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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영화,리뷰,

악녀시대

by Casey,Riley 2023. 6.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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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악 녀 시 대
이상우

                 차  례
1. 한낮의 정사
2. 질투에 불타는 여자
3. 자하문의 총성
4. 사라진 여인
5. 야수들의 잔치
6. 이유없는 자살
7. 새벽의 도망자
8. 음모가 이루어지는 곳
9. 승부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10. 두번째 자살
11. 예술적인 살인
12. 묘지앞에 서다
13. 수풀 속으로 숨다
14. 비오는 날의 밀담
15. 뜻밖의 방문객
16. 추악한 정치꾼들
17. 제 3의 살인
18. 책상위의 정사
19. 여자의 원한
20. 저울위의 세상
21. 미치고 싶은 밤
22. 여자와 정치가
23. 미망인의 증언
24. 사랑 도피의 종말
25. 벗겨지는 흑막
26. 지문의 수수께끼
27. 여자의 눈물
28. 강변의 데모가
29. 오명자의 고백
30. 사라진 부부
31. 밝혀지는 진실
32. 경감님 미안해요




         1. 한낮의 정사
  왁자지껄한 임시 선거 사무실. 아직 입후보자 등록
  이 시작되지 않았기 때문에 간판은  그냥 민주보수당
  방태산 사무실로만 붙어  있는 허름한  빌딩 2층이었
  다. 몇군데 임시 칸막이를 해서 접대실, 위원장실 등
  을 만들고 고가구점에서 사온 낡은  소파와 집기들이
  무질서하게 놓여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일당 5천원
  에서부터 3만원까지 받는 운동원들 백여 명이 들랑거
  리고 있으니 온전한 집기인들 그대로 있을 리가 없었
  다.
  운동원은 대부분이 가정 부인들이었고 개중에는 할
  일 없는 복덕방 노인들도 더러 섞여 있었다. 3만원씩
  받는 고급 운동원은  활동장이란 감투를  쓰고 있는,
  동네 유지 출신들이다.
  몇 번이나 출마했다가  2, 3등으로  떨어진 방태산
  은, 이번에 당적을 민주보수당으로  바꾸어 출마하면
  꼭 당선될 것이라는 확신을 가지고 있었다.
  한 달쯤 뒤면 입후보자 등록이 시작되고 정식 선거
  운동이 스타트될 것이다. 그러나 방태산은 전에 하던
  대로 불법적인 소위 사전 운동을 벌써 시작한 것이었
  다. 전에보다 운동원을 거의 배로 늘리고, 있는 재산
  없는 재산을 모두 털어넣고 이번엔  승부를 내겠다는
  각오를 하고 있었다.
  그러나 천성이 남 속이기 좋아하고 권력 주변을 배
  회하면서 재산 긁어 모으는 비상한 재주를 발휘할 뿐
  아니라 여자들을 지나치게 좋아해 신망을  얻지 못하
  는 정치 지망생이었기 때문에 이번에도  당선될 것이
  라는 장담은 아직 아무도 못했다.
  방태산이 2층에서 쫓기다시피 계단으로 내려섰다.
  "나 옆집 여관에서 눈 좀 붙이고  올께 급한 일 있
  으모 전화해라."
  그는 뒤따라 내려서는 비서격인  방총무를 보고 퉁
  명스럽게 말했다. 방총무는 그의 육촌동생이었다.
  "저, 형님!"
  "임마 위원장이라고 부르라 안캤나!"
  방태산은 버럭 화를 냈다.
  "앗 참, 위원장님, 활동장들이 실탄 없다고 아우성
  입니다. 오늘 저녁때 다섯 방씩 주기로 했는."
  "임마, 내가 총알공장 차려놨나? 웬걸 다섯 방씩이
  나 돌라카노? 없다캐라."
  실탄이란 선거 바닥에서 통하는  말로 현금을 뜻한
  다.
  방태산은 휭하니 계단을 내려와  옆집 여관으로 걸
  어갔다.
  "안녕하셔유, 위원장님!"
  선거관리 사무실로 들어오던 오명자가 공손히 인사
  를 했다.
  오명자는 8천원짜리 운동원으로 하루 종일 표를 주
  우러 다니다가 저녁때 들어와 보고를 하고 퇴근한다.
  방태산의 경력과 사진이 인쇄된  전단을 넣어 가지
  고 다니기 위해 어울리지 않는 큰  핸드백을 들고 다
  닌다.
  썩 미인은 아니지만 작고  오막조막하게 생긴 얼굴
  이 귀여웠다. 작은 코와 이마, 그리고  양 뺨이 햇볕
  에 익어 빨갛게 되었다. 귀엽게 보자면 연지 바른 인
  형 같았다. 체구도 얼굴에 어울리게 자그마하지만 가
  슴은 매우 큰 편이어서 육감적이었다.
  미인이라고 하기보다는  여성다운 여자라고  할 수
  있었다. 나이는 갓 서른인데 일찍  결혼해 딸이 둘이
  나 있었다.
  남편은 일류 대학 철학과를  나왔다고 하지만 밤낮
  빈둥거리며 놀기만 하는 고등 룸펜이었다.
  오명자가 이런 저런 험한 일까지 하면서 살림을 꾸
  려 나갔지만, 남편은 모른 척하고 제 멋에 겨운 세월
  을 보냈다.
  파출부 노릇을 주로 하던  오명자는 친구의 소개로
  이곳 일당 운동원이 되었었다.
  "아, 오여사구나."
  방태산이 반갑게 인사를 받으며 멈추어 섰다.
  "아이, 위원장님도! 제까짓게 무슨 여사예요, 여사
  는"
  "무신 소리고? 오명자 같은  여자를 여사라 안카고
  누를 여사라카노? 인물 좋고 예절 바르고"
  방태산은 두 팔로 제스처를  써가면서 너스레를 떨
  었다.
  "너무 그러지 마세요. 부끄러워요."
  오명자는 양 볼에 홍조를  띄우면서 정말 부끄러운
  듯 얼굴을 숙였다.
  "저, 여기 좀 따라 오이소. 내 의논할 게 있심더."
  방태산은 오명자의 소매를 당기며  앞장 서서 여관
  으로 들어갔다.
  그는 빌려 놓고 쓰는 2층  구석방으로 오명자를 데
  리고 들어갔다.
  온돌방 한가운데 낮은 책상이 놓여 있고 책상 위에
  는 전단같은 지저분한 인쇄물이 무질서하게  놓여 있
  었다.
  바닥에는 다 마시고  난 맥주병 서너  개가 뒹굴고
  있고 그 옆에는 이불이  펴 놓은 채로  그냥 있었다.
  여기 저기 종이 나부랑이며 신문들이  제멋대로 흩어
  져 있었다.
  오명자는 쭈뼛거리면서, 겁에 질린  토끼마냥 눈을
  둥그렇게뜨고 방안을 둘러보았다.
  "방이 좀 지저분하재. 아이고 피곤해라.  거 좀 앉
  으이소."
  방태산은 요 위에 털썩  주저앉으면서 오두마니 서
  있는 오명자를 보고 말했다.
  "아따, 내가 사람 잡아 묵는 담보인기요? 거 좀 앉
  으소. 내당신  남편 취직건  땜에 들어오라고  한긴
  데"
  오명자는 눈이 번쩍 뜨였다. 전부터  일만 잘 되면
  남편 취직을 좀 부탁하려던 참인데 먼저 이야기를 꺼
  냈으니 얼마나 좋은 기회냐고 그녀는 생각했다.
  "아따, 좀 앉으소."
  방태산은 오명자의 얼굴이 풀어지자 히죽이 웃으며
  재촉했다.
  "이것 좀 치워야겠네요."
  오명자는 방바닥에 흩어진 맥주병이며 종이 조각들
  을 챙기기 시작했다.
  방태산은 요 위에 팔베개를  하고 드러누워 부지런
  히 방바닥 정리를  하는 오명자를  바라보고 있었다.
  장판 위를 바삐 움직이는 오명자의 잘록한 발목과 희
  고 탄탄해 보이는 장딴지를 은근히 바라보며 즐겼다.
  그의 시선은 장딴지를 타고 올라가 체크 무니 포플
  린 치마에 감춰진 볼륨 있는 허벅지와  히프 위로 몇
  번이나 오르락내리락했다.
  금새 방이 말끔히 정리되었다.
  "자, 맥주나 한잔 하면서 이야기합시더."
  방태산이 벌떡 일어나 조그만  냉장고에서 맥주 한
  병과 컵 2개를 꺼냈다. 오명자는 단정히 앉아 맥주를
  따고 한 잔 가득히 부었다.
  "자, 우리 당의 승리를 위하여."
  방태산이 건배를 한 뒤 잔을 비웠다.
  "아, 와 안 묵는기요? 이거 맹물이나 마찬가지라카
  이."
  오명자는 하는 수  없이 잔을 얌전히  비워야만 했
  다. 술은 입에도 대 본 일이 없는  오명자는 금방 얼
  굴이 화끈해지고 가슴이 콩콩 뛰기 시작했다.
  "이번에 내가 당선이  안 되더라도  오여사 남편은
  책임지께. 일류 대학을 나와 가지고 논다카이 이눔의
  세상이 제대로 안된 거 아이가. 내가 당선이 되면 썩
  좋은 자리 갈끼고  낙선되면 그냥 입에  풀칠이나 할
  곳에 넣어줄께. 그 일일랑 안심 콱 놔라."
  "위원장님, 정말 고맙습니다.  이 은혜는  꼭 잊지
  않겠습니다."
  오명자는 고개를 깊숙이  숙여 인사를 하고  난 뒤
  잔을 내밀었다.
  그러나 방태산은 잔을 받지 않고 오명자의 두 손을
  움켜쥐었다. 오명자는 움찔하기는 했으나  손을 뿌리
  치지는 못했다.
  "헤헤, 손이 이기 뭐꼬? 그 예쁜 몸매에 일을 얼마
  나 했으모 손이 이리 거치노? 어디 팔목 좀 보자."
  그는 오명자의 팔소매를 걷어올렸다.
  "아이, 위원장님!"
  오명자가 팔을 빼내려고 하자 방태산이 잡아당기는
  바람에 그녀는 그의 가슴에 엎어지고 말았다.
  방태산은 재빨리 오명자를 끌어안고 방바닥에 나뒹
  굴어졌다.
  "위원장님, 이러시면"
  "너 같은 미인은  첨 봤다. 여기  아무도 없으니께
  걱정 말아라. 쥐도 새도 모른다."
  "위원장님"
  "가만 있으라카이. 내,  남편 취직은  책임질 테니
  까."
  방태산의 육중한  가슴을 밀어내던  오명자는 남편
  소리가 나오자 저절로 팔에서 힘이 빠졌다.
  방태산은 오명자가 저항을 포기했다는 것을 알아차
  리자 그녀의 옷을 재빨리 벗겨냈다.
  오명자는 절망적인 얼굴로 눈을 꼭 감은 채 꼼짝도
  하지 않고 누워 있었다.
  그녀의 옷은 뱀의 허물처럼 벗어져 나갔다. 덮쳐오
  는 거센 파도에  모래섬이 무너지듯,  그녀의 정조가
  무너진다고 생각하며 그녀는  눈물이 고이기  시작했
  다.
  '그이가 떳떳한 자리에 취직만  한다면 참아야
  지. 여보, 용서해 주세요.'
  오명자는 속으로  흐느끼며 남편에게  용서를 빌었
  다.
  손은 거칠고, 얼굴은 햇빛에 그을렸지만 그녀의 속
  살은 희고 매끄러웠다.
  탄력 넘치는 두 개의 유방은 30대답지 않게 풋풋하
  고 탐스러웠다. 배꽃 잎을 연상케  하는 그녀의 아랫
  배와 팽팽한 히프는 작은 여관방을 꽉  채운 것 같은
  착각을 일으키게 했다.
  방태산은 입가에 비굴한 미소를  흘리며 그녀의 순
  박한 알몸을 천천히 내려다보고 있었다.
  "네 남편은 내가 책임진다카이"
  그는 혼잣말처럼  중얼거리며 떨고  있는 오명자를
  절망의 나라로 밀어넣기 시작했다.
  방태산의 이러한 비겁한 장난은  선거철이 올 때마
  다 되풀이되던 일이었다.
       2. 질투에 불타는 여자
  추경감은 모처럼  일찍 들어와  아내와 외동딸에게
  체면이 섰다고 생각했다.
  결혼한 지 25년. 아내의 얼굴도  제대로 보지 못한
  채 바쁘고 고달픈 형사 생활이 흘러가고 이젠 얼굴에
  주름살투성이만 남았다. 그가 어느날 화장실 거울 앞
  에서 본 자신의 모습은 참으로  한심하다고 생각했었
  다.
  25년 동안 집에 들어와서 세 식구가  함께 앉아 오
  손도손 저녁을 먹어본 것은 손가락으로  꼽을 정도로
  적다고 생각했다.
  "나미야, 우리 오늘 엄마하고 외식할까?"
  추경감이 딸을 핑계대고 아내의  눈치를 슬쩍 보았
  다.
  나미라는 이름은  추경감이 붙였다고  하지만 실은
  아내가 붙인 이름이었다.
  첫아이인 나미를 낳았을 때였다. 아내가 야근을 하
  고 있는 남편 추순경에게 전화를  걸어 알렸다. 그러
  나 사건에 쫓기고 있던 추순경은 그냥 건성으로 대답
  을 했었다. 화가 난 아내는 오늘같은 날도 범인과 싸
  워야 할 사람이 당신뿐이냐고 투정을 부렸다. 추경감
  은 그대로 화가 나서 "남이야" 하고  버럭 소리를 지
  르고 전화를 끊어버렸다. 화가 난  아내는 아이 이름
  을 "남이야" 라고 붙여버렸었다.
  "너희 아빠 늘그막에 철난다."
  아내가 빈정대기는  했으나 즐거운  표정으로 옷을
  갈아입고 거실로 나왔다.  모처럼 세  식구가 외식을
  나가는 조그만 행복의 순간이었다.
  "딩동"
  그때 초인종이 울렸다. 세 사람은  서로 얼굴을 쳐
  다보았다.
  "누굴까?"
  "내가 알아요? 또 너의 아빠 친구들인가부다."
  아내는 투정부터 나왔다.
  그러나 거실로 들어선 사람은  추경감의 친구가 아
  니었다. 키가 크고 얼굴이 잘 생긴 여인이었다. 얼핏
  보아 나이는 20대 후반이거나 30대 초반처럼 보였다.
  세련된 옷차림에 길게 늘어뜨린 머리가 품위 있는 여
  인으로 보였다.
  "저녁때 불쑥 찾아와서 죄송합니다. 추경감님께 꼭
  드릴 말씀이 있어서요."
  여인은 공손히 추경감한테 인사를  하며 천천히 말
  했다.
  화장기가 있는 듯  만 듯한 얼굴에  옅은 분홍색의
  입술 연지가 지성적으로 보였다.
  "저를 어떻게 아셨죠?"
  추경감이 약간은  당혹스럽게 물으며  아내를 흘깃
  보았다. 아내가 긴장한 표정으로 여인을 뚫어지게 바
  라보고 있었다.
  "경찰관으로 있는 친구 남편에게서 들었습니다. 초
  면에 당돌하게 집까지 찾아온 것을 용서하십시요. 하
  지만 경감님께 꼭 부탁드릴 일이 있어서입니다. 잠깐
  만 시간을 내주실 수 있는지요?"
  추경감은 거절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누추하지만 좀 앉으시지요."
  추경감은 낡은 소파에 같이 앉기를 권했다. 웬만한
  집이라면 벌써 쓰레기장으로 보냈을 법한, 정말 낡은
  응접세트였다. 그나마 좁은 아파트라 여기 저기서 여
  닫는 문에 스쳐 모서리가 볼품없이 닳아 있었다.
  "그럼 실례하겠습니다."
  여인은 소파에 다소곳이 앉았다.  추경감이 나미와
  아내를 흘깃 보았다. 나미는 불만스러운 모습으로 제
  방에 들어가고 아내는 차를 준비하러 부엌으로 갔다.
  "저는 방배동에 사는 정필대라는  사람의 아내입니
  다. 그냥 송희라고만 불러주세요."
  "예, 전 추라고 합니다."
  추경감은 멋적은 듯 담배를 꺼내  물었다. 불이 잘
  켜지지 않는 고물 지포 라이터를 꺼내들고 계속 철거
  덕거리며 불을 붙이려고 애를 썼다.
  "그래 무슨 말씀이신지요?"
  그는 담뱃불 붙이는 걸 포기한 듯 라이터를 호주머
  니에 도로 넣었다.
  "이건 개인적인 부탁입니다만"
  "말씀하세요. "
  "경감님은 우리나라에서  제일 가는  수사관이라고
  들었습니다. 경감님이라면 꼭 저를  도와주시리라 믿
  습니다."
  ""
  "저의 남편 정필대를  좀 조사해  주시지 않겠습니
  까? 아니,조사가 아니라 무슨 짓을 하는지 좀 알아주
  시지 않겠습니까?"
  "예?"
  "아무래도 그이가 수상해요. 혼자  밤에 이상한 사
  람들을 만나면서 쏘다녀요. 그 중에도 예쁜 아가씨나
  여염집 유부녀 같은 여자도 만나고 옛날엔 참 착
  실한 사람이었어요. 그런데  요즘 여자가  생긴 것이
  분명해요. 그래서 부정한 방법으로 돈을 끌어대고 이
  상한 여자 들과 놀아나는 것 같아요."
  "부탁이란 그겁니까?"
  추경감은 아내가 거칠게 놓고 가는 인삼 찻잔을 들
  면서 어이가 없다는 듯이 송희를 쳐다보았다.
  "저에게는 생사가 걸린 일입니다.  만약 그이가 나
  를 배신하고 다른 여자와 놀아난다면  전 죽어버리겠
  어요. 아이 분해."
  여자는 정말 눈물을 찔끔 찍어냈다.
  "송희씨, 나는 국가에서 월급을  받고 일하는 경찰
  관입니다.
  그런 개인적인 일을 할 만큼  한가하지 못해요. 그
  만 돌아가실까요?"
  추경감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경감님, 제가 왜 그걸 모르겠어요? 그래서 댁으로
  찾아온 겁니다. 경감님  같은분이면 절  꼭 도와주실
  거예요. 그렇죠?"
  "이봐요, 송희 여사 제발 좀  돌아가 주십시오. 그
  런 건 외국의 사립탐정 같은 사람이 돈 받고 하는 일
  이요."
  "돈이라면 저도 얼마든지 있어요, 경감님!"
  "이런 딱한 노릇이 있나!"
  추경감은 정말 어떻게 해볼 수 없는 여자라고 생각
  했다.
  "나미야, 우리 나가자."
  추경감이 소리치자 나미와 아내가 거실로 나왔다.
  "어디 외출하시려는군요. 시간을 뺏어 죄송합니다.
  그럼 내일 다시 들르겠습니다. 안녕히 계십시오."
  송희는 그렇게 말하며 뜻밖에도 쉽게 물러갔다.
  "별 미친 여자 같으니라고"
  추경감이 안도의 숨을 내쉬며 투덜거렸다.
  그러나 안도의 숨을 내쉴 단계가  아니었다. 그 이
  튿날 밤 송희는 다시 추경감의 아파트로 찾아왔다.
  "허허, 그런 일은 홍신소에나 알아보라니까요."
  추경감은 아예 송희를 밀어내려는 태도로 말했다.
  "경찰은 민중의 지팡이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지팡이도 지팡이 나름이지요. 우리가 뭐 정치가라
  도 되는 줄아십니까?  저희가 하는 일은  범죄, 그
  중에서도 강도살인등에 관계되는 것만 취급하는 강
  력반이란 말씀입니다."
  추경감은 답답한 심정에 반도 안 피운 담배를 재떨
  이에 거칠게 문질러 꺼버렸다.
  '어느 놈이 내 얘기를 이  여자에게 했는지 알기만
  해봐라. 그 녀석을 그냥'
  추경감의 행동은 그런 그의  생각을 대변하고 있었
  다.
  "그럼 범죄와 관계되는 일이라면 맡으실 수 있으시
  다는 거죠?"
  "그렇긴 하지만 그것도 계통을 밟아야 하는 것이지
  요. 먼저신고를 하고"
  "그럴 수 있다면야 얼마나  좋겠습니까? 하지만 남
  편이 확실한 범죄를 저지르고 있는  것도 아닌데, 어
  떻게 함부로 신고를해서 남편의 체면을  손상시킬 수
  있겠어요? 만약에 제 짐작이 틀리기라도 했다면 저는
  다시는 남편 앞에서 고개를 들 수가 없을 거예요."
  추경감은 문득 이상한 분위기를  느꼈다. 처음에는
  남편의 부정을 조사해 달라던 투의 부탁이 어느덧 범
  죄의 냄새를 풍기고 있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남편 되시는  분이 범죄  단체와 연관이
  있는 것 같다는 말씀인가요?"
  "꼭 그런 것은 아니지만"
  '단수가 높은 여자로군.'
  추경감은 얼굴을 약간 찌푸렸다. 자신이 송희가 쳐
  놓은 덫에 걸려드는 것 같은 생각이 자꾸 들었다.
  "부군이 범죄와 관련이  되어 있는  듯한데 경찰에
  신고하자니 혹시 잘못 생각한 것이면  가정불화가 생
  길 것 같고 그냥 두자니 영  마음이 놓이지 않는다는
  것인가요? 아니면 여자와 놀아나는 것 같은"
  "둘 다라고 생각할 수는 없을까요?"
  송희는 긴 머리를  쓸어 넘기며  대답했다. 그러고
  보니 그녀는 자주 머리를 쓰다듬는 버릇을 가지고 있
  었다.
  '완전히 덫에 걸렸군.'
  그 모습을 바라보며 추경감은 다시 한숨을 푹 내쉬
  었다.
       3. 자하문의 총성
  '정치가에게 한두 번 당해 보았나?'
  강형사는 볼이 탱탱  부어 중년 남성의  뒤를 쫓고
  있었다. 들킬 테면 들키라지 하는  식으로 별로 주의
  도 하지 않은 채 되는대로 뒤를 밟고 있었다.
  "정필대라는 사내가 누군데요?"
  갑작스레 정필대를 미행하라는 추경감의 지시에 강
  형사는 깜짝 놀라  반문했다. 지금  추경감과 강형사
  팀은 거물급 청부살인으로 보이는 사건을  맡아 증거
  수집에 정신이 없는 참이었기 때문이다.
  "이번 총선에 나오려는 인물이야."
  "그럼, 정치인이란 말입니까?"
  강형사가 눈이 둥그레져서 물었다.
  "맞았어. 서울 제 13 선거구에 나올 것이란 인물일
  세."
  "저, 그거 안 할랍니다. 정치인  조사해 봐야 본전
  찾기 어려워요. 틀림없는 것을 밝혀내도 정치 모략이
  다 뭐다 하면서 거꾸로 경찰만 죽는 꼴 되는 것 한두
  번 보았습니까?"
  "누가 그거 모른대. 하라면 하지,  뭔 말이 그렇게
  많아."
  "아무튼 전 못합니다. 다른 사람 시키십시오. 게다
  가 지금 우리가 좀 중요한 시기입니까? 미제 사건 다
  섯 개가 한꺼번에 풀릴지도 모르는 때입니다."
  "그건 내가 더 잘 알아. 자네밖에  믿을 만한 사람
  이 없으니까 자네를 붙이는 거야."
  "그럼 그 자가 청부살인 조직과  무슨 관계가 있습
  니까?"
  "그런 건 아니지만"
  추경감은 어색함을 덜려는 듯 담배를 꺼내 물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싹싹하던  강형사도 담뱃불을  붙여
  주지 않았다. 그 덕분에 추경감은 라이터를 철컥대며
  시간을 벌 수 있었다.
  "이것 봐, 강형사, 이게 사적인  일이라는 것은 나
  도 알아. 그래서 자네를 시키는 거라니까. 자네가 이
  일을 맡아야 누구보다도 빠르게 종결짓고  우리 일로
  돌아올 수 있을 것이라 믿어서 시키는 것이라고."
  이 말에 우쭐해서 미행을  떠맡았던 것이 실수였다
  고 강형사는 생각했다. 정필대 미행사건을 거의 개인
  적인 일처럼 여기며 맡은 강형사는 우선 그들 주변을
  살펴보았다.
  정필대. 나이는 36세. 직업은 하도 많아 헤아릴 수
  가 없었다.
  방배복지회장, 삼한물산 고문,  청소년선도연맹 부
  이사장 아내의 이름은 송희. 나이는  30세. 아들
  하나, 딸 하나. 이번 총선거에서는 민족당 후보로 서
  울 제 13 선거구에서 출마할  가능성이 높았다. 그는
  십여년 전부터 민족당 총재의 비서로 일해오며 13 선
  거구에서 기반을 닦았다고 한다.
  키가 크고  눈이 부리부리하며  얼굴이 사나이답게
  생겼다. 지방대학 정치학과를  나온 뒤  잠시 미국에
  유학 갔다가 1년도 안돼 돌아왔다고 했다.
  아내와는 금슬이 좋은 편으로  특별히 바람을 피울
  이유는 없었다.
  강형사는 3일째 정필대를 미행했으나 별 수상한 점
  을 발견하지 못했다.
  4일째 되던 날 점심 무렵  강형사는 여전히 소득없
  는 미행을 하고 있었다.
  '추경감님도 그 나이에 여자한테 약해 가지고.'
  강형사가 이 사건을 맡게 된 까닭을 생각하며 피식
  웃는 동안 정필대가  웬 여자와 만나는  것처럼 보였
  다.
  강형사가  신경을 곤두세웠다.
  정필대의 집에서 나온 이후 그가 한 일이란 주목할
  만한 일이 아무 것도 없었다.  그런데 드디어 묘령의
  여자가 접근한 것이다. 멀리서 보아도 상당히 미인축
  에 드는 여자였다. 나이는 20대 후반 정도로 보였다.
  긴 머리가 인상적이었다.
  그런 데다가  정필대가 앞장서자  여자는 다소곳이
  그의 뒤를따르는 것이 아닌가? 둘은 스스럼없이 근처
  의 여관으로 쑥 들어갔다. 안에서  바야흐로 무슨 일
  이 일어날는지야 익히 짐작이되었지만 강형사가 그런
  현장을 덮칠 필요는 없었다. 간통이란 친고죄이기 때
  문에 강형사는 그저 그 여자의 신원과 사실을 기록해
  두었다가 추경감에게 충실히 보고만 하면  되는 것이
  었다.
  강형사는 일단 빠져나갈 수  있는 뒷문이 있는가를
  조사해 보았다. 자그마한 여관이란 정문 이외의 출입
  구는 보이지 않았다.
  강형사는 느긋한 마음으로 여관 현관의 자판기에서
  커피를 한잔 뽑아들고 천천히 마시며 시간을 보냈다.
  종업원 총각이 별 싱거운 사람도 다 보았다는 듯이
  강형사를 쳐다보고 있었다. 그러나 객실에서 나올 손
  님을 기다리는 친구쯤으로 생각한  모양이었다. 다른
  동료들은 지금 전문적인 범죄자들의 뒤를  쫓느라 온
  갖 고생을 다 하고 있을 것인데  그에 비하면 풋나기
  를 쫓고 있는 자신은 행운아라는 생각을 하며 강형사
  는 다시 한번 정필대의 행동일지를 살펴보았다.
  오전 7시 00분 조깅을 나오다. 지나는 모든 이에게
  인사.
  오전 8시 43분 외출. 자가운전.
  오전 9시 15분 민족당사 도착.
  오후 1시 32분 민족당 사무총장 한장식과 나타남.
  오후 2시 40분 일식집 '미선'에서 점심 후 혼자 걸
  음.
  강형사는 그 밑에 2시 56분 '자하문장' 투숙, 20대
  후반 여성과 동행이라고 적어 넣었다.
  '자판기 커피는 너무 달단 말야. 차라리 블랙을 뽑
  을 것을 그랬나?'
  강형사가 느긋한 마음으로 엉뚱한  후회를 하던 순
  간이었다.
  "탕!"
  분명히 총소리 같은 것이 들렸다. 3시 15분이었다.
  강형사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틀림없이 여관
  내부에서 들려온 소리였다. 여관 종업원도 눈이 휘둥
  그레져서 달려왔다.
  총소리는 여관 2층이나 3층에서 난  것 같았다. 강
  형사는 그것이 권총 소리라는 것을 알았지만 다른 사
  람은 무슨 굉음인지 잘 분간하지 못할 그런 불명확한
  소리였다.
  "나는 경찰이다."
  강형사가 어리둥절해진  총각 종업원을  보고 말했
  다. 종업원은 더욱 질린 표정이 되었다.
  "지금 그 소리 어디서 났지?"
  강형사가 손가락으로 계단 쪽을 가리키며 말했다.
  "2층인 것 같습니다."
  여관은 모두 3층뿐이었다. 강형사는 급히 위층으로
  뛰어 올라갔다.
  "자네는 아무도 나가지 못하게 막고 있어."
  강형사는 따라 올라오려는 종업원을 제지했다.
  2층에서는 두 사람이 문밖을  내다보고 있었다. 남
  자와 여자였다.
  "어디서 소리가 났습니까?"
  강형사가 누구라 할 것 없이  외치듯이 물었다. 목
  만 밀고 내다보던  젊은 여자가 자기  앞방을 가리켰
  다.
  "203"
  강형사는 중얼거리며 그리로 뛰어갔다.  그러나 문
  은 굳게 잠겨 있었다.
  "열쇠!"
  그렇지 않아도  여관 여주인이  마스터키를 가지고
  달려오고 있었다.
  "당신이 이 여관 주인이요?"
  "예, 당신은 누구요?"
  늙수그레한 여주인이 엄청나게 부른 비계덩이 배를
  내밀면서 퉁명스럽게 말했다.
  "난 경찰관이요.  빨리 현관에  내려가 투숙객들이
  나가지 못하게 하시오."
  강형사의 지시에도 여주인은 멀뚱하게  섰을 뿐 현
  관을 지키러 나갈 생각을 하지 않았다.
  "뭐해요! 신나는 구경거리라도 있는 줄 알아요?"
  강형사가 호통치자 그제서야 그녀는 프론트로 내려
  갔다.
  강형사가 문을 따고  활짝 열었다.  거기엔 비참한
  광경이 기다리고 있었다. 문을 열자 벌써 피비린내가
  확 풍겨옴으로써 비극적 상황을 알려주고 있었다. 방
  안에는 벌거벗은 한  사나이가 침대에  누워 있었다.
  그 주위로 피가 아직도 번져 나가고 있었다.
  강형사가 다가가 얼굴을 살폈다.  강형사는 기겁을
  하며 뒤로 주춤 물러섰다.
  "아니, 이럴 수가! 이건 정필대"
  강형사는 마지막 말을 신음처럼 삼켰다.
  정필대가 왼손에 권총을 쥔 채  쓰러져 있었다. 왼
  쪽 머리에 관통상을 입고 이미  절명한 후였다. 방안
  을 조심스럽게 살펴보았으나 같이 온  여성은 보이지
  않았다.
  "이것 봐! 미스터"
  강형사는 현장을 보존하기 위하여  다시 문을 잠그
  고 종업원을 불렀다.
  "박입니다. 박철호."
  "미스터 박, 203호에 같이 투숙했던 아가씨는 어떻
  게 됐어?"
  "아가씨라뇨?"
  이놈이 얼이  빠지더니 기억상실증이라도  걸렸나?
  강형사는 한 대 쥐어박고 싶은 심정을 억누르며 다시
  물었다.
  "20대 후반으로 보이는 아가씨가 함께 들어오지 않
  았어?"
  "아니요."
  박철호는 파랗게 질려 있기는  했지만 기짓말을 하
  는 것 같지는 않았다.
  "그럼 자네 혹시 그 여자가 들어오는 것을 놓친 건
  아냐?"
  "목 떨어질 일이 있나요? 손님 들어오는 것을 놓치
  게요?"
  "이것들 봐. 좀 비켜 주게."
  "도대체 무슨 일이야?"
  투숙했던 손님들이 더러는 현관으로 내려왔다.
  "지금 나가실 수가 없습니다."
  강형사는 그쪽은 쳐다보지도 않고 잘라 말했다.
  "그렇다면 그 사람 뒤에 들어온 딴 여자 손님은 없
  나?"
  강형사가 다시 다급하게 물었다.
  "없습니다 그 손님은 혼자 들어왔어요."
  "시치미떼지 마! 밖에서  내가 다 보고  있었단 말
  야."
  "정말입니다. 그 손님은 혼자 들어왔어요. 계단 옆
  방을 달라고 했습니다."
  "계단 옆방?"
  강형사는 머리를 갸웃거리며 그  말에 무슨 의미가
  있는지를 생각해 보았다.
  "하지만 그 뒤에 들어온 여자는 있습니다."
  "그게 무슨 소리야? 금방은 없다고 하고서?"
  "203호실 손님과는 관계가 없다는 거지요. 그 여자
  는 303호에 들었어요."
  "진작 말했어야지. 쑥색 바바리를 입었지."
  "예, 맞습니다."
  강형사는 로비를 둘러보았다. 그 여자는 보이지 않
  았다. 강형사는 다시 한번 여주인과 종업원에게 손님
  중 아무도 나가게 해서는 안된다고  다짐을 시키고 3
  층으로 올라갔다.
  303호의 문을 한번 노크했으나 아무런 기척이 없었
  다. 강형사는 불길한 생각에 문을  왈칵 잡아당겨 보
  았다.
  뜻밖에 잠기지 않은 문이 활짝 열렸다.
  "어마?"
  여자의 찢어지는 듯한 비명이 들렸다. 그제야 강형
  사는 큰 실수를 한 것을 알았다. 실오라기 하나 걸치
  지 않은 남녀가 사랑의 행위에 정신이 하나도 없다가
  강형사의 침입에 깜짝 놀랐던것이다. 사실 그에 못지
  않게 강형사도 놀랐다.  얼른 문을 닫았다.  얼핏 본
  바로는 정필대와 동행했던 여자로는 보이지 않았다.
  곧 문이 벌컥 열렸다.
  "너 뭐하는 새낀데 함부로 문을 열고 지랄이야!"
  사내는 30대 초반으로  보였다. 바지만  일단 입고
  나왔는데 상당히 좋은 체격을 지니고 있었다.
  "죄송합니다."
  "죄송하다면 다야? 이 잡놈의 자식을 그냥!"
  사내는 강형사의 말을  채 다 듣지도  않고 멱살을
  휘어잡고 흔들었다.
  "나는 경찰관이요.  이 안에서  사건이 발생했습니
  다. 볼일 다 보셨으면 아래층으로 좀 내려오실까요?"
  "볼일?"
  사내는 혼자 킥 웃더니 강형사를 보고 다시 신경질
  을 냈다.
  "남이야 무슨 볼일을 보든  왜 참견이오? 경찰이면
  경찰이지 남의 사생활은 왜 참견하느냔  말이오." 라
  고 화를 내며 잡은 멱살에 더욱 힘을 주었다.
  생각대로라면 바닥에 메어꽂아도  시원찮겠지만 강
  형사는 꾹참고 말했다.
