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분만 만나 보세요, 가슴이 따뜻해집니다
유재건
책머리에
세상에 태어난 지 꼭 60년이 되는 날 아침에 책상 앞에 않았다. 인생을 보람
있게 잘 살아온 후에 회고록을 써야 할 테지만 아직은 그런 나이가 아니라는 생
각이 문득 들었다. 아직도 선한 목적을 정해 놓고 열심히 자신의 뜻을 펴야 할
때라서인지는 몰라도 지난날을 회상하며 감상에 젖을 시간도 없고 그럴 경황도
없는 것이 현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유치한 나 자신의 이야기를 엮어 내놓은 것은 `인생은
60부터`라는 말을 믿고 지금부터 다시 시작하는 마음으로 삶의 방향을 잡아 보
려는 소망 때문이다.
뛰어난 삶을 독보적으로 살아왔기 때문에 무언가 보여줄 것이 있는 것은 물론
아니다. 다만 한 우물을 파지 못하고 이일 저일을 해오면서 겪은 시련과 고난은
남못지 않게 모진 것이었다. 공군 장교를 제대하면서 찍힌 `요시찰 인물` 상표는
제대 후 취직할 때와 유학 갈 때 모두 어려움을 주었고, 계속되는 미국에서의
변호사시험 낙방과 이철수 재판 과정에서 받았던 불이익 등이 너무 소중한 자료
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해서 이런 경험들을 일종의 보고 형식으로 묶어 보았다.
지금 생각해 보면 지난날 나의 삶에는 부끄러웠던 일도 적지 않았으며 웃지
못할 실수도 많았던 것으로 기억된다. 그러나 좋았던 시절이나 힘들었던 시절을
막론하고 나는 늘 낙관적인 생활 자세를 잃지 않으려고 무진 애를 쓴 기억이 난
다. 내가 소속한 집단이나 이웃에게 즐거움과 보람을 전해 주는 역할을 감당하
기 위해 애써 노력하며 살아왔기 때문에 나에게는 시련과 역경 같은 단어는 오
히려 충만하고 보람있는 삶을 위한 발판으로 생각된 적이 많았다.
나는 인권 변호사로서, 대학 교수와 학장으로서 그리고 대기업의 사장으로서
다양한 경험을 쌓았다고 자부한다. 일생 동안 시민단체에서 자원봉사를 줄곧 해
오고 있다. 학생 때 농촌봉사 캬라반운동으로 시작해서 국제시민봉사회, 유네스
코학생회, 교포문제연구소, 교통유자녀회, 경실련, 교육민회, 고엽제환자돕기, 사
랑심기, 선면회, 선덕원 및 시민단체기금 등에서 뜻 맞는 선후배들과 인생과 사
회를 배우며 살아가고 있다. 이와 같은 경험들이 MBC 시사토론과 KBS 심야토
론의 사회자로 다방면의 폭넓고 깊은 토론 진행을 큰 실수 없이 몇 년간 진행할
수 있게 했다고 생각한다.
우리 사회의 여론 주도층과 사회 각분야의 지도층 인사 1,200명과의 토론 결
과, 나는 우리 사회가 당면한 문제점과 그 해결 방안을 종합적으로 검토하고 정
리할 수 있었으며, 이를 우리 정치에 접목시켜 우리나라의 나갈 길을 합리적으
로 제시하면서 잃어버렸던 정치권의 신뢰와 애정을 되찾는 일에 앞장서 보겠다
는 뜻을 안고 정계에 입문하게 된 것이다.
해야 할 많은 일들 중에서 선거혁명과 정당의 민주화가 제일 시급하다고 믿는
나로서는 내 출신지인 성북구로부터 새로운 시도를 모색하기 시작하였다. 돈 안
드는 선거와 지역구 관리 그리고 민도 높은 선진 정치문화를 가꾸어 가는 것이
얼마나 힘들고 외로운 길인가를 절감하지만 내가 성북구에서 이런 풍토를 마련
하는 것이야말로 우리 정치에서 시험무대라는 일종의 소명감을 가지고 꾸준히
지역 주민들과 머리를 맞대고 때로는 토론하고 때로는 설득도 해가면서 작고 소
중한 정치혁명을 해 나가고 있다고 믿는다.
“5분만 만나 보세요, 가슴이 따뜻해집니다”가 지난번 선거에서의 표어였다.
이 표어만큼 나의 일생이나 생활 방식을 잘 표현하는 것도 없으리라는 생각에서
이 책의 제목으로 감히 정해 보았다.
부끄러운 삶을 이야기하다 보니 본의 아니게 우리 조상 어른들과 가족들에게
실례가 되는 얘기도 한 것을 인정한다. 미수를 지내신 홀어머니께 무한한 감사
를 드린다. 영원한 반려자이며 천생배필인 나의 아내 김성수와 삼남매의 적극
후원에 감사한다. 아울러 국회와 지역구 사무실의 직원들과 시공사의 사장님 이
하 관계자 여러분께 깊은 감사를 드리고 싶다.
1997년 9월 16일
동소문동 우거에서
유재건
다윗의 신화
정치가 없는 땅
“이 땅엔 정치가 없다. 오직 정치인만 존재한다.”
최근 발간된 어느 계간지의 권두언에서 단언적으로 선언한 글이다. 일간지의
중견 언론인 두 분도 “이 땅엔 정치가 없다.”고 시론을 썼다. 정치가 사라졌고
행정도 어디 갔는지 보이지 않는다고 지탄하며, 그렇기에 정책은 물론 없다는
논리다. 무서운 말이다. 정치가 실종되었다면 나 같은 송사리 정치인은 정치를
하기 위해 정치권에 발을 들여놓은 것이 아니라 정치인이 되기 위해 어려운 관
문을 뚫고 국회의원이 된 것이란 말이다.
우리나라의 정치인들이 국민의 신뢰와 사랑을 잃어버린 지 오래인 것 같다.
국민들의 삶의 편의와 사람답게 생을 즐길 수 있는 각종 법과 제도를 만들고,
국민의 귀중한 재산과 생명을 보호해야 하는 정치권이 국민들의 비난을 받고도
한마디 항변도 하지 못하는 꼴이 되었다.
나는 어려서부터 가르치는 일을 주로 하다가 변호사로, 교수로, 기업체의 전문
경영인으로 그리고 우리 사회의 여러 가지 쟁점들을 골라 시시비비를 가리며 이
사회의 나갈 길을 바르게 찾아보기 위한 방송 시사토론을 진행하는 일에 종사하
다가 뒤늦게 정당에 발을 들여놓았다. 그래서인지 많은 사람들로부터 왜 늦은
나이에 정치에 몸을 담았느냐, 정치권 진입의 동기가 무엇이냐는 질문을 많이
받았다.
나는 어려서부터 정치학을 전공했기 때문에 정치권에 대한 관심이 남달랐다.
그러나 정치에 입문하는 것엔 엄두도 못 내었다. 나같이 마음 약하고 뚝심이 없
는 사람은 정치권에서 배겨나기 어려울 것이라는 막연한 두려움이 있었기 때문
이다.
그러던 내가 새로 창당한 새정치국민회의에 참여하게 되었다. 내 삶의 엄청난
변화였다. 가히 혁명적인 결단이 아닐 수 없다. 대학의 학장으로 그리고 법학과
교수로 혹은 변호사로 큰 풍파 없이 편안히 지낼 수 있는 내가 평탄치 못한 정
치권에 진입했기 때문이다. 새 정당에 참여할 것을 권고 받고 참 많은 생각을
했다. 고민스러운 결단을 내리기까지 꽤 많은 날들을 보낸 후 아내와 의논한 끝
에 최종 단안을 내렸던 것이다.
그것은 편안하게 정치할 수 있는 여당이 아니라 야당에 들어간다는 사실이 내
주위 친구들을 놀라게 했다. 많은 친구들이 만류했다. 나 같은 성격으로는 한국
정치에 맞지 않는다는 게 만류의 이유였다. 우선 한국 사회에서 정치를 하려면
돈이 있어야 하고 정치 기술이 있어야 하는데, 두 가지 조건 모두 나는 낙제라
는 것이다. 친구들이 말하는 정치 기술이란 권모술수나 잔꾀 같은 것을 의미했
을 것이다. 정직하고 진솔하게 그리고 겸손하게 행동해서는 정당 조직에서 밀린
다는 논리였다.
한국 사회와 한국 정치계의 문제 중 새로운 신인 정치의 유입과정과 방법에
문제가 많다는 것은 그간 학자들이 꾸준히 지적해온 문제이다. 그러나 해방이
된 지 50여 년이 지났어도 이 문제는 별로 변함이 없이 오늘과 같은 형태가 계
속되고 있다.
실력 있고 양심적인 정의로운 사람들이 이 중요한 정치계에 들어갈 수 없고,
들어가서도 버텨 내지 못한다면 우리나라는 어떻게 될 것인가? 참으로 끔찍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빠르게 변하고 있는 세상에서, 그리고 국경 없는 무한 경쟁
의 새 세기를 맞이하여서는 실력 있고 비전 있는 정치 지도자가 나와야 한다.
그래서 깨끗하고 맑은 사회를 만들어 나가며 국제사회에서 존경받는 자존심 있
는 나라, 경제적으로뿐만 아니라 도덕적으로도 실력 있고 강한 나라가 되게 하
려면 새로운 피(세력)가 수혈되어야 하는데 누가 이 일을 위해 나설 것인가?
민주주의는 정당정치이며 정당정치는 여당과 야당이 정치의 파트너로, 국정의
동반자로 같이 튼튼하고 건실하게 발전해야 하며 그렇게 하기 위해 야당에 실력
있고 국민의 존경을 받는 정치인들이 고루 탄생해야 한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이런 생각 끝에 나는 김대중 총재가 이끄는 국민회의에 입당할 것을 결심했
다. 우리나라의 정치 지도자 중에 민주화와 힘없는 민중들의 인권을 위해 다섯
번이나 죽을 고비를 넘기면서도 한 번도 뜻을 굽히지 않은 민주 지도자로서, 그
리고 꾸준한 연구와 부지런한 공부로 우리나라를 통일의 길과 경제 부흥의 길로
인도할 수 있는 경력과 경륜이 있는 준비된 지도자, 게다가 도덕적으로 깨끗한
삶을 살아온 김 총재를 모시고 정치를 배우며, 한 번도 이룩해 보지 못한 민주
적 정권교체에 적은 힘이나마 보탬이 되어 보자고 결심하게 되었다. 총재와 당
은 정치 신입생인 나를 부총재로 임명하고 전국구 국회의원으로 국회에 가서 일
할 수 있게 보장해 주겠다고 약속을 했다.
1995년 8월 11일, 새정치국민회의 창당발기인대회가 63빌딩 국제회의장에서
열렸다. 새로운 정당의 지도자인 김대중 총재의 창당 배경과 정당으로서의 비전
등을 강연이 아닌 패널들과의 토론형식으로 꾸며서, 발기인대회의 하이라이트로
삼겠다고 계획하였다. 준비위원장인 임채정 의원과 황주홍 박사, 박우섭 위원장
들과 하루 전날 리허설을 하며 만반의 준비를 다했다.
정당의 발기인대회나 창당대회라곤 생전 구경도 해 보지 못한 내가 새 정당의
시작을 알리는 행사를 의미 있고도 지루하지 않게 진행해야 하는 막중한 임무를
맡게 된 것이다. 어떻게 하면 이 일을 잘 감당할 수 있을까 저녁 내내 이러저러
한 생각을 많이 하였다. 나의 결론은 한 가지였다. 얕은 재주로는 사람을 현혹시
킬 수 없다는 것. 진실하게 모인 사람들에게 진실한 감동을 주려면, 참가자들의
텁텁한 심정을 이해하고 아픈 데를 감싸 주며 가려운 곳을 긁어 주는 심정으로
얘기를 이끌어 가야겠다고 생각했다.
나는 전국에서 몰려온 7천여 명의 발기인들 앞에서 왜 이 시점에 새 정당을
만들어야 하는가? 이 정당은 무엇을 해야 하는가? 국가와 민족을 위한 생활 정
치를 펼쳐 나갈 정책 정당의 발기인이 된 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하는가? 나라를
사랑하고 우리 국민의 아픈 곳을 어루만져 주고 가려운 곳을 긁어 주는 정당의
발기인이 되기를 원하는가? 등의 질문을 던지고 그들의 화답을 들었다.
장내는 열기로 꽉 차고, 새 정당은 지금까지 존재했던 정당과는 색다른 정당
이라는 확신을 갖게 된 당원들과 발기인들의 호응은 놀라울 정도였다. 보람을
느꼈다. 최선을 다해 새로운 정당, 신뢰받고 사랑받는 국민의 정당을 만드는 일
에 적극 참여해야겠다고 다짐했다. 신문에 심야토론 프로 사회자가 야당 발기인
대회에서 사회를 봤다는 기사가 나왔다. KBS 심야토론 담당자들이 어쩔 줄을
몰라하는 것 같았다. 깨끗이 사의를 표했다. 2년여 위원으로 봉사하던 대통령 자
문 정책기획위원회(전 21세기 위원회)에 위원직, 사표를 냈다.
미국 유학 때부터 알고 지내던 서진영 위원장은 나의 입장을 이해하는 것 같
았다. 다음 주부터 새학기 강의시간까지 배정 받은 아내는 학교로부터 강의시간
을 미국 사람에게 맡겼으니 양해하라는 전화를 받았다고 어처구니없어한다. 미
안한 마음이 들었다. 실은 결혼할 때부터 정치를 하지 않겠다고 약속했던 내가
이제 약속을 파기하고 정치에 발을 들여놓게 되었으니, 아내에게는 엄청난 충격
이었을 것이다. 학교에서 잘리고 신문에 기사까지 나오던 날 우리 둘은 엄숙하
게 그 옛날 `정치불입문` 약속 파기식을 거행했다. 그러면서 새롭게 전개될 정치
권의 앞날을 기대 반 두려움 반으로 내다보면서 아내의 손을 굳게 잡았다.
`천국구`에서 `지옥구로`
우리나라에서 국회의원이 되는 길은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전국구로서, 지역
적인 기반 없이 소속 정당의 입후보자들이 얻는 총득표 수에 비례해서 미리 등
록된 전국구 의원 후보자 명단에서 당선되는 방식이다. 이에 비해 지역구 의원
은 특정 지역의 기반에 근거해서 유권자의 직접선거에 의해 다수의 표를 얻은
한 명이 뽑히는, 이른바 소선거구제가 실시되고 있다.
내 경우에는 갑자기 입당했고, 정당 생활의 경험도 없었기 때문에 당연히 전
국구로 원내 진출하기를 원했다. 그리고 당 총재 역시 틀림없이 전국구의 빠른
순번(적어도 5번 이내)으로 공천해 줄 것을 약속하였기 때문에 여기저기서 당
개편 대회가 열릴 때마다 마치 감초 연사처럼 하루에도 두 곳 이상을 다니며 축
사, 격려사를 하고 다녔다.
그럭저럭 연말이 지나고 새해가 되어 1월 2일에 선린 회원(강원용 목사님의
사회 제자)들이 예로부터 지속해 온 것처럼 강원용 목사님 댁에 세배를 드리러
간 적이 있다. 목사님 댁에 조금 늦게 도착하자마자 40여 명의 회원들이 모두
나를 쳐다보며 전국구냐, 지역구냐를 묻는 것이다. 나는, “무슨 소리냐, 지역구
에 아무 준비없이 어떻게 나간단 말이냐?”고 펄쩍 뛰었다. 옆에 앉아 있던 신
낙균 형이 중앙당 간부들의 얘기를 소개한 것이 화근이 된 셈이다.
나가고 안 나가는 것은 나의 문제인데 친구들은 자기들이 흥분해서 찬반 양론
으로 나뉘어서 토론을 벌였다. 목사님이나 옆 친구들의 결론은 이런 것이었다.
이왕 국회의원을 하려면 지역구에서 한번 싸워 이겨야 정치적 생명력이 연장된
다는 것이다. 전국구는 당내에서 힘도 없을 뿐만 아니라, 돈도 없고 조직도 경험
도 없는 유재건이 과연 전국구로서 정치계에서 잘 견뎌 낼 수 있겠는가라는 것
이 그들의 의문이었다.
지역구는 비록 엄청난 위험부담이 있으나 되기만 하면 장래가 밝을 것이라는
의견이었다. 그러니까 본인의 장래 일정을 잘 고려해서 한 번만 할 것이면 전국
구를 고수하고 그렇지 않으면 지역구에 나가 보는 것도 좋겠다고 권고하였다.
특히 김용기 교수는 자기가 도와 줄 테니 지역구로 나가라고 열을 올렸다. 이
친구들은 내가 성북(갑)구에 거명된다는 사실도 이미 알고 있으면서 현역의원과
나를 비교해 가면서 몹시 열띤 토론을 밤늦게까지 했다. 정작 당사자인 나와 아
내는 유구무언인지라 듣기만 하였다.
당의 중진들이 내게 지역구 출마를 권하기 시작하는 분위기가 조성되고 있었
다. 나처럼 좋은 조건을 가지고 이번 기회에 지역구로 나가지 않으면 언제 나가
겠느냐고 몇몇 부총재들이 번갈아 가면서 충고를 했다. 나는 펄쩍 뛰면서 안 된
다고 항변을 하였다. 정작 선거에 나갈 사람은 난데 모두 콩이야 팥이야 제각기
떠들어댔다. 기자들간에도 의견이 양분되었다는 말을 들었다. 일부는, “나가면
안 된다. 전국구를 약속했으면 전국구로 영입해서 스스로 지역구를 찾게 해야지,
3선의 현역 의원이 버티고 있는 곳에 당의 입장만 생각하고 점잖은 사람 하나
병신 만들려고 그러느냐.”고 하면서 반대를 했다. 이에 반해 일부 기자들은 “
나가면 승산이 있다. 성북구 정서가 이제 새 사람을 원하기 때문에 유 부총재
정도가 나가면 괜찮을 것이다.”라는 소수 의견을 냈다는 후문이다.
성북구 내의 시의원 세 명과 구의원 10여 명이 중앙 당사와 일산 김대중 총재
자택으로 찾아가서 나를 공천해 달라고 시위까지 했다는 말을 듣기도 했다. 나
를 지역구로 내보내기 위해 조직국 사람들이 모양새를 갖추려고 지역 구민들을
끌어들였는지는 알 재주가 없다.
어느 날 성북구 의원들에게 거의 납치되다시피 성북구 소재 모음식점으로 끌
려갔다. 10여 명의 시, 구의원들이 모여서 제각기 한마디씩 하기 시작했다.
“새로 정착되기 시작한 지방자치 제도의 바람직한 정착을 위해서도 이 지역
에서 국민회의 출신의 국회의원이 꼭 나와야 한다.” “여러 사람들이 자천 타
천으로 이 지역에 거론되고 있으나 3선 관록의 상대방을 꺾기에는 모두가 역부
족이다.” “유일한 가능성은 유 부총재니까 당을 위해서 용단을 내려 달라.”는
내용들이었다.
아무런 걱정 말고 몸만 나오면 된다고 열을 올리는 의원도 있었다. 조직도 자
금도 필요 없으니 몸만 나오면 된다는 것이다. 내가 경험이 없어 자신이 없다고
하니까, “걱정 마십시오. 우리들이 선거 한두 번 치러 봤습니까? 경험은 필요
없습니다. 우리들만 믿고 그저 오시기만 하면 됩니다.”라는 말만 되풀이하였다.
이런 연유로 해서 지역 구민들의 성화에 못 이겨 지역구로 공천을 받고 이른
바 `지옥구`라고 하는 지역구 후보가 된 셈이다. 이일을 두고 당시에는 말도 많
았다. “김대중 총재가 멀쩡히 잘 있는 사람을 꼬셔다가 전국구를 약속해 놓고
돈이 없다고 지옥구로 밀어냈다.” “그것 보라구. 내 뭐라고 했어. 어떻게 돈도
없는 유재건이에게 전국구 3번을 줘. 나는 애당초 사기 친다고 생각했다구.” “
점잖은 국제 신사 한 사람 또 병신 됐네. 하기야 뭐 한두 사람인가. 늘 그랬으니
까.” “창당 때 부려먹고 신나게 같이 뛰다가 밀리는 거지 뭐.” 이렇게 여러
가지 일설과 억측이 난무했다.
더욱 재미있는 사실은 아무도 내가 당선되리라고 믿는 사람이 없었다는 것이
다. 모두 3선의 현역 의원이 당선될 것이라고 믿고 있었던 것 같다. 나는 최선을
다해서 선거 유세를 하였다. 트럭을 타고 80여 차례나 떠들고 다녔다. 어떤 때는
다섯 명을 앞에 놓고 어떤 때는 아파트를 올려다보면서 눈물로 호소한 적도 있
었다.
출마를 결정한 이상 천국구냐 지옥구냐의 논란은 깨끗이 끝이 났다. 이제는
당선이냐 낙선이냐가 문제였다. 그러나 당신을 위해서 법을 어기거나 남의 눈을
속여 가며 가증스럽게 의롭지 못한 선거운동을 하는 것에는 절대 반대하는 입장
을 보였다. 사실은 이것이야말로 당선에 버금가는 보람이었다고 생각한다.
“5분만 만나 보세요, 가슴이 따뜻해집니다”
성북구 출마가 결정된 후 여러 군데서 연락이 왔다. 경험이 많은 선거기획 전
문회사와 선거 전문가들도 있었다. 선거기획안을 표본으로 보내 주는 회사도 있
을 정도였다. 선거 경험도 없고 조직도 없는 나로서는 전문가의 도움이 절실히
필요했으나, 이들이 요구하는 비용이 너무나 커서 엄두를 못 내고 말았다. 실례
로 간단히 억대가 넘는 액수였다.
총선 출마를 미리미리 준비하고 대비해 왔던 후보들은 벌써 선전책자, 팜플렛,
명함 등 새로운 아이디어로 유권자의 눈을 끌 수 있는 재미있고 참신한 내용물
을 많이 내놓고 있었다. 그러나 나는 돈 많이 드는 전문 기획사나 전문가의 도
움을 아예 포기하고 우리당의 홍보위 부위원장인 전병헌 후배에게 도움을 요청
하였다.
우선 친구들을 대동하고 나와서 내 하소연을 듣고 자문을 해달라고 부탁을 했
다. 강남역 근처에 있는 부산 삼정 한식집에 몇이서 모였다. 이들 중에 성북구
자체를 잘 아는 사람은 없었고, 대개가 일반적인 선거에 경험이 있는 젊은 후배
들이었다. 그 중에 몇 명은 지난 서울시장 선거와 92년 대통령 선거 때 직접 기
획단의 일원으로 혹은 홍보요원으로 뛰었던 경험자들이었다.
그들은 내게 어렸을 때의 경험, 미국에서 재판하던 일, 당에 오기 전에 심야토
론 때의 에피소드 등 이것저것 조서 꾸미듯이 물어보고 내 설명을 잘 듣더니,
약 세 시간 후에 처방을 내놓았다. 그것이 바로 선거 내내 사용했던 나의 주제,
“5분만 만나 보세요, 가슴이 따뜻해집니다.”였다. 그러면서 그들은, “다른 뽀
족한 방법이 없습니다. 부총재님은 그저 많이 만나시기만 하면 이기십니다. 되도
록 많이 만나서 악수를 하십시오. 만나서 따뜻함만 보여 주시면 됩니다. 말씀 잘
하시는 것은 세상이 다 아는 사실입니다. 그저 악수하시고 인간적인 정을 보여
주십시오. 아주 자연스럽게 하실 수 있을 겁니다. 하나도 겁내실 필요 없이 내일
아침부터 동네에 나가셔서 하루에 5천 명과 악수하겠다는 각오로 뛰십시오”
저녁 내내 받은 자문은 이것이 전부였다. 이제는 성북구 현지에 오랫동안 뿌
리를 내리고 살고 있는 유지들과 우리 당 당원들을 만나 봤다. 당원들 얘기는
지난 10여 년간 선거를 몇 번 치르며 번번이 선거에 승리했던 P씨만 잡으면 걱
정 없다는 것이었다. 여러 당원이 모두 같은 내용을 귀띔해 주었다.
그래서 P씨를 만나 도와 달라고 하면서 내가 할 일을 자문해 달라고 했다. 그
랬더니 그저 악수나 잘 하고, 정견발표 잘 하고, 개인 연설 열심히 하면 걱정 없
을 것 같다는 얘기다. 실감이 나질 않았다. 그래서 P씨가 가지고 있는 생각은 무
엇이냐고 물었다. 무슨 선거 전략을 가지고 있는지 알고 싶어서였다. 몇 가지 비
장의 카드가 있다는 대답이다. 선거전이 본격화돼 가면서 상황을 봐서 이 비장
의 카드를 하나씩 쓰겠다면서 내게는 얘기도 해주지 않는다.
나는 아직도 그 비장의 무기를 한 가지밖에 모른다. 그 한 가지는 김대중 총
재의 말씀을 녹음해서 우리 당원들에게 들려 주는 시스템 개발이었다. 김대중
총재의 음성으로,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여러분이 키워 주신 김대중입니다. 내
가 제일로 아끼고 사랑하는 유재건 부총재를 출마하도록 권고했습니다. 지금까
지 나를 아끼고 성원해 주신 여러분께서 이번에 유재건 부총재를 꼭 당선시켜서
우리 당에 힘을 보태 주셔야 하겠습니다. 꼭 부탁합니다.”라는 내용의 몇 초 안
되는 메세지다. 이 음성을 들으면 국민회의 `열성당원`들은 속된 말로 `뿅간다`
는 것이다. 그러나 꽤 많은 총재 지지자들 가운데 나를 잘 몰랐던 사람들에게는
나를 지지하게 되는 계기를 마련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나는 `하루 5천 명
과의 악수`라는 목표를 정해 놓고 새벽부터 뛰었다. 새벽 5시쯤 일어나 정릉 약
수터나 개운산 운동장에 가서 운동하러 나온 유권자들을 만나서 같이 운동하고
인사하는 것으로 일과를 시작했다. 운동이 끝난 뒤엔 간단히 아침을 먹고 전철
역 입구에 서서 출근하는 유권자들에게 인사를 했다.
하루는 정릉4동 버스 정류장에서 인사하며 명함을 전해 주고 있었다. 20대 아
가씨가 급하게 길을 거너오기에 명함을 주면서 “유재건 후보입니다. 잘 부탁합
니다.”라고 인사를 하였다. 그는 거의 내 손을 뿌리치다시피 몸을 돌리더니 받
기를 거절하고 뛰어갔다. 어처구니 없었다. 어른이 주는 것이니 나중에 버리더라
도 일단 받기나 하면 좋으련만, 즉석에서 그렇게 나를 무안하게 만들 필요가 있
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 왜 내가 이렇게 나와서 아들 딸 같은 어린 사람들에
게 괄시를 받아야 한단 말인가, 하는 서글픈 생각마저 들었다. 나는 아직도 버스
를 기다리고 서 있는 그에게 다가가서, “아까는 너무 바쁘셔서 명함을 못 받으
셨죠? 유재건 후보입니다. 여기 명함 한 장 드리겠습니다.”라고 정중히 명함을
건네 주었다. 그는 얼굴이 빨개지며, “감사합니다.”하면서 두 손으로 명함을
받았다. 좋은 교훈을 얻게 되었다. 결코 한 번 거부당했다고 실망할 필요가 없
다. 열과 성을 가지고 다시, 또 다시 시도했을 때 전에 볼 수 없었던 결과를 얻
게 된다는 새로운 교훈을 얻게 되었다. 그 날은 하루종일 기분이 좋았다.
새벽 운동장과 전철역 출근길 인사를 마치면 2천5백 명쯤과 악수를 하게 된
다. 우리 지역에서는 길음동, 성신여대 앞 그리고 한성대 앞 세 군데 지하철역이
있어 번갈아 가면서 아침 출근 길목을 지켜 서서 악수를 했다. 저녁 때쯤 시장
을 돌며 가게 주인과 장보러 나온 주부들과 계속 손이 부르트도록 악수를 하면
밤 늦게까지 약 5천 명의 손을 잡게 된다. 손은 부르트고 목은 갈라진 채 집으
로 돌아와 늘어져 자게 된다.
사형수와 사형수를 살린 사람
첫 번째 합동 정견발표가 3월 31일 일요일 오후 삼선초등학교에서 열렸다. 옛
날에는 돈을 주며 청중을 동원하기가 일쑤였다고 들었다. 나는 우리 운동원들에
게 절대로 사람을 동원하지 말고 세싸움 같은 것도 절대로 하지 말 것을 심각하
게 당부하였다.
어렸을 때 바로 이 성북구에서 저 유명한 조병옥 대 조소앙의 정견발표장에
가서 두 대정객의 열띤 정견발표를 들으며, `나도 언젠가는 저렇게 이 지역을 위
해 대표가 되겠다고 외칠 때가 있겠지.` 하고 생각했던 적이 있었다. 바로 6.25가
나던 그 해 그 소위 5.30선거 때였다. 당시 야당이었던 조소앙 선생이 훨씬 나아
보였다. 그는 그 때도 삼민주의를 주장하셨다. 동네 사람들 얘기는 이승만 박사
가 조병옥 박사를 좋아하니 당연히 조 박사가 될 것이라고 믿는 것 같았다. 그
러나 성북구민으로서의 자존심을 가지고 있는 주민들은 야당 후보인 조소앙 선
생을 뽑았다. 전국에서 제일 유명한 구가 되었고 조소앙 선생은 전국 최다 득표
자가 되었다. 그 이후에 서범석, 고흥문, 조세형, 조윤형, 이철 의원 등을 거쳐가
며 이 지역에서는 혁혁한 야당 의원들을 국회로 보낸 것이다.
이번에 나 역시 야당 후보로 출마를 했다. 우리는 불행하게도 또 하나의 야당
후보와 함께 경합을 벌이게 되어, 불가피하게 누가 더 야당다운가를 가지고 논
쟁도 벌여야 했다.
드디어 첫 번째 합동 정견발표회의 날이 왔다. 후보의 대변인들이 제비를 뽑
아 연설 순서를 짜게 되었다. 사무국장이 나 대신 심지를 뽑았는데 6번을 뽑은
것이다. 민주당 후보가 1번이었고, 신한국당 후보는 네 번째로 그리고 나는 여섯
번째로 정해지게 되었다. 이번에 출마자가 모두 일곱 명인데, 날씨는 춥고 여섯
명이 30분씩 연설을 하면 세 시간이 넘게 되어 몹시 지루한 오후가 될 수 있겠
다 생각했다.
첫 번째 올라간 민주당 후보는 인사하자마자 국민회의의 유재건 후보는 평소
에 존경해 오던 선배인데, 왜 잘 커 가는 후배의 정치 생명의 싹을 잘라 놓기
위해 이 지역에 출마했느냐면서, 부도덕한 선배의 욕심과 우리 당 총재의 후배
죽이기가 손발이 맞아서 이 지역에서 3대째 12년간이나 국회의원을 지낸 자기의
앞길을 막기 위해서 출마했으니, 자기를 다시 뽑아서 본때를 보여야겠다고 목이
터지라고 외치는 것이었다. 더욱 웃기는 일은 자기가 조국의 민주화를 위해 사
형수가 되어 감옥에 있을 때 나는 미국에 가서 호의호식하고 편히 지내다가 이
제 와서 왜 남의 지역을 넘보느냐는 논리를 펴 가며 군중들을 선동하는 것이었
다. 나는 선거 연설을 여러 번 들었으나 처음부터 이와 같이 인신공격으로 나가
는 연설은 그리 흔한 일이 아니기에 속으로 혼자서, `아, 연설은 이렇게 하면 안
되는데, 정견발표장에서 상대방 비방만 하는 연설은 유권자들이 식상해하는데,`
하는 생각을 하며 전날 저녁 때 일을 떠올렸다.
바로 전날 저녁 성북구 선관위 위원장인 김성수 판사와 같이 일곱 명의 후보
자가 모두 한자리에 모여 합동 정견발표를 생산적인 정견발표장으로 만들 것을
약속하면서 인신공격이나 흑색선전은 하지 않기로 서약하고 문서에 서명까지 한
사실이 너무도 생생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까짓 약속이 뭐 그리 중요한 것
이냐는 양 처음부터 나는 심한 인신공격을 받게 된 것이다.
더욱 한심한 것은 후보의 연설이 끝나면 그 후보를 지지하기 위해 동원된 지
지자들(혹은 이들을 박수부대라고도 부른다)을 모두 몰고 자리를 뜬다는 사실이
다. 1번이 끝나니 한 모퉁이가 크게 잘린 듯이 떨어져 나가고 그 다음 번이 끝
나면 또 몰려 나가고, 이런 모양이 계속되는 것이다. 내 순서는 두 시간 반이나
지나서, 끝에서 두 번째가 되니, 운동장 안의 유권자들은 처음에 비해 5분의 1쯤
밖에 안 되는 숫자가 남을 것 같아 마음이 언짢았다. 나를 모르거나 반대하는
사람들이 내 소견을 들었으면 좋을 텐데 하는 생각이 들어 기분이 씁쓸했다.
드디어 내 차례가 왔다. 소개를 받으며 서서히 단상 위로 올라 가는데, 이상한
광경을 보게 되었다. 학교 운동장 밖에서부터 수백 명의 인파가 안으로 몰려들
어 오는 것이다. 어디로 나갔다가 다시 들어오는 사람들인지 아니면 지금 처음
으로 오는 사람들인지 알 수 없으나 어림잡아 5백여 명은 넘게 몰려들어 온다.
갑자기 힘이 나면서 쉰 목소리가 터져 나오는 듯한 기분이 들어서 나는 정중히
인사를 하고 내가 태어나서 자란 곳에서 일생을 봉사하면서 이 지역에 뼈를 묻
을 각오로 고향에 돌아왔다는 말을 한 후에, 어제 선거관리위원장과 후보자들의
약속이 있었기 때문에 타후보의 신상에 관한 얘기는 하지 않고 다만 이 지역이
문화적으로 낙후된 사실을 지적하고 삶의 질을 높이는 생활 정치를 펼치겠다는
소견을 말하고는, 몇 가지 이 지역에 필요한 것들을 조목조목 들어서 나의 정견
과 약속을 설명하였다. 그리고 나서, 인신공격을 받았기 때문에 한두 가지 오해
를 바로잡기 위해 해명을 하겠다고 말한 후, `미국에서의 호의호식과 한때 미국
시민권까지 받고 국적을 버렸던 사람`에 대해 설명을 하였다.
`사실 나는 미국에 유학을 가서 변호사가 되었고 오랜 기간을 살다 한국에서
아주 살 목적으로 7년 전에 영주 귀국한 사실이 있다. 나 스스로 우리나라 국적
을 버린 적은 없다. 미국에서 동포들 변호를 위해 시민권을 얻었던 적은 있으나
한국 국적을 버리지 않았었다. 귀국해서 법무부 법무과에 갔더니, 형식상 필요해
서 이제라도 오전에 국적포기 신청을 내고 오후에 국적회복 신청을 하라는 권고
를 받고 이와 같은 법은 고쳐야겠다는 생각을 하면서 관리들의 지시에 따랐을
뿐이다. 민주당 후보가 민주 회복을 위해 애쓰다 감옥살이를 했다는 얘기를 듣
고 평소 그의 정의로움에 존경을 표해 왔었다. 그러나 나도 미국서 사형수 구명
을 위해 집을 잡히고 6년 반을 무보수로 그의 석방을 위해 시간과 정력을 바친
사람이다. 미국 동포라면 내 이름과 내가 한 일을 다 잘 알고 있다. 나는 조국
앞에 성북구 유권자 앞에 하나도 부끄럽지 않게 설 수 있다. 멀쩡한 사람을 국
적을 버리게 강요하는 잘못된 법은 고쳐야 한다. 무식한 국회의원은 이런 법이
있는지도 모른다. 이번 기회에 실력 있는 국회의원을 뽑아 여러분의 자존심을
살려 달라.`
나는 연설 전에 청중을 향해, `존경하는 여러분, 내가 발표한 후에 또 한 분의
후보께서 연설을 하게 되는데, 제발 나를 지지하고 사랑하시는 여러분께서는 가
시지 마시고 끝까지 저와 같이 남아서 일곱 번째 연사의 정견을 들어 주시면 고
맙겠습니다.`라고 부탁을 했다. 또 한 가지 재미있는 사실은 `유재건 후보` 어깨
띠를 두른 운동원들이 봉투와 집게를 들고 운동장에 떨어진 휴지와 담배꽁초를
집고 있는 장면이었다. 이 아이디어는 배성자 집사의 창안이었으며, 김은혜 자매
와 그의 미국인 남편과 황창호 사장의 분위기 연출이 두고두고 기억된다.
쪽 팔러 다니는 놈은 다 그 놈이 그 놈?
지하철역 인사를 마치고 집에 잠깐 들러서 지역 안에 있는 상가 방문을 계획
하고 청년 당원들과 집을 나섰다. 초등학교 2, 3학년쯤 돼 보이는 어린이 둘이
학교에 가는 길인지 저만치 걸어오는 것이 보였다. 내가 먼저 인사를 청했다.
“어린이들, 안녕. 2번 아저씨 알지?”
“네, 2번 아저씨는 돈암초등학교 졸업생이시라면서요. 우리들의 선배시라고
우리 엄마가 얘기해 주셨어요.`”
“아, 그러니? 아이구 고마워라. 나는 너의 대선배다. 6회 졸업생이니까, 아버
지 어머니보다 더 먼저 졸업했을 거야.”
“그런데 아저씨, 지금 어디 가세요?”
“오 그래. 나를 사람들에게 알려야 하니까 시장으로 명함 돌리고 인사 드리
러 간단다.”
“아, 네. 쪽 팔러 나가시는군요. 알았어요. 사실은 우리 아빠는요. X번 찍는다
고 하셨어요. 그런데 우리 엄마하고 나하고 우리 선배 찍어 드려야 된다고 막
우겼어요. 제가 잘 설명했으니까 걱정 마세요.”
“그래, 고맙다. 좋은 하루 되거라. 그리고 친구들에게도 2번 알지?”
“네, 알았어요. 2번.”
즐겁고 기분 좋은 대화였다. 그렇다. 오늘도 나는 쪽을 팔러 또 나가야 한다.
제대로 선거운동을 할 수 있는 날이라야 고작 15일밖에 안 된다.
시장에 가서 점포 주인들과 주부들을 만나서 대화를 나누며 나를 알리는 일이
오후에는 제일 중요한 일과이다. 우리 구역에는 일곱 개의 재래식 시장이 있다.
길음시장, 아리랑시장, 정릉시장, 돈암시장, 삼선시장, 성북시장 그리고 보문동시
장 등이다. 오늘은 삼선교시장 차례다.
어느 시장이나 상인들은 이구동성으로 장사가 안 된다고 야단들이다. 치마저
고리와 이불 등 한복 전문집이 한 열댓 개 죽 붙어 있는 골목에 들어섰다. 수십
년 동안 변함없이 나란히 붙어 있는 작은 골목 좌우의 점포들이다. 주인아주머
니들을 한군데 모이게 하고 왜 경기가 이렇게 나쁜가, 왜 장사가 안 되는가를
조목조목 설명해 나갔다.
“지난해 우리는 9퍼센트 이상의 경제 성장률을 자랑했습니다. 나라가 9퍼센
트 이상 부자가 되었다고 쉽게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왜 중소기업체
부도율이 이전 해보다 더 높으며, 사장들 스스로 목숨을 끊는 사람이 그전보다
더 많아졌습니까? 가만히 살펴보니 우리들 같은 서민층은 나라가 부자가 되었어
도 혜택 받은 것 하나도 없습니다. 그런데 10대 재벌이니 30대 기업이니 하는
회사만 돈을 벌었다. 그런 얘깁니다. 잘못된 것입니다. 그것뿐입니까? 대기업이
콩나물공장, 두부공장 다하지요. 백화점을 크게 짓고 독점을 하다 보니 재래시장
은 물건이 백화점보다 비싸지거든요. 누가 여길 옵니까? 차 세울 곳이 있습니
까? 에어컨이 있습니까? 거기다 백화점 버스들이 여러 대 동원되어 동네마다 골
목마다 공짜로 버스에 태워 백화점을 마음대로 드나들게 하지요. 경쟁이 되질
않습니다. 값도 그렇죠. 그러니 공짜 버스 타고 백화점으로 몰리게 되는 것이지
요.”
“야, 맞다. 그 백화점 버스가 요 앞 가게 앞에 서 있는 것을 오늘도 보았어
요. 그게 그런 거로구나. 그러니 우리들만 하루종일 파리 날리고 가족들 볼 면목
이 없네그려.”
거의 한탄조의 독백이었다.
시장 바닥에 쪼그리고 앉아서 채소를 팔고 있는 아주머니를 만났다. 60대 가
까이 되신 분이었다. 나는 손을 잡으며 오늘 매상이 어떠냐고 물었다. 별로 신통
치 못한 것 같았다.
“힘드시겠지만, 조금만 참고 견디십시오. 부족하지만 제가 국회에 가서 시민
들의 고충과 아주머니와 같은 분들의 어려움을 해결해 드리도록 최선을 다하겠
습니다.”
“이봐요. 높으신 양반, 왜 때만 되면 나타나? 보통 때 좀 다니면서 살펴봐야
지. 또 선거 때가 됐구먼.”
옆에 섰던 선 비서가 난처하다는 듯이 끼여들었다.
“아주머님, 이분은 이번 선거에 처음 나오신 분입니다. 전에는 대학에서 가르
치셨고, 방송에서 토론 사회자셨습니다.”
아주머니는 나를 빤히 쳐다보더니, 자기 눈을 앞치마로 비비며 나를 아래위로
훑어보는 것이었다. 그러더니 아까보다는 다소 부드러운 표정으로 그러나 음성
은 여전히 카랑카랑하게, “뭘 그래, 그 놈이 그 놈이지, 별수 있겠어, 내가 이
자리에서 장사한 지가 20년이 넘었어. 뭐 달라진 것이 있어야지. 그리고 이봐요,
이 양반 텔레비에 자주 나와서 낯이 익은데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뭐가 처음
나왔어? 나온 지 꽤 오래 됐구먼.”
“아, 그것은요, 시사토론 사회하러 텔레비전에 나온 거지요. 국회의원 출마는
이번이 처음입니다.”
눈치 빠른 선 비서가 아주머니 앞에 쌓여 있는 상추 열 단쯤을 들고, “아주
머니, 이것 싸 주세요. 얼마죠?”했다. 아주머니는 웃으면서, “아니 이걸 다 사
시려고? 고맙소.” 하더니, “그래 이번엔 새사람이 나와야지. 뭐 해 놓은 게 있
어야지.” 하면서 돈을 받는다.
“코아래 진상 없다.”는 옛말을 상기했다. 유권자들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가?
가려운 데가 어딘가를 찾아 긁어 주어야 한다는 원론적인 이치를 우리는 다 잘
알고 있지만, 실제 삶에서는 착각하는 경우가 많은 것 같아서 뒷맛이 씁쓸했다.
국경을 넘은 뜨거운 격려
요즈음 세상은 옛날과 다르다는 것을 오늘 다시 실감했다. 어제 있었던 제1차
합동 정견발표 장면이 KBS의 9시 뉴스를 타고 전국에 퍼져 나간 것은 물론 미
국 로스앤젤레스에 사는 교포들에게도 전달이 된 모양이다. 많은 분들에게서 전
화가 왔다.
“아니, 유재건 변호사를 우리가 다 아는데 이곳에서 고생하며 공부하고, 변호
사가 된 후에도 불쌍한 동포들을 위해 돈 한푼 안받고 무료 변론을 일삼았고,
교포 사회에 크고 작은 일만 있으면 우리의 대변자 역할을 하시던 분을, 아니
이렇게 억울할 데가 있습니까? 우리가 비행기를 대절해 나가서 성북구 유권자들
에게 설명하고 싶습니다. 그러니 힘내십시오. 공의로우신 하나님이 계시지 않습
니까? 하나님이 다 아시는 일을 사람이 머리 굴려 조작해봐야 길게 못 갑니다.
곧 탄로납니다. 걱정 마십시오. 유 변호사, 믿습니다.”
70년대 한국에서 살기 어려워 멕시코 국경을 건너 미국에 밀입국해서 숨어 살
다시피 고생을 하다가 몇 년 전에 내 사무실을 통해 영주권을 받은 일이 있는
사람에게서 걸려 온 전화 내용이었다. 또 이혼을 하겠다고 사무실을 찾아왔던
젊은 내외를 여러 시간 상담하면서, 아내까지 동원하여 그들의 사정 얘기를 듣
고 같이 고민하면서 화해를 권고해서 성공했던, 그래서 지금은 성공적으로 사업
을 크게 하고 있는 후배 부부에게서도 연락이 왔다.
“아니, 이럴 수가 있습니까? 그 사람 나도 같은 무렵에 대학을 다녔기 때문
에 잘 압니다만, 해도 너무 했습니다. 선배님의 착하고 어지신 심성을 성북구 사
람들에게 우리가 어떻게든 알려야 되겠다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서울에 나가서
는 못하지만 이곳에서 최선을 다해 보겠습니다. 힘내십시오.”
바쁜 미국 생활을 하는 사람들에게서 이런 성원의 전화가 수도 없이 걸려 왔
다. 나는 밖으로 다니며 유세에 바쁜 관계로 다 통화를 하지 못했고, 아내와 자
원봉사자들이 수도 없이 전화를 받았노라고 보고하는 것이었다.
며칠 후에 로스앤젤레스에서 들어온 팩스를 보고 우리는 모두 놀랐고 기뻐하
였다. 그 곳에서 발행되고 있는 한국일보와 중앙일보에, 전면광고로 크게 `우리
는 유재건 변호사를 사랑합니다`라고 쓰고 1천3백 명의 친구들이 지지 서명을
하고 하단에 성북구의 16동 이름을 다 적어 넣은 것이다. 그러면서 성북 갑구에
연고가 되는 사람들에게 사본을 보내서 나를 알리겠다는 눈물겨운 전화를 또 해
주는 것이다.
가족들과 친구들이 외국에 많이 살고 있어 자주 국제전화를 하고 있으나, 오
늘 같은 감동적인 전화를 국제선을 타고 받아 보기는 정말 난생 처음이었다. 이
일을 위해서 수고한 한국일보의 민병용, 김종수, 김상우, 김근복 등의 후배들에
게 늘 빚진 기분을 갖고 있음도 밝혀 둔다. 어제에 이어 오늘은 샌프란시스코에
서 연락이 왔다. 이연택 중앙일보 지사장과 박종웅 후배 등이 시작을 해서 새크
라멘토의 김익창, 전상옥 선배 내외분과 옛날 친구들이 또 신문의 지면을 빌려
나를 성원하는 광고를 내 주시고 서울에 아는 분들에게 연락을 해 주셨다.
캐나다에 사는 민영서 군에게서 전화가 왔다. 경기고 후배로 유네스코 영어회
화클럽 회장 출신이다. 지금 토론토에서 제일 유명한 설계회사를 경영하고 있는
중인데 나의 출마 소식을 듣고 격려 전화를 해 준 것이다.
그의 전화 내용은, “선배님, 아니 선생님. 얼마나 애쓰십니까? 그 유명한 현
역 의원이 있는 지역에 왜 하필 나가셔서 그 고생이십니까? 너무 걱정이 됩니
다. 그 쪽 사정은 좀 어떻습니까? 제가 다음 주에 나가서 뵙고 자원봉사도 좀
하겠습니다. 꼭 당선되셔야 합니다. 우리 조국에 선생님 같은 분이 국회에 가셔
서 새물결운동을 일으키실 때가 됐습니다. 저는 이곳에서 공부를 마치고 설계사
로 잘 지내고 있지만 언제나 학생 때 선생님께서 가르쳐 주신 새물결 정신을 한
번도 잊은 적이 없습니다. 지금도 혼자 있을 때는 독서, 둘이서는 토론, 셋이서
는 합창, 넷 이상은 운동을 실천하고 있습니다. 맑고 깨끗한 정신을 유지하며 건
강하게 잘 살고 있는 이 모든 것이 그 때 선생님께서 동기부여를 해 주신 덕분
이라고 생각합니다. 곧 나가서 뵐게요. 참, 뭐 필요한 것은 없으세요. 제가 좀 도
울 길을 알려 주세요.” 하는 것이었다.
호주 시드니에 살고 있는 노정언 군에게서 연락이 왔다. 소식을 듣고 내일 비
행기로 떠난다는 것이었다. 오지 말라고 말할 기회도 주지 않고 혼자 말하다 전
화를 끊는 노 군은 30년 전과 하나도 변함이 없었다.
“유 선생님, 내일 비행기 예약했어요. 한 달만 나가서 뛸게요. 제 친구들 몇
하고 이미 연락을 다 했습니다. 이런 기회를 얼마나 기다렸는지 아세요? 드디어
제 실력을 보여 드릴 기회가 왔군요. 저의 집사람과 딸들에게도 결재를 다 받았
습니다. 하루만 기다리세요. 제가 가서 끝내 드릴게요.”
뭘 끝내 준다는 것인지, 뭘 와서 하겠다는 것인지 모를 일이다. 무조건 나와서
하겠다는 것이다. 노 군은 서울 문리대 1학년 때 만나서 내가 지도하던 유네스
코 학생회장으로, 영어회화클럽의 회장으로 가까이 지내며 친형제같이 지내던
친구다. 학생들이 나에게 `유구라`라는 별명을 붙여 주었는데 나의 수제자라고
해서 `노구라`라는 별명을 얻은 친구다. 누구나 만나면 형님, 누님이고 아무와도
곧 친해지는, 인간관계 맺음에 뛰어난 친구였다. 지금은 시드니에서 사업을 잘
하고 있는데 나를 돕기 위해 나온다는 것이다. 고맙기 짝이 없는 친구들이다.
하루는 길음시장을 돌며 유세를 하는데 뜻밖에 캐나다에 살고 있는 이유식 회
장이 불쑥 나타나더니 손을 잡는다. “형님, 얼마나 고생이십니까? 진작 나와서
도왔어야 했는데 늦었습니다.”
십수년 전 동경에서 세계 한민족대회 때에 만났던 캐나다 한인 연합회장 출신
의 시인이자 사업가인 이 회장은 동포들이 모이는 각종 회의에서 늘 의기투합하
며, 해외 5백만 한인 동포의 권익 옹호와 인권 문제에 늘 뜻을 같이 하던 동지
이다.
“돈도 없으실 텐데, 코쟁이들한테서 번 돈 좀 가지고 왔으니 직원들 식사는
제가 사겠습니다.” 하며 후원금까지 내놓는 것이었다. 너무 고마워서 눈물이 날
지경이었다.
이 고마움을, 당당히 당선되어서 일류 의원이 되어 갚아야겠다고 다짐했다.
돈을 뿌려야
이제 투표일도 이틀밖에 남지 않았다. 나는 유세차를 타고 다니며, 10분씩 20
분씩 정견을 발표하며 지역을 누비고 있었다. 신문을 통해서 발표되는 여론조사
는 내가 낙선될 것으로 나타나고 있었다. 이상한 일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전혀 낙선의 가능성을 느끼지 못하고 뛰었다는 것이다. 과학적인 여론조사를 무
시하거나 못 믿는 것은 아니지만 이번에는 별로 믿어지지 않았다. 아마 이런 생
각 때문에 그렇게 많은 사람이 출마하고 낙선하고 또 출마하고 낙선하고 하는
일을 거듭 반복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
미아리고개 넘어 정릉으로 가는 마을버스를 타려고 줄을 길게 늘어서 있는 버
스 정류장에 차를 세워 놓고 한판 유세를 벌였다. 우리 당의 노래가 나오고, 유
재건 찬가가 나오고 사회자가 소개하면 올라가서 한 20분 연설을 하는 것이다.
그럭저럭 80여 회 떠들고 다니다 보니 목이 쉬었다. 좀체 목이 상하지 않는 좋
은 목소리의 소유자라고 하는 나는 이 중요한 때에 목소리가 아름답지 못해 안
타까웠다.
막 연설을 마치고 내려오는데, 선철훈 비서와 후배 노정언이 뛰어온다. 얼굴
모습들이 심상치 않다. 나는 직감적으로 무슨 일이 터졌구나 하고 생각했다. 사
실 엊그제 검찰이 우리 당의 청년부장을 잡아 간 후로는 선거사무실도 저기압이
고 운동원들의 사기도 떨어져 있었던 때라 걱정이 될 수밖에 없었다.
“후보님, 큰일났습니다. L씨가 찾아와서 말하는데요 미국 정보계들의 여론조
사 결과가 나타났는데 이번에 우리측에서 특정 조치를 취하지 않으면 틀림없이
낙선이랍니다. 그래서 사모님과 유재일 사장(사촌동생)이 지금 돈을 빌리러 가셨
습니다.”
“아니, 그럼 그 특정 조치라는 게 돈을 빌려다 뿌리라는 뜻인가?”
“그렇습니다. 그렇지 않고는 절대 안 된답니다. 이는 한국 정부의 고위층과
미국 정보 계통의 정보이기 때문에 틀림없습니다.”
“그래, 이거 야난났군. 빨리 사촌동생이 어디 있는지 수소문해서 돈 빌리는
일 즉시 중단하고 선거사무실로 오라고 연락하게. 나도 곧 돌아갈 테니까.”
“알겠습니다. 그렇게 하겠습니다.”
나는 잠깐 혼자서 조용히 생각에 잠겼다.
`이런 일이 왜 생겼을까? 그 정보의 사실 여부 이전에 이런 말을 퍼뜨린 사람
은 누구이며, 무엇을 기대하고 이런 얘기를 흘렸을까? 그리고 돈을 뿌려야 된다
는 말은 무슨 뜻일까? 돈을 얼마를 어디에 어떻게 뿌리란 말인가? 대체 누구에
게 돈을 주라는 말인가?`
곰곰히 생각해 보니 큰일날 소리였다. 보이지 않는 마수가 우리를 얽어매려고
공연한 소문을 만들어 냈고, 또 우리의 대응을 보며 약점을 잡으려는 계획이 아
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끔찍한 일이다. 당선에 눈이 어두워 불법을 자행하라
는 것인데 나는 절대로 그렇게는 할 수 없었다. 나는 과거 선거 후보자들이 낙
선 후에, “그 때 한 장만 더 썼더라면.” 혹은, “그 원수놈의 동그라미, 딱 한
개 모자라서 떨어진 것 아닌가?” 등의 푸념을 하는 것을 가끔 들어 왔다. 많은
사람들이 돈만 있으면 표를 살 수 있다고 생각하고 있는 우리나라 실정을 나는
잘 알고 있다. 이런 관행을 없애서 돈을 적게 쓰는 선거를 해야 한다고 선거공
영제의 도입을 주장해 온 나는 늘 주장하는 바와 같이, “낙선이 되더라도 정직
하게 떨어져야지, 당선에 눈이 어두워 선거법을 어긴다거나 불법을 감행해선 절
대 안 된다.”라는 지론을 다시 한번 강조하였다.
사촌동생 유 사장은 자기 예금통장을 탈탈 털어 거금을 가지고 얼굴이 벌겋게
상기되어 숨이 차서 들어왔다. 나는 그를 진정시키고 똑같은 말을 다시 차분히
해 주었다.
기다리던 아내에게서 연락이 왔다. 내가 사무실에 있는 것을 확인하고 즉시
돌아왔다. 같이 대화를 나누기도 전에 그는 편안한 인상으로 들어왔다. 너무나
침착하고 자연스러워서 같이 모여 이 문제를 가지고 염려하고 논의하던 사람들
이 모두 의아해하는 눈길로 그를 주시했다.
“어떻게 된 거요? 어디를 갔다 오는 길이오?”
내가 먼저 물었다.
“여보 이거 없었던 걸로 해야겠어요. 아무 소리도 안 들은 것으로 하는 것이
좋겠어요.”
“왜? 어디서 무슨 소리를 듣고 오는 게요? 어서 말을 좀 해 봐요.”
“여보, 아무리 생각을 해도 이건 누가 우리를 음해하려고 꾸민일 같아요. 혹
시나 해서 이종찬 의원 사모님 윤장순 씨를 지금 만나고 오는 길이에요. 그 분
은 선거를 벌써 다섯 번씩이나 치르는 것이라 별 경험을 다해 봤을 것 같아서
의논을 좀 하려고 연락을 해서 만났어요.”
“그래서, 윤장순 씨는 뭐라고 합디까?”
“아무래도 미국이 어쩌고, 정보가 어쩌고, 하는 것이 이상하다고, 그런 것 믿
지 말고 동네 다니며 악수하며 느끼는 유권자들의 손의 체온을 느껴 보며 얼마
나 많은 사람이 도와 줄 것 같은가 생각해 보래요. 그래서 가만히 생각해 보니
적어도 5:5는 넘고 6:4 정도는 아무리 짜게 계산해도 되는 것 같다고 그랬지요.
그랬더니, 그러면 잊어버리라는 거예요.”
“여보, 잘했소. 나도 같은 생각이오. 자, 그러니 여러분. 이 일은 여기서 완전
히 끝을 냅시다. 모두들 못 들은 것으로 하고 완전히 잊어버리고, 하던 일로 복
귀합시다. 나는 또 성북동 가두 유세로 나가겠소. 자 정직하게 최후의 승리를 위
해 파이팅! 필승!”
모두 같이 외치며 자리를 떴다. 우리들의 승리의 확신은 더 커졌다. 지역의 분
위기가 어느 곳으로 쏠리는지를 감지한 상대방의 의도적인 낭설 유포이거나, 진
정으로 나를 아끼고 사랑하는 사람들이 이런 낭설을 듣고 걱정이 되어 귀띔을
해 준 것이라 추측이 된다. 지금까지도 이 일은 밝혀지지 않은 채 선거는 끝났
다. 결과는 정직하고 깨끗한 우리들의 선거운동이 주효했다.
지지연설까지 자원봉사
선거 때 자원봉사자가 얻는 것이 무엇일까? 왜 사람들이 귀중한 시간과 정력
을 어느 특정 후보를 위해 그렇게 애를 써 가며 선거운동에 참여하는가? 민주주
의가 성숙하게 정착된 사회와 우리 사회는 자원봉사의 동기에 차이가 있음을 발
견하게 되었다.
나 역시 미국에서 특정 후보의 선거운동원으로 자원봉사를 한 경험이 있다.
다른 친구들과 같이 민주시민으로서의 하나의 훈련과정으로 생각하고 참여하며
많은 것을 배웠다. 학교에서 책으로 배우지 못한 실제 정치의 모습은 이와 같은
자원봉사 경험 없이는 알기가 어렵다. 나는 솔직히 아무리 생각해도 내가 봉사
해서 도움을 준 것보다는 내가 배운 것이 더 많다고 생각하고 있다.
나는 캘리포니아 주의 제리 브라운 주지사, 아트 토레스 상원의원, 연방상원으
로 출마했던 리오 메커티 부지사들을 도운 적이 있다.
이제 세월이 흘러 나의 선거를 돕는 자원봉사자들을 만나게 되니 감회가 깊었
다. 고마운 자원봉사자들은 여러 층의 사람들로, 나를 좋아하고 언제고 나를 위
해 자신의 시간과 재주를 가지고 돕기를 원하는 이들이었다. 경원대의 제자들이
많이 왔다. 재학중에 총학생회의 회장과 간부를 지냈던 제자들은 내가 학장 재
임시에 학교 발전과 학교생활에 관해 서로 생각이 달라 매일 논전을 벌이고 어
떤 때는 나에게 야단을 맞았는데, 나를 돕고자 달려온 것이었다. 옛날 유네스코
에서 가르치던 제자들도 몰려왔다. 연세대 KUSA 후배인 조남준 사장은 회사에
서 과장과 사원을 파견해서 자원봉사를 하게 했다. 친척들이 여럿이 몰려와서
도왔다. 이들 봉사자들은 대부분 내 선전 명함을 유권자들에게 전하면서 나를
소개하는 일을 하였다. 고마운 일은 50~60명의 봉사자들이 자기들끼리 정이 들
어서 신명나게 같이 일하는 모습이었다.
모 대학 김 교수의 부인은 전에 미국에서 살며 내 사무실의 도움을 좀 받은
분이다. 이번 선거통에 옛날 빚을 갚겠다고 우리 선거 사무소에 나타났다. 매일
아침 자원봉사팀장이 조를 짜서 활동할 지역을 정해서 내보낸다. 김 교수 부인
은 나의 5촌 당숙모와 친척 여동생과 한 조가 되어, 3인 1팀으로 성북동 쪽으로
나가 집집마다 다니며 명함을 문틈으로 집어넣는 일을 했다. 그런데 바람이 불
어 명함이 다 날아가고 말았다. 그래서 이 팀은 스카치 테이프를 구해 가지고
명함을 집 대문에 붙이기 시작했다. 그런데 이번에는 몇 집 하기도 전에 어디서
나타났는지 경찰관이 나타나서 선거법 위반이라며 이들을 지서로 끌고 갔다. 그
리고 지서에서는 성북구에 연락하여 이 세 여자들을 성북서로 데려가고 말았다.
생전 경찰서라고는 가 보지 못한 세 여자는 너무 겁이 나서 눈물까지 흘렸다.
서에 불려 간 여자들을 하나씩 불러 심문을 시작하면서 경찰의 주된 관심사는
이들이 참 봉사자인가 아니면 돈을 받고 명함 돌리는 사람인가를 알아내는 일이
었다. 그래서 경찰은 큰소리로 겁도 주고 달래기도 하면서 집요하게 돈을 받았
는지를 추궁했다는 것이다.
김 교수 부인은 정색을 하고 책상을 치면서 일장의 연설을 하였다.
“이것 보세요. 돈을 받고 선전하느냐고요? 나는 대학교수의 부인이고 내 아
들도 대학교수입니다. 나는 유재건 후보를 미국에서 변호사 하실 때부터 잘 알
고 있습니다. 그는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선 무료로 변호를 해 주시는 분이셨습
니다. 나는 그 분의 신세를 갚아야 합니다. 그 분은 우리 모자의 은인입니다. 남
편이 학위를 마치고 무작정 귀국하고 난 뒤, 우리 아들은 UCLA에 입학하게 되
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영주권이 없어서 엄청난 등록금을 내야 했습니다. 그래
서 혹시 영주권을 얻을 수 없을까 하고 유 변호사님 사무실을 찾아갔었습니다.
그 분은 우리 모자를 자기 집에 머물라고 하시며 아들의 등록금까지 내주셨습니
다. 그 아들이 지금 대학교수가 되었습니다. 당신들은 무엇을 조사하려는 겁니
까? 성북구에 유재건 후보 같은 훌륭한 지도자가 입후보한 것을 감사하게 생각
하시고 모두들 도와 주세요.”
이처럼 당당하게 선거운동까지 했다는 것이다. 경찰서 조사 담당자는 다른 방
에 있는 동료 경찰관들을 불러 모아 놓고, “이분 애기 좀 들어 보라.”고 권고
하더란 애기도 들었다. 아마 큰 감동을 받은 모양이었다. 세 여자는 바로 집으로
돌아왔다. 모두 두렵고 불안해서 걱정을 하고 있다가 미세스 김이 일장 연설을
하는 것을 듣고 자기들도 다른 경찰들과 같이 숙연해졌다는 것이다. 참 자원봉
사의 표본을 잘 보인 사건이었다.
어느 날 저녁에는 지역구에서 유세를 하게 되었다. 연단에서 열심히 연설을
하면서 저쪽 지하철 입구를 바라보니, 여러 명의 대학생들이 줄을 서서 명함을
돌리며 꾸벅꾸벅 절을 하고 있는 것 아닌가.
나는 연설 말미에 이렇게 외쳤다.
“참 봉사자가 나라를 바꿉니다. 선거에서 한몫 잡으려는 선거꾼과 오늘도 저
기 서 있는 자원봉사자들 중에 돈 받고 나온 사람이 있다면 이번에는 바뀌어야
합니다. 대학생들은 우리의 꿈이요, 희망입니다. 정신이 맑아야 합니다. 만약 여
러분 중에 일당 2만원, 3만원 받고 지성인의 양심을 판 사람이 있으면 지금 바
로 하던 일을 마치고 우리 사무실로 오십시오. 우리 함께 새로운 정치의 장을
열어 봅시다. 이 일은 여러분만 혹은 나 혼자만으로는 절대로 불가능합니다. 우
리가 모두 같이 해야 합니다. 내일 우리 사무실에서 만나요. 새로 시작합시다.”
다음 날 우리 선거사무소에 세 명의 대학생들이 찾아왔다. 어제까지만 해도
너무 자존심 상하고 속상했는데, 지금은 우리 모두 힘을 합쳐야 되겠다고 서로
격려하면서 왔다며 최선을 다하겠다는 것이다. 자원봉사자의 수도 늘었고, 활약
도 매우 뛰어났다. 이들에게 감사한다. 그 중의 한 친구는 함께 봉사하던 동료와
결혼을 하게 되었고, 나는 이들을 위해 주례를 섰다.
솔직하고 진실하게
선거판의 기적을 믿는 사람이 있을지 모르겠다. 생각도 못했던 일이 생겨 어
렵던 문제가 해결되는 경우 사람들의 반응은 각기 다를 것이다. 신앙생활을 하
는 사람은 믿음의 대상이 도움을 주었다고 믿고 감사할 것이다. 제2차 합동 정
견발표회가 있는 날, 최선을 다해서 유권자들에게 호소함으로써 아직도 마음의
결정을 못한 사람들에게 위로와 희망을 주어야겠다는 생각으로 우리 성북구의
현안 문제와 의원으로서 할 수 있는 일들 그리고 우리나라의 위상과 우리나라의
당면 과제 등을 쉽게 그러나 감동적으로 전달해야겠다고 생각하고 정릉에 있는
숭덕초등학교 교정으로 갔다.
지난주, 첫 번째 발표할 때 후보자들이 서로 세를 과시할 목적으로 두 시간
전부터 자기 선전원들과 운동원들을 동원하여 정문앞을 독점하고 후보 이름을
연호하면서 소란을 피운 적이 있었다. 나의 운동원들도 미리 정문 앞에 나가서
상대방 운동원들과 설전을 벌이기도 하고 서로 욕설도 했다. 나는 너무 부끄러
웠다. 다른 후보들은 어떻게 하든지 나는 달라야 한다는 교만과 오기가 있었기
때문에 나는 나의 운동원들을 모아놓고 이번에는 절대로 지난번과 같은 행동을
해서는 안 된다, 질서정연하게 자리에 앉아서 연설을 경청하고 좋은 애기가 나
오면 박수도 치면서 점잖고 의연하게 선거운동을 해야 된다고 힘주어 부탁을 했
다. 이번에는 아주 조용하게 입장을 했고 추첨을 해서 나는 네 번째 연설을 하
게 되었다. 김영철 사무국장은 지난번에 이어 이번에도 좋은 순서를 뽑고 기뻐
하는 모양이 순진한 소년 같아 내 마음이 다 흐뭇하였다.
첫 번째 연사가 등단해서 나를 표적으로 삼아 비판, 두 번째, 세번째 연사 모
두가 나를 공격하는 것이었다. 나에 대한 공격은 내 바로 앞에서 연설을 한 후
보에 가서 극치에 이르게 되었다. 나는 나에 대한 공격이 어느 정도 끝나고 자
기 자랑으로 들어가는 때쯤 해서 화장실을 찾았다. 돌아오는 내게 누가 인사를
하는데 언뜻 생각이 나지 않는다. 보통 유권자나 지역 주민이라면 그저 악수만
하고 잘 부탁한다고 하면 되지만, 이 친구는 고급 승용차 앞에 비서와 기사와
같이 서서, “변호사님, 저 기억하시겠는지요? 그 동안 얼마나 저를 원망하셨어
요. 죽을 죄를 지었으니 용서하십시오. 성공해서 찾아뵙는다고 결심하고 사업을
시작해서 밤낮없이 뛰어다니다 차일피일 하면서, 귀국하셔서 TV토론 하시는 것
당에서 활약하시는 것 다 알고 있으면서도 이렇게 늦게 찾아뵙게 되었습니다.
용서하십시오. 그리고 앞으로 큰일하십시오. 제가 열심히 사업해서 유 변호사님
을 후원하겠습니다. 이번에 필승하십시오. 여론이 아주 좋습니다.” 하는 것이었
다.
“아니 Y군이 아닌가? 이게 어떻게 된 일인가? 이게 몇 년 만이냐고? 그래,
그 동안 사업을 했었군. 아, 참 반갑고, 고맙네. 너무 감사해. 이제 내 연설 차례
니 연설 끝난 뒤 다시 애기하세.”
"네, 그렇게 하겠습니다. 사모님은 어디 계십니까? 제가 만나 뵙고 인사를 좀
드리고 싶습니다."
나는 단위에 올라가면서 Y군의 일을 생각했다.
`그렇다. 그 때가 언제인가. 10년도 넘었구나. 아니 13년이나 되었군. 하도 소
식이 없어서 야속한 생각까지 했었지. 역시 교육자의 자제이고 점잖은 가정 출
신이니 찾아왔구나. 이렇게 어려운 때 나타나 주었으니 참으로 고마운 일이다.`
수많은 사람 중에 Y군의 출현이 이렇게 고맙고 격려가 되는 이유는 무엇일
까? 그 날의 정견발표는 엄청난 성공이었다. 우리 지역의 분위기가 확 바뀌는
계기가 되었다는 간부 당원들의 애기를 선거가 끝난 다음에 들었다. 나는 신들
린 사람같이 소신을 밝히면서 마음으로부터 우러나오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면
서 그의 인도대로 연설을 계속해 나가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물론, 원고도 없고 준비된 내용도 없었다. 그저 즉흥적으로 앞에서 연설한 후
보들의 잘못된 생각과 태도를 지적하면서 성북구 유권자들에게 나를 진솔하게
알리는 노력을 성심껏 엮어 나갔다. 나는 연설 중간에 은혜를 갚겠다고 찾아온
Y군의 일이 자꾸만 떠올라, 그 애기를 하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나는 연설을
계속하면서, `하나님은 분명 살아 계시는구나.`하는 생각을 하였고, `아무리 잔꾀
를 써서 나와 우리 당원들을 음해하고, 없는 죄를 만들어 덮어씌우려 해도 하나
님이 지켜 주시는 한 승리는 우리 것이다.`는 생각이 들면서 가슴이 뿌듯해지고
자신감이 넘치게 되니, 청중의 반응은 열화와 같았다. 한마디 한마디에 박수가
쏟아져 나오는 것 같았다. 지금 생각하니 당선이 확정되기 시작한 순간 같은 느
낌이 들었다.
그렇다. Y군이 나타났다. 내 언제고 그가 나타날 줄 알았다. 그는 결코 은혜를
저버릴 사람은 아니라고 나는 처음부터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정견발표의 하이라이트는 어떤 후보자의 나에 대한 공격이었다. 내용은 나는
지조가 없는 정치인이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내가 김영삼 정부의 정책기획 자문
위원으로 YS 정권을 돕다가 어느 날 갑자기 DJ 쪽으로 끌려가 부총재까지 하고
있으니 나는 정치 지조가 없는 사람이라고 매도하면서, 나 같은 사람을 믿지도,
찍지도 말아야 한다는 내용이었다.
나는 다음과 같이 대응을 했다,
“그렇습니다. YS 정권에서 정책자문위원이 되어 대통령에게 자문을 했습니
다. 그러나 지자제 선거가 끝나고 YS의 태도와 대응 기획 내용을 들으며 실망을
많이 했고, 새로운 정당이 생겨날 때 참여하게 되었습니다. 옳습니다. 제가 지조
가 없다고 생각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저는 우리 국민과 성북구 주민을
위하는 일이라면 누구에게도 자문해 주고 싶습니다. 제가 그 동안 배운 지식과
교양과 경험이 우리나라와 우리 지역에 필요하다면, 언제든지 지조 없다는 소리
를 들을지라도 우리 지역 발전과 우리나라의 윤택해짐을 위해서는 아무하고도,
어디서든지, 무슨 조건이든지 봉사하고 싶습니다. 같이 일할 수도 있습니다. 저
는 YS 정권 초창기에 주로 대학교수들과 같이 정책위원으로 자문했던 일을 결
코 부끄럽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저는 지금도 우리 국민과 성북구민을 위하는
일이라면 신한국당 대표가 불러도 가서 자문을 할 것이며 민주당의 총재가 오라
고 해도 갈 것입니다. 저를 인신공격하고 지조 없다고 질타하신 후보의 소속 정
당의 대표가 불러도 갈 것입니다. 저는 그런 사람입니다. 어느 곳에 붙어서 개인
의 입신양명을 위해 지조니 명분이니를 내세우는 사이비 지도자를 싫어합니다.
나라와 우리 구민을 위해서라면 발벗고 자기 자신을 희생할 준비가 되어 있는
일꾼을 우리는 찾아야 합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우레 같은 박수가 터져 나왔다. 우리는 연설회가 끝난 후 줄을 지어 정릉과
길음동시장을 누볐다. 자원봉사자들의 사기는 하늘을 찌르는 것 같았다. 선거일
나흘 전인 이 날이 내가 당선되는 분위기의 전환점이었다고 어느 전문가가 귀띔
해 준 일도 있었다. 이날 연설에서 유권자들은 나의 솔직함과 신실함을 보았다
는 애기다. 지도자의 진솔함과 신실함을 국민을 원하는 것 같다.
선거판의 기적
제2차 합동 정견발표 날 10여 년이 넘게 소식이 없던 Y군이 나타났다는 사실
을 나는 선거판의 기적 몇 가지 중의 하나라고 지금도 생각한다. 그렇다. Y군이
성공해서 나타났다. 기회를 보려고 기다리다가 내가 가장 어려운 일을 겪을 때
크게 돕기 위해서 지금 나타났다는 것이다. 참 기적 같은 얘기였다.
80년대 초반, 나는 새크라멘토에서 이철수 재판을 끝내고 석방된 철수 뒷바라
지를 어느 정도 끝낸 후 로스엔젤레스에 사무실을 차리기 위해 분주하게 준비를
하고 있었다. 어느 날 밤에 전화가 걸려 왔다. 텍사스 주에서 걸려 온 것으로,
수신자 부담 전화였다. 호기심으로 받을 수밖에 없었다.
“여보세요. 여기는 텍사스 주의 이민국 구치소입니다. 저는 Y라고 하구요. 멕
시코를 통해 불법으로 미국에 입국하다 검거되어 이곳에 며칠간 잡혀 있습니다.
미국에 아는 사람도 없고 친구도 없습니다. 저좀 구해 주십시오.”
“그런데 내가 사는 곳은 거기에서 거리도 멀고 또 내가 이제 밥벌이를 시작
하게 되어서 어떻게 도울 수가 없습니다. 미안합니다. 그런데 나에 대해선 어떻
게 알게 되었습니까?”
“네, 한국에서부터 알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미국에서 가난한 교포들을 위해
무료로 변호해 주시는 유일한 분이라는 사실을 저는 잘 알고 있습니다. 저는 대
학을 중도에 쫓겨나서 어쩔 수 없이 이렇게 오게 되었습니다.. 살려 주십시오.
이 은혜는 꼭 갚겠습니다.
“네, 사정이 퍽 딱하긴 하지만 내가 몇 년을 무보수로 일했기 때문에 이제는
더 이상 봉사할 수가 없으니 양해하세요. 미안합니다.”
거의 억지로 전화를 끊었다. 다음 날 저녁에 Y군은 또 다시 전화를 걸었다.
이번에는 울면서 5.18 광주 항쟁의 희생자라는 애기, 아버지가 교장이라는 애기,
대학을 중퇴하고 쫓겨오다시피 했다는 애기들을 했다.
나는 광주 항쟁이 미국 언론을 통해서 보도될 때에 너무나 창피하고 속이 상
해서 도저히 그냥 지낼 수가 없어서 북가주에 살고 있는 교포 유지 80여 명과
같이 사태의 심각성을 검토하면서, 민주시민들이 맨주먹으로 시위하는 것을 총
칼로 짓밟은 군부에 대해서 준엄한 항의를 한 적이 있기 때문에 그가 광주 사건
의 희생자라고 하는 것이 마음에 걸렸다. 그리고 교육자 자제인데 나라가 어지
럽고 어른들이 똑똑치 못해 희생되는 젊은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 눈시울이 뜨
거워지면서 알겠다고 내가 어떻게 해 볼 테니 기다리라고 위로를 하고 전화를
끊었다.
다음 날 워싱턴 DC의 법무부와 이민국에 연락하였고 텍사스 이민국 구치소에
전화로 판사와 연락을 하여 보석금으로 미화 5천 달러를 내고 석방하기로 협의
를 보았다.
아침부터 하루종일 전화재판을 마친 것이다. 문제는 이런 거금을 마련해서 이
민재판소에 보내는 일이었다. 6년이 넘게 `이철수 사건`에 매달려 돈벌이보다는
무료 변론과 후원하는 일만 전념하다 이제 겨우 철수 재판이 끝나기가 무섭게
또 무료 봉사해야 할 일이 생기니 아내에게 얘기하기가 좀 거북하였다. 그러나
이와 같은 돈 마련은 그와 협의하지 않으면 불가능하기 때문에 어제 전화로 Y
군이 호소하던 애기를 자세히 설명하고 협력을 요청하였다. 아내는 뜻밖에도 선
선히, “젊은 학생의 장래를 열어 주는 일이라면, 이 일을 맡아야 돼요.” 하며
동의해 주었다.
즉시 보석금을 송금하고, 텍사스에서 로스엔젤레스까지 비행기표를 사서 지급
으로 보내면서 구치소장에게 전화로, “한국에서 온 청년이라 영어도 서투르고
지리도 모르니 구치소에서 비행장까지 차를 좀 태워 주기 바란다.”고 완곡히
부탁을 했다. 그리고 Y군에게 전화로 설명을 하면서 비행기를 타고 로스앤젤레
스 공항에 내리면 우리 내외가 서 있을 테니 걱정 말고 비행기를 타고 오라고
일렀다.
