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문화재 수난사
이구열
서장
1960년대에 문화공보부에서 간행된 한 책자는 '문화재'의 개념을 "보존할 만한
가치가 있는 민족문화의 유산, 즉 영어의 '컬추럴 애세츠'(Cultural Assets)를
뜻한다"고 설명하고 있다.
5.16 직후인 1962년 1월 10일, 정부는 외국의 예를 따라 민족의 영광인
문화유산의 보호에 더욱 철저를 기한다는 명제 아래 '보호법'을 처음으로
제정·공포하면서, 과거의 국보·고적이라는 분류적인 말 대신 종합적인 의미를
지니는 '문화재' 라는 새로운 용어를 처음으로 사용했다. 이후 이 '문화재' 라는
용어는 급속도로 우리 사회에 침투되었고 매스컴은 '문화재' 라는 낱말이
들어가는 각종 유물의 새로운 출현·출토·발견·발굴 뉴스와 그 밖에 도굴
혹은 해외유출 등의 범죄적인 사건들을 끊임없이 보도하고 있다. 또한
정부당국도 갈수록 민족문화재 보호에 입체적인 노력을 강화하고 있다.
1972년 봄의 문화재보호협회 발족은 정부의 문화재 보호정책의 새로운 방향
설정이었다. 정부가 지원하는 민간 주도의 사단법인체로서 민족문화재 보호의
범국민운동을 추진하게 되는 한국문화재보호협회(당시 초대 이사장은 이선근
박사, 문화공보부 문화재위원회 위원장)의 운동지침은 '알기'·'찾기'·'가꾸기', 곧
문화재 보호를 위한 국민계몽과 그들의 협조 및 참여를 호소하고 나아가서
'문화재 애호사상의 생활화' 를 목표로 하는 것이었다.
문화재 애호사상의 생활화, 그것은 구체적으로 어떤 상태일까. 아니 그 보다도
문화재 보호의 진정한 의미와 가치의 인식상태란 어떤 것일까.
오래 전 한국에서도 상영된 적이 있는 미국영화 '대열차작전' 은 2차대전 중
파리의 지하 항전대원들이 독일군의 프랑스 미술품 약탈작전(그것은 히틀러의
개인적인 야욕의 하나였다)을 마지막 순간에 실패시키는 항쟁기록이었다. 그때
지하 항전대원들로 하여금 독일군의 탱크나 작전본부를 폭파하는 대신 미술품
따위를 보호하는 데 목숨을 걸도록 한 영화 속의 극적인 대사가 있었다. 그것은
한 여성 미술관원의 다음과 같은 한마디였다.
"저것들(미술품)은 프랑스의 영광입니다."
조국 프랑스를 영광되게 하고 있는 중요한 상징으로서의 문화유산인
미술품들을 독일군이 몽땅 독일로 실어 나르려는데도 '미술품 따위' 라고 모른
척하겠느냐는 여성 미술관원의 진정한 조국애는, 결국 그 자리에서 지하
항전대원들을 움직여 파리의 미술품 다시 말해서 프랑스의 영광을 지키게
했다는 것이 영화의 줄거리였다.
앞의 영화에서 강조된 '프랑스의 미술품=프랑스의 영광' 이라는 인식은 오늘날
역사 있는 모든 민족의 공통된 자부심이며 긍지이다. 고려청자나 이조백자, 혹은
산간벽지의 절터에 외롭게 선 옛날의 돌부처 하나하나가 모두 한국의 역사와
문화와 한국인의 지혜를 구현하고 있는, 살아 있는 '한국의 영광' 이며 '민족의
삶의 기념물' 들인 것이다.
조상의 물려준 문화유산에서 민족혼과 민족의 주체적 긍지를 찾자는 호소는
결코 어제오늘에 나온 말은 아니다. 과거 일제 침략 하에서도 그것을 역설한
민족적인 지식인들은 이미 많았다. 그들은 어두운 시대의 선각자들이었다.
3.1운동이 있은 지 5년 후인 1924년 10월 13일자 (동아일보)에 '고미술일석화'
라는 글이 실려 있다. 필자는 '성서한인' 이라는 익명. 그런데 이 글은 단순한
골동품 얘기가 아니라 '민족정신을 되찾자' 는 주장을 전개함으로써 일제에
항거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앞의 필자는 첫머리에 이렇게 쓰고 있다.
"우리에게는 '우리의 것' 이라고 할 만한 것이 너무도 적다.
정치·경제·교통기관.·수도·전등, 심지어 의복과 음식까지도 '우리의 것' 이라
할 만한 것이 없다. 우리는 진실로 '남의 세상' 에 살고 있다. 물질적으로만 그런
것이 아니라 정신적으로도 그러하다. 혹은 구미인의 정신으로 살고 혹은
일본인의 정신으로 산다. 청년남녀들은 서양인 또는 일본인 중의 하나를 뽑아
그를 통하여 서양 혹은 일본의 정신을 배우기에 골몰한다. …이 모양으로 우리는
남의 세상에 살고 남의 정신에 살고 있다."
익명의 '성서한인' 은 계속해서 역설한다.
"직접으로 민족의 정신을 전달하는 것으로 이제 남은 것은 문학과 미술이다.
이곳에 우리는 겨우 우리 선인의 정신을 자유로 탐출하고 흡수할 자유를 가진다.
그런데 우리는 우리 선인의 문학과 미술에 접할 수 있는가? 없다. 금일의 교육을
받은 청년에게 우리 선인 중에 누가 값있는 시인이며 문사인가 물어보자. 그네는
대답을 못할 것이다.
미술에 관하여서도 그러하다. 우리 청년들은 류밴스나 밀레의 이름은 안다.
그러나 그네들은 우리 선인 중의 어떤 미술가의 이름을 알며, 어떤 작품에
지식을 가졌나? 없다.
자각이 있는 신세대는 조선정신의 부활을 갈망한 것이니, 우리는 그날이 멀지
아니한 것을 믿는다. 따라서 조선 고문학의 발굴과 고미술의 탐구가 우리의
민족적 운동의 제목을 이룰 날이 멀지 아니한 것과 또 그리 하지 아니하면
아니될 것으로 믿는다."
이 글은 이 땅의 민족혼과 주체적인 자부심을 말살하려던 일제 총독부의
심기를 자극시켰던 것 같다. 다음날 계속해서 싣기로 되었던 2회분은 신문에서
찾아볼 수 없다. 그러나 일제 하의 36년을 통해 국내에서 발간된 조선인의
신문과 잡지는 이 땅의 문화유산, 곧 모든 민족혼의 표상을 알려주고 그것들이
지니는 가치와 긍지를 끊임없이 소개하고 상기시킴으로써 보호 및 재인식에
직접 간접으로 영항력을 행사했다.
신문과 잡지의 민족적인 문화재 보호 노력뿐만 아니라, 민족문화재의 가치를
인식하고 계몽하면서 일제 식민지 하에서 행동으로 그것을 지키고 보호한
사람도 많았다. 그들은 권력과 돈으로 이 땅의 문화재들을 모조리 갈취해 가려던
일본인 수집 및 약탈자들과 눈에 보이지 않는 숱한 대결의 비화를 남기고 있다.
제1장 선각의 인맥
근대적인 금석고증학의 선구자 추사 김정희
1928년에 최초의 한국 서화가 인명사전인 위창 오세창의 편저 (근역서화징)이
간행되었을 때 육당 최남선은 신문에 기고한 서평의 첫머리에서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조선이 세계에 있어 오랜 문화국이요, 가장 의의 있는 문화적 일민방임은
이제 새삼스레 들출 것 아니어니와 예술 업적도 타국에 떨어지지 아니함을 본다.
다만 타에 비하여 조선은 그러함을 아는 이가 적고, 또 누구든지 그러함을 환히
알도록 작품을 많이 또 고루 전존하지 못하고, 또 작가와 작풍 및 그 계통·영향
등에 관한 기록·연구가 행하지 아니하여 예술적인 외관이 번듯하지 못할
따름이다. 오늘날 조선을 알아야 한다는 어의에는 당연히 조선예술을 알아야
한다는 의미가 포함돼 있음으로 인함이다."
이어서 육당은 위창의 (근역서화징) 편저와 그의 수십 년의 연구생활이야말로
"조선의 예술적 기업을 호지함이며 가장 암혹한 운중에서 가장 섬삭한 전광"
이라고 감격적인 찬사를 보내고 있다.
사실 위창 오세창은 이 땅의 문화유산, 곧 민족문화재에 대한 최초의 근대적인
연구가였고 수집가였다. 3·1운동 33인 민족대표의 한 사람으로서 항일투쟁의
선봉에도 섰던 위창은 서예와 서화감식안에서도 당대의 제일인자였다.
위창의 선각적인 문화재 연구 업적과 공헌은 오늘의 고고학 및 미술사학계의
선구였다. 그러나 문화재에 대한 근대적인 인식과 새로운 가치관은 18세기 이후
중국에서 전파된 새로운 과학적 학풍인 고증학의 실학사상이 싹틀 때에
여명기를 가졌다. 이 여명기의 최대의 거인은 말할 것도 없이 추사 김정희였다.
24세 때(1809년) 아버지를 따라 청나라에 다녀온 후로 추사는 '실사구시' 의
실학사상으로 근대적인 금석고증학의 선구적인 업적을 남겼다. 그는 처음으로
한국 금석학의 체계를 세운 연구학자였다.
추사의 금석학 연구의 가장 전설적인 기록은 서울 북한산 비봉에 올라가서
그때까지 아무도 정확히 그 역사와 내용을 알지 못했던 이끼 낀 돌비석의
비문각자를 판독·고증한 일이다.
순조 16년(1816년) 7월 어느날의 일이었다. 금석학과 고증학에 한창 심취하고
있던 31세의 추사는 김경연이란 친구와 비봉 꼭대기의 수수께끼의 옛 비석을
조사·판독하기 위하여 가파른 암벽을 기어 올라갔다. 그들은 조선 한양 도읍
때의 유명한 배후인물인 무학대사와 관련이 있다는 막연한 전설의 비문을 이끼
속으로 짚어 나가다가 깜짝 놀랐다. 비문내용이 무학대사는커녕 1천 수백 년 전
신라 진흥왕(6세기 중엽)의 순수비임을 선명하게 밝혀주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추사 자신도 예기치 못했던 감격적인 발견이었다.
추사가 김경연과 더불어 북한산 승가사에서 10분도 채 안 걸리는 비봉의
정상까지 올라가서 고색 짙고 마멸이 심한 돌비석의 비문을 처음으로
판독·고증할 때까지 그것이 (삼국사기)에도 빠져 있는 신라 진흥왕의 북한산
순수기념비임을 알아본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보다도 오히려 엉뚱한 전설이
비석의 역사적 가치와 정체를 흐려놓고 있었다.
가령 1750년께에 이중환이 저술한 (택리지)는 이런 전설을 적고 있다.
"무학대사가 이태조를 도와 한양에 도읍을 정하고자 백운대로부터 산줄기를
따라 내려오다가 이 비봉에 이르렀더니, '무학은 이곳을 잘못 찾아왔다' 는
글귀가 새겨져 있는 비석이 있어 발길을 되돌렸다."
추사는 비봉의 비문을 탁본해 가지고 내려와서 읽을 수 있는 글자들의 내용을
더욱 신중히 고증하였다. 그는 비문의 '남천군주' 라는 네 글자를 주목했다.
그리고 결론짓기를, (삼국사기)의 기록인 "진흥왕 29년에 북한산주를 폐하고
남천주를 두다" 로 미루어 진흥왕 29년(568년) 이후에 세워진 것이라고
단정했다. 이 결론은 오늘의 학자들에게도 그대로 받아들여지고
있다((문화재대관) 국보편 해설, 문공부 발행).
한편 추사가 비봉의 비를 신라 진흥왕의 순수비로 고증했다는 사실에
누구보다도 놀라움과 반가움을 표시한 사람은 운석 조인영이었다. 뒷날 영의정을
지내는 운석은 그해에 마침 사신을 따라 청나라에 갔다가 그곳의 금석학
연구가인 유희해와 친교를 맺게 되었고, 귀국하면서 조선의 금석문 탁본을
수집하여 보내주겠다고 약속했던 터라 추사가 새로 발견했다는 신라 비문은
그의 청나라인 친구를 위해 다시 없는 선물감이라고 여겼던 것 같다.
다음해(1817년) 6월 8일, 추사는 운석을 데리고 두번째로 비봉에 올라가서
그들이 실력껏 읽을 수 있었던 68자를 최후로 확인하였다.
그런 후에 그들은 그 비문 탁본을 즉시 중국의 유희해에게 보내주었다. 그
외에도 운석은 태고사의 '원증국사비' (고려말) 등 97종의 금석문 탁본을
마련하여 보내줌으로써 유는 청나라에 가만히 앉아서 (해동금석원)과
(해동금석존고)라는 조선의 금석문 책을 2권씩이나 펴낼 수 있었다. 그 바람에
추사가 발견한 북한산의 신라 진흥왕 순수비의 새로운 귀중한 금석문사료는
국내가 아니라 유감스럽게도 청나라에서 꾸며진 책 속에 먼저 수록되어 세상에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전후 두 차례에 걸쳐 비봉의 신라 진흥왕 순수비를 고증·판독한 추사는 또
그러한 사실에 대해 큰 자부심과 우월감을 갖고 있었던 것 같다. 비석측면에
굳이 새겨놓은 다음과 같은 내용의 각자가 그 점을 입증해주고 있다.
"이 신라 진흥대왕 순수비는 병자년(1816년) 7월에 김정희·김경연이 와서
읽었다."
"정축년(1817년) 6월 8일에는 김정희·조인영 같이 와서 읽을 수 있는 68자를
심정했다."
오늘 같으면 문화재의 현상 변경으로 법에 저촉되는 행위이다.
전의 고구려와 백제 땅이었던 곳을 점령하여 신라의 국토를 크게 확장시킨
진흥왕은 재위 29년(568년)에 새로운 국경을 순방하며 국위를 선양했다. 그리고
그때의 행차를 기념하여 여러 곳에 '순수정계비'를 세웠다. 추사가 북한산
비봉에서 발견한 것은 결코 유일한 것은 아니었다. 오늘날 이 '진흥왕 정계비' 는
북한 지역인 함경남도의 황초령과 마운령의 두 곳과 경남 창녕 것을 합해 모두
네 곳에서 발견되었고, 창녕 것은 지금 국보 33호로 지정되어 있다. 이 창녕
것은 맨 먼저 세워진 것으로 건립연대가 서기 561년(진흥왕22년)으로 비문에
나타나 있다.
추사 자신은 진흥왕의 북한산 순수비를 처음으로 발견한 후, (동국문헌비고)에
이미 (해동집고록)을 빌려 기록되어 있는 황초령비의 내용을 참작함으로써 그의
북한산비의 고증에 확신을 가졌다. 그러나 그는 황초령비를 직접 볼 기회는
없었고, 다만 간접으로만 그 내용을 재확인했을 뿐이었다.
그것은 1852년의 일이었던 것 같다. 추사는 그와 친숙한 사이였던 함경관찰사
윤정현의 도움으로 일찍부터 알려져 있던 황초령의 진흥왕 정계비 탁본을
입수하여 북한산 것과 대조하며 자신의 눈으로 또 한번 고증·판독했다. 그러고
나서 자신의 학문적인 기쁨과 고증의 감동을 또다시 기념하기 위하여
'진흥북수고경' 이라는 여섯 자의 현판글씨를 자신의 독창적인 '추사체'로
자필하여 함경도로 보내주었다.
그후 이 현판은 황초령비를 보호하기 위해 관찰사가 지은 비각에 걸려 있었고,
현재 우리는 그 목각현판의 탁본을 볼 수 있다. 현판뿐 아니라 추사는 그에게
탁본을 보내준 관찰사 윤정현을 대신하여 황초령비의 귀중한 역사적 가치를
재인식시키는 새로운 비문을 짓고, 또 스스로 써서 보냄으로써 유적의
해설비로서 옆에 세우세 하였다. 비문에는 '윤정현 서' 라고 되어 있으나 그
자체가 추사의 글씨라고 금석학자 임창순 선생은 감정하고 있다. 비문의 내용은
이러하다.
"이 신라 진흥왕비는 동북 정계로 구지는 황초령인데 돌이 위아래로 떨어져
나가고 글자가 185자만이 남았다. 지금 중령으로 옮겨 비각으로 덮고, 암벽에
끼워놓았다. 황초령과 멀지 않아 경계에 큰 차는 없다. 옛날 탁본을 가지고 보면
첫줄 '왕' 자 아래에 '순수관경간석명기' 의 글자가 있다. 아울러 기록하여 없어진
것을 보충한다."
황초령비를 위해 특별히 현판과 새로운 비문을 쓴 직후, 추사는 근대 한국
최초의 고고학적 연구논문인 (금석과안록)을 남겼다. 곧 그가 직접 발견한
북한산비와 탁본으로 확인한 황초령비에 대한 고증과 해설을 기록한
필사본(국립중앙도서관 소장)이다.
(금석과안록)에서 추사가 시도한 과학적 논증은, 1) '진흥'은 시호가 아니라
생존시에 사용한 칭호이며, 2) (삼국사기)는 진흥왕의 북순 사실을 빠뜨렸고,
신라의 국경을 안변까지로 기록한 것은 잘못이다, 3) 진흥왕은 독자적인 연호를
썼고, '짐'·'제왕' 이란 말을 쓴 것은 그때 신라가 독립국으로서의 체제를 확고히
갖추고 있었음을 뜻한다는 것이었다. 그 밖에 추사는 비문에 나타나는 신라의
지명·관명·인명 등을 분석했다.
1786년에 판서의 아들로 태어나서 1856년에 71세로 타계한 추사 김정희는
일찍이 청나라에 갔을 때, 당시 북경의 유명한 석학이던 완과 옹방강을 가까이
접촉할 기회가 있었다. 이후 추사는 그들과 계속 친교를 맺으면서 학문을
닦았다. 그의 타고난 총명과 끊임없는 탐구는 이윽고
경학·사학·고증학·서예·금석학에 걸쳐 어느 누구도 따를 수 없는 깊고 넓은
학문과 예술의 경지를 개척했다. 그는 과거에 합격하여 암행어사와 병조판서를
역임했으나 정치사건에 연루되어 전후 10년간의 귀양살이-제주도와 북청에서-를
당하는 파란 많은 생애를 보냈다. 그러나 오히려 그 속에서 그의 학문과 예술은
찬연하게 연마되었다. 그의 글씨는 대단히 창조적이고 뛰어난 명필로서
한국미술사에 빛나고 있고, 또한 서화의 감정과 평론에서도 그는 당대의
거벽이었다. 따라서 그의 학문과 예술사상은 그의 뒤를 잇는 세대에 크게 영향을
끼쳤다.
대대로 청나라를 내왕하던 역관 집안에 태어나 역시 역관이 되었던 역매
오경석은 추사보다 45세나 아래였으나 어려서부터 추사의 학문과 예술의 경지를
흠모한 문인이었다. 그는 16세의 어린 나이로 역관 시험에 합격하여 23세
때(1853년)부터는 청나라를 내왕하면서 자신의 눈으로 직접 저쪽의 새로운
학문사상과 서양의 문물을 접촉하였다. 그렇지만 청나라를 내왕하기 전부터
가졌던 금석학에 대한 관심이나 시·서·화에 대한 각별한 취미와 연구는
당대의 거성인 추사와 그의 직계 제자들에 의해 자극과 영향을 받은 것이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대대의 역관 집안이어서 청나라의 진귀한 서화를 포함하여
국내외의 미술품이 집에 많았다는 가정환경이 역매를 당시 서울 장안의
대표적인 교양인사들과 쉽게 접근할 수 있게 한 행운의 조건이었다. 그가 추사의
가장 가까운 제자이며 친구였던 우선 이상적을 진작부터 접촉하면서 많은 것을
가르쳐 받고 또 그를 통해 추사의 세계도 더욱 깊이 이해할 수 이었던 것은,
그러한 가정적인 조건이 작용했던 것으로 믿어진다.
역매보다 27세나 위인 우선은 당시 추사 다음 가는 안목과 교양을 지닌
지식인의 한 사람이었다. 그는 역매가 청나라에 가기 훨씬 전에 이미 수차례에
걸쳐 그곳을 다녀왔고, 그때마다 그가 수집 및 입수할 수 있었던 중국의
금석문과 서화들을 추사와 더불어 감상하고 고증하는 기쁨을 나누곤 했었다.
그때의 여러 가지 일화들을 우선은 그의 (은송당집)(필사본, 국립중앙도서관
소장)에 풍부하게 기록하여 남기고 있다.
추사는 멀리 제주도에 유배당해 있을 때 우선을 생각하며 한 폭의 그림을
그렸는데 , 지금도 전해지고 있는 유명한 '세한도' 가 바로 그것이다. 고고한
품격으로 문기 짙은 노송과 초당을 그리면서 지기지우를 생각한 추사의 '세한도'
를 서울에서 전해 받은 우선은 감동하였고, 1844년에 청나라에 가는 길에 그것을
가지고 가서 일찍부터 추사를 알고 있던 그곳 명가들에게 보여 절찬을 받았다고
전한다. 우선 추사보다 18세 아래였다.
역매 오경석과 불우한 천재 고람
역매 오경석이 어려서부터 그의 집안과 밀접한 관계에 있었던 것으로
믿어지는 우선 이상적에게 글씨와 시문을 지도 받고, 서화의 안목도 높일수
있었다는 것은 커다란 행운이었다. 그러나 그가 청나라를 드나들기 직전인 스물
안팎 때의 가장 가까웠던 선배로서 그의 시문과 서화를 늘 예리하게 비판해준
사람은 당시 시·서·화 삼절의 혜성 같은 천재였던 고람 전기였다. 역매보다
불과 여섯 살 위였건만 그는 안목이 매우 뛰어났고, 그 때문에 서울 장안의 서화
애장가와 수집가들이 줄곧 그에게 감정과 평가를 의뢰해 오곤 했었다. 역매도
집안에 들어온 서화폭들을 언제나 그에게 보였던 것 같다. 그때의 그들의 친밀한
관계를 알려주는 흥미있는 고람의 편지들이 전해지고 있다.
1900년을 전후한 시기에 위창 오세창이 1879년에 작고한 아버지 역매의
생활기록들을 정리하다가 발견한 것으로, 고람의 편지들을 서첩으로 꾸민 듯한
(위공소찰)(이겸로 소장)이라는 책자가 그것이다. 역시 위창의 부탁으로 서첩의
표제를 쓴 듯한 몽인 정학교(서울 광화문의 현판을 쓴 당대의 유명한 교양인이며
서화가)가 표제 밑에 다음과 같은 말을 적고 있다.
"위공이 역매와 주고 받은 편지들이다. 40년 전의 일로서, 손님이 앉은
자리에서 얘기를 하면서 아무렇게나 휙휙 쓰던 때가 어제 같은데, 지금 그
글씨들을 대하니 어찌 슬프지 않으랴. 몽인은 쓴다."
앞의 발문으로 미루어 몽인은, 갓 서른의 젊은 나이로 아깝게 요절하였으나
천분의 재예와 안목으로 출중했던 고람을 그의 가난한 생활의 방편이었던
한약방으로 자주 찾아간 적이 있었던 모양이다. 몽인은 고람보다 일곱 살
위였다. 그런 관계를 알고 있었기 때문에 위창도 그에게 특별히 (위공소찰)의
서첩 표제를 간청했던 것 같다. 다음에 편지 내용을 몇 대목 소개해본다(모두
고람이 역매에게 써 보낸 것).
"담계와 석암-중국의 유명한 서화가들-의 대련 2폭을 어제 저녁에 권군이
가지고 왔는데 우선 여기 놔둔다. 진짜인지 가짜인지 확실한 결정을 내리지
못하겠다. 당신의 감정이 틀림없는 것 같다. 책 2권을 받았다."
"어제 보낸 서화 12폭 중에서 확실하고 의심의 여지가 없는 것은
(정수첩)(화첩인 듯) 1권뿐이다. 당신은 어떻게 생각하는지? 영표(청대의 유명한
화가 황진)의 족자는 돌려보낸다."
"며칠 앓고 일어났다. 마침 부득이한 용차가 있어 부탁하니 가진 것이 있으면
20냥만 4∼5일간 빌려줄 수 없겠소? 이런 일을 부탁하니 미안하오."
"보내준 예서 대련(역매가 써 보낸 글씨)은 재기가 넘쳐서 매우 좋은 데가
있다. 그것만 가지고도 세상에 이름이 날 만하나, 그러나 붓을 뉘어서 쓰고
중봉(붓의 중봉)을 많이 쓰지 않았고, 짜임새도 어색한데가 있어서 조금 흠이다.
한대의 비첩을 많이 보고 문자기에 대한 공부를 더 한다면 옛사람 부끄럽지
않겠다."
이 편지 내용만 보아도 청나라를 드나들기 전까지 역매는 고람에게 많은 것을
배우고, 또 모든 것을 상의하면서 교양과 안목에 자극을 받았던 것 같다.
19세기 중엽, 서울에서의 국내외 신·구 서화의 유전 및 감정·평가의 내막을
알려주는 고람의 흥미있는 편지들은 (위공소찰)로 묶여진 것 외에도 또 하나의
묶음이 전해지고 있다. 당시 돈 많은 수집가였던 모양인 경연재라는 사람(이름은
불명)이 고람에게 서화의 감정 및 검토를 부탁했다가 받은 편지들인데, 이것은
역매의 경우와는 달리 수신인 자신이 생전에 서첩으로 꾸몄음이 분명한 것이,
표지에 '두당척소' 라 쓰고 그 아래에는 '경연재 심장' 이라 적고 있다(임창순
소장). '두당' 은 고람의 별호였다. 이 서첩에는 당시의 그림 값이 어느
정도였는가를 밝혀주는 다음과 같은 대목이 있어 특히 흥미롭다.
"(보내온 그림의) 8폭은 보잘 것이 없다. 살 것이 못 되나 40냥 부른 것을
수차 흥정하여 24냥까지 내려갔는데, 그 이하는 나로선 다시 얘기하기가
어려우나 원한다면 다시 한번 물어보겠다."
"설재의 그림은 값이 15민(냥)이라는데 주인이 도로 찾고 있다(경연재가
가져갔던 듯). 도로 보내라. 그림도 그다지 좋지 않다. 모처(추사나 우선 같은
최고의 안목인을 가리킨 듯)에 감정을 의뢰했다간 코웃음을 받을 게다. …요새
들으니 구리개(지금의 서울 을지로) 이첨정 집에 서화 수십 종이 있다는데 들은
적이 있는지? 가서 보고 싶다. 볼 길이 없을까."
역매가 역관으로서 청나라에 첫발을 디딘 것은, 고람이 30세의 젊은 나이로
짧은 천재의 생애를 마치기 1년 전인 1853년의 일이었다. 이후 1879년에 49세로
세상을 떠날 때까지 그는 10여 회에 걸쳐 청나라를 내왕했고, 그러는 동안
중국의 서화·골동품·금석문 탁본 등을 무수히 수집해 가지고 옴으로써 서울의
서화가와 교양인 사회의 중국문화 접촉에 크게 기여했다. 동시에 그는 저쪽의
새로운 문명서적들도 계속 가져옴으로써 이 땅의 개화사상을 촉진시켰다.
그러나 역매는 그의 교양생활의 중심이었던 귀한 서화 컬렉션을 더불어
감상하고 즐겨주었어야 할 고람이 불행히도 일찍 죽었다는 사실에 고독을 금치
못했던 것 같다.
만년에 남긴 문집 (천죽재차록)에서 역매는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계축년(1853년)부터 갑인년(1854년)에 걸쳐 비로서 연경에 원유하게 되면서
여러 박아지사와 교유하고 견문을 더욱 넓히게 되었는데, 그러는 동안 원·명
이래의 서화 110여 점을 구득하게 되고 삼대, 진·한의 금석문과 진·당의
비첩도 또한 수백 점을 모았다. 비록 당·송의 진적을 얻지 못한 것이
유감이지만 이것만으로도 압록강 이쪽에서는 자랑할 만하다. 내가 이것들을 얻는
데는 수십 년의 오랜 세월이 걸렸고, 또 그것들이 천만리 밖에서 모아들인
것이니 마음과 정신을 크게 쓰지 않았던들 참으로 쉽사리 얻을 것이 못된다.
나와 같은 벽을 갖고 있던 사람이 전기 공이었는데, 불행히 일찍 죽어서 내가
수장한 것을 미쳐 보지 못하였다. 죽은 그를 다시 살려서 같이 토론하며 감상할
수 없을까. 이것을 쓰면서 눈물을 금치 못하겠다."
청나라를 드나들던 초기인 1858년에 역매는 저쪽의 금석한 연구가인 유희해의
(해동금석원)과 추사의 (금석과안록)에 자극을 받은 듯 금석학 취미와 각별한
관심으로 (삼한금석록)이라는 자그만한 책자를 엮었다(필사본, 국립중앙도서관
소장). 내용은 추사가 이미 독자적으로 발견하고 고증하여 그의 (금석과안록)에
기록한 '신라 진흥왕 정계비' 와 역시 추사가 처음으로 발견하고 고증한 바 있는
'평양 성벽석각' 등의 국내 금석문을 원문으로 모으고 거기에 약간의 해설과
청나라 및 국내학자들의 논평을 곁들인 것이었다. 당시 역매의 나이 28세였다.
역매의 (삼한금석록)에 처음으로 기입된 '평양 성벽석각' 금석문은 추사가 44세
되던 해인 1830년에 묘향산을 탐승하고 돌아오다가 평양의 옛성벽에서 발견한
것이었다. 그때 그의 예리한 고증학적 안목은 성벽에 끼어져 있던 깨진 옛
석각편에서 '물하소형' 등 마멸이 심한 20자 내외의 글자를 판독했을 뿐인데도
자체의 고법과 단편적인 고구려의 관직명을 들어 '틀림없는 고구려의 금석문'
이라고 갈파했었다.
그런데 이 '평양 성벽석각' 은 그후 언제 어떤 경위로 그랬는지는 알 수
없으나 평양의 성벽에서 떼어져 서울로 운반되었다. (삼한금석록)을 적을 당시에
역매가 그것을 직접 입수하고 있었는지, 아니면 훨씬 뒤에 위창이 수집한
것인지는 알 길이 없으나 1910년대 중엽의 신문기사는 그 귀중한 석각문화재를
위창이 애장하고 있음을 확인시켜주고 있다. 오늘날 남한에서 볼 수 있는 유일한
고구려 금석문인 이 성벽각자는 1965년에 이화여대 박물관에 들어갈 때까지
위창 집안에서 갖고 있었다.
위창은 역매가 수집한 국내외의 풍부한 미술품 컬렉션을 유산으로 물려받은
외아들이었다. 그리고 이 위창이야말로 한국의 서화시와 기타 민족문화재 연구를
실질적으로 개창한 최초의 근대인물이었다. 그는 서화와 갖가지 진귀한 문화재가
모아져 있는 선택된 가정환경에서 자라면서 일찍부터 자연스럽게 미의 안목을
높일 수 있었고, 또 혈통적으로 타고난 취미는 그로 하여금 뒷날에 가서
근대적인 서화 연구의 개척자가 되게 하였다. 그는 중국 것이 중심이었던
아버지의 수집품에 자신의 눈으로 발견하고 수집한 희귀한 고서화들을
보탬으로써 2대에 걸친 최대의 컬렉션으로 발전시켰다.
그러면서 그는 중국의 서화만을 높이 사려고 했던 그전까지의 문화식민지적인
모화사상에서 탈피하여 이 땅의 민족 서화사 기록들을 가능한 모든 문헌에서
찾아내어 정리하는 한편 유존하는 고서화들을 파악 혹은 수집·보호하는 연구를
시작했다. 그러한 그의 선각적인 민족사관과 주체의식은, 수집가이자 개화파의
외교관으로 대원군의 쇄국세력 밑에서 박규수 등과 개국론을 강력히 주장하고
1876년의 강화도조약을 성공시킨 배후의 주역자였던 아버지 역매의 행동적인
사상에서 직접적으로 영향받은 자각이었을 것으로 믿어진다.
한국의 서양문화재와 기타 모든 문화유산에 대한 근대적인 재인식과 민족적
자부는 전적으로 위창 오세창의 학구적인 노력에서 비롯되었다 해도 과언은
아니다. 그의 그러한 노력은 1910년을 전후한 시기에 본격적으로 싹텄던 것
같다. 그전까지는 새로운 사상과 견식의 성장기였다.
최초의 한국 미술가 사전 엮어낸 위창 오세창
위창 오세창은 4∼5대에 걸친 집안의 전통을 이어서 20세 때에 역관 시험에
응시, 합격하여 사역원 역관이 됐다. 3년 후인 1886년에는 조정의 인쇄
출판기관이었던 박문국의 주사로서 (한성순보)(최초의 근대적인 신문) 기자를
겸했다. 이후 1896년에 일본 문부성 초청으로 도쿄의 외국어학교의 조선어
교사로 1년간 가 있게 될 때까지 그는 여러 관직을 역임하였다. 그러나
1902년에는 개화당 사건에 연루되어 일본에 망명, 5년만에 귀국했다. 그 무렵
일본에서 손병희·양한묵 등의 권유로 천도교에 입교했다.
이렇듯 개화운동의 적극적인 참가자였던 위창은, 망명지 일본에서 돌아온
직후인 1906년에는 천도교를 배경으로 손병희·권동진·이인직 등과 민족적
개화사상을 계몽하기 위해 (만세보)를 창간하여 사장에 취임했고, 1909년에는
다시 대한협회를 배경으로 배일사상을 고취하는 (대한민보) 창간에 협력하는 등
눈부신 활동을 보였다.
그러나 다음해에 가서 국운은 마침내 기울고 국토는 일제의 식민지로
병합당하고 말았다. 통탄스런 시대의 격변과 망국의 암흑기를 목격하면서 위창은
집안의 민족문화 컬렉션을 새로운 감회로써 되만지기 시작하였다.
민족의 앞날을 걱정하면서 그는 떠돌아다니는 민족문화의 유산들, 특히 서화를
힘 자라는 대로 더욱 찾아 모았다. 위창의 서화 수집은 여유를 즐기는 단순한
취미가 아니었다. 그는 역대 서화가의 이름과 확실한 관계기록 및 진적을
조사·정리하여 우선 후학들을 위해 이 땅의 서화가 인명사전을 펴낼
계획이었다. 이 계획은 1910년대 중엽에는 상당히 진척되고 있었던 것 같다.
당시 (매일신보) 기자가 위창댁을 방문하여 그의 서화 컬렉션과 연구·정리
생활을 보고 쓴 (별견서화총)이라는 기사가 있다.
"근래에 조선에는 전래의 진적서화를 헐값으로 방매하며 조금도 아까워할 줄
모르니 딱한 일이로다. 이런 때에 오세창 씨 같은 고미술 애호가가 있음은 가히
경하할 일이로다. 씨는 십수년 이래로 조선의 고래 유명한 서화가 유출되어 남을
것이 없을 것을 개탄하여 자력을 아끼지 않고 동구서매하여 현재까지 수집한
것이 1,275점에 달하는데, 그중 1,125점은 글씨요 150점은 그림이다.
세종·선조·숙종·영조·정조 시대의 것이 많고, 신라·고려 때 것도 적잖이
모았으니 명현석유와 고래화가의 필적을 망라하였다해도 과언이 아니로다. 씨는
앞으로 100여 점만 더 구득하면 조선의 명서화는 누락됨이 없으리라 하여 고심
수집 중이며, 다만 서화를 수집함에 그치지 않고 그 필자·별호·연대·이력
등을 상세히 조사하여 참고케 하였는데, 그 목록만 하여도 세상에서 가히 구득치
못할 가치가 있겠더라. 기자는 씨에게 그를 사진판으로 출판하여 조선의 고미술
동호자에게 할애할 것을 권유했고 씨도 그런 계획이 있어 그 기회를 엿보는
중이라며 우선 그 목록을 정리·출판하여 서화 동호자의 참고자료가 되도록
하리라더라."
1910년대 중엽의 위창의 생활내막과 컬렉션을 가장 상세히 알려주는 글은
1916년 12월 7일부터 5회에 걸쳐 (매일신보)에 연재된 만해 한용운 선사의
위창댁 방문기인 (고서화의 삼일)이다. 3년 후의 3·1독립운동 때에 가선 다같이
33인 민족대표에 끼지만 만해와 위창이 만나기는 이때가 처음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진작부터 서로의 존재와 민족사상을 익히 알고 있었다. 만해의 위창
방문기를 쉽게 풀어 긴요한 대목의 요지만 인용해 본다.
"11월 26일(1916년) 하오, 박한영·김기우 두 분과 동행하여 조선 고서화의
주인되는 위창 오세창 선생을 돈의동으로 방문하다. 나는 그가 조선 고화를
수집한다는 말을 들은 지 이미 오랜지라, 일찍부터 구경하고 싶었으나 여러 일로
좀처럼 기회를 얻지 못하다가 기우의 소개로 마침내 뜻을 이루게 되었다."
"위창댁에 이르러 중문을 들어서니 마당에는 국화분 몇이 놓여 있다. 응접실에
들어가 앉으니 기우가 나를 위창에게 소개하여 지면의 예를 나누었다. 그런 후
위창은 그의 오랜 친구인 기우를 시켜 별실에서 서화 축을 가져오도록 하였는데,
그전에 벽에 걸린 서화를 보라 한다. 나는 머리 들어 사벽을 돌아보았다.
북쪽 벽에는 '주정의 명' 을 탁본한 것이요, 서쪽 벽의 것은 석각을 탁본한
5폭을 이어서 표구한 것이다. 첫 번째 행의 '물하소형' 4자는 성벽의 각자이니,
위창은 내가 그것을 보고 있었을 때에 나무상자 하나를 열더니 한 조각의 돌을
보여주는데, '물하소형' 등의 글자가 새겨져 있는 성석이라. 나머지 4행은
'통격석비' (백제의 유허 비문), '동우불광청' (단곡사의 신라 신행선사 비문),
'대사유악장' (정토사의 고려 자등탑비 비문), '일시동인실개유지' (승암사의 이조
무학선사 비문)이었다."
"어느 겨를에 기우는 일곱 축의 화첩을 가져다 놓고 열람을 독촉하는지라,
벽에서 눈을 돌리니 (근역화휘)라고 표제가 적혔는데 위창이 직접 화첩을 꾸미고
쓴 것이라. 제1축은 31인의 그림 41점으로 되었는데 첫장은 고려 공민왕의 양
그림이요, 그외 신사임당의 '초충도' 등이 들어 있다. 제2축은 30인의 41점,
제3축은 31인의 41점, 제4축은 20인의 29점…. 나는 눈으로는 그림을 보고
손으로는 화가의 이름을 짚어 나가기에 바빴다. 이렇게 그리워하던 영예스러운
우리 고인의 수택을 접촉하니 감개가 무량하였다. 계속해서 29인의 그림 32점을
모은 제5축, 24인의 34점이 들어 있는 제6축, 26인의 33점이 든 제7축을 모두
보았다. 도합 191인의 역대 화가가 그린 250점의 그림을 5시간 반이나 걸려
배람하였다. 다시 서첩까지 보려 했으나 시간이 너무 오래되고 하여 다음날로
미루고 발길을 돌렸다."
"다음날에는 오래 전부터 약속이 있었던 김남천, 강도봉 두 스님을 청하여
동행하려던 차에 마침 광문회에 머무르고 있던 김노석이 찾아왔길래 동행
여부를 물으니 그도 좋은 기회라고 흔연히 나서는지라, 4인이 동행하여 서첩을
보기 시작한 것이 하오 1시 반이었다. 표구는 화첩과 똑같고, 표제는
(근역서휘)니, 모두 23축으로 되어 있었다.
제1축에는 조선 최고의 명필 김생의 금니서와 최고운의 은니서가 있는데
이것이 진적(진짜)인지 아닌지 약간 의심의 여지가 있다지만, 그 밖에 정몽주의
글씨는 어제 공민왕의 그림을 보던 감회가 그치지 않았던 터라 더욱 감명을
받았다.
제2축 이하에는
성삼문·이황·정철·허난설·송운대사·한석봉·이괄·송시열·허미수·정약용
·김정희의 각체 각종 내용의 글씨들이 모아져 있는데, 모두 692인의 진묵이라,
그것들을 불과 3시간에 다 보고 나니 속첩이 또 있단다. 그러나 그것은 내일 또
보기로 하고 일어섰다."
"다음날엔 혼자서 찾아가다가 중로에서 김노석을 만나 돈의동 위창댁에
이르니 조선 제일의 호고가인 최남선과 최성우가 먼저 와 있었다. 서로 오랜만의
인사를 나누고 곧 (근역서위.속)을 보기 시작하였다. 이 속첩은 모두 12축으로
408인의 글씨를 보충한 것인데 그 속엔 고려 때의 금니자를 비롯하여
임경업·이삼만·민영익 등의 필적이 수집되어 있었다. 본첩것과 합치면 실로
1,100인의 글씨가 모아졌고, 화첩이 그림까지 치면 도합 1,291인의 수적이라.
더구나 그것들이 신라의 김생으로부터 현대까지 1,200여 년에 걸쳤으니 이렇듯
잔편단간의 고서화를 채집하는 데 성공한 위창에게 그 동안의 고로를
위로하기보다 그 행복을 축하하겠도다."
만해는 그 외에도 미처 표구를 하지 못한 채로 있는 고서화와 탁본, 그밖에
살아 있는 서화가들의 작품도 볼 수 있었다. 끝으로 그는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조선의 고서화를 이렇듯 수집함은 실로 일조일석의 일이 아니며, 그 가전의
사업인데, 그가(위창이) 전력으로 수집을 착수하기는 7년전의 일로써 그 애씀과
성의는 누구도 동정을 표하지 않을 수 없도다. 서화의 원본을 수집함에 있어
어떤 땐 힘겨운 값으로 사기도 하고 혹은 어떤 이의 기증도 있었다. 그렇게 얻은
후에 필주(작가)의 역사기록을 찾아 연구하고, 그 연대를 찾아내어 순서를
정리하느라 정신과 체력을 모두 바쳤도다. 조선의 고인의 수적을 이같이 모음은
누구를 위함인가. 고물이 무엇인지 모르는 조선인의 안목으로는 이상하게 보이기
쉬우리로다. 나는 그 나라의 고물은 그 국민의 정신적 생명의 양식이라고 듣고
있다. 나는 위창이 모은 고서화들을 볼 때에 대웅변의 연설을 들은 것보다도,
대문호의 소설을 읽은 것보다도 더 큰 자극을 받았노라. 만일 훗날 조선인의
기념비를 세울 날이 있다면 위창도 일석을 점할 만하도다."
위창의 컬렉션에서 민족의 정신적 생명의 줄기를 본 만해는 크게 감동했던
모양이다.
불교계의 거인으로 독립투사였고 (님의 침묵)으로 유명한 민족시인인 만해
한용운이 1916년 가을에 컬렉션에서 보고 감동한 (근역화휘)와 (근역서휘)는
그보다 10년 후에 이루어지는 위창의 필생의 업적인 (근역서화징)(한국 최초의
역대 미술가 사전)의 기본 자료였다. 위창은 그의 컬렉션의 분류·정리와
편저에서 '조선' 이란 말 대신에 이 땅의 상징적 명칭의 하나인 '근역' 으로
표기했다. 그는 (근역인수)라 하여 역대 서화가와 명인들이 직접 사용한 각종
도장의 인영도 체계적으로 모으고 있었다.
이러한 한국 서화사 자료의 입체적인 조사와 개척적인 정리는 위창의 생애를
영광되게 한 문화적 업적이지만, 반면 민족문화에 대한 그의 사랑과 집착은 그가
3·1운동 때에 민족대표 33인의 한 사람으로 기개를 보인 투철한 독립정신과
함께 당시 조선사회에 참으로 값진 영향을 끼쳤다. 많은 뜻있는 학도와 인사들이
그의 주변에서 정신적인 영향을 받았고, 또 이땅의 문화유산에 대한 지식과
긍지를 높였다. 그러한 위창의 영향력은 한국 근대문화 초기의 커다란 사회적
공헌이었다.
서예와 전각, 그리고 서화감식안에서 모두 당대의 대가였던 위창은
3·1운동으로 옥고를 치른 직후인 1921년 10월에 민족 미술가들의 단체인
서화협회가 기관지 (서화협회 회보)를 창간할 때 그동안 (삼국사기)와
(삼국유사)를 비롯한 약 150종의 각종 문헌에서 뽑아 모았던 역대 서화가의
기록들을 '서가열전' 과 '화가열전' 이라는 제목으로 동시 연재를 착수했었다.
'탑원초의' 라는 필명으로 '나대편' 을 소개하고, 이어서 '여대편'을 착수했다가
(서화협회 회보)가 제2호로 중단(1922년)되는 바람에 계속 활자화되지 못하고
말았지만 앞의 두 '열전' 은 한국미술 사료의 최초의 정리 작업이었다.
위창의 역대 서화가의 행적 및 사료정리는 1928년에 마침내 한 권의 책으로
출판되었다. 곧 (근역서화징)인데, 이 최초의 한국 미술가 사전은 오늘에
이르러서도 그 방면의 유일한 문헌으로서 학계와 교양인 사회의 긴요한 사서
역할을 하고 있으니 이것 하나만으로도 위창의 공적은 너무나 크다. 1959년에
나온 김윤영 편저의 (한국서화인명사서)는 약간의 보충은 있으나 대체로
(근역서화징)을 국역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집안의 풍부한 컬렉션과 근대적인 집념의 소산인 위창의 명저 (근역서화징)이
처음으로 출판되었을 당시의 반응은 앞에서 이미 소개한 육당 최남선의 표현,
'암흑한 운중의 전광' 으로 대표되지만, 삼국시대 이후의 392인의 화가, 576인의
서가, 그리고 서화를 겸했던 149인의 기록을 연대순으로 정리하여 수록한
(근역서화징)의 출현에 대해 육당은 또 '참으로 일대경이에 속하는 업적' 이라고
신문에 썼다.
(근역서화징)에 앞서는 것이 있다면 추사에 완전히 심취했던 문도인 우봉
조희룡이 1844년에 기록한 (호산외사)를 꼽을 수 있다. 18∼19세기의 대표적인
명인 41인의 평전인데, 그러나 여기엔 화가로
최북·임희지·김홍도·김영면·이재관·전기가 포함되어 있을 뿐이다.
(근역인수)는 수집 정리자인 위창이 작고하고 15년 후인 1968년 가을에 서울
국회도서관에서 출판되었다. 조선 초기부터 근대에 걸치는 856명의 서화가가
애용했던 성명, 아호, 별호, 자, 기타 별칭, 이명의 도장 약 3,800종을 실제의
날인본(종이에 찍힌 상태)으로 모았던 이(근역인수)의 방대한 유고는 위창이
한국전쟁 중 대구에 피난하고 있다가 1953년에 90세로 별세한 후 유가족이
보관하고 있었다. 그것을 국회도서관의 강주진 관장이 출판을 전제로
인수함으로써 (근역서화징)과 더불어 위창의 필생의 큰 업적으로 쌍벽을 이루는
(근역인수)의 내용이 처음으로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는데, 이는 한국의
전각예술의 역사적인 전통과 실제 사용을 한눈에 보여주는 최대의 자료
집성이기도 하다.
위창은 이 야심적인 인수(도장의 숲)를 반세기에 걸쳐 수집하는 동안
조선시대의 각종 인보·인집·인첩·인책을 모두 참고, 흡수하고 있다.
한편 역대 서화가의 진필 수집이었던 (근역화휘)의 일부는 3·1운동 이후
위창의 생활이 차차 어려워지던 1930년을 전후한 시기에, 당시 서울의 부호로서
미술품 수집가였던 다산 박영철에게 넘어갔다가 1940년에 경성제대(지금의
서울대)에 기증되어 지금도 대학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다. (근역화휘)에선
(천)·(지)·(인)의 세 화첩(도합 67점의 소폭 그림이 들어 있다)이, 그리고
(근역서휘)에선 모두 35첩이 다산의 기증으로 역시 서울대박물관에 고스란히
전해지게 되었는데, 당시 기증자의 친일색이 개운찮게 뒤따르긴 해도 그것은
참으로 다행스런 행선지였다.
(근역서휘)와 (근역화휘)에 들어가지 않은 1,116점의 글씨와 그림(주로 근대의
문인화)들은 따로 (근묵)이라는 압축된 표제로 묶어(모두 34권) 위창이 끝까지
간수하고 있다가 유족에게 물려줬다. 그러다 1964년에 성균관대학에 들어가 현재
대학박물관에 소중히 보관되고 있다. 위창이 직접 쓴 '근묵' 이라는 제자 밑에
'팔십위' 라고 낙관 한 것을 보면 이 속첩이 꾸며진 것은 1943년의 일이었던 것
같다.
아버지 대로부터 이어졌던 위창의 컬렉션엔 진귀한 책도 많았다. 희귀한
고려본과 조선 초기의 진본들이 포함돼 있는 이 문고는 1962년에
국립중앙도서관에 들어갔는데, 약 3,200책이었다. 그밖에 낙랑시대의 명문이 있는
귀중한 전 2점(하나는 서기 335년명)과 역시 글자가 들어 있는 삼국시대의
기와조각 44점, 그리고 앞에서 이미 소개한 '고구려 성벽각자' 는 1965년 10월에
이화여대박물관이 위창의 유족으로부터 인수했다.
한국미술사 연구에 바친 열정의 생애 우현 고유섭
1928년 4월, 경성제대(지금의 서울대) 법문학부에 미학 연구실이 창설되어
일본인 교수들이 미학과 동·서양의 미술사 강의를 시작했을 때, 누구의
강의시간이건 한 번도 빠지는 일이 없는 너무나 열심인 학생 하나가 있었다.
그는 교수들의 주목을 끌어 2년 후에는 연구실 조수로 임명되었다. 이름은
고유섭, 그해에 그는 법문학부 철학과를 졸업하고 있었는데, 전공이
한국인으로서는 처음인 미학 및 미술사였다. 이후 그는 한국미술사의 실질적인
개척자로서 눈부신 연구와 조사활동 그리고 정력적인 집필생활을 시작했는데
그의 학문적인 기초는 미학연구실에서 3년간 조수로 있을 때 틀이 잡혔다.
규장각 도서를 샅샅이 뒤져 미술사 자료와 화론을 뽑기 시작하는 한편, 전국
각처의 유적지와 도요지를 현지 답사하는 왕성한 연구활동을 시작한 것도
그때부터였다.
우현 고유섭의 출현은 구한말 이후 이 땅의 역사적인 모든 유적과
미술문화재의 근대적인 학술조사 및 연구가 일본인 전문가와 학자들에게 거의
독점되고 있던 그 당시의 현실을 고려할 때 참으로 다행스럽고 반가운 일이었다.
1933년에 그는 일제 밑에서 가장 배일 기질이 강했던 개성사람들의 환영을
받으며 그곳 시립박물관 관장으로 부임했는데 그때 나이 30세였다. 이후 그의
한국미술사 연구는 본격화되고, 일본인 전문가들 속의 유일한 조선인
소장학자로서 민족적인 기개를 펴 나갔다. 이 땅의 문화유산과 미술문화재를
말하는 그의 글들이 개성과 서울에서 발행되던 신문·잡지에 끊임없이 실렸고,
일본인이 중심이었던 관계 학계에서의 그의 존재는 당시 뜻있는 조선인
지식층과 학도들에게 자부심을 심어주기에 족했다.
원 태생지가 강원도였다는 설이 있는 우현은 소년기를 인천에서 보내고
거기서 국민학교를 다녔다. 아버지가 이미 대학 교육을 받았다고 알려진 선택된
가정이었으나 생활은 넉넉한 편이 아니었다고 한다. 서울의 보성고보(지금의
보성중고교)를 거쳐 경성제대를 졸업할 때까지의 학비를 비교적 부유했던 인천의
처가에서 많이 대주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따라서 그후의 학문 생활도 언제나
가난을 면치 못했다. 개성박물관장으로 있을 때에 그가 받은 보수란 기껏 시청의
과장급이었다. 그러나 그의 학자적인 자세는 언제나 고고했다.
우현의 뚜렷한 목표와 그가 스스로 선택한 사명은 오직 하나, '한국미술사의
완성' 이었다. 그러한 그의 열의와 뜻을 재정적으로 다소 협조해준 사람이 있긴
했으나 그는 많은 어려운 조건을 민족애로써 극복해 나갔다. 그는 개성박물관
사택에서 정열적으로 연구논문을 집필하는 한편, 민족문화재의 재인식을
호소하고 그것들을 주목케 하는 교양물을 신문·잡지에 계속 기고했다. 위창의
뒤를 잇는 새세대인 우현의 과학적인 한국미술사 연구·개척은 사랑방 취미의
감상과 감식 위주로 고미술을 관심했던 그전까지의 귀족주의시대의 종말을
뜻하는 것이기도 했다.
개성박물관으로 있으면서 우현은 당시 개성에서 발행되던 (고려시보)에 개성
일원의 고적을 조사·소개하는 수년에 걸친 장기 연재물을 집필했다. 그때
우현의 존재에 심취한 3인의 젊은 학도가 있었다. 모두 개성에 집을 갖고 있던
이 학도들은 가까이에서 우현의 민족적인 미술사연구와 고적 조사의 중요한
의미에 감명을 받는 동안 어느덧 우현의 뒤를 계승하려는 열렬한 제자가
되었는데, 이때의 그들의 지연에 의한 접촉과 인연이야말로 한국인에 의한
한국미술사학계의 여명이었다.
왜냐하면 그때의 3명의 학도, 곧 동경제국대학에 재학 중이던 황수영과
메이지대학에 재학 중이던 진홍섭, 그리고 개성의 송도고보를 졸업하고 있던
최순우는 우현이 1944년에 41로 요절한 후 모두 한국미술사의 전문가로
성장·활약하면서 학계 발전에 중심적인 역할을 했고, 그들 밑에서 많은
제3세대의 연구학도들이 배출됨으로써 오늘의 한국미술학계가 틀 잡혀졌기
때문이다. 해방 후 그들과 함께 한국미술사학계 형성에 크게 기여한 김원룡
교수가 있으나 이 김교수만이 우현과 직접적인 관계가 없다.
애석하게도 우현의 생애는 너무 짧았으나 그가 처음으로 문을 열었던
본격적인 한국미술사 연구는 개성에서 그의 후배이자 제자들인 황·진·최에
이어져 더욱 체계적으로 연구·개발되면서 그는 영광된 개척자의 상으로 살아
있게 되었다. 동시에 이 땅의 문화유산에 대한 지난날의 그의 과학적인 접근과
연구 업적은 오늘날 한국미술사학계에 하나의 우상이 돼있다.
사실 우현은 그의 짧은 생애에 기적에 가까운 연구 업적을 남겼다.
한국미술사와 문화재에 대한 그의 학문적 정열은 1930년부터 불과 10여 동안
(진단학보)를 비롯한 학회지와 신문·잡지에 발표된 약 150편의 연구논문,
유적조사, 혹은 답사기, 연구 여화, 화가론 외에도 민족문화재를 보호를 위한
시평, 해설, 수필 들이 대변해주고 있다. 그 밖에도 상당 분량의 미발표 유고
뭉치와 조사 노트가 있었다. 이 유고들은 우현이 타계하면서 3명의 문도 중의 한
사람인 황수영 교수가 보관하였다가 해방 직후부터 순차적으로 출판되었는데, 곧
(송도고적)(1946년), (조선탑파의 연구)(1948년), (조선미술문화사논총)(1949년),
(고려청자)(1954년), (전별의 병)(1958년), (한국미술사급 미학논고)(1963년),
(조선화론집성 상.하)(1965년)이다. 이는 3인의 제자 황·진·최의 스승을 기리는
헌신적인 협력의 소산이었다.
(송도고적)은 1936년부터 4년에 걸쳐 (고려시보)에 연재되었던 것으로 우현이
살아 있을 때 주위에서 간곡히 출판을 권유하여 조판까지 되었으나 일제의
탄압으로 저자는 인쇄본을 끝내 보지 못하고 눈을 감은 애석한 유래를 갖고
있다. 그러나 해방 직후 마침내 출판이 되었을 때 그 첫장에는 다음과 같은 말이
들어 있는 우현의 자서가 있었다.
"고적은 인간 생활의 전통을 보여주는 증징체다. 창조는 전통 위에서
이루어진다. 이리하여 역사는 생활의 잔해가 아니라 창조의 온상이며 고적은
한낱 역사의 조백(생명이 없는 유물)이 아니라 역사의 상징, 전통의 현현인
것이다."
한국민속학의 정열적인 개척자 석남 송석하
우현 고유섭은 유형문화재를 연구대상으로 한 한국미술사의 개척자였다. 반면
같은 시기에 무형문화재 쪽의 가면극과 그밖의 전통적인 민속의 조사·연구에
투신했던 또 한 사람의 정열적인 개척자가 있었다. 곧 석남 송석하였다. 두
사람은 1930년대에 마치 약속이나 했던 것처럼 민족문화재의 큰 두 갈래를
분할해 갖고 다같이 영예로운 개척자가 되었는데, 우현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오늘의 한국 민속학계는 석남과 더불어 시작되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공교롭게도 그들은 1904년생의 동갑이었다.
돌이켜보면 이 민속학 분야에도 미술사의 위창 오세창처럼 조선 말엽에
눈떴던 존경할 만한 선각자는 있었다. 그 대표적인 인물은 상현 이능화였다.
1889년에 서울에서 영어학당을 졸업하고 한성외국어학교의 프랑스어 교사,
한성법어(프랑스어)학교 교장을 지내는 등 개화기에 국제적인 시야를 가졌던
상현은 한일합방 이후 위창 등과 민족정신의 계몽 및 선양에 힘쓰면서 종교와
민속에 관한 많은 저서를 집필했는데, 넓은 의미의 무형문화재와 민속학에
관계되는 것으로 (조선무속고)·(조선여속고)·(조선해어화사)(기생의
풍속사)·(조선제례고) 등이 있다. 이 책들은 비록 위창의 (근역서화징)처럼
순한문으로 씌어진 것이긴 하지만 뒤에 이어지는 새로운 세대의 관심에 중요한
길잡이가 되었다.
상현 같은 선각자를 배경으로 석남이 이 땅의 민속놀이와 그 원형을
조사·연구하고 또 보호의 중요성을 사회에 인식시키는 근대적인 민속학 운동을
시작한 것은 1930년을 전후한 시기였다. 고종황제 때에 시종무관을 지낸 경남
언양의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나 일본의 동경제국대학 상대에 유학, 상학을
전공하다가 민속학에 뜻을 두면서 이미 보장받았던 엘리트 코스를 집어치운
석남은 조선에 돌아오자 각지를 여행하면서 무서운 집념으로 살아 있는 민속의
기초 조사에 착수했다. 그러다 그는, 도쿄의 와세다대학에서 사학을 전공하고
와서 민족문화 연구에 착수했던 손진태(석남보다 4살 위, 한국전쟁 때
서울대학교 문리대 학장으로 있다가 납북), 고향 친구로 역시 와세다대학에
유학하여 영문학을 전공한 정인섭 등과 더불어 최초의 조선민속학회를 조직하고,
집의 돈을 가져다 (조선민속)(1933년 1월에 1호 발행)이라는 역시 최초의 민속학
연구지를 발행하는 등 눈부신 활동을 펴 나갔다.
집에서 가져다 쓸 수 있는 돈이 있었다는 조건은 석남의 민족적인 포부와 이
땅의 민속학 개척을 위해 참으로 다행한 일이었다. 당시 그는 독일제 고급
카메라와 노트가 든 가방을 메고 자유롭게 여러 지방을 답사하면서 세상에 잘
알려지지 않았거나 무시되고 있던 독특한 민속놀이를 비롯하여 전통적인 각종
연중행사와 종교의식을 사진과 기록으로 남겼다. 풍속적인 민구와 예부터
내려오는 서민문화의 각종 민예품들도 그의 중요한 관심사였고, 또 수집의
대상이었다.
살아 있는 민속의 형태를 조사·파악하는 현지 답사와 함께 석남은
옛문헌들을 뒤져 그것들의 연원과 유래를 찾아내는 학술적인 고찰에도 열중했다.
그러면서 그는 신문·잡지에 민속학의 새로운 의미를 역설하고, 더 많은
관심인과 연구가를 기대하는 글을 계속 기고했다. 그는 연구학자인 동시에
사회운동가였다. 그는 자신이 조사한 자료와 지식을 독점하려 하지 않았고,
언제나 여러 동학자 및 대중과 관심을 같이하려고 했다.
사재로 '조선민속학회'를 이끌면서 석남은 사라져가는 이 땅의 민속놀이를
세상에 알려 재인식시키는 한편 그 보호에 힘쓰는 행사도 자주 꾸몄다.
(조선일보)를 움직여 전국 각지의 농악대를 서울로 불러다 일대 경연대회를
여는가 하면 황해도의 '봉산탈춤' 을 처음으로 서울에 유치하여 '양주별산대놀이'
와 비교하는 무대를 꾸미기도 했다. '봉산탈춤'은 석남을 가장 매혹시킨
민속놀이의 하나였다.
