총각이 무슨 주례를 봐?
이기정
차례
추천의 말/최인호, 정채봉
책을 내면서/이기정
제1부 신학생 개X도 아니다
신문팔이 소년
성당 앞에 까만 옷 입은 사람
해방촌의 신학생네 집
아버지, 아버지
신학생 개X도 아니다
나무와 바위, 그리고 이솔 스님
명동 지킴이
제2부 총각이 무슨 주례를 봐
생각은 단순하게
저는 신부님이 싫어요
강함을 이기는 부드러움
참기쁨
총각이 무슨 주례를 봐
타이핑을 안 하면 감점
강제로 여행을 시킵시다
외로울 땐 언제든지
빛의 예술
공주병, 왕자병 환자들에게
혀끝과 손끝의 상처
언론이 해야 할 일
어머니께서 차려주신 식탁 앞에서
판단하지 말고 있는 그대로
빨간색, 파란색
제3부 그래, 말만 들어도 고맙다
놋그릇에 찌든 때처럼
참믿음
세상의 원리인 삼위일체
그대 무거운 짐 벗고 가벼워지려거든
당신 방법대로 돌보시는 주님
그래, 말만 들어도 고맙다
돈을 지상에서 최고로 생각하라
꼬마성인 말셀리노
우리들 부족한 머리로는
2천년 전의 개혁가
슬픔과 근심이 기쁨이 되리니
나비가 된 애벌레
기를 펴고 삽시다
세상만사가 헛되다
버림으로써 얻는 지혜
낟알과 과일, 그리고 빵과 포도주
깜박 잊고 고기를 드셨다구요?
천사가 된 불구 소녀
신부와 수녀가 많아야
금붕어 먹이를 주며
사랑으로 이어지는 생명의 고리
퍼내도 넘치는 샘물
신부님이 사람 차별해?
신부님, 우리 신부님
제1부 신학생 개X도 아니다
신문팔이 소년
늦은 밤, 어쩌면 막차일지도 모르는 지하철 전동차 안이었습니다. 신부 직분을
가진 저로서는 밤 늦게 지하철을 타는 경우란 극히 드문 일입니다.
승객들은 피로에 젖은 얼굴로 혹시 내릴 역을 지나치지나 않을까 가끔씩
창밖을 두리번거리며 의자에 기대 앉아 있었습니다. 그 중간중간에는 술취한
사람들이 열차가 움직일 때마다 이리 비틀 저리 비틀 몸을 가누지 못하며
꾸벅꾸벅 졸고 있었습니다. 하나 같이 삶의 질곡에 찌들고 지친 모습들
뿐이었습니다.
그때였습니다. 전동차 옆칸으로 통하는 문이 열리면서 신선한 생기가 넘치는
목소리가 들려왔습니다.
"내일 아침 조간이요! 내일 아침 조간 신문이요!"
열 대여섯 살쯤 되었을까, 아직도 앳되보이는 소년이 신문을 한 아름안고
나타났습니다. 승객 중 몇 명이 신문을 샀습니다. 저도 얼른 돈을 꺼내 신문을
한 장 샀습니다.
솔직히 말하면 저는 신문을 별로 안 보는 축에 듭니다. 더군다나 내일 아침
신문이라면 좋든 싫든 내일 아침 제 방 문앞에도 떨어져 있을텐데 구태여
밤늦게 사들고 갈 필요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무의식적으로 지갑을 꺼내 신문 한 장을 산 데는 그만한 사연이
있었습니다.
코 끝에 배어오는 비릿한 기름 냄새 같은 인쇄잉크의 향기를 맡으며 저는
아련한 어린 시절의 추억 속으로 빨려 들어갔습니다.
저 역시 가난한 신문팔이 소년이었습니다. 평안북도 강계의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난 제가 신문팔이가 된 것은 순전히 6.25 전쟁 탓이었습니다. 지주이며 또한
기독교 집안이었던 관계로 공산주의자들로부터 갖은 박해를 받아야 했던 저의
할아버지께서는 국군이 압록강까지 밀고 올라오자 아버지에게 가족을 이끌고
이남으로 내려가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북쪽은 사람 살 곳이 못 된다. 이남으로 내려가되 서해안은 위험하니
동해쪽을 택하여 산을 따라 내려가라."
강계란 곳이 워낙 산중이다보니 평소 산과 친해서 그러셨는지는 몰라도
할아버지의 그 말씀 때문에 아버지와 어머니, 형들과 누나, 그리고 남동생 등
우리 여덟 식구는 산을 따라 신의주를 지나 원산까지 왔고 원산에서 다시
태백산맥을 따라 속초까지 내려왔습니다.
전쟁 중이라 쓸만한 남자는 무조건 잡아가는 바람에 아버지와 형들은 우리와
함께 동행할 수 없었습니다. 어머니와 저와 동생, 그리고 누나들은 비록
산길이기는 했으나 마을을 따라 이동했지만 아버지와 형들은 우리와 헤어져
더욱 깊은 산속으로만 숨어 다녀야 했습니다.
헤어질 때는 다음 목적지를 정해놓고 각자 흩어졌다가 다시 모이곤 했습니다.
우리 가족이 다음 목적지에서 함께 만나기로 한 장소는 언제나 그곳의 가장 큰
교회였습니다.
신의주에서 가장 큰 장로교회, 원산에서 가장 큰 장로교회에서 몇월 몇일까지
만나자는 것이 우리 가족이 뿔뿔이 흩어지면서 서로에게 한 약속이었습니다.
나중에 알고 보니 그 당시는 우리 가족만 그랬던 게 아니라 북에서 피난하던
사람들이 교회에서 재회하는 경우가 흔했다고 합니다.
그렇게 해서 원산을 거쳐 속초 근방까지 내려왔으나 헤어지고 만나고 하느라
시일을 끌다보니 전선이 우리를 앞질러 가는 바람에 우리는 다시 원산으로
거슬러 올라가 얼마 동안 그곳에서 지내다 1.4 후퇴 때 피난선을 타고 부산항에
닿았습니다.
우리가 부산으로 내려와 정착한 곳은 대청동, 바로 영주동고개 넘어 복병산
기슭을 타고 넘는 언덕배기에 위에 있는 판자촌이었습니다.
저는 고향인 강계에서 유치원을 다녔으므로 곧바로 학교에 입학하려고 했지만
이미 학기가 시작된 후라서 다음해까지 기다려야만 했습니다.
그 동안 저는 판자촌의 형들을 따라다니며 신문팔이를 하기로 했습니다.
처음에는 부모님 몰래 하다 들통나 야단을 맞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동네
형들이 신문을 팔아 번 돈으로 눈깔사탕도 마음대로 사먹고, 새파란 유리구슬도
한 움큼씩 사는 게 무척 부러워 저는 그 일을 그만둘 수 없었습니다.
"내일 아침 부산일보요! 내일 아침 부산일보요!"
오후 여섯시쯤 신문을 받아 9시까지 열심히 뛰어다니면 보통은 손을 털 수
있었습니다.
어둠이 짙어가는 부산 시내를 잰 걸음으로 뛰어다니며 저는 배고픔도 잊고
목청을 높여 신문을 사라고 외쳤습니다.
그러던 어느날이었습니다. 그런 제 모습이 애처롭게 보였던지 한 번은 어떤
분이 저를 불러 세우고는 물끄러미 바라보며 물었습니다.
"꼬마야, 너 몇 살이냐?"
"일곱살이요."
"그럼 학교는 다니냐?"
"아니요, 내년에 갈 거예요."
"그래? 너 이 다음에 학교 가거든 공부 열심히 해야 한다. 그 신문 몽땅 이리
다우."
그 분은 제가 그때까지 가지고 있던 신문을 한꺼번에 몽땅 사는
것이었습니다.
"아저씨, 신문은 다 똑같은데 한 장만 사시면 되잖아요?"
제 어린 생각으로는 아저씨의 그러한 행동이 이해되지 않았습니다.
고개를 갸웃거리며 뭔가 이상하다 하면서도 어ㅉ든 신문을 다 팔았으니
기분은 좋아서 보통 때는 동생과 내 몫으로 각각 두 알씩, 네 알만 사가지고
들어가던 눈깔사탕을 그날만은 봉지째 사들고 깡충거리며 집으로 달려갔습니다.
"참으로 고마우신 분이로구나. 어린 네가 고생하는 게 마음에 걸려서 그
아저씨가 신문을 몽땅 사주신 게야."
어머니께서 제가 봉지째 사온 알사탕을 한 개 입에 넣으시며 하신 그 말씀을
듣고서야 저는 그 아저씨가 착한 사람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런 일이 있은 후 며칠이 지나 저는 또 다른 일을 겪게 되었습니다. 어떤
아저씨가 전봇대에 기대서서 저를 불렀습니다.
"야, 신문! 이리 와!"
저는 그 아저씨 앞으로 쪼르르 달려가 신문 한 장을 내밀었습니다. 아저씨는
전봇대에 기대선 채 신문을 읽기 시작했습니다.
"아저씨, 신문값 주셔야죠."
그러나 그 아저씨는 제 말은 들은 척도 않고 신문만 계속 뒤적거리는
것이었습니다.
"아저씨, 빨리 신문값 주셔야 딴데 가서 팔지요."
"짜아식, 되게 시끄럽게구네. 기다려, 임마."
그 아저씨가 오히려 소리를 버럭 지르는 바람에 저는 기가 팍 죽어 또 한참을
기다렸습니다. 그러나 아저씨는 계속 신문만 보는 것이었습니다.
어서 딴데 가서 팔아야 이걸 다 팔 텐데 하고 생각하니 저는 자꾸만 조바심이
나 견딜 수 없었습니다.
"아저씨, 돈 주세요! 신문을 보셨으면 돈을 주셔야죠."
저는 참다 못해 소리를 지르며 아저씨에게 다가섰습니다.
"짜아식 이게, 너 맞고 싶어?"
하는 말과 함께 느닷없이 그 아저씨가 발길질을 하는 바람에 저는 그만
땅바닥에 자빠지고 말았습니다. 마침 비가 온 뒤가 질퍽질퍽한 땅에 신문을
안고 쓰러졌으니 옷이며 신문이 온통 흙탕물에 뒤범벅이 되었습니다.
"조용히 신문이나 좀 보려고 했더니, 쬐끄만 자식이! 어서 꺼지지 못해, 임마!"
그 아저씨는 신문값은커녕 오히려 야단만 치고 사라졌습니다.
저는 땅바닥에 주저앉아 엉엉 울기만 했습니다. 팔아야 할 신문이 흙범벅이
됐으니 옷에 묻은 흙보다 그것이 더 큰일이다 싶었습니다.
"나쁜 아저씨야. 내가 힘만 세다면 달려가 죽어라 하고 패줬을 텐데..."
저는 울면서 중얼거렸지만 인적이 드문 곳이어서 누구 하나 보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러니까 저는 신문팔이를 하면서 착한 사람과 나쁜 사람, 선과 악이 어떻게
다르다는 것을 몸으로 부ㄷ혀가며 배운 셈입니다.
사실 그때 저는 동네 형들을 따라 입으로는 '내일 아침 부산일보, 내일 아침
부산일보'하고 외치기는 했지만 글자조차 깨우치지 못한 때였습니다.
하루는 신문을 팔러 다니다 다른 동네 아이들이 구슬따먹기를 하는데 정신이
팔려 구경하다 한참만에 일어서는데 손에 들고 있던 신문 이름이 생각나지
않았습니다. "내일 아침"은 생각이 나는데 그 다음이 전혀 생각나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지나가는 아저씨를 붙잡고
"아저씨, 이 신문이 무슨 신문이지요?"
했더니 그 아저씨가
"임마, 이름도 모르면서 팔고 다니냐? 부산일보다."
하시며 가르펴 주었습니다.
"아참! 그렇지. 부산일보인데."
저는 제 머리를 쥐어박으며 다시 '내일 아침 부산일보'를 외치고 다녔습니다.
글도 깨우치기 전에 선과 악을 몸으로 겪으면서 배운 저는 이 다음에 커서
어른이 되면 신문을 몽땅 사주신 그 아저씨처럼 착한 사람이 되겠다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래서 이듬해 서을 재동초등학교 부산 피난 임시분교에
입학한 저는 아주 열심히 공부했던 기억이 납니다.
늦은 밤, 모두들 지친 몸으로 귀가길을 서두르는 전동차 안에서 생기발랄하게
들려오는 신문팔이 소년의 외침 속에서 되돌아 본 어린 시절 기억의
편린들입니다.
성당 앞에 까만 옷 입은 사람
원산항에서 피난선을 타고 부산으로 내려갔던 우리 가족이 수복 후 서울로
이사와 처음 정착한 곳은 해방촌이었습니다. 이태원에서 후암동으로 이어지는
언덕배기에 다닥다닥 붙여 지은 판자촌이 그 당시 해방촌의 풍경이었습니다.
집이라고 해야 미군부대에서 흘러나온 종이 박스를 펴 겹겹이 벽을 하고 그
위에 천막이나 판자조각을 덮은 것이 고작이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비가 조금만
와도 이 구석 저 구석에서 빗물이 새는 게 예사였습니다. 그때마다 사람들은
통조림 깡통을 편 양철조각으로 빗물이 스며드는 곳을 땜질하느라 바빴습니다.
해방촌에서의 생활은 부산에서의 피난생활이나 별반 다를 것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수복이 된 후 정을 나누며 살던 이웃 사람들이 한집 두집 서울로 이사를
떠나자 우리도 부산에서의 생활을 정리하고 서울로 떠날 수밖에 없었습니다.
부산을 떠난 이유 가운데 하나는 제 남동생의 죽음이었습니다. 저보다 한 살
아래였던 그 동생은 지금 와 생각해 보면 원래 약골이었던 것같습니다. 얼굴이
새하얗고 성질도 온순하기 그지없어 꼭 여자애 같았습니다.
한 살이 위인 저는 때때로 동네 형들에게 대들기도 하고 수틀리면 곧잘
형들을 메어꽂기도 했습니다만 제 동생은 항상 온화하고 고분고분해 다투기는
커녕 손에 뭘 쥐고 나가면 주는 것인지 빼앗긴 것인지도 모르게 가진 것을 금방
다 주고도 생글거리며 들어오는 바람에 제가 늘 보호자처럼 돌봐줘야만
했습니다.
신문팔이를 하여 번 돈으로 엿이나 눈깔사탕을 사가지고 들어오면 반색하며
나에게 매달리던 그 동생이 살아 있다면 지금쯤 저와 같이 늙어갈 나이가
되었을 텐데도 그 동생은 아직도 귀여운 일곱 살짜리 소년으로만 제 가슴 속에
아프게 남아 있을 뿐입니다.
어느 날인가 작은 누나가 어디서 하얀 백설기 떡을 얻어와 동생과 셋이 함께
신나게 먹었습니다. 멥쌀로 만든 백설기는 말라 비틀어저 마치 돌덩이처럼
딱딱했지만 꼭꼭 씹어서 삼킬 때는 달콤하고 고소함이 어우러져 맛이
그만이었습니다.
그런데 떡을 먹고 난 뒤 얼마쯤 지났을까, 동생의 얼굴이 새파래지더니 숨을
헐떡이는 것이었습니다. 큰누나를 찾아 동생을 업혀 급히 병원으로 달려갔지만
의사 선생님께서는 이미 때가 늦었다는 것이었습니다. 먹은 것이 급체했는데
소화기능이 너무 약해 어쩔 수가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부산의 메리놀병원으로 기억합니다. 의사선생님은 갖은 방법을 다 써봤지만
결국 그날 동생은 일곱 살의 나이로 하늘나라에 갔습니다.
저는 그때 처음으로 어른들로부터 '하늘나라'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개신교(장로교) 집안에서 컸으니 때로는 어른들을 따라서 기도도 하고 아멘
소리를 곧잘 했지만 건성이었을 뿐, 어린아이인 저에게 '하늘나라'의 현존을
확신시킨 사람은 죽은 제 남동생이었습니다.
제가 어린 나이에 이미 '나는 이다음에 커 어른이 되면 신부가 되겠다'고
결심했던 동기도 바로 동생의 죽음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천사처럼 착했던 제 동생이 '하늘나라'의 천사가 되어 있을 것이란 믿음은
그때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습니다.
"하늘나라에 천사가 한 명 모자라는 바람에 하느님께서 갑자기 네 동생을
데려가신 게야."
울고 있는 저에게 해주셨던 어머님의 그 말씀이 지금도 틀림없다고 굳게 믿고
있으니 말입니다.
'동생을 만나기 위해서라도 하늘나라에 가야 한다. 그럴려면 나도 동생처럼
착해져야지.'
나는 그때부터 결심을 하고 싸움질을 하고 싶어도 억지로 참았습니다. 남을
이기려고 하지도 않았습니다. 무엇보다 내가 싸웠던 이유가 대부분 동생
때문이었는데 동생이 없으니 싸울 일도 없어진 셈이었습니다.
동생이 '하늘나라'로 간 무렵 어머니와 누나는 천주교로 개종했습니다. 동생의
죽음을 겪으면서 어머니의 믿음에 무언가 중대한 변화가 있었던 듯합니다.
덕분에 어머니께는 제게 누나뻘 되는 대녀가 생기게 되었습니다. 그 누나는
자주 우리 집에 와 식구처럼 정답게 지내곤 하였습니다. 그 누나 또한
피난민이었는데 동생을 잃고 의기소침해 있던 저를 무척 귀여워해 주었습니다.
그 누나는 미용사였던 듯싶습니다. 저를 자주 미장원에 데려가 초콜릿이며 껌,
사탕 등을 사 주며 마치 비서처럼 어디를 가든 꼭 데리고 다녔던 기억이
납니다.
하루는 그 누나의 손목을 잡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이었습니다. 제가 그
누나에게 물었습니다.
"누나, 하늘나라에 가려면 어떻게 하면 돼?"
"성당에 열심히 나가고 공부 열심히 하고 착한 일도 많이 하고 그러면 갈 수
있을 거야."
"누나도 잘 모르는 모양이구나?"
그 누나의 대답이 확실치 않아서 따져 물었습니다.
"왜 몰라? 나는 하늘나라에 질러 가는 길도 아는데."
"그 길이 뭔데? 질러 가는 길이 뭐야?"
나는 다시 물었습니다.
"알려 주면 네가 그 길로 갈래?"
"응. 갈래."
"약속할 수 있어?"
"응."
"너 정말 손깍지 끼고 약속할 수 있어?"
"응."
"좋아. 손 내밀어!"
그 누나와 저는 손가락을 걸고 엄지손가락으로 도장까지 찍어가며
약속했습니다.
"그럼 알려줄게 귀 좀 줘 봐."
나는 내 귀를 그 누나의 입술 가까이 가져다 댔습니다.
"신부가 되는 거야."
"신부? 신부가 뭐야?"
"성당에 가면 계시잖아? 문 앞에 까만 옷 입고..."
지금 생각해 보면 그 누나도 정작 신부가 뭔지도 모르면서 성당 문앞에 까만
옷 입고 서 있는 사람 정도로만 제게 알려주었습니다. 철없던 시절 그 누나와
겁없이 한 그때 약속이 지켜진 것 같아 이 역시 하느님의 뜻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남은 생애 동안 제게 주어진 직분인 사제 생활에 충실하여 그때 어머니와 그
누나가 얘기한 대로 천사가 된 동생을 만나기 위해 하늘나라를 향해 질러
갔으면 하는 바람은 살아온 날보다 살아갈 날이 더 짧다고 느껴지면 느껴질수록
더욱 절실해지는 바람입니다.
해방촌의 신학생네 집
제가 처음 들어간 학교는 서울에서 피난내려온 재동초등학교
임시분교였습니다. 그러나 서울이 수복되어 재동초등학교가 서울 본교로
옮겨가는 바람에 제가 졸업할 때의 학교 이름은 부산 남일초등학교로 바뀌어
있었습니다.
초등학교를 졸업하던 그해 우리 식구들은 서울로 이사하게 되었습니다.
아버지와 형들은 그때 이미 서울 해방촌에 자리잡은 후였지만 메리놀병원에서
간호사로 근무하던 누나와 초등학교 6학년이었던 저 때문에 두 집 살림을 하게
됐고 어머니는 부산 살림을 맡아 하여야 했습니다.
사정이 이랬으니 저는 어차피 서울의 중학교를 택해 진학해야 할
형편이었습니다. 그런데 겨우 초등학교를 졸업한 어린 나이에 학교 이름까지
찍어 혜화동에 있는 소신학교에 지원하겠다고 말씀드리자 부모님은 제게
'소신학교가 도대체 무슨 학교인지 알기나하고 그러느냐?'며 반대하셨습니다.
그러나 어머니의 대녀였던 그 누나와 비밀리에 한 약속도 있었고 또 천사가
된 동생을 만나기 위해 하늘나라에 질러 가려면 꼭 신부가 되어야겠다는 제
결심만은 굽힐 수 없어 계속 고집을 부렸습니다. 마침내 부모님도 할수없이
승낙하시고 말았습니다.
부산 집에 다니러 오신 아버지 편에 원서를 써 보내고 얼마 뒤 입학시험을
치르기 위해 저 혼자서 서울행 기차를 탔습니다.
서울역에 내리면 아버지와 형이 마중나오기로 약속하긴 했지만 혹시나
잘못되면 어쩌나 싶어 주소와 약도를 꼭 품고도 혹시 잃어버리지나 않을까 잔뜩
신경써야만 했습니다.
그렇게 잔뜩 긴장하고 오다 그만 깜박 잠이 들었습니다. 지금은 다섯 시간
남짓 걸리는 거리지만 석탄 연기를 화통으로 뿜어내던 그 시절 증기기관차는 열
몇 시간을 타야 했습니다. 아침에 탄 차가 밤이 되어 창밖 구경조차 할 수 없게
되었으니 어린 저로서는 잠이 들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떠들썩한 소리에 깨어 보니 서울역이었습니다. 주머니에 넣은 주소와 약도를
다시 한 번 챙겨 보고는 사람들에게 떠밀리다시피하여 개찰구를
빠져나왔습니다. 저만큼 앞에서 아버지와 형이 저를 기다리며 서 계신 것이
그렇게 반가울 수 없었습니다.
머리를 쓰다듬어 주시는 아버지를 따라 형과 나란히 걸으며 후암동을 지날
즈음 저는 화들짝 놀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형! 내 책보 못 봤어?"
"책보라니?"
"내 책보말이야."
"역에서 안 들고 나오던데?"
열차에서 내릴 때 주소와 약도에만 신경을 쓰느라 시렁 위에 올려놓은
책보따리를 그만 깜박 잊어버리고 내린 것이었습니다.
그 책보따리에는 입시 참고서들이 몽땅 들어 있었습니다. 그걸 잊어버리고
내렸으니 야단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렇다고 되돌아서 가봤자 찾을 수도 없는 일, 이제는 소신학교고 뭐고 다
글렀다 싶었습니다. 일부러 서울 가서 지리도 익히면서 시험공부를 할 요량으로
시험 날짜를 열흘이나 앞두고 올라왔는데 큰일이었습니다. 그 열흘 동안 책이
있어야 공부를 할 텐데 공부고 뭐고 멍청히 시간만 낭비하게 된 것입니다.
자포자기하는 마음으로 서울 구경만 신나게 했습니다. 전차를 타고 중앙청도
가보고 덕수궁, 창경궁 등을 둘러보기도 했습니다.
그해 소신학교는 경쟁률이 6:1이나 되었습니다. 그러니 소신학교는 불합격될
게 뻔하고 해방촌에서 가깝다는 숭실중학교나 오산중학교 정도만 가도
다행이라는 생각이었습니다. 그래도 이왕 원서를 냈으니 시험이나 쳐 보자 하는
마음으로 소신학교부터 시험을 쳤습니다. 그런데 합격자 발표를 보니
31번이라는 제 수험번호가 딱하니 붙어 있는게 아니겠습니까.
그때의 기쁨은 이루 말할 수 없었습니다. 깡충깡충 뛰었던 기억이 납니다.
피난민들이 모여 사는 해방촌에서는 저를 포함해 소신학교 학생이 네 명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중에서 묘하게도 우리 집만 '신학생네 집'이라고
불렸습니다. 똑같은 학교였는데도 다른 집은 아이들의 이름을 붙여 '귀남이네
집' '용수네 집'이라고 불렀는데 우리집은 그저 '신학생네 집'으로만 부르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더욱 묘한 것은 몇 년이 지난 다음 보니 저를 뺀 나머지 신학생들은
이런저런 사정으로 소신학교를 그만두고 다른 학교로 전학을 했는데 유독
'신학생네 집'이라고 불리던 우리 집의 저만 소신학교를 마치고 대신학교로
진학하게 되었다는 사실이었습니다.
지금 생각해도 하느님의 뜻이라고 밖에는 이해되지 않는 일입니다.
아버지, 아버지
지금으로부터 삼십여 년 전 이야기입니다. 어느 일요일, 집에서 누가 면회
왔다는 이야기를 듣고 "틀림없다. 아버지가 드디어 구두를 사 오셨구나!" 하면서
계단을 신나게 콩콩콩콩 하면서 달려 내려갔습니다.
저는 1957년 봄에 서울 혜화동 동성 학교 뒤에 자리한 성신 중고등학교에
신학생으로 입학하여 착실하게 공부하고 있었습니다. 중학교를 마치면 고등
학교도 그대로 올라가야 하는 제도였고 학생들은 중학교 1학년부터 전부 기숙사
생활을 해야 했습니다.
고등학교 1학년이 되어 교모에 높을 '고'자를 달고 나니 어깨가 으쓱하고 괜히
건들거리고 싶은 마음은 신학생이라고 없을 리 없었습니다. 저는 그때 남들처럼
튼튼한 구두가 신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워커에 까만 물감을 들여서 갖다
달라고 집에 편지를 했던 것입니다.
면회실에 들어가니 커다란 잠바를 입으신 갸름한 아버지가 빙그레 웃으시며
앉아 계셨고 탁자 위에는 신문지로 싼 큼직한 물건이 있었습니다. 저는 아버지
앞에 서서 깍듯이 하고 자리에 앉았습니다. 속으로 아버지에게 대견하게 보여야
하고 사치하게 보이면 안 되며 학교 생활이 힘들다고 해도 안 되고 모든 게
좋다고 말씀 드려야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여하튼 아버지를 만나니 기쁘기도 하지만 어색한 기분이기도 했습니다.
이러저러한 문안을 올린 후에 아버지는 구두를 풀어서 신어 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잔뜩 호기심에 싸여 신문지를 한겹 두겹 벗기면서 '군인 구두인
워커보다는 일반 구두면 더 좋을 텐데...'하는 사치한 생각을 하면서 한 편으로는
'안돼! 아버지가 신학생인 나에 대해 실망하실거야.'하고 스스로를 꾸짖었습니다.
포장을 벗겨보니 번쩍하고 빛나는 구두 코끝이며 발목의 부드러운 가죽이
아주 비싼 부츠였습니다. 당시에는 이런 구두는 백 명 중 한두명이 신을까 말까
할 정도였습니다. 밖에 나갈 때 신으면 뻐길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아버지는 매일 서울 장안을 두 바퀴씩 자전거로 돌면서 자동차 부속을
배달하는 일을 하시던 때였습니다. 힘든 일을 하시는 아버지를 생각하며 콧등이
시큰해지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경쟁이 심한 데다가 당시에는 자동차의 숫자도
많지 않았던 탓에 누가 계속 더 많이 외상을 깔아 놓느냐 하는 경쟁이 심한
때였습니다. 이 정도의 구두를 사려면 일주일 정도의 수입을 몽땅 합해야
된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저는 잠시 구두를 내려다보다가 불현 듯 퉁명스럽게 한마디 내뱉고
말았습니다.
"아버지, 나 이건 안 신을래. 도로 가져가요."
속으로는 가져가실까 봐 불안해 하면서도 겉으로는 말이 왜 그렇게 나왔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멋을 좀 부리려고 혼자 몰래 꿈꾸던 것을 들켜버렸다는 데
대한 불쾌감이 갑자기 제 안에서 발동해 버린 것입니다. 저는 왠지 아버지를
괴롭히고 싶은 마음까지 갑자기 들었습니다. 아마 반항기라 그랬는지, 너무 좋아
그랬는지, 욕망이 너무 쉽게 이루어져 허탈감에서 그랬는지 좌우간 잘
모르겠습니다.
"내가 워커 물들여 달랬지, 누가 이런 거 갖다 달랬어?"
원래 아버지는 모든 것을 좋게만 해석하는 착한 분이셨습니다. 그런
아버지이기에 나를 짜증나게 한다고 속으로 아버지를 탓하는 심사도
일어났습니다. 그러나 아버지는 잔잔한 음성으로 말씀하셨습니다.
"그래도 아버지가 기껏 사온 건데 신어 보기라도 하려무나."
저는 아버지가 시키는 대로 묵묵히 신어 보았습니다. 약간 큰 정도였습니다.
그래도 고맙다는 말이나 좋다는 말은 나오질 않았습니다. 어색한 투정을 하면서
사치하다느니, 운동장에서 마구 신지도 못하겠다는니, 너무나 커서 양말을 다섯
개는 신어야 되겠다느니 하며 투덜대었습니다. 그러는 가운데 나의 속마음이나
겉마음도 모두 한뜻이 되어 싫다는 쪽으로 밀어붙이기로 작정해 버렸습니다.
한참이나 나의 어리석은 이중 심리적 불평을 들으면서 아무 말씀도 하지
않으신 채 멋쩍은 손놀림으로 꾸역꾸역 다시 구두를 싸시는 아버지의 모습,
그때 그 모습이 '아버지'라는 단어만 들으면 언제나 내 마음에 뭉클하며 솟아
피어납니다.
아버지는 학교 선생을 지내신 분으로 글쓰기를 좋아하셨습니다. 공무원
생활도 오래 하셨고 6.25 이후에는 장사에 손을 대셨지만 워낙 마음이 선하셔서
이익 남기는 것을 무슨 죄라도 지은 양, 남에게 손해를 끼치는 것으로 생각하고
괴로워하셨습니다. 어머니와 이 점에서 자주 다투시는 것을 여러 번 보았습니다.
그러나 다투는 것을 자식들이 있을 때였고 단둘이 있을 때에는 어머니가
사과를 하시며 마음을 곱게먹고 험한 세상 서로 사랑하며 살기로 결론을 내리곤
하는 것을 저는 잠결에 여러 번 들은 적이 있습니다.
아버지의 깊은 곳에 뿌리 박힌 선한 성품에서 저는 선비, 스승, 어른, 지도자
등의 말에 대한 개념을 파악할 수 있었고 인내, 용서, 화해, 진리, 희생 같은
추상 단어의 개념을 잡을 수 있었던 듯합니다.
오늘도 아버지를 생각하면 '감사합니다'라는 마음이 절로 납니다. 이미 세상을
떠나신 지 수십 년이 지났지만 아버지는 지금도 나의 선비, 스승, 어른,
지도자이시며, 용서, 화해, 진리, 희생을 가르치고 계신 분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때 구두를 도로 싸 가지고 자전거에 실으실 때 나의 발은 꿈틀꿈틀하며
막을까 말까, 신경이 교차되었습니다. 끝내 실려 보낸 이중 성격의 요사스런
마음을 가졌던 저는 오늘도 아버지께 반성을 사랑으로 드립니다.
어쩌면 그렇게 나무라시거나 타이르심 없이 제가 하라는 대로 해주셨는지...
다른 아버지들은 우리 아버지를 비웃을지도 모르겠지만 바로 그런 아버지였기에
오늘도 아버지의 가르침은 전류 같은 에너지로 지속되며 제 안에서 활동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신학생은 개X도 아니다
누구든지 신부가 될 수는 있지만 그렇다고 아무나 신부가 되는 건 아닌가
봅니다. 제가 그랬습니다.
저도 소신학교를 졸업할 때까지는 그런 대로 평탄하게 공부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제가 대신학교로 진학하겠다고 하니까 부모형제의 반대가 극심했습니다.
특히 어머님의 반대가 심했던 게 저로서는 의외였습니다.
부모 마음이란 다 그렇겠지만 자식을 낳아 공부시켜 좋은 색시감 얻어 장가도
보내고 가정을 꾸려 행복하게 사는 모습을 지켜보는 게 낙일수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어지간한 신앙이 아니고서는 자식이 결혼도 하지 못하는 신부나
수녀가 되겠다고 할 때 선뜻 동의하기는 어려울 것이라는 생각도 듭니다.
제 어머님 심정이 꼭 그랬던 것 같습니다.
"네가 정녕 신부가 되겠다고 나서면 나는 성당에 그만 다니겠다."는 말까지
하시며 반대하셨으니 말입니다. 나중에는 형들이 학교까지 찾아와, 군대에
간다는 핑계를 대고 나와서 제대 후에 형들이 하는 간장공장을 함께 하지고
꾀기도 했습니다.
대신학교 학생이라 하여 병역이 면제되는 것도 아니어서 공군에 입대했는데,
180센티미터의 키에 늘씬한 몸매 때문에 공군본부 의장대 행사요원으로
발탁되어 버렸습니다.
의장대 생활이란 훈련의 연속이기 때문에 졸병 1년은 얼마나 바빴던지 지금
와서는 기억조차 나지 않습니다. 몸이 고달프니 마음을 다르게 먹을 틈조차
없었던 것 같습니다. 하지만 상병으로 진급하자 총을 마치 젓가락처럼 가지고
놀 만큼 기술이 숙달되고 더 이상의 훈련도 없이 행사날 외에는 노는 시간이
많아 마음이 해이해지기 시작했습니다.
