대의 말이 아니었더라면 나는 미처 깨닫지 못할 뻔했네."
그날 밤 동탁은 여포와 함께 군사를 돌려 낙양으로 돌아와 문무백관을 조
당에 모아 놓고 천도할 일을 의논했다. 그 허황한 천문설은 금세 정책의
근본 방침이 되어 조의에 부쳐진 꼴이 되었다.
"동도 낙양은 광무제께서 수도로 정하신 지 2백여년으로 그 기수가 이미
쇠했소. 내가 살피건데 천운이 장안에 있는 듯하니 나는 황제의 어가를 모
시어 서행하려 하매 그대들은 각기 그 준비를 서둘러 주시오."
조의란 조정에서 하는 백관회의이다. 하나의 안건을 놓고 백관이 의논하여
결정하는 것이 관례였다. 그러나 동탁이 참석하는 회의는 그렇지 않았다.
가가 제안하는 것에는 아무도 반대 의사를 말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이번
만은 달랐다. 안건이 너무나 중대하였다. 한 나라의 수도를 옮기는 일이니
백관은 하나같이 당혹함과 우려의 기색을 감추지 못하였다. 무거운 침묵을
깨고 사도(민정과 교육을 담당하는 정승) 양표가 일어서서 입을 열었다.
"승상, 지금은 그때가 아닙니다. 관중은 비어 둔 지 오래여서 폐허와 같습
니다. 아무런 명분도 없이 종묘와 황릉을 버리고 천도한다면 백성들이 놀
라 동요할까 두렵습니다. 자고로 천하에 동요가 일어나기는 쉬워도 다시
안정을 찾기는 지극히 어려운 법입니다. 승상께서는 깊이 생각하시기 바랍
니다."
"너는 국가의 대계를 방해하려 함이냐?"
동탁이 성난 목소리로 사도 양표를 꾸짖었다. 그러자, 이번에는 태위 황완
이 나섰다.
"양 사도의 말씀이 지당합니다. 옛날 왕망이 역적을 도모했을 때, 장안을
불살라 버려 기와 조각만 뒤덮인 황폐한 땅이 되어 버렸습니다. 백성들은
뿔뿔이 흩어졌습니다. 지금 낙양과 같은 훌륭한 궁궐과 수만 호의 가옥을
버리고 폐도와 다름 없는 장안으로 천도하심은 옳지 않은 일입니다."
동탁은 그의 말을 받았다.
"관동에 도적들이 일어나 천하가 시끄러운 이때 장안에는 효산과 함곡관과
같은 지형이 험한 요새가 있다. 또한 농우 지방이 가까워 큰 나무와 석재
벽돌과 기와 등을 쉽게 구할 수 있다. 그러므로 궁실은 몇 달 안 가서 지
을 수 있으니 그대들은 공연한 반대를 하지 말라!"
사도 순상이 벌떡 일어났다.
"만약 지금 황부를 버리고 천도를 한다면 장사꾼은 장사할 대상이 없을 것
이며, 공인 또한 직업을 잃게 될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백성들은 소동을
일으킬 터인즉, 제발 백성들을 생각하여 천도를 미루어 주소소."
그 말에 동탁의 얼굴이 붉으락 푸르락 하더니 소리쳤다.
"나는 천하를 위하는 사람이다. 몇 안 되는 백성을 위해 천하의 대계를 그
르치란 말이냐. 이제 백성 따위를 염두에 둘 겨를이 없다."
순상도 수그러들지 않았다.
"백성은 나라의 근본입니다. 백성이 없는 나라가 어디 있겠습니까?"
"아니 너 이놈, 감히 나에게 거역하려 드느냐? 내 말이 곧 천자의 말이거
늘.... 여봐라, 저놈들의 관직을 박탈하고 내쫓으라!"
동탁이 내뱉듯 말하고는 묘당을 떠나 수레에 오르려 할 때 무관 두 사람이
수레 앞에 무릎을 꿇었다. 동탁이 바라보니 성문교위 오경과 상서 주비였
다.
"무슨 일인가?"
"오늘 궁중에서 천도를 내정하셨다 하온데 이를 듣고 긴히 간하고자 합니
다."
"...."
"전통이 있는 도읍은 하루 아침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옵니다. 한실 12대
에 걸친 이곳을 버리고..."
오경과 주비의 말을 다 듣기도 전에 동탁의 얼굴이 노기로 붉게 변하더니
소리쳤다.
"이전에도 너희 두 놈의 말을 듣고 원소를 살려 두었다. 그런데 그놈이 나
에게 반역하지 않았느냐. 너희들도 원소의 일당임이 분명하다."
동탁은 무사들에게 명하였다.
"빨리 이 두 놈의 목을 베어 성문에 효수하여라!"
무사들은 교위 오경과 상서 주비를 도성 밖으로 끌고 가 목을 베었다. 동
탁은 양표.황완.순상 세 사람의 관직을 박탈하여 내쫓고 오경과 주비의 목
을 베게 한 후 마침내 천도하라는 명을 내렸다. 그때 이유가 동탁에게 가
까이 가 속삭였다.
"지금 군자금과 군량미가 턱없이 부족합니다. 지금 낙양에는 부자가 많습
니다. 그 부자들에게 그럴듯한 죄를 씌워서 그들의 재산을 몰수하십시오.
원소와 내통했다는 구실을 내세워 일족일가를 몰살하고 재산을 취한다면
엄청난 재물이 모일 것입니다."
"과연 뛰어난 방책이다. 즉시 결행하라."
이유는 그 즉시 기마병 5천 명을 선발하여 낙양의 부자들을 모조리 잡아들
였다. 잡혀 온 부호는 그 수가 수천 명이나 되었다. 그리고 그 부호들의 집
집마다 '반신역당'이라고 쓴 깃발을 꽂았다. 잡아 온 부호들은 모두 도성
밖으로 몰아내어 죽이고 그들의 재산을 몽땅 빼앗았다. 천도령이 내려진
며칠 후 이각과 곽사를 시켜 낙양의 도민들을 강제로 한 곳에 집합시켰다.
그리하여 도민들을 5천 명, 혹은 7천 명으로 조를 짜고, 그 사이에 병사 1
대씩을 끼워 장안으로 내몰기 시작했다. 젖먹이 어린애를 품에 안은 아낙
네, 노인과 병든 사람을 등에 업은 사람도 있었다. 남루한 옷에 몇 푼어치
도 되지 않을 듯한 가재도구를 짊어지고 어린애의 손을 끌고 가는 사람도
있었다. 아수라장이 이곳이요, 생 지옥이 따로 없는 참상이었다. 설상가상
으로 난폭한 군졸들은 만행을 서슴치 않았다. 그들은 유부녀와 처녀를 가
리지 않고 겁탈하고, 백성들의 재물을 강탈했다. 지쳐서 쓰러진 자가 있으
면 지체없이 길가 웅덩이 아무 데나 버렸다. 백성들의 울부짖음은 하늘을
가득 메웠다. 동탁은 낙양을 떠나면서 모둔 성문에 불을 지르고 종묘와 궁
궐도 태우며 행여 백성들 중 남은 자가 있을까 하여 민가에까지 불을 지르
니 한나라 200년 도읍지인 낙양은 하루 사이에 잿더미로 변하고 말았다.
동탁이 낙양에 불을 놓은 이유 중의 하나는 이곳에 들이닥칠 원소.조조등
제후들에 대한 초토화 작전이었다. 그뿐이랴. 동탁은 여포를 시켜 역대 황
제와 황후, 후비들의 능을 파헤치고 금은보화를 꺼내었다. 군사들은 한술
더 떠 전날 벼슬했던 사람들의 무덤과 부자들의 무덤까지도 마구 파헤쳐
값나갈 만한 것들은 모조리 도적질하니 이들이야말로 나라의 군사라기보다
는 한낱 도적이랄 수밖에 없었다. 동탁은 금은보화를 수천 대의 수레에 싣
고 황제와 황후, 후비 그리고 조정의 문무백관을 겁박하여 장안으로 떠나
면서 여포로 하여금 사수관의 수비군을 그제야 철수시키게 하였다. 그러나
사수관을 지키던 장수 조잠은 동탁이 낙양을 불사르고 장안으로 천도하며
사수관을 버리고 장안으로 철수하라고 명령을 내리자, 크게 노하여 그길로
손견의 진중으로 가 항복하고 손견을 사수관으로 안내했다. 한편 호뢰관에
맨 먼저 입성한 유비는 멀리 불바다가 된 낙양을 보고 온몸으로 치르 떨며
원통해했으나 어찌해 볼 도리가 없었다. 낙양뿐 아니라 그 부근의 산과 들
이 온통 불바다였다. 맨 먼저 낙양에 들어선 것은 손견의 군대였다. 불길은
하늘을 찌르고 검은 연기는 물결처럼 땅 위에 서려 있었다. 사수관에서 낙
양으로 오는 2,3백리의 길에는 사람은 말할 것도 없고 닭이나 개 한 마리
도 보이지 않았다. 손견은 화끈거리는 열풍 속에서 목청을 높여 군사들에
게 명했다.
"먼저 불부터 꺼라. 재물은 사사로이 취하지 말라. 누구든 백성들을 보면
보호하고 궁궐에는 위병을 세우라."
여러 제후들의 군대들도 속속 낙양으로 몰려와 진을 쳤다. 한편 조조는 낙
양에 당도하자마자 곧바로 원소를 찾아가 물었다.
"지금 역적 동탁이 장안을 향해 서쪽으로 떠났으니, 이런 좋은 기회를 놓
치지 말고 추격해서 사로잡아야 함에도 어찌하여 장군은 군사를 여기에 주
둔시키고 움직이지 않습니까?"
"지금 연이은 싸움으로 병마는 지쳐 있소. 이미 낙양을 점령하였으니 2,3일
휴식할까 하오."
원소는 조조의 말을 건성으로 받아넘겼다.
"동탁이 궁궐은 물론이고 낙양을 불바다로 만들고 천도하니 종묘사직이 위
태롭고 백성들은 동요하고 있습니다. 이때야말로 동탁을 쳐없애고 천하르
바로잡을 때입니다. 여기서 진을 치고 있으면 군사들의 마음이 느슨해집니
다. 지체하지 말고 추격하는 것이 상책입니다."
"그대는 나를 받드는 사람이 아니오? 동탁을 추격할 때는 군령으로서 발표
하겠소."
원소는 더 이상 말도 하기 싫다는 듯 외면하고 말았다. 조조는 다른 제후
들에게도 이 한 판 싸움으로 도망치는 동탁을 잡아 천하를 안정시키자고
권했으나 선뜻 조조의 뜻에 응하는 제후가 없었다. 조조는 울화가 치밀었
다.
'못난 졸대기들하고는 논할 가치도 없군.'
조조는 이렇게 중얼거리더니 결연히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진영으로 돌아
왔다. 조조는 곧 하후돈.하후연.조인.이전.악진 등과 함께 군사 1만여 명을
이끌고 동탁의 뒤를 쫓았다. 조조는 동탁 일행이 재물을 실은 수레며, 부녀
자들을 대동하고 있어 행려도 느리고 사기도 크게 떨어져 있을 것이라고
판단했다.
"추격하라! 적군은 멀리 가지 못했을 것이다."
조조는 몸소 선두를 달리며 군사들을 독려했다. 한편 황제의 어가를 비롯
한 백성들은 산을 넘고 내를 건너며, 형양땅에 이르자 태수 서영이 나와
영접했다. 황제와 백성들의 행렬도 잠시 형양에 멈추었다. 그때 조조가 추
격해 온다는 급보가 날아들었다. 천자와 시종들은 겁에 질린 얼굴이었고
동탁도 당황해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그러나 이유만은 여유만만한 얼굴로
동탁에게 하나의 계책을 내놓기 위해 입을 열었다.
"승상께서는 조금도 염려하지 마십시오. 이곳 태수 서영에게 영을 내리시
어 형양성 밖의 요지에 군사를 매복하게 하십시오. 조조군이 서영의 매복
군을 지나치도록 그대로 두시고 우리가 그들과 싸울 때 서영군이 일제히
그 뒤를 공격하면 앞뒤로 적을 맞은 조조군은 크게 패할 것입니다. 그이후
에는 감히 뒤쫓는 군사가 없을 것입니다."
동탁은 즉시 서영을 불러 이유의 계교대로 지시하고 따로 여포에게도 정병
3만을 주어 추격해 오는 조조를 막게 했다. 여포가 동탁의 명을 받아 막
진을 벌이자 과연 조조군이 급히 추격해오는 것이 아닌가.
"음, 이유가 헤아린 바를 넘지 못하는구나."
여포가 혼자말처럼 중얼거리며 군사를 배치하고 싸울 채비를 갖추었을 때
였다. 조조가 말에 채찍을 휘두르며 큰 소리로 여포를 꾸짖었다.
"이 역적 여포야, 천자를 핍박하고 백성들을 끌고 대체 어디로 가려하느
냐?"
여포도 채찍을 들어 조조를 가리키며 맞받았다.
"주인을 배반한 놈이 이제 죽을 마당에 무슨 망령된 말을 하느냐!"
그러자 조조의 등뒤에서 하후돈이 창을 치켜들고 여포에게로 나는 듯이 말
을 몰았다. 하후돈이 여포와 맞서 싸우기 수 합이 되기도 전이었다. 홀연
왼편에서 이각이, 오른편에서는 곽사가 군사를 이끌고 나왔다. 조조는 그때
서야 적의 계교를 간파하고 크게 당황하여 하후연과 조인으로 하여금 그들
을 맞아 싸우게 하였다. 그러나 조조가 세 방면에서 쳐들어오는 여포.곽사.
이사의 군세를 대적하기에는 중과부적이었다. 더욱이 여포를 당해내지 못
한 하후돈이 말머리를 돌리자 여포는 승기를 잡고 그를 급히 추격했다. 한
번 밀리기 시작한 조조의 군사는 걷잡을 수 없이 무너져 갔다. 이미 대세
가 기울어 싸움을 돌이킬 수 없음을 알아차린 조조는 급히 퇴각명령을 내
려 형양성을 버리고 달아났다. 조조가 어는 산기슭에 당도하여 말을 세우
니 시각은 이경쯤 되었으나 달이 밝아 대낮 같았다. 하루 종일 싸우고 쫓
기느라 지치고 허기진 조조의 군사들이 막 솥을 걸고 밥을 지으려 할 때였
다. 사방에서 함성을 지르며 그때까지 매복해있던 서영의 군사들이 덮쳐왔
다. 싸우면서 피하고 달아나다 다시 싸우는 조조의 주위에는 이제 10여명
남짓한 군사밖에 따르지 않았다. 장수들은 난전 속에 뿔뿔이 흩어져 조조
의 주변에는 한 사람도 보이지 않으니 참으로 일생일대의 처절한 패배였
다. 말과 사람이 모두 상처를 입고 기진맥진하였는데 남아 있는 것이라곤
제대로 걷지도 못하는 군사들 뿐이었다. 단신으로 동탁을 죽이려다 실패하
고 천하의 제후들을 모아 급기야는 동탁으로 하여금 수도 낙양을 버리고
장안으로 천도하게 만든 조조가 아니었던가. 원소를 맹주로 하였다고는 하
나 그때마다 조조가 계교를 내어 실제로 제후들을 지휘한 사람은 조조 바
로 그였다. 그러한 조조가 필마단신으로 지금까지 숨어서 기다리던 서영의
새로운 군사를 만났으니 어찌 대적이나 해 볼 수 있으랴.
사라진 대의명분을 얻은 손견
조조는 서영을 피해 말머리를 돌려 달아나다가 오히려 서영과 정면으로
맞닥뜨렸다. 조조는 기겁을 하여 다시 오던 길로 달아나는데 서영이 마상
에서 쏜 화살이 조조의 한쪽 어깻죽지에 꽂혔다.
"앗!"
조조는 어깨가 잘려나가는 듯한 아픔을 느끼면서 말의 목을 꼭 끌어 안고
엎드렸다. 서영이 쏜 두 번째 화살이 '윙'하고 귓전을 스치고 날아갔다. 조
조는 어깨의 화살을 뽑을 겨를도 없이 그대로 말을 달렸다. 어깨에서 흐르
는 피가 말의 갈퀴와 안장을 적셨지만 말을 박차며 달리고 또 달렸다. 얼
마나 달렸을까. 마악 언덕길로 피해 달아날 때였다. 돌연 숲속에서 인기척
이 나더니, 고함 소리가 들렸다.
"앗, 조조다."
서영의 군사들 중 한무리가 미리 매복해 조조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군사들이 일시에 쏟아져 나와 창으로 찌르자 말이 창에 찔렸다. 말은 울부
짖으며 앞다리를 들고 곧추섰다. 조조는 말등에서 뒤집히며 땅바닥으로 떨
어졌다. 뜻밖의 일이었다. 이미 서영의 화살에 심한 상처를 입은 조조는 말
에서 떨어지는 순간 기력이 다하여 축 늘어졌다. 간신히 죽음의 구렁텅이
에서 몸을 빼낸 조조였지만 이제는 마지막 순간을 눈앞에 두고 있었다. 그
러나 조조는 아직 그 명이 다할 때가 아니었던지, 아니면 하늘이 보살핌인
지 그 순간에 뜻밖의 일이 벌어졌다. 조조의 아우 조홍이 난군속에서 가까
스로 목숨을 건져 홀로 산중을 헤매다 문득 귀에 익은 말울음소리를 듣고
급히 그쪽으로 달려온 것이다. 그때 말과 함께 쓰러져 있는 조조에게 서영
의 군사들이 달려들려는 순간이었다. 조홍은 깜짝놀라 바람같이 달려가 한
군사는 뒤에서 칼로 후려치고, 덤벼드는 또 한 군사는 정수리를 쳐 거꾸러
뜨렸다.
"형님, 정신차리십시오. 홍입니다."
조조가 얼른 고개를 들어보니 바로 조홍이 아닌가. 조조는 저승길에서 마
치 부처라도 만난 듯이 반가웠으나 몸을 추스릴 수 없었다.
"급합니다. 어서 말에 오르십시오. 저는 걸어서 따르겠습니다."
"난 이제 틀렸다. 아우나 빨리 이곳을 빠져 나가거라. 화살을 맞은 데다 말
굽에 가슴을 밟혀 숨쉬기가 어렵다. 그러니 어서 너만이라도 달아나 후일
을 도모하도록 하라."
조조가 고개를 흔들며 말하자 조홍은 조조를 말 잔등 위로 들어올리며 말
했다.
"천하를 위해 이 홍은 없어도 되지만 형님은 아니 됩니다."
조홍은 이렇게 말하며 입고 있던 투구와 갑옷을 벗어 몸을 가볍게 하였다.
조홍이 그렇게 말하자 조조도 힘을 얻은 듯 몸을 일으켰다.
"알았다. 만약 내가 목숨을 보전한다면 오로지 네 덕이다."
조홍은 칼을 빼들고 말고삐를 잡은 채 달리기 시작했다. 얼마나 달렸을까.
어느덧 산의 내리막이 끝나고 훤히 트인 벌판이 나타났다. 벌판을 한동안
달리니 앞에는 큰 강이 가로막혀 있는데 뒤에서는 추격해 오는 적병들의
함성이 들려오고 있었다. 진퇴유곡이었다. 어느 새 밤이 깊어 사경이 되었
을 때였다. 조조는 앞을 가로막고 있는 강물을 보자 길게 탄식하며 말했
다.
"아아 , 내명수는 이제 끝난 모양이구나. 나를 말에서 내려다오. 적군의
손에 죽느니 차라리 자결을 해야겠다."
조홍은 조조를 말 위에서 부축해 내린 뒤 힘찬 목소리로 말했다.
"심약한 말씀 마십시오. 궁하면 통한다고 하였습니다. 운명은 하늘에 맡기
고 이 강을 건넙시다."
조홍은 몸에 지니고 있는 무거운 물건들을 전부 버렸다. 그러고는 칼을 입
에 물고 조조를 업은 후 탁류 속으로 뛰어들어 헤엄치기 시작했다. 물살이
빨라 그들은 금세 하류로 떠내려갔다. 마침내 맞은편 언덕이 눈앞에 보였
다. 조홍은 있는 힘을 다해 헤엄을 쳤다. 맞은편 언덕이 손에 잡힐 듯 가
까워졌으나 그곳에 당도하기까지는 쉽지 않았다. 사나운 물결이 둔덕에 부
딪쳐 소용돌이를 이루며 흐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문득 맞은편 언덕을
보자, 그나마 남아 있던 실낱 같은 희망이 사라졌다. 언덕 위에는 서영의
일개 부대가 조그만 진지를 구축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 앞쪽에는 강을 감
시하기 위한 듯 두 명의 군사가 강 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들 군사들은
조조 일행을 발견한 듯 고함 소릴 내는가 싶더니 곧바로 진지 쪽에서 여러
명의 병사가 달려나와 활을 쏘아댔다. 수많은 화살이 바람을 가르고 날아
와 강물 위에 떨어졌다. 이때 조홍은 조금씩 앞으로 나아가 강가에 닿았으
나 앞뒤로 떨어지는 화살을 피하기 위해 죽은 듯이 엎드려 있었다. 그런데
멀리 강의 상류 쪽에서 한 무리의 군사가 강을 따라 내려오는 것이 보였
다. 훤히 밝아오는 하늘 아래 펄럭이는 기치를 보니 그것은 어김없는 형양
태수 서영의 병력이었다. 조조를 찾아 강을 건너 추격해 온 것임에 틀리없
었다. 조홍은 이제 죽은 척하고 엎드려 있을 형편도 아니었다. 조홍은 벌
떡 일어나 전후좌우로 칼을 휘두르며 쏟아지는 화살을 막으며 달리기 시작
했다. 조조도 죽을 힘을 다해 달렸다. 두 사람인지 한 사람인지 멀리서 볼
때는 분간할 수 없을 만큼 엉켜붙어 달리고 있었다. 그때 한 줄기의 흙먼
지를 일으키며 이쪽으로 달려오는 10여기의 군사가 눈에 들어왔다. 어젯밤
부터 조조의 행방을 애타게 찾아다니던 하하돈과 하후연이었다.
"서영은 주공을 범하지 말라!"
하후돈.하후연은 나는 듯이 달려와 서영의 군사를 덮쳤다.
"이 패잔병들아. 마지막 발악을 하려느냐. 내 칼을 받으라!"
서영이 몇 남지 않은 패잔병 정도로 가볍게 여기는 듯 기세 좋게 하후돈에
게 달려들었다. 하후돈이 창을 치켜들고 말을 달려 서영을 가로막았다. 몇
합 부딪치지 않아 하후돈의 창에 서영이 말 아래로 굴러 떨어지니 대장을
잃은 서영의 졸개들은 싸울 엄두를 내지 못해 달아나고 말았다. 하늘이 도
왔음인지 위기일발의 사지에서 벗어난 조조 일행이 한참을 달리고 있는데
또 한 떼의 군마가 다가왔다. 조조가 놀라 그들을 자세히 살펴보니 다행히
도 그들은 조인.이전.악진일행이었다. 조인 등은 조조가 무사한 것을 보고
눈물을 흘리며 기뻐했다 조조가 그들을 보며 혼자말로 중얼거렸다.
'아, 내가 헤아림이 모자랐구나. 장수된 사람은 죽음을 가볍게 여겨서는
아니 되거늘, 만일 어젯밤에 절망하여 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면 이들을
어찌 볼 수 있었을 것인가!'
구사일생으로 간신히 목숨은 건졌으나 조조의 심경은 참으로 견디기 어려
울 만큼 착잡했다.
'앞뒤를 가리지 않았던 무모한 진병으로 군사들만 많이 죽였구나....!'
조조가 남은 군사를 수습해보니 1만여명의 병력이 고작 5백 명을 넘지 못
했다. 그는 침통한 얼굴로 탄식하고 좌우의 신하들을 둘러보며 말했다.
"일단 하내군으로 피신하여 후일을 도모하자."
5백 명도 되지 않는 초라한 군사를 거느린 조조는 낙양으로 가는 대신 하
내를 향해 말머리를 돌렸다. 동탁과 여포를 잡을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눈앞에 두고도 결단을 내리지 못한 제후들에 대한 실망과 분노가 마음 소
게 자리잡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한편 낙양은 아직도 검은 연기와 희뿌연
먼지로 가득 차 있었다. 제후들은 제각기 진영을 정하고 군사를 풀어 불을
끄며, 시가를 정돈하고 있었다. 손견은 옛 조정의 건장전터에 군막을 치고
폐허가 된 궁궐을 대대적으로 손보기 시작했다. 대궐 마당에 산더미 같이
쌓인 기와 조각이며 불타다 남은 목재 등을 쓸어 없애고, 동탁이 파헤친
능침을 복구케 하였다. 또한 태묘터에 임시로 3간 사당을 짓고 여러 제후
들을 청하여 역대 황제의 신위를 모시고 제사를 지냈다. 이때 제후들에게
전령의 보고가 들어왔다.
형양 땅에서 조조군이 전멸하다시피 참패한 후, 하내로 피신하였다 합니
다."
제후들은 그 소식에 어두운 기색으로 서로 얼굴을 마주보았다. 그러자 원
소는 입가에 냉소를 띠며 입을 열었다.
"동탁이 낙양을 버린 것은 힘이 없어서가 아니라 이유가 간하자 그 말을
좇은 것이다. 그것도 모르고 불과 1만여 명으로 그들을 섬멸하려 덤볐으니
분별없는 혈기가 아닌가."
원소는 제후들의 맹주로서 함께 진격하여 싸움을 돕지 않아 패배한 조조를
안타깝게 여기기는커녕 오히려 패전을 비웃었다. 그렇게 되니 뜻을 같이하
자던 제후들은 이미 동지도, 맹주도 아니랄 수밖에 없었다. 제사가 끝난
뒤 모든 제후들은 각기 자신들의 진지로 돌아갔다. 손견 역시 군막에 ㄷ르
어 잠을 청했으나 마음이 심란하여 잠을 이루지 못했다. 손견이 밖으로 나
와 건장전의 돌층계에 앉아 북녘 하늘을 바라보노라니 천자를 상징하는 자
미원별 주위에 희뿌연 기운이 가득 서려 있었다.
'제성이 밝지 못하니 역적은 나라를 어지럽히고, 만백성은 도탄에 빠져 낙
양은 텅빈 황무지가 되었구나....'
손견은 하늘을 우러러 탄식하며 눈물을 지었다. 이때 돌층계 아래에 있던
종자 한 사람이 손가락질하며 외쳤다.
"건장전 남쪽 우물 속에서 오색이 영롱한 빛이 뻗쳐올랐다가 사라지곤 합
니다. 제가 헛것을 본 것 같지는 않습니다."
손견이 한동안 그 우물을 쳐다보았다.
"너의 말을 듣고 보니 그런 것 같기도 하다. 횃불을 밝히고 우물 곳에 들
어가 보아라."
손견의 말에 우물 속으로 들어간 종자는 잠시 후 한 여인의 시체를 건져
올렸다. 시체는 꽤 오래된 듯하나 전혀 상한 데가 없었으며 창백한 얼굴은
아직도 흰 구슬처럼 아름다왔다. 내궁의 여인이 입는 옷을 입었는데 이상
하게도 여인의 목에는 자그마한 비단 주머니 하나가 걸려 있고, 백랍같이
흰 여인의 손이 그 비단 주머니를 꼭 움쳐쥐고 있었다. 죽어도 놓지 않겠
다는 일념이 엿보이는 모습이었다.
"그 주머니를 이리 가져오너라."