  "죄송합니다. 아무튼 빨리 옷을 입으시고 내려오십
  시오."
  그제서야 사내도 멱살을 풀었다.  그는 투덜거리며
  방안으로 들어갔다. 슬쩍 들여다보니 여자는 벌써 옷
  을 다 걸치고 있었다.
  단발에 풀어진 파마  머리를 하고  있었다. 얼굴에
  주근깨가 촘촘히 박혀 있었다.
  뚱뚱보 여주인이 신고를 했다고  했지만 경찰의 출
  동은 늦었다.
  강형사는 우선 여관에 들어  있는 사람들을 체크하
  기 시작했다.
  현관 로비는 사람들로 복작대고 있었다.
  "이 여관 종업원은 모두 몇 명입니까?"
  강형사가 뚱보 여주인에게 물었다.
  "저하고 저 박군하고 교환 겸 경리  보는 미스 조,
  이렇게 셋 입니다."
  "숙박부 좀 볼까요? 오늘 것 말입니다."
  "예? 오늘 거요?"
  "예."
  "저어, 보아도 소용이  안되실 텐데요.  아무 것도
  적지를 않았거든요."
  "뭐요? 숙박부를 적지 않아요?"
  "원래 낮 손님은 묵어 가지를 않는 법이라서요."
  그러면서 여주인은 슬그머니 봉투 하나를 강형사에
  게 내밀었다.
  "이게 뭐요?"
  "약소합니다만 점심값이라도 하시라고"
  여주인은 어색하게 웃으며 말했다.
  "이거 정말 안되겠구만."
  강형사가 눈을 부라리자 여주인은 찔금하여 봉투를
  다시 집어넣었다.
  "왜 이렇게 하는 겁니까?"
  "이유가 뭡니까?"
  사람들이 물었다.
  "살인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4. 사라진 여인
  "언제 풀어줄 거요?"
  처음부터 빠져나가고 싶어 안달이 나 있던 중년 사
  내가 다시 강형사에게 재촉했다.
  "잠시만 기다리십시오."
  강형사는 지극히 사무적으로 대답했다.
  "이것 봐, 자네 그렇게 함부로 날뛰어도 무사할 줄
  알면 큰 오산이야. 내가 시경에 한 마디만 하면 자네
  는 모가지가 날아간다고."
  "제발 덕분에 그런 일이나 있었으면 좋겠소."
  짜증이 날 대로  나 고함을 빽  지르는데 경찰차의
  싸이렌 소리가 들려왔다.
  "수고하십니다."
  강형사는 들어오는 경찰관에게 신분을 밝히며 인사
  를 했다.
  "천만에요. 그런데 누구를 수사 중이셨습니까?"
  인사를 받은 사람도 자신의  신분을 밝히며 인사를
  했다. 종로서의 최경감이었다.
  "특수한 임무를 띠고 용의자를  미행중이었는데 이
  곳에서 죽었습니다."
  "타살입니까?"
  "아직 알 수 없습니다. 협조를 부탁드리겠습니다."
  "그러지요."
  최경감은 선선히 허락을 했다. 나이는 추경감과 비
  슷하게 보였다. 그러나 비쩍 마르고  키가 큰데다 두
  터운 안경까지 쓰고있어서 인상은 정반대였다.
  "일단 여관 내의 사람들을 조사해 보지요."
  최경감은 말을 마치기가 무섭게  부하들을 척척 지
  휘했다. 그것도 추경감과는 대조적인 스타일이었다.
  여관 주인과 종업원을 제외하자  남은 사람들은 모
  두 6명이었다.
  최경감과 강형사는 여관의 101호실을  임시 사무실
  로 사용하기 시작했다.
  처음으로 들어온  사람은 앞서부터  큰소리를 치고
  있던 차주호라는 인물로 자주민주당의 정책연구실 차
  장이었다. 그 점이강형사의 주목을 끌었다.
  나이는 56. 갖고 있는 직함은 그 외에도 수없이 많
  았다. 그러나 강형사의 눈을 번쩍 뜨이게 한 것은 그
  가 관계하고 있는 지역이 모두 서울  제 13 지역구에
  있다는 사실이었다.
  '이것 봐라. 이 친구도 출마하려는 것 아냐?'
  강형사의 가슴 속에서 강력한 의문이 떠올랐다.
  그와 함께 여관에 들었던  여인은 명목상으로는 개
  인 비서로 되어 있었으나 무슨 일로 이곳에 들었는지
  는 불문가지였다.
  여인은 진유선이라고 했다. 나이는  27세. 큰 눈동
  자의 인상적인 얼굴을 하고 있었다.
  "이런! 세상에 이렇게 여자가 널려 있는데 왜 나는
  이 나이에 이르도록 장가 한번 못 들었을까?"
  강형사는 미리 이름까지 지어 놓은 미래의 아들 세
  종이를 생각하며 괜한 울분에 사로잡히는 것이었다.
  "사무실을 놔두고 왜 벌건 대낮에  여관에 와야 합
  니까?"
  "정치인이란 보안이 생명이니까요."
  진유선은 뻔뻔한 얼굴로 대답했다.
  '그래, 그렇게 생각하자.'
  강형사는 애써 속을 삭였다.
  "총소리를 들으셨습니까?"
  강형사가 둘에게 물었다. 둘이  묵었던 방은 201호
  로 203호와는 하나 건너 있는 방이었다.
  "총소린지는 몰라도 쾅하는 소리는 들었소."
  차주호가 대답했다.
  "그때 어디 계셨습니까?"
  "물론 방에 있었소."
  "다른 소리는 들으신 것이 없습니까?"
  "없소."
  그의 대답은 간결하였다.
  "이제 가도 되겠소?"
  "안됩니다. 신분을 확인해 보고  지문을 찍으신 후
  에 가실 수있습니다."
  "뭐야! 날 범인으로 생각하는 거요?"
  차주호는 벌컥 화를 내며 반말로 호통을 쳤다가 슬
  그머니 말끝을 경어로 고쳤다.
  "그것은 의례적인 절차입니다."
  최경감이 쌀쌀맞게 대꾸했다.
  "좋아, 좋아. 마음대로들 해보라고."
  차주호의 말을 귓등으로 흘리며 강형사는 진유선에
  게 물었다.
  "당신도 같이 있었습니까?"
  "당연하잖아요?"
  진유선은 쏘아붙이듯이  말했다. 강형사는  은근히
  심술이 돋았다.
  "뭘 하고 계셨습니까?"
  "그건 정치적인  사안이오. 여기서  밝힐 수는  없
  소."
  "좋습니다. 나가시면 부하들이 다음 절차를 안내할
  것입니다."
  다음으로 들어온 사람들은 강형사와 싸운 사람이었
  다. 강형사는 따라 들어오는 여인을  세밀히 살폈다.
  그러나 정필대를 따라들어온 여인같이 보이지는 않았
  다.
  "두 분은 함께 들어왔습니까?"
  "물론이지요. 종업원에게 물어보시오."
  그것은 사실이었다. 그러나 강형사를  괴롭히는 것
  은 두 여인이 입고 있는 옷이 같다는 사실이었다. 강
  형사는 정필대가 들어 오던 순간을 다시 한번 생각해
  보았다. 자신이 자리를 비운 것은 단 한번이었다. 자
  판기에서 커피를 뽑던 그 순간.
  쑥색 바바리는 흔한 것이고  올가을에는 이상할 정
  도로 유행하고 있었다. 같은 옷을  입고 있다는 것이
  유별난 일일 수는 없었다.
  "나는 택시운전사요. 이 사람은 내 마누라고."
  사내는 무뚝뚝하게 말했다. 아직도 감정이 삭지 않
  은 모양이었다.
  "부인과 왜 집을 두고?"
  "집에는 애가 있어서 우리는 날을 걸러 쉬니까
  편하게"
  말을 하다 보니 사내도 기가 차는지  말을 끊고 강
  형사를 빤히 바라보기만 하였다.
  사내의 이름은 김형진이었다. 아내의  이름은 이혜
  원으로 되어있었다.
  "운전면허증은 안 가지고 나오셨습니까?"
  김형진이 주민등록증을 내어놓자 강형사가 물었다.
  "개인 택시 운전사도 아닌데 면허증은 뭐하러 달고
  다니우?"
  김형진은 여전히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2층이 다 차지 않았는데 3층에 방을 얻은 것은 특
  별한 까닭이 있는 일인가요?"
  "그건 종업원에게 물어보구료. 난  조용한 방을 달
  라고 했을 뿐이니."
  둘은 아예 총소리도 듣지 못했다고 대답했다. 있을
  수 없는 일도 아닌 것 같았다.
  마지막 쌍은 젊은  남자와 약간 나이가  든 여자였
  다.
  여자가 먼저 앞서서 말했다.  강형사에게 총소리가
  난 방을 가리켜 준 여자였다.
  "나는 여기 앞에 있는 황금  살롱에서 일하는 미스
  권이라고 해요. 여기는 불려왔을 뿐이에요."
  권영미라는 여자가 당당하게 말하는  동안 뒤에 서
  있던 남자는 오히려  주눅이 들어 있는  것처럼 보였
  다. 권영미는 진한 화장을 하였지만  나이가 이미 30
  대 초반으로 보여 야화의 세계에서는 한물 간 여자로
  보였다.
  '이 여자도 정필대와 만난 여자가 아니다. 그럼 그
  여자는 어디로 사라진 것이지?'
  강형사는 일단 그 의문을 접어 두고 마지막 남자를
  보았다.
  이름은 오승정. 강북대학교의  학생이었다. 강형사
  는 한심한 눈길로 그를 바라보았다.  그는 더욱 움츠
  러들었다.
  "한 마디만 합시다. 학생 신분으로 여기 올 곳입니
  까?"
  "죄, 죄송합니다."
  오승정은 고개를 푹 숙이며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총소리는 들었다고  했지요? 바로  내다보았습니
  까?"
  "아니오. 그게 총소리인 줄은 몰랐어요. 그런데 아
  래층에서 경찰 아저씨 소리가 시끄럽게  들리기에 총
  소린 줄 알고 내다보던 중이었지요."
  권영미가 떠벌이며 대답했다.
  "다른 소리를 들은 것은 없습니까?"
  역시 없다는 대답이었다.
  사람들의 신원에는 모두 이상이  없는 것으로 확인
  되었다. 그때 한 경찰관이 최경감에게 보고하기 위해
  왔다.
  "경감님, 106호실에 누군가 머물렀던  흔적이 있습
  니다."
  "뭐야!"
  그 소리에 더 놀란 것은 강형사였다.
  곧 여관 종사자들이 불려왔다.
  "에구, 난 모르오. 난 내실에서 자고 있있어요."
  뚱뚱보 여주인은 손을 내저으며  부인했다. 교환겸
  경리인 미스 조도 아는 바 없다고 딱 잡아뗐다. 그러
  나 박철호는 틀렸다.
  그는 강형사가 물어보기도 전에  벌써 몸이 딱딱하
  게 굳어 있었다. 이마에서는 식은  땀마저 주르르 배
  어 나왔다.
  "그건 누구였지?"
  강형사는 이미 확신을 가졌다. 박철호의 얼굴이 일
  그러졌다.
  툭 튀어나온 광대뼈가 더욱  솟아오른 것처럼 보였
  다.
  "저, 저"
  "엉뚱한 변명일랑은 늘어놓을 생각을 마!"
  강형사의 호통에 그는 더욱 얼이 빠져버렸다.
  "저, 그, 그렇습니다. 바로 그 여자였습니다."
  "그 여자?"
  강형사가 씩 미소를 지었다.
  "그 여자는 어디 있나?"
  "가, 가버렸나 봅니다."
  박철호의 이마에서는 땀이 주르르 흘러나왔다.
  "가버리다니? 언제?"
  "제가 형사님과 올라갔을 때"
  "뭐라고? 너는 나하고 같이 올라오지 않았잖아!"
  "저, 저, 사실은 급한 일이 있다고 해서"
  그는 더욱 당황해 어쩔 줄을 몰라 했다.
  그러나 속으로 더 당황한 것은 강형사였다. 눈앞에
  서 범인이 사라져 버린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에 그
  는 울화가 치밀어 견딜 수가 없었다.
  "그래서 처음부터  들어오지  않았다고 했다  이거
  야?"
  "예."
  그러나 그건 더욱 이상했다.
  '다른 이유가 있는 거야.'
  강형사는 박철호를 더욱 의심스런 눈초리로 바라보
  았다.
       5. 야수들의 잔치
  "장배 형님,  큰일  났습니다. 형주가  달아났습니
  다."
  얼굴이 심하게 얽은 친구가 황금 살롱의 내실로 뛰
  어들며 외쳤다.
  "임마, 그게 뭔 소리야?"
  눈꼬리가 길게 찢어진 사내가  곰보의 앞을 가로막
  고 물었다.
  "큰형님은요?"
  "큰형님이고 뭐고 간에 나한테부터 말해 봐."
  "자하문에서 일하는 철호가 전화를  줬는데 갑자기
  경찰이 와서 형주에게 돈을 맡겨  도망치게 했다는데
  그 녀석이 바로 여기로 안온 걸 보면 내뺀 게 아니고
  뭐겠습니까?"
  "이런 제기랄! 뭐하다 그렇게 됐대?"
  "모르겠어요. 총소리가 났다고도 하던데"
  "총소리?"
  최장배는 그 소리에 얼굴이 흙색이 되었다.
  "혹시 다른 곳에서 낌새를 챈 기습은 아니고?"
  "그건 아니에요. 지금 자하문  앞에는 경찰로 북적
  북적합니다."
  "형님은 지금 여기 안 계시고  미상동 용궁 살롱에
  계시다. 내가 여기서 전화를 드릴  테니까 너는 빨리
  그리로 달려가서자세히 보고 드려라."
  곰보는 더욱 사색이 되어 살롱에서 빠져나갔다.
  "형주라니? 그 미남이 무슨 일을 당했어요?"
  황금 살롱의 주혜선 마담이 장배의 팔을 감으며 물
  었다. 눈가에 약간의 주름으로 보아  30대 후반이 다
  되었다는 것을 알 수는 있었으나 아직도 미색이 고운
  여인이었다.
  "놔! 지금 형주 따위가 문제가 아니야."
  "왜애? 무슨 일인데 그래?"
  주마담은 장배의 가슴을 쓰다듬으며 물었다.
  "시끄러!"
  장배는 거칠게 주마담을 밀어내더니 전화기를 잡았
  다.
  "나 장배요. 우리 형님이 거기  계시지요? 긴급 상
  황이 발생했다고 알려 주십시오."
  장배는 잠시를 참지 못하고 수화기를 든 채 왔다갔
  다하며 정신이 하나도 없어 보였다.
  "형님! 형주가 달아난 모양입니다.  자세한 보고는
  그리로 간곰보가 해드릴 것입니다만 빨리  무슨 조치
  가 필요할 듯합니다."
  장배는 이마에서 땀을 닦으며  '형님'의 지시를 기
  다렸다.
  "예, 예. 알겠습니다. 그렇게 하겠습니다."
  장배는 전화를 내려놓더니 그  길로 밖으로 뛰어나
  갔다.
  "대체 무슨 일이야니까?"
  주마담이 등 뒤로 외쳤지만  장배는 전혀 아랑곳하
  지 않았다.
  "아이, 궁금해라. 형주란 친구가 도대체 뭘 했기에
  장배가 저렇게 쩔쩔맬까?"
  주마담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옳아! 미스 박에게 물어봐야겠다."
  주마담은 형주와 가장 친하게  지내는 살롱의 호스
  티스인 박정자를 불렀다.
  "미스 박, 너 형주라고 알지?"
  "헝주씨요?"
  "그래, 형준지 행준지 하는 그치 말야."
  "그런데 왜요? 도망이라도 쳤어요? 나  외상 준 거
  없어요."
  "누가 너보고 돈 물어내라고  하더냐? 그게 아니고
  그치 뭐하는 친군지 너 좀 아냐?"
  "알긴 뭘 알아요? 언니 기둥서방이나 마찬가지지."
  박정자는 별 걸  다 물어본다는 듯이  입을 삐죽이
  내밀고 퉁명스럽게 대꾸했다.
  "그래도 하룻밤에  만리장성이라는데 나보다야  더
  아는 게 있겠지? 말 좀 해봐."
  "왜 그래요? 경찰이 찾기라도 한답디까?"
  "찾는 게 다 뭐냐? 아예 잡아갔다더라."
  주마담은 행여 무슨 소리가  나올까 하여 부풀려서
  말을 했다.
  "예에?"
  박정자의 눈이 왕방울만해졌다.
  "그럼 경찰이 여기도 찾아올께  아니에요? 재수 옴
  붙었네!"
  "그러길래 내가 묻는  것 아니냐?  뭐 들은  것 없
  어?"
  "정말없어요. 얼마나 얼음 같은  사낸네요? 잠꼬대
  도 안해요"
  "얼음 같기는? 아침에 네가  배웅하는 표정 보니까
  밤새 열두 번두 더 죽었다 살아난 것 같더라."
  "그거하고 무슨 관계유?"
  미스 박이 곱게 눈을 흘겼다.
  "그건 그렇다마는 큰일이다. 최근에  이상한 일 없
  었니?"
  "혹시"
  "혹시 뭐?"
  "아니에요."
  "뭔데?"
  "아니라니까요!"
  박정자는 되려 큰 소리로 화를 내고는 안채 쪽으로
  들어가버렸다.
  어쩌다 잡혀 갔을까? 혹시 사람이라도  죽인 건 아
  닐까? 그 자의 싸늘한 얼굴로 미우러 보아 능히 그러
  고도 남을 만한데
  정자는 사흘 전 밤의 일을  떠올리고 있었다. 새벽
  2시경 자신의 방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나와 보니 구
  형주였다.
  "좀 자고 가겠어."
  이미 그런 부탁을 거부할 단계는 넘어 있었기에 정
  자도 스스럼없이 받아들였다.
  "어디서 오입질을 하다가  생각이 나서  오는 길이
  야?"
  정자는 싫지 않은 투정을  부리며 형주에게 매달렸
  다.
  "오입?"
  형주는 피식 웃으며 말했다.
  "내가 오입을 하지 않았다는 증거를 보여주지."
  그러면서 형주는 웃통을 벗어 젖혔다. 근육질의 단
  단한 상체가 드러났다.
  그는 그날 밤 여느 때보다 정열적으로 정자를 사랑
  해 주었다.
  그를 안 것이  그리 짧은 시간의  일은 아니었지만
  그때서야 그의 멋진 진면목을 보는 것 같았다.
  그전까지야 정자가  그에게 갖고  있는 기억이라는
  것은 그저 길거리의 깡패 정도의  인식에 불과했으나
  그 이후로는 자신이  의지할 수 있는  하나의 사내로
  인정되기 시작하였던 것이다.
  더구나 그날 밤 그가 한 말은  정자의 귀에서 떠나
  지 않고 있었다.
  "너는 정말 멋진  여자야. 조금만  기다려 보라고.
  내가 이 생활 청산을 하게 해주지."
  "흥, 그건 또 무슨 농담이야?"
  "농담이라니! 내 말만 잘 들으면 돼. 너 얼마면 여
  기서 풀려나니?"
  "700만원."
  정자는 일부러 액수를 불려서 말해 보았다. 형주는
  그 말에놀라지도 않고 무뚝뚝하게 말했다.
  "1주일이면 된다. 1주일 후면  나하고 살림을 차리
  자."
  정자가 그 말을 꼭 믿은 것은 아니다. 그렇게 시작
  된 관계들이 어떻게 끝나는가를 그녀는 잘 알고 있었
  다. 그러나 잠시만이라도 웃음과 몸을  파는 이런 곳
  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그의 말은 너무나 매력적이었
  다.
  "그래, 무슨 일을 시킬려는 거지?  시키는 대로 해
  줄 테니까."
  형주는 그 말에 씩 웃으며 말했다.
  "그거야. 시키는 대로만 하면 돼."
  그러나 오늘이 바로 그 1주일째 되는 날이 아닌가?
       6. 이유없는 자살
  정필대의 부검 결과는 자살로 나왔다.
  "정계에 화려한  데뷔를  꿈꾸던 인물이  자살이라
  고?"
  부검 결과를 보면서 추경감은 납득할 수 없다는 투
  로 말했다.
  "그렇습니다."
  강형사도 맞장구를 쳤다.
  "여관에서 빠져나간  여인이 범인임에  틀림없습니
  다."
  "그건 여자가 아닐지도 몰라."
  추경감이 고개를 가로 저었다.
  "예?"
  "그곳에서 발견된 머리카락을 수거하여  조사해 보
  았어. 20대중반의 남자. 혈액형은 A형으로 판별이 되
  었단 말야."
  "그, 그럴 리가"
  "자네의 그 단정을 먼저 짓고  추리하는 버릇이 여
  기서 또 실수를 한 거야."
  "그 방에서 지문은 검출되지 않았습니까?"
  "여러 지문이 검출되었지. 종업원들의 것을 제외하
  고도 다섯 개의 다른 인물들  지문이 발견되었어. 그
  중 둘은 여자, 셋은 남자였는데 우리가 확인할 수 있
  었던 인물은 구형주라는 인물이야. 폭력  전과 2범으
  로 현재 나이는 27세이고 혈액형은 A형. 활동 지역은
  자하문장을 포함하여 동삼동,  미상동, 운정동  등인
  친구지."
  "그렇다면 도망친 인물은 바로 그 구형주라는"
  "그럴 가능성이 높지."
  "면목 없습니다."
  "강형사가 고개돌 떨구었다."
  "아니야. 이건 내 잘못도 커.  사건을 너무 단순하
  게 생각했단 말야. 미행을 해달라는  그 남자가 죽을
  줄 누가 알았어! 그의 아내 부탁을 너무 가볍게 봤던
  것 같아. 자네한테 누군가한 사람을  더 붙여 주었어
  야 했던 거였어."
  추경감은 답답한 듯이 일어나면서 담배를 꺼냈다.
  "문제는 그 종업원이야.  박철호라는 의도적으
  로 그 사실을 은폐하려고 했단 말야. 왜 그랬을까?"
  "지금 종로서에 연행되어 있는 것으로 알고는 있습
  니다만"
  "풀려나오면 자네가 한번 더 만나 줘야겠어."
  "그러지요."
  "싸우지 않고 이기는 것이 최상이라고 했는데 벌어
  질 것이라는 암시를 받은 일을  막아내지를 못했으니
  부인을 무슨 낯으로 대하겠나?"
  그 말은 강형사에게가 아니라  추경감 자신에게 하
  는 말과 같았다.
  "부검 소견서에는 무어라고 되어 있습니까?"
  "직접적인 사인은 좌측  두개골 파열로  되어 있고
  그 원인은 총상, 사용된 흉기는  현장에서 발견된 것
  과 같은 콜트 32구경. 약물  복용을 하였거나 반항한
  흔적이 없고 두피 부위의 화상과 왼손에서 나온 화약
  혼적으로 보아 스스로 발사한 것이  틀림없다고 되어
  있네. 권총에선 다른 사람의 지문을 찾지못했어."
  "그건 말도 되지 않아요.  여관방에 혼자 들어가서
  홀랑 벗고 권총 자살이라니?"
  "내 말이 바로 그거야."
  "그리고 좌측 머리가 깨졌다면 그것도 이상한 일이
  아닙니까?"
  "그건 그렇지 않아. 정필대는  왼손잡이었어. 그러
  니까 그게 정상이지.  타살된 것이라면  정필대를 잘
  아는 이가 죽였다는 증거가 되기도 하는 거야."
  "그 총은 어디서 난 것입니까?"
  "총의 넘버 부위를 줄칼로  밀어버렸더군. 현재 과
  학수사연구소에서 흔적을 찾고  있기는 한  모양인데
  아무래도 무리인 모양이야."
  "일단 그 점에서도 자살일  리는 없습니다. 생각할
  수 있는 최선의 경우는 정필대가 죽음으로 몰릴 만큼
  긴박한 상황에있었던 것이라고 볼 수밖에 없습니다."
  "나 역시 그렇게 생각하고 있어."
  추경감은 힘없이 말하며 시계를 내려다보았다.
  "이런!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되었군. 퇴근길에 미안
  하네만 나와 함께 정필대의 집으로 가 보지 않겠나?"
  "무슨 말씀이십니까? 당연히 가 보아야지요."
  강형사는 앞장서서 문을 열었다.
  표면적으로는 이 사건은 종로서의 최경감 관할하에
  놓여 있었다. 때문에 추경감은 강형사를 정필대의 집
  으로 데려가는 것을 주저했던 것이다.
  정치 지망생의 의문의 죽음답게 상가집은 시끌벅적
  했다. 대문 앞에 도착하자 벌써 국화 향내가 코를 찔
  러왔다. 그렇게 큰  집은 아니었다. 지은  지 오래된
  낡은 건물에 비해 정원이 꽤 넓고  잘 가꾸어져 있었
  다. 이미 집안은  문상객으로 꽉  들어찼는지 쌀쌀한
  날씨에도 블구하고 뜰에서도  여기저기 자리가  펴져
  있고 사람들이 듬성듬성 앉아 있었다.
  추경감과 강형사가 어린  상주와 맞절을  했다. 열
  살도 채 안돼 보이는 사내아이가 공손히 무릎을 꿇고
  앉았다. 천진스런 얼굴이  그렇게 슬프게  보일 수가
  없었다. 추경감은 콧잔등이 시큰함을  느끼며 시선을
  옆으로 돌렸다. 옆에는 친척인 듯한  중년 사내와 소
  복차림의 젊은 여인이 있었다.
  "부인은 어디 계신가요?"
  의례적인 인사가  끝나자 추경감이  그들에게 물었
  다. 분명 있어야 할 송희가 보이지 않는 것이었다.
  "예? 무슨 말씀인지요?"
  "고인의 사모님 말씀입니다. 송희 여사"
  "바로 이 분이 제수씨, 그러니까 동생 필대의 안사
  람이오"
  중년 사내가 갑자기 눈을 흡뜨며  말했다. 어떤 어
  중이 떠중이들이 초상집에 뭔가 뜯어먹으러 온 줄 안
  모양이었다.
  추경감은 깜짝 놀라 다시 부인을 바라보았다. 자신
  을 찾아온 송희와는 어느 한 구석도  닮은 곳이 없었
  다.
  그때는 정장을 하고 화장을 했었다고 하지만 그 얼
  굴을 못 알아볼  리가 없었다.  천하의 추경감이라도
  이번에는 당황하지않을 수 없었다.
  "저, 부인, 혹시 일전에 제 집으로 방문을 오신 적
  이 있습니까?"
  추경감은 질문을 해놓고도 얼간이  같은 말을 했다
  고 생각했다.
  "예? 제가요? 선생님이 뉘신지도 모르는데"
  여인은 눈을 동그랗게 뜨며 겁에 질린 표정으로 말
  했다.
  "놀라지 마십시오. 저는 시경 강력반의 추경감이라
  고 합니다."
  "조사는 벌써 다 해갔는데 또 무슨 일이오?"
  정필대의 형 용대가 송희를  감싸듯이 나서며 말했
  다.
  "이건 조사가 아닙니다."
  추경감이 나직이 말했다.
  "두 분은 저와 잠깐 다른  곳에서 이야기를 나눌까
  요?"
  그들은 추경감을 조용한 방으로 안내했다.
  일을 하는 친척들이 잠간씩 눈을 붙이는 골방 같은
  곳이었다.
  나머지 방은 대소를  가릴 것 없이  손님들로 가득
  차 있었다.
  "저는 필대의 형 용대라고 합니다."
  정용대는 인사를 하며 명함을 내밀었다. 상복인 검
  은 싱글 속에서  명함을 꺼내는 것을  보니 어지간히
  극성스런 장사꾼인 모양이군  하고 강형사가  생각했
  다. 공화상사 대표이사라고 되어있었다.
  "제수씨에게 무슨 일이?"
  정용대는 성급히 물어왔다.
  "저한테 사모님을 자처하는 사람이  일전에 찾아온
  적이 있습니다."
  "예?"
  송희가 놀라서 반문했다.
  "저는 선생님을 처음 뵙는데요?"
  "친척이나 친지, 친구의 남편,  누구라도 좋습니다
  만 아는 경찰관이 있습니까?"
  송희는 머리를 가로 저었다. 작고  귀엽게 생긴 여
  자였다. 어딘가 서구적인  미모를 지니고  있던 가짜
  송희와는 너무나 대조적으로 생겼다.
  추경감은 자신이 도깨비에게 홀린  것 같은 황당한
  생각이 들었다.
  추경감은 찾아왔던  여인의 모습을  자세히 설명했
  다.
  "짐작이 가는 사람이 있습니까?"
  둘 다 전혀 아는  바가 없다고 했다.  오히려 놀란
  것은 강형사였다.
  "경감님, 저는 본 적이 있습니다.  바로 그 여관으
  로 정필대씨와 함께 들어간 그 여자 같습니다."
  "뭐라고?"
  추경감도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렇다면 이건 철저히 계획된 사건이잖아!"
  "잠간, 두 분이 나누는 말씀이 무슨 뜻인지요?"
  정용대가 물었다. 추경감은 그간의  경위를 자세히
  설명하였다.
  어떻게 가짜 송희의 농락에 말려들었는가를 설명한
  다는 것은 추경감으로서는  참으로 쑥스러운  일이었
  다. 그 점은 강형사도 마찬가지였다.
  "그렇다면 필대는 경찰이 지켜주는  가운데 살해당
  했다는 거군요. 당신들은 자살이라고 주장하지만
  걔는 자살한 이유가 없어요."
  정용대가 비웃는 투로 말했다.
  "그 점에 대해서는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강형사가 공손하게 사과의 뜻을 표했다.
  "그보다 이미 사태가 이렇게 된 이상 그 여자가 누
  구인지를 밝혀야만 하겠습니다."
  "그렇지요. 밝혀야지요."
  송희가 부르로 떨며 말했다.
  "저 이런 말씀 드리긴 뭣합니다만  저 혹시 부
  군과 가까이 지낸  여자 분이  오해는 마십시요.
  가령 사무실의"
  강형사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댁은 내 남편이 어떤 년  앞에서 벌거벗고 있다가
  총에 맞았다고 생각하는 모양이군요."
  송희가 발칵 화를 내면서 강형사를 돌아보았다. 그
  녀의 작고 핏기 없는 입술이 바르르 떨렸다.
  "아니, 아니, 그런 것은 아닙니다. 다만"
  '다만'이라고는 했으나 사실 할 말은 없었다. 강형
  사는 얼굴이 벌개져서 송희의 시선을 피했다.
  "중요한 것은 그것이 아닙니다. 사실 아직 그 여자
  가 우리의 적인지 친구인지 판단하기는  이르다는 생
  각이 듭니다."
  "그건 또 무슨 소립니까?"
  정용대가 물었다.
  "어쩌면 그 여자는 우리에게 도움을 주려고, 즉 정
  필대의 죽음을 막고자 찾아왔던 것인지도 모르지요."
  "아니면 경찰에 뻔뻔하게 도전하여  이겨 보겠다는
  생각으로 찾아왔던 것인지도 모르고요."
  정용대는 여전히 비꼬는 말투였다.  사실 강형사의
  뇌를 스치는 생각도 그것이었다.
  "엄마, 손님이 찾으셔요."
  조금 문이 열리며 상주인 꼬마가 말했다.
  "그럼, 오늘은  이만 실례하겠습니다.  앞으로라도
  새로운 사실이 생각나시거나 하면 연락 주십시오."
  추경감과 강형사는 냉랭한 눈초리  속에서 몸을 일
  으켰다.
  "찾는 사람이 누구든?"
  "몰라요. 어떤 아줌마예요."
  꼬마는 도리질을 했다.
  "어머, 희아야."
  송희는 '희아야' 소리에 고개를 퍼득 들었다. 고등
  학교 때의 단짝 오명자가 거기 있었다.
  "아니, 어떻게 알고 왔니?"
  송희는 반갑게 손을  마주 잡으며  말했다. 눈에는
  금방 물기가 서렸다.
  "바보야, 내가 왜 몰라. 이게 무슨 일이니"
  오명자도 그렇게 말하며 울먹였다.
  "그래, 그래. 네가 모르는 게 있을 리가 없지."
  그렇게 말하며 송희도 눈물을 쏟았다. 고등학교 시
  절 오명자는 뭐든지 다 아는 잡학 박사로 유명했었던
  것이다.
  "이게 웬 날벼락이니?"
  송희는 어깨를 들먹이며 오명자의 손을 꼭 쥐었다.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우리 그이를 죽인 거야."
  "아니, 누가 그런 끔찍한 일을"
  "그건 나도 몰라. 하지만 누가 그런  일을 한 것만
  은 틀림없어."
  송희는 한참 동안 설움을 이기지 못하고 소리를 죽
  이며 울었다. 얼마 동안 울고 있던 송희가 문득 고개
  를 들었다. 물기 젖은 그녀의  눈이 이상하게 번득였
  다.
  "너 방태산의 선거 사무실에 나간다지?"
  송희가 오명자를 뚫어지게 쳐다보며 말했다.
  "으응."
  오명자는 그 섬한 눈빛에 질려서 겨우 대답을 했
  다. 차라리 부인을 하고 싶은 모양이었다.
  "지금 든  생각이긴 하지만  그 사람이  제일 수상
  해."
  송희는 아주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오명자가 알아
  듣지 못했다.
  "뭐라고?"
  "오늘은 안되겠어. 너, 장례식 끝난  뒤에 한번 더
  와 줘."
  "그, 그래. 그럴께."
  "꼭 와야 한다. 아니, 내가 먼저 연락할게."
  송희는 다시 오명자의 손을 꼭 쥐었다. 무엇인가를
  말할 것같은 눈빛이었으나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7. 새벽의 도망자
  박정자는 조용히 방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깜짝 놀
  라 일어났다.
  "이 밤중에 누구람?"
  그러나 사실 밤중은 아니었다.  새벽 5시였던 것이
  다. 밤일을하는 그들에게는 밤중이나  마찬가지일 뿐
  이다.
  정자는 늘어진 슬립을 채 끌어올리지도 않은 채 문
  을 열었다.
  구형주가 사라진 이후로 불안하여  깊은 잠을 이루
  지 못하고 있었다.
  "어머나!"
  놀라는 정자의 입을 거친 사내의 손이 막았다.
  "쉬!"
  그 소리만으로도 정자는 그것이 누군지 알 수 있었
  다.
  "형주씨."
  그러나 그 목소리는 형주의  손에 막혀서 나오지는
  않았다. 형주는 민첩하게 정자의 방으로 들어왔다.
  "읍, 읍."
  정자는 형주에게 입을 풀어 달라고 손으로 말했다.
  "어떻게 된 거예요?"
  정자는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내게도 기회가 온 거지."
  형주도 낮은 소리로 대답했다. 옆방과는 얇은 베니
  아 합판으로 칸막이가 되어 있으므로 작은 소리도 쉽
  게 새어나가기 때문에 조심해야 했다.
  "여기서는 말할 수가 없어."
  형주는 조심스레 정자의 팔을 끌어당겼다.
  "어딜 갈려고?"
