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지 7권
평역: 김홍신
노장 황충과 위연
유비는 형주로 군사를 물린다 하면서 부수관을 지키는 양회와 고패, 두 장수
를 불러 참하고 부성을 차지한다. 유장의 군사들은 낙현을 굳게 지키고 유비는
황충과 위연으로 하여금 영채를 급습토록 하여 촉장 등현을 죽이고 사로잡은 냉
포를 풀어준다.
가맹관을 물러난 유비는 부성으로 향하던 도중 사람을 시켜 부수관을 지키는
양회와 고패에게 작별을 알리게 했다.
"유 황숙께서 형주로 회군하려 하십니다. 떠나기 전에 유 황숙께서 두 분 장군
과 작별 인사를 나누고자 하십니다."
양회와 고패는 유비가 형주로 돌아가기 위해 군사를 거느려 온다는 말에 속으
로 크게 기뻐했다.
그들은 곧 이 일을 의논하기 위해 한 자리에 모였다.
"유비가 형주로 돌아가기 위해 이곳으로 온다는데 이 일을 어떻게 생각하나?"
양회가 가만히 묻자 그런 양회의 속마음을 들여다본 듯 고패가 조용히 웃으며
말했다.
"이제 유비가 죽을 차례가 온 것이네. 우리가 각기 비수를 가슴에 품고 가 유
비를 전송하는 자리에서 찔러 죽이도록 하세. 그러면 우리 주공의 큰 근심거리
를 없애는 것이 될 것일세."
"그것 참 좋은 묘안이네. 나도 유비를 죽여 없앨 작정이었네."
두 사람은 이렇게 의논한 뒤, 군사 2백을 거느려 관을 나가 유비를 배웅하러
갔다. 고패가 말한 대로 가슴에 비수 한 자루씩을 품은 채 나머지 군사들은 관
안에 남겨 두고 굳게 지키게 했다.
그때 유비는 군사들을 이끌고 부수가에 이르고 있었다. 문득 방통이 말 위에
서 유비에게 당부했다.
"양회와 고패가 오거든 주공께서는 경계심을 풀지 말고 방비를 철저히 하도록
하십시오. 그러나 만약 그들 둘이 오지 않거든, 그들이 의심하고 있는 것이니 곧
바로 부수관을 치되 모든 일을 신속히 하여 방비할 틈을 주지 말고 급히 빼앗아
야 할 것입니다."
방통의 말에 유비가 고개를 끄덕이고 있는데 문득 회오리 바람이 크게 일더니
앞서 가던 말 앞의 수자 기가 부러졌다.
유비가 그 모양을 보자 불길한 느낌이 들어 방통에게 물었다.
"이게 무슨 징조이오?"
유비의 물음에 방통이 서슴없이 대답했다.
"이는 주공께 경고의 뜻을 내리는 것입니다. 양회와 고패가 주공을 해할 뜻이
있음을 알리는 것입니다. 주공께서는 미리 대비를 철저히 해 두십시오."
유비는 방통의 말을 듣자 겉옷 속에 두꺼운 갑주를 받쳐 입고 허리에는 보검
을 찼다.
"양회,고패 두 장수가 전송하러 온다고 합니다."
그때 사람이 와서 알리므로 유비는 행군을 멈추고 두 장수를 기다렸다. 방통
은 위연과 황충에게 군령을 내렸다.
"두 장수가 이끌고 온 군사는 마군이건 보군이건 한 사람도 돌려 보내지 말도
록 하라."
위연과 황충은 군령을 받고 물러났다.
얼마 있지 않아 양회와 고패가 유비 앞에 이르렀다. 방통과 유비가 어떤 계책
을 세웠는지 알 리 없는 양회와 고패는 유비의 군사들이 의외로 경계하는 기색
이 없자 속으로 크게 기뻐했다.
'우리 뜻대로 되어 가고 있구나!'
양회와 고패는 예물로 가지고 온 염소와 소, 그리고 술을 바치며 진정으로 헤
어지는 것이 섭섭하다는 얼굴을 지었다.
두 사람은 유비와 방통이 앉아 기다리고 있는 장막 안으로 들어갔다. 양회가
유비를 보니 갑주도 입지 않은 채였다. 양회는 속으로 쾌재를 부르며 유비에게
정중히 인사를 올렸다.
"황숙께서 먼길을 돌아가신다기에 저희들이 보잘 것 없으나 술과 안주를 마련
해 전송차 왔습니다."
인사말과 함께 술을 따라 유비에게 권했다. 그러자 유비가 사양했다.
"두 장군께서는 관을 지키느라 수고가 많은 터이니 마땅히 술잔을 먼저 받아
야 할 것이오."
유비가 굳이 먼저 마실 것을 권하자 양회와 고패는 그 술잔을 들이켰다.
두 사람이 술을 다 마시자 유비가 다시 청했다.
"내가 두 분 장군과 은밀히 의논할 일이 있소이다. 다른 사람들은 내보내도록
하시오."
유비는 그 말과 함께 수하에게 눈짓해 양회,고패가 데리고 온 2백의 군사를
중군장 밖으로 내보내게 했다.
양회와 고패는 그런 유비를 말릴 수도 없었다. 차라리 그들 두 사람과 유비와
방통만이 마주 앉게 된 것을 더없이 좋은 기회가 될 수 있다고 여기고 있을 때
였다.
유비가 별안간 호통을 쳤다.
"이 두 놈을 묶어라!"
그 소리와 함께 장막 뒤에서 유봉,관평이 도부수들을 이끌고 나와 양회,고패가
미처 손 쓸 사이도 없이 두 사람을 꽁꽁 묶어 버렸다.
유비가 사로잡힌 그들을 보고 꾸짖었다.
"나는 너의 주인과 종친이며 형제뻘이 된다. 그런데 어찌하여 너희 두 사람이
짜고 우리 사이의 정리를 갈라 놓으려 했느냐?"
그러자 방통이 좌우에게 명을 내렸다.
"저놈들의 몸을 뒤져 보라!"
좌우의 군사들이 두 사람의 몸을 뒤져 보니 과연 날이 시퍼렇게 선 비수가 품
속에서 나왔다.
"저런 죽일 놈들이 있나, 빨리 목을 베어라!"
방통이 그들 두 사람을 끌어 내어 목을 베라고 했다. 유비는 차마 그들을 죽
일 수 없다는 듯 입을 다물고 있을 뿐이었다. 그들을 죽임으로써 스스로 유장과
의 정리를 끊는다고 생각하니 선뜻 결단을 내리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었다. 그
러자 방통이 그런 유비를 깨우쳤다.
"저 두 놈은 원래부터 주공을 해치려던 자들이었습니다. 그 죄는 죽어 마땅합
니다."
방통은 이어 다시 도부수들에게 호통을 쳐 양회와 고패의 목을 베게했다. 이
때 황충과 위연은 양회와 고패가 거느리고 온 군사 2백을 사로잡아 가두고 있었
다. 두 장수의 목이 떨어지자 겁에 질려 떨고 있는 군사들에게 유비가 부드러운
목소리로 달랬다.
"너희들은 놀라지 말라. 양회와 고패는 나의 형제간을 이간질했을 뿐만 아니라
나를 해치려고 칼까지 품고 있었으니 죽였을 뿐이다. 너희들이 무슨 죄가 있겠
느냐!"
유비는 술과 고기를 내려 군사들의 놀란 가슴을 위로해 주었다. 그러자 방통
이 군사들에게 말했다.
"내가 그대들을 우리 군사로 받아들이려고 하니, 이제 우리 군사를 인도해 관
을 빼앗을 수 있도록 하라. 그러면 후한 상을 내리겠다."
죽은 줄로만 알았던 군사들은 두 장수가 죽은데다 목숨까지 살려 주고 술을
내려 어르니 방통의 말을 따르지 않을 수 없었다. 모두 입을 모아 방통의 말을
따르겠다고 대답했다.
그날 밤이었다.
양회와 고패가 거느리고 왔던 2백 군사를 앞세운 유비의 대군이 부수관으로
향했다. 관문 앞에 이르자 앞선 군사 중의 하나가 외쳤다.
"양 장군과 고 장군께서 돌아오셨으니 어서 관문을 열어라!"
그 소리에 성 위에 있는 군사들이 관문 쪽을 굽어보니 모두 자기 편 군사들이
틀림없으므로 즉시 관문을 열었다. 그러자 어둠 속에서 숨소리를 죽이고 있던
유비의 군사들은 관문이 열리자 일시에 짓쳐들었다. 자기 편 군사들인 줄 알고
아무런 방비도 하지 않고 있던 부수관 안의 군사들은 성난 파도처럼 밀려드는
유비군을 맞아 제대로 싸우지도 못하고 모두 항복했다. 유비는 피 한 방울 흘리
지 않고 관을 얻었으며, 부수관 안의 군사들까지 자기 편 휘하로 거두어들인 것
이다.
유비는 이날 2백 군사들을 비록한 공을 세운 장졸들에게 모두 상을 내린 후
군사를 나누어 부수관의 앞문과 뒷문을 지키게 했다.
다음 날 힘들이지 않고 서천을 빼앗기 위한 첫 관문인 부수관을 얻은 유비는
술과 고기를 내려 군사들을 위로하는 한편 공청에서 잔치를 베풀었다. 술이 얼
근히 오른 유비가 방통을 돌아보며 말했다.
"오늘의 이 술자리가 실로 즐겁지 않소?"
평소 인의를 내세워 온 유비답지 않는 소리였다. 방통이 빈정거리는 투로 불
쑥 유비에게 핀잔을 주었다.
"남의 나라를 치고도 즐거워하는 것은 어진 이의 법도가 아닙니다."
유비가 그 대답에 몹시 불쾌한 듯 목소리를 높여 방통을 꾸짖었다.
"지난날 주의 무왕도 주를 쳐 빼앗은 후 풍악을 울리며 그 공을 경축했다 하
는데, 그럼 그 무왕도 어진 분이 아니란 말인가? 오히려 군사의 말이 도리에 맞
지 않음이 아닌가. 듣기 싫으니 썩 물러가도록 하라!"
비록 술에 취했다고는 하나 유비가 아픈 곳을 찔렸음인지 일찍이 볼 수 없었
던 큰 꾸짖음이었다. 그러나 모욕에 가까운 꾸짖음을 듣고서도 방통은 크게 웃
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쩌면 자신이 항상 유비를 일깨워 주며 했던 말을 비
로소 유비의 입으로 듣게 되었음을 기뻐했는지도 모른다.
만취한 유비를 좌우 사람들이 후당으로 부축하여 가서 눕혔다. 유비는 그대로
곯아떨어져 밤중에야 겨우 눈을 떴다.
유비가 술이 깨자 좌우 사람들이 술자리에 있었던 일을 들려 주었다. 유비는
그 말을 듣고 크게 뉘우쳤다.
다음 날이 되자 유비는 이른 아침에 옷을 갖춰 입고 당상에 나가 방통을 불러
들인 후 어제 있었던 일을 사과했다.
"어제 술에 취해 내가 말을 함부로 한 모양이오. 부디 가슴에 새겨 두지 마시
오."
방통은 유비의 사과에 빙그레 웃을 뿐이었다. 유비가 거듭 잘못을 빌었다.
"어제 일은 나의 실수였소이다."
"군신이 함께 실수를 했는데 어찌 주공만이 잘못이었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제게도 잘못이 있습니다."
방통이 밝게 웃으며 그렇게 말하자 유비도 그제야 소리내어 웃었다. 한동안
웃으며 즐겁게 이야기를 나누고 나니 언제 그런 일이 있었나 싶게 이전과 다름
없는 사이가 되었다.
한편 유비가 양회와 고패 두 장수를 죽이고 부수관을 차지했다는 소식을 들은
성도의 유장은 크게 놀랐다.
"일이 정말 이렇게 될 줄을 어찌 알았으랴!"
유장은 한탄하며 여러 문무관원들을 모은 후 이 일을 의논했다.
유비에 대해 처음부터 눈에 쌍심지를 돋웠던 황권이 먼저 입을 열었다.
"밤낮을 가리지 않고 군사를 낙현으로 이끌어 성도로 들어오는 물줄기 같은
길을 막도록 하십시오. 유비가 아무리 날랜 군사와 사나운 장수가 있다 할지라
도 그곳만 막으면 쉽게 성도로 들어오지는 못할 것입니다."
황권의 말에 유장도 이제는 악몽에서 깨어난 듯 지체하지 않고 군령을 내렸
다.
"유괴,냉포,장임,등현 네 장수는 군사 5만을 거느려 밤낮없이 낙현으로 가 유비
를 막아라!"
네 장수는 그날로 낙현을 향해 군사를 이끌었다. 가는 도중 유괴가 다른 장수
들에게 말했다.
"내가 전에 듣기로 금병산 속에 도호를 자허상인이라고 하는 한 이인이 있어
사람이 죽고 사는 것과 귀하게 되는 것, 천하게 되는 것을 손바닥 보듯이 안다
고 하오. 마침 오늘 행군 도중에 금병산을 지나게 되니 한 번 그 사람을 찾아가
물어 보는 것이 어떻겠소?"
갈 길이 급한데 유괴가 뜻밖의 말을 하자 장임이 핀잔을 주었다.
"대장부가 군사를 거느리고 적을 맞으러 가는 마당에 한낱 산야에 묻혀 사는
사람에게 무엇을 물어 본다는 말이오?"
그래도 유괴는 정색을 하고 우겼다.
"아니오. 옛 성인께서 이르시기를 '지성으로 도를 닦으면 가히 앞날의 일도 안
다'고 하였소. 그러니 고명한 사람이 있다면 그에게 앞일을 물어 흉한 길은 비켜
가고 길한 것은 취해야 할 것이오."
유괴의 말을 듣고 보니 다른 장수들도 마음이 달라졌다. 이에 네 장수는 행군
을 멈추고 기병 5, 60을 거느리고 금병산 아래에 이르러 나무꾼에게 길을 물었
다. 나무꾼이 높은 산꼭대기를 손으로 가리켰다.
네 장수가 나무꾼이 가리킨 높은 산꼭대기를 향해 올라가니 과연 암자가 하나
있었다. 암자 앞에 네 장수가 이르자 도인을 시중드는 아이가 나와 그들을 맞으
며 이름을 물었다. 네 장수가 각각 이름을 대자 아이가 방으로 안내했다.
과연 방 안에는 자허상인이 방석 위에 꼼짝 않고 앉아 명상에 잠겨 있었다.
네 사람은 그 도인에게 절을 올린 뒤 앞일을 물었다.
그러자 자허상인이 조용한 가운데 말했다.
"빈도(수도하는 사람이 스스로를 낮춘 말)는 산야에 숨어 사는 한낱 늙은이에
지나지 않소이다. 어찌 길흉을 알 수 있겠소?"
자허상인이 대답을 하지 않자 유괴가 다시 절을 올리며 간청했다. 자허상인은
그제야 아이에게 종이와 붓을 가져오게하여 여덟 구로 된 글을 써서 유괴에게
주었다.
네 사람이 그 글을 읽어 보았다.
왼쪽의 용과 오른쪽의 봉이
서천으로 날아드니
봉추는 땅에 떨어지고
와룡은 하늘로 오르네.
하나 얻고 하나 잃음은
하늘이 정한 이치이네.
천기대로 움직여서
구천으로 들지나 말라.
자허상인이 서천의 앞일과 그들 네 장수의 앞일을 암시한 글귀를 주자 유괴가
욕심을 내어 다시 물었다.
"우리 네 사람의 앞날 운수는 어떠합니까?"
자허상인은 그 물음에 차갑게 잘라 말했다.
"정해진 수는 피할 수 없으니 굳이 물어서 무슨 소용 있겠소?"
자허상인이 그렇게 대답하고 조용히 눈을 감아 버렸다. 더 이상 물어도 대답
하지 않겠다는 뜻인 듯했다.
하는 수 없이 산에서 내려오던 유괴가 입을 열었다.
"선인의 말을 믿지 않을 수 없소. 어쩐지 마지막 두 구절이 마음이 걸리오."
그 말에 장임이 유괴에게 가소로운 듯 핀잔을 주었다.
"산야의 한낱 미치광이 늙은이의 헛소리요. 그런 말을 믿어 무슨 득이 있겠
소."
네 사람은 다시 말에 올라 길을 떠났다. 낙성은 성도와 부성의 중간에 자리하
고 있었다.
낙현에 이른 넷은 각처의 험한 길목을 나누어 지키기 위해 군사를 나누었다.
유괴가 배치를 서둘렀다.
"낙성은 성도를 지켜 주는 울타리와 같은 곳이니 이곳을 잃는다면 성도를 지
켜 내기 힘들 것이오. 그러니 우리 넷 중 두 사람은 성을 지키고 두 사람은 낙
현 밖 산을 의지하여 진을 펼쳐야 하오. 성 안과 밖에 진을 세워 서로 호응한다
면 적군이 감히 이곳으로 쳐들어오지 못할 것이오."
유괴의 말에 냉포,등현이 나섰다.
"우리 두 사람이 나가 성 밖에 진을 세우겠소."
유괴가 곧 두 장수에게 군사 2만을 주니 두 장수는 낙성에서 60리 떨어진 곳
에 진을 세웠다. 유괴는 장임과 함께 나머지 군사 3만을 거느리고 성 안에 머물
면서 적이 오면 막을 채비를 갖추기 시작했다.
그때 유비는 부수관에서 방통과 더불어 낙성을 깨칠 일을 의논하고 있었다.
그때 유비가 내보낸 척후병이 헐레벌떡 달려와 알렸다.
"촉의 네 장수가 군사 5만을 이끌고 와 낙성에 이르렀습니다. 그 중 냉포,등현
두 장수가 군사 2만을 거느려 낙성에서 60리 떨어진 곳에 산을 의지해 영채를
세웠습니다."
유비가 곧 모든 장수들을 불러모아 의논했다.
"성도에 들기 위해선 먼저 성 밖의 진영부터 쳐야 하오. 누가 가서 냉포와 등
현의 진영을 부숴 첫 공을 세우겠소?"
그러자 휘하 장수들 가운데 제일 늙수그레한 노장 황충이 몸을 일으키며 말했
다.
"이 늙은이가 한 번 가 보겠습니다."
유비는 쾌히 승낙하며 격려했다.
"노장군께서 낙성으로 가셔서 냉포,등현 두 장수의 진영을 빼앗아 준다면 내가
반드시 후한 상을 내려 그 공을 기릴 것이오."
황충이 늙은 장수인 자신에게 유비가 서슴없이 허락하자 크게 기뻐하며 곧 군
사를 거느려 떠나려고 그 자리를 물러날 때였다. 돌연 한 장수가 장하에서 소리
치며 나섰다.
"노장군께서는 이미 나이가 있으신데 어찌 그 힘겨운 일을 맡으시겠습니까?
비록 재주는 없으나 그 일을 제게 맡겨 주셨으면 합니다."
유비가 누군가 하고 본즉 그는 바로 위연이었다. 그러나 황충이 그 말을 듣고
잠자코 있을 리가 없었다. 문득 목소리를 높여 위연을 나무랐다.
"내가 이미 군사들에게 장령까지 내렸는데 어찌 자네가 나서서 감히 내 공을
뺏으려 하는가?"
위연도 물러서지 않고 대꾸했다.
"장군께서는 이미 늙으신 몸이라 힘과 기력이 예전같지 않으실 것입니다. 듣기
로 냉포와 등현은 촉에서도 이름난 장수들로 한창 혈기 왕성한 굳센 장수라 하
였습니다. 만약 노장군께서 실수라도 하여 그들을 사로잡지 못한다면 이는 주공
의 큰 일을 그르치는 것이 될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대신 나서겠다는 뜻이며
달리 다른 뜻이 있는 건 아니니 노엽게 듣지 마십시오."
위연이 그렇게 말은 했으나 황충이 들을 때는 늙은이가 함부로 나서지 말라는
뜻으로 들을 수밖에 없었다. 황충이 그 소리에 불끈하여 위연에게 호통을 쳤다.
"닥쳐라! 오히려 너와 같이 혈기만 믿고 덤벙대는 자야말로 위험하다. 네 이
놈, 나를 어찌 늙었다 하느냐? 어디 나하고 한 번 무예를 겨루어 보겠느냐?"
위연이 그 말을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이 대답했다.
"좋소이다. 주공 앞에서 무예를 겨뤄 이긴 사람이 나가기로 하는 게 어떻겠습
니까?"
황충이 성난 얼굴로 그 말에 대답은 하지 않은 채 섬돌 아래로 발걸음을 옮기
더니 불쑥 군교에게 말했다.
"어서 칼을 가져오너라! 내 위연 저놈하고 한판 싸워 보리라!"
황충이 칼 가져오기를 기다리며 위연을 노려보는 기색이 아무래도 한바탕 싸
움을 벌일 기세였다.
그러자 유비가 깜짝 놀라며 소리쳐 만류했다.
"두 사람 다 물러나시오. 내가 이제 군사를 거느려 서천을 취하려 함에 있어
오로지 두 장군의 힘만을 믿고 있는 터인데, 두 호랑이가 싸우면 반드시 하나는
상해 나의 큰 일을 그르치게 되오. 그러니 그대들 두 사람은 다툼을 그만하고
화해하도록 하시오!"
유비는 휘하 장수들이 그처럼 왕성한 전의를 품고 있다는 것이 한편으로는 기
뻐 좋은 말로 두 장수를 달랬다.
그러자 방통이 유비를 거들며 나섰다.
"그대들 두 사람은 헛된 다툼을 그만두도록 하시오. 지금 냉포,등현이 각각 영
채를 세우고 있다고 하니 두 장수는 가긱 한 영채씩을 맡아 깨뜨리면 될 것이
오. 어느 쪽 장수이든 면저 적의 영채를 빼앗는 장수에게 첫 번째 공을 돌리도
록 하겠소. 황장군은 냉포의 영채를, 의연 장군은 등현의 영채를 맡도록 하시오."
방통이 그렇게 군령을 내리니 두 사람은 굳이 다툴 필요가 없어졌다. 이에 두
장수는 각기 군사를 거느리고 맡은 영채를 치기 위해 그 자리를 물러났다. 두
장수가 물러가자 방통이 문득 유비에게 청했다.
"두 장수가 가는 도중 서로 다툴까 두려븟ㅂ니다. 주공께서는 군사를 거느려
두 장수의 뒤를 도와주도록 하십시오."
그 말에 유비도 그것이 걱정수럽던 터라 두말 않고 방통의 말에 따랐다. 유비
는 방통을 부성에 머물게하여 지키게 한 후, 자신은 유봉,관평과 함께 군사 5천
을 거느려 두 장수를 뒤따르기로 했다.
한편 황충은 자기의 진으로 돌아오자 군사들에게 영을 내렸다.
"내일 새벽 사경쯤에 밥을 지어 먹고 오경에 떠날 준비를 하라. 날이 밝을 무
렵이면 출발하되 왼쪽 산골짜기로 나아가도록 하라!"
황충이 진병을 서둘렀다. 그러자 위연이 은밀히 군사를 황충의 영채로 보내
황충이 언제 출발할 것인가를 엿보게 했다. 황충의 군사를 살피러 갔던 군사가
오래지 않아 돌아와 알렸다.
"내일 사경에 밥을 지어 먹고 오경에는 떠난다 하옵니다."
위연이 그 소리를 듣고 지체하지 않고 군사들에게 영을 내렸다.
"우리 군사들은 내일 이경에 밥을 지어먹고 삼경에 떠나도록 하되 날이 밝을
무렵에느 등현의 영채 가까이에 이르도록 해야 할 것이니라!"
황충보다 한 발 먼저 적의 영채를 힐 심산이었다.
영을 받은 군사들은 이경에 바바을 지어 먹고 말에서 방울을 떼어낸 후, 입에
는 재갈을 물렸다. 그런 다음 깃발은 말아서 들고 무기를 갖춘 후 삼경일 되자
영채를 떠났다.
황충에게 공을 빼앗기지 않겠다고 잔뜩 벼르고 있는 위연인지라 가는 도중에
엉뚱한 욕심이 생겼다.
'등현의 영채만을 빼앗는 다면 그게 큰 자랑거리가 될 리 없지 않은가. 그럴
바엔 차라리 냉포의 영채부터 빼앗고 내가 맡은 등현의 영채마저 뺏는 다면 황
충을 따돌리고 공을 혼자서 독차지할 것이 아닌가.'
옥심에 눈이 어두우니 이젠 적군의 군세나 형세는 안중에도 없었다. 위연은
군사들에게 갑자기 영을 바꾸어 내렸다.
"군사들은 모두 방향을 바꾸어 왼편 산기슭으로 향하라. 먼저 냉포의 영채부터
치기로 한다."
황충보다 먼저 떠난 위연의 군사들인지라 날이 밝아 올 무렵이 되자 냉포의
영채 가까이에 이르렀다. 황충위 군사들은 아직 보이지 않았다.
위연은 군사들을 잠시 쉬게 하며 북과 기치, 창칼과 무기들을 벌여 세워 싸울
채비를 했다.
그런데 옥심만 내었지 적의 경계 탯를 염두에 두지 않은 위연이었다. 그들이
영채 가까이 이르자 냉포가 미리 풀어 놓은 척후병들에 의해 냉포에게 즉각 알
려지고 말았다.
냉포는 적의 기습에 대비한 채비를 서둘러 마친 후 적이 급습해 오기전에 먼
저 들이치기로 하고 말 위에 올랐다.
냉포는 포향 한 소리를 터뜨리는 것과 동시에 삼군을 이끌어 위연의 영채로
덮쳐들었다.
당황한 건 오히려 위연이었다. 싸울 채비만을 떠벌리던 위연은 기습을 가하기
도 전에 냉포가 먼저 급습해 오니 경황 중에 적군을 맞지 않을 수 없었다.
위연이 냉포를 맞아 황급해 말을 달려나가 싸웠다. 두 장수가 말을 부딪치며
겨군 지 30여합이나 되었다.
그때 서천의 군사들은 두 갈래로 나누어 위연의 군사를 덮치고 있었다. 위연
의 군사들은 잠도 제대로 자지 못하고 밤길을 달려온 군사들이었다. 게다가 양
쪽에서 기습을 당하는 형세가 되었다. 사람과 말 모두 함께 지친 군사들이었으
니 제대로 싸울 수가 없었다. 좌충우돌, 같은 편끼리 부딪고 넘어지며 달아나기
바빴다.
위연이 뒤쪽 자기편 군사가 크게 혼란이 이는 가운데 흩어져 달아나는 걸 보
고 더 싸우고 있을 수 없었다.
냉포에게 크게 칼을 한 번 휘둘러 그가 물러나는 사이 위연은 급히 말머리를
돌려 달아나기 시작했다.
서천 군사들이 달아나는 위연을 그냥 둘 리 없었다. 위연을 뒤쫓으며 형주군
을 공격하니 형주군은 크게 패한 채 달아날 수밖에 없었다.
위연의 군사가 크게 죽고 상한 가운데 5리 쯤을 달아났을 때였다. 홀연 산 뒤
쪽에서 북 소리가 크게 일며 등현의 군사들이 산골짜기를 휘돌아와 길을 가로막
았다.
"위연은 달아나지 말고 순순히 말에서 내려 항복하도록 하라!"
그 소리에 더욱 급해진 위연이었다. 말을 박차고 힘껏 채찍질을 하며 앞으로
헤치고 달려가려는데 말도 지쳤던지 갑자기 앞굽을 꿇고 고꾸라지고 말았다. 말
이 고꾸라지니 위연이 온전할 리 없었다.
저만치 말 앞쪽 땅바닥에 나뒹굴고 말았다. 등현이 그걸 보자 위연을 한 창에
찍을 기세로 말을 달려와 창을 번쩍 치켜들었다.
위연도 그 지경이 되니 별 도리없이 그 창을 맞을 수밖에 없었으나 그때 어디
선가 바람을 가르며 나는 시윗소리가 나더니 등현의 등을 꿰뚫었다.
화살에 맞은 등현이 위연을 찌르는 대신 자기가 먼저 말 위에서 굴러떨어지고
말았다. 이때 위연 뒤를 따르던 냉포가 그 모양을 보고 말을 달려 등현을 구하
러 가자, 산 위에서 한 장수가 말을 달려오면서 산이 떠나갈 듯 소리쳤다.
"노장 황충이 여기 있다. 냉포는 어서 내 칼을 받으라!"
그 소리에 냉포가 칼을 들어 먼저 달려드는 황충을 급히 막았다. 냉포가 황충
을 맞아 싸웠으나 그가 대적해 싸울 상대가 아니었다. 몇 번 황충의 칼을 막고
피한 걸 다행으로 여기며 급히 말머리를 돌려 달아났다. 황충이 그 뒤를 쫓으며
냉포군을 찌르고 베며 휩쓸어가니 냉포군은 크게 어지러워졌다.
그럴 동안 황충이 거느린 군사 중의 한 무리가 위연을 구해 곧장 적의 영채
쪽으로 향했다.
그때쯤 냉포는 황충이 자기를 바짝 뒤짜르므로 말을 돌려 죽기 살기로 싸워
10여 합을 어우르고 있는데 문득 황충의 군사들이 달려오고 있지 않은가.
냉포는 왼편 자기의 영채를 버린 채 황망히 뒤따르는 군사를 이끌고 오른편
영채로 향했다. 그런데 냉포가 오른편 등현의 영채로 말을 몰아 달려가보니 영
채에 펄럭이는 깃발이 아무래도 이상했다.
냉포가 얼굴빛이 달라지며 갑자기 말을 세웠다. 그러자 등현의 영채 안에서
한 장수가 말을 달려나오는데 보니 금빛 갑옷에다 비단 전포를 입은 유비였다.
좌우로는 유봉과 관평을 거느리고 있었다.
등현이 군사를 거느리고 위연을 치러 나간 사이 뒤따르던 유비가 텅비다시피
한 등현의 영채를 화살 한 대 쏘지 않고 차지한 것이었다.
유비가 얼이 빠져 있는 냉포를 보고 큰 소리로 꾸짖었다.
"이놈 냉포야, 내가 너희들 영채를 이미 다 차지했는데 네가 어디로 달아나려
하느냐!"
유비의 대갈 일성에 냉포는 앞과 뒤로 길이 막혀 황망한 중에 산 속 좁은 길
로 급히 말을 달렸다. 냉포가 낙성을 향해 뒤도 돌아보지 않고 10여리를 달려갔
을 때였다.
홀연 좁은 산길에서 군사들이 양쪽에서 내달아와 갈퀴와 올가미를 날려 그를
덮씌우더니 말 잔등에서 낚아챘다.
그들 복병은 위연의 군사들이었다. 위연이 공을 혼자 독차지하려다가 오히려
기습을 당해 목숩까지 위급한 지경에 이르렀으나 황충의 덕으로 살아났던 터였
다. 이에 위연은 자기의 잘못을 생각하니 주공을 대할 면목이 없었다. 어떻게 죄
를 면할까를 생각하다 뒤따르는 후군을 수습하고 항복해 온 서천 군사들에게 서
천군이 달아날 만한 길을 물어 그곳에 매복해 있었던 것이었다. 그러다가 운 좋
게도 마침 도망쳐오는 냉포를 사로잡게 된 것이었다.
냉포를 사롭잡은 위연은 그나마도 할 말을 찾게 되었다고 여기고 냉포를 묶어
유비가 있는 영채로 향했다.
그때 유비는 항복해 온 서천 군사들을 달래고 있었다. 면사기를 내세우고 군
사들에게 영을 내렸다.
"서천 군사로서 무기와 갑옷을 버리고 우리에게 항복해 오는 자는 일체 죽이
지 않도록 하라. 만일 항복하는 적을 죽이는 자가 있으면 그를 목베리라!"
군사들에게 엄하게 이른 뒤 유비는 다시 서천 군사들을 향하여 어르고 달랬
다.
"너희 서천 사람은 다 부모와 처자가 있을 터인데, 참으로 항복하는 자는 나의
군사로 받아들일 것이니라. 만약 원치 않는 자가 있더라도 모두 고향으로 돌려
보내 주리라!"
서천의 군사들은 그 말을 듣자 자기 귀를 의심할 지경이었다. 유비의 너그러
운 마음씨에 감격하지 않은 사람이 없었다. 모두 성정을 굽혀 유비의 너그러움
에 고마움을 나타냈다.
이때 냉포의 왼쪽 영채를 빼앗은 황충이 유비의 영채에 이르렀다. 황충은 유
비에게 다가가 아뢰었다.
"위연이 이번에 공을 도맡아 세우려다 군령을 어겼습니다. 자칫 일을 그르칠
뻔하였을 뿐만 아니라 군령마저 어겼으니 그에게 죄를 물어 군령의 엄함을 보여
야 할 것입니다."
위연을 위급에서 구해 주기는 했으나 황충은 노기가 이는 듯 정색을 하고 지
난날 밤에 있었던 일을 말했다.
유비도 황충의 말을 듣자 성난 목소리로 급히 위연을 불러 오게 했다. 때마침
위연이 냉포를 생포해서 영채로 들어오고 있었다.
유비는 위연이 냉포를 사로잡아오자 노기를 누그러뜨리며 황충에게 가만히 말
했다.
"위연이 비록 죄가 크나 냉포를 사로잡은 공을 보아 그를 용서해 주어야겠
소!"
유비는 황충을 달래는 한편, 위연에게 엄한 목소리로 꾸짖었다.
"위연은 듣거라! 군령을 어긴 죄 목을 베어야 마땅하나 세운 공도 있는데다
특히 황 장군께서 너그러이 용서하라고 하니 이번만은 특별히 그 죄를 덮어 두
기로 한다. 위연은 목숨을 두 번이나 구해 준 황 장군에게 감사하되 다시는 다
투지 않도록 하라!"
유비의 말에 위연은 유비에게 머리를 조아려 감사한 다음 황충에게도 잘못을
빌며 목숨을 구해준 은혜에 감사했다. 유비는 황충에게 후한 상을 내렸다. 황충
도 유비가 그토록 자기를 높여 주며 위연을 뉘우치게 하자 크게 감격했다.
황충과 위연의 일을 그렇게 수습한 유비는 냉포를 장하에 이끌어 오게 했다.
냉포가 묶인 채 이끌려 오자 몸소 결박을 풀어 주며 그를 청해 앉힌 뒤 술잔을
건네며 달랬다.
"그대는 내게 항복할 뜻이 있는가?"
유비가 묻자 냉포가 머뭇거림 없이 대답했다.
"죽은 목숩을 살려 주셨는데 어찌 항복을 마다할 수 있겠습니까? 만약 저를
놓아 주신다면 유괴와 장임도 달래 항복하도록 권하겠습니다. 그 두 사람도 저
와 죽고 살기를 함께하기로 했던 사람들이니 제가 가서 그들을 달래면 낙성을
바치고 항복할 것입니다."
유비가 냉포의 말에 크게 기뻐했다. 만약 냉포의 말대로 된다면 그야말로 화
살 한 개 쏘지 않고 낙성을 얻게 될 것이기 때문이었다. 만약 거짓으로 냉포가
빠져 나가기 위해 꾸며댄 말이라고 해도 이름 없는 촉의 장수 한 사람쯤 놓친다
하여 별로 두려워할 바도 아니었다.
유비는 즉시 안장과 말을 내주고 냉포를 낙성으로 가게 했다. 그러자 위연이
나서며 유비에게 간했다.
"저 사람을 보내서는 아니 됩니다. 그놈이 이곳을 빠져 나가면 다시는 돌아오
지 않을 것입니다."
"내가 인의로써 사람을 대하면 그도 나를 저버리지 않을 것이니 괘념치 말라."
유비는 그를 돌려 보내면서도 의심은커녕 오히려 위연을 달랬다.
그러나 낙성으로 돌아간 냉포는 끝내 돌아오지 않았다. 냉포는 유괴와 장임에
게 유비에게 사로잡혔던 일을 입 밖에도 꺼내지 않았다.
"적군 10여 명을 단숨에 때려 죽인 다음 그 말을 빼앗아 타고 달려오는 길이
오."
장수로서 적에게 사로잡혔다가 거짓말을 하고 빠져 나왔다는 말을 할 수는 없
었다. 그러나 유괴가 보니 황망할 수밖에 없었다.
부하 군사들은 모두 죽거나 적에 투항하고 장수만 돌아왔으니 어쨌든 크게 패
한 싸움이 아닐 수 없었다. 이에 유괴는 사람을 성도로 보내 이 사실을 유장에
게 알리게 했다.
유장은 이 소식을 듣고 크게 놀라며 모든 관원들을 모아 놓고 이 일을 의논했
다. 그러자 큰 아들 유순이 나서며 힘찬 목소리로 말했다.
"제가 군사를 이끌고 가서 낙성을 지키겠습니다."
유장은 그런 맏아들이 대견스러웠으나 아직 나이가 어려 아무래도 미덥지가
못했다. 여러 관원들을 둘러보며 물었다.
"내 아이가 가겠다고 하였소. 그런데 저 아이를 도와 줄 사람이 있어야겠는데
누가 나서겠소?"
"제가 함께 가겠습니다!"
유장이 소리나는 쪽을 보니 그는 사돈이 되는 오의였다. 유장의 친형인 유위
는 원래 오의의 매씨에게 장가를 들었는데 그 뒤에 죽었던 터였다.
유장은 기뻐하며 오의에게 물었다.
"사돈 어른께서 가신다면 더 바랄 나위가 없습니다. 그런데 부장으로 누구를
데리고 갔으면 좋겠습니까?"
"오란과 뇌동이 좋겠습니다."
그러자 오의가 서슴없이 청했다.
유장은 오의의 말에 쾌히 승낙하고 그들에게 군사 2만을 주었다. 오의는 그날
로 군사를 이끌어 낙성으로 향했다.
유괴와 장임은 오의와 군사 2만을 성 안으로 맞아들인 뒤 오의에게 그동안의
일을 자세히 들려 주었다.
그들의 이야기를 듣고 난 오의가 궁금한 얼굴로 물었다.
"이미 적이 성 아래까지 온 거나 다름없이 위급한 형세인데 공들은 어떤 계책
이라도 세워 두고 있소?"
어쩌면 장수들에게 은근히 따지듯한 말투였다. 오의가 유장의 사돈인지라 그
들이 내심 당황하는 가운데 냉포가 얼른 입을 열어 계책 하나를 말했다.
"이 부근에는 부강이 흐르고 있으며 물살이 빠르고 거칩니다. 적이 산 아래 영
채에 있으니 그 지세가 낮습니다. 제게 군사 5천만 주신다면 삽과 곡갱이를 가
지고 가서 부강의 둑을 일시에 무너뜨리겠습니다. 부강의 물이 한꺼번에 산 아
래 영채에 쏟아진다면 유비의 군사는 모두 물살에 휘말려 죽고 말 것입니다."
오의가 들어 보니 참으로 훌륭한 묘책이 아닐 수 없었다. 냉포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더니 곧 군사 5천을 주며 말했다.
"좋소이다, 그대는 곧 군사 5천을 이끌고 가 부강의 둑을 일시에 무너뜨리도록
하시오. 내가 오란과 뇌동에게 군사를 주어 그대 뒤를 받치도록 하겠소."
이에 냉포는 군사들에게 명해 둑을 무너뜨리는 데 쓸 삽과 곡갱이들을 준비하
게 했다.
한편 유비는 그때 황충과 위연에게 각기 빼앗은 영채를 하나씩 맡겨 지키도록
한 다음 부성으로 돌아왔다.
유비는 방통을 청해 다음 일을 의논하고 있는데 멀리 나가 있던 세작이 돌아
와 알렸다.
"동오의 손권이 사람을 동천 장로에게 보내 화친을 맺고 앞으로 가맹관을 칠
채비를 하고 있다 합니다."
그 소리에 유비가 깜짝 놀라며 방통에게 물었다.
"가맹관을 잃으면 우리가 돌아갈 길이 끊어지는 것이오. 만약 그렇게 된다면
나아갈 수도 물러설 수도 없게 되니, 이 일을 어찌하면 좋겠소?"
그러자 방통은 대수롭지 않다는 듯이 맹달에게 말했다.
"공은 서촉 사람이니 이곳 지리에 밝을 것이오. 공이 가서 가맹관을 지키는 것
이 어떻겠소?"
그러자 맹달도 주저하지 않고 대답했다.
"그렇다면 제게 한 사람만 더 데려가게 해 주십시오. 그렇게 하면 가맹관을 지
키는 데 별 어려움이 없을 것입니다."
"그게 누구요?"
유비가 그 말에 반가운 얼굴로 물었다.
"그 사람은 지난날 형주의 유표 밑에서 중랑장을 지낸 바 있는데, 남군 지강땅
사람으로 이름은 곽준이며 자는 중막이라 합니다."
유비가 그걸 마다할 리가 없었다. 곧 곽준을 불러 맹달과 함께 가 개맹관을
지키도록 했다.
맹달이 가맹관을 지키기 위해 떠나자 방통은 그 자리를 물러나 거처하는 곳으
로 돌아왔다. 방통이 잠시 쉴 틈도 없이 문 앞을 지키는 군사가 와서 알렸다.
"어떤 나그네가 와서 군사를 뵙겠다고 합니다."
"어떤 사람인가?"
방통이 만나기를 뒤로 미루고 싶어 그렇게 물었다. 그러자 그 군사가 그 사람
의 풍채나 행색을 말하는데 방통이 들어보니 여느 사람 같지 않았다.
방통은 자리에서 일어나 그 사람을 맞으러 나갔다. 방통이 그 사람을 보니 키
가 여덟 자에 용모가 비범하고 체구 또한 우람했다. 그러나 옷차림은 남루하여
볼품이 없는데다 머리를 짧게 끊어 목덜미를 덮을 만큼 풀어헤치고 있었다.
"선생은 뉘시오?"
방통이 목소리를 낮추어 물었다.
그러나 그 사람은 물음에는 대답할 생각도 않고 발걸음을 성큼성큼 옮겨 당위
로 오르더니 침상 위에 벌렁 드러누웠다.
원래 방통도 여기저기를 마음대로 떠돌며 생활했던 적이 있었으나 이 사람처
럼 무례한 경우는 처음이었다. 그러나 어이가 없는 가운데도 다시 그가 누구인
가하고 몇 번을 채근해 물었다.
"그대는 잠시 조용히 하게! 내가 그대에게 천하의 큰 일을 일러 주고자 하네."
흡사 아랫사람 대하듯한 오만불손한 태도였다. 방통이 의아스러운 가운데도
하는 말이 심상치 않아 좌우 사람을 시켜 술상을 마련하여 오도록 했다. 술상이
들어오자 그 사람은 벌떡 일어나더니 술과 안주를 먹어대기 시작했다. 체면치레
라든가 마주 권하는 법도 없이 한동안 마실 만큼 마시고 먹을 만큼 먹더니 다시
그 자리에 쓰러져 잠이 들었다.
이에 방통은 가만히 법정을 불러 오게 했다. 법정은 촉의 사정이나 인물에 대
해 훤히 알고 있었으므로 그에게 물어 보기 위해서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법정이 달려왔다. 방통이 밖에서 그를 기다리고 있다가 맞
으며 그 사람의 생김새와 행동거지를 들려 준 후 물었다.
"혹시 그 사람이 누구인지 알 수 있겠소?"
그러자 법정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혹시 팽영언이 아닌지 모르겠소이다."
법정이 직접 그를 보기 위해 가만히 당 위로 올라 누워 있는 사람을 굽어보았
다.
"효직은 그간 별고 없었는가?"
문득 그 말소리와 함께 누워 있던 그 사람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법정도 그 사람을 보자 반가운 듯 서로 손을 마주 잡고 쓰다듬으며 크게 웃었
다. 방통이 궁금증을 이기지 못한 채 법정에게 물었다.
"이분은 뉘시오?"
법정은 그제야 방통에게 그 사람을 소개했다.
"이분의 이름은 팽야이요, 자는 영언이라 쓰며 촉 땅의 호걸입니다. 그런데 주
군인 유장에게 바른말을 너무 심하게 하다 미움을 사서 머리를 깎이고, 목에 쇠
고리를 낀 채 남의 종살이하는 벌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머리가 저렇게
짧아졌지요."
방통은 그에 대한 유장의 노여움이 컸음을 짐작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
면 유장에게 도움을 줄 사람이 아님을 알았다. 방통은 그에게 더욱 예로써 대하
며 물었다.
"그럼 선생께서는 어쩐 일로 이렇게 찾아 주셨습니까?"
그러자 팽양이 큰 소리로 대답했다.
"내가 공들의 군사 수만의 목숨을 구하기 위해 특별히 왔소이다. 그러나 유 황
숙을 뵙고 나서야 말씀드릴 것이오."
방통은 짐작대로 필시 그 말에는 까닭이 있을 것이라 여겼다. 이에 법정은 급
히 유비에게 이 일을 알렸다. 유비도 그 말을 듣고 놀라며 몸소 팽양을 찾아와
예를 나누었다.
"우리 군사 수만의 목숨을 구해 주신다 함은 무슨 말씀이십니까?"
유비가 묻자 팽양이 유비에게 되물었다.
"장군께서는 낙성 앞쪽의 영채에다 군사를 주둔케 하셨을 것입니다. 그러합니
까?"
그러자, 유비는 황망히 황충과 위연이 군사를 거느려 두 영채를 지키고 있다
고 숨김 없이 말했다.
"장수된 사람으로서 어찌하여 지리를 알지 못하십니까? 그 두 영채는 부강을
의지하고 있습니다. 만약 적이 둑을 무너뜨리고 일시에 강물을 터놓고 군사들이
나아가지도 물러서지도 못하게 앞뒤를 막는다면 어찌하시겠습니까? 군사들은 한
사람도 살아남지 못하고 모두 강물에 빠져 죽게 될 것입니다. 그 영채들은 마치
호수 바닥에 있는 것과 다름없이 위험한 곳입니다."
팽양이 유비에게 꾸짖듯 말하자 유비도 그제야 비로소 깨닫는 바가 있었다.
놀란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고 있는데 팽양이 다시 말을 이었다.
"지금 강성(북두칠성)이 서쪽에 있고 태백(금성)이 이곳에 나타났으니 이는 상
서롭지 못한 조짐입니다. 그러니 장군께서는 깊이 살피시기를 바랍니다."
유비는 팽양의 가르침에 감사하며 막빈으로 모시는 한편 사람을 황충과 위연
에게 보내 영을 내렸다.
"아침 저녁으로 물샐틈 없이 순찰을 하되 특히 적이 부강의 둑을 터놓는 것을
엄히 살피도록 하라."
이에 황충과 위연은 서로 의논하여 하루에 한 번씩 번갈아 가며 순찰을 돌되
만약 적군이 나타날 때는 힘을 합쳐 치기로 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그날은 밤이 되자 비바람이 몹시 거세게 불기 시작했
다.
비 오기만을 기다리던 냉포는 때가 왔다고 여기고 군사 5천을 거느리고 부강
으로 나가 강가의 둑을 터놓기 위해 채비를 하고 있었다. 그런데 어둠 속에서
홀연 함성이 크게 일어나며 군사들이 내달아왔다. 냉포는 크게 놀랐다. 이토록
비바람이 심한 날에 적군이 매복하고 있으리라고 생각지도 못했던 냉포였다.
냉폰느 하는 수 없이 급히 군사를 물리려 하는데 깜깜한 밤이라 지척을 분간
할 수 없었다. 적의 움직임도 군세도 알 길 없는 가운데 아군끼리 부딪고 짓밟
히며 큰 혼란이 일었다.
냉포가 그 혼란 속을 헤치며 말을 달려 달아나는데 문득 앞쪽에서 한 장수가
군사를 거느린 채 앞을 가로막았다. 그 장수가 가까이 다가오는데 보니 바로 위
연이었다. 냉포가 칼을 빼들고 위연에게 덤벼들었다. 그러나 칼과 칼이 부딪친
지 수합이 되지 못해 냉포는 다시 위연에게 사로잡히고 말았다.
이때 냉포를 돕기 위해 군사를 거느리고 오란과 뇌동이 나타났으나 급보를 받
고 달려온 황충의 군사들과 마주쳤다. 황충은 군사를 휘몰아 오란과 뇌동의 군
사를 덮치면서 닥치는 대로 베고 찔렀다. 오란과 뇌동은 크게 패한 채 쫓기고
말았다.
사로잡힌 냉포는 다음 날 부성으로 이끌려 가 유비 앞에 또다시 꿇어앉았다.
유비는 냉포를 굽어보며 소리쳤다.
"내가 너를 인의로 대해 주었거늘 너는 어찌하여 감히 나를 거스렸느냐? 이젠
너를 용서할 수 없다!"
유비는 즉시 그를 성밖에 끌어 내어 목을 베게 하고, 그를 사로잡은 위연에게
후한 상을 내렸다.
유비는 다시 팽양을 청해 잔치를 베풀어 극진히 대접했다.
"실로 선생의 가르치심이 없었던들 우리 군사 수만 명이 한꺼번에 목숨을 잃
을 뻔했습니다."
유비가 술잔을 권하며 팽양에게 감사를 표했다.
그때 문득 사람이 들어오더니 유비에게 알렸다.
"형주의 제갈 군사께서 마량을 보내 글을 전하게 하였습니다."
유비가 즉시 그를 불러들이도록 했다. 마량이 들어와 유비에게 절하며 형주
소식을 전했다.
"형주는 편안하니 주공께서는 염려하지 마십시오."
마량은 이어 공명이 준 글을 유비에게 바쳤다.
유비가 급히 그 글을 읽어 보았다.
제가 밤에 태을수(하늘을 보고 점을 치는 법을 적은 책)를 보니 올해가 계
해년으로 강성(북
두칠성)이 서방에 있으며, 또 건상(천문)을 보니 태백성(금성)이 낙성 땅 위
에 자리잡고 있었
습니다. 이는 대장의 몸에 길한 일은 적고 흉한 일이 많은 징조를 뜻합니다.
부디 주공께서는
모든 일은 신중히 살피시어 함부로 나서지 않도록 하십시오.
유비는 공명이 그토록 자신을 걱정하고 있음을 알고 곁에 사람이 있는 것도
잊고 몇 번인가 그 글을 되풀이해 읽었다.
글을 읽고 난 유비는 마량을 형주로 돌려보낸 후 방통에게 말했다.
"내가 형주로 돌아가서 모든 일을 공명과 한번 의논해 보아야겠소."
형주를 너무 오랫동안 떠나 있었다는 생각이 일며 문득 공명을 만나고 싶어진
유비가 그렇게 말했으나 방통의 생각은 달랐다.
방통은 유비의 속마음을 알고 은근히 갈등이 이는 가운데 속으로 생각하고 있
었다.
'공명은 내가 서천을 얻게하여 공을 세울까 두려워하고 있는 것이리라. 그래서
그 글을 보내 이 일을 방해하는 것이리라.'
방통이 잠시 동안 대답을 하지 않고 있다가 이윽고 입을 열었다.
"저 역시 태을수를 헤아려 보아 강성이 서방에 있음을 이미 알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주공께서 서천땅을 얻을 징조이지 흉한 일이 일어난다는 것은 아
닙니다. 그리고 저 역시 천문을 보았습니다만 태백성이 낙성 위에 있다 하나 이
는 우리가 촉의 장수 냉포의 목을 베었으니 이미 그 흉조에 가름한 셈입니다.
주공께서는 부질없는 의심으로 일을 그르치시지 마시고 급히 여세를 몰아 군사
를 내도록 하십시오."
방통이 유비를 부추기며 재촉하자 유비도 하는 수 없이 내친 김에 서천을 떨
어뜨리자는 방통의 말에 따르기로 하고, 군사를 이끌어 성도로 향했다.
가는 도중에 황충과 위연이 함께 나와 반갑게 유비를 영채로 모셨다.
"낙성으로 들 수 있는 길이 몇 군데나 있소?"
영채로 든 유비가 법정에게 물었다.
그러자 법정이 땅바닥에 지도를 그려가며 설명했다. 유비는 전에 장송이 준
촉의 지도를 꺼내 법정이 그려 준 것과 대조해 보니 조금도 어긋남이 없었다.
"낙산 북쪽에 큰길이 하나 있는데 그리로 가면 낙성의 동문에 이르게 됩니다.
또 산 남쪽에 작은 길이 있는데 그리로 가면 낙성 서쪽 문에 이르게 됩니다. 그
러나 두 길 어느 곳으로도 군사를 내실 수 있습니다."
방통이 그 말을 듣자 얼른 유비에게 말했다.
"제가 위연을 선봉으로 삼아 남쪽의 작은 길로 나아가겠습니다. 주공께서는 황
충을 선봉으로 삼아 북쪽 큰길로 나아가도록 하십시오. 그리하여 낙성에 이르면
그때는 전군이 함께 들이치도록 하면 될 것입니다."
방통은 좁은 길로는 아무래도 군사를 이끌기 힘드리라 여겨 유비에게 큰길로
나아가도록 권했다. 그러나 유비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했다.
"나는 어릴 적부터 말타기와 활쏘기를 익혔고 좁은 길도 많이 다녀 본 적이
있소이다. 그러니 군사는 큰길로 가서 동문을 공격하도록 하시오. 나는 곧장 남
쪽 좁은 길로 가 서문을 치겠소."
그러나 방통은 유비의 말을 듣지 않고 우겼다.
"큰길에는 반드시 적이 방비하고 있을 것입니다. 그러니 그곳은 주공께서 나아
가 적을 치고 길을 뚫어야 할 것입니다. 저는 좁은 길로 나아가겠습니다."
방통이 이번에는 그럴싸한 구실을 대며 유비에게 큰길로 갈 것을 권했다. 방
통이 유비를 걱정하며 편한 길을 권유하는 것을 유비가 모를 리 없었다. 그러나
유비는 험하고 좁은 산길로 방통을 보내는 것이 아무래도 미덥지 않아 다시 말
했다.
"군사는 내 말을 듣도록 하시오. 어젯밤 꿈이 한 신인이 나타나 쇠몽둥이로 내
오른팔을 쳤소이다. 그런데 아직까지 오른팔이 쑤시는 듯하오. 이번에 가는 길이
아무래도 좋지 않은 둣하오. 차라리 군사께서 부성으로 돌아가 그곳을 지켜 주
는 것이 좋을 것 같소."
"대장부가 싸움에 나가 죽거나 다치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어찌 그런 꿈 따
위로 걱정할 수 있겠습니까?"
방통이 서슴없이 그렇게 대답했다. 그러자 유비가 이번에는 공명의 글을 핑계
대어 말했다.
"내가 걱정하는 바는 공명의 글 때문이오. 그러니 군사는 부성으로 돌아가 그
곳을 지켜 주시오.."
그러나 유비가 공명의 글을 핑계댄 것은 잘못이었다.
방통은 유비의 말에 오기가 치솟는 듯 오히려 큰 소리로 껄껄 웃으며 말을 이
었다.
"주공께서는 지나치게 공명의 글에 정신을 빼앗기고 계십니다. 공명은 저 혼자
서 큰 공을 세울까 봐 두려워하여 그런 글을 보내 주공의 마음을 어지럽게 한
것입니다. 마음에 의혹이 생겨 어지러워지면 꿈 속에도 그 일이 나타나는 법입
니다. 그러니 꿈이 불길하다고하여 반드시 두려워할 일은 못 됩니다. 저는 주공
을 위하여 간과 뇌를 쏟으며 죽는 것이 원래의 바라는 바입니다. 주공께서는 다
시 여러 말씀 마시고 나아가도록 하십시오."
방통의 끝내 이렇게 우기니 유비도 더 권할 수가 없었다. 이에 방통은 전군에
게 영을 내렸다.
"내일 새벽 오경 무렵까지 밥을 먹고 해뜰 무렵에는 진군하도록 채비를 갖추
라!"
다음 날 새벽이 되자 선봉이 된 황충과 위연이 먼저 군사를 거느리고 떠나갔
다.
유비와 방통은 각기 길을 떠나기 전에 낙성에서 만날 일을 정하려는데 문득
방통이 탄 말이 발을 헛디뎌 쓰러지자 방통이 땅 위로 떨어졌다.
"군사는 어찌하여 이렇게 볼품 없는 말을 타고 다니시오?"
"이 말을 타고 다닌지 오래 되었습니다만 일찍이 이런 일은 없었습니다."
방통이 대수롭지 않다는 듯 대답했다.
"만약 싸움터에 나가서 이런 일이 있었다가는 목숨이 위태로운 지경에 이르게
되오. 내가 타고 있는 흰 말은 매우 길이 잘 들었으니 군사가 타더라고 결코 실
수가 없을 것이오. 이 볼품없는 말은 내가 타겠소."
유비가 자신이 타던 흰 말의 고삐를 끌어다 방통에게 주었다.
"주공의 크신 은혜에 오직 감격할 따름입니다. 내 비록 만 번 죽는다 해도 어
찌 주공의 은혜에 보답할 수 있겠습니까?"
방통은 유비의 고마움에 눈시울을 붉히며 허리를 굽혀 사례했다. 이윽고 말을
바꾸어 탄 유비와 방통이 각기 정한 길로 떠났다. 유비는 말을 바꾸어 주자 몹
시 감격스런 얼굴로 눈시울을 붉히던 방통의 얼굴이 눈앞에 떠올라 멀어져 가는
뒷모습을 한동안 지켜 보다가 불안하고 무거운 마음을 뒤로 하고 서둘러 큰길로
나아갔다.
봉추 떨어지는 낙봉파
낙성을 치기 위해 유비와 길을 나누어 진군하던 방통은 낙봉파 계곡에서 화살
세례를 받고 말과 함께 쓰러지고 만다. 한편 낙성 서쪽으로 짓쳐든 장비는 성문
을 굳게 닫고 나오지 않던 엄안을 유인하는데 성공하고 엄안을 이용해 45개 관
소를 쉽게 통과한다.
그 무렵, 낙성에 있던 오의와 유괴는 냉포가 강둑을 무너뜨리려다 적에게 사
로잡혀 죽었다는 소식을 전해 듣고 크게 놀랐다. 이에 여러 사람을 불러 놓고
대책을 의논했다.
장임이 먼저 나섰다.
"이곳 성 동남쪽 산 속에 작은 사잇길이 하나 있는데 매우 중요한 길목이니
내가 군사 한 무리를 이끌어 그곳으로 가서 지키겠소. 그대들은 낙성을 굳게 지
켜 주시오. 만약 실수하는 날에는 우리는 물론 성도까지 위험해진다는 걸 잊지
마시오."
그렇게 말하고 있는데 형주 군사가 두 갈래로 나뉘어 낙성을 치러 온다는 급
보가 전해졌다.
장임은 군사 3천을 거느리고 급히 산골짜기의 사잇길로 가 군사들을 매복시켰
다. 그때 위연이 군사를 거느리고 나타났다.
장임은 가만히 영을 내려 위연이 그곳을 지나치게 내버려 두도록 했다. 적의
선봉부대를 맞아 싸우다가는 뒤따르는 적의 공격을 한꺼번에 받게 된다. 그렇게
되면 군세가 약한 자신의 군사가 그들을 당해 낼 수 없기 때문이었다.
위연의 선봉부대가 지나갈 동안 매복해 있던 장임은 오래지 않아 방통이 군사
를 이끌어 오는 것을 보았다.
군사 중의 하나가 방통을 가리키며 말했다.
"저기 군사들 가운데 흰 말을 타고 오는 장수가 바로 유비임이 틀림없습니다."
이전의 싸움터에서 흰 말을 타고 있는 유비를 본 적이 있는 군사가 흰말을 보
자 그렇게 말한 것이었다. 장임이 숲 속에서 가만히 보니 과연 흰 말을 타고 오
는 장수가 있는지라 크게 기뻐하며 군사들에게 은밀히 영을 내려 채비를 갖추게
했다. 장임의 영을 받은 궁노수와 궁수들은 일제히 활에 살을 메긴 채 적이 나
타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때는 늦 여름이었다.
방통은 이때 좁은 길로 군사를 이끌어 가는데 문득 머리를 들어보니 양쪽 산
등성이가 바싹 다가들 듯 가까웠으나 그 아래 좁은 길이 한없이 뻗어 있었다.
좁은 골짜기에는 나무와 풀이 빽빽히 들어서서 서로 얽혀들고 있었는데 잎새
들이 하늘을 가릴 둣이 무성했다. 방통은 어쩐지 그 길로 접어드는 것이 망설여
졌다. 무성한 잎새에 가려 산 속을 살필 수 없는 것이 아무래도 불길한 생각이
들었다. 이윽고 방통은 문득 어떤 예감이 일어 말을 세우고 군사들에게 물었다.
"이곳은 어디인가?"
군사들 중에 촉에서 투항한 군사 하나가 대답했다.
"이곳은 낙봉파라고 합니다."
그 소리에 방통은 깜짝 놀라며 얼굴색이 달라졌다.
"내 도호가 봉추인데 이곳 이름이 낙봉파라니... 곧 봉이 떨어지는 언덕이란 뜻
이 아닌가. 필시 나에게는 이롭지 못한 곳이리라!"
방통이 그렇게 생각이 미치자 급히 군사들에게 큰 소리로 외쳤다.
"모두 물러나도록 하라!"
방통이 채찍을 들어 흔들며 그렇게 군령을 내렸다. 그러나 그 군령이 자신의
죽음을 부른 신호가 되고 말았다. 그때 포향이 숲 속을 뒤흔들며 울리는 것과
함께 빗발치듯 화살이 방통의 몸으로 날아들었다. 몸을 감출 틈도 없이 순식간
에 3천 군사의 화살이 벼메뚜기 날아들 듯 백마 위를 덮치니 방통도 어찌해 볼
도리가 없었다.
아깝게도 방통은 백마와 함께 수많은 화살에 맞은 채 그 자리에 쓰러지고 말
았다. 이때 그의 나의 겨우 서른 여섯이었다. 그 당시에 동남 지방에는 이런 동
요가 아이들 입으로 널리 불려지고 있었다.
봉(봉추) 한 마리와 용(공명) 한 마리
다투어 촉 땅으로 나아가네.
겨우 반길도 못 가서
절벽 동쪽에서 봉은 죽고
바람은 비를 부르고, 비는 바람을 몰아오네.
한 나라 일어날 때 험한 촉길 열리고
촉 땅 길 여는 일은
다만 홀로 한 마리 용이 할 뿐이네.
장임은 봉추가 백마와 함께 온몸에 화살이 꽂혀 죽자 유비를 죽인 것으로 알
고 기뻐했다.
"적군의 총수 유비를 죽였다. 형주의 군사는 한 놈도 남기지 말고 모두 사로
잡아라!"
장임이 호령하며 3천 군사를 앞뒤로 내몰자 방통군은 큰 혼란에 빠졌다. 좁은
골짜기에서 앞과 뒤가 막한 채 물러서지도 나아가지도 못한 군사들은 날아오는
화살을 피할 도리가 없었다. 거기다가 대장마저 죽고 없으니 갈팡질팡하는 가운
데 마치 가마솥의 고기 꼴이 되어 화살에 맞아 죽은 군사가 태반을 넘었다.
앞서 가다 다행히 적의 화살을 피한 군사 몇이 달려가 선봉인 위연에게 이 일
을 알렸다. 이에 위연이 황급히 군사를 되돌려 본진을 구하려 했으나 마음만 급
했지 길이 좁아 마음대로 달려들 수조차 없었다.
그러는 사이 위연도 위급한 지경에 빠지고 말았다. 위연이 다시 군사를 물리
려 했을 때 산 위의 촉의 매복병으로부터 화살이 우박 쏟아지듯 쏟아져 내렸다.
머리 위에서 떨어지는 화살에 위연이 어쩔 줄 모르고 있는데 투항한 촉의 군사
하나가 말했다.
"이럴 바에는 낙성 쪽으로 달려 큰길로 가는 것이 좋겠습니다."
위연은 어느 길이 좋고 나쁜 길임을 따질 겨를이 없었다. 그 군사가 가리키는
곳을 향해 우선 머리 위에서 떨어지는 화살부터 피하며 급히 내달았다. 그러나
그곳도 안전한 길은 아니었다. 한동안 말을 달리다 보니 홀연 앞쪽에서 뿌연 먼
지를 일으키며 한 떼의 군마가 마주 달려오고 있었다. 가까이 다가오는데 보니
그들은 촉의 장수 오란과 뇌동이 거느린 군사들이었다.
뿐만 아니라 뒤쪽에서는 장임이 군사를 거느려 그를 뒤쫓아오고 있었다. 그야
말로 앞과 뒤에서 한꺼번에 적을 맞게 된 위연이 죽기 살기로 싸우며 길을 열려
고 했으나 이미 겹겹이 에워싸인 터라 혈로를 뚫을 수가 없었다. 이제는 최후까
지 싸우다 죽는 길밖에 없었다.
그때였다. 오란과 뇌동이 거느린 후군 쪽에서 함성이 일며 군사들이 뿔뿔이
흩어지며 혼란이 일었다. 오란과 뇌동이 그 모양을 보자 위연을 버리고 급히 후
군을 구하기 위해 말을 달렸다. 위연이 그 기회를 놓치지 않고 그들의 뒤를 쫓
으며 길을 열려고 하는데 문득 한 장수가 적병 가운데를 헤치고 칼을 휘두르며
달려오더니 소리쳤다.
"문장(위연의 자), 내가 그대를 구하려고 왔노라!"
그 소리에 위연이 놀라 바라보니 그는 바로 황충이었다.
황충이 달려오자 위연은 힘이 솟았다. 그때까지 혈로를 뚫기에 바빴던 위연은
이제는 적을 깨뜨려야겠다고 생각하고 황충과 힘을 합해 적을 치기 시작했다.
황충이 성난 기세로 오란과 뇌동군을 덮치고 위연마저 함께 힘을 합하자 이제
는 싸움의 방향이 뒤바뀌었다. 황충과 위연이 오란과 뇌동군을 앞과 뒤에서 공
격하자 그들은 마침내 당해 내지 못한 채 뭉그러지기 시작했다.
황충과 위연은 도망가는 그들을 뒤쫓아 낙성 아래까지 짓쳐들었다. 그러나 성
을 지키고 있던 유괴가 성문을 열고 대군을 이끌고 나왔다.
황충이나 위연은 원래 이끌었던 군사가 적었던데다 위연의 군사는 장임에게
이미 태반 이상이 꺾여 있었다. 유괴의 대군이 쏟아져 나와 덮치니 많은 군사가
꺾인 채 어려운 지경에 빠져 있는데 유비가 군사를 이끌어 왔다. 다행히 두 장
수는 몸을 빼내 유비가 있는 영채를 향해 말을 달렸다. 그러나 미처 영채에 이
르기도 전에 매복해 있던 장임이 군마를 이끌어 나와 길을 막았다.
뒤에서는 유괴와 오란·뇌동이 추격해 오고 있었다. 촉의 군사들이 드센 기세
로 유비군을 몰아치자 유비는 감히 영채로 들어갈 생각을 하지 못했다. 유비는
싸우고 물러나기를 거듭해 가며 부관으로 방향을 바꾸어 달렸다.
숨도 쉬지 않고 달려온 말과 사람이 모두 지친 가운데 가까스로 부관 가까이
에 이르렀으나 장임이 바로 등 뒤에까지 바싹 뒤쫓아오고 있었다.
이미 지쳐 있는 유비의 군사들인지라 싸울 엄두를 못 내고 달아나기에만 바쁘
니 장임이 더욱 급하게 군사를 이끌었다.
유비가 위급한 지경에 이르렀을 때였다. 부관을 지키고 있던 유봉과 관평이
군사 3만을 이끌고 왼편과 오른편으로 군사를 나누어 구원하러 왔다. 장임의 군
사도 뒤쫓느라 어지간히 지쳐 있는 군사들이었다. 거기다가 앞만 보고 달려왔는
데 왼쪽과 오른쪽에서 유봉과 관평이 급습해 오자 크게 어지러워지면서 혼란이
이는 가운데 많은 군사가 꺾였다. 장임도 더는 버티지 못하고 달아나기 시작했
다.
이번에는 관평과 유봉이 그들을 뒤쫓기 시작했다. 20여 리를 쫓으며 많은 마
필을 빼앗은 다음 더는 뒤쫓지 않고 부관으로 돌아왔다.
그때쯤 유비는 한숨을 돌리고 부관으로 들어가자 문득 방통부터 찾았다.
"군사는 어이하여 보이지 않는가?"
그 물음에 황충과 위연도 그제야 고개를 휘둘러보며 군사를 찾았다. 그러나
방통의 모습은 끝내 보이지 않았다. 그러자 낙봉파에서 살아 남은 군사 하나가
유비에게 놀라운 소식을 아뢰었다.
"군사께서는 적군이 쏘는 무수한 화살에 맞아 말을 타신 채 낙봉파에서 목숨
을 잃고 말았습니다."
그 말을 듣자 유비는 낙봉파가 있는 서쪽을 보고 목을 놓아 울었다. 이윽고
유비는 울음을 거두고 제단을 쌓아 방통의 넋을 달랠 제사를 올리게 하니 모든
장수들도 통곡 소리를 그치지 않았다.
공명이 자신의 오른팔이라면 방통은 자신의 왼팔이 아닌가. 유비는 슬픔을 가
누지 못하고 오열하였다.
유비와 모든 장수들이 방통의 죽음을 슬퍼하고 있는데 황충이 뒷일이 걱정된
다는 듯 눈물을 거두고 아뢰었다.
"군사께서 이번에 세상을 떠난 것을 알면 장임이 분명 부관을 치러 올것입니
다. 만약 장임이 군사를 이끌고 오면 주공께서는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제 생각
으로는 형주로 사람을 보내 제갈 군사를 이곳으로 청하시어 서천을 깨칠 계책을
세우시는 것이 좋겠습니다."
황충의 말에 유비가 고개를 끄더였다. 유비도 방통이 없는 지금 공명을 청할
마음이 간절했으나 형주를 생각하고는 선뜻 입을 열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었다.
그때 군사 하나가 와서 알렸다. 바로 황충이 짐작한 대로였다.
"장임이 군사를 이끌고 성 아래에 이르렀습니다."
그 말에 황충과 위연이 분연히 일어나며 소리쳤다.
"제가 가서 그 자의 목을 치겠습니다."
"제가 가서 방통 군사의 원한을 풀겠습니다."
그러나 유비는 두 장수의 노기를 달랬다.
"이번 싸움에 져서 우리 군사의 기세가 많이 꺾여 있으니 굳게 이 성을 지키
며 공명 군사가 올 때까지 기다리도록 하리라."
유비가 무거운 얼굴로 그렇게 명하니 황충과 위연도 고집을 부릴 수가 없었
다. 이에 부관을 굳게 지키기만 하고 나가 싸우지 않았다.
유비는 공명에게 보내는 글을 써서 관평에게 주면서 일렀다.
"너는 형주로 가서 군사께 이 글을 드리고 군사를 모셔 오도록 하라."
관평은 유비의 명을 받고 즉시 형주를 향해 밤낮없이 달렸다. 공명에게 서신
을 보낸 유비는 성문을 닫아걸고 부관을 굳게 지킬 뿐이었다.
그 무렵 공명은 때마침 7월 칠석을 맞았다. 공명은 주군인 유비가 없어도 매
년의 예에 따라 제사를 지내고 잔치를 열어 여러 문무관원들을 위로했다.
그런데 밤이 이슥했을 때 큰 별 하나가 이상한 빛을 뿌리며 서쪽 하늘로 떨어
지다가 흰 광채를 남기며 흩어졌다.
공명이 그걸 보다 깜짝 놀라 술잔을 떨어뜨리더니 얼굴을 소매에 묻고 통곡했
다.
"슬프구나, 봉추여! 실로 가슴아픈 일이로다."
여러 관원들이 공명의 돌연스러운 통곡에 어안이벙벙해 그 까닭을 물었다. 공
명이 울음 섞인 목소리로 대답했다.
"내가 지난번에 살펴보니 강성이 서쪽에 있어 군사에게 이롭지 못했소. 또한
천구성(재물을 맡은 별, 혹은 그 달의 흉신)이 우리 군을 침범하고 있는데다 태
백성(금성)이 낙성위에 머물고 있어 주공께 글을 보내 모든 일을 삼가며 조심하
라고 여쭈었소. 그런데도 서쪽에 있는 별이 떨어지고 말았소. 이는 필시 방사원
이 죽었음을 알리는 징조이오."
공명은 그렇게 말하더니 다시 목을 놓아 울며 소리쳤다.
"우리 주공께서 팔 하나를 잃으셨도다!"
여러 관원들은 공명이 아무리 천문에 능하다 하나 방통이 죽었다고 하니 얼른
그 말을 믿을 수가 없어 어리둥절한 채 서로 얼굴만 쳐다볼 뿐이었다. 공명이
그런 관원들을 보고 말했다.
"며칠 안에 흉한 소식이 있을 것이오. 그때가 되면 자연 알 수 있으리다. 아아,
슬픈 일이구나..."
그렇게 되니 자연 그날 밤의 잔치가 순조롭게 이어질 리 없었다. 모두들 자리
를 털고 일어나 침통한 얼굴로 돌아갔다.
그런데 그로부터 며칠이 지나지 않아 관우의 양아들 관평이 서천에서 달려왔
다. 공명이 수일 안에 소식이 있을 거라고 말한 그대로였다. 여러 문무관원들은
놀라움과 함께 불길한 예감이 일었다.
관평은 공명에게 유비의 글을 바쳤다.
공명이 급히 그 글을 뜯어보았다.
지난 7월 7일 방통 군사께서 낙성을 치러가다 낙봉파에서 적장 장임의 군사
들이 쏜 화살에
맞아 세상을 떠났소.
그 글을 본 공명은 다시 한 번 목을 놓아 울었다. 여러 관원들도 그제야 공명
의 헤아림이 옳았음을 알고 방통의 죽음을 슬퍼하며 울었다.
이윽고 공명이 울음을 거두고 여러 관원들을 둘러보며 말했다.
"주공께서는 부관에서 나아가지도 물러나지도 못할 지경에 이르렀으니 내가
가 보지 않을 수가 없소."
옆에서 그 말을 듣고 있던 관우가 물었다.
"군사께서 떠나시면 이곳은 누가 지킨다는 말씀이오? 형주는 중요한 곳이니
가볍게 생각하실 일이 아닙니다."
공명이 이미 형주의 방비를 염려하고 있었던 듯 입을 열었다.
"주공께서는 형주를 누구에게 맡기라는 말을 하지 않으셨으나 나는 주공의 뜻
을 알 수 있소."
공명은 유비의 글을 여러 관원들에게 보이며 다시 말을 이었다.
"주공께서는 형주에 대한 일은 모두 내게 맡기시고 나의 뜻대로 결정하도록
하신 것이오. 그러나 관평으로 하여금 글을 전하게 하신 뜻은 곧 관운장에게 형
주를 지키는 중임을 맡기고 싶다는 뜻이기도 하오. 운장은 지난날 복사꽃 핀 동
산에서 맺었던 형제의 의를 생각하시어 온 힘을 다해 이곳을 지켜 주시오. 이
일은 결코 가벼운 임무가 아니니 운장은 특히 이 점을 가슴에 새기도록 하오."
공명이 정색을 하고 관우에게 간곡히 말하자 관우도 사양하지 않고 공명의 말
에 따랐다.
"군사께서 도원에서 맺은 형제의 의맹을 말씀하시는데 어찌 다른 말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관우가 결연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공명은 곧 잔치를 베풀고 그 자리에서 형주의 인수를 넘겨 주며 다시 한 번
당부했다.
"이제 형주의 모든 일은 장군의 손에 달렸소."
"대장부가 무거운 책임을 맡은 이상 목숨을 바쳐서라도 저버리지 않을 것이
오."
관우가 결의에 찬 얼굴로 그렇게 말했다. 공명은 관우의 목숨을 바친다는 말
이 마음에 걸렸다. 관우가 너무 죽음을 가볍게 여기는 듯했기 때문이었다. 한 나
라를 맡아 보는 무거운 책임을 맡은 사람이 그와 같이 죽음을 가볍게 여겨서는
뒷일이 아무래도 염려되지 않을 수 없었다.
공명이 안심이 되지 않는 듯 관우에게 물었다.
"만약 조조가 군사를 거느리고 오면 장군은 어찌하시겠소?"
"힘을 다해 막겠소."
"조조와 손권이 한꺼번에 쳐들어올 때는 어찌하겠소?"
"군사를 두 갈래로 나누어 양편 적을 동시에 치겠소."
그러자 공명이 고개를 가로저으며 관우에게 말했다.
"만약 그렇게 한다면 이 형주는 위태로워지고 말 것이오. 내가 이제 여덟 자의
글귀를 드릴 테니 장군은 그걸 새겨들으시기 바라오. 그 글귀에 이른 대로 하면
이 형주를 지켜낼 수 있을 것이오."
"여덟 글자란 무엇입니까?"
공명의 말에 관우가 급히 물었다.
공명은 관우의 물음에 천천히 여덟 자를 시를 읊듯이 말해 주었다.
"북거조조, 동화손권."
즉 북으로는 조조를 막되, 동의 손권과는 화친하라는 뜻이었다. 관우가 그 글
귀의 뜻을 속으로 헤아리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군사의 말씀, 가슴에 새겨 두겠습니다."
공명은 그제야 다소 마음을 놓은 듯 관우를 보좌할 사람들을 뽑았다.
문관으로는 마량, 이적, 향랑, 미축을, 장수로는 미방, 요화, 관평, 주창을 뽑아
관우를 도와 형주를 지키도록 했다.
공명은 곧 친히 군사를 거느리고 서천을 향할 채비를 하는 한편, 장비에겐 날
랜 군사 1만을 뽑아 주며 명을 내렸다.
"장군은 먼저 파주를 치고 이어 낙성 서쪽으로 짓쳐들도록 하시오. 먼저 그곳
에 이르는 자가 가장 큰 공을 세우게 되는 것이오."
장비에게 그렇게 군령을 내린 공명은 이어 조운에게 군사 한 갈래를 내어 주
며 영을 내렸다.
"자룡은 강줄기를 따라 올라가 낙성에 이르도록 하라. 역시 먼저 낙성에 이르
면 첫 번째 공으로 삼으리라."
두 장수에게 그렇게 영을 내린 다음 공명은 간옹, 장완과 더불어 군사 1만 5
천을 거느리고 서천을 향해 떠났다.
장완은 공명이 형주를 지키고 있을 때 공명 휘하에 든 선비였는데 영릉 상향
사람으로 자를 공염이라 불렀다. 형양 땅에서 학문이 높은 사람으로 이름나 있
었는데 이때 서기일을 보고 있었다.
공명은 군사를 거느려 장비, 조운과 함께 떠나기는 했으나 가는 길은 각각 달
랐다.
공명은 군사를 이끌어 가는 장비를 불러 당부했다.
"서천은 일찍이 영웅 호걸이 많으니 그들을 결코 가볍게 맞서서는 아니 될 것
이오. 또한 서천으로 가는 도중 전군에게 엄명을 내려 백성들의 물건을 빼앗거
나 괴롭히지 않도록 하시오. 이르는 곳마다 백성들을 위로하고 달래며 민심을
모으도록 하시오. 익덕에게 내 특히 이르거니와 군사들에게 함부로 매질을 하지
않도록 하고 아껴 주도록 하시오. 부디 하루라도 빨리 낙성에서 함께 만날 수
있기를 바라며, 도중에 그릇됨이 없도록 해 주시오."
장비의 급한 성미를 잘 아는 공명이 노파심이 일어 간곡히 일렀다.
장비도 공명의 말귀를 알아듣고 그의 말을 따를 것을 약조한 후 군사를 거느
려 떠났다.
장비는 공명의 말대로 가는 곳마다 백성들을 보살펴 주고 위로했다. 항복해
오는 사람이 있을 때는 그들을 따뜻이 맞아 주며 휘하의 군사들과 다름없이 대
우해 주었다. 장비가 한천길로 나아가 파군 가까이에 이르렀을 때 풀어 둔 세작
이 달려와 알렸다.
"파군태수 엄안은 촉의 이름난 장수로서 나이는 비록 늙었으나 힘은 이전과
다름이 없다 합니다. 강한 활을 잘 쏠 뿐 아니라 큰 칼을 써서 능히 만 명의 적
을 당적할 수 있는 용맹은 지녔다고 합니다. 그 엄안이 성을 굳게 지키며 결코
항복하지 않을 기세입니다."
장비는 세작의 말을 듣고 우선 파성에서 10여 리 떨어진 곳에 영채부터 세웠
다. 그리고 사람을 보내 자신의 말을 전하게 했다.
"너는 엄안에게 가서 내 말을 그대로 전하도록 하라. 빨리 나와서 항복하면 성
안 백성들을 살려 둘 것이로되, 만약 그렇지 않고 거스른다면 곧 성을 허물고,
늙고 어리고를 가리지 않고 모두 살아남지 못할 것이라고 일러라."
장비의 영을 받은 사람이 그 말을 전하러 파성으로 향했다.
그런데 엄안은 촉의 장수 중에서도 충의가 남다른 장수였다. 일찍이 유장이
법정을 보내 유비를 서천으로 불러들일 때 그 소식을 듣고, '이는 산에 있는 사
람이 무섭다고 그 산 속에다 호랑이를 끌어들여 자신을 지켜 주기를 바라는 것
과 다름없구나'하고, 크게 탄식했던 장수였다.