1930년대 중엽, 이런 일이 있었다고 한다. 석남은 사리원(봉산군청 소재지)을
찾아가서 당시 조선인들의 군중적인 모임을 좀처럼 허락하려고 하지 않던
일본인 책임자를 설득시킨 후, '봉산탈춤' 의 전통적인 기능보유자들을 모아 7월
백중날(음력) 한바탕 놀게 하고는 그 진행과정과 대사를 촬영·기록하는 한편
방송국을 움직여 실황중계의 특별방송까지 시켰다. 또 그때 마침 백두산의 동물
생태를 조사하러 가던 스웨덴의 동물학자 베르그만을 끌어들여 그로 하여금
'봉산탈춤' 놀이를 무비카메라로 촬영케 함으로써 유럽에 이 땅의 고유한
민속놀이 하나를 소개하도록 했다고 한다(교수의 증언, (한국민속고) 서문에서).
앞의 이야기가 혹시 1934년 단오날에 '조선민속학회'와 경성제대 민속조사반이
사리원에서 특별히 '봉산탈춤' 을 실연시켰던 때의 일인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이때엔 같이 참관하기로 했던 방송국과 신문사측이 사정으로 불참했다고 석남은
기록하고 있다( (한국민속고)에 수록된 (사리원 민속무용에 대하여)에서 ).
조국이 해방을 맞은 뒤, 석남은 그의 평생의 꿈이었던 민속박물관을
발족시키는 데 성공했다. 그때 그의 집념을 협조해준 사람은 과거의 총독부
박물관을 인수한 국립박물관의 김재원 관장이었다. 김관장은 당시 미군정청의
관계관을 움직여 국립민족박물관 간판을 서울 남산 밑에 있던 전의 총독부 소속
건물에 걸게 하고 석남이 관장으로 취임하는 데 협력했다. 이 민족박물관의
내용은 지난날 조선의 민예품에 심취했던 일본인 연구·수집가 야나기
무네요시가 경북궁의 한 고건물을 빌려 개인적으로 창설했던 조선민족미술관의
컬렉션(도자기·민화·기타 민예품)에 석남 자신이 수집했던 민속 가면 등을
합친 것이었다. 그는 이 민족박물관을 오래 전부터의 꿈이었던 미속의
진작·조사·연구기관으로서의 민속박물관으로 발전시키려 했었다(1936년 1월
1일에 (동아일보) 지상에서 말한 공상계획). 그러나 불행히도 그는 1948년에
45세로 병사함으로써 그 새로운 포부는 좌절되고 말았다.
석남이 작고한 뒤, 국립민족박물관도 열의 있는 적절한 후계자가 없이
우여곡절을 겪다가 한국전쟁 직후에 정부기구 축소 조치로 폐쇄되고, 가면을
포함한 그의 민속애의 컬렉션은 야나기의 그것과 분별이 불가능하게 뒤섞여
국립박물관에 흡수되었다.
그뿐이 아니었다. 석남의 또다른 컬렉션으로, 1949년에 서울 보성중고교(전형필
재단)에서 인수했던 진귀한 고서들도 한국전쟁 중 학교 도서관에서 무참히
피해를 받아 상당수가 사라져갔고, 다행히 살아남은 2,359책이
한국민족미술연구소(현재 간송미술관)로 옮겨 보관돼 있다. 진작부터 학계가
알고 있던 귀중본 가운데 (삼국유사)의 잔본과 (매월당 시호)(필사본)는
인멸돼버렸고, 희귀한 계미자본(1403년에 주조된 최초의 조선 동활자 책)의
(동래선생교정 북사상절) 2책만이 기적적으로 수습되어 있다.
한편 석남이 (조선민속)을 비롯한 여러 잡지와 신문에 발표해 남긴 30여 편의
연구논문과 계몽적인 글들은 그가 타계한 지 12년 만인 1960년에 그의 매부되는
양재연 박사가 중심이 되어 (한국민속고)라는 단행본으로 묶어 출판하였다.
문화재를 통해 일제와 대결한 간송 전형필
1930년대에는 일제의 의한 이 땅의 민족색 말살정책이 유형 무형으로
강화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한국 근대문화의 비약적 개화기였고 동시에
민족의 문화유산에 대한 존중과 인식이 사회적으로 크게 계몽된 시기였다.
문화재에 대한 재인식과 사랑은 당시 여유 있는 인사와 수집가들에 의해 옛
서화와 책, 기타 도자기, 불상 등 모든 종류의 고미술품이 수집·보호되는
양상으로 나타났다. 물론 그중엔 일본인 권력자 혹은 골동상과 결탁한 무리들도
많았고, 또 자신의 부나 안목을 자랑하려는 수집가도 적지 않았다. 그러나 그런
속에서도 민족혼을 지킨다는 뚜렷한 목적의식으로 재산을 아끼지 않은
민족문화재의 참다운 수호자가 있었다. 그 대표적인 인물이 간송 전형필이었다.
같은 세대의 고유섭과 송석하가 유형 무형의 문화유산을 학술적으로
조사·연구한 반면 간송은 개인적인 상속재산으로 그것들의 수집·보호에
심혈을 기울임으로써, 모든 것이 갈취·파괴당하던 일제 하 식민지에서 민족적인
사명의 하나를 감당한 제3의 공로자였다. 그러한 간송의 업적은 사학자 김상기
박사의 다음과 같은 증언에서 단적으로 파악된다.
"회고컨대 일제 침략시기에 있어 귀중한 우리의 문화재가 날로 일인을
비롯하여 기타 외국인의 손에 수탈되고 있을 제, 선생은 문화재 수호를 그의
사명으로 여기고 일생을 통하여 사재를 기울여 저들과 경쟁하면서 수많은
문화재를 구입 또는 회수할 제, 때로는 일본까지 건너가 우리의 국보급 문화재를
국제적 경쟁 속에서 고가로 매환(사서 되가져옴)하여 국제사회에 화제를
던지기도 하였다."(한국민족미술연구소 발행)
간송은 1906년에, 당시 서울 종로 일대의 상권을 잡다시피했던 큰 부호의 둘째
아들로 태어나 휘문보고(지금의 휘문중고교)를 거쳐 1929년에 일본 도쿄의
와세다대학 법과를 졸업했다. 일찍부터 남달리 생각하는 것이 깊고 도량이
넓었던 그는 일본 유학을 마치자 선대로부터 물려받은 막대한 재산을 가치 있게
쓸 수 있는 어떤 민족적인 과제가 있는가를 자문하게 되었다. 그때 그에게
재산가만이 가능한 민족문화재의 수호에 나서도록 권하고 혹은 영향을 준
인사와 선배들이 있었다. (근역서화징)의 편저자로 문화재 수집·보호의
대선배이자 구안의 선각자였고 3·1운동 때엔 민족대표의 한 분이었던 위창
오세창은 특히 간송의 명예로운 생애의 초기에 결정적인 영향을 준 인사였다.
위창댁을 드나들면서 서화와 고서에 대한 견식과 안목을 높이는 한편
본격적으로 수집을 시작하게 된 간송은 주위에서 일본인에게 빼앗겨서는
안된다고 말하는 중요한 문화재가 있으면 값을 따지지 않고 무조건 사들였다.
그러한 그의 재산 선용과 민족적인 사명감을 정신적으로 격려해준 사람으로는
위창 외에도 문인화가로 교양 있는 수집가였던 영운 김용진과 휘문고보 시절의
은사인 최초의 서양화가 춘곡 고회동(1920년대 중엽 이후 전통적인 묵화로 전향)
등이 있었다.
서화와 고서로부터 시작되었던 간송의 컬렉션은 차차 고려 및 조선시대의
도자기, 기타 불교 조각품 등으로 수집 대상이 확대되어 갔다. 그것은 사적인
취향과 단순한 독점의 만족감을 떠난, 민족문화재의 광범위한 보호로서의
사명감을 가진 수집이었다. 그의 안목은 갈수록 높아졌고 따라서 그가 잡는
물건들은 예외 없이 민족미의 정수들이었다 그의 눈은 당시 탐욕스런 일본인
수집가와 골동상을 앞지르곤 했다. 어쩌다 일본인에게 놓친 물건이 있을 때면
있는 힘을 다하여 사오고야 마는 투쟁을 벌였다. 그것은 문화재를 통한 일제와의
대결이었다.
일제의 국토를 침탈당하고 있는 현실 상황에서 미래의 광복을 지향하는
민족문화재의 수집·보호와 훗날의 사회적 기여야말로 자신에게 부과된
사명이라고 확신하게 된 간송은 순수환 협력자가 추천하는 미술품과 스스로
주목한 문화재들을 지체 없이 사들이느라고 여차하면 부동산까지 처분했다. 가령
일본인에게 빼앗기게 된 국보급의 고려청자 하나를 시급히 일본에서 되사오기
위해 시골의 농장 하나를 팔아야 했던 일도 있었다.
확고한 목적위식으로 시작된 간송의 컬렉션은 급속도로 그 내용이 풍부해져
갔다. 1930년대 중엽엔 벌써 개인미술관의 시설을 필요로 했을 정도에 이르렀다.
그즈음 서울 성북동의 유서 깊은 선잠단(양잠의 창시자라는 중국 원비 서릉씨를
제사 지내던 곳으로 고려시대 이후 왕비가 양잠의 의식을 베풀었다) 일대의 숲
속에 우아한 양식 별장을 짓고 살던 프랑스인이 있었다. 구한말에 이 땅에
건너와서 비료장사를 하여 크게 돈을 벌었던 브레상이라는 독신자였다. 그런데
이 프랑스인이 마침 귀국한다고 별장과 숲을 내놓게 되었다. 간송은 그 지대와
숲과 별장이 마음에 들었다. 그는 즉각 그것을 사들이고 별도로 자신의 미술관
건물을 숲 속에 세우는 구상을 서둘렀다.
1936년, 성북동의 선잠단 숲 속에는 드디어 한국 최초의 개인미술관이자
나라를 잃은 민족의 역사적 문화재 보호에 몸과 재산을 바치기로 결심한 한
장한 청년 독지가의 의지를 상징하는 아담한 2층 건물이 세워졌다. 그리고 이
건물에는 민족문화의 정화들이 수북하게 모여진 집이라는 뜻의 '보화각' (지금의
간송미술관)이라는 현판이 걸렸는데, 그때 그런 이름을 지어주고 또 현판 글씨를
써준 이는 바로 위창 오세창이었다.
보화각은 간송의 의지와 결의를 더욱 넓혀주는 장소가 되었다. 그는 빚나는
민족미술의 전통을 연구하고 계승시키는 장소로서 보화각이 기능하기를 원했다.
그는 컬렉션의 내용을 더 많은 걸작 미술품과 중요 문화재로 계속 채워 나갔고,
문고에는 한국 미술문화 연구에 필요한 모든 서적을 국내외에서 사들였다.
1930년대에 이미 실천전으로 목표했던 간송의 앞서와 같은 원대하고 치밀한
계획은 일제의 태평양전쟁 패망과 조국의 해방, 그리고 미구에 닥친 비극적인
한국전쟁 등을 겪으면서 지연되다가 그의 생전에 끝내 실현을 보지 못하고
말았지만, 그가 수집하여 고스란히 보존시킨 수만 점의 각종 문화재들은
지난날의 그의 큰 뜻과 업적을 대변해주고도 남는다. 한국전쟁 때에 유실된 극히
일부를 제외하고는 거의 완전하게 오늘도 보호되어있는 보화각 컬렉션은 간송이
57세로 작고한 지 4년 후인 1965년부터 고인의 유지를 잇는
학국민족미술연구소(소장 전영우는 간송의 둘째 아들)에서 정리를 맡아 순차적인
공개와 목록 정리가 이루어졌다.
개인 수집으로는 국내 최대의 보고인 간송 컬렉션은 한국전쟁 때 하마터면
북한 인민군들에 의해 몽땅 북으로 옮겨져 갈 뻔했었다. 그러나 유엔군의
전격적인 9·28 서울 수복으로 그 임무를 맡았던 북에서 온 요원들은 미처 그럴
겨를이 없었다. 그후 1·4후퇴 때엔 부산 지역의 안전지대로 모두 옮겨짐으로써
전란으로부터 보호되었다.
제2장 일제하의 수난
고려청자 최대의 장물아비 이토 히로부미
19세기 말엽부터 1945년까지의 한국의 근대사를 완전히 짓밟고, 국토까지
빼앗았던 일제와 일본인들의 온갖 죄악상을 낱낱이 밝혀 기록하기란 도저히
불가능할 것이다. 그 중의 한 영역인 역사 유적과 문화재의 약탈, 도굴, 파괴
그리고 헤아릴 수 없는 불법반출 등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극히 제한된 일본인들
자신의 기록과 역시 제한된 국내의 목격담 혹은 증언들이 그 윤곽과 만행의
일변을 밝혀주고 있을 뿐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 빙산일각의 확실한 증언과
기록만으로도 과거 일제와 일본인들에 의한 민족문화재의 수난이 어느 정도
극악한 상태였는지를 능히 파악할 수가 있다.
일제의 침략세력에 편승하여 일확천금을 꿈꾸었던 일본인 골동상과
호리꾼('호리'는 '도굴'의 일본말) 패거리가 부산과 인천항으로 줄지어 상륙하여
고려의 왕도인 개성 일원의 왕릉을 포함한 고분들을 닥치는 대로 파헤치기
시작한 것은 1905년 전후의 일이었다. 그들이 노린 것은 수백 년전부터
일본인들이 최고의 진품으로 여겨 오던 고려자기였다. 이 20세기초의 왜구들은
장총으로 주민들을 위협하는 한편 이 땅의 가난하고 무지한 일부 백성을 돈으로
매수하여 개성과 강화도 일대에서 수백 수천의 고려고분을 모조리 파헤치면서
그들이 목적한 각종 고려자기와 부장품을 노다지로 약탈했는데, 이는 일제에
의한 한국문화재 수난 초기의 최대의 만행이었다.
옛부터 한국에서는 어떤 무덤이라도 그것을 고의적으로 파헤치는 일은 절대로
용납될 수 없는 행위였다. 그것은 전통적인 사회윤리에 위배되는 것이었다.
옛부터 내려오는 가장 심한 욕 가운데 '굴총할 놈' 이라는 표현이 있을 정도로
그것은 못된 짓이었다. 그런데 '굴총할 놈' 의 정도가 아니라 '굴총하는 놈' 이
바다 건너 일본에서 줄지어 밀어닥쳤으니 천인이 공노할 노릇이었다.
1894년의 청일전쟁에 이어 1904년의 러일전쟁에서 거듭 승리를 거둠으로써
한반도에 대한 독점적인 침략과 지배권을 장악한 일제세력을 따라 일본에서
건너온 골동상의 앞잡이들과 현지에서 눈뜬 일본인 흐리꾼, 곧 '굴총하는 왜놈'
들이 개성 일대의 고분 속에서 파낸 고려자기들은 일단 서울로 모아졌다가
대부분 일본으로 반출되었다. 그리고 그 즈음엔 벌써 서울에서도 이 고려자기의
도굴폼들을 대량으로 사들이는 세력 있는 일본인 수집가가 하나씩 둘씩
나타나고 있었다. 한 일본인의 기록은 당시 서울에서의 고려청자 수집가로 이미
소문나 있던 일본인으로 아유가이, 아가와 등의 이름을 들고 있다.
또 개성 일원에서 같은 패거리의 일본인들이 도굴해 온 고려정자들을 산같이
쌓아놓고 서울의 일본인 수집가나 일본 본토로 그것들을 중개한 골동상으로는
곤도라는 자가 있었는데 그는 지금의 충무로 입구 근처에 가게를 갖고 있었다.
1905년 11월에 일제의 군사적 협박으로 체결된 을사보호조약 이후 소위
보호정치의 초대 통감으로 온 한국 침략의 괴수 이토 히로부미가 저희 천황과
기타 일본의 귀족사회에 선물한다고 실어내간 무려 수천 점의 고려청자도 대개
곤도를 통해서 무더기로 입수한 것이었다. 이토 히로부미는 한국의 문화재 약탈
및 반출에서도 원흉의 역할을 했다. 그의 고려정자 대량 반출과 수집은
일본인들의 도굴행위를 최악의 상태로 조장시켰기 때문이다.
서울에 일제 통감부가 설치되고 이토 히로부미가 초대 통감으로 군림한
1906년에 서울에 건너왔던 일본인 가운데 미야케라는 변호사가 있었다. 그는
일본에 있을 때 이미 개성지방에서 일본인들이 도굴하여 가져간 고려자기들을
접촉 혹은 입수할 수 있었던 것 같다. 뒷날 그는 이런 말을 쓰고 있다.
"전부터 나는 옛 도자기에 깊은 감동을 느꼈었는데, 애써 한국까지 가게 된
것도 실은 한국의 옛 도자기의 친밀감에 이끌린 때문이었다."
이 미야케라는 사나이는 당시 한국에 몰려 와서 온갖 못된 짓을 다하던
일본인 무리들 속에선 그래도 양식이 있는 지식층이었다. 그도 결국은 고려자기
같은 한국 도굴품들을 현지에서 헐값으로 마음껏 입수해서 즐기려고 서울을
찾아온 일본인의 한 사람이긴 했으나 당시 그의 눈에도 정도가 너무 심하다고
비쳤었던지 약 30년 후에 가서 과거의 죄스런 비화들을 비교적 풍부하게
기록하여 남기고 있다. 다음은 (그때의 기억-고려고분 발굴(도굴)시대) 라는
표제로 된 미야케의 회고기에서 추린 일제침략과 한국문화재 수난의 초기
기록이다.
"(1906년 현재) 서울에는 곤도라는 일본인의 골동가게가 하나 있었다.
그리고는 다카하시라는 사나이가 가게는 따로 없이 고려자기를 들고 다니며
우리들에게 팔곤 했다. 이 다카하시란 사나이는 본시 순사(경찰)로 오랫동안
개성 방면에 근무했었다는 관계로 개성 부근에서 도굴한 물건들을 사들이고,
혹은 직접 개성에 가서 모아 가지고 오곤 했다. 곤도의 골동가게에 들어오는
고려시대의 발굴품(도굴품)들은 나타나기가 무섭게 누군가가 가져 갔다. 그러자
재미를 붙인 누군가가(물론 일본인) 자꾸 시켰던지, 그후 가게에는 고려자기의
수가 날로 급증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때까지도 서울의 한국인 지식층 가운데 고려청자의 존재나 진가에
눈뜬 사람은 거의 하나도 없었고, 또 본 적도 없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당시
고려자기는 일본인들이 무덤 속에서 파내어 일본인들끼리만 사고 파는 진기한
물건이었다. 미야케는 다카하시에게서 들었다는 다음과 같은 일화를 소개하고
있다.
"언젠가는 박식한 한국인이 왔길래 앞에 있는 고려청자를 보였더니 '이건 대체
어디 것이냐?' 고 진귀해 하는지라. '개성에서 출토된 고려시대의 것'이라고
했더니 깜짝 놀라더라는 것이다."
미야케의 증언을 빌리면, 일본인들에 의한 고려자기의 도굴과 수집이 절정에
이른 시기는 이토 히로부미가 통감 자리에서 물러나던 1909년 무렵부터였다.
그러나 그에 앞서 이토 통감이 서울에서 고려자기를 어떤 식으로 얼마나 휩쓸어
가져 갔는지에 대해서도 미야케는 꽤 자세히 기록하고 있다.
"당시 예술적인 감동으로 고려자기를 모으는 사람(일본인)은 볼로 없었고,
대개는 일본으로 보내는 선물감으로 개성 인삼과 함께 사들이는 일이 많았다.
이토 통감도 누군가에게 선물할 목적으로 굉장히 수집한 한 사람이었는데,
한때는 그 수가 수천 점이 넘었을 것으로 짐작되었다. 이 무렵 닛타라는
사나이가 있었다. 이토 통감의 연회석에 대기하고 있다가 춤과 노래로 흥을
돋우던 자인데, 그러다가 여관을 개업했었다. 이토는 틈만 있으면 이 여관에
나타나 닛타를 시켜 '얼마든지라도 좋으니 고려자기를 가져오라. 몽땅 사자' 하는
식으로 마구 사들였다. 그리고 그것들을 '여기서 저기까지 30점, 50점' 하는
식으로 선물하기가 일쑤였다. 언젠가는 곤도의 가게에 있는 고려자기를 몽땅
사버린 적도 있었다. 그 때문에 한때는 서울 장안에 고려자기의 매품이 동이
난 적도 있었다."
이토 히로부미는 한반도의 국권을 송두리째 빼앗는 데 성공한 일제침략의
괴수이자, 개성 일원에서의 고려고분 파괴와 고려자기 도굴을 크게 조장시킨
원흉이었다. 또한 그는, 과거 임진왜란 때에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그의 졸개들을
시켜 이 땅에서 저질렀던 대대적인 문화재 약탈과 유적 파괴의 범죄 행위를
또다시 반복한 불법침입자의 두목이었다.
이토가 통감 재임 2∼3년 동안에 그를 믿고 무볍의 만행을 저지른 일본인
호리꾼들의 도굴품인 고려청자를 수천 점 이상이나 무더기로 사들이게 되자
도굴사태는 절정기로 치닫게 되고 서울과 본토의 일본인들 사이에 고려자기
장사와 수집이 큰 유행을 이루게 도이었다. 미야케는 자신도 참가했던 당시의
상황을 앞의 회고기에서 다음과 같이 알려준다.
"(이토 통감이 골동가게의 고려자기를 몽땅 사들이는 일이 있은 후), 그
경기에 자극되었는지 바야흐로 고려청자에 열광하는 시대가 출현하였고, 한때
그것(도굴과 장사)으로 생활하는 자가 수천 명이란 얘기가 있었다. 따라서 당시
도굴을 당한 개성, 강화도, 해주 방면의 대소 고분의 수는 놀라울 정도였다는
것이다. 지난날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정한역(임진왜란) 때에도 고려고분 몇 개를
발굴(도굴)하여, 오늘날 우리나라(일본)에 전해져 있는 '운학문청자' 같은 명품은
그때에 가져온 것이 많다고 한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조선에서는 선조에 대한
공경심이 깊고 특히 분묘는 소중히 여기는 습관이 있어 꿈에라도 그것을
발굴하여 예전 일을 알려고 한다든지 혹은 옛 기물을 파내어 그것을 즐기려고
한 사람은 전적으로 없었다. 이 일(고려자기 도굴)은 춘추의 필법으로 말하면
일본인이 발굴(도굴)한 것이다."
일본인조차도 이 정도로 쓰고 있으니 그 실제의 양상이 어떠했을까. 미야케는
"그러나 하수인은 언제나 조선인이었다" 고 말하고 있다 얼마간 사실이었을지
모른다. 하지만 가난하고 무지했던 그들은 총을 가진 해적 같은 일본인의 위협과
다소의 품삯에 매수되어 움직였을 뿐이었다. 그리고 그들에게 예로부터 가장
꺼리고 몹쓸 짓으로 알고 있던 '굴총' 짓을 시켜서 얻은 출토품으로 뒤에 가서
한껏 돈을 번 자들은 일본인들이었다. 청자를 포함한 고려고분의 매장
문화재들은 당시 일본인들에게 가장 밑천 안 들이고 착취할 수 있는
보물들이었다. 본국에서 먹을 것 없어 맨손으로 돈 벌러 온 무식한 악당들이었던
일부 일본인들에겐 그것은 특히 눈을 까뒤집고 덤빌 만한 노다지 금광 같은
치부의 대상이었다.
그들은 개성 일원의 지리와 정보에 익숙해지면서, 그리고 서울의 일본인
골동품상과 수집가를 통한 판로가 갈수록 확대 보장되면서 만행의 도굴장소를
개성에서 강화도와 해주 쪽으로 넓혀 나갔다. 그리고 모든 지역의 고려고분이
파헤쳐졌다.
일본인 호리꾼의 수효는 날로 늘어갔고 한국인 하수인 없이 직접 도굴을
감행하는 자도 많아졌다. 미야케도 그 사실을 마지못해 시인하고 있다.
"고려자기 도굴이 최고조에 달한 때엔 일본인도 직접 참가했는지 모르지만,
일본인은 대체로 뒤에 앉아 출토품을 사들여서는 당시 조선에 와 있던 일본인
호사가들 사이로 들고 다니며 이익을 취했다."
미야케 말고 또 다른 일본인의 기록을 인용해 보자. 1930년대에
평양박물관장을 지낸 고이즈미의 증언이다.
"(조선의 고분들이) 오늘과 같은 참상을 격게 된 것은 병합(한일합방)을
전후해서 일본인이 조선의 시골까지 들어가게 된 후의 일이며, 일확천금을
꿈꾸며 건너운 자들(일본인)이 황금의 사발이 묻혀 있다든지 정월 초하룻날에는
금닭이 무덤 속에서 운다든지 하는 전설이 있는 고분을 금광이라도 파는
심산으로 파고 다녔다. 곳에 따라서는 그곳에 주둔하고 있던 헌병(일본인)까지도
그들과 행동을 같이 하는 자가 있었다니 딱한 일이었다."( (조선) 6월호, 1932년,
조선총독부 간행)
일본인 무법자들이 고려고분에서 약탈해 온 고려자기의 대대적인
장물아비이자 당대의 권력자였던 이토 히로부미는 한편으로 친일매국의
앞잡이였던 이완용(당시 대한제국 내각 총리대신)으로 하여금 창덕궁의 고종
황제를 정신적으로 위로해 드린다고 동물원과 함께 박물관을 창설하게 함으로써
일본인 무법자들이 도굴한 고려자기와 기타 고분유물들을 고가로 팔 수 있는
길을 열어주었다. 국권을 상실하는 을사보호조약을 앞장서서 이토와 체결했던
매국노 이완용은 그때 이미 허수아비였고, 미술품과 유물 수집을 실제로 맡은
자는 이토의 지시를 받는 통감부의 일본인 관리들이었다.
결국 일제 통감부 시절에 한반도에 상륙해 있던 일본인 호리꾼과 골동상들은
한국땅에서 빈손으로 갈취하고 도굴한 고려자기들을 통감부 관리들을 통해 한국
왕실에 고가로 팔아 넣음으로써 이중의 수지를 맞출 수 있었다. 일본인의 한
증언기록을 빌리면 한 개에 보통 5원, 비싸야 10원에서 20원 정도가 그 시절의
고려자기 값이었는데 당시 화제가 되었던 최고 기록은 창덕궁박물관에서 사들인
'청자진사포도동자문표형병' 으로 정확히 950원이 지불되었다. 그런 식으로
벼락부자가 된 일본인이 당시 서울에 얼마나 많았을까 능히 상상된다.
일본에서 가져온 것이 아니라 바로 우리 것을 불법으로 파 온 그 자들에게
그런 식의 거액의 돈을 왕실에서 지불하도록 한 이중의 역적이 또한 당시
궁내부대신 서리를 겸하고 있던 이완용 총리대신이었다. 지금 국립중앙박물관이
관리하고 있는 과거의 창덕궁 이왕가박물관(해방 후엔 덕수궁미술관으로
불리다가 1969년 5월에 국립박물관으로 흡수됨) 컬렉션의 고려자기 6,562점의
출토지를 보면 99%가 개성 부근으로 기록되어 있는데, 그 대부분이 앞서와 같은
경위로 일본인들로부터 사들인 도굴품들이었다.
이완용이 어지러운 국운에 처한 고종황제를 위로해 드리기 위해 박물관을
꾸미게 되었다지만, 거기에 어떤 물건들이 수집된다는 것을 임금으로선 알 리도
없었고 도 그 시기에 그런 일을 원했을 리도 없다.
그것은 이완용이 이토 통감의 문화적 음모에 맞장구친 계획이었다. 왜냐하면
나중에 고종황제에게 생색을 내려고 한 자는 다음의 일화에서 확인되듯이
이토였기 때문이다. 본래 조각가로 1913년에 이땅에 건너와서 한국의 옛
도자기문화를 연구했던 일본인 아사가와가 창덕궁 이왕가박물관장으로 있던
스에마쓰에게 들었다는 확실한 기록이다.
"어느날 이태왕(고종황제) 전하께서 처음으로 구경을 하시게 되었을 때, '이
청자는 어디서 만들어진 거요?' 하고 묻자, 이토 통감이 '이것은 이 나라의 고
려시대의 것입니다' 하고 설명을 하니, 전하께서는 '이런 물건은 이 나라에는
없는 거요' 라고 말씀하시는 것이었다. 그러자 이토는 말을 못하고 침묵해버렸
다. 알다시피 출토품(굴총해서 꺼낸 물건)이라는 설명은 그 경우 할 수가 없었
으니까."( (조선의 미술공예에 관한 회고), 1945년)
결국, 고종황제는 아무것도 몰랐던 것이다.
궁중에도 전래품이라곤 없던 고려청자를 처음 보고, "저런 것은 어디서
가져왔느냐?" 고 의아해 했을 때 이토는 아마 식은땀을 흘렸을 것이다. 그는
결국 대답을 못하고 쩔쩔맸다. 만일 그때에 고종황제가, 처음으로 보는 그
신기하게 아름다운 고려청자들이 일본인들에 의해 고려시대의 왕릉을 포함한
귀인의 무덤들이 모두 굴총되어 나온 물건들이란 것을 알았더라면 어떻게
되었을까. 아마 1년 후에 가서 영영 나라를 빼앗기게 될 때만큼이나 충격적인
비애와 망국의 한을 통감했으리라.
앞에서 이미 언급했지만 이토 히로부미는 일제의 한국혼 말살 및 국가 병합
음모를 확고히 굳히는 동안 일본인들이 이 땅에서 도굴한 수천 점 이상의
고려자기를 무더기로 수집했었다. 그중에서 그는 일품 103점을 골라 저희
메이지천황에게 진상했고, 그 외에도 당시 일본의 권력사회와 귀족들에게 한
무더기씩 보내어 한국에서의 최대의 선물로 삼았다.
그것은 서울에서의 다른 숱한 경로를 통한 도굴품의 대량 반출과
병행됨으로써 일본 본토의 상류층과 돈 있는 수집가들에게 고려자기 수집의
대유행을 일으켰다. 그때의 정황을 말해주는 구체적인 사례의 하나로 한일합방
직전인 1909년 가을에 도쿄에서 열렸던 대대적인 고려자기 경매전시를 들 수
있다.
여기 얇은 가죽과 비단으로 장정된 고급 카탈로그가 하나 있다. 표제는
'고려소', 곧 고려자기란 뜻이다. 앞의 경매전 때의 출판물인데, 서문에 이런 말의
씌어 있다.
"이 고려자기는 옛날에 외국으로 건너간 것을 제외하면 한국 안에서는 단
1점도 지상에서 그것을 볼 수가 없었고, 모두 고분에서 파내고 있다."
"고려자기의 미술상의 가치는 일찍부터 우리나라(일본)의 호사가들 사이에
애완돼 왔고 또 귀중시되었다. 그러나 고려시대에 송도(개성)를 중심으로 구워진
본고장의 참으로 정교한 물건은 아직도 세간(일본 사회)에 널리 소개되어 있지
않다. 따라서 이번에 고분 속에서 나온 고려청자와 백자들을 여기서 처음으로
접촉하게 된 사람들은 모두 믿으려고 하지 않는다. 이 물건들이 '나이치'(일본
본토)에 흘러들어오기 시작한 것은 불과 30년 이래(이 점은 주목할 만한
증언이다)의 일이다."
"다음에 고려자기의 출토지를 보면, 특히 정교한 것들은 송도를 중심으로 하여
100여 리 안팎의 분묘에서 나오고 있고, 강화도의 고려 귀인묘에서도 나오고
있다. 해주 등지에서도 때때로 나온다. 전라도와 경상도에서 나오는 것들은
고려자기임에는 틀림없으나 질이 좀 다르다."
이 서문의 필자는 일찍이 한국에 건너와서 고려자기 도굴을 진두 지휘한
자였거나 아니면 뒤에서 적극적으로 조종했던 악질적인 장물아비였던 듯, 당시의
실태와 정보에 너무나 환하다. 거기에 죄의식이라고는 털끝만큼도 비치지 않고
뻔뻔스럽게도 이런 말을 계속해서 쓰고 있다.
"지금은 우리 일본인들이 (한국의) 어디라도 들어가 있기 때문에, 만일 있는
물건(고분 속의 고려자기)이라면 반드시 출토시키지 않으면 안된다."
앞의 필자는 또 저들이 고려자기를 도굴하면서 하수인으로 부려먹은 몇몇
한국인의 행동을 고의적으로 과장시키면서 정작 저희 일본인들의 죄과에는
일언반구도 언급하지 않고 있다.
"고려시대의 무덤들은 모두 오랜 세월의 풍우 속에 꺼져버려 우리들(일본인)
눈에는 분별할 수가 없으나 한국인은 막대기(쇠꼬챙이)로 그것들을 찔러보고 그
속의 음향으로 감정을 하고 파내는 것이다."
이외에도 너무나 뻔뻔스런 말이 많으나 생략한다. 도판들을 살펴보면 5명의
일본 귀족과 도쿄 오사카 등지에서 21명의 수장가가 출품했던 약 120점의 각종
고려자기가 사진으로 확인되는데, 개중엔 현재 국내의 국보 혹은 보물급에
들어갈 일품들도 수두룩하다.
여기서 또하나 주목되는 것은 당시 서울에 있던 수집가 아유가이와 골동상
곤도를 비롯하여 시라이시 아카보시란 이름의 일본인들이 출품하고 있는
사실이다.
일본인들에 의한 한국의 고분 도굴과 고려자기 약탈행위는, 이토 히로부미가
초대 통감을 물러난 지 몇 달 후 만주 하얼빈 역에서 일제의 한국침략에
항거하는 안중근 의사에게 통렬히 사살되는 사건 같은 한국인의 분노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끊임없이 계속되었다. 2대 통감으로 온 소네아라스케가
한국인들의 눈초리를 두려워하여 다소 신경을 썼던 모양이지만 그도 엄중한
금지령을 내리지는 않았다. 굴욕의 한일합방 후에도 일제 총독부는 일본인의
도굴행위를 한동안 묵인해주었다. 미야케는 (그때의 기억)에서 이렇게 증언하고
있다.
"발굴(도굴)이 성해짐에 따라 조선인들의 반감도 갈수록 높아졌다. 그러나
금지시키려고 했을 무렵엔 벌써 수천 명이라는 사람(일본인)이 그 짓으로 생업을
하고 있어 별안간 금지한다는 것은 그들의 사활 문제라서 총독부에서 정책상
서서히 금지하는 방침을 세우고 당분간은 묵인하는 상태였다."
결국 일본인 도굴꾼들은 통감부와 총독부로부터 그들의 식민지 정착과
생활기반이 확고해질 때까지 보호를 받았다. 그러나 그들은 곳곳에서 분노한
한국인에게 혼나는 일도 많았다. 가령 1916년에 강화도의 고려고분을 조사하러
갔던 이마니시 류는 뒤에 이런 말을 기록 하고 있다.
"수년 전에 한 일본인이 도굴하여 유물의 일부를 꺼냈는데, 폭도(분노한
한국인을 이런 식으로 표현하고 있다)들에게 습격을 받고 도망쳤다고도 하고
혹은 무사히 도굴품을 갖고 갔다는 설도 있었다."
이마니시는 또 이렇게 쓰고 있다.
"자고로 조선인은 그 조상의 묘에 손을 대는 법이 없었는데 악질 일본인들이
남의 나라의 조상의 무덤을 그토록 비정하게 도굴하였다."
총독부 초기 이후 조선의 고적조사와 각종 고분 발굴에 참가했던 우메하라
스에지도 과거의 죄스런 사실에 다음과 같이 언급하고 있다.
"(우리들의 학술조사) 고물 수집가(일본인 도굴꾼과 장물아비)들에 의한
유적의 파괴를 조장시킨 좋지 못한 면도 있음을 부정할 수 없다. 대체로
조선에서의 유적의 파괴, 특히 고분 도굴은 러일전쟁 후 고려청자가 부장되었던
개성지역으로부터 시작되어 대정(일본 연호, 한일합방 후) 연간에 들어와 경북
선산 부근을 주로 하는 낙동강 유역의 유적이 도굴되었고, 1923∼1924년에는
낙랑고분군이 또한 대규모의 도굴을 당하게 되었다."(우메하라 스에지,
(한국고대문화), 해방 후 일본에서 집필)
한편 일찍부터 한국의 옛 도자기를 수집·연구한 전문가인 고야마 후지오는
1937년에 이런 증언기록을 남기고 있다.
"1911∼1912년께에는 고려자기의 수집열이 최고조에 이르러 당시 그것들의
도굴과 판매로 생활하는 자가 수백 수천 명에 달했었다고 하며, 그후 금령이
엄해져 한때 발굴(도굴)은 뜸해진 듯했으나 오늘날까지 고려고분의 도굴은
끊인 날이 없고, 그동안 출토시킨 고려 고도기의 수는 몇 십 몇 백만 점으로
이루 헤아릴 수 없을 정도다."(고야마 후지오. 권22의 (고려의 고도기) )
여기서 고야마가 말하는 몇 십만 혹은 몇 백만 점이란 그만큼 엄청난
숫자였다는 뜻이겠으나 어쨌든 그 대다수는 일본으로 건너갔다. 사학자 이홍직
교수는 현재 일본의 민간인들이 소장하고 있는 고려자기만 약 2만 점으로
추산했지만( (사학연구) 18집의 (재일 한국문화재 비망록), 1964), 사실은 그
이상일 것으로 믿어지고 있다. 가령 근년의 어느 일본인 관계전문가의 견해를
빌리면 통틀어 3∼4만 점은 될 것이라고 한다. 그 보다도 현재 국내의 모든
박물관 소장품과 민간 소장의 고려자기를 합쳐서 약 2만 점으로 칠 때, 배
혹은 그 이상을 지금도 일본인들이 갖고 있다고 보면 틀림없을 거라는 것이
국내 전문가들의 대체적인 추측이다.
현해탄을 넘나든 시련의 경천사탑
일제의 통감부 설치로부터 한일합방에 이르는 통분스런
시기(1905∼1910년)를 전후하여 일본인들이 이 땅에서 허겁지겁 탐을 냈던
문화재는 고분속의 고려자기만은 아니었다. 그들의 눈독은 산간벽지의 옛 절과
절터에서 석탑·불상·범종, 기타 모든 불교미술품과 옛 책에 이르기까지
닥치는 대로 확대되면서 한국 안의 모든 종류의 문화재가 상상을 넘는 참혹한
수난을 당했다. 그때의 일본인 약탈자로는 지위의 높고 낮음이 없었다.
고려자기의 최대의 장물아비였고 고분 도굴의 공공연한 조장자였던 이토
히로부미가 결정적인 한국 통치의 첫 단계로 소위 통감부를 설치한 직후인
1906년 12월에 한국을 방문했던 일본정부의 고관이 하나 있었다. 다나카 당시
궁내대신(장관)이었다. 그는 이토가 한국 침탈의 기초작업을 완전히 다져놓은
한반도를 유유히 찾아온 기회에 사적인 야욕의 치밀한 해적행위를 저질렀다.
문화재 약탈이었다.
"고종황제가 기념으로 하사했다. 개성 근처의 절터에 있는 대리석탑을
서해로 해서 도쿄의 다나카 대신댁 정원으로 운반하라."
다나카가 서울에서 직접 비밀지령을 내렸던 것인지 어떤지는 확실치 않다.
여하간 일단의 일본인들은 앞서와 같은 지시 명령을 앞세우며 개성에서
서남쪽으로 약 50리 떨어진 부소산 기슭의 옛 절터로 달려갔다. 여러 문헌
기록에 경천사라는 절이 있었다는 곳으로 일본인들이 몰려 갔을 때엔 절간
건물이라곤 이미 하나도 없는 황량한 폐사지였다. 물론 한명의 중도 없었다.
다만 고려시대의 특이한 대리석탑 하나가 우뚝 서 있었다. 높이가 13m도 넘는
거대한 탑신마다 온통 섬세한 부조를 가진 걸작 석조유물이었다. 바로
다나카가 노린 탑이었다. 그는 한국에 오기 전에 이미 이 경천사 자리의
대리석탑에 눈독을 들였던 것이 분명했다. 그렇다면 그 정보 출처는 1902년에
현지를 조사하고 사진까지 찍었던 세키노의 '조사보고' 였을 가능성이 짙다.
그러나 뒤에 덜미를 잡히게 한 것도 세키노의 그 조사기록이었다.
여하튼 일단의 일본인 무법자들은 "임금님이 하사했다"는 허위의 주장과
공갈 및 총검의 시위로 인근 주민의 저항과 관할 군수의 항거를 묵살하며
석탑을 마구 해체·포장해서 수십 대의 달구지로 야밤에 개성역으로
빼돌렸다가 기차로 인천까지 운반했고, 다시 배에 옮겨 싣고 일본으로의 반출
범행을 성공시켰다(초판에서 말한 서해안 영정포에서의 선적설은 잘못된 증언
얘기였다. 부록1 참조). 그것은 한국의 임금님을 판 치밀하고 완벽한 문화재
약탈작전이었다. 그러나 다나카 궁내대신의 이 경천사 십층석탑 불법반출은
금세 소문이 크게 나면서 양식 있는 일본인들 사이에서도 비난의 소리가
높아지게 되었다. 누구보다도 엄중하게 그 불법행위를 지적한 사람은 초대
총독인 데라우치 마시타케였다. 통감부의 3대 통감으로 이완용과 더불어
한일합방 조약을 성취시켰던 일제 육군대장 데라우치는 초대 조선총독으로
눌러 앉으면서 이 땅의 독립사상과 언론을 무자비하게 탄압한 무단정치로
악명이 높지만, 문화재의 경우에서만은 몇가지 가상한 일화를 남기고 있다.
"다나카가 실어간 석탑을 조선의 원위치로 돌려보내라. 그것은 불법적인
반출이었다."
당시 일본 제국주의의 강력한 실력자의 한 사람이었던 데라우치는
조선총독으로서 본국 정부의 한 고위층이었던 다나카를 서슴지 않고 궁지에
몰아넣었다. 그러나 뜻밖에 명예를 손상당하게 된 다나카 역시 만만찮은
권력자였다. 순순히 속죄하며 애써 탈취해 온 석탑을 되돌려 보낼 리가
없었다. 결국 데라우치는 그의 총독 재임 기간인 1915년까지 도쿄의 다나카
저택 정원에 들어가 있던 경천사 석탑을 반환시키지 못했다. 그러나 다나카는
그가 감정적으로 맞섰던 데라우치 총독이 본국 정부의 총리대신으로 승진해
오면서 더욱 약세에 몰렸다.
데라우치 총독이 언제부터 다나카의 경천사 십층석탑 불법반출 사실을
알았는지는 확실치 않다. 어쩌면 세키노가 1912년 8월부터 다음해 9월까지
5회에 걸쳐 (국화)라는 일본 잡지에 발표한 조사논문 (조선의 석탑파)에서 그
석탑의 행방을 궁금해 한 대목을 읽고 처음으로 그 사실을 주목하게 되고, 또
그 반출자의 신분도 확인한 후 참으로 조선을 위하는 듯한 정치적 제스처로서
자신의 실력을 과시하려 한 것이 다나카를 상대로한 '경천사 석탑의 반환요구'
였는지도 모른다. 세키노는 앞의 조사보고의 '폐경천사 대리석탑' 조항에서
다음과 같이 언급하고 있다.
"경천사는 경기도 풍덕군(개풍군의 옛 명칭) 부소산 속에 있었으나 터뿐이고
내가 명치 35년(1902년)에 조사할 때는 대리석 다층탑만이 남아 있었다. 이
탑이 그후 나이치(일본 본토)로 반출되었다고 하는데 지금 그 소재지는 알
수가 없다."
이어서 세키노는 이 경천사터의 대리석 다층탑은 고려 말기의 이채로운
걸작이라고 강조하면서 탑의 세부구조를 상세히 설명하였다. 이 글로 인해
다나카의 불법반출은 오래 숨겨질 수가 없게 되었다.
이윽고 경천사 석탑의 반출자와 이전지는 판명되었다. 그러나 다나카는
조선총독 데라우치의 불쾌한 압력과 일부 여론에 굴복하여 탑을 다시 내놓는
모욕을 좀처럼 감수하려 들지 않았다. 그는 몇 해 동안 배짱 좋게 버텼다.
데라우치의 후임으로 2대 총독이 된 하세가와 요시미치는 부임 3년째 되던
1918년에 가서야 전임자 데라우치가 해결치 못했던 경천사 석탑의 반환문제와
과거의 전말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되었던 것 같다. 그는 총독부 학무국
고적조사과를 시켜 그 자초지정을 듣는 한편, 꼭 다시 찾아와야 하는가의
의견을 물었다. 그때 고적조사과의 책임자였던 오다(동경제대 사학과 출신으로
뒤에 경성제국대학 교수)는 총독 앞으로 다음과 같은 조사보고서를 작성했다.
"그 탑은 개성 남쪽 풍덕의 부소산 경천사 자리에 있던 것으로서 지금
개성(서울) 파고다공원 안에 있는 원각사터 십삼층석탑(10층의 잘못 이해)과
똑같은 형식에 속하며, 그 건립은 고려 충목왕 4년(1348년)으로서 원각사터
탑은 이를 모조한 것임. 경천사가 폐사가 된 후 야산에 홀로 서 있던 것을
명치 42년(40년의 잘못, 1907년)께 당시 궁내대신 다나카 백작이 이를
나이치(일본 본토)로 운반하여 물의를 일으켰음. 그 바람에 포장도 풀지 않은
채 현재의 장소(도쿄의 다나카저댁 정원)에 보관 돼 있는 것으로 듣고 있음.
전 총독 때에 수차 반환해 오는 논의가 있었으나 지연되어 오늘에 이르렀음.
다나카 백작은 하등의 수속도 거침이없이 그것을 운반해 감으로써 어떤
구실로도 그의 사유물일 수는 없음. 조선의 습관을 따르면 절이 폐멸함과
동시에 (탑 같은 것은) 나라의 소유로 귀속되는 것이며 오늘에 있어서는
국유로서 본부(총독부) 소관에 속하는 것임."(당시 총독부 조사서류철)
이 오다의 조사보고로 미루어 보아도 고종황제가 다나카에게 경천사 석탑을
하사했다는 말은 터무니없는 계획된 조작이었음이 입증된다. 이홍직 교수도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고종의 하사 운운은 믿을 수 없는 일이며, 고종이 경천사탑을 알 까닭도
없었고 다나카 자신이 그것을 강청해 가져간 것은 분명하다."( (사학연구)
18집의 (재일 한국문화재 비망록), 1964년)
다나카는 피할 수 없이 그를 고립시킨 여론과 조선총독부의 계속적인
반환요구에 마침내 굴복하고 말았다. 총독부에서 오다의 명확한 전말 보고가
있은 후의 일이었다.
그러나 탑재들이 서울에 도착했을 때 포장을 풀고 보니 그것은 도저히 복원
조립이 불가능할 정도로 파괴가 심했다. 일본인들이 원위치인 경천사 절터에서
서둘러가며 급히 해체할 때의 심한 상처와 그후 일본으로 운반될 때의 파괴가
가중된 것이었다.
서울에 돌아오긴 했으나 곳곳이 온통 파괴된 경천사탑은 경복궁 근정전
회랑에서 다시 방치상태에 놓이게 되었다. 그러기를 40년. 오늘의 위치인
근정전 동쪽회랑 밖에 과거의 위관으로 보수, 복원 된 것은 1960년의
일이었다. 현재 국보 제86호로 지정되어있는 이 경천사 십층석탑을 그때
성공적으로 보수 복원한 사람은 그 방면의 전문가로 제일인자였던 임천(당시
국립박물관 연구원)이었다.
석굴암에서 사라져버린 아름다운 오층소탑
1909년 가을의 일이었다. 신라의 고도 경주 일원의 고적을 보러온 일제 고관
일행이 있었다. 2대 통감이 된 소네 아라스케가 초도순시라 하여 수행원들을
거느리고 경주를 찾은 것이었다. 그들은 불국사로 해서 석굴암까지 올라갔다.
그리고 그들이 그들이 돌아간 후 석굴암 안에 있던 아름다운 대리석
오층소탑이 온데간데 없이 증발했다. 소네가 개인적으로 탐을 냈었거나 아니면
어딘가에(저희 황실 같은 데) 선물하기 위해서 일본으로 빼돌린 것이
분명했다. 일본인들조차 그것은 소네가 가져갔다고 공공연히 말하고 있었다.
다음과 같은 증언기록들이 그 사실을 명백히 알려준다.
먼저 경주박물관 초기(1930년 전후)에 촉탁으로 관장을 대리했던 모로가의
증언이다.
"지금 석굴암의 9면관음(11면관음의 잘못) 앞에 남아 있는 대석위에 불사리가
봉납됐었다고 구전되는 소형의 훌륭한 대리석제의 탑이 있었는데 지난 명치
41년 봄(42년 가을의 착오. 1909년)에 존귀한 모 고관이 순시하고 간 후
어디론지 자취를 감추어버린 것은 지금 생각해도 애석하기 짝이 없는 일이다"
((경주의 신라유적에 대하여)에서)
다음은 한국의 미술과 민예의 열렬한 연구가였던 야나기 무네요시의 언급이다.
"목격자의 술회를 빌면 11면관음 앞에 작고 우수한 오층석탑 하나가 안치돼
있었다고 한다. 그것을 소네 통감이 가져갔다고 말하고 있으나 정말인지는 알 수
없다."( (석불사의 조각에 대하여), 1919년)
1925년까지 10여 년간 경주에 살면서 신라의 유적을 조사ㆍ연구한 후
1929년에 (조선 경주의 미술)이란 책을 낸 나카무라도 그의 저서에서 이렇게
쓰고 있다.
"불타(석굴암 본존상) 뒤의 9면(11면)관음 앞에 자그마하고 우수한 오층석탑이
안치돼 있었는데 언젠가 사라져 지금은 볼 수가 없다. 쓸쓸히 대석만 놓여져
있을 뿐이다. 풍문을 빌리면 모씨의 저택으로 운반되어 갔다는 것이다."
이상의 여러 증언으로 미루어 석굴암의 오층소탑 증발이 소네 통감과
직접적인 관련이 있음은 명백하다. 1967년의 (석굴암 수리공사 보고서)도 과거의
굴대 오층소탑에 대해 언급하였는데, "소네에 의해 약탈되었다"고 명기하고 있다.
석탑을 약탈당한 후, 석굴암은 탑상을 구비하였던 본래의 모습을 상실하고
불상들만 있는 석굴이 되고 말았다. 이는 오늘날 국보 중의 국보인
석굴암으로서는 커다란 상처이다.
소네는 소위 한국 통감으로서 1년도 채 있지 않았지만 이 땅의 문화유산, 특히
옛 책(고서)들을 대량으로 수집하여 일본 황실에 헌상한 사실로 미루어 석굴암
소탑쯤 예사로 빼돌릴 수 있는 자였다. 그가 일본으로 대량 반출한 한국의 옛
책들도 고려자기 도굴꾼과 같은 패거리였던 또다른 무리의 일본인 무법자들이
곳곳에서 약탈 혹은 협박하여 헐값으로 빼앗은 것들이었다. 이토가 고려자기를
무더기로 실어내 간 짓과 똑같은 수법으로 소네는 한국의 구가와 서원과
사찰에서 갈취한 귀중한 서적들을 무더기로 반출해 갔다. 그 일부는 1965년까지
일본 궁내청 서릉료(서고)에서 '소네 아라스케 헌상본' 이라 하여 은밀히
보관되다가 한일 국교 정상화 후 반환문화재의 일부로 돌아와 현재
국립중앙도서관에 들어가 있다.
반면 석굴암의 오층소탑은 아직도 오리무중이다. 해방 후 국내 관계전문가들이
일본 안의 행선지를 백방으로 탐색해보았으나 실패했다. 그러나 국내 전문가들은
아직도 정보추적을 포기하고 있지는 않다. 그들은 이 아름다운 오층소탑이
일본의 어딘가에서 언젠가는 발견될 것으로 믿고 있다.
석굴암의 감불과 불국사 다보탑의 돌사자
작고 아름다운 대리석 오층소탑이 증발하던 무렵에 석굴암은 또 다른
석조물을 도난당했다. 굴대 주벽 위쪽에 배치된 10개의 감실에 하나씩 안치돼
있었던 작은 석상들 가운데 2점을 훔쳐간 자가 있었던 것이다. 말할 것도 없이
일본인의 소행이었다.
석굴암이 일본인들에게 주목되기는 1907∼1908년의 일이었다. 어떤 일본인의
기록을 빌리면, "1907년께에 '토함산 꼭대기 동쪽에 큰 석불이 파묻혀 있다' 는
말이 누가 발설했는지도 모르게 당시 일본인 사이에 퍼졌었다"고 한다.
다른 어떤 증언은 그때 일본인들에게 처음으로 석굴암의 존재를 알린 사람은
우연히 그쪽으로 발길을 돌렸던 우편배달부였다고 한다. 당시 우편국장은
일본인이었다.
그즈음의 석굴암은 석축의 둥근 천장 일부와 전실부가 무참히 허물어져 석굴
전체가 온통 파괴된 상태였다. 그리고 중들은 의병 난리 이후 산 밑으로 모두
피신하여 지키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고 한다. 그 틈을 타서, 일본에 실어가면
크게 돈을 벌 수 있는 이 땅의 문화재를 찾아 안 가는 데 없이 헤매던 일본인
무법자들이 옳다구나 하고 침입했던 것이다. 그들은 석굴암에서 손쉽게 운반할
수 있었던 작은 감불좌상 둘만 훔친 것은 아니었다. 석굴 본존의 뒤켠 둔부를
무자비하게 때려 파괴했는데, 혹시 그 속에 복장유물이라도 들어 있지 않을까
해서 저지른 만행이었다.
이때의 일본인 무법자들은 불국사에서도 석조물을 약탈했다. 다보탑의
상층기단 네 귀퉁이에 놓여져 있던 작은 돌사자상 넷 중에서 보존상태가 가장
나쁜 하나만 남기고 모두 들고 달아났던 것이다. 당시 불국사엔 몇 명 안되는
중들이 있었다. 일본인 악당들은 그들을 위협하고 몇 푼의 돈을 집어주고는
유유히 사라져 갔다. 소위 통감부 시기에 한국에 건너와서 경주군 주석서기로
있으면서 소네 통감의 불국사 및 석굴암 관람을 안내했던 기무라가 뒷날 이런
말을 쓰고 있다.
"나의 (경주군) 부임을 전후해서, 도둑놈들에 의해 환금(돈 주고 빼앗았다는
뜻)되어 나이치(일본 본토)로 반출돼 있는 석굴 불상(석굴암 감불) 2구와
불국사의 다보탑 사자 1대(2구, 정확히 3구)와 등롱(사리탑) 등 귀중물이
반환되어 보존상의 완전을 얻는 것이 나의 죽을 때까지의 소망이다."( (조선에서
늙으며), 1924년)
이 글로 미루어 기무라도 석굴암과 불국사에서 귀중한 유물을 약탈해 간
일본인 소행에 매우 분개하고, 그 행선지를 알아내려고 애쓴 것 같으나 소네
통감이 불법반출한 석굴암 오층소탑에 대해서는 언급을 회피하고 있다.
반면 기무라는 또 하나의 비화를 적고 있는데, 석굴암이 하마터면 모조리
해체되어 서울로 운반될 뻔했다는 얘기다.
소네 통감이 불편과 험난을 무릅쓰고 토함산을 올라 석굴암의 놀라운 구조와
감동적인 불상조각들을 구경하고 오층소탑까지 빼돌린 후, 세키노가 현지를
학술적으로 조사하여 그 역사적ㆍ예술적 가치를 최고로 평가하자, 통감부는 보수
및 보호방법을 검토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때의 결론이 석굴암의 불상 전부와
불국사의 철불을 서울로 운반하자는 것이었다. 통감부는 즉각 경상관찰사를 통해
그 계획을 현지 군수에게 알리고, 소요경비의 견적서를 올리도록 명령했다.
그러나 그것은 당시로선 도저히 불가능한 계획이었고, 현지 여론도 심상치 않아
흐지부지 취소되고 말았다는 것이다.
그때의 계획으로는, 해체한 석굴암의 석불과 기타 모든 석재를 토함산에서 약
40리 내려온 동해안의 감포를 통해 배로 인천까지 운반한다는 것이었다.
한일합방 직전의 일이었다.
요릿집 정원에서 기적적으로 되돌아온 불국사 사리탑
1902년 8월 어느날, 경주의 불국사를 찾아온 일본인 고적전문가가 있었다.
당시 동격제국대학 조교수였던 세키노였다. 그는 대한제국 정부의 초청으로 이
땅의 옛 건물(고건축물)과 고적의 실태를 조사한다고 하였으나 실제 내막은
청일전쟁에서 이긴 일제가 한반도 침략 계획에 필요한 입체적인 정보수집을
위해 일방작으로 강청한 각 분야 시찰ㆍ조사의 일환이었다.
행동과 예산에서 특권이 보장되었던 세키노는 그때 한국의 주요 고적지와 옛
건물을 매우 정확하게 조사ㆍ파악하고 돌아갔다. 개성 근처의 폐사지에서, 현재
국보로 지정돼 있는 경천사 십층석탑을 처음으로 조사ㆍ평가한 것도 그때였다.
세키노의 발길이 처음으로 경주에 닿았을 때의 불국사는 말할 수 없이 황폐된
상태였다. 지키는 중도 한둘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나 감히 절안의 유물을
훔쳐다 파는 무뢰한은 한국인 가운데는 한 사람도 없었던 시절이라, 비록
무너지고 깨지고 했을망정 신라 이후의 걸작 석조물들과 불상은 거의 그대로
남아 있었다.
세키노는 그것들을 낱낱이 조사하고 사진도 찍었다. 그는 이때의 조사정보를
2년 후인 1904년에 일본에서 발표한 (한국건축조사보고)에 포함시켰다. 그러자
당시 한국에 건너와 있던 한 일본인 무법자가 불국사 쪽으로 당장 약탈의 손을
뻗쳤다. 다음은 현재 불국사 대웅전 뒤쪽 비로전 앞의 자그마한 보호각 속에
들어 있는 사리탑(보물 제61호)이 그때 당했던 수난의 내력이다.
1902년에 한국의 고적과 고건축물을 처음으로 조사하러 왔을 때, 세키노는
그때 벌써 개성에 정착하고 있던 그의 동족인 한 일본인으로부터 신세를 진
적이 있었다. 그때의 신세를 생각해서 세키노는 일본에서 출판한 그의
(한국건축조사보고) 한 권을 보내주었다. 그런데 그 선물은 결과적으로 개성의
그 자에게 한국에서 약탈할 만한 중요한 문화재의 정보를 제공한 격이 되고
말았다.
1906년의 일이었다. 세키노가 알려준 정보를 갖고 경주로 내려간 개성의
일본인은 불국사에 이르러 몇 명 되지도 않았던 사승들을 위협하고 약간의 돈을
집어준 후, 섬세하게 조각된 사리탑 하나를 일본으로 반출하는 데 성공했다.
그즈음 도쿄에 있던 세키노는 우에노 공원께의 '정양헌'이란 요릿집 정원에서
그것을 발견하고 깜짝 놀랐다. 그러나 그도 일본인이었다. 같은 일본인이
한국에서 약탈해 온 불국사 사리탑의 불법적인 처사를 고발하기는커녕
(국화)라는 잡지의 요청으로 해설을 썼다. 물론 배후의 범죄 행위엔 입을 다물고
있었다.
1909년 이후, 세키노는 재차 한국에 와서 고적조사를 하게 되었다. 한일합방
직후의 조선총독부는 그에게 불국사에서 일본으로 반출해 간 사리탑을
되찾아다가 원위치에 놓도록 조사를 의뢰했다. 그러나 그 사리탑은 도쿄의
요릿집에서 이미 딴 데로 팔려나간 후, 행방을 감추고 있었다. 여러 가지로 몹시
마음에 걸렸었는지 그후 세키노는 사리탑의 행선지를 계속 탐색하고 있었다.
그러기를 20년.
드디어 그는 도쿄의 나가오라는 제약회사 사장집 정원에서 그것을 발견했다.
1933년 5월 말의 일이었다. 몇 다리를 거친 소유자였던 나가오가 그때
세키노에게 어떻게 설복당했는지, 7월 말에 가서 조선총독부에 기증하는
형식으로 불국사의 원위치로 사리탑을 깨끗이 반환했다. 그것은 하나의
기적이었다.
한편 불국사의 다보탑 돌사자를 약탈해 간 자도 사리탑의 범행자인 개성의 그
일본인이었을지도 모르는데 거기에 대해선 세키노도 별 언급이 없다. 다만 그는
1902년에 조사할 때엔 4구가 다 있었는데 1909년에 다시 와 보니 비교적 완전한
2구가 반출돼 있었다고 언급했을 뿐이었다( (조선의 석탑파), 1912∼1913년).
그렇다면 그 뒤에 다른 일본인이 남은 2구 중의 하나를 또 약탈해 간 것이 된다.
이렇게 두 번에 걸쳐 다보탑에서 잃은 3구의 돌사자는 석굴암의 오층소탑과
마찬가지로 지금도 일본 안의 행선지를 찾아내지 못하고 있다.