  정자가 걱정되는 말투로 물었다.
  "걱정 말고 따라와."
  그러나 걱정을 안할 수가 없엇다. 그곳은 빠져나갈
  곳이 없는 밀폐된 지역이었기 때문이다. 빠져 나가려
  면 살롱의 중앙을 통과해야만 했다.  그러나 문은 굳
  게 잠겨져 있다. 그 열쇠는 주마담만이 가지고 있다.
  사실 정자는 형주가 어떻게 이곳으로 들어왔는지조차
  알지를 못하였다.
  그러나 일단은 형주가  이끄는 대로  따라 나섰다.
  형주는 그만큼의 신뢰감을 그녀에게 주고 있었다.
  형주는 살롱의 문을 열고  화장실로 그녀를 데리고
  갔다.
  "응?"
  그제서야 정자는 형주의 행동을 이해할 수 있었다.
  황금 살롱은 지하에 들어 있었으나  화장실은 계단으
  로 올라간 위치에 있었다. 그곳의 들창을 떼어낸다면
  밖으로 나갈 수 있을 것 같았다.
  과연 정자의 생각대로 화장실의  들창은 이미 떼어
  져 있었다.
  형주는 정자를 먼저 밀어올려  그녀를 밖으로 밀어
  냈다. 정자는 둔부에 닿는 그의  손이 따뜻하다는 생
  각을 했다.
  밖으로 나온 그녀는 일순 당황하고 말았다. 어두운
  방에서 그대로 나오는 바람에 그녀는 걸치고 있는 것
  이라고는 헐렁한 슬립밖에 없었던 것이다. 당황한 그
  녀는 들창으로 다시 발을 들이 밀었다.
  "뭐하는 거야?"
  낮은 소리로 형주가 그녀를 탓했다.
  "아무것도 입은 게 없단 말이에요."
  그녀는 그 말을  하면서도 주위를  살폈다. 다행히
  이른 시각이라 지나다니는 사람은 보이지 않았다.
  "자"
  형주는 정자의 발을 다시 밀며 점퍼를 벗어 내밀었
  다.
  "이것 갖고는 안돼요"
  정자는 일단 점퍼를 팔에 꿰면서 말했다.
  "가만 있어봐."
  형주는 벌써 반쯤 몸을 내놓고 있었다.
  "좀 끌어당겨."
  들창은 형주의 몸이 드나들기에는  작은 편이었다.
  정자는 주위를 힐끔힐끔  살피면서 형주를  끌어당겼
  다.
  "이게 뭐예요?"
  정자가 신경질적으로 말했다. 점퍼  밑으로는 슬립
  의 레이스가 빠져 있었고 정자의 늘씬한 다리에는 새
  벽 추위로 닭살이 돋아있었다.
  "이걸 입어."
  형주는 어느결에 준비를 한 것인지 가방을 하나 가
  지고 있었다. 그 속에서 바지를 하나 꺼내 주었다.
  "맞을는지 모르겠어. 암 좀 클지  몰라. 내가 입으
  려고 산거야 작으면 큰일이니까 큰 걸로 샀어."
  형주는 들창을 다시 맞춰 끼우며 말했다.
  "용의주도한 남자야."
  정자는 경탄스런  눈초리로 쭈그리고  앉아 끼우고
  있는 형주를 바라보았다. 슬립을 입은  채 바지를 입
  으니 모양이 말이 아니었지만 그런 것을 투덜거릴 수
  는 없었다.
  "어디로 갈 작정이야?  최부장하고  곰보가 찾느라
  눈이 벌건데."
  형주는 대꾸 없이 정자를 잡아끌었다. 마침 지나가
  는 택시가있었다.
  "인천!"
  형주는 차를 타자  인천으로 가자고  했다. 기사가
  돌아보았다.
  "인천은 곤란헌디요. 역까지만 가시지요?"
  "5만원을 드리지요."
  "그렇다면 또 얘기가 틀리지요."
  기사는 갑자기 공손해지며 핸들을 잡았다.
  '야반도주라도 하는 연인인가베?'
  기사는 그 정도로  생각한 듯 두  사람을 백미러로
  넘겨다보았다. 정자는 그제서야 추위와  두려움을 느
  꼈다. 형주의 팔에 꼭 안겨들었다.
  "아저씨, 이 차 왜 이렇게 추워요?"
  "금방 차고에서 나왔기땀새 그렇죠. 쬐깐만 있으면
  훈훈해질겁니다."
  "형주씨"
  정자는 다시 형주를 바라보며  말했으나 형주는 손
  가락을 그녀의 입술에 갖다 대었다.  그녀는 입을 다
  물었다. 얼마 가지 않아 차  안이 훈훈해지자 그녀는
  졸음이 쏟아졌다.
  "이런 위급한 순간에 졸리다니 나도  참 웃기는 여
  자야."
  정자는 그런 생각과 함께 잠에 빠져들었다.
  "다 왔어. 일어나."
  정자가 비몽사몽간에 깨어난 곳은  부둣가였다 .비
  릿한 바다 내음이 전해져 왔다.
  "여기가 어디야?"
  낯선 풍광에 정자는 어리둥절해졌다.
  "인천으로 가자고 한 소리 못 들었어?"
  "그건 들었지만"
  "그치들이 찾지 못할 지역으로  도망칠 거야. 지금
  할 수 있는 말은 그것밖에 없어. 그리고 배를 타려는
  거야."
  그 말은 정자에게 침묵을 요구하고 있는 것이었다.
  "좋아, 우린 신혼여행 온 걸로  해두지 뭐. 하지만
  배 고프다. 형주씨."
  형주는 그녀의 투정을 웃으며  바라보았다. 화장을
  안한 그녀는 새로운 아름다움이 있다고 생각했다. 늘
  전등불 밑에서 술잔을 들고 보던 모습과는 아주 딴판
  이었다.
  "정자, 몇 살이지?"
  "진짜 나이?"
  형주는 고개만 끄덕였다. 점퍼도 없는 셔츠 차림에
  커다란 가방만 어깨에 멘 형주의 모양은 웬지 쓸쓸하
  게 보였다.
  "스물 다섯. 나이로 치면 한물  갔지. 꺾어진 오십
  이니."
  그러다가 정자는 갑자기 생각난  듯 화들짝 놀라면
  서 큰 소리로 말했다.
  "형주씨 큰일 났어.  나 핸드백을 안  가지고 왔단
  말야"
  형주는 히죽이 웃으며 말했다.
  "악어가죽 핸드백으로 사줄 테니 아까워하지 마."
  "바보야, 거기 주민등록증이 있단 말야. 그게 없으
  면 배를 못타잖아."
  "뭐?"
  형주도 그 말에는 난감한 모양이었다.
  "그래, 주민등록증이 없으면 배를 못 타지. 하지만
  그것도 다 수가 있을 거야."
  "어쨌든 진짜 배 고프다. 거기다가  춥고. 우린 돈
  까지 없으면 진짜 거지 중의 상거지야."
  "걱정 말어. 곧 등 따시고 배부르게  해줄 수 있으
  니까."
  "등 따시고 배부르게? 그러면 애  하나 업고 9개월
  된 임신부가 되는 거라던데? 난 그렇게 되고 싶지 않
  은데"
  가을 바다 바람이 정자의 앞이마를 스쳤다. 머리카
  락이 날렸다.
  형주가 그것을 뻔히 쳐다보고 있었다.
  "나, 보기  흉하지?  머리  정리도 못하고  나왔으
  니 아무튼 나 뭐 사달란 말야."
  정자는 형주의 팔을 잡아끌었다.
       8. 음모가 이루어지는 곳
  오명자가 송희를  만난 곳은  종로의 '카펜터'라는
  커피숍이었다.
  그들의 여고 시절에 선도부  선생님들을 피해 가끔
  들르던 곳이다. 의자도 낡고 탁자도 몇 개 없는 조그
  만 다방이었다. 명자는 낡은 홀의  벽을 쳐다보며 철
  없던 학창시절을 떠올렸다.
  "왜 방태산의 일을 도와주고 있니?"
  송희는 주문을 하기가 무섭게  오명자에게 말을 걸
  었다.
  "먹고 살기 위해서지."
  송희의 살기등등하던 눈빛도 이제는 많이 가라앉아
  있었다.
  그러나 얼굴은 퍽  수척하게 보였다.  충격이 컸던
  모양이다.
  "네 남편은 아직"
  "그 무능력자 이야기는 하지도 마."
  "그렇구나."
  송희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내가 부탁을 하나 할께."
  오명자는 계속 불안한 마음을 씻을 수가 없었다.
  "사실 내 남편도 그곳에서 출마를 할 예정이었어."
  "그곳?"
  "그래. 방태산이 나오려는 13선거구 말야."
  "그래?"
  오명자는 침을 꿀꺽 삼켰다. 어렸을 때부터 긴장할
  때면 나오는 버릇이었다.
  "우리의 우정을 생각해서 하는  말이야. 꼭 들어주
  겠지?"
  "원 애두. 갈피를 못잡겠구나. 무슨 일인지 자세히
  말부터 해라. 우리가 뭐 어제 오늘 사귄 친구니?"
  "그래, 내가 말할께."
  송희의 표정에 다시 원한의 빛이 떠올랐다.
  "너도 다 들었겠지?  신문에도 다  나갔으니까. 우
  리 그이가 여관에서  벌거벗은 채 죽었다는  것 말이
  야. 처음엔 이상한대로 자살이 아닐까 그렇게도 억지
  로, 정말 억지로 생각해 보았어.  하지만 아니야. 그
  럴 수가 없어. 우리 그이가 왜  죽니? 공천받고 정계
  에 발을 들이민 그 자리에서 왜  자살을 그건 정
  말 말도 안돼."
  송희는 울먹거리며 말했다.
  웨이터가 커피를  따르며 이상하다는  눈초리로 두
  사람의 얼굴을 흘깃흘깃 보았다.
  "내가 허투로 이런 말을 하는 게  아냐. 다 짚이는
  바가 있어서 그래. 어떤 년이  나를 사칭하고 경찰에
  찾아가 우리 그이를  조사해 달라고  그랬대. 그년이
  우리 남편을 죽인 거야.  그년을 꼭 찾아내고  말 거
  야."
  여전히 오명자는 송희가 무슨 말을 하는지를 알 수
  없었다.
  그러나 그녀가 너무 격앙되어  말을 하고 있었기에
  그대로 듣기만 하였다.
  "내게 떠오른 육감이 있어. 이건 정치적인 음모야.
  우리 그이가 나오면 지가 떨어질 거니까 우리 그이를
  죽인 거라구. 방태산이 범인이야. 틀림없어."
  "무어?"
  "늘 남편하고 그 수하 사람들이  하는 얘기를 귀가
  따갑도록들었지. 남편은 그 지역구에서  나올려고 열
  심히 정보 수집을 하고 있었거든.  너 방태산이 조심
  해야 한다. 보통 호색한이 아니거든.  반반한 여자라
  면 다 건드려. 혹시 너한테도 손 뻗치지 않든?"
  "무슨 소리야?"
  오명자는 속으로 뜨끔하면서도  겉으로는 시치미를
  떼었다. 등골로 전율이 스쳤다.
  "여자들의 온갖 약점을 다 잡아서  꼼짝 못하게 한
  데. 너한테도 남편 취직이니 뭐니  하는 올가미를 가
  지고 덤벼들지 몰라."
  그러나 오명자는 그  말을 겉으로  무시해 버렸다.
  그리고 화제를 돌렸다.
  "방태산이 여자를 꼬셔서  네 남편을  죽였다는 거
  야?"
  "그렇대니까. 뭘 들었어?"
  "그렇게 악독한 사람은 아닌데"
  "아직도 네가 뭘 모로는구냐"
  송희가 안타까운 표정으로 명자를 건너다보았다.
  "정계라는 게 사실 알고  보면 참 더러운  게 많단
  다. 물론 내 남편처럼 양심적인 사람도 없는 건 아니
  지만 그이도 형님  되시는 이가 사장쯤  되다 보니까
  정치 자금을 이리저리 댈 수있었지, 웬만한 집안이라
  면 어림도 없는 게 정치야. 심지어 보스가 되려면 단
  단한 돈줄부터 쥐어라 하는 소리까지 있으니까. 방태
  산이 같은 게 어디서 돈을 대겠어. 다 사기치고 다니
  는 거야. 그 와중에 여자까지 건드리고 다니니"
  "그래서 내가 뭘 해주었으면 좋겠어?"
  송희의 말이 끝이  없을 것 같아  오명자가 중간에
  말을 끊었다.
  "그래, 그 얘기를  안했구나. 방태산을  좀 조사해
  줘. 틀림없이 증거가 있을 거야."
  그러면서 송희는  핸드백을 열어  하얀 사각봉투를
  하나 꺼냈다.
  "50만원이야 부탁해."
  "집어 넣어! 그런 일은 할 수 없어!"
  오명자는 뜻밖에도 버럭 화를 내었다.
  주위의 사람들이 죄 그들을  쳐다보았다. 웨이터도
  따가운 눈초리로 그들을 바라보았다.
  "왜 이래?"
  "돈으로 친구를 살려고 하다니.  너도 정계의 썩은
  사람들과 다를 바 없어."
  오명자는 차가운 눈으로 송희를 바라보았다.
  "너마저 나를 도울 수 없다는 거니? 너마저?"
  송희는 슬픈 눈으로 차가운  오명자의 얼굴을 쳐다
  보았다. 그녀는 그 눈을 거역할 수가 없었다. 그것은
  고등학교 때부터 그랬다.
  학창시절 두  사람은 가까운  사이임에는 틀림없었
  다. 그러나 어딘가 둘은 어울리지 않는 면이 있었다.
  송희는 공주님과 같은 존재였고 오명자는  시종과 같
  은 존재였다. 송희는 결코 자신보다  나은 아이를 친
  구로 용납할 수  없는 사람이었다.  그래서 오명자가
  가장 친한 친구로 되어진 것인지도 몰랐다.
  "그래! 좋아, 좋아. 하지만 너한테 돈을 받을 수는
  없어."
  "아니야. 받아야 해.  그게 너뿐만  아니라 내게도
  좋아."
  "그건 또 무슨 소리야?"
  "돈을 받아야 내 마음이 편해. 그리고 너도 의무감
  이 생기고"
  오명자로서는 그 말이 불쾌했으나 그렇게까지 송희
  가 나온다면 자신도 조건을 걸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렇다면 우리 남편을 취직시켜 줘."
  "그 사람, 취직할 생각이 이제는 있어?"
  "그래. 이제는 나이가 방해물이 되었을 뿐이야"
  "그래? 니네 남편 이제 철났구나."
  송희는 조건을 수락했다. 거래가 이루어진 것이다.
  "하지만 방태산이 범인이 아닐 수도 있어. 무슨 꼬
  투리라도있니?"
  "알고 있어. 네가 필요한 것은 모두 여기 있어. 천
  천히 읽어봐. 이것은 죽은 그이가  조사해 놓은 방태
  산의 비리야. 거긴  참말도 있고 거짓도  있을 거야.
  정치란 상대방을 모함하는 일이 가장 중요한 일 중의
  하나래. 그리고 이 돈도 가져가 봐.
  보수가 아니라 경비라고 생각해. 돈이 없으면 조사
  도 할 수없잖아."
  그 말에는 오명자도 군말없이 돈을 받아들였다.
  "그런데 왜 경찰에 사건을 맡겨 두지 않는 거니?"
  "경찰은 이런 사건을 다룰 수가 없어. 진상을 알아
  내려고도 하지 않는데다가  알아내봤자 정치  모략이
  다, 공작이다, 중상이다, 이렇게  떠들어대면 만사형
  통이거든."
  송희는 고개를 저으며 힘없이 말했다.
  "그러니까 내가 기댈 수 있는 언덕은 너밖에 없어.
  게다가 너는 방태산의  심장부에 있는  것 아니겠니.
  제발 이 원수를갚게 해줘."
  "같은 이야기를 두번씩 할 필요는 없잖야."
  송희는 그 말에  한시름을 놓았다.  집안이 어려워
  비록 대학은 가지 못했던 명자지만 그 머리만은 얼마
  나 비상했는지를 잘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방태산이 정말 사람을 죽이라고 했을까?"
  송희와 헤어진 오명자는 그 생각이 들 때마다 짐승
  처럼 덤벼드는 방태산의 모습이 눈앞에 아른거렸다.
  차가운 가을 바람이 그녀의 정신을 일깨워 주었다.
  그녀는 먼저 송희의 자료를 읽어  보아야겠다는 생각
  을 하곤 바로 근처의 카페에 들어갔다.
  "손님을 기다리십니까?"
  웨이터가 주문표를 내밀며 공손하게 물었다.
  "아니요."
  "그럼 뭘로 주문하시겠습니까?"
  "스크류드라이버."
  아직 4시밖에 되지  않았지만 약간은  술이 필요할
  것 같았다.
  그녀는 조금씩 술을 마시며 서류를 읽기 시작했다.
  읽어 나갈수록 오명자의 가슴은  진정할 수 없도록
  뛰기 시작했다. 서류대로라면 방태산만한  악당은 천
  하에 없을 것이었다.
  그 대부분은 사기에 관한 항목들이었다. 당선을 담
  보로 내건 협박들이 그 주 내용이었는네 그는 떨어진
  뒤에도 자기 당의 위세를 빌어 사건을 유야무야로 만
  들어놓는 데 전문가였다. 그리고  사람들도 정치가와
  싸워봐야 희망이 없다고 생각하고 포기하기가 일쑤였
  다.
  카페 창 밖으로 바람이 불 때마다 잎새들이 떨어졌
  다. 멍하니 그것을 바라보던 오명자는 쿨적거리며 조
  용히 울기 시작했다.
  술기운이 약간 올라서 그런 건지도 몰랐다. 자신의
  인생이 허무하기 짝이 없다고 생각되었다.
  여고 시절엔 반에서 1, 2등을 다투었다. 그러나 애
  당초 대학에 갈 형편은 되지  못했다. 술주정뱅이 아
  버지와 행상을 나가는 어머니에게 바랄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애당초 여상을  보내려 했던 것을
  그래도 우겨서 인문계 학교로 왔을 때는 오명자 역시
  생각한 바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4년  장학금을 받을
  수 있을 정도로  공부를 하자는 것이  그녀의 목표였
  다.
  그러나 어머니의 죽음과 함께 모든 꿈은 깨어졌다.
  그녀가 예비고사에서 305점이라는 훌륭한  점수를 받
  았던 그날 그녀의 어머니는 번쩍거리는  로얄 살롱에
  받혀서 죽고 말았다.  장소가 육교  밑이었기 때문에
  보상도 받지 못했다. 당장 집안에서  돈을 벌 사람이
  라고는 자신 하나밖에 없었다.
  지금의 남편을 만난 것은  그녀가 다방에서 레지를
  하던 때였다. 명문대에서 가까운 위치의 다방이라 대
  학생들도 곧잘 드나들었다. 그리고  대학가에 지금처
  럼 카페가 널려 있는 때도 아니었다.
  그녀의 남편이 된  문석관과 처음 만난  것은 축제
  때였다. 갑자기 다방에  뛰어든 그는  오명자의 손을
  덥석 쥐더니 마구잡이로 밖으로 끌어냈다.
  거기에 생각이 미치자 오명자는  빙긋이 웃음을 머
  금었다. 그때가 그녀의 일생에서 가장 행복했던 때라
  는 생각이 들었다.
  문석관은 파트너를 찾아서 뛰어든  것이었다. 친구
  들끼리 그날 5시에  파트너를 데리고  모이기로 되어
  있었던 것이다. 벌써 준수한 그의  외모에 반해 있던
  그녀는 군말없이 그를 따라갔다.
  그렇게 인연은 시작되었던 것이다.
  '더 생각하면 무얼 해.'
  오명자의 눈에는 다시 주르르 눈물이 흘렀다. 그러
  나 옛 생각은 끊임없이 그녀의 머리속으로 돌아갔다.
  남편은 그 당시만 해도 급진적이었다. 학벌도 지위
  도 괘념치 않았다. 오명자에게 결혼을 신청하였던 것
  이다. 그것이 악연이었는지도 모른다.
  물론 납편의 집안에서는 극렬한 반대가 있었다. 그
  때문에 비록 얼굴을 내밀 수 없는 시댁이긴 하였지만
  든든했던 남편의 집안이 하루 아침에 부도를 내고 파
  산하였다.
  '그리고 이제는 정절마저 잃은 화냥년이 된 거지.'
  오명자는 손수건을 꺼내 눈물을 닦았다.
  어디에서부터 출발할 것인가가 문제였다.
  '신미혜, 그 여자부터야.'
  오명자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신미혜는  기록에 나
  와 있는 유일한 여성 피해자였다.
  서류에 따르면 신미혜는  방태산에 의해  4년 전에
  농락당하고 임신까지 하였다가 버림받자 자살한 것으
  로 되어 있었다. 오명자는 자신의  경우와 비슷한 그
  여자의 일에 분노를 느꼈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나라도 나서서  당신을 매장시
  키고 말 거야."
  오명자는 이를 뽀드득 갈았다. 방태산이 그렇게 악
  질적이고 쓰레기 같은 인간이라는 것이  믿어지지 않
  을 정도였다. 그의 버릇 중 10분의 1만이 진심이라도
  그에게 표를 던질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표는
  커녕 침을 뱉을  유권자들만 있을  것이라고오명자는
  생각했다.
       9. 승부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이런 중대한 순간에 이게 무슨 일이야!"
  "죄송합니다, 형님."
  "죄송하다고 해결될 일이야!"
  최장배는 가운데 머리가  한 줌 빠진  초로의 사내
  앞에서 쩔쩔 매며 말하고 있었다. 그곳은 아주 잘 차
  려진 사무실이었다.
  모든 것이 최고급의 사무기재로 꾸며져 있었다. 그
  러나 교양 있는 자들이라면 그것이  번쩍거리는 천박
  한 것들로 되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리고
  책상에는 수석들과 조각품만 들어있을 뿐 책이라고는
  한 권도 보이지 않았다.
  "형주가 어디로 갔는지는 알아냈어?"
  "그게 아직"
  최장배가 식은땀을 흘릴 때  전화벨이 아름다운 소
  리를 내며 울렸다. 최장배가 전화를 받았다.
  "나, 최장배야."
  "예, 형님, 곰보입니다. 큰일이 났습니다."
  "큰일은 이미 났잖아. 또 무슨 일이야?"
  "형주가 박정자라는 기집년 하나를  꿰차고 토꼈습
  니다."
  "뭐야? 너희들은 무엇을 했어?"
  "그게"
  "이놈의 새끼들 모두 손목을 잘라버리겠다!"
  "자 장배형"
  "거기 어디야?"
  "황금 살롱입니다."
  "꼼짝 말고 있어라! 내가 곧 그리 가겠다."
  최장배는 전화를 끊었다. 형님이라는  사나이를 돌
  아보았다.
  "형님, 형주가 나타났던 것 같습니다. 그곳으로 가
  보겠습니다."
  "명심해. 형주란 놈을 잡아오지  못한다면 너도 용
  서받을 수 없다는 것을 말이다."
  "잘 알고 있습니다"
  최장배는 식은땀을 흘리며 물러났다.
  형님이라는 자는 그의 뒷모습을  분노의 눈길로 바
  라보았다.
  단 하나의 실수가  조직을 무너뜨려 온  것을 그는
  너무나 많이보아왔다.
  폭력과 범죄의 세계에서 잔뼈가 굵은 남봉철, 그는
  마침내 서울의 암흑가를  휘어쥔 형님의  자리에까지
  오른 것이었다.
  '망할 것들, 그 돈이 어떤 돈이라고 함부로 돌린단
  말인가! 다시 전화벨이 울렸다.
  그는 천천히 수화기를 들었다.
  "남봉철입니다."
  "나요, 나. 그간 안녕하셨소? 난 보시다시피 잘 돼
  가지요."
  "잘 돼 가다니,  그게 누구  덕인 줄은  알고 계시
  오?"
  "하하하, 그걸 왜  내가 모르겠소.  헌데 그쪽에는
  무슨 이상이 생긴 모양인데."
  "음"
  남봉철은 깊은 신음을 내뱉었다.
  "문제가 심각하다면 상의를 해야겠는데요?"
  "아직은 괜찮소. 필요한 조치는  우리가 취할 것이
  요."
  남봉철이 피식 그를 비웃었다.
  남봉철은 전화를 내려놓았다. 그는 천천히 몸을 일
  으켜 창 쪽으로 걸어갔다. 형주를 잡아야 한다. 그러
  나 아무도 모르게 해내야 한다는 딜레머가 그를 괴롭
  혔다. 더욱 문제가 되는 것은 이 일로 경찰이 끼어드
  는 것이었다. 그것만은  무슨 일이  있어도 막아야만
  했다.
  박철호라는 녀석이  경찰에 모든  이야기를 하지는
  않았을 것이라고 그는  생각했다. 그러나  경찰은 곧
  형주가 자하문장에 있다가 도망쳤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그러면 박철호가 얼마나 버틸 수 있을까? 남
  봉철은 머리를 가로 저었다.
  그런 하찮은 녀석  때문에 전 조직이  위험에 빠질
  수는 없었다.
  남봉철은 그를 은신시킬까 하는 생각도 했다. 그러
  나 그가 사라지면 경찰은 전력을 기울여 그를 찾으려
  할 것이다. 그건 위험 부담이 더 크다고 생각되었다.
  '죽이는 수밖에 없어.'
  남봉철은 박철호를 죽이기로 결심했다.
  그래야 조직의  은폐가 가능해질  것이라고 형님이
  생각하고있던 무렵, 황금  살롱 내부를  살피고 있던
  최장배는 갑갑한 심정을 누를 길이 없었다.
  "아시다시피 문은 안으로 잠겨 있고 아침에 일어났
  을 때에도 안으로 잠겨진 상태 그대로였습니다. 여긴
  지한데 들어을 곳도 없고 나갈 곳도 없단 말입니다."
  곰보의 설명 그대로었다.
  "문 닫기 전에 그년이 도망친 것은 아냐?"
  "그렇지 않아요."
  주마담이 끼어들었다."
  "어제 나와 함께 끝가지 손님을 받았어요. 형주 사
  건도 있고해서 외박도 보내지 않았다고요."
  "그럼 어떻게 사라졌단 말야? 홍길동이라도 나타났
  단 말이야!"
  최장배가 화를 냈다.
  "완전히 허를 찔렸어. 설마하니  여자를 데리고 달
  아날 줄이야 꿈엔들 생각해 보았나 어디."
  최장배의 온몸은 땀으로 흠뻑  뒤덮였다. 세수라도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머리 속이  너무 혼탁했
  다.
  화장실에 도착한 그는 물을 있는껏 틀고는 아예 머
  리통을 세면대에 집어넣고 흔들어댔다.
  "씨원하구만."
  머리를 흔들며 고개를 번쩍 든 최장배의 눈에 화장
  실의 들창이 잡혔다. 그 들창은  형주가 어떻게 침입
  하고 도망쳤는지를 알려주고 있었다.
  "젠장할 그놈은 여길 통해서 도망쳤어."
  최장배가 얼굴에서 물을 뚝뚝 떨어뜨리며 화장실에
  서 뛰쳐나왔다. 잠시 후 그들은 그 사실을 확인할 수
  가 있었다. 화장실의 들창은 먼지  사이로 손가락 자
  국이 선명히 나 있었고 밖에도 발자국들이 남아 있었
  다.
  "이것 봐요, 장배씨, 승부는 아직  끝나지 않은 거
  예요. 나한테 잘 보이면 누가 알아요? 무슨 정보라도
  내놓을지"
  얼굴이 벌갛게 단 최장배에게 주마담이 생글거리며
  다가갔다.
       10. 두번째 자살
  서울의 서북쪽 관문에 위치한 자하문장. 그 조그만
  장급 여관에서 두번째의 살인사건이  일어났다. 종업
  원 박철호는 귀 밑에 단 한번의  칼질로 죽은 시체로
  발견되었다. 자하문장의 자기 방에서였다.
  전날에야 연행에서 돌아온 박철호가 고단할 것이라
  고 생각하여 깨우지 않고 기다리던  뚱뚱보 여주인이
  참다 못해 12시쯤에 깨우러 가보자 잠자듯이 죽어 있
  었던 것이다.
  "이젠 망했군. 1주일도 안돼서 둘씩이나 죽어 나가
  다니. 이눔의 여관에 무슨 귀신이 쓰였을꼬?"
  뚱뚱보 여주인은 완전히 넋이 나가버렸다.
  "이제 흉가라고 내놔도 안 팔릴 거고.  이 일을 어
  떻게 해야한담?"
  경리 미스 조에게 하소연조로 물었다. 그러나 경찰
  에 살인사건을 신고하고 난 그녀의  대답이 여주인을
  더 낙담하게 했다.
  "저, 오늘로 그만둘래요."
  "그래, 내가 뭐 붙잡을 형편이나 되냐. 알았다, 알
  았어. 뒈질놈은 다 뒈지고 갈 년은 다 가거라."
  경찰이 도착하기에 앞서 강형사가  먼저 여관에 들
  어왔다. 그는 살인사건을 모르고 들른 것이었다.
  종로서에 연락헤 본 결과  박철호를 풀어줬다는 통
  보를 받고 여관으로 찾아온 것이었다.
  "미스터 박 있습니까?"
  강형사를 본 여주인의 눈은 곱지  못했다. 그가 올
  때마다 사람이 하나씩 죽었기 때문이다.
  "또 죽었소."
  여주인은 퉁명스럽게 대꾸했다
  "예?"
  강형사가 자기 귀를 의심했다.
  "자살했어요. 다 당신네들이  죽인 거요.  그 착한
  애를 얼마나 들볶았으면 자살을 다"
  여주인은 말을 다 하지 못하고 울먹거렸다. 그녀가
  쿨적거릴때마다 배가 출렁거렸다.
  "어디 있습니까?"
  강형사의 질문에 미스 조가 방을 안내하였다.
  "자살이라는 것을 어떻게 알았습니까?"
  "유서가 있어요."
  미스 조가 간단하게 답했다. 그녀가 방을 가리키기
  가 무섭게 강형사는 돌아서서 뛰어갔다.
  문을 열자 피비린내가 확 풍겨왔다. 강형사의 훈련
  받은 눈이 조심스레 사체와 방을 훑었다.
  머리를 문 쪽으로 두고 쓰러져  있었다. 방이 좁아
  발은 바로창 밑에 놓여 있었다. 이불 위로 쓰러져 있
  었다. 서서 목의 동맥을 끊은 모양이다. 그것을 증명
  하듯 발치에 안전면도기에 넣어서 쓰는  면도날이 놓
  여 있었다. 햇빛을 받아 날카로운  양 날이 섬득하게
  번쩍거렸다.
  피가 오른쪽 귀 밑에서 흘러내리고  있었다. 귀 뒤
  의 경동맥이 잘린 것이 틀림없었다.  그 옆에 종이가
  놓여 있었다. 피에 반쯤 젖어 있었다.
  "더 이상 살고 싶지 않다. 저  세상에서는 보다 좋
  은 것이 기다리고 있기를 바란다."
  글씨는 상당히 떨려 있었다.  서명은 없었다. 피가
  굳었고 사반이 형성되기 시작한 것으로 보아 죽은 지
  12시간이 넘은 것 같았다.
  강형사는 피를 피해 창가로  다가가 창을 열어보았
  다. 창 밖은 여관의 뜰이었다. 창을  열자 쇠로 만들
  어진 방충망이 강형사를 가로 막았다. 강형사는 다시
  돌아서서 사체를 바라보았다.
  작은 장이 강형사의  눈에 띄었다.  다가가 서랍을
  열어보자 온갖 잡동사니들이 쏟아져  나왔다. 손톱깎
  이, 이쑤시개, 볼펜, 여러 명함들, 압정이니 클립 따
  위들이 보였고 심지어는 콘돔도  있었다. 면도칼통도
  있었다. 아직 뜯지도 않은 새 것이었다. 면도기는 방
  구석에 놓여 있었다. 요즘 유행하는  한날만 쓰는 면
  도기였다.
  겉으로 보기에는 자살임이 틀림없었다.  그러나 강
  형사는 석연찮은 생각이 자꾸 들었다.
  "여관에 손님이 있습니까?"
  "있을 턱이 없잖아요. 그런 사건이 있었는데"
  미스 조가 시무룩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럼 무서워서 청소도 못했겠군요."
  "그렇지요, 뭐. 또 그 방은  아예 치우지도 말라던
  데요."
  강형사는 다시 머리를 갸웃거렸다.
  "누군가 들어온 것이 틀림없는데,  어제 다녀간 사
  람이 하나도  없습니까?  손님이 아니더라도  말입니
  다."
  "없어요, 없어."
  여주인이 팔을 내저었다.
  "그럼 어젯밤 미스터 박 방에서  이상한 소리가 나
  는 것도 듣지 못했습니까?"
  "우린 밤귀가 밝은데 어제는 아무  소리도 못 들었
  어요."
  여주인이 여전히 퉁명스런 목소리로 말했다.
  "그 글씨는 미스터 박의 글씨가 맞나요?"
  "맞는 것같이 보였어요."
  미스 조가 대답했다.
  "어제 문은 언제 잠갔습니까?"
  "여관에 손님이 안 차면 문이야 안 잠그지요. 그냥
  닫아둘 뿐인데, 종이 달려 있어서 누구든지 들어오면
  금방 알 수 있어요."
  강형사는 현관으로 돌아가 종을  살펴보았다. 그는
  조용히 문을 열어보려고 여러번 노력하였지만 실패하
  였다. 도저히 소리를내지 않고는 문을  열 수가 없었
  다.
  현관 외에 들어올 곳이 없다는 것은  이미 지난 번
  에 확인한바 있다.
  "두 분은 함께 계셨습니까?"
  "그래요."
  뚱뚱보 여주인은 그 질문이  어쩐지 자기를 의심하
  는 것 같아 갑자기 불안감이 엄습하여  오는 것을 느
  꼈다.
  부검 결과가 나와봐야 어떻게  된 영문인지 알겠구
  나 하고 생각한 강형사는 최경감을 만날 것인가 잠간
  고민하였다. 그때 싸이렌 소리가 들려왔다.
  "또 만났군."
  최경감이 무뚝뚝한  소리로 강형사에게  인사했다.
  감식반원들이 뒤를 따라 들어왔다.
  "안녕하셨습니까?"
  "음, 이번에도  특수한 임무로  누군가를 미행하고
  있었나?"
  "아닙니다. 이번에는 박철호를 지난번 사건 건으로
  만나려고했었습니다."
  "그래?"
  최경감은 더 강형사에게 관심을  두지 않고 능숙한
  솜씨로 사건을 지휘하였다. 강형사도  조사과정을 조
  용히 지켜보았다.
  "박철호는 정필대  사건  심문에서 뭘  얘기했습니
  까?"
  조사가 끝나자 강형사가 물었다.
  "끝까지 도망친 것은 여자였다고  들이대자 사색이
  되더구만."
  최경감은 강형사가  왜 남의  사건에 뛰어드는지에
  대해서는 한 마디도 묻지 않고 선선히 대답을 해주었
  다.