엄안은 그 후 짐작대로 유비가 부관을 빼앗았다는 말을 듣고 울분을 가누지
못해 군사를 이끌고 싸우려고 했다. 그러나 자신이 성을 비운 사이 혹시 형주
군사가 쳐들어오지 않을까 염려되어 성을 지키고 있던 중이었다. 이때 장비가
군사를 이끌어 왔다는 소식을 듣고 즉시 군사 6천을 점고하여 싸울 채비를 서두
르고 있었다. 그러자 장비의 성품을 전해들은 바 있는 수하 한 사람이 꾀를 내
었다.
"장비는 이전에 장판교에서 호통 소리 한 번으로 조조의 백만 대군을 물리친
무서운 장수입니다. 조조도 장비가 나서면 몸을 피했다고 하는 터이니 적을 가
벼이 여기고 함부로 맞서서는 아니 될 것입니다. 차라리 도랑을 깊이 파고 성벽
을 높이 세워 굳게 지키기만 하고 나가 싸우지는 마십시오. 그들은 우리가 나가
지 않으면 한 달을 넘기지 못해 군량미가 바닥이 날 것이며 그렇게 되면 스스로
물러나지 않을 수가 없을 것입니다. 게다가 장비는 워낙 성격이 불 같아서 우리
가 나가 싸우지 않으면 반드시 울화가 치솟을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원래가 군
사들에게 매질 잘하기로 소문이 나 있으니 그가 가만히 있을 리가 없습니다. 군
사들에게 닥달을 하며 매질로 울화를 풀게 되면 군사들은 마음이 달라질 수밖에
없으니 자연히 군사들의 사기가 꺾이게 될 것입니다. 그때를 기다려 우리가 군
사를 내몰아 간다면 단번에 장비를 사로잡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엄안이 그 장수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찬동했다. 엄안도 장미의 용맹을 모
르는 바는 아니었다. 무턱대고 그들과 부딪쳤다가는 파성이 위험한 지경에 이르
게 될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이에 엄안은 군사를 이끌고 성 밖으로 나가는 대신
군사를 성 위로 올려보내 지키도록 했다.
그때 문득 적군 하나가 성문밖에 와서 외쳤다.
"성문을 여시오. 전할 말을 가지고 왔소."
엄안은 성문을 열게 하고 그를 데려오게 한 후 물었다.
"그대는 누구인가?"
"장 장군께서 전할 말이 있어 저를 보내신 것입니다."
"전할 말은 무엇인가?"
엄안이 이렇게 묻자 그 군사는 장비가 한 말을 그대로 전했다. 그러자 엄안은
크게 노해 소리쳤다.
"장비, 그 보잘 것 없는 놈이 어찌 이리도 무례할 수가 있느냐! 내가 그 도적
에게 항복할 사람으로 알았더냐? 너는 가서 내 뜻을 장비에게 전하도록 하라!"
엄안은 그렇게 말한 뒤 그 군사의 코와 귀를 베어 버린 후 장비에게 돌려 보
냈다. 그 군사가 장비에게 돌아와 울며 말했다.
"엄안이 저를 이렇게 만들었습니다. 장 장군께 온갖 욕설을 자 퍼부었습니다."
그 군사도 울분에 쌓여 장비의 화를 잔뜩 돋구기 위해 엄안을 헐뜯었다. 장비
는 그 모양을 보자 이를 갈며 고리눈을 부릅뜨더니 그 즉시 말을 타고 군사 수
백을 거느려 파성으로 달려가 싸움을 걸었다.
그러나 성 위의 군사들은 장비에게 갖은 욕설만을 퍼부어댈 뿐 성 밖으로 나
오지는 않았다.
화가 머리끝까지 치받힌 장비가 몇 차례나 성 밑 적교로 달려가 도랑을 건너
려 했다. 그러나 그럴 때마다 성 위에서 비 오듯 화살이 쏟아질 뿐이었다. 화살
이 쏟아지니 장비는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이러기를 해가 질 때까지 되풀이했
으나 적군은 종내 성 밖으로 나오지 않으니 장비는 울분을 씹으며 영채로 돌아
오고 말았다.
다음 날이었다. 이른 아침이 되자 장비는 지체하지 않고 군사를 이끌어 파성
으로 달려갔다. 장비가 성 위를 바라보며 싸움을 돋우고 있을 때였다. 엄안이 활
에 살을 메게 시위를 당기자 화살은 보기 좋게 장비의 투구에 꽂혔다.
장비가 이를 부드득 갈더니 성 위의 엄안을 보고 삿대질을 하며 큰 소리로 외
쳤다.
"내가 늙은 네놈을 잡아 그 살을 씹고야 말 것이니라!"
그러나 엄안은 그런 장비를 지켜만 볼 뿐 성문을 열고 나오지 않았다.
장비는 그날도 해가 저물자 잔뜩 화난 얼굴로 되돌아오고 말았다.
사흘째가 되는 날이었다.
장비는 전날과 다름없이 군사를 이끌고 나가 성벽 둘레를 돌며 욕설을 퍼부어
댔다.
원래 파성은 산에 세운 성이었으므로 그 주위가 온통 험한 산으로 둘러싸여
있었다. 장비는 문득 성 안의 허실을 살피고 싶어 스스로 말을 몰아 산 위로 올
라갔다. 성보다 더 높은 산 위에 오르니 파성 안이 들여다보였다. 성 안의 군사
들은 싸울 때의 복장을 갖춰 입고 대오를 정연히하여 성 안의 요긴한 곳을 엄히
지키고 있었다. 성 안의 백성들은 벽돌과 돌을 나르며 성을 지키는 군사들이 하
는 일을 돕고 있었다.
성밖에 나오지 않을 뿐 성 안에서는 이미 싸울 채비를 다 갖추고 있었다. 장
비는 한동안 성 안을 굽어보더니 이윽고 산 아래로 내려와 영을 내렸다.
"기병은 말에서 내리고 보군은 땅바닥에 주저앉도록 하라! 그리하여 아무런
방비가 없이 마음놓고 있는 것처럼 보이게 하라!"
장비가 욕설만을 퍼부어 적이 나오지 않자 적을 꾀어내기 위해 내린 영이었
다. 그러나 그 꾀에도 적이 넘어가지 않았다. 장비의 화만 돋구고 군량이 떨어질
때까지 기다리고 있는 엄안이 섣불리 군사를 성밖에 내보낼 리가 없었다.
장비는 화가 치밀어 욕설을 퍼붓다 하릴없이 영채로 돌아오고 말았다.
'아무리 욕을 해대도 꿈쩍도 않으니 도대체 어떻게 해야 된다는 말인가?'
장비가 영채 안에서 그렇게 중얼거리며 생각에 잠겨 있는데 문득 한가지 생각
이 떠올랐다. 장비는 목소리가 큰 군사 50여 명만을 뽑아 영을 내렸다.
"너희들은 파성으로 가 엄안에게 갖은 욕설을 다 퍼부어라. 만약 엄안이 군사
를 성밖에 이끌고 오면 내가 기다렸다가 그들을 치겠다."
적은 군사만을 보내어 엄안을 꾀어내려는 장비의 생각이었다. 군사의 수가 적
음을 보고 일시에 몰려나와 치려고 하면 거짓으로 도망치는 동안 장비가 달려나
가 이들을 치고 성 안으로 밀고 들어갈 작정이었다. 장비는 그들을 파성으로 보
내고 난 뒤 다른 군사들에게는 싸울 채비를 갖추고 기다리게 했다.
이윽고 파성 아래에 이르른 장비군을 갖은 욕설을 다 퍼부었다. 그러나 성 안
의 군사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장비는 엄안이 군사를 이끌고 나오기만 하면 단
번에 쓸어 버릴 심산으로 손바닥을 비비며 초조히 기다렸으나 끝내 나오지 않았
다.
50여 명의 군사는 그렇게 하기를 사흘째나 계속했으나 파성의 성문은 굳게 닫
힌 채 열릴 줄 몰랐다.
엄안은 성문 위에서 적의 초조해하는 모양을 보며 크게 웃을 분 장비의 꾀에
말려들지 않았다.
장비는 날이 흘러갈수록 초조한 가운데 이마를 잔뜩 찌푸리며 궁리를 거듭했
다. 그러다 문득 또 한 가지 생각이 떠올랐다.
계교가 떠오르자 장비는 군사들에게 즉시 영을 내렸다.
"전군은 모두 사방으로 흩어져서 땔나무나 마초를 뜯어 오도록 하라. 그러나
그 일을 하는 동안 성으로 통하지 않고 성도로 갈 다른 산 길이 있는가를 찾아
보도록 하라!"
장비의 영에 따라 군사들은 산으로 들어가 나무를 베고 풀 뜯는 일만을 계속
했다.
군사들이 모두 그 일에 매달리게 한 다음부터 장비는 군사를 파성으로 보내지
않았다.
한편 엄안은 날마다 성 아래로 와 욕설을 퍼붓던 장비의 군사들이 며칠째 얼
씬도 하지 않자 문득 의심이 일었다. 그렇다고 장비가 영채를 거두어 돌아간 것
도 아니었다. 갑자기 장비의 군사가 눈에 띄지 않으니 문슨 엉뚱한 계교라도 꾸
미고 있는지 알 수가 없었다. 거기다가 장비군이 며칠 전부터 산 속에 군사를
보내고 있는 것이 무슨 까닭인지 알 수가 없었다.
이에 엄안은 군사 10여 명을 뽑아 장비의 군사로 변장시켜 산에 오르도록 했
다.
"너희들은 낫을 가지고 뒷산에 들어가도록 하라. 다음 날 아침에 장비군이 오
면 그들 틈에 끼여들어 종일 그들과 함께 일을 하다 그대로 장비군인 것처럼 하
고 적의 본진으로 숨어들도록 하라. 그들이 어찌하여 나무와 말먹이풀을 베는지
그 까닭을 알게 되거든 즉시 성으로 돌아오라."
이에 엄안의 군사들은 밤이 되기를 기다려 산 속에 들어가 다음 날 아침이 되
기를 기다렸다.
다음 날이 되자 장비의 군사들은 여느 날과 다름없이 산 속으로 들어와 나무
를 하고 풀을 벤 후 저녁이 되자 영채로 돌아갔다. 엄안의 군사 10여 명도 그들
무리에 섞여 장비의 영채로 들어갔다.
군사들이 산 속에서 영채로 들어가자 장비는 때마침 울분을 달래지 못한 듯
발을 구르며 화를 내고 있는 중이었다.
"하찮은 늙은 놈 엄안이 나의 속을 태워 죽이려 하는구나!"
장비의 외치는 소리가 장믹 밖까지 쩌렁쩌렁 울렸다. 그러자 장막 주위에 있
던 군사 서너 명이 장비에게 아뢰었다.
"장군께서는 너무 서두르지 마십시오. 요며칠 동안 산을 둘러보며 작은 샛길을
하나 찾아 냈습니다. 그 길로 가면 싸우지 않고도 무사히 파군을 지나쳐 갈 수
가 있을 것입니다."
장비에게는 귀가 번쩍 뜨일 소리가 아닐 수 없었다. 그러나 장비의 태도가 이
상했다. 그 소리를 듣자 오히려 펄쩍 뛰며 더욱 큰 소리로 그 군사들을 나무라
기 시작했다.
"네놈들은 지금 무슨 소리를 하고 있느냐? 그런 길이 있었다면 왜 진작 내게
그걸 말해 주지 않았느냐?"
그 군사들은 샛길을 발견하고도 호되게 꾸짖음을 당했다. 그러자 장비의 그
기세가 두려웠던지 군사들이 입을 모아 변명했다.
"엊그제야 겨우 찾아 냈으나 다시 한 번 더 자세히 살펴보느라 그리 되었습니
다."
그 말을 듣자마자 장비가 또 큰 소리로 외쳐댔다.
"일이란 꾸물대다가는 기회를 노치게 된다. 오늘 밤 이경에 밥을 지어 먹고 삼
경에 영채를 거두어 떠나야 할 것이니라! 사경에 군사들은 말에 재갈을 물리고
방울을 떼내도록하여 달빛을 따라 은밀히 그 길을 지나가도록 하라. 내가 앞장
서서 길을 열어 나갈 것이니 군사들은 모두 내 뒤를 따르도록 하라!"
장비는 그 군령을 전군에게 전하도록 했다.
형주 군사들 틈에 섞여 있던 엄안의 군사 10여 명은 장비가 외치는 소리는 물
론 전군에게 내린 영을 들었다. 그들은 이 영을 듣자 뜻밖에도 손쉽게 장비군의
기밀을 알게 되어 공을 세우게 되었다고 여기고 가만히 영채를 빠져 나와 파성
으로 달려가 엄안에게 알렸다.
엄안은 이 소식을 듣게 되자 크게 기뻐했다.
"내가 이미 그놈이 더 이상 참고 배겨내지 못할 줄 알고 있었다. 그놈이 작은
샛길로 지나가려 하니 양초와 치중(수레에 싣는 짐)은 반드시 그 뒤를 따를 것
이다. 내가 그들의 뒤를 덮친다면 그놈이 어디로 달아날 수 있다는 말인가? 실
로 힘만 믿고 꾀가 모자란 그놈이 이제 꼼짝없이 내 계책에 떨어지고 말았구나."
엄안이 이제 장비를 사로잡은 거나 다름없다고 여기며 곧 군사들을 모아 영을
내렸다.
"오늘 밤 이경에 밥을 지어 먹고 삼경에는 성을 나가되, 나무와 풀이 무성한
곳에 매복하도록 하라. 그런 후 장비가 샛길을 지나간 뒤 군량과 말먹이풀과 치
중을 실은 수레가 오면 군호로 북을 칠 테니 그때 일제히 달려나와 그들을 휩쓸
어 버리도록 하라!"
엄안의 영에 모든 군사들은 밤이 되기를 기다려 밥을 지어 먹고 싸울 채비를
갖추었다. 이윽고 삼경이 되자 군사들은 파성을 출발하여 산 속에 이르렀다. 군
사들은 여기저기 나무와 풀이 많은 곳에 매복한 후 북 소리가 울리기만을 기다
리고 있었다.
이때 엄안도 비장 10여 명을 거느리고 숲 속에 이르러 나무 뒤에 몸을 숨겼
다. 그럴 동안 이미 삼경이 가까워 오고 있었다. 이윽고 오래지 않아 조용한 산
속에 나뭇잎 헤치는 소리가 들리며 저편에서 창을 비껴든 장비가 군사를 거느리
고 좁은 길을 지니가고 있었다.
엄안이 바라보니 앞선 장수는 분명 장팔사모를 비껴쥔 장비임에 틀림 없었다.
엄안군은 그들이 지나가도록 내버려 두었다.
장비가 그들 앞을 지나간 뒤 3, 4마장쯤 이르렀을 때였다. 뒤이어 수레와 군사
가 뒤따라왔다. 엄안은 기다리던 수레와 인마가 가까이 다가오자 영을 내렸다.
"북을 울려라!"
그러자 조용하던 숲 속에 북 소리가 크게 일고, 매복해 있던 군사들이 일제히
달려나와 수레를 덮치려 했다.
그때였다. 홀연 징 소리가 한 번 크게 울리더니 한 ㄸ의 군마가 달려와 오히
려 수레를 덮치려던 엄안군을 급습했다. 뿐만 아니었다. 어둠 속에서 뜻하지 않
게도 날벼락 같은 호통이 들려 왔다.
"늙은 도적은 달아나지 마라! 내가 너를 사로잡으려 기다린 지 이미 오래이
다."
깜짝 놀란 엄안이 소리나는 쪽을 바라보았다.
한 장수가 검은 말을 몰아오는데 표범 같은 머리에 고리눈을 부릅뜨고 범 같
은 수염이 뻗친데다 손에는 장팔사모를 들고 있는데 그는 조금 전에 그곳을 지
나친 장비였다.
엄안은 이미 샛길을 지나간 장비를 본 터라 불쑥 다시 나타난 장비를 보자 크
게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징 소리가 그치지 않고 울려 숲 속을 뒤흔들고 있는
데 숲 속에서 쏟아져 나온 장비의 군사들이 엄안의 군사들을 베고 찔렀다.
엄안이 이 뜻밖의 사태에 어안이벙벙해 있는데 장비가 장팔사모창을 휘두르며
다가왔다. 엄안은 그런 경황 중에도 역시 촉의 맹장답게 장비의 사모를 칼로 막
으며 맞섰다.
두 장수가 창으로 찌르고 칼로 베며 싸우기를 10여 합이 되었을 때였다. 장비
가 문득 몸을 비틀거리는 듯하자 엄안이 큰 칼로 힘껏 내리쳤다. 그러나 몸을
비틀거린 건 장비가 짐짓 엄안의 빈틈을 노리기 위한 거짓 몸짓이었다.
장비가 엄안의 칼을 슬며시 피하자 엄안이 칼을 너무 힘껏 내리치느라 중심이
기운 그 틈을 노려 장비는 엄안의 갑옷 끈을 바싹 끌어당기자마자 그의 몸을 들
어 땅바닥에 내팽개쳤다. 그러자 장비의 군사들이 달려들어 순식간에 엄안을 덮
어 누르고 꽁꽁 묶어 버렸다.
먼저 앞장 서서 군사를 이끌었던 장비는 실은 장비와 용모가 닮은 사람을 뽑
아 거짓으로 꾸민 장비였다.
장비는 산 속에서 군사들로 하여금 풀을 베게하여 엄안군을 성 밖으로 끌어
낸 뒤 좁은 길로 파군을 지나가려는 것을 알린 것이었다. 또한 장비는 미리 군
사를 숨겨 둔 후 엄안이 북 소리를 군호로 삼을 것이라 여겨 자신은 징 소리를
군호로 삼았던 것이었다.
"엄안은 이미 사로잡히는 몸이 되고 말았다. 항복하는 자는 그 죄를 묻지 않겠
다."
엄안을 사로잡은 장비가 산이 떠나갈 듯 소리치자 엄안의 군사들은 더 망설일
틈도 없었다. 모두 창칼을 버리고 장비에게 항복했다. 장비는 여세를 몰아 파군
성으로 내달았다. 파성에는 이미 거짓 장비가 거느린 군사가 얼마 남지 않은 엄
안군을 쳐서 성을 빼앗은 뒤였다. 이에 장비는 우선 방문을 내걸어 백성들을 해
치지 않도록 엄명을 내리는 한편 놀란 백성들을 좋은 말로 달래 위로했다.
성 안이 안돈되자 군사들이 결박지은 엄안을 끌어왔다. 장비가 대청 위에 앉
아 엄안을 내려다보고 있는데도 엄안은 결코 무릎을 꿇지 않았다. 이를 보자 장
비는 고리눈을 부릅뜨며 이를 갈더니 큰 소리로 꾸짖었다.
"이미 내가 여기에 이르렀는데 대장이란 자가 그 꼴을 하고도 감히 나를 거스
르려 하는가?"
그러나 엄안은 조금도 흔들리는 기색이 없이 오히려 장비를 꾸짖었다.
"너희들이 의를 저버리고 우리 주와 군을 침범하지 않았느냐? 우리 장수들 중
에 목이 떨어질지언정 항복하는 장수들은 없을 것이다."
장비는 크게 노해 좌우에게 목을 베라고 외쳤다.
그러나 엄안도 지지 않고 장비에게 호령했다.
"이 역적놈아, 목을 베려거든 즉시 벨 것이지 어찌하여 화만 낸다는 말이냐?"
엄안의 목소리가 조금도 움츠러듦이 없이 굳세고 우렁찬데다 얼굴에 두려워하
는 빛이 전혀 없었다.
장비는 그런 엄안을 물끄러미 바라보더니 문득 얼굴빛이 달라졌다. 장수의 눈
은 역시 참다운 장수를 알아본 것일까. 잠시 망설이다 장비는 벌떡 몸을 일으켜
계단 아래로 내려가며 소리쳤다.
"너희들은 잠깐 물러가 있거라!"
엄안의 좌우에 늘어서 있던 군사들을 물러나게 한 장비는 부드러운 미소로 친
히 엄안의 결박을 풀어 주었다. 군사들이 어리둥절해 있는데 장비는 새옷을 가
져오게하여 엄안에게 입힌 뒤 손수 팔을 이끌어 대청 위의 한가운데 높은 자리
에 앉히고는 넙죽 절을 했다.
"지금까지 장군을 욕되게 한 말을 용서하십시오. 저는 원래부터 노장군께서 서
천의 호걸임을 알고 있었소이다."
엄안은 장비의 진정어린 간곡한 목소리를 듣고 크게 놀랐다. 장비라면 천하가
다 아는 맹장이 아닌가. 그런데 자기의 충절을 가상히 여기고 절까지 하니 그의
굳어 있던 마음도 흔들리고 있었다. 장비의 은혜와 의로운 마음에 감복한 엄안
도 그제야 패장으로서 겸허하게 항복했다.
뒷날 사람들은 그런 엄안을 시를 지어 찬탄했다.
백발이 될 때까지 서촉에 살아
맑은 이름 온 나라에 울려 퍼지네.
충성심은 밝은 달과 같고
큰 기상 장강을 휘감아올린 듯했네.
차라리 목 잘려 죽을지언정
어찌 무릎 꿇고 항복하랴.
파촉의 늙은 장군만한 이
천하에 그 짝 찾을 수 없으리.
또한 엄안을 사로잡아 그의 의기와 충절을 보고 그에게 몸을 굽히며 받아들인
장비의 덕을 뒷날 사람들이 시를 지어 기렸다.
엄안을 사로잡은 그 용맹 절륜했고
오직 그 의기로 군민을 복종시켰네.
지금도 그를 모신 사당이 있어
백성들이 술과 안주 바치네.
장비는 엄안을 후히 대접하고 상빈의 예로 대하여 그의 마음을 위로해 준 후
서천으로 가는 길을 물었다.
엄안이 장비의 물음에 무겁게 입을 열기 시작했다.
"싸움에 진 장수가 두터운 은혜를 입었으니 어찌 보답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
까? 개나 말의 수고로나마 그 은혜에 보답할까 하거니와, 화살 한 대 날리지 않
고도 성도까지 들도록 하겠습니다."
"어느 길로 가야 하겠습니까?"
장비가 반색을 하며 다시 물었다.
"이곳 파성에서 낙성에 이르기까지 도중의 모든 관소는 이 늙은이가 맡고 있
소이다. 군사를 이끌고 그 관소를 모두 빼앗으려면 백만 대군을 이끌어도 가벼
이 떨어지지는 않을 것입니다. 장군의 두터운 은혜를 입었으니 바라건대 이 늙
은 이를 전부 선봉으로 세워 주십시오. 제가 이르는 곳마다 그들을 불러내어 달
랜 후 투항하도록 해 보겠습니다."
촉에서 내노라하는 장수가 그렇게까지 나올 줄은 미처 생각지도 못했던 장비
였다. 이에 장비는 춤이라도 출 듯 기뻐하며 엄안에게 감사해 마지않았다. 엄안
의 말대로 그에게 전부 선봉을 맡게 하고 자신은 그 뒤를 따르기로 했다.
엄안은 선봉이 되어 이르는 관소마다 군사를 불러내어 달래니 과연 그의 말대
로 두말 없이 항복해 왔다. 그 중에는 마음을 정하지 못하고 주저하는 자가 없
는 것은 아니었다. 그럴 때마다 엄안이 좋은 말로 타일렀다.
"내가 이미 항복을 했는데 그대가 무엇을 더 망설일 것이 있느냐?"
그 말에 더는 주저함이 없이 모두 성문을 열어 엄안을 맞이했다. 그렇게 되니
장비는 가는 도중 피 한 방울 흘리지 않고도 모든 관소를 지날 수가 있었다.
낙성을 차지한 유비
장비는 낙성에 이르러 곤경에 빠진 유비를 돕고, 뒤늦게 도착한 공명은 계교
를 내어 장임을 사로잡는다. 한편 강족과 손을 잡고 농서 일대를 평정한 마초는
기주로부터 항복을 받아 내려 하나 결국 성과 아내마저 잃고 쫓겨간다.
다른 길로 떠났던 공명은 이미 떠나기 전에 사람을 유비에게 보내 모두 낙성
에서 만나기로 했음을 알리게 했다.
유비는 사자가 전해 준 공명의 글을 받아 보고 장수들을 불러 놓고 의논했다.
"공명과 익덕, 조운이 길을 나누어 서천으로 들어오고 있는데 낙성에 이르면
함께 성도로 향할 예정이다. 공명이 알려온 바에 의하면 물길과 뭍길로 칠월 스
무 날에 떠났다고 하니 며칠 사이에 낙성에 이르게 될 것이다. 우리도 지체하지
말고 군사를 내어야 하지 않겠는가?"
그러자 황충이 생각해 둔 것이 있는 듯 유비에게 아뢰었다.
"매일 군사를 이끌고 와 싸움을 돋우던 장임이 우리가 나가 맞지 않으니 지금
쯤은 마음이 느슨해져 맥이 빠져 있을 것입니다. 원군이 오기만을 기다릴 것이
아니라 준비가 허술한 틈을 타 오늘 밤 군사를 나누어 급습해 보는 것이 어떻겠
습니까? 그렇게 되면 한낮에 그들을 맞아 싸우는 것보다 더욱 큰 이로움이 있을
것으로 여겨집니다만..."
유비도 그 말을 옳게 여겨 고개를 끄덕이더니 곧 황충의 말대로 영을 내렸다.
"황 장군은 군사를 거느려 왼쪽 길로, 위 장군은 오른쪽 길로 나아가라. 나는
군사를 거느려 가운데 길로 달려 적을 찌르리라!"
그날 밤 이경 무렵이었다. 마침내 성문을 굳게 닫고 있던 부성의 유비 군사는
성문을 박차고 짓쳐나왔다.
그때 장임의 군사들은 유비군과의 오랜 대치에 지쳐 있었다. 아무리 싸움을
걸어도 유비군이 응해 주지 않자 모두 맥이 빠져 아무런 방비도 하지 않은 채
제각각 처소에서 깊은 잠에 빠져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유비가 세 갈래로 군사를 나누어 장임의 본진으로 짓쳐들어 닥
치는 대로 불을 놓자 여기저기서 불길이 거세게 타올랐다. 장임의 군사들은 밤
중에 당한 기습에 얼이 빠져 싸울 생각도 못한 채 부성으로 달아나기에 바빴다.
유비는 달아나는 장임의 군사들을 숨쉴 틈도 주지 않고 뒤쫓았다. 그러나 장임
의 군사 중 먼저 도망간 무리가 낙성에 이르러 장임이 쫓겨오는 걸 알렸다. 이
에 낙성을 지키던 장수가 군사를 이끌고 와 도망해온 군사들을 성 안으로 맞아
들였다.
유비는 달아나던 군사들이 성 안으로 들어가자 쫓기를 멈추고 도중에 영채를
세웠다.
날이 밝기를 기다린 유비가 군사를 휘몰아 성을 에워싼 후 공격했다. 그러나
장임은 어젯밤에 크게 패한 뒤라 성문을 굳게 닫아걸고 나오지 않았다.
유비가 성을 에워싸고 공격을 퍼부은 지 사흘이 지났으나 장임은 성 안에서
나올 기미조차 보이지 않았다. 다음 날, 유비는 공격의 방향을 바꾸어 몸소 한
떼의 군사를 이끌고 서문으로 향하는 한편 황충과 위연은 동문을 치도록 했다.
유비가 남문과 북문을 치지 않고 비워 둔 건 그들에게 그 두 문으로 달아날 길
을 열어 주기 위해서였다.
원래 남문은 험한 산이 잇닿아 있었으며, 북문 앞은 부수가 흘러 적군이 달아
난다 하더라도 길이 막혀 있는 것과 다름없었다.
유비가 낙성을 깨치기 위해 거센 공격을 퍼붓고 있을 때 장임도 나름대로 유
비를 칠 꾀를 내고 있었다.
장임은 성 안에서 유비가 말을 몰아 오락가락하며 공격을 퍼붓고 있는 군사들
을 독려하고 있는 모습을 유심히 지켜 보고 있었다.
장임은 진시(상오 7-9시)에서 미시(하오 1-3시)에 이르자 유비와 군사들이 모
두 지친 듯 공세가 무디어지기 시작하는 걸 보고 곧 오란과 뇌동을 불렀다.
"이젠 우리가 적을 칠 때가 왔다. 그대들은 군사를 거느려 북문으로 나가 동문
을 공격하고 있는 황충과 위연을 쳐라. 나는 군사를 거느려 남문으로 나가 유비
를 치겠다. 그럴 동안 성 안의 모든 백성들은 성 위에 올라가 북을 치고 함성을
울리도록하여 우리 군사들이 성 안에 머무르고 있는 것처럼 허장성세하라."
한편 그때까지 서문을 공격하고 있던 유비는 해가 기우는 것을 보자 그날도
성을 뺏기는 어렵다고 여겼다. 하는 수 없이 영을 내려 후군부터 먼저 물러가도
록 했다. 그런데 영을 받은 군사들이 영채 쪽으로 돌아가려고 할 때였다. 홀연
성 위에서 북 소리와 함께 요란한 함성이 일었다.
유비의 군사들은 돌연스런 그 함성에 모두 성문 위를 바라보고 있는데 문득
남문 쪽에서 크게 함성이 일며 한 떼의 군마가 쏟아져 나왔다.
앞선 장수를 보니 장임인데 말을 달려 곧장 유비 쪽으로만 달려오고 있었다.
며칠 동안 공격을 퍼부어 이미 지쳐 있는 유비의 군사들이라 때아닌 기습에
크게 혼란스러워져 제대로 싸우지를 못했다.
황충과 위연이 위급한 유비를 구하려 했으나 그들도 역시 똑같은 처지에 빠져
있었다. 오란과 뇌동이 군사를 이끌어 와 황충과 위연을 덮쳤기 때문이었다.
유비는 장임이 곧장 자기 쪽으로 짓쳐들자 이내 이번 싸움이 이롭지 못함을
알고 급히 말머리를 돌려 산 속 좁은 길을 향해 달렸다. 그런 유비를 장임이 바
짝 뒤쫓자 두 사람 사이의 거리가 점점 좁아졌다.
그때 유비는 군사를 거느릴 경황이 없어 홀로 말을 달리는데 장임은 수하 몇
기를 거느리고 뒤쫓고 있었다. 유비 홀로 달아나는 걸 보자 장임은 이제야 유비
를 사로잡은 거나 다름없다고 여기고 말을 박찼다.
유비는 뒤돌아볼 겨를도 없이 앞만을 향한 채 말에 채찍을 가하는데 문득 앞
쪽에 한 떼의 군사가 산길을 내려오고 있는 것이 아닌가. 유비가 속으로 탄식해
마지않았다.
'아, 앞에는 복병이요, 등 뒤에는 뒤쫓는 적군이니 하늘이 나를 버리시는구나!'
유비가 탄식하며 다시 앞쪽에서 마주 오는 군사를 보는데 문득 앞선 장수가
눈에 익은 얼굴이었다. 유비가 내친 김에 앞으로 말을 달리며 보니 그는 꿈 속
에 그리던 호랑이 수염에 고리눈이요 장팔사모를 치켜든 장비가 아닌가.
실로 위급한 순간에 때맞춰 나타난 장비를 보자 유비는 하늘에 감사했다. 장
비는 그때 엄안과 함께 산길로 낙성을 향해 달려오던 중이었다. 그런데 멀리서
뿌옇게 먼지가 일어나는 것을 보자 분명 형주 군사와 서천 군사 사이에 싸움이
일어난 것으로 짐작했다. 이에 장비는 엄안을 뒤따르게 하고 앞장 서 서둘러 말
을 달려오다 쫓기고 있는 유비를 만나게 된 것이었다.
장비는 유비를 맞은 뒤 인사말을 건넬 사이도 없이 장팔사모를 치켜든 채 장
임을 향해 말을 박찼다. 유비를 사로잡을 줄 알고 기뻐했던 장임이었으나 뜻밖
에 땅 속에서 솟아나기라도 한 듯 호랑이 같은 장비를 맞게 되었으니 한순간에
기쁨이 절망으로 뒤바뀐 셈이었다. 그러나 목숨이 위태로운 지경이라 이를 악물
고 장비와 맞섰다. 장임이 장비와 어우러진지 10여 합을 버텼을 때였다. 장비의
뒤를 따르던 엄안이 군사를 이끌고 오자 마침내 장임이 말을 돌려 달아났다. 장
비가 그 뒤를 쫓아 성 아래까지 이르렀으나 장임이 성 안에 들어가 적교를 끌어
올리고 말았다.
장비는 말을 되돌려 유비에게 돌아왔다.
"군사께서는 강물을 거슬러 오기로 하셨는데 아직 이곳에 오지 못하신 것 같
소. 이제 내가 먼저 이곳에 이르렀으니 첫째 공을 내게 빼앗기게 된 것 같소."
장비는 공명보다 자기가 먼저 온 것에 대해 어깨를 들썩이며 자랑했다. 유비
는 장비의 자랑에 고개를 끄덕이며 환히 웃더니 물었다.
"산길이 험할 뿐만 아니라 가로막는 적군도 많았을 텐데 어떻게 아우가 이처
럼 빨리 올 수 있었단 말이냐?"
장비가 아니었더라면 이미 지금쯤 장임에게 사로잡혀있을지도 모를 일이라 유
비는 장비가 장하게만 보였다. 유비의 물음에 장비는 어깨를 으쓱이며 대답했다.
"오는 도중에 관소가 마흔다섯 군데나 있었소. 그러나 엄안 장군의 덕으로 싸
움 한 번 하지 않고 무사히 올 수 있었소."
장비는 엄안을 만나면서부터 지금까지의 일을 낱낱히 들려 주었다. 그 동안의
경위를 유비에게 말하고 난 후 장비는 엄안을 불러 유비를 뵙게 했다. 유비는
엄안을 보자 크게 기뻐하며 치하했다.
"만약 노장군이 아니었던들 아우가 어찌 이렇게 무사히 당도할 수 있었겠소?"
유비는 그 말과 함께 입고 있던 황금빛 쇄자갑(쇠사슬로 만든 갑옷)을 엄안에
게 입혀주었다. 유비가 이토록 두터이 대해 주자 엄안은 몹시 감격하여 절을 올
려 고마움을 표했다.
유비는 좌우에게 분부하여 잔치를 베풀도록 했다. 그러나 술자리가 베풀어지
기 전에 급보가 날아들었다.
"황충, 위연 두 장군이 오란, 뇌동과 싸움을 벌이고 있는데 오의, 유괴가 군사
를 이끌고 나와 두 장군을 쳤습니다. 앞과 뒤로 적을 맞게된 두 장군께서는 크
게 패해 동쪽으로 쫓겨갔다 합니다."
장비가 그 말을 듣자마자 유비를 재촉했다.
"군사를 두 갈래로 나누어 달려가 황충과 위연을 구해 내야겠소."
유비도 그 소식을 듣고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다. 장비가 좌군을 이끌도록 하
고 자신은 우군이 되어 군사를 이끌었다.
이때 오의와 유괴는 황충과 위연을 뒤쫓아가다가 문득 뒤에서 함성이 일어 뒤
돌아보았다. 그런데 유비와 장비가 두 갈래로 군사를 이끌어 오고 있는 것이 아
닌가. 오의와 유괴는 더 이상 뒤쫓다 살아남지 못할 것을 알고 황급히 성 안으
로 달아나 버렸다.
그때까지도 오란과 뇌동은 곧장 황충과 위연만을 뒤쫓고 있었다. 그들이 유비
와 장비가 이끌고 온 것을 알았을 때는 이미 길이 끊긴 뒤였다.
그런데 이들을 더욱 당황하게 한 것은 황충과 위연이었다. 황충과 위연은 유
비와 장비가 구원 온 것을 알자 몸에 힘이 솟아 달아나기를 멈추고 말머리를 돌
려 뒤쫓던 두 장수에게 덤벼들었다. 그렇게 되니 앞뒤에서 적을 맞게 된 오란과
뇌동이었다.
오란과 뇌동은 사태가 위급함을 알았으나 이미 형주의 범 같은 네 장수를 맞
아 싸운다는 것이 무모함을 깨달았다. 거느리던 군사를 이끌고 유비 앞으로 다
가와 말에서 내려 항복하고 말았다.
유비는 그들의 항복을 기꺼이 받아들였다. 유비는 두 장수가 거느리던 군사를
거두어들인 뒤 낙성 가까이에다 영채를 세웠다.
이때 장임이 오란, 뇌동 두 장수가 유비에게 항복했다는 소식을 듣자 수심에
잠겨 있는데 오의와 유괴가 입을 모아 말했다.
"형세가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죽기 살기로 싸우지 않으면 적을 꺾기가 어려
울 것이오. 한편으로는 사람을 성도로 보내 주공께 위급함을 알리고 계책을 세
워 적을 막아야 할 것이오."
두 장수는 비장한 각오라도 한 듯 결의에 찬 목소리였다. 장임도 가만히 앉아
서 적이 오기만을 기다릴 수 없다고 여겨 의견을 내었다.
"내가 내일 군사를 거느리고 나가 싸우는 척하다 도망가며 적을 북쪽으로 유
인하겠소. 그때 성 안에 군사 한 무리를 내보내 그 뒤를 끊어 주시오. 그리하여
유비가 오란과 뇌동을 사로잡을 때처럼 앞뒤로 적을 치면 우리도 적을 쉽게 꺾
을 수 있을 거요."
그러자 오의가 나섰다.
"그렇다면 성 안의 군사는 내가 이끌겠소. 유 장군께서는 공자 유순을 도와 성
을 단단히 지키도록 하시오."
세 사람은 이렇게 의논을 정하고 채비를 차렸다.
다음 날이 되었다. 장임이 군사 수만을 이끌어 성문을 열고 함성을 지르며 싸
움을 돋우었다. 성 안의 군사가 나오기만을 기다리고 있던 장비가 말을 몰아 장
임을 맞았다. 장임은 10여 합을 싸우다 슬며시 말머리를 돌려 달아났다. 장비가
기세를 올리며 장임의 뒤를 쫓았다.
그때 홀연 성문이 열리며 오의가 한 떼의 군마를 이끌어 와 장비의 뒤를 끊었
다. 그와 함께 장임도 말머리를 돌리더니 장비를 에워쌌다.
어느 새 적에게 감금당한 꼴이 된 장비는 나아가지도 물러서지도 못하고 있었
다. 겹겹이 적에게 에워싸인 장비를 향해 포위망이 점점 좁아지고 있는데 홀연
부강 강변 쪽에서 한 떼의 군사가 나타났다.
앞장 선 장수는 나는 듯이 말을 달려 오의 쪽으로 다가갔다. 오의가 그 장수
를 맞아 싸우자 단 1합도 넘기지 못했다. 한칼에 오의의 칼을 쳐내더니 오의의
목덜미를 덥석 움켜쥐어 사로잡고 말았다.
그 장수는 다시 말을 몰아 장비를 에워싼 군사들을 치기 시작했다. 대장 오의
를 단 1합에 사로잡은 걸 본 오의의 군사들은 그가 달려오자 뿔뿔히 흩어졌다.
장비가 그걸 보고 가만히 있을 리 없었다. 흩어져 달아나는 군사를 휩쓸며 길을
열어 그 장수 쪽으로 말을 달려와 보니 그는 바로 조운이었다. 조운을 보자 반
가운 마음과 함께 얼른 공명이 생각났다.
"군사께서는 어디 계신가?"
조운이 조금도 흐트러짐이 없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군사께서도 이곳에 이르셨습니다. 지금쯤은 주공을 뵙고 계실 것입니다."
장비는 조운과 함께 사로잡은 오의를 데리고 영채로 돌아갔다. 장임은 유인책
이 뒤틀려 버리자 하는 수 없이 성 안으로 드는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되니 낙
성의 장수는 이제 장임과 유괴만 남은 셈이었다.
그들이 영채에 이르자 공명과 장완, 간옹이 있었다.
장비가 말에서 내려 공명에게 인사를 올리자 공명이 놀란 얼굴로 장비에게 물
었다.
"아니, 장 장군... 장군이 어떻게 이곳에 먼저 왔소?"
곁에 있던 유비가 그 동안의 경위를 공명에게 자세히 들려 주었다. 유비의 말
을 듣고 나더니 공명이 유비에게 경하해 마지않았다.
"장 장군이 이제 능히 계책을 쓸 줄 아니 이 또한 주공의 크신 복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자 조운이 사로잡은 오의를 유비 앞에 이끌어 와 꿇어앉게 했다.
유비가 오의를 내려다보며 물었다.
"너는 어찌하겠느냐? 항복하겠느냐?"
"이왕 사로잡힌 바 되었으니 어찌 항복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유비가 기뻐하며 웃음 띤 얼굴로 몸소 결박을 풀어 주었다. 공명이 오의에게
성 안에 대해 물었다.
"성을 지키는 장수들로는 누구 누구가 있는가?"
오의가 공명의 물음에 순순히 대답했다.
"유계옥의 아들 유순을 돕는 유괴와 장임이 있습니다. 유괴는 그리 대단한 인
물이 아니나 장임은 촉군 태생으로 그 용맹과 지략이 빼어납니다. 결코 가볍게
보아서는 아니 될 것입니다."
"음-. 그렇다면 장임부터 사로잡은 후에 낙성을 빼앗으리라."
공명이 고개를 끄덕이며 혼자말을 하더니 다시 오의에게 물었다.
"내가 보니 성 동쪽에 다리가 하나 있던데 그 다리를 무슨 다리라 하는가?"
"금안교라고 합니다."
공명은 그 말을 듣더니 무슨 생각에서인지 말 위에 훌쩍 올라 금안교로 갔다.
금안교 아래로 흘러가는 강물을 두루 살펴본 공명이 돌아오더니 불쑥 황충과 위
연에게 영을 내렸다.
"금안교에서 남쪽으로 5, 6리 떨어진 곳에 양쪽 언덕에는 갈대와 억새풀이 우
거져 있으므로 능히 군사를 매복시킬 수 있을 것이다. 위 장군은 창수 1천을 거
느리고 가서 왼쪽에 매복했다가 적의 말탄 장수들만 창으로 찌르도록 하라. 황
장군은 칼과 도끼를 든 군사 1천을 거느리고 가서 오른편에 매복했다가 적군이
타고 지나는 말 다리만을 쳐서 적을 무찌르도록 하라. 장임은 그 모양을 보고
산 동쪽의 좁은 길로 달아날 터인즉 장비는 군사를 거느리고 가서 그곳에 매복
해 있다가 사로잡으면 될 것이니라."
공명은 이어 조운에게도 영을 내렸다.
"금안교 북쪽에 매복해 있다가 내가 장임을 유인하여 금안교를 지나가거든, 그
즉시 다리를 끊어 버리도록 하라. 그런 다음 군사를 북쪽으로 이끌어 그곳에서
함성을 울려 장임이 남으로 달아나게 하라. 그리하면 내가 세운 계책에 장임이
걸려들게 될 것이다."
이미 장임이 성 안에서 나오기도 전이었으나 공명은 여러 장수들에게 그를 잡
을 배치부터 끝냈다. 공명이 일러 준 대로 장수들이 군사를 이끌어가자 공명은
말 위에 오르더니 낙성 쪽으로 유유히 말을 몰았다.
한편 성도의 유장은 위급을 알려 온 사자의 급보를 받고 탁응과 장익 두 장수
를 보내 낙성의 싸움을 돕게 했다. 이에 힘을 얻은 장임은 유괴와 장익으로 하
여금 성을 지키게 하고 자신은 탁응과 함께 적을 맞기로 했다. 군사를 두 갈래
로 나눈 장임은 스스로 전부를 맡고 탁응에게 후군을 맡겨, 서로 접응하기로하
여 성문을 열고 군사를 이끌었다.
그때 공명은 대오도 어지러울 뿐만 아니라 날래 보이지 않는 군사 한 무리를
이끌고 이미 금안교를 건너오고 있었다. 장임은 성 밖 멀리까지 가기도 전에 먼
저 적을 맞게 되자 그들을 찬찬히 살펴보았다.
그 군사를 이끈 장수가 바로 그 유명한 공명이라고 하니 장임이 신중을 기하
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런데 공명이 싸움터에 나온 장수답지 않게 그 행차가
한가로웠다.
사륜거를 타고 윤건 차림에 학의 날개로 만든 부채로 부채질을 하며 오는데
그 옆에 1백여 명의 군사가 호위하고 있었다.
공명이 장임을 보자 손가락질하며 꾸짖기부터 했다.
"백만 대군을 거느렸던 조조도 내 이름만을 듣고 달아났다는 걸 너는 알고 있
느냐, 모르고 있느냐? 네가 대체 어떤 놈이기에 항복하지 않고 감히 내게 맞서
려 하느냐?"
말 위에서 이 모양을 지켜 보던 장임은 공명이 대오도 어지럽힌 채 괜한 허풍
이라도 떠는 것처럼 보였다.
'사람들이 일찍이 제갈량의 군사 부림이 귀신 같다고 하더니 이제 보니 공연
한 헛소문이 아닌가?'
그가 거느린 군사가 제대로 대오도 갖추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적을 치러 오
는 거동이 날랜 군사로 보이지 않았다. 이에 장임은 입가에 가소롭다는 듯 비웃
음을 날리더니 창을 높이 쳐들어 군호를 내렸다. 그와 함께 장임의 군사가 일제
히 공명의 군사를 향해 물밀 듯이 밀려들었다.
공명이 그 기세에 놀란 듯 황망히 사륜거를 내팽개치고 말 위에 오르더니 말
을 달려 금안교를 건너 달아나고 있었다. 한 번 부딪쳐 보지도 않고 달아나는
적을 보고 한 번쯤 의심을 할 만했으나 장임은 뒤쫓는 데만 정신이 팔려 있었
다. 단번에 오합지졸 같은 적을 쓸어 버리겠다는 기세로 앞만 보고 내달았다.
장임의 군사들이 금안교를 지났을 때였다. 홀연 함성이 일며 왼쪽에서는 유비
가 오른쪽에서는 엄안이 군사를 이끌고 달려나왔다.
'아뿔사, 적의 계략이었구나!'
장임이 그제서야 깨닫고 급히 군사를 물리려고 하는데 조운이 이미 금안교를
끊은 뒤였다.
장임은 산길이 있는 북쪽으로 말머리를 돌렸다. 말을 달리다 보니 앞쪽에는
조운이 군사를 벌여 세우고 장임이 오기만을 기다리고 있는 것이 아닌가.
장임이 황급히 말머리를 돌려 남쪽 개울을 끼고 달렸다. 그렇게 5, 6리 쯤을
달리다 보니 좌우가 모두 우거진 갈대숲이었다.
장임은 한숨을 돌리며 말을 달리는데 홀연 한 떼의 군사들이 갈대숲에서 벌떡
일어나더니 창으로 말탄 군사들을 찔렀다. 위연이 거느린 창수 부대들이었다.
장임이 깜짝 놀라 말을 박차는데 황충이 거느린 도수 부대들이 일제히 몰려나
와 칼로 말다리를 보이는 대로 후렸다. 말은 고꾸라지고 말 위에서 떨어진 군사
들은 꼼짝없이 사로잡히는 몸이 되고 말았다.
마군이 그 모양으로 뭉그러지자 보군은 감히 뒤따를 생각도 하지 못한 채 멍
하니 그 자리를 지킬 뿐이었다. 장임은 뒤따르는 군사를 돌볼 처지가 되지 못해
겨우 수십 기만을 거느리고 산길을 향해 내달았다.
그러나 그 산길이야말로 장비가 장임을 사로잡으려고 기다리고 있는 곳이었
다. 장임이 산길로 달려오자 장비가 벼락치듯한 호통 소리를 내질렀다. 장임이
말머리를 돌리려 했으나 장비 군사들이 일시에 장임에게 덤벼드니 장임은 그 많
은 군사를 당하지 못하고 사로잡히는 몸이 되고 말았다.
장임을 따라왔던 탁응도 장임이 적의 계책에 떨어져 오도가도 못하는 걸 보자
이미 싸움은 판가름난 것으로 알았다. 더 버텨 보았자 참혹한 죽음을 맞이할 뿐
이라고 여겨 조운에게 가서 항복했다.
장임을 사로잡은 장비와 탁응의 항복을 받은 조운이 각각 군사를 이끌고 대체
로 돌아왔다.
유비는 항복한 탁응을 따뜻이 맞으며 상까지 내렸다. 그때 장비가 장임을 이
끌고 왔다. 유비가 장임을 달랬다.
"촉의 모든 장수들이 대체를 헤아려 한결같이 항복해 오는데 그대는 어찌하여
항복하지 않았느냐?"
장임은 눈알을 부라리며 성난 목소리로 외쳤다.
"촉의 충신이 어찌 다른 주군을 섬기겠느냐!"
유비는 그 인물이 아까워 다시 항복을 권했다.
"그대는 천시를 알지 못하는가? 항복하면 내 그대를 높이 쓰리라."
그러나 장임은 단호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만약 지금 항복한다 해도 내가 섬기는 주인에 대한 충성심은 변함이 없을 것
이다. 그러니 어서 나를 죽이도록 하라!"
유비가 차마 장임을 죽이지 못하고 있는데 곁에 있던 공명이 유비에게 말했
다.
"그의 뜻이 저토록 굳으니 그 훌륭한 이름이나마 뒷날에 전해 주도록 하십시
오."
공명은 그 말과 함께 유비를 대신해 좌우에게 명했다.
"그를 끌어 내 목을 베라!"
공명은 장임이 끝내 자기 편으로 마음을 돌리지 않을 사람임을 알고 그를 목
베게 한 것이었다.
유비는 꿋꿋한 그 절개에 감탄하여 그를 금안교 가에 장사지내 주도록 하고
충혼비를 세워 그 충절을 기리도록 했다.
장임마저 죽고 나자 이제 낙성에 남아 있는 장수는 유괴뿐이었다.
다음 날, 유비는 항복한 촉의 장수들을 앞세워 낙성으로 가서 그들을 달래게
했다.
"성문을 열고 항복하도록 하라. 그리하여 성 안 백성들이 고생을 하지 않도록
하라!"
엄안이 성 위를 보며 소리지르자 유괴가 성 위에 나타나 갖은 욕설을 퍼부으
며 항복한 장수들을 꾸짖었다.
"촉의 은혜를 팔아먹은 짐승만도 못한 놈들이 어찌 나더러 항복을 하라고 하
느냐? 내가 너희들부터 죽여 부끄러운 이름을 뒷날까지 전하게 하리라!"
유괴의 꾸짖음이 이어지자 엄안은 더 듣고 있을 수 없었던지 화살을 뽑아 유
괴를 쏘려고 했다. 그러자 성 위의 한 장수가 칼을 뽑더니 한칼에 유괴를 쳐죽
였다. 이어 성문이 활짝 열리더니 그 장수가 달려나와 항복했다. 성문이 열리자
유비의 군사는 일제히 성 안으로 밀려들었다. 그렇게 되니 유장의 아들 유순은
급히 서쪽 성문으로 빠져 달아나는 수밖에 없었다.
성 안에 든 유비는 방을 내걸어 백성들의 마음에 동요가 일지 않도록 하는 한
편 유괴를 죽인 장수를 찾았다.
"유괴를 죽인 장수는 누구인가?"
유비가 물으니 군사 하나가 대답했다.
"무양 사람으로 이름은 장익, 자를 백공이라 부릅니다. 지난번 탁응과 함께 낙
성을 도우러 성도에서 보낸 장수입니다."
유비는 즉시 그를 불러 후한 상을 내리는 한편, 이번 싸움에 공이 많은 다른
장수들에게도 상을 내렸다.
낙성을 떨어뜨리고 시가가 다시 평온을 되찾자 공명이 뒷일을 유비에게 의논
했다.
"이제는 성도를 깨뜨리는 일만 남아 있으나 너무 급히 서둘러 공든 탑을 무너
뜨려서는 아니 될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찌해야 좋겠소?"
유비가 공명에게 물었다.
"낙성이 떨어졌으나 걱정스러운 것은 다른 주군입니다. 그 주군들이 힘을 합해
우리와 맞선다면 우리가 그들을 대적하기 힘들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가 먼저
사람을 보내 미리 어루만져 주고 서서히 성도로 들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군사의 말씀이 과연 묘책이오."
유비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이에 공명은 즉시 군사를 나누어 서천의 여
러 고을로 진병케 했다.
장익과 오의는 조운과 더불어 외수, 정강, 건위 부근의 고을을 달래도록 하고
엄안, 탁응은 장비와 더불어 파서, 덕양을 비롯한 주변 고을로 가도록 했다. 그
곳에서 고을을 다스리는 관원들을 격려하고 백성들을 위로하는 한편, 민심을 얻
은 후 성도로 들도록 했다.
장비와 조운이 군사를 거느리고 떠나자 공명은 나머지 항장들을 불러 놓고 물
었다.
"낙성에서 성도까지에는 어떤 관소들이 있는가?"
항복한 장수 한 사람이 공명의 물음에 대답했다.
"면죽 땅에만 많은 군사가 지킬 뿐입니다. 그러니 면죽을 취하면 어렵지 않게
성도에 이를 수 있습니다. 다른 곳은 행인을 검문하는 관문 정도라 별것이 못
됩니다."
공명이 그 말에 따라 군사 낼 일을 궁리하고 있는데 법정이 유비에게 권했다.
"이미 낙성이 떨어졌으니 촉은 이제 위급한 지경에 이르렀다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백성들을 불안케 하고 화를 입히는 것은 피하시는 것이 좋겠습니다. 주
공께서는 원래 인의로써 백성들을 따르게 하시니 아직은 군사를 내지 마십시오.
그럴 동안 제가 유장에게 글을 써 사람을 보내 이해를 따져 설복시켜 보겠습니
다. 유장도 민심이 주공께 돌아서고 있음을 알게 된다면 절로 와서 항복하고 말
것입니다."
"효직의 말씀이 과연 내가 바라던 바요."
유비가 크게 기뻐하며 법정의 의견에 따랐다. 공명은 그 말에 따라 곧 법정에
게 글을 쓰게하여 사람을 뽑아 성도로 보내 유장에게 그 글을 전하게 했다.
그 무렵 낙성에서 쫓겨온 유순은 그의 아비 유장에게 낙성이 유비에게 떨어졌
음을 알렸다. 유장이 크게 놀라 급히 관원들을 모아 놓고 대책을 물었다.
그러자 종사 장건이 계책을 냈다.
"지금 유비가 비록 낙성을 빼앗았다고 하나 군사가 많지 않을 뿐 아니라 아직
촉의 선비와 백성들이 그를 따르지 않고 있습니다. 또한 그들의 군량도 촉에서
나는 곡식에 의지할 뿐이며 군중에는 치중도 보잘 것 없습니다. 이때 파서와 재
동 백성들을 모두 부수 서쪽으로 옮기고 그 창고와 들의 곡식을 모조리 불태워
버리도록 하십시오. 유비가 군량을 조달할 수 없도록 한 다음 성 주위의 웅덩이
를 깊이 파고 성벽을 높이 쌓아 방비만 하고 나가 싸우지 않도록 하십시오. 그
렇게 한다면 군량이 바닥이 나고 물자가 없어 백 일을 넘기지 못하고 물러나고
말 것입니다. 그때 우리가 군사를 휘몰아 그들을 친다면 유비는 힘들이지 않고
사로잡을 수 있을 것입니다."
정건이 열띤 목소리로 그렇게 말했으나 유장은 그 말을 별로 탐탁지 않게 여
겼다.
"그렇지 않소. 내 일찍이 적을 막아 나라를 지키고 백성들을 편안케 한다는 말
은 들었으나 백성들을 쫓아 내어 적을 막는다는 말은 들은 바 없소. 공의 말을
따를 만한 계책이 아닌 듯하오."
유장이 한마디로 그 계책을 물리치니 장건도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그때
문득 사람이 와서 유장에게 알렸다.
"법정이 글을 보내 왔습니다."
유장이 곧 사자를 불러 오게하여 그 글을 뜯어보니 그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지난날 주공의 명을 받들어 형주와 우호를 맺었는데도, 뜻밖에도 주공은 아
랫사람들의 말만
들으시어 형세가 이 지경에 이르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지금도 유황숙께서
는 지난날의 정과
친족간의 우의를 잊지 않고 계십니다. 만약 주공께서 지금이라도 마음을 돌
리시어 형주로 귀
순하신다면 제가 보건대 결코 박대하지 않을실 것입니다. 바라건대 거듭 깊
이 헤아리시어 결
단을 내려 주십시오.
그 글을 본 유장은 크게 노해 글을 북북 찢으며 욕설을 퍼부었다.
"법정은 주인을 팔아서 제 한 몸의 영화를 사려는 배은망덕한 놈이다. 역적이
무슨 염치로 나에게 이와 같은 글을 보냈다는 말인가!"
유장은 글을 가져왔던 사자를 호령하여 성 밖으로 쫓아낸 뒤 처남인 비관에게
군사를 주어 면죽을 지키게 했다.
이에 비관은 남양 태생이며 이름은 이엄, 자를 정방이라고 하는 한 인물을 천
거하며 그와 함께 가기를 청했다. 유장이 비관의 청을 마다할 리 없었다.
비관은 이엄과 함께 군사 2만을 거느리고 면죽으로 떠났다.
이 무렵 익주 땅은 동화라는 사람이 다스리고 있었다. 그는 남군 지강 태생으
로 자를 유재라 불렀는데 유장에게 한 통의 글을 올렸다.
그 글의 내용은 전날의 원수였던 한중 장로와 화친을 맺은 후 구원병을 청하
라는 것이었다.
유장은 그 글을 보자 동화를 불러들였다.
"장로와 나와는 대를 이어오며 원수가 된 사이다. 그가 어찌 우리를 구해 주겠
느냐?"
유장이 동화에게 묻자 동화는 서슴없이 대답했다.
"그렇지만은 않습니다. 그가 비록 우리와는 원수지간이나 유비가 낙성을 차지
하고 있으니 그도 위급한 형세에 처해 있습니다. 이는 곧 입술이 없어지면 이가
시린 격입니다. 우리가 망하면 이웃나라도 위험에 처한다는 것을 들어 이해를
따져 타이르면 우리의 청을 가볍게 물리치지 못할 것입니다."
유장은 지금으로서는 달리 다른 방책이 없었다. 궁여지책으로 마침내 동화의
말을 받아들여 곧 글을 써서 사자를 한중으로 보냈다.
한편 이전에 조조에게 쫓겨 오랑캐인 강(티벳)족 땅으로 달아났던 마초는 2년
여를 지나는 동안 마침내 강병들과 손을 잡았다.
때는 건안 18년 가을인 8월이었다.
마초는 강병들을 조련하여 농서지방의 여러 고을들을 쳐서 항복을 받았다. 그
일대의 주군이 모두 그에게 평정되기에 이르렀는데 다만 기주만은 마초의 거센
공격을 받았으나 끝내 항복하지 않았다.
이때 기주성을 지키고 있던 조조 휘하의 장수이며 태수인 위강은 마초의 공격
을 받자 하후연에게 구원을 청했다. 그러나 하후연도 조조의 허락 없이 함부로
군사를 움직일 수가 없었다.
하후연으로부터 구원군이 끝내 오지 않자 위강은 마초의 공격에 더 이상 버텨
내지 못할 것 같아 수하들을 불러 놓고 의논했다.
"아무래도 이 적은 병력으로는 마초를 막을 수 없을 것 같소. 차라리 항복하는
것이 어떻겠소?"
그러자 참군 양부가 눈물을 흘리며 반대했다.
"마초가 임금을 거스른 역적인데, 어찌 그런 자에게 항복을 할 수 있다는 말이
오?"
"형세가 이 지경에 이르렀는데 항복하지 않고 어찌하겠는가?"
양부가 거듭 항복을 말렸으나 위강은 듣지 않고 기어코 성문을 열어 마초에게
무릎을 꿇고 말았다.
마초는 위강의 항복을 받아들이고 성 안으로 들었다. 그런데 위강은 항복을
하면 마초가 자기를 두텁게 대해 줄 줄 알았으나 마초의 생각은 달랐다.
"싸움에 지게 되니까 항복하는 약삭빠른 자는 의에도 벗어난 자이다. 설사 항
복했다 하더라도 언젠가는 딴마음을 품을 자이다."
마초는 위강을 크게 꾸짖고는 위강을 비롯한 문무관원 40여 명을 목베고 말았
다. 그때 양부는 다행히도 문무관원들 틈에 끼여 있지 않았다. 이를 알고 한 사
람이 마초에게 고해 바쳤다.
"양부는 항복하지 못하도록 말린 자입니다. 어찌 그 자를 목베지 않습니까?"
그러나 마초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그 사람은 의리를 지킨 사람이다. 그런 사람을 죽일 수 없다."
마초는 그를 죽이지 않음은 물론, 다시 양부를 참군으로 썼다. 이에 양부는 마
음 속으로 생각하는 바가 있어 마초의 분부에 따랐는데 얼마 있지 않아 양관과
조구를 천거했다. 마초는 양부의 천거를 흔쾌히 받아들이고 그들을 모두 군관으
로 삼았다.
어느 날 양부가 다시 마초에게 청했다.
"제 처가 고향인 임조에서 죽었습니다만 이번 난리통에 가 보지 못했습니다.
두 달간만 말미를 주시면 장사를 지내 주고 오겠습니다."
마초는 조금도 의심하지 않고 그 자리에서 선선히 응락했다. 그러나 양부가
한 말은 거짓이었다. 두 달간의 말미를 얻은 것은 역성에 있는 고모를 만나기
위함이었다.
양부는 그 길로 기주성에서 몸을 빼내어 역성에 이르자마자 고종형제인 무이
장군 강서가 있는 고모집을 찾아갔다. 강서의 어머니이자 양부의 고모는 그때
나이 여든두 살이었다. 이 고모는 이웃 나라에서까지도 '정절을 지키는 현숙한
부인'으로 칭송이 자자한 사람이었다.
양부는 고모를 뵙고 절을 올린 후 눈물지으며 말했다.
"제가 성을 지켜 내지 못해 주인이 죽었으나 저는 아직 죽지 않고 있으니 부
끄러워 고모님을 뵈올 낯조차 없습니다. 마초가 임금을 거스르고 함부로 군수를
죽였기 때문에 기성 사람치고 그에게 한을 품지 않은 사람이 없습니다. 그런데
도 형님은 역성을 지키고 있으면서도 역적을 치실 생각은 않으니 이 어찌 신하
된 도리라 할 수 있겠습니까?"
양부가 그 말과 함께 더욱 섧게 눈물을 흘리는데 그 눈물은 한이 맺힌 피눈물
이었다. 강서의 어머니는 그런 양부를 보자 아들을 불렀다.
"위사군이 마초 그 역적에게 죽임을 당한 것은 너의 죄라 할 수 있다."
강서의 어머니는 그렇게 아들을 꾸짖은 후 양부도 준열히 나무랐다.
"너는 마초에게 항복하여 지금까지 그의 녹을 먹어 오지 않았느냐? 그런데 어
찌하여 지금에야 마초를 치려 하느냐?"
양부가 그 까닭을 말했다.
"제가 항복하여 역적을 섬기고 있는 것은 수치를 무릅쓰고라도 살아서 유사군
의 원수를 갚기 위해서입니다."
그러자 강서가 입을 열었다.
"마초는 워낙에 용맹한 자이네. 경솔히 도모하기가 어려울 것이네."
"그렇지 않습니다. 마초가 용맹은 있어도 지모가 얕으니 우리가 쉽게 이길 수
가 있습니다. 내가 이미 양관, 조구와 함께 은밀히 약조를 해 주었으니, 만일 형
님께서 군사만 일으키신다면 반드시 그 두 사람이 안에서 내응할 것입니다."
양부가 강서를 부추기며 말했다. 강서의 어머니가 그 말을 듣더니 아들을 꾸
짖었다.
"네가 일을 서두르지 않고 언제까지나 기다리기만 하겠다는 거냐? 사람은 모
두 죽게 마련이다. 충의를 위해 죽는다면 그 죽음은 때를 얻은 것이다. 너는 내
걱정일랑은 하지 말라. 네가 만약 나를 염려하여 양부의 말을 듣지 않겠다면 내
가 먼저 죽어 네 근심을 덜어 주마."
어머니가 그렇게까지 말을 하니 강서가 더는 주저하지 않았다. 강서는 평소
가까이 지내던 통병교위 윤봉과 조앙을 불러 함께 군사 일으킬 일을 의논했다.
그런데 이때 조앙의 아들 조월은 기성이 함락된 이후 마초 수하에서 비장 노
릇을 하고 있었다.
그날 조앙은 집으로 돌아가자 아내 왕씨에게 탄식했다.
"내가 오늘 강서, 양부, 윤봉과 더불어 죽은 태수 위강의 원수를 갚기로 하였
소. 그러나 아들 조월이 지금 마초를 섬기고 있으니 우리가 군사를 일으키면 마
초는 나의 아들부터 죽일 것이오. 장차 이 일을 어찌하면 좋겠소?"
조앙의 아내는 그 말을 듣자 눈물을 글썽거렸으나 이내 눈물을 거두고 정색을
하며 말했다.
"임금과 부모가 당한 굴욕을 씻기 위해서는 죽어도 아까울 것이 없거늘 하물
며 자식 하나 잃는 것이 문제겠습니까? 만약 당신이 아들 잃는 것이 두려워 이
일에서 빠지신다면 제가 먼저 죽어 욕됨을 씻겠습니다."
"알았소. 이젠 망설이지 않을 것이오."
조앙은 아내의 말을 듣고 마음을 정한 후 그렇게 말했다.
다음 날, 그들은 마침내 군사를 일으켜 윤봉과 조앙은 기산에 진을 치고 양부
는 역성에 머물렀다.
그러자 조앙의 아내 왕씨는 모든 패물과 비단을 들고 가 남편이 있는 기산으
로 가서 군사들에게 나누어 주고 격려하며 사기를 복돋워 주었다.
한편 기성에 있던 마초는 네 사람이 모여 군사를 일으켰다는 소식을 듣자 크
게 노했다.
"조앙의 아들 조월의 목을 베라!"
마초는 즉시 조월을 쳐죽이게 한 후 몸소 군사를 일으켜 방덕, 마대와 더불어
역성으로 향했다.
이때 역성에 있던 강서와 양부도 마초가 친히 군사를 이끌어 오자 군사를 거
느리고 나와 둥그렇게 진을 세웠다.
양쪽 군사가 둥글게 진을 치고 맞서자 양부와 강서가 모두 흰 갑옷을 입고 나
와 마초를 향해 큰 소리로 꾸짖었다.
"임금을 거스른 의리없는 역적놈아! 너의 목을 잘라 죽은 주군의 한을 씻으리
라!"
그 소리를 듣고 크게 노한 마초가 대꾸 한 번 없이 곧바로 군사를 휘몰아갔
다.
양군 사이에는 일대 혼전이 벌어졌다. 일찍이 조조도 대군을 이끌었으나 낭패
를 당했던 마초의 용맹이었다. 게다가 날래고 굳센 강족의 군사들을 강서와 양
봉이 어찌 당할 수 있으랴. 강서와 양봉의 군사는 크게 패해 달아나니 마초가
거친 기세로 추격했다.
이때 홀연 등 뒤에서 요란한 함성이 일며 윤봉과 조앙이 군사를 이끌어 왔다.
마초가 말머리를 돌려 그들을 치려는데 달아나던 양부와 강서도 말머리를 돌려
마초에게 덤벼들었다.
앞과 뒤에서 협공을 받게 되자 마초는 군사를 돌볼 겨를도 없이 한동안 어지
러운 싸움을 벌였다. 그렇게 되니 마초군의 형세도 싸움에 이롭지만은 않았다.
게다가 또 한 떼의 군사가 나타났다. 난데없이 나타난 그 군사는 곧장 마초가
싸우는 한가운데를 찌르고 들어왔다.
선두의 장수는 바로 하후연이었다. 하후연이 마침내 조조의 허락을 받고 군사
를 이끌어 온 것이었다. 하후연의 군사들은 조조의 정예군일 뿐만 아니라 무기
나 장비가 제대로 갖추어진 군사들이었다.
마초가 아무리 용맹스럽다고는 하지만 세 갈래로부터 공격을 받게 되니 견디
지 못했다. 형세가 더욱 위급해지자 감히 더 싸울 수가 없어 마침내 크게 패한
채 달아났다.
마초는 그 길로 밤을 새워 말을 달려 다음 날 날이 밝을 무렵에야 기성에 이
르렀다.
"성문을 열어라!"
마초가 성 아래에서 소리쳤다. 그런데 성 안에서 난데없이 화살이 빗발치듯
쏟아졌다.
"이놈들아 똑똑히 보아라! 주인도 못 알아보느냐!"
군사들이 자기를 알아보지 못하고 활을 쏜 것인 줄 알고 마초가 소리 높여 외
쳤다.
그러자 성 위에서 양관과 조구가 마초를 내려다보며 꾸짖었다.
"네 이놈! 임금을 거역한 역적놈아, 내가 너에게 천벌을 내리리라!"
그 말과 함께 마초의 아내 양씨를 끌어 내 한칼에 목을 베 성 아래로 던졌다.
또 마초의 어린 아들들을 끌어 내더니 목을 베고, 일가 친척 10여 명도 모두 끌
어와 목을 베어 성 아래로 내던졌다.
"으음..."
마초는 그 광경을 보며 분노와 슬픔에 가슴이 터질 듯해 신음 소리와 함께 말
에서 굴러 떨어질 뻔했다. 그때 뒤를 따르던 하후연이 군사를 이끌고 들이닥쳤
다.
마초는 하후연의 군사가 많은 걸 보자 감히 싸울 엄두를 내지 못하고 방덕,
마대와 함께 한 가닥 길을 열어 달아났다.
달아나는 도중 강서, 양부와 맞닥뜨려 한바탕 죽기 살기로 싸워 길을 열어 달
아날 뿐이었다. 강서, 양부를 겨우 뿌리치고 달아나는데 이번에는 또 윤봉과 조
앙이 앞을 막았다. 다시 남은 힘을 다해 이를 악물고 싸워 길을 열었으나 그의
군사는 이리 찢기고 저리 찢겨 겨우 50여 기만 뒤따르고 있었다.
마초는 밤을 새워 말을 달려 사경쯤에 역성에 이르렀다.
"여기가 어디인가?"
"역성입니다."
마초가 물으니 방덕이 대답했다.
마초는 성 앞에서 머뭇거리다가 강서와 양부가 군사를 이끌어 나가 자기와 싸
운 이후 아직 성 안에 들어오지 않았음을 생각했다. 마초는 이 성을 빼앗기로
하고 성문 앞으로 가 소리쳤다.
"성문을 열라! 강 장군께서 돌아오셨다."
성 안의 군사들은 아직 어두운 밤이라 마초의 군사들을 얼른 알아보지 못했
다. 서슴없이 강 장군이 돌아왔다는 외침에 의심하지 않고 성문을 활짝 열어젖
혔다. 가만히 성문 안에 들어선 마초는 그때부터 돌연 무자비한 살인귀로 변했
다. 그의 눈에는 아직도 성 위에서 목이 떨어지던 아내와 아들들의 모습이 떠나
지 않고 있던 참이었다. 성을 지키던 군사들은 물론 백성들을 닥치는 대로 죽여
버렸다.
성 안을 온통 피바다로 만들며 한바탕 휩쓴 마초는 곧장 강서의 집으로 갔다.
마초는 강서의 늙은 어머니부터 끌어 냈다. 강서의 어머니는 살기 등등한 마초
를 보고도 조금도 두려워함이 없이 손가락질하며 꾸짖었다.
마초는 스스로 칼을 빼어 강서의 어머니를 베어 죽이고 이어 윤봉과 조앙의
가족을 끌어 내어 늙은이 어린애 할 것 없이 모조리 목을 베어 분풀이를 했다.
그러나 조앙의 아내 왕씨는 남편이 있는 기산의 군중에 가 있었으므로 죽음을
면했다.
다음 날이었다. 마초를 뒤쫓던 하후연이 역성에 들이닥쳤다. 하후연의 대군이
밀려오자 불과 50여 기를 거느리고 성을 지키던 마초는 역성을 빼앗은 것도 하
루밤의 꿈에 불과했다. 하후연의 대군과 맞설 수 없음을 알고 마초는 성을 버리
고 서쪽을 향해 달아났다.
마초가 말을 달려 20여 리를 갔을 때였다. 문득 앞쪽에서 한 떼의 군사가 길
을 막는데 앞선 장수를 보니 바로 양부였다. 양부를 보자 마초는 눈에 불이 일
며 이를 부드득 갈았다. 성도 빼앗기고 아내와 자식마저 잃게 된 것이 모두 자
신을 배신한 양부 탓이라 여기자 마초는 앞뒤를 생각할 겨를도 없이 말을 박찼
다. 양부에게 달려간 마초는 창을 번쩍 들어 그를 내려찍으려 하는데 양부의 동
생 일곱이 일시에 내달아와 마초의 창을 막으며 덤벼들었다.
이때 마대와 방덕은 양부의 군사들을 맞아 한바탕 싸움을 벌이고 있었다. 그
럴 동안 악에 바친 마초가 양부의 일곱 동생을 차례로 목베고 말았다.
양부도 마초의 창에 다섯 군데나 찔렸지만 이를 악물고 그와 싸우고 있었다.
그러나 양부가 마초를 당해 낼 리가 없었다. 마초의 공격에 밀려 마침내 그의
한 창에 찔릴 위급한 지경에 이르렀다.
그때 홀연 수많은 군사를 이끌고 하후연이 마초의 등 뒤를 급습해 왔다. 마초
는 다시 분통을 삼키며 황망히 말머리를 돌려 달아났다. 그렇게 되니 그나마도
거느렸던 50여 기의 군사 중 하후연과 양부의 군사들에 의해 모두 목숨을 잃고
방덕, 마대와 예닐곱 기만이 그를 딸르 뿐이었다.
온갖 고초를 겪어 가며 가까스로 강족과 손을 잡고 다시 군사를 일으켰지만
주어진 천운 탓인가, 다시 패전한 마초의 행렬은 그저 쓸쓸하고 초라하기만 했
다.
다시 불타는 서량
성도에 있는 유장은 원수지간이었던 장로에게 구원병을 요청하고, 낙성에 입
성한 유비는 민심을 진정시킨다. 조조에게 패해 달아났던 마초는 서량에서 기성
을 빼앗고, 난폭한 마초에 대항하던 충신들은 하후연의 도움으로 간신히 마초를
몰아낸다.
마초가 몇 기만을 이끌고 어디론가 달아나자 하후연은 뒤쫓기를 그만두고 농
서 지방 고을을 순시하며 백성들을 안정시켰다. 하후연은 강서와 양관, 조앙에게
각 지역을 나누어 주며 그곳을 맡아 지키게 했다. 농서 일을 매듭지은 하후연은
마초를 몰아내는데 으뜸가는 공을 세우고 크게 다친 양부를 수레에 태워 허도로
향했다.
양부가 조조를 뵙자 조조는 그의 공을 치하하며 관내후의 벼슬을 내렸다. 그
러나 양부는 그 벼슬을 굳이 사양했다.
"저는 난리를 막은 공도 세우지 못했으며 절개를 지켜 죽지도 못했습니다. 법
에 의해 마땅히 죽었어야 할 몸인데 무슨 얼굴로 벼슬까지 받겠습니까?"
그러나 조조는 그런 양부를 더욱 가상히 여겼다.
"공의 충절을 높이지 않는다면 이 조조를 천하가 어리석다고 비웃을 것이오.
공에게 벼슬을 내림은 한 사람을 높이는 것이 아니라 만인에게 충의를 북돋우는
격려가 된다는 것을 생각해서 하는 것이오."
조조가 그렇게 말하며 벼슬을 내리자 양부도 더는 사양할 수가 없었다.
그 무렵, 마초는 방덕, 마대와 더불어 멀리 한중에 이르러 이 나라의 오두미교
의 종문 대장군 장로에게 의지하러 갔다.
마초가 몸을 의탁하러 오자 장로는 크게 기뻐하며 그를 맞아들였다. 마초의
용맹을 잘 알고 있는 장로는 그를 받아들인다면 서쪽의 익주를 빼앗고 동쪽의
근심거리였던 조조도 능히 막을 수 있으리라 여겼다. 장로에게는 묘령의 딸이
있었다. 마초의 용맹을 탐낸 장로가 자기 딸을 마초에게 시집 보내 이번 기회에
아예 자기 일족으로 만들고 싶어 신하들을 모아 놓고 의논했다.
"마초가 효용이 절륜한 사람임은 그대들도 다 알고 있을 것이오. 그래, 이번
일을 계기로 내 딸을 마초와 짝지어 사위로 삼으려 하는데 그대들의 생각은 어
떠하오?"
그러자 대장 양백이 고개를 저으며 간했다.
"마초의 아내와 자식들이 참혹한 죽임을 당한 것은 그가 원래 성품이 악해 남
을 많이 해쳤기 때문입니다. 주공께서는 어찌하여 그런 사람을 사위로 삼으려
하십니까?"
양백의 말을 들으니 장로도 마음이 달라졌다. 앞 뒤 가리지 않고 지나치게 그
의 용맹을 탐냈던 자신을 뉘우쳤다. 그렇게 되니 혼담은 없었던 일이 되고 말았
다.
그런데 누군가가 이 일을 마초에게 일러바쳤다. 마초가 그 말을 듣자 성이 나
서 펄펄 뛰었다. 장로의 사위가 된다면 언젠가는 자신의 야심을 이룰 수도 있었
는데, 양백이 그걸 가로막은 것을 알자 그를 죽여 없애야겠다고 작정했다.
양백도 마초의 이런 속마음을 눈치챘다. 그를 대하는 마초의 눈길이나 행동거
지가 심상치 않음을 보고 형 양송과 의논했다.
"이 일을 어찌하면 좋겠습니까?"
"그 자가 지금은 몸을 굽혀 주인을 따르고 있으나 언젠가는 딴마음을 품을 것
임에 틀림없다. 함께 힘을 합해 먼저 그를 없애 버려야 되리라."
양백과 양송은 이렇게 뜻을 모으고 기회가 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바로 그 무렵, 유비를 막기 위해 유장이 사람을 보내 장로에게 구원을 청해
온 것이었다. 그러나 유장과는 원수지간으로 지내던 장로라 한마디로 호통을 치
며 거절하니 사자는 도망치듯 물러가고 말았다.
그러나 위급한 지경으로 내몰린 유장이었다. 이번에는 황권을 사자로 보내 다
시 장로와의 화친을 빌게 했다.
한중으로 온 황귄은 장로와 유장이 원수지간으로 지냈음을 잘 알고 있었다.
무턱대고 장로를 찾아갔다가는 지난번 사자처럼 내쫓기기 십상이라 여기고 장로
를 만나기 전에 양송을 찾아가 말했다.
"우리 서천과 동천(한중)은 한마디로 이와 입술과 같은 가이라 아니할 수 없
습니다. 우리 서천이 망하면 동천도 무사히 보전하기 어렵습니다. 만약 이번에
우리를 도와 주신다면 서천 스무 고을을 떼어 그 은혜에 보답할까 합니다."
황권은 장로가 오래 전부터 서천을 탐내 왔던 점을 이용해 미끼를 던졌다. 양
송은 황권의 말을 듣자 기뻐하며 황권을 장로에게로 데려갔다.
장로는 무엇보다 서천 스무 고을을 준다는 말에 원수지간임도 잊은 듯 생각이
달라졌다. 장로로서도 언젠가는 자신이 뺏어야 할 땅인데 유비가 먼저 서천을
뺏으려 하니 가만히 두고 볼 수만은 없는 일이기도 했다. 먼저 서천 스무 고을
을 거두어들인 후 다시 기회를 엿보기로 작정한 장로가 황권의 말을 좇으려 했
다. 그러나 이때 파서 사람 염포가 나서며 간했다.
"유장은 주공과는 대대로 원수지간인데 지금 형세가 위급해지니 거짓으로 구
원을 청하기 위해 땅을 떼어 주겠다고 하는 것입니다. 결코 속아서는 아니 될
것입니다."
염포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이었다. 계하에서 우렁찬 소리를 외치며 나선 사
람이 있었다.
"제게 한 떼의 군사를 주신다면 가서 유비를 사로잡고 또한 땅도 얻어 오겠습
니다."
모두 그 소리에 놀라 바라보니 그는 바로 마초였다.
"주공의 분에 넘치는 은혜에 보답코자 제가 군사를 이끌고 가서 가맹관을 빼
앗고 유비를 사로잡아 오겠습니다. 그리고 유장에게서 스무 주를 주공께 바치도
록 하겠습니다."
장로는 몹시 기뻐했다. 마초라면 능히 그 일을 해낼 수 있다고 여겼기 때문이
었다. 장로는 마초의 말에 쾌히 허락하고 황권을 먼저 샛길로 돌아서 가게 한
다음 마초에게 군사 2만을 주어 유장을 구원하게 했다. 방덕은 이때 병석에 누
워 있었으므로 장로는 대신 양백을 감군(군사를 감독하는 관리)으로 삼아 함께
떠나게 했다. 장로는 마초와 양백이 서로 죽이려고 벼르고 있음을 알 리 없는지
라 믿고 있는 양백에게 감군을 맡게 했던 것이었다.