신학교 생활이나 군대생활, 특히 절도와 정확을 기하는 의장대 생활은
일맥상통하는 점이 없지 않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남아돌게 되자 그런 절도와
정확성에서 좀 벗어나 보고 싶은 이유없는 반항심 같은 것이 마음 속에서
꿈틀거리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아예 날짜를 정해 놓고 정확하게 1년
동안 세상을 거꾸로 살아보자고 마음먹었습니다. 그 1년 동안 세상의 죄란 죄는
실컷 지어보자는 생각까지 하게 되었습니다. 생각만 한 게 아니라 실제로
행동으로 옮겨 죄를 짓기 시작하였습니다.
당시 제 신분이 신학생이니 군대 상관들은 제가 정직하리라 믿고 의장대의
보급품 관리를 맡겼습니다. 그런데 제가 사악한 마음을 먹고 나니 상관들은
꼼짝없이 고양이에게 생선을 맡진 꼴이 되어버리고 만 것이었습니다.
당시에는 그렇지 않아도 상하 구분없이 군대 물품의 횡령이 흔하던
시절이었습니다. 더구나 의장대는 항상 신품만 지급받아 쓰기 때문에 조금만
절약해도 보급품이 남아돌 수밖에 없었습니다. 처음에는 상관들이 어디에 가서
뭘 좀 팔아오라는 심부름을 시키면 마지못해 팔아오는 정도였지만 마음이
바뀌니 널려 있는 게 모두 제 것이었습니다. 삥땅을 조금씩 챙기면서 돈에 눈을
뜨고 수중에 돈이 있으니 술도 마시게 되고 여자도 하나 꾀어 사귀기
시작했습니다.
같은 부대에 저와 동기로 함께 들어간 신학생이 또 한명 있어서 그 친구와
둘이서 단짝처럼 지냈습니다. 그런데 이 친구는 언제나 저보다 한 술을 더 뜨는
것이었습니다.
심지어 한 번은 여자한테 빠진 그 친구가 외출나가 규정시간을 넘기고 외박을
하고 오는 통에 그 친구는 영창으로 넘어가고 나머지 부대원은 단체기합을 받게
되었습니다. 고참들은 "신학생 자식들이 오히려 더 개판치고 다닌다"며 야단이
났습니다.
한 고참 병장이 저를 불러 세우더니
"야, 임마! 지금부터 내가 하는 대로 따라 해!"
하더니
"복창 준비!"
를 외쳤습니다.
"복창 준비!"
저는 부동자세로 복창 준비 구호를 따라 했습니다.
"복창!"
"복창!"
"신학생은 개X도 아니다."
"신학생..."
저는 차마 끝까지 따라 할 수가 없었습니다.
"임마, 복창 못 하겠어?"
고참 병장이 호통쳤지만 끝내 군대용어로 '쪼인트를 까이면서'도 저는 끝내 그
뒷말을 복창할 수 없었습니다. 우리 두 사람을 뺀 나머지 전체 신학생들의
명예를 지켜줘야 할 것 같아서였습니다.
결국 정신없이 터지고 체이며 기합받다 보니 나중에는 정신이 다 오락가락할
정도였습니다.
어쨌든 그 일이 있은 뒤부터 저는 은근히 오기가 발동해 서서히 중심을
잡아가기 시작했습니다. 바로 곁에 가까운 사람이 그러고 있으니 나라도 똑바로
해서 전체 신학생의 이미지를 살려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입니다.
레크리에이션 지도자 강습이나 사진 강의를 받으러 다니기도 하고, 어쨌든
여가 시간을 좋은 방법으로 돌리려고 노력했습니다. 사귀던 여성을 설득시켜
영세까지 받게 하고 그녀의 친구들과 우리 부대원들이 함께 등산팀을 조직해
외출 때는 산을 오르기도 했습니다.
이제 와 제가 신부가 된 것을 돌이켜 보면 하느님께서 하시는 일이란 참으로
오묘하다는 생각에 오싹오싹합니다. 삶의 고비고비마다 나를 잡아매시고
다듬으시는 하느님. 어쩌면 하느님께서는 군대시절 가장 가까운 사람을
거울삼아 저 같은 인간을 당신의 도구로 다듬으신 것 같습니다.
그 친구는 결국 사제가 되지 못했습니다. 솔직히 말해 저는 그 친구 덕택에
사제가 된 것인지도 모릅니다. 물론 더 큰 뜻은 하느님께서 이미 작정하신
것이겠지만...
나무와 바위, 그리고 이솔 스님
제가 천주교 신부로서 한평생 외길을 걷겠다고 결심을 하기까지에는 주변에서
조언을 해 주신 분들이 많이 계십니다만 그분들 중에는 아이러니컬하게도
스님이 한 분 계십니다. 더구나 그 스님은 아주 결정적일 때 흔들리고 저를
사제의 길을 가도록 붙들어 주신 분이라서 오래도록 기억하고 있습니다.
가톨릭 신학대학 재학 중에 공군에 자원입대하여 제대를 얼마 앞두고 얻었던
마지막 휴가 때였습니다. 벌써 30년이란 세월이 지난 일이라서 스님의 법명은
잊어버렸습니다만 '이 솔'이라는 특이한 이름이어서 아직껏 그분의 함자를
기억하며 삽니다.
그당시 저는 사진에 심취하여 겨울 설경을 찍기 위해 속리산에 갔었는데
도착하던 날 오후부터 눈이 폭설로 변하면서 찻길이 끊어지는 바람에 며칠 후
길이 열릴 때까지 꼼짝없이 갇혀버리는 신세가 되었습니다.
이 솔이라는 이름을 가지신 그 스님께서도 저처럼 속리산에 다니러 오셨다가
길이 막혀서 하산을 하지 못하셨던 걸로 기억됩니다.
스님과 저는 매일 저녁 같은 시각에 같은 다방에 홀로 앉는 나그네였습니다.
폭설 때문에 고립된 사람은 여럿이 있었지만 다른 사람들은 모두 일행이 있었고
외톨이 여행을 온 사람은 스님과 저, 둘 뿐이었습니다.
나이 차이가 10년은 넘게 났지만 스님과 저는 쉽게 친해졌습니다. 각자
숙소로 정한 여관에서 찻집에 이르는 길마저도 발목이 푹푹 빠지는
눈길이었지만 다방에 가면 음악도 들을 수 있고 또한 그 당시에는 좀체로 보기
드문 흑백 TV가 있어서 객지에서의 무료함을 달랠 수가 있었습니다.
저녁식사가 끝나면 두사람은 마치 약속이나 한 듯이 서둘러 다방으로 향해
밤이 이슥하여 뚱뚱한 다방 여주인이 하품을 두세번 연거푸하며 문을
닫아야겠다고 할 때까지 많은 얘기를 주고받았습니다.
그때 그분과 나눴던 대화의 주제는 주로 나무와 돌, 특히 거목과 바위에 대한
얘기였습니다.
나무나 바위는 스스로 자리를 옮겨 앉지 못합니다. 한 번 태어난 곳에서
수백년 또는 수천년의 긴 세월을 견디어 냅니다.
비가 오면 오는 대로, 눈이 오면 눈이 오는 대로, 바람이 불면 바람이 부는
대로, 춥거나 덥거나 그 모든 조건을 불평없이 수용하며 또한 순응하면서
인고의 긴 세월을 지켜갑니다.
그러다가 나무는 끝내 인간에 의해서 절단되어 목재로 쓰이거나 고목이 되어
썩게 되지만 썩어서도 분해가 되어 토양에 거름이 되고, 바위 또한 석재로
쓰이거나 풍상에 부서져 돌이 되고 흙이 됩니다.
창조주의 섭리에 순응하며 묵묵히 긴 세월을 버틴 거목과 바위가 끝에 가서는
본래의 형체를 잃고 세상에서 흔적이 없어질 때는 새로운 생명을 배태하는
원천이 되는 것입니다.
눈이 치워지고 버스 길이 트여서 고립된 지 나흘만에 속리산에서
내려옴으로써 저와 이 솔 스님과의 나무과 바위에 관한 대화는 그쯤에서 끝을
맺었습니다. 그러나 당시 제대 후의 신학대학 복학 문제를 앞에 두고 복학을
해야 하느냐 마느냐로 고민하면서 갈등을 겪고 있었던 제가 이 솔 스님과의
만남이 있은 뒤에 복학을 해서 신부가 되겠다는 결심을 굳혔던 걸 생각하면
스님과의 대화에서 많은 도움을 받았으리라 생각됩니다.
스님과 신부의 삶이 어쩌면 거목과 바위와 같은 맥락이나 기가 있는 것인지는
앞으로 살아가면서 좀 더 깊이 사색해 보아야 할 명제로 남겨두고 말입니다.
명동 지킴이
동창 신부들이 가끔 놀리는 말로 저를 그렇게 불렀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서울대교구 교무처장으로 있다 곧장 명동성당의 수석신부가 된 탓일 겝니다.
지킴이라고 해봤자 86년부터 92년까지니 햇수로 따지면 6년 정도를
명동성당에서 지냈습니다.
생각나시겠지만 그 무렵은 시국이 제일 어수선했던 때였습니다. 명동성당
수석신부라는 직채은 명동성당의 살림살이를 맡아 하는 일이어서 그때 저는
하루하루를 무척 힘들게 보내야 했습니다.
6.29 선언이 나오고 나서도 일주일에 평균 2, 3개의 시위대가 명동성당을
점령(?)했습니다.
"왜 자꾸 성당으로만 몰려오십니까?"
하고 길을 막으면 성당 건물을 가리키며
"이 집이 당신네 집이요? 하느님의 집이지."
하면서 막무가내로 밀고 들어오는 겁니다.
성전을 가리키며 '하느님 집'이라고 하는데야 신부인 저로서는 '아닙니다' 할
수 없는 일이니 뒤로 물러날 수밖에 없습니다.
곧장 시위대와 경찰은 양쪽에서 서로 바리케이트를 칩니다. 종교행사는 해야
하고, 시위도 해야 하고... 그러다 보니 신자들이 다니기조차 불편하기 짝이
없었습니다.
언젠가는 성당 입구에서 경찰이 신자들을 검문하기까지 한다는 소리를 듣고
'눈으로 보면 알텐데 검문까지 할 게 뭐 있느냐?'고 경찰 책임자를 만나
따지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성서나 성가책을 들고 버젓이 들어과 시위대에 합류하는 사람들이 제
눈에도 몇 사람씩이나 띄는 걸 보면 신자와 시위대를 가려낸다는 것이 사실상
불가능한 일일 것 같았습니다.
시위대가 들어오면 성당은 금세 난장판이 됩니다. 화장실에는 변기가 막히고
여기저기서 전기를 끌어다 마음대로 전등불을 켜니 누전차단기가 내려가 주위가
온통 암흑천지가 되기 일쑤였습니다. 건물 옥상에 물탱크를 얹어놓고 모터를
이용해 물을 퍼올려 썼는데 걸핏하면 모터가 타버려 수도가 나오지 않는
겁니다.
원래 명동성당을 찾는 신자들이 잠시 이용할 수 있도록 설계된 시설로
한꺼번에 3천명, 4천명의 식구들이 들어와 생활까지 하려니 무리가 갈 수밖에
없는 일이었습니다.
누전차단기가 내려가 정전이 되거나 모터가 타버려 수돗물이 안 나오면
오히려 시위대 쪽에서 빨리 안 고친다고 성화가 대단합니다.
화장실을 넓직하게 새로 고치고 40드럼이나 들어가는 대형 물탱크를 발주하여
옥상에 설치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아무리 '하느님 집=내 집'이라고 찾아온 사람들이지만 돈 한 푼 안
내고 명동성당 시설을 사용하는 처지인 만큼 조금만 더 조심해서 사용하면
좋으련만 하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장례미사나 혼배미사가 시위대에 의해
방해를 받기도 했습니다.
심지어 성탄대축일 행사를 준비하고 있는데 시위대가 들어와 데모를 하겠다는
겁니다.
그들의 처지를 모르는 바 아니지만 성직자로서 또 해야 할 일이 있는 만큼
그들을 타일러 보기도 했습니다.
"성탄절에는 치열한 전쟁을 하다가도 휴전하고 장병들에게도 휴가를 주는
법입니다."
시위대와 경찰을 오가며 설득하다가는 안 되겠다 싶어 명동성당 옥탑에
청와대에까지 들릴 정도의 고성능 스피커를 달았습니다.
그 스피커는 명동 일대를 완전히 제압할 정도로 소리가 컸습니다.
"명동성당에서 알립니다. 오늘 저녁 7시에는 저녁미사가 있으나 시위대는 오후
여섯시 이후 본 성당의 종교행사를 방해되는 일체의 행동을 금해 주시기
바랍니다."
제가 방송하는 그 소리는 시위대나 경찰에 똑같이 다 들리므로 그 시간은 곧
휴전 시간임을 선포하는 것이나 다름없게 되어버렸습니다.
근래에 와서 그 스피커를 떼어버렸다고 합니다만 가끔은 추기경님이나
주교님의 견해를 방송하기도 해서 그 스피커는 민주화 과정에서 한 때 중요한
역할을 하기도 했습니다.
수석신부의 역할 중에는 붙잡혀간 시위대원을 빼내 오는 역할도 있었습니다.
잡혀간 시위대원이 도화선이 되어 시위가 더욱 격렬해질 수도 있다고 으름장 반
설득 반으로 경찰을 달래 잡혀간 사람들을 석방시켜 데리고 오는 것입니다.
그러나 처음에는 단순한 열정으로 시위에 가담했다 차츰차츰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변해가는 사람들을 눈으로 지켜보면서 신부로서 안타까움을 느낄 때도
한두 번이 아니었습니다.
어쨌든 민주화 과정에서 순수한 열정으로 시위에 가담했다가 끝내는 엉뚱한
방향으로 가게 되는 사람들이 없지 않다는 것은 민족의 장래를 생각해서도 슬픈
일이며 앞으로도 우리가 가장 경계해야 할 일들입니다.
제2부 총각이 무슨 주례를 봐
생각은 단순하게
신학대학 시절 영어 공부를 한답시고 들고 다녔던 책 가운데 'Dear
Abby'라는 제목의 책이 있었습니다. 그 책의 저자는 애비(Abby)라는
필명으로 미국의 유명 신문에 연재되는 인생상담 칼럼의 카운셀러였는데,
정확한 이름은 너무 오래된 일이라 생각나지 않습니다.
오렌지색 표지에 그려진 진홍색 하트가 퍽 인상적이었던 그 책의 내용
중 지금도 기억이 생생한 칼럼이 하나 있습니다.
어떤 부인이 애비 여사에게 다음과 같은 사연의 긴 편지를 보내
왔습니다.
"애비 여사. 저는 두 아이를 가진 엄마입니다. 며칠 전 남편과 함께
TV를 보던 중 마침 TV 화면에 나오는 익사 사고에 관한 뉴스를 보다
곁에 있던 남편에게 '만약 보트가 뒤집혀 당신 어머니와 내가 동시에 물에
빠졌다고 가정하고 당신이 두 사람 가운데 오직 한 사람만 구출할 수밖에
없는 입장이라면 당신은 당신 어머니와 나, 두 사람 중에서 누구를 선택할
거예요?'라고 물었습니다.
물론 그이가 저를 구하겠다고 대답하리라 믿고 했던 질문이었습니다만
제 남편의 대답은 예상 밖이었습니다. '두 사람을 모두 구해내면 좋겠지만
두 사람 중에서 딱 한 사람만 구해야 할 상황이라면 나는 마땅히 어머니를
구해야 한다'는 것이 그의 대답이었습니다.
저는 남편을 사랑했고 아이들을 헌신적으로 길렀습니다. 그런 저에게
남편이 어떻게 그런 식으로 말을 할 수 있습니까?
저는 물에 빠져 숨이 꼴딱거려도 외면하고 자기 어머니만 구하겠다니,
저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고민녀 올림"
효가 백행의 근본인 우리에게는 지극히 당연하고 정상적인 남편의
대답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레이디 퍼스트'에 길들여진 그 미국 여인에게는
매우 충격적인 대답이었던가 봅니다.
저는 고민녀의 질문에 대한 애비 여사의 대답이 무척 궁금했습니다.
부부란 돌아서면 남이지만 모자 간의 혈연은 끊을래야 끊을 수 없는
관계다, 또한 자식이 자신을 낳아준 어머니에게 고마움을 느끼는 것은
당연한 것으로 남편의 그 대답에는 전혀 하자가 없다는 식의 결론을 내릴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애비 여사의 해답은 참으로 간단하기
그지없었습니다.
"고민여에게. 수영하는 법을 배우십시오."
라는 짧은 대답을 애비 여사는 그 긴 상담편지에 대한 대답으로
신문지면에 실었던 것입니다.
물론 위트나 유머로 치부할 수도 있겠습니다만 애비 여사는 개그우먼이
아닌 유명한 카운셀러였습니다. 그녀의 선문답식 답변에는 심오한 뜻이
내포되어 있었습니다.
수영하는 법을 배우라는 그 대답에는 '고민할 필요가 없다. 무엇 때문에
있지도 않은 가상의 일을 가지고 고민을 하느냐? 당신이 나를 안구해
준다고 하니 나도 이제부터는 수영을 배우러 다녀야겠다고 말을 하든지
진짜로 수영을 배워두었다가 그런 일이 생기면 그때 가서 헤엄쳐 나오면
될 것을 가지고 공연히 속을 끓이지 말라'는 뜻이 함축되어 있는
명답이었습니다.
사람들은 아주 단순한 것을 가지고 공연히 복잡하게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래서 복잡하게 생각하는 것이 오히려 말썽의 원인이 되고
문제가 되고 끝내는 오리무중 속에 빠져 해결의 실마리를 찾느라
전전긍긍하는 경우를 주위에서 흔히 봅니다.
아이들이 어른들보다 퍼즐을 잘 푸는 까닭은 아이들의 단순한 사고와
단순한 시각 때문일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어린이처럼 되라고
하신 말씀이나 어린이가 곧 어른들의 교과서라는 말의 뜻도 어쩌면
어린이의 단순한 사고를 배우라는 것이 아닐까 생각됩니다.
저는 신부님이 싫어요
포르투갈의 리스본에서 프랑스 파리까지는 기차로 18시간 가까이 달려야
하는 거리입니다. 배낭을 지고 혼자 기차 여행을 시작한 지 20여일이
지나면서 참으로 여러 가지 일을 겪었습니다. 1970년 후반, 유럽의
젊은이들 사이에 배낭여행이 유행하던 때였습니다.
북적거리던 열차는 프랑스 국경을 넘어서면서부터 겨우 한숨 돌릴
정도의 여유가 생겨서 그제야 겨우 복도에 신문지를 깔고 허리를 편히
눕힐 수 있었습니다. 조금 전만해도 복도에 웅크리고 앉을 만한 자리만
있으면 행복하겠다고 생각할 정도였습니다. 방학 마지막 달인 9월 초
유럽의 젊은 배낭족들이 마지막으로 몰릴 때였습니다.
무스탕이라는 마을에 기차가 머물렀습니다. 불과 2분도 안 될 정도로
잠깐 정차하는 이 작은 마을에서 몇 명이 타고 내렸습니다. 썩 잘생긴
편은 아니지만 귀염성 있게 생긴 한 아가씨가 복도에 누워 있는 제 발치에
서 있었습니다. 저를 밟고 지나갈 수 없어 저의 옆구리와 벽 사이에 난
좁은 틈으로 막 발을 밀어 넣으려는 그 아가씨는 웃음을 약간 머금으며
저에게 '실례합니다'하는 표정이었습니다. 저는 얼른 일어나 비켜
주었습니다. 그 여자는 바로 옆의 콤파트먼트(칸막이한 객실)로
들어갔습니다.
아직도 열차 안은 만원이어서 저는 자리를 빼앗길까봐 다시 두 다리를
길게 펴고 앉아 잠을 청했습니다. 정거장마다 이렇게 일어났다 누웠다
하며 열차가 빨리 목적지에 닿기만을 기다리고 있는 참인데 누군가가
저에게 담배를 권하는 것이었습니다. 바로 그 아가씨였습니다. 모든 피로가
절로 풀리는 야릇한 기분이었습니다. 그녀는 나의 일거수 일투족을 몇
시간이나 계속 주시하고 있었던 것이었습니다.
이미 새벽이 찾아와 안개 낀 프랑스 남부의 조용한 정취가 그림같이
차창을 메우고 있었습니다. 우리 둘은 창밖을 내다보면서 서툰
외국어(불어, 이태리어, 영어)를 섞어 가며 어느 나라에서 왔고 목적지는
어디인지를 이야기하고 서로에게 궁금한 점을 묻고 답하고 하느라 시간이
흐르는 줄 모르고 있었습니다.
그녀의 목에 걸린 예쁘고 가는 금목걸이에 달린 하트 모양의 메달이
아침 햇살에 반짝이고 있었습니다. 저는 그 메달에 호기심이 생겨 살짝
뒤집어 보았습니다. 성모 마리아 상이 부조되어 있었습니다. 어머니가 한
살 때 해주신 것이며 다른 메달보다 자기는 이 메달을 매우 사랑하고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모녀 간의 애틋한 사랑을 진하게 느낄 수
있었습니다. 그녀도 그 점을 긍정하며 어릴 때 어머니의 품속에서 받았던
사랑의 한 조각이라고 했습니다.
그녀는 가톨릭 신자인 자기네 집은 부모가 너무 열심히라서 괴롭다고
말했습니다. 그녀는 자기네 본당 신부가 연세가 많은데 고집이 세고
너무나 완고해서 성당에 가고 싶지 않다는 것이었습니다.
나도 같이 거들어 주기 시작했습니다. 내가 합세해 주자 그녀는 더욱
열을 내면서 고리타분한 고목 같은 노인 신부들과 교회 등에 대해 평소
가지고 있던 불만을 한바탕 터뜨리는 것이었습니다. 가톨릭은 이제 뭔가
새로워져야 한다는 말에 맞장구를 쳐주기도 했습니다. 그녀는 신부에 대한
불만을 저에게 실컷 쏟아 놓았습니다.
얼마 후 차장이 저에게 자리가 있으니 앉으라고 알려주었습니다. 우리는
함께 자리를 만들어 앉을 수 있었고 몸이 편해지니 마음까지 편해져서
마치 친한 이웃이라도 된 느낌이었습니다. 그러나 머지 않아 헤어질
시간이 가까워졌습니다.
전화 번호를 가르쳐 줄 수 있느냐고 물었더니 그녀는 그러지 말고
여권을 서로 바꾸어 보자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순간 깜짝 놀라서
동문서답으로 슬슬 피하려고 했으나 그녀는 짓궂고 끈질기게 제 여권을
보려고 하였습니다. 자기 여권을 꺼내 들고 계속 조르는 것이었습니다.
할수없이 먼저 그녀의 여권을 받아 쥐고 보는 순간 그녀는 제 여권을
강제로 뺏다시피 가져가 버렸습니다.
그 순간 그녀의 놀라는 표정이라니!
"아니, 당신 신부란 말이예요?"
나의 여권에는 로만 칼라 정장 사진이 붙어 있었습니다. 그 다음 순간
정신을 차린 그녀에게 저는 꼬집히고 얻어맞고 한바탕 폭행을 당했습니다.
눈물이라도 내밀 듯이 투명한, 우습기도 하고 어이없기도 해서 어쩔 줄
모르는 커다란 눈망울과 발갛게 달아오른 볼, 저도 너무 웃다가 사래가
들어 숨이 막힐 지경이었습니다.
저 같은 신부는 상상도 못했다며-김이 샌 표정이 약간 감도는
듯했지만-정말 후련하게 고백을 하게 되어 참 기쁘다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다음부터는 신부 때문에 성당에 안 다닌다는 말은 절대로 하지
않겠다며 새끼손가락을 걸며 약속했습니다.
강함을 이기는 부드러움
지금으로부터 10여년 전인 1984년 여름 사만다라는 미국의 열세 살짜리
소녀가 당시의 소련 공산당 서기장 안드로포프에게 편지를 띄웠습니다.
편지의 내용은 이랬습니다.
"아저씨! 만약 전쟁을 찬성하느냐 반대하느냐를 투표를 부친다면
아저씨는 어느 쪽에 표를 찍으시겠습니까? 저는 미국과 소련이 전쟁을
하는 것을 원치 않습니다."
당시는 심각한 냉전체제였습니다. 그러나 소련 공산당 서기장은 그
소녀의 편지를 받은 다음-정치적인 제스처였는지는
모르겠습니다만-사만다 양을 소련으로 초청하여 여러 곳을 구경시켜 주고
자신의 부드러운 면을 한껏 보여주었습니다.
이듬해엔 미국에서 소련의 어린이들을 초청했습니다. 뉴욕에서 9명의
미.소 어린이들이 대화를 나누고 기자회견도 했습니다. 그 가운데 한
어린이가 앞으로 핵전쟁이 일어나서는 안 된다고 말했고, 다른 어린이들도
"우리는 전쟁없이 친하게 지내고 싶습니다"라고 아주 천진난만하게 기자들
앞에서 말했습니다. 물론 그 때문이라고 말할 순 없지만 그 이후 미국과
소련의 벽은 무너지고 말았습니다.
어른들의 마음이 선해지면 어린이의 힘이 위대해집니다. 우리는
어린이들이 이 사회에서 커다란 역할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어린이들로부터 배워야 합니다.
주나라 문왕의 스승 가운데 죽자라는 분이 계셨습니다. 죽자는 제자인
문왕에게 이런 명언을 남겼습니다.
"강한 것을 이기려 하면 반드시 유로써 이겨야 한다. 강을 강으로써
이기려 하면 더 큰 강함이 이루어진다."
문왕은 스승의 가르침을 따라 중국의 북방 국경지역에 평화촌을
만들었습니다. 국경 근처에 자그마한 읍들을 세우고 어린이 놀이터와
어린이 보호구역을 만들어 놓았습니다. 전방에 초소를 만들어 병사들을
시켜 지키는 것이 아니라 평화촌을 만들어 아이들이 서로 국경을
건너다니며 마음껏 뛰놀게 했습니다. 특히 주나라 주변 국가의 어린이들이
오는 것을 대환영했습니다. 다른나라 아이들이 국경을 넘어와 하루 종일
놀다 집으로 돌아가는 것이 곧 귀국이었습니다.
이것이 청나라를 거쳐 지금까지 내려오면서 중국이 그 큰 땅덩어리를 잘
지키는 비법입니다. 그렇게 때문에 중국의 변방 지역 사람들은 인접국가의
말을 매우 잘합니다. 지금은 북한이 들어서서 국경을 봉쇄하고 있다고
합니다만 예전에는 두만강과 압록강에 면해 있는 중국의 도문, 안동, 연길
지역 통용어가 중국어와 조선어였습니다. 인도 변방에서는 인도말과
중국어, 소련 변방에서는 러시아어과 중국어, 이런 식으로 되어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국경선을 지키기 위해 구태여 군인들이 애쓰지
않아도 되었습니다. 어린이들이 왔다갔다하는 지역에서 어떻게 어른들이
서로 총질을 해댈 수 있겠습니까?
약 4, 5년 전에 신문에서 본 기사가 생각납니다.
어느 아파트에서 시체 썩는 냄새를 맡고 죽은 지 몇 달이나 지난 옆집의
시체를 찾아냈다는 보도였습니다. 이 끔찍한 사건이 알려지자 어느
아파트에서는 어린이들이 어른들만 보면 설령 처음 보는 사람이라
하더라도 '아저씨 안녕하세요?' '아주머니 안녕하세요?'하며 인사를 하게
했습니다. 엘리베이터를 탈 때도 어른들에게 '먼저 타세요'하며 양보했고
내릴 때도 어른들께서 먼저 내리시고 양보하는 깍듯한 예절을 보였답니다.
아파트의 어머니들이 반상회를 통해 그렇게 결정해 시행했다고 합니다.
물론 오래 가지 못하고 흐지부지 돼서 우리 어린이들 교육에 크게
이바지하지는 못했습니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라 아니할 수 없습니다.
어린이들은 백지상태이기 때문에 어른들이 무엇을 어떻게 그리느냐에
따라서 여러 가지 모습이 형성되는 것입니다.
조선 중기에서 말기까지 서당에서는 훈장이 1천 자밖에 되지 않는
천자문을 가지고 한 사람에게 몇 년씩을 가르쳤습니다. 고작 1천 자밖에
되지 않은 천자문 책을 가지고 글자 한자 한자의 의미를 익히며 인생을
사는 지혜를 터득할 수 있도록 가르쳤습니다. 천자문을 떼고 나면 수신
책을 읽는데 그 중 가장 유명한 것이 전남 담양에서 이율곡 선생께서
지으신 <소다 후지훈>과 <학교 보덕>이라는 것입니다. 이 문집은
가문에서 어린이들을 교육하는 원리로 쓰면서 동시에 이웃의 어린이를
어떻게 가르쳐야 하는지에 대해서도 기술하고 있습니다.
또한 조선조 말기 실학파 이덕무 선생이 쓴 수신 책의 내용을 보면 오늘
우리가 읽어도 감명받을 만한 많은 글귀가 있습니다.
'어른이 등을 긁어라 하거든 손을 입에 대고 호호 불어 데운 후에
긁어드려라' '쌈을 싸 먹을 때는 눈을 내리 깔아라' '신을 신을 때는 뒤축을
꺽어 신지 말아라' '머슴이나 아랫사람에게 큰소리로 야단치지 말아라'
'남과 무엇을 나눌 때는 내 몫이 남의 몫보다 적게 하라'는 등의 좋은 말이
많이 있습니다.
우리의 교육은 원래 이렇게 인간적인 도리가 무엇보다 앞서는
것이었습니다. 자기 부모 섬기듯 동네 어른들을 공경하고, 내 자식
훈육하듯 남의 자식도 타일렀습니다. 다른 어떤 경서들보다 수신 책을
앞세웠던 것도 학문에 밝은 것보다 인간으로서의 도리에 밝은 것이
우선이라는 생각에서였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훌륭한 전통은 일본의 침략으로 속국이 되고 6.25를
겪으면서 맥이 끊겨버리고 이후 서구의 물질문명이 급격히 밀려오면서
물질만능, 이기주의가 최고의 가치로 떠오르게 된 것입니다.
70, 80대 사람들이 우리 세대인 50, 60대 사람들을 키우면서 가르쳤던
것들을 우리는 잔소리로 받아들였습니다. 우리 세대가 배운 교과서에는
이같은 내용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우리 윗세대 어른들은 천자문이나
수신편이라는 교과서로 교육을 받았지만 우리 세대에서는 그런 것들이
교과서에 없었기 때문에 잔소리로 밖에 들리지 않았던 것입니다.
인간교육을 하는 참소리를 잔소리로만 받아들였던 우리들 50, 60대가
오늘의 아이들이 무서운 아이들로 변했다는 등의 말을 양심 부끄럽게 할
수가 있는 겁니까? 따지고 보면 우리 자녀들이 어릴 때 부모인 우리가
그렇게 만들어 주었기 때문에 그리 된 것이 아닙니까?
7, 8년 전 일본에게 어린이 교육에 관한 심포지움이 있었습니다. 그때
자료정리를 한 것을 한 번 읽어본 적이 있습니다.
우리 나라 부모님들은 어린이들이 공부를 할 때 어느 과목에 치중하라고
가르치느냐는 질문에 대부분(약 70%) 수학이라고 대답했습니다. 일본
부모들은 외국어에 충실하라고 했고 대만 부모들은 사회학을 첫째로
꼽았습니다. 미국은 과학이었습니다.
수학이 무서운 사람을 만드는 첫째 조건입니다. 수학적인 사고방식은
사람과 사람 사이의 계산까지 빨리 돌아가게 합니다. 저 사람이 내게
유리하냐 불리하냐, 플러스냐 마이너스냐, 둘이 힘을 합치면 되느냐
안되느냐, 이런 수치 대입 방식으로 대인관계를 맺고, 모든 것을
수학적으로 계산하는 습관을 우리는 우리의 어린이에게 생각도 없이
주입시켰던 것입니다. 그래서 젊은이들은 따지길 좋아합니다.
'아버지께서 잘 한 게 뭐 있어요?'
이게 바로 수학공부를 잘 한 사람들의 태도입니다.
'어머니가 내게 해준 게 뭐가 있어요?'
이게 바로 수학공부를 잘 한 결과입니다.
명절 때가 되면 부모님께는 이 선물, 장모님께는 저 선물, 이렇게 재면서
선물을 해 드리면서 그것으로 효도를 다 한 줄로 압니다.
'제때에 선물 가져가 찾아 뵈었으면 됐지 뭘 더 해드려?'
'부모님은 형이 모셔야지 동생인 내가 왜 모셔?'
이렇게 하나하나 따지는 이유가 다 우리가 자식들에게 수학공부에
치중하라고 강조했기 때문입니다.
또 우리나라 어린이들은 심부름 중 70, 80%가 가게에 가서 뭘 사오라는
것입니다. 미국 부모들은 자녀들에게 접시를 닦기, 식탁준비, 가사돕기
심부름을 주로 시키고, 일본 부모들은 유리창 닦기나 방 청소 등의 집안
청소를 주로 시킨다고 합니다. 이게 바로 우리들의 잘못이었습니다. 수학
위주로 가르쳤습니다. 돈 쓰는 것을 가르쳤습니다. 거기다가 왜 못
깎았느냐고 야단까지 칩니다. 왜 그 집에서 샀느냐, 저쪽 집에 가서 사면
싼데. 물건이 좋다 나쁘다, 편파적인 것도 가르쳤습니다. 그래서
어린아이들이 돈 맛을 알았습니다. 우리 어른들이 가르친 것입니다.
그러니까 돈 갈취하는 범죄가 더 극성을 떠는 것 아닙니까?