손견이 시체를 자세히 살핀 후 조금 물러나며 말했다. 여인의 목에서 비단
주머니를 벗겨 내어 건네자 손견은 주머니 속의 물건을 횃불에 비춰 보았
다. 그 순간 손견의 눈이 휘둥그래졌다. 비단 주머니는 금실과 은실로 수
놓여 있었고, 그 속에는 주홍빛이 감도는 작은 상자가 들어 있었다. 작은
상자에는 황금 자물쇠가 채워져 있어 무척 소중한 물건이라고 넣어둔 듯이
보였다. 손견이 손수 자물쇠를 풀고 열어보니 상자 속에는 한 개의 도장이
있었다. 보석처럼 빛나는 돌의 윗부분에는 다섯 마리의 용이 새겨져 있었
다. 그 크기는 아래위가 각기 네치 정도로 윗부분에는 서로 엉킨 다섯마리
용이 아로새겨져 있고, 약간 떨어져 나간 한쪽 모서리에는 황금으로 봉을
박아 메워 놓았으며 인면에는 전자로 글이 새겨져 있었다. 손견은 이 진귀
한 물건을 보자 짚히는 데가 있어 장수 정보에게 물었다.
"이것이 무엇인가?"
손견이 도장을 내밀며 물었다. 정보는 학식이 있는 인물이었다. 손에 들고
자세히 살펴 보더니 소스라쳐 놀라는 것이었다. 정보는 손바닥위의 도장을
바라보며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이것은 전국의 옥새입니다. 틀림없는 옥새입니다."
"무엇이, 전국 옥새라고?"
"네, 그러합니다. 이것을 자세히 살펴보십시오."
정보는 횃불 가까이 옥새를 가져가 밑바닥에 뚜렷이 새겨진 전자의 글을
소리내어 읽었다.
수명어천 명을 하늘에서 받았으니,
기수영창 길게 영원히 번창하리.
"옛날 형산에 살던 변화란 사람이 봉황새가 돌 위에 사는 것을 기이하게
여겨 돌의 중앙부를 잘라 내었다고 합니다. 잘라 낸 그돌을 초나라 문왕께
바치자, 문왕은 세상에 드문 보석이라 하여 소중히 간직했다 합니다. 그
후 시황제께서 솜씨좋은 옥공을 불러 갈고 닦게 하여 방원 네치의 옥새로
만들었습니다. 이 옥돌이 그 옥새이옵니다. 여기 새긴 글씨는 당대의 명문
이사가 쓴 것입니다."
"음-"
"그 뒤 진시황 28년에 시황제께서 순시차 동정호를 건너다 풍랑을 만나 배
가 뒤집힐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시황제께서 급히 이 옥새를 호수에 던지
자 풍랑이 멈췄다고 합니다. 천자의 위엄이 능히 용왕을 물리친 것이라 여
겨 모두 놀라고 신기하게 여겼습니다. 또한 38년에 시황제께서 순시차 화
음따에 이르자 낯선 자가 옥새를 들고 길을 막아서더니 시종에게 말하였습
니다.
'이것을 조룡(진시황)께 돌려드리고자 합니다.' 하며 옥새를 건네 준 후
자취도 없이 사라지니, 이 옥새는 다시 진나라로 돌아왔다 합니다. 그 이
듬해에 진시황이 붕어하신 후에 자영이 옥새를 우리 한나라 고조께 바쳤습
니다. 그 이후 왕망이 반역을 일으키자 또 한차례 변이 일어났습니다. 효
원 황태후께서 이 옥새를 내어 줄 때 왕망의 심복인 왕심과 소헌을 이 옥
새로 내리쳐 한 귀퉁이가 깨어진 것을 이렇게 금으로 때웠습니다. 그 후에
광무제께서 의양에서 이 보물을 회수해 오늘날까지 대를 이어 간직해 왔었
습니다. 근래에 들으니 십상시 난 때 소제께서 그들에게 이끌려 북망산에
갔다 환궁해 보니 옥새가 없어졌다 하였습니다."
정보가 여기까지 얘기한 후 손견의 귓전에 소근거렸다.
"이 옥새는 하늘에서 내리신 것입니다. 태수로 하여금 구오(황제를 나타내
는 수)의 자리에 오르시게 하여 자손만대로 대통을 잇게 하시려는 상서로
움에 틀림없습니다. 이곳에 오래 머물러 계실 것이 아니라, 급히 강동으로
돌아가셔서 대사를 도모하시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일찍부터 손견의 야심을 알고 있던 정보의 거리낌없는 진언을 듣자 손견도
마음이 크게 움직였다. 손견은 굳게 결심한 듯 고개를 끄덕이고 나서 문득
주위의 부하들에게 엄하게 일렀다.
"오늘 일은 결코 입밖에 내지 말라. 만일 누설하는 자가 있으면 목을 칠
것이니 그리 알라."
이으고 밤이 깊어갔다. 손견은 자기의 군막에 돌아와 잠이 들었으나, 정보
는 여러 장수들과 군사들에게 은밀히 일렀다.
"주공께서 갑자기 병환이 나시어 내일 진영을 거두고 급히 강동으로 떠나
야 할 것 같으니 그리 알라."
정보는 병을 핑계로 밤중에 길 떠날 준비를 하게 했다. 그러나 손견의 부
하중에는 원소와 같은 고향 사람이 있었다. 그는 이 비밀을 원소에게 전해
많은 상금을 받을 욕심으로 그날 밤 몰래 원소의 진영으로 찾아가 은밀히
뵙기를 청했다. 원소는 같은 고향 출신인 손견의 수하 한 사람이 뵙기를
청한다는 시종의 전갈에 괴이쩍게 여겼으나 심상치 않은 느낌이 들어 그를
군막 안으로 불러들였다.
"어찌하여 이 깊은 밤에 나를 찾았느냐?"
"손 장군께서 조금 전 옥새를 얻으셨습니다."
"뭐? 옥새를 ?"
원소가 크게 놀라 반문했다. 그 군사는 조금 전 있었던 일을 자세히 원소
에게 알려 주었다. 원소는 그 군사에게 많은 상금을 주고 자기의 진영에
숨겨 두었다. 날이 밝자 손견이 원소를 찾아와 작별을 고했다.
"요즘 잔병이 많아 군무가 몹시 고달프게 여겨집니다. 잠시 장사로 가 정
양하고자 하직 인사를 올리러 왔습니다."
원소는 손견이 천연덕스럽게 말하자 크게 웃었다.
"장군께서는 이 견이 하직 인사를 하는데 어찌하여 웃음으로 무안을 주시
오.?"
"하하하....내가 알기로는 공의 병은 전국의 옥새 탓이 아닌가 하오?"
손견의 안색이 금세 달라질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시치미를 떼고 다시 물
었다.
"아니, 그게 무슨 말씀이오?"
"지금 우리가 군사를 일으켜 역적을 치려함은 한나라를 도와 종묘사직을
올바르게 세우기 위함이었소. 옥새는 조정의 보물이니 마땅히 조정에게 되
돌려 주어야 할 것이오. 신하된 자가 사사로이 지닐 물건이 아니오. 그런
데 어찌하여 옥새를 숨겨 고향으로 돌아가려 하시오?"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손견은 여전히 시치미를 뚝 떼었다.
"건장전 우물에서 건져 올린 여인의 시체에서 나온 것이 무엇이요?"
손견은 찔끔했다. 도대체 알 수 없는 일이었다. 어찌하여 옥새의 비밀을
원소가 알고 있다는 말인가. 그러나 이미 시치미를 뗀 이상 그대로 뻣대는
수밖에 없다고 여긴 손견으로선 짐짓 화난 목소리로 말했다.
"나는 모르는 일이오. 그런 건 도시 본일도 없소이다."
손견이 딱 잡아떼자 원소가 다소 노기 서린 목소리로 말했다.
"공이 옥새를 내어놓지 않음은 마음 속에 딴 뜻을 품고 있음이 아니고 무
엇이오?"
"말씀이 너무 지나치십니다. 왜 생사람을 잡으려 하시오?"
"닥치시오. 빨리 내놓으시면 스스로 화를 당하는 일은 면할 것이오."
"내가 만약 그것을 숨겼다면 뒷날 제명에 죽지 못하고 칼과 화살에 맞아
비명에 죽고 말 것이오."
손견이 하늘을 가리키며 맹세까지 했다. 사정을 알리 없는 여러 제후들이
그것을 보자 손견의 편이 되어 원소를 말리려 들었다.
"저렇게 맹세까지 그의 말이 맞는 것 같소."
그러자 원소가 어제 어젯밤에 온 손견의 부하 군사를 불러냈다.
"어젯밤 우물 곁에 이 군사가 있었소, 없었소?"
원소의 말에 손견이 보니, 우물에서 궁녀의 시체를 건져 낼 때 있었던 자
기의 졸개임에 틀림없었다. 손견이 배신한 군사를 보자 왈칵 화가 치밀어
솟았다.
"이놈! 있지도 않은 일을 만들어 이간질이나 하려 드느냐?"
손견이 칼을 빼들어 그를 죽이려 했다. 그러자 원소도 지지않고 칼을 빼들
며 소리쳤다.
"이 군사를 죽이려 함은 바로 입을 막아 나를 속이려는 것이다. 어찌 함부
로 칼을 빼드느냐?"
이때 원소의 상장인 안량과 문추가 원소의 등뒤에서 눈을 부라리고 있다가
원소가 칼을 빼들자 그들도 각기 칼을 빼들었다. 손견의 장수 정보.황개.
한당 등 일당백의 용장들도 칼을 뽑아들고 손견을 호위하고 나섰다. 깜짝
놀란 것은 여러 제후들이었다. 원소와 손견 사이에 옥새가 어떻고 하며 험
한 말이 오고 갔지만 영문을 알 수 없어 어리둥절해 있을 뿐이었다. 기주
의 장수들과 강동의 장수들이 서로 칼을 뽑아 겨루려하니 사태가 심상치
않았다. 제후들은 일제히 일어나 칼을 맞겨눈 가운데로 뛰어들었다. 제후
들의 한 패는 원소를, 다른 한 패는 손견을 제지하며 말렸다. 손견은 마지
못하는 척하며 그 자리를 재빨리 빠져 나왔다. 손견은 자신의 진지로 돌아
와 지체하지 않고 군사를 거두어 강동으로 떠났다. 손견이 군사를 이끌고
자기의 고향으로 돌아갔다는 것을 뒤늦게 안 원소는 크게 노해 형주자사
유표에게 밀서를 보냈다. '손견이 옥새를 가지고 도주하고 있으니 길을 막
고 있다가 옥새를 빼앗으라'는 내용이었다. 원소는 하내에 있는 조조에게
사람을 보내어 손견의 옥새 문제를 조조와 의논할 마음으로 낙양으로 청했
다. 조조가 원소의 부름을 물리치지 못해 약간의 군사를 이끌고 낙양에 당
도하니 여러 제후들은 소연을 베풀고 조조를 대접하며 위로했다. 몇 순배
의 술이 돌자 분연히 일어나 입을 열었다.
"내가 대의를 세우고 역적 동탁을 치려고 할 때 제공께서도 뜻을 같이 하
여 군사를 일으키었소. 그 동안 험난한 고비를 겪으며 낙양에 당도했으나
동탁은 장안으로 떠난 뒤였소. 그때 나는 마음 속으로 동탁을 추격하면 얼
마든지 그를 잡을 수 있다고 생각하고 작전을 세우고 있었소. 즉 맹주 원
공께선 하내의 군사를 이끌어 맹진과 산조 땅을 지켜 장안의 한쪽 팔을 묶
어 두고, 또 다른 여러 제후들께서는 성고 땅을 굳게 지키되 오창산에 진
을 치고 환원과 대곡의 험준한 요새를 제압하면서, 원술 장군은 남양의 군
사들로 단수.석현에 주둔한 후에 무관으로 진격하여 장안을 외딴 섬처럼
고립시키고, 이어 장안의 동쪽과 서쪽, 북쪽을 지키는 경조와 우풍익.좌부
풍.등 삼보군을 진동시키고 싶었소. 군사는 움직이지 않고 길게 호를 파서
보루를 높이 쌓은 후, 군사가 헤아릴 수 없이 많은 것처럼 보이게 하여 의
병(적을 의혹시키는 군사)전술로 적을 위협하여 대세가 기울어진 것처럼
과시했다면 역적 동탁을 능히 평정할 수 있었을 것이오. 그러나 제공께서
는 주저하며 이곳에 머무르시고 나아가지 않아 천하의 기대를 저버렸으니
어찌 한탄할 일이 아니오. 이 조조는 참으로 부끄럽기 짝이 없소이다."
사리에 한 치도 어긋남이 없는 조조의 진심을 듣자 원소를 비롯한 모든 제
후들은 어느 누구도 입을 열지 못했다. 어느 한 사람 지난 일에 대한 솔직
한 반성도, 그렇다고 이제라도 분연히 진격하자고 하는 이도 없이 좌중은
그저 조용하기만 했다. 이윽고 연회는 무거운 침묵속에서 어색하게 끝나고
말았다. '원소를 비롯한 모든 제후들이 각기 서로 엉뚱한 뜻을 품고 있어
능히 함께 큰 일을 도모하지 못하겠구나.'
조조는 생각이 이에 미치자 지체하지 않고 남은 군사를 수습하여 양주를
향해 떠났다. 공손찬도 군사들을 이끌어 북평으로 돌아갔다.
백마장군 공손찬과 상산의 조자룡
원소의 꾐에 빠져 한복은 기주를 빼앗기고 공손찬은 원소와 반하교에서
일전일퇴의 공방을 거듭한다. 죽음의 위기에 몰린 공손찬은 조자룡을 만나
목숨을 구하나 다시 패전에 이른다. 이때 유비,관우,장비의 구원병이
달려와 싸움은 잠시 중단된다.
조조와 손견 그리고 공손찬마저 군사를 거두어 낙양을 떠나자 원소도
하는 수 없이 진영을 거둔 후 하내로 이동했다.
원소 또한 워낙 대군을 거느리고 있는 터라 양초가 부족해 군사를
보존하기가 어려웠다.
그때 기주 목사 한복이 원소에게 군량미를 보내어 군용에 보태 써라
했다. 원소는 한복에게 실로 엄청난 신세를 지게 된 셈이었다.
그러나 한복은 스스로 베풀었던 은혜가 역으로 화가 되어 되돌아올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이때 모사 봉기가 조용히 원소에게 진언했다.
"천하를 종횡하는 대장부가 어찌 남이 보내주는 양식만을 의지하고
있어서야 되겠습니까? 기주는 땅이 넓고 곡식과 물자가 풍부하니 차제에
기주를 취해 장래의 발판으로 삼아야 합니다."
"그렇게 된다면야 오죽이나 좋겠소. 하지만 어떻게 그 땅을 취한단
말이오?"
원소가 탄식하며 말했다.
"먼저 북평의 공손찬에게 은밀히 사람을 보내시어 함께 기주를 쳐 이를
반씩 나누어 다스리자고 권하는 것입니다. 공손찬은 주공의 제안에 따라
틀림없이 군사를 일으킬 것입니다."
"그런 연후에는?"
"공손찬이 군사를 일으키면 주공께선 한복에게 은밀히 사람을 보내
공손찬의 거병을 알려 주십시오. 그리하면 한복은 반드시 주공께 구원을
청할 것이며, 일이 이에 이르면 기주는 이미 주공의 것이 된 바와
다름없습니다."
"음-. 과연 신통한 계책이군."
원소는 무릎을 치며 기뻐했다. 그날로 북평태수 공손찬에게 밀서를
보냈다.
공손찬은 이 밀서를 받고 크게 기뻐했다. 함께 기주를 쳐서 그 땅을
나누어 갖자는 내용이었으므로 주저할 이유가 없었다. 기주는 공손찬이
이전부터 탐내고 있던 땅이었으나 한때 동지였던 한복이 태수로 있는 터라
먼저 나서서 기주를 치자고 하니 좋은 구실까지 생긴 셈이었다.
공손찬은 즉시 군사를 일으킬 준비를 서둘렀다.
한편, 원소는 다시 밀서를 한복에게 보냈다. 한복은 원소로부터 온
밀서를 받고 급히 펼쳐 보았다.
북평태수 공손찬이 몰래 대군을 일으켜 기주를 공격하려 하니 그 대비를
하도록 하오.
물론 원소가 공손찬을 사주한 사실을 알 리 없는 한복은 크게 놀라 여러
신하들과 더불어 대책을 의논했다.
모사 순심이 먼저 입을 열었다.
"공손찬이 연주와 대주의 무리를 거느리고 달려온다면 그 예봉을 꺾기가
어려울 것입니다. 더구나 공손찬의 진중에 유비,관우,장비 등의 맹장이
합세하게 되면 더욱 감당키가 어려울 것입니다. 고맙게도 이번에 우리에게
공손찬의 침범을 미리 알려 준 원소는 지혜와 용맹이 출중한데다 휘하에
이름난 장수 또한 많습니다. 장군께서 사람을 보내 기주를 함께 지키자고
청하시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그는 반드시 달려와 장군을 도울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공손찬쯤은 걱정하실 필요가 없을 것입니다."
한복이 듣기에도 순심의 의견이 백번 옳은 것 같았다. 즉시 별가 관순을
불러 원소에게 원병을 청하려 보내려는데, 장사 경무가 분연히 일어나
자못 격앙된 목소리로 한복에게 간했다.
"원소는 지금 외로운 나그네의 신세인데다 그 군사는 주리고 헐벗은
상태입니다. 군량이 떨어져 마치 갓난아이가 눈치보듯 우리의 동정만
살피고 있는 중입니다. 우리가 군량을 대어 주지 않으면 원소는 마치 젖
없는 아기처럼 저절로 굶어 죽을 처지인데 어찌하여 그에게 의지하려
하십니까? 부디 깊이 살피시어 행하심이 좋을 듯합니다."
그러나 이미 원소에게 의지할 것을 작정한 한복이었다. 한복은 경무의
말에 웃으며 대답했다.
"경무는 너무 격하지 말라. 나는 본디 원씨네 가문에서 벼슬을 지낸
사람이었다. 도한 재주와 힘이 원소에게 미치지 못한다. 옛말에도 어진
이를 가려서 다스림을 양보하는 것은 군자의 법도라 하였다. 그대들은
어찌 아녀자들처럼 그리도 마음이 좁아 원소를 질투하는가?"
여러 신하들 사이에도 한복의 말이 옳다는 의견과 경무의 말에 따라야
한다는 사람이 있어 의견이 분분했다. 그러나 한복은 기어이 관순을
원소에게 보내어 구원병을 청하게 했다.
경무는 한복의 앞을 물러나 하늘을 보며 한탄했다.
"아, 양 떼 속으로 승냥이를 불러들이는구나. 이제 기주도 이것으로
그만이로다."
결국 경무의 충언이 받아들여지지 않자 벼슬을 버리고 떠나는 한복의
신하들이 서른 명을 넘었다.
그러나 오랫동안 충의로 한복의 명을 거역하지 못해 원소의 진중으로 가
구원을 청했으나 관순도 경무와 같은 생각을 가졌던 신하였다.
경무와 관순 두 사람은 성밖에 숨어 원소가 기주에 들어오기를 벼르며
기다리고 있었다.
마침내 원소가 기주에 들어오는 날이었다. 경무와 관순은 나라가 망하는
꼴을 그냥 보고 있을 수만 없어서, 길목을 지키고 있다가 칼을 빼들고
원소에게 덤벼들었다.
그러나 원소를 죽여 기주를 구하려는 충성심이 가상했으나
역부족이었다. 그들은 항상 그림자처럼 호위하던 원소의 상장 안량과
문추의 단칼에 힘없이 목숨을 잃고 말았다.
원소는 위풍 당당히 기주성에 입성했다. 태수 한복 이하 군신들이 성벽
위에 정기를 게양하고 원소를 국빈으로 영접했다.
원소는 성 안으로 들어오자 즉시 승냥이의 마음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원소는 성청에 좌정하며 외쳤다.
"먼저 정사를 바르게 하는 것이 나라의 토대를 굳건히 다지는
첫걸음이다."
이어 한복을 분위장군에 명하고 스스로는 기주목이 되었다. 그리고
심복인 전풍,저수,허유,봉기등에게 기주를 다스리는 행정을 맡게 했다.
한복의 벼슬은 실제 권한을 모조리 빼앗긴 허울 좋은 이름뿐이었다.
한복은 그제서야 자신의 어리석음을 뉘우쳤으나 이미 때는 늦었다.
'아아, 이제야 경무의 말이 옳았음을 알겠구나.'
한복의 생각이 이에 미치자, 이곳에 머물러 있다가는 언제 목숨마저
빼앗길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복은 일가권속을 버려 두고 몰래
기주를 도망쳐 진류태수 장막에게 몸을 의탁했다.
한편, 북평의 공손찬은 원소와의 밀약을 태산같이 믿고 군사를 일으켜
진군하기 시작했다. 그라나 기주는 이미 원소의 손아귀에 들어가 있음을
알게 되자 아우 공손월을 원소에게 보냈다. 비록 싸우지는 않았으나
원소가 먼저 청한 일이니 약속대로 기주 땅을 반분해 달라고 요구하기
위해서였다.
원소는 시치미를 떼고 듣기 좋은 말로 대답했다.
"나라를 나누는 일은 중대한 문제이므로, 그대의 형을 직접 만나
의논하겠소."
공손월은 원소의 말을 의심하지 않았다. 약속을 지키지 않겠다는 것도
아니었으며, 원소의 말처럼 나라를 나누는 일이 중대한 일인만큼 형
공손찬과 의논하겠다는 말이 옳은 것이라 여겼다. 공손월은 후한 대접을
받고 원소에게 작별을 고한 뒤 말을 몰았다.
공손월이 채 50리도 달리지 못했을 때였다. 돌연 길 옆 숲 속에서
한무리의 군마가 쏟아져 나왔다.
"우리들은 동 승상의 명을 받은 장수들이다."
이렇게 외치며 쉴새없이 화살을 쏘아댔다. 불시에 당한 일이라 공손월은
제대로 몸을 피할 겨를도 없었다. 더구나 사신으로서 잠시 다녀오는 길로
여겨 싸울 채비도 제대로 갖추지 못하고 있었던 공손월은 날아오는 화살이
온몸에 꽂혀 고슴도치와 같은 모습으로 무참히 죽고 말았다. 요행이
목숨을 건진 시종이 공손찬에게 이 소식을 전하자 공손찬은 대로했다.
공손찬은 자기 아우를 죽인 자가 원소라는 걸 대뜸 알아차렸다. 장안에
있는 동탁이 군사를 보내 그곳에 숨겼다가 자기 아우를 죽일 리가 없기
때문이었다.
"원소 그놈이 나하고 무슨 원소진 일이 있기에 나를 속여 한복을 치게
했을까? 게다가 제놈은 그 틈을 타 기주를 빼앗아 차지한 뒤에 오늘 또 내
아우를 죽이다니... 내 이 원수를 기필코 갚고 말리라!"
공손찬은 이를 갈고 소리 높여 외치며, 전군에 출동을 명했다. 공손찬의
군대가 물밀 듯이 기주로 향했다.
원소도 공손찬의 군대가 밀려온다는 소식을 듣자 기다렸다는 듯이, 즉각
대군을 거느리고 기주성밖에 진을 쳤다.
양군은 반하를 사리에 두고 진을 쳤다. 원소군은 다리의 동편에,
공손찬의 군은 다리의 서편에 포진하였다. 공손찬은 말을 몰아 반하교
한복판에 나아가 큰 소리로 원소를 꾸짖었다.
"의리부동한 놈 원소야. 네 어찌 나를 팔아 기주를 차지하고 내
아우까지 죽였느냐?"
원소도 말을 몰아 다리의 입구에 이르러 외쳤다.
"한복이 재주 없음을 알고 스스로 나에게 기주를 넘겨 주었거늘, 너야
말로 무슨 연유가 있기에 내가 너를 속였다고 야단이냐?"
"닥쳐라 원소 이놈. 지난날 네놈을 충의로운 장수로 여겨 맹주로
받들었다만, 이제 보니 승냥이 마음에 개새끼만도 못한 천하에 몹쓸
놈이로다. 음흉한 꾀로 남의 땅을 빼앗고 동탁군으로 가장시켜 사신인 내
아우까지 죽이고도 네 어찌 밝은 대낮에 낯짝을 드러내고 함부로 지껄여
대느냐."
공손찬이 더욱 큰 소리로 꾸짖자, 원소는 더 이상 말을 주고받다가는
자기의 떳떳치 못한 행적만 드러내는 결과가 되겠으므로 얼른 좌우를
둘러보며 소리쳤다.
"저런 못된 놈, 누구든 저 놈을 산채로 잡아 혀를 뽑아라!"
"제가 나가겠소이다."
원소의 말이 끝나자 기다렸다는 듯이 문추가 창을 휘두르며 다리 위로
말을 몰았다.
문추가 다리 위로 달려나오자 공손찬도 분기 충천하여 그럴 맞아 한바탕
싸움을 벌였다.
두 사람이 한동안 불꽃 튀기는 싸움을 벌였으나 공손찬은 문추를 당해
낼 수가 없었다. 20여 합을 부딪다 공손찬은 자기의 진지로 말머리를 돌려
달아났다.
"게 섰거라!"
여세를 몰아 문추는 무서운 기세로 공손찬을 추격해 왔다.
그러자 공손찬의 휘하 장병들이 문추를 에워싸고 덤볐다. 그러나 문추의
창에 찔리고 말발굽에 채여 수많은 군사들이 쓰러지는 가운데 문추는
공손찬의 중군까지 짓밟았다.
"공손찬은 빨리 말에서 내려 항복하라!"
그걸 본 공손찬 휘하의 장수 넷이 일제히 문추에게 덤벼들었다. 그러나
문추는 조금도 두려움 없이 네 장수를 맞아 싸웠다. 창과 칼이 어우러졌다
다시 갈라지기를 몇 번 하더니 문추의 창이 번쩍하는 순간 한 장수가 피를
토하며 말에서 떨어졌다. 장수 한 사람이 넘어지자 나머지 세 장수도
문추의 기세에 눌려 말머리를 돌리고 말았다.
이미 싸움은 원소군의 승리로 기울어진 것 같았다. 공손찬군은 중군까지
돌파당하니 더 이상 싸울 엄두도 못내고 달아나기에 급급했다. 난전
속에서, 문추가 다시 공손찬을 발견하고 뒤쫓자 공손찬은 급히 산골짜기로
말을 몰았다. 공손찬은 달아나기에 정신이 없어 활과 화살도 다
떨어뜨리고 투구마저 벗겨져 땅에 떨어졌다.
머리털은 흐트러져 산발이 된 채 산비탈을 향해 말을 달릴 뿐이었다.
그러나 말도 지쳤는지 앞다리가 바위에 걸리는가 싶더니 그만 앞으로
고꾸라지고 말았다. 그 바람에 공손찬은 몸이 뒤집히면서 벼랑 아래로
떼굴떼굴 굴러 떨어졌다.
'이제 끝이로구나.'
공손찬이 체념을 하면서도 사력을 다해 허리의 장검을 뽑아들고
가까스로 일어서려 할 때였다. 참으로 아슬아슬한 순간이었다.
별안간 언덕 위에서 뛰어내린 한 젊은 장수가 공손찬을 쫓는 문추의
앞을 가로막으며 장창을 겨누었다.
"문추는 내 창을 받으라!"
그 장수는 문추를 향해 또렷한 목소리로 외쳤다.
문추의 창에서 몸을 피하게 된 공손찬이 정신을 차려 자기를 구하려는
장수를 바라보니 키가 8척에 떡 벌어진 어깨가 한눈에 들어왔다. 짙은
눈썹 아래 눈매가 서글서글하였고, 얼굴이 넓고 턱은 두겹으로 두툼하여
위풍이 당당한 젊은 장수였다.
젊은 장수의 용맹 또한 공손찬이 감탄할 만큼 대단했다.