마초는 아우 마대와 의논한 후 날을 정해 서천으로 떠났다.
그때 유비는 낙성에 머물러 있었는데 법정이 유장에게 전한 글을 주어 보냈던
사자가 성도에서 돌아와 유비에게 고했다.
"제가 글을 전하자 유장이 그 글을 읽어 보더니 그 자리에서 찢어 버렸습니다.
저도 쫓겨 나오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정도란 자가 계책을 올렸는데 들에 있는
곡식과 창고를 모조리 불태우고 파서 백성들을 부수 서쪽으로 피신을 시키고자
하였습니다. 또한 성 주위의 해자를 깊이 파고 성벽을 높이 쌓아 성을 지키기만
하라고 권했습니다."
그 소리를 듣자 유비와 공명은 크게 놀랐다. 유장이 그 계교를 받아들이면 유
비군으로선 성도를 깨치기는커녕 도리어 위태로운 지경에 빠질 우려가 있기 때
문이었다.
"일이 만약 그렇게 되면 우리가 낭패를 면할 길이 없지 않은가."
"그거 큰일이구나!"
유비와 공명이 근심스런 얼굴로 걱정하고 있는데 법정이 문득 껄걸 웃으며 안
심시켰다.
"주공께서는 걱정하실 일이 못 됩니다. 그 계책이 비록 그럴 듯하나 지나치게
마음이 약한 유장이 받아들이지 않을 것입니다."
과연 법정의 헤아림은 어김없이 들어맞았다. 다음 날이 되자 정도의 계책이
받아들여지지 않았다는 소식이 날아들었다. 며칠이 지나도 파서 백성들이 부수
서쪽으로 움직이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유비는 그제야 마음을 놓고 있는데 공명이 이런 기회를 틈타 유비에게 진병을
서둘게 했다.
"급히 군사를 내어 면죽 땅을 빼앗아야 할 것입니다. 그곳만 얻게 되면 성도를
깨뜨리는 일은 어렵지 않을 것입니다."
성도로 가는데 가장 방비가 엄한 면죽부터 떨어뜨려 놓고 보자는 공명의 말에
유비는 두말 없이 그대로 따르기로 했다. 곧 황충과 위연에게 군사를 주어 면죽
관으로 나아가게 했다.
유비군이 면죽관으로 밀고 들어오자 유장의 장수 비관은 이엄에게 군사 3천을
주어 나가 맞게 했다. 이에 이엄은 군사를 거느리고 나아가 황충과 위연을 마주
한 채 진을 쳤다.
양군이 각기 진을 치자 먼저 황충이 말을 달려나갔다. 그러자 이엄도 말을 마
주 달려나왔다. 두 장수가 어우러져 싸우기를 4, 50여 합이 되었으나 좀처럼 이
기고 지는 쪽이 없었다. 진중에서 이 싸움을 지켜 보고 있던 공명이 징을 울려
군사를 거두게 했다.
"조금만 더 싸움을 계속했으면 그놈을 죽일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군사께서는
왜 군사를 거두셨습니까?"
황충이 볼멘소리로 물었다.
"이엄의 무예를 보니 힘만으로는 사로잡기 어려울 것 같소. 내일 다시 싸울 때
장군은 짐짓 패하는 척하고 달아나 그를 산골짜기로 꾀어들이도록 하시오. 그때
이엄이 생각지 못한 군사로 그를 급습케 하면 우리가 이길 수 있소."
공명이 황충에게 가만히 말했다. 늙은 장수 황충이 공명의 말에 슬며시 오기
가 치밀었으나 군사의 말이니 거스를 수도 없었다.
다음 날이 되자 이엄이 다시 군사를 거느리고 나왔다. 황충이 그를 맞아 호기
롭게 싸운 지 10여 합이 되자 공명이 이른 대로 슬며시 말머리를 돌려 달아났
다.
전날에 이어 또 황충이 말머리를 돌리자 이엄은 그가 늙은 장수라 힘이 모자
라 도망가는 것으로만 알았다. 말에 힘껏 채찍질하며 단번에 그를 사로잡겠다는
듯이 뒤쫓았다. 뒤쫓다 보니 어느 새 깊은 골짜기에 들어서고 말았다. 그때서야
불현 듯 정신을 차리고 급히 말머리를 돌리며 군사들에게 명했다.
"더 이상 뒤쫓지 말고 물러서라!"
이엄이 말머리를 돌려 오던 길로 되돌아가려는데 앞쪽에는 이미 위연이 군사
를 늘어세운 채 길을 막고 있었다.
그때 산 위에서 공명이 소리쳤다.
"공은 항복하도록 하시오. 만약 항복하지 않으면 양쪽에 숨겨 둔 강한 쇠뇌로
방사원(방통)의 원수를 갚을 것이오."
이엄은 이미 옴짝달싹할 수도 없이 적의 계책에 걸려들었음을 알았다. 이에
이엄은 말에서 내려 갑옷을 벗고 항복하고 말았다.
공명은 이엄과 그를 따라 항복한 군사들을 데리고 유비에게 갔다. 유비는 항
복한 적의 장수 이엄의 결박을 풀어 주며 정중하게 그를 맞았다. 이엄은 유비가
그토록 두텁게 자기를 대해 주자 감격하여 마음으로 항복하고 유비에게 의견을
내었다.
"비관이 비록 유익주(유장)의 처남되는 사람이기는 하나 저와는 친분이 두터
운 사이입니다. 제가 가서 그에게 항복을 권해 볼까 합니다."
유비가 이엄의 말에 주저없이 선뜻 허락했다.
이엄은 그 길로 면죽관으로 달려가 비관을 만났다.
"유비는 어질고 덕이 높은 사람이오. 만약 항복하지 않고 싸우다가는 큰 화를
면치 못할 것이오."
이엄이 간곡히 권하자 비관도 마음이 움직였던지 고개를 끄덕였다. 비관은 성
문을 열고 이엄을 따라나와 유비에게 항복했다.
한 번 싸우지도 않고 면죽관을 얻은 유비는 성에 들자 다시 성도를 칠 의논을
했다.
그때 홀연 놀라운 소식이 날아들었다.
"한중의 장로가 마초, 양백, 마대를 보내 가맹관을 치게 했습니다. 지금 맹달과
곽준이 지키고 있으나 형세가 매우 위급합니다. 만약 구원이 늦어지면 가맹관은
그들의 손에 넘어가고 말 것입니다."
"아마 성도의 유장이 나라를 쪼개 장로에게 주기로 하고 구원을 청한 모양이
오."
마초의 용맹을 잘 알고 있는 유비가 크게 놀라며 공명에게 말했다. 공명도 놀
란 얼굴로 유비에게 아뢰었다.
"그들을 막으려면 장익덕이나 조자룡 두 사람 중 한 명을 보내야만 대적할 수
있을 것입니다."
"자룡은 군사를 이끌고 밖으로 나가고 아직 돌아오지 않았소. 지금 익덕이 마
침 여기 있으니 하는 수 없이 익덕을 보내야겠소."
유비가 걱정스런 얼굴로 말했다. 장비가 성급하기만 해 물불을 가리지 않고
싸우려고만 들다 실수라도 하지 않을까 염려되었기 때문이었다. 유비의 그런 마
음을 알고 있는 공명이 유비를 안심시켰다.
"주공께서는 익덕에게 아무 말씀도 하지 마십시오. 제가 익덕에게 경솔히 마초
와 싸우는 일이 없도록 해 보겠습니다."
그때 장비도 마초가 가맹관을 친다는 소식을 듣고 씩씩거리며 급히 뛰어들어
왔다.
"형님, 내가 가겠소. 내 가서 그놈의 목을 비틀어 버리겠소."
그러나 공명은 장비의 말을 못 들은 체하며 유비에게 걱정스러운 얼굴로 힘없
이 중얼거렸다.
"지금 마초가 와서 가맹관을 치고 있으나 우리에게는 그를 대적할 만한 사람
이 없어 걱정입니다. 그러니 형주에 파발마를 띄워 관운장이라도 불러 와야 하
겠습니다."
장비가 이 말을 듣더니 분이 치솟는 듯 볼멘소리로 벌컥 화를 냈다.
"군사께서는 어찌하여 나를 그토록 가볍게 여기시오? 내가 일찍이 조조의 백
만 대군을 소리 한 번 질러서 쫓아 버린 몸이오. 그까짓 마초 한 놈이 무에 그
리 대단하겠습니까?"
"그때는 조조가 우리 쪽의 현실을 잘 알지 못했기 때문이었소. 만약 그가 우리
의 허실을 알았더라면 장군도 무사할 수 없었을 것이요. 마초의 용맹은 천하가
다 아는 터요. 지난번 위교의 싸움에서 조조마저도 그에게 죽을 뻔했던 고비를
맞았소. 그러니 아무나 함부로 맞섰다가는 목숨을 잃기 십상이오. 설령 관운장이
간다 하더라도 꼭 이긴다고는 장담할 수 없을 것이오."
공명이 정색을 한 채 잔뜩 마초를 칭송하며 장비의 호승심을 부추켰다. 잔뜩
약이 오른 장비가 분연히 말했다.
"알았소. 그래도 나는 가겠소. 만약 마초를 이기지 못하면 내 목을 자르는 군
령이라도 달게 받겠소."
장비의 말에 공명은 마지못한 듯 말했다.
"장군이 군령장까지 써 두고 가겠다고 하니 하는 수 없구려. 그러면 장군이 선
봉이 되어 가도록 하시오."
그제야 장비에게 가맹관으로 가도록 허락한 공명이 다시 유비를 돌아보며 말
했다.
"주공께서는 익덕을 선봉으로 삼고 후군이 되어 가맹관으로 가셨으면 합니다.
저는 이 면죽관에 남아서 조자룡이 돌아오면 뒷일을 의논하겠습니다."
공명은 장비를 보내되 만약을 염려하여 유비를 뒤따르게 했다. 공명의 뜻을
짐작한 유비도 쾌히 공명의 말에 좇았다.
"저도 함께 보내 주시기 바랍니다."
장비도 선뜻 허락하지 않는 터라 입을 닫고 있던 위연이 그제야 나서며 말했
다. 공명은 그에게도 군사 5백을 주어 척후를 맡게하여 출발하게 했다. 그 뒤로
장비, 그리고 유비가 뒤를 받치도록하여 가맹관으로 나아가게 했다.
그렇게 되니 가맹관에 가장 먼저 이른 것은 위연이었다. 위연은 장비에게 첫
번째 공을 빼앗기고 싶지 않았다. 장비가 가맹관에 이르기도 전에 서둘러 적장
양백을 향해 말을 달렸다. 양백도 마주 나와 위연과 부딪쳤다. 두 사람이 어우러
져 10여 합을 싸웠을까, 양백은 위연의 상대가 되지 못했다. 양백이 더는 위연을
당할 수 없음을 알고 말머리를 돌려 달아났다.
양백을 사로잡아 공을 세워 보겠다고 잔뜩 벼르고 있던 위연은 급하게 그 뒤
를 쫓았다. 한동안 달리다 보니 문득 한 떼의 군사가 그 앞을 가로막았다.
마초의 아우 마대가 군사를 이끌고 나온 것이었다.
위연은 마초를 본 적이 없어 뒤늦게 나온 이 장수가 마초인 줄 알고 칼을 휘
두르며 달려나갔다. 마대가 위연을 맞아 한바탕 싸움을 벌였다.
10여 합을 부딪쳤을 때였다. 마대 역시 말머리를 돌려 달아나기 시작했다.
마대를 마초로 알고 있는 위연인지라 더욱 기세가 오를 수밖에 없었다. 공명
이 그토록 추켜세운 마초가 자기를 당하지 못해 달아나니 그를 사로잡아 큰 공
을 세울 욕심에 앞뒤를 살피지 않고 곧장 말을 박차 뒤쫓았다.
그러나 위연이 뒤쫓아오기를 바라고 달아나던 마대가 갑자기 말 위에서 몸을
비트는가 싶더니 활을 당겼다. 화살은 뒤쫓기에만 급해 아무런 대비가 없었던
위연의 왼쪽 팔꿈치에 꽂혔다.
위연은 그제야 자기를 꾀어내기 위한 것임을 알았다. 한 손으로 말고삐를 움
켜쥔 채 말을 되돌려 가맹관 쪽으로 달아났다. 이번에는 마대가 그런 위연을 뒤
쫓아 관문 앞까지 이르렀을 때였다. 벼락치듯한 호통 소리와 함께 관 위에서 말
을 달려 내려오는 장수가 있었다.
장비가 그때서야 가맹관에 이르러 위연이 싸우고 있다는 말을 듣고 달려온 것
이었다. 마대에게 쫓기던 위연을 구해 가맹관 안으로 들여보낸 장비가 이번에는
마대를 보고 소리쳤다.
"대체 넌 어떤 놈이냐? 죽더라도 이름이나 밝히고 죽도록 하라!"
다른 싸움터 같았으면 곧장 말을 달려 장팔사모를 휘둘렀을 장비였다. 그러나
떠나기 전에 공명이 잔뜩 마초를 추켜세운 터라 장비도 함부로 내닫지를 않았
다.
"서량의 마대를 몰라보고 하는 소리냐? 너야말로 웬놈이냐?"
장비가 이름을 밝히라는 말에 마대가 화가 나 소리쳤다. 속으로 은근히 경계
했던 장비는 그가 마초가 아니란 말에 맥이 탁 풀렸다.
장비는 마대를 보고 심드렁한 목소리로 말했다.
"네놈은 마초가 아니로구나. 귀찮으니 냉큼 물러나도록 하라. 너는 내 적수가
아니다. 어서 가서 마초에게 나오라고 하되, 연인 장익덕이 여기서 기다린다고
일러라."
장비의 말에 마대는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올랐다.
"네가 어찌 감히 나를 그렇게 업신여길 수가 있단 말이냐?"
마대가 그렇게 외치며 창을 치켜든 채 곧장 장비에게 짓쳐들었다. 마대가 말
을 달려오니 장비가 맞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러나 두 사람의 싸움은 오래가지
않았다. 마대가 10여 합을 부딪기도 전에 장비의 장팔사모를 당하지 못해 황망
히 달아났기 때문이었다. 장비가 도망가는 마대를 뒤쫓으려 하는데 관에서 한
사람이 말을 달려오면서 소리쳤다.
"아우는 그만두게. 갈 것 없네."
그 소리에 장비가 뒤돌아보니 유비가 달려오고 있었다. 유비는 장비와 함께
관으로 돌아가며 말했다.
"자네 성미가 급해 가볍게 싸움에 말려들까 걱정되어 달려왔다네. 이미 마대를
쫓아 버렸으니 오늘은 군마를 쉬게 하고 내일 다시 마초와 싸우도록 하게!"
다음 날이었다. 유비가 관 아래를 내려다보니 북 소리와 함께 마초의 군사가
물밀 듯이 밀려오고 있었다. 그 맨 앞에 창을 들고 말을 이리저리 몰며 유유히
뒤따르는 장졸들의 의기를 돋우며 달려오는 장수가 있었는데 그가 바로 마초였
다. 마초는 머리에 사자 모양의 투구를 쓰고, 허리에는 짐승을 그린 띠에다 몸에
는 은빛 갑옷을 입고 있었다. 그 차림새가 기품이 있어 보이면서도 날래 보이며
인물 또한 빼어났다.
유비가 그 모습을 보자 절로 감탄하고 말았다.
"사람들이 마초의 헌걸찬 모습을 칭송하며 금마초(비단같은 마초라는 뜻)라고
한다더니 과연 듣던 대로구나!"
유비가 마초를 보고 입에 침이 마르도록 추켜세우자 장비는 어금니를 악물며
부르르 떨었다. 장비는 더는 참지 못하고 말 위에 오르는데 유비가 급히 말렸다.
"잠깐만 기다려라. 먼저 마초의 날카로움을 피한 후에 기회를 보도록 하라."
그런데 마초 또한 성미가 급한 장수가 아닌가. 장비가 마주 나오지 않자 참지
못하고 관 아래에서 소리쳤다.
"장비는 어디 숨었느냐? 내가 오니 지레 겁을 먹었느냐? 어서 썩 나오지 못할
까?"
장비가 그 소리를 듣자 두 주먹을 움켜쥐더니 금방 말을 달려나갈 기세였다.
그럴 때마다 유비가 장비를 말렸다.
마초가 관 아래에서 욕을 퍼부으며 싸움을 돋우고 유비는 장비를 말리기를 몇
차례나 되풀이하는 사이 한나절이 흘러갔다. 유비가 그때서야 관 아래를 굽어보
았다. 마초의 군사들은 관 안에서 군사들이 나오기를 기다리다 지친 표정으로
마음이 풀어지기 시작했다.
"자, 지금이다. 아우는 서둘지 말고 5백 기만을 거느리고 나가 싸우도록 하라!"
비로소 유비가 영을 내렸다. 장비는 신이 났다. 그 말만을 기다리고 있던 장비
가 관문을 활짝 열어젖히자마자 장팔사모를 비껴잡고 바람같이 내달았다.
마초는 갑자기 장비가 뛰쳐나오자 창을 들어 휘저으며 군사들이 화살이 닿지
않는 거리로 물러나도록 군호를 내렸다. 장비도 군사들을 늘여 세우더니 나아가
지 못하도록 그 자치에 멈추게 했다. 이때 관 안에 있던 군마들도 장비군을 뒤
이어 내려와 뒤를 받치고 있었다.
장비는 마초의 군사들에게는 눈길 한 번 주지 않은 채 오로지 마초를 노려보
며 홀로 말을 몰아 앞으로 나서며 소리쳤다.
"네가 연인 장익덕을 알아보겠느냐?"
마초가 그런 장비를 비웃으며 대꾸했다.
"우리 집은 대대로 공후의 명문이다. 어찌 너따위 두메산골 무지렁이를 알아볼
수 있겠느냐?"
장비가 그 소리를 듣고 참고 있을 리가 없었다. 창을 꼬나잡더니 말을 박차
곧장 마초를 향해 내달았고, 마초도 장비가 나오기를 기다렸다는 듯 말을 몰았
다. 이어 말과 말이 부딪칠 듯이 엇갈리며 창과 창이 부딪쳤다. 억센 두 기운이
창끝에서 부딪치니 불꽃이 일었다. 그 격렬함은 보는 사람의 간담을 서늘하게
했다. 찌르고 막는가 하면 어느 새 후비는 창을 막아 내며 또다시 후리니 보는
이의 눈이 어지러워질 지경이었다.
흡사 성난 독수리 두 마리가 구름 사이에서 서로 부딪쳐 살을 물어뜯는 듯했
다.
그렇게 싸우기 1백여 합, 그러나 어느 한쪽도 물러서지 않으니 승패를 가릴
수가 없었다.
"실로 범 같은 장수들이구나."
유비가 감탄하며 장비가 혹시 실수라도 할까 봐 징을 쳐 장비를 불러들였다.
장비가 자기 진으로 돌아가자 마초도 말머리를 돌려 진으로 돌아갔다.
진으로 돌아온 장비는 싸움을 중도에서 멈춘 것이 마땅치 않은 듯 잠시 말을
쉬게 하더니 투구도 쓰지 않고 머리를 수건으로 싸맨 채 또다시 적진으로 달려
가 마초에게 싸움을 돋우었다.
마초도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이 말을 달려나왔다.
유비는 자기가 말릴 틈도 없이 장비가 말을 달려나가자 아무래도 마음이 놓이
지 않았다. 이에 자신도 투구와 갑옷을 갖춰 입고 군사를 이끌어 관 아래로 내
려갔다.
장비와 마초가 다시 맞붙어 싸운 지 1백여 합, 그러나 두 장수는 여전히 지친
기색 없이 더욱 맹렬한 기세로 싸울 뿐이었다. 두 장수의 싸움이 그렇게 이어지
자 유비가 다시 징을 쳐 군사를 거두게 했다. 두 장수는 승패를 판가름내지 못
한 채 다시 군사를 거두어 본진으로 돌아갔다.
유비는 이미 해가 기울어 가고 있었으므로 싸움을 다음 날로 미루기로 하고
장비를 불러들인 것이었다.
싸울 때마다 징을 쳐 진으로 불러들이기만 하자 장비가 유비에게 볼멘 소리로
투정을 부렸다.
"마초는 용맹이 뛰어난 장수이니 너무 가볍게 보아서는 아니 된다. 싸움은 내
일 다시 하기로 하고 오늘은 날도 저물어 가니 이만 관으로 돌아가 쉬도록 하
게."
유비가 그렇게 말하며 싸움을 만류했지만 장비는 말끝마다 마초를 칭찬하는
유비의 말에 더욱 심사가 뒤틀렸다.
"난 죽어도 돌아가지 않겠소. 조금만 더 싸우면 저놈의 목을 칠 수 있는데 무
엇 때문에 쉰다는 말입니까? 지금 당장 승부를 결정짓겠소."
"하지만 해가 저물었는데 어떻게 싸운다는 말인가?"
"횃불을 밝히면 될 게 아닙니까!"
유비가 장비를 달랬으나 장비는 불 같은 성깔을 억누르지 못해 싸운다고 우겼
다.
진으로 돌아간 마초 또한 장비와 같은 마음이었다. 승패를 결정짓지 못하고
돌아온 게 끝내 마음에 걸렸다.
마초는 다시 말을 바꿔 타고 창을 비껴들고 와 소리쳤다.
"장비야, 네 놈이 불을 밝히고 싸울 용기가 있느냐?"
그러잖아도 싸우기를 유비에게 우기고 있던 참이라 장비가 두말 할 것도 없이
몸을 날려 말 위에 올랐다. 장비가 장팔사모를 치켜들고 달려가며 소리쳤다.
"내가 너를 사로잡기 전에는 맹세코 관으로 들지 않으리라!"
"내가 할 말을 네가 하고 있구나. 나 또한 네놈을 사로잡지 못하면 결코 진으
로 돌아가지 않을 것이다."
두 사람이 그렇게 으르릉거리며 맞서니 양쪽 군사들은 일제히 고함을 지르며
횃불을 밝혔다. 양편 군사가 각기 횃불을 밝히니 그 횃불이 1천여 개나 되엇고,
그 밝기가 한낮과 다름없었다.
두 장수가 휘황한 횃불 아래서 어우러졌다. 이번에야말로 결판을 내겠다는 듯
이 거센 부딪침이 있은 지 20여 합, 그런데 문득 마초가 등을 보이고 달아나기
시작했다.
"이놈, 어디로 달아나려 하느냐?"
장비가 우레같이 소리를 질렀으나 마초는 되돌아보지도 않고 그냥 말을 달릴
뿐이었다. 마초는 장비가 아무리 싸워도 물러설 기색이 없는 것을 보고 꾀를 내
었다.
짐짓 싸움에 진 것처럼 꾸미고 달아나 뒤쫓아오기를 기다려 다른 방법으로 공
격하기로 작정한 것이었다. 그러나 장비도 싸움터를 누빈 맹장이었다. 뒤쫓기는
해도 갑자기 달아나는 마초가 수상쩍어 경계심을 늦추지 않았다. 장비가 한동안
뒤쫓고 있을 때였다. 마초가 갑자기 몸을 홱 돌리더니 쇠 몽둥이를 던졌다. 장비
가 얼른 말 위에 엎드려 피하자 몽둥이는 귓전을 스치고 지나갔다.
이번에는 장비가 꾀를 내었다. 문득 그 몽둥이에 겁을 먹은 듯 급히 말머리를
돌려 달아났다.
그러자 이번에는 마초가 다시 장비를 뒤쫓기 시작했다. 장비는 마초가 급히
자기를 뒤쫓자 갑자기 말을 돌려 세우더니 활에 살을 메겨 마초를 겨누고 쏘았
다. 마초도 장비를 무작정 뒤쫓지만은ㄴ 않고 바짝 정신을 차리고 있었으므로
몸을 틀며 날아오는 화살을 피했다. 화살은 마초의 몸을 아슬아슬하게 스치고
지나갔다.
서로 꾀를 내어 한 번씩 공격을 주고받았으나 그래도 승부가 가려지지 않자
마초는 뒤쫓기를 그만두었다. 장비를 계속해서 뒤쫓으면 결국 장비의 진 쪽이라
더 쫓는건 이롭지 않다고 여겼기 때문이었다. 장비도 마초가 말머리를 돌리자
진으로 돌아왔다.
그러자 유비가 진 앞으로 달려나가며 말머리를 돌려 돌아가는 마초한테 큰 소
리로 타일렀다.
"나는 인의로써 사람을 대할 뿐 결코 속임수를 쓰지는 않는다. 마맹기, 그대는
군사를 거두어 돌아가서 편히 쉬도록 하라. 이번 싸움은 우리가 이롭지만 그 기
세를 몰아서 그대의 군사를 치는 일은 하지 않겠다."
마초도 그 말을 듣자 얼른 군사를 거두었다. 유비의 군세가 자신의 군세보다
많은 것이 사실이었다. 혹시나 유비군이 뒤를 덮치지나 않을까 염려하여 자신이
후군을 맡아 뒤를 방비하며 군사를 물렸다.
마초가 물러나자 유비도 군사를 거두어 가맹관으로 돌아갔다.
다음 날, 날이 밝기가 무섭게 장비는 다시 마초와 싸우려 들었다. 그때 군사
하나가 달려와 아뢰었다.
"제갈 군사께서 오셨습니다."
유비가 뜻밖에 공명이 왔다는 말에 의아로우면서도 반가운 마음으로 달려나가
맞아들였다.
"군사께서는 웬일로 이리로 오시었소?"
유비는 면죽을 지키고 있어야 할 공명이 왔으므로 반가운 가운데 그렇게 물었
다.
"마초는 천하에 둘도 없는 범 같은 장수라 듣고 있습니다. 두 장수를 싸우게
둔다면 반드시 한쪽이 목숨을 잃게 될 것이니 조자룡과 황현승(황충)에게 면죽
을 맡기고 이리로 달려온 것입니다. 제가 계책을 써서 마초를 주공께 투항하도
록 해 보겠습니다."
바로 유비가 바라던 바라 공명의 말에 반색을 하며 물었다.
"나 역시 마초의 빼어난 용맹을 아깝게 여기고 있던 터요. 어떻게 하면 그를
내 사람이 되게 할 수 있겠소?"
"제가 들은 바로는 동천의 장로가 스스로 한녕왕이 되려 한다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그 수하인 모사 양송은 몹시 뇌물을 좋아한다고 합니다. 주공께서는 지
름길로 사람을 보내 은밀히 금은보화를 주어 그의 마음을 사로잡도록 하십시오.
그런 다음 장로에게 글을 보내도록 하십시오."
"어떻게 글을 써야 되겠소?"
"주공께서는 '내가 유장과 서천을 다투는 것은 곧 그대의 원수를 갚기 위한 것
도 되니 그대는 결코 우리 둘 사이를 이간질하려는 무리들의 말에 귀를 기울이
지 말라'고 하십시오. 또한 '내가 서천을 얻은 뒤에는 반드시 그대를 천자께 상
주하여 한녕왕에 오르게 해 줄 것인즉 마초를 불러들이도록 하라'고 쓰십시오.
그리하여 장로가 마초를 한중으로 불러들일 때는 제가 다시 계책을 써서 그를
항복하게 하겠습니다."
공명이 양송에게 금은보화를 미리 주어 그의 마음을 사로잡아 놓으려는 뜻을
알게 되자 유비는 새삼 공명의 계책에 고개를 끄덕이며 기뻐했다. 유비는 공명
이 이른 대로 즉시 글을 쓰고 금은과 주옥을 손건에게 주어 지름길로 한중으로
가게 했다.
한중에 이르른 손건은 먼저 양송부터 찾아가 가지고 간 금은주옥을 뇌물로 바
치며 온 뜻을 말했다. 양송은 뇌물을 보자 크게 기뻐하며 벌린 입을 다물지 못
하더니 기꺼이 손건을 장로에게 데려다 주었다.
손건이 장로에게 유비의 글을 바치자 장로는 단숨에 읽어 본 후 양송에게 물
었다.
"현덕의 벼슬이 한낱 좌장군일 뿐이오. 어떻게 그가 나를 천거하여 한녕왕이
되도록 할 수 있다는 말이오?"
그 물음에 양송이 서슴없이 대답했다.
"유현덕은 바로 대한의 황숙입니다. 벼슬의 높고 낮음에 관계없이 누구보다도
더 당당히 천자께 아뢸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보다 더욱 이롭다 할 것
입니다."
양송은 입에 침이 마르도록 여러 가지를 유비에게 이롭게 말해 주었다. 모든
일을 양송에게 의논하던 장로인지라 그의 말을 듣고 크게 기뻐하며 즉시 사람을
보내 마초에게 군사를 물리도록 영을 내렸다.
장로가 그렇게 영을 내려 공명의 계책대로 일이 풀려가는 것을 보고도 손건은
돌아가지 않았다. 그는 마초가 군사를 거두어들이는 것을 보기 위해 양송의 집
에 머물렀다.
그런데 다음 날이 되자 마초에게 갔던 사자가 돌아와 뜻밖의 소식을 알려왔
다.
"마초는 공을 이루기 전에는 돌아올 수 없다고 하였습니다."
장로는 자신의 영을 마초가 거스르자 크게 노하며 다시 사람을 보내 그를 불
렀다. 그러나 이번에도 마초는 장로의 부름을 거절했다. 장로는 두 번 세 번에
걸쳐 마초를 불렀으나 끝내 돌아오지 않았다. 기회를 보아 아우 양백과 함께 마
초를 죽여 없애기로 작정하고 있던 양송이 이를 보고 가만히 있지 않았다.
"마초는 원래부터 믿지 못할 사람이었습니다. 주공께서 내리신 영을 거슬러 가
며 군사를 거두지 않음은 필시 그가 다른 마음을 품고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양송은 장로에게 마초를 그렇게 모해하는 한편 사람들에게 널리 거짓 소문을
퍼뜨리게 했다.
"마초는 원래 서천을 빼앗아 스스로 촉의 주인이 되어 아비의 원수를 갚을 야
심을 지녔을 뿐, 결코 한중을 받들려는 마음이 아니었다."
여러 사람들의 입과 입으로 이 말이 전해지니 장로의 귀에 들어가지 않을 수
없었다. 장로는 곧 양송을 불러들여 이 일을 노기 띤 목소리로 물었다.
"마초 그놈이 은혜를 모르고 도리어 한중을 넘보고 있다고 하오. 이 일을 어찌
했으면 좋겠소?"
일이 이렇게 되기를 기다리고 있던 양송이었다. 짐짓 정색을 하고 생각해 두
었던 계책을 장로에게 말했다.
"사람을 보내 마초에게 이르도록 하십시오. '네가 기어이 공을 이루겠다면 한
달의 기한을 주되 세 가지 공을 이루라'고 하십시오. 그 세 가지 공이란 '첫째는
서천을 뺏어야 할 것이며, 둘째는 유장의 목을 베어야 할 것이며, 셋째는 유비의
형주 군사를 물리치라'고 하십시오. 만약 '이 세가지 공을 이루면 상을 내릴 것
이로되 그렇지 못하면 너의 목을 바쳐애 한다'고 하십시오. 그리고 다른 한편으
로는 장위에게 군사를 주어 모든 관을 굳게 지키게하여 마초가 이곳으로 이르지
못하게 하십시오. 그렇게 한다면 마초가 변란을 일으킨다 할지라도 염려하지 않
으셔도 될 것입니다."
장로가 들으니 양송의 말이 묘책이 아닐 수 없었다. 곧 양송의 말을 좇아 사
람을 보내 세 가지 조건을 마초에게 전하게 했다.
장로가 보낸 사자에게 그 말을 전해 들은 마초는 크게 놀라지 않을 수 없었
다. 세 가지 일을 단 한 달 안으로 해내라니 그건 자기를 없애겠다는 소리나 다
름없었다.
"내게 어찌 이럴 수가 있다는 말이냐? 그새 마음이 변해 나를 없애려고 한다
는 말인가?"
마초는 길게 탄식하며 아우 마대를 불렀다. 마대를 불러 이 일을 의논했으나
마대라고 달리 묘안이 있을 리 없었다. 마초는 하는 수 없이 군사를 거두기로
하고 마내에게 일렀다.
"장로가 내건 세 가지 조건을 한 달 안에 어떻게 이룰 수 있겠느냐? 차라리
싸움을 그만두고 군사를 거두어 돌아가는 수밖에 없다."
그런데 마초가 군사를 거두어 한중으로 돌아오려 한다는 보고를 받자 양송은
또 소문을 퍼뜨리게 했다.
"마초가 군사를 되돌려 오는 것은 곧 한중을 치기 위해서다."
장로의 귀에도 곧 이 소문이 들어갔다. 장로는 곧 장위에게 군사를 주며 한중
으로 들어오는 일곱 군데의 관소를 굳게 지켜 마초를 막게 했다.
이렇게 되자 마초는 이제 한중으로 갈 수도 없고 그렇다고 군사를 이끌어 나
아갈 수도 없는 처지가 되고 말았다.
한편 한중과 마초의 이 같은 내막을 전해 듣게 된 공명이 유비에게 말했다.
"지금 마초는 나아갈 수도 물러설 수도 없는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이제는 제
가 가서 마초를 만나 세 치 썩지 않은 혀로 그를 달래 항복하도록 해 보겠습니
다."
공명의 말에 유비가 깜짝 놀라면 만류했다.
"선생은 나의 고굉(팔과 다리같이 소중함)이시오. 함부로 마초를 찾아갔다가
무슨 변이라도 당하면 어쩌시려고 이러시오?"
"제가 이미 일이 이렇게 될 줄 알고 헤아려 둔 바가 있습니다. 주공께서는 걱
정하지 마십시오."
유비의 만류에도 공명이 굳이 가겠다고 우겼다. 그러나 유비가 선뜻 허락하지
않고 있는데 수하 사람이 와서 아뢰었다.
"조자룡 장군의 추천장을 가진 사람이 서천에서 투항해 왔습니다."
유비가 서천에서 온 사람이라는 말에 급히 그를 불러들이도록 했다. 유비가
그를 불러들이고 보니 촉의 선비 이회였다. 그는 건녕 유원 사람으로 자를 덕양
이라 썼는데 그가 조운에게 항복해 온 것이었다.
이회는 이전에 유장이 유비를 서천으로 불러들이려 하자 이를 반대했던 사람
중의 하나였다. 유비가 뜻밖에도 그가 투항해 오자 의아로운 얼굴로 물었다.
"그대는 일찍이 유장에게 나를 서천으로 들이지 말라고 진언하였다고 알고 있
소. 그런데 지금 나에게 투항하니 그 까닭이 무엇이오?"
"제가 알기로는 '어진 새는 나무를 가려서 깃들고 어진 신하는 주인을 가려서
섬긴다'고 하였습니다. 제가 이전에 유익주에게 진언한 것은 그의 신하로서 도리
를 다하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러나 제 말을 듣지 않으니 그가 패할 것은 뻔한
이치입니다. 그런데 장군께서는 어지심과 덕을 촉 땅에 널리 베푸시니 반드시
뜻하신 바를 이루실 것입니다. 그러니 이를 알고도 어찌 유장의 휘하에 머물 수
가 있겠습니까?"
이회는 자신이 품고 있던 생각을 솔직하게 말했다. 유비는 그의 당당한 태도
에 호감이 가 부드러운 목소리로 다시 물었다.
"선생께서 이렇게 오셨으니 반드시 가르침을 주시리라 믿습니다. 어떤 가르침
을 주시겠소?"
"제가 듣건대 지금 마초는 오도가도 못할 고단함에 빠져 있다 합니다. 제가 전
에 농서에 있을 때 그와 사귄 적이 있습니다. 바라건대 제가 가서 그를 장군께
항복하도록 한 번 달래 볼까 합니다. 장군의 뜻은 어떠하신지요?"
이회가 유비의 물음이 서슴없이 대답했다. 공명이 이 말을 듣고 이회에게 말
했다.
"그렇지 않아도 나 대신 갈 사람을 찾고 있던 중이었소. 그런데 선생께선 마초
에게 가서 어떻게 달래려고 하시오?"
이회는 지체하지 않고 공명에게 귀엣말로 무어라고 소곤대었다. 공명이 고개
를 끄덕이며 이회의 말을 듣고 크게 기뻐하며 그를 마초에게 가게 허락했다.
마초의 진영에 이른 이회는 문을 지키는 군사에게 우선 자기의 이름부터 마초
에게 알리게 했다. 군사는 곧 마초에게 달려가 이회라는 사람이 찾아왔음을 알
렸다.
'이회가 왔다는 말인가? 나는 그가 말을 잘 하는 선비라는 것을 알고 있다. 그
가 온 것은 분명 나를 달래려고 온 것이리라!'
마초는 혼자말처럼 중얼거리더니 도부수 스무 명을 불러 명을 내렸다.
"내가 너희들더러 그를 '죽이라!'고 소리치거든 지체없이 달려나와 난도질해
버리도록 하라!"
마초는 그렇게 영을 내린 후 이회를 불러들이도록 했다. 얼마 되지 않아 이회
가 마초의 장막 안으로 들어왔다.
마초는 이회가 들어오자 매서운 눈길로 바라보며 앉은 자리에서 꼼짝도 않은
채 차가운 목소리로 물었다.
"그대는 무슨 일로 내게 왔는가?"
마초의 그 목소리는 지난날 사귄 사람을 대하는 태도가 아니라 마치 적을 문
초하는 것과 다름이 없었다. 그러나 마초의 살기 띤 눈초리를 보면서도 이회는
조금도 움츠러드는 기색이 없이 목소리를 높여 말했다.
"오늘 특별히 온 것은 세객이 되어 장군을 달래려고 왔소."
이회가 막상 그렇게 나오니 마초도 일순 말문이 막혔으나 곧 목소리를 높이며
다시 말했다.
"내 칼집에 보검을 갈아 놓았으니 어디 하고 싶은 말을 마음대로 해보아라. 만
약 그대의 말이 이치에 닿지 않을 때는 당장 내 검의 칼날을 시험하리라."
마초가 그렇게 말하며 이회를 노려보았으나 그는 조금도 두려운 기색없이 껄
껄 웃더니 대꾸했다.
"장군에게 화가 닥쳐오니 새로 갈아 놓았다는 그 칼을 내 목에 시험하기 전에
먼저 장군 목에 시험해 볼까 걱정이오."
"내가 화가 닥친다니, 그게 무슨 말이냐?"
이회가 변설에 능하다는 것을 마초가 모르는 바가 아니었다. 그러나 자신에게
화가 미친다는 말에 그 까닭이나 들어 보자는 생각에서 물었다.
이회가 기다렸다는 듯이 서슴없이 입을 열었다.
"내가 듣건대 아무리 남을 헐뜯기 좋아하는 사람도 월나라 서자(전국 시대의
미녀 서시)의 아름다움은 감출 수가 없었소. 또한 아무리 남의 칭찬을 잘하는 사
람도 제나라 무염(전국시대의 현부인, 추녀로 유명함)의 추함을 가리지는 못한다
하였소. 해도 한낮이 지나면 기울게 마련이고 달도 차면 다시 기울게 마련인 것
이 천하의 이치요. 지금 조조는 장군의 아비 죽인 원수이며, 또 농서 사람들에게
도 뼈에 사무친 원한을 품게 하였소. 장군은 앞으로는 형주 군사를 물리쳐 유장
을 구원하지도 못했으며, 뒤로는 장로를 대할 수도 없게 되었소이다. 그러니 장
군은 사해에 몸을 의탁할 곳이 없는 몸이며 주인이 없는 딱한 신세가 되어 버렸
소. 만약 다시 지난번 위교 싸움에서 조조에게 쫓길 때나 기성에서 쫓겨날 때와
같은 일을 당할 때는 무슨 낯으로 천하 사람들을 대하겠소?"
마치 대나무를 쪼개 내듯 마초의 가장 아픈 데를 여지없이 찌르고 들어가는
조리 있는 이회의 말이었다. 마초는 그 말을 듣자 이회에게 허세 부리는 것이
부질없는 짓임을 알고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공의 말씀이 지당하오. 나는 지금 가려 해도 앞으로 나아갈 길이 없는 몸이
오."
그러자 이회가 대뜸 마초에게 꾸짖듯이 물었다.
"공이 내 말을 알아들었다면 어찌하여 장막 뒤에 숨겨 둔 도부수들을 그냥 두
고 있소?"
이회가 도부수들을 숨겨 둔 것까지 처음부터 알고 있었다는 듯이 말하자 마초
가 몹시 부끄러워하며 급히 도부수들을 꾸짖었다.
"어쩐 일로 네놈들이 장막 뒤에 숨어 있었다는 말이냐? 썩 물러가지 못할까?"
그 소리에 도부수들이 머리를 싸매고 달아났다. 도부수들이 물러나자 이회는
비로소 마초에게 찾아온 뜻을 밝혔다.
"유 황숙께서는 어진 이들을 예를 다해 대접하고 몸을 숙이는 분이니 나는 그
뜻한 바를 이루리라고 믿소. 나는 그 때문에 유장을 버리고 유 황숙께로 간 것
이오. 뿐만 아니라 일찍이 공의 선친께서는 유 황숙과 함께 역적을 치기로 맹세
한 터였소. 만약 공이 유 황숙을 이긴다 하더라도 기뻐할 사람이 누구이겠소. 그
건 바로 공의 원수인 조조요. 그런데 공은 어찌하여 어둠을 벌리고 밝음을 찾으
려 하지 않으시오? 공은 밝은 주인에게 의지하면 위로는 아버님의 원수를 갚고
아래로는 공명을 도모할 수도 있지 않겠소?"
마초는 이회의 말에 그제야 크게 깨닫는 바가 있었다. 고개를 끄덕이며 이회
의 말에 따를 뜻을 밝힌 후 곧 함께 온 장로의 장수 양백을 불러들여 목을 베었
다. 원래 장로의 사위가 되는 걸 막았던 양백을 죽이기로 작정했던 마초였지만
이회 앞에서 양백을 죽여 이젠 장로의 장수가 아님을 보여 주기 위함이었다.
마초는 양백을 목벤 후 곧바로 군사를 거느려 가맹관으로 가 유비에게 항복했
다.
처음부터 마초를 자기 사람으로 만들고 싶었던 유비였다. 마초가 스스로 항복
해 오자 친히 나아가 귀한 손님을 맞는 예로써 맞아들였다.
유비가 그토록 두텁게 자기를 맞아들이자 마초는 감격해 땅에 엎드려 머리를
조아리며 고마움을 표했다.
"이제 밝은 주인을 만났으니, 마치 구름과 안개를 헤치고 비로소 맑은 하늘을
뵙는 듯합니다."
유비는 마초를 손수 부축해 일으켰다.
한중 땅에 유비의 사자로 가 있던 손건도 마초가 한중으로 들 수 없게 되자
가만히 몸을 빼쳐 가맹관으로 돌아와 있었다.
유비 익주목이 되다
유비에게 항복한 마초는 서천 군사를 몰아 유장에게 항복할 것을 권한다.
마음 약한 유장은 익주를 유비에게 바치고 유비는 익주목이 되어 나라와 백성을
안정시키는 한편, 그 동안 싸움에 지친 군사들에게 후한 상을 내린다.
마초가 항복해 오자 유비는 가맹관을 지키는 일도 이제 크게 염려할 필요가
없었다. 이에 곽준, 맹달 두 장수에게 가맹관을 맡겨 지키게 했다. 그리고 유비
는 나머지 군사를 이끌고 성도를 치기 위해 면죽땅으로 향했다.
유비가 면죽에 이르자 조운과 황충이 나와 맞아들였다. 유비가 성 안에 들어
성도 칠 일을 의논하는데 수하 사람이 들어와 알렸다.
"촉의 장수 유준과 마한이 군사를 이끌고 와 싸움을 돋우고 있습니다."
그 말이 끝나기도 전에 조운이 나섰다.
"제가 가서 그들을 사로잡아 오겠습니다."
조운은 그 말과 함께 말 위로 몸을 날리더니 군사를 이끌고 나갔다. 유비는
조운이 떠나자 마초를 대접하기 위해 성 위에 술상을 마련하게 했다. 그런데 아
직 술상이 다 마련되기도 전에 조운이 어느 새 적장 유준과 마한의 목을 베어
가지고 왔다. 천하의 맹장 마초도 그토록 날랜 조운의 무용에 속으로 은근히 감
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에 마초는 자신의 무용도 떨쳐 보이고 항복해 온 장
수로서 공을 세우고 싶은 마음에 유비에게 말했다.
"이제 주공께서는 군마를 수고롭게 할 것 없이 제가 유장을 불러내어 항복하
도록 달래 보겠습니다. 만약 항복을 하지 않는다면 마대와 함께 성도를 떨어뜨
려 주공께 두 손으로 받들어 올리겠습니다."
유비는 몹시 기뻐하며 그날은 밤늦도록 잔치를 열어 마초를 위로했다.
그 무렵, 싸움에 패한 서천 군사들은 익주로 돌아가 유장에게 알렸다.
"유준, 마한 두 장수는 조자룡과 싸우다 죽었으며 저희들은 패한 채 도망쳐왔
습니다."
유장은 두 장수가 몇 합을 부딪지도 못한 채 목이 떨어졌다는 말을 듣고 크게
놀랐다. 그 이후로는 성문을 굳게 닫은 채 나가지 않았다.
그런 어느 날 수문장이 달려와 알렸다.
"성 북쪽에 마초가 구원군을 이끌고 왔습니다."
마초가 이미 유비에게 항복한 걸 모르고 있는 군사라 유장에게 그렇게 말했
다. 유장은 그러나 선뜻 성문을 열기가 두려워 우선 그들을 살펴보기 위해 성
위로 올라가 보니 과연 마초와 마대가 성 아래에 있다가 소리쳤다.
"청컨데 유계옥은 잠시 나오시오. 내가 할 말이 있소이다."
"말씀해 보시오."
유장이 성 위에서 내려다보며 외쳤다. 그러자 마초는 말 위에서 말채찍을 치
켜들며 성 위를 보고 목소리를 높여 외쳤다.
"나는 원래 장로의 군사를 거느리고 익주를 구하러 왔었으나 누가 알았겠소?
장로는 양송의 모략만을 듣고 도리어 나를 해치고자 하므로 나는 유 황숙에게
항복하고 말았소. 공께서도 항복하시어 성 안 백성들의 고초를 면하게 하시오.
만약 항복하지 않고 어리석은 고집을 피운다면 내가 먼저 이 성을 칠 것이오."
유장은 그 소리에 깜짝 놀라 얼굴이 흙빛으로 변했다. 한중의 장로가 구원군
을 보낸 걸로 알고 있었는데 이제 마초마저 유비와 함께 공격하려 하니 하늘이
무너져내리는 것만 같았다. 마음 약한 유장은 몹시 놀라 이내 성벽 위에 혼절해
쓰러지고 말았다. 모든 벼슬아치들이 또한 놀라며 쓰러진 유장을 부축해 자리에
뉘였다. 반식경이 지나서야 정신을 차린 유장이 탄식하며 힘없는 목소리로 말했
다.
"나의 헤아림이 어리석었음을 뉘우치고 있으나 이제 때가 너무 늦었소. 성문을
열고 항복하여 백성들이나 구하도록 해야겠소."
그러자 동화가 결연한 목소리로 유장의 말을 가로막고 나섰다.
"성 안에는 아직도 군사가 3만이나 남아 있으며 군량과 마초도 1년은 더 버틸
만합니다. 그런데도 어찌 항복을 하려 하십니까? 아니 됩니다."
그러나 유장은 더 이상 싸울 마음조차 없는 듯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우리 부자가 촉을 다스린 지 20년이 되었건만 백성들에게 베푼 은덕이 없었
소. 게다가 3녀여를 싸우는 동안 애꿎은 백성들의 뼈와 살만 들판에 굴렸으니
이것이 다 나의 죄가 아니고 무엇이겠소? 그러니 어찌 내 마음인들 편안할 리가
있겠소? 차라리 항복하여 백성들의 고초나 면하게 해 주는 것이 옳을 것이오."
유장이 처량한 목소리로 그렇게 말하자 곁에 있던 모든 벼슬아치들이 한결같
이 눈물을 흘렸다. 그때 벼슬아치들 중의 한 사람이 나서며 결연히 외쳤다.
"주공의 말씀이 하늘의 뜻과 같습니다."
모두들 그 사람을 보니 그는 파서군 서충국 사람으로 이름이 초주요, 자는 윤
남이었는데 일찍부터 천문에 밝은 사람이었다.
"내 말이 하늘의 뜻에 맞는다니, 어찌하여 그렇다는 말이오?"
유장이 뜻밖의 말에 궁금한 듯 물었다.
"제가 밤에 별자리를 보니 뭇 별들이 촉군으로 모여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중
에서도 큰 별 하나가 있었는데 그 광채가 마치 보름달같이 제왕의 기운이 서려
있었습니다. 더구나 1년 전부터 아이들이 부르는 노래 가운데는 이런 노래가 있
었습니다.
'만약 새밥을 먹으려거든, 선주(유비)께서 오실 때를 기다려 보세' 이 노래는
바로 이런 일이 벌어질 것을 미리 알려준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결코 하늘의
뜻을 거슬러서는 아니 될 것입니다."
그 소리를 듣자 유비가 서천으로 들 때부터 반대하던 황권과 유파는 크게 노
하여 칼을 빼들고 초주의 목을 치려 했다. 그러나 이미 항복하기로 마음을 정한
터라 유장이 두 사람을 말렸다. 그때 한 사람이 들어와 알렸다.
"촉군태수 허정이 성을 빠져 나가 마초에게 항복했습니다."
또 한 번 유장의 기를 꺾는 소리였다. 유장은 여러 장수들이 투항하고 이제
성 안의 신하마저 적에게로 가 버리자 슬픔을 가누지 못해 목을 놓아 울더니 부
중으로 들어가 버렸다. 유장이 자리를 뜨니 그날의 의논은 결말을 보자 못한 채
모두 흩어지고 말았다.
다음 날이었다. 문을 지키는 장수 하나가 들어와 알렸다.
"유 황숙의 막빈인 간옹이란 자가 와서 주공을 뵙고자 합니다."
유장은 그를 물리침은 곧 싸움을 자청하는 격이 되니 그를 맞아들이지 않을
수 없었다.
"성문을 열고 맞아들이도록 하라."
유장이 힘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문을 지키는 장수가 성문을 열고 간옹을 맞아들였다. 간옹은 수레를 타고 성
안으로 들어오는데 마치 성을 함몰시킨 장수인 양 자못 거만스런 태도였다. 간
옹의 그런 오만스런 태도를 보다못해 문득 한 사람이 칼을 빼들며 큰 소리로 꾸
짖었다.
"되지 못한 놈이 저희들 뜻대로 일이 되어 가는 듯하니 벌써부터 사람을 업신
여긴다는 말이냐? 네가 감히 우리 촉 땅 사람들을 우습게 본단 말이냐?"
간옹이 그 소리에 놀라 보니 그는 광한군 면죽 사람으로 이름이 진복이요, 자
는 자칙이었는데 간옹과는 이전에 사귄 적이 있는 사람이었다. 간옹은 황망히
수레에서 내려 진복에게 머리를 숙이며 사과의 말부터 꺼냈다.
"현형이 여기 있는 것을 몰라보았소. 부디 너무 나무라지 마시기 바라오."
간옹은 진복에게 공손한 어조로 그렇게 말하자 진복도 가까스로 화를 누그러
뜨렸다.
간옹은 진복과 함께 성 안에 들어가 유장을 만나자 간곡한 어조로 유비의 너
그러움과 넓은 도량을 말하며 항복을 권했다.
"유 황숙께서는 밝으시고 너그러우시니 결코 해칠 뜻이 없으십니다."
유장도 이미 마음이 기울어진 터라 더는 머뭇거리지 않았다. 항복할 뜻을 간
옹에게 말하고 그를 후하게 대접했다.
다음 날이었다.
유장은 몸소 태수의 인수와 문서를 간옹에게 건네 준 다음 함께 수레를 타고
성 밖으로 나갔다. 유장이 항복하러 온다는 전갈을 받은 유비는 친히 영채 앞에
나와 유장의 손을 잡고 눈물을 흘리며 말했다.
"내가 어찌 인의를 저버릴 수 있으리오. 그러나 대세는 어찌할 수 없으니 이
현덕을 너무 원망하지는 말게."
유비가 눈물까지 흘리며 간곡히 말하자 유장도 그 두터운 후의에 목이 메었
다. 두 사람은 함께 유비의 영채로 들어서자 유장은 인수와 문서를 유비에게 넘
겨 주었다. 이에 유비는 유장과 말머리를 나란히하여 성으로 들어갔다.
유비와 유장이 성으로 들어가자 백성들은 향을 사르고 향기로운 꽃과 등촉을
내걸고 집 밖으로 나와 영접했다. 백성들의 괴로움을 면해 주기 위해 항복한 유
장과 새 주인이 익주를 더욱 든든하게 지켜 주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두 사람을
모두 환영하는 것이었다.
유비가 공청에 이르러 당 위에 오르자 고을 안의 모든 벼슬아치들이 당 아래
에 모여 절을 올렸다. 그러나 오직 황권과 유파만은 집에 들어앉아 문을 닫은
채 그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유비의 장수들이 분개하여 외쳤다.
"황권과 유파가 어찌 이리 무례할 수가 있다는 말이오? 당장 집으로 찾아가
목을 베어 버려야겠소."
장수들이 그렇게 떠들며 당장 그 두 사람의 집으로 달려갈 기세였다. 그러자
유비가 황급히 영을 내려 그들을 만류했다.
"그만두거라. 만약 두 사람을 해치는 사람이 있으면 내가 그 3족을 죽이리라!"
유비는 끝내 두 사람이 유장에게 충절을 꺾지 않은 것을 가상히 여겼다. 그리
고 유비는 엄명을 내린 후에 몸소 두 사람의 집으로 찾아가 다시 이전처럼 벼슬
길에 오르기를 권했다. 황권과 유파는 유비가 몸소 찾아와서 은덕을 베푸니 감
복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에 두 사람은 다시 유비를 섬기기로 맹세했다.
성 안의 일이 평정되자 공명이 유비에게 권했다.
"이제 서천은 평정되었습니다. 그러나 한 성 안에 두 주인이 있을 수 없으니
유장을 형주로 보내도록 하십시오."
"내가 촉군을 얻은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어찌 유계옥을 멀리 내보낼 수가
있겠소?"
유비는 유장을 내쫓는 것 같아 마음이 선뜻 내키지 않았다. 그러자 공명이 그
런 유비의 마음에 정색을 하며 깨우쳤다.
"유장이 자신의 기업을 잃어 버린 것은 그 마음이 너무 약했기 때문입니다. 주
공께서도 그런 아녀자 같은 인정으로만 일을 처결하신다면 이 땅도 결코 오래
보전치 못할까 걱정됩니다."
공명이 그렇게까지 매섭게 유비를 몰아붙이니 유비도 그 말을 좇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날로 크게 잔치를 열어 유장을 위로하며 전위장군의 인수를 주고 재
물을 수습케하여 남군 공안으로 옮겨 살도록 했다. 그리하여 유장은 촉을 떠나
그 지위와 처소를 바꾸어 공안에서 여생을 보내는 몸이 되었다.
유장이 떠나고 없자 유비는 스스로 익주목이 된 후에 항복한 모든 촉의 벼슬
아치들에게 후한 상과 벼슬을 내렸다.
엄안을 전장군으로 삼고, 법정을 촉군태수로, 동화를 장군 중랑장에, 허정은
좌장군 장사, 방의를 영중사마로, 유파를 좌장군, 황권을 우장군으로 삼았다. 그
리고 나머지 오의, 비관, 팽양, 탁응, 이엄, 오란, 뇌동, 이회, 장익, 초주, 진복, 여
의, 곽준, 등지, 양홍, 주군, 비위, 비시, 맹달 등 항복했던 벼슬아치들에게 각기
벼슬을 내리니 유비 휘하에 든 촉의 사람들이 60여 명이나 되었다.
유비는 이어 공명을 군사로 삼고 관우를 탕구장군 한수정후에, 장비는 정원장
군 신정후로 삼았다. 조운에게 진원장군, 황충은 정서장군, 위연에게는 양무장군,
마초는 평서장군으로 재수했다. 또한 손건, 간옹, 미방, 미축, 유봉, 관평, 주창,
요화, 마속, 장완, 마량, 이적 등 옛부터 거느렸던 문무백관 모두에게 벼슬을 내
리고 후한 상을 내렸다.
다만, 공명만은 지난날과 다름없이 군사의 자리에 그대로 머물렀다.
유비는 특별히 관우에게 사자를 보내 황금 5배 근, 은 1천 근에 돈 5천만 전
과 촉 땅에서 나는 비단 천 필을 주고 다른 문무관원들에게도 공에 따라 각기
상을 내렸다.
유비는 거느리던 문무백관에 논공 행상을 내린 후 다시 소와 말을 잡아 크게
잔치를 열어 군사들을 위로했다. 또한 창고를 열어 가난한 백성들에게 쌀을 나
누어 주었다. 유비가 군민 모두에게 후하게 대하며 은덕을 베풀자 유비의 덕을
칭송하며 기뻐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이렇게하여 익주가 안정되어 가자 유비는 성도의 좋은 집과 전답을 거느리고
있는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려고 했다.
"내가 나라를 갖게 되었으니 장수들에게도 집과 전답을 주어 그 가솔들을 편
안하게 살게 해 주어야 하지 않겠는가?"
그렇게 하려면 집과 전답들을 촉 땅 사람들로부터 거두어들여야 했다. 그것은
성이나 나라를 뺏은 사람들이 당연히 행하는 권리였다. 그러나 조운이 나서서
이를 말렸다.
"지금 익주 땅 사람들은 오랜 싸움을 겪어 논밭과 집들이 텅 비다시피 했습니
다. 그러니 집과 땅을 마땅히 백성들에게 되돌려 주고 편안히 농사를 짓게하여
살도록 해야 민심이 따를 것입니다. 백성들의 집과 땅을 뺏어 관원들의 상으로
내리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유비는 그 동안 공을 세운 장수들에게 보답키 위해 집과 전답을 나누어 주려
고 했던 것인데 조운이 그렇게 말하자 크게 기뻐했다. 곧 집과 전답 나누는 일
을 중지하고 그 대신 공명에게 나라를 다스리는 법 조례를 만들게 했다.
공명은 며칠이 지나지 않아 법 조례를 만들었다. 그런데 그 법이 너무나 엄했
다. 법정이 그 법 조문을 보고 공명에게 말했다.
"옛적에 한 고조께서 세 조문으로 간략하게 법을 정했기 때문에 백성들은 그
은덕에 감복했습니다. 군사께서도 황조와 같이 법을 간추려 백성들에게 관대히
하시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그러나 공명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그대는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시는구려. 한 고조는 그 전의 진나라가 너무 포
악한 법을 써서 모든 백성들이 원망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으므로 그 반대로 너
그러움으로 법을 줄이어 민심을 수습했던 것이오. 그러나 지금은 그때와 다르오,
유장은 어둡고 약해 덕을 베풀지 않았으면서도 형벌과 위엄으로 기강도 세우지
못했소. 그러니 백성도 따르지 않고 임금과 신하의 도리마저 어지러워졌던 것이
오. 가까이하는 자만 벼슬을 높이고 따르는 자에게만 은혜를 베풀면 임금에게
느슨해지게 마련이니 어찌 유장이 망하지 않고 배기겠소. 내가 이제 위엄을 보
이되 법으로써 행하고 법이 행해지면 참다운 은혜를 알게 될 것이오. 또한 벼슬
에는 차등을 두어 벼슬이 오르면 그것이 곧 영화로움임을 알 게 할 것이며 은혜
와 영화를 함께 얻으면 위와 아래의 절도가 있게 마련이니 이로써 다스리는 도
리가 비로소 드러나게 될 것이오."
공명이 단숨에 그렇게 말을 끝맺자 법정은 깊이 탄복하고 말았다.
며칠이 지나지 않아 국령, 군법, 형법 등이 조령에 걸쳐 병부가 설치되었다.
각 주에 파견된 장수들이 백성들을 지키고 다스리는 한편 어려움을 위로해 주
니 서촉은 점차 안정을 되찾았다.
그때 법정은 촉군태수를 지내고 있었는데 다스리는 고을에서 지난날의 은혜와
원한을 가림이 지나칠 정도라 흉을 본 이가 많았다. 작은 은혜라도 잊지 않고
보답하는 대신 사사롭고 하찮은 원한도 잊지 않고 앙갚음을 하지 않은 것이 없
었다. 보다못해 누군가가 공명에게 이 사실을 고해 바치며 덧붙여 아뢰었다.
"효직이 너무 지나치게 하찮은 원한까지 들춰내 앙갚음을 하니 군사께서 좀
꾸짖어 주십시오."
그러나 공명은 머리를 내저으며 말했다.
"지난날 주공께서 형주를 지키고 계실 때의 딱한 처지를 생각해 보시오. 북으
로는 조조를 두려워했으며 동으로는 손권을 경계해야 했었소. 그 난국을 헤치고
오늘날 주공께서 날개를 펼칠 수 있었던 것은 효직의 크나큰 보좌가 있었기 때
문이었소. 그런데 이제 효직이 하고 싶은 대로 좀 하는데 그런 작은 일로 어찌
그를 나무랄 수 있겠소?"
공명이 법을 시행함에 공정하고 엄했으나 이제 갓 임지로 가 고을을 다스리느
법정을 지난날의 공훈을 생각해서라도 꾸짖고 싶지 않았다. 또한 법정이 언제까
지나 그런 도량 좁은 앙갚음을 계속하리라고 보지 않았다. 과연 법정은 이 이야
기를 전해 듣고 부끄러움을 느껴 그 뒤는 남의 원성을 살 일은 삼갔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유비가 공명과 함께 한가롭게 이야길 나누고 있는데
관우가 하사받은 금과 은에 대한 고마움을 전하고자 사자로 보낸 관평이 익주에
당도했다. 유비가 관평을 불러들이게 했다. 관평이 유비에게 절을 하고 나서 관
우의 글을 올리며 말했다.
"아버님께서 마초의 무예가 빼어나다는 소문을 들으시고 이곳 서천으로 와서
한 먼 겨루어 보고자 하십니다. 백부님의 허락을 받아 오라 하셨습니다."
그 말에 유비는 몹시 걱정스런 얼굴로 공명을 보며 물었다.
"만약 운장이 와서 마맹기와 무에를 겨룬다면 둘다 무사하기 어려을 것이오.
어찌했으면 좋겠소?"
그러나 공명이 빙그레 웃으며 유비를 안심시켰다.
"걱정하실 일이 아닙니다. 제가 운장에게 글을 써 보내겠습니다."
유비는 그 말을 듣자 공명을 재촉했다. 미처 공명의 글을 받기도 전에 관우가
성도로 달려올지도 모를 일이라 공명이 글을 쓰자마자 곧 관평에게 주어 형주로
가게 했다.
관평은 그 길로 황급히 형주로 달려가 관우에게 공명의 글을 전했다. 그러자
관우가 궁금한 듯 관평에게 물었다.
"내가 마맹기와 겨뤄 보고 싶다는 말을 전하였느냐?"
"말씀드렸더니 군사께서 글을 전하라고 주셨습니다."
그 말에 관우는 얼른 글을 뜯어 보았다.
장군이 맹기와 무예를 겨뤄 보고 싶으신 뜻은 잘 알겠소이다. 그러나 제가
생각건데 맹기의
무예와 용맹이 남달리 빼어나다 하나 옛날의 경포와 팽월(둘다 한 고조 휘
하의 맹장)의 무리
에 지나지 않습니다. 익덕과 겨룬다면 앞을 다툴 것이나 미염공의 절륜함에
는 이르지 못할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장군께서는 형주를 지키는 중한 책임을 지고 있는
터인데 그곳을 중
히 여기지 않고 서천으로 왔다가 만약 형주에 뜻하지 않은 변이라도 생긴다
면 그때는 어찌하
실 작정입니까? 바라건대 부디 밝게 헤아려 움직이도록 하십시오.
공명의 글은 관우에게 성도에 오는 걸 말리는 내용이었으나 관우의 자부심을
상하지 않게 한껏 그 무예를 추켜세운 것이었다. 공명이 무예로서는 천하에 높
은 자긍심을 두둔해 주고 마초와 겨루는 것을 말리기 위한 글이었다.
과연 공명의 생각대로 관우는 그 글을 보더니 수염을 쓰다듬으며 껄걸 웃고는
말했다.
"공명은 역시 내 마음을 알아 주는 사람이군."
관우는 그 글을 곁에 있는 사람들에게 돌려 보게 하며 서천으로 가려는 생각
을 버렸다.
이 무렵, 동오의 손권은 유비가 서천을 손에 넣고 유장을 공안을호 내쫓았다
는 소식을 듣게 되었다. 손권은 기다리던 때가 왔다고 여기고 곧 장소와 고옹을
불렀다.
"전에 유비가 서천을 취하는 즉시 형주는 돌려 주겠다고 했었소. 이미 그가 파
촉 마흔한 고을을 취했으니 이제야말로 형주를 되돌려 받아야 할 때요. 만약 그
가 약속을 어긴다면 군사를 일으켜서라도 도로 찾아야 할 것이오!"
손권이 열띤 목소리로 그렇게 말하자 장소가 입을 열었다.
"조금만 기다려 주십시오. 모처럼 동오가 평온해진 터에 군사를 일으키는 것은
좋지 않을 듯합니다. 제가 계교를 써서 유비로 하여금 형주를 두 손으로 받들어
바치도록 하겠습니다."
장소가 그렇게 말하자 손권이 반가운 얼굴로 물었다.
"어떤 계책을 써서 형주를 도로 뺏겠다는 말이오?"
"유비가 믿고 있는 사람은 오직 제갈량입니다. 그런데 그의 형인 제갈근이 지
금 동오에 벼슬을 살고 있습니다. 그의 가솔들을 모두 감옥에 잡아두고 제갈근
만 서천으로 보내시어, 아우 제갈공명으로 하여금 형주를 반환하도록 하게 하십
시오. '만약 형주를 반환하지 않으면 반드시 내 가솔들에게 화가 미칠 것'이라고
제갈근이 말하면 제갈공명도 형제의 정리를 생각하여 마다할 수가 없을 것입니
다."
"제갈근은 어질고 미더운 군자이오. 내 어찌 그의 가족을 잡아 가둘 수가 있겠
소?"
손권이 선뜻 승낙을 하지 못하자 장소가 말했다.
"그건 걱정하지 마십시오. 제갈근에게 계략임을 밝히면 그도 안심하고 다녀올
것입니다."
장소가 그렇게 말하자 손권은 그 계책을 따르기로 하고 제갈근에게 계책을 일
러 준 뒤 곧 그의 가솔들을 모두 감옥에 가두었다. 제갈근에게는 글 한 통을 써
서 주어 서천으로 보냈다.
서천으로 떠난 제갈근은 성도에 이르자 먼저 유비에게 사람을 보내 자기가 온
것을 알렸다. 유비는 동오에서 제갈근이 왔다는 전갈에 저으기 놀라며 공명을
불러 물었다.
"군사의 형님께서 무슨 일로 오셨겠소?"
공명도 뜻밖이라는 얼굴이었으나 이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아마 형주를 도로 내놓으라는 말씀을 하러 오셨을 것입니다."
그 말에 유비는 짐작했던 터였으나 걱정스런 얼굴로 공명에게 물었다.
"그렇다면 어떻게 대답을 해야 좋겠소?"
"이렇게 하시면 되겠습니다."
공명은 목소리를 낮추어 귀엣말로 유비에게 대답할 말을 가만히 일러주었다.
공명은 그 길로 성 밖으로 나가 형을 맞아들였으나 자기 집이 아닌 빈관으로 모
셨다.
빈관에 든 제갈근에게 공명이 오랜만에 형에게 절을 올리자 제갈근은 대뜸 목
을 놓아 울었다. 공명이 짐짓 놀라운 표저을 지으며 물었다.
"형님께서는 어인 일로 이토록 슬피 우십니까?"
"내 집안 식구들이 이제 모두 죽게 되었구나."
제갈근이 이렇게 대답하며 가솔들이 옥에 갇힌 사실을 말하자 공명은 고개를
끄덕이며 형을 안심시켰다.
"혹시 형주를 되돌려 받지 못한 것 때문이 아닙니까? 저로 인해 형님 댁 가솔
이 화를 당한대서야 되겠습니까? 형님은 너무 염려하시지 마십시오. 제가 방책
을 세워 곧 형주를 동오로 되돌려 주도록 하겠습니다."
"그렇게만 해 준다면 무슨 걱정이겠느냐?"
제갈근은 뜻밖에도 일이 쉽게 풀려 나가자 눈물을 거두고 밝은 얼굴로 공명에
게 말했다. 제갈근은 공명과 함께 곧 유비를 만나 보고 손권의 글을 전했다. 유
비가 그 글을 읽고 나더니 대뜸 성난 목소리로 소리쳤다.
"손권이 제 누이를 내게 시집 보내고 내가 형주에 없는 틈을 타 몰래 데려갔
다. 이것이 어찌 사람의 정리나 도리를 아는 사람의 짓거리라고 할 수 있겠는
가? 내가 당장이라도 서천의 군사를 크게 일으켜 강남을 짓밟아 한을 풀려는 참
인데, 뭐 이제 형주를 돌려 달라구?"
유비가 그렇게 소리치자 제갈근은 가슴이 철렁했다. 그러자 공명이 울며 땅에
엎드리더니 빌었다.
"오후가 저의 형님 식구를 모조리 옥에 가두었다 합니다. 만일 형주를 돌려 주
지 않으면 형님의 식구들은 모두 목숨을 잃고 말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제가
무슨 낯으로 홀로 이 세상에 살아 남을 수 있겠습니까? 바라건대 주공께서는 제
낯을 보아서라도 형주를 동오에 돌려 주시어 우리 형제간의 정분을 이어갈 수
있도록 해 주십시오."
공명은 울음 섞인 목소리로 간곡히 말했다. 그러나 유비는 공명의 말에 귀도
기울이지 않은 채 성난 얼굴로 입을 다물고 있을 뿐이었다. 공명은 더욱 슬피
울며 거듭 애원했다. 그러자 유비도 마지못한 듯 입을 열었다.
"군사가 그렇게까지 말하니 군사의 낯을 보아서 우선 형주의 절반을 돌려 주
기로 하겠소. 장사, 계양, 영릉 세 군을 돌려주리다."
"그러시다면 그 내용을 문서로 남겨 주십시오. 운장에게 글을 써 주시어 세 군
을 돌려 주도록 하십시오."
유비의 허락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공명이 그렇게 청했다. 유비는 이번에도 마
지못한 듯 붓을 들어 관우에게 보내는 글을 썼다. 유비가 그 글을 제갈근에게
주며 일렀다.
"자유(제갈근)는 형주에 가거든 내 아우 운장에게 좋은 말로 청을 드리시오.
아우는 성미가 불같아 나도 함부로 말을 못하는 터이니 각별히 조심하도록 하시
오."
유비가 관우에게 슬며시 이 일을 떠넘겼다.
제갈근은 형주의 반이라도 되돌려 받게 된다면 동오의 손권에게 할 말이 있게
되는 셈이었다. 이에 유비의 글을 받아들고 그날로 성도를 떠나 형주로 향했다.
제갈근이 형주에 이르자 관우는 그가 군사 공명의 형이라 중당으로 맞아들였다.
손님과 주인이 각기 예를 올린 후 제갈근은 유비의 글을 전하며 말했다.
"황숙께서는 우선 세 군을 동오로 되돌려 주기를 허락하셨습니다. 장군께서는
그 땅을 돌려 주시면 돌아가서 오후를 뵙게 될 때 제 얼굴이 서겠소이다."
그러나 관우는 유비의 글을 읽더니 얼굴색부터 달리하며 소리쳤다.
"나와 형님은 도원에서 형제의 의를 결의할 때부터 쓰러져 가는 한실을 바르
게 받들자고 맹세했소. 형주로 말하자면 원래부터 대한의 땅이거늘 어찌 한 치
의 땅일지라도 마음내키는 대로 남에게 내어 줄 수가 있단 말입니까? '장수는
밖에 나와서는 임금의 명을 받지 않을 수도 있다'라는 옛말도 있소이다. 비록 형
님의 글을 받아 오시기는 하였으나 나는 형주를 내 줄 수가 없소이다."
그 소리를 듣자 제갈근은 가슴이 철렁했다.
"지금 오후는 나의 가솔들을 모조리 옥에 가두고 형주를 되돌려 받지 못하면
모두 죽이겠다고 하였습니다. 바라건대 장군께서는 저를 가엾게 여겨 주십시오."
유비의 글을 보고도 한마디로 잘라 거절하자 제갈근은 관우에게 애원하며 매
달렸다. 그러나 관우는 제갈근의 말에도 얼굴빛 하나 변하지 않은 채 말했다.
"그런 수작은 모두 손권이 꾸민 계교이오. 그런 잔꾀에 누가 속아 넘어갈 줄
아시오?"
"장군께서는 어찌 그리 경우가 없으십니까? 황숙께서 이미 허락하셨으며 제
아우의 낯을 보아서라도 어찌 그리 무정하게 물리칠 수 있소이까?"
다급한 제갈근이 관우를 원망했다. 그러자 관우는 칼에다 손을 얹으며 성난
목소리로 말했다.
"다시는 실없는 말씀을 하지 마십시오. 이 칼은 원래 무정할 뿐이오."
그러자 관우의 뒤에 시립해 있던 관평이 나서며 관우를 말렸다.
"이분은 군사님의 백씨이십니다. 군사의 낯을 생각하셔서라도 아버님께서는 부
디 고정하십시오."
소도 언덕이 있어야 비빈다는 격으로 관우가 그렇게 나오니 제갈근은 더 이상
말도 붙일 수가 없게 되고 말았다.
제갈근은 두려움과 부끄러움으로 쫓겨나듯 그 자리를 물러나 다시 서천으로
향했다. 관우에게 쫓겨나오다시피하여 동오로 돌아갈 수 없는 일이었다. 다시 아
우 공명에게 이 일을 호소하려고 서천으로 돌아오자 공명은 이미 지방으로 순시
를 나가고 없었다. 제갈근은 유비를 찾아보고 눈물을 흘리며 형주에서 있었던
일을 말했다.
유비는 관우가 제갈근을 죽이려고까지 했다는 말을 듣고도 별로 놀라는 기색
이 아니었다. 오히려 짐작했던 일이라는 듯 관우를 두둔하며 듣기 좋은 말로 제
갈근을 달랬다.
"원래 내 아우란 사람이 그렇게 성미가 급하니 이야기를 하기가 쉽지 않았을
것이오. 공은 잠시 동오로 돌아가 계시도록 하시오. 내가 동천의 한중 여러 고을
을 얻으면 운장을 불러 그 쪽을 지키게 한 다음 그때 형주를 돌려주겠소."
제갈근이 들으니 기가 막힌 소리였다. 처음 형주를 절반이라도 돌려 주겠다는
소리도 결국 그렇게 되니 빈말이 되고 말았다. 그러나 유비에게 더 이상 떼를
쓸 처지도 아니었다. 하는 수 없이 답답한 마음을 달래지도 못한 채 그 자리를
물러나 동오로 향하는 수밖에 없었다.
동오로 돌아온 제갈근은 오주 손권에게 서천과 형주에서 있었던 일을 전했다.
그 말을 다 듣고 난 손권이 벌컥 화를 내며 소리쳤다.
"자유는 이번에 바쁘게 왔다갔다 하며 공연히 헛수고만 했구려. 그게 모두 제
갈량이 꾸민 계교가 아니오?"
손권이 발을 탕탕 구르며 그렇게 외쳤다.
"아닙니다. 그럴 리가 없습니다. 아우는 유비에게 울면서 두 번 세 번 청을 들
여 세 군을 돌려 받기로 허락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운장이 끝내 고집을 부려
일이 이렇게 된 것입니다."
제갈근이 기겁을 하며 손권의 말을 부인했다.
제갈근이 그렇게 말하자 손권은 화를 누그러뜨리고 더 이상은 그 일을 묻지
않고 제갈근의 가솔들을 감옥에서 풀어 주게 하더니 물었다.
"이미 현덕이 세 군을 돌려 주기로 했다니 우리가 장사, 영릉, 계양 세 고을에
우리 관원을 보내 관장하는 것이 어떻겠소?"
"주공의 말씀이 옳으십니다."
제갈근은 손권의 말에 반대할 수가 없었다. 손권은 곧 동오의 관원을 각 고을
의 태수로 명해 세 군으로 보냈다. 그러나 세 군으로 갔던 관원들은 모두 다 도
로 쫓겨 돌아왔다.
"관운장이 우리를 받아 주지 않았습니다. 도로 돌아가자 않으면 모두 죽이겠다
고하여 급히 도망쳐오는 길입니다."
그 말을 듣자 손권은 다시 화가 머리끝까지 치솟았다. 홧김에 노숙을 불러들
여 꾸짖었다.
"자경은 지난날 현덕을 위해 보증까지 서 주고 형주를 빌려 주었소. 그런데 이
제 현덕이 서천 땅을 차지했는데도 돌려 주지 않고 있소. 그런데도 보증을 선
그대는 가만히 보고만 있을 작정이시오?"
노숙도 이 일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 지 모를 리 없었다. 손권이 크게 화를
내며 책망하자 그 동안 생각해 둔 바가 있는지라 얼른 입을 열었다.
"저에게 한 가지 계책이 있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주공께 아뢰려던 참이었습니
다."
"어떤 계책이오?"
손권이 한결 목소리를 누그러뜨리며 물었다.
"강의 상류인 육구에 군사를 머무르게 하고 잔치를 열어 관운장을 청하도록
하겠습니다. 관운장이 오면 좋은 말로 달래 보되 듣지 않으면 도부수들을 매복
시켰다가 죽여 버리면 됩니다. 만약 관운장이 오지 않으면 그때는 즉시 군사를
내몰아 형주를 빼앗도록 하겠습니다."
손권이 들으니 한 번쯤 베풀어 볼 만한 계책이었다. 그렇지 않아도 유비가 서
천에 있는 틈을 타 군사를 일으키려던 참이었다. 만약 관우가 계책에 떨어지면
힘들이지 않고도 형주를 손에 넣을 수 있다는 생각에 손권은 두말 없이 노숙의
말에 따랐다.
"그렇게 하는 것이 내 뜻과도 같소. 즉시 그렇게 하시오."
손권이 노숙의 말을 좇으려 하는데 감택이 나섰다.
"그건 아니 될 말입니다. 운장은 세상이 다 아는 범 같은 맹장입니다. 일이 제
대로 되지 않을 경우에는 도리어 그에게 큰 해만 당하게 될까 걱정입니다."
"그러다가 형주는 언제 되돌려 받는다는 말인가?"
손권은 버럭 화부터 내며 감택의 말을 물리친 후 노숙에게 그 계책을 행하도
록 재촉했다.
이에 노숙은 육구로 가서 여몽, 감녕을 불러 의논했다.
"영채 바깥 강가 임강정에 잔치를 베풀고 관운장을 청하기로 했소. 그가 올 경
우를 대비하여 도부수를 매복시키도록 하시오."
노숙은 계책을 자세히 일러 둔 뒤 말 잘하는 사람을 뽑아 관우를 청하는 글을
써서 강을 건너게 했다. 노숙이 보낸 사자가 강가에 이르자 관평은 그를 붙들어
온 뜻을 묻고 곧 형주로 데려가 관우를 뵙게 했다.
사자가 관우를 보자 엎드려 절하며 잔치에 청하는 뜻을 간곡히 고한 후 노숙
의 글을 올렸다. 관우가 그 글을 다 읽고 나더니 주저하는 기색없이 사자에게
일렀다.
"자경이 잔치를 열어 청하니 가지 않을 수가 없다. 내일 내가 잔치에 갈 테니
그대는 먼저 돌아가도록 하라."
관우가 선뜻 그렇게 말하며 사자를 돌려 보내자 관평이 걱정스런 얼굴로 물었
다.
"지난번 제갈근과의 세 고을 문제로 동오의 군사들을 쫓아 보낸 터라 아무래
도 노숙이 좋은 뜻으로 청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아버님은 어찌하여
선뜻 가신다고 허락하셨습니까?"
관평의 물음에 관우는 껄껄 웃으며 대답했다.
"낸들 어찌 그들의 속을 모르겠느냐? 이번에 잔치를 열어 나를 부른 것은, 제
갈근이 돌아가 세 군을 되돌려 받지 못한 것은 나 때문이라고 말했기 때문일 것
이다. 그리하여 노숙은 육구에 둔병하고 나를 불러 형주를 돌려 달라고 달래리
라. 그런데 내가 가지 않겠다고 하면 그들은 내가 두려워 오지 않았다고 할 것
이다. 나는 내일 10여 명만 데리고 칼 한 자루를 찬 채 작은 배를 타고 가서 노
숙이 내게 어떻게 하나 지켜 보리라."
그러자 관평은 아무래도 호랑이의 소굴로 드는 것 같아 다시 간했다.