새벽 7시에 도착하는 비행기라 우리는 밤 11시에 새크라멘토를 출발해서 밤새
도록 교대로 운전을 하며 새벽 7시에 로스앤젤레스 공항에 도착했다. 새벽에 마
중 나온 동양인 내외는 우리뿐이라 Y군은 내리자마자 곧바로 우리를 발견하고
반가워 어쩔 줄을 몰라했다. 우리는 Y군을 데리고 식당에 가서 아침을 대접하고
백화점에 가서 내의 등 당장 필요한 것을 사 가지고 윤정이네 아파트로 갔다.
수영선수 최윤희와 윤정이는 내 동창생의 딸들로 미국인 코치에게 수영을 배우
며 대학에 다니고 있어, 엄마와 같이 아파트를 세내서 살고 있었다. 급한 김에
여자만 셋이 있는 집으로 가서 목욕을 하고 정신을 차려 로스앤젤레스 한인타운
쪽으로 나오게 하고 우리는 집으로 돌아갔다.
Y군은 교회도 나가고 학교도 다니면서 미국 생활에 적응하기 시작했고 나는
이민법원에 계속해서 재판을 연기만 시키고 있었다. 6개월 연기하고 다시 가서
6개월 허가를 받으며 약 2년을 버텼다. 그러던 어느 날, 다시 나와 같이 체류 연
장과 추방 재판을 위해서 법원에 출두해야 할 Y군이 행방불명이 된 것이다. 그
래서 보석금으로 5천 달러 예치해 둔 돈을 찾지도 못하게 되었다. 백방으로 수
소문해 보았으나 그의 행방은 묘연하였다. 결국 포기하고 말았다. 우리 내외는
크게 실망했다. 의리 없는 젊은이라고 생각했고 우리 형편에 큰돈을 찾지 못하
게 된 것이 너무 아깝기도 하였고, 미국에서 정착하기 위해서 하나하나 단계적
으로 진행하다가 중도 포기를 하게 되니 기분도 착잡하였다.
그리고 세월은 많이 흘렀다. 나는 90년에 한국으로 영주 귀국하게 되었고 매
주말이면 심야토론 진행을 위해 얼굴이 비쳐지게 되었으니 언제고 Y군이 연락
을 하겠지 하고 혼자 생각하면서 7년을 지냈다. 전혀 찾을 길이 없어서 우리 내
외는 가끔 그에게 속았다고 서로 애기를 했었다. `그렇게 얌전하게 생기고 예의
도 바르더니 그런 것이 모두 맘에도 없는 계획적인 의도였나.`하는 생각을 가진
적도 있었다. 그 Y군이 오늘 나타난 것이다. 감사한 일이다.
기독교에서는 `여호와 이레`라는 말이 있다. 필요할 때 필요한 것을 알맞게 준
비해 주시는 여호와를 찬양하는 말이다. 선거판에 나타난 Y군 사건을 우리 내외
는 여호와 이레라고 생각하고 감사했다.
억울하면 당선 되라
선거 때 주의할 점이 한두 가지가 아니겠으나 상대방의 흑색선전이나 중상 모
략을 조심해야 한다고 선배들이 몇 번 주의를 환기시켜 주었다. 나는 선거 경험
이 없었기 때문에 무슨 애기인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나 같은 사람에게 무슨
나쁜 소문을 만들어 흠을 잡는단 말인가? 나야 그 동안 정치를 한 적도 없고 공
천 경쟁을 벌인 적도 없지 않은가? 흑색선전이나 모략 같은 것은 정치를 오래
해 온 사람에게나 해당되는 것으로 오해하고 있었다. 나는 괜찮은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교만한 생각이었는지 모르겠다. 그러나 나는 생전 처음 출마하면서 나
만 깨끗하다면 무슨 문제일까 하는 안일하고 순진한 생각을 가지고 있다가 큰
병을 당하게 되었다.
낙선이 되더라도 정직하고 합법적으로 선거운동을 해야 한다고 목이 쉬어라고
외쳐 대던 내 도덕심에 찬물을 끼얹는 일이 생겼다. 아니 나의 경쟁자가 그렇게
꾸민 흉계에 우리는 희생이 된 것이다.
선거일이 일주일밖에 남지 않은 4월 3일, 검찰청의 수사관이 우리 지구당 사
무실에 와서 청년부장을 연행해 갔다. 영장도 없는 임의 동행이었기에 조사만
하고 돌려보낼 줄 알았으나 선거일이 며칠 남지 않았는데도 검찰은 야당 후보의
핵심으로 운동하고 있는 청년부장을 잡아가서 우리 지역의 청년 조직을 완전히
와해시키고 만 사건이 발생했다.
이들은 상대 후보의 제보를 받고 그들의 고소에 의해 수사를 하게 되었다고
했다. 우리 청년부장이 그 후보를 사실이 아닌 말로 인신공격을 하고 명예를 훼
손하였으며, 선거를 앞두고 흑색선전을 하였으니 선거법 위반으로 엄히 다스려
야 한다는 것이었다. 고소를 한 원고의 증거품은 우리 당의 청년부장과 원고측
정당의 자원봉사자의 전화통화 녹음 내용이었다. 원고측에서는 이 녹음 내용을
PC통신에도 띄웠다. 우리 청년부장의 대답을 유도하기 위해 교묘하게 질문을 해
서 대답을 이끌어 내는 내용이 그대로 PC통신에 오르게 되자, 여기저기서 원고
측의 불법적인 전화 도청과 흑색선전을 위한 부당한 음모를 맞고소하든지 별도
로 고소를 해야 한다는 여론이 지배적이었다. 그러나 나는 단연 고소를 하면 안
된다고 주장했다.
우리 유권자들은 고소하는 사람을 정말 싫어할 것이라고 믿었다. 우리는 검찰
이 정말 합리적으로 이 문제의 자초지종을 살펴 현명한 결정을 내려 주기를 기
대했다. 그러나 우리의 기대는 “역시 그랬구나.”로 끝났다. 청년부장은 계속
구속된 채로 재판을 받고 겨우 집행유예로 풀려 나왔다. 아무 죄도 없는 선량한
사람에게 억울하게 올가미를 뒤집어 씌우고, 그가 조직했던 우리 당의 청년들
모임을 와해시키는 큰 역사를 이룩했다.
우리나라의 고등학생만 되어도 이런 사건이라면 정확하고 합리적으로 곧 해결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청년부장은 유죄를 받았다. 어처구니없는 노릇이었
다.
혐의 내용을 살펴본다면 이런 것이었다.
어느 날 우리 청년부장은 여당의 친구로부터 구청장이 발부한 재산세 납입 안
내서를 건네 받게 된다. 야당 출신으로 3선 현역 의원인 X후보의 집과 땅이 성
북동에 있으며, 세금고지서에서는 주소, 이름, 그리고 본적 등이 기록되어 있었
다. 후보자 X와 이름이 꼭 같이 때문에 박 부장은 “아뿔싸, 이 지역은 엄청나
게 집값이 비싼 지역인데 가난한 것을 늘 자랑삼던 X의원이 어떻게 이 지역에
땅과 집을 가지고 있단 말이간?” 이상한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이 때에 전화
가 걸려 왔다.
성북구의 어떤 유권자라고 자기 소개를 한 이 사람은 유 후보를 위해서 얼마
나 수고하시느냐고 인사를 한 후, X후보에 관해서 험담을 하기 시작하더라는 것
이다.
“아니, 청렴결백하다는 X의원이 정말 그렇게 재산이 많다면 그 사람 위선자
아닙니까? 사실이라면 저는 이번에 그 사람 낙선 운동을 벌이겠습니다.”
“아, 그렇습니까? 그렇지 않아도 그 분의 재산에 관한 정보를 입수해서 가지
고 있습니다.”
“어떤 내용입니까? 성북동 소재 집과 땅, 그리고 압구정동의 아파트 등에 관
한 것이 아닙니까?”
“네, 그래요. 어떻게 아시죠? 그런데 실은 확실치가 않아요. 좀더 조사해 봐
야 되겠어요. 좀더 알아본 다음에 통화하죠.”
“네, 그렇게 합시다.”
이런 내용이 모두 X의원 선거사무실에서 도청, 녹음한 내용들이다. 이렇게 전
화를 걸어서 대답을 유도한 사람은 지난번 선거때 X의원을 위해 자원봉사했고
이번 선거 때는 X의원의 비서를 하고 있는 사람이었다.
그리고, 또 놀라운 것은 X의원 사무실에서 여러 사람이 같이 전화를 도청했다
는 사실이다. 검찰은 이런 정황을 다 알고도 유죄 판결을 내렸다, 검찰의 강직성
을 의심할 일이다. 사무국장이 시켰다는 것이 사실이라면 선거법에 위반되어, 사
무국장이 유죄판결을 받게 되고 연좌제에 의해서 당선자의 당선이 무효가 된다.
사무국장을 오라가라 하면서 그에게서 잘못을 찾아보려고 노력한 흔적도 우리는
보게 되었다. 이 일을 확대해서 나의 당선을 무효화하려는 의도가 있었다면 크
게 잘못 생각한 것이며 이와 같은 부조리는 언제고 정확하게 재평가를 받아야
한다고 나는 굳게 믿고 있다.
내가 당선된 성북구에서 일어났던 일이기에 나는 일을 크게 벌이고 싶지 않았
다. 그러나 이와 같은 지역에 대표가 되겠다는 사람이 당선을 위해 주민들에게
고통을 주고 주민들을 괴롭히는 일을 해서는 안 된다고 나는 믿는다.
나라면 그렇게 못한다.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이 사건과 관련된 사람들이 나
같은 생각을 갖게 되기를 기도한다. 나를 위해서 당을 위해서 옥고까지 치른 청
년부장의 노고에 감사와 격려를 보낸다. 이 일은 우리들에게 큰 교훈을 주었다.
나는 언제고 이 사건 관련자들의 진의를 밝히고 싶다. 그리고 선거 때 흑색선전
을 하는 사람은 유권자가 엄히 응징해야 한다고 믿는다. 다시는 그런 나쁜 버르
장머리를 버리도록 말이다.
내 인생의 진실은
아버지에 대한 회상
“아버지와 함께 살았으면 얼마나 좋았을까?”라고 문득 생각해 본 적이 있
다. 아무리 생각해도 내가 아버지와 같이 한집에서 살아 본 기억조차 희미하다.
어린 시절부터 아이들과 더불어 놀아주는 아버지들을 볼 때마다 부러운 나머지
눈물겹기까지 하였다. `나에게는 왜 저런 아버지가 없는 것일까?` 마음속으로 홀
로 된 어머니를 동정 반 원망 반 했던 기억이 난다.
나의 아버지는 충청남도 천안에서 태어나 15세 되던 해에 보통학교(지금의 초
등학교) 5학년을 마치면서 할아버님의 중매로 혼인을 하였다. 충남 연기군 반곡
면 출신의 어머님은 방년 19세로서 그 당시의 풍습으로는 혼인이 매우 늦은 편
에 속했다고 한다. 요즈음처럼 맞선을 본다든지 데이트를 한다는 것을 꿈도 꾸
지 못하던 시절이라서 이렇게 두 분은 얼굴도 모른 채 혼례를 치르게 되었고,
나의 어머님은 초례청에서 처음으로 남편 될 사람을 몰래 훔쳐보셨다고 했다.
그러나 혼례식을 마친 아버지는 서울로 공부하러 떠나고, 어머니는 시골집에
서 시부모님 모시고 머슴들을 거느리면서 이른바 시집살이를 하게 된다. 아버지
는 겨울방학 때인 음력 정초에 설을 쇠러 시골집에 다녀가는 것이 고작이었다.
그렇게 아버지가 다녀가신 후에 어머님은 나를 갖게 되었다.
부전자전이라고 하던가? 이즈음 할아버지께서는 시골 동네 앞 마을 사거리 주
막집에 흘러 들어온 접대부와 속된 말로, 눈이 맞아 어느 날 밤에 야반도주하듯
이 그 여자와 어디론가 가출을 하고 말았다. 이 때 집안의 여자들이 겪게 된 혼
란이야 상상하기 힘들 것이다, 이 바람에 할머니는 시골집과 가지고 있던 논과
밭을 모두 팔고 서울로 무작정 상경을 감행했다. 서울에서 집값 싸고 산수 좋은
곳을 찾다 보니 성북구 돈암동 산자락에 작은 집을 마련하고 서울에서의 새 생
활을 시작하였다.
이런 까닭으로 인하여 나는 음력 1937년 음력 8월 대보름날인 추석에 돈암동
에서 태어나게 되었다. 아침 7시가 되어 추석 차례상을 다 차려 놓자마자 내가
고성을 지르며 태어나게 되었다. 그 결과 차례를 지내지도 못하였지만, 시집온
지 8년만에 첫아들을 얻게 된 어머님의 기쁨은 하늘을 날 것 같았노라고 후에
어머니가 내게 말한 적이 있다. 아마도 아버지가 밖으로만 돌아다니시고 집에
오시지 않아 주위 사람들로부터 자존심이 상하는 일이 많았던 참에 아들을 낳음
으로써 모든 문제가 해소되었기 때문이리라.
이렇게 한편으로는 아버지 얼굴도 모른 채 태어난 서러움과, 다른 한편으로는
우리 집 여성들의 기대와 축복 속에 태어난 나는 해방되기 1년 전인 1944년에
혜화초등학교에 입학하게 된다. 왼쪽 가슴에 흰 손수건을 달고 감색 양복에 하
얀 깃을 달고 모자까지 갖추어 쓰니까 그럴 듯하였다. 이 때 다시 한번 아버지
가 계셔서 내 모습을 보면 멋있다고 할 거라고 생각하였다. 사실 어떤 아이들은
아버지와 같이 자전거를 타고 학교에 오기도 하였다. 이 때 난생 처음으로 아버
지가 집에 계셨으면 하는 생각을 하였다(이후 또 다시 내가 아버지 생각을 한
때는 대학 졸업 때와 결혼식장에서였다).
신나는 학교생활도 잠깐, 비좁은 교실 사정을 해결하기 위해 돈암동에 학교를
새로 짓고 삼선교 북쪽에 사는 아이들을 전학시키는 제도가 시행되었다. 나는
돈암동에서도 다시 북쪽으로 미아리 고개를 넘어야 되는 곳에 살고 있었으니 전
학대상의 순위 일 번일 수 밖에 없었다. 이후에 돈암초등학교에 전학하고 보니
혜화초등학교에 비해 그 시설이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형편없었다. 우선 산꼭
대기에 새로 우뚝 선 학교 건물을 멋있게 덮을 수 있는 나무가 없어서 얼마나
황량한지 말도 못할 지경이었다. 혜화초등학교는 커다랗고 푸른 나무가 그늘로
덮어 주고 시원한 약수 같은 물이 있어 흡족한 기분이 절로 생겨난다. 그러나
새 학교는 빡빡 깍은 머리처럼 후텁지근하고 마음이 답답한 기분이 들었고, 특
히 운동장이 높은 곳에 위치한데다가 한쪽 편이 전차가 다니는 큰길가에 마주하
고 있어 공놀이를 하다가 공이 밑으로 떨어지는 날엔 전찻길까지 공을 주우러
가야 했다.
하루는 운동장에서 공을 차다가 공이 운동장 밖으로 굴러서 전찻길까지 굴러
내려갔다. 여럿이서 가위 바위 보를 해서 진 사람이 가서 공을 주워 오기로 하
였다. 두 명을 뽑아서 공을 주워 오게 하고 우리는 마냥 기다리고 있었다. 한 시
간이 지나도 이 친구들이 돌아오지 않는 것이 아닌가? 우리는 기다리다 지쳐서
집으로 돌아가기로 결정했다. 심부름 간 친구 중 하나의 집이 우리 집으로 가는
길목에 있어서 찾아가 보았다. 그 친구 어머니 하시는 말씀이, “학교에서는 벌
써 돌아왔는데, 축구공을 들고 친구들하고 같이 공차러 나갔다.”는 것이다. 나
는 그 친구가 원망스럽기는커녕 공 하나 마음대로 찰 수 없는 새 학교가 야속하
기까지 하였다. 뿐만 아니라, 혜화초등학교에 못 다니게 된 것이 무척이나 나의
기분을 상하게 만들었다.
기가 죽은 채로 머리를 숙이고 지나가다가 우연히 혜화초등학교에 같이 입학
했던 K군을 만났다. 새 학교에서 좀처럼 볼 수가 없어서 궁금해하던 차였다. 그
친구 집이 돈암동이기 때문에 당연히 돈암초등학교에 전학했어야 함에도 불구하
고 이게 어찌된 일인가? 아직도 혜화초등학교에 다니고 있다는 것이다. 아무리
이해하려고 해도 어떻게 된 영문인지 모를 일이었다.
그 날 저녁 내내 궁금한 사실을 혼자 알고자 애를 써 보았으나 허사였다. 이
튿날 학교에서 돌아오는 길에 K군의 집을 방문했다. 그는 혜화초등학교 자랑에
침이 마를 정도였으며, 거지 같은 산꼭대기 학교에 다니느라 참 김이 새겠노라
고 비아냥거리기까지 하였다. 기분이 나빴지만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꾹 참으면
서 그가 원하는 대로 일단 그를 부러워한다는 눈치를 주고 좋은 학교에 다니는
네가 나보다 훨씬 훌륭한 사람이라고 추어올려 주면서 어떻게 삼선교 이북에 사
는 네가 혜화초등학교에 남게 되었느냐고 부드럽게 물었다.
그 친구는 아직도 그 이유를 모르냐는 듯이 자랑스럽게 그의 아버지 얘기를
꺼내는 것이었다. K의 아버지는 중앙청의 무슨 과장인데 아버지가 자기에게 새
학교에 다니고 싶은지, 그대로 혜화초등학교에 남고 싶은지 묻기에 새 학교는
싫다고 대답했고, 아버지가 학교에 한 번 다녀가신 후에 그대로 혜화초등학교에
남게 되었다는 이야기다. 하루종일 고민하던 의문을 풀긴 했으나, 계속 궁금증이
생겨나게 되었다. 아버지가 높은 지위에 있으면 학교에서 가르치는, 꼭 지켜야
한다는 이른바 `원칙`마저도 변경될 수 있다는 말인가? 삼선교가 전학의 분계선
이라는 설명도 들었고, 부모님께 보내는 교장선생님의 편지에도 `원칙`이라는 말
이 강조되어 있었다. 그러나 아버지에 따라서 원칙이 변경될 수 있다는 것인지
도무지 알 수 없었다.
이런 아픔을 겪으면서도 돈암초등학교에 다니는 친구들과 선생님들이 재미있
어서 곧 이런 아픔을 잊고 열심히 뛰어 놀며 공부에 전념하게 되었다. 그러나
문득문득 `중앙청의 과장` `원칙도 바꿀 수 있는 아버지` `힘도 없는 학교` 등
이런 생각들이 나이가 들어가면서도 내 머릿속에 계속 남아서 나를 괴롭혔다.
이듬해 해방은 되었으나 나라의 큰 어른들이 괴한들의 총탄에 맞아 쓰러졌다
는 뉴스가 계속 보도되었다. 특히 우리 민족의 국부이신 백범 김구 선생이 육군
소위 안두희의 총탄에 돌아가셨다. 백범 선생의 국민장은 장안의 화젯거리였다.
나는 아침 일찍 동네 친구들을 꾀어서 국민장이 열리는 시청 앞으로 나가 일찌
감치 자리를 잡았다. 어린 마음에도 마지막으로 가시는 애국자 백범 선생을 꼭
내 눈으로 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몇 시간이 지났는지 드디어 장례 행렬이 지나간다고 기마경찰이 분주히 오가
며 주위를 정돈하기 시작했다. 커다란 태극기를 든 사람들과 만장을 든 사람들
이 지나가는데, 아! 이게 웬일인가? 내 아버지가 만장을 들고 왼쪽 소매에 검은
리본을 차고 지나가고 있지 않은가? 나는 나도 모르게 “아버지!”하고 불렀으
나, 아버지는 앞만 향한 채 행진하고 계셨다. 두 친구, 영철이와 강남이는, “야!
너의 아버지는 어디 계신데? 어느 쪽이냐?”라고 묻는 것이었다. 나는 신이 나
서 친구들에게 아버지를 가리켰다. “야! 너의 아버지가 K의 아버지보다 더 높
은 사람이구나!” 그들은 나를 존경하는 것 같았다. “너의 아버지는 과장보다
더 높으시지? 그렇지? 아니 중앙청보다 더 높은 데 계시지? 어디서 일하시니?”
하고 묻는다.
그러나 정작 자식인 나는 아무런 대답도 할 수 없었다. 사실은 아버지가 어디
서 무슨 일을 하고 계신지 정말 몰랐다. 나중에 6.25가 터지고 북쪽으로 끌려가
실 때 아버지가 `한국산업경제 신문사`의 사장이었다는 말만 듣게 되었다. 그 후
한 번도 볼 수 없었던 아버지. 그 아버지가 그리워지는 이유는 무엇일까? 나도
삼남매의 아버지이자 이제는 할아버지가 된 나이에 새삼스럽게 아버지가 생각나
는 것은 내 마음 저편에 아버지에 대한 진한 그리움이 아직도 남아 있기 때문이
리라.
아버지를 사랑한 여인들
“할아버지와 아버지의 피를 닮지 말아라.”
이 말은 나의 어머니가 항상 내게 해 주시던 말씀이기도 하고 일종의 넋두리
이기도 하다.
나의 어머님과 숙모님들은 다 함께 모여 빨래나 다림질을 하면서 유가네 집에
시집와서 죽도록 고생하고 있다고 한풀이를 하곤 했다. 이럴 때면 빠짐없이 나
오는 레퍼토리가 바로 할아버지와 남편들의 흉보기이다.
우리 집안의 어른들은 정이 꽤나 많은 분들이었나 보다. 할아버지는 늙으셔서
중풍으로 돌아가시기까지 작은할머니와 같이 사시다가 70이 넘어 병들고 늙어지
자 할아버지를 업어 가라는 전갈이 와서 내가 직접 찾아가 할아버지를 우리 집
으로 모셔 왔다.
할아버지는 충남 천안 태생으로 일찍이 목촌학교를 거쳐 예산농업학교를 다니
신 분으로 당시로서는 제대로 공부를 하신 인텔리 층에 속하였다. 일찍이 열한
살에 열다섯 살 된 할머니와 결혼해서 아들 셋과 딸 하나를 두셨는데, 그 중에
맏이가 바로 나의 아버지이다.
할아버지는 기골이 장대하고 잘 생긴데다 약주를 좋아한 덕분에 시골 주막집
의 여인네들로부터 제법 인기가 있었던 모양이다. 그러던 중 젊은 여자와 같이
집을 버리고 부산으로 가는 바람에, 할머니로부터 속된 표현을 빌리자면 `완전히
찍히는` 신세가 되었다.
할머니가 고향의 재산을 모두 정리하고 서울로 올라갔다는 소문을 듣고 할아
버지가 본가에 빈손으로 돌아오셨다. 물론 지난날의 어리석음을 말끔히 씻고 열
심히 직장을 다니겠다는 맹세를 하면서 말이다. 이 말에 책임을 지려는 듯 서울
대학병원의 수위가 되고 얼마 후에 수위장으로 승진도 하셨다. 이런 연고로 내
가 혜화초등학교에 입학한 후에 학교가 끝나면 바로 할아버지 직장인 원남동 소
재의 서울대병원에 자주 들른 기억이 난다, 어린 눈에는 금테를 두른 모자를 쓰
고 장군 복장 같은 제복을 입은 할아버지의 모습이 얼마나 멋져 보였는지 모른
다. 간혹 가다가 병원을 드나드는 의사, 간호사들은 내가 늦게 바람을 피워서 낳
은 아들인 줄 알고 말을 건네기도 하였다.
어떻든 간에 6.25전쟁이 날 때까지 할아버지는 비교적 충실한 가장으로 살며
과거의 죄를 어느 정도 용서받는 듯하였다. 그러나 타고난 바람기를 재우기에는
역부족이었나 보다. 우리 가족이 모두 시골로 피난간 후 할아버지는 혼자 서울
에 남아서 한동네에 살던 과부 할머니와 동거를 하게 되고, 돌아가시기 얼마 전
에 내가 모셔올 때까지 그 댁에서 사셨다.
할아버지는 서울대병원에서 일하면서 의사들과 이학 박사들을 많이 보셔서 그
런지는 몰라도 내가 의학박사가 되기를 기대하였다. 그러나 후에 할아버지가 동
장으로 당선되고 내가 여러 웅변대회에서 상을 탈 때마다 대회장에 와서 대견해
하시며 의사가 되라는 말씀을 더 이상 하시지 않게 되었다.
역시 피는 물보다 진한 것인가? 나의 아버지 역시 15세에 결혼을 하였으나,
서울로 일본으로 객지 생활을 하면서 어머니 외에 다른 여자들과 같이 지내게
된다. 6.25 직후에 납북되신 후 우리는 아버지 소식을 전혀 듣지 못한 채 47년의
세월을 보내고 있다. 그러나 아버지를 볼 수 없는 세월 탓인지는 몰라도 아버지
에 대한 원망보다는 아버지의 연인조차도 그리운 추억거리로 떠오른다.
지금까지도 아버지의 연인들 중 몇 분이 아련한 기억 속에 남아 있다.
그 중 한 분은 제주도 출신으로, 해방되던 해에 아버지와 함께 우리 집에서
살았다. 얼굴이 예쁘고 아름다운 여인으로 기억하고 있다. 어머니는 아버지와 그
연인이 주무시는 건넌방에 매일같이 군불을 지피고 아침마다 겸상을 차려서 들
고 가시곤 했다. 나보다 세 살 위인 누님은 어머니의 어리석어 보이는 고도한
친절이 못마땅해서 그 여인을 보면 눈을 흘기면서 미워했지만, 나는 왠지 모르
게 그녀를 작은어머니라 부르면서 잘 따랐다.
한 달 가량 같이 살던 작은어머니가 드디어 어머니를 붙잡고 자기는 더 이상
형님을 가슴 아프게 하는 일은 할 수 없다고 제주도로 돌아갈 것임을 울면서 호
소하게 된다. 마음씨가 착한 어머니는, “그게 무슨 소리냐.”며 우리 집에서 같
이 살자고 울면서 만류하는 것이 아닌가. 그러나 작은어머니는 결단을 내리고,
“다시는 형님처럼 곱고 착한 분을 가슴아프게 하지 말라.”고 아버지에게 준엄
한 훈계와 신신당부를 하면서 서울역을 떠나고 말았다. 목포행 저녁 7시 열차로
떠나는 그녀를 위해 우리 모두 배웅을 나갔다. 나와 어머니는 너무 섭섭해서 눈
물을 흘리며 자주 편지하고 서울로 올라오라고 부탁하면서 이별의 아픔을 달랜
기억이 생생하다. 그러나 항상 관계가 좋지 않았던 누나는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았다.
정확히 언제였는지는 모르지만 또 한 분의 아버지의 연인이 내 기억 속에 남
아 있다. 어느 날 오후 젊은 여인을 데리고 집에 오신 아버지가 어머니에게 그
여인을 소개했고, 그 여인은 공손하게 어머니에게 큰절을 올렸다. 어머니는 조그
마한 여자 시계를 꺼내 내놓으면서 정표로서 시계를 받아달라고 말하였다. 그
여인은 고맙다고 받으면서 핸드백에서 비녀를 내놓고, “형님 잘 봐주세요.”라
고 애교를 부리면 인사하는 것이 아닌가.
나는 어머니가 선물하신 시계의 출처가 궁금했으나 굳이 묻지 않았다. 후에
어머니가 친구분에게 하시는 말을 듣고 안 사실이지만, 일주일 전에 아버지가
사람을 시켜서 시계를 주면서 일주일 후에 여인네가 오면 주라고 하셨다는 것이
다. 이 때 어머니의 심정이 어떠했을까를 생각하면 어머니의 처지가 한없이 측
은해 보이기도 한다.
한때 아버지는 말을 타고 다닌 적이 있었다. 함께 말을 타고 다니던 여자 경
찰이 있었는데, 아마도 아버지가 여자 경찰 후원회 회장이었기 때문인가 보다.
내가 보기에 높은 말안장에 앉아서 털모자를 쓰고 위풍당당하게 달리던 아버지
의 모습이 할아버지로부터 자주 듣던 독립군 장군처럼 느껴졌다. 이런 아버지를
친구들에게 자랑하고 싶었지만 아버지는 집에 들어오시기는커녕 얼굴만 삐죽 내
밀었다가는 이내 떠나시곤 하였다. 아마도 어머니에게 생활비만 전하고 가시는
모양이었다.
이런 사정을 나로서는 알 턱이 없었고, 젊은 여자 경찰은 나를 무척이나 귀여
워했다. 아버지도 안 계신 어느 날 혼자 집에 와서 나를 데리고 백화점에 간 적
이 있다. 무엇이 가지고 싶은가 묻기에, 나는 스케이트가 가지고 싶다고 말했다.
그 결과 초콜릿 색깔의 스케이트를 갖게 되었다. 그 때 백화점 직원이 나를 보
며, “어쩌면 남매가 그렇게 닮았느냐?”고 하면서, “참 좋은 누나를 두어서 좋
겠다.”고 하는 것이다. 나는 백화점에서 돌아오는 전차에서, “누나, 우리 아버
지 지금 어디 계실까?” “누나는 좋겠다. 아버지랑 매일 만나니.”라고 말한 적
이 있다. 누나는 얼굴이 빨개지면서, “그래, 그렇지만 나도 아버지랑 매일 만나
지는 못해. 아버지는 원래 무척 바쁘신 분이야. 나도 가끔 만날 뿐이야.”하고
말했다. 이해가 되는 것도 같았다. 그러나 말을 하면서 그 누나는 연신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지금까지도 그 눈물의 의미를 알 수가 없다. 지금 그 누나는 무
엇을 하고 있을까? 회갑을 맞이한 나이에도 그 때의 이상야릇한 기분이 잊혀지
지 않는다.
6.25가 터지자 아버지는 누나와 나를 오산의 동축골이라는 곳으로 피난시켰다.
참외밭으로 둘러싸인 이 마을이 바로 아버지와 같이 사시던 작은어머니의 친정
댁이기도 하다. 이분은 어머니와 동갑내기로 아버지보다 네 살 위였고 서울 시
내의 마당발로 알려져 있었다. 사실인지는 모르지만 일제시대 유명한 일본인 판
사의 부인이었다는 얘기도 들은 바 있다.
나는 한 달에 한 번 정도 아버지와 작은어머니가 사시는 광화문 집에 가서 생
활비를 타 오는 역할을 하기도 하였다. 토요일에 가서 하룻밤 자는 날이면 작은
어머니는 일요일 아침에 나를 데리고 목욕탕에 가시곤 했다. 나이가 아홉 살이
나 된 나를 여탕에 데리고 들어가니 탕에 있는 여자들의 불평이 오죽했겠는가?
나는 쥐구멍에라도 들어가고 싶은 창피함 때문에 재빨리 탕 속에 들어가 두 눈
딱 감고 앉아서 보고 듣지도 못하는 양 흉물을 떨었던 기억이 난다.
작은어머니는 아버지와 마지막까지 같이 계신 분으로 6.25 발발 후 아버지가
납치된 다음에도 가끔 찾아가서 인사를 드렸다. 미국에서 있다가 서울에 올 때
꼭 만나 뵙고 인사 드리면 어머니께 갖다 드리라고 하면서 스웨터나 속내의를
사 주시면서 눈물을 흘리시곤 하였다. 하지만 몇 년 전 80세를 넘기지 못하고
한 많은 인생을 마감하셨다.
그 후에도 그 분의 조카딸들과 여전히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있음은 우리 어
머니의 넓은 이해심과 사랑 때문이 아닌가 생각한다. 그 많은 남편의 여인네들
을 조금도 미워하거나 원망하지 않고 지내셨던 어머니를 보고 나의 아내나 어머
니를 평소부터 아시는 분들은 천사가 아니고서야 어떻게 그렇게 살 수 있느냐고
고개를 갸우뚱거린다.
내가 보기에도 어머니는 참 별난 인생을 사신 분이다. 그러나 참으로 넓고 깊
은 인생을 살아 오신 분이기도 하다. 아마도 사랑과 믿음과 이해심 하나로.
원칙과 융통성 사이에서
하나밖에 없는 고모가 결혼하는 날이다. 중학교 입학시험을 준비하며 꼭 개근
을 해서 상을 받고 싶어서 가족들이 모두 결혼식장에 가는데 나는 가지 못했다.
나의 고모는 우리 집안의 외동딸로서 아버지 3형제에 이어 막내로 태어난 고
명딸이었다. 초등학교 때에는 운동과 노래로 학교에서 유명한 학생이었다. 해방
이 되어서 우리 집안에서 처음으로 머리를 볶고(퍼머넌트) 할아버지가 무서워
집에 들어오지 못하고 며칠을 나의 숙부(고모의 둘째 오빠)댁에서 지낸 역사를
가진, 우리 집안 개화의 개척자이시기도 한 분이다.
우리 집안의 파이어니어답게 최초의 연애 결혼을 한 식구로 기록된다. 고모가
스무 살 때 스물네 살 된 고모부와 연애결혼을 했다. 고모부는 법원 서기로 근
무하는 개성 출신의 멋쟁이 청년이었다. 그는 기타를 잘 치며, 동네 수평틀에서
대차 소차를 자유자재로 해서 처음으로 동네 친구들 앞에서 나의 큰 자랑거리가
되셨다. 결혼식 날에는 처음으로 우리가 사는 달동네에 택시 열여섯 대가 들어
왔다. 장관이었다. 고모는 시댁이 있는 개성으로 떠나고 누나와 나는 그 날 저녁
서운한 나머지 많이 울었다.
개근상을 받기 위해 고모의 혼인식에 참석하지 못한 것에 죄스러운 마음이 들
었다. `그까짓 상장이 뭐기에 가족이 다 모이는데 나만 빠져야 되는가? 고모가
얼마나 섭섭했을까?`하는 생각을 했다. 이 일이 있은 후에 나는 커 가면서 원칙
과 융통성이라는 명제를 많이 생각하게 됐다.
고집스럽게 원칙만 고수하다가 이웃에게 섭섭함을 주는 일은 없을까? 원리 원
칙만 따지다가 더 큰 것을 잃어버리는 일은 없을까 하는 문제를 늘 생각해 본
다.
나의 첫딸이 초등학교에 들어갔을 때 나는 매우 흥분한 것을 기억한다. 어린
딸 승영이가 어느 날 감기가 심해서 열이 많이 났다. 아내는 학교를 쉬어야 한
다고 하고 나는 아프더라도 학교는 가야 한다고 논쟁을 벌였다. 나는 딸이 무슨
일이 있더라도 학교는 가야 되고 모범생으로서의 성실성을 선생님께 보여야 한
다고 주장했다. 언제나 그렇듯이 아내의 주장을 수용하고 나서 나 혼자 학교에
가서 딸아이의 담임선생님을 만났다.
감기가 심해서 못 왔다고, 억지로라도 데리고 와서 개근을 시켜야 될 텐데 미
안하다고 했더니, 선생님은 깜짝 놀라는 표정을 하면서, 나를 마치 야만인 바라
보듯이 쳐다보는 것이었다. “아니, 감기든 아이가 학교에 오면 다른 아이들에게
금방 옮길 텐데 당연히 집에서 쉬어야지 학교는 왜 나옵니까? 어쩌면 그렇게 공
동체 생각을 하지 못하고 이기적인 생각을 하실 수 있습니까?”라며 힐책하듯이
설교를 하는 것이었다. 개근상 좋아하다가 큰 망신을 당한 셈이다. 개근을 한다
는 원칙만 주장하다가 촌놈이 된 경우였다.
그 동안 내 위주로만 생각하던 꽉 막힌 사고방식에 문제가 있다는 것을 깨닫
게 되었다. 그 이후에 두 아들을 교육시킬 때는 조금만 열이 나도 학교를 쉬게
했다. 집에서 푹 쉬고 몸이 다 나은 다음에 깨끗한 몸과 마음으로 학교에 가는
것이 여럿을 위해서 바람직한 일이라는 것을 알게 됐다. 사실상 개근상은 있지
도 않았고, 아무도 개근상에 의미조차 부여하지 않았다.
결혼식에 참석치 못해서 내가 항상 미안한 마음을 가지고 있던 고모님은 아들
셋, 딸 둘을 잘 키우셨고, 사촌들이 모두 장성해서 엄마, 아빠가 되었으나 나의
오랜 외국생활 때문에 동생들의 결혼식에 한 번도 참석을 못했다.
지난 96년 4월, 내가 성북구에서 국회의원에 출마했을 때 고모님은 한 달 내
내 우리 집에 오셔서 선거운동원으로 새벽부터 장조카 선전을 하고 다니셨고,
고모부님은 선거사무소에서 경리 책임자로 고생를 무척 많이 하셨다. 70이 넘으
신 고모부님은 젊은 선거운동원들과 잘 어울려 어려운 일을 너무도 멋지게 감당
해 주셨다. 옛날 우리 집에 장가오실 때 할아버님께서 찜찜해하셨지만-단순히
연애 결혼이라는 이유 때문에-어린 내가 나서서 할아버님을 설득했던 공을 고모
부님께서 잘 아시는지라 이번에 빚갚음을 단단히 하신 셈이다.
나의 아버지가 맏이고 고모님이 막내이며, 중간에 두 분의 숙부가 아버지 형
제 자매들의 전부이시다. 첫째 숙부님은 삼남매를 두시고 돌아가셨는데, 사촌여
동생 재희는 독실한 기독교 가정에 출가해서 믿음 생활을 잘 하는 장로님의 가
족이 되어 행복하게 살고 있다. 남자 사촌 재일과 재영은 독학으로 대학과 대학
원을 나와 떳떳한 사업가와 전문 경영인으로 각기 남매를 두고 잘 지내고 있다.
둘째 숙부님은 6.25 때 납북된 채, 숙모님 혼자 다섯 살 된 외아들 재원을 잘
키워 지금 미국에서 사업을 하고 있다. 이들 사촌들은 모두 부족한 사촌형인 나
를 우리 집안의 기둥이라고 물심양면으로 돕고 있다. 참 착한 동생들이라 감사
하게 생각하고 있다.
나 자신에게는 세 살 위 누님밖에 없어 우리는 두 남매가 같이 자랐다. 누님
은 6.25가 나자 학업을 중단하고 결혼하여 매형과 같이 고생은 하지만 열심히
재미있게 살아가고 있다. 어머님께 대한 효성이 지극해서 동네에서 소문이 자자
하다.
할아버님과 아버님, 두 숙부님들 이렇게 네 분이 모두 작은댁들이 있었으나,
우리 집의 남매, 둘째 댁의 삼남매, 셋째 댁의 외아들, 모두 여섯 명의 사촌뿐이
다. 우리 어머님은 큰집, 작은댁의 자녀들이 아버지 유산 때문에 다투는 것을 보
시고, 우리는 이복 형제들이 없는 집안인 것이 참 다행이라고 자랑스럽게 말씀
하시다가 며느리한테 빈축을 받으신 적이 있었다.
`책을 들고 살다 죽으라` 가르쳐 주신 선생님
언제부터인지 잘 기억은 나지 않으나 나는 `이 세상에서 만나게 되는 모든 사
람들은 나의 선생님이 될 자격이 있는 사람들이니 겸손하게 열심히 배워야 된
다.`는 생각을 갖고 살아 오고 있다. 그런 생각 때문에 남보다 더 많이 배웠다고
단언할 수는 없겠으나 지금도 그 생각에는 변함이 없다. 그런 생각 때문에 많은
사람들에게서 좋은 영향을 많이 받고 살아간다고 믿고 있다.
나의 스승들은 내가 졸업한 정규 학교에서 정규 교육을 해 주신 분들과, 학교
밖 사회에서 이모저모로 사귀며 일하면서 내게 교훈을 주신 사회교육의 스승들
로 나누어 볼 수도 있겠다.
나는 다른 사람보다 비교적 학생 생활을 많이 한 사람이다. 한국에서 18년간,
미국에서 11년간을 정식 학생으로 공부했다. 그러니까 29년은 공부 외에는 한
것이 없는 직업학생(Professional Student)이었다.
이 긴 학생 생활 중에서 수많은 선생님들을 만났으나 제일 인상 깊게 지금도
내 마음속에 살아, 시시 때때로 내게 교훈을 주신 한분은 일생 동안 잊어 본 적
이 없다. 그 분은 초등학교 졸업반 때의 담임이시던 김옥석 선생님이다.
나는 일제 말엽에 혜화동에 있는 혜화초등학교에 입학했다가 해방을 맞이했
고, 돈암동에 있는 돈암초등학교로 전학해 1950년에 졸업을 했다. 초등학교 때는
매년 한 학년씩 진급할 때마다 담임선생님이 바뀌는 바람에 그야말로 1년간 정
이 들 만하면 선생님이 바뀌어서 깊은 인상을 간직하기가 어려웠던 것 같다.
5학년 때 다른 초등학교에서 전근해 오신 새 선생님께서 우리반의 담임이 되
셨다. 오시자마자 학교에는 소문이 자자하게 퍼졌다. 아주 무서운 선생님이고 체
조와 음악에 뛰어난 분이라는 이야기 등등이었다.
나는 5학년이 되면서 `중학교에 가려면 공부를 좀더 열심히 해야 되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동네 아이들과 그렇게 즐기던 병정놀이 부대에서 탈퇴도 했고,
매일 저녁 동네 수평틀에 나가서 기계체조와 마라톤 연습하던 것도 끊고 집에
박혀 열심히 공부를 했다. 학년말 일제고사 때 1등도 하게 됐다.
5학년 때, 세수를 하지 않고 오는 애나 숙제를 안 해 오는 아이들을 벌주시는
선생님을 보고, 나는 무서운 분이라는 생각을 하며, 가능하며 내 할 일이나 하고
가까이 상종을 해선 안 되겠다는 건방진 생각을 해 본 적도 있었다.
어린 마음에도 나는 `학생들을 때리며 가르치는 것이 꼭 교육적일까?` 하는
회의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실은 그 때까지 나는 집에서 한 번도 매를 맞아 본
적이 없었다. 내 걱정은 `혹시라도 매맞는 아이들이 앙심을 품고 나중에 선생님
께 복수를 학 되면 어쩌나.`하는 것이었다.
어쨌든 그렇게 5학년이 끝나고 6학년이 되었는데, 담임이 바뀌지 않고 2년을
계속해서 우리 반을 맡게 되었다는 것이다.
얼굴이 늘 무섭게 보이고 학생들을 자주 때리셔서 그랬는지, 아무도 좋아하는
아이들은 없는 것 같고, 오히려 `어휴, 또 이거 야단났구나.` `지긋지긋한데 왜
바뀌지 않았나.` 하는 생각을 갖는 아이들이 있는 것 같은 눈치였다.
나는 그저 무해 무득, 별 감정이 없었다. `어쨌든 1년간 잘 공부하면, 그렇게
부러워하고 흠모의 대상이었던 중학생이 되는구나.`하는 엷은 흥분 때문에 별 감
각이 없었던 것 같다.
선생님께서 6학년이 되자마자 새로운 제도를 마련하셨다. 매달 보는 시험 성
적에 따라 자리를 배정하는데, 책상을 여섯 줄로 배치하고 맨 왼쪽 줄에 1등에
서부터 10등까지, 다음 줄에는 11등부터 20등까지 맨 마지막 줄에 51등부터 60
등까지 앉히는 것이었다.
학기초부터 시작하여 매달 첫날에 자리 변동이 일어나게 되는데, 보통 셋째
줄에서 끝줄까지는 큰 변화가 있으나 첫째와 둘째줄은 별 변화 없이 열 달을 지
냈던 것으로 기억된다.
그러다가 이런 좌석 배치가 `비민주적이고 비교육적이며, 특별히 선생님이 편
애하고 있던 아이들을 위한 것이니 즉시 그만두게 해야 한다.`고 강력히 반대하
는 투서를 교장선생님에게 보낸 학부형이 나타나서 문제가 되었다.
그 때 요즈음의 공청회 같은 것이 열렸는데, 내 아버지는 선생님을 옹호하는
발언을 했고, 이 제도가 계속되게 하는데 도움을 주셨던 것 같다. 한바탕 소동을
치르고 난 후에도 자리 변동은 별로 이루어지지 않은 채 졸업을 하게 되었다.
1950년 4월, 6.25 사변이 일어나기 두 달쯤 전에 있었던 졸업식날에는 비가 부
슬부슬 내렸다. 나는 6년 개근상과 우등상을 받게됐고 국어사전도 받았다. 졸업
식 노래를 부를 때도 그저 담담하기만 했었다.
식이 다 끝나고 선생님께서 우리들을 정문 앞까지 인도하셨고, 그 곳에서 마
지막 부탁의 말씀을 듣게 되었다. 그렇게 무서웠던, 그래서 별명이 `호랑이 선생
님`이셨던, 인정머리는 한푼 어치도 없는 사람처럼 우리들을 사정없이 매질하시
던 선생님께서 우리들에게 마지막 고별사를 하시며 눈물을 흘리시는 게 아닌가?
“여러분, 이제 오늘이 여러분들과의 마지막 날입니다. 그 동안 2년간 내게 매
맞은 사람, 벌섰던 사람들, 여러분이 커서 선생님이 되고 큰 일하는 지도자가 되
면 이 선생님이 왜 매를 들었는지 이해하게 될 겁니다. 여러분에게 매를 든 날,
나는 밤에 잠을 못잤던 날이 여러 날이었습니다. 얼마나 아팠을까, 얼마나 나를
원망할까 하는 생각 때문에서였습니다. 여러분, 크게 되십시오. 그러기 위해서는
책을 손에서 놓지 마십시오. 죽을 때까지 책을 들고 살다 책을 들고 죽으십시오.
섭섭했고, 속상했던 감정은 지금만 가지고 안녕히 가십시오. 언제나 건강과 책을
잊지 마십시오. 여러분, 안녕.”
또 새로운 두 줄기의 눈물이 선생님 얼굴에, 그 호랑이 선생님 얼굴에 흘러내
렸던 것을 나는 지금도 잊을 수가 없다.
경기중학 1학년 입학식은 그 해 6월 5일이었는데, `선생님의 부탁대로 살아야
큰 인물이 되겠구나.` 하며 종로서관에 가서 세계 위인전기를 사서 읽으며 중학
교 생활을 기다렸던 기억이 새롭다.
스무 날 정도 공부를 하고 6.25가 터지는 바람에 시골로 피난을 가게 됐을 때,
식구들이 가방 하나씩을 들고 나서는데 나는 위인전기 몇 권을 챙기다가 할머님
께 야단을 맞았다. “꼭 필요한 옷가지와 먹을 것을 가지고 가는 것이 피난이지
책을 들고 가면 유학 가는 것이지 어디 피난이냐.”는 말씀이었다.
그래도 나는 몇 권을 몰래 챙겨 가지고 피난길을 떠났던 기억이 난다. 피난지
에서 이 책이 없었다면 어떠했을까 생각하니 그것은 마치 읽을거리 없는 감옥
같았을 것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선생님께서 권고해 주신 `언제나 책을 들고 살라`는 교훈을 나는 아직까지 잘
지키고 있다. 집에서는 물론 누구를 만나러 식당이나 다방에 갈 때도 늘 손에
책이 없으면 불안하다. 몇 분 기다리는 동안에 읽을거리도 없이 무료하게 앉아
있는 것은 정말 시간낭비 같아서 꼭 책을 들고 다닌다. 비행장에 갈 때도 마찬
가지다.
집에서는 꼭 책을 들고 잠을 잔다. 어떤 날은 한 페이지를 다 읽지 못하고 잘
때도 있으나, `죽을 때까지 책을 들고`라는 교훈을 주신 선생님의 음성이 아직도
내 귓가에 여운으로 남아 있기 때문에 피곤해서 쓰러지고 싶은 늦은 밤에도 `네,
선생님. 책 들고 자겠습니다.`하는 마음으로 책을 들고 잔다.
집사람은 언젠가 이런 내 꼴을 보며, “생전 수면제 같은 것 한번도 안 먹는
당신은 이제 보니까 책이 수면제였군요.”하며 한장도 다 읽지 못하고 들자마자
곯아떨어지는 나늘 놀린 적이 있었다.
담배 피우는 사람들은 주머니에 담배가 떨어지면 공연히 불안하고 초조해지며
신경질도 쉽게 난다는데, 나는 책이 주머니나 가방에 없는 날 몹시 우울하고 기
분이 나쁘다.
고등학교 때 책을 사고 싶은데 돈이 없어 책방에 들러 두세 시간 서서 책을
빼 읽다가 다음 날 가서 나머지를 읽고 하느라고 점원에게 눈총을 받은 적도 있
었다. 이제는 읽고 싶은 책을 한 달에 몇 권쯤은 사서 읽을 수 있는 형편이라
매주 토요일 오후에는 주로 책방에 들르는 것이 취미이다.
별 취미가 따로 없는 나는, 누가 취미를 물으면 곤란한 때가 가끔 있다. 요즈
음은 고상한 취미 축에 들지도 못하지만 누가 물으면 `신문 기사 스크랩하기`하
고 말하고 있는데, 참 취미를 말하라면 실은 `책방 가기`가 제일 큰 취미일 것이
다.
선생님의 교훈은 나에게서 우리 집의 세 아이들에게도 전수되어 세 아이들 모
두 책을 들고 다닌다. 책 많이 읽는 사람이 세상에서 말하는 부귀영화를 다 누
리는 것 같지는 않으나, 매일매일 그리고 매순간 자기 발전, 자기 성장을 느끼며
보람되고 감사한 생활을 할 수 있으니 고맙기 짝이 없다.
스승님의 가르치심을 죽는 날까지 지키면서 살아갈 수 밖에 없도록 이제는 몸
에 밴 습관이 되어 버린 이 책읽기 버릇이 우리 가정의 가풍이 되기를 바라고
있다.
재작년에 국민학교 교장으로 정년 퇴직하시던 날 국민학교 동창 셋이서 선생
님을 뵈러 간 적이 있었다. 정부에서 내리는 교육훈장보다도 우리들 정성이 담
긴 금 열쇠가 더 귀하고 고맙다고 하시면서 눈시울을 적시던 선생님의 모습이
기억나다. 그렇게 담당하고 근엄하시던 얼굴에선 두 번째 눈물을 보았던 것 같
다.
선생님은 이미 교육계에서 은퇴하셨지만, 선생님의 가르치심은 지금도 제자들
을 통해 다시 후학들에게 면면히 전해 가고 있으니, 선생님의 혼은 많은 사람들
정신에 영영 살아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내내 건강하시고, 그 우렁찬 음성이 계
속 유지되시기를 빈다.
“헬로우, 아임 어 크리스천”
6.25사변은 우리 가정에 엄청난 변화를 가져왔다. 아버지가 납치되심으로 인해
서 외아들인 내가 빨리 철이 들 수밖에 없었다.
환경이 사람을 변화시킨다는 말을 나는 믿는다. 중학교에 들어가자마자 전쟁
이 나고 20일 만에 학교를 중단하고 시골로 피난갔다 서울이 탈환되면서 다시
서울로 돌아와 등교했으나 일주일 만에 중공군이 가세하게 되어 다시 피난을 간
곳은 아버지의 고향인 천안이었다. 겨울 내내 시골 아이들과 나무하러 다니며
시간을 보내다 봄이 되어 새학기가 될 무렵 아우네 장터에 중학교가 생겼다는
말을 듣고 학교를 찾아갔다. 이 때가 1951년 3월이었는데, 이제 두 주만 있으면
새학기가 되니 그 때 다시 1학년으로 들어오라는 교장선생님의 말씀이었다. 나
는 어린 마음에 이제 전쟁이 끝나면 본교로 갈 텐데 옛날 한반 친구들이 모두 2
학년인데 나만 1학년일 생각을 하니 하늘이 무너지는 것같이 앞이 캄캄하였다.
나는 교장선생님께 조건을 내 걸었다.
“교장선생님, 학년말 시험만 보게 해 주십시오. 만약 제 점수가 시원치 않으
면 다시 1학년에 등록하겠습니다. 그러나 제 점수가 중간 이상만 되면 2학년으
로 받아 주십시오.”
교장선생님은 쾌히 승낙을 해 주셨다. 단지 내게, “약속은 꼭 지켜야 한다.
나중에 억지 쓰면 안 된다.”라는 말만 강조하셨다.
나는 반에 들어가 인사를 하고 경복중학 교복을 입은 친구에게 사정을 하고
그의 노트를 빌려 밤을 새워 가며 베껴 썼다. 국어, 역사, 물리, 지리 등은 노트
를 베껴 가면서 즉시 외웠고, 수학은 초등학교 때 실력 가지고도 충분히 해결할
수 있었으며, 영어는 나무를 하러 다니는 중에 1학년 영어 교과서 <크라운>을
전부 독학으로 마쳤기 때문에 문제가 없었다.
그런데 우스운 일이 생겼다. 기말시험의 결과는 반 전체에서 성적이 제일 좋
다는 것이다. 거짓말 같은 사실이었다. 학교 다닌 지 일주일 만에 2학년에 올라
가게 되었다. 2학년 반에서는 영어 시간이나 수학 시간에 선생님들은 나를 불러
질문을 하는 사례가 빈번해지게 되어, 나는 의무적으로 예습.복습을 할 수밖에
없었다. 선생님들 몇 분은 서울에서 대학을 1, 2학년 다니다 피난와서 교사가 되
신 분들이셨다. 영어 시간에 드디어 능동태, 수동태를 배우는데, 영어 선생님께
서 혼동하셔서 과거분사와 과거형을 구별하지 못하시는 것 같아 내가 혹시 잘못
배우는 것이 아닌가 하는 걱정을 하기도 했다.
바로 그 때 교장이시던 김주 교장선생님이 천안중학교 교장으로 영전을 하시
게 되었다. 나도 그 때 교장선생님을 따라 실력 있는 선생님들이 많은 학교로
가야 본교에 가서도 공부를 제대로 계속할 수 있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김주
교장선생님은 특별히 배려해 주셔서 전학에 필요한 등록금을 전부 면제해 주셨
다. 천안중학에서 3학년 1학기를 마치고, 본교인 경기중학이 서울 덕수초등학교
에서 공부를 한다는 얘기를 들었기에, 방학이 되자마자 서울로 가서 본교로 복
귀하기로 마음을 먹었다.
간단한 옷가지와 책 몇권을 가지고 천안에서 버스를 타고 노량진까지 갔다.
도강증이 없는 사람은 노량진까지만 다니고, 미군 헌병이 서 있는 초소에서는
군용 차량까지 철저하게 검열하며 군인 차량에 승차하고 있는 군인들까지 일일
이 출장중인지 휴가중인지 검사하고 있었다.
나는 가방을 메고 초소로 걸어가 미군 헌병을 불렀다. 시골 교회에서 만들어
준 교인 신분증을 꺼내 보이며, “헬로우, 아임 크리스천(여보세요, 나는 기독교
인입니다).”이라고 웃으며 말을 걸었다. 미군 헌병은, “쏘, 왓(그래, 그래서 어
쩌라는 거냐)?”하며 내 아래위를 훑어보는 것이었다. 그저 그에게 간청을 해서
한강만 넘어가면 되겠기에 2년 반 동안에 배운 영어를 총동원해서 이 헌병을 설
득하기 시작했다. 그 때 나의 한정된 영어 단어로 설명했던 것은, “나는 기독교
인이다. 나는 좋은 학생이다. 우리 학교가 강건너에 있다. 나는 아버지가 북쪽으
로 끌려갔기 때문에 꼭 학교에 가서 공부해야 한다. 우리 어머니께서는 오늘도
나를 위해서 기도하고 계신다. 우리 어머니도 좋은 기독교 신자다.”전혀 한강을
건너갈 수 있는 이유가 안 되는데 영어로 설명할 수 있는 최상의 표현이 이렇게
나왔다.
한참 신분증(교인증)을 바라보던 미군은, “아임 크리스천 투. 아이 윌 고 백
투 스쿨...(나도 기독교인이다. 나도 학교로 돌아갈 것이다).” 여기까지는 알아들
었는데, 그 뒤는 그가 무슨 말을 했는지 전혀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나는 이
때, `아, 영어 공부를 해야 되겠다. 실제 산 공부를 해야 되겠다.`고 생각했다. 잠
시 후 미군 지프차가 왔다. 헌병이 미군 기사에게 몇 마디 하니까, 그는 웃으며
나를 보고 올라타라는 시늉을 했다. 성큼 올라탔다. 보초 서 있는 헌병에게 인사
할 틈도 없이 강을 건너 서울로 들어갔다. 이 때가 1952년 여름이니까 피난간
지 2년 반이 지난 후였다.
외국어는 모방하는 것
미국 헌병의 배려로 나는 덕수초등학교로 갈 수 있었다. 나는 덕수 초등학교
에 찾아가자마자 신고를 하고 반 배정을 받았다. 담임이 이석희(전 중앙대학교
총장) 선생님이셨다. 고약한 것은 초등학교의 변소가 경기여고를 마주보고 서 있
게 되어 매일 그 곳에 가서 볼일을 보면서 여학교 교실을 쳐다봐야만 하는 것이
었다.
이석희 담임선생님께서는 서울 문리대 철학과 출신의 노총각이셨는데, 3학년
때는 영어를 가르쳐 주셨고, 고등학교에 올라가서는 심리학, 독일어 등을 가르쳐
주셨다. 선생님께서는 강의시간에 틈틈이 사람답게 산다는 것이 무엇인지, 일류
학교를 다니는 사람의 소명이 무엇인지 등을 가르쳐 주셨다. 경기중고등학교 전
체를 통해서 가장 기억에 남는 은사를 꼽으라면 이석희 선생님을 말하는 동기생
들은 비단 나만이 아니다.
이석희 선생님이 주신 말씀 중 실질적으로 내게 큰 도움을 준 말씀이 많은데,
그중에서도 “영어는 외국어다. 우리가 창조하는 것이 아니라 모방하는 것이다.
”라고 하신 말씀이다.
이 말씀은 내가 오늘까지 인생 길을 걸어오는 동안에 많은 시사를 주었다. 선
생님의 말씀대로 외국어는 한마디라도 내 멋대로 말하고 해석한다면 그 말을 말
살하는 결과를 가져온다. 그러므로, 외국어는 원어를 충실하게 모방하면 되는 것
이다.
원어를 충실하게 모방하려면 내 말버릇 내 생각을 버려야 한다. 내 말버릇과
내 고정관념을 가지고 있는 한 올바른 모방이 있을 수가 없다.
그러므로 온전히 자기 부정 없이는 외국어를 내 말로 만들 수가 없다. 즉, 자
기 부정이라는 겸손은 외국어를 배우는데 필수 조건인 것이다.
그리고 외국어를 배우는 데 있어 절대로 필요한 것은 정확한 말과 정확하게
가르치는 선생이다.
마음을 비우고 열심을 다해 공부한다 해도 정확한 말을 배우지 못한다면 올바
른 외국어 공부가 될 수 없다. 그러므로 그릇됨이 없는 말과 스승을 통하여 모
방을 해야 한다.
이것은 비단 외국어를 배우는 데만 해당하는 것이 아니요, 인생 전반에 걸쳐
올바른 삶을 살기 위한 길임을 나이를 먹을수록 더욱 절실하게 깨닫게 되었다.
선생님의 가르침대로, 나는 열심히 영어 공부를 하였다.
조그만 카드에 영어 문장을 써서 전차를 탈 때나 혼자 길을 걸을 때 자꾸 외
는 일을 계속했다. 어떤 때는 영어 성경 구절을 적어 외웠다. “좁은 문으로 들
어가라.”라든지 신약에 나오는 여덟가지 복, 고린도전서 13장에 나오는 사랑의
정의, 갈라디아서의 성령의 아홉 가지 열매 등을 매일 외우며 다녔다.
한 번은 교회에 같이 다니던 여학생이 조용히 할말이 있다고 하더니, “요즘
어디 아픈 데는 없니, 혹시 어디가 좀 이상한 것 아니니?”라고 묻는 것이었다.
그래서 왜 그렇게 묻느냐고 했더니 자기 반 친구가 전차 안에서 나를 보았는데,
혼자 눈을 감고 중얼대더니 조금 뒤에 눈을 뜨고 또 중얼대는 모양이 꼭 약간
정신이 이상해진 사람 같더라고 귀띔을 해 주더라는 것이다. 중3 때부터 재미를
붙인 영어는 대학에서도, 공군에 가서도 그리고 미국 유학을 가서도 큰 도움이
되었다. 영어 공부에는 왕도가 없는 것 같다. 꾸준히 연습하고 반복해서 외우고
외국인같이 흉내내는 노력이 제일 중요한 것 같다.
그 때 그 사람
피난 나갔던 시민들이 하나 둘 서울로 돌아오기 시작했다. 미아리 다리 밑, 서
라벌예술대학 밑 우리 동네도 거의 빈집이 없이 모두 돌아왔다. 워낙 가난한 달
동네였던 우리 동네 사람들은 먹고 사는 문제가 참으로 심각하였다. 어른들은
막노동판으로, 주부들은 광주리를 머리에 이고 행상을 나가고, 어린이들은 구두
닦이 통을 메고 나설 수밖에 없었다.
몇몇 동네 친구들은 미군 부대에 하우스 보이로 취직해 일을 다녔다. 이 친구
들이 그 때로서는 제일 형편이 좋은 편이었다. 그들로부터 가끔 껌이나 초콜릿
같은 것을 얻어먹기도 했다. 나는 저녁에 찹쌀딱을 팔기도 했으나 크게 도움이
되지 않았다. 어머님꼐서는 동네 바느질을 대신 해 주시고 얼마씩의 수입을 얻
으시곤 하였다.
내 또래 친구들은 초등학교도 못 다니고 일을 해야 하기 때문에 한글도 깨치
지 못한 친구들이 많았는데, 난 이 친구들에게 한글을 가르쳐 주어야겠다는 소
명감 같은 것을 느끼게 되었다. 나는 할아버지께 부탁해서 동회 건물을 빌려 야
학을 하기로 결심하고 학생들을 모으기 시작했다. 몇몇 친구들 집에 들러 취지
를 설명하고 저녁에 자녀들을 내보내 달라고 부탁을 하였더니, 부모님들 중 몇
분이 자기들도 까막눈이니 눈 좀 뜨게 해 달라고 기다렸다는 듯이 부탁을 하는
것이었다. 즐거운 비명을 지르지 않을 수 없었다.
야학교 문을 여는 날 벌써 1백여 명이 몰려들었다. 앉을 자리가 없었다. 동회
의 공문 요지 뒷장을 사용해서 공책을 대신 했으나 학생 수는 많고 공책 살 돈
은 없어 걱정이 되었다. 이 때에 우리 동네를 담당했던 성북경찰서 형사 중에
이종복이라는 젊고 기발한 청년이 나타났다. 종이와 노트, 그리고 연필들을 한
리어카 잔뜩 싣고 온 것이다. 이는 물론 그의 사재를 털어서 마련한 것이었다.
나는 교실에서 이종복 선생을 소개했고, 학생들은 열화와 같은 박수를 보냈다.
비가 오나 눈이 오나 하루도 빠짐없이 저녁마다 한글을 가르쳐 드디어 6개월
이 지난 후 1차 졸업생을 내게 되었다. 한글로 간단한 편지 정도를 쓸 실력을
가지고 졸업을 하게 되는 것이었다. 생전 기역, 니은도 모르던 동네 아주머니들
이 앞장서서 졸업생들로부터 돈을 걷어 은수저 한벌을 사서 내게 선물을 해 주
었다. 은수저 선물을 가지고 온 반장은 누가 얼마를 냈는지 적은 종이를 수저와
같이 네게 주었다. 이 목록을 보면서 너무도 재미가 있어서 혼자 크게 웃었다.
명단을 살펴보니, 김도토리 씨 10원, 최언년씨 10원, 홍넙적 5원 등으로 적혀 있
었다. 생전 처음 한글로 써 보는 남의 이름이라는 것이다. 많은 이수자들이 감격
하고 감사해했다.
구두닦이로 학교를 잘 다니지 못하는 어린 친구들을 위해 시작한 한글 야학이
어쩌다 보니 부인들과 어머니들의 여인교실 비슷하게 되어 버려 처음에는 다소
잡음이 일어나기도 했다. 그러나 좋은 뜻을 가지고 시작한 이 일은 많은 사람들
이 관심을 가지게 되어 우리는 동네에서 명물 비슷하게 되었다. 인근 각처에서
문의가 오고 신청이 쇄도해서 미아리 고개 넘어 문맹자는 우리가 책임을 져야
되겠다는 소명감 같은 것까지 생기게 되었다.
야학은 계속 되었고, 김도토리 씨같이 6개월 만에 한글을 뗀 사람들은 나오지
않았다. 내가 고3이 될 때까지 이 일을 계속하다가 1955년 드디어 야학은 문을
닫게 되었다. 성북경찰서에서는 다음해에 있을 대통령 선거에서 한글도 모르는
사람이 있으면 안 되겠다고 생각하고 적극 야학을 장려하다가 국민 감정을 잘
나타내는 구호가 동네에서 나돌자, 이를 야학에서 배운 결과로 무식한 동네에서
도 구호가 나오는 것이라면서, 한글 배우기를 중단시키는 것이 선거에선 유리하
다며 한글 학교를 끝내라고 명령했다.
실은 한글을 배운 사람이 신기해서 라디오에서 떠들고 있는 말을 받아 적기
시작했고, 그 중에는 야당의 구호였던, “못살겠다. 갈아보자.”같은 구호도 있었
다. 이 노트를 보고 있던 성북서 파견 담당관은 더 계속됐다가는 나라가 뒤집힐
지도 모른다는, 초조하고 긴장된 여당의 분위기 때문에 야학 폐쇄를 건의해서
하루 저녁에 문을 닫게 되었다. 나 역시 고3이 되어 대학 입학 준비를 할때가
되었기에 저녁에 가르치는 시간을 줄여야겠다고 생각하던 참이라 오히려 잘 되
었다고 생각하고 단념을 하려고 마음먹었다. 그러나 이게 웬일인가? 동네 아주
머니들 중 기회를 놓쳐 한글반에서 공부를 하지 못했던몇 분이 저녁에 집으로
찾아와서 야학을 계속해야 된다고 핏대를 올리는 것이 아닌가? 또 다른 진풍경
은 이번 야학의 문을 닫은 것이 내 의사인가 아니면 정부 당국의 압력인가 확실
하게 밝히라고 동네 청년들이 추궁하고 나섰다는 사실이다. 나는 주위의 눈치를
보면서, “내가 공부를 하기 위해서 좀 쉰다고 그랬다.”고 말했다. 그러나 정부
나 경찰등 기득권층 사람들에 대한 불신이 높은 달동네 사람들은 내 말을 사실
로 받아들이지 않으려고 했다. 그러면서 이번 선거에 본때를 보여 주어야 한다
고 자기들끼리 흥분하는 것이었다.
나는 우리나라 순경들에 대해서 비교적 좋은 인상을 가지고 있다. 특히 말단
에서 빛을 받지도 못하고, 알아주는 사람 하나 없이 봉사하는 모범 공무원들을
볼 때 절로 머리가 숙여진다. 이와 같은 나의 인상은 야학 때 연필과 노트를 대
주던 이종복 순경의 영향이 아닌가 생각해 본다. 그 때 이후 40년이 흐른 1996
년 나는 국회의원 선거에 입후보해서 정견발표를 하게 되었고 내 연설을 듣기
위해 모여들었던 청중 속에서 낯익은 사람을 발견하게 되었다. 백발이 성성한
70의 노객이 된 그를 나는 즉시 알아보았다.
“그 때 그 사람, 이종복 순경이구나!” 나는 그를 유권자들에게 소개하면서
40년 전 야학과 이 순경 얘기를 했다. 우레와 같은 박수가 쏟아져 나왔다. 나의
이웃과 공동체를 위한 어렸을 때부터의 관심이 약간은 증명이 된 사건이었다.
살아가면서 전혀 예상치 못했던 많은 일들이 생기게 된다는 것을 선거 때 또 체
험했다.
그 때 그 시절에 내게서 한글을 배웠다는 할머니가 돈 3만원을 들고 선거사무
소로 찾아오셨다는 소리를 들었다. 이 할머니는 내가 출마한 성북구가 아닌 다
른 동네에 살고 계셨다. 어느날 TV를 보는데 유재건이라는 이름이 나오더라는
것이었다.
“얼굴을 알아보기 어렵지만 이름은 분명히 기억하고 있다. 까막눈을 뜨게 해
서 TV에 나오는 유재건이라는 이름을 읽을 수 있게 해 준 선생님을 TV에서 보
니까 너무 반갑고 기뻐서 찾아왔노라.”며 자기를 소개하더라는 것이다. 나는 밖
에서 유세차를 타고 바쁘게 돌아다니고 있을 때였다. 사무국장이 할머니께 곧
연락해서 나와 만나게 할 테니 좀 기다려 달라고 했더니 무슨 소리냐며 이 바쁜
데 자기는 아무 도움이 못 되니 일하게 두시고 이 다음에 당선 된 다음에 다시
찾아오겠다고 하며 봉투를 놓고 갔다는 것이다. 이름도 남기지 않고 전화번호도
모르기 때문에 당선된 후에도 인사도 못했다.
고마운 것을 잊지 못하는 고운 마음씨, 일부러 찾아와서 당선을 빌어 주는 아
름다운 정성, 이런 것들이 밑거름으로 쌓여 당선되었다고 나는 생각했다. 그 때
어린 시절, 불행하게 까막눈으로 일생을 지낼 이웃들의 눈을 뜨게 해 준 그 정
성과 열정으로 이 동네 우리 주위 이웃들에게 민주주의의 눈을 뜨게 해 드려야
할 책무가 나에게 지워졌으니, 이제 다시 민주주의와 정의와 평등의 눈을 뜨게
하는 강습을 열어야겠다.
촌놈이 흥분하면
내가 고등학교를 다니던 1953년에서 56년 사이는 6.25전쟁 직후로, 폐허 뒤에
나라를 새로 세우는 건설 시기라고 할 수 있었다. 피난 나갔던 친구들이 속속
서울로 돌아오게 되어 한 반밖에 없던 우리 학년은 어느덧 일곱 반이 되었다.
나는 열심히 영어 공부를 하는 틈틈이 변론반에 들어가서 과외 활동에 참여하였
다. 교내 웅변대회에 나가서 처음으로 3등을 했고, 학교 밖에서 열리는 각종 웅
변대회에도 여러 차례 참가하여 상을 타기도 했다.
한 번은 당시 시공관에서 3.1절 기념 고등학생 웅변대회가 열렸다. 경기중학교
교복을 입고 많은 남녀 학생들이 모인 대회장에서 상을 받게 되었다. 그전에 웅
변대회에서 상을 받는 학생들을 본 적이 있는 터라 나도 그들의 흉내를 내보려
고 상장과 부상을 받고 돌아서서 상장을 높이 들고 청중들을 향해 절을 하는데
부상으로 받은 커다란 국어사전이 앞으로 떨어져 맨 앞줄에 앉아 있는 여학생
머리 위로 떨어졌다. 죄 없이 날벼락을 맞은 여학생은 비명을 지르며 옆으로 피
하는 소동이 일어났는가 하면, 곧이어 터진 웃음소리로 인해 장내는 떠나갈 듯
했다. 나는 너무 미안하고 죄스런 마음으로 어쩔 줄을 몰랐다. 게다가 너무 창피
하여 쥐구멍에라도 들어가고 싶었다.
`촌놈이 흥분하니까 이런 어처구니없는 사고가 다 나는구나!`
얌전히 상장과 부상을 받아 옆에 끼고 무대를 걸어 옆쪽으로 내려왔으면 아무
일 없었을 것을 공연히 요즈음 표현으로, 폼 좀 잡으려고 상장을 높이 들었다가
망신을 당한 것이다. 이 때의 창피했던 기억은 일생을 살아가면서 내게 큰 교훈
이 되고 있다. `흥분하지 마라. 너 자신에게는 엄청나게 흥분되는 일일지 몰라도
다른 사람에게는 아무것도 아닌 것이라는 사실을 기억하라.`는 것이다. 그 후로
는 웅변을 하러 무대에 올라갈 때나 내려올 때나 상을 타러 무대에 올라갈 때
많은 주의를 하게 되었다.
이처럼 어설프게 뽐내 보려다 창피를 당했다. 그러나 그 실패는 내게 좋은 약
이 되어 값진 교훈을 얻었다.
그것은 상장과 부상을 들고 청중을 향해 인사를 하는 지극히 단순한 행위도
거저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이다.
내 마음을 매료시킨 그 학생의 그 멋진 인사는 마음과 정성을 들여 준비한 것
임을 짐작할 수가 있었다. 그 인사는 그 학생 자신에게서 나온 것이지 결코 모
방한 것이 아님을 알 수 있었다.
그런데 나는 남의 흉내를 낸 것뿐이었다. 청중을 향한 마음이나 정성은 없이
내 멋만 내는 진실하지 못한 인사였다. 그러니 당연히 창피를 당해야 할 인사였
던 것이다.
아름답고 덕스러운 인격. 뭇 사람의 박수를 받기에 합당한 인격은 작은 행동
에도 진실하며 보잘것없는 일에도 소홀함이 없다.
나는 정성스러운 인사는커녕 제 자랑을 하려고 멋부리다가 창피를 당하고 말
았다. 그것도 남의 멋을 모방하다가...
그 후로부터 나는 인사를 나눌 때 각별히 마음을 가다듬게 되었다. 행여나 내
인사에 진실하지 못한 마음과 모방이 깃들일까봐 두려워서...
나의 고등학교 시절
우리 학교에는 변론반 활동이 매우 활발해서 방학 때 같이 합숙도 하고 각종
대회에 연사를 참석시키기도 하고 또 매년 교내웅변대회를 열기도 했다. 우리
학년에서는 67년 대통령 선거 유세시 헬리콥터 사고로 평택 근처에서 사망한 현
범주 군이 단연 유명 연사였다. 2년 선배로 권오철, 엄창섭 선배, 한 해 선배로
김정원 선배(현 국제 교류재단 이사장)가 단연 군계 일학으로 전국에 이름을 날
리던 웅변가였고, 나보다 1년 후배로는 연대의 김달중 교수, 정근모 박사, 2년
후배로 박청방 사장, 안동일 변호사들이 있었고, 3년 후배로 변론반장은 서울 법
대의 송상현 학장이었다. 3년 선배인 이회창 변호사도 변론반장 출신이라는 사
실을 나중에 알게 되었으나 대회에 나가서 웅변하는 모습은 한 번도 본 적이 없
다.
변론반 담임선생님으로는 성균관대학교의 명예교수이신 최윤원 선생님과 신영
묵 선생님이 열심히셨다.
변론반 활동을 회고하면서 잊을 수 없는 친구들이 지금은 고인이 된 손영수
군과 김동훈 군이다. 손 군은 경남 밀양 출신으로 농사를 짓는 아버지의 후원으
로 서울에서 자취를 하면서 학교를 다니던 색다른 친구였다. 그는 방세가 밀리
면 교장선생님을 찾아가 돈을 빌려 방세를 낸 유일한 학생이었다. 처음엔 조재
호 교장 선생님이 선선히 방값을 내 주셨으나 두 번째 다시 돈을 빌려 달라고
했을 때 교장선생님은 서무과로 손 군을 데리고 가서 서무과장에게 돈을 빌려
주고 밀양의 아버지에게 연락을 하라고 했다. 손 군은 제발 아버지에게는 연락
을 하시지 말아 달라고 하면서 이번엔 어떻게 자신이 해결해 보겠다고 하고 도
망치듯이 서무과를 빠져 나온 일이 있었다. 그가 왜 그랬는지는 밝혀지지 않은
채, 대학을 졸업하고 경신중학에서 공민 과목을 가르치다가 숙직 날 강도의 습
격을 받고 격투하다가 강도의 각목에 맞아 30세의 나이에 세상을 떠나게 된 불
운한 친구였다. 학교 교내 웅변대회에 나가서 웅변을 했지만 3등을 한 기록밖에
없는 친구였다.
김동훈 군은 별명이 짱구였는데, 교내 웅변대회에 반대표로 나가서 `송아지는
송아지, 망아지는 망아지`라는 제목으로 사자후를 토해 친구들을 많이 웃긴 친구
였다. 어렸을 때 버릇이 좋아야 커서도 큰 인물이 된다는 내용의 원고를 재미있
게 연설해서 유명해진 친구였는데, 입상은 하지 못했다.
경기 변론반에서 열정을 가지고 후배들을 돌본 선배 중에 이광서 형이 특출했
다. 그는 재학중에 대대장으로서 지도력을 발휘했던 선배로서 졸업 후에도 변론
반 후배들을 격려하기 위해 자주 모교에 들러 주었다. 고려대학을 마치고 공군
장교가 된 그를 공군에 입대해서 반갑게 만났고, 제대 후에 그는 국회에서 섭외
과장, 국장 등을 역임하면서 국회 공무원으로 오래 근무하다 80년대 불행하게도
해직되었다. 그는 오랜 법정 투쟁을 했고, 명예롭게 복직되어 전문위원으로 근무
하고 있던 중, 나와 다시 국회에서 만나게 되었다. 지금도 광서 형은 다정하기
짝이 없다.
이렇게 변론반에 있었던 친구들, 그리고 선배와 후배들, 서로 질세라 목청 높
여 변론을 하는 라이벌들이었다. 그러나 그 이름을 생각만 해도 가슴이 훈훈해
짐은 어떤 말을 외쳐도 가슴 뜨겁게 조국을 사랑하고 눈물겹도록 민족을 아끼는
마음은 똑같았고 하나같이 진실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조국과 민족에 대한 사랑을 외치지 않을 수 없어서 변론반에서 서로 질세라
외쳤던 친구들. 그리고 선배와 후배들. 이들은 조국 사랑이란 공통의 목적을 가
지고 겨루는 선의의 라이벌들이었다.
그리고 반세기 가까이 흐른 세월 속에서도 그 열정은 변치 않아 이 나라의 각
분야에서 없어서는 안 될 귀중한 사람들이 되어 여전히 조국 사랑이라는 공통의
목적을 가지고 서로 질세라 뛰고 있으니 참으로 감사한 일이다.