천하의 맹장 문추와 맞붙어서 50여 합을 싸웠으나 젊은 장수는 조금도
물러섬이 없이 당당히 맞서고 있었다. 창과 창이 부딪치고 어우러지며
불꽃을 뿜었다.
이때 공손찬의 휘하 장병이 공손찬을 구하기 위해 떼지어 몰려왔다.
문추는 자기와 맞서는 이 장수의 솜씨가 자기에게 손쉬운 상대가
아니라는 걸 알았다. 게다가 공손찬의 휘하 장수들이 가세하여 공격해
오자 말머리를 돌려 자기의 진영으로 꽁무니를 뺐다.
그 젊은 장수는 달아나는 문추를 바라보기만 할 뿐 굳이 뒤쫓지는
않았다.
공손찬은 그제서야 생기를 되찾고 젊은 장수에게 인사를 청했다.
"구함을 받게 되어 고맙소이다. 나는 북평의 태수 공손찬이외다. 장군의
높은 성함을 듣고 싶소?"
젊은 장수는 공손찬에게 허리를 굽혀 예를 표한 후 대답하였다.
"저는 상산, 진정 땅 사람으로 성은 조, 이름은 운이요, 자는 자룡이라고
합니다. 본디 원소의 휘하에 있었습니다만, 원소에게 충군구민(나라에
충성하고 백성을 구함)의 마음이 없음을 보고 그럴 떠나 장군을 찾아가는
길이었습니다. 그런데 뜻밖에도 이런 곳에서 만나 뵙게 되었습니다."
"아아, 상산의 조자룡! 참으로 고맙소이다. 이 공손찬이 지인을 겸비한
사람은 못 되나 그대가 나를 도울 뜻이 있다면 함께 힘을 모아 백성들의
고통을 덜어 줌이 어떻겠소?"
공손찬은 조자룡에게 치하한 후 함께 자기의 진영으로 돌아와 군사를
수습했다. 비록 첫싸움에서 패하기는 했으나 공손찬의 군세가 빈약한 것은
아니었다.
다음 날, 공손찬은 반하교로 나아가 군사와 철기병을 좌우로 나누어
진을 치게 했다. 그 형세는 가히 날개를 편 듯하였다.
더구나 한 쪽 진지의 철기병 5천여 필의 말은 태반이 새하얀 백마였다.
공손찬은 이전에 그가 오랑캐를 맞아 싸웠을 때 철기병을 편성하여 적을
격파한 적이 있었다. 그 이후 강인(오랑캐)들은 백마를 보기만 해도
달아났다.
그로부터 그의 백마진은 천하에 그 명성을 떨쳤고, 세상에서는 그를
백마장군이라 부르며 두려워하였다.
원소는 강 건너편 언덕에서 멀리 적진을 바라보고 있었다. 공손찬이
자랑하는 백마진을 좌우로 나누어 진을 편성하자 이쪽도 선봉을 두 대로
나누어 포진시켰다. 그리고는 안량,문추 두 장수를 선봉으로 삼고
궁노수(화살을 연달아 쏘는 일을 맡았던 군사) 1천 명씩을 각각 나누어
공손찬의 기마대 공격을 막도록 했다.
전투가 벌어지면 왼편 군사는 공손찬의 오른쪽 군대를, 오른편 군사는
왼편 군사에게 활로 공격하도록 했다. 또한 국의 라는 장수에게 8백 명의
궁수와 보병 1만 5천을 주어 진 앞에 배치시켜 적의 선봉 기마대가 짓쳐
들어올 때를 대비케 했다.
원소 자신은 마병과 보병 수만을 거느리고 뒤에서 응전하기 위해 철통
같은 중군을 형성했다.
이렇듯 큰 강을 사이에 두고 전투의 기세는 차츰 무르익어 갔다.
공손찬은 적의 포진을 보고 부하 대장 엄감을 선봉으로 삼았다.
스스로는 중군이 되어 마상에 앉아 싸움을 돋우었는데, 붉은 바탕에
금색으로 수놓은 '수'자 기를 말 앞에 높이 세워 기세를 과시했다.
공손찬은 어제 자신의 목숨을 구해 준 조운(자룡)을 비범한 인물로
여겼으나 아직 그의 속마음을 알 수 없어 군사 5백을 주어 후진에 머물러
있도록 하였다.
양군은 대치한 채 진시(오전 8시경)부터 사시(오전 10시경)가 되도록
흐르는 강물 소리만 들을 뿐 이렇다 할 움직임을 보이지 않았다. 원소군은
공손찬의 군대가 먼저 공격해 들어오기 전에는 꼼짝달싹도 하지 않을
기세였다. 원소는 공손찬의 백마 철기대의 명성을 잘 알고 있었기에,
섣불리 움직였다간 철기대에 유린당하기 십상인지라 먼저 공격해 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원소군의 장수 국의는 휘하의 궁수들에게 단단히 일러 두고 있었다.
"모두 방패 밑에 몸을 숨겨라. 설사 적이 활을 쏘더라도 움직이지 말라.
포향(신호용 포성)이 터지고 나의 명령이 있으면 그때 일제히 활을 쏘도록
하라."
끝내 원소군이 움직이지 않자 원소군의 대비를 알리 없는 공손찬은 먼저
원소군을 향해 활 공격을 퍼부었다. 화살이 비 오듯 날아들었으나,
원소군은 꼼짝도 하지 않았다.
공손찬은 엄강에게 출진토록 명을 내렸다.
"엄강, 그대가 저놈들을 짓밟아 버려라!"
공손찬의 명을 받자 엄강은 북과 징을 울리며 원소의 진을 향해 돌진해
들어갔다.
엄강의 군사들이 오십 보 앞으로 다리를 건널 찰나, 원소의 진영에서
돌연 천지를 진동시키면서 국의가 거느린 8백 궁노수들이 몸을 일으켜
일제히 화살을 쏘아댔다. 엄강의 군사들이 가까운 거리에 오기를 기다려
쏘아대는 화살인지라 엄강의 많은 군사들은 팔 한번 휘둘러 보지도 못하고
화살이 날아올 때마다 죽거나 상했다.
엄강은 위협을 느껴 급히 말머리를 돌리려 했으나, 뒤에는 계속 부하
군사들이 전진하고 있었으므로 쉽지가 않았다. 그러자 원소군의 장수
국의가 칼을 휘두르며 나는 듯이 달려와 엄강을 한 칼에 베어 죽였다.
그때쯤 엄강이 거느린 군사들은 적의 화살에 맞아 죽거나 상한 자가
절반이나 되었다.
대장마저 목이 달아났으니 엄강의 군사는 아우성을 치며 제각기
달아나기에 바빴다.
이를 본 공손찬의 좌우 양군이 급히 구원에 나섰다.
그러나 안량,문추가 거느린 궁노수들마저 가세하여 활을 쏘니 화살에
맞아 죽고 상하는 군사가 부지기수였다.
공손찬이 자랑하던 철기병마저 혼란에 빠져 우왕좌왕하자 사기가 오른
건 원소군이었다.
이때를 놓치지 않고 사기가 오른 원소의 중군이 함성을 지르며 구름처럼
다리를 건너기 시작했다.
선봉장 국의는 공손찬의 진문에까지 이르러 먼저 수자 기를 들고 있는
장수부터 거꾸러뜨리고 기를 빼앗아 강물에 던져 버렸다.
공손찬은 철기병을 독려하며 쏟아져 오는 적의 무리를 대적했으나
국의의 거센 맹공에 점점 밀리고 있었다.
거기다가 안량, 문추 두 장수마저 가세했다.
"저놈이 공손찬이다. 사로잡아라!"
공손찬은 하는 수 없이 달아나는 군사들 틈에 뒤섞여 황급히 말을
돌렸다.
"뒤쫓아라, 한 놈도 남기지 마라!"
어느 새 원소가 거느린 중군도 안량,문추,국의가 싸우고 있는 공손찬의
중군까지 짓밟고 후진으로 와 달아나는 적을 베었다.
공손찬은 또 한 번의 참담한 패배를 맞았다. 1진이 무너지고 2진이
궤멸당하니 중군은 도망치기에 바빴다. 달아나는 군사들도 적의 말발굽에
짓밟혀 지리멸렬이었다.
그러나 공손찬의 진중에 한 진만은 그 아수라장 속에서도 꿈쩍도 않고
있었다.
고작 5백의 군사만을 거느린 후진의 객장 조자룡의 부대였다.
"저건 뭐냐, 저놈들도 짓밟아라!"
선봉의 국의는 승세를 타고 신들린 듯이 말을 달리며 외쳐댔다.
국의가 후진을 향해 돌진하자 후진은 돌연 연꽃이 피어나듯 진영을 활짝
펼쳤다. 펼쳐진 진영을 오무리자 곧장 앞으로 돌진했던 국의의 군대가
영락 없이 포위당한 꼴이 되고 말았다. 국의가 당황하여 말머리를 돌리며
칼을 휘둘렀다. 그러자 사방에서 화살이 날아들고 창으로 찌르며 공격해
들어왔다.
국의가 말에 채찍을 가하여 황급히 포위망을 뚫으려 할 때였다.
조자룡이 백마를 달려 들이닥쳤다.
그러나 원소의 상장 문추도 꺾지 못한 조자룡의 창이었다. 창칼이 몇 번
어우러지는가 싶더니 조자룡의 창에 찔려 국의가 말 위에서 떨어져
나뒹굴었다. 조자룡의 백마는 국의가 뿌린 피로 매화꽃이 떨어진 것처럼
붉게 물들었다.
조자룡은 말머리를 돌려 마주 오는 안량,문추의 군사를 향해 돌진했다.
왼쪽과 오른쪽의 창을 번갈아 휘두르니 그가 모는 말 좌우에는 적군이
풀잎처럼 스러졌다. 마치 사람이 아니라 천신이 말을 달리는 듯했다.
조자룡의 공격에 원소군은 뒤로 물러서려 했으나, 퇴로는 반하교밖에
없었다. 그나마 반하교를 미쳐 건너지 못한 군사들이 물에 빠져 죽으니 그
수를 헤아릴 수 없었다.
한편 원소는 선봉의 이런 전투 상황을 모른 채 척후가 달려와 전한
소식에 크게 기뻐하고 있을 따름이었다.
"국의 장군께서 공손찬의 대장기를 쓰러뜨리고, 공손찬을 추격하여 적진
깊숙이 돌입하였습니다."
그 소리에 기뻐 껄껄 웃던 원소는 아무런 대비도 없이 전풍과 함께 근위
군사 수백, 궁노수 수십 기만을 데리고 싸움 구경을 나섰다.
원소는 전풍에게 호기롭게 입을 열었다.
"백마 5천 필로 모양만 그럴 듯하게 벌렸지 별 것 아니지 않은가.
공손찬이 그토록 무능한 위인인 줄은 몰랐네."
원소가 껄껄대며 호기를 부리고 있을 때였다. 갑자기 그의 주변에
화살이 소나기처럼 쏟아져 내렸다.
"아니? 이게 어찌 된 일이냐!"
싸움을 강 건너 불구경하듯 마음놓고 보고 있었던 터라 원소가 놀란것도
무리가 아니었다. 깜짝 놀라 선봉을 바라보니 이미 선봉의 군사 쪽에는
심상찮은 혼란이 이는 듯했다. 원소는 황망히 방패막이 안으로 뛰어들기
위해 좌우를 살폈다.
그와 동시에 중군 쪽에서 한바탕 어지러운 소용돌이가 이는 듯하더니
조자룡과 그의 군사가 물 속에서 치솟은 신룡처럼 원소 앞에 나타나
모습을 드러냈다.
전풍 또한 원소 못지않게 놀라 몸을 떨며 말했다.
"주공, 급합니다. 저기 반하교 다리 밑으로 잠시 몸을 피하십시오."
한편 이때 후퇴하던 공손찬도 적의 선봉이 조자룡에게 순식간에
무너지는걸 모고 다시 군사를 수습했다.
공손찬은 말머리를 되돌려 조자룡을 뒤따르며 대열이 흐트러진 원소군을
치기 시작했다.
"주공, 어서 몸을 숨기십시오."
전풍이 원소에게 재차 간했다. 그 소리에 원소는 불끈 오기가 솟구쳤다.
머리에 썼던 투구를 벗어 땅바닥에 내동댕이치면서 외쳤다.
"대장부가 전장에 나서 싸우다 죽을지언정 어찌 다리 밑으로 구구하게
몸을 숨긴다는 말이냐!"
원소는 칼을 배들고 죽기를 각오하고 적진 속으로 말을 몰았다. 이를 본
전풍과 군사들도 모두 새로운 용기를 내어 죽기를 작정하고 싸웠다.
이때 조자룡에게 밀렸던 안량과 문추도 원소와 합류하였다. 그렇게 되니
전세는 또다시 뒤집혀졌다.
아무리 용맹스럽던 조자룡이었지만 불시에 원소군이 합세하니 거느린
군사의 수가 너무 적어 중과부적이었다. 게다가 자신의 휘하 중에는 용맹
있는 장수 한 사람도 변변히 없었다. 조자룡이 원소군을 뚫지 못하고 차츰
밀리기 시작했다.
원소군은 붕괴 직전의 대세를 다시 돌이켜 공손찬의 군사를 짓쳐 들어가
어느 새 본진까지 육박해 갔다.
이날, 양군의 접전은 실로 일진일퇴의 공방을 거듭했다.
시체는 들을 메우고 피는 반하의 대하를 붉게 물들였다. 이렇듯
새벽녘에서 한낮에 이르기까지 난투와 혼전을 거듭했던 것이다.
조자룡의 활약으로 그나마 꺼져가던 대세를 만회한 공손찬이 본진에서
겨우 숨을 돌리고 있었다.
그때 느닷없이 원소를 선두로 전풍,안량,문추가 일시에 군사를 몰아오니
군사를 추스릴 여우도 없었다.
공손찬은 급히 말을 재우쳐 달아났다.
원소의 추격은 맹렬했다. 이 기세를 몰아 공손찬을 사로잡아 싸움을
끝낼 심산인지 선두에서 말을 달렸다.
그들은 무턱대고 공손찬을 뒤쫓는 원소를 향해 덮쳐들었다.
"원소야 게 섰거라. 평원의 유비 현덕이 여기 왔다!"
그들은 유현덕,관우,장비의 세 형제였다. 공손찬이 원소와 싸운다는
소식을 듣고 밤낮을 가리지 않고 달려오던 도중 원소를 만나게 된
것이었다.
유비의 쌍고검, 관우의 청룡도, 장비의 장팔사모가 일제히 원소만을
노리고 덮쳐들었다. 원소의 수하 장수들이 원소를 호위하려 했으나 세
형제의 위세를 당할 수는 없었다.
원소는 혼비백산이 되었다. 손에 들었던 보검마저 땅에 떨어뜨린 채
허둥지둥 달아나기에 바빴다.
공손찬은 그 여세를 몰아 다시 원소를 뒤쫓았다. 원소는 반하 다리에
이르러서야 부하 장수들의 호위를 받아 간신히 다리를 건널 수 있었다.
원소의 군사가 대패해 달아나니 공손찬도 본래의 진영에 다시 진을 치고
군사를 수습했다.
공손찬은 유현덕을 진중으로 이끌어 정중히 치하했다.
"만약에 그대가 와서 나를 구하지 아니했던들 지금쯤 나는 어찌
되었겠나? 낭패를 당할 뻔했소이다."
"어찌 형님께서 이 아우에게 베풀어 주신 은덕에 비할 수 있겠습니까?
제가 일찍 오지 못해 오히려 송구스러울 따름입니다."
유비는 머리를 숙이며 공손히 대답했다.
공손찬은 이어 수하 장수를 시켜 조자룡을 불러오게 했다.
"며칠 전에도 나를 위기에서 구해 준 한 젊은 장수가 있었네. 아우와
뜻이 잘 맞으리라 생각되네."
조자룡이 공손찬의 부름을 받고 오자 그를 유비에게 소개했다. 공손찬은
문추에게 쫓겼을 때부터 조자룡이 보여 준 눈부신 활약과 뛰어난 용병,
그리고 그 인품을 자세히 유비에게 들려 주었다.
조자룡은 자기를 앞에 둔 채 극구 칭찬하는 공손찬의 말을 듣게 되자
쑥스러운지 얼굴을 붉혔다.
아직 스물이 안 되어 보이는 나이에 늠름한 체격, 별같은 맑은 눈, 넓은
얼굴, 얼굴을 붉히는 동심을 바라보며 유현덕은 한없는 친밀감을 느꼈다.
유현덕은 그런 조자룡을 보며 자신도 모르게 미소지었다.
그 미소를 보자 조자룡도 고개를 숙이며 웃어 보였다.
현덕의 온화한 눈과 조자룡의 부드러우면서도 냉 한 눈길이 서로
마주쳤다.
공손찬은 유비를 가르키며 말했다.
"이분은 유비 현덕이라는 분으로 나와 호형호제의 사이라네. 오늘
평원에서 예까지 달려와 나를 구해 주었다네."
조자룡은 공손찬의 말을 듣자 몹시 놀라는 듯했다.
"그러시다면 소문이 자자한 관우,장비 두 호걸과 결의형제 맺으신
유현덕이시군요. 저는 상산 진정 태생으로 조운, 자는 자룡이라 하옵니다.
사유가 있어 공 태수님의 진중에 머물며 변변찮은 공을 세웠습니다만,
보시다시피 배운 것 없는 약관에 불과합니다. 앞으로 높으신 가르침을
받고자 합니다."
조자룡은 허리를 굽히며 정중히 예를 올렸다.
"겸손한 말씀이오. 나 역시 아직은 뜬구름과 같은 정처 없는 몸이외다.
나야말로 조 공의 가르침을 받아야지요."
유비가 조자룡을 보는 순간 오래 전부터 사귀어온 듯한 친밀감을
느꼈듯이 조자룡 또한 유비를 보는 눈이 각별했다. 두 사람은 마주본
순간부터 십년지기를 만난 듯한 마음이었다.
'비범한 인물이로다.'
유비는 그를 본 순간 마음 속으로 이렇게 되뇌였다. 유비는 비록
처음으로 본 조자룡이었으나 까닭없이 자신과는 깊은 인연이 닿아 있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이 사람이야말로 장래 천하를 다스릴 인걸이다.'
조자룡 또한 유비의 온화한 말과 인품을 보고 까닭 모를 존경심이
일어났다.
한편 원소는 싸움에 크게 패한 후, 더 이상 나서고 싶지 않아 성문을
굳게 닫아 걸고 군사를 보내지 아니하였다. 양군은 서로 맞선 채 달포
가량을 대치하고 있었다.
군웅할거 손견과 유표의 싸움
천하의 영웅들이 각기 세력 다툼에 맞물려 전쟁은 끊이지 않았다.
강동의 손견 또한 지난날의 옥새 건으로 양양성의 유표와 한판 승부를
벌인다. 큰아들 손책을 이끌고 한강에 오른 손견은 칼 한 번 안 쓰고 화살
10만 촉을 얻으며 파죽지세로 양양성을 공략한다.
원소와 공손찬이 싸워 원소가 패했다는 소식은 곧 장안의 동탁에게도
전해졌다.
그 무렵 천도 이후 시간이 지남에 따라 장안은 차츰 번화한 거리로
변모해 갔고, 질서도 크게 정돈되어 갔다. 그러나 동탁의 허세와 그
호사스러운 생활만은 이곳 장안으로 천도한 이후에도 변함이 없었다.
그는 스스로 여러 대신들을 다스리는 태정상국이라 칭하고 전권을
휘두르고 있었다.
어느 날, 모사 이유가 찾아와 고했다.
"원소와 공손찬은 당대의 호걸들입니다. 비록 일찍이 동맹군을 일으켜
승상을 거역하였으나 모두 뛰어난 영웅들입니다. 이번에 천자의 조칙을
보내어 두 사람을 화해시키십시오."
"나더러 두 사람의 화해를 주선하란 말이냐?"
"지금 쌍방이 모두 크게 상처를 입고 지쳐 있는 만큼 화해의 칙사가
내려가면 속으로는 기뻐하며 응할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승상의 권위가
만천하에 높이게 되고 승패 없는 괴로운 싸움을 피하게 된 두 사람은
승상께 감화되어 자연히 따르게 될 것이옵니다."
동탁이 듣고 보니 그럴듯한 말이었다. 동탁은 이유의 말에 기뻐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동탁은 즉시 천자께 아뢰어 조칙을 내리게 한 다음 태부
마일제,태복 조기 두사람을 칙사로 하여 하북 반하로 내려보냈다.
칙사 마일제는 먼저 원소의 진으로 가 조칙을 전했다. 이어 공손찬에게
가 동탁이 화해를 바라고 있다는 뜻을 전했다.
이로써 두 사람의 화해는 쉽게 이루어졌다. 천자의 명을 받듣다는
명분을 내세웠으므로 두 사람은 거리길 것이 없었다. 각각 승산이 없는
싸움에서 손을 떼게 되자 속으로는 내심 기뻐했을 것이다.
태부 마일제가 반하교 기슭의 한 정자에 양군의 대장을 초청하여 화해의
술잔을 나누게 한 뒤 장안으로 돌아가자, 원소와 공손찬도 같은 날에
병마를 거두어 각기 북평과 기주로 돌아갔다.
그 후 공손찬은 장안으로 감사의 표문을 올리면서 유비 현덕을 평원의
상(태수)으로 봉하기를 원한다는 표를 상주하였다.
동탁은 공손찬의 화해를 권한 것에 감사하는 표문을 보낸 것에 만족하고
있던 터였다. 동탁이 예측한 대로 이제 그가 자기를 거역하기는커녕
머리를 숙이는 지라 무릎을 치며 기뻐했다.
손 하나 움직이지 않고 공손찬을 굴복시킨 셈이었다.
동탁은 공손찬의 표에 대해 선선히 윤허를 내렸다. 유비 현덕에게
벼슬을 올리는 명을 내려 공손찬이 자기의 휘하임을 더욱 명확히 해
두자는 속셈도 있었다.
공손찬은 이로써 유현덕의 공훈에 보답한 셈이 되었다.
유현덕이 평원을 향해 떠나는 전날 밤이었다.
누군가 조용히 유현덕의 막사를 찾는 사람이 있었다.
"유 장군! 나는 공손찬을 영웅으로 알고 찾아왔는데, 이제 보아하니 그
또한 원소와 다를 바 없지 않습니까. 동탁이 보낸 화해의 칙사를 맞이하여
즉시 원소와 화해를 하는 등 하찮은 공에 만족하는 것을 보니 그 그릇은
천하를 세울 영웅의 것이 아닌 듯싶습니다."
조자룡은 이렇게 탄식하더니 자신의 속마음을 털어놓았다.
"유 장군, 원컨대 저를 평원으로 데려가 주십시오. 이제 앞으로 큰 일을
하실 분은 유 장군밖에는 없을 듯합니다."
유현덕은 조자룡의 말을 듣고 깊은 생각에 잠겼다. 조자룡을 자기의
휘하로 데려가고 싶은 마음은 간절했으나 그건 공손찬을 배신하는 행위와
다름없었다.
유현덕은 조자룡을 달래며 조용히 입을 열었다.
"나는 그러한 대재가 못되오. 그러나 후일 다시 만나는 인연이 있기를
바랍니다. 지금은 그런 때가 아닙니다. 시기가 올 때까지 잠깐 몸을 굽혀
공손 태수를 섬기십시오. 다시 만날 날이 있을 것입니다."
유현덕이 조운을 위로하고 서로 눈물을 흘리며 작별을 고했다.
다음 날, 현덕은 관우,장비와 함께 휘하 군사를 거느리고 이제는 평원의
태수가 되어 길을 떠났다.
한편, 원소의 아우 원술은 그 무렵 근거지인 남양에 있다가 형 원소가
기름진 옥토 기주를 얻었다는 소식을 듣고 있었다. 그런데도 자기에게는
아무런 포상이 없자 속으로 은근히 불만을 품었다.
바로 사촌이 땅을 사면 배가 아프다는 격이었다.
'지난날 맹주로 받들며 목숨도 돌보지 않았건만, 기주를 취하고서도 이
아우에게는 기별도 없다는 말인가?'
생각다 못해 원술은 사람을 보내 원소에게 말 1천 필을 청했다.
그러나 원소 또한 힘기르기에 여념이 없던 때였다. 비록 기주 땅이
기름진 옥토라 하나, 이를 지키기 위해 많은 힘을 길러 두지 않으면 항상
위협을 느껴야 하는 처지였다. 뿐만 아니라 기주로 말하면 자신도
한복으로부터 빼앗은 땅이라 언제 어느 곳에서 욕심을 내어 군사가
일어날지 몰랐다.
힘을 기르기 위해서는 우선 말이 필요했다.
공손찬의 백마부대와 부딪쳐 본 터라 원소 또한 더 많은 말이 필요했다.
이런 때에 아우 원술이 터무니없는 요구를 해오자 화가 나서 사자를
나무라며 돌려 보냈다.
원소에게 보낸 사신이 돌아와 말을 주는 대신 꾸짖음만 듣고 왔다고
말하자 원술은 이를 갈며 노했다.
'옛날 일이나 형제의 정리로 봐서도 이렇게 야박할 수 있단 말인가.
차라리 남이라면 이토록 분하지는 않겠다만...'
원술 또한 야심을 품고 있었던 터라 그가 거느린 군사가 적지 않았다.
생각다 못해 가까이에 있는 형주태수 유표에게 사신을 보내어 양곡 20만
섬을 빌려 달라고 요청했다.
유표 또한 군사를 거느린 몸이라 양곡 20만을 선뜻 내놓을 입장이
아니었다. 유표가 핑계를 대어 원술의 청을 거절했다.
'음-. 이것도 원소 형이 시킨 것임에 틀림없다.'
속이 좁은 원술은 분한 김에 그만 이성을 잃고 말았다.
그는 마침내 강동의 손견에게 몰래 사람을 보내 밀서를 전하게 했다.
지난날 유표가 공의 길을 막고 옥새를 내놓으라고 괴롭힌 것은 다 나의
형 원소가 시킨 것이외다. 형 원소는 또다시 유표와 함께 장군을
공격하기로 은밀히 약조하였소. 사태가 이에 이르렀으니 공은 조속히
거병하여 형주를 취하시오. 나는 장군을 도와 기주를 칠 것이오. 장군이
형주를 얻고 내가 기주를 얻으면 이는 한꺼번에 장군의 두 원수를 갚는
길이 아니겠소. 결코 일을 그르치지 않기를 바랄 뿐이오.
손견은 원술이 보낸 밀서를 받아들자 대뜸 거병을 작정했다.
'그렇지 않아도 이를 갈고 있던 중이다. 이제야 말로 지난날 나를 괴롭힌
유표에게 원수를 갚을 기회이다.'
손견은 정보,황개,한당을 불러 의논했다. 그러나 정보는 손견에게 그
무모함을 간했다.
"한쪽의 밀서만을 믿고 그와 운명을 같이한다는 것은 위험한 일입니다.
또한 원술은 원래 간사하여 믿을 만한 위인이 못됩니다."
"그것쯤은 나도 알고 있다. 그러나 그의 힘에 의지해서 군사를 일으키는
것이 아니다. 내가 스스로 원수를 갚을 뿐이다."
"그러하오나 거병을 하자면 대의명분이 있어야만 합니다."
"원소는 지난날 낙양에서 나를 그토록 능멸하지 않았느냐. 유표 또한
원소의 지시를 받고 길을 막아 나의 군대를 괴롭히지 않았더냐. 이제 그
치욕과 원한을 함께 갚자는 것이다."
손견은 원래 혈기가 넘치는데다가 한 번 작정하면 이것저것 살핌이 없이
밀어붙이는 성격이었다. 이미 군사를 일으키기로 작정한 터라 정보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
손견이 있는 장사성은 양자강 지류의 유역에 있었다. 성안의 시가는
바다처럼 넓은 태호에 임하고 있어 일찍이 수리의 혜택을 받아 문화가
발달하고 군비도 넉넉했다.