"아버님께서는 만금같이 귀하신 몸으로 어찌하여 몸소 호랑이의 굴 속 같은
곳으로 드시려 하십니까? 이러시다가는 큰아버님의 무거우신 당부를 저버리게
되실까 두렵습니다."
그러나 관우는 그 말에는 귀도 기울이지 않은 채 여전히 껄껄 웃으며 말했다.
"나는 일찍부터 수천 수만의 창칼이 물결치고 돌과 화살이 비 오듯 쏟아지는
싸움터에서도 홀로 말을 달리며 무인지경 드나들 듯했다. 그런데 어찌 강동의
쥐새끼 같은 무리들을 두려워하겠는가?"
실로 태산처럼 드높은 자부심이 아닐 수 없었다. 관우의 의기가 누그러들지
않자 곁에 있던 마량이 보다못해 나섰다.
"비록 노숙이 장자(덕망이 있음)의 풍도를 지닌 사람이라고는 하나 지금은 그
도 다급한 지경에 이르렀으니 딴 마음을 품지 않을 수가 없을 것입니다. 장군께
서는 이를 살피시어 가벼이 몸을 움직여서는 아니됩니다."
관우는 이미 마음을 정한 터라 마량의 말도 듣지 않았다.
"옛날 전국 시대에 조나라 사람 인상여는 닭 한 마리의 목을 비틀 만한 힘도
없었으나, 민지 땅 모임에서 강국인 진의 군신 보기를 티끌 보듯 했소. 그런데
하물며 만인을 대적하는 법을 깨우쳐 온 내가 아니오? 이미 허락한 일을 저버려
믿음을 잃어서는 아니 될 것이오!"
관우의 마음을 돌릴 수 없음을 안 마량이 뒷일을 대비토록 일깨웠다.
"그러시다면 장군께서 가시기 전에 미리 대비책을 세워 두셔야 할 것입니다."
관우가 그 말까지는 물리칠 수 없는 듯 마량에게 말했다.
"관평으로 하여금 빠른 배 10여 척에 헤엄에 능한 수군 5백을 태워 강 위에
머물고 있도록 해 주시오. 그리고 강가에서 붉은 기를 흔들거든 곧 배를 그리로
보내도록 해 주시오."
관우의 말을 곁에서 듣고 있던 관평은 그 길로 나가 날랜 군사를 뽑으며 채비
를 서둘렀다.
그때, 관우를 만나 보고 돌아간 동오의 사자는 노숙에게 가서 관우가 잔치에
참석할 것을 허락했다고 알렸다.
녹숙은 여몽을 불러 의논했다.
"관운장이 내일 잔치에 오겠다고 하니 어찌했으면 좋겠소?"
"그가 군마를 이끌고 온다면 저는 감녕과 더불어 군사를 거느려 강언덕 좌우
에 매복해 있다가 포 소리를 군호로 그 군사를 치겠습니다. 그러나 만약 군사를
거느리지 않았다면 도부수 50여 명만을 뜰 뒤에 숨겨 두었다가 기회를 보아 그
를 죽여 버리면 됩니다."
노숙은 여몽의 말에 따르기로 하고 계책을 펼 채비를 하도록 했다.
다음 날이 되자 노숙은 사람을 시켜 강 언덕에서 관우가 오는 것을 지켜 보게
했다.
진시(상오 7-9시)가 좀 지나서 강 저쪽에 한 척의 배가 나타났는데 몇 사람의
사공만 보이고 배 한가운데는 큰 글씨로 '관'이라고 쓴 붉은 기가 보였다. 관우
의 배가 틀림없는지라 배가 가까이 다가오기를 기다리며 동오의 사람들이 이마
에 손을 얹고 살피고 있었다. 배가 가까이 오는데 보니 관우는 초록빛 전포에
푸른 머릿수건을 두르고 배 위에 앉아 있었는데 당당한 풍채가 자못 위엄이 있
었다. 그 곁에는 주창이 큰 칼을 받쳐들고 있었고, 나머지 군사들은 여덟이나 아
홉으로 보이는데 모두 관서의 장사들인 듯 우람한 체구에 각기 칼을 차고 있었
다.
이윽고 관우가 강가에 이르자 노숙은 뜰 안으로 맞아들였다. 노숙은 뜻밖에
군사의 호위도 없이 온 그를 보며 놀라는 한편 의심이 부쩍 들었다. 군사를 거
느리지도 않았으면서 전혀 이쪽을 경계하는 기색이 없자 오히려 노숙이 경계하
는 마음이 일었다.
노숙과 관우가 정자에 오르자 서로 예를 주고받은 뒤 서로 잔을 권했다. 그러
나 정작 잔치가 시작되자 노숙은 관우를 바로 바라보지 못했다. 자신의 계책으
로 관우를 죽이는 것이 마음을 무겁게 누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관우
는 태연히 술잔을 기울일 뿐이었다.
이윽고 술이 얼근히 오르자 노숙도 굳었던 마음이 풀려 천천히 말을 꺼냈다.
"장군께 한 마디 드릴 말씀이 있으니 들어 주신다면 다행이겠습니다."
"말씀해 보시오."
관우가 수염을 쓰다듬으며 웃음 띤 얼굴로 말했다.
"지난날 형님되시는 유 황숙께서 이 사람을 중간에 넣으시어 우리 주공에게
형주를 빌려가시면서 서천을 얻으면 돌려 주시기로 하셨습니다. 그런데 이제 이
미 서천을 취하셨는데도 형주를 돌려 주시지 않으시니 이는 믿음을 거스르는 것
이 아니겠습니까?"
"그 일은 나라일이니 이런 술자리에서 이야기할 것이 아니오."
노숙이 말머리를 꺼내자 관우는 한마디로 잘라 말하며 노숙이 다음 말을 꺼내
지 못하게 했다. 그러나 그대로 입을 다물 노숙이 아니었다.
"우리 주공께서는 보잘 것 없는 강동에 계시면서도 형주 땅을 빌려 드린 것은
그 당시 황숙께서 싸움에 져서 멀리 쫓겨나시어 발붙일 땅이 없음을 딱하게 여
기신 까닭이었소. 황숙께서는 이제 익주를 얻으셨으니 마땅히 형주를 되돌려 주
어야 할 것이오. 황숙께서는 그나마 우선 세 군만을 돌려 주시겠다고 허락하시
었소. 그런데 장군께서는 그것마저 돌려 줄 수 없다 하시니 어찌 도리에 맞는
처사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노숙이 사리를 따져 가며 관우에게 쏘아붙였다. 관우도 문득 엄한 얼굴로 노
숙에게 말했다.
"적벽 싸움 때 우리 형님께서는 몸소 비 오는 듯한 화살과 돌을 무릅쓰고 힘
을 다해 조조를 쳐부쉈소. 그런데도 어찌 헛고생만 하시고 조그만 땅 한 조각도
가져서는 아니 된다는 말씀이오. 그대는 그 공은 생각지 아니하고 이졔 그 땅마
저 되찾으려 하시오?"
"그렇지는 않소이다. 그러나 장군께서는 황숙과 더불어 지난날 장판의 싸움에
서 지자 계책은 궁한데다 힘도 다해 멀리 달아나려 하셨소. 이에 우리 주공께서
의지할 데 없는 황숙을 딱하게 여기시어 선뜻 형주를 빌려 드린 것은 땅이 아깝
지 않아서가 아니었소이다. 그 땅에 의지해 뒷일을 도모하시라는 우리 주공의
호의를 생각지 않으시고, 이미 서천을 얻으시고도 형주에 그냥 눌러앉아 계시니
이는 탐심에 타 의를 저버리는 것이니 실로 남의 비웃음을 살까 걱정이오. 장군
께서는 부디 이를 살펴 주시기 바라오."
노숙이 관우의 말을 되받으며 따지고 들자 관우가 노숙의 말꼬리를 잘라 버렸
다.
"그 일은 형님께서 알아서 하실 일이오. 내가 관여할 바가 아니오."
그러나 노숙은 물러서지 않고 관우의 말꼬리를 붙들고 공세를 취했다.
"내가 듣기에 장군께서는 유 황숙과 함께 도원에서 의맹을 할 때 죽고 살기를
더불어 하기로 하셨다고 하였소. 그러니 황숙의 일이 곧 장군의 일이나 다름이
없을 터인즉 어찌 그런 말씀을 하시오?"
관우는 원래 말재주에 능한 장수가 아닌데다 정곡을 찌르는 노숙의 말이 이어
질수록 할 말이 궁해졌다. 얼른 대답을 하지 못하고 있는데 주인의 몰리는 형세
를 보다 못해 뜰 아래에서 주창이 소리쳤다.
"하늘 아래의 땅은 오로지 덕이 있는 이가 차지하고 이를 다스리게 마련이거
늘 어찌 그대들 동오만이 차지해야 한다는 말인가?"
정자 안이 쩡쩡 울리는 목소리였다.
그러자 관우는 짐짓 놀란 듯 낯색까지 변하며 벌떡 일어나 주창이 받쳐들고
있는 큰 칼을 빼앗아 들며 소리쳐 꾸짖었다.
"나라의 중대한 일을 논하거늘 네가 어찌 감히 끼여들려 하느냐? 어서 나가도
록 하라!"
관우가 눈짓을 보내며 엄한 목소리로 그렇게 꾸짖자 주창도 얼른 관우의 뜻을
알아차렸다.
주창은 멋쩍은 듯이 밖으로 나가자 강 언덕으로 달려가 붉은 기를 휘둘렀다.
저쪽 편 강 위에서 붉은 기가 흔들리기만을 기다리고 있던 관평이 쏜살같이 배
를 몰아 강동의 강가에 닿았다. 주창이 자기의 뜻을 알아채고 밖으로 나가자 관
우는 오른손에는 주창에게서 뺏은 칼을 들고 왼손으로 노숙의 팔목을 잡으며 몹
시 취한 체하며 입을 열었다.
"공은 오늘 나를 잔치 자리에 청한 것이니 다시는 형주 일을 입에 담지 않도
록 합시다. 이미 내가 취했으니 혹시 술김에 목소리를 높이다 옛 정을 해칠까
두렵소이다. 내가 다음 날 사람을 시켜 공을 우리 형주 땅으로 청할 터인즉 그
때 다시 의논하면 될 것이오."
관우가 그렇게 말하며 슬며시 노숙의 팔을 잡고 이끌고 가는데 그 억센 힘에
마치 어린애가 끌려가듯 강변으로 끌려가고 있었다. 노숙은 술이 확 깨는 듯했
다. 관우가 이미 자신들의 계책을 알고 주창을 내보낸 후 술 취한 척하며 자신
을 볼모로 잡아 강가로 가고 있음을 알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관우가 오른손
에 큰 칼을 움켜쥐고 있어 몸을 빼쳐 달아날 수도 없어 그 억센 힘에 넋나간 사
람처럼 끌려갈 수밖에 없었다.
그때 여몽과 감녕이 이 모양을 보고 군사를 휘몰아 덮칠까 했으나 칼을 든 관
우에게 노숙이 잡혀 있으므로 그가 다칠 것을 염려하여 감히 군사를 내몰지 못
했다.
관우는 관평이 타고 온 배 가까이에 이르자 그제서야 얼른 노숙의 손을 놓고
뱃머리에 오르며 작별 인사를 했다.
"자경은 잘 있으시오. 후한 대접 잊지 않으리다!"
관우는 그 말과 함께 배를 타고 떠나갔다. 노숙은 멍하니 떠나가는 배를 바라
보고 서 있을 수밖에 없었다.
관우가 탄 배는 벌써 바람을 타고 멀리 달아나고 있었다. 감녕, 여몽의 군사들
이 달려나와 활을 쏘았으나 이미 소용 없는 일이었다. 스스로 동오로 찾아온 관
우를 돌려 보낸 노숙은 여몽을 불러 다시 의논했다.
"계책대로 일이 이루어지지 않았으니 어찌하면 좋겠소?"
"우선 주공께 알리시고 군사를 일으켜 관운장과 싸워 결판을 내는 수밖에 없
습니다."
노숙의 물음에 여몽이 대답했다. 노숙도 그 말에 따라 즉시 손권에게 사람을
보내 관우를 놓쳐 보낸 일을 알렸다. 손권이 그 보고를 받고 펄쩍 뛰며 크게 노
한 채 영을 내렸다.
"이제는 군사를 일으켜 형주를 쳐야겠으니 모든 관원들을 불러들이도록 하
라!"
손권이 여러 관원들을 불러들여 형주 칠 채비를 서두르고 있는데 뜻밖의 소식
이 전해졌다.
"조조가 다시 30만 대군을 이끌고 강남으로 내려온다고 합니다."
그 소리에 손권은 깜짝 놀라며 급히 노숙에게 사람을 보내 영을 전하게 했다.
"형주를 그냥 두고 그 군사를 합비와 유수로 옮겨 조조를 막도록 하라!"
조조가 진병한다는 소리에 형주를 치려던 동오의 군사들은 다시 말머리를 돌
려 조조를 막으러 합비와 유수로 향했다.
조조 복 황후를 때려 죽이다
조조는 남정길에 나서려는 것을 잠시 중단하고 위왕에 오르고자 했으나 순유
의 반대로 뜻을 이루지 못한다. 복 황후는 친정아버지를 시켜 조조를 없애고자
하나 그 일이 탄로나 복 황후 일가는 삼족이 멸한다. 그 후 조조는 자기의 딸을
정궁황후에 앉히고 국구가 된다.
그 무렵 조조는 삼십만 대군을 동원하여 지난번 적벽에서 당한 치욕을 씻고자
남정길에 오르려 했다. 그러자 참군 부간이 글을 올려 아뢰였다.
제가 듣건데 '무력을 쓰려 할 때에는 먼저 위엄을 보여야 하며, 문으로써 일
을 시작하려면 먼
저 덕을 닦아, 위엄과 덕을 아울러 행한 이후라야 왕업을 이룰 수 있다'했습
니다. 지난날 천
하가 크게 어지러울 때 명공께서는 무를 쓰시어 열에 아홉은 평정하시었으
나, 아직 왕명에
따르지 않는 곳으로는 오와 촉이 있습니다. 오에 거친 장강이 가로놓여 있
고, 촉은 험한 산이
가로막고 있으니 위엄만으로는 이기기가 어렵습니다. 어리석은 저의 생각으
로는 먼저 문과
덕을 닦은 후에 무위를 내세우셔야 되리라고 여겨집니다. 잠시간 갑옷과 투
구를 걸어 두시고
무기를 눕혀 군사를 쉬게 함과 아울러 선비를 기르시다가 때를 기다려 움직
여야 함니다. 지
금 수십만의 대군을 일으켜 장강으로 갔다가 만약 적들이 그 험한 지세에
의지해 깊이 숨어
있어 우리 군사들이 능히 그 힘과 기계를 쓰지 못해 우리의 권위를 떨쳐 보
이지 못한다면 하
늘 같은 위엄만 땅에 떨어지고 말 것입니다. 명공께서는 부디 깊이 살피시
기를 바랍니다.
조조는 그 글을 읽어 보자 크게 깨닫는 바가 있었다. 마침내 남쪽을 치려던
생각을 고쳐먹고 남정 출진을 뒤로 미루었다. 그 대신 새로 문부 제도를 설치하
여 여러 곳에 학교를 세우고 선비들을 예를 다해 맞이하여 높이 대했다. 조조가
부간의 말을 좇아 크게 문덕을 일으키자 칭송이 그치지 않았다.
이에 시중 왕찬과 두습, 위개, 화흡 등은 조조를 위왕으로 받들려고 했다.
"조 승상은 위의 왕위에 오르신다 해도 조금도 과만하지 않을 분이시오."
그러나 중서령으로 있는 순유가 이 말을 전해 듣고 그들을 찾아와 고개를 저
으며 말했다.
"그건 아니 될 말이오. 승상께서 벼슬이 위공에 이르렀으며, 그 영화는 구석을
더했으니 그 지위가 더 이상 오를 데가 없을 지경이오. 그런데 이제 다시 왕위
에까지 높인다면 이는 이치에 어긋나는 일이오."
순유가 그렇게 말하며 반대하자 그들은 입을 다물어 버렷다. 그런데 아첨배들
의 중상이 가미되어 이 말이 조조의 귀에 들어갔다. 앞으로 제위에 올라야겠다
는 야심이 마음 속 깊이 불타고 있던 조조는 순유가 반대하고 나서자 크게 노했
다.
"이 사람이 순욱처럼 되고 싶다는 말인가!"
조조는 그 이후부터 순유를 자기의 앞길을 가로막는 또 한 사람의 장애물로밖
에는 보지 않게 되었다.
순유도 조조가 한 말을 전해 듣자 근심이 되지 않을 수 없었다. 지나날 순욱
이 조조에게 구석을 내리는 것을 반대하다 결국 조조의 미움을 사 스스로 목숨
을 끊지 않았는가.
순유는 조조의 엉뚱한 야심을 위해 이날까지 일해 온 자신에 대한 분노와 우
울한 마음에 휩싸여 번민하다 그만 병이 나 자리에 드러눕고 말았다. 순유는 자
리에 누운 지 열흘 만에 끝내 숨을 거두니 그의 나이 쉰 여덟이었다.
막상 순유가 죽었다는 말을 듣자 조조는 자뭇 애통해했다.
'아깝구나, 그도 지금까지 나를 도운 으뜸 가는 공신의 한 사람이었는데...'
조조는 순유를 성대히 장사지내 주었다. 그리고 위왕에 오르려던 마음을 버리
고 말았다. 지난날 구석을 받으려 했을 때 그로 인해 순욱이 죽고 이번에는 위
왕에 오르려던 자신의 야심으로 인해 순유마저 죽게 되자 다시는 그 일을 입에
담지 못하게 했다.
이 무렵 조조의 위세는 이미 조정을 뒤덮고 있었으며 천자는 전혀 실권이 없
는 허수아비에 지나지 않았다.
하루는 조조가 칼을 찬 채 대궐로 들어가니 헌제는 그때 복 황후와 함께 앉아
있다가 황망히 자리에서 일어섰다. 헌제도 놀란 얼굴로 조조를 바라보았다. 조조
가 뻣뻣이 선 채로 헌제에게 말했다.
"손권과 유비가 제각기 한 고을씩을 차지한 채 조정의 명을 거스르고 있습니
다. 어찌하면 좋겟습니까?"
겁에 질려 있던 헌제가 떨리는 목소리로 간신히 답했다.
"모든 일은 위공이 알아서 처결하시오."
그러자 조조가 문득 성난 얼굴로 천자에게 대꾸했다.
"폐하께서는 어찌 생각하시는 바를 말씀하시지 않으십니까? 폐하께서 그러시
니 바깥 사람들은 모두 이 조조가 폐하를 속인다고 수군거리게 됩니다."
조조는 헌제가 지나치게 주견을 내세우지 않아 오히려 자신의 처지를 어렵게
만드는 데 대한 노기가 치솟았다. 그런 조조의 생각을 아는지 모르는지 헌제는
여전히 떨리는 목소리로 말할 뿐이었다.
"어찌하여 위공은 그런 말씀을 하시오? 공이 나를 보좌해 준다면 그보다 더
다행한 일이 없겠소. 그러나 그렇지 못하겠거든 은혜를 베풀어 제발 나를 가만
히 버려 두시길 바랄 뿐이오."
헌제의 힘없는 목소리를 들은 조조는 무기력한 그 모습에 더욱 화가 치솟았
다. 눈을 부릅떠 헌제를 노려보다니 뚜벅뚜벅 발걸음을 옮겨 대궐을 빠져 나갔
다.
그 모양을 본 천자의 조신들이 몸을 떨며 분함을 감추지 못했다. 천자와 복
황후도 두려움과 불쾌감으로 어쩔 줄 모르고 있었다. 좌우의 신하 중의 하나가
헌제에게 아뢰었다.
"근자에 듣자하니 위공은 스스로 왕이 되고자 일이 꾸민다고 하였습니다. 그러
니 이제 머지않아 천자의 자리도 도적질하려 할 것이 분명합니다."
그 말을 들은 천자와 복 황후는 다시 두려움과 분함에 휩싸여 서로 손을 잡고
목놓아 울며 탄식했다.
"실로 하늘 아래 이토록 기막힌 일이 있다는 말인가?"
이윽고 복 황후가 눈물을 거두더니 천자에게 아뢰었다.
"저의 친정아버지 복완은 항상 조조를 죽여 조정의 화를 없애겠다는 마음을
품고 있습니다. 제가 몰래 글 한 통을 써서 저의 아비에 보내 그 일을 도모할까
합니다."
복 황후가 뜻밖에도 놀라운 말을 하자 천자는 목소리를 낮추며 걱정스런 얼굴
로 말했다.
"지난날 국구 동승이 바로 그 일을 꾸미려다가 계책이 새어 나가 오히려 죽임
을 당했소. 이번에 또 일이 어그러진다면 이제는 이 몸과 황후도 끝장이 나고
말 것이오."
그러나 조조에게 원한이 서린 복 황후는 천자의 말에도 결코 물러서려하지 않
았다.
"아침 저녁을 가릴 것 없이 바늘방석에 앉아 있는 듯하니 이래가지고서야 어
찌 살아 있는 목숨이라 할 수 있겠습니까? 제가 살피건대 환관들 중에 이 일을
부탁할 만한 사람으로 목순이란 충의로운 이가 있습니다. 그에게 글을 주어 저
의 아비에게 전하도록 하겠습니다."
헌제도 목순이라면 믿을 만하다고 여겨 그를 불러들이게 했다. 이윽고 목순이
오자 헌제는 좌우 사람들을 내보낸 다음 그를 병풍 뒤로 불러들여 눈물을 흘리
며 당부했다.
"역적 조조란 놈은 제가 스스로 위왕이 되려고 한다 하니 머지않아 천자의 자
리까지 뺏으려 할 것이다. 이 몸은 황후의 아버지 복완을 시켜 이 역적을 없애
려 하나 사방이 온통 그의 심복들로 차 있으니 이 명을 믿고 전하게 할 만한 사
람이 없구나. 그리하여 그대에게 황후의 밀서를 맡겨 복완에게 전하려 하니 바
라건대 그대의 충의를 믿고 있는 이 몸의 뜻을 저버리지 않도록 하라!"
목순도 천자와 황후의 사정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근신이었다. 천자의 명
을 눈물로 받들며 답했다.
"신은 폐하의 크신 은혜를 입고 있는 몸입니다. 죽기를 마다 않고 폐하의 은혜
에 보답하겠사오니 제게 밀서를 맡겨 주십시오."
이에 복 황후는 붓을 들어 곧 밀서를 써서 목순에게 주었다. 목순은 만약을
대비하여 궁리하던 끝에 그 밀서를 머리 속에 감추고 가만히 대궐문을 나섰다.
목순은 그 길로 복완의 집으로 가 글을 전했다. 복완이 보니 그 글이 황후의
친필이므로 읽기를 마친 후 목순에게 말했다.
"지금으로선 조조의 심복이 조정에 깔려 있으니 급히 이 일을 도모하기는 어
렵네. 앞으로 강동의 손권과 서천의 유비가 반드시 각기 군사를 일으킬 것이므
로 그렇게 되면 조조도 그들을 치러 갈 것이리라. 그때를 틈타 조정에 있는 충
의로운 신하들을 모아 의논한 다음 안팎에서 힘을 합해 이 일을 도모하도록 하
세."
복완의 말에 목순도 생각해 둔 바를 밝혔다.
"그러시다면 황장께서는 다시 황후께 답신을 올리고 밀조를 받아내도록 하십
시오. 그런 다음 은밀히 사람을 동오와 촉 땅으로 보내 군사를 일으키게 하시고,
안에서 내응하여 역적을 쳐 폐하를 구하도록 하십시오."
복완은 목순의 말을 옳게 여겼다. 곧 황후에게 보내는 글을 써 주었다. 목순은
이번에도 그 글을 상투 속에 감춘 채 대궐로 향했다.
그러나 조정의 신하 중에는 복완이 염려했듯 조조의 심복이 많았다. 그 중 목
순을 살핀 자가 있어 의심쩍은 거동을 조조에게 가만히 알렸다.
"목순이 천자를 뵙고 대궐을 빠져 나가 복완의 집으로 갔습니다."
지나날 동 귀비의 아비인 동승이 모반을 꾀한 이래 외척에 대한 경계심을 늦
추지 않고 있던 조조였다. 언제나 심복에게 명해 감시를 게을리하지 않던 조조
가 그 말을 듣자 몸소 대궐 문 앞으로 가 목순이 돌아오기를 기다렸다.
과연 오래지 않아 목순이 대궐 문으로 돌아오고 있었다. 조조가 기다리고 있
는 것을 알 리 없는 목순이 대궐 문을 들어서다 조조와 마주쳤다.
"어디 갔다 오는 길인가?"
조조가 매서운 눈초리로 목순을 바라보며 묻자 목순은 등골이 오싹했다. 그러
나 다음 순간 애써 태연한 얼굴로 둘러댔다.
"황후께서 편찮으셔서 의원을 부르러 갔었습니다."
조조는 여전히 날카로운 눈초리로 목순을 노려보며 물었다.
"그럼 부르러 갔던 의원은 어찌하여 보이지 않는가?"
"아직 이곳에는 이르지 않았습니다."
목순이 그렇게 둘러댔으나 목소리는 떨리고 있었다. 조조는 더는 묻지 않고
거느리고 왔던 군사들에게 명했다.
"이 사람의 몸을 뒤져 보도록 하라!"
조조의 명에 따라 군사들이 목순의 몸을 샅샅이 뒤져 보았다. 옷 안은 물론
신발까지 뒤지며 살펴보았으나 이상한 물건은 나오지 않았다. 조조도 아무것도
나오지 않으니 더 이상 트집을 잡을 수가 없었다.
"알았네. 그만 가 보게."
조조는 하는 수 없어 목순을 놓아 주었다. 목순은 호랑이 아가리를 벗어난 듯
급히 옷매무새를 갖춰 입고 대궐 안으로 들어갔다.
이때였다. 홀연 회오리바람이 불어 와 목순이 머리에 쓰고 있던 사모가 바람
에 날려 땅에 떨어졌다. 사모가 떨어지자 목순은 깜짝 놀라며 황망히 그걸 주웠
다.
"그 사모를 이리 가져오게."
조조는 목순이 당황하는 모습을 보자 사모를 가져오게하여 구석구석을 살펴보
았다. 그러나 사모 안에서도 아무것도 나오지 않았다. 조조가 사모를 돌려주며
얼핏 목순의 머리를 보았다. 조조가 그의 머리 쪽으로 눈길을 주자 목순은 가슴
이 두근대기 시작했다.
목순은 얼른 그 자리에서 벗어나기 위해 사모를 조심스럽게 두 손으로 눌러
썼다. 그러나 목순이 머리를 흐트리지 않으려고 가만히 사모를 눌러 쓴다는 것
이 얼결에 그만 거꾸로 돌려 쓰고 말았다.
육감이 빠른 조조였다. 목순의 당황스런 태도와 머리를 조심스럽게 매만지는
것을 보고 군사들에게 다시 명했다.
"저 자의 머리 밑을 뒤져 보아라!"
복 황후는 물론 한실의 운명이 좌우되는 순간이었다. 군사들이 달려들어 목순
의 사모를 벗기고 머리를 뒤졌다. 목순의 얼굴이 백지장처럼 창백해져 군사들을
뿌리치려 했으나 소용 없는 일이었다. 결국 머리 속을 뒤지자 복완이 황후에게
깨알 같은 글씨로 써 준 글이 나왔다. 유비 손권과 손을 잡고 안팎에서 칠 수
있도록 밀조를 내려 달라는 글이었다.
조조는 그 글을 읽자 분노로 치를 떨었다. 조조는 목순을 밀실에 가두고 문초
를 했다. 그러나 목순은 갖은 고문을 다 해 보았으나 끝내 입을 열지 않았다.
조조는 목순의 말을 기다릴 것 없이 그날 밤에 갑병 3천을 뽑아 복완의 집을
에워싼 후 영을 내렸다.
"늙고 젊고를 가리지 말고 삼족에 이르기까지 모조리 끌어 내어 옥에 가두고
집 안을 샅샅이 뒤져라."
조조의 영에 따라 갑병들이 복씨 집안 사람들을 모조리 감옥에 가두는 한편
집 안을 샅샅이 뒤져 황후의 친필 밀서를 찾아 내었다.
이윽고 날이 밝아오자 조조는 어림군의 대장 극려에게 명을 내려 황후의 옥새
를 거두어 오게 했다. 이때 천자는 궁밖에 있다가 극려가 3백 갑병을 거느리고
들이닥치자 크게 놀랐다.
"무슨 일인가?"
"위공의 명을 받들어 황후의 옥새를 거두러 왔습니다."
극려가 무엄하기 짝이 없는 태도로 말했다. 그 소리에 천자는 얼굴색이 달라
지며 비밀이 탄로난 것임을 알았다. 천자는 애간장이 찢어지는 듯한 고통으로
정신이 아득하기만 했다.
그럴 동안 극려는 후궁에 이르렀다. 복 황후가 막 자리에서 일어났을 때였다.
극려는 복 황후를 거들떠보지도 않고 옥새를 맡고 있는 궁녀를 불러 옥새를 빼
앗은 뒤 후궁을 빠져 나갔다. 복 황후는 그걸 보자 일이 탄로난 것임을 깨달았
다. 복황후는 두려움에 얼굴이 파랗게 질려 전각 뒤의 초방 사이에 있는 좁은
이중 벽 속에 숨었다.
그런지 얼마 되지 않아 상서령 화흠이 무장한 군사 5백을 거느리고 곧바로 후
원으로 들어와 궁녀들에게 호통쳤다.
"복 황후는 어디 있느냐?"
궁녀들은 어찌할 바를 모른 채 벌벌 떨면서도 모두 한결같이 모른다고 대답했
다. 화흠은 주저하지 않고 곧장 황후가 거처하는 잠긴 방문을 부수고 방 안을
휘둘러보았다. 그러나 황후는 보이지 않았다. 전각이란 전각은 전부 다 뒤져도
황후가 보이지 않자 화흠은 벽과 벽 사이의 틈새가 있음을 아는 터라 군사들에
게 명해 벽을 허물게 했다. 벽을 허물자 그 속에 복 황후가 얼굴이 파랗게 질린
채 웅크리고 앉아 있었다.
화흠은 황후를 보자 대뜸 머리채를 움켜잡고 밖으로 끌어 냈다. 황후가 머리
채를 잡힌 채 처참한 몰골로 질질 끌려나오며 애원해 빌었다.
"부디 목숨만은 살려 주시오."
그러나 화흠은 눈을 부라리며 황후를 꾸짖을 뿐이었다.
"스스로 위공께 가서 빌어라."
황후의 모습은 차마 눈뜨고 볼 수 없는 지경이었다. 머리는 풀어 흐트러진데
다 신발도 신지 않은 맨발이었는데 화흠은 머리채를 고삐처럼 잡고 짐승을 끌고
가듯 복 황후를 끌고 갔다.
이를 보던 궁인들은 화흠의 무도한 행동에 치를 떨지 않는 이가 없었다. 벼슬
길에 나오기 이전 원래 화흠은 빼어난 글로 일찍부터 이름을 떨친 사람이었다.
그 당시 재명을 드날리던 병원.관녕과 친분이 두터웠으므로 사람들은 그들 세
사람을 한 마리 용이라 일컬으며 칭송했다. 그 중에서도 화흠은 용의 머리요, 병
원은 배, 그리고 관녕은 용의 꼬리에 비유했으니, 셋 중에서도 화흠의 재주를 더
높이 우러렀다.
그러나 세 사람의 친분은 오래 가지 못했다.
세 사람의 친분에 금이 가기 시작한 것은 화흠의 그 빼어난 글솜씨와는 다른
그의 성품 탓이었다.
벼슬길에 오르기 전의 어느 날, 관녕과 화흠이 뜰에서 채소 씨앗을 심고 있었
는데 호미질을 하는 중에 땅 속에서 금덩이가 하나 나왔다. 관녕은 금덩이를 보
았으나 재물을 탐하지 않는 선비답게 본체만체 호미질을 계속했다. 그러나 화흠
은 금을 집어들고 한참을 보다가 땅에 버렸다. 또 하루는 함께 글을 읽고 있던
중 대문밖에 귀인이 지나가지 벽제(벼슬아치의 행차 때 하인이 길을 여는 소리)
소리가 요란했다. 그러자 화흠은 그 소리를 못 들은 채 단정히 앉아 글만 읽고
있는 관녕과는 달리 그는 책을 내던지고 밖으로 뛰쳐나가 한참동안 그 행차를
구경하고 돌아왔다.
관녕은 화흠의 이런 행동을 보고 그가 재물과 벼슬욕에 사로잡혀 있음을 알고
그를 비루하게 여기고 그 이후에는 더불어 지내지 않으며 친구로 사귀기를 마다
했다. 그 이후 관녕은 글과 수양을 닦는 선비로서의 자세를 흩뜨리지 않는 일생
을 보냈다. 관녕은 천하가 어지럽자 조조를 피해 요동 지방에 몸을 숨기고 한
누각에 기거하면서 머리에는 흰 관을 쓰고 한 나라가 망한 것을 슬퍼했다. 뿐만
아니라 목숨이 다할 때까지 조조의 나라인 위에 나가 벼슬을 하지 않았으며 항
상 스스로가 죄인임을 자처했다.
그러나 화흠은 그 이후 벼슬을 얻기 위해 손권을 섬겼고, 다시 조조가 그 위
세를 떨치자 그에게로 갔다. 벼슬에만 눈이 먼 화흠은 지난날 선비로서의 풍모
는 어디로 갔는지 찾아볼 수 없이 복 황후를 잡아내는 끔찍한 일도 서슴지 않게
된 것이었다.
뒷날 사람들은 화흠의 그와 같은 변신을 슬퍼하고 관녕의 선비로서의 절개를
우러르는 시를 지었다.
그날의 화흠 끔찍도 하구나
벽 허물고 황후 잡아가네.
악을 도와 범이 날개를 얻는 듯하니
용머리 그 재주, 천 년이 가도 욕뿐이네.
또한 화흠에 비해 관녕을 기린 시가 있다.
요동 땅에는 관녕루가 있느나
사람은 가고 빈 누각이나 이름만은 남았구나.
우습구나 부귀를 탐하던 화흠이여
흰 관 쓴 풍류에 어찌 비하리.
화흠이 황후를 끌고 외전으로 나오자 이 모양을 본 헌제가 전 아래로 내려와
황후를 안고 목을 놓아 통곡했다. 황후도 헌제를 얼싸안으며 소리높여 울부짖었
다.
"이제 첩은 죽을 목숨이오니 다시는 폐하를 모시지 못할 것입니다. 부디 옥체
를 잘 지키시옵소서."
헌제도 목이 메었다.
"내 목숨도 언제 그렇게 될지 알 수 없는 일이오. 이 몸이 원망스러울 뿐이
오."
그러자 화흠이 무엄하게도 황제와 황후를 향해 소리쳤다.
"위공의 분부가 계셨으니 지체할 수가 없소."
화흠은 군사들을 재촉하여 황후를 끌어가게 했다.
황후가 이끌려 가자 헌제는 주먹으로 가슴을 치며 소리내어 울다가 곁에 서
있는 극려를 보며 탄식했다.
"천하에 어찌 이런 일이 있을 수가 있단 말이오?"
천제는 분함과 슬픔을 이기지 못해 그 탄식과 함께 목이 메인 채 쓰러졌다.
극려는 좌우에 명을 내려 급히 헌제를 부축하여 궁 안에 들게 했다.
화흠이 복 황후를 끌어 조조 앞에 데리고 가자 조조는 살기 띤 눈으로 노려보
며 꾸짖었다.
"내 너희들을 정성스런 마음으로 대했거늘 너희들은 도리어 나를 해치려 드는
구나. 너를 죽이지 않으면 반드시 나를 해치려 들 것이다!"
복 황후는 조조의 칼날같이 매서운 눈을 보자 온몸에 맥이 빠지며 소름이 돋
는 듯했다. 조조는 황후를 향해 마치 개를 꾸짖듯 한 후에 독기서린 목소리로
간단히 영을 내렸다.
"저년을 끌어 내어 때려 죽여라!"
조조가 그렇게 엄명을 내리자 좌우에 시립해 있던 갑병들이 채찍과 몽둥이로
개잡듯 패니 황후는 아픔에 못 이겨 비명을 지르다 마침내 숨져버리고 말았다.
이미 독기가 오를 대로 오른 조조였다. 황후를 때려 죽인 조조는 이어 궁으로
들어가 황후의 소생인 두 왕자에게 독약을 먹여 죽여 버렸다.
조조는 다시 황후의 아버지 복완과 목순, 그리고 2백여 가솔들을 모두 궁아문
네거리에 끌어 내어 목을 베었다. 그걸 본 사람들은 한결같이 그들의 죽음을 슬
퍼하며 두려움에 떨었다.
건안 19년 11월의 일이었다.
복 황후가 죽은 뒤로 헌제는 음식을 입에 대지 못했다. 며칠이 지나도 여전히
식음을 전폐하자 조조가 헌제를 찾아왔다.
"폐하께서는 근심을 거두시기 바랍니다. 신은 결코 딴 뜻을 품어서가 아닙니
다. 신의 여식이 이미 폐하의 귀인이 되어 폐하를 모시고 있는데 원래 어질고
효심이 두텁습니다. 폐하께서는 이제 정궁으로 받아 주신다면 신의 큰 기쁨이겠
습니다."
조조가 자기 딸을 황후로 천거하니 헌제는 그 말을 물리칠 도리가 없었다. 조
조는 순유가 죽은 후 스스로 왕위에 오르려던 생각을 버린 대신 이에 딸을 황후
로 삼아 국구가 되고자 했다. 스스로 국구가 됨은 두 번씩이나 황후가 국구와
모반을 꾀했던 화근을 잘라 버리는 일도 되었다.
헌제는 조조의 말을 좇아 건안 20년 정월 신년을 축하하는 설날에 그 딸을 정
궁 황후로 맞아들였다. 모든 조정의 벼슬아치들이 아무도 이를 반대하고 나서는
사람이 없었다.
조조는 그의 딸이 황후가 되고 자신은 국구가 되자 그 위세는 더 높아갔다.
그러자 전부터 오와 촉을 치기 위해 군사를 내려 했던 일에 대해 문무관원들을
불러모아 의견을 물었다.
"손권과 유비를 치려고 하는데 어찌하면 좋겠는가?"
그러자 모사 가후가 조조에게 권했다.
"먼저 하후돈과 조인을 불러 함께 의논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후돈과 조인은 그때 서쪽의 변방을 지키고 있었기에 가까운 동오와 서천에
대한 소식을 들어 보고 계책을 짜자는 것이 가후의 뜻이었다. 그 말에 조조는
고개를 끄덕이며 곧 사람을 보내 그 둘을 불러 오게 했다.
하후돈보다 조인이 먼저 허도에 이르렀다. 조인이 허도에 이르니 밤이 깊었으
나 급한 마음에 조조를 보러 갔다.
이때 조조는 술에 취해 깊은 잠에 빠져 있었으나 조인은 조조와의 친족이라
거침없이 부중으로 들어갔다. 그러나 문밖에 허저가 칼을 짚고 시립해 있다가
조인을 가로막았다.
"들어가실 수 없으십니다."
조인이 벌컥 성을 내며 부릅떴다.
"나는 같은 조씨로 삼촌을 뵈러 가는데 그대가 어찌 감히 나를 가로막는다는
말인가?"
그러나 허저는 조금의 동요도 없이 조인을 가로막은 채 말했다.
"장군께서는 비록 친족이시나 바깥을 지키시는 외번의 관원이요, 그러나 이사
람 허저는 비록 친족은 아니나 부중을 호위하는 일을 맡고 있습니다. 주공께서
지금 취해 당 위에 누워 계시니 함부로 들여보낼 수 없습니다."
허저가 꿈쩍도 않은 채 가로막고 서 있자 조인도 더 떼를 쓰지 못했다. 하는
수 없이 조조가 깨어난 후 허저의 허락이 떨어질 때를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뒤에 이 말을 전해 들은 조조는 허저를 칭찬해 마지않았다.
"허저는 과연 충성스런 사람이구나! 그와 같은 자가 있으니 내가 베개를 높이
하고 잘 수 있지 않은가."
그런 일이 있은 지 며칠 후에야 하후돈이 당도했다. 하후돈이 허도에 이르자
조조는 다시 여러 문무관원들을 불러모아 군사 낼 일을 의논했다.
"오와 촉을 갑자기 치기를 어렵습니다. 그러나 한중의 장로부터 치신 뒤에 촉
을 치도록 하십시오. 한중은 서촉을 드나들 수 있는 길과 다름없으니 한중을 치
신다면 촉을 치는 일은 한 번의 북소리에 깨칠 수가 있을 것입니다."
한중과 촉의 가까운 곳을 지키며 그곳의 지세를 알고 있는 하후돈의 말에 조
조가 주저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대의 말이 바로 나의 뜻과 같네."
조조는 그 말과 함께 서쪽을 칠 군사를 일으켰다.
조조는 서쪽을 정벌하기 위한 군사를 세 대로 나누었다. 전부선봉은 하후연과
장합이 맡게 하고 조인과 하후돈은 후부를 맡아 군량과 마초를 대게 하고 자신
은 중군을 이끌기로 했다.
조조가 군사를 일으킨 소식은 한중의 장로에게도 전해졌다. 장로는 급히 아우
장위를 불러 조조를 막을 일을 의논했다.
"조조가 대군을 이끌고 온다고 하니 어찌하면 좋겠나?"
그러자 장위가 서슴없이 답했다.
"우리 한중에서 가장 지세가 험한 곳은 양평관입니다. 제가 좌우의 산과 숲에
잇대어 진과 책을 수십 개 세워 조조의 군사를 막아 보겠습니다. 형님께서는 한
녕에 머무르시며 군량미와 마초를 대어 주십시오."
장로는 아우 장위의 말에 크게 기뻐하며 곧 양앙, 양임과 함께 군사를 거느려
양평관으로 떠나게 했다.
장위가 말을 달려 양평관에 이르러 영채를 세우자 조조군의 선봉인 하후연.장
합도 그곳에 이르렀다. 그러나 장위가 먼저 그곳에 와 영채를 세우고 있었으므
로 15리쯤 떨어진 곳에다 진을 쳤다.
이날 밤이 되자 하후연, 장합이 이끌고 온 군사들은 먼길을 왔으므로 모두 피
곤해 밥을 지어 먹자마자 그만 잠에 곯아떨어졌다. 그런데 밤이 깊어 가자 홀연
영채 뒤에서 크게 함성이 일며 한 줄기 불길이 오르더니 양앙, 장임 두 장수가
각기 두 길로 군사를 휘몰아 덮쳐 왔다. 적의 뜻하지 않은 기습에 놀란 하후연
과 장합이 황망히 말 위에 올라 그들과 싸우려 했으나 이미 어지러우진 군사들
이라 제대로 싸움이 되지 않았다. 몰려온 한중의 군사들은 여기저기 불을 놓으
며 영채로 밀려드니 조조 군사들은 싸움 한 번 제대로 해 보지도 못한 채 뭉그
러지고 말았다.
하후연.장합은 하는 수 없이 말머리를 돌려 조조에게 달려가 이 사실을 알릴
수밖에 없었다. 두 장수의 말을 들은 조조는 크게 놀라 성난 목소리로 꾸짖었다.
"너희들은 이미 한두 해째 싸움터를 누빈 장수들이 아니지 않느냐? 그러기도
'군사가 먼길을 걸어 피곤할 때는 마땅히 적이 영채를 기습해 올 것에 대비해야
한다'는 것도 모르고 있었느냐? 이를 미리 채비할 줄도 모르는 장수가 어디 있
다는 말이냐! 저놈들의 목을 베어야 하리라."
조조가 몹시 성이 나 앞뒤를 돌보지 않고 그렇게 소리쳤다. 그러나 좌우에 있
던 모든 장수들이 간곡히 말리자 목베는 일만은 그만두었다.
첫 싸움에서 어이없이 패한 조조는 몸소 군사를 거느리기로 하고 다음날이 되
기를 기다렸다. 날이 밝자 조조는 지체하지 않고 선봉이 되어 군사를 이끌었다.
양평관이 가까워지자 점점 산세가 험악하고 울창한 숲으로 뒤덮여 있어 군마
를 어디로 이끌어야 할지 알 수가 없을 지경이었다. 게다가 이 험한 지세를 이
용하여 적이 매복해 있지나 않을까 두려웠다.
어제도 적의 기습을 당한 터라 조조는 하는 수 없이 군사를 되물려 영채로 돌
아왔다.
"애당초 한중 땅이 이토록 험한 줄 알았다면 내가 군사를 일으켜 이곳에 오지
않았을는지도 모를 일이네."
조조가 영채로 돌아와 허저와 서황을 보고 넋두리를 늘어놓았다. 그러자 허저
가 결연한 목소리로 조조에게 간했다.
"그러나 이미 이곳에 군사를 이끄셨습니다. 이제 주공께서는 수고로움을 아끼
셔서는 아니 될 것입니다."
조조도 여기까지 이끈 군사를 물릴 생각은 없었다.
다음 날, 조조는 허저, 서황 두 장수와 함께 장위의 영채와 책을 살피러 나갔
다. 세 필의 말이 산모퉁이를 돌아나가자 멀리 장위의 영채가 보였다. 조조가 한
동안 장위의 영채를 살피다 말채찍을 들어 가리켰다.
"저렇듯 진이 견고하니, 일시에 치기는 어려우리라."
그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홀연 등 뒤에서 함성이 크게 일며 화살이 빗발치
듯 쏟아졌다. 조조가 놀라 돌아보니 한중의 장수 양앙, 양임이 두 갈래로 군사를
거느리고 달려오며 화살을 날리고 있었다.
조조가 당황해 어쩔 줄 모르는데 허저가 서황에게 소리쳤다.
"내가 적군을 막겠소. 서공명은 주공을 잘 보살피시오."
허저가 말을 마치고 말을 달려 양앙, 양임을 향해 달려갔다. 이에 양앙, 양임
이 허저를 맞았으나 두 장수가 원래 허저의 상대가 아니었는데다 허저가 목숨을
돌보지 않는 거친 기세로 두 장수에게 덤벼드니 끝내 당해 내지 못하고 말을 돌
려 달아났다. 두 대장이 쩔쩔매며 달아나기에 급급하자 이를 본 군사들도 감히
덤벼들 엄두가 나지 않았다.
그 틈을 타 서황은 조조를 호위하며 왔던 길로 되돌아가는데 산모퉁이를 돌자
앞에 또 한 떼의 군사가 달려왔다. 놀라서 앞선 장수를 보니 다행히도 하후연과
장합이었다.
하후연과 장합은 산 위에서 크게 함성이 일자 급히 조조를 구원하러 군사를
ㅇ르고 달려온 것이었다. 하후연, 장합이 구원하러 오자 조조는 그들에게 쫓길
이유가 없었다. 서황마저 말머리를 돌려 하후연, 장합과 함께 도리어 적을 치러
가니 양앙.양임의 군사들이 어찌 조조의 범 같은 네 장수를 당할 수 있겠는가.
네 장수는 순식간에 적을 짓밟고 조조를 호위해 유유히 영채로 돌아왔다.
조조는 허저, 서황, 하후연, 장합 네 장수에게 후한 상을 내렸다.
장위는 처음 기습으로 기세가 오른 듯했으나 조조군의 군세가 대단하고 장수
들의 용맹이 두려워 군사를 이끌어 맞서는 것을 피했다. 양평관에 들어앉아 지
키기만 할 뿐 나오지를 않으니 조조군도 험한 지세를 의지해 지키고 있는 관을
먼저 공격하기는 어려웠다. 그리하여 양군은 서로 대치한 채 50여일 이 흘렀다.
그런 어느 날 조조가 돌연 군사를 물리라는 영을 내렸다.
"모두 돌아갈 채비를 하라. 이곳에서 물러가리라!"
그러자 가후가 영문을 알 수 없다는 듯 까닭을 물었다.
"적의 군세가 강한지 약한지 아직 알아보지도 못한 터입니다. 그런데 어찌하여
스스로 물러나려 하십니까?"
"지금 적은 매일 관을 지키기 위해 굳게 방비만 하고 있네. 그러니 쉽게 적을
깨뜨리기 어려울 것 같네. 이때 물러가는 것처럼하여 소문을 퍼뜨리고 적을 안
심시킨 뒤 방비를 풀게 한 다음 우리가 기마병으로 그들을 급습케 한다면 반드
시 이길 것이네."
조조가 그렇게 말하자 가후가 감탄해 마지않았다.
"과연 승상의 귀신 같은 계교는 저희들이 헤아릴 길이 없습니다."
조조는 곧 하후연, 장합에게 영을 내렸다.
"두 장수는 각기 경기병 3천을 이끌고 작은길로 나누어 은밀히 양평관 뒤로
돌아가도록 하라."
조조는 그렇게 영을 내린 뒤 자신은 영채를 뽑아 나머지 군사들을 거두어 물
러났다.
조조군의 움직임이 곧 양앙에게도 알려졌다. 양앙은 양임을 불러 이 일을 의
논했다.
"조조가 군사를 거두어 물러난다 하니 이때야말로 그들을 뒤쫓아 친다면 반드
시 조조를 깨뜨릴 수 있을 것이오. 장군의 생각은 어떻소?"
양앙의 물음에 양임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했다.
"조조는 원래 모계가 많은 인물이오. 그것이 속임수일지도 모르니 함부로 그들
을 뒤쫓아서는 아니 될 것이오."
그러나 양앙은 양임의 말을 마땅치 않게 생각했다.
"공이 가기 싫다면 나 혼자라도 달려가 조조를 치겠소."
"급히 그들을 뒤쫓는 건 위험합니다. 조금 더 두고 보십시오."
양임이 다시 간곡히 말렸으나 양앙은 듣지 않았다. 한중의 마지막을 재촉하는
부질없는 고집이었다. 곧 다섯 진의 군사를 모조리 거느리고 조조를 뒤쫓으러
나갔다.
그런데 그날은 서로 마주 대해도 얼굴을 알아보지 못할 만큼 안개가 짙은 날
이었다. 안개가 너무 자욱해 양앙의 군사들은 더 나아가지 못하고 그 자리에 머
물며 안개가 걷히기를 기다렸다. 그때쯤 하후연은 군사를 거느리고 소리를 죽여
산 뒤로 돌아가고 있었다. 자욱한 안개 속을 헤치며 가만히 나아가고 있는데 앞
쪽에서 사람의 말소리와 말 울음소리가 들려 왔다. 하후연은 틀림없이 적의 매
복군일 것으로 여기고 급히 인마를 재촉해 다른 길로 접어들었다. 그러나 복병
을 피해 나아간 곳이 바로 양앙의 영채 앞이었다.
양앙이 군사를 뽑아 나간 터라 얼마 되지 않은 군졸들은 짙은 말발굽 소리가
들리자 양앙이 안개 때문에 되돌아온 것으로 지레짐작했다. 진문을 열어 양앙을
맞아들이려는데 막상 들어온 건 하후연의 군사들이었다.
하후연이 안으로 들고 보니 바로 적의 영채인데 군사들의 수가 얼마되지 않았
다. 하후연이 그 좋은 기회를 놓칠 리가 없었다. 안으로 밀고 들어가면서 불부터
질러댔다. 영채를 지키던 군졸들은 그제야 적군이 밀려든 것을 알고 당황하여
뿔뿔이 흩어져 달아나기에 바빴다.
이윽고 안개가 걷히자 양임은 영채에 붉은 불길이 치솟고 있는 것을 보고 군
사를 거느리고 구원하러 달려왔다. 그러나 양임이 군사를 이끌고 오자 그를 맞
은 것은 하후연이었다.
하후연이 칼을 빼들어 양임을 내리쳤으나 양임이 황망히 칼끝을 피했다. 하후
연과 양임이 칼과 칼을 맞대며 수합을 싸울 때였다. 양임의 등 뒤에는 장합의
군사가 밀어닥쳤다. 양임은 하후연과 대적하기도 힘든 판이라 더는 싸울 생각도
못하고 황망히 길을 열어 남정 땅을 향해 말을 달렸다.
한펴 ㄴ안개 속에서 오도가도 못하고 있던 양앙은 조조를 뒤쫓기에는 너무 지
체되었다고 여겨 다시 본진으로 돌아왔다. 그러나 본진에는 뜻밖에도 다섯 군데
의 진문이 모두 불에 타 버린 채 하후연과 장합이 점령하고 있었다. 뿐만 아니
었다. 물러난 줄 알았던 조조가 군사를 거느리고 뒤쫓아오고 있었다. 앞과 뒤로
적을 맞게 된 양앙은 달아날 길부터 찾았으나 쉽게 길을 열 수가 없었다. 양앙
이 힘을 다해 칼을 휘두르며 길을 열려고 하는데 한 장수가 앞을 가로막았다.
"이놈, 순순히 그 목을 바쳐라."
소리친 장수는 바로 장합이었다. 양앙은 장합을 맞아 죽기로 작정하고 싸웠으
나 불과 수합을 버티지 못하고 장합의 한칼에 목이 떨어지고 말았다. 대장이 죽
고 나니 앞뒤로 길이 막힌 졸개들인들 무사할 리가 없었다. 모두 목이 떨어지거
나 항복하는데 그런 가운데서도 몸을 빼내 도망친 졸개 몇이 양평관으로 달려가
장위에게 이 사실을 알렸다.
그 소리를 듣자 장위도 마음이 다급해졌다. 이미 한 장수는 죽고 군사들도 잃
은데다 자기 혼자 조조군을 맞게 된 셈이니 더 이상 양평관에 머무를 수가 없었
다. 밤이 되자 황망히 성문을 빠져 나와 한중으로 달아나고 말았다.
조조가 군사를 거느려 양평관에 쳐들어가니 성 안은 이미 텅비어 있었다. 이
렇게하여 한중의 관문과 같은 양평관을 조조는 힘들이지 않고 손안에 넣게 되었
다.
한편 그때 남정에 이르른 장위는 그곳에서 양임을 만나 장로를 보러 갔다. 장
위가 장로에게 도망쳐오게 된 경위를 말했다.
"양앙.양임 두 장수가 양평관에 이르는 길목을 지키고 있었으나 조조의 계책
에 떨어져 영채를 빼앗기는 바람에 양평관을 더 이상 지킬 수가 없었습니다."
그 말을 듣자 장로는 크게 노해 길길이 뛰며 양임을 꾸짖었다.
"싸움에 져 나라가 위급해진 마당에 무슨 얼굴로 나를 보러 왔다는 말인가?
여봐라 저 자의 목을 베라."
그러자 양임은 죽고 없는 양앙을 탓했다.
"저는 양앙이 조조군을 뒤쫓는 것을 간곡히 말렸으나 그가 듣지 않다가 이런
변을 당한 것입니다. 바라건대 저에게 군사를 한 번만 더 주신다면 가서 싸워
반드시 조조군을 깨뜨리고 돌아오겠습니다. 만약 그때도 져서 돌아온다면 군령
에 의한 처벌도 달게 받겠습니다."
양임이 당장 목이 떨어질 판이라 다시 싸우겠다고 나섰다. 다급하기는 장로도
마찬가지라 양임이 군령에 따라 처벌도 마다하지 않자 화를 누그러뜨리고 양임
에게 다짐을 두었다.
"그렇다면 군령장을 써 두고 나가겠는가?"
"군사만 주신다면 군령장을 써 두고 가겠습니다."
양임이 장로의 명에 따라 군령장을 써 두자 장로는 그제야 2만의 군사를 주어
조조를 막게 했다. 양임은 그 길로 군사를 이끌어 남정으로 나아갔다.
한편, 조조는 단 한 번의 계책으로 양평관을 얻자 다시 군사를 이끌어 나아가
기로 했다. 그러나 역시 걱정은 이곳의 험한 지세였다. 이에 하후연에게 군사 5
쳔을 주며 남정으로 가는 길목을 살피도록 했다. 조조의 명에 따라 하후연이 군
사를 이끄는데 양임이 이끌고 오는 군사와 맞닥뜨렸다. 양군은 각기 그 자리에
서 진을 벌이고 싸울 채비를 갖추었다.
양임이 부장 창기를 내보내 하후연과 싸우게 했다. 양임의 명을 받들어 창기
가 말을 몰아 나오기는 했지만 그는 하후연의 적수가 아니었다. 맞부딪친다고
할 것도 없이 창칼을 겨룬 지 3합도 되지 못해 하후연의 한칼에 창기가 찔려 말
아래로 굴러 떨어지고 말았다.
자기가 내보낸 부장 창기가 그렇게 맥없이 쓰러지자 양임도 가만히 있지 않았
다. 창을 꼬나들고 말을 달려 하후연에게 덤벼들었다. 양임은 그래도 한중이 믿
고 있는 장수라 창기와는 자못 달랐다. 하후연과 어우른지 30여 합이 되었으나
이기고 짐이 판가름나지 않았다.
그러자 하후연은 싸우다 힘에 부친 척 슬며시 말머리를 돌려 달아났다. 도망
가다 타도계를 쓰기로 했다. 하후연이 도망가자 양임이 기세를 올리며 뒤쫓아왔
다.
"네 이놈 하후연아, 어디로 달아나느냐?"
양임은 성미가 급했다. 양임이 주저하지 않고 급히 뒤쫓자 하후연은 몸을 홱
뒤틀어 바싹 등 뒤까지 따라온 양임을 한칼에 내리쳤다. 양임은 눈 깜짝할 사이
에 일어난 일이라 비명 한 번 지르지 못하고 그대로 말 아래도 굴러 떨어지고
말았다. 창기에 이어 믿었던 대장도 죽자 군사들은 기가 꺾였다. 하후연이 군사
를 내몰며 양임의 군사를 들이치니 모두 달아나기에 바빴다.
조조는 하후연이 양임을 죽였다는 전갈을 받자 남정 땅으로 군사를 휘몰아 진
을 세웠다. 이제 남정성을 보고 호령하면 그 소리가 듣릴 정도의 가까운 거리였
다.
장로는 얼굴색이 달라진 채 황급히 문무관원들을 모아 놓고 그 대책을 물었
다. 그러자 염포가 일어나 소리쳤다.
"조조 수하의 장수를 막을 만한 사람은 한 사람밖에 없습니다. 주공께서는 그
사람을 부르십시오."
장로에게 귀가 번쩍 뜨이는 말이 아닐 수 없었다. 염포를 바라보며 반색을 하
고 물었다.
"그 사람이 대체 누구인가?"
"그는 바로 남안 출신으로 방덕이란 사람입니다. 그는 지난날 마초를 따라 주
공께 투항했으나 마초가 서천으로 떠날 때 병으로 누워 있었기 때문에 함께 가
지 못했습니다. 그 동안 주공의 은혜를 입으며 이곳에 머무르고 있는데 어찌하
여 그 사람을 내보내 조조를 막으려하지 않으십니까?"
장로는 그제야 잊고 있던 방덕이 생각나 고개를 끄덕이며 크게 기뻐했다. 곧
그를 불러 후한 상을 내리고 군사 1만을 주어 조조를 막게 했다.
방덕은 장로가 군사를 주기가 바쁘게 남정성으로 달려가다 10여 리쯤 떨어진
곳에서 조조의 군사와 마주쳤다. 방덕은 조조군을 보자 진을 벌인 뒤 말을 달려
싸움을 돋우었다.
"조조는 듣거라. 서량의 방덕이 예 있다. 어서 나와 내 칼을 받으라!"
조조는 군사를 이끌고 온 장수가 방덕인 것을 알자 전에 위교에서 싸울 때의
그 빼어난 용맹이 생각났다. 조조는 문득 그 방덕을 보자 슬며시 딴마음이 일어
장수들에게 말했다.
"방덕은 서량의 용맹이 뛰어난 장수이다. 원래 마초의 사람으로 지금은 마지못
해 장로에게 의탁하고 있으나 필시 그의 뜻은 다른 곳에 있을 것이다. 나는 이
사람을 얻었으면 하는 바 그대들은 급하게 그를 치려 하지 말고 천천히 싸워 그
를 지치게 한 후 사로잡도록 해 보라."
모든 장수들이 조조의 뜻을 받드는 가운데 먼저 장합이 방덕을 맞아 싸웠다.
그러나 싸움은 오래 가지 않았다. 장합이 수합을 싸우다 슬며시 말머리를 돌려
달아났다. 이어 하후연이 말을 달려 방덕을 맞았다. 하후연도 이미 꾸며 놓은 계
교대로 몇 합을 부딪다 힘이 부친 듯 말머리를 돌려 진으로 되돌아왔다. 이어
서황이 나가 싸우다 다시 물러나고 그 뒤를 이어 허저가 달려나갔다.
조조의 장수들이 아무리 힘을 다하지 않았다고는 하나 이미 세 장수와 겨룬
방덕이라 웬만하면 힘이 부칠 만도 하였으나 조금도 지친 기색이 없었다.
이에 허저는 이번에야말로 그를 지치게 하리라고 싸우기를 50여 합이나 계속
했다. 그러나 방덕은 연거푸 네 장수를 맞고도 두려워하는 기색이 없었다. 허저
도 그만 말머리를 돌려 진으로 돌아오니 장수들은 한결같이 비록 적이지만 그의
용맹에 감탄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과연 방덕은 예사 장수가 아닙니다."
조조는 장스들이 그렇게 칭찬하자 더 한층 그릴 아끼는 마음이 일었다.
"어떻게 하면 그를 내 사람으로 만들 수 있겠는가?"
조조가 장수들을 둘러보며 묻자 가후가 입을 열었다.
"장로가 믿고 있는 모사 중에 양송이란 이가 있습니다. 이 사람은 원래 탐욕이
많아 뇌물을 몹시 밝히는 자입니다. 그에게 은밀히 사람을 보내 금은과 비단을
보내 매수한 후 장로에게 방덕을 헐뜯게 하도록 하십시오. 그러면 장로가 방덕
을 의심하게 될 터인즉 그때를 기다려 일을 꾸미면 어렵지 않게 방덕을 우리
진으로 끌어올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남정성 안으로 사람을 보내야 할 텐데 어떻게 성 안으로 사람을 보
낼 수 있다는 말인가?"
"그건 어렵지 않은 일입니다. 내일 방덕과 싸우다 짐짓 패한 체하고 진을 버리
고 달아나는 것입니다. 그러면 방덕은 틀림없이 우리의 진을 차지할 것입니다.
밤이 되기를 기다려 우리가 다시 대군을 휘몰아 진으로 덮쳐들면 방덕도 하는
수 없이 성 안으로 군사를 거둘 것입니다. 그때 말 잘하는 군사 한 사람을 적군
으로 꾸며 그들 사이에 섞어 성 안으로 함께 들이면 됩니다."
조조가 들으니 가후의 꾀가 그럴 듯했다. 곧 뛰어난 군관 한 사람을 뽑아 후
한 상을 내림과 동시에 황금 엄심갑(오늘날의 방탄 조끼)을 입히고 그 위헤 한
중 군사의 복색을 입혀 영채 으슥한 곳에 숨게 했다.
다음 날이 되자 하후연, 장합에게 각기 한 떼의 군사를 거느려 멀리 가서 매
복하도록 했다. 두 장수가 매복을 끝내자 서황이 군사를 이끌고 나가 방덕에게
싸움을 돋우었다. 방덕이 지체하지 않고 군사를 휘몰아 서황을 맞아 싸웠다. 서
황이 수 합을 부딪다 다시 말머리를 돌려 달아났다. 방덕은 이번에야말로 놓치
지 않겠다는 기세로 곧장 서황의 뒤를 쫓았다. 서황의 영채 가까이 이르러서도
방덕이 뒤쫓기를 멈추지 않자 조조 군사들은 뿔뿔이 흩어지며 영채를 버리고 달
아났다.
그렇게 되니 방덕은 어렵지 않게 조조의 영채 하나를 손 안에 넣었다. 방덕은
영채를 얻자 뒤쫓기를 그만두고 영채를 둘러보며 몹시 기뻐했다. 영채 안에는
군량과 마초가 가득 쌓여 있었기 때문이다. 마초와 군량을 그대로 두고 도망함
으로써 정말 황급히 물러난 듯이 보이게하여 계책임을 의심하지 않도록 하기 위
함이었다.
방덕은 군량과 마초까지 얻게 되자 그것이 미끼인 줄을 알 리 없어 기쁨을 감
추지 못하며 사람을 보내 이 일을 장로에게 알리게 하는 한편 잔치를 열어 군사
들을 위로했다.
그런데 그날 삼경 무렵이 되자 갑자기 영채 주위의 삼면에서 불길이 하늘을
태울 듯 붉게 일며 군사들이 세 길에서 한꺼번에 밀려들기 시작했다. 방덕이 보
니 가운데 길로는 서황과 허저요, 왼쪽에서는 장합이, 오른쪽에서는 하후연이 군
사를 휘몰아오고 있었다. 삼면에서 달려온 군사들은 방덕이 차지하고 있는 영채
를 마구 짓밟으며 쳐들어오자 잔치까지 열며 방심하고 있던 방덕의 군사들이 크
게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방덕의 군사들이 좌충우돌하며 흩어지고 달아나는데
방덕도 조조의 대군을 막을 수가 없어 황망히 말을 타고 길을 열어 남정성으로
향했다.
그러자 영채를 급습했던 조조의 군사들은 숨쉴 틈도 없이 방덕의 뒤를 쫓았
다. 방덕이 성 아래에 이르자 급히 성문을 열게 하고 뒤따른 군사를 이끌어 성
안으로 들어갔다. 이때를 기다리고 있던 조조의 세작은 그 틈을 이용해 한중 군
사들 틈에 섞여 성 안으로 들어갔다.
성 안에 들어간 조조군의 세작은 군사들 틈에서 슬며시 몸을 빼내어 부중으로
가 양송을 뵙기를 청해 절을 올린 후 말했다.
"위공 조 승상께서는 오래 전부터 공의 높으신 덕을 들으신 지 오래이라 특별
히 저를 보내셨습니다. 조 승상께서는 황금 엄심갑을 보내시어 믿음의 징표로
삼으려 하기니 받아 주시고, 또한 승상께서 보내신 밀서를 바치도록 하셨습니
다."
세작은 옷 속에 입고 있던 황금 갑옷을 벗어 밀서와 함께 양송한테 바쳤다.
양송은 황금 갑옷을 받자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조조가 자기를 높이 대하는 듯
하자 마음이 달라진 양송은 조조가 보낸 밀서를 읽고 나더니 세작에게 가만히
일렀다.
"내가 위공께 은혜에 보답할 것이니 안심하시라고 전하게. 내게 좋은 계책이
있으니 위공께서 이르신 대로 따르겠다고 말씀드려 주게."
양송은 세작이 물러나자 그날 밤이 되기를 기다려 장로를 찾아가자 장로가 물
었다.
"방덕이 조조의 영채를 빼앗았다가 다시 하루를 넘기기도 전에 패했다니 그
까닭이 무엇이오?"
방덕이 싸움에 이겼다는 전갈을 받고 크게 기뻐했던 장로였다. 그러나 그 기
쁨이 가시기도 전에 싸움에 져 쫓겨오니 화가 나 있던 차에 양송이 들어오자 물
었다. 양송에게는 더없이 좋은 기회가 아닐 수 없었다.
"그 역시 마초의 일족 외에 아무것도 아닙니다. 모처럼 조조의 진을 빼앗고도
당장 그 진을 내어 준 걸 보면 필시 조조와 내통하여 뇌물을 받고 일부러 패한
것이라고밖에 볼 수 없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방덕을 못마땅히 여기던 터에 양송이 방덕을 헐뜯자 장로는 앞
뒤를 살필 생각도 않고 화부터 냈다. 곧 방덕을 불러들여 갖은 욕설을 다 퍼부
으며 좌우에게 명했다.
"저 자의 목을 베도록 하라!"
그러자 방덕을 천거했던 염포가 나서 목놓아 울면서 장로를 말렸다.
"방덕의 말을 들어 보도록 하십시오. 그리하여 그의 죄가 없음이 밝혀지면 다
시 싸워 싸움에 졌던 허물을 씻게 해 주십시오."
염포가 간곡히 만류하자 장로는 간신히 화를 누그러뜨리고 방덕에게 소리쳤
다.
"내일 다시 나가 싸워서 이기지 못 하면 그때는 반드시 목을 베리라!"
장로가 양송의 말만 믿으니 방덕은 말 한 마디 못 하고 마음 속으로 장로를
원망하면서 그 자리를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합비대전 일백 기의 결사대
조조가 동천을 얻자 유비는 손권을 부추겨 합비를 치게 한다. 손권은 군사
를 일으켜 보급로를 끊기 위해 환성을 빼앗고 여세를 몰아 합비를 친다. 그러자
조조군의 장요가 조조의 계책을 받아 죽기 살기로 싸워 손권에 타격을 존다. 손
권은 다시 합비를 공략하고 조조는 40만 대군을 이끌고 합비에 이른다.
다음 날이 되자 조조군은 남정성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방덕은 군가를 이끌고
나가 조조군과 맞섰다. 방덕이 나오기를 기다리고 있던 조조는 허저에게 싸우도
록 명을 내렸다.허저가 말ㅇ르 달려나가 방덕과 부딪쳤다. 그러나 몇 합을 싸우
다 말머리를 돌려 달아나기 시작했다. 이번 싸움에 지면 방덕은 어차피 떨어질
목숨이었다.
비장한 각오를 한 방덕인지라. 달아나는 허저를 급히 뒤쫓았다. 한동안 뒤를
돌아볼 틈도 없이 허저를 뒤쫓고 있느에 문득 선언덕에 조조가 말을 타고 나타
나더니 외쳤다.
"방영영은 어찌하여 빨리 항복하지 ㅇ는가?"
방덕이 놀라 말을 멈추고 조조를 바라보았다.
조조를 보자 방덕의 머릿속에는 얼핏 생각나는 것이 있었다.
'그렇다. 조조를 사로잡기만 하면 적의 장수 1천 명을 사로잡는 것보다 나으리
라.'
방덕은 그렇게 생각이 미치자 말을 박차 방향을 바꿔 조조가 있는 산언덕을
향해 달려갔다. 그러나 그곳에 조조가 파 놓은 함정이 있다는 것을 방덕이 알
리 없었다. 조조를 쫓기에만 마음이 급해 말을 달리던 방덕은 갑자기 하늘이 무
너지고 땅이 꺼지는 듯하더니 말을 탄 채 깊은 구덩이 속으로 떨어지고 말았다.
파 놓은 함정에 방덕이 빠졌음을 알자 조조의 군사 들은 함정 주위에 몰려들어
쇠갈고리와 밧줄을 구덩이 속으로 던졌다. 꼼짝없이 방덕은 쇠갈고리와 밧줄에
묶여 구덩이 위로 끌어올려졌다.
그러자 조조가 얼른 말에서 내리더니 군사들을 꾸짖어 물리친 후 몸소 방덕의
결박을 풀어 주며 달랬다.
"장군의 용맹을 내가 아끼고 있던 바요. 장군은 나와 함께 뜻을 펴는 것이 어
떻겠소?"
방덕은 조조가 그토록 호의롭게 대하자 그렇지 않아도 장로를 원망하고 있던
참이라 마음이 움직였다. 밝지 못한 장로를 섬기느니, 차라리 조조를 섬기기로
하고 ㄴ죽 엎드려 절했다.
"이 몸은 위공께 항복하겠소이다."
방덕이 항복하자 조조는 친히 방덕을 부축해 일으키고 말위에 오르게 한 후 대
채로 돌아갔다. 방덕과 함께 대채로 돌아갈 때 조조는 짐짓 남정성 사람들이 볼
수 있는 길을 택해 성 안 사람들로 하여금 그 모양을 보게 했다.
남정성 위의 군사들이 죽시 이 사실을 장로에게 알렸다.
"방덕이 조조와 함께 말머리를 나란히 하여 조조의 대채로 가고 있었습니다."
장로는 그 말을 듣자 더욱 크게 놀라면서도 다른 한편으로 결국 양송의 말대
로였음을 믿게 되어 더울 양송에게 의지하게 되었다.
다음 날이 되자 조조는 삼면에다 구름사다리를 세우고 포를 쏘며 성을 공격했
다. 조조가 남정성을 단번에 깨칠 듯한 기세로 성을 들이치자 장로는 아우 장위
와 의논했다.
"조조의 공격이 저토록 드세니 아무래도 이 성을 지켜 내지 못할 것만 가다.
어찌하면 좋겠느냐?"
장위라고 해서 뾰족한 수가 있을 리 없었다. 장위는 잠시 무거운 얼굴로 생각
에 잠겨 있다 불쑥 한마디 내뱉었다.
"형세가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창고를 모두 불살라 버리고 남산으로 달아나
파중이나 지키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그러자 옆에 있던 양송이 짐짓 걱정스런 얼굴로 가만히 말했다.
"조조의 대군과 싸우다 주공과 백성들이 화만 입을까 두렵습니다. 그렇게 되면
성문ㅇ르 열고 조조에게 항복하느니만 못합니다."
신임하는 양송이 항복을 권했으나 장로는 그것만은 선뜻 따를 수가 없었다.
장로가 얼른 결정을 짓지 못하고 있는데 장위가 입을 열었다.
"창고에 불을 지르로 파중으로 가는 것이 상책입니다."
장위도 성문을 열고 성을 고스란히 조조에게 넘겨 주자는 양송의 말만은 따르
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장로가 무겁게 입을 열어 자신의 속마음을 털어놓았다.
"나는 이전부터 안의 천자를 따르려 했으나 아직 뜻을 펴기도 전에 일이 이
지경에 이르고 말았다. 이제 부득이 떠나게 됐으나 창고의 양곡은 모두 나라의
것이 아닌가. 그러니 태우고 떠나는 것은 옳은 일이 아니다."
장로는 창고에 자물쉬를 튼튼히 채운 후에야 가솔들과 벼슬아치들을 거느리고
남문으로 달아났다. 조조 군사들이 이를 알고 장로를 뒤 쫓으려 했다.
조조가 남정성 안에 들어가 보니 창고와 곳간에는 모두 자물쇠가 채워져 있었
다.
조조는 성을 버리고 달아난 주인답지 않은 장로의 도량에 문득 감복하는 마음
이 일었다. 조조는 장수들에게 장로를 쫓지 말도록 영을 내린후 사람을 파중으
로 보내 항복을 권하게 했다.
장로는 조조가 뒤쫓아 자신을 사로잡을 수도 있었으나 뒤쫓지 않고 군이 사람
을 보내 항복을 권하자 마음이 움직였다. 그러나 아우 장위만은 끝내 조조에게
항복하는 것을 반대했다.
"조조에게 항복하더라도 결국은 살아 남지 못할 것입니다. 그러느니 끝까지 싸
워 기업을 지켜야 할 것입니다."
장위가 결연한 목소리로 말하자 장로는 아우의 뜻을 물리치지 못했다. 양송은
장로의 생각이 아우 장위의 뜻에 기우는 것을 보자 조조에게 밀서를 보냈다.
장로가 항복할 뜻이 있으나 아우 장위가 따르지 않고 싸울 것을 주장하고 있
습니다. 급히 파중으로 진병하시면 제가 안에서 내응하겠습니다.
조조는 양송의 밀서를 받자 몸소 군사를 있끌고 파중으로 향했다. 조조가 파
중으로 밀려오자 자우이가 군사를 이끌고 나왔다. 장위가 군사를 거느리고 나오
는 걸 본 조조는 허저로 하여금 장위와 싸우게 했다. 장위가 한중을 지키기 위
해 끝내 싸을 것을 주장하며 달려나온 기개는 가상했다.그러나 그는 허저의 적
수가 못 되었다.
장윈느 며 합 부딪지도 멋하고 허저가 내리찬 한칼에 목이 떨어지고 말았다.
장위가 죽고 나자 이미 기운 싸움이라 여긴 장졸들은 허저에게 쫓기며 황급히
성 안으로 들고 말았다.
아우 장위가 죽자 장로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성문을 굳게 닫고 지키는 것
뿐이었다.
조조 못지않게 파중이 떨어지기를 기다리고 있는 양송인지라 이를 그대로 보
고 있지만은 않았다. 장로에게 나아가 충돌질했다.
"싸우지 않고 성 안에 있음은 앉아서 죽음을 기다리는 것과 같습니다. 제가 힘
을 다해 성을 지킬 테니 주공께선 몸소 군사를 거느려 싸워 결정을 내도록 하십
시오. 죽기로 싸운다면 조조를 물리치지 못할 것도 없습니다."
믿고 있는 양송이 거듭 부추기니 장로도 그 말에 따르기로 했다. 그러자 염포
만은 간곡히 말렸다.
"아니 됩니다. 지금 성문을 열고 나가는 것은 스스로 죽음을 재촉하는 것밖에
되지 않으며 이는 조조가 바라고 있는 바입니다. 오로지 살 수 있는 길은 성문
을 닫고 굳게 지키는 방법ㅂ에 없습니다."
그러나 염포의 말보다 양송의 말을 더 굳게 믿고 있는 장로였다. 곧 군사를
거느리고 성을 나섰다. 장로가 군사를 거느리고 나서자 조조군이 벌떼처럼 달려
들었다. 그러자 장고의 후군이 조조군의 위세에 겁을 집어 벗고 싸우기도 전에
달아나기 시작했다.
장로가 아무리 죽기로 작정하고 싸우려고 했지만 군사들이 뜻대로 따라 자지
않으니 싸움이 제대로 될 리 없었다. 하는 수 없이 급히 군사를 물리며 성으로
말머리를 돌렸다.
"빨리 성문을 열라!"
성문 앞에 이르른 장로가 소리쳤다.
그러나 양송이 성문을 굳게 닫아 걸고 성문을 열지 않아ㅆ. 양송의 속임수에
넘어간 것도 모른 채 장로는 오도가도 못하고 쩔쩔매고 있을 때 위쫓아온 조조
가 소리쳤다.
"장 장군은 어서 항복하여 목숨을 보전하시오."
이제 달아날 곳도 없고 달아나기에도 늦은 장로인지라 마침내 말에서 내려 엎
드리고 말았다. 이렇게 되니 3대에 걸혀 이어져 온 한중의 기업도 끝내 조조에
게 넘어가고 말았다.
장로가 항복하자 조조는 그를 두터이 대하며 진남장군이란 벼슬까지 내렸다.
남정성을 버리고 달아날 때 차고와 곳간을 불태우지 않고 자물쇠로 봉해 둔 것
을 갸륵히 여겼기 때문이었다. 장로를 따르던 문무의 관원들도 모두 받아들이고
염포를 비롯하여 벼슬아치들을 후에 봉하느 모두가 조조를 따랐다.
이렇게 하여 한중일 평정되자 조조는 장로 스스로 사군이라 칭하며 오두미도
교주가 되어 다스리던 한중의 각 군에 태수와 도위를 두되 한중 사람들로 임명
하여 다스렸다.
조조는 공이 큰 군사들에게 상을 내렸으나 한중을 취하는 데 공이 가장 컸던
양송에게는 뜻밖에도 큰 벌을 내렸다.
"너는 어진 사람을 모함하고 오직 주인을 팔아 저 한 몸의 영화만을 구한 놈
이다. 내가 너를 죽여 그 주인을 배반한 자는 결코 용서받을 수 없다는 것을 보
여 주리라!"
조조는 양송을 저잣거리에 끌고 가 목을 베도록 영을 내렸다. 장로를 거슬러
한중을 조조에게 바친 양송은 거리로 끌려 나가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목이 떨
어지고 말았다.
후세 사람은 시를 지어 양송을 비웃었다.
어진 이를 해코지하고 주인 팔아 공세웠네.
금덩이 은덩이 가득 쌓여 있으나 모두 다 헛일.
영화가 오기 전에 제 몸 먼저 육시를 당했네.
천 년이 지나도 사람들 양송을 비웃네.
조조가 장로의 항복을 받아 동천을 얻고 그 동천도 안정되어 가자 주부사마의
가 뵙기를 처하여 권했다.
"유비는 속임수로 유장의 서천을 빼앗았기 때문에 서촉 가람들이 아직 유비를
마음으로는 따르지 않고 있습니다. 그런데다 주공께서 한중을 평정하셨으니 그
도 두려워하며 당황하고 있을 것입니다. 이때 지체하지 않고 군사르 움직이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지혜로운 이는 기회를 놓치지 않는 법입니다. 이때를 놓치
지 않도록 하십시오. 주공께서 급히 군사를 내시면 이제 가까스로 리업을 다지
고 있는 유비는 홍수에 휩쓸리듯 무너지고 말 것입니다."
사마의의 말을 듣더니 조조가 문득 고개를 들어 탄식했다.
"사람이란 실로 만족을 모르는 모양이구나. 이미 농땅을 빼앗았는데 또 다른
땅을 뺏고 싶어지는 것이 사람의 마음인가?"
그러자 유엽이 사마의의 말에 찬동하며 조조를 부추겼다.
"승상께서는 어찌하여 그런 말씀을 하십니까? 사마중달의 말이 옳습니다. 만
약 이 일을 늦추었다가는 다스림에 밝은 제갈량이 승상이 되고, 3군을 관우,장비
같은 용장이 이끄는 장수가 자리잡으면 촉은 평온을 되찾게 됩니다. 그들 장수
들이 혐한 관소와 길목을 지키고 방비를 든든히 한다면 촉은 다시는 범흘 수 없
는 땅이 되고 말 것입니다. 그러니 지체하지 마십시오."