꿈과 정열뿐이던 대학 시절
새벽기도 때문에
우리 집안은 대대로 샤머니즘을 신봉하는 전통 무속 종교의 가문이었다.
6.25가 터지고 아버지가 납치되어 소식이 없자, 어머니는 서울에서 유명하다는
점집은 다 찾아다니셨다. 아버지의 생사를 알아보기 위해서였다. 결혼 후 내내
작은댁들하고만 사시고 우리 집에는 그야말로 몇 년에 한 번 들를까 말까 하는
아버지였는데도 어머님께서는 매일같이 점치는 집에 찾아다니며 위로를 받으시
는 것이었다. 하나같이, “살아 있다.”는 점괘를 얘기해 준다는 것이다. 그러면
언제 어떻게 집으로 돌아오신다거나 하는 얘기는 없고 그냥, “살아 있다.”라는
말만 한다는 것이다. “돌아가셨으니 단념하라.”고 말하면 기분도 나쁠 것이고
복채를 받는 데에도 다소 문제가 있음을 감안했기 때문이리라 혼자 생각도 해
본다.
그렇게 9.28수복 이후 가을을 지내다가 1.4후퇴로 다시 천안으로 피난을 가게
되었다.
참으로 묘한 것은 옛날 할아버님이 주로 드나드시며 한량으로 노시던 사거리
의 주막집이 있던 곳에 교회가 생겼다는 사실이다. 젊은 전도사 내외가 할아버
님 대신 우리를 유혹(?)했던 것이다. 이 시골 교회는 오랫동안 교직자가 부임하
지를 못해 밤실 사시는 집사님께서 예배를 인도하면서 성전을 지키셨는데, 그
분의 기도는 참으로 눈물겨운 그러나 힘있는 기도였다. 지금 아드님 한 분은 고
합의 부회장 이상운 장로이고 또 한 아드님은 목사님이시다.
나는 점집을 전전하시던 어머니께, “예수님께 아버지 문제를 맡기는 수밖에
없겠다.”고 간곡히 청했다. 누님도 동의를 해서 어머님과 누님과 나는 셋이서
이 봉양 성결교회를 다니게 되었다.
사실 나는 6.25가 터지기 전해인 초등학교 5학년 때 돈암동 1번지 서라벌대학
밑에 있던 교회에 난생 처음으로 친구를 따라간 적이 있었다.
유년 주일학교에서 5학년 반에 배속되어 여자 선생님의 성경 얘기를 재미있게
듣고 예쁜 카드를 받아 들고 집으로 돌아왔다. 상냥하고 친절하고 예쁜 여선생
님이 보고 싶어서 주일을 손꼽아 기다렸다. 그 때가 마침 11월이라 교회에서는
크리스마스 성극연습을 하게 되었다. 선생님은 나를 뽑아서 동방박사를 하라고
하셨다. 다른 친구들이 부러운 시선으로 나를 쳐다보는 것까지는 어깨도 으쓱해
지고 기분도 좋았으나, 그 날 돌아오는 길에 나보다 훨씬 먼저 교회에 다니던
애들에게 집단으로 에워싸여 공갈 협박을 받았다. 내가 교회에 나오면서부터 분
위기가 나빠졌으니 여럿을 위해 교회에 나오지 말라는 내용이었다. 그리고 지금
은 신사적으로 충고하지만 만약 집이나, 교회 목사님, 선생님께 고자질을 하면
정말 재미없을 테니 그렇게 알라는 것이었다.
정말로 기가 막혔다. 교회가 무엇을 하는 곳인 줄도 모르는 나에게 질투와 시
샘 때문에 교회의 문을 막아 놓는 일이 벌어졌던 것이다. 워낙 겁이 많은 나는
확실하는 겁을 집어먹었고, 우물우물 교회를 나가지 못하다가 전쟁을 맞았고, 이
제 중학생이 되어 시골로 피난을 와서 아주 작은 교회(전기도 없어서 등잔불을
몇 개 걸어 놓고 예배를 보는 교회)에 나가서 기독교의 진리를 배우게 되었던
것이다.
매년 박수 무당 집에 가서 빌고 재수굿도 가끔 하고 고사떡을 해서 이웃에 돌
리고 하시던 어머님게서 나이 41세에 하루아침에 교인이 되신 것이다. 나나 누
이에게는 어려울 것이 없으나 어머니에게는 정말 큰 결단일 수밖에 없는 일이었
다. 우리는 아버님의 무사하심과 어서 전쟁이 끝나서 다시 만나게 해 달라는 기
도를 같이 드렸다.
서울로 환도해서는 우리 동네에서 개천 건너 미아동 감리교회가 있는 것을 발
견하고 그 교회에서 박경용 목사님, 김남이 사모님의 지도를 받으며 믿음 생활
을 계속하였다. 어머님은 속장이 되셨고 여선교회 봉사부장으로, 다시 권사님이
되셔서 교회를 열심히 섬기셨다.
나는 열여섯 살에 주일학교의 반사가 되어 열두 살 열세 살짜리 제자들을 가
르쳤다. 그들이 지금은 오십이 넘어 같이 늙어 가고 있다. 한국선명회 최성균 본
부장이 그때의 제자이다. 곧 중, 고등부 회장이 되어 학생회원 배가운동을 벌였
다. 나는 학교에서 돌아와선 미아리 지서 앞 버스정류장에 서서 전도를 하기 시
작했다. 네 명의 회원이 전부였던 중, 고등부는 1년 내에 1백2십여 명에 이르게
됐다. 미아리 다리 밑에 있는 철봉과 수평틀에서 실력을 과시하던 박인수 군이
교회에 나오면서 중, 고등부 성가대가 조직됐고, 그 당시 자기 목소리 좋은 것도
몰랐던 그가 서울 음대를 나와 지금은 유명한 성악가, 음대 교수가 되었다.
나는 주일날이면 아침부터 밤까지, 수요일 저녁예배, 금요일 속회, 토요일 반
사 공부, 성가대 연습 등 교회에서 거의 살다시피 하면서 고등학교를 졸업하게
되었다. 박경용 목사님께서는 나는 감리교 신학대학에 입학해서 유명한 부흥목
사가 되어야 한다고 나를 불러 조용히 권고하셨다.
나는 목사님의 권유에 따라 감신 원서를 받아다 충실하게 기록했다. 그러나
막상 목사가 된다고 생각하니 새벽기도가 문제였다. 새벽 잠이 많은 내가 새벽
이나 새벽기도를 할 생각을 하니 신학대학에 갈 용기가 나질 않았다. 하루에 열
번씩 가고 싶은 대학이 변하는 것이었다. 사관학교에 가서 등록금 걱정을 할 필
요 없는 국비 장학생이 되면 괜찮을 것 같다는 생각도 했다. 유니폼이 멋있기로
는 해사가 제일인 것 같지만 바다에서만 지내는 것이 별로 재미가 없을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육사는 별로 멋이 없는 것 같고... 이런저런 생각으로 초조한 가
을을 보내면서 하나님께 기도를 자주 하게 되었다.
바로 이 무렵 교감선생님과의 면담이 내 앞길을 결정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
다. 연천 출신이셨던 교감선생님은 신학교나 사관학교 보다 믿는 학교인 연세대
의 정치외교학과에 원서를 내는 것이 가장 적성에 맞는다고 격려해 주시며 무시
험 특차로 추천을 해 주시겠다고 하셨다. 그렇게 해서 55년 11월, 고등학교 졸업
3개월 전에 나는 이미 연세대 정외과의 합격통지서를 받게 되었다. 연대 정외과
에는 서석순 교수와 조효원 교수 등 해방 후 국제정치학 박사를 받으신 두 분이
다 계셨다. 고등학교 동창들은 3월에 있을 대학시험 공부를 하느라고 정신이 없
을 때에 나는 이미 합격이 된 기쁨을 안고 앞으로의 대학 생활을 어떻게 보낼
것인가 하는 생각을 하면서 시간을 보냈다.
새로운 발을 허락받고
나는 스무 살이 되는 해를 병원에서 맞았다. 대학 1학년 겨울방학 때 시골에
갔다 돌아오는 길에 신문에서나 보던 교통사고를 당했던 것이다.
가로수를 받고 논두렁으로 뒤집혀 떨어진 버스에서 발뒤꿈치를 다쳐 장장 다
섯 달을 병원에서 지냈다. 이 발 가지고는 외교관이고 교수고 다 틀린 것 같은
생각이 들어 짜증만 났다. 학교는 벌서 몇 달을 못 다녔으니 속이 많이 상했다.
왜 하필이면 다닐 곳도 많고 할 일도 많은 내게 이런 어려움을 당하게 하나. 나
는 이렇게 오래 놀면 안 되는데, 하는 생각을 하면서 초조해했다.
억지로 대학생이 되었으나 할머님과 어머님을 모시고 내가 뛰어 다녀야 생활
이 되는 형편이니 더욱 초조하고 불안할 수밖에 없었다. 아버지가 6.25때 납치되
신 후 나는 문패 값을 해야 되는 세대주가 되어 과부 아닌 과부댁 둘을 모시고
신문 돌리기, 찹쌀떡장사, 아이들 공부 가르치기 등으로 생활을 꾸려가야 했으므
로 가만히 앉아 쉴 팔자가 못 되는 몸이었기 때문이다.
어서 퇴원해서 더 부지런히 살아야지, 하는 생각을 하다가 다른 동창들은 잘
먹고 잘 입고 주는 용돈 받아 가며 그저 학교만 다니면 되는데 나는 왜 이렇게
피곤하게 살아야 하는가, 또 이 사고는 무슨 날벼락인가, 하고 병원 침상에 누워
생각하니 눈물이 나오면서 힘이 빠졌다.
이 때 새로 부임한 간호사 K양의 위로가 내 일생의 큰 교훈으로 남아 육십이
다 된 지금까지도 큰 고동으로 와 닿는다. K양은 지방 간호학교를 졸업한 기독
교인으로 매일같이 환자를 위해 일일이 기도하면서 약도 주고 치료도 하는 백의
의 천사였다. 그녀는 실망해서 말이 없는 내게 이렇게 말했다.
“참으로 하나님 은혜가 감사하지요. 그 엄청난 사고에서 살려주시고 다시 걸
어다닐 수 있도록 발뒤꿈치도 고쳐 주셨으니, 이 발로 이제는 필요한 곳을 찾아
다니며 이웃 돕는 일을 해야 됩니다. 물론 학교에 열심히 다니시는 것은 기본입
니다. 힘을 내십시오. 새로운 발을 허락하신 하나님께 감사하시고 감사한 마음으
로 열심히 봉사하면서 사십시오.”
나는 나보다 겨우 한 살 위인 그의 짧은 설교를 들으며 깊은 감동을 받았다.
그 날 밤 K간호사의 말을 다시 반추하면서 눈물을 흘렸다. 그리고 하나님께 감
사하며 약속을 했다.
“감사합니다. 발을 고쳐 주셨으니 바른 길을 걸으며 거친 길이라도 의로운
일을 위한 것이라면 찾아 나서겠습니다.”
지팡이를 짚고 복학해서 그렇게 그리던 학교로 돌아갔다. 몇 달 후 지팡이 없
이 걷게 되면서 여름방학을 맞았다. 농촌 봉사대원이 되어서 간단한 훈련만 받
고 농촌으로 갔었다. 아주대 이화수 박사, 황필호 박사, 숙대의 전희정 박사 등
이 같이 갔던 동기생들이다.
다시 개학이 되어서는 가정교사 노릇을 했다. 그리고 고등학교 때 영어 선생
님이 모 대학에서 영어 원서 강독을 가르치셨는데, 그 책을 빌려다가 시험 볼
페이지까지 번역을 해서 학교 앞에 가서 영어 원서 강독 아무개 교수 강의 번역
판이 나왔다고 광고를 하니 삽시간에 1백여 권이 팔려 버렸다. 등록금하고도 남
는 액수의 돈을 벌었다. 재미도 있었다. 만사에 감사하면서 즐겁게 지냈다.
대학 4년간, 나는 여름방학 때마다 봉사 활동을 다녔다. 학기 중에는 연극반에
들어가 네 번이나 연극을 했다. 고생스러우나 재미있었다. 표재순 씨와 오현경
씨가 같이 연극을 했던 동기들이다. 소속된 과의 학회지 편집도 맡아 겨울방학
때 선배들에게 찬조금도 걷으러 다녔다. 연극 활동을 통해서 나 아닌 남을 이해
하는 훈련을 많이 쌓았고 학회 활동을 통해서 선후배들을 많이 사귈 수 있었다.
나는 또 매주 한 번씩 사회과학연구원(서대문 소재)에 모여 연구 발표하는 연구
모임의 일원으로 열심히 영어로 된 정치, 외교 관계 학술지를 읽는 훈련을 했다.
강신조 전 의원, UNDP의 권원중 선배, 강신표 교수, 지건수 교수 등의 지도를
받았고 배재대학교의 이성근 총장은 내가 추천한 후배 회원이다.
과에서 일년에 한 번 소풍을 가면 노래와 만담 시간이 있었다. 노래는 김달중
교수가 일등이고 만담은 LG의 천진환 사장과 내가 당연 압권이었다. 개교기념일
에 단과대학별 연극 경연대회 때 문화일보의 유경환 논설위원과 배화여전의 진
혜숙 교수와 같이 연극을 해서 우승을 하기도 했다. 참으로 바쁘고 숨차게 뛰어
다니며 가능한 여러 활동에 다 참여했다.
대학을 졸업하던 해 4.19가 났다.
공군장교 훈련소에서 그 소식을 들었다. 지루한 6개월간의 훈련을 바쁘고 보
람차게 마치고 소위가 되었다. 동기생들이 자치회장으로 선출해 주어 열심히 동
기생 대신 기합도 받고, 사격도 많이 했다. 병원에서 치유받은 새 발, 새 다리를
가지고 동기들이 지치고 의기소침해 있을 때 나는 열심히 춤을 추면서 친구들을
위로하고 웃기는 얘기도 많이 했다. 그 때 같이 광대 노릇하던 동기들이 이상주
울산대 총장, 윤형원 전 교총회장 등이다.
오산 비행장에서 요격 관제 장교로 근무할 때는 미군들을 상대로 위안부가 된
우리 여성들이 억울하게 유린당하는 것을 보고 미국 친구들과 여러 번 다퉜다.
이들이 우리나라 사람들을 부당하게 취급하는 것을 따져서 정신차리게 하기 위
해서는 영어를 열심히 배워야겠다고 생각하여 영어회화를 열심히 공부했다. 이
때 배운 영어가 미국 유학을 가게 했고, 그 곳에서 변호사가 되어 이번에는 정
식으로 미국 법정에서 시시비비를 가리는 일을 하게 되었다. 그 중에서, 이 철수
사건에 자원해서 6년을 무료로 봉사하며 여섯 번 재판하며 사형 선고까지 받았
던 그를 10년 2개월의 옥살이에서 풀려나게 했다.
나의 20대는 병원에서 시작하여 미국 유학으로 막을 내리고 30대로 넘어갔는
데, 이 묘한 병상의 인연이 나의 일생의 길을 안내하는 길잡이가 되었던 것이다.
“감사함으로 무슨 일이든지 열심히 새 발을 가지고 뛰어다니며 행하라.” 이
한마디가 지금도 나를 움직인다. 열심히 선한 목표를 세우고 행하다 보면 다음
에 할 일이 또 생긴다. 그 동안 열심히 했던 일들이 뒷받침이 된다. 일을 하다
보면 어느새 나 자신에게 흐뭇한 보람이 돌아오는 것을 느끼게 된다. 손해보는
것 같으나 절대로 손해가 아닌 또 하나의 감사할 기회가 돌아온다. 감사하며 열
심히 이 발 가지고, 이 치유받은 발을 가지고...
비는 행운을 싣고
대학에서의 전공은 정치외교학이었으나 영문과 강의가 재미가 있어 오화섭 교
수의 셰익스피어 강의를 열심히 들었다. 리어 왕, 맥베스, 햄릿 등과 영어수필
강독 등을 수강하면서 오 교수님과 친하게 되었다.
오 교수님은 연극반 지도교수이셨다. 1학년 2학기 때 연극반에서 연극을 연습
한다고 놀러 오라는 교수님의 초청을 받고 연극반 연습실에 한번 가본 것이 졸
업할 때까지 연극반과 인연을 맺게 된 계기였다.
당시 영문과 4학년이며 후에 오 교수님의 사모님이 되신 김형순 선배가 번역
한 <Rain Maker>라는 극본을 우리 말로, `비는 행운을 싣고`라고 번역했다. 여
러 명의 반원들이 빙 둘러앉아 대본을 읽으면서 배역을 정하게 되었다. 나는 이
연극에서 주연이라고 할 수 있는 아버지 역을 맡게 되었다. 연극반장이었던 4학
년의 조기진 선배가 비오게 하는 사기꾼 역, 나의 두 아들은 영문과의 안병준(박
인수 교수의 매형)과 김형욱(사학과 출신)이었으며 주연인 외동딸 사브리나 역은
영문과의 최우숙 양(국민회의 장재식 의원의 부인)이었고 사위는 표재순 사장이
었다.
하루 공연을 위해 두 달을 합숙하면서 연습을 했고, 프롬프트(무대 뒤에서 대
사 읽어 주는 사람) 없이 대사를 다 외워서 3막의 연극을 했다. 연극 좋아하시는
백낙준 총장님, 사돈 되시는 현재명 교수님, 최현배 부총장님, 김윤경 교수님들
을 모시고 노천극장에서 공연을 했다.
공연이 끝나고 수천 명의 관객이 재미있게 관람하고 떠난 노천극장에는 깔고
앉아 있던 신문지만 펄럭이고, 우리들은 허탈감에 빠져 넋잃은 사람같이 앉아
있다가 소위 쫑파티라는 뒤풀이로 들어갔다. 연출을 맡았던 철학과의 방효덕 선
배는 눈물을 흘리며 시를 읊기도 하고 노래도 하면서 밤을 새운 기억이 연세대
학 4년을 통해서 제일 기억에 남는 추억이다.
한번 발을 들여놓으면 빠지기 어렵다는 연극반의 매력에 끌려 다음 해도 또
그 다음 해도 번역극인 `트와일라이트 웍(Twilight Walk)`, `17포로수용소`, `리
투아니아`등에서 크고 작은 배역을 맡아 연극을 했다. 동기로서는 오현경 군이
연극반장을 했고 주역으로 활약했다.
개교기념일 날에는 단과대학별 장기 대회가 있었다. 나는 연극반 출신이라고
해서 정법대학 프로그램을 맡아 유경환(문화일보 논설실장) 동문과 같이 정법대
학팀을 조직하여 단막극을 준비했다. 개화기에 고종 황제와 언더우드 박사를 신
뢰가 바탕이 된 우정 관계로 설정하고, 둘 사이를 이간하려는 일본인들의 간계
그리고 이를 사전에 막아 보려는 충직한 신하의 노력 등을 코믹하게 엮어 보았
다. 웃으면서 야사를 음미해 볼 수 있도록 한 이런 내용으로 우리는 단과대학
중 2등을 차지했다.
백 총장 아들인 백관익 군이 언더우드, 진혜숙(배화여전 교수) 동문이 하녀,
정외과 후배 김춘수 동문이 거지, 유영호 동문이 일본 헌병, 그리고 나는 충신으
로 출연해 관복과 변장한 꼽추복을 번갈아 입으며 무대 위를 뛰어 다니듯이 연
기하던 기억이 새롭다. 이 촌극에서도 나는 만담 비슷한 웃기는 얘기를 해서 장
내를 사로잡기도 했다.
정법 대학 전체 피크닉에서는 노래자랑과 만담 대회가 있었다. 나는 백 총장
님 외의 몇몇 교수님들 흉내내는 것과 선교사들의 실수담을 소재로 해서 만담
부분의 일등을 했고, 천진환(LG 사장) 동문이 2등, 노래자랑에는 김달중 교수가
1등을 했다. 정법대학 친구들이 나를 이 때부터 `유구라`라고 별명을 붙여서 오
랫동안 `유구라`소리를 듣게 되었다. 그 때 정법대학장이셨던 신동욱 교수는, 연
세대 역사상 제1만담가는 미국의 소리 방송을 오래 맡아하시던 목사요 설교가요
성악가요 작곡가이신 황재경 동문이고, 제2의 황 동문이 나라고 극찬을 해 주셨
다. 지금도 천진환 동문을 만나면 그 때 2등을 한 것에 불만을 토하면서 다시
해 보자고 하며 같이 웃는다.
정법대학의 회지인 <화백> 편집위원으로 책을 만들며 고생하던 기억도 생생
하다. 여자 위원으로 노옥주 동문이 유명했다. 우리들 편집위원의 임무는 원고를
맡아 편집을 해서 회지를 출판하는 일 외에도 출판에 필요한 경비를 선배들을
찾아다니며 받아 내는 일이 있었다. 여름방학을 통해서 많은 선배님들을 만나게
되어 이 때의 만남이 오랫동안 선후배의 끈끈이로 남게 되어 그 당시에 고생은
했으나 보람있는 활동이었다고 생각한다. 이 여학생을 모르면 가짜 연대생이라
고 할 정도로 교내외로 유명했던 노옥주 동문과의 그 때의 만남이 오랫동안 동
문 선후배로 가까이 지낼 수 있게 된 것은 참 감사할 일이다.
이화여고 때부터 뛰어나게 공부를 잘하고 활달하던 노 동문은 검정고시를 거
쳐 한 해 월반해서 연대 이공대학에 입학했다가 적성에 맞지 않아 다음에 법과
에 입학했다. 고등학교 때부터 필명을 날려 <거울>지 기자를 지낸 멋쟁이라 많
은 남학생들이 공연히 가슴을 두근거리며 그의 거동에 많은 관심을 가졌다. 주
위의 몇 친구들이 데이트를 신청했다는 얘기는 들었으나 성사가 되었는지는 밝
혀지지 않았다. 나는 한 학기 회지 <화백>을 만드는 일 때문에 가까이 사귈 수
있는 기회가 있었으나 언제나 단체로 위원들이 같이 만나서 일만 했기 대문에
서로 개인적인 사정을 나눌 수는 없었다.
세월이 수십 년이 흘러 우리는 로스엔젤레스에서 어른이 되어서 만났다. 노
동문은 미국에 유학와서 영화, 매스컴, 법학 등 여러 분야의 공부를 마치고 미국
연방정부의 교통항공국의 고급 공문원이 되어 실력을 과시하고 있었다. 중국과
의 항로 개설 문제 등을 의논하기 위해 미국 정부 관리 여러 명을 거느리고 한
국 교통부에 회의하러 왔을 때의 얘기를 듣고 같이 폭소를 터뜨렸던 적이 있다.
교통부 직원들이 모인 회의장에서, 맨 앞에 수석 대표로 입장하는 노 동문에
게, “미안하지만 통역은 나중에 들어오시고 수석 대표께서 먼저 들어오시게 안
내해 주시죠.”라고 한국측 대표인지 안내자인지가 말하더라라는 것이었다. 하도
어이가 없어서 그냥 서서 머뭇거리니까 눈치 빠른 미국 차석 대표가 호통치듯
한국 대표에게 수석 대표가 누군지 미리 보낸 공문도 못 읽어 보았느냐고 힐문
을 하니까 그제야 정중히 모시더라는 것이다. 아직도 한국 사회가 남성 중심의
구태를 못 면해서 이런 일이 일어났다고 여권신장론을 펴던 노 동문은 쉰에 접
어들면서 정부에서 은퇴해서 개인 사업을 크게 하고 있으며, 미국 내의 자랑스
런 한국인으로 몇 번 한국 신문에 소개된 적도 있다.
가정교사에서 사교춤 강사까지
4년간의 대학 생활 동안에 몇 가지의 돈벌이를 하면서 등록금을 마련해야 했
다. 지금도 내가 고학하면서 했던 일을 소개하면 많은 사람들은 믿어지지 않는
다고들 한다.
첫 번째 아르바이트는 가정교사다. 어떤 때는 먹고 자면서 영, 수를 가르치며
등록금을 번 적도 있고, 시간제 가정교사로 하루에 두세 시간씩 집에서 다니면
서 가르친 적도 있다. 부끄러울 것도 없고 별로 힘들 것도 없는 평범한 아르바
이트였다. 단 연극 연습 때문에 먹고 자면서 가르치던 자리를 떠나야 할 때 몇
번 망설이면서 큰 결단을 내려야 했다.
두 번째 아르바이트는 사교춤 강사였다. 사교춤이 사회적으로 잘 용납이 되지
않던 때였으며 그 유명한 춤의 명수 박인수 사건이 일어난 지도 얼마 안 되던
때가 사교춤 강사라면 오해를 받을 수 있겠으나, 나는 동네 아주머니들에게 사
교춤을 가르쳐서 등록금을 충당하기도 했다.
나의 사교춤 실력은 실제보다는 이론에 더 밝았고 사교춤의 기본 지식들을 정
확히 가르치는 일로 나타났다. 연대의 무시험 특차 합격자 발표가 다른 1차 대
학 시험 보는 시기보다 3개월이나 빨랐기 때문에 이 세 달 동안 사교춤을 배우
던 친한 동기 동창이 있어 그를 따라다니며 열심히 배워 두었던 것이다.
장충동 적산가옥 같은 이층 한옥집에서 여자 선생님으로부터 친구 두 명과 강
습을 받았다. 이 선생님은 걷는 법, 잡는 법, 신호 주는 법, 예의범절 등 기초가
되는 에티켓을 가르쳐 주고, 그 다음에 여러 명의 스텝을 가르쳐 주었다. 수강료
를 낸 내 두 친구를 붙잡고 실습도 시켜 주었다. 나는 돈을 내지 않았기 때문에
앉아서 열심히 듣고 보기만 했다. 노트에다 적어 볼까 하다가 얌체 소리를 들을
까 봐 그냥 앉아서 보기만 했다.
교습이 끝나면, 빨리 집에 와서 교습장에서 배운 것들을 기록하면서 혼자 연
습을 했다. 하루는 내 방에서 열심히 보고 들은 대로 춤 연습을 하고 있는데, 어
머니께서 웬 밤중에 걸레질을 그렇게 오래 하느냐고 물으시던 일이 기억난다.
혼자서 스핑턴이니 리버스턴이니 지그재그니 하는 것들을 연습하면서 익힌 사교
춤을 나중에 가르치기까지 했으니 사실은 약간 염치없는 일이었다는 생각도 해
본다.
다음 아르바이트는 성우 흉내내는 일이었다. 아현동에 있는 현상소에서 밤을
세워 가며 무성영화를 틀어 놓고 입을 맞추어 목소리를 넣는 일이다. 이 일은
아직도 비밀이기 때문에 자세히 밝히기가 좀 그렇고 그런 일이었다. 내 목소리
가 상당히 좋다는 사실은 그 때 전문가들에게 들어서 자신을 갖게 됐다.
또 다른 아르바이트는 영어 교과서 번역을 하는 일이었다. 경기 고등학교 때
영어를 가르치시던 오병수 선생님께서 서울의 모 대학의 교수가 되셨다. 어느
날 인사하러 교수님댁에 들렀다가 나의 대학 생활 얘기, 아르바이트 얘기, 교수
님의 강의 얘기들을 나누다가 교수님이 가르치시는 영어 원서 강독책을 보게 되
었다. 꽤 재미있었다. 그런데 시험 때면 결석을 많이 하는 학생들이 아주 어려워
한다는 것이었다.
여기서 힌트를 얻어 며칠 후 중간시험 발표가 된 것을 보고 선생님의 원서 강
독 프린트를 묶은 한 십여 페이지 되는 것을 몇 시간에 걸쳐서 번역을 했다. 동
네 동회 사무실에 있는 등사판을 빌려 번역된 한글판 2백 부를 만들어 그 대학
정문 앞에 가지고 가서 좌판을 깔았다. 벽에사 `XXX교수 영어 원서 강독 번역
판 나왔다`라고 써 붙였다. 몇 시간이 안 돼서 다 팔렸다. 놀라운 일이었다. 한
학기 등록금하고도 얼마가 남는 수입이 들어왔다. 참 신기했다. 이 사회에서 조
금만 눈을 뜨고 노력하면 살길이 있구나 하는 생각을 하면서 신이 나서 돌아왔
다. 누가 볼까 봐 검은 안경까지 쓰고 서서 프린트물을 팔던 그 때를 생각해 보
면 입맛이 씁쓸하기도 하지만 그 당시는 공연히 어깨가 으쓱해지고 내 덕에 낙
제할 학생들이 낙제를 면하게 되었을 테니 좋은 일을 했다는 생각도 들었다.
문제는 그 다음에 터졌다. 꼬리가 길면 잡힌다는 속담처럼 내가 바로 그 짝이
난 것이었다. 비교적 쉽게 한 밑천 잡게 된 나는 다음 학기말 시험 때를 손꼽아
기다리게 됐다. 학생을 통해서 몇 페이지까지가 시험 범위인지 확인하고 또 다
시 번역 작업에 들어갔다. 오래 된 일이라 거의 다 잊어버렸으나 원서의 내용이
상법에 관련된 것이었다. 이사의 의무와 권리, 내부자 거래의 부당성 등의 내용
이 조금씩 기억난다. 후에 미국에서 상법 강의를 들었을 때 옛날에 번역했던 단
어들이 익숙하게 나타났기에 지금도 기억이 나는 것 같다.
어찌 되었건 몇 시간 고생하면 재미를 톡톡히 보려니 하는 생각으로 학교 앞
에 가서 좌판을 벌였다. 몇몇 친구들이 사 가기 시작하더니, 서너 명이 한꺼번에
몰려와서 들여다보다가 한 친구가 얼마냐고 흥정을 하는 척하더니 두 친구가 그
냥 번역판을 들고 가 버리는 것이 아닌가. 나는 뒤쫓아가면서 돈을 내고 가라고
소리를 질렀다. 그들은 돈을 줄 테니 따라오라면서 교문 안으로 나를 유인하는
것이엇다.
그 때 나는 아차 나머지 물건들을 팔아서 충당하고 한두 권 잃어버리는 것이
좋겠다는 판단을 하게 되었다. 아깝고 괘씸했지만 포기하고 돌아서 깔아 놓은
좌판 쪽으로 가는데, 아뿔싸! 체격이 건장한 친구가 주섬주섬 다 집어들고 교문
쪽으로 걸어오는 것이 아닌가. 그러면서 나를 보고 따라 들어오라는 시늉을 한
다. 밤새고 번역하고 땀 뻘뻘 흘리며 책으로 만들고 창피를 무릅쓰고 교문앞에
서서 노점을 벌인 것이 무슨 잘못된 일이겠는가 하는 마음이 들어, `좋다. 어디
따져 볼 테면 따져 보자.` 하는 생각으로 따라 들어갔다.
수위실 뒤로 따라가 보니 벌써 서너 명이 서 있었고 나를 보자 마자, “야, 이
XX야, 남의 학교에서 원서 장사를 해. 너 영어 잘하면 얼마나 잘해. 이 개XX야,
돈 번 것 다 내놔. 그리고 다시는 여기 오지 마. 이XX, 지난번에 봐줬더니 재미
들었어.” 하면서 주먹이 날아들었다. 옆에 있던 친구는 발로 차는 폼이 태권도
초단쯤 되는 아이들인 것 같았다. 나는 대항할 기운이 없었다. 육체적으로도 딸
렸지만 내가 한 번역판 장사가 떳떳하지 못하다는 생각이 들어 잘 알겠다고 빌
면서 도망치듯 빠져 나왔다. 이번 장사는 헛수고였다. 쉽게 등록금 좀 충당하려
던 얕은꾀가 오래가지 않았던 것이다.
어렸을 때, 신문 돌리고, 찹쌀떡 팔던 경험까지 다 합치면 참으로 여러 가지
사업을 해 본 셈이다. 그런데도 비즈니스 조직은 몸에 꼭 맞는 것 같지 않아, 해
운회사에서 과장으로 잠시, 종합회사에서 사장으로 3년여 몸담아 보았으나 오래
있을 생각이 나질 않았다. 비즈니스의 참 묘미를 몰라서 그럴까, 아니면 사농공
상이라는 잘못된 구시대의 구태의연한 사고방식 때문일까. 알 수 없는 노릇이다.
항아리 다방의 미스 유
KBS-TV의 <11시에 만납시다>에 출연해서 이계진 아나운서와 대담을 하고
호텔로 돌아왔다. 잠옷을 갈아입기도 전에 전화벨이 울렸다.
“여보세요.”
“여보세요. 아, 오빠 들어오셨군요. 오늘밤 텔레비전에 나오신 것 보았어요.
너무 반가워서 방송국에 연락을 해서 오빠가 계신 곳을 알게 되었어요. 너무 반
가워요. 오빠.”
“여보세요. 대단히 죄송합니다만, 누구신지요?”
“아니, 오빠 저를 잊어버리셨어요? 제가 누군지 모르세요?”
“아, 네 제가 요즘 기억력이 좀 나빠져서 네, 누구신지 이름을 대 주시면 좋
겠습니다만...”
“그만두세요. 실망했어요. 어쩜 저를 잊어버리세요, 그래. 섭섭해요. 아니 이
름을 꼭 대야만 기억하세요?”
“아, 미안해요. 이름을 좀 알려 주시면 좋겠습니다만...”
너무 어처구니없는 통화를 하고 있는 중이었다. 나는 여동생이 없는 몸이라
친척 여동생이거나 그저 동생같이 가깝게 지내던 사람이 틀림이 없겠으나 영 생
각이 나질 않는다. 궁금하기 짝이 없었으나 이제 이쯤에서 포기할 수밖에 없었
다. 자기 이름을 대고 인사를 나누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을 하고 있는데,
“오빠 그럼 이만 끊을게요. 제가 궁금하시면 고려빌딩 뒤에 있는 세종빌딩으
로 오세요. 그 안에 제과점이 있을 거예요. 거기 오면 제가 누군지 알게 되실 테
니까요.”
“아니, 지금 누구신지 성함을 좀 알려 주시면 안 됩니까?”
“됐어요. 바쁘시면 안 오셔도 좋구요. 여하튼 이름은 못 대겠어요. 안녕히 주
무세요.”
거의 일방적으로 전화를 끊었다. 세상에 이런 어처구니없는 일은 처음 당하는
것이었다. 섭섭한 쪽은 내 쪽이었다. `자기가 누구 누구라고 먼저 말을 하고 대
화를 하면 모든 궁금증이 풀릴 텐데, 누군지 예의가 부족한 여인이구나.` 하는
생각을 하며 잠을 청했다.
다음 날 하루종일 세종빌딩 생각을 하면서 여기저기 볼일을 보러 다녔다. 저
녁 늦게 모든 약속이 끝나 여동생을 찾아 세종빌딩으로 향했다. 빌딩 지하층에
제과점이 있어 주저 없이 제과점 카운터를 향해 들어가다 입을 딱 벌리고 말았
다. 그렇다. 그 곳에 앉아 있는 중년 여인은 바로 그 옛날에 항아리 다방에서 일
하던, 그 순진했던 단발머리 그 아가씨가 틀림이 없다.
그러나 나는 20여 년이 넘는 세월 동안 한 번도 다시 만나 보지 못했었고, 서
로 소식도 없이 지냈기 때문에 그의 이름을 전혀 기억해 낼 수가 없었다. 그러
나 그는 분명히 항아리 다방에서 만나서 내가 진심으로 타일렀던 그 여자아이가
틀림없었다. 확실했다. 나는 너무 반가워서,
“야, 이거 항아리 아냐?”
“그래요, 오빠 이제 생각이 나셨군요. 어젯밤에는 미안했어요. 나를 알아보시
나 하고 시험해 보고 싶었어요. 그런데 전화를 끊고 후회했어요. 너무 제가 짓궂
었나 봐요. 오빠, 그래요. 제가 항아리에서 일했던 미스 유예요.”
“그렇구나. 이게 몇 년 만이야. 아유 참 반갑기 짝이 없네, 그래 결혼은 물론
했을 것이고 아이들도 있겠지?”
“그럼요. 다 오빠 덕분인 걸요. 애 아빠는 의사고요, 아들 둘은 다 중학교에
다니고 있어요. 이 제과점은 제가 너무 심심해서 심심풀이로 운영하고 있는 거
예요.”
이렇게 20년 만에 우리는 다시 극적으로 만나게 되었다. 그는 틀림없이 미스
유였다. 대학 4학년 때 친구들과 하루에 거의 한번씩 들르는 다방 `항아리`가 학
교 앞에 있었다. 어느 날 어린 단발머리가 새로 종업원으로 들어와 차를 나르기
시작했다. 나는 호기심으로 그의 이름을 물었다. 미스 유라는 대답이었다. 보통
이런 곳에서 일하는 사람들이 가명을 쓰기 때문에 참 이름을 다시 물었다.
“얘, 내 이름이 유재건인데, 버들 유자고 문화 유가라 유가만 보면 나는 꼭
참 이름을 확인하는 버릇이 있단다. 어디 유 씬지 말해 봐.”
“네, 아 그래요. 실은 저도 문화 유씨구요. 아버지 돌림자가 열자시고 저는
재자 돌림입니다.”
“그래? 그렇다면 우린 친척이구나. 아주 가까운 일가가 되는 거야. 너는 재자
돌림이니 내 동생이 틀림없다. 반갑구나.”
“어머, 저도 반가워요. 잘 돌봐 주세요. 정말 오빠시네요.” 하면서 얼굴을 붉
히며 민망해하는 모양이었다. 나는 다음 날에도 항아리 다방에 가서 유 양을 만
났고, 이 순진한 어린 소녀에게는 마땅한 곳이 아니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나는
아는 선배가 운영하는, 서대문 부근의 출판사에 유 양을 소개했다. 일하면서 저
녁에 야간 고등학교에 다니며 열심히 공부해서 떳떳하게 앞길을 개척하라고 신
신당부하면서 그에게 힘을 북돋워 주고, 나는 졸업과 동시에 공군 장교로 떠나
게 되었다. 그리고 아무 소식 없이 20년이 흐른 다음 우리는 오늘 어른이 되어
서 다시 만나게 되었던 것이다. 참 반가웠다. 유 양은 눈물까지 흘리며 내 손을
잡고 놓질 않는다. 그리고 그의 얘기는 한 시간이 넘도록 계속되었다.
“그 때 오빠가 소개해 주신 서대문 출판사 일을 하면서 저는 D여고 야간을
다녔죠. 시인이신 사장님의 배려로 저는 급사로 시작을 했으나 1년 후에 사무원
이 되었고, 3년 후 여고를 졸업하면서는 계장이 되었으며, 다시 S대 국문과 야간
에 입학해서 대학을 마쳤어요. 그리고 편집 책임자까지 되어 의대생과 사귀다
결혼하여 의사 부인이 되었어요. 시골에 계신 부모님께도 오빠가 은인이라는 말
을 다 했지요. 아버지는 이미 돌아가셨지만, 어머님은 제가 지금 모시고 있어요.
오빠 오늘 제가 이렇게 잘 살고 잇는 것이 다 오빠가 잘 인도해 주신 은혜라고
믿고 있어요. 너무 고마워요.”
“그래, 고마운 것은 내 쪽이야, 이렇게 맨손으로 서울에 올라와 열심히 일하
고 공부해서 성공했으니 참 대견하다. 너무 잘 됐어 고맙군, 고마워.”
“사실은 오빠에 관한 소식을 가끔가끔 듣다가 지난 10여 년은 전혀 소식을
몰라 참 궁금했어요. 어떻게 좀 찾아봤으면 좋겠다고 혼자 생각하다가 지난번
신문에서 기사를 읽고 즉각 오빠라고 확신을 했죠.. 사진은 옛날과 달랐지만, 출
신 학교와 봉사하시는 일, 변호사란 직업, 이런 것들이 오빠답더라고요. 얼마나
자랑스러운지 우리 집 아들 두 놈을 앉혀 놓고 오빠 자랑을 했어요. 그리고 너
희들도 이분같이 훌륭한 사람이 되라고 일렀지요.”
“아, 그랬구나. 참 장하네, 장해.”
“그 때 제가 항아리에서 오빠를 처음 만났을 때가 수원에서 중학교를 졸업한
해니까 제가 열일곱 살 때네요. 지금 생각하면 사람의 운명이 참 묘한 인연 때
문에 엄청나게 방향전환이 되는 경우가 있는 것 같아요. 그 때 제가 오빠 같은
분을 못 만났다면 저는 지금 어떻게 되었을지, 생각만 해도 겁이 나요. 어제 저
녁 텔레비전을 보다가 오빠가 나오시는 것을 보고 우리 식구들 모두 불러 놓고
같이 보았지요. 여전하시더군요. 그 목소리하며, 재미있게 얘기하시는 솜씨, 하나
도 안 변하셨더라구요. 저는 아이들을 부르며, 애들아 내가 얘기했던 엄마의 오
빠 되시는 분 있지? 그 분이 텔레비전에 나오셨다. 어서 와서 봐라. 그랬죠. 그
리고 전화를 드렸다가 약간 실망했어요. 저를 기억 못하셔셔...”
“아, 이 사람아, 자기 관등 성명을 미리 대야 내가 즉시 알지. 그렇게 하면
어떻게 알아내겠나. 원래 내가 사람을 잘 기억하는 편인데 어제는 힌트가 없어
서 내가 실수했네.”
미스 유는 미국에 있는 올케 갖다 드리라고 가죽 핸드백, 구두 등 기타 필수
품을 사서 새로 산 가방에 차곡차곡 넣어 주었다.
어떤 만남이든 만남은 소중한 것이다.
영원한 멋쟁이, 서석순 박사님
은사 서 박사님과의 첫 번째 만남은 1950년 겨울 연대 문과대학 2층에서 있었
던 면접 시험장에서였다. 무시험 서류 전형에 1차 합격한 정치외교과 지원자들
이 면저 순서를 기다리고 있었는데, 대기장에는 갖가지 루머가 떠돌고 있었다.
합격하려면 정외과의 서 박사님 질문에 대답을 잘 해야 되는데 질문 중에는
정외과를 영어로 무엇이라고 하느냐 하는 것이 있으며, 노래 한 곡쯤은 잘 불러
야 한다는 것 등이었다.
같이 대기하고 있던 고교 동기 정태동 박사가 즉시 신문사에 다니고 있는 형
에게 전화하여, 정치외교과가 영어로 `Department of Political Science and
Diplomacy`라는 것을 알아 내어 우리들에게 알려 주었으며, 나는 손바닥에 이를
적어 계속 외우던 생각이 난다.
정작 면접 때에 선생님께서 물으셨던 것은, 왜 정외과를 지원했느냐? 제일 좋
아하는 외교관은 누구냐? 고등학교 때 어떤 과외 활동을 했느냐? 등이었던 것이
기억난다.
그러나 기다리고 있던, 내 손바닥에 적힌 답에 대한 질문은 빨리 나오지 않는
것이 아닌가. 미리미리 준비하기 위해 슬쩍 손바닥을 열었는데, 아차! 하도 긴장
하고 땀을 많이 흘린 탓에 손바닥에 적힌 사연은 저혀 알아볼 수 없는 한 줄기
작대기뿐, 감도 잡히지 않는 것이 아니가!
그 때의 당황했던 기억은 지금도 잊을 수 없는 대단한 것이었다. 그러나 천만
다행히도 기대했던 정외과의 영어 단어는 그냥 넘어가고 말았고 덕분에 그렇게
들어가고 싶었던 학과에 들어갈 수 있게 되었다.
이렇게 시작한 은사님과의 대면은 학부 4년, 대학원 2년 동안에 그렇게 많은
강의를 들었건만, 면접시험이라는 명목으로 두 번이나 다시 만나는 인연을 갖게
된다. 즉, 62년 석사 과정 입학 때와 64년 동아일보사의 기자시험 3차 면접 때였
다.
결과를 고백하자면, 대학원은 합격하였고, 동아일보 기자시험은 낙방이었다.
은사님께서는 여섯 분의 논설위원 중 한 분으로 면접 심사위원이셨고, 나는 1차,
2차 시험에 합격한 사람 중에서 아마 한 명 낙방하는 데 당당히 들었던 것 같다
(낙방하게 된 구체적이고 심각한 이유는 이 글에서는 밝힐 수가 없음.)
어쨌든 정외과 졸업생 중에 나만큼이나 은사님의 강의를 많이 들은 사람도 별
로 많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6년간 가르침을 받고 세 번이나 면접시험
을 치는 내가 아는 서 박사님은 다음과 같은 분이시다. 그러나 이는 나의 경험
이지, 어떤 객관적인 자료나 통계에 의한 보편 타당한 서술은 될 수 없겠다. 어
디까지나 나의 주관적인, 그리고 내 제한된 접촉을 통한 경험에서 내 마음속에
부각된 은사님의 이미지이며,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닐 것이다.
첫째로, 선생님은 서양의 젠틀맨십과 동양의 선비 정신이 조화있게 접목된 국
제 신사라고 생각된다. 간단히 말하자면 멋쟁이시다. 1학년짜리 우리들은 그의
멋있는 중절모자와 금박으로 이름을 새겨 넣은 책가방에 무척 매력을 느꼈다.
그리고 안경 위에 선글라스를 덧씌우는 것도 퍽 신기하고 멋있게 느껴졌다.
주말에 정구복으로 갈아입으시고 라켓을 들고 운동장으로 뛰어 가시는 모습을
보며, 나는 커서 꼭 유학을 가서 다른 것 다 못 사도 저 가방과(내 이름자가 선
명히 새겨진) 라켓을 꼭 사 들고 돌아와야 되겠다고 생각했었다.
말씀하시는 투도 꼭, “아무 아무개 군, 했나요?” “어떻게 생각하나요?” 등
퍽 다정하게, 그러나 위엄을 잃지 않는 양반 같은 언사셨다. 선생님께 처음 소개
받은 그 유명한 한스 켈젠 교수가 꼭 서 박사님 같은 인상일 것이라고 혼자 생
각해 봤다.
후에 켈젠 교수의 손자사위가 된 동창생 이정훈 박사(현 하와이대학 경제과
교수)에게 물어 봤더니, 전혀 닮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학생 때는 우리 선생님께
서 적어도 켈젠이나 모겐소 교수 등과 맞먹는 분일 것이라는 자부심을 갖고 백
양로를 신나게 오르내렸던 기억이 내가 생각해도 순진하고 귀여운 생각마저 든
다.
둘째로, 우리 스승님은 민주주의 정신이 몸에 밴, 그래서 가르침과 행동으로
민주주의의 참 의미를 우리들에게 가르쳐 주신 분이시다.
1956년 우리가 입학하던 해에 미국 앨라배마 주의 보퍼스 주지사와 흑-백 문
제가 <타임스>에 실렸었다. 강의실에 들어오신 선생님은 기사 내용을 간단히
소개해 주신 후에, 인종차별 문제와 평등 문제에 관해 토론해 보라고 하셨다.
여러 친구들이 흑인들을 차별하는 백인 우월주의자들을 질타하는 열변을 토했
으며, 김태훈 동기와 나는 백인들이 차별하는 것은 그럴 만한 이유가 있다며, 흑
인들의 게으름, 의존하려는 태도, 불결한 삶의 자세 등을 예로 들면서 백인 편을
들어 소수 의견을 개진했던 생각이 난다. 물론 느물대기 잘하는 김태훈 사장의
억지에 가까운 이론이었다.
선생님께서는 미국의 공화당과 민주당의 의석 분포와 의회 내에서의 다수당과
소수당의 토론과 타협을 통한 의회 활동, 대법원 판결의 다수 의견과 소수 의견
을 설명해 주시며, 참 민주주의는 의견이 다른 사람들이 의견 교환을 통해 공동
의 선을 향해 타협하며 승복하는 것이라고 가르쳐 주셨다.
중간시험 직전에 소위 퀴즈라는 것이 있었다. 그 질문은 지금 열심히 열애하
고 있는 영국의 마거릿 공주와 타운센트 대령이 과연 결혼할 것인가, 금년 가을
연대, 고대 운동경기에서 어느 학교가 이길 것인가, 미국에서 흑-백 문제 해결의
방안은 무엇이 있을까 등이었다. 몇 문제 더 있었으나 기억이 안 난다.
모든 문제에 정, 오가 있을 수 없는, 우리 각자의 의견과 주장이 있을 수 있
는, 모두 맞을 수밖에 없는 문제들을 내놓음으로써 우리들이 자연스럽게 토론을
하게 만드시고, 활발한 토론을 통해 참 민주주의를 터득하게 하시려는 선생님의
뜻을 어렴풋이나마 짐작하게 된 것은 학교를 졸업한 한참 후였다.
세 번째로, 선생님은 제자들을 퍽 아끼시며, 제자들의 사회 진출을 위해 언제
나 시간을 내주셨고, 하늘의 별 따기만큼이나 어려웠던 직장 주선에 늘 길잡이
가 되어 주셨던 일을 기억한다.
나 자신만 해도, 선생님께서 논설위원이셨고 심사위원이셨던 동아일보 시험에
낙방된 후, 선생님의 적극적인 주선으로 유네스코 한국위원회에 첫 취직을 할
수 있었다.
서울대, 고대 그리고 연대 출신 한 명씩으로 청소년 활동 부서를 새로 만들어
바람직한 학생, 청소년 활동을 지도하는 일을 하게 되었는데, 선생님께서는 기회
만 있으시면 직장의 직속 윗사람에게, 내가 일을 잘 하고 있는가를 문의하시고
잘 보살펴 달라고 부탁하셨다는 얘기를 직장의 상사로부터 미국 유학을 떠날 때
에 들어 알게 되었다.
연대 정외과 하면, 매년 졸업생 중의 거의 반 정도가 미국으로 유학을 떠나는
것이 보통이었는데, 거의가 선생님의 추천서를 받아서 갔던 것으로 기억된다.
학교에 계실 때나 4.19 이후 공보처 장관을 하실 때나 신문사에서 논설을 쓰
실 때나 정외과 졸업생들의 미국 유학 추천서가 언제나 책상에 쌓여 있는 것을
보았으며, 하나도 빠짐없이 정성껏 써 주신 것으로 안다.
나 자신도 미국의 여러 대학에 입학 허가를 신청하면서 선생님을 여러 번 괴
롭혀 드렸으나, 진학 문제에 대해서는 한 번도 짜증을 내시거나 귀찮아하시는
표정을 본 적이 없다.
네 번째로, 선생님은 우리들에게 급변하는 세계 정세 속에서 세계인으로 안목
을 넓히는 훈련을 은연중에 시켜 주셨다고 기억된다. 대학원에서 과제도 매주
영문으로 된 정치 외교나 국제 관계 전문잡지의 논문을 한 편씩 정독, 분석하여
강의실에서 발표하는 것을 내 주셔서, 처음에는 수십 시간 사전을 찾아 가며 무
진 고생을 했으나 2년간 계속하다 보니 이력이 나게 되었다.
그 덕분에 후일 미국에서 대학원 세미나나 법과 대학원 공부를 할 때에 얼마
나 쉬웠는지 모른다. 지금 생각해 볼 때, 그 때 힘겨운 연습을 하지 않았더라면
미국에서 아주 힘이 들었거나 학위 공부가 불가능했을 것으로 생각이 된다. 미
국도 가기 전에 국제정치학계의 동향과 전망 등을 이곳에서 체감할 수 있었던
것이 얼마나 다행이었는지 모른다.
선생님께서는 아직도 옛날 그대로 멋쟁이시다. 88년 미국 로스엔젤레스 지역
옛날 제자들 50여 명이 텍사스에서 가르치고 계신 선생님 내외분을 모셔 와서
사은의 모임을 가진 적이 있었다.
그 자리에서 선생님께서는, “나는 한국의 연대에서 약 8년간, 그리고 미국 대
학에서 20여 년 이상 가르치고 있는데, 그 옛날 잠깐 가르쳤던 연대의 제자들이
이렇게 불러 주니 감개가 무량하다.”고 눈물을 흘리시면서, “나는 연대 출신이
아니고 미국서 학위를 마치고 귀국하여 가르치는 사람으로 연대 정외과와 인연
을 맺은 사람인데, 언제나 내가 연대 졸업생, 연세인으로 착각하며 살아가고 있
다. 내 일생에 연대 정외과를 뺀다면 너무 무의미할 것 같다. 나는 미국에 살고,
이곳에서 가르치고 있지만 죽을 때까지 연세인이고 싶다.”고 소감을 피력하셨
다.
선생님이 가르쳐 주신 학문과 민주주의 정신, 신사도를 열심히 배워 따라가려
고 애쓰면서 살아 왔지만 스승님의 그 멋은 배울 수가 없는 것 같다. 안에서부
터 우러나오는 그 멋 말이다.
스승의 손에 정구채가 늘 쥐어진 채로 건강하신 모습을 오랫동안 뵙게 되길
비는 마음 간절하다.
나라와 사회의 부름 받고
몸무게를 늘리려고
지금은 체중이 너무 나가서 몸무게를 줄이려고 다이어트를 하고 있는 중인데,
불현듯 공군 장교 시험을 보던 시절이 생각났다. 그 당시 서울에서 필기시험과
신체검사에 합격한 우리들은 대전에 가서 정밀 신체검사를 받게 되었다.
여의도에서 실시되었던 1차 정밀 신체검사에서는 초등학교 동창생이 공군병원
의 의무병으로 근무하였기 때문에 키와 몸무게를 재는 데 큰 문제 없이 넘어갈
수 있었다. 그러나 대전에서 실시하는 정밀검사에서는 문제가 될 것 같아서 안
절부절못하고 있었다.
그 이유는 공군 장교가 되려면 최소한 52킬로의 몸무게가 기본이고 그 이하인
경우 정밀검사에서 떨어지기 때문인데, 하필이면 동네에서 제일 친하게 지내는
친구와 내가 그 경우에 해당될 줄이야 누가 알았겠는가?
D군은 꼭 합격이 되어야 할 텐데 어떻게 하면 좋겠느냐고 땅이 꺼져라 한숨
을 쉬면서, 이럴 바엔 차라리 1차 시험에 불합격했더라면 대전까지 오지도 않았
을 것 아니냐며 혼자 투정을 부리기까지 하였다. 우리 둘은 내일 있을 정밀검사
를 위해 하루 전날 기차로 대전에 와서 여관에 묶고 있는 중이었다.
저녁을 먹고 그 친구와 나는 역전 다방에서 커피를 마셨다. 그는 계속 안절부
절못했고 나는 무슨 좋은 생각이 떠오르기를 기대하며 앉아 있었다. 드디어 한
가지 묘안이 떠올랐다. 매우 원시적이고 유치한 방법이기는 하지만 당시로서는
별다른 방법이 따로 없으니 도리가 없었다.
둘이서 다방을 나와 대전역에서 도청 방향으로 가다 보면 있는 목적교까지 걸
어갔다. 그리고 다리 밑으로 내려가서 돌들을 살펴 보기 시작했다. 그럴듯한 차
돌멩이 두 개를 골라 가지고 여관으로 돌아온 나는 친구에게 내의를 벗으라고
했다. 그리고 나서 손수건으로 차돌을 싸서 속내의 가랑이 속에다 차돌을 넣고
손수건을 감싸고 꿰매기 시작했다.
친구는 기가 막히는지 입만 딱 벌린 채 앉아서 아무 말이 없었다. 일을 마친
후에 입어 보라고 하니까, “웃기지 말라.”고 코웃음을 치는 것이었다. “내 몸
무개가 지금 50킬로인데 이 조그만 차돌맹이 넣어 봐야 1킬로 될까말까 하지 않
느냐.”며 쓸데 없는 짓 그만두라는 식이었다. 오히려, “누구 망신당하는 꼴 보
고 싶으냐?”고 내게 신경질을 부리는 것이 아닌가?
나는 속으로, `이 친구야 내가 무슨 돈을 받고 이러느냐, 아니면 내가 꼭 책임
져야 할 무슨 이유가 있어서 이러는가. 오직 동네 친구가 같이 입교해서 성공적
으로 훈련을 마치고 장교가 되어 군복무 의무를 보람있게 마치자는 뜻에서 애를
쓰는 것이 아닌가.` 하고 생각했으나 그런 식으로 말하지 않았다. 단지, “야! 같
이 입교해야 할 것 아냐? 어쨋든 좀 웃기지만 이렇고 입고 내일 가자. 그 다음
은 내가 책임질게.”라고 말했을 뿐이었다.
내게 속셈이 있기는 있었다. 고등학교 동기인 최용빈 군의 형님이 대전 의무
대장인 최 중령이라서 이미 접촉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사실은 정작 내일 있
을 정밀검사에 자신이 없는 것은 나 자신이었다. 나는 지난해를 포함해서 두 해
에 걸쳐 징병검사에서 무종을 받을 정도로 신체 조건이 부실한 사람이었다.
스무 살 때, 타고 가던 버스가 길가의 가로수를 들이받고 논 밑으로 구르는
바람에 발뒤꿈치를 심하게 다쳐서 여섯 달이나 입원한 적이 있다. 발뒤꿈치가
거의 떨어져 나가 뼈만 남아 있는 상태에서 넓적다리 살을 떼어 피부 이식을 했
으나 보행이 여의치 않아서 계속해서 무종 판정을 받았다. 금년마저 무종을 받
으면 영구히 병역에서 면제되어 다른 친구들이나 동기들보다 먼저 취직도 할 수
있고 사회생활도 빨리 해서 자리를 잡을 수도 있는 처지였다. 그러나 내 또래
친구들이 모두 병역의 의무를 감당하기 위해 몇 년씩이나 나라를 지키는데, 나
만 발뒤꿈치를 핑계로 면제를 받고 취직을 먼저 한다는 것이 상상할 수 없는 부
도덕한 일로 여겨졌다.
이런 얌체 같은 사람들이 이 사회에서 지도급 인사가 될 수 없다는 생각이 들
었다. 따라서 다소 결격사유가 있더라도 이를 보완해서 군복무를 마쳐야 한다는
것이 평소 나의 소신이었다. 그러나 논산훈련소가 아니라 공군장교 훈련소에 입
대하는 것은 이미 필기시험에 25대 1의 경쟁이라서 2차시험 격인 신체검사에서
떨어뜨리는 것은 식은 죽 먹기였다. 이런 까닭에 허약 체질로 떨어질까 봐 겁이
났던 것이다.
다행스럽게도 신체검사의 총책임자인 의무대장이 동창생의 형님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고 친구의 편지까지 전하면서 신체검사 전날에 그 분과 점심식사를 같이
했기 때문에 내 문제만큼은 자신이 있었다. 친구의 체중 미달 문제도 걱정이 되
기는 했으나 해결이 가능할 것도 같았다.
나는 친구에게 큰 소리를 치면서 일단 안심을 시켰다. “야! 걱정마. 만일 네
가 떨어지면 나도 안 들어갈 거야. 이곳까지 와서 같이 살고 같이 죽는 거야, 너
없이 나 혼자 무슨 재미가 있겠니. 둘이 같이 죽고 같이 사는 것이니, 합격이든
불합격이든 같이 가는 거다. 걱정 말고 잠이나 자자.” 하고 말하였다. 친구는
안심을 하는 것 같았다.
새벽 6시에 일어나 버스를 타고 공군기술교육단으로 들어갔다. 거기에서 고등
학교와 대학 동기들도 만났다. 신체검사장에서는 최중령께서 합격 불합격의 최
종 판단을 하고 있었다. 다시 찾아뵙고 인사를 하면서 친구를 소개했다. 내 친구
중에 제일 건강하고 동작 빠르고 똑똑한 친구인데, 단지 저울에 따라서 몸무게
가 1, 2킬로 올랐다 내렸다 하는 문제가 있다고 미리 귀뜀을 해 주었다. 그 분은
웃으면서 우리 둘을 격려해 주었다.
나는 어깨를 으쓱하면서 친구에게, `너 내가 어제 얘기한 뜻을 이제 알겠니?`
하고 말하는 것처럼 빙그레 웃어 보였다. 그도 역시 웃었지만 아직도 겁먹은 웃
음이었다.
결국 나는 `갑종 합격`을 복창하고 친구 차례를 기다렸다. 드디어 최 중령은
모든 기록을 훑어보더니 지금까지는 단순히 `갑종 합격` `불합격`으로 판정해 오
다가 친구 차례에 와서는 `52킬로 갑종 합격` 하는 것이 아닌가. 친구도 `52킬로
갑종 합격`을 큰 소리로 복창하고 경례를 한 후에 내게로 뛰어왔다. 이제 모든
문제는 해결되었다.우선 화장실로 달려가서 차돌 두 개를 제거해 버리고 한밭식
당으로 설렁탕을 먹으로 갔다.
요즈음 군대 가기 싫어서 일부러 살을 빼며 몸무게를 줄인 사람들의 얘기가
항간의 화젯거리가 되었다. 몸무게를 늘려서 꼭 들어가야 하겠다고 애를 쓰던
그 때를 생각하니 참 사람도 가지가지구나라는 생각이 든다.
1, 2킬로는 설렁탕 한 그릇이면 쑥 올라가는 것인데 1킬로가 모자라서 군대를
가지 않은 사람들을 이해할 수가 없다. 내 친구처럼 아침에 설렁탕 한 그릇만
먹고 차돌멩이 두 개로 2킬로나 몸무게를 늘린 사람과 너무 대조된다고 본다.
우리는 나란히 공군 항공병학교 장교 후보생이 되어 훈련받는 동안 나는 자치
회장으로, 그는 총무로 동기생들의 살림을 도맡아 열심히 훈련을 받고 당당히
장교로 임관하게 된다. 불합격과 합격선상에서 왔다갔다하던 우리 둘은 각종 경
기나 구보대회에서 언제나 1, 2등을 다투며 좋은 성적을 거두었다. 그것은 아마
도 꼭 들어가고 싶은 공군에 우여곡절 끝에 어렵사리 들어왔으니 최선을 다해서
남들보다 더 열심히 노력하자는 결의를 다졌던 우리 둘만의 입교 전날 밤의 결
심 때문이리라.
내 몸은 나라에 바친 관물
졸업을 앞두고 직장을 찾아야 되겠는데 갈곳이 없었다. 공개시험을 보는 곳은
은행과 신문사뿐이었는데 은행은 별로 관심이 없고 신문사밖에는 취직시험을 볼
곳이 없었다. 신문에 발표된 시험요령을 살펴보니 군 병역을 필한 사람을 찾는
곳이 대부분이었다. 사실 나는 버스 사고로 발뒤꿈치를 크게 다쳤기 때문에 두
번이나 무종 반정을 받았고 금년에 다시 무종이면 병종이 되어 영영 군대에 가
지 않아도 되게 되어 있었다.
나는 깊이 생각해 보았다. 다른 동창들과 친구들이 모두 군복무를 위해서 몇
년씩 학업을 중단하고 또는 직장 생활을 미루고 군대에 가는데, 나만 뒤꿈치를
핑계로 군복무의 의무를 면제받고 몇 년 먼저 사회생활을 시작한다는 것은 너무
염치없는 일이라고 생각되었다. 훈련받을 때나 군인으로 복무할 때 뒤꿈치 때문
에 불편할 때가 있을지 모르겠지만 병역의무는 떳떳하게 마쳐야 한다고 생각했
고, 논산훈련소에 가서 훈련을 받고 육군 사병으로 삼 년간 군대 생활을 할 결
심을 하고 신변 정리를 하기 시작했다.
이 무렵 정치과 동기인 김계산 군이 어디서 알고 왔는지 공군 장교 모집 시험
이 있는데, 시험 요강을 읽어 보니 육군 사병이나 마찬가지로 복무 기간이 3년
이라며 이왕이면 장교로 가자고 나를 꼬셨다. 나는 어차피 3년간 군대를 다녀와
야 하니 이왕이면 장교 생활을 하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시험은 12
월에 있고 시험과목은 영어와 논문이 공통과목이고 선택과목이 하나 있었다. 나
는 여러 과목 중에서 `정치지리` 과목을 선택했다.
다행히 나는 미국에서 세 가지 박사 학위를 받고 귀국한 라기호 박사에게서
정치지리 과목을 한 학기 수강하면서 대단한 흥미를 가지고 있었다. 우리나라같
이 지정학적으로 묘한 위치에 놓여 있는 나라는 정치지리를 잘 배워 두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해서 열심히 원서도 읽어 가며 공부를 꽤 해 둬서 자신이 있었
다. 게다가 이 과목을 가르치는 학교는 연대 정외과 외에는 없었기 때문에 자신
있게 이 과목을 선택으로 정했다.
그라나 막상 시험지를 받고는 실망이 컸었다. 문제는 정치지리가 아니라 어느
나라의 수도는 어디냐는 정도의 인문지리 수준의 문제가 출제됐기 때문이었다.
어쨌든 사관학교 교관 요원으로 한 명을 뽑는다는 얘기를 들었는데 20여 명이
이 과목을 선택한 것 같았다. 약간 걱정이 되었지만 별 도리 없이 발표 날을 기
다리며 입대할 준비를 했다. 다행히 합격이 되었고 나는 3월 10일 대전에 있는
항공병학교 장교 후보생 대대로 입교하게 되었다. 1백2십 명의 14기 각종 장교
중에는 연세대 출신 아홉 명, 경기고 출신이 다섯 명 있었고 서울대학 출신 중
에 전부터 알고 지내던 친구들이 많이 있어서 별로 외롭지 않았다.
첫날 저녁에 입고 왔던 옷을 모두 벗어 집으로 부치고 지급된 군복과 군화와
군모를 착용했다. 머리를 빡빡 깎고 똑같은 옷을 입으니 모두 좀 모자라는 사람
들 같아 보였다. 교관들에게는 우리가 모두 똑같은 후보생으로 보였을 것이고
바보같이 보였을 테니 막 다루기 편했었을 것이다. 우리들 중에는 부유한 가정
출신, 아버지가 장관이나 교수, 교직자 출신도 다소 있었지만 일단 머리 깎고 똑
같은 제복을 입으니 우리는 완전히 평등한 후보생이 되었다.
첫날밤 학교에서 대전역까지 구보가 있었다. 나는 두꺼운 양말에 빨래비누칠
을 한 것을 준비해 신고 가볍게 뛰어 낙오하지 않고 천 관문을 마칠 수 있었다.
두세 명의 동기생들이 뒤따르던 구급차에 실려 돌아왔다. 밤 10시쯤 시작한
뛰기는 역전까지 왕복하고 돌아오니 새벽 2시가 되었다. 그 때부터 소위 점호가
시작됐다. 나무 침상 위에 서서 구대장의 여러 가지 질문에 대답하면서 내무 생
활의 제반 규율을 교육 받는 일로 새벽 5시까지 소리를 지르고 큰 소리로 복창
하면서 서서 몇 시간을 지냈다. 동기 중 하나는 낮부터 소화가 되지 않은 상태
에서 부동자세로 몇 시간을 버티다가 바지에서 변을 지리는 불상사까지 일으키
고 말았다. 소문은 금방 전체로 퍼져 훈련이 끝날 때까지 첫날밤 점호에서 무슨
무슨 일 있었던 후보생 딱지가 붙어 다녔다.
그 날 밤 배운 것 중에 제일 중요한 것은 무슨 보고나 할 얘기가 있을 때 장
소와 때를 가릴 것 없이 언제나, “유재건 후보생, XX님께 용무.”라고 소리를
지른 다음 허락이 내리면 큰 목소리로 할 얘기를 해야 한다는 것이 있었고, 또
하나는 지급받은 모든 물품은 관물로 나라에서 세금으로 구입한 것이니 절대로
훼손하면 안 된다는 것이었다.
그 날 밤 구두를 지급받았으나 내 발에는 작아서 들어가질 않았다. 구대장님
께 큰 구두를 요청했으나 없으니 알아서 하라는 것이었다. 그래도 아침부터 뛰
면서 훈련을 받으려면 구두가 제일 긴요한 것이라, 다시 가서 큰 구두로 교환해
줄 것을 요청했다. 없다고 짜증까지 내면서 그는, “군대에서는 이런 때에 발을
깎아서라도 구두에 맞춰야 한다.”며 야단을 치는 바람에 두말도 못하고 돌아와
서 기가 팍 죽어 있었다. 그러나 내일 아침에 새벽 점호에 신어야 할 생각을 하
니 참으로 난감한 생각이 들었다.
전에 논산 훈련소에 갔다 온 친구들 생각이 났다. 모자를 잃어버리면 변소에
가서 일 보고 있는 아무나의 모자를 벗겨 쓰면 된다는, 군대에서만 있을 수 있
는 생존 방식 애기를 들은 바 있었다. 그러나 장교 후보생 훈련소에서는 그래서
는 안 되겠다고 생각했다. 할 수 없이 가지고 있던 면도칼로 구두의 가운데를
베어 구두의 볼을 넓히고 신어 보니 잘 들어갔다.
드디어 아침 점호 때 잘 신고 집합했다. 6시 아침 기상나팔을 불면 5분 내에
옷을 입고 구두끈 매고 구대별로 집합을 해야 한다. 부동자세로 차렷하고 있는
우리들을 하나하나 검사하는 주번사관이 내 앞에 와서 섰다. “귀관.” “네 유
재건 후보생.” “귀관은 어찌해서 관물을 훼손했나? 관물 훼손은 군법회의에
회부감이라는 사실을 모르는가?” 건물이 흔들릴 정도의 큰소리로 새벽 공기를
가르며 눈에 불을 켜고 야단이다.
나는 억울하기도 하고 야속한 생각이 들면서 약이 올랐다. 요즘 말로 열을 받
은 것이다. 그래 큰 소리로, “네, 관물훼손죄는 잘 알고 있습니다. 어제 지급받
은 구두가 작아서 신을 수가 없어 맞는 구두로 교환을 요구했으나 허사였습니
다. 주번사관님은 발을 깎아 구두에 맞추라고 하셨으나 나라에 이미 바친 이 몸
은 내 몸이 아니라 관물이 되었는데, 이 관물과 구두 중 어느 하나를 훼손하지
않으면 제게 맡겨진 임무를 완수할 수 없게 되었기에 부득이 덜 중요한 관물을
훼손하게 되었습니다. 처벌을 달게 받겠습니다. ”했다.
참으로 비장한 해명의 순간이었으나 동기생들은 웃음을 참느라고 킥킥거리며
애를 쓰는 것 같았다. 주번사관은 내게는 더 이상 추궁하지 않고, “웃는 놈이
누구냐? 웃은 놈을 다 3보 앞으로.” 하고 호통을 쳤다. 1백여 명이 삼 보 앞으
로 나와다. 기가 막힌 주번사관은 적당히 점호를 끝내고 돌아갔다. 우리는 참 많
이 웃었다. 이를 계기로 동기생들은 나를 자치회장으로 뽑았다. 첫날 점호 때의
인상이 꽤 깊었었나 보다.
아직도 그리운 대전 삼탕
나는 군대 훈련을 받으면서 마음을 단단히 먹은 바 있었다. 이왕 하는 것 철
저히 하자는 생각이었다. 모든 규정 이행은 물론 어색할 정도로 군인답게 생활
하자는 것이었다. 그래서 3보 이상은 언제나 뛰어서 다니고 식사할 때도 걸을
때도 직각 보행, 직각 숟가락질하기 등을 열심히 실천했다. 구대장님과 주번사관
님께서 가르쳐 준 것을 열심히 따라 했다.
토요일은 주로 사역을 많이 했다. 첫주 토요일 영내에서 잔디 뗏장 떼는 작업
을 하다 쉬고 있었다. 검은 안경을 쓰고 지휘봉을 든 삼구대장이 우리 쪽으로
걸어오고 있었다. 그런데 그의 바지 지퍼가 내려와 있고 사이가 꽤 벌어져 있는
것 아닌가? 나는 얼른 일어나서, “차렷, 작업중 이상 없음.” 하고 보고를 했다.
쉴 때는 처음 본 사람이 아무나 이렇고 보고하는 것이 규율이었다. 그는 보무
당당하게 지휘봉을 휘두르며, “좋아, 쉬엇.” 하며 우리들을 둘러보았다. 나는
얼른 그에게 다가가, “유재건 후보생, 구대장님께 용무.” 하고 벼락같이 소리
를 질렀다. 그는, “좋아, 뭔가?” 하며 나를 쳐다봤다. 나는 작은 소리로, “구
대장님 바지의 지퍼를 올리십시오.” 했다. 그는 얼굴이 빨개지면서 지퍼를 올리
며, “그래, 좋아, 가 봐.” 했다. 나는, “용무, 끝.” 하고 큰소리로 보고를 하고
돌아와 앉아 있던 곳으로 돌아왔다. 둘러앉아서 담배를 피우던 동기들은 배를
잡고 웃었다. 구대장은 멋쩍어서서인지 바로 돌아서서 다른 곳으로 갔다.
우리들은 여러 가지 종류의 기합을 받았다. 연병장을 기는 포복, 비오는 날 팬
티 바람에 이불과 요를 메고 뛰는 매트리스 맘보, 부동자세로 서서 모기에 뜯기
기 등 지나친 기합을 많이 받았다. 6개월 훈련받은 기간에 받은 기합들이 60여
가지 되었는데 우리 14기 공군 장교 회지에 이상주 후보생(현재 한림대 총장)이
자세히 기록했었는데 지금은 그 잡지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 하나도 없다.
처음 몇 주는 기합받느라 고단하고 바빠서 시간가는 줄도 모르고 집 생각할
겨를도 없었지만 몇 달이 지나면서 지루하고 지겨운 생각까지 났었다. 6.25 기념
일이 되었는데 주말이 끼여 3일정도 휴일이 될 수 있었다. 친구들은 특별 외박
으로 집에 좀 다녀왔으면 좋겠다고 야단들이었다.
나는 부대 근처 유성여중에 가서 교장선생님을 만나 도서실이 있느냐고 물어
보았다. 없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장교 후보생들이 세 권 이상씩 책을 가지고 올
테니 우리 대대장에게 우리가 자매결연을 맺었다는 것과 책이 필요하니 집에 가
서 가져올 수 있게 배려해 달라고 부탁해 달라고 했다. 교장선생님은 즉시 대대
장에게 찾아가 얘기를 했다. 이것으로 인해 특별 외박으로 집에 다녀온 첫 번째
기록이 되었다. 3일 간 집에 다녀온 친구들은 세 권 이상 책을 가지고 와서 6백
여 권의 책을 기증하게 되었고, 대전일보에 기사로 보도도 되었다. 장군 진급을
몇 달 앞둔 기술교육단 단장이 이 보도를 잘 활용했다는 후문을 들었다.
자치회장으로 나의 주된 임무는 어떻게 하면 기합받지 않고 재미있게 훈련기
간을 보내는가 하는 일이었다. 토요일은 일과가 없기 때문에 하루종일 작업을
하게 된다. 그래서 매주 토요일 후보생을 위한 교양강좌를 개설했다. 뙤약볕 아
래서 사역하는 것보다 강당에서 교양강좌를 듣는 것이 우리에겐 훨씬 좋았다.
우선 경비가 안 드는 후보생 아버지들 중에 저명인사 초청 계획을 세웠다. 상공
부장관이 되신 주요한 선생(주동설 군의 부친)을 시작으로 변종서 군의 부친 변
홍규 감리교 감독님, 고재수 군의 부친 고광만 문교부차관 등 여러분이 기꺼이
초청에 응해 주셨다. 교양강좌 시간은 부대 내의 전 장교들과 대전 유지들에게
도 인기가 있었다.
자치회에서 무인판매대를 운영해서 전 공군의 자랑거리가 됐다. 휴게실에 무
인판매대를 설치하고 노트와 펜, 내복류, 양만, 세면도구, 책, 먹거리, 음료수 등
을 쌓아 놓고 정가를 앞에 붙여 놓은 후 모금함을 설치했다. 이 중에 음료수가
인기가 높았다. 날씨가 더운데 훈련을 받게 되어 땀을 많이 흘렸기 때문이다. 매
일 밤 책임자인 김승국 군(현 건국대 교수)과 구매 책임자인 신호옹 군과 계산
을 해 보면 얼마씩 축이 나곤 했다.
몇 명이 돈을 내지 않고 물건을 가져갔다는 얘기다. 매주 보고서에는 정직하
게 꼭 맞게 교장에게 보고를 했지만 내 월급에서 자주 찔러 넣었다. 어느 친구
인지 지켰다가 잡아 야단을 치고 싶지만 우리 동기생들에게도 딱 맞는다고 보고
를 했다. 돈을 내지 않고 먹거나 마신 친구가 나를 거짓말쟁이라고 속으로 비웃
었을지 마음이 찔렸을지는 알 길이 없다.
자치회 임원들은 매일 밤 친구들이 다 잠든 후에 모여 해야 할 일들을 점검하
고 계획하는 시간을 가졌다. 그래서 언제나 잠을 덜 잤다. <보라매>라는 회지도
만들었고, 사진은 최상용 군과 김광국 군이 잘 찍었다. 다른 친구들이 모두 끙끙
거리며 기합을 받는데 사진 찍는다고 왔다갔다하다 욕을 먹은 적도 있다. 나중
에 앨범이 나온 다음에 이들에게 감사는 했지만, 기합을 받을 때는 사진이고 뭐
고 다 밉게 보이니 할 수 없었다.
주말에 외출을 나가게 되면 주로 영화나 음악 감상을 하고 맛있는 것을 사 먹
고 돌아오는 것이 고작이었으나, 동작 빠른 친구들은 벌써 여자 친구들을 사귀
어 데이트도 했다. 대전에 유일한 왕생백화점에서 일하는 아가씨들이 예쁘다고
소문이 나서 우리는 여럿이 백화점에 가서 돌아다닌 기억이 난다. 만년필부에
일하던 아가씨들이 아주 예뻤다. 보통 우리는 외출시 3탕을 했다. 외출 나가자마
자 유성에서 온천탕 한 탕, 한밭식당에서 설렁탕 한 탕, 그리고 자유궁다방에서
쌍화탕 한 탕은 필수였다. 대전 삼탕이라면 공군 장교들은 다 아는 일이다.
건달들이 형님으로 모신 사연
평택 부대에 근무하면서 일주일에 3일 정도는 대학원에 나가야 하기 때문에
밤에 일하고 낮에 공부를 해야 하니, 군대 생활은 무척이나 바쁘게 지냈다. 군대
생활은 바쁘지 않으면 무슨 사고가 난다고 어느 선배 장교가 한 말도 사실이었
다. 별로 할 일 없을 때 바림직한 일보다는 별로 좋지 않은 일들을 하게 된다.