  "그러더니 자네 핑계를 대더구만.  그 남자가 돈을
  쥐어주며 자기 얘기를 하지 말아달라고 신신당부했다
  는 거야. 그런데 자네가 없어진  여자가 있다고 자꾸
  그래서 얼른 그렇게 꾸며댔다는 거지."
  강형사는 추경감의 질책이 들려오는  것 같아 고개
  를 움츠렸다.
  "그리고는 끝내 그 남자는 처음  본 남자라고 우기
  더구만. 하지만 그건 말이 안되잖야."
  "그런데 왜 구속을 하지 않았습니까?"
  "구속하려고 했지. 하지만 그  친구가 범인이 아니
  라는 것은 너무나 확실했거든. 그 때문에 도주, 증거
  인멸의 위험이  없다고  영장이 기각되었어.  제기랄
  거, 왜 알잖아"
  최경감은 짜증스런 얼굴로 말하고 있었다.
  "이번 사건을 어떻게 보십니까? 자살 같습니까?"
  "아니. 내가 취조하면서 느낀  것은 박철호만큼 생
  에 애착이 강한 놈도 없을  것이라는 점이었어. 절대
  로 자살할 업두를 못낼 위인일세. 거 참 이상한 일이
  야."
  "그렇다면 살인이란 말입니까?"
  "글쎄 객관적으로 보기에는 확실히 자살이야. 지난
  번 사건과 같아 보이지 않나?"
  "제 생각도 최경감님 생각과 동일합니다."
  강형사가 동감을 표시했다.
  "하지만 범인이 같다고는 여겨지지 않는군요."
  초동수사를 끝낸  뒤 시체는  대학병원으로 옮겨졌
  다.
  "내 차로 같이 가겠나?"
  최경감이 그때까지  남아 있던  강형사에게 호의를
  보였다.
  "아닙니다. 저는 좀더 살펴보겠습니다."
  강형사는 최경감의 제의를 사양하였다.  그는 아무
  래도 석연찮은 점을 풀어 헤쳐야겠다고 생각했다. 박
  철호는 타살되었다는 육감에서 그는 헤어날  수가 없
  었다.
  "저, 드릴 말씀이"
  최경감 일행이 일단 경비  순경만 남기고 철수하자
  미스 조가 강형사에게 말을 걸었다.
  "응? 무슨 일입니까?"
  강형사는 멍한 생각에 빠져  여관 마당을 거닐다가
  놀라 그녀를 돌아보았다.  키가 작고  못생긴 여자였
  다.
  "형사님이 자꾸 이상하다고 하니까 저도 이상한 생
  각이 들었어요."
  "그게 뭐지요?"
  "저는 잠이 들면 꼭  밤에 한번 소변을  보러 가기
  때문에 잠을 깨는데 어제는 그런 일이 없었어요."
  "언제나 그렇단 말입니까?"
  "물론 아주 피곤하면 그렇지  않아요. 하지만 어제
  는 그런 피곤한 일도 없었걸랑요.  게다가 요새는 무
  서워서 깼다가도 그냥 참고 자버리거든요. 그런네 이
  상하게 어제는"
  "어제 뭘 마셨지요?"
  "특별한 것은 없어요. 가게에서 콜라 한 병 사다가
  마신 것밖에 없어요."
  형사의 머리를 스치는 것이 있었다.
  "빈 병은 어디 있지요?"
  "벌써 내다 버렸지요."
  암담해지는 강형사의 눈치를 모른 채 미스 조는 태
  연하게 말했다.
  "그걸 사오면서 무슨 일이 없었어요? 가령"
  "아니, 전혀요."
  "잠깐!"
  강형사의 머리에 번개 같은 영감이 다시 떠올랐다.
  "콜라를 사러 갔던 때는 언제였지요?"
  "박군이 돌아오기 전이었어요. 5시쯤?"
  "가게까지는 23분 정도밖에 안 걸리지요?"
  "예, 그래요."
  강형사는 여관으로 다시 들어갔다.
  "미스 조가 콜라를 사러 갔을 때 어디 계셨죠?"
  "방에 있었어요."
  여주인은 갑작스런 강형사의 질문에  놀라 몸을 사
  리며 대답했다.
  "무슨 일이 있었을 겁니다. 잘 생각해 보세요."
  "아하, 그러고 보니 일이 있었어요."
  한참 무엇인가를 생각하던 여주인의 눈빛이 반짝였
  다.
  "101호실 쪽에서 무슨소리가 나는 것 같았어요. 그
  래서 그리로 갔었지요."
  101호실이라면 현관에서 가장 먼 방이다.
  "그렇다면 내가 101호실로 가보지요. 101호실에 들
  어갔었나요?"
  "아니오. 거기까지 갔다가 그냥 돌아왔어요."
  "좋습니다. 101호실 앞에 제가 있을 테니까 현관을
  열어 보세요."
  형사는 101호실 앞에서 귀를  기울였다. 소리가 희
  미하게들렸다.
  "소리가 들리는군요.  그때 종소리를  못 들었습니
  까?"
  "잘 모르겠어요."
  주인은 애매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그쪽으로만 신경을 써서."
  '그렇다. 범인은 여관의 구조를 잘 아는 사람일 것
  이다. 그 짧은 순간에 범행은 이루어졌던 것이다. 범
  인은 이 근처에서 기회를 노리고  있었다. 미스 조가
  나가는 것을 보자 기회를 잡았다고  생각했던 것이고
  여관 구석 쪽으로 돌을 던져 유인한  뒤 들어와서 주
  전자에 약을 탔을 것이다. 그  다음에는 박철호의 방
  에서 유유히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그 뒤에 박철
  호가 들어오자 위협하여 유서를 쓰게  했다? 이 부분
  이 좀 이상하군. 박철호에게도 약을 먹였을 가능성이
  있군.'
  여기서 강형사의 추리가 일단 끊겼다. 보다 절박한
  의문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왜 한 여관 종업원을 이렇게 치밀한 계산 아래 죽
  여야 했단 말이지?'
  강형사는 담배를 한 대 피워 물었다.
       11. 예술적인 살인
  "이번에도 자살일 가능성이 큰 것으로 나타났어."
  추경감이 부검 소견서를 책상 위로 던졌다.
  박철호가 죽기 전에 환각제 종류의 약을 사용한 것
  은 알 수있지만  그것은 자살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먹었을 가능성이 크고 그의 팔에 있는 바늘 구멍으로
  보아 마약을 여러번 사용한 경험이 있는 자라는 것이
  야."
  "아닙니다. 이번의 경우는 진짜 자살처럼 보이기는
  하지만 절대로  살해된 것이라고  확신할 수  있습니
  다."
  강형사가 흥분하여 말했다.
  "무슨 근거로?"
  추경감이 담배를 꺼내 물며 말했다.
  "자네 말을 듣고 자하문장의 주전자를 회수하여 조
  사해 보았지만 그저 수도물에 불과했어. 수면제 따위
  는 검출되지 않았단 말야."
  "당연하지요. 범인은  이미 치밀한  계획을 세우고
  있었습니다. 그 정도의 실수를 할 리가 없는 거지요.
  하지만 사실은 거기에 작은 과오가 있었던 겁니다."
  "작은 과오?"
  "예, 작지만 확실히 범행이  있었다는 것을 증명할
  수 있는 실수입니다."
  "흠, 그게 뭐지?"
  추경감은 흥미가 당기기 시작했다. 강형사는 그 눈
  치를 채고 우쭐해졌다.
  "그날 밤 주전자에 담겨 있던 물은 끓인 물, 즉 보
  리차였던 것입니다. 범인은 들어와서 자리가 비어 있
  는 틈에 수면제를 탔지요. 일을  쉽게 해치울 속셈이
  었지요. 혹시라도 있을 방해와 자신의 퇴로를 확보하
  기 위해서 말입니다."
  "그래서?"
  "그리고 범행 후에 증거물 없앨  생각으로 물을 쏟
  아 버리고 맹물을 담아둔 것이었습니다. 여기에 실수
  가 있었던 거지요."
  형사는 의기양양했다.
  "여관 주인은 주전자의 물이 보리차였다는 것을 증
  언했습니다. 그럼 범인은 누구인가? 일단 알 수 있는
  것은 범인이 박철호와 면식범이라는  점입니다. 그것
  도 상당히 밀접한 관계에 있는 인물이었습니다. 아마
  도 박철호에게 마약을 제공하는 인물이었을 가능성이
  큽니다. 박철호는 그에게 별 의심이 없 었던 거지요.
  마약을 받아 먹고  나서 부르는 대로  유서를 썼습니
  다. 그 뒤에  저항력을 상실한  박철호를 예술적으로
  처치해 버린 거지요."
  "예술적으로?"
  추경감의 그 반문은 이미  강형사가 예상하고 있었
  던 것이다.
  "그렇지요. 예술적이지요. 경감님은  '누구를 위하
  여 종은 울리나'라는 소설을 읽어 보셨습니까?"
  "헤밍웨이의 소설 말이지. 읽지는  않고 게리 쿠퍼
  와 잉그릿드 버그만이 나오는 영화는 보았지."
  "거기에 보면 고통 없이 죽는  방법에 대하여 마리
  아, 아니 잉그릿드 버그만이 조던, 즉 게리 쿠퍼에게
  말하는 대목이 있습니다. 바로 귀  뒤의 경동맥을 끊
  는 방법이지요. 그리고 마사다에 대해서 들어보신 적
  이 있습니까?"
  "마, 사, 다?"
  "예. 마사다란 이스라엘이 옛날 로마제국에 정복될
  때 마지막 남아 있던 요새였습니다. 마지막까지 거대
  한 로마 제국에 대항하던 집단이었지요. 이들은 점령
  될 위기에 처하자 죽음으로써 최후의 저항을 하게 됩
  니다. 이때 사용된 자살 방법도 귀 뒤의 경동맥을 자
  르는 것이었지요."
  "그건 모두 문학작품이지 현실은 아니잖아?"
  추경감은 강형사가 문학 지망생이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강형사의 꿈은 은퇴  후에 자기가 겪은
  사건들을 소설로 쓰는 것이었다.
  강형사는 추경감의 말에 한번 히죽 웃더니 다시 말
  을 이었다.
  "문학은 현실에 바탕을 둔  것이지요. 이번 범인도
  이런 점을 잘 알고 있는 친구였습니다. 자기 몸에 피
  가 튈 만한 일은 하지 않은 것이지요."
  "그럴 듯하군. 그렇다면 범인은 어떻게 잡지? 담겨
  진 단서가 없잖아."
  "아닙니다. 여러 가지 증거가 있습니다. 우선 범인
  은 박철호를 아는 면식범입니다. 그리고 더불어 여관
  사람들도 얼굴을 알고 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왜냐
  하면 범인은 여관의 구조를 잘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
  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은  범인은 마약밀매 조직
  과 어떻게든지 관련이 있다는 점입니다."
  "음, 계속해 봐."
  "그렇다면 범인은 그 지역을 지배하고 있는 마약조
  직을 수사해 보면 나타나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문
  제는 왜 박철호를  죽였는가 하는  점입니다. 그것도
  하필이면 이 시기에."
  "이 시기라면?"
  "도망친 구형주 때문에  조사를 받고  난 직후라는
  점입니다."
  "구형주라고 단정은 짓지 말고"
  "아무튼 여관에서 도망친  남자로 인해  그 친구가
  의심을 받고 수사를 당하던 중이었습니다."
  "음."
  그 남자는 구형주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렇다면
  마약과 구형주와 박철호, 이 세 가지 함수가 우리 손
  에 쥐어져 있는셈입니다. 박철호의 살해도 여기서 벗
  어난 결과는 아닐 것입니다."
  "그럴 듯하군."
  추경감이 짙은 담배 연기를 뿜으며 말했다. 강형사
  는 더욱 자신의 추리에 매료되었다.
  "저는 구형주의 전과 기록을 살펴보았습니다. 폭력
  전과 2범이더군요. 마약밀매 조직이 그  정도의 사내
  를 어디에 이용했을까 하는 점을 생각하는 것은 간단
  했습니다. 정필대의 살인이었지요."
  "그럴 수도 있겠지."
  추경감이 심드렁하게 답했다.
  "정필대를 죽인 후에"
  "왜 정필대를 죽였지?"
  "그건 아직 잘 모르겠습니다만 아마도 정치 자금의
  문제와 관련이 있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
  니다. 돈 문제로 분란이 생겨서  살인이 일어난 것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그렇다면 가짜 송희는 뭐지?"
  "그것도 현재로서는 잘  알 수는  없지만 수사상의
  혼란을 일으키려는 농간이 아닐까 생각됩니다."
  "그렇다고 해두고, 계속 말해 보게."
  "그래서 정필대를 죽인 후에 구형주를 몰래 내보낸
  것이지요. 그때까지는 들통이 나지  않으리라 생각했
  던 거지요. 하지만남자가  머물러 있던  것을 경찰이
  밝혀내자 박철호가 형사들한테 입을 열까  걱정이 된
  조직에서 살해해 버리고 만 것입니다."
  "아무래도 아구가 떨어지지 않는걸  자네는 제
  법이긴 하지만 아직 아마추어 티가 난단 말야."
  추경감이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먼저 가짜 송희를 내게 보내서 정필대를 주목받게
  할 필요가 없어. 만일 자네가  미행하지 않았다면 손
  님들을 다 내보내고 여관을 개끗이 정리한 후에 신고
  를 할 수도 있었던 것이거든."
  "아하! 경감님의 말씀을  들으니 알  것 같습니다.
  그 송희는 분명히  우리 쪽이었던  겁니다. 정필대가
  위험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던 거지요. 그래서 경감님
  에게 도움을 요청하고자 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정필
  대가 위험하다는 것을 알게 된 경로를  설명할 수 없
  는 위치에 있는 여자였기 때문에 자신을 정필대의 부
  인인 송희라고 속인 것이지요."
  "그렇다고 치더라고 역시 이상해. 구형주는 자신의
  정체가 탄로났다는 것을 모르는 상태에서  이미 행방
  을 감추었어. 이미 구형주는 비밀리에 전국에 지명수
  배되어 있단 말야. 그런데 그  근처의 불량배들도 사
  건이 있던 날 이후 구형주를 보았다는 사람이 없네."
  "그거야 당연하잖습니까? 살인을  저지른 다음인데
  숨겨야지요."
  "그럴 바에는 박철호는 왜 도망을 치지 않았을까?"
  "사건을 은폐하기 위해서지요."
  형사에게는 모든 것이 명확했다.
  "그럼, 자네가 보았다는  그 여자,  가짜 송희라고
  생각되어지는 여자는 어떻게 되지?"
  "모든 걸 지금 알 수는 없지 않습니까?"
  추경감의 추궁에 마침내 강형사는 말문이 막혀버렸
  다.
  "자네 추리 중 믿어지는 부분은 박철호가 살해되었
  을 가능성이 있다는  것뿐이네. 나머지  부분은 그저
  생각일 뿐이야. 박철호와 구형주가 무슨 관계가 있을
  지는 몰라. 그리고 마약과 관계가 있을는지도 모르겠
  네. 그건 마약 전담반의 최경감에게 좀 물어보게. 최
  경감은 알고 있지? 예전 김묘숙 박사 살인사건 때 만
  나 보았으니까."
  "예, 알고 있습니다."
  강형사가 시무룩한 표정으로 말했다.  자신의 멋진
  추리가 받아들여지지 않는 데 대한 불만이었다.
       12. 묘지앞에 서다
  그날 따라 추적추적 비가 내렸다.
  오명자는 망우리의  공동묘지에 있었다.  빗줄기가
  차츰 굵어지는 것 같았지만 그런 것은 아랑곳하지 않
  았다.
  "이 근처라고 했는데"
  오명자는 묘지들의  언덕 중간에  멈춰서 비석들을
  찬찬히 살폈다.
  있었다. 신미혜.
  오명자는 허겁지겁 그 비석 앞으로 다가갔다. 마치
  묘지가 갈라지고 그 속에서 진실을 이야기해 줄 원혼
  이라도 기다리고 있다고 생각하는 눈치었다.
  그러나 수많은 다른 묘지와 하나도 다르지 않은 그
  묘지는 신미혜가 스물넷의 젊디젊은 나이에 죽었다는
  것만을 알려줄 뿐이었다. 오명자는 그  앞에 국화 한
  다발을 내려놓았다. 그리고 자신이 조사한, 4년 전에
  죽은 신미혜의 이야기를 되새겼다.
  눈보라가 쏟아지던 겨울이었다. 그해  겨울은 유난
  히도 춥게 느껴졌다. 서슬이 퍼런  계엄령 하에 놓여
  있던 거리에는 사람들의 마음까지 굳어 있었다.
  강동대학교 졸업반이던 신미혜는 동부 이촌동의 낡
  은 아파트에서 혼자 자취를 하고  있었다. 강원도 산
  골에서 올라온 미혜는 집에서 얼마간  부쳐오는 돈과
  이일 저일의 아르바이트로 겨우 학비를  대며 공부하
  고 있었다. 아파트도  미국으로 이민간  언니 친구가
  비워 놓은 것을 잠시 쓰고  있었다. 겨울 방학인데도
  그녀는 시골집에 가지 않고 서울에  남아 있었다. 겨
  우내 학비를 벌어야 했기 때문이었다.
  "딩동."
  아파트의 초인종이 울렸다. 흰 눈이 쏟아지는 깊은
  밤이었다.미혜는 잠옷 바람으로 일어나  현관으로 다
  가갔다.
  "누구세요?"
  현관은 열지 않은 채 나직이 물었다.
  "나야, 나 방태산이다."
  미혜가 조용히 문을 땄다.
  "아이고 무신  날씨가 이  모양이고. 어이구  춥어
  라."
  태산은 어깨까지 함박눈을 뒤집어쓰고  있었다. 그
  러나 예전과는 달리 머리도 수염도  단정하게 정리되
  어 있었다.
  "얼른 옷 벗으시고 아랫목에서 몸 좀 녹이세요. 따
  뜻한 커피 가져올께요."
  혜는 어른스럽게 침착했다.
  "커피는 무신 커피고. 고마 이리  오이라. 니 보고
  싶어 환장했데이."
  방태산은 돌아서는 미혜의 어깨를  덥석 껴안았다.
  그리고 우악스럽게 그녀를 방바닥에 넘어뜨리고 얼굴
  을 부벼댔다. 미혜는 크게 저항도  하지 않고 덮치는
  얼굴을 받아들였다.방태산은 미혜를 눕혀  놓은 채로
  황급히 옷을 벗어 아무 곳에나  집어던졌다. 금새 알
  몸이 된 방태산은 미혜의 얇은 잠옷을  찢을 듯히 황
  급히 벗겨냈다.
  "아이"
  미혜는 너무나 급히 서두르는  방태산의 손을 거들
  어 스스로 브래지어 끈을 풀고 팬티를 발치로 벗어내
  렸다. 방태산의 급한 성미를 잘 알기 때문에 그를 따
  를 수밖에 없었다.방태산은 억센 손으로 가녀린 미혜
  의 유방을 움켜쥐고 거칠게 그녀를 다루었다.
  "좀 천천히 저 도망 안 가요."
  미혜는 얼굴을 찡그리며 마구  밀고 들어오는 방태
  산의 남성을 받아 들여야만 했다.
  "우리 인자 곧  형편 피일끼다. 오늘  정치 규제법
  풀린다 안카나."
  태산은 그의 작업을  멈추지 않고 숨을  바삐 몰아
  쉬면서 떠들었다.미혜는 방태산의 말을  뒷전으로 흘
  리며 그의 목을 팔로 감았다. 그녀의 몸 깊은 중심에
  서 쾌락의 씨가 천천히 온 몸으로  퍼져 나가는 것을
  느꼈다.방태산이 규칙적으로  움직일 때마다  그녀의
  긴장은 계단처럼 절정을 향해 한 계단씩 올라갔다.
  "선거가 멀지 않아 있을 모양인데, 이번엔 꼭 당선
  될끼다. 정치 규제법에 묶여서 투쟁한 놈 표 안 주고
  어느 놈  줄끼고. 군부가  결국 나를  거물로 만든
  것 흐, 흠."
  방태산은 말을 잇지 못하고 신음을 토한 뒤 미혜한
  테서 떨어져 나갔다.그는 따뜻하지도 않은 맨 방바닥
  에 널부러져 담배를  피워 물고 포만감에  젖어 있었
  다.
  "내 말 알아들었나?"
  방태산은 미혜가 그의 말을 들은 척도 않고 옷매무
  새를 고치고 있자 큰 소리로 되물었다.
  "예? 무슨 규젠가 뭔가라고 하셨죠?"
  "허허 참. 정치 규제가 풀린다 안카나."
  그제야 미혜의 눈이 번쩍 뜨였다. 방태산은 자기가
  정치 활동만 할 수 있게 되면 미혜와 꼭 결혼할 것이
  라고 입버릇처럼 말해 왔기 때문이다.
  "아니, 그게 정말이에요?"
  미혜가 방태산의 가슴을 쓸어안으며 말했다.
  "속고만 살았나? 사나이 하는 말에 무신 토를 그리
  달아쌌노? 요걸 고마 칵 잡아 묵어뿌릴가?"
  방태산은 미혜가 귀여워 죽겠다는  시늉을 해 보였
  다.
  "오늘 총재님을 만난기라. 서울 제 13 지역구는 내
  끼라 안카냐."
  "그런 건 아무래도  좋아요. 저만 버리지  말아 줘
  요."
  "허허, 버리다이? 니가  내 은인인네  우애 버리긋
  노? 내가 패가망신하고 쫓기 댕기니까 한 놈도 내 도
  와주는 놈 없더라. 나한테는 미혜 니밖에 없는기라."
  방태산이 미혜의 뺨에 입술을 부볐다.
  "오늘 그래서  말끔하게  면도를 하고  나가셨었군
  요."
  꽤나 따갑기만 하던 방태산의  얼굴을 생각하며 미
  혜가 물었다.
  "하모."
  "우리 결혼은 언제 해요?"
  미혜는 오래 전부터 하고 싶던 말을 내뱉었다.
  "결혼? 암, 해야재."
  결혼 이야기가 나오자 방태산의 목소리에는 갑자기
  힘이 빠졌다.
  "언제 해요?"
  "글쎄 말이다. 니캉 내캉 나이  차이가 얼마고? 열
  두 살 아이가?"
  "그것과 결혼과 무슨 상관이에요?"
  미혜는 방태산의 말에서 어렴풋이  불안 같은 것을
  느꼈다.
  "여편네 그년은 도망가고 없다만서도 니 내 말
  잘 새겨들어라. 니하고 내하고 열두  살 차이모 그게
  적은 차가 아잉기라. 이제 나는  늙어가고 니는 한창
  피어나는 나이에"
  "우리 딴 이야기해요."
  미혜는 방태산의 입을 막고 말았다.  그 뒤에 나올
  이야기가 어쩐지 겁이 났던 것이다.
  그들이 알게 된 것은 미혜가 대학교 1학년 때 그의
  사무실에 아르바이트를 갔을 때였다.  지역구 주민에
  게 추석을 맞아  인사장을 보내는  일이었다. 방태산
  대신 서명을 하고 주소를 적는일이다. 그곳에서 그녀
  의 빼어난 미모는 곧 방태산의 눈에 들었다.
  풍성한 머리에 큰 눈동자, 작은 입술, 그리고 어린
  만큼의 순박함이 그녀에게는 가득했다.  방태산은 곧
  그녀에게 접근했다.
  방태산 역시 못생긴 축에 속하는 인물은 결코 아니
  다. 그리고 미혜는 객지에 오래  살면서 따뜻한 정이
  그리웠다. 누군가가 자기를 보호해 줄  사람을 늘 기
  다리고 있었다. 어려운 일이 생겼을 때 의논해 줄 사
  람이 그리웠다.
  미혜의 고향은 속초였다. 언니가 한  명 있기는 했
  지만 미혜가서울에 올라오기  바로 직전에  미국으로
  건너가 유학의 길을 밟게 되었다. 기업체에서 대어주
  는 장학금으로 공부를 계속하게 된 것이었다. 외톨박
  이 미혜에게 신사로 위장한 방태산이  접근하는 것은
  생각보다 쉬웠다. 여자 다루기에 이력이 난 방태산에
  게 순진한 여대생 하나 손에 넣는 것은 누워서 떡 먹
  기였던 것이다.
  그들의 관계는 어느 정도는 로맨틱한 것이었다. 미
  혜에게 있어서 방태산은 연인이요, 아버지요, 선생이
  었다.
  그러던 관계가 결정적으로 깊어진  것은 정치 규제
  가 실현되면서부터였다. 어수선하던 정국을  틈타 정
  권을 잡은 군부는 구정치인들의 타도에  전력을 쏟았
  다. 방태산도 그 명단에 속해 있었다. 3년간 다진 발
  판을 무기로 정계에 다시 도전하려던 방태산으로서야
  속이 뒤집히는 일이었지만 일단은 위험으로부터 도망
  치는 일이 급했다. 그는 체포를  면하려고 미혜의 집
  으로 숨어들었다.
  그러나 그는 계엄 당국이 꼭 검거해야  할 만큼 거
  물도 아니었다. 거물들을  묶는 데  도매금으로 끼인
  송사리에 불과했다.
  오갈 데 없는 그는 아예 미혜의  아파트에 얹혀 살
  게 되었다.그는 자기의 아내가 정치적인 압박을 핑계
  로 도망쳤다고 말했지만 사실상 이유는  방태산의 여
  성 편력에 진절머리를 낸  때문이었다.최근 민주화를
  요구하는 분위기가 무르익으면서 정권을 잡고있던 세
  력은 일부 해금을 약속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고
  그 명단 속에는 방태산도 들어  있었다. 사실은 그만
  큼 그가 비중이 없음을 증명하는 것이기도 했지만 그
  로서야 절호의 기회를 다시 잡은 폭이었다.
  그러자 이제는 미혜가 슬슬 짐이 되기 시작하였다.
  그녀는 너무 어리고  그를 뒷받침할  재력도 없었다.
  그리고 그는 이제 그녀에게 싫증이 나기 시작하고 있
  던 참이기도 했다.그러나 미혜로서는 결코 그를 놓칠
  수 없었다. 그에게 그만큼 깊이  빠져 있기도 했거니
  와 그의 아이를 가졌던 것이다. 그녀는 곧 임신 사실
  을 알려 방태산의 결심을 굳히리라고  마음먹고 있었
  다. 그러나 방태산은 그날 아침  나간 이후 들어오지
  않았다. 계엄령은 해제되고 정치 바람이 전국에 거세
  게 불기 시작했다. 겨울잠을 자던  동물들이 봄을 맞
  은 듯 여기저기서 정치 지망생들의  목소리가 높아졌
  다. 그러나 방태산은 미혜를 영영 잊은 듯했다.
  기다리다 못한 미혜는 방태산을 찾아 나섰다. 그의
  사무실에 수십번 전화도 걸었다. 그러나 그의 모습도
  볼 수 없었고 그의 목소리도 들을 수 없었다. 미혜는
  정신없이 그를 찾아 헤맸다. 드디어 선거 유세장에서
  그를 찾아낼 수 었었다. 그러나 다가갈 수가 없었다.
  두터운 외투에 가려진, 불러오기 시각한 그녀의 배를
  보여줄 수가 없었다. 방태산의 곁에는 새로운 여인이
  었었던 것이다. 그의 아내가 되었다는 노애리라는 여
  인이. 그녀는 아파트로, 자신의 초라한  아파트로 돌
  아왔다. 밤을 새워  눈이 붓도록 울었다.  그리고 두
  통의 긴 편지를 썼다. 한 통은  방태산에게, 한 통은
  미국의 언니에게.
  다시 부모님에게 남기는 짧은 유서를 썼다. 그리고
  그날 밤, 2월  13일 그녀는 극약으로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속초의 부모는 그녀를 누가 죽음으로 몰았는
  지 알지 못하였다. 그녀가 유서에 다만 남의 애를 배
  고 배반당한 못난 여식이 죽음으로  사죄한다고 써놓
  았을 뿐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녀의  부모는 그
  남자를 쫓을 능력도 지니지 못했었다.  그냥 땅을 치
  고 통곡만 했다. 미국에서 잠시  돌아왔던 그녀의 언
  니도 그녀가 신신당부해 놓았듯이 그녀의  죽음에 대
  하여 일체 함구하였다. 쓸쓸한 그녀의 장례식에 방태
  산은 그림자도 비치지 않았다.
  선영들께 부끄럽다고  고향에도 가지  못한 그녀의
  시신이 묻힐 때도 비가 내렸다. 겨울이 채 가지도 않
  은 날의 쓸쓸하기 이를 데 없는 비가 새로 생긴 조그
  만 그녀의 묘 위에 그칠 새 없이 뿌려졌다.
  생각을 되새기던  오명자의 눈에서도  눈물이 흘렀
  다.
  "누구시죠?"
  오명자의 뒤에서 여자 목소리가  들렸다. 오명자는
  눈물을 훔치며 돌아보았다. 자주빚  레인코트를 입은
  여자가 서 있었다.
  "저는 신미혜의 친구입니다."
  뭐라 딱히 자신을 설명할 수 없는 오명자가 머뭇거
  리며 말했다. 자신의 처지가 죽은  신미혜와 다를 바
  없다는 동류의식이들었다.
  "헌데 당신은 누구시죠?"
  "나는 이 무덤 주인의 언니입니다."
  신미혜의 언니 신지혜가 조용히 말했다.
       13. 수풀 속으로 숨다
  형주와 정자는 근처의 해장국집에서 든든하게 배를
  채웠다.
  "이제는 뭘 할 거야?"
  정자가 반짝이는 눈빛으로 물었다.
  "쇼핑."
  형주는 간략하게 대답하고 일어났다.
  "쇼핑? 무슨 쇼핑?"
  "네 옷가지들을 사야지."
  "내 옷가지라고?"
  정자는 정말 기뻐서 고함을 쳤다.  형주는 그런 정
  자의 기분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여자란 어떤
  경우에 처해도 옷과  같은 외모를 꾸미는  일이 가장
  즐거운 일인 모양이다.
  "그러고 나선?"
  "방을 하나 잡고 혼례를 치러야지."
  "피!"
  정자는 콧방귀를 뀌긴 했지만  소녀처럼 가슴이 설
  레었다.
  "아, 자유스러움이란 이런 걸까?"
  정자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형주의  팔에 팔짱을 끼
  었다.
  "사실은 바로 여기서 배를 타고  떠나려 했는네 정
  자 주민등록증 때문에 조금 더 머물러야겠어."
  "그것 때문에 꼬리가 잡히는 건 아냐?"
  "그것까지 생각하고 있어. 걱정할 필요 없어."
  형주는 자신만만했다.형주가  주민등록증을 위조하
  여 온 것은 그로부터 사흘  후였다.형주가 정자의 인
  물 사진을 가지고 주민등록증 위조 조직을 찾으러 돌
  아다닌 사이 정자는 여관에 머물면서  쇼핑과 군것질
  로 시간을 보냈다.형주가 닥치는 대로 집어준 돈다발
  을 백 속에 넣고 정자는 쇼핑을 나섰다. 돈을 그렇게
  마음대로 써보기는 난생 처음이었다.  그녀는 마음에
  드는 여러 가지 옷부터 닥치는 대로 사 입었다. 평소
  에 그녀가 원하던  보라색 볼레로 스타일의  옷이 첫
  품목이었다. 고급스러운 블라우스도  세 벌을  샀다.
  구두도 최고급 브랜드로 두 켤레를  샀다. 돈을 마음
  대로 쓴다는 것이 그렇게 즐거울  수가 없었다. 처음
  에는 몇만 원에서 기십만 원을  오르락내리락하는 물
  건을 그렇게 산다는 것이 어쩐지 떨렸지만 살수록 점
  점 신이 나고  기분이 좋아졌다.신나는  사흘이 지난
  후 형주는 재벌 2세 같은 말끔한 차림으로 나타났다.
  "후후후, 형주씨 넥타이 맨 거 첨 봤어."
  "어때? 괜찮어?"
  형주가 빙긋이 웃으며 턱을 치켜들었다. 본래 미남
  인 그가 그렇게  차리자 정말 어디에  내놔도 빠지지
  않을 인물이었다.
  "제비족 같아."
  "뭐?"
  "호호호."
  그들은 한참 웃다가 심각한 얼굴이 되었다.
  "급해. 우린 이제 빨리 도망쳐야  돼. 그 놈들에게
  금방 소식이 들어갈 거야."
  "그 놈들이라니?  주마담은 이제 포기했을 거야."
  "주마담 따위를 가리키는 게 아냐."
  형주는 더 이상  말하지 않고 정자를  연안 부두로
  끌고 나갔다.
  "표는 끊었어. 목포행, 2시 출발이야."
  "어머머, 자기  마음대로야.  그럼 30분밖에  없잖
  아?"
  "바쁜 것이 우리를 구할 수 있어."
  바쁜 것이 그들을  구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30분
  후 그들은 목포행 여객선 위에 있었다.
  "어휴, 형주씨, 너무 춥다."
  갑판에 나와 있던 정자는  형주에게 어리광 부리듯
  이 말했다.
  "그럼 들어갈까?"
  "싫어. 냄새나고 어지럽단 말야."
  "그럼 어떡하라고?"
  형주가 난감한 표정으로 말했다.
  "꼭 안아주면 되지."
  "뭐?"
  "뭐 어때? 우린  신혼 부부잖야. 자기,  벌써 잊은
  것은 아니겠지."
  "잊기는?"
  형주는 정자를 꼭 품안에 안았다. 주위에서 힐끗힐
  끗 쳐다보는 눈길도 있었지만 둘 다 아랑곳하지 않았
  다.
  "형주씨, 우리를 쫓는 사람이 누구야? 형주씨가 갖
  고 있는 돈은 누구  돈이고? 사실은 나  쓰면서도 겁
  나. 형주씨, 은행이라도 하나 턴 것 아냐? 은행 돈은
  번호로 추적이 가능해서 함부로 쓰면 금방 잡힌대."
  형주는 그 말에 웃었다.
  "걱정 마. 이 돈은 추적해도 경찰에는  알릴 수 없
  는 돈이야. 정치한다는 골빈 놈들이  쓰려던 돈이야.
  어차피 술값으로 없어지거나 비누,  치약으로 둔갑해
  서 유권자라는 사람들한테 공짜로 뿌릴 돈이었으니까
  절대로 경찰에는 알리지 못해."
  "정치 자금이란 것이구나."
  정자가 제법 유식한 말을 했다.
  "쉿! 조용히 이야기해. 나는 운반책이었어. 그런데
  기회가 온 거였지. 내가 갖고  있는 가방에는 현금으
  로 8천만원이 들어 있다고. 하지만 이  정도 돈이 없
  다고 붙을 놈 떨어지고 떨어질 놈이 붙겠어?"
  "그럼 우리를 쫓는다는 것은"
  "그래 내가 있던 조직이지. 뽕식구들이지."
  형주는 태연하게 말했지만 정자는  그의 품에서 약
  간 떨고 있었다. 뽕식구란 히로뽕  밀매 조직을 말하
  는 것이다. 그들이 얼마나 잔혹하고 끈질기다는 것을
  그녀는 여러 사람들한테 들어서 잘 알고 있었다.