어른들은 아이들 보고 무섭다고 말할 자격이 없습니다. 우리 어른들이
부드러운 가정을 이끌어가는 데 신경쓰지 않고, 자기가 밖에서 하는 일이
마땅히 자기가 해야 할 천직이라고 생각지 않고, 일하는 자체가
스트레스요, 일 안하면 스트레스를 안 받는다는 듯 매일 저녁 밖에서
술이나 마시고 2차 3차까지 가야 하는 것인지, 우리 남자 어른들
양심적으로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자식들이 밤늦게 들어오면 그 이유를
들어보지도 않고 무조건 나는 사업상으로 술을 먹다 보니 늦지만 너는
무엇 때문에 늦느냐고 야단치지 마십시오. 고민과 슬픔에 빠져있는 친구를
맥주집에 데려가 맥주 한잔 시켜놓고 달래주느라 밤을 새웠다던가 그밖의
다른 이유가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어른들이 사정은 들어보지도 않고
무슨 큰 사건이나 터진 것처럼 떠들면서 야단을 쳐서야 될 일입니까?
특별한 이유도 없이 밤늦게 다니는 학생이 있다면 일단은 그 학생이 어릴
때 부모 중 어느 한 분이 밤늦게 다닌 일이 있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어른들은 지켜야 할 규칙을 안 지키면서 어린아이들에게만 지키라고 할
수 있습니까? 우리 아이들은 우리가 교육시켜야 한다는 것을 각성하셔야
합니다. 자녀와 얼굴을 맞대고 함께 살아가며 벗을 키워야 합니다.
자녀들을 마치 사육하듯 키워서 될 일입니까?
이제 이땅의 젊은이들은 무섭게 어른들을 향해 도전해 오기
시작했습니다. 지금은 어른들이 경제권을 쥐고 있어 자식들에게 야단칠
수도 있지만 이제 조금만 지나 자식들이 장성하여 결혼하고 새살림을
꾸리기 시작하면 그때부터 어른들은 자식들에게 강요하다시피 공부시킨
수학 때문에 무서운 계산법에 의한 대접을 면할 수 없게 됩니다.
'세끼 밥값과 교육비 들인 것 계산해 되돌려드리고 양로원에나
보내드리면 되지 뭐'
이렇게 극단적인 모습으로 안 된다고 누가 보장하겠습니까? 우리가
객관식 공부만 가르쳤기 때문에 젊은이들이 어른들의 마음을 헤아릴 수
있는 기초를 없앴습니다. 그래서 객관식 출제에 숙달된 젊은이들은
어른들의 마음을 헤아릴 줄 모릅니다.
'이것이냐 저것이냐, 4개 중 하나만 택하라, 답은 이것이다.'
그렇게 교육시켜 놓았으니 젊은이들도 '아버지 이것입니까? 저것입니까?
대답하십시오'하면서 흑백논리로 따지면 들어옵니다. 이걸 하면 내
아버지요, 이걸 안 하면 내 아버지가 아니다, 이런 식이 됩니다. 얼마나
간단하고 단순합니까? 이것이 바로 객관식 교육의 폐해라는 것을 왜
모르십니까?
예수님께서는 열두 제자에게
"너희도 이 어린이처럼 되어라. 그렇지 않으면 천국에 들지 못한다. 이
어린이를 받아들이면 곧 나를 받아들임이니라."
하시며 바로 어린이가 어른의 교과서임을 가르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이제 어른들은 어린이들을 보고, 오늘의 젊은이들을 보고 진정 자신들이
한 짓을 회개해야 합니다. 젊은 세대들이 뭐라 하면 아무 소리 하지 말고
당할 만큼 당해 주십시오. 그럴 때 오히려 젊은 세대들은 미안한 마음을
느끼게 될 것입니다.
그렇지 않고 오늘도 젊은 세대와 대화조차 나누지 않으면서 무조건
'어디를 싸돌아 다니느라고 밤늦도록 다니느냐?'고 야단만 친다면 머지않은
장래에 '할머니는 밤늦게 뭐하러 돌아다니느냐?'고 거꾸로 야단맞게 될
것입니다. 그들이 늦게 들어왔으면 늦게 들어온 이유가 있을 것입니다.
대화를 나누고 사랑으로 감싸며 얼굴을 맞대는 친구가 되어 주십시오.
참기쁨
일반인들은 신부나 수녀들의 생활이 무척 외롭고 고독하리라
생각합니다. 물론 신자들 중에도 아직 그런 생각을 가지신 분이 많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오직 예수님만 믿고 따르다 보니 세상 사는 맛도 전혀 모르고
자식사랑이며 부모사랑이며 아기자기한 인간적인 사랑의 재미는 통 못
보고 답답하게 일생을 사는 줄로만 생각합니다. 기쁨도 별로 없고
그렇다고 슬플 것도 별로 없는, 그야말로 무미건조하고 덤덤한 생활을
하는 것이 사제나 수녀, 수도자들의 삶이리라 치부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전혀 그렇지 않다는 것을 저는 확실하게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오히려 신부나 수녀들이야말로 이 세상에서 가장 큰 기쁨을 느끼며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이라는 것을 증거를 들어 확실하게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복음이 무었입니까? 복음은 곧 이 세상을 구원하는 기쁜 소식이
아닙니까? 기쁜 소식을 세상에 전하는 자가 기쁨을 느끼지 못한대서야
말이 됩니까? 그래서만 기쁜 게 아닙니다. 실제 생활을 통해 느끼는
성소자들의 기쁨이야말로 일반인들이 결코 느낄 수 없는 최상의 기쁨이며
그것은 곧 이 세상에서 미리 가불해 맛보는 천상의 기쁨인 것입니다.
루시아는 제가 영등포본당 주임신부로 있으면서 영세를 준
아가씨입니다. 웃을 때는 하얀 치아가 마치 보석처럼 반짝거리며 돋보이는
그녀는 청년단체에 가입하여 교회활동에도 열심이었고 또한 인근 공단의
근로자들을 위한 사회봉사에도 적극적인 활달한 성격의 소유자였습니다.
그러던 그녀가 갑자기 모습을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렇다고 교적을
옮겨간 것도 아니고, 궁금하여 그녀의 친구들의 통해 알아봤더니
사회봉사를 함께 하던 청년과 연애하다가 그만 실연당해 사람들 만나기가
부끄럽고 창피하다며 두문불출하고 지낸다는 것이었습니다. 친구들을 보내
몇 차례 만나기를 청했지만 이루지 못하고 저는 명동으로 자리를 옮기고
말았습니다. 일에 빠져들어 그녀에 대한 기억이 차츰 희미해져 가던
어느날이었습니다. 저녁미사를 마치고 나오는 내 앞에 그녀가 서
있었습니다.
"신부님, 저 기억나세요?"
"그럼, 기억하구말구. 루시아인걸."
그녀의 눈에 금세 맑은 이슬이 괴는 것을 볼 수 있었습니다.
"고마워요, 신부님. 제 본명까지 기억해 주시고..."
라일락꽃 향기가 짙어가던 5월의 밤. 계성학교 입구의 돌턱에 걸터앉아
우리는 오랫동안 많은 얘기를 나눴습니다. 얘기를 나눴다기보다는
들었다는 표현이 정확하겠지만... 그녀는 실연의 아픔을 딛고 일어선
그간의 이야기들을 숨김없이, 마치 고해성사하듯 제게 하나하나 얘기해
주었습니다. 그녀는 어느새 옛날의 루시아로 돌아와 있었습니다. 그녀와의
재회는 나로서는 형언할 수 없는 큰 기쁨이었습니다. 몇해 동안 헤어졌던
내 누이를 만났다 하더라도 그렇게 큰 기쁨을 못 느꼈을 것입니다.
얼마 후 그녀가 혼배성사의 주례를 부탁하려고 신랑될 사람과 함께 나를
찾아왔고, 또 얼마 뒤에는 아기를 가져 불룩한 배를 자랑하러 왔다면서
나를 찾아왔습니다. 한참 뒤에는 예쁜 아들을 안고 부부가 함께 내게
찾아와 유아세례를 받고 갔습니다.
"신부님, 우리 아가 참 예쁘지요? 신부님 본명을 따라 우리 아가도
사도요한이라고 지었어요."
루시아는 이 세상의 기쁨이란 기쁨을 몽땅 독차지한 듯 기뻐했습니다.
저는 곁에서 그냥 빙그레 웃어 보이기만 했지만 루시아가 느끼는 기쁨보다
기뻐하는 그녀를 바라보는 내 기쁨이 얼마나 더 큰 참기쁨인가를 느끼면서
숙연해지기까지 했습니다.
"신부님께 항상 감사드립니다"라고 말하는 그들 내외의 감사보다 내가
그들에게서 느끼는 고마움이 훨씬 더 크고 깊음을 그들이 알까요?
아주 가끔씩 겪는 경우이기는 하지만 고백소에서 10년, 20년 쌓였던
한을 눈물로 풀면서 깊은 통회로 덕지덕지 지은 죄를 낱낱이 들어가며
고백하는 성사를 봐주고 나면 마치 제 몸 속에서 십년 묵은 체증이
한꺼번에 싹 가시는 듯한 쾌감을 느낄 때가 있습니다. 그때는 내 몸의
세포 하나하나가 생명을 얻어 다시 살아나는 듯한 황홀감을 만끽합니다.
하느님께서 내 몸에 오셔서 성호를 긋는 내 손끝을 타고 짜릿짜릿하게
고백자의 온몸 구석구석까지 전달되는 극치의 쾌감을 사제가 아니고서는
맛볼 수 없는 참기쁨이기도 합니다.
성직자들은 신자들이 곁에 있고 또한 신자들이 그들을 이해해 주는 한
결코 외롭지 않습니다. 자신을 도구로 써주실 분이 계시고 자기를 필요로
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어찌 고독을 느끼겠습니까? 그래도 인간이기에
어쩌다 잠시 외로움을 느낄 때가 있다면 제 경험으로는 신자들이 제
마음을 이해해 주지 못할 때 뿐입니다. 그러나 잠깐 동안일 뿐입니다.
돌아서면 금방 서로 이해하니까요.
성직자가 되면 부모 곁을 떠난다고 생각하실지 모르지만 성직자야말로
오히려 일생 동안 부모 곁에 남는 존재임을 아셔야 합니다. 사제나
수도자들은 배우자나 자식에 얽매이지 않으므로 언제까지나 그 부모만을
생각하는 순수한 자식으로 남을 뿐입니다.
불효한 신부, 불효한 수녀라는 말을 들어보신 적 있습니까? 자식을 효자,
효녀로 만드실 의향이 있으시거든 주저하지 마시고 그 자녀를 성직자로
만드십시오.
총각이 무슨 주례를 봐?
가끔 혼인미사를 집전하다 보면 축하객 가운데 신자가 아닌 분들이
오셔서 농담삼아 하시는 소근거림이 들려올 때가 있습니다.
"총각이 주례를 보고 있구먼."
그 정도는 약과입니다.
"장가도 한 번 안 가본 양반이 주례사를 들어봉께 장가 열 번도 더 간
사람 같고마이."
혼인미사 중에 강론을 들으신 한 할머니께서 미사를 끝내고 평복으로
갈아입고 나오는 저를 보시며 칭찬삼아 하는 말씀을 들은 적도 있습니다.
일반 예식장에서는 명망이 있고 자식복도 좋으신 분이 결혼식 주례를
맡지만 천주교회에서는 혼인식을 하느님께서 주관하시는 일, 즉 성사라고
하여 결혼식은 혼인미사로 올립니다. 넓은 세상, 모래알처럼 많은 사람
중에 오직 두 남녀가 만나 한쌍의 부부가 되는 인연을 일컬어
천생연분이라 함도 하늘이 맺어준, 하느님께서 맺어주신 인연이라는
얘기입니다.
예전에는 혼인 당사자들끼리는 얼굴도 모르는 채 양가 부모님의
약속이나 집안 간의 소개에 의해 혼인을 하거나 고작해야 먼발치에서
신랑감이나 신부감의 자태만 보고 혼인을 하는 중매결혼이 보편적인
일이어서 천생연분이라는 말이 실감이 났습니다만 요즈음의 젊은이들,
특히 신세대 부부들은 자기들끼리 좋아하며 사귀다가 결혼을 해서 그런지
천생연분이란 말은 우습게만 생각하고 자기들의 결혼은 오직 자기
자신들이 맺은 것으로 생각합니다. 하늘이 맺은 것을 결코 사람이
풀어서는 안 된다 했건만 이혼율이 증가하는 추세, 특히 젊은층의
이혼율이 급증하고 있는 추세가 바로 그것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저는 혼례미사를 집전할 때 강론을 통해 결혼은 곧 십자가를 지는
일이라는 것을 강조합니다. 십자가는 희생이며 고통입니다. 십자가는 또한
용서와 사랑이며 기쁨이기도 합니다. 부부가 서로를 생각하고 위하는
마음은 희생적이어야 합니다. 부부 간에는 나를 낮추고 상대방을 높이는
기본틀이 있어야만 합니다. 서로 잘났다고 하다가는 싸움만 하다가 세월이
갈 것입니다.
저는 총각이어서 그런지 '부부 싸움은 칼로 물 베기'라는 말뜻을 제대로
알지 못합니다. 다만 금방 원수처럼 싸우다가도 그 이튿날 아침에 보면
언제 그랬느냐는 식으로 헤헤거리는 걸 보면 두 사람 사이에 뭔가 분명히
있기는 있는 모양이라고 짐작합니다만 그게 뭔지는 확실하게 모릅니다.
부부가 함께 살다보면 즐겁고 기쁜 일만 있는 게 아닙니다. 오히려 괴롭고
힘든 일이 많은 게 우리네 삶이 아닙니까? 더구나 한 사람도 아니고 두
사람의 삶이 하나로 겹쳤으니 모든 것이 배가되는 것은 정한 이치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머리가 두 개일 경우에만 그렇습니다. 머리는 둘이더라도
마음은 하나가 될 때 고통도 기쁜도 진정으로 함께 나눌 수 있는 부부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쉽게 얻어지는 결론이 아니기에 부부생활이란 것이
어려운 것입니다. 서로가 상대방에게 자신을 낮추고 상대방 앞에서 자신을
죽이고 작게 하여 두 머리가 작아져서 하나의 머리 무게가 될 때 가서야
서로는 한마음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부부 간에
신뢰가 쌓이고 사랑이 쌓여야만 가능한 것입니다. 그것이 컴퓨터 단말기에
화상이 떠오르듯이 일순간에 짠하고 오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많은
풍파를 견뎌내고 난 연륜이 쌓여서 마치 먼지가 눅진한 녹때가 되듯해야만
그런 모습의 행복한 부부상이 만들어지는 것입니다. 하루아침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고통을 견디고 얻어내는 기쁨과 승리가 곧 십자가의 길입니다. 총각인
제가 혼인미사의 주례를 주례상(강론)를 잘 한다는 칭찬을 받는 이유는
바로 위에서 말씀드린 십자가의 길이 제가 가는 길이기 때문일 것입니다.
어느날 갑자기 생기는 신심으로는 참 신앙인이 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런
신앙은 먼지와 같아서 바람만 조금 불어도 금세 날아가 버립니다.
부부간의 사랑 또한 그와 같다는 것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타이핑을 안하면 감점
"학생 여러분은 앞으로 매주 자기가 정한 책을 10-20쪽으로 나누어
정독하고 이를 A4용지로 두 장, 곧 2쪽으로 요약하십시오. 단 타자기로
쳐야 합니다. 아무리 글을 깨끗하게 썼더라도 타자기로 치지 않으면 10점
감점입니다."
'참 기가 막혀, 타자기가 어디 있다고, 아니 여기가 타자 학원인가?
우리를 타이피스트로 만들 작정인가? 타자학원을 지금 어떻게 다니라는
거야.'등등의 불평불만이 적지 않았습니다. 80년대 초반이었습니다. 저는
서울 혜화동에 자리한 교리신학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었는데
학생들의 대부분은 수녀님들이라 더더구나 저의 이 주장은 비난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왜 타이프를 쳐야 하는가?'라는 강의를
시작했습니다. 요지는 앞으로 10년 후면 컴퓨터가 모든 면에서 이 사회의
주요 역할을 하게 되고 특히 모든 사무 행정은 컴퓨터 없이는 불가능하게
된다고 전제했습니다. 그런데 컴퓨터는 그 자판이 지금의 타자기 형식을
벗어날 수 없을 테고 타자기로 자판을 익히면 컴퓨터는 결코 낯설지
않다고 기초 설명을 했습니다.
당시에는 컴퓨터 학원에서 애플 8비트 컴퓨터로 베이식 프로그램 정도를
배우면 최첨단을 배우는 정도로 생각했습니다. 저는 곧 컴퓨터가 모든
분야에 파고들 것이고 주산이나 부기는 곧 골동품이 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타자기를 사용하면 늙어서 손이 떨려도 글씨는 누구나
알아보게 쓸 수 있으며, 엉망인 필체로 읽는 사람의 고충을 무시하는
미련한 사람이 안 되려면, 지진이 나거나 차를 타고 가면서도 글을 정확히
쓰려면, 등등 별별 설명을 다 했습니다. 그리고 컴퓨터 없이는 아무것도 못
할 세상이 곧 닥쳐올 것이라는 엄포도 곁들이며 미래사회에서 살겠다는
사람들이라면 타자를 쳐야 된다고 주장했습니다. 저는 공약도 했습니다.
10년 후에는 틀림없이 여러분 책상 위에 컴퓨터가 있을 것이며 그 속에
책장 2-3개 분량의 책 내용을 담아두었다가 필요할 때 쉽게 꺼내 볼 수
있게 될 터이니 두고 보라고 말했습니다.
84년부터 지금까지 잠잘 시간을 하염없이 빼앗아 버린 것이 나의
컴퓨터입니다. 그러나 밉지 않습니다. 오히려 귀엽고 신통하고 신나고
줄겁습니다. 은행에 갈 필요없이 책상 앞에 앉아 온라인으로 돈을
보낸다든가, 여행사에 가지 않고도 기차표나 비행기표를 예약하거나
좌석의 현황을 남들에게 알려주면 신기해합니다. 하루가 24시간뿐인데
어떻게 글을 쓰고 언제 사진을 찍고 햄을 하고 매일 미사에 강론하고
여행도 다니고 성당도 새로 짓고 용산이나 청계천에 뭘 사러 다니고 할 수
있느냐고 주위 사람들이 말합니다. 그러면 저는 '시간이 남으니까 그러죠'
라고만 말합니다. 불이 나면 제가 제일 먼저 챙길 것은 제 컴퓨터의 하드
디스크입니다. 지금은 컴퓨터 사용자로서만 만족하고 있는 제 자신이
불만입니다. 좋은 프로그램들을 많이 만들어 내놓는 젊은이들에게는 항상
고맙고 감사할 뿐입니다. 85년에 8비트 베이식으로 회원관리나 주소록
또는 회계 프로그램을 짜서 여기저기 잘난 척 봉사하던 때가
부끄럽습니다.
아직도 컴퓨터를 나하고는 아무 관계없는 기계 덩어리하고 생각하는
분은 혹시 안 계신지 모르겠습니다.
강제로 여행을 시킵시다
1978년 여름 8월 중순에서 9월 중순까지 배낭여행을 했습니다. 유럽을
동서남북으로 끝닿는 데까지 가는 것이 저의 목표였습니다.
"넌 얼마 들었니?"
"난 1000불 들었어."
"어휴 힘들었겠구나. 난 1400불 들었는데..."
학교 친구들이 세 달 이상의 여름방학을 마치고 10월에 개강하면 서로
주고받는 이야기들이었습니다. 유럽 학생들은 방학으면 으레 여행하는
것이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대개 한 달 정도는 이웃나라의 생활에
젖어보는 것이 보통이었습니다. 더구나 대학생이라면 학업과도 밀접한
관계가 있기 때문에 더욱 당연하게 여겨지는 것이었습니다.
'좋다. 두고 보자. 난 유럽 학생들보다 더 큰 어려움도 이길 수 있는
강인한 한국인이다.'
고 다짐하며 배낭여행을 여행하기로 마음먹었던 것입니다. 6월 중순에
시험을 일찍 서둘러 치루고 캐나다로 가서 교포성당을 돌보며 우선 두 달
동안 아르바이트를 한 후 유레일 패스를 사고 치밀한 계획을 세웠습니다.
일정은 방학 전에 공고를 했으나 동행하겠다는 친구들이 하나도 나서지
않았습니다. 할수없이 혼자 로마에서 출발하여 다시 로마로 되돌아오는
기간을 30일로 잡고 여행을 시작하여 무사히 끝냈습니다.
"난 이번에 300불을 갖고 시작했는데 40불이 남았지."
라고 말할 수 있었습니다. 학생들은 놀랐고 한국인에 대한 두려움마저
갖게 해준 듯했습니다.
잠자리는 달리는 야간 열차였습니다. 아침에 파리에 도착하여 종일
누비고 다니다가 저녁 6시 경이면 역으로 가서 서성대며 다음날 관광할
도시를 찾아보다 오스트리아 빈으로 결정합니다. 빈에서 종일 걸으며
버스타고 돌아다니다 저녁이 되면 스위스의 루체른으로 발길을 정합니다.
파리나 뮌헨 같은 좀 큰 도시는 동서나 남북으로 다른 도시에 갔다 다음날
다시 오면 되었습니다.
빨래를 최소한으로 하되 매일 빨아야 할 것은 양말 1컬레, 손수건 한 장
그리고 작은 팬티 하나면 되었습니다. 빨래는 역의 화장실이나
기차화장실에서 했습니다. 말리는 방법은 기차에서 잘 때 배나 다리에
올려놓고 자는 것이었습니다.
식사는 약간 문제가 있었습니다. 처음 계획은 물과 빵만으로 해결할
작정이었습니다. 슈퍼에서 물과 빵을 사서 비닐봉지에 넣어 가지고
다니다가 식사를 해결하는 것입니다. 공원이나 관광지의 벤치에 앉아서
여유있는 식사 시간을 가졌습니다. 그러나 4, 5일 후에는 도처히 참을 수
없어 물을 주스로 바꾸어 피로를 풀기로 했습니다. 1주일쯤 지나자
소화장애를 일으키는 것 같아 우유로 바꾸었습니다. 빵도 처음에는
식빵으로 했으나 나중에는 과일이나 땅콩 따위가 들어있는 빵으로
바꾸었습니다. 그때 제일 저를 괴롭히던 것은 열차 안에서 파는 따끈한
커피 한 잔이었습니다. 그것을 참던 고통은 글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였습니다.
아침 8시나 10시경 어느 도시의 역에 도착하면 10불 정도의 돈으로 지도
한 장과 버스표나 전철표 4장 정도를 사면 끝입니다. 먹는 것 외에는
이것이 지출내역의 전부였습니다. 화장실에 들러 세수도 하고 머리도 슬쩍
감았습니다. 상쾌한 기분에 도취되어 지도를 보며 갈만한 곳을 찾아보고
역 주변의 지리를 익히는 데 약 1시간 정도를 소비합니다. 그러나
저에게는 충분하고 든든한 것이 있었습니다. 배낭 속에 들어있는 슬라이드
필림 50여 통과 카메라가 바로 나의 힘이었습니다. 나는 배낭 속의 필림에
넓은 유럽을 몽땅 담아서 짊어지고 다니는 거인이었습니다. 유럽의 어느
곳이든 나의 카메라에 잡히기만 하면 바로 내 것으로, 내 사진으로
되어버렸습니다.
젊은 자녀를 둔 부모님들께 부탁드립니다.
'고등학교를 마치면 무조건 외국으로 강제여행을 시켜야 합니다.'
'비행기표와 유레일 패스와 하루 용돈 20불 정도만 주십시오. 더 이상은
필요없습니다.'
자식에게 조국과 가정의 소중함을 알게 하려는 부모라면 이렇게 해야
합니다. 이런 일을 못 시키는 부모는 부모자격이 의심스럽고 이런 여행을
하려들지 않는 젊은이는 장래가 밝지 못합니다. 이 짧은 글로 저는 기대를
걸어봅니다. 미래에는 한국이 세계를 지배하게 될지 모른다든가 한국이
세계에서 가장 살기좋은 나라가 될지 모른다든가 하는 공상을 말입니다.
공상만은 아닙니다. 우리보다 앞선 나라건 뒤진 나라건 그곳의 아름다운
자연을 눈으로 담아오십시오. 저들의 공원과 아름다운 도시, 빼어난 의상의
색상이나 디자인, 발전된 산업의 현장, 삶의 현장을 우리의 머리로
마음으로 사진으로 글로 저마다 가져옵시다. 세금 한푼 안 내도됩니다.
삼천리에 쏟아놓고 우리 글 우리말로 우리에게 맞게 정리해 봅시다.
외로울 땐 언제든지
"CQ, CQ, CQ..."
"여기는 HL1(에이치, 엘, 원) MWN(마이크, 위스키, 노벰버)"
아무나 붙들고 얘기를 나누고 싶은 한가한 시간이면 저는 마이크를 잡고
CQ를 외쳐 댑니다. 한두 번 CQ를 외치다 보면 어느 새 응답이 옵니다.
"HL1-MWN, 여기는 DS1-AZL(디, 에스, 원-에이, 지, 엘). 국장님,
주파수를 정해 주세요, 오바"
오늘은 어디선가 고운 음성을 가진 여성이 나의 CQ에 마이크를 잡고
응해 왔습니다.
"DA1-AAZL. HL1-MWN. 입감되시면 145.18.QSY."
"HL1-MWN. DS1-AZL. 네, 145.18, 로저."
그렇게 해서 이름하여 '햄(HAM)'-아마추어 무선사들인 우리는 서로
얼굴도 이름도 모르면서 열린 공간에서 따로 만나 대화를 나누는
것입니다.
"DS1-알파, 주루, 리마. -HL1-마이크, 위스키, 노벰버. 올라오셨습니까?
오버."
먼저 마이크를 잡은 사람이 주파수를 정하고 상대방을 확인합니다. 항상
상대방 콜사인(호출부호)을 먼저 부른 다음 자기 콜사인을 부릅니다.
"HL1-엠, 더불유, 엔. -여기는 DS1-에이, 지, 엘. 네, 마이크
터닝하겠습니다."
"DS1-AZL. -HL1-MWN. 이렇게 CQ에 응해 주시고 만나서
반갑습니다. 제 QRA(이름)는 이슬비 할 때 이, 기러기 할 때 기, 정다운
할 때 정, 이기정 오퍼레이터입니다. QTH(주소)는 동대문구 답십리 5동
487-50호입니다."
우리는 이렇게 하여 금세 친구가 됩니다. 어디에 살며 무슨 일을 하며
어떤 취미를 가지고 있느냐는 등의 얘기로 시작해서 날씨며 계절이며 서로
살아가는 얘기 등 많은 얘기를 나누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대화를 하다
보면 어느새 새 친구를 사귀었다는 즐거움과 기쁨이 가슴 가득
차오릅니다.
때로는 가까운 일본을 비롯해 동남아는 물론 근래에는 태양 흑점 관계로
교신에 지장이 많지만 멀리 미국이나 남미, 유럽까지도 갑니다. 무한한
공간에서 시도 때도 없이 만날 수 있는 많은 친구들이 지구촌 여기저기에
있으므로 저는 덜 외롭습니다. 하느님과 같이 사는 신부라서 이른
새벽부터 미사를 드리며 강론을 해야 하고 사목활동이며 교리강좌,
방송교리 등 그 모든 것이 또한 철저한 준비가 사전에 선행되어야 할
일들이어서 시간을 더 이상 쪼갤 수 없을 정도로 바쁘게 살고 있지만,
언뜻언뜻 너무나 인간적인 고독감이 저를 엄습할 때 마이크를 잡고
교신하는 것이 이젠 버릇처럼 되어버렸습니다.
그 사이 많은 친구를 얻었습니다. 신부가 햄을 한다는 게 드문 일이어서
희소가치 때문인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얼마 전 택시를 탔더니 우연히 햄
장비가 부착된 차량이었는데 기사 양반이 제 이름을 기억하고 계셨습니다.
"햄을 하는 사람들을 보면 직업이 아주 다양합니다. 저처럼 운전대를
잡는 택시기사가 있는가 하면 회사원, 공무원, 학생, 심지어 천주교 신부도
있습니다."
"신부요?"
"예. 답십리 성당에 계시는 이 무슨 신부라고 하던데..."
"그 신부 할 일이 되게 없는가 보죠?"
무슨 말씁을 하시나 들어 보려고 짐짓 모르는 척 하고 그렇게
여쭤봤습니다.
"무슨 말씀이세요? 신부, 그 양반들 따지고 보면 외로운 신세 아녜요?
자식이 있습니까, 마누라가 있습니까? 사람이 곁에 아무도 없을 때를
생각하면 마치 절해고도에 혼자 있는 것 같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언제든지 마이크만 잡으면 누구하고나 대화를 나눌 수 있으니 그런
양반들에게는 햄(HAM)이 진짜로 배가 한참 고플 때 먹는 햄이나
다름없죠."
입담도 좋고 이해심도 많은 기사 아저씨였습니다.
그날도 돌아와 밤늦게 교신하고 있는데 누군가에 의해 브레이크가
걸려왔습니다. 브레이크라 함은 두 사람이 교신하고 있을 때 제3자가
끼어들겠다는 신호를 보내오는 것입니다. 사이클을 맞추다 보면 남들이
하는 얘기를 모든 사람들이 들을 수 있는 열린 공간이라서 대화하는
사람들이 자기와 아는 사이일 때는 반가워 끼워드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브레이크 스테이션을 확인하였더니 인사해 온 사람은 10년 전
제가 명동성당에 있을 때 저에게서 혼배성사를 받았다는 분이었습니다.
그동안 신부님의 소식을 듣지 못하다 이렇게 햄 가족으로 신부님을 다시
뵙게 돼서 얼마나 기쁜지 모른다고 하는 그분의 반가운 목소리에 저도
짜릿한 행복감마저 느꼈습니다.
외로움을 많이 타시는 분, 여행을 많이 하시는 분은 햄을 하시면 더욱
좋습니다. 언제 어디서나 누구하고라도 부담없이 대화를 나눌 수 있으며
어디로 여행을 하든 CQ만 내면 햄 가족을 만날 수 있고 그곳 지리를
모를 경우에는 자세히 안내도 받을 수 있어 취미 중에는 아주 좋은
취미활동입니다. 햄들이 하는 일이 자신의 고독을 해소하기 위해 친구를
사귀는 것만으로 끝나는 것은 아닙니다. 그것은 단지 시작일 뿐이고
교통정보를 제공한다거나 위급환자 발생 등 불의의 사고를 신속히 처리할
수 있게 도와주는 등 사회봉사 차원에서 좋은 일을 많이 하고 있다는
사실도 기억해 주셨으면 합니다.
빛의 예술
명동성당에 있을 때 가톨릭회관에서 문화강좌의 일환으로 취미 삼아
가르쳤던 사진강좌가 어느덧 7년째 접어들고 있습니다. 가톨릭회관에서,
더군다나 신부인 제가 강사가 되어 강의를 하다 보니 많은 사람들은 그
프로그램의 천주교 신자들만 대상으로 하는 것인 줄 알고 또 신자들만
수강하겠거니 생각하는 분들이 많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사진 촬영에
관심을 가진 분은 누구든지 수강할 수 있습니다. 실제로 그 동안 제
프로그램을 통해 사진을 배우신 분들을 보면 스님을 비롯해 개신교
목사님, 원불교 정녀님도 계시니 종교와는 무관한 셈입니다. 다만 널리
홍보되지 않아 앞서 제 프로그램에 참석했던 분들의 소개나 추천을 통해
강좌가 이어지고 있기 때문에 그리 활발한 편은 못됩니다만 근래에는 명동
근처의 직장인들이 자주 찾아와 고무적이라 할 수 있습니다.
사진이라는 말이 우리에게 사진이라는 한자어로 먼저 알려져 영어의
'photo'라는 개념에 대한 이해가 부족합니다만 'photo'란 '빛을 찍는다'는
뜻입니다. 빛을 발견하고 빛을 그리는 예술이 곧 사진입니다. 사실 그대로
나오는 게 사진이라고 생각해서는 빛의 예술인 사진예술을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사진은 뚱뚱한 사람을 날씬하게 찍을 수 있고 키가 작은
사람을 큰 사람으로 보이게 찍을 수도 있으며 몸체가 큰 사람을 아담하게
찍을 수도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찍는 사람 마음 먹기에 따라 피사체의
모양이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다는 얘기입니다. 그러므로 사실 그대로
나오는 게 사진이라는 말은 맞지 않습니다.
사람들은 자연스럽게 있다가도 사진을 찍으려고 카메라를 들이대면 금세
굳어져 근엄한 표정이 되어버리곤 합니다. 자연스러운 그 모습, 있는
그대로의 모습이 보기 좋아 핀트를 맞췄다가 곧 실망하고 맙니다.
사진값이 턱없이 비쌀 때 사진관에 가 사진을 찍던 옛날 버릇이 남았거나
주로 기념사진으로만 사진을 찍다 보니 그리 된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는
사진값이 저렴해져서 취미생활 중 가장 비용이 덜 드는 취미가
사진촬영이라고들 합니다. 카메라를 의식하여 억지로 표정을 짓지 마시고
자연스러운 모습을 사진에 담아두십시오. 있는 그대로의 모습에서 풍기는
아름다움을 찾아내 그것을 사진으로 표현하는 것이 곧 사진예술입니다.
많은 사진작가들이 좋은 작품을 찍기 위해 산하를 헤매고, 꽃을
찾아다니고, 인파 속을 쏘다니면서도 사람을 찾아나서는 까닭이 바로 그
때문입니다.