그래서 바쁜 생활이 아주 생산적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나는 무척 바쁘게 지내
면서 또한 별의별 부대 일에 약방의 감초같이 참여했다.
어느 날 부대 앞동네, 부인회에서 단옷날 기념 노래자랑과 그네타기 대회를
주최하게 되었는데 앰프 시설을 빌려 달라는 것이었다. 부대장이 허락해서 앰프
와 마이크 등을 빌려 주며 적극 돕기로 했다. 자신이 생긴 부인회 간부들은 노
래자랑 때 군인이 심사위원을 해야 불평불만자들의 훼방을 막을 수 있으니 유
중위를 심사위원으로 나오게 해 달라는 것이었다. 부대장은 이것도 또 쾌히 승
낙해 주었다. 그래서 생전 처음 노래자랑 심사를 하게 되었다. 자정곡과 선택곡
을 한 곡씩 부르는 것이었다. 선택곡 중에 내가 잘 알고, 많은 사람이 좋아하는
노래를 부른 사람은 점수를 넉넉히 주고, 내가 모르는 노래를 부른 사람은 보통
점수를 주어 노래 자랑을 마쳤다. 여러 권위자들 중에 결과 발표를 내가 해야
된다고 주장하기에 그렇게 하였다.
이 부인회는 우리 사회에 보통 존재하는 부인들 모임이 아니라, 국제결혼을
했거나 미군과 살림을 살고 있는 여자들의 모임인데, 이들은 몇 가지 규칙을 만
들어 회원들에게 주지시키고 있었다. 예를 들면, `남의 남자 뺏지 않기` `11시 이
후에 동네에서 고성방가 하지 않기` 등 여러 가지가 있었다. 회장은 미군 현병과
같이 지내는 이화여대 중퇴의 40대 후반의 여인이었고 군기를 잡는 감찰위원들
은 5, 60대의 부인들이었다. 소위 외인부대 근처의 직업여성을 천대시하는 시대
였지만 이들은 상당수가 동생들 대학공부 시켜 주기 위해, 부모님을 돕기 위해
또는 결혼에 실패하고 출가외인이 되어 친가에 신세지지 않기 위해 이곳에 몰려
든, 한 많고 설움 많은 여인들이라 눈물이 많고 동정심도 많은 여인들이 많았다.
자기들 프로그램을 적극 도왔다고 하며, 나를 자기들 모임의 고문으로 추대했다.
명함을 찍지는 않았지만 나의 직함은 공군 중위, 부대 부인회 고문이었다.
어느 날 이 동네에 사고가 났다. 대학생 동생 둘을 공부시키고 있는 나이 좀
든 린다가 약을 먹고 자살을 한 것이다. 힘들고 어려워도 열심히 돈을 벌어 두
동생 대학 등록금을 꼬박꼬박 보내주며 살던 린다는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유명했다. 그런데 어느 날 대학을 나온 여동생이 사귀던 남자와 결혼을 하기 위
해 남자 부모의 승낙을 받으러 갔는데, 어떻게 알았는지 언니 핑계를 대면서 결
혼을 반대했다는 것이다. 속이 상한 여동생이 언니를 찾아와 넋두리를 퍼부었고
듣다 못한 언니는 약을 먹고 세상을 떠났다는 것이다. 2백여 명의 회원들이 흰
옷을 입고 상여를 메고 장지를 가는 장례 행사를 부인회에서 또 맡게 됐다. 미
군 부대의 부대장과 많은 군인들이 카메라를 들고 이 진풍경을 찍고 취재하느라
고 야단들이었다. 사회에서 버림받았다고 스스로 자신들에게 나쁜 이미지를 가
지고 사는 이들을 돕고 격려해 주는 일은, 총각이었던 나로서는 쉽지 않은 일이
었다. 내가 제대를 하게 되었을 때는 어떻게 알았는지 이들이 제대 파티를 성환
목장에서 열어 주었다. 어떤 자매는 눈물까지 흘리며 섭섭해했다.
제대를 한 뒤에는 5년간 직장생활을 하다가 미국에 유학을 갔다. 박사 학위를
위해 워싱턴 주의 시애틀에 있는 주립대에서 공부할 때에 옛날 평택, 오산에서
살던 부인 회원 여럿이 그 지역에 살고 있다가 내가 왔다는 소식을 어떻게 듣고
여러 명이 찾아왔다. 모두들 하나같이 한국에서 천대받고 무시당할 때 자기들을
인간적으로 자매같이 대해 준 거의 유일한 한국 남자, 유 중위는 영영 잊지 못
하겠다는 얘기였다. 참으로 사람의 만남과 인연은 묘한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보다 나이가 휠씬 더 든 이 자매님들은 내가 결혼한 것을 진심으로 축하해 주
면서 그 옛날 공군 시절 제일 인기 있던 유 중위를 미국 땅에서 다시 만나게 되
니 너무 반갑다며 어쩔 줄을 몰라했다.
나는 이들의 미국 생활을 보면서 또 다시 가슴 아픈 면을 보게 되었다. 어떤
이들은 그래도 잘 살고 있으나 많은 사람들이 아주 어렵게 살아가고 있음을 알
게 되었다. 대부분이 학력이 낮고 미국 생활에 관한 사전 지식 없이 무조건 와
서 많은 시행착오를 범하고 있는 것이었다. 이 사실을 알게 된 나는 마침 미국
연방정부 교육부에 동양의 소수 민족들 재교육을 위한 자금 지원을 받았다. 우
선 제1차년도에 이 부인들의 정착을 위해서 직업훈련, 취미교실, 자매결연 가정
등의 프로그램을 계획하면서 사무실과 직원도 확보해서 사업을 시작했다. 2차년
도에는 정규교육과 훈련이 주로 실시되고 스스로 자립할 수 있는 프로그램이 개
발되었고, 3차년도에는 한국에서 한국 여자와 결혼하려는 미군 신랑들을 위한
문화, 역사, 풍습 등의 교육이 계획에 포함되었다.
한국 사람들만 돕는다면 자금 조달이 불가능하기 때문에 일본, 중국, 필리핀,
태국 등 다른 동양계 이민들을 모두 수혜자로 잡고 계획을 세웠다. 직원도 사무
국장은 한국인, 차장은 필리핀인 그리고 이사진에는 동양계 각국 대표가 참여하
는 기구를 만들어 운영하였다. 이 계획을 수립하기 위해 기초 조사하는 일과 기
초 지식과 배경 연구에 옛날 오산, 평택에 살던 부인회 회원들이 적극적인 후원
자가 되었으니, 참 묘한 인연이었다. 왕년의 부인회 고문은 미국에 와서도 계속
고문직을 맡게 된 것이다.
미국에서 옛날 평택 미국부태 수사과에서 일하던 수사관도 만났고, 부대 앞에
서 주먹 좀 쓰던 건달 비슷한 친구들도 만나서 반갑게 해후하기도 했다. 실은
이 친구들과 처음에는 별로 반갑지 않은 관계로 만났던 것인데 미국에서 만나니
반갑기까지 했다. 5.16 군사혁명이 나자, 부대 앞에서 PX물건 장사하는 사람, 여
자들 등쳐먹는 건달들을 혁명군들이 잡아간 적이 있었다. 진공상태가 된 부대
앞 질서를 잡기 위해 새로운 건달들이 몰려들었다. 부대 앞의 음식점이고 맥주
마시는 집이고 이들이 무법 지대로 떠들고 다니며 동네 분위기를 다 흐려 놓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우리 부대 내 직속 부하인 홍 하사가 술집에서 이 친구들과
다투다 코뼈가 부러지는 불상사가 일어났다. 나는 즉시 현장으로 나가서 그들
패거리 중의 제일 맏형이 되는 대장을 찾아 단둘이 만나 승부를 겨뤘다. 물론
말로 좋게 한 것이지 주먹을 쓴 것은 아니었다. 고려 시대의 서희의 항변을 생
각하며 이 친구와 담판을 했다. 치료비 전액 부담은 물론 때린 부하들을 찾아
사과를 시키도록 하고, 앞으로 이와 같은 불상사가 다시는 없도록 대장인 그와
내가 의형제를 맺었다고 소문을 퍼뜨리는 일을 하기로 쌍방 합의를 했다. 그는
입담이 좋고 잘생긴 호남형의 건달인데 대전에서 놀다 이 지역에 와서 패권을
장악한 자였다. 나를 형님이라고 하는데 실은 그가 나보다 두세 살 위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여하튼 그는 다니면서 건달들에게 내 PR을 그럴듯하게 하고 다녔다. 학교 때
부터 유도가 3단이고 태권도 3단인 유 중위님은 작심하고 공부를 열심히 해서
공군 장교 시험에 합격했고, 훈련받을 때부터 자치회장으로 완전히 공군을 잡은
사람으로 문무를 겸한 선배로서 대전에서부터 모시던 형님을 여기서 다시 만나
게 되었다는 내용이었다. 그러니,“너희 동생들. 이형님을 나 대하듯 모시는 것
은 물론, 혹시 공군들과 시비가 있을 때는 꼭 유 중위님의 얘기를 하면서 일단
휴전을 제의해라. 그러면 그 뒤는 내가 책임질 터이니 알겠지?”라고.
기가 막힌 사실은 이 친구 얘기 중,“어디 그 형님이 과거에 우리같이 놀던
사람 티가 하나라도 나냐? 사람이 공부를 많이 하더니 확 달라졌어. 옛날 어렸
을 때 그 형님이 미아리 미군부대 앞에서 날리던 분인데 전혀 그렇게 안 보이
지? 참 사람 변하는 것은 알 수가 없다.”는 얘기가 들어간다. 하루아침에 나는
건달에서 회개하고 새사람이 된 사람, 옛날에 무섭던 사람이 되어 버렸다.
우리 부대 선배 장교님들께는 좀 민망했으나, 우리 부대 하사관과 사병들도
이런 소문을 듣고 나는 무척 어려워하는 풍토가 생겨서 부대 통솔에는 도움이
많이 되었다. 미국에서 만난 부대 수사과 직원들도 부대에 드나들던 우리 하사
관들과의 충돌로 인해 좋지 않게 평택에서 만나게 되었으나 미국에서 다시 만나
니 무척 반가웠고, 옛 친구같이 이민 생활에서 같이 도우며 잘 지냈다.
기차타고 부대이동
공군 장교 훈련이 끝날 무렵이던 무슨 특기를 받느냐가 모두의 관심사다. 나
는 같은 내무반의 침상 전무이며 자치회 부회장으로 나를 많이 도와 준 변종서
군의 아버님과 공군 참모총장을 지내신 최용덕 장군이 친하시다는 얘기를 들은
적이 있는지라 변 군에게 부탁을 했다. 부디 최 장군께 우리 두 사람 좋은 특기
를 받게 해 달라고 꼭 얘기를 하라고 간청을 했다. 그러면서 항공병학교 교관은
절대 안 된다고 못을 박았다. 하도 훈련이 고생스러우니까 대전이라면 신물이
난다는 것이 모두의 심정이었다. 어떤 친구는 대전에다 대고 오줌도 안 누겠다
고 할 정도였으니까.
변 군이 서울을 다녀오던 저녁, 희색이 만면한 그는 나를 조용한 곳으로 데리
고 가더니,"야, 이제 잘됐어, 너하고 나하고는 공군에서 제일 좋은 특기를 받게
됐어, 최 장군님이 직접 도와 주셨어. 일본도 자주 가고 미국도 가게 된데. 너무
잘 됐지. 야, 아무에게도 아직 말하지 말아야 한다."고 신나게 떠들었다.
나는 종서가 너무 고마웠다. 사실 공군에 들어올 때 나는 사관 학교 교관요원
으로 합격이 되었다. 그런데 사관학교에서 지리를 가르치고 있는 교관이 원래는
우리가 임관하는 달에 제대를 해야 하는데 연장 근무를 신청했다는 것이다. 그
래서 나는 사관학교에 가서 가르칠 기회를 갖지 못한 채 최 장군이 추천한 공군
에서 제일 좋은 특기를 받게 되었다. 그런데 나중에 알고 보니 이 특기는 아무
도 좋아하는 사람이 없고 인기가 제일 없는 관제 특기였다. 6개월을 전자 통신
학교에서 관제교육과 영어교육을 받고 평택 레이더 사이트로 첫 번째 배속을 받
았다. 이곳에서 4년간 관제사로 근무하다가 제대를 했다. 변종서 중위와 나, 단
둘만이 한곳에 배속되어 전속 한번 못 가고 한곳에서 제대한 경우가 된 것이다.
삼교대로 근무하는 관제사 업무는 근무시간이 일정치 않고 아침, 저녁, 밤 삼
교대로 번갈아 근무를 하게 되는데 밤근무 즉, 11시부터 아침 7시까지의 근무는
다 싫어하는 시간이었다. 나는 주로 밤근무를 도맡아 하고 낮에는 기차를 타고
서울에 가서 대학원 강의를 들었다. 일주일에 세 번쯤은 학교에 가야 하기 때문
에 나는 주로 기차에서 잠을 잤다. 덕분에 4년 근무 후 제대하면서 석사 학위도
같이 받게 되었다. 관제 특기 아니면 불가능한 일이었으니 학위도 같이 받게 되
었다. 관제 특기 아니면 블가능한 일이었으니 공군에서 제일 좋은 특기라고 하
신 최용덕 장군의 말씀이 전혀 틀렸다고는 할 수 없을 것이다. 일본도 가고 미
국도 갈 수 있는 특기라고 했지만 나나 종서나 일본이고 미국이고 한 번도 나라
를 떠나 본 적이 없었다.
군복을 입고 다니면서 부끄러운 일, 맹랑한 일도 했다. 지금 생각하면 참 얼굴
뜨거운 일들도 제복을 빙자해서 속된말로 주접을 떨었던 것이 민망한 생각이 든
다. 하루는 주말에 평택에서 기차를 타고 서울로 향했다. 이 주간이 마침 육해공
삼군 합동 무임 승차단속 주간이었다. 세 명의 육해공군 헌병이 기차에 타고 있
는 군인들의 승차권 검사를 한다. 맨 뒤칸부터 조사를 하니 차표 없는 군인들은
다음 칸으로 다시 다음칸으로 도망치다시피 밀려가고 있다. 평택에서 서울행 기
차를 타는 군인은 모두 공군뿐이다. 오산과 수원에서 승차한 군인들도 모두 작
전사령부와 수원비행단 소속의 공군 하사관들이었다. 모양 잘 내기로 유명한 공
군 하사관들이 애인을 만나고 친구를 만나려고 바지 주름을 빳빳이 세우고 구두
도 번쩍번쩍하게 광을 내고 서울로 올라가다 추격을 당한 꼴이 되었다.
실은 장교인 나도 기차표 없이 탔기 때문에 망신당하기 좋게 되어 버렸다. 난
감하기 짝이 없었다. 한 칸을 옮겨 맨 끝칸으로 가서 가만히 방법을 생각하는데
기차는 영등포를 이미 지났고 노량진을 지나 용산역에 닿았다. 마지막 한 칸은
거의 전원이 공군 하사관들로 꽉 찬 셈이다. 서울역까지 갈 시간이 없었다. 나는
큰소리로, “전 장병 모두 하차해서 집합.”하고 명령을 내렸다. 카키복 공군 장
교복에 은줄 장교모를 쓰고 검은 안경까지 낀 내 모습이 그땐 썩 괜찮았었다고
지금도 생각된다. 하사관들은 앞 다투어 하차해서 정렬하기 시작했다. 키 큰 순
서로 3열 횡대로 세워보니 약 1백5십 명은 되었다. 나는 그들에게, “열중 쉬엇.
차렷.”을 두 세번 한 다음에, “부대 이동에 이탈이 없어야 한다.”고 즉석 훈
시를 한 다음, “줄줄이 우로 갓.”하며 개찰구를 향해서 부대 이동을 시켰다.
무임승차 단속반원 헌병들이 보는 가운데 멋진 부대 이동 행진이 거행되고 있
었다. “하나, 둘, 하나, 둘.”하며 구령까지 부르며 나도 대열과 같이 발을 맞추
어 걸었다. 부대원들의 구두 소리는 절도 있고도 아름답게 들렸다. 짝 짝 구두
소리가 리드미컬하게 들렸다. 표 받는 직원이 서 있는 곳까지 이동시킨 나는, “
중대 섯 좌측 1열부터 퇴장. 다음 2열, 3열.”하면서 모두 내보내고 나는 어리둥
절해서 서 있는 역무원과 굳은 악수를 나누고, “수고하십쇼”하는 말 한마디만
남기고 나왔다. 아직도 대열을 흐트러뜨리지 않고 기다리고 있는 하사관들 앞에
서서, 드디어 나는 입을 열었다. “공군 305대대의 유재건 중위다. 외출 즐겁게
보내고 귀가 하도록, 알았나?” “네.” 역전이 떠나가듯 큰 소리로 응답한다.
“좋다. 해산!” “야!” 모두 해산시켜 놓고 나는 군 기관원이나 헌병이 무슨
군대 이동이냐고 혹시 묻지는 않을까 은근히 겁이 나서 부지런히 걸어서 맞은편
건물 2층 다방으로 들어갔다. 숨 좀 가다듬으며 주위를 살펴보기 위해서였다. 아
무도 따라오는 사람이 없고 나를 쳐다보는 사람도 없었다.
월요일 아침 부대로 출근하니 여기저기 타 부대에서 근무하는 동기생들로부터
전화가 오고 있었다. 자기 부대 하사관이 지난 주말에 어려운 곤경에 빠졌을 때
305부대 유 중위가 슬기롭게 자기를 구출해 주었다고 극구 칭찬을 하더라는 것
이다. 여러 명의 전화를 받았다. 이 얘기가 공군본부에까지 소문이 나서 정훈국
에서 출판하던 공군 잡지에 소개되기도 했다.
공군에 근무하면서 이렇게 이상하거나 우스운 일로만 이름을 날린 것은 물론
아니었다. 전투 요격관제사로 훈련 요격 때마다 좋은 성적을 냈고 공중에서 길
을 잃어버렸거나 기음이 떨어져 방황하는 비행기를 안전하게 비행장으로 유도하
여 표창을 받은 적도 있었다.
하루는 레이더 판을 들여다보고 있는데, 김포 근처 상공에서 삼각 비행을 하
고 있는 비행기를 발견했다. 위치를 말해 주며 통신을 시도했으나 대답이 없었
다. “내 통신이 들리면 굵은 줄로 표시하라.”고 지시하니 즉시 굵은 줄이 비행
기 주위에 나타났다. 나는 고장이 났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래서 조종사를 안심
을 시킨 다음에 기름과 계기를 점검하게 하고, 기름을 아끼기 위해 엔진을 끈
채 활공하는 기술로 비행장을 향해 고도를 순차적으로 낮추게 유도하며 오산 미
군 비행장으로 안전히 착륙토록 하였다.
당시 나의 비밀 암호 번호가 011이었는데, 안전히 착륙한 조종사가 나를 찾는
것이었다. 지상 전화로 받아 보니, 미국 공군 소령이 계기로 고장이 나고 송신이
여의치 않아 비상 삼각 비행을 하면서 초조히 기다리다다 나의 통신을 받게 되
었는데, 내가 안전하게 착륙을 시켜 주니 너무 감사하다면서 오산 장교를 클럽
에서 한턱 낼 테니 꼭 오라는 것이었다. 그 소령이 나를 자기 생명의 은인이라
고 생각했고 참모총장 표창을 상신했다는 얘기를 공군 참모총장 부관을 지낸 2
년 선배 김교선 형에게서 들었다. 내가 누군지 확실히 잘 모르는 김 선배는 요
격관제사로 현역 근무하는 중위가 군무중에 행한 일로 인해 참모총장 표창은 바
람직하지 못하다고 생각해서 반대 건의를 했다는 자백을 들었다. 오래 지난 일
이라 나는 다 잊어버렸었는데, 김 선배 얘기를 듣고 보니 그 때 그 일 때문에
작전 사령관 표창을 받았던 일이 있었던 것 같다.
첫 직장
64년 10월1일, 4년 반의 공군 장교 생활을 마감하고 명예제대를 하게 되었다.
무직자가 된 나는 제대금으로 받은 얼마의 돈으로 마지막 석사논문 손질을 하기
시작했다. 평택 부대에서 근무할 때 미군 도서관을 자주 드나들 수 있었기 때문
에 최근 국제 정세의 추세와 국제 관계에 관한 논문과 책을 많이 읽을 수 있었
다. 그 중에 내가 관심을 갖고 살펴 본 것은 지역적 집단 안전보장기구에 관한
것들이었다. NATO와 SEATO, 바르샤바 조약 등을 검토해 보며, 평화 유지와
전쟁 억지를 위해 항상 위험이 존재하고 있는 동북아의 문제를 생각하여 NATO
라고 부를 수 있는 동북아 집단 안전보장 체제를 제안하는 논문이 나의 석사논
문이었다.
김명회 박사가 주심이며, 추헌수 교수와 이극찬 교수가 부심으로 심사해 주셨
다. 논문은 다 됐으나 이를 책자 형태로 스무 권이나 만들어 학교에 제출하는
일이 문제였다. 비용이 만만치 않았기 때문이다. 내 어려운 사실을 안 최봉삼 동
기가 신일무역 사장이신 형님께 부탁을 드려 형님이 출판비를 부담해 주셨다.
지금도 잊지 못한 은혜이다.
그 때 청와대에서 사람을 추천해 달라는 연락을 받은 김명회 은사님은 나를
선뜻 추천해 주셨다. 청와대의 3급 비서관을 할 사람으로, 군복무를 마친 깨끗한
정치과 출신을 찾는다는 것이다. 청와대 실장을 시내 모 호텔에서 만나서 면담
을 했다. 나의 솔직한 한국의 장래에 대한 견해를 들은 세 분의 어른들은 좋다
며 같이 일해 보자고 했다. 알고 보니 사정 담당이었다. 사실 제대하고 석사도
마친 상태라, 이제 직장만 있으면 결혼해서 어머님께 효도도 해야 할 나이가 되
었기 때문에 내게는 직장이 절실했다. 때마침 지도교수의 추천을 받아 직장이
소개되었으니 이 얼마나 고마운 일인가? 그러나 인터뷰도 끝내고 하루하루 기다
려도 영 소식이 없었다. 김 박사님도 궁금해하시는데 청와대에서는 감감 무소식
이었다.
그럴 때쯤 대학 은사이시며 고등학교 선배이신 서석순 박사께 연락이 왔다.
한국 유네스코위원회에서 청소년, 대학생 지도를 위한 간사 자리가 새로 생겼는
데 아무리 생각해 봐도 유 군이 적격자이니 그 곳의 양우석 총무부장을 만나서
얘기를 들어 보라는 것이다. 다음 날로 고등학교 선배가 되시는 양 부장을 만났
다. 그는 여러 가지 새로운 활동에 대한 얘기를 한 끝에 사무총장이신 조민하
교수께서 강원용 목사님 친구이시니 강 목사님께서 전화로 부탁을 하신다면 틀
림이 없겠다는 것이다. 강원용 목사님을 찾아갔다. 자초지종을 들으신 목사님은
지금 당장 조 총장을 만나러 가자고 했다. 그래서 목사님을 모시고 유네스코회
관으로 조민하 총장을 찾아갔고, 강 목사님께서는 조 총장님께 새로 생긴 자리
는 내가 최고 적격자라며 자신 있게 추천을 하셨다. 조 총장님은 그 말을 듣더
니 그 자리에서 결정을 하자면서 다음 월요일부터 출근을 하라고 명하셨다. 대
학의 은사님들을 잘 만나 쉽게 취직 자리를 얻으니, 다 나의 복이라고 생각한다.
그 즈음 서석순 박사께서는 정외과를 억지로 밀려나다시피 그만두시고 동아일
보 논설위원으로 계셨었다. 나는 제대 후에 석사논문을 쓰면서 동아일보 기자
시험을 본 적이 있었다. 1차, 2차 다 붙고 나서 3차에 떨어졌다. 그 때 3차 구두
시험 위원 여섯 명 중에 서 박사님께서 계셨는데 나는 그 시험을 낙방을 한 것
이었다. 대학에서 4년간 대학원에서 2년간 선생님 밑에서 공부한 제자가 마지막
구두시험에서 떨어지게 되니 선생님께서 마음에 부담을 가지셨던 것 같았다. 그
러다 선생님의 후배인 양 부장으로부터 유네스코 얘기를 듣자마자 나를 찾으신
것이다. 이 일 때문에 서 박사님 형님의 처남인 김계삼 동기가 얼마나 오해를
했는지 모른다. 자기도 일자리를 찾고 있는데 어쩌면 사돈인 자기를 젖히고 나
를 추천했느냐고 막 화를 내기까지 했다.
나는 그에게 부담을 느껴 유네스코에 취직하자마자 작업을 해서 5개월 만에
김계삼 군을 그의 적성에 맞는 유네스코 출판부 영문 잡지 편집국에서 일하게
해 주었다. 지금은 고인이 된 그는 참 순진하고 단순한 친구였다. 둘이서 정외과
를 나와 공군 장교 4년을 같이 하고, 제대하여 극적으로 둘이 같이 유네스코 직
원이 되었으니 이런 것은 보통 연부이 아닐 수밖에 없는 것인데, 그는 항상 내
게 경쟁심 같은 것을 가지고 혼자 괴로워했다. 그가 말년에 대학원장으로 있던
경남대학에 나를 특강 강사로 초빙해 어렸을 때의 오해 같은 것은 다 풀었다.
참 기분이 좋았다. 그리고 1년 만에 그는 세상을 떠났다.
유네스코에서 대학생들과 같이 여름방학 봉사 활동을 하기 위해 화성군에 답
사차 갔었는데 지서 순경이 나를 찾아왔다. 거수경례를 크게 하면서 청와대 비
서실에서 찾는다는 것이었다. 나는 청와대로 전화를 걸었다. 청와대에서는 나를
만나고 싶으니 시간을 정해 달라고 했다. 나는 아주 단호히 그리고 당당하게,“
미안하지만 면접 후 두 달간 아무 연락이 없어, 좋은 직장을 찾았으니 잊어버리
십시요.”라고 쏘아붙이듯이 내뱉고 내 쪽에서 먼저 전화를 끊었다. 그리고 청와
대는 그만이었다.
누가 알아보지도 않았고 누가 뭐라 해명도 없이 수십 년이 흐른 후, 나는 청
와대 총무과에서 오래 근무했던 연대 동기 진혜숙 교수에게서 그 때의 상황을
상세히 들을 수가 있었다. 진혜숙 동문이 나의 얘기를 듣고 너무 좋고 질투가
날 정도로 놀랐다는 것이다. 처음부터 높은 직급을 받고 시작하기 때문이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며칠 후 안기부 조회 내용에 따라 나는 채용 불가라고 결정이
내려 자기 자신도 크게 놀랐다고 했다. 빨간 줄이 많이 쳐진 파일에 절대 불가
도장이 찍혀 있었다. 이유는, 납치된 동도극장 사장을 역임한 삼촌 때문이었다.
수십 년 후 그 때의 기분을 얘기하는 나의 친구 진혜숙 동문은 아주 감회가 깊
다고 말한다. 그 때 내가 좋은 직급으로 청와대에 들어갔더라면 내 운명은 지금
과 전혀 다른 방향으로 발전했을지도 모를 일이라며, 그자신도 고개를 갸우뚱거
린다. 나는 보이지 않는 손이 도왔다고 생각했다.
유네스코 청소년부에는 서울대 출신 조철화(전 적십자사 사무총장)선생, 고대
출신 이세기 선생과 연대 출신인 나와 셋이서 청소년과 대학생 사업을 시작했
다. 내게 부과된 첫 번째 프로젝트는 한국 청소년단체협회 창립을 위한 기초 조
사, 중요 인사 접촉, 세미나 그리고 창립과 활동 등의 일이었다. 나는 정부 각
부처에 등록된 청소년단체를 찾았다. 약 240개의 단체가 교육부, 보사부, 법무부
등에 등록되어 있었다. 설문지를 만들어 단체의 실정을 조사했다. 놀라운 일은
전체 240개 등록된 단체 중에 전화도 없는 단체, 사무실도 없는 단체, 임원도 없
는 단체가 대부분이었고, 제대로 활동을 하고 있는 단체가 30여 개 되었다.
나는 기본 조사에 근거하여 이 단체의 이사장과 실무 간사를 초청해서 세미나
를 준비했고, 그 곳에서 자연스럽게 청소년단체협의회를 창립을 꾀하게 되었다.
춘천 관광호텔에서 열린 이 세미나는 한국 청소년 운동 역사에 크게 기념이 될
만한 일로 기억되게 되었다. 당시 협의회장은 YMCA의 김치욱 총무, 부회장에
는 적십자사의 서영훈 청소년부장과 걸 스카우트의 양순담 회장 등이었다. 나는
실무 사무 책임자가 되어 세계 청소년연맹 같은 국제 조직과 연계를 가지며 국
내 청소년 지도자들의 훈련 계획도 수립하는 일을 하였다.
대학생들의 건전한 과외 활동을 돕기 위해 한국 유네스코 학생협회를 만들어
전국 40여 개 대학에 협회 KUSA를 만들기 시작했다. 참 신명나게 일하던 시절
이었다. 내 적성에 꼭 맞는 일이라고 생각되어 기쁘고 즐겁게 일했다. 이 시절에
지도했던 학생들이 이제는 사회의 저명인사들이 되어 크게 활약하고 있으니, 그
들만 만나면 옛날 생각이 나고 마음이 든든해진다.
평화는 사람의 마음에서
나의 첫 직장은 유네스코였다. 유엔의 특별 기구 중 하나인 교육, 과학, 문화
기구로서 우리는 유엔의 회원국은 아니었으나 유네스코에는 정식 회원국이기 때
문에 이 기구를 통해서 한국의 위상을 높이는 일들을 꽤 하고 있었다. 바쁘게
일년 가까이 지낸 66년 1월, 미 국무부의 대표가 미국에서 개최되는 국제 청소
년지도자 교환교육 계획에 참가할 한국 대표를 직접 인터뷰를 통해서 뽑기 위해
서 한국에 왔다. 소위 CIP 프로그램이라고 알려진 이 연수 계획은 전세계 1백여
개 국에서 약 1백5십 명의 청소년 지도자들을 초청하여 2주간 회의, 두 달간 대
학교육, 석 달간 현장실습을 시키며 미국 청소년 단체의 실체를 보고 배우며 민
박을 통해서 미국을 이해시키기 위해 국무부와 제휴하여 클리블랜드에 있는 CIP
본부에서 시행하고 있는 아주 좋은 프로그램이었다.
이 계획은 창시자인 오랜돌프 박사가 직접 한국에 와서 우리나라 청소년 단체
에서 추천받은 수십 명의 청소년 지도자들 중에 두 명을 선발했다. 다행히 걸스
카우트의 이연숙 선생과 내가 뽑혔다. 우리 둘은 4월 5일 서북항공편으로 뉴욕
에 갔다. 내 일생 처음 나가는 외국 여행이라 매우 흥분했고 기대도 컸었다. 뉴
욕에서의 일주일은 주로 프로그램 소개와 관광이 주였고 클리블랜드에서는 대학
에서 6주간 세미나가 있었다. 미국 사람 집에서 같이 기거하면서 오전중에는 학
교 공부, 오후에는 주민과 같이 지역사회의 여러 가지 활동에 참여해서 많이 배
우고 한국을 알리는 일을 했다.
직업이 다르고 사는 동네도 다른 세 가정에 2주일씩 민박을 하면서 미국을 이
해하는 기회를 갖게 되었다. 첫 번째 가정은 화공학 박사인 제약회사 부사장 댁
으로, 클리블랜드 시 교외의 최고급 주택지에 거주하는 상류 사회 가정이었다.
대학 다니는 딸 하나만 집에 있고 아들들은 다 독립해 살고 있는 가정인데, 독
일계 이민의 2세로서 열심히 공부해서 자수성가한 가장과 알뜰한 주부의 표본
같은 어른들이었다. 같이 나이아가라 폭포도 가 보았고, 주말마다 인근의 명소를
탐방했으며, 고급 사교 파티에도 특별손님으로 여러 번 같이 다니며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었다.
두 번째 집은 적십자사의 직원인 부인 혼자 사는 가정인데 남편과 사별하고
교회 일과 지역사회 일에 온 정성을 다 바치고 있는, 봉사가 몸에 밴 여장부 스
타일의 중년 여자 가장 댁이었다. 사귀는 친구들도 거의가 지역사회를 걱정하는
시민단체 지도자들이거나 자원봉사자들이었다. 유나이트드 웨이라는 지역에 시
민단체를 후원하기 위해 각급 직장에서 걷은 후원금을 모으고 관리하고 사업계
획에 따라 배분하는 일을 하는 기관으로, 나로서는 처음 알게 되는 참신한 단체
들이었다. 우리도 이런 기관이 있어 공신력을 가지고 여러 의미 있는 시민단체
들을 후원하는 일이 이루어졌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
세 번째 가정은 유치원에서 초등학교 3학년까지 연년생으로 3형제를 키우는
전기기술자 가정이었다. 남편은 주말이면 큰아들이 소속한 소년단을 위해 자원
봉사로 자동차 운전도 해 주고 캠프에 가서 요리도 해 주는, 서울에선 보기 드
문 착실한 가장이었다. 부인은 집에서 아이들 옷 떨어진 것을 꿰매 주고 천을
싸게 사다가 집에서 재봉틀로 셔츠를 만들어 입히는 살림꾼이었다. 이렇게 알뜰
하게 살림을 하다가 교회에 헌금하는 일을 게을리하지 않고 소년단을 위해 놀랄
만큼의 후원금을 내놓는 내외였다. 서울에서 자원봉사 정신이나 기부금 희사 정
신을 전혀 보지도, 경험하지도 못한 내게는 참으로 큰 충격이 아닐 수 없었다.
세 가정에서 2주간씩 식객으로 지내면서 영어도 많이 는 것 같았다. 처음에
잘 듣지 못했던 단어들고 꽤 잘 들리기 시작했다. 나는 아직 미혼이라 개인적으
로 이 다음에 가정을 이룰 때 어떻게 하면 좋은 남편과 가장이 될 수 있을까 하
는 점을 배워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우리나라의 장래를 위해서 가정과 지역
사회와 개인의 관계가 어떻게 공동체를 위해 협력하며 관계를 정립해야 할 것인
가 하는 문제들을 깊이 생각하는 계기가 되었다. 배울 점이 많은 미국 가정에 6
주간 같이 생활하면서 이번 미국 여행은 내 일생에 제일 보람있는 교육 훈련의
기회라고 생각했다.
나는 지금도 이 프로그램의 창시자인 오랜돌프 박사를 회상하며 깊은 존경과
경의를 보낸다. 오랜돌프 박사는 독일 출신으로 신학과 철학을 공부하여 교수가
되었으며, 세계 제 2차대전중 미국 유니온 신학교의 초청을 받아 본 회퍼 목사
와 같이 미국에 건너가 특강을 하게 되었다. 히틀러의 학정이 극에 달해서 죄
없는 유대인들을 모두 학살하고 나라를 군사 독재로 휘둘러 암울하게 만들어 놓
았을 때 미국에 온 두 학자는 많은 고민을 하게 되었다는 얘기를 들었다.
유니언 신학교에서는 교수 자리를 놓고 두 학자를 유혹했다. 본 회퍼 목사는,
“조국이 독재자의 학정에 시달리고 있고 동포들이 신음하고 있는 때에 나 혼자
미국에 남아서 편히 지낸다면 전쟁이 끝난 후 조국 재건 때 나는 설자리가 없게
될 것임으로 고국이 어려움에 처한 지금 고국에 돌아가서 동포와 같이 죽고 살
아야 한다.”고 만류를 뿌리치고 독일로 귀국하여 몇몇 목사들과 히틀러 암살
계획을 세웠다가 동지의 배신으로 독일이 연합국에게 항복하던 1945년 부활절
일주일 전에 교수형에 처해졌다.
오랜돌프 박사는 생각이 달라서 미국에 남아 독일의 종전을 위해 노력하다 종
전을 맡게 되었다. 조국에 귀국하여 히틀러에게 희생된 본 회퍼 목사를 생각하
며 친구를 빼앗아 간 동족을 말살시킨 전쟁을 이 땅에서 없애 버리고 평화의 씨
를 심어야 하겠다고 결심한 오랜돌프 박사는 클리블랜드 지역사회 유지들과 같
이 클리브랜드 국제 교환 프로그램을 창설하게 되었고, 미국 국무부의 지원과
후원을 받아 전 세계에서 청소년들을 위해 일하는 지도자들을 초청해서 미국을
알리고 또 서로의 이해를 도모하며 친구를 만들게 하려는 목적으로 이 일에 몸
을 바치게 된 것이다.
내가 일하고 있는 유네스코의 기본 정신과 꼭 같은 뜻을 가지고 이 사업을 시
작한 오랜돌프 박사의 뜻은 바로 우리 참가자들에게 전달되었고, 우리 참가자들
은 모두 조국에 돌아가서 청소년들을 올바르게 성장시켜 전쟁 없는 평화로운 세
계를 만드는 데 앞장을 서야겠다고 다짐을 하기도 했다. “전쟁은 인간의 마음
에서 시작되어야 합니다. 평화를 구축하기 위해서는 남을 이해하고 역지사지의
정신을 가져야 하는데 이웃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의 신을 신어 봐야 합니다.
나라간의 평화를 위해서는 그 나라 사람들을 이해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그 나라에 가서 보고 또 그들을 초청해서 우리를 보여 주어야 합니다. 결국 마
음의 문을 열고 친구가 되어야 합니다. 이 일을 위해 우리는 매년 1백여 명의
전세계 지도자들의 만남의 장을 마련하고 있습니다. 이 만남을 통해서 이 땅에
평화가 이루어지는 계기가 되기를 바랍니다. 오늘 우리는 평화의 씨를 심어야
하겠습니다.” 뉴욕에 도착하자마자 개회 인사를 통해 오랜돌프 박사께서 우리
에게 주신 말씀이다.
그는 몇 년 전에 세상을 떠났으나 지금까지도 전세계에 많은 지도자들이 그의
정신과 사상을 존경하고 그를 추모하고 있다. 나는 귀국해서 기회가 있을 때마
다 이 6개월의 미국 생활을 소개하면서 오랜돌프 박사의 정신을 늘 전도자같이
전하면서 다녔다. 지금도 그의 인류애와 평화 정신은 전세계 구석구석에 씨뿌려
졌다고 생각한다.
평화의 씨가 꽃피울 날을 기다리고 계실 오랜돌프 박사님, 편히 잠드소서.
고스톱도 못 치는 주제에
문교부에서 시행하는 유학 자격 시험의 유효기간은 3년이었다. 나는 대학을
졸업하던 60년에 한 번, 아직 공군 장교로 근무하던 63년에 한 번, 그리고 제대
하고 유네스코에서 일하던 66년에 시험을 봐서 매번 합격을 했다. 미국 대학에
서의 장학금을 받는 일과 어머님과 할머님의 생계 대책이 서야 유학을 떠날 수
있었기 때문에 자격시험에 합격은 했으나 언제 공부하러 떠나게 될지 전혀 미지
수였다. 나의 가정 형편으로서는 도무지 유학을 떠날 형편이 못 되었기 때문에
정작 유학을 떠날 수 있을는지는 아무도 장담을 할 수 없는 노릇이었다.
그러던 유학이 가능하게 될 계기가 생겼다. 나는 공군 제대 후에 첫 직장이었
던 유네스코를 떠나 성창해운에서 일을 하게 되었다. 결혼을 하게 되니 유네스
코 월급으로는 생활이 어렵게 되었다. 아내가 선배 언니 되는 사람과 의논한 끝
에 마침 사람을 찾고 있는 성창해운에서 일을 하게 되었다. 나의 2년 선배이자
공군 참모총장 부관으로 내가 받을 뻔했던 총장 표창장을 못 받게 했던 김교선
형이 서울사무소 소장이었고 내가 그 밑에서 해운 일을 하게 되었던 것이다. 월
급은 유네스코의 약 세배가 되었다. 대학생 지도가 보람이 있었으나 실제적으로
세 배의 월급을 주는 직장에서 일을 해야 살림을 꾸려 갈 수가 있었다.
회사에서는 일본에서 차관을 얻어 선박을 건조하기 위해 경제기획원 외자 도
입국의 허가를 받는 일을 맡아서 진행하고 있었다. 당시 경제기획원장관은 김학
렬 씨였고, 경무대 비서실장이셨던 박찬일 회장이 우리 회사의 어른이셨는데 김
장관은 수시로 박회장께 전화를 걸어 장관으로 있을 때 옛날 빚을 갚을 테니 무
슨 부탁이든 좀 하시라고 보채듯이 채근까지 하던 때였다. 박 회장께서는, “고
마운 말씀이시나 장관께 폐가 되면 안 되니, 걱정 마시라.”고 늘 안심시키는 말
슴을 하시고, 나를 불러 힘이 들더라도 말단 담당자부터 사귀어 가며 허가를 받
아 보라고 격려해 주셨다.
경제기획원 담당자들 두 명과 시내 호텔에서 목욕을 하고 저녁을 먹기로 약속
을 하고 단단히 준비를 하고 호텔로 나갔다. 같이 기분좋게 목욕을 하고 방으로
돌아와 땀을 식히며 맥주를 한 모금 마셨다. 두 사람은 가운을 입은 채 화투판
을 벌이면서 나보고 같이 하자는 것이다. 나는 몹시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교제하러 나온 사람이 손님들과 같이 하자는 것을 응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
다. 몹시 당황한 나는 죄지은 사람같이 기가 죽은 목소리로, “죄송합니다. 저는
아직 고스톱을 못 배웠습니다. 용서하십시오. 이거 대단히 죄송합니다.”라고 부
족함을 빌었다. 큰 임무를 띠고 나온 몸이라 혹시 일을 그르칠까 해서, “정말
죄송합니다. 곧 배워서 한번 모시겠습니다. 이거 제가 아직 경험이 부족해서 실
례가 됐습니다.”라고 빌기까지 했다.
나는 그들도 어이가 없으니, “그럽시다 다음에 다시 한판 합시다.”라고 말할
것이라고 기대했었다. 그런데 나의 기대는 산산조각이 나고 말았다. 나는 저녁에
나오기 전에 두 사람의 배경을 조사하고 나왔다. 출신지와 출신 학교, 그리고 친
구 관계도 다 알게 되었다. 그 중에 나와 동갑인 한 친구는 나의 고교 동기인
친구와 아주 절친한 사이라는 것도 알게 되었기 때문에 그런 기대도 했던 것이
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물론 그들도 실망해서 그런 것이겠지만, 너무 기가
막힌 반응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여보슈, 일류 회사의 과장이 교제하러 나와서 고스톱도 못한다면 뭐하러 나
왔소? 당신 누굴 놀리는 거요. 이거 뭐 이래. 아니, 회사일 보러 나왔소. 아니면
그냥 놀러 나왔소? 어떻게 당신 같은 사람을 회사에서 내보낸단 말이요. 기가
막혀서, 참. 김새네. 가보든지 말든지 맘대로 해요. 제기랄, 시간만 뺏겼네.”
이런 모욕적인 반응에 나 역시 참을 수가 없었다. 나는 벌떡 일어나서 화투를
만지고 있는 두 사람을 향해서 설교하듯이 말했다.
“여보시오. 당신들 XX와 동창이고 XX와 친구들이지요? 당신들 평생 지금
그와 같은 자리에 앉아서 이런 짓이나 하며 지낼테지. 형편없는 친구들 같으니
라구. 이봐요 공무원 양반들, 정신차려요. 언제까지 머리 좋은 당신들, 일류 학교
나온 사람들이 썩어서 이 나라를 좀먹을 작정이요? 당신들 오늘 저녁 왜 여기
나왔소? 뭘 기대하오? 정신들 차려요. 우리가 이 땅에서 이리저리 다 알 만한
사람들로 여기저기서 만나면서 살게 될 텐데. 오늘 못 볼 사람같이 면박을 주니,
좋소. 나도 당신들 더 볼 생각 없소. 나는 회사 일을 망쳐 놨으니 내일 사표를
낼 작정이오. 당신들도 자존심 있고 당당한 공무원이 되어 주시오. 부정한 일은
용감하게 거절하는 정직한 공무원이 되어 주길 바라겠소. 오늘은 분위기를 맞춰
드리지 못하고 나 때문에 기분을 흐려서 미안하오. 약간의 선물도 가지고 왔으
나 그냥 가지고 가겠소. 부디 나같이 권력없고 영향력 없는 시민들에게 원망 듣
는 일이 없도록 사시기 바라겠소.”
준엄한 꾸지람이었다. 몇 분간을 숨도 쉬지 않고 혼자서 떠들었다. 말을 마치
고 나니 분이 좀 풀리는 것 같았다. 그들은 조용히 듣고만 있었다. 나는 양복을
입고 나왔다. 기분이 찜찜하면서도 상쾌했다. 묘한 기분이었다. 이튿날 아침 일
찍 박찬일 회장님께 이실직고하고 사표를 제출했다. 박 회장께서는 내 배경으로
너무 무리한 일을 부탁했다며 미안하다고 하시더니 오후에 나를 불러 담당 부처
의 국장에게서 서류를 찾아 오라고 했다. 나는 즉시 국장을 찾아가 허가 서류를
받아 들고 국장에게 정중한 인사를 받고 나왔다. 나오면서 어젯밤 담당자 두 사
람에게 고맙다고 인사를 했다. 그들의 얼굴색이 변했다. 어쩔 줄을 몰라하는 모
양이었다. 나는 아무 일 없었던 것처럼 정중히 악수를 하고 나왔다. 그들은 내가
뭐 믿는 곳이 있어서 어젯밤 그렇게 큰소리를 쳤겠구나 하고 생각했을 것 같다.
사표가 수리되지는 않았지만 한국 사회에서 개인 회사의 과장으로 돈 봉투를
들고 다니면서 사람들을 만나는 일이 지겹다는 생각이 들었다. 유네스코 때는
월급은 3분의 1밖에 되지 않았지만, 이런 수모를 받는 일은 전혀 상상도 못한
일이었다. 이 얘기 외에도 개인 회사에 근무하면서 겪는 자존심 차원이 아닌, 근
본적인 내 인생관에 관련된 몇 가지 사연들이 있어 회사를 떠날 생각을 하게 되
었다. 두 곳에서 목타게 나를 원했다. 한 곳은 토지개발공사의 비서실장 자리고
또 한 곳은 YMCA 다락원훈련소의 사무국장 자리였다. 박 회장님은 이런 곳에
서 조회만 오면 절대로 놔줄 수가 없다고 잡아떼시기 때문에 우리나라 안에서
다른 직장으로의 전직은 불가능하게 되었다. 적십자사의 청소년 부장 자리 얘기
도 있었다.
결국 나는 회사를 떠날 수 있는 길은 유학밖에 없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문제
는 어머님과 할머님의 생계 대책이었다. 이 때 최봉삼 동기의 부인인 윤영자 자
매께서, “걱정 말고 가서 공부하세요. 이제 못 가시면 유학은 어려워요. 두 어
른들은 제가 모시겠어요. 꼭 가서 학위 받고 나오세요. 그 때는 우리나라도 좋은
나라가 될 것 아니겠어요?”하면서 격려해 주는 것이었다. 눈물겨운 일이었다.
나는 성창해운이 대리점을 맡고 있는 K-LINE 배 중에 인천에서 시애틀까지
가는 것이 있어 일본 본사에 얘기해서 한 자리를 얻었다. 배로 2주일이면 시애
틀에 내리게 되었으니 그 곳에서 비행기로 솔트레이크(Salt Lake)시로 가서 자
동차로 프로보(Provo)시로 가면 아주 적은 돈으로 학교에 갈 수 있었다. 그러나,
출국 인사차 찾아가 만난 김철순 선배께서 공부하러 가는 사람이 골 흔들리게
무슨 배를 타고 가느냐고 즉석에서 비행기표를 사 주셔서 생각도 못한 비행기로
유학을 떠나게 되었다. 고마운 분들의 은혜를 지금도 잊을 수가 없다.
우물 안 개구리의 유학생활
은혜는 갚아야 하는 것
꿈에도 그리던 유학의 길을 떠난 것이 69년 9월 1일이었다. 학기 시작은 9월
15일인데 애당초 배를 타고 가려고 했다가 비행기표가 생기는 바람에 일찍 도착
할 수 있었다. 시애틀에서 작은 비행기로 갈아타고 유타 주의 수도인 솔트 레이
크로 가서 비행기를 타고 프로보 시 브리감 영 대학(Brigham Young Univ.)이
있는 곳으로 택시를 타고 갔다.
손에 있는 돈은 미화 5백 달러뿐이었다. 박찬일 회장님이 한두푼 모아 놓으셨
다 주신 돈이다. 첫 학기 등록금이 240달러이니 계산이 맞을 리가 없는 억지 유
학이었다. 이 중에서 택시비로 30달러를 쓰게 되니 기가 막혔다. 택시 미터기가
10전씩 올라갈 때마다 가슴이 철렁철렁 내려앉는 것 같았다. 우선 학교 외국인
지도교수실에 가서 한국 학생 명부를 보여 달라고 했다. 25명 정도의 한국 학생
명단에 전화번호가 나와 있어 전화를 걸어 봤다. 아무도 대답이 없다. 모두들 여
름방학 때 돈벌이 떠난 다음 아직 돌아오지 않았다는 것이다.
나는 염치없이 외국인 지도교수인 바스코 태너(Vasco Tanner) 박사 댁으로
가서 며칠을 지내면서 계속 한국 학생들을 찾았다. 마침 LA에서 개학 준비차 돌
아온 오길재 형을 만나게 되었고 그가 쓰고 있는 지하실 방 한쪽을 한 달에 30
달러 내는 것으로 계약을 하고 짐을 옮겼다.
이 학교로 유학을 오게 된 연유도 따지고 보면 기막힌 사연이었다. 서울에서
속히 `출 한국`을 해야겠는데 장학금 주는 학교만 찾아 허탕만 치고 난감해하고
있을 때 우연히 유네스코에서 같이 근무하던 안상희 군을 만났다. 그는 미국 대
학에서 입학 허가를 받았는데 갈 수가 없다고 하는 것이었다. 안 군과 같이 일
하고 있는 사람인데 그 학교에 가서 공부하고 싶으니 이미 허락해 주신 자리에
내가 갈 수 있도록 해 달라고 했다. 사실 될 수가 없는 일인데 어찌된 일인지
나의 배경이 재미있다고 허락해 줄 테니 오라는 것이었다. 입학 허가는 열흘 만
에 받고 서둘러 다른 대학과 비교해 볼 겨를도 없이 떠나서 간 곳이 유타 주 산
골에 있는 이 아름다운 학교였다.
또 한 가지 우연한 일은 서울에 있는 미국공보원(USIS)의 졸단 테너 원장과
몇 년을 사귀고 있었지만, 그의 아버지가 이 학교 외국 학생 지도교수로 계시다
는 것은 꿈에도 생각지 못했던 일이라는 것이었다. 그래서 떠나기 전에 테너 교
수께 편지를 했고, 자리를 잡을 때까지 자기 집이 학교 근처에 있으니 와서 있
으라는 허락을 받게 된 것이다. 어느 곳에 가든지 나를 도와 주는 고마운 분들
을 많이 만나게 되는 행운을 늘 갖고 사는 사람이 되어야겠다는 생각을 더욱 하
게 되었다.
오길재 형은 수학과 대학원 학생으로 간호사 출신의 부인은 대전에서 직장을
다니고 혼자서 자취를 하고 있었는데, 나와 나이가 동갑으로 취미가 요리하는
것이었다. 그 때까지 나는 밥 한번 해본 경험이 없는 사람이었는데 오 형에게
밥짓는 법, 김치 담그는 법, 꼬리곰탕 끓이는 법, 김치찌개 끓이는 법을 열심히
배웠다. 개학할 때까지 열심히 배워서 나는 이제 자취 능력을 어느 정도 갖추게
되었다.
우리 유학생들이 여름 일터에서 속속 돌아왔고, 유학생회에서는 신입생 환영
회도 열어 주어 여러 한국 유학생 선배들을 만나게 되었다. 전부터 그 곳에서
공부하고 있던 김헌수 군이 돌아와 우리는 셋이서 한 방에 살게 되었다. 김 군
은 부산의 유명한 사업가의 아들로, 내 동기 동창의 조카 되는 친구였다. 고등학
교만 마치고 미국에 와서 대학을 마치고 대학원에서 공부하고 있는 성품 좋고
착한 친구였다. 같이 살면서 개학 후에도 학교에 가고 올 때 그의 새차로 늘 태
워다 주면서 한 번도 싫은 기색을 하지 않았다.
나는 자전거를 하나 사서 타고 다녔다. 가을에는 참 좋았으나 겨울이 되어 눈
이 쌓이고 바람이 불면 몹시 날이 추워서 자전거 탈 때 속내의를 두껍게 껴입고
귀마개까지 해야 했다. 그러나 일단 건물 안에 들어서면 난방장치가 잘 되어 있
어 땀이 많이 나는 것이었다. 그러면 화장실에 가서 내의를 벗어 책가방 속에
집어 넣고 다니다 자전거로 집에 올 때 다시 화장실에 가서 내의를 껴입는 일을
하면서 나는 언제나 자동차를 사서 타고 다닐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을 하였다.
첫 학기를 잘 해내야 미국 공부를 성공적으로 해낼 수 있다는 선험자들의 경
험을 귀담아 들었기에 열심히 강의를 듣고 참고 논문을 읽고 요약해서 카드를
만들고 하면서 바쁘게 지냈다. 3학점짜리 세 과목에다 1학점짜리 셰익스피어 강
의를 수강했다. 이 강의는 연극과에서 비연극과 학생들을 위해 개설한 강좌인데
한 학기 동안 여덟 번의 연극을 감상만 하면 A를 받는 과목이다. 예전부터 좋아
했던 햄릿, 맥베스, 리어왕, 베니스의 상인 등 셰익스피어의 명작을 원어로 감상
하고 학점을 얻는 일이니 참으로 멋졌다. 저녁 7시에 시작하는데 1분만 늦어도
입장이 불가능하다. 한 번은 총장이 1, 2분 늦게 도착했는데 결국 입장하지 못하
고 돌아간 일이 있었다.
연극과에서 박사학위 공부를 하면서 조교를 하고 있는 신일수군(한양대 영연
과교수)의 안내로 연극과에 자주 드나들었고 좋은 구경을 많이 할 수 있었다. 나
는 전공을 정치외교학에서 사회사업으로 바꾼 관계로 대학원의 첫 학기에는 사
회학 종합 세미나, 방법론을 위한 사회통계론, 사회복지 세미나 등을 수강했다.
평소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던 과목이라 흥미도 있었고 또 새로운 이론을 배우게
되니 매일이 신기하고 마음에 기쁨이 넘쳐서, 즐겁고 기쁘게 공부할 수 있었다.
유학 첫 학기에 제일 힘든 일은 두고 온 가족들에 대한 걱정이었다. 어머님은
어머님대로, 새색시인 아내 그리고 한 살도 안 된 첫딸 모두 보고 싶고 여기서
맛보는 새로운 경험을 나누고 싶었다. 서울에서 떠나올 때 아내와 했던 약속은,
“훗날을 위해 꼭 1년만 떨어져 살자, 그러면 1년 후에 내가 무슨 일이 있어도
초청할게. 그 때까지 꾹 참고 열심히 공부하고 딸 키우며 지내자.”였다. 그러나
그럭저럭 자리가 잡혀가는 것 같은 생각이 드니 아내가 보고 싶고 같이 있으면
공부가 잘 될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나는 시간만 나면 이공대학 실험실을 찾아다니기 시작했다. 아내 성수는 화학
과 출신이니 연구실에 무슨 자리라도 좀 써 달라고 여러 교수님들의 연구실을
찾아다녔다. 마침 생화학 연구실 교수님께서 연방정부의 연구비를 받게 되어 조
교를 쓰게 되었으니 데리고 오라는 것이다. 미국에 온 지 석 달 만에 아내와 미
국에서 상봉한다는 것은 꿈같은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부랴부랴 서울에 연락을
해서 수속을 하라고 했다. 우선 혼자만 오고 단계적으로 계획을 추진하자고 했
다. 성수는 너무 기뻐했다. 남편의 실력에 놀라는 것 같았다. 그는 미국에 가면
파티도 자주 가게 될 것 같다고 생각했는지 옷도 드레시한 정장을 맞추고,
YMCA에 가서 사교춤도 배워 가지고 12월 23일 크리스마스 이브 하루 전날 미
국에 도착했다. 김헌수 군의 자동차로 비행장에 가서 마중을 하고, 지하실 아파
트에는 `환영 김성수 여사`라는 플래카드를 걸어 놓고 동네 유학생 여러 명이
환영 축하연을 베풀고 성탄 예배를 드렸다. 꿈같은 일이었다. 1년 약속이 석 달
만에 이루어진 것이다.
나는 첫 학기부터 등록금과 생활비 때문에 매일 뛰어다니다 드디어 학교도서
관에 자리를 잡었다. 도서관의 카탈로그 부의 책임자는 덴마크에서 유학와서 도
서관학 공부를 마치고 사서가 된 사람이었다. 나는 유네스코 도서실에서 일한
경험이 있다고 해서 일자리를 얻었다. 그러나 무엇을 했느냐고 묻기에, 신간도서
가 들어오면 분류하고 중요한 도서는 읽고 요약하는 일을 했다고 했다. 그랬더
니 카탈로그 부서에 맞겠다고 나를 그 부서에 배치해 주었다. 책을 찾는 카드
한 묶음과 카드 설명에서 저자 이름이나 책제목을 가지고 카드를 찾아 없으면
신청받고, 구매중인 책 제목있는 곳을 찾고, 혹은 빌려 갔는지 여부를 확인하는
일을 했다. 하루에 세네 시간 일한다면 나는 한 시간 내에 주어진 분량을 다 끝
낼 수도 있었다. 다른 학생들은 하루종일 해도 나만큼은 어림도 없었다. 다른 학
생들보다 두 배쯤의 카드를 찾아 놓고 한쪽 귀퉁이에 앉아 숙제를 하면 시간을
효과적으로 보내기 너무 좋은 일터였다.
첫 학기를 성공적으로 끝낼 수 있었던 것은 서울에 계신 어머님과 할머님을
위해 최봉삼 군의 부인께서 매월 생할비를 보태 드리고, 김장 때 배추 백 포기,
겨울에는 연탄을 사서 드리는 눈물겨운 뒷받침 덕이라고 생각한다. 어서 공부를
마치고 이 은혜를 갚아야겠다는 생각에 이를 악물고 새벽잠을 줄이며 공부에 전
념하였다.
1인 5역
자신만만하게 아내를 미국으로 불러들였으나 연구비를 받아 조교로 채용하겠
다는 생화학 연구실 교수는 무슨 이유에서인지 연구비를 받을 수 없게 되어 채
용을 못하겠다고 했다. 생활비가 막막한 가운데 첫 학기가 지나갔다. 하나님이
도우셔서 네 과목 전부 A학점이 나왔다. 외국인 학생이 약 1천5백 명 되는 학교
에서 첫 학기에 영어 과목도 듣지 않고 모두 A학점을 받은 첫 번째 외국 학생
이라고 학교신문에 이름이 나오고 사회학과 교수들이 축하를 해 주고 야단이었
다. 그러면서 스펜서 칸디(Spencer Condie)교수가 등록금 면제는 물론 조교로서
한 달에 2백 달러를 주겠다는 것이다. 나와 아내는 안도의 한숨을 쉬면서 감사
했고, 계속해서 도서관에서 일해서 또 얼마의 수입을 잡게 되어 방도 번듯한 집
으로 이사도 가게 되었다.
일주일에 이틀씩, 저녁에 가르치는 한국어 강사가 되어 선교사로 나갈 사람과
선교사로 한국에 다녀온 학생들에게 한글을 가르치는 일도 했다. 토요일은 운동
선수 중에 학업이 뒤떨어진 학생들을 세 시간씩 개인 교수하는 일도 했다. 시간
당 수당은 연방정부 재향군인청에서 나왔다. 게다가 몰몬교 선교부의 주일 공과
책을 한역하는 번역원을 맡아 하게 됐다. 이럭저럭 한 달 수입이 1천달러는 넘
게 되니 부자가 된 기분이었다. 또 동네의 각종 사교 클럽에서 한국인계 강사로
초청되어 한국에 관한 강연을 자주 하게 되니 수입도 짭짤했다. 자동차도 사고
딸을 데려올 비행기표를 위한 자금도 차곡차곡 모아지게 되었다. 석사 학위를
위해선 27학점이 필요했는데 9개월 만에 다 마치고 석사논문을 쓰기 시작했다.
나는 사회학과로 전공을 바꾸면서 정치사회학의 일부인 지역사회 지도자의 문제
에 관심을 갖게 되었고, 지역사회에서 누가 영향력이 있는지, 영향력은 왜 생기
는 것인지, 또 의사 결정시 어떤 사람들이 가장 영향력을 발휘하는지 등을 알아
보기 위한 연구계획을 세워 지도교수의 허락을 받았다. 옆 동네인 스프링스빌
(Springsville)을 연구 대상으로 삼고 약 2개월 동안 매일 그 곳에서 하루종일 사
람을 만나면서 연구를 했다.
제일 먼저 상공회의소 사무국장을 만나 이 동네에서 제일 영향력 있는 사람
세 분을 추천해 달라고 했다. 그는 은퇴한 대학 총장과 시장과 몰몬교 회장을
추천해 주었다. 나는 세 사람을 다 만나면서 그들이 추천해 준 지역사회의 영향
력 있는 사람을 다 만나서 다시 묻고 또 물으며 이름이 거론되지 않을 때까지
면담을 했다. 그러다 보니 70여 명을 만나게 되었다. 이들은 대략 세가지 그룹의
지도자들이었다. 현직에 있는 기관장들과 은퇴는 했지만 아직도 영향력을 행사
하는 사람들, 그리고 각종 지역사회 사업과 행사를 계획하고 추진했던 지도자들
(Positional, Reputational and Decision-making Leaders)이었다.
이와 별개로 동네인 213가구를 표본으로 해서 일반적인 지도자와 중요한 사업
에 영향력을 미친 지도자들을 찾아 내는 연구를 했다. 그러던 중 한 가지 재미
있는 발견을 하였다. 지난 5년간 지역 사회에 중요한 문제가 생길 때마다 등장
했던 인물들은 5년간의 신문을 뒤져 보며 20명쯤 찾아 냈는데, 이들은 예외 없
이 지도자로 거명된 인사들이었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동네에 문을 닫아 버린
극장 개발 문제, 고등학교 밴드부 신설 문제, 연방정부의 교육예산이 삭감되어
학교도서관의 이용 시간이 줄어든 것을 모금을 통해 환원시키는 일 그리고 청소
년 탈선행위를 방지하기 위해 지역 주민들도 선도대원으로 구성하는 사업 등에
앞장섰거나 반대 이론을 냈거나 적극 도움을 제공한 사람들이 거명되었다.
석사논문을 끝내고 여러 대학에서 박사 과정 입학 허가 신청을 냈다. 나의 석
사논문이 사회학과 우등생 클럽에서 수여하는 우수논문으로 뽑혀 지도교수와 같
이 가서 상도 받고 축하 리셉션에 아내와 같이 참석하여 그 동안 아내의 뒷바라
지를 위로하는 시간을 갖기도 했다. 그리고 덴버에서 열리는 록키마운틴 사회과
학자협회 연차세미나에 논문요약이 채택되어 미국 유학한 지 1년도 안 돼 논문
을 발표하는 영광을 안게 되었다. 박사 과정에 입학 허가를 신청하면서 이 논문
을 꼭 같이 보내 자기소개도 했으나 여러 학교중에 UCLA와 워싱턴 주립대학에
서 받아 주겠다는 연락이 왔다.
사실 워싱턴 대학은 사회학과 과장였던 프랭크 미야모토(Frank Miyamoto) 교
수가 덴버에서 내가 발표하는 발표장에 참석하셔서 논문 내용도 이미 아셨고,
발표가 끝난 다음에 사회학 연구 방법론으로 유명한 워싱턴 대학에서 공부하고
싶다는 나의 뜻도 이미 아셨기에 서류심사로 나를 받아 주셨고, 조교로서 월 4
백달러 정도를 줄 수 있다는 제의도 했다. UCLA에서는 왕복 비행기표를 보내면
서 인터뷰를 해야 결정을 하겠다는 연락이 왔다. 그래서 한국인이 많이 살고 있
는 LA에 가서 구경도 할 겸 공짜 비행기표도 있으니 인터뷰에 응하기로 했다.
UCLA에서는 연구 계획과 가족 형편을 묻고는 좋다고 하며 조교로 2백9십 달
러를 주겠다면서, 나는 나이도 있고 가족도 있기 때에 특별 배려하는 것이라는
말까지 하였다. 집에 돌아와서 아내와 상의한 끝에 시애틀을 택하기로 결정했다.
그 이유는 LA에 비해서 시애틀은 한국 동포가 적어서 공부에 전념하기에 좋고
학교에서 주는 돈도 UCLA보다 많고, 또 중요한 이유는 당시 미국 사회학계에서
사회학 방법론의 거두인 허버트 블레이럭(Hubert Blalock) 박사가 이 대학에서
가르치고 있기 때문이었다.
미국에서의 두 번째 학교를 결정하고 정들었던 프로보 시를 떠난 것은 72년 6
월이었다. 이사 트럭을 빌려 살림과 책을 싣고 큰 도시인 시애틀을 향해 길을
떠났다. 그 동안 서울에 두고 왔던 딸 승영이와 어머님도 미국에 오셨고, 아들도
미국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우리는 대식구가 되었다.
내가 먼저 미국에 갔고 다음에 아내, 그 다음에 딸, 어머님, 그리고 아들의 출
생으로 온 가족이 단계적으로 미국에 모이게 되었고 유학생치고는 대식구를 거
느린 늙은 유학생으로 학교에서도 유명해지고 말았다. 처음에 낯선 아주머니를
따라 미국에 온 한 살이 넘은 딸은 저녁마다 울면서 아빠, 엄마한테 가겠다고
떼를 쓰는 것이었다. 내가 아빠고 엄마라고 달래 보려 했으나 믿지 않고 계속
우는 것이었다. 내가 아니면 누가 아빠냐고 물으면 사진을 가리키면서 사진 속
아빠가 자기 아빠라는 것이다. 약 두 달이 넘도록 아빠, 엄마, 아니면 할머니에
게 가겠다고 떼를 쓰며 울어서 우리는 달래다 못해 같이 울기도 했다.
너무 힘이 들었다. 생활 환경이 갑자기 바뀐 것에 적응하지 못하는 딸아이가
너무 안쓰럽고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유학생들 중에 교육에 전념하기 위해 서
울 할머니 댁에 아이를 데려다 주는 유학생들을 보면 우리는 도시락을 싸 가지
고 다니며 말렸다. 부모와 자녀는 힘이 들더라도 같이 있어야 한다. 힘든 고생과
어려운 역경도 같이 극복해 나가야 부모 자식간에 감정이 생겨나는 것 같아서
자녀를 할머니, 할아버지께 보내는 것은 적극 만류했다. 우리의 경험에 비추어
봐서 소명감 같은 것이 생겨 결사 반대하고 다녔다.
혼자서 1인 5역을 하는 것은 힘이 드는 일이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가족이 다
함께 모여 살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의 축복이라고 나는 지금도 생각한다.
자격증 없는 변호사 행세
박사 과정에 들어와서 첫 학기에 너무 큰 충격을 받았다. 지금까지 살아오면
서 여러 해 동안 공부를 해 왔으나 D학점을 받아 보기는 처음이었다. 사회통계
학을 수강했는데 수학 박사에 사회학 박사이신 블레이렉 박사는 우리에게 고급
수학 확률을 꼭 들어야 한다고 강조하면서 사회통계의 기초를 강의해 주셨는데
중간시험에 D를 받았던 것이다. 앞이 캄캄했다. 아내와 자식들을 볼 면목이 없
었다.
나는 이를 악물고 밤을 세워 가며 집중적으로 공부를 하기 시작했다. 연구실
에서 밤을 새우는 것은 보통이었다. 드디어 학기말 시험 때가 됐다. 나는 A+를
받았다. 교수님께서는 자기 강의 역사상 중간시험 때 D를 받은 학생이 A로 학
기를 끝내는 경우는 평생 처음이라며 극구 칭찬해 주셨다. 아내에게 자랑삼아
얘기하니, 무척 기뻐하면서 용기를 불어넣어 준다. “당신은 하면 되는 사람이니
까 문제없어요. 나는 당신이 좋은 성적을 받을 줄 알았어요.”하며 기쁨의 눈물
까지 보인다. 그 때의 우리 가정은 내가 성적을 잘 받고 학교에서 장학금을 받
는 것이 생존하는 일 자체이기 때문에 점수가 매우 심각한 문제였다.
워싱턴 대학은 한국 유학생이 꽤 많은 학교였다. 한인 학생회는 회원이 1백여
명 이상 되었고, 회장이던 유현 판사는 유학생들의 권리와 편의를 위해 애를 많
이 썼다. 나는 학생회지 편집장을 맡아 우리 학생들의 전공 소개, 부인들의 이야
기들을 신문에 소개하며 유학생들간의 커뮤니케이션에 관심을 많이 쏟았다. 또
한 가지 특기할 일은, 그 때까지 학생들과 교포들은 3.1절 행사도 따로 하고 성
탄절 행사도 따로 하며 말도 잘 하지 않고 서로 어울리지 못하던 것을 아타까워
해 공동으로 하는 행사를 주선했다. 3.1절에 만해 한용운 연구로 15년 만에 박사
학위를 받은 생 솔버그 박사가 기념연설을 했고 처음으로 교포들과 학생들이 같
이 행사를 치르게 됐다.
나는 사회학과에서 사회 방법론을 가르치면서 박사 공부를 계속했다. 1백5십
여 명의 사회학과 학생들이 신청하는 이 강좌는 5학점짜리로 일주일에 다섯 시
간, 매일 한 시간씩 가르치게 되어 있었다. 처음에는 동양인이라고 이상하게 보
거나 약간 무시하던 학생들이 재미를 붙여서 수업을 잘 따라와 주었고, 나는 학
교에서 최고의 조교 선생으로 뽑히기도 하였다. 신기한 일이었다. 아마도 내 성
의와 부지런함 때문에 동정표를 준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사회학과 박사 과정에서 박사 후보가 되려면 방법론 시험에 합격을 한 후에
두 가지 분야의 시험을 통과해야 논문을 쓸 수 있었다. 2년째 되던 해 그 유명
한 방법론 시험을 통과했다. 수학이 싫어서 정치외교과에 갔던 내가 수학과에
가서 확률 과목을 택하면서 자료 처리에 필요한 사회통계의 기초를 단단히 한
다음 조사방법, 자료 처리, 설문지 작성 방법들을 평가하는 연구방법론 시험에
합격한 것이다. 사회변동과 정치사회학이 내가 택한 두 가지 특수 분야였다. 이
제 학과목은 더 이상 등록할 필요가 없어서 논문 준비를 하면서 계속해서 학부
학생들을 가르쳤다. 시애틀은 서북항공사(NWA)의 비행기가 기착하는 서북부 지
역의 관문이라 많은 한국 이민들이 이 도시를 통해 미국에 이민도 오고 방문차
오는 곳이었다. 가끔 이민국과 이민국 재판소에서 연락이 와서 영어 못하는 사
람이 있으니 통역을 해 달라고 요청이 왔다. 나는 기꺼이 자원봉사 통역에 나섰
으며, 후에 이민국에서는 시간당 얼마씩 통역 사례금도 받게 되었다.
서울에서 모 대학 교수가 시애틀을 통해서 입국하다가 이민국 관리에게 적발
되어 영주권을 압수당하고 이민국 재판에 회부된 일이 있었다. 영주권자가 오랫
동안 한국에 가 있었기 때문에 미국에서의 영주 의사가 없는 것으로 간주하겠다
는 것이다. 나는 단순한 통역이 임무였으나 영주권을 되찾기 위해 밤새 같이 재
판 준비를 하여 재판에 임했다. 이민국 판사는 나에게 많은 관심을 가져주면서
내 설명을 잘 경청해 주었고, 이번에는 영주권을 돌려 주겠으니 영주권자의 의
무인 세금 납부와 주소 등록을 꼭 하라는 충고를 하며 재판을 끝냈다. 좋은 겅
험을 얻게 되었고, 재미를 느끼게 되었다.
서울에서 방문차 미국에 오신 어머님의 미국 체류 비자는 애당초 6개월이었
다. 6개월이 지나 연장을 해서 1년을 계셨다. 한 번 더 연장해서 1년 반을 체류
하였고, 또 다시 6개월 연장 신청을 했다. 며칠 후 이민국에서 회답이 왔는데 더
이상 연장이 불가능하니 30일 이내에 준비해서 자진 출국하라는 것이었다. 만약
그렇지 않을 경우, 강제 출국을 각오하라는 내용이었다. 나는 이민국장에게 장문
의 편지를 써서 서울에 나가 살 수 없다고 특별 배려를 해 달라고 간청을 했다.
이민국장은 자기는 아무것도 할 수 없으니 재판 과정중 이민국 판사에게 사정
얘기를 잘 해 보라고 했다.
나는 한미간의 전통과 풍습의 차이점을 비교하는 진술서를 작성했다. 외아들
인 나는 어머니를 모셔야 되고, 혼자 서울에 가시면 아무도 돌볼 수 없어 어머
님은 비인도적인 대우를 받게 되기 때문에, 어머니의 경우는 특별 쿼터를 적용
해서 인도주의적인 차원에서 외아들과 같이 계시도록 영주권을 발급해야 마땅하
다는 요지의 진술서를 작성했다. 일종의 추방 재판을 변호하는 내용이었다. 판사
는 잘 듣더니 “미스터 유, 왜 법과 대학을 가서 변호사가 되지 않았소? 지금이
라도 법대에 가서 공부해 보시오. 내가 추천해 줄 테니 용기를 내 봐요. 당신은
아주 훌륭한 변호사가 될 자질을 갖춘 것 같소.”라고 말하면서, 특별 쿼터를 배
려하여 영주하시게 도와 주겠다고 결정을 내렸다. 거짓말 같은 일이었다. 불가능
한 일이 일어난 것이다.
나는 판사가 권고한 대로 미국에서 변호사가 되려면 어떤 절차를 밟아야 되는
가 찾아보기 시작했다. 결국 엉뚱한 생각이라는 결론이 나왔다. 미국 대학에서
거의 A학점으로 졸업한 법과 대학 적성 시험(Law School Aptitude Test)에서
좋은 성적을 받아야 입학 신청이 가능하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이다.
“객기지, 내 나이에 무슨 법과 대학이란 말인가.”
나는 시작하기도 전부터 벌써 포기하고 말았다.
내기 도박은 이제 그만
나는 고스톱을 못 치기 때문에 회사를 그만두게 된 역사를 가지고 있다. 원래
도박을 좋아하지 않는다. 어렸을 때 우리 동네에 노름꾼 아버지를 둔 친구가 있
었다. 며칠씩 집을 비웠다가 어쩌다 집에 들어오는 날은 친구 엄마와 대판 싸움
을 하고 세간이든 뭐든 돈 될 것은 골고루 다 들고 나가서 또 며칠씩 집에 안
들어온다는 말을 들었다. 그러면서 그 친구는 친구들과 하는 구슬치기나 딱치치
기까지도 버릇이 되면 자기 아빠같이 될까 두럽다면서 절대로 우리들과 같이 이
런 놀이를 하지 않았다.
내가 중학교에 들어갈 무렵 그 친구네 집은 아빠의 노름빚 때문에 남의 손에
넘어갔고, 친구의 엄마까지도 아빠의 노름빚 때문에 술집으로 팔려 갔다는 얘기
가 동네에 파다하게 퍼졌었다. 그 친구는 부산 고모댁으로 보내진 후 아직까지
그에 대해 아무런 소식도 들은 일이 없다. 나는 가난한 동네에서 이와 같은 가
슴 아프고 슬픈 기억이 있어서인지 도박하면 가난한 사람만 하는 것이라는 선입
관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요즈음 신문에 심심지 않게 도박단의 검거, 해외 원
정 도박단의 검거 소식 등을 보는 전문가들은 도박을 고치기 어려운 패가망신의
버릇이라 규정하고, 무슨 수를 써서라도 도벽을 고쳐야 한다고 경고하고 있다.
나는 여러 가지 유혹에 약한 사람이라고 스스로 생각하고 있으며 나의 의지는
부끄러울 정도로 약하다고 항상 생각하고 있으나 이 도박의 유혹에는 매우 강하
다고 스스로 생각하고 있다. 그럴만한 이유가 있다.
시애틀에서 사회학 박사 과정을 밟고 있을 때였다. 박사 과정과 시험을 다 마
치고 논문만 남겨 놓은 박사 후보생이 예닐곱 명 그리고 아직 과정을 밟고 있는
나 같은 학생이 두세 명 있었다. 논문을 쓴다는 작업은 아침부터 밤까지 책상
앞에 쪼그리고 앉아 있다고 잘 써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이들은 주말이면 모
여서 맥주도 마시고 `섰다`도 하면서 공부 스트레스를 해소하기도 한다. 나도 이
친구들이 불러내는 바람에 아내의 눈치를 보면서 어느 주말에 새벽까지 섰다를
하고 돌아온 적이 있었다.