  "이런 바보. 걱정 마 안심 푹 놓으란 말야."
  형주가 웃으며 그녀의 등을 다독였다. 포근한 손길
  이라고 그녀는 느꼈다.
  "내가 알기로 우리 식구들은 인천과  부산 두 곳으
  로 뽕을 들여오거든."
  "그렇다면 우리가 이 배 탄  걸 알았을지도 모르잖
  아?"
  정자가 불안한 얼굴로 형주를 쳐다보았다.
  "아마 우리가 내릴 목적지도 알지 모르지."
  "바보야 그럼 어떡해?"
  정자는 얼굴이 하애게 질렸다.
  "걱정 말라니깐. 다 생각한 거니까."
  형주는 정자의 어깨를 다시  다독이며 침착한 목소
  리로 말을 계속했다.
  "우리는 목포에서 내릴  게 아냐. 이  배는 중간에
  군산에서 멈춘다고. 우리는 거기서 내리는  거야. 그
  다음에는 거기서 남원으로 갈 거야."
  "남원? 왜 하필이면 남원이지?"
  조금은 안심이 된 목소리로 정자가 물었다.
  "남원에 혹시 아는 사람 있어?"
  "아니, 전혀 모르는 곳이에요."
  "하지만 나는 조금 아는 바가 있지."
  형주가 담배를 꺼내 물었다. 거센  바람에 불이 잘
  붙지 않았다. 정자가 두 손으로  그의 라이타를 감싸
  주며 물었다.
  "거기 친척이라도 있어?"
  "아니, 나도 아는 사람은 전혀 없어."
  "그런데 왜 그리로 가는 거야?"
  "그래야 우릴 못 찾을 테니까. 그리고 또 한 가지,
  거긴 춘향이하고 이몽룡이가 만났던 동네거든."
  "뭐예요? 그럼 자긴 이몽룡이고  난 춘향이가 되는
  거야?"
  정자가 이번에는 웃었다. 형주는  변덕스러운 그녀
  가 더 사랑스러웠다.
  "우리는 바다로 숨는  게 아냐. 수풀  속으로 숨는
  거라고. 바다는 한눈에 다 보이지만  숲은 바로 앞도
  안 보이거든."
  한편 형주가  뽕식구라고 말하는  조직은 그때서야
  형주의 행방을 알아냈다.
  "형님, 쌍검의 행방을 알았습니다."
  곰보가 최장배에게 달려왔다.
  최장배는 미상동의 용궁 살롱에  있다가 곰보의 말
  을 듣고 벌떡 일어섰다.
  "그곳이 어디야?"
  "인천입니다. 그리고 목포로 가는  배를 탔다는 것
  도 알아냈습니다."
  "좋야 수고했어. 그리고 그년도 같이 있었겠지?"
  "정자 말입니까?"
  "그래."
  "물론이지요."
  "좋아."
  최장배가 좋아하고 소리친 순간이었다.  살롱의 문
  이 벌컥 열렸다.
  "최장배, 꼽짝 마라!"
  "억, 형님 피하십시요."
  곰보가 고함을 쳤다. 그러나 우르르 몰려 들어오는
  경찰에는 속수무책이었다. 최장배는 곧 팔을 꺾인 채
  끌려나왔다.
  "왜 이러십니까?"
  최장배는 몸을 뒤틀며 반항했다.
  "최장배씨, 당신을  박철호 살인범으로  체포합니
  다."
  형사가 잔뜩 비꼬는 어투로 말했다.
  "뭐, 뭐야? 말도 안돼!"
  최장배는 큰소리를 쳤지만 어투에는 불안감이 잔뜩
  배어 있었다.
  "자네는 현장에 너무나  중요한 증거를  남겨 놓았
  어. 그것 때문에 들통이 나고 만 거야."
  "중요한 증거?"
  최장배는 얼떨결에 강형사의 말을 따라 했다.
  "그렇지. 바로  면도칼이야 박철호와  자네가 쓰는
  면도칼은 종류가 틀려.  자네가 쓰는  면도칼은 양날
  면도칼이지만 박철호가 쓰는 면도칼은 한날짜리란 말
  야. 그걸 몰랐던 모양이지. 아무려면  자살하려는 친
  구가 한 통이나 남아 있는 면도칼을두고 새로 면도칼
  하나를 달랑 사서 자살하는 데 쓸 것 같나?"
  그 말에 최장배는 고개를 숙이고 낮게 욕을 내뱉고
  말았다.
  "뿐만이 아니지. 우리는 그  앞 구멍가게에서 자네
  가 범행에 사용한  면도칼을 구입하였다는  것도, 그
  앞 약국에서 수면제를 구입한 것도 모두 알고 있어."
  최장배는 묵묵부답이었다.
  "이 친구는 어떻게 할까요?"
  곰보를 붙잡고 있는 순경이 물었다.
  "공무집행 방해와 범인도주 및  은폐에 협력하였으
  니 끌고 가."
  곰보의 연행으로 수풀 속의 두 사람은 아직도 기회
  를 가질수 있게 되었다.
       14. 비오는 날의 밀담
  방태산의 선거 사무실은 갑자기  활기를 띠기 시작
  했다. 가장 강력한 라이벌인 정필대가 스스로 목숨을
  끊고(신문들은 일단 그렇게 추정했다) 말았으니 이것
  이야말로 천우신조의 기회가 아닌가고 방태산은 생각
  했다.표를 얻기 위해 하루 종일  선거구를 누비던 운
  동원들은 거의 돌아가고 각 지역  책임자인 활동장들
  만 남았다.열두 명 중 세 명은 볼일이  었어 먼저 나
  가고 아홉 명이 남아 었었다.  활동장은 아니지만 마
  지막까지 남아 사무실을 정리하고 가는  오명자도 남
  아 었었다.
  "모두 주목!"
  방태산이 위엄을 갖추며 가슴을  앞으로 내밀고 턱
  을 집어넣는 자세로 일어서면서 말했다.
  "오늘도 활동장 여러분 수고가  많았다. 우리는 반
  드시 이기고 만다. 여러분이 주워  모은 한표 한표가
  이 사람을 의정단상에  세우고 말끼다.  나는 햇볕에
  시커멓게 탄 너거들 얼굴이 자랑시럽은기라!"
  방태산의 억양이  차츰 높아지면서  억센 사투리가
  나오기 시작했다.
  "이건 아무나 몬하는기라. 느거나  내처럼 피로 뭉
  친 사람들만이 해낼 수 있는기라.  이번 선거는 벌써
  우리가 이긴기나 마찬가지 징조가 막  나타난다 아이
  가. 우리 13구에서 출마한다고 소문낸 모씨도 사라졌
  고"
  방태산은 그렇게 말하다가 잠시  말을 끊고 고개를
  갸웃했다.
  "마, 내가 그 사람이 죽었다고 좋아하는 건 추호도
  아인기라. 선량한 상대자로 싸우다 먼저 간 사람한테
  본인은 심심한 조의를 표하는 바가 없지 않는기라."
  "킥킥"
  뒤에 서 있던 젊은 활동장이 참다  못한 웃음이 터
  져나왔다.
  "거 머꼬? 심각한 말 하는데 웃고 그랄끼가?"
  "죄송합니다."
  "이상 끝. 오늘은  이만 해산이다.  오명자 여사만
  남고 다 가거라."
  그래서 선거 사무실의  하루는 마무리되어 갔다.
  활동장들은 삼삼오오 짝을 지어  한잔씩 하러 나가
  고 어수선하고 텅빈 사무실에는 방태산과 오명자만이
  남았다.오명자는 방태산의 존재를 의식하지 않으려고
  흩어진 집기를 바로  놓는 등 부지런히  실내 정리를
  했다. 그러나 방태산이 게슴츠레한 눈으로 자기의 종
  아리며 히프를 쳐다보고 앉아 었으리란  짐작은 하고
  있었다.오명자가 실내를 거의 정리했을 때였다.
  "오여사, 고마 이리 오이라."
  방태산이 소파에 앉아 걸쭉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
  는 털이 숭숭 나 흉물스러운 다리를  낮은 탁자 위에
  올려놓고 뒤로 비스듬히 자빠진 자세로 앉아 있었다.
  "일 고마하고 일로 오라카이."
  오명자가 들은 척도 아니하자  방태산은 조금 신경
  질적으로 말했다.오명자는 아무 말 않고 방태산 앞에
  와서 가만히 섰다.
  "위원장님, 커피 한 잔 드릴까요?"
  오명자는 그 자리를 모면하기 위해 말을 꺼냈다.
  "커퍼? 치아라. 그 썩은 물 묵으모  잠만 안 온다.
  우리 속시원한 맥주 한 잔 묵쟈."
  태산이 일어서서 칸막이를 해놓은 위원장실로 들어
  갔다. 거기엔 사무용 책상 하나가  가운데 버티고 있
  고 그 앞에 고가구점에서 사온 응접  세트가 놓여 있
  었다. 밖의 응접 세트는 비닐로 커버를 했지만 이 방
  의 것은 그래도 라쟈로 커버를 한 것이었다. 새 것일
  때는 값깨나 나갈  쇼파 같았다.방태산은  옆에 있는
  조그만 냉장고를 열고 맥주 한 병과  컵두 개를 가지
  고 왔다.
  "오여사, 이리 들어오이라. 아무도 보는 사람 없데
  이. 우리 맥주 한잔 함시로 오늘 일 마무리짓자."
  그는 책상 모서리에 맥주병을 탁탁 쳐서 뚜껑을 열
  며 말했다.
  "퍼뜩 오이라."
  오명자가 자기 자의로 어떻게 할 수 없는 최면술에
  걸린 사람처럼 무표정하게 위원장실로 들어갔다.
  "자, 한 잔 받아라."
  "제가"
  오명자가 술병을 받으려고 했다.
  "오여사가 먼저 한 잔 해라. 레디  파스토란 거 안
  있나."
  명자는 하는 수 없이 맥주잔을 두 손으로 받았다.
  두 사람은 금새 맥주 한  병을 비웠다.오명자가 한
  잔을 두고 씨름하는 사이 방태산은 나머지를 다 비웠
  다.
  "오여사, 요새 잘 안 보이던데 뭐 걱정거리 있나?"
  방태산이 음흉한 웃음을 흘리며  명자 얼굴을 들여
  다보았다.
  "아니예요."
  오명자는 혹시 이 능구렁이가 자기 뒷 조사를 하고
  있는 것을 눈치챈 것이나 아닐까 해서 찔끔했다.
  "걱정꺼리 없으모 다행이다. 요새  며칠 못 봤더니
  더 이쁘졌다 아이가."
  태산이 손으로 오명자의 볼을  잡으며 말했다.그녀
  가 얼굴을 돌리자 이번엔 그가 벌떡  일어나 옆에 와
  서 앉았다.
  "요거 때문에 내 미치겠에이."
  방태산은 오명자를 와락 끌어안았다.  술냄새 나는
  입을 그녀의 입술에 덮쳤다.
  "으음"
  오명자가 고개를 돌려 그의  돌연한 공급을 피하려
  고 했다.
  "어허, 새삼스럽게 와 이카노?"
  이번에는 큼직한  방태산의 왼손이  그녀의 유방을
  덥석 잡았다.
  "정말 이러시면"
  오명자는 방태산의 손목을 잡고 모기 울음 같은 약
  하디  한  소리로 말했다.
  "오여사, 내가 뭐 남이가? 내  오여사 냄편 책임진
  다 안카나. 우리가 살을 섞은 사이에"
  방태산의 손목을 꽉 쥐었던  오명자의 팔에서 힘이
  빠져나갔다. 가슴 속 깊은 곳에서 끓어오르는 분노를
  참느라 이를  악물었다.젖가슴을 주무르던  방태산의
  손이 이번엔 오명자의  허벅지로 아갔다.  그의 손은
  송충이처럼 위로 기어올라가기 시작했다.그의 입에서
  는 가쁜 숨결이 터져나왔다.뜨거운 숨결을 내뿜던 방
  태산은 오명자를 안고  벌떡 일어섰다.  그녀를 자기
  책상 위에 반드시 눕혔다.
  "아이 위원장님"
  오명자가 책상 위에서 일어나 앉으려고 했다.
  "가만"
  방태산이 한 손으로 목을 껴안고 책상 위에서 덮쳐
  왔다. 그의다른 한 손이 명자의  치마를 걷고 올라와
  팬티를 우왁스럽게잡아다녔다.
  "아이 위원장님"
  오명자는 책상 위에서 남자 밑에 깔린다는 것이 조
  금은 이상한 기분을 만들어 주었다.  그녀의 마음 속
  에서 들끓는 분노와는 달리, 그녀의  육체는 차츰 방
  태산의 손 끝에서 덥혀지고 있었다.
  '이래서는 안되는데'
  오명자는 이렇게  생각하면서도 두  다리는 팬티가
  쉽게 벗어지도록 도와주고 있었다.
  "책상이라카는 건 사무만 보는 건 아인기라."
  방태산은 하얗게 드러난 오명자의 하체를 바라보면
  서 황급히 자기 옷을 벗어 던지기 시작했다.
  "책상 위의 여자라 그거  영화 제목감 아이가.
  어떤 멋쟁이도 사무실 책상 우에서  이래 놀아보지는
  몬했을끼라."
  그는 자기의 아이디어가 기가 막힌다는 듯 그 말을
  계속 되풀이하면서  오명자 위에  엎어졌다.오명자는
  방태산의 서두는 율동을 몸으로 받으면서 창 밖을 내
  다보았다. 아랫배에서 서서히 퍼지는 쾌감이 그녀 육
  신의 배신을 말해 주고 있었다.창  밖으로 앙상한 가
  로수들이 하늘거렸다. 오명자는 묘지에서  만난 신지
  혜라는 여자를 떠올리고 있었다. 그녀의 이미지는 마
  치 저 앙상한 가로수와 같았다. 속이 텅빈 듯한 느낌
  을 그녀는 풍기고 있었다.
  "당신은 참 재미있는 사람이군요."
  그녀는 묵묵히 오명자를 바라보다가  먼저 말을 꺼
  냈다.
  "왜 벌써 4년이나 지난 일에 관심이 있죠?"
  "그건 4년 전의  일이 아니에요.  지금도 계속되고
  있는 일이랍니다."
  오명자는 지혜의 말에 대답한 뒤 이어 말했다.
  "나는 오명자라고 해요."
  "나는 신지혜라고 함니다"
  "미국에 계신 줄 알았는데"
  "얼마 전에 돌아왔지요. 이럴 게 아니라 우리 어디
  로 나갈까요?"
  지혜는 오명자를 이끌어 시내로  들어왔다. 그녀는
  차를 갖고 있었고 운전 솜씨도 보통이 아니었다.
  "미국에서는 차가 없이는 살 수가  없다 보니 어쩔
  수 없이 차를 몰게 되었는데 그게  버릇이 되어 한국
  에서도 차를 몰아야만 움직이겠더군요."
  그녀는 혼자말처럼 지껄이며 담배를 꺼냈다
  "피우시나요?"
  "아니오."
  오명자가 깜짝 놀라 사양했다.
  "한국 여자들은 담배를 거의  안 피우더군요. 대학
  생들을 빼면 말이에요. 하지만 결혼을  하면 모두 담
  배를 끊는다니 그것도 참 신기한 일이에요."
  "얼마만에 귀국하신 거죠?"
  "8년이지요. 미혜가 대학에 진학하기 얼마 전에 떠
  났었으니까요."
  "그럼 나이가?"
  "우리 나이로 치면 서른둘이지요."
  전혀 그렇게 보이지 않았다.  서른둘이면 오명자보
  다 두 살이나 많은 폭인데 오히려 서너 살은 어려 보
  였다. 담배를 입에문 모습이 고혹적으로 비쳤다.
  "아 참, 비가 와서 창문도 못 열 텐네 담배 연기를
  싫어하는건 아닌지요?"
  "아니, 괜찮습니다."
  그것은 진심이었다. 긴 머리칼에  하얀 피부, 오똑
  한 콧날, 고대  희랍인들이 그녀를  보았다 하더라도
  자신들의 어떤 여신에 뒤지지 않을  것이라 생각했으
  리라.
  "한데 이건 너무 이상한  우연의 일치군요. 이렇게
  신미혜씨의 언니를 만나다니"
  오명자가 아까부터  이상하게 생각한  점을 질문했
  다.
  "그 말 한 마디로 당신은  거짓말을 잘하지 못한다
  는 것을 드러냈군요."
  지혜는 오히려 이상한 말로 오명자의 말을 받았다.
  "예?"
  "오명자씨는 아까 미혜의 친구라고  하지 않았던가
  요?"
  "아아, 네"
  오명자는 말문이 막히고 말았다.  방금 '신미혜씨'
  라고 한 것이 실수였다.
  "나는 벌써 오명자씨가 미혜의 친구가 아니라는 것
  을 알고 있었답니다."
  지혜가 멋진 폼으로 담배 연기를 내뿜으며 말했다.
  "나는 누군가가 미혜의  옛 일을  조사하고 있다는
  것을 들었어요. 그래서  나는 반대로  '그 누군가'를
  조사하기 시작했지요. 미혜의 묘지는 이상한 우리 둘
  이 만나기가 아주  적당한 장소  같았어요. 말하자면
  내가 당신을 미행하다가 붙잡은 것이지요."
  오명자는 잠시 아찔한  기분이 들었다.  이 여자는
  보통내기가 아닌 것이다.
  "어디 좋은 장소를 알고 계신 데가 있나요?"
  지혜가 물었다. 차는 이미 시내로 들어와 있었다.
  "아니오. 특별한 곳은 아무 데로나 가시죠."
  "난 아직 별로 아는 곳이 없어서"
  지혜는 주저하듯이 말하였다. 창 밖으로 '르네상스
  '라는 간판이 흐릿하게 보였다.
  "르네상스라, 이름이 마음에 드는데요.  저리로 가
  지요."
  혜가 차를 꺾었다.르네상스는  레스토랑이었다. 빗
  줄기가 이제  뜸해졌다.내부로 들어가자  초호화판의
  장식들이 펼쳐졌다. 로코코 시대의 독특한 풍취를 내
  는 실내 장식들로 치장되어 있었다.
  "제 멋대로군."
  지혜가 자리에 앉으며 비웃는 투로 말했다.
  "예?"
  "여기 장식 말이에요. 정문은  바로크 양식으로 꾸
  며져 있는데 들어와 보니 후기 로코코 양식에다가 저
  걸 한번 보세요."
  지혜가 가리키는 곳에는 큼지막하게 피카소의 그림
  '아비뇽의 처녀들' 복사판이 걸려 있었다.
  "누구의 머리인지 참 대단한 방법으로 장식을 했군
  요. 식사전이신가요?"
  오후 5시 30분이었다.
  "예."
  "그럼 일단 뭐든 먹고 이야기를 하지요."
  그 뒤에 그녀는 식사가 끝날 때까지  한 마디의 말
  도 하지 않았다.후식까지 다 먹어치운  뒤 그녀가 입
  을 떼었다.
  "동생에 대해서 왜 조사하시죠?"
  "예?"
  "내가 알아낸 것은 당신이 미혜를 조사한다는 것뿐
  이었어요. 미혜에 대해 어느 정도나 알고 계시나요?"
  오명자는 자신이 알고 있는  것을 자세하게 그녀에
  게 설명하였다.
  "대단하시군요. 그걸 어떻게 알게  되었나요? 누구
  에게서 미혜의 억울한 죽움을 들었나요?"
  "송희라는 내 친구에게서 듣게 되었어요."
  "송희?"
  지혜의 미간이 살짝 찌푸려졌다.
  "예, 정필대라는 남자의  아내인데 정필대씨는
  얼마 전에 살해를 당했어요."
  "뭐라고요? 정필대가 죽었다고요?"
  지혜가 놀라 소리쳤다.
  "예, 아시는 분인가요?"
  "알다뿐이겠습니까?"
  그렇게 말하던 지혜는 곧 목소리를 낮추었다.
  "신문에 가끔 나는 정치인 아녜요?"
  ""
  "그 얘긴 이따가 해드리죠.  먼저 하시던 말씀이나
  계속해 보세요."
  지혜는 담배를 한 대 피워 물었다.
  "그 정필대의 사인이 수상하다고 송희가 나한테 달
  려왔어요. 그러면서 방태산이 수상하니  조사해 달라
  고"
  "방태산과는 어떤 관계지요?"
  그녀의 눈이 가늘어졌다.
  "아무런 관계도 없어요. 그  자 밑에서 선거운동원
  으로 있을뿐이지요. 나는 방태산이 어느 정도로 타락
  한 인간인지를 알 수가 없었기 때문에 조사를 시작했
  지요. 그 첫대상이 신미혜씨였던 거지요."
  "왜 하필이면 미혜지요?"
  "나와 같은 여자이기 때문이지요.  송희가 건네 준
  자료에는 사기에 대한 것은 많았지만 여자 문제에 관
  한 것은 그것 하나뿐이었습니다. 여자들은 그런 문제
  를 숨기기 때문인  모양이에요. 사실  나도 정필대가
  이 사건을 어떻게 알아냈을까 여간 궁금한 게 아니랍
  니다."
  "그건 궁금할 것도 없어요. 내가 그에게 가르쳐 준
  것이니까요."
  "예? 어디서 말입니까?"
  "그가 총각 행세를 하던 미국에서였지요."
  인생이란 얼마나  얽히고설키는 것일까?  오명자의
  생각은 거기서 끊기고 말았다.아직  해가 떨어지지도
  않은 저녁 무렵. 사무실 책상  위에서 벌어진 불륜의
  정사는 싱겁게 끝났다. 급히 서둘던 육중한 방태산의
  육체는 마지막 몸부림을 치면서 뜨거운  신음을 토해
  낸 뒤  오명자로부티 떨어져나갔다.아랫도리를  벗은
  채 소파에 널부러진 방태산은 담배 연기를 천장을 향
  해 길게 뿜어댔다.오명자는 방태산의 그 모습을 책상
  위에 누운 채 내려다보면서  슬퍼졌다. 슬프다기보다
  는 분노와 비애가 범벅된 심정이 그의 누선을 자극했
  다. 그녀는 갑자기 흐르는 눈물을  닦을 생각도 안했
  다. 어엿한 남편을 두고 대낮 남의 사무실 책상 위에
  서 짐승 같은  인간에게 몸을 내맡긴  자기의 행동이
  너무나 후회스러웠다.
  조금 전 쾌락으로 떨던 자기의 육체가 치사하게 보
  였다. 남편으로부터는 느끼지 못하던 전율 같은 것을
  자기의 육체는 즐겼다.  마음과 육체가  서로 배신의
  길을 가는 자신이 저주스러웠다
  "오여사, 뭐하는거요? 또 올라가까?"
  방태산이 넋울 잃고 있는 오명자를 보고 말을 걸었
  다.명자는 이를 꼭 물고 생각했다.
  "내가 네놈의 정체를 세상에 밝히고 말 것이다."
  그녀는 옷도 채 입지 않고 소파에  누워 있는 방태
  산을 내려다보며 자기 옷을 챙겨 입었다.
       15. 뜻밖의 방문객
  추경감은 아내가 삶아준 국수를  두 사발이나 비우
  고 아랫목에 비스듬히 누워  텔레비젼을 쳐다보았다.
  오랫만에 아내가 삶아준 국수는 어릴 때 어머니가 해
  주던 그맛이 제법 났다. 학교에서  허기진 배로 집에
  들어서면 언제나 웃는 얼굴로 그를  맞아주던 어머니
  가 "얘야, 오늘 국수 삶아 줄까?"  하고 다정하게 묻
  고는 했다. 전쟁통이라  밀가루도 구하기  힘든 부산
  피난 시절. 밀을 껍질도 벗기지 않고 제분을 해 누로
  스름한 국수였었다. 마당겸  길에 놓은  풍로에다 푹
  삶은 국수를 건져  찬물에 씻은 다음  널찍한 사발에
  수북이 담고 멸치국물을 끼얹었다. 파란 애호박 삶은
  것을 숭숭 썰어 얹고 간장을 찔끔 두른 그 국수가 그
  렇게 구수할 수 없었다.
  추경감이 혼자  빙긋이 웃으며  돌아가신 어머니의
  모습을 회상하고 있을 때였다.
  "아빠, 우리 코미디 봐요. 텔레비 돌릴래요."
  나미가 방안에 들어오며 떼를 썼다. 추경감은 미국
  방송을 틀어놓고 슈퍼볼 경기를 보고 있었다.
  "코미디는 무슨  코미디야. 지금  막 시작한  경긴
  데"
  추경감은 전혀 양보할  생각이 없었다.  틈만 나면
  미국의 슈퍼볼 시리즈를 보기 때문에 각 팀의 성적이
  나 스타의 기록까지 훤한, 별난  취미를 가진 추경감
  이었다.
  "아니, 영어도 제대로 모르시면서  밤낮 그놈의 철
  모 쓴 애들 싸움만 봐요. 나미 보게 좀 돌려요."
  곁에서 책을 읽고 있던 아내가 딸 편을 들었다.
  "영어도 모른다고?"
  "그렇죠 뭐."
  "예스는 예이고, 노우는 아니오이고,  와이프는 마
  누라고, 프래틀러는 수다장이"
  "뭐라구요? 나 기가 막혀."
  아내는 더 상대하기 싫은 듯 일어나서 나가버렸다.
  "아이, 아빠!"
  그러나 나미는 포기하지 않고 졸랐다.
  "밖에도 텔레비젼 있잖아."
  "피이, 요새 그런  구닥다리 흑백을  누가 본대요.
  더구나 지맘 내켜야 나오는 화면인데."
  "그럼 내가 나가서 볼까?"
  "아빠, 그러지 말고 우리 텔레비젼  하나 더 사요.
  저것도 이젠 낡아서 엉망이잖아요. 요즘 웬만한 집엔
  모두 두대 세대씩 있어요."
  "얘야, 그런 소리 마라. 너희  아빠 봉급이 얼만데
  새 텔레비젼을 또 사니?"
  밖에서 안 듣는 척하던 아내가  큰 소리로 말했다.
  다 같은 경찰관이고  다 같은 경감인데  아무개 집앤
  자가용까지 있더라는 말을 가끔 하는 아내였다. 그러
  나 추경감이 그러길 바라는 것은 아니었다.
  "딩동."
  그때였다. 누군가가 초인종을 울렸다.
  "녜, 나가요."
  나미도 핑계김에 나가버렸다. 추경감은  다시 느긋
  한 기분으로 담배를 꺼내 물고 격렬한 싸움이 벌어진
  화면을 즐겼다.
  "여보, 손님 오셨어요."
  문 밖 거실에서 아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추경감
  은 아주 못마땅한 표정으로 엉거주춤 일어났다. 바지
  만 입고 위에는  런닝셔츠 바람인 그는  쉐터 하나를
  꺼내 입고 마지못해  거실로 나섰다.  거실엔 뜻밖의
  인물이 와 있었다.
  "아니, 당신은?"
  추경감은 눈이 둥그래졌다.  거기 서  있는 사람은
  다름 아닌 송희, 아니 정필대의  아내를 자처하고 그
  의 뒷조사를 부탁하러 왔던 그 여자였다.
  "그 동안 안녕하셨어요? 경감님."
  그녀는 담담한 표정으로 인사를  했다. 여자로서는
  비교적 큰 키에 긴 목, 그리고 검고 치렁치렁한 생머
  리가 인상적이었다. 그녀는 언제나 쉽게 표정을 나타
  내지 않았다. 약간은 우울한 듯하면서도 하얀 얼굴이
  미인축에 든다고 할 수 있었다.
  "거기 좀 앉으시요."
  그 여자가 잿빛 바바리코트를 벗어 얌전하게 갠 뒤
  옆에 놓으면서 앉았다.
  "경감님, 죄송합니다. 경감님을 속인  일을 용서하
  십시오."
  그녀가 공손히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제 이름은 지혜라고 합니다. 신지혜입니다."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이요? 어흠, 어흠."
  추경감은 헛기침을 두어번 하고는  점잖게 말을 했
  다.
  "그럴 사정이 있었습니다. 정필대씨는 그때 누군가
  가 죽이려고 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전 그를 죽게
  내버려 둘 수가 없기 때문에 그랬던 것입니다."
  "예? 누가 정필대씨를 죽이려고 했습니까?"
  추경감이 또 한번 놀라며 물었다.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누군가가 죽이려고
  한 것은 확실합니다."
  "신지혜씨는 그걸 어떻게 알았나요?"
  "그건 말씀드리기  어렵습니다. 그러나  제 말씀을
  믿지 않으셨기 때문에 정필대씨가 결국 피살된 것 아
  닙니까?"
  "정필대가 피살되었다고 누가 그러던가요?"
  "신문에는 자살했다고 났지만 그걸 믿을 사람은 아
  무도 없을 것입니다.  국회의원 선거  출마 예상자가
  대낮에 호텔에서 벌거벗은 채 유서도  없이 자사살했
  다면 누가 믿겠습니까?"
  "호텔이 아니고 여관입니다."
  추경감이 바로 잡아 주었다.
  "호텔이건 여관이건 그건 중요하지 않습니다. 문제
  는 경찰관이 감시하고 있는 인물이  죽었다는 것입니
  다."
  신지혜의 그 말은 변명의  여지가 없다고 추경감은
  생각했다.
  "그건 어쨌든, 신지혜씨는 도대체 누굽니까?"
  "저에 대해서 여러 가지로  알아보셨으리라고 믿습
  니다만, 제 소개를  한번 더 하겠습니다.  전 고향이
  강원도 속초입니다. 부모님은 돌아가시고  안 계십니
  다. 저는 미국에서 오랫동안  공부하다가 돌아왔습니
  다. 국제경영학 학위를 받고 왔습니다.  다음 학기부
  터 서울 근교의 어느 전문대학에서 강의을 하게 되었
  습니다. 서울에는 가까운 친척이 별로  없습니다. 저
  는 지금  조그만 아파트에서  혼자 자취하고  있습니
  다."
  "정필대씨와는 어떤 관곕니까?"
  추경감은 가장 궁금한 것을 물었다.
  "그냥 아는 사이입니다.  미국에서부터라고 해야지
  요."
  "그런데 왜 그때는 정필대가 위협당하고 있다는 말
  을 하지않았습니까?"
  "그렇게 말씀드렸어도 제 말을 믿지는 않으셨을 겁
  니다. 저는 다만 정필대씨가 다른 사람 손에 죽는 것
  을 막기 위해서였습니다."
  "다른 사람 손에?"
  추경감이 다시 눈을 크게 뜨고 그녀를 뚫어지게 쳐
  다보았다. 화장기 없는 조그만 입술이 지성적으로 보
  였다.
  "그렇습니다. 정필대는 딴 사람  손에 죽어선 안됩
  니다. 그는 내가 죽여야만 하니깐요. 하지만 이젠 글
  렀죠."
  지혜는 이 말을 하면서 입가에 섬짓한 미소를 담았
  다. 크게 뜨인 추경감의 눈이 더욱 커졌다.
  "아니, 지금 무슨 말을"
  "놀라실 것 없어요. 그건 제 개인적인 복수니까요.
  이젠 다 지나간 일 아닙니까?  저는 정필대가 죽었다
  는 이야기를 듣고 얼마나 실망했는지 모릅니다."
  "왜 정필대를 아가씨가 죽여야만  합니까? 무슨 사
  정인지"
  "그건 차차  말씀드릴께요. 오늘은  제가 경감님을
  속이고 정필대의 아내 노릇한 것을  사과드리러 왔을
  뿐입니다. 여기 제  전화번호가 있으니까  혹시 제가
  있어야 할 일이 있다면 연락해  주십시오. 남의 부인
  을 사칭한 것도 죄가 된다면 달게 받겠습니다."
  신지혜는 조그만 종이 쪽지 하나를 탁자 위에 내놓
  고 일어섰다.
  "잠간만, 쥬스나 마저 마시면서"
  추경감이 그녀를 잡아두려고 했으나 그녀는 추경감
  의 말을 무시한 채 쥬스잔도 채  비우지 않고 거실을
  조용히 걸어나갔다. 지혜가  나가고 난  뒤 추경감은
  머리를 한 대 얻어맛은 듯 멍하니 한참 동안 앉아 있
  었다. 한참만에 제 정신을 차린  추경감은 그녀가 남
  기고 간 전화번호 쪽지를 주워서  수첩에 넣었다. 그
  리고 그녀가 앉아서 계속 쓰다듬던 그녀의 긴 머리카
  락 한 올을 찾아내 소중히 간수했다. 그뿐 아니라 그
  녀가 마시고 간 쥬스 글라스를  손수건으로 싸서보관
  했다. 나중에 지문을 검출해 낼  속셈이었다. 머리카
  락도 분석해서 기록해  놓을 생각이었다.  그 이튿날
  추경감은 강형사를 불러다 놓고 신지혜에  관한 이야
  기를 해주엇다.
  "참 반장님도 반장닌은 어깨  여자한테 그렇게
  약하십니까? 신지혜가 왜 정필대와  원수지간이 되었
  나 하는 것을 꼭 캐냈어야 하는 것  아닙니까? 이 신
  문 좀 보세요."
  형사는 투정부리듯 볼멘 소리를  하고는 석간 신문
  사회면을 추경감 앞에 펼쳐 놓았다.
  정필대씨 자살 사건 배후 있는 듯
  큼직한 활자가 눈을 찔렀다. 기사의 내용은 경찰이
  자살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믿을 수 없다는 요지였다.
  모종의 정치적 음모가 배후에 있는 것 같다는 분석이
  었다. 정필대는 야당  출마예상자 중  신진 세력으로
  가장 부각된 후보였다는 것이다. 반면 자민당 후보인
  차주호는 집권당에서 꼭 당선시키고자 하는 인물이라
  는 점을 강조해 놓았다. 꼭 집어서 쓴 기사는 아니지
  만 여당 후보의 가장 큰 난적을  고의로 제거시킨 것
  이 아니냐는 뜻을 은근히 비치고 있었다.
  "빌어먹을 놈들. 제멋대로 쓰라고 하지."
  추경감은 이마를 찌푸리며 벌떡 일어섰다.
  "문제는 저희들이 범인을 빨리 잡지  못한 데에 있
  습니다. 트집 잡기  좋아하는 기자들에게  좋은 꺼리
  생긴 것 아닙니까?"
  추경감은 아무  말도 않고  실내를 왔다갔다하다가
  불쑥 말을 꺼냈다.
  "방태산이란 자가 수상하지 않아?"
  "예?"
  "그 친구 지금은 보수당이라고 했나? 그 친구 경력
  을 보면 권모술수 깨나  쓸 인물이야. 그  친구 그날
  알리바이를 좀 조사해 보구 선거  사무실 주변도
  조금 알아봐. 아주 행실이 좋지  않다는 이야기를 정
  보과에서 들은 일이 있어. 데리고  있는 비서며 여자
  선거 운동원 등 닥치는 대로 식한다는 소문이야."
  "식이라뇨?"
  강형사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먹을 식. 한자도 몰라?"
  "아, 예, 헤헤헤"
  강형사가 머리를 긁적이며 웃었다.