사진은 메모광이 메모를 하듯 자기 주위에서 일어나는 일들에 대한
기록으로도 완벽한 기능을 다할 수 있습니다. 직장이며 친구들이며 슬펐던
일이며 기뻤던 일 등등 그 모든 것을 아주 정확하게 기록으로 남길 수
있는 가장 완벽한 수단이 곧 사진입니다. 그래서 사진을 '기록의 예술'
'순간의 예술'이라고 일컫기도 합니다. 영화라면 몰라도 그까짓 것 사진이
무슨 예술이냐고 하는 사람들도 간혹 있습니다. 그러나 그림을 보고 우는
사람은 없어도 사진을 보고 우는 사람은 많습니다. 육영수 여사의
영구차를 떠나보내며 외롭게 서 있는 박정희 대통령의 모습이 많은
사람들, 특히 그를 미워했던 사람들조차 가슴을 찡하게 만들었던 그때 그
장면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그림이 그런 감동을 줄 수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제가 사진촬영에 재미를 느끼고 사진기술 습득을 위해 공부를 시작한
지는 30여 년이 됩니다. 소신학교 시절 처음에는 그림에 소질이 있어
펜화를 그리다 대상물을 카메라로 찍고 다시 그것을 그림으로 옮기는
과정을 거듭하면서 사진에 흥미를 느끼게 된 것입니다. 소신학교 때와
대신학교 시절 학교 사진반 활동을 하면서 신학생들의 생활을 사진으로
찍어 방학 때는 여러 섬을 돌아다니며 신학교를 소개하기도 했고 그 당시
처음 시행하게 된 주민등록증에 붙일 대신학교 교수님들이며 학생들의
사진을 자진해서 몽땅 찍어 주기도 했습니다. 대신학교 시절에는 또
사진으로 아르바이트를 하기도 했습니다. 주로 약혼사진이나 결혼사진을
찍었는데 특색있는 아이디어 덕분에 인기를 끌었습니다. 사진값을 받는
것이 아니라 작품값을 받을 정도였으므로 그 돈으로 신학교 등록금이며
용돈을 쓰기에 충분했습니다.
비록 사진강좌를 개설해 강의를 하고 있고 그동안 제 프로그램을 통한
수강자가 2000명에 육박하지만 저는 지금도 사진에 대한 공부를
게을리하지 않습니다. 사진기술이 그만큼 발달하고 사물을 아름답게 보는
눈을 더욱 가꾸면 앞으로도 사진이 표현할 수 있는 영역은 세상에 빛이
있는 한 무궁무진하기 때문입니다.
공주병, 왕자병 환자들에게
지존파다 막가파다 하는 요상한 패거리들이 물의를 일으킬 때마다
어른들은 흔히 이렇게 말합니다.
"세상이 어쩌다 이 모양이 됐어? 요새 젊은 것들이 하는 짓을 보면
정말로 한심하기 짝이 없단 말이야."
마치 모든 잘못은 '젊은 것들'에게만 있고 그렇게 말하는 자신에게는
전혀 책임이 없다는 듯이 쯧쯧 혀를 찹니다. 그러나 따지고 보면 세상을
이 모양으로 만든 책임은 젊은이들이 아니라 세상을 조금이라도 더 산
사람들, 즉 그렇게 말하는 어른들에게 더 많은 젓이 아닐까요?
세상은 심은 대로 거두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 사회에 만연한 생명
경시 풍조는 우리 어른들이 가족계획이라는 미명 아래 산아제한을 하면서
낙태가 흔해지게 된 것과 무관하지 않습니다. 폭력이 난무하는 잔인함과
몰인간적 행위는 6.25 전쟁을 전후해서, 또한 5.18 사건을 통해 행해진
어른들의 잔혹한 행위가 답습되는 것에 불과합니다.
중국에까지 가서 동족에게 사기를 일삼는 사람들 가운데 젊은이가
있었다는 얘기를 들은 바가 없습니다. 업자들로부터 꿀꺽꿀꺽 뇌물을
받아먹는 사람들이 젊은이라는 소리도 들어본 바가 없습니다. 몇백 억
몇천 억씩을 먹고도 눈 하나 깜짝 안 하는 이들은 바로 어른들 중의
높으신 상어른들이 아닙니까? 그러므로 어른들은 세상이 어쩌다가 이
모양이 됐느냐고 탓할 자격이 없습니다. 오히려 가슴을 쥐어뜯으며
뉘우쳐야 합니다. 그리고 나서 젊은이들과 머리를 맞대고 우리의
손자손녀들이 살아가야 할 세상이 보다 좋은 세상이 될 수 있도록 지혜를
짜내야 합니다.
보십시오. 대통령이 아무리 칼국수를 먹으며 '달라집시다'
'깨끗해집시다'라고 목청을 돋워본들 관행에 젖어 있는 어른들이 실권을
쥐고 있는 오늘의 세상에서는 그 말이 먹혀들지 않고 있지 않습니까.
가신이라는 측근들이 그 말을 듣지 않았고 직속 부하인 장관들이 뇌물
때문에 구속되지 않았습니까.
교통위반으로 딱지를 뗀 사람들의 말을 들어보면 '전경한테 걸리면 꼼짝
못한다'고 말합니다. 딱지를 떼는 대신에 몇푼 집어주면 해결되던 관행을
오늘날 젊은 전경들이 뜯어 고치고 있습니다. 부패와 비리를 일삼는
어른들을 가까이 보면서 자란 젊은이들이 이제 어른들을 향해 매서운
모범을 보이고 있는 것입니다. 옛날 생각만 하고 돈을 건넸다가는 오히려
망신만 더 당할 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겐 아직 희망이 있습니다.
탐욕과 권력에 집착하는 어른들이 물러나고 오늘의 젊은이들이 주역이 될
때쯤에는 우리 사회도 좋은 쪽으로 많이 달라져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앞에서 저는 이땅의 젊은이들에게 희망을 걸고 있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러나 솔직히 말하면 저도 이제는 나이가 50줄을 넘은 어른이 됐기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요즈음의 젊은이들에게서 느끼는 불만이 한 두
가지가 아닙니다. 그러나 저의 불만은 어디까지나 그들에 대한 기대
때문에 생기는 것이니 이 글을 읽는 젊은이가 있다면 서운하게 생각할
필요는 없습니다.
요즘의 젊은이들에게는 대개 공주병, 왕자병 같은 것이 있습니다.
어른들이 둘만 낳아 잘 길러 보자고 외동딸, 외아들을 낳아 떠받들어 키운
결과이기는 합니다만 이 병에 걸린 젊은이가 많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대개 자신이 특별대우를 받아야만 기분이 좋습니다. 이들은 개체의 존재가
중요시되지 않는 단체에 들어가 자신의 모습이 튀지 않으면 금방
뛰쳐나오려고 합니다. 끈기며 패기가 부족하거나 아예 없는 편입니다.
인내심 또한 찾아 보기 힘듭니다. 요즘 젊은이들은 나약합니다. 키나
체격은 윗 세대보다 훨씬 커졌지만 속을 들여다 보면 오히려
허약해졌습니다. 체질이 허약한 사람은 뒷심이 부족해 도전의식이 없고
조금이라도 힘든 일은 가급적 피하려 애쓰며 쉬운 일만 골라서 하려 하고
또한 매사를 쉽게 포기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남과 북이 첨예하게
대립하고 있는 현 상황에서 우리의 젊은이들이 특히 강해져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만 이제 군대도 예전 같지 않아서 어느 정도 추운 날이나 더운
날에는 훈련을 중단할 수밖에 없는 실정이라고 합니다. 한참 발육이
왕성한 시절에 학교공부에 얽매여 허덕이다보니 그리됐을 것이라고 이해는
갑니다. 그런 지위나 명예, 재산을 잃으면 그 자체만을 잃은 것이지만
건강을 잃으면 모든 것을 한꺼번에 잃는다는 사실을 명심하고 건강한 몸을
만들기 위해 젊은 시절에 규직적인 운동습관을 길러야 합니다.
이제는 과거와 달리 지능지수(IQ) 대신 감성지수(EQ)가 중시되는
시대입니다. 미국 같은 선진국에서는 이미 감성지수 개발을 위한 교육
프로그램이 시행되어 큰 효과를 얻고 있습니다. 건강한 육체에서 건강한
정신이 생성되며 아울러 감성지수 또한 비례적으로 상승하는 것입니다.
대학가에 서점이 점점 줄어들고 대신 유흥업소가 늘어난다고 합니다.
실제로 대학가에 가보면 예전의 모습을 찾을 길이 없습니다. 예전에는
젊은이들의 돈벌이가 쉽지 않았습니다. 돈을 벌 수 있는 방법이란
고작해야 신문배달, 가정교사 등 한 손으로 꼽을 정도입니다. 그렇게
힘들여 일해도 학자금을 대기가 빠듯했습니다. 요즘에는 각종
아르바이트가 성행하고 그 보수도 좋아져서 고학을 하기가 훨씬 쉬워진
듯합니다. 고액과외가 성행하여 학생들의 주머니가 두둑해졌고 부모들이
주는 용돈도 많아져 유흥업소가 대학가 근처에 독버섯처럼 만연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 책임의 전부가 젊은이에게 있는 것은 아니겠지만 젊은이들도
반성해야 할 것입니다.
젊은이들 중에는 세계명작을 책으로 읽는 것보다 영화나 비디오로 본
사람들이 훨씬 많은 게 현실입니다. 그래서는 그 작품의 거죽만 핥는 격이
되어 깊은 참맛을 느낄 수 없습니다. 무엇이든 쉽게 생각하고 쉽게
해결하려는 사고방식이 이런 현상을 초래한 것입니다. 좀더 진지한 태도로
사물에 접하고 보다 철학적인 사고로 장래를 추구하는 젊은이가 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책을 많이 읽어야 합니다.
마지막으로 한 가지만 더 지적한다면 오늘의 젊은이들에게서는
예의범절을 찾아 보기 힘들다는 것입니다. 농경사회에서 산업사회로
발전하는 과정에서 전통적인 대가족제도가 붕괴되면서 생긴 현상이기는
하지만 부모들이 지나치게 떠받들어 키운 탓에 저마다 공주나 왕자처럼
떠받들어지기를 바랄 뿐 남을 섬기는 모습은 찾아 보기 어렵습니다.
예의란 타인과의 접촉에서 형성되는 일종의 규범입니다. 그것은 곧 남을
존중하고 나를 낮추는 겸손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의
젊은이들은 '개성'이라는 미명 아래 자신만을 강조하고 과시하고자 합니다.
자연히 예의범절은 발붙일 곳이 없어집니다. 혼자만 사는 세상이라면
예의에 있건 없건 상관이 없습니다. 무인도에서 벌거벗고 다니면 누가
뭐라고 하겠습니까. 하지만 남과 더불어 살 수밖에 없는 인간으로서
때로는 협동하고 때로는 양보하는, 더불어 사는 삶을 위한 기본틀이 있을
것이며 그것이 곧 사람이 동물과 다른 점이기도 합니다.
개성이라는 미명 아래 지나치게 야한 옷차림에 해괴한 머리 모양을 하고
거리를 활보하는 모습이며 지하철 안에서 남의 이목을 전혀 고려치 않고
스스럼없이 진한 애정 표현을 하는 젊은이들의 모습을 보면 곤혹스러울
때가 많습니다. 자기 부모나 친척, 스승 앞에서는 차마 그런 행위를 하지
않을 것입니다. 자신과 연관이 있는 사람이 그 자리에 없다고 해서
공공연하게 그런 행위를 한다는 것은 그곳에 있는 사람들을 무시하는
무례한 행위와 다름없습니다. 자기 전공과목 담당교수가 아니라고 해서
교수에게 주먹질을 한 학생이 있는가 하면 주차 문제로 이웃집 사람을
폭행하여 죽음에 이르게 한 젊은이도 있습니다.
거듭 강조하지만 젊은이들은 우리 어른들이 저지른 비리와 비례를
답습해서는 안 됩니다. 먹고 살기 힘들어서 이기적이 될 수밖에 없었던
어른들을 이해하고 보다 넓은 포부를 가진, 남을 생각하는 삶을 사는
젊은이가 되어야 합니다. 오늘의 젊은이들이 이 사회의 주역이 되었을 때
보다 밝고 깨끗한 사회가 이루어지기를 간절히 기원합니다.
혀끝과 손끝의 상처
어머니가 해주시는 식사는 식당에서 사 먹는 식사와는 다릅니다. 돈을
지불하지 않아 다른 것이 아니고 그 맛의 차원이 다릅니다. 어머니의
손끝에서 나오는 입에 익은 맛이 다릅니다. 어머니의 손은 나의 모든
부분에 연결되어 있나 봅니다. 그 연결은 일방 통행이 아니라 나의 반응을
해석할 줄 아는 쌍방 통행의 손길입니다.
판단을 잘못한 일부 병든 어머니들은 때로 자녀에게 무서운 식사를
강요하기도 합니다. 자녀의 입맛을 무시하고 강제로 입을 벌려 먹이는
식사법도 있습니다. 소화도 안 될 음식을 배가 불러 더 이상 못
먹겠는데도 한 사발 떠 주고 강제로 먹으라고 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밥하기 싫어서 생쌀을 내놓거나 키 크라고 생콩나물을 무작정 먹이는
경우도 있다는 것입니다. 물론 과장된 이야기이지만 요즘 이런 어머니들이
적지 않다고 합니다. 문제가 아닐 수 없습니다.
"1등 해라. 서울대학생 가진 엄마 좀 되어 보자." "악착같이 공부해라."
"네가 할 일이란 오로지 공부밖에 없어. 공부 말고 다른 할 일이 뭐가
있니?" "친구들은 아예 만나지도 마. 경쟁이야 경쟁. 이겨야 돼!" "이제부터
성당에도 가지 마. 교리 공부 따위는 시험에 안 나온다구!" "미사만 보고
얼른 오도록 해. 교리 시간에는 안 가도 돼. 1등 해야되잖아."
앞집에서도 뒷집에서도 옆집에서도 똑같은 소리가 들립니다. 어른들은
모두가 앵무새들인가 봅니다. 아니면 녹음 테이프를 잘못 꽂았나 봅니다.
사실 그렇게 공부, 공부 해봤자 인간성을 상실한 괴물 인간이나 되고
맙니다. 부모의 강요로 1등만 계속한 똑똑한 상전으로 키워낸 결과
어머니는 후에 집이나 지키고 애나 보는 하녀의 신세로 전락하고 맙니다.
공부는 지혜를 쌓는 것이며 처세와 인품을 기르는 것, 즉 사람됨을 배우는
것이라고 저는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요즘의 공부는 물질 세계의
원리들을 많이 외우는 것으로 퇴색되었습니다. 마음과 정성으로 간을
맞추어 요리된 지혜가 아니라 과학자들이 발견해 놓은 것들을 읽고 외우는
것이 공부의 전부라고 생각들 하는가 봅니다.
18세기 이후 프랑스에서는 교육의 목적을 백과사전식 인간 양성에 두어
그 후 나라가 급속도로 쇠약해졌습니다. 영국도 이과 같은 목표로 교육을
하다가 현인들의 반박으로 방향을 바꾸었습니다. 미국도 19세기부터
상식을 중심으로 교육하다가 금전 만능과 소비 미덕의 주장과 개인주의를
불러일으켰습니다. 금세기에 와서 선진국들은 전인 교육을 뒤늦게야
부르짖고 있습니다. 사실 산업 혁명으로 인한 기술 교육 중시의 사회
분위기 때문에 인간을 위한 교육은 기업을 위한 교육의 일환으로
전락했다고 보아도 과언이 아닙니다.
우리 나라는 예로부터 동방예의지국이라 불릴 만큼 서로 예의를 지키며
이웃과 어울려 살았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어떻습니까. 그토록 훌륭한
전통을 가지고 있는 우리가 지금 자녀들을 교육하는 태도를 한번 살펴
봅시다. 무조건 경쟁에서 이길 것을 강요하는 부모들의 욕심 때문에
우리의 자녀들이 멍들어가고 있습니다. 부모의 정신 나간 교육 때문에
괴로워하다 심지어는 목숨까지 끊는 경우가 적지 않은 것이 엄연한 현실이
아닙니까. 누구의 혀끝에서 생긴 병 때문인지, 또 누가 이끄는 손길
때문인지 자녀들을 가진 부모들은 깊이 생각하여야 하겠습니다. 학교
선생님들은 물론 교육의 이념을 다시 한번 되새겨봐야 할 것입니다.
우리 모두의 자녀들을 위하여 교육의 올바른 방향을 연구하여 잡아
나아가도록 관심을 촉구해야 하겠습니다. 백과사전은 역시 도서실에나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그런지 백과사전의 유사품 같은 젊은 인간들이
도서실에 많이 있는가 봅니다. 그러나 앞으로의 사회는 백과사전적 지식을
갖춘 사람을 요구하지 않습니다.
이제부터 한 50여 년 간 한국에서는 아름다운 민요가 창작되지 못할
것입니다. 이제부터 한 50여 년 간 한국에서는 심금을 울리는 예술의
창조는 없을 것입니다. 이제부터는 당분간 기대하지 맙시다. 구수한 인간
사회를 ... 이제는 아예 포기할 수밖에 없습니다. 세상을 인품으로 밝힐
지도자가 나타나리라는 것을 ...
언론이 해야 할 일
우리 민족은 예로부터 예의바르고 희생심이 강하며 끈기있고 평화를
사랑하는 민족입니다. 우리 나라 역사상 우리 쪽에서 먼저 전쟁을 일으켜
남의 나라를 공격한 적은 없었습니다. 언제나 우리가 피해를 당했지만
그렇다고 나라를 아주 잃지는 않았습니다. 일제 치하 36년의 어두운
과거가 있긴 합니다만 그렇다고 그들이 우리말과 글, 민족혼까지 없애지는
못했습니다.
요즈음 신문, TV 등 매스컴을 보면 나라의 앞날이 걱정되는 게 솔직한
심정입니다.
일제 치하 말엽 우리 나라에 신문이 처음 생길 때만 해도 당시의
신문들은 우리 겨레의 앞날에 횃불 같은 역할을 했습니다. 하지만 근래에
들어 우리의 신문이 국민에게 어떤 영향을 주고 있는가, 10년 혹은 20년
후의 겨레의 앞날에 오늘의 신문이 어떤 보탬을 줄 것인가를 생각하면
깊은 회의를 지나 암담하기조차 합니다. 우선 신문을 펼쳐보면 지면이
온통 광고 투성이입니다. 순전히 돈을 벌기 위한 방법으로 신문을 만드는
것 같아 보입니다. 신문이 몇십만 부 나간다고 하니 조그마한 광고 하나를
내려고 해도 몇백만 원을 줘야 겨우 신문에 실립니다. 우리 독자들이 그
신문을 봐주니까 그렇게 되는 겁니다. 방송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광고
때문에 신문사가 돈을 벌고 방송사들이 흑자를 내는 겁니다. 그런데 왜
오늘의 매스컴이 국민에게 희망과 꿈을 주기 못하고 험한 이야기만 싣는지
도대체 저로서는 알 길이 없습니다.
외국의 경우를 보면 신문사에 근무하는 직원들이 사무실 출근율은
30%를 넘지 않는다고 합니다. 나머지 70%는 사무실에 나오지 않고
현장에서 발로 뜁니다. 출퇴근 시간을 신문사의 출퇴근시간에 맞추지 않고
자신이 맡은 현장의 시간에 맞추어 그들과 함께 살면서 현장의 소리를
생생하게 취재해 기사화합니다.
그런데 우리 나라의 신문사 사회부 기자들은 대부분 경찰서에서
취재합니다.
제가 명동성당에 있을 때 가까이 있는 중부서에 갈 일이 몇 번 있었는데
그곳에는 따로 기자실이 있을 정도로 많은 기자들이 머무르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아침에 잠시 신문사로 출근했다 경찰서로 와 하루 종일을 거의 그
곳에서 보냅니다. 사회부 가자들이 버스나 전철을 타고 대중과 섞여
대중이 무슨 생각을 하며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지 그 실상을 봐야 대중의
소리를 실을 수 있고 사회를 선도하는 가사를 쓸 수 있을 텐데 하루 종일
경찰서에 가만히 앉아 있다 보니 자연히 사건기사밖에 쓸 것이 없는
것입니다. 나쁜 짓을 해서 경찰서에 잡혀오는 사람이 전 국민 중 과연 몇
%나 되겠습니까? 아주 극소수의 사람들이 저지르는 범죄의 뒤만
좇아다니며 가사화하다 보니 마치 우리 나라가 범죄의 천국인 양 국민들이
착각하는 것입니다. 정상적으로 평안히 사는 사람, 사회적으로 옳고 좋은
일 하는 사람이 기사거리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범죄사건 위주로 취재해 전 국민에게 범죄사건을 알리는 기사가 국민
전체의 정신교육상 좋은 일이 아니라는 것은 선진국에서는 이미 오래 전에
통감한 사실입니다. 그래서 선진국 경찰들은 기자들이 특종이라고 하는
사건을 자기네들끼리는 알아도 일반 국민은 전혀 모르게 합니다.
비상출동이라고 해서 경찰이 오고 순찰차가 와도 근처의 주민들은 무슨
일인지 모릅니다. 그것은 범죄혐의자의 인권보호 측면도 있지만 그 범죄가
국민교육에 해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가까운 데서 범죄를 자주 접하다 보면 국민은 약해지고 공포에 질리게
됩니다. 국민을 공포로부터 보호해야 할 책임은 경찰뿐만 아니라 언론도
함께 져야 합니다. 그런 신문을 안 보고, 그런 TV 뉴스를 안 보면 오히려
하느님 말씀을 잘 듣고 좀 더 편안하게 살 수도 있을 것입니다. 자꾸 그런
것을 유난스럽게 떠드니 봉고차만 봐도 인신매매단 생각이 나고, 으슥한
데서는 사람만 봐도 겁나고, 죄없이 지나가는 사람을 공연스레 의심하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열 두 사도를 세상으로 파견하시는 구절이 생각납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대중들에게 보내시면서 이러이러한 것들을 하지 말라
하시며 가르치셨고 또한 파견된 제자들은 세상에 나가 마귀를 쫓아내고
병을 고쳐 주는 일을 했습니다. 저는 이 두 가지가 오늘날 우리가 참으로
해야 할 일이라고 통감합니다.
오늘날 매스미디어는 군중에게 마귀, 악을 심어주고 있는 겁니다. 사건을
다 보여 알게 하곤 이렇게 하면 안 된다, 이런 걸 보면 안 된다는 식으로
계속 주입시켜 이제는 국민 모두 신경성 노이로제에 걸리다시피
되었습니다. 매스미디어는 악을 쫓아내고 병을 고쳐주는 것이어야 합니다.
지금과 같이 약한 모습을 전파하고 병을 심어주는 쪽으로 대중을 몰고가는
것은 바람직하지 못합니다. 이제라도 매스컴은 따뜻한 시각으로 사회의
병을 치유하는 쪽으로 방향을 잡아야 합니다.
또한 우리 국민의 심성을 순화하는 데 매스컴이 특별히 신경써야 할
것입니다. 그래야만 자랑스런 우리의 민족성이 우리들의 후대에게 이어질
것입니다.
어머니께서 차려주신 식탁 앞에서
"흘리지 말고 먹어라." "골고루 먹어라." "소리내지 말고 먹어라."
"가만히 앉아 먹어라." "음식을 삼킨 후에 이야기를 하거라." "남기지 말고
먹어라."하시던 어머니 말씀을 들으면서 어릴 때 집에서 가족들과 함께
식사하던 생각이 납니다. 그때 그 정겨운 장면은 내 마음에 언제나
아름다운 기억으로 남아 있습니다.
식사하다 내가 뭘 좀 흘리면 어머니께서는 눈을 살며시 흘기시고는
행주를 가져와 닦아주셨습니다. 어머니께서는 간혹 생선이나 돼지고기
등을 제 숫가락 위에 얹어주시고는 '마른 논에 물 들어가는 것 하고 자식
입에 밥 들어사는 것을 보는 게 제일 좋다.'고 말씀하시며 제가 먹는
모습을 행복스런 표정으로 지켜보셨습니다.
"자극적인 음식을 계속 먹으면 고집센 사람이 되고, 반찬을 가리지 않는
사람은 사람을 가리지 않는 사람이 되고, 싫어하는 반찬도 잘 먹는 사람은
희생적인 성격을 가지는 사람이 된다. 엄마가 만든 음식에 투정을 부리는
것은 불효며 밥상에서 늘 고마운 마음을 갖고 맛있게 먹으면 여러 사람을
즐겁게 해줄 수 있다."던 말씀도 기억이 납니다. 어머니께서는 밥상에 앉는
자식의 태도와 표정을 보시고 내 자식이 무엇을 먹어야 하는지 또 얼마나
먹어야 하는지를 알아차리시고 음식을 장만하셨던 것 같습니다.
식탁에 앉아 식사하는 사람들의 모습을 유심히 보면 그 사람의 건강
상태를 파악할 수 있다는 말씀이 내게는 신기하게 들렸습니다. 그러나
이제 와서 생각하니 맞는 말씀이셨습니다.
그때 어머니께서 말씀하셨던 건상상태란 심리적인 건강, 정신적인 건강,
육체적인 건강까지 모두 포함한 것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어머니께서는
제가 밥상머리에 앉아 밥을 먹는 모습을 보시면서 그 모습만으로도 그날
내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 쪽집게 처럼 알아내셨으니 말입니다.
"너 오늘 선생님께 야단맞았지?"
"너 또 누구와 다퉜구나?"
어머니의 신통력에 놀랬던 기억이 새삼스럽습니다. 마치 눈으로 보신 듯
정확하게 알아내는 어머니는 저의 정신적인 건강을 돌봐주시는 신경정신과
전문의셨고, 육체적인 건강을 진단하는 주치의였으며 인생을 가르쳐주시는
철학교수이기도 하셨습니다.
"수저를 입속에 넣을 때는 이에 닿는 소리가 나지 말아야 하고 수저를
뺄 때는 입술을 꼭 오무려 천천히 빼야 돼."하시며 손수 시범을
보이기까지 하시며 식사법을 가르치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밥상에
앉아서는 큰 소리를 내서는 안 되고 좋지 않은 흉한 이야기도 삼가야 하며
개도 밥을 먹을 때는 건드리지 않는 법이니 남에게 자극을 주는 말은
절대도 해서는 안 된다는 말씀도 하셨습니다.
가정의 식사법이란 참으로 중요한 것입니다. 가족들이 식탁에 둘러앉아
식사하는 자리에 함께 끼어 보면 그 가정의 기본 모습을 알 수 있습니다.
아버지가 식탁에 앉아 있는 모습을 많이 보면서 자란 아이들은 예의바르고
안정감이 있습니다. 어머니가 이끌어가는 화목한 식사 분위기는
자녀들에게 어머니의 존재를 느끼게 하는 뿌리가 되며 동시에 자녀들을
효자 효녀로 키우는 요체가 됩니다. 특히 식사예절이나 분위기는 자녀들의
성격 형성에 가장 큰 영향을 준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식사는 되도록 식구들과 함께 식사예절을 지켜가며 하여야 합니다. 더구나
오손도손 정다운 얘기를 주고 받으며 같이 식사를 한다면 그 가정에는
더욱 밝은 미래가 보장되리라 생각합니다.
가족을 구태여 식구라고 하는 의미가 무엇이겠습니까? 이 핑계, 저
핑계를 대며 따로따로 식사하면서도 우리는 한 식구라고 하고 있으니
가족간의 대화가 끊어지고 점점 이기적이 되어 가는 것입니다. 큰 힘 안
들이고 행복한 가정을 이룰 수 있는 최상의 방법이 곧 식구들과 함께
식탁에 둘러앉아 화목한 식사를 하는 일입니다. 여러분, 우리 지금 곧장
집으로 돌아갑시다.
판단하지 말고 있는 그대로
오래된 이야기 중 다음과 같은 교훈적인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떤 현인이 길을 걷다 길에서 싸우는 두 사람을 만났습니다. 그 중 한
사람이 현인에게 자초지종을 설명했습니다.
"처음엔 이렇게 되었는데 어쩌다가 저렇게 되고 또 그렇게 되다 보니
이렇게 되었으니 내가 맞지요?"
현인이 그 얘기를 자세히 듣고
"아! 그렇군요. 당신 말이 맞습니다."
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러자 상대편 사람이 또 현인을 붙들고
"그게 아니라 처음엔 이렇게 됐는데 어쩌다가 이렇게 됐고 또 이렇게
이렇게 됐으니 제가 맞지요?"
하는 것이었습니다. 현인이 가만히 그 얘기를 듣고 나서
"그렇습니다. 당신 말이 맞습니다."
라고 대답했습니다.
곁에 서서 멀거니 싸움을 구경하던 사람이 현인에게 대들 듯
항의했습니다. 아마도 현인이 하는 말이 답답했던 모양입니다.
"아니, 판정해 주실 바엔 확실하게 누구는 옳고 누구는 그르다고
하셔야지 둘 다 맞다 그러시면 도대체 뭡니까?"
현인은 그 사람의 항의를 잠자코 듣더니
"그러고 보니 당신 말도 맞구려."
하더랍니다.
저는 어릴 때 그 이야기를 듣고 '그런 게 어디 있어? 현인이면 현인답게
옳고 그르고를 확실히 가려야지, 그러지도 못하면서 그게 무슨
현인이냐?'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복음서에 나타난 모든 것을 보면 사람을 사랑하라는 계명은
있어도 사람이 사람을 판단할 자격이 있다고 하신 말씀은 그 어디에도
없습니다. 서로 용서하란 말씀은 있어도 사람을 판단하라는 말씀은
없습니다. 옳고 그름은 인간 내면에 대한 채근이며 또 한 사람이 옳다
하면 다른 한 사람이 흠이 있는 것이나 다름없고 그것마저 시간이 지나
감정의 먹구름이 말끔히 걷히면 아무 것도 아닌 것이기에 현인은 판단하지
않고 참으로 현명한 침묵으로 일관한 것이나 다름없었습니다.
우리는 스스로의 판단과 지식 때문에 수많은 사람과 부딪치고 있습니다.
손바닥도 마주쳐야 소리가 납니다.
부부싸움도 마찬가지입니다. 요란스런 20대의 부부싸움과는 달리 50대,
60대의 부부싸움을 보면 한 쪽에서 따발총처럼 쏘아대면 가만히 듣고 있다
상대가 지칠 정도가 되면
"이제 다 됐어? 밥 줘." 그럽니다.
이러니 우리네 어른들 싸움을 보면서 함부로 판단하지 않는 것이 얼마나
현명한 것인지 새삼 느께게 됩니다. 젊었을 때, 또는 한창 신경질이 날 때
우리는 얼마나 많은 잘못을 저지르며 살았는지... 이 모든 것을 생각해
보면서 이제 우리는 함부로 판단하지 말고 그저 모든 것을 있는 그대로
인정해야 합니다.
'저 사람 성격이 그러니까 그렇구나.' 그렇게 인정하면 됩니다.
세상에는 이런 사람 저런 사람이 모두 섞여 있습니다. 모든 사람은 각각
달리 태어났기 때문에 성격이 각각 다르고, 생각도 각각 다른 것이
정상입니다. 나와 똑같은 환경에 처해서 나와 똑같은 생각, 나와 똑같은
판단을 왜 하지 않느냐고 말하는 것은 내가 바로 감정에 휩싸여 있다는
증거이며 억지를 부리고 있다는 방증인 것입니다. 남을 판단하는 것도 한
번 하면 두 번 하게 되고, 그러다 보면 자꾸만 반복하게 돼서 결국 나만
중증환자가 되는 것입니다. 어떻게 보면 우유부단해 보이지만 "그래,
나하고 같은 순 없지. 저 사람은 내가 아니니까 그럴테지." 이렇게
생각하는 것이 곧 남을 받아들이는 것이며 나 자신을 큰 그릇이 되도록
다듬는 것입니다.
빨간색, 파란색
저는 빨간색을 싫어합니다. 빨간색을 보면 붉은 피가 연상되어 섬뜩하게
느껴집니다.
명동성당의 수석신부로 있을 때 빨간색 플래카드와 빨간 머리띠를 두른
시위대를 셀 수 없이 많이 만났습니다. 하필이면 왜 빨간색 머리띠를
둘렀느냐고 그들에게 물어 보면 조직에서 나눠준 것이니 둘렀을 뿐이라고
대답하는 사람들이 대부분이고 좀 안다고 대답하는 사람도 빨간색이 눈에
확 띄는 색이어서 그랬을 것이라는 정도였습니다. 그러나 그래서만이
아닙니다. 빨간색은 자극적인 색이어서 사람을 흥분시킵니다. 사람은
흥분하면 이성보다 감성 쪽으로 치우치게 마련입니다. 세태에 따라 시위가
차츰 격렬해지는 것도 어쩌면 그 빨간색 때문이 아닐까 싶습니다.
시위대가 명동성당에 진입했다는 경비실의 보고를 받으면 보좌신부들과
함께 대책을 숙의합니다.우선 시위대의 성격을 분석하여 보호할 것이냐
선도할 것이냐 등 최선의 교화방법을 토의하게 됩니다. 설령 실정법을
위반한 범죄자라 하더라도 일단 성당 안에 발을 들여놓은 이상 교회가 할
일은 교화일 뿐입니다.
6.29 선언 전후에는 정말로 공감이 가고 보호해 주고 싶은 시위대도
많이 있었습니다. 그때는 신부들이 스스로 주머니를 털거나 교우들의
도움을 받아 시위대에게 마실 것이나 먹을 것을 사다 주기도 했습니다.
그뿐 아니라 시위대 때문에 뙤약볕에서 고생하는 경찰에게도 빵과 마실
것을 사다 나눠주었습니다.