손견이 거병을 작정하자 5백여 척의 전선은 언제라도 강을 건널수
있도록 준비되었다. 손견은 준비가 완료되자 명을 내려 진병케했다.
그러자 이러한 소문은 형주에서 온 세작(첩자)들에 의해 즉시 유표에게
알려졌다.
유표는 크게 놀라며 급히 휘하의 장수들을 불러모아 대책을 상의했다.
"강도의 손견이 길을 막았던 지난 일로 군사를 일으켰다 하니 어찌하면
좋겠소?"
모사 괴량이 일어나 입을 열었다.
"태수께서는 너무 걱정하시지 마십시오. 강하성의 황조로 하여금
선봉자장을 맡겨 방비케 하십시오. 그런 다음 태수께선 형주와 양양의
군사를 친히 거느리시어 뒤를 받치신다면 강과 호수를 건너며 피로에 지친
손견을 잡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닐 것입니다."
유표는 괴량의 말을 옳게 여겨 그의 말에 좇았다. 황조에게 손견의
군사를 막도록 하는 한편 친히 병마를 모아 그 뒤를 받치며 방비에 만전을
기했다.
그때 손견은 세 아내를 두었는데 정실인 오씨와 몸에서는 네 형제를
두었다. 맏이가 책으로 자가 백부, 둘째가 권으로 자가 중모, 셋째가
익으로 자는 숙필, 넷째가 광으로 자는 계좌였다.
또한 오씨 부인의 여동생이 있는데 이 여인은 손견의 둘째부인이
되었다. 이에 손견은 대오녀 소오녀를 다 아내로 삼은 것이다. 소오녀의
몸에서도 낭이라는 아들과 인이라는 이름의 딸을 얻었다.
애첩 유씨에게 아들 하나를 또 얻으니 이름은 소, 자는 공예였다.
출진 전날이었다. 손견의 아우 손정이 그 조카들을 데리고 어두운
얼굴로 손견을 찾아와 말했다.
"지금 동탁이 대권을 잡아 국정을 오로지하고 있고, 천자는 나약할
뿐이어서 천하가 어지럽습니다. 천하의 영웅들이 각기 세력 다툼이 그치지
않는 이때 강동은 형님 덕에 무사했습니다. 그런데 형님은 작은 원한을
풀기 위해 대군을 일으키시니 마땅한 일이 아닌 줄 아옵니다. 바라건대
형님께서는 다시 한 번 헤아려 주시옵소서."
손정의 말에 손견은 껄껄 웃으며 아우를 정중히 꾸짖었다.
"나의 심중을 모르고 함부로 말하지 말라. 나는 장차 천하를 평정하고자
하는 대망을 품고 있는 몸, 천하를 종횡하려는 내가 어찌 원수를 두고도
갚지 않을 수 있겠느냐? 이를 일벌백계로 다스리지 않는다면 앞으로도
나를 거스르는 자가 나설 것이다. 아우는 물러가라."
손견의 이 같은 말에 손정은 대꾸할 말을 찾지 못했다. 그러자
열입곱살인 홍안인 장남 책이 아버지 앞으로 나서며 말했다.
"아버님께서 기어코 출정하신다면 소자도 데려가 주십시오. 일곱 형제
중 제가 맏이입니다. 맏이로서 형제를 대표하여 아버님을 따라
모시겠습니다."
장남 손책의 말에 손견은 대견스럽다는 듯이 아들의 얼굴을 지켜 보며
말했다.
"너의 말이 기특하다. 내일의 출진에 늦지 않도록 만반의 준비를 하고
기다려라."
손견의 아들 중 장남 책과 차남 권은 이미 강동 사람들에게 널리 알려져
사랑을 받고 있었다. 어머니 오 부인의 빼어난 용모와 아버지 손견의
강골을 이어받은 용자를 지니고 있었다.
그때 장남 손책은 이미 강동에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무용을 떨치고
있었다. 손책은 병가의 상속자로 자라나 어릴 때부터 무예를 익혔다. 그곳
강남 태생으로 보기 드물게 7척이 넘는 거한인데다, 검술과 힘은 이미
아버지에 비해 손색이 없었다.
다음 날 새벽, 손견은 아들 책과 휘하 장수들을 거느리고 포구로 나가
군선에 올라 진군을 시작했다. 손견의 군선은 양양성 한강 어귀 번성을
향해 닻을 올리자 강 위를 미끄러지듯 나아갔다.
한편 유표의 명을 받아 강하를 지키던 황조는 궁노수들을 강변에
매복시켜 두고 있었다. 손견의 전선들이 강 위에 모습을 드러내자
궁노수들에게 명을 내렸다.
"적선이 가까이 오기 전까지는 화살을 쏘지 말라!"
황조의 군사들은 매복한 채 배가 강기슭에 당도하기만을 기다렸다.
손견의 배가 강기슭에 이르자 우거진 갈대밭과 방패와 토루 그늘에서는
수많은 화살과 쇠뇌들이 날아왔다.
그러자 이번에는 손견이 군사들을 향해 영을 내렸다.
"절대로 가벼이 움직이지 말라. 뱃전에 엎드려 몸을 숨기되 배를 기슭에
대지 말고 그대로 저어 나가라!"
손견의 명에 따라 군사들은 뱃전에 몸을 숨긴 채 영문도 모르고 강 위를
오르내리기만 했다.
육지에 상륙하지 않고 함성만 지르며 강 위를 오르내린 지 사흘 밤낮이
되었다.
황조의 궁노수들은 무턱대고 배를 보고 활을 쏘아댈 뿐이었다. 화살은
강물에 떨어지거나 혹은 뱃전에 꽂히고 배의 바닥에도 떨어졌다. 그러나
군사는 한 사람도 상하지 않았다.
손견은 그 화살들을 남김없이 주워 모으게 하였다. 그때서야 군사들은
손견이 왜 그런 명을 내렸는지 알고는 탄복하였다.
그야말로 '얻은 떡이 두레반'이었다. 이렇게 떨어진 화살을 주워 모으니
그 화살이 자그만치 10만여 개나 되었다.
황조의 진에는 사흘 동안 수십 차례나 오르내리는 배에 미친 듯이
화살을 쏘아댔으니 어느덧 화살이 바닥이 났다.
군사들은 이제 팔이 떨어져 나갈 듯이 아파 기진맥진하였다.
손견은 그제서야 총공격령을 내렸다.
"배를 강기슭에 대라, 닻을 내리고 돛대를 올려서 얻은 화살로 일제히
적을 쏘면서 한 놈도 남김없이 도륙하라!"
그날따라 바람의 방향이 바뀌어 강쪽에서 강기슭으로 세차게 불었다.
손견의 군사는 육지의 적을 겨냥하여 쉴새없이 활을 쏘며 미끄러지듯
배를 강가로 몰고 갔다.
강변에 있던 1만여 황조의 궁노수들은 빗발치듯 쏟아지는 화살에 어찌할
바를 몰라 허둥거렸다. 화살에 맞아 죽거나 상하는 군사가 헤아릴수 없이
많았다.
적병이 뭍에 오를 때를 기다려 공격을 펴야 하는 법인데 화살이 바닥난
황조군이 오히려 화살 세례를 받고 있으니 견디어 낼 재간이 있을 리
없었다. 그들은 고스란히 강 언덕을 내어 준 채 달아나기에 바빴다.
손견의 군대는 기세가 하늘을 찌를 듯하고 황조의 군사들은 화살에 쫓겨
달아나기에 바빴다.
황조는 남은 군사를 거두어 황망히 진을 물렸다.
손견의 군사는 강 언덕을 오르자 무인지경을 달리듯 틈을 주지 않고
쏜살같이 황조를 뒤쫓았다.
먼저 정보,황개가 두 갈래로 나뉘어 황조의 본진을 향해 진격하였다.
또한 한당은 정예군을 거느리고 황조의 퇴로를 막으며 삼면에서 공격을
폈다. 황조는 더 이상 지탱할 수가 없어 번성을 버리고 우선 가까운
등성으로 들어가 가까스로 패군을 수습했다.
손견은 황개로 하여금 군선을 지키게 한 후, 친히 전군을 이끌며 등성을
향해 숨돌릴 틈도 없이 진군했다.
손견이 전군을 이끌로 오자 황조는 군사를 수습하여 성밖으로 들판에
진을 쳤다. 황조는 적이 며칠씩이나 배 위에서 공격을 받은데다 숨돌릴
틈도 없는 공격으로 지쳐 있으리라 여겼다. 피로한 군사들이 오기를
기다려 어제의 패전을 설욕하는 역습을 감행할 심산이었다.
한편 황조군이 멀리 바라다보이는 등성 밖 들판에 진을 치자 손견도
진을 벌인 다음 말 위에 높이 앉아 문기 아래로 나갔다.
손견의 옆에는 그의 아들 손책이 번쩍이는 갑옷을 입고 창을 치켜들고
있었다.
황조는 손견 부자가 진문 앞에 나타나자 자신도 두 장수와 함께 모습을
드러냈다. 한 장수는 강하의 장호요, 또 한 장수는 양양의 진생이었다.
황조는 채찍을 높이 들어 손견을 큰 소리로 꾸짖었다.
"강도의 쥐새끼 같은 도적놈아! 어찌 감히 한실 종친의 땅을 넘보느냐."
황조는 손견을 꾸짖은 후 장호에게 명을 내렸다.
"그대는 옥새를 훔친 저 자를 사로잡아 오라!"
황조의 명을 받은 장호가 창을 휘두르며 달려나왔다.
그러자 미처 명을 들을 새도 없이 손견의 진에서는 한당이 칼춤을 추며
달려나갔다.
장호와 한당이 양군의 가운데서 맞붙었다. 칼과 창이 부딪치며 불꽃을
튀긴 지30여 합이 되자 장호의 칼리 차츰 밀리기 시작했다.
그러자 진생이 장호를 돕고자 급히 말을 달려 한당한테로 덤벼드니,
손책이 재빨리 창을 놓고 활을 잡았다.
아버지 손견의 옆에 있던 손책이 시위에 화살을 메겨 만월같이 당긴후
힘차게 쏘았다. 화살은 '휘잉' 하고 날아가 진생의 이마에 정확히 박혔다.
진생은 처절한 비명 소리와 함께 말에서 굴러 떨어졌다. 응원하러 오던
진생의 비명소리에 놀란 장호가 당황하고 있는 사이에 한당의 칼이
번쩍하자, 장호의 머리가 투구와 함께 두 개로 갈라지고 말았다.
장호,진생 두 장수가 어이없게도 한꺼번에 죽자 황조군은 흔들리기
시작했다.
손견의 군사가 그 기세를 타고 함성을 울리며 황조의 진영으로 밀고
들어갔다. 정보가 황조를 사로잡기 위해 선두에서 그를 쫓았다.
황조는 급히 투구를 벗어 던지고 말에서 내려 병사들 틈에 끼여들었다.
장수로서 부끄럽기 짝이 없는 짓이었으나, 황조는 목숨을 보전키 위해
군사들과 함께 도망쳤다.
뒤쫓던 정보는 표적이던 투구가 없어지자 누가 황조인지 분간할 길이
없었다. 황조는 보병들 속에 섞여 가까스로 등성으로 숨어들었다.
손견은 유표의 패잔병을 휩쓸며 양양성 북쪽 한수까지 진격하는 한편
수군은 한수에 머물게 하였다.
황조가 패잔병 틈에 섞여 겨우 목숨만을 보전해 오자 유표는
망연자실하고 있었다.
모사 괴량이 유표에게 의견을 내놓았다.
"지금 우리 군사들은 전투에 대해 전의를 잃고 있습니다. 잠시 성 밖의
해자(성밖에 둘러서 판 못)를 손보고 보루를 높게하여 손견의 예봉을
피하도록 해야 합니다. 그런 다음 기주의 원소한테 구원을 요청하는 것이
상책입니다."
그때 괴량의 말을 듣고 있던 채모가 버럭 소리를 지르며 앞으로 나섰다.
"잠깐, 그 말은 참으로 졸렬하기 짝이 없소. 지금 적군이 성 아래까지
몰려와 버티고 있는데 어찌 손을 묶어둔 채 생사를 남의 손에 의지한단
말이오? 바라건대 제가 비록 재주는 없으나 성 밖으로 나아가 결전을
벌이겠습니다. 성문을 닫고 성을 지키는 일은 그 이후에도 늦지 않을
것입니다."
유표는 그의 장수다운 기개를 장하게 여겼다.
"그대의 말대로 하라."
채모는 1만여 기의 군사를 거느리고 양양성을 출발하여 현산에 포진하고
손견의 군대를 기다렸다.
황조를 뒤쫓던 손견은 유표의 흩어져 있는 군사를 쓸어 버릴 작정으로
진격을 계속해 현산에 당도하였다.
채모가 말을 타고 나타나자 손견은 좌우를 돌아보며 말했다.
"저 자는 유표 후실의 오라비다. 누가 사로잡을 텐가?"
"제게 맡겨 주십시오."
정보가 쇠자루가 달린 창을 비껴들고 말을 몰아 나갔다. 채모가 겁없이
맞서 나왔으나 정보와 몇 합을 겨루지 못하고 황급히 말머리를 돌려
달아나기 사작했다.
형주의 군사들은 잇단 패전으로 사기가 떨어져 있는데다가 대장 채모가
꽁무니를 빼며 달아나니 싸워볼 생각도 않은 채 그 뒤를 따랐다.
손견은 대군을 몰아 달아나는 채모의 군사들을 뒤쫓으며 사살하니
살아서 도망간 군사는 절반에도 미치지 못했다.
많은 군사를 잃었을 뿐만 아니라 겨우 목숨만을 부지해 온 채모를 보자
이번에는 괴량이 득의에 찬 목소리로 유표에게 간했다.
"채모는 좋은 계책을 받아들이지 않고 무모한 행동을 하다 아까운
군사만 잃게 했습니다. 이는 마땅히 군율에 따라 목을 쳐야 할 것입니다."
괴량의 말에 유표는 난감한 표정이었다. 처남인 채모에게 차마 벌을
내릴 수는 없어 괴량을 좋은 말로 달래었다.
"우리가 적과 대치하고 있는 이때, 한 사람의 군사도 아쉽거니와
우리끼리 다툼을 벌여서야 되겠는가? 그러니 군율은 후일로 미루고 우선
급한 불부터 끄고 보세."
유표의 애첩인 채모의 여동생은 절세의 미인으로 유표가 정을 쏟고
있었으므로 다만 좋은 말로 괴량을 달래고 농성할 채비를 서두를
뿐이었다. 그러한 사정을 잘 아는 괴량은 더 이상 벌을 내리자고 주장할
수가없어 입을 다물었다.
손견은 유표의 군대를 크게 물리친 이후 양양성을 점령하기 위해
사방으로 군사를 포진시켜 성을 철통같이 에워쌌다.
양양성은 뒤로는 산을 업고, 앞으로는 강이 흐르고 있었다.
일찍부터 '형주의 험'이라 불릴 만큼 천연적인 요새여서 공격이 여간
까다롭지가 않았다.
그런 어느 날이었다. 홀연 광풍이 크게 일더니 손견의 본진에 세워둔
수자 기가 두 동강으로 부러져 버렸다.
대장을 상징하는 수자 기가 저절로 부러지자 군사들은 물론 부장들로
불길한 느낌이 일어 불안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적이 성문을 굳게 닫고 나오지 않는데다 군사들도 오랜 싸움으로 지쳐
있습니다. 게다가 광풍으로 인해 수자 기가 부러진 일은 길조가 아닙니다.
잠시 군사를 물려서 강동으로 돌아가셨다가 다시 진군하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한당이 이렇게 간하자 손견이 펼쩍 뛰며 그를 나무랐다.
"그게 무슨 못난 소리냐! 연전연승을 해 조만간에 양양성을 취하게
되었거늘... 바람에 기가 좀 부러졌기로 군사를 돌이킨다는 것은 당치않은
말이다."
손견은 이렇게 말한 후, 부러진 기로 인해 군사의 사기라도 떨어질 것을
염려하며 말을 이었다.
"바람은 곧 천지의 호흡이다. 겨울을 앞두고 이러한 삭풍이 부는 것은
곧 계절의 변화를 알리는 것이다. 이 삭풍은 겨울이 온다는 것을 알리는
것이지 기를 부러뜨리기 위한 바람은 아니다. 그리 알고 모든 장수와
군사들은 괘념치 말라."
손견의 말을 듣고 보니 그것도 이치에 맞는 말이었다.
여러 장수들은 더 이상 반대하지 않고 군사들의 의기를 돋우었다.
다음 날부터 손견군은 다시 함성을 크게 울리며 성을 공격하였다.
해자를 메우고 불화살을 쏘았으며, 보병은 뗏목을 만들어 타고 성벽을
기어 올랐다.
그러나 성 안의 방비도 만만치 않았다. 성벽을 기어오르는 군사는
성위에서 쏘는 화살이나 돌멩이에 맞아 아래로 글러 떨어질 뿐이었다.
손견이 군사를 휘몰아 거센 공격을 퍼부었으나 양양성은 여전히 꿈쩍도
하지 않았다.
그런데 손견의 수자 기가 부러져 이상한 조짐이 보였던 일은 하늘에도
나타났던 모양이었다.
광풍이 불었던 다음 날이었다.
양양성에서는 괴량이 유표의 앞에 나아가 가만히 진언하고 있었다.
"어젯밤에 천문을 본즉, 평소에는 보이지 않던 형성이 서쪽 들판으로
떨어졌습니다. 미루어 보건대 장성이 땅에 떨어질 상으로, 이것은 분명히
손견의 진영에 흉한 조짐이 일어나는 것을 일러 주고 있는 듯합니다."
유표로서는 귀가 솔깃해지는 말이었다.
"이 기회를 놓치지 말고 원소에게 사람을 보내어 응원을 청하신다면
손견군은 뿔뿔이 촉어지거나 최로가 끊겨 독안에 든 쥐 꼴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유표는 괴량의 말을 듣고 마음이 움직였다. 우선 손견의 진영에 불길한
조짐이 있다는 괴량의 말에 은근히 기대가 되었다.
뿐만 아니라 손견군과 언제까지나 이렇게 대치 상태로 있을 수만은 없는
처지였다.
"그렇다면 누가 저 손견의 포위망을 뚫고 원소에게 간다는 말이냐?"
"제가 다녀오겠습니다."
유표가 아끼는 장수 여공이 나섰다.
여공이 원소에게 전할 밀서를 받아 성을 나서려 할 때, 괴량이 그를
불러 한 가지 계책을 일러 주었다.
"여공이 중책을 맡았다 하니 한 가지 계책을 일러 주겠소. 내가 이르는
대로 꼭 실행히시오."
"잘 알겠소이다."
"활 잘 쏘는 기병 5백을 이끌고 활을 쏘면서 포위망을 뚫고 현산으로
가도록 하시오. 그러면 손견이 반드시 뒤를 쫓을 것이오. 그대 여공은 군사
1백 명을 산 위쪽에 풀어 큰 돌이나 나무 등을 모아 두게하고, 다른 군사
1백 명은 활을 들고 숲 속에 매복케 하시오. 그런 다음 뒤쫓는 적을
이리저리 피해 달아나되 숲 속에 매복시킨 궁노수들이 있는 곳으로
유인하시오. 적이 그곳에 오면 한꺼번에 돌과 화살을 퍼붓도록 하시오.
손견은 원래 성격이 과격하고 성급하여 몸소 나설지도 모르니 어쩌면
손견도 사로잡을 수 있을 것이요. 만약 우리의 계책이 맞아 떨어져 승세를
잡으면 연주포를 올려 신호를 하시오. 그러면 성에서도 군사를 이끌고
나가 싸우겠소. 그러나 적이 뒤쫓아오지 않거나 뒤쫓아오더라도 우리
계책대로 되지 않거든 그대로 원소에게 달려가시오. 오늘 밤에는 달이
그리 밝지 않을 테니 해질녘에 출발하는 것이 좋을 것이오."
"훌륭하신 계교입니다."
여공은 괴량의 계책을 머릿속에 되새겨 보며 성 안에서도 활 잘 쏘고
힘이 센 군사들만 뽑아 거느리고 소리 없이 동문을 열었다. 발소리를 죽여
손견의 초병으로 보이는 군사 5, 6명을 처치하고 질풍처럼 말을 달려
손견의 진중을 뚫었다.
난데없는 함성과 병마의 말발굽 소리에 손견은 놀라 물었다.
"무슨 일인가?"
"성안에서 한무리의 군마가 불시에 동문을 열고 달려나와 현산 쪽으로
갔습니다."
손견은 그 말을 듣자 문득 원소와 유표가 손을 잡고 자기를 치려한다는
원술의 밀서가 생각났다.
'유표가 원소에게 구원병을 청하기 위해 보낸 군사임에 틀림없다.'
손견은 생각이 이에 미치자 급히 갑주를 꿰입고 말위에 올랐다.
"나를 따르라!"
손견이 외치며 몸소 맨 앞을 달리며 여공의 군사를 뒤쫓기 시작했다.
너무 다급하게 서둔 바람에 뒤따르는 군사들은 졸장 30여 기에 불과했다.
여공이 뒤를 돌아보니 적의 군사가 추격해 오므로 괴량이 일러 준
계책대로 침착하게 명을 내려 군사들을 움직였다.
숲 속에 궁노수들을 매복시킨 후 벼랑 위에는 바위와 돌을 쌓아 두고
군사를 배치시켜 두었다.
빠른 말을 타고 먼저 달려온 손견이 현산 기슭에 이르렀을 때, 여공은
이미 군사의 배치를 끝내고 남은 군사를 거느리고 산기슭으로 서서히 말을
몰고 있었다.
손견은 그런 여공군을 보고 급히 말을 몰아 달려왔다.
손견이 여공을 뒤쫓으니 여공은 그를 맞아 몇 합을 겨루는 체하다
못당하겠다는 듯 급히 말머리를 돌렸다. 여공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번개같이 현산 쪽으로 달렸다.
손견이 눈앞의 적을 단숨에 쳐부술 기세로 뒤쫓자 여공은 숲에 이르러
재빨리 몸을 숨겼다.
앞뒤를 조금만 더 침착히 헤아렸더라도 손견은 적의 유인책이라는 것을
짐작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원래 과격하고 혈기에 넘치는 성미라
여기까지 뒤쫓아와 머뭇거릴 손견이 아니었다.
산 아래까지 달려온 손견은 부아가 치밀었다. 산 위를 향해 말을 몰며
뒤쫓아온 군사들에게 명했다.
"주저하지 말고 나를 뒤따르라!"
산을 오르려면 숲 속으로 들어가야 했다. 그 숲의 옆에는 가파른 벼랑이
있었다. 손견이 산비탈로 말을 몰자 뒤따르던 군사 몇도 현산의
오르막길로 들어섰다. 이미 어둠이 짙게 깔린 깊은 밤이었다. 거기다가
잡초넝쿨과 허물어지는 토사에 밀려 말은 제대로 걷지도 못하고 울부짖을
뿐이었다.
그때였다. 홀연 산 위에서는 징 소리가 요란히 일며 커다란 바위가 굴러
떨어지기 시작했다. 손견은 옴치고 뛸 수가 없었다. 쏟아져 내린 바위들은
순식간에 몇 안 되는 손견의 군마들을 덮쳐 버렸다.
어디 그뿐이랴. 숲 속에서는 때를 맞춰 쉴새없이 화살이 날아들었다.
'아뿔사, 적의 계교였구나.'
손견이 사태를 깨닫고 탄식했을 때는 이미 늦었다. 손견의 머리 위로
커다란 바위 하나가 덮씌워졌다.
"쿵!"
지축을 흔드는 듯한 요란한 소리와 함께 성미 급한 강동의 호랑이
손견은 말과 함께 화살에 맞고 바위에 깔린 몸이 되고 말았다. 깨어져
피에 얼룩진 머리가 바위 밑으로 보일 분 그의 사지는 바위 밑에 깔려
알아볼 수도 없었다.
손견의 죽음 산 장수와 죽은 송장
성미 급한 손견은 싸움을 이기고도 양양성을 얻지 못해 전력만 소비하고
유표는 원소에게 구원병을 청하러 가면서 유인계를 쓴다. 이로써 유표는
하룻밤 사이에 손견은 물론 강동 군사를 짓밟는다. 한편 손견을 잃은
손책은 죽은 부왕의 시체와 산 적장을 맞바꾸어 강동으로 철수한다.
이때 그의 나이 서른 일곱으로 한 헌제 초평 3년 신미, 11월 7일이었다.
일찍부터 뛰어난 무용을 세상에 떨치며 큰 뜻을 펴기 위해 세력을 한참
키워 가던 때였다.
여공은 손견군이 바위에 깔리고 화살에 맞아 몰살당하자 연주포를
울렸다. 성 안에서는 전군이 출동 태세로 초조히 기다리던 중 연중포
소리가 울리자, 황조,괴월,채모 등 여러 장수들이 제각기 군사를 이끌고
나와 닥치는 대로 손견군을 찌르고 베었다.
손견이 없는데다 불시에 형주의 군사들이 쏟아져 나오더니 강동의
군사들은 혼란에 빠져 도망가기에 바빴다.
한편 황개는 이때 한강 기슭에서 군선을 지휘하며 손견의 뒤를 받치고
있었다. 문득 본진에서 함성이 일며 병장기가 부딪치는 소리가 나자
거느린 수군을 이끌고 급히 말을 달렸다.
황개가 본진에 이르러 보니 황조의 군사들이 진영을 짓밟고 있었다.
황개는 적의 선두를 이끌고 있는 황조를 보자 똑바로 그에게 말을
몰았다. 황조도 황개를 맞아 칼을 휘둘렀다.
그러나 황조는 몇 합을 제대로 부딪치지도 못하고 황개에게 사로잡히는
몸이 되고 말았다.
이때 손견의 본진으로 향하던 정보는 현산에서 큰 전과를 올리고
내려오는 여공을 만났다. 정보는 여공을 보자 손견의 아들 손책을
보호하기 위해 말을 돌려 달아났다. 그러나 현산에서 적을 섬멸하여
기세가 오른 여공은 정보를 줄기차게 뒤쫓았다.
이에 정보도 도망가다 말고 여공을 맞아 싸웠다. 그러나 여공은 정보의
적수가 아니었다. 겨우 2, 3합도 채 넘기지 못하고 정보의 창에 찔려
여공이 말 아래로 굴러 떨어졌다.
여공은 큰 공을 세우고도 어이없는 죽음을 맞고 만 것이다.
양군의 격렬한 전투는 날이 밝아오면서 끝이 났다. 강동의 군사들에게는
그때까지도 손견의 죽음이 알려지지 않았다.
형주군과 강동군은 시작도, 계책도 없는 가운데 벌어진 싸움이었지만
가장 길고도 격렬한 하룻밤 사이의 전투였다.
어두운 밤중에 서로 엎치락뒤치락 뒤섞여 펼쳐진 난전이어서 양군의
사상자는 놀라울 정도로 많았고 모두가 피곤했다. 유표의 군사는
양양성으로 돌아가고, 강동의 군대는 한수 방면으로 철수했다.
손책은 한수로 철수한 뒤에야 아버지 손견의 죽음을 알았다. 어젯밤부터
아버지의 모습이 보이지 않아 근심이 되었으나 사방에서 전투가 벌어지는
때였으므로 찾을 수도 없었다.
손책이 목을 놓아 우니 모든 장수들과 군사들도 손견의 시체만이라도
찾으려고 샅샅이 뒤졌다. 그러나 어디에서도 그의 시체는 찾을 수가
없었다.
그러다 손견의 머리는 장대 끝에 매달리고 시체는 양양성으로 떠메여
갔다는 것을 나중에야 알게 되었다.