  "신지혜는 정필대가 살해될 것이란 것을 알고 있었
  어. 그런걸 보면 방태산이나 차주호  측근 쪽에서 무
  슨 음모가 이루어졌는지 몰라. 오라,  신지혜와 방태
  산이 무슨 관계가 없는지 좀  알아보라구. 난 아무래
  도 방태산이란 자가 수상하단 말야."
  "또 노형사의 육감입니까?"
  "내 육감이 틀린 일 있어?"
  "그렇다고 맞은 일은 있습니까?"
  추경감은 더 이상 아무 말도 않고 입을 다물었다.
  "추경감님, 정필대가 자살한 권총에선 정필대 외의
  어떤 지문도 발견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왼손잡이에다 왼쪽 관자놀이를 쏜  것입니다. 이론상
  으로 자살에 무리가 없죠."
  형사가 추경감의 눈치를 슬금슬금 보며 말했다.
  "그게 수상하단 말야. 정필대를 쏘아 죽인 뒤 권총
  의 지문을 깡그리 지우고 정필대 왼손에 쥐어 놓았다
  고 볼 수 밖에 없어. 그렇지 않으면  정필대 외의 누
  군가의 지문이 권총에  있어야 된단  말야. 정필대가
  정신 이상자가 아닌 이상 대낮에 허름한 여관에 들어
  가 발가벗고 권총 자살을 할 수가 없어."
  "정필대가 무엇 때문에 그 여관에  갔냐 하는 것이
  최대의 의문입니다. 그 다음 하필 왜 그 시간에 같은
  제 13 선거구 출마 예상자인 차주호가 거기서 여비서
  와 함께 있었느냐 하는것도 의문이구요."
  "그건 그곳이 사람 눈을 피하기  쉽고 선거구와 가
  까우니까 그럴 수도 있겠지."
  경감은 그렇게 말하면서도 내심으로는 강형사와 같
  은 생각을 하고 있있다.
  "거기서 죽은 박철호란  녀석과 도망친  또 하나의
  사나이 그 누군가 최장배인가 장대인가  하는 녀
  석도 무슨 상관이 있을 거야."
  "이놈들 배후에 혹시  방태산이 있는  것이 아닐까
  요? 그렇다면 다음엔 차주호가 당할지 모르죠."
  "쓸데없는 소리 그만두고 어서 방태산과 신지혜 관
  계나 알아봐."
  경감이 의자에 털석 주저앉아  신문 사회면을 다시
  보았다. 아무래도 분이 풀리지 않는 모양이었다.
       16. 추악한 정치꾼들
  강형사가 민주보수당 서울 제 13 지구당 위원장 사
  무실을 방문했을 때 방태산은 자리에 없었다.
  꽤 넓은 사무실에는  방금 전쟁을 치른  듯이 각종
  팜플레트가 어지럽게 널려 있었다. 여기저기 라면 상
  자가 쌓여 있고 구석에는 냄비며 먹고  난 우동 그릇
  등이 지저분하게 놓여 있었다.
  "어디서 오셨지요?"
  키가 크고 목이 두터운  젊은이가 두리번거리는 강
  형사를 보고 물었다.
  "전 경찰관입니다만"
  강형사는 조심스럽게 말했다. 야당  사무실에서 말
  실수 했다가는 큰 곤욕을 치른다는 것을 정보과 동료
  들로부터 많이 들었기 때문이다.
  "예, 그렇습니까?  누추하지만 좀  앉으십시오. 전
  여기 총무를 맡고 있는 방이라고 합니다."
  그는 상냥스럽게 강형사에게 의자를 권했다.
  "미스 권, 여기 차 좀 가져오지."
  방총무가 사무실 구석 의자에  앉아 잡담하고 있는
  두 여자를 향해 크게 소리쳤다.  미스 권이라는 사무
  실 여사무원과 일을 마치고 돌아온  오명자가 이야기
  를 나누고 있었다. 방총무의 주문에  발딱 일어선 것
  은 미스 권이 아니라 오명자였다. 오명자는 계단께로
  나가 자판기에서 종이컵 커피 두 잔을 뽑아다가 방총
  무와 강형사 앞에 놓았다. 키가  조금 작기는 했으나
  풍성한 가슴과 히프가 육감적인 오명자의  모습은 누
  가 보아도 금방 요염하다는 생각을  갖게 했다. 우아
  한 여성미와는 거리가 멀지만 남자들의  천한 욕심을
  자극시키는 그런 특별한 매력을 가지고  있는 여자였
  다. 오명자는 탁자 위에 커피를  내려놓으며 두 다리
  를 가지런히 모아 옆으로 무릎을  굽혔다. 컵을 놓는
  손이 얼굴에 비해 거칠지만 희고  통통하다고 강형사
  는 생각했다.
  "고맙습니다."
  강형사가 점잖게 인사를 했다. 오명자는 그냥 강형
  사를 쳐다보며 약간 웃어 보였다.  동그란 얼굴에 약
  간 주근깨가 퍼져 있었다. 햇볕에  탄 건강한 모습이
  미인은 아니지만 귀엽성이 있어 보였다.
  "그래, 어느 서에 계신"
  "예, 전 시경에 있습니다만 방위원장님은 지금
  안 계신지요?"
  강형사는 연신 절을 하다시피  하는 저자세로 방총
  무에게 물었다.
  "예, 곧 들어오실  겁니다. 급한  일이시면 저한테
  말씀하십시오. 전 위원장님의 재종동생입니다."
  그는 동생이라는 말에 힘을 주었다.
  "예, 그렇습니까? 뭐 특별한  일은 없습니다만
  그냥 요즘 공기가 어떤가 하고."
  형사는 금방 무엇이라는 핑계를  대지 못하고 어물
  거렸다.
  "예, 알겠습니다. 차나 한 잔 드시고 가시지요. 형
  님이 안 계셔서 도움을 드리기는 어렵고"
  방총무의 태도가 갑자기 바뀌었다.  도움을 드리기
  어렵다는것이 무슨 뜻인지 처음에 강형사는 알아듣지
  못했다. 그러나 그것이 금일봉을 뜻한다는 것을 그는
  곧 알아차렸다. 강형사는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마시고 있던 종이컵을 방총무의 얼굴에 내동댕이치고
  싶은 충동을 느꼈지만 꾹 참았다.
  "제가 온 것은"
  강형사가 크고 또렷한 목소리로 말을 꺼낼 때였다.
  "앗따 방 좀 치아라. 이기 뭐꼬  순 돼지우리 아이
  가"
  걸쭉한 목소리로 떠들면서 방태산이 들어왔다.
  "저 형님, 손님이"
  "인마야 또 형님이가?"
  "저 참 위원장님."
  "그래 뭐꼬, 방총무?"
  방태산이 강형사를 흘깃 보면서  말했다. 부리부리
  한 눈에 두툼한  입술이 정열적으로  보였다. 훤칠한
  키와 떡 벌어진 어깨, 널찍한  이마 등이 사나이답게
  생겼다고 강형사는 생각했다.
  "안으로 들어가시죠."
  방총무는 방태산과  함께 위원장실이라고  쓴 곳의
  도어를 열고 들어갔다. 허술한 칸막이를 해놓아 안에
  서 하는 말이 모두 들렸다. 아니, 들렸다기보다는 강
  형사가 들으라고 하는 소리 같았다.
  "시경에서 지나다가  들렸다는데요, 별  볼일은 없
  고, 뭐 뻔한 것 같은데요."
  총무의 소리였다.
  "알았다. 작은 봉투를 줘 보내라."
  "형님이 직접"
  "알았다"
  강형사는 더 참을 수 없는 수모였지만  다시 꾹 참
  았다.
  "저어, 위원장님 방으로 들어가시지요."
  조금 있다가 방총무가 강형사를 안내했다.
  "저, 강이라고 합니다. 시경에 있습니다."
  강형사는 온갖 굴욕을 참는다는 기분으로 공손하게
  절을 했다.
  "아, 강형사, 배국장 잘 있능교? 그리 앉으이소."
  방태산은 손을 내밀어 악수를 청하며 말했다.
  "배국장이라구요."
  강형사가 어리둥절했다.
  "아, 시경국장  말입니더. 내  잘 알지요.  가거든
  이 방태산이가 안부 전한다고 카이소."
  방태산은 싱글싱글 웃으며 거드름을  피웠다. 이런
  작자면 충분히 살인 음모 같은 것도 꾸밀 수 있을 것
  이란 육감이 강형사의 머리를 스쳤다.
  "아 예, 우리 국장님하고 친분이 두터우시군요. 저
  같은 쫄따구야 국장님을  뵈올 수나  있습니까? 헤헤
  헤."
  강형사는 머리를 긁적이며 말했다.
  "그래, 나한테 특별히 볼일이라도 있는교? 참 맥주
  한잔 할랑기요?"
  방태산은 벌떡 일어나 옆에  있는 조그만 냉장고를
  열고 캔맥주 두 개를 들고 왔다. 그는  캔을 픽 소리
  를 내며 딴 뒤 벌컥벌컥 들이켰다.
  "커어, 아 시원하다. 하나 드이소."
  "전 근무 중이라 술은"
  "앗따 이기 뭐 알콜인교 음료수지. 자 드이소."
  강형사는 마지못해 캔을 받아 탁자 위에 그냥 놓았
  다.
  "그래, 무신 일인교?"
  "그냥 지나다 들렀습니다. 인사도 여쭐겸"
  "하하하, 알겠심더. 오신 손님인께 빈 손으로 보낼
  수야 없지요. 하하하."
  형사는 비위가 발칵 상했으나 참고 다시 입을 열었
  다.
  "저 몇 가지만 여쭐 말씀이 있어서"
  "어려버 말고 말하이소."
  "혹시 신지혜라는 여자를 아시는지요?"
  "신지혜?"
  "예, 강원도 속초가 원래 고향이고 미국서 박사 학
  위를 받고 요즘 돌아온 30대 초반의"
  "신지혠지 구두지혠지 그런 아이 난 모르오."
  "그 동생이 신미혜라고"
  "신미혜?"
  방태산의 움칫 놀라는 표정을  강형사는 놓치지 않
  았다.
  "당신 난데 없이  그거 무신 홍두깬기요?  내가 뭐
  그런 여자애들하고 뭐꼬, 스캔들 만들었다고 소문 낼
  라카나? 누구 시킨 짓인교?"
  방태산의 태도가 돌변했다. 강형사는  얼른 화제를
  바꾸었다.
  "위원장님, 그 무슨  당치 않은  말씀입니까? 그냥
  농담으로 받아 주십시오. 걔들은 이  근방 술집 애들
  입니다. 위원장님이 워낙 인기가 있으니까 그런 애들
  이 사죽을 못쓰고 선전합디다."
  "흠, 그래요? 내 속아주지."
  방태산의 태도가 다시 좀 누그러졌다.
  "저어, 정필대와 차주호에 대해서  들으신 것 없으
  십니까? 뭐 언제 만났다든지"
  강형사가 다시 방태산의 표정을 유심히 살폈다.
  "죽은 사람은 와 들먹이노? 지 싫다고  이 세상 버
  린 사람"
  "자살이 아닌지도 모르지 않습니까?"
  "그래요? 나도 그 점이 좀  수상타 생각 안하는교.
  경찰에서도 그리 보는 모양이재?"
  "타살이라면 혹시 배후에 정치색과  관련이 있는지
  모른다는 생각이 드는데요"
  "그렇재?"
  방태산의 눈이 반짝였다.
  "반드시 뭐가 있을끼라. 이  13 선거구에서 라이발
  제거시킬 힘 있는 사람은 누구겠는교?  거 가서 알아
  보이소."
  "차주호씨 말인가요?"
  "내사 마 꼭 차주호 자민당  위원장이라고 내 입으
  로 말한 거 아니구마."
  "두 사람이 자주  만난다거나 그런  일이 있었습니
  까?"
  "아이 경찰이 여당 후보  동정도 그렇게 모르는교?
  두 사람은 자하문장인가 뭔가에서 여러  차례 만나는
  걸 본 사람이 있구마."
  "예? 무엇 때문입니까?"
  "그야 내가 우찌 아는교. 하지만 뻔한 거 아이겠능
  교. 힘 있는 사람이  힘 없는 사람  양보시킬라고 한
  거 아니겠는교? 안되면 완력도 쓸끼고"
  "누가 힘 있는 사람입니까?"
  "앗따 이 사람, 이거 참말로 형사가? 와 그리 눈치
  도 없노? 여당 사무실 주변에 가서  좀 알아보소. 요
  새 기기서 실탄 펑펑 쏜다카이."
  "실탄?"
  "이거 말이다 이거."
  방태산이 답답하다는 듯이  손가락으로 동그라미를
  그려 보였다
  "아, 예"
  강형사는 더 이상 머뭇거리지 않고 일어섰다.
  "자, 이거 찻값 하이소."
  방태산이 책상 서랍에서 조그만  봉투 하나를 꺼내
  재빨리 강형사의 점퍼  호주머니에 찔러  넣었다. 그
  솜씨가 텍사스의 총잡이들만큼이나 빨라 강형사가 거
  절할 틈도 없었다.
  "아니"
  "총무, 손님 가신다."
  곧이어 방총무가 들어와 밀다시피  하는 바람에 강
  형사는 엉거주춤 밖으로 나왔다.
  "안녕히 가십시요."
  방총무의 인사를  등뒤로 받으며  강형사는 계단을
  내려왔다. 호주머니에서 봉투를 꺼내  만지작거릴 때
  였다.
  "안녕하세유?"
  조금 전 사무실에서 커피를  가져다 주던 오명자가
  계단을 올라오며 인사를 했다.
  "아가씨, 이것 좀 받아요. 방태산씨한테 도로 주든
  지 아니면 아가씨가 쓰든지 맘대로 해요."
  형사가 봉투를 오명자에게 내밀었다.
  "난 아가씨 아닌데"
  오명자가 방긋이 웃으며 말했다.
  "그래요? 미안해요. 나하고 차 한잔 할까요?"
  강형사가 헛일 삼아 던져본 말이었다.
  "좋아요. 저 여관 지하에 다방이  있어요. 제가 곧
  갈 테니 가서 기다리시겠어요?"
  뜻밖의 반응에 강형사는 마음속으로 쾌재의 노래를
  불렀다. 두 사람은 조금 뒤 좁고 음침한 다방에 마주
  앉았다.
  "전 오명자라고 해요. 보수당  사무실에 있는 선거
  운동원이에요. 일당 받고 다녀요. 남편은  직업 없이
  평생 놀기만하고요."
  명자는 묻지 않는 말까지 늘어놓았다.
  "선생님은 정필대씨의 죽음에 대해  조사하고 계시
  지요? 제가 얘기하시는 걸 엿들었어요."
  "아니, 저어"
  강형사가 당황할  정도로 오명자는  이야기를 술술
  풀어나갔다.
  "제가 보기에도  방태산씨는 수상한  점이 많아요.
  늘 최대의 적은 차주호가 아니라  햇병아리 정필대라
  고 했거든요. 그 놈만 교통사고로 뒈지든지 식중독으
  로 죽든지 하면 쉽게 풀릴텐데 라고 늘 말했거든요."
  "그야 화가 나면 하는  소리겠지요. 실제로 죽이겠
  다고 큰소리치는 사람이 사람 죽이는 것 못 보았습니
  다."
  강형사가 웃으면서 말했다.
  "그게 아니예요. 방태산 위원장님  같은 사람은 능
  히 할 수있는 사람이에요. 공무원이나 기업하는 사람
  약점 잡아 가지고 돈 욹어내는 데 귀신이거든요."
  "그런데 오명자씨는 방태산씨를 그렇게 싫어하면서
  왜 선거운동을 해주고 있습니까?"
  "할 수 없이  그러고 있는 거죠.  저도 공무원이나
  기업주처럼 오금을 잡혔거든요."
  오명자가 갑자기 우울한 표정을 지었다.
  "오금을 잡혀요?"
  "방태산이 천하에 둘도 없는 오입장이란 것 모르셔
  요?"
  강형사는 그 말에 금방 눈치를 챘다.
  "저, 사무실에 오명자씨 같은 여자가 많나요?"
  "알 수 없어요. 하지만 모두 당했다고 보아야지요.
  저 엉터리도 누군가의 손에 숨을 거둘 거예요."
  강형사는 착하게 보이는 오명자의 얼굴에서 번개처
  럼 스치는 표독함을 언듯 보았다.
       17. 제 3의 살인
  언제나처럼 추경감이 살인 현장에 도착했을  때는 이
  미 강형사와 다른 요원들이 초동 수사를 거의 끝냈을
  무렵이었다.
  "도대체 어떻게 된 거야. 그놈의 13 선거구에 마귀
  가 붙었나? 출마하려는 사람들은 왜 다 죽어?"
  추경감이 큰 소리로  떠들면서 들어섰다.  늦게 온
  자기 체면을 캄플라지하려는 순진한 속셈이  다 내다
  보여 강형사는 킥 웃기만 했다.
  제 13 선거구의 보수당 출마 예상자인 방태산이 갑
  자기 죽었다.
  아니, 죽었다기보다는 더 극적으로  표현한다면 자
  기 사무실에서 어느 날 새벽 시체로 발견된 것이다.
  방태산은 어수선한 선거 사무실  구석에 있는 위원
  장실이라는 곳의 소파  위에서 거의 벗은  채로 죽어
  있었다.
  옷은 벗어서 여기저기 아무렇게나 집어던지고 아랫
  도리는 완전히 나체에다 위에는 런닝셔츠 한 장만 걸
  치고 있었다.
  그는 이마에서부터 목과 가슴으로  수십 군데 칼로
  난자당해 처참한 피투성이가 되어 있었다.
  "시체를 제일 먼저 발견한 사람은 누구야?"
  추경감이 강형사를 보고 물었다.
  "방총무라고, 이 사무실의 사무장 비슷한 청년입니
  다. 죽은 방태산의 7촌 동생인가"
  "7촌동생이 어딨어?"
  "아니, 6촌동생인가 하는 사람이죠.  옳지 저기 있
  군요, 방총무."
  형사가 그를 불렀다. 체구가 당당하고 두터운 목이
  운동 선수 출신같이 다부지게 보였다.
  "당신이 방총무요?"
  추경감이 무뚝뚝하게 물었다. 그는  추경감의 아래
  위를 천천히 훑어보았다. 별볼일 없게 생긴 중늙은이
  가 왜 땅땅거리냐는표정이 역력했다.
  "이거 미안합니다. 형님의 죽음에는 심심한 애도를
  표합니다. 범인을 빨리 잡기 위한  것이니 협조해 주
  십시오."
  강형사가 기분 나빠 하는 방총무의 표정을 읽고 얼
  버무렸다.
  "방총무가 여기 나온 것이 몇시쯤이었나요?"
  추경감이 팜플레트가  흩어져 지저분한  탁자 위에
  잉덩이를 걸치면서 물었다.
  "오늘 새벽 5시쯤입니다. 저는 늘  그때 나와서 오
  늘 할 일의 스케줄을 짜거든요."
  "그때 이야기를 자세히 해주시겠습니까?"
  "제가 들어왔을 때 사무실에는 아무도 없었습니다.
  이 빌딩 현관에만  경비원 한 사람이  꾸벅꾸벅 졸고
  있더군요."
  "이 집은 그 경비원이 있는  현관 말고는 드나드는
  곳이 없습니까?"
  추경감이 물었다.
  "그렇지 않습니다. 계단을 통해  밑의 지하로 내려
  갈 수 있습니다. 현관을 거치지 않아도 되지요. 지하
  에는 이발소, 다방, 라면집 등이 있지요."
  "거기서 밖으로 나갈 수도 있습니까?"
  "물론이죠."
  "계속 이야기해 보시죠."
  추경감이 다시 재촉했다.
  "저는 경비원의 인사를 받으며  걸어서 2층 사무실
  로 왔지요. 문은 잠겨 있지 않았습니다."
  "평소에는 잠그나요?"
  이번엔 강형사가 메모를 하면서 물었다.
  "거의 그렇습니다. 열쇠는 저와  형님이 가지고 있
  습니다. 그래서 사무실로 들어섰더니 불이 켜져 있더
  군요. 사무실은 텅빈 채 아무도 없었습니다. 저는 제
  책상에 가서 앉아 책상서랍을 열었지요. 그러다가 이
  상한 낌새를 느꼈습니다. 목 뒤가 섬득한 것 같은 감
  을 느끼고 돌아다보았지요. 위원장실 문이 반쯤 열려
  있고 사랍의 맨발이 조금 보였어요.  나는 깜짝 놀라
  그곳으로 뛰어가 보았지요. 그랬더니 아 글쎄"
  방총무는 몸서리가 쳐진다는 듯  주전자를 들고 꼭
  지채 물을 벌컥벌컥 마셨다.
  "그래서요?"
  추경감이 위원장실 쪽을 힐끗 쳐다보며 재촉했다.
  "형님은 소파 위로 한쪽 다리를  걸치고 머리는 땅
  바닥에 떨어진 채 피투성이가 되어  쓸어져 있었습니
  다. 그러니까 하체의 절반쯤이 소파에 얹혀 있었습니
  다. 위에 입은 소매 없는 런닝셔츠는 피에 젖어 아예
  붉은색 내의 같았습니다. 밑에는 아무것도 입지 않았
  어요. 나는 즉각 살인이라는 것을 알았지요. 너무 놀
  라 다리가 덜덜 떨리고 말이 나오지 않았습니다."
  "그때 방안 모양은 어땠나요?"
  "정신이 없어 자세히 보진 못했습니다만 좀 어지러
  운 것 같았습니다."
  "소파가 제자리에 있지 않고 탁자  위의 컵이 깨졌
  어요. 전화기도 바닥에 떨어져 박살난  걸 보면 격투
  같은 것이 있었다고 보아야지요."
  강형사가 보충 설명을 했다.
  "그래서 어떻게 했나요?"
  "살인 현장은 손대면 안된다는 생각이 들어"
  "왜 그런 생각을 했나요?"
  "텔레비젼에서 수사 드라마 같은 걸 보면 그렇더군
  요. 그래서 전 112에 전화를 걸고 현관의 경비원한테
  알렸지요."
  총무의 말은 거짓이 없는 것  같았다. 한참 생각에
  잠겨 있던 추경감이 입을 열었다.
  "한 가지만 묻겠습니다. 형님은 누가 살해한 것 같
  습니까?"
  "예? 제가 그걸 알면 형사반장 하지 이러고 있겠습
  니까?"
  그는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으로  추경감을 쳐다보았
  다.
  "그래도 뭔가 짚이는 데가 있지 않을까요?"
  "형님이 이번 선거에 당선될 것이란  것은 삼척 동
  자도 다 압니다. 형님이 국회의원에 당선되어선 안된
  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누구겠습니까?"
  방총무의 말에도 무슨 뜻이 숨어 있는가를 금방 알
  수 있었다. 정치적인  라이벌의 이름만  대지 않았을
  따름이었다.
  "어젯밤에 늦게까지 같이 있었던  사람은 누구누구
  입니까?"
  추경감이 다시 물었다.
  "글세요. 활동장들이 나가고 나면  제가 그날 일에
  대해 보고를 하고"
  "그날 일이란?"
  "예, 뭐 실탄 나간 것, 득표  성과 등이죠. 그리고
  나면 대개 오여사나 미스 권이 이곳  정리를 하고 나
  가죠."
  방태산이 실내를 생각난 듯이  둘러보았다. 어지럽
  기 짝이 없었다.  방태산의 얼굴을  인쇄한 선전지며
  선거공약을 쓴 벽보 등이 어지럽게 흩어져 있었다.
  "그런데 이상합니다. 전혀 정리를  하지 않았군요.
  오여사가 게으름을 피운 것 같습니다."
  "좋습니다. 일 보십시요."
  그쯤에서 추경감은 방총무를 풀어 주었다.
  "수사본부를 어디에 차렸나?"
  "예, 이곳 관할서입니다. 옆에 있는  여관방 두 개
  를 빌려 요원들이 우선 쓰기로 했습니다."
  강형사가 손가락으로 창 너머  보이는 여관 간판을
  가리키며 말했다.
  "저 여관에 방태산이 쓰던 방이 있습니다."
  "아니, 이곳에 사무실이 있는데 그곳 여관은 왜 쓰
  나?"
  "가끔 쉬기도 하고 은밀한 손님을  만날 때 쓴답니
  다."
  "은밀한 손님?"
  추경감이 코웃음을 쳤다.
  "저쪽 빌려 놓은  여관으로 오명자라는  여자를 좀
  데리고 오게."
  경감이 밖으로 앞장서서 나갔다.
  온돌방 여관에 오명자가 강형사를  따라 들어왔다.
  겁에 질려 굳은 표정의 오명자는 입을  꼭 다물고 있
  었다. 수수한 옷차림이었지만 어딘가 조금 천한 섹시
  한 분위기가 풍겼다.
  "간단히 몇 가지만 묻겠습니다.  아시는 대로 솔직
  히 말씀해주십시오."
  명자는 다소곳이 꿇어앉아 고개만 끄덕였다.
  "편히 앉아요."
  추경감이 굳은  그녀의 표정을  누그러뜨리기 위해
  말했다. 오명자가 자세를 고쳐 앉았다.  다리를 옆으
  로 포개 놓느라고 치마가 걷혀 올라가고 하얀 허벅지
  의 속살이 잠깐 강형사 눈에  들어왔다. 강형사는 안
  보는 척하며 흘금흘금 그것을 홈쳐보고 있었다.
  "언제부터 방태산씨 선거 사무실 일을 했습니까?"
  "한 달 반쯤 되었습니다."
  "무슨 일을 했나요?"
  "관내에 아는 사람들을 찾아다니며 표를 찍어 달라
  는 말을 하고 다녔지요."
  "방태산씨와는 처음에 어떻게 알았습니까?"
  "우리 동네 사는 사람이  여기 활동장으로 있는네,
  그 사람이  소개를 해서  일당 운동원으로  들어왔어
  요."
  "방태산씨와 개인적으로 만난 일이 있습니까?"
  ""
  "괜찮습니다. 솔직히 말씀해 주셔야 범인을 잡습니
  다."
  "예."
  "자세히 좀 이야기해 줄 수 있습니까?"
  "일 끝나고 나서 내가  청소할 때 가끔  맥주 한잔
  같이 마신일이 있어요."
  "특별히 일당을 더 주신 일은?"
  "아이구 아저씨도, 그 사람이 얼마나 소금인데요."
  "맥주만 마셨나요?"
  추경감이 아픈 곳을 쩔렀다.
  오명자는 눈만 두리번거릴 뿐 대답을 얼른 하지 않
  았다.
  "남편은 아주머니가  이곳에  나간다는 것을  압니
  까?"
  "예, 하지만  방태산 위원장님이  누군가는 모릅니
  다."
  "무슨 뜻이죠?"
  "저어, 저희 남편 만나신 건 아니죠?"
  오명자는 갑자기 불안한 표정으로 되물었다.
  "걱정 말아요. 방태산과 맥주  마셨다는 이야기 안
  할 테니까."
  형사가 안심을 시켰다.
  "어젯밤 이야기를 좀 해주시겠습니까?"
  추경감이 물었다.
  "다 끝난 뒤에 정리하고 집에 갔습니다."
  "몇시에 갔습니까?"
  "여덟시쯤 갔습니다."
  "그 말이 맞습니다. 현관 경비실서 확인했습니다."
  형사가 보충 설명을 했다.
  "사무실이 하나도 정리되어 있지 않던데요?"
  "예?"
  오명자가 약간 당황하는 것 같았다.
  "솔직히 말씀해 보세요."
  "제가 책상 정리를 하려고 하는데"
  오명자는 한참 머뭇거리다 말을 계속했다.
  "위원장님이 불러서  그 방으로  갔지요. 그랬더니
  냉장고에서 맥주병을 꺼내서 한 잔  마시자고 하더군
  요. 저는 술을 잘  못하는네 자꾸 권하는  바람에 한
  잔 마시고"
  "한 잔입니까?"
  "모르겠어요. 몇 잔 마신 것  같아요. 그래서 어지
  러워 청소를 못하고 그냥 집으로 갔습니다."
  "술만 마셨나요?"
  추경감이 오명자의 얼굴을 정면으로 쳐다보며 물었
  다.
  "예."
  한참 머뭇거리던 오명자가 모기 소리만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때 누가 오지는 않았나요?"
  "아뇨."
  오명자가 고개를 저었다. 그때 여관 여주인이 쥬스
  석 잔을가지고 들어왔다.
  "됐습니다. 자 한 잔씩 드시죠."
  강형사가 쥬스 글라스들 권했다. 세 사람은 말없이
  쥬스를 마시며 각각 다른 생각들을 하고 있었다.
  "이제 가도 좋습니다."
  오명자가 절을 꾸벅하고 일어서서 나갔다.
  "그 쥬스 글라스에서 오명자 지문을 떠 놓도록."
  "꽤 거짓말을 하는군요."
  강형사가 쥬스잔을 손수건으로 감싸 간수하면서 말
  했다.
  "내가 여자라도 그렇게밖에는 얘기하지 않겠어."
  추경감이 시무룩하게 말했다.
       18. 책상위의 정사
  늦가을 해가 뉘였해지자 날씨는 재법 쌀쌀했다.
  "강형사, 출출하지?"
  추경감이 앞섶이 다 닳은 갈색 점퍼를 걸치며 물었
  다. 한잔 하겠느냐는 뜻이었다.
  "좋죠."
  강형사가 뒤적이던 수사 기록을 덮으며 일어섰다.
  "뭐가 좋아?"
  "석촌 호숫가 포장마차집 어떻습니까? 부글부글 끓
  는 냄비에서 오뎅 한  꼭지 척 말아들고 쐬주  한 잔
  기울이는 맛이야말로"
  강형사가 침까지 삼키며 말했다.
  "쯧쯧쯧"
  추경감이 혀를 차자 강형사는 뜻을 알지 못해 멍청
  하게 서 있었다.
  "자네는 아무래도  서민층을 벗어나긴  글렀어. 좀
  스케일 크게 놀 수 없나?"
  "예? 아 그것 좋죠.  제가 잘 아는  아가씨가 요즘
  서초동에 새로 룸살롱을 열었다고 하는데"
  "쯧쯧쯧. 좀 색다른 멋을 찾아라."
  추경감이 앞장서서 나갔다. 두 사람은 강형사가 운
  전하는 낡은 프레스토를 탔다.
  "영동교 밑의 한강 공원 선착장으로 가지."
  "예?"
  "왜?"
  "아니, 이런 쌀쌀한 날씨에 거긴 왜 갑니까?"
  "자네는 겨울 바다의 멋도  모르나? 지금 한겨울은
  아니지만 쓸쓸한 가을의 한강 유원지. 사람들 발길은
  뚝 끊어지고 라면봉지만 낙엽처럼 뒹구는 강변. 추억
  도 낙엽인양"
  "반장님, 됐습니다 됐어요. 그건 제가 습작으로 쓴
  시인데 언제 보셨어요?"
  "자네 그 수사  기록부 뒤에 써  놓았더군. 마흔이
  내일 모렌데 아직도 문학 청년이야?"
  "헤헤헤"
  두 사람은 모처럼 가슴 후련하게 웃었다.
  사건이 풀리지 않아 매일처럼  머리를 싸매고 이곳
  저곳을 뒤지며 다녔다. 오늘은 발상의 전환이란 것을
  하기 위해 추경감이 찾아낸 곳이 쓸쓸한 선착장 횟집
  이었다.
  강물 위에 덜렁  떠 있는 횟집은  그야말로 썰렁했
  다. 창 밖에서는 움퍽 줄어든  한강물이 잔잔한 파도
  를 일으키고 있었다. 즐펀한 수면  위에는 어둠을 뚫
  고 쏟아진 총총한 별빛이 반짝였다.
  "어때? 텅빈 선착장. 동양화의 여백  같은 멋이 있
  잖아?"
  추경감이 소주잔을 들어 한  입에 털어넣으며 말했
  다.
  "야, 우리 반장님 다시 보았습니다.  그런 멋이 있
  는 줄 몰랐습니다. 동양화의 여백, 참  기가 맥힌 표
  현입니다."
  "어허, 너무 아부할 건 없어.  수사잡지에 난 누구
  의 수필 속에 나온 말이니까."
  두 사람은 거기서 수사회의를 시작했다. 두 사람만
  참석한 것이니까 회의라고 할 수는 없지만 그들은 의
  견 교환을 늘 그렇게 했다.
  "그래, 감식 기록부터 검토하지."
  추경감의 말을 따라 강형사가 늘 들고 다니는 수사
  기록부를 펼쳤다. 수사 기록부라기보다는  강형사 개
  인의 메모책이었다.
  "런닝셔츠는 입고 아랫도리는 벗고  있었다는 것은
  여자와 정사를 벌이고 있었다는  증거입니다. 사무실
  에서 정사를 벌일만한  여자라면 근방의  유흥음식점
  아가씨들이거나 선거 운동원 중의 누구라고 할 수 있
  겠지요. 가령 오명자라든지"
  강형사가 먼저 의견을 제시했다.
  "방태산은 워낙 여자를 좋아하고 무책임한 짓을 많
  이 하는 사람이니까"
  추경감이 동의를 했다.
  "그러나 그런 것을 가장해서 누군가가 즉였을지 모
  릅니다."
  "다른 유류물은 없었나?"
  "정사를 한 흔적이 있었습니다.  책상 위에서 체모
  가 발견되었는데 대부분  방태산의 것이었고  나머지
  하나는 여자의 것으로 추측된답니다.  혈액형은 A형,
  그러니까 A형 여자와  책상 위에서  정사를 벌였다는
  뜻이죠. 지문도 여러 개 발견되었는데  대조해 본 결
  과 방태산 자신의 것이 가장 많고  방총무, 미스 권,
  오명자 등의 것이 나왔습니다. 그리고 도저히 신원을
  밝힐 수 없는 지문이 맥주병과 냉장고  문 등에서 몇
  개 나왔습니다. 혈액형은 AB형인네 오명자의 것은 아
  니었습니다. 그녀는 A형입니다. 미스 권은 O형, 방태
  산도 O형, 방총무는 B형이었습니다."
  "여자 지문이었나?"
  "그걸 알 수가 없지요. 그 지문은 변형의 일종인데
  보통 사람과는 전혀 다른 특이한 형태라고 합니다."
  "그 외의 것은?"
  "치명상은 어느 자상이다고 할 수 없을 정도였습니
  다. 목과 가슴 등 상반신을 찔린 곳이 스물한 군데였
  습니다. 그야말로 난자라는  표현이 맞을  것 같습니
  다. 원한에 의한 살인이거나 아니면  서툰 사람의 솜
  씨로 보아집니다. 칼은 발견하지 못했지만 과도 같다
  는 분석이 있습니다."
  "머리카락이 있었다고 했지?"
  추경감이 마침 들여온 초어  매운탕을 입으로 후후
  불며 떠먹었다.
  "예, 방태산의 왼손에 머리카락이 몇 올 쥐어져 있
  었습니다. 꽤 긴 것으로 보아  여자의 머리칼 같았습
  니다. 혈액형은 A형."