친구들끼리 내기를 하면 따든 잃든 입맛이 씁쓰름하기 마련이다. 그래서 나는
이들의 초청을 여러 가지 이유를 들어 사양하곤 했다. 몇 주를 그렇게 거절을
하고 혼자 집에서 열심히 책을 보며 지냈다. 그러던 어느 날, 몇몇 친구가 아예
나를 데리러 집에까지 찾아왔다. 그래서 나는 그들의 성의에 이끌려 오늘 한 번
만 나가고 다시는 하지 않겠다고 아내로부터 양해를 얻고 P군의 아파트에 가서
판에 끼게 됐다. 꼭 열 명이 자웅을 겨루는데, 본판이 있고, 또 `통먹기`라고 해
서 큰 액수의 돈을 걸고 화투장을 돌리고 있었다. 나는 공군 시절 배운 섰다 실
력을 한번 발휘해야 되겠다고 생각했다. 오래간만에 친구들과 한판 붙은 것이었
다. 이 동네 부인들은 남편들의 소위 `동양화 보기`를 아주 싫어했다. 어서 서둘
러서 학위를 받고 국내외로 가르치러 나가야 될 텐데 큰일이라고 한탄을 하고
있었다. 어떤 친구는 논문만 쓰는데 10여 년이나 걸리고 있으니 가족의 마음이
오죽하였겠나 상상할 수 있을 것이다.
나는 분위기를 살피면서 서서히 섰다판으로 끼여 들어갔다. 나는 속으로 오늘
을 내 화투놀이의 마지막 날로 삼아야겠다는 다짐을 하면서, 이 친구들도 이 놀
이에 정이 떨어져서 원래 우리가 해야 할 일에 정성을 기울이도록 해야겠다는
생각을 하였다. 그래서 나는 이판에 나온 돈을 모두 싹쓸이로 따 놓고 내 결연
한 의지를 발표하는 것이 제일 옳은 방법이라는 생각을 했다. 열 명의 친구들이
모두 아마추어이기 때문에 두 장의 화투 쪽을 들고 맞추어 보는 시늉은 하지만
상대방의 표정이나 상대방의 화투장에는 관심 표명도 전혀 못하는 형편이었다.
나는 요행히 선을 잡게 되었다. 그리고 `노루` 두 장을 왼손에 깊이 감추고 화
투장을 돌렸다. 몇 명이 섰다고 선언하면서 돈을 계속 댄다. 나는 적극성을 띠지
않고 엄살을 좀 부렸다. 친구들이 많이 따라 나섰다. 원판 돈도 벌써 수북히 쌓
였고 옆에 `통먹기` 돈도 꽤 괜찮았다. 서너 명이 땡을 잡았으나 장땡을 잡은 나
를 존경하듯이 쳐다만 보았지 아무 말도 못하는 것이었다. 계속 화투패를 돌렸
다. `삼팔 광땡`도 잡아 보고 다른 땡도 잡아 보면서 서너 차례 선을 잡고 내놓
고를 몇 번 해 보았다. 판돈이 거의 내 앞으로 쌓였다. 대세는 이미 굳어졌다.
아무도 나를 의심하지는 못하고 그저 오늘 웬일이냐고, 어떻게 그렇게 운이
좋으냐 정도를 지껄이며 모두들 풀죽은 기색이었다. 그럴 만한 것이 이미 돈은
다 나왔고 개인 수표도 여러 장 돌아다니는가 하면 시계를 푼 친구도 있었다.
나는 똑같은 수법으로 불과 몇 십분 이내에 끝을 내고야 말았다. 다 따 버렸다
는 말이다. 싹쓸이를 했다. 그러나 나는 딴 돈은 세어서 나누어주고, 시계는 주
인에게 돌려 주고, 개인 수표는 모두 찢으면서, “우리 이제 이런 노름, 그만합
시다. 이 수표가 돌아가서 부인들이 보면 기분이 어떻겠습니까? 나는 사실 오
늘만 하고 이 노름 끝내기로 작정했습니다. 그리고 또 밝혀야 될 일이 있습니다.
아까 제가 화투 패를 돌릴 때 내가 좋아하는 화투장은 이 왼손에 집어 넣고 돌
렸는데 아무도 못 보신 것 같았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내가 다 따긴 했지만 제
실력으로 이긴 것이 아니라 조작한 것이기에 여러분께 다 돌려 드린 것입니다.
양해해 주시고 이젠 이런 노름 그만했으며 좋겠습니다.”
분위기가 상당히 숙연해졌다. K군은 얼른 튀어 나와, “나는 아까부터 이상하
다고 생각해서 형의 손을 봤지.”라고 말했다. 그러나 아무도 그 친구의 말을 심
각하게 듣지 않는 것 같았다. 유학생 부인들은 무척 좋아했다. 나는 유학생 부인
들 모임에만 가면 큰 환영을 받았다. 이 이후에 나는 한 번도 화투를 잡지 않았
다. 내기는 따든 잃든 뒷맛이 좋지 않다. 하지 않는 것이 최상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내 사회학 이론의 근간이 된 `사회학의 고전`
우리가 살아가는 동안에 참으로 난감하고 당혹스러운 일을 종종 당하게 되긴
하지만, 유학이라고 가서 첫날 첫시간 처음 만났던 교수와의 첫 대화는 평생을
통해서 잊을 수 없는 부끄럽고 두려웠던 기억으로 지워지지 않고 내 가슴에 남
아 있다.
누가 책 얘기만 하면 우선 내 머리에 떠오르는 것이 이 날 교수가 내게 물었
던 그 책, 미국의 사회학자 밀스(C.W. Mills)의 〈권력 엘리트(Power Elite)〉라
는, 1950~60년대 초에 서양 사회과학 분야에서 격렬한 논쟁의 대상으로 등장했
던 책이다.
10여 명의 사회학 석사 과정의 학생들이 첫 시간이라 각자 간단한 자기소개를
하게 되었고, 나는 한국에서 정치학 학사와 석사를 마치고 근대화의 물결을 타
고 새롭게 변화해 가고 있는 한국사회에 근본적으로 필요한 공부를 하기 위해
사회학을 공부하러 이곳 미국에 왔다는 소개를 하자마자 교수의 첫 질문이, “
밀스 교수의 책을 읽었느냐?”는 것이었다.
이 책이 정치학이나 사회학도들의 필독서라는 것도 실은 이 시간 이후에 알게
된 사실이었다. 부끄러움을 만회하기 위해 밤을 새워 사전을 찾아가며 읽었던
이 책이 내 석사논문의 길잡이가 되어〈미국의 지역사회 지도자와 관련 구조 연
구〉라는 논문을 쓰게 되었고, 이 논문이 미국 사회학 우등생 클럽이 주는 그
해 최우수 석사논문으로 뽑히는 행운을 얻게 되었다.
나는 그 후 공부를 마치고 사회학 개론을 가르칠 때 꼭 읽어야 할 참고서로
이 책을 늘 추천하면서 가르쳤기 때문에 내 삶과 아주 깊은 인연을 맺게 된 잊
을 수 없는 책이 되었다.
전체 15장, 4백 25면에 달하는 방대한 내용으로 엮여져 있는 이 책은, 제1장에
서는 미국의 권력 구조를 분석하기 위한 이론적인 전제로 미국의 상류 사회를
다루었고, 이어서 지방사회, 유명인사, 상류가문 대재벌, 회사의 최고간부, 군부지
도자 등을 차례로 분석하였으며, 전체를 묶어 체계적인 하나의 권력 집단에 관
한 이론 체계를 형성해 나갔다.
요즈음 우리 사회에 문민정치 시대가 왔다고 하는 얘기를 하면서 여러 각도로
문민정부를 정의하고 있는 중이다. 어떤 이들은 문민정치란 소수의 정치 엘리트
와 기득권층에 독점되었던 권력이 정치의 주인인 대중들에게 돌아가서 국민이
정치의 주인이 되는 것을 말한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권력의 구조와 새 문민정
부의 지도자들의 권력을 본뜬 시각이 달라져야 한다는 얘기들도 한다. 과거 30
여 년간 군사문화가 지배하던 우리 사회에서 오래간만에 문민정치니 모두가 참
여하는 정치니 하는 말을 들으며 30여 년 전에 공부하던 밀스 교수의 이론을 생
각해 본다.
그가 말하는 `권력 엘리트`란, 한 사회에 주요한 지배적 제도 내에서 최고 지
위를 점유하며 정책 결정을 담당하고 있는 사람들을 말한다. 즉 정치·경제·군
사의 세 가지 영역에서 관의 집권화와 관료화되어 가고 있는 이들 제도의 지휘
명령권을 행사하고 있는 사람들을 말하는데, 이 사회는 정치가와 재벌과 군부가
상호 연계, 협력하면서 끼리끼리 뭉쳐 지배하고 있다는 것이다.
우리나라에 군사혁명이 일어나고 소위 3공 시절이 되어, 군 출신도 아니고 특
정 지역 출신도 못되는 나는, 되는 일이 없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능력 있는 사
람이 실력껏 대접받는 곳이라고 믿고 찾아왔던 미국에서, 권위 있는 사회학자의
이론을 통해서 이와 같은 내용을 공부하면서 나는 점점 더 고민의 수렁으로 빠
져들어 가고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되었다.
지금까지 내가 어렴풋이 이해하고 있던 미국이란 나라는, 개인의 능력과 노력
에 따라 성공을 보장받을 수 있는 기회의 나라, 모든 사회집단이 균형을 이루고
있는 이상적인 자유민주주의 사회였으나 이 환상이 단번에 깨져 버리는 것 같았
다.
소수의 권력과 부를 잡은 사람들이 자기들의 고유 영역을 넘어서면서까지 서
로 교류하고 있으며, 유착 현상은 점점 증대하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민주 사회에서 국가의 주인인 일반 대중(국민) 쪽에서 볼 때에 이들 권력 집
단은 `우리`가 아닌 우리와 거리가 먼 `그들`인 것이다. 그들은 세습된 귀족은
아니지만 현대자본주의의 폐쇄적인 계급 구조 위에서 배타적으로 충원되는 새로
운 귀족인 것이다. 마치 밀로반 지로스가 일찍이 갈파한 바 있는 `새로운 계층
(new class)`인 것이다. 그들은 특정 제도와 사회적 출신을 배경으로 성장한 엘
리트이며 자신의 제도적 지위를 통하여 또 다른 지위와 권력을 선택하고 획득하
고 유지하는 사람들이다.
이런 현실에서 열심히 노력하며 차곡차곡 부를 축적해 가면 부자가 될 수 있
다는 미국 특유의 `성공신화(American Dream)`는 허황된 얘기일 뿐인 것이다.
더욱 놀라운 것은 민주주의 정치 질서는 기본적으로 군부에 대한 민간인 우월
의 원칙에 있으나 당시의 미국은 그것이 역전되어 군부가 민간인을 압도하며,
군부의 영향은 정치, 경제, 외교분야에까지 침투하고 있는 것이었다. 군부의 역
할이 이렇게 확대되자, 정치적 민주주의 형식마저 약화되는 것은 물론 모든 생
활 영역에서 군국주의의 종속 현상으로 변모되어 가고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이 군부, 경제, 정치 엘리트의 역할과 기능이 비대해짐에 따라 미국 사
회질서가 여러 집단간의 세력 균형으로 유지 된다고 하는 균형 이론은 허구가
되어 버리고, 권력 구조는 소수 최고위층 엘리트에게로 집중되어 있을 뿐이었다.
어쩌면 떠나온 우리 사회의 당시 사회현상을 그렇게 그림같이 반영하고 있는지
놀라움과 실망을 금할 수가 없었다.
미국에서 살아 보기도 전에 이 책을 통해서 도덕성을 상실해 버린 병든 미국
의 사회상을 알 수 있게 되었고, 인간이 사는 사회는 어느 국가이든지 간에 지
배와 피지배의 권력 구조가 뼈대를 이루고 있으며, 권력의 속성이란 작게 갖게
되면 더 큰 것을 위해 정당하고 합법적인 과정(민주적 절차)을 무시하려는 성향
까지 있다는 사실을 배우게 되었다.
이 책에서 밀스는 미국 사회의 병든 현상을, 그리고 대중사회에서 개인의 가
치판단 능력조차 상실한 채 소비지향 사회의 무력한 상품 노예로 전락해 가는
미국인들의 실상을 있는 그대로 파헤쳤던 것이다.
무엇을 어떻게 해야 건전한 민주 사회가 되고 복 받는 미국이 될 것이라는 가
치판단이나 대안 등을 내어 놓지도 않은 채, 밀스교수는 이 책 출간 후 얼마 안
된 1962년 3월 21일, 46세의 젊은 나이로 타계했다.
그러나, 미국은 워터게이트 사건을 거쳐 카터의 도덕정치 시대, 레이건-부시의
미국의 영광을 되찾는 정치를 거쳐, 월남전에서의 큰 교훈을 안고 오늘날 변혁
의 주인공 클린턴 시대를 맞게 되면서, 소외된 다수의 소리가 점점 커져 가고
있고, 여러 가지 사회집단들이 같이 발전하는 균형 잡힌 사회로 나아가고 있다.
밀스의 생각과 통찰력, 그리고 무엇보다도 `지극히 왜소하고도 지엽적인 문제
에 매달려서 조사 통계로만 모든 것을 처리함으로써 사상적 빈곤을 안고 있던
미국의 사회학 방법론`에 대항하여 역사와 사상과 사회의 상상력적 종합성을 학
문 연구의 근간으로 삼은 그의 문제 접근 태도는 학문 연구에 새로운 영역을 보
여 주어 이제 빼 놓을 수 없는 사회학의 고전이 되었다.
새 정부 출범을 맞으면서 우리 사회의 권력 구조와 대조해 보면서 앞으로 지
향해야 할 우리의 과제를 찾아보기 위해 다시 한번 책장을 열어 봐야겠다.
실패할 수 있는 용기
미국의 명문 버클리 대학교의 총장이었던 존 가드너(John Gardner) 박사의 〈
실패할 수 있는 용기(Courage to Fail)〉라는 책을 읽을 수 있었던 것이 아마도
오늘의 내가 이렇게 존재할 수 있는 명분이 되었다고 나는 가끔 생각하며 지낸
다.
미국에서 법과 대학원을 졸업하고 변호사 시험에 떨어지면서 나는 너무도 깊
은 절망에 빠진 적이 있었다. 그 무렵 서울에서는 아주 가까운 동기 동창이 사
업에 실패하자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는 소식이 들려 왔다. 몹시 마음이 흔들렸
다. `산다는 것이 무엇인가? 어떻게 사는 것이 바람직한 삶인가?`에서 시작해서
`왜 살아야 하는가?`까지 삶의 근본 문제를 심각하게 생각해 보게 되었다.
생각한 일들이 모두 잘 이루어지고 계획한 일들이 문제없이 성사되면 살아야
하고, 그렇지 않고 계획이 뜻대로 이루어지지 않고 시도하는 일마다 되는 일이
없으면 살 가치가 없는 것일까? 하는 생각을 하면서 도대체 우리 인간들이 그렇
게 열망하는 성공이란 무엇일까? 왜 성공을 해야 하는가? 점점 더 철학적인 삶
의 근본 문제까지 생각하게 되었다. 우리의 삶이 성공인가, 실패인가는 누가 어
떤 기준을 가지고 평가해야 하는가? 마음속에 평화가 있고 보람이 넘치는 매일
의 삶이 있다면 결과에 대해 심각히 생각하지 않아도 되지 않을까?
삶의 목적이 확실한 사람은 자신의 삶이 자신의 것이 아니라는 자각을 갖게
됨과 동시에 자신에게 허락된 재주와 건강을 가지고 열심히 그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노력하게 된다. 삶 전체의 목적을 위해 작은 목표를 설정하고 꾸준히 애쓰
는 과정 자체가 삶이라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살아가는 과정에서 우리는 소위
성공도 할 수 있고 실패도 할 수 있다. 우리 삶이 궁극적으로 성공했는가 실패
인가를 평결하는 일은 우리의 몫이 아닌 것이다. 우리 자신들이 설정한 목표는
잘못된 것일 수도 있고 너무 높은 것일 수도 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스스로 세운 목표를 달성하지 못하고 있다. 그 이유는 계
획을 세우는 데 실패하는 경우이고, 두 번째 이유는 한 번 실패했을 때 다시 계
획을 세우는 데 실패했기 때문이다. 첫번째 계획에 실패하면 곧 그것을 포기해
버리기 때문이다. 사실 성공한 사람들은 어떤 계획에 실패했을 때 다시 계획을
세우고 쉴새없이 도전하는 적극적인 사고방식을 가지고 사는 사람들이라는 것을
우리는 앞서 살았던 사람들의 예에서 많이 찾아볼 수 있다.
세상에 완전한 사람이 없듯이 항상 성공만 하는 사람은 하나도 없는 것이다.
때때로 실패의 쓴잔을 마시게 되는 것이 우리들의 삶인 것이다. 문제는 이 실패
를 어떻게 성공의 기본으로 삼느냐 하는 것이다. 대답은 꾸준한 노력과 끈기 있
는 재도전이다. 물론 새로운 접근 방법을 실패에서 찾아야 한다. 순전히 재수가
없어서 일이 잘 안 될 때도 있겠으나, 대개는 노력이 부족했다든지 짧은 시간에
너무 큰 일을 해내려는 욕심 때문에 실패하는 경우가 많다.
베네수엘라의 한 다이아몬드 광산업자 얘기가 생각난다. 라파엘 소라노라는
빈곤한 원주민이 다이아몬드를 캐러 왔다. 그 곳은 그때까지 다이아몬드 발굴에
성공한 사람이 하나도 없었던 지역이었다. 그도 지쳐 포기하려는 생각도 했으나
끈기 있게 하상에 널려 있는 수백만 개의 돌 가운데 99만 9천9백99개를 채취해
서 검사를 했다. 그러나 모두 평범한 돌 외에는 아무것도 아닌 것이었다. 몇 달
동안 고생을 했으나 소득은 하나도 없었다. 그러나 그는 마지막 1백만 개째 돌
을 집어 들었다. 무척 무거웠다. 그냥 돌이라기에는 너무 무거웠다. 그 돌은 다
이아몬드였다. 뉴욕의 보석상인 해리 윈스턴은 라파엘 소라노에게 원석 값 20만
달러를 지불했고 세공 작업을 거친 뒤 그 다이아몬드는 지금 `리버레이터`라는
이름으로 알려져 있는, 세계에서 제일 큰 다이아몬드로 평가받고 있다.
이상의 일화가 말해 주듯 우리들 대부분은 노력해야 할 때에 노력을 포기하는
결점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계속되는 실패에도 불구하고 역사상 가장 극적인
모범을 보인 사람 중의 하나가 아마도 에이브러햄 링컨의 직업적인 기록일 것이
다.
그는 1832년, 23세 때에 직업을 잃었다. 23세 때에 주 의회 선거에서 실패했
다. 24세 때 사업에 또 실패했다. 25세 때 주 의회 의원에 당선됐지만, 26세 때
사랑하는 애인을 잃는 쓰라림을 맛보았다. 27세 때는 신경쇠약과 정신분열증으
로 고생했다.
29세 때는 주 의회 의장 선거에서 낙선했고, 31세 때, 하원의원 지명선거에서
낙선했고, 34세 때 하원의원 선거에서 낙선했으며 39세 때 하원의원 지명선거에
패배했다. 46세 때 상원의원 선거에서, 47세 때 부통령 선거에서, 49세 때 상원
의원 선거에서 낙선하고 말았다.
그러나 1860년 51세에는 드디어 대통령이 되었다. 그는 패배를 숙명으로 생각
하지 않았다. 그 대신에 실패를 연기된 성공으로 간주했다. 실패할 수 있는 용기
를 가진 사람이었다. 이 세상에 재능이 있지만 성공하지 못한 사람도 많다. 성공
이란 천재들에게만 찾아오는 것이 아니다. 행복이란 것이 영리한 사람에게만 보
장된 것은 더더욱 아니다. 꾸준히 참고 애쓰는 사람에게 불만은 없다. 참고 견디
는 사람, 다른 사람들이 포기했을 때 계속 노력하는, 실패 할 수 있는 용기를 가
진 사람은 드디어 성공을 거두게 된다. 가드너 박사의 `실패할 수 있는 용기` 때
문에 나는 여러 번의 낙방의 경험을 통해 더욱 실력 있는 변호사로서, 시험에
합격한 첫해부터 쉽게 합격했던 동창 변호사들보다 더 큰 사건과 더 의미 있는
변호 업무를 맡아 보람있는 일들을 하게 되었다.
오늘도 나는 또 실패의 경험을 맛보았다. 그러나 이 실패가 내 인생을 송두리
째 삼켜 버릴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기 때문에 다시 실패의 원인을 찾아 새롭게
도전할 준비를 한다. 죽을 때까지 이 일이 반복될 것 같다. 실패를 딛고 일어서
서 작은 성취를 맛보며 가슴 뿌듯이 느껴 보며 내일을 맞이한다. 실패할 수 있
는 용기를 갖게 되면서 성공과 실패가 결국은 동전의 앞뒷면과 같다는 것을 깨
닫게 된다. 용기가 꺼지지 않기를 기도하는 마음으로 지금 해야 할 일을 찾아
나서야겠다.
공동체를 위하여
이 사회에 꼭 필요한 단역이 되어
1958년이니까 어언 39년 전 얘기다. 그 당시만 해도 연세대학교에 변변한 강
당이 없었기 때문에 크고 작은 행사를 모두 노천극장에서 치를 때다.
연극을 좋아하시던 용제 백낙준 총장님 때문은 아니겠으나, 영문과의 오화섭
교수가 지도하시던 연희 극예술연구회가 상당히 인기가 있었고, 매년 가을 한
차례씩 노천극장에서 연극을 해 오던 때다. 대부분의 연극반 회원들은 문과 대
학생들이었고 문과 대학생 외에 연극반원은 별로 없었는데, 정외과에 다니던 나
는 어쩌다가 오화섭 교수의 영어수필강독과 희곡 시간을 택해 수강하다가 연극
반에 가입하게 되었다. 그때의 연극반은 한 번 발을 들여 놓으면 졸업할 때까지
빼지 못하는 이상한 풍토여서, 요즘 말로 `못 말려`였다. 졸업생들도 계속 드나
들었기 때문에 단원들간의 유대 관계도 끈끈했었다.
지금도 내 기억에 생생한 연극반 추억이 있다. 오화섭 교수의 번역극, 〈트와
일라이트 웍〉을 연습하는데 이 극중에서 아서(Arthur)라는 노인 역이 나온다.
연극이 거의 끝날 무렵에 대사 한마디 없이 무대 왼쪽에서 나와서 바른쪽으로
걸어 나가는 역이다. 연극반원들 중에 아무도 이 역을 원하는 사람이 없어 고민
에 빠졌을 때 내 친구 J가 이 역을 맡겠다고 자청하였다.
연극하는 날 밤(노천극장에서 한 번만 공연하는데, 조명 때문에 낮에는 못하고
저녁에만 공연이 가능했었음) 내 친구 J는 어머님과 누님들 그 동네 친구 여동
생들까지 여러 관객을 초청해 왔었다. 어머님, 누님들 그리고 이 친구를 보러 온
친구들은 첫막부터 친구가 나오기를 잔뜩 기다리며 연극을 감상하고 있었다. 그
러나 첫막이 다 끝나고 제2막이 끝나 가도 이 친구가 등장하지 않으니 모두들
이 친구가 뒷스탭으로 연극을 돕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추측까지 하고 있었
던 것이다. 그러던 중 제3막도 거의 끝날 무렵에 무대 왼쪽에서 잠옷을 입은 영
감이 두리번거리며 등장하더니 한마디 말도 없이 서둘러 무대 오른쪽으로 빠져
나가는 것이 아닌가? 어머니와 가족들은 너무 서운해서 허무함까지 느꼈다는 후
일담을 들었던 적이 있다.
이 하루 저녁 잠깐의 역을 위해 내 친구 J는 두 달 동안 연습을 하는데 한 번
도 빠진 적이 없었다. 시간을 어긴 적도 없었다. 전체 배역들과 호흡을 같이 하
기 위해 처음부터 끝까지 묵묵히 제 역을 잘 소화내 냄으로써 많은 반원들을 감
동시켰던 것이다.
지금 이 친구 J는 한국 굴지 재벌 회사의 사장이다. 어느 회사라면 다 알 만
한 회사인데, 그는 전 직원의 존경의 대상이 되고 있다. 비록 작은 일이라도 맡
은 일에 묵묵히 최선을 다하는 그의 책임감과 남들이 하기 싫어하는 인기 없는
역을 스스로 자원하여 충실히 감당하는 그를 누가 싫어하겠는가? 일생을 통해서
나는 이 친구(나의 고등학교와 대학 동기 동창생)를 잊을 수가 없고, 모교 연세
대학을 생각하면 이 친구를 늘 떠올리게 된다.
내가 연극을 좋아하는 까닭에 우리 집 아이들 삼남매도 중, 고등학교 때에 모
두 연극 활동을 했었다. 미국에 오랜 기간 살았기 때문에 위의 두 남매는 미국
에서 학교에 다녔으며, 막내는 고1 때 함께 귀국하여 서울에서 고등학교를 졸업
하였다. 막내는 고1로 전학을 오던 첫해에 학교 연극에 참가하게 되었다. 몇 달
동안을 아침엔 한 시간 전에 등교하고, 방과후엔 남아서 연습을 하고 오곤 하더
니 드디어 공연 날이 되었다고 우리 내외를 초대하는 것이다. 무슨 역을 하는지
사전 예비 지식도 없이 연극을 보러 가서 아들 나타나기만을 기다리며 연극을
감상했다. 이제나저제나 하며 기다려도 아들은 나타나지를 않았다. 옛날 내 친구
J를 생각하며 끝까지 참고 기다리던 끝에 드디어 막내가 무대에 등장했다. 아들
은 멕시코 복장에 가구를 메고 등장하여 주인공 집 문에 대고, “가구배달 왔습
니다. 어디로 디립깝쇼?” 하고 외치는 대사 한마디하고는 짐을 내려놓고 나가
는 것이었다.
많은 관객이 웃음을 터뜨렸다. 아주 훌륭한 연기였다. 전문가들 말에 의하면
대사가 많은 주연급 배역보다도 이렇게 한마디하는 것이 더 어렵다고 하는데,
아들은 아주 코믹하게 잘 해냈다. 집에 돌아올때까지 나는 혼자서 좀 섭섭한 마
음을 지울 수가 없었다. 내 동창네 아이, 후배 모 씨의 딸들은 모두 첫막부터 끝
까지 무대에서 눈부신 활약을 하는 주연급 배역들을 해냈는데, 내 아들은 뭐가
부족해서 대사 한마디밖에 없는 단역 중에 단역을 배정 받았는가 하는 생각까지
하게 되었다. 그래서 연극이 끝나고 열렸던 간단한 다과회에서 몇몇의 학부형들
이 막내 칭찬하는 소리를 듣고는 그것이 마치 나를 비웃는 듯한 느낌까지 갖게
되었다. 그러나 집에 돌아온 막내의 얘기를 듣고는 그러한 생각을 가지고 있었
던 나 자신이 몹시 부끄럽게 여겨졌다. 막내의 말에 의하면 연극에서는 출연하
는 사람 모두가 중요하며, 한 사람이라도 호흡이 맞지 않으면 전체가 흔들리게
되기 때문에 배역 모두가 귀중하다는 것이다. 더구나 배역 선정 때는 대본을 미
리 받아다 읽어 본 후에 각자 맡고 싶은 역을 얘기해 보라고 해서 자기는 짐꾼
역을 자원했다는 것이다.
아들에게서 큰 일깨움을 얻었다. 늘 학교에서 일등을 하기만 기대했고, 주연만
선호했던 나는 몹시 부끄러웠다. 연세 동산에서 내 친구 J를 통해서 묵묵히 자
신의 주어진 일에 충실하는 민주 시민의 역할이 얼마나 소중한가를 이미 배웠던
내가, 치열한 경쟁의 사회생활을 하면서 이 소중한 사실을 모두 다 망각해 버린
것 같았다. 연세 동산에서 옛날 스승님들-백낙준, 최현배, 김윤경, 조의설-께 배
운 것은 일등하고, 주연하고, 권력의 자리에 앉으라는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우
리를 자유스럽게 하는 진리를 배우고 매일 매일을 멋있고 보람있게 살면서, 하
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없는 마음의 평화를 지니라는 것, 그것이 아니었던가!
모두 일등만 원하고 남을 짓밟고서라도 남보다 앞서는 것을 최고의 가치로 여
기는 우리 사회에서 묵묵히 자기 맡은 일에 최선을 다하는 단역 배우들 같은 우
리 연세 동문들이 이 사회의 밑기둥들이란 생각이 새삼스러운 것은 아닐 것이
다. 언제나 자랑스러운 내 친구 J군과 내 막내아들의 연극 활동을 통해서 일깨
워진, 일생을 잊을 수 없는 큰 교훈의 싹이 연세 동산에서부터 비롯된 것을 늘
감사하며, 그리운 배움의 집 연세 품에 안기어 뛰놀던 그 시절을 허락해 주신
하나님께 감사한다.
참다운 힘은 `사랑`
미국 시카고 대학교 심리학과에서는 어떤 사람이 힘이 있는 사람인가를 찾아
내기 위한 실험을 한 적이 있다. 이 실험을 하기위해, 빈방에 체격이 크고 작은
아이들을 집어넣어 놓고 한쪽으로만 볼 수 있는 유리벽을 만들어 그 안을 들여
다보았다. 얼마 후에 방안에서는 체격이 제일 큰 아이가 힘으로 다른 아이들을
누르고 대장이 되어 있는 현상을 볼 수 있었다. 다음에는 아주 허약한 아이에게
재미있는 장난감을 잔뜩 갖게 하고, 체격이 각기 다른 아이들을 한 방에 집어
넣었는데, 이번에는 장난감 가진 아이 옆으로 다른 아이들이 모여들면서, 그 장
난감을 하나 얻어 같이 놀아보려고 온갖 애교를 다 떠는 것을 볼 수 있었다. 다
음의 실험은 아는 것이 많은 아이와 그렇지 않은 아이들을 같이 있게 하는 것이
었다. 결과는 아는 것이 많은 아이 앞으로 다른 아이들이 모두 몰려와 애기를
듣고, 그 아이를 존경하는 듯 바라보더라는 것이다.
이와 같이 힘이 될 수 있는 것들을 한 가지씩 주고 실험을 할 때는 뚜렷하게
힘의 소재가 나타났었는데, 이와 같은 힘의 요소가 되는 것들을 가진 여러 아이
들을 다같이 한 방에 들여놓으니까 재미있는 현상이 일어났다. 처음에는 가진
자들의 필요에 의하여 물물교환 형식으로 서로 바꾸어 갖기 시작하더니, 점점
욕심이 생기기 시작하여 서로 더 많이 가지려고, 오래 가지고 있으려고 하다보
니, 여럿이 같이 더불어 사는 것이 아니라 혼자 살아남기 위한 치열한 경쟁과
싸움이 벌어져, 결국엔 장난감도 다 부서지고 돈도 없어지고, 기운 센 아이도 많
이 아는 아이도 결국은 기진맥진해져서 다 포기하더라는 것이다.
시카고 대한 연구팀은 돈 있는 사람, 기운이 센 사람, 정보가 많은 사람, 요즈
음 표현으론 언론, 방송 등 매스컴을 장악한 사람등이 힘(Power)을 얻게 되고,
힘있는 사람들은 그 영향력(Influence)으로 다른 사람을 자기 재미와 만족을 위
해 부려먹으려고 드는 사실을 이 실험을 통하여 발견하게 되었는데, 더 중요한
발견은 이 힘과 영향력이 잠시 번뜩하더니 끝난다는 것이었다. 다시 말해서 순
간적인 뽐냄으로 끝나고 말기 때문에 우리 마음속에 기억된다든지, 그와 같은
힘을 축적하기 위한 그들의 노력이나 숨은 얘기들을 음미할 시간이 전혀 없고,
또 그럴 필요도 느끼지 못한다는 것이다.
박스 비버라는 사회학자는 서양의 물질문명을 분석하면서, 자본주의 정신과
기독교 윤리가 합쳐져서 이룩한 서양의 자본주의 체제 밑에는 부지런함, 정직함,
열심히 이웃을 섬기면서 자본을 늘리고 이와 같이 부유해진 자본을 다시 벌어들
였던 사회에 여러 모양으로 환원한다는 기독교 윤리가 강하게 작용하고 있다고
피력한 바 있다. 이와 같은 정신하에 부를 축적한 사람은 금력을 중심으로 한
힘이 길게 유지될 수 있을 것이다. 오늘날 우리는 주변에 힘있는 사람, 권세가
있는 사람, 명예가 있는 사람, 돈이 많은 사람 등을 보게 된다. 언뜻 보기에 이
와 같은 권력을 가진 사람들은 돈 가진 이, 기술 가진 이, 머리 좋은 이들을 자
기 마음대로 부릴 수 있는 것 같다. 그래서 자기 마음대로 하고 싶은 일을 다
하고 사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과거 역사를 통하여, 이렇게 힘있어 보였던 무수한 사람들이 어처구니
없이 사라져 가 버린 사실을 우리는 너무나 잘 알고 있다. 이와 같은 역사를 외
면하거나 무시하는 미련한 사람은 참 의미의 힘있는 자는 결코 될 수 없음도 우
리는 또한 역사를 통해 잘 배워 오고 있다. 아주 가까운 예로 헌법까지 고쳐 가
며 평생 힘있는 사람을 원했던 박 대통령의 말로를 보자. 그 외에 우리나라에서
도 멀게 가깝게 세도나 권세가 얼마나 그 기반이 허약하고 쉽게 무너질 수 있는
것인지 우리들은 어제도 오늘도 잘 보고 있지 않은가?
여기서 힘이나 세력의 정당성(Legitimacy)이나 타당성 같은 것을 얘기하고 싶
지 않다. 다만 참다운 힘이란, 그 힘이 겉으로만 나타나는 영향력, 다시 말해서
감투 같은 것이 아니라, 감투가 없어도 사람들 마음속에 오래 남아 커다란 영향
력을 미치는 힘, 그래서 그렇게 감동받은 사람들이 또 다시 이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는 힘있는 일을 하게 만드는 원동력이 될 수 있는 힘, 그런 힘이라고 생각
하며, 나는 그것을 찾아보고 싶다. 과연 어떤 힘이 이와 같이 오래오래 사람들
마음속에 남아, 이 세상을 조금씩 더 나은 세상으로 만드는 일에 참여하게 하고
있는 것일까?
참다운 힘이 있는 사람은 어떤 사람일까? 나는 그런 사람으로 인도의 간디와
미국의 마틴 루터 킹 목사를 들고 싶다. 두 사람은 닮은 점이 많다. 인권운동,
약자를 위한 투쟁, 그리고 수많은 체포와 옥중 생활도 비슷하다. 그러나 무엇보
다도 닮은 것은 그들의 사랑의 이념이다. 킹 목사가 간디에게서 배운 행동 이념
은 유명한 `사티아그라하`이다. 이는 해석을 하자면 진리의 힘(Truths-force)이
다. 사회 개혁은 무력이나 폭력으로 되지 않고 민주의 진리에 확고하게 설 때
가능하다고 간디는 믿었던 것이다. 바른 생각으로 바른 일을 위하여 전진할 때
어떤 폭력도 이것을 저지할 수 없다고 확신하였던 것이다.
킹 목사는 간디의 `진리의 힘`에 대신하여 `사랑의 힘(Love-force)`을 내세웠
다. 킹 목사는 미국 내의 2천만 흑인들의 인권과 자유를 위해 수없이 투옥되면
서도, 무저항으로 옳지 않은 권력에 대항하며 싸우면서 다음과 같이 사랑의 힘
을 가르쳤다. 첫째, 이는 악에 저항하는 힘이며 비겁한 자의 방법이 아니다. 둘
째, 상대방의 우정을 벌자는 것이며 증오를 일으키는 것이 아니다. 셋째, 우리의
공격 대상은 악의 세력이며 우연하게도 그 악에 사로잡힌 인간이다. 넷째, 복수
심 없이 순수하게 고통을 감수하는 것이다. 다섯째, 우리는 정의의 편에 서 있음
을 믿는 것이다. 여섯째, 육체와 폭력뿐 아니라 마음의 폭력도 회피하는 것이다.
여기서 마음의 폭력은 증오심을 말한다.
킹 목사는 이와 같이 사랑의 힘으로 세상을 변화시킨 위대한 힘을 발휘했던
사람이다. 그는 39세 때 백인 우월주의자의 총탄을 맞고 테네시 주 멤피스 시에
서 쓰러졌지만, 그의 유명한 워싱턴 대행진 때의 연설은 전세계의 평화를 사랑
하고, 우리 인간은 누구나 하나님께로부터 공평하게 창조된 동등한 형제라는 것
을 믿는 사람들의 마음속에 아직도 살아 움직이고 있다. 아직도 독재자의 압박
에, 옳지 않은 악의 지배하에 신음하고 있는 많은 사람들의 마음속에 킹 목사의
외침인, “나는 꿈을 가지고 살고 있다. 조만간 노예로 팔려 온 우리 조상들의
아이들과 이 땅의 권세가인 판사나 상원의원의 자녀들이 같이 손잡고 소꿉장난
을 하면서, 이 나라의 장래를 위해 같이 머리를 조아려 슬기를 서로 짜내는 그
날이 곧 오리라는 그런 꿈 말이다.”가 큰 위로와 함께 우리가 살아남아서 악과
투쟁할 힘을 주고 있다.
킹 목사는 간디의 영향을 제일 많이 받았다. 즉 간디야말로 킹 목사의 마음을
움직인 대단한 힘을 가진 사람이었던 것이다. 이런 사람이 참다운 힘이 있는 사
람이지, 누가 힘있는 사람이란 말인가? 킹 목사는 간디를 가리켜, “간디는 예수
의 사랑의 윤리를 가장 대규모로 실천해 보여 준 역사상 최초의 인물이다. 나는
그의 비폭력 사상을 본받고 있다.”고 말함으로써 그의 이념 형성에 가장 큰 영
향을 준 인물이 간디임을 시사한 적이 있다.
간디의 정신을 본받은 인도 민중이 영국 관헌의 몽둥이 밑에서 하나하나 행진
하며 차례차례 총에 맞아 쓰러지는 장면을 영화 <간디>에서 보았다. 킹 목사의
흑인 시위대도 기쁜 마음으로 체포되어 감옥으로 보내졌다. 이 힘, 진리의 힘,
사랑의 힘이 우리들 생각으로 불가능하게 여겨지는 엄청난, 초인적인 힘을 발휘
하게 하는 것이다.
위의 두 위인의 행적을 살피면서, 간디의 무상 정신(Non-injury)은 부정적으로
도 들린다. 간디는 이를, “무상이란 악행을 해 오는 자에게 선으로 승리하는 가
장 적극적인 태도.”라고 설명한다. 간디는 평생을 거쳐 2,338일을 감옥에서 살
았다. 그러나 영국 관헌은 그를 죽이지 못했다. 그는 인도에 자유를 갖다 주었을
뿐 아니라, 전 인류에게 참다움이 결국 이긴다는 확신을 심어 주었다. 즉 참다운
진리가 세상을 이기는 힘이라는 것을 가르쳐 주었던 것이다. 킹 목사의 기본 정
신이 아카페 사랑임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간디는, “사랑에는 종류가 없다. 다
만 심도가 있을 뿐이다.”라고 말했다. 어떻게 사랑을 하느냐보다 얼마만큼 사랑
하느냐가 문제인 것이다. 참사랑, 헤아릴 수 없는 사랑이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
며, 감동받은 사람들이 세상을 움직이는 역사를 우리는 너무나 잘 알고 있다.
동물원에 구경을 갔던 어떤 모자의 얘기가 기억난다. 어린 아들이 사자가 갇
혀 있는 우리에 가서 열심히 들여다보다 쇠창살 사이로 머리가 쑥 들어갔는데
빠지질 않는 것이다. 두마리 사자는 먹이가 들어왔다고 생각하고 어슬렁어슬렁
어린이의 내민 머리 쪽으로 걸어오는 것이 아닌가? 어머니는 있는 힘을 다하여,
“하나님 제 아들을 살려 주세요.”라고 외치면서 쇠창살 두 개를 양손에 잡고
옆으로 늘렸는데 쇠창살은 늘어나고 사자가 어린이의 콧잔등에 입을 대기 직전
에 머리를 빼내어 살았다는 얘기다.
이 연약한 어머니의 어디서 그런 엄청난 힘이 나왔을까? 이는 자식을 사랑하
는 무한한 사랑의 힘이다. 바로 이 사랑에서 이 사회를, 이 역사를 움직이는 원
동력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연약하게 보이지만 참 힘이 있는 사람, 사랑이 많
은 사람들이 점점 늘어날때 역사는 바뀌게 된다. 절망과 허무로 내닫고 있는 우
리 역사의 방향을 바꾸어 놓을 사람이 필요한 때에 우리는 살고 있는 것이다.
남은 문제는 다른 사람의 사랑만 기대하고 있어야 될 것인지, 아니면 나 자신이
어떻게 사랑을 키워 나갈지의 선택만 남은 셈이다.
가는 정이 있으면 오는 정도 있다.
나는 어렸을 때부터 사업가가 될 수 없다고 생각해 왔다. 그것은 영악스럽게
자기것을 챙길 줄 아는 사람이라야 장사에서 성공한다는 얘기를 아주 어렸을 적
부터 할머님으로부터 자주 들어왔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부업 비슷한 장사도 아닌, 간단한 돈벌이는 그런대로
꽤 잘해 본 경험은 있었다. 어렸을 때 학비를 벌기위한 신문 돌리기나 찹쌀떡
장사, 번역해서 팔기 등에 꽤 재미를 본 적이 있었으며, 미국에서는 백과사전 판
매원이 되어서 두 달 동안에 지역에서 최고 판매원이 되어 특별상도 받았고 한
국지사장 자리를 권유받은 적도 있었다.
나는 그렇지만 사업이나 장사는 공부를 계속하기 위해 잠깐 할 수는 있어도
직업으로 갖기를 원치는 않았었다. 그 이유는 아마도 할머님의 예전의 말씀이
늘 머릿속에 남아 있기 때문일 것이고, 또 하나의 이유는 미국 유학가기 직전에
있었던 고급공무원과의 설전과 사표 사건 때문일 것이다.
그런데 다시는 사업을 하거나 사업하는 사람과 같이 일을 하지 않겠다고 다짐
했던 내가 미국의 변호사 생활을 청산하고 귀국해서 한국의 50대 재벌 중의 하
나인 Y회사의 사장이 되었다.
대단한 변신이다. 기업 내에서 경험이나 단계적인 진급 경험도 없는 나는 부
장, 이사, 상무, 전무를 건너 뛰어 곧바로 사장이 되었다.
사장은 회사의 얼굴이기 때문에 회사를 대표해서 대외적으로 회사의 이미지를
높이며 부하직원들을 격려, 감독해서 이윤을 내는 것이 주임무이다.
경험이 전혀 없는 나는 처음 한 달간 회사의 업무 내용을 파악하는 데 보내
며, 임원들과 같이 일상 일과 때뿐 아니라 저녁에도 서로 인간적인 사귐을 가지
면서 회사일을 파악하기 위한 공부를 했다.
사실 내가 이 회사에 꼭 맞는 얼굴이었는가에 대해선 아직도 정답이 없다. 한
동안 사장이 될 사람을 찾고 있을 때 동창생인 친구가 나를 소개해서 창업자이
신 회장님을 면담했다. 친구는 회장님에게 나와 당시 경제기획원 장관이었던 조
순 부총리와의 두 시간 반 동안의 대담 테이프를 미리 보여 드려서 회장님께서
는 이미 나에 대해서 많은 것을 알게 되셨던 것이다.
경험도 없는 내가 사장이 되자마자 닥친 첫 번째 시련은 아연 공장에서 근무
하는 노동조합 대표와의 임금협상이었다. 노조위원장과 지도자들은 이미 사장
취임 전부터 그 해의 임금협상을 위해 단단히 준비하고 별러왔다는 것이다.
새로 부임한 사장이 미국에서 인권변호사였고, 매주 텔레비전에서 시사토론을
진행하는 사람이라고 알려지자 근로자들은 상당한 기대를 가지고 기다리고 있었
던 것이다. 또 한 공장의 문제는 근로자들의 이직 문제였다. 자녀들의 교육을 위
해 큰 도시로 떠나가는 일꾼들이 늘어나서 근로자 충원 계획이 골칫거리였다.
나는 공장에 자주 내려갔고, 갈 때마다 이전에 있었던 간부만의 회식제도를
없애고 전 근로자가 함께 모이는 칵테일 리셉션으로 대체했다. 몇백 명의 근로
자가 한곳에 모여 사장과 약속도 하고 얘기도 나누며 소주와 오징어와 떡을 나
누어 먹으며 즐겼다.
강당에 직원 부인들 몇백 명을 초청해서 교양강좌도 하고, 자녀 교육 문제 강
연도 하며 사장과 가까이 할 수 있는 시간을 가져 보기도 했다. 자녀 교육 때문
에 직장을 떠나는 직원들의 형편을 감안해서 강당에서 영어와 수학 과외공부를
시작했다. 전직 초등학교 교사 출신 부인들에게 얼마의 수고비를 지불했다. 성과
가 상당히 있었다.
사장과 직원과의 좋은 관계는 회사와 노동조합간의 임금교섭과 단체교섭을 상
당히 부드럽게 만든다. 나는 말단 근로자의 사정을 이해하기 위해 시간만 나면
같이 대화하는 시간을 갖기도 했다.
그러던 어느 날, 공장의 숙소를 지키는 혼자 사는 아주머니의 아들이 결혼을
하는데 주례를 서 달라는 부탁을 받았다. 이 아주머니는 20년 전 장마통에 남편
이 물에 빠져 세상을 떴고 혼자서 갖은 고생을 하면서 삼남매를 키웠는데, 장남
이 결혼하게 되자 사장의 주례로 식을 치르는 것이 일생의 소원이라는 것이다.
회사의 간부들은 뭐 그렇게 먼곳까지 가서 주례를 하느냐며 사양하는 것이 어떻
겠냐고 나를 만류했지만, 나는 고집스럽게 이 일만은 꼭 해야 된다고 우겼다. 마
침 3월 1일 공휴일이라 아침 일찍 아내와 같이 여섯 시간을 운전해 가서 주례를
마쳤다. 이 동네 면장을 위시해서 유지들과 아주머니의 친척들이 모두 참석해서
결혼을 축하하며 사장이 주례를 서니 너무 감격스럽다고 인사를 했다.
다음 해, 임금협상이 심각해졌을 때 노조 간부이며 협상대표인 두 사람이 아
주머니의 시동생과 친척 되는 사람으로 작년에 결혼식에 참석했던 사람이었다.
그 아주머니가, “말단직원까지 애정을 가지고 사랑하는 사장님을 봐서라도
이번만은 과도한 투쟁을 삼가고 합리적인 범위 내에서 타협을 보자.”고 앞장을
서서 애써 주었다는 말을 후에 들었다. 그 말을 듣고는, `가는 것이 있어야 오는
것이 있으며 세상에는 공짜가 없다.`는 말을 다시 음미해 보았다.
나는 학교로 부임하기 위해 3년 1개월 만에 사장직을 사임했다. 정든 직원들
과 이별하는 일은 섭섭한 일이긴 하나, 나보다 더 전문적 지식이 있는 이 회사
의 공채 1기인 분에게 사장자리를 넘겨드리고 떠나게 되어 마음이 든든했다.
나는 내 아이들에게도 그리고 제자들에게도 언제나, “몸담고 있던 조직을 떠
날 때 그 곳에 있는 동료나 선후배가 그리워하는 사람이 되라.”고 가르쳐 왔다.
이 회사에서 나는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지는 알 수가 없다. 그러나 나는 최선을
다했다고 생각한다.
학교 바로 세우기
정확히 말해서 93년 3월 23일 학장에 취임했다. 학교 강당에서 남 몰래 하지
말아야 할 일 하듯이 친구나 가족초청도 없이 몇몇 학생과 교직원, 교수 몇 명
이 모여 그야말로 간단하고 조촐하게 그러나 매우 우습게 겪은 취임식이다. 사
실 학교측의 사려 없는 실수라고 단정지을 수밖에 없는 일이었다.
그야말로 모셔오는 새 학장에 대한 인사가 아니었다. 그러나 학교측에서는 매
우 급한 상황이 벌어졌기 때문에 별 도리가 없었던 모양이다.
본관 정문 앞에 새 학장을 환영한다는 현수막이 걸려 있고 군데군데 나의 경
력과 소개를 겸한 포스터에 신임학장을 환영한다는 학생들의 결의는 처음일 것
이라고 시사저널 기자가 귀띔을 해 준다. 나는 전혀 모르는 일이다. 단지, “환
영하지 않는 곳에 왜 간단말인가?”하는 오기만 있지 실제 학원 내의 사정을 잘
알 턱이 없었다.
며칠이 지나지 않아 신문에 우리 학교가 거명되면서 몇 명 안되는 교수들 중
에 상당수의 이름이 신문, 방송에 거명되면서 10여명 이상이 구속, 송치, 재판으
로 이어지는 엄청난 일이 벌어졌다.
트럭이 서너 대씩 찾아와 학교 입시자료와 컴퓨터 관련자료를 다 싣고 갔다.
신문은 매일 아침 이 사건을 대서특필한다. 방송국과 신문기자들이 학장실에 몰
려들어 추궁한다. 나는 도무지 모르는 일이다.
자존심이 상한 학생회에서는 자기들 나름대로 의사표시가 강력하다. 총학생회
임원진들이 시한부 단식을 선언하고 본관 정문 앞에 앉아 시위를 한다. 학교의
정상화를 위한 단식이라면, 나도 참여하겠다고 선언하고 등산복 차림으로 갈아
입고 학생들이 꿇어앉아 있는 정문에 가서 자리를 잡고 앉아 버렸다.
몇 시간이 지났을까? 총학생회장 김웅규 군이 슬며시 다가오더니 학장실로 올
라가자는 것이다. 침상이며 침구는 준비해 놓았으니 올라가시라는 것이다. 그래
서 조건부로 단식농성을 풀고 학장실로 같이 올라가 이른바 삼자 토의안을 결정
하게 되었다.
학원 정상화를 위해서 학장과 총학생회장과 교수 대표 삼자가 계속 협의하면
서, 제발 학교일을 의논 결정하자는 데 합의를 보고 이 기구의 이름을 `학교정상
화를 위한 삼자회담`이라 정했다. 학생들의 요구조건, 교수들의 생각들을 정리해
서 재단의 한 국장에게 보내기도 하고 우리 자신의 모색도 해 보는 기구였다.
나는 계속 대화를 해 나가면서 학교를 위한 3대 원칙을 정했다. 좋은 학교가
되려면 세 가지 원칙이 뚜렷이 서서 계속 그렇게 되어 가야 한다고 나는 주장하
면서 우리 학교에서는 (1)입학전형의 공정성, (2)졸업사정의 철저, (3)교수임용의
공개 및 투명성 보장을 들었다.
그리고 학교에서 수익이 되는 모든 것은 학교에 재투자되어야 사학이 산다는
것이 나의 지론이었다.
첫째의 나의 운영방침은 `학사행정의 철저`였다. 입학부정으로 전세계에 오명
을 남긴 학교의 이미지를 어떻게 회복할 수 있을까?
고심도 했다. 고등학교에 찾아다니며 선물도 주고 소주도 사 먹이며 섭외를
해야 지원학생이 많이 오지, 그렇지 않으면 학생들이 모자랄지도 모르니 예산을
써서 섭외활동을 하자는 직원대표의 건의를 일축해 버렸다. 학교의 특성과 장점
을 보고 지원하면 하는 것이지 소주 받아 주며 학생 보내 달라는 일은 이제는
그만두어야 할 때라고 생각했다. 상당한 반대와 거부반응이 있었다. 나는 눈을
딱 감았다.
원서마감 날 아침부터 긴장이 되었다. 작년에 6:1이었다는데, 금년에는 섭외활
동도 하지 않았고, 교수들이 구속된 데다 부정을 저지른 학교로 소문도 났으니
분명히 작년만 못할 것이라고 모두들 믿고 있었다. 게다가 신문광고나 고등학교
찾아가기 등을 모두 거부했으니 만약 작년만큼 학생이 오지 않으면 내가 책임을
져야할 형편이었다.
점심때가 되도록 원서 접수는 매우 저조했다. 나는 학장실에서 보고나 받고
앉아 있을 수가 없어 직접 접수창구로 내려가 살피기 시작했다. 오후가 되면서
슬슬 학생들이 몰려오기 시작하더니 마감시간 세 시간을 남겨 놓고는 마치 벌떼
몰려오듯이 밀려오는 것이었다. 나는, “이제 됐다. 내 체면은 이제 살았구나.”
하고 혼자 무릎을 쳤다. 옆에 있던 학생과장이 무슨 일이냐고 내게 묻는다. 나는
그저 여유있게, “어때요? 작년보다 좀 못한 것 아니오?”하고 그에게 물었다.
그는, “아니 무슨 말씀이십니까? 작년보다 많으면 많았지 절대로 적지는 않습
니다.”라고 자신있게 답하는 것이었다. 5시 마감시간에 접수사항을 알아보니 작
년보다 많은 학생들이 원서를 접수시켰는데 우리 정원에 비하면 7:1쯤 되는 수
였다. 나는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책임추궁은 면했기 때문에 기분이 가벼웠다.
두 번째로 교육부를 놀라게 한 나의 결정은, 겁도 없이 2백5십명을 졸업사정
에서 탈락시킨 일이다. 학부형들이 교무과장 사무실에 와서 시위를 하고 지도교
수들을 욕했다, 얼렀다 하며 서슬이 퍼래진 것이다. 학장인 내가 직접 학부형들
을 만나 설득작전에 나섰다. 나의 설득내용은 이런 것이었다.
“귀댁의 자녀가 이제 몇십 년 동안 사회생활을 해나갈 텐데 한학기 먼저 졸
업하고 일생 병든 사람 같은 가슴을 안고 살기를 원하십니까? 아니면 한 학기
더 배워서 수십 년간 대우받고 존경받는 직장의 일꾼이 되는 것을 원하십니까?
”
많은 학부형들이, “뜻을 잘 몰랐기 때문에 오해했었습니다. 참이유가 말씀하
신 바와 같다면 누가 뭐라겠습니까? 잘 좀 부탁 드립니다. 정직하게 해 주세요.
참 기가 막히고 힘든 매일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병철씨의 말씀처럼 자식키움
이 맘대로 안 된다는 것을 뼛속 깊이 공감하고 있습니다.”
교육부에서도 깜짝 놀라 연락이 왔다. 그렇게 해도 성하게 학장직을 계속할
수 있느냐는 질문이었다. 나는 원칙대로, 법대로 하겠다고 아주 단호하게, 쓸데
없는 잡음을 차단했다.
세 번째, 깨끗하고 존경받는 학원을 만들기 위해서는 교수임용을 공평하고 균
등하게 해야 한다는 사실을 강조하고 새로운 임용기준을 만들었다.
즉 해당학과의 교수들이 심사를 하고, 그것을 가지고 교수 임용위원회에서 심
사한 다음, 보직교수회의에서 다시 점수를 매긴 후에 3배수로 추천된 것을 토대
로 이사장이 최종 결정하는 새로운 교수임용에 관한 운영국정 세칙을 준비했고
그대로 운영을 했다. 불만이나 불평이 나올 틈도 없었다.
입학원서와 인지대 수입을 가지고 10년 근속한 교수들을 유럽으로 연구여행을
보냈고, 겨울에는 미국으로 영어연수를 보냈다. 처음 있는 일이었다. 시간강사 1
백9십 명을 초청해 학기초에 잔치를 열어 드리고 좋은 강의를 부탁 드렸다.
시간강사 10년 만에 처음 받는 대접이라고 말하며, 학교 마크가 들어간 손목
시계를 받고 기뻐하는 어느 시간 강사의 눈물어린 고백도 들었다.
모두 다 이 학교에 들어온 학생들에게 만족한 강의를 통해서 학교가 할 의무
를 다해야 한다는 나의 평상시의 책임론에서 나온 처사들이다. 학교를 떠난 다
음에 교수들과 교직원들에게서 직접 얘기를 들어 보지 못해 얼마나 학교가 달라
졌는지 모른다. 내 욕심으로는 일등학교가 되었으면 좋겠다.
교통사고 유자녀, 누가 돌봐야 하나
자동차 사고로 부모를 잃어버리고 친척집에서 혹은 고아원에서 살고 있는 어
린이들을 서울로 초청해서 서울 구경을 시켜주고 장학금도 주는 행사가 KBS소
강당에서 열리고 있었다.
행사를 주관하는 단체의 고문자격으로 참석한 건교위원인 이윤수 의원은 어린
이들의 사연을 들으며 계속 눈물을 흘리고 있다. 나는 이 단체의 이사장 자격으
로 참석하고 있는 중이었다. 부모를 교통사고로 잃고 어린 동생과 같이 할아버
지 할머니댁에서 초등학교에 다니고 있지만 열심히 공부해서 부모 없는 어린이
들에게 희망을 주고 용기를 주는 지도자가 되겠다고 다짐하는 어린 소년을 보면
서 나도 눈물이 나오는 것을 막을 길이 없었다. 이 의원과 나는 서로 쳐다보며,
이 불쌍한 어린이들을 최선을 다해서 돕자고 약속했다. 교통유자녀협회의 수기
입상자 발표식장에서였다.
이 세상에 멀쩡한 사람이 몇이나 될까? 어떤이는 생긴것은 멀쩡한데 하는 짓
이 정상이 아닌 사람이 있는가하면, 육체는 불구일지언정 샛별같이 빛나는 영혼
과 정신을 가지고 우리를 감동시키는 사람도 있다.
요즈음 우리나라를 찾는 외국인들에게 한국 방문의 첫인상을 물으면 상당수의
외국인들이 두 가지를 지적한다. 서울의 밤하늘마다 수놓은 것 같이 만발한 십
자가와 자동차 홍수를 든다. 자동차 홍수가 날로 더 심해져 이제는 살인적이라
는 표현도 시들해지고 끝까지,갈 데까지 긴 상태라는 말까지 나오고있다.
그래서 선거 때만 되면 사람들은 서울의 교통문제를 해결해 줄 사람만 나오면
시장도 시켜 주고 대통령도 시켜 준다고 아주 당당하게 말하고 있다. 자동차가
많아서 출퇴근은 물론 주말에 어디 꼭 갈 일이 있어도 엄두를 못 내는 것이 요
즈음 우리나라의 교통 현황이다.
문제는 자동차의 수가 많아져서 1천만 대가 되었다든지, 교통문화가 정착되지
않아서 무질서가 극에 달했다든지, 교통사고로 죽는 사람이 많다든지 하는 것들
이 아니다. 정말 큰 문제는 정부의 교통문제를 담당하는 주무부서의 정책의 부
재와 일이 커졌을 때 서로 책임을 전가하는 무책임과 소명감 부족 때문이다.
나는 얼마 전부터 경제정의실천 시민운동연합의 교통광장의 대표가 되어 우리
나라의 교통 전반에 관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교통문제 전문가들로 구성된 교
통광장을 운영하며 도시 교통 해결방안, 주차장 문제, 혼잡통행세 문제, 지하철
문제, 택시와 버스의 문제점 등 여러 가지 정책적인 해결을 돕기 위한 세미나와
워크샵을 조직하기도 했다.
뺑소니차와 교통법규를 위반하는 운전자들을 고발하기 위한 시민교통경찰 발
대식을 갖고 서울시내 2백5십 명의 대원을 모집하여 제복조끼까지 입혀 가며 그
들의 감시활동을 격려하기도 했다.
해마다 추석과 음력설이 되면 온 민족이 고향찾기 대이동을 하게 된다. 어떤
이는 명절날 하루 전날까지 일을 하다가 고향에 내려갈 길이 막히는 경우도 있
다. 나는 몇몇 동지들과 같이 추석명절 승용차 함께 타기 운동을 벌여 수백 명
의 승용차 운전자들이 고향가는 길에 동행을 만나 같이 귀향하는 일을 돕고 있
다. 금년의 두 번째 승용차 함게 타기 행사를 오늘 막 마치고 돌아와서 이 글을
쓰고있다.
해가 거듭될수록 이 운동은 많은 사람들의 관심을 얻게 되었고 돕는 후원자도
많이 생겨나서 다행스럽게 운영되고 있다.
지금은 교통광장 활동이 중단되어 이전의 동지들이 자주 만나지 못하고 있으
나 각자들의 활동이 있을 때 서로 찾아 격려하고 있다.
임통일, 진삼현, 박용훈.
나는 아직도 교통유자녀 돕기운동의 일을 계속 하고 있다. 전국에 약 20만 명
의 어린이들이 이 운동의 도움을 받는 대상자들이다. 정부예산도 별로 없고 독
지가들의 후원도 아주 미미하다.
지난해에도 교통사고로 사망한 사람의 수가 7만3천 명이 넘었다. 그 가운데는
일가족 몰살의 경우도 있었고, 부모만 사망한 경우도 상당수가 되는 것이다. 이
들을 어떻게 해야 할까?
이 어린이들은 여러 가지 문제를 가지고 겨우 생존하고 잇다. 우선 정신적으
로 몹시 불안하고 초조하다. 자동차 소리만 들으면 경기를 일으킬 정도로 두려
워한다. 또한 대부분의 이 어린이들은 매우 가난한 환경에 놓이게 되어 재정적
인 보조를 필요로 하고 있다. 교통사고유자녀협회에서는 이 어린이들에게 장학
금을 지급해서 학업을 계속하게 해 주는 일과, 정신적으로 안정이 안 된 어린이
들은 상담을 통해서 안시키고 정상적인 학교와 사회생활을 할 수 있도록 돕는
일이 주된 일이다.
그 동안 인정 많은 독지가들이 여러 가지 도움을 주어 몇백 명에게 장학금도
지급하고 해마다 몇백 명식 서울로 초청해서 가정으로 초대해 민박도 시켜 주고
호텔에서 재우면서 63빌딩이나 남산 등 볼 만한 곳을 구경시켜 주기도 했다.
본적인 문제가 해결되려면 이와 같은 어린이 장난 같은 일들 가지고는 턱도
없는 일이다. 정부가 배려를 해서 이 불상한 어린이들의 앞길을 열어 주어야 한
다. 일본의 경우 자동차 관련 보험에 교통사고유자녀돕기를 위해 일정 금액을
미리 떼 놓는 법이있다. 우리나라에서도 이런 어린이들을 위해 정부차원의 정책
이 세워져야 한다고 믿는다.
우리는 언제 어떻게 무서운 자동차나 트럭에 희생될지 알 수 없는 세상에 살
고 있다. 누구라도 자동차 사고로 불구자가 될 수 있고 누구라도 사고로 자녀들
만 이 땅에 남겨 둘 확률이 있는 것이다.
자동차 사고를 줄여야 한다. 운전을 법규에 맞게 해야 한다. 이른바 교통문화
가 정착되어야 하겠다. 무엇보다도 양보하는 미덕과 교통질서를 지키는 준법정
신이 필요하다. 부모를 불의의 사고로 잃어버린 어린이들도 부모가 있는 어린이
들처럼 교육도 받고 보호도 받는 나라가 되어야겠다.
우리 아이들을 입시지옥에서 해방시키자
과외망국이란 말이 떠돈 지 벌써 한두 해가 아니다. 입만 열면 교육입국이다,
교육의 백년대계를 떠들어 대지만 정부가 주도하는 졸속한 조령모개의 교육정
책, 서로 책임전가만 일삼는 교육 주체들의 직무유기와 구경꾼의 입장에 매몰되
어 온 시민들의 무기력감 속에 우리 교육은 절대절명의 위기에 빠지고, 자라나
는 세대들은 피폐할 대로 피폐된 교육 현실에 망가지며 병들어 죽어 가고 있다.
이제 죽음과 죽임의 교육이 아니라 사람다운 삶을 되살리는 교육으로 우리 교육
을 우리 스스로의 힘으로 개혁해 다가올 새로운 시대를 예비할 뿐 아니라 그 시
대를 앞장서서 만들어 갈 이 시대의 주체들을 함께 키우기 위한 주민자치 원칙
에 따른 새로운 교육의 물고를 터야겠다. 더 이상 교육의 주체이자 소비자인 학
생과 부모들이 교육문제 해결의 전면에 나서야 할 때라고 느낀 우리들은, 드디
어 교육개혁과 자치를 위한 시민모임을 만들고, 나는 공동의장에 피선됐다.
언론들은 이 모임을 교육주권회복을 위한 최초의 교육개혁 시민운동체라고 부
르며 대서특필하엿다. 교육문제 해결에 있어 근본적인 발상의 전환이 필요하다
고 생각하는 YMCA, YWCA, 학부모 연대회의, 교육개발원 연구원과 일선 학교
교사와 대학교수들 1백여 명이 모여 창립을 했으며, 다음과 같은 `시민 교육주권
선언문`을 발표했다.
우리는 모였다. 풀리지 않을 것 같은 교육문제를 앞에 놓고 또 다시 모였다.
우리의 삶에서 교육의 중요성이 점점 더 커져 가는 만큼, 현재의 교육은 그 참
담함을 더욱 드러내기에 모였다.
세계는 정보화사회를 준비한다며 교육개혁의 거대한 혁명을 일으키고 있다.
정보화사회의 핵심 자산인 인력, 그리고 그들의 창의력을 키우기 위해 숱한 지
혜와 자본, 그리고 정치력이 몰리고 있다. 그리고 선진화된 교육상품을 각국의
보호장벽을 뚫으며 퍼뜨리기 시작했다. 이제 교육의 문제는 단지 `하나의 문제`
에서 벗어나 미래 사회에서 살아남는 문제가 되어 가고 있다. 그러한 역사적 시
점에서 우리는 모였다.
그동안 국가주도의 경제개발 과정에서 교육은 우리의 사람의 영역을 떠나 국
가의 영역으로 파묻혀 들어갔다. 가정과 마을과 여러 공동체의 영역에 깊게 뿌
리 박고 있었던 교육은 교육관료들이 다루는 `숫자`와 정책의 영역으로 추상화
되었다. 사람들은 교육의 주인 자리를 잃고 이리저리 끌려 다녔다. 그러는 동안
`삶으로서의 교육`을 잃은 수많은 사람들이 교육의 혹독한 지배를 받으며 숱한
눈물을 뿌렸다.
무거운 책가방에 매달려 끌려가는 아이들은 두 가지 갈림길만을 제시받았다.
하나는 언젠가 한 번은 패배할 숱한 경쟁의 일시적인 승리자가 되는 길이고, 다
른 하나는 장기적 패배의 출발이라고 규정된`결정된`패배자가 되는 길이다. 양쪽
모두가 자기의 삶과는 무관하다고 생각하는 수많은 어린 마음들은 스스로 목숨
을 끊었다.
부모들은 아이들과 사랑과 믿음으로 만나기는커녕 그들에 대한 냉혹한 감시자
로 내몰렸다. 전국이 어린아이들에 대한 감시망으로 얽혀 갔다. 부모들이 가족
행사에 입시생을 소외시키고 교사나 과외선생과의 연대하에 발랄하게 살 젊은
에너지를 참고서에 붙잡아 두는 동안 가정 자체도 상처를 입어 갔다. 아버지들
의 가중되는 노동 강도와 어머니의 재정운영부담은 가정을 냉각시켰고, 일탈 청
소년이 저지르는 끔찍한 가정 파탄의 뉴스는 노인 학대의 이야기로 이어졌다.
국가 주의적 관주도의 교육이 그 마지막 한계에 도달했다는 사실이 우리를 일
어서게 했다. 뜻 있는 교육자들의 사기 저하와 좌절, 그 뒤에서 살쪄 온 각종 교
육 장사, 파행적인 입시 위주 교육이 빚어낸 대규모 비리와 부정 사건... 국가주
의적 관주도 교육이 파탄났음을 알리는 조종이었다. 정부나 민간교육 지도자들
은 국가주의적 관주도의 교육정책이 뚜렷한 한계에 다다랐음을 정직하게 선언해
야 할 시점에 이르렀다. 정부가 정직하게 시인하고 대안을 찾지 않을 경우, 전국
에서 기존 교육 체계가 대규모로 붕괴되는 위기가 발생할지도 모른다. 이 위기
감이 우리를 일어서게 했다.
우리는 이제 선언하고자 한다 권위주의적이고 관료주의적인 교육은 끝났다
고. 교육은 일상의 삶의 풍성한 영역에서 결정되고 거기서 성숙해야 한다고. 그
리고 그것이 가치와 인격의 파탄을 넘어서면서 역사의 상처를 딛고 미래를 대비
할 중요한 방도라고. 우리는 작지만 풍성한 삶의 영역에서 지구촌 시대를 대비
하려고 한다. 교육에 대한 결정권을 행정당국에만 위임해 왔던 사람들, 그리하여
교육 주권을 방기했던 모든 사람들이 구체적인 책임을 져야 할 때가 왔다. 과거
의 교육은 주권자들의 권리 포기에 의해 악화된 것이기도 하다는 데 우리는 책
임의식을 느낀다. 우리는 시민이기도 하며 부모이기도 하고 아이들이기도 하며
교사나 교육정책가이기도 하다. 파탄난 교육을 삶의 영역 속에서 다시 세우려는
의지를 지닌 모든 사람들이다. 그런 사람이라면 누구에게도 실천의 장을 개방할
것이며 동시에 실천의 막중한 책임을 부과할 것이다. 우리는 구체적 삶을 살찌
우려는 미래지향적 시각에서 잘못된 교육을 비판할 것이다. 철저히 비판할 것이
다. 그리고 우리 스스로가 정책가가 될 것이다. 우리는 작지만 내일을 여는 인간
교육의 정부를 우리 삶 속에 키울 것이다.
이제 위기는 가일층 더해지고 과제는 그만큼 급박하게 다가오고 있다. 세계는
교육개혁 전쟁으로 치닫고 있으며, 사회는 교육개혁을 강력하게 요구하고 있다.
그 동안 아이들이 흘린 수 많은 눈물의 강, 잠재력을 키우지 못한 사회인들이
겪는 좌절의 늪, 가정이 겪는 상처의 고름들이 원망 반 희망 반의 눈빛으로 우
리를 응시한다. 우리의 실천을 요구한다. 교육정책을 욕하는 것으로 자족할 것인
가. 아니면 손발을 털고 일어날 것인가.
이제 당신이 대답할 차례다. 우리 모두가 대답해야 할 때다.
1993. 11.13
창립 후 첫 번째 행사는 동아일보사와 공동 주최로 프레스센터에서 가졌던 교
육 개혁 세미나였으며 주제는 `이제는 우리 아이들을 입시지옥에서 풀어 주자`
였다. 입시에 시달리는 고3 여학생, 고3 담임선생님, 그리고 학부형이 나와서 기
막힌 실상을 증언했고 장내는 눈물 바다로 변했다. 모두 같이 느낀 점은 이제야
말로 우리 아이들을 지옥에서 건져내야겠다는 생각이었다.
정부는 우리가 주장하는 것들 중에 상당 부분을 교육개혁안에 포함해서 발표
했다. 교육개혁은 그러나 온전치 못하기 때문에 개혁 작업은 계속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무엇보다도 학교교육이 충실해야되겠고 망국적인 과외가 사라져 사교육비가
없어져야 하겠다. 더 많은 노력이 필요하다. 우리 아이들을 살리기 위해서 개혁
작업은 계속되어야 할 것이다.
토론 없는 시대에 토론자가 되어
시애틀의 잠 못 이룬 밤
1989년 9월에 여름 휴가를 시애틀로 갔다. 15년 전에 유학하던 곳이라 이러저
러한 사연들이 많이 남아 있는 곳이다. 교선 형님댁에 가서 며칠 쉬면서 멍청하
게 시간을 보낼 필요가 있다고 주장하는 아내의 강요에 못 이겨 끌려가다시피
떠난 여름휴가 여행이었다.
미국 생활 20여 년에 아이들 없이 단 둘이서만 휴가를 떠난다는 것을 생각도
하지 못하던 우리가 사무실을 비우고 아이들도 떨어뜨려 놓고 용단을 내린 것은
그만큼 휴식이 절실해서였을 것이다. 변호사 사무실을 차려 놓고 몇 년간 정신
없이 뛰다 보니 정말로 피곤에 지칠 지경이었다. 아내는 내가 워커홀릭(일 중독
증)이라고 걱정하면서, 이는 알코홀릭(알코올 중독증)보다 더 무서운 병이라고,
좀 쉬면서 일을 하라고 충고한 적이 있었다. 할 일은 아직도 쌓여 있고 읽을 거
리도 쌓여 있으나 이번 여름에는 내딴에 큰 맘 먹고 떠난 여행길이었다.
인쇄소 일로 바쁜 교선 형님은 요즈음 재미있게 보았다는 비디오테이프를 몇
개 내주며 심심할 테니 테이프나 보며 지내라며 일터로 나갔다.
이 아름다운 시애틀에 와서 친형제 같은 분들과 반갑게 만나 중국집에 가서
맛있게 먹은 자장면이 그만 화근이 되었는지 아내는 설사를 하게 되었다. 설사
후에 기진맥진한 아내는 낮잠만 자는 것이다. 미국에서 제일 살기 좋은 도시로
몇 번씩 뽑히기도 했던, 전후좌우 어디를 돌아보아도 촉촉하고 파란 산과 바다
가 함께 보이는 그림 같은 항구도시에 와서 자연을 즐기기는커년 낮잠만 자는
아내 옆에서 나는 형님이 빌려 온 비디오 테이프를 티브이에 꽂았다.
서울의 MBC-TV에서 제작된 테이프인데 제목이 `시사토론`이었다. 생전 처음
보고 듣는 프로다. 사회자는 나의 고교 후배인 박경재 변호사이며 같이 대담을
나누는 사람은 놀랍게도 박정희 대통령의 맏딸인 박근혜 양이었다. 신기한 일이
었다. 박 변호사는 너무하다고 느낄 정도로 집요하게 박정희 대통령 생존시의
에피소드를 캐묻는다. 어떤 때는 야비하다고 느낄 정도로 이미 돌아가신 분의
사생활에 대해서 집중 추궁을 한다. 박근혜 양의 정확하고 낭랑한 음성과 대답
하는 자세가 인상적이었다.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똑똑해 보였다.
한 시간 동안 재미있게 프로를 진행하는 박 변호사가 너무 멋있게 보였다. 그
러면서 그가 부러웠다, “어떻게 저런 멋있는 프로그램을 맡게 되었을까?” 하
는 생각을 하면서 끝까지 열심히 비디오를 시청했다. 교선 형님 내외와 같이 늦
게까지 이 시사토론에 관해서 얘기를 나누었다. 박 변호사가 너무 지나치다는
것이 형님의 생각이었고 아내와 희경 언니는 하나도 지나치지 않았다는 반응이
었다. 나는 미국에서 인터뷰의 여왕인 바바라 월터스를 생각했고, 래리 킴을 회
상했다. 인터뷰를 잘 유도해서 시청자들이 알고 싶어하는 검은 것, 숨겨진 것들
을 찾아 끄집어 내는 것은 기술인 것 같고 훈련이 필요하겠다고 생각했다.
어쨌든 그 날은 밤잠을 설쳤다. 우리나라에 드디어 저런 방송을 통해서 언로
가 터졌다 하는 생각을 하니 여간 흥분스럽지 않았다. 6.29선언을 거쳐 새정부가
들어서면서 민주화가 이루어지고 있는 것같이 느껴졌다.
외국 생활이 벌써 몇 년째인가? 20여 년이라면 강산이 두 번쯤 변한 세월 아
닌가? 처음 유학올 때에 학위만 받고 바로 돌아가 나라 건설에 이바지하자는 생
각이 이렇게 오랫동안 귀국을 못하게 된 것은 70년 초의 유신헌법과 비민주적이
고 비인도적인 군사 정부 아래서 도저히 살아갈 수가 없다고 생각되었기 때문이
다. 이제 우리 사회가 많이 달라졌구나 하는 생각을 갖게 된 것은 이 시애틀 휴
가 때 비롯되었다. 비디오 테이프 하나만 보고 우리 사회 전체 분위기를 쉽게
해석한다는 것은 다소 무리가 있겠으나 어쨌든 박근혜 양과의 대화를 들으면서
저 정도로 과거 정권과 지도자를 비판하고 또 저만큼 지도자의 가족이 변호를
하는 토론이 존재한다는 그 자체가 벌써 민주사회로의 문이 열리는 것이라는 생
각이 들어 가슴이 뛰며 잠을 설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웃기는 일은, “내가 귀국해서 저런 토론 프로그램에 사회를 하면 꽤
잘 할텐데.”하는 생각이 갑자기 들었다는 것이다. 엉뚱한 생각이 아닐 수 없
다.
무슨 자격으로 외국에서 20년 떨어져 산 사람이 첨예하게 대립되는 쟁점 사안
을 뜨겁게 토론하는 TV프로의 사회자가 된단 말인가? 터무니없는 꿈같은 생각
일 수밖에 없다. 아내에게 내 소망을 얘기해 봤다. 놀라운 것은 그의 반응이었
다. “당신이 하면 잘하지 뭐. 그런데 줄이 닿아야지. 누가 시켜 줘야지 될 텐
데...” 하면서 다분히 긍정적으로 대응하는 척하더니, “어서 가서 변호사 사무
실에 밀린 일이나 합시다. 때가 되면 무엇은 못하겠소.”하며 냉수 먹고 속차리
라는 듯이 타이른다.
나는 계속 박 변호사와 박근혜 양의 대담 장면을 머리에 떠올리며 혼자서 평
가까지 해 봤다. “초대 손님이 저렇게 완강히 부인할 때 사회자가 어디까지 추
궁해 들어가야 할까? 저 정도에서 분위기를 바꿔야 하는 것이 아닐까? 너무 지
나치게 지엽적인 작은 문제에 시간을 많이 쓰는 것은 아닌지?” 하는 생각들을
하면서 꼬박 밤을 세웠다.
사실 내가 방송에 아주 백면서생은 아니었다. 60년대 초 텔레비전이 처음 우
리 사회에 선을 보일 무렵 나는 KBS의 특수 프로그램의 사회자로 꽤 인기를 끈
적도 있었다. 색다른 외국인들이 우리나라를 찾을 때 초대 손님으로 모시고 대
담하는 프로를 진행했었다. 예를 들면 , 스코틀랜드의 고적대가 왔을 때 대장과
대원 몇 사람과 대담, 그리고 세계에서 키가 제일 큰 사람, 호주의 여자 레슬링
선수, 네덜란드의 유명한 마술사, 그리고 몇 나라의 수상과 왕실 가족들 등을 스
튜디오에 초청해서 대담을 했다. 나는 영어로 묻고 그들의 대답을 한국어로 통
역해서 소개하는 식으로 대담을 진행했다. 나의 정확한 직책은 KBS가 남산에
있을 때 객원 통역 사회자였다.