손책이 다시 한 번 목놓아 운 뒤에 부르짖었다.
"아버님의 시신이 적의 손에 있는데 어찌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단
말이오."
손책은 여러 장수들을 군막으로 불러모은 뒤 유표와 다시금 싸울 대책을
의논했다. 적장 황조를 사로잡은 황개가 나서며 말했다.
"어젯밤 적장 황조를 사로잡아 우리 진중에 묶어 두었으니, 사신을 보내
주고의 시신과 바꾸자고 하면 어떨까요?"
그러자 군리 환해가 아뢰었다.
"그 일이라면 제가 한 번 나서 보겠습니다. 저와 유표와는 이전에
친분이 있으므로 저를 사신으로 보내 주십시오."
손책이 환해의 말을 따르기로 하였다.
환해는 단신으로 양양성에 가서 유표와 대면하고 온 까닭을 밝혔다.
"주공의 유해와 황조를 바꾸는 것이 어떻겠소?"
유표는 환해의 말을 듣고 싸움을 끝내게 된 것을 다행으로 여기고, 죽은
송장과 산 장수를 바꾸는 데 있어 쾌히 승낙했다.
"문대의 유해는 이미 관에 안치해 놓았으니 황조를 풀어 주면 돌려
드리겠소이다. 그런 다음 양군은 군사를 물려 서로 침범하는 일이 없어야
할 것이오."
환해가 유표의 말에 고마움을 표하고 일어섰다.
그때 계단 아래에서 이 말을 듣고 있던 괴량이 소리치며 나섰다.
"주공, 아니 됩니다. 절대로 아니 됩니다. 이때야말로 강동의 군사들을
한 사람도 살려서 보내지 말아야 합니다. 손견의 유해와 황조를 바꿔
화평을 얻는다 하더라도 그것은 한때에 불과할 것입니다. 강동은 언젠가는
오늘의 치욕을 갚고자 반드시 군사를 일으킬 것이옵니다. 먼저 환해의
목을 벤 다음에 한수로 추격령을 내려야 합니다."
괴량의 말에 유표가 선뜻 입을 열지 못하고 있자 괴량이 다시 유표를
일깨웠다.
"지금 손견은 죽고 그 아들은 아직 어립니다. 이때를 틈타 군사를 몰아
추격한다면 크게 힘들이지 않고 강동을 취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그냥 돌려보내신다면 이는 고양이를 호랑이로 키우는 격으로 뒷날 형주의
후환을 만드는 격이 될 것입니다."
그래도 유표는 마음을 돌이키지 못하고 고개를 저었다.
"아무리 적이라 하나 화친을 청하러 온 환해를 죽이는 일도 그렇고,
아직 황조가 적의 손에 있으니 어찌 그를 버릴 수가 있느냐?"
"황조 한 사람을 버려 강동을 얻을 수 있다면 이 또한 좋은 일이
아니겠습니까?"
괴량이 간곡히 간했다. 그러나 유표는 한사코 괴량의 말을 물리쳤다.
"황조는 나와 서로 마음을 통하는 사이이며 충실히 나의 심복이었네.
그를 저버리는 것은 의가 아니다."
유표는 이렇게 말한 후 손견의 유해와 황조를 교환키로 하고 환해를
돌려보냈다. 약속대로 손견의 유해를 돌려 받은 손책은 군사를 거두어
뱃머리에 조기를 달고 강동으로 돌아왔다.
그는 부친을 곡아의 언덕에 묻고 난 후 장엄한 장례를 올렸다. 장례가
끝난 후 손책은 강도에 머물면서 어진 선비와 천하의 영웅호걸들을 널리
불러모았다. 그들을 후히 대접하며 몸을 굽혀 받드니 사방에서 선비와
영웅호걸들이 구름떼처럼 모여들었다.
"강동의 손견이 죽었다!"
손견이 유표와 싸우다 죽었다는 소문은 장안에 있는 동탁의 귀에도
들어갔다.
"한 가지 근심거리가 없어진 셈이구나."
동탁은 혼자 중얼거리더니, 좌우의 시자들을 돌아보며 문득 생각난 듯
물었다.
"그 아들이 지금 몇 살이나 되었느냐?"
"열일곱인 줄 아옵니다."
"아직 애송이로군."
동탁은 적이 안심하며 웃었다. 동탁은 열일곱의 손책을 아직
어린아이로만 여겼다.
이 무렵, 동탁의 교만과 횡포는 나날이 심해져 가기만 했다.
그는 상국에서 태정태사로 앉더니 이번에는 자기를 주 나라 무왕을
받들던 여상에 비하며 스스로 상부(아버지와 같은 높임을 받음)라고 칭한
후 문무백관들에게 그렇게 부르도록 했다.
의장도 천자와 똑같게 갖춰 입었으며, 그가 어전을 드나들 때에는
천자와 같은 행렬을 갖추게 했다. 뿐만 아니라 그의 아우 동민에게
좌장군의 직책과 호후라는 작위를 내리고, 조카 동황은 시중으로 삼아
금군(친위대)을 거느리게 했다. 아우 동민에게 어림군의 병권을 장악하게
한 것이었다. 그리고 동씨 성을 쓰기만 하면 나이를 가릴 것 없이 모두
열후에 봉하니 천하는 동탁의 것인 듯했다.
동탁은 장안에서 2백 50리쯤 떨어진 곳에 미오라는 물 맑고 경치가
빼어난 곳에 성을 쌓게 했다.
미오의 길지를 골라 왕성을 능가하는 성을 지으니 그 성이 곧
미오성이었다.
성의 규모나 모양도 장안성과 똑같게 짓도록 하였는데 부역으로 동원된
사람이 25만여 명이나 되었다. 궁실은 장안성의 금궁보다 더 화려하고
현란했다. 또한 창고 안에는 20년은 풍족하게 먹을 곡식을 쌓아 두었다.
또 이곳에 열다섯에서 스무 살까지의 미동과 미녀 8백을 뽑아 후궁에
머물게 했다. 지난날 낙양의 능침에서 파낸 재물과 보석들도 모두
미오성에 산더미처럼 쌓아 두고 있었다.
동탁은 자기의 일가권속까지 거느리고 미오성에 거처하면서 황금과
비단, 맛있는 산해진미로 주지육림에 빠져들었다.
동탁은 미오성에 머물면서 한 달 혹은 보름에 한 번 꼴로 장안성으로
출사했다. 동탁이 출사하는 날에는 문무백관들이 장안 동편에 있는
횡문밖까지 나와 그를 전송하고 맞이하기에 바빴다.
동탁은 그럴 때마다 길가에 장막을 치고 잔치를 벌여 백관들과 술을
마시곤 하였다. 잔치를 벌여 상부로서의 위엄과 권세를 과시하기
위해서였다.
어느 날 동탁이 횡문 밖으로 나가니 문무백관들은 한결같이 동탁을
전송하면서 전과 같이 술판을 벌이고 있었다.
때마침 북지에서 난을 일으켰다가 포로로 잡힌 군졸 수백 명을 끌고
가던 행렬이 그 앞을 지나가게 되었다.
동탁은 즉시 그들을 술자리 앞으로 끌어오게 한후 그들을 나란히
세우더니 손발을 자르거나 눈알을 뽑거나, 혀를 뽑게 했다. 또 어떤 자는
큰 솥에 삶아 죽이기까지 했다.
포로들의 비명 소리와 구슬픈 통곡이 하늘에 사무칠 듯이 산천을 울리니
문무백관들은 몸을 떨며들었던 수저를 땅에 떨어뜨렸다.
그러나 동탁만은 태연히 술잔을 기울이며 즐겨 먹고 마셨다.
문무백관들에게 겁을 주기 위한 속셈도 있었던 터라 동탁은 두려움에 떠는
백관들을 보며 껄껄 웃을 뿐이었다. 백관들은 그러한 진풍경을 외면하고
귀를 막았다. 그렇다고 일어설 수도, 갈 수도 없었다. 동탁은 이같이 날이
갈수록 잔인무도해졌다.
어느 날, 천문관의 관원 한 사람이 동탁의 부름을 받고 와 그 앞에
무릎을 꿇었다.
"태사께서 부르셨습니까?"
이날은 궁궐 안의 성대에서 주연이 베풀어지는 날이었다. 주연 준비가
한창일 때 그 천문관이 온 것이었다.
"무슨 변고는 없느냐?"
동탁이 그 천문관에게 물었다.
"있사옵니다. 어젯밤에 한 무리의 검은 기운이 솟아올라 밤하늘을
꿰 었나이다. 아나도 백관 중에 흉기를 품은 자가 있지 않나
생각되옵니다."
"음-. 나를 거스를 마음을 품은 놈이 있다는 말인가?"
이윽고 주연이 베풀어질 시간이 되자 성대에서 만조백관들이 자리를
채웠다. 주연이 베풀어지고 술이 몇 순배 돌 때 여포가 바쁜 걸음으로
들어와 동탁의 귀에 대고 몇 마디 수군거렸다.
백관들을 술을 마시다 말고 동탁과 여포의 거동에 신경을 곤두세웠다.
동탁은 여포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음침하게 웃더니 나지막하게
말했다.
"음-. 저런 괘씸함... , 끌어내어 없애 버려라."
동탁의 말이 채 떨어지기 전에 여포는 몸을 일으키더니 눈을 부라리며
만좌한 백관들을 향해 뚜벅뚜벅 걸어왔다.
"이놈아 나 좀 보자!"
술자리에 끼여 앉은 사공(건설대신) 장온에게 다가온 여포가 그의
목덜미를 움켜잡고 당 아래로 끌어내렸다.
"앗, 이게 무슨 짓인가."
장온이 졸지에 당하는 일이라 얼굴이 파래지며 외쳤다.
"닥쳐라 이놈!"
여포의 그 괴력으로 비둘기라도 움켜잡듯 장온의 몸을 아예 덜렁 들고
밖으로 나가 버렸다.
잠시 후, 시종이 붉은 소반에 이상한 물건을 받쳐들고 와서 탁자의
가운데에 놓았다. 아직도 붉은 피가 뚝뚝 떨어지는 장온의 목이었다.
그렇지 않아도 장온이 끌려가는 모습에 모두 가슴이 철렁 내려앉은
백관들이었다. 장온의 목을 보자 백관들도 모두 새파래진 낯빛으로 몸을
떨고 있었다.
백관들을 살피고 있던 동탁이 소리 높여 껄껄 웃으며 입을 열었다.
"제공들은 놀라지 마시오. 장온이 남양의 원술과 결탁하여 나를
모해하려 하였기 때문에 천벌을 받은 것이오. 원술이 놈이 보낸 밀서가
장온의 집으로 간다는 것이 봉선(여포의 자)의 집으로 잘못 전해졌던
것이오. 그래서 장온의 삼족도 조금 전에 다 잡아다 목을 베었소. 공들과는
아무 관계가 없는 일이니 놀라거나 두려워할 것 없소."
백관들은 더 이상 캐물을 수도 없었다. 술잔을 기울이는 척하다 말없이
흩어지고 말았다.
사도 왕윤도 이날의 주연에 참석했다가 집으로 돌아가는 수레 안에서
동탁의 전횡과 악행에 통분을 금치 못하고 있었다.
왕윤은 자가 자사로 태원군 기 땅 태생이었다. 어려서부터 충의를
숭상하고 공명에 눈떠 학문에 정진하였다. 그러나 무엇보다 그의 이름을
드높인 것은 불의를 보고 참지 못하는 그의 성품이었다.
그가 벼슬길에 올라 오늘에 이르기까지 숱한 핍박을 받으면서도 굴하지
않고 절의를 지킨 일화들은 널리 세상에 알려진 바 있었다.
낙양에서 지낼 때도 조조에게 동탁의 암살을 부탁하기도 했고, 지방의
군벌과 은밀히 연락을 취해 동탁 타도 운동을 벌이기도 했다.
아직 그 뜻은 이루지 못하고 있었으나 나이에 비해 경골한(의지나
신념이 강해 남에게 굽히지 않는 사람)으로서의 그 성품은 변하지 않고
있었다.
'이대로 가다간 머지 않아 천자도, 그리고 나도 동탁 일파에게 죽임을
당하리라.'
집에 돌아와서도 왕윤은 무법부도한 동탁에 대한 울분과 고뇌로 잠을
이루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나 동탁을 제거할 마땅한 계책이 떠오르지 않았다. 왕윤은 답답한
마음을 가눌 길이 없어 지팡이를 짚고 뒤뜰을 거닐었다.
때마침 달이 휘영청 밝았다.
왕윤이 차가운 이마에 손을 얹고 밝은 달을 우러르며 깊은 시름에 잠겨
있을 때, 어디선가 탄식하는 가느다란 흐느낌 소리가 들려 왔다.
'이 밤중에 이게 무슨 소리인가?'
왕윤은 의심쩍어 주위를 둘러보았다. 연못 건너편에 있는 모란정의
창문에서 달빛에 반사된 가느다란 불빛이 비쳤다.
발소리를 죽이고 살그머니 다가가 엿보니 정자 안에는 가기 초선이 홀로
앉아 있었다.
가기란 고관의 저택에 양육되면서 손님이 있을 때 연회에 나와 노래를
부르고 춤도 추며 시중을 드는 여종이었다.
그러나 왕윤과 초선은 주인과 종 이상이며, 양부와 양녀 이상의 혈육과
같은 진한 정으로 이어져 있었다.
그녀는 어릴 적부터 친부모를 알지 못했다. 서역 태생인 그녀는 어릴 때
노예로서 낙양에 끌려온 것을 왕윤이 데리고 와, 구슬을 닦듯이 여러 가지
기예를 가르쳐 가기로 삼았다.
콧날이 오뚝하고, 파란빛이 도는 눈을 지닌 그 소녀를 왕윤은 자기
친딸처럼 귀여워하면서 길렀다. 그런 초선도 이제 방년 열여섯의
요조숙녀로 자라나 자색과 가무가 빼어난 미인으로 성장하고 있었다.
그런 초선의 아름다움은 이 뒤뜰에 피어난 부용꽃도, 도리(복숭아,
자두의 꽃)의 색향도 따르지 못할 정도였다.
총명한 초선은 왕윤이 자기를 친딸처럼 아껴 주며 귀여워해 주자 그
은혜를 가슴 깊이 새기고 있었다.
왕윤은 초선의 거동을 잠시 살핀 뒤 입을 열었다.
"요망스럽게 계집이 어찌하여 이 밤중에 탄식하며 홀로 울고 있느냐,
무슨 말 못 할 사정이라도 있다는 말이냐?"
초선이 깜짝 놀라 자세를 가다듬고 무릎을 꿇었다.
"아닙니다. 천첩이 감히 무슨 사정이 있겠습니까?"
왕윤은 이렇게 말하는 초선의 아름다운 이마에 깊은 수심이 어린 듯하여
다시 물었다.
"그럼 왜 아직까지 잠을 이루지 못하고 깊은 탄식을 하고 있느냐?"
"허락하여 주신다면, 아뢰옵겠나이다. 진작부터 아뢰고저 하였으나 감히
아뢰지 못하고 있었사옵니다."
"무슨 말인지 알 수 없으나, 숨김없이 말해 보려무나."
"대감님이 너무 가여워서... 울음이 나왔습니다. 요즘은 한결 여위시고
음식도 드시지 않아 안타까운 마음 비길 데가 없사옵니다."
"음-."
초선은 고개를 숙이며 나지막한 음성으로 말을 이었다.
"대감님께서 천첩을 거두시어 키워 주시고 가무를 배우게 하시고
친자식처럼 사랑해 주시니 저는 태산 같은 은혜를 받은 몸이옵니다.
이처럼 너그럽게 대해 주시니 소녀 비록 뼈가 가루 되고 몸이 부서진다
하더라고 그 만분의 일도 갚지 못할 것이옵니다. 그런데 근자에 이르러
대감님을 뵈오니 미간에수심이 떠날 날이 없는 듯하옵니다. 이는 필시
나라에 큰 일이 있을 것으로 짐작되었으나 감히 여쭙지는 못했습니다.
그런데 오늘밤에는 잠자리에도 드시지 못하시고 뒤뜰을 거니시니 이 선이
어찌 잠자리에 들 수 있겠습니까? 대감님을 멀리 뵈옵다가 천첩도 그만
장탄식을 하게 되었사옵니다. 혹시 천첩이라도 쓰실 곳이 있으시다면
만번을 죽어도 사양치 않고 이 몸을 던지겠..."
초선은 흐르는 눈물에 말을 맺지 못하고 옷소매를 얼굴로 감쌌다.
"음-."
왕윤은 초선에게 뜻밖의 말을 듣고 내심 놀라면서 감탄하였다. 왕윤은
문득 눈부시게 아름다운 초선의 얼굴에 서린 결의에 찬 표정을 보았다.
왕윤은 불현 듯 머리를 스치는 생각에 지팡이를 짚고 일어났다.
"한 나라가 너의 손에 달려 있을 죽이야 누가 알았겠느냐. 여기서 이럴
것이 아니라 나를 따라오너라."
왕윤은 초선을 데리고 화각으로 들어가더니 초선을 자리에 앉히고 그
앞에 꿇어 엎드려 엄숙하게 머리를 조아려 절을 하였다.
초선이 깜짝 놀라 황망히 일어서며 방바닥에 꿇어 엎드렸다.
"대감님께서 어찌하여 이 천한 것을 이토록 놀라게 하십니까!"
"초선아, 너에게 절을 하는 것이 아니라 한 천하를 구해 줄 천인에게
절을 하는 것이다. 부디 네 몸을 빌어 한나라의 백성들을 불쌍히
여겨다오!"
왕윤의 두 눈에서는 어느 새 눈물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왕윤의 눈물을
보자 초선의 눈시울도 붉어졌다.
"초선아, 한 천하를 위해 너의 목숨을 내게 줄 수 있겠느냐?"
왕윤의 말에 초선은 조금도 동요의 빛 없이 또렷이 대답했다.
"이미 말씀드렸습니다마는 비록 이 몸이 천하고 보잘것 없으나 쓰일데가
있다면 기꺼이 따르겠사옵니다. 죽어도 사양치 않겠사오니 영을 내려
주옵소서."
그러자 왕윤이 무릎을 꿇은 채 말했다.
"지금 백성들은 도탄에 빠져 허덕이고 언제 죽을지 모르며, 임금과 신하
사이가 달걀을 쌓아 놓은 듯 위험하기만 하다. 이 모두가 역적 동탁때문이
아니더냐. 그놈이 천자의 자리를 뺏으러 가는데도 조정의 백관들은 그저
한숨만 쉬고 있을 뿐이다. 동탁에게는 여포라는 양자가 있는데 그놈의
무용은 천하에 아무도 당할 자가 없구나."
초선은 눈을 초롱초롱히 뜨고 왕윤이 가슴속에서 토해내는 말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오늘날까지 동탁을 죽이려 한 사람이 한둘이 아니다. 그러나 뜻을 이룬
사람이 없었다. 오히려 그놈에 의해 참수만 당할 뿐이었다. 동탁은 항상
열겹 스무겹으로 호위를 붙이고 있으며, 또 천하 제일의 장사 여포가 있어
아무도 근접하지 못한다. 다만 너 초선만이 그 일을 해낼 수가 있다.
동탁과 여포는 술을 탐하고 색을 좋아한다. 오늘 문득 네 말을 듣고보니
한 가지 계책이 떠오르는 구나. 두 사람을 맞붙게 하는 연환계가 그것이다.
먼저 너를 여포에게 시집보내기를 허락한 후, 다시 동탁에게 너를 바치는
것이다. 그들이 너를 보고도 마음이 동하지 않을 리 없다. 그러므로 너는
두 놈들 사이에서 서로 반목하도록 만들어야 한다. 그리하여 두 사람이
싸우도록 만드는 것이다. 여포로 하여금 동탁을 즉이게 한다면 이는
천하를 구하며, 악을 없애는 길이 된다. 초선아, 네 몸을 그들 부자에게
던지는 것은 사람으로서 못할 짓이나, 천하를 바로잡는 길이 그 일밖에
없구나. 초선아, 너의 뜻은 어떠냐?"
초선은 왕윤의 말을 듣고 고개를 숙였다. 구슬 같은 눈물이 마룻바닥에
떨어졌다. 이윽고 초선은 고개를 들어 또렷한 음성으로 말했다.
"저는 이미 대감께 아뢰지 않습니까. 만 번을 죽어도 마다하지 않겠다고
말씀드렸습니다. 대감님을 위해 죽는 일이 무엇이 두렵겠사옵니까?
그들에게 이 몸을 보내 주시옵소서."
"오오, 고맙다 초선아. 그러나 이 일이 누설되는 날에는 멸족을 당하는
화를 면치 못할 것이다."
"염려 마옵소서. 천첩도 지혜를 다하겠사오며 만약 대의를 이루지 못해
난도질당하여 죽은들 후회하지 않을 것이옵니다."
왕윤은 초선의 말에 다시 일어나 절을 올렸다. 절을 한 왕윤은 초선의
손을 잡고 다시 한 번 눈물을 흘리니 초선의 아름다운 눈에서도 쉴새없이
눈물이 떨어졌다.
왕윤은 가보로 전해져 오던 황금관을 꺼내 세공을 시켜 칠보로 장식한
후 사람을 시켜 남몰래 여포에게 보냈다.
여포는 값으로는 헤아릴 수 없는 그 진귀한 관을 받고 몹시 기뻐했다.
"왕 사도의 집에는 옛부터 명검보주가 많이 전하여 온다는 소문은
들었다. 그러나 낙양에서 천도한 후에도 이런 훌륭한 보물이 있는 줄은
몰랐도다."
여포는 용맹이 출중하였지만 단순한 사람이었다. 고마움을 표시하기
위해 즉시 적토마를 타고 왕윤의 집으로 달려갔다.
왕윤은 몸소 문 밖에까지 나와 여포를 반갑게 맞이하며 후당으로 이끈후
상좌에 앉히고 술과 안주를 차려 대접했다.
답례를 하러 갔다가 더욱 큰 환대까지 받게 되자 여포는 옥배를든채
왕윤에게 깊이 감사하며 말했다.
"저로 말하면 동 태사를 섬기는 승상부의 일개 장수에 불과합니다.
사도께서는 명망이 높은 조정의 대신이신데 어찌 소인을 이토록
과분하도록 환대하십니까?"
"허허, 지나친 겸양의 말씀입니다. 지금 천하에 영웅이라 일컬어질
사람은 오직 장군 한 분뿐이오. 이 왕윤은 장군의 관작을 존경하는 것이
아니라 장군의 영용무쌍한 재질을 사모하는 것이오."
왕윤이 여포를 잔뜩 치켜올리며 이렇게 둘러댔다. 그러자 여포는 비로소
천하의 영웅은 자기 한 사람밖에 없다고 생각한 듯 크게 웃으며 술잔을
받아 마셨다.
몇 순배의 술이 돌고 여포가 웬만큼 취하자 왕윤은 술시중을 들고 있는
시첩에게 분부를 내렸다.
"우리 집에 귀빈이 오셨으니 아기씨 보고 나와서 인사를 여쭈라고
일러라."
"예."
여포의 시중을 들던 시첩들이 물러갔다. 잠시 후 방 밖에서 조용한
인기척이 나더니 두 시첩이 휘장을 들어올렸다.
여포도 무심코 술잔을 놓고 그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두 시첩에게
양쪽으로 부축을 받으며 곱게 단장한 초선이 들어섰다.
원래 뛰어난 자태인데다 정성을 다해 치장까지 했으니 초선의
아름다움이 눈부실 지경이었다. 고개를 반쯤 숙이고 조용히 걷는 모습은
한 떨기 모란꽃처럼 청초하면서도 요염했다.
"어서 오십시오."
초선은 손님에게 엷은 미소와 함께 매혹적인 눈길을 보낸 후 고개를
숙여 인사를 올렸다.
여포는 그런 초선을 황홀한 눈빛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달보다 환하고
꽃보다도 예뻤다.
왕윤은 앞에 놓인 술잔을 들어 초선에게 건네주며 말했다.
"너에게는 다시없는 영광이니라. 여 장군께 술을 한 잔 올리도록
하여라."
초선은 눈가를 붉게 물들이고 은어처럼 고운 섬섬옥수를 내밀어 비취
술잔을 권하였다.
여포는 제정신이 아니었다. 어떻게 술잔을 받고 어떻게 마셨는지 알지
못할 정도였다. 초선의 움직임에 따라 훈훈한 향내음이 코를 스쳤고,
가슴은 벌렁벌렁 마구 뛰었다.
술잔을 따른 초선은 곧 물러나며 휘장 밖으로 나가려 했다.
"초선아, 잠깐 기다려라."
왕윤은 초선과 여포를 번갈아 바라보면 입을 열었다.
"여기 계시는 여 장군은 내가 평소에 공경하는 분이며 우리 집안의
은인이기도 하다. 허락을 하신다면 옆자리에 앉아 모시도록 하여라."
왕윤의 말에 초선은 살며시 여포 옆에 앉았다. 그러나 고개를 떨구고
있을 뿐 말은 하지 않았다.
아까부터 놀란 눈이던 여포가 비로소 왕윤에게 물었다.
"이 낭자는 누구시오?"
"내 딸 초선이외다."
왕윤의 말에 여포가 더욱 놀란 듯 감탄 섞어 말했다.
"대관의 슬하에 이렇게 아름다운 따님이 있었습니까?"
"규방에서만 자라 세상 물정을 모를뿐더러 손님 앞에 나온 것도 오늘이
처음이오."
"그런 따님을 오늘 이 여포 앞에 불러 내시다니 경대에 감사할
따름입니다."
"우리가 장군의 방문을 얼마나 기뻐하고 있는지를 알아 주신다면 더
이상 바랄 것이 없겠소이다."
"이제 환대는 충분히 받았습니다. 대감, 취했소이다."
여포가 취한 중에도 문득 흐트러진 자신의 모습을 보이지 않으려는 듯
왕윤에게 이렇게 말하며 자리를 뜨려 했다.
"몇 잔 술에 무슨 말씀이오. 초선아, 어서 술을 권해 올리지 않고 뭘하고
있느냐."
초선은 여포의 잔에다 술을 가득 부었다. 여포는 차츰 몽롱하게 취기가
돌았다.
그러자 왕윤이 여포를 바라보며 물었다.
"장군! 이 아이를 장군의 첩으로 보낼까 하온데 장군의 의향이
어떠시오? 이제 늙은 몸이라 누구에게 의탁하여야 하나 마땅치가 않구려.
장군께서 거두어 주신다면 마음놓고 눈감을 수 있을 터인즉..."
여포는 자기 귀를 의심했다. 여포는 그만 자신의 체면도 잊고 황급히
왕윤에게 물었다.
"옛? 따님을... 대감, 그 말씀이 진정이십니까?"
"어느 앞이라고 감히 거짓말을 하겠소."
여포는 벌떡 자리에서 일어나 왕 사도한테 넙죽 절을 올리며 머리를
조아렸다.
"오, 초선을 저에게 주신다면 소장은 견마의 충성으로 왕 사도를 받들어
모시겠습니다."
"좋은 날을 택하여 장군의 부중으로 보내오리다."
왕윤은 짐짓 흡족한 표정으로 여포에게 말했다.
"대감, 나는 너무 취했습니다. 행보도 어렵군요."
그때쯤 취기가 오른 여포는 뜨거운 눈으로 초선을 보았다. 초선도
부끄러운 듯 얼굴을 붉히고 입가에 엷은 미소를 띤 채 여포에게 은은한
눈길을 보냈다. 여포는 꿈인지 생시인지 덩실덩실 춤이라도 추고 싶었다.
그러나 왕윤은 단호히 입을 열어 여포를 깨우쳤다.