  "그렇다면 방태산을 찌른 사람의  머리칼이라고 해
  석된단 말인가? 오명자의 혈액형이 A형이라고 했지?"
  "예."
  추경감은 고개를 흔들었다.
  "여자와 정사 중일 때 누군가가 덤벼 찌를 수도 있
  고 죽인뒤 위장을 할 수도 있지."
  "그 외 발자국은 여러 개가 섞여 있어 특별한 것을
  찾을 수는 없었습니다. 참, 땅바닥과  방태산의 피묻
  은 런닝셔츠에서 이상한 성분을  발견했습니다. 마늘
  의 미세한 분말 입자와 활석 분말을 검출했습니다."
  "활석?"
  "예, 우리가 어릴 때 담벼락에 낚서를 하던 석필이
  라는 돌의 가루 말입니다. 그리고 마늘"
  "그게 뭘까?"
  "글쎄입니다. 어디  석재 공장이나  공예품 공장에
  갔다 왔을까요?"
  "한 병만 더 할까?"
  추경감이 빈 소주병을 기울이다가 강형사를 쳐다보
  았다. 벌써 두 병이나 비워 두 사람은 얼큰한 상태였
  다.
  "딱 한 병만 더 하죠."
  그들이 다시 세 병째의  소주를 시작하며 수사회의
  가 계속 되었다.
  "아무래도 방태산을  죽인  범인은 여자가  아닐까
  요?"
  "그렇게 건강한 남자가 여자하고 붙어 일대일로 싸
  우다 당한단 말이야? 말도 안되지."
  경감이 손을 흔들었다. 그 손은 벌써 술에 취해 제
  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전번 정필대 사건과 유사한 점은 없나?"
  "그쪽은 권총을 사용했고 이쪽은  칼을 사용했다는
  점이 다릅니다만, 벌거벗고 죽었다든지 같은 13 선거
  구의 출마 예상자였다든지 하는 것은 같습니다."
  "지문이라든지 혈액흔 같은 감식 결과를 좀 비교해
  보라구."
  "제 생각엔 아무래도 정치적 음모의  결과일 것 같
  은 생각이 듭니다."
  "나도 그렇게 생각한다네. 방태산의  살았을 때 동
  태를 새로 알아보게. 그리고 강력한 세 후보 중 아직
  살아 있는 차주호를 잘 감시해야 해.  아니, 그 사람
  이 당할 수도 있어."
  들은 그날 밤 결국 소주 다섯  병을 비우고 엉망이
  되어서야 집으로 갔다.
       19. 여자의 원한
  추경감은 강형사를 대동하고 신지혜의 자취 아파트
  를 찾아갔다. 미리 전화를 하고  가진 않았지만 그녀
  는 대낮인데도 집에있었다.
  "웬일로 낮에도 집에 계십니까?"
  추경감이 강형사를 소개한 뒤 물었다.
  "돈이 안 드니까요."
  신지혜의 대답은 간단하고 차가왔다.
  "정필대씨와는 어떤 관계지요?"
  강형사가 추경감을 제끼고 단도직입적인 질문을 했
  다.
  "왜 묻죠? 그건 내 사생활인데요."
  "정필대씨가 살해됐기 때문입니다."
  강형사가 위압적인 어조로 말했다.  신지혜가 웃음
  을 터뜨렸다.
  별 풋나기 형사도 다 보겠다는 표정이었다.
  "신문에는 모두 자살로 나와 있다고 하던데"
  "정필대씨가 죽었다는 것을 어디서 들었지요?"
  "어떤 친구한테서요. 그 친구  이름까지 대야 하나
  요?"
  "아, 됐습니다."
  추경감이 강형사의 질문을 제지하고  나섰다. 신지
  혜가 계속 빗나간 답변을 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우리는 정필대씨의 사건을 타살로 보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용의자 중의 한 사람으로 죽은 방태산씨도
  넣고 있었습니다.
  그런네 방태산씨마저  피살체로 발견된  것입니다.
  헌데 오명자씨의 증언에 따르면 신지혜씨는 정필대씨
  와 가까운 사이였던 것 같군요. 게다가 내게 와서 조
  사를 헤달라고까지 부탁했었으니까요."
  "하지만 아무 소용이 없었지요.  결국 죽고 말았으
  니."
  "신지혜씨는 이번 사건들과 밀접한  관계들을 갖고
  있어요. 그러니 협조하는 뜻에서  정필대씨와의 관계
  에 대해서 자세히 말씀해 주시지 않겠습니까?"
  추경감의 정중한 부탁이 지혜를 움직인 것 같았다.
  "예, 그러시다면 좋습니다. 말씀드리지요. 먼저 정
  용대라는 사람을 알고 계십니까?"
  "예, 알고 있습니다. 정필대씨의 형으로"
  "공화상사 사장이지요."
  끼어드는 강형사의  말을 신지혜가  중간에서 잘랐
  다.
  "공화상사라고 하면 잘 모르는 사람들도 많을 겁니
  다. 소비재를 만드는 회사가 아니니까요.  하지만 순
  수익 면에서는 국내 50대 기업에  들어가는 무역회사
  랍니다. 제가 미국에서 박사 학위를  받을 수 있었던
  것은 공화상사의 도움 덕택이었습니다.
  기업의 PR정책의 일환인 셈으로  학교 재단으로 오
  는 장학금으로 미국으로 갈 수 있었던 거지요."
  "잠간만, 신지혜씨의 전공은 무엇입니까?"
  "국제경영입니다. 보통 무역학과라고 하지요. 전에
  도 말씀드렸을 텐데 차 한잔 하시겠습니까?"
  그때야 신지혜는 두 사람이 자기 집에 온 손님이란
  생각이 들었는지 예의를 차렸다.
  "괜찮습니다. 우린 곧 가야 하니까요."
  추경감이 정중히 사양했다.
  "그러면 유학을 마친 후에는 공화상사에 들어가 일
  을 해야하는 것 아닙니까?"
  "그렇지는 않습니다. 그건 어디까지나 장학금인 셈
  이니까요.
  기업이 번 돈을  투자하는 것이지 그  어떤 조건이
  붙는 돈은 아닙니다."
  신지혜가 설명하였다.
  "그럼 기업으로서는 남는 게 없지 않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우선 좋은 일을 하고 있다는 광
  고 효과가 있습니다. 다음으로는 장학금을 대준 학교
  에 발언권이 세어지게 됩니다. 그리고  그 기업의 혜
  택을 받은 학생은 다른 기업과 동일한 조건에서 직장
  을 선택하게 될 때 그 기업을 선택하게 됩니다. 교수
  가 되더라도 그 기업으로 우수한 학생을 보내게 됩니
  다. 물론 제가 말씀드린 것이 꼭 그렇다는 뜻은 아니
  지만 일반적으로 이러한 경향이 크다는 것이지요. 기
  업이 학교에 장학금을  대주는 것은 결코  손해 보는
  일이 아니라는뜻입니다. 세상에는 눈에  보이지 않는
  이득이라는 것도  많지않습니까? 여러분은  형사니까
  저보다도 더  그런 경우를  많이 보았을 줄  압니다
  만"
  그렇다. 강형사는 신지혜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얼마나 많은 살인이 돈과 관계 없이 일어나는가를 그
  도 신물이 나도록 보아왔던 것이다.
  "이야기가 옆길로 샜군요. 정필대씨와의 관계에 대
  해서 물으셨지요. 그 이야기는  미국 시카고에서부터
  시작됩니다."
  시카고의 날씨는 항상 음산했다. 스모그 현상도 늘
  심하여 도심으로만 나오면 꽉 막히는 느낌이었다. 그
  러나 신지혜는 꾸욱  그런 환경을  참아내고 있었다.
  여기서 박사 학위만 따낸다면 지금까지의  모든 고통
  은 끝나는 것이라는 생각이 시카고의  우중충한 날씨
  마저 잊게 하였다. 그녀의 박사학위  논문은 모든 준
  비가 끝나 있는 상태였다. 이제  남은 일이라고는 직
  접 쓰는 것뿐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거기다가
  그녀에게는 졸업과 동시에 강의를 맡을 수 있는 기회
  마저 주어져 있었다. 아직은 그 모든  것이 1년 후의
  일이 될 것이었지만 그녀는 미국에 온 이래 지금처럼
  일이 잘 풀려 나간 적이 없었다.
  그것은 또한  정필대라는 사내의  등장과도 연관이
  있는 것인지도 몰랐다.  그는 막대한  기부금을 내고
  정치학과 대학원에 들어온 한국인이었다.  서로 드문
  한국인들끼리 만날 기회는 얼마든지 있었고  알고 보
  니 그는 신지혜의 장학금을 대어주는  공화상사 사장
  의 동생이었던 것이다. 둘 사이는 급속도로 가까워졌
  다.
  정필대와 처음  만나던 때는  신지혜에게 있어서는
  큰 고비를 맞고 있던 때였다.
  동생이 죽은 지 3년만에 아버지마저 돌아가시고 말
  았던 것이다. 만리타향 이국에서 의지할  수 있는 사
  람이라고는 정필대밖에 없었다. 둘은 함께 귀국했다.
  그러나 정필대는 이때까지도 자신이 총각이라고 거
  짓말읕 하고 있었고 물론 자신의 집에는 연락도 하지
  않은 채 귀국하였던 것이다.
  아버지의 장례를 치르고 신지혜는  모진 결심을 안
  고 다시 미국으로  돌아갔다. 집안을  다시 일으키는
  것은 오로지 자신에게 달려 있다는 결심이었다. 그런
  네 박사학위 논문 심사가 진행되던 중 어머니마저 돌
  아가셨다는 소식이 전해져 왔다.
  귀국한 그녀는 정말 넋이 빠진  듯했다. 그리고 방
  태산에 대한 적개심이 더욱 불타  올랐다. 거기에 정
  필대에 대해서도 약간의 원망이 생겼다. 그녀는 어머
  니라도 살아 생전에 결혼식을 올리자고  그를 그렇게
  졸라대었지만 그가 늘 미적미적한 태도로  결혼을 유
  보해 왔던 것이었기 때문이다.
  "동생이 자살했다고  하던데  그 이유는  무엇입니
  까?"
  강형사가 다시 이야기의 흐름에 끼어들었다.
  "방태산 때문이었지요."
  신지혜는 스스럼없이 대답했다.
  "예?"
  "미혜는 방태산의 애를 가졌더랬어요. 그런데 방태
  산이 동생을 버린 거지요. 그  충격으로 자살한 거예
  요."
  신지혜는 전혀 감정의 동요를  보이지 않으며 말했
  다.
  "그럼 방태산씨는 신지혜씨 집안의 큰 원수가 되는
  것 아닙니까?"
  "그렇다고 할 수 있지요.  아무튼 순서대로 이야기
  를 하지요. 그러면 어떻게  된 영문인 줄  알게 되실
  테니까. 나는 이번에 정착을 위해 귀국했을 때까지도
  정필대씨가 유부남인 줄은 꿈에도 몰랐지요."
  신지혜는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이는 선거가 임박해서 당에서  자신을 부른다고
  나보다 조금 일찍 귀국했어요. 그런데 한 달 전에 귀
  국을 하고 나서였습니다. 얼핏 서점을 지나다가 보니
  까 국회로 뛰는 사람들이라는 제목의 기사가 실린 잡
  지가 있더군요. 그 잡지를 사서 보았지요. 서울 제13
  지역구에 정필대씨가 나온다는  기사가 실려  있더군
  요."
  "방태산씨도 있었겠지요?"
  강형사가 물었다.
  "물론이지요."
  신지혜는 더욱 냉랭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런데 거기에는 부인 송희  여사와의 사이에 1남
  1녀라고 적혀 있었던 거예요. 나는 멍청하게 눈을 뜨
  고 속았다는 것을 알았지요."
  "그래서 어떻게 했나요? 정필대씨를 찾아갔나요?"
  "뭐하게요? 미국에서의 일은 미국에서의  일. 구질
  구질하게 그런 것을 따져서 무얼 합니까?"
  "그럼 저를 찾아온 것은 무슨 까닭이었습니까?"
  추경감이 물었다.
  "아, 그건 제가 정보를  하나 입수했기 때문이었습
  니다. 정필대씨의 생명이 위험할 수도 있다는 정보였
  지요. 모르는 사이라면야 모르겠지만 피차 아는 사이
  에 그냥 내버려 둘 수는없고 그렇다고 정필대씨를 만
  나서 이러저러 하니 그만두어라 하고  말하기도 싫고
  해서 추경감님을 만났던 거지요."
  "거짓말하지 마십시요. 신지혜씨는 그때 그런 마음
  의 여유를 가지고 있지 않았습니다."
  추경감이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
  한참 생각에 잠긴 듯 고개를 숙이고 있던 신지혜가
  다시 입을 열었다.
  "선생님 말씀이 맞아요. 그는 나의 원수예요. 다른
  사람 손에 죽어선 안돼요."
  "그런네 하필이면 저를 택했습니까?"
  "강력계에 계시고 또  가장 유능한  분이라는 평을
  익히 들은바 있기  때문이었지요. 그건  지난 번에도
  말씀드린 줄 아는네요?"
  "왜 정필대씨에게 직접 말하지 않았지요?"
  "저로서는 그를 두번 만난다는 것이 별로 내키지를
  않더군요. 공연히 만났다가 구설수에라도  오르면 이
  곳에서 제 생활은 모두 깨지고 말 것 아닙니까? 정치
  가들에게는 언제나 사회의  포커스가 맞춰져  있는데
  특히나 선거 때에  그런 일이 생기면  저는 미국으로
  다시 돌아가야 되지 않겠어요?"
  "네, 좋습니다 한  가지만 더  묻겠습니다. 사건이
  나기 전에 방태산씨를 본 적이 있나요?"
  "아니요."
  신지혜는 간단하게 빨리 대답했다.
  "방태산 사건이 발생했던 날 어디에 있었습니까?"
  "곽진 박사와 함께 춘천에  놀러 갔었습니다. 곽박
  사란 저의 보이프랜드라고 하는 게 옳겠지요."
  "어떤 사람입니까?"
  "미국 대학에  있는 사람입니다.  정필대씨를 알기
  전부터 저를 좋아한 사람인데 정필대씨에게 배신
  당하고 그냥을 못 견딜 것 같아  그를 서울로 불렀지
  요."
  "꼭 한 가지만 더 물어봅시다."
  강형사가 약간 상기된 얼굴로 물었다.
  "만일 방태산을  만났더라면, 죽지  않은 방태산을
  만났더라면 어떻게 대했겠습니까?"
  "그런 인간은 상대할 가치가 있겠습니까?"
  신지혜는 끝까지 냉정을 잃지 않고 있었다.
       20. 저울위의 세상
  "뭐야! 최장배가 연행되었다고?"
  남봉철은 전화통에 대고 깊은 신음을 토했다.
  "바보 같은 자식, 일을 어떻게 처리한 거야."
  전화 상대방의 긴 설명이 있었다.
  "알았어. 당분간 그건 들여오지  말도록 하고 모두
  들 은신해 있도록."
  남봉철은 최장배의 충성심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러나 경찰 역시 만만히 볼 상대는 아닌 것이다.
  남봉철은 머리 위로 주르르 흐르는 땀을 닦으며 곰
  곰히 생각에 잠겼다.
  제일 먼저 걱정이 되는 것은 경찰이 사건을 어디까
  지 알고 있는가 하는 것이었다.
  "젠장맞을! 하필 그곳에서 살인  사건이 일어날 건
  또 뭐람?" 그는  누구에게랄 것 없이  분노를 터뜨렸
  다. 그러나 그  분노는 공허히  메아리쳐서 자신에게
  돌아올 따름이었다. 본래대로 일이 되었다면 8천만원
  이라는 이번 히로뽕 판매 수입의  절반이 차주호에게
  전달되었어야 하는 것이었다. 그렇게  되었더라면 지
  금까지 건네준 2억이라는 막대한 자금과 더불어 자신
  의 위치도 확고부동하게  굳혀 나갈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아니었던가.
  남봉철은 자리에  앉아 머리를  쓸어넘기며 자신의
  나이를 새삼 떠올려 보았다. 이제 예순다섯. 더 이상
  암흑가의 보스로만 있기에는 너무 늙은  나이라는 생
  각이 들었다.
  "은퇴하려는 마당에 이게 무슨 꼴인가?"
  그는 씁쓸한 웃음을 머금었다. 그리고 전화를 들었
  다.
  "차위원장님 계십니까? 난 남이라는 사람이오."
  차주호는 자리에 없었다.
  "위원장님 들어오시면 빨리 이리로  전화를 해달라
  고 전해 주시오. 아주 긴급한  문제가 발생했다고 말
  씀드리면 됩니다."
  그는 전화를 끊은 뒤 깍지를 끼고  다시 깊은 생각
  에 빠졌다. 이상하게도 처음 떠오른  것은 자신의 유
  년 시절이었다.
  큰형님의 이름은 지금은 남봉철이라고 하고 있었지
  만 그의 고향 충청북도 산골에서는  덕배라고 불렸었
  다. 서울에 올라왔던 것은 해방  직후였고 그때만 해
  도 혈기 왕성한 촌무지렁이에 지나지 않았다. 좌우익
  의 치열한 싸움터에서  처음 그는 못  배우고 헐벗은
  사람들의 벗이라는 좌익의 편에 서게  되었다. 그 자
  신이 찢어지게 가난하게 살아왔던 탓이기도 했다. 그
  는 두려움이 없이 선봉에 서서 대열을 지도했고 그러
  한 그의 모습은 곧 남로당 간부의 눈에 띄었다. 사실
  은 그것이 그의 화려한 변신의 시작이기도 했다.
  여순 반란사건과 대구 폭동 등의 일련의 실패를 보
  면서 또 그와 함께 날로 위력을 다해 가는 우익의 힘
  을 보면서 그는 점차 회의를  느끼기 시작했다. 좌익
  의 선봉에 서 있는그에게 돌아오는 것은 화려한 호칭
  이외의 것은 존재하지  않았다. 그의  생활은 여전히
  궁핍했고 그것은 생명의 위험을 늘상  받는 그에게는
  도무지 양에 차지를 않는 것이었다.
  그의 전향 이유는 그렇게 단순했다.  그는 다만 편
  안한 삶을 살고 싶었던 것이다.
  남봉철의 추억은 거기서 잠시 끊겼다.
  "그렇지. 형주라는 놈의 배반도  거기에 이유가 있
  을 것이다. 계집까지 달고 달아났으니"
  그는 물론 구형주의 행동을 이해할  수 있었다. 그
  러나 절대로 용납할 수는 없는 것이었다.
  그의 좌익 조직 탈퇴 이후 그가 속해 있고 그가 관
  할하던 조직은 풍지박산이 나고 말았다. 그리고 그는
  다시 좌익으로부터 쫓기게 되었다. 그러나 그 위험이
  다가오기 전에 전쟁이 일어났고 거기서  그는 새로운
  활로를 뚫기 시작했다.
  그때부더 그는 한 조직원의  탈퇴가 얼마나 위험한
  일인가를 잘 알고 있었다. 구형주가  바로 그런 녀석
  이었다. 그 녀석 때문에 그는  인생 최후의 도박에서
  궁지에 빠져들고 만 것이었다.
  "나는 정치와는 마가 낀 놈인지도 모르지."
  남봉철은 중얼거리며  씁쓸하게 웃었다.  그에게도
  자유당 시절 이정재의 부하로 들어갈 기회가 있었다.
  그러나 밀수에 재미가 들린 그는 보다  많은 돈을 벌
  수 있는 길을 택했고 그것이 현명한 판단이었다는 것
  은 516이 증명해 주었다. 용하게 법망을 피해 왔던
  그는 단 하나의 전과도 가지고 있지 않았을 뿐만아니
  라 이정재, 유지광 일파와는 아무런 연관도 없었기에
  정치깡패 소탕과 불량배  소탕에서도 아무런  피해를
  입지 않을 수있었다. 그러한 그가 늘그막에 정치인과
  손을 잡은 것은 물론 정계에 나가고자  하는 욕망 때
  문은 아니었다. 그는 조직을 인계시키고 합법적인 그
  늘 아래서 자신의 여생을 마치고 싶었던 것이다.
  그는 다시 한번 구형주를 생각했다.
  그를 먼발치에서 한번 본 적이  있다. 그때 최장배
  는 충성심이 대단한 놈이고 재간도 대단하게 갖춘 놈
  이라고 칭찬했었다. 그런 놈이 갑작스레 배반했을 리
  는 만무했다.
  "왜일까?"
  그는 자신의 생각이 본궤도에  올랐다는 것을 직감
  적으로 느꼈다. 형주라는  놈은 도망갈  구멍을 파고
  있었던 것이다. 여자를 데리고 나간 치밀성이 그것을
  증명하고 있었다. 박정자라는 여자는 아무 것도 가진
  것이 없이 몸만 빠져나갔다고 했다. 그것은 구형주가
  그 여자의 옷가지를 준비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남봉철은 도리질을 했다. 그가 돈을  혼자 갖고 있
  을 기회란 주어질 수가 없는  것이었다. 자금은 둘이
  운반한다. 구형주와 함께 돈을 운반했던 것은 최장배
  였다. 그가 이 배반을 사주했을리는 없다. 그 다음에
  는 자하문장의 박철호와 함께 있게 된다.
  그 역시 조직을  배반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가
  배반했다면 구형주와 함께 도망을 쳤어야 옳다. 그는
  그러지 않았다.
  그렇다면 결론은 명확한 것이다. 구형주는 그날 자
  하문장에서 살인사건이 일어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고 생각할 수 있다. 그는  목줄기가 당겨지는 느낌이
  들었다. 누군가가 조직에 도전하고 있는  것이다. 그
  러나 남봉철은 그가 누구인지 전혀 감이 잡히지 않았
  다.
  아름다운 전화벨 소리가 그의 깊은 생각을 깨웠다.
  그는 비서의 말을 기다리지 않고 전화를 들었다.
  "여보세요?"
  뜻밖에도 여자의  목소리였다. 차주호를  기다리고
  있던 그는 전화를 다시 끊어버릴까 하는 생각이 들었
  다.
  "형님 계신가요? 저는 황금  살롱의 주마담이에요.
  형님이 들으면 기뻐하실 소식이 있다고 좀 전해 주실
  래요?"
  "내가 형님이요."
  "형주라는 사람에 대한 소식인데  얼마에 사시렵니
  까?"
  주마담은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
  "무슨 정보인지도 모르는데  그건 너무  빠르지 않
  소?"
  "세상이란 원래 저울질하면서 사는 세상인데, 싫으
  시면 그만두어요."
  "좋소 무조건 사기로 하지요. 가격은?"
  "한 장이면 되겠어요?"
  남봉철은 주마담이 진담으로 하는 소린지 농담인지
  몰라 한참 생각했다.
  "좋소. 정보를 넘겨줄 장소와 시간을 대주시오."
  "오늘 저녁 6시 황금 살롱, 저희  집에 오세요. 술
  잔이 앞에 있어야 이야기가 나오죠."
  "그건 안되오. 거기는 경찰의  이목이 집중되어 있
  어요."
  결국 이 여자는 술을 팔겠다는 목적으로 엉뚱한 소
  리를 하고 있다고  남봉철은 생각했다.  형주에 대한
  정보라면 그가 단숨에 달려올 것이라는  것을 어떻게
  알았을까.?
  "좋아요. 나 또 주마담한테 속아주지. 허허허."
       21. 미치고 싶은 밤
  초라한 어머니의 영혼과 만나고  오던 신지혜와 곽
  진은 우울한 기분이었다. 양주군 백석면에 있는 망월
  사에 어머니의 혼령을 위탁했었다. 평소 불교 신자였
  던 어머니는 망월사에 있는 한스님을 알고 지냈기 때
  문이었다. 누가 죽였든지간에 미혜의  원수로 생각해
  온 방태산이 죽었다는 것을 어머니에게  알리고 싶었
  던 것이다.
  곽진은 미국에서부더 가장 가깝게 지낸 보이프랜드
  였다. 보이프랜드라고 밖에 표현할 수가 없지만 정필
  대에게 배신당한 후 그를 배우자로 몇번 생각해 보기
  도 했다.
  미국에 건너가 고학으로 공부를  마친 곽진은 시카
  고의 한 대학에서  조교로 일하고  있었다. 서울에서
  동물학과를 나온 곽진은 그곳에서 수의사  공부를 다
  시 하고 대학 부속 동물원에서 일했었다.
  정필대가 떠난 후 한참  방황하던 신지혜를 붙잡아
  준 사람이 곽진이었다.  그때는 순수한  친구였었다.
  서로를 위해 무슨 일이라도 해주고 싶은 사이였다.
  그는 이제 갓 서른을 넘었지만 고학하느라 너무 고
  생을 했기 때문에 30대 중반으로 보였다.
  신지혜의 부름으로 서울에 머물고  있는 그는 웬만
  하면 여기 신지혜와  함께 남을까 하는  생각도 하고
  있었다.
  "미스터 곽, 언제 갈 거야?"
  거의 십여분 동안 아무 말도 않고 북한산 꼭대기만
  바라보고 있던 지혜가 입을 열었다.
  렌트카를 운전하고 있던 곽진은  흘깃 지혜를 돌아
  보고는 다시 묵묵히 악세레이터를 밟았다.
  "아직"
  한참만에 곽진이 대답했다.
  "난 도로 미국으로 갈까봐요."
  "왜?"
  곽진은 여전히 지혜를 돌아보지도 않고 말했다.
  "여기서 살아야 할  이유가 없어. 정든  사람은 다
  죽고, 미워해야 할  사람까지 허무하게  가 버렸으니
  무슨 이유로 여기 남아 있어?"
  "대학 강의 얻어 놓은 것은?"
  "그게 뭐 대수야."
  "여긴 조국이니까 살아야 할 이유가  없는 건 아니
  지"
  "미스터 곽은 자기 고향 아냐?"
  "난 언젠가 돌아올 거야."
  "요즘 난 괴로워. 모두 떠나고 혼자 남는 것 같아.
  괴롭히는 사람도 같이 있어야 사는 맛이 나는가 봐."
  ""
  "미스터 곽."
  "응?"
  "나 좀 어떻게 해줘."
  그때야 곽진이 신지혜를 돌아다보았다.  차창 사이
  로 불어오는 바람에 긴 머리카락을  흩날리는 그녀의
  눈에선 두 줄기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의지력 강하
  고 담이 큰 지혜가 눈물을 흘리는  모습을 그는 처음
  보았다.
  곽진은 기어를 쥐고 있던  오른손으로 지혜의 손을
  가만히 잡았다.
  "우리 맥주 한 잔 마시고 가.  아니, 한 잔이 아니
  라 쓰러질 때까지 좀 마시자구."
  백석면서 서울로 들어오는 좁은  2차선 아스팔트길
  옆에는 여기저기 유흥  시설 안내판이  눈에 띄었다.
  그중에는 장흥 유원지라는 간판도 보였다.
  곽진은 그쪽으로 차를 돌렸다.
  "장흥이라는 데 가 보았어?"
  곽진이 나직한 목소리로 물었다.
  "아니."
  "그곳이 요즘 신흥 유원지인데 아주 그럴 듯하대."
  곽진의 말이 맞는 것 같다고  지혜는 생각했다. 장
  흥에는 음식점, 카페를 비롯해 맥주홀,  디스코 하우
  스 등 근사하게 단장한 시설이 서울의 강남을 뺨치게
  했다.
  그들은 그리 크지  않은 스탠드바 같은  건물 앞에
  차를 세우고 안으로 들어갔다.
  아직 이른 저녁이라  손님은 별로  없었다. 실내는
  밖에서 보기보다 훨씬 호화스러웠다.
  가운데 여러 대의 마이크와 함께  기타, 피아노 등
  악기들이 놓여 있었다.
  그들은 맥주를 청해 놓고 목을 축였다.
  "미스터 곽, 대학 다닐 때 애인 없었어요?"
  신지혜가 서툰 솜씨로 담배를 피워 물면서 말했다.
  "그건 골백번도 더 얘기했잖아. 가난하다고 채였다
  는 거"
  "미안해. 또 아픈 상처를 건드렸군.  채인 건 나도
  마찬가진데. 자, 그런 뜻에서 한 잔."
  지혜는 글라스를 쨍 소리가 나도록 부딪친 뒤 단숨
  에 잔을 비웠다.
  "곽진, 나 오늘 실컷 취하고  싶어. 시시한 맥주로
  는 안되겠어요."
  신지혜는 정말 보통 날보다는 좀 달라 보인다고 곽
  진은 생각했다.
  망월사에 가자고 한 것부터가  이상했다. 절에서도
  어머니 아버지의 명패 앞에서 너무나 서럽게 우는 것
  을 멀리서 곽진은 지켜보고 있었다.
  "우리 결혼할까? 계약  결혼이라는 것  있지. 1년,
  아니 여섯달, 아니 한 달만 어때?"
  신지혜는 얼마 안 가 술주정을  하기 시작했다. 그
  러나 곽진은싫은 내색 않고 그것을 다 반아주었다.
  몇 시간이 흘렀을까? 중앙 두대에 악사들이 나타나
  고 빛 못본 가수 지망생 아가씨가  노래를 부르기 시
  작했다.
  홀에는 손님들로 어느새  가득 찼다.  모두가 남녀
  짝을 맞추어온 아베크족 같았다.
  신지혜와 곽진이 맥주  열 병 이상을  비우고 났을
  때였다.
  갑자기 경음악의  톤이 달콤한  멜로디로 바뀌더니
  실내 조명이 거의 꺼지다시피 어두워졌다.
  가운데 무대 위에  붉은 스포트가 비추자  키가 큰
  댄서 아가씨가 나타났다. 댄서는 달콤한 선율에 맛추
  어 흐느끼듯 춤을 추면서 한 가지씩  한 가지씩 옷을
  벗어 던지기 시작했다.
  객석 여기저기서  탄성과 휘파람  소리가 흘러나왔
  다. 깔깔거리는 술 취한 여자의 웃음도 들렸다.
  음악이 점점  클라이막스를 향해  올라가자 댄서는
  가슴에 마지막으로 남았던 브레지어를  뜯어냈다. 탱
  탱한 유방이 봉숭아씨 터지듯 조명 앞에 튕겨져 나왔
  다. 댄서의 입에선 신음 같은 소리가 새어나왔다. 여
  기저기서 교성과 휘파람 소리가 들렸다.
  신지혜는 자기가 댄서가 된 듯한 착각을 하면서 숨
  을 가쁘게 몰아쉬었다.
  음악이 점점 톤을  높여 폭발할  즈음에 이르렀다.
  이제 더 이상 참을  수 없다는 듯 마지막  고음을 낼
  때 무용수의 아랫배 끝에 있던 조그만 팬티가 허공으
  로 던져졌다.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늘씬한 댄서의 육체가
  온 실내를 폭발시켰다.
  "우리 딴 곳에 가요."
  신지혜가 갑자기 일어서며 곽진을  끌고 밖으로 나
  왔다.
  밖으로 나온 두  사람은 뜨거운 술집  안 공기와는
  또 다른 상쾌한 공기를 들이마셨다. 속이 후련해지는
  것 같았다.
  취기가 한껏 오른 신지혜의  눈에 장흥원이란 여관
  의 네온사인 불빛이 비쳤다.
  "우리 오늘 여기서 자고 가요."
  "서울 안 가고?"
  곽진이 뜻밖이란 듯이 물었다.
  "서울 가보아야 기다릴 사람 있나요? 이제 이 넓은
  천지에 내가 기댈  사람은 미스터  곽, 자기밖에  없
  어."
  "어째 오늘 밤은 지혜 같지 않군."
  "내 말대로 할 거야 안할 거야?"
  지혜가 갑자기 신경질적으로 말했다.
  "좋아요. 알았어요."
  두 사람은 차를 장흥원 앞에 세우고 나란히 여관으
  로 들어갔다. 시골 여관 치고는  아주 깨끗하고 시설
  이 좋았다. 두 사람은 방안에  들어서자마자 누가 먼
  저랄 것도 없이 뜨거운 포옹부터 나누었다.
  그들이 육체를 서로 나눈 것은 처음이 아니지만 오
  늘 밤처럼 뜨겁기는 처음인 것 같았다.
  두 사람은 누구에게 쫓기는  사람들처럼 급히 옷가
  지들을 벗어 팽개치고 알몸이 되어 침대로 뛰어 올라
  갔다. 가슴과 다리가 온통 털부성이인 곽진은 미끈한
  글래머 신지혜의 허리를 으스러지도록  껴안았다. 한
  쪽 팔은 가늘고 야들야들한 지혜의 긴  목을 잡고 입
  맞춤을 했다. 지혜가 숨이 막혀  두 주먹으로 곽진의
  어깨를 칠 때까지 입맛춤이 계속되었다.
  곽진은 그 동안에 지혜의 두 다리를 헤치고 소중한
  중심부를 부지런히 공략하고 있었다.  그러나 지혜가
  본능적으로 무릎을 붙이고 열지 않는 바람에 꽤 시간
  이 걸려야만 했다.
  "이 털부성이 좀 보아, 짐승 같아 자기는"
  지혜가 무릎을 약간 늦추어  주면서 곽진의 가슴털
  을 쓰다듬었다.
  "나야 매일 짐승하고 같이  사니까 닮아 가는가봐.
  동물원의 고놈들도 사랑을 나눌 땐 참 볼 만하거든."
  "그래요. 아이 천천히"
  지혜는 자기의 중심부로 들어오려는 곽진의 남성을
  피하면서 말했다.
  "동물 중에 가장 멋있는 섹스를 하는 것은 어떤 놈
  이에요?"
  "놈이 아니라 년도 있는데."
  "아이"
  "코끼리의 사랑이 가장 정열적인  것 같아. 그들은
  땅이 울리도록 서로 애무를 하다가 마침내 육중한 수
  컷의 몸이 암컷을짓누르지."
  "어마"
  "그런데 말야 어마어마한 수컷의 그것은"
  "얼나마 커요?"
  신지혜는 물어놓고 혼자 킥킥대며 웃었다.
  "길이가 약 90센티, 둘레는 30센티 정도 되지."
  "엄마야, 기둥이군 기둥, 호호호."
  신지혜는 곽진의 겨드랑이를 간지럽히며 웃었다.
  "그런데 말야 그  어마어마한 외모와는  달리 사랑
  행위는 십초도 채 안돼 끝나버려."
  "애게!"
  지혜는 더 못 참겠다는 듯이 곽진을 끌어안았다.
  "빨리 나 좀 어떻게 줘. 오늘  밤은 정말 미쳐보고
  싶어."
  서서히 일기 시작한  파도는 얼마 안  가 폭풍우로
  변했다. 신지혜의 뜨거운 신음과 함께 장흥 유원지의
  네온 불빛은 하나둘 꺼져갔다.
       22. 여자와 정치가
  추경감은 차주호의  주변을 조사하기  시작했다. 제
  13 선거구의유력한 후보  예상자 세 사람중  유일하게
  살아남은 사람이었다.
  원래 야당을 할 만한 인물이 못 되었는지는  몰라도
  그는 정권이 바뀔 때마다 여당 쪽에서 일해 온 사람이
  었다.
  자유당 때는 정치 깡패 조직의 문전에서 얼씬거리며
  알아주지 않는 주인을  위해 충성을 바치던  사람이었
  다.