경기고등학교와 기독학생회 선배이신 이상설 선배가 제작담당 계장 시절의 얘
기다. 그 때 제법 인기도 있어서 방송국의 특채 의혹도 있었다. 그 후에 미국에
서 법과 대학원에 다닐 때 매주 교포들을 위해서 한국어 방송을 담당했던 경험
이 있다. 가주주립대 세크라멘토 캠퍼스의 방송 시설을 이용해 그 대학의 교육
과의 김은철 교수가 방송국장이고 주 정부 교통부 소속 백성직 씨가 기술 담당
그리고 나는 아나운서였다. 5천 명쯤 되는 교포들을 위해 매주 한시간 방송을
하는데 특히 노인들은 손꼽아 이 시간을 기다리면서 시간을 늘려 달라고 야단들
을 하던 기억이 난다. 며칠 쉬고 로스엔젤레스로 귀가하면서도 `이제 과연 귀국
할 때가 되었는가? 그렇다면, 귀국해서 무엇을 할 것인가? 그렇다. 가자, 가서
무엇이든지 해 보자. 아니, 아이들이 어리지 않은가? 막내가 과연 한국 생활에
적응할 수 있을까?` 이런 생각들로 머리가 꽉 차 있었다.
방송 토론을 잘하려면
KBS-TV의 <심야토론, 전화를 받습니다>를 1년 반이나 진행했다. 그 동안
수 많은 찬사와 비판을 동시에 받으며 10여 년을 계속해 온 이 프로는 아직도
시청자들로 하여금 주말 밤을 텔레비전 수상기 앞에 귀를 열고 앉아 있게 한다.
초기에 비해 요즈음은 다소 시청자들의 관심에서 멀어진 감이 없지 않지만, 아
직도 많은 사람들의 흥미와 관심의 대상이 되고 있다는 것이 사실이다. 처음 시
작할 때 시청자들의 참여라는 형식상의 특성 때문에 많은 기대를 모았었다. 시
청자들에게 스튜디오와 연결된 전화를 통해 즉석에서 참여할 수 있는 통로를 열
어 둔 점이 이 프로의 가장 큰 특징이라 할 수 잇다. 뿐만 아니라 정권의 시녀
라는 비판을 받아 온 방송에서 예전과 달리 진보 성향의 토론자들도 참석하며
그들의 주장과 신랄한 논쟁을 거르지 않고 들려 줌으로써, 미지근한 덕담이나
나누고 헤어지던 과거의 토론 프로와 달리 진지한 시청자들로부터 긍적적인 평
가를 받은 것도 사실이다.
토요일이라 비교적 여유있는 시간대에 자리잡고 있고, 생방송으로 진행된다는
사실이 내게는 큰 매력으로 다가와서 기회가 오면 진행을 맡아 보았으면 하고
생각하던 것이 실제 기회로 다가오게 되었던 것이다. MBC 시사토론 때의 인상
이 담당자들로 하여금 나를 초빙하게 한 것 같다.
나는 그 동안 내가 직접 방송을 시청하면서 느낀 점과 친구들의 견해를 종합
해서 이 프로의 문제점이 무엇인가를 정리하기 시작했다. 첫째는 토론자 구성이
균형이 맞지 않은 것이었고, 둘째는 주제 선정이 마땅치 않았던 것 같았다. 또
다른 불만은 `전화를 받습니다.`가 아니라 `전화를 받지 않습니다`라는 별명을
얻을 정도록 전화 연결이 되지 않는 것이었다. 이와 같은 문제는 프로그램의 운
영의 묘를 살리면 고쳐질 수 있다고 생각해서 담당 주간과 차장과 담당 PD들
과 사전 준비를 철저히 하라는 데에 동의를 했다. 열심히 같이 노력을 했다. 사
회의 공기로서 방송의 역할을 제대로 수행하고자 한다면 정치권의 동향에 따라
변신을 할 것이 아니라 이 풍토가 가지는 장점을 살릴 수 있도록 운영의 문제를
고민하면서 공정하게 진행해야겠다는 결의를 하면서 준비하기 시작했다. 2주간
에 제일 논란이 되는 사안을 골라 그 문제에 전문성을 가진 인사와 국민의 대표
인 의원들을 섭외하기 시작했다. 쉬운일이 아니다. 꼭 나와서 토론에 참여했으면
참 좋겠다고 생각되는 인사들은 이러저러한 이유로 출연을 사양한다. 또 어려운
점은 섭외를 할 때 꼭 묻는 내용이 누구누구가 나오느냐는 질문이다. 아무개가
나오면 나가기 곤란하다는 경우가 가끔 있다. 그래서 어떤 논점이 있을 때 찬반
으로 토론할 수 있는 배경과 연구 업적이 있는 인사를 섭외하기가 쉽지 않기 때
문에 어떤 경우는 토론 당일인 토요일 아침까지 토론자가 결정되지 않았던 때도
있었다. 참 난감한 일이다. 그래서 부랴부랴 여기저기 전화해서 토론 제목에 관
한 일로 전문가가 아닌 이중 혹은 삼중의 인사가 대타로 나서는 경우가 있다.
결과는 뻔하다. 시청자들의 수준이 매우 높기 때문에 상당한 고정 시청자는 벌
써 금방 짐작을 하고 전화를 건다. 토론자 선정에 신경 써 달라는 부탁이다
. 또 어려운 점은 화요일 아침에 이미 그 주간의 얘깃거리인 주제를 정하고 토
론자를 섭외하며 토론을 준비하고 있는데, 방송국의 고위층의 생각은 다른 주제
가 좋겠다고 해서 주제를 바꾸라는 부탁이 있는 경우다. 어느 경우는 수요일, 목
요일 그리고 목요일 토론 주제가 매일 한 가지씩 바뀌어 하루 만에 토론자를 새
롭게 섭외하는 그야말로 난리를 겪은 경우도 있다. 방송사의 자율적인 판단으로
더 적합한 주제로 바꾸기를 원해 이런 일이 발생하는지, 아니면 시국과 관련해
서 외부의 부탁(알력)을 받아 이런 일이 일어났는지 알 길이 없다. 나는 토론을
진행하면서 이런 이유나 배경을 따지거나 묻지 않고 방송국이 결정하는 대로 묵
묵히, 어려운 일이지만 최선을 다했다.
토론 프로그램은 토론 과정을 통해서 시청자들에게 의견을 형성시키는 기능과
집중된 여론을 형성시키는 기능과 이를 통해서 국민의 합의점을 찾아 냄으로써
사회 통합의 기능을 수행하는 것이라고 정의할 때, 이 프로를 제작하는 제작진
과 진행자는 소명의식을 가지고 준비해야 한다고 생각해 왔다. 나는 이 일을 가
히 성스러운 나의 임무라고 생각해서 늘 손도 깨끗이 씻고 잡념도 버리고 집중
해서 그야말로 기도하는 마음으로 준비에 임했었다.
토론은 정치, 사회적 주제를 주로 다루기 때문에 외압의 위험이 분명 있기 마
련이다. 자칫 잘못하면 시간 때우기 제작이나 무의미한 프로그램으로 전락하기
쉽기 때문에 정신을 똑바로 차리고 제작팀과 처음부터 방송이 나갈 때까지 공동
보도로 협동하지 않으면 자존심이 상하는 일이 생기게 된다는 것을 나는 잘 경
험했다.
나의 진행의 원칙은 출연한 토론자의 배경을 미리 조사하여 가장 편하게 본인
을 잘 발표할 수 있는 분야나 문제를 마음놓고 피력할 수 있도록 분위기를 유도
하는 일과 다른 의견이 첨예하게 대립되어 논전이 선을 넘을 지경에 이를 때 빨
리 평화적 진화 작업을 펼치는 일이다. 진행자는 말을 삼가야 한다는 것이 나의
원칙이다. 말을 많이 끌어내는 일이 임무라고 생각한다. 여러 후배들로부터 토론
사회를 잘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느냐는 질문을 가끔 받는다. 왕도는 없다. 그러
나 내 경우를 본다면, 첫째는 준비다. 주말에 두 시간 토론을 위해 나는 30시간
이상 준비를 했다. 일간신문 전부, 주간지, 월간지에 실린 관련 기사는 다 읽고
감을 잡아야 한다. 둘째, 토론하는 시간까지 모든 사물을 접할 때 사람을 만날
때, 토론 주제와 연관을 지어 살피는 일이다. 순간 순간 진행할 때 사용할 수 있
는 아이디어가 생긴다. 그러면 그것을 수첩에 메모해야 한다. 셋째는 보통 때의
폭넓은 독서다. 그리고 주제에 따른 스크랩을 정리해 두는 일이 필요하다. 예를
들면, 법률, 교육, 정치, 사회... 그 중에서 다시 사법개혁, 과외비 문제, 선거법,
성폭력, 통일 문제 등, 수도 없이 세분될 수 있는 자료들을 모으는 버릇이 필요
하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인내심을 가지고 남의 얘기를 잘 듣는 버릇,
그리고 듣고 자기에게 유익한 교훈을 찾는 태도가 필요하다.
두 방송사와의 기이한 인연
첫 방송의 녹음이 끝났다. 보도제작국의 PD들의 비판이 무섭고 따가울 정도였
다. 너무 무르다는 평도 있었고 토론자들을 이끌고 앞서 나가야 될 텐데 뒤에서
모는 형국이라는 비판도 있었다. 대체로 썩 잘하지는 못했으나 그렇게 잘못한
것도 없는 무덤덤한 보통의 토론이라는 것이 중평이다. 제작국장은 다음 번 토
론을 다시 한번 시험해 봐야 정확히 평가할 수 있다고 덧붙인다.
오늘의 토론은 노태우 대통령이 새해 벽두에 발표한 바 있는 `삼통`(통상, 통
행, 통신)에 근거해서 `남북통일의 지름길`이 제목이었다. 참석자는 민정당의 김
현욱 외통위원장, 통일민주당의 박관용 의원, 평민당의 조순승 의원과 연세대의
이기택 교수였다. 통일 문제에 대해서는 평소에 비교적 공부와 준비가 되어 있
던 관계로 쉽게 사회를 볼 수가 있었다.
다음주 예정인 심야영업 구제 문제는 나를 무척이나 난처하게 만들었다. 나는
심야영업을 하는 곳을 잘 모르고 있었기 때문에 심야 카페, 노래방 그리고 접대
하는 사람들이 있는 음식점 등을 돌아다니며 평소에 모르고 지내던 사실들을 많
이 배우게 되었다.
이런 와중에도 여러 신문기자들이 인터뷰 요청을 해 오고 있었다. 어떻게 토
론 사회자가 되었는지 많은 사람들이 궁금해한다는 것이었다. 그럴 만도 하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미국의 LA에서 법률 사무실을 운영하던 변호사로서 89년
11월 서울을 방문할 기회가 생겨서 비행기에 몸을 싣고 있었다. 기내에서 우연
히 신문을 보다가 MBC-TV 시사토론의 사회자가 그만두었다는 기사를 발견하
게 된다. 서울에서 일을 마친 후 방송위원회에서 사무총장 서리로 있던 김한길
의원에게 전화를 걸어 혹시 시사토론의 사회자가 결정되었냐고 물어 보았다. 그
의 대답인 즉 아직 결정되지 않았다는 내용이다. 그래서 누구에게 이야기를 해
야 좋을지 모르니까 관계자를 소개해 달라고 부탁을 하였다.
아무런 계산이나 훈련된 기술도 없이 그저 하고 싶은 생각 때문에 부탁을 했
던 것이다. 지금 생각해 보면 터무니없는 시도라고 할 수 있겠다. 운이 좋았던지
김한길 의원이 나를 방송국에 소개했고 보도제작국장실에서 부국장과 부장, 차
장들과 같이 두 시간동안 이야기할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되었다. 일종의 인터뷰
인 셈이다. 그들이 내린 잠정적인 결론은 아무래도 위험부담이 크다는 것이었다.
그 이유는 미국에서 너무 오랫동안 살았기 때문에 한국 사회에 대한 감이 부
족할 것이라는 것과 내 음성에 콧소리가 많이 섞여 있어 만족스럽지 못하다는
내용이었다. 나는 별반 들인 노력도 없고 섭섭할 것도 없어서 홀연히 미국으로
돌아가서 열심히 변호사 일을 계속하고 있었다. 며칠 후에 당시 방송위원장이었
던 강원용 목사님께서 전화를 주시며 아직도 방송에 관심이 있느냐고 물으시면
서 그렇다면 즉시 서울에 오라는 말씀이셨다.
나는 방송 실무자들이 나를 택하지 않았다는 말을 하면서 포기했노라고 말씀
을 드렸다. 이 때 우연히 서울에서 재미 한인 인권문제에 관한 세미나에서 논문
을 발표해 달라는 연락이 왔다. 나는 90년 1월 3일, 바쁜 일정에도 불구하고 논
문 발표를 위해 아카데미 하우스에 가게 되었다. 30분 동안 나의 발표를 들었던
방송사 기자들이 나의 발표 내용이 감동적이고 음성과 매너가 매우 좋다고 방송
국 안에서 소문을 냈다는 얘기를 나중에 들은 적이 있다.
그래서였는지는 몰라도 회의 참석중인 내게 MBC에서 연락이 왔다. 시사토론
회의 사회를 시험삼아 한번 해 보지 않겠느냐는 내용이다. 나는 다소 망설이다
가 해 보겠다고 통보하고 첫 번째 시사토론을 1월3일에 하게 되었다. 첫 번째에
이어 두 번째 토론을 끝내며 방송사는 1년 계약을 하자고 제의했다. 그 결과 나
는 3년 반 동안 무려 2백여 회의 시사토론을 진행하는 행운을 잡게 되었다.
매주 화요일 아침, 보도제작국장과 부국장 및 담당 부장이 함께 그 주간에 제
일 문제가 되는 사건을 제목으로 정하고 이 문제에 걸맞는 전문가와 정부 관계
자들을 네 명 내지 다섯 명 섭외를 해야 한다. 나는 관계 기사를 각종 신문에서
찾아 내고 주간과 월간잡지에 관련 기사를 모두 조사하며, 방송국 내에 관계 부
처 출입기자를 만나, 무엇이 논쟁거리인지 토론할 만한 문제점들을 만들어 토론
준비에 만전을 기해야 했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토론 제목에 관련된 기사나 서
적은 모두 섭렵해야 마음이 놓였다. 예를 들어 증시 폭등 문제면 재경원 출입기
자에게, 그리고 교육 문제면 교육부 출입기자에게 정부의 입장과 학부모와 전문
가들의 입장을 종합해 가며 토론거리를 준비했다. 수시로 방송사 내의 해설위원
실을 찾아 해설위원들의 자문도 많이 받았다. 회가 거듭될수록 여러 가지 반응
이 나타나는데, 격려하는 내용이 많아져 용기를 갖게 되었다.
3년 반의 토론 사회를 마치고 학교 일에만 전념하고 있는데 KBS 심야토론, `
생방송 전화를 받습니다`에서 연락이 왔다. 사실은 그때까지 어렸을 때부터 누님
같이 지내 오던 이연숙 선생(현 정무2장관)이 이 프로를 진행하고 있었는데, 여
협 회장으로 가시게 되어 새로운 사람이 필요하니 사회자로 와 달라는 것이었
다. MBC를 끝내고 약 반 년을 쉰 다음에 다시 마이크를 잡고 시청자 앞에 서게
되어 감회가 새로웠다. MBC와 달리 심야토론은 생방송이며 방청객이 공개홀에
나와 앉아 있고 또 시청자들이 방송중에 전화로 토론에 참여하는 내용으로 밤
10시 30분부터 두 시간 내지 세 시간씩 진행하게 된다. 방송을 마치고 집에 돌
아가면 대략 새벽 2시나 3시가 된다. 첫 방송부터 PD의 지시대로 매끈하게 진행
을 했다. 3년 반 동안 쌓아 온 관록이 있어서인지 별로 긴장이 되지 않았다. 많
은 시청자들이 전화와 편지를 보내 평가해 주어 보람도 느끼게 되었고, 시청률
도 내가 맡은 후부터 올라가고 있다는 얘기도 들었다.
토요일 생방송을 위해 목요일에 방송국에 가서 담당 PD들과 의논을 한다. 교
수나 저명인사들 중에 토론에 참여하기 원하는 사람도 있으나 토론 주제에 맞지
않는 경우 초청할 수가 없다. 어떤분들은 토론 주제에 꼭 맞는 인사이기 때문에
부탁을 하지만 거절을 당하는 경우가 많다. 방송국 직원들이 청하다가 잘 안 되
는 경우 내게 부탁해 달라는 요청을 자주 받았다. 꽤 많은 교수들과 학자들이
나를 돕는 의미에서 방송 출연에 응하기도 했다. 방송국 직원들은 나의 폭넓은
교우 관계에 대해서 늘 놀랍다고 말한다.
나는 방송이 참으로 하고 싶었고 그 방송을 5년이나 열심히 했다. 한 번밖에
없는 유일한 생방송 토론을 진행하는 특권을 누렸었다. 행운이었다. 많은 저명인
사들을 만나게 되었고 많은 것을 배웠다. 지금도 방송사 간부를 만나면 어서 정
치를 마치고 방송에 복귀하여 사회자가 돼 달라는 농담반 진담반의 청을 받곤
한다. 그들이 인정해 주는 것이 고맙고 기분이 좋다.
MBC 시사토론을 3년 반이나 진행했다는 것은 기적 같은 일이라고 같이 방송
을 준비했던 PD들이 말해 준다. 방송을 진행하는 동안에도 “젊은 얼굴이 필요
하다.”는 등, “한 사람이 너무 오래 하면 참신성이 떨어진다.”는 등 별별 힘
빠지는 말들을 많이 들었다.
특별한 결격사유가 없고 맡아서 진행하는 사람이 그만둔다는 의사표시도 하지
않은 상태에서 이러쿵저러쿵 말들을 하는 것은 열심히 해 보고자 하는 사람의
사기를 떨어뜨리고 허탈하게 하는 일이다.
방송국의 속성이 원래 그렇다는 사실을 시간이 가면서 이해하게 되었다. 눈치
없는 사람이라는 소리 듣기 전, 적당한 때에 방송을 그만 두었다.
그러나 그것이 나만이 적당한 때라고 생각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모르지만...
시사토론의 세계화
MBC 시사토론을 진행하는 동안 외국에서 큰 일이 있을 때 현지에 찾아가서
몇 차례 토론을 진행하기로 했다. 러시아와 정식국교를 재개하는 조인식이 있는
날 모스크바에 가서 토론을 했다. 소련인 한국 경제 전문가들과 외무부 직원들
과 교포 학자들을 초청해서 토론을 했다. 토론을 시작할 때 몇 마디 하는 개회
멘트를 크레믈린 궁전 앞에 서서 내 딴에는 멋을 부리며 하던 기억이 생생하다.
“한국과 러시아가 오랫동안 적대 관계에 있었으며 한반도의 분단과 남북간의
갈등에 따라 먼 나라였으나 오늘 역사적인 우호조약이 체결됨으로 양국은 새 시
대를 향해 과거의 앙금을 풀고 미래지향적인 우호 관계를 맺어 여러 가지 교환
개척과 교역이 필요하다고 봅니다. 오늘은 이곳 모스크바 현지에서 러시아의 외
교관과 교수, 그리고 한국계 전문가들을 모시고 앞으로의 양국 관계, 구체적인
교역 증대 방안 등을 심도 있게 강구해 보겠습니다.”이런 멘트였다.
또 이번 여행에 노태우 대통령을 수행했던 분들과 외무부장관과 상공부장관을
초청해 모스크바 현장에서 토론을 했다. 생동감 있는 토론으로 의미 있는 계획
이었다.
노태우 대통령과 고르바초프 대통령이 샌프란시스코에서 회합을 하고 돌아오
는 길에 하와이를 거쳤다. 하와이 호놀룰루의 힐튼 호텔 뒤뜰에서 바다를 바라
보며 토론을 벌였다. 공로명 외무부장관과 청와대 경제특보 김종인 박사와 하와
이 대학의 미국인 정치학 교수, 서대숙 박사등이 참석하여 러시아와 한국 관계
의 전망을 조명하면서 주위 일본, 중국, 미국과 양국과의 관계가 어떻게 전개될
것인가 등을 토론했다. 햇볕이 내려 쪼이는 바닷가에서 땀을 흘리며 토론하기가
무척 더웠다. 나는 토론중에 시청자들에게 양해를 구하고 자연스럽게 양복 윗저
고리를 벗었다. 다른 토론자들도 따라 벗었다. 파란 하와이 하늘밑에 야자나무를
배경으로 야외 토론을 계획하는 사람과 진행하는 사람은 힘이 들었으나 시청하
기는 시원하고 신선했기에 많은 시청자들로부터 좋은 반응을 얻어 냈다. 이 날
토론에 참여해서 뜨거운 태양 아래 두 시간 반이나 견뎌야 했던 공로명 외무장
관은 머리에 화상을 입게 되었다. 크게 고통을 당하셨던 것 같다. 후에 나를 보
고 공 장관께서는, “MBC를 상대로 화상 치료비, 정신적 고통 치료비, 일 못해
손해 본 비용 등을 들어 손해배상청구 소송을 제기하고 싶은데, 유 변호사가 맡
을래 아니면, 다른 변호사를 소개해 줄래.” 하고 농담을 하셨다. 나는, “저는
안 되고요. 어떤 의미에서 저는 공범자니까요. 공성도 변호사가 맡으면 되겠네
요.”라고 말하고 같이 웃었다. 공성도 변호사는 공 장관의 아들로 법대 2학년
여름에 내가 운영하는 변호사 사무실에서 훈련을 받은 적이 있는 후배 변호사이
다.
남북한이 유엔에 가입하는 92년 9월, 워싱턴 DC와 뉴욕의 유엔본부 앞에서 토
론을 했다. 워싱턴에서는 이항열 교수(재미 정치학자회의 회장), 안재훈 기자(워
싱턴 포스트지)가 토론에 참여했고 서울에서 간 상공장관과 현홍주 대사가 참석
했다. 남북한이 같이 유엔에 가입하던 날 유엔본부 앞뜰에 의자를 놓고 야외토
론을 시도했다. 만국기가 휘날리는 국기게양대를 배경으로 해서 박정수 의원, 박
찬종 의원과 이상옥 외무장관, 노창희 유엔대사가 참석했다. 현장 감각이 생생한
토론이었다. 각국의 취재진들과 관광객들이 몰려들어 구경을 했다. 유엔이 생긴
후 본관 건물 앞뜰에서 중계차를 세우고 무대를 가설해서 토론 프로그램을 진행
해 보기는 처음이었을 것이다.
이 때 한국에는 많이 알려지지 않았지만 미국 정치학계에서는 이름을 날리고
있는 이홍영 박사를 캘리포니아 주의 버클리 대학에서 뉴욕까지 모셔 와서 이상
옥 외무장관과 자리를 같이 하게 하여 나와 셋이서 `한국의 유엔 가입이 주변
국가에 미치는 영향`을 주제로 토론을 했다. 이 토론도 역시 유엔본부 건물이 보
이는 옆뜰에서 진행됐다. 가끔씩 지나가는 자동차들의 경적소리도 들어가 있고,
현장감 있게 토론을 진행했다. 이홍영 박사는 예일대에서 정치학을 가르치다가
버클리대의 동아시아 연구소에 유명한 스칼라피노 교수 후임으로 선발된 연세대
정외과 출신 교수다. 중국정치를 오래 연구했고 <문화혁명 이후의 중국>이라는
그의 저서는 미국 대학들이 교과서로 채택하고 있는 실력파 교수이다. 토론을
진행하면서 가끔씩 실력 있는 교수나 전문가를 내 손으로 발굴해서 등장시키는
일이 무척 보람이 있었다. 나의 한 해 후배인 이 교수의 경우도 그런 경우였다.
93년 4월 29일, 로스앤젤레스의 흑인 폭동은 전세계를 놀라게 했다. 우리 동포
들의 사업체 2천여개가 불에 타고 부서지는 엄청난 사건이었다. 미국 사회의 흑
-백 문제가 한-흑간의 갈등처럼 비쳐진 불행한 사태였다. 맨주먹으로 이민가서
먹을 것 못 먹고 입을 것 못 입으며 열심히 모아 겨우 장만한 점포가 불에 타고
맨손이 된 동포들의 절규는 애절하기만 하였다. 부시 대통령이 한인타운을 방문
하고, 상처를 싸매 주려고 미국 정부에서도 손을 뻗치고 한국 정부도 적십자사
를 통해서 후원금도 보냈다. 정계 인사들도 위로차 로스앤젤레스를 방문했으나
뒷맛은 그리 깨끗하지 못했다. 무슨 동기로 왔느냐는 현지 동포들의 볼멘 소리
나, 실질적으로 눈에 띄는 도움 외에는 별로 느껴지지 않은 상태이기 때문이었
을 것으로 이해가 간다.
문화방송 시사토론팀도 이 중요한 역사의 현장에 폭동의 참 원인, 한-흑간의
갈등 양상의 유래와 현황, 미국에서의 인종간의 바람직한 공존 방향, 한-흑 갈등
의 해소 방안, 동포 사회와 본국 정부와의 관계들을 토론하기 위해 로스앤젤레
스를 찾았다. 한국계 사회학 교수 유의영 박사는 나와 동갑으로 오랜 친구이자
바쁜 그의 일정을 잡았고 흑인 목사로서 LA 근처에서 복합민족 상담 전문가, 그
리고 백인 장로교 목사, 한국계 2세 변호사 오 엔젤라(나의 법대 후배), LA경찰
국의 부국장(유명한 앵커 패트리샤 도요타의 남편)등을 2,3일 안에 섭외하여 출
연시켰다.
같이 갔던 MBC의 기자와 프로듀서들이 입을 딱 벌렸다. 미국에서 단시일 내
에 스튜디오도 빌리고 바쁜 사람들 섭외해서 출연시키고, 한국 언론들 다 접촉
하고 한인 사회 지도자들과 접촉하여 협력을 얻고 하는 문제들을 혼자 다 해내
는 것을 보았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이제서야 내가 미국 변호사 출신이고 이 지
역에서 수십 년 살아서 교포 사회 대소사에 늘 중심이 되어 살아 왔던, 우리 동
포들이 다 인정하는 동네 변호사였다는 것을 알게 되었던 것이다.
방송은 성공이었다. 영어와 한국어로 이중 언어 사회를 했으며 기술적으로 잘
전달이 되었다. 이렇게 재미를 본 MBC는 한 달에 한 번쯤 외국에 나가서 토론
을 해 봤으면 좋겠다는 의견이 나돌기 시작했다. 그러나 문제는 경비였다. 한 번
나가서 일주일쯤 준비하고 진행하고 돌아오려면 미화 약 3만 달러는 소요된다는
계산이 나왔기 때문이었다.
하고 싶었지만 경비 때문에 주춤거리고 있을 때, 고성관 보도제작국장이 나에
게 간절히 부탁을 하는 것이다. 대우의 김 회장에게 스폰서를 부탁해 달라는 것
이다. 어차피 홍보가 필요한 회사이니 우리 토론 시작과 끝에 대우 이름이 나가
도록 하는 조건으로 교섭을 해 달라는 것이었다. 김우중 회장과는 중,고등학교,
대학을 10년 같이 다닌 동기 동창이지만 아직 한 번도 무슨 부탁을 해 본 일이
없는 사이라 조금 망설였으나 이는 공익을 위하고 대우를 위한 것이니 부끄러울
것 없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대우 회장실에 연락을 했다.
빡빡한 스케줄 때문에 쉽게 시간을 내기 어려운 가운데 강릉에서 열리는 전국
여자 축구대회에 참석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강릉 문화방송의 이영익 사장
이 주관하는 이 행사에 축구협회 회장인 김 회장을 모시는 데 성공한 이사장은
내게도 정중한 초청을 해 주었다. 강릉 이영익 사장실에서 차를 마시며 나는 시
사토론의 외국 진행을 설명했고, 김 회장은 좋은 아이디어라고 회장실 담당자에
게 얘기해 놓겠으니 MBC 담당자와 만나서 해결하도록 하라면서, “토론 사회를
너무 잘해서 여자들에게 인기가 자꾸 올라가서 야단이구먼, 너 이러다가 정치하
는 것 아니야?” 하며 나를 놀리기까지 하였다.
대우와 MBC사이의 해외 토론 스폰서 계약은 정식 문서로 체결되어 다음 달
부터 시행되었다. 1년간의 계약이라, 열두 번쯤 해외에 나가서 했을 터인데, 4.29
LA폭동 때 내가 한 번 나간 것을 제외하고 열한 번 모두 내가 아닌 엉뚱한 외
부 인사를 사회로 시키며 진행되었다. 어떤 의미에서 약속이나 신의 위반 같은
것이지만 나는 문제를 제기하지 않았다. 일주일에 두 번씩 드나드는 방송사지만
나는 내 직장같이 늘 생각해서 조금도 흠집나는 것을 원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럭저럭 지내다 나는 방송을 그만두고 학교의 학장직에 전념하게 되었다. 어
느 날 방송국에서 연락이 왔다. 대우와의 1년 계약이 끝나게 되었으니 1년만 더
연장하도록 대우측에 부탁을 해 달라는 내용이다. 나는 순간적으로 당황했으나
곧 노력해 보겠다고 얘기했다. 나는 끝까지 어른같이 행세하고 싶어서였다. 요즘
세상에 제소리도 내지 못하는 약한 사람같이 보였기 때문에 후배들도 마음대로
흔들겠지만, 어느 때가 되면 나를 이해하겠지 하는 심정으로 대우에 연락을 했
다. 대답은 뻔했다. 내가 진행하는 것을 기대했으나 전혀 엉뚱한 사람만 사회자
로 나타나고 나는 한 번도 비치지 않았으니 그 쪽도 이상했었을 것이다. 나는
충실하게 MBC측에 전했다. 대우가 계약 기간을 연장하고 싶어하지 않는다고.
나는 지금도 그 연유는 알 길이 없다. 왜 사회자로 나를 택하지 않고 엉뚱한
사람들에게 사회를 맡겼었는지. 혹시 내 영어가 부족해서일까? 미국에서 살아
본 기간이 짧아서일까? 모를 일이었다. 지난 일이긴 하지만, 보람있고 즐거웠던
토론 진행 3년 반의 아름다웠던 추억 속에 한 점의 오점으로 남는 기억이다.
왜 토론문화가 없는가?
5년 이상 시사토론을 진행하면서 왜 좀더 멋진 토론이 불가능한가 하는 생각
을 자주 해 보았다. 사람들은, “우리 사회에서 토론이 잘 되지 않는다.” 혹은
“토론 문화가 없다.” 혹은 “토론 문화가 정착되지 않았다.”는 말을 자주 한
다. 왜 그럴까? 몇 년간 토론을 진행하면서 느낀 나의 소감은 다음과 같다.
첫째, 우리나라 사람들은 동양문화의 영향으로 아직도 수직적 인간관계와 수
직적 가치 체계를 존중하기 때문에 지위나 신분이 같지 않으면 평등한 관계에서
토론이 불가능하다. 어렸을 때부터 윗사람을 존중하고 윗사람 말씀을 예의 있게
정중히 경청하고 순종해야 된다고 배워 온 우리나라 사람들은, 윗사람과 대화할
때는 상대방의 얼굴이나 눈을 쳐다보지 못하고 머리를 숙이고 말을 해야 겸손하
고 예의바른 사람이라고 훈련받아 왔기 때문에 정면으로 서로 얼굴을 바라보면
서 갑론을박 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인 양 되어 버렸다.
특히 스승이나 선배와 토론을 같이 하게 될 경우 상대방의 논의의 허점이나
약점을 발견하고도 끝까지 추궁하지 못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그래서 가끔 TV
토론에서도 논리의 대결보다는 질의응답식의 토론으로 진행되는 경우를 보게 되
는데, 이는 토론의 방법이나 내용을 몰라서가 아니라 윗사람에 대한 의식적인
예의때문인 것이다. 체면과 위신을 중시하는 우리 사회에서 후배나 아랫사람이
여러 사람 앞에서 선배를 곤경에 빠뜨리는 것과 입장을 곤란하게 만든다는 것은
사회적으로 용납이 어려운 분위기가 지금까지의 우리 사회의 단면이었던 것이
다.
둘째로 우리는 토론에 필요한, 제대로 말하고 잘 듣는 훈련이 부족하다. 표현
능력이 대체로 부족하다. 국어교육이라면 읽고 쓰고 말하는 능력을 갖추도록 골
고루 가르쳐야 하는데, 우리의 경우 말하기 훈련은 초등학교 교육과정에 들어
있지 않다. 말하는 능력은 훈련을 통하여 개발되고 배양되는 것인데 우리나라에
서는 초등학교 때 다소 발달하고 자유스러운 토론의 분위기가 잠깐 생기다가 중
학교에 들어가면서 완전히 없어져 버리게 된다.
대학 입시 준비 장소인 고등학교 때는 더 말할 나위가 없다. 오래 전부터 중.
고등학교에 웅변반이나 변론반이 있어 말하는 훈련을 시키는 경우가 꽤 있었다.
그러나 이 웅변이란 것은 일방적으로 원고를 써서 외워서 웅변대회 날 줄줄 외
우는 형식의 대회를 위한 준비가 고작이다. 같이 토론하는 쌍방 통행의 대화가
아니라 일방통행의 연설인 것이 미국이나 서양 다른 나라의 토론반의 활동과는
차이가 난다. 이같이 토론 훈련이 부족한 관계로 정정당당하게 자기의 의사를
자유롭게 개진하지도 못하며 남의 주장을 제대로 수용도 못하는 것이다.
셋째, 오랫동안 지녀 온 단순 사고의 체질과 의식은 다원적 대화의 정신을 키
우지 못했으며 여러 번 나라의 어려움을 겪어 오면서 흑-백 논리가 사회를 지배
하게 되어 중간에 위치한 다른 여러 의견이나 주장은 무시되어 왔던 것이다. 사
실 참다운 대화는 남의 존재를 그 자리에 그대로 있도록 용인하는 데에서 출발
한다. 대화란 서로 똑같지 않은 두 입장의 존재를 전제로 하기 때문이다. 특히
토론은 상대방의 존재를 인정하는 다원적 세계의 존재 방식이다. 만일 한편에서
다른 편의 무조건의 동화나 추종을 요구한다면 그것은 대화가 될 수 없으며, 다
른 것의 존재 자체를 부인하는 흑-백 논리는 극한 대결만 낳을 뿐, 창조적인 대
화나 토론은 불가능하게 되는 것인데, 흑과 백이 아닌 회색이나 흑-백 사이에
또 다른 성향의 색깔도 인정해야 토론이 가능해진다.
넷째, 남의 말을 듣는 훈련이 부족하다는 점이다. 남의 생각을 받아들이는 훈
련도 부족하고 남의 의견을 존중하는 자세도 확실치 않다. 자기 주장과 반대되
는 의견을 듣고도 인내하면서 자기논리를 펼 줄 아는 기술이 부족하다. 따라서
남이 토론할 때 잘 듣고 응답할 생각은 안 하고 자기가 준비해 온 내용을 잃지
않으려고 상대방의 얘기는 아예 듣지 않는 경우가 많이 있다. 이는 토론자의 자
세가 될 수 없다. 토론이란 결국 어떤 문제를 놓고 서로가 찬성, 반대 의견을 제
시하면서 결론에 도달하는 기승전결의 과정이다.
서로 입장과 의견을 달리하는 사람들이 설득과 납득의 과정을 거쳐 공통적 결
론에 도달하는 논리와 이성의 작품이라는 사실을 이해한다면 바람직한 토론이
어떤 것이어야 할지 쉽게 알 수 있을 것이다.
남의 말을 존중할 줄 모르는 사람들은 결국 남의 인격을 존중할 줄 모르는 사
람들로서 왕왕 토론장을 투우장으로 착각하는 경우가 있다. 외부의 영향 때문에
승패를 가리기 원하는 분위기로 전락될 경우 토론의 장이 싸움판으로 전락되는
사실을 가끔 보게 된다. 유교 사상의 깊은 영향으로 우리는 복종에 익숙해 있으
며 `순종의 미덕`이라는 가르침에 젖어 왔다. 토론한다고 하면 점잖지 못하게 혹
은 쩨쩨하게 따지는 것으로 생각하는 사람들도 많다. 그래서 어떤 쟁점 사항에
관하여 논평을 부탁하면 으레 싸움을 전제로 하며 “침묵은 미덕.”이다. “침묵
은 금이고 웅변은 은이다.”하며 입을 다물고 과묵하게 지내는 것이 신사라고
생각하는 풍토에 젖어 왔기 때문에 토론 문화는 옳게 꽃피울 수 없었다고 생각
된다.
토론은 승부를 내는 운동경기가 아니라 여러 사람의 의견을 통해 있는 사실의
확인이나 새로운 것을 찾아내는 작업이다. 다수의 의견을 검증하는 것과 소수의
주장이 과연 가치 있는 것인가 찾아 보는 일도 토론의 일부에 속한다고 볼 수
있다.
민주주의의 기본이 대화이며 설득과 타협을 통해 여러 다른 의견들이 수렴되
는 사회로의 모순과 갈등의 조화를 꾀하며 공존의 가능성을 도모하기 위해 토론
문화가 활성화되어 자유롭게 국민들이 의사를 개진하고 개인의 주장을 펴 나가
야 하겠다는 주장이 일고 있다.
탄탄한 민주 사회 건설을 위해서도 토론이 활기를 띠어야 하며 주권자인 국민
의 언로가 터져야 한다고 믿고 있다.
현대사회의 특징이 가치의 다양화, 욕구의 다양화로 표현될 수 있다면 권위주
의적인 토론 문화는 설자리가 없게 되며 다가오는 미래에 적절히 적용할 수 있
는 토론 문화의 정착을 위해 우리들의 유연성과 보다 튼튼한 논리적 사고 기반
을 닦아야 하겠다.
대통령에 출마할 뻔했던 이야기
국군 조직법 개편을 위한 방송을 준비중이었다. 국방부 대변인실에서 홍보 자
료도 보내 오고 당시 국방부장관인 이상훈 장군이 만나자는 전갈도 해 왔다. 국
방부에서는 이 중요한 사안을 전국민 앞에서 토론하는데, 주무 부서인 장관이
직접 나와서 토론하는 일은 좋은 일이겠으나 장관이 달변도 아니고 야당의 거물
정치인이 나와서 반대 이론을 펴는데 과연 장관이 설득력 있게 토론을 할 수 있
겠느냐가 국방부 당국의 고민거리였다. 나를 만난 이 장관은 어떻게 하였으면
좋겠느냐고 묻는 것이었다. 국방부 간부들의 입장은 나가서 본전 찾기 어려운
방송에 뭐하러 나가겠는가, 대변인이나 담당 본부장이 나가는 것이 훨씬 효과적
이라 생각해서 장관 출연에 부정적인 입장이었다. 나는 정반대로 권고했다. “이
렇게 중요한 사안일수록 책임을 맡은 장관이 나와서 진솔하게 국민들을 설득하
는 것이 좋습니다. 이 선배님께서 어눌하다, 말주변이 없다 하는 얘기는 들었습
니다만 이 토론은 논리 대결이 아닙니다. 진실하고 겸손하게 정부의 욕심 없음
을 보여 주면 여론의 뒷받침을 받게 되고 입법이 쉬워집니다. 나오십시오!”
“그러면 유 변호사가 책임질 수 있지?”
“네? 뭘 책임지라는 말씀입니까? 법안 통과 말입니까, 선배님 자리 보존 말
입니까?”
“둘 다 책임지라고.”
“알겠습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이상훈 장관의 출연이 결정되었고 야당에서는 정대철 의원과 장군 출신의 정
모 의원이 출연하게 되었다.
열띤 토론이 전개되었다. 국군 조직의 문제점, 미군과 국군과의 전쟁시와 평화
시의 작전권 문제, 합참과 삼군사령관실과의 문제 등 새로운 군대 내외의 문제
가 상당히 전문적으로 토론되었다. 토론 말미에 군인의 자세와 마음가짐 문제를
논의하던 어떤 토론자는 최영 장군을 본보기로 거론하기도 하였다. 원래 이 토
론의 성격이 그렇듯이 합의 도출된 결론을 가지고 어떤 결정을 내리지 못했다.
그러나 여당과 야당이 충분히 자당의 입장을 밝히는 장이 되었고 국민들의 지지
를 호소하는 기회는 되었다고 생각한다. 나는 토론을 마치면서 다음과 같이 토
론 종결 멘트를 하였다.
“전국에 계신 시청자 여러분, 어떠셨습니까? 나라의 운명을 좌우할 만한 중
요한 사안에 관해 다소라도 이해가 되셨습니까? 밤이 늦었습니다. 벌써 잠자리
에 들 시간이 되었습니다. 우리가 편히 잠자리에 들 수 있도록 4천만의 불침번
이 되어 조국 방위에 수고하시는 국군장병 여러분, 여러분의 노고에 감사를 드
리며, 저는 오늘 밤 이 방송에 토론자로 황금 알기를 돌같이 하라 하신 최영 장
군이나, 갖은 모함과 멸시를 마다하지 않고 나라가 위급할 때 백의종군하신 이
순신 제독이나, 사랑하는 부하를 살리고 스스로 산화한 강재구 소령이 나왔다면
과연 어떤 국방조직법을 주장하셨을까 생각해 보았습니다. 사랑스러운 우리 조
국이 당리당략 때문에 마구 훼손되어선 안 되며 몇몇 개인의 정권 연장 욕심 때
문에 나라 이름이 이용되어선 절대로 안 되겠습니다. 우리 모두의 열과 성으로
지켜 나가야 할 우리 땅, 우리 조국입니다. 시청자 여러분, 그리고 일선에 계신
국군장병 여러분 안녕히 계십시오. 여러분을 믿고 우리도 편히 잠들겠습니다.”
다음 날 방송국과 내 사무실로 여러 통의 전화가 걸려 왔다. 편지도 오기 시
작했다. 나는 깜짝 놀랐다. 어떻게 이렇게 많은 반응이 나오게 되었는지 궁금하
기도 했다. 알고 보니, 이상훈 국방장관께서 전국의 부대와 장병들에게 공문을
내어 국군조직법에 관한 토론에 장관이 나가서 설명을 하게 되었으니 모두 시사
토론을 시청하라고 지시를 내렸다는 것이었다.
일선에서 고생하며 휴전선을 지키던 사병들이, 백령도 공군 레이더 부대의 하
사관들이 방송을 보고 공개 방송에서 자기들같이 힘없고 약한 졸병들의 노고를
격려해 주고 더욱이 4천만의 불침번 운운하면서 사기를 복돋워 주어 자존심을
살려 준 경우는 처음 있는 일이라고 정말 감사하다는 내용의 편지와 전화였다.
하도 반응이 좋고 편지가 많이 오는 것을 보고 방송국 PD는, “정말 인기 대단
하십니다. 지금 대통령에 출마하시면 군인들 표는 다 긁겠는데요. 잘 생각해 보
시죠.”라고 농담을 하기도 하였다.
참 보람을 느꼈다. 피곤한 밤중에 땀흘려 진행하는 시사토론이 과연 효과가
있을까 회의하던 나는 상당히 격려가 되었고 크게 고무되었다. 더 좋은 방송을
해야 되겠다는 각오가 새롭게 생겨났다.
한 번은 경제 문제 토론 때 토론자끼리 인신공격 비슷한 발언을 해서 토론 분
위기가 험악해진 때가 있었다. 토론자 중에 실무경제 경험이 많은 상과대학 선
배가, 조목조목 정부의 경제정책에 대하여 통계를 대가며 지적하는 후배 경제학
교수를 향해, “좌우간, 우리나라 교수님들, 실물경제도 잘 모르면서 이론만 가
지고 혹은 잘 맞지도 않는 통계 얘기만 하니 너무 답답합니다. 그 고리타분한
이론은 이제 그만 읊어요.”라고 격한 음성으로 발언을 하였다. 후배 교수는 한
치의 양보도 없이 선배의 말이 떨어지기도 전에 반격을 가했다.
“선배님, 저도 상대를 졸업한 지 20년이 되었습니다. 경험이 없다고 하시는데
무슨 경험을 의미하십니까? 저도 선배님께서 몸담고 계신 학문 출신입니다. 앞
으로 제게 모른다는 말씀은 하지 마세요. 제 얘기가 틀렸으면 틀렸다고 말씀하
십시오.”
사태가 심각하게 번지기 전에 내가 끼여들었다.
“자 이제 남은 시간에는 결론에 해당하는 부분으로 우리나라의 지금 실정으
로 볼 때에 성장에 우선을 두어야 하겠습니까? 아니면 분배에도 관심을 가져야
하겠습니까? 교수님부터 의견을 말씀해 주시죠.” 하면서 토론의 방향을 돌린
적이 있다. 두 사람은 토론이 끝난 후, 휴게실에서 설전을 계속하다가 떨떠름하
게 악수를 하며 헤어졌다.
증식 폭등을 맞아 정부가 증시 부양 자금을 풀어야 할 것인가가 주제가 되어
토론이 진행되었다. 정부의 증권감독원 대표, 재경원, 증권사 사장, 학계 대표, 그
리고 증권에 참여했다가 크게 손해를 본 시민들의 모임 대표가 나와서 토론을
했다. 정부의 인도에 따라 믿고 증권에 투자했다 망했으니 정부가 책임지라는
시민 대표의 주장이 상당히 거칠게 토로되었다.
나는 토론을 마치며, “남은 시간은 한 분당 2분씩 결론을 말씀하시면 되겠으
니, 모두 시간 엄수에 협력해 주실 것.”을 당부하면서 시민 대표에게 마이크를
넘겼다. 이분은 즉시 말문을 열며, “존경하는 국민 여러분, 여기 토론자들 모두
증시 때문에 머리가 좀 아프신 분들이겠으나 피를 본 사람은 나 하나뿐인데 무
엇 때문에 똑같이 시간을 배분합니까? 이 남은 시간 10분은 불초 이 사람이 다
쓰겠음을 미리 양해 말씀 구하면서 아주 간단히 요약해서 결론적으로 말씀을 올
리겠습니다.” 하고는 일장의 연설을 하는 것이었다. 나는 몇번이나 시간 사인을
보냈으나 그는 이제 나는 쳐다보지도 않고 기염을 토하는 것이었다. 억지로 겨
우 방송을 마쳤다. 알고 보니 이분은 대전에서 고등학교를 다닐 때 웅변방장이
었으며 여러 대회에서 상을 탄 적이 있었는데, 그 때 이후 40년 만에 처음으로
오늘 신명나게 웅변을 했다는 것이었다. 그 분은 신이 났겠으나 내 등은 땀으로
흥건하게 젖었다.
나의 사랑, 나의 가정
행복의 조건
예술과 낭만의 도시, 파리를 둘러보고 왔다. 여러 번 가 볼 기회가 있었으나
바쁜 일정 때문에 갈 수가 없었기에 아내에게 미안한 마음을 가지고 있다가 이
번에 둘이 같이 다녀올 수 있었다.
사진으로만 보았던 유명한 개선문, 에펠 탑, 세느 강의 유람선, 노트르담 성당,
몽마르트 언덕, 여러 박물관들, 그리고 프랑스의 역사가 담긴 베르사이유 궁전
등 꼭 보아야 할 곳을 며칠 내에 훑었다. 일찍부터 파리 여행에 대비해서 프랑
스의 역사와 명소들의 뒷얘기를 면밀히 공부해 두었던 수첩을 들고 감개무량한
역사의 현장을 답사하면서 여러 가지 감명 깊은 공부를 하게 되었다.
에투알 개선문을 바라보면서 하나님의 공의로운 섭리를 다시 깨달았다. 파리
의 상징인 개선문은 나폴레옹의 승리의 영광을 기념하기 위해 높이 50미터, 폭
45미터로 세워졌으며, 이를 중심으로 열두 개의 크고 작은 거리가 부채꼴 모양
으로 뻗어 나가고 있다. 샹젤리제 거리를 향한 오른편 기둥에 새겨진 프랑스 국
가와 아르세예즈와 공신 장로 5백58명의 이름이 선명하다. 영웅 나폴레옹은 이
개선문이 원성되기 전에 외롭게 세인트 헬레나 섬에 유배되었다가 1840년 12월
15일 유해가 되어 개선문을 통과했던 것이다. 인간의 역사를, 권세와 영광을 다
시 샹각하게 하는 교훈의 문이다.
에펠 탑은 1889년 파리 만국박람회 때 세운 것으로 당시의 문화인들이 파리의
미관을 해친다고 맹렬히 반대했었으나, 지금은 오히려 전세계 관광객들에게 호
평을 받고 있으며, 오늘날 방송, 통신에 크게 공헌을 하고 있다. 앞을 내다보는
설계자들의 장기적인 안목에 고개가 숙여진다.
나폴레옹 대관식이 있었고, 드골 장군이 파리 해방 기념 미사를 드렸던 아름
답고 웅장한 노트르담 성당과 몽마르트 언덕의 사크레쾨르 성당 등 우리를 압도
하는 웅장한 겉모습과 섬세하고 아름다운 실내 디자인 앞에 우리는 발길을 돌리
기가 어려운 것을 느꼈다. 특히 `순교의 언덕`이라고 불리는 몽마르트 언덕길은
옛 순교자가 잘린 자기의 머리를 두 손에 받쳐들고 걸어 올라갔던 길이라고 해
서, 하나님의 일을 위해 스스로를 희생한 순교자들 앞에 머리가 숙여지는 곳이
었다.
그러나 이 여러 명소들 중에서도 관광객들의 입을 벌어지게 하는 것은 베르사
이유 궁전이었다. 루이 14세가 프랑스의 권력과 왕의 권력을 과시하기 위해 반
세기가 넘게 막대한 경비와 인력을 동원해 권위와 호화로움의 극치를 보여 준
궁전이다. 이곳에서 3대에 걸친 왕과 왕비가 살았다. 사치의 극치를 보여 준 루
이 16세 왕비였던 앙리 마리 앙트와네트는 역사상 전무후무한 사치스러운 삶을
살다가 1793년 단두대의 이슬로 사라져 버렸다.
인간이 창조할 수 있는 아름다움과 사치의 극치를 보면서, 이런 곳에서 살던
사람들이 모두 행복하였을까 하는 생각을 하면서, 10년 전 미국에서 살 때 염가
할인 판매점에서 반값에 사서 입던 옷을 그대로 입고 이 엄청난 호화로움을 바
라보면서 순진하게 웃으며 즐거워하는 소박하고 극히 자연스러운 아내를 바라보
면서, 문득 아내의 얼굴을 마리 앙트와네트 얼굴 위에 슬쩍 올려 놓아 본다. 누
가 더 행복할까? 대답은 즉시 나왔다.
이런 얘기를 들은 적이 있다. 제왕 중의 제왕인 루이 14세가 엄청난 베르사이
유 궁전을 지어 놓고 병이 들었다. 유명한 의사들이 제각기 처방을 내놓았다. 그
중의 한 가지가 이 세상에서 제일 행복한 사람의 내복을 빌려 입으면 병이 곧
나을 것이라는 것이었다. 신하를 대동한 왕이 전국을 찾아다녔으나 행복한 사람
들을 만날 수가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시골길을 지나다가 언덕에 앉아 흥겹게
피리를 부는 목동을 만났다. 그의 얼굴은 기쁨과 감사가 넘쳐 마치 천사같이 보
였다. 왕은 그에게 행복한가를 물었다. 그는 물론 너무 행복해서 무엇에다 감사
찬송할지 모르겠다고 답하였다. 왕은 무엇이 그렇게 행복한지 재차 물었다. 목동
은, “파란 하늘이 있고 호흡할 수 있는 맑은 공기가 있고, 또 자신이 돌보아야
하는 양들이 있으니 왜 행복하지 않겠느냐.”고 대답하는 것이었다.
왕은 목동의 속옷을 빌려 달라고 부탁하였다. 목동은 미안해하면서 일생 동안
속옷을 입어 본 일이 없다고 죄송하다는 것이다. 역사를 통해서 제왕 중의 제왕
이라고 불리면서 72년간 왕위에 있으며 온갖 영화를 누렸으나 행복을 모르던 루
이 14세는, 말년에 목동의 행복론을 듣고 깊은 감동을 받았다.
요즈음 많이 가진 사람, 많은 돈을 몰래 숨겨 두었던 사람들, 덜 가진 사람의
것을 빼앗아 더 많이 가지려는 사람들이 어려움을 당하는 것을 보면서도 우리의
마음을 비우지 못하고 있는 우리들을 생각하며 파리 여행을 마쳤다.
귀국하기 전날 밤, 아내와 나는 서로 내복을 살펴봤다. 아내의 속내의는 역시
10년 넘은 것으로, 많이 낡았고 구멍도 나 있는 것을 보며, 좋은 것도 사 주지
못하고 늘 미안한 마음으로 지내는 자신의 입장에 대한 변명을 하고 말았다.
“여보, 당신 속옷을 보니 그 행복했던 목동 다음으로 행복한 사람 같군.”
무궁화표 하나, 독수리표 둘
아이들이 몇이냐고 묻는 사람들에게 가끔 농담으로 대답하는 나의 우스갯소리
가 있는데, “무궁화표 하나에 독수리표 둘입니다.” 하는 것이다.
삼십이 넘어 겨우 노총각을 면한 나는 결혼하던 해에 첫딸을 낳았다. 할머니
나 어머니께서는 전혀 내색은 하지 않으셨으나 손자를 기다리던 터라 다소 섭섭
하셨을지 모르나, 두 할머니들의 첫 손녀에 대한 사랑은 말로 다 할 수 없었다.
나는 딸아이의 이름을 지현이라 짓고 싶었으나 장모님과 아내가 유명한 작명
가로부터 좋은 이름을 받았다고 하여 승영으로 지어야 된다고 우겨대는 바람에
내 주장은 철회했다. 나는 우리 집안의 내력이 아들이건 딸이건 돌림자를 따서
이름을 짓는 전통이 있기 때문에 맏딸 아이는 나중에 사정이 바뀌는 한이 있더
라도 돌림자인 현자를 꼭 넣어 이름을 짓고 싶었다. 그러나 장모님의 정성을 고
맙게 받아들여 지금까지도 부르기도 쓰기도 어려운 이름으로 짓게 되엇다. 이름
이 무게가 있고 의미가 있어, 여자지만 집에서 아이나 키우고 주저앉아 있지 말
고 법정으로 사무실로 뛰어 다니는 변호사가 되었는지 알 수 없는 일이다.
여하튼 첫딸이 돌도 되기 전에 나는 미국유학을 떠났고 1년 가까이 친할머니
와 외할머니 손을 번갈아 왔다갔다하다, 엄마 아빠가 공부하고 있는 미국에 혼
자서 오게 된 우리 딸 승영이를 생각하면 지금도 그 때에 잘못한 우리의 판단을
아타깝게 생각한다.
처음 몇 달 동안은 매일 밤만 되면 할머니한테 가겠다고 울어 대서 여러 밤을
세워 가며 같이 운 적이 많았다. 그럭저럭 커서 학교에 들어가게 되었고 학교에
서는 언제나 최우등생으로 선생님들의 칭찬을 들으며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명문
버클리 대학에 입학하였다. 승영이는 3년 동안 졸업에 필요한 과목을 다 이수했
다. 정치학, 사회학, 역사, 경제학, 사회사업, 동양역사 등을 다 섭렵한 후 그 애
는 수사학으로 학사 학위를 받고 하버드 법대에 입학하게 되었다. 캘리포니아
주 내에서 우리 한인 사회는 물론, 미국 커뮤니티에서도 딸 칭찬이 대단했다. 자
랑스러운 딸이었다. 그는 대학 재학중 이미 영국과 프랑스에 가서 여름학기를
보낸 적도 있고, 단기선교사로 산골에 가서 복음을 전파하는 일도 해 봤고, 북구
에 가서 선교활동도 하는 등 선교하는 일에 정성을 쏟은 적도 있었다.
우리 가정의 자랑인 맡딸이 하버드 법대 2학년 때 드디어 결혼을 하겠다는 것
이었다. 사위 될 청년은 이미 몇 년 전부터 우리가 잘 알고 지내는 학생이라 그
의 인간성이나 생활태도 등 별로 흠 잡을 데 없는 좋은 청년이라는 것을 잘 알
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기분이 이상했다. 질투심은 물론 아닌데 딸을 멀쩡히 뺏
기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이상야릇한 느낌이 들었다. 그렇지만 잘 큰 딸이 자기만
을 사랑하는 사람과 같이 일생을 사랑받고 살아갈 수 있다는 생각이 우리 두 내
외를 크게 위로해 주었다. 사위가 된 의섭이는 딸과 버클리 대학 동창이며, 같이
교회에 다니는 친구였다. 나이가 동갑이었는데 대학을 졸업하고 둘 다 법과 대
학원에 입학하던 여름, 그가 결혼 승낙을 아내에게 구했었다는 것이다. 아내는
딸의 나이와 해야 할 공부를 핑계삼아 거절 비슷하게 했던 모양이다. 그는 수긍
하는 척하더니 그 다음 날부터 우리가 사는 아파트 벤치에 앉아 성경도 읽고 기
도도 하며 아파트 주위를 돌기도 했다. 경비아저씨가, “학생, 여기서 뭐하는 거
요?” 하고 묻자 의섭이는, “네, 저 여기서 운동하고 있습니다.”라고 대답했다
고 한다. 그러자 경비는, “아니 운동을 하려면 넓은 운동장에서 할 일이지 왜
남의 아파트는 돌고 있어?” 하고 핀잔까지 주더라는 것이다.
의섭이는 어느 날 드디어 자기의 결의를 단행하기로 작정하고 아파트 둘레를
일곱 바퀴 돈 다음에 두 손을 번쩍 쳐들고 “할렐루야.”를 외치고 나서 우리
집에 쳐들어왔다. 마치 여리고성을 함락시킨 여호수아와 같이 자신만만하게 찾
아와 걸림돌이라고 생각했던 장모를 함락시키는 데 성공했던 것이다.
서울에서 가족들끼리만 모여 약혼식을 올렸고 대학원 2년을 마친 후 로스엔젤
레스에서 결혼식을 올리게 되었다. 나는 결혼식 이틀 전날 도착해서 모레 있을
식 준비에 이상 유무를 점검하면서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은 보고를 듣게 되었
다. 딸의 건강상태가 결혼식을 거행해도 좋을지가 걱정이 된다는 얘기다. 부랴부
랴 UCLA 대학병원에 가서 피검사와 기타 검진을 마친 후 결혼하는 데에는 이
상이 없겠다는 의사의 보증을 받고 식을 거행하게 되었다. 그렇게 야단법석을
치고 난 후, 딸의 팔을 끼고 식장에 입장하는데 눈물이 앞을 가려 걸을 수가 없
었따. 예식 도중에 혼주 대표인사를 하라는 주례 목사님의 안내를 받고 단에 선
나는 또 눈물이 앞을 가렸다. “딸년이 뭐길래. 그제 비행기를 타고 서울에서 오
면서 비행기 안에서 계속 생각해 봤습니다.”로 시작된 나의 인사말은 장내를
울음바다로 만들어 버렸다. 물론 잔잔한 파장의 울음 물결이었으나 딸 가진 많
은 친구들이 공감을 느끼며 같이 눈물을 흘렸다. 어제부터 찝찔하던 기분이 확
눈물에 쓸려 나간 듯 개운한 것을 느꼈다. `눈물의 긍정적 역할`이란 제목의 소
론도 쓸 만하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지금 현재 둘은 학업을 마치고 변호사가 되었고 딸 둘어 낳아 일인 삼역을 감
당하며 열심히 살고 있다.
독수리 둘은 미국에서 출생한 아들들을 일컫는 표현인데 큰놈이 드디어 결혼
을 해서 독립을 했다. 교회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다가 침례교회 목사님의 외동딸
과 결혼하게 되었는데, 원앙새 한 쌍 같다. 막내 독수리표는 아직 학교에 다니며
공부하고 있다. 홀로 서기 5년째로 당당히 자립하고 있어 우리의 자랑이 되고
있다.
이제 세계화 시대에 무궁화표나 독수리표나 모두 외국에서 전문지식을 배우고
일하고 있다. 그러나 부모의 나라 한국을 위해 무엇으로 어떻게 기여해야 좋을
지를 매일 생각하고 있다는 소식을 자주 접하고 있다. 그렇다. 이제 이 세상에서
는 어디서 태어났는지, 어디서 살고 있는지가 그렇게 중요하지 않은 것 같다. 세
계화의 시대가 되었으므로.
유 니드 유(You Need You)
`유 니드 유(You Need Yoo)`는 우리 집안의 트레이드 마크다. “당신은 유가
성을 가진 나를 필요로 합니다”라는 뜻이다.
삼남매 중에 딸아이가 중2가 되면서 학생회장 후보가 되어 출마하게 되었다.
자신을 알리기 위해 갖가지 표어를 후보 학생들이 만들어 붙이기도 하고 들고
다니기도 하는 터라 딸은 온 가족을 모아 놓고 도움을 청했다.
나는 옛날 아이젠하워 대통령이 아들인 스티븐스와 대통령 선거전을 치를 때
유명한 표어인, `아이 라이크 아이크(I Like Ike)`가 좋았다고 소개를 했다. 아이
크는 아이젠하워의 별명으로, 이 짧고 간단한 표어가 그 때 중학생이었던 먼나
라의 나까지 아직 기억하고 있으니 잘된 것이 틀림없는 것 같았다. 이 얘기를
듣고 있던 막내 앤디가, 우리는 “유 니드 유(You Need Yoo)"로 하면 좋겠다는
제안을 했다. 만장일치로 통과가 됐고 우리는 밤새 크고 작은 `유 니드 유(You
Need Yoo)`를 써서 다음 날 학교에 가서 붙이고 결심 했다.
간접선거였던 딸의 경우는 각반 대의원 스무 명이 투표를 하는데 백인 남학생
후보와 동점이 되었다. 다시 재투표를 했으나 또 동점이 되었다. 거의 일주일을
결정을 못하고 있던 학교 당국은 전체 학생이 모인 자리에서 직접 선거 형식을
택하게 되었으며 후보는 딸 승영이와 다른 백인 남학생으로 바꿔서 경선을 하게
되었다. 몇 점 차이로 딸이 낙선을 했다. 꼭 되리라고 믿고 있었던 딸의 실망이
컸던 것 같다.
우리가 살던 곳은 중류층 이상의 가정이 살고 있는 지역이었고, 딸이이가 다
닌 학교는 백인 학생들만 다니는 곳으로 학교에 동양계 학생은 겨우 너덧 명에
불과하였다. 아마도 동양계 여학생이회장이 되는 것에 자존심이 상한 백인 학생
들이 모여서 의논을 한 끝에 후보를 바꾸어 백인을 당선시키자고 결의를 했던
것 같다. 회장에 당선된 마크라는 백인 학생은 축구부 주장 출신으로 정치에 관
심이 있는 아이였는데, 후에 딸아이와 친해져서 커서까지 친하게 지내고 있다.
그 친구 마크가 후에 이와 비슷한 얘기를 슬쩍 흘렸기 때문에 감을 잡게 되었었
다. 그 얘기를 듣고 미국 사회 내에 아직도 존재하고 있는 인종차별 의식이 없
어지고 모든 사람이 하나님 앞에 평등하다는 생각을 가져야 이 나라가 축복을
받을 텐데 하는 생각을 했다.
어쨌든 딸 승영이는 처음으로 실패의 쓴잔을 마시게 되었다. 나는 `실패할 수
있는 용기`를 가진 사람이 큰 사람이 된다는 얘기로 딸을 위로했다. 많은 실패를
경험했던 링컨 대통령 얘기도 해 주었다. 하기는 나 자신이 변호사 시험에 열
번씩 떨어지며 실패의 쓴잔을 마시고 있을 때여서 생생한 내 얘기를 하면서 아
빠는 결코 실망하지 않는다. 다시 도전한다는 얘기를 해 주었다. 그 이후로 딸은
시험에 실패한 적이 별로 없이 여러 가지 시험에 합격하며 잘 지내고 있다.
아들 피터(Peter)도 누나가 회장에 출마했다가 이상하게 절차가 바뀌는 바람에
낙선한 것을 만회라도 하려는 듯이 3년 후에 회장 출마를 선언했다. 예외 없이
이번의 슬로건도 `유 니드 유(You Need Yoo)`였다. 이 슬로건을 친구들과 같이
학교에 걸고 붙이고 해서 열심히 한 끝에 다섯 표 차로 피터가 당선되었다. 누
나의 억울한 낙선을 보란 듯이 만회한 셈이 되었다. 피터는 회장으로서 여러 가
지 프로젝트를 고안했고 뛰어난 지도력을 발휘했다.
막내 앤드류(Andrew)는 초등학교 5학년 때 로스엔젤레스로 전학을 하게 되어
새 동네에서 잘 적응을 하다 중학교에 갔다. 3년 후에 다시 서울로 이사하게 되
어, 위의 두 남매는 미국에 남겨 두고 막내만 우리와 같이 서울에 와서 고등학
교에 입학했다.
막내는 연극반, 밴드반, 합창만에 들어서 학교활동을 열심히 하더니, 고2 때
회장에 출마하게 되었다. 어쩌다 보니 회장 출마가 우리 집의 전통이 되고 말았
다. 이번에도 슬로건은 `유 니드 유(You Need Yoo)`였다. 볼펜 2백 개를 사서 `
유 니드 유, 앤드류 유(You Need Yoo, Andrew Yoo)`라고 써 놓고 한국반 학생
들에게 자기를 알리는 일을 했다.
네 명의 후보가 나와서 합동 정견발표를 하게 되었는데 막내는 바로 그 날 홍
콩에서 열리는 합창대회에 참가하러 떠나는 날이라 학생들 앞에서 정견발표를
할 기회를 놓치게 되었다. 그래서 나는 막내에게 충고를 해 주었다. “너만 빠지
면 손해를 볼 테니 사정을 상세히 설명하는 내용의 편지를 써서 학생들에게 나
누어 주고 떠나라. 특히 홍콩에 가는 것이 놀러가는 것이 아니고 학교를 빛내러
가는 것이라는 것을 밝혀야 된다.”고 내가 신신당부를 했다. 아무 말 없이 듣기
만 하는 막내가 별 반응을 보이지 않아 답답했다. 그러더니 자기 혼자 자력으로
해 볼 테니 걱정하지 말라는 것이었다. 별로 말이 없던 녀석이라 선거가 있던
날도 늦게까지 연락이 없었다.
궁금한 나는 막내와 친하고, 이번 선거에서 사무장으로 막내의 선거를 도왔던
얼(조영남 씨의 장남)에게 전화를 해서 겨우 당선된 사실을 알았다. 얘기를 들어
보니, 정견발표회 날 막내 차례에는 막내가 홍콩으로 떠나기 전날 찍어 놓은 비
디오 테이프를 틀어 주었다는 것이다. 나는 겨우 머리를 써서 편지를 써서 돌리
라고 했는데 막내와 그 팀들은 비디오까지 동원을 했으니 나의 머리가 구식이며
시대에 뒤떨어진다는 것을 절감하게 되었다.
`당신이 필요로 하는 사람인 나를 써 주십시오` 하는 것이 우리 가정의 기도
제목이다. 이 표어는 또한 공인으로서 이웃과 우리 공동체가 섬겨야 하는 우리
가족의 계속되는 봉사정신이 지주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웃이 원하는 나,
이 사회가 필요로 하는 나, 나라가 필요로 하고 민족이 요구하는 사람으로 최선
을 다해야 한다.
`최고`보다는 `최선`을 다하는 삶
하나밖에 없는 딸의 졸업식에 참석하려고 20여 시간이나 비행기 여행을 했으
나 하나도 피곤하지 않았다. 대학 4년을 마치고 법과 대학원에 입학하여 3년을
고생해서 이제 법학박사 학위를 받는, 어떻게 보면 정규 교육의 마지막 졸업식
이 되겠다 생각하여 학교 일정을 사흘간 미루고 떠난 여행이었다. 태평양을 건
너면서 며칠 전부터 일간신문을 크게 장식했던 기사 내용을 자꾸 떠올렸다. 우
리 딸아이도 바로 그 명문 대학을 졸업하게 되기 때문에 관심을 자연히 갖게 되
는 것 같다.
우리나라의 모든 신문이 다 다룬 것 같은 기사의 내용인즉, 유명인사의 장남
이 하버드 대학의 전교 수석으로 졸업을 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퍽 장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세계적인 명문 하버드 대학을 꼴찌로 졸업하게 된다 해도 장한
일인데 전교 수석 졸업이라니 대단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귀재가 아니라 천재,
아니면 신동쯤 되지 않고서야 전세계에서 몰려온 수재들 중에 어떻게 수석 졸업
을 할 수 있단 말인가? 아이들을 셋쯤 기르고 학교에 보내다 보니 각종 학교 졸
업식도 참석하게 되며 중.고등학교나 대학교의 졸업 중에서 벨레딕로리언이라고
해서 대표 연설하는 것도 들어 보았고, 또 졸업생 중에서 우등생, 최고 우등생
등을 따로 골라서 상을 주는 학교 등도 물론 보아 왔다. 그러나 하버드 대학에
서는 수석 졸업생을 정하지 않는 것으로 알고 있었는데, 금년에는 유난스럽게
떠들썩해서 공연히 가슴이 다 두근거리는 설렘을 안고 졸업식장에 들어가 말로
만 듣던 하버드 대학 졸업식을 직접 보게 되었다. 금년이 제 342회 졸업식인데,
대학 중앙도서관 앞 광장에서 졸업생 5천8백12명과 학부형과 동문 등 수만 명이
몰려 그야말로 축제 분위기 속에 거행되었다. 오전 10시부터 하버드 전체 졸업
예식이 거행되는 가운데 열네 명의 명예박사 학위가 수여되었으며, 졸업식의 꽃
이라 할 수 있는 졸업생 대표 연설이 있었다. 학사 학위를 받는 졸업생 두 사람
과 대학원 학생 대표 한 사람, 모두 세 명의 연설이 있었다.
존 로세티 군은 라틴어로 그리고 엘로우 부린 군은 영어로 연설을 했다. 대학
원 졸업생 대표 연설은 인도 출신으로 공중보건학 석사를 받게 되는 바샤와키바
티챠라 양이 했는데 15분 가량의 연설중에 6,7차례 박수가 나왔으며 함성도 터
졌다. 그의 연설의 내용은, 자기는 인도의 아주 가난한 도시 출신이기 때문에 교
육을 받아야만 시집갈 때 가져가는 지참금이 그만큼 낮아지기 때문에 가난한 가
계 부담을 덜기 위해 공부를 시작했다, 그런데 오늘 세계 명문의 하버드 대학원
까지 와서 공부를 하게 되었으니 이제 고국에 돌아가 억울하게 비인간적 대우를
받고 있는 인도 여성들의 해방을 위해 헌신하겠다는 결연한 의지를 나타내는 내
용이 들어 있어 많은 사람들을 감동시켰다. 여러 순서 중 이 학생의 연설이 아
직도 내 귀에서 들리는 듯 매우 진한 인상을 받았다.
앞에서 말한 수석 졸업생 결정은 몰론 없었고, 이 날 나온 대학 신문에 각종
상을 받게 되는 졸업생들의 명단이 소개되었고, 상금도 미화 75달러에서부터 3
천 달러까지 있는 것이 눈에 띄었으며, 한국 이름도 대여섯 명 들어 있는 것 같
았다.
10시부터 시작된 전체 졸업식은 12시에 끝이 났다. 12시부터 각 단과대학별로
점심을 같이 하면서 졸업장을 받게 되어 나는 법과 대학에 가서 딸의 학위 수여
식을 지켜보며 16년 전 같은 학위를 내가 받을 때 초등학교 4학년이었던 딸을
생각해 보며 세월의 흐름을 느껴 보기도 하였다. 오후 2시부터는 동창회 주최의
졸업생(신입 동창 회원) 축하 모임인데, 여기서 주 연사의 연설을 듣게 된다. 이
번에는 명예법학박사 학위를 받은 합참의장 콜빈 포웰 장군의 연설이 있었다.
물론 명연설이었다. 이틀에 걸쳐 동네 축제같이 벌어지는 하버드 대학의 졸업식
은 참으로 장관이었으며 나는 혹시 우리가 배워 올 만한 아이디어가 있지 않을
까 해서 열심히 이틀간 쫓아다니면서 메모도 하고, 사진도 찍으며 많은 것을 보
고 듣고 배워 왔다.
수만 리 떨어진 하버드 대학의 어느 졸업생 이름이 한국 사회에 크게 부각되
며, 자녀를 교육시키는 많은 부모들의 부러움의 대상이 되었으며, 또 자녀를 성
공적으로 교육시켜야겠다는 새로운 각성을 주게 되었다는 긍정적인 측면을 생각
하면서 또 다른 한편 우리나라 사람은 `수석`, `일등`, `최고`를 참 좋아하는구나
하는 생각도 해 보게 된다. `세계에서 최고`, `아시아에서 최고`라는 말을 우리는
가끔 듣게 된다. 최고가 나쁠 것은 없겠으나 최선을 다하지 않고 최고만 되기
바라다가 망치는 예를 너무 많이 봐 왔기 때문에 이 `최고`, `최우수`, `최고 수
석` 등에 대해서 한번 짚고 넘어가고 싶은 욕구가 하버드 졸업식에 가면서, 돌아
오면서 계속 일어나는 것이다.
최고는 아니지만 최선을 다하면서 법과 대학원을 졸업하는 딸의 수고가 너무
고맙고 자랑스러워 여러 번 마음속으로, `그래, 참 잘했다. 너무 잘했다. 최선을
다한 것을 이 아버지가 안다. 축하한다.` 하는 말을 뇌까려 본다.
최고는 부러운 것임에 틀림없다. 최고 수석은 부러워할지언정 비판할 것이 아
니다. 그러나 아쉬운 것은 최고에게만 박수를 보내고 최선을 다한 사람에게는
박수는커녕 그 존재까지 망각하고 있는 것이 우리 실정이다. 우리 사회는 최고
주의가 성행하고 있다. 이 최고주의의 성향이 강해지면 강해질수록 전체와 공동
체는 약해지는 위험에 빠지게 되고, 소외당하는 계층이 형성될 뿐만 아니라 인
간 평등의 가치를 상실하며 인간의 욕심만 추구하게 되고 만다. 초등학생들에게
장래의 희망을 물으면 대부분의 아이들은 대통령이 되겠다고 의사표시를 하고
그 다음은 장관 순서로 그 다음은 역시 최고가 될 만한 자리로 메워지곤 한다는
보고서가 있는데, 이러한 한국인의 대중적인 공통 심리 현상은 부모들의 최고주
의 삶과 의식의 소산인 것이다. 최고가 되기 위해 부모의 말씀에 순종해야 되고
최고 수석을 만들기 위해 갖가지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열심히 뒷바라지하는
우리나라 부모들의 정성을 시비하자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자녀가 최고가 되기
를 원하는 것이 자녀 그 본인을 위하는 것인지, 부모들 자신 때문인지 혼동될
때가 가끔 있기 때문에 하는 이야기다.
최고가 최고의 인격을 의미하거나 최고가 최고의 양심에 정비례한다고 단정지
을 수 없다는 사실은, 대강대강 급하게 세상을 사는 사람은 느끼기 어려울지 모
르겠으나 한번 짚어 볼 만한 일이다. 중학교 나온 사람보다 대학을 수석으로 나
온 사람이 더 인격자라고 생각할 수 없는 것은, 최고에서 발견되지 않는 것을
최선에서 찾을 수 있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성경 속에 많은 인물들이 숱한 실수와 연약함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 칭찬을
받은 것은 그들의 삶이 최고라는 판단에서가 아닌, 고쳐 살아가는 최선의 삶 때
문이었다. 이것이 인생을 인생으로 보시는 하나님의 기준인 것이다. 최고주의는
최고가 못 될 때 실망이 아주 크고 절망을 맛보아야 하는 어려움이 있지만, 최
선주의는 최선의 삶이 잉태하는 보람이 주어진다. 최선을 다하는 삶에는 거짓이
끼여들지 못한다. 한탕주의나 기회주의는 더더욱 차지할 자리가 없다.
최고주의에 약한 우리들은 최선의 삶의 의미를 생각하고 자신의 능력 안에서
최선을 다하는 노력에 박수와 격려를 보내며 살아야 하겠다. 최선의 삶을 사랑
하는 부모는 결코 남과 비교해서 얻어지는 행복감도 불행감도 모른 채 다만 최
선을 사랑할 뿐이다.
“마땅히 생각할 그 이상의 생각을 품지 말고 오직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나눠 주신 믿음의 분량대로 지혜롭게 생각하라.”(로마서 12:3)
변호사라 너무 돈벌이에만 눈이 멀어 소송 왕국이니 변호사 망국론이니 하는
이야기가 나오고 있는 미국 땅에서 억울한 사람이 없는 정의로운 사회를 만들기
위해 하나님께로부터 똑같이 지음받은 우리 인간들의 권리와 복리를 위해 적은
힘을 바쳐 하나님의 정의가 강물같이 흐르는 세상이 되게 하기 위해, 법률을 택
한 사랑하는 딸아! “최선을 다하라(Do your best), 너의 최선의 노력이 하나님
의 눈에 최고가 될 수도 있음을 믿자.”
아들을 통한 교훈
첫아들 피터는 미시간 주의 오와쏘라는 조그마한 시골동네 출신이다. 아빠도
한 번도 가 보지 못한 곳에서 태어나게 된 사연이 있다.