시위대를 이끄는 지도자들과 만나 시위의 범위, 방법, 시간 등에 대해
협의하기도 했고, 경찰 지휘관을 찾아가 중재하기도 했습니다.
시위대에게는 글자 그대로 시위 이상의 극렬행위는 삼가 달라고 부탁하고
교회안에 들어온 이상 도덕성이 결여된다면 교회가 함께 할 수 없다는
교회의 입장을 설명하며 시위를 통해 여론을 환기시키는 이상의 목표를
정하지 말라고 당부하는 것이 제 임무였습니다. 시위는 여론의 환기에
그쳐야지 그 이상의 목표를 달성하려고 욕심을 부리다 보면 결국은 가열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간혹 시위가 과격해지기를 바라는 세력이
배후에 있다는 것입니다. 그 때문에 말썽이 되는 것입니다.
조직이나 교육방법, 그들이 쓰는 용어나 구호, 유인물의 내용 등을 보면
어디서 따온 것이라는 것을 금방 알 수 있는 시위대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주장이나 구호가 교회의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해서 교회가 그들을
내쫓을 수는 없는 것입니다. 천주교에서 왜 그런 시위대를 비호해 주는지
모르겠다는 등의 오해를 받기도 했지만 앞에서 말씀드렸듯이 설사
범법자라 하더라도 일단 교회에 들어오면 교회가 할 일은 도덕성에 입각한
교화사업밖에 없습니다.
최근의 한총련 사태를 보면서 느끼는 바가 많습니다. 시위 참가
학생들을 마치 공산주의에 물든 사람들로 보는 듯한 시각은 바른 시각이
아닙니다. 물론 그 중에는 사상학습이나 다름없는 의식화 교육을 받은,
그야말로 불순분자들이 끼어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학생들은 선량한 학생들입니다. 그 또래의 나이에 갖게 되는 호기심과
정의감, 끈끈한 동료애나 선후배간의 일체감, 마치 학교 운동팀의 경기장에
응원을 가듯 선배, 친구를 따라 시위현장에 나간 학생들이 대부분인
것입니다. 문제는 그들을 조직적으로 이용하려 했던 세력들에게 있습니다.
하지만 그런 세력이 학생운동권에 있다고 해서 정부에서 그들에게
전적으로 책임을 씌우려 하는 것도 온당한 해결방법이 못 됩니다.
근원적인 문제를 그냥 두고 지엽적인 것만 해결한다고 해서 문제가
해결되지는 않습니다. 그런 세력이 형성되기까지의 우리의 정치, 우리의
교육, 우리의 사회를 돌이켜 보고 모두가 반성해야 합니다. 민주주의의
허울을 쓰고 아직도 활개를 치는 독재의 잔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권리나 명예에 집착하여 한번 자리에 오르면 죽기 전에는 비켜 주지
않으려 하는 우리의 정치 지도자들에게는 전혀 죄가 없다는 말입니까?
우리의 교육은 과연 제대로 되고 있습니까? 인격은 불문하고 오직
공부만 잘 하면 일류학교에 가고 장학금을 타서 공짜로 공부를 하고 졸업
후에는 좋은 자리는 몽땅 독식하는 이런 교육제도나 방법이 제대로 된
것입니까? 가진 자는 전혀 내놓을 줄 모르고 강한 자는 약자를 억누르는
사회가 아닙니까? 없는 사람, 약한 사람들이 무전유죄 유전무죄라고
절규하며 우리의 법치를 탄식하는 소리를 이 사회의 지도자들은 듣습니까,
안 듣습니까?
우리의 젊은 학생들은 아마도 이런 얘기들을 하고 싶어 시위에 가담했을
것입니다. 어른들이 젊은이들의 바른 소리를 들어 줄 장을 안 만들어 주니
시위라는 극단적인 방법을 택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부터는 빨간색 머리띠나 플래카드는 화염병과 함께 버려야
합니다. 대신 파란색 머리띠, 파란색 플래카드, 그리고 야구시합 응원 때
흔히 쓰는 막대 풍선을 들고 시위를 합시다. 파란색은 사람을 차분하게
하고 보는 이에게도 안정감을 줍니다. 자극이나 흥분 등이 감성쪽이라면
파란색은 차분함, 평화로움 등 이성쪽입니다.
6.29 선언이 있기 얼마 전 일이었습니다. 명동성당으로 진입한
시위군중을 진압하기 위해 출동한 경찰병력이 명동성당을 겹겹이
에워쌌습니다. 저는 시위대 지휘자급을 만나 밤 10시까지 시간을 정해
성당 안에서만 시위를 하기로 합의하고 밤 8시쯤 인근의 중부경찰서를
찾아갔습니다. 오늘 밤 10시에 시위를 끝낼 테니 시위대가 성당을
빠져나갈 때 길을 비켜주고 버스 정거장까지 경찰이 길 옆에 도열해 서서
시위대가 성당 문앞을 나서거든 박수로 환영해 보내 주면 안 되겠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는 말도 안되는 소리라고 펄쩍 뛰었습니다. 시위대가 질서를
지킨 데 대한 예우로 한 번쯤은 그렇게 해 줄 수도 있는 일이 아니냐고
몇번이나 간청했습니다. 그러나 책임자인 그는 신부님을 봐서라도 자기는
그러고 싶지만 높은 사람들이 그 사실을 알았다가는 다음날 아침 자기는
당장 징계당할 것이라며 곤혹스러워 했습니다. 그런데 밤 10시 정각
시위가 끝나고 시위대가 성당 문을 나서는 순간 우레와 같은 박수 소리가
주위에서 들렸습니다. 2열도 도열한 경찰병력이 헬멧을 벗고 박수로
그들을 맞아준 것입니다. 시위대는 스크럼을 짜거나 어깨동무를 하고
노래를 부르면서 성당 문을 나와 질서정연하게 버스정거장까지 걸어나가
각자 흩어졌습니다. 며칠 뒤 중부경찰서의 그 책임자를 만나 고맙다고
인사했더니 신부님 의견을 상부에 보고해 그 보고가 여러 단계를 거쳐
청와대까지 올라 갔다 다시 내려오는데 무려 2시간이나 걸렸다고 하면서도
멋있는 시위였다고 흐뭇해했습니다.
법 테두리 안에서 평화적으로 하는 시위는 민주주의의 멋이기도 한
것입니다.
제3부 그래, 말만 들어도 고맙다
놋그릇에 찌든 때처럼
사람들은 스스로 피땀 흘려 한푼 두푼 저축해 모은 돈은 함부로 낭비하
지 않습니다. 그러나 부모로부터 많은 유산을 상속받았다거나, 땅값이 벼락
같이 올라 갑자기 부자가 되었다거나, 또는 일확천금한 사람들은 돈을 모
으는 데 노력을 들이지 않았기 때문에 그 가치를 모르고 흥청망청 써버리
는 모습을 흔히 볼 수 있습니다.
사람을 사귀다 보면 어떤 사람은 처음엔 왠지 밉살스럽고 거북스럽지만
나중에는 미웠던 것들이 정이 되고 그것이 채곡채곡 쌓여 사랑하게 되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런 사랑은 대부분 질그릇처럼 은은하면서도 오래갑니
다. 그러나 첫눈에 반했다거나 갑자기 스파크가 일어나듯 불붙는 사랑은
양은냄비처럼 금방 데워졌다가 금방 식어버려 결코 오래가지 못합니다.
우리의 믿음, 즉 우리의 신앙 또한 그와 같습니다. 가끔 '왜 저는 믿음이
안 생길까요?' '왜 저는 하느님의 사랑이 느껴지지 않을까요?'하고 묻는 신
자들이 있습니다. 그럴 때 저는 그분에게 되묻습니다.
"일 년에 몇 권 정도 교회 관련 책을 보십니까?"
"그런 책은 별로 본 일이 없는데요."
"그러면 피정이나 특별한 영신 훈련 등에는 1년에 몇 번 정도 참가하십
니까?"
"그런 게 있나요?"
"1년에 고백 성사는 몇 번 정도 보십니까?"
"성사표가 나와야 보지요."
"그러면 아침기도, 식사후기도, 삼종기도, 저녁기도는 매일 열심히 하십
니까?"
"그걸 뭐 꼭꼭 챙겨서 해야 합니까? 할 때도 있고 안 할 때도 있죠."
이렇게 대답하시면서 왜 신앙심이 생기지 않는냐고 물으면 그런 분이야
말로 귀가 있어도 알아듣지 못하는 분이 아니겠습니까?
신앙심은 그렇게 쉽게 생기는 것이 아닙니다. 이 세상의 어떤 좋은 일도
쉽게 저절로 이루어지는 법은 없습니다. 신앙심 역시 여러분들께서 먹고
살기 위해 돈을 버는 것보다 훨씬 얻기 어렵습니다. 신앙심이야말로 여러
분이 영원한 생활을 살아가는 데 필요한 자금이기 때문입니다. 세상을 살
아가기 위해 필요한 재물을 얻기도 그렇게 힘든데 영원한 삶을 살아가지
위해 필요한 자금이 저절로 떨어질 리 있겠습니까? 영생을 얻기 위한 자금
이야말로 하느님의 정확한 방법에 따라 계산되는 것입니다. 삶의 역경 속
에서 힘들여 하나씩 하나씩 얻게 되며 노력으로 축적되고 끈기로써 유지되
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당신과 우리 사이에 십자가를 놓으셨습니다. 그 십자가 위에서
그분은 세상을 떠나셨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 인간들을 구하시려고 당
신의 분신인 외아들의 목숨까지 내놓으셨는데 우리는 하느님의 사랑을 얻
기 위해 과연 무엇을 했습니까? 하느님의 말씀이 담긴 책을 1년에 한 권도
안 보았다구요? 피정 한 번 안 했다구요? 1년 동안 고백성사 한 번 안 보
았다구요? 그러면서도 믿음이 안 생긴다고, 하느님의 사랑이 안 느껴진다
고 이야기할 수 있습니까?
비지땀을 흘리면서 아침부터 저녁 늦게까지 일해서 그달 그달 봉급을 받
아 조금씩 때어 억척같이 모아야 겨우 살 집이라도 하나 마련하듯, 신앙심
도 꾸준히 미사에 참례하여 죄를 뉘우치고 주님께 영광을 드리며 감사하고
찬미하며 오늘을 살아야 요만큼 자라고, 내일 또 기도하고 감사하고 찬미
하고 죄를 뉘우치면서 조금씩 쌓이는 것입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은 죽기 직전에 한꺼번에 믿어 그냥 공짜로 천당으로
직행하겠다고 합니다. '우선은 돈 좀 벌고 죽을 때가 돼서야 믿지뭐!'합니
다. 참으로 어이없고 한심한 일입니다. 하느님이 그런 꾀보를 못 알아 보실
것 같습니까? 아주 미세한 먼지가 조금씩 찌들고 찌들어 때가 되듯, 우리
들의 영혼 속에 신앙의 아주 작은 먼지가 찌들어 때가 되어 굳어야 하느님
께 그것을 보시고 비로소 "너는 내 자녀다"라고 하시며 기뻐하실 것입니
다. 그렇게 찌든 때는 어느 한 순간에 앉은 먼지가 아닙니다. 한 순간에 앉
은 먼지는 후우 하고 불어내는 입김에도 날아가버립니다. 우리의 신앙심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느날 갑자기 하느님이 좋아지고 갑자기 마음이 기쁨으로 가득해 하느
님을 찬미하고 싶어지면 바로 그때를 조심해야 합니다. 그 순간이 지나면
하느님이 막 미워지고 싫어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은근하고 진중하게 쌓이는 믿음을 위해서는 매일 변함없이 끈기있게 신
심을 닦아야 합니다. 그런 생활을 영위하는 사람은 주위로부터 저 사람은
변함없는 사람이라고 신임받겠지만, 쉽게 믿음을 얻으려고 하는 사람은 쉽
게 따돌림받게 될 것입니다.
참믿음
7, 8년 전의 얘기입니다. 세계에서 가장 크다는 미국의 나이아가라 폭포
에서 실제로 있었던 일입니다.
그 날은 날씨가 매우 쾌청했습니다. 며칠 전부터 미국과 캐나다의 매스
컴은 미국의 유명한 곡예사가 외줄을 타고 나이아가라 폭포 위를 건너 간
다고 떠들썩했습니다. 마침내 그 날이 되자 수많은 관광객과 취재기자들이
카메라를 들고 나이아가라 폭포로 모여들었습니다. 곡예사가 드디어 줄을
타기 시작했습니다. 곡예사의 외줄 밑에는 웅장한 나이아가라 폭포가, 혹시
곡예사가 실수하여 떨어지면 금방 삼켜버리겠다는 듯 큰 소리를 내며 물보
라를 일으키고 있었습니다. 나이아가라 폭포에서 일어나는 큰 물보라는 바
람을 일으키기도 합니다. 어쩌다 그 물보라에 휘말리기라도 하면 어디로
떨어져 어디에 파묻히는지 시신조차 찾지 못할 정도로 거대한 힘을 가졌다
고 합니다.
사람들은 숨을 죽이고 한 가닥 외줄 위를 걸어가는 곡예사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습니다. 곡예사는 수많은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아슬아슬, 조심조
심, 마침내 그 폭포를 건너갔습니다. 숨을 죽이고 그 광경을 지켜보던 많은
관중들이 곡예사에게 환호와 갈채를 보냈습니다.
잠시 뒤 곡예사는 관중들을 향하여 소리쳤습니다.
"여러분! 재가 지금 이곳으로 건너왔습니다. 여러분 다 보셨습니까?"
"예. 봤습니다."
모두들 그렇게 대답하며 그에게 박수를 보냈습니다.
"여러분! 제가 지금 이곳으로 건너왔습니다. 여러분 다 보셨습니까?"
"예. 봤습니다."
모두들 그렇게 대답하며 그에게 박수를 보냈습니다.
"그렇다면 여러분. 제가 다시 저쪽으로 건너가겠습니다. 건너왔으니 다시
건너갈 자신이 제겐 있습니다. 제가 안전하게 다시 저쪽으로 건너갈 수 있
다고 믿으신다면 저에게 박수를 주십시오!"
많은 사람들이 박수로 그에 대한 믿음을 표시했습니다.
"좋습니다, 여러분. 여러분들께서 믿어 주신다니 더욱 힘이 솟습니다. 그
러면 제가 다시 건너갈 수 있다고 믿는 여러분들 가운데 한 분만 이 앞으
로 나와주십시오. 어느 분이라도 좋습니다. 제가 이번엔 그분을 등에 업고
나이아가라 폭포 위를 외줄을 타고 건너 가겠습니다. 아무나 한 분 나와
주십시오!"
하지만 그 많은 사람 중 단 한 사람도 나오지 않았습니다.
"정말 한 분도 나오지 않으시겠습니까?"
그가 큰 소리로 외쳐 봤지만 아무도 나서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때, 어떤 어린아이 하나가
"저요! 제가 하겠습니다!"
하며 손을 들고 앞으로 나왔습니다.
곡예사는 그 아이를 번쩍 안아 올려 목마를 태우고 그 폭포 위를 다시
건너가시 시작했습니다. 사람들은 조금 전보다 더욱 가슴 조이며 그 광경
을 지켜 보았습니다. 어린아이는 곡예사의 어깨 위에서 재미 있다는 듯 손
을 흔들어 먼짓 포즈도 취하며 폭포를 건너 갔습니다.
사람들은 갑자기 그 아이가 누굴까 하고 궁금해지기 시작했습니다. 왠
어린아이가 저렇게 용감하게 저 무서운 폭포 위를 겁도 내지 않고 건너갈
수 있을까 하여 무척이나 궁금했던 것입니다. 곡예사가 드디어 줄을 안전
하게 건너 목마 태운 아이를 내리자 많은 기자들이 어린아이 주위에 모여
들어 질문공세를 폈습니다.
"무섭지 않았니, 얘야?"
"아니요. 무섭긴 뭐가 무서워요. 재미있던데요."
너무나 천진난만한 어린아이의 대답이었습니다.
"바람이 조금 세게 불긴 했지만 견딜 만했어요."
아이는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말했습니다. 기자들은 그 어린 아
이의 대답에 어안이 벙벙해졌습니다. 그 중 한 기자가 아이에게 다시 물었
습니다.
"네 아버지는 어디 계시냐?"
그 질문에 아이는 곡에사를 손으로 가리키면서
"저분이 제 아빠예요."
하고 대답 하더랍니다. 곡예사를 진실로 믿은 사람은 단 하나, 곡예사의
자식인 그 어린아이뿐이었습니다. 그 어린아이에게는 그의 아버지가 바로
하느님이었습니다.
'아버지께서는 줄을 잘 타신다. 내 아버지는 저 줄을 타고 안전하게 건너
가실 것이다. 나 또한 아버지께서 안전하게 지켜주실 것이다.'
그의 자식만이 아버지를 믿은 것이었습니다. 이것이 곧 믿음입니다. 믿음
에는 조건이 없습니다. 믿음으로 인해 내 인생이 부유하게 된다든지, 믿음
으로 인해 하느님께서 나를 잘 되게 해주실 것이라든지, 그런 믿음은 결코
믿음이 아닙니다. 믿음이란 오로지 내 인생의 전부를 바친다는 신념 그 자
체입니다. 조건없이 자기 인생을 몽땅 걸어버리는 것이 믿음입니다. 믿음을
마치 지갑 속에 넣어 가지고 다니는 부적처럼 생각하고 종교를 하나의 액
세서리로 보는 그런 사람들의 믿음은 믿음이 아닙니다. 참 믿음은 바로 위
에서 말씀드린 어린아이와 같은 순수한 믿음이어야 합니다.
세상의 원리인 삼위일체
세상 만물의 겉모양을 자세히 살펴보면 설 수 있는 것들은 대부분 다리
가 세 개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카메라를 세우는 삼발이도 다리가 세 개
이며 그 다리가 똑같은 길이가 될 때만 안정되게 서 있을 수 있습니다. 회
사가 섰다, 공장이 섰다 하는 것도 따지고 보면 공장 건물이 있고, 종업원
이 있고, 제품이 나오고 있어야 비로서 정상적으로 '섰다'는 말을 할 수가
있습니다. 가정을 이루기 위해서는 아빠와 엄마, 그리고 자녀들, 이렇게 세
요소가 있어야 합니다. 그러기에 자녀가 없는 젊은 부부는 아직 우리 '가
족'이라는 말을 쓸 수 없습니다.
또한 여러 방면에서 3요소라는 말이 쓰이고 있습니다. 이 세상의 빛깔에
는 3원색이 있습니다. 모든 색깔은 바로 이 3원색의 배합에 의해 나올 수
있습니다. 또한 영양의 3대 요소, 비료의 3대 요소, 국가의 3대 요소 등 많
은 것들이 3요소에 의해 구성되고 있습니다.
사람이 사람답기 위해서, 즉 인격적인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세 가지 요
소가 있어야 합니다. 신체적으로 멀쩡해야 하고 정신적으로 정상적이어야
하며, 자기가 하는 말이나 행동에 책임질 줄 알아야 합니다.
또한 우리의 생활에도 3요소가 있습니다. 사람인 내가 있고, 힘이 있고,
일이 있어야만 합니다. 힘이 없거나 힘은 있는데 일이 없으면 생활이 되지
않습니다. 이 셋 중 하나만 길면 전체의 균형이 기울어집니다. 일이 적은데
힘은 남거나 일은 많은데 힘이 모자란다면 문제가 발생합니다.
세 다리는 똑같아야 합니다. 그래야 균형이 잡힙니다. 이원리는 우주의
모든 것을 지배합니다.
신앙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가끔 신앙이 안 생긴다는 신자들의 말을 듣
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을 보면 대부분 거룩한 일을 전혀 하지
않는 사람임을 알 수 있습니다. 내가 있고, 신앙에 대한 사랑이 있고, 그
사랑으로 신앙에 관한 책을 몇 권 사 본다든지 피정을 간다든지 또는 기도
생활을 열심히 한다든지 하는 에너지를 쓸 일을 스스로 해야만 신앙이 생
깁니다. 영세를 받았다고 해서 아무 노력도 하지 않고 가만히 있으면서 왜
신앙이 안 생기느냐고 하면 어쩌란 말입니까?
이와 같이 이 세상의 원리를 보면 모든 것이 다 하나같이 삼위일체의 형
식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참으로 신비스런 일이 아닙니까? 그래서 우리
는 역시 하느님 자신이 삼위일체이시니 그분이 창조하신 모든 것이 또한
삼위일체구나 하는 생각을 갖게 됩니다.
그러나 우리가 삼위일체를 쉽게 알아듣지 못하는 것은 주위의 모든 삼위
일체 속에 묻혀 살고 있기 때문에, 너무나 오묘한 이 세상 돌아가는 이치
를 부족한 우리의 머리로는 이해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라고 볼 수 있
습니다. 마치 공기 속에 사는 우리가 우리가 공기의 고마움을 모르듯이 말
입니다.
그대 무거운 짐 벗고 가벼워지려거든
어떤 사람이 시장에서 소금을 사 당나귀 등에 실었습니다. 당나귀는 무
거운 소금을 지고 주인을 따라 길을 걸어 갔습니다. 저만큼 앞에 개울이
하나 나타났습니다. 개울 바닥에는 풀이끼가 끼어 매우 미끄러웠습니다. 개
울을 건너던 당나귀가 그만 발을 헛딛는 바람에 주저앉고 말았습니다. 그
런데 조금 뒤에 일어서 보니 당나귀는 소금의 무게가 훨씬 가벼워졌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소금이 물에 녹아버렸기 때문입니다.
'아하! 이건 거구나! 이거 잘 됐다.'
당나귀는 그때부터 개울만 있으면 일부러 쓰러져 조금씩 소금을 줄였습
니다. 결국 당나귀 등에는 빈 자루만 덩그러니 남게 되었습니다. 나귀 주인
은 당나귀가 꾀를 쓴 것을 알고 혼내 주기로 작정했습니다. 다음 장날 주
인은 장터에 나가 이번에는 일부러 솜뭉치를 사 당나귀 등에 실었습니다.
솜뭉치는 별로 무겁지고 않았지만 당나귀는 그 짐조차 꾀를 써 가볍게 하
고 싶었습니다.
'좋다! 개울만 나와라. 또 쓰러져 이 짐을 가볍게 하리라!'고 결심하고 개
울이 나오기만 기다렸습니다. 드디어 개울이 보였습니다. 꾀많은 당나귀는
잘 만났다 하며 일부러 물속으로 쓰러졌습니다. 그러나 일어나 보니 생각
과는 달리 짐은 오히려 더 무거워졌습니다.
'아하! 내가 너무 빨리 일어나 그런가 보구나. 이번엔 제대로 넘어져야
지.'하고 생각하고는 아예 뒤로 벌렁 자빠졌습니다. 그러면서 딴엔 머리를
쓴다고 한참 동안 허우적거리며 물속에 잠겨 있었습니다. 그런 뒤에 일어
나 보니 솜이 있는 대로 물을 가득 먹어 당나귀는 진땀 빼는 고생을 했다
는 '꾀많은 당나귀' 이야기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너라. 내가 너희를 편히 쉬게 하리
라!"
이 말씀을 믿는 사람은 성당에 나와 무거운 짐을 가볍게 느끼면서 신앙
생활을 잘 유지해 나갑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은 성당에 나가면 건강도 좋
아지고 사업도 더 잘 된다고 해서 성당에 나왔다가 실망만 하고 돌아섭니
다. 죄를 짓지 말라 하지요, 거짓말도 못 하게 하지요, 주일을 꼭 지키라
하지요, 교무금은 내고 헌금도 해야지요, 그러면서도 또 있는 것은 남에게
나눠주라 하지요. 그런 것들이 그에게는 무겁게 느껴지기 시작한 것입니다.
자신이 지금 살아있는 세상, 성당 밖의 세상이 휠씬 가볍다고 생각하면서
끝내는 성당을 외면하고 마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사람도 언젠가는 뉘우칠 것입니다. 그 스스로 세상의 모든 것
들이 헛되다는 것을 깨달을 때 그는 비로소 깊이 뉘우치면서 성당으로 돌
아와 주님 앞에 모든 것을 바치고
"내게 있는 모든 것은 오직 당신 것입니다."
하고 고백할 것입니다. 그때서야 그 사람은 가벼워집니다. 영원하신 주님
에게서는 그 모든 것이 녹아버리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주님에게서 무
엇인가 얻어가려 하면 무거워지고, 주님께 무엇인가 바치려 하면 가벼워지
는 것입니다.
세상 사는 이치도 모두 마찬가지입니다. 남에게 무언가 베풀면 기쁨으로
마음이 가벼워지고 남게게 무언가를 바라면 마음이 무거워지게 마련입니
다.
당신 방법대로 돌보시는 주님
제가 안식년을 맞아 시골에서 살 때의 이야기입니다.
어미염소가 새끼를 낳았습니다. 네 마리 염소가 각각 한 마리씩 낳았으
니 모두 네 마리의 아기 염소가 늘어난 셈이었습니다. 그 중 한 마리가 어
미염소의 배 밑에 깔려 그만 죽고 말았습니다. 드럼통을 반으로 갈라 안에
다 짚을 깔고 산실을 만들어 줬는데 비좁아 그리 된 것입니다. 또 한 마리
새끼염소는 울 밖으로 나갔다 턱이 높아 들어가지 못하고 바깥에서 떨다
얼어 죽고 말았습니다. 모두 관리인인 저의 잘못으로 죽은 것이었습니다.
그러던 어느날 밤 폭풍우가 요란하여 창밖에 별로 신경쓰지 못한 채 염소
가 다 들어간 줄 알고 덧문을 닫고 잠이 들었습니다. 이튿날 아침 깨어보
니 새끼염소 한 마리가 밤새 내린 비를 흠씬 뒤집어스고 앙상하게 젖은 채
지친 상태로 울밖에 엎어져 있었습니다. 울 안에서는 어미 염소가 동동걸
음을 치며 울부짖는 것이었습니다. 깜짝 놀라 얼른 안아다 어미염소가 있
는 울타리 안에 넣어줬더니 새끼염소는 어미의 품으로 달려들어 겨우 젖을
빨기 시작했습니다. 그동안 어미염소는 혓바닥으로 새끼염소의 온몸을 열
심히 핥아주었습니다. 사람의 잘못으로 또 한 마리의 새끼염소를 죽일 뻔
한 것입니다.
하느님은 참으로 용하신 분입니다. 이 넓은 우주, 공간의 그 많은 것들을
어쩌면 이렇게도 정확하게 잘 돌보시나 하고 참으로 감탄하지 않을 수 없
습니다. 봄이 되면 이 산 저 산에 진달래가 울긋불긋 피어나고 동구 밖에
는 복숭아꽃이 그 찬란한 분홍빛을 띠고 만발합니다. 어느새 햇풀이 돋아
나 새파랗게 대지를 덮고 그 틈새로 알에서 깨어난 풀벌레들이 먹이를 찾
아 땅위를 기어다닙니다. 참으로 오묘한 대자연의 흐름 속에서 우리 인간
이 돌본다는 것이 얼마나 하찮은 것인가를 생각해 봅니다. 다리 하나, 가스
파이프 하나 제대로 돌보지 못하는 것이 우리네 인간입니다. 성수대교가
붕괴되어 많은 인명피해가 난 것이 엊그제 같은데 아현동 도시가스 폭발에
이어 이번에는 또 대구에서 가스 폭발사고가 일어나 100명이 넘는 사람이
유명을 달리했습니다. 인간이 돌본다는 것은 결국 이렇게 부족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기에 우리 인간은 하느님을 경배하고 찬미해야 합니다. 만약 태양을
인간에게 돌보라고 했더라면, 비와 바람을 인간들이 관리하도록 내버려두
셨더라면 어떤 일이 일어났겠습니까? 몇 마리 새끼염소마저 제대로 돌보지
못하는 것이 우리들 인간이라는 것을 하느님께서 미리 알고 계셨음이 오직
다행스러울 뿐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십자가에 처형되신 후 제자들이 당신의 말씀을 믿으려
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그 제자들을 돌봐주시기 위해 나타나셨던 분입
니다. 그 제자들은 사흘만에 다시 살아 오시겠다는 주님을 기다리지 않고
시골로 내려가거나 저희들 멋대로 고기잡이를 나갔습니다. 그러나 밤새도
록 단 한 마리의 고기도 잡지 못한 그 제자들을 돌보려고 주님은 나타나셨
습니다.
"밤새워 잡았는데, 얘들아 뭘 좀 잡았느냐?"
하시며 손수 숯불을 피우시고 허기진 제자들을 위해 아침식사를 준비하
셨던 자상하신 그분이 바로 우리주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예수께서는 베드
로에게 세 번씩이나
"너 나를 사랑하느냐?"
고 연거푸 물으셨습니다. 자기가 사랑하지 않는 사람에게 '나를 사랑하느
냐?'고 묻는 경우는 없습니다. 주님께서 베드로, 즉 자신의 제자를 얼마나
지극히 사랑하셨으면 그렇게 세 번씩이나 물으셨겠습니까. '너 나를 사랑하
느냐?'는 질문은 곧 '나는 너를 사랑한다'는 깊은 애정표현이기도 했습니다.
그토록 우리를 사랑하시며 돌봐주시는 분이 우리 주 예수입니다. 주님은
우리 인간들을 결코 그대로 내버려두시지 않습니다. 보잘것없은 풀벌레까
지 돌보시는 주님께서 당신의 모습대로 지으신 인간들을 왜 돌보지 않으시
겠습니까? 다만 우리의 잘못된 판단을 고쳐야 합니다.
주님께서 주님 방식대로 제자들을 돌보셨습니다. 제자들의 머리로, 제자
들이 생각하는 방식대로 돌보셨더라면 국가를 세워 로마를 멸망시키고 제
자들에게 권력을 쥐게 해주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영원할 수 없으
며, 따라서 그 방법이 아니었습니다. 주님께서는 주님 방식대로 그들을 돌
봐주셨기에 오늘날 그 제자들은 성인이 되었습니다. 주님 앞에 우리의 방
법을 제시하며 돌봐달라고 하지 마십시오. 재산을 갖게 해주십시오, 권력이
나 명예를 갖게 해주십시오, 하고 아무리 청해 봤자 그분은 들어주시지 않
습니다. 만약 여러분의 헛된 욕심대로 이루어진다면 여러분은 마귀의 앞잡
이가 되어 결국 멸망하고 말 것입니다. 하느님은 우리 인간이 아무리 조건
을 붙여 애원해도 우리가 제시하는 조건은 들은 척도 않으시는 것입니다.
우리 인간이 부족하다는 것을 그분 스스로 잘 알고 계시기에 오직 하느님
방식대로만 돌보실 뿐입니다. 우리는 오직 주님께서 돌보시는 방법을 믿어
야 합니다. 그래야 두려움이 없으며 멸망하지 않습니다. 우리의 조건을 제
시하지 마십시오. 우리의 요구조건이 얼마나 바보스러운 것인지 깨달아야
합니다. 우리가 돌보고 있는 것 자체도 하느님방식이 아닌 우리 방식대로
돌보고 있음을 스스로 깨우쳐야만 합니다.
"내 자식을 내 방식대로 돌보려고 했습니다."
"내 아내를 내 방식대로 돌보려고 했습니다."
"내 남편을 내 방식대로 돌보려고 했습니다."
이 얼마나 부족한 생각이었습니까? 이제라도 좋습니다. 잘못된 우리 생
활을 반성하고 부족한 우리 머리, 우리 생각을 하느님 방식에 맞추는 그
순간 여러분은 천상의 기쁨을 이 땅 위에서 만끽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그래, 말만 들어도 고맙다
성탄이 지난 어느 날이었습니다. 네 살쯤 되어 보이는 꼬마가 커다란 장
난감 자동차를 안고 성당 마당으로 들어서더니 곧장 성당 안으로 들어가는
것이 보였습니다. 저는 사제관에서 내다보다가 그 꼬마가 교우의 집 아이
라는 걸 알았습니다. 무슨 일인가 싶어 살금살금 그 아이의 뒤를 밟아 성
당 안으로 들어가 보았습니다. 아이는 자꾸 두리번거리며 제대 앞까지 나
아갔습니다.
"아무도 없잖아! 예수님이 어디 있어? 엄마가 가서 인사하고 오랬는데..."
그렇게 중얼거리기도 했습니다. 그러다 아이는 십자가에 달린 예수님을
발견한 모양입니다. 십자가를 멍하니 바라보던 녀석이 이번에는 시선을 떨
구고 가슴에 안고 있던 지동차를 또 물끄러미 쳐다보았습니다. 그런 식으
로 몇차례 번갈아 보더니 자동차를 내려놓고 두 손을 모아 기도를 올리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는 왠지 시무룩한 표정으로 조금 전까지 소중하게 들
고 있던 자동차를 아무렇게나 집어들고 돌아서서 나오다 자기를 지켜보고
있던 저와 정면으로 마주치게 되었습니다.
"예수님도 장난감 가지고 놀았어?"
꼬마가 제게 물었습니다.
"그럼."
"엄마가 사줬대?"
"응. 그럴 걸."
"근데 예수님 되게 불쌍하다. 그치?"
"왜?"
"저렇게 벌거벗고, 옷도 없잖아!"
나는 아이를 안고 계단을 내려왔습니다. 그 아이는 정말 훌륭한 기도를
한 것이었습니다. 좋은 장난감을 가지고 예수님 앞에 갔다가 그 불쌍한 예
수님을 보고 그만 장난감을 숨기듯 돌아선 그 꼬마는 참으로 주님을 보았
던 것입니다. 십자기에 매달린 주님의 모습이 너무 처참해 그 모습을 보면
서 장난감 선물이 어쩌구 저쩌구 하는 말을 도저히 할 수 없었던 것입니
다. 주님의 참 모습을 그 어린이는 순수하게 목격하였던 겁니다.