이전의 조조 같으면 더 이상 말이 필요 없었겠으나 웬일인지 익주로 군사를
내는 일에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았다.
"우리 군사들이 그 동안 산 넘고 물을 건너 먼길을 왔느데다 오랜 싸움에 지
쳐 있을 것이오. 군사들을 한동안 쉬게 하는 것이 좋겠소."
조조는 사마의와 유엽에게 그렇게 말하며 두 사람의 말을 물리쳤다.
조조가 촉을 공격할 마음이 없다는 걸 알자 두 사람도 더는 권할 수가 없었
다.
그 무렵, 조조가 한중을 평정했다는 소식을 듣자 서천 사람들은 모두 조조가
서천으로 밀고 들오올 것이라고 여겨 하루에도 몇 번씩 졸라며 두려움에 떨려
있었다. 촉을 얻긴 했으나 아직 기업을 굳건히 다질 겨를 이 없었던 터라 유비
는 걱정스런 얼굴로 공명을 불러 이 일을 의논했다.
"걱정하지 미십시오. 제게 조조를 물리칠 계책이 있습니다."
공명이 이미 생각해 둔 바가 있다는 듯 유비에게 서슴없이 말했다.
"어떤 계책이오?"
유비가 반색을 하며 물었다.
"지금 조조가 합비에 군사를 머무르게 함것은 손균을 방비하기 위함입니다. 이
때 우리는 강하,장사,계양 3군을 동오로 돌려 주는 것입니다. 그리고 말 잘하는
사람을 보내 손권에게 이롭고 해로움을 따져 군사를 일으켜 합비를 치도록 하면
조조도 어쩔 수 없이 군사를 남쪽으로 돌릴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유비가 그 말을 듣고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물었다.
"그렇다면 누구를 보내면 좋겠소?"
그러자 가까이에 있던 이적이 선뜻 나서며 말했다.
"그 일은 제게 맡겨 주십시오."
이적이 나서자 유비는 매우 기뻐했다.
곧 손권에게 줄 글을 쓰고 예물을 갖추어 먼저 형주에 들러 관우에게 이 일을
알린 다음 동오로 가게 했다. 이적은 유비가 이른 대로 형주의 관우를 찾아가
손군에게 세 군을 돌려 주는 까닭을 말하고 다시 말릉으로 가 손권 뵙기를 청했
다.
유비가 뜻밖에 사람을 보내자 손권은 이적을 노려보며 우선 무슨 일인가 까닭
을 물었다.
"그대는 무슨 일로 왔는가?"
이적은 예를 올란 후 공경스런 말투로 손권에게 답했다.
"전에 제갈 자유께서 세 군을 찾으로 오셨을 때 공교롭게도 군사께서 계시지
않아 양도해 드리지 못했습니다. 이에 유 황숙께서 그 땅을 돌려 드린다는 것을
글로 써서 가져왔습니다. 원래 형주의 남군과 영릉 까지 돌려 드려야 하지만, 조
조가 동천을 빼앗았기 때문에 우리 관 장군께서 몸둘 곳이 없어지게 됩니다. 지
금 합비가 비어 있으니 군후께서는 군사를 일으켜 그것을 치셔서조조가 남쪽으
로 군사를 이끌도록 해 주십시오. 그런 후 우리 주공께서 동천을 얻으시게 되면
그때는 지체없이 모든 형주를 돌려 드리겠다고 하셨습니다."
손권은 지난번 약속했던 세 군을 돌려 주겠다는 말에 잠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이저가 한 말에 대해 대답은 하지 않은 채 말했다.
"그대는 잠시 역관에서 기다리도록 하시오. 의논해 본 후에 알려겠소."
이적을 내보낸 위 손권이 보사들을 불러 의견을 묻자 장소가 입을 열었다.
"이것은 조조가 서천으로 쳐들어올까 두려워 유현덕이 궁여지책으로 꾸민 계
교입니다. 그러나 설령 그렇다 하더라도 조조가 한중에 머물고 있는 틈을 타서
우리가 합비를 취해 두는 것도 또한 현명한 처사가 아닐 수 없습니다. 우리에게
도 이로운 이링니 유현덕의 청을 물리칠 필요는 없습니다."
손권은 장소의 말을 옳게 여겼다. 손권은 이적을 불러 큰 은혜라도 베푸는 듯
하며 합비로 군사 낼 일을 승낙하며 서천으로 가게 했다. 이어 손권은 노숙으로
하여금 형주 세 고을을 받아들이게 한 후 군사를 육구에 둔병케 하고, 그곳에
있던 여몽,감녕과 여항에 있는 능통도 말릉으로 불러들였다.
다음 날이 되자 여몽과 감녕이 말릉에 이르럿다. 송권을 찾아본 여몽이 의견
을 내었다.
"지금 조조는 여강태수 주광으로 하여금 환성땅에 둔병케 하면서 벼농사를 짓
게 하여 합비 창고에 가득 군량을 비축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먼저 환성 땅을
빼앗아 조조의 보급로를 끊은 뒤에 합비로 군사를 내시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손권이 여몽의 말을 듣자 기뻐했다.
"장군의 계택이 내 마음에 드오."
손권이 여몽의 말에 좇기로 하고 여몽,감녕을 선봉으로, 장흠과 반장은 후군을
맡게 했다.
손권은 몸소 주태,진무,동습,서성,정보응ㄹ 거느리고 중군이 되어 진병키로 했
다. 다만 그때 동오의 원로 장수였던 정보와 한당은 멀리 변방의 오새를 지키로
있었으므로 함께 떠나지 못했다.
강을 건넌 손권의 군사는 먼저 가는 길목에 있는 화주를 빼앗은 다음 환성으
로 밀려들었다. 이때 환성태수 주광은 손권이 군사를 이끌로 오자 사람을 합비
로 보내 구원을 청하는 한편 성에 의지해 지키기만 할뿐 나가 싸우려 하지 않았
다.
손권이 몸소 성 아리까지 나아가 살펴보는데 성 위에서 화살이 비 오듯 쏟아
져 내려 푸른 일산과 기에 꽂혔다.손권은 습히 진으로 돌아와 장수들을 불러 놓
고 의견을 물었다.
"어떻게 해야 환성을 뺏을 수가 있겠소?"
"군사들에게 가까운 곳에 흙으로 산을 만들게 하고 그 위에서 공격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동습이 먼저 의견을 내자 서성도 계책을 내었다.
"구름사다리를 세운 후 무지개다리를 놓아 그 위에서 성 안을 굽어보며 공격
해야 합니다."
그러나 여몽이 고개를 가로저으며 가만히 말했다.
"두 분의 말씀이 그럴 듯하오만, 모두가 하루 이틀에 될일이 아닙니다. 그럴
동안 합비에서 구원군이라도 오면 우리는 환성을 얻기 어려울 것입니다. 우리군
사는 지금 막 싸움터에 이르러 그 기세가 자못 드높으니 힘을 돋우어 성을 공격
하도록 합시다. 이런 기세로 내일 성으로 짓쳐 들면 오시나 미시에는 환성을 깨
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손권은 여러 장수들의 말을 듣고 있다가 그 말에 따르기로 했다. 다음 날 오
경이 되자 일제히 3군을 일르켜 성을 들이치기 시작 했다. 그러나 환성의 군사
들도 이미 대비를 하고 있었던 듯 화살과 돌 세례를 퍼붓기 시작했다.
그러자 선봉장인 감녕이 방패로 머리를 가린 가운데 쏟아지는 화살과 돌을 바
긍며 성벽을 기어올라갔다. 감녕이 성벽을 기어오르자 주광은 숭노스들에게 명
해 더욱 맹렬히 화살을 쏘아붙이게 했다. 그러나 감녕은 물러서지 않았다 .방패
로 쏟아지는 화살을 마긍며 성벽을 기어올랐다. 감녕이 번개처람 손에 든 철련
(쇠로 된 죄인을 묶는 차꼬)으로 주공을 후려갈겨 쓰러뜨렸다. 감녕과 군사들이
성벽을 기어오르자 여몽은 몸소 북을 치며 싸움을 돋우었다.
감녕잉 여강채수 주공을 쓰러뜨리자 이를 본 손권의 군사들은 더욱 힘이 솟았
다. 앞을 다투어 성벽 위로 기어올랄 쓰러진 주광부터 쳐죽이니 이를 본 주광의
군사들은 너도나도 창칼을 던지고 항복했다. 이미 대장이 죽고 송벽 위로 적군
이 기어오르자 나머지 조조군도 더는 싸울 엄두가 나지 않았다.
손권이 드디어 환성을 점령했을 때는 진시에 이르렀을 무렵이었다. 주광을 돕
기 위해 급히 구원군을 이끌고 달려오던 장요는 도중에 환성이 이미 손권의 손
안에 떨어졌다는 전갈을 받았다. 장요는 때가 늦었음을 알고 군사를 되돌려 합
비땅으로 돌아가고 말았다.
환성을 손안에 넣은 손권이 성안으로 들어가자 여항에 있던 능통이 그제야 군
사를 거느리고 이르렀다. 손권은 성 안에 들자 성대한 잔치를 베풀게 했다. 소를
잡고 술을 걸러 삼군에게 내려 배불리 먹였다.
한편 여러 장수들에게도 후한 상을 내리며 술자리에 청해 그 공을 치하했다.
이때 여몽은 오늘 싸움에서 가장 으뜸 가는 공을 세운 감녕에게 윗자리를 권한
후 그의 용맹을 한껏 추켜세웠다.
술잔이 오가고 잔치가 한창 무르익어 갈 때였다. 얼큰히 술기가 오른 능통은
늦게 이르러 오늘 함께 싸우지 못해 심사가 좋지 않았다.
게다가 지난날 선친을 화살로 쏘아 죽인 원수인 감녕이 공을 세웠다 하여 온
통 칭송이 그에게 오마지자 속을 끓이고 있던 차에 손권일 먼저 자리르 뜨자 능
통은 그대로 참지 못했다. 한동안 눈을 부릅뜨고 감녕을 노려보다 문득 좌우에
있는 사람의 허리에 있는 칼을 쏙 빼들며 소리쳤다.
"잔치 자리에 흥일 없는 듯하오. 제가 칼춤을 출 테니 모자란 솜씨나마 흥을
돋우시기 바라오."
그러자 감녕이 잔치를 시작할 때부터 자기를 노려보던 능통의 살기 띤 눈초리
를 모를 리가 없었다. 능통이 양손에 칼을 들고 춤을 추자 그도 즉시 두손에 창
을 쥐고 일어나더니 잔치상 가운데로 나섰다.
"저도 이 창으로 잔치 자리의 흥을 돋울까 합니다. 나의 창 쓰는 법을 구경삼
아 보아 주시오."
두 사람이 서로 창과 칼을 가지고 춤을 추는데 서로 노려보는 눈빛에 살기가
번뜩이고 있었다.
여몽이 그들 두 사람을 속마음을 눈치채자 그냥 보고만 있을 수 없었다. 얼른
한 손에는 방패를 다른 한 손에는 칼을 들고 두 사람 사이에 끼여들었다.
"두 분의 무예가 아무리 능하다 하나, 내 솜씨를 따르지는 못할 거요. 나의 칼
과 방패를 쓰는 솜씨도 구경해 주시기 바라오."
여몽은 칼과 방패로 둘 사이에서 춤을 추며 감녕과 능통이 가까이 다가서지
못하도록 떼어 놓았다. 잔치 자리에 때아닌 칼춤이 벌어지고 그낌새가 심상치
않음을 느낀 장수들 중에 하나가 이 일을 손권에게 알렸다. 손권이 그 사실을
전해 듣자 곧장 말을 달려 잔치 자리로 향했다. 손권은, 능통이 감녕을 아비 죽
인 원수라고 여기고 있을 것이라 생각하고 그대로 두었다가는 분명 두 장수 중
의 하나가 죽을지 모르기 때문에 달려온 것이다.
손권이 잔치에 자리에 이르자 능통과 감녕은 그제야 무기를 걷고 자리에 않았
다. 손구너이 눈을 부릅뜨며 큰 소리로 꾸짖었다.
"내가 항상 그대들 두 사람에게 지난날의 원한은 잊어 버리라고 하지 않았던
가! 그런데 어찌 오늘 이런 꼴을 보이는가?"
그러나 손권의 성난 꾸짖음에 능통은 옛 한을 억누르지 못해 땅에 엎드려 통
곡했다. 손권은 그런 능통을 좋은 말로 타이르고 진정시켰다.
다음 날이 되자 손권은 환성을 깨뜨린 여세를 몰아 다시 3군을 일으켜 합비로
향해 나아갔다.
한편 합비성을 맡아 지비던 장요는 이곳의 수비를 게을리한 적이 없었으나 환
성이 떨어졌다는 소식을 접하고 조바심에 잡겨 있었다. 환성을 깨뜨린 손권이
몸소 대군을 이끌고 합비로 오고 있다는 전갈을 받았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한
중에 있는 조조가 설제를 보내 나무 상자 한 개를 전했다.
장요가 그 나무 상자를 보니 조조가 쓴 글로 봉인이 되어 있었다. '적군이 오
거든 열어 보라!'는 글을 본 장요는 조조가 상자 속에 계책을 써 둔 것이라 여기
고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런데 그날로 손권이 10만 대군을 이끌고 합비성에 이르렀다. 장요는 급히
조조가 보낸 나무 상자를 열어 보았다.
손권이 군사를 이끌고 오거든 장 장군과 이 장군이 출전하고 악 장군은 성을
지키게 하라.
장요는 이전과 악진을 불러 조조의 글을 보여 주며 상의했다.
"승상의 뜻이 이러하시니 두 장군의 생각은 어떠시오?"
그러자 그 물음에 대답 대신 악진이 장요에게 되물었다.
"장군의 생각은 어더하시오?"
"지금 주공께서 머리 동천에 계시니 손권은 이 기회를 틈타 우리를 치려 하고
있소. 그렇게 하여 군사들의 마음을 안정시킨 후 성을 지키도록 해야 할 것 이
외다."
장요가 서슴없이 대답했다. 평소 이전은 장요와 사이가 좋지 못했다. 나가 사
워야 한다는 장요의 말을 듣고도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이전이 그렇게 입
을 다물고 있자 악진도 몸을 사렸다.
"적을 수가 워낙 많은데다 우리 군사가 적으니 맞서 싸우기가 어렵소. 나가서
싸우느니 성안에서 굳게 지키느니만 못할 것이오."
그 말을 듣자 장요가 정색을 하며 자리를 박차고 분연히 일어났다.
"공들은 모두 사사로운 감정만을 앞세우고 공사를 돌보지 않는구려. 그렇다면
나 혼자라도 나가 죽기로 싸워 결판을 내겠소!"
장요가 큰 쇨로 군사들에게 명해 말을 이끌고 오라고 재촉했다. 이전도 그때
서야 자리에서 ㅂ러떡 일어나더니 말했다.
"장군께서 그러시는데 내가 어찌 사사로운 감정만을 가지고 공사를 저버릴 수
있겠소? 바라건대 제게도 명을 내려 주시오. 장군의 명에 따르겠습니다."
장요는 이전이 자신과 평소 사이가 가깝지 않았으나 싸움을 앞두고 흔쾌히 그
런 감정을 씻어 버리는 것을 보자 몹시 기뻤다. 이에 반가운 목소리로 이전에게
당부했다.
"고맙소이다. 만성께서는 내일 군사를 거느리고 소요진 북쪽에 매복해 기다리
다 오병이 쳐들어오거든 소사교 다리를 끊도록 해 주히고. 나는 악문겸과 함께
적을 치겠소."
이전은 장요의 명을 받자 흔쾌히 군사를 거느려 소요진을 향했다.
그때 손권은 여몽,감녕을 선봉으로 삼고 자신은 능통과 함께 중군이 되어 합
지를 향해 진군하고 있었다. 나머지 장수들은 후군이 되어 뒤따르니 그 기세가
자못 드높았다.
이윽고 선봉인 여몽,감녕은 합비성 밖에서 악진과 마주치게 되었다. 환성에서
용맹을 떨쳐 기세가 오른 감녕이 악진을 보자 곧장 말을 박차고 달려나갔다.
악진도 마주 달려나와 둘 사이에는 불꽃 튀는 싸움이 어우러지는 듯했다.그러
나 두 장수가 싸운 지 10여 합도 못되어 악진이 지짓 패한 척하며 슬며시 말머
리를 돌려 달아나기 시작했다.
감녕은 더욱 기세가 올랐다. 뒤에서 두 사람의 싸움을 지켜 보고 있던 여몸에
게 자기를 뒤따르라는 군호를 보내며 곧장 달아나는 악진을 뒤쫓았다.
그때 중군을 이끌고 있던 손권에게 선봉인 감녕과 여ㅁ이 첫싸움에서 이겼다
는 소식이 전해졌다. 손권은 그 소리를 듣자 신명이 나 기세를 몰아 단번에 합
비를 깨칠 욕심으로 군사들을 재촉하여 달려갔다. 손권이 소요진 북쪽에 이르렀
을 때였다 .문득 천지가 뒤집힐 듯한 포 소리가 연달아 일더니 왼편에서는 장요
가, 오른편에서는 이전이 한 떼의 구마를 이끌고 급습해 왔다. 감녕과 요몽은 생
각없이 악진을 뒤쫓느라 중군과의 거리가 너무 멀리 떨어져 있었다.
손권은 자기 편의 군사가 이겼다는 말만 듣고 기세 조헥 다릴다가 뜻밖에 저
그이 매복구니 나타나자 몹시 당황해ㅆ. 얼른 감녕과 여몽에게 구원을 청하려는
데 그럴 겨를도 없이 장요가 이미 눈앞에 이르러 있었다. 손권의 옆을 따르던
능통의 휘하 군사는 겨우 3백여 기에 지나지 않았다. 양쪽에서 밀려드는 조조
ㅜ사의 위세에 홍수에 둑이 무너지듯 뭉그러지는데 능통이 손권에게 소리쳤다.
"주공께서는 빨리 소사교를 건너도록 하십시오."
그 외침이 끝나기도 전에 장요가 기병 2천여를 이끌고 들이닥쳤다. 능통은 손
권을 구ㅏ기 위해 말을 되돌려 그들을 막으며 죽기로 작정하고 싸웠다. 그러나
그때는 이미 이전이 소사교를 끊은 뒤였다.
소사교는 남쪽 부분이 이미 두어 길ㅇ나 무너져내리고 널판때기 하나 걸려 있
지 않았다. 소ㄴ이 무너져내린 다리르 보며 얼굴빛이 변한 채 어쩔 줄 모르고
쩔쩔매고 있는데 아장인 곡리가 손권을 보고 큰 소리로 외쳤다.
"주공께서는 말을 뒤로 물리쳤다가 다시 말을 박차 끊어진 곳을 뛰어 넘으십
시오."
손권은 그 말을 듣자 정신을 가다듬고 말을 3장 가량 되몰고 갔다. 그리고는
다리를 향한 채 채찍이 부러져라 말엉덩이를 후리치는 한편 양쪽 발로 옆구리를
찼다. 고삐를 바싹 잡고 쏜살같이 달려 다리 앞에 이르러 다시 채찍을 치니 말
을 큰 울음소리를 내며 네 굽을 모아 힘껏 솟구쳐 허공을 날아 다리 남쪽에 내
려섰다.
뒷날 사람들이 이때의 광경을 찬탄하여 시를 지었다.
유비의 적로마가 단계를 띄어넘으니
오늘 또, 오호가 합비 싸움에 졌네.
뒤로 물러서서 준마 몰아 채찍질하니
보라, 옥룡이 소요진 위를 날으네.
손권이 다리를 뛰어넘어 남쪽 언덕에 내리자 ㅎㄴ인 서성과 돌습이 급히 배를
저어 와서 맞았다.
그때 능통과 곡리는 힘을 다해 장요를 맞아 싸웠으나 점점 어려운 형세로 밀
리고 있었다. 그러자 그때서야 중군에서 싸움이 일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 감녕
과 여몽이 군사를 되올려 구원하러 왔다. 그러나 능통을 구하기도 전 이들을 기
다리고 있던 이전이 군사를 내몰았다.
선봉과 중군, 후군이 장요의 매복에 걸려 각기 세 갈래로 흩어지게 되니 제대
로 힘을 쓰지 못해 이날 동오군은 결국 태만이나 꺾인 채 크게 패하고 말았다.
손권을 구하기 위해 장요를 맞아 싸우던 능통이 거느렸던 3백의 기병은 모두
죽임을 단하고 말았다. 다만 능통과 곡리만은 몇 군데 창에 찔려 무거운 상처를
입고도 말을 달려 소사교에 이르렀다. 이미 다리가 끊어 졌다는 것을 알았으나
여러 군데 상처를 입은 몸이라 다리를 뛰어 넘을 기력이 없었다. 하는 수 없이
강물을 따라 허둥지둥 달려가는데 때마침 배를 타고 있던 손권이 그들를 발견하
자 동습으로 하여금 구해 오도록 했다. 동습은 위험을 무릅쓰고 배를 저어가 가
까스로 능통과 곡리를 배에 태웠다.
여몽과 감녕도 그대 겨우 목숨을 구해 남쪽 언덕으로 도망쳐왔다.
손권의 참담한 패배였다.
그 싸움으로 강남 사람들은 장요에게 어찌나 혼이 났던지, 밤에 어린 아이들
이 울다가도 장요의 이름만 들먹이면 울음을 그쳤을 정도였다.
손권은 감녕과 여몽,능통이 돌아오자 그들의 호위를 받으며 영채로 돌아왔다.
손권은 자기를 살리기 위해 몸을 던져 적을 막은 능통과 소사교를 뛰어넘도록
깨우쳐 준 곡리에게 후한 상을 내렸다.
손권은 많은 군사를 잃었으므로 군사를 유수로 물린 후 다시 싸울 채비를 했
다. 전선을 정돈하여 정돈하여 수륙으로 일제히 진병하기로 하는 한편 강남으로
사람을 보내 새로 군마를 뽑아 싸움을 돕도록했다.
한편 장요는 손권이 유수에서 다시 군마와 전선을 정돈하고 강남에서 군사를
데려와 다시 합비를 치러 온다는 소식을 전해 들었다. 장요는 손권이 한 번 패
한 이래 다시 군사를 일으킨다는 말에 그 군세가 가볍지 않을 것으로 여겼다.
자기가 거느린 군사로는 적을 박개 어렵다고 생각하고 급히 설제를 한중으로
보내 조조에게 구원을 청하게 했다.
조조는 여러 장수들과 모사들을 불러모은 후 의논했다.
"이 기회에 서천을 치려 하는 데 그대들의 뜻은 어떤가?"
그러자 유엽이 나서며 조조에게 간했다.
"지금 촉 땅은 안정되어 있는 데다 우리가 공격할 것에 대비한 채비도 갖추어
져ㅆㄹ 것입니다. 지금 쳐들어갔다가는 쉽게 깨뜨리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럴 바
에댜 우선 군사를 강남으로 돌려 위급한 합비를 구해야 할 것입니다."
유엽의 말에 조조가 고개를 끄덕였다. 곧 하후연에게 한중으로 드는 험한 길목
인 정군산을 지키게 하는 한편 장합으로 하여금 몽두암을 비롯한 한중으로 드는
길목을 맡아 지키게 했다. 그리고 나머지 군사들은 모조리 유수로 향하게 했다.
이때 손권은 유수에서 합비를 치기 위해 새로운 군마를 수습하고 있었는데 홀
연 급한 전갈을 받았다.
"한중의 조조가 40만의 대군을 이끌고 합비를 도우러 온다 합니다."
이에 손권은 모사들을 불러 의논한 후 동습과 서성 두 장수로 하여금 큰 배
오십 척을 내어 유수 어귀에 매복케 했다. 이어 진무에게는 군사를 거느려 강
언덕을 오가며 순찰을 강화하게 했다.
손권이 유수를 지키기만 하고 나가 싸우려 하지 않자 장소가 일어나 아뢰었
다.
"지금 조조가 먼길을 달려오니, 우리가 나아가 그들의 날카로운 기세부터 꺾어
야 합니다."
손권도 그 말을 옳게 여겨 여러 장수들을 둘러보며 물었다.
"누가 조조의 군사를 대적하여 날카로운 기세를 꺾어 놓겠는가?"
그러자 능통이 먼저 몸을 일으키며 말했다.
"제가 가겠습니다."
손권이 기뻐하며 능통을 바라보며 물었다.
"군사는 얼마를 데려가면 되겠느냐?"
"3천이면 충분하겠습니다."
능통이 서슴없이 대답했다. 그러나 그 소리가 채 끝나기도 전이었다.
"기병 백이면 넉넉하거늘, 무엇 때문에 3천이나 거느리고 간다는 말입니까?"
문득 한 사람이 일어나며 소리쳤다. 모두가 놀라 모니 그는 바로 감녕이었다.
감녕이 능통의 말을 반박하고 나서자 감녕을 원수로 여기고 있는 능통이 화를
벌컥 내며 소리쳤다.
"네 어찌 그따위 큰소리를 쳐 나를 희롱하려 드느냐?"
가녕이 그 소리를 듣고 가만히 있을 리가 없었다.
"겁쟁일 장수가 아닌 담에야 3천 기가 무슨 필요가 있느냐? 내가 백기를 거느
리고 가서 싸울 테니 앉아서 구경이나 하라!"
두 사람이 눈을 부라리며 입씨름을 벌이자 손권이 두 사람을 타이르며 말렸
다.
"조조의 군세가 크다 하니 가볍게 여겨서는 아닐 될 것이오."
손권은 이어 능통이게 명을 내렸다.
"그대는 유수구로 나가 그곳을 살피다 조조의 군사가 이르거든 급습하여 기세
를 꺾도록 하라!"
능통은 손권이 먼저 자기에게 명을 내리자 곧장 3천 인마를 거느리고 유수에
있는 자긍ㄴ 성채로 향했다. 능통이 군사를 이끌어가는데 미처 유수구에 이르기
도 전에 맞은편에서 쟝요가 군사를 거느리고 몰려오고 있었다. 양군이 맞닥뜨리
자 장요가 말을 달려나왔고 능통도 말을 달려나가 어우러졌다. 두 사람일 창칼
을 부딪은 지 50여 합이 되었으나 승부가 좀처럼 가려지지 않았다. 손권은 이를
보자 능통이 혹시 실수라도 할까 염려하여 여몽에게 다시 영을 내렸다.
"여 장군이 장요를 맞아 싸우고 능통을 돌려 보내도로 하시오."
여몽이 말을 달려 장요를 맞자 능통이 진으로 돌아왔다.
능통이 돌아오는 것을 보자 감녕이 손권에게 나아가 아뢰었다.
"제가 밤이 되기를 기다려 기병 백 명을 거느리고 나아가 조조의 영채를 부수
겠습니다. 만약 군사를 한 산람이라도 잃거든 공으로 치지 않겠습니다."
장요를 눈앞에 둔 손권인지라 감녀의 의기를 갸륵히 여겼다. 이에 정예군 백
명을 뽑아 주고 술 50병을 양고기 오십 근을 내려 군사들을 위로 하게 했다. 감
녕은 자기 진으로 돌아와 가려뽑은 군사 백 명을 뜰앞에 벌여 앉게 하고 술과
양고기를 내놓았다. 감녕은 은 주발에 가득히 술을 따라 연거푸 두잔을 마시더
니 입을 열었다.
"오늘 밤 우리는 주공의 명을 받들어 조조의 진을 쳐부쉬야 한다. 이 술과 안
주는 특별히 주공께서 내리신 거싱니 모두 한 잔씩 들이키고 힘을 다해 조조의
영채를 깨뜨리도록 하자!"
술과 안주를 내놓자 멋모르고 좋아하던 군사들은 감녕의 말에 서로 얼굴만을
쳐다볼뿐 아무런 대꾸가 없었다. 백 명의 군사로 수십만 조조군의 진을 공격하
려 한다니 그건 불을 지고 기름 소긍로 뛰어들라는 것과 다름아니었다.
감녕은 군사들의 얼굴에 문득어두운 기색이 감돌자 감연히 칼을 뽑아 들고 눈
을 부릅떴다.
"상장인 나까지도 목숨을 내던져 조조의 진으로 뛰어드는데 너희가 어찌 감히
주저하고 있느냐!"
군사들은 감녕이 큰쇨로구짖자 이미 여러 군사들 중에서 뽑힌 몸이라는 걸 깨
닫고 마음을 다져머긍며 한결같이 입일 모았다.
"저희들도 죽기로 작정하고 싸우겠습니다."
감녕은 그제야 군사들에게 술과 고기를 배불리 먹게 한 후, 밤 이경이 되자
흰거위 깃털을 하나씩 나누어 주며 일렀다.
"이 깃털을 투구 앞쪽에 꽂아 우리가 백 명르 결사대로서 한편임을 알게 하는
징표로 삼겠다."
군사들은 모두 결연한 모습으로 갑옷을 갖춰입고 투구에 깃털 하나씩을 꽂은
후 말에 올라 조조의 영채를 향해 말을 박찼다. 조조의 영채에 이른 군사들은
우선 녹각부터 뽑아 던지고 함성을 울리벼 곧바로 조조가 있는 중군으로 향했
다.
그러나 조조가 있느 중군은 방비도 단다히 해 두고 있었다. 수레로 울타리치
듯 겹겹이 둘러놓아 철통같이 방비를 하니 쉽게 뚫고 들어갈수가 없었다. 쉬게
중군으로 들기가 어려워지자 감녕은 닥치는 대로 좌충우돌 했다. 밤중에 느닷없
이 나타난 적이라 조조군은 정신을 가다듬을 새도 없었다. 적의 수호가 얼마인
지도 알 수 없는 가운데 저희들끼리 짓밟고 치고 때리니 그야말로 난장판이 되
고 말았다.
그 틈을 타 감녕의 군사들은 영채 안을 휘젓고 다니면서 닥치는 대로 찌르고
베었다. 한도안 조조의 영채를 휘젓고 다니며 조조군을 쑥대밭으로 만들자 다른
영채들도 그제야 횃불을 밝히고 북을 울리는 가운데 함성을 지르며 감녕을 사로
잡으러 달려나왔다.
감녕은 군사를 거두어 영채 남쪽 문을 치며 빠져 나왔다 .조조구닝 이를 보고
도 감녕군이 두려워 감히 앞을 막는 군사가 없었다.
이때 손권은 주태에게 한 떼의 군사를 주어 감녕을 돕게 했다. 감녕이 한바탕
조조 영채를 짓밟고 달아나는 가운데 조조 군사는 얼른 그들을 뒤쫓지 못했다.
저렇게 적은 군세로 영치를 급습하고 달아날 때는 뒤에 틀림없이 매복군이 있다
고여겼기 때문이었다.
감녕이 군사를 이끄고 돌아와 군사를 점고하니 한 사람도 빠지지 않았다. 감
녕이 다시 군사를 거느리고 영문에 이르자 군사들은 북을 치고 피리를 불며 만
세를 부르니 그 환호성이 땅과 하늘에 떨쳐 울리는 듯했다.
북 소리 땅을 뒤흔드니
동오 군사 짓쳐들고 귀신이 곡하네.
깃털 머리에 꽂은 백 군사 조조군 휩쓰니
사람들 감녕을 범 같은 장수라 일컫네.
감녕이 돌아오자 손권이 크게 기뻐하며 몸소 영문까지 나와 백 명의 군사를
맞아들였다. 그러자 감녕이 말에서 뛰어내려 엎드려 절했다. 손권은 감녕을 부축
해 일으키며 말했다.
"장군의 이번 싸움은 늙은 역적 조조의 간담을 서늘하게 만들었을 것이오. 내
가 장군을 위험한 곳으로 보낸 것은 죽이려 함이 아니라 장군의 담력을 보기 위
함이었소."
손권은 이어 비단 천 필과 좋은 칼 백 자루를 내리며 공을 치하했다. 감녕은
받은 비단과 칼을 군사들에게 골고루 나누어 주었다.
손권은 기쁨을 감추지 못한 얼굴로 여러 장수들을 둘러보며 외쳤다.
"조맹덕에게는 장요가 있고, 내게는 감흥패가 있다. 능히 한 번 겨루어 볼 만
하지 않은가!"
손권이 그렇게 말하며 장수들의 의기를 돋우자 동오의 장수와 군사들의 기세
가 드높아졌다.
그러나 장요는 지난 밤에 급습을 당해 크게 패하자 그 패배를 되갚기 위해 날
이 밝기가 무섭게 군사를 이끌어 와 싸움을 돋우었다.
"바라건대 제가 나가 장요와 싸우도록 해 주십시오."
능통이 분연히 나섰다. 감녕이 어젯밤에 백 기 만을 거느리고 나가 큰 공을
세우고 돌아오자 능통은 속이 끓어 앉아 있을 수가 없었다.
손권은 능통의 청을 주저하지 않고 허락했다. 능통이 5천 군마를 수습하여 떠
나자 손권은 몸소 감녕을 거느리고 그 뒤를 따라가 능통이 싸우는 모습을 지켜
보았다. 양군이 마주하며 둥굴게 진을 펼치자 선두에 장요가 말을 달려나오는
데 왼쪽에는 이전이, 온른쪽에는 악진이 따르고 있었다.
능통이 칼을 휘두르며 마주 달려나가자 장요는 먼저 악진을 내보내 싸우게 했
다.
두 장수의 칼이 맞부딪치며 싸움이 어우러졌다. 말과 말이 엇갈리며 칼과 칼
이 부딪은 지 50여 합이 되었으나 승부가 정해지지 않았다.
조조는 두 장수가 싸운다는 말을 전해 듣자 몸소 말을 몰아 문기 아래까지 나
와 지켜 보았다. 두 장수가 한 참 싸우는데 보니 어느 쪽도 기울어짐이 없자 조
조가 조휴에게 가먼히 일렀다.
"너는 몸을 숨기고 적장을 쏘도록 하라."
조휴는 조조가 은밀히 내린 명을 받고 장요의 등 뒤로 슬그머니 다가가 모모을
숨긴 채 활에 살을 메겨 능통을 향해 쏘았다. 화살은 날아가 능통의 말을 맞하
고 말았다. 화살에 맞은 말이 놀라 하늘을 향해 울부짖으며 뛰어오르자, 말 위의
능통이 중심을 잃고 앞쪽 땅바닥에 곤두박히고 말았다.
악진이 그 좋은 기회를 놓칠 리가 없었다. 땅에 내동댕이 쳐진 능통을 한창에
꿸 기세로 말을 달려나왔다. 능통에게 달려간 닥진이 창으로 막 찌르려 할 대였
다. 어디선가 시위 쇨가 나며 화살 한 대가 날아오더니 악진의 얼굴에 꽂혔다.
악진은 외마디 비명 소리를 지르며 그대로 말에서 굴러 떨어지고 말았다.
두 장수가 모두 말에서 굴러 덜어지자 양편의 군사들이 달려나와 각기 저희
편 장수를 구해갔다. 양군은 우선 장수를 구하는 일이 급한 일이라 각기 징을
울려 군사를 물렸다. 하마터면 악진의 창에 목이 떨어졌을 능통이 진으로 돌아
오자 손권에게 절하며 살려 준 은혜에 감사했다. 그러자 손권이 까닭을 알 수
없는 웃음을 지었다.
"악진의 볼에 활을 쏘아 장군을 구해 준 사람이 누구인 줄 알겠는가?"
"아직 알지 못하고 있습니다. 어느 분이십니까?"
능통이 궁금한 듯 급히 물어 오자, 손권이 여전히 웃음 띤 얼굴로 대답했다.
"바로 감녕일세."
뜻밖의 말에 능통이 얼른 입을 열지 못하다가 감녕에게 다가가 머리를 조아려
절을 올리며 정중한 목소리로 고마움을 표했다.
"공께서 이렇듯 크신 은헤를 베푸실 줄은 미처 생각지 못했소이다."
감녕은 머리를 조아리는 능통을 붙들어 일어켰다. 그 이후부터는 두 사람일
해묵은 원한을 씻고 생사를 함께 하는 벗이 되어 서로 얼굴을 붉히는 일이 없었
다. 손권도 이번 싸움으로 두 사람이 화해하게 된 것을 큰 수확으로 여겼다.
좌자와 위왕 조조
손권은 유수에서 조조와 겨룬 지 한 달이 지나도록 승패가 가려지지 않자
해마다 조공을 바치기로 하고 화친을 청한다. 한중 땅 일부를 얻은 조조는 더욱
포학해져 자신에 해로운 말을 하는 자는 모두 죽이고 위왕에 오른다. 도인 좌자
가 나타나 조조의 죽음을 예언하며 희롱하닌 조조는 놀라 몸져눕는다.
한편 조조는 닥진을 쟝중으로 데려가 치료를 받게 한 다음, 다음날로 군사를
다섯 갈래로 나누어 유수로 짓쳐들었다. 조조는 스스로 가운뎃길로 나가고 외쪽
1로군은 장요, 2로군은 이전, 오른쪽 1로군은 서황, 2로군은 방덕으로 하여금 각
기 1만의 군사를 거느리게 했다.
이때 동습,서성 두 장수는 군사를 배 위에 태우고 있었는데 조족누이 다섯 길
로 밀고 들어오는 것을 보자 군사들은 그 드높은 기세에 모두들 겁을 먹고 있었
다.
서성은 군사들의 얼굴색이 하나같이 모두 두려움에 치 있는 거승ㄹ 보고 큰
소리로 꾸짖었다.
"주군의 녹을 먹었으면 충성을 다해 주군을 섬겨야 한다. 너희들이 두려워할
게 무엇이냐!"
그 말과 함께 날랜 군사 수백을 뽑아 작은 배에 태운 후에 강을 건너 이전의
진을 향해 덮쳐들었다. 배에 남은 동습은 이때 군사들에게 함성을 지르게 하고
북을 울려 서성의 의기를 북돋워 주었다. 그런데 강 위에서 홍연 거센 바람이
크게 일기 시작하더니 집채 같은 파도가 일며 흰 물결이 부서지니 배가 금방이
라도 뒤집힐 듯했다. 군사들이 기겁을 하며 다투에 각함에 뛰어내려 목숨을 건
지려 했다. 동습이 그걸 보자 칼을 빼들고 소리쳤다.
"장수가 주군의 명을 받들어 역적들을 막고 있느데 어찌 감히 배를 버리고 달
아나려 하느냐?"
그 외침과 함께 동습은 배에서 각함으로 뛰어내린 군사 10여 명의 보긍ㄹ 베
었다. 그러나 바람은 점점 더 거세게 불어 산같은 파도가 일더니 끝내 동습이
타고있던 배가 뒤집어지고 말았다. 동습도 마침내 그 파도에 밀려 물 속으로 빠
져 죽고 말았다.
서성은 그때까지도 이전의 군사 틈에서 닥치는 대로 베고 찌르며 적과 싸우고
있었다.
이때 진무는 조조 군사가 강변에까지 이르러 동오 군사와 싸우고 있다는 말을
전해 듣고 급히 한떼의 군사를 이끌어 도우러 갔다. 그러나 미처 강변에 이르기
도 전에 조조의 장수 방덕을 만나 한바탕 어지러운 싸움이 벌어졌다.
그때 손권은 유수성에 머무르고 있었는데 조조 군사가 강변에까지 말려들고
있다는 보고를 듣자 주태와 함께 군사를 거느리고 나갔다. 손권이 동오군의 싸
움을 도우러 강변에 이르러 보니 적군들 트멩 서성의 모습이 눈에 띄자 급히 말
을 몰아 그를 구하려 했다.
그러나 앞뒤를 살피지 않고 성급히 달려나간 게 화근이었다. 손권이 다급히
말을 내몰아 가자 이르 본 장요와 서황이 양쪽에서 군마를 이끌어 와 에워쌌다.
거기다가 이전의 군사까지 장요 군사와 합치니 손권은 오도가도 못하고 적진
한가운데에 갇히고 말았다.
이때 조조는 높은 언덕 위에서 양군이 싸우는 모습을 지켜 보고 있었다. 조조
는 손권이 자기 편 군사에게 갇힌 것을 보고 허저에게 급히 영을 내렸다.
"그대는 손권이 갇혀 잇는 곳으로 급히 가 손권의 군사들을 두 갈래로 갈라
놓도록 하라. 서로 구원할 수 엇도록 길을 끊도록 하라."
허저가 조조의 영을 받아 나는 듯이 말을 달려 손권의 군사를 두 갈래로 갈라
놓았다.
이때 적진에 손권과 함께 갇혀 있던 주태는 힘을 다해 조조군을 치면서 길을
열었다. 길을 열자 강변으로 달려가 손권을 찾아보았으나 찾을 수가 없었다. 이
에 다시 말을 돌려 적진 속으로 말을 몰았다.
"주공께서는 어디 계시는가?"
손구넝르 찾으며 좌충우돌하던 주태가 졸개들을 만나자 물었다.
"주공께서는 적진 안에 갇혀 계십니다. 몹시 위급하십니다."
조조군에 ㅉ겨온 듯 졸개들이 손으로 한 적군이 가장 두텁게 에워싸고 있는
곳을 손가락질하며 대답했다. 그 소리를 듣기 무섭게 주태는 자신의 몸을 돌보
지 않고 적진 속을 헤치고 들어갔다.
적진을 헤치고 들어가자 곧장 손권에게 다가간 주태가 소리쳤다.
"주공께서는 저를 따르십시오. 제가 길을 열겠습니다."
순권은 그때 적에게 갇혀 어찌할 줄 모르고 닥치는 대로적ㅇ르 내리찍고 있던
중이었다. 문득 주태가 나타나자 저승에서 만난 부처보다 반가웠다. 칼을 후린
뒤 곧장 주태의 뒤를 쫓았다.
주태가 힘을 가다듬어 몇 겹으로 에워싼 적을 닥치는 대로 베며 길을 열자 손
권도 뒤따르는 적을 찌르며 말을 달렸다. 주태가 있는 힘을 다해 강변에 이르러
문득 고개를 돌려 보니 손권이 보이지 않았다.
깜짝 놀란 주태가 다시 말을 돌려 적진 속으로 뛰어들었다. 손권이 여전히 적
의 포위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음을 보고 주태가 마을 달려 가자 손권은 낯빛
이 변해지며 말했다.
"적진을 둘고 나가면 화살일 일시에 쏟아져 나갈 수가 없네. 어찌하면 좋겠는
가?"
"그러면 이번에는 주공께서 먼저 달려나가도록 하십시오. 제가 뒤를 맡겠습니
다."
주태의 말에 손권은 두말없이 그 말에 따랐다.주태는 좌충우돌하며 방패로 막
으면서 손권을 호위한 채 비 오듯 쏟아지는 화살을 막으며 달렸다. 그러나 방패
로 막는다고 하지만 자신의 몸은 제대로 가릴 수 없었다. 창에 두 군데나 찔리
고 10여 개의 화살이 갑옷에 꽂혀 있었다. 그러나 목숨을 돌보지 않고 사우며
달리는 주태의 덕분에 손권은 강변에 이를 수가 있었다.
손권이 강변에 이르자 그곳에는 마침 여몽이 한 떼의 수군을 이끌어 오고 있
는 중이었다. 요몽은 손구너을 보자 얼른 배에 태웠다. 주태와 함께 가까스로 배
에 오른 손권은 그제야 길게 한숨을 내뿜으며 넋두리를 늘어놓았다.
"내가 적진을 빠져 나올 수 있었던 것은 주태가 적을 세 번씩이나 헤쳐 주었
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서성은 아직 적진을 뚫지 못하고 있다. 이제 그가 무슨
수로 적진을 뚫을 수 있겠는가!"
그러자 온몸이 상처투성이인 주태가 다시 몸을 일으키며 말했다.
"제가 다시 가서 구해 오겠습니다."
주태는 그 말을 남기고 말위에 올라 창으로 춤을 추며 적진으로 말을 몰았다.
주태가 옴몸을 피로 물들인 채 달려들자 조조의 군사들도 그 용맹스러움에 기가
꺾여 함부로 덤벼들지 못했다. 그 틈을 타 주태는 조조군을 찌르고 후리며 서성
을 구해 돌아오는 데 두 장수가 모두 창에 찔려 중한 성처를 입고 있었다.
"뒤쫓는 적에게 활을 쏘아라!"
주태와 서성이 강변으로 말을 달려오자 여몽은 배 위에서 군사들에게 명해 일
제 화살을 쏘게 했다. 화살 때문에 조조군이 뒤쫓지 못하자 여몽은 주태와 서성
을 배 위에 맞아들였다.
주태와 서성이 배 위에 올라 목수은 건졌으나 진무는 그때까지 도 방덕을 맞
아 싸우고 있었다.
그러나 싸울수록 순세가 약한 진무 족이 점점 불리한 형세가 될 수밖에 없었
다. 응원 오는 군사도 없으니 점점 산골짜기로 쫓겨가는데 산에는 나무와 덤불
이 빽빽히 들어차 있었다. 진무가 망덕에게 쫓겨 산 속으로 들어가다 다시 싸우
기 위해 몸을 홱 트는데 전포 소매가 나뭇가지에 걸려 팔을 마음대로 쓰지 못하
는 지경이 되고 말았다. 뒤쫓던 방덕이 그 모양을 보고 한칼에 내려쳐 진무의
목을 말 아래로 떨어뜨리고 말았다.
이때 조조는 달아난는 손구너을 보자 몸소 군사를 강변으로 휘몰아 일제히 활
을 쏘게 했다. 전날 밤 중군이 교란당한 앙갚음을 톡톡히 하고 있는 셈이었다.
"손권이 탄 배위로 화살 세례를 퍼붓도록 하라!"
조조가 군사들을 재촉하며 소리쳤다. 조조군은 손권의 배를 향해 어지러이 화
살을 쏘아붙였다. 손권의 수군도 조조군을 향해 화살을 쏘았다. 그러나 배 위의
수군들은 주태와 서성을 구하느라 많은 화살을 날렸으므로 남아 있느 화살이 얼
마 되지 않았다. 조조군을 향해 나머지 화살을 날리다 보니 얼마 되지 않아 바
닥이 나고 말았다.
여몽이 크게 당황해하며 어찌할 줄 모르고 있는데 홀연 강 저편에서 수십 척
을 큰 배가 줄을 지어 바람을 타고 다가오고 있었다.
요몽이 자세히 살펴보니 그 배들의 선두에 한 장수가 서 있었는데 그는 바로
육손이었다.
육손은 원래 오군 오 땅 태생으로 자를 백언이라 했다. 그는 주듀처럼 지방의
명문 호족 출신이었으나 어려서 부모를 여의고 삼촌인 육강의 집에서 자랐다.
나이 스물한 살 때부터 손권을 모시고 있었는데 손권의 신임과 기대가 두터워
형 손책의 딸을 아내로 삼게 했다. 손권이 그를 특히 두터이 한 까닭은 그의 좋
은 가문 탓도 있었으나 반드시 그런 이유에서만은 아니어다. 그는 젊었을 때 단
양,산월 등의 도적들을 용맹과 지략으로 평정하여 많은 사람들을 탄복하게 했다.
또한 그의 인품에 대해서도 이런 얘기가 전해지고 있다.
단양에 있는 적을 평정하러 갔을 때의 일이었다. 순우식이라는 회계군 태수가
손권에게 상주하여 육손을 모함했다. 육손이 군사가 모자라 그곳 고을 사람들을
군사로 뽑은 것을 두고 백성들ㅇ르 못살게 굴고 있다고 갖은 거짓말을 보태 비
방했다. 그 일이 있은 뒤 손권에게 돌아온 육손은 순우식을 훌륭한 사람이라고
극구 칭찬했다.
"순우식이 그대를 비난해 왔는데 어찌하여 그런 상대를 칭찬하다니 모를 일이
네."
손권이 의아스런 얼굴로 육손에게 물었다.
육손이 그 말을 듣고 입을 열었다.
"그는 백성들의 편에 서서 저를 비난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제가 여기서 그를
비난한들 무슨 좋은 일이 있겠습니까?"
그 말을 듣고 손권이 고개를 끄덕이며 감탄했다.
"그대야말로 실로 온후한 도가의 풍모를 지녔음일세. 그대의 도량을 감히 누가
따르겠는가?"
이렇듯 육손은 모략에 뛰어났을 뿐만 아니라 어진 성품을 지닌 사람이었다.
그런 사람됨이 손권의 믿음을 얻게 한 것이었다.
육손은 여몽이 거느린 수군이 화살을 쏘지 못하고 있는 것을 보고 군사들에게
영을 내렸다.
"조조의 진으로 활과 쇠뇌를 퍼붓도록 하라!"
육손의 수군은 일제히 화살을 쏘며 배를 몰아 나아갔다.
육손이 10만의 군사를 이끌고 오자, 여몽의 수군들은 사기가 드높아졌고 금세
조조 군사들은 기가 꺾였다. 조조는 10만의 구낫가 일제히 화살을 날리니 더는
버티지를 못하고 급히 군사르르 물렸다.
육손은 배를 강가에 재고 달아나는 조조군을 뒤쫓게 했다. 육손의 수군들은
등을 보이고 달아나는 적에게 화살을 날리거나 닥치는 대로 찌르고 베었다. 승
세느 한순간에 뒤바뀌고 말았다. 뉵손이 거느린 수군은 그 군세로 보나 기세로
보나 모두 조조군을 누르고 있었다.
조조는 수많은 군사를 잃고 허둥지둥 영채로 쫓겨갔다.
이날 동오군이 거두어들인 마필만 해도 수천 필이 되었다.
육손은 조조를 멀리 쫓은 후 난전 중에 방덕에게 죽은 진무의 시체를 찾아 냈
다.
또한 동습마저 물에 빠져 죽었다는 것을 알게 되자 손권은 몹시 애통해했다.
손권은 동습의 시신을 찾게 하여 진무의 시신과 함께 성대히 장사를 치러 주었
다.
손권은 두 장수를 장사지낸 후 공이 많은 장졸들을 뒤해 크게 잔치를 열어 위
로했다.
이번 싸움에서 주구보다 공이 쿤 사람은 주태였다. 손권은 친히 잔에다 술을
따라 주고 그의 등을 쓰다듬으며 눈에 눌물이 고인 채 그 공을 기렸다.
"경이 세 번씨기나 묵숨을 돌보지 낳고 나를 구하기 위해 창에 찔린 곳이 수
십 군데, 그대의 살일 모두 창으로 그림을 새긴 것 같구나. 그러니 내가 어찌 경
을 친형제와 같은 정으로 대하지 ㅇ을 수가 있겠소? 이제 경에게 모든 병권의
무거운 짐을 맞기려 하오. 경은 니에게 둘도 없느 공신이니 마땅히 나와 함께
기쁨을 함께할 것이오."
손권은 그 말과 함께 주태의 옷을 벗게 하고 여러 장수들에게 보이며 말을 이
었다.
"이 상처 하나하나가 모두 려으이 충혼과 의로운 마음을 뜻하고 있소. 자, 모
두들 보시오."
주내의 온몸은 칼로 도려지고 후벼파져 나무 뿌리가 이리저리 뻗친 듯한 상처
로 뒤덮여 있었다. 손권은 그 상처 하나하나를 짚어 가며 어디서 어떻게 입은
상처인가를 물었다. 주태는 주군의 물음이라 마다할 수 엇어 성처를 입던 때의
일들을 낱낱이 들려주었다. 손권은 그때마다 큰 잔으로 술을 따라 니리니 주태
는 온몸에 있는 숱한 상처만큼 술을 마셔 몹시 취했다.
손권은 거기서 그치지 않고 주태에세 푸른 비다느로 만든 일산을 내렸다.
"앞으로는 어디를 가든 이 청라선을 받치고 다니도록 하시오."
푸른 비단 일산은 자신만이 쓰고 다니는 것이었다. 손권은 주태에게 그 일산
을 쓰게 함으로써 그 공을 더욱 높여 여러 장수들의 부러움을 사게 했다.
손권이 유슈에 머물면서 조조와 서로 겨룬 지 한달이 지났으나 승패가 가려지
지 않았다. 손권도 유수를 지키기만 하고 움직이지 않았으며 조조 또한 유수를
함부로 침범할 수가 없었다. 양군이 서로 군사를 내지 ㅇ으니 대치만 한 채 날
짜만 흘러가자 어느 날 장소와 고웅이 손권에게 아뢰었다.
"조조의 군세가 워낙크니 우리 힘으로 밀고 들어가 이기기는 어려울 듯합니다.
또한 싸움을 오래 끌다가는 우리 군사들만 상하게 할 뿐입니다. 그러니 차라리
조조와 화친을 청하여 인마를 더욱 조련시키고 백성들을 안정시키는 것이 나을
듯싶습니다."
손권도 아무런 이득도 없이 무작종 서로 대치만 하고 있느 거이 부질없는 것
임을 느끼고 있었다. 곧 그들의 말을 좇아 보즐을 조조의 영채로 보내 해마다
세공을 바치기로 하고 화친을 청하게 했다.
조조 또한 사정이 손권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오랜 원정으로 군사들의 사기
가 떨어진데다 강남을 단번에 평정ㅎ기가 어렵다는 것을 알고 잇엇다. 게다가
손권이 세공까지 바친다고 하여 자신의 체면치레를 해주자 화친하자는 손권의
말을 못이긴 척 받아들이기로 했다.
"굳이 화친할 뜻이라면 먼저 동오에서 군사를 물리도록 하라. 그러면 나도 군
사르 돌이키리라." 보질이 손권에게 돌아와 조조의 말을 전했다. 손권은 유수 땅
을 장흠과 주태에게 맞ㅌ겨 지키게 하고 군사를 거느려 말릉으로 돌아갔다. 손
권이 구낫를 거두어 갔다는 말ㅇ르 듣자 조조도 조인과 장요를 합비에 남겨두겨
허도로 돌아갔다.
손권과 조조가 각각 군사를 거두어 돌아가기는 했으나 각기 지키던 곳을 장수
들에게 맡겨 대비케 하니 싸움의 불씨는 여전히 그 자리에 남겨 두고 간 셈이었
다.
동로 하여금 해마다 세공을 바치도록 하고, 한중 당이 새로이 위의 땅으로 속
하게 되자 허도의 백관들은 더욱 조조의 공을 치하했다.
이럴 때 조조가 허도로 돌아오니 자연스레 조조를 위왕으로 받들자는 말이 문
무백관을 사이에 오르내리고 있었다. 대부분의 백관들이 조조를 위와으로 받들
려 했으나 이번에느 상서로 있는 최염이 또 그 일이 옳지 않음을 들어 반대하고
나섰다. 그러나 다른 백관들이 최염에게 슬며시 엄포를 놓았다.
"공은 순욱과 순유의 일을 모르고 계시오?"
최염이 그 말을 듣자 오히려 더 화를 내며 소리쳤다.
"이제 때가 이른 것인가. 반드시 변괴가 닥칠 것인죽 그대들 하고 싶은 대로
해 보게들..."
원래 천성이 강직한 최염이 그렇게 소리치니 모두 입을 다물고 말았다. 그러
데 그 자리에는 최염과 평소 사이가 좋지 않았던 자가 있어 이일을 가만히 조조
에게 고해 바쳤다.
조조가 그 말ㅇ르 듣더니 대뜸 얼굴빛이 달라졌다. 아직도 자기를 거스르는
자가 잇다는 것을 알게 되자 서슬퍼른 오기가 솟구쳤다. 조조는 즉시 영을 내려
서 최염을 옥에 가두게 하고 정위에게 문초하게 하였다.
최염은 이미 죽기로 작정한 듯 두 눈을 부릅'뜨고 수염을 꼿꼿이 곧추 세우며
오히려 문초하는 정위를 소리쳐 꾸짖었다.
"조조가 임금을 속이는 역적임을 네놈은 모른다는 말이냐!"
정위로부터 그 말을 전해 들은 조조가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소리쳐 영을 내렸
다.
"그놈을 장살 하라!"
최염은 마침내 옥중에서 매맞아 죽고 말았다.최염이 그렇게 죽음을 맞자 그
이후로는 조조의 위왕 받들기를 반대하는 사람이 없었다.
때는 건단 21년 5월이었다. 마침내 모든 조정의 문무백관들은 천자에세 표문
을 올리며 아뢰었다.
"위공 조조의 공덕은 하늘에 닿고 땅에 가득하니 옛적의 이윤이나 주공도 이
에 따르지 못할 것입니다. 원컨대 그 공덕을 기리어 위왕으로 봉하소서."
천자는 비록 신하된 자들의 말이었으나 이를 물리칠 처지가 되지 못했다. 하
는 수 없이 그 말을 좇아 글솜씨가 뛰어난 종요에게 명해 조서를 쓰게 하고 조
조를 위왕으로 세우게 했다.
천자가 조서를 내리자 조조는 짐짓 세 번이나 글을 올려 사양하는 척 했다.
그러나 세 번 모두 받아들여지지 않고 다시 조서가 내리자 마침내 조조는 왕위
를 절하며 받았다.
조조가 행차할 때 열두 줄 황금 면류관에 여섯 마리 말이 끄는 황금수레를 타
고, 천자가 거동할 때 입는 의목과 의장을 갖추니 그 모습이 참으로 현란했다.
조조는 위왕에 오른 후 업군에 큰 위왕 궁전을 세우고 세자 세울 일을 의논했
다.
조조의 본처인 정씬느 원래 자식이 없었다. 첩인 유씨는 아들 앙을 우었으나
지난날 장수를 치러 갔을 때 죽어, 첩 변씨가 낳은 아들 넷이 있었다. 큰아들은
비요, 둘째는 창, 셋째는 식, 넷째가 웅이었다.
조조는 본처인 정 부인이 자식이 없으므로 내쫓은 후 변씨를 왕비로 봉했다.
그러나 무장으로서나 위정자로서나 당대에 비길 영웅이 없다던 조조도 후계자를
정하는 것만은 쉽지 않았다.
아비가 된 입장에서 본다면 조조가 네 아들 중 가장 총애한 것은 셋째인 식이
었다. 조식의 자는 자건으로 총명할 뿐만 아니라 글재주가 빼어났다. 붓만 들면
아름다운 글이 줄줄 쏟아지는 문장가이기도 했다.
일찍이 '황삭의 시인'이라고 불리울 정도로 뛰어난 문학과 예술에 대한 안목을
지니고 있던 조조였다. 그 감성을 이어받은 듯한 조식에게서 자기의 분신을 보
는 듯한 생각이 들었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러나 맏아들 조비는 아버지 조조가 동생인 조식을 총애하는 마음을 알고 있
었다. 아버지의 뒤를 이어받지 못할까 두려워하다 중대부 가후를 찾아가 계책을
물었다.
조비가 그때 가후를 찾아간 것은 두 사람 모두에게 커다란 행운이었는지도 모
른다. 동탁의 휘하에서 이각과 장수, 그리고 지금의 조조에 이르기까지 주인을
바꿔 가며 살아 온 가후는 앞날에 대한 밝은 헤아림이 뛰어난 모사였기 때문이
었다. 가후는 조비에게 귓속말로 계책을 일러 주었다.
그 이후부터 조비는 가후가 일러 준 말을 따랐다. 조조가 멀리 싸움을 나가게
되면 여러 아들이 배웅을 하는데, 그럴 때 조식은 언제나 아버지의 공떡을기리
는마음을 말이나 그롤 나타냈다. 그러나 가후의 말을 들은 이후 조비는 글로써
정을 드러내는대신 하염없이 울기만을 하다가 절을 올리며 배웅하니 보는이들은
모두 조비의 마음에서 우러나는 듯한 지극한 효심에 감탄했다.
조조도 그런 조비를 보자 조식이 비록 재주가 뛰어나나 갸륵한 정과 정성은
조비보다 못한 것으로 여기게 되었다. 뿐만 아니었다. 조비는 아버지를 가까이
모시는 신하들을 재물로 매수하여 조조에게 자기의 덕이 높음을 칭송하게 했다.
이렇게 되니 조조도 조비와 조식 중 누구를 세지로 세울 것인지 결정을짓지
못하고 있다가 어느 날 가후를 불렀다.
"내가 후사를 세우고자 하는데 조비와 조식 중 누구를 세자로 삼는 것이 좋겠
소?"
그러나 가후는 입을 다물고 있을 뿐 대답을 하지 않았다. 조조가 대답을 재촉
했다.
"지금 그대의 의견을 듣고자 하는데 어찌 아무말이 없는가?"
"딴 생각이 떠올라 미처 말씀을 올리지 못했습니다."
가후가 시치미를 떼며 말머리를 돌렸다.
"딴 생각이라니, 무엇을 생각했는가?"
조조가 다급하게 묻자 가후가 대수럽지 않은 일이라는 듯 말했다.
"원본초와 유경승의 부자가 얼른 생각나서 그랬습니다."
원소나 유표는 모두 맏이를 후사로 세우지 않고 그 아우를 세워 골육간에 싸
움을 일으키게 한 장본인들이었다. 조조는 가후의 말을 듣고는 껄걸 웃었다.
"무슨 말인지 알아들을 만하오."
조조는 그렇게 말하더니 마침내 맏아들 조비를 왕세자로 삼았다.
가후는 지난날의 두 사람을 예로 들어 은연중에 조비를 천거한 셈이었다. 이
런 경우 직접 자신이 한 사람의 이름을 댄다면 그를 애써 비는 셈이 되어 자칫
하면 훗날 화를 자초할 여지를 나미게 된다. 이에 가후는 직접 이름을 대거나
대답하는 것을 피하고 간접적으로 교묘히 응대한 것이었다. 실로 난세를 살아가
는 철새 책사로서의 풍모를 엿보게 하는 가후다운 처세술이 아니할 수 없었다.
그 해 10월이 되자 새로운 궁궐이 세워졌다. 궁궐이 세워지자 조조는 궁궐의
뜰에 심기 ㅜ이해 각처로 사람을 보내 진귀한 꽃과 과일나무는 구해 오게 했다.
그대 조조는 동오에도 사람을 보내 왕명을 전하게 하고 온주 땅의 특산물인 규
를 가져오게 했다.
손권은 위왕에 오른 조조에게 환심을 사기 위해 온주에 영을 내려 큰 귤만 마
흔 짐을 고르게 하여 업군으로 보내게 했다. 그리하여 큰귤을 짊어지고 밤을 도
와 가며 업군으로 가던 짐꾼들은 가는 도중에 지쳐 어느 산기슭에 앉아 잠시 쉬
고 있었다.
그때 애꾸눈에다 다리를 절며 머리에 등나무로 만든 관을 쓰고 푸른 옷을 입
은 한 늙은이가 다가왔다.
"그대들이 짐이 많아 힘이 드는 모양이오. 그대들의 수고를 덜어 드리기 위해
내가 좀 져다 줄까 하는 데 어떻겠소?"
짐꾼들은 그 노인이 제대로 짐을 져 줄 만한 사람으로 보이지 않았으나 조금
이라도 짐을 덜어 준다면 다행이라고 여겼다. 짐꾼들이 그 늙은이를 반기며 짐
을 벗어 주었다. 그 늙은이는 짐 하나마다 5리씩을 져다 주었다. 그런데 짐짝을
메고 절뚝이며 걸어가는데 그 늙은이가 진짐은 마치 봇짐이라도 진 것처럼 가볍
게 보였다. 모두가 괴이하게 여기고 고개를 갸웃거리며 놀라워했다. 애꾼눈 늙은
이는 짐을 져 주고 떠나면서 짐꾼을 거느린 관리에게 작별 인사를 하면서 당부
했다.
"빈도는 위왕과 같은 고향 사람인 좌자로, 자는 원방, 도호는 오각 선생이라
하오. 업군에 이르거든 위왕에게 좌자를 만났더란 얘기를 해 주시오."
그 늙은이는 그 말을 남기더니 소매를 떨치며 뒤도 돌아보지 않고 사라져 버
렸다. 관리는 까닭없이 그가 꺼림칙했으나 그렇다고 그가 해를 끼친 것도 아니
어서 업군으로 길을 재촉했다.
이윽고 귤을 진 짐꾼들이 업군 궁궐에 이르렀다. 온주 귤이 왔다는 말을 듣고
조조는 오랫동안 그 맛을 잊고 있었던 터라 기뻐하며 얼른 쟁반 에서 큰 것 하
나를 쪼개 보았다. 그런데 어찌된일인지 귤 껍질 속은 과육이 없이 모두 비어
있었다. 조조가 깜짝 놀라며 두 개, 세 개를 쪼개 보았으나 매한가지였다.
조조는 귤을 가져온 관리에게 그 까닭을 물었다. 관리도 그냥 몸을 떨기만 할
뿐 그 까닭을 알 리가 없었다.다만 오는 도중에 좌자라는 괴이 쩍은 도인을 만
난 일을 아뢸 뿐이었다.
"오는 도중에 좌자라는 도인을 만났는데 귤짐을 날라 주고 가 버렸습니다. 그
도인이 어딘가 괴이쩍었습니다만..."
좔 리가 좌자에 대한 이야기를 조조에게 들려 주었다. 그러나 조조는 얼른 그
말이 믿어지지가 않은 듯 엄한 눈초리로 관리를 다그치고 있는데 문득 문을 지
키는 장수가 들어와 아뢰었다.
"좌자 선생이라는 사람이 와서 대왕께 뵙기를 청하고 있습니다."
조조가 때마침 그가 왔다고 하자 얼른 그를 불러들이게 했다. 수문장이 그를
조조 앞에 데리고 왔다.
"바로 저분이 오는 도중에 만난 그 사람입니다."
관리가 좌자를 보자 조조에게 말했다. 조조가 그를 보고 정색을 하며 꾸짖었
다.
"너는 대체 어떤 요술을 부렸기에 내 과실의 속을 송두리째 없애 버렸느냐?"
그러나 좌자는 알수 없다는 얼굴로 웃으며 말했다.
"그걸 리가 있습니까? 어디 제가 껍질을 벗겨 보지요."
좌자는 그 말과 하께 귤 하나를 집어 껍질을 벗겨 보았다. 귤 안에는 보기에
도 먹움직스런 과육이 그득 들어 있어 과즙이 주르르 흘러내렸다. 조조가 졸라
스스로 귤을 집어들고 껍질을 벗겨 보았다.
그러나 귤 안은 텅 비어 있었다. 그러자 좌자가 몇 개를 더 집어 껍질을 벗겨
보았으나 여전히 과육일 듬뿍 들어 있었다. 그러나 조조가 집는 귤은 모두 속이
비어 있었다.
조조는 그제야 좌자에게 자리를 권한 후 정중한 목소리로 물었다.
"선생은 부슨 까닭으로 나를 찾아 주셨소?"
그러나 좌자는 그 말에는 대답도 하지 않은 채 술과 고기를 청했다. 조조는
그의 오만스러운 짓거리에 마음이 언짢았으나 하는 수 없이 술과 고기를 내오게
했다. 술과 고기를 내오자 좌자는 단숨에 술 닷 말과 양고기 한 마리를 게눈 감
추듯 먹어치웠다. 그러고도 취하거나 배부른 기색이 아니었다. 조조가 속으로 은
근히 놀라며 다시 물었다.
"대체 무슨 술법을 쓰기에 이토록 신통한 재주를 부릴 수가 있는가?"
좌자가 그제야 입을 열어 먼저 자기의 내력부터 이야기했다.
"빈도는 서천 가릉의 아미산 속에서 30년 이나 도를 닦고 있었소이다. 그런 어
느 날 홀연 바위벽 속에서 나의 이름을 부르는 소리가 들리기에 놀라 보니 아무
도 눈에 띄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며칠 동안 이런 일이 계속되었소. 그런 어느
날, 홀연 하늘에서 뇌성 벽력이 하늘과 땅을 뒤흔들 듯하더니 벼락이 떨어져 비
위가 두 쪽으로 갈라 지며 그 속에서 '둔갑천서'라는 책 세권이 나왔소. 세 권
중 상권은 '천둔'이라 하였고, 중권은 '지둔'이며, 하권은 '인둔'이라는 책이었습니
다.
"그 책에는 어떤 술법이 씌어 있었소?"
조조가 문득 궁금한 얼굴로 책에 대해 물었다. 좌자가 열띤 목소리로 말을 이
었다.
"천둔편을 익히면 구름과 바람을 타고 태허로 날아오를 수 잇으며, 지둔편을
익히면 산을 뚫고 돌을 가를 수 있습니다. 또한 인둔편을 익히면 구름처럼 천하
를 떠돌며 몸의 형체를 비꿀 수도 있으며 몸을 숨긴 채 칼이나 단거을 날려 남
의 목을 벨수도 있는 술법입니다. 지금 대왕의 지위와 권세는 더 오를 데가 없
을 만큼 올랐소이다. 이제 잠시 물러나 빈도와 함께 아미산에 ㅡ시어 도나 닦으
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제가 그 천서 세권을 대왕께 가르쳐 드리겠습니다."
왕위를 버리고 자기의 제자가 되라는 좌자의 말에 조조는 속이 끓었으나 겉으
로는 태연한 척했다.
"나 역시 선뜻 용단을 내려 물러날 생각을 하고 있었소. 그러나 천하가 아직
평정되지 않았고 조정이 나를 대신해서 보필할 만한 사람을 얻지 못하고 있소이
다. 조야의 안위를 버려 둔 채 어찌 내 몸 하나 편하자고 왕위를 버릴 수가 있
겠소?"
그러자 좌자가 큰 소리로 웃더니 서슴없이 말했다.
"어찌 대왕을 대신할 만한 사람이 없겠소. 익주의 유ㅕ덕은 한실의 종친일 뿐
아니라 당세의 영웅이라고 들었소. 왜 그분에게 대왕의 자리를 점겨 주지 않으
시오? 만약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이 빈도가 칼을 날려 그대의 목을 자를 것이
오."
그렇지 않아도 치솟는 화를 억누르고 있던 조조가 그 소리를 듣자 노기로 얼
굴이 일그러지더니 쇨쳐 꾸짖었다.
"이제보니 네놈이 바로 유비의 세작이로구나!"
조조는 좌우에게 명해 좌자를 묶게 했다. 좌자는 무사드렝게 묶이면서도 얼굴
색 하나 벼나지 않은 채 껄걸 소리내어 웃을 뿐이었다. 조조는 옥졸들에게 명해
형틀에 묶어 매질을 하게 했다. 그러나 옥졸들이 한참 때리다가 보니 좌자는 조
금도 아파하는 기색없이 드르렁드르렁 코를 골며 잠을 자고 있었다.
조조는 요망한 술법으로 좌자가 자신을 놀리는 것만 같아 더욱 화가 났다. 조
조ㅈ좌자의 목에 ㅋ칼을 씌우고 발에도 쇠차꼬를 채우고 온몸을 쇠사슬로 얽어
옥에 가두게 했다. 그러나 얼마 후 옥 안을 들여다본 옥졸은 깜짝 졸라고 말았
다. 칼과 쇠차꼬가 저절로 떨어져 나가고 없을 뿐만 아니라 그토록 매를 맞았건
만 한 군대도 상한 곳이 없이 좌자는 태평이 누워 있었다.
조조는 좌자를 이레 동안이나 옥에 가둔 채 굶겨 보았다. 물 한방울 주지 않
고 이레를 굶겼으나 좌자는 땅바닥에 단정한 모습으로 앉아 있었는데 볼적마다
얼굴색은 윤기가 나고 혈색이 더 좋아지기만 했다. 옥졸이 이 사실을 조조에게
알렸다. 조조는 굶기게 해도 소용이 없음을 알고 좌자를 끌어 내게 했다.
"네놈은 무슨 요망스런 술법을 쓰기에 굶어도 죽지 않느냐?"
좌자가 여전히 껄걸 웃으며 대답했다.
"이 빈도는 하루에 천 마리의 양을 먹어도 배부른 줄을 모르고 10년을 먹지
않아도 배가 고픈 눌을 모르오."
조조는 좌자를 다시 오겡 가두는 일이 부질없음을 알고 아예 그를 풀어 주게
했다.
좌자를 풀어 준 그날, 조조가 왕궁에 크게 잔치르 벌여 모든 분부백관들을 불
렀다. 백관들이 모두 술잔을 돌리기 시작하는데 좌자가 나막신을 끌고 잔치 자
리에 나타났다. 애꾸눈에다 다리마져 절룩이며 꾀죄죄한 몰골로 나타난 좌자를
보자 문무백관들이 모두 놀라며 어이없다는 올굴로 그를 바라보았다. 좌자는 백
과들에게는 눈길 한 번 주지 않은 채 조조를 보고 말했다.
"대왕이 오늘 땅과 물에서 나는 온갖 음식을 다 장만하여 신하들과 함께 잔치
를 열었구려. 천하의 진귀한 음식들이 많겠으나 혹시 없는 것이 있으면 말씀해
보시오. 이 빈도가 빠진 음식이 있으면 마련해 드리고자 왔소이다."
그 말에 조조는 이제야 여럿이 보는 데서 좌자를 골탕먹일 기회라고 여기고
얼른 청했다.
"나는 용의 간으로 국을 끓여 먹고 싶다. 그대가 그걸 마련할 수 있겠는가?"
조조가 그 말과 함께 좌자를 지켜 보았다. 조자가 서슴없이 대답했다.
"어려울 것 없소이다."
ㄱ고는 먹과 붓을 청하더니 흰 벽에 용 한 마리를 그렸다. 좌자는 그린 용을
보고 도폿자락으로 한면 후려치자 용의 배가 쩍 갈라졌다. 좌자가 용의 뱃속에
손을 넣에 가능ㄹ 끄집어 내니 피가 뚝뚝 떨어졌다.
조조가 두 눈으로 그 노라운 술법을 보기는 했으나 미덩지지 않아 문득 큰 소
리로 좌자를 다그쳤다.
"네가 소매 속에 감추어 들여 온 것이 아닌가? 그래 놓고도 속이려 하느냐?"
그러자 좌자는 그에 대답을 하느 대신 다시 조조에게 청하게 했다.
"지금은 추운 겨울이라 나무와 풀이 모두 다 말라 죽었소이다. 이 빈도가 대왕
께 꽃을 드리고자 하는 데 특별히 무슨 꽃을 좋아하시는지 말씀해 보시오."
조조가 이번에는 그도 어쩔 수 없으리라 여기며 답했다.
"나는 모란꽃을 좋아한다."
"그런 쉬운 일이지요. 이 빈도가 대왕께 모란꽃을 바치겠소이다."
좌자는 큰 화분 한 개를 가져오게 하더니 입에 잔뜩 물을 머금어 화분에 뿜었
다. 얼마 지나지 않아 화분 안에는 모란 줄기가 돋고 그 줄기에서 선연한 모란
꽃 봉오리 한 쌍이 소담스럽게 꽃을 피웠다.
모든 문무관원들이 눈을 비비며 그 꽃을 바라보았다. 용의 간을 꺼잴때까지만
해도 얼떨떨해하며 믿지 못하다가 모란꽃을 보자 모두 감탄해 마지않으며 좌자
를 자리에 불러들였다. 그때 요리사가 생선회를 내왔다. 좌자가 그 회를 흘낏 보
더니 참견했다.
"생선회라면 송강에서 나는 농어회라야 먹을 만하지요."
송강은 태호로부터 흘러내리는 강으로, 이 강에서 잡히는 농어는 맛이 좋기로
이름나 있었다.
"아무리 이른난 생선이라 해도 천 리 밖 농어를 어찌 먹을 수가 있겠는가?"
조조가 좌자에세 핀잔을 주었다. 좌자가 또 서슴없이 조조의 말을 받았다.
"농어쯤 구하는 일이 무에 그리 어려운 일이겠소. ㄴ싯대나 하나 빌려 주시면
당장이라도 농어회 맛을 보게 해 드리겠소."
좌자는 낚싯대 한 벌을 가져오라 해서 전각 뜰아래에 있는 연못으로 가더니
그 낚싯대를 드리웠다. 얼마 지나지 않아 펄펄 뛰는 농어가 낚싯대에 걸려 올라
오는데 순식간에 수십 마리를 낚아 올렸다. 그러자 조조가 또 트집을 잡았다.
"이 농어는 원래부터 연모셍 있던 것들이다. 어찌 송강의 농어라 하는가?"
좌자가 그런 조조를 반박했다.
"대왕께서 어찌 거짓말을 하시오? 천하의 농어들은 아가미가 두 개밖에 없소
이다. 그러나 송강의 농어만은 아가미가 네 개이니 이 농어를 보시고 판결해 주
시오."
그 말에 관원들이 농어를 살펴보았다. 과연 좌자의 말대로 농어의 아가미는
모두가 네 개였다. 좌자가 다시 한술 더 떠 생선회를 먹는 풍류비방을 일러 주
었다.
"송강의 놀어를 회쳐 먹자면 반드시 촉에서 나는 붉은 싹이 난 자아강(생강)
이 있어야 제 맛이 나는 법이오."
조조가 그 말을 듣고 얼른 좌자에게 물었다.
"그럼 그것도 가져올 수 있다는 말인가?"
"그런 더욱 쉬운 이이지요."
좌자가 선뜻 대답하더니 쇠로 만든 분 하나를 엎어놓고 그 위에 옷을 벗어 덮
더니 잠시 뒤에 옷을 벗겼다. 그러자 쇠분 안에는 붉은 싹이 돋은 생강이 가득
들어 있었다. 좌자는 그 분을 조조 앞에 갖다 놓았다. 조조가 생강을 한 웅큼 움
켜쥐며 보려는데 문득 분 안에 책 한 권이 들어 있는 것이 보였다.
조조가 책을 보니 겉장에는 자신이 이전에 지은 책의 제목인 '맹덕신서'라고
씌어 있었다. 조조는 그 책을 집어 책장을 두루 넘겨 보고 깜짝 놀랐다. 자신이
지은 내용과 한자도 어긋난 데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조조가 놀라는 가운데도 좌자가 어찌하여 그 책을 화분 안에 두었는지 까닭을
알 수 없었다. 그때 좌자가 옥 술잔에 술을 가득히 부어 조조에게 올리며 말했
다.
"대왕께서 이 술 한잔을 마시면 천 년 수를 누릴 것이외다."
그러나 조조는 좌자가 주는 술을 선뜻 받아마실 마음이 내키지 않았다. 게다
가 그 술에 대한 의심마저 들어 술잔을 받지도 않은 채 말을 이었다.
"그대가 먼저 마시도록 하라."
좌자가 조조의 말에는 별다른 기색을 드러내지 않은 채 문득 관에 꽂혀 있는
비녀를 뽑았다. 좌자는 그 비녀로 술잔 한가운데를 한 번 줄을 긋듯 그으니 잔
안의 술이 절반씩 갈라졌다.
좌자는 잔 안의 술 반을 마시고 그 나머지 반을 조조에게 주며 일렀다.
"나머지 반 잔을 잡수시오."
좌자가 술잔을 내밀자 조조느 원래부터 그 술을 마실 마음이 아니었던 터라
벌컥 화를 내며 소리쳤다.
"네놈이 실로 무례하기 짝이 없구나!"
조조가 끝내 잔을 무리치며 소리치자 좌자는 그 술잔을 공중으로 던져 버렸
다. 그런데 공중으로 떠오른 술잔은 금세 흰비둘기로 변하더니 궁궐 처마 밑을
맴돌며 날고 있었다.
모든 문무백관들은 넋이 빠진 듯 그 비둘기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자 문지
기가 급히 달려오더니 알렸다.
"지금 좌자가 궁문 밖으로 나갔습니다."
그제야 조조를 비롯한 백관들이 주위를 둘러보았으나 이미 그곳에 좌자의 모
습은 보이지 않았다.
이미 좌자를 죽여 없애기로 작정하고 있던 조조는 아짓도 좌자의 술법에 경탄
해 마지않는 백관들을 둘러보며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저런 요물은 마땅히 없애 버려야 한다. 그대로 두었다가는 반드시 화를 자초
하게 될 것이다."
조조는 허저를 불러 철갑 3백 기를 이끌고 가 좌자를 사로 잡아 오게 했다.
허저가 영을 받고 군사를 이끌어 성 밖으로 달려가니 좌자가 나막신을 신고 절
름거리며 걸어가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저만치 걸어가고 있는 좌자를 단숨에
뒤쫓아 사로잡으려 허저가 말을 몰았다. 그러나 이게 웬일인가. 허저가 아무리
말을 달려도 나막신을 신고 절름거리며 걸어가는 좌자를 도저히 따라잡을 수가
없었다. 그렇게 뒤쫓기를 한동안 하다 보니 어느 산모퉁이에 이르렀다. 때마침
좌자 ㅊ길에 어떤 양치기 소년이 양떼를 몰고 나타났다. 그러자 좌자는 홀연 양
떼들 속으로 뛰어들어 숨어 버렸다. 허저가 급히 활을 꺼재 양들 틈에서 좌자를
찾아 쏘려 했으나 그 마스빙 보이지 않았다. 허저는 양 떼들을 살펴보다 ㅈ자가
필시 양의 보습으로 둔갑했으리라고 여겼다. 이에 허저는 양들을 모조리 죽여
버리고 말았다. 양들이 보두 죽어 버리자 양치기 소년은 소리내어 슬피 울었다.