"오늘밤은 우리 집에서 묵어 가게 했으면 좋겠소만 동 태사께서
아신다면 혹 의심하실가 근심이 됩니다. 내 좋은 날을 택해 초선을 보내
드릴테니 오늘은 그만 돌아가시오."
여포는 감사한 마음을 전한 뒤, 몇 번이고 뒤돌아보면 아쉬운
발걸음으로 돌아갔다.
경국지색 초선 여포와 동탁에게 불을 당기다
왕윤은 동탁을 청하여 온갖 음식과 초선으로 하여금 동탁을 혼란케
했다. 동탁은 홀린 듯 넋을 잃고 왕윤은 초선을 동탁에게 바친다. 여포는
초선을 못잊어 승상부 곁을 떠나지 못하고 초선은 여포와 동탁, 두
사나이의 가슴에 뜨거운 불을 당겨 원한을 사게 한다.
그로부터 며칠이 지난 후였다.
왕윤은 조정에 출사하자 여포가 보이지 않는 기회를 틈타 동탁 앞에
나아가 무릎을 꿇었다.
"저의 누옥(자기 집을 겸손하게 부름)이 비록 누추하오나 태사를 모시고
약주 한 잔을 대접하고 싶습니다. 왕림해 주신다면 큰 기쁨이겠습니다."
"사도께서 불러 주신다니 고맙소. 경과 같은 조정의 원로가 청하는데 내
어찌 마다할 수 있겠소."
동탁은 몹시 흐뭇한 듯 다음 날로 날을 정하며 선뜻 응낙했다. 왕윤은
집으로 돌아가자 즉시 산해진미를 장만하게 하고 대청에 연회석을
만들었다. 연회석의 바닥에는 능라(두꺼운 비단과 얇은 비단)을 깔았으며,
주위에 휘장을 둘러치고 눈부신 포진(잔치를 할 때 앉을 자리를 깖)을
하니 마치 황제라도 모시는 듯한 잔치자리 였다.
다음 날 정오경에 동탁은 천자의 행차보다 더 호화롭게 많은 장수들을
거느리고 왕윤의 집으로 왔다.
왕윤은 조복을 갖추어 입고 밖으로 나가 정중히 동탁을 맞으며
재배하였다. 동탁의 수레는 창을 든 수백 명의 호위군이 에워싸고 있었다.
동탁이 수레에서 내리자 시신, 백관 등이 전후좌우를 응시하며 집안으로
들었다. 왕윤은 동탁이 들어오자 다시 마당에서 두 번 절한 후, 당하에
머물러 있었다.
동탁은 왕윤이 이토록 자기를 높이 모시자 더욱 흐뭇했다. 조정의
원로에다 명문의 집안이며 성품이 곧기로 유명한 왕윤이었다. 이토록
자기를 경대하니 이제 그도 자기에게 스스럼없이 굽히어 자신과
가까워짐을 뜻하는 것이라 여겼다.
동탁은 껄껄 웃으며 좌우에 분부하였다.
"사도를 받들어 당으로 오르시도록 하라."
동탁은 왕윤에게 자기의 옆자리에 앉도록 권했다.
왕윤은 동탁의 옆자리에 앉으며 송구한 듯 말문을 열었다.
"태사의 성덕이 넓고 높으니 이윤이나 주공도 이에 미치지 못할
것이옵니다."
왕윤의 찬사에 동탁은 희색이 만연하였다. 왕윤은 준비해 둔
산해진미에다 술을 권하며 시첩들에게 풍악을 울리게 하였다. 거문고와
풍류 소리는 이웃에까지 널리 퍼지고 맛좋은 음식은 끊일 사이 없이
이어졌다.
"태사께서는 이제 후당으로 드시지요."
날이 저물고 술이 거나하게 취하자 왕윤은 동탁을 호젓한 후당으로 청해
들였다.
"너희들은 밖에 나가 있거라."
후당에 들자 동탁은 갑사들을 물리쳤다. 좌석에 두 사람만 남게되자,
왕윤이 동탁에게 술잔을 올리며 말했다.
"제가 어려서 천문을 좀 배웠습니다만, 당금의 천문을 보건대 한조의
운명도 이미 다한 듯하옵니다. 이제 태사의 공덕은 천하에 떨치시고
있습니다. 태사께서 순이 요를 잇고, 우가 순을 잇듯 한을 이어받으신다면
그야말로 천심과 민의에 합당할 것입니다."
왕윤의 입에서 뜻밖의 말이 나오자 동탁은 왕윤을 곁눈질해 보며 한껏
겸양을 떨고 말했다.
"그게 무슨 말이오? 그건 내게 과분한 말씀이오. 한 번도 염두에 둔
적이 없소."
동탁은 왕윤의 말이 더할 나위 없이 흡족했으나 짐짓 시치미를 떼고
말했다. 왕윤은 동탁이 시치미를 뗄수록 다시 그를 부추겼다.
"옛부터 '도가 있는 자가 도 없는 자를 치고, 덕없는 이가 덕 있는
이에게 자리를 내어 준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어찌 과분한 일이라
이르겠습니까?"
"하하하... 만약 이 동탁에게 천명이 돌아온다면 사도께서는 원훈이 되실
것이오."
동탁이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동탁의 말에 왕윤은 머리를 조아려 절까지
하니 동탁은 이제 왕윤이 천자를 거슬러 자기에게 돌아선 것으로 믿었다.
동탁은 흐뭇한 기색을 감추지 못하며 술잔을 맘껏 들이켰다.
노재상 왕윤은 접대에 소홀함이 없어 방안에 촛불을 밝혀 놓고 다시
주안상을 차리게 한 후 입을 열었다.
"교방(국악원의 단원)의 풍악만으로는 흥이 덜합니다. 마침 저의 집에
제가 기른 가기가 있어 그 기예가 볼 만하니 한번 보여 드릴까 합니다."
"그거 참 좋은 일이오."
왕윤이 주렴을 올리게 하니 주악 소리가 은은히 울리는 가운데 시첩에게
에워싸인 초선이 나타나 춤을 추기 시작했다. 경국지색의 미인, 초선은
소매를 나풀거리며 교태어린 몸짓으로 춤을 추었다.
그녀를 위해 사죽관현의 절묘한 소리가 울려 펴졌다. 초선이 춤을 추는
매혹적인 모습을 노래한 시가 있다.
춤추는 이 누구요, 소양궁의 궁녀인가
날렵한 몸 놀란 기러기 같구나
동정호 봄물결 위로 나는가 했더니
저 양주 미인처럼 사뿐사뿐 걷누나
바람결에 하늘거리는 한 떨기의 꽃이련가
화당에 향 어리어 향기 그윽하네.
동탁은 초선의 아름다운 모습과 춤솜씨에 넋을 잃고 바라보았다.
"음-. 훌륭한 춤이로다."
동탁이 감탄해 마지않더니 한 곡이 끝나자 또 한 곡을 요청하였다.
초선이 다시 일어서자 교방의 악사들이 더욱 신바람을 내어 연주하였고,
초선은 춤을 추며 애절한 목소리로 노래를 불렀다.
홍아의 바른 장단 제비처럼 빠르구나
한 조각 흐르는 구름 화당에 머물렀네.
그린 듯 검은 눈썹, 나그네의 한숨 자아내고
달같이 환한 얼굴 옛 친구의 간장 태우네.
천금 같이 웃는 자태 유전으로도 살 수 없어
버들띠로 백보 단장을 꾸밀 수 있으랴.
춤추기를 다하고 주렴 너머로 추파 보내니
알 수가 없구나 초양왕이 누구인가?
눈은 초선의 모습을 응시한 채 노래 가사에 귀를 기울이던 동탁은
초선의 가무가 끝나자 감흥에 못 이겨 왕윤을 보고 말했다.
"사도, 저 아이가 누구요? 교방의 여자는 아닌 듯하오만..."
"마음에 드셨습니까. 가기 초선입니다."
"가기라고? 이리 좀 가까이 오라고 하시오."
동탁의 말에 왕윤이 얼른 초선을 불렀다.
"초선아, 태사께서 부르시니 어서 인사를 올려라."
초선은 몹시 부끄러운 듯 섬섬옥수로 고요히 발을 걷고 당 안으로
들어서며 이마를 숙였다. 가까이서 초선을 보자 동탁은 마음의 동요가
일었다. 지금까지 수많은 여자를 품에 안았으나 아직까지 보지 못했던
뛰어난 절색이었다.
동탁이 초선을 취한 눈으로 보다가 불쑥 왕윤에게 말했다.
"사도, 이 아이의 노래를 한 곡조 더 듣고 싶소이다."
왕윤이 동탁의 청을 마다할 리 없었다. 일이 뜻대로 되어 감을
마음속으로 기뻐하며 초선에게 일렀다.
"태사께서 청하시니 한 곡조 더 불러라."
초선은 장단을 맞추는 단판(나무로 만든 박)을 손에 들더니 옥구슬
굴리는 듯한 당당한 목소리로 조용히 노래를 불렀다.
앵두 같은 빨간 입술 방싯 열리어
하얀 구슬 드러내고 봄 노래 부르네
향기로운 혀끝으로 칼날을 토해 내어
나라 어지럽히는 간신을 베려 하네.
"허, 기막힌지고."
동탁은 홀린 듯 넋을 잃고 있다 노래가 끝나자 초선의 노래 솜씨를 입에
침이 마르도록 칭찬하였다.
초선이 부른 노래가 자신을 가리켜 간사한 간신에 비유한 것도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신선의 선녀는 바로 이 초선을 두고 하는 말인가 보오. 미오성에도
가인은 많으나 초선과 같은 미색은 없소. 만일 초선이 한 번 웃는다면
장안의 분대(화장한 아름다운 여자)가 다 무색해지리라."
왕윤이 기다리던 말이라 이때를 놓치지 않고 입을 열었다.
"태사께서 그토록 초선을 높이 보아주시니 기쁘기 한량없습니다. 그토록
초선이 마음에 드셨습니까?"
"나는 참다운 미인을 오늘 밤에야 본 것 같소."
"제가 이 아이를 태사께 바치고 싶사옵니다. 받아 주실지 몰라 망설였을
뿐입니다."
동탁의 입은 함박만큼 벌어졌다. 자신이 원하던 바인지라 귀가 번쩍
뜨이는 말임에 틀림없었다.
"허, 사도께서 그토록 큰 은혜를 베푸시다니, 이 은혜를 무엇으로
갚겠소?"
왕윤이 다시 한 번 간곡히 말했다.
"이 아이도 태사님을 모시게 된다면 그보다 더한 복이 어디
있겠습니까?"
왕윤은 눈물을 속으로 삼키며 거듭 감사의 말을 늘어놓았다. 왕윤은
즉시 수레를 준비시켜 초선을 먼저 승상부로 태워 보냈다. 초선이 자기의
부중으로 가자 동탁도 회가 동해 마음이 급해졌다. 동탁이 몇순배의 술이
돌자 취기를 핑계로 돌아갈 채비를 차렸다.
"사도, 이젠 돌아가야 되겠소이다. 오늘의 환대와 은혜 잊지 않을
것이오."
동탁이 자리에서 일어나 작별 인사를 했다.
왕윤은 말을 타고 동탁의 수레를 따르며 승상부까지 배웅했다.
왕윤이 집으로 돌아오는 길이었다. 저편 어둠 속에 붉은 등불들이 길을
환히 밝힌 가운데 말발굽 소리도 요란하게 이쪽으로 달려오는 한 무리의
기마대가 있었다. 기마대의 선두에는 적토마를 탄 여포가 있었다.
여포는 왕윤의 앞에 다가오더니 말을 세운 후 대뜸 왕윤의 옷깃을
움켜잡으며 소리쳤다.
"사도는 지난날 초선을 내게 주겠다고 약조해 놓고도 오늘 태사에게
보냈으니 이게 어찌 된 일이오? 그래 누굴 희롱하는 거요?"
"그 일이라면 여기서는 이야기할 것이 못 되니 우선 집으로 갑시다."
왕윤은 노발대발하는 여포를 달래 자기 집으로 이끌었다.
두 사람이 말에서 내려 후당으로 들어가자 왕윤이 먼저 입을 열었다.
"여 장군은 어째서 이 늙은이를 의심하시오?"
왕윤은 짐짓 영문을 알 수 없다는 얼굴을 지었다.
"누가 내게 와서 그러는데, 사도가 초선을 수레에 태워 승상부로
들여보냈다고 하던데 그게 대체 어찌 된 일이오?"
화가 풀리지 않은 여포는 여전히 목소리를 높인 채 물었다.
"그건 여 장군께서 몰라 하시는 말씀이요. 이 늙은이가 망령이라도 나지
않은 이상 어찌 장군에게 한 입으로 두 말을 하겠소?"
"그럼, 어찌된 연유이오?"
왕윤은 정색을 하고 말했다.
"사실 그 일은 이렇게 되었소이다. 어제 조당에 나갔다 태사를 만났소.
그런데 태사께서 이 늙은이를 보시더니 '내가 상의할 일이 있어 내일
사도댁으로 찾아가겠소' 하십디다. 그래서 변변치 않은 술자리를 마련해
놓고 기다렸던 것이외다. 태사께서 오시고 술이 몇 순배 돈 후 '내가
듣자하니 사도에게 초선이라는 딸이 있어서 내 아들 봉선에게 주겠다고
하셨다는데 나도 이야기를 듣고 또 직접 한 번 볼 겸해서 왔소' 하고
말씀하시었습니다. 그래 이 늙은이가 초선을 불러내어 태사님께 인사를
시켰습니다. 그러자 태서께서 '오늘이 마침 길일이니 내가 당장 여식을
데리고 가서 봉선과 짝을 지워주겠소' 하십디다. 여 장군도 생각해 보시오,
태사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시는데 어느 분부라고 이 늙은이가 감히
거역한단 말이오?"
왕윤의 말을 듣고 보니 여포는 할 말이 없었다. 그토록 씨근덕거리던
숨소리가 금세 수그러들더니 머리를 조아리며 사과했다.
"이 포가 잘못 알고 경솔히 처신하였습니다. 내일 다시 와서
사죄하리다."
여포가 간곡히 사죄하자 왕윤이 웃으며 다시 말했다.
"뭐, 사죄까지 하실 것 있겠습니까? 내 딸아이의 혼수도 있으니 초선이
장군께 가면 댁으로 보내 드리도록 하리다."
여포는 초선의 혼수감을 직접 자기의 집으로 보낸다고 하자 더 이상
의심을 할 수도 없었다. 왕윤에게 백배사죄를 한 뒤에 집으로 돌아갔다.
그러나 여포가 집에 순순히 돌아오기는 했으나 그날 밤은 이런저런
생각으로 깊은 잠을 이루지 못했다.
'지금쯤 초선은 어떻게 지내고 있을까?'
초선의 생각이 좀처럼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다. 여포는 침상에 가만히
누워 있을 수가 없어 휘장을 젖히고 창 밖으로 시선을 주었다. 그리고는
승상부의 하늘을 멍한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그날 여포는 번뇌와 욕망으로 마음을 끓이며 뜬눈으로 밤을 보내며 날이
밝아오기를 애타게 기다렸다.
아침이 되자 여포는 양부인 동탁이 자기를 부르리라 여기며 승상 부중을
떠나지 않고 하회를 기다렸다. 그러나 해가 중천에 떠올라도 동탁에게서는
아무런 기별이 없었다.
여포는 기다리다 못해 승상부로 등청했다. 이렇다 할 용무도 없었으나
그는 곧바로 동탁의 침전으로 갔다.
"태사께서는 기침하셨는가?"
동탁의 시첩몇이 중당에 모여 있는 걸 보자 여포가 대뜸 물었다.
"아직 휘장이 드리워져 있습니다."
시첩 중의 하나가 대답했다.
여포는 까닭 모를 불안에 사로잡혔으나 내색하지 않고 조용히 물었다.
"벌써 정오가 가까운데 아직도 주무시는가?"
그러자 그 중의 한 시첩이 여포에게 다가와 귀에다 대고 속삭였다.
"태사께서는 어젯밤 새로 들어온 어느 여인과 침소에 드신 뒤 아직
기침을 아니 하셨습니다."
"새로 들어온 여인이라면?"
여포의 불안감은 더욱 커졌다. 떨리는 목소리로 그 시첩에게 물었다.
"예, 왕사댁에서 온 초선이라는 여인이라 하옵니다."
여포는 그 말을 듣는 순간 눈알이 뒤집히는 듯했다. 여포는 분노로
얼굴이 붉어진 채 중당을 빠져 나왔다.
초선은 어디까지나 자기의 아내가 될 사람이었다. 동탁이 아무리 미색에
눈이 뒤집혔다 하더라도 며느리감을 자기의 침소로 들게 할 수는 없는
일이 아닌가.
밖으로 나온 여포는 가끔 연못 건너편 후당 쪽을 지켜보곤 하였다.
후당의 침전은 한낮이 되어서야 창문이 열렸다.
"태사께서 방금 기침하셨습니다."
한 시첩이 달려와 알렸다. 여포는 곧장 동탁의 침소가 있는 후당으로
들어가 방 뒤꼍 난간 쪽에 몸을 가린 채 방안의 동정을 살폈다.
이때 초선이 자리에서 일어나 창문 앞에서 머리를 빗고 있었다. 문득 창
밖 연못에 속발관을 쓴 몸집이 큰 사람의 그림자가 어른거리는 게 보였다.
초선이 살그머니 곁눈질해 보니 그는 바로 여포였다.
초선은 짐짓 눈썹을 잔뜩 찌푸리고 슬픔에 쌓인 표정을 지었다. 그러다
비단 수건으로 연신 눈물을 훔치는 시늉도 해 보였다.
이런 모습을 훔쳐보던 여포는 잠시 자취를 감추었다가 얼마 안 있어
다시 나타났다.
여포는 초선의 슬픔에 싸여 눈물을 흘리는 것을 보자 가슴이 메이는
듯했다. 초선의 눈물이 자기를 생각하며 흘린 것이라 생각하니 동탁에
대한 분노가 사무쳤다.
동탁은 그때서야 자리에서 일어나 중당에 앉아 있었다. 여포가 들어오는
것을 보고 동탁이 물었다.
"밖에는 아무 일 없느냐?"
"없습니다."
여포의 대답이 오늘 따라 짤막했다. 여포는 동탁의 옆에 시립했다.
동탁이 늦은 조반을 들고 있는 동안 여포는 곁눈으로 주위를 살폈다. 그때
주렴 안을 서성이던 한 여인이 얼굴을 반쯤 내밀었다. 초선이었다.
여포를 바라보는 초선의 시선에는 그를 향한 애틋한 그리움과 은근한
정이 담겨 있었다. 그런 초선을 바라보는 여포는 마음이 산란하여 제
정신이 아니었다.
"별일 없으면 봉선은 그만 물러가거라!"
"동탁은 심상치 않은 여포와 초선의 눈길에 의심이 일며 노기가
치솟았으나 억누르고 말했다.
동탁은 그 후로 초선의 미색에 빠져 달포 남짓 그 방에서 나오지
않았다. 그는 밤과 낮을 가리지 않고 초선을 가슴에 품고 탐했다.
그러나 아무리 정력이 뛰어난 동탁이지만 나이가 있는지라 병치레를 할
때도 있었다. 초선은 허리띠도 풀지 않고 정성을 다해 동탁을 돌보았다.
초선의 극진한 간호에 동탁은 더욱 그녀를 아끼고 사랑했다.
어느 날 여포는 동탁이 몸이 불편하여 자리에 누워 있다는 말을 듣고
문안차 승상부에 등청하였다.
여포가 문안 갔을 때 동탁은 마침 잠들어 있었다. 동탁이 깨어나기를
기다리며 서 있는데, 문득 침상 저쪽에서 초선의 모습이 보였다. 초선은
애처로운 눈빛으로 애원하듯 여포를 바라보았다.
그런 초선을 보자 여포는 뜨거운 것이 치솟으며 가슴이 뛰기 시작했다.
초선은 여포가 자기를 보고 있자 자기 가슴을 손으로 가르키더니 이어
동탁을 가리키며 참을 수 없다는 듯 눈물을 뚝뚝 흘렸다.
'당신을 사랑하고 사모하는 마음 간절하지만 동탁이 가로막고 있어서 갈
수 없다'는 뜻이었다.
그 모양을 바라보는 여포는 가슴이 찢어지는 듯했다. 이때 잠들어 있던
동탁이 심상치 않은 느낌이 들었는지 눈을 떴다.
여포가 서 있는 모습을 보자 정신을 차리며 그를 바라보았다. 그러나
여포가 한 곳으로 정신이 쏠려 바라보고 있자 동탁은 고개를 돌려 그곳을
바라보았다.
침상 저쪽으로 바라보니 그곳 휘장밖에 초선의 모습이 어른거렸다.
동탁은 불끈 화가 치솟아 호통을 쳤다.
"네 이놈! 감히 내 계집을 희롱하다니!"
여포는 동탁의 호통에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여포는 어쩔 줄 몰라
머뭇거리고 있자 동탁의 노기는 더욱 끓어올랐다.
"여봐라, 게 누구 없느냐? 저놈을 당장 끌어 내고 앞으로 이곳에 얼씬도
못하게 하라!"
동탁은 큰 소리로 좌우를 불러 여포를 밖으로 끌어 내게 하고, 다시는
중당에 들지 못하게 엄명을 내렸다.
여포 또한 분노를 억누를 길이 없었으나, 그 자리를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분통이 터지는 판에 모욕까지 당한 여포는 끓어오르는 마음으로
집에 돌아오다 길에서 모사 이유를 만났다.
여포는 이유에게 전후 사정을 얘기하며 자기의 억울함을 호소했다.
"이제 부중에도 들지 못하고 쫓겨난 몸이 됐소이다."
여포가 씨근덕거리며 말하자 이유는 덜컥 걱정이 앞섰다. 여포와 동탁이
등을 지면 큰일이 아닌가. 아유는 여포를 달랜 후 급히 와방으로 달려갔다.
동탁 또한 아직도 분을 삭이지 못하고 있다가 이유가 들자 여포가 자기
애희를 희롱한 이야기를 욕설을 섞어 가며 들려주었다.
이유는 동탁의 말에 동조하는 듯 쓴웃음까지 지어 가며 목소리를 낮추어
말했다.
"말씀을 듣자 하니 태사께서 괘씸하게 여길만 하옵니다. 그러나
태사께서 천하에 군림하시려면 소인의 사소한 잘못은 웃으며 용서하는
관도(관대한 법도)가 있어야만 합니다. 만약 여포를 멀리하게 되어 그가
딴마음을 품고 태사님을 훌쩍 떠나버리면 대사를 그르치게 될 지도 모르는
일이옵니다."
이유가 동탁에게 타이르듯 말하자, 동탁도 그제서야 정신이 들었다.
동탁에게 있어서는 천하를 취할 야망을 펴기 위해 여포가 없어서는 안될
인물이었다.
"어찌하면 좋겠느냐?"
"근심하지 마십시오. 여포는 단순한 사람입니다. 불러들이시어 금은을
내리시고 부드럽게 어루만지시면 될 것입니다."
동탁은 이유의 충언을 받아들여 다음 날 여포를 승상부로 불러들였다.
"어제는 내가 병중이라 심신이 불편하여 네게 심한 말을 하였다. 마음에
새겨 두지 말라."
그리고는 여포에게 황금 열 근과 비단 스무 필을 내렸다. 동탁이 그렇게
예물까지 내리니 여포는 고마움을 표하고 승상부를 물러났다. 그러나
여포의 가슴에는 항상 초선의 생각이 떠나지 않고 있었다.
동탁은 그럭저럭 병세가 회복되자 다시 입조하여 정사를 살폈다. 여포도
그 후 전보다는 휠씬 말수가 적어졌지만 임무에 충실하여 승상부로
등청하였다.
어느 날, 동탁은 헌제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여포가 전 밖에서 창을
들고 서 있는데 초선의 아름다운얼굴이 자꾸만 눈앞에 어른거리는 듯했다.
가슴에 타오르는 열정을 주체하지 못한 여포는 창을든 채 승상부로 말을
달렸다. 승상부에 다다른 여포는 말을 문 앞에 메어두고, 방천화극을 든 채
초선이 있는 후당으로 들어갔다.
"장군께서 어인 일로..."
초선이 놀란 체하며 여포에게 물었다.
"그대를 보러 온 것이요."
여포가 뜨거운 눈길로 초선을 바라보며 말했다. 그러자 초선이 주위를
살피며 말했다.
"이곳 시녀들의 눈이 번잡하므로 장군께서는 후원의 봉의정에 가서 저를
기다려 주십시오. 곧 장군을 뒤따르겠습니다."
초선의 말에 여포는 가슴을 두근거리며 방천화극을 옆구리에 낀 채
봉의정으로 달려갔다. 잠시 후 초선이 꽃나무 사이를 지나 버들가지를
헤치며 사뿐사뿐 걸어왔다. 그 모습은 구름 사이로 월궁의 선녀가
하늘에서 내려온 듯 더 한층 아름다웠다.
초선은 여포한테로 왈칵 달려와,
"장군..."
하며 슬픔에 겨운 목소리로 불렀다.
두 사람은 정자의 그늘진 곳으로 자리를 옮겨 나란히 섰다. 그리고 한
동안 말없이 서로의 얼굴을 쳐다보기만 하였다. 여포는 온몸의 피가
끓어오르는 것만 같았다.
여포가 초선의 어깨를 감싸쥐었다. 그러자 초선은 여포의 가슴에 얼굴을
묻고 소리 없이 흐느끼기 시작했다.
"초선, 울고 있지 않느냐? 나하고 만나는 것이 기쁘지 않느냐? 어찌하여
그토록 눈물을 흘리는가."
"아닙니다. 장군, 천첩은 너무 기뻐 눈물이 나오는 것입니다."
초선은 흐르는 눈물을 비단으로 훔치며 여포에게 하소연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제가 비록 왕 사도님의 친자식은 아니었으나 그 어른은 친자식처럼
저를 거두었습니다. 그러다 장군을 뵙자 이 몸은 평생토록 장군을
모시도록 허락을 받아 평생의 소원이 이루어졌다고 좋아하였습니다.
그런데 뜻밖에도 태사께서 저의 몸을 더럽혀 놓을 줄이야 어찌 상상이나
했겠습니까. 동 태사께서 저를 장군께 데려다 준다기에 거역하지 못하고
따라왔습니다..., 첩이 그때 한을 품고도 목숨을 끊지 못한 것은 장군께
억울한 연유도 고하지 못하고 영영 이별하는 것이 억울하였기 때문입니다.
이제 장군님을 뵈었으니 부끄러움을 견디며 살아 온 보람을 느낍니다.
이미 더럽혀진 이 몸, 다시는 장군님을 섬길 수 없으니 차라리 장군님
앞에서 목숨을 끊어 저의 마음을 보여 드리고자 합니다."
초선은 울음을 삼키며 말을 마치자 정자 아래에 있는 연못에 몸을
던지려 하였다.
여포가 황망히 초선의 옷자락을 부여잡으며 말했다.
"나도 네 마음을 다 안다. 그러나 죽어서는 아니 된다."
초선은 여포의 손을 뿌리치려 몸부림쳤다.
"이 손을 놓으십시오. 죽게 내버려두소서. 살아 있어도 이승에서는
장군과 인연이 없는 이 몸, 마음은 날이 갈수록 괴롭고 몸은 불인한
태사의 희생이 되어 밤마다 시달릴 뿐입니다. 차라리 저승에 먼저 가
장군과 맺어질 날을 기다리겠습니다."
"초선, 잠깐만 기다려라. 너무 슬퍼하지 말고 기다려다오. 내가 이승에서
너를 아내로 삼지 못한다면 어찌 영웅이라 할 수 있겠느냐?"
여포가 이렇게 외치자 초선이 그제서야 그를 올려다보며 물었다.