저는 칭찬에 익숙치 않습니다만 매일 미사에 빠지지 않는 우리 성당 복
사단 어린이들은 종종 칭찬합니다. '선서! 나는 신부가 되기를 희망하며, 나
는 수녀가 되기를 희망하며..'라는 복사단 기도를 바치는 그 아이들은 아직
너무 어려 신부나 수녀가 뭔지 정확하게 잘 모릅니다. 그러나 괜찮습니다.
하느님께서는 그 아이들을 기억해 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 아이들은
자라나 수녀나 신부가 되건 안 되건 '네가 어렸을 때는 그렇게 앵무새처럼
열심히 내게 기도했었는데 지금은 어떠냐?'하는 식의 좋은 관계를 하느님
과 맺게 될 것입니다. 참으로 아름다운 관계 아닙니까?
어떤 엄마가 아이들에게 과자를 사다주고 이건 저녁에 먹을 테니 먹지
말라 이르고는 밖으로 나갔습니다. 언니는 엄마가 시킨 대로 하려고 했지
만 동생은 막무가내였습니다. '먹자' '말자' '먹자' '안돼!' 한참을 승강이하다
언니가 밖에 나간 사이에 동생은 과자를 꺼내 먹었습니다. 저녁에 엄마가
돌아와 그 과자를 찾았습니다. 언니는 엄마 말씀대로 먹지 않았다고 자랑
하듯 말했고 동생은 엄마게게 하도 먹고 싶어서 꺼내 먹었다고 실토하고
잘못을 빌었습니다. 그러자 엄마는 "그래, 할 수 없지 뭐. 어차피 너희들
주려고 산 것이니 제일 먹고 싶은 때 먹었으면 됐다."며 그냥 넘어갔습니
다. 그러나 그 아이가 먹고 나서도 '먹기는 먹었지만 조금밖에 안 먹었으니
괜찮지?' 한다거나 '아니야, 난 안 먹었더. 정말이야' 하면 어머니는 그때
부터 그 아이를 보고 고민하게 됩니다. 하느님과 우리의 관계 또한 그러합
니다.
시잡간 딸이 친정 어머니는 항상 자기에게 줘야만 하는 존재로 알고 시
도 때도 없이
"엄마. 나 뭐가 필요해, 알았지? 안녕."
"엄마. 나 뭘 좀 줘. 안녕."
계속 그런 전화만 하면 어머니는 딸의 전화만 받으면 '이것이 또 뭘 달
라고 그럴까'싶어 걱정부터 하게 됩니다. 반면 매일 어머니에게 전화를 해
서 이렇게 말하는 딸이 있습니다.
"밤새 어떠세요? 시내에 나왔다 엄마 생각이 나서 전화했어요. 잘 계시
죠? 또 전화 드릴께요."
"엄마. 나 애를 키우다 보니 엄마 생각이 나더라구요. 엄머도 나 키울 때
애 많이 쓰셨죠? 고마워요, 엄마."
이런 전화를 자주 받으면 그 어머니는 시무룩해 있다가도 전화벨만 울리
면 우리 딸이구나 싶어 그저 싱글벙글하실 겁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매일 하느님께 전화를 해서
"하느님 우리 애들 아빠가 뭘 어떻게 했는데 도와주세요, 아셨죠? 안녕."
하고 끊고서는 또 다음날
"하느님 이것 도와주세요, 저것 도와주세요, 안녕."
이런 식으로 자꾸 전화를 드리면 하느님께서는 그 사람이 또 기도를 하
려고 하면 '아아구 또!'하시며 아예 귀를 막으실 겁니다. 줄 것이 없는데도
자꾸만 주고 싶은 관계, 하느님과도 그런 관계를 맺어야 합니다. 성서에
'아들이 빵을 달라는데 돌을 줄 사람이 어디 있느냐'하셨듯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해가 되는 것을 달라고 하면 주지 않으십니다.
돈을 주는 것도 해가 됩니다. 그런 기도는 하느님께서 들어주시지 않습
니다. 질적인 향상을 위해 달라고 그러면 주십니다. 보다 높은 인생의 가치
를 위해 달라고 하면 기꺼이 주십니다. 그러나 인간의 욕심, 욕정, 물질 같
은 것을 달라고 하면 우리 하느님은 들은 척고 하지 않는 분입니다.
"하느님, 제가 하느님을 위해 일을 더 할께요. 저에게 시키실 일이 있으
면 시키세요" 하고 기도하면
"그래. 말만 들어도 고맙다. 참으로 고맙구나."하실 것입니다.
돈을 지상에서 최고로 생각하라
오늘날 이 세상에는 하느님께서 내려주신 십계명이 아닌 세상에서 만들
어진 계명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 중 하나로 재물의 십계명이란 것이 있습
니다. 하느님이 계실 자리에 돈을 올려놓은 것입니다.
제1계명:돈을 지상에서 최고로 생각하라.
제2계명:돈을 속된 것으로 낮춰 보지 말라.
제3계명:돈을 벌기 위해서는 주일에도 쉬지 말라.
제4계명:돈 앞에는 부모도 없다.
제5계명:돈 앞에서는 모두가 다 경쟁자다. 무조건 이겨야 한다.
제6계명:돈만 있으면 사랑도, 지위도 살 수 있다.
제7계명:남의 것을 가지려는 마음이 있어야 돈을 번다.
제8계명:거짓말을 잘 해야 돈을 번다.
제9계명:돈만 있으면 남의 부인도, 집도 살 수 있다.
제10계명:남의 재물도 내 것으로 만들 야심을 가져야 돈을 번다.
어디 그뿐입니까? 권력을 좇는 사람들은 '권력이 최고의 힘을 가진다. 권
력을 얕보지 마라'는 그들 나름대로의 계명을 만들 것이고, 매스미디어를
통한 홍보에 미친 사람들은 또 그들대로 '홍보는 최고의 힘을 가지고 있다.
홍보 수단을 얕보지 마라. 홍보의 황금시간은 주일이다. 홍보를 잘 하면 불
효자도 효자가 되고, 도둑질도 홍보만 잘 하면 좋은 일이 된다.'는 계명을
만들 것입니다. 세상에는 이토록 사람들을 현혹시키는 계명들이 많기 때문
에 하느님께서 미리 아시고 하느님의 십계명을 우리에게 주신 것입니다.
성전에서 장사를 하던 유다인 무리들에게 화를 내시는 예수님을 잠시 생
각해 봅시다. 그때 그 유다인들은 예수님께 정식으로 도전장을 냈습니다.
예수님을 죽이겠다는 자신만만한 도전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스스로 생
사여탈을 주관하시는 분이셨기에 그들의 도전이 참으로 가소롭고 고까우셨
을 것입니다.
"너희들이 이 성전을 허물어라. 내가 사흘만에 다시 세우겠다."
바로 너희들이 나를 죽여도 나는 사흘만에 다시 살아나리라는 그 말씀이
셨습니다. 그들이 심오한 그 말씀의 참뜻을 알아들을 리 없었습니다.
"46년이나 걸려 지은 성전인데 감히 사흘에?"하고 비웃으며 끝내 예수님
을 십자가에 못박았습니다. 그러나 오늘날 주님의 역사하심을 보십시오. 전
세계에 얼마나 많은 성전이 지어졌습니까? 예루살렘의 성전은 허물어졌지
만 세계 곳곳에는 수많은 성전이 새로 지어졌습니다.
하지만 오늘 우리 주변에는 아직도 그 당시의 유다인과 같은, 어쩌면 그
보다 못한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들에겐 이 성당이 아무런 의미가 없
습니다. 성당 앞을 무심히 스쳐 지나갑니다. 그들은 이미 하느님이 계실 자
리에 돈을 올려놓았기 때문에 '하느님을 믿으면 돈이 생기는냐?'고 우리들
에게 반문합니다. 그들은 돈을 벌어 주는 하느님이 아니면 아무 소용이 없
습니다. 그러면서 유다인처럼 우리들을 비웃음의 대상으로 삼습니다. 그러
나 그냥 두십시오. 유다인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듯 그들이 우리를 십
자가에 못박으면 우리는 당당하게 못박힙시다. 그들이 우리에게 가시관을
씌우면 즐겁게 가시관을 씁시다.
우리는 하느님의 십계명만 지니고 살고 있으므로 금력과 권력의 계명에
매달려 사는 그들에게 주님처럼 십자가에 못박혀 처형되어도 괜찮습니다.
그들이 진정 죽지 않을 자신이 있는 사람들이라면 하느님께 도전하라고 하
십시오.
그들이 후회할 때는 이미 늦은 것입니다. 값비싼 인생을 유한한 세상의
헛된 계명을 좇아다니다 결국 그들이 이 세상에서 그토록 애지중지하며 숭
배했던 것들이 아무 값어치가 없는 것임을 깨달을 때 그들은 무서운 고통
을 느끼며 죽음의 세계로 빠져들 것입니다.
꼬마 성인 말셀리노
지금부터 약 8세기 전 프랑스 남쪽 지방에 말셀리노라는 어린아이가 있
었습니다. 영화로 소개된 바도 있고 또 나중에 이 아이의 이름을 따 그 도
시의 이름이 '말셀리노'로 바뀌기도 한, 유명한 여덟 살짜리 꼬마 성인입니
다.
이 어린이는 산간 마을의 가난한 집에서 태어나자마자 부모님이 돌아 가
셔서 가까운 수도원의 수사님들 손에 자랐습니다. 수사님들은 개구쟁이 말
셀리노와 친구가 되어 주며 남들보다 잘 키워보러고 노력했습니다. 말셀리
노는 수사님들과 언제나 명랑하게 놀았습니다. 같이 식사도 하고, 청소하는
것도 거들고, 수사님들께서 기도할 댄 저 만큼 뒤에 서서 조용히 두 손을
모아 기도도 하면서 꼬마 수사처럼 살아지만 어린애다운 장난기는 날로 심
해 갔습니다.
그러던 어느날부터 말셀리노가 이상한 행동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빵을
훔치기 시작한 것입니다. 폐쇄된 수도원이라 그 빵을 가지고 나가 누구에
게 줄 수도 없고, 다른 것과 바꿔 먹을 수도 없었습니다. 처음에는 그저 장
난기가 발동해 그러겠거니 하던 수사님들도 마침내 궁금증울 풀기 위해 말
셀리노의 행동을 숨어서 지켜보기로 했습니다. 하루는 일부러 빵을 치우고
소년이 먹을 것만 남겨 두었습니다. 소년은 훔칠 빵이 없자 제 몫의 빵을
먹지 않고 옷자락에 숨겨 어디론가 살금 살금 도망가듯 나가는 것이었습니
다. 수사님들은 말셀리노의 뒤를 밟았습니다. 소년은 그런 줄도 모르고 그
빵을 가지고 다락방으로 올라갔습니다. 다락방은 창고였습니다. 그 창고 속
에는 오래 되어 먼지가 하얗게 쌓인 커다란 십자가가 하나 있었습니다. 소
년은 다락방으로 올라가더니 문을 닫았습니다. 뒤를 밟던 수사님 한 분이
열쇠 구멍으로 몰래 그 소년의 동태를 살폈습니다. 소년은 품에서 빵을 꺼
내 십자가 앞으로 바싹 다가갔습니다.
"아저씨, 배 많이 고프시죠? 여기 빵 가져 왔어요. 빵 드세요."
그 순간 십자가로부터 손이 쑤욱 내려오더니 그 빵을 받아 드는 것이었
습니다.
"아저씨, 배고프면 하나 더 드세요. 오늘은 두 개밖에 못 가져왔어요. 더
드시고 싶으면 말씀하세요. 제가 더 가져올 수 있어요."
소년은 그렇게 십자가를 향해 말했습니다. 그것을 보던 수사님은 너무
놀라 뒤에 서 있던 수사님들을 밀치고 수도원으로 뛰어가 본 대로 말을 전
했습니다.
"자네가 혹시 환상을 봤을지도 몰라. 내 눈으로 봐야지."
서로들 그러면서 다음날 다시 말셀리노의 뒤를 밟아 보기로 했습니다.
다음날 수사님들은 소년이 가져갈 수 있도록 일부러 많은 빵을 식탁 위
에 놓아 두었습니다. 소년은 역시 그 빵을 훔쳐들고 다락방으로 갔습니다.
수사님들은 또 소년의 뒤를 밟았습니다. 소년은 어제와 똑같이 빵을 들고
십자가 앞으로 다가갔습니다.
"아저씨, 오늘은요, 우리 수사님들이 빵을 그냥 식탁 위에 쌓아두셨더라
구요, 그래서 오늘은 많이 가져왔어요. 많이 드세요, 아저씨."
하면서 빵을 예수님께 드렸습니다.
그 소년은 그분이 예수님인지도 모르고 헐벗은 아저씨가 참으로 불쌍하
게만 여겨졌던 것입니다.
"우리는 식탁에 앉아 편안하게 빵을 먹는데 식사도 앉아서 못 하시고 저
렇게 매달려 계시니 얼마나 힘드실까? 아저씨, 힘 드시면 여기 좀 내려오
셔서 쉬세요."
"그래. 어디 좀 그래볼까?"
십자가에서 내려오신 예수님은 귀여운 소년 말셀리노를 사랑스런 눈으로
내려다보며 말씀하셨습니다.
"말셀리노야, 내가 네 소원을 하나 들어 주고 싶구나. 소원이 있으면 말
해 보려므나."
"아저씨, 전 엄마가 무척 보고 싶어요. 아저씨, 엄마를 좀 보게 해 주세
요."
"그래, 그것이 정녕 네 소원이냐? 나중에 얼마든지 네 엄마를 볼 수 있
는데."
예수님의 목소리는 이제 밖에까지 들렸습니다. 열쇠 구멍으로 들여다보
던 수사님은 물론 이제는 뒤에 섰던 수사님들도 그 소리를 들을 수 있었습
니다.
"아녜요, 아저씨. 지금 보게 해주세요. 제 소원을 들어주신다고 했잖요.
엄마가 보고 싶어요, 아저씨."
하며 떼를 쓰는 소년의 목소리도 들렸습니다.
"그래, 그럼 할 수 없지. 이리 오너라."
예수님은 말셀리노를 품에 안으시고 자장가를 불렀습니다. 그때, 열쇠 구
멍으로 들여다 보던 수사님이 하도 놀라 인기척을 내며 문을 건드렸습니
다. 수사님들이 정신을 차리고 안으로 들어가보니 예수님은 어느 새 십자
가에 그대로 계시고 소년 말셀리노는 소파에 누워 십자가를 바라보며 평온
하게 잠들어 있었습니다. 수사님들이 말셀리노를 깨워보니 말셀리노는 이
미 곱게 숨진 후였습니다. 예수님은 귀여운 말셀리노를 하느님의 품으로,
엄마가 살고 있는 하늘나라로 데려가신 것입니다.
또 다른 이야기가 하나 있습니다. 어떤 아저씨가 성당에 나와 열심히 기
도를 했습니다.
"주님 제 아들이 이번에 대학입학시험을 쳤습니다. 꼭 붙게 해주시고, 저
의 집사람이 신경질이 좀 많은 편인데 그것도 좀 없애 주시고, 제 사업도
잘 되게 해주시고, 제 어머님이 늙으셔서 몸이 좋지 않으시니 좀 낫게 해
주시고, 제가 데리고 있는 사람이 거짓말을 잘 하는데 못 하게 해주시고,
그저 모든 것이 두루두루 잘 되게 해주십시오."
그리고 나서 가만히 앉아 생각에 잠겼습니다. 예수님께서 마음으로 그
기도에 응답해 주셨습니다.
"네 기도를 잘 들었다. 그런데 말 끝마다 뭘 해주십시오, 어떻게 해주십
시오, 하는데 도데체 나한테 뭘 그렇게 달라고 그러느냐? 내가 너에게 주
려고 내가 가진 것들을 살펴보니 내 머리엔 가시관이 있고 내 손과 발에
못이 박혀있는 십자가 뿐이다. 십자가를 주려 하니 내가 매달려 있을 데가
없고, 못을 빼서 주려고 하니 내가 떨어질 것같고... 그래도 줄 수 있는 건
이 머리에 쓴 가시관 뿐인데, 어떠냐? 이것을 네게 줄 테니 가질 테냐?"
"아니요. 예수님, 그건 곤란합니다."
하면서 그 아저씨는 고개를 저었습니다. 다음부터 그 아저씨는 마음을
고쳐 먹게 되었습니다. 그 후로 기도를 할 땐
"주님, 당신을 보니 머리도 못 깎으셨군요, 저는 이렇게 이발을 했는데.
예수님은 옷도 없으시군요, 저는 이렇게 한 벌 해 입었는데. 시계도 없으시
죠? 지갑도 없으시죠? 저는 지갑도 있고 그 속에 돈도 있느데. 당신은 가
진 게 참으로 없으시군요. 제겐 가진 게 이렇게 많은데. 그런데 왜 제가 예
수님께 자꾸 달라고만 했는지 모르겠습니다. 용서하십시오, 예수님. 이제부
터는 예수님께서 필요하신 게 있으시면 말씀하십시오. 제가 드리겠습니다."
이렇게 기도를 했다고 합니다.
우리들 부족한 머리로는
사람들에게 '당신은 누구요?'하고 물으면 일반적으로 다른 사람과의 관계
를 드어 자기가 누구임을 밝힙니다. '아무개의 엄만데요' '아무개의 집사람
입니다' '아무개씨가 저의 선친입니다'하는 식으로 말입니다. 그런데 자기
집에 들어갈 때 집 안에서 '누구세요?'하고 물으면 그냥 '나다'라고 말씀하
실 것입니다. 한 가정 안에서도 '나다.'라고 자신을 밝힐 수 있는 사람은 그
집안에서 가장 어른이 되는 분밖에 없습니다.
야훼! 바로 하느님을 칭하는 말입니다. 개신교에서는 '여호아'라고도 합니
다. '야훼'라는 말은 우리말로 '나는 나다'라는 뜻입니다. 이 세상의 주인이
신 분, 주님 역시 '당신은 누구십니까?'라고 묻자
"나는 나다."
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나는 나다'라는 이 말씀은 내 위에는 아버지도
없고, 어른도 없고 '내가 오직 그 원천이다'라는 뜻도 됩니다.
복음에서 유다인들이
"당신은 도대체 누구요?"
"쉰 살도 못 되었는데 아브라함을 보았단 말이요?"
하고 예수님께 대들었을 때, 예수님은
"나는 아브라함이 태어나기 전부터 있었다."
고 자신을 표현하십니다. 바로 이 구절은 삼위일체이신 예수님의 신성을
예수님 스스로 밝히신 것입니다. 그러나 일반인들은 알아듣지 못합니다. 인
간의 사고방식으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돌을 들어 예수님을 치려고까지 했습니다.
하느님을 만약 이 세상에서 만난다면 우리는 그분을 이해할 수 없을 것
입니다. 어쩌면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 정상이라고 봐야 합니다. 하느님께서
는 우리 인간들을 다 이해할 수 있지만 우리는 우리들의 부족한 머리 때문
에 하느님을 다 이해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자신의 머리가
부족함을 모르고 삽니다. 굼뱅이가 어찌 자기가 매미가 될 것이란 걸 알겠
으며, 올챙이가 어찌 자신이 개구리가 되리라고 생각하겠습니까? 그러나
굼벵이는 자라서 매미가 되고 올챙이는 커서 개구리가 됩니다.
사람들은 세상의 모든 것을 자신의 머리로 이해하지 못하면 '세상에 그
럴 수가 있느냐'고 하면서 거부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나 세상은 그럴
수가 있습니다. 내 머리는 내 머리일 뿐이기 때문입니다. 내 머리가 내 아
내가 내 남편의 머리일 수 없고 내 자식의 머리일 수 없기 때문입니다. 아
내인 내 마음이 남편의 마음일 수 없고, 또한 자식의 마음일 수 없습니다.
이렇게 우리는 각자의 개체성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다른 이의
정체성도 인정해 주어야 합니다. 그래야만 인간관계가 원만해집니다. 사람
끼리도 서로 이해하지 못하는 우리가 어떻게 하느님을 이해할 수 있다는
말입니까? 우리는 부족합니다.
주님의 말씀을 이해하지 못하는 유다인들이 돌을 들어 예수님을 치려 했
듯 오늘도 우리는 마음에 안 드는 계명을 어기면서 윤리의 규범이신 예수
님께 오히려 욕을 하거나 반항할 때도 많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느님꼐
서 '나는 나다'라고 말씀하신, 바로 그분인 예수님이 '나는 나다'라고 말씀
하신 것을 쉽게 알아듣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믿읍시다!
우리 머리는 부족하기 때문에, 우리 머리가 이해할 수 없는 굉장한 하느
님이시기 때문에 우리는 믿어야 하는 것이며 믿을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모두 이해해서 믿는 것이 아니라 부족한 머리로는 다 이해할 수 없
기 때문에 믿는 것입니다.
'나는 믿음이 안 생긴다'고 말하는 이도 있습니다. 믿음이 생기고 안 생
기고 하는 감정이 아니라 무조건 믿는 것입니다. 알아서 믿는 게 아니라,
알아들을 수 없기 때문에 믿는 것이 믿음입니다. 생각해 보면 사람과 사람
사이에도 알아들을 수 없는 일들이 많습니다. 자기 머리를 기준으로 상대
방을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엄마가 자기 자식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것도 바로 자기 식으로 자식을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상대방의 말을 60%
나 70%만 알아들어도 대단한 것입니다. 제가 여러분께 말씀드리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제가 100을 이야기하면 교우들은 60%만 듣습니다. 부족한
머리로 생각하며 사는 육신의 세계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다른 차원의
세계, 초자연적 세계에서는 제가 100을 얘기하면 반짝하는 순간에 여러분
은 모두를 온전하게 이해하게 됩니다.
바로 그런 세계가 초자연의 세계, 육신을 초월한 죽음의 세계며 천당이
기도 합니다. 우리는 육신으로 이 세상에 살고 있으므로 저 세상을 모르는
게 정상입니다.
자식이 내 말을 안 듣고, 내가 내 자식을 100% 이해하지 못하느 게 정
상인 것입니다. 그것을 '왜 이해하지 못할까?'하고 가슴을 쥐어뜯으면 스트
레스만 쌓이고 마침내 병이 됩니다. 그게 바로 비정상입니다. 하느님께서도
인간에게 죄 지을 자유를 주셨는데, 왜 인간이 인간에게 죄 지을 자유마저
박탈하려고 하십니까? 죄가 많은 곳에 은총이 많듯이 죄를 지을 이유가 있
어야 통회할 자유도 있는 것입니다.
'저렇게 말을 안 듣는 자유를 가진 내 자식을 내가 만들었구나'하고 깊이
생각할 때 하느님의 신비스런 능력을 느끼며 오히려 속썩이는 자식을 통해
더욱 거대한 세상을 맛보실 수 있을 것입니다.
2천년 전의 개혁가
흑인 노예들의 고통을 그린 영화를 보면 종이란 것이 얼마나 비참하고
비인간적인 대접을 받으며 고생하는지를 느낄 수 있습니다.
우리 나라에서는 별로 심한 편이 아니었다고 합니다만 근세에까지 노비
제도가 있었습니다. 다른 나라, 즉 계급으로 신분을 구분하는 사회에서는
인간을 인간 이하로 비하시키는 노예에 대한 횡포가 끊임없이 이어져왔습
니다.
"주여, 말씀하소서. 당신 종이 듣나이다."
구약성서에 보면 사무엘도 그랬고 모세도 그랬고 또한 많은 예언자들이
하느님의 말씀을 들을 때 그렇게 말했습니다. 종은 곧 노예를 가리키는 말
입니다. 역사를 통해 살펴보면 나라와 나라 사이에 전쟁이 일어나면 포로
들을 잡아와 종으로 부려먹었습니다. 궁궐을 새로 짓거나 성을 쌓거나 힘
든 공사를 할 때 종의 노동력을 마치 소모품 쓰듯 하였습니다. 이집트의
피라미드도, 로마의 거대하고 웅장한 건물들도 모두 종을 혹사시켜 지은
것들입니다.
이제 노예제도는 차츰 세상에서 물러나고 직원체계로 구성되는 회사제도
가 들어서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예수님께서는 이미 2천년 전에
우리에게 그것을 깨치시려 하셨으니 그분이야말로 얼마나 앞선 분이셨습니
까? 주님께서는
"나는 섬김을 받으로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다."
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미 2천년 전에 이러한 획기적인 말씀을 하실 수
있는 분이야말로 개혁가요, 구세주요, 또한 뭇 사람을 비천한 존재로부터
이끌어 높여주시는 영도자이십니다.
그런데 아직도 우리는 자신을 주변 사람들에게 종으로 내놓지 않고 있습
니다. 오히려 주변 사람들로부터 섬김을 받으려 하고 있습니다. 섬김을 받
는 것이 곧 사랑받는 것이라고 잘못 생각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섬김을 받
는 것은 사랑이 아닌 아집이며 독선입니다. 섬김이 곧 사랑입니다. 일생을
바쳐 남을 섬긴다 하면 괴로울 것 같아도 그렇게 살아가다 보면 발 그것이
사랑이었구나 하고 깨닫게 됩니다. 사랑은 주는 것으로 끝내야 합니다. 되
돌려받으려고 생각하며 주는 사랑은 참사랑이 아닙니다.
주님은 우리를 종의 지위에서 끌어올려 벗이라 하였고 벗의 위치를 더
끌어올리고 주님 자신은 더 밑으로 내려가셔서 스스로 종이 되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주님의 사랑이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주님의 섬김이었습니다.
우리 모두에게 주님은 당신을 종으로 맡기셨습니다. 이제 주님은 우리의
사랑을 받으셔야 합니다. 주님께서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기 때문입니다. 주
님께서 먼저 우리를 섬기셨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선택하셨기 때
문입니다.
"내가 너희에게 새로운 계명을 주겠다. 서로 사랑하여라."
세상에 어느 성현께서 이와 같이 계명과 사랑을 직결해서 인류에게 정확
히 가르쳐주셨습니까? 생각하면 할수록 너무나도 획기적이고 혁명적인 사
랑이란 계명을 우리에게 남기신 그분이야말로 인간이 아니라 바로 하느님
이셨구나 하는 걸 깨닫게 됩니다.
사랑이라는 계명으로 살아가는 우리들, 결코 세상에서 알려준 세상의 사
랑이 아닌 주님께서 알려주신 하느님의 사랑, 그 사랑의 진가를 한 번 맛
보면 우리의 신앙적 사랑이 얼마나 값지고 보람된 것인지 깨닫게 됩니다.
주님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시는 표정으로서 우리를 높여 주시고 자신은 오
히려 낮추어 종의 자리로 내려 앉으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사랑은 상대를
키우고 높이며 자신은 작게 하며 또한 낮추는 것입니다.
슬픔과 근심이 기쁨이 되리니
제가 시골에 살 때 조그마한 가게집에 사시는 할머니 한 분을 잘 알고
지냈습니다. 그분은 젊었을 때 농사 짓고 나물 광주리를 머리에 이고 저자
거리에 나가 팔기도 하면서 슬하에 아들 둘과 딸 셋을 키우셨습니다. 이제
는 그 아이들이 다 커서 모두 시집, 장가 보내고 명절을 맞아 찾아온 손자
손녀들의 재롱을 보시며 좋아하고 계셨습니다.
우연히 그 가게 앞을 지나다 손자들이 노는 것을 뒷짐을 진 채 물끄러미
바라보시는 할머니께 인사를 드렸습니다.
"할머니, 기쁘시지요?"
"아이구, 그럼요. 이게 바로 천당이지, 천국이 어디 따로 있습니까? 사람
이 다 제 마음먹기에 따라 살 수 있는 거지요. 이렇게 사는 것이 천당 아
닙니까?"
하시며 옛날 이야기를 하시더군요.
할머니도 얼마 전까지는 걱정 속에서 살았다고 합니다. 자식들이 이젠
다 자리가 잡혀 그런 대로 잘 살지만 '저것들이 자식들을 다 어떻게 키우
나' '저것들 공부는 또 어떻게 시키고'하면서 자기처럼 아이들을 키우느라
고생할 것 같아 걱정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 무렵 부부가 함께 교통사고
를 당하여 할아버지가 돌아가시고 할머니 혼자 살아 퇴원하고 보니 처음엔
슬프로 허전했지만 어느날부터 왠지 사는 게 기쁘고 그저 매사가 즐거더랍
니다.
"저는 이제 예배당에 가나 안 가나 이렇게 늘 천당에 사는 걸요, 뭘."
하시기에
"네, 할머니. 맞아요, 정말 천당에 사시는 거예요."
하고 제가 맞장구를 쳐드렸더니 아주 기분좋아 하시더군요.
'실패는 성공의 어머니'라는 말은 성립되지만 '슬픔은 기쁨의 어머니'라는
말은 성립되지 않습니다. 슬픔은 자꾸 슬픔을 만들고 기쁨은 자꾸 기쁨을
만듭니다. 기뻐하면 즐거움이 따르고 또 만족하게 됩니다. 반대로 슬퍼하면
속이 상하고 이어 고통이 따르며 결국 더욱 큰 슬픔에 잠기에 됩니다. 그
래서 기쁨과 슬픔은 전혀 다른 두 집안인 것처럼 생각되기도 합니다. 이
두 집안은 평범한 마음으로는 결코 하나가 될 수 없습니다. 결국 슬픔을
기쁨으로 바꾸는 것을 우리의 마음 먹기에 달린 게 아닐까 생각합니다. 한
순간 이렇게 생각하던 것을 저렇게 돌려 생각하면 고통도 기쁨이 될 수 있
는 게 아닐까요.
더구나 늘 기쁨으로 사는 사람에겐 슬픔이 와도 그리 크지 않지만 늘 슬
픔 속에 살던 사람은 조금만 슬퍼도 정신을 차리지 못할 정도로 고통스럽
게 마련입니다. 이럴 때 '너희는 슬퍼하겠지만 세상은 기뻐할 것이다. 너희
는 근심에 잠길지라도 그 근심은 기쁨으로 바뀔 것이다.'하신 주님의 말씀
을 생각해 봅니다.
해산 날을 받아 놓고 진통을 두려워하는 여인이 아이를 낳고서는 진통을
잊고 아이를 얻어 기뻐하듯, 고통을 딛고 부활하신 예수님을 다시 만나는
기쁨을 그분은 그런 식으로 미리 예고해 주셨습니다. 주님은 자신의 죽음
앞에서도 이렇게 차분히 말씀하실 수 있는 분이셨습니다. 슬픔과 기쁨이
곧 해석하기 나름이라고 했습니다.
매사를 슬프게 보지 말고 하느님의 뜻으로 알고, 기쁜 쪽을 보는 버릇을
가지는 것이 천상의 세계를 미리 끌어와 맛보는 것입니다. 또한 이것이 천
당으로 가는 요령을 터득하는 길이라고 생각합니다.
나비가 된 애벌레
봄이 오면 벌레들이 많이 나옵니다. 벌레들의 일생을 살펴보면 애벌레일
때는 자꾸 먹기만 합니다. 서로 엉키어 살면서 다투어가며 저만 먹으려고
밀고 밀치고 다른 놈 위에 올라타 그놈이 먹는 것을 빼앗아 먹기도 합니
다. 그 모양이 마치 사람들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아귀다툼을 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저는 언젠가 실험을 해 보고 싶어서 호랑나비 종류의 나비가 나뭇잎에
알을 슬어 놓는 것을 보고 그것을 주워다 병에 흙을 담고 넣어두었습니다.
얼마가 지나서 벌레가 부화되기 시작했습니다. 싱싱한 나뭇잎을 계속 넣어
주었더니 벌레들은 그 잎을 갉아먹고 살았습니다. 이슬 젖은 잎을 계속 넣
어주었더니 해만 뜨면 사각사각 이파리를 갉아먹는 소리가 들릴 정도였습
니다. 벌레들이 점점 자라 더듬이도 나고 행동반경도 넓어졌습니다. 핀셋으
로 그 중 몇 마리의 더듬이를 한 쪽씩 잘랐습니다. 그 후 얼마 지나서 누
에고치 속의 번데기 같은 모습으로 변하면서 벌레들은 애벌레로서의 일생
을 마감했습니다. 그 벌레들은 나비가 될 줄 모르고 벌레로 살았으리라 생
각됩니다. 나비가 되었다 다시 벌레가 된 경우가 없었으니 벌레들은 그렇
게 생각할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이제 벌레들은 먹지도 않고 움직이지도 못하고 숨도 쉬지 않았습니다.
껍질은 점점 짙은 고통색으로 변하면서 딱딱하게 굳어져 갔습니다. 그런데
불과 1주일이 못 되어 껍질이 금이 가고 갈라지기 시작하더니 어느 순간
그 안에서 아름다운 날개 한 쪽이 쫙 펴져 나왔습니다. 곧이어 또 한 쪽
날개가 마저 펴져 나왔습니다. 참으로 아름다운 나비였습니다. 벌레와 나비
가 어떻게 한 몸에서 나는지 도저히 상상조차 할 수 없을 정도로 아름다운
나비였습니다. 자기 몸의 일부였던 껍질을 벗고 나오는 나비는 참으로 호
화 찬란하기가 그지없었습니다.
그것을 보면서 나는 우리 사람들의 형혼도 육신을 벗어날 때는 저렇게
아름다운 모습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면서 그 나비의 더듬이를 살펴 보
았습니다. 내가 핏셋으로 잘라버린 더듬이는 나비가 되었어도 자라지 못하
고 잘린 그대로였습니다. 더듬이가 두 개 그대로 있는 나비는 정상적으로
너울너울 날아갔는데 한쪽 더듬이를 잘린 나비는 더듬이가 잘린 쪽으로만
날아 제자리에서 뱅뱅 도는 것을 보고 저는 참으로 많은 것을 느꼈습니다.