그때였다. 죽어 자빠진 양들 거운데 문득 땅바악에 뒹굴고 있던 양의 머리에
서 말소리가 들려왔다.
"얘야, 우지 마라. 양 머리를 모두 양의 목에 붙여라."
양치기 소년은 그 소리에 기겁을 해 얼굴을 싸매고 허둥지둥 달아나는데 다시
등 뒤에서 사람의 말소리가 들렸다.
"얘야, 놀라지 말고 내 말을 들어라. 양의 모두 살려 줄 테니 몰고 가거라."
소년은 양을 몰고 가라는 말에 고개를 돌려보니 좌자가 언제 그랬느냐는 듯
양 떼를 살려 끌어오고 있었다. 소년은 양 떼를 부자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양
떼를 끄렁오는 좌자에게 고맙다는 인사를 드리려고 하자 좌자는 소매를 떨치더
니 발길을 돌려 펴연히 거렁가고 있었다. 그 절룩거니는 걸음이 어찌나 빠른지
소년이 미처 입을 열기도 전에 벌써 멀리 사라지고 말았다.
야야치기 소년이 이 놀랍고도 신기한 일을 주인에게 일러 바쳤다. 주인도 이
미 좌자의 얘기를 들은 터라 그 일을 숨겨 둘 수만은 없어 조조에게 알렸다.
조조는 허저의 말을 듣고 이미 좌자가 죽은 줄 알았으나 그 말을 듣자 벌컥
화를 내며 소리쳤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그놈을 찾아내도록 하라. 그놈으 죽여 버리지 않으면 안
된다."
조조느 좌자의 모습을 화고ㅇㅇ게 그리게 하여 각처에 나눠 주며 잡아들이게
했다. 사흘도 되지 않아 성 안팎에서 애꾸눈에다 절름발이에, 흰등나무 관에 푸
른 옷을 입고 나막신을 신은 좌자가 잡혀 왔는데 그 수가 무려 3,4백 명은 되어
보였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그 얼굴 생김새가 모두 한결같이 좌자의 모습 그대
로였다. 그렇게 되니 궁궐의 감옥에는 모두 좌자로 들끓고 있었다.
조조는 장수들에게 급히 영을 내렸다.
"저것들을 모두 한데 엮듯이 묶어 돼지와 양의 피를 뿌려라."
좌자에게 피를 뿌려 요망스런 술법을 쓰지 못하도록 한 뒤 조조는 성남쪽의
교련장으로 끌어 내게 했다.
조조는 몸소 갑병 5맥을 거느리고 가 그들을 모조리 못 베었다. 그런데 그 많
은 좌자는 모두 목이 잘릴 때마다 목구멍에서 한 줄기 푸른 기운을 내뿜었다.
그 기운은 하늘로 연기처럼 피어 오르다가 한 곳에 뭉쳐지더니 이내 좌자로 변
했다.
좌자가 하늘을 향해 손지슬 하니 하늘에서 흰 학 한 쌍이 내려와 그를 태웠
다.
학을 탄 좌자는 손뼉을 치며 큰 소리로 웃더니 조조를 꾸짖었다.
"흙쥐가 쇠버믈 따라가니 간웅이 정월 아침에 죽는구나."
좌자의 말은 조조가 언제 죽을지를 예언한 것으로 건안 25년 정월, 즉 경자년
무인 달이란 뜻이었다. 이것을 오행으로 따지면 경은 금이며 자는 쥐를 뜻하고,
무는 흙, 인은 범을 말함이니 곧 그 뜻을 글로 나타내면 경자 무인이 된다.
조조는 좌자의 말을 드드고 얼른 그 대강의 뜻을 짐작했다. 화가 머리끝까지
치민 조조가 분풀이하듯 장수들에게 소리쳤다.
"일제히 활을 쏘아 저 요사스런 놈을 죽여라!"
조조의 영이 떨어지자 장수들이 일제히 화살을 날리는데 홀연 거센 회오리바
람이 일더니 모래가 공중으로 휘말려 오르고 돌이 땅 위에 굴렀다. 그와 함께
목이 날린 시체들이 제각기 몸을 벌떡벌떡 일으키더니 땅바닥에 떨어진 자기 머
리를 주워들고 조조에게로 달려들었다.
문신든은 물론 담력이 세다느 장수들도 한결같이 이 으스스한 광경을 보고 놀
라 나자빠지고 말았다.
조조가 아무리 담력이 세다 하나 거센 바람과 목 없는 시체들이 모글 주워들
고 몰려들자 배겨내지 못하고 외마디 비명을 지르며 쓰러지고 말았다. 잠시 후
바람이 멎자 시체들의 모습도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말았다.
그제야 정신을 가다듬은 좌우 사람들이 조조를 부축해 궁궐로 돌아갔다. 조조
는 얼마 지나지 않아 깨어나기는 했으나 너무 놀란 나머지 마침내 병이 들어 자
리에 눕고 말았다.
천기 누설하는 관로와 한조의 신하들
조조는 병이 깊이 들자 관로를 청해 들이고 관로의 말 한 마디에 병석에서
일어나 천ㅎ 대세와 자신의 앞날을 점친다. 관로는 천기를 누설할 정도의 신복
을 알아맞히는 자이다.
조조가 좌자 때문에 병이 깊이 들자 온갖 약을 다 써 보았으나 효험이 없었
다.
문무관원들이 근심에 잠겨 있는데 태사승 허지가 허도에서 조조를 찾아왔다.
조조는 답답한 마음을 달래지 못하던 터라 허지를 보자 대뜸 당부했다.
"그대는 일찍이 점을 잘 친다고 했는데 내 병세가 어떤지 점을 쳐 보아라."
그러나 허지가 고개를 가로저으며 다른 사람을 천거했다.
"저의 점은 그다지 신통하지가 못합니다. 대왕께서는 신복 관로에 대해 들으신
적이 있으시니까? 어찌하여 아직 그를 청하지 않으십니까?'
"관로의 이름은 들은 적이 있으나 아직 그 점술이 어느 정도인지는 알지를 못
한다. 그를 알고 있거든 자세히 말해 보라."
조조가 혹 그에게 병을 낫게 할 비방이라도 얻게 될지 모른다는 기대감으로
허지에게 청했다. 허지가 관로에 대해 아는 대로 이야기를 시작했다. 그 이야기
의 내용은 대개 이러했다.
관로의 자는 공명이라 하며 평원땅 사람이었다. 원래 얼굴이 못생겼으며 술을
좋아하고 천성이 소탈했다. 그의 아버지는 냥야군의 구장을 지냈으며 어렸을 때
는 그곳에서 자랐다. 그런데 관로는 나이 8,9세가 되자 하늘의 별을 쳐다보기를
좋아하여 밤이 깊어도 잠들 줄을 몰랐다. 부모는 그의 건강이 염려되어 이를 말
렸으나 듣지 않았다. 뿐만 아니라 오히려 부모에게 묻곤 했다.
"집에서 기르는 앍과 들판의 따오기도 스스로 바람과 비가 올 때를 아는데 하
물며 사람이 어찌 앞일을 모른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동내 아이들과 놀 때도 땅바닥에 천문도를 그려 놓고 해와 달과 별을 그려 넣
고는 했다. 저마 나이가 들자 주역을 열심히 읽었으며 풍각(바람의 방향으로 길
흉을 점침)에도 밝을 뿐 아니라 수의 이치나 관상을 보는 술법에도 능했다.
그러자 낭야태수 선자춘은 관로의 소문을 듣고 그를 청해 불러들였다.
그때 선자춘의 손님으로 말 잘한다는 선비 1백여 명이 함께 그 자리에 있었
다. 관로가 자리를 둘러본 후 태수에게 청했다.
"저는 아직 나이가 어려 담력이 세지 못합니다. 먼저 술 석 되를 마시고 나서
말씁드리겠습니다."
선자춘이 뜻밖의 말을 의아하게 여기며 술 석 되를 주자 관로는 그 술을 마시
고 나서 주저하는 기색 없이 다시 물었다.
"오늘 저와 말씀을 나눌 분은 부군 좌우에 앉아 계시는 저 선비분들이십니
까?"
선자춘은 관로의 당돌한 물음에 고개를 가로저으며 웃었다.
"내가 그렇게 무지하지 않으니 나 혼자서 그대와 담론코저 한다네."
이에 두 사람은 주역의 이치를 따져 보기 시작했는데 관로는 막힘이 없이 물
흐르듯 대답하면서도 말 한 마디가 치밀하고도 깊은 이치를 담고 있었다. 선자
춘이 관로를 몰아세우노라 까다롭고 어려운 점만을 꼬집어 거듭 물었으나 그 대
답은 조금도 막힘이 없었다.
아침부터 시작한 두 사람의 담론의 끼니를 들여올 틈도 주지 않고 밤 늦도록
이어지니 선자춘은 물론 모여 있던 선비들도 감탄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그 일
이 있고 난 뒤로는 모두들 관로를 '신동'이라 부르게 되었다.
관로 의 이름이 사방에 퍼져 나가자 소문을 듣고 어느 날 곽은이란 이가 관로
를 청했다. 곽은의 형제 셋은 모두 다리를 절고 있었는데 관로에게 점을 쳐 달
라고 청한 것이었다.
관로가 점을 쳐 본 후 입을 열었다.
"점괘를 보니 곽씨 대대의 묘소에 여자 귀신이 있네. 그 귀신은 그대의 백모가
아니면 숙모가 되는 것 같네. 이전에 흉년이 들었을 때 그대들 형제들이 쌀 몇
되를 뺏기 위해 우물에 밀쳐넣고 큰 돌로 머리를 쳐서 죽인 일이 있었으리라.
그 혼이 아픔과 원통함을 이기지 못해 하늘에 호소하니 하늘에서 벌을 내려 그
대들을 절름발이로 만든 것이닌 무슨수로 낫기를 바라겠는가?"
그 말을 듣고 삼 형제는 일제히 엎드려 울며 죄를 뉘우쳤다.
또 한 번 안평태수 왕기가 관로의 점이 신통하다는 것을 알고 청했다. 그때
마침 그 지방 신도 땅 현감의 처가 심한 두풍을 앓는데다 그 아들도 가슴앓이를
하여 관로를 불러 점을 쳐보게 한 것이었다.
관로가 점을 쳐 보더니 말했다.
"그 집 서쪽 귀퉁이에 남자 시체 둘이 묻혀 있는데 한 사람은 창을 들었고 또
한 사람은 화살을 들었소. 그런데 머리가 벽 안쪽에 있고 다리는 벽 바깥쪽에
있어 창을 가진 사람이 다른 사람의 머리를 찌르고 또 그 사람은 화살로 다른
사람의 가슴을 찌르고 있소이다. 그러니 부인은 머리가 아프고 그 자제분은 가
슴이 아픈 것이오."
그 말을 듣고 현령이 땅을 파 보니 과연 땅 속 여덟 자 되는 곳에 두 개의 관
이 나왔다. 관 하나에는 창이 들었고 다른 관에는 짐승의 뿔로 만든 활과 화살
이 들어 있었는데 나무로 된 것은 모두 썩어 버렸으나 그 형상은 관로가 말한
그대로였다.
관로가 그 뼈를 성 바깥쪽 십 리 되는 곳에 잘 묻어 주라 이르자 현령은 그
말에 따랐다.
그러자 그 이후에는 부인과 아들의 병이 씻은 듯이 나았다.
또 관도 땅 현감인 제갈원이 신흥태수로 떠나게되자 관로가 저홍 나온 걸 보
고 전을 쳐 보게 했다.
관로가 보이지 않는 것도 꿰뚫어 존다는 말을 듣고 믿어지지 않아 이를 시험
해 보기 위해서였다.
제갈원은 제비알과 벌집과 거미를 각각 세 개의 합 속에 넣어 두고 뚜껑을 닫
은 후 그 속에 든 걸 알아맞히게 했다.
관로가 점괘를 뽑아보고 그릇 뚜껑에 그 점괘를 글로 풀어 써 주었다.
첫째 합에는,
머금은 기운이 머지않아 변해
집 처마에 의지하고
그 모양이 암수로 구별되어
활짝 날개를 펼 것이니
이는 분명 제비알이로다.
라고 썼으며, 또 둘째 합에는,
집과 방이 거꾸로 매달렸는데
문이 많아여럿이 살겠네.
정기는 감추고 독은 기르고
가을이면 변하니
이는 벌 집이로다.
라고 썼다. 또 셋째 합에는 다음과 같이 썼다.
긴 다리 두려운 듯 뻗어
입으로 실 토해 그물 짜네.
그물쳐 먹이 잡으나
어두워야 이익이 있으니
이는 거니로다.
그 글을 보자 그 자리에 있던 모든 사람들은 모두 깜짝 놀라며 감탄해 마지않
았다.
관로가 이렇듯 감춰진 물건도 귀신같이 알아맞히자 앓은 물건까지도 점을 쳐
찾으려는 사람도 많았다.
한 번은 한 늙은 시골 아낙이 소를 잃어 버리자 관로를 찾아왔다. 관로가 접
괘를 뽑아 보고 일러 주었다.
"북쪽 개울가에서 일곱 사람이 소를 잡고 있는 중이니 급히 가면 가죽과 고기
만은 찾을 수 있을 것이오."
늙은 아낙이 그 말을 듣고 급히 그곳으로 가 보았더니 과연 일곱 사내가 한참
고기르 ㅅ고 있는 중이었는데 가죽과 살은 아직 먹지 못해 남아 있었다. 늙은
아낙은 이 일을 고을 태수 유빈에게 일러 바쳤다. 유빈이 그들을 잡아들에게 한
후 늙은 아낙에게 물었다.
"그놈들이 그곳에 있는 줄 어떻게 알았는가?"
늙은 아낙은 관로에게 점을 쳤던 사실을 말해 주었다. 이에 유빈은 그 말이
믿어지지 않아 관로를 부중으로 청하게 했다. 유빈은 태수의 인수와 산닭 깃털
을 합 속에 넣어 두고 관로가 오자 그 속에 무엇이 들어 있니를 물어 보았다.
관로가 점괘를 뽑더니 말했다.
"안은 모가 나나 밖은 둥글고, 오색 무늬와 글이 씌었으며, 보배롭되 믿음을
지키며, 나오면 도장이 되는 것이 들어 있으니 이는 관인 주머니일 것입니다.
관로는 다른 합을 보고 말을 이었다.
"높은 산 바위마다 새가 있는데, 몸에 붉은 옷을 입었도다, 날개 깃털을 검고
주르며, 새벽이면 반드시 우니 이는 산닭의 깃털입니다."
유빈은 그 말을 듣자 크게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관로의 신통한 점복에 감
복하여 이후부터는 그를 귀한 손님이로 두터이 대했다.
관로는 점 못지않게 상도 잘 보았다.
어느 날 관로가 한가로운 틈을 타 상 밖을 거닐고 있었는데 우연히 밭을 갈고
있는 잘생긴 한젊은이를 보았다. 관로는 사람을 보면 그 상을 보는 것이 버릇처
럼 되어 자기도 모르게 그 젊은이를 보다가 문득 글음을 멈추고 물었다.
"젊은이의 이름은 무엇이며 나이가 어떻게 되는가?"
"제 이름은 조안이며 나이는 열아홉입니다. 그런데 선생은 뉘십니까?"
젊은이가 잠시 머뭇가리다 대답한 후 의아스런 얼굴로 되물었다.
"나는 관로라는 사람이다. 내가 자네의 눈썹과 눈썹 사ㅣ을 보니 죽음의 기운
이 서려 있구나. 사흘을 넘기지 못할 것인즉, 자네 용모가 수려하네만 목숨을 길
게 타고나지 못했으니 참으로 애석하구나."
관로가 탄식 ㅆ어 말했다. 젊은이는 그 말을 듣자 한도안 어이가 없었으나 곧
집으로 달려가 아비에게 그 말을 전했다. 그 아비는 급히 관로를 쫓아와 땅에
엎드려 절을 올리고 눈물을 쏟으며 빌었다.
"선생께서는 제발 저의 자식놈을 살려 주십시오."
"하늘이 정한 명이오. 어찌 그 명을 피할 수가 있겠소?"
관로가 무거운 얼굴로 그렇게 대답했으나 그 아비는 물러서지 않았다.
"이 늙은 것에게 자식이라고는 이 아이 하나뿐입니다. 부디 선생께서 너그러움
을 베푸시어 이 아이에게 살 길을 가르쳐 주시옵소서."
아비가 간곡히 애걸하고 조안 또한 울며 매달리자 관로도 그들 부자의 애절한
정을 보고도 차마 못 본 체할 수가 없었다. 관로가 한동안 생각에 잠기다가 조
안에게 말했다.
"자네는 깨끗한 술 한 병과 녹포(말린 사슴 고기)를 가지고 남산 큰 소나무
아래로 가게. 그 곳 반석 위에느 두 사람이 바둑을 두고 있을 것인즉, 한 사람은
흰 도포를 입고 남쪽으로 향해 앉았을 것이니 그 얼굴이 매우 험상ㄱ을 것이다.
또 한 사람은 붉은 옷을 입고 북쪽으로 향해 앉아 있을 것이니 그 생김이 수려
할 것이니라. 그 두사람이 바둑에 정신이 팔려 있을 때 자네는 곁에서 무릎을
꿇고 술을 따르고 녹포를 바치도록 하게. 그들이 술과 안주를 다 먹은 뒤에 엎
드려 울며 목슘을 빌어 보도록 하게, 그러나 잊지 않아야 할 일은 내가 자게에
게 이렇게 시켰다는 말은 절대로 입 밖에 내어서는 아니 되네."
조안의 아비는 그 말을 드드자 고마워한 나머지 관로를 집으로 청해 후하게
대접하며 사람을 시켜 좋은 술과 녹포를 구해 오게 했다.
다음 날, 조안은 술과 녹포와 접시를 싸들고 남산으로 향했다. 한 5,6리쯤을
가니 과연 큰 소나무 ㅇ의 넓은 바위 위에 앉아 두 사람이 바둑을 두고 있었다.
두 사람은 바둑에 골몰하느라 조안이 다가가도 전혀 알지 못하고 그저 바둑판
만 들여다보고 있었다. 조안은 무릎을 꿇고 술과 안주를 접시에 받쳐 오리자 두
사람은 바둑에 정신이 쏠려 누가 주는지도 알지 못한 채 술을 받아 마셨다. 그
렇게 마신 술이 그들 자신도 모르는 새에 술 한 병을 다 비우고 말았다.
마침내 바둑 두기를 멈추고 바둑판을 쓸자 조안이 엎드려 울면서 목숨을 빌었
다.
"두 분께서는 은혜를 베풀을 불쌍한 목숨을 구해 주십시오."
그제야 두 사람이 조안을 돌아보며 깜짝 놀랐다. 두 사람이 어이가 없ㄴㄴ 듯
잠시 얼굴을 마주 보더니 붉은 도포를 입은 노인이 구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이건 틀림없이 관로가 시킨 것이리라. 그런데 우리 두 사람이 이미 이 사람이
주는 술고 ㅏ안주를 먹었으니 모른 척할 수도 없는 일이 아니오? 가엾게 여겨
살려 주도록 합시다."
그러나 흰 도포를 입은 노인이 마지못한 듯 옷 속에서 장부를 꺼내 조안의 이
름과 나이를 묻고 한참 동안 문서를 뒤지더니 입을 열었다.
"네 나이 올해 열아홉이니 마땅히 죽어야 할 때가 되었으나 불쌍히 여겨 죽는
날짜를 미루어 주리라. 신구 위에 아홉 구자 하나를 더 써 넣어 줄테니, 그렇게
되면 아흔아홉이 되어야 너의 목숨이 다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돌아가거든 관
로에게 이르길 다시는 하늘의 기밀을 누설하지 말라고 일러라. 만약 또다시 누
설하면 반드시 천벌을 면치 못할 것이니라."
붉은 도포의 노인은 붓을 꺼내 조안의 나이 위에 구자 하나를 더 써 넣었다.
조안은 고마움을 이기지 못해 수없이 절을 올리는데 홀연 향기로운 바람이 은은
히 일더니 두 노인은 학이 되어 하늘을 향해 훨훨 날아갔다.
조안은 그 길로 집으로 돌아가 집에 머물고 있는 관로와 아버지에게 남산에서
있었던 일을 들려 주었다. 조안의 아비가 기쁨에 겨워 춤을 추고 있는데 조안이
궁금증을 견디지 못해 관롱게 물었다.
"두 분은 대체 뉘십니까?"
"붉은 옷을 입은 분이 남두성이고 흰 옷을 입은 분은 북두성이라네."
"제가 듣기로는 북두성은 별이 아홉 개라고 하였는데 어찌 한 분뿐이십니까?"
조안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묻자 관로가 조용히 웃으며 대답했다.
"흩어져 있을 대는 아ㅎ이나 합쳐 있으면 하나가 되네. 북두성은 죽음을 맡고
남두성은 사람이 태어남을 맡고 있네. 이제 묵두성이 자네에게 목숨을 아흔아홉
까지 늘려 주었으니 무엇을 근심할 게 있겠나."
조안과 그 아비는 관로에게 엎드려 절을 올리며 고마워했다.
그러나 관로는 그 이후로느 천기를 누설할까 두려워 점치는 일을 삼갔다.
허지는 관로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 준 후 조조에게 말했다.
"지금 그 사람이 평원 땅에 머물고 있으니 대왕께서 길흉을 아시고자 하신다
면 그를 불러 물어 보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조조는 마음이 우울하고 답답하던 차에 허지의 권유를 받고 크게 기뻐 하며
곧 사람을 펴우언으로 보냈다. 관로는 부름에 완강히 거절했으나 사자가 두 번,
세 번 간청하는 데다 위왕의 영이라 하는 수 없이 조조 앞에 이르러 절을 올렸
다.
조조는 관로에게 죄자를 목베고 나서 자신인 병을 얻게 된 경위를 자세히 들
려 준 후 말했다.
"이게 무슨 징조인지 그대가 점을 쳐서 알아보시오."
그러나 관로는 점을 쳐 보지도 않고 대수럽지 않다는 듯 대답했다.
"그까짓 것은 사람의 눈을 어지럽혀 속이는 술법에 지나지 않는데 무엇을 그
렇게 근심하신다는 말씀입니까?"
관로가 그렇게 말하자 조조는 갑자기 그때까지 가습 속에 그득했던 근심이 사
라지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조조는 마음이 안정되자 그 날 부터 병세가 점
차 차도를 보이기 시작했다.
몸이 점점 회복되자 조조는 그 동안 미루었던 천하의 일이 걱정되어 관로에게
점을 쳐 보게 했다.
"천하의 일이 어떻게 될지 점을 쳐 주시오."
관로가 점괘를 뽑아 보더니 말했다.
"3과 8이 이리저리 엇갈리고, 누런 멧돼지가 범을 만나, 정군 남쪽에서 팔 하
나를 잃게 되니 손발 같은 장수 한 사람을 잃을 것입니다."
조조는 후사 문제로 걱정을 했던 이후라 자기 자손들의 복록에 대해서도 점을
쳐 보게 했다.
점괘를 뽑다 본 관로가 글로써 점괘를 풀이해 주었다.
"사자궁에, 신위가 평안하고, 왕도가 새로워지니, 자손이 매우 높고 귀하게 될
리라."
자손이 높고 귀하게 된다는 풀이에 조조는 크게 기뻐했다. 관로는 조조의 아
들 조비가 마침내 한의 천자가 된다는 걸 예언한 것이었다. 조조가 좀더 자세한
풀이를 물었으나 관로가 가만히 웃으며 대답을 피했다.
"아득한 하늘의 운수를 어찌 사람이 미리 다 알수가 있겠습니까? 세월이 가다
보면 절로 아시게 될 것이니 너무 서두르지 마십시오."
조조도 천문이나 음양학에 남 못지않은 식견이 있었다. 그러나 관로가 세상에
흔히 있는 점술사가 아님을 은근히 자신의 곁에 붙들어 두고 싶었다.
"공을 태사로 삼고 싶소. 나와 함께 이 궁에 머무르며 후사를 도모하지 않겠
소?"
그러자 관로는 고개를 가로 저으며 벼슬을 물리쳤다.
"고마운 말씀이오나 저는 명이 짧고 상또한 궁해서 감히 그런 벼슬을 지낼 위
인이 되지 못합니다."
"그게 무슨 말인가? 어찌하여 명이 짧고 상이 궁하다 하는가?"
"저의 관상이 이마에는 주골이 없고, 눈에는 안정이 또렷하지 못하고 코에는
양주가 서지 못했습니다. 다리에는 천근이 바로서지 못했고, 등에는 삼갑이 없으
며, 배에는 삼임이 없으니 이 모두가 명이 짧은 상입니다. 제가 태산에 올라 귀
신을 달랠수는 있어도 세상에서 사람을 다스릴 수는 없습니다."
관로가 스스로의 명을 예언하며 벼슬을 사양하자 조조도 더는 권하지 않았으
나 또 하나 자신의 궁금증을 물었다.
"그렇다면 나의 상은 어떤가?"
"대왕께서는 사람으로서는 최고의 지위에 오르셨는데 다시 무슨상을 보려 하
십니까?"
관로가 다시는 대답을 하지않자 조조가 거듭 물었다. 그러나 관로는 여전히
웃기만 할 뿐 끝내입을 열지 않았다. 조조는 묻기를 단념하고 이번에는 문무관
원들을 불러 관로를 보게 한 뒤 물었다.
"이 사람들의 상은 어떠한가?"
관로가 여러 관원들을 둘러보더니 말했다.
"모두 다 세상을 다스릴 만한 훌륭한 신하들입니다."
"저 사람들의 길흉은 어떤가?"
조조가 관로에게 물었다. 그러나 관로는 더는 입을 열지 않았다. 관로가 대왕
의 영이라 마지못해 점을 쳤으나 조안의 일이 있은 후부터는 이전처럼 함부로
점을 치는 걸 꺼렸다. 그러자 조조가 다시 말했다.
"동오와 서촉에 대해 알고 싶으니 점을 쳐 주시오."
관로는 그 말조차 물리칠 수가 없었던지 점괘를 뽑아 본 후 말했다.
"동오에서는 대장 한 사람을 잃게 될 것이요, 서촉에서는 군사를 움직여 경계
를 침범해 올 것입니다."
조조는 아직 관로가 점술이 용함을 직접 시험해 본 적이 없는 터라 얼른 그
말이 믿어지지 않는다는 얼굴이었다. 그런데 홀연 합비에서 급한 전갈이 전해졌
다.
"동오의 육구 땅을 지키던 노숙에게 변고가 생겼다 합니다.
그소리를 듣자 조조는 깜짝 놀랐다. 관로가 한 말이 어긋나지 않았기 때문이
었다. 조조는 사람을 한중으로 보내 그 일을 자세히 알아보도록 했다. 며칠이 지
나 한중으로 갔던 사자가 돌아와 놀라운 소식을 전했다.
"유현덕이 장비와 마초를 하관에 보내 관을 뺏으려 하고 있습니다."
조조는 군사를 일으켜 한달음에 달려가 유비를 칠 기세였다. 조조가 떠나기
전에 관로에게 점을 쳐 보게 했다.
"내년 초봄에 허도에 큰 불이 날 것이니 대왕께서는 결코 멀리 움직이지 않도
록 하십시오."
관로가 점을 쳐 보더니 조조에게 말했다.
조조는 관로의 예언이 모두 들어맞았으므로 그 말을 듣고는 감히 군사를 이끌
어 갈 수가 없었다. 이에 조홍을 불러 영을 내렸다.
"너는 군사 5만을 거느리고 나아가 하후연과 장합을 도와 동천을 지키도록 하
라."
조조는 또 하후연에게도 군사 3만을 주며 허도로 가서 순시하는 것을 게을리
하지 않도록 하며 뜻밖의 변고에 대비케 했다. 또한 장사 왕필에게 허도의 어림
군을 지휘하게 했다. 조홍에게 군사를 딸려보내 한중의 경계를 더욱 단단히 지
키게 하고 하후연을 보내 불에 대한 대비를 하게 한 후 조조는 업군에 그대로
머물러 있었다. 그러자 주부 사마의가 왕필에게 어림군을 모두 맡긴 일을 두고
조조에게 걱정스러운 듯 간했다.
"왕필은 술을 너무 좋아하고 맺고 끊음이 분명치 못하니 자칫 일을 그르칠까
두렵습니다."
"왕필은 내가 온갖 가시밭길을 걸을 때부터 나를 따라다니며 함께 고초를 겪
어 왔다.충성스럽고 부지런할 뿐 아니라 마음이 칠석같이 굳은 사람이라 내가
특별히 어림군을 그에게 맡긴 것이다."
조조가 그렇게 말하니 사마의는 그대로 물러나고 말았다.
조조는 왕필에게 어림군을 거느려 허도의 동화문 밖에 진을 펼치고 있게 했
다. 참으로 신기한 관로의 점괘였다.
조조는 유비의 한중 침범과 관로의 예언에 따라 불이 날 것을 대비하여 군사
를 풀어 허도를 살피게 하자 옛 한조의 신하들은 이를 심상치 않은 일로 여겼
다.
이때 허도에 경기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낙양사람으로 자를 계행이라 했다.
그는 승상부연을 지내다 뒤에 시중소부가 되었는데 사마직 위황과는 평소 마
음을 터 놓고 지내는 가까운 사이였다.
경기는 조조가 왕이 되어 천자의 수레에다 복색을 하고 다니는 걸 보자 속이
뒤틀렸다. 조조가 위왕으로 만족하지 않으리라고 여긴 경기는 위황을 불러 의견
을 나누었다.
"역적 조조가 날로 간악해져 가니 머지않아 반드시 천자의 자리도 빼앗고 말
것이네. 우리가 한의 신하인데 어찌 그 역적질을 돕고만 있을 수 있겠나?"
그러자 위황은 고개를 끄덕이며 뜻을 함께할 만한 사람부터 천거했다.
"옳은 말일세. 내가 몹시 가까이 지내는 사람 중에 김위란 사람이 있네. 정승
을 지냈던 김일제의 후손으로, 일찍부터 조조를 치고자 하는 마음을 품고 있음
을 알고있네. 게다가 어림군을 맡게 된 왕필과도 가까운 사이이니 이 사람과
함께 일을 하면 대사를 이룰 수도 있을 것이네."
" 그러니 우리가 함께 가서 그의 속마음을 떠보기로 하세. 그리고 난 다음에 함
께 일을 할 것인가, 아닌가를 정하세."
위황이 그렇게 말하자 경기가 마다할 리가 없었다. 두 사람은 김위의 마음을
떠보기로 하고 그의 집으로 향했다.
때는 건안 23년 정월이었다.
두 사람이 김위의 집으로 가자 김위는 반갑게 후당으로 두 사람을 맞아들이며
자리를 권했다. 서로 인사를 주고받은 후 위황이 먼저 말을 꺼냈다.
"자네가 왕장사와 매우 가까운 사이라고 하여 우리 두 사람이 청할 일이 있어
이렇게 왔다네."
"청이라니 무슨 청인가?"
김위가 뜻밖이라는 듯 의아스런 얼굴로 반문하자 위황이 정색했다.
"내가 소문을 들으니 머지않아 위왕께서 천자의 선위를 물려받아 대위에 오른
다 하였네. 그렇게 되면 자네와 왕장사는 반드시 벼슬이 높아질 것이네. 원컨대
그때 우리를 잊지 않고 끌어 주면 그 은혜는 잊지 않겠네."
김위가 들으니 조조가 천자의 자리를 물려 받음을 추호도 의심하지 않는 말투
였다. 그때 시중드는 아이가 차를 쟁반에 받쳐들고 들어왔다.
"차를 가지고 올 것 없다."
김위는 그 찻잔을 뺏어 방바닥에 팽개치며 아이에게 소리쳤다.
그러자 위황이 짐짓 놀란 척하며 김위를 원망했다.
"덕위(김위의 자)가 어찌이리 오랜 친구를 이토록 박대하는가?"
그러자 김위가 매서운 목소리로 위황을 나무랐다.
"내가 자네들과 가까이 지낸 것은 모두 다 한조의 뛰어난 신하의 후손들이었
기 때문이었네. 그런데 이제보니 그대들은 한의 은혜에 보답할 생각은 아니하고
고리어 역적에게 빌붙어서 벼슬이나 얻겠다고 나에게 청한다는 말인가? 내가 어
찌 그대들 같은 자와 친구로 사귈 수가 있다는 말인가!"
그러자 이번에는 옆에 있던 경기가 한 번 더 김위의 속을 떠보았다.
"하늘이 정한 운수가 그러하니 우린들 별 도리가 없지 않은가?"
그말에 김위는 더욱 분개하며 소리쳤다.
"어찌 너희들이 한조의 신하들인가? 그러고도 죽어 황천의 조상들을 대할 낯
짝이 있겠느냐!"
김위가 그토록 몹시 화를 내는 것을 보자 위황과 경기는 서로 얼굴을 마주보
며 고개를 끄덕였다. 김위의 충성스런 마음이 그누구에게도 뒤지지 않을 만큼
굳음을 보고 그제서야 마음 속을 털어 놓았다.
"실은 우리는 자네에게 함께 역적을 쳐없애자고 의논하러 온 것일세. 지금 한
말들은 자네의 마음을 떠보기 위해 한 말이니 너그럽게 헤아려 주기바라네."
김위도 비로소 두사람이 찾아온 뜻을 알았다.
문득 얼굴이 밝아지며 분연히 말했다.
"나의 집안이 대대로 한조를 받들어 왔는데 어찌 역적을 따를 리가 있겠나?
그런데 자네들은 한실을 붙들어 세우겠다 하니 무슨 좋은 방책이라도 있는가?"
그물음에 위황이 기가 꺽인 목소리로 대답했다.
"우리가 한실을 바로 잡을 마음은 간절하나 아직 계책을 정하지는 못했네."
김위가 그말을 듣자 생각해 둔 바가 있어 서슴지 않고 의견을 내었다.
"나는 안팍으로 힘을 합쳐 왕필을 죽이고 그병권을 뺏어 천자를 모시겠네. 그
런 다음 유 황숙과 손을 잡는다면 조조를 없애는 일도 어렵지는 않을 것일세."
두사람도 그의 말이 자기들의 생각과 다를 바 없음을 알게 되어 손을 덥석 잡
았다. 더욱 힘이 난 김위가 또 사람을 천거했다.
"내게 마음을 터놓고 지내는 믿을 만한 두사람이 있네. 그들로 말할 것 같으면
그 아버지를 조조가 죽였으니 조조는 곧 그들의 원수가 되는 셈이네. 성 밖에
그들이 살고 있는데, 분명 우리 편이 될 것인즉 우리들의 오른쪽 날개로 삼아야
겠네."
"그들이 누구인가?"
"바로 태의 길평의 아들들이라메. 맏이는 갈막이라 부르는데 자는 문연이라 하
며, 그아우는 길목이라하고 자는 사연이라 한네. 그의 아버지 길평이 지난날 동
승의 의대조 사건으로 조조에게 죽임을 당했을 때 그 둘은 멀리 시골로 도망가
목숨을 건졌었네. 이제는 몰래 허도로 돌아와 살고 있는데 우리가 조조를 치려
하니 어찌 우리말을 따르지 않겠나."
태의 길평의 아들이라면 경기와 위황도 믿을 만했다. 이에 기쁨을 감추지 못
하며 그 길로 사람을 보내 두 형제를 불러 오게 했다.
"역적 조조에 대한 원한을 한시도 잊어 본 적이 없소. 맹세코 이 몸을 바쳐 조
조를 쳐 없애고야 말겠소."
길씨 형제가 이르러 김위가 모든일을 털어놓고 말하자 형제는 분노에 찬 눈물
을 쏟으며 맹세했다.
끌어들일 사람이 다 모이자 김위가 생각해 둔 바를 밝혔다.
김위는 때마침 정월 보름날이 다가오고 있었으므로 그 경축일을 이용해 대사
를 거행 하기로 했다.
"대보름날 밤, 원소절을 경축할 것이네. 그때 경소부와 위사직 두 사람은 각기
집안의 장정들을 거느려 왕필의 영문 앞으로 나오도록 하게. 영문 안에서 불길
이 일어나거든 각각 길을 나누어 양쪽으로 쳐들어가 왕필을 죽이도록 하게. 그
런다음 나와 함께 대궐로 들어가 천자를 오봉루로 모시고 가서 문무백관들을 모
아 역적을 치라고 직접 분부를 내리시도록 하겠네. 그때 길문연 형제분은 성 밖
에서 가로막는 자들을 쳐죽인 다음 성 안으로 밀고 들어와 불을 질러 군호로 삼
고 백성들에게 '역적을 쳐 없애자'고 선동을 해 주게. 그런 한편 성밖에서 구원
오는 군사가 있으면 그들을 막도록 하게. 그럴 도안 천자께서 영을 내리시어 구
원군들을 항복하게 할 것이네."
"그렇게 하여 성 안을 평정한 다음에는 어떻게 할텐가?"
경기와 위황이 그 뒷일이 궁금한 듯 물었다. 김위가 말을 이었다.
"천자의 영에 따라 군사들이 항복하면 나는 군사를 거느리고 업군으로 달려가
조조를 사로잡겠네. 그런 한편 천자의 조서를 서촉으로 보내 유 황숙을 불러들
이면 되네. 보름날에 거사하되 밤 이경에 결행 하기로 하세. 부디 매사를 신중히
하여 지난날 동승처럼 화를 당하는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해야 하겠네."
김위의 말대로라면 대사가 어긋날 리가 없어 보였다. 다섯 사람은 고개를 끄
덕이며 결의에 찬 얼굴로 피를 섞어 하늘을 우러러 맹서한 후 헤어졌다.
집으로 돌아가자 각기 장정들을 모으고 병기를 정돈하며 채비를 해 두었다.
경기와 휘황은 장정들과 하인들을 합치니 각기 3,4백 명은 족히 되었고 병기도
이미 마련해 둔 것이 있어 보름날이 되기만을 기다렸다. 길막 형제도 장정 3백
을 모은후 교외로 사냥을 하러 간다고 말하고 병기를 손질하며 성문 앞을 살피
고 있었다.
김위는 채비가 다 갖추어지자 보름날이 되기 전날 왕필을 찾아가 넌지시 부추
겼다.
"지금 천하가 평안하고 위왕의 위세는 사방에 떨쳐 울리는 가운데 정월 대보
름을 맞았습니다. 거리마다 등불을 밝혀 태평 성세를 기려야 할것입니다."
김윙의 말에 조조의 손발과 다름없는 왕필은 더없이 흐뭇해했다. 그말을 옳게
여겨 그 자리에서 영을 내렸다.
"대보름날에는 집집마다 등불을 달고 문간을 색실로 엮어 꾸미도록 하여 아름
다운 명절을 경축하도록 하라."
왕필의 영에 따라 백성들은 대보름날의 명절 채비에 여념이 없었다.
드이어 정월 대보름날이 되었다. 하늘은 맑게 개어 밤하늘에 달과 별이 밝게
빛나고 있었다. 집집마다 등불을 밝혔고 거리마다 오색의 등불이 휘황찬란하게
빛나니 백성들은 저마다 흥겨운 마음을 가누지 못해 거리로 쏟아져 나와 흥겹게
노닐고 있었다. 그렇게 되니 넘녀노소 가리지 않고 쏟아져 나온 사람들로 거리
가 메워졌다. 흥겨운 풍악이 울리는 가운데 이 날만은 어림군도 백성들을 막지
않았다.
어림 장군 왕필도 여러 장수들과 함께 영문 안에서 크게 잔치를 벌이고 있었
다. 장수들뿐만 아니라 졸개들도 끼러끼리 모여 술판을 벌이고 노래하며 춤을
푸고 있었다.
그런데 밤 이경이 지났을 무렵이었다. 별안간 영문 안에서 함성이 일어나는가
싶더니 군사 하나가 달려와 왕필에게 알렸다.
"병영 뒤에 불길이 일고 있습니다."
왕필이 황급히 장막 밖으로 나가보니 이미 연기가 자욱하고 불길이 크게 이는
가운데 함성이 요란했다. 불길은 영문 뒤의 남문에서 치솟고 있었다. 왕필은 그
불이 누군가가 일부러 지른 것임을알고 허둥지둥 말위에 올라 남문으로 향했다.
이때 경기와 위황은 영문 뒤에서 불길이 일어나자 장정들을 이끌어 영문 안으로
뛰어들고 있었다.
경기가 보니 남문 쪽으로 왕필이 달려가고 있는 것을 보고 급히 화살 한 대를
날렸다.경기가 쏜 화살은 왕필의 어깨죽지에 맞아 하마터면 말위에서 떨어질 뻔
했다.
가까스로 말고삐를 움켜쥐고 몸을 추스린 왕필은 화살을 뽑아 팽개친 후 말을
재우쳐 서문을 향해 달아 났다. 뒤에서는 뒤쫓는 군사들의 함성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다급해진 왕필은 말에서 뛰어내려 길거리에 쏟아진 사람들 가운데 섞여
정신 없이 달리다가 마침 가까운 거리에 있는 김위의 집으로 가 대문을 두드렸
다. 김위가 가까운 벗이라 우선 그의 집에라도 들어가 몸을 숨길 심산이었다.
이때 김위는 사람을 시켜 영문뒤에 불을 지른 후 장정들을 이끌고 경기와 위
황을 도우려고 나가고 없었다. 집 안에는 김위의 아내와 부녀자들만이 있었는데
황급히 대문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김위의 아내는 자기 남편이 돌아온 줄로알
고 대문을 열며 물었다.
"벌써 돌아오시우? 그래 왕필이 놈은 죽이셨소?"
대문 밖에서 이 말을 들은 왕필은 소스라치게 놀랐다. 김위의 아내가 빗장을
뽑는 사이 황망히 몸을 피했다.
"이번 일은 김위와 그 무리들이 꾸몄구나."
왕필이 이렇게 중얼거리며 급히 조휴의 집으로 달려가서 이 사실을 알렸다.
"김위. 경기. 위황이 함께 난리를 일으켰소!"
피투성이가 된 왕필의 말에 조휴는 크게 놀라며 얼른 갑옷을 입고 급히 군사
1천여 명을 수습해 성안으로 달려갔다.
그때 성안은 이미 사방이 불길에 휩싸여 있었다. 오봉루에도 불길이 번져 헌
제는 후궁으로 몸을 피했고, 조조의 심복들만이 목숨을 돌보지 않고 궁문을 지
키고 있었다. 조휴가 보니 성 안에는 불길이 이는 가운데 반란군의 함성으로 뒤
덮이고 있었다.
"조조를 죽여라!"
"조조의 무리를 죽이고 한실을 되찾자!"
이때 조조의 명을 듣고 하후돈이 허창을 살피기 위해 3만 군사를 거느리고 허
창성 5리 밖에 진을 치고 있었다. 하후돈이 순시를 하던중 허창성을 보니 불길
이 일며 함성이 은은히 들려 왔다. 하후돈은 변이 일어난 것을 알고 곧 거느린
3만 군마를 이끌어 성을 에워싸는 한편 자신은 한떼의 군마를 이끌고 성안으로
달려들어 조휴를 도와 반란군을 쳤다.
양군은 어둠 속에서 죽고 죽이는 혼전을 벌이다 보니 어느 새 새벽이 되었다.
그러나 경기와 위황은 하후돈의 대군을 대적하기는커녕 조휴의 군사들과 맞서
기도 힘든 쳐지였다. 거느린 장정들도 얼마 되지않는데다 그나마 조련을 받은
군사들이 아니어서 싸움이 길어질수록 어려운 처지에 빠질 수밖에 없었다.
어느덧 날이 밝아 오자 하후돈과 조휴 군사들의 칼에 맞아 꺾인 장정들의 시
체가 늘어 갔다. 거기다가 또 기를 꺾는 보고가 들어왔다.
"김위 어른과 길막 형제분이 모두 목숨을 잃었습니다."
경기와 위황은 그 소식을 듣자 일이 뒤틀려 버렸음을 알고 길을 열어 성문 밖
으로 달아났다. 그러나 성문 밖에는 이미 하후돈의 군사들이 에워싸고 있었던
터라 두 사람은 산 채로 사로 잡히고 말았다. 두 사람을 뒤 따르던 장정 1백여
명은 순식간에 하후돈의 군사들에 의해 떼 죽음을 당하고 말았다. 한조를 다시
일으키려던 한신들의 충의도 끝내 물거품이 되고 마는 순간이었다.
하후돈은 성 안의 불을 모두 끄고 난 후 바로 난을 일으킨 다섯 사람의 가족
들을 ㅁ모리 잡아들였다. 한편으로는 사람을 급히 없군으로 보내 조조에게 이
사실을 알렸다.
'역시 관로의 예언이 어김없이 들어맞았구나!'
조조는 속으로 곤로에게 감탄하는 가운데도 한조 옛 신하들의 끈질긴 모반에
치를 떨었다.
"김위. 경기. 휘황 등 다섯 집아의 가족들은 늙고 젊고를 가리지 말고 모두 거
리에 끌어 내어 목을 베도록 하라. 그리고 조정에 있는 문무백관들은 모조리 업
군으로 끌고 오도록 하라!"
조조의 영을 받은 하후돈은 경기와 휘황부터 저잣거리로 끌어 내었다. 경기는
손을 뒤로 묶인 채 길거리로 끌려가면서도 얼굴을 쳐들고 조조에게 욕을 퍼부어
댔다.
"이눔 역적 조조야, 내가 살아서 너를 죽여 간을 씹지 못한 것이 원통 할 뿐이
다. 그러나 귀신이 되어서라도 내가 너를 죽이고야 말리라!"
경기가 고래고래 고함을 지르자 끌고가던 망나니가 긴 칼로 경기의 입을 찢어
놓았다. 경기는 흐르는 피로 땅을 ㅍ건히 적시면서도 호통을 멈추지 않으니 망
나니가 칼로 그목을 내리쳤다.
위황 또한 경기와 다름없이 조조를 욕하다가 이마로 땅을 짓찧으며 한탄해 마
지않았다.
"원통하구나, 조조를 죽이지 못한 것이 원통하구나!"
위황은 이를 부드득 갈더니 마침내 머리로 땅을 짓찧어 스스로 목숨을 끊고
말았다.
한조 신하들의 드높은 기개에 보는 이들은 모두 눈물을 삼켰다. 뒷날 사람들
이 의로운 두사람의 의기를 시로 지어 기렸다.
충성스런 경기와 어진 위왕
맨손으로 하즐을 떠받들어 일으키려 했네.
그러나 뉘 알았으랴 한실의 운이 다했음을
가슴 가득 한을 품고 저승길로 갔네.
경기와 위황이 죽자 하후돈은 다섯 집안의 가족들을 보조리 죽인 다음 조정의
문무백관들을 거느려 업군으로 갔다. 조조는 그들을 교련장에 끌고 가 오른쪽에
는 붉은 기를 세우고 왼쪽에는 흰기를 세워 놓게 한 다음 백관들에게 영을 내렸
다.
"경기,위황이 모반을 꾸며 허도에 불을 질렸을 때 그대들 중에는 나와서 불을
끈 사람도 있을 것이고 겁이 나 문을 닫아걸고 나가지 않은 사람도 있었을 것이
다. 그때 불을 끈 사람은 붉은 기 밑으로 가서 서고, 집에 있었던 사람은 흰 기
밑에 가 서도록 하라."
조조의 말에 문무백관들은 대부분이 붉은 기 아래로 몰려갔다.
'불을 끄려고 했다고 해야 벌을 받지 않을 것이 아닌가!'
문무백관들은 속으로 그렇게 생각하며 붉은 기 아래로 모여든 것이었다. 흰
기 아래에 선 사람은 세 사람 중 한 사람꼴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나 조조는 붉은 기 아래 서있는 백관들을 보고 소리쳤다.
"저 자들을 모조리 묶도록 하라!"
놀란 것은 붉은 기 아래 모여 있던 백관들이었다. 모두들 소리내어 울며 비명
을 질렀다.
"대왕전하 억울합니다."
"저희들이 무슨 죄가 있습니까? 불을 끄려 했느데 어찌 그것이 죄가 됩니까?"
그러자 조조가 그들을 노려 보며 호통을 쳤다.
"그때 너희들은 불을 끄는 것보다 실은 역적들을 도우려는 마음이었을 것이다.
아무리 변명해도 내 눈은 속일 수 없으리라."
그렇게 말한 조조는 그들을 모두 장하 강변으로 이끌고 가 목을 베게 했다.
이때죽은 백관들이 3백이나 되었다.
그러나 흰 기 아래 모였던 백관들에게는 상을 주어 허도로 돌려 보내면서 타
일렀다.
"그대들은 겁이 다 집 밖에 나가지 않았으리라. 그러나 역적들을 도우려 하지
않은 것만은 분명할 뿐만 아니라 적어도 나를 거스르지 않았으니 내가 상을 주
리라."
조조는 경기와 위황의 반란을 빌미로 허창에 있던 백관들의 거의 대부분을 죽
여 다시는 자신을 거스리는 자가 없도록 했다.
이때 경기의 화살에 맞아 크게 상처를 입었던 왕필은 상처가 악화되어 죽고
말았다.
조조는 그를 후히 장사지내 준 후 조정에 새로운 기풍을 일으키기 위해 허창
의 관작을 고쳤다.
조후에게 어림군의 총독을 맡게 하고 종요를 상국으로, 화흠을 어사대부로 삼
아 조정에 다시금 변란이 일어나지 않도록 했다.
그런 다음 제후의 등급을 새로 정했다.
후의 작위에는 6등 18급과 관서의 제후 17급을 새로 정해 모두 금도장에 자줏
및 인수를 주었다.
또한 관내외후 16급을 정해 은도장에 검은 인끈을 주었으며, 5대부 15급을 두
어 구리도장에 고리 달린 인끈을 지니게 했다.
관작을 새롭게 정하자 조조는 그에 따라 조정으로 벼슬아치들을 새로운 사람
으로 앉혔다.
조조가 조정의 일을 배듭짓고 나자 관로의 점이 과연 신통했음에 다시 한 번
감탄하며 후한 상을 내렸다.
그러나 관로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했다.
"대왕께서 업군에 머물러 계셨던 것도 하늘이 정한 이치였습니다. 허창의 면란
도, 또 제가 대왕께 그 일을 예언한 것도 아마 하늘의 뜻일 것입니다. 그러니 제
가 공을 내세워 대왕의 은혜를 받음도 쑥스러운 일입니다."
관로는 조조가 내리는 상을 굳이 마다하고 받지 않았다.
장비에게 보내는 군전공용미주
조조군의 장합은 파서로 군사를 이끌어 가나 장비의 군세에 밀려 영채로 쫓겨
난다. 이후 도무지 싸우려 들지 않아 이에 장비는 한 가지 꾀를 내어 날마다 술
만 퍼바시며 여흥을 즐긴다. 환가 난 장합은 다시 군사를 이끄나 크게 패하고
와구관으로 도망간다.
그 무렵 조조는 관로가 허도에 불이 날 것이라고 이러 준 말이 생각나 만약을
대비해 업군에 머무는 대신, 조홍에게 군사를 거느려 한중으로 가게 했다.
조홍은 한준ㅇ에 이르로 하후연과 장합에게 중요한 길목을 맡아 지키게 하고
자신은 대군을 이끌고 적을 맞으로 나갔다.
조홍과 먼저 부딪친 서촉의 장수는 바로 마초의 휘하 오란이었다. 장비는 그
때 뇌동을 거느리고 파서 땅을 지키고 있었으며, 마초는 하판에 이르자 오란에
게 전군을 이끌어 적의 형세를 살피게 했다. 오란인 적을 살피러 가는데 군사를
이끌고 온 노홍과 맞닥 뜨리게 되었다.
오란은 조홍이 대군을 이끈 것을 보자 우선 이일을 마초에게 알리기 위해 군
사를 물리려고 했다. 그런데 아장 임기가 군사를 물리려는 걸 반대하고 나섰다.
"적은 지금 박 군사를 이끌고 이곳으로 왔소. 아직 싸울 채비도 안 되어 있는
적을 쳐서 날카로운 기세를 꺾지 않는다면 무슨 낯으로 마맹기를 대하겠소?"
임기는 그 말과 함께 오란이 입을 열 사이도 없이 창을 ㅅ휘두르며 말을 달려
노홍에게 덤벼들었다. 조홍이 이제 막 적을 맞으러 나온 터라 잔뜩 경계를 하고
있는데 한 장수가 말을 달려 오므로 칼을 뽑아들고 그를 맞았다. 어우러져 싸운
지 불과 3합을 넘기지 않고 조홍은 임기를 베어 말아래로 거꾸러뜨렸다.
앞선 장수가 맥없이 쓰러지자 오란의 군사는 벌써 겁을 먹고 있는데 노홍이
이긴 여세를 몰아 대군을 휘몰아 오란 군사를 덮쳤다. 오란의 군사는 크게 꺾인
채 달아나기에 바빴다. 오란이 도망쳐 돌아오자 마초느 오란의 경솔한 싸움을
호되게 나무랐다. 마초는 이전에 조조군과 수없이 부딪쳐 본 적이 있어 결코 얕
잡아볼 수 없는 군사임을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어찌하여 나와 의논 한 마디 없이 가벼이 군사를 냈다는 말인가?"
오란은 궁색하지만 사실대로 고할 수 밖에 없었다.
"임기가 내 말을 듣지 않고 군사를 내다가 패하고 말았습니다."
"이제부터는 좁고 험한 길목을 지키기만 하고 나아가 싸우지 않도록 하라."
마초가 오란에게 엄명을 내린 뒤 사람을 성도로 보내 이 사실을 알리고 유비
와 공명에게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지를 물었다.
마초가 성도에서 분부가 오기를 기다리고 이쓴 사이 조홍은 이를 의아스럽게
여겼다. 마차가 굳게 지키기만 하고 오지 않는 것을 보고 혹시 무슨 계책이라도
쓰려는 것이 아닐까 하여 군사를 남정으로 물렸다. 그러자 장합이 때마침 조홍
을 찾아와 마땅찮은 얼굴을 하고 물었다.
"장군은 이미 적의 장수를 목베어 첫싸움에서도 이겼는데 어째서 군사를 뒤로
물리셨습니까?"
"마초는 싸움이라면 물불을 가리지 않고 뛰어드는 장수입니다. 그런데도 나와
싸우지 않는
것은 틀림없이 다른 뜻이 있어서일 것이오. 게다가 내가 업군에 있을 때 점 잘
치는 관로가 이르기를 한중에서 큰 장수 한 사람이 꺾인다 했소. 어쩐지 그말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는구려. 그래서 가벼이 나아가지 못하고 있소."
장합이 그 말을 듣더니 큰 소리로 웃으며 말했다.
"이건 장말 뜻밖의 말씀입니다. 장군께선 반평생을 싸움터에서 보냈으먼서도
어찌하여 점쟁이의 말에 마음을 빼앗기고 계십니가? 내 비록 재주가 없으나 거
느린 군사를 이끌고 가 파서를 빼앗겠습니다. 파서가 우리의 손안에 떨어진다면
촉을 빼앗는 일은 손바닥 뒤집는 것보다 쉬운 일일 것입니다."
조홍은 장합이 지나치게 호기만을 앞세우는 것같아 정색하며 말렸다.
"그곳 퍼서를 지키는 장비도 가볍게 여길 장수가 아니오."
그러나 장합은 물러서지 않고 불끈하며 더욱 큰소리를 쳤다.
"사람들은 장비를 몹시 겁내고 있지만 제 눈에는 어린아이로밖에 보니지 않습
니다. 만약 장군께서 조금이라도 그를 두려워하는 눈치를 군사들에게 보이신다
면 이 또한 군사들의 기세를 꺾는 결과가 될 것입니다. 제가 이번에 가서 꼭 장
비를 사로잡아 오겠습니다."
장합이 굽히지 않고 조홍에게 청했다. 조홍도 장합이 그렇게까지 끈질기게 청
하자 마지못해 응하기는 했으나 저으기 불안한 마음을 감출 수가 없었다.
"그렇게 장담은 하나 만약 실수라도 하면 어쩌겠소?"
"염려하지 마십시오. 만약 장비를 사로잡지 못하거든 그때는 군령에 따라 벌을
받겠습니다."
"좋소. 그럼 군령장을 쓰시오."
조홍은 군령장을 받고서야 그가 파서로 군사를 내는 일을 허락했다. 장합은
곧 군사를 이끌고 파서로 향했다. 그때 장합은 군사 3만을 거느리고 산을 의지
하여 세 곳에 진을 펴고 있었다. 그 하나는 암거채라 부르고 또 하나는 몽두채,
또 다른 한곳은 탕석채라 불렀다. 장합이 파서를 치러갈 때 세 곳에 있는 군사
반씩을 뽑아 가고 나머지 군사들은 그곳을 지키게 했다.
장합이 군사를 이끄고 파서로 떠나자 그일은 장비의 귀에도 전해졌다.
장비는 듭히 뇌동을 불러 의논했다.
"장합이 군사를 이끄고 온다니 놈들을 개미처럼 짓밟아 주고 싶은데 어떻게
했으면 좋겠나?"
뇌동이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말했다.
"이곳 낭중은 땅이 거칠고 산세가 험하기 이를데 없으니 군사를 매복시키기가
좋습니다. 장군께서는 군사를 거느려 적을 치시고 제가 복병을 거느려 호응한다
면 장합도 능히 사로잡을 수가 있을 것입니다."
장비는 뇌동의 말에 따랐다. 곧 날랜 군사 5천을 뽑아 먼저 나가 매복케 했다.
자신은 군사 1만을 거느리고 낭중으로 향했다.
장비가 낭중 30리 밖까지 나아가자 마주 오는 장합의 군사와 맞닥뜨리게 되었
다. 양군이 군사를 늘어세워 진을 세우자 장비가 먼저 장팔사모를 비껴들고 말
을 달려 싸움을 걸었다. 장합도 기세 좋게 창을 꼬나들고 말을 몰아왔다. 말이
엇갈리며 서로 상대방의 날카로운 기세를 꺾으려는 듯 창과 창이 무서운 힘으로
부딪쳤다. 그렇게 어우러지기를 30여 합이나 되었을까. 홀연 장합의 군사 뒤편에
서 크게 함성이 일어났다.
장합이 흘깃 뒤돌아보니 산 뒤쪽에 촉병의 펄럭이는 깃발들이 눈에 띄었다.
뒤쪽의 함성도 그 깃발들을 보고 장합의 군사들이 놀라 지른 소리였다. 장합
이 그걸 보자 뒷길이 끊길까 두려워 더는 싸울 마음이 없어졌다. 장합은 힘껏
장비를 한 번 몰아붙인 뒤 틈을 타 말머리를 돌렸다.
"이놈, 기다려라. 어디로 달아나려느냐!"
장비가 호통을 치며 뒤쫓았다. 장합은 얼마 전 조홍 앞에서 장비를 사로잡겠
다고 큰소리치던 일은 까맣게 잊어 버린 듯 뒤도 돌아보지 않고 달아나기에만
바빴다. 장비는 그런 장합을 뒤쫓으며 장합을 따르는 졸개들을 마구 찔러 죽였
다.
그런데 이번에는 매복해 있던 뇌동이 5천 군사를 이끌고 마주 알려나와 길을
끊었다. 뇌동이 군사들을 시켜 산 뒤 여기저기에 깃발을 꽂아두어 매복군이 있
는 것처럼 꾸민 뒤 몸소 군사를 이끌고 나온 것이었다. 앞과 뒤로 적을 맞은 장
합은 군사를 돌볼 겨를이 없었다.
장비와 뇌동에게 수많은 군사가 꺾이는 가운데 황망히 옆길로 달아날 뿐이었
다. 장비와 뇌동은 밤을 도와 장합을 뒤쫓다보니 어느 새 그의 영채가 있는 암
거산아래에 이르렀다.
장합이 쫓겨오자 군사들이 그를 영채 안으로 맞아들인 뒤 뇌목괴 포석을 배치
해 놓고 지키기만 할 뿐 나와 맞서지 않았다. 장비는 하는 수 없이 암거산 십
리 밖에 진을 친 후 다음 날 다시 가서 싸음을 돋우었다. 그러나 장비에게 혼쭐
이 난 장합은 여전히 밖으로 나와 싸우려 들지 않았다.
장비 또한 험한 산 위에까지 군사를 이끄고 갈 수도 없는 터라 장합을 멀거니
바라보기만 할 뿐이었다. 장합은 장비의 울화를 돋우려는 듯 산위에 올라 북을
치고 피리를 불게 하며 아장들과 더불어 술을 마시고 있었다.
장지가 그 꼴을 보다못해 군사들을 시켜 욕을 퍼붓게 했다. 그러나 장합은 여
전히 술만 마실 뿐이었다. 날이 저물어가자 장비는 하는 수 없이 군사를 물릴
수밖에 없었다.
다음 날이 뒤자 장비는 전날보다 더 심하게 욕을 퍼붓게 했으나 장합은 여전
히 얼굴도 내밀지 않았다.
울화통이 터진 뇌동이 참지 못하고 군사를 이끌어 산으로 밀고 올라갔다. 그
러나 그건 장합이 바라던 바였다.
산 위에서는 기다렸다는 듯 큰 통나무와 바위, 화살이 비 오듯 쏟아져 내렸다.
뇌동은 급히 군사를 물리려 했으나 이번에는 창석채.몽두채에 있던 장합의 군사
들까지 쏟아져 내려와 달아나는 뇌동의 군사들을 덮쳤다.
뇌동은 결국 적지 않은 군사들만 잃은 채 영채로 돌아오고 말았다. 다음 날이
되자 전날 뇌동이 싸움에쪄 울화가 치민 장비는 몸소 군사를 이끌고 산 아래로
가 고래고래 소리지르며 욕설을 퍼부었다. 그러나 장합은 여전히 나오지 않았다.
장비는 군사들을 시켜 입에 담지 못할 갖은 욕설을 퍼붓게 했다. 그러자 장합
도 어지간히 화가 났던지 산 위에서 마구 욕설을 퍼붓기 시작했으나 밖으로 나
오지는 않았다. 이에 장비는 꾀를 써서 장합을 칠 궁리를 해보았으나 마땅한 계
책이 떠오르지 않았다. 그렇개 서로 노려보며 욕질만 하는 가운데 어느 새 50여
일이 흘러갔다.
그러다 장비는 무슨 생각에서인지 암거산 바로 앞에 대채를 세운 후 장합에게
질세라 술을 퍼마시기 시작했다.
장비는 술을 마구 퍼마신 후 몸을 비틀거리며 장합의 진을 바라보고 욕을 해
댔다. 럴큰하게 취한 부하들도 목소리를 높여 장비를 따라 욕질을 해댔다. 장비
의 술타령과 욕질은 날이 갈수록 더욱 심해졌다.
이러한 때 성도에 있던 유비는 장합과 싸우고 있는 장비와 그군사들을 독려하
기 위해 많은 음식과 물건들을 보내왔다. 유비가 보낸 사자는 성도로 돌아가자
본 대로 보고했다.
유비가 전황을 보고받고 깜짝 놀라며 공명을 불러 걱정스런 얼굴로 물었다.
"장비의 그 술망나니 버릇이 또 도진 모양이오. 어찌했으면 좋겠소?"
공명은 그 말을 듣더니 껄걸 웃으며 말했다.
"군중에는 아마 좋은 술이 없을 것입니다. 성도에 있는 좋은 술 오십독만 수레
에 실어 보내십시오. 장 장군이 실컷 마시게 말입니다."
유비가 공명의
말에 정색을 하며 반문했다.
"당치도 않은 말씀이오. 아우는 원래 술을 마시면 실수가 많소. 그런데 군사께
서는 어찌 아우에게 술을 주라 하시오?"
"주공께서는 그처럼 오랫동안 익덕과 형제로 지내셨으먼서도 어찌 그성품을
모르십니까? 익덕이 원래 성격이 거칠다 하나 지낭번 서천을 얻을 때는 적의 장
수 엄안을 계책을 써서 사로잡은 후 의롭게 살려 우리 편으로 삼은 적도 있었습
니다. 이는 결코 용맹만으로 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지금 장합과 맞선 지 50
여 일이 지난 가운데 익덕이 술에 취해 장합에게 욕설을 퍼붓기만 한다고 하니
그것도 까닭이 있을 것입니다. 결코 술을 탐해서가 아니라 바로 장합을 치기 위
한 계략일 것입니다. 주공께서는 술을 보내 주도록 하십시오."
"공명이 여전히 웃음을 거두지 않은 얼굴로 말했다. 그제야 유비도 그것이 장
합을 격동시켜 꾀어 애려는 속셈임을 알았으나 그래도 안심이 되지 않는 듯 공
명에게 말했다.
"비록 그렇다고는 하나 무턱대고 믿고 있을 수만은 없으니 위연을 보내 돕게
하는 것이 좋겠소."
공명도 유비의 말을 옳게 여기고 곧 위연을 불러 술을 가지고 가서 장비를 돕
게 했다.
그런데 술을 실은 수레 위에 눈에 잘 띄는 크고 노란 기를 꽂고 그 기에는 '
군전공ㄷ미주'이란 글씨를 쓰게 했다.
장합으로 하여 이 기를 보게 하기 위함이었다.
위연은 세 수레에 술독을 가득 싣고 노란 기를 펄럭이며 장비의 진에 이르렀
다.
"주공께서 술을 내리시며 저더러 장군을 도우라 하시었소."
장비는 두 번 절하며 술을 거두자마자 즉시 위연과 뇌동에게 군령부터 내렸
다.
"장군들은 각기 한 때의 군마를 거느리고 좌우의 날개가 되도록 하되,군중에
붉은 기가 으르거든 곧장 내달아 적을 친도록 하라."
그렇게 군령을 내린 장비는 가져온 술을 장막 앞에 늘어놓게 한 뒤 수레에 있
던 기를 늘여 세우고 북을 치게 하며 전보다 더 큰 술잔치를 벌였다. 오랜만에
마셔보는 좋은 술이라 장비는 몇 잔을 연거푸 들이켰다.
장비의 장막을 살피고 있던 장합의 세작이 얼른 그 사실을 산 위로 올라가 알
렸다. 장합이 세작의 말을 듣자 산봉우리에 올라 장비의 장막을 내려다보았다.
아니나 다를까 장비는 전보다도 더 질펀히 주저앉아 술잔치를 벌이고 있는데,
졸개 두 명이 장비 앞에서 씨름까지 하고 있었다.
그 꼴을 보니 장비는 정말 자기 따위는 염두에도 두고 있지 않는 둣한 방자한
태도였다. 장비가 자기를 꾀어 내기 위해 속임수를 쓰고 있음을 장합이
모르는 바 아니었으나 그 속임수가 그렇게 까지 심해지자 장합은 노기로 얼굴까
지 붉히며 중얼거렸다.
'장비란 놈이 너무나 나를 가볍게 여기는구나!'
그런 생각이 들자 울컥 울화를 참지 못하고 두 주먹을 움켜쥐더니 불쑥 영을
내렸다.
"오늘 밤에 산을 내려가 장비의 영채를 치리라. 몽두채,탕석채 군사들도 모두
나와 나의 좌우 날개가 되도록 전하라!"
그날 밤이었다. 장합은 희미한 달빛을 받으며 군사를 거느리고 산기슭으로 내
려와 장비의 영채 가까이에 이르렀다. 장합이 먼저 장비의 군막을 살피니 등불
과 촛불을 휘황하게 밝힌 가운데 장비는 그때까지도 술을 마시고 있었다.
장합은 장비를 죽일 수 있는 더없이 좋은 기회라 생각하고 크게 소리를 질러
군호를 보내며 장비를 향해 내달았다. 장합의 군호에 맞춰 산기슭에서는 북 소
리가 크게 일며 군사들이 장합의 뒤를 따랐다. 장합은 곧장 중군으로 달려가 장
비의 군막으로 덮쳐들었다.
그런데 요란한 북 소리와 함성에도 불구하고 장비는 여전히 자리에 앉은 채
움직일 줄을 몰랏다.
장합은 곧장 바람처럼 장비에게 다가가 한 창으로 찔러 넘어뜨렸다. 그런데
창을 맞으며 퍽 소리와 함께 쓰러지는 장비를 보니 뜻밖에도 짚으로 사람 형상
을 만들어 갑옷을 입혀 놓은 한낱 제웅이 아닌가. 깜짝 놀란 장합이 속았음을
알고 말머리를 돌리려 할 때였다. 홀연 장막 뒤에서 돌을 날리는 연주포 터지는
소리가 크게 나더니 한 장수가 내달아와 길을 막았다. 고리눈에다 표범 수염을
세운 장비가 벼락치듯 호통소리를 내질렀다.
"이놈, 장합아, 네 목을 가지러 왔으니 달아나지 마라!"
잠합은 그가 바로 장비임을 알자 정신이 아뜩했다. 장비가 곧장 장팔사모를
휘두르며 장합을 덮쳐들자 장합도 정신을 가다듬어 장비의 창을 막았다. 밝은
불빛 속에 장합은 장비를 맞아 삐르고 피하며 40여합을 싸웠다. 그러나 싸움이
이어질수록 장합의 손은 점점 떨리기 시작했다. 장합은 몽두채,장석채에서 자기
를 도우러 오기만을 기다리며 있는 힘을 다해 장비의 창을 막고 있었다.
그러나 그 두 곳에서 구원 오더 군사들도 장합과 다름없는 처지였다. 좌우 나
랙가 외어 산 속을 지키고 있던 위연과 뇌동의 군사들에게 뭉그러졌을 뿐만 아
니라 영채마저 빼앗겨 버린 뒤였다.
장비와 싸우고 있던 장합은 구원병이 오지 않자 초조해하며 흐ㄹ 산채를 바라
보았다. 산 위에는 불길이 치솟고 있었다. 그제야 장합은 일일 어긋났음을 알았
다. 두 영채마저 적에게 빼앗긴 것임ㅇ르 짐작하자 더 이상 버텨낼 수가 없었다.
달아날 길마저 끊기기 전에 급히 말머리를 돌려 있는 힘을 다해 와구관으로 말
을 달렸다.
장비는 달아나는 장합을 뒤쫓으며 그의 군사들을 마구 짓밟았다. 위연,뇌동도
창 칼로 찌르고 베며 흩어지는 장합으리 군사들을 죽였다.
장합은 영채 셋을 고스란히 장비에게 빼앗겼을 뿐만 아니라 이번 싸움에서 3
만의 군사가 1만으로 줄어들고 말았다. 장비는 싸움에서 크게 이긴 후에 이 소
식을 성도에 알렸다. 누구보다 가장 기뻐한 사람은 유비였다.
과연 장비가 술을 마신 것이 공명의 말대로 장합을 끌어 내기 위한 계책이었
음을 알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 와구관으로 드렁간 장합은 하는 수 없이 조홍에게 구원을 청했다. 남은
군사가 겨우 1만이니 장비가 군사를 이끌어 오면 막아 낼 수가 없어 급히 구원
을 청한 것이었다. 그러나 장합이 보낸 사자의 말을 듣더니 조홍은 벌컥 화를
냈다.
"장합이 내 말을 듣지 않고 어거지를 써 군사를 내더니 기어코 긴요한 요새마
저 빠앗기고 이제와서 구원을 청한단 말아냐?"
조홍은 구원군을 보내기는커녕 사자에게 엄한 목소리로 영을 전하게 했다.
"구원병은 보낼 수가 없으니 어서 스스로 나아가 장비를 맞아 싸우라고 일러
라!"
장합은 그 말을 전해 듣자 눈앞이 캄캄했다. 그러나 다시 구원군을 청할 수도
없는 일이어서 혼자서 막아 낼 수밖에 없었다. 겨우 계책을 정한 장합은 군사 2
대로 하여금 앞 산 속에 매복케 한 후 분부를ㄹ 내렸다.
"내가 싸우가가 패한 척하며 달아나면 장비가 나를 뒤쫓을 것이다. 너희들은
그들의 돌아갈 길을 끊도록 하라."
장합은 나머지 군사들을 이끌얼 적진으로 나아갔다. 그런데 이때 뇌동이 군사
를 이끌어 와구관으로 오다가 장합과 마주쳤다. 뇌동은 장합을 보자 서슴없이
칼을 빼들고 달려들었다. 장합이 뇌동을 맞아 몇 합을 싸우다가 힘이 부친 듯
말머리를 돌려 달아나자 뇌동은 단번에 사로잡을 기세로 뒤쫓아갔다. 뇌동이 산
앞까지 ㅈ아함을 뒤쪼자 매복해 있던 장합의 군사들이 일제히 내달아 길을 끊었
다. 달아나던 장합도 갑자기 군사를 되돌리며 나는 듯이 달려와 한칼에 뇌동의
목을 베어 버렸다.
겨우 목숨을 건진 뇌동의 군사 가운데 하나가 본진으로 돌아가 이 일을 알렸
다. 장비는 뇌동이 죽었다는 말에 크게 노해 말을 달려 장합에게 덮쳐들었다. ㅈ
아합은 두어 번 창을 쓰다 다시 말머리를 돌려 달아났다.
그러나 장비는 장합을 뒤쫓지 않았다. 뇌동 졸개의 말로 미루어보아 틀림없이
장합이 매복을 써 뇌동을 눅였으리라 짐작되기 때문이었다.
장합은 달아나다 다시 맞붙고는 달아나기를 계속했다. 장비는 장합의 그 꼬릉
ㄹ 지켜 보다 군사를 거두어 영채로 돌아갔다. 장비는 위연을 불러 의논했다.
"장합이 매복계를 써서 뇌동을 죽이고 또다시 나를 꾀려 하고 있다. 그러니 내
가 그 술책을 거꾸로 이용해 그 잘을 사로잡아야겠다."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위연도 뇌동의 죽음에 분개한 얼굴로 장비에게 물었다. 장비가 잠시 생각에
잠기다 말했다.
"내가 내일 군사를 거느리고 나아가 장합을 맞겠다. 내가 속는 척하며 장합을
뒤쫓으면 반드시 매복군이 나타날 거싱다. 그ㅐ는 날랜 군사들을 뽑아 뒤쳐져
내 뒤를 따르다가 적의 매복군이 나오면 구낫를 나누어 양쪽에서 치도록 하라.
그러나 그 전에 달아날 만한 곳에 마른 풀더미를 실은 수레 10여 채에 불을 질
러 도망갈 길목을 막도록 하라. 나는 기세가 오를 때 장합을 사로잡아 뇌동의
원수를 갚겠다."
위연이 들으니 빈틈없는 계책이 아닐 수 없었다. 이에 고개를 끄덕이며 두말
없이 준비를 서둘렀다.
다음 날이 되자 장비는 군사를 이끌고 와구관으로 향했다. 장합이 얼른 말을
달려나와 장비와 맞붙었다. 그러나 짐작했던 대로 10여 합을 부딪지 않아 다시
패한 척하며 달아났다. 장비가 이번에도 속는 척하며 장합을 뒤쫓았다.
장합은 이번에야말로 꼼짝없이 장비가 걸려들었다고 여긴 듯 싸우다 도망가기
를 뒤풀이했다. 장합은 장비를 산골짜기까지 끌어들이자 갑자기 후군을 전군으
로 삼고 말머리를 돌려 장비에게 덤벼들며 매복군이 쏟아져 나오기를 기다렸다.
그런데 뜻밖의 일이 벌어졌다. 매복군이 달려나오려 할 즈음 위연이 거느린
구낫들이 갑자기 나타나 산골짜기 좁은 길목을 수레로 막은 채 물을 질렀다. 불
은 수레를 태우고 풀과 나무에도 번져 거센 불길과 함께 자욱한 연기가 산굴짜
기를 뒤덮으니 매복군이 빠져 나올래야 나올 사가 없었다.
불길이 번지고 연기가 오르자 장비는 군사를 휘몰아 뜻하지 않은 불길에 어찌
할 바 모르고 위왕좌옹하는 장합의 군사들을 마구 들이쳤다. 장합은 그제야 장
비가 도리어 자기의 계책을 어꾸로 이용한 것임을 알았으나 이미 때는 늦었다.
장합은 급히 한목숨 구하기 위해 힘을 다해 길을 열버 와구롼으로 향해 달려
갔다. 문을 걸어닫고 다시금 굳게 지킬 뿐이었다.
위연과 밤께 와구관까지 뒤쫓은 장비는 관문을 뚫으려고 며칠을 두고 거센 공
격을 퍼부었으나 허사였다. 관이 워낙 튼튼한데다 지세가 험준해 공격을 하는
데도 어려움이 많았다.
장비는 와구관을 힘으로 깨뜨리는 것을 단념하고 20리 밖으로 군사를 물렸다.
그런 후에 장비는 스스로 10여 기를 뽑아 위연과 함께 산길을 살피러 나섰다.
장비가 한동안 산길을 살피고 있을 대 문득 종부처럼 보이느 남녀 8,9명이 눈에
띄었다. 그들은 등짐을 지고 풀포기를 움켜잡거나 혹은 칡넝쿨을 휘어잡으면서
산 위를 오르고 있었다.
장비가 채찍을 들어 농부들을 가리키며 위연에게 말했다.
"와구관을 손안에 넣는 일은 저 농부들에게 달려 있구나."
위연은 얼른 이 말을 알아듣지 맛하고 그 사람들을 멍하니 바라보기만 하였
다. 장비는 졸개들을 불러 명했다.
"너는 가서 저 농부들이 놀라지 않게 좋은 말로 달래 몇 사람만 이리고 데려
오도록 하라."
졸개들이 달려가 젊은이와 늙은이 몇 사람을 이끌어 왔는데 모두 겁에 질린
듯한얼굴로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장비는 부드런운 목소리로 그들을 안심시킨 후에 궁금한 바를 물었다.
"그대들은 어디로 가는데 이처럼 험한 산길을 넘어가는가?"
"저희들은 모두 한중에 사는 사람들로, 지금 고향으로 돌아가는 길입니다. 그
런데 큰 전쟁이 일어나 낭중으로 가는관도가 막혔다기에 하는 수 없이 이 산길
을 택한 것입니다."
농부들이 입을 모아 말했다. 장비가 보니 그들이 거짓으로 하는 말을 아닌 듯
했다. 장비가 다시 물었다.
"그럼 이 길로 가면 낭중으로 갈 수 있는가?"
"그렇습니다. 이곳으로 가 창계를 지나 재동산 회근천을 거쳐 한중으로 가면
됩니다."
장비는 고개를 끄덕이더니 정말로 하고 싶은 말을 넌지시 물어 보았다.
"이 길로 가면 와구관까지의 거리느 얼마나 되겠는가?"
"그다지 멀지 않습니다. 재돋산 샛길은 바로 와구관 뒤로 통하고 있습니다."
농부 하나가 손짓해 가며 길을 가르쳐 주었다. 장비는 몹시 기뻐하며 농부들
을 영채로 데리고 가 술과 음식을 대접하는 한편, 위연을 불러 분부를 내렸다.
"그대는 군사를 이끌고 가 와구관을 치도록 하라. 나는 기병을 거느리고 재동
산 샛길로 빠져 나가 와구관 뒤를 치리라."
장비는 곧 기병 5백을 데리고 농부들을 앞세워 재동산 샛길로 향했다.
한편, 와구관에 있던 장합은 장비와 거센 공격에도 견고한 관 덕문에 그럭저
럭 버틸 수 는 있었으나 이제 원군이 오지 않으면 한 걸음도 움직일 수가 없을
지경에 이르렀다.
장합이 오로지 원군이 오기만을 애타게 기다리고 있는데 수하 한 사람이 달려
와 알렸다.
"위연이 지금 관 아래로 와서 공격을 하고 있습니다."
장합이 곧 갑옷을 입고 말 위에 올라 관 아래로 내려가려는데 군졸 하나가 달
려오더니 다급한 목소리로 알렸다.
"와구관 뒤 네다섯 곳에서 불길이 일며 한 떼의 군마가 달려오고 있습니다. 그
러나 어느 편 사인지는 알 수가 없습니다."
그 말에 장합은 얼른 말머리를 돌려 관 뒤쪽으로 달려갔다. 혹시나 기다렸던
구원군이 온 것은 아닌가 했으나 이게 웬일인가. 나는 듯이 달려 오는 기병들의
기가 바람에 날려 젖혀지면서 나타난 얼굴을 고리눈을 부릅뜨고 표범 수염을 한
장비였다.
ㅈ아합은 대번에 얼굴잭이 달라지며 급히 말머리부터 돌렸다. 장합은 관옆으
로 종하는 샛길을 향해 말을 재촉했다. 그러나 걸어서 지나기에도 좁은 길인데
다 바위와 자갈이 많아 빠릴 달릴 수가 없었다. 장비가 놓칠세라 급히 추격해
오니 마음이 조급한 장합은 있는 힘을 다해 채찍을 휘두르며 달아나려 했으나
소용 없는 짓이었다. 장합은 말을 버리고 허둥지둥 산 위로 기어올라 가까스로
길을 찾아 달아나는데 따르는 군사라곤 열명에 지나지 않았다.
장합은 터벅터벅 걸어서 남정에 이르러 험한 산길을 오느라 흙투성이가 된 남
루한 몰골로 조홍에게 갔다.
조홍은 3만의 군사중 겨우 열 명의 군사만을 이끌고 온 장합을 보자 벌컥 성
부터 냈다.