불법반출되어 돌아오지 않는 석물들
다른 모든 분야에서도 그랬지만 조선총독부는 일본인들이 이 땅에서
불법적으로 약탈하고 혹은 협박과 돈으로 매수해서 일본으로 실어 간 문화재에
대해서는 종류와 수량을 불문하고 기정사실로 삼아 뒤를 묻지 않음으로써
그들의 소유권을 보호해주었다. 그러면서 불국사와 석굴암 같은 파괴가 심한
일부 중요한 고적을 대대적인 전시효과를 노려 보수하는 척 함으로써 병 주고
약 주고 하는 식의 이중의 기만적인 침략정책을 수행했다.
총독부의 특례적인 반환 노력과 일부 양식 있는 일본인 학자의 협력으로
일본에서 되돌아온 것은 일제 36년을 통해 앞에서 소개한 '경천사 십층
석탑'(국보 제86호)과 '불국사 사리탑'(보물 제61호)뿐이었다. 이흥직 교수의
표현을 빌리면 그것은 "일본인들이 불법으로 가져간 대소 무수의 석물에 비하면
구우의 일모에 지나지 않는 것"으로, 결국 총독부는 일단 저들의 본토로 실어 간
문화재에 대해선 그 경위를 일절 추궁한 일이 없었던 것이다.
세키노의 증언기록을 빌리면 불국사 사리탑의 경우, 개성에 있던 일본인이
도쿄로 불법반출한 후 요릿집 정원에서 자랑스레 공개되어 잡지에 사진과
해설까지 실렸다는 것이니 그런 사례가 당시 일본 안에서 얼마나 많았을까.
다행이 그때의 사리탑은 20년 후의 소유자에 의해 기적적으로 반환이 되었지만
오늘날 석굴암과 불국사의 다보탑을 병신으로 만들고 있는 소탑과 감불과
돌사자상의 행방은 여전히 묘연하다. 그 한스러움을 이홍직 교수는 작고하기
전에 또 이렇게 쓰고 있다.
"석굴암의 소탑과 감불의 행방을 추궁하여 그것을 원상복귀할 것을 전 국민의
염원으로 삼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어찌 석굴암에서 없어진 것뿐이랴. 일제 때 일본인들이 약탈하고 불법 반출해
간 무수한 한국문화재의 대다수가 영원히 돌아오지 않을 강을 건너고 있는
것이다.
현재 일본 안의 여러 미술관과 개인 컬렉션에서 한일합방 전후 혹은 그
이후에 이 땅에서 반출해 간 부지기수의 각종 문화재의 일부가 목격 또는
확인되고 있지만 이미 반환을 강력히 요구할 수 있게 돼 있지가 않다.
일본정부를 상대로 한 과거의 불법적인 반출문화재 반환 요구와 제한된 실현은
1965년의 반환목록으로 일단 끝나 있다. 그렇다고 아직도 무수하게 일본에 남아
있는 것들이 오늘날 한국인의 눈에 자연스럽게 보여질 수는 도저히 없는 일이다.
개성지역에서의 도굴품으로서 현재 일본의 중요문화재(보물급)로 지정돼 있는
'고려청자음각정병' 의 소장처인 도쿄의 네즈미술관 입구와 정원에는 물을 것도
없이 일제 때 이 땅에서 불법반출해 간 석물들-고려시대의 우아한
'팔각원당형부도' 를 비롯하여 같은 고려유물인 방형탑과 귀부, 조선시대의
석등과 문무석인, 석양, 동불, 동종 등-이 버젓이 놓여 있어 오늘날 그곳을 찾는
한국인의 심회를 불쾌하게 하고 있다.
약 10년 전에 그곳을 방문했던 한 국내 전문가가 미술과 책임자에게 그것들을
소장하게 된 유래를 물었더니, "일제시대에 고물상에서 구입했다" 고만 말할 뿐,
아무런 기록자료도 없었다고 한다. 물론 그것들이 반출당한 국내의 원위치나
절터, 그리고 탑비명 같은 것도 전혀 알 수 없었다.
이러한 불법반출 석물들은 네즈미술관뿐 아니라 다른 곳에서도 얼마든지
발견되고 있다. 도쿄의 '오구라집고관' 에는 율리사터에서 실어간 팔각석탑이
있고, 오사카미술관은 조선시대의 전형적인 사리탑과 비석, 그외 고려시대
것으로 믿어지는 좌불을 갖고 있다.
행방불명된 보리사터의 부도
서울 이화여자대학교 총장공관 정원에 보물 제351호로 지정돼 있는
팔각원당형의 부도가 있다. 고려 초기의 우아한 석조유물이다. 문공부 발행의
(문화재대관)(보물편) 상권은 이 부도의 원위치에 대하여, "확증은 없으나 경기도
양평군 용문면 연수리의 보리사터로 추정되고 있고, 일찍이 원위치를 떠나 서울
시내 남산동 집에 와 있던 것을 현위치로 옮겨온 것" 이라고 해석하고 있다.
양평의 보리사터에서 일본인이 반출해 온 것이 분명한 것 같으나 확실한
기록이나 증언이 없어 그저 '석조부도' 라고만 명명돼 있는 이 보물을
이화여대가 입수한 것은 1956년이었다. 총장공관을 새로 짓고 정원을 꾸미게
되었을 때 정원 설계를 맡았던 사람이 남산동 1가의 어느 큰 정원이 있는
집에서 값진 나무들을 팔려고 한다는 소문을 듣고 알아보니 과거 일제때에
증권으로 치부했던 일본인 닛타가 살았었다는 집이었다. 좋은 나무가 많았고
귀한 식물도 있었다. 이화여대에선 그것들을 한꺼번에 구입했다. 그때 남산동
정원의 한쪽 구석에서 별로 눈에 띄지도 않게 놓여 있던 이끼 낀 부도 하나도
묻어 왔다.
이화여대로선 뜻하지 않았던 굉장히 행운이었다. 왜냐하면 앞의 부도는
총장공관 정원에 옮겨 세워진 후 금세 관계전문가들의 주목을 끌어 중요한
문화재로 지정되었기 때문이다. 또 몇몇 전문가는 이 유물이 1911년에 일본인
악당들에 의해 양평에서 서울로 반출된 후 자취를 감추었던 보리사터의
석탑(부도) 같다는 심증을 굳히고 현지조사까지 하였는데. 확증은 못 잡았지만
거의 틀림없다는 결론을 내렸다. 이로써 수십 년 동안 행방불명으로 증발했던
보리사터의 귀중한 유물 하나를 되찾게 된 셈인데, 과거 총독부 조사자료에는 이
부도를 가리킨 것이 분명한 반출경위가 밝혀져 있다.
먼저 1916년의 총독부 (고적조사보고). 당시 조사자는 일본인 전문가
이마니시였다.
"(현재 보리사터에는) 현가탑비의 비신·귀부·이수가 여기 저기 산재해
있다. 그외 현기탑이었을 하나는 마을의 김선호 등의 말을 빌리면 수년 전까지
귀부와 가까운 지점에 있었는데 일본인이 서울로 운반해 갔다고 한다."
조사자 이미나시는 이어서 다음과 같이 자신의 의견을 단서로 붙이고 있다.
"이미 서울 방면으로 반출된 현기탑을 색출해내어 박물관에서 영구히
보존시키도록 할 것을 간절히 바람."
여기서 현기탑일 거라고 이마니시가 추측한 것은 대경대사 현기의 사리나
유골을 넣은 부도를 말하는 것으로, 부도도 탑의 일종이다. 현기는 신라 말엽의
고승으로 경순왕의 스승이었다. 왕건(고려 태조)이 신라를 멸망시킨 후, 현기를
양평 미지산 기슭의 보리사에 가 있게 했었다. 대경대사는 시호. 그래서
보리사에는 그를 기념하는 탑들이 세워졌던 것인데 그후 절은 폐멸하고 탑들만
남아 있었던 것이다.
이마니시는, 이미 반출당한 부도탑은 그 행방을 찾되 현지에 쓰러져 버림받고
있는 탑비라도 서울로 옮겨 오는 것이 좋겠다고 또 하나의 의견을 제시했다.
"이러한 천 년의 옛 비석이 선려하게 유존됨은 경탄할 일임. 국보로서
보존시켜야 함. 그러나 현재의 위치에 보존시키기는 어렵고 서울의 박물관에
옮겨서 보존되기를 간절히 바람."
그후 총독부는 이마니시의 의견을 받아들여 현기탑비를 서울로 옮겨 1915년에
경복궁 안에 건립했던 총독부박물관(후에 국립중앙박물관)에서 보호하도록 했다.
현재 경복궁 잔디밭의 석물군 속에 들어 있는 보물 제361호의 '대경대사탑비' 가
본래의 절터를 이탈한 경위이다.
한편 1917년 12월에 경기도 경찰부장은 총독부 정보과장 앞으로 대략 다음과
같은 내용의 양평 보리사터 석탑(부도탑) 반출 내막의 조사보고를 올리고 있다.
이마니시의 조사 정보와 의견에 따라 총독부가 지시했던 일이었다.
"경기도 양평군 용문면 연수리의 보리사터에는 이중탑(지금 이화여대에 있는
부도는 얼핏 이층석탑 같은 형태이다)이 있었는데, 절터의 논밭 임자인
함백용·박영범·박돈양 세 사람이 이웃의 상원사로 하여금 그것을 옮겨 가도록
기부했던바, 1909년 7월 어느날 일본인 3명이 상원사를 찾아와서 그 석탑을 비싼
값으로 사겠다고 했으나 응하지 않자 거듭 끈덕지게 요청하였다 함. 그러자
최화송이란 주지가 기증자인 앞의 세 사람과 협의하여 결국 120원을 받고
석탑을 팔아 넷이서 분배해 가졌다 함. 그러나 그들은 그때 석탑을 산 일본인의
주소 성명을 모르고 있었으며, 다만 서울에 살고 있다고만 말하더라고 함. 한데
조사해 보니 그때 석탑을 삼으로써 어디로든지 반출할 수 있는 권한을 갖게 된
일본인은 본정(지금의 충무로) 2가 18에 살고 있는 다나카와 약초정(지금의
초동)에 사는 다카하시란 고물상이었음이 밝혀졌음. 이들은 그 석탑을 1911년
8월에 명치정(지금의 명동) 2가에 사는 시로로쿠에게 500원을 받고 다시 팔았음.
그렇게 석탑의 소유권을 인수한 시로로쿠는 730여 원의 운반비를 들여 그것을
반출하였고, 현재도 그가 가지고 있음."
이 경찰조사는 양평에서 반출된 보리사터의 부도탑이 1917년 12월엔 당시
서울 명동에 살고 있던 시로로쿠라는 일본인의 손에 들어가 있었음을 명확히
알려준다. 이렇게 소재지가 판명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총독부는 그것을
압수하거나 다시 사들여서 이마니시가 제의한 것처럼 박물관에 넣는 적극적인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 그리고 이 부도는 그후 또 다른 일본인에게 넘어가게
되면서 아주 행방을 감추었다. 이렇게 완전히 잊혀졌던 것이 45년 후인 1956년에
명동과 바로 이웃인 남산동의 과거의 일본인집 정원에서 기적적으로 발견된
것인데, 전의 집주인이었던 닛타가 시로로쿠에게서 직접 사들였던 것인지는
확실치 않다.
여하튼 과거의 닛타의 집에서 나타난 부도가 1911년에 시로로쿠가 사서
가지고 있던 양평 보리사터의 현기부도탑, 바로 그것이라는 확증을 잡을 길이
없다는 이유로 오늘날 보물로서의 지정 명칭이 다만 '석조부도' 라고만 돼 있는
것은 이 부도가 일제 아래의 비운에서 아직도 깨끗이 풀려나지 못한 억울한
숙명이다. 문제는 8·15해방 때 닛타가 아무말도 남기지 않고 일본으로
쫓겨감으로써 그의 정원에 숨겨져 있던 부도는 10여 년간 완전히 족보 불명이
돼버렸던 때문이다.
그러나 중요한 유물은 언젠가는 전문가의 눈에 띄게 마련이다. 남산동의
부도가 이화여대로 옮겨진 후 전문가들은 과학적인 연구 조사에 착수하게
되었다. 그리고 양평 보리사터의 그 현기탑이 거의 확실하다는 결론이
내려지면서 그동안 족보를 잃었던 부도는 명예를 회복하기에 이르렀다. 일제
밑의 가장 전형적인 수난과 비운의 문화재인 이 부도에 대하여 장문의
학술논문을 쓴 김화영은 다음과 같이 결론짓고 있다.
"현기탑이 서울로 반출된 장소와 이화여대의 부도가 발견된 장소가 동일한
지점은 아니나 매우 가까운 거리였다는 점, 그리고 그것은 해방후 명동 부근에서
발견된 유일한 부도인 데다가 각 부의 양식과 조각수법이 고려 초기로
현기탑비와 같은 시기의 작품이라는 점 등으로 미루어 현기탑으로 추정할 수
있다."( (사총) 12·12합집, 고려대사학회, 1968년)
반출경위가 인멸된 원공국사승묘탑
앞의 양평 보리사터 현기부도탑은 서울에서 찾아갔던 일본인들의 끈덕진
강청에 따라 상원사 주지가 그전의 소유권 주장자인 3명의 마을사람들과
공동으로 팔아먹은 것이었다고 당시 일본 경찰은 조사, 보고했었다. 그러나
그때의 일본인들은 이 땅을 강점한 일제의 강세를 배경으로 거리낌없이
조선인을 위협하고 공갈하며 최소의 돈으로 그들을 매수함으로써 값나갈 유물을
아무 데서나 불법반출한 악질적인 고물상(골동상) 패거리였다. 그들은 양평의
현장에서 현기부도를 120원으로 사 놓고는 서울에 앉아서 또 다른 일본인에게
500원에 팔아 넘김으로써 당장 380원을 벌어들였다. 이런 일은 일제 초기엔
비일비재했다.
일찍이 이 땅에 건너왔던 일본인들 가운데 일부 악질배들은 앞서와 같은
수법의 문화재 반출 및 큰 부자가 되었고, 그들은 1945년 일제가 패망하여
철수할 때까지 큰소리치며 이 땅에서 살았다. 그때까지 각계각층의 일본인들이
개인적으로 점유하고 있던 한국문화재의 종류와 수는 부지기수였다. 그중엔
총독부 법령에 따라 등록된 것도 많았다. 해방전까지 서울 남대문 시장께에
살았던 와다가 그의 정원에 갖다놓고 즐겼던 '거돈사 원공국사승묘탑' 도 그중의
하나였다.
그것은 이웃인 남산동의 닛타가 몰래 점유하고 있었던 보리사터의
현기부도탑과는 달리 전문가들의 조사·평가에 따라 1938년 10월 이후 이미
고려 초기의 중요한 유물로 지정돼 있었다. 그러나 그것이 원위치인 강원도
원성군 부론면 정산리의 거돈사터에서 언제 어떤 일본인들이 어떤 수법으로
서울로 반출해 왔고, 또 어떤 경로로 남대문께의 와다의 집으로 팔려
들어갔었는지의 경위를 알려주는 기록이나 자료는 하나도 없다. 보리사터의
그것과는 정반대의 수난 조건을 갖고 있다.
보리사터의 것은 반출경위는 뻔한데 물건이 서울에서 행방불명됐고, 이
거돈서터의 것은 서울에서 줄곧 있는 곳이 확인돼 있었으나 반출경위와 그
증거가 완전히 인멸돼 있다. 그러나 둘은 공통점이 있다. 다같이 지대석까지
일괄하여 반출하지 않고, 위의 탑신부만 들어옴으로써 지금 이화여대에 있는
보리사터의 부도나 경복궁에 있는 거돈사터의 승묘탑이 모두 지대석을 갖추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다.
거돈사터의 원공국사승묘탑은 해방 후 보리사터의 현기부도탑과는 또 다른
경로로 현재의 위치인 경복궁의 석물군 속에 들어갔다. 그것은 1948년의
일이었다. 당시 미군정청의 미술·고적 담당 고문으로 채핀이라는 미국인
할머니가 와 있었다. 그녀의 출근 근무처는 국립박물관이었다. 어느날 그녀는
과거에 총독부가 지정한 문화재의 소재지를 재확인하려고 일본인 와다가 살던
집을 찾아 남대문 시장께로 발길을 돌렸다가 거기에 분명이 있어야 할
원공국사승묘탑이 어디론가 없어진 것을 처음으로 알게 되었다. 해방 후에
누군가가 실어 갔다는 것이었다.
채핀은 경복궁으로 돌아오자 당시 박물관 연구원이었던 황수영에게 어찌된
영문인가를 물었다. 그러나 누구도 미처 몰랐던 일이었다. 놀란 그들은 즉시
사라진 지정문화재의 행방을 조사, 추적했다. 몇몇 증언으로 승묘탑의 행선지는
금세 밝혀졌다. 이아무개라는 사람이 성북동 골짜기의 별장에 실어다가 계류와
정자 옆에 세워 놓고 있었던 것이다. 그것이 이미 국가에 등록돼 있는 문화재인
것을 모르고 있던 이아무개는 박물관측의 설명에 따라 순순히 탑을 도로
내놓았고, 승묘탑은 경복궁으로 옮겨졌다. 현재 보물 제190호로 지정돼 있다.
보령의 절터에서 사라진 비운의 오층석탑
일제 초기인 1910년대 중엽에 인천 부회의원(시의원)으로 고노라는 일본인이
있었다. 그도 석탑을 탐내어 충남 보령지방에서 오층석탑 하나를 지능적인
수법으로 불법반출해서 인천의 자기집 마당에 놓고 있었다. 그는 보령군 대천면
남곡리 당동의 이름 모를 폐사지에서 있던 오층석탑을 반출해 오는 방법으로서
한 사람의 조선인을 돈으로 매수하고, 그가 절터의 땅임자에게 가서 석탑을 사는
간접적인 간계를 썼다. 그러고 나서 그는 그의 매수자로부터 석탑을 말썽 없이
다시 사는 형식으로 무난히 인천까지 실어 왔다. 그러나 총독부의 고적조사과가
그 사실을 알고 보령군수에게 진상을 조사하도록 지시하자 고노의 완벽했던
석탑 반출음모는 즉각 탄로가 나고 말았다.
보령군수의 현지 진상보고와 인천의 이전지 확인을 토대로 총독부
고적조사과가 작성한 조사서가 있는데 대략 다음과 같은 내용이다.
"석탑을 판 사람이 그것은 예전부터 자기집의 소유물이었다고 주장하나 말도
안되는 소리인 것이 조선의 풍속은 개인집에 탑을 세우는 일이란 없었기 때문임.
설사 집을 지은 자리가 예전의 절터여서 석탑이나 석불 같은 것이 있었다 해도
조선사람들은 그것을 자기 소유로 생각하는 일은 절대로 없었음. 한데 그것을
매각하는 것은 전적으로 근래의 생긴 폐습이며, 그들은 자기 것이 아닌 것을
팔아먹는다는 점을 익히 알면서도 감히 그런 짓을 하는 자들임. 이번 사건만
해도 고노가 직접 그것을 사지 않고, 표면상으로는 다른 조선인에게 일단 석탑을
팔게 한 후에 다시 자기 소유로 만들었는데, 매각인에게 그럴 권리가 없었던
것은 말할 것도 없음. 따라서 이번 사건의 석탑은 그들의 매매를 취소시켜야
하며, 인천의 고노 조사관을 보내 그럴 필요가 있다면 서울의 박물관으로
가져오는 것이 좋을 듯함."(1916년)
이 조사서의 주목할 만한 마지막 대목인 '불법적인 매매의 취소와 경우에 따라
인천에서의 석탑 압수' 건의가 총독부에 의해 실행되지 않은 것은 확실하다.
불법적인 일본인 매수자 고노는 인천의 부회의원쯤 되던 신분이어서 무슨 수를
썼던 것 같다. 비운의 오층석탑은 보령의 원위치로 돌아가지도 않았고, 서울의
박물관으로도 오지 않았다. 인천항에서 재빨리 일본 본토로 빼돌렸는지, 그후에
인천에서 그 석탑을 조사했거나 확인한 전문가가 없다.
반면 해방 후, 과거에 고노가 살았던 인천 송학동의 별장에서는 많이 깨지고
형태나 연대도 신통치 않은 삼층석탑 하나가 발견되었는데 그것도 충청도
어디선가 가져온 것이라는 막연한 증언이 있었다. 그러나 그것을 보령에서
반출했던 문제의 오층석탑으로 보긴 어렵다. 무엇보다도 3층과 5층이라는 차이가
있다. 해방 후까지 남아 있던 신통찮은 삼층석탑은 현재 인천공보관 앞으로
옮겨져 있다.
앞의 총독부 조사서에는 또 하나의 놀라운 사실이 첨가돼 있다. 인천의 고노가
충남 보령군 대천면의 폐사지에서 오층석탑을 반출하던 무렵에 같은 보령군의
미산면 성주리에 위치하는 성주사터의 석탑에도 반출음모자의 손길이 뻗치고
있었다는 내막이다. 그것은 인천으로 불법반출된 석탑 사건을 조사하는 중에
잡힌 또 다른 음모였다. 그러나 다행히도 이 음모는 진행 중에 포착, 제지되었고
성주사 탑들은 위기일발에서 화를 면할 수 있었다.
오늘날 이 성주사터의 오층석탑은 보물 제19호로, 그리고 삼층석탑 둘은 보물
제20호와 제47호로 지정돼 있다. 모두 통일신라시대의 유물이다. 석탑 외에도 이
성주사터에는 신라 말엽의 대학자인 최치원이 비문을 쓴 '낭혜화상
백월보광탑비' 가 있어 국보 제8호로 지정돼 있다.
무법자들에게 유린된 석물들
1916년에 조선총독부가 제정 공포한 (고적 및 유물 보존규칙)과
고적조사위원회 설치규정은 그전까지 방임되었던 일본인 무법자와 그들에게
나쁜 짓을 배우고 혹은 매수되어 움직였던 일부 조선인의 문화재 약탈 및
반출행위에 다소 위협이 되었다. 그러나 그들의 범행은 조금도 중단되지 않았다.
완전 무방비 상태였던 깊은 산골짜기의 절터라든지, 한두 명의 허약한 중이
지키고 있던 몰락한 명찰, 그밖에 교통이 불편하고 외진 유적지에서 그들은
여전히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유물을 빼냈고, 그것을 딴 데 팔아 큰 돈을
버는 불법행위를 감행했다. 당시 일본인 사회에서 그들의 만행은 대개 뒤탈 없이
성공했다. 또 그들은 서로 협력하여 불법적인 이익과 귀한 유물의 소유욕을
충족시켰다. (고적 및 유물 보존규칙)이 공포된 후 몇몇 경우가 적발돼도 일본인
관련자들은 이렇다 할 형벌을 받는 일이 없었다. 일본인들은 조선인의 경우와는
달리 일찍부터 생활주택의 정원과 조경에 배치하는 석물로서 불교 문화의 고색
짙은 석탑과 석등을 진중히 여겼다. 따라서 일제의 침략세력으로 이 땅에서 부를
누리게 되었던 많은 일본인들이 그들의 정원에 조선의 아름다운 옛 석탑과 석등
혹은 부도를 들여놓으려고 한 것은, 말하자면 자연스런 생심이었다. 그리고 이
생심이야말로 실제 불법적인 약탈행위들과 공범 관계를 맺게 했고, 동시에
배후조정 혹은 요청자로서 공모하게 한 것이다.
충남 보령의 이름을 잃은 절터에세 인천의 고노라는 일본인이 조선인을
중간에 내세워 감쪽같이 오층석탑을 반출해내던 무렵, 같은 인천에 살고 있던
우에하라라는 도 다른 일본인은 경기도 용인에서 삼층석탑을 실어다놓고 있었다.
1919년의 총독부 고적조사 서류에서 그 사실이 짝막하지만 명확하게 씌어 있다.
"그 탑은 경기도 용인군 남서면 창리 탑골의 폐사지에 있던 것을 작년
말(1919년)에 인천 축현으로 이전한 것으로 그 뒤 다시 현재의 장소인
산수정(지금의 송학동) 우에하라의 택지 안에 옮겨진 것임."
혹시 이탑이 1970년 초까지 인천경찰서 앞의 은행 관사 안에 있었던
삼층석탑과 같은 물건인지도 모르나 이미 확인할 길이 없다. 다만 당시 인천에서
삼층석탑을 조사한 서울의 전문가들은 고려시대의 비교적 우아한 유물이라고
평가했다.
옛 절터의 석탑이나 부도 같은 역사 유물은 어떤 경우라도 개인이 임의로
처분할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도처에서 불법적인 매매와 반출 또는 약탈이 일제
말기까지 끊임없이 계속되었다. 모두가 일본인들이 직접 간접으로 감행한
것이었다. 다음은 1930년대에 적발된 몇몇의 확실한 사례이다.
1936년에 서울 돈압동 424에 살고 있던 닛타(혹시 뒤에 남대문께에 살며
'거돈사 원공국사승묘탑' 을 사 갖고 있던 신전의각과 동일 인물인지도
모르겠다)가 경기도 안성군 이죽면 장원리 절터에 있던 우수한 석탑 하나를 서울
자기집 마당으로 반출했다가 불법행위로 걸렸다. 같은 해 2월에는 군산에 살던
다케다라는 일본인이 이 모라는 조선인 앞잡이와 짜고 충남 예산군 덕산면
옥계리의 삼층석탑을 100원으로 몰래 사서 군산으로 반출했는데, 불법적으로
그것을 팔았던 백철현이란 사람이 양심의 가책을 받고 매매를 취소한 후
원위치로 다시 옮겨다 놓았다. 또 같은 무렵에 전북 옥구군 개정면 발산리에
살던 시마다니라는 일본인은 충남 부여군 은산면 각대리의 절터에서 우수한
오층석탑을 무단 반출했다가 적발되었으나 석탑은 원위치로 돌아가지 않았다.
해방전까지 군산의 어느 농장에 이건돼 있었다는 은산면 숭각사터의 삼층석탑과
관련이 있음직하다.
극적으로 구출된 보화각의 무도와 석탑
지금 서울 성북동의 간송미술관(보화각) 뒤뜰에는 지난날 일제 밑에서
일본인들에 의해 유린당했다가 간송 전형필 선생의 극적인 보호를 받은 행운의
'석조부도' 와 석탑이 세워져 있다.
먼저 부도. 원위치는 충북 괴산군 칠성면 외사리. 이름을 잃은 절터에서 고려
중엽 이전의 양식을 갖춘 깨끗하고 아름다운 부도를 본 일본인 악당들은
마을사람 하나를 매수하여 그것을 공공연히 빼돌렸다. 시기는 1930년대말. 곧 이
부도는 인천으로 옮겨졌고, 배에 실려 일본 본토로 팔려나가게 되는 최악의
수난에 직면해 있었다. 그것을 인천 항구에서 붙잡은 사람이 간송이었다.
민족문화재 수호와 해외유출 방지를 위해 막대한 사재를 아낌없이 그리고 가치
있게 투입하던 간송의 민족적 사명감은 당장 그 일본인 무법자와 대결하게 했다.
그는 일본인이 제시한 엄청난 액수를 즉석에서 지불했다. 부도를 실은 배가
인천에서 출항하기 직전의 일이었다.
극적으로 구출된 괴산 부도는 인천에서 보화각이 있는 숲 속에 옮겨져 소중히
복원되었다. 지금의 상태는 한국전쟁 때 쓰러졌던 것을 1964년 2월 3일에 부도의
은인인 간송의 대기일을 기념하여 한국미술사학회의 전신인 고고미술동인회가
재차 복원한 것이다.
다음은 삼층석탑. 언제 어디서 어떤 일본인 악당이 반출했던 것인지 일체의
기록을 상실한 고려시대의 유물인데. 이미 일본 본토로 팔려갔었다. 그 뒤
오사카에서 경매에 붙여지게 되었을 때 서울에서 간송이 그 정보를 입수했다.
이번에도 그는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다. 어떤 일이 있어도 되사와야겠다는
것이었다. 그는 즉시 사람을 놓아 가격에 구애받지 말고 낙찰시키도록 당부했다.
오사카 경매장에서의 응찰 경쟁자는 당시 일본의 어느 재벌이었다. 그러나 그도
결국 막판에 가서 손을 들었다. 온갖 오욕을 당하던 석탑은 간송의 민족적
결의와 대담한 돈의 지원으로 다시 고국에 돌아와 역시 보화각 뒤뜰에 조용한
안신처를 얻었다.
간송은 평소 그가 손댄 장한 일의 내막이나, 거기에 쓴 돈의 액수를 조금도
밝히려고 하지 않은 고매한 인격자였다. 따라서 앞의 괴산 부도나 일본에서
되사온 삼층석탑에 정확히 얼마나 많은 돈을 지출했던 것인지는 아무도 모른다.
간송은 자신만의 지출기록조차 남기지 않았다. 그 대신 과거의 그의 너그러운
인품을 말해주는 일화는 많다. 오사카 경매장에서 만난을 무릅쓰고 한번 보지도
않은 삼층석탑을 무조건 되사오게 했던 일에 대해 간송은 뒷날 한 가까운
연구가에게 이런 말을 했다.
"일본 재벌과 경쟁이 붙는 바람에 생각했던 이상으로 엄청난 값으로 낙찰을
보았으나 막상 일본서 실어다놓고 보니 기대했던 거와는 딴판이라. 허나 하는 수
없었지 어쩌나."
그뿐이었다.
일제 밑에서 간송처럼 이땅의 문화유산을 철저한 사명감과 신념으로 사랑하고
행동으로 지킨 사람은 많지 않았다. 반면 악질적인 일본인들과 결탁하거나
그들의 수법을 배워 민족문화재를 도굴 혹은 불법반출하여 일본인 사회에
팔아먹는 딱한 조선인 무뢰한과 그 앞잡이들이 1930년대엔 부쩍 늘고 있었다.
1935년 8월에 다음과 같은 사건이 적발되고 있다.
"경북 문경군 신북면 관음리의 폐사지에 서 있던 석탑을 서울 신용산에 사는
임장춘이란 자가 사서 운반 중이라는바, 그러한 매매와 운반은 법령 위반임.
조사보고 요망. 판사람은 현지 관음리의 이아무개. 손아무개임. 임장춘은 석탑류
매매의 상습자인 배성관이란자와 전부터 긴밀한 사이이나 이번 사건의 책임자는
임이었고, 배는 뒤에서 자금을 융통해준 간접적인 관계에 있음."(총독부에서
경북도지사 앞으로 보낸 서류)
현재 문경읍 경찰서 갈평지서에 세워져 있는 관음리 오층석탑이 바로 그때
임장춘이 불법반출하려다 실패한 석탑이다.
중흥산성에서 해체된 걸작 쌍사자석등
일제 밑에서 일본인 무법자들이 한반도 전역을 유린하며 약탈 혹은
불법반출한 석탑·석등·부도의 수효와 그 만행의 형태, 그리고 그것들의 행방을
낱낱이 조사·집계한 자료는 아직 없다. 또 그것은 도저히 불가능한 일이다.
수를 헤아릴 수 없는 석탑·석등·부도가 인천·부산·군산·목포 기타
여러항구에서 일본 본토로 실려 나갔지만 1966년의 (한일 문화재 및 문화협력에
따른 협정) 후의 반환문화재 가운데 석탑류는 하나도 포함돼 있지 않다. 모두
개인 소유로 돼 있다는 이유로 일본정부는 그것들을 제외시켰다.
일제 때 얼마나 많은 석탑류가 일본에 유출되었는가를 알려주는 몇 가지
구체적인 자료가 있는데, 그 하나는 1930년대에 오사카에서 주기적으로 경매가
벌여졌을 때의 목록들이다. 그것을 보면 한 번 경매 때 보통 50∼60점의 조선
석탑·석등·부도가 모여지고 있다. 8·15 직전까지 도쿄의 어느 백화점
아래층에는 일본인 골동상과 공모하여 이 땅의 문화재 반출과 판매에 성공한
이아우개란 반역적인 조선인 골동상이 각종 석물을 즐비하게 진열해놓고
일본인들에게 팔고 있었다.
현재 국내에서 국보 혹은 보물로 지정돼 있는 석조물 가운데에도 앞에서 미처
언급하지 못한 수난의 내력을 가진 것들이 많다. 한 예로 국보 제103호인
'중흥산성 쌍사자석등' 은, 1930년에 전남 광양군 옥룡면 운평리 중흥산성의
폐사지에서 불법반출되어 대구에 살던 일본인 수집가 이치다의 집 정원으로
들어가게 돼 있던 것을 총독부가 용케 중간에서 접수하여 서울의 박물관으로
운반해 온 것이다. 그 정확한 내막이 1932년 5월에 총독부 고적조사과 기수였던
오가와가 작성한 현지 조사보고서에서 확인된다.
"전남·북지방에서 석탑·석등 등이 매매되어 부잣집 마당에 놓이고, 혹은
바다를 건거 나이치(일본 본토)로 반출됨이 심하고, 천여 년을 유존한 국보적
고탑을 넘어뜨리고 파괴하여 내부에 수장하고 있던 유보를 훔쳐 팔아먹는 자가
있다는 풍문을 가끔 들었었고, 그런 유물로 믿어지는 것을 수삼차 본일도 있음.
작년 가을에 대구에 사는 이치다가 어느 시골에서 석탑과 석등을 산후, 대구로
운반해도 괜찮겠느냐는 것이어서 소재지와 매매의 이유를 물으니, '전남 광양군
옥룡면에서 보통학교 후원회가 기금 자산을 만들 목적으로 중흥산성 내에 있는
삼층석탑과 석등을 매각했다. 시골 산중에 고대의 유물을 두었댔자 보호가 되지
않는다. 대구로 이전하여 마당 안에 두고 싶다' 는 희망이었음.
3월 17일. 광주에서 도지사관사 마당에 옮겨져 있는 석등을 보았음. 지금까지
3개밖에 발견되지 않은 일품임.
3월 20일 밤에 옥룡 경찰관 주재소를 찾아 중흥산성 내의 폐탑 매매의 건을
들었음.
'소화 5년(1930년) 8월게 옥룡보통학교 후원회가 기본금 조성을 위해 산성
안의 석탑 및 석등의 매각처를 변정섭이라는 자에세 의뢰했음. 변은 부산에 있는
성명 미상의 매수인 2명을 동반하고 와서 물건을 보게 하였음. 그리하여 일금
750원으로 매매의 약속이 성립되었음. 학교 후원회 쪽에서는 100원 정도면 팔릴
거라고 생각했던 터라 너무나 고가인 관계로 놀래어 군 당국에 상담하니, 유물의
매매는 고적·유물 보존규칙에 의해 불가하다는 지시를 받았음. 그 뒤에 여러
가지 문제가 연속되었음.'
이상이 경찰관에게 들은 대요임. 부산의 매수인은 대구의 이치다에게 전매할
약속을 했었고, 이치다는 후지다 촉탁(총독부 소속)에게 상담이 있어 이번에
출장·조사를 하게 된 것임."
걸작 '쌍사자석등' 은 부산의 악질 골동상(일본인이었을 듯함)과 대구의
간접적인 유물 약탈자였던 이치다의 손이 뻗치면서 당장 중흥산성에서 해체되어
옥룡면사무소 앞에 반출됐었다. 그러나 그들의 파격적인 매수 수법에 놀란
주민들이 뒤늦게 불법행위임을 깨닫고, 이어서 당국이 개입하자 일본인
무법자들의 음모는 결국 실패했다. 석등은 한동안 광주의 전남 도지사 관사로
옮겨졌다가 1937년 1월 5일에 서울 박물관으로 올라와 그해 11월에 경복궁 안에
복원되었다. 그 공로자는 오가와였다. 그후 아마누마라는 일본인이 이런 말을
쓰고 있다.
"오가와가 그 석등을 일차 조사하고 서울로 올라와 총독부에 복명하여 유물
등록수속을 마치고, 그해 12월에 재조사한 끝에 서울로 운반해왔다. 하마터면
골동상의 손을 거쳐 대구의 부호의 소유로 돌아가 우리는 도저히 볼 수 없는
운명에 빠지게 될 것을 살려 지금 총독부박물관에 옮겨져 있다."
당시 대구에는 이치다 외에도 또 한사람의 악명 높은 일본인 수집가가 있었다.
남선전기 사장 오구라 다케노스케였다. 그런데 이오구라는 이치다가 걸작 석등의
불법 입수를 꾀했다가 실패한 전남 광양지방의 어느 절터의 탑 속에서 약탈된
작은 '금동팔각사리탑' 하나를 말썽없이 입수하고 있었다. 그는 또 경주 부근의
어느 석탑 속에서 훔친 작은 '금동삼층탑' 도 취득하고 있었는데 모두 희귀한
걸작이었다. 8·15해방 전후해서 일본으로 반출되어 현재 둘 다 일본의
중요미술품으로 지정돼 있다. 오구라는 일제가 패망할 때가지 대구 시내의 자기
집에 온갖 종류의 풍부한 도굴 및 약탈문화재 컬렉션을 향유하고 있었는데 그때
정원에 놓여 있던 고려시대의 걸작 '석도부도' 둘은 8·15해방 이후
귀속재산으로 대구시가 압류하고 있다가 경북대학교 박물관으로 이관되어 현재
보물 제135호와 제258호로 지정돼 있다.
그러나 그것들이 언제 어느 절터에서 반출된 것인지는 배후의 장본인이었던
우구라가 약탈과 입수 경위에 대해 일절 함구한 채 일본으로 돌아갔기 때문에
전혀 알 수가 없다. 다만 이 부도들은 과거의 총독부 때에도 이미 주목되어
1942년 6월에 모두 중요한 유물로 지정돼 있었다는 사실이 확인되고 있을
뿐이다.
경주 근처인 경북 월성군 안강읍 옥산리에 위치하는 국보 제40호의 '정혜사터
십삼층석탑'(통일시라시대)은 1911년에 약탈될 뻔했었다. 수명의 반출음모자들이
밤중에 나타나 상륜부와 위로부터 세 층을 해체하여 땅에 내려놓았을 때, 마침
한 마을사람이 지나다가 그 광경을 목격하고 "어느놈들이냐?"고 호통을 쳐
범인들은 도망치고 석탑은 위기일발에서 화를 면했던 것이다. 그후 이
십삼층석탑은 땅에 내려진 탑재들을 되올리지 못한 채 오랫동안 십층탑 꼴로 서
있었다. 그통에 상륜부는 아주 잃어버리고 말았다.
지금 서울 경복궁의 국립중앙박물관 석물군 속에 들어 있는 보물 제357호의
'정도사터 오충석탑' 에 대해서는 1968년에 문공부 문화재관리국이 발행한
(문화재 대관) (보물편) 상권에 '1924년에 원위치(경북 칠곡군 약목면
복성동)에서 현위치로 이건한 것' 으로 기록돼 있지만 1912∼1913년에 일본인
조사가 세키노가 발표한 논문 (조선의 석탑파)에는 '그전에 벌써 칠곡 절터에서
불법반출되어 오야라는 철도관리국장 관사에 들어가 있다' 고 밝혀져 있다.
그후에 총독부가 경복궁으로 옮겨 왔던 것 같다.
총독부의 가공할 사적파괴령 비밀문서
처음엔 석탑 자체에만 눈독을 들여 어떠한 어려운 운반조건도 무릅썼던
일본인 무법자들은 차차 탑 속에 들어 있는 사리장치 유물만 꺼내는 새로운
범행을 병행시키게 되었다. 이 새로운 목표물은 무거운 큰 덩어리의 탑재들을
많은 인원과 시간을 동원하여 불법반출하는 모험에 비하면 훨씬 손쉽게 성공할
수 있는 매력적인 대상이었다.
탑이 깨져 나가거나 말거나 밀어서 무너뜨리고, 혹은 사리장치가 있음직한
부분의 탑재 사이에 지렛대를 넣어 들어올린 후 유물만 꺼내는 일은 몇이서
하룻밤 사이에 간단히 해치울 수 있는데다가 잘 걸리면 작은 순금불 같은
굉장하고 진귀한 보물을 손에 넣을 수 있었기 때문에 일본인 악당들의 목표물은
더욱 다양해졌다.
석탑 속의 사리장치 유물을 노리는 범행은 1920년대에 급격히 성행하기
시작했는데, 그바람에 반출당하는 화를 면했던 탑들도 성한 것이 없게 되었다.
탑의 생명으로서의 비장품인 사리장치 유물, 곧 삼국시대 이후의 금·은 혹은
금동제의 작은 불상·보탑·합 기타 사리병과 그 외함들을 약탈당하고 시신처럼
기울거나 파괴되어 균형을 잃은 탑들이 곳곳에서 일제 아래의 비운을 통곡하게
되었다.
1930년대 중엽의 일이었다. 개성 시외에 있는 고려시대의 현화사칠층석탑 속의
사리장치를 노린 악당들이 있었다. 그들은 비가 쏟아지고 무섭게 천둥이 치는
밤중을 이용하여 다이너마이트 탑신을 폭파했다. 가까운 주민들은 그 소리를
번갯불 천둥소리와 분별할 수가 없었다. 주민들은 날이 밝은 후에야 석탑의
처참한 수난을 목격할 수 있었다. 불행중 다행인 것은 탑이 완전히 박살나지
않고 상처투성이나마 제자리에 서 있는 기적이었다. 범인들은 얼마 후 경찰에
잡혔으나 그들이 성공적으로 약탈했던 사리장치의 금제유물은 벌써 금은방에
가서 두드려 짓이겨진 뒤였다.
1934년 11월 경기 도지사가 총독 앞으로 보낸 보고서에서는, 여주군 북내면
상교리에 있는 당시 보물 제15호의 지정문화재였던 '고달사터 부도'(현재 국보
제4호)의 내부 유물에 손을 댄 자가 있었다는 내용의 다음과 같은 피해보고가
기록돼 있다.
"부도 전방 약 10m 거리에 있는 장군석을 들어다 부도의 기단 옆으로
기대놓고, 기계를 사용하여 연대(앙련이 조각된 상대석)를 한쪽에서 들어 올린
다음, 그 짬에 작은 돌들을 끼워 간격을 고정시킨 후, 내부를 뒤진 흔적이 있음.
뿐만 아니라 기단 속에 고물(금속유물)을 넣었을 장치(사리장치)가 없어진
것으로 미루어 절취당한 것으로 인정됨."
무엇보다도 일제의 발악적인 석조문화재 파괴와 무자비한 유린은
조선총독부가 1943년에 각 도경찰부장에게 지시·명령한 (유림의 숙정 및
반시국적 고적의 철거)에서 절정에 이른다. 태평양전쟁을 도발했던 일제가
미·영연합군의 무서운 반격을 받아 패색에 휩싸이게 되자 조선총독부는 이
땅의 항일민족사상과 투쟁의식을 유발시키고 있는 민족적인 사적비들을 모조리
파괴해서 없애려고 든 것이다. 가령 이성계가 왜구를 크게 무찌른 기념비인
'황산대첩비' 를 비로해서 임진왜란 때 수만 명의 왜군을 남쪽 바다에서
궤멸시킨 이 땅의 성웅 이순신 장군의 전승 기록을 새긴 비석 같은 것들을
남김없이 말살시키라는 것이었다. 그때 총독부가 작성한 파괴 대상의 격파기념비
목록을 다음과 같다.
1. 고양 행주전승비 2. 청주 조헌전장기적비 3. 공주 명람방위종덕비 4. 공주
명위관임제비 5. 공주 망일사은비 6. 아산 이순신신도비 7. 운봉 황산대첩비 8.
여수 타루비 9. 여수 이순신좌수영대첩비 10. 해남 이순신명량대첩비(현재 보물
제503호) 11. 남해 명장량상동정시비 12. 합천 해인사 사명대사석장비 13. 진주
김시민전성극적비 14. 통영과 남해의 이순신충렬묘비 15. 부산 정발전망유지비
16. 고성 건봉사 사명대사기적비 17. 연안 연성대첩비 18. 경흥 전보파호비 19.
회령 고충사타 20. 진주 촉석정충단비
다음은 조선총독부가 이 땅의 민족혼을 말살시키려는 최후의 발악으로 이른바
반시국적인 고적은 소관 도경찰부장들이 임의로 철거(실제 내용은 파괴)시켜도
좋다고 결정했을 때의 가공할 비밀문서의 내용이다. 1943년 11월 24일 기초된 이
문서는 총독부 학무국장이 경부국장에게 넘겨준 후 각 도경찰부장에게
비밀지령으로 하달되었다.
"수제: 철거할 물건중 '황상대첩비' 는 학술상 사료로서 보존의 필요가 있기는
하지만 그 존재가 관할 도경찰부장의 의견대로 현시국의 국민사상 통일에
지장이 있는 만큼 그것을 철거함은 부득이한 일로 사료됨. 따라서 다른 물건들과
마찬가지로 적당한 처치 방법을 강구할 것.
참조: '황산대첩비' 는 보존령(총독부 고적 및 유물 보존령)에 따라 지정할
만한 것은 아니나 이성계가 왜구를 격파한 사적을 기록한 것으로서 그 존재는
당시 일본인 해외 발전의 사적의 증징이기도 하고, 그 비석의 형식은
미술상·학술상 시대의 한 기준이 될 수 있는 것으로서 현지에서 보존시킴이
이상적이겠으나 그 존재가 치안상 철거해야겠다는 관할 경찰당국의 의견은
현시국에 부득이한 것으로 간주됨. 그것을 서울로 가져오기엔 수송의 곤란이
적지 않고, 그 처분을 경찰당국에 일임하는 바임."
이 비밀문서 뒤에, 앞에서 소개한 파괴 대상의 비석 목록이 첨가되었는데,
제목은 '황산대첩비' 를 예로 든 (현존 유사품 일람표)였다.이후 각도에서는 일제
경찰부장의 명령으로 이땅의 역사적 민족적 항일기념유적들이 모조리
파괴당하는 통분스런 일을 겪게 되었다.
1380년 9월에 당시 고려의 장군이었던 이성계가 이지란 장군관 함께 지리산
근방에 침입한 왜적 아지부대를 크게 무찌른 승리의 사실이 새겨져 있던 전북
남원군 운봉면 화수리의 '황산대첩비' 가 맨 먼저 산산조각으로 폭파되었다.
총독부의 승인을 받은 전북 경찰부장은 1577년에 건립되어 400년 가까이 민족의
한 수호비로 살아 있던 '황산대첩비' 를 완전히 말살시키기 위해 다이너마이트를
사용했다. 그것은 일제 말기의 무자비한 발악의 상징이었다. 대첩비가 섰던
자리엔 지금 한두 조각의 비편만이 남아 일제 치하의 잊을수 없는 굴욕을
생생하게 상기시켜주고 있고, 사적 제104호로 지정돼 있다. 1970년 무렵에 새로
만든 '황산대첩비' 가 세워졌다.
합천 해인사에 세원져 있던 임진왜란 때의 전설적인 승병장이자 고승이었던
사명대사의 '석장비' 는 경남도 경찰부장의 지시·명령에 따라 1943년 12월에
처참하게 파괴되었다. 강원도 고성군 거진면의 건봉사에 세워져 있던 또 다른
사명대사의 기적비도 같은 때에 같은 운명으로 참혹하게 파괴되었다.
임진왜란 때의 최대의 영웅인 충무공 이순신 장군의 왜군 섬멸 기념비들은
진작부터 차례로 파괴당하거나 원위치에서 철거되어 어디론가 운반되고 있었다.
전남 해남군 문내면 동외리에 있던 이충무공의 '명량대첩비' 와 여수의
'좌수영대첩비' 및 '타루비' 는 총독부가 과거의 왜구 혹은 왜군 격파기념비들을
남김없이 파괴하거나 없애도록 비밀지령을 내리기 이전인 1942년에 이미
원위치에서 철거되어 사라졌었다. 주민들은 그것들이 총독부 명령으로 서울로
운반되었다는 사실을 알았으나 확인할 수 없었다.
그러다가 일제는 드디어 태평양전쟁에서 패망했고 이 땅엔 마침내 해방의
날이 왔다. 해남과 여수의 지방유지들은 즉각 서울로 사람을 보내어 그들이
일제에게 빼앗겼던 이충무공 대첩비들의 안전 여부를 알아보았다. 참으로
다행그럽게도, 그것들은 경복궁 근정전 앞뜰 땅속에 깊이 생매장돼 있었으나,
파괴돼 있지는 않았다. 물론 그것들은 그후 지방유지들에 의해 원위치로 모셔져
갔다. '명량대첩비'는 현재 보물 제503호로 지정돼 있다.
땅속의 쇠솥에서 나온 형제불
1907년 어느날, 충남 부여군 규암면 규암리에서 마을사람 하나가 땅을 파다가
우연히 뚜껑이 덮인 옛날 쇠솥 하나를 발견했다. 솥 안에는 금빛도 찬연한 작은
부처님이 둘이나 들어 있었다. 선량한 발견자는 그 사실을 숨기지 않고 마을에
알렸다. 그러자 당시 부여 지구에 파견돼 있던 이른바 통감부 소속의 일제
헌병대가 알고 압수의 손길을 뻗쳤다. 주인이 나타날때까지 유실물로서
보관한다는 것이었다.
어느 난리때, 어느 절의 중들이 부처님에 화가 미치지 않도록 땅속 깊이
안전하게 묻어놓았다가 다시 캐서 절로 모셔갈 기회를 갖지 못하든 바람에
영원히 잊혀져버렸으리라 추측되는 그 작은 금동불들을 임자가 나타날 때까지
보관한다던 일제 헌병대는 1년 후에 가서 결국 '임자 없는 물건' 이라 하여
일본인들을 상대로 경매에 붙였다. 저들 멋대로의 압수와 처분이었다.
불상이 낙찰자는 니와세라는 일본인이었다. 그는 크기는 약간 다르나 백제
시대의 뛰어나게 아름다운 불교미술품인 금동관음보살입상 둘을 독차지한
것인데, 겉으로는 경매입찰이었으나 내막은 헌병대를 통한 단독 점유였을
가능성이 짙다.
니와세는 1922년에 그가 갖고 있던 두 개의 백제 금동불 중 하나를 대구의
이치다(1930년에 '중흥산성 쌍사자석등' 을 불법적으로 입수하려고 했던 자)에게
팔아 넘김으로써 15년 전에 땅속의 한 솥에서 나왔던 형제불은 그후 영원히
헤어지게 되었다.
크기가 약간 작아 동생뻘이었던 것(높이 약 22.8cm)은 해방 후 서울에서 압수,
귀속재산으로 국립박물관에 들어갔으나 대구로 가 있던 형뻘 되는 불상(높이 약
28cm)은 소장자였던 이치다가 해방후 일본으로 숨겨 갖고 간 듯, 아주
사라져버렸다.
고려자기나 석탑류에서도 마찬가지지만 일제 때의 고적 혹은 고미술
관계서적이나 도록에 무수히 소개돼 있는 일본인 소장의 귀중한 불상들이
오늘에 와서 거의가 행방불명이며 국내에서는 완전히 찾을 수가 없다. 그 태반이
일본으로 반출된 것이다.
일제 초기부터 일본인들은 석탑류에서처럼 이 땅의 대소 불상 유물을
마음대로 소유할 수 있었다. 일확천금을 꿈꾸며 날뛰던 일부 악질 일본인들은
곳곳의 폐사지에서 석탑과 함께 석불도 걸리는 대로 불법반출하여 돈 있는
일본인 사회에 팔아 넘겼고, 순금 혹은 금동제의 작고 값나가는 불상을 약탈하기
위해서 시대가 오랜 석탑이나 부도를 무너뜨리고 그 속의 사리장치 유물을
훔쳤다. 그런가 하면 살아 있는 사암에서 약탈하거나 매수하는 방법도 썼다.
그들의 악랄한 약탈품 가운데 국보적인 가치를 갖는 어떤 불상은
총독부박물관과 이왕가박물관으로도 비싼 가격으로 팔려 들어갔다.
당시 일본인 사회에 이 땅의 각종 불상에 대한 관심과 식견을 고조시킨 것은
고려자기나 석탑류의 경우처럼 역시 일본인 전문가들의 고적조사 보고와
강연회였다. 한 일본인이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기록하고 있다.
"1915년 5월이었다고 생각된다. 세키노 박사가 서울 남산여학교 강당에서
고적조사의 보고연설을 한 일이 있었다. 그때 이런 말이 나왔다. '나이치(일본
본토)와 계열을 같이 하는 불상이 조선에 많이 있을 걸로 생각하고 많은 사원을
조사해 봤으나 비교적 적었다. 어디선가 나타날 거라고 주의해 보았더니 근자에
와서 여러 곳의 절터, 산속의 동굴, 경작지 같은 데서 하나둘씩 출토되기
시작했다. 이왕가박물관의 많은 불상은 그런 경위로 모여진 것들이다.' 사실
그후에도 삼국시대와 신라의 불상들이 무수히 출토되고 있다. 박사의 강연이
있은 후, 어떤 사람(물론 일본인)이 높이가 약 23cm쯤 되는 금동불상 하나를
들고 가서 박사에게 감정을 부탁했다. 강원도 산 속에서 나왔다는 그 불상을 본
박사는 깜짝 놀라면서, '이건 굉장한 삼국시대 불상이다. 이런 것이 민간에
나돈다는건 곤란한 일이다' 고 주의를 시키는 것이었다."(조선의 미술공예에 관한
회고, 1945년)
삼국시대 최대의 걸작 금동반가사유상
앞에서 세키노 박사의 불상 관계 강연과 당시 어떤 일본인이 입수해 갖고
있던 삼국시대의 귀중한 금동불상에 대해 언급한 아사가와는 또 이런말을 쓰고
있다.
"흠명천황 때(일본 역사의 6세기 중엽) 백제에서 처음으로 불상과 경전이
일본으로 '도래' 했다는 사실로 미루어 백제의 옛 땅인 부여지방에서 아스카(일본
역사의 6∼7세기 문화)식의 불상을 찾아 구해 봤더니 과연 그런 것들이 출토되는
것이다."
일본인 무법자들이 백제의 불상을 찾아 헤매던 때의 짤막한 증언인데,
그렇다고 그들의 발길이 부여 쪽으로만 향했던 것은 물론 아니고, 경주의 신라
유적지와 기타 모든 지역의 절터. 혹은 살아 있는 사찰에도 거침없이 그들의
검은 손길은 뻗쳐나가고 있었다. 역시 한일합방 이전부터였다.
두 패의 일본인 악당들이 한일합방을 전후해서 정확히 어느 지역의 어떤
절에서 약탈해 온 것인지 일체의 경위를 흐린 채 서울로 불법반출해 온
삼국시대의 최대의 걸작 불상 2구가 있었다. 현재 한국의 국보 중의 국보로
국립중앙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는 '금동미륵보살반가사유상' 2구가 그것이다.
학계가 아직 원위치를 해명하지 못하고 있는 이 두 반가상 중이 하나는
1912년 2월 21일에 이왕가박물관이 2,600원이라는 거액을 지불하고 서울에서
사들였는데, 그때 그것을 판 자는 무법의 약탈자들을 거느리고 있었거나 그들과
긴밀히 접촉하고 있던 고물상인 가지야마라는 일본인이었다. 그는 정말
일확천금을 한 운수 좋았던 악당이었다. 총독부는 그의 불법적인 행위를 모른
체하였고, 결국 범인은 누구한테도 그 반가상의 반출지를 추궁받지 않았다.
오히려 그들은 주위의 개인적인 질문에도 원위치와는 전혀 거리가 먼 듯한 다른
지역을 댐으로써 오늘날까지도 전문가들 사이에 수수께끼를 남겼다.
그것은 악당들의 고의적인 증거인멸 술책이었다. 이후 전문가들은 뚜렷한
증거나 자료가 없이 범인들이 작전상 퍼뜨린 것으로 믿어지는 풍문을 따라
불확실한 위치를 말하게 되었는데, 세키노도 "이 반가상은 경주 남쪽 오릉
부근의 폐사지에서 출토되었다고 한다." 고 1933년에 발표한 논문 (조선
삼국시대의 조각)에 쓰고 있다.
이왕가박물관이 그것을 입수할 때에도 반출지는 경주지방으로 알려져 있었던
것 같다. 아사가와는 (조선의 미술공예에 관한 회고)에서 다음과 같이 언급하고
있다.
"이 놀라운 불상이 이왕가박물관의 광채로 모셔지기까지에는 당시 관장이었던
스에마쓰의 고심이 많았는데, 그에게 들은 바로는 출현지로 믿어지는 경주로부터
서울로 올라왔을 때에는 표면을 두터운 호분으로 칠하고 면상을 먹으로
그렸는데 눈꼬리가 처지고 꼬불꼬불한 수염에 까만 눈동자 그리고 입술은
빨갛게 칠해져 고색은 커녕 더럽혀진 흰벽과 같은 얼굴이었다고 한다. 그런 것을
더운 물로 닦아내고, 금빛을 안정시키기 위해 젖은 거적으로 싸고 하여 지금과
같은 모습을 볼수 있게 되었다고 한다."
이 아사가와의 회고담에서 주목되는 것은, 앞의 반가상이 세키노가 풍문에
들었던 것처럼 이름 모를 폐사지에서 출토된 것이 아니라 '출현'(발견), 곧 어느
살아 있는 사암에 엄연히 전해되던 것을 몰래 약탈, 아니면 협박 혹은 매수하여
서울로 반출해 왔음을 시사하고 있다는 점이다.
무엇보다도 세키노의 '경주지역 출토설' 인용을 신뢰성 없는 말로 만들고 있는
것은 1915년에 이네다라는 일본인이 (조선에 있어서의 불교예술 연구)라는
글에서 이왕가박물관의 반가상에 대해 언급한 다음과 같은 증언이다.
"1910년에 충청도 벽촌에서 올라왔는데 삼국시대 말기의 대표적인 미술품이며
세키노 박사도 삼탄하였고, 또 독일의 박물관 기사도 와 보고는 십만 금도
아깝지 않은 진품이라고 하였다."
이네다는 한일합방 전에 한국에 건너와 충남 계룡산에 머물면서 한국의
불교문화와 유물을 조사·연구했던 일본인이었다. 그는 한국말도 꽤 잘했었다고
한다. 따라서 그가 이왕가박물관의 '금동미륵보살반가상' 에 언급하여 "충청도
벽촌에서 올라왔다"고 단정적으로 쓴 데는 그만한 확실한 정보와 내막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을 것으로 믿어진다.
또 그것이 서울로 올라간 해가 정확히 1910년이었다는 대목도 신빙성 있는
증언이다. 그렇다면 그 반가상은 서울로 불법반출된 후, 2년 동안 몇 다리를
건넜거나 아니면 처음부터 가지야마라는 일본인 악당이 감추어 갖고 있다가
이왕가박물관의 스에마쓰 관장과 은밀히 접촉한 끝에 2,600원이라는 엄청난 돈을
받고 무사히 팔아먹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아사가와가, "그것을 박물관이
입수하기까지에는 스에마쓰 관장의 고심이 많았다"고 쓴 회고담은 그때
가지야마가 값을 워낙 호되게 불렀던 때문이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어쩌면
3,000∼4,000원쯤 내라고 했었는지도 모르겠다.
아무튼 "그 반가상은 1910년에 충청도 벽촌에서 올라왔다" 는 이네다의 기록은
세키노의 자신 없는 '경주지역 폐사지 출토설' 보다 훨씬 신빙성이 있다. 만일
경주가 아니라 충남의 어느 벽촌이 정확한 반출지였다면 그 반가상은 신라가
아니라 백제불일 수도 있다는 중요한 가정이 성립된다. 일찍이 고유섭 선생도
(금동미륵반가상의 고찰)이라는 논문에서 "그것이 백제의 것인지 신라의 것인지
확실치 않다" 고 회의를 표했었지만 가장 본격적으로 문제를 제기한 전문가는
황수영 교수였다.
황교수는 1960년의 (역사학보) 13집에 발표한 (백제 반가사유석상 소고)에서
이네다의 증언기록에 주목하면서 대략 다음과 같이 논급하고 있다.
"이네다 역시 정확한 지명이나 전세, 출토의 구별이 없이 충청도 벽촌이라
하였으나 그것은 벽촌에 있던 이름없는 사암 같은 곳에서 발견, 반출했다는
뜻으로 해석된다. 세키노 박사가 만약 '충청도 벽온으로부터의 출래설' 을 전문의
'경주지역 출토설' 과 함께 기록하였던들 이 유상(반가상)은 신라설에 앞서, 또는
동시에 백제의 것으로도 추정되었을 것이 틀림없다. 그러나 '충청·백제설' 은
전혀 표면화되지 못하고 오직 '경주·고신라설' 만이 유독 신봉되고 고수되면서
일본인 학자들 가운데 거기에 의문을 제게한 사람이 없었다."
이왕가박물관이 문제의 반가상을 입수하던 1912년에 형태와 크기가 거의 같은
또 하나의 걸작 '금동미륵보살반가상' 이 어디선가 불법반출되어 서울에서
거액의 판로를 찾다가 관헌의 주목을 받아 데라우치 총독 관저에 기증형식으로
들어갔는데, 세키노 박사의 기록을 빌리면 그때의 기증자는 후치가미란 자였다.
그의 정체도 가지야마와 같은 일당의 장물아비였거나 고물(문화재) 약탈의
배후의 조종자였던 것 같다.