우리의 인생살이는 참으로 어렵습니다. 감정에 눈이 어두우면 죽어서 우
리의 영혼도 그렇게 될 것입니다. 살아있을 때 내 욕심만 부려 그저 끌어
안기만 하고 앞을 내다보지 못하는 병이 있다면 우리의 영도 죽어서 남의
영을 들여다보지 못할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속을 썩이면서 영혼의 에너지를 많이 썩혀버렸다면 우리의 영혼도 한 쪽이
썩은 영혼이 되어 제대로 날지도 못하고 푸득거리며 뒹굴고만 있지 않을
까, 그것이 곧 지옥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우리의 영혼은 날개를 좌악 펴고 활기있게 훨훨 날아갈 수 있어야 하겠
습니다. 육신까지 하늘로 올라갈 수는 없지만 우리의 영혼이 날개를 펴고
저 하늘로 올라갈 때까지 영혼을 건강하게 유지해야만 활기있게 끝까지 날
아갈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의 영혼은 어떻게 길러지는가? 그것은 바로 우리 각자의 육신 안에
서 길러지고 다듬어지는 것입니다. 내 영혼 내가 기르고 내 영혼 내가 다
듬는 것이 바로 우리 인생입니다.
하느님은 우리에게 예수님을 인생의 해답으로 보내주셨습니다. 탄생이
무엇이며 고통이 무엇이며 사는 게 무엇이며 어떤 계명을 지키고 어떻게
살아야 하며 또 어떻게 죽어야 하는 것까지 가르쳐 주신 분입니다. 그러기
에 주님은 '나는 인간들의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라고 말씀하신 것입니
다. 인생의 어떤 의문이 있다면 예수님을 찾아가시면 거기에서 의문을 풀
수 있기 때문에 주님은 바로 인생의 해답 그 자체이십니다. 창조주께서 우
리에게 주신 해답이신 예수님의 생을 보면서 우리도 비록 믿음은 약하지만
벌레가 나비가 됨을 생각하면서 제 2생도 생각해 보아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들에게 제 2생이 분명히 있다고 그토록 여러 번 강조
하셨고 스스로 부활하시어 육신을 나타나셨다가 하늘로 오르시면서 제자들
에게 명명백백히 보여주셨습니다. 또한 그러 모든 사실들이 글로 남아 우
리가 보고 듣고 믿을 수 있게끔 해주셨습니다. 이렇듯 근거가 확실한데도
우리는 왜 애벌레들처럼 1생만 생각하며 꿈틀거리면서 살고 있는지 생각하
면 한심합니다. 우리도 예수님처럼 영원한 제 2생을 향하여 우리의 일생을
바쳐야 합니다. 모쪼록 우리의 생활이 보다 영원한 세상을 향하여 사는 멋
지고 값진 일생이 될 수 있도록 노력해야 되겠습니다.
기를 펴고 삽시다
모든 사람에게는 기가 있습니다. 기가 우리 몸의 어느 부분에서 나오는
것인지는 잘 모릅니다. 그러나 '기를 쓴다' '기를 받는다'는 말이 있듯 우리
는 하느님의 기, 예수님의 기가 우리 몸 안에 들어올 수 있도록 가슴을 열
지 않으면 안 됩니다.
사도행전의 내용을 살펴보면 혀 모양의 불덩이가 나타나 겁을 먹고 방
안에 숨어 있던 제자들과 성모님, 그리고 또 다른 제자들 모두에게 갈라져
각각의 머리 위에 내리고 그 중 가장 많은 성령을 받은 베드로사도가 더
이상 숨어있지 않고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고 되어있습니다. 그 장면을
우리가 오늘 좀더 현실적으로 생각해 본다면 오늘날 우리도 얼마든지 주님
의 기 가운데 살아 활동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갇힌 사도들의 생활, 그
들은 주님께서 돌아가신 지 불과 사흘, 시간적으로 따져서는 만 이틀을 못
참고 엠마오로, 갈릴레아로 각자 흩어집니다. 그리스도를 왕으로 하여 이
세상에 왕국을 건설해 장관 자리 하나쯤은 떼어 놓은 당상으로 여겼던 그
들은 예수님께서 돌아가시자 그만 희망을 잃고 실의에 빠져 흩어집니다.
이때 예수님께서는 흩어진 제자들 앞에 나타나셔서 그들의 마음을 뉘우치
게 하고 다시 한 자리로 불러모으십니다. 이렇게 하신 후 40일, 예수님은
제자들이 보는 앞에서 승천하셨습니다.
제자들은 다시 의지할 곳을 잃고 공포에 떨면서 누가 방문을 두드리기만
해도 소스라쳐 놀란 정도로 겁을 먹고 모여 있었습니다.
'흩어지지 말고 모여 있어라, 내가 협조자를 보내주마' 하셨는데도 그 말
씀이 무슨 뜻인지 모르고 겁에 질려 있었습니다. 그 당시에는 제자들이 예
수님의 시신을 훔쳐다 놓고 사기를 친다는 말도 있었고 그런 제자들을 잡
아다 족쳐야 한다고 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소문도 있었으니 더더욱 잔뜩
겁을 먹었을 것입니다. 누구 하나 사람들 앞에 '내가 예수님의 제자요!' 하
고 나설 용기를 내지 못했습니다. 그렇게 그들은 성모 마리아를 중심으로
한 자리에 모여 열흘 동안 숨어 지내면서 무슨 얘기들을 했을까 한 번 상
상해 봅시다.
"우리가 이래도 되는 걸까? 죽은 사람도 살리신 예수님이신데, 죽으신
후에도 육신으로 부활하셔서 우리 앞에 나타나신 예수님이신데, 그런 분을
마음에 모신 우리가 이렇게 무서움에 떨며 숨어 있어야만 하는걸까?"
그랬을 것입니다. 사도 베드로를 중심으로 여러 제자들은 예수님의 행적
을 더듬으며 열흘 동안 피정을 하면서 마음이 점점 더 뜨거웠을 것입니다.
"그렇다. 주님은 신기한 분이시다. 예수님 같으신 분은 인류사에 다 이상
이 있을 수 없다."
이런 마음이 서로들 사이에 일치를 이루는 순간 성령이 하늘에서부터 뜨
겁게 내려오신 것입니다. 그 순간 그들은 하느님의 기를, 주님의 기를 받았
고, 그래서 겁에 질렸던 그들 가운데 누가 '그렇다' 하고 외치자 '맞다' 하
면서 동시에 일어설 수밖에 없는 상황이 벌어졌을 것입니다.
사도 베드로께서 앞장서서
"우리가 바로 예수님의 증인이요. 우리가 예수님을 증언하지 않으면 누
가 예수님을 증언하겠소?"
하며 밖으로 나갔을 때 사도들은 용기를 내지 않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이제 우리도 주님과 함께 죽자' 그런 각오가 없었더라면 그들은 그렇게 용
기를 내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들 자신에게 파멸이 올지도 모른다는 강박
관념이 그들을 밖으로 내몰았을 수도 있지만 그들의 용기는 당시로서는 대
단한 것이었습니다. 때마침 장날, 그들 주위에 모여선 많은 사람들을 향해
베드로 사도는 외칩니다.
"여러분이 십자가에 못박아 죽이신 예수님은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그
예수님을 죽이신 데 대해 여러분과 여러분의 후손들은 책임을 져야만 합니
다."
하며 유다인들을 고발했습니다. 그 자리에 모여 있던 모든 유다인들은
그 제자들이 어느 나라 말로 했어도 다 알아들었을 것입니다. 설령 우리가
그 자리에 있었다 하더라도 알아들었을 것입니다.
사도 베드로가 기를 쓰며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의 피의 대가를 구하고
나섰을 때 수많은 청중은 이미 기가 죽어 베드로 사도의 기를 받지 않을
수 없었으리라 생각됩니다. 이것이 바로 기의 대결에서 사도들이 이겼던
결과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기가 꺾였습니다. 유다인들은 겁을 내기 시작했
습니다. 그래서 베드로 사도가
"세례를 받으시오."라고 외치자
"그래, 그래야 되겠지. 용서받으려면 그럴 수밖에 없어."
이렇게 결심했을 겁니다. 이것이 바로 그 유명한 오순절 성령강림일에
있었던 상황이라고 유추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가끔 천주교라는 이름으로 이 사회와 만날 때 괜히 기가 죽어버
립니다. 왜 우리가 기가 죽어야 합니까? 사회의 여러 요인들이 우리에게
겁을 주기는 합니다만 그렇다고 기가 죽을 이유는 없습니다. '겨자씨만한
믿음이 있다면 이 산 보고 저 산으로 가라고 해도 갈 것'이라고 하셨습니
다.
믿음이 바로 핵입니다. 그리스도만 믿는다면 나도 영원히 살 수 있다는
신앙, 그것 하나면 됩니다. '다 죽어도 나는 안 죽어' 하는 기를 가진다면
무서울 게 뭐 있겠습니까? 우리가 믿는 바가 돈이요, 우리가 믿는 바가 세
속이요, 나의 육신과 능력이요, 내 남편이요, 내 집안이다 보니 우리는 약
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나는 구원받는 사람이다. 나는 영원히 죽지 않는
다.'하는 믿음이 약하다 보니 기를 쓰지 못하는 게 아닌가 생각합니다.
왜 우리 천주교 신자들의 기가 죽어 있어야 합니까? 그러지 맙시다. 각
자 자신의 산앙을 겨자씨만한 믿음으로 키워 놓고 그 다음에는 불의 앞에
서 기를 쓸 줄 알고, 고통 앞에서 기를 써서 견뎌내며, 기를 쓰고 어려움을
뚫고 나갈 수 있어야만 합니다. 예수를 믿는 사람인 가톨릭 신자는 용기를
낼 수 있는 사람들의 후손입니다. 그러기에 천주교에는 순교자가 많았던
것입니다. 이제 우리도 순교자의 후손답게 그런 기를 가지고 생기있는 믿
음을 지녀야 합니다.
세상만사가 헛되다
한 해의 결실을 맺는 중추가절을 맞이하고 있습니다. 전도서 1장 2절 아
래에서 보면 '헛되고 헛되다. 세상만사 헛되다.'하는 탄식조의 구절이 나옵
니다. 사람이 하늘 아래에서 아무리 수고한들 무슨 보람이 있으랴? 그렇습
니다. 이 세상에 목적을 두고 이 세상에서 결실을 맺으려 한다면 참으로
헛됩니다. 많은 사람들은 지금도 그것이 헛되다는 것을 모르고 나이가 들
어서도 철부지처럼 그 헛된 것들을 향하여 헛된 걸음으로 다가서고 있습니
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의 헛됨을 면하는 방법이 있습니다. '하느님을 위하여'
라는 단어를 앞에 붙이면 그 모든 헛된 것이 보람찬 일이 될 수 있습니다.
사람이 이 세상에서 비록 가장 미천한 일을 한다 하더라도 그것이 하느님
을 위해 하느님 뜻을 따라 보다 영원한 것을 지향하는 것이라면 하늘나라
에서는 결국 큰 상을 받게 될 것입니다. 해가 뜨고 지는 것도 하느님의 숨
결을 생각하며 바라보는 사람에게는 감탄스럽고 그것을 하느님께 영광으로
돌릴 수 있습니다.
하느님을 느끼지 못하고 영원한 세상을 생각하지 않는다면, 맨손으로 태
어난 우리들이 이 세상에서 보람을 느껴본들 그것은 잠시 지나가는 바람일
뿐입니다. 죽음 앞에서는 모든 것이 사라져버리고 무덤 속에 모든 것이 묻
혀버리고 맙니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은 오늘도 이런 이치를 깨닫지 못하
고 헛되이 다투고 발버둥치며 하루하루를 무의미하게 보내고 있습니다. 인
생의 의미를 현세에 둘 것이 아니라 영원한 내세에 둘 때만이 오늘 하루의
내 삶이 영원한 삶을 위해 무엇을 준비했던가 되돌아볼 수 있습니다. 당하
고 있는 고통이 있다면 그 고통을 벗어나는 것도 속절없는 일입니다. 고진
감래라 하여 고통 뒤에는 달콤한 것이 온다고 합니다만 영원함을 놓고 볼
때는 그렇지 않습니다. 고통을 벗어나면 또 다른 고통이 옵니다. 고통이 없
으면 고통이 없는 것 또한 고통이 됩니다.
조용할 때는 시끄러운 것이 그리워 조용함을 피하고, 시끄러우면 시끄러
운 게 싫어 조용한 데를 찾는 것이 우리네 변덕스러운 인간의 허무한 감정
인 것입니다. 방향을 잡지 못하고 외로워하다 슬퍼하고 슬퍼하다 기뻐하는
감정의 변화는 마치 물이 증기가 되어 하늘로 올라가 다시 비가 되어 땅에
내려 물이 되고 그 물이 다시 하늘로 올라가는 것과 조금도 다를 게 없는
것입니다.
만물이 창조주의 법칙을 따라 항구적으로 움직이는 데는 뜻이 있고 보람
이 있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생각할 수 있는 머리를 가지고서도 오히려
자기 능력이나 생각의 한계를 스스로 제한하는 바람에 좀처럼 하느님께 도
달하지 못합니다.
신앙을 가진 사람들은 참으로 행복한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하느님을 알
기 때문에 해가 뜨고 지는 것이 왜 보람있는지 알고, 우리에게 주어진 그
어떤 어려움도 주님께 감사하다는 기도를 드릴 자세가 되어 있습니다. 우
리는 고통을 당할 때 '하느님께서 저를 사랑하셔서 제게 이런 고통을 주시
어 고통을 깨닫게 해주심을 감사합니다.' 할 수 있고, 고통이 없을 때는 '감
사합니다. 주님, 저를 이렇게 편히 쉬게 해주시니 감사합니다.'라고 기도드
릴 수 있습니다. 모든 것이 하느님과 직결될 때 의미있는 고통과 의미있
는 안식과 의미있는 삶이 되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사랑하고 결혼하고 자식을 키우고, 또 다 키워 사회에 보낸
다 한들 무슨 보람이 있습니까? 보람이 있다 한들 그 자식이 잘못해 사건
을 저지르거나 곤경에 쳐하면 보람이 고통이 되어 결국은 고통을 위해 몸
부림쳐 온 것처럼 허무하게 되지 않는다고 그 누가 보장합니까?
그러기에 우리가 하느님을 떠나서는 어느 한 시각, 어느 한 구석에서라
도 진정한 행복을 맛볼 수 없는 것입니다. 이러한 인생의 깊은 뜻을 모르
고 오늘도 수많은 사람들은 참 행복이 무엇인지도 모르면서 기쁨과 즐거움
을 찾아 그것이 행복이라면서 헛되이 헤매고 있습니다. 이 세상의 어떤 즐
거운도 주님의 영원한 세계 앞에서는 허무한 것이요, 악이 될 수 있습니다.
나에게는 보람을 주는 일이라 하더라고 주님 앞에서는 과오를 범할 수 있
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버림으로써 얻는 지혜
심청전이나 춘향전을 읽어 보십시오. 심청이는 아버지께서 눈을 뜨시리
라 믿고 아버지와 헤어져 그 곁을 떠납니다. 그러나 그녀의 갈 길은 죽음
입니다. 죽으러 팔려가면서도 심청은 아버지께서 눈을 뜨시리라 굳게 믿습
니다. 춘향이도 이도령의 성공을 위해 헤어지며 기다립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선택하시자 그들은 그물과 배를 모두 버려주고 육
친의 아버지께도 잘 께시라는 인사 한마디 못 드리고, 배가 얼마인지, 그물
의 값이 얼마인지, 그 그물을 가지고 앞으로 얼마를 더 벌어들일 수 있을
지 전혀 계산해 보지도 않고 무작정 예수님을 따라 나섰습니다. 버림에는
큰 덕이 있습니다. 이별, 떠나가는 것, 그것은 버림이요 포기요 끊음이지만
보다 큰 것을 얻기 위한 지혜이기도 합니다. 그것은 또한 버림으로써 보다
값진 것을 얻기 위한 지혜이기도 합니다. 뿐만 아니라 그들은 이미 포기함
으로써 달성되는 그 높은 경지를 미리 맛본 사람들이기도 합니다. 무엇을
끊음으로 해서 그것을 다스리는 한 계단 높은 차원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버리거나 떠날 때 그 이유는 생각지 아니하고 버리는 것
만 아까워 하면서 놓을 줄 모릅니다. 오히려 힘주어 잡기만 하면서 안타깝
게 삶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별에는 간혹 시원섭섭하다는 표현을 쓰기도
합니다. 헤어지거나 떠나거나 버리거나 포기할 때는 기쁨의 뜻도 함께 있
을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이별의 서운함이 결코 이별의 슬픔을 이길 수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이별의 슬픔을 이 세상 어느 민족보다도 남달
리 강하게 느끼는 민족이 우리 한민족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우리 민족의 이별에 대한 애틋하고 미표한 정서는 어떻게 보면 신비스럽
기조차 합니다. 그러한 이별에 관한 수많은 사연들이 우리들의 역사와 문
화 속에 미학의식으로 깊이 잠재되어 있습니다. 이별은 또한 상봉을 애타
게 기다리는 전제이기도 합니다. 위에서 예로 말씀드린 심청전과 춘향전을
읽으면서 우리는 그들의 헤어짐이 곧 그들의 만남이 되기를 기대합니다.
우리의 고전을 읽어보면 눈물을 머금게 하는 대목이 거의 이별과 상봉 장
면에 집약되어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대중가요의 대부분이 또한 그런 내용
을 가사로 쓰고 있습니다.
이렇게 우리의 정서를 은근하고 끈끈하게 울려주는 내용이 어째서 이별
과 상봉 두 가지로만 묘사되는지 참으로 알 수가 없습니다. 아마도 우리
한민족이 유달리 정이 깊어 그런 게 아닐까 생각해 보기도 합니다. 헤어져
슬퍼 울고, 만나 기뻐 울고, 이렇게 헤어짐과 만남에서 흘리는 눈물 속에는
우리의 깊은 정서가 담겨 있습니다. 그러한 정서 안에서 삶의 진한 맛을
우리는 느낄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 민족은 다른 민족보다 종교성향
이 강한 민족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덕이나 선행 등에 유달리 정을 느
끼는 성향을 보면 우리 민족은 이미 삶 속에서 깊은 종교성에 눈뜨고 있음
을 느낄 수 있습니다.
구약성서 요나서에 보면 니느웨 사람들이 하느님을 믿고 단식을 선포합
니다. 그들은 먹고 마시고 즐기는 세속의 호사생활을 버리고 떠납니다. 그
리하여 그들은 마침내 하느님의 용서를 받습니다.
사도 바오로께서 고린토 사람들에게 보낸 편지의 한 구절에도 이별의 참
의미를 일깨우는 구절이 있습니다.
"교우 여러분, 제 말을 명심하여 들으십시오. 아내가 있는 사람은 아내가
없는 사람처럼, 슬픔이 있는 사람은 슬픔이 없는 사람처럼, 물건을 가진 사
람은 그 물건이 자기 것이 아닌 것처럼, 함께 살지만 함께 살지 않는 것처
럼..."
이별이란 의미를 늘 마음 속에 자기 것으로 알고 살 때에야 비로소 참된
자기 것을 찾을 수 있다는, 참으로 심오한 뜻을 지닌 구절입니다.
마르코복음 1장 14절을 읽어보면 '그들은 곧 그물을 버리고 예수를 따라
갔다'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그들은 아버지 제배데오와 배와 그물을 버
리고 예수님을 따라갔습니다. 주님의 부르심 때문에 그들은 그물을 버릴
수 있었습니다. 그물이 없었으므로 주님께서 주시는 일감을 얻을 수 있는
여백을 갖게 된 것입니다.
갑자기 죽음이라는 단어를 생각해 보지 않을 수 없습니다. 헤어짐, 끊음,
버림, 이별 그 모든 것의 최후의 지점은 죽음입니다. 이 세상에 태어날 수
밖에 없었던 사람들은 태어났기 때문에 결국은 죽을 수밖에 없는데, 죽는
그 순간에는 이유여하를 막론하고 이 세상의 모든 것과 이별을 해야 합니
다. 그러므로 우리는 죽음으로서만 체험할 수 있는 이별을 살아 있으면서
느낄 수 있는 덕을 가져야 합니다. 어차피 죽으면 버릴 것이란 걸 알았으
면 살아있으면서 버릴 줄도 아는 덕스러운 사람이 됩시다. 그것이 바로 우
리들의 신앙을 새롭게 이끌어 주는 성숙의 경지입니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종교를 보면 대부분 버림의 덕을 강조하고 있
습니다. 불교가 그렇고 우리 가톨릭이 그렇습니다. 많은 수도자들은 버림으
로서 더 많은 것을 얻고, 또 더 많은 것을 얻기 위하여 모든 것을 버립니
다. 보이는 것을 버리고 보이지 않는 것을 향하여 가는 삶을 세속적인 잣
대로는 쉽게 이해할 수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주님께 안기면서 "마귀의 유혹을 끊어버립니까? 이 세상의 온갖
허례허식을 끊어버립니까?"하는 물음에 자신있게 "끊어버립니다. 끊어버립
니다."라고 대답했고 이렇게 사실 우리는 끊어버렸습니다. 그런 모든 유혹
을 끊어버린 우리들이기 때문에 "전능하신 천주 성부 천지의 창조주를 믿
습니까?"하는 물음에도 "믿습니다."라는 대답을 할 수 있었습니다. 주님의
이름으로 마귀를 끊어버리면 마귀가 없음을 얻게 됩니다. 그럼으로써 우리
는 마음 속에 주님의 거처를 마련할 수 있었습니다.
하느님을 믿음으로써 세속의 허례허식을 끊어버리게 되면 허허로운 무상
의 세계를 얻게 됩니다. 그럼으로써 하느님 나라에서 우리의 역할을 담당
할 수 있게 됩니다. 이왕에 끊어버리려면 좀 더 용기를 내어 확실하게 끊
어버리고, 어차피 버릴 것이라면 더욱 과감하게 버린다면 이별의 아픔 뒤
에 상봉의 기쁨이 찾아오듯 새로운 세상인 영원한 생명으로 가는 진입로가
당신을 기쁘게 맞아 줄 것입니다.
낟알과 과일, 그리고 빵과 포도주
참으로 먹고 살기가 힘들었던 때가 생각납니다. 그때는 먹거리가 얼마나
귀했던지 봄이 되면 집집마다 쑥을 캐 쌀가루나 밀가루에 묻혀 버무리를
쩌 먹었고, 그것마저 배불리 먹지 못하면 아이들은 산으로 올라가 물이 오
른 소나무 속껍질을 벗겨 마치 껌을 씹듯 꼭꼭 씹어 삼키면서 허기진 배를
달래기도 했습니다. 햇보리가 펴 보리 이삭에 낟알이 익어갈라치면 그 이
삭을 잘라 불에 그슬린 다음 손바닥으로 부펴 파란 보리 낟알을 입 안으로
털어넣느라 아이들의 손바닥과 입 언저리는 온통 검댕이 투성이가 되곤 했
습니다. 그 시절 겉보리를 방아에 찧어 만들어 먹었던 보리개떡의 그 기막
힌 맛은 가난했던 그 시절을 살았던 모든 이에게는 향수를 느끼게 하는 추
억 속의 맛일 것입니다. 가을에 추수한 곡식은 겨울 내내 먹다 보니 이미
바닥이 났고 보리가 익어 양식이 되려면 아직도 한참을 기다려야 할 그 시
기를 춘궁기, 이름하여 보릿고개라 했습니다.
'오뉴월에 오는 손님은 못된 시어머니보다 더 밉다'는 말은 더위 때문에
그랬겠지만 '3, 4월에 오는 사돈은 왜놈 순사보다 더 무섭다'는 말은 가난
때문이었습니다. 그때는 모두들 살기가 고만고만해서 소홀히 대접할 수 없
는 사돈 같은 큰 손님이 오면 그야먈로 큰일이었습니다. 그 당시는 가까운
사람을 만나면 손윗사람에게는 '진지 드셨습니까?'라는 말이 인사였고, 손
아랫사람에게는 '밥 먹었느냐?'는 것이 곧 인사였습니다. 아직까지도 어른
들에게는 그 습관이 남아 있어 자식들이 밤늦게 들어오면 대뜸 하신다는
말씀이 '저녁은 먹었니?'입니다.
물론 그 말씀에는 자식에 대한 부모의 지극한 사랑이 담겨 있기도 합니
다. 내 자식이 밤늦게 들어오다 보니 밥상을 차려달라는 것이 눈치가 보여
혹시나 저녁끼니를 거르지나 않을까, 부모는 그것이 걱정이 되어 그러실
수 있습니다. 그러다 혹시 몸이 축나면 어쩌나, 부모에게는 그것이 큰 걱정
거리가 될 수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부모의 자식자랑은 그렇게 먹는 것에
서부터 시작하는 것인가 봅니다.
2천년 전 세상에 오셨던 예수님 역시 우리 아버지가 분명하기 않습니까?
어쩌면 그렇게도 정확하게 우리들을 아시고 하필이면 우리가 즐겨 먹는 빵
과 포도주로 '나를 기념하라'고 하셨는지 그 까닭이 분명하지 않습니까? 그
분이 곧 우리의 아버지이시기에 우리가 먹는 것으로 당신을 기념하라 하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는 진정 자식으로 대해 주신 것입니다.
알고 보면 예수님만 그러신 것이 아닙니다. 야훼 하느님께서도 우리에게
그렇게 하셨습니다. 태초에 야훼 하느님께서 세상만물을 지배케 하기 위해
당신의 모습을 닮은 사람을 흙으로 빚으시고 축성하신 다음 하신 말씀이
"이제 내가 너희에게 온 땅 위에서 낟알을 내는 풀과 씨가 든 과일나무
를 준다. 너희는 이것을 양식으로 삼아라."
하신 것입니다. 우리의 생명을 이어가는 데 필수불가결한 양식은 그러므
로 우리에게 있어서는 생명과 같은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느님의 아들이시
며 신약은 구약의 완성이란 말을 우리에게 스스로 증명해 보여 주셨습니
다.
빵은 곧 '낟알이 든 풀'인 밀에서 만들어진 것이며 포도주는 바로 '씨가
든 과일'인 포도에서 숙성된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양식으로 밀과
포도나무를 주셨지만 예수님께서는 보다 완성된 빵과 포두주로 우리에게
생명을 주시고 기념하라 하신 것입니다.
우리 안간의 생명의 역사가 다하는 그날까지 예수님을 기념하기 위해 드
리는 우리 천주교회의 미사는 잠시도 끊이지 않고 연결되고 있음을 여러분
은 분명히 아셔야 합니다. 세계 각국에서 해가 뜨는 순서대로 새벽미사, 아
침미사, 저녁미사로 이어지는 미사가 무엇을 뜻하겠습니까? 처음과 같이
이제는 항상 영원히 이어지는 이 미사가 곧 우리의 생명이란 말씀이 여러
분은 그래도 믿기지 않습니까?
깜박 잊고 고기를 드셨다구요?
PBC 평화방송 라디오를 통해 매주 금요일 오후 3시 10분부터 40분간 생
방송으로 진행되는 신앙 상담 프로그램을 맡은 지 벌써 3년차에 접어듭니
다. 그 정도 했으면 지금쯤 이력이 날 법도 한데 유리벽으로 밀폐된 방송
실에 진행등이 켜지고 시그널 음악이 들어오면 저는 항상 처음 방송을 하
는 것 같은 긴장감에 휩싸이곤 합니다. 진행을 맡은 맹경순 아나운서의 침
착하고 차분한 음성이 도입부를 열며 인사를 나눌 때까지, 마이크 앞에서
오히려 평화스러워 보이는 맹경순 아니운서가 참으로 신기하다는 생각만
들 뿐 제 가슴의 두근거림은 멈추질 않습니다. 방송실 밖에서는 담당 PD
와 AD가 청취자들로부터 걸려오는 전화를 받아 부지런히 모티터에 연결하
면서 수신호를 보내옵니다. 드디어 제 차례가 오는 것입니다.
"안녕하세요? 신부님. 저는 도곡동에 사는 엘리사벳이라고 하는데요."
헤드폰을 통해 전화 건 사람의 음성이 들려오면 그제서야 제 마음이 평
온을 되찾게 됩니다.
"엘리사벳 자매님, 반갑습니다."
청취자들 생각에는 '반갑습니다'라는 제 인사말이 방송이니까 으레껏 하
는 인사치례로 들릴 지 모르지만 사실 그때만큼은 전화를 걸어오신 분의
음성이 마치 구원의 목소리처럼 반갑게 들리는 것입니다.
"신부님, 저는 지난 주 금요일 집안 혼인잔치에 갔다가 그만 깜박 잊고
고기를 먹었거든요. 죄가 되나 해서요..."
첫 질문자이신 엘리사벳 자매님의 질문은 금욕제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우리 천주교회에서는 금요일에 금욕제를 지키라고 합니다. 그러나 집안
잔치에 초대되어서까지 고기를 드시지 말라는 얘기는 아닙니다. 모임이나
잔치에 가시기 전에 본당 신부님께 말씀드리고 관면을 받는 분들도 계십니
다만 금요일임을 잊어버리고 고기를 잡수셨다고 해서 죄가 되는 건 아닙니
다. 원래 금욕제를 지키라고 한 뜻은 집안에서 음식을 만들 때 1주일에 하
루쯤은 고기 음식을 만들지 말고 그렇게 해서 절약된 것을 남을 위해 쓰라
는, 즉 남을 위해서 나를 희생하는 마음을 갖자는 취지에서 나온 것입니다.
어떠세요, 엘리사벳 자매님? 제 대답이 자매님께 참고가 되셨으면 합니다
만?"
"네. 감사합니다. 신부님. 안녕히 계세요."
전화는 그렇게 해서 끝나지만 일반적으로 질문을 해오시는 신자분들이
내적인 것보다는 외형적인 것에 너무 집착하는 것 같아 마음 한구석이 늘
개운치가 못합니다. 금요일에 먹지 말라고 한 고기를 먹었다고 해서 죄가
되는 것이 아니라 남을 생각하지 않는 마음, 이웃을 사랑하지 않는 마음이
곧 죄의 근원이 되는 것입니다. 금욕제는 안 지켰다고 해서 성사꺼리가 되
는 건 아니라는 말입니다.
어떤 분은 묵주기도를 매일 바치는데 월요일엔 '환희의 신비' 화요일엔
'고통의 신비' 수요일엔 '영광의 신비' 그런 식으로 꼭 순서를 지켜야만 되
느냐고 궁금해하십니다. 월요일에 '환희의 신비' 대신에 '고통의 신비'를 바
친다고 해서 큰 탈이 될 까닭이 없습니다. 묵주를 손에 잡고 기도를 바치
는 자체가 중요한 것이지 형식이 중요한 게 아니기 때문입니다.
우리 가톨릭이 하나이고 공번된(어느 한쪽으로 치우치거나 사사롭지 않
고 공평한) 교회라는 뜻에서 다른 종교에 비해 형식을 중요하게 여기는 것
은 사실입니다만 그렇다고 해서 믿음의 형식이 믿음의 본질을 좌우할 수는
없지 않겠습니까? 가톨릭의 형식은 다만 가톨릭교회의 하나이고 공번됨을
이어가기 위한 수단일 뿐입니다. 비디오 시대가 돼서 그런지 신앙인들이
내면적인 신앙의 본질을 접어두고 자꾸만 외형적인 형식에만 치중하는 것
같아 안타깝습니다.
그래서일지는 몰라도 방송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은 언제나 하고 싶었던
말을 다 못하고 돌아선 듯해서 그때마다 다음 번엔 좀더 잘 해야지 하는
생각을 갖게 되지만 여태껏 한 번도 흡족한 대담을 한 적이 없는 것 같아
마냥 아쉽기만 합니다.
천사가 된 불구 소녀
해마다 5월 8일, 어버이날이 오면 어떤 평신도가 강연했던 내용이 아주
감명깊게 가슴 속에 떠오릅니다. 그분은 중학교 교사였고 부인 또한 국민
학교 교사로서 흔히 말하는 부부교사였습니다. 그들 부부는 본당 신부님의
사목활동을 열심히 도와주셨고 또한 두내외의 봉급 중 한 사람 몫은 언제
나 교회에 내놓아 어린아이들이나 교리교육 참가자들, 노인들을 위해 쓰도
록 했습니다.