나는 유타 주의 브리감 영 대학에서 석사논문을 쓰고 있던 터라 몹시 분주한
때여서 아내는 나를 위해서 의사였던 형부와 언니가 살고 있던 미시간에 가서
피터를 분만하게 되었던 것이다. 2년전 큰딸 분만 때에 제왕절개 수술을 했던
이유로 이번에도 수술을 하는 것이 원칙이라는 얘기를 들은 관계로 그렇게 마음
에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런데 미시간에 가서 병원에 들렀던 아내는 미국 의사
말이 모든 것이 정상이고 산모가 건강하기 때문에 자연분만을 시도해 보고, 만
약 무슨 문제가 발생할 가능성이 다소라도 감지되면 그 때 수술을 해도 될 것이
라는 얘기를 해 주었다는 것이다. 역시 실력 있는 산부인과 의사라 뭔지 다른
데가 있다고 생각되었다. 드디어 분만 날이 가까워졌다. 진통이 시작되었는데 주
치의가 어디 출장을 갔다는 것이다. 할 수 없이 나의 동서 되는 정신과 의사가
병원으로 아내를 데리고 가서 자연분만으로 피터를 출산하게 되었다.
나는 내색을 하지 않았으나 은근히 이번에 아들을 보았으면 하고 바랐었다.
아내의 전화를 받고 나는 뛸 듯이 기뻤다. 유학생 친구 몇과 같이 축하파티를
벌였다. 그리고는 너무 기분을 내고 신나게 운전하고 가다 일단 정지신호를 위
반하게 되었다. 교통순경이 따라왔다. 차를 세워 놓고, 오늘 아들을 낳았다는 전
화를 받고 너무 기뻐서 흥분하는 바람에 실수로 위반을 했는데, 다시는 안 그럴
테니 한 번만 봐 달라고 사정을 했다. 교통순경은 웃으면서 자기도 아내가 임신
중인데 아들을 기대하고 있노라며, 기분을 이해하니 조심해서 운전해 가라며 경
례까지 붙였다.
서울에 어머님과 장모님께 전화로 이 소식을 전했다. 장모님은 무릎을 탁 치
시며, `이제 됐다.`고 외치셨다는 것이다. 처남댁은 자신은 이미 아들을 낳아서
기르고 있는데 친손자 때는 아무 감동이 없으셨던 어머님이 외손자 소식에 무릎
까지 치셔서 섭섭했다는 얘기를 후에 우리에게 했다.
이렇게 태어난 우리집의 장손자 피터는 어려서부터 귀엽고 착하게 잘 자랐다.
학교에서도 선생님들에게 귀염을 받고 친구들의 부모님들에게도 예절바른 어린
이로 어느 학교에서도 뛰어났었다.
그러던 피터가 고등학교 때 새크라멘토에서 로스앤젤레스로 전학을 가면서 적
응하는 데 문제가 있었는지 차츰 차츰 공부나 학교 활동보다는 몇 명의 건달 같
은 친구들과 같이 노는 시간이 많아졌다. 머리도 이상하게 깎거나 물을 들이고,
학교를 빼먹기 시작하면서 학교 성적이 떨어졌는데도 걱정 하나 하지 않는 지경
에까지 이르게 되었다. 공부 잘하고 모범생으로 누구에게나 칭찬받는 두 살 위
누나와 네 살 밑의 동생 사이에서 소위 샌드위치 신세가 되어 두각을 나타내지
못하던 피터가 형제들과 집을 떠나 자립하면서 홀로서기를 해 보겠다고 집을 나
가게 되었다. 우리는 백방으로 말렸으나 한번 마음을 정한 아들은 끝까지 자기
고집을 굽히지 않고 객지생활을 시작하게 되었다. 집에서 받은 돈은 자기 혼자
보다는 친구들과 나누어 쓰는지 생각보다 자주 돈을 요구하기도 했다.
어쨌든 아들은 몇 년간을 방황하면서 청소년 때에 하고 싶은 일들을 다 해 가
며 지냈다. 자기가 하고 있는 일이 옳지 않음을 알기 때문에 어쩌다 집에 올 때
면 그는 늘 화난 얼굴에다 불평과 불만이 꽉 찬 얼굴로 시비만 일삼았다. 특히
엄마하고의 갈등은 대단히 골이 깊었다.
우리 두 내외는 우리의 부족함과 아들에게 좋은 환경과 분위기를 제공하지 못
해 아들이 이러한 어려움을 겪고 있다고 생각하였고 죄책감까지 느끼게 되었다.
우리 내외는 하나님께 매달려 기도하며 우리의 잘못을 회개하고 피터의 앞길을
바로 인도해 달라고 매일 새벽 기도하기에 이르렀다. 매일 새벽 눈물 젖은 기도
를 하였다. 부끄러워서 말도 못 꺼내던 아들 얘기를 가까운 친구들에게 하면서
기도를 부탁했다. 여러 친구들이 우리 아들을 위해 기도하기 시작했다.
그러던 중 결혼한 딸아이가 보스턴에서 딸아이를 낳았다. 조카가 태어났다는
소식에 아들은 조카를 보러 누나 집을 찾아갔다. 그 곳에서 생명의 신비로움에
경이로워하던 아들에게 매형 의석은 좋은 충고를 해 주었고, 피터는 그 말에 감
동하여 자기의 부끄러운 과거를 회개하고 거듭나게 되었다. 꿈같은 얘기다. 몇
년을 방황하던 아들이 자기 조카가 생긴 것을 기회로 하여 조카에게 자랑스러운
외삼촌은 못 될지언정 부끄러운 삼촌은 되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을 했다는 것이
다.
그는 즉시 누나 집 근처로 이사를 했고 학교에 다니면서 교회에서 유년부 아
이들을 가르치기 시작했다. 여름에 단기 선교사로 한국에 와서 우리를 찾아왔다.
옛날의 피터가 아니었다. 얼굴이 천사같이 아름답게 빛났다. 우리 부부에게 몇
번씩, “오래 참아 주셔서 고맙습니다.”라는 말을 했다. 자기를 새사람으로 만
드신 분은 예수님이기 때문에 자기는 그 고마운 마음을 이웃을 위해 나누며 봉
사해야겠다고 다짐하는 아들의 모습은 참 보기가 좋았다.
아들은 지나겨울에 교회에서 같이 반사로 수고하는 목사님의 외동따님과 결혼
을 하게 되었다. 자기를 변화시킨 주인공인 누나네 딸, 로이스와 또 새로 탄생한
둘째딸 폴린을 위해서 자기 아이 낳는 것을 보류하겠다는 얘기를 듣고 나는 또
놀랐다. 우리 내외는 아들에게 감사하고 있다. 그 애가 없었다면, 우등생으로만
있었다면, 우리가 얼마나 교만했을까. 얼마나 잘난 척하며 살고 있을까 생각하면
몸서리가 쳐질 정도로 부끄러운 일이다. 아들을 통해서 기도를 가르쳐 주시고
겸손을 훈련시켜 주신 주님께 감사 드린다. 좋은 집과 정원, 편안한 침대와 사랑
하는 강아지까지 버리고 거리의 소년같이 떠돌아다니며 먹을 것도 제대로 먹지
못하고 고생한 아들은 우리 때문에 고생한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우리를 위
해 십자가를 졌다고 생각한다.
고마운 아들아! 아빠는 너를 우리에게 보내 주시고 보살펴 주신 하나님께 항
상 감사한다.
박수 치는 사람이 많아야
아들이 다니는 학교 연극에 다녀온 어머니의 고백을 듣고 무릎을 쳤던 기억이
난다.
학교 연극에 뽑혔으니 꼭 구경을 해야 한다고 강권하는 아들의 권유를 받고
연극하는 날 저녁 학교에 갔었다는 것이다. 막이 올라가고 연극이 시작되어 한
동안이 지나도 아들은 나타나지 않더라는 것이다. 한참 후에 연극이 진행되는데,
구경꾼으로 앉아서 열심히 박수를 치는 몇 명의 아이들 중에 아들이 끼여 있더
라는 것이다. 다른 집 아이들은 멋있는 대사를 곁들여 신나게 무대를 왔다갔다
하면서 열연을 펼치는데, 아들은 대사 한마디 없이 묵묵히 앉아서 박수만 치다
가 연극이 끝이 났다는 것이다.
어머니는 내심 창피한 생각과 주연, 조연으로 등장한 아이들을 부럽게 생각하
며, `겨우 이 역을 하기 위해 지난 한 달간 매일 방과후에까지 남아 연습을 했단
말인다.` 하는 허무한 생각까지 들어 성공적으로 연극을 마치고 기뻐서 날뛰는
아들을 시큰둥한 표정으로 맞았다는 것이다. 아들은 너무 자랑스럽게 연극 끝난
것을 보고하면서, 이번 연극이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은 말없이 박수 치는 배역을
맡은 아이들의 자연스럽고 열성적인 연기 때문이라고 지도교사가 몇 번 칭찬을
하더라면서 기뻐서 어쩔 줄 모르더라는 것이다.
매일같이 학교에서 일등만 하기를 기대하고, 무엇이든지 남보다 우수하게 뽑
혀 특별 대우만 받기를 기대했던 어머니는 아들 보기가 부끄러웠고 박수 치는
구경꾼의 중요성을 새롭게 깨닫게 되었다는 얘기다.
올해(92년) 우리나라에서는 국회의원이 뽑혔고 대통령이 뽑혔다.
한 해를 보내며 수십만 명의 대학 입시생들이 뽑히지 못하는 쓴잔을 마시게
된다. 피눈물나는 노력과 각고 끝에 뽑히는 일은 장한 일이다. 그러나 뽑히지 못
한 사람들의 장함을 한껏 인정해야 겠다.
우리 사회는 모두 주연을 원하는 사람들로 꽉 차 있다. 모두 박수를 받기만
원하지 박수를 치려 하지 않고 있다. 어렸을 때 가정에서부터, 학교로부터 박수
받는 사람이 되라고만 배워 왔지, 이름 없이, 빛 없이 박수 치는 사람이 되라는
교육은 받지 못하고 자라나고 있다.
내 동창 J군은 학교 연극반에서 대사 한마디 없이 끝막에 잠옷 입고 눈 비비
며 동쪽 끝 무대에서 서쪽으로 걸어 나가기만 하는 연기를 위해 다른 배역 맡은
친구들과 함께 두 달을 같이 합숙하면서 연습을 했다. 대사 한 마디 하지 않는
배역이지만 연습시간에 한 번도 빠진 적도 늦은 적도 없다. 묵묵히 맡은 역에
열심히 연기를 잘 해냈다. 물론 연극 구경왔던 어머니와 누님들은 크게 실망했
었다는 후일담도 들었다. 연극의 전체 분위기를 위해 누군가가 꼭 해야 할 일,
그러나 아무도 원치 않는 일을 전체를 위해 묵묵히 해 나갔던 그는 지금 우리나
라 굴지의 대회사의 명망 있는 사장이다. 모두 그를 존경하고 노사 갈등이 없는
멋쟁이 회사를 이끌고 있다. 역시 큰 인물이 되었다.
새해를 맞으면 박수 치는 사람이 많이 나와 맡은 연기를 충실히 감당하는 사
회가 되어야겠다는 생각을 해 본다.
우리는 지금까지 누가 나타나서 무슨 일을 하겠다고 하면 부정적으로 끌어내
리는 평가에 열을 올려 왔다. “그 친구는 나하고 동창인데, 참 별 볼일 없는 친
구가 나왔어.” “그 친구 나하고 한동네 살았었는데 웃기고 있구먼. 참 세상에
인물도 없군. 그런 친구들이 나와서 야단이니.” 하는 등의 얘기를 무수히 들어
왔지, “그 친구 뛰어난 재주는 없어도 아주 우직할 정도로 정직하지, 일 시키면
아주 잘할 수 있을 거야.” “그 친구, 능력은 고하간에 우선 부지런한 친구지,
옆에서 조금만 도와 주면 무슨 일이든지 훌륭히 감당할 수 있을걸.” 등의 긍정
적인 반응에는 인색해 왔던 것이 사실이다.
이 사회가 돌아갈 수 있는 무대에서 박수 치는 역은 아무도 하려고 하지 않았
고 그저 너나 할 것 없이 주연만 하려고 난리를 치며 살아 온 것 같다.
이제 새해를 맞아 새로운 정부가 구성되면 새로운 기분으로 2000년대를 맞게
되는 이 시점에 우리가 진정으로 해야 할 일은 같이 살아가려는, 더불어 같이
나라를 발전시키려는 공동체 의식과 협동정신이라는 것을 깨달아야겠다.
1백여 년 전 초창기 미국 선교사 중에 제임스 게일(James Gall)이라는 선교사
가 쓴 <한국의 풍물>을 보면 우리나라의 고유한 풍습으로 가래질이 소개된다.
혼자서가 아니라 둘이 혹은 그 이상의 사람들이 유기적이고 균형잡힌 공동의 과
제를 해결하는 흥겨운 가래질은, 우리들의 협동정신과 같이 살아가는 모습을 그
대로 보여 주고 있다고 말할 수 있겠다.
지난 오랜 세월 동안 우리는 몇몇 소수의 기득권을 가진 사람들과 그 주위의
몇몇 사람들이 너무 오랜 세월 우리의 좋은 것들을 독식하려는 욕심으로부터 파
생되는 여러 가지 병적인 사회 현상들을 잘 체험해 왔다.
주연으로 뽑힌 사람은 혹은 무서운 권력을 가지고 스스로 주연이 된 사람들은
조연들을 완전히 무시하고 혹은 박수 치는 사람들을 완전히 거들떠보지도 않는
가운데 반쪽 무대 혹은 자연스럽지 못한 무대를 연출해 오면서 많은 폐단을 자
초해 왔던 것을 우리는 기억하고 있다.
이제 우리가 꿈꾸는 무대에는 주연과 조연이, 박수 치는 사람들이 모두 함께
호흡을 맞춰 보는 아름다운 무대가 되어야겠다. 박수 치는 구경꾼의 성원에 힘
입은 주연들의 신중한 연기를 기대하면서 박수 치는 구경꾼들의 중요성을 다시
한번 강조해 둔다.
우리 부부의 평등 이야기
우리 부부가 `평등부부상`을 받았다고 하니까 사람들은 모두 남편인 나에게
감사하다고, 축하한다고 인사들을 한다. 평등하게 될 때까지 부부가 같이 노력을
했기 때문일 텐데, 으레 부부간의 평등이란 말이 적용될 때는 평등하지 않아도
될 남편이 크게 양보해서 평등하게 된 것같이 느끼는 것 같다. 우리 사회의 지
난 세월의 역사요 관행 때문일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하기는 내가 현재 회장 일을 맡고 있는 `여성의 전화` 소속의 `평등 문화를 가
꾸는 남성 모임`이 있다는 사실도 남편 쪽이 평등하게 되도록 노력하는 것이 중
요하다는 것을 증명해 주고 있는 것 같다. 평등 문화를 가꾸는 여성 모임은 없
으니까.
어쨌든 부부가 평등한 가정이 바람직하고 건강하다고 하는데 크게 반대하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것 같다. 그러면 어떤 부부가 평등한 부부일까? 여성신문사의
평등부부상 심사위원들이 심각하게 고심하다가 찾아 낸 기준이 있을 것이고, 그
기준에 비슷하게 맞았다고 해서 우리 부부도 평등 부부 몇 쌍 중에 한 자리를
차지하게 되었을 것이다.
내가 정의하는 평등 부부는 위의 심사기준과 꼭 같지는 않다. 우선 평등 부부
는 민주적인 가족 분위기에서 자연발생적으로 태동한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민
주적 가정은 가족 구성원들이 민주적으로 가정 일에 참여하고 책임을 지는 일이
다. 부모를 모시고 사는 가정, 자녀를 양육하며 사는 가정, 혹은 두 내외만 살고
있는 가정이 모두 사정이 다를 수도 있겠으나, 근본적으로 구성원의 인격이 존
중되고 개인의 재주와 취미가 인정되며 가족 공동체 의식을 갖는 가정은 민주
가정이라고 말할 수 있으며, 그와 같은 가정의 핵인 부부는 평등 부부의 자격을
갖게 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것만으로 필요 충분하다고는 할 수 없겠다. 민주적 가정 안에서 평
등 부부는 몇 가지 충분한 조건을 더 갖춰야 한다. 예를 들자면 둘이서 있을 때
는 모든 것이 꼭 같이 평등하고 말할 수 없이 행복하게 보이지만, 이웃 공동체
나 소속된 조직에 한 가지 기여도 없이 둘이만 고고한 부부는 비록 평등하게 보
일지 모르지만 우리가 평등 부부로 존경하기 어렵다고 생각한다. 결국 평등 부
부가 되려면, 그 옛날 미국의 심리학자 에리히 프롬이 갈파했던 `사랑의 기술
(The Art of Loving)`중 책임감을 갖고, 상대방의 주장에 귀를 기울이며, 그의
신을 신고 그를 이해한다는 기초적인 삶의 윤곽만큼은 잡힌 사람이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내 친구들은 나를 페미니스트라고 부른다. 페미니스트의 정확한 정의가 무엇
인지 확실치는 않지만 나는 어려서부터 여자들 틈에서 극진한 대우를 받고 자라
왔기 때문에 여자들을 좋아하고, 또 받아 왔던 후한 대접을 갚으면서 살아야겠
다는 생각은 언제나 하면서 살아가고 있는 것이 틀림없는 사실이다.
열네 살, 중학교 1학년 때 6.25 사변이 일어났고, 작은어머니와 따로 사시던
아버지가 납북되어 가시고, 할아버님께서도 작은 할머님과 따로 사시게 되어, 우
리 집에는 할머님, 어머님, 하나밖에 없는 누님, 그리고 유일한 남자인 나만 남
게 되었다.
우선 세 여자들 모두가 생계를 위해서는 완전 무능력한 분들이라 우리 가정은
경제적인 위기에 놓이게 되었다. 어머님께서 우선 재봉틀 한 대를 구하셔서 아
는 사람들의 바느질을 대신하시면서 치열한 생존의 마당에 온 가족이 나서기 시
작했다. 누님은 대학진학을 포기하고 스무 살 어린 나이에 출가하게 되고, 나는
신문 돌리기, 가정교사로 가계를 도우며 공부를 계속하게 되었다. 경기고등학교
를 마치고 연세대 정외과에 무시험 특차로 진학을 하면서 대학공부 하랴 가족
생계를 책임지랴, 바쁘게 뛰어 60년에 대학을 마치고는 공군 장교로 입대하게
되었다. 장교 생활중에 받은 봉급으로는 대학원 등록금 내고 할머님, 어머님 모
시고 생활하기에 넉넉지 못해, 어머님께서 50이 넘으신 연세에 일터를 찾아 나
서시게 되었다.
나는 어서 제대해 안정된 생활을 하면서 두 어른을 모셔야 되겠다는 생각으로
백방으로 직업을 찾았으나 용이하지 않았다. 하고 싶은 공무원이나 신문기자는
마지막 문턱에서 말할 수 없는 사정으로 좌절되어, 별로 생각해 보지도 않던 유
네스코의 대학생 지도 간사가 되었다. 열심히 학생들을 지도하면서 두 어른들이
원하는 며느리, 손자며느리를 찾아보았으나 그 역시 여의치 않았다. 우선 내 직
업이 그리 인기가 있는 것이 못 되었으며, 과부의 외아들이라는 사실이 불리한
조건이 되었다. 나이가 서른 살이 되는 해에 드디어 방 두 칸짜리 주택을 구입
하게 되면서 새 식구를 맞아들여야겠다는 초조한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두 어른들은 공개적으로 나를 압박하시지는 않으셨지만 은근히 내가 어서 장
가를 들기를 원하시는 것 같았다. 드디어 이화여대 졸업반인 지금의 아내 김성
수가 나타나는 사건이 발생했다. 학생 지도자 대표로 6개월간 미국을 시찰하고
학생 지도자들을 앞에 두고 강연을 하는 날 생전 처음 김성수를 보게 되었다.
그때 그는 이대 화학과 3학년이었다. 나는 여러 모로 견디기가 힘든 이 어려운
시절에 미국에 유학가서 공부나 하고 돌아왔으면 하는 생각을 하고 있을 때였
다. 다음해 가을 YMCA 캠프장에서 4개 국제야영 캠프 봉사 활동에 참여했던
학생대표자협의회를 주관하게 되었다. 그 모임에서 1년 만에 김성수를 다시 만
나게 되어 가까이 얘기할 기회가 있었다.
미국에 있는 두 언니와 오빠가 주선해서 졸업 후에 미국에 유학을 가게 될 것
이라는 말을 들었다. 명랑하고 인상이 순하게 생겼으며 맑은 웃음이 마음에 들
었다. 그러나 선생과 학생 사이라는 것을 느끼게 되어 조심스럽게 내 얘기를 하
면서, 나처럼 조건이 좋지 않은 신랑감이지만 친구 중에 혹시 관심이 있는 여학
생이 있으면 소개하라고 부탁을 했다.
그는 매우 동정적으로 내 얘기를 잘 듣더니, 다음 주에 연락을 해 왔다. 학교
에 가서 친구들에게 공보를 했는데 한두 학생이 나타났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들을 하나씩 데리고 나오겠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나는 담담하게 하루건너 그
들과 만나서 얘기를 나누었다. 그런데 그렇게 마음이 내키지 않았다. 우선 그 친
구들은 김성수같이 이해심이 많지 않은 것 같아 보였다. 그래서 머뭇거리게 되
었다.
성수와 제일 친한 친구인 혜은이가 어느 날 혼자 찾아오더니 단도직입적으로
따져 묻는다. 내가 마음속으로 좋아하는 사람은 성수인데 공연히 친구 소개 운
운한 것 아니냐면서, 시간 끌지 말고 확실하게 밝히라는 것이었다. 나는 난처하
면서도 올 것이 왔구나 싶은 생각을 하고 웃기만 했다. 그들은 곧 성수의 부모
님께 나에 대한 얘기를 하였으며 부모님들로부터 만나자는 전갈이 왔다. 가볍게
시작한 대화가 아주 심각하게 그것도 매우 급속도로 진전되어 갔다.
성수네 어머님과 우리 어머님이 같이 만나서 서로, “철없는 아이, 잘 보아 달
라.”고 하는 부탁의 인사를 나눈 뒤, 곧바로 결혼날짜를 잡는 얘기로 들어갔다.
그렇게 해서 우리는 성수가 이대를 졸업한 2월26일로부터 열흘 되는 3월7일, 시
내 YMCA강당에서 결혼식을 올리게 되었다.
스물세 살의 새색시와 서른한 살의 노총각의 결혼은 내 주위 사람들에게는 큰
구경거리 같았다. 많은 사람이 몰렸고, 우리 결혼식에는 아침부터 비, 눈, 진눈깨
비, 여하튼 하늘에서 올 수 있는 것은 다 내렸다. 이 무렵에 나는 매 주말마다
친구들 결혼식의 사회를 맡아서 바쁘게 지낼 때였는데, 막상 나 자신의 결혼식
에는 사회자 없이 음악으로 진행하는 식으로 계획을 하였다.
축하하러 오신 많은 어른들과 친구들에게 재미있고 기억에 남는 예식으로 기
억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 우리는 하루 전날 식장에 가서 음악 연주자들과 같
이 연습을 하였다. 신랑이 먼저 입장하고 신부가 나중에 입장하는 평등하지 못
한 남녀 차별에 대해서 늘 마음이 흔쾌하지 못한 감정을 가지고 있던 나는 나의
결혼부터 남녀가 평등한 관계로 새 삶을 시작하는 모습을 보여 주어야겠다는 생
각이 들어, 결혼식에 신랑과 신부가 함께 입장하는 형식을 시도해 보았다. 신랑
인 나는 주례인 당시 연세대 총장이셨던 박대선 목사님과 손을 잡고 옆문으로
입장하고 신부는 아버지와 손을 잡고 입장하면서 현악 삼중주의 연주로 결혼예
식이 시작되었다. 사회자도 없이 음악으로 시작된 결혼예식은 약 15분간 걸렸으
나 YMCA 대강당에 모였던 많은 하객들에게 새로운 감동을 주었다. 무언가 새
롭고 세련된 결혼식이라는 얘기를 후에 자주 듣게 되었다. 폐백이니 어른들께
인사하는 순서도 파격적으로 개선해야 되겠다 해서 양가의 어른들 다모신 자리
에서 평등하게 인사를 받으시게 했다. 양가 어른들도 모두 새로운 방식이 참 좋
겠다고 말씀들 하셨다.
나는 특히 아버지가 계시지 않기 때문에 장인 어른을 양가의 아버님으로 모시
고 좌우에 어머님과 장모님을 모신 가운데 폐백을 치러, 사돈간에 가로놓인 장
벽을 뛰어 넘는 분위기를 연출했다.
드디어 삼십의 노총각이 결혼을 하게 되었고 가정을 이루게 되었다. 원래 결
혼 전부터 여자들을 모시고 유일한 남자로 살아 온 나는 비교적 능숙한 솜씨를
발휘하며 가정의 모든 여자들을 기쁘게 해 주는 일을 고안해 내기 시작했다.
아주 작은 집에 여러 명의 여자가 하루 종일 유일한 남자인 나만을 기다리고
있는 일은 사실 숨막히는 답답한 일이 될 수도 있는 것이다. 할머님, 어머님, 열
세 살 된 시골의 먼 친척 아이 등과 생활하다가 새 식구가 들어왔고, 후배 노정
언 군이 결혼선물로 가지고 온 치와와 종의 예쁜 개 `꽃님`이도 암캐였다.
1년 뒤에 첫딸 승영이를 합치니 여자 여섯에 남자 하나의 가정이 된 것이다.
여자 여섯이 저녁 때만 되면 모두 귀를 쫑긋하고나 돌아오기만 기다린다. `꽂님`
이는 벌써 구멍가게를 돌아설 때부터 내 발소리를 알아차린다. 일하는 아이 영
자도 어렸을 때부터 아버지같이 따르던 아저씨가 결혼을 했지만 새아주머니보다
훨씬 이전부터 아저씨를 잘 안다고 기득권 행세 비슷한 것을 하는 모양이다. 나
는 역할 분담을 해 주어야겠다고 생각하고, 아침 출근 때 가족 구성원들에게 숙
제를 내주고 나선다. 어머니께서는 목사님과 같이 심방을 많이 나가시게 하고,
할머님은 전보다 더 자주 따님댁과 친척댁 방문 나들이, 영자는 빨래만 하는 것
이 아니라 다림질까지 일을 맡기고, 새색시 성수는 신문을 읽고 스크랩하는 일
과 육아백과 책을 읽으며 어머니 수업하는 것, 그리고 꽃님이는 더 많이 재롱을
부리고 자는 것 등등.
세월은 흘러 우리는 유학을 떠났고, 할머님은 86세로 세상을 뜨셨고, 우리는
삼남매의 부모가 되어 어른이 되었고, 외국 생활을 오래 하다가 민주화된 고국
에 돌아와 가르치며, 방송하며 살다가 요즘은 정치권에 발을 들여놓게 되었다.
홀어머님은 지금 88세로 우리들을 위해 밤낮으로 기도해 주시며 건재하시다. 딸
은 결혼해서 딸을 낳아 우리는 외할아버지, 외할머니가 되었다.
우리는 오랜 세월을 흘어머님을 모시고 한 집에서 셋이 같이 생활했다. 문화
적 배경과 성격이 뚜렷하게 다른 세 사람의 개인이 한 지붕 아래서 같이 지냈지
만 한 번도 큰소리 내거나 다투어 본적이 없다. 참으로 감사한 일이다. 나는 자
랑스럽다.
우리 가정의 `가정 평화 유지론` 강의를 여러 모임에서 자주 소개할 기회가
있다. 우리 가정의 평화 유지의 비결은 두 가지가 있는데 그 중 하나는 각자의
역할 분담이고, 두 번째는 서로 측은히 여기는 마음가지기인 것이다. 그러면 우
리 집에서 역할 분담의 모습은 어떠한가?
우리 어머님은 부엌을 완전 장악하신다. 새벽부터 하루종일 뭘 만드시고 요리
하면서 우리들 먹이시는 것이 최고의 낙이시다. 주부인 성수는 아예 부엌은 완
전히 어머님께 전담을 부탁한다. 며느리가 얼씬거리는 것도 좋아하시지 않는 것
같다. 나머지 시간은 텃밭을 일구시고, 채소를 심고 가꾸신다. 하루종일 바쁘시
다. 전깃불 고장난 것, 수도꼭지가 고장난 것 등 뭐 돌아가다가 멈추거나 잘못된
것이 생기면 연장을 들고 나서는 것은 성수다. 자동차의 오일 가는 일, 간단한
튠업이라고 해서 스파크 플러그 나가는 것 등은 자동차 밑에 기어 들어가서 잘
고친다. 나는 못한다. 나는 그 대신 화초에 물주고, 사진틀 걸고 실내 장식하는
일 등을 맡는다. 가족들의 사진첩을 정리하고 스크랩을 하고, 아이들 어렸을 때
는 방 정리를 같이 도와 주는 일을 해 왔다. 셋이서 서로 하는 일이 뚜렷하게
분담되어 하루종일 바쁘게 살다 보면 부딪칠 필요가 없고 부딪칠 신간이 없어
좋다.
두 번째, 서로 측은히 여기는 마음을 갖는다는 것은 처음부터 그렇게 하겠다
고 계획한 것은 아니었다. 결혼 생활을 하면서 어머님을 모시고 살아가면서 셋
이 다 같이 느끼게 되어 계속 실행하고 있는 우리 삶의 한 단면이다. 우리 부부
는 일생을 혼자서 외아들의 성공을 위해 희생해 오신 어머님을 대단한 분이라고
생각하며, 당신의 삶이 요즈음 표현으로 하면 기본 인권이 유린당한 채 인내만
강요받아 오신, 참으로 억울한 삶이건만 한 번도 누구를 원망하지 않으시고 늘
감사하면서 웃고 사시는 넓은 마음의 소유자인 어머님을 측은히 여기는 것은 물
론, 우리가 잘 모셔야 하겠다는 다짐을 자주 한다. 어머님과 나는 아내 성수를
고맙게 생각한다. 우리보다 훨씬 잘 사는 가정의 막내딸로 귀염받고 자라나 아
무것도 없는 우리 가정에 시집와서 고생하면서 살아가고 있는 며느리에게 고마
운 정을 느끼며 사시는 어머님과 나는, 아내의 희생적인 노력에 감사하면서 늘
측은히 여기는 마음을 갖는다.
또한 두 고부는 나를 불쌍하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공부하기 좋아하는데, 집
안에서 돕지 못해 혼자 고학하며 공부하느라고 남들보다 학위 공부도 늦게 끝이
나서 40이 되어서야 학위를 받게 되니, 참으로 고생이 많다고 생각하며 나를 염
려하고 격려하는 두 여인의 마음을 나는 늘 느끼며 살아 왔다.
아무리 착한 사람들이라도 한 가정에 이렇게 같이 살다 보면 짜증도 나고 속
상한 일도 있고 싫증도 나게 되는 법이다. 그래서 상대방에게 섭섭한 표시가 나
게 될 것이다. 측은지심은 불교나 유교에서도 높이 평가하는 덕목인 것이다.
이런 생각을 갖게 되면 가족 구성원을 인정하게 된다. 우리 인간은 누구나 인
정받고 싶어하는 본능이 있다. 우리 집의 연세 드신 어머님이나 막내아들 할 것
없이 모두 다 인정받기를 좋아하는것 같다. 서로 인정해 주는 훈련이 가정에서
이루어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부부간에 상호 장점을 격려해 주고 부추겨 주는
일은 가정의 생동력을 제공해 주고 창조의 힘을 발하게 해 준다.
평등한 부부가 되려면 자존심 처리를 잘 해야 한다. 우리 부부는 나이 차이가
여덟 살이나 되어 결혼 초에는 다소 문화적 충격이 없지 않았다. 특히 외아들로
집안에서 칭찬만 듣고 자란 나는 단점을 지적당하고 비판을 듣는 일엔 그리 익
숙하지 못했다. 반면 성수는 오빠가 여럿 있는 가정에서 막내딸로 비교적 민주
적으로 자라났으며 집안에서 아버지나 오빠들에게 바른말하고 비판을 하던 버릇
이 있어, 결혼 후에 내게도 많은 비판을 퍼부었다. 처음에는 몹시 곤혹스럽고 괴
로웠으나 나는 자존심을 버리고 충고를 열심히 경청하는 훈련을 쌓기 시작했다.
어떤 대목은 내가 보고 배우며 자라 온 것과는 전혀 차원이 다른 것들도 있어
수긍하기가 어려웠다. 그럴 때는 대화를 통해서 서로의 생각을 확인하고 두 사
람이 만들어 가고 있는 `우리가정`은, 보편적인 다른 어느 가정이 아닌, 우리 둘
만의 새로운 가치 창조에 근거한 새 가정 문화를 창조하기 위해 깊은 대화를 나
눈다. 이런 주제로 대화를 나누다보면 어떤 때는 새벽 3시, 4시를 넘기기가 일쑤
다.
처음에 성수는 내가 말을 잘 하니까, 모든 일을 다 내 주장에 맞게 억지로라
도 논리에 맞는 궤변까지 늘어놓으면서 일방적으로 이끌어 갈 텐데 무슨 대화가
되겠냐며 토론을 꺼렸다. 심지어 아예 자포자기식으로, 한 사람이 말을 너무 잘
하니 하고 싶은 대로 하라며 토론을 기피할 때도 있었다. 그러나 나는 집요하게
그의 토론을 끌어내기 위해 다각도로 노력을 했다. 어떤 때는 비유로, 어떤 때는
서양 속담을 예로 들며 포기하지 않고 애쓴 결과, 성수는 기꺼이 대화를 통한
토론에 참여하기 시작했다. 미국에 가서 사회사업 석사 과정을 마치며 특히 상
담 이론을 배우면서 대화하는 법, 토론하는 법에 대단한 실력을 발휘하게 되어,
얼마 전부터는 여러 면에서 나의 자문 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는 중이다.
나는 아내의 장점을 주로 두둔하고 개발해 칭찬하는 일을 주로 한다. 성수는
나의 단점을 지적해 주고 개선책을 많이 제시해 준다. 나는 열심히 듣고 고쳐
나가려고 노력한다. 부부간에 꾸준한 대화가 민주적 가정을 만들어 가게 하고
평등한 부부가 되게 한다. 평등한 부부가 되기 위해선 고정관념적인 생각을 버
리고 가정에서나 사회에서나 평등하게 역할을 감당해야 할 것이다.
나는 집에서 가끔 다림질을 한다. 아내만이 하는 일이라는 관념을 깨고 싶다.
설거지도 한다. 청소도 가끔 한다. 아내 성수는 자동차 오일 가는 일과 화장실
물 안 내려가는 것들을 몸소 고친다. 둘이 다 재미있게 일하지, 억지로 하는 일
이 아니다. 즐겁고 기쁘게 하기 때문에 별로 힘이 안 든다. 그리고 기분이 좋고
자랑스럽기까지 하다.
나는 가정이나 사회나 국가나 민주주의가 자리잡아 그 토대가 확립되려면 3C
가 있어야 된다고 믿는다. 커뮤니케이션(Communication), 즉 대화, 토론이다. 커
먼센스(Commom Sense), 상식을 벗어나지 말아야 한다. 컴프로마이즈
(Commpromise), 타협이다. 무조건 타협하자는 사람은 줏대 없는 사람이라고 매
도하는 경향이 우리 사회에 만연해 있다. 그러나 실은 타협하고 절충하는 노력
은 우리 가정과 사회에 꼭 필요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오늘도 우리 부부는 상식을 벗어나지 않는 범위 내에서 가족의 계획을 서로
의논한다. 토론도 한다. 그리고 절충한다. 타협을 하기 위해서 자기의 주장을 양
보도 한다. 평등한 부부 관계가 유지되도록 노력한다.
바로 이렇게 서로 노력하는 것이 우리 부부가 평등부부상을 받게 한 이유인
것이다. 서로 사랑하고 노력하는 부부들은 모두 평등부부상을 받을 자격이 있는
것이 아닌가 하고 생각해 본다.
세상의 반은 여자
`남자와 여자가 평등하게 대우받는 사회`, 그래서 이 땅에 생명을 받고 태어난
사람들이 남자이기 때문에 혹은 여자로 태어났기 때문에 부당한 대우를 받는 억
울한 일이 없는 사회를 바라는 사람들의 모임이 있다. `평등 문화를 가꾸는 남성
모임`이 바로 그것이다.
몇 년 전부터 우리 사회에는 `성폭력`이니 `성희롱`이니 하는 말들이 언론을
통해 등장하면서 `성폭력상담소`와 `여성의 전화`등의 기관이 생겨나서 억울하게
성폭력을 당하는 여인들, 성희롱을 당하는 여성들을 도와 그들이 피해를 극복하
고 건강한 삶을 되찾을 수 있게 하는 일들을 하고 있다. 이와 같은 여성들의 문
제는 남자들이 문제를 야기시키는 주체이기 때문에 남자들의 협력이 없이는 문
제 해결이 불가능하다고 생각되어, 우리 사회에 남녀평등 문화를 확산시겨, 성차
별에서 야기되는 부당한 인권침해를 줄이자는 것이 `평등 문화...`모임의 참 뜻이
다. 나는 창립 때부터 이 모임의 회장으로 평등 문화 확산을 위한 연구, 세미나,
교양 강좌 등을 벌이고 있는 중이다. 나는 일생을 홀어머니를 모시고 살아 오면
서 아주 어려서부터 여자들로 둘러싸인 분위기에서 살아 왔다. 할머니와 어머니
그리고 고모와 누이는 모두 나를 지극히 위해 아껴주는 여인들이었다. 실로 표
현하기 어려울 정도의 사랑을 독차지하며 어린 시절을 보내면서, 여인들은 남자
를 위한 액세서리나 조연 같은 존재이지 독자적인 인권을 소유한 독립된 개체라
는 것은 상상할 수조차 없었다.
1956년 연세대학교에 입학하여 처음으로 남녀공학의 분위기 속에서 공부를 하
게 되었다. 처음으로 여자도 대학생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신기하게 느끼면서 몇
명 안되는 여학생들을 호기심과 신비함으로 바라모면서 대학 생활을 시작하였
다. 동급생 여학생들 몇 후배 여학생들과 많은 얘기를 나누며 처음으로 여성들
도 지성적인 토론과 대화를 나눌 수 있는 남성들과 평등한 자격을 갖춘 인격체
라는 것을 직접 체험할 수 있었다.
당시 연세대에는 미국에서 공부를 한 교수님들이 여러분 계셨다. 일찍이 기독
교의 영향과 서양의 문화를 익히셨던 교수님들의 남녀평등 개념에 관한 가르침
은 신기하고도 신선한 충격으로 지극히 촌스러웠던 나를 깨우쳐 주기 시작하였
다.
용재 백낙준 총장님, 외솔 최현배 부총장님, 정석해, 김윤경 교수님들의 가르
침은 일생 동안 살아 오면서 내 가슴에 부각된 이미지로 남아 삶을 지탱하고 있
다.
이분들의 가르침 중에서도 제일 크고 소중한 것을 구태여 지적한다면 나는 서
슴지 않고 진리, 자유, 평등의 개념이라고 말할 수 있겠다. 이것은 모교 연세의
교훈이기도 하다. 자유인이 되어 남을 차별하지 않고 더불어 같이 공생하는 삶
은 진리를 통해서만이 가능하다는 가르침이다. 진리가 우리를 자유롭게 한다는
것이다. “진리는 사랑이다. 진리를 사랑하는 연세인은 많은 것을 사랑해야 한
다. 자신을 사랑해야 하며 자신을 존중해야 한다. 여기서부터 참 사랑이 시작된
다.” 어느 날 기도회 시간에 백 총장의 설교 말씀 중 지금도 기억에 생생한 대
목이다.
“여학생들 괴롭히지 마세요. 그들을 여러분의 누이동생 이라고 생각해 보세
요. 그래도 그들을 놀리고 괴롭힐 수 있겠어요?” 최현배 부총장님의 어느 날
아침 훈시 말씀이다. 나는 지금도 이 말씀을 정확하게 기억하고 있다.
평등 문화를 가꾸는 남성 모임의 시작도 실은 매맞는 여성들을 위해 보금자리
요 피난처를 만들어 주자는 취지의 모금 만찬 행사에 참석했다가 억울하게 매맞
는 여성의 사례를 듣고 너무나 부끄러운 마음에서 출발했다. 그 때 외솔과 용재
선생님들의 가르침이 불현듯 내 가슴과 머리를 두드리며, 마치 “당장 꺼져 가
는 귀한 목숨이 바로 옆에 있는데 무엇을 보고 있느냐?” 하는 거의 원망에 가
까운 채근을 하시는 것 같은 느낌을 갖게 되었다. 그래서 곧 이 모임을 시작하
면서 이 땅에서 남녀간의 평등 문화를 가꾸는 일부터 착수하기로 작정했던 것이
다. 내가 먼저 마음의 문을 열고 열정적으로 대하면 상대방도 마음의 문을 열게
된다. 나는 캠퍼스 커플 동문을 무척 부러워한다. 연세 동산에서 진리를 배우고
평등을 배워 일생 동안 평등 문화를 주장하며 살아가는 평등 남편들을 캠퍼스에
서 만나는 일은 아주 귀한 일일 것이다. 모교가 내게 심어 준 이 평등사상을 전
파하는 일을 죽을 때까지 계속해야겠다.
나의 인권사랑과 이철수 사건
이철수 사건의 프롤로그
가난하기 짝이 없고 슬픈 일이 많아도, 나서 자란 곳에서 그냥 조상의 무덤을
지키면서 눌러 살다가 죽어 가는 것이 우리들 선조들의 살아가는 방법이었다.
그런데 지금 전세계에는 우리 인구의 10분의 1이 넘는 동포들이 퍼져 살아가고
있다. 놀라운 숫자가 조국을 떠나 새 땅에서 슬기롭게 뿌리를 내리려고 갖은 고
생을 다하며 살아가고 있는 중이다.
우리나라의 운명과 여러 모로 깊은 관계가 있는 미국에만도 약 1백80만이 넘
는 동포가 살고 있는데, 새 땅에서 사람 대접받고 살아가기 위한 그들의 사연
은 눈물겹기 그지없다. 그 중에서도 새나라의 문물을 잘 모르고 언어의 불통 때
문에 생사람이 살인자가 되어 사형 선고를 받고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기 직전에
동포들의 눈물겨운 구명 노력에 힘입어 사형수가 누명을 벗고 자유를 찾게 된
얘기가 있다.
벌써 수십 년 전의 일이다. 죄 없는 우리 동포 이철수는 억울하게 살인자의
누명을 쓰고 10년 2개월의 옥고를 치렀고, 동포들은 20여만 달러의 변호 성금을
거두어 6년 동안 다섯 번의 재판을 통해 그를 구해 냈다.
나는 처음부터 구명위원회의 위원장으로 자원봉사 변호사 6년을 미친 사람같
이 뛰어다니며 철수 구명운동에 앞장을 섰다. 억울한 동포의 누명을 벗겨 주고,
영어도 짧고 미국 이민 역사도 짧지만, 옳다고 주장하는 뼈대있는 사람들이 미
국에 와서 살고 있다는 것을 천명함으로 앞으로 돈 없고 영어 못하는 사람들의
기본 인권에 정부 당국이 더 깊은 이해를 가져 주기를 목적했던 구명운동은, 그
목적을 달성했기 때문에 철수가 석방되면서 후원회는 해산했고 변호 성금으로
모금되었던 기금 중 나머지는 미국 땅에서 주류 사회에 실력 있게 진출하려는
젊은 층의 교육을 돕기 위해 한미연합회(Korea American Coalition)에 기부하였
다.
십여 년 전 미국에서 벌였던 구명운동에 본국의 관심과 성원도 대단했던 연유
로 여러 사람들로부터 철수 사건에 관해 질문을 많이 받게 되었으며, 또 상당한
사람들이 그 사실을 정리해서 일반에게 알리는 것이 미국에 살고 있는 동포들에
게나 본국 동포에게 좋은 교훈이 될 것 같다고 꼭 책으로 엮어야 된다고 야단들
이었다.
그러나 나는 글재주도 없을 뿐더러 자칫 잘못하여 두 가지 큰 오해에 말려들
염려가 되어 주저하면서 몇 년을 끌어 왔다.
두 가지 오해란 6년간 무보수로 봉사하면서 내 집까지 보석금으로 저당잡혀
가며 이 일에 몰두했던 나의 순수한 동기가 잘못 이해되지나 않을까 하는 못난
생각이고, 또 하나는 자칫 잘못하면 미국 사법 당국이나 미국 정부를 사람을 무
시하는 형편없는 나라로 비판하려는 목적으로 비쳐지지나 않을까 하는 걱정이었
다. 사실은 미국식 법률 교육이 검토되고 있는 이 때에 돈보다 참 사람의 편에
서서 애쓰는 미국의 변호사들, 양심 있는 배심원들, 판사들의 면모는 미국의 자
랑인 동시에 우리가 꼭 배워야 할 대상이라고 생각한다.
실은 현재 사실 그대로 기록을 남겨 이 사건이 주는 교훈을 찾아보는 일이 중
요하다고 생각되어 글재주도 없는 내가 소설도 아니고 수필도 아닌 그리고 자서
전도 아닌 사건 보고서 같은 양식으로 사실만 기록하여 발표하려고 준비중에 있
다.
특히 이 긴 재판투쟁에 한 번도 얼굴 찌푸리지 않으시고 방청 교포들이 먹을
김밥과 떡을 밤늦게 만드시면 제1호 후원회원이 돼 주신 90을 바라보는 우리 홀
어머님, 재판정에 사람들 수송을 우해 매일 밤 동네 사람들에게 전화하며 자동
차 운전할 사람을 찾느라 수고하면서도 늘 기쁘고 감사하게 도와 준 나의 영원
한 반려자 아내 성수, 그리고 밤낮 밖으로 돌아다니며, 철수에게 아빠를 빼앗겼
다고 농담까지 하던 삼남매에게 감사를 하며 재판에 얽힌 몇 가지 에피소드를
소개한다.
약 1백 년 전부터 미주 땅에 정착하여 이민 생활을 시작했던 우리 한민족은
지금 50개주 구석구석에서 슬기롭게 뿌리를 내리며 여러 지역사회에서 모범적인
이민으로 인정을 받으며 살아가고 있는 중이다. 이민 1백 년사에 세상을 놀라게
한 재판이 둘 있었는데, 하나는 1930년의 장인환 열사 사건이고 두 번째가 이철
수 재판 사건이다.
미국 재판정에 울려 퍼진 애국가
1982년 9월 3일 저녁 8시 15분
미국 샌프란시스코 형사지법 제27호 법정
재판장: 로버트 도시(Robert Dorsee) 판사
저녁 8시가 지나면서 밀폐된 평결실에서 사흘간이나 실랑이들 벌여 오고 있던
열두 명의 배심원들이 드디어 합의에 도달했다는 뉴스가 새어 나오기 시작했다.
사실상 엊그제 9월 1일 토니 세라(Tony Serra)변호사의 마지막 변론을 끝으로
평결실로 인도된 배심원들은 이틀이 지나가도록 유.무죄의 결정을 내리지 못한
채 오늘 3일째로 접어들었던 것이다. 내일부터 시작되는 노동절 연휴를 집에 돌
아가서 가족들과 같이 보내고 싶은 심정은 배심원들 모두가 같을 것 같아 이 황
금 연휴가 시작되는 오늘 저녁때까지는 끝장을 낼 것이라는 짐작을 하고 있었던
터였다.
오늘도 예외 없이 120여 명의 교포 방청객들이 몰려와서, 형사지법 제27호 법
정 앞 복도에서 서성거리는 사람, 아예 복도에 털썩 주저 앉아 있는 사람, 그리
고 몇 년을 끌어 오면서 엎치락뒤치락하며 재판을 계속하고 있는 이 사건의 귀
추가 주목되어 몰려든 신문기자들, 방송국 기자들, 검찰청과 법원의 직원들로 27
호 법정문 앞은 작은 시장터 같기도 한 광경을 이루고 있었다.
아침부터 몰려든 우리 교포 방청객들은 점심과 저녁을 법원 구내식당에서 적
당히 간단하게 때우고 오늘은 어쨌든 끝장이 날 것이니 끝까지 지켜보자고 나의
말을 믿고 버티고 기다리는 중이었다. 나는 입맛이 없어서 저녁도 거른 채, 내
얼굴만 쳐다보며 이것저것 물어 오는 교포들에게 대꾸하면서, 피곤한 내색을 감
추고 버티고 평결 결과를 기다리고 있었다.
8시가 지나면서 복도 주변이 술렁거리기 시작하더니, 곧 법정이 개정될 예정
이니 정숙하게 입장해 달라는 법원 직원의 안내가 있었다. 모두들 긴장과 호기
심으로 가득 찬 심각한 얼굴을 하고 조용조용히 법정 안으로 들어갔다.
방청석 맨 앞줄에, 송정률 목사님(샌프란시스코 감리교회의 원로목사님), 천주
교회의 한상호 신부님, 그리고 샌프란시스코 여래사의 설조 주지스님(현 불국사
주지)이 나란히 손을 잡고 앉았고, 그 뒤로 치마 저고리의 할머니, 할아버지들,
그리고 블루진을 입은 교포 2세, 1.5세대 청년들, 흑인, 멕시코인, 일본인, 중국인,
재판 후원회원들이 1백2십 석을 꽉 메웠다. 6년 이상을 끌어온 이 재판의 마지
막 결정적 순간을 지켜보겠다는 우리고 교포들과 후원회원들이었다.
카메라를 둘러맨 보도진들은 법정 밖에서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다. 27호 법정
은 조용했다. 방청객들의 면면을 훑어보니 피곤하고 지친 표정들이었다. 나는 조
용히 방청석 맨 앞줄로 나가서 교포들을 향해 조용히 그러나 심각하게 당부의
말을 했다.
“여러분 드디어 우리가 6년 동안 싸워 왔던 이 재판의 결판이 가까이 온 것
같습니다. 이제 배심원들이 만장일치로 합의를 본 것 같습니다. 판사님이 입장하
면 배심원 대표가 평결 결과를 발표하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 그 동안 너무 고
생이 많으셨습니다. 감사합니다. 오늘 밤, 혹시 우리가 지더라도 우리는 고등법
원, 대법원에 가서 이 재판을 뒤집을 수가 있습니다. 그러니 여러분들께서는 이
성을 잃지 마시고 끝까지 정숙하여 미국 법정 질서를 지켜주시기 바랍니다. 우
리가 오늘밤, 무죄 평결을 받아 내게 되면 철수의 석방은 시간 문제입니다. 그러
나 우리가 승리했다고 법정 질서를 문란하게 하면 안 되겠으니 끝까지 점잖게
교양인답게 문화민족의 긍지를 보여 주셔야 되겠습니다. 승리를 위한 축하 파티
는 이 옆 한일관에서 있을 예정이니 끝까지 질서를 지켜 주십시오. 아셨죠?”
모두들 고개를 끄덕이며 알아들었다는 표정을 했다. 나는 공연히 마음이 설레
고 어떻게 할 수가 없었다. 또 다시 일어나서 방청석을 향했다.
“여러분, 이제 잠시만 버텨 주십시오. 우리 하나님께서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
고 이 땅에서 억울하게 눌려 사는 사람들에게 희망의 표적을 곧 보여 주실 것입
니다. 여러분, 한 달이 넘도록 고생 많이 하셨습니다.”
나는 공연히 목소리에 힘이 빠지면서 이 재판에서 또 지게 된다면 또 얼마나
많은 애를 써야 하며 얼마나 시간이 걸려야 철수가 석방이 될 수 있을까 하는
걱정이 순간적으로 스쳐 가는 것을 억지로 참고 태연한 척 앉아 있었다.
드디어 법원 서기가 들어와서 판사의 입장을 선언했고 도시 판사는 배심원들
의 입장을 명했다. 법정의 왼쪽 문을 통해 배심원 대표 존슨(Johnson)씨를 선두
로 하여 열한 명의 배심원이 천천히 그러나 의미심장하게 법정으로 들어오고 있
었다. 나는 이들의 걸음걸이와 인상을 훑어보면서 다소 안도의 숨을 쉴 수 있었
다. 보통 사형 재판의 경우 배심원들이 평결을 마치고 법정으로 입장할 때 그들
의 인상으로 유,무죄를 짐작할 수가 있다. 무죄 평결로 합의를 보고 입장하는 표
정과 유죄로 합의하고 입장하는 태도가 전혀 차이가 있는 것이 수년 동안 재판
을 지켜본 나의 경험이다. 무죄 평결로 합의가 이루어졌을 때는 그들의 걸음걸
이가 가볍고 입장하면서 방청석 쪽을 쳐다보는 것이 대개의 경우이다. 유죄 평
결시는 그 반대이다. 걸음걸이가 무겁고, 머리를 숙이고 걷거나 앞만 보고 걷지,
방청석 쪽은 절대로 쳐다볼 생각을 않는 것이 보통이다.
배심원 대표인 존슨 씨는 우리 쪽을 자주 쳐다보며 나를 찾는 것 같았다. 약
간 웃는 듯한 얼굴이나 벌겋게 상기된 얼굴이었다. 그는 내가 철수 재판 투쟁위
원회 회장으로 이 재판 지원에 앞장 서 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는 처지다. 한
달여 걸린 이 재판 중에 매일같이 법정에서 얼굴을 서로 보아 왔고 눈도 마주쳤
으나, 한 번도 인사나 대화는 없었다. 그러나 나는 그가 어떤 사람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는 처지였다. 공연히 가슴이 두근거리며 흥분되기 시작했다. 내가 지
금 보고 느낀 것들이 피곤에 지쳐 있는 내가 너무 이 재판 승소에 골똘하다 혼
자 느끼는 공상 같은 것은 아닌지 의심이 가기 시작하면서 다리가 떨리기 시작
하는 것이었다. 이 때 추숙남 변호사가 내 옆으로 오더니 내 손을 꼭 잡고 의미
있는 웃음을 짓는다.
한 달 내내 법정에서 변호사들과 방청객들의 뒷바라지를 감당해 온 햇병아리
변호사 추숙남이다. 일찍이 어린 나이게 흑인 병사와 결혼한 언니를 따라 이민
와서 갖은 설움과 어려움을 이겨 내며, 이철수 후원회원이 되어 법과 대학에 관
심을 갖게 되엇고 금년에 UCLA법대를 졸업한 교포 여성이다.
다시 정신을 차리고 배심원석을 바라보았다. 우리가 이긴 것이 틀림없는 것
같았다. 자신이 있었다. 배심원들의 면면을 훑어봤다. 아까운 청년을 교수대에
보내기로 작정한 사람들이 분명 아니었다. 나는 다시 무죄 평결이 선언된 다음
에는 어떻게 해야 하나, 두 번째 옥중 살인 사건에 관한 재판 전략에 대해, 신문
방송 기자들에게 어떻게 브리핑을 해야 하나 등 급히 해야 할 일들이 머릿속을
스쳐 가고 있는 것을 일부러 지워 버리려고 머리를 좌우로 흔들었다. 우선 지금
일단 이겨야 한다. 이기고 보자, 그 다음은 또 해결의 실마리가 풀리겠지.
도시 판사의 음성이 들려 왔다.
“배심원 여러분, 드디어 전원 일치 합의 평결을 보신 것 같은데, 맞습니까?”
“네, 드디어 합의를 보았습니다.” 존슨 배심원 대표의 대답이었다.
“평결 결정문을 서기에게 전해 주십시오.”
“네, 그렇게 하겠습니다.”
존슨 배심원 대표는 접은 종이를 서기에게 전해 주었고 서기는 접은 종이를
그대로 판사에게 넘겨 준다. 나는 종이를 펴서 평결 결정문을 읽고 있는 도시
판사의 표정을 통해 조금 전의 나의 확신을 재확인하려 했으나 판사의 얼굴은
너무나 무표정이었다. 감을 잡을 수가 없다. 다시 초조해지기 시작했다. 판사가
혼자 훑어 본 평결문을 다시 서기에게 건네 주자, 서기는 그것을 받아 들고 낭
독하기 시작했다. 서기는 얼굴은 벌겋게 상기되었으며, 종이를 잡은 손이 바르르
떨리고 있는 것까지 역력히 볼 수 있을 정도로 긴장해 있었다. 피고 이철수가
무슨 죄목으로 언제 어디서 검거, 구속, 재판을 받고 어디서 지내다가 재심이 허
락되어 재판지를 바꿔서 이곳 법정에서 재심을 한 결과, 배심원 전원은 다음과
같이 평결하기에 이르렀다는 내용을 모두 읽기 때문이었다. 그런 다음 말미에,
“피고 이철수에게 배심원 전원 합의로 무죄를 평결함.”으로 끝났다.
반수 이상의 방청객들은 영어를 모르는 이민 교포들이었기 때문에 눈치만 살
피고 있다가 일제히 나를 쳐다보는 것이 아닌가? 분명 무죄 판결이었다.
두 달 가량 진행된 이번 재판은 샌프란시스코의 형사지법 제27호 법정에서 열
렸는데, 이곳은 재판장과 법원 서기, 속기사, 배심원 열 두 명과 후보 배심원 세
명이 법원 정면에 앉게 되어 있고, 방탄 유리로 칸을 막은 후에 유리벽을 통하
여 재판을 방청할 수 있도록 방청석이 마련되어 있었다. 방청석은 유리벽을 통
해서 모든 재판 진행 상황을 볼 수 있고, 스피커를 통해서 말소리도 들을 수 있
었으나, 재판정은 실제로는 독립된 옆방같이 꾸며져 있었다. 가끔 흉악범을 재판
하는 재판정에서 불법으로 무기를 가지고 들어온 피고의 동료들이나 조직범죄
패거리들이 총을 쏘거나 재판을 방해하는 일들이 벌어지자 법원측에서는 살인
재판이나 강력범 재판에는 이 특수 법정을 사용하게 된 것이다. 애당초 검사가
이 재판정을 건의했을 때 우리는 철수는 위험한 인물이 아니며 무슨 위험이 있
겠느냐고 강하게 반대한 바 있으나, 법원에서는 검찰의 뜻을 들어 주게 되어 이
재판정에서 재판을 했던 것이다.
그 순간 나는 방청하는 교포들과 유리벽 너머 이쪽에 앉아 있다가 무죄 판결
을 받게 된 것이다. 불과 몇 분 전에 끝까지 정숙해 달라고 신신 당부했던 내가
나도 모르게 벌떡 일어나서
“여러분 이겼습니다. 이제 끝났습니다.”라고 소리를 지르며, 맨 앞줄에 앉아
기도하는 자세로 앉아 계신 송정률 목사님, 한상호 신부님, 설조 스님의 손을 잡
고, “목사님, 신부님, 스님 고맙습니다. 드디어 이겼습니다.” 하고 소리쳤다.
아직 재판이 다 끝나지도 않았고 또 교포 방청객들을 선도해야 할 내가 먼저
흥분하여 실수를 하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 아차 하는데, 도시 판사의 음성이
들려 왔다.
“여러분 조용히 하십시오. 본 재판장은 배심원 전원의 평결에 근거하여 피고
인 이철수가 무죄임을 선언합니다.”
바로 이 `무죄` 판결을 위해 지난 몇 년간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시간과 재주
와 재물을 받쳐 애써 왔던가? `무죄` 이 한마디, 그것이 전부였다.
이 때, 피고석에 앉아 있던 철수가 벌떡 일어났다.
“재판장님 제가 한 말씀 해도 좋겠습니까?”
철수 눈에서는 이미 빗물처럼 눈물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재판장은 고개를 끄
덕였다.
“여러분 감사합니다.”
한마디히고 눈물이 복받쳐 말을 잇지 못하다가 이렇게 말했다.
“여러분 저는 처음부터 죄가 없었습니다. 오늘의 이 승리는 제가 죄가 없으
니까 당연한 일이겠으나, 여러분들의 도움이 없었다면 불가능했을 것입니다. 우
리의 권리와 자유는 지킬 수 있는 힘이 있어야 지켜지는데, 저같이 힘없는 사람
을 위해서 여러분이 힘써 주셔서 정의를 구현했습니다. 여러분, 다시는 이 땅에
서 죄 없는 사람을 죽여 없애는 이런 억울한 일은 없어야 되겠습니다. 여러분,
여러분의 승리를 축하합니다.”
눈물, 콧물이 뒤범벅이 되어 울부짖듯이, 마치 법철학 강의를 하듯이 외치던
철수가 검사를 뚫어지게 쏘아보더니, 손을 번쩍 들어 그를 지적하면서,
“그런데, 여러분, 저 검사와 같이 자기 업적만 생각하고, 억울한 사람...” 하
는데 도시 판사나, “이철수 씨 그만, 그만하면 됐습니다.”하면서 철수의 말을
막았으며, 철수는 즉시 얘기를 끝냈으나 무서운 눈으로 검사를 계속 째려보았다.
검사는 고개를 숙이고 앉았다가 판사가 퇴장 선언을 하자마자 뒤도 안 돌아보고
급히 퇴장해 버렸다.
이제 정말 끝난 것이다. 미국 법정의 질서를 지켜 달라고 호소했던 장본인인
내가 또 다시 “이겼다.”를 외쳤다. 모두가 같이 “이겼다.”를 외쳤다. 1백2십
명이 모두 다 끌어안고 울며 뺨을 맞추었다. “이겼다.”를 외치다가 나는 송 목
사님께 감사 기도를 부탁 드렸다.
“여러분, 하나님께 감사의 기도를 드립시다.”
모두 울면서 기도를 드렸다. 기도가 끝나자 샌프란시스코 한인회 이돈웅 회장
이 애국가를 선창했고 우리는 모두 애국가를 불렀다.
철수 어머니는 나를 부둥켜안고 법정 바닥에 털썩 주저앉아 대성통곡이다. 힘
들게 살아 온 한국과 미국에서의 생활, 슬프고 힘들었던 일생에다 살인자의 어
머니라는 불명예가 벗겨진다는 기쁨과 감격이 뒤범벅이 된 울음인 것 같다. 교
포 방청객 모두 껴안고 악수하며, 얼굴을 비비며, 그야말로 배달의 피로 한 덩어
리가 된 것 같은 감동 어린 장면이었다. 교포1세, 2세도 없고, 일본 사람, 중국
사람, 흰 사람, 검은 사람, 남녀노소가 따로 없는 것 같다.
텔레비전 방송국과 신문기자들이 몰려와서 인터뷰를 하느라고 야단법석이다.
한국일보 샌프란시스코 지사의 김한길 기자(현 국민회의 의원)를 비롯해서 교포
신문 기자들이 전화통에 매달려 본사에 기사를 송고하느라고 정신이 없다.
보통 형사사건 피의자가 무죄 판결을 받게 되면 즉시 석방이 되는 것이나, 철
수의 경우는 또 한 가지 옥중 살인 사건 재판이 계류중이라 무죄 선고를 받고도
법정에서 한 발짝도 나오지 못하고 우리들과 눈인사만 나누고 다시 끌려 들어가
는 것이다. 다른 날, 재판정에서 수갑을 차고 교도관들에게 끌려 들어갈 때는 몹
시 마음이 아팠으나, 오늘은 괜찮았다. 조금만 참고 기다리자, 우리와 같이 햇빛
을 볼 날이 곧 올 것이다. 몸조심하고 조금만 기다려라. 방탄 유리벽을 사이에
두고 그간 입놀림으로 통화를 해 왔기 때문에 서로 잘 통했다. 충분히 대화가
가능했다. 그는 머리를 끄덕였고 크게 웃으며 손도 들어 V자를 지어 보였다.
복도에서는 아직도 울며, 웃으며 야단들이다. 시계는 벌써 10시를 가리킨다.
그러니까 무죄 선고가 난 후 한 시간이 넘도록 울고 웃고 법석을 친 셈이다.
오늘은 아침부터 27호 법정 밖 복도는 우리들이 대절하다시피 하루종일 웅성
거리며, 초조하게 기다리며 담배만 피워 대서 벽에 붙어 있는 재떨이가 넘쳐서
밑으로 재가 떨어지고 바닥도 지저분하기 짝이 없었다. 우리는 이웃에 있는 한
일관에 가서 승전 축하 파티를 하기 전에 법원 복도 청소 작업에 들어갔다. 복
도 전체를 다니며 담배꽁초를 줍고 재를 쓸었다. 재떨이 청소하는 것을
NBC-TV 기자가 카메라를 들이대고는 계속 찍기 시작했다.
법원에서 4, 5블록 떨어진 곳에 있는 한국 음식점, 한일관으로 몰려간 동포들
은 법정에서의 감격을 계속 뿜어 내면서 울고 또 웃고, 또 울고, 계속 야단들이
다.
어느 틈에 축하 칵테일과 샴페인이 준비되어 드디어 승전 축하 샴페인을 터트
리고 건배를 해야 할 텐데 정작 오늘의 수훈 공로자들인 변호팀과 철수는 보이
지 않는다. 샌프란시스코 한인회 이돈웅 회장, 인력개발원의 홍순경 이사장, 왕
기주 여래사 신도회장, 홍순구 씨 등이 앞에 나와서 교포들에게 변호팀이 도착
할 때까지 조금 기다려 달라고 당부한다.
사실 나는 법정에서 구치소로 끌려간 철수를 면회하러 변호사팀과 구치소로
갔었기 때문에 축하 파티장에는 좀 늦게 도착했던 것이다. 구치소에서 나는 철
수에게 몸조심하라는 당부를 하고 지금부터가 제일 중요한 때이니 경거망동하지
말고 침착하게 밖으로 나올 때까지 절대 감정적으로 흥분하면 안 된다고 당부하
고, 이제 샌퀸틴 형무소에서 스턱턴 카운티 구치소로 이감되어, 옥중 살인 재판
건을 준비해야 된다고 알려 주었다.
이 때 동아일보 샌프란시스코 지사장 정선희 씨가 재빠르게 변호팀에 끼여 간
수의 눈을 피해 면회실에 들어와 철수와 몇 마디 인터뷰를 하는 것이다.
정선희 지사장: 지금 심정이 어떤가?
이철수: 오늘의 무죄 판결은 교포 여러분들의 뜨거운 성원 때문이니, 감사의
마음을 교포들에게 꼭 전해 주십시오.
정선희 지사장: 법정에서 당당히 검사를 비난했는데...
이철수: 그랬다. 결창 당국은 진범을 알면서도 나를 붙잡아 무고하게 9년간 옥
살이를 시켰다. 사람의 희생을 가볍게 아는 부도덕한 사람들을 질타하고 싶었다.
정선희 지사장: 앞으로 어떻게 될 것 같나?
이철수: 두 번째 사건도 결단코 이기고 말겠다. 서두르지 않고 끈기 있게 기다
려 꼭 나가서 여러분들의 손을 잡게 될 것이다. 계속 성원해 주실 것을 당부 드
린다.
인터뷰하는 것을 옆에서 지켜보면서, 5, 6년을 끈 이철수 재판이 우리 교포 신
문사 기자들의 취재와 인터뷰 기법을 훈련하는 데에 크게 기여하는구나 하는 생
각을 혼자 해 보았다.
우리 변호사 일행은 드디어 승전 축하 파티를 열리고 있는 한일관에 도착했
다. 기다리고 있던 1백여 명의 교포들은 우리가 들어가자마자 기다렸다는 듯이
샴페인을 머리 위에서부터 마구 부어 대는 것이었다.
나는 며칠째 집에도 못 가고 법원 근처에서 자면서 재판을 진두 지휘하느라고
양복도 못 갈아입고 단벌로 며칠을 지냈지만, 샴페인으로 옷 좀 젖는 것은 아무
문제도 아니었다. 벌거벗으라고 해도 벗을 기분이다. 머리로부터 온몸에 샴페인
냄새가 푹 배였다. 이럴 줄 알았으면 조금 전에 집에 전화해서 축하 파티에 참
석하라고 집사람을 초청할 때 옷 좀 가지고 오라고 할걸 하는 생각도 났으나 이
젠 소용없는 일이었다. 집사람은 이미 한 시간쯤 전에 집을 떠났을 것이고 약
20분 후면 이곳에 도착할 테니 무슨 소용이 있겠나.
홍순경 씨가 장내를 정리하면서 나를 소개한다. 나는 책상에 올라가서 다음과
같이 건배 제의를 했다.
“오늘이 있기까지 철수를 위해 도와 주신 교포 여러분께 철수후원회를 대신
해서 심심한 감사를 드립니다. 그리고 이 재판을 위해 애써 주신 세라 변호사님,
핼론 변호사님, 톰슨 탐정, 여러 자원봉사 변호사님들께 감사를 드립니다. 무엇
보다도 샌프란시스코에 교양 있고 양심있는 배심원들에게 존경을 보냅니다. 이
철수 군의 무죄가 밝혀져 나는 내 일생에 가장 큰 기쁨을 느꼈습니다. 이번 구
명운동을 통해서 이것은 인권 투쟁이 한 사람의 힘으로 되는 것이 아니고 여러
사람들의 저력으로만 가능하다는 것을 새삼 느꼈습니다. 이번 사건을 통해서 자
유 시민들이 다시는 불공평한 재판을 받지 않게 되는 계기가 되었으면 합니다.
이번 승리는 우리 60만 재미 교포들이 슬기롭게 이 땅에 뿌리를 내릴 수 있는
전환점이 되었다고 봅니다. 이제 우리 오늘을 위하여, 정의를 사랑하는 온 세계
의 친구들을 위해 축배를 제의합니다. 자 다같이 건배!”
다소 긴 건배 제의였으나 장내는 조용했고 계속 흐느끼는 소리가 들려 오고
있었다.
이 때 새크라멘토에서 달려온 아내가 들어서는 것이 보였다. 랑코 야마다 변
호사와 추숙남 변호사가 뛰어가 얼싸 안고 통곡이다.
“여러분, 잠깐만, 오늘이 있기까지 5년 이상을 자기 집까지 잡혀가면서 뚝심
있게 구명운동을 진두 지휘해 오신 유재건 회장의 부인이신 김성수 여사가 지금
막 도착하셨습니다. 재판 때마다 방청객들 뒷바라지를 위해 자동차 배차, 떡 만
들기, 그의 내조가 없었다면 오늘의 유재건 회장이 어떻게 있었겠습니까? 다시
한번 유 회장님 내외분을 위해 뜨거운 박수를 부탁 드립니다.”
홍순구 씨의 제안이었다. 모두 우레와 같은 박수로 우리 내외를 격려해 주었
다. 5년 동안 철수 구명으로 눈을 뜨고 철수 후원으로 잠자리에 들면서 받았던
슬픔과 괴로움, 억울한 사연들이 말끔히 씻기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나는 박수
치는 동포들에게 손짓으로 그만하라는 표시를 하면서, “여러분, 자 한 잔씩 드
십시오. 할 얘기가 너무 많습니다. 밤이 새도록 얘기하고 노래하고, 그동안 못했
던 모든 것을 다 털어놓읍시다. 오늘 이 자리가 있기까지, 사실 저의 내외는 앞
장서서 뛰어 다녀서 눈에 띄었던 것이지, 앞에 나타나지 않고 뒤에서 도우신 많
은 사람들이 있었다는 것을 말씀 드리고 싶습니다. 여러분 모두들같이, 재판 때
마다 끈질기게 방청하시며 재판을 지휘해 주신 분들, 귀한 변호 성금을 내 주신
분들, 이루 다 열거할 수도 없습니다. 그러나 그 중에서도, 처음부터 이 사건을
신문에 보도하고, 신문사의 눈치를 보면서 매일같이 이 사건을 다루어 주신 <새
크라멘토 유니어> 지의 이경원 기자님이 여기 계십니다. 이 선생님께 한 말씀
부탁 드리겠습니다.”
나는 식당 한쪽 구석에 앉아 한 손에 맥주잔, 한 손에 담배를 들고 넋 나간
사람처럼 앉아 있는 이경원 기자를 불러내려 했다. 그는 계속 마시며, 피우며 손
을 저어 할말이 없다는 시늉을 한다. 두 번 이상 부탁이 통하지 않는 사람임을
잘 아는 나는, 나와서 얘기하라는 청은 다시 하지 않고 그저, “여러분, 우리 이
경원 기자님을 위해 그간 수고하신 노고를 위로하는 박수를 좀 부탁합니다.”
했다. 큰 박수가 울려 퍼지고, 그는 앉은 채 일어나지도 않고 계속 눈물만 손으
로 연신 닦아 내린다. 우리 집 사람이 그 쪽으로 가서 이경원 기자와 부둥켜안
고 무슨 얘기를 나누는 장면이 보인다.
“야 저기 우리들이 나온다.” 누군가가 큰소리로 한쪽 귀퉁이에 있는 TV를
가리키며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우리들 시선이 TV로 향했고 TV의 소리가 흘
러 나온다. 우리는 모두 호기심을 가지고 TV에 귀를 기울였다.
“11시 뉴스를 말씀 드리겠습니다.”
맑고 고운 여자 아나운서의 정확한 영어 발음이 들렸다.
“차이나타운의 알리스 사건이라고 불리며 지난 5년간 캘리포니아 주 역사상
희귀한 사건으로 잘 알려진 이철수 사건이 사건 발생 후 10년 만에 드디어 재심
을 통해 무죄로 판결이 났습니다. 지금 화면에 보시는 장면은 재판 승리의 기쁨
에 모두 얼싸안고 환호하며 눈물을 흘리는 장면이며, 바로 이 장면은 하루종일
어지럽혀진 법정 복도를 깨끗이 청소하고 있는 한인들의 모습입니다. 지난 70년
대부터 수십만 명의 한국인이 미국을 찾아왔으나 아직 정착 초기 단계에 있어
어떠한 사람들인지 궁금해하는 미국 사회에 깨끗하고 질서 있는 민족임을 보여
준 좋은 예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재판에 승리한 이철수 후원회원들은 지금 이
시간 한일관 음식점에서 축하 파티를 진행하고 있는 중입니다. 다음 소식...”
TV는 꺼지고 또 다시 박수와 함성이 터져 나왔다.
철수 어머니, 이미례 씨가 의자에 올라서서 인사말을 한다.
“여러분, 고맙습니다. 이 죄 많은 애미 혼자 몇 번 죽으려고 시도했으나 질긴
목숨 아직도 붙어 있다가 오늘 내 아들의 무죄 선고를 보게 되었으니, 이제는
열심히 살아서 여러분 은혜에 보답하겠습니다. 여러분, 고맙습니다.” 목이 메어
서 끝 부분은 잘 들리지도 않았다.
이 날 밤에 재판 승리의 주인공들은 말이 없었다. 그저 웃고 울고 술을 마셨
다. 이경원 기자, 랑코 야마다 변호사, 토니 세라 변호사와 스튜어트 핼론 변호
사, 그리고 팅크 톰슨 탐정 등 모두 말이 없었다.
철수 어머니는 좌석을 돌면서 술잔을 권하고 그저, “고맙습니다.”만을 연발
하는 것이다.
이 때, 오늘까지 재판에 임했던 배심원 중 세 명이 이곳에 왔다고 랑코가 내
게 귀뜀을 해 준다. 열두 명의 배심원 중에서 세 명이 재판이 끝났는데도 집에
가지 않고 이곳으로 온 것이다. 열두 명 배심원 중 대표였던 스콧 존슨 씨는 부
인까지 대동하고 들어왔다. 그 뒤에 멕시칸계의 사무엘 씨와 흑인계 프레처 씨
가 따라 들어오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재판 시작부터 끝날 때까지 배심원 대표
를 지낸 존슨 씨는 사회사업가로 눈먼 부인과 결혼해서 살고 있는 인도주의자로
서, 이 날 밤 이철수 후원회의 회원이 되어 철수가 석방될 때까지 많은 시간과
재주를 바친 귀한 사람이다. 미국 형사재판 사상 배심원이던 사람이 피고를 위
한 후원회의 회원이 된 첫 번째 사건인지 모르겠다.
오늘밤은 실로 “땡큐”의 밤이었다. 감사의 파티였다. 영어를 모르는 교포 할
머니, 할아버지들은 미국 사람이나 외국 사람만 보면 붙들고 “땡큐”를 연발하
는 것이다.
누가 알아 냈는지 다음 날인 9월 4일이 핸론 변호사의 생일이라는 것이 밝혀
져, 우리는 핸론 변호사의 생일 축하 노래를 다같이 불렀고 샴페인 건배를 다시
한번 외쳤다. 이번 재판 기간 동안 몸무게가 20킬로 가까이나 빠졌다는 버클리
대학 출신의 핸론 변호사는 손을 쳐들고 흔들면서 “야~.” 하고 소리를 질러
환호에 답하는 것이었다.
벌써 12시를 넘어 1시가 가까워지는데도 아무도 자리를 뜰 생각을 하지 않는
다. 군데군데 앉아 있는 사람, 서서 얘기하는 사람, 아직도 눈물을 흘리는 사람,
반은 지치고 반은 흥분한 상태로 계속 열기는 높다.
나는 토니 세라 변호사가 오늘 새벽 5시에 뉴저지행 비행기로 다른 재판을 위
해 여행을 가야 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터라 적당히 파티를 마무리지어야겠다
고 생각해서, “자, 여러분 잠깐만 실례를 하겠습니다. 이제, 철수가 완전 석방되
어 우리와 같이 손잡고 축하 파티를 하는 날을 위해서 이제 이만큼 하고 다시
작전을 짜야겠습니다. 그러니, 아쉬운 대로 이 정도에서 이 한일관 주인과 종업
원들도 이제 쉬어야 할 시간이니, 우리 모두 일어서서 손을 잡고 큰 원을 만듭
시다. 철수와 우리가 뿌리를 내리고 살기 위해 찾아온 이 땅에 모두 억울하게
짓밟히는 사람이 없는 공평한 사회가 되기를 기원하며 고향의 봄을 부르면서 오
늘의 승전 파티를 모두 마치기로 하겠습니다. 자 나의 살던 고향은 시~작~.”
모두들 같이 불렀다. 손을 꼭 잡고 흔들기도 하며, 양손을 올렸다 내렸다 하며
2절까지 부르고 난 후에 누군가가 계속 서울의 찬가를 부르기 시작했다.
서울의 찬가를 부르는 동안에 몇 분의 노인들이 손을 놓고 원 안으로 들어와
덩실덩실 춤을 추기도 했다.
이 날 밤 파티 경비는 여행사를 경영하는 이돈웅 샌프란시스코 한인회장이 부
담했다. 나는 2시가 넘어서 호텔로 돌아왔다.