총독 관저에 들어간 반가상에 대해서도 세키노 박사는 "액석하게도 출처가
명백하지 못하다. 그러나 경상도에서 발견된 것인 듯하다" 고 자신 없는 추측에
그친다.
모두가 일본인 무법자들이 유물의 불법적인 반출지나 출토지를 전혀 말하려
하지 않아꼬, 또 반출 혹은 약탈경위와 증거를 완전히 인멸시킨 때문에 생긴
학계의 안타까운 수수께끼들이다.
데라우치 총독이 일본인 무법자들로부터 기증받아 개인 소유로 총독 관저에
갖고 있던 반가상은 그가 총리대신으로 승격하여 본국으로 돌아가던 때인
1916년 4월 18일, 총독부박물관(1915년 발족)에 기증되었다. 학계가 알고 있는
걸작 불상을 차마 도쿄로 실어갈 수는 없었던 모양이다.
1912년에, 하나는 이왕가박물관에 그리고 또 하나는 데라우치 총독에게
진상됐다가 총독부박물관에 들어온 원위치 불명의 두 '금동미륵보살반가사유상'
은 현재 모두 세계적인 명품이며, 국보 제83호와 제78호로 지정되어
국립중앙박물관에 진열돼 있다.
약탈자들에게 바꿔치기당한 유점사 오십삼불
1912년, 금강산지역의 불교유적을 조사하러 갔던 일본인 전문가 시키노와
야쓰이는 내금강께의 유점사에서 신라시대의 '53불신앙' 의 실상을 말해주는,
높이 약 7∼41cm의 작은 금동불상 50구를 발견하고 깜짝 놀랐다. 53구 가운데
3구만 잃었을 뿐 거의 고스란히 보존돼 있었던 것이다. 세키노와 야쓰이는
그들이 발견하고 조사한 유점사 53불중의 유존상들을 1917년과 1920년에 간행된
(조선고적도보)(총독부 간행) 제5책과 제7책에 사진과 함께 소개하면서 '기적적인
대발견' 이라고 표현했다. 그러나 이때의 학술적인 조사·평가와 사진은 다른
일본인 무법자들에겐 일확천금할 수 있는 좋을 약탈거리이 정보였다.
1916년 3월, 치밀한 사전계획을 세운 일단의 일본인 무법자들이 마침내 금상산
유점사로 침입해 갔다. 그들은 주저하지 않고 본전인 능인보전으로 달려가서 그
안에 모셔져 있던 53불의 유존상 중에서 가장 값나감직한 신라유물 17점을
골라잡고 유유히 사라졌다. 백주의 약탈이었다. 그런데 그때 그들은 사승이나
누군가를 위협하느라고 권력신분을 가장하여 개성에서 왔다고 큰소리를 쳐 결국
자기 노출의 실수를 범했던 것 같다. 그래서 절에서 불상 도난신고를 받은
경찰은 곧장 개성으로 범인 일당을 추적할 수 있었다.
그러나 얼마 후, 범인에게서 도난품을 압수했다면서 일본인 순사(경찰)가 가져온
불상은 17점 전부가 아니라 9점뿐이었다.
무력했던 중들은 9점만이라도 살아 돌아온 것을 다행으로 여기고는 그 이상
문제삼지 못했다. 또 그 불상들의 조형적인 양식이나 세부적인 형태에 평소
아무런 지식도 관찰도 없었던 중들은 돌아온 9점 가운데 6점은 능인보전에서
도난당했던 유점사 전래의 신라유물이 아니고 일본인 악당들이 개성에서
지능적으로 바꿔치기 한 원위치 불명의 보잘것없는 수상들이란 점을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범인을 추적했던 일본인 순사는 개성에서 쉽게 그들을 붙잡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범인들에게 매수되어 악질적인 음모에 가담했다. 그들은 개성에서
쉽게 구할 수 있었거나, 아니면 범인들이 어디서 또 약탈해 갖고 있었던 듯한
전혀 별개의 대단찮은 작은 불상 6점에다가 유점사에서 훔쳐온 것 중에서
조각수법이나 형태가 가장 떨어지는 3점을 붙여 도합 9점을 경찰이
압수·반환시키는 것처럼 꾸몄다. 이 음모는 완전히 성공했다. 돌아온 9점의
불상조차도 3분의 2가 형편없는 것으로 바꿔치기된 사실에 의심을 품은 중은
그때 유점사에 하나도 없었기 때문이다.
일본인 악당들은 그후 유점사에서 깨끗이 절취한 14 신라불상들을 '유점사
전래상' 이라는 족보까지 붙여 공공연히 국내외로 암매·유출시켰는데, 현재
보스턴미술관이 언젠지 모르게 입수해 갖고 있는 '금동약사여래입상' 은 그중의
하나로 1917년의 (조선고적도보)에 사진과 조사기록이 수록돼 있다. 또
일본인으로 요코다, 이토 등이 그때의 유점사 도난품을 입수·소장하고 있었으나
오늘의 행방은 확인되지 않고 있다(유점사 오심삼불 해설, 황수영 편, 1967년).
한편 1935년 3월에 총독부박물관의 촉탁이던 일본인 가야모토와 사와가
14일간 유점사의 53불을 다시 본격 조사했는데, 뒤에 그들이 작성한 복명서에는
1910년대의 조사보고에 수록된 원래의 전래상은 36점뿐이고, 엉뚱한 것이
6점(1916년에 일본인 도둑들이 바꿔치기한 것), 그리고 과거의 조사보고에 있는
것 중의 11점(사실은 전의 고적조사 보고에 이유 없이 빠진 3점을 합쳐 14점)은
도난당하고 없으며, 따로 1930년에 송만공선사 등이 발의하여 당시
경성미술품제작소에서 새로 만들어 보충한 8점의 금동여래상과 보살입상이
있었다고 상세히 기록돼 있다. 그러나 8·ㅜ15해방 이후 북한지역인 금강산
유점사의 53불이 어찌되었는지, 해방 직후에 누군가가 모두 싸가지고 남한으로
내려왔다는 설과 평양으로 옮겨져 갔다는 미확인 정보가 전할 뿐이다(앞의
(유점사 오십삼불 해설) ).
한송사터 석조보살좌상의 수난사
한일협정으로 1966년에 일본정부가 한국에 반환한 과거의 약탈 및 불법반출
문화재 가운데는 일부 도쿄국립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던 5점의 불상이 포함돼
있다. 그리고 그중에 귀국 즉시 국보 제124호로 지정된 고려시대의 희귀한
백대리석 조각품인 보살좌상이 있다. 좌고 92.4cm, 목이 부러졌으나 깨끗이
붙였고, 이마의 백호로 끼워졌던 큰 보옥을 누군가에게 탈취당했을 때의 상처를
제외하면 거의 완전한 형태의 걸작 미술품이다. 원위치는 강원도 강릉시
성내동의 한송사터. 1880년께의 어느날 밤, 무서운 태풍으로 절간 건물들이
완전히 찌부러진 뒤로 백옥(백대리석)으로 만든 불상 둘과 비신을 잃은 귀부만이
남았더라는 전설의 절터이다.
동해안의 황량한 한송사 절터의 두 백옥불상(보살좌상) 중의 하나는 머리가
부러져 나간 데다가 오른쪽 팔도 무참히 깨져 나간 상태였으나 또 하나는 크게
파손된 데가 없는 완전한 상이었다. 완전한 보살좌상은 한송사가 폐사가 된 후,
즉시 인근의 칠성암이란 작은 암자에서 가져갔다. 그것은 사암 사이에 흔히 있는
자연스런 이전이었다. 그리고 약 30년이 지났을 때 그 완전한 백옥불상을 찾아
일본으로 빼돌리려는 일본인 무법자가 나타났다. 한일합방의 직후인 1911년
3월의 일이었다.
당시 강릉 측후소의 기사였다는 설이 있는 와다라는 일본인이 한송사터의
모래밭에 몹시 파괴된 불완전한 형태로 버려져 있던 백옥불에 완전한 짝이
있었다는 말을 듣자 한 마을사람을 잡고 만일 그 행방을 수소문해서 알려주면
후하게 사례하겠다고 은밀히 유혹했다. 돈이 유혹을 받은 마을사람은 즉시
사방으로 탐색한 끝에 마침내 그 소재지를 확인해냈다. 그 정보는 즉각 와다에게
제공되었고, 반출음모는 당장 행동으로 옮겨졌다. 그는 한송사터에서 약 30리
떨어진 언덕의 칠성암을 곧바로 찾아갔다. 그리곤 암자를 지키고 있던 중에게
단도직입적으로 한송사터에서 옮겨온 불상을 양도하라고 윽박질렀다.
거부했다가는 어떤 화를 입게 될지 몰라 겁을 집어먹은 중은 겨우 "불상을
천좌시키려면 반드시 격식을 갖춘 예불의식을 가져야 한다" 는 조건을 말했을
뿐이었다.
일본인 악당은 매수금으로 미리 준비했던 몇 푼의 돈을 칠성암의 허약한
중에게 집어주고는 암자 밖의 풀숲에 모셔져 있던 걸작 백옥불상을 아무런 장애
없이 탈취할 수 있었다. 그때 이미 머리는 부러져 있었다.
탈취자 와다는 그것을 본국 정부에 대한 충성과 자신의 입명출세를 계산한
이용물로 삼을 속셈이었다. 그는 장정 두 사람이면 거뜬히 들 수 있는 좌고 1m
미만의 석불을 어렵지 않게 주문진 선착장으로 운반한 후, 배에 실어 도쿄의
제실박물관(지금의 국립박물관)으로 직행시켰다. 1911년 10월의 일이었다. 그후
이 석불은 '재선와다가 기증함' 이란 카드와 함께 55년 동안이나
도쿄국립박물관에 진열돼 있었다.
이상이 1966년에 과거의 잘못을 사과하며 일본정부가 한국에 반환한 문화재들
속의 걸작 대리석 조각품으로 귀국 즉시 국보가 된 '석조보살좌상'의 수난의
내력이다. 다행히 강릉에서의 불법반출 당시의 확실한 기록과 내막이 1912년
1월에 발행된 일본의 (고고학잡지)에 소개돼 있어 일제 초기의 맹랑한 일본인
악당이었던 와다의 범행 내막을 정확히 알 수 있는데, "그때 그 불상의 반출자인
재선 모씨(와다를 지칭)로부터 발견 및 반출경위를 들었다" 는 일본인 필자는
또, "불상이 (강릉에서) 도쿄로 반출된다고 할 때에 나는 그 보물을 볼 수
있었다. 기념으로 사진도 찍었다" 고 덧붙이고 있다.
한편 와다는 머리와 오른팔이 깨져 나간 탓으로 일본인 무법자들에게
유린당하지 않고 한송사 옛터 모래밭에 그대로 남아 있던 불완전 백옥불까지도
강릉 측후소 마당에 실어다 놓았다. 그 상태만으로도 귀중한 고려시대의
백대리석 조각품이었기 때문이다. 해방 후 오랫동안 강릉시 명주군청 마당에
옮겨져 있다가 현재는 강릉향토사료관에서 보호되고 있다. 보물 제81호로 지정돼
있다.
데라우치 총독에게 진상된 유덕사터 석불좌상
일제의 초대 조선총독이었던 데라우치는 헌병과 총칼을 앞세운 무단정치로
악명 높은 식민지 통치자였다. 그러나 그는 이 땅의 문화재 보호에 있어서는
(고적 및 유물 보존규칙) 공포와 고적조사위원회 설치 등 적절한 업적을
남겼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다. 1915년의 총독부박물관 설립과 고적·유물의
수집·연구, 전문가를 동원한 연차적인 고적조사, 그밖에 개인적으로 진상받아
총독관저에 갖고 있던 삼국시대의 최대 걸작 불상의 하나인
'금동미륵보살반가상' 과 기타 소장품 일부를 본국으로 돌아가기에 앞서
총독부박물관에 기증했다는 사실 등이 그러한 평가의 근거가 돼 있다.
그러나 이 데라우치도 만 6년 동안의 총독 재임기간 중 이 땅의 각종
문화재와 미술품을 무수히 혹은 진상받아 일본으로 빼돌린 후, 자기 고향에
'조선관' 이라는 개인 수집품 진열관까지 세웠었다는 내막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더구나 그 진열관 건물 자체가 서울의 경복궁에서 계획적으로 뜯어간
것이었다는 사실은 데라우치가 얼마나 이중적인 식민지 통치자였던가를
입증해주고도 남는다. 작고한 이홍직 교수가 1964년에 써서 남긴 (재일
한국문화재 비망록)에 다음과 같은 말이 언급돼 있다.
"초대 총독 데라우치는 그의 고향인 야마구치현 하기에 막대한 (한국의)
미술품과 전적을 수집해서 경복궁 안의 건물까지 이건하여 '조선관' 이라 칭하고
거기에 보관하고 있어서 유명하였는데, 그후 이것은 산일되어 지금 그 일부가
야마구치 현립 단기여자대학의 도서관에 보관되어 있으나 그 내용에 대해서는
아직 밟혀져 있지 않다."(사학연구,18집)
1913년께의 일이었다 데라우치 총독이 경주를 순시하던 중에 당시
경주금융조합 이사로 있던 오히라라는 일본인의 집 정원에서 아주 품위 있는
신라시대의 완전한 석불 '석가여래좌상' 을 목격하고 몹시 탐을 내는 눈치를
보였다. 그리고 며칠 후의 일이었다. 서울로 돌아온 데라우치 총독은 그의
관저(당시 남산 밑의 왜성대) 정원 한쪽에 경주의 오히라 집에서 본 그 탐나던
석물이 어느새 올라와 있는 것을 보고 깜짝 놀랐다. 동시에 눈치 빠른 오히라의
충성스런 소행에 미소를 금치 못했으리라.
하룻밤 사이에 경주에서 서울의 총독관저로 진상된 그 석불좌상은 오직
좌대부의 하대석만 구비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후 1939년에 그 하대석을
찾으려고 경주로 내려갔다가 결국 실패한 총독부박물관의 한 조사자가 그때
현지에서 확인한 다음과 같은 과거의 상황을 복명서에 적고 있다.
"데라우치 총독이 경주를 순시할 제 그 석불을 보되, 재삼 되돌아보며
숙시하기에 당시 소장자였던 오히라가 총독의 마음에 몹시 들었음을 눈치채고
즉시 서울 총독관저로 운반하였다고 함."
그 석불은 본시 경주 시외인 월성군 내동면 도지리에 있는 유덕사터에 남아
있던 유물이었다. 그것을 당시 많은 일본인들이 거리낌없이 저지르던 수법
그대로 불법반출해다가 자기집 마당에 버젓이 놔두고 자랑하던 오히라가
데라우치 총독에게 진상하여 서울로 올라온 '석조석가여래좌상' 은 계속 남산
밑의 왜성대에 그대로 전해지다가 1927년에 경복궁 뒤에 총독관저(지금이
청와대)가 신축되자 그리로 옮겨져 갔고, 현재도 청와대 숲속 침류각 뒤의 샘터
위에 잘 안치돼 있다.
굴불사터 사면석불의 수난
일제 밑에서 한국의 종류의 문화재가 얼마나 처참하고 어이없게 일본인들에게
빼앗기거나 파괴당했는가를 구체적으로 조사·파악하고 있는 오늘의 국내
전문가들은 특히 굴욕의 한일합방을 전후한 시기를 "완전 무법과 묵인된 약탈의
시대" 라고 말하고 있다. 그리고 그때 일본인들이 불법적으로 반출 혹은 약탈한
우리의 문화재는 부지기수란 표현이 모자랄 정도라고 말한다. 황수영 교수는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한일합방에 앞서서 일확천금을 꿈꾸며 귀중한 보물탐색에 혈안이 되었던
일본인 상인 또는 무뢰도당의 손으로 산간벽지의 고사암 또는 암굴과 같은
봉안처에서의 불법반출과 사찰 등에 보존되어 오던 불상·사보류에 대한
약탈행위는 말할 것도 없거니와 절터 등에 남아 있던 석조미술품의 대량
반출이나, 세계사상 그 유례가 다시 없는 수만 고분의 도굴행위 등은…, 작품 그
자체가 마땅히 지녀야 할, 아니 지니고 있던 학적 무형의 가치를 박탈당하고
일괄 유물과 분리되어 환금과 탈취의 표적으로만 취급되었다. 이곳에 우리 고대
문화재의 박해와 해명을 위하여 다시는 회복할 수 없는 중대한 타격이 일제
초기에 있었다."( (역사학보), (반가사유석상소고), 1960년 )
현재 보물 제121호로 지정돼 있는 경주시 동천리 굴불사터의 자연암
'사면석불' 의 남쪽면에 해당되는 고부조는 석가여래삼존상이었다. 그런데 거기서
본존 석가여래의 머리 부분과 오른쪽의 협시보살상 전체를 정으로 쪼아 떼어간
악당이 있었다. 곧 "완전 무법과 약탈의 시대" 에 있었던 기막힌 수난의
하나였다.
반쯤 땅속에 묻혀 있던 '사면석불' 을 현재와 같이 전모를 볼 수 있게 파올린
것은 1914∼1915년의 일이었다. 그리고 얼마 후, 정을 들고 온 무법자에 의해
석가여래의 불두와 전신상의 협시보살 부분이 감쪽같이 떼어져 어디론가
사라져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후 일본인 학자나 관계전문가들은 애초부터
그랬던 것처럼 모른 체함으로써 1960년 무렵까지만 해도 누구 하나 그 부분을
주목하고 의심한 전문가가 없었다.
1960년께였다. 당시 문교부 국보보존위원회 위원이었던 간송 전형필 선생과
이홍직·황수영 교수 일행이 경주의 유적을 조사하러 갔다가 굴불사터의
'사면석불' 을 돌아보게 되었다. 그때 일행의 화제가 드디어 반세기전에 일본인
악당이 감쪽같이 떼어 간 부분에 미치게 되었다.
예리한 눈으로 먼저 문제를 제기한 사람은 간송이었다. 일행은 긴장하여 그
자리에서 세밀한 검토를 하게 되었다. 그들은 큰 바윗덩이의 암면 부조의 하나인
남쪽면의 오른쪽에서 본존상의 머리와 협시보살상 전체를 기술적으로 쪼아
떼어간 정 자국을 확인할 수 있었다. 또 그 보살상의 가장자리로 이어져 있던
천의 자락이 얇고 섬세한 부분까지는 도저히 떼어갈 수 없었던 점이 주목되었다.
그리고 몇 해 후 한일회담 문화재관계 한국대표로 일본에 건너갔던 황수영
교수는 교토대학 고고학 연구실에서 1915년께에 찍은 경주 굴불사터 '사면석불'
의 사진 원판들을 보았다. 거기에 움직일 수 없는 증거가 나타나 있었다. 불두와
보살상을 떼어 간 직후의 사진이어서 그 자리는 한눈에 알아볼 수 있게 희고
생경한 상처를 그대로 보여주고 있었다. 드디어 모든 것은 판명되었다.
1969년에 문공부와 문화재관리국이 간행한 (문화재대관) (보물편) 중편의
'굴불사터 석불상' (사면석불) 도판해설은 그 부분에 대해 이렇게 언급하고 있다.
"사면석불의 남면상은 원래는 삼존상으로 만든 것이지만 일제 때에 오른쪽
보살상을 완전히 떼어 가고 본존상의 머리까지 떼어 간 참혹한 수난을 입었다."
반세기 전에 일본인 악당에 의해 무자비하게 떼어져 간 비운의 '사면석불'
남면의 석가상 불두와 그 옆의 보살상은 지금 일본의 어느곳에 가 있을까.
도둑맞은 관덕동 석탑의 돌사자상 한 쌍
30여 년 전에 경북 의성군 단촌면 관덕동의 '삼층석탑'(현재 보물 제188호)에서
경주박물관으로 옮겨져 있는 마멸이 심한 암수 한 쌍의 돌사자가 있다. 암놈의
크기는 높이가 52cm, 수놈은 35cm. 특히 암사자상에는 배밑 양편과 앞발 사이로
들어가 젖을 빨고 있는 세 마리의 새끼사자가 귀엽게 곁들여져 있는데, 이런
자연스런 사실표현의 어미와 새끼사자의 상은 시대를 불문하고 국내 유일의
진귀한 조각품이다. 뿐만 아니라 그것은 동양 전체에서도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가장 오래된 통일신라시대의 유물로서 일찍부터 일본인 전문가들도 경탄했었다.
1934년 1월에 발행된 일본의 (건축잡지)에 의성 관덕동 석탑에서 일찍이 네
마리의 돌사자상을 조사했던 일본인 전문가 후지시마가 다음과 같은 말을 쓰고
있다.
"(석탑에서) 가장 흥미있다고 말할 것은 상층기단 위의 네 귀퉁이에 놓여 있는
4개의 석사자이다. 마멸되긴 했으나 자세히 조사해보건대 암·수 두 쌍이다.
암사자는 겨드랑 밑으로 새끼사자를 넣고 젖을 빨게 하였다. 암사자를 곁들임은
중국에서도 송대 이상으로 오래된 것을 구하기 힘들며, 조선에서는 각 대를
통하여 그 예가 없고, 일본에서도 가마쿠라시대 이전으로 올라가면 발견할 수
없다. 동양에서 아사(새끼모양의 조각품)로 최고의 예가 된다."
문제는 이 일본인 전문가가 경탄해 마지않은 유물 평가에 있지 않다.
후지시마가 그런 얘기를 써서 발표한 지 5년 후인 1939년에 이르러 그때까지
관덕동 삼층석탑을 분명히 장식하고 있던 그 두 쌍의 네 마리 돌사자 중 상태가
더 완전했던 것 같은 한 쌍을 일본인 악당이 감쪽같이 훔쳐갔기 때문이다.
후지시마의 앞의 글로 미루어 도둑맞은 한 쌍 중의 암사자도 역시 현재
경주박물관에 옮겨져 있는 암사자처럼 젖을 빨고 있는 새끼들은 배 밑에
거느리고 있었을 것으로 믿어진다. 그것은 경주 불국사 다보탑의 네 마리 돌사자
중 몹시 깨지고 마멸이 심한 한 마리만 남겨 놓고 두 차례에 걸쳐 세 마리를
약탈해 간 사실과 똑같은 악랄한 일본인 무법자의 소행이었다.
후지시마는 두 쌍(네 마리)의 돌사자가 고스란히 놓여 있을 때에 관덕동
삼층석탑을 조사했다. 그러나 일본인 무법자의 석탑 및 돌사자의 일괄약탈 및
반출기도는 그 전에 있었다. 후지시마도 그 사실을 적고 있다.
"탑 전체(돌사자 포함)가 1931년에 대구의 모씨(물론 일본인 골동품상이었거나
배후의 교사자)에게 팔려 해체가 착수되었다가 (주민들의 반발로) 단념하고
종전과 같이 다시 쌓아 올렸다고 한다."
해방 후 전문가들이 현지를 조사하고 주민들에게 들은 바로는, 대구에 살던
어떤 일본인이 불법적으로 탑을 사서 모조리 해체한 후 탑재들을 하나씩
가마니로 싸서 의성역으로 실어 내갔을 때 주민들이 들고 일어나 일대 충돌이
있었다고 한다. 결국 일본인 무법자와 그 일당의 석탑 반출음모는 주민들의
살기등등한 반발에 부딪쳐 실패로 돌아갔고, 그후 탑재들은 주민들에 의해
원위치로 되옮겨져 가서 예전대로 복원되었다.
1차 수난 때엔 돌사자들도 무사했었다. 그러나 이 사자들의 안전은 결국
10년을 넘기지 못했다. 1939년 어느날, 두 번째로 악당들이 침입해 왔다.
새끼사자를 거느린 두 쌍의 돌사자 중 보존상태가 좋은 쪽의 한 쌍이
목표물이었다. 그들의 범행은 완벽하게 성공했다. 후지시마가 '한국의 유일한
유물일 뿐 아니라 동양에서도 가장 오랜 귀중한 조각품' 이라는 가치 평가와
함께 위치를 소개해주고 있었기 때문에 범인들은 그 돌사자 약탈작전을 아주
간단히 해치울 수 있었을 것이다.
총독부는 뒤늦게 관덕동 삼층석탑을 고적·유물로 등록시키고(현재 보물
제188호), 한 쌍을 도둑맞고 한 쌍만 남은 돌사자를 현지의 보존이 어렵다하여
경주박물관으로 옮겨 갔다. 1939년 10월의 일이었다. 그러나 도난당한 한 쌍의
돌사자는 지금까지도 행방이 묘연하고, 경주박물관에서 보호하고 있는 마멸이
심한 한 쌍만이 보물 제202호로 지정돼 있다.
국보 해제당한 가짜 상원사동종
1906년 11월에 서울 남산의 북쪽 기슭, 지금의 대한적십자사 건물 위쪽에
일제침략의 일익으로 종교적인 거점을 확보한 일본의 불교세력이 있었다. 이른바
동본원사(본시는 일본 교토에 있었다)의 경성 별원. 1년 전의 을사보호조약으로
이미 국권을 빼앗겼던 고종황제가 황태자(뒤의 순종)와 함께 침략의 괴수 이토
히로부미의 강청을 뿌리치지 못하고 할 수 없이 내놓은 하사금으로 지은
법당이었다고 한다.
이 침략의 신축 사원에서는 옛날부터 일본인들이 항상 탐냈던 신비로운
음색과 아름다운 형태의 한국종 명품을 어디서라도 찾아내 가져올 흉계를
꾸몄다. 그러자 그 전부터 이미 한국의 유적지와 사찰지역을 유린하며
일확천금의 보화와 유물 약탈을 일삼고 있던 일본인 무뢰한 하나가 탐낼 만한
정보를 갖고 와서 흥정을 했다. "경기도 양평의 용문산 쪽에 있는 작은 절터에,
순금을 3할 이상이나 함유하고 있는 종소리는 실로 신묘한 아주 오래된 대종
하나가 있다" 는 것이었다.
일본인끼리의 거리낌없는 동종 반출음모가 즉각 착수되었다. 졍보를 제공하고
즉석에서 거액의 판로를 확보한 야마구치라는 무뢰한이 용문산의 상원사로
달려갔다. 이 상원사는 을사보호조약이 체결된 후 끝까지 나라를 지키겠다고
일어섰던 의병들을 잔학하게 추격했던 일본군대에 의해 불질러진 후로 종각
하나만을 남기고 있었다. 야마구치는 초토화된 깊은 산 속의 절터에 움막 같은
임시 법당을 꾸미고 있던 정화삼이란 중과 불법적인 범종 매매계약을
성립시켰다.
당시의 남산 본원사측 기록을 보면 그때 야마구치를 통해 종값으로 지불된
돈은 800원이었다고 하나 실제로 그런 큰돈이 상원사 중에게 수교되었는지는
의문이다. 그러나 그때 상원사를 지키고 있던 중이 적잖은 돈을 받고 범종을 판
것은 확실한 것 같다. 주민들의 증언을 빌리면 그후 그 중은 일본인에게 범종을
판 돈으로 전답을 샀었다고 한다. 한심스런 중이었다.
1908년 4월 하순(7월 설도 있다). 서울의 일본절에는 드디어 대종이 도착했다.
약 1.5m의 높이에 구경이 약 1m, 그리고 무게가 400관이나 되는 육중한 대형
동종이었다.
일본인 중들은 감동하고 만족해 했다. 그들은 종값 800원에 운반비 515원을
지출하고 있었다. 반면 그 범종이 이상한 외모나 그것이 서울에서 160리 거리인
양평 용문산 상원사에서 서울로 운반되는 동안데 많은 어려움이 있었다는
중간상인 야마구치의 어딘가 의심쩍은 이야기에 선뜻 의심을 품은 사람은
그때도 그후에도 없었다. 1931년에 간행된 (남산 본원사소사)에도 이렇게 씌여
있을 뿐이다.
"서울 동대문 밖에서 '폭도'(당시 일제침략에 항거하던 한국인들을 지칭한
일본인들의 표현)들에게 방해를 당해 세 번이나 운반이 중단되다가 일본 헌병의
다대한 협조로 한강 수로를 돈 후 용산에서 남산 본원사로 옮겼다."
'폭도'들의 방해를 이유로 동대문 밖에서 여러 날을 지체한 점, 한강을 통해
용산에 도착한 배에서 범종이 인양되었다는 점, 그리고 그 범종에 대해서도 뒤에
여러 권위 있는 일본인 전문가들조차 '조선종'으로 여기기를 꺼리고 언급을
기피하거나 일본종 비슷한 괴상한 양식이라고 말한 점 등이 모두 어딘가 석연치
않았건만 깊이 조사·분석한 전문가가 아무도 없었다. 오히려 총독부는 그것을
'통일신라말 또는 고려초의 유물' 이라는 막연한 결론을 내려 보물로
지정하기까지 했었다.
8·15해방 후 남산 본원사가 갖고 있던 '전 상원사 범종' 은 조계사(서울
종로구 수송동)로 옮겨져 갔다. 그리고 과거 일제 때의 평가가 그대로 존중되어
국보 제367호로 지정됐다. 그러나 언젠가는 진실을 끝까지 추적하는 전문가가
나타나기 마련이다.
1962년 12월 12일, 문교부 문화재위원회 제1분과위 18차 회의는, '그 종은 결코
한국 것이 아니며 오랜 작품도 아니다. 일본인 무뢰한들이 계획적으로 일본에서
급조한 것을 배로 싣고 와서 한강에서 진짜 상원사종과 감쪽같이 바꿔치기한
가짜 상원사종으로 추리된다' 는 황수영 위원의 그 동안의 입체적인 조사 결론에
따라 정식으로 국보 해제를 선언했다.
그렇다면 그때 한강에서 일본으로 직행했을 진짜 상원사종은 그후 어떻게
되었을까. 아직도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이다.
일제 병기창으로 끌려갈 뻔한 보신각종
태평양전쟁을 도발시켰다가 미.영 연합군의 무서운 반격을 받아 마침내
자멸위기에 몰리게 된 일본 국군주의 조선총독부는 이른바 '총후의 정신협력'
이라는 발악적인 전쟁 수행의 한 수단으로 강제적인 금속류 공출령을 선포했다.
일반 가정의 놋쇠로 된 숟가락·젓가락·밥그릇으로부터 사찰과 교회의 동종,
청동 혹은 철불, 기타 모든 종류의 금속 기물을 자진해서 헌납하라는 것이었고,
나중엔 강제로 빼앗아 갔다. 강화도의 전등사에서 전래의 동종과 불기들을
강제로 공출당한 것도 그때였다. 경찰을 앞세운 협박적인 집행이었다. 완전히
공포 분위기의 악몽기였다.
같은 해, 서울에서는 종로의 보신각종이 일제 병기창으로 끌려가서 녹아
사라질 위기에 처해 있었다. 조선총독부의 악랄한 앞잡이들이 그것을 지목했던
것이다. 1944년 8월 12일, 총독부의 앞잡이 단체였던 소위 국민 총력 경성연맹
회장이 전체 조선연맹 사무총장 앞으로 다음과 같이 독촉·상신하고 있다.
"결전하, 금속 회수의 강화 철저의 건:결전하, 금속류 회수가 계속 강화되고
있는 차제에 일반대중은 정신 협력의 의기를 나타내야 함에도 불구하고,
종로가의 보신각 대종, 총독부 청사 내의 동상(초기 총독상 2점이 있었다) 등이
아직도 그대로 놓여져 있음은 당국의 진두수범상 일고를 요함. 기타 부내(서울
시내)에 있어서도 사원·교회 등 각 방면에 존재하는 금속류가 아직도 상당한
것으로 믿어지는바, 그것들을 즉각 공출·처치되어야 할 것으로 사료됨."
보신각종의 위기일발. 그러나 이 종은 총독부가 1934년 8월에 보물로
지정하였던 어찌할 할 수 없는 문화재였다. 따라서 총독부도 그것만은 건드릴 수
없었다. 또 서울의 민족적인 민심을 크게 자극할 역효과를 우려했을지도 모른다.
결국 보신각종은 병기창에 끌려가는 죽음을 아슬아슬하게 면한 채 조국의
해방을 맞이했고, 오늘날엔 보물 제2호로 지정돼 있다.
서울 종로 네거리의 보신각종은 조선 태조 4년(1395년)에 처음 주조됐었다.
그러나 그것은 임진왜란 때에 왜병들에 의해 불질러져 녹아 없어졌다. 현재의
종은 세조 13년(1468)에 주조되어 돈의문(서대문) 안의 정릉사와 원각사에 걸려
있다가 임진왜란 후 종각만 재건된 현위치로 옮겨져 보신각종이 됐던 것인데,
과거의 왜병들의 후예에 의해 또다시 불 속의 죽음을 당할 뻔했으니 지금의
보신각엔 왜적에 대한 한스러움이 사무쳐 있을 것이다.
한편 강화도의 전등사종은 일제 말기에 강제 공출당한 후 영원히 돌아오지
않았다. 그 대신 해방 후에 영문을 알 수 없는 중국 북송 때의 귀중한 종이 하나
굴러 들어왔다. 해방이 되자마자 전등사 주지는 일제에게 빼앗겼던 종이 혹시
인천 항구의 어디쯤에 버려져 있지 않을까 해서 찾아 나섰다가 부평의 조병창
자리 뒷마당에 큰 동종이 하나 버려져 있다는 말을 듣고 그리로 달려갔다.
그랬더니 전등사에서 가져온 종은 아니고, 그보다 더 큰 대종이었다. 여하간
임자가 나타나지 않는 종이니 이거라도 대신 운반해 가자 해서 얻은 것이 지금
전등사에 걸려 있는 높이 1.63m의 중국종으로, 1037년에 중국 백암산 숭명사에서
주조했다는 명문이 들어 있다. 1963년에 처음으로 중요한 문화재임이
조사·확인되어 보물 제393호로 지정되었다. 전등사의 중국종이 해방 직후에
부평 조병창에 버려져 있게된 경위에 대해서는 역시 일제 말기에 중국
점령지역에서 배로 반출돼 왔던 것이 아닌가 추측되고 있을 뿐이다.
강화군의 강화면 관청리에는 일제 때부터 보물로 지정돼 온 또 하나의 큰
동종이 있는데(현재 보물 제11호, 1711년에 주조), 이 종은 또 1866년의 병인양요
때 서울 근처까지 접근해 왔던 프랑스 함대의 병사들이 저희 나라로 실어
가려고 강화읍 서문 밖 토끼다리까지 굴려 갔다가 너무 무겁고 운반하기가
힘들어 포기하고 말았다는 비화를 갖고 있다.
식민지 연구자료로 이용된 규장각 장서
한일합방과 함께 일제의 조선총독부가 접수한 구한국 정부재산 중의 가장
귀중한 문화재는 규장각에 비장돼 있던 방대한 분량의 고서와 지방의
사고본들이었다. 당시 규장각은 경복궁 동쪽의 건춘문 맞은편인 지금의
국군통합병원 자리에 있었다.
경복궁 안의 집옥재를 비롯한 여러 건물에도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옛 책들이
쌓여 있었다. 그러나 이 귀중한 전적 문화재들은 외세 침입과 매국정객들의
창궐로 국력과 조정의 완전히 마비상태에 빠지던 19세기말 이후 누구도 돌보는
사람이 없어 먼지와 습기 속에 방치된 상태였다.
대한제국 정체의 여러 분야의 무력과 마비상태는 이 땅의 완전식민지화와
국토 병합을 음모하고 있던 일제에게는 더할 나위없이 고마운 정황이었다.
한일합방에 앞서 소위 통감부가 속셈을 감추며 행정력을 발휘한 것의 하나가
먼지더미 속에 버려져 있던 규장각 장서의 정리 및 보존 대책이었기 때문이다.
1908년, 통감부는 일본인 전문가들을 불러다가 국내 학자의 협력을 받아
규장각의 네 서고에 가득히 쌓여 있던 옛 책들을 전부 밖으로 꺼내면서 먼지도
털고 일광소독도 시켰는데, 그때 처음으로 파악된 장서 내용은 뒤에 (규장각
폭서목록)이라는 책자로 간행되었다. 그 무렵 통감부는 창덕궁에 박물관과
동·식물원을 창설한 것처럼 또 이 규장각 장서를 중심으로 대한제국
제실도서관을 설치시켜 준다고 통감부 아래 임시 취조국을 두고 여러 곳의 옛
책들을 낱낱이 조사하게 했었다.
현재 서울대학교 중앙도서관이 관리하고 있는 과거의 규장각 장서 중에
(제실도서지장)이라는 장서인이 찍혀 있는 것들이 있는데, 곧 일제 통감부
시절의 경위를 말해주는 증거이다. 한일합방 후, 일제는 과거의 한국 왕실을
총독부 산하의 이왕직 관리기관 속에 봉쇄시켰고, 또 과거의 한국정부 재산과
왕실의 개인적인 재산을 분리시키면서 규장각 장서들을 총독부 것으로
만들어버렸다. 그러다 1931년에 경성제국대학 도서관에 이관시켜 일본인
교수들의 식민지 연구자료로 삼게했었는데, 해방 후 자동적으로 서울대학교
도서관 소관이 되었다.
규장각을 비롯한 각처의 장서들을 모조리 접수한 총독부는, 이왕가에게는
그전까지 건재했던 지방의 4대 사고의 하나인 전북 무주의 '적상산성 사고본' 을
인수하도록 생색을 냈다. 주객이 뒤바뀌어 나라를 빼앗긴 이왕가는
침략자로부터, 5백 년 사직이 소중히 물려주고 있던 막대한 수량의 온갖 귀중한
사책들 가운데 (이조실록) 1질이 포함된 지방 사고의 장서 한 벌을 배정받은
것이었다. 그것도 '조선총독부기증' 이란 도장까지 찍히면서였으니 모두 망국으로
인한 모멸이었다.
지금의 창덕궁 장서각은 그때 이왕가가 무주에서 올려온 '적상산성 사고본' 을
중심으로 발족한 것인데, 내막을 들여다보면 이 또한 친일 매국배들이 나라를
팔아먹은 경기의 풍성하고 어수룩한 재정 밑에서, 이왕직이 일본인 고관
퇴물들의 사복을 채워 줘 가면서 이왕가를 위하는 체 생색을 낸 일이었다.
그리고 그때 창덕궁에 들여보낸 (이조실록)과 기타 사고본에 '무주 적상산성
사고본, 조선총독부 기증' 이란 도장을 찍은 자는 뒤에 가서 총독부 도서관장을
지낸 하기야마였다. 그는 장서각 발족 당시 한동안 실무 책임자로 있었다.
통감부가 빼돌린 구한국의 고서
규장각의 장서들은 통감부가 고스란히 접수·정리하여 잘 간수하다가
경성제국대학(현재 서울대학교)으로 이관시킨 것처럼 알려져 왔다. 그러나 이
규장각 장서도 사실은 통감부 시절이거나 그 이전에 벌써 상당수의 귀중본이
일제의 침입자들에 의해 유린돼 있었다. 약 60년 후인 1965년에 와서야 그
사실이 처음으로 밝혀졌다. 무뢰한은 다름아닌 이토 히로부미였다.
그 확실한 기록을 과거의 총독부 서류철에서 처음으로 찾아낸 사람은 당시
규장각 도서들을 관리하고 있던 서울대학교 중앙도서관의 백린 열람과장이었다.
과거의 규장각 도서를 정리하다가 그는 1911년의 총독부 취조국 서류철
하나를 발견했다. 규장각 장서를 접수할 때의 관계 서류철이었다. 그 속에
그때까지 관계 학계를 포함하여 누구도 알지 못했던 놀라운 내막이 하나 들어
있었다. 그것은 이토 히로부미가 규장각에서 골라잡은 후 일본에 빼돌렸던
귀중본의 목록이었다.
1911년 5월 15일자로 일본정부의 궁내부대신 와타나베가 조선총독
데라우치에게 대략 다음과 같은 골자의 조회공문을 보내고 있었다.
"이토 히로부미가 한·일 관계사항의 조사를 목적으로 일본에 가져온 조선의
서적들이 있는바, 이토가 죽은 후로 그책들은 궁내성 도서료에 보관되고 있음.
이는 일본 왕족 및 공족의 실록편수에 참고로서 필요하며, 또 이 조선책들은
일본의 제실도 서관에는 없는 것들이니 아주 양도되기를 원함."
내역은 정치·역사·인물에 관한 책과 소수의 문지 및 읍지들로서 모두 33부
563책이었다. 과거의 장서각 장서목록과 대조시켜 본 결과 백린은 읍지를 제외한
모두가 원래부터 규장각 도서였음을 확인했다. 읍지 74책도 영조 연간에
홍문관에서 작성한 고본들로서 고종 32년(1895년)에 홍문관이 폐쇄되면서
규장각으로 이관됐던 것들이었다
이 규장각 장서들은 이토가 정확히 언제 어떤 수법으로 일본에 반출해
갔었는지는 확실치 않으나 백린은 한일의정서가 체결된 직후인 1904년 3월과
다음과 11월의 을사보호조약 체결 때에 이토가 특사로 왔었던 사실을 들어 그때
가져간 것이 틀림없다고 추정하고 있다. 그리고 그의 검토를 빌리면 그때 이토가
반출한 도서 등에 현재 국내에 없는 유일본과 서울대학교 규장각 도서에 낙질로
돼 있는 귀중본은 (조감) 4권, (국조통기), (삼충록), (영남인물고) 13책,
(반양일기), (동사보유), (기재답기) 등이다(백린, (서지학) 창간호 (윤승전문에
대출된 규장각 도서에 대하여), 1968년).
약 60년 전에 한국침략의 원흉인 이토 히로부미가 개성 근방에서 일본인
무법자들이 난굴한 고려자기들을 무더기로 입수해서 일본으로 실어내 간 사실은
이미 앞에서 상세히 언급했지만 규장각에 비장돼 있던 책까지 공공연히 반출해
갔었다는 사실은 우리를 또 한번 아연하게 만든다. 그 책들은 한일합방 직후
일본 궁내부대신과 조선총독 데라우티사이에, 그러니까 침략자인 저들끼리의
절차를 거쳐 정식으로 일본정부에 양도되어 현재 도쿄 궁내청 서릉료에 소장돼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으나, 1966년의 문화재반환협정 때에는 한 권도 되찾아
오지 못했다.
사전에 벌써 규장각 귀중본에 손을 대고 그중에서 한국침략에 도움이 될
책들을 골라 일본으로 불법반출했던 침략의 괴수 이토 히로부미는 드디어 초대
통감이 된 후에도 여러 경로를 통해 접수 혹은 수집한 무수한 옛 책과 문헌들을
통감부 이름으로 일본에 빼돌렸다. 그 일부가 역시 도쿄의 궁내성 서릉료에
소장돼 있었다. 뿐만 아니라 여기엔 2대 통감이었던 소네 아라스케가 반출한
책들도 들어가 있었다. 이른바 '통감부 장서' 와 '소네 아라스케 헌상본' 으로 총
163부 852책인데, 다행히 이것만은 1966년에 반환문화재로 돌아왔다.
4대 사고의 기구한 종말
총독부가 접수한 구한국 정부의 역대 장서는 서울의 규장각본 외에도
한일합방 당시까지 병화를 피할 수 있는 심산유곡 네 곳에 소개되어 엄중히
보관돼 있던 엄청난 분량의 사고본이 있었다. 나라를 잃은 후 창덕궁에
연금당하게 된 이왕기가 총독부로부터 기증이라는 모멸스런 형식으로 인수한
무주의 '적상산성 사고본' 은 별도로 치고, 강화도의 '정족산성 사고본' 과 강원도
'오대산 사고본', 그리고 경북 봉화의 '태백산 사고본' 이 그것이었다. 이 지방 4대
사고에는 가장 귀중한 (이조실록)이 각각 1질씩 간직돼 있었다.
정족산과 태백산의 사고본들이 통감부 때부터 이미 서울로 운반되기 시작하여
지금의 서울대학교 부속병원 자리에 있던 종친부 건물의 임시 규장각 분실에
전부 모여진 것은 한일합방 직후인 1910∼1912년의 일이었다. 정족산 사고본은
1866년의 병인양요 때 강화도에 상륙하여 관청리의 동종(현재 보물 제11호)을
약탈해 가려고 했던 프랑스 함대의 수병들에 의해 이미 상당수가 탈취됐었다고
하나(이홍직 편, (국사대사전) ) 1937년에 경기도가 조사.편찬한 (경기지방의
명승고적)(일문)에는 그런 설명을 다음과 같이 부인하고 있다.
"삼랑성(정족산) 안의 사고는 건립(1660년) 이래 완전히 보호되어 왔다. 프랑스
병사들의 내습도 동문 밖에서 격퇴되었기 때문에 약탈당할 틈이 없었고, 당시
프랑스 병사들이 가져갔다고 전해지는 것은 강화 읍내에 있었던 규장외각의
장서들이었다."
여하간 (이조실록) 같은 귀중본만은 잘 보조시켰던 정족산 사고본과 태백산
사고본은 그런대로 수습이 잘되어 규장각 장서들과 함께 전체가
경성제국대학으로 넘어가 서울대학교 중앙도서관에 고스란히 소장돼 있지만,
총독부가 저들 마음대로 본국의 동경제국대학 부설도서관에 실어 보내 식민지
연구자료로 삼게 했던 오대산 사고본은 10년 후에 가서 기구한 종말을 고했다.
오대산 사고본이 총독부의 양도로 몽땅 동경제국대학으로 실려 간 것은 1914년
3월의 일이었다. 총독부는 사고의 보호를 맡고 있던 월경사의 인근 주민들을
강제동원하여 동해안의 주문진 선착장까지 등짐과 달구지로 운반한 뒤 배로
실어 갔다. 그때의 상황이 (월정사 사적기)끝부분에 이렇게 적혀 있다.
"1914년 3월 3일, 총독부 소속 관원 및 평창군 서무주임 오케구치 그리고
고용원 조병선 등이 와서 본사(월정사)에 머무르며 사고와 선원보각에 있던 사책
150짐을 강릉군 주문진으로 운반하여 일본 동경제국대학으로 직행시켰다. 그때
간평리의 다섯 동민이 동원되었는데 3일에 시작하여 11일에 역사를 끝냈다."
그렇게 해서 일본으로 반출돼 간 오대산 사고의 (이조실록) 1벌을 포함한
사책들은 데라우치 총독의 한일합방 선물로서 동경제국대학 도서관에
보관되다가 1923년에 도쿄 일원을 불바다로 만든 관동대지진 때에 모두
불타버리고 말았다. 살아남은 책은 교수들이 밖으로 대출해 갔던 20여 책에
불과했다.
다른 사고들도 다 마찬가지였지만 오대산 사고도 내부의 장서를 몽땅
일제에게 빼앗긴 뒤로 빈 건물만이 쓸쓸히 남아 있다가 그조차 주저앉아
없어지고 지금은 겨우 그 터만을 확인할 수 있을 뿐이지만, 가장 귀중한
왕조실록을 보관하던 유서깊은 곳이어서 사적 제37호로 지정돼 있다. 다른
사고들 역시 한 채의 건물도 보호되지 못했다. 무주 '적상산성 사고' 의 경우는
산성 안의 수호사였던 안국사에서 사고 건물 하나를 헐어다가 명부전을 삼고
있으나 원형을 상실하고 있다. 또 언제 그렇게 뜯어 옮겨졌는지도 확실치 않다.
(적성지)에는 (이조실록)을 보장하던 선원각이 6간, 그외 사고 12간과 수사당
6간이 세워져 있었다고 기록돼 있다. 그리고 이곳의 모든 장서가 이왕가의
장서각으로 옮겨져 가던 한일합방 직후까지는 그 건물들이 모두 건재했었음을
당시 사진으로 확인할 수 있을 뿐이다.
귀중한 장서들을 계획적으로 약탈한 가와이
엣부터 귀중한 서적은 다른 여러 분야의 문화재와 마찬가지로 임진왜란때에
1차적으로 치명적인 약탈을 당했다. 나머지의 대다수도 그때 건물과 함께
왜병들에 의 해 불질러졌다. 이홍직 교수는 (임진란과 고전유실)에서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그들(왜병)은 조선 팔도에서 마음껏 그 흉악상을 발휘하여 잔학한 살육은
물론, 사찰·관아·궁궐을 방화·파괴하여 역로의 유형적 무물은 거의 다
형적조차 없어지고 말았다. 뿐만 아니라 많은 보물과 귀중한 문화재를 계획적
혹은 충동적으로 약탈하였다. 당시 왜장 우키다가 조선에서 약탈한 수십 궤짝의
서적을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비서에게 준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그들은 식자
있는 중들을 등용하여 계획적으로 관아·구가의 장서를 샅샅이 탐색하여 약탈해
갔다.
그것은 실로 놀라울 만한 수량에 달하여 조선에서는 임진 전 간행의 전적은
거의 씨를 말릴 지경이 되었다."(한국고문화론고, 1954년)
구한말과 한일합방을 전후한 시기에도 마찬가지였다. 통감.총독에서부터 여러
계층으로 무법의 약탈 및 불법반출자가 있었다. 임진왜란 이후 두 번째로 당하는
치명적인 전적의 수난이었다.
1908년(융희 2년) 12월 29일, 경기도관찰사는 강화군수로부터 대략 다음과
같은 '정족산성 사고'의 중대사를 김급 보고받았다.
"한 일본인이 일본 헌병 2명과 헌병 보조원 5명의 호위를 받으며 전등사(당시
사고의 수호사)에 찾아와서 사고 안을 조사할 필요가 있으니 문을 열라고
강청하였으나 응하지 않자, 드디어는 도끼로 사고의 문짝을 부수고 들어가 두세
시간이나 내부를 뒤진 뒤 21권의 서책을 가지고 갔음. 그 사실을 전등사
주지로부터 보고받은 즉시 강화군 헌병 분견소에 물어 그런 불법행위를 감행한
일본인이 대체 누구인가를 규명하여 본즉, 서울의 동양협회 전문학교(당시
일본의 동양전문학교 경성분교) 간사로 있는 가와이(하불홍, 하합홍민의 잘못
표기)란 자로서 통감부 헌병대장 아카이시 소장의 소개가 있어 그의 신분을
보호해주었다 함."
일본인들이 감히 사고에까지 침입하여 문짝을 부수고 사책을 훔쳐갔다는
중대한 사건은 경기관찰사로부터 다시 서울의 내각으로 즉각 보고되었다. 그러나
경찰 치안권을 포함한 모든 주권을 이미 일제 통감부와 헌병대에 빼앗기고 있던
허수아비의 대한제국 내각은 총리대신(당시 이완용)의 명의로 사건의 진상을 더
자세히 알아보되 강화도의 일본 헌병 분견소 소장과 책을 가져갔다는 일본인
가와이에게 조회하여 그 책들을 도로 갖다놓게 하라는 소극적이고 형식적인
지시를 경기관찰사 경유 강화군수에게 내렸을 뿐이었다. 모든 범죄 수사권을
일본 헌병과 경찰이 완전 장악하고 있던 터에 명목뿐이던 지방의 일개 군수가
무슨 힘이 있었으랴.
기왕에 체결된 협약과 조약에 따라 한국인 행정책임자를 강력히 보필하기로
약속이 돼 있던 일본 경찰도 헌병의 횡포엔 맥을 못 추고 있던 때였다. 1909년
3월 11일자로 경기도 경찰부장(일본인)은 통감부 경찰국장에게 그동안의 가건
경위를 조사·보고하면서 다음과 같이 발을 빼고 있다.
"인천 경찰서장으로부터 하등의 보고가 없으나 사건이 헌병대에 관련된
것이므로 본건 조사로 인하여 혹시 헌병과 충돌이 일으킬 염려도 있어
경찰에서는 일부로 조사를 단념하였기 내보하는 바임."(국사편찬위원회
보관문서)
결국 통감부 시절에 서울에 와 있던, 책을 알던 일본인 악당 가와이는 이론
헌병대의 무법의 세력을 업고 강화도의 사고본을 계획적으로 약탈하는 데
성공했을 뿐 아니라 그의 불법행위가 중앙에까지 보고됐었음에도 불사하고
헌병대의 비호로 버젓이 버틸 수 있었다.
서울에 머무르는 동안 가와이는 그런 악질적인 수법으로 귀중한 한국의
고서들을 마음껏 약탈 혹은 수집하여 일본으로 빼돌렸는데, 현재 일본 교토대학
부속도서관이 소장하고 있는 이른바 '가와이문고' 가 바로 그것들이다.
일본에 유출된 서적들
한일합방을 전후하여 일본 학계엔 조선 연구의 열기가 높았다. 동경제국대학의
한반도를 포함한 대륙관계 연구학자들이 조선총독 데라우치를 움직여 오대산
사고의 (이조실록) 1질과 기타 귀중한 사책 전부를 실어 갔던 처사는, 그러한
열기와 대륙으로 눈을 돌리던 일제 야욕의 일단이었다. 당시 침략적인
대륙진출의 연구자료를 집중적으로 수집하고 있던 동경제국대학의 이른바
'백산흑수문고'(우리의 오대산 사고본도 이 속에 들어갔었다)의 '백산흑수' 는
'백두산-흑룡강' 쪽을 목표로 한 침략의 야망을 드러내고 있었다.
그와 같은 일본 학계의 조선 연구열은 구한말 이후 일제세력에 편승하여 이
땅에 건너왔던 안목 있는 일본인 무법자들로 하여금 각처의 귀중한 고서와
문헌들을 닥치는 대로 약탈 혹은 수집케 하였고, 그 대다수는 조만간에 일본으로
반출되었다. 약탈자들 가운데는 통감부와 헌병의 권력을 등에 지고 무법을
자행한 자가 많았다. 헌병을 앞세우고 간화 사고본을 백주에 약탈해 간 가와이는
그런 악질 중의 하나였다.
통감부 시절에 통역관으로 와 있던 마에나도 일제 권력을 배경으로 한국의 옛
책을 무수히 수집·반출해 간 대표적인 인물이었다. 그의 수집이ㅣ 모두 정당한
방법에 의한 것이 아니었으리라는 점은 명백하다. 그는 통감부 재직시에
강화도에서 실어 왔던 '정족산성 사고본' 을 비롯하여 곳곳의 전적 문화재를
매만지는 과정에서 개인적으로 적당히 귀중본을 헐값으로 사들이거나
빼앗음으로써 막대한 분량의 한적 컬렉션을 향유할 수 있었다. 뒤에 '마에마
장서' 로 통하게 된 이 한국 책들은 현재 도쿄의 '동양문고'(일본 국회도서관
산하)에 대부분 들어가 있다. 수집가 자신이 비망록처럼 해제한 (고선책보) 3책이
1934년부터 20여 년에 걸쳐 간행됐는데 그 내용은 놀랄 만큼 넓은 범위에 걸쳐
있다.
구한국 학부의 고문으로 왔던 헤이하라도 상당 분량의 한국 책을 수집해 간
일본인의 한 사람이었다. (조선법제사고)라는 논문으로 법학박사 학위를 땄던
아사미의 방대한 한국 책은 일본의 미쓰이 재벌로 넘어가 '미쓰이문고' 로
보관되다가 2차대전 후 미국의 버클리대학에 팔려 갔다. '탁족문고' 로 알려졌던
가네자와의 한국 책들은 2차대전 중 미군 공습으로 불타버렸다고 한다. 그밖에
일제 때 서울의 (경성일보) 주필로 있었던 도쿠도미의 '성기당문고' 와 오사카
시립도서관의 한국 책. 그리고 (삼국유사)(안정복의 수택본)를 포함하여 숱한
귀중본을 수집한 이마니시의 장서 등이 모두 한일합방을 전후한 시기에 이
땅에서 마구 약탈당했거나 휴지처럼 헐값으로 팔려 간 것들이다.
총독부 초기부터 고적조사위원을 역임했고, 뒤에 경성제국대학 교수를 지낸
조선사 전문학자인 이마니시는 훗날 (삼국유사)를 입수할 때의 경위를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대정 5년(1916년)에 경성의 한 책장수(조선인이었던 듯)가 (삼국유사) 1부를
제공하기에 꿈 같은 심정으로 좋아 어쩔 줄 모르면서 그것을 구입했다. 책은
실로 안순암의 수택본으로서 곳곳에 그의 자필지어가 있고, 더구나 귀중하기
이를 데 없는 그 완본인 '신전본'·'덕천본'에 탈루돼 있는 일곱 장을
완비한데다가 그 일곱 장에는 대단히 중요한 기사가 있는 것이다."
여기서 '신전본'·'덕천본' 하는 것은 임진왜란 때 약탈해 간 한적의 일본
안에서의 전래문고를 말한다. 이마니시는 또 미국으로 팔려 갔다는 '미쓰이문고'
의 수집가인 아사미가 한국 최고의 승전인 (해동고승전)(고려 고종 때인
1215년에 간행)의 유일한 낙질 2권을 입수해 간 것도 서울에서였다고 그의
(고려사연구)에 적고 있다.
모두 지난날의 부끄러운 기록들인데, 1913년 2월의 (매일신보) 사설이 당시의
딱한 정황을 다음과 같이 단적으로 알려주고 있다.
"몰지각한 부류들은 선조 및 고철의 영묵잔편을 진개처럼 여기고, 혹 몇 푼의
동전에 매각불석하니 인문의 쇠퇴가 어찌 이리 심하뇨. 가련하도다." (사설
제목은 (고서적의 필보호) )
팔만대장경 도난사건
"해인사에 보존되고 있는 세계적인 문화재 "팔만대장경판" 중 10여 장이
분실되어 있었다."
1969년 10월에 서울과 지방의 신문들이 일제히 보도한 중대한 뉴스였다.
문화재관리국에서 조사를 위촉받았던 서수생 교수와 조명기 박사가 합천
해인사의 '팔만대장경판' 을 54년 만에 처음으로 낱낱이 조사하는 과정에서
밝혀낸 것이었는데, 그 내막이 신문에 크게 보도되자 관리당국과 학계는 미처
알지도 못했던 사실에 모두 충격과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문화재관리국에
보고된 분실 경판은 18장이었다.
그러나 이 분실 숫자는 여전히 불확실했다. 또한 그것들이 언제 어떻게 도둑을
맞었는지 정확한 내막은 이미 알 길이 없었다. 그런데 다행히 과거의 총독부
기록 하나가 뒤에 색출되었다. 1937년 12월 20일, 당시 해인사 주지 장제월이
미나미 총독에게 (국보 및 사찰재산 도난 보고의 건)이라 하여 다음과 같은
내용의 서면 보고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
"본년 8월 28일, 당사가 안장하고 있는 고려대장경판목 전부를 만주국 정부의
의뢰로 탑탁(인출)함에 있어 허가를 상신했던바, 본년 9월 11일부로
본부(총독부)의 인가가 내렸기로 경성제국대학 법문학부 교수 다카하시 박사와
지휘 밑에 인경공사를 실시할 제, 당사 소유 국보 고려대장경 판목 및 당사
소유재산 귀중품이 도난되었음을 발견하였음. 도난당한 날짜는 미상임."
그리고 뒤에 도난당한 경판명을 적고 있는데, '대반야바라밀다경' 1장,
'대장엄경론' 1장, '대장경목록' 1장, '석교분기원통초' 1장으로 돼 있다.
앞의 도난보고를 받은 총독부에서는 다음해인 1938년 2월 25일부로 경남
도지사에게 "해인사 대장경판(당시 보물 제111호)과 기타 귀중품 도난의 전말을
상세하게, 그리고 시급히 조사하여 보고하라" 는 지시를 내리고 있다. 그 뒷조사
보고는 기록이 없어 상세하지 않으나 그때 도난당한 경판 4장이 되돌아오지
않았던 것만은 확실하다. 최근에 획인된 '18장' 의 분실 경판은 그 4장을 포함한
숫자로 생각되는데 나머지는 그 뒤에, 아니면 같은 무렵에 모두 도난당했던
것인지도 모른다.
1937년의 '팔만대장경' 인경 때엔 두 벌을 떠서 한 벌은 평북 영변의 보현사에
보낸 것으로 알려져 있으나 그때의 대대적인 작업장(경판고) 경비책임자는
해인사 지구 경찰관 파출소였다. 이 파출소의 주임은 전부터 악질 순사부장으로
유명한 일본인이었다. 과거의 총독부 고적조사 서류철에 입각하여 현지에서
청취된 증언은 1937년의 경판 및 귀중품 도둑이 바로 그 자였다는 것이다.
대장경의 인경 현장을 보호·경비한다고 칼자루를 휘두르며 얼씬대던
순사부장이란 자가 그 경판들이 보통 보물이 아닌 것을 알자 범행을 저지른
것이다.
8천 장도 넘는 산더미 같은 경판들 속에서 4장쯤 슬쩍 빼 가진들 누가 알랴
싶었는지도 모른다. 뒷날 누군가가 그 자의 집에서 목격한 바로는, 훔쳐 온
4장의 대장경판을 일본식 4각화로(소위 이로리)의 외곽으로 붙여놓고 있었다고
한다. 그러다 그것이 또 어떻게 되었는지 알 도리도 없다(또 다른 증언을 빌리면
그때의 범행자가 가야면의 다른 순사부장이었다고는 한다).
돌어켜보면 1915년에 총독부에서 오다 등 7명이 해인사에 파견되어
'팔만대장경판' 에 대한 첫 조사를 했을 때 결판이 18장이었고, 뒤에 그것을
보각하여 채운 것으로 돼 있으나, 그것들도 그전에 일본인 무법자들이 훔쳐
갔었는지도 모른다.