"지금의 그 말씀은 장군님의 진심이옵니까? 그렇다면 첩을 하루빨리
구해 주시기를 바랄 뿐입니다. 첩에게는 하루가 10년같이 괴롭습니다."
"아무렴, 구해 주고 말고! 잠시만 기다려라. 결코 오래 가지 않는다.
오늘은 그 늙은 것을 수행하여 입궐하였다가 잠시 이곳에 들렀을 뿐이다.
퇴궐한다면 금세 발각이 될지도 모르니 오늘은 그만 헤어지자."
"벌써 가시렵니까?"
초선은 여포의 소매를 잡고 홀짝홀짝 울면서 놓지 않았다.
"장군은 이 천하에 둘도 없는 영웅이라고 들어 왔습니다. 그런 장군께서
어찌하여 늙은 태사를 겁내어 밑으로 몸을 굽히고 계십니까?"
초선은 원망이 서린 시선으로 여포를 하염없이 바라보다가 눈물을
비오듯 흘렸다.
"나에게도 생각이 있으니 조금만 기다려라."
여포가 초선의 손길을 뿌리치며 화극을 들고 떠나려 하자 초선이 여포의
앞을 막으며 말했다.
"장군께서 그토록 태사님을 두려워하시는데 어찌하여 첩이 밝은 햇빛 볼
날을 기다리겠습니까?"
초선의 말에 여포는 부끄러움으로 얼굴이 달아올랐다.
여포가 지금까지 가졌던 자부심이 초선이 앞에서 무참히 무너지는 듯
하자 그는 오기가 치솟았다.
"내가 그 늙은 도적을 두려워하다니... 나는 아직 그 누구도 두려워한
적이 없다."
여포가 이렇게 내뱉고는 화극을 내려놓은 뒤 초선을 껴안았다. 초선도
여포의 넓은 가슴으로 파고들었다.
"저는 태사의 발소리만 들어도 몸이 떨리고 소름이 끼칩니다. 아아,
언제까지나 이렇게 장군의 품에 안겨 있었으면..."
초선이 방울 굴리는 듯한 목소리로 소곤거리며 여포의 가슴을 파고들자
둘은 껴안은 채 떨어질 줄을 몰랐다.
여포는 초선의 뺨에 자기의 뺨을 대고 비볐다. 향긋한 여인의 살내음과
함께 초선의 홍루(미인의 눈물)가 여포의 뺨까지 적셨다.
이때, 동탁은 황제에게 정사를 상주하고 있다가, 문득 심상치 않은
예감이 일어 당하를 보니 아니나 다를까, 여포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불현듯 의구심이 솟아 황망히 황제께 물러가겠다는 인사를 올린 뒤 급히
수레를 몰아 승상부로 돌아왔다.
문 앞에는 여포의 적토마가 매어져 있었다.
동탁은 문지기에게 여포의 행방을 물었다.
"온후(여포의 벼슬 이름)께서는 안으로 드시었습니다."
동탁은 좌우를 물리치고 곧장 후당으로 뛰어들었다. 그의 얼굴은 이미
노기로 붉게 물들어 있었다. 동탁은 후당을 둘러보았으나 여포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으며 초선의 이름도 불러 보았으나 대답이 없었다.
동탁은 시첩 하나를 붙잡고 물어 보았다.
"초선은 어디 갔느냐?"
시첩은 동탁의 열에 들뜬 얼굴을 보자 두려움에 떨며 겁먹은 목소리로
말했다.
"후원에서 꽃구경을 하고 계십니다."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동탁은 부리나케 후원으로 달려갔다.
동탁이 후원으로 들어서자 여포와 초선이 봉의전 아래 곡란에서 서로
부둥켜안고 얼굴을 비벼대며 옥신각신하는 것처럼 보였다.
동탁의 눈에 불꽃이 튀었다. 열화와 같이 노한 동탁은 한 모퉁이에
세워져 있는 화극을 보자 그것을 집어들며 우레와 같은 소리를
버럭질렀다.
"이노옴 여포야!"
초선을 껴안은 채 정신이 없던 여포는 움찔 놀라 고개를 돌렸다.
거기에는 동탁이 살기를 띤 얼굴로 화극을 잡은 채 달려오는 것이 보였다.
여포는 얼른 품안에 품었던 초선을 풀어놓고 황급히 정자 아래로
달아났다.
"거기 서지 못하겠느냐!"
동탁이 뒤쫓으며 소리쳤다. 그러나 여포가 어찌나 빠르게 도망치는지
비만한 동탁으로서는 따를 수가 없었다.
동탁이 여포를 따라잡을 수가 없음을 알고 손에 쥐고 있던 방천화극을
치켜들어 힘껏 여포를 향해 던졌다.
"너, 이놈 여포야!"
동탁이 던진 방천화극은 곧장 여포의 등줄기를 향해 날아갔다. 그러나
동탁의 무예가 뛰어나다 하나 당대의 영웅 여포에겐 무용지물이었다.
여포는 날아오는 화극을 슬쩍 피하며 주먹으로 내려쳐 떨어뜨렸다.
뒤따라간 동탁이 그 화극을 주워들고 다시 뒤쫓으려했으나 여포는 이미
후당 문 밖으로 달아난 뒤였다. 그래도 동탁은 단념하지 않고 헐레벌떡
후당 쪽으로 달렸다.
그때 누군가가 급히 후당 문 쪽으로 달려오는 사람이 있어 정신없이
뒤쫓던 동탁은 그 사람과 세차게 부딪치고 말았다.
동탁의 비대한 몸뚱이가 술통이 넘어지듯 데구루루 굴렀다. 동탁이
정신을 가다듬고 보니 그는 모사 이유였다.
동탁은 노기 충천해 있었으나 이유에게까지 화를 낼 수는 없었다.
이유는 황급히 동탁을 부축해 일으켜 서원으로 모셨다.
동탁이 씨근덕거리며 물었다.
"너는 무슨 일로 왔느냐?"
"제가 막 승상부로 들다 도망쳐오는 여포와 만났습니다. 여포가
말하기를 '태사께서 나를 죽이려 하신다.' 하기에 급히 달려오다 그만
태사와 마주쳐서 넘어지시게 하였습니다. 실로 만 번 죽어 마땅한 죄를
지었습니다."
이유가 허리를 꺾으며 사죄하자 아직 화가 풀리지 않은 동탁은 고개를
흔들며 말했다.
"죽일 놈의 바로 여포 그놈이다. 빨리 여포를 잡아서 그놈의 목을 베어
오너라. 그놈이 내 애첩 초선을 희롱하려 들었다."
이유는 동탁의 말을 듣자 연유를 헤아릴 듯하였다. 동탁의 노기 서림
시선을 피해 잡시 고개를 숙이고 있다가 입을 열었다.
"태사님 잠시 고정하십시오. 여포의 목을 베는 것은 태사께서 스스로의
목에 칼을 대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나 동탁에게는 이제 이유의 간언도 들리지 않았다.
"글쎄, 이런 죽일 놈을 보아라. 이 일을 어찌 참으란 말이냐. 그놈이
초선이를 희롱하는 꼴을 내 눈으로 똑똑히 보았단 말이다. 봉의정 아래
꽃밭에서 희롱을 하고 있더구나. 어서 그놈을 잡아오지 않고 뭘
꾸물거리느냐?"
동탁의 서슬이 아직도 퍼렇자 이유는 더욱 차분히 몸을 가누고 또렷한
음성으로 말했다.
"태사님의 말씀은 옳지 않으십니다. 태사님께서는 이럴 때일수록
저절영회라는 연회의 고사를 돌이켜 보시고 전후를 헤아리셔야 합니다."
이유는 지난날의 고사 한 가지를 동탁에게 상기시켜 주었다. 이유와
모든 대사를 함께 의논했던 동탁인지라 그가 간곡히 진언하는 말을 뿌리칠
수가 없었다. 가까스로 노기를 가라앉히고 그의 말을 되새겨 보았다.
옛날 초나라의 장왕은 신하들을 데리고 성대한 연회를 베풀었다. 연회가
한창 무르익어 갈 때 별안간 바람이 일더니 촛불이 모두 껴져 버렸다.
장왕은 '빨리 불을 밝혀라!' 하고 좌우에게 독촉하였다. 그러나
좌중에서는 '어두운 곳에서 마시는 술도 또한 풍치가 좋지 아니한가' 하며
흥겨워하였다.
그런데 여러 신하를 접대하기 위하여 동석케 했던 장왕의 애희가 그
자리에 있었다. 그를 짝사랑하던 장웅이란 장수가 어둠을 틈타 애희의
입술을 범했다. 애희는 소리를 지르려다 꾹 참고 그 신하의 갓끈을 잡아
끊어가지고 장왕의 곁으로 다가갔다.
애희가 장왕에게 말하길,
"조금 전 어둠 속에서 소첩을 껴안고 입을 맞춘 못된 놈이 있습니다.
빨리 불을 밝혀 그 신하를 잡으십시오. 갓끈이 끊어져 있는 자가 바로 그
놈입니다."
하며 자기의 정절을 자랑하듯 과장하여 호소하였다. 그러자 장왕은 무슨
생각에서인지 불을 밝히려는 시신을 황급히 만류하였다. 그런 다음 좌중을
향해 말했다.
"오늘 밤은 여러 장수의 무공을 치하하는 뜻에서 베푼 연회요. 제장이
유쾌하면 나도 유쾌하오. 이 밤이 새도록 즐겨야 하오. 다만 한 가지
오늘은 특별히 갓끈을 끊고 즐기는 연회이니 제장들은 모두 갓끈을
끊으시오."
장왕의 명에 따라 모든 사람은 갓끈을 끊었다. 그 이후에 시신들이 불을
밝혔으므로 애희의 기지도 허사가 되어, 누가 그녀의 입술을 범했는지
종내 밝혀지지 않았다.
그 후, 장왕은 진나라와 싸움이 일어나자, 진나라의 대군에게 포위당해
목숨이 위태로웠다.
이때 한 장수가 포위망을 뚫고 달려와 장왕을 업고 달아나 군왕의
목숨을 건졌다. 장왕은 온몸에 피투성이가 된 그 장수를 보고 물었다.
"고맙구나. 이제 그대 덕에 목숨을 건졌도다. 그런데 그대는 대체
누구이냐?"
그러자 그 장수는,
"제가 바로 몇 해 전에 연회장에서 갓끈을 끊긴 어리석은 자입니다."
하고 말한 후 숨을 거두었다.
이유가 동탁에게 이 고사를 상기시킨 후 입을 열었다.
"말할 것도 없습니다만 그 장군은 장왕의 은혜에 보답한 것입니다.
태사께서도 부디 장왕의 너그러움을 헤아리시기 바랍니다."
동탁은 이유의 말에 얼른 마음이 움직이지 않은 듯 씨근덕대며 입을
다물고 있었다.
그러자 이유가 다시 말을 이었다.
"태사, 초선이로 말하면 한낱 시첩에 불과합니다. 여포는 태사의 심복
맹장입니다. 만약 태사께서 이 기회에 초선을 여포에게 주신다면, 그는
은혜에 감복하여 태사를 위해 목숨까지도 바칠 것입니다. 바라건대
태사께서 이 점도 헤아려 주십시오."
동탁은 이유의 말이 옳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초선을 쉽게
단념할 수도 없는 동탁이었다.
동탁은 생각에 잠겨 있더니 이윽고 고개를 들었다.
"네 말에도 일리가 있다. 나도 헤아려 보겠다."
동탁의 뜻밖에도 그렇게 말하자 이유는 기뻐하며 물러갔다.
이유는 여포가 무엇 때문에 동탁에게 불만을 품고 있는지 모르는 바가
아니었다. 초선에게 깊이 빠져 있는 동탁과 질투로 번민하고 있는 여포를
보며 근심에 차 있던 이유였다.
그런던 차에 정영회의 고사를 들어 동탁에게 간했던 것이었다. 동탁도
자신의 말에 깨닫는 바가 있는 듯하여 이유는 한시름 놓게 되었다.
'이로써 태사와 온화의 문제는 잘 해결되겠구나.'
그러나 이유도 깨닫지 못한 것이 있었다.
이유는 초선이 가슴에 품고 있는 계책을 알지 못했다.
한편 동탁은 이유가 물러난 후에 후당으로 들어갔다. 초선이 휘장을
움켜쥐고 울고 있었다.
"너는 어찌하여 감히 여포와 사사로이 정을 통하느냐?"
동탁이 초선에게 눈을 부라리며 말했다. 동탁의 말에 초선은 눈물부터
흘렸다.
"태사님, 실로 원통하고 분한 일이옵니다."
"내가 이 두눈으로 보지 않았느냐, 그런데도 딴 말을 하려느냐?"
동탁이 초선을 더욱 큰 소리로 꾸짖자 더욱 애처롭게 울며 말했다.
"제가 후원에서 꽃구경을 하고 있을 때였습니다. 여 장군께서 후원으로
뛰어들었습니다. 여 장군으로 말하면 태사님의 양자님이 아니시옵니까.
그러므로 첩은 여 장군을 경계하지 않고 대했는데 오늘은 방천극을 들고
와 '태사의 아들인 나를 피하느냐' 하시면서 창으로 위협하였습니다. 저는
하는 수 없이 봉의정까지 달아났습니다. 첩은 여 장군이 그곳에까지
쫓아오자 그가 못된 욕심을 품고 있는 것이라 여겼습니다. 연못에라도
몸을 던져 자결하려 하자 그 자가 불쑥 첩을 껴안고 놓아 주지를
않았습니다. 생사의 고비에 서 있을 때 태사님께서 나타나시어
구사일생으로 빠져 나올 수 있게 된 것이옵니다. 억울하고 원통한
마음이야 뒤로하고, 추한 혐의라고 벗을까 하여 드리는 말씀입니다."
초선이 애처로이 흐느끼며 말하자 동탁의 마음도 사르르 녹아내렸다.
동탁은 계집에게 배신을 당하지 않았다는 것에 안도하며 초선의 마음을 떠
보기 위해 입을 열었다.
"음-, 내가 미처 깨닫지 못했구나. 여포가 초선을 그토록 탐하니 초선아,
너를 여포의 아내로 보내고 싶은데 네 뜻은 어떠냐?"
그러자 초선이 소스라쳐 놀라더니 동탁의 가슴을 파고들며 목을 놓아
울었다.
"태사께서는 무슨 말씀을 그렇게 하십니까? 첩의 몸은 이미 귀인을
섬겼거늘, 어찌 갑자기 저 사나운 가노에게 내리려 하십니까? 차라리
죽을지언정 그런 종놈에게 몸을 더럽히고 싶지는 않습니다."
말을 마치기가 무섭게 초선은 벽에 걸려 있는 동탁의 보검을 뽑아들고
목에 갖다대었다.
초선의 돌연스런 행동에 동탁은 급히 그녀의 손에서 칼을 뺏어 내던지고
급히 초선을 껴안았다. 동탁은 그런 초선을 보며 내심 기쁨에 겨워 더욱
사랑스런 마음이 들었다.
그러나 초선은 동탁을 밀치고 바닥에 엎드려 통곡을 하면서 푸념을
하였다.
"이제야 첩도 알겠나이다. 보나마나 이유가 여포의 청을 받아 그런
진언을 하였음이 분명하옵니다. 이유와 여포는 태사님이 계시지 않을 때면
언제나 소곤소곤 밀담을 나누곤 했었으니까요. 대감의 체면도 돌보지 않고
첩을 태사께로부터 얻어 내고자 이유가 계책을 꾸민 것임에 틀림없습니다.
첩은 이유란 놈의 고기를 생으로 씹어도 분이 풀리지 않을 것입니다."
동탁은 울부짖는 초선을 무릅 위로 안아 올려 가슴에 안았다.
"알았다. 내 어찌 너를 여포에게 줄 수 있겠느냐?"
"태사님의 뜻이 그러하다 하나, 여기 이대로 있다가는 반드시 여포에게
해를 당할 것입니다."
"염려 마라. 내일 미오성으로 돌아갈 때 함께 가도록 하자. 미오성에는
20년은 먹을 수 있는 군량미와 수백만의 군사가 있다. 나의 뜻대로 되면
너를 왕비로 만들 것이고, 만약 뜻을 이루지 못하더라도 너에게 한평생
부귀영화를 누리도록 하겠다."
초선은 동탁의 그 같은 말을 듣고 눈물을 거두며 동탁의 가슴에 얼굴을
묻었다.
다음 날이었다. 동탁과 초선간에 오고 간 이야기를 알리 없는 이유가
동탁을 찾아왔다.
"어젯밤 여포의 집으로 찾아가 태사님의 말씀을 전했더니 여포는
태사님의 은혜에 감사하며 죄를 크게 뉘우치고 있었사옵니다."
"음-."
"오늘이 마침 일진이 좋은 날이니 초선을 여포에게 보내는 게
어떻겠습니까? 이왕 내리시기로 한 이상 하루라도 빠른 것이 좋을
듯합니다."
그러나 하룻밤 사이에 동탁은 달라져 있었다.
"음-. 나와 여포는 부자지간이다. 아비가 데리고 살던 계집을 어찌
자식에게 물려주겠느냐. 우선 초선을 희롱한 죄는 불문에 붙인다고 전하고
그를 달래 두어라."
이유는 어이가 없었다. 동탁이 하룻밤 사이에 이렇게 마음이 달라진
것은 초선의 농간 때문이라는 걸 짐작했다.
"태사님,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태사님께서는 초선이에게 너무 깊이
빠지시면 아니 되옵니다. 태사님이 도모하실 천하를 생각하시어 깊이
헤아리시기 바랍니다."
동탁은 어젯밤 초선에게 들은 말도 있는 터라 이유를 괘씸하게 생각하고
있는 터였다. 동탁이 돌연 노기 등등하여 소리쳤다.
"이유 이놈, 너는 너의 처를 여포에게 줄 수 있느냐. 초선의 일에
대해서는 다시는 거론치 말라. 다시 입밖에 내면 목을 벨 것이다."
기가 막힌 일이었다. 동탁의 우직스런 고집을 알고 있는 터라 이유는 더
이상 입을 열지 않고 물러났다.
승상부를 빠져 나온 이유가 하늘을 우러르며 탄식했다.
"아아, 한낱 계집에 의해 우리들 모두 죽게 되었구나."
동탁의 죽은 시중 채옹의 곡소리
동탁은 황제 등극의 환상 속에서 여포에게 죽음을 당한다. 사람들은
시신의 배꼽에 심지를 박아 불을 켜놓고 그를 조롱한다. 한때 그에게
발탁되어 관직에 오른 채옹은 죽음을 슬퍼하다 처형된다.
동탁은 이유가 물러나자 곧 영을 내려 미오성으로 돌아갈 채비를 하게
했다.
이윽고 동탁이 수레에 올라 미오성으로 향하자 만조 백관들은 성문
밖으로 나와 동탁의 행렬을 배웅하였다.
한편 여포는 집에서 창문을 열고 거리를 바라보고 있었다.
'오늘은 일진이 좋으니 동탁이 초선을 보내 줄 것이라고 이유가 말하지
않았는가.'
여포는 목이 빠지게 혹시나 하는 기대를 품고 거리를 살피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자 거리에서 요란한 말발굽 소리와 수레바퀴 구르는 소리가
들려 왔다.
여포는 문득 이상한 생각이 들어 마굿간으로 가 적토마에 올라타고
장안의 변두리까지 채찍을 휘둘렀다.
거리에는 이미 동 태사가 행차한다는 소문이 나 있었다. 밭에서 일을
하던 농부나 행상인 할 것 없이 모두 길가에 나와 부복하고 있었다.
여포는 언덕 자락에 말을 세우고 큰 나무 뒤에 몸을 숨기고 있었다.
동탁의 행렬이 길게 꼬리를 물고 지나갔다. 그 중 황금의 거개에 주렴이
흔들리는 한 수레가 삐그덕거리며 지나가고 있었다.
바로 그 수레에 초선이 앉아 있었다. 초선은 문득 언덕 자락을 보았다.
거기에는 여포가 서서 수레를 훔쳐보고 있었다. 여포는 초선과 시선이
마주치자 당장이라도 달려갈 듯한 몸짓이었다. 초선은 와서는 안 된다는
듯 얼굴을 흔들었다.
그런 후 수건으로 낯을 가리고 소리 없이 우는 시늉을 하였다.
수레의 행렬은 삐그덕거리며 차츰 멀어져 갔다.
여포는 멀어져 가는 수레를 핏발이 선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초선을 나에게 돌려준다더니 그것도 새빨간 거짓말이었구나!'
여포는 자신도 모르게 새어 나오는 한숨을 지으며 지그시 입술을
깨물었다. 그리고 비로소 이유의 말은 거짓이었음을 깨달았다. 아니,
이유가 거짓말을 한 것이 아니다. 동탁이 완강하게 초선을 잡고 놓아주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여포는 생각했다. 동탁을 거역하지 못해 울며 끌려가는
초선을 지금도 보지 않았던가.
'아아, 초선은 울고 있었다. 가기 싫은 걸 동탁이 억지로 끌고 갔다!'
여포가 꿇어오르는 분노와 슬픔을 달래고 있을 때였다. 문득 뒤에서
인기척이 났다.
"온후가 아니시오. 이런 곳에서 뭘하고 계십니까?"
여포가 돌아다보니 바로 사도 왕윤이었다.
"이 늙은이는 그 동안 몸이 불편해 바깥출입을 못했던 터라 장군을 뵙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오늘 동 태사께서 미오로 돌아 가신다기에 불편한
몸을 이끌고 나와 문 앞에서 전송하고 오는 길입니다. 그런데 여 장군께선
어찌 이곳에서 한숨만 쉬고 계십니까?"
"바로 대감의 딸 초선이 때문입니다."
"아니, 여 장군 그게 무슨 말씀이시오?"
왕윤은 짐짓 놀라며 영문을 알 수 없다는 얼굴이었다.
"설마 잊지는 않으셨겠지요. 사도께서 이 여포에게 초선을 주겠다던
약조 말입니다."
"이 늙은이가 어찌 그 약조를 잊을 리 있겠소?"
"그 초선을 늙은 도둑이 가로채고 말았소이다."
왕윤은 믿어지지 않는다는 듯한 얼굴로 여포에게 반문했다.
"아니, 여태껏 장군에게 초선을 보내지 않았다는 말입니까?"
여포는 지금까지의 자초지종을 소상히 들려주었다. 왕윤은 하늘을
우러러보다가, 땅을 발로 차기도 하며 여포의 이야기를 듣고 있었다.
이야기를 다 듣고 난 왕윤은 길게 한숨을 쉬면서 말했다.
"정말 믿어지지 않는 말씀이오. 태사께서 그런 짐승 같은 소행을 저지를
줄은 몰랐소."
왕윤은 그렇게 동탁을 욕하고 난 후 여포의 소매를 끌며 나지막히
말했다.
"이곳은 길가이니...갑시다. 그 일은 제 집에서 조용히 의논하는 게
좋겠소."
왕윤은 흰 나귀를 타고 앞장 섰다. 여포는 왕윤을 따라 그의 집으로 가
으슥한 방으로 안내되었다.
주안상이 올려진 뒤 여포는 다시 봉의정에서 일어났던 일을 자세하게
왕윤에게 이야기하였다.
이야기를 듣고 난 왕윤은 슬며시 여포의 화난 얼굴을 엿보다 한숨을
길게 쉬며 말했다.
"태사가 내 딸을 범하고 장군의 아내를 빼앗았으니, 이는 하늘이 노하고
또한 천하의 웃음거리가 되고 말았소. 사람들은 태사를 비웃기 전에 나
왕윤과 장군을 비웃을 테니 기가 막힐 노릇이군요. 나야 늙고 힘이 없어
어쩔 수 없다지만 장군 같은 천하의 영웅이 이 같은 욕됨을 당하니 실로
애석한 일이외다. 이것은 다 나의 허물이니 여장군, 용서를 빌
따름입니다."
여포는 왕윤의 말을 묵묵히 듣더니 참고 있던 분노가 터져 나오는지
주먹으로 땅바닥을 치며 분연히 말했다.
"왕 사도, 두고 보시오. 내 맹세코 그 늙은 도적을 죽여 이 치욕을 씻고
말 것이요."
"아니, 이 늙은 것이 그만 실언을 했소. 여 장군 함부로 그런 말씀
마시오. 행여 태사의 귀에라도 들어가는 날이면...."
왕윤이 황급히 여포의 입을 손으로 막으며 짐짓 겁에 질린 시늉을
하였다.
그러나 여포는 이미 치솟기 시작한 분노를 삭이지 못하고 격앙된
목소리로 말했다.
"대장부가 이 세상에 태어났다가 언제까지나 남의 밑에서 몸을 굽히며
지낼 수는 없소이다."
왕윤은 기회를 놓치지 않고 여포를 다시 충동질했다.
"장군의 용맹과 그릇으로 말한다면 동 태사에게 몸을 굽히고 있다는
것이 잘못된 일이지요."
"내가 그 늙은 도적을 죽이고 싶은 마음은 간절하나 그래도 이미
부자지간으로 불러 왔으니 뒷사람이 손가락질할까 그것이 두려울 뿐이오."
여포의 입에서 나올 말은 다 나온 셈이었다. 왕윤은 여포에게 이렇게
대답해 주었다.
"그건 그렇지 않소. 장군의 성씨는 여씨이고, 태사의 성씨는 동씨가
아니오? 이야기하신 바와 같이 봉의정에서 태사가 장군에게 창을 던졌을
때이니 부자지간의 정은 끊어진 거나 다름없지 않소. 특히 태사가
아직까지 자기의 성씨를 장군에게 주지 않고 있지 않습니까? 이는 양부니
양자니 하는 명목으로 장군의 무용을 계속해사 태사의 휘하에 묶어
두겠다는 속셈이나 다름없소이다."
왕윤의 말에 여포는 무릎을 치며 말했다.
"옳은 말씀이오. 참으로 귀한 것을 깨닫게 해 주셨습니다. 이 여포는
참으로 생각이 짧은 사람이었습니다."
여포가 그렇게 말하자 왕윤은 동탁을 죽이기로 한 여포의 마음이 굳어
졌음을 알 수 있었다. 왕윤은 그럼 여포에게 이제 결정적인 대의 명분을
세워 주어야겠다고 여겨 입을 열었다.
"장군께서 만일 태사를 해하고 한실을 건진다면 장군의 이름은
청사(역사 책)에 길이 빛날 것이요. 그렇지 않고 동탁을 돕는다면 역신이란
이름을 남겨 만대에까지 그 더러운 이름이 전해질 것이오."
여포는 왕윤의 말을 자리에서 일어나 절을 하며 받았다.
"이 여포의 뜻은 이미 정해졌으니 사도께서는 의심치 마십시오."
여포는 조정의 원로 대신이요, 마음이 곧고 충성심이 높기로 이름난
왕윤이 자기에게 그토록 큰 힘이 되어 주자 이젠 주저할 것이 없었다.
그리하여 절까지 하며 자기의 결심을 보인 것이다.
왕윤은 여포에게 다시 한 번 다짐을 주며 그의 마음을 엿보았다.
"만에 하나 이 일이 실패하면 큰 화를 면치 못할 것이오."
여포는 칼을 뽑아 자신의 팔뚝을 찔러 피를 흘리며 맹세했다.
왕윤은 그 모양을 보고 그 앞에 무릎을 끓고 말했다.
"한나라 사직이 장군의 힘으로 바로 서게 되었소. 이 일은 우리 두
사람만 알고 있는 비밀로 해 두시오. 뒷일은 다시 계책을 마련하겠소."
여포는 적토마를 타고 돌아갔다. 왕윤은 그 뒷모습을 보고 홀로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여포가 돌아가자 왕윤은 평소의 동지들을 불러모았다.