며칠 동안 집에도 못 들어가고 법원 근처에서 묵으면서 매일 아침 1백 명 이
상씩 방청객들을 동원하기 위한 전략을 세우기 위해 샌프란시스코의 한인회, 노
인회, 부인회, 인력개발원 등의 대표와 연락을 해야 했으며, 교포 신문사, 한국,
동아, 중앙일보의 기자들과도 긴밀히 연락을 해야 하며, 미국 재판이 한국의 재
판과 여러 가지 면에서 다르기 때문에 재판 설명, 앞으로의 전망들을 설명하느
라 별로 잠도 제대로 못 잤던 것이다. 오늘은 며칠 만에 집사람과 같이 호텔로
돌아왔다. 잠이나 실컷 잤으면 좋겠다.
나는 아내에게 어젯밤 8시 30분, 마지막 무죄 판결이 떨어질 때의 재판정 분
위기를 실감나게 설명해 주었다. 지난 5년간 재판이 열릴 때마다 매일같이 부인
들을 동원하며 재판을 지켜보던 아내는 지난번 스턱턴 재판소에서 두 번째 옥중
살인 사건 재판이 사형으로 선고되자마자, 재판정 바닥에 철썩 주저앉아 한참
동안 일어나지 못하고 허무하게 앉아 눈물만 흘렸었다. 아내는 그 때를 생각하
면서 만에 하나 이번에도 우리가 이기질 못하면 도저히 다시는 일어설 용기가
나질 않아서 이 날 마지막 선고는 직접 보기를 꺼리고 집에서 초조하게 내 연락
만 기다렸다는 것이다. 고마운 아내에게 오래간만에 고맙다는 표시를 했으며, 아
내는 내 지구력과 뚝심에 다시 한번 경의를 표한다는 반 농담, 반 진담의 찬사
까지 하면서 어느새 잠이 들었다.
이후에 두 번째 옥중 사건도 순조롭게 풀려 이철수 군은 10년 2개월 만에 밝
은 세상으로 나오게 되었다.
설마 한국 사람이 사람을 죽였을까?
나는 77년 8월 1일부터 연방정부 지역사회 변호사가 되어 새크라멘토 법률구
조처에서 일하게 되었다. 지난 5월 30일 법과 대학원을 졸업하면서, 미국 국회에
서 통과된 소수 민족들과 가난한 사람들을 돕는 법률구조 사업 계획에 참가하게
된 것이다. 이 계획은 전국에 1백여 도시의 빈민들을 상대로 법률구조 활동을
벌이는 것으로, 금년도 법대 졸업생을 그 대상으로 뽑는 것인데, 나도 시험에 응
시하여 20대 1의 어려운 경쟁을 뚫고 합격의 영예를 차지하게 되었다.
특별히 실력이 있어서가 아니었다. 소수 민족 응시자 중의 거의가 흑인과 멕
시코계, 그리고 약간의 중국, 일본계와 인디언이 몇 있었으나 전국에서 한국계는
나 하나였기에 희소가치의 덕을 본 셈이다.
그리고 미국 정부로서는 매년 엄청난 숫자의 한국 이민이 몰려 들어오는데 한
국계 변호사는 몇 명 손꼽을 정도였고 특히 돈버는 변호 업무보다 인권과 소수
민족의 권익을 위해서 예방 법학이라는 개념의 지역사회 변호 활동의 개념을 정
립하고 법과 대학원 3년 동안도 주말마다 법률 상담과 교육을 실시하며, 이 분
야의 글을 발표한 젊은 졸업생을 찾을 수가 없는 때에 나의 장래의 계획과 포구
가 자기들이 생각하는 것과 너무 일치한다고 감탄하면서 나를 뽑았던 것이다.
워싱턴 DC 연방정부 법무부에 가서 훈련을 받고 모두 무변호사촌으로 파송되
는 형식으로 떠났으며, 내게는 캘리포니아 주의 수도인 새크라멘토 시의 법률구
조처에서 일하겠다는 나의 뜻에 따라 특별한 곳을 지정해 주었던 것이다.
나는 앞으로 한국 이민이 제일 많이 몰려 살게 될 캘리포니아 주에서 일을 해
야 되겠다는 생각을 하였다. 당시 한국 교포가 제일 많이 살고 있는 곳을 로스
엔젤레스, 그리고 다음이 샌프란시스코, 산호세, 샌디에이고 순이었으나, 내가 새
크라멘토 시를 택한 것은 아직 햇병아리 법조인이 바로 교포 사회에 들어가 실
력도 없이 시달리다 아무것도 못할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한인들이 많이
사는 동네에서 떨어져 있으면서 주청 소재지라 중요한 주의 정책이 이루어지는
곳, 그리고 모교가 인접해 있는 곳에서 앞으로 교포 사회를 위해 효과적으로 봉
사하기 위해 준비를 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법률구조처의 선배 변호사들은 아주 적은 봉급을 받으면서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열심히 소송도 하고 법률 상담도 하고 있어 배울 것이 많았다. 첫달부터
사회보장 수혜자의 불이익을 보상받게 하기 위한 소송을 담당한 선배 변호사를
도와서, 면담, 증거 수집, 판례 조사 등의 일을 하였고, 전세입주자의 권리, 소비
자 보호법에 관련된 법, 이민법 등에 관해 눈을 뜨기 시작하게 되었다. 법대에서
배우지 않은 새로운 분야였다.
법대에서 공부하는 것보다 실제 법을 적용하는 일이 더 재미있었다. 캘리포니
아 주는 매년 두 차례의 주 변호사 시험이 있어, 내년 2월에 있을 변호사 시험
을 보기 위한 준비도 서서히 해야겠다고 생각하던 10월의 어느 날이었다.
미국에 와서 10년 공부하면서 여러 군데에서 일을 해 봤지만 모두 임시직이나
학기중에 아르바이트 같은 일들이었지 정식 월급을 받는 변변한 직장은 처음인
지라, 흥분되기도 하고 슬며시 겁도 나는 그런 시절이었다. 법대를 졸업하고 연
방정부에 직업이 있다니까 은행에서 쉽게 융자를 해 주어, 방 넷이 있고 아름다
운 정원이 앞뒤로 예쁘게 정리된 단독주택도 구입하게 되었다. 물론 집값의 20
퍼센트만 내고 80퍼센트는 은행이 내주고 우리는 매달 은행에 원금과 이자를 한
30년 내면 된다.
아이 셋과 어머님을 모시고 살아야 하기 때문에 적어도 방이 넷은 있어야 했
다. 마침 우리 식구 크기에 꼭 맞는 좋은 집이 나타나 쉽게 살 수 있었다. 집이
필요하다고 생각하고 아침신문에서 집 매매 난을 살피다가 방 네 개 짜리 집을
복덕방의 도움 없이 주인이 직접 팔겠으니 관심 있는 사람은 전화해 달라는 광
고를 발견하게 되었다. 나는 무릎을 탁 치면서, “여보, 찾았다. 우리 집을 찾았
다. 이 집이 꼭 맞는 집인데 가 봅시다.”하면서 흥분했다. 아내는 별로 믿어지
지 않는 눈치였다. 가서 살펴봐야 하고, 또 집값의 20퍼센트를 요구하는데 그 돈
도 없이 기분만 가지고 어떻게 집을 사느냐는 것이다. 논리적으로 맞는 말이다.
여하튼 집주인에게 전화를 했다. 오후 2시에 그 집에서 만나기로 했다. 자기들
이 급해서 이미 집은 비웠기 때문에 빈집이라 잠겨 있으니 열쇠를 가지고 오겠
다는 것이었다. 약속한 정시에 그 집에 가서 주인을 만났다. “여보, 집이 맘에
들어도 좋은 내색은 너무 내지 마세요. 그래야 흥정이 쉬워지니까요.”아내의 충
고였다. 그럴듯한 충고였다.
그런데 집이 꼭 맘에 들었다. 거실도 응접실도 다 맘에 들고 우선 방이 넷이
라 아이들이 제 방을 가지고 자유롭게 클 것 같아 더욱 집이 마음에 들었다. 주
인은 어떠냐고 묻는다. 꾹 참고 그저 괜찮다고 대답했다. 아내도 만족해하는 것
같았다. 나보고 너무 좋아하는 내색하지 말라던 그가 먼저 코를 실룩거린다. 좋
은 감정을 감추지 못하는 솔직하고 순진한 아내가 집값 좀 깎자고, 내숭을 떨자
고 한 것은 그저 소망 사항에 불과한 것이었다. 순박한 트럭운전기사인 집주인
은 우리 사정을 다 듣고 난 후에 돈을 있는 대로 그냥 받겠다고, 나머지는 생기
는 대로 형편대로 갚으라는 것이다. 상식적으로 이해가 잘 안 되는 것이지만, 그
렇게 해서 집을, 그것도 우리 마음에 드는 집을 사서 이사하게 되었다. 처음 만
났는데 어떻게 우리에게 그런 특전을 베푸느냐고 물었더니, “한눈에 좋은 사람
들이라는 것을 알았고, 앞으로 변호사로 크게 대성할 것 같은 생각이 들어 도와
주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는 것이다. 고마운 일이다.
곧바로 우리는 이 집에 여덟 살 된 딸과 여섯 살과 두 살이 된 아들 둘, 그리
고 어머니를 모시고 이사와서 살게 되었던 것이다.
이사와서 직장 생활을 시작한 지도 벌써 두 달이 넘어 새크라멘토에 가을이
찾아왔다.
여름내 9월까지는 무척 덥지만 10월이 되면 갑자기 선선해지면서 일년 중 가
장 아름답고 쾌적한 계절이 된다. 조금 떨어진 곳에서 국민학교에 들어가 재미
있게 공부하던 딸, 승영이가 이곳으로 이사와서 새 학교에 진학을 하게 되어 어
떻게 학교에서 새 친구들과 잘 어울리며 적응해 가고 있는지 학교에 가서 담임
선생님과 의논을 해 봐야겠다는 얘기를 나누면서 저녁식사를 마치고 신문을 집
어 들었다.
“여보, 이것 보세요. `철수 리라는 사람이 샌프란시스코에서 살인을 해서 지
금 종신 징역을 살고 있는데 형을 살고 있는 감옥 속에서 또 살인을 해서 재판
을 받게 되었는데 재판에서 살인이 판명되면, 캘리포니아 주의 부활된 새 사형
법에 따라 10년 만에 처음으로 교수형에 처해질 것이다`라는 기사가 났어요. 이
사람이 이철수라면 한국 사람 아닌가요?”
“무슨 한국 사람이겠어, 중국 사람이겠지, 찰스 리라면 중국 사람 중에 성이
이 씨인 사람들이 아주 많고, 찰스는 흔한 이름이니 중국인일게요. 우리나라 사
람은 아직 사람을 죽일 정도로 미국에서 무서워지지도 못했고, 샌프란시스코에
서 살인을 했다면 그 곳은 중국촌인데, 틀림없이 중국인일거요. 그건 그렇고 내
일 승영이 담임선생님과의 면담은 몇 시오? 애가 어떻게 적응하고 있나, 학교에
서 무슨 이상한 행동은 하지 않는가 잘 살펴 달라고 부탁하고 학교 주위환경도
좀 잘 살펴보고 오시오.”
나는 철수 얘기를 꺼낸 아내에게 우리 딸 승영이 학교 얘기만 하고 말았다.
이튿날, 출근하자마자 새크라멘토 유니언 신문사의 이경원 기자에게 전화를
했다.
“이 선생님, 어제 저녁 신문 보셨어요? 철수 리라는 사람이 감옥 안에서 살
인을 해서 사형을 받을 것 같다는 기사가 난 것을 보고 저의 집사람은 한국 사
람이 아니냐고 묻더라고요. 보셨어요?”
이경원 가자는 한참 아무 말도 없이 잠잠하더니 전 같으면 이 쪽에서 한마디
할 때 두 마디 세 마디 하는 양반이 오늘 따라 말이 없다. 이상했다. 나는 다시
철수 리가 한국 사람이냐, 중국 사람이냐, 이 기사 내용을 알고 있느냐고 재차
물었다. 그제야, 이경원 기자는 보통 때와는 달리 힘없는 목소리로 대답하는 것
이었다.
“하이, 제이(내 이름을 `Jay kun`이라고 쓰기 때문에 첫글자 제이를 이름으로
부르고 있었음), 사실은 나도 어제 그 신문을 보고 밤잠도 못 자고 꼬박 세웠어.
그 철수 리라는 아이가 한국 애야. 약 4년 반 전에 샌프란시스코에서 검거되어,
재판지가 이곳 새크라멘토로 변경되어 여기서 재판을 받고 일급 살인자로 평결
되어 종신형을 살고 있는 애지.”
“아니 그럼, 이 선생님은 그 애가 한국 애라는 것도, 그리고 그 애가 살인자
라는 것도 알고 계셨단 말입니까?”
“이곳에서 재판할 때 우리 신문사의 법원 출입기자인 스티브가 취재까지 했
지. 모두들 그가 중국인인 줄 알고 있다가 재판이 끝날 때쯤 그 애가 한국인이
라는 것을 알게 되었는데, 재판이 너무 일방적으로 일사천리 진행됐다고 스티브
가 나한테 와서 불평을 한 사실이 있었어. 그러나 나는 속수 무책이었지. 내가
뭘 어떻게 할 수 있겠나?”
“그러면, 그 애가 한국에서 이민온 앤가요, 아니면, 미국 출생 한인 2세인가
요?”
“실은 철수 재판이 끝나고 늘 이 재판 사건이 마음에 걸려서 샌프란시스코
차이나타운과 한국 커뮤니티를 잘 아는 교포들을 몇번 만나서 이 사건에 관해서
좀 알아보기도 했었어. 그런데 뭔지 미심쩍다는 얘기야. 철수가 진범이 아닌데
잘못 찍힌 것 같다는 얘기야. 그 애는 열두 살 때 엄마 따라 건너온 애고.”
“뭐가 잘못됐다는 건가요? 그럼 그 애는 죄도 없는데 억울하게 누명을 썼다
는 겁니까? 나쁜 친구나 혹은 돈 때문에 어떤 사람의 하수인이 됐다는 겁니까?
아니면 멀쩡한 애를 경찰이 병신 만들었다는 겁니까?”
“제이, 사정이 좀 복잡해. 그리고 내가 몇 달간 샌프란시스코에 다니면서 수
집한 정보도 있고 지금 길게 얘기할 시간이 없으니 그만하고, 그래 사무실 재미
는 어떤가?”
“네, 재미있습니다. 배우는 것이 많습니다.”
철수 사건 재판 뒷바라지 6년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제이, 우리 철수 리를 함께 면회 한번 가 보는 것이 어떨까? 우리가 궁금해
하던 것들이 많이 풀리겠지. 나는 한국인 기자로서 중국 사람, 일본 사람, 멕시
칸 얘기, 심지어 필리핀 사람들 얘기도 많이 다뤄 봤는데 아직까지 한국 사람들,
내 동족에 대한 기사를 한 번도 써 본 일이 없기 때문에 늘 무언가 빚진 기분을
가지고 살고 있었는데, 이 철수 리 사건만 해도 벌써 몇 년 전부터 나를 괴롭혀
왔다고. 그 애가 죄가 있고 없고는 별도로 치고라도 뭔지 도움을 줄 수 있는 길
도 찾지 못하고 있었거든.”
“좋습니다. 이 선생님, 같이 가 보십시다. 저도 관심이 많이 있습니다. 언제
어떻게 면회를 가야 할지 좀 알아보시고 연락 주십시오.”
도원의 결의
다음날은 이 기자의 신문사 사무실에서 둘이 만나 그 동안 힌츠 변호사 사무
실에서 조사한 내용들과 어제 하루종일 철수 엄마와 나눈 얘기들을 같이 정리해
보는 작업을 하면서 철수가 꼭 만나 보라고 했던 일본인 여자 법대생 랑코 야마
다 양을 만나 보기로 했다.
이 기자가 전화를 걸었다. 마침 집에 있었다. 며칠 전 철수에게서 편지를 받았
는데 우리 두 사람을 만나서 얘기를 나누라고 했다면서 전화를 기다렸다는 것이
다.
다음 날 저녁, 랑코가 학교를 끝내고 오겠다고 하며 저녁 때 만나기로 했다.
이 기자의 사무실에 나타난 랑코는 우리의 기대와는 전혀 다른 가냘픈 일본 여
성이었다. 철수의 말에 의하면 샌프란시스코의 일본인 봉사센터에서 자원봉사하
고 있는 커뮤니티 워커(Community Worker)라고 해서, 우리는 다소 남자 같고
억세고 씩씩하게 생긴 여자를 연상했던 터라 사실 놀랄 수 밖에 없었다. 초등학
교 5, 6학년 아들만한 체격에 아주 곱고 가냘프게 생긴 작은 여자가 아주 조용
조용한 목소리로 자기소개부터 하는 것이었다. 자기는 일본인 3세로 지금 철수
가 수감되어 있는 트레이시 옆 스턱턴에서 출생하여 샌프란시스코에서 대학을
나왔으며 지금은 캘리포니아주립대의 헤이스팅스 법과 대학원 2학년에 재학중이
라고 했다. 4년 전 철수가 검거되었다는 신문을 보고 전혀 믿어지지 않아 차이
나타운에 있는 중국 친구들을 통해서 그 곳의 젊은 갱단들의 활동성도 혼자 조
사해 보았는데, 자기는 근 1년간 사귀었던 철수는 성품상 도저히 사람을 죽이거
나 돈을 받고 갱단의 하수인이 되어 엄청난 범죄를 저지를 애가 아니라는 것을
너무나 잘 알고 있다고 했다. 그래서 뭔가 잘못된 것이라고 생각하고 동양계 변
호사 사무실을 찾아 도움을 요청하며 다녔다는 얘기를 단숨에 털어 놓는다. 그
러면서, 모두 살인범 재판이기 때문에 최소한도 변호사 선임료를 우선 3천 달러
쯤 받아야 일을 착수할 수 있겠다고 해서 친구들에게 도움을 청하여 모금을 해
보려다 실패했다는 얘기, 그래서 가난하고 영어 못하는 어려운 사람들을 변호해
주는 변호사가 필요하다고 생각되어 자기가 법대에 갈 결심을 했다는 얘기, 처
음 철수가 수감되고 몇 번 면회 갔던 얘기 등등을 털어놓았다.
한 편의 영화를 보듯이, 소설을 읽듯이 랑코 양의 얘기에 말려 들어가 넋빠진
사람들같이 그녀의 얘기를 듣고 있던 이 기자가 드디어 담배를 한 대 피워 물며
말문을 열었다.
“철수하고는 언제 어떻게 만나서 친하게 되었나요?”
“이 기자님, 용서하세요. 담배 한 대 피워도 괜찮을까요?”
“아, 어서 피우세요. 불 여기 있습니다.” 나는 얼른 성냥을 켜 담배에 붙여
주었다.
“고맙습니다. 사실은 우리 언니 레이코가 철수와 먼저 친했어요. 철수가 일본
타운에서 음식점 보이로 일하고 있을 때 우리 언니가 그 곳에 드나들며 철수와
사귀었어요. 찰리라고 부르면서 어느 날 언니와 제가 같이 살고 있는 아파트에
철수를 데리고 와서 제게 소개해 주었어요. 키도 저같이 작고 상냥하고 인사성
이 밝아서 우리 언니는 철수를 동생같이 사랑했고 철수는 언니와 저를 무척 따
랐어요. 외롭게 혼자 떠돌아다니던 때라 우리 자매가 친척같이 느껴졌을 거예요.
가끔 우리 집에 놀러 오곤 했는데 그러다 사건이 터졌죠.”
“아, 그랬군요. 그 때 철수는 어디서 누구와 살고 있었나요?”
“아아, 여기저기 싼 아파트에 살며 혼자 자취를 하고 있었을 거예요. 사건이
났을 때는 브로드웨이 어디서 살고 있었고 그 전에는 일본 동네 근처에서 살았
던 것 같아요. 차이나타운 근처로 이사갔던 것은 그 쪽이 막일 찾기가 쉬워서
그랬을 것 같아요.”
“그랬군요. 그 당시, 내 말은 사건 당시, 철수 친구가 누군지 아셨나요. 혹시
아는 친구 있었습니까?”
“친구는 하나도 못 봤어요. 철수는 늘 혼자 다녔죠. 그러나 옷은 깨끗이 입고
바지 주름도 매일 잘 세우고, 멋을 좀 부렸었죠.”
“그랬군요. 철수를 돕겠다고 나섰던 친구들은 어떤 사람들이며, 지금도 그런
사람들이 있나요?”
우리는 번갈아 가면서 여러 가지 궁금한 사항들을 순서 없이 마구 물어 댔다.
이경원 기자의 녹음기는 물론 잘 돌아가고 있었다. 몇 가지 궁금한 것들을 물은
다음에 우리는 같이 커피를 시켜들었다. 그리고 나서 이번엔, 랑코가 우리에게
묻는 순서가 됐다. 내가 데이비스에 있는 법대 졸업생이라는 것을 알고 힌쯔 변
호사 사무실에 철수 재판 서류 검토를 해 본 결과 감상이 어떠냐고 묻는 것이었
다. 우리가 학교에서 배운 수정 헌법이 보장한 기본 헙법의 위반 가능성과 경찰
조사 과정에서 불법 내지 범법 사실들을 여러 가지 발견할 수 있었다는 설명을
했다. 예쁜 눈을 깜빡이며 신기해했다. 자기도 뭔가 잘못됐을 것이라는 짐작을
하고 있었는데, 이번 철수의 편지를 받고 정말 너무 기쁘고 고마워서 뭐라고 표
현할 수가 없다는 것이다. 랑코는 이 날 밤 아주 중요한 사실을 나지막한 소리
로 우리에게 들려 주었다. 만약에 재심 같은 것이 허락만 된다면 센프란시스코
사건의 진범을 아는 중국인을 증인으로 내세워 철수의 무죄를 밝힐 길도 있을
것 같다는 얘기였다. 우리는 너무 놀라서 아무도 없는 이 기자의 신문사 사무실
인데도 주위를 살피면서 랑코에게 바짝 다가앉았다. 우리의 호기심에 꽉찬 표정
을 알아차린 랑코는 차근차근 얘기를 다시 시작했다.
차이나타운의 사정에 밝은 친구를 사귀게 되어 지난 몇 년간 그 곳에 드나들
면서 청소년들도 만나 보고 학생들도 만나 보면서 차이나타운의 생태에 관해서
열심히 캐 보았다는 것이다. 아직도 그 곳에는 몇 개의 청소년 갱단이 존재하고
있는데 사건 당시의 경쟁 관계였던 조퐁계와 와칭계가 아직도 경쟁하고 있으나
죽이는 일은 일단 하지 않고 와칭계 살해자가 경찰에 검거되자 변호사 비용을
각출해 구명운동을 벌이기로 했는데 변호비용 걷은 돈을 고문이었던 단원끼리
시비가 벌어져, 와칭단원이 죽었다는 얘기, 그리고 그 날 현장에서 진범을 목격
하고 누군지 식별도 할 수 있었으나 생명이 위험해서 발설을 못하고 있는 증인
을 찾아냈다는 사실 등을 듣게 되었다. 참으로 놀라운 일이었다. 그렇다면 진범
이 엄연히 활보하는데 철수는 살인자가 되어서 평생을 감옥에 있게 된단 말인
가? 이런 불공평하고 억울한 일이 어디 또 있겠는가? 이 기자와 나는 너무 놀라
서 한동안 서로 얼굴만 쳐다보며 할말을 잊었었다.
“아니, 그러면 랑코가 그를 만났단 말인가요?”
“네, 물론이죠. 만나서 얘기도 듣고 그와 나만 아는 극비로 했어요. 만약에
내가 이 사실을 안다는 사실을 갱단들이 알게 된다면 저는 그 날로 어떻게 될
거예요. 아주 무서운 일이에요. 저는 무척 위험한 일인 줄 알면서도 어쩔 수가
없었어요. 꼭 진범이 가려져서 철수의 무죄가 밝혀져야 한다고 생각해요. 이런
얘기는 철수는 몰라요. 알면 그 안에서 미칠 거예요. 철수에게 당분간 비밀로 해
주세요. 그 사람은 지금 좋은 직장에 다니고 있어요. 몹시 두려워해요. 아직은
이 사실을 발설할 용기를 가지고 있지 못해요. 제가 계속 그 사람과 연락을 맺
으면서 좋은 때가 오기만을 기다려야겠어요.”
“야, 이거 맹랑한 일인데, 진범이 따로 있다. 이 사실을 아는 증인이 있다.
아, 참 기가 막히는 일이구나. 아니 그런데, 그 사람이 언제 어디서 범인을 보았
다는 겁니까?”
“네, 그 사람은 사건 당일 바로 그 장소에 있었구요. 그래서 범인이 총을 쏘
고 뒷길에 총을 버리고 빠른 걸음으로 뛰다시피 걸어 내려가는 것을 정확히 보
았다는 거죠. 그리고 얼마 후 차이나타운에서 그 진범이 활개를 치면서 자기 동
료들과 걸어다니는 것을 또 다시 보았다는 거예요. 먼저보다 훨씬 멋있게 보였
고, 더 힘이 센 두목같이 행동하는 것까지 보았다는 거예요. 그리고 동네 아이들
이 그를 킬러라고까지 부르고 있다는 겁니다. 요즈음은 한동안 차이나타운에서
없어졌다는 거예요.”
“음, 기가 막힌 얘기로군, 아니 진범이 따로 있는데 억울하게 감옥에서 썩고
있으니, 거 참 기가 막히네. 아마 나 같았으면, 내가 철수라면 불이 치밀어 올라
오고 복장이 터져서, 벌써 죽든지 하지 이렇게 못 기다릴 거야. 기가 막혀서 원.
”
이경원 기자는 아직도 믿어지지 않는 말을 한다는 듯 랑코만 응시하고 있다.
가만히 듣고만 있던 나는,
“이건 정말 대단한 사실인데, 지금 우리에게 두 가지 문제가 당장 가로놓여
있는 셈이로군요. 우선 이미 다 끝나 버린 재판이지만 어떻게 해서든지 다시 재
판을 받도록 하는 일이 첫째고, 두 번째 일은 다시 재판할 때 그 증인이 법정에
서서 확실히 철수는 범인이 아니라는 사실을 증언해야 하는 바로 그 문제입니
다. 지금 같아서는 랑코를 만난 것이 얼마나 다행인지 모르겠군요. 긴밀히 연락
하면서 철수 구명 작전을 같이 짭시다.”
“네, 그래요. 맞는 말씀이세요. 두 분이 앞장서셨으니 이제 조직적으로 구명
운동을 전개해야 해요. 적어도 영자 신문에 기사가 나오고 한국 신문에서도 취
급을 하게 되면 상당한 호응이 있을 것 같은데요. 어쨌든 이 친구 살려 내야 되
요. 일본에 있는 저의 언니는 가끔 편지를 철수에게 보내고 있구요. 그 때마다
돈도 얼마씩 보내나 봐요.”
“아, 다 좋은 말씀들인데, 나는 이 양키 신문사 기자니까 앞에 나서면 안 돼
요. 뒤에서 엉큼하게 기사나 유리하게 쓰고 앞장은 제이가 서야 됩니다. 그리고
제이는 교회 장로니까 우선 교회 네트워크를 이용해서 이 일을 알리고 헌금을
모금해서 재판 투쟁을 해야 해요. 하여튼 내 생각에는 제이가 한국 교포 사회에
이 사건을 알리는 책임을 맡고 랑코는 샌프란시스코의 일본 커뮤니티를 맡는 것
으로 우선 정합시다. 랑코, 〈삼국지〉란 책 읽어 본적이 있어요?”
“〈삼국지〉요? 없는데요.”
“〈삼국지〉는 유명한 소설인데요, 엄청나게 긴 장편이에요. 아마 한국 사람
들 고등학교 정도 졸업한 사람은 다 읽었을 거예요. 일본의 큰 소설은 〈대망〉
이라는 정치소설이 있는데,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막부를 통일하는 얘기 비슷한
소설인데요. 거기에 세 사람의 중요한 인물이 나와요. 관우, 장비, 그리고 가만
있자. 제이 또 하나는 누구더라?”
“그건 유비죠. 유비 현덕이오. 세 사람이 의형제를 맺는데 그 중에서 유현덕
이 제일 맏형이죠.”
“아, 그랬지. 그럼 우리도 오늘밤 정해요. 나이는 내가 제일 많지만 성격상으
로 보면 나는 혈기 방장한 장비일 것이고 조용하면서 조직적으로 맡은 일을 효
과적으로 감당하는 성격으로는 랑코가 관운장, 그리고 덕과 지혜가 겸비한 유비
는 역시 제이가 맡아야 겠네. 당신 싫어하는 사람 없잖아?”
“글쎄요. 어쨌든 우리 셋이 삼국지의 세 사람의 성격과 꼭 맞지는 않기 때문
에 지금 명명하는 것이 꼭 맞진 않다고 봅니다. 제 생각에는 정신적으로 여하튼
이철수 군을 구명하기 위해 셋이 동지가 되자는 말에는 적극 동의합니다. 그래
서 제 생각은요. 우리 셋이 삼국지의 역할을, 필요할 때 때와 장소에 따라서 돌
려 가며 맡아 하면 된다고 생각합니다. 좋습니다. 그럼, 그 세 사람은 `도원의 결
의`라는 것을 했는데 우리는 `새크라멘토 유니언 약속`을 하기로 하고 그 징표로
나가서 뭐 입이나 축입시다. 일어나시죠.”
“그럽시다. 그럼 나갑시다.”
랑코는 우리의 얘기를 호기심 어린 눈으로 이 기자와 나를 번갈아 쳐다보며
열심히 들었다. 예의상 열심히 들어 주는 것이지 얘기의 내용을 다 이해하고 있
지는 않는 것 같았다.
신문사 밖으로 나온 우리들은, 이미 12시가 넘은 후였기 때문에 24시간 여는
브로드웨이에 있는 데니스 음식점으로 갔다. 저녁 일을 마친 노동자 차림의 미
국인들 서넛 말고는 음식점 안이 텅텅 빈 채였다. 우리는 스낵을 주문해서 먹으
며 또 얘기를 계속했다. 이번에는 철수 구명을 위한 조직을 어떻게 했으면 좋을
까 하는 아주 구체적인 문제를 의논했다.
랑코는 그 동안 미국 사회 내에서 재판 투쟁을 벌였던 소수 민족들의 단체의
이름을 예로 들면서 열심히 설명하는 것이었다. 무슨 무슨 법률기금 혹은 변호
기금 등이 여러 사람을 위해 쓰여졌다는 얘기다. 우리 경우는 영어 이름이 교포
사회에 생소할 것 같으니, 아주 평범하게 이철수 재판 투쟁위원회나, 이철수 구
명위원회 혹은 포괄적으로 이철수 후원회라고 하면 어떻겠느냐는 의견을 내었
다. 영어로는 `Committee for Cholsoo Lee` 혹은 `Cholsoo Lee Defense
Committee`로 하자는 안이 나왔다.
새벽 4시에 우리 셋은 굳은 악수를 나누고 헤어졌다. 미국 땅에서 철수 구명
을 조직적인 운동으로 벌이기 시작한 첫날밤으로 기록해야 마땅하다고 생각된
다.
1978년 11월 13일, 비가 억수같이 퍼붓는 북캘리포니아의 새크라멘토 시에서
였다.
`애국 환상에 젖은 이급살인자` 장인환 의사
오늘도 철수 재판의 후원을 위해 모인 교포들 앞에서 나는 1900년 초 바로 이
곳 샌프란시스코에서 있었던 장인환 의사의 스티븐스 암살 사건과 재판 과정을
설명하면서 몇 명되지 않았던 우리 동포들이 애국자의 재판을 뒷바라지하던 얘
기를 소개하고 동포들의 성원을 부탁하였다.
장인환 의사의 스티븐스 암살 거사는 다음과 같은 얘기다.
스티븐스 암살 사건은 1908년 3월 23일,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일어난 일로
서 재미 한인들의 반일 애국 정신을 웅변으로 증명한 사건이다. 스티븐스(C. W.
Stevens)는 20대 초반이던 1885년 주일 미국 영사관 서기관으로 부임해 오랫동
안 일본에 살았던 친일적 인물로서 나중엔 일본 외무성에 들어가 주미 일본 영
사관 고문을 지낸 사람이다. 노-일 전쟁이 한참이던 1904년 8월 일본은 강제로
제1차 한일협약을 체결해 한국의 내정을 개선한다는 명목으로 외국인 고문을 한
국 정치에 참여시키는, 이른바 `고문 정치`를 시작했다. 스티븐스는 이 때 외교
고문으로 취임해 한국 외교를 일본의 뜻대로 이끄는 데 크게 기여한 인물이었
다.
1908년 3월 20일 일본항공편으로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한 스티븐스는 머물고
있던 페어먼트 호텔에서 가진 기자회견에서 최근 한국의 실정에 대해 (1)일본이
한국을 보호하게 된 후로 한국에 이익이 되는 일이 많기 때문에 근래에는 한일
양국 인사들간에 교제가 점점 친밀해지고 있다. (2)일본의 한국인에 대한 정치는
미국의 필리핀에 대한 정치와 같다. (3)일부 불만 세력이 일본의 보호 통치에 반
대하고 있으나 대부분의 한국인들은 예전처럼 정부로부터 학대를 받지 않아 크
게 환영하고 있다는 망언을 서슴지 않았다. 이러한 내용이 신문에 보도되자 샌
프란시스코에 있는 한인들이 울분을 터뜨리며 스티븐스에게 찾아가 해명을 요구
하였다.
정재관, 최유섭, 문양목, 이학현 등 공립협회 간부들의 항의를 받은 그는 더욱
오만한 자세로, “한국에 이완용 같은 충신이 있고 이토오 같은 통감이 있으니
한국으로선 큰 행복이요 동양에 큰 다행이다. 내가 한국 형편을 보니 태황제께
서 실덕이 심하고 완악한 관리들이 백성의 재산을 강도질하고 백성이 어리석어
독립할 자격이 없은 즉, 일본서 빼앗지 아니하면 벌써 이 나라에 빼앗겼을 터이
다.”하므로 울분을 참지 못한 대표들은 그의 멱살을 잡고 의자를 뒤엎는 등의
소동을 벌였다. 공립협회 본부로 돌아온 대표들과 우리 동포들은 스티븐스의 태
도를 바꾸기는 어려우니 이번 기회에 그의 목숨을 빼앗아 한국인의 독립의지를
널리 떨칠 것을 결의하였고, 거사 책임자로 전명운 공립협희 회원을 선출했다.
그 때 회의장에 있던 또 한사람 장인환은 만약의 사태에 대비, 아무도 모르게
자신이 거사의 마무리를 맡을 결심을 하고 있었다.
3월 23일 아침, 스티븐스는 오클랜드에서 워싱턴 DC로 가는 대륙 횡단 열차를
타기 위해 샌프란시스코 선착장에 도착하였다. 그가 승용차에서 내리는 순간 전
명운이 권총을 쏘았으나 불발되었다. 당황한 전명운은 스티븐스를 향해 달려가
권총 손잡이 부분으로 그를 내려치기 시작했다. 난투극을 벌이고 있는 그들을
향해 어디선가 세 발의 총알이 날아들었다. 두 발은 스티븐스에게, 한 발은 전명
운에게 박혔다. 장인환이 일찍부터 선착장에 나와 전명운 의사의 거사가 혹시
실패하지 않을까 혼자 염려하고 만일의 사태에 대비하고 있었는데, 아니나 다를
까 전명운 의사가 거사에 실패하게 되니 대신 총을 쏘았던 것이다. 장인환 의사
는 현장에서 체포되었으나 그의 태도는 당당했다. 범행 동기를 묻는 기자들의
질문에, “스티븐스는 한국 정부의 외교 고문으로서 한국의 녹을 먹으면서 일본
을 위해 일했으니 바로 왜놈과 다름없으며 한국의 적이기 때문이다.”라고 떳떳
하게 거사 이유를 밝혔다.
스티븐스를 암살한 장인환은 1875년 3월 30일 평양에서 출생하여 일찍이 미미
감리교회에 들어가 세례 교인이 되었고 천성이 착실하여 학자의 풍채가 있었으
나 국가를 위해서는 오히려 독립운동에 참여하겠다는 무사의 기개를 가진 인물
이었다. 그는 1905년 2월 하와이 이민에 응모하여, 농장에 가서 일하다가 1906년
8월 샌프란시스코에 설립된 교민단체 대동보국회 창설에 가담하였으며 대동보국
회 회원으로 공립협회 회관에서 있었던 스티븐스 면담보고회에 참석했다가 거사
를 결심했던 것이다.
3월 27일부터 장인환 의사의 인정심문이 시작되었다. 샌프란시스코 지방법원
12호 법정에서 열린 이 재판에서 죄목은 `계획에 의한 1급 살인`이었고, 장 의사
의 변론을 담당한 변호사는 나단 코글란(Nathan C. Coghlan), 로버트 페랄
(Robert Rerral), 버렛(Beret)등 세 명이었다. 변호인들은, “이번 사건은 단순한
살인이 아니라 자기의 조국을 위한 애국 행위임으로 당연히 무죄가 되어야 한다
고 열변을 토하는가 하면, 벤자민 블록(Benjamin Block), 새뮤얼 나이트(Samuel
Knight), 제임스 헨리(James H. Hanley) 검사들은 미국 시민을 살해한 혐의에
대해 사형을 요청하였다.
샌프란시스코의 한인들은 물론 하와이, 로스엔젤레스 그리고 멀리는 멕시코에
가 있는 한인 노동자까지 재판에 관심을 가지고 변호 성금을 보내왔다. 이 애국
재판은 8개월간 계속되었고 성금도 7천4백억 달러가 걷혔다. 이 때의 구명 후원
회장은 샌프란시스코의 백일교였다.
재판이 진행되는 동안이나 그 전부터 장인환 의사는 거사 동기를 이렇게 주장
했던 것이다.
“여러 말 할 것이 없이 일본이 한국에 대하여 불의의 행동을 한 것은 세상이
다 아는 바이오. 스티븐스는 한국 고문관으로 한국의 월급을 먹으면서 도리어
일본을 도와 주고 한국 2천만 동포를 은근히 독살하는지라, 내 나라를 망하게
하는 도적을 없애지 아니하면 우리는 일본인의 손에 멸망할 것이니, 나의 마음
이 탱중한 분기를 이기지 못하여 국적을 없이하고 내 몸을 살신성인하여 나와
같은 의사들이 연속하여 내 뒤를 따라오기를 원하는 바이오. 만일 내 생명을 돌
아보고 목숨을 도모코자 하더라도 나의 부모, 처자, 형제자매가 매일 일본인에게
학살을 당하는 터인즉, 살아도 산 것이 아니다.”
장 의사는 1908년 12월 23일 배심원으로부터 `애국적 환상에 의한 2급 살인`
으로 평결되었고, 다음 해 1월 2일 쿡(Cook) 판사에 의해 25년 금고형으로, 샌퀸
틴 주립형무소에 수감되었다. 그는 형무소에서 죄수번호 23298번을 달고 모범수
로 복역하면서 일요일에는 옥중 교회에 나가면서 카펫의 실 짜는 일과 세탁 기
술 등을 배웠다.
변호인은 1914년, 16년, 17년 세 차례나 가석방 신청원을 냈으나 모두 기각되
었으며 1918년 황사선 목사와 강영소 국민회장이 출옥 후의 생계보장서를 내기
도 했다. 드디어, 형무소측은 1919년 1월17일 만 10년 8개월의 옥중생활을 한 장
인환에게 가석방을 허가했고, 그는 자유의 몸이 되었다. 당시 미국의 한인 사회
는 돌아온 애국지사를 위해 대대적인 환영잔치를 베풀며 진심으로 환영하였다.
그는 23년 만에 자신의 고향인 평양에 가서 감리교 정의학교를 나온 젊은 윤치
복 양과 결혼하였고 다시 미국으로 귀환하여 세탁업을 하다가 결국은 우울증이
정신이상 증세로 발전되어 1930년 5월22일 병원에서 자살하고 만다. 동년 5월26
일 장인환 의사 사회장이 범교포적으로 거행되었고 샌프란시스코 근교 사이프러
스 공동묘지에 안장되었다. 미주내 애국지사 제1호로서 짧지만 장하게 살다간
장인환 의사는 1975년 8월 3일, 해외애국지사 묘를 고국으로 옮긴다는 대한민국
정부의 계획에 따라 이장되어 동작동 국립묘지에 말없이 잠들어 있다.
스티븐스 암살사건은 일본의 조선정책을 폭로하고 조선민족의 독립정신을 서
방에 알렸다는 1차적인 의미 외에, 산만하게 추진되었던 해외교포들의 민족운동
을 하나로 묶는 계기를 마련해 주었다.
당시 샌프란시스코만 해도 대동보국회와 대항적인 성격의 공립협회가 있었고
하와이에도 한인협정협회가 있어 같은 민족운동의 목적을 가지고서도 행동통일
을 하기가 어려웠다. 그러던 중 대동보국회 회원 장인환과 공립협회 회원 전명
운의 거사가 일어났고, 이들의 구명운동을 연합적으로 전개한 것이 계기가 되어
미주지역의 한인단체들의 통합단체인 국민회가 이루어지게 된 것이다.
이 장인환 의사의 거사와 재판과정을 살펴보면서 이철수 구명후원회를 구성하
여 억울하게 옥살이를 하고 있는 이철수를 구해야겠다는 각오가 생기기 시작하
였다. 이 일을 추진함으로 해서, 매년 이민으로 미국에 입국하는 수많은 한국 이
민세대들은 미국 생활이 일천하고 영어도 서투르지만 옳고 그른 것을 시비할 줄
아는 뼈대 있는 민족임을 미국 사회에 알려야겠다는 생각과, 수많은 한인교포
단체들을 한데 연계시키는 구심점이 되는 일로 이 후원활동을 알려야겠다는 생
각을 갖게 되었다.
1908년에 일어났던 장인환 의사 사건과 1973년에 발생한 이철수 사건은 한인
들이 제일 많이 참여했던 두 큰 재판사건으로, 발생 시기나 사건 내용은 각기
다르긴 하지만 한민족의 동포애를 통한 단결을 과시한 사건으로 미주 한인 이민
사에 길이 기억될 사건이라 생각된다.
철수 후원회 삼총사
이철수 구명운동이 끝난 후, 캘리포니아 주의 언론인들이 이철수 후원회의 삼
총사는 신문기자 이경원과 교사, 의사인 김익창-그레이스 김 부부, 그리고 유재
건 변호사라고 농담을 한 적이 있다.
이경원 기자는 현재 <새크라멘토 유니언>지의 폭로기자. 미국신문사에는 `조
사기자 또는 탐정기자(Investigative Reporter)`라는, 비밀 탐정같이 수사하여 폭
로하는 기자가 따로 있다.
그는 당시 50세로서, 경기도 개성에서 출생하여 아버지를 따라 전라남도 광주
에서 고등학교를 마치고 고려대 영문과에 들어갔다. 입학하자마자 좌익학생들이
투쟁하고 신탁통치 찬반으로 학생사회가 분열되고 하던, 해방후 혼란했던 시기
에 젊은 혈기에 깊은 연구도 없이 좌익학생들과 같이 몰려다니기도 하다가, 6.25
전쟁 전해에 미국 유학을 떠났다. 일리노이 주립대학에서 언론학으로 학사와 석
사학위를 받고 버지니아 주 지방신문 기자로 언론생활을 시작했다. 올챙이 기자
시절 자동차 사고를 취재하기 위해 병원응급실을 매일밤 들러야 했는데, 그 때
응급실 담당 간호사였던 미국인 페기(Peggy)를 만나 결혼해서 지금까지 3남매를
낳고 잘 살고 있다.
사회부 기자와 정치부 기자로서 애팔래치아 산맥 근처의 탄광촌과 빈민들을
취재했으며, 케네디 대통령 취임 이래 미국의 뉴프론티어 운동을 취재하면서 애
틀랜타와 몽고메리 시에서 일어났던 흑인 인권운동을 직접 취재하기 위해 지도
자였던 마틴 루터 킹 목사와 아버나티(Abernaty)목사를 수행하면서 흑인들의 인
권과 복지문제를 수년간 다뤄 왔다.
이어서 미국 내에 멕시코인들의 문제와 스파이로 오해도 받고 집단 강제 수용
소에 보내졌던 미국계 일본인 문제 등, 미국 내의 소수민족의 사정과 문제점을
정확한 사실분석으로 예리하게 파헤쳐, 미국 사회에 소수민족 문제를 다루는 기
자로서 명성을 이미 떨치고 있던 몇 안 되는 한국인 신문기자이다.
바로 몇 년 전에는 캘리포니아 주의 상하 양원 1백2십 명의 비리와 추문을 6
개월 이상 취재해서 `골든 돔(Golden Dome, 주정부의회의 지붕이 금빛깔의 돔
형식의 동유럽 양식의 지붕인데, 이 골든 돔이 부와 권력의 상징이 되고 있음)`
이라는 시리즈 기사를 한 달간 연재함으로 캘리포니아 전체를 한번 들었다 놓은
것같이 떠들썩하게 만든 장본인이기도 하다.
이 기사 때문에 특정집단의 위협을 받고 미국의 FBI요원들이 6개월간 신변보
호를 위해 동행하기까지 했던 일이 있다. 이 기사가 미국 사회에서 제일 권위
있는 내셔널 헤드라이너(National Headliner)상을 받게 되었다. 그 후에 A.P상,
법원출입기자상, 캘리포니아 변호사협회장상 등 굵직굵직한 상만도
25개나 받았다.
미국에 유학온 지 30년간 한 번도 한국에 가 본 적이 없는 이경원 기자는 이
승만 정권 시절, 방학이면 워싱턴DC에 있는 한국대사관에서 한국에 관한 미국
신문의 기사를 읽고 분석하여 대사에게 보고하는 일을 했었다. 당시 주미 한국
대사는 양유찬 씨였는데, 대사관의 불의한 일에 항의도 하고 급기야는 이승만
대통령에게까지 바른말로 진언하는 일도 있었다는 얘기를 나중에 후일담으로 들
은 적도 있다.
미국 신문기자 후배들은 그를 언론계의 형사 콜롬보라고 부른다. 양복은 50년
대 것 한 벌, 바지는 언제나 담뱃불 때문에 구멍이 몇 개 나 있는, 그리고 밥풀
두세 개가 늘 떨어져 있는 후줄근한 것 하나뿐이다. 그를 두고 새크라멘토 시민
들은 재미있는 일화를 많이 만들어 낸다. 브라운(Brown)2세 주지사 때의 일이
다. 비서되는 아가씨가 이경원 기자(미국인들은 K.W. Lee라고 부르는데 우리도
어떤 때는 K.W.라고 부르기도 한다)를 보고 세 번 크게 놀랐다는 얘기다.
처음엔 전화로 지사와 만나겠으니 약속시간 좀 만들어 달라고 부탁할 때 너무
발음이 한국적이고 세련되지 않은 것 같아 놀라고, 두 번째는 약속시간에 나타
난 K.W.의 몰골이 하도 소탈해서 놀라고, 세번째는 아침신문에 K.W.Lee이름으
로 나간 기사를 읽고 놀랐다는 것이다. 아니 그렇게 영어를 더듬거리며, 넥타이
의 속의 좁은 자락이 언제나 길어서 굵은 자락보다 더 길게 늘어지고, 밥풀이
몇 개 묻은 윗저고리를 입었다가는 다시 어깨에 둘러 메었다 하면서 침을 뱉다
시피 더듬거리는 그가 이렇게 아름답고 힘있는 기사를 쓸 수 있다는 말인가 하
여 혀를 내둘렀다는 것이다.
이경원 기자와 의기투합하여 이철수 사건을 세상에 알리고 그의 구명운동을
시작하면서 가장 많은 지원과 격려를 아끼지 않은 분들이 여럿 있었으나, 그 중
에서도 철수사건 시작에서부터 끝까지 나를 도와서 이 일을 성사시키는 데 뒤에
서 공헌한 사람을 꼽으라면 김익창 부부를 들지 않을 수 없다.
김익창 박사는 1930년 평북 신의주 출신으로 다섯 살 때 유학을 떠난 아버지
와 같이 일본에 건너가 유치원을 마치고 귀국하여 신의주에서 16세까지 살다가
해방이 되자 남하하여 서울 고등학교에 입학, 1949년에 졸업했다.
졸업하던 해에 서울대학교 의과대학에 입학했다가 6.25사변이 발발하자 해군
으로 입대해서 위생병으로 근무를 마치고 복학하여 1956년 서울의대를 졸업했
다. 졸업과 동시에 국가의사시험에 합격하고 미국의 병원으로 수련의가 된 후
도미하여 애리조나 주 투손(Tucson)시에 있는 성모병원(St. Mary`s Hospital)에
서 수련의로 훈련을 받으며 애리조나 주립대학의 임상심리학과의 박사과정에 입
학하여 1960년 6월, 4년 만에 박사학위를 받았다.
뉴욕 주의 버팔로 주립대학에 임상심리학 요원겸 정신과의사로 취업하여 근무
하다 62년에 서울에서 온 전상옥과 결혼을 했다. 1년 후 63년에 캘리포니아 주
베이커빌에 있는 주립병원에 임상심리학 박사 요원으로 일자리를 옮겨 두 아들
을 낳고 계속 캘리포니아 주에서 살고 있는 중이다.
그는 데이비스(Davis)시에 거주하면서 그 곳 미국 장로교회의 장로로 장립이
되었고 주립병원에서 연구개발 및 인사담당 책임자로 승진되었다. 1980년에 재
미 한인 정신과 의사협회를 창립, 초대 회장을 역임했고 동양인 <정신과 의사
협회보>편집장으로, <국제 정신과 의사 협회보>부편집장으로 미국 내에서는 물
론 국제적으로 잘 알려진 정신과 의사 겸 심리학자로서 수백 편의 논문과 저서
를 출판한 자랑스러운 우리 동포 의사인 동시에 동포 사회의 지도자이다. 그의
부인 전상옥 선생은 미국 이름, 그레이스(Grace)에 남편의 성인 김 씨를 붙여 그
레이스 김으로 미국에 알려진 고등학교 교사 겸 카운슬러이며 사회운동가이다.
그는 1931년 중국의 상해에서 독립운동차 그 곳에 머물고 있던 전재웅 선생과
어머니 송성도 권사 사이에서 태어나서, 초등학교와 중학교를 다니다 해방되던
해인 45년 평안북도 의주로 귀국했다. 46년에 남하하여 숙명여고에 진학했다가
6.25전쟁을 맞았다. 고등학교 때부터 남달리 소외 계층에 관심을 가지고 자원봉
사하던 그레이스는 전쟁중에 고아들을 보살피다가 1.4후퇴 때 고아들을 데리고
제주도로 피난을 가서 지내다가 서울로 환도하여 서울대학교 사범대학에 입학하
여 학업을 마치고 서울의 숭의여학교의 교사가 되었다.
그는 청량리에 천막을 치고 고아들을 위한 야간학교를 개설하여 교장 겸 교사
로 부모 없는 아이들을
가르치다가 62년 미국에 있는 김익창 박사의 초청으로 도미하여 결혼을 하게 되
었다. 아들 둘을 낳아서 키우면서 캘리포니아 폴리 대학교에서 교육학 석사학위
를 받고 데이비스 고등학교 교사로, 카운슬러로 교단에서 가르치면서 미국 장로
교회와 한인교회를 위해 여러 가지 봉사 활동을 전개한 바 있다. 데이비스 장로
교회의 장로로 장립되었으며 미국 장로교단의 한국 교회 육성을 위한 여러 위원
회에서 봉사했으며, 전 미국 장로교회 동양 여성협의회 회장, 서부지역 대표, 서
부지역의 다민족 협의회 회장, 한국학교 교장, 데이비스 교육구의 인권위원, 공
정취업위원회 등의 책임자로, 국제 결혼한 동양 여인들 상담소의 책임자로 지
역사회와 미국 장로교단에 너무 잘 알려진 교육자이다.
1988년 그는 학부모들이 뽑은 최우수 교사로 선발되기도 하였다. 한글 신문에
`그레이스에게 물으세요`난을 통해 자녀교육, 가족문제, 부부문제 등의 인생상담
을 다년간 했으며 <대화의 광장>이라는 책으로 신문에 연재되었던 글들을 묶어
출판도 하였다.
김익창 박사와 그레이스 김 부부는 미주 한인 동포라면 거의가 다 알 정도로
한인 동포 사회를 위해 수십 년을 꾸준히 봉사하고 있는 모범 가정이다. 아들
둘은 성장해서 장남은 현재 워싱턴 DC에서 캘리포니아 주 출신 하원의원의 보
좌관으로 있고, 작은아들은 컴퓨터 전문가로 사업을 성공적으로 하고 있는 중이
다.
또 한 사람 철수 구명운동에서 빼놓은 수 없는 사람을 꼽자면 현재 클리블랜
드 시에 있는 유승일 박사를 들 수 있겠다. 서울 출신으로 서울고등학교를 고학
으로 마치고 서울대학교 의예과 1학년 때 홀어머님의 외아들로 학비가 여의치
않아 도미하여 우수한 성적으로 의과대학에 진학했으며 의대를 졸업한 후에 유
명한 메이요 클리닉(Mayo Clinic)에서 훈련을 받고 미국 군의관으로 8군에 소속
되어 미 육군 소령으로 한국에 와서 복무를 했다.
이후 미국으로 돌아와 새크라멘토 카운티 정신과의사로 근무하면서, 주립대학
의 의과대학에서 겸임교수를 하게 되어, 새크라멘토로 이사온 것이 78년, 이철수
재심 청원이 심리되던 바로 그 때였다. 이철수 후원 활동이 한참이던 때에 그는
형무소로 철수를 면회다니며 철수를 안정시키는 일을 담당하여 큰 역할을 했다.
유승일 박사는 세 살 때 아버지를 여의고 홀어머님과 누님들 사이에 외아들로
자라면서 자수성가한 사람으로, 그와 나는 상당히 비슷한 배경을 가지고 자라
왔기 때문에 의기투합이 되어 철수구명에 많은 시간을 쏟았다. 눈물이 많은 유
박사와 나는 같이 철수를 면회할 때마다 그가 불쌍한 생각이 들어 많이 울었다.
셋이서 아버지 없는 외아들이라는 공통점이 있었고, 또 유 박사와 나는 군대 생
활을 통해서 국제 결혼한 우리나라 여성들의 한과 설움을 너무나 잘 알고 있기
때문에 얼굴만 서로 쳐다봐도 피차의 감을 잡을 수 있었다.
첫 번째 재심 청문이 끝나 우리가 원하는 대로 재심이 허락되는 날, 우리는
유 박사 댁에 모여 승전 축하를 밤이 새도록 한 적도 있었다. 그는 카운티에서
공무원으로 일했기 때문에 주정부 관선 변호사 사무소에서 그의 공적 봉사를 정
식으로 의뢰하였고, 이에 따른 전문 의사 사례비도 지급받게 되자, 일금 3천 달
러를 철수 후원회에 희사하기도 하여 후원회원들의 사기는 물론 일반 사람들에
게도 큰 감명을 준 적도 있다. 그는 미국 사회의 심리를 너무 잘 알고 있는 터
라 이철수 재판 전략회의 때마다 항상 기발한 아이디어를 내놓아 후원회 일을
크게 도왔다.
유 박사는 또 자기 고등학교 선배인 김학현 박사를 후원회에 끌어들였는데,
김 박사는 애틀랜타 시내 한인교회를 순히하며 이철수 사건을 알리면서 모금까
지 해서 후원회에 보내는 열성을 보였다. 부부가 의사인 김 박사 내외는 미국
사람들도 인정하는 훌륭한 의사로서 철수 사건이 끝날 때까지 열심히 후원 활동
을 펼친 고마운 분들이었다.
미국 ABC-TV의 이철수 사건 특집방송
83년 5월 5일 목요일 밤10시, ABC-TV는 이철수 사건을 다룬 특집방송을 방
영했다. 담당 프로듀서는 에나 리스너와 재키 파머. 이들은 지난 연말 캘리포니
아 수도 새크라멘토에서 이철수 사면 요구 촛불시위에 참가해서 취재했던 사실
이 있으며 지난날 뉴욕에서 있었던 철수 후원회 주최 철수 석방 환영파티가 열
렸던 영빈관에도 참석했던 적이 있는 프로듀서들이었다.
“10년 묵은 사건이 이제 와서 뒤집혀진 것은, 살인죄의 너울에서 벗어난 이
철수 씨로서는 개인적인 인간 승리인 동시에 미국의 법조계로서는 더없이 수치
스러운 일로 기록될 케이스”라고 방송을 시작한 사회자 휴 다운스 씨는 철수
사건을 다음과 같이 요약하는 방송을 했다.
“사법제도가 실수를 저지를 때 이를 교정하기 위해서는 오랜 세월이 걸리는
법이다.”로 말문을 연 담당기자 밥 브라운씨는 일반 시민과 변호사들로 구성된
후원회 조직의 집념으로 20여만 달러의 후원금을 모금했으며, 이 사건의 주역들
이 여러 명 있으나 숨겨졌던 증인을 찾아 내는 데 공을 세운 사설탐정 팅크 톰
슨 씨를 소개하면서, 샌프란시스코 차이나타운 사건 현장으로 자리를 옮기며 극
적인 상황을 설명해 나갔다.
73년 6월 3일 여름날 오후 사살된 입이탁은 차이나타운 번화가 교차로에서 신
호등에 멈춰 섰다가, 신호가 바뀌어 차도로 내려서는 순간 뒤통수에 총을 맞는
다. 혼란 속의 약 3초 동안이 이철수의 그 후 10년의 운명을 결정지었다. 당시
차이나타운에서는 살인사건이 연달아 일어났으며 이번이 열세 번째 살인이었다.
철수 사건의 변호팀의 한 사람인 스튜어트 핸론 씨는, 당시 샌프란시스코시 당
국이 제기한, 관광 명소인 샌프란시스코의 이미지 문제와 시민들의 항의에 고심
하고 있었다. 이철수는 한국인으로서 그러한 새물결의 일부였다.
10대였던 이 씨는 이민 정착 단계에서 겪는, 가정과 학교에서의 부적응 때문
에 거리의 소년이 되었고 소년원 신세도 지면서 지냈었다. 사건 전날 이 씨는
권총 오발 사고를 냈다. 경찰은 이 총기 오발 사고에 즉각 신경을 썼으며, 이로
인하여 철수는 혐의자로서의 빌미를 제공하게 된다. 처음에는 사건의 총알과 오
발 사고를 냈던 총알이 같다고 추정했으나 후에 이 사실이 번복되었음에도 불구
하고 일단 용의자가 된 이 씨는 계속 추적의 대상이 되었다.
구속된 이 씨는 증인 세 명으로부터 범인으로 지목된다. 수병인 존 휴이와 스
키 선수인 데입시 레넌과 앤디 밀 등 세 명이 사건 현장 길 건너편에서 살인 사
건을 목격했다는 것이다.
일급살인범이 되어 형무소에 수감된 이 씨는 형무소 안의 갱단들 싸움에 또
다시 희생물이 되는 사건이 일어났다. 백인 갱단원이 칼을 들고 죽이려 드는 것
을 구사일생으로 그의 칼을 뺏어 정당방위에 성공했던 것이다. 이 일로 그는 사
형선고를 받게 되었다.
두 번째, 옥중 살인 사건은 오히려 이 씨에게 유리한 결과를 주게 되었다. 변
호팀은 사형을 면해 주기 위해 첫 번째 사건을 뒤집는 작전을 쓰게 되었다.
당시에 법대 출신 연방정부 법률구조처의 유재건 변호사와 <새크라멘토 유니
언>지의 이경원 기자의 노력으로 후원회가 조직되고, 기사로 사건이 알려지게
되면서 사건 당시 가장 가까운 지점에서 사건을 목격했던 증인 스티브 모리스
씨를 찾아 내게 되자 재심을 청구했고, 재심이 허락되어 10년 묵은 사건 재판을
다시 한 결과 이 씨는 무죄판결을 받게 되었다... 재심재판 때에 상황이 비교적
자세히 설명되었다.
이 씨의 어머니, 이미례 여사도 등장하여 8,9년 동안 내 아들이 갇혀 있다고
서툰 영어로 울부짖는 장면, 한국인을 비롯한 여러 인종들이 함께 벌이는 후원
회의 활동상, 한국 교회에서 기도하며 헌금하는 모습(내가 출석하던 새크라멘토
연합장로교회에서 철수를 위한 특별기도와 헌금 장면을 촬영했음), 주청사 앞에
서의 사면 청원 시위 모습 등 감동적인 장면을 많이 방영하였다.
드디어 법원은 첫 번 사건을 무죄로 판결했고, 두 번째 사건도 일심 판결의
유죄를 번복하는 고법의 판결을 받게 되어, 금년 3월 28일 이 씨는 보석으로 석
방된다.... 보석금을 마련하기 위해 집까지 잡힌 내 얘기도 소개됐다.
이 프로그램의 마지막은 다음과 같은 결론으로 맺는다.
“이 씨의 장래는 두 번째 옥중 살인 사건으로 아직도 밝지 못하다. 항소 법
원은 7월 11일로 재판 날짜를 잡고 있어 변호인측의 후원회비 조달 준비를 할
시간이 많지 않다고.”
전국으로 방영된 이 프로그램은 엄청난 수의 미국인들이 시청했으며, 아직까
지 이 사건을 모르고 있던 미국인이나 한국인에게 사건의 경위를 잘 알리는 계
기가 되었다. 두 번째 사건의 재판을 준비하면서 우리는 샌호킨 카운티 검찰에
계속해서 사건 기각의 압력을 넣고 있었고, 이 방송 이후에 검찰 내에서 심각하
게 고민을 한 것 같다.
이와 같이 미국 사회 전반과 검찰에 엄청난 파문을 던지게 된 인기 프로
<20/20>은 어떻게 해서 이 사건에 관심을 갖고 사건을 방영하기까지 되었는가?
그 뒷얘기가 있다. 이는 뉴욕에 거주하는 유명한 작가 미치 웨글린(Michi
Weglyn) 여사의 부단한 노력의 결과임을 밝힌다.
미치는 일본인 농사 이민의 딸인 이민 2세이다. 그는 청소년기를 세계 제2차
대전중에 강제수용소에서 지낸 여인이다.
1941년 일본이 진주만을 공격함으로써 미국과 전쟁을 시작하여 세계대전으로
번지게 되자, 미국 정부는 대통령령으로 미국 내에 거주하는 일본계 미국 시민
11만 명을 대여섯 군데에 수용소를 만들어 집단 수용하게 했다. 미국 전역에 흩
어져 살던 일본계 시민들은 미국에서 출생한 시민임에도 불구하고 적성 국가인
일본과 내통할 염려가 있다는 이유로 강제수용을 감행하게 되었다. 집도 농토도
직장도 다 버리고 한 사람당 트렁크 하나씩만을 가지고 트럭과 기차에 실려 사
막이나 초원 지대 같은 유타 주, 애리조나 주 등 한적한 곳에 천막을 치고 주위
엔 철조망을 치고 집단으로 생활하게 한 것이 소위 강제수용소(Concentration
Camp)였다. 심하게 자존심을 상한 2세, 3세들의 자살 소동도 이 때 있었다.
수용소에서 고등학교를 마친 미치는 이곳을 탈출하기 위해서 대학에 진학을
하게 된다. 동부에 있는 마운틴 홀리오크(Mt. Holyoke)대학에 진학하여 1학년을
다니다, 굶주리고 불결한 수용소 생활에서 얻은 폐결핵 때문에 학교를 쉬게 된
다. 그러나 대학에서 그는 미술에 재주가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되어 1년간의
병원 치료를 마치고 전쟁이 끝난 1946년에 다시 바나드(Barnard) 학교에 복교하
였으나 폐결핵이 재발하여 다시 휴학을 하게 된다. 그는 몇 년을 고생한 후 유
명한 페리 코모(Perry Como) 쇼프로그램의 의상 담당 디자이너가 되어 이름을
날리는 계기를 맞게 된다. 8년간을 최고 인기 프로의 의상 담당으로 있다가 독
립해서 의상디자이너로 뉴욕의 유명인사가 된다.
그러나 그는 전쟁중에 갇혀 있던 수용소 생활을 평생 잊지 못하고 그 때 겪은
기막힌 사연을 책으로 엮어 생전 처음으로 책을 출판한 것이 미국에서 베스트셀
러가 되었다. 1976년에 미국의 비인도적이고 불법적인 강제수용소 생활을 고발
한 <수용소 생활(YEARS OF Infamy)이란 제목의 책으로 그는 일약 유명 소설
가가 된다. 사실상 이 책의 원고를 탈고한 후 8년간 출판을 못하다가 드디어 양
식 있는 출판사를 만나 햇빛을 보게 되면서 단번에 베스트셀러가 되는 기적을
일으켰고, 그 때부터 그는 여러 곳의 강연과 텔레비전 출연 등 바쁜 일정을 보
내게 되었다. 특히 동양계의 인권운동의 상징적 대모가 된 그는 일본 여인들과
미국 사회제도의 갈등에서 야기되었던 `웬디 요시무라(Wendy Yoshimura) 사건`
과 `도쿄 로스(Tokyo Rose) 사건`의 배후 인물로서 두 사건 모두 대중의 호응을
얻어 승리하는 역사를 만들어 낸 장본인이기도 하다.
나와 가까운 친구로, 뉴욕 철수 후원회를 처음 만들어 끝까지 투쟁했던 페기
사이카(Peggy Saika)를 통하여 철수 얘기를 듣게된 그는 즉시, “미국 사회에서
억눌리거나 소외된 사람의 인권을 찾고 불평등을 비판하는 일은 매스컴의 도움
없이는 불가능한 것이다”라는 점을 강조하면서 자기가 아는 텔레비전 관계 인
사들을 접촉하기 시작하였으며 드디어 ABC 텔레비전의 휴 다운스와 해리 리노
너를 만나 이 사건을 방영할 것을 부탁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의 집요한 부탁 때문에 ABC에서는 드디어 방영을 결정하고 82년 12월 새크
라멘토에서 열렸던 사면 청원 촛불시위를 현장 취재하면서 사건의 감을 잡고 드
디어 전국에 이 사건을 소개하게 되었던 것이다. 미치는 2차대전 때 나치수용소
에서 구사일생으로 살아 나온 독일계 남편 웨글린(Weglyn)씨와 뉴욕에 거주하
고 있다.
또 한 사람, 뉴욕에서 텔레비전을 비롯한 언론의 후원을 얻도록 도운 여인, 하
와이 이민의 후예인 2세 한국인 베티 마샬(Bety Marshall) 여사를 잊을 수 없다.
그는 미치 웨글린의 친구로서 미치로부터 철수 얘기를 듣고 자극을 받아, 뉴욕
에 있는 자기 사무실 `베티 마샬 PR사무소`를 철수 후원회 사무실같이 각종 포
스터를 걸어 놓고 가능한 모든 친지들에게 사실을 알리며 여러 활자 매체에 사
실을 알리는 글을 기고하기도 하였다.
나는 꿈을 갖고 있습니다
오늘도 나는 철수 사건을 소개하면서, 이 구명운동이야말로 새로운 땅에 뿌리
를 내리고 슬기롭게 살기 위해 애쓰고 있는 우리 동포들이 사람답게 대접받고
살기 위한 운동임을 강조하면서, 미국의 인권운동과 미국 사회의 불평등 그리고
이를 해소하기 위한 여러 가지 노력 등을 소개했다.
특히 `비폭력 불복종`인권운동으로 유명한 마틴 루터 킹 목사의 발자취를 같
이 소개하였다. 나는 자주 킹 목사의 워싱턴 대행진 때의 연설, 즉 `나는 꿈을
갖고 있습니다`의 몇 줄을 외우면서 연설의 클라이맥스를 삼곤 했다.
“나는 꿈을 갖고 있습니다. 언젠가 옛날 노예의 자손들과 옛 주인의 자손들
과 같이 형제애의 탁자 위에 함께 앉을 수 있는 날이 오리라는. 또 나는 꿈을
갖고 있습니다. 나의 네 어린 자녀들이 그들의 피부 빛깔이 아니라 그들의 인격
으로 평가되는 나라에서 살게 되리라는. 나는 언젠가는 억압과 불의의 열기로
시달리고 있는 미시시피 주마저도 정의와 자유의 오아시스로 변모할 것이라는
꿈을 가지고 있습니다.
오늘 나는 꿈을 지니고 있습니다. 나는 언젠가는 간섭과 약속파기를 밥먹듯이
입에 담고 다니는 앨라배마의 악독한 인종차별주의자들과 주지사를 깨부수고 어
린 흑인 소년 소녀들이 한 형제인 어린 백인 소년 소녀들과 손을 잡을 수 있을
것이라는 꿈을 지니고 있습니다.
나는 언젠가는 모든 골짜기가 높아지고, 모든 산과 언덕이 낮아지며, 거친 땅
이 평평해지며, 구부러진 땅이 펴지며, 주의 영광이 드러나 모든 사람들이 주의
영광을 함께 보게 될 것이라는 꿈을 지니고 있습니다.
이것이 우리의 꿈입니다. 이것이 내가 남부로 되돌아갈 때 가져갈 믿음입니다.
이 믿음을 지닐 때 우리는 희망의 돌멩이가 묻혀 있는 절망의 산을 개척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 믿음을 지닐 때 우리는 우리나라의 소란한 불협화음을 아름
다운 형제애의 심포니로 바꿀 수 있을 것입니다. 이 믿음을 지닐 때 우리가 언
젠가는 자유로우리라는 것을 믿고 함께 일하고, 함께 기도하며, 함께 투쟁하여
함께 자유를 옹호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가 모든 주요 도시에서, 모든 마을과 촌락에서 자유의 종소리가 울려 퍼
지는 것을 허락하고 자유의 종소리를 울려 퍼지게 할 때, 우리는 모든 하나님의
자녀들, 흑인과 백인, 유태인과 독일인, 가톨릭과 개신교들이 함께 손을 잡고 마
침내 자유 전능하신 하나님께 감사할 것입니다. 우리는 마침내 자유롭게 되리라
는 오랜 흑인 영가를 노래할 그 날을 위해 달음박질할 수 있을 것입니다.
나의 이 꿈은, 언젠가는 이 나라가 각성하여 우리가 만든 법안의 진정한 의미
를 살릴 수 있을 것이라는 미국의 꿈과 깊이 연결되어 있습니다. 모든 인간이
평등하게 창조되었다는 것을 자명한 진리로 우리는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이와 같은 연설문을 소개하고, 잘살기 위해서 찾아온 이 땅에서 우리가 잘못
된 재판을 바로잡고 편견과 오해를 가지고 힘없는 사람을 잡아 가두고 생명을
끊는 정부 당국의 실수를 바로잡는 이 엄청난 일을 이민 역사도 짧고 영어도 부
족한 우리가 이렇게 외치는 것은, 공평하시고 정의로우신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
는 믿음과 선한 뜻을 세우고 옳은 목표를 향해 수많은 사람들이 마음을 한데 합
치면 시간은 걸리더라도 정의는 반드시 이루어진다는 것을 믿기 때문이라는 내
용의 강연을 하였다.
마틴 루터 킹 목사는 1929년 1월 15일 미국 남부 조지아 주의 애틀랜타에서
자수성가한 목사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가 보스턴대학에서 신학박사 과정을 마
친 54년에 앨라배마 주 몽고메리 시의 한 교회에 목사로 부임하면서 그의 인권
운동가로서의 한 많은 삶이 시작되었다. 55년 12월 미국 인권운동사에 중요한
획을 긋는 `흑-백차별 버스 안 타기 운동`이 바로 이곳엣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버스 안에서 백인에게 자리 양보하기를 거부한 흑인 여성 조지 파크스가 체포됨
으로써 시작된 몽고메리의 투쟁은, 킹 목사의 집에 폭탄이 투척되는 등 시 당국
과 백인 우월주의자들의 계속되는 방해 공작에도 불구하고 3백81일간이나 계속
되었다.
결국 연방대법원으로부터 앨라배마 주의 흑-백 분리법이 미국헌법에 위배된다
는 판결을 끌어낸 이 투쟁은 킹 목사를 미국 인권운동의 중심적 인물로 끌어올
리게 되었다.
그러나 킹 목사에게 있어 몽고메리 투쟁의 의미는 그 이상의 것이었다. 대학
시절부터 읽어 온 간디의 비폭력 투쟁의 가치를 확인시켜 준 것이다. 그의 비폭
력 투쟁 노선은 흑인에게는 자긍심을 그리고 백인에게는 부끄러움을 가르치며
50년대 말부터 60년 초까지 미국 남부의 인종차별 폐지 투쟁에 상당한 힘을 발
휘했다.
가장 인종차별이 심한 지역의 하나인 앨라배마 주 버밍햄에서 있었던 1963년
의 투쟁은, 비폭력 불복종 투쟁이 지배 집단의 폭력성을 철저히 폭로함으로써
결국은 승리할 수 있음을 보여 주었다. 시위에 참여한 6,7세의 어린이들에게까지
물대포와 경찰견을 푸는 경찰의 잔인성은 세계를 경악시켰고, 결국 여론의 압력
에 밀린 앨라배마 주는 공공시설에서의 인종차별을 금지하고 흑인들에게 더 많
은 일자리를 약속하지 않을 수 없었다.
당시의 이런 인권운동의 승리는 61년 등장한 케네디 대통령 정부와 무관하지
않다고 본다. 진보적 입장에서 민권운동에 동조적인 입장에 섰던 케네디 대통령
은 버밍햄 투쟁이 흑인들의 승리로 끝난 한 달 후인 63년 6월 흑인들의 인권을
광범위하게 보장하는 인권법을 만들어 의회에 보냈다.
그러나 케네디 대통령은 이 법안이 의회에서 통과되는 것을 보지도 못하고 그
해 11월 22일 댈러스에서 총탄에 쓰러지고 만다. 킹 목사는 케네디 대통령의 죽
음을 자신의 죽음에 대한 예고처럼 느꼈다. 미국의 연방수사국(FBI)을 비롯한
기득 계층의 이익을 지키기에 급급한 세력들이 도처에서 인권운동을 와해시키기
위해 운동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64년 킹 목사는 그의 생애의 최고봉에 올랐다.
그 해 1월 <타임>지가 선정하는 올해의 인물에 뽑혔고 10월에는 노벨 평화상
수상자로 선정되었다.
그러나 그를 둘러싼 운동 환경은 점점 과격해지고 있었다. 비폭력 투쟁으로는
본질적인 변화를 가져올 수 없다며 흑인 권력을 통한 흑인 국가 건설을 주장하
는 말콤 엑스 등 흑인 이슬람 세력이 도시 빈민층에 급속히 영향을 키워 가고
있었고, 운동권 내부에서도 킹 목사의 개혁 노선을 비판하는 목소리들이 높아졌
다. 급진파들의 비판에 킹 목사는, “폭력은 악을 증가시키고 그들의 목표 그 자
체를 거부하는 것이기 때문에 부도덕하고도 비신용적이다.” 라며 자신의 비폭
력 투쟁의 원칙을 옹호했다. 킹 목사는 또 미국 인구의 10퍼센트도 안 되는 흑
인들이 백인들의 가공할 힘에 맞서 흑인 국가를 건설한다는 주장은 허황된 것일
뿐만 아니라 흑-백 통합만이 흑인이 이사회에 뿌리내릴 수 있는 길이라고 확신
했다.
그러나 로스앤젤레스 왓츠와 뉴욕 할렘에서 일어난 흑인들의 분노는 부와 경
제적 권리의 근본적인 재분배 없이는 사회 정의가 이루어질 수 없다는 사실을
확인시켜 주었다. 킹 목사는 흑인들의 고통이 단순히 피부 빛깔에서 오는 것만
은 아니고 경제적 계급의 문제가 인종 문제보다 더 본질적이고 변화시키기 어렵
다는 사실을 깨달았다고 후에 고백하기도 했다. 이러한 그의 각성은 그를 개혁
가에서 혁명가로 변신시켰다.
“지난 12년 동안 우리는 개혁운동을 해 왔다. 그러나 이제 우리는 혁명의 시
대로 나아가지 않으면 안 된다.”는 67년 킹 목사의 선언은 혁명가 킹 목사의
출정 선언이었다.
미국 사회의 근본적 변화를 추구하며 시카고 빈민운동에 뛰어든 킹 목사는 도
시 빈민의 문제가 당시 한창 고조되고 있던 월남전과 무관하지 않음을 발견한
다. 빈민층은 그들의 빈민 문제 해결을 위해 쓰여질 막대한 정부 예산이 먼 나
라의 민족 해방운동을 저지하기 위한 전비로 전용됨으로써 고통을 받는 데 그치
지 않고 그들의 형제, 아들, 남편을 이 무용한 전쟁에 바치는 희생까지 치르고
있다고 생각하기에 이르렀다. 킹 목사가 이렇듯 미국 사회의 본질적인 문제에
접근하자 연방수사국을 비롯한 미국 기득 계층은 킹을 다른 인권지도자에 이어
제거 목표로 삼기에 이르렀고, 68년 4월 4일 제임스 얼레이라는 암살자의 총탄
이 그의 가슴을 뚫게 된다. `평생을 가난하고 헐벗은 이웃과 함께 한 사람`으로
평가받기 원했던 킹 목사는 39세의 젊은 나이에 흑-백 공존의 사회건설이라는
자신의 꿈의 날개를 접지 않을 수 없었고, 그의 꿈은 여전히 이루어져야 할 것
으로 남아 있는 것이다.
미국 연방의회는 킹 목사의 탄생일인 1월 15일을 공휴일로 지정하자는 법안을
통과시켰다. 이 법안은 그가 총탄에 쓰러졌던 68년 이후 매년 상정되어 왔던 것
이나 15년 만인 83년 10월에 결실을 본 것 이다. 미국 역사상 개인의 이름으로
연방 공휴일에 명명된 세 번째 인물, 흑인으로서는 최초의 인물이다. 그는 콜럼
버스, 워싱턴에 이어 세 번째 영광을 안은 역사적 인물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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