불상, 탑, 동종 할 것 없이 사찰문화재가 일본인 악당들에게 닥치는 대로
약탈되던 한일합방 전후의 무법시대에 해인사의 대장경을 노린 자도
있었으리라는 것은 충분히 상상할 수 있다. 이곳의 '팔만대장경판' 을 최고의
보물로 일본인 사회에 알린 조사보고가 1910년에 이미 간행되고 있어 그럴
가능성은 더욱 짙다. 무라야마라는 일본인이 경위를 알 수 없는 (해인사대장경
조사보고)를 발표하였던 것이다.
낙랑고분의 대난굴시대
1970년대 초에 중국 대륙의 호남성 장사시 교외의 한 고분에서 약 2,100년
전의 한나라 문물이 쏟아져 나와 세계적인 뉴스가 되었다. 이 발견은 1968년에
하북성의 만성에서 발굴된 유승묘(B.C. 2세기말의 서한시대)의 경이로운
금루옥의 등에 이어서 한문화의 전모를 재확인시킨 최대의 사건이었다. 그러나
반세기 전까지만 해도 한문화의 가장 중요한 내용의 출토유물은 1909년 이후
북한의 평양 근교 대동군 댜동강면을 중심을 발굴된 낙랑고분에서 나온
것들어었다.
낙랑은 전한의 무제가 B.C. 108년에 위씨조선을 멸망시키고 설치한 4군의
하나였던관계로 그 옛터의 고분 출토유물은 한문화 것이 중심이었다. 그것들을
일본인 전문가들이 한반도 침략과 더불어 처음으로 조사·발굴하게 되었을
때에도 그 눈부신 유물 내용은 세계적인 뉴스가 됐다. 그러자 예외없이 그곳에
나타난 것이 일확천금을 노린 일본인 무법자들이었다.
1909년 10월, 일제의 강청에 따른 한국정부의 위촉으로 두 번째 고적조사를
착수하게 되었던 일본인 전문가 세키노는 다니, 구리야마라는 두 조수를
대동하고 평양에 이르렀다. 그때 그들은 (평양일보)의 일본인 사장이었던
사라카와로부터 대동강 남안인 대동강면에 시대를 알 수 없는 고분들이 숱하게
군집해 있다는 말을 처음으로 들었다. 세키노 일행은 일정을 변경하고 즉시
그쪽으로 발길을 돌렸다. 과연 아주 오래된 고분들이 널려 있었다. 그들은
그중의 2기를 골라잡고 내부를 알아보려고 당장 시굴에 들어갔다.
막연한 기대를 갖고 고분의 시굴을 지휘하던 세키노는 전(벽돌)으로 현실을
꾸민 속에 한나라 문화의 거울을 비롯해서 무기며 토기 등이 부장돼 있는
사실을 확인하고 깜짝 놀랐다. 그러나 그는 곧 그 이유를 깨달았다.
약 2천 년 전에 아주 놀라운 문화를 누리고 있던 한민족이 이주해 살았던
낙랑시대의 고분 유적지, 그리고 완전히 잊혀졌던 한분화의 지하보고, 그것은
굉장한 발견이었다. 뒤에 가서 밝혀지지만 평양 근교와 황해도 쪽에 걸치는
낙랑고분은 수천 기에 이르고 있었다.
세키노의 조사팀은 다음해 가을에도 2기의 낙랑고분을 발굴하여 많은 유물을
출토시켰고, 1911년 10월에는 세 번째의 조사발굴이 사리원 근처에서
실시되었다. 대방태수 장무이의 무덤과 당토성으로 불리던 곳에서 대방군의
치지로 생각되는 토성이 이때에 발견되었다. 그들은 또 1913년 9월에 가서
진남포 부근과 봉산군의 유적 및 고분을 조사.발굴하여 한대의
와당·복식품·동기·도기·칠기·옥석기·무기 등 풍부한 부장품을 획들했다.
그들은 마치 당연한 것처럼 그 출토품들을 모조리 일본으로 실어 갔다.
1912년 4월, 동경제국대학 공학부에서는 건축학과가 마련한 한 전시회가
주목을 끌었다. 제3실의 (조선지부)에 처음으로 진열·공개된 낙랑고분
출토유물이 주목의 초점이었다. 다음은 당시 일본의 고고학 잡지가 소개하고
있는 그때의 전시유물이 내용과 명확한 반출경위이다.
"세키노 조교수와 다니, 구리야마 일행이 조선에서 3회에 걸쳐 가져온 것으로
너무도 풍부하여 일일이 매거하기가 어려우나 중요한 것만 지적하면 낙랑시대의
고분지역인 대동강면 상오리 석암동 발견의 한경, 오주전, 증(시루), 당토성
발견의 전, 봉산군 미산면 오상동 발견의 '사군대방태수장무이' 란 명이 있는
묘전. 안학궁지 발견의 고와, 강동 한왕묘 발견 유물 등이다."
1912년의 동경제국대학의 공대의 조선 고대유물 전시장에는 낙랑고분과
유적지에서 출토해 반출해 간 유물들 외에도 경북 고령의 대가야 왕궁지와
고분에서 학술조사를 빙자하여 세키노 등이 파 간 기왓장과 토기들, 진주에서
발굴한 고분 부장유물, 경주 부근의 서악동에서 발견했다는 돌베개, 작은 신라
불상 6점, 신라 고와전 500장, 강화에서 도굴된 고려시대의 상감청자, 고려
중엽의 유명한 문신이었던 이공수의 무덤을 도굴해서 꺼낸 석관, 묘지, 동경,
나전공예품 등이 진열돼 있었다.
이 유물들은 지금도 동경대학 공대에서 간직하고 있을 것으로 믿어진다.
그리고 우리는 지금 1916년에 조선총독부가 발간한 (조선고적도보) 권1에서
그때의 불법적인 반출유물인 동경, 무기, 팔지, 반지, 오주전, 옹기, 주발,
전(대동강면 석암동의 낙랑고분 출토품) 등 일부를 사진 도판으로 확인할
뿐이다. 이 도판 유물들은 (조선고적도보)에 사진으로 소개될 때 벌써
동경제국대학 공대 소장품이라고 기정사실화시키고 있다.
세키노는 1909년의 고적조사(낙랑고분 기타)가 한국정부의 위촉에 의한
것이었다고 마치 순수한 요청이라도 받았던 것처럼 뒷날의 조사보고서에서
말하고 있으나 그것은 표면적인 형식에 불과했다. 그때는 이미 일제세력이
한국정부를 완전히 장악하고 있었다. 따라서 그에게 고적조사를 위촉하여
필요하면 마음대로 고분도 파고 유물도 일본으로 실어갈 수 있게 자유를 부여한
것은 소위 통감부의 정략의 하나였다. 그에게 절차상 합법적인 유적 파괴와 유물
약탈 및 불법반출을 허가한 한국정부의 명목상의 부서는 탁지부였다. 그러나
당시 탁지부의 사실상의 실권자는 아라이라는 일본인 차관이었다. 그리고 당시
동경제국대학 조교수였던 세키노에게 한국 전역의 사적을 조사케 하자는
입체적인 침략 계획의 하나를 기안한 자가 바로 그 아라이 차관이었다. 다음해에
한일합방이 이루어진 후로는 물론 저들 마음대로였다.
세키노가 인솔하는 정식 발굴대가 평양 근교의 대동강 남쪽(대동강면)에서
낙랑고분 10기를 발굴하여 예기치 못했던 굉장한 유물들과 이루 수습할 수 없을
정도의 막대한 부장품들을 출토시킨 것은 1916년 10월의 일이었다. 이때 발굴된
10기의 고분에는 제1호에서 제10호까지 번호가 붙여졌는데 현재 국보 제89호의
'금제교구'(국립중아박물관 소장)는 그때 제9호 고분에서 출토되었다. 섬세한
순금 세공에 비취를 박은 이 교구는 한대 문화의 극치를 보여주는 세계적인
발견이었다.
그러나 그러한 센세이셔널한 발견은 동시에 "낙랑고분에 순금 보화가
무더기로 묻혀 있다" 는 소문을 낳게 했고, 이어서 무법자들의 도굴행위가
걷잡을 수 없이 성해하도록 만들었다. 일본인들은 대동강면 일대의 낙랑고분을
"지하의 정창원(일본의 유명한 고대 동양미술품 보고)" 이라고 부르며 너도 나도
그 속의 '임자 없는' 보물을 꺼내 가지려고 덤볐다. 한 일본인이 뒷날 당시
상황을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1916년에 세키노 박사 일행이 대동강면의 낙랑고분을 발굴하여 수백점의
귀중한 부장품을 출토시킨 후로 낙랑유물에 대한 관심이 점차 민간에도 퍼져
1922년쯤에는 개성 부근에서 고려자기를 도굴하던 무리들이 낙랑고분에 눈을
돌려 도굴을 일삼더니 1924∼1925년에 이르러서는 최악의 난굴시대가
전개되었다."
그러나 그것은 위의 얘기다. 세키노가 낙랑고분을 조사하기 시작하던 즈음에
평양을 중심으로 일본인들의 도굴과 약탈은 이미 시작됐었다. 세키노의
조사보고에 그 사실들이 기록돼 있다. 그는 조사 초기에 이미 야마다라는 평양
거주의 일본인이 수집하고 있던 도굴품들을 보았고, 얼마 후에는 그가
낙랑군지라고 추정한 지점에서 " '낙랑태수장', '정감장인' 같은 글자가 새겨진
귀중한 봉니가 발견(도굴)되었다" 는 말을 들었다고 쓰고 있다. 또 그 무렵에
평양의 복심원 검사장이었던 세키구치란 일본인도 '조선우위' 라고 새겨진
봉니를 토성리에서 입수해 갖고 있었음이 확인되고 있다.
일본인 무법자와 악질 수집가들이 직간접으로 도굴하고 혹은 뒤에서 조종했던
낙랑고분의 상상을 넘은 대난굴시대는 1923년께부터 4∼5년에 걸친 시기를
말한다. 한 일본인의 다음과 같은 회고담에서 우리는 그때의 놀라운 내막을 엿볼
수 있다.
"그렇게 대난굴시대가 전개되는 바람에 평양(일본인사회)엔 별안간 낙랑열이
전염병처럼 만연되면서 낙랑의 명성을 천하에 울리게 되었다. 그 무렵 당국의
취체는 오늘(1934년 현재)과 같이 엄중하지는 않았고, 오히려 관계에 있는
일부의 사람들이 고분에서의 출토품(도굴품)을 일반인에 앞서 다투어가며
점유하는, 지금 생각하면 아주 꿈 같은 시대로서, 대정
13∼14년(1924∼1925년)께엔 평양 시민(물론 일본인들을 중심으로 한 말)으로서
낙랑고분의 출토품에 1∼2원을 주고 고경 1장이나 토기 항아리 1개쯤 사 갖고
있지 못하면 바보 취급을 받았다는 거짓말 같은 얘기도 있다."
앞의 증언자는 또 계속해서 당시의 구체적인 싱태를 이렇게 알려주고 있다.
"심한 경우는 관립학교이 선생이 백주에 당당하게 수명의 인부를 데리고 가서
구분의 봉분 한복판을 위로부터 파들어가서 눈부신 부장품들을 끄집어내기도
했다. 이 시기에 가장 많은 일품들이 자연 민간수집가 손에 들었갔다. 그러나
얼마 후부터는 도굴자들이 평양의 수집가에게만 팔다가는 크게 돈벌이가 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게 되자, 어디를 어떤 경로로 연락했는지 경성·교토 방면의
호사가(수집가)들과 줄을 대고는 도굴품 중 일품은 그쪽으로 몰래 빼돌려 평양의
수집가에게서보다 두세 배의 보수를 받았다."(팔전창명, (낙랑과 전설의 평양),
1934년)
일본인 중간상인과 교사자에게 매우 혹은 유혹되었던 가난하고 무지한 일부
조선사람은 그들의 불법적인 도굴행위가 경찰에 적발이라도 되는 날엔 모든
책임을 혼자 뒤집어쓰고 호되게 곤욕을 당하곤 했다. 반면 배후의 일본인인
붙잡혀 처벌당하는 일은 좀처럼 없었다.
그 실태는 1926년 8월 2일에 열렸던 총독부 고적도사위원회 회의록에 이런
발언이 나올 정도였다.
"도굴하도록 유인하고, 그 짓을 사주하는 자를 엄벌해야 한다. 그리고 그
다음에 직접 발굴한 소민을 처벌해야 한다. 발굴한 소민만 벌함으로써 그
범죄주인 자가 오히려 벌을 면하는 것 같은 사례가 만일 사실이라면 참으로
괴이한 일이며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러나 지방과 중앙(서울)의 권력층 수집가들과 항상 접선하고 있던 악질적인
배후의 일본인 범죄주들은 언제나 안전한 위치에 있었다. 그리고 그들의
조직적이고 직접적인 도굴행위와 자금 조달은 1천 수백 기의 낙랑고분에서
부장품이 바닥이 날 때까지 계속되었으니 이는 세계적으로도 유례가 드문
대규모의 유물 약탈이었다.
뒷날의 한 조사보고는 "약 1,400기의 낙랑고분 가운데 도굴을 면한 것은 약
140기뿐이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 처참한 대난굴시대에 얼마나 많은 귀중한
유물과 국보급 문화재들이 출토돼 일본인들의 수중에 들어갔을까. 상상조차 할
수 없는 불쾌한 수수께끼이다. 다만 다편적으로 당시의 몇몇 중요한 도굴품이
기록과 사진으로 알려져 있는데, 그 하나는 세키노가 1923년에 소개하고 있는
전한시대의 유물인 '영광 3년명'(B.C 41년)의 동종(동체의 지름은 약 40cm)이다.
당시의 소장자는 평양중학교 교장으로 있던 도리카이였다.
1922년 10월 중순에 평양 근교의 대동강 건너편인 선교리(낙랑고분 지역) 철도
공사장에서 중국인 인부가 출토시킨 것을 공사 감독이었던 하시모토라는
일본인이 가로채 가졌다가 자기 아들이 다니고 있던 평양중학교 교장인
도리카이에게 가져왔다는 경위였다. 그러나 세키노는 그 얘기를 액면대로 믿지는
않았다.
"그 동종의 발견자인 중국인 인부가 뒤에 또 동종과 함께 출토되었다는 깨진
거울을 도리카이 교장에게 갖고 왔다고 하여 역시 중학교에 진열하고 있었으나
과연 어느 곳에서 동시에 발견된 것들인지 알 수 없다."(전한 영광의 3년의 동종,
1923년)
B.C. 41년에 주조된 전한시대의 진귀한 보물이었던 '영광 3년명 동종'의 입수
소장자 도리카이는 당시 일본인 자제들만 다니던 평양중학교의 일본인
교장이었다. 이 중학교에는 교장 외에도 낙랑고분의 출토품들을 탐욕스럽게
취득하여 도굴을 조장시킨 악질적인 일본인 교사가 있었는데 기타무라라는
자였다. 그는 한때 평양의 일본인 사회에서 가장 유명한 도굴품 장물아비의 한
사람이었다. 그러나 그는 낙랑고분의 부장품이 바닥이 난 1930년대에 이르자
그동안 계획절으로 수집 혹은 직접 도굴했던 천금의 장물 컬렉션 보따리를 안고
유유히 평양을 떠나갔다.
일본인 가운데 교육자라는 자가 이 판이었다. 그가 바로 야다(팔전창명)가
(낙랑과 전설의 평양)에서 증언하고 있는 구체적인 도굴 일화의 하나인 "백주에
당당하게 인부를 데리고 가서 고분 속의 눈부신 부장품들을 약탈하곤 했던
관립학교 선생", 그 자였는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당시의 못된 일본인 교사는
비단 기타무라만이 아니었다.
야다는 또 그의 회고기에서 낙랑고분 대난굴시대의 평양의 일본인
수집가(사실은 장물아비들)였던 도미다, 모로카, 하시도, 나카무라, 오무라, 오노,
나카니시, 오카모도, 야마다, 세키구치 등의 대표적인 명단을 소개하고 있는데,
그밖에 1934년 현재 수집품을 몽땅 감추어 갖고 깨꿋이 평양을 떠나버린 자로서
앞의 평양중학교 교사 기타무라와 평양여학교 교장이었던 시라카미의 이름을
들고 있다.
그뿐이 아니었다. 야다는 도 평양고등학교의 교장 얘기도 하고 있다. 이
학교는 조선인 자제를 수용하는 중학교였으나 교장은 역시 일본인이었다. 그런데
이 일본인 교장도 낙랑고분의 한대 유물들이 마구 도굴되어 나올 무렵에 이른바
수집가들 사이에서 자그마치 1만 원이라는 거액을 호가한 '거섭 원년명 화문경'
을 단돈 1원에 입수했다.
그밖에도 그는 B.C. 3세기에 한나라에게 멸망당한 진나라 때의 무기인
과(창)와 한대의 '녹유박산향로', '녹유항아리' 등 고고학적으로 너무나 귀중한
도굴품들을 입수하고 있었다.
'거섭 원년'은 서기 5년에 해당된다. 1925년 가을에 후지다 등이 총독부의
발굴·조사 계획에 따라 평양 근교에서 2∼3기의 낙랑고분을 학술적으로
조사·발굴할 때에 연호명이 있는 칠기가 발견되어 획기적인 사건으로
관계전문가들을 흥분시켰는데, 그중의 하나는 '거섭 3년명'(서기 8년)의 것이었다.
그리고 같은 고분에서 화문경 하나도 발견되었다고 보고되었으나 명문은 없었다.
따라서 평양고등보통학교의 일본인 교장이 입수해 갖고 있던 도굴품 '거섭
원년명'의 화문경은 그만큼 최고의 고고학적 가치를 갖는 유일한 유물이었다.
그 존재가 알려지자 수집가 사이에서 1만 원을 호가했다는 사실은 결코
부당한 평가가 아니었다. 그런 엄청난 보물을 우매하고 가난했던 발견자(현지
주민이 우연히 출토했는지도 모른다. 당시 그런 일이 흔히 있었다)는 그런 것을
가져오도록 유인했을 일본인 고등보통학교 교장에게 갖고 가서 단돈 1원을 받고
팔았던 것이다.
모든 도굴품은 필연적으로 일본인들에게 점거되던 시대였다. 세키노도 이렇게
쓰고 있다.
"작년(1925년) 이후 도굴이 성한 결과, 다수의 무기·동기·도기류가 발견되어
대부분은 평양에 거주하는 일본인 호사가의 손에 들어갔다."
세키노는 그중 중요한 것의 하나로 평양의 아무개가 소유하고 있던 서기
9년명의 칠기 파편을 예로 들면서, "이것은 지금까지 발견된 재명칠기의 최신의
것" 이라고 소개하고 있다. 그는 또 이렇게 당시의 불법적인 도굴품 범람과
뒷거래의 실정을 알려주고 있다.
"토민들의 도굴품으르 일본인 호사가들이 다투어 매수하는 바람에 갈수록
도굴은 장려되는 결과를 빚고 있다. 지난해 10월에 평양에 갔을 때 그런
출토유물(도굴품)을 보았는데, 그 수량이 굉장할 뿐 아니라 그중에 진기한 것이
적지 않음에 놀랐다."( (낙랑시대의 고분), 1926년)
광개토왕릉비와 일본 스파이
1879년, 그때 이미 대륙 침략이 치밀한 작전 음모에 착수하고 있던 일본
군국주의의 참모본부로부터 특수 임무를 부여받은 12명의 청년장교와 하사관이
있었다. 그들은 한반도를 거쳐 중국 각지에 비밀리에 투입되었다. 그들의 임무는
전략적인 정세 정탐, 곧 10여 년 후에 벌어질 청일정쟁을 염두에 둔
첩보행위였다. 다시 말해서 그들은 스파이였다. 그들은 "군작전상 필요할 모든
지역의 지리·정지를 완벽히 파악해두라" 는 야마가다 육군사령관의
지시·명령을 받고 있었다.
표현상으로는 '어학 연습생으로서의 청국 여행' 이라는 행색을 가장했던
전략적으로 훈련받은 이때의 일본 스파이 장교들 가운데 한·청 국경지역에서
암약하던 사고 가게노부라는 포병 중위가 있었다. 그는 압록강 중류의 만포진
대안에 위치하는 고구려 초기의 도읍지인 통구지방(만주 집안현)의 국내성
유적지에서 거대한 자연석을 세워 만든 높이 약6.3m의 비석 하나를 주목하고
즉시 4면의 비문을 쌍구법으로 떠냈다. 그러나 이때의 스파이 장교의 쌍구란
것은 -최근에 와서야 그 가공할 내막이 과학적 연구로 폭로돼 가고
있지만-비정상적인 방법에 의한 것이었고, 특히 비문 일부를 일제의 침략주의에
유리하게 해석되도록 조작한 것이었다.
그것은 한국 고대사 연구에 다시 없이 중요한 '고구려 광개토왕릉비' 가 일제
군국주의에 의해 악랄하게 유린되던 순간이었다. 왕이 죽은 지 1년 후인 서기
414년에 세워진 이 거대한 돌비석은 고구려의 국토를 크게 확장시킨 광개토왕의
영웅상과 업적을 기념한 것으로 그 비문은 한국의 가장 오래된 금석문이기도
하다. 그리고 그 비문 중에는 신라·가야·백제를 도와 왜군을 무찌른 사실도
있는데, 1884년에 일제 군국주의의 첩자였던 사고 중위가 본국의 참모본부로
가져갔다는 최초의 비문에는 어처구니없게도 "서기 391년에 왜군이 바다를
건너와 백제,신라를 쳐서 신민으로 만들었다"로 해석이 가능하게 돼 있었다.
놀라운 음모였다.
일제 참모본부는 사고 중위가 조작해 온 비문을 놓고 한학자들을 동원하여
그들의 옛 문헌인 (일본서기)와 (고사기)에 나오는 "진구고고의 신라 침공 및
야마토 정권의 출병에 따른 가야지역의 '임나일본부'(식민지) 설치" 라는 허상의
전설기록을 확실한 사실로 확정시키는 2단계의 음모에 착수했다.
드디어 청일전쟁이 시작된 1894년에 이르러 일제 참모본부는 재차
'광개토왕릉비' 의 탁본을 정확히 떠 오게 하여 사고 중위가 가져온 비문과 비교
검토한 후, 이미 조작해놓은 부분을 영구히 사실 원문으로 만들어버기리 위해
현지에 기술자를 보내 비면 전체에 석회를 이겨 바르고는 조작한 문구의 글자를
새겨넣어 감쪽같이 위조했다. 그러나 이 석회물질이 세월이 지나고 풍우에
씻기는 동안 부분적으로 부스러지고 혹은 떨어져 나가면서 본시의 비면각자가
아님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그 과정은 1910년대 이후 수차에 걸친 탁본에서
자연스럽게 나타나 1930년대에 이름녀 조각의 핵심부인 '내도해'(왜군이 바다를
건너왔다)의 3자는 완전히 증발해 버리고 없다. 결국 그 3자는 원비문엔 없었던
조각된 석회각자였기 때문이라고 한다(일본에서 발표된 교포 사학자
이진희의연구 결론).
앞서와 같은 일제침략 초기의 놀라운 '광개토왕릉비' 일부 비문 조작은 이제
국내와 일본 사학계에서 거의 반론의 여지가 없는 사실로 분석되고 있다. 그러나
과거에도 이미 비문의 일부 조작 사실을 비친 일본인 조사자가 있었다.
1914년에 세키노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자세히 조사해 보건대, 문자의 간지는 석회로 메워져 있을 뿐 아니라 왕왕
자획을 보태고, 또는 완전히 새로운 석회면에 문자를 새긴 것도 있다. 이같은
보족은 대체로 원자와 잘못이 없는 것 같으나 그렇더라도 절대적으로 믿긴
어렵다. 다소의 오독도 있는 것 같다."
일제의 한반도 침략음모가 오래 전부터 그토록 치밀했다.
가야고분의 처참한 도굴현장
1910년을 전후해서 약 10년간 개성과 강화동 일원에서 일본인 무법자들에
의해 감행되었던 고려고분의 남김 없는 파괴와, 수만 점 혹은 그 이상의
고려자기 부장품 약탈에 이어서 1925년을 전후한 약 5년 동안 대동강 하류의
악랑고분 지역에서 전성기를 이루었던 대대적인 도굴은 지난날 한국의
역사유적과 지하의 매장문화재들이 얼마나 철저하게 유린되고 수탈당했던가의
전형이었다. 그러나 그들의 대규모의 조직적인 고분 도굴과 유물 약탈은 거기서
그친 것이 아니었다.
낙동강 하류와 경주지역에 무수히 널려 있는 가야 및 신라고분군도 앞의 두
지역에 맞먹는 무진장한 부장품의 보고였다. 아니, 초기의 소규모적인 도굴과
유물 약탈은 이쪽에서 먼저 착수되고 있었다. 일본 무법자들의 상륙 루트가
부산, 대구, 서울, 개성, 평양이었고, 따라서 그들의 일확천금의 야욕은 그들이
가장 먼저 접촉할 수 있었던 신라와 가야의 유적지에서부터 채워지기 시작했다.
계획적인 고분 도굴 및 모든 종류의 지상문화재 약탈을 뒤에서 조정했던
일본인 골동상이 맨 먼저 거점을 확보한 것도 부산에서였다. 그리고 나서 차차
대구.서울로 제2.제3의 일본인 골동상들이 속속 북상했다. 물론 그들과 함께
해적이나 다름없는 무법자였던 호리꾼들도 북으로 북으로 보물 약탈지역을
확대시켰다.
고령·창령·선산·함안·진주 일대에 널려 있는 5∼6세기 가야고분의
부장품들이 바다를 건너온 일본인 무법자들에게 유린되던 초기의 몇몇
사실기록이 일본인 조사 확인자들에 의해 증언되고 있다. 1911년 3월에 발행된
일본의 고고학 잡지에서 세키노가 발표한 조사보고 (가야시대의 유적)에 이런
증언기록이 나온다.
"작년(1909년인 듯)에 가야유적을 조사학 때, 창년에 이르러 고령에서 본
것보다고 더 큰 고분을 조사할 수 있었는데, 그러나 이미 발굴되어 석곽 일부를
노출시키고 있었다."
"진주 동북쪽의 옥봉에도 이미 발굴된 고분이 있었다. 이 고분에서 도굴된
숱한 도기(가야토기)와 칠기가 진주경찰서에 보관돼 있었다(도굴자로부터
압수했던 듯). 이것들은 공과대학(동경제국대학 공대)에 기증하기로 되어 근일
중에 도착할 것이다."
그자가 그자였다. 일본인 무법자가 도굴했을 유물을 일본인 경찰서에서
불법행위로 압수해 갖고 있다가 학술조사를 나왔다는 세키노를 통해 저들
맘대로 일본의 동경제국대학에 기증했다는 것이다. 일본인들 마음대로 움직이는
세상이었다. 낙동강 하류에 산재하는 수천 기의 고분들이 개성 일원의 고분과
대동강 하류의 고분처럼 일본인 호리꾼과 배후의 조종자들에 의해 집중적으로
도굴되기 시작한 것은 한일합방 직후인 1914년께부터였다. 1917년에 총독부
고적조사위원이었던 이마니시(뒤에 경성제국대학 교수)는 다음과 같이 그 참상을
보고하고 있다.
"선산군:본군에 유존하는 약 1천 기 혹은 그 이상의 고분은, 2∼3년 전부터 이
지방에 고분 속의 유존고물을 완롱하는 폐풍이 일어 사리의 도당들이 매수하는
바람에 무뢰한의 끊임없는 도굴장이 되었다. …군집하는 고분이 도굴로 인해
파잔. 황폐하는 참상은 차마 볼 수가 없을 정도이고, 실로 잔인혹심의 극이다.
이는 현대인의 죄악이며, 땅에 떨어진 도의를 보려거든 이 고분 군집기를 가
보라."
그 광경이 얼마나 처참하고 분노를 금치 못하게 했었으면 이마니시의
조사보고를 이처럼 흥분하게 했을까. 그러나 그도 그런 천인공노할 대규모의
고분 도굴이 주범이 일본인이란 말은 차마 못 쓰고 간접적으로만 시사하고 있을
뿐이다.
경북 선산지역에서 가야고분의 처참한 도굴현장을 목격하고 충격을 받았던
이마니시의 조사보고엔 또 이런 증언이 포함돼 있다.
"제6구:2∼3년 전에 고적조사원(총독부 소속)이 발굴·조사했는데, 전문한
바로는 완전한 광(묘혈)이 유존하여 금환 등이 유물이 있었다고 하나, 그 상세한
사실을 알 수 없음은 유감이다. 또 1기의 외에는 모조리 도굴되었는데 그 중엔
아직 생토가 채 마르지 않은 것도 있었다.
총독부에서 내려갔던 고적조사원이란 자까지도 순금 팔지 같은 값진 출토품은
슬쩍 제것으로 만들어버렸던 사례가 암시적으로 고발돼 있다. 이마니시는
계속해서, 선산군 옥성면의 고분지역에서는 그럴 생각만 있으면 얼마든지 손쉽게
값진 유물들을 꺼내 가질 수 있게 무덤 속이 드러난 것조차 있는데도 주민들의
전통적인 도덕관념이 그런 것에 조금도 손을 대고 있지 않은 것은 사실에
감동하며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이곳의 고분들 중에는 묘광을 그대로 노출시킨 것도 있다. 고분의 봉토가
유실되어 그렇게 광을 노출시키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민중이 거기에 접근하지
않고, 또 침해하지도 않는 순박함이여. 사자에 대한 예를 결하고 있는 현대의
도굴·파괴, 고인의 분묘에 능욕을 가하고 있는 현대인(일본인)에 비하면 송연한
바가 있다. 구조선의 도덕을 보려거든 이 옥성면의 제분을 가 보면 족하리라."
이 조사보고는 '분노를 금할 수 없는 고분 도굴범은 조선인 중엔 없으며,
모두가 도의를 상실한 일본인 무뢰한들' 이라는 사실을 명백히 시사하고 있다.
이마니시는 또 서울의 한 골동가게(주인은 물론 일본인이었을듯)에서 정확한
출토지는 알 수 없었으나 선산지방에서의 도굴품임이 분명한 가야문화의 귀중한
유물들이 일본인들에게 팔려 나가는 광경을 직접 목격한 일도 있었다. 그때
메모했던 유물 목록까지도 그는 조사보고에 밝히고 있는데, 1)순금귀고리(경주
보문리의 부부총 부장품과 동일형식) 2)순금팔지(여러 개가 나왔을 듯) 3)곡옥
4)관옥 5)유리옥 6)기타 옥류 7)검두 8)무기·철창·직도 9)마형대구 등이
그것이다. 이중 2) 3) 4)는 그후 교토대학으로 들어갔다.
이마니시는 다시, 함안과 창녕에서도 그때 대다수의 가야고분이 도굴되고
있었음을 알려주고 있다.
"함안군: 본군 고분들도 이미 상당수가 도굴당했으나 최근 수년 동안은 뜸했던
것 같다."
"창녕군: 이 지방의 대부분의 고분도 파괴·도굴되어 그 패해가 너무나
심하다. 목마산 동남쪽 언덕 위의 제1군 8호분은 수년 전에 병사(일본 병사)가
발굴하여 다수의 와기(토기)를 획득했다는 설이 있다. 창녕읍의 북쪽
제5군에서도 대규모의 도굴이 시도되다가 중지한 흔적이 있었다."
이 같은 무법의 고분 도굴사태가 조사·보고되자 총독부는 아직 성한 고분이
많이 있는 창녕 교동 일대에서 약 100기를 서둘러 발굴했다. 이때의 부장품 출토
상황에 대해 다니는 마차 20대, 화차 2간 분량이었다고 기록하고 있다(1917년도
총독부 (고적조사보고) ). 그러니 일본인 무법자들이 선산과 기타 지역에서 수천
기를 도굴한 가야고분의 부장품 유물의 분량이 어느 정도였을까가 능히
상상된다. 그 도굴품들은 그 즉시로 대구.부산.서울 그리고 본토의 일본인 수집가
수중으로 사라져 갔다. 순금귀고리의 경우만을 말한 다음과 같은 후지다의
증언적인 지록은 그 전모의 일각을 알려주는 데 불과하다.
"조선에서 발견된 귀고리(순금)는 실로 상당수로, 학술적 발굴조사를 거친
것만도 70쌍에 이르지만 사인의 비장품이 되어 조선과 도쿄·교토에 있는 것도
대단히 맣다. 도쿄의 네즈, 교토의 기요마치와 모리야가 가진 것만도 수십
쌍이다. 그것들의 대부분은 신라와 가야지역인
경주·달성·선산·안동·합천·고령·거창 등지에서의 출토품으로 전해지고
있다."
신라고분의 황금유물에 미친 무법자들
경주 일원의 신라고분들도 낙동강 하류 일대의 가야고분과 마찬가지로 최악의
수난을 겪었다. 순금의 왕관·팔지·귀고리를 비롯한 1천 수백 년 전의 고귀한
미술품과 값진 유물이 무진장 부장 돼 있던 신라고분들은 가야고분과 함께
일본에서 맨손으로 건너온 무법의 보물 약탈자들에게 입이 벌어지는 일확천금의
광대한 지하보고였다.
일제 초기의 한 조사기록은 경주 부근에서만도 수만 기의 삼국시대
신라고분들이 있었다고 조사돼 있다. 1915년네는 총독부 위촉으로 최초의 학술적
조사발굴이 경주 남산 밖의 황남리고분에서 이루어져 철검·철창, 기타 토기들을
출토시켰다. 같은 때 보문리에서도 또 하나의 고분이 발굴되었는데 여기서는
순금으로 된 팔찌·귀고리·반지가 발견되었다. 뒤에 이 고분은 '부부총' 으로
명명되었다. 이어서 1918년에는 경주 동쪽의 명활산 기슭에 있는 고분이
조사·발굴되었는데 여기서도 순금 귀고리, 금·은 팔지와 반지, 기타 옥류의
장신구가 출토되었다. 이와 같은 신라고분의 놀라운 부장품 내막은 소위 학술적
발굴이라는 이름의 합법적 고분 파괴자들에 의해 갈수록 세인의 관심을
집중시켰다. 동시에 그 내막은 경주지역에서 일확천금의 유물 약탈을 노리던
도굴꾼들에겐 더욱 풍부한 지식과 정보를 제공하는 결과를 빚었다.
무법자들을 신라고분의 황금유물에 미치게 한 결정적인 사건은 1921년에 경주
남문 밖의 파괴된 커다란 고분 속에서 황금보관을 위시해서 역시 순금으로 된
귀고리·팔지·반지·과대·요패·은합 등이 쏟아져 나왔을 때였다. 뒤에
금관총으로 명명된 이 고분의 출토유물들은 신라미술의 극치를 집중적으로
입증시키기에 족했다. 이때의 출토품인 금관은 현재 국보 제87호로, 그리고
과대와 요패는 국보 제88호로 지정돼 있다.
3년 후인 1924년에도 황금보관과 귀고리·요패·도제기마인물상, 기타
주형토기 등이 부장돼 있던 금령총이 발굴되었다. 이때 출토된 금관은 현재 보물
제388호, 도제 기마인물상은 국보 제91호로 지정돼 있다.
이러한 일련의 찬란한 신라유물 발굴은 도굴꾼들의 사리심을 갈수록
자극시켰다. 1925년 4월 15일자 (경성일보)에는 다음과 같은 기사가 실려 있다.
"경주지방은 신라 천년의 구도로 세인이 알다시피 최근 수년간 고분 발굴로
귀중한 출토품이 있었고, 황금의 보관·패도, 기타 고고학상 심대한 참고자료를
제공하고 있다. 그러나 근자엔 밀굴자가 많아, 어떤 소식통을 빌면 그 상습자가
약 20명에 달하고 있으며, 그 출토품(도굴폼)은 주로 일본인 고매자(고물
매수자)가 착착 구입하여 부당한 이익을 보고 있는데, 최근의 현저한
출토품으로서 '당삼채' 와 같은 항아리를 밀굴하여 수천 원에 밀매한 자가
있으나 그 항아리 속에는 또 5개의 금자(금붙이 유물)가 들어 있어 비상히
귀중한 것이었다고 한다. 그런 것이 일본인 고매자에 의해 대구의 호사가에게
팔려 갔다고 하는데 그러한 부정밀굴에 대해서 당국의 엄중한 취체가 기대되고
있다."
당시 대구에는 그러한 도굴행위를 뒤에서 조종하고 혹은 직접 지원한 돈 많고
악질적인 일본인 수집가가 여럿 있었다. 오구라와 이치다는 그 대표적인
인물이었다. 1923∼1924년의 총독부 (고적조사보고)에 그들의 장물 컬렉션
일부가 소개돼 있는데 먼저 오구라에게서 전문가가 주목한 것은,
1)은제투조패식금구(완전품) 2)물고기를 물고 있는 조형토기 3)안구가 얹힌
마형토기 4)쌍배차륜토기 등으로, 출토지는 '남선(영남지역) 발견' 이라고만
말해지고 있다. 그리고 이치다는 역시 '남선 출토' 라는 금동관의 '조형전립금구'
와 양산에서 출토된 것으로 추정되는 '변형칠유경' 등을 갖고 있었음이 밝혀져
있다.
1905년 가을에 수학여행이란 명목으로 한국에 건너와서 고대 역사유적을
답사하며 유물 실태도 조사했던 동경제국대학의 사학도 하나가 있었다. 당시
대학원에 재학 중이던 이마니시(뒤에 경성제국대학 교수)였다.
그는 경주에 이르러 남산 쪽에서 신라시대의 와당과 토기, 기타
불상(석불이었던 듯)의 파편을 채집했고 사천왕사 근처에서는 보상화문이 나타나
있는 전과 10여 장의 와당을 주워 동경제국대학 문과대학으로 갖고 갔다고
여행기에서 밝히고 있다.
그는 또 다음과 같이 당시의 도굴실태를 기록하고 있다.
"소생은 대형 고분 하나와 중형의 것을 몇 기쯤 조사했는데, 그중 하나는 이미
발굴(도굴)되어 내부가 교란되어 있었고, 다른 하나에서는 83개의 고기(토기)가
발견되었다는 말을 들었다. 경주의 신라고분들은 근년에 와서 한국정부의
정령문치의 결과, 소생이 여행할 ㄷ시는 도굴이 끊임없이 행애져 그 발굴품은
모두 일본인 상인의 손에 들어가고 있었다. 고분 속에서 꺼내진 유물이 부산과
대구에 나와 있어 소생은 비교적 좋은 것을 구할 수 있었다. 발견품(도굴품)은
거의 토기 뿐이지만 이 토기들은 일본의 그것과 비교하면 극히 우수한 작품이다.
소생이 여행할 당시는 고분 도굴이 성하진 않았으나 개성 부근에서의 고려시대
분묘 도굴이 크게 유행하자 그후 경주에서도 맹렬히 발굴되어 소생은
작년(1909년)에 대구에서 그런 발굴품이 고물상의 손에 적취함을 보았는데,
2∼3점의 철기 외엔 토기들이었다."
이 이마니시의 기록은 1905년 당시 이미 신라고분의 도굴이 착수되고 있었고,
출토유물들은 모조리 일본인 상인(골동항) 수중에 들어가고 있었음을 명백히
알려준다. 그리고 1909년에는 부산과 대구의 일본인 골동상이 신라와
가야고분에서 도굴한 토기와 철기들을 산적해놓고 있음을 보았다고 증언하고
있다.
그러다가 총독부의 학술조사와 발굴로 촐토된 황금빛 보관·순금귀고리·팔지
등이 세상에 알려지면서 도굴은 극성기를 맞게 된 것이다. 대구에서 남선전기
사장으로 있으면서 풍부한 재력으로 마음껏 도굴품을 사들이고 또는 뒤로 돈을
주어 계속 도굴해 오도록 지원했던 악명 높은 수집가 오구라가 아주 작고
완전한 순금관을 입수한 것도 그때였다. 국보급인 이 작은 순금관은 현재
일본에서 '중요미술품' 으로 지정되어 도쿄국립박물관에 진열돼 있다. 물론
소장자는 '오구라 컬렉션' 이다.
일본인 무법자들에 의한 경주지방의 유적 파괴와 고분 도굴은 일제 말기까지
끊임없이 계속되었다. 이런 일도 있었다.
1925년 8월의 일이었다. 동경제국대학 농학부의 하라라는 교수가 신라시대의
정원을 조사·연구한다고 경주를 찾아왔었다. 그는 총독부의 사전 승인도 받지
않고 현지의 고적보존회를 움직여 인부를 사서 임해전지(현재 사적 18호)의
유구를 함부로 출토시키고는 큰 발견이라고 떠들었다. 그리고는 파헤친 자리도
그대로 버려둔 채 도쿄로 돌아가버렸다. 물론 그가 빈손으로 갔을 리는 없었다.
그의 불법적인 발굴은 물론 뒷수습조차 하지 않은 그의 처사는 많은 사람의
분노를 사게 했던 듯, 총독부가 뒷조사한 보고서에도 "한심스럽기 짝이 없는
자였다. 엄중한 취체가 있어야겠다"고 기록돼 있을 정도이다.
1934년 4월에는 같은 임해전지에서 또다시 매장문화재를 무더기로 도굴한
경주 거주의 일본인 무뢰한이 있었다. 다음은 그때 경주박물관이 서울
총독부박물관에 보고한 내용이다.
"최근 석빙고 근방에 거주하는 일본인이 임해전지 부근의 토지를 발굴하여
전돌과 기와 등을 채취했음을 탐지하고, 즉시 현지 도굴상태를 조사해 본바,
도굴자는 인왕리 입구에 거주하는 하시모토라는 자로서 목하 경찰에서 취조
중임. 도굴 유물은 화강석 석재 이백 수십 개, 전돌 188개였음."
백제유적 약탈로 악명 높은 가루베
낙동강 하류와 경주 일원에서 가야고분과 신라고분이 끊임없이 도굴되고 있을
때, 부여와 공주지역에서는 또 백제고분이 같은 수난을 겪고 있었다. 말한 것도
없이 배후의 조종 및 교사자는 수집가를 자처한 돈 있는 일본인 악당과
골동상이었다. 1927년에 공주 송산리 고분들을 조사한 총독부(고적조사보고)에
당시의 도굴실태가 언급돼 있다.
"1927년 3월께 마을사람들의 도굴로 제1호분에서 곡옥·유리옥·철검·도끼
둥의 잔결이 출토됐다는데 현재 그것들은 공주 읍내의 모 일본인이 갖고 있다고
한다. 또 제2호분에서도 순금귀고리 한 쌍이 발견되었는데, 이것은 지금
나이치에 있는 아무개의 소장으로 돌아갔다고 한다. 이번에 조사산 고분들은
예전에 혹은 최근에 도굴당하고 있어 발견된 부장품은 극히 적었다."
공주와 부여 일원의 백제유적이 처음으로 조사되기는 1909년에 세키노일행이
표면상 구한국 탁지부 위촉으로 한반도 전역의 고적조사를 실시할 때였다.
그들은 1915년의 두번째 학술조사 때엔 공주산성 부근에서 백제고분을 시굴하여
내부 구조도 파악하고 부장품도 꺼냈다. 우아한 문양의 백제와당이 이때
처음으로 주목되었다. 일본인 골동상과 악질적인 도굴꾼들에겐 모두가 고맙기
짝이 없는조사 정보들이었다. 그들은 또 하나의 지하보고에 눈독을 들이고
암암리에 움직이기 시작했다.
1923년 6월 공주고등보통학교 동북쪽에서 배수로 공사가 착수됐을 때 땅속의
약 1.5m 지점에 약 100여 장이 전돌을 쌓아 우물처럼 만든 속에 토기 항아리
하나가 들어 있는 신비로운 백제 유구가 발견되었다. 그때 재빨리 그 전돌들과
토기 항아리를 가로챈 자가 있었는데 그가 일본인 골동상 구라모토였다.
진작부터 공주에 정착하여 백제유물의 약탈 및 도굴품을 서울과기타 지역으로
전매하던 구라모토는 측면에 장식적인 문양과 문자가 나타나 있는 전돌들을
불법적으로 독점한 뒤, 서로 긴밀한 일당이었던 서울의 골동상 아미이케에게
내밀히 연락을 취했다.
구라모토의 연락을 받은 아마이케는 당장 공주로 달려 갔다. 그는 약 100여
장의 전돌 가운데서 장식문양과 문자가 들어 있는, 곧 갑이 많이 나갈 10여 장을
골라 잡고 서울로 올아갔다. 그리고 그는 그중의 8장을 즉각 총독부박물관에
팔아넘겼다. 나머지는 당시 서울 남대문로 3가에서 '조선고미술 공예품 진열관'
이란 간판을 걸고 있던 대규모의 고미술상 도미다에게 들어갔다.
세키노 박사가 총독부박물관에 팔린 공주 출토의 진기한 백제 전돌을
처음으로 목격하고 깜짝 놀란 것은 10월의 일이었다. 그는 박물관측으로부터
"서울의 골동상 아마이케에게 샀는데 출토지는 공주란다" 라는 말을 듣고는 즉시
현지조사를 떠났다. 그러나 공주에 도착하여 문제의 전돌과 토기를 불법으로
점유했다가 팔아먹은 골동상 구라모토를 찾아 나머지를 보여달라고 했던 그는
또 한번 놀랐다. 같은 날, 세키노를 한발짝 앞질러 공주로 달려온 아마이케가
전에 고르고 남겨놓았던 전돌들을 깨진 조각까지도 몽땅 묶어가버렸던 것이다.
눈치 빠른 골동상의 무법의 매점 행위였다.
어디서나 출토유물을 불법적으로 강점하고 그것들을 암거래하여 치부하는
자는 모두가 일본인들이었다. 공주에서는 1920년에 이미 송산리고분의 1호에서
5호까지가 깡그리 도굴되고 있었다. 그렇듯 고분 속의 모조리 약탈된 후, 5호
고분의 텅 빈 현실에는 당시의 마코라는 일제 담뱃갑 하나가 남겨져 있어
도굴꾼의 여유작작했던 범행을 말해주고 있었다(현장을 목격한 공주 고인의
증언).
1926년 8월에 개최되었던 총독부 고적조사위원회 회의록에 이런 말이 나온다.
"…유래, 조선에서는 고분은 선조의 영역으로 신성시하였고, 그 부장품과 같은
것에 손을 대는 일도 있을 수 없었다. 타인이 그것을 파괴하는 것도 고래로
대죄로 여겼다. 따라서 본부(총독부의)의 학술적 조사 때에도 지방민(현지
주민)의 반감을 초래한 적조차 있었다."
이 무렵 공주에는 중학교 교사로서 백제고분을 연구한답시고 여우처럼
부장품을 파먹은, 참으로 악질적인 일본인이 등장하고 있었다.
가루베, 1945년에 일제 패망과 함께 한 트럭 분량의 백제유물 컬렉션을 갖고
무사히 일본으로 돌아간 후, (백제미술)(백제유적의 연구) 등의 저서를 출판하여
백제통을 자처했던 인물이다. 지금도 공주에 가면 지난날의 그의 고분 도굴
사실과 악질적인 유물수집의 내막을 잊지 못하고 분개하는 사람들이 많다.
"아주 나쁜 놈이었다. 연전에 송산리에서 무령왕릉이 기적적으로 발견되어
그속에서 수천 점의 부장품이 쏟아져나와 국내외에 최대의 고고학적 성과로
소개되었지만 바로 그 앞 왼쪽으로 붙어 있던 제6호분을 완전히 파먹은 자가
바로 가루베였다는 사실은 여러 증거로써 이미 명백히 입증돼 있다. 공주 시민이
잊지 못할 최고로 악질적인 도굴꾼이요, 유물 약탈자였다. 당시 같은 일본인
사회에서도 그 자는 용서할 수 없는 못된 자로서 말해졌을 정도다."
이는 공주의 여러 증언자의 한결같은 증언이다. 그토록 악명높은 가루베가
처음으로 조선에 발을 디딘 것은 1924년이었다. 그는 공주고등보통학교의 일본어
교사로 10여 년 재직했다. 그동안 그는 온갖 불법적인 방법으로 백제유물을 수집
혹은 도굴했다. 그는 백제문화를 연구한답시고 심지어 학생들까지 동원했었고,
유적지를 알아 오는 일과 유물 수집을 숙제로 내주는 일조차 있었다 한다. 뒤에
알려진 바로는 그는 부산의 일본인 골동상과 늘 연락을 취하고 있었는데, 그의
아버지는 또 교토에서 골동상을 경영하고 있었다.
1927년에 송산리 제1호 고분에서 도굴된 유물들이 공주 읍내의 모 일본인에게
들어가 있다는 당시의 총독부 (고적조사보고)의 도굴품 소장자가 가루베였을
가능성도 있다. 가루베 자신은 어떤 글에서도 그의 도굴품에 관해 일언반구의
언급도 없으나 불상을 입수했던 일은 약간 밝히고 있다. 공주읍 부근에서 출토된
'금동여래상'(높이 약 7cm)과 이인면 목동리 부근에서 출토된 '동조보살상'(높이
약 18.2cm), 그리고 부여군 규암면 내리에서 출토된 '금동협시보살상'(높이 약
5.7cm)등이다.
그보다도 가루베는 송산리 제6호분의 단독 도굴과 부장품의 독점적인
약탈에서 최고의 악명을 남기고 있다. 그것은 1933년의 일이었다. 여러 증언을
종합하면 그는 제5호 고분 바로 옆에 위치하는 제6호분을 연도 입구의
천장께에서 곧바로 파들어가서 모든 부장품을 깨끗이 약탈해먹은 것이 확실하다.
어떤 증언자는 그가 무덤 속에 들어가기 전에 먼저 개를 집어넣었다는 내막까지
말하고 있다. "당시 나이 서른 안팎이었던 가루베는 중학교 교사의 탈을 쓴
천하의 고얀 놈이었다" 고 공주의 증언자들은 말하고 있다. 그는 제가
도굴해놓고도 그 사실을 공주경찰서에 신고하여 완전범죄를 꾀했을 정도로
대담했다. 공주경찰서의 보고를 받고 현장에 급히 내려갔던 총독부박물관 촉탁
고이즈미(뒤에 평양박물관 역임)는 뒷날 "그것은 눈뜨고 볼 수 없는 참상이었다"
고 술회하고 있다. 그리고 그때 벌써 "저 가루베가 아무래도 수상쩍다" 는 말이
나돌았는가 함은 얼마 후에는 일본인 수집가들 사이에서 "가루베 자식, 이번에
한 20만 원 벌었을 거야" 하는 말이 공공연히 나돌고 있었다고 한다. 논 상답 한
마지기에 70∼80원 할 때 20만 원이라면 그때 가루베가 도굴해 먹은 송산리
제6호분의 유물 내막이 어느 정도였을까가 어림된다. 전문가들은 1971년에
무령왕릉에서 나온 부장품을 염두에 두고 상상할 수 있을 거라고 추정하고 있다.
가루베는 공주에서 강경의 중학교로 전근해 가서 이번엔 호남 일대의 유적을
조사·연구한다고 유물을 수집 혹은 탈취하다가 일제 패망의 8·15해방을
맞았는데, 그 겨를에도 그는 그의 온갖 불법행위를 컬렉션을 모조리 일본으로
반출하는 데 성공했다.
8.15 직후, 가루베는 강경에서 트럭 1대에다 그의 컬렉션을 몽땅 싣고 재빨리
대구로 도망쳤다. 대구에서 같은 악당이었던 오구라와 합류했다. 그리고 그들은
일본으로의 비밀 반출 루트를 물색할 수 있었다.
해방과 함께 국립박물관 공주분관장으로 취임했던 유시종 관장이 미군정청을
통해 일본으로 돌아간 가루베에게 과거의 컬렉션을 어떻게 했느냐고 문의한
적이 있었다. 그때의 화신이 "공주박물관에 모두 갖다놓고 왔다" 는 것이었다.
뻔뻔스런 거짓말이었다. 유관장은 공주지구 미군정관과 함께 강경까지 가서
가루베가 살던 집도 뒤져 보았으나 아무것도 없었다.
제3장 서양인의 수집
구한국시대의 서양 외교관들
1971년 6월에 나는 구미 각국의 유수한 박물관과 미술관이 소장하고 있는
수천 점의 한국문화재와 미술품 내막을 10회에 걸쳐 (서울신문)에 연재,
소개했다.
편의상 몇몇 경우를 여기에 다시 인용하면, 먼저 런던의 대영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는 조선시대의 초상화 '수각수로도' 는 윌리엄 앤더슨이라는
영국인이 가져간 것을 1881년에 박물관에서 인수했다는 기록을 갖고 있다. 또
고려시대의 '은입사향로'(1358년명) 하나는 인버네언 부인이 갖고 있다가
1945년에 대영박물관에 기증한 것이다.
호놀롤루미술관이 소장하고 있는 조선말의 목각동자상과 고려청자
'상감연화문주전자' 는 1927∼1928년에 개인(미국인)이 기증했다고 카탈로그에
명기돼 있다. 보스턴미술관에는 1910년대 중엽에 한국에 와서 수집한 찰즈
B.호이트의 고려자기 컬렉션이 모두 유증돼 있다.
보스턴미술관은 또 1910년대에 일본인 오카구라가 입수해 갖고 있다가 미국인
에드워드 J.흄즈에게 팔아넘긴 신라시대의 걸작 '금동약사래입상'을 기증받아
소장하고 있고, 그외에도 국내에서 필적할 만한 것이 없는 11세기 고려시대의
은제도금 주전자와 승반을 갖고 있다.
런던의 빅토리아 앤드 앨버트미술관은 1910년대 중엽에 르 브롱드의 한국
도자기 컬렉션을 기증받았고, 덴마크의 국립박물관에는 구한말에 건너간 것으로
믿어지는 신라시대의 청동불 2구와 고려말의 목불, 그리고 각종 민속자료가
진열돼 있다.
1950년대 후기에, 그전까지의 소장자인 일본인으로부터 신라시대의
금동관(고분 도굴품)을 입수해 갖고 있는 파리의 기메미술관엔, 1887년에
서울에서 한·프조약을 체결한 프랑스 공사 콜랭 드 플랑시(한국명 갈임덕)가
1903년까지의 재임기간 중 서울에서 수집한 고려자기 등이 기증돼 있다. 파리에
있는 또 하나의 주목할 만한 한국문화재로서 체르뉘스키미술관이 소장하고 있는
고려시대의 자그마한 동종은 미술관 창설자인 앙이체르뉘스키가 1871년에서
1837년까지 중국·일본으로 미술품을 수집을 떠났을 때 일본에서 사 간 것으로
짐작되고 있는데, 이 종에는 1311년 마들어졌다는 명문이 새겨져 있다.
서독의 쾰른동양미술관에 있는 한국 도자기들은 "1910년에 아돌프 피셔가
현지(한국)에서 출토품을 수집한 것을 1차세계대전 직후에 입수했다" 고 미술관
카탈로그에 소개돼 있다. 또 이곳에 진열돼 있는 고려청자 '표형주전자' 는
1928년에 런던에서 공개된 호브슨의 컬렉션에 들어 있던 물건이다.
이상은 현재 구미 각국의 미술관이 소장하고 있는 수천 점의 한국문화재와
미술품 중 반출 시기와 경위가 확실한 극히 일부의 내용이지만, 그 나머지는
한국에서 일본인 무법자들이 도굴,약탈 혹은 불법적으로 수집한것들이 일본을
통해 각국으로 팔려 나간 것들이다. 다만 앞에서 몇 사람의 서양인 이름이
언급됐듯이 1883년의 인천 개항 이후 서울에 등장한 구미 각국의
외교관·기술자·정부고문·선교사·외국어 교사 등 여러 분야의 서양인 가운데
한국의 옛 미술품을 수집한 사람이 더러 있긴 했으나 그 수는 역시 제한돼
있었다. 더구나 그들 가운데 일본인 무법자들처럼 이땅의 문화재를 폭력적으로
약탈하거나 도굴한 무법의 수집가는 별로 없었다.
1894년에 서울의 프랑스어 학교 교장으로 초빙돼 왔던 에밀 마르텔의
회고담에 이런 말이 나온다.
"내가 한국에 오던 무렵에 고려자기를 수집하고 있던 서양인은 미국 공사
알렌(한국명 안연)과 프랑스 공사 플랑시 등이었는데, 플랑시의 수집품들은 현재
파리의 기메미술관에 보존돼 있다. 그중에는 내가 그에게 기증한 것도 있다."
((외국인이 본 조선외교비화), 1934년)
마프텔 자신도 서울에서 약 50년 사는 동안 상당히 안목 있는 수집을
했었는데, 그의 컬렉션이 그후 어찌 되었는지는 알려져 있지 않다.
마르텔의 회고담
에밀 마르텔은 자신이 서울에서 골동품을 수집하기 시작하던 때의 일화를
이렇게 말하고 있다.
"나는 어려서부터 골동 수집을 몹시 좋아하여 지금도 계속하고 있다.
지금으로부터 40여 년 전(1894년)의 이야기지만 내가 처음으로 조선에 왔을
때에는 이렇다 할 재미있는 골동품을 찾아볼 수 없었으나 프랑스공사 플랑시
씨의 집이라든지 미국 공사 알렌 씨 집에서 처음으로 고려자기를 관상하게
되면서 나는 그것을 사랑하기 시작했다. 당시만해도 그러한 고려자기의 꽃병이나
항아리·접시·사발 같은 것은 서울 거리를 아무리 걸어도 어느 골동상에서도
볼 수 없었을 뿐 아니라 구하려 해도 좀처럼 손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런데 몇
해 후가 되니가 스스로 구허려고 하지 않는데도 조선인이 자꾸 팔러 오는
바람에 차차 수집을 하게 되었다.
당시 조선인이 골동품을 팔러 오는 광경은 매우 재미있었다. 그들은 골동품을
보자기에 싸 가지고 아주 소중하게 들고 오지만 그 태도가 도무지 심상치 않고
시종 주위를 살피는데 어딘가 불안에 쫓기는 듯했다. 지금 와서 생각해 보건대,
거기엔 두 가지 이유가 있엇던 것 같다. 즉, 양반의 소장품을 몰래 부탁받고
팔러 오는 경우와 고분의 도굴품을 밀매하러 오는 경우였다. 당시 가끔 그런
말을 들은 적이 있었고, 팔러 오던 측이 골동에 관해 아무런 지식도 갖고 있지
못했던 사실을 나는 기억하고 있다.
마르텔은 도 구한말의 골동 가격을 말하는 일화도 소개하고 있다.
"나는 그들이 갖고 온 물건들 속에서 눈부신 것 서너 개를 집어 들고 하나씩
가격을 묻는다. 그러면 그들은 4개를 모두 사준다면 10원만 받겠다고 말한다.
나는 그건 좀 비싸니까 8원으로 하자고 교섭하나 그들은 좀처럼 응하지 않는다.
나느 할 수 없다는 듯이, '내일이면 8원으로도 살 사람이 없을 거다, 7원밖엔 못
받을 거다, 내 말이 믿어지지 않으면 내일 가서 보라' 고 말해서 돌려 보낸다.
그러면 그들은 잠시 떠나갔다가 곧장 되돌아와서 '그러면 8원으로 하자' 고 한다.
결국 그런 식으로 물건을 팔고 갔다. 나는 당시 값이 너무나 싸기도 했으므로
그렇게 상당수를 수집하였고, 나 외에도 그런 방법으로 산 사람이 상당수 있었던
걸로 안다."
일본에서 건어론 무법자들이 고려고분에서 고려자기를 약탈하기 시작하면서
조선인 가운데에도 어느덧 도굴한 유물을 외국인에게 들고 가서 몇푼 받고
팔아넘기는 불쌍한 행상이 하나씩 둘씩 나타나던 때를 마르텔은 말하고 있다.
한편, 나중에 도자기류의 수집품을 모두 파리의 기메미술관에 넣었다는, 당시
서울 주재 프랑스 공사 플랑시는 1903년까지의 재임기간 중 고서도 적잖이
수집했다. 오랫동안 파리의 국립도서관에 비장돼있다가, 1970년대 초 유네스코
주최 '책의 역사' 전시회에 처음으로 나와 세계 최고의 금속활자본이라고 크게
뉴스가 되었던 고려의 활자본 (직지심체요절)(1377년, 청주 흥덕사 간본)으
서울에서의 입수자가 바로 플랑시였다. 그 사실도 1970년대에 와서야
밝혀졌는데, 당시 파리의 국립도서관 동양도서 책임자인 세귀 여사의 증언을
통해 국내에 알려진 내막은 이러하다.
콜랭 플랑시는 서울에서 프랑스 공사로 있으면서 수집한 수백 권의 고서를
프랑스로 가지고 갔다. 그는 1930년에 사망했는데, 그 전에 그 한국고서의
일부를 파리의 동경대학에 기증했고, 나머지는 옛 책과 미술품 경매장이던
드루오호텔에 내다 경매에 붙여 팔았다. (직지심체요절)은 뒤의 경매품 속에
들어 있었다. 동양고서 전문가의 평가에 따라 파리국립도서관이
(직지심체요절)을 입수하려고 했을 때엔 이미 그 진본은 앙리 베베르의 수중에
들어간 뒤였다. 그러나 베베르는 도서관측의 간곡한 교섭을 받자 "내가 죽은
후에 기증하겠다" 고 약속했다. 이때에 약속은 이행 되었다. 1950년, 베베르가
사망하자 (직지심체요절)은 약속대로 파리국립도서관으로 들어갔다.