"내가 싸우지 말라고 그토록 말렸건만 너는 어거지를쓰며 군령장까지 써놓고
가지 않았느냐? 장수가 되어 그 많은 군사를 다 잃고도 무슨 낯으로 살아 다시
찾아왔다는 말인가!"
조홍은 이어 좌우에게 엄한 목소리로 영을 내렸다.
"이놈을 당장 끌어 내어 목을 베도록 하라!"
조홍의 성난 목소리를 듣자 행군사마 곽회가 급히 나서며 조홍에게 말했다.
"'삼군의 군졸들은 얻기 쉬우나 한 사람 장수는 구하기 어렵다'는 옛말이 있습
니다. 장합의 이번 죄는 실로 용서하기 어려우나 위왕 전하께서 아끼시는 장수
이니 함부로 죽일 수 없습니다. 잠시 그 목숨을 살려두고 그에게 5천의 군마를
주어 그 죄를 씻을 만한 공을 세우도록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그에게 가맹관
을 빼앗게 하면 초긍ㄴ 그 중요한 관을 지키기 위해 전군을 이끌어 되돌아올 것
이 틀림없습니다. 그렇게 되면 한중은 자연 평온을 되찾게 될 것입니다. 만약 이
번에도 공을 세우지 못하면 그때 두가지 죄를 함께 물어도 늦지 않을 것입니다."
곽회의 조리 있는 말을 듣자 조홍의 노여움도 어느 정도 누그러지는 듯했다.
잠시 입을 다물고 있던 조홍이 장합에게 엄명을 내렸다.
"다시 군사 5천을 줄 테니 너는 가서 가맹관을 취하도록 하라. 만약 그렇지 못
할 때는 군령으로 그 죄를 다스리겠다."
장합은 가까스로 목숨을 구해 5천의 군마를 이끌고 이번 사움에서 전날의 치
욕을 씻겠다고 다집하며 가맹관으로 떠나갔다.
그 무렵 가맹관을 지키던 유비의 장수는 맹달과 곽준이었다. 장합이 군사를
이끌고 가맹관으로 떠났다는 말을 듣자 맹달과 곽준은 대책을 논의했다.
"주위의 지세가 험하고 거치니 일부러 나가 싸울 것 없이 관문을 굳게 닫고
지키는 것이 상책일 것이요."
그러나 맹달은 그 말에 따르려 하지 않았다.
"적이 먼길을 와 지쳐 있을 대 그 기세를 꺾어 놓아야 할 것이오. 장군은 관을
지키시오. 나는 그들을 맞아 싸우겠소."
맹달이 부득부득 우기자 곽준도 말릴 수가 없었다.맹달이 군사를 이끌고 나
가 장합을 맞았다.
그러나 죽기로 작정하고 싸우는 장합을 당해내지 못하고 크게 패한 채 관으로
쫓겨오고 말았다.
큰소리치고 나갔던 맹달이 단번에 패해 쫓겨오자 곽준은 깜짝 놀라며 급히 성
도로 사람을 보내 이 사실을 알렸다. 유비는 먼저 공명을 청해 대책을 물었다.
공명은 대답 대신 여러 장수들과 모사를 당상에 불러모은 후 애써 근심스런 얼
굴을 지으며 말했다.
"지금 가맹관이 위급하다 하니 낭중에 있는 익덕이라도 불러야겠소. 장합을 물
리치려면 그것밖에 달리 길이 없을 듯하오."
그 소리에 법정이 펄쩍 뛰며 말렸다.
"지금 익덕은 와구관을 빼앗아 지키고 있는데 그곳 또한 요긴한 길목입니다.
만약 익덕을 불러들인다면 반드시 변이 일어날 것이늑, 그곳에서 낭중을 엄중히
지키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여기서 다른 장수를 보내 가맹관으로 쳐들어오는
장합을 막게 해야 합니다."
공명은 그 말이 나올 줄 알고 있었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웃다가 다시 정색
을 하고 말했다.
"그러나 장합은 조조 휘하의 명장이오. 내 생각으로는 장비가 아니고는 그와
대적할 만한 사람이 없을 것 같소이다."
그곳 당상에 모여 있는 장수들에겐 모욕적인 말이 아닐 수 없었다. 그러자 장
수들 중 홀연 한 사람이 자리를 박차고일어나며 분에 못 이긴 목소리로 소리쳤
다.
"군사께서는 어찌항 여기 있는 장수들을 그렇게도 업신여기시오. 내 비록 재주
는 없으나 저를 보내주신다면 장합의 목을 베어 바치겠소."
그 소리에 모두 고개를 돌려 그를 보니 그는 바로 늙은 장수 황충이었다. 그
러나 공명은 황충에게 당치도 않다는 듯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한승의 말씀은 지극히 용맹스럽소만 어찌하겠소. 이미 늙으셨소이다. 어찌 장
합을 당해 낼 수 있겠소?"
황충은 공명의 말에 백발을 곤두세우며 소리높여 외쳤다.
"내 비록 늙었으나, 두 팔은 아직 쌀 석 섬 무게의 큰 활을 잡아당길 수 있으
며, 온몸의 힘을 모으면 천 근의 무게도 들어올릴 수 있소. 어찌항 장합 따위의
하찮은 필부놈 하나를 당해 내지 못한다고 하시오?"
황충이 그렇게 말했으나 공명은 다시 그의 분기를 돋우었다.
"장군의 나이 이미 칠순에 가까운데 어찌 늙지 않았다 하겠소?"
그 말을 들은 황충은 치솟는 화를 참지 못하고 당 아래로 성큼성큼 내려가더
니 시렁 위에 얹힌 큰 킬을 뽑아 칼춤을 추었다. 무거운 칼을 마치 나무젓가락
돌리듯하더니 다시 벽에 걸려 있는 강한 활을 내려 두 손으로 단숨에 꺾어 버렸
다. 웬만한 젊은 장수도 꺾기 힘든 활이었다.
그제야 공명도 고개를 끄덕이며 물었다.
"장군께서 꼭 가시겠다면 부장으로는 누구를 데리고 가겠소?"
"엄안과 함께 가겠소. 그 역시 늙은 장수이나 그의 용맹이 뛰어남을 알고 있
소. 만약 실수라도 하는 날에는 나의 하얗게 센 이머리를 바치겠소이다."
황충의 의기를 한껏 돋운 뒤어야 공명은 그의 출진을 허락했다. 옆에서 공명
과 황충의 말을 듣고 있던 유비도 흡족한 얼굴로 말했다.
"장군의 의기가 참으로 가상하오. 엄안과 함께 가서 장합을 물리치시오."
유비까지도 황충이 떠나는 거승ㄹ 허락하자 조운이 급히 공명에게 아뢰었다.
"지금 장합이 가맹관을 공격하고 있는데 군사께서는 어찌 이를 아이들 장난으
로 보아 넘기듯 하십니까? 가맹관을 잃으면 바로 이곳 성도가 위태롭게 됩니다.
그런데도 어찌하여 두 늙은장수만을 보내 그토록 큰적과 맞서게 하십니까?"
그러나 공명은 조금 전 황충에게 했던 말과는 달리 이미 황충잉 싸움에서 이
긴 것과 다름없다는 투로 조운에게 대답했다.
"그대는 두 사람이 늙었다고 장합이 치지 못할 줄로 아는가? 내가 보기에는
늙은 두 장수의 손에 의해 한중 땅이 우리 차지가 되 것이네."
그러나 조운은 얼른 그 말이 믿어지지 않았다. 그 자리에 있던 다른 장수들도
모두 조운의 생각과 다를 바가 없었다. 모두들 어이가없다는 듯이 웃으며 그 자
리를 물러나고 말았다.
황충과 엄안이 군사를 거느리고 가맹관에 이르자 구원군이 오기를 고대하고
있던 맹달,곽중도 어이업성 하기는 마찬가지였다.
'공명도 실수를 하는구나. 이곳이 얼마나 긴요한 ㄱ목인데 어쩌자고 저토록 머
리가 처옇게 센 늙은이들을 보냈다는 말인가?'
두 사람은 이렇게 생각하며 씁쓸한 웃음을 머금었다.
황충이 그들의 속마음을 헤아리고 엄안을 불러 말했다.
"그대는 여기 있는 조 사람들의 얼굴을 보셨소? 모두들 우리 두 사람을 늙었
다며 비웃고 있소이다. 그러니 그들로 하여금 우리말에 따르게 하자면 깜짝 놀
랄 만한 공을 세워야 할 것이오."
엄안도 분한 마음을 달래지 못해 결연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오직 장군께서 영만 내려 주십시오. 힘을 다해 영을 받들겠습니다."
두 장수는 장합과 싸울 일을 의논한 뒤 황충이 먼저 군사를 이끌고 관을 나섰
다.
장합은 송도에서 군원군을 보냈다는 말을 듣고 소긍로 은근히 걱정하고 있었
으나 황충아 군사를 이끌오 오자 소리내어 껄걸 웃었다.
"너는 늙은 주제에 부끄러운 줄도 모르느냐? 무슨 싸움을 하겠다고 허옇게 센
머리를 날리며 염치도 없이 나왔느냐!"
장합의 비웃음에 황충은 성이 뻗쳐 소리쳐 꾸짖었다.
"네 이놈! 어린 것이 내가 늙었다고 깔보는 모양이나, 내 손에 있는 이 보금은
아직 늙지 않았다."
그 소리와 함께 황충은 말을 박차 장합에게로 달려갔다. 장합과 황충의 창과
칼이 불꽃을 일으키며 부딪쳤다.
두 사람이 어우러진 지 20여 합이 되었을 때 홀연 장합의 등 뒤에서 크게 함
성이 일었다. 황충이 관 아래로 나올 때 엄안은 군사를 이끌고 샛길로 나가 장
합의 뒤를 치기로 했던 것이었다. 뜻밖에 등 뒤로 적군이 밀려 닥치니 장합도
크게 당황하였다. 게다가 늙은이로만 여긴 황충도 함부로 상대할 장수가 아니었
다.
황충과 엄안이 힘을 다해 장합을 들이치니 장합은 혼자서는 당해 낼 수가 없
었다. 장합의 군사들은 일시에 무너지며 적의 함성에 쫓기면서 90여 리나 물러
났다. 장합이 멀리 물러난 걸 보자 황충과 엄안은 군사를 거두어 영채로 돌아갔
다. 영채로 돌아간 황충은 그곳을 지키며 함부로 군사를 움직이려 하지 않았다.
한편 조홍은 장합이 이번에도 패했다는 소식을 전해 듣자 펄펄 뛰며 소리쳤
다.
"당장 장합을 잡아들여 목을 베도록 하라!"
그러나 이번에도 다시 곽회가 조홍에게 간곡히 만류했다.
"지금 장합을 다그쳐 죄를 물으려 하면 서촉의 유비에게로 투항하기 쉽습니다.
차라리 다른 장수를 보내 그를 돕는 척하며 딴마음을 갖지 않도록 단속하는 것
이 상책입니다."
조홍도 곽회의 말을 듣고 보니 생각이 달라졌다. 장합이 정말 궁지에 몰리다
못해 유비에게로 가 버린다면 큰일이었다. 이에 곽회의 말에 따르기로 하고 곧
하후돈의 조카 하후간과 항복해 온 장수 한현의 아우 한호에게 군사 5천을 주어
장합을 돕게 했다.
두 장수는 그날로 군사를 이끌어 장합의 영채로 달려갔다. 장합의 영채에 이
르러 하후상과 한호는 우선 싸움의 형세부터 물었다.
"황충은 늙었으나 용맹이 가볍지 아니하오. 거기다가 엄안이 그의 곁에 이ㅆ나
함부로 맞서서는 아니 되오."
장합이 그렇게 대답하자 한호가 원한에 찬 얼굴로 말했다.
"제가 지난날 장사에 있었을 때 저 늙은 도적 황충은 위연과 짜고 성을 적군
에게 내 주어 형님을 죽게 했소. 이제 여기서 만난 것은 하늘의 뜻이니, 내가 반
드시 그놈을 죽여 한을 씻고야 말겠소."
한호는 말을 마치자 곧바로 하후상과 함께 거느리고 온 군사를 이끌어 황충을
치러 떠났다.
이때 황충은 날마다 군사를 풀어 그 일대의 지세를 살피고 있었다. 그 부근의
지세에 밝아야 싸움에 이길 수 있다는 생각에서였다. 그런 어느날 엄안이 황충
에게 말했다.
"이곳에서 한도안 가면 천탕산이라는 산이 있는데 그곳은 조조가 군량과 마초
를 쌓아두는 곳입니다. 그곳을 점령해서 군랴오가 마초를 끊어 버린다면 한중을
얻는 일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황충은 그 말을 듣자 몹시 기뻐하며 말했다.
"그렇소. 장군의 말씀이 바로 내 뜻과 어긋남이 없소이다."
황충은 그렇게 말한 후 엄안의 귀에 대고 생각해 두었던 계책을 말했다. 엄안
은 고개를 끄덕이더니 급히 군사를 수습하여 어디론지 말을 달렸다. 황충이 영
채에 혼자 남아 있는데 군사가 들어와 알렸다.
"하후상과 한호가 군사를 이끌어 오고 있습니다."
그말을 듣자 황충은 곧 싸울 채비를 갖추고 영채를 나와 하후상과 한호를 맞
았다. 양군이 마주보자 한호가 진 앞으로 달려나오며 황충을 꾸짖었다.
"주인을 배반한 의리 없는 늙은 도적 황충아! 내가 바로 한현의 아우 한호다.
내 오늘 너의 목을 베어 형님의 한을 씻어야겠다. 어서 그 목을 바쳐라!"
한호가 창을 꼬나들고 단숨에 황충을 꿰려는 듯 말을 달려나왔다. 그때 이를
지켜 보고 있던 하후상도 한호가 걱정되어 말을 달려 황충에게 달려들었다. 황
충은 한꺼번에 두 사람의 장수를 맞아 각기 10여 합씩을 싸우다가 말머리를 돌
려 달아나기 시작했다. 한호와 하후상이 달아나는 황충을 20여 리나 뒤쫓아가
황충의 영채를 빼앗았다. 영채를 빼앗기고 달아나던 황충은 군사를 모아 수습하
고 새 영채를 세웠다.
다음 날이 되었다. 하후상과 한호는 다시 군사를 이끌어가 황충에게 싸움을
겅었다. 황충도 말을 달려나와 하후상과 한호를 맞았으나 두 사람을 맞아 싸우
기는 벅찬 듯 몇 합을 부딪다 그만 말머리를 돌리고 말았다. 하후상과 한호는
황충이 이제 늙은 장수라 두 사람을 당해 낼 수가 없어 달아나는 것이라 여기고
기세를 올리며 뒤쫓았다.
황충이 달아나기만 하니 하후상과 한호는 새로 세운 황충의 영채마저 빼앗았
다. 비록 나무와 풀로 급히 얽어 만든 임시 영채이긴 하나 황충의 영채를 빼앗
은 것에 흡족해 하며 뒤쳐져 오고 있는 장합을 불러 영채를 지키게 했다.
그러자 장합이 걱정스런 얼굴로 두사람에게 말했다.
"황충이 이틀 동안이나 제대로 싸우지도 않고 달아나기만 하니 반드시 속임수
가 있을 것이오. 함부로 뒤쫓지 않도록 하시오."
하후상이 그말을 듣더니 벌컥 화를 내며 장합을 나무랐다.
"당신이 그렇게 겁이 많으니 싸울때마다 질 수밖에 더 있겠소? 당신은 두말
할 것 없이 우리 두 사람이 공을 세우는 것이나 구경하시오."
장합은 그들의 지나친 말에 분기가 치밀었으나 그들 말대로 싸움에 지기만 했
던 게 죄가 되어 아무 말 없이 얼굴만 붉레 물들인 채 물러나고 말았다. 다음
날도 하후상, 한호 두 장수는 황충과 싸웠다. 그러나 싸움의 양상은 전날과 다를
바가 없었다. 황충이 싸우다가 또 20여 리를 달아나자 두 장수는 뒤쫓다가 날이
어두워졌으므로 하는 수 없이 진을 세워 날이 밝기를 기다렸다.
다음 날이 되어 두 장수가 군사를 이끌고 싸우러 나가자 황충은 이제 싸우지
도 않고 달아났다. 하후상,한호와 황충이 마치 쫓고 쫓기는 사냥꾼과 짐승처럼
몇 번을 거듭하다 보니 가맹관에 이르렀다. 더는 물러날곳이 없게 되자 황충은
가맹관으로 들어갔다.
하후상, 한호는 가맹관에 이르러 영채를 세운 후 거센 공격을 퍼부었드나 황
충은 문을 걸어 잠그고 나오지 않았다. 하후상과 한호는 단번에 가맹관을 깨칠
기세로 관을 에워쌌다.
황충이 허겁지겁 가맹관으로 쫓겨오자 처음부터 늙은 장수라고 미덥지 않게
여겼던 맹달은 은근히 겁이 났다. 이 사실을 알리는 글을 써서 성도로 사람을
보내 유비에게 전하게 했다.
유비는 그 글을 보고 깜짝 놀라 공명을 불러들여 의논했다.
"황충이 싸울 때마다 져서 영채를 모두 빼앗기고 가맹관으로 쫓겨갔다 하오.
이일을 어찌했으먼 좋겠소?"
그러나 공명은 놀라기는커녕 가만히 웃으며 말했다.
"주공께서는 놀라지 마십시오. 지금 늙은 장수 황충은 적을 교만스럽게 만드는
교병계를 쓰고 있습니다."
그러나 조운을 비롯한 여러 장수들은 공명의 그말을 맏으려 하지 않았다. 그
것 보라는 듯 비아냥 섞인 웃음을 지을 뿐이었다.
공명의 말을 듣고도 유비는 마음을 놓을 수가 없었다. 이에 양아들 유봉을 가
맹관으로 보내 형세를 보아가며 황충을 돕도록 했다.
유봉이 가맹관에 이르자 황충은 알 수 없다는 얼굴로 물었다.
"작은 장군께서 몸소 오시어 싸움을 도우려 하니 고맙소이다만 여기 오신 까
닭이 무엇입니까?
"아버님께서 장군이 여러 번 싸움에 지셨다는 말씀을 들으시고 특별히 저를
보내 도와 드리라 하셨습니다."
황충은 그말을 듣고 껄걸 소리 내어 웃더니 말했다.
"그긋은 이 늙은이가 교병계를 쓴 것이오. 오늘 밤에 한바탕 싸워 그들에게 내
주었던 영채를 모두 되찾고 그들의 양식과 마필마저 빼앗을 것이오. 내가 그 동
안 여러 영채를 내준 것은 그곳에 적의 치중을 쌓아두게 하기 위함이었소. 이제
곽준은 관을 지키고 맹 장군과 내가 양식과 마필을 거두어올 테니 장군님은 구
경이나 하시오."
유봉은 그제야 공명이 말한 대로였음을 알았다.
그날 밤이 되자 황충은 군사5천을 이끌고 가맹관을 나섰다.
이때 하후상, 한호는 황충이 싸우러 나오지 않으니 기다리다 마음이 풀어져
황충의 5천 군마가 오는 줄은 까맣게 모르고 곤한 잠에 빠져 있었다. 요란스런
함성이 일며 순식간에 군사가 밀어닥치니 장수들은 갑옷을 입을 겨를도, 말에
안장 얹을 틈도 없었다. 큰 혼란이 이는 가운데 좌충우돌 혼전을 빚었다.
하후상, 한호는 잠결에 가까스로 말에 안장을 얹어 황급히 목숨을 구해 달아
났을 뿐이었다.
하후연 황충의 칼 아래 눕다
엄안과 함께 천탕산을 빼앗은 황충은 유비의 영을 받아 법정과 함께 정군산으
로 향한다. 힘만 있고 지모가 부족한 하후연에게 황충과 법정은 계책으로 맞서
고, 마침내 하후연의 목을 한칼에 베고 정군산을 취한다.
날이 밝아 오자 황충의 군사들은 그 동안 내 주었던 세 영채를 한꺼번에 되찾
았을 뿐만 아니라 적이 거두어들인 치중을 성 안으로 끌어들였다.
황충은 숨돌릴 틈도 없이 군사들을 재촉해 한호와 하후상을 뒤쫓으려 했으나
유봉이 말렸다.
"군사들이 모두 지친 듯하니 장군께서도 잠시 쉬었다가 군사를 움직이도록 하
십시오."
그러나 황충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했다.
"호랑이 굴에 들어가지도 않고 어찌 호랑이 새끼를 잡을 생각을 할 수 있겠습
ㄴ?"
황충이 그 말을 남기며 몸소 말을 달려갔다. 황충이 스스로 앞장 서 달리자
군사들도 모두 힘이 나 앞을 다투어 달렸다.
황충이 뒤쫓지 않아 잠시 숨을 돌리고 있던 장합의 군사들은 황충의 거센 추
격에 깜짝 놀라 어찌할 줄 모르고 호둥대기만 했다. 모두가 목숨을 구하기 위해
뒤돌아볼 틈도 없이 뿔뿔이 흩어져 달아나기에 바빴다.
영채를 지키고 있던 장합도 가맹관을 치러 갔던 군사들이 도망쳐오자 더 이상
버틸 수가 없을 것으로 여겨 영채를 버리고 함께 달아났다. 장합이 한수가에 이
르러서야 도망쳐온 하후상과 한호를 만날 수 있었다. 장합이 두 장수에게 말했
다.
"가까이에 있는 천탕산은 우리의 군량과 마초를 쌓아 둔 곳이며 그 옆의 미창
산에는 군량을 쌓아 둔 곳이오. 그러니 이곳은 한중에 있는 군사들을 먹여 살리
는 중요한 곳이 아날 수 없소. 만약 이곳을 잃게 되는 날이면 군량이 끊어져 마
침내 한중 땅 전체를 잃게 된 것이오. 마땅히 지킬 계책을 세워야 할 것이오."
장합이 두 장수를 일깨웠다. 하후상과 항호는 장합의 말을 듣지 않다가 크게
패한 뒤라 고개를 끄덕이며 그의 말을 듣고 있었다. 하후상이 생각난 바가 있
는 듯 입을 열었다.
"미창산은 나의 숙부이신 하후연이 지키고 계시며 바로 정군산이 잇닿아 있으
니 걱정하지 않아도 될 것이오. 그런데 천탕산은 하후덕 형님이 지키고 있으니
그곳으로 가서 돕는 것이 좋겠소."
장합도 하후연이 지키는 곳보다 하후덕이 지키는 천탕산이 미덥지가 않았다.
이에 장합은 sen 장수와 함께 패잔병을 이끌고 천탕산으로 갔다. 천탕산에 이르
러 하후덕을 보고 그들이 이리로 온 까닭을 말하자 하후덕은 달갑지 않다는 얼
굴로 말했다.
"이곳은 10만의 대군이 지키고 있으니 굳이 돕지 않아도 되오. 그보다는 차라
리 군사를 거느리고 가서 빼앗긴 영채나 되찾도록 하오."
장합이 큰소리치는 하후덕에게 말했다.
"지금은 이곳을 굳게 지키고 있어야 하오. 함부로 군사를 내어서는 아니 됩니
다."
장합의 말이 끝나기도 전이었다. 홀연 산모퉁이에서 북 소리와 징 소리가 요
란히 일더니 군사 하나가 숨을 헐떡이며 달려왔다.
"황충의 군사가 쳐들어오고 있습니다."
그 소리를 듣자 하후덕이 비욱음을 날리며 말했다.
"구 ㄴ은 도둑이 병법도 모르면서 용맹만 믿고 분별없이 날뛰는군."
황충을 가볍게 여기는 하후덕을 보자 장합이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그렇지 않소. 황충은 용맹만 있는 것이 아니라 지모도 지닌 장수요. 결코 가
볍게 여겨서는 아니되오."
그러나 하후덕은 장합의 말에 껄껄거리며 웃더니 잘라 말했다.
"지금 서천 군사들은 먼길을 와서 몹시 지쳐 있을 것이오. 게다가 우리 진 깊
숙이까지 밀고 들어와 싸우려 하니 이토록 무모한 용병이 어디 있겠소?"
"그래도 적을 가볍게 보아서는 아니 되오. 굳게 지키며 적을 살피도록하오."
황충에게 혼이 났던 장합이 걱정스런 얼굴로 다시 만류했다. 그러자 형을 죽
인 원수에다 영채마저 빼앗긴 한호가 다시 분한 마음을 앞세우며 호기 있게 나
섰다.
"바라건데 제게 날랜 군사 3천만 주신다면 황충을 사로잡고 말겠소."
한호의 말에 하후덕이 쾌히 응낙하며 군사를 주어 산을 내려가 싸우도록 했
다.
황충이 한호를 맞아 다시 군사를 수습하여 맞서려 하자 유봉이 또 걱정스런
얼굴로 말렸다.
"해가 이미 서쪽으로 기울었고 군사들도 먼길을 와 지쳐 있습니다. 잠시 쉬었
다가 싸우는 편이 좋겠습니다."
황충이 껄걸 웃으며 유봉의 말을 물리쳤다.
"그렇지 안소이다. 이는 하늘이 내게 큰 공을 세울 기회를 내리신 것이오. 이
를 마다하면 하늘을 거스르는 일이 되오."
황충은 북을 울리게 하여 기세를 돋우며 군사를 이끄는데 한호가 산 아래에
이르렀다.
황충은 한호가 군사를 이끌고 달려오자 말을 박차 큰 칼을 휘두르며 마주 달
려갔다. 한호가 황충을 맞았으나 하룻강아지 범 무서운 줄 모르는 꼴이었다. 제
대로 어우러지기도 전에 황충의 한칼에 목이 떨어져 말아래로 뒹굴게 되었다.
장수끼리의 싸움이 그렇게 되자 촉군의 기세는 하늘을 찌를 듯했다. 모두들
함성을 지르며 다투어 산위로 기어올랐다. 대장이 맥도 못추고 목이 떨어진 뒤
라 한호의 군사들은 벌써 기가 반쯤은 꺾여 있었다. 게다가 촉군의 드높은 기세
앞에 더욱 쩔쩔매며 물러설 순도 나아가지도 못하는 가운데 많은 군졸들이 적의
칼에 찔려 죽고 상했다.
장합과 하후상도 그모양을 보고만 있을 수는 없었다. 급히 군사를 거느려 내
려가 폭군을 막으려 하는데 이게 웬일인가? 이번에는 산 위에서 크에 함성이 일
더니 불길이 하늘로 치솟으며 하늘을 붉게 물들였다.
산 위에서 불을 지르며 함성을 울린 군사들은 황충이 미리 천탕산 뒤로 올라
가게 했던 엄안의 군사들이었다.
천탕산 본진에 있던 하후덕이 깜짝놀라 군사를 이끌고 불을 끄기 위해 나섰
다. 그러나 불을 끄기도 전에 하후덕의 본진을 치러 가던 엄안과 맞닥뜨리고 말
았다. 하후덕을 본 엄안이 큼호통 소리와 함께 손을 번쩍 치켜드는가 싶더니 어
느 새 한칼에 하후덕의 몸을 두 동강 내고 말았다.
원래 엄안은 황충이 이른 대로 군사를 거느려 천탕산 으슥한 곳에 매복해 있
었다. 황충이 산 아래로 군사를 이끌어 오자 마른 풀에다 불을 붙여 산불을 일
으켰다. 불 때문에 오왕좌왕하는 하후덕군을 공격하러 내려오다 하후덕을 만나
한칼에 죽여 버린 것이었다.
엄안이 하후덕의 군사들을 들이친 기세를 몰아 산 뒤로부터 내려가고 황충이
산 아래에서 밀고 올라가니 장합과 하후상은 앞뒤로 적을 맞은 격이었다. 서로
돌볼 처지가 되지 못한데다 불길마저 사방으로 번지니 마침내 천탕산을 버리고
길을 찾아 정군산으로 말을 몰아 하후연에게로 달아났다.
이에 천탕산을 빼앗은 황충은 군사를 수습한 뒤 사람을 보내 성도의 유비에게
이 일을 알렸다. 유비는 모든 장수들을 불러 황충과 엄안이 천탕산을 점령했음
을 알리고 몹시 기뻐했다.
법정이 앞일에 대한 의견을 유비에게 밝혔다.
"지난번에 조조가 장로의 항복을 받아 한중을 평정했을 때 그 여세를 몰아 촉
까지 취하지 않고 하후연, 장합 두 장수를 남겨 두고간 것은 큰 실책이었습니다.
이제 장합을 쳐서 천탕산을 빼앗았으니 주공께서 몸소 대군을 거느리신다면 한
중은 능히 평정될 것입니다. 그 다음으로 군사를 조련하고 양곡을 바축한다면
나아가 조조를 칠 수 있고, 물러나 안으로 도성을 지키신다면 대업도 이루실 수
있습니다. 하늘이 내리신 이 기회를 놓쳐서는 아니 될 것입니다."
유지는 물론 공명도 법정의 말이 옳다고 여겨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뜻이
모아지다 지체하지 않고 유비는 군사를 내기 위해 영을 내렸다.
익덕과 조자룡을 선봉으로 삼아 제갈량 군사와 함께 10만 대군이 한중으로 진
병하리라."
유비는 군령을 내려 장수들로 하여금 군사를 수습하게 한 뒤, 좋은 날을 택해
각 영문에 격문을 띄워 모든 방비를 엄중하게 했다.
때는 건안 23년 7월이었다.
유비는 10만 대군을 이끌고 가맹관으로 나가 황충과 엄안을 불러들인ㄴ 뒤
후한 상을 내리며 말했다.
사람들은 모두 장군을 늙었다고 걱정하였으나 오직 군사만이 장군의 능력을
알고 적과 싸우게 했소. 과연 장군이 뛰어낭 공을 세워 기쁘기 한량없소. 그런데
한중의 정군산은 남정의 요긴힌 길목이며 또한 군량과 마초를 쌓아 둔 곳이오.
만약 정군산만 빼앗는다면 양평 일대는 우리 손안에 든 거나 다름없소. 황 장군
이 가서 정군산도 취할 수 있겠소?"
마다할 황충이 아니었다.
"곧 군사를 거느려 나아가겠습니다."
황충이 분연히 대답하고 물러나려는데 공명이 손을 저으며 말렸다.
"황 장군께서 비록 영용스러우나 하후연은 장합 따위와 견줄 사람이 아닙니다.
그는 육도삼략에 늘통하고 싸움터에서의 임기응변도 능합니다. 지난날 조조가
서량에 변이 났을 때 하후연을 장안으로 보내 마초를 막게 하고 이번에 한중을
지키게 한 것도 그가 장수로서의 재질이 뛰어나기 때문이었습니다. 내 생가가으
로는 형주의 관운장에게 이 일을 맡겨야 할 것 같소이다."
공명이 이렇게 하는 것은 황충에게 격장법을 쓰는 것이었다. 황충이 공명의
속마음을 알 리 없어 팔을 걷어붙이며 말했다.
"옛날 염파(전국시대 때의 장수)는 나이 여든이었으되 한 말 밥에 고기 열 근
을 먹었다 하오. 제후들은 그 용맹이 두려워 감히 조나라의 경계를 범하지 못하
였다 했소. 그러데 내 나이 아직 일흔도 넘지 않았는데 군사께서는 어찌 그렇게
가볍게 넘보십니까? 이번에는 부장도 거느리지 않고 3천 군마만을 이끌고 가 하
후연의 목을 베어 발 앞에 바치겠습니다."
항총은 모소리를 돋우어 그 말을 마치자마자 바로 말 위에 오르려 했다. 공명
이 더는 말리지 않았으나 황충에게 일렀다.
"장군께서 굳이 가시겠다면 한 사람을 딸려 보내겠소. 어떻소?"
"좋소이다."
황웅은 공명이 더 이상 막지 안흔 것만으로도 다행으로 여겨 서슴없이 대답했
다. rhdayd이 다시 말했다.
"그럼 장군께서는 법정을 데리고 가 모든 일을 함게 의논하도록 하십시오. 나
도 곧 장군을 뒤따르면서 돕겠습니다."
황충은 공명의 말을 받들어 법정과 함게 구남를 이끌고 떠났다.
황충이 정군산을 향해 군사를 거느려 떠난 뒤 공명이 유비에게 말했다.
"노장 황충을 분발시키려고 일부러 격동시키는 말을 했습니다. 이에 황충의 감
정이 격해져 큰소리를 치고 갔습니다만 이번데는 공을 세우기가 어려울 거싱니
따로 인마를 뽑아 그를 도와야 할 것입니다."
공명은 곧 조운을 불러 영을 내렸다.
"그애는 한 떼의 군마를 이끌어 샛길로 나가 황충을 돕도록 하라. 그러나 황충
이 싸움에 이기거든 나서지 말고 만약 실수라도 있어 위급해지거든 즉시 돕도록
하라."
두 장수가 한꺼번에 나서 서로 공을 다투다 보면 일을 그르칠 수도 있기에 조
운한테 그렇게 분부한 공명은 이어 유봉과 맹달을 불러 영을 내렸다.
"너희들은 3천 군마를 거느리고 산 속의 험한 곳으로 가서 기치를 많아 세워
두도록 하라. 많은 군사가 있는 것처럼 꾸며 적으로 하여금 놀라 위심하도록 하
라."
세 장수는 공명의 영을 받들어 모두 군사를 이끌어 나갔다.
공명은 멀리 떨어져 있는 장수들에게도 영을 내렸다. 하판에 있는 마초에게는
사람을 보내 계책을 전했다. 이어 엄안을 파서 땅 낭중으로 보내 장비 대신 지
키게 하고 장비와 위연을 불어들여 함께 한중 정벌에 나서게 했다.
공명의 한중 정벌에 대한 모든 채비를 빈틈없이 갖추니 이제 군사를 움직일
일만 남았다.한편 장합과 하후상이 천탕산을 빼앗기고 얼마 되지 않는 패잔병을
이끌고 하후연에게로가 그 동안의 경위를 낱낱이 말했다.
"천탕산을 잃고 한호,하후덕도 적의 손에 죽고 말았습니다. 뿐만 아니라 오느
도중에 들은 바로는 유비가 몸소 군사를 거느려 한중 땅을 빼앗으러 온다고 합
니다. 급히 이 일을 위왕께 알려 날랜 군사와 용맹스런 장수를 청하도록 하십시
오."
하후연도 그 말을 듣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먼저 사람을 뽑아 이소식을
조홍에게 알렸다. 놀라기는 조홍도 마찬가지였다. 이미 한중의 밥줄인 천탕산을
적에게 빼앗긴데다 유비가 몸소 군사를 내었다는 말에 자신이 친히 밤을 도와
허창으로 말을 달렸다.
조홍은 조조 앞에 나아가 하후연이 전해온 소식을 알렸다.
조조도 조홍의 말을 듣자 크게 놀랐다.
설마했던 일이 막상 벌어지고 나자 한중을 평정했을 대 파촉을 휩쓸지 않았던
일이 후회되었다.
조조는 즉시 문무백관을 불러놓고 한중을 구할 일을 의논했다.
장사 유엽이 입을 열었다.
"만약 한중을 잃으면 중원까지 물안해질것입니다. 그러므로 대왕께서는 수고로
움을 사양치 마시고 몸소 서둘러 나아가시어 그들을 정벌하셔야 합니다."
조조도 듀ㄷ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탄식했다.
"전에 경이 말대로 서촉을 쳤던들 오늘날 이런 일이 일어나지는 않았을 것이
오. 실로 한스럽소."
조조는 그 말과 함께 급히 영을 내려 40만 대군을 일으키게 하고 스스로 군사
를 이끌기로 했다.
조조는 군사를 세 길로 나누어 나아가기로 하고, 전부 선봉은 하후돈에게 , 조
휴에게는 후군을 맡게 하고 자신은 중군을 거느리기로 했다. 대군 40만이 꼬리
를 물고 나아가니 그 꼬리는 끝이 보이지 않았다.
조조는 흰 말에 금으로 만든 안장을 얹고 비단옷에 옥띠를 두르고 있었다. 부
사들이 붉은 비단에 금줄이 달린 일산을 들고 있었으며, 거기에다 좌우에는 그
ㅁ로만든 철퇴와 은으로 만든 월과 등봉,과모를 들고 있었다. 조조의 수레에는
일월용봉의 기치가 휘날려 바로 천자의 행차난 다름없음을 보여 주었다. 조조의
수레를 호위하는 군사만도 2만 5천이었다. 이들을 5천 명씩 다섯 부대로 나누어
각기 청,홍,백,흑,황의 5색 시치와 번을 들게 했다. 그들 더섯 부대의 갑옷과 말도
각기 그가 속해 있는 빛깔로 꾸미니 그 위용과 호화찬란함은 눈이 부실 지경이
었다.
대군이 동관을 지나는데 그림같이 아름다운 한 줄기 푸른 숲이 무성한 곳이
눈에 띄었다.
"저곳은 어디인가?"
"남전이란 곳입니다. 저 숲 속에 바로 채옹의 집이 있는데 지금은 그의 딸 채
염이 그의 남편 동기와 함께 살고 있습니다."
"천하에 빼어난 문장가였던 채옹의 딸 채염이 이곳에서 살고 있다는 말이가?"
신하의 대답에 조조는 문득 지난 일이 떠올랐다.
조조는 원래부터 채옹과는 서로 친하게 지내던 사이였다. 채옹이 동탁의 시체
앞에서 울었다 하여 왕운의 명에 의해 죽임을 당한 이후, 그 딸 채염은 위도개
란 사람에게 출가했다.
그러나 뒷날 오랑케에게 붙들려가 강제로 오란태의 아내가 되고 말았다. 오랑
캐의 아들을 둘이나 낳으며 살았지만 남의 나라에 갇혀 자나께나 고향을 그리워
하며 눈물 지으니 그 소매가 마를 날이 없었다.특히 오랑캐가 즐겨 부는 호가라
는 피리 소리를 들을 때마다 더욱 고향을 그리는 마음이 짙어져 그 슬픔을 노래
한 호가십팔박을 스스로 지었다.
그 노래가 중윈에 흘러들어온 것을우염히 조조가 듣고 해절한 채염의 심정을
깊이 동정하게 되었다. 조조느 사람을 시켜 북쪽 오랑태애ㅔ게 천금을 주는 대
신 채염을 중원으로 풀어 주도록 청했다.
북방의 좌현왕도 그때 조조의 위세가 하늘을 찌를 듯하여 두려운 마음에 채염
을 한으로 돌려 보냈다. 이 후 조조가 채염과 동기를 짝지워 준 것이었다.
조조가 그 채염이 사는 남전에 이르자 지난날이 생각나 군사들을 먼저 보내
알리게 하고 그 잡앞에 이르렀다. 이때 동기는 관청으로 나간 터라 채염만이 집
에 있었다.
생명의 은인인 조조가 왔다는 말을 듣자 채염을 신발도 신지 않고 황급히 문
밖으로 나와 맞았다.
채염이 조조를 맞아 당 위로 모시고 깍듯이 절을 올긴 후 조조 옆에 시립했
다.조조가 감회가 해로운 듯 채옹의 집을 둘러보니 문득 벽에 걸린 비문 족자가
눈에 띄었다. 조조는 그 비문을 보고 물었다.
"저것은 무엇인가?"
채엄이 조조의 믈음에 답했다.
"이것은 조아의 비에 있느 글귀입니다. 옛날 화제 때 상우 땅에 조우라는 사내
무당이 있었는데 그는 사파악신을 추며 신을 섬겼습니다. 어느해 단옷날 조우는
술에 취해 배 위에서 춤을 추다가 그만 강물에 빠져 죽고 말았다 합니다. 그에
게는 딸이 하나 있었는데 그때 나이 열넷이었습니다. 아비가 죽자 그 딸은 에레
동안 강변을 오르내리며 밤낮을 울다가 물 속에 뛰어들어 죽어습니다. 그런데
닷새째가 되던 날 놀랍게도 그 마비의 시체를 들에 업은 채 다시 강물 위로 떠
올랐습니다. 마을 ㅅ들이 딸의 지극한 효성에 감복하여 그 마비와 딸을 강가에
장사지내 주었다고합니다. 그 뒤 상우 현령 도상이 이 사실을 조정에 알려 호녀
로 널리 기리게 하고 한단순이란 사람으로 하여 그 일을 비문에 새기게 했습니
다. 그때 한단순의 나이 겨우 열셋이었느데 글 한 자 고치는 일 없고 획 하나
다시 쓰는 법 없이 단숨에 써내겨 갔다 합니다. 마침내 비석이 세워지자 그 당
시 사람들은 보두 한단순의 재주에 감탄했습니다. 저의 선친께서 그 말을 들으
시고 그 비문을 보러 비석에 있느 곳에 갔으나 마침 날이 저물을 소능로 더듬어
읽으신 후 붓을 들어 비석 위에 새로이 여덟 글자를 쓰셨습니다. 후에 저의 선
친께서 쓰신 여덟 자도 비문에 새겼다고 하는데 저 족자의 글귀가 바로 그 글입
니다."
조조느 채염의 말을 듣고 나더니 다시 한 번 그 족자의 글귀를 유심히 보았
다. 비문 족자에 쓰인 글씨는 다음과 같았다.
황견유부
외손제구
조조가 그 뜻을 헤아려 보려 했으나 얼른 생각이 나지 않자 채염을 보고 물었
다.
"너는 이 글 뜻을 아느냐?"
채염일 얼굴을 붉히며 대답했다.
"비록 선친께서 남기신 글이나 아직 그 뜻을 알지 못합니다."
조조는 함께 온 여러 모사들을 둘러보며 물었다.
"그대들은 이 글귀의 듯을 알겠는가?"
여러 모사들도 서로 얼굴을 마주볼 뿐 선뜻 대답을 하지 못하고 있는 데 한
사람이 불쑥 나서며 말했다.
"제가 그 뜻을 알았습니다."
조조가 보니, 그는 주부 양수였다. 그의 재주가 뛰어남은 조조도 잘 알고 있었
다. 그러나 그 자신이 모르는 뜻을 그에게 듣고 싶지 않았다.
조조는 손으로 말리는 시늉을 하며 말했다.
"경은 잠시 기다려 주게. 내가 좀더 헤아려 본 후에 물어 보겠네."
그 말과 함께 조조는 채염과 작별을 가고 길을 나섰다. 조조는 말ㅇ르 타고
삼 마장쯤을 가다 홀연 그 글을 뜻을 깨우쳤다느 듯이 양수를 돌아보고 빙긋이
웃으며 말했다.
"그 글의 뜻을 알겠구나. 겨잉 먼저 말해 보라."
양수는 웃으며 글 뜻을 풀이했다.
"그 글귀는 어떤 뜻을 숨겨서 써놓은 글입니다. 즉 황견유부의 '황견'은 얼굴빛
으로 물들인 실입니다. 그러니 실에 색이 있으니 두 글자를 붙이면 끊을 '절'자
가 됩니다. 또 '유부'는 어린이를 붙이면 '묘할 묘'가 됩니다. 그러므로 '황견유부'
는 곧 '절묘'하다는 말을 숨겨 둔 글입니다. 또 '외손제구'의 외손은 딸이 낳은 아
들이니 두 자를 붙이면 이는 좋을'호'가 됩니다. 다음 '제구'는 다섯 가지 짜고,
맴고, 신 음식들을 담는 그릇이니 담을 수에 신자를 쓰면 이는 말씀사가 됩니다.
그러므로 '외손제구'는 곧 좋은 말에라는 '호사'가 됩니다. 그 듯을 합쳐 보면 '절
묘호사', 즉 절묘하게 잘 지은 좋은 글이라는 뜻으로 한단순의 글을 칭찬하 것입
니다."
조조는 크게 놀라며 감탄했다.
"그 글을 보자마자 단번에 그 뜻을 알았으니 실로 놀라운 식견이오."
다른 사람들도 모두 양수의 뛰어난 재주와 학식에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조조는 그날 안으로 남정에 이르렀다.
조홍은 조조를 맞아들이고 그 동안 장합이 싸울 대마다 졌던 사살을 낱낱이
알렸다.
"그건 장합의 조가 아니다. 이기고 지는 것은 병가에 매양 있는 일이니라."
조조는 장합을 꾸짖는 대신 온후한 도량을 보였다.
조홍은 유비군과 하후연의 형세를 조조에게 알렸다.
"지금 유현덕은 황충을 보내 정군산을 치고 있는데, 하후연은 대왕께서 군사를
이끄신 거승ㄹ 알고 나가 싸우지를 않습니다."
조홍이 하후연을 못마땅하다느 듯이 얘기하자 조조도 그 말에느 고개를 끄덕
이며 말했다.
"적이 왔는데도 나가 싸우지 않는다면 이는 적에게 겁을 집어먹고 있다는 것
을 보여 주는 것과 마찬가지다."
조조는 곧 사람을 보내 하후연엑 나가 싸우라는 영을 전하려는데 유엽이 걱정
스런 얼굴로 말했다."
"하후연의 성정이 너무 거센데다가 곧기만 하니 혹시 적의 간계에라도 빠질까
두렵습니다."
조조도 그 말을 듣고 새겨 생각하니 걱정이었다.
급히 글을 써서 사자에게 주어 보냈다. 하후연은 사자가 전해 주는 글을 뜯어
보았다.
무릇 장수된 사람은 강함과 부드러움을 더불어 행할 줄 알아야 하며 결코
용맹만을 믿어서는 아니 된다. 만약 용맹만을 믿는다면이는 한낱 필부의
적수밖에 되지 않으리라. 내가 지금 남 정에 이르러 경의 묘재를 보고자
한다. 이 묘재라는 글귀에 부디 욕됨이 없게 하라.
묘재는 또한 하후연의 자이기도 했다. 조조는 하후연의 자를 글귀안에 넣어
그가 하후연을 두텁게 믿고 있음을 은연중에 밝힌 것이다. 하후연도 그 글을 보
자 힘이 부쩍 솟았다. 속으로 조조가 자신을 그토록 믿고 있음을 알고 사자를
돌려 보낸 다음 장합을 불러 앞으로의 일에 대해 의논했다.
"지금 위왕께서는 대군을 이끌고 남정에 머무르고 계시오. 그런 터에 이곳을
지키기만 하면 언제 공을 세우겠소? 그러니 내일 나가 싸워 황충을 사로잡도록
하겠소."
그러나 장합은 여전히 하후연이 나가는 걸 말리기만 했다.
"황충은 꾀와 용맹을 함께 갖춘 장수인데다 지금은 법정이 곁에서 돕고 있으
니 결코 가볍게 여겨서는 아니 외오. 다행히도 이곳은 산길이 험하니 나가 싸운
다 해도 굳게 지키는 것만 못할까 합니다."
그러나 조조의 글을 받아 본 뒤 하후연의 마음은 이미 정해져 있었다. 장합의
말에 잘라 말했다.
"지금이 좋은 기회요. 만약 이 기회를 놓치고 다른 사람이 공을 세우기라도 한
다면 나와 장군은 무슨 낯으로 위왕을 뵙겠소? 장군은 산을 지키시오. 나는 나
가 싸우겠소."
하후연은 그 말과 함께 좌우에게 영부텨 내렸다.
"누가 선봉이 되어 적을 꾀어 오겠는가?"
"제가 가겠습니다."
하후상은 이번에야말로 황충을 꺾겠다고 속으로 다짐하며 나섰다. 하후연이
기뻐하며 일렀다.
"앞서 나가다가 황충과 싸우게 되면 짐짓 힘이 모자라 달아나는 척만 할뿐 결
코 끝까지 부딪지 말라. 내게 계책이 있으니 그 계책에 따르도록 하라."
하후연은 하후상에게 계책을 일러 준 후 군사 3천을 주어 내보냈다.
그 무렵 황충은 군사를 이끌고 법정과 함께 정군산 기슭까지 밀고 들어와 여
러 번 싸움을 돋우었으나 하후연은 굳게 지키기만 할 뿐 나오지 않았다. 그대로
영채로 밀고 들어갈까 했으나 산길일 워낙 험하고 거칠어 더 이상 나아가지 못
하던 중이었는데 군사 하나가 와서 알렸다.
"산 위의 조조 군사가 산을 내려오고 있습니다."
황충이 몸소 나아가 그들을 맞설 채비를 서두르는데 부장 지식이 말렸다.
"노 장군께서 몸소 앞장 서 저긍ㄹ 맞으실 필요가 없으십니다. 제게 1천여 기
를 주십시오. 젝나서 그들을 치겠습니다."
진식이 서슴없이 나서자 황충은 그 의기를 기뻐하며 그에게 군사 1천을 주어
나가 싸우게 했다.
하후상이 군사를 이끌고 오자 진식은 진을 벌인 후 그를 맞았다.
하후상의 군사가 밀려오자 진식이 곧장 말ㅇ르 달려자가 덤벼들었다. 하후상
이 칼을 들어 진식을 맞다 싸운 지 수합이 되자 당할 수 없다는 듯 말머리를
돌려 달아나기 시작했다. 진식은 하후상이 도망가자 더욱 기세가 올라 놓치지
않게다는 듯이 급히 뒤쫓았다. 진식이 앞만 보고 한동안 뒤쫓고 있는데 홀연 양
쪽 산 위에서 통나무와 바위가 굴러 떨어졌다. 진식은 더 나아갈 수가 없었으므
로 물러나려는데 하후연이 이미 등 뒤의 길을 끊고 군사를 휘몰아왔다.
진식은 그제야 적의 계책임을 알았으나 때는 이미 늦은 뒤였다. 달아나려 길
을열기 위해 있느 힘을 다해 적을쳤으나 하후연에게 사로잡힌 몸이 되고 말았
다. 진식이 사로잡히자 그르 다르던 군사들도 태반이 항복하고 말았다. 살아 남
은 졸개 몇몇이 황충에게 달려가 이 사실을 전했다.
"진 장군이 하후연에게 사로잡힌 채 끌려가고 말았습니다."
황충은 크게 놀라며 법정에게 이 일을 의논했다. 법정이 생각에 잠기다 입을
열었다.
"하후연은 원래 성품이 가볍고 조급한데다 자신의 용맹만을 지나치게 믿고 꾀
를 쓸 줄 모릅니다. 우리 편 군사들의 의기를 돋워 천천히 진을 쌓으면서 산 위
로 밀고 올라가면 하후연은 반드시 산을 내려와 싸우려들 것입니다. 이것이 바
로 '반객위주의 병법'이라고 하는 바 오히려 우리 군사가 앉아서 적을 방비하는
것을 말합니다."
황충도 함부로 험한 산길을 나아갈 수가 없는 터라 법정의 말을 좇았다. 즉시
군사들에게 군중에 있는 좋은 물건들을 내어 삼군에게 상을 내림으로써 군사들
의 의기를 북돋워 주자 환호성이 골짜기를 메우고 죽기를 작정하고 나가 싸울
것을 맹세했다.
황충은 사기가 오른 군사들을 이끌면서 조름씩 앞으로 나아가 진을 치고 또
조금씩 나아가 진을 치기를 되풀이했다.
이 사실은 곧 하후연의 귀에도 들어갔다 황충이 조금씩 자기의 영채로 다가오
고 있다는 말을 듣자 참지 못하고 자리를 바차고 일어났다.
"황충이 오기를 기다리고 있을 수만은 없다. 내가 나가 단번에 그들을 짓밟아
주리라."
하후연이 군사를 이끌어 나가려는데 장합이 또 말렸다.
"지금 적은 손님이 오히려 주인처럼 앉아서 치러 오는 군사르 마겠다는 '반객
위주'의 계책을 쓰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가 나가 힘서 사움을 한다면 적
의 계책에 말려드는 격이 됩니다. 나가서는 아니 될 것입니다."
그러나 하후연은 끝까지 지키기만 하자는 장합의 말을 귓등으로 흘려 버리고
조카인 하후상에게 말했다.
"너는 군사를 이끌고 가 황충을 사로잡도록 하라."
하후상은 영을 받들어 곧 군사를 거느리고 산 아래로 내려가 황충의 영채 앞
에 이르렀다. 그러나 황충은 기다렸다는 듯 칼을 빼들고 달려와 하후상을 맞았
다.
황충이 늙었다고는 하나 아직 하후상이 그에게 적수가 될 수는 없었다. 몇번
부딪지도 않아 하후상은 황충의 손아귀에 덜미를 잡혀 사로잡히고 말았다.
하후상이 눈 깜작할 사이 황충에게 붙들려 버리자 졸개들은 감히 싸울 엄두가
나지 않았다. 모두들 내려왔던 길을 도로 올라가 하후연에게 이 사실을 알렸다.
하후연은 조카가 황충에게 사로잡혔다는 말을 듣자 얼굴색이 달라졌다. 하후
연으로서는 그대로 내벼려 둘 수도 없었고, 그렇다고 군사를 이끌어 나갔다가는
도리어 하후상을 죽이는 결과가 될지도 몰라 생각에 장겨만 있었다. 하후연은
궁리 끝에 진식과 하후상을 서로 맞바꾸기로 하고 곧 사람을 뽑아 황충에게 보
냈다.
"하후연 장군께서 촉군의 진식이 사로잡혀 있으니 하후상과 맞바꾸고자 하십
니다."
그러자 황충도 마다하지 않고 흔쾌히 응낙했다.
"내일 양쪽 진 한가운데서 바꾸자고 전하라."
다음 날 양쪽 군사는 산골짜기의 넓은 곳에 이르러 진세를 벌이고, 황충과 하
후연이 각각 본진의 문기 아래에 나섰다. 황충과 하후연의 곁에는 각각 하후상
과 진식이 서 있었는데 그들은 사로잡힌 몸이라 갑옷을 벗기운 채였다.
이미 두 장수를 바꾸기로 했으므로 양쪽 진에서 크게 북 소리가 울리자 진식
과 하후상은 각기 자기 진을 향해 달려갔다.
그런데 하후상이 자기의 진문 앞에 거의 이르렀을 때였다. 황충이 홀연 화살
한 대를 뽑아 활시위에 메겨 하후상을 향해 쏘니 화살은 날아 하후상의 등에 꽂
혔다. 등에 화살을 맞은 채 달려온 하후상을 보자 하후연이 불같이 노했다.
"늙은 도적놈이 이런 속임수를 쓰다니!"
하후연은 옥서릉ㄹ 퍼부으며 말ㅇ르 박차 황충르 향해 내달았다. 황충도 백발
을 흩날리며 하후연을 향해 달려갔다. 서로 말이 엇갈리는 가운데 불꽃을 튀기
며 20여합을 싸우는데 홀연 징 소리가 울렸다. 조조군이 군사를 거두어들이는
징 소리였다.하후연이 그 징 소리를 듣고 영문을 알 수 없는 가운데도 말머리를
돌려 진으로 돌아갔다.
그러나 진으로 돌아가느 하후연의 군사들을 황충은 가만히 놓아 두지 않았다.
군사를 휘몰아 덮치니 하우연의 군사들은 크게 꺾인 채 진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징 수리 때문에 사움에 지게 된 하후연이 진으로 도아와 대뜸 성난 목
소리로 물었다.
"무엇 때문에 징을 쳐 군사를 물리게 했는가?"
진을 지키던 장수가 그 물음에 답했다.
"산골짜기 움푹 패인 곳에 촉군의 깃발이 여럿 보이는데 복병임에 틀림없습니
다. 혹시 장군게 화가 닥칠까 염려되어 급히 징 소리를 울렸습니다."
하후연이 산골짜기를 바라보니, 과연 촉군의 기치가 무수히 바람에 펄럭이고
있었다. 하후연은 이후부터 굳게 문을 닫고 나가지 않았다.
하후연이 문을 굳게 닫고 나오지 않으니 황충은 정군산 바로 아래에 진을 옮
긴 후 법정과 앞일을 의논했다.
"하후연이 끝내 나오지 않을 때는 어찌해야겠소?"
그러자 법정은 손으로 정군산 옆의 산을 가리키며 말했다.
"정군산 서쪽에 우뚝 치솟은 산이 있는데 산세를 보니 사방이 모두 험준하기
이를 데 없어 보입니다. 만약 저 산을 빼앗는다면 정군산이 한 눈에 내려다보이
니 그 배치와 진용을 속속들이 알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정군산을 빼
앗는 일은 손바닥 뒤집는 것보다 쉬울 것입니다."
황충이 그 산을 쳐다보니 매우 높은 산이었으나 산 위는 평평해 보니고 그 위
로는 약간의 군마만이 보일 뿐이었다.
황충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저 산을 빼앗도록 해보겠소."
황충은 밤이 되기를 기다려 이경 무렵이 되자 군마를 이끌어 북과 징을 울려
기세ㅡㄹ 올리며 곧장 산꼭대기로 향해 밀고 올라갔다.
이 신에는 하후연의 부장인 두습이 수백 명만을 거느리고 지키고 있었다. 황
충이 많은 군사를 거느린 채 산위로 말고 오자 겁이 더럭 났다 그래서 그만 싸
워보지도 않고 산을 버리고 달아났다.
황충이 화살 한 대 쓰지 않고 산을 빼앗아 멀리 바라보니 과연 정군산이 눈
아래로 내려다보였다.
"이제 장군은 산 중턱을 지키도록 하십시오. 나는 이곳에 있다가 만약 하후연
의 군사가 오면 흰 기를 흔들 테니 그때는 군사를 움직여선 아니 됩니다. 적의
마음이 풀어지고 지쳐 있을 때는 기다려 제가 붉은 기를 올릴 테니 그때 들이치
도록 하십시오. 이것은 '편히 쉬며 기운을 돋워 지친 군사를 치는 이일대로'의
병법이니 반드시 이기는 수입니다.
황충은 기뻐하며 법정의 말을 좇아 산 중턱에 군사를 머무르게 했다.
한편 두습은 군사르 거느리고 달아나서 하우연에게 보고했다.
하후연은 분함을 억누르지 못한 채 소리쳤다.
"늙은 도적이 맞은편 산을 차지하고 있다니 내가 가만히 보고 있을 수가 없다.
모두 싸우러 나갈 준비를 하라!"
그러나 이번에도 장합이 나서 하우연을 말렸다.
"그것은 다 법정이 낸 꾀이니 장군께서는 결코 나가 싸워서는 아니 됩니다. 이
곳을 그저 굳게 지키기만 하십시오."
"적이 맞으편 산에서 우리의 허실을 훤히 내려다보고 있는데 어찌 싸우지 않
고 가만히 있을 수 있겠는가?"
하후연이 당치도 않다는 듯 소리쳤다. 장합이 다시 극구 말렸으나 하후연은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 그대로 군사를 이끌어 산을 에워싸게한 다음 갖은 욕을
다 펴부으면서 싸움을 돋우었다.
산 위에서 이 모양을 보고 있던 법정은 흰 기를 들어 황충에게 일체 군사를
움직이지 않도록 신호를 보냈다. 황충이 미동도 않은 채 어느덧 오시가 되자 하
후여늬 군사들은 욕석을 퍼붓다 제풀에 지쳐 대오에서 벗어나 잇을 뿐만 아니라
말에서 내려 땅바닥에 주저앉아 쉬기까지 하였다.
법정이 보니 처음의 정연했던 대오와 엄한 기세라곤 찾아볼 수 없었다.. 바로
이런 때를 기다리고 있었는지라 법정은 즉시 흰 기를 내리고 붉은 기를 들어 휘
둘렀다.
그러자 별안간 북 소리와 피리 소리가 요란히 일어, 그 함성이 땅과 하늘을
가득 메운 가운데 황충이 멀너 말을 달려 산 아래로 달려가고 그 뒤고 군사들이
쏟아져 내려왔다. 그 기세가 마치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꺼지는 듯했다.
산꼭대기에 있던 적군만을 염두에 두고 있던 하후연은 불쑥 산중턱에서 쏟아
져 내리는 듯한군사들을 보았으나 미처 싸울 태세를 갖출 겨를이 없었다. 놀란
눈으로 보고 있다가 황망히 군사들을 수습하려는데 어느 새 하늘에서라도 떨어
진 듯 황충이 바로 눈앞에 달려오고 있었다.
"이놈 하후연, 내가 너를 기다린 지 오래다. 내 칼을 받아라!"
벼락치듯한 외침과 함께 황충의 칼이 번쩍 치켜들리는가 싶었다. 하후연은 급
히 그를 맞을 태세를 갖추었으나 그가 미처 칼ㅇ르 뽑기도 전에 이미 황충의 칼
이 머리와 어깨를 찍으니 하후연은 두 토막이 나 버렸다.
일찍이 조조가 의군을 일으켰을 때부터 조조와 함께 싸움터를 누지던 맹장 하
후연의 최후였다. 조조로서는 30여 년을 자기의 손발같이 부리며 믿고 있던 장
수 한 사람ㅇ르 잃게 된 셈이었다.
이날 황충의 용맹을 뒷날 사람들이 시를 지어 찬탄했다.
늙은 장수 큰 적에게 달려가
백발로 위엄을 떨쳤네.
놀라운 힘으로 강궁도 당기더니
바람 일으키며 서리 같은 칼 휘둘렀네.
웅장한 목소리 범의 부르짖음 같고
날랜 말은 용처럼 날았네.
적장의 목을 베어 공훈 크고
경계를 열어 임금의 터 넓혔네.
황충이 한칼에 하후연의 죽이자 그 졸개들은 감히 싸울 생각도 못한 채 제각
기 살길을 찾아 뿔뿔이 흩어졌다.
홍충은 그 갯를 타고 전군사능로 지쳐들었다. 장합이 군사를 이끌어 와 황충
을 맞았으나 황충은 진식과 군사를 나누어 양쪽에서 들어쳤다. 장합 역시 용맹
스러운 장수였니만 이미 승패가 갈린 싸움이라 당해 낼 수가 없었다.
장합이 황망히 말머리를 돌려 달아나는데 홀연 한 떼의 군마가 산 숙에서 쏟
아져 나와 앞을 가로막았다. 앞선 장수가 장합을 보고 말을 달려 나로며 벼락채
듯 소리를 내질렀다.
"상산 조자룡이 여기 있다. 너희들은 꼼짝 말고 게 섰거라!"
장합은 조자룡이란 이름을 듣자 케게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싸울 샐각도 아
니한 채 급히 정군산 본진 쪽으로 말머리를 돌려 달아났다. 장합이 뒤돌아볼 틈
도 없이 말을 채찍질해 달리고 있는데 앞쪽에 티끌이 자욱이 일면서 또 한떼의
군마가 나타났다.
장합이 놀란 눈으로 그 굼마를 보니 앞선 장수는 바로 본진에 남겨 두고 온
두습이었다. 장합이 그제야 한숨을 돌리는데 두습이 허겁지겁 달려와 알렸다.
"정군산을 촉의 장수 유봉,맹달에게 빼앗기고 말았습니다."
그 소리를 듣자 장합은 맥이 풀렸다. 하는 수 없이 황충과 싸우려던 생각을
버리고 두습과 함께 한수로 가 영채를 세운 다음 사람을 보내 조조에게 소식을
전하게 했다. 장합의 사자는 조조를 보자 그간의 일을 전했다.
"저욱ㄴ산은 이미 촉군에게 빼앗겼습니다. 게다가 하후연 장군이 황충에게 죽
임을 당하고 장합 장군은 한수에 머무르고 계십니다."
조조는 하후연이 죽었다는 말에 목을 놓아 울었다. 조조 스스로도 늙어가는
지금 지난날 반평생을 함께 하온 미더운 장수를 잃었다는 말에 목이 메이는 것
이었다.
넉자로 된 제 구절의 점괘 중 '삼팔종횡'은 3과 8을 곱하여 24, 즉 건안 24년
을 뜻한다. 또 '황저'는 누런 돼지니 기해, 즉 돼지해를 말하며, 우호는, 정월이
인의 달이니 기해년 정월이란 뜻이었다.
또 '정군지남'은 정군산 남쫏이란 말이요, '상절일고'는 손말과 같은 명장르 잃
는다는 뜻이다. 즉 그 네 구절을 풀이하면 '건안 24년 기해 정월에 정군산 남쪽
에서 손발 하나를 잃는다'는 뜻이었다. 조조는 관로의 점괘를 생각하고 크게 감
탄해 마지않았다.
"참으로 찾아보기 힘든 신복이 아닐 수 없었다. 관로에게 사람을 보내 한 번
더 그를 불러오라!"
조조가 그렇게 말하며 사람을 보내 관로를 불렀으나 그는 이미 어디로 갔는지
자취를 감춘 뒤었다.
조조는 하후연을 죽인 황충에게 이를 갈며 몸소 대군을 일으키기로 하고 벌떡
일어섰다.
"내가 몸소 가서 하후연의 원수를 갚으리라!"
조조는 서황을 선봉으로 삼고 군사를 거느려 나아가 한수 가에 이르렀다. 정
군산에서 쫓겨와 그곳에 진을 치고 있던 장합,두습이 나와 조조를 맞아들이며
말했다.
"정군산을 잃었으니, 미창산 군량과 마초가 걱정입니다. 지금이라도 북산의 영
채로 옮겨 놓고 군사를 움직이도록 하십시오."
조조가 장합,두습을 못마땅히 여겼으나 그 말만은 옳았다.
"그렇게 하도록 하라."
조조는 두 사람의 말대로 군량과 마초를 북산 영채에 옮기도록 영을 내렸다.
제갈공명은 지혜로 한중을 취하고
한수를 사이에 두고 대진한 조조와 유비군, 공명은 조조의 의심 많음을 이
용하여 제 꾀에 스스로 넘어가도록 계책을 쓴다. '지모 있는 자는 오히려 그 지
모에 빠진다'는 계책이다. 한수에서 대패한 조조는 양평관으로 쫓기고 그의 아들
조창이 그를 구원하러 온다.
한편 하후연을 목벤 황충이 그 머리를 가지고 가맹관으로 돌아오자 유비의 기
쁨은 컸다. 유비는 그 자리에서 황충을 정서대장군으로 높이고 크게 잔치를 열
어 그 공을 치하했다.
잔치가 한참 무르익어 가는데 아장 정저가 와서 급한 소식을 알렸다.
"조조가 하후연의 원수를 갚겠다며 몸소 20만 대군을 이끌어 오고 있습니다.
오는 도중 한수에 이르러 장합으로 하여금 미창산의 양식과 마초를 북산 영채에
옮기고 있다 합니다."
공명이 그 말을 듣더니 유비에게 대책을 말했다.
"조조가 대군을 이끌고 왔으니 군량과 마초를 빼앗길까 걱정이 되어 그것부터
안전한 곳으로 옮겨 놓을 생각입니다. 이는 그의 약점이 군량과 마초임을 스스
로 가르쳐 주고 있는 셈입니다. 만약 우리 쪽에서 그들의 양식과 마초를 불태우
고 치중을 빼앗는다면 조조의 날카로운 기세도 꺾일 수밖에 없습니다."
곁에서 그 말을 듣고 있던 황충이 벌떡 일어나며 청했다.
"이 늙은 몸이 다시 한 번 그 일을 맡겠습니다."
공명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했다.
"조조는 하후연에게 비할 사람이 아닙니다. 결코 가볍게 맞서서는 아니될 것이
오."
유비도 공명과 같은 생각이라는 듯 입을 열었다.
"하후연이 비록 우두머리라 하나 그는 용맹만을 믿는 장수에 지나지 않았소.
실은 장합에게도 미치지 못하오. 만약 장합을 벨 수 있다면 하후연을 목벴던 것
보대 열 배는 낫다고 할 수 있을 것이오."
유비의 말에 황충이 분연히 말했다.
"저를 보내주신다면 반드시 장합의 목을 베어 오겠습니다."
"좋소이다. 대신 조자룡과 함께 가도록 하시오. 그리고 모든 일을 서로 의논해
서 하도록 하오. 누가 공을 세우나 보겠소."
공명이 마지못한 듯 허락하며 황충에게 일렀다. 황충은 이번에도 출진하게 된
것을 다행으로 여기며 즉시 떠날 채비를 하였고, 공명은 장저로 하여금 부장으
로서 황충을 따라가도록 했다.
군사를 이끌고 가던 도중 조운이 황충에게 물었다.
"지금 조조는 20만 대군을 이끌고 와서 열 군데로 나누어 영채를 세우고 있다
합니다. 장군께서는 주공 앞에서 조조의 군량과 마초를 불태우겠다고 장담하셨
습니다만 이 일은 결고 가벼운 일이 아닙니다. 장군께서는 무슨 계책이라도 있
으십니까?"
황충은 젊은 장수 조운이 자신을 미덥지 않게 여기는 듯하자 마음이 언짢았
다. 황충이 퉁명스런 목소리로 조운에게 말했다.
"내가 먼저 갈 테니 장군은 뒤에서 구경이나 하시오."
"그건 아니 되오. 제가 먼저 갈 테니 장군께서 뒤따라오십시오."
아무래도 황충이 못 미더웠던지 조운은 자신이 앞장 서겠다고 말했다.
황충이 못마땅하다는 얼굴로 조운에게 대꾸했다.
"내가 주장이고 그대는 부장인데 어찌 나보다 먼저 가겠다고 하는가?"
조운이 잠시 생각하다 의견을 내었다.
"저와 장군은 모두 주공을 위해 충의를 다하려는 몸입니다. 주장과 부장을 따
져보아야 무슨 득이 있겠습니까? 그러니 우리가 제비를 뽑아 선봉을 정하는 게
어떻겠습니까?"
황충도 그 제안까지는 물리칠 수가 없었다. 황충이 응낙하자 두 사람은 제비
를 뽑았다. 제비를 뽑아 가리니 선봉은 황충이었다. 이에 황충이 군사를 이끌어
나가려는데 조운이 말했다.
"장군께서 먼저 가시게 되었으니 저도 힘을 다해 뒤에서 도와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제가 무작정 기다리고 있을 수만은 없으므로 장군께서 돌아올 시각을 정
해 두어야겠습니다. 장군께서 그 시각에 돌아오면 저는 군사를 움직이지 않고
있겠습니다. 만약 그 시각이 지나도 아니 오시면 저는 즉시 군사를 움직여 장군
을 도우러 가겠습니다."
황충도 조운의 말을 옳게 여겼다.
"공의 말씀이 옳소. 만약 내가 오시까지 이르지 않거든 그때는 공이 나를 도와
주시오."
황충은 그 말을 남기고 자신의 진으로 돌아갔다.
황충과 시각을 정한 후 조운은 본진으로 돌아와 부장인 장익에게 말했다.
"황한승이 내일 오시까지 적의 양곡과 마초를 불태우기로 하고 떠났다. 만약
그 시각까지 돌아오지 않으면 내가 도우러 갈 것이다. 우리 진은 한수를 앞에
두고 있어 지세가 매우 위험하니 내가 떠난 이후에 그대는 진을 지키되 함부로
움직이지 않도록 하라."
그때 황충도 자기 진으로 돌아가 부장 장저에게 일렀다.
"내가 하후연을 죽였으므로 장합이란 놈은 혼이 나 기가 꺾여 있을 것이다. 나
는 내일 새벽 적의 양초를 겁탈하러 갈 것인즉 군사 5백을 남겨 진을 지키게 하
고 그대는 나를 돕도록 하라. 삼경에 군사들을 배불리 먹인 후 사경에 진을 나
서도록 하되 바로 북산 밑으로 밀고 올라가 장합부터 사로잡고 양초를 취할 것
이니라."
장저는 황충의 영을 받자 곧 채비를 서둘렀다.
이윽고 다음 날 사경 무렵이 되자 황충은 군사를 이끌고 북산으로 향했다. 한
수를 지나 북산 아래에 이르자 동이 트기 시작했다. 황충이 북산 위를 살피니
군량과 마초가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다.
"진은 튼튼하지만 지키는 군사는 얼마 되지 않는다. 모두 말에서 내려 뛰어올
라가 군량과 마초에 불을 질러라!"
황충이 우렁찬 목소리로 영을 내리자 책을 지키던 얼마 되지 않는 조조의 군
사들이 촉군을 보고는 기겁을하여 달아났다. 황충의 기병들이 말에서 내려 급히
마른 풀과 나뭇가지를 양곡 위에 놓고 불을 지르려 할 때였다.
장합이 황충의 군사가 기습해 왔다는 소식을 듣고 군사를 거느리고 함성을 지
르며 내달려왔다.
황충과 장합의 군사들이 어우러지는 가운데 한바탕 싸움이 일었다. 양군이 벌
이는 백병전은 피로 물들였고, 이 소식은 얼마 되지 않아 조조에게도 전해졌다.
"서황은 군사를 이끌고 달려가 장합을 도우라."
조조가 서황에게 명을 내렸다. 서황은 군사를 이끌고 가 황충을 겹겹이 에워
쌌다.
서황이 장합과 함께 가세하자 황충도 쉽게 그들을 뚫지 못했다. 적병에게 에
워싸인 채 있는 힘을 다해 싸웠으나 점점 위급한 지경으로 빠져들고 있었다.
이때 부장 장저는 군사 3백을 이끈 채 적의 포위를 뚫어 진으로 달아나고 있
었다. 그런데 얼마 가지 못해 한 무리의 조조 군사에 의해 앞을 가로막혔다. 앞
선 장수를 보니 문빙이었다. 등 뒤에는 뒤쫓던 조조 군사들이 달려오고 있으니
장저는 오도가도 못하는 꼴이 되고 말았다.
이 때 이미 오시가 지나고 있었다. 황충이 돌아오기를 초조하게 기다리고 있
던 조운은 끝내 황충이 돌아오지 않자 갑옷과 투구를 쓰고 말 위에 올랐다. 군
사를 거느려 떠나기 전에 부장 장익에게 다시 한 번 일렀다.
"그대는 진을 단단히 지키고 영채의 벽 뒤에 활과 쇠뇌를 지닌 도부수들을 배
치해 적의 기습에 대비하도록 하라."
조운은 그 말과 함께 창을 비껴들고 바람같이 말을 몰았다. 조운이 말을 달린
지 오래지 않아 앞쪽에 티끌이 자욱이 일며 한 ㄸ의 조조 군사가 앞길을 가로막
았다. 앞선 장수는 문빙의 부장 모용렬이었다.
"이놈 어디를 가느냐?"
모용렬은 촉의 군사가 오자 길을 막고 칼을 휘두르며 조운에게 덤벼들었다.
조운은 문빙의 부장과 싸우며 지체할 틈이 없었다. 조운의 창끝이 하늘로 치켜
들리는가 하더니 번쩍 빛을 내며 내리치자 어느 새 모용렬의 목은 말 아래로 굴
러 떨어지고 있었다. 제법 기세 좋게 달려오던 조조 군사들이 그 모양을 보자
기겁을 하며 뿔뿔히 흩어졌다.
조운은 그런 조조군을 휩쓸며 곧장 적진으로 달려갔다. 그러나 또 한 무리의
군마가 앞을 가로막았다. 앞선 장수가 조운을 보며 제법 큰 소리로 호통을 쳤다.
"이놈 어디를 가려느냐? 가려거든 네 목을 내놓고 가라."
조운도 그 장수를 보고 호통을 쳤다.
"너는 도대체 웬놈이기에 내 앞을 가로막느냐?"
"나는 위의 대장 초병이다."
"촉의 군사들이 어디 있느냐?"
조운은 앞에 있는 장수는 눈에 들어오지도 않는다는 듯 앞쪽을 살피며 물었
다.
"촉의 장수나 졸개들이 죽은 지 이미 오래다. 이제 네놈의 목이 떨어질 차례
다."
초병이 겁도 없이 기세 좋게 소리치자 조운의 눈에는 순간 불이 번쩍 일었다.
"이놈! 감히 뉘 앞이라고 주둥이를 나불대느냐?"
조운이 창을 꼬나쥐고 말을 박찼다. 조운의 창이 위로 치켜들리는가 싶더니
어느 새 초병의 몸이 두 동강이 되어 말 아래로 떨어졌다. 조운의 기세에 얼이
빠진 초병의 군사들이 아우성을 치며 달아났다. 조운이 달아나는 적병들을 휩쓸
며 바로 북산 아래쪽에 이르러 보니 장합과 서황이 황충을 겹겹이 에워싸고 있
었다. 양군 모두 이른 아침부터 시작한 싸움이라 몹시 지친 모습이었다.
조운이 그 모양을 보자 외마디 고함 소리와 함께 말을 몰아 에워싸고 있는 적
을 좌우로 휩쓸며 뛰어들었다. 조운이 달려가는 좌우에는 적군의 목이 가을 바
람에 날리는 낙엽처럼 떨어졌고, 조운은 10만 대군이 둘러싼 조조의 진중을 무
인지경 달리는 듯했다.
창을 좌우로 춤추듯 휘두르니 창끝은 마치 배꽃이 춤을 추며 떨어지는 것 같
았고, 햇볕 아래 번쩍이는 창날은 한겨울 흰눈이 흩날리는 듯했다.
장합과 서황이 후진이 크게 어지러워지는 듯하여 고개를 돌려보니 조운의 창
법이 마치 하늘에서 내려온 신장처럼 창으로 춤을 추는 듯했다. 조운의 몸은 보
이지 않는데 은빛 찬란한 창날만 햇빛에 번쩍였고, 조운의 창에서 빛이 번쩍일
적마다 군사들의 목이 떨어져 나갔다.
장합과 서황은 간담이 서늘해 감히 맞서지 못하고 있는데 조운은 그 틈에 황
충을 구해 냈다.
"빨리 내 뒤를 따르십시오."
조운은 황충을 구한 뒤 무인지경처럼 말을 달려 달아났다. 적군들 수만 명이
그 주위를 둘러싸고 있었으나 아무도 길을 막으려 나서는 자가 없었다.
이때 조조는 높은 곳에서 싸움을 살펴보고 있다가 깜짝 놀라며 좌우에게 물었
다.
"저 장수는 누구인가?"
"바로 상산의 조자룡입니다."
조운을 알아본 한 사람이 대답했다.
"지난날 당양 장판의 영웅이 아직도 변함없이 살아 있구나!"
조조는 그렇게 감탄하며 급히 영을 전하게 했다.
"그가 닿는 곳에서는 섣불리 대적하지 않도록 일러라!"
조조는 조운을 사로잡지도 못하고 군사만 꺾일까 두려워 그렇게 영을 내렸다.
그 사이 조운은 적의 포위를 뚫어 황충을 구해 말을 달리는데 문득 군사 하나
가 앞을 가리키며 말했다.
"저기 동남편의 적군이 에워싼 곳을 보십시오. 그곳에 필경 장저 장군이 계실
것입니다."
조운이 그 말을 듣더니 말을 재우쳐 본진으로 달리지 않고 동남쪽을 향해 달
려갔다. 장저를 구하기 위함이었다. 조운이 나는 듯 말을 달려 가는데 '상산 조
자룡'이라고 쓴 기가 바람에 펄럭였다. 지난날 당양 장판에서 그의 용맹을 본 조
조 군사들이 그 기만 보고도 기겁을하여 달아났다. 조운은 그 틈에 부장 장저마
저도 구해 말을 달렸다.
조조는 조운이 동서쪽을 가르며 가는 곳마다 자기 군사를 쳐 황충을 구하고
장저마저 구출해가는데도 누구 하나 가로막는 장수가 없자 문득 자기 편 장수들
의 무력함에 화가 치솟았다.
"아무리 조자룡이 용맹스럽다고는 하나, 이토록 우리 진을 짓밟고 있는데도 그
걸 막을 장수 하나 없다는 말인가?"
조조가 몸소 군사를 이끌고 조운을 뒤쫓아 가자 장수들도 조조 뒤를 따랐다.
그러나 그때 조운은 황충과 장저를 구해 이미 본진 가까이에 이르고 있었다.
조운이 영채로 돌아가자 부장 장익이 달려나와 맞는데, 조운의 등 뒤 저편에 홀
연 먼지가 자욱이 일어나고 있었다. 조조 군사가 뒤쫓아오는 것을 보고 장익이
조운에게 말했다.
"조조가 군사를 이끌어 뒤쫓아오고 있습니다. 군사를 성 안으로 들이 뒤 문을
닫게 하고 적루(망대)에 올라 적을 막게 하십시오."
그러자 조운이 우렁찬 목소리로 소리쳤다.
"채문은 닫지 말라. 네 어찌 지난날 내가 당양 장판에서 말 한 필 창 한 자루
로 조조의 83만 대병을 검불보듯 했던 일을 모르느냐? 게다가 지금은 군사도 있
고 장수도 있는데 무엇이 두려워 문을 걸어닫는다 말이냐?"
조운은 장익을 나무란 뒤 다시 그에게 영을 내렸다.
"모든 궁노수들을 영채 앞에 파놓은 해자 속에 매복하도록 하라. 그리고 깃발
과 창검을 눕혀 놓아 적의 눈에 띄지 않도록 하고 북과 징 소리도 내지 않도록
하라."
조운은 영을 내린 후 말 위에 오른 채 창 한 자루만을 비껴들고 홀로 영문밖
에 가서 우뚝섰다.
그때 앞서 달려오던 장합과 서황이 촉군의 영채 앞에 이르렀다. 해가 이미 기
울어 가는데 촉군의 군사들이 보이지 않고 깃발과 창검도 보이지 않는데다 북
소리도 울리지 않았다. 그런데다 성문을 활짝 열려 있는 가운데 조운만이 창을
들고 홀로 영채 앞에 우뚝 서 있지 않는가.