남편 되시는 중학교 선생님이 자기 세대 젊은 부부들을 모아놓고 강연하
는 것을 들은 적이 있는데 요즈음 젊은 부부들이 노인이나 어른들 모시는
게 아주 한심하다는 내용이었습니다. 말로만 인사하고 입으로만 공경하는
경향이 있다고 그분은 말했습니다. 불쌍한 노인들은 국가에서 주는 버스표
몇 장 얻어 점심을 거르면서 쓸쓸하게 공원에나 나가 소일하시는데 자식들
은 부모가 무엇을 원하고 바라는지 그런 건 조금도 신경쓰지 않고 그저 입
으로만 '건강하십시오' '안녕히 주무셨어요?'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런 것
쯤은 그나마 돈이 들지 않으니 읊조리기라도 하는 것이라고 그분은 야단쳤
습니다. 부모님은 자식 교육에 온 정성을 쏟으셨습니다. 여러분이 여러분
자식을 위해 지출하는 돈이 얼마나 많습니까? 자식들 교육을 위해선 학원
에 보낸다, 운동하러 보낸다... 내리사랑이라고 하지만 너무 지나치다는 말
씀이었습니다. 어른들께도 마땅히 자식에게 하는 만큼은 해드려야 하지 않
느냐는 것이었습니다. 잡술 것도 없이 해놓고 '많이 잡수십시오' 쉴 곳도
드리지 않고 '편히 쉬십시오'
그 선생님은 또 이렇게 질책하셨습니다. 여러분은 어른들만 그렇게 모시
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마저 그렇게 모시고 있는 것 아닙니까?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히 빛나시며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
서도 이루어지소서.'하면서 우리가 언제 예수님의 이름이 거룩하게 빛날 수
있도록 협조했으며 그 나라가 땅에서 이루어지도록 협조했습니까? 아무 것
도 협조한 게 없이 뻔뻔스럽게 기도만 한다고 되는 겁니까? 교무금을 잘
내야 합니다. 많이 벌어서 많이 내야 합니다. 그래야만 예수님의 이름을 거
룩하게 할 수 있고 아버지 하느님의 뜻이 땅에서도 이루어지도록 할 수 있
는 겁니다.
그 평신도의 강연을 들은 지 약 7년 후 다시 그곳을 방문하게 됐습니다.
그들 내외에게는 아이들이 있었는데 그 중 하나는 태생 소아마비에 걸려
있었습니다. 그곳 본당 신부님과 함께 미사를 드렸는데 제대에 올라서 앞
에 앉은 그들 가족을 보니 제 가슴이 무척 답답하고 안타까웠습니다. 언니
는 불구인 동생을 감싸안고 미사를 보더군요. 미사가 끝나자 그곳 본당 신
부님께서 제게 그 교우 댁을 한 번 직접 방문해 보라고 말씀하시더군요.
아이 때문에 신경을 많이 쓰실 텐데 어떻게 가겠느냐고 했더니 그러니까
한 번 가보라는 말씀이셨습니다.
그 집에 들어가는 순간 저는 다시 깊은 감명에 빠졌습니다. 소아마비 어
린이에게 그 식구들이 바치는 정성이 저로 하여금 '바로 여기가 천당이구
나!'하는 걸 느끼게 했기 때문입니다.
그 부인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병원에 가서 아이를 낳는데 다리 한 쪽이
먼저 나오고 머리도 찌그러져 나오더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때는 눈앞이 캄
캄해서 내외가 서로 얼굴만 쳐다보고 울기만 했답니다. 퇴원하자마자 아이
는 친정 부모가 데려가고 내외는 함께 성당으로 찾아갔답니다. 그리고는
하소연을 했습니다.
"하느님, 왜 이렇게 하십니까? 이것이 무었입니까? 저희가 어떻게 살라
고 이러십니까?"
눈물만 나오고 가슴이 터지도록 아팠답니다. 그리고 한참 후였습니다. 남
편은 갑자기 이상한 기분이 들면서 온몸에 기운이 돋아 성당 밖으로 힘차
게 뛰어 나왔습니다.
'아! 세상은 그대로 있었구나'
남편은 참으로 신가함을 느끼고 뒤돌아보니 부인이 방긋이 웃으며 따라
오고 있더랍니다. 그 부인은 신부에게 말했습니다.
"하느님께서 우리 가정을 특별히 사랑하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
로 구원하셨듯 우리도 하느님으로부터 그 십자가를 받았습니다. 나는 이
십자가를 내 일생 기쁨으로 지고 가겠습니다."
그 부인은 또
"제가 그때 성당에서 무슨 뜻으로 제게 이런 고통을 주시느냐 하면서 예
수님께 이 아이가 누구냐고 기도했더니 주님께서 '내가 보낸 하늘나라의
천사다. 바로 내가 너희 집에 간 것이다.'하고 말씀하셨습니다."
하고 말씀하시더란 것입니다. '주님께서 우리집에 오셨다' 그때서야 비로
소 그녀는 힘이 나더랍니다.
그 딸의 본명은 안젤라였습니다. 안젤라는 천사라는 뜻입니다. 그 집에서
는 언제나 천사님께서 우선권을 드립니다.
"천사님, 이렇게 할까요?"
"천사님, 식사를 신부님께 먼저 드릴까요?"
천사 아이가 고개를 끄덕거리고...
매사가 그런 식이었습니다. 그것은 그 집안 예절이 됐습니다. 그 아이는
자기가 천사임을 믿으면서 자신이 그 가정을 지키는 역할을 하고 있다고
믿는 것 같았습니다.
어느날 그 소녀의 아버지가 평소보다 5시간쯤 늦게 귀가하게 됐답니다.
"천사님, 오늘은 아빠가 늦으시네요."
엄마가 그랬더니 꼬마 소녀가 휠체어를 타고 문 앞으로 가 묵주를 들고
기도를 하더랍니다. 그러다 그 묵주를 손에 든 채 잠이 들었답니다. 그 아
버지가 11시 쯤 들어오시다 그 장면을 보니 한 손에는 묵주를 들고 평화로
이 잠든 드 모습이 정말로 천사의 모습이더랍니다. 그 아버지는 천사 앞에
무릎을 꿇고 잘못했다고 속으로 빌었다고 합니다. 그 소아마비 소녀는 아
직도 천사처럼 살고 있습니다. 마침 오늘 그 동네에 부고가 있어 전화 통
화를 하며 안부를 묻기도 했습니다.
천주교 주교단에서는 가정공동체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하느님
께서 우리에게 내려주신 참 선물은 이 세속에서 만들어진 것들이 아닙니
다. 때문에 언제나 하느님 입장에 서서 생각하는 마음을 갖도록 노력하는
것이 바로 신앙입니다.
신부과 수녀가 많아야
근래에 와서 '아들, 딸 둘만 낳아 잘 기르자'는 말이 생겼습니다. 그렇게
해서 얼마나 자녀를 잘 길렀는지, 잘 기른다는 것이 무슨 뜻인지 생각해
보신 적이 있습니까?
아이들이 학교에 다닐 때는 '잘 한다'는 말이 공부를 잘 한다는 뜻으로
쓰이고, '좋다'하는 말은 착하고 성실하다는 뜻으로 통용됩니다. 그러나 그
아이들이 학교를 졸업하고 사회로 나가면 달라집니다. '잘 한다'는 말은 별
로 쓰일 데가 없고 '잘 산다'는 말은 부자로 산다는 뜻이 되어버리고 맙니
다. '좋다'는 말은 돈이 많다, 비싸다는 뜻으로 둔갑하고 맙니다.
'저 집이 좋다'하면 비싼 집이라는 뜻이 되고 '저 옷이 좋다'하면 입기 편
하고 몸에 맞는다는 뜻보다 '비싼 옷'이라는 생각을 먼저 갖게 됩니다. 왜
학생 때는 '좋다' '잘 한다'는 말이 그렇게 쓰이다 갑자기 뜻이 바뀌는지 모
를 일입니다.
이렇게 물질만능 사조가 팽배한 세상에서 과연 자녀를 잘 키웠다, 잘 길
렀다는 기준을 여러분들은 어느 쪽에 두고 말씀하십니까?
좋습니다. 자녀는 둘만 낳았다고 칩시다. 두 집이 아이 둘씩 길렀는데 한
집은 아이를 잘 기르기 위해 어릴 때부터 과외공부를 시키고 학교 선생님
을 찾아다니며 발목을 잡고 '우리 아이는 어떻고 어떠니 선생님께서 우리
아이를 좀 다듬어 주세요.'해서 열심히 다듬었습니다. 대학에 가서는 교수
님께 '우리 아이 머리 속에다 뭘 좀 많이 넣어주세요'해서 지식만 쌓게 했
습니다. 공부 때문에 방해된다고 성당은커녕 성경도 못 보게 하며 길렀습
니다. 다른 한 집은 어릴 때부터 부모와 같이 놀고, 같이 공부도 하고, 같
이 성경도 읽고, 함께 성당에도 다니며 사랑으로 길렀습니다. 이 두 집안
아이를 하느님 앞에 데려가 보십시오. 하느님께서는 어떤 아이를 잘 길렀
다고 하시겠습니까? 머리에 지식만 많이 들었다고 해서 잘 키운 자식이라
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남을 위해 유익하게 쓰지 않고 자신만을 위해 쓰
는 지식을 가진 사람들이 그 지식을 이용해 우리를 괴롭히며 해를 끼치고
있는데 말입니다.
우리 본당의 복사단 아이들은 매일 미사에 나와 가끔은 복사 당번을 해
야 합니다. 남과 싸워도 안 됩니다. 한 번 쯤은 야단치고 넘어가지만 두 번
싸움을 하면 복사단에서 떨어져나갑니다. 학교 성적이 1년 이상 중간 성적
이하로 떨어지면 탈락하게 됩니다. 어른들 말씀하시는데 끼어들면 안된다,
음식을 남기지 않는다, 큰소리를 지르지 않는다, 못 한다는 말은 해서는 안
된다는 등 지켜야 할 규범도 많습니다. 또한 복사들은 평일 저녁 미사에
참석하여 '나는 신부가 되기를 희망하며...' '나는 수녀가 되기를 희망하며...'
라는 복사단 기도와 선서를 해야 합니다.
저는 미사를 드리면서 물을 따라주는 복사들을 보며 짜릿한 전율 같은
감동을 느낄 때가 있습니다. 우리 신부와 수녀들, 즉 동정을 지키며 혼자
사는 이들에게 이어져오는 같은 맥락의 어떤 기가 통하고 있음을 그 아이
들에게서 느낍니다. 이 어린 복사들을 볼 때 나도 서른 몇 해 전 신부님
앞에서 저렇게 했었는데 하는 생각이 나면서 아련한 그리움에 가슴 뭉클할
때도 있습니다. 신학교 시절 40명의 급우 중 30명의 급우들과 제 부모의
친상에 참석했던 기억도 떠오르곤 합니다.
그날 영구차 뒷자리는 우리 신학생들이 차지했고 앞자리에는 형님들과
형수님들께서 앉아 계셨습니다.
'저분들은 슬플 때 서로 기댈 사람이 하나 뿐이지만 나에게는 이제 40여
명의 급우들이 모두 기댈 곳'이라고 생각하니 힘을 얻어 고개를 들수 있었
습니다.
제가 사제서품을 받던 날 맨 처음 제의실에서 하늘을 향해 부모님을 위
해 울면서 강복을 드렸습니다.
부모에 대한 순정과 효심을 그대로 순수하게 지니고 살 수 있는 사람은
오히려 결혼하지 않고 동정으로 사는 우리들 신부와 수녀라고 생각합니다.
신부와 수녀를 많이 양성하면 할수록 나라가 튼튼해질 수 있습니다. 3공에
서 5공까지 군사정부는 천주교를 건드리다 거덜난 것입니다. 오늘의 민주
화는 바로 천주교가, 신부들이 앞장서서 얻게 된 것이라 해도 과언이 아닙
니다. 우리 신부과 수녀들은 거느리는 가족이 없기 때문에 진실을 위해 내
목숨 하나 바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모든 사람을 위해서 내 목숨
하나 바치는 것을 두려운 일이 아니라 기쁜 일입니다. 그래서 선진국가에
서는 신부와 수녀를 윤리, 도덕의 스승으로 보고 있습니다. 젊은 아이들이
예의 없이 어른들 앞에서 버스 좌석에 앉아 있는 것을 신부나 수녀가 노려
보면 얼른 일어선답니다. 그렇지만 다른 노인들이 아무리 쳐다봐도 본 척
도 안 한답니다. 신부과 수녀가 쳐다보면 말로 표현 안 되는 어떤 두려움
때문에 일어서지 않을 수 없다고 합니다.
제가 말씀드리고자 한 뜻은 자식을 잘 기르는 것이 과연 무엇인지 다시
한 번 생각해 보고 여러분의 어린 자녀들을 복사단에 보내 주시라는 말씀
을 드리고저 한 것입니다. 건강해야 합니다. 신앙심이 있어야 합니다. 공부
도 잘 해야 합니다. 이러한 자녀들이 있으면 복사단에 도전해 보십시오.
금붕어 먹이를 주며
저는 오래 전에 숙소에서 열대어를 길러 본 적이 있습니다. 어항 속의
물고기들은 제가 먹이를 줘야 먹고, 제가 물을 갈아주어야만 신선한 공기
를 마시고 삽니다. 제가 햇빛을 받도록 해 줘야 물고기들은 햇살을 받을
수 있습니다. 어항에 형광 등을 켜 주었습니다. 형광 등의 빛으로 어항 속
에서는 새 수초가 돋아나고 물고기들은 그 속을 유유히 떠다니면서 제가
넣어준 실지렁이를 먹이통에서 꺼내 먹었습니다. 그런 물고기들의 모습을
물끄러미 들여다 보노라면 참으로 별의별 놈이 다 있구나 하는 생각을 하
게 됩니다. 먹이통에서 먹이를 꺼내 먹으면서도 저 혼자 먹으려고 다른 물
고기들의 접근을 힘으로 막는 욕심쟁이 물고기가 있는가 하면, 그래도 그
물고기의 눈치를 보면서 재빨리 먹이를 가로채 물고 나오는 놈도 있고 또
어떤 녀석은 어항 속을 열심히 쫓아 다니면서 큰 놈이 물고 나오다 흘린
찌꺼기를 주워 먹기도 하고 또 어떤 놈은 밑바닥에 가만히 누워 청소하듯
바닥에 떨어진 것만 주워 먹는 놈도 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괜히 먹지도
않으면서 먹는 놈 뒤만 쫓아다니며 훼방만 놓는 녀석도 있습니다. 저는 미
소를 띤 채 그 어항 속의 물고기들을 들여다보며 네놈들이 아무리 그래봤
자 내가 먹이를 주지 않고 물도 안 갈아 주고, 전등도 안 켜주면 한 시도
살지 못할 것이라는 생각을 하며 싱긋이 웃었습니다. 그 물고기 가운데 내
게 감사하는 놈이 한 놈이라도 있는 줄 아십니까? 천만의 말씀입니다. 하
기사 먹이를 주려고 다가가면 아는 척하며 모여들고 갑자기 행동이 부산해
지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먹이를 먹으면서 제가 곁에서 보고 있어도 제가
있다는 것을 느끼거나 감사하다는 표정을 짖는 놈은 한 마리도 없습니다.
저는 이놈들의 노는 꼴을 물끄러미 보다가 시선을 돌려 창 밖의 높은 하늘
을 바라보았습니다.
어항 속의 불빛처럼 파아란 하늘, 거기에 두둥실 떠 있는 흰 구름 몇 조
각을 바라보다 저는 갑자기 섬뜩해짐을 느꼈습니다. 내가 서 있는 이 세상,
어쩌면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지구는 하느님께서 지으신 거대하고 둥근 어
항이 아닐까 싶었기 때문입니다. 그 어항 속의 물고기들처럼 살아 가는 우
리 인간들...
"너희들은 내가 주는 모든 것을 취하면서 정말 내게 도마운 줄 알고 있
느냐?"
하시는 그분의 음성이 어디에선가 은은히 들려 오는 것 같았습니다.
사랑으로 이어지는 생명의 고리
6.25 때 어떤 군인이 페허가 된 한 마을을 점령하여 수색하다 폭격에 맞
아 비스듬히 쓰러져가는 집 안에서 갓난아이의 가느다란 울음소리를 들었
습니다. 그 군인이 문을 열어보니 아기는 입과 옷이 온통 피로 물들어 있
고 곁에 누워있는 어머니는 야윌 대로 야위어 이미 죽은 지 오래 되는 시
신이더랍니다. 그런데 자세히 살펴보니 어머니의 열 손가락은 모두 잘려져
있었습니다. 아기는 어머니의 손가락에서 흘러나온 피를 빨아먹으며 간신
히 살아남았던 것입니다. 포탄 때문에 밖으로 나갈 수 없었던 그 어머니는
젖이 나오지 않자 자신의 손라각을 하나씩 잘라 흘러내리는 피를 젖 대신
아이 입에 물려주어 그 아이를 살린 것입니다.
사람만 그런 건 아닙니다. 동물 중에도 이러한 예는 얼마든지 있습니다.
어떤 종류의 거미는 등에서 진을 내 새끼들에게 먹이다 새끼들의 이빨이
좀 세지면 등껍질을 무르게 해서 새끼들이 파먹도록 하고 자신은 차츰차츰
죽어간다고 합니다.
펠리컨이라는 새는 몸이 쇠진하여 새끼들에게 먹이를 구해다 먹일 힘이
없으면 자신의 가슴을 쪼아 심장에서 나오는 피를 새끼들에게 먹입니다.
마지막에는 제 살점을 뜯어 새끼들에게 먹이로 주면서 죽어갑니다. 그래서
우리 교회에서는 성체성사의 상징으로 펠리컨을 예로 들기도 합니다.
이러한 자연의 신비로움은 결코 사람이나 동물에 국한되는 것이 아닙니
다. 식물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모든 식물의 새싹은 그 어미가 되는 씨앗
속에 든 양분을 먹고 자랍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이 신비스런 자연의 법칙 안에 얼마나 깊은 뜻이 들어
있습니까?
모든 생명의 역사는 '사랑'이란 끈으로 이어지고 있습니다. 사랑 없이는
이어질 수 없는 것이 바로 생명의 역사입니다. 지극한 사랑 없이는 자식을
키울 수 없으며 새끼를 낳아 기를 수가 없습니다. 이 신비한 자연의 섭리
안에서 우리는 세상만물을 지으신 하느님에 대해 경외감을 느끼며 다시 한
번 그분께서 우리에게 무언으로 역사해 보이시는 오묘한 사랑의 뿌리를 확
인할 수 있어야 합니다. 주님 또한 그러셨습니다. 그분은 세상에 오셔서 우
리에게 사랑하는 법을 가르쳐주셨고, 삶을 통하여 보여주셨으며, 죽음으로
인간에 대한 하느님의 사랑을 보여주셨습니다.
위에서 말씀드린 세상만물의 생성과정을 유추해 보면 창조주의 습성을
알 수 있지 않겠습니까? 최고의 걸작품으로 만든 인간이, 자신을 대신해서
만물을 지배하라고 만드신 그 인간들이 자꾸 죄나 짓고 지옥의 나락으로
굴러떨어져 죽어가는 것을 보다 못해 하느님은 수많은 예언자들을 보내셨
습니다. 그래도 안되니까 끝내는 자신의 사랑하는 외아들을 이 세상에 내
려 보내시어 사랑을 가르쳐주셨습니다. 우리는 오늘 '밀알 하나가 땅에 떨
어져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남아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는
말씀에서 심오한 사랑의 의미를 깨달아야 하겠습니다. 아울러 사랑의 모범
을 보여주신 예수님께 대한 믿음도 더욱 굳게 키워야 하겠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 모두 진실로 회개해야 합니다.
이 사랑으로 가득찬 창조의 기운 안에 살면서도 우리는 아직껏 이기적인
사랑 속에서만 살아가고 있습니다. 내 자식도 내 마음에 들어야만 사랑하
는 우리 인간들, 내 뜻에 맞으면 사랑하고 내 뜻에 맞지 않으면 증오를 내
뿜는 것이 우리들 인간입니다. 이런 것은 사랑이라 말할 수 없습니다. 그러
기에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에게 아직도 사랑을 외치고 계신 것입니다. 우리
는 오직 그리스도를 통하여 그분의 참사랑의 의미를 깨쳐야 합니다. 껍질
을 깨는 아픔을 느끼며 회개하고 보다 높은 차원의 그리스도적 사랑으로
우리 모두 거듭나야 합니다. 그때에 이르러서야 우리는 십자가가 무엇인지
를 알고 이 생명의 역사에 깃들어 있는 하느님의 참사랑이 무엇인가를 진
정으로 깨달을 수 있을 것입니다.
참사랑을 깨닫는 것은 보통사람으로서는 하기 어려운 것입니다. 철저한
자기 반성과 뉘우침을 바탕으로 한 진정한 회개 속에서 얻어지는 사랑이야
마로 진실로 믿는 이들에 대한 하느님의 축복입니다. 좁디좁은 가슴으로
내 마음에 드는 것만 사랑하는 시시한 사랑을 하면서 우리가 감히 어떻게
하느님의 사랑을 대하겠습니까? 밀알이 죽지 않으면 언제나 한 알로 남습
니다. 죽읍시다! 먹힙시다! 즐겁게 죽고, 즐겁게 먹힙시다! 우리의 주님이
바로 그렇게 십자가에서 돌아가셨기 때문에 이제 이렇게 많은 열매를 맺으
신 것입니다. 그 한 알의 밀알은 십자가의 거름으로 썩어 바로 오늘 우리
의 제단에 새로운 빵으로, 새로운 그리스도로 우리에게 오십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이는 내 살이니 받아 먹으라."
어쩌면 이렇게도 지극하신 사랑을 주시는지... 우리가 받아 먹는 이 성체
는 바로 펠리컨이 제 새끼에게 떼어주는 가슴살과 같으며, 아기에게 자기
의 피를 빨아먹이며 죽어간 어머니의 피와 같은 사랑, 바로 그 자체입니다.
내 자식이 내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미워한다면 나는 과연 하느님 마음
에 얼마나 들었는지 생각해 보십시오. 하느님은 오늘도 우리를 이렇게 찾
아오시며 '내 살을 받아 먹으라. 내 피를 받아 마시라' 하십니다. 우리는 이
토록 놀라울 정도의 사랑을 하느님으로부터 받아 먹으면서 왜 우리들 생활
속에서는 실천하기 못하는지 부끄러움을 느끼고 더욱 더 깨우쳐야만 하겠
습니다.
퍼내도 넘치는 샘물
초기의 그리스도교 신자들은 가진 것을 서로 나누며 사랑을 중심으로 뭉
쳐 공동생활을 했습니다. 자기가 가진 재물을 팔아 무리가 함께 먹고 입을
것을 사는 데 주저하기 않았으며 가진 재물을 내놓지 않고 숨기거나 재물
을 팔아 따로 자기 몫을 감추면 죄가 되어 벌을 받는다는 생각을 가졌습니
다. 그러므로 그 당시 많은 사람들이 그리스도교인들의 살아가는 모습을
보면서 '저 사람들에게는 서로 사랑한다는 기초가 있구나.'하며 무척 부러
워했다고 합니다. 하나가 되기 위하여 서로 사랑하는 것은 바로 오늘날까
지도 우리 교회가 번창하는 기초가 되고 있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세상에 올 때 빈손으로 왔듯이 세상을 떠날 때도 무엇 하
나 몸에 지니지 못한 채 빈손으로 떠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이 세
상에서 우리가 소유하고 있는 것들도 결코 영원한 소유일 수 없는 것입니
다. 우리는 주인이 아니라 다만 관리인에 지니지 않습니다. 내가 가진 재
산, 내게 딸린 식구나 직원들은 내 소유가 아닙니다. 관리인이 잠시 내게
있을 뿐인 것입니다.
답십리본당 증축공사를 하는 과정에서 처음에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많
은 공사비가 소요되게 되었습니다. 증축건물의 뒤편에 자리한 단독주택 주
인이 그간에 몇 차례 사람을 넣어 협상을 시도해 봤으나 끄떡도 하지 않더
니 증축건물이 자기집 때문에 3m나 들어가 모양없이 지어진다고 하는 소
리를 듣고는 찾아와 '나 때문에 성당 건물을 보기 싫게 지어서는 안 된다'
면서 선선히 매매에 응해 시세에 맞게 그 집을 구입하게 되었습니다. 뿐만
아니었습니다. 외부계단이 도시미관에 저촉된다 하여 이를 헐어내고 내부
계단을 변형해야 하고 뒷벽도 누가 봐도 성당 건물답게 치장해야 될 것 같
아 처음에는 생각지도 않았던 비용들이 늘어나게 된 것입니다.
그렇게 되자 신자들은 '신부님께서 결단을 내려주셔야 한다'고 요청해 왔
습니다. 신자들이 말한 결단이라는 것은 주임신부인 내가 신자들을 일일이
면담해서 생활형편에 따라 증축기금을 할당하라는 것이었습니다.
"전세입니까? 자기 집입니까?"
"제 집입니다."
"몇 평짜리 집이지요?"
"38평형 아파트입니다."
"그럼 300만원 내세요."
이런 대화가 사제와 신자 강의 대화라면 너무 삭막하지 않습니까? 설령
100평짜리 집에 산다 하더라도 그 집 살림살이 속 내용도 모르면서 일률적
으로 평당 얼마씩 내라고 한다는 것도 사리에 합당치 않습니다. 비록 성전
건립을 위한 모금이라 하더라도, 또한 그런 방법이 일부 다른 본당에서 쓰
고 있는 방법이라 하더라도 저는 차마 그렇게 하기 싫었습니다. 그래서 저
는 신자들에게 강론을 통해 내 평소의 지론인 십일조를 바치라고 말씀드렸
습니다.
"땅에서 나는 곡식이든 나무에 열리는 열매이든 땅에서 난 것이 10분의
1은 야훼의 것이니 야훼께 바칠 거룩한 것이니라."
그렇습니다. 오직 관리인일 뿐인 우리는 부지런히 일해 소출을 내어 그
10분의 1은 온 땅의 주인이신 야훼 하느님 몫으로 내놓은 것이 당연한 것
입니다. 주인이 전부를 다 내놓으라는 것도 아니고 10분의 1을 내라고 하
셨는데 그것도 못 내겠다면 거저 먹자는 것 아닙니까? 10분의 1을 내어야
10분의 9가 진정 내 것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모두 내 뜻으로서가 아니라 이 세상의 주인이신 하느님의 뜻에
따라 하느님으로부터 내 생명을 받았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분으로부터 선
택까지 받아 믿는이가 된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이 세상을 살면서 얻
는 것의 10분의 1은 당연히 주인이신 주님을 위해 내놓아야 합니다.
애급의 노예생활에서 해방되어 나오던 날 야훼 하느님께서는 애급의 모
든 맏아들과 가축의 첫 배에서 난 새끼들은 모조리 치셨지만 이스라엘의
모든 맏아들과 가축들은 하나도 손대지 않으셨습니다. 그런 야훼 하느님께
서 '이스라엘의 맏아들과 가축의 첫 배에서 난 새끼들은 야훼 하느님의 소
유라고 규정한다'고 해서 어폐가 되는 일이 아니지 않습니까? 택함을 받는
다는 것이 공짜일 수 없다는 것입니다.
개신교에서는 이 십일조가 제대로 지켜지고 있습니다만 우리 천주교회에
서는 유명무실해져 있습니다. 오랜 역사와 전통을 가진 우리 천주교회가
오늘날 개신교의 왕성한 활동에 따르지 못하는 이유가 저는 바로 이 십일
조의 유명무실, 천주교 신자들의 십일조 불이행에 기인한다고 생각합니다.
야훼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보호하시며 분명히 그 대가를 요구하시는 분
이십니다. 아브라함과 아브라함의 많은 후손들에게 하느님이 되어주기로
약속하시며 '3년 된 암소와 3년 된 암염소와 3년 된 숫양과 산비둘기 집비
둘기 한 마리씩을 나에게 바쳐라'하시지 않으셨습니까. 야곱이 늙어 얻은
애지중지하던 아들 이삭을 재물로 바치라 하시며 시험까지도 서슴지 않으
셨던 분이 바로 야훼 하느님이 아니십니까.
예수님께서도 '너희의 재물이 있는 곳에 너희의 마음도 있다'하며 재물창
고를 하늘에 마련하라고 가르치고 계십니다. 내 수입의 10분의 1, 즉 십일
조를 바치는 것은 바로 내가 이 세상에서 번 재물을 하늘나라의 재물창고
에 넣어두는 것이나 다름 없습니다.
실제의 예로 생각해 보십시다. 사람들은 십일조를 내면 마치 내 수입의
10분의 1이 손해인 줄로만 알고 있는데 실제로 그렇게 해보면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제 개인의 경우 본당 주임신부로서 받는 금액, 신자들이 드리는
미사 예물 중 일부, 잡지나 신문에 기고해서 받는 원고료, 평화방송 교리상
담에 나가 받는 금액, 기타 책을 출판해 받는 인세 등을 합쳐 월 평균으로
하면 1백 60만원 정도 됩니다. 저는 그 중 10분의 1을 교구로 보냅니다. 저
뿐 아니라 매달 십일조를 낸 사람이 1년이 지난 뒤에 계산을 해보면 전에
십일조를 내지 않을 때보다 생활이 궁색해졌다든가 재산이 줄었다든가 하
는 사람은 결코 한 사람도 나오지 않습니다.
우리의 계산대로라면 십일조를 낸 만큼 연간 소득이 줄든지 재산이 줄어
야 하는 것 아닙니까? 그런데 정작 해보면 그렇지 않은 것입니다. 십일조
를 내면 재산이 축난다는 것은 부족한 우리 머리 속의 계산일 뿐입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그 몇 배로 갚아주시기 때문에 우리를 절대로 축나게 하
시지 않는다는 것을 일깨워 주실 뿐입니다. 물이 고이면 썩어도, 샘물은 퍼
마시고 또 남을 퍼주어도 항상 넘치는 이치과 같은 것입니다.
우리 천주교회가 왕성한 교회활동을 하기 위해서는 신자들이 십일조를
내는 것을 의무화해야 합니다. '너희 재물이 있는 곳에 너희의 마음도 있
다'는 예수님 말씀이 얼마나 지당하신 말씀입니까. 십일조를 열심히 바치는
사람들은 하늘창고에 그만큼 재물을 쌓아놓은 사람들이니 이미 자신이 하
늘창고에 쌓은 재물이 아까워서도 결코 쉽게 하느님 곁을 떠나지 않을 것
입니다. 십일조를 열심히 내는 사람이 많아지면 냉담하는 교우가 생길 까
닭이 없습니다. 십일조를 내게 되면 오히려 더 많이 벌어 더 많이 쌓으려
할 것이라는 것이 제 생각이며, 이것이 바로 재물이 있는 곳에 우리 마음
도 있다며 우리 인간들의 속마음을 깊숙히 간파하신 예수님의 뜻일 것입니
다.
신부님이 사람 차별해?
미사 때 성체를 받아드는 신자들의 거칠고 투박한 손을 보면 때때로 가
슴이 멍해질 때가 있습니다. 특히 실비아 할머니의 손을 볼 때마다 참 힘
들게 사시는 분이로구나 하는 생각에 가슴 한 구석이 아릿하게 저려옴을
느낄 때가 많았습니다. 성당 증축 공사를 하면서 신자들로부터 봉헌금을
거둘 때였습니다. 할머니께서 제 손에 돈봉투를 꼭 쥐어 주시는 것이었습
니다.
"할머니, 형편에 맞게 내세요. 그리구요, 다음부터는 봉투에 할머니 이름
을 쓰셔서 사무실에다 내세요."
몇 번을 그렇게 말씀 드렸지만 할머니께서는 제 말에는 아랑곳없이 빈번
이 저에게 직접 돈봉투를 주시는 것이었습니다.
"뭘 그래. 창피스럽게 어떻게 사무실에 내나. 쬐끔 넣은 걸 가지고."
"글씨 쓸 줄 알아야제. 이름 안 씀 어때. 하느님이 다 아실티지, 뭐."
할머니의 대답은 여러 가지였습니다만 그때마다 제 가슴은 더욱더 아팠
습니다. 단칸 지하 셋방에는 남비 몇 개와 가스 버너 한 개가 달랑 놓여
있더라는 이야기를 들었기 때문입니다. 어느 날 저는 용기를 내서 돈봉투
를 가져오신 할머니께 말씀드렸습니다.
"할머니, 이젠 증축기금 그만 내셔도 돼요. 할머니 생활은 어떻게 하실려
구 그래요. 그동안 너무 많이 내셨잖아요."
"왜, 내 돈은 어디에 뭐가 묻었어? 사람 괄시허나? 신부님이 왜 그러셔?
사람 차별해?"
"할머니, 제 뜻은 그게 아니구요. 할머니 생활하시기도 버거우시잖아요.
그래서 그래요."
"그만 둬. 내가 세끼 밥을 못 먹는 것도 아니구 옷이 없어 벗구 다니는
것도 아니구, 나 남한티 괄시받을 짓 한 거 하나두 없어. 하느님한티 물어
봐. 내 돈 깨끗한 돈이여. 왜 안 받으려구 그래?"
저는 할 말을 잃고 두 손으로 그 돈을 받아들었습니다. 코끝이 찡해오는
아픔을 우리 주님 당신께서도 느끼시리라 믿으면서 말입니다.
신부님, 우리 신부님
지난 여름 그 무덥던 날, 비오듯하는 땀으로 옷을 흠뻑 적시면서 거푸집
을 뜯어 어깨에 지고 계단을 걸어 내려오시던 신부님의 모습을 우리는 결
코 잊지 못할 것입니다. 젊고 건장한 우리도 힘에 겨워 얼굴을 찡그릴 수
밖에 없었던 그 무거운 짐을 지고서도 평온하기만 하셨던 신부님의 표정이
생각납니다. 사제서품 25주년을 맞는 조촐한 은경축 잔치마저도 한사코 만
류하신 신부님의 깊은 속뜻을, 형편이 어려운 자식이 마련하는 찬치상이
부모 마음을 아프게 한다는 것을 저희는 잘 압니다. 그러나 저희에게 너무
나 많은 것을 주신 신부님이기에 저희는 부끄럽습니다. 답십리 성당 서진
석
강론 중에 신자들의 무분별함과 안일함을 책하시며 열변을 토하실 때는
마치 주변에 있는 물건을 집어서 던지기라도 할 것 같은 강경한 어조로 우
리를 벌벌 떨게 만드는 무서운 신부님. 그러나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신부님이 얼마나 다정다감하며 자상한 분인지를. 답십리 성당 김사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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