플랑시가 (직지심체요절) 같은 귀중본을 수집할 수 있었던 것은 것은 그가
서울 주재 프랑스 공사로 있을 때 데리고 있던 동양학자 모리스 쿠랑의 협력에
의한 것이었던 것 같다. 쿠랑은 1890년부터 1년 반 동안 서울의 프랑스 공사관에
근무하면서 조선의 옛 책들을 연구했는데, 그의 권고에 따라 플랑시 공사는 많은
귀중본을 수집했음이 분명하다. 그는 귀국한 후 프랑스어로 된 (한국서지)를
발간했는데, 그 속에 이미 (직지심체요절)이 소개돼 있다. 쿠랑의 (한국서지)는
1894년부터 1901년까지 4권으로 묶은 한국 고서목록르로 약 3,821종을 다루고
있다. 뒤에 플랑시가 그의 한국 고서 컬렉션 일부를 파리의 동야대학에
기증했다는 것도 쿠랑과 관련된 것이 아니었나 싶다.
1880년대에 들어와 서울엔 외국 공관이 다투어 등장하면서 많은 서양인들이
조선을 드나들게 되었다. 그것은 조선 반도가 세계로 향해 문이 열릴때의 급격한
시대적 변화였다. 서양인들은 극동의 작은 '은둔의 나라, 조선'(1882년에 미국인
그리피스가 지은 영문 (한국사)의 표제)의 지리.풍속과 역사.문화에 처음으로
접촉하면서 각자 취미껏 이 땅의 전통적인 공예품.미술품 기타 골동품을
수집하였고, 조선 연구를 위해 귀한 책들도 입수해 가졌다. 그중에서도 교양
있는 서양인들 사이에 가장 환영을 받은 것은 역시 개성 근처에서 일본인
무법자들에 의해 도굴되기 시작했던 고려자기였던 것 같다. 미국 공사와 프랑스
공사를 위시해서 많은 서양인들이 서울에서 그것을 사 갖고 있었다고 에밀
마르텔은 그의 회로록에서 말하고 있지만, 당시의 독점적인 수집 및 매수자는
역시 일본인들이었다.
1902년에 한국에 건너와서 고건축물과 미술문화를 조사했던 세키노의
(한국건축 조사보고)(1904년 간행)에 이런 말이 나온다.
"도기에 이르러서는 근년에 개성 부근의 고분을 발굴(도굴)하여 그것을 얻는
일이 빈번한데 모두 부장품이다. 그러나 분묘를 파는 것은 나라가 금하는
행위로서 범법자는 목숨을 걸어야 하기 때문데 그것을 얻으려 면 다소의 위험을
무릅써야 한다. 나는 서울과 개성에 거류하는 일본인 동포에게서 그와 같은 많은
도기를 보았다. 야마요시 씨도 전에 주한 일본공사관에 근무할 때에 그것을
수집하여 거의 수백 점에 이르고 있다. 지금은 도쿄 제실박물관에 방을 하나
얻어 그것들을 진열하고 있다."
한편, 러일전쟁이 한창이던 1905년 이른 봄께, 달성군 팔공산 속의 한 절에서
모종의 비밀임무를 수행하고 있던 일본인 특무대원 하나가 있었다. 이름은 가토,
그는 병을 정양한다는 구실로 신분을 감추고 약 3개월간 절에 머무르면서
특무활동을 하고 있었는데, 어느날 그는 금당암의 수미단 밑에 이상한 나무궤짝
하나가 있는 것을 보고 그 속을 조사해 보자고 노승들에게 제의했다. 일본인
특무대원의 요청을 노승들은 거절할 수 없었다. 그들은 마침내 수백 년 동안
누구도 건드린 적이 없는 궤짝의 뚜껑을 열어 보았다. 그랬더니 그 속엔
뜻밖에도 커다란 고려청자 항아리가 하나 들어 있었다.
뒷날 가토가 일본의 잡지에 밝힌 바로는 그때의 도자기는 높이가 약 80cm에
우아한 연화당초문이 양각돼 있고, 그 굽 밑에는 유약이 칠해져 있지 않은
태토에 관기가 새겨져 있었다고 한다. 그런데, 뒤에 들으니 "한일합방 직후인
1911년에 그 고려자기 항아리는 어느덧 대구의 거주하는 서양인에게 팔려
나갔고, 그 뒤 다시 인천을 거쳐 외국으로 반출되었다"고 하더라고 가토는
덧붙이고 있다. 그러나 절에서 그것을 팔았다는 말이 없고, 오히려 그런 일이
발생하자 절에서는 한때 난리가 났었다는 전문도 있는 것을 보면 가토 자신이
소문을 낸 이후 일본인 무법자들이 그것을 뺏어다가 서양인에게 팔아먹었던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가토가 말하는 대형 고려청자 항아리를 궤짝 속에 전래시키고 있던 절은 현재
대구시 도학동으로 행정구역이 바뀌어 있는 동화사였다. 그는 또 이런 얘기를
적고 있다.
"그와 비슷한 또 하나를 나는 보 적이 있는데, 1915년 10월 말에 총독부에서
경남 양산군의 통도사 출장을 명령받았을 때다. 그것은 대종형의 고려청자
향로였는데, 한 선방의 불단 밑에 있던 오랜 궤짝 속에 많은 파경과 함께 들어
있던 것이라고 말해지고 있다. 내가 그것을 목격하던 당시엔 저 유명한
십불골탑(금강계단을 말한 듯) 좌측에 위치한 작은 불전의 향로로 사용되고
있었다. 그후 수년이 지나서 그것에 대한 얘기를 들으니까, 오래 전부터 부산에
살고 있던 일본 왕래의 상인(일본인 골동상을 말한 듯)이 오사카에서 만든
커다란 진유향로를 갖고 가서 그것과 바꾼 후 어디론가 가지고 가버렸다는
것이었다."
이 증언은 통도사의 희귀한 전세품 고려자기 향로도 결국 일본인 악당이
악랄한 수법으로 탈취해 갔음을 알려주고 있다.
간송 전형필과 존 개스비 컬렉션
1914년을 전후해서 일본 도쿄에 와서 정착한 영국인 변호사가 하나 있었다.
이름은 존 개스비, 당시 25세의 청년이었다. 도쿄에 정착한 지 며칠 안되는
어느날, 그는 거리를 산책하다가 어느 골동상에서 희한하게 아름다운 꽃병
하나를 발견했다. 값을 물으니 500원, 당시 시세로는 호되게 비싼 가격이었다.
그러나 개스비는 꼭 그것을 입수하고 싶었고, 결국 사고야 말았다. 본시 귀족
가문의 미술품 애호가였던 그는 예리한 눈을 갖고 있었다. 그대 그가 처음으로
산 것은 일본 도자기로 '나베시마 핵회화훼문병' 이었는데, 뒷날 일본의
중요미술품(보물급)으로 지정됐을 정도로 제대로 본 명품이었다. 그는 곧
고려자기의 경이로운 아름다움을 접하게 되면서 거기에 완전히 미쳤다.
"고려자기의 아름다운 빛과 형태는 섹계의 어느 나라의 도자기보다도
훌륭하다"고 개스비는 감동했다. 이후 그는 서양인으로서 고려자기의 최대의
안목 있는 수집가로 군림하게 되었는데, 도쿄를 중심으로 한 일본 안에서의
수집은 물론, 여차하면 조선에 건너와 여러 골동상을 순례하면서 걸작과 일품을
사 모았다.
이런 일화가 전한다. 1930년대 초기의 일이었다. 모든 사람들이 새해맞기에
바쁜 섣달 그믐날이었는데, 개스비가 도쿄에서 비행기로 급히 서울에 달려왔다.
알고 보니 전부터 어떤 일이 있어도 입수하고 싶다고 서울의 골동상에게
말해놓았던 일본인 고관 수장의 걸작인 고려시대의
'청자상감유죽연로원앙문정병' 과 '백자박산향로' 를 어떤 가격으로라도 사버릴
작정으로 돈을 준비해 갖고 왔다는 것이었다.
그와 거래를 하고 있던 골동상은 때가 공교롭게도 섣달 그믐날이어서
난처했지만 개스비의 결의가 하도 비장한 바람에 실례를 무릅쓰고 소장자를
찾아갔다. 그리고 그가 어떤 수단과 방법으로 일본인 교관을 움직였던 것인지
개스비는 다음날 아침, 그러니까 정월 초하룻날 아침 그가 돈을 아끼지 않고
원했던 두 점의 고려자기를 손에 넣고 도쿄로 돌아갈 수 있었다. 그것은 대단한
집념의 성공이었다.
그때 개스비가 서울의 일본인에게서 거액으로 양도해 간 2점의 고려자기는
그의 다른 고려자기 컬렉션과 함께 몇 해 후에 가서 서울의 민족적인 문화재
수집·보호자였던 간송 전형필이 몽땅 인수히게 되지만 보통 진품이 아니었다.
간송이 그것을 인수하자 총독부에선 곧 보물로 지정했었다. 현재는 이
'청감상감유죽연로원앙문정병' 이 국보 제66호, '백자박산향로' 가 보물 제238호로
지정돼 있다.
간송은 1957년에 존 개스비를 회상하며 이렇게 쓰고 있다.
"외국인으로서 우리나라의 고도자, 특히 고려자기를 좋아하여 수집한 사람은
상당히 많이 있었으나 대개는 그 수집품이 양이 많은 반면 질이 떨어지고, 질이
우수하면 양이 많지 못하였다. 또 처음에는 수집열이 대단하였으나 몇 해 지나는
동안에 차차 식어져서 그만두는 사람도 많았다. 그중에 영국인 존 개스비 씨는
수십 년 동안 꾸준히 방대한 수량의 최우수 작품만을 모아놓았으니 당시
고려자기 수집가로서의 그의 이름이 내외에 떨쳤던 것이다. …오랜 시일을 두고
투철한 감상안과 열성 있는 수집으로 이루어진 그의 컬렉션은 당시의 고미술
수집가, 특히 도자기 수집가들의 선망의 적이 되었던 것이다.
간혹 수집가와 골동상들이 모여서 한담을 할 때면, '개인으로 그의 수집품만큼
우수한 고려자기르 가진 사람은 없을 것' 이라느니, '지금부터 시작해서 그만큼
거대한 수집을 한다는 것은 꿈같은 얘기' 라느니 하는 것이었다."(간송 전형필,
월간 (신태양),(고미술 수집여화) )
1930년대에 중엽에 이르러 개스비의 고려자기 컬렉션은 그처럼 유명했고 또
그 내용은 어떤 수집가의 컬렉션보다도 높이 평가됐다. 따라서 그의 집을
출입하는 골동상이 도쿄·서울·부산 등지에 여러 명 있었다. 간송도 한창
수집을 하던 때라 역시 그들과 접촉이 있었다. 간송은 그들에게 "만약 개스비가
그의 고려자기들을 처분한다는 정보가 있으면 지체없이 연락해 달라" 고 넌즈시
부탁했다. 그러나 좀처럼 그런 정보는 없었다.
간송 정형필은 존 개스비가 언젠가는 그의 고려자기 컬렉션을 모두 내 놓아
처분할 거라고 예측하고 있었다. 그때엔 일본 사람이나 기타 외국인에게
넘어가지 안도록 즉각 손을 써서 인수해야 한다고 다짐하고 있었다. 그것은 그가
스스로 짊어진 민족적 사명이었다.
과연 간소의 예측은 적중했다. 1937년 2월의 일이었다 . 개스비와 가까이
접촉하고 있던 도쿄의 한 골동상에게서 한 통의 편지가 날아 왔는데, "개스비가
고려자기들을 처분하려고 한다" 는 것이었다. 몹시 고대하던 정보였다. 그러나
편지 내용만으로는 미진한 점이 많았다.
"처분한다면 전부냐, 일부냐?"
간송은 그 점을 확실하게 확인해 달라고 도쿄의 정보 제공자에게 지급으로
독촉했다. 그랬더니, 며칠 후 정확한 회신이 날아왔다.
"처분결정으느 확실하며, 일부가 아니라 전부라고 말한다. 중간 알선은 나 한
사람만이 위임받았다. 일단 전보를 칠 터이니, 그때에 지체없이 도쿄로 와 달라."
며칠도 안돼서 기다렸던 전보가 오고, 간송은 그 즉시 도쿄로 출발했다. 2월
26일, 일본 육군의 일부 청년 장교들이 국수적인 반란을 일으켜 여러 명의
대신과 정부 고위층을 기습, 잔혹한 살상을 감행한 저 유명한 2·26사건의 꼭
1주년이 되던 날이었다. 도쿄 역에는 사전에 연락을 받은 골동상이 마중나와
있었다. 급히 여관으로 직행한 간송은 비로소 개스비가 왜 그의 소중한 컬렉션을
전부 처분하려 하고 있는지의 사정을 알 수 있었다.
"1년 전 바로 오늘 발생한 2·26사건을 보고 개스비 씨는 즉각적으로 일본이
멀지 않아 미·영에 대해 전쟁을 일으킬 것이라고 내다본 것 같다. 그래서 그는
급히 중요한 재산을 모두 정리하고 영국으로 돌아갈 준비를 하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
골동상의 말이었다. 납득할 수 있는 변화였다. 사실 2·26사건 이후 일본에선
군부의 정치 지배력이 무섭게 강화되고 있었다. 이러한 변화는, 개스비가
예측했던 그대로 몇 달 후 먼저 중일전쟁으로 나타나기 시작했던 것이다.
다음날 아침, 간송은 중간 골동상의 안내를 받으며 도쿄 고지마치에
호화저택을 갖고 있던 존 개스비를 방문했다. 그때의 인상과 개스비에게서의
극적인 고려자기 인수의 감회를 간송은 훗날 이렇게 쓰고 있다.
"밝은 아침 햇볕이 유리창으로 따뜻이 비치는 2층 응접실에는 눈이 부시도록
찬란한 고려자기들이 진열되어 있었다. 푸른 비취빛이 줄줄 흐르는 향로, 매병과
알토란같이 모아놓은 향합·유호를 정신없이 보고 있을 때, 단정한 옷차림을 한
주인 개스비 씨가 나타났다. 그 뒤에는 빈틈없는 정장을 한 집사가 엄숙히
시립하고 있었다. 알선인이 '어제 서울에서 오신 전선생이십니다' 하고 소개를
하니, 그는 자못 뜻밖이라는 듯이 미소를 띠며 '아아, 그러세요? 서울에서
여기까지 오셨군요' 하며 반가워하였다. 그날 저녁에 비로소 들으니, 알선인은
그때까지 매수인이 누구인 것을 밝히지 않고, 다만 모 수집가가 내일 올 터이니
준비하라는 말만 했다고 한다. 그도 알선인을 전적으로 신임하는 터이므로
어련하겠느냐고 믿고 있었던 모양이다. 그러나 내심으로는 도쿄나 오사카의
저명한 수집가 중의 한 사람일 것으로 생각하고 있었던 모양인데 뜻밖에 한국
청년(당시 간송은 31세였다)이 나타나서 의외로 생각했던 모양이었다.
그러나 그도 전부터 한국의 고미술품 수집가로서의 나의 이름은 알고 있었던
모양이다. 그뿐 아니라 항상 한국의 그 훌륭한 고미술품들이 한일합방 이후 수십
년 동안을 통째로 일본인 손아귀 속에서 좌우되고 있는 것을 매우 애석하게
생각하고 있던 차에 한국인 수집가가 차차 생겨서 열심히 수집에 노력하고 있는
것을 알고 무척 기쁘게 생각하고 있었다 한다. 그런 대에 내가 나타나게 되니
더욱 반가웠던 것이었다. 나는 그에게 오랫동안 많은 한국 미술품을 수집해 준
것을 치사하고, '나도 귀하의 애써 모은 수집품을 인수하여 귀하에게 지지
않도록 정성껏 보존하겠다'고 말한 후 그의 수집품을 즉석에서 인수하였다."
그때 간송이 지금 돈으로 치면 아마 수억 원대에 가까웠을지도 모를 거액의
사재를 아낌없이 지불하고 존 개스비의 알짜 고려자기 컬렉션을 몽땅 인수하여
국내에 되가져 온 용단은 보통 위대하고 용기 있는 민족의식이 아니었다.
도쿄에서 개스비 자신이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듯이 만일 간송이 평소 예의
주목하고 있다가 즉각 달려가지 않았던들 그것은 일본 안의 재벌 수집가에게
넘어갈 수밖에 없었던 컬렉션이었다. 또 만일 그렇게 되었더라면 우리는 오늘날
여러 점의 국보와 보물 고려자기를 그때 영영 외국인에게 빼앗기고 말았을
것이다.
이미 언급한 국보 '청자상감연로원앙문정병' 과 보물 '백자박산향로' 외에도
그때 도쿄의 영국인 개스비에게서 극적으로 인수, 국내로 되가져다가 보호한
고려자기 가운데 현재 국보 혹은 보물로 지정된 것들이 있는데,
'청자기린유개향로'(국보 제65호),'청자오리형수적'(국보 제74호) 등이 그것이다.
보물 제241호의 '청화백자철사진사국화문병' 도 그때 개스비의 컬렉션에 들어
있었던 물건인 것 같다.
그렇듯 국보급이 5∼6점이나 포함돼 있던 개스비의 컬렉션을 기회를 놓치지
않고 되사오기 위해 간송은 선대로부터 물려받고 있던 공주지방의 농장을 급히
처분해야 했다고 한다. 그때 개스비는 전쟁이 임박하고 있는 불안한 국제정세
때문에 할 수 없이 그의 컬렉션을 내놓게 되었으나 근 30년간 최대의 사랑과
안목으로 수집하였던 한국의 도자기들과의 석별을 아쉬워하면서 고려청자의
'양각모란문잔' 하나와 '향합' 하나를 기념으로 간직하겠다고 돌려놓았을
뿐이었다.
"짐(인수한 고려자기)을 싸는 동안 그는 나를 오랜 친구와 같이 친절해
대접해주었다. 그는 나보다 훨씬 연장인 관계도 있었겠지만, '귀하는 아직
연부역강하니 아무쪼록 그 훌륭한 귀국의 미술품을 많이 수집해서 세상에
소개하라' 고 격려하는 것이었다. 그의 서재나 응접실을 보아도 송청자 화병에
꽃을 꽂아놓고, 조선백자들이 놓여 있을 뿐이었다. 내가 '귀하는 구주나 일본의
도자기는 수집하지 않으십니까?' 하고 물으니, 그는 '고려자가보다 더 좋은 것이
어디 있나요? 다른 자기들은 다 연대가 매우 떨어지지 않아요?' 하는 것이었다.
작별할 때, 나는 '오랫동안 애장하였던 수집품들과 헤어지게되니 대단히
섭섭하시겠습니다. 고려자기가 보고 싶거든 언제든지 오십시오' 하였더니, 그는
'암, 가구말구요. 꼭 가보겠습니다. 그러나 한국의 자기를 한국의 수집가인
귀하가 한국으로 가져가게 되니 정말 기쁩니다' 하는 그의 대답에는 정말 기쁨이
넘쳐 흐르는 듯하였다."(간송 전형필, 월간 (신태양)(존 개스비 씨 이야기),
1957년)
존 개스비는 그의 고려자기 컬렉션을 간송에게 모두 도로 내준 후에도 한 1년
동안 도쿄에 머물러 있다가 영국으로 돌아갔다.
도쿄에서 서울로 운반된 개스비의 컬렉션은 1936년 간송의 개인미술관이자
나라를 잃은 민족의 한 생명의 보존처로서 세운 성북동 숲속의
보화각(간송미술관)에 들어간 후 오늘날까지 고스란히 보호되고 있다. 간송은 또
생전에 그 도자기들을 매만질 적마다 개스비를 생각하곤 했다. (존 개스비 씨
이야기)에서 그는 이렇게 맺고 있다.
"그가 오늘날까지 생존해 있다면 때때로 고려자기를 생각할 것아다. 만일 그가
아직 생존해 있어서 노구를 이끌고 한국으로 찾아온다면, 다행히 전화를 면한
그의 애장했던 고려자기를 보여주고 싶다. 말없는 자기들도 뜻이 있으면
반겨하리라."
고려자기를 매체로 한 한국의 간송과 영국인 개스비의 이 일화는 과거 일제
밑에서 도국과 불법적인 독점만 일삼던 부지기수의 일본인 수집가들을 상기할
때 정말 고려자기처럼 깊고 파란 빛을 내포하고 있다. 물론 정당한 입장에서
서로 팔고 산 것이긴 하지만 일본인 수집가와의 사이엔 그런 우정도 있는
일화가 하나도 전하지 않을 뿐 아니라 있은 적도 없었다.
구미미술관에 들어가 있는 한국불화들
1970년대초 국립중앙박물관은 구미 각국의 주요 미술관이 소장하고 있는
한국의 불화들 가운데 현재 국내에선 하나도 확실한 것이 보존돼 있지 못한
고려시대의 것들이 적지 않음을 처음으로 확인하고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1971년 7월, 미국의 여러 미술관을 시찰하러 떠났던 황수영 관장은 뉴욕의
메트로폴리탄미술관 둥양관의 일본인 불화전문가 호리오카로부터 한국 전문가의
평가와 의견을 듣고 싶다는 구미미술관 소장의 한국 불화 약 50점의 사진을
복사해 받았다.
황관장이 미국에서 가져온 한국불화의 사진을 검토한 박물관의 전문가
최순우·정양모 학예연구관은 그중의 적어도 5∼6점은 분명히 고려 때 것이고
다른 10여 점은 조선 전기 것으로 보았다. 호리오카가 조사한 구미의 한국불화
소장 미술관은 그가 연구원으로 있는 메트로폴리탄미술관을 비롯해서 미국 안의
프리어미술관, 클리블랜드미술관, 필라델피아미술관, 호놀룰루미술관 외에 영국의
대영박물관, 빅토리아 앤드 앨버트미술관, 독일의 베를린미술관, 벨기에의
브뤼셀미술관 등이었다.
연제 어떤 경로로였는지는 확실치 않으나 기왕에 한국에서 유출된, 국내에도
없는 귀중한 불화들이 구미의 큰 미술관에 잘 보존돼 있으니 다행이라면
다행이지만 오늘의 국내 학도로서 우리의 옛 불화를 연구하려면 불가피
일본이나 구미로 찾아가야 하게 되었으니 부끄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현재 외국의 미술관 혹은 개인에게 유출돼 있는 한국불화의 대부분이 구한말
이후 일제 식민지 아래에서 일본인 무법자들에게 약탈당했거나 일부 어리석은
중들이 그들에게 매수되어 헐값으로 팔아넘긴 것들임은 말할 것도 없다. 그중의
일부가 일본을 통해서 구미로 전매돼 나간 것이다.
구한말 이후, 이 땅에서 각종 역사 문화재 약탈로 일확천금을 꿈꾸던 일본인
무법자들에게 가장 손쉽고 가벼운 약탈대상의 하나가 불화였다. 큰 불상이나
석탑 같은 것을 불법반출하는 데는 어려움이 따랐지만 불화는 돌돌 말면 한
손에 잡히는 가벼운 물건이었다.
한 예로 양산 통도시의 불화들이 일본인 무법자에게 약탈당한 것은 1900년을
전후한 때였다. 1903년 2월에 일본에서 발행된 (고고계)란 잡지에 당시 도쿄
제실박물관에서 전시되었던 불법반출의 통도사 불화에 관한 기사가 실려 있다.
"이 조선불화는 본시 경남 통도사에 있던 것으로 본존 2체외에 성상 혹은
천부수호신 같은 것도 있다. 또 악기를 갖고 있는 보살상 같은 것도 있다.
시대는 3백 년 전쯤 되어 보이며 착색이 선미하고 뵤법도 훌륭하여 한번 볼
만하다."
한국에서의 일본인들의 문화대 약탈과 일본으로의 불법반출은 구한말에
서울에 와 있던 서양인 외교관과 선교사들 사이에서도 비난의 소릿가 높았던 것
같다. 1906년 12월의 황태자 혼례식에 특사로 왔던 당시 일본 궁애상 다나카가
새성 남쪽의 풍덕에서 경천사 십층섭탑을 일제의 무력과 일본인 골동상을
앞세워 약탈해 갔던 사건은 이미 앞에서 소개했지만, 1907년 5월 28일자 일본의
(후쿠오카 일일신문)에 보도되었던 대략 다음과 같은 내용의 기사가 1970년대초
서울의 국사편찬위원회 자료실에서 발견되었다.
"과반, 한국의 황태자 전하 어혼례 때 특사로 파건되었던 다나카 궁내상은
그때 한국의 역사상 국보인 백옥제(흰 대리석) 다층탑이 둘이나 있는 것을 보고,
그 진품에 침을 흘린 나머지 둘 중의 하나인 경기도 풍덕에 있는 것을 지난 2월
4일 서울에 거주하고 고물상(일본인)으로 하여금 군민의ㅣ 저항을 물리치고
다소의 무력도 사용하여 무난히 인천으로 빼내고, 3월 15일 도쿄에
도착시켰는데, 이 탑은 값으로 치면 200만 원을 호가할 만큼 희귀한
진품인데다가 다나카가 그것을 반출해 오는 과정의 수속이 의심스러워 목하
미국에서도 이 문제에 관해 비난의 소리가 높다는 것이고, 그곳(미국)에 체재
중인 구로키 대장 같은 이가 매우 난처한 처지에 몰려 있다고 한다."
일본인들이 한국문화재 약탈 내막을 폭로한 미국의 신문보도에 당시
일본정부는 몹시 당황했던 모양이다.
제4장 8.15해방 직후
일제 패망 후의 적산문화재들
1945년 8월 15일, 일본 군국주의는 드디어 패망하고 한국의 그들에게
36년간이나 강점당했던 국토를 되찾았다. 감격스런 조국의 광복, 민족의 해방,
그동안 이 땅에서 그토록 기세등등하게 군림하고 있던 각계각층의 일본인들은
하룻밤 사이에 세상이 뒤집히자 당장 기가 꺾였다.
그들은 한국인의 보복을 겁내며 목숨만이라도 부지하려고 전전긍긍했고, 온갖
추태로 과거를 사죄하려고 들었다. 그런가 하면 그 판국에도 귀한 물건만은
어떻게 해서든지 일본으로 가지고 가려고 치밀하게 움직인자도 많았다. 그들의
귀한 물건이란 금불이 패물과 이 땅에서 약탈 혹은 수집해 가지고 있던
역사유물과 미술품들이었다.
9월 들어 하지 중장이 이끄는 미군이 서울에 진주해 와서 일제 조선총독의
항복을 받았다. 이어서 미군정장관에 취임한 아놀드 소장은 본국으로 철수하는
일본인들에게 1인당 고리짝 2개씩 허용한다고 1차 군정령을 발표했다. 그렇게
되면 작은 불상이라든지 고려자기 같은 것들은 꽤 숨겨 갖고 갈 수가 있었다.
그러나 얼마 안 가서 처음의 군정령은 "육색 1개 이상 안된다"로 변경되었고,
미술품 수장자와 공동상이었던 일본인들의 속셈은 좌절되었다.
사태가 그렇게 되자 할 수 없이 소장품 목록을 작성하여 현품과 함께
덕수궁미술관과 전의 총독부박물관(현재 국립중앙박물관)에 갖다 바치고 떠나는
사람이 나타났는가 하면, 끝까지 물건을 포기하지 않은 부류들은 평소 친했던
한국인 친구에게 뒷날 적당한 시기까지 물건을 맡아 보관해 달라고 교섭하거나
싼 값으로라도 모두 처분하려 들었다.
한편 총독부박물관을 접수한 김재원 박사는 미군의 협조로 과거에 일본인들이
갖고 있던 미술품과 기타 모든 한국 유물들을 적산문화재로서 국가에
귀속시키기 위한 작업에 착수하고 있었다. 하루는 서울 남산동에 있는, 전에
사이토라는 일본인이 살고 있던 집 창고 속에 각종 미술품이 가득히 쌓여
있다는 정보가 박물관에 들어왔다. 김박사는 즉시 현장으로 달려갔다. 과연 정보
그대로였다. 술장사로 큰 부자였던 사이토의 수집품이었던가 본데 그는 그것들을
다 어떻게 할 수가 없었던지 창고 속에 모두 모아놓고는 그대로 급히 일본으로
떠난 것 같았다.
김박사는 일단 박물관으로 돌아왔다. 그 엄청난 분량의 물건들을 박물관으로
운반 운반하려던 트럭과 인원이 필요했다. 그러나 그날 즉각 운반수단을
강구하지 못한 것은 큰 실수였다. 며칠 후 다시 남산동을 찾아갔을 때엔
누군가가 깨끗이 실어내 가고 창고 속은 텅 비어 있었다. 불법적인 반출자는
사이토의 컬렉션 내막을 진작부터 알고 있던 어떤 약삭빠른 한국인
골동상인이었거나 그와 손을 잡은 폭력배의 소행이었을 것으로 믿어지지만 그
자가 누구였는가는 끝내 밝혀지지 않고 말았다. 해방 직후 무법의 혼란기엔 그런
일이 비일비재했다.
남산동의 적산문화재 접수엔 실패했지만 그 대신 김박사는 수집가와 연구들
사이에서 보통 '니와세불상' 으로 통하고 있던 유명한 백제불인
'금동관음보살입상'(높이 21.4cm)을 입수하는 데는 성공했다. 그것은 1907년에
충남 부여군 규암면 규암리에서 마을 사람이 우연히 출토시킨 것을 일본인
헌병이 강제로 빼앗아 갖고 있다가 당시 이미 서울에 정착해 있던 니와세라는
일본인에게 팔아먹었던 한 쌍의 완전한 걸작 백제불상 중의 하나로 해방 당시의
소장자는 경성제국대학의 의학부 교수 시노자키였다.
미군정청으로 박물관장직을 위촉받았던 김재원 박사에게 '니와세불상'의
소장처를 알려준 사람은 총독부박물관 때의 책임자였던 아리미쓰 교수였다. 그는
별안간 박물관을 인수하게 된 한국인들에게 박물관 유물과 기타 내막을 상세히
파악하게 해주기 위해 약 1년간 귀국을 보류하고 있었다.
아리미쓰의 정보 제공으로 김재원 관장은 아직 일본으로 떠나지 않고 있는
시노자키에게 전화를 걸었다. "세상이 다 아는 그 백제불상은 일본에 갖고 가지
못할 테니 다른 생각 말고 박물관에 보내라" 고 넌지시 찔러보았다. 그랬던니
대답이 꽤 당당했다. "나도 많은 돈을 주고 산 물건이니 그 액수의 돈을 갖고
오라"는 배짱이었다. 그것도 "현찰을 갖고 오지 않으면 내놓을 수 없다" 고
끝까지 버틸 듯이 굽히지 않았다. 그렇게 되니 방법은 하나뿐이었다. 김관장은
미군에게 협조를 요청했다. 그리고 몇 시간도 안되어 지프를 타고 출동했던 미군
헌병이 그 백제불상을 들고 박물관에 들어섰다. 현재 보물 제195호,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돼 있다.
해방 직후의 위급한 상황 하에서도 부산·대구에 거주하고 있던 돈 많은
일본인 수장가, 가령 대구의 오구라나 이치다 같은 악명 ㅁ은 수집가들은 온갖
불법적인 방법으로 독점하고 있던 부지기수의 한국문화재들 가운데 알짜들은
모두 묶어 갖고 밀선을 이용하여 유유히 한국을 탈출했다. 이치다는 서울에서
김재원 박물관장이 미군 헌병의 협력으로 일본으로의 출발 직전에 극적으로
압수할 수 있었던 이른바 '니와세불상'과 함께 같은 때 같은 장소에서
출토되었던 또 하나의 보물급 백제불상을 갖고 있었다. 1922년 니와세에게서
양도받은 것이었다.
서울에서 하나를 붙잡은 김관장은 마땅히 대구 것도 속히 손을 써서 접수해닥
다시 짝을 채워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는 이번에도 미군에게 협력을 요청했다.
그러나 그땐 이미 늦어 이치다는 벌써 문제의 백제불상은 물론, 모든 알짜
수장품을 몽땅 꾸려 가지고 일본으로 도망친 뒤였다. 결국 그 백제불상은 영영
놓치고 말았다. 믿을 만한 후일담을 빌리면, 호눌룰루미술관이 일본에서 그것을
사 가려고 애썼으나 끝내 못 사고, 이치다도 그 뒤 노령으로 죽었다고 한다.
세상이 다 알던 악질적인 일본인 수장가는 끝까지 악질적이었다. 그들은 이제
때에도 말기에도 총독부의 승인 없이 이 땅의 중요한 문화재를 일본으로 반출할
수 없었건만 일제가 패망하고 한국의 독립을 보면서 쫓겨가는 마당에서도
한가닥 속죄삼의 표시는커녕 그들의 수장품을 거의 모조리 일본으로
불법반출했다. 그것은 최대의 마지막 악질행위였다.
공주의 송산리 백제고분을 깨끗이 도굴해 먹은 가루베의 경우도 앞의
'백제유적 약탈로 악명높은 가루베' 항목에서 이미 언굽했지만, 도쿄의
미극동사령부에까지 협조를 의뢰하여 미군 헌병으로 하여금 일본의 어느 시골로
돌아가 있는 그를 찾아가, 한국에서의 수장품들을 어찌 했느냐고 추궁케
했었으나 "현지엔 모두 두고 왔다" 는 거짓말로 불법반출을 부인하더라는 통보가
서울의 미군정청을 통해 박물관에 전달됐을 뿐이었다.
또 다른 이야기로, 이른바 조선총독부 시정기념관 주임으로 있던 가토
간가쿠의 경우가 있다. 가토는 러일전쟁을 전후한 시기에 인류학과 고고학
연구를 빙자하여 소련을 드나듯 전신 스파이로서 1905년엔 경북 팔공산의
동화사에 숨어 있으면서 그곳에 정착하여 총독부 관리로 오래 있다가
시정기념관 주임이라는 중요한 직책에까지 올랐던 것인데, 그땐 나이도 많았던
탕이었겠지만 일제의 패망을 눈앞에 보자 그렇게도 하루아침에 표변할 수가
없었다.
하루는 이 가토가 경복궁의 박물관으로 김재원 관장을 찾아와서 머리가 땅에
닿도록 큰절을 하면서 애원했다.
"사렬주십시오. 박물곤 어디에라도 써주십시오. 일본인 망하고 조선이 독랍한
것은 정말 잘된 것입니다. 저는 조산에 그재로 살겠습니다. 저의 아낸느 조선
여성입니다. 일본의 침략정치 때엔 조선인들엑 일본이름으로 창씨를
강요했습니다만 이번엔 제가 조선 이름으로 창씨 하겠습니다. 오늘부터는 저를
이관각으로 불러주십시오."
참으로 흉물스런 표변이었다. 그의 부인은 사실 한국 여성이었고 그녀의 성이
이씨였다. 그리고 그는 과연 부인의 이씨 성을 따른 이관각이란 한국인 이름으로
내내 서울에 숨어 있었고, 나중엔 세검동 밖으로 나가 살다가 한국전쟁 직전에
거기서 죽었다. 그동안 그는 한국에서의 연명의 수단으로 진귀한 '은제탑' 을
유력한 미군 장교에게 선물했더라는 얘기도 있었고, 또 숱한 미술품과 기타
골동품들을 내다 팔면서 생활을 유지했는데, 그 물건들은 가토가 한국에 계속
눌러 산다는 바람에 급히 귀국하던 일본인 친구들이 적당한 시기까지 보관을
부탁한다고 맡겨두고 간 것들이었다.
현재 이화여대박물관 소장하고 있는 국보 제107호의 조선백자
'철사포도문항아리' 의 8·15 전의 수장자는 1916년 이후 총독부 철도국에
근무하다가 뒤에 조선척도 주식회사 전무가 되었던 시미즈라는 일본인이었다.
앞의 항아리 외에도 그는 상당수의 도자기를 수집해 갖고 있었다. 드디어 일제의
패망으로 한반도에서 쫓겨가게 되자, 그는 다른 것은 다 제쳐놓고라도 그
'철사포도문항아리' 만은 숨겨 갖고 가려고 하였다. 높이 53.3cm의 당당한
크기인데다 철사의 포도덩굴이 멋지게 그려진 최대의 걸작어었기 때문에 만일
무사히만 갖고 갈 수 있었다면 말할 것도 없이 거액의 신용수표나 다름없었다.
미군정청의 처음 군정령이 한 사람 앞에 고리짝 두 개까지 혀가한다고 했을
때 시미즈는, '그렇다면 갖고 갈 수 있다' 고 생각하고 치밀한 은닉수단을
강구했다. 그는 한지를 한 아름 사오게 해서는 항아리의 안팎을 겹겹으로 싸
발라 깨지지 않게 한 후 누가 봐도 귀중한 조선백자 항아리라고는 도저히
깨닫지 못할 만큼 위장시켰다.
그러나 처음 군정령이 다시 바뀌어 육색 한 개로 대폭 통제되자 그의 치밀한
계획은 좌절되고 말았다. 그는 할 수 없이 자기의 부탁을 들어줄 만한 한국인
친구를 찾아가서 특히 그 백자항아리를 적당한 시기까지 잘 좀 보호해 달라고
당부하면서 그의 모든 수장품을 맡겼다.
시즈미가 일본으로 떠난 지 약 1년 후의 일이었다. 일제 때부터 골동품
중개인이었던 조아무개란 사람이 큰 물건 하나를 잡았는데, 바로 시미즈가
한국인 친구에게 보관을 부탁하고 간 '철사포도문항아리' 였다. 그것을 골동가로
들고 나와 판 청년은 다름아닌 보관자의 아들이었다.
항아리가 골동가에 나왔을 때 조아무개는 당장 큰 물건인 것을 알아차렸다.
그는 급히 돈을 마련하여 그것을 붙잡아놓고는 같은 골동가의 중개인으로
전부터 잘 아는 사이였던 유모·한모를 통해 고미술품 수집가이며 당시
수도경찰청장이었던 장택상에게 가지고 갔다. 물론 상당한 액수를 불렀다.
그러나 몇 달 후 그는 불의의 병고로 죽었다(수집가 선우인순의 증언).
결국 장택상 컬렉션에 들어간 국보급의 '백자철사포도문항아리' 는 1950년대
말까지 소장자의 시흥 별장에 애장되다가 우연한 기회에 그 물건을 보고 몹시
반했던 김활란 박사(당시 이화여대 총장)가 그때 돈 1,550만 환으로 인수하여
이화여대박물관에 넣었다. 국보 지정이 된 것은 그 직후의 일이었다.
지금 이화여대박물관은 앞의 국보 백자항아리 말고도 보물 제237호로 지정돼
있는 높이 35cm의 청자항아리를 갖고 있는데, 고려 초기인 '순화 4년'(993년)에
만들어졌다는 관명의 굽 밑에 새겨져 있어 과거의 조선총독부 때 이미 보물로
지정됐던 물건이다. 해방 전까지의 소장자는 역시 일본인이었다. 잠사회사의
중역이었던 이도라는 사람으로 그는 꽤 안목이 있는 수집가였다.
일제의 패망을 눈앞에 다다랐을 때였다. 이도는 지정보물을 포함한 그 진귀한
수장품들을 빨리 돈과 바꾸어야겠다고 정세를 판단하자 조선인 광산왕으로
미술품 수집가였던 최창학을 찾아가서 모두 인수하라고 제의했다. 그러나
최창학은 자기 나름의 기호가 강했다. 그는 아무리 보물로 지정된 물건이라도
색깔과 기형이 별로 아름답지 못한 '순화 4년명 청자항아리' 는 비싼 값에 비해
감상할 가치가 너무 없다고 거절했다. 그 대신 그는 다른 지정보물인 고려청자
대접과 그밖의 아름다운 감상용 도자기들을 일괄해서 사들였다.
해방과 함께 '순화 4년명 청자항아리' 가 어떤 경로로 이도의 집에서
흘러나왔는지, 그리고 한국전쟁을 어디에서 무사히 견디었는지는 확실치 않다.
세인에게서 완전히 잊혀진 유전하던 그 항아리가 서울 화신백화점 뒤의 한
골동가게에 방긋이 나타난 것은 1955년께의 일이었따. 그러나 가게 주인은 그
물건의 과거의 내력이나 진가를 전혀 모르고 있었다. 그때 우연히 그 가게에
들었다가 '국내에서 드디어 나타났구나!' 하고 마음속으로 흥분하며 부르는 값을
적당히 지불하고 재빨리 입수한 구안자는 당시 이화여대박물관 창설을 맡고
있던 장규서였다. 그것은 눈의 승부였다. 몇 해 후, 장씨는 그가 개인돈으로 샀던
'순화 4년명 청자항아리' 를 이화여대박물관으로 들여보냈다.
8·15전까지 군산에서 큰 지주로 군림하면서 가나한 농민들을 수탈하여 부와
취미를 마음껏 즐기던 미야자키란 일본인이 있었다. 그는 지금의 서울 시청
근처에 위치한던, 조선인 경영으로는 최대의 골동상이었던 '문명상회' 주인
이아무개와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면서 상당수의 일품 고려자기와 불상 등을
수집하고 있었다. 증언자들의 말을 빌리면 문명상회가 입수했던 물건 가운데
값나가는 알짜들은 대부분 군산으로 보내져 미야자키의 컬렉션 속에
들어갔었다고 한다.
해방이 되자 이아무개는 미야자키의 그동안의 수장품들을 몽땅 뒤잡아 서울로
올려 왔다. 그중에 희귀한 오리형 청자연적이 하나 포함돼 있었다. 현재 국보
제74호로 지정돼 있는 간송미술관 소장의 '청자압형수적' 과 거의 모양이 같으나
부분적으로는 약간 다른 특질을 갖는 걸작이었다고 한다. 최초의 소장자는 해주
동중학교의 다나카라는 일본이니 서무주임이었다. 그것을 1934년에 당시 해주
황해도청에 근무하고 있던 조선인 수집가 선우인순이 처음으로 보고 그때
돈으로 1,600원이란 거액으로 인수했었는데 출토지는 연평도란 얘기였다. 말할
것도 없이 도굴품이었다.
그후 오랫동안 이 명품 '청자오리형연적' 은 선우씨가 애장하다가 사정으로
서울의 문명상회에 잡히게 되었다. 그리고 나중엔 이 또한 문명상회의 주인
이아무개의 손으로 군산의 미야자키에게 넘겨졌었다. 해방과 함께 다행히
일본으로 반출되지 않고 서울로 다시 올라온 이 '청자오리형연적' 은 뒤에
손아무개에게 들어갔고, 지금은 또 다른 수장가에게 넘어가 있다는 말이 있으나
확인돼 있지 않다. 뒤의 수장가는 또 과거에 서울 충무로에서 '오사카야' 라는
책방을 열고 있던 이토라는 일본인의 수장품이었던 뚜껑이 붙은 흑백상감무늬의
대형 걸작 고려자기 항아리도 여러 다리를 거쳐 입수해 갖고 있다고
고미술상가에선 말하고 있으나 역시 확인돼 있지 않다.
해방 직후, 서울에서 일본인 수집가들이 급히 처분하려고 허겁지겁 내놓은
미술품들을 계획적으로 긁어 모은 사람은 많았다. 장아무개라는 골동상인이 그
대표적인 인물이었다. 당시 마포에 있던 그의 집 창고를 들여다본 적이 있는 한
증언자는 트럭으로 수십 대 분량의 쌓여 있었는데, 내용도 온갖 것이 다
있었다고 말하고 있다.
기회를 민첩하게 포착하고, 모든 방법으로 적산문화재들을 독립적으로 긁어
모았던 장아무개는 미군정 말기까지 서울의 골동사회에서 가장 활발한 실력자로
군림했다. 그러다가 수완 좋게도 미군 군용기에 상당량의 값진 물건들을 싣고
일본으로 출국했는데, 증언자들은 그가 밀선도 이용하여 다른 일본인들의
수장품과 기타 문화재들까지 불법 유출시켰다고 말하고 있다. 그는 미군을
매수했던 것 같고, 일설엔 주한미군 사령관이었던 하지 중장에게 유명한 일본도
'마사무네' 를 바치는 등 대단한 술수를 썼었다고 한다. 그러나 그의 문화재
밀수와 불법 출국 사실은 곧 당국이 알게 되었고, 대한민국 수립 후 이승만
대통령이 당장 그를 잡아오라고 지명 체포령까지 내렸었다는 얘기가 있다.
조국의 해방이나 독립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은 골동상인이었다. 그는 방금 이
땅에서 쫓겨간 과거의 침략자인 일본으로 자진해서 빠져나간 후 불법반출해 간
각종 문화재와 미술품을 처분하고 그곳에 정착하여 살다가 1970년 무렵에
죽었다.
미군정청에 근무하던 테일러 중령과 과거 일본인 수장가의 얘기도 전해진다.
서울 남산 밑에 상당수의 물건들을 그대로 남겨놓고 급히 떠나버린 일본인이
있었다. 그 집에 테일러 중령이 세들어 살고 있었다. 그는 전의 일본인 집주인이
수집해놓은 도자기와 기타 미술품을 발견하자 견물생심의 환성을 올렸다. 그리고
얼마 후 미국으로 돌아갈 때 그는 그것들을 몽땅 실어 가는데 성공했다. 그러나
그의 불법반출품들을 미굴에서 금세 문제가 되어 출처를 추궁받은 후
외국재산의 불법취득 및 반입죄로서 처벌을 받았다는 말이 있다. 그때 서울의
미군정청에도 조회가 왔었다고 한다(당시 국립박물관장 김재원 박사의 증언).
제5장 한국전쟁과 잃어버린 국보
전쟁의 포화 속에서 지켜낸 박물관 유물들
북한공산군이 38선을 넘어 전격적으로 남침을 감행한 1950년 6월 25일은 전쟁
도발자가 치밀하게 계산한 일요일이어서 국립박물관엔 책임 있는 직원이 아무도
출근하고 있지 않았다. 김재원 관장이 그의 사택으로 급히 달려온 박물관 연구원
최순우로부터 사태의 위급함을 안 것은 그날 오후였다. 서울 거리는 벌써 완전히
불안과 공포에 휩싸여 있었고, 스피커에서는 외출 혹은 휴가 장병의 즉시 귀가를
독촉하는 급박한 목소리가 거듭 울리고 있었다.
26일 아침, 모두 불안스럽게 출근한 박물관 직원들은 정확한 전황을 알길이
없는 채 만약에 대비한 비상조치를 서둘렀다. 진열장에서 모든 유물과
미술품들을 꺼내 안전한 창고 속에 격납했다. 어떤 상황 아래서도 박물관 소장의
국가 문화재들을 보호해야 하는 것이 그들의 최대의 임무였다. 당시 서울
국립박물관의 직원들은 김관장 외에 이홍직·김원룡·황수영·최순우 등이었다.
27일 밤엔 서울 시내에 공산군의 박격포탄이 떨어지기 시작했고, 사태는
절망적이었다. 28일, 공산군은 마침내 서울에 들어왔고 박물관은 고립되고
말았다. 박물관 직원 가운데 유물 보호를 포기하고 혼자 전란을 피해 남쪽으로
탈출한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 김관장 이하 모든 직원은 경복궁안의 관사를
중심으로 모여 전세의 귀추를 초초하게 지켜볼 뿐 어찌할 방도가 없었다.
7월 5일게였다. 북에서 온 이른바 물질조사 조사보존위원회의 서울 지구
책임자라는 김아무개가 박물관을 접수한다고 찾아왔다. 그는 뒤켠의 관사에서
직원들을 불러내어 유물 보호를 계속 맡도록 하라고 말할 뿐 당장은 별다른
행동이 없었다. 김관장만 관사에 연금당하는 상태였다. 한국 전쟁으로 자기
정체를 드러낸 공산당원 하나가 박물관에도 있었다. 사진실에 근무하던
김영욱이었다. 그가 박물관 책임자로서 상부 공산당 조직과 연락을 취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사상성분이 비교적 온건한 사람이었다. 그 때문에 박물관
직원들은 다소 마음을 놓을 수 있었다.
8월에 들어서자 B29의 실지 서울 폭격이 매일같이 계속되었다. 그러나
도심지나 고궁은 피했기 때문에 박물관 창고의 유물은 안전했다. 유엔군의
공중공격과 위협은 날로 심해지고 공산군의 패색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일부
발물관 직원들은 몰래 숨겨둔 라디오의 단파 방송으로 유엔군의 참전과
철수했던 국군의 북진 기세를 알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날, 박물관에 김아무개가 다시 나타나 유물소개를 위한 준비에
착수하라는 심각한 지시를 해왔다. 전세가 악화되자 북으로 실러 가려는 건지,
아니면 서울 안의 다른 안전한 곳으로 이동시키려는 건지 알 수는 없었으나,
직원들은 "빨리 모든 유물을 포장하라" 는 독촉에 따를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수만 점의 박물관 물건을 모두 포장하여 신속히 이동시킨가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도저히 움직일 수 없는 큰 철조와 석조 미술품은 그대로 두고
중요하고 작은 것만 수천 점이 포장되었다. 그것들은 일단 경복궁에서
덕수궁미술관의 더 완벽한 지하창고로 옮겨졌다. 덕수궁미술관(당시 관장은
이규필) 소장의 미술품도 중요한 겻은 역시 모두 포장되어 지하창고로 내려와
있었다.
그리고 며칠이 지났을 때, 공산당 관계책임자들은 덕수궁도 불아했음인지
이번엔 종묘 경내의 숲 속에 땅굴을 파도록 박물관과 미술관 직원들을
동원시켰다. 이곳으로 성북동의 간송미술관 소장품을 포함한 기타 민간
소장품즐도 모두 옮겨올 계획이었다. 밤마다 땅굴 파는 작업이 강행되었다.
그러나 이 작업은 유엔군의 극적인 인천 상륙과 서울 수복의 임박으로 중단되고,
공산군과 공산당 조직은 서울 시가전 대비와 북으로으 후퇴를 서두르느라고
갈팡질팡이었다.
9월 20일, 한국군 해병대를 선두로 한 유엔군은 드디어 한강을 건너 서울
탈환의 마지막 공격을 가하고 있었다. 그때 경복궁 뒤뜰의 박물관 관사에서는
김재원 관장이 급히 영어로 된 신분증을 만들어 직원들에게 나누어주고 있었다.
드디어 박물관이 위치한 경복궁에도 포탄이 떨어지고 있었다. 중앙청이
불붙고, 몇 채의 고건물이 말아갔다. 남쪽에서 쫓겨 온 공산군의 일부가 궁
안으로 밀어닥쳐서 개인호를 파고 지뢰를 매설하는 등 서울에서의 마지막
저항과 시가전을 준비하고있었다.
박물관 직원들은 무서운 포화 속을 뚫고 경복궁을 빠져나와 유물이 있는
덕수궁으로 갔다. 3개월간의 공산치하에서 박물관 책임당원으로 등장했던
김영욱은 한 직원에게 "나는 북으로 떠납니다. 같이 가자곤 않겠습니다" 는 말을
남기고 사라져 갔다.
덕수궁미술관 지하창고에 모두 무사히 모인 박물관 직원들은 각자 최후의
안전처를 선택하여 미술관 건물과 옆의 석조전 지하실 금고 같은 곳으로 들어가
숨었다. 석조전에 포탄 하나가 명중하여 불길이 치솟았다. 유물이 보관돼 있는
미술관 건물이 불붙지 않은 것이 천행이었다. 최악의 공포속에 며칠이 지나갔다.
9월 26일, 유엔군은 마침내 서울을 완전 탈환했다. 유물들과 박물관 직원들은
극적으로 모두 무사했다. 석조전이 불탈 때 동료직원의 안전을 확인하려고
밖으로 나온 이홍직 학예감이 가까이에서 작렬한 포탄의 파편을 이마에 맞는
부상을 당했을 뿐이었다.
9월 28일 정부 수복. 29일, 이승만 대통령이 유엔군 사령관 맥아더 원수를
대동하고 공로로 서울 귀환. 수도 서울 탈환식 거행.
유엔군은 계속 북으로 공산군을 추격하고 있었다. 30일엔 북진하는 유엔군에게
38선 돌파명령이 내려지고, 10월 18일엔 '평양 입성' 이라는 전격적인 공세가
감행되었다. 그리고 11월 1일엔 마지막 선인 신의주와 한.만국경에 육박하고
있었다. 전쟁의 종식과 국토통일은 목전에 있었다. 그러나 거기가 고비였다. 10월
중순의 중공군이 개입하면서 전황은 급변하고 있었다.
정부가 중공군의 개입 기미를 발표한 것은 서울이 수복된 지 20일 후인 10월
17일이었다. 국립박무관에선 평양박물관 접수문제를 숙의하던 참이었다. 중공군
개입으로 인한 예측할 수 없는 불안한 정세를 주목한 김재원관장은 백낙준
문교부장관을 은밀히 만나 국립박물관과 덕수궁미술관 소장의 문화재를 남쪽의
안전지역으로 소개하는 대책이 긴급하다는 점을 협으했다. 백장관도 그 중요성을
금세 깨달았다. 그는 그 즉시 이대통령에게 가서 설명했다. 이대통령은
누구보다도 문화재의 인식이 높았다.
"극비로 속히 서울을 떠나게 하라. 부산의 안전처로 운반하되 민심이 동요치
않도록 비밀을 유지하다. 그리고 우반 도중의 보호에 최선을 다하되, 모든
기관이 협력하라."
대통령의 긴급 비밀지령이었다. 미국대사관에도 협력을 요청했다. 앞에서는
상황이 너무 급박했던 나머지 국가 문화재의 철수작전을 펼 겨를이 없었지만,
만냑에 대처하는 이번 비밀 소개계획엔 시간적 여유가 있었다. 미국대사관에선
크네츠 문정관(뒤에 워싱턴 인류학박물관 근무)이 최대의 협력으로 트럭을
마련해주고, 유엔군 작전열차 소에 특별 회차도 주선했다.
10월말, 국립박물관은 비밀 간부회의를 갖고 부산으로의 유물 운반계획에
착수했다. 김관장과 소수의 간부직원들만이 진행시킨 비밀 작업이었다.
덕수궁미술관 지하창고에 그대로 보호돼 있던 박물관과 미술관 소장품들은
밤중에 트럭에 실려 서울역으로 운반돼 갔다.
서울역에서 군용열차의 특별 회차에 실린 박물관과 미술관 유물들이 아무도
모르게 부산으로 출발한 것은 11월 4일이었다. 예측했던 대로 중공군의 개입이
치열해지기 시작한 때였다. 약 1주일 만에 부산에 도착한 1차 소개 유물들은
사전에 연락이 되어 급히 안전창고로 개조한 미공보관 건물(한국전쟁 발발
당시엔 대사관이 사용해다) 차고에 격납되었다. 유물관 간부들뿐이었다. 이들은
1.4후퇴 때까지 3차에 걸쳐 박물관과 미술관 유물을 무사히 부산으로 운반하는
데 성공했다. 중요한 물건은 거의 서울을 떠나고 있었다. 그러나 아직도 남은
물건은 있었다. 서역벽화 같은 큰 덩어리의 귀중한 유물이었다.
행방불명되어 사라진 국보들
인해전술로 유엔군을 위협한 중공군이 재차 서울을 유린했을 때에도 박물관에
남아 있던 유물엔 큰 피해가 없었다. 이번엔 북으로 실어 가려고 한 증거가
뚜렷했으나 기동력의 부족과 유엔군의 폭격으로 인한 위험 때문에 결국 뜻을
이룰 수가 없었던 것 같았다.
1951년 3월 14일, 유엔군은 서울을 다시 탈환하고, 다음날엔 정부 선발대가
서울로 올아왔다. 부산에 내려가 있던 박물관과 미술관에선 이번에도
미국대사관에 협조를 요청하여 서울에 남아 있는 물건의 각별한 보호조치를
강구했다.
미국대사관이 이기봉 서울특별시장을 위해 내준 비행기에 국립박물관의
선발대로 최순우 연구관이 편승하여 서울에 올라온 것은 3월 29일의 일이었다.
두 번에 걸쳐 무참히 파괴되고 부탄 이때의 서울은 그럴 겨를이 없던 전쟁
초기와는 달리 거의 대부분의 시민이 남쪽으로 피난하고 있어 군인과 경찰
선발대를 제외하면 황량하고 텅빈 도시였다. 박물관 직원으로서 혼자 서울에
올라온 최연구관은 이번에도 피난을 가지 못하고 숨어 지내던 나이 많은 수위
한 사람을 겨우 찾아내어 박물관에 남아 있던 서역벽화를 위시한 물건들의
포장과 부산으로의 4·5차 운반에 도움을 받았을 뿐이었다. 중공군이 다시
구파발까지 육박해 오는 춘계공세의 위험을 무릅쓴 임무수행이었다.
2차 서울수복 후의 두 차례에 걸친 나머지 유물의 부산 이동으로
국립박물관과 덕수궁미술관의 소장품은 거의 완벽하게 보호되었다. 부산의
미국대사관 차고를 임시 창고로 빌었던 유물상자들은 뒤에 경남 도지사의
주선으로 부산 시내의 한 약품회사 창고인 4층 콘크리트 건물로 모두 옮겨져
보호되다가 휴전과 함께 서서히 서울로 올라왔다.
한국전쟁 중에도 국립박물관 미술관 소자으이 국보와 기타 미술문화재들은
그처럼 완벽하게 보호되었지만 개인 소장품과 지방 사찰의 건물과 국보급 유물
중엔 적절한 대책이 없었던 탓으로 영원히 사라지거나 행방불명이 된 것들도
있었다.
1948년 10월게 강원도 오대산 골짜기(양양면 서면)에서 목기를 만들어 팔던
사람들이 산집을 짓다가 땅 속에서 기적적으로 출토시킨 국보급의 신라종이
있었다.
정원 20년(신라 애장왕 5년, 804년)에 만들어졌다는 명문이 들어 있던 이
동종은 같은 오대산지역의 '상원사동종'(725년명, 현재 국보 제36호)과
경주박물관의 '성덕대왕신종'(771년명, 현재 국보 제29호)에 이은 제3의
신라종으로 그것은 해방 직후의 최대의 발견이었다. 발견자인 산 속의 선량한
목기공들은 그 사실을 즉시 관계당국에 신고했었다.
문교부의 정보 연락을 받은 국립박물관의 황수영 연구관이 현장으로 달려간
것은 다음해 6월의 일이었다. 그러나 동종의 출토지는 38선에 접근한 삼엄한
전투지구여서 다가갈 수가 없었다. 그는 겨우 월정사까지 가서 자세한 얘기만
들은 후, 군에 협조를 요청하여 가능한 한 빨리 월정사로 옮겨다 놓도록
당부하고는 일단 돌아왔다. 그후 동종이 계획대로 무사히 월정사로 옮겨져
왔다는 연락을 받고 이홍직 연구관과 함께 두 번째로 오대산을 찾아간 것은
한국전쟁이 일어나던 1950년 정초였다. 그들은 처음으로 기적의 새로운 국보급
신라종을 보았다. '상원사동종' 및 '성덕대왕신종' 과 양식을 같이하는 높이 약
1m의 전형적인 신라종으로서 종몸 안쪽에 이두문으로 된 147자의 명문이 나타나
있었다. 입체적으로 사진도 찍고 종소리도 한번 울려 보았다. 맑고 신비스런
신라의 음향이 오대산의 자운을 흔들었다.
임진왜란 같은 때 왜병이 약탈에서 종을 보호하려고 중들이 땅 속 깊이 묻어
감추었던 것일까? 현장 조사에서 출토지 근처가 선림사터란 것만 밝혀졌을 뿐
수수께끼의 동종이었다. 그러나 다시 소생했으니 기적이었다. 한데, 누가
예측했을까. 한국전쟁 중 월정사가 불탈 때, 땅속에서 기적적으로 소생한 지
겨우 3년 만에 이 제3의 국보급 신라종은 누구도 보호대책을 쓰지 않아 무참히
녹아버리고 말았다. 비운의 신라종이었다.
한국정쟁 직전인 1950년 5월에 국립박물관에선 해방 후 처음인 국보특별전이
열렸다. 개인 소장품들도 거의 출품됐다. 그중에 대한민국 수립과 함께 초대
외무부장관을 역임한 창랑 장택상의 소장이었던 당시 국보 제413호의
'청화백자진사도문재접'도 포함돼 있었다. 해방 전까지 나이토라는 일본인이 갖고
있던 물건이었다. 창랑이 어떤 경로로 입수했는지 확실치 않으나 그것을
국보특별전에 출품하고 있었다.
안으로 큼집하고 탐스런 복숭하 셋을 꽃처럼 맞추어 배열하고, 그 사이에
가느다란 잎사귀를 장식적으로 그려 넣은 호화롭고 귀족적인 대접으로 일제
때부터 보물로 지정되었던 걸작 조선자기였다. 전시 기간이 끝나자 이 대접은
노량진에 있던 창랑의 별장으로 되돌아갔다. 그리고 한 달도 안되어 한국전쟁이
일어났다. 비극적인 3년간의 전란 끝에 휴전이 성립되고, 국보들의 안전 여부가
확인될 때였다. 창랑의 별장에선 '동란 중에 불타 없어졌다' 는 대답이었다.