사례교위 황완과 복야사(활 솜씨가 뛰어난 무사의 관직) 손서에게
왕윤은 그 동안의 경위를 들려 준 후 의견을 물어 보았다.
복야사 손서가 먼저 입을 열었다.
"듣자하니 주상께서 환중이셨다가 쾌유되어 일어나시었소. 말솜씨 좋은
사람을 뽑아 미오성으로 보내 폐하께서 상의할 일이 있다 하고 동탁을
장안으로 부르는 것이오. 한편으로는 폐하의 밀조를 여포에게 내려, 궐문
안에 무장한 군사를 매복시켰다가 동탁이 궐문을 들 때 주살하는 것이
상책이 아닐까 합니다."
"그러나 누구를 보내어 동탁을 유인해 올까요?"
황완이 묻자 손서가 거침없이 대답했다.
"이숙이 적임자입니다. 기도위 이숙은 여포와 같은 고향 출신인데
여포를 동탁에게 끌어온 장본인이요. 그런 공훈을 세웠는데도 동탁이
냉대하자 몹시 원망하고 있으니 동탁을 없애는 일을 마다하지 않을
것입니다. 또한 그를 보낸다면 동탁도 의심하지 않을 것입니다."
"좋은 생각이오. 즉시 여포에게 알려 이숙과 만나게 하시오."
왕윤은 손서의 의견에 찬동했다.
다음날, 왕윤은 여포를 불러 조정 대신들이 마련한 계책을 소상히
일러주었다.
여포도 흔쾌히 왕윤의 말에 맞장구를 쳤다.
"이숙이라면 이 포도 잘 아는 사이입니다. 만약 이숙이 말을 듣지
않는다면 그 자의 목부터 베겠소."
여포와 의견의 일치를 본 왕윤은 즉시 사람을 보내어 이숙을 은밀히
청하였다.
왕윤의 저택에 당도한 이숙은 뜻밖에도 여포·손서·황완 등이 자리에
않아 있자 크게 놀라는 표정이었다.
한 차례 인사가 오간 위 여포가 정색을 하고 입을 열었다.
"지난날 공이 나는 구슬러 정건양을 죽이고 동탁의 막하로 들게 한 바
있었소. 그러나 이제 보니 동탁은 위로는 황제를 속이고 아래로는
백성들을 학대하여, 그 죄와 악이 하늘과 땅에 가득 차 사람은 물론 신도
분개하고 있소. 이에 조정의 대신들은 지혜를 모아 동탁을 죽이기로
하였소. 공께서 황제의 거짓 조서를 받들고 미오성으로 가 통탁에게
전하여 입조케 하시오. 그러면 우리는 군사를 매복시켰다가 놈을 주살할
계획이오. 우리 모두 무너져 가는 한실을 일으켜 세우는 충신이 되고자
하는데 공의 의향은 어떠시오?"
말을 마친 여포가 이숙에게 슬며시 다가갔다. 이숙은 동조하지 않을
때는 단칼에 그를 베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여포의 이런 행동은 기우에 지나지 않았다. 이숙은 주저함이
없이 선뜻 여포의 말에 찬동했다.
"나 역시 그 늙은 도적을 없애고자 하였으나 마음을 터어놓고 모사할
사람이 없어 한탄하던 중이었소. 장군의 말씀 듣고 보니 이는 분명 하늘의
뜻인가 보오. 이 이숙이 어찌 두 마음을 갖겠소?"
말을 마친 이숙은 그 자리에서 화살을 분질러 자기의 뜻에 변함이
없음을 서약했다.
왕윤은 그런 이숙에게 좋은 말로 다시 달래며 미끼를 던졌다.
"만약, 일이 뜻대로 된다면 그대는 한실의 일등 공신이니 무거운 벼슬을
내릴 것이오."
이숙은 그 말에 절하며 감사를 표했다.
다음 날, 이숙은 수십 명의 기병을 거느리고 미오성으로 갔다.
동탁은 조정에서 칙사가 왔다 하므로 이숙을 성 안으로 불러들였다.
원래 조정의 격식대로 하자면 동탁은 성문밖에 나와 부복하여 칙사를
맞이해야 하나 동탁은 그런 격식을 무시했다.
이숙은 동탁 앞에 이르러 절을 올렸다.
"황제께서 무슨 조서를 내렸느냐?"
이숙이 밝은 표정으로 대답했다.
"황제께옵서는 그 동안 환후가 잦으시다 보니 마침내 태사께
선위(임금의 자리를 물리는 일)하실 결심을 하신 듯합니다. 문무백관을
미앙전에 모이게 하여 그 일을 정하기 위해 조서를 내리셨습니다."
동탁의 늙은 얼굴은 기쁨을 감추지 못하고 금세 환하게 밝아졌다.
동탁이 마음속에 품고 있던 꿈이 이토록 빨리 이루어질 줄은 몰랐다. 너무
쉽게 꿈을 이루자 한 가닥 의구심이 일어날 지경이었다.
동탁이 이숙에게 물었다.
"얼른 믿어지지 않는구나. 조신들의 의향은 어떠한가?"
슬며시 조정 대신들의 동태를 엿보기 위한 물음이었다.
"천자께서 문무백관을 중앙전에 모으시고 이 일을 물으셨습니다. 그란
한 입처럼 찬동하였사옵니다."
동탁은 그제야 입이 벌어지더니 다그쳐 물었다.
"사도 왕윤은 뮈라고 하더냐?"
이숙이 주저하지 않고 대답했다.
"왕 사도께서 더없이 기뻐하시며 벌써 수선대를 쌓아 놓으시고
태사님께서 오시기만을 기다리고 계십니다."
동탁은 그 말을 듣고 입이 귀밑까지 찢어졌다. 조정의 원로대신 와
사도까지 나서서 자기를 맞을 준비를 한다면 이미 조정은 자기에게 기울어
진 것이라 여겼다.
"허허, 이렇게 빨리 일이 되어 갈 줄은 몰랐구나. 하하하, 그러고 보니
간밤의 꿈이 신통하군."
동탁은 껄껄 웃으며 말했다.
"어떤 꿈을 꾸셨습니까?"
이숙이 물어 보았다.
"커다란 용이 바람을 일으키며 내려와 내 몸을 감싸는 꿈이었다."
"길몽입니다. 시간을 지체치 마시고 입궐하시어 조칙을 받도록
하십시오."
이숙이 때를 놓치지 않고 그를 재촉하며 한 마디 덧붙였다.
"태사님, 서두르십시오. 선위를 받으로 가는 경사스러운 행차시니 너무
많은 군졸을 거느린다면 시간만 지체될 것이옵니다. 행장을 간소히 하는
것이 좋은 듯합니다.
"오냐, 여부가 있느냐."
이미 동탁은 선위를 이어받는다는 기쁨에 다른 것을 헤아릴 여유가
없었다.
동탁은 즉시 심복들인 이각·곽사·장제·번주 네 사람을 불러들였다.
"황제께서 나더러 천자의 선위를 받으라는 조서를 내리셨다. 그대들은
내가 입궐하고 없는 사리에 비웅군 3천을 거느리고 미오성을 지키고
있으라!"
동탁은 이어 입궐할 채비를 차리게 한 후 이숙을 돌아보면 말했다.
"내가 제위에 오르면 너로 하여금 잡금오(황궁 경비대장)를 삼으리라."
"황공하옵니다. 폐하!"
이숙은 기쁨을 감추지 못하며 폐하라고 부르면 천자를 대하는 배례를
하였다.
동탁은 만면에 웃음을 띠며 내당으로 들어갔다. 노모에게 이 기쁜
소식도 알리고 하직 인사도 올리기 위해서였다. 이때 동탁의 노모는
아흔의 나이였다. 동탁이 절을 하고 하직을 고하자 노모는 비대한 몸으로
간신히 절을 하는 아들에게 물었다.
"너는 어디를 가려고 하느냐?"
"예, 소자는 한조의 제위를 물려받으러 가는 길입니다. 어머니께서는 곧
황태후가 되실 것입니다."
그러냐? 그러나 이 어미는 요즘 살이 떨리고 가슴이 두근거린다.
아무래도 길조가 아닌 듯하다."
"어머님께서 장차 국모가 되실 텐데 어찌 놀라운 조짐이 없겠습니까?
하하하."
동탁은 태연히 웃으며 노모 앞에서 물러나오자 이번에는 초선에게로
갔다.
"내가 지금 천자가 되려고 길을 떠나니, 내 너를 귀비로 삼을 것이다."
초선은 계획이 서서히 열매를 맺어 가고 있음을 깨달았다. 그러나
시치미를 떼고 기쁨을 감추지 못하겠다는 듯 동탁의 품안을 파고들다
배례까지 했다.
동탁은 성장을 하고 수레에 올라 앞뒤로 호위를 받으며 미오성을
떠났다.
동탁이 제위에 오르기 위해 미오성을 떠나는 행렬은 이숙의 말에 좇아
행장을 간소하게 했다고는 하나 제법 길게 이어졌다.
수레를 호위할 백마의 기병을 앞뒤에서 세우고 문무가신들이 수레 뒤를
따랐다. 수레는 오색찬란한 깃발 속에 묻혔고, 기병들의 번쩍번쩍 빛나는
창날과 황금 안장이 위풍당당했다.
행렬이 30리쯤 나아갔을 때였다. 동탁이 타고 있던 수레가 '덜컹'하는
소리와 함께 옆으로 넘어질 듯 크게 기울었다.
"무슨 일이냐?"
"황공하옵니다. 한쪽 수레바퀴가 부러졌습니다."
수행하던 시신이 이마를 조아리며 대답했다. 동탁은 하는 수 없이
수레에서 내려 말을 타고 나아갔다.
그런데 또 10리를 채 못 가서였다. 돌연 동탁이 타고 있던 말이 갑자기
머리를 흔들어대며 사납게 울부짖더니 앞다리를 번쩍 들어올리며 날뛰는
바람에 고삐가 끊어지고 재갈이 벗겨졌다.
동탁이 불길한 느낌이 들어 언짢은 마음에 이숙을 불렀다.
"수레바퀴가 부러지고 말꼬삐 또한 끊어지니 이것은 무슨 조짐이냐?"
이숙도 이리 예견할 수 없었던 흉조여서 당황했으나 동탁이 물어 오므로
오히려 잘 된 일이라 생각했다.
"염려하실 것 없사옵니다. 태사께서 한조를 선위받게 되오니, 이젠
옛것을 버리고 금안(천자의 자리)을 타실 조짐입니다."
이숙이 그럴 듯하게 둘러대자 동탁의 어둡던 얼굴이 활짝 개었다.
"하하, 그 말이 맞는 말이로다."
날이 어두워 행렬은 하룻밤을 묶은 후 다시 길을 떠났다.
다음 날은 장안의 성 안으로 드는 날이었다. 그런데 그 날은 아침부터
안개가 자욱하더니 행렬이 움직일 즈음에는 광풍이 휘몰아쳐 천지가
암흘으로 변했다.
동탁이 어두운 하늘을 보며 이숙을 불렀다.
"이건 또 무슨 징조인가?"
"태사께서 한의 기업을 선위받으심은 용이 하늘로 오르는 것과 다를 바
없습니다. 하늘에 붉은빛과 땅에는 자줏빛 안개를 드리워 하늘의 위엄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붉은빛과 자줏빛 안개라. 그러고 보니 그 말 또한 맞구나."
이숙의 능란한 대답에 동탁은 기뻐하며 길을 재촉했다.
이윽고 동탁은 장안성 앞에 이르렀다. 성문 앞에는 문무백관이 이전과
다름없이 횡문밖에 나와 그를 맞았다.
그러나 그날따라 공교롭게도 이유만이 병이 나서 마중 나오지 않았으니
동탁으로서는 실로 커다란 불운이 아닐 수 없었다.
동탁이 승상부에 이르러 좌정하자 여포가 가장 먼저 나서며 축하 인사를
했다.
동탁은 여포를 바라보고 비대한 몸을 추스르며 말했다.
"내가 만약 황제에 오른다면 너는 천하의 병마를 총독게 하리라."
여포는 고개 숙여 고마움을 표시했다. 여포도 그날 밤은 동탁의 침소
밖에서 호위했다.
이날 밤, 동탁은 침실에 시첩을 들이지 않고 홀로 잠자리에 들었다.
그러나 내일이면 황제가 된다는 생각을 하니 동탁은 좀처럼 잠을 청할
수가 없었다.
그때 침실 밖에서 저벅거리며 걸어다니는 발자국 소리가 들려 왔다.
동탁이 몸을 자리에서 일으키며 외쳤다.
"밖에 누가 있느냐?"
그러자 휘장 밖에서 이숙이 대답했다.
"온후께서 호위를 하고 있습니다."
여포가 호위하고 있다는 말에 동탁은 마음을 적어 놓으며 잠을
청하였다. 그러다 멀리 거리에서 아련히 들려 오는 아이들의 노랫소리에
눈을 떴다.
천리초 푸리고 푸르지만
열흘이 되면 살지를 못한다.
바람결에 실려서 들려 오는 아이들의 노랫소리는 가락이 구슬프고도
처량했다.
동탁은 기분이 언짢아져 이숙을 불렀다.
"이 밤중에 무슨 노래인가?"
"저 노래는 한실의 유씨가 망하고 동씨가 새로 일어선다는 것을 노래한
것입니다."
이숙은 시치미를 뚝 떼고 대답했다.
"그렇지. 동씨가 일어난다는 것은 확실하지 않느냐."
동탁은 고개를 끄덕였으며 얼마 후 깊은 잠에 빠졌는지 코를 골고
있었다.
이숙이 얼른 동탁에게 그렇게 둘러댔으나 원래의 뜻은 그 반대였다.
천리초는 천·리·초이니, 즉 동을 파자 해서 부른 것이다. 또한
십·일·상이란 탁자를 두고 한 말이니 곧 동탁이 죽는다는 뜻이었다.
이숙의 교묘한 말에 넘어간 동탁은 자신을 가리킨 것이 아닌, 한실의
운명을 가리킨 것이라 생각했다.
다음 날 아침, 통탁은 의장을 갖추고 어제보다 더 요란한 행장을 차렸다.
희뿌연 아침 안개에 휩싸인 궁문을 향해 나아갈 때였다. 흰 깃발을
어깨에 메고 푸른 도포를 입은 한 도인이 흰 건을 쓰고 긴 장대를
들었는데, 그 끝에는 한 길쯤 되는 베를 매달고 입구자를 써서 양편에
높이 들고 가는 것이 눈에 띄었다.
"저것이 무엇이냐?"
이숙이 가만히 생각해 보니 입구가 둘이며 여가 분형하고 베로 기를
만들었으니 포의 뜻이 분명했다. 동탁이 여포한테 죽는다는 암시였다.
그렇지만 이숙은 슬며시 둘러댔다.
"아마 미친놈인가 봅니다."
짧게 답한 후 시위 군사들에게 행렬 밖으로 쫓아내라고 소리쳤다.
동탁은 문득 여포의 얼굴이 떠올랐다.
봉의전에서 초선과 밀회를 하던 그의 모습이 떠올라서 불쾌했으나, 이미
행렬의 선두는 궁궐 문 앞에 다가가니 문 앞에는 군신들이 조복을 갖추어
입고 마중해 있었다.
궁궐의 규치인 만큼 동탁은 수행하는 모든 군사를 대궐문 앞에 대령케
했다. 그곳에서는 20여 명의 군사에게 수레를 밀게 하여 궁궐의 내정으로
들게 되어 있었다.
그러나 그때도 동탁은 전혀 의심을 하지 않았다. 그런데 대궐문을 지나
전문을 바라본 동탁은 얼른 주위를 살폈다. 무언가 본능적으로 느껴지는
섬뜩함 때문이었다. 전문 양쪽에 왕윤과 황완, 두 사람이 칼을 빼들고 서
있지 않는가.
동탁은 심상치 않은 공기를 느끼며 황망히 이숙을 불렀다.
"이숙, 이숙! 저들이 왜 칼을 뽑아들고 있느냐?"
그러나 이숙은 대답도 없이 수레를 힘껏 전문 안으로 밀어넣었다.
동탁의 수레가 전문 안으로 밀려들어오자 왕윤의 고함 소리가 쩌렁쩌렁
울렸다.
"미오의 역적이 여기 왔노라. 무사들은 어서 나오라!"
왕윤의 말이 미처 끝나기도 전에 '와아!' 하는 함성과 함께 1백여 명의
무사들이 양쪽에서 쏟아져 나왔다. 그들이 순식간에 동탁의 수레를 뒤엎어
버리자 수레에서 동탁이 굴러 떨어졌다.
"하늘을 거스른 늙은 역도, 천벌을 받으라!"
무사들은 일제히 동탁을 향해 덤벼들었다. 무수한 창과 칼이 그를
찌르고 베었다. 가슴이며 어깨 머리 등 가릴 것이 없었다.
그러나 원래 조심성 많은 동탁이었다. 그가 천하를 마음대로 주무르고
있는 동안 몸에 배인 조심성이기도 했지만 몇 번인가 경험한 그의
주살기도 이후 그런 조심성은 더욱 심했다.
그는 조복속에 갑옷을 받쳐 있었던 터라 피투성이가 되기는 했으나
치명상은 입지 않았다.
비대한 몸으로 땅바닥을 구르면서 절규했다.
"아들아, 봉선아 어디 있느냐?"
그러자 수레 뒤편에서 여포가 달려나오며 소리쳤다.
"천자의 조칙이다. 역적은 어명을 받들어 창을 받으라."
여포의 외침이 들리는가 싶더니 방천화극은 어느 새 동탁의 목을
꿰뚫었다. 옆에 있던 이숙이 보검을 휘둘러 동탁의 목을 베니 그의 몸에서
목이 굴러 떨어졌다.
비명조차 지를 틈도 없이 당한 동탁의 죽음이었다.
여포는 왼손에 방천하극을 바꾸어 들고 오른손으로 품속에서 조서를
꺼내어 큰 소리로 읽었다.
"조칙을 받들어 역적 동탁을 죽였다. 나머지 사람들에 대해서는 그 죄를
묻지 않을 것이다."
모든 장수와 관원들이 일제히 만세를 불렀다.
이때 동탁의 나이 54세. 한의 헌제 초평 3년, 임신, 4월 23일이었다.
후세 사람들은 역적 동탁의 죽음을 이렇게 한탄했다.
왕업 이루면 왕이요
성령 이루지 않았어도 부자는 될 수 있거늘
누가 하늘의 뜻에 사사로움이 없음을 모르는가
미오성 세우자 패망했구나.
마침내 대역적 동탁이 주살되자 만세 소리를 궁궐의 담장을 넘어 장안의
거리에까지 퍼져 나갔다.
한편 문무백관들이 동탁의 죽음을 기뻐하며 환호하고 있을 때 다시
여포가 소리쳤다.
"나머지 다른 사람에게 죄를 묻지 않기로 했으나 동탁의 옆에 달라붙어
작악무도한 소행을 저지른 놈이 있다. 그 자가 바로 이유이다. 누가
승상부로 가서 이유를 잡아오겠는가?"
"제가 가겠습니다."
이숙이 선뜻 대답하며 군사를 거느리고 승상부로 달려갔다.
이숙이 승상부의 문안으로 들어서려는데 한 무리의 군사들에 의해
비명을 지르며 끌려 나오는 자가 있었다. 바로 이유였다.
그 군사들은 승상부에 소속된 하급 관료들이었다. 그 중의 하나가
이숙에게 다가와 말해다.
"평소에 증오해 오던 놈이었습니다. 동 태사가 주살 되었다는 말을
듣자마자 저희들 손으로 잡아 궁궐로 끌고 가던 길이었습니다. 바라건대
저희들의 지난날 허물을 묻지 말아 주십시오."
이숙은 손쉽게 이유를 사로잡았으므로 즉시 그를 끌고 궁궐로 갔다.
왕윤은 지체없이 장터에 끌어내어 백성들이 보는 앞에서 참수하라고
명하였다.
왕윤은 이어 여러 백관들을 향해 외쳤다.
"미오성에는 동탁의 일족과 그놈이 기르고 있는 대군이 있다. 그것들을
소탕할 용자는 없는가?"
말이 떨어지기도 전에,
"내가 가겠소!"
하고 나선 자가 있었다. 두말 할 것도 없이 그는 여포였다. 왕윤은
여포에게 이숙과 황보승의 두 장수를 딸려서 군사 5만여 기를 거느리고
미오성을 향해 진군토록 했다.
미오에는 곽사·장제·이각·번주 등의 대장이 비응군 3천을 비롯,
1만여 명의 군사로 성을 지키고 있었다.
그러던 차에 동탁이 장안에서 비명 한 번 지르지 못하고 무참히
주살되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거기다가 여포가 대군을 이끌고
쳐들어온다는 말을 듣자 그들은 싸울 엄두도 못낸 채 군사를 이끌고
양주로 달아났다.
미오성에 가장 먼저 뛰어든 건 물론 여포였다. 그의 눈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곧장 후당으로 달려가 비원의 방을 헤집고 다니며 외쳤다.
"초선, 초선아!"
초선은 후당의 한 방에 홀로 서 있었다. 여포는 달려가 마음껏 초선을
껴안았다.
초선도 이제 동탁은 죽었지만, 여포에게 아직은 본심을 보일 때가
아니었다.
두 사람은 그 동안의 회포를 푸느라 주고받는 얘기가 끝이 없었다.
여포는 초선을 번쩍 안고 후당에서 달려나와 적토마에 채찍질하여
장안으로 돌아갔다.
미오성에는 이숙과 황보승의 군사들이 난입하여 살육 , 약탈, 방화 등
온갖 폭력이 저항하지도 못하는 무리들에게 자행되고 있었다.
내당과 후당에는 초선 외에도 양가집 미녀가 8백여 명이나 있었는데, 이
수많은 여인들이 군사들에 의해 모두 유린되었다.
흡사 꽃밭에 휘몰아친 광풍이요, 우박이었다. 황보승은 부하 군사들의
만행을 나무라지 않았다. 약탈과 겁탈을 마음껏 하도록 내버려두었다.
드디어 황보승은 군사들에게 명을 내렸다.
"동탁의 일족은 남녀노소를 가릴 것 없애 한 사람도 남기지 말고 모조리
참살하라."
동탁의 어머니인 아흔 살의 노파는 살려 달라고 비명을 지르며 황보승
앞에 꿇어 엎드렸으나 한 군사가 그 목을 쳤다. 불과 한 나절 사이에
참살된 일족의 수는 남녀 모두 1천5백여 명이나 되었다.
한편, 이숙과 황보승의 관장 아래, 무려 열 채나 되는 보물창을 열자
황금이 수십만에다, 백금이 수백만, 온갖 비단과 주옥·보석이 쏟아져
나왔다.
또한 곡창에 있는 양곡은 그 반을 백성들에게 나누어 주고 반을 관고로
옮겼다. 그 양곡도 자그마치 8백만 섬이나 되었다.
동탁이 주살된 후 하늘의 조화인지 짙은 안개가 걷히더니 하늘에서는
밝은 태양이 며칠을 두고 빛나고 있었다.
성 안은 물론, 성 밖 백성들은 늙은이, 젊은이 할 것 없이 모두 거리로
쏟아져 나와 밤낮없이 춤추고 노래했다.
백성들은 거리에 버려진 동탁의 시체에 몰려들어 그 몸둥이를 짓밟지
않은 자가 없었다. 효수된 그의 머리는 공처럼 발에 차여 구르고 있었다.
동탁의 시체는 위난 기름기가 많은 비만체질이었다. 시체를 지키는
군사들이 장난기가 발동해 그 배꼽에 심지를 박아 불을 켜서 등을
만들었다.
동탁의 아우 동민, 형의 아들인 동황도 수족이 잘려서 장터에 버려졌다.
이렇게 죽일 사람은 죽이고 벌줄 사람은 벌을 주었다. 황보승과 여포는
그 모든 뒷처리를 끝내자 왕윤에게 이를 알렸다.
이에 왕윤은 도당에 백관들을 모아 놓고 큰 잔치를 베풀었다. 그들이
서로 노고를 치하하며 술잔을 나누고 있을 때 갑자기 밖에서 한 관료가
달려와 고했다.
"동탁의 썩어 가는 시체 옆에서 대성통곡하는 사람이 있다 합니다."
그 말을 듣자 왕윤이 눈에 핏발을 세우며 말했다.
"역적 동탁의 죽음을 백성뿐만 아니라 하늘도 기뻐하거늘, 대성통곡을
하다니, 그놈을 냉큼 잡아오너라."
잠시 후 그 사람이 무사들에게 이끌려 왔다. 백관들은 그를 보자 크게
놀랐다. 그 사람은 다름아닌 시중 벼슬을 지냈던 채옹이었다. 채옹은 천하
문장가롤 당대의 명사였다.
"저 사람은 채옹이 아닌가?"
만조 백관들은 깜짝 놀랐다. 왕윤도 전혀 뜻밖의 채옹이 잡혀 들어오는
것을 보고 노여움은 더 한층 컸다.
왕윤은 뜰 아래 꿇린 채옹을 큰 소리로 꾸짖었다.
"역적 동탁을 주살한 것은 나라를 구함이 아니던가. 그런데 그대는
한나라의 신하로서 나라를 위해 이를 기뻐하기는커녕 역적의 죽음을
슬퍼했다니 대체 무슨 까닭인가?"
채옹이 엎드려 사죄했다.
"소인이 비록 뛰어난 재주는 없으나 대의가 무엇인지 알고는 있습니다.
어찌 나라를 배반하고 동탁을 따를 리 있겠습니까? 다만 한때의
지우지감(인격 학식을 알아서 후히 대접함에 대한 고마움)으로 나도
모르게 운 것이니 그 죄가 큰 것은 스스로 알고 있습니다. 원컨대
사도께서 나의 이러한 심사를 가엾게 헤아려 주십시오. 그 죄를 묻되
경수월족(얼굴에 문신을 넣고 발꿈치를 자름)에 머무르게 하시어, 이옹이
붓을 들고 '한의 역사'를 중단없이 쓰도록 허락해 주소서."
채옹의 재주를 아끼는 태부 마일제가 왕윤에게 다가와 귓속말을 했다.
"백개(채옹의 자)의 박식함은 세상에 어깨를 견줄 사람이 없다 하옵니다.
만약 '한나라 역사'를 계속 쓰게 하여 이를 완성한다면 참으로 일세의
성사라 하겠습니다. 거기다가 그의 효행은 이미 세상에 널리 알려져
있으므로 그를 죽인다면 이는 인망을 잃는 것이 될 것입니다."
그러나 왕윤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오. 옛날 효무제가 사마천을 죽이지 않고 사기를 쓰게 하시더니
마침내 비방하는 글을 써서 후세에 전하였소. 국운은 쇠하고 정사는
어지러운 이때요. 바르지 못한 신하를 천자 옆에 두어 붓을 잡게 한다면
우리도 후세 비방을 면치 못할 것이오."
왕윤이 강력히 반대하자 마일제는 더 이상 입을 열지 못했다. 그러나 그
자리를 물러난 후 여러 백관에게 말했다.
"왕윤의 일족은 뒤가 끊길 것이오. 옛말에 '착한 사람은 나라와
기강이요, 글을 짓는 것은 나라의 법전이라 하였소. 기강을 멸하고 법전을
없애니 어찌 명을 부지할 수 있겠소."
왕윤은 끝내 마일제의 권고를 받아들이지 않고 채옹을 하옥한 후 목베어
죽였다.
뜻있는 사람들은 이 소식을 듣고 채옹을 불쌍히 여겨 모두 울었다.
후일 사가들은 채옹이 사정에 끌려 동탁을 곡하여 슬퍼한 일은 잘 한
일이라고 할 수 없으나, 왕윤이 채옹을 죽인 일은 지나친 처사였다고들
하였다. 2권에서 계속
책,영화,리뷰,
삼국지1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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