장합과 서황은 뜻밖의 광경에 감히 앞으로 내닫지 못했다. 군사들은 하나도
보이지 않는데 성문까지 열어젖히고 조운이 홀로 말 위에 있으니 한편으로는 계
교인지도 모른다는 의심이 들었다. 그러나 뒤이어 조조가 그곳에 이르자 망설임
없이 장합과 서황에게 군령을 내렸다.
"뭘 망설이느냐? 모든 군사를 앞으로 나아가게 하라. 적은 속임수라도 있는
것처럼 꾸며 허세를 부리고 있다. 어찌 저토록 작은 조자룡의 진 하나를 빼앗지
못한다는 말인가!"
조조가 장합과 서황을 질타하며 영을 내리자 그제야 장수들도 함성을 지르며
말을 달렸다. 그러나 대군을 거느리고 장수들이 달려오는데도 조운은 여전히 그
자리에 우뚝선 채 눈을 부릅떠 노려보고만 있을 뿐이었다. 그런데 장수들을 뒤
따르던 군사들은 조운의 모습을 보자 두려워하며 나아가기는커녕 발길을 되돌렸
다.
그러자 조운이 창을 번쩍 치켜들어 휘둘렀다. 그와 때를 같이해 영채 밖 구덩
이 속에 매복해 있던 궁노수들이 불쑥 몸을 일으키며 일제히 활과 쇠뇌를 쏘았
다.
이때 이미 해가 기울어 사방에 어둠이 깔리고 있어 조조군은 촉군의 수가 얼
마쯤 되는지 알 수가 없었다. 그런 가운데 조조 군사들은 어둠속에 날아온 활과
쇠뇌에 맞아 상하는 자가 헤아릴 수 없었다.
조조는 그제야 조운의 계교에 걸려들었다고 여겼다. 조조는 겁이 나 말머리를
돌려 달아나기 시작했다. 조조가 달아나자 장수와 군사들도 달아나기에 바빴다.
그러자 그때까지 영채와 구덩이 속에 몸을 숨기고 있던 조운의 군사들이 북과
징 소리를 울리며 조조군을 뒤쫓기 시작했다. 다급해진 조조 군사들이 어둠 속
에서 먼저 달아나기 위해 저희들끼리 짓밟고 밀치며 한데 뒤엉키는 가운데 가까
스로 한수 가에 이르렀다. 그러나 조운의 군사가 북 소리, 징 소리를 하늘이 떠
나갈 둣 울리며 급하게 뒤쫓으니 후진은 앞만 보고 달렸다.
그 바람에 앞서 달려온 군사는 뒤쫓아온 군사들에게 떠밀려 한수 강물에 빠져
죽은 자만 해도 헤아릴 수 없이 많았다.
조조는 군사를 돌볼 사이도 없이 오직 목숨을 구해 달아날 뿐이었다. 조운과
황충, 그리고 장저는 조조를 뒤쫓으며 조조 군사들을 닥치는 대로 쳐죽였다.
조조가 말고삐를 단단히 잡고 정신 없이 북산 쪽으로 말을 달리는데 홀연 미
창산 쪽에서 두 갈래의 군마가 쏟아져 내려왔다. 그들은 유봉과 맹달이 거느린
군사들로 미창산의 사잇길을 내려오며 조조의 군량과 마초를 전부 불사르고 내
려오던 중이었다.
조조는 이미 미창산이 적군의 손에 떨어졌음을 깨닫고 북산도 온전히 지켜 낼
것 같지 않자 황급히 말머리를 돌려 남정으로 향했다. 그러나 서황과 장합도 자
기의 대채에서 버텨낼 수 없음을 알고 진을 버린 채 달아났다.
그렇게 되니 조운은 조조의 영채를 고스란히 손안에 넣게 되었다. 황충은 조
조가 버리고 간 양곡과 마초는 물론 한수 가에 두고 간 병기와 물자를 모두 거
두어들였다.
조조군을 크게 꺾고 영채를 모조리 빼앗은 조운과 황충은 곧 그 소식을 유비
에게 알렸다.
유비가 그 기쁜 소식을 듣고 공명과 함께 한수로 달려와 조운의 군사 한 명을
불러 물었다.
"조 장군이 어떻게 싸우던가?"
그 군사가 유비에게 대답했다.
"조 장군은 하늘에서 내리신 신장이십니다. 10만 대군을 앞에 두고 창을 휘둘
러 적진을 헤쳐 나가시는데 마치 배꽃이 펄펄 떨어져 내려 춤을 추듯 했습니다."
그 군사는 조운이 황충을 구하던 일과 영채 앞에서 창 하나만 달랑 들고 우뚝
선 채 조조의 대군을 맞던 일 등을 자세히 전했다.
유비는 감탄을 하며 좌우를 둘러싸고 있는 험악한 산길을 바라보며 공명에게
말했다.
"자룡의 온몸은 그대로 담력 덩어리인 모양이오!"
뒷날 사람이 시를 지어 조운의 용맹을 이렇게 찬양했다.
지난날 장판에서 싸울 때의 용기,
그 위풍 조금도 줄지 않았네.
적진을 뚫어 영웅의 기상 펼치고
적진에 갇혀 오히려 용맹 떨쳤네.
귀신도 울부짖고
하늘과 땅도 놀라네.
상산의 조자룡
온몸이 모두 담력 덩어리이네.
유비는 조운의 큰 공을 치하하며 그를 호위장군으로 삼고, 모든 장졸들에게
상을 내린 다음 크게 잔치를 열어 위로했다. 잔치가 무르익어 가고 있는데 홀연
급보가 전해졌다.
"조조가 다시 대군을 야곡의 좁은 길로 보내 한수를 빼앗으려 한다 합니다."
그러나 유비는 껄껄 웃으며 대수롭지 않다는 듯 말했다.
"조조가 다시 온다한들 무엇을 어찌하겠다는 말인가? 한수는 이미 내 손에 든
거나 다름없다."
유비는 군사를 이끌고 조조 군사를 맞으러 한수 서쪽으로 나아갔다.
그때 조조는 서황을 선봉으로 삼아 기어코 한수를 빼앗고야 말겠다고 단단히
다짐하고 있는데, 떠나기 전에 아문장군으로 있는 왕평이 나서 말했다. 그는 자
를 자균이라 하며 이곳 파서군 탕거 사람이었다.
"제가 이곳 지리를 잘 알고 있습니다. 서 장군을 도와 촉군을 무찌르겠습니
다."
조조가 기뻐하며 왕평을 부선봉으로 삼아 서황과 함께 가게하고 자신은 정군
산 북쪽에 둔병했다.
서황과 왕평은 한수 강변에 이르자 서황이 군사들에게 영을 내렸다.
"강을 건너 진을 치도록 하라."
왕평이 서황의 영을 듣고 고개를 가로저으며 물었다.
"강을 건너 진을 쳤다가 급히 물러나야 할 경우가 생기면 어찌하시렵니까?"
"옛적에 한신(한 고조의 명장)은 물을 등져서 배수진을 쳤던 적이 있었다. 이
는 곧 '죽을 땅에 몸을 둔 후에야 차라리 살아날 수 있다'는 뜻에서 세운 진이
아니겠는가?"
서황이 왕평의 물음에 그렇게 대답했다. 그러나 왕평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서
황을 말렸다.
"그렇지 않습니다. 옛적에 한신이 배수진을 쳤던 것은 적이 지모가 없음을 알
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지금 장군께서는 조자룡과 황충의 속마음을 헤아릴
수 있으십니까?"
왕평이 거듭 반대하자 서황이 잘라 말했다.
"정 그렇다면 그대는 보군을 거느리고 이곳에서 적을 방비하도록 하라. 그리고
내가 기병을 거느려 적을 깨뜨리는 걸 구경이나 하라."
서황은 고집을 꺾지 않고 배다리를 놓고 한수를 건너 영채를 세웠다. 서황이
강을 건너 영채를 세우는 걸 본 황충과 조운이 유비에게 말했다.
"서황이 강을 건넜으니 저희들이 조조 군사를 치겠습니다.
유비가 싸울 것을 허락하자 두 사람은 군사를 이끌고 떠났다. 가는 도중 황충
이 생각하는 바를 말했다.
"서황은 자기의 용맹만을 믿고 무턱대고 강을 건너왔을 것이오. 그러니 우리는
그들이 지칠 때를 기다려 해질 무렵에 군사를 두 갈래로 나누어 들이치는 것이
어떻겠소?"
조운이 두말 없이 황충의 말을 따르기로 하고 각자 군사를 진문 안에 머무르
게하여 저녁 ㄸ가 되기를 기다렸다.
서황은 강을 건넌 후에는 반드시 촉군이 북을 울리며 덤비리라고 여겼으나 화
살 하나 날아오지 않았다. 이에 진시(오전 8시)가 되자 군사를 이끌어 촉의 영채
앞으로 다가와 싸움을 걸었으나 그래도 촉군은 문을 걸어 잠그고 아예 나오지도
않았다.
서황은 성미가 급한 장수였다. 촉군이 나오지 않자 고래고래 악을 써가며 싸
움을 돋우었다. 그렇게 하기를 신시(오후 4시경)까지 하였으나 촉군은 꿈쩍도 하
지 않았다. 화가 치밀 대로 치민 서황이 궁노수들에게 영을 내렸다.
"활과 쇠뇌를 퍼붓도록 하라!"
활과 쇠뇌가 영채 쪽으로 날아오자 황충이 조운에게 말했다.
"서황이 활과 쇠뇌를 쏘는 것은 군사를 물릴 생각에서일 것이오. 이때를 틈타
서황을 칩시다."
황충의 그 말이 떨어지기도 전에 과연 조조의 후대가 흩어지며 물러나기 시작
했다.
공격할 때만을 기다리고 있던 촉군은 북 소리를 크게 울리며 나아가는데 황충
이 왼쪽길로, 조운은 오른쪽 길을 택해 달려갔다.
이미 싸우기를 포기하고 물러나는데 갑작스럽게 좌우에서 황충과 조운이 군사
를 휘몰아 짓쳐드니 서황의 군사들은 크게 혼란을 일으켰다. 제대로 싸워볼 엄
두도 못내고 달아나는데 앞에는 강물이었다. 그러나 뒤에서는 계속 밀고 도망쳐
오니 앞쪽 군사들이 자연 강물로 밀려 들어갈 수밖에 없었다. 강물에 수많은 군
사가 빠져 죽는 가운데 서황도 달아날 수밖에 없었다. 서황이 있는 힘을 다해
길을 열어 가까스로 강 건너 영채로 들어가자 분한 김에 역정을 내며 애꿎은 왕
평을 닦아세웠다.
"너는 우리 편 군사가 위태로운 걸 보고도 어찌하여 바라보기만 하고 도와 주
지 않았느냐?"
왕평으로선 어이없는 말이 아닐 수 없었다.
"만약 제가 도우러 갔다면 이 영채마저 이미 우리의 것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강을 건너지 말라고 말씀드렸는데도 듣지 않으시더니 결국 이런 변을 당한 것이
아닙니까?"
그러나 서황은 분이 머리까지 차 자기 잘못을 뒤돌아보기는커녕 말대꾸하는
왕평만이 괘씸하게 여겨졌다. 이에 앞 뒤 뒤돌아보지 않고 왕평을 죽이려 들었
다.
그날 밤이었다. 자신의 말을 듣지 않고 강을 건널 때부터 서황의 어리석음에
실망했던 왕평은 영채를 버리고 달아나기로 작정했다. 먼저 거느리던 군사들에
게 시켜 영채에 불을 지르게 했다. 영채 여기저기에 불길이 치솟자 조조 군사들
은 이리 뛰고 저리 뛰며 크게 어지러워했다. 왕평은 그 틈을 타 한수를 건너 조
운의 영채로 달려가 항복하고 말았다.
조운은 왕평을 데리고 가 유비를 뵙게 했다. 유비는 뜻밖에 투항해 온 왕평을
맞아 크게 기뻐했다. 왕평은 투항해 온 까닭을 밝히며 한수의 지리를 자세히 유
비에게 일러 주었다.
"내가 왕자균(왕평의 자)를 얻었으니 이제 한중을 얻은 것이나 다를 바 없겠
구나."
유비는 곧 왕평을 편장군 겸 길을 안내하는 향도사로 삼았다. 서황은 왕평이
조운에게 투항하자 자신의 잘못을 그에게 뒤집어 씌울 좋은 기회로 여겨 조조에
게 달려가 왕평을 핑계댔다.
"왕평이 배반하여 영채에 불을 지르고 유비에게 투항했습니다."
조조는 싸움에도 지고 왕평에게도 속은 것으로 알고 크게 노해 몸소 한수를
빼앗으러 대군을 휘몰았다.
이에 조운은 조조의 군사가 대군인지라 한수 서쪽으로 군사를 물려 조조 군사
와 한강을 사이에 두고 대치하기로 했다. 조조도 함부로 강을 건널 수 없어 우
선 한수 가에다 진을 세웠다.
조운이 한수 서쪽에 진을 세우자 유비는 공명과 함께 한수의 형세를 살피러
왔다. 한수 상류를 살피던 공명의 눈에 문득 강가의 토산(흙산) 하나가 보였다.
그 토산을 보니 능히 1천여 명의 군사는 매복할 수 있을 만한 크기의 산이었다.
공명이 영채로 돌아와 조운에게 일렀다.
"장군은 군사 5백을 거느리되 각기 북이나 꽹가리, 피리를 지니게하여 저 토산
에 숨어 있게 하라. 그런 후 저녁 무렵이나 밤에 영채 안에서 한 방 포 소리가
울리거든 일제히 북과 징과 꽹가리를 울리되 절대로 나가 싸우지 말라."
조운이 공명의 분부를 받고 군사를 이끌고 물러났다.
조운을 보낸 뒤 공명은 높은 산 위에 올라가 조조의 진세를 살펴보고 있었다.
다음 날이 되자 조조가 군사를 이끌어 와 싸움을 돋우었다. 그러나 촉군의 영
채에서는 좀처럼 싸우러 나오지 않을 뿐만 아니라 화살 하나 날리지 않았다.
촉군이 나와 싸우지 않고 날이 저무니 조조도 하는 수 없이 군사를 물릴 수밖
에 없었다.
그날 밤이 갚어 갈 무렵이었다.
공명은 조조의 영채에 화톳불이 꺼지고 군사들이 잠든 것을 보자 포를 쏘게
했다. 토산에 있던 촉군은 포 소리가 나자 일제히 북을 울리고 징이며 꽹과리를
울렸다.
놀란 것은 조조군이었다. 갑자기 북 소리와 징 소리, 꽹과리 소리가 요란스럽
게 울려대니 낮ㅇ는 몸을 웅크리고 있던 촉군이 야습이라도 하러 오는 줄 알았
다.
장수들은 황망히 갑옷을 꿰입고 군사들은 병기를 챙겨 싸울 채비를 갖춰 영채
밖으로 달려나왔다. 그러나 영채 밖에는 적병은커녕 그림자도 보이지 않았다.
장졸들은 적의 속임수였음을 알고 다시 잠자리로 돌아갔다.갑옷과 옷을 벗고
누웠을 때였다. 다시 포 소리가 울리고 북 소리가 크게 울렸다. 뒤따라 징 소리,
피리 소리, 꽹과리 소리와 함성일 울렸다. 조조 군사들은 깜짝 놀라 자리를 박차
고 일어났다. 다시 무장을 갖춰 영채 밖으로 뛰쳐나갔으나 여전히 촉군은 그림
자도 보이지 않았다.
밤새 그런 일이 몇 번인가 이어졌다. 그러다 보니 조조군은 잠 한숨 잘 수가
없었다. 그런 일은 그날 밤만이 아니라 사흘 동안이나 계속해서 일어났다.
사흘 밤을 불안과 놀라움과 의심을로 잠 한숨 자지 맛하던 조조도 두려움이
일어 영채를 뽑아 멀리 30여 리나 물러났다. 조조는 넓은 들판에 영채를 세우고
촉군의 야습에 대비했다.
조조가 멀리 물러나 영채를 세우는 것을 본 공명이 웃으며 말했다.
"조조가 비록 병법을 안다 하나 속임수는 모르는구나."
조조가 물러나자 유비는 강을 건너가 강을 등지고 영채를 세웠다. 유비가 영
채를 세운 후 공명에게 앞일에 대해 물었다.
"이제 어떻게 했으면 좋겠소?"
공명이 생각해 둔 계책을 유비에게 귀엣말로 일러 주었다.
한편 조조는 유비가 강을 건너 배수진을 치는 것을 보자 그 결의가 심상치 않
음을 알았다. 이에 조조는 사람을 보내 유비에게 싸움을 청하는 전서를 전하게
했다.
"내일 오계산 앞에서 만나 싸우자고 하시오."
조조의 전서를 보자 유비를 대신해 공병이 그렇게 대답했다.
다음 날, 양군은 중간 지점인 오계산 앞에 마주 보고 진을 벌였다.
양군이 진을 세우자 조조는 용봉 정기를 두 줄로 벌여 세우고는 말을 타고 문
기 아래 나서 세 번의 북 소리가 울리기를 기다렸다. 왕으로서의 위엄을 드러내
기 위해 북을 세 번 울리게 한 것이었다. 조조는 유비의 진영 쪽을 보며 소리쳤
다.
"유비는 앞으로 나와 내 말을 들어라!"
이에 유비는 유봉,맹달과 여러 장수들을 거느리고 천천히 말을 몰아 진의 앞
쪽에 나섰다.
조조가 그런 유비를 채찍을 들어 가리키며 소리쳐 꾸짖었다.
"유비는 어찌하여 은혜와 의리를 잊고 조정을 거스르는 역적이 되었느냐?"
유비도 서슴없이 소리쳐 조조를 꾸짖었다.
"나는 대한의 종친으로 천자의 조서를 받들어 너를 치는 것이다. 너는 위로는
황후마마르 해쳤으며 그그로 왕이 되어 참람하게도 천자의 수레와 의장을 마음
대로 쓰고 있으니 너야말로 역적이 아니고 무엇이냐?"
그 말을 듣자 조조느 벌컥 성이 나 죄우를 돌아보며 소리쳤다.
"서황은 어디 있는가? 어서 저 놈의 목을 베어 오라!"
조조의 성난 외침을 듣고 서황이 달려나갔다. 이에 유비는 유봉으로 하여금
서황을 맞게 했다.
그런 후 유비는 서황과 유보이 맞붙어 싸우는 걸 보지도 않고 말머리를 돌려
영채 안으로 들어가 버리고 말았다. 유봉 또한 서황과 싸우다 그를 당할 수 없
다는 듯 말머리를 돌려 달아났다.
유봉이 달아나는 걸 본 조조가 급히 장졸들을 재촉했다.
"유비를 사로잡으라. 그를 사로잡는 자는 서천왕으로 삼을 것이다."
조조의 외침을 듣자 조조군의 장수들이 함성을 지르며 유비의 진 쪽으로 달려
갔다.
조조의 장수들이 대군을 이끌고 밀려들자 초군은 둑이 무너지듯 ㅎ어져 영채
는 물론 말과 무기도 모두 팽갱치고 달아났다.
조조군은 촉군을 뒤쫓다 말고 버린 말과 버린 물건들을 거두어들이기에 바빴
다. 조조가 그 모양을 보자 급히 징을 쳐 군사들을 불러들이게 했다. 징 소리에
하는 수 없이 진으로 되돌아온 장수들은 어리둥정한 얼굴로 물었다.
"저희들이 유비를 사로잡을 참이었는데 대왕께서는 어찌하여 급히 군사를 불
러들이십니까?"
"의심스러운 것이 있어 군사를 거두게 한 것이다. 축군이 한수를 등지고 영채
를 세웠음이 의심스럽고 싸움터에서 꼭 필요한 말과 병기를 버리고 달아나는 것
또한 의심스럽다. 급히 군사를 물리도록 하라."
조조는 장수들에게 그렇게 말한 뒤 전군에게 영을 내렸다.
"촉군이 버린 물건을 하나라도 줍는 자가 았으면 목을 베리라! 모든 군사는
물러나도록 하라!"
촉군이 달아난는 것을 거지승로 패한 척하는 것으로 봄 조조가 신중을 기해
내린 영이었다.
그러나 공명은 조조가 자기 꾀에 자기가 넘어가기를 기대하고 있던 참이었다.
기다린 대로 좌연 조조는 지나친 의심으로 군사를 물러나게 하였고, 이때를 기
다린던 공명느 깃발을 높이 쳐들어올리게 했다.
그 깃발을 본 유비가 중군을 휘몰아 조조 쪽으로 달려왔다.
뿐만 아니었다. 왼쪽에는 황충이, 오른쪽에는 조운이 각기 군사를 이끌어 왔
다.
유비와 황충 그리고 조운이 세 갈래로 짓쳐들자 싸우기 전부터 이미 물러나고
있던 조조군은 그대로 무너지며 달아나기에 바빴다.
조조는 달아나면서 장수들에게 일렀다.
"군사들에게 남정 땅으로 도망쳐 그곳에서 모이게 하라!"
그러나 남정도 조조의 뜻대로 갈 수 있는 곳이 못 되었다. 조조가 남정으로
향하려고 앞을 보니 남정으로 가는 다섯 갈래의 길에 이미 불길이 치솟고 있었
다.
이미 장비와 위연이 그 길을 막고 불을 지른 것이었다.
장비와 위연은 낭중을 그들 대신 지키려고 온 엄안에게 그곳의 방비를 맡긴
후 구나슬ㄹ 두 갈래로 나누어 밀고 들어가 남정을 빼앗은 것 있었다.
남정이 적의 손에 떨어진 것을 알자 조조는 크게 놀랐다. 조조는 뒤돌아볼 겨
를도 없이 황망히 말을 채우쳐 양평관으로 달렸다.
유비는 조조를 뒤쫓으며 곧장 남정,포주에 이르러 그곳 백성들을 안심시킨 후
공명에게 물어 보았다.
"어찌하여 이번 싸움에서 조조가 이토록 쉽게 허물어졌소?"
공명이 소리 없이 웃으며 대답했다.
"조조는 원래 의심이 많은 사람입니다. 옛말에 '지모 있는 자는 오히려 그 지
모에 자신이 빠진다'는 말이 있습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아무리 군사를 잘 부린
다 하나 의심이 잦으면 패하는 일도 많습니다. 저는 조조의 의심 많음을 알고
그 의심을 거꾸로 이용해 쉽게 이길 수 있었습니다."
유비가 마음 속으로 감톤하며 고개를 끄덕이다 다시 공명에게 앞일에 대해 궁
금하다는 듯 물었다.
"지금 조조가 양평관으로 쫓겨났으니 그 평세가 외로운 지경이 되었소. 군사는
앞으로 어떤 계책으로 그를 물리치겠소?"
"제게 이미 정해둔 계책이 있습니다."
공명이 서습없이 대답하더니 장비,위연 두 장수르 불러 영을 내렸다.
"두 장군은 곧 두길로 군사를 이끌어 조조의 양도를 끊도록 하시오."
장비와 위영이 영을 받들어 군사를 이끌어 가자 공명은 다시 황충과 조운을
불렀다.
"두 장군은 각기 한 떼의 군마를 이끌고 가서 양평관 주위의 산에 불을 지르
도록 하시오."
이에 황충과 조운도 각기 길을 안내할 향도관을 앞게원 군마를 이끌오 갔다.
한편 양평관에 이르른 조조는 그날로 군사를 풀어 유비의 동정을 살피도록 했
다.
다음 날이 되자 군사가 달려와 알렸다.
"지금 촉군이 멀고 가까운 갯길을 모두 끊고 나무를 베어다 불을 지르고 있습
니다. 그러나 군사들은 어디에 있는지 보이지 않습니다."
조조는 왜 촉군이 얼른 싸우러 오지 않고 숨어서 나무를 불태우고 있는지 까
닭을 알 수 없었다. 잠시 생각에 잠기고 있는데 또 한 사람이 달려와 알렸다.
"장비와 위연이 군량을 약탈해 가고 있습니다."
조조는 그제야 촉군이 자신들의 양도를 끊으려는 속셈임을 알았다. 그곳의 군
량마저 빼앗긴다면 큰 이리 아닐 수 없었다. 조조는 장수들을 둘러보며 물었다.
"누가 가서 장비를 대적하겠는가?"
"제가 가겠습니다."
허저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자 조조는 반색을 하며 그에게 일렀다.
"그대는 날랜 군사 1천을 뽑 양초를 싣고 오는 군사들을 호위해 오도록 하라."
허저는 곧 1천여 기를 이끌고 양평관을 출발했다. 허저가 가느 도중 양초를
식고 오던 관원과 만나게 되자 관원은 기쁨을 감추지 못하며 말했다.
"장굼께서 오시지 아니하셨던들, 이 양초는 양평관까지 아르지 못했을 것입니
다."
어림군의 대장인 허저가 직겁 군사를 거느려오자 해량관은 안도의 한숨을 쉬
며 술과 고기를 내어 바쳤다. 허저는 우선 양초가 안전한 것을 보자 기분이 흡
족하였고, 말을 달려온 뒤라 갈증이 나는 터에 술을 보자 마음이 움직였다. 연거
푸 몇 잔을 마시고 나니 취기가 올랐다. 취기가 오르니 다시 술을 청하게 되고
그러다보니 몹시 취해버렸다.
허저는 그제야 몸을 일으키며 수레를 재촉했다. 그러자 해량관이 걱정스런 얼
굴로 만류했다.
"이미 해가 저물어 갑니다. 수레가 지나가야 할 포주 땅은 산세가 험악하여 밤
에는 가기가 어렵습니다. 내일 날이 밝기를 기야려 떠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그러나 이미 술기가 머리끝까지 올라 취흥이 도도해진 허저였다. 호기스런 목
소리로 해량관을 나무랐다.
"걱정하니 말라. 내가 홀로 만 명은 당적할 만한 용맹을 지녔음을 모르는가?
오늘 밤에는 달빛마저 밝으니 양초를 싣고 달빛 아래를 달려 보리라."
허저가 그렇게 큰소리친 후 말을 타고 수레를 거느린 채 앞서 나갔다.
밤 이경 무렵이 되었을 때 수레는 포주의 험한 길에 이르렀다. 길로 접어들어
거의 반쯤 이르렀을 무렵이었다.
홀연 어두운 산그늘에서 북 소리 피리 소리가 요란하게 울리더니 한 떼의 군
마가 달려왔다. 앞장 선 장수는 바로 고리눈에 호랑이 수염의 장비가 장팔사모
를 치켜들고 있었다.
장비는 곧장 말을 몰아와 허저에게 덮쳐들었다. 허저는 장비를 맞아 칼로 춤
추듯하며 맞서ㅆ. 그러나 이미 크게 취해 있던 허저는 손과 발이 떨려 장비의
매서운 공격을 당해 내지 못했다.
싸운 지 수 합이 되지 않아 장팔사모에 어깨죽지를 찔려 몸을 뒤집으며 말 아
래로 떨어지고 말았다. 허저의 군사들은 황급히 달려가 말 아래로 떨어진 허저
를 구해 달아나기에 바빴다.
장비는 허저 군사들과의 싸움보다는 공명의 명에 따라 양초를 빼앗는 일을 더
중히 여겨 그들이 달아나자 뒤쫓지 않고 수레를 거두어들인 후 영채로 향했다.
한편 허저가 크게 다친 채 양초를 빼앗기고 돌아오자 조조도 더 이상 양평관
에 들어앉아 있을 수만은 없다고 여겼다. 겁없이 양초까지 빼앗으며 죄여 오는
유비와 마지막 한판 싸움을 벌이기로 하고 출진 채비를 서두르게 했다. 조조는
의사를 불러 허저의 상처를 치료하게 하고 자신은 대군을 이끌어 유비에게 싸움
을 걸었다.
조조가 대군을 이끌어 오자 유비도 군사르 이끌어 나왔다. 양군은 가긱 둥그
렇게 진을 벌인 가운데 맞섰다. 유비는 유봉을 내보내 싸우게 했다. 유봉이 달려
나오자 조조가 유비를 향해 욕설을 퍼부었다.
"탁군에서 짚신이나 팔아먹던 어린 놈아, 너느 언제나 거짓 자식만 내보내 싸
우게 하느냐! 만약 내아들 황수아가 왔더라면 네놈의 수양아들을 짓이겨 버리고
말았을 것이다."
노란 수염이란 뜻의 황수아란 조조의 둘째 아들 창의 별명이었다.
유봉은 조조가 자기를 수양아들이라고 반정거리며 욕을 하자 화가 치솟았다.
장창을 비껴들고 말을 박차 곧장 조조에게로 달려가 한 창에 찔러 버리려고 했
다.
"서황은 어디 있느냐? 어서 저놈의 목을 가져오라!"
조조가 급히 서황을 부르자 서황은 말을 재우쳐 한 달음에 달려가 유봉을 맞
았다. 한동안 창칼을 맞대 싸우던 중 유봉은 서황을 당해 내지 못하겠다는 듯
슬며시 말을 물리더니 급히 말머리를 돌려 달아나기 시작했다.
조조가 달아나는 우봉을 뒤쫓기 위해 대군을 휘몰았다. 뒤도 돌아보지 않고
달아나기만 하는 유봉을 보니 조조는 문득 의심이 일었으나 어느새 촉군의 진
앞에 다다르고 있었다. 그때였다.
촉군의 영채에서 홀연 북 소리, 징 소리가 요란스럽게 울려왔다.
"말머리를 돌려라. 적의 계교다!"
그렇지 않아도 의심일 일던 조조는 분명 촉군의 복병이 있을 거싱가. 짐작하
고 급히 소리쳤다. 앞만 보고 내닫던 군사들에게 갑자기 후퇴령이 내리자 제각
기 다투어 달아나며 넘어지고 떠미는 가운데 짓밟혀 죽거나 상하는 자가 많았
다. 의심 많은 조조를 이용한 공명의 계책이 또 한 번 보기 좋게 맞아떨어진 것
이었다.
조조는 뒤돌아볼 틈도 없이 곧장 양평관으로 달아났다. 서황도 군사들을 이끌
고 조조르 뒤따르고 있는데 촉군은 숨돌릴 틈도 없이 급히 그들을 뒤쫓아 뒤쳐
진 군사들을 찌르고 짓밟았다.
촉군은 양평관 아래까지 말고 들어왔다. 성문을 걸어 잠그었으나 촉군은 물러
나지 않고 거센 공격을 퍼붓기 시작했다. 동문에 촉군이 불을 지르자 불길이 크
게 일었다.
성안의 군사들이 동문의 불길을 잡으려 하는데 서문 쪽에서도 촉군의 함성이
크게 일었다. 놀란 군사들이 서문을 방비하려는데 이번에는 또 남문에서 불길이
활활 일어났다. 뿐만 아니라 북문에서는 북 소리, 징 소리가 요란했다.
조조도 그 지경이 되자 더 이상 양평관에 머물러 있을 수 없다고 여기고 길을
열어 양평관을 버린 채 달아났다.
그러나 달아나는 조조를 촉군이 가만히 놓아둘 리가 없었다. 조조의 뒤를 급
한 기세로 뒤쫓기 시작했다.
조조가 말고삐를 두 손으로 움켜잡고 앞으로 내달으며 한동안을 달리고 있는
데 홀연 앞쪽에 티끌이 자욱이 일며 한 떼의 군마가 나타났다. 조조가 놀라 보
리 앞선 장수는 바로 장비가 아닌가. 얼른 뒤를 돌아바니 자기를 뒤쫓는 장수는
당양 장판 싸움에서 용매을 떨치던 조운이었다. 조조는 눈앞이 캄캄했다.
게다가 이번에는 포주 쪽에서 황충이 한 떼의 군사를 이끌어 달려오는게 보였
다.
좆는 정신을 가다듬고 급히 옆길을 뚫어 달아났다. 조조의 군사들은 촉군과
싸울 엄두도 못내고 다만 조조만을 보호해 달아날 뿐이었다.
크게 패한 조조가 촉군의 세 갈래 군사르 따돌리고 가까스로 야곡 계곡으로
접어들었다.
그런데 맞은편에서 또 티끌이 자욱하게 일며 한 떼의 군마가 달려오는 것이
아닌가.
"만약 저 군사들이 촉군이라면 나는 이제 끝장일 수밖에 없다."
숨이 턱에까지 찬 조조가 한중의 계곡에서 자신도 모르게 스스로를 단념하는
순간이었다.
그런데 조조가 절망적인 눈으로 마주 오는 군사를 바라보니 뜻밖에도 앞정 선
장수는 둘째 아들 조창이었다.
조창의 자는 자문이었는데 어릴 때부터 말타기와 활쏘기를 잘했다. 뿐만 아니
라 힘이 천하장사라 맨주먹으로 호랑이를 때려잡은 일이 있었다. 그러나 조조는
무예만 밝히는 조창을 타일렀다.
"네가 글읽기느 마다하고 활쏘기, 말달리기만을 좋아하니 그것은 필부의 용맹
에 지나지 않는다. 글공부를 멀리하고 어찌 귀한 사람이 될 수 있겠느냐?"
조창은 아버지의 걱정스런 말에 서슴없이 대답했다.
"대장부로 태어났으면 마땅히 위청,곽거병의 발자취를 배워 그 공을 사막에까
지 세우고 수십만 대군을 이끌어 천하를 종횡해야 할 것입니다. 어찌 한가하게
책이나 읽어 박사나 되라 하십니까?"
또 이런 일도 있었다. 조조가 아들 둘을 모두 불러놓고 앞으로의 뜻하는 바를
하나하나 ㅜㄹ어 보았다. 조창의 차계가 되자 그는 주저하지 않고 대답했다.
"저는 장수가 되겠습니다."
"장수가 되어서 어찌하겠는가?"
"갑옷을 입고 창을 들어 어려움을 맞아도 주저하지 않고 사졸들의 앞장을 서
겠습니다. 뿐만 아니라 상을 내리고 벌을 내림을 엄중히 하여 믿음을 잃지 않겠
습니다."
조조는 그 말을 듣고 기쁜 듯 껄걸 소리내어 웃었다.
지난 해에 대군이 반란을 일으켰을 때 조조느 조창에게 군사 5만을 주어 평정
하게 했다. 조조는 떠나는 조창에게 깨우쳐 주었다.
"집 안에 있을 때는 너와 나는 아들과 아비 사이이나 나라일을 받들때는 군신
의 사이가 된다 법에는 사사로운 정이 잇을 수 없으니 너는 이 점을 가슴에 새
겨야 한다."
조창을 떠나면서 아버지 조조의 말씀을 가슴 깊이 새기고 대북으로 갔다.
싸움터에 나선 조창은 언제나 앞장 서서 싸웠으며 군사들도 그런 조창을 위해
서라면 목숨도 돌보지 않고 싸웠다. 조창은 상건 땅까지 밀고 들어가 북방을 모
두 평정하고 있었다.
그 무렵 조창은 아버지 조조가 싸움에 져 양평관으로 쫓겨났다는 말을 듣고
급히 군사르 이끌어 구원하거 온 것이었다.
조조가 야곡 계구에서 뜻밖에 조창르 만나게 되자 저승에서 아들을 만난 듯
반사웠다.
"나의 아들 황수아가 왔으니 내 반드시 유비를 깨뜨리겠다."
조조는 힘이 솟아 군사를 되돌려 그곳에다 영채를 세웠다. 우선 영채를 세워
군사를 수습한 뒤 다시 유비와 싸울 채비를 하기 위함이었다.
유현덕 한중왕에 오르다.
유비는 여러 장수들의 강력한 권유에 못 이겨 스스로 한중왕의 자리에 오르
고, 이를 알리는 표문을 천자에게 바친다. 이의 소문을 들은 조조는 손권에
게 밀서를 보내고, 손권은 관우에게 청혼을 넣게 한다.
조조가 아들 조창이 이끌어 온 구사 5만과 함께 야곡에 새로이 영채를 세웠다
는 소식은 곧 유비의 귀에도 들어갔다. 유비는 여러 장수들을 불러놓고 물었
다.
"누가 가서 조창과 싸우겠는가?"
"제가 나가겠습니다."
유봉이 선뜻 나섰다. 지난번 조조가 친아들인 조창을 잔뜩 추켜세우고 자신은
수양아들이라며 업신여기던 일이 생각나 화가 치밀었던 유봉이 었다.
"이번에는 저도 보내 주십시오."
그러자 맹달이 또 나섰다. 우비는 고개를 끄떡이더니 입을 열었다.
"그럼 그대들 두 사람이 함께 가도록 하라. 과연 누가 공을 세우나 두고 보리
라."
유비는 두 사람의 공명심을 부추긴 후 각기 군사 5천을 주며 떠나게 했다. 이
에 유봉이 앞장 서 가고 맹달이 그 뒤에 군사를 이끌며 따랐다.
촉군이 밀려오자 조창도 군사를 이끌어 가 맞섰다.
유봉은 조창을 보자 한칼에 벨 듯한 기세로 달려나갔다. 유봉과 조창이 창칼
을 맞댄 지 불과 수합이 되지 않아 누가 보아도 알 수 있게 그 싸움의 향방은
뚜렷해졌다. 유봉이 기세는 좋았으나 조창의 맞상대가 되기에는 무예가 한 수
아래였다. 유봉이 급히 말머리를 돌려 돌아오고 대신 맹달이 급히 말을 몰아나
가 조창을 맞아 싸우려 할 때였다. 홀연 조창의 뒤쪽이 크게 어지러워지기 시작
하였다.
뜻밖에 마초와 오란이 두 갈래로 군사를 거느려 조창의 뒤를 덮친 것이었다.
맹달도 기회를 놓치지 않고 군사를 이끌어 조창군에게로 밀려들었다. 그야말로
불시에 앞뒤로 적을 맞게 된 조창은 어찌할 줄을 몰라 우왕좌왕하고 있었다.
마초의 군사는 오랫동안 싸움터에 나가지 않고 쉬어온 터라 그 기세가 자못
날카로웠다. 많은 군사가 죽고 상하는 가운데 조창이 길을 열어 달아나다 문득
오란과 맞닥뜨렸다. 조창은 오란을 맞아 불과 2, 3합을 맞부딪친 뒤 창을 쳐들어
한창에 그를 꿰고 말았다. 조창이 적장을 창으로 찔러 말 아래로 떨어뜨리자 군
사들은 기세를 올리며 다시 촉군과 싸우기 시작했다. 이에 촉군과 조창군은 한
동안 혼전을 벌였다.
"군사를 물리도록 하라."
조조가 싸움을 지켜 보다 조창이 앞뒤로 협공을 받고 있음을 보고 영을 내린
것이었다.
조조는 조창이 군사를 거두어오자 야곡 어귀의 영채를 지키며 군사를 움직이
지 않았다. 양군이 서로 마주 보며 군사를 머무르게 한 지도 며칠이 흘러가고
있었다. 조조의 마음은 답답할 뿐이었다.
군사를 거두어 돌아가자니 촉군이 비웃을 것이고, 그렇다고 앞으로 나아가 적
을 치자니 촉군이 점점 늘어나는데다 호랑이 같은 마초도 은근히 두려웠다. 나
아가지도, 물러나지도 못하고 있는 가운데 조조는 답답한 얼굴로 생각에 잠겨
있었다.
"저녁 진지를 가지고 왔습니다."
그때 포관(요리사)이 조조에게 닭탕을 바쳤다. 조조가 무거운 마음으로 닭탕을
먹다가 그릇 속에 들어 있는 계륵(닭의 갈비)응 건져내다 문득 생각나는 바가
있어 쓴웃음을 지었다. 계륵이란 원래 먹기 불편할 뿐 아니라 먹을 것도 없었다.
그렇다고 버리거나 남에게 주자니 아까운 것이 아닌가. 그게 바로 '계륵'인 것이
다. 조조는 이번 싸움과 한중땅이 바로 계륵과 같다는 생각이 퍼뜩 든 것이었
다. 국토가 넓지도 않은 대단찮은 한중 땅이지만 버리기가 아깝다 보니 지금은
오도가도 못하는 처지가 된 것이 아닌가.
이때 장막을 들치고 하후돈이 들어와 물었다.
"오늘 밤의 군호(암호)는 무엇이라 했으면 좋겠습니까?"
그날 그날 저녁마다 군호를 정하기로 되어 있어 하후돈이 그걸 물으러 온 것
이었다.
"계륵, 계륵이라고 하라."
닭갈비를 보고 있던 조조가 무심코 그렇게 말했다. 하후돈은 조조가 서슴없이
말하므로 의미심장한 뜻이 담긴 말일 거라고 지레 짐작하고 장수들에게 군호를
전했다. 이에 그날 밤 진중의 암호가 계륵임을 알게 된 관원들 중 행군주부 양
수는 거느린 군사들에게 일렀다.
"너희들은 각기 짐을 꾸리도록 하라. 곧 이곳을 떠나게 될 것이다."
양수가 거느린 군사들은 이 뜻하지 않은 말을 듣고 의아스런 가운데도 서둘러
짐을 싸기 시작했다. 이 모양을 엿본 군사 하나가 하후돈에게 이를 알렸다. 하후
돈이 깜짝 놀라며 불러들인 후 물었다.
"공은 어찌하여 군사들에게 별안간 짐을 꾸리라고 하셨소?"
그러자 양수가 가만히 말했다.
"오늘 밤 군호를 들어보니 위왕께서 곧 군사를 물리실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원래 계륵이한 먹자니 먹을 것도 없고 그렇다고 버리자니 아까운 것이지요. 지
금 우리의 싸움이 바로 그런 형국입니다. 앞으로 나아간댔자 이길 가망이 없고
무러서면 촉군의 비웃음을 사게 됩니다. 그러나 지키고 있어도 아무런 이득이
없습니다. 그래서 위왕께서는 이 싸움을 마치 계륵 같다고 여기신 것입니다. 그
러니 차라리 일찍 돌아가느니만 못하지요. 두고 보십시오. 내일이면 위왕께서 틀
림없이 군사를 물리실 것입니다. 그때 급히 부산을 떠는 것보다 미리 채비를 해
두려고 짐을 꾸리는 것입니다."
하후돈으로서는 양수의 말을 듣고 헤아림에 그저 감탄할 뿐이었다.
"참으로 용하시오. 공기야말로 위왕 전하의 마음 속을 훤히 들여다보고 계신
듯하오."
하후돈은 고개를 끄덕이더니 그가 거느린 군사들에게도 짐을 꾸리게 했다. 하
후돈이 그러니 다른 장수들인들 그대로 있을 수가 없었다. 모두 거느리는 군사
들에게 짐을 꾸려 돌아갈 채빌르 서두르게 했다. 군사들은 모두 고향으로 돌아
간다는 말에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조조는 그날 밤도 무거운 마음으로 잠을 이루지 못하고 있다가 동부(의장용으
로 만든 강철 도끼)를 들고 진중을 돌아보고 있었다. 조조가 진을 돌다보니 군사
들이 모두 짐을 싸고 있었다. 깜짝 놀란 조조가 급히 장막 안으로 들어와 하후
돈을 불러들였다.
"어찌 된 일인가? 지금 군사들이 짐을 싸고 있는데 대관절 누가 돌아갈 채비
를 하라고 하였는가?"
"주부 양수가 대왕 전하의 뜻을 미리 헤아려 돌아갈 채비를 하므로 저도 그를
따랐습니다."
하후돈이 어리둥절한 얼굴로 대답했다.
"그럼 양수를 불러들이라!"
조조가 싸늘한 목소리로 명했다. 양수가 불려 오자 조조는 험악한 얼굴로 양
수에게 짐을 싸게 한 까닭을 물었다. 양수는 서슴없이 계륵에 대한 뜻을 풀이하
며 덧붙였다.
"미리 전하의 뜻을 헤아려 짐을 싸게 했습니다."
그 말에 조조는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호통을 쳐 양수를 꾸짖었다.
"네 어찌 감히 함부로 말을 지어 내어 군사들의 마음을 어지럽히려 드느냐!"
조조는 그 말과 함께 도부수들을 불러 매서운 목소리로 영을 내렸다.
"이 자를 끌어내 목을 벤 후 그머리를 진문 밖에 높이 내걸어 함부로 터무니
없는 말을 하는 자들의 본보기로 삼으라."
천하의 재사 양수는 그 재주만 믿고 오만스럽게 처신하다 스스로 죽음을 앞당
기고 말았다.
사실, 양수는 비상한 재주를 지닌 반면 그 재주를 믿어 담이 컸고, 그 재능이
항상 조조를 능가하여 조조를 거슬린 적이 많았다.
일찍이 이런 일이 있었다.
조조가 업군의 후궁에 화원을 꾸미게 했다. 화원이 다 만들어지자 조조가 둘
러보더니 잘됐다 못돼싸 말 한 마디 없이 문 위에다 '활'자 한 글자를 써놓고 돌
아갔다.
"무슨 뜻일까?"
조경사도 벼슬아치들도 모두가 조조의 뜻을 몰라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러나
양수는 단번에 그 뜻을 알아재고 웃으며 말했다.
"문에다 활자를 썼으니 '넓을 활'자가 되오. 이는 승상께서 화원의 문이 너무
넓은 것을 싫어하신 것이오."
"과연 그렇군."
"모두가 양수의 말을 듣고 감탄하며 담을 고치고 문을 좁힌 후 다시 조조를
청했다. 조조가 화원 문을 본 후에 빙그레 웃으며 물었다.
"누가 내 뜻을 짐작하고 이같이 고치라고 했는가?"
"주부 양수가 가르쳐 주었습니다."
"과연 뛰어난 헤아림이다."
조조눈 입으로는 그렇게 양수를 칭찬했으나 조금 전까지의 흡족해 하던 표정
은 사라지고 말았다.
또 한번은 이런 일이 있었다. 북쪽 변방에서 양의 젖으로 만든 타락죽(오늘날
의 우유 가공품같이 생긴 죽)한 합을 조조에게 바쳤다.
조조는 붓을 들어 '일합락'이라고 써둔 뒤 문갑 위에 올려 두었다. 그런데 마
침 양수가 들어와 그걸 보고는 그곳에 있는 사람들과 한숟갈씩 나누어 먹어 버
렸다.
조조가 그것 보고 양수에게 물었다.
"그대는 어찌하여 이 죽을 먹게 했는가?"
양수가 빙긋 웃으며 거침없이 대답했다.
"승상께서 합위에다 '한 사람이 한 입씩 먹는 타락죽"이라 쓰셨으니, 제가 어
찌 승상의 뜻을 어길 수 있겠습니까?"
'일합락'에서 '합'자를 풀어 쓰면 '인일구'가 되고 앞의 일자와 합치면 곧 '한 사
람이 한 입씩 먹는 타락죽'이 된다.
조조는 양수의 번뜩이는 재치에 겉으로는 유쾌하게 웃었으나 마음속으로는 두
려운 나머지 미워하고 꺼려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조조는 항상 자기를 해칠 사람이 있을까 하여 두려워했다.
가까이에 있는 신라들로 믿지 못해 거짓말로 위협했다.
"나는 꿈을 꾸다가 사람을 죽이는 경우가 있으니 내가 잠들었을 때 가까이 오
지 않도록 하라."
그런 어느 날 조조가 낮잠을 자는데 이불이 침상에서 미끄러져 떨어졌다. 가
까이서 조조를 모시던 신하 하나가 급히 달려가 이불을 덮어 주는데 조조가 벌
떡 일어나더니 칼을 뽑아 그 신하를 베어 버렸다.
조조는 다시 침상에 누워 코를 골며 잠을 잤다. 얼마 뒤에 조조는 잠에서 깨
어나더니 짐짓 놀란 얼굴로 물었다.
"누가 나의 근시를 죽였는가?"
신하들이 떨리는 목소리로 본 대로 대답했다. 조조는 깜짝 놀라며 한바탕 슬
피 울더니 죽은 신하를 후하게 장사지내 주도록 했다. 그 이후부터는 조조에게
잠이 들면 가까이 있는 사람을 죽이는 습관이 있는 것으로 여겨 조조가 잘 때는
가까이에 다가가는 사람이 없었다.
그러나 양수만은 조조의 속마음을 헤아리고 있었다. 조조가 본보기로 죽인 근
시의 장례식 날, 양수는 그 사람의 죽음을 가엾게 여겨 관을 가리키며 조상하는
말을 했다.
"승상께서 꿈 속에 자네를 죽인 것이 아니라 자네가 꿈을 꾸다가 죽은 것일
세."
양수가 조조의 거짓말을 그렇게 빗대어 말했고, 그 말은 조조의 귀에도 들어
갔다. 조조는 그 이후로 더욱 양수를 꺼려하고 멀리했다. 양수가 지나치게 자신
의 속마음을 꿰뚫어보고 있어 감탄의 마음이 어느 새 강한 시샘과 같은 미움으
로 변해 마침내는 그를 귀찮은 존재로 여겼다. 양수가 조조의 심기를 거스린 일
은 그뿐만 아니었다.
조조는 위왕에 오르고 나서 누구를 세자로 책봉할까 하고 아들들을 눈여겨보
고 있었다. 조조의 셋째 아들 조식은 평소 양수의 식견이 뛰어남을 알고 그를
청해 밤새도록 얘기하기를 즐겨했다. 조조는 그때 셋째 아들 식의 재주를 눈여
겨보던 터라 그를 세자로 삼으려 했다.
그런데 맏이 조비는 이 낌새를 눈치채고 조가현령이며 재주가 남다른 오질을
불러 이일을 의논하려 했다.
그러나 그가 부중에 드나드는 것이 남에 눈에 띌까 걱정이 되었다. 생각다 못
한 조비가 오질을 큰 대광주리 속에 넣고 숨긴 뒤 비단이라 속이고 부중으로 들
였다. 그런데 눈치 빠른 양수가 그 일을 알아채고 곧 조조에게 달려가 일러 바
쳤다.
"조가현령 오질이 바구니에 몸을 숨겨 왕자님의 부중을 드나들고 있습니다."
조조는 그 말을 듣자 즉시 사람을 시켜 조비의 집을 살피도록 했다.조비는 자
기가 감시를 받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자 걱정스런 얼굴로 오질에게 말했다.
"그대가 드나드는 것을 아버님이 아신 모양이오. 집 주위를 살피고 있으니 어
찌했으면 좋겠소?"
오질은 조금도 놀라는 기색 없이 태펴스럽게 말했다.
"조금도 걱정하지 마십시오. 내일은 광주리에다 잔뜩 비단을 담아서 들여오도
록 하십시오. 그러면 지난번의 일도 의심받지 않게 됩니다."
이에 조비는 다음 날 오질의 말대로 광주리에 비단을 넣어 들여왔다. 조조가
살피러 보낸 사람이 달려와 그 광주리를 뒤져보니 정말 비단만 잔뜩 들어 있었
다. 살피러 온 자가 그 사실을 조조에게 말했다.
그 말을 듣자 조조는 양수에게 엉뚱한 의혹을 품고 더욱 미워했다.
'양수가 비를 모함하려 드는구나.'
조조는 양수에게 아무리 재주가 있다하나 형제간의 세자 책봉 문제에까지 끼
어들어 다툼이 일게 하는 자라 여겨 그를 언젠가는 죽여 없애야겠다고 작정했
다.
하루는 조조가 조비와 조식의 재간을 실험해 보기 위해 업군의 성 밖으로 심
부름을 보냈다. 그리고는 즉시 성문을 지키는 문리를 은밀히 불러 엄하게 영을
내렸다.
"어느 누구를 가릴 것 없이 오늘은 성문 밖으로 나가지 말라."
문리가 조조의 영을 받고 나간 후, 큰아들 조비는 성문을 나가려 했으나 문지
기가 내보낼 리 없었다. 조비는 끝냐 성문 밖으로 나가지 못하고 그냥 조조에게
로 돌아왔다. 조식이 그 말을 엿듣고 급히 양수를 불러 이일을 의논했다. 양수가
조식에게 일러 주었다.
"왕자께서 왕명을 받든 몸인데 어찌 막을 수가 있겠습니까? 만약 굳이 막는다
면 두말 없이 목울 베도록 하십시오."
조식은 양수의 말을 듣고 성문으로 갔다. 문지기가 가로막자 조식은 양수가
이른대로 문지기를 꾸짖으며 칼을 뽑아 그의 목을 베오 버리고 성문을 나갔다.
조조는 그 얘기를 전해 듣고 조비보다는 조식을 세자 감으로 마음 속으로 점
찍게 되었다. 그러나 양수가 조식에게 가르쳐 준 이 사실은 오래가지 않아 조조
의 귀에 들어가고 말았다.
"그 일은 모두 양수가 일러 주었습니다."
누군가가 조조에게 일러 바치자 조조는 크게 노했다. 자신은 물론 아들들까지
도 양수는 조식을 위해 이른바 '답교'를 만들어 주었는데 조조가 뭐든 물을 때
그 물음에 따라 대답할 열 가지를 마련해 준 일이었다.
조조는 가끔 군사를 부리는 일과 나라 다스리는 일을 조식에게 물어 보았는데
그럴 때마다 조식의 대답은 거침이 없었다. 조조가 처음 한두번은 그런 조식을
어여삐 여겼으나 점차 의심이 들기 시작했다.
그런데 조비는 아우 조식이 아버지의 물음에 거침없이 대답하는 것 보고 조식
의 신하를 매수하여 양수가 가르쳐 준 '답교'을 훔쳐 내게 했다.
조비는 양구의 '답교'를 손에 넣자 조조에게 갖다 바쳤다.
'양수 이놈이 어찌 감히 이리도 나를 속이는가!"
이러한 일이 있은 후 조조는 양수를 죽이기 위해 기회를 엿보고 있던 중이었
다. 그런데 이번에 또 양수가 나서 군사들의 짐을 꾸리게 하여 조조가 모른는
사이에 전군을 술렁이게 한 것이었다. 이에 조조가 군사들의 마음을 어지럽혔다
는 죄목으로 양수를 죽이니 그의 나이 아깝게도 서르세 살이었다.
재주 때문에 스스로 그 무덤을 판다는 말 그대로 그의 죽음은 그 재주가 불러
들인 액운이었음에 틀림없다. 그의 재눙은 애석한 것이었으나 재사로서의 지모
와 함께 슬기로운 처세가 부족했던 양수였다.
특히 조조 아들들의 다툼에 분별없이 끼여들오 그 재기를 부리다가 조조에게
결정적인 낙인이 찍힌 점 등은 그가 스스로 불러들인 화였다. 식견이 높은 재가
는 안다고 하여 모두를 말하지 않는다. 조조가 세자 책봉을두고 모사 가후에게
그 일을 물었을 때 가후는 끝내 자신의 생각을 밝히지 않고 다른 일에 비유하여
조조 스스로가 결정을 내리게 한 것만 비교해 봐도 그렇다.
양수가 부자간의 세자 책봉에 이르기까지 그 재주만을 믿고 끼여들었으나 아
무리 있더라도 뒷날 간신의 문초를 면치 못할 것이리라. 게다가 패전 중인 진중
에 미리 회군할 것을 헤아려 채비를 하게 한 것은 군사를 부리는 법도로 봐서도
용납될 리가 없는 일이었다.
뒷날 사람들이 그의 죽음을 시로 남겨 한탄했다.
영특한 양덕조
대를 이어 벼슬길에 오르는데
붓을 들면 용이나 뱀이 내닫듯 하고
가슴에는 뛰어난 글 가득하네
입을 열면 사람들이 놀라고
말로써 다투면 모든 기재들도 못 당하네.
뛰어난 재주 그릇되이 부려 몸 망치니
어찌하여 군사를 물릴 데 함부로 입을 열었나.
조조는 양수의 목을 베고 양수의 말을 듣고 경솔히 짐을 꾸린 하후돈까지 잡
아들이게 하여 짐짓 성난 목소리로 호령했다.
"하후돈도 그대로 둘 수는 없다. 그의 목도 베도록 하라."
그러자 여러 장수들이 한결같이 입을 모아 만류했다.
"아니 됩니다. 하후돈은 일찍이 대왕께서 위병을 일으키실 때부터 내왕을 받든
공이 큰 맹장입니다. 적을 앞에 두고 그런 장수를 죽이는 것은 좋지 않습니다."
조조도 진정으로 하후돈을 죽이려는 것은 아니었다. 장수들이 말리자 마지 못
한 듯 하후돈을 꾸짖어 물리치며 전군의 흩어진 마음을 추스리려는 듯 영을 내
렸다.
"내일은 일제히 나아가 적을 깨뜨리겠다. 그리 알고 채비를 갖추라!"
다음 날이 되자 조조는 군사를 이끌어 야곡 어귀로 나아갔다. 조조가 군사를
이끌고 촉군에서는 위연이 군사를 마주 이끌고 나왔다.
"너의 유비의 종노릇을 그만두고 내게 항복하도록 하라!"
위연도 질세라 조조를 소리쳐 꾸짖었다.
"나라를 훔친 도적이 어찌 내게 항복하라 하느냐? 네놈이야말로 항복하면 목
숨을 살려 주겠다."
조조는 방덕을 내보내 위연과 싸우게 했다. 방덕이 말을 달려나와 위연과 맞
붙자 한바탕 어지러운 싸움이 벌어졌다. 한동안 팽팽하게 싸움이 어우러지고 있
을 때 영체에서 불길이 오르며 군사 하나가 달려가 조조에게 급보를 전했다.
"마초가 도 영채를 급급하여 불을 질렀습니다."
그 소리를 들은 장졸들은 얼굴색이 달라지며 혼란에 빠졌다. 조조도 눈앞이
캄캄했으나 다시 정신을 가다듬고 칼을 뽑아들어 외쳤다.
"만약 물러나는 자가 있으면 누구든 가리지 않고 목을 베리라!"
조조가 외치며 모든 장수들을 촉군에게 휘몰자 군사들도 기세를 올리며 장수
들의 뒤를 따랐다. 조조군이 있는 힘을 다해 촉군에게 덮쳐들자 촉군도 그 기세
를 당하지 못한 듯 크게 어지러워지며 달아났다.
위연의 군사가 물러나자 조조는 군사를 돌려 영체룰 짓밟고 있는 마초를 치게
했다.
조조는 말을 달려 높은 언덕으로 올라가 양군의 싸움을 살피는데 홀연 한 떼
의 군마가 조조가 있는 언덕을 향해 치달아오고 있었다.
"위연이 예 있으니 조조는 꼼짝말고 게 섰거라!"
위연이ㅏ 소리치며 시위에 살을 매겨 조조에게 쏘아붙였다. 순식간ㅇ의 일이
라 조조는 미처 손쓸 겨를이 없었다. 화살이 조조의 얼굴 한가운데를 향해 날아
가 보기 좋게 맞추자 조조는 외바디 비명과 함께 몸을 뒤집으며 말 아래로 떨어
지고 말았다.
위연이 그걸 보고 한칼에 조조를 칠 기세로 언덕 위로 말을 박찼다. 위연이
번뜩이는 칼날을 쳐들어 조조를 찍어려 할 때 한 장수가 나는 듯이 내달으며 소
리쳤다.
"우리 주공을 다치게 하지 말라!"
위연이 고개를 돌려보니 조조의 아장 방덕이 무서운 기세로 달려오고 있었다.
위연은 그런 방덕을 맞아 싸웠다. 그러나 방덕이 죽기로 작정하고 힘을 다해 밀
어붙이니 위연도 그 기세에 눌려 말머리를 돌려 물러나고 말았다. 이때 마초도
이미 군사를 물린 뒤였으므로 방덕은 가까스로 조조를 구해 돌아갈 수 있었다.
방덕이 조조를 구해 영채로 돌아온 후 상처를 살피니 화살은 바로 조조의 인
중(코 밑)에 맞았기 ㄸ문에 앞니 두 개가 부러져 있었다. 위원이 달려와 치료를
하고 있는데 조조는 그제야 양수가 군사를 물릴 일을 알고 짐을 꾸리던 일이 생
각나 그의 생각이 옳았음을 알았다. 조조는 양수의 시체를 거두어 후하게 장사
지내라고 이른 후 전군에 영을 내렸다.
"물러날 테니 떠날 채비를 하도록 하라."
조조는 방덕을 후군으로 삼아 촉군이 뒤쫓을 것에 대비케하고 전거(담요를 깐
수레)에 누워 좌우 호분군의 호위를 받으며 돌아갔다.
조조군이 야곡에 이르렀을 때였다. 홀연 산 위의 양쪽에 크게 불길이 일면서
군사들의 함성이 산골짜기를 메웠다. 조조 군사들은 당황하여 어찌할 바를 몰랐
다.전거에 누워 있던 조조도 군사들과 다를 바가 없었다. 가까스로 목숨을 구해
군사를 물리는 판에 다시 촉군이 몰려오니 조조도 얼굴색이 달라졌다.
지난날 동관에서 수염을 자르며 달아나던 일과 적벽 싸움에서 목숨이 바람 앞
에 깜박이는 촛불 같았던 때가 되살아났다.
공명은 조조가 군사를 되돌릴 것을 미리 헤아려 마초와 위연을 비롯한 여러
장수들에게 10여 리 길에 이르러 군사들을 이끌어 매복케 했던 것이었다. 게다
가 위연의 화살에 맞아 촉군을 보기만 해도 간담이 서늘해져 달아나기에 급급한
조조군의 사기도 꺾일 대로 꺾여 있었다.
그런 판에 양쪽 산에 불길이 오르는데다 뒤쫓아온 군사는 마초가 거느린 복병
이 아닌가. 조조는 마초군에게 직밟히는 군사들을 호령하며 밤낮없이 달려 수천
의 군사가 껐인 후에야 가까스로 경조땅에 이르러 겨우 숨을 돌리 수 있었다.
조조가 싸움에 크게 패해 한중을 버리고 다친 몸으로 허도로 달아나자 유비는
여러 고을을 거두어들이게 했다. 맹달·유봉·왕평으로 하여금 상용일대의 고을
을 빼았게 했다. 조조가 유비에게 쫓겨가자 신탐을 비롯한 그곳의 태수들은 유
비가 군사를 내어 치기 전에 먼저 항복해 왔다.
유비는 여러 고을을 거둔 후 한중을 평정하자 백성들을 안심시키고 삼군에게
는 사을 내려 치하하니 기뻐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그 중에서도 가장 기뻐한 것은 유비를 따라다니던 장수들이었다. 의지 할 곳
없이 떠돌며 온갖 고초를 겪어야 했던 장수들은 이제 서천·한천의 광대한 따을
얻게 되어 바야흐로 오와 위에 버금가는 세력을 지니게 되니 그 기쁨은 말할 것
도 없었다.
이에 여러 장수들은 은연중에 유비를 한중의 천자로 떠받들자는 생각이 있었
으나 감히 입 밖에 낼 수가 없었다. 섣불리 입을 열었다가 한의 황숙인 유비에
게서 어떤 불호령이 떨어질지 몰라 기회를 엿보다 군사공명에게 먼저 그 뜻을
비쳤다.
"이제 서천과 한ㅊ의 모든 백성들은 모두 주공의 덕을 흠모하여 마음속으로
한중의 왕위에 오르시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안으로는 백성들을 편안케 하시고
밖으로는 한중을 넘보는 적을 평정해 주기시를 진정으로 바라고 있으니 바라컨
데 주공께 말씀드려 백성들의 뜻을 살피시게 하십시오."
공명은 장수들의 말을 듣자 끄덕이며 말했다.
"나도 생각해 둔 바가 있소. 그대들은 조금만 더 기다리도록 하시오."
공명은 장수들에게 그렇게 이른 뒤 법정을 비롯한 여러 사람을 거느리고 유비
에게 ㅊ아가 정중한 목소리로 말했다.
"지금 조조가 나라의 권세를 마음대로 휘두르고 있어 백성들에게는 임금이 없
는 것과 다름 없습니다. 주공께서는 이미 인의와 덕망이 사해에 가득하시며 또
한 서천과 동천의 따을 두셨으니 모자람이 없는 모든 것을 겸비하셨습니다. 이
제 하늘의 뜻에 응하고 백성들의 바람에 따르실 ㄸ입니다. 제위에 오르시어 올
바른 명분과 밝은 주장을 펴시어 나라의 역적을 치시되 일이 더디면 좋지 않습
니다. 좋은 날을 택해 재위에 오르도록 하십시오."
공명의 말에 유비가 놀란 얼굴로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군사의 말씀은 옳지 않소. 내 비록 한실의 종친이나 아지 호도에 천하가 계시
니 아직 신자의 몸이오. 만약 왕위를 참칭한다면 무슨 명분으로 조조의 반역을
친다고 하겠소?"
"그렇지 않습니다. 지금 천하는 무너지고 찢기어 영웅들이 일어나 제각기 한
곳을 차지하고 있습니다. 또한 천하의 재주 있고 덕 있는 이들은 제각기 목숨을
돌보지 않고 용의 비늘을 끌어잡고 봉의 날개를 붙들듯 밝은 주인을 섬겨 공명
을 이루려 하고 있습니다. 주공께서는 명분을 따라 의를 지키려고만 하시다가는
모든 사람들의 바람을 저버리는 것이 됩니다. 바라건대 주공께서는 깊이 헤아려
주십시오."
공명이 다시 유비에게 권했다. 그러나 유비는 여전히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했
다.
"그럴 수가 없소. 내가 외람되게 존위에 오를 수는 없소이다. 천천히 여러 사
람의 의견을 모아 보도록 합시다."
그러자 그 자리에 있던 다른 사람들이 입을 모아 말했다.
"주공께서 만약 끝내 물리치신다면 여러 사람들의 마음이 흩어지고 말 것입니
다."
공명은 유비의 마음을 바꿀 수 없음을 알고 천자의 위를 권하는 대신 다리 제
안했다.
"주공께서 평생 동안 위를 근본으로 삼아 오셨기에 천자의 존호가 꺼려진다면
왕위에 오르시도록 하십시오. 이제 형주와 양양 그로고 동천과 서천을 거느리고
계시니 한중왕으로 오르시도록 하십시오."
그러나 유비는 선뜻 허락하지 않았다.
"그대들이 나를 한중왕으로 받들려하나 천자의 조서를 받들지 않으니 어찌 왕
위를 참정할 수 있겠소?"
"지금 조조가 조정의 일을 좌지우지 하고 있으니 천자께 상주한들 무든 소용
이겠습니까? 잠시 권도(그때의 형편에 따라 일을 처리함)를 취하십시오. 지금은
법도만을 따르실 때가 아닙니다.
공명이 조정의 형편을 들어 유비에게 바로 왕위에 오르도록 권했다. 그러자
보다못한 장비가 소리쳤다.
"성씨가 다른 사람들도 너나없이 ㅁ 임금이라고 떠들어대는데 형님은 한조의
종친이 아니시오? 한중왕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바로 천자의 자리에 오른들 안
될 것이 무엇이겠소?"
"너는 여러 말 하지 마라!"
장비가 소리치며 나서자 유비가 목소리를 높여 꾸짖자 주위는 잠시 찬물을 끼
얹은 듯 조용해졌으나 이윽고 공명이 다시 간곡히 청했다.
"주공께서는 우선 형편에 따라 한중왕에 오르신 뒤에 천자께 표문을 올려도
늦지 않으실 것입니다."
"아니 되오. 그럴 수 없소이다."
유비는 그래도 왕위에 나아가는 것을 마다했다. 한조를 받들 것을 평생을 통
해 다짐해 왔던 그인지라 원술이나 조조처럼 선뜻 황위를 받아들일 수가 없는
듯했다.
그래도 공명은 물러서지 않았다. 거듭하여 여러 장수들과 간청하니 우비도 사
양하다 못해 마침내 왕위에 오르는 것을 허락했다.
건안 24년 7월 어느 날, 유비는 한중왕의 위로 나아갔다.
면양(섬서성, 한중의 서쪽)따에 식전을 세우고 주위 9리에 걸쳐 단을 쌓았다.
다석 방위에다 각기 기치와 의장을 벌여 세우고 모든 신하들이 벼슬에 따라 차
례대로 늘어선 가운데 허정와 법정이 유비를 단 위로 모셨다. 유비는 왕의 의장
을 갖춰 입고 남쪽을 향해 앉아서 왕관과 옥새를 받은 후 모든 벼슬아치들로부
터 하례를 받으며 한중왕이 되었다.
유비는 왕위에 오르자 곧 후사를 세우고 여태껏 자신을 따랐던 신하들의 벼슬
을 높였다.
아들 유선을 세자로 삼은 다음, 허정을 태부로 받들었다. 법정은 상서령으로
높이고 공명은 그대로 군사로 삼되 나라 안팎의 일과 군무를 모두 관장케 했다.
관우, 장비, 조운, 마초, 황충은 오호대장으로 삼아 다른 장수들보다 그 벼슬을
높였다. 위연은 한준태수로 삼아 그 공을 기리고 다른 벼슬아치들에게도 각기
그 공에 따라 벼슬을 높였다.
유비는 거느리던 이들을 한 나라의 완전한 신하의 체제로 갖춘 후 허도의 천
자께 표문을 올려 스스로 한중왕이 되었음을 아뢰었다.
-비(유비)는 한낱 재주 없는 신하로 상장의 무거운 책임을 맡아 삼군을 거느려
밖으로 나와 있으나, 역적을 없애고 왕실을 바로 세우지도 못했습니다. 폐하의
거룩한 가르치심을 오래도록 이루지 못하여 천하가 아직도 어지러우니 잠 못 이
루는 근심으로 날을 보내고 있습니다. 지난날 동탁이 난을 일으킨 이래 흉포한
무리가 벌떼처럼 일어나 천하를 어지럽히며 백성들을 괴롭혔습니다.
그러나 폐하의 성덕에 힘입어 신하와 백성들은 충의로 뭉쳐 그들을 치고 혹은
하늘이 벌을 내려 다행히 포악한 무리와 역적들이 모두 얼음 녹듯 사라졌습니
다. 다만 오직 조조만이 남아 나라의 권세를 마음대로 휘두르며 날뛰고 있습니
다.
-신은 일찍이 거기장군 동승과 함께 조조를 쳐없애려 하다가, 일이 탄로나 뜻
을 이루지 못하고 동승만을 죽게 한 바가 있었습니다. 신은 그때 가까스로 몸을
빼내었습니다만 근거 없이 떠돌다 보이 충의는 마음뿐, 조조가 황후를 시해하고
황자를 독살하는 극악무도한 짓을 저지르기에 이르렀습니다. 신이 비록 뜻을 함
께할 사람을 모아 치고자했으나 나약하고 모자람이 많아 여러 해 동안을 아무것
도 이룬 바 없이 되고 말았습니다. 이러다 헛되이 죽어 나라의 무거운 은혜를
저버리게 되지나 않을까 하여 자나깨나 탄식하며 두려운 나날을 보내고 있습니
다.
-이제 신이 거느리는 무리들은 옛 우서(서경)를 따르고자 합니다. 우서에서 말
한바 '천자께서 구족을 높이 대하고 그들은 천자를 힘써도우니 제위와 왕위를
서로 주고받음을 길이 전한다'고하였습니다. 또한 주나라가 2대 하,은에 걸쳐 종
친이 아닌 제희를 왕으로 세웠으나 주나라를 보살핀 것은 종친인 진과 정이었습
니다. 뿐만 아니라 한고조께서도 나라가 흥하니 자제분들을 왕으로 높여 아홉
나라를 일으키실 때 여씨에게 왕위를 내리셨으나 마침내 불순한 뜻을 품은 그를
베고서야 나라의 대통을 안정시킨 바 있습니다.
-지금 조조는 바르고 곧은 이들을 미워하고 그를 따르는 무리들에 둘러싸여
흉측한 본성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그러나 종친들은 나약하고 폐하의 일족이 벼
슬자리에 있지 못한 터라 폐하를 도울 길이 없습니다. 사태가 이 지경에 이르렀
으니 이에 지난날의 법도에 따라 신을 높여 잠시 대사마 한중왕으로 받들려 하
고 있습니다.
-신이 엎드려 거듭 생각해 보니 나라에서 받은 은혜가 두터운데다 한지방을 맡
아 다스리는 무거운 자리에 있으면서도 이루어 놓은 것이 없어 실로 부끄럽기
그지없사옵니다. 그런 중에 다시 높은 위에 오른다는 것은, 스스로 죄스러운 마
음과 사람들로부터 비난을 받을까 하여 마다했습니다. 그러나 신을 받드는 무리
들이 의를 내세우며 권하고 우기기를 거듭하였습니다.
-이에 신이 물러서서 다시 한 번 생각해 보니 아직 역적을 치지 못했으며 나라
의 어지러움을 바로잡지도 못하여 장차 사직마저 기울려고 하니 실로 두려움과
근심으로 머리가 깨어질 듯합니다.
-그러할진대 만약 성조를 평안히 세울 수만 있다면 비록 끓는 물이나 타는 불
속에라도 뛰어들어야 하며 뼈가 부서져 가루가 된다 한들 마다하지 않아야 할
때라 여겼습니다. 그리하여 따르는 이들의 말을 좇아 먼저 옥새를 받아들이기에
이르렀습니다.
-이제 폐하를 우러러 작호를 칭하려 하니 위는 높은데다 폐하의 은혜는 두터
워 걱정되고 두려웁기가 마치 낭떠러지에 선 듯하옵니다. 다만 힘과 정성을 다
해 천자를 위해 군사를 기르고 충의로운 이들을 모아 하늘의 뜻과 때에 따라 흉
악한 역적을 쳐없애 사직을 바로 세울 것을 맹세하나이다. 이에 삼가 엎드려 표
문을 올립니다.
유비가 천자께 올린 표문의 내용은 그러했다.
조정에서 허락하든 않든 표를 올리지 않고 왕위에 오를 순 없다고 여긴 유비
였다. 표문이 허도에 이르자 업군에 있던 조조가 그 소문을 듣고 펄적 뛰며 노
했다.
"무엇이라고? 돗자리나 짜서 팔던 촌놈이 어찌 감히 이럴수가 있다는 말이냐?
내가 맹세코 이놈을 죽여 없애리라!"
그렇게 소리친 조조는 이어 좌우에게 소리티며 영을 내렸다.
"모든 군사들을 일으켜 서천과 동천으로 쳐들어갈 것이니 채비를 갖주도록 하
라. 그놈과 결판을 내고야 말리라!"
그러자 한 사람이 나서 말했다.
"대왕께서는 한순간의 노여움을 참지 못하시어 대군을 이끄시고 멀리 나아가
셔서는 아니 됩니다. 제게 한 가지 계책이 있으니 화살 한 대 쏘지 않고도 유비
가 촉 땅에 머무른 채 스스로 화를 입게 할 수가 있습니다. 유비의 군사들이 지
쳐 힘이 다하기를 기다리셨다가 한 장수를 보내시면 서천은 절로 평정되고 말
것입니다."
조조가 보니 그는 바로 사마의였다.
"중달은 부슨 고견이라도 있다는 말인가?"
군사를 내기로 마음을 정한 터에 그가 출진을 반대하며 나서자 조조는 목소리
를 높이며 물었다.
"강동의 손권과 유비를 먼저 싸우게 하십시오. 손권은 유비에게 그누이를 시
집 보냈다가 유비가 없는 틈을 타 몰래 동오로 불러들였습니다. 또 유비는 형주
를 손권에게 빌린다고 했으나 돌려 주지 않았습니다. 그런 까닭에 이들 두 사람
은 서로 이를 가는 사이가 되었습니다. 그러니 이제 말 잘하는 한 사람을 뽑아
밀서를 전하게 하며 손권을 달래보도록 하십시오. 손권으로 하여금 형주를 치게
하면 유비는 부득이 동천과 서천의 군사를 뽑아 형주를 구원하려 할 것입니다.
그때를 틈타 대왕께서 군사를 거느려 한중과 서천으로 밀고 들어가신다면 유비
는 양쪽을 다 막지못해 위태로운 지경에 이르게 될 것입니다."
조조가 듣고 보니 무릎이라도 치고 싶은 계책이 아닐 수 없었다.
"실로 좋은 계략이오."
조조는 기뻐하며 곧 만총에게 밀서를 써 주며 강동으로 가 손권을 만나보게
했다.
만총이 강동으로 건너가 손권 만나기를 청하자 손권은 그를 보기 전에 여러
모사들을 불러 놓고 의논했다.
"조조가 사람을 보냈는데 어찌하면 좋겠는가?"
그러자 장소가 손권에게 전했다.
"위와 우리 오는 원래 아무 원수진 일이 없었는데 제갈량의 말에 넘어가 여러
해 동안 서로 싸움이 그치지 않았습니다. 이로 인해 백성들의 고달픔은 이만저
만이 아니었습니다. 이제 만총이 온 까닭은 반드시 우리와 손을 잡자는 뜻일 터
인즉 주공께서는 예를 갖추어 대하도록 하십시오."
손권ㄴ도 유비가 한중을 손에 넣고 스스로 왕위에 오른 사실을 이미 알고 있
었다.
지난날 빌려간 형주를 돌려 주지 않는데다 이제는 언제 유비가 강동을 넘볼지
도 모를 일이어서 걱정을 하고 있던 터였다. 이에 손권은 장소의 말을 받아들여
만총을 맞아들이도록 했다.
만총이 들어와 손권에게 절을 올리자 손권은 그를 귀한 손님으로 대하며 맞
이 했다.
만총이 조조의 글을 올리며 말했다.
"원래 오와 위는 원수진 일이 없는데 유비 때문에 사이가 벌어진 것입니다. 이
에 위왕께서는 특별히 저를 보내시어 장군께서 형주를 치시면 위왕께서는 한천
으로 군사를 내시어, 유비의 머리와 꼬리를 동시에 쳐부수겠다는 말씀을 드리도
록 하셨습니다. 유비를 깨뜨린 뒤에는 그땅을 반씩 나눈 뒤 서로 침범하지 않을
것을 맹세하자고 하셨습니다."
그말을 들은 손권은 조조가 보낸글을 보니 만총이 한 말과 같은 뜻이 담긴 글
이었다.
손권은 그 자리에서 대답을 하지 않은 채 잔치를 베풀어 만총을 대접한 뒤 역
관에 나가 편히 쉬게 하고 모사들을 불러 의견을 물었다. 그러자 고웅이 먼저
입을 역었다.
"비록 우리를 꾀는 소리이긴 하나 그 말이 이치에 어긋나지는 않습니다. 주공
께서는 조조의 말대로 유비의 머리와 꼬리를 치기로 하고 만총을 돌려 보내도록
하십시오. 다른 한편으로는 사람을 몰래 강 건너 형주로 보내 관운장의 동정을
살핀 다음 도모하셔야 할 것입니다."
그러자 제갈근이 의견을 내었다.
"제가 듣기로는 관운장이 형주에 머무른 후에 유비가 그에게 아내를 얻게 해
주어 아들과 딸을 하나씩 낳았다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딸이 어려 아직 혼처를
정하지 않았다 하니 제가 가서 주공의 세자와 혼인하도록 청해 보는 게 어떻겠
습니까? 만약 운장이 허락하면 바로 운장과 함께 의논해 힘을 합쳐 조조를 칠
것이고 그렇지 않고 거절하면 그때는 조조와 힘을 합해 형주를 치는 것이 어떻
겠습니까?"
제갈근의 말에 손권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손권은 유비를 마땅치 않게 여기
고 있었으나 제갈근의 말대로 된ㄴ다면 형주를 다시 찾을 구실을 만들 수도 있
는 일이었다.
그러나 그보다도 만약 서천을 먼저 취한다 하더라도 조조가 약속을 지켜 줄지
에 대한 의문을 품지 않을 수 없었다. 이에 손권은 제갈근의 말부터 먼저 따르
기로 했다.
손권은 만총에게는 조조의 말대로 군사를 내겠다고 약속하고 헌도로 돌려보낸
후 한편으로는 제갈근이 성 안으로 들어가 관우를 보고 예를 올리자 관우가 궁
금한 듯 찾아온 용건을 물었다.
"그래 자유께서는 무슨 일로 또 오시었소?"
지난번 형주의 세 고을이라도 되돌려달라고 찾아온 그에게 관우는 엄포를 놓
아 쫓아보냈었는데 그가 다시 또 왔으므로 무뚝뚝한 목소리로 물었다. 이에 제
갈근이 웃음 띤 얼굴로 대답했다.
"특별히 양가에 좋은 인연을 맺고자 왔습니다."
"좋은 인연이라니? 그게 무슨 말씀이오?"
"우리 주인 오후께서 아드님 한 분을 두셨는데 매우 총명하십니다. 마침 장군
께 따님이 한 분 계시다는 말을 듣고 저를 보내 혼인을 청하게 하셨습니다. 양
쪽 집안이 맺어져서 힘을 합해 조조를 친다면 그보다 더 좋은 일이 어디 있겠습
니까? 군후께 청하오니 부디 좋은 뜻으로 헤아려 주시기 바랍니다."
관우는 제갈근의 말이 끝나자 붉어진 얼굴로 노기를 띠며 소리쳤다.
"범의 딸을 어찌 개의 자식에게 시집 보낼 수가 있겠느냐! 만약 그대 아우의
낯을 보지 않았다면 나는 선 채로 그대의 목을 잘랐을 것이리라. 여러 말 말고
물러가라!"
관우는 그 호령과 함께 좌우에 명해 제갈근을 내쫓게 했다. 제갈근도 더 이상
입을 열 처지가 되지 못했다. 다만 머리를 싸매고 달아난 듯 물러나고 말았다.
<제8권에서 계속>
책,영화,리뷰,
삼국지 7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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