확인한 그렇다고 믿지 않을 도리도 없었다.
청랑의 국보 대접은 그후 '동란 중 소실'로 국보목록에서 자동삭제되었지만,
이렇다할 해명자도 없이 '행방불명' 으로 처리되다가 1962년의 문화재 재지정
때에 와서야 국보 해제가 된 도자기가 또 하나 있다. 역시 한국전쟁 직전의
국보특별전에 나왔던 물건이었다.
당시 소장자는 장아무개였다. 미군정 말기에 수량과 내막을 알 수 없는
문화재들을 일본으로 불법반출시키고 자신도 일본에 건너가 살다가 죽은
골동상인이다. 해방이 되자 일본사람들의 소장품이었던 문화재를 가장 많이
독점해 갖고 있었다는 장아무개는 전에 아가와라는 일본인이 소장했던
지정보물인 고려자기 '철채백화당초문매병' 을 어느새 입수하고 있었다.
국보특별전을 기획하며 과거의 지정문화재들의 행방을 찾던 국립박물관의
관계직원이 그 고려자기가 일본으로 유출되지 않아 다행히 장아무개의 소유가
되어 서울에 있다는 사실을 처음으로 확인하고 거처를 수소문해보니, 그는
일본에 건너가 있고 물건만 박태식(뒤에 H증권 사장)이란 사림에게 잡혀져
있었다. 박씨는 그때 돈 5백만 환을 장아무개에게 빌려주고 그 담보로 도자기와
불상 등 약 50점의 고미술품을 맡아 가지고 있었다. 그중에 국보 고려자기(해반
후의 지정번호는 국보 제372호)가 들어 있었다.
박씨는 장아무개의 측의 허락을 받고 그 국보 고려자기를 국립박물관의
특별전에 출품했고 전시기간이 끝난 후 장아무개 측은 박씨에게 담보로 잡혔던
물건들을 도로 찾아버렸다(박태식의 증언). 그리고 얼마 안 있다가 한국전쟁이
터지고 국보 '철재백화당초문매병' 은 영원히 사라졌다. 장아무개가 다른 물건과
함께 일본으로 반출시켰다는 유력한 설이 있었으나 확인할 수 없었다. 협의자는
일본에 정착해 살았으나 그 국보 고려자기의 행방엔 일언반구의 증언도 없이
침묵을 지키다가 죽었다. 조국애나 민족의식이라곤 추호도 없던 골동상인이었다.
8.15해방을 전후한 시기에 부주의로 파괴되었다는 2점의 국보 고려자기가
있다. 그중의 하나는 당시 소장자의 해명이 애매하여 '행방불명'으로 여겨져
있고, 또 하나는 조각난 것이 확인되었으나 한국전쟁 후의 처리 여부가 불분명한
채로 세상에서 아주 잊혀져 있다. 해방 직전에 광산왕 최창학이 일본인 소장자
이도로부터 사 가졌던 '청자상감보상화문대접' 과 '보주문합자' 이다.
해방 후 과거의 지정보물을, 소재지나 건재 여부도 정확히 조사함이 없이 국보
명칭으로 모두 재지정할 때 국보 제371호의 번호가 붙여졌던 물건으로서 과거의
소장자가 밝힌 바로는 대접을 3만 원에, 그리고 합자를 2만 원에 샀다고 한다.
그러나 그의 국보 고려자기 입수 사실은 해방 후 몇 해가 지나도록 당국이
확인하고 있지 못했다. 국보 소재지의 변동 신고 없었기 때문이었다. 해방
전후의로 무질서한 사회상이었다. 최창학뿐 아니라 8·15로 인한 국보 유전
시기를 틈타 그것들을 입수해 가졌던 골동상인이나 돈 있는 수집가 가운데 그
사실을 당국에 자진해서 신고한 사람은 거의 없었다.
그런 가운데 국보특별전이 기획됐다. 최창학이 과거에 이도가 가졌던 국보
고려자기 2점을 입수하고 있다는 정보를 수장가 사회에서 확인한 국립박물관의
최순우 연구관이 출품을 부탁하려고 그를 찾아갔다. 그랬더니, 다음과 같은
해명이었다.
"내가 입수했던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8·15직전, 시골에 소개돼 갔다가
돌아와서 금고 속에 넣어 두었던 그 물건을 꺼내려다가 그만 실수하여 모두
깨졌다. 그래서 버리고 말았다."
그는 다섯 조각이 난 청자대접의 조각을 내보였다. 그러나 합자는 그때 아주
바스러졌기 때문에 쓰레기통에 버렸다는 것이었다. 어처구니없는 해명이었다.
아무리 바스러졌기로서니 물건이 지정된 보물이었는데 뒤에라도 관계당국자나
박물관 전문가에게 확인도 안 시키고 쓰레기통에 버릴 수 있었을까. 확실히 다섯
조각이 났던 대접은 잘 붙여 수리한다면 원형만은 되찾을 수 있었다. 그러나 그
조각들조차 한국전쟁과 소장자의 타계로 영영 증발하고 말았다. 완전히
바스러졌다는 합자와 능히 복원할 수 있었던 깨진 대접 조각들이 모두 일본으로
건너갔다는 풍문이 있었으나 이 역시 확인되지 않았다.
다음은 한국전쟁 중에 행방불명이 된 국보 불상 한 쌍의 수수께끼이다. 동란
직전인 5월에 국보특별전을 끝낸 국립박물관의 김재원 관장과 김원룡·최순우
연구관 일해이 광주 조선대학의 특별초청으로 한국의 고미수에 관한 강연을
하러 내려갔다. 강연 일정을 마친 일행은 광주 일원의 문화재와 유적을 살피게
되었다. 그들은 무승산 기슭의 고찰인 증심사에 전해 오던 당시 국보 제211호의
'금동석가여래입상' 과 제212호의 '금동보살입상' 을 보러 찾아갔다. 그런데, 절에
이르러 주지에게 들으니, "무등산 일대에 공비 출몰이 심하여 작은 국보
불상들은 경찰서로 옮겨져 보호되고 있다" 는 것이었다.
김관장 일행은 그 길로 경찰서로 향했다. 국보가 옮겨진 사실과 그 상태를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과연 서장은 안전한 금고 속에 귀중히 모셔 두었던 두
불상을 내보이며 '부득이한 보호조치' 라고 설명했다. 사실 거기까진 참으로 잘한
국보 보호의 잠정적 대책이었다. 그러나 1933년에 증심사 오층석탑 속에서
발견된 자그마한 이 두 국보 신라불(높이 15cm내외)은 그때 국립박물관의
김관장 일행이 본 것이 마지막이었다. 예기치 못했던 비극의 한국전쟁이
일어나자 서장은 위급한 임무를 수행하느라고 금고 속의 국보 불상엔 신경을 못
썼고, 그후 어떻게 된 것인지 알 수 없다는 것이다.
휴전 후, 서울에서 관계전문가가 현지에 내려가 보았으나 두 국보 불상의
행방을 알거나 증언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동안 경찰서장도 여럿이
바뀌고 있었다. 불상을 보호한다고 가져갔던 경찰서자의 변명은 의심하자면
충분히 위문스러웠다. 아무리 정세가 급했다고는 하지만 자신이 아주 귀중하게
금고 속에 모셔 보호하고 있던 작은 국보 불상 2개쯤 살릴수 없이 버리고
떠났을까. 그러나 때가 때였던 만큼 증심사 국보 불상의 행방불명은 어떤 책임
추궁도 없이 기정사실로 돼버렸고, 10년 후의 국보 재지정 때에 가서는 이미
없어진 물건으로 처리하여 목록에서 사라졌다.
지금은 후전선 바로 남쪽에 위치하지만 강원도 간서의 건봉사는 한국전쟁
전까지는 38선 이북이었다. 이곳에 일제 때에 이미 보물로 지정된 고려시대의
'마지금니화엄경' 권46과 정호 2년명(고려 고종 1년, 1214)의 '동제은상감향로'
가보존 돼 있었다. 해방후 서류상의 국보 번호 제412와 제419호였다. 이 두
국보도 한국전쟁 중 행방불명이 되었다. 화엄경은 1951년 5월 20일 건봉사
건물들이 폭격으로 불탈 때 없어졌고, 향로는 한국전쟁 전에 북한에서 외금강
신계사의 유물수집소로 이전시켰다는 설이 있으나 확실치 않다.
한국전쟁 당시의 주지로부터 들었다는 어떤 증언자의 말을 빌리면, 향로도
한국전쟁 때까지 그대로 건봉사에 보관돼 있었고, 절이 온통 불탈 때 누군가가
밖으로 굴려내는 것을 분명히 보았으니 그 뒤 행방불명이 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확실한 얘기인지 이 또한 믿기 어렵다.
한국전쟁 당시 국보 제276호였던 진주의 유서 깊은 촉석루가 원인 모를
폭탄에 맞아 완저히 불타버린 것은 유엔군이 진주를 점거했던 공산군을
격퇴시킨 지 20일 후인 1950년 9월 1일의 일이었다.
공중에서 느닷없이 낙하해 온 폭탄 하낙 촉석루 지붕 한복판에 직총으로
맞아 작렬했다고 한다. 그리고 장중했던 2층 누각의 고건축물은 화염속에 사라져
갔다. 돌발적인 참사였다. 유엔군의 반격으로 퇴각당했던 공산군의
박격포탄이었을까?
현재의 건물은 1959년 진주 시민들이 복원한 것으로 과거의 원형을 그대로
재현시키고 있다. 진주의 전설적인 명승지인 남강의 절벽 위에 위치하는
촉석루는 역사가 밝혀주고 있듯이 임진왜란 때 의기 논개가 왜장 게다니를 끼고
남강물로 떨어져 죽은 조국의 상징적 명소이다. 진주 시민들은 과거의 국보
건축물을 재현시키는 동시에 논개의 구국정신을 길이 살리는 명소를 되꾸민
것이다.
촉석루가 불탈 때, 경북 안동에서는 국보 제302호로 지정 보호되던 문묘
대성전에 직격탄이 명중하여 박살이 났다. 이 대성전 건물은 전북 장수의 향교
건물과 함께 조선 초기의 양식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건축문화재였다.
휴전이 성립되고 2년 후인 1955년, 지리산의 빨치산들이 마지막으로 소탕될
때였다. 전남 승주군에 위치하는 명찰인 송광사의 여러 국보 건축물 중 백운당과
청운당이 그동안 절을 점령하고 있던 빨치산들의 방화로 깡그리 불타버리고
말았다. 국보 제404호로 지정돼 있던 건물이었다.
불길은 대웅전에서부터 치솟았다. 이어서 백운당과 청운당으로 번지면서
송광사 경내는 순식간에 온통 불바다로 변했다. 산밑 마을로 쫓겨 가있던 3명의
스님이 위험을 무릅쓰고 달려가 필사적으로 불을 끄려고 했지만 그 엄청난 불
앞에선 속수무책이었다. 한 스님이 마을로 다시 뛰어 내려가서 사람들을
동원시켰을 때는 이미 대웅전과 국보 건물인 백운당.청운당은 잿더미로 변하고
있었다. 그러나 마을 사람들의 협력으로 스님들은 다른 국보 건물인 국사당(현재
국보 제56호)과 하사당(현재 보물 제263호)만은 살릴 수 있었다. 그때 화재를
면한 약사전도 지금도 보물 제302호로 지정돼 있다.
신라 말엽에 창건된 국내 최대 명찰의 하나인 송광사는 지금도 국보와 보물을
가장 많이 지니고 있는 절로서 유명하다. 빨치산 점령 하의 최악의 수난과 화재
때 국보 건물 두 채와 많은 부속건물을 잃긴 했으나 스님들은 나머지 국보와
기타 유물들을 잘 보호했다. 현재 이 절엔 건물 아닌 불교 미술품과 고문서로
10점의 국보와 보물이 간직돼 있다.
같은 전남지역인 장흥군의 보림사 대웅전이 포탄에 맞아 불타 없어진 것도
한국전쟁 중의 참화였다. 2층 팔작지부에 속속들이 웅건한 건축양식을 보여주던
조선 초기(추정)의 이 대웅전 건물은 당시 국보 제240호로 지정돼 있었다.
여기서도 국보 건물의 대웅전은 잃었으나 나머지 국보 석탑과 부도 및 탑비엔
큰 피해가 없었다.
곡성군 관음사의 국보 건물이었던 원통전의 경우는 한국전쟁 직전인 1950년
봄에 빨치산들이 불질러 타버렸다는 설이 있는가 하면,작고한 고건축 전문가
임천은 일제 때(1930년 전후)에 실화로 불탔다고 증언한 적이 있어 확실한
내막을 알수 없으나 해방 후에도 국보 제273호로 지정문화재 목록에 올라
있었다. 이 관음사는 또 국보 제214호의 '금동관세음보살좌상'도 소장하고
있었는데, 원통전이 불탈 때였는지 아니면 한국전쟁 때의 어떤 수난으로였는지는
모르지만 크게 깨져 국보의 면모를 상실했고, 지금은 목록에서 삭제돼 있다.
제6장 매장문화재
새롭게 시작한 조사 및 발굴
8.15 해방 후 한국인 조사 연구팀에 의한 최초의 문화재 조사 발굴은 1946년
5월에 경주 노서리의 파괴된 고분에서 실시되었다. 국립박물관의 김재원 관장이
지휘하고, 현지에서 경주 분관장이 협력한 시험발굴이었다. 실측은 과거
총독부박물관 때부터 경험이 많은 유일한 전문가인 임천, 그리고 사진 촬영은
이건중이었다.
발굴은 의외의 성과를 거뒀다. 뒤에 '호우총' 으로 명명된 이 고분에서는
뜻밖에도 고구려 때 광개토대왕을 기념하여 특별히 만든 청동합형용기가
발견되어 학계를 놀라게 하였다. 굽 밑에 '을묘년구강상광개토지호태왕호우십'
이라는 명문이 양각돼 있었다. 이 호우는 삼국시대 신라고분의 연대 고찰에
하나의 중요한 근거를 제시해주었다. 을묘년은 서기 415년으로 추정되었다.
호우총에서는 그 밖에도 순금 귀고리 한 쌍과 '목심칠면' 같은 특이한 유물이
출토됐다.
인접한 또 하나의 고분에서도 순금 귀고리 한 쌍과 목걸이 한 쌍이
출토되었다. 이 고분은 그 후 '은령총' 으로 명명되었다.
1947년 5월엔 개성 남쪽의 장단군 진서면 법당방의 고려 벽화고분이 두
번재로 발굴 조사되었다. 이때의 조사 발굴팀은 경주 고분 발굴후 국립박물관
연구원으로 들어온 이홍직 김원룡을 중심으로 임첨과 이건중이 이번에도 실특과
모사 그리고 사진을 담당했다. 현지에서는 당시 개성분관원이었던 최순우가
참가했는데, 법당방 벽화고분의 최초의 조사 발견자가 바로 그였다. 그는 그해
3월 18일, 지방의 고미술 애호가인 강필운과 함께 고적조사를 나갔다가 우연히
3기의 고려고분을 발견했던 것인데 그중 가운데 것이 석실내부에 귀중한 벽화를
지니고 있었다.
동서남북의 네 벽에 그려진 벽화의 주제는 관을 쓴 인물 초상이었고, 천장에는
천체도가 그려져 있었다. 이 벽화는 1916년에 역시 개성 남족인 개풍군 청교면
양릉리 수락암동의 석실고분에서 발견된 이후 두 번째인 고려 고분벽화의
출현이었다. 부장 유물은 이미 도굴당하고 없었다. 마을의 노인들의 증언은
"수십 년 전(한일합방 전 후)에 수명의 일본인 도굴꾼이 총을 메고 와서 마을
사람들을 가까이 오지 못하게 위협하면서 모두 파 갔다" 는 것이었다. (이홍직,
고려벽화분발굴기, 1954년).
국립박물관 연구관에서 일할 사람들이 짜여지면서 한국인들에 의한
민족문화재의 연구 조사 및 발굴 활동이 차차 기틀을 잡게 되었다. 1948년에는
세 번째로 경주 황오리 고분이 조사 발굴 되었다. 이 해엔 또 국립박물관의 첫
고적조사 보고인 (호우총 은령총)이 간행되었다. 미국을 비롯한 선직국과의
정보교환도 이루어지기 시작했다. 그러나 1950년 5월의 국보특별전 기획 등으로
더욱 틀리 잡히던 국립박물관은 북한 공산군의 불의의 남침으로 최대의 시련을
겪게 되었다.
한국전쟁 중, 국립박물관 소장 유물의 보호는 모든 박물관 직원에게 부과된
최대의 사명이었다. 다행히 박물관 문화재들은 9·28 수복까지의 공산 치하
3개월 동안 무사했고, 그 후 1·4 후퇴를 전후한 5차에 걸친 부산으로의
비밀철수작전으로 성공적인 보호가 이루어졌지만 거기엔 위험이 따랐다.
한국전쟁 중 부산에 임시 건물을 빌려 기능을 재 수습하는 동안에도
국립박물관은 제한된 연구 조사 활동을 수행했다. 1952년 3월엔 경주 금척리의
신라고분이 발굴되었는데, 이것은 경주-대구간 도로확장공사로 파괴 노출된
2기의 고분에 대한 조사 발굴이었다. 다음해 6월과 7월에는 역시 경주 노서리에
위치하는 신라 고분 제 137호와 제 138호가 발굴되었다. 138호분에서는 희귀한
반형토기와 골호 및 뚜껑이 있는 장경호 등이 출토됐다.
국립박물관의 활동은 다시 차근차근 본궤도를 되찾고 있었다. 1955년 11월에는
경주 황오리에서 두 번째 발굴이 시도되었다. 이때의 발굴 책임자는 당시 경주
분관장이었던 진홍섭 교수 였다. 도시계획에 따른 도로공사중 처음으로 드러난
이 고분에서는 순금 반지와 팔지 마구 무기 기타 토기들이 발견되었다.
문화재 보호법의 제정. 공포
한국전쟁 후에 새로운 보물을 탄생시킨 가장 사건적인 문화재 보수공사가
1959년에 있었다. 경북 칠곡군 동명면 송림사의 쓰러져 가던 통일신라시대의
오층전탑(당시 국보 제313호, 지금은 보물 제 189호)에 정부예산으로 보호의
손길이 미친 것은 그때 4월의 일이었다. 탑을 해체 수판으로 오려 만든 금빛
찬란한 작은 사리탑은 그 안에 새파란 유리로 된 너무나 아름다운 형태의
사리병을 안치하고 있었다. 또 은판을 투각한 섬세한 나무 모양의 상징적인
금구엔 금실로 고정시킨 무수한 영락들이 매달려 있었다. 그밖에도 수십 점의
각종 유물이 들어 있었다. 다만 12세기의 고려청자 합 하나가 따로
발견되었는데, 이 뜻밖의 유물은 고려 중엽의 중수 사실을 말 해주는 증거였다.
현재 이 귀중한 송림사 전탑유물들은 보물 제 325호로 일괄 지정되어
국립중앙박물관에 진열돼 있다.
같은 해 12월엔 경주 동남쪽 동해안께의 감은사터(월성군 양북면 용당리)의
삼층석탑(현재 국보 제112호) 2기를 해체 수리하다가 이번에도 통일신라시대의
놀라운 미술문화를 재확인시키는 걸작 사리장치 유물들을 발견했다. 유물들은
동서 쌍탑 중 서쪽 탑 속에 들어 있었고, 청동제 사리기와 사각감이 나왔다.
특히 정방형의 기단을 가진 보탑형의 사리기를 중심으로 난간 네 귀통이에
배치한 주악천인들과 높직한 기단의 사면을 파고 넣은 팔부신장은 일찍이 볼수
없었던 최고의 의장이었다. 이 감은사 석탑유물들도 보물 제 366호로 지정되어
현재 국립중앙박물관에서 볼 수 있다.
1960년을 전후한 시기는 정부 당국은 물론 매스컴을 포함한 일반 국민들의
민족문화재에 대한 인식이 급속도로 높아지던 때였다. 동시에 지난날 일본인
도굴꾼과 악질적인 수집가들의 앞잡이 혹은 하수인으로서 매장 문화재에 관한
지식을 쌓았던 일부 골동상인과 그들의 조직망에 의한 불법적인 도굴이
곳곳에서 성행하기 시작한 것이 이 시기였다. 그들의 배후에는 돈 많은
장물아비와 수집가가 있었다. 정부의 적극적인 대책이 시급히 요구되는
상황이었다. 이 시급산 문제에 강력히 대응한 것이 문화재보호법의 제정,
공포였다.
1962년 1월 10일자로 공포된 전문 7장 73조, 부칙 3조의 이 문화재보호법은
처음으로 문화재의 개념과 종류를 설정하고( 1)유형,무형문화재 2)기념물
3)민속자료), 정부 자문기구로 전문적인 문화재위원회의 설치를 규정했다. 이
문화재보호법은 또 매장문화재의 처리규정과 발견 혹은 신고자에 대한
표창(보상) 그리고 불법적인 도둑이나 임의의 취득자, 그밖에 문화재의 불법적인
국외반출자에 대한 강력한 처벌도 규정하고 있었다.
무엇보다도 선량한 매장 문화재의 발견 및 신고자에 대한 응분의 표팡과
보상규정은 획기적이었다. 밭을 일구다가, 혹은 토목공사장에서 우연히 출토시킨
문화재를 지방 행정계통을 통하거나 문화재 관리국 또는 국립박물관에 직접
신고했을 때, 물건의 귀중성과 가치평가에 준해서 정부가 적절한 보상금을
지불한다는 이 규정은 골동상인들에 의한 중간 탈취와 귀중한 발견 문화재가 또
다시 종적을 감추는 악폐를 막을 수 있을뿐 아니라 선량한 발견 및 신고자를
위해서도 지극히 고무적인 조처였다.
가령 시골의 한 주민의 국보나 보물급의 유물을 우현히 출토시켰다고 할 때,
만일 뜨내기 골동상인에게 적당히 처분하려 든다면 최소의 가격으로 빼앗기기가
일쑤다. 그리고 공돈이라고 몇 푼 받고 물건을 거저 빼앗겼다가 매장문화재
발견의 신고를 이행하지 않은 사실이 적발되면 그는 법에 규정된 처벌을 면할
수가 없다. 그런 일이 실제로 수없이 있었다. 대개 법을 모르는 시골 사람들이
당하는 일이다.
또 그전까지는 매장문화재를 발견한 사람이 그 사실을 당국에 신고한
경우에도 국가에서 적절한 표창이나 정당한 보상이 없어 섭섭히 여긴 일이
많았다. 그런 일은 발견자로 하여금 굳이 신고할 생각을 하지 않게 하는 결과를
빚고 있었다. 그런 모든 부당한 처사에 정부가 현실적으로 대처한 것이 '표창과
보상'의 명혹한 규정이었다.
매장문화재를 발굴한 사람들
1963년 5월 2일의 일이었다. 경남 밀양읍 용평일에 살던 김락화(당시 23세) 들
3명의 청년이 가까운 호성리의 형원사 절터 쪽으로 나무를 하러 갔다가
부도탑이 세워져 있던 자리에 반쯤 흙에 묻혀 있는 기단부 석재를 호기심으로
들춰보다가 깜짝 놀랐다. 밑에서 석실이 나타나고, 그 안에는 온갖 무늬를 가진
파란 빛깔의 눈부신 옛날 그릇들이 들어있었다. 세어 보니 사기 그릇이 모두
8점, 그리고 유기그릇이 하나였다. 일찍이 본 적이 없는 희한한 옛날
그릇들이었다.
청년들이 발견한 그릇들은 모두 고려시대의 상감청자로 '죽조화초문매병'하나,
'운봉문'과 '모란학국연화문'의 대접이 둘, 나머지는 팔각접시들이었따.
유기그릇은 뚜껑이 있는 합이었다.
순간적인 호기심에 발견해낸 이 매장문화재들이 어떤 경로로 신고됐는지는
상세히 밝혀져 있지 않으나 그후 경북대 박물관에 보관되다가 문화재 관리국이
출토경위를 조사 확인한 후 국가 귀속물로 접수했다. 그리고 정부는 1년후
발견자인 3명의 청년에게 '매장문화재 발견 및 신고자에 대한 보상규정'에 따라
물건의 가치평가로 책정한 10만원의 보상금을 지불했다. 이는 문화재보호법이
제정된 후 중요한 매장문화재의 발견자가 정부로부터 처음으로 큰 액수의
보상금을 지불했다. 이는 문화재 보호법이 제정된 후 중요한 매장문화재의
발견자가 정부로부터 처음으로 큰 액수의 보상금을 받은 매우 고무적인 사례의
하나였다.
앞의 경우는 문화재보호법에 따른 정상적인 귀착이고 보상이었다. 그러나
아직도 매장문화재의 발견을 큰 횡재로 여기고 몰래 숨겨 갖고 있다가 많은
돈을 받고 팔아먹으려고 이리저리 찾아다니는 사람들이 있었다. 밀양에서 나무를
하러 다니던 가난한 청년들이 귀중한 고려자기들을 출토시킨 지 50일 후인 6월
22일에 경북 월성군 천북면 북군리의 저수지 근처에서 높이 44cm에 둘레가
46X50cm나 되는 최초의 대형 가형토기를 우연히 발견한 황모 노인의 경우가
그러한 예의 하나였다.
황노인은 장마비가 쑤셔놓은 저수지 북쪽의 모래밭을 걷고 있었다. 한참
걷다보니 눈앞에 시커멓고 이상한 물건 하나가 모래 위로 솟아나와
있었다.다가가서 조심스럽게 파내어 보니 완전한 형태의 큼직한 기와집
토기였다. 노인은 크게 값나갈 옛날 물건임에 틀림없다고 판단했다. 그는 꿈을
잘 꾼 횡재라 생각하면서 아무에게도 그 사실을 알리지 않은 채 경주의
골동상을 찾아갔다. 경주에서는 윤아무개(그 후 수차 문화재 도굴사건에 관련된
혐의로 구속되었고, 한때는 복역까지 한 골동상)가 4만 원을 집어주고 물건을
잡았다. 물론 불법적인 거래였다. 법적으로 그것은 장물이었다.
귀중한 대형 가형토기의 출토 사실과 그것이 불법적으로 거래되었다는 정보를
입수한 당시 박일훈 경주박물관장이 장물을 산 윤아무개를 찾아가 문화재
보호법의 매장문화재 규정에 입각한 국가 귀속을 주장했으나 그는 그 자리에서
15만 원을 요구했다. 마땅히 국가에 귀속돼야 할 물건을 움켜쥐고 흥정하자는
것이었다. 그는 법을 냉소하고 있었다. 경찰에 고발할 수 있었지만 경주박물관은
좋게 물건을 입수할 방법을 찾기 위해 일단 문제의 가형토기를 인수하여 서울의
국립중앙박물관으로 갖고 왔따. 그러나 국립중앙박물관이 그것을 불법적인 장물
취득자로부터 살 수는 없었다.
"국가에서 안 사주겠다면 딴 곳에 팔겠다."고 호언하는 윤아무개가 물건을
다시 찾아가자. 박물관 측에서 할 수 없이 경찰에 협조를 의뢰했다. 끝가지
버티려던 윤아무개는 뒤잡은 가형토기를 경주에서 다시 서울로 갖고 올라와서
팔 만한 곳을 찾고 있었다. 서울에는 지방에서 올라오는 희귀한 물건을
사회적으로 신분이 높거나 좀처럼 접근하기 힘든 수집가들에게 안전하게
팔아주고 구전을 먹는 이를테면 거물급 골동상인들이 있었다.
서울에 올라온 윤아무개는 그들과 접선하고 있었다. 반면 경주박물관측에선
그의 행동을 계속 감시하고 있었다. 서울로 뒤쫓아온 한 박물관 직원이 그의
거처를 찾아냈을 때에는 모처에 50만 원을 받고 팔기로 이미 계약이 돼 있다고
호언하고 있었다. 그러나 경찰이 지명수배하고 있는 사실을 알자 그는 기가
죽었다. 그는 체념한 듯이 물건을 내놓았다. 7월 19일의 일이었다. 결국 국가가
매장문화재로 압수한 그때의 대형 가형토기는 현재 국립중앙박물관에 들어가
있다.
1963년 7월 16일. 경남 의령군 대의면 하촌리에서 칠순 고령의 시어머니와
5남매를 거느리고 막벌이 가장 노릇을 하던 가난한 강갑순 여인(당시 41세)이
18세의 큰아들 전병철 군을 데리고 마을 밖의 도로공사장에 나가 돌을 나르는
일을 하고 있었다. 공사장은 야산 비탈이었다.
강여인이 아들과 둘이서 묵묵히 돌무더기를 헤치고 있을 때였다. 곡괭이에
널찍한 잡석하나가 덜컥 걸려 젖혀지면서 무심히 그 밑으로 시선을 보내던
모자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금빛 찬연한 작은 부처님이 반듯이 눕혀져 있었던
것이다. 부처님이 눕혀져 있는 공간은 폭 30cm, 길이 40cm, 그리고 깊이가
30cm가량이었다. 잡석으로 급히, 그러나 정성껏 꾸며진 작은 석실이었다.
부처님은 배모양의 광배를 뒤로 붙이고 있는 높이 약 16cm의 완전한
'금동여래입상'으로 광배엔 많은 글자가 새겨져 있었으나 발견자인 촌부와
소년은 그것이 얼마나 귀중하고 값진 옛날 유물인지를 알 턱이 없었다. 그들은
다만 금으로 만든 부처님인가보다고 속으로 마음을 설레고 흥분했을 뿐이었다.
그들의 수상쩍은 흥분을 눈치챈 사람은 없었다.
그날의 품일이 끝났을 때 강여인은 아직도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부처님을
품속에 소중히 품고 아들과 함께 집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며칠이 지나자 소문이
나기 시작했다. 이윽고 마을 사람들이 다 알게 되었다. 강여인은 부처님을 집안
깊숙한 곳에 꼭 간직하고 있었다. 동네 어른들이 법에 따라 경찰에 가서
발견경위를 신고하고 물건도 바쳐야 할 것이라고 타일렀다. 가난했으나 그지없이
순박하기만 했던 강여인은 동네 어른들이 시키는 대로 따랐다.
대의면 지서에 신고된 강여인 발견의 매장문화재 금동불은 곧 경남 도당국에
보내진 후, 즉각 문교부에 보고 되었다. 그리고 수차에 걸친 전문가들의 현지
조사와 불상의 평가가 이루어졌다. 그 결과 남한지역에서 출토된 유일한
고구려불로 밝혀졌다. 전체적으로 뛰어난 조각미와 균형을 가진 이 의외의
고구려불은 특히 광배에 새겨진 '연가 7년' 으로 시작되는 4행 47자의 아주
귀중한 명문을 지닌 최대의 국보급이었다. 관계학계는 해방 후 땅 속에서 출현한
불상으로는 가장 큰 발견이라고 놀라움을 표시했다. 다만 출토지가 그런 불상이
나타날 만한 절터도 아니며, 그럴 수 있는 불교 유적지도 아닌 점이 수수께끼로
남았다.
불상은 그해 12월 4일, 서울로 올라와 즉시 국보 제 119호로 지정된 후
국립박물관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1년 동안의 법적 공시기간이 지난 1964년 10월
14일, 발견자인 강여인은 생전 처음으로 서울에 올라와서 특별히 문교부 장관이
수교하는 보상금 20만원을 받았다. 그때 불상이 출토된 땅의 임자였던
전형진(당시 56세)도 20만 원을 보상받았다. 지하 출토유물인 매장문화재의 국가
귀속과 함께 정부가 책정한 40만 원을 법에 따라 발견자와 반씩 나눈
금액이었다. 그것은 문화재보호법이 제정 공포된 후 최대 액수의 보상이었다.
한편 강여인이 즉각 국보로 지정될 만큼 참으로 귀중한 '연가 7년명'의 고구려
불상을 돌더니속에서 기적적으로 출토시키던 무렵, 같은 의령군의 봉수면
서암리에서도 높이 12.5cm의 '금동여래입상' 하나가 출토되었다. 서암리에 사는
농부 엄필섭(당시 50세)이 강우술 소유의 논바닥에 쌓여 있는 돌무더기를
헤치다가 뜻밖에 발견했던 것인데, 발견자는 마땅히 자기 소유물인 것으로
착각하고 그 불상을 2년 이상 집에 간직하고 있었다. 그러나 결국 그 사실을
마을 사람들이 알게 되자, 경찰이 매장문화재의 불법 점유를 들어 법적으로
압수하기에 이르렀다. 1966년 2월의 일이었다. 불상은 곧 서울로 보내져
국립박물관에 들어갔다. 국가 귀속이었다. 비록 스스로 신고하지 않았던
압수물건이긴 했으나 정부는 법을 몰랐던 발견자와 출토지 임자에게 12만원의
보상금을 지급했다.
중요한 매장문화재를 출토시켜 정부로부터 10만 원 이상의 보상금을 받는
사례가 날로 잦아졌다. 그것은 일반의 문화재에 대한 새로운 인식의 반증이었다.
정부 행정망과 매스컴의 계몽도 컸다.
1964년 4월 12일에 강원도 횡성군 횡성면 향교리의 논에서 고려시대의
청동범종 하나와 기타 청동향로, 쇠솥,고려청자 등 모두 6점을 출토시킨 윤성복,
박광선 등 4명은 발견 유물을 곧장 당국에 신고하여 국가에 귀속시킨 후
30만원의 보상금을 받았다.
같은해 5월 27일엔 대구 시내의 육군 503방첩대 건물의 대장실 마루밑에서
전기 누전방지공사를 하던 전기공 백승원 씨가 8.15때 일본인들이 숨겨두고 갔던
삼국시대의 와당과 토기, 그밖에 고려자기 조선자기 청동자기 등 142점의 유물을
무더기로 발견하여 1년 후에 14만 4천 원의 정부 보상금을 받았다. 백씨가
발견한 물건들은 지난날 대구의 그 건물에 살았던 악명높은 일본인 수집가
오구라가 8.15을 전후해서 중요한 것들은 모조리 일본으로 갖고 가고, 미처
가져갈 수 없었던 나머지를 마루밑에 감쪽같이 감춰두었던 것으로 해방 후 19년
만에 처음으로 그 사실이 드러난 것이었다. 그런데 그때가지 일본에 살아 있던
오구라(당시 96세)의 반응은 너무나 뻔뻔스러웠다.
"예전에 내가 살고 있던 집에서 찾아냈다는 물건들 중 일본 그림을 포함한
59점을 돌려달라"는 수작이었다. 그해 10월에 그런 뻔뻔스러운 요구를 적은
오구라의 편지를 친절하게도 서울의 문화재관리국에 전해준 재일 교포가 있었다.
그때 "일본 물건을 돌려받고 싶으면 오구라 자신이 일본에 반출해 간 수천 점의
중요한 한국문화재부터 먼저 돌려 보내야 할 게 아니냐?"고 누가 반문하자
이아무개라는 쓸개 없는 교포는 자기가 답변할 성질이 아니라고 회피하여
빈축을 샀다.
20년 가까이 교묘하게 은닉돼 있던 오구라 수집품의 일부는 그것들이
발견됨과 동시에 과거의 적산문화재로 국가에 귀속되어 경주박물관에서 모두
인수했다.
고철수집상이던 윤태진, 윤석진 형제가 휴전선 가까운 경기도 연천군 백학면
원당리의 영농지역에서 높이 약 37cm의 고려동종과 1369년에 만들어 졌다는
44자의 귀중한 명문이 새겨져 있는 '청동반자'를 철물탐지기로 출토시킨 것은
1966년 1월 17일이었다. 경기도 파주에 주소를 둔 잡상인이었던 윤씨 형제는
비록 생활은 가난했으나 마음씨가 착했다. 그들은 철물탐지기에 걸려 나온 옛날
유물인 동종과 반자를 들고 자진해서 서울의 덕수궁미술관(1969년에
국립중앙박물관에 흡수됨)을 찾아갔다.
"보통 고철로 팔아넘기기엔 좀 아까운 귀중한 옛날 물건 같아서 갖고 왔으니
중요한 것이면 나라에 바치겠다."
윤씨 형제의 선량하고 소박한 말이었다. 미술관엔 마침 이호관 연구관이
있다가 물건을 인수하고 그들에게 국가 보상의 길을 열어주었다. 1년 후, 그들은
35만 원의 보상금을 받고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윤씨 형제가 고려동종과 반자를 출토시킨 지 8개월 후인 9월 6일에는 또 전남
고흥군 포두면 송산리에서 돌담을 헤치던 정병임이란 사람이 역시 고려시대의
동종 하나를 발견하고 당국에 신고한 수 10만원의 보상금을 받았다. 그리고
그보다 앞서 5월 9일에는 '연가 7년명' 의 고구려 불상과 또 하나의
'금동여래입상' 을 출토시킨 경남 의령지방의 칠곡면 외조리 뒷산에서 조선 중종
23년(1528)에 꾸며졌던 왕자 숭수아지씨의 태실이 발견되고, 그 속에서 왕실의
백자항아리와 태의 주인공을 기록한 태지판이 2장이 나타났다.
발견자는 마을의 전용중 씨였다. 그는 산을 개간하다가 우연히 태신을
발견했던 것인데, 그 속에서 나온 유물들을 고스란히 당국에 신고하여 12만원의
보상금을 탔다. 1964년 10월에 서울의 김아무개라는 골동상인이 박아무개 등의
도굴꾼을 시켜 전국의 조선 왕실태릉을 계획적으로 도굴, 수십 점의 품질 좋은
백자항아리를 불법적으로 꺼내 암매해 먹다가 적발당해 모두 구속되었던 사건을
상기할 때 잊혀졌던 의령태릉에서 출토된 유물의 법적인 수습은 참으로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매장문화재의 발견 및 신고자에 대한 기록적인 보상은 1967년 1월 28일에
서울 성북구 삼양 1동 108번지의 산비탈에서 백제불로 추정된
'금동관음보살입상' 이 출토되었을 때였다. 발견자는 6년 전에 제기동 집을
화재로 잃은 후 삼양동 골짜기의 국유지에 집을 마련하고 살던 박용출 씨(당시
52세)였다.
전날 밤 꿈에 집 뒤의 비탈이 무너져 내리면서 온 식구가 깔려 죽는 일을
당했던 박씨는 아침에 눈을 뜨고도 불안한 생각이 가시지 않아 장남과 함께
새삼스럽게 위험이 느껴진 쪽으로 깊게 하수도 공사를 착수했었다. 1m쯤 땅을
파 내려갔을 때였다. 괭이 끝이 금속물에 닿는 예리한 음향이 울려 나왔다.
출토되자마자 국보 제 124호로 지정되어 120만 원이라는 기록적인 보상금을
책정케 한 삼국시대의 걸작 불상인 높이 20.7cm의 '금동관음보살입상' 이
출토되던 순간이었다.
박씨가 꿈 때문에 출토시킨 금빛 찬란한 보살상은 괭이로 맞은 옷자락 부분이
약간 부서졌을 뿐 완전한 상태였다. 떨어졌던 부분도 흙속에서 찾아냈다. 독실한
불교신자였던 박씨는 며칠간 그 부처님을 모시고 있다가 당시 동국대학교
박물관의 불상전무가인 황수영 교수를 찾아가 평가를 요청했다. 황교수는 그
자리에서, '국보급의 놀라운 불상' 이라고 경탄하고, 속히 법적 절차를 밟아
문화재 관리국에 신고하는 것이 좋겠다고 권고했다. 발견자는 황교수의 말을
따랐다.
2월 7일, 서울지역에서 출토된 놀라운 삼국시대 불상은 발견자의 자진 신고에
따라 매장문화재로서 국가에 귀속되었고, 이어서 즉각 국보로 지정되었다.
발견자 박씨는 문화재보호법 제 47조(매장문화재) 규정에 의한 1년동안의 유실물
공고기간이 지나자 책정 보상액이었던 120만 원의 절반인 60만 원을 받았다.
(나머지 절반은 법적으로 출토지의 땅임자가 받게 돼있다).
1967년엔 100만원대의 보상금을 받은 매장문화재의 발견 신고자가 잇달아
나왔따. 정초에 서울에서 국보 '금동관음보살입상'이 발견된 데 뒤이어 4월
18일에는 고철수집상 이영주 씨가 경기도 여주군 금사면 상품리에서
철물탐지기로 동종 하나와 기타 유물을 출토시켜 당국에 신고하고 1년후
100만원의 보상금을 지급받았다. 7월 6일에는 충남 대전시 괴정동 244-4에서
밭을 일구던 손용갑 씨가 땅 속에서 뜻밖에도 초기 철기시대의 발견 신고하여
120만원의 보상금을 받았다. 11월 10일엔 또 경북 금릉군 부항면 사등 1리에서
통일신라시대의 주목할 만한 '금동보살입상' 하나가 출토되었는데, 이때의 발견
신고자인 마을의 이관하 씨와 땅임자에게는 새로운 보상기록인 140만 원이 1년
후에 지급되었다.
문화재 관리국이 집계한 자료에 따르면 1961년부터 1996년 7월 현재가지의
매장문화재 발견 및 신고 건수는 모두 4,304건이고, 보상 총액은 6억 4,850만
8,595원에 이르고 있다. 그중 한 사례로 1970년대 초반에 강원도 정선군 임계면
고양리에서 13세의 어린이가 통일신라시대의 작은 '금동여래입상'(높이 13cm)을
출토시켜 당시로서는 매우 큰 돈인 80만 원을 보상받은 일을 들 수 잇다.
행운의 어린이는 임계국민학교 6년생이었던 이춘달군으로 불상을 출토시킨
날짜는 1971년 6월 21일이었다. 이군은 그날 마을 뒷산에서 놀이터를 만드느라
땅을 파다가 불상이 나타나자 소중히 들고 산을 내려와서 아버지(당시 62세)에게
가져다 보였다. 그러나 아버지도 그 불상이 얼마나 중요한 문화재인지를 알지
못했다. 당국에 신고하면 정당한 보상금이 나온다는 문화재보호법 상식도
없었다.
이군의 아버지는 아들이 우연히 캐 온 불상을 갖고 있다가 엿장수에게 단돈
2천 원을 받고 팔았다. 그 사실이 강원도 공보실에 뒤늦게 신고되었다. 도
공보실에서는 즉시 불상의 행방을 수배한 끝에 마침내 그것을 되찾는 데
성공했다. 불상은 곧 서울의 문화재 관리국으로 올라왔고, 평가심의회에서
통일신라시대의 우수한 불상임이 밝혀졌다. 그리고 발견자인 이군과
땅임자에게는 80만 원의 보상액이 책정되었다.
제 7장 도굴,도난 위조품
최대 규모의 현풍 도굴사건
논과 밭에서 일하던 농부가, 혹은 토목 공사장의 인부가, 그 밖에
고철수집상인, 나뭇꾼, 마을 언덕에서 놀던 어린이가 전혀 뜻밖에 중요한
매장문화재를 출토시킨 후 문화재보호법의 절차에 따라 신고하고 물건을 국가에
바침으로써 수만 원에서부터 백만 원대에 이르는 부상금을 타는 일이
1960년대에 속출했지만, 반면 직업적인 범죄의 도굴이 가장 성행한 것도 그
시기였다.
유명한 현풍 도굴사건이 일어난 것은 1963년의 일이었다. 경북 달성군 현풍면
일대에서 두더지처럼 고분을 파고 들어가서 부지기수의 각종 부장품을 꺼내
팔아 먹던 패거리 일당이 검거 되고 나아가서 서울의 유력한 인사가 그들의
도굴품 가운데 일부 중요한 물건을 사 가졌던 사실이 드러나 세인을 놀라게
했던 사건이다. 시가 2천만 원 상당의 고분 유물 400여 점을 약 2년 동안 탈없이
파먹던 최대 규모의 도굴꾼 일당이었다고 당시 신문들이 대서특필했던 이현풍
도굴사건의 배후에는 악질적인 자금 조달 및 불법적인 매수자로 대구의
골동상인 장아무개, 윤아무개, 최아무개가 있었다. 그리고 그들에게 교사되어
현풍면 일대의 고려 및 신라시대 고분들을 조직적으로 도굴했던 불법행위자
6명은 현지의 농민과 외래 침입자였다.
그들의 조직적인 범죄는 1961년 4월 중순에 착수되었음이 경찰조사에서
밝혀졌다. 범인들은 첫 범행으로 현풍면 하동 뒤쪽의 고려고분들을 도굴, 약
50점의 고려자기를 꺼내는 데 성공했다. 장아무개, 윤아무개가 그것들을 사
주었다. 장과 윤은 그중 30점을 당시 대구 J모직회사에 와 있던 일본인
하야시에게 20만 원을 받고 팔아넘겼다. 그후 현풍지방에서는 수십 회에 걸친
도굴이 거듭되었다. 도굴유물들은 그때마다 장아무개와 윤아무개, 최아마개에게
넘어갔다가 다시 서울로 밀매되어 일부 중요한 것들은 많은 수장가의 손에
들어갔다.
1963년 2월 8일, 대구 경찰에 의해 일망타진된 현풍 도굴꾼과 배후의 조종자
및 도굴품의 중간 취득자들이 경찰에 자백하면서 그 압수한 각종 유물 가운데
관계전문가들이 깜짝 놀란 중요한 물건은 삼국시대의 '금동안장금구'와 '금관',
기타 희귀한 가형토기, 마형토기, 오리형토기 등이었다. 삼국시대 유물로는
최초의 출현인 말안장의 금구는 1961년 10월에 도굴배 일당 중의 강아무개와
구아무개가 안동군 일직면에 있는 구분에서 캐낸 후 대구 골동상에게 단돈 3만
6천 원을 받고 팔았다. 그후 중간 취득자였던 골동상인은 당장 100만 원을
호가하면서 비밀히 전해할 곳을 찾고 있다가 미처 처분하지 못했던 수백 점의
다른 도굴 유물들과 함께 경찰에 압수당ㅎ다. 압수 도굴품들은 뒤에
국립박물관이 모두 접수했다.
그러나 그때까지 밝혀지지 않았던 국보급의 순금관 하나를 현풍 도굴꾼들이
도굴했던 사실이 마저 드러난 것은 범인들이 대구 지검에 구속·송치된지 약
5개월 후인 7월에 검찰의 심문과정에서였다. 이 금관은 1962년 3월에 일당 중의
구아무개가 도굴하여 대구의 윤아무개에게 구화 110만 환을 받고 팔았다. 그러나
실제로 도굴한 것은 5개월 전 고령지방에서 였다고 범인은 검찰에서 자백했다.
윤은 그의 손에 들어온 최대의 고분유물인 삼국시대의 금관을 돈 많은
수집가에게 거액으로 전매하기 위해 즉시 서울의 골동상 김아무개, 장아무개와
접선했다. 그러다 장아무개의 소개로 이병철 컬렉션에 들어가게 되었는데,
그때의 계약 가격이 구화로 1,100만 환(화폐개혁후 110만원)이었다고 한다.
현풍 도굴사건의 주범들은 검거된 수 문화재보호법 위반으로 유죄판결을 받고
복역했다. 반면 몇 다리를 건너 금관을 입수했던 이병철 재벌은 선의의 수집이
묵인되어 별 말썽없이 그의 수장품으로 낙착되었다. 그러나 이 금관은 그후 근
10년간 일체 공개하는 일이 없어 관계사회의 비상한 관심을 집중시겼었다.
그러다 1971년 4월에 국립박물관에서 호암(이병철 씨의 아호) 컬렉션이
특별전시될 때에 처음으로 공개된 후 국보 제 138호로 정식지정되었다.
1964년 10월엔 서울에서 도굴꾼 일당이 검거되었다. 서울 중부서가 박아무개
등 3명의 직업적인 범인과 그들의 도굴품을 사 주던 배후의 장물아비
김아무개를 긴급 구속하고, 김의 집에서 고분 도굴유물인 고려자기와 조선자기
수 백점을 압수했던 사건이다.
서울에 주소를 둔 이때의 도굴범들은 특히 전국 곳곳의 태릉을 전문적으로
파헤쳐 조선 역대황족의 태를 넣어 묻었던 최고 품질의 백자태항아리들을
꺼내다가 김모를 통해 팔아먹고 있었다. 경찰에 검거되어 자백한 바로는 그들은
구속될 때가지 3년 동안 서울 인근은 물론, 경기도 광주지방, 더 나아가서
강원도 원주 속초 삼척, 충북 충주, 경북 울진등지까지 도굴지역을 확대시키다가
마침내 꼬리가 잡혔다. 그들에게 태릉의 소재지와 태항라이ㄹ 전문지식을 알려준
김아무개는 한국전쟁 전부터 골동 중개인이며 암매상이었다.
석가탑 다라니경의 위기일발
재벌과 사회 권력층의 고미술품 수집열은 도굴을 조장하는 한 원인이었다.
1965년을 전후해서 전국의 직업적 또는 일시적인 도굴군의 총수는 약 천여
명으로 추산됐다. 그들은 고분만 도굴하는 것이 아니라 국보 석탑까지
무너뜨리거나 지렛대로 한쪽을 들어올리고 내부의 사리장치 유물을 훔쳐냈다.
경상도와 전라도 일대에서 각종 도굴사건이 끊임없이 일어났다. 범인들은
그때마다 수배당하고, 대개 검거 구속된 후 법에 따라 처벌을 받았으나 얼마 안
있어 모두 풀려나왔다. 문화재보호의 최대의 암인 도둘꾼의 범행은 좀처럼
뿌리가 뽑히지 않았다. 최근엔 법이 강화되어 도굴사건이 거의 사라진 듯이
보이지만 그렇다고 완전히 근절됐다고 믿기도 어렵다.
전체국민의 분노를 샀던 가장 악질적이고 대담한 도굴배들의 범행은 경주
불국사 석가탑(국보 제12호)의 유린과 내부유물의 탈취 기도였다. 1966년 9월의
사건이었다. 감히 석가탑의 내부 유물을 노린 범인들의 배후의 인물은 경주
시내의 악명 높은 골동상인 윤아무개였다. 9월 3일, 윤의 집에서 유아무개,
주아무개, 임아무개 등 4명이 치밀한 계획을 짠 후 그날 밤 11시에 불국사로
침입했다.
그러나 주가 준비했던 재크가 거대한 삼층석탑(석가탑)의 중심부를 한쪽으로
들어 올리기엔 너무 작아 1차 기도는 결국 실패앴다. 다음날, 대구에 가서 급히
구해 온 대형 오일 재크를 갖고 유와 주가 2차로 불국사에 접근해 갔다. 역시 밤
11시께 고요한 한밤중을 택했다. 그들은 재크로 석가탑의 1층 옥개석 한쪽을
들어올리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그 속엔 아무것도 없었다. 다음날 밤, 3차
범행이 시도되었다. 이번엔 3층 옥개석을 들어 젖혔다. 그러나 그 속에서도
범인들이 노렸던 사리장치 유물은 만질수 없었다. 또 허탕이었다.
만일 다음날 아침에 불국사 승려가 석가탑의 이상을 발견하고 경찰에
신고하지 않었던들 법과 사회 도의를 비웃던 범인들은 그날 밤 2층 옥개석을
마지막으로 들어올려 보고 마침내 세계 최고의 목각 인쇄물인 다라니경과
참으로 귀중한 불국사 창건 당시의 수십 점의 석가탑 사리장치 유물(현재
일괄하여 국보 제126호)을 고스란히 절취하는 데 성공하였을는지도 모른다.
위기일발의 모면이었다.
당시 석가탑은 범인들의 무자비한 재크 사용으로 석탑의 한 부분이 깨져
나가고 탑신 전체가 한쪽으로 기울어 무너질 듯한 위험한 상태에 처해 있었다.
도굴범들의 소행임이 분명하다고 본 불국사측은 긴급 신고를 했고, 경주경찰서는
용의자를 수배한 지 며칠 만에 범인 일당을 검거했다. 잡혀 온 범인들은 목적을
달성하지는 못했다고 고백했다. 그러나 그들의 말을 곧이곧대로 믿을 수는
없었다. 탑을 해체해보지 않고는 모를 일이었다.
범인들이 건드려 한쪽으로 위험스럽게 기운 석가탑을 그대로 둘 수 없었던
문공부 문화재관리국은 탑의 피해상을 바로잡고 사리장치 유물의 안전 여부도
확인하기로 결정했다. 문화재 전문가와 석조물 보수 전문가들이 현지에 내려가
해체·보수 작업에 착수했다. 그런데 작업 도중 2층 옥개석이 로프에서 떨어져
일부가 파괴되는 충격적인 사건이 또 발생했다. 그러나 바로 그 밑에서
'다라니경' 과 사리장치 유물들이 완전한 상채로 발견되었던 것이다.
새벽에 발견한 황금 보따리
미슬품의 도난이나 위조 행위는 유적지에서 고대 유물을 절취하는 도굴행위와
함께 외국에서도 끊임없이 일어나고 있는 미술품 범죄사건이다. 어디서나간에 그
범행 동기는 손쉽게 큰돈을 벌려는 일반적인 범죄심리가 지배적이지만 경우에
따라선 질투와 적의 혹은 영웅심에서 발단된 예도 있었다.
20세기에 들어와서 일어난 최대의 세계적인 미술품 도난 사건은 1911년 8월
21일에 파리의 루브르미술관에서 발생했던 유명한 '모나리자' 의 실종이었다.
범행 2년 후인 1913년 11월에 체포된 범인 페루지아(루부르미술관의
고용인이었던 이탈리아 청년)는, 지난날 이탈리아를 짓밟고 이탈리아의 문화재와
미술품들을 마구 약탈해갔던 나폴레옹에 대한 복수였다고 정치적이고 영웅적인
동기를 말했다. 그러나 실제로 범인은 '모나리자' 를 이탈리아로 숨겨 갖고 가
"나는 가난하다" 면서 피렌체의 우피치미술관에 10만 불에 팔려고 하다가
붙잡혔던 것이다.
한국에서 가장 오래고 가장 유명한 기록은 1927년 11월 10일 밤에
경주박물관에서 발생한 금관총 출토유물의 도난사건이다. 도난 사실이 밝혀진
것은 11일 아침이었다. 범인은 유물 진열실의 자물쇠를 부수고 들어가서 금관을
제외한 나머지 순금제 유물인 과대·요패·귀고리·팔찌·반지 등을 몽땅 싸
갖고 사라졌다. 황금유물만 노린 도둑이었다. 차마 금관까지는 손댈 수 없었는지
아니면 싸 갖고 가기가 거추장스러워서였는지 어쨌든 그것만 무사했다.
신라왕릉에서 출토된 황금유물 도난사실이 알려지자 경주 시내는 발칵
뒤집혔다. 신문들은 약 1만 원 상당의 신라 귀금속품이 도난당했다고 대대덕으로
보도했다. 용의자 몇 명이 검거되었으나 그들은 범행을 부인했고 증거도 없었다.
범인들은 좀처럼 잡히지 않았다.
'도난당한 순금유물들이 곧바로 일본이나 어디로 유출되지나 않았을까. 혹은
범인이 단순한 금덩어리로 만들어 팔아먹으려고 유물의 형태를 짓이겨버리는
최악의 사태가 나지는 않았울까.'
경찰보다 경주 시민들이 더 초초해 했다.
경찰과 박물관측에선 범인이 보통 무식한 도둑일지 모른다는 전제 하에 "천
수백 년 전에 만들어진 금세공품은 아무리 녹여 갖고 있어도 요즘의 금과
달라서 금방 알아볼 수 있다" 고 헛소문을 퍼뜨렸다. 또 그때만 해도 무덤
속에서 나온 물건을 집안에 갖고 들어오면 반드시 식구 중의 누가 앓거나
변고가 생긴다는 미신이 살아 있었기 때문에 "경찰은 앓는 사람이 잇는 집이나
무슨 변고가 있는 집을 특히 주목해서 수사의 손길을 뻗치고 있다" 는 유언도
퍼뜨려 범인에 대한 심리적인 작전도 폈다. 그러나 모두가 허사였다.
해가 바뀌어 1928년 봄이 되어도 범인과 도난유물은 오리무중이었다. 경찰
수사는 절망적이었다. 경주로 유람객을 유치하는 데 다시 없는 중요한 박물관
보물을 영원히 잃어선 안된다고 생각한 경주번영회가 적극적으로 개입하여
도난당한 물건의 소재지나 정보를 제공해주는 사람에겐 1,000원의 사례금을
내겠다고 발표했다. 도난미술품에 대한 국내 최초의 거액현상금이었다. 그러나
여전히 아무런 정보도 단서도 잡히지 않았다. 안타깝게 5개월이 지났다.
그러던 5월 20일 새벽 5시께의 일이었다. 경주 시내에서 변소를 치러다니던 한
노인이 경찰서장 관사 앞을 지나다가 대문 기둥 밑에 놓여진 흰 백로지로 싼
이상한 보따리를 발견했다. 다가가서 지겟작대기로 넌지시 찔러보니 속에서
찰그락 하고 금속음이 울리고, 싼 종이의 한켠이 벌어졌다. 그 순간 노인은 깜짝
놀랐다. 번쩍이는 황금빛, 숨을 죽이고 물건을 다시 살펴보던 노인에게 퍼뜩
깨달아지는 것이 있었다. 박물관 도난품?
노인은 두 손으로 조심스럽게 황금 보따리를 들어 가슴에 안고 거름지게를 진
채 경찰서로 곧장 달려가서 숙직실 문을 두드렸다.
노인이 들고 온 보따리는 과연 경주박물관에서 도난당했던 그 순금
유물들이었다. 기적의 생환이었으나 범인은 끝내 잡히지 않았다. 범인은 반지
하나와 그밖의 순금장식 몇 점만 갖고 나머지를 고스란히 경찰서장 관사 문밖에
갖다놓고 다시 종적을 감추었다.
현재 국보 제88호로 지정돼 있는 금관총 '과대와 요패' 가 그때 도난당했다가
되돌아온 물건이다.
도난당한 황금 모조금관
경주박물관의 금제유물을 노린 도둑이 1956년에도 있었다. 1927년의 첫 번재
도난 때엔 범인이 지붕과 벽면을 뚫고 유물 진열실로 침입하려다 실패한 후
나중엔 정면의 이중철문의 자물쇠를 뜯고 들어갔지만 이번엔 저녁 때 박물관
진열실 문이 닫히기 전에 관람객을 가장하여 잡입해 있다가 범행을 감했했다.
이때의 목표물은 바로 금관이었다.
금관총 출토유물의 두번째 수난이었다. 앞의 범인은 금관에만은 손을 대지
못했다. 그런데 이번엔 다른 자질구레한 금제품이 아니라 신라고분에서 나온
최대의 국보유물인 금관, 바로 그것을 훔쳐 팔아먹으려고 했으니 참으로 대담한
자였다. 치밀하게 유물실에 잠복해 있던 범인은 밤중에 이르러 성공적으로 일을
치렀다. 그는 국보 금관만 싸 들고 유유히 사라졌다.
국보 금관의 도난, 충격적인 사건이었다. 그러나 다행히도 그것은 진짜가
아니라 만일의 경우를 생각해서 똑같은 모조품을 만들어 진열장에 넣었던 가짜
금관이었다. 전문가는 말할 것도 없고, 웬만한 눈을 가진 사람이면 그것이
모조품이란 것을 한눈으로 식별할 수 있었지만 범인은 찬란한 황금빛에만
현혹됐을 뿐 유물 감식엔 무식햇다.
사건 발생 후 경주박물관에선 도난당한 금관이 모조품이라는 사실을 해명하고,
신문들도 그렇게 보도했다. 그러나 그때까지도 범인은 추호의 의심도 없이 훔친
금관을 막보따리처럼 싸 갖고 부산 방면으로 탈출하려고 경주역에 나가 기차를
기다리고 있었다. 거기서 범인은 자신의 범행사건을 보도한 신문기사를 읽어보고
그제서야 그것이 '가짜 금관' 이란 사실을 알았다. 범인으로선
청천벽력이었으리라. 그러나 그는 물건을 박물관에 도로 보내지도 않았고 경찰에
자수하지도 않았다. 그는 경주역에서 곧장 시외의 서천께로 도피해 가서
모래밭을 깊숙이 파고 그 속에 일확천금의 어리석었던 꿈과 진짜로 알았던 모조
금관을 함께 묻어 버렸다.
그리고 얼마 후, 범인은 결국 금관 도난사건의 용의자로 경찰에 검거되었다.
그는 모든 경위를 자백했다. 그러나 그의 자백에 따라 서천 모래사장으로 갔던
경찰은 그곳에 묻었다는 모조 금관을 찾지 못했다.
신라시대의 황금 보관을 노린 도둑은 8·15 직후 서울의 국립박물관에도
나타났다. 그때 박물관에선 과거 일제 때에 경주 고분에서 발견된 세
금관(금관총·금령총·서봉총 출토)의 모조품을 하나씩 만들어 일반에게
관람시키고 있었다. 진짜 유물들은 불안한 사회정세에 비추어 금고 속에 넣어
보관하고 있었다. 출토지인 경주의 박물관에는 가장 유명한 금관총금관의
모조품을 내려 보내고, 서울의 경복궁박물관에 진열된 것은 금령총과 서봉총
금관을 모조한 것이었다. 그런데 박물관에서 짐짓 염려하고 대비했던 그대로
금관을 노린 도둑이 침입했던 것이다.
어느날 밤, 경복궁의 국립박물관 금관 진열실에 잠입한 도둑이 두 금관을
모조리 들고 사라졌다. 이튿날 아침에야 박물관 직원이 그 사실을 알았다.
이때의 범인도 10년 후에 경주박물관의 모조 금관을 훔쳤던 범인처럼 그것이
모조품인 줄은 꿈에도 생각지 못한 무식한 도둑이었다. 박물관측에선 즉시
신문을 통해 도난당한 금관이 순금이 아닌 모조품이라는 사실을 해명하고
물건을 돌려보내 달라고 호소했지만 허사였다. 역시 신문보도로 가짜란 사실을
안 범인이 실망하여 밟아 뭉개버린 모양이었다.
서울과 경주박물관에서 두 번에 걸쳐 도난당했던 금관들이 모두 진짜
유물이었다면 어떻게 됐을까. 그리고 만일 그 범행이 성공적이었다면 아마
일본이나 다른 외국으로 영원히 팔려 나갔을지도 모른다. 국내에서는 세상이 다
아는 지정 국보의 금관을 그것도 박물관에서 훔쳐온 물건을 몰래 사 가질
어리석은 수집가가 있을 리 없기 때문이다.
극적으로 위기를 모면한 한국의 세계적 고대 미술품인 3개의 금관 중 '금관총
금관'은 현재 국보 제87호, '금령총 금관' 은 보물 제338호, 그리고 '서봉총 금관'
은 보물 제339호로 각각 지정 보호되고 있다.
봉은사 보물 향로 도난사건
1961년에 서울 창덕궁에 보존되 오던 과거의 왕실 유물과 미술품의
도난사실이 알려져 세인을 놀라게 한 적이 있었다. 그때 내각 사무처가 발표한
그 도난유물과 미술품의 수는 무려 216점이었다. 그러나 이 숫자는 정확한
파악이 아니었음이 그후 조사에서 드러났다. 당시 창덕궁 유물과 미술품의
관리자는 구황실 재산사무총국이었는데 전문적인 직원이 없었고, 따라서 정확한
유물 조사대장조차 작성돼 있지 못한 실정이었다. 과거의 서류나 기록도 8·15와
한국정쟁 때 거의 유실되고 없었다.
사건이 발표된 후 확실한 내막조사를 위촉받았던 관계전문가들은
조사과정에서 기록에 없는 유물들이 나타나는가 하면 기록에 있는 물건이
기록장소에 없는 어처구니없는 관리상태를 확인했다. 물론 실제로 도난당한
것으로 믿어지는 유물도 많았다.
창덕궁의 귀중한 왕실 유물과 미술품 200여 점이 도난당했다고 발표되기 전인
5월, 창덕궁에 침입하여 '칠보화병' 과 '칠보향로' 등 4점의 유물을 훔쳐내어
골동상에 팔려던 범인이 경찰에 체포된 일이 있었다. 이때는 구황실
재산사무총국에서 도난사실을 즉시 알고 경찰에 신고했기 때문에 당장 범인도
잡고 물건도 무사히 되찾을 수 있었다. 그러나, 3월에(사실은 그 이전에)
도난당했다지만 실제로 언제 어떻게 도난당한 것인지 확실치 않은 유물과 범인
수사에서 경찰은 아무런 구체적인 단서도 잡을 수가 없었다.
국가 지정문화재인 국보와 보물을 훔쳐 국내 혹은 국외로 팔아먹으려던
그야말로 간덩이가 부은 절도범 사건이 1963년 이후 다섯 번이나 있었다. 첫
사건은 서울 한강 남쪽의 봉은사에서 일어났다.
1963년 5월 9일, 문화재관리국 직원 한 사람이 봉은사에 보관돼 있던 보물
제321호의 '지정 4년명' 고려 '청동루은향로' 의 보호상태를 확인하려고 나갔다가
향로가 감쪽같이 도난당한 사실을 처음으로 발견했다. 신고를 받은 경찰은
도난현장을 검색한 후 봉은사 측에서 의심스럽게 여기고 있는 유력한 용의자
유아무개를 전국에 즉각 수배했다. 용의자의 행방을 추적하여 수명의 형사가
각지로 급파되고, 다른 수사진은 성루과 기타 도시의 골동상을 내사했다.
보물 향로의 절도 용의자 유모(당시 32세)는 자칭 수도승으로 제주도 한라산에
있는 관음사에서 수도생활을 하다 올라왔다면서 봉은사를 찾아왔다. 사건 발생
한달 전의 일이었다. 그는 수도승임을 자처하여 어렵지 않게 숙식을 허락받을 수
있었다. 그는 봉은사에 머무르는 동안 보물 관리책임자인 김대성 씨(당시
26세)와 같은 방에서 기거했다. 그때 보물 향로를 보고 값으로 치면 100만 원도
넘을 거라는 농담도 주고 받았다. 그러던 그가 온다간다 말없이 사라진 후 보물
향로의 도난 사실이 발견되었다. 절 측에서 먼저 의심을 했고, 경찰도 유력한
용의자로 단정할 만한 인물이었다.
범인 수사에 착수한 지 일주일 만인 18일 오전, 서울 시내 조선호텔 앞의 한
골동상에 들렀던 성동서의 길운제 형사가 결정적인 단서를 포착했다. 이틀 전에
향로를 팔겠다고 온 사나이가 있었는데 연락처를 말하고 갔다면서 골동상
주인은 용의자의 거처를 알려주었다. 길형사는 그길로 불광동의 D여관을
급습했다. 범인은 예측했던 대로 봉은사에서 사라졌던 자칭 수도승
유아무개였다. 미처 팔아먹지 못한 보물 향로가 여관방 한구석에 숨겨져 있었다.
형사가 들어닥치자 범인은 모든 범행사실을 즉석에서 자백했다. 범행날짜는
5월 3일이었다. 보물 관리자 김씨가 부산에 다니러 간다고 떠나자 유는 우발적인
범행을 감행했다. 다락방에서 몰래 열쇠를 꺼내 갖고 보물고의 문을 열고
들어갔다. 그리고 간단히 보물 향로를 꺼내 들고 봉은사를 탈출했다. 밤
9시께였다.
크기가 한 아름이나 되는 향로를 보자기에 싸 갖고 무사히 한강을 건넌 유는
택시를 잡아타고 범행장소와 정반대쪽인 서대문고 불광동으로 달린 후 D여관에
투숙했다. 그리고 다음날부터 그는 거액으로 팔아먹을 곳을 찾아 나섰다. 그가
자백한 바로는 모 재벌 수집가에게 팔려고 중간 소개인과 접촉하려다가
실패했고, 조선호텔 앞의 골동상을 찾아갔다가 마침내 경찰 수사망에 걸려들었던
것이다. 범인은 대학교육까지 받은 지식청년이었다.
국보 청동향로와 난중일기 도난사건
봉은사에서 보물 제321호의 고려시대 청동향로 도난사건이 있은 지 1년 7개월
후인 1965년 1우러 19일 새벽의 일이었다. 이번엔 경남 밀양의 표충사에 보관돼
있던 국보 제75호의 또다른 고려시대 청동향로(정식 명칭은 청동함은향완)가 또
도난당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때에도 도난 사실의 발견자는 국보 유물의
보호관리자인 절 측이 아니라 밀양교육청에서 향로의 보존상태를 확인하러 갔던
문화재 관계직원이었다.
밀양교육청의 이운성 문화계장이 표충사를 찾아간 시간이 마치 국보 향로의
도난 사실을 알기라도 했던 것처럼 19일 오전 10시께였다. 그러나 그는 사실
아무런 예감도 없었다. 그는 사무적으로 유물관의 바깥문 열쇠를 열고 안으로
들어가 유물함을 살펴보려고 하다가 국보 향로를 노린 침입자가 있었던 흔적을
발견하고 깜짝 놀랐다. 이중삼중으로 채워진 자물쇠가 그대도 매달린 체
유물함은 무참히 파괴돼 있었다. 그리고 사라진 국보 향료, 승려들도 처음으로
그 사실을 알고 펄펄 뛰었다. 다른 유물들을 조사해 보니 사찰보물인 금당저
하나와 가사고리 1조도 없어져 있었다.
긴급신고를 받은 밀양 경찰은 표충사에 수사본부를 설치하고 입체적인 범인
수사에 착수했다. 경찰은 승려들의 증언으로 사건 하루 전날인 18일 오후 2시께
부산 수산대학생을 자칭한 5명의 청년에게 도난당한 국보 향로를 특별히
관람시킨 사실을 주목했으나 범인의 단서는 좀처럼 잡히지 않았다.
경남 경찰국은 도난 국보의 해외 유출을 봉쇄하기 위해 부산과 기타 항구에
연락하고 형사를 급파하는 한편, 전국 경찰에 범인 체포의 협조를 의뢰하는
전국적인 수배를 강화했으나 범인은 교묘히 행방을 감추고 있었다.
신문들은 연일 도난당한 국보 향료의 사진과 특징 기타 상세한 기록을
보도하여 경찰수사에 협력했고, 시민들의 협조도 간접적으로 있었으나 범인은
70일간이나 수사망을 피해 다녔다. 그러나 그는 마침내 붙잡혔다.
5월 28일밤, 서울 영등포서가 확실한 정보를 입수하고 범인을 급습하여
체포하는 데 성공했다.
표충사를 찾아가 계획적으로 국보 향로를 훔쳤던 주범 송아무개(당시 30세)는
영등포구 고척동의 그의 집에서, 그리고 그가 훔쳐온 향로가 국보지정문화재인
줄 알면서도 5만 원에 사 갖고 있던 이아무개(당시 43세)는 충무로 3가에서 각각
체포, 긴급 구속되었다. 도난당했던 국보 향로는 장물아비였던 이아무개의 집에
숨겨져 있었다.
당시 신문보도를 따르면 이아무개는 한국은행 촉탁으로 고금회폐 컬렉션의
감정과 정리를 맡고 있던 자칭 고화 전문가로 S초급대학 강사라는 신분이었다.
주범 송아무개도 대학교육을 받은 인텔리청년이었음이 경찰조사에서 밝혀졌다.
그는 표충사 국보 향로를 절취한 뒤에도 경찰 수사망을 비웃으며 또 다른
범행을 계속하고 있었다.
경찰에서 자백한 바로는 그는 표충사에서의 범행 20일 뒤인 2월 10일
새벽에도 경기도 안양읍의 염불암에 침입하여 벽에 걸려 있던 불화를 훔쳤고,
다시 5일 뒤에는 강원도 오대산의 상원사로 가서 경계가 허술한 틈을 이용하여
작은 석불좌상 2점을 훔쳐 서울로 갖고 와서 공모관계의 장물아비였던
이아무개에게 1,500원과 5,000원에 각각 팔아먹었다. 그때의 불화와 석불좌상
2점도 이의 집에서 압수되었다.
1967년에는 두 달 간격으로 국보 제119호의 '연가 7년명' 금동여래입상과 역시
국보 제76호의 '이충무공 난중일기' 가 도난당하는 충격적인 사건이 잇달아
발생했다. 문화재 관리당국에 대한 매스컴과 여론의 비판이 빗발치듯 쏟아졌다.
사건은 너무나 중대했다. 다행이 이번에도 도난당했던 두 국보 중 불상은 사건
발생 13시간 만에, 그리고 (난중일기)는 열흘 만에 되찾았지만, 거듭된 이 국보
도난사건은 국가 지정문화재의 보호대책에 심각한 문제점을 노출시켰다.
특히 불상의 경우는 백주에 덕수궁미술관 진열장에서 감쪽같이 사라졌고,
범인은 그것을 훔쳐 팔아먹기 위해서가 아니라 비뚤어진 영웅심과 사회에 대한
어떤 적의에서 사건을 저질렀던 듯한 증거와 경위를 남겨 관계당국과 세인을
더욱 놀라게 하였다.
국보 고구려불상 도난사건의 미스터리
국보 제119호의 '연가 7년명 금동여래입상'(높이 16.2㎝)이 덕수궁미술관 2층
제3전시실의 진열장에서 백주에 도난당한 사건이 발생한 것은 정확히 1967년
10월 24일 오전 10시를 전후해서였다. 그날도 미술관은 평일처럼 오전 9시에
전시실 문을 열고 9월 24일부터 한 달 동안 계속돼 온 해방후의 출토 및
발굴문화재 특별전 관람객을 입장시키고 있었다.
제3전시실의 경비를 담당하고 있던 김영석 씨가 국보 불상의 도난 사실을
발견한 것은 오전 10시 40분께였다. 잠시 딴 방을 돌다가 제3실에 돌아온 그의
눈앞엔 청천벽력의 광경이 벌어져 있었다. 가장 눈에 띄게 높이 1m의 진열대
위ㅔ 놓여져 있던 사방 60㎝의 유리곽 속의 국보 고구려불상이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없었던 것이다. 대담한 범인은 유리곽 속에 푸른색 볼펜으로 급히 적은
다음과 같은 조소적인 메모 쪽지를 남기고 있었다.
"국장님(문화재관리국장을 지칭, 당시 하갑청 씨)께 직접 알리시오. 오늘 24시
안으로 반환한다고, 세계 신기록을 남기기 위해. 타인에게 알리거나 약은 수작
부리다 죽은 자식 자지 만지는 격이 되지 말고. -24일. 이따 11시경에 국장님께
알리겠음(인편·편지·전화 등). 지문감정 의뢰 불요."
물론 국보 불상의 도난사실은 즉시 경찰에 신고되었다. 치안국은 도난 국보의
해외 유출을 막기 위해 전국의 공항 및 항만을 긴급 봉쇄하고 철저한
비상검문을 실시하도록 전국 경찰에 지시했다. 서울 시경에서는 민완 형사들이
동원되었다. 그러나 범인은 벌써 안전한 은닉처에 숨어 있었다.
한편 하갑청 문화재관리국장은 범인이 메모로 약속한 자진 연락을 초조하게
기다리고 있었다. 과연 약속시간인 오전 11시가 30분쯤 지난 때에 하국장의
집(당주동)에 범인의 전화가 걸려 왔다. 범인은 "미안하다. 돌려주겠다"는 말만
하고 일방적으로 전화를 끊었다. 전화는 오후 3시와 6시에도 걸려 왔다. 그러나
범인은 메모에서 24시(밤 12시) 안에 반환하겠다고 분명히 말하고 있었다.
밤이 깊어가고 있었다. 하국장은 피가 마르는 듯한 초조감 속에 범인의 전화를
기다리며 대기하고 있었다. 밤 11시 5분께. 드디어 네 번째로 범인의 전화가
집으로 걸려 왔다 부인 서정희 씨가 먼저 전화를 받은 후 하국장에게
넘겨주었다.
"불상을 한강철교의 제3교각 16번과 17번 침목 받침대 사이 및의 모래밭에
묻어 놓았으니 찾아 가시오."
마치 스릴러 영화의 대사 같았다. 수화기를 놓자마자 하국장은 경찰에
알리지도 않은 채 부인과 운전사 셋이서 한강으로 차를 달렸다. 과연 불상이
비닐봉지에 잘 싸여져 모래 속에 묻혀 있었다. 극적인 사건 종말이었다. 그러나
그때 하국장이 경찰에 알리지 않고 단독으로 행동한 처사와 범인이 20만 원을
요구했다는 설은 뒤에 많은 의혹을 낳게 했고, 사건 내막은 시종 미스테리로
남았다. 경찰은 끝내 범인을 잡지 못했다.
국보 제76호의 (난중일기) 도난사건은 국보 고구려불상 도난사건의 미스테리가
채 잊혀지기도 전인 그해 12월 30일 밤에 발생했다. 그야말로 민족혼이라곤
터럭만큼도 없는 무뢰한이 충남 아산의 현충사에 침입하여 (난중일기)를
계획적으로 훔쳐갔던 것이다. 그 어느 때보다도 국민을 분노케 한 사건이었다.
범인은 사건 발생 10일 만인 1968년 1월 9일, 부산 시경 형사대에 의해
부산에서 체포되었고 도난당했던 (난중일기)도 무사히 되찾았지마, 잡고보니
범인은 1963년 봄에 서울 봉은사에서 보물 제321호의 '지정 4년명' 고려
청동향로를 훔쳐 서울 시내의 골동상에 팔아먹으려다가 붙잡혔던 전과범
유근필이었다. 그는 이번엔 훔친 (난중일기)를 일본 쪽에 팔아먹으려고 부산에서
루트를 찾고 있었다고 자백했다. 임진왜란 때 침략해 온 왜군을 크게 무찌르고
민족과 국가를 지킨 성웅 충무공 이순신 장군의 구국정신과 애국혼이 담겨져
있는 친필 기록물이자 지정국보인 (난중일기)를 딴곳도 아닌 일본에
팔아먹으려고 했다니 참으로 통탄할 일이었다.
1970년 7월에도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들었던 중요한 문화재의 도난사건이
있었다. 경붑 안강읍의 옥산서원에 전래되던 현존하는 가장 오랜 (삼국사기)의
도난이었다. 경찰 수사로 뒤에 다 찾은 것으로 공식 발표되었으나, 사실은 2질의
(삼국사기)가 보존되던 중에 독락당에 있던 1질 9책은 끝까지 되찾아내지 못한
채 수사가 중단되었다. 도난을 면한 1질은 사건 후 보물 제525호로 지정되었다.
위조품의 희비극
미술품의 모조와 위작만큼 아마추어 애호가로부터 돈 많은 수집가, 나아가서
전문학자와 미술관·박물관에 이르기까지 여러 사람들을 골탕먹이는 일도 없다.
국내뿐 아니라 세계적으로도 얼마나 많은 완전무결한 가짜와 위작 미술품들이
세계 각지의 미술관과 개인 컬렉션에서 진짜 행세를 하고 있는지는 아무도
모른다는 것이 국제 미술사회의 관측이다.
한국에서도 이 가짜 미술품과 위작 문화재들의 윤곽을 어림할 수 없을만큼
범람하고 있고, 또 어디선가 계속 만들어지고 있다. 그것은 물론 고의적인
일확천금의 사기행위이지만 진귀한 역사유물이나 특정 명가의 글씨 혹은
그림(반드시 걸작이 아니라도)을 찾는 돈 많은 수집가나 미술관·박물관의
심리와 요청이 있는 한 근절될 수 없는 자연발생적인 사회악이다.
서울의 고미술상과 수집가 사회에 나돌고 있는 가짜 유물과 위작 미술품은
삼국시대의 토기로부터 불상·고려자기 그리고 조선시대의 서화와 각종
공예품에 이르기까지 모든 분야를 침범하고 있다.
물론 그 수는 국내의 전체의 진짜 문화재와 미술품에 비길 때 극히 제한도니
범위에 지나지 않지만 끊임없이 여러 사람을 골탕먹이고 있다. 가령 현재 추사
김정희의 글씨로 통하고 있거나 말해지고 있는 것 가운데 6∼7할 혹은 그
이상이 가짜라고 전문가들은 말하고 있을 정도이다. 또 대우너군의 유명한 난초
그림이라고 말해지는 것들 중 9할은 믿을 수가 없다고 단언한 전문가도 있다.
한국에서 가짜와 위작 미술품이 성행하기 시작한 것도 역시 일제 때부터였다.
이 땅에서 권력과 부를 독점하고 있던 일본인 수짖ㅂ가와 애호가들이 다투어
진귀하고 유명한 유물과 미술품을 점유하려고 덤비자, 그에 따라 위작자들이
나타나고 무수한 가짜가 나돌게 되었던 것이다.
한 일본인은 1934년에 이런 말을 써 남기고 있다.
"교토의 돈 많은 수집가(골동상)가 평양 부근에서 출토되는 고와에 손을 뻗쳐
그곳 골동상을 통해 상당한 고가로 매점을 착수한 바람에 1930년부터 다음해
가을까지 약 1년간은 값이 치솟고 물건이 동이 났다. 그러자 낙랑, 고구려
와당의 가짜 전성기가 연출됐다. 옛날에 구운 것과 같은 흙으로 감쪽같이 옛것을
흉내내 만들고, 교묘하게 문양까지 새겨 놓고 구었기 때문에 처음엔 모두
속았다."
진귀한 유물이나 특정 명가의 걸작엔 한정이 있다. 그런 것을 지나치게 탐낼
때 가짜가 등장한다. ㅎ방 후에도 숱한 가짜사건이 골동상과 수집가 사이에
있었으나 그런 일은 당사자들이 서로 감추는 바람에 내막이 정확히 알려져 있지
않다. 그러나 그 사회에서는 그때마다 금세 소문이 퍼지곤 했다.
불상 같은 금속유물 분야에선 골동상과 수장가 사회에서 상당한 전문가로
통하는 서울의 골동상인 김아무개가 경주 근처에서 쏟아져 나온 희귀한
이형토기에 7∼8백만 원을 투자해서 수백 점을 집중적으로 불법입수한 후,
수집가 이아무개(작고)와 정아무개에게 성공적으로 전매했다가 뒤에 그것들이
모조리 가짜임이 밝혀져 당사자들이 큰 골탕을 먹은 것은 물론 한동안 골동계의
고소거리가 되었던 사건이 1965년께에 있었다. 1970년대 초에는 또 대구에서
삼국시대의 금관이 둘이나 서울의 골동상가에 나타났다가 5년 전에 위작하여 땅
속에 묻어두었던 치밀한 가짜(?)임이 탄로난 적이 있다. 뿐만 아니라 수년 전엔
어느 대학박물관에서 가짜 금관을 샀다가 망신을 당한 일도 있다. 전
국립박물관장 김재원 박사는 또 미국의 어느 박물관 창고에서도 틀림없는 가짜
신라금관을 보았다고 말하고 있다. 가짜 유물, 가짜 미술품의 비화는 수없이
많다. 그중엔 정말 진짜를 뺨치는 가짜가 있는가 하면 전문가면 금세 식별할 수
있는 서투른 가짜도 있다. 지난해 봄에 일본에서 온 한 젊은 고문화 연구가가
일본의 어느 재벌 수집가의 최근 입수품이라는 신라시대의 사리장치 사진을
갖고 와서 서울의 전문가에게 검토를 요청했다. 그런데 사진을 보니 5년 전에
이미 국내에서 가짜로 점찍힌 송림사 오층전탑 유물의 사리장치(보물 제325호)의
위작이었다. 그후 일본으로 유출되어 진짜 행세를 한 모양이었다. 그런가 하면
또 하나의 신라 사리장치 위작이 최근 일본의 한 예술잡지의 고미술상 광고에
사진으로 소개되고있었는데(물론 진짜라는 설명으로) 이것은 감은사터의 서쪽
삼층석탑 속에서 나온 유물(보물 제306호)을 모조한 것이 분명했다.
지금까지 나는 근대 이후 백 년 동안에 한국의 문화재가 겪은 수난과
민족적인 보호의 이면적인 비화를 확실한 자료와 기록 그리고 유력한 증언
취재로 엮어 왔다. 그러나 지금까지의 이야기느 ㄴ어디까지나 제한된 단면에
불과하다. 완전히 잊혀지고 혹은 아무런 기록도 남기지 않은 비화가 몇 십배, 몇
백배도 될 것이다. 그동안 자료와 기록을 찾고도 충분히 다 소개하지 못한 것도
있다.
현재 정부는 약 1,500여 점의 귀중한 유형문화재를 국보와 보물로 지정·
보호하고 있다. 그밖에 전통적인 놀이와 음악·연극·공예기술 등 48종이 중요
무형문화재로 지정돼 있고, 또 전국의 중요한 역사유적과 기념물이 그 환경과
더불어 사적으로 지정되어 국가적인 보호가 취해지고 있다. 보존시켜야 할
가치가 있는 옛날의 옷과 민속적인 유물, 기타 시골의 특정구가가 또한
중요민속자료의이름으로 지정돼 있다.
일부 문화재의 국가 지정 및 특별보호는 우리 민족의 긍지와 실체의 문화적
영광이라는 인식에서 출발하고 있다. 그렇다고 민족문화재의 한계가 앞서와 같은
제한된 지정·보호에서 금 그어지는 것은 결코 아니다. 그것은 굳이 그럴 필요가
있다고 정부와 전문가들이 생각하고 평가한 대표적인 것의 윤곽에 지나지
않느다. 수천 년 민족사의 구체적인 문화유산인 모든 문화재는 학술적으로나
예술적으로 연구 혹은 보존될 가치를 갖고 있다. 그중에는 물론 특히 중요한
것이 있고 그렇지 못한 것이 있기도 하지만, 참다운 문화재 가운데 버려서
아깝지 않은 것은 하나도 없으리라.
앞에서 말한 지정문화재의 수효는 현재 국내에 유존되고 있는 각종 문화재의
1%도 안된다. 전국의 박물관과 국가 소유의 유적.유물 그리고 개인이 갖고 있는
물건을 모두 합친다면 그 수는 수십만 점 이상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반면
그한말 이후 일본과 그밖의 외국에 유촐되고 혹은 빼앗긴 것이 10만 점은 될
것으로 추산된다. 그 모든 것이 이 땅에서 창조되고 발달한 문화유산이며 동시에
세계 인류문화의 한 지역적인 기념물이자 역사유물들이다.
문화재에 대한 오늘의 인식은 그것을 창조한 어느 민족이나 국가의 범주를
떠나 세계 전체인류의 공동의 문화유산으로 존중·파악되고 있고, 그에 따라
유네스코가 중심이 된 국제적인 보호운동과 보존대책이 강구되고 있다.
국제사회에서 잇따라 일어나고 있는 중요한 역사유물과 미술품의 불법적인
밀수·도난·가짜 제작 등의 사건은 그때마다 세계 주요 국가가
인터폴(국제형사경찰기구)을 통해 즉각 범죄정보를 입수하여 범인 체포의
국제수사에 협력하게 돼 있다. 미국 같은 나라에서는 FBI가 전적으로 개입하고
있으며, 죽은 후버 FBI 국장은 미술품의 도난·사기·위조 사건을 전담하도록
하는 특별수사관까지 임명했다.
모든 문화재와 역사 기념물의 보호 및 보존운동은 오늘날 국제적인 공동의
문제로 부각돼 있다. 한국에서 문화재보호법이 강화되고 있는 것은 당연한
조치이다. 그러나 문화재 범죄사건은 한국을 포함한 세계 곳곳에서 끊임없이
일어나고 있고, 그중에서도 국제적인 골칫거리는 밀수 및 유출 음모이다.
문공부가 조사.작성한 자료를 보면, 1)국제공항과 항구 2)외교화물과 유엔군
운송수단 3)국제우편과 소포 4)기타 밀수출(충무·마산 등지를 거점으로 한 작은
화물선과 어선을 이용하는 방법)을 통해 한국의 문화재 불법반출이 끊임없이
기도되어 왔음을 알 수 있다.
문공부 조사자료는 이러한 한국문화재의 끊임없는 불법반출 음모의 원인을,
'한국 고미술품에 대한 외국인의 관심 증가' 와 '고미술품의 국가간의 가격차로
인한 계획적인 밀수'로 파악하고 있다. 그 이면엔 물론 국내의 일부 골동상과
악당들이 관여하고 있음이 분명하고, 이들의 불법적인 암약은 유적지의 도굴과
매장 및 은닉문화재 절취, 그밖의 범죄행위자와 더불어 민족문화재 보호에
커다란 암이 되고 있다.
부록
경천사 십층석탑 수난 전말
-1907년 대한매일신보 고발 및 논평 속보 전문
이 책 본문의 '경천사 십층석탑' 비화는, 1972년 당시(서울신문에 연재 집필할
때)의 조사·취재 범위에서 그 탑이 1907년에 일본인 악당들에게 참담하게
당했던 수난의 내막을 밝힌 것이다. 고려시대의 그 걸작 대리석탑 약탈의
장본인은 1906년 12월에 한국에 특사로 왔던 당시 일본 궁내대신 다나카였다.
그러나 상세한 그 내막과 정확한 경위는 알 수가 없었다. 그러던 가운데
1976년에 한국신문연구소가 영인본으로 발간한 대한매일신보(1904.8.∼1910.10.)의
1907년 3∼6월 지면에서 나는 여기에 전문을 전재하는 경천사탑 수난의 추적
고발기사와 그를 민족적으로 분개한 논설의 속보들을 감명 깊게 발견할 수
있었다.
그 보도는 일제의 한국 침략 가속화와 일본인 악한들의 무법적인 민족문화재
약탈 및 일본으로의 반출에 대한 엄숙한 항변이었고, 전체 한국인의 울분을
대변한 민족언론의 통렬한 고발이었다. 그것은 오늘날에 와서도 한국인의
자존심을 충족시켜 준다. 그 당시에도 국내에서는 대한매일신보만이 그러한 항일
고발기사를 정면으로 보도하고 있었다.
그런가 하면, 일본에서는 당시 니로쿠신문과 만조보가 경천사탑의 일본으로의
불법반출 사실을 비판적으로 보도하였을 뿐 아니라, 미국의 언론들도 그 사건을
문제삼았던 사실을 알려주고 있었음이 대한매일신보의 그 전재보도가
확인해주고 있다. 반면 당시 오사카 아사히신문은 한국 국왕이 다나카 특사에게
그 팁을 기증하여 일본에 가져오게 되었다고 다나카를 거짓보도를 하고
있었음도 대한매일신보에 밝혀져 있다.
한편 비운의 경천사 십층석탑이 당시 경기도 풍덕군의 절터에서 주민들을
총과 칼로 위협한 일본인 악당글에게 마구 해체되고 일본 헌병의 비호를 받으며
개성 기차역으로 불법반출되던 과정에거, 군수가 주민들과 함께 분노하여 그
만행을 끝까지 저지하려고 했으나 결국 불가항력이었던 당시 실정도
대한매일신보는 알려준다. 뿐만 아니라 그 보도에는 경천사탑의 피탈 상황을
알고 있던 내부(내무부)가 아무런 조치도 취하려 하지 않은 당시의 무력했던
정부 실정도 통분스럽게 드러나 있다.
본문에서 밝힌대로 다나카가 국내외가 범죄시한 여론과 조선총독부의 반환
요구에 굴복하여 하는 수 없이 서울로 되돌려 보낸 시기는 확실치는 않으나
1919년 무렵 일이었다.
그 탑재들은 원위치의 복원 조립이 불가능하게 부분적인 파손이 너무나
심했다. 때문에 경복궁 근정전 회랑에 쌓아놓은 채 방치되다가 해방 후 1960년에
경복궁 동쪽 건춘문 안에 억지로 복원 건립이 이루어져 국보 86호로 지정되기도
했다. 그런대로 그위치에서 지난 35년간 위용을 빛냈던 경천사탑은 수년 전부터
착수된 경복궁 자체의 대대적인 복원계획 진행에 따라 1995년에 또다시
해체되어, 문화재관리국 문화재연구소 전문가들이 현재 탑재들의 참혹한 상처와
파괴된 부분을 새로이 최대한 보수하는 작업이 실시되고 있다. 이 작업은 여러
해 걸릴 예정이고, 앞으로의 재조립 위치는 국립중앙박물관이 신축·이전되는
용산의 박물관 경역으로 예정돼 있다.
다나가 자작 급 일탑
1907년 3월 7일자 논설
일본에서 왔던 특사 다나카 자작이 일본 황제에게 한국 황제가 개성 부근의
경천사 십층석탑을 선물하도록 욕심을 내다가 실패하고 말았음은 뒤에
기술하겠지만, 내무부에 줄이 있는 어떤 사람이 일본 특사에게 그 석탑 선물은
반드시 허락될 것이라고 확언하여, 다나카 자작이 귀국하는 인사로 한국 황제를
뵈올 때에 그에 대한 감사의 뜻을 표명하였더니, 우리 황제께서 역사적으로
귀중한 그런 석탑을 내줄 의향이 없다고 거절하셨다 함은 특사의 흉계가 탄로난
것이다.
그러나 엊그제 궁중에 들어온 보고를 들어니, 흉악한 일본인들이 그 석탑을
어떻게든 약탈해 가려고 하고 있음이 분명하다. 방금 접한 믿을 만한 보도를
빌건대, 삼사 일 전에 무기를 가진 일본인 130∼200명 가량이 탑이 있는 곳에
급습해 와서, 그 지역 관리자와 주민들의 항의에도 불구하고, 탑을 해체하여
개성철도역으로 운반하고, 다시 부산으로 실어갔다고 한다. 그런 약탈이
이루어질때에 일본인 순사들이 철도역 주위를 에워싸고 있었다고 한다.
이 보고는 개성의 지방관리가 직접 알려온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무법행위는
일본인들의 횡포한 행동을 역력히 드러낸 것이며, 한국 황제와 인민에게 고통을
안겨준 것이다. 이 사실이 명확히 보도되는 것을 깊이 믿고 싶지는 않다.
만약 앞의 보고가 과연 사실이라면, 다나카 자작의 사절이 우리 국민을 고의로
만만하게 본 것임을 누구나 확실하게 알 것이다. 한국 인민이 그 만행과 모욕에
능히 항거하여 일어설 것임은 이미 스스로 표시하였다. 만약 다나카 자작이 그
귀중한 석탑의 불법반출을 기어이 해 간다면 그가 능히 생각한 것보다 더 많은
곤란을 겪게 될 것이다.
사수 옥탑
1907 3월 12일자 잡보
개성군과 풍덕군 접경지역에 있는 경천사탑은 고려 공민왕 때에 공주를 위해
옥석(대리석)으로 10여 층(10층)이 되게 세운 수백 년 된 유물이다. 한데 무슨
허가를 받았는지, 일본인들이 그 탑을 무너뜨려 일본으로 실어간다 하기에,
두군민이 구름처럼 몰려들어 결사적으로 빼앗기지 않겠다고 맹세하였다고 한다.
옥탑 탈거의 속문
1907년 3월 21일자 잡보
개성 쪽에 있는 옥탑을 일본인들이 약탈해간 사건은 이미 거론하였지만,
그곳에서 방금 또 전해진 이야기에 따르면, 풍덕군 서면 경천리 읍내에서 10여
리 되는 곳에 있었던 그 탑은 고려 공민왕 때에 중국 원나라의 노국공주가
공민왕의 왕비로 시집오면서 석탑재를 가지고 와서 세웠던 것으로, 서울의
사동탑(원각사지 십층석탑)과 같은 시기에 건립된 것으로, 중국 원나라 재상
탈탈의 원탑이다.
그 돌은 옥 같기도 하고 아니기도 하며, 돌 같기도 하고 아니기도 하여
사동탑과 똑같다. 아래층에 조각된 인물상들은 무지한 부녀자들이 쪼아가 상처를
입었고, 윗층의 인물상들은 온전하니, 이는 6백여 년이나 된 유물이다.
지난 3월 6일에 일본인 수십 명이 많은 인부를 데리고 와서 허락문서도 없이
탑을 헌다는 사실을 군청에서 듣고, 그를 막으려고 하였다. 그랬더니 그 날은
탑을 헐기 위한 장목 등만 가져다 놓았고, 10일에 가보았더니 탑은 이미 다 헐려
달구지 여러 대로 거의 다 운반되어 갔고, 남아 있는 탑석은 40여 덩어리였다.
그 불법반출 때의 정황을 자세히 알아보았더니, 8일에 내부의 경무 고문
통역관 와타나베 등이 석탑을 조사하려고 내려왔다기에 군수가 같이 가서 하루
머무르며 그 운송을 금지시킴과 함께 인부들은 쫓아보냈고, 만일 내부에서
허락문서가 도착하면 그 뒤에 실어가느 것을 논의하자고 말하고, 그 즉시 그
문제를 개성 이사청 경부가 하기노에게 조회하고, 또 내부와 도에도 보고하였다.
뿐만아니라, 동네사람 수십 명을 불러내 며칠이라도 산에 올라가 탑을 지키라고
하였더니 일본인과 인부들이 다짜고짜 총을 쏘고 칼을 휘두르면서 탑을 헐어
10여 대의 달구지로 실어가니, 동네사람들은 그것을 막을 수 없었다고 하기에,
군수가 현지에 달려가 보았더니, 완전히 실어가고 남은 것이 하나도 없었다.
관리들에게 들으니, 작년 가을에 성명을 알 수 없는 감리자가 일본인 승려
아유가이·다이엔·에묘의 청원을 받아 탑이 섰던 경천사 터에 사찰을 새로
세우겠다더니, 이번 일도 일본인이 아유가이 등을 시켜서 저지른 것이라고 한다.
갱론 도취옥탑
1907년 4월 13일자 논설
다나카 자작의 사절이 개성 근방의 옥탑을 탈취해 간 사건은 매우 잘못된
것이라고 엊그제 (서울 프레스) 신문(일제 통감부가 발행한 영자지)에 개탄한 바
있으니, 우리 대한매일신보의 사건 폭로를 그 신문이 받아준 것은 이번이 처음
인 듯하다. 그 기자의 비탄과 그 논조가 자못 솔직하였다. 따라서 본 기자가 그
내막을 재론하고 싶지 않지만, 일본인은 거짓 사과를 잘 하는 만큼, 이
옥탑사건을 만약 엄밀하게 밝히지 않으면 그런 사태는 오늘처럼 이어질 것이다.
생각건대 한국은 옥탑을 잃고 한탄을 얻었으나 일본으로서는 옥탑을 얻고 잃은
것은 없게 된 것이다.
(서울 프레스)가 보도하기를, 만약 이토 히로부미 후작이 한국에 있었던들
이런 못된 짓은 반드시 없었을 것이라 하였고, 일본인의 그 불미로운 행위를
가볍게 거론하려고 하면서, 일개 일본인으로 진기한 물건을 사고파는 자를 이번
문제에 끼어넣어 옥탑을 옮겨가려고 음모한 자는 그 상인이라고 꾸며대고 있다.
또한 이미 꾸며댄 말도 있다. 다나카 자작이 이 문제를 한국 내부대신과
궁내부대신에게 말하여 동의를 얻었다는 것이고, 그 대신들은 통해 황제의
허락도 얻었다는 말이 그것이다.
기자가 요 전날 쓴 바와 같이 황제에게서 그런 허락을 얻었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다나카 자작이 귀국하는 인사를 드리러 갔을 때에 황제가 육백여
년의 그 고적을 옮겨가겠다는 것을 들어주었을 리 만무하고, 설령 옥탑을 선물로
삼기로 했다 하더라도 그것은 황제의 본뜻의 아니었을 것임도 일본 사절도 역시
알았을 것이다. 결국 재난을 당한 옥탑의 탈취자는 그를 반출해 가면서 실컷
즐거워했을 것은 역시 뻔한 일이다.
우리가 탐문한 바로는 그 반출자는 전보통신과 철도관처의 협조를 받았고,
무장한 자들을 데리고 가서 시위를 하기도 했다. 그때 철도관청 사람들이 해체한
옥탑 전부를 기차로 실어갔다는데도, 그 사실을 전보로 내무부에 보고하지 않은
것도 이상한 일이다.
만약에 이토 후작이 한국에 있었던들 그런 일은 절대로 없었을 것이라고 하는
것은 혹시 그랬을지 모른다는 말이다. 그런 말이 어찌 한국사람을 위로할 수
있겠는가. 만약 그 후작이 한국에 와 있는 일본사람을 대신하여 어떻게든 스스로
책임을 지겠다면, 그가 자주 한국을 떠나 있을 때에도 적합한 사람으로
대리권한자를 정했어야 한다.
기자가 그에 대해 말할 것이 이뿐이 아니지만, 다만 옥탑을 완전하게 도로
갖다 놓을 것을 권고하며 이 글을 맺는다.
옥탑과 급 기 행상
1907년 4월 19일자 논설
근래에 서울에 풍설이 나돌고 있다. 얼마전에 도둑질해 갔던 옥탑을 당장 도로
가지고 와서 일본인들이 무참하게 멋대로 옮겨간 그 자리에 다시 세워놓는다는
것이다. 이 풍설을 항상 요긴하게 탐문하는 곳에 입수된 것을 우리가
알게됐는데, 이로써 통감부가 과연 하나의 자혜로운 일을 능히 하겠다는 것인가.
우리가 믿을 만한 희망은 약간 있다.
그 옥탑을 되돌려 주는 것을 자혜로운 일로 말하려는 것은 그들이 여러
사례에서 이미 말하고 행동한 뒤에는 누구도 그들을 시켜서 번복할 수 없었음을
우리가 익히 보아 알고 있는 때문이다. 따라서 그 되돌아옴은 자혜롭게
이루어지는 것이라고 말할 만하지만, 그러나 그 옥탑이 실제로 되돌아 왔을
때에는 그것이 순전히 저들 스스로의 결정이었다고 할 사람도 있을 것인데,
그것을 어찌 증명할 수 있으랴.
생각건대 그 일은 만약 대한매일신보의 격론과 일본 (크로니클 신보) 지상에
흘법(서양인 이름) 씨의 비판론이 없었더라면 이미 잊혀지게 됐을 것이고,
한국인은 그 옥탑 때문에 탄식만 했을 것이다.
이 옥탑 사건을 계기로 앞으로 주시할 것이 있다. 첫째는 이토 히로부미
후작이 그의 통감부 소속과 그밖의 일본인들이 한국인 소유물을 저들의
소유물처럼 마구 차지하려는 태도를 혀용하지 않겠다는 의사를 한인에게
표시하라는 것이고, 둘째는 일본인 수없이 마구 차지한 일이 결국 오래 가지
못할 것을 또한 염두하라는 것이다.
그러니, 한국 인민이 일본 군인들에게 강점을 당한 토지도 혹시 적절한 보상을
받을만한 희망이 더러 있다. 뿐만 아니라, 한국 주권도 다시 되돌려 받게 그들이
소유한 우편 및 전신과 재정, 기타 여러 가지를 일본 정부가 처리해 줄지
모른다는 몽상 또한 있을수 있다.
일보의 옥탑기
1907년 4월 23일자 잡보
(오사카 마이니치 신문) 제9006호 보도에 옥탑 사진이 실려 있고, 그에 대한
기사가 장황한데, 대략 다음과 같은 내용이다,
경천사탑은 도쿄발물관 앞에 세워졌다
예부터 조선에 유명한 탑이 둘이 있었다. 그 하나는 서울 종로의 원각사
자리에 세워져 있고, 또 하나는 풍덕군의 경천사 자리에 있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조선 침략인 임진왜란 때에 가토 기오마사가 그 탑을 일본으로
가져오고 싶어했다는 설이 다나카 궁내성대신의 귀에 들어가, 그 두탑 중의
하나를 일본으로 옮겨오면 그 비할 데 없는 진귀품은 우리 일본 미술계를 위해
행복한 일이라 생각하고, 지난번 사절로 갔을 때에 조선 국왕에게 그를
간청하였던 바, 한국 정부측이 그 뜻을 이해하고, 이번에 조선 국왕께서 우리
궁내성에 경천사탑을 기증함으로써 박물관 앞에 세우고 영구히 보존하게
되었다… 운운.
탑 형태의 대략
탑의 높이는 약 4장 2척, 회백색 대리석의 13층(정확히는 기단 3층 위로
10층)으로 만들어졌다. 위의 5개 층에는 4면에 불상 셋씩이, 중간 2개 층에는
불상 다섯씩이, 그리고 밑의 5개 층(기단 포함)은 12면으로 조성돼
있는데(기본적으로는 +자형), 그 각면에도 불상 셋씩이(실제는 보살상들도
곁들여져) 조각돼 있다. 맨 위의 상륜부는 금속으로 만들어져 있는데, 정교하기가
이를데 없다. 탑의 현판석(1∼3층)에는 각기 화엄회, 대동금석문, 원나라 역사,
풍덕읍지 및 금음집 등의 내용이 새겨져 있어 기이함이 넘친다. 또한 관음보살이
불법을 강론하는 형상도 있으니, 그 보배로움이 이루 말할 수 없다.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그 가치를 말한다면 한국의 공채(일본에서 빌은 국채=외채)의 태반을
저당으로 잡힐 수 있을 정도라고 한다.
기자의 보탬말
일본인이 옥탑을 도둑질해 간 사실을 거론한 일이 여러 번이었지만, 개서군에
사는 한계명 씨가 (오사카 마이니치 신문)을 보다가 위와 같은 기사를 읽고
분통을 참을 수 없어서 그 신문을 우리 (대한매일신보)에 보내주었기에, 그
내용을 요약하여 여기에 게재하니, 애독자 여러분은 알고 있기를 바란다.
한국 보탑 문제
일본 이륙신문 역등. 1917년 6월 4일자 별보
최근에 도착한 외신을 빌면, 미국에서는 한국의 보탑 문제로 떠들썩한 논평을
불러일으켰는데, 미국에 머무르고 있는 일본의 구로키 대장은 신문기자들의
접근을 일절 사절하였다고 한다. 다음에 그 사실의 진상을 소개한다.
보탑이라면 어느 탑을 말하는가. 문제가 된 보탑은 백옥으로 만들어진
5층탑(10층탑의 잘못된 기록)인데, 높이가 9척 2촌(42척의 잘못된 기록)이고,
기가로 말한다면 수백만 원에 이를 것이다.
지금으로부터 1천 년 전(6백 년 전의 잘못된 기록)에 중국에서 한국에 기증한
둘 중의 하나인 그 보탑은 한국의 역사적인 보물임은 말할 것도 없다. 무지한
한국사람들은 그 탑의 돌가루를 먹으면 어떠한 중병이라도 당장 낫는다고
맹신하며 '약옥탑'이라고 부른다.
문제의 발단
문제가 된 경위를 알아보았더니, 저번의 한국 황태자 책봉의식 때에
우리(일본) 황실에서는 다나카 궁내성장관을 특사로 보낸 바 있는데, 그는 옛날
물건을 애호하는 습관이 있어서 욕심을 참을 수 없었던지 일·한 양국친교
기념물 명목으로 앞에 말한 두 보탑 중의 경기도 풍덕군에 있는 것을 간청하여
얻었다.
가져온 자와 의문점
그 백옥탑을 다나카 궁내성장관에게 기증하였는지, 또는 억지로 일본 황실에
기증하였는지 이미 의문스럽다. 일본과 한국의 친교를 위한 기념물로 한국
황제가 일본 황실에 기증하였다면, 상당한 예절의 격식을 거쳤어야 하는데,
기증문서 하나가 없고 사절 한 명도 없었으며, 서울에서 고물상을 하고 있는
일본인을 통해 일본으로 보내졌다는 것은 더욱 의문스러운 일이다.
일본에 가져온 과정
다나카 궁내성장관이 백옥탑을 일본에 가져온 과정을 적어 보면, 올해 2월
4일, 서울에서 고물상을 하고 있는 후쿠오카현 출신의 곤도라는 자가 헌병들을
데리고 풍덕군에 나타나 보탑을 헐어가겨고 하자 군수 등이 그를 허락하려 하지
않았고, 주민들 중에서도 강력히 항거하려는 사람이 나오자 부득이 약간의
무력을 쓴 뒤에 보탑을 결국 해체하여 인천으로 운반하였다. 3월 15일에는
도쿄의 신바시에 도착했고, 19일에 우에노 공원 안의 재실박물관으로
운송되었다.
보탑의 현재
재실박물관에서는 어떤 명령이 있기 전에는 보탑의 해체포장물들을 엄밀히
보관하라는 지시를 받고 있었기 때문에, 일본과 한국의 친목을 기념한 그 보물도
현재는 박물관 경내의 한 구석에 포장된 채로 보관돼 있으며, 누구도 그 실물을
보는 영광을 갖지 못했는데, 바다 건너 미국에서 그것이 문제가 되었음은
유감스럽운 일이었다.
앞으로의 조치
이 사건에 관하여 당국자는 속히 그 탑이 일본에 오게 된 자초지정을
공개하고, 천황이 본 뒤에는 일반인들도 관람케 하여 한국 정부에 성의를 보일
필요가 있다. 만약에 탑을 가져온 절차에 잘못된 점이 있었다면 다나카 대신이
불가불책임을 지어 두 나라 황실에 누가 미치지 않게 하여야 할 것이다.
옥탑 탈거의 전말
1907년 6월 4∼6일자 잡보
풍덕궁 서면 경천리는 개성과의 경계에 있다. 그 마을 뒷골짝에 경천사가
있었으며, 그 절 앞에 12층(정확히는 3층 기단 위로 10층) 옥탑이 서 있었다. 그
탑신에는 12진상(불상 보살상)이 정교하게 조각돼 있으며, 탑의 높이는
10장(100척)이다. 그 한 면에는 (지정 8년 경천 축원 위황제황후태자)의 15자가
새겨져 있고, 다른 한 면에는 (법륜상전) 네 글자가 옆으로 새겨져 있다.
전해지는 말로는 중국의 원나라 재상 탈탈이 불탑을 세우기를 원하여 진녕군
강융(?∼1349, 고려 충선 충숙왕 때의 공신)이 원나라의 석공 장인을 데려다가
이 탑을 조성하였다고 한다.
그 석재의 품질은 옥 같으면서서도 옥이 아니고, 돌 같으면서도 돌이 아니다.
물 속에 있던 돌이라고도 하며, 부드러운 듯하면서도 단단하고 그 색은 연한
푸른빛이니, 고려 공민왕비인 노국공주가 노나라에서 가져온 것이다. 절은 이미
없어진 지 오래고, 탑만 홀로 우뚝 서 있었으니, 목동들이 날마다 건드리고
상처내어 밑의 5층(기단부 2층 포함)은 조각 형상과 글자 획이 많이 손상돼
있다. 그렇더라도 6백 년 전래의 유물로, 국가적으로 참으로 애석한 상태이다.
지난 가을에 일본인 중 다이엔·아유가이·에묘 3인이 나타나서 군수에게
청원하기를,
"우리들이 경천사를 중축하고 탑을 보호하겠다" 운운하였다.
그래서,
"그런 일은 내무부의 소관이다. 그러니 내무부에 가서 말해보라"고 이르고
돌려보냈더니, 며칠이 안되어 또 와서 청원하기를,
"내무부 지시 속에 민가와 무덤들의 피해가 없겠는지 소상히 보고하라
하였으니, 즉시 밝혀 보고하시오" 하기에, 부득이 별로 피해가 없겠다고 즉시
내무부에 보고하였으나, 아직 별다른 지시가 없었다.
광무 11년(1907) 2월 21일에 현지 군수가 경천리 마을의 보고를 받아보았더니,
일본인 수십 명이 탑 근처에 몰려와서 천막을 치고 장목과 볏짚 등을 실어다
놓고 탑을 헐려고 한다고 하길래, 당장 경찰관과 군청 서기를 보내어 일본인들의
간계를 들추어 보려고 하였더니 일본인 수십 명이 수상하게 움직이다가 탑을
허는 일을 멈추었다. 그 행위를 따져 물었더니, 칼을 휘두르며 맞서서 응답을
하지 않았다.
다음날, 내무부 경찰 고문의 통역인과 와타나베 타카직로가 탑이 헐린 것을
조사하기 위하여 서울에서 내려왔다고 하므로, 군수가 말하기를, "사전에 허락한
문서가 접수된 바가 없는데, 마음대로 헐어가려고 하는 것은 어찌된 짓인가,
즉시 가서 중단시키라"고 하였더니, 와타나베가 말하기를,
"어찌 좌시할 수 있겠는가. 그러나 그 유물은 그렇게 중요한 것도 아니다.
내가 관리 한 사람을 데리고 빠른 시간 안에 현장조사를 하고 허는 일은
중단시킨뒤에 와서 말하겠다"고 하기에 군수가 말하기를,
"그럴 필요 없다. 그 고적 유물은 우리나라 지역 기록에 소상히 실려 있어
동양에 알려져 있다. 누구를 막론하고 폭력적으로 헐어가려고 한다면 그 사태를
막아야 한는 책임은 군수에게 있는 것이다."
그리하여 경천리에 달려가 보았더니, 개성 경찰 지서의 경부 안토 도모쿠마가
역시 먼저 조사를 하러 와 있었다. 와타나베 및 안토와 함께 탑이 있는 곳에
가보았더니, 전날 밤 사이에 몰래 다 헐어버려 해체된 탑재들을 짚자리로 묶어
포장한 것이 40여 덩어리였고, 깨져서 버려진 조각들이 또한 적지 않았다.
산골짜기 입구로 줄지어 탑재를 실어가려는 달구지가 넷이나 되어, 군수가 그
주동자를 물으니, 모두들 말하기를,
"주동자는 서울에서 오지 않았고 단지 현장 감독자 몇이 와 있다"고 하기에,
다시 와타나베에게 그 내막을 알아봐 달라고 하였더니, 와타나베가 말하기를
"여기 와서 처음 들어보았더니, 일본인 중인 점패가 실제 주동자로서 당국에
진작 청원하였으나 내무부에서 승낙을 피하고 있다. 승인을 기다리지 않고 탑을
헌 것은 크게 잘못된 일이다. 그러나 승낙문거가 곧 내려오게 할 것이니 특별히
허락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고 하기에, 군수가 통역인 및 와타나베와 현장
감독자라는 자에게 말하기를,
"허가문서가 도착한 다음에 실어감이 마땅하니, 지금 실어가려고 묶어 놓은
탑재들은 우선 다시 풀어놓고 인부들은 돌아가게 하라"라고 했더니, 와타나베가
감독자라는자에게 이르기를,
"만일 그래야 한다면, 주동자가 오지 않고 현장 감독자가 전담한 일이니, 오늘
달구지 4대가 공친 손해비는 감독자가 책임지고 배상해야 할 것이다"고 말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군수가 또 말하기를,
"만일 허락문서를 갖고 실어간다면 상대방은 누구인가. 손해금은 주동자와
감독자가 지출해야 할 것이다."
그에 대해 와타나베가 대답을 못하자, 즉시 감독자를 시켜 달구지 위에 실려
있던 여덟 덩어리의 탑재를 풀어서 한 곳에 모아놓고, 인부들도 되돌려보내고
나서 한참 앉아있다가 와타나베 및 안토와 작별하며 말하기를,
"오늘 세 관헌이 함께 현장조사와 수송 금지 조치를 취했으니, 마땅히
허락문서가 도착한 후에나 실어갈 수 있을 것이다. 감독자에게 당연한 그 사유를
알아듣게 하여 다시는 잘못을 거듭하지 않게 함이 어떤가."라고 하자,
와타나베와 안토가 모두 응락하며 감독자에 그렇게 하라 이르고 다시 말하기를,
"이처럼 귀국 관인이 감시하고 있는데 감독작 무슨 일을 또 일으킬 수
있겠는가, 염려할 것 없다"고 하였다.
그리고 나서 군수가 먼저 일어나 경천리로 돌아가고 서기와 마을의 동장을
시켜 현장에 달려가 다시 동정을 엿보고 보고하라 이르고 관아로 돌아오니 날은
이미 저물었다. 그 뒤 얼마 안 있어 서기와 동장이 보고해 오기를,
"여러 관헌이 돌아가자 감독자가 다시 당장 탑재를 실어가려고 들면서
말하기를, '만일 실어가지 못하면 손해가 적지 않다. 따라서 불가불 급히
실어가야 한다. 남은 돌들은 앞으로 허락문서를 기다려 가져갈 것이니 의심하지
말라' 하기에, 동장이 꾸짖어 말하기를, '비록 한 조각 돌이라도 손대선 안된다.
눈을 속여 실어가려고 든다면 이는 도리에 어긋나는 일이다'라고 경고하며
절대로 못하게 하였다. 그랬더니 수십 명의 불법적인 무리가 칼을 빼들고 우리를
위협하기에 끝까지 항거하지 못하고 돌아왔다"는 것이어서, 군수가 그 간악함에
분통하면서 다시 동장에게 말하기를,
"마을에 있으면서 막으려면 쉽지 않을 것이니, 그대가 사람을 수십 명 데리고
가서 며칠이라도 교대로 지켜보고 그래도 약속을 어긴다면 즉각 달여와
보고하라" 하고 군수도 즉시 경천리로 가려고 떠났다. 그러나 도착하기 전에
마을의 보고가 있었다.
"일본인들이 새벽에 몰래 남아 있던 탑재석을 달구지 수십 대에 싣고 이미
급하게 떠나버렸으니, 그 과정에서 동민 20여 명이 일제히 달려들어 막으려고
했더니, 일본인 사오십 명이 각기 총검을 들고 시위를 하며 달구지를 좌우에서
호송하는 바람에 도저히 막을 수가 없었다."
군수가 즉시 달구지 바퀴 자국을 따라가 보았더니, 이미 개성의 기차 정거장에
이르러 가지런히 쌓아놓고 포장된 덩어리마다 '궁내성에 보내지는 물건'이란
표지가 붙여져 있었다. 그래서 개성에 있는 일본 관할 기관에 달려가서 경찰관
하기노와 와타나베를 만나 항의하기를,
"나 역시 막지 못한 것이 잘못이지만 그것이 운반될 적에 총검이 달구지를
에워싸고 있었으니 우리가 그것을 끝까지 막으려고 했더라면 많은 사람이
구타를 당하고 상해를 입는 굴욕을 당했을 것이다. 그러니 뭐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라고 했고, 아키노는,
"비록 허가문서 없이 헐어갔더라도 하는 수 없다. 그 탑은 이미 다 운반되었고
현재 기차에 실려 떠나게 된 마당이니 서로 책임을 따져도 소용 없는 일이다.
그대 군수는 이 사실을 귀국 내무부에 보고하면 될 것이다"고 했다.
한국 보탑 문제의 속론
1907년 6월 5일자 별보
풍덕군 보탑 사건에 대하여 우리 대한매일신보는 거듭 별론한 바 있지만, 그
사실이 동서 여러 나라에 알려져 미국의 여러 신문에서도 크게 논평되었으며,
일본의 (만조보)와 (이륙신문)이 또한 공평한 해설로 그를 비평하고 있다.
어제 날짜(6월 4일자) 대한매일신보에 이미 일본의 (이륙신문)의 논평을
특별히 옮겨 소개했지만, 다름아닌 일본인이 쓴 그 사건 논평은 일본의 간악한
짓을 감싸려고 하면서 말한 것이데도 그 정도였으니, 하물며 세계 각국의 객관적
논평은 어떠했겠는가.
무릇 일본인의 강압적인 행위와 교묘한 속임수의 수단은 이루 말할 수 없고,
그들이 위협 또는 유혹으로 한국인 소유의 물건을 크건 작건 가리지 않고
무법적으로 탈취해 간 것이 이루 해아릴 수 없을 지경이다. 그러나 이번 옥탑은
6백 여 년이나 된 고적일 뿐아니라 그 정교한 조형미는 과연 미술적 보물이어서
그 가치는 수백만 환으로 계산될 수 있다.
저번에 다나카 자작이 일본 황실의 사명을 띠고 한국에 건너왔을 때에 오직
고물을 탐내는 욕심으로 그 옥탑을 가져가고 싶어 했으나 한국 황제폐하의
허락을 얻지 못했고, 한국 정부의 승낙도 받을 수 없었다.
이른바 고물상인 곤도 사고로라는 자가 헌병들과 철로 역부들을 거느리고 그
탑이 있는 곳에 가서 밤을 세워 탑을 헐어 몰래 실어갔으니, 그 행위를 어찌
도둑질이라 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만약 한국 황제폐하의 허락하심과 한국 정부의 승낙이 없었더라면 정당한
예의의 절차와 명백한 공문이 확실하게 있어야 했을 터인데, 어찌하여 지금껏
양국 황실 사이의 정중한 말이 없었으며, 한국 정부가 지시한 문서가 그 군에
보내진 바 없고, 그 지방 관리들이 왜 저항하였으며 마을 주민들이 왜 탑을
지키려고 했고, 일본인 사오십 명이 왜 칼을 휘두르며 위협적인 행동을
보였는가.
그 여러 정황으로 미루어 볼 때 일본인의 논평이 비록 교묘한 말과 수식어로
분장하여 천하의 이목을 속이려 한들, 과연 그렇게 되겠는가. 그런 까닭에
서울에서 발간되는 (서울 프레스)가 일본인의 언론기관으로 (대한매일신보)와
대립관계에 있으면서도 이번 사건에 이르러서는 (대한매일신보)의 비판적 보도를
받아들여, '일본 이토 후작이 만일 한국에 있었더라면 그런 일은 절대로 없을
것'이라 하였고, 다나카 자작은 일개 상인에게 모든 책임을 뒤집어 씌우고
자기는 책임이 없다고 하니, 그 불법행위의 사실을 (서울 프레스)도 숨길 수
없다고 자인한 상태임이 확연하다.
하물며 (만조보)와 (이륙신문)에 격력한 논박과 공평한 해설이 잇따라 실렸고,
미국이 여러 신문의 논평이 또한 그렇게 자자하였으니, 6백여 년 전래의
고적이자 수백만 환 가치의 이 보물을 도둑질해 간 사실이 천하에 폭로되었고,
만세를 두고 그것은 잊혀지지 않을 것이니, 그것이 일본에 가 있는데 따른
막대한 오명을 어찌 씻을 수 있겠는가.
앞으로 올바른 조치는 오로지 그 보탑을 한국에 되돌려보내어 기왕의 잘못을
사죄함으로써 양국 황실의 우의를 더욱 돈독케 하는 것이다. 그리고 다음으로는
한국에 대하여 상응한 가치의 물품으로 사죄의 뜻을 표명함이 마땅하다. 만일
그렇게 하지 않으면 그 보탑이 일본의 박물관에 있는 것이 영예가 되지 못할
것이고 역사적으로 무수한 수치가 될 것이니, 일본 당국자는 잘 깨닫고 반성하여
올바른 조치를 취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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