  419가 일어나자 집권자들의 집에 불을 지로고  동
  상을 부수는 일에 앞장을 섰었다. 곧 반독재 운동가로
  돌변하고 서울 변두리에서 시의원에 출마를 했다 보기
  좋게 낙선한 뒤 당시 집권당의 당원으로 들어가  어느
  참의원 의원의 비서관을 지냈다.
  516군사 혁명이 일어나자 재빨리 재건 국민운동이
  니 뭐니하는 조직에  끼여들어 자기가 가장  애국자인
  척 떠들고 다녔다.
  민간 정부가 들어서자 지금  제 13 지구가 된  동의
  동장 감투 하나를 얻었다.
  그 이후 동장을 그만 두고 자민당에 입당할  때까지
  계속 여권에서 일을 해 왔다.
  나이 56세가 되도록 직장이란  것을 가진 것은  1년
  반 동안 한 동장 경력뿐이었다.
  그는 선거가 있을 때마다 보이지 않는 그의  사조직
  을 동원해 충성을 바쳐 자기 보스의 득표 활동을 도왔
  다.
  그의 표리부동하고 약은 처세와는 달리 우직한 충성
  심도 있는 것은,  그가 원래 깡패  조직의 일원이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추경감은 지금도 그가 거느린 사조직의 대부분은 깡
  패 조직이거나, 그와 유사한 불법 범죄 조직일 것이라
  는 예감이 들었다.
  추경감은 그것을 확인하기 위해 정보과의 제 13  선
  거구나 자민당 담당 형사들을 여러 명 만나  이야기를
  들어보았다.
  그들도 차주호가 어떤  조직과 연관이 있을  것이란
  의심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집권당의 국회의원 공천
  예정자이니만큼 함부로 대하거나 뒷조사를 하는 일 등
  은 하지 않는 것이 좋을 것이란 말을 해주었다.
  추경감은 자기 모가지 걱정까지 해주는 동료가 고맙
  기도 하지만 은근히 화를 나게도 했다.
  추경감은 차주호를 직접 찾아가서 만나기로  작심했
  다.
  추경감이 자민당 제  13 지구당 사무실을  찾아갔을
  때는 점심때라서 그런지  거의 텅비어 있고  비서격인
  진유선만이 사무실을 지키고 있었다.
  턱이 뾰족하고 눈꼬리가 위로 치켜올라가 고집이 셀
  것처럼 보이는 진유선은 추경감을 보자 상냥하게 웃었
  다.
  선거를 앞둔 입후보  예상자의 비서인 만큼  사람을
  대하는 부드러움이 몸에 배어 있었다.
  "어서 오십시오. 무슨 일을 도와드릴까요?"
  추경감은 지나치게 하얀 그녀의 피부가 병적이란 생
  각을 하면서 함께 빙긋이 웃었다.
  "저어, 차위원장님을 좀 뵈러 왔는데"
  추경감이 존대말을 쓰기도 뭣하고, 그렇다고 초면에
  말을 놓을 수도 없어 어물어물했다.
  "예, 저는 진유선이라고 합니다. 위원장님의  비서입
  니다. 선생님은 어디서 오셨다고 여쭐까요?"
  "시경에서 왔다고  해주십시오.  서울 시경의  추라
  고"
  "예, 그러세요. 여기 좀  앉으세요. 위원장님이 점심
  식사 나가서 아직 안 들어오셨거든요."
  그때였다. 전화벨이 요란하게 울렸다. 진유선이 전화
  를 받았다.
  "예, 위윈장님, 별일은 없구요.  지금 손님이 오셔서
  기다리고 있습니다. 예, 시경에 계시는 분이라고  여쭈
  시랍니다. 예, 알겠습니다."
  수화기를 내려놓은 진유선은 다시 방긋 웃으며 말했
  다.
  "바쁘지 않으시면 한  십오분만 기다리시랍니다. 곧
  들어오신다구요."
  "좋아요."
  추경감은 소파에 앉아 담배를 꺼내 물었다.
  "미스 진은 초면이 아닌네"
  추경감은 그때야 생각이 났다.  자하문장 정필대 피
  살 사건을 조사할 때 한번 본 일이 있기 때문이다. 그
  러나 진유선은 추경감을 기억하지 못하는 것 같았다.
  "저를요? 죄송합니다. 전 기억이 영 나질 않는군요."
  진유선은 여전히 상냥한 웃움을 지우지 않고 말했지
  만 약간은 당혹스런 표정이었다.
  "미안해. 내가 잘못 본 것 같아"
  추경감은 어물거리며 시선을 딴  데로 돌렸다. 뒷벽
  에 빽빽하게 써놓은 스케줄판을  보았다. 날짜가 적힌
  캘린더 같은 보드 위에 비닐을 씌우고 그 위에 사인펜
  으로 붉은 글씨 푸른 글씨 등이 잔뜩 쓰여 있었다. 추
  경감은 담배 연기를 길게 뿜으며 그것을 뚫어지게  쳐
  다보았다.
  "22일 박사장과 점심, 25일 14시 3동 마을회관 기공
  식. 19시 김여사 신도들과 만찬"
  대체로 이런 유의 글씨가 여러 사람 필체로 쓰여 있
  었다.
  추경감은 정필대 사건이 난 6일칸을 찾아 보았다.
  '자하문장 남'
  '정사장 2시'
  이렇게 쓰여 있었다. '자하문장 남'이란 것은 6일자
  칸에 쓰인게 분명했으나  '정사장 2시'는 그  다음 칸
  즉 7일인지 6일인지 잘 분간이 가지 않았다.
  만약 그것이 6일을 말한다면 정사장은 정필대일  가
  능성이 많았다. 차주호가 허름한 여관인 자하문장에서
  무엇 때문에 정필대를 만나려고 했을까? 더구나  그때
  는 진유선을 데리고 갔었지 않은가? 만약 차주호가 진
  유선을 데리고 그곳에 가서 정필대를 만났다면 여
  기까지 생각한 추경감의 뇌리를 번개처럼스치는  생각
  이 있었다. 추경감이 진유선의 얼굴을 다시 보았다.
  출중한 미인은 아니지만 그런 대로 생긴 편이다.
  치켜 올라간 눈꼬리며 검은 눈썹, 날카로운 코, 얇은
  입술이 대담한 일을 저지를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정필대가 발가벗은 채  권총을 맞았다는 것은  어느
  여자와 정사를 하려고 했거나 한 뒤임이 분명했다. 그
  렇다면 진유선을 용의 선상에서 배제할 수 없다는  생
  각이 들었다. 진유선은 자기의  보스인 차주호를 위해
  무슨 일이든지 할 수 있는 여자인지도 모른다고  추경
  감은 생각했다.
  또 하나 '자하문장 남'이란 무엇일까? 남이란 '만남
  '이라고쓴 것이 오래 되어 '만'자가 지워졌다고 볼 수
  도 있다. 아니면 '남'이란 사람의 이름이거나 성이라고
  볼 수도 있었다.
  추경감이 골똘히 추리에 사로잡혀 있을 때 진유선은
  계속 걸려오는 전화를 받고 있었다. 그  전화 중의 하
  나가 추경감을 긴장시켰다.
  "아, 예, 남사장님이시군요. 위원장님이 몹시 기다렸
  어요. 예, 예, 지금은 안 계시구요. 한 십분 뒤면  들어
  오십니다. 예, 예, 칠칠공육에  사사이삼 예, 적었어요.
  그럼 그리로 연락드릴께요."
  7706에 4423.  추경감은 전화번호임에  틀림없는 그
  숫자를 재빨리 머리속에 적어  두었다. 남사장이 저기
  적힌 '자하문장 남'일 가능성이 크다는 생각이 들었다.
  "손님이 오셨다고? 이거 죄송합니다. 목구멍이 포도
  청이라. 풀칠 좀 하느라고"
  그때 차주호가 들어오며 너스레를 떨었다. 추경감이
  일어나 고개를 숙였다.
  "자자, 들어갑시다. 미스 진, 거 당귀차로 부탁해요."
  추경감은 떠밀리다시피 방안으로 들어섰다.
  사무실은 널찍하고  으리으리한 집기로  차 있었다.
  방태산의 선거사무실과는 비교가 안되었다.
  강의를 해도 될 법한 넓은 방 한켠에는 회의 탁자가
  놓여 있고 그 옆에 은회색의 고급  소파가 있었다. 사
  무용 고급 가구책상에는 위원장 차주호라는 자개로 새
  긴 펫말이 얹혀 위엄을 과시했다. 의자 뒤에는 수놓은
  깃발이 서 있고 그 위에는  당총재의 컬러 사진이 든
  액자가 걸려 있었다.
  "자, 앉아서 이야기하지요. 시경에서 오셨다구요?"
  검고 굵은 안경테  너머로 미소를 띄우며  차주호가
  말했다.
  "저어, 추라고 합니다."
  추경감은 명함을 건네 주었다. 두 사람은 소파에 마
  주 앉았다
  "무슨 좋은 정보라도 있습니까?"
  차주호는 목소리가 쉰 듯했다.  매일 많은 사람들을
  상대하니까 목이 쉴 법도 했다.
  "전 수사만 맡고 있기 때문에 정보는 별로  없는 사
  람입니다. 다만 좀 여쭤볼 말씀이"
  "하하하, 그래요? 그럼 저  정필대나 방태산 수사를
  맡고 있나요?"
  차주호는 일순 당황하는 듯한 그림자가  스쳐갔으나
  곧 너털 웃음으로 자기 표정을 감추어 버렸다.
  "정필대 사건은 직접 제 담당이 아닙니다만  연관은
  있습니다. 방태산씨 사건은 바로 제 담당입니다.  위원
  장님은 역시 날카로우십니다. 금방  제 의도를 꿰뚫어
  보시니까요."
  "아, 저야 눈치로 먹고 사는 정치인  아닙니까, 정치
  인. 그래 내가 무슨 도움을 줄  수 있습니까? 나도 이
  거 그 두 사람이 없어져 영 싱겁게 되었습니다."
  "정필대씨는 평소에 돈이 없어 좀 쩔쩔맸다고  하던
  데요."
  "아, 그야 정치인이 쓰는  제스추어 아닙니까? 하긴
  그 형인 정용대씨가 돈깨나 있는 사람이지만 동생한테
  는 한푼도 안준다고 하더군요."
  "그래요? 아무러면 형제간인데"
  "아, 정치와 돈에 형제  부모가 있습니까? 정필대가
  나와봤자 돈만 쓰고 떨어질 게  뻔한데 어느 형이 돈
  대겠습니까? 미국물 먹고 온 신출내기가 정치라는  정
  짜나 알겠습니까? 철없는 짓 하다가 쯧쯧 아마 모
  르긴 해도 빚만 잔뜩 졌을겁니다."
  "그럼 그가 죽기 전에 돈에 쪼들리고 있었겠군요."
  추경감이 눈을 반짝이며 물었다.
  "그야 내가 어떻게 압니까. 우리한테 들리는 소문으
  로는 곧 사퇴할 것이란 이야기였습니다."
  "예, 그랬군요. 방태산씨는 어땠습니까?"
  "어떤 면 말입니까?"
  "가령"
  "그 작자는 여자 좋아하다가 망했습니다."
  "예?"
  "치마만 둘렀다고 하면 부하 직원이고 친구  여편네
  고 가리지 않으니 내 그 친구 여자 칼에 죽을  줄
  알았다니까."
  "예?"
  "그 친구 계엄령 때  도망다니면서도 여자 없인  못
  사는 친구였어요. 숱한 여자를  건드렸다가 돈으로 때
  우고 꿇어 앉아 빌고 한 것이 뭐 한두 껀이었나요?"
  "이번에도 무슨 확증이"
  "여보슈 추경감, 자기  사무실에서 여자하고 노닥거
  리다가 죽은 것이 뻔한데 뭘 자꾸 그러시요? 거 보수
  당에 모여 있는 정치꾼들치고 돈 좋아하고 여자  좋아
  하지 않는 놈 어디 있어요. 우선"
  "예, 알겠습니다."
  "내가 형사하는  게  낫겠어, 허허허.  이건  농담이
  고 자, 우리 추경감 잘 봐주시오. 나는 장관  만나
  면 잘 얘기하리다."
  추경감은 씁쓸한 기분으로 그 방을 나올 수밖에  없
  었다.
  사무실로 돌아온 추경감은 강형사에게 7706에  4423
  이란 전화번호를 주고 그곳에 남이라는 사람이 있는지
  를 알아보라고 했다.
  강형사가 그곳에 전화를 걸었다.
  "예, 살롱입니다"
  상냥한 여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살롱이라구요? 어느 살롱이지요?"
  강형사가 되물었다.
  "이냥반이 대낮부터 취했나.  어느 살롱인지도 모르
  고 전화질을 해요?"
  상냥하던 목소리가 금방 짜증으로 바뀌었다.
  "메모를 해놓았는데 지워져서  번호만 남았어요. 나
  는 반도그룹 비서실장인데  손님 접대할 일이  있어서
  그럽니다."
  "아이구, 그러세요? 진작  그렇게 말씀하시지요.  난
  주마담이라고 합니다. 여기가  바로 황금  살롱이에요.
  한남대교 입구에서 오른쪽으로"
  주마담이란 여자는 갑자기 껌벅 죽는 시늉을 하면서
  좔좔 이야기를 쏟아놓았다.
  "남사장 안 오셨나요?"
  강형사가 이판사판으로 말을 던져 보았다.
  "남사장?"
  주마담이 약간 주춤했다.
  "조금 전에 그리로  간다고 갔는데  아, 남사장
  말예요, 남사장. 천하의 남사장을 몰라요?"
  "아, 예, 큰형님 말씀이군요.  남봉철 사장님 말씀이
  죠? 조금전에 나가셨어요."
  "어디로 간다고 그랬습니까?"
  강형사는 열심히 메모를 하면서 물었다.
  "글쎄요, 자기 사무실에 갔겠죠. 신사동 말입니다."
  "차위원장 만나러 간 것 아닙니까?"
  "차선생님 전화 받고 나가셨어요. 아마 신사동 계실
  거예요."
  "거기 전화번호가"
  "아니, 남사장님 사무실 전화번호도 모르셔요?"
  주마담이 갑자기 의심스런 목소리로 말했다.
  "아, 여기 있습니다.  그리로 전화해 보죠.  저 외국
  바이어 오면 다시 전화할게요."
  강형사는 얼른 전화를 끊어버렸다.
  "남봉철이 누굽니까?"
  강형사가 추경감에게 물었다. 강형사의 전화하는 모
  습을 보고 있던 추경감은 아무 대꾸도 않고  마약반에
  전화를 걸고 있었다.
  "남봉철에 관한 자료 좀 보내 주시오."
  추경감은 전화를 끊고 강형사에게 말했다.
  "그는 옛날부터 유명한 마약 밀수업자였어."
       23. 미망인의 증언
  "명자야!"
  오랫만에 오명자를 만난 송희는  그녀의 손을 와락
  잡으면서 눈물부터 글썽거렸다.
  "송희야!"
  "정말 해치웠구나. 천하의 악당이 드디어  지옥으로
  갔어. 우리 그이한테 큰 소리로 막 떠들고 싶어."
  송희는 커피숍에 빽빽하게 앉아  있는 다른 사람들
  은 전혀 의식하지 않고 큰 소리로 말했다.
  "얘, 진정해. 우리 앉아서 천천히 이야기하자."
  오명자가 주위 사람들을  의식하고 송희를  앉혔다.
  그녀는 쥬스 두 잔을 시킨 뒤  심호흡을 몇번 하면서
  송희의 마음이 가라앉기를 기다렸다.
  "그 동안 어떻게 지냈니?"
  송희는 계속 울먹울먹하면서 말을  참느라 애를 썼
  다. 그녀는 비로소 주위 사람들을 의식한 것 같았다.
  "일각이 여삼추라는 옛말 있지. 우리 여고 다닐  때
  말라깽이 한문 선생이 늘 하던 말"
  "앤 별 케케묵은 얘기를 다 꺼낸다."
  오명자가 미소를 머금었다. 송희는 그 말을 해 놓고
  는 자신의 마음이 조금 누그러진 것을  느끼는 것 같
  았다.
  "방태산! 그 원수를 어떻게 갚느냐 하는 생각만으로
  내 생활이 꽉 차 있었어. 너에게서 무슨 소식이 오지
  않을까 하고. 그야말로 하루가 1년처럼 괴롭고"
  "미안해, 자주 연락 못해서."
  "그런데 말야, 어느날 밤 텔레비에 마침내  그 녀석
  얼굴이 크게 나오잖야. 나는 밥을 먹다가 놀라 쳐다보
  고 있었더니 죽었다고 하는 거야. 나는 숟가락이 떨어
  지는 것도 몰랐어."
  "그런데 너는 방태산이 너의 허즈를 해쳤다고 확실
  히 믿고있는 기니?"
  "너 지금 무슨 얘길 하는  거야?  방태산이 아니고
  우리 그일 죽일 사람이  이 세상에 어디  있어? 네가
  겪어 보았으면 그작자가 어떤 못된 인간인가 하는 것
  을 알았을 텐데"
  송희는 새삼스럽게 무슨 이야기를 하느냐는 태도였
  다.
  "너 그 녀석이  무슨 나쁜 짓을 하고  다녔는지 다
  알지? 내가 메모한 것 주었잖아."
  "응, 대강은 보았어."
  "거기 적은 것  말고도 얘기하자면 얼마든지  있어.
  우리 집에 와서 얼마나 행패를 부렸는데"
  "뭐? 집에까지 방태산씨가 찾아왔었단 말야?"
  오명자는 처음 듣는 이야기라 귀가 번쩍했다.
  "응, 내가 그 얘긴 안 했었나?"
  송희가 갑자기 실수라도 한 듯 꺼림칙한 표정이 되
  었다.
  "어디 자세히 좀 이야기해 보아."
  송희는 한참 머뭇거리다가 입을 열었다.
  "방태산은 이 세상에서 가장 악랄한 인종에 속하는
  인간지말자야. 우리 그이의 약점을 잡아 가지고 얼마
  나 괴롭혔는지 몰라."
  "무슨 약점을 잡았길래?"
  송희는 남은 쥬스를 꿀꺽꿀꺽 소리를 내며 마신 뒤
  이야기를 계속했다.
  그녀의 남편, 죽은 정필대는 원래 큰 돈이 없었다고
  한다. 그의 형이  재벌급 회사의  사장이지만, 동생이
  정치한다는 것을 탐탁하게  생각지 않았다.  탐탁하게
  생각지 않는 정도가 아니라 적극적으로 말렸다. 만약
  자기 말을 듣지 않는다면 지금까지 주던 생활 보조비
  도 끊어버리겠다고 말했다.
  별로 재산이 없는 정필대는  형님 회사의 고문이란
  이름으로 생활비를 받아 살고 있었다.
  돈에 쪼들린 정필대는 정계의 줄과 한자리 하고 있
  는 동창들을 통해 여러 가지 잇권  운동에 손을 대었
  다. 그 중에 한 건이 문제가 생겼다.
  서울 근교의 그린벨트 지역에  대규모 별장식 갈비
  집을 만드는 일에 개입을 했었다.
  그곳은 원래 건축 허가가 나지 않는 지역인데, 형질
  변경과 건축 허가 등을 내주었다. 고위층에 있는 동창
  과 야당 정치인들의 힘을 빌어 구청  등에 압력을 넣
  어 허가를 얻어 주었다.
  그러나 허가가 떨어지자 정작  업주는 약속한 돈을
  내놓지 않았다. 약속한 금액의 5분의 1도 안되는 돈을
  내고는 시치미를 떼어버렸다.
  그런데 일이 거기서 끝나지가 않았던 것이다.
  그린벨트 지역에 공사를 하기 위해 나무를 베어 내
  자 인근 주민들이 사방에 진정서를 내는 바람에 공사
  를 할 수 없게 되어버렀다.
  업주는 정필대를 찾아와 대결해 줄 것을 요구했다.
  그러나 일이 풀리지 않았다.
  업주는 교제비로 준 돈은 물론 어마어마한 돈을 손
  해배상조로 요구했다.
  정필대는 업주한테  시달림을 당했지만  쉽게 돈을
  내놓을 처지가 못 되었다.
  이렇게 되자 업주는 소송을 걸겠다고 날뛰었다.
  이 사실을 알아낸 방태산은  정필대를 협박하기 시
  작했다.
  언론 기관에 정필대의 비리를 폭로해서 내장시키겠
  다는 것이었다. 그러니 13 지역구 출마를 포기하고 다
  른 지역으로 가든지, 정치에서 손을 떼라고  윽박지르
  기 시작했다.
  궁지에 몰린 정필대는 한때 정치에서 손을 떼고 미
  국으로 도로 가버릴까 하는 생각도 많이 했었다.
  "여보, 아무래도 안되겠어. 형님은 형님대로 저렇게
  펄펄 뛰지. 사방에선 고발하느니 폭로하느니 하고 날
  뛰지. 모든 것 그만두고  우리 미국으로 이민이나 갈
  까?"
  잔뜩 술에 취해 늦게 들어온 정필대가 송희를 보고
  하소연한 적이 한두번이 아니었다. 그러나 송희의 생
  각은 좀 달랐다. 송희는 남에게 지기 싫어하고 오기가
  있는 여자였다.
  "그런 약한 소리 하지 말아요. 방태산 자기에겐  약
  점이 없나요? 그쪽 사람을 매수해서 방태산의 약점을
  알아보아요. 이에는 이로, 눈에는 눈이에요."
  정필대는 송희의 말대로 방태산의  주변을 캐기 시
  작했다.
  그도 워낙 지저분한 직업  정치인이라 문제삼을 만
  한 일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그 중에도 여자와의 불
  미스러운 관계가 가장많았다.
  주변에 있는 많은 여자들을  닥치는 대로 건드렸으
  나 거의가 창피해서 문제를 삼지 않았다. 그러나 맥주
  홀에 있는 한 아가씨는 쉽게 물러나지 않았다. 나이도
  어린 그 아가씨는 방태산의 아이까지  잉태했으니 그
  냥 물러설 수 없다는 것이었다. 돈도 귀찮으니 자기와
  결혼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방태산의 사무실로 집으로 찾아다니는  것이 몇 달
  이나 되었다고 한다.
  정필대는 몰래 그 여자를 만나 전후 사정 이야기를
  자세히들었다. 그리고 쉽게 해결이 되지 않으면 혼인
  빙자 간음, 위자료 청구 등 소송을 내야 한다는 어드
  바이스까지 해주었다.
  "이봐요, 방태산 선생, 이쯤에서 내 일에서 손을 떼
  지요. 당신이 끝까지 이런  식으로 나오면 나도 칼이
  없는 것은 아니라오. 삼각지에 있는  비어홀 '죽순'의
  미스 고를 알지요?"
  정필대는 방태산을 초대하고 저녁을  함께 먹은 뒤
  헤어질 무렵 반격을 시작했다.
  "미스 고라니? 맥주홀 아가씨가 뭐 한둘인교?"
  방태산은 확실히 쩔끔한 것 같았다.
  "여기 혼인빙자 간음의  형사소송 고소장과 위자료
  청구 민사소송 솟장이 있소. 이걸 내일 접수시키고 내
  가 기자회견을 할까요?  아니면 방선생이  직접 기자
  회견을 하시겠어요?"
  방태산의 얼굴이 벌갛게 달아올랐다.
  "이 나쁜 놈, 지금 나한테 공갈이야?"
  그가 흥분해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어허 방선생 취하셨나? 그렇게 흥분한다고 해결될
  일이 아니잖소? 우리 한잔 하면서 생각해 봅시다. 미
  스 고 뱃속에있는 방선생의 2세도 생각하셔야지요."
  방태산은 목에 선 핏줄이  자차 사라지더니 창백한
  얼굴로 다시 주저앉았다.
  "자, 술 한잔만 더 하면서 우리 천천히 방법을 생각
  합시다. 우리 같은  정치인끼리 물고  뜯어서야 쓰나
  요?"
  정필대의 잔을 받는 방태산의  손이 가늘게 떨리기
  까지 했다.
  "정치라는 건 더러운 물건이요. 손만 대면 온  몸을
  더럽히게된단 말씀이야. 방선생도 잘못하다간 빵간 신
  세 지게 되지 않겠어요? 하지만 그래서야 쓰나요. 막
  아야지요."
  "정형, 우리 지금까지의  일은 없었던 걸로  합시대
  이. 내 다시는 그린벨트건 입밖에 내지 않기로 맹세하
  지. 좋은기 좋은거 아잉기요?"
  "그러나 우리끼리 덮어둔다고 해결될 일이 아닌 것
  같은데요?"
  "뭐라꼬? 그라모 우리 일을  어느 연놈이 해결한다
  캅디까?"
  "미스 고가 가만 있지 않을 겁니다."
  수세에 있던 정필대가 이제는  완전히 공세로 바뀌
  었다.
  정필대는 한발 더 나아가 방태산이 13 선거구를 포
  기하든지 아니면 어마어마한  금전으로 자기와  미스
  고의 입을 막든지 하라고 윽박질렀다.
  방태산은 심히 난처한 입장에  처해 정필대에게 살
  려 달라고 매달렸었다.
  "막다른 구멍에 몰리면 쥐도 고양이를 문다고 하지
  않아? 방태산이 마침내 우리 그이를 해치고 만 거야.
  전번에 너한테 준 방태산의 비리 기록은 그때 조사해
  두었던 거야. 미스 고의 일만 빠졌었어."
  오명자는 송희의 이야기를 들으며, 왜 방태산이  정
  필대를 죽였다고 처음부터 단정하고 있었는지  알 것
  같았다.
  그보다 방태산의 더러운 여자  사냥 버릇에 혐오감
  을 또 한번 느꼈다. 그런 쓰레기 같은 인간 앞에 치마
  끈을 푼 자기의 행동이 새삼 저주스러워졌다.
  "그런 쓰레기를 치워 주어서 고마워. 넌 역시 내 친
  구야."
  송희는 다시 오명자의 손을 꼭 잡으며 나직하게 말
  했다.
  "얘, 실은 말이야"
  오명자가 무엇인가를 밝혀야 한다는 생각으로 말을
  시작했다.
  "나 이야기 안해도 다 알아. 우리 더 이상  그 불쾌
  한 사나이 이야기 하지 말자."
  "저어, 우리 그이 말이야"
  오명자는 입안에서 뱅뱅 돌던 말을 꺼냈다.
  "알았어. 내 우리 시숙한테 이야기해서 그 회사  어
  디 자리 좀  만들어 보라고 할께.  은혜는 꼭  갚아야
  지."
  송희는 방태산을 죽인 사람이  오명자라고 믿는 것
  같았다.
  오명자는 무엇이라고 더 변명을  하고 싶었으나 그
  냥 참았다.
  뒷날 진실이 밝혀질 것이란 생각만 했다.
       24. 사랑 도피의 종말
  전해 주어야 할 거금을 가로채고 여자까지 빼낸  구
  형주는 도피처 남원에서 달콤한 사랑 꿈을 꾸고  있었
  다.
  여관이나 호텔에 들면  이상하게 보일 것을  염려해
  변두리에 전셋방을 얻었다.
  남원으로 전근 온 국민학교 선생 부부라고 속여, 동
  네 사람들도 의심은 커녕 선생님이라고 깍듯이 존경을
  표했다.
  그들은 날마다 학교 간다고 나와서는 광한루로 어디
  로 관광을 다니며 놀았다.
  대낮에는 전주로 나가 호텔방 같은 데서 하루를  보
  내며 아담과 이브식의 사랑 놀음을 즐기기도 했다.
  "우리 오늘 저녁때까지 여기서 놀다가 돌아가자."
  전망 좋은 전주 도심의 호텔방에 들어온 형주가  정
  자의 허리를 덥석 안으며 말했다.
  "끼니는 어떻게 하구?"
  "밖에 나가서 점심 될 만한 것 좀 사다  두지. 김밥,
  샌드위치, 뭐 그런 것."
  "내가 사올께요."
  정자는 생긋이 웃으며 형주의 품에서 빠져나갔다.
  그녀가 점심식사 감을 사러 나간 사이 형주는 창 밖
  을 내다보고 있었다. 호텔에서 나간 그녀가 큰길로 가
  는 것이 보였다. 보라색 투피스 차림의  그녀 뒷 모습
  이 멋있어 보였다.
  그녀는 호텔 문을 걸어 나가더니 바로 정문 곁에 있
  는 공중전화 박스로 들어갔다.
  "아니?"
  형주가 고개를 갸웃하며 그 모습을 보고 있었다. 전
  화를 걸려면 호텔에서도 걸 수 있는데 왜  공중전화에
  까지 갔을까 하는 의문이 생겼다. 혹시  자기 몰래 전
  화할 곳이 있지 않나 하는 의혹이 생겼다.
  "이곳도 물가가 꽤 비싸요. 당신 스시 좋아하지?"
  정자가 밝은 웃음을 담으며 점심밥을 사 들고  호텔
  로 들어섰다.
  "응? 응, 좋아하지."
  형주는 떨떠름한 표정으로 정자를 쳐다보며  대답했
  다.
  "무슨 일 있었어요?"
  형주의 표정을 금방 읽은 정자가 물었다. 그녀는 돈
  을 펑펑 쓰며 사랑의 도피행각을 즐기고 있지만  마음
  밑바닥에는 항상 쫓긴다는 불안이 남아 있었다.
  "아냐. 당신  나가다가 어디  전화  거는 것  같던
  데"
  형주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정자는 잠시 주춤하다가
  깔깔 웃으며 말했다.
  "하하하, 그래서 당신 날 의심한 거야? 나가다가 생
  각하니까 집 부엌 연탄불 위에 주전자를 올려놓은  게
  생각났지 뭐야. 그래서 주인 아줌마한테 전화 걸어 그
  것 좀 보아 달라고 했지."
  "그랬어? 허허허, 난 또"
  형주는 정자를 와락 껴안고 침대 위로 쓰러졌다. 급
  히 옷 단추를 풀기 시작했다.
  "아이, 다 구겨져요. 제가 벗을께요.  급할 게 뭐 있
  어요. 잠간만"
  그러나 정자가 벗기 전에 형주가 그녀의 옷을 다 벗
  겨버렸다.
  순식간에 발가숭이가 되어버린 정자를 그는  흐뭇한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불공평해요. 형주씨는 왜 안 벗어요?"
  정자가 뇌쇄적인 포즈를 취해  보이며 불평했다. 그
  녀는 뒤로 묶었던  긴 머리를 풀어  늘어뜨렸다. 희게
  윤기나는 그녀의 팽팽한 육체가 대낮의 호텔방을 긴장
  시켰다.
  "우리 에덴 동산놀이 할까?"
  형주가 정자의 젖가슴이며 비너스의 언덕에서  눈을
  떼지 않고 옷을 벗기 시작했다.
  뒷골목 주먹 세계에서  단련된 그의 탄탄한  육체가
  정자 앞에우뚝 섰다. 왼쪽 팔과 가슴에 새겨진 청룡의
  문신이 살아 있는듯 꿈틀거렸다. 딱 벌어진 어깨와 울
  퉁불퉁한 팔다리의  근육, 팽팽하게  긴장된 뱃가죽이
  다이너마이트 같은  에너지를 발산했다.  정자는 그의
  우람한 육체에 잠시 도취된 듯 말을 잊고 서 있었다.
  "자, 지금부터 집에 갈 때까지  우리는 이렇게 지내
  는 거야."
  형주의 장난끼어린 말이었다. 그에게도 이러한 동심
  이 있었나 하는 생각이 정자에게 들었다.
  그들은 침대 위에서  엉켜 뒹굴기도 하고  욕실에서
  끓어오르는 정열을 불태우기도 했다.
  하루 종일 호텔방은 뜨거운 숨결로 가득 차 있었다.
  그들은 몇번씩이나 사랑을  나누어도 지칠 줄을  몰랐
  다.
  그들의 방탕한 밀월은 시간 가는 줄을 몰랐다. 그러
  나 두 사람의 마음 속엔 항상 불안한 불씨가 납아  있
  었다.
  그들은 가짜 선생 노릇이 너무 오래되면 들통이  날
  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고 다른 동네를 물색했다.
  마침 옆 동네에 수퍼마키트가 딸린 셋집이 있어  그
  것을 사기로 하고 계약을 해두었다.
  그들은 가지고 온 돈이 흥청망청 쓰는 바람에  자꾸
  만 줄어들고 둘만의 사랑놀이도  점점 시들해지자, 가
  슴에 있던 불안의 씨가 자꾸만 키져갔다.
  자기들 조직의 남봉철 같은 냉혹한 보스가 언젠가는
  자기들을 찾아낼 것이란 불안 속에 세월을 보냈다. 남
  봉철이 만약 구형주를 찾아낸다면 온전하게 살려 두지
  않을 것이란 사실을 그는 잘 알고 있었다.
  수퍼마키트를 계약하고  오던 날이었다.  먼저 집에
  들어온 구형주는 아무래도 이상한 예감이 들어 문밖에
  나간 박정자를 찾아보았다.
  그때 박정자는 마을 앞에 있는 공중전화 박스에  있
  었다. 그녀는 구형주가 보고 있는 줄도 모르고 조그만
  명함 같은 것을 핸드백에서 꺼내 놓고 전화번호를  누
  르고 있었다.
  구형주는 정자가 자기 몰래 어딘가에 전화하고 있는
  것을 두번째 목격한 것이다. 그는 덜컥 불안한 생각이
  들었다.
  "혹시 정자가"
  그는 정자가 서울의 큰형님 남봉철에게 전화를 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심이 덜컥 났다. 그렇다면 박정자
  가 지금까지 자기의 동정을 일일이 조직 보스한테  보
  고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
  '설마? 정자가 나를 배신하고 그런 짓이야'
  그는 고개를 가로  저었으나 불안한 생각을  완전히
  떨쳐내지는 못했다.
  구형주는 먼저 집에 들어와 앉았다가 뒤에 들어오는
  정자를 보고 대수롭지 않은 일인 듯이 물었다.
  "왜 늦었어?"
  "응, 그냥"
  정자는 어물거리미 부엌으로 들어갔다. 부엌으로 가
  면서 방바닥에 획 집어 던진 핸드백에 구형주의  시선
  이 닿았다.
  그는 방으로 들어가 재빨리 그녀의 핸드백을 열어보
  았다.
  조금 전에 전화걸 때  본 것 같은 명함을  찾았으나
  그런 것은 보이지 않았다. 그 대신  명함 크기만한 종
  이쪽지를 발견했다.
  서너 개의 전화번호가 적혀 있었다.
  황금 714
  문자 519
  창 442
  이런 식의 번호가  적혀 있었다. 형주는 '황금'이란
  것이 서울의 황금 살롱일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정자가 무엇 때문에 황금 살롱에 자주 전화를 걸었
  을까? 황금 살롱은 보스 남봉철이 사랑방처럼  사용하
  는 곳이 아닌가? 그곳의 주마담은 남봉철의 조직과 마
  찬가지가 아닌가?'
  여기까지 생각한 구형주는 벌떡 일어섰다.
  "여자는 절대로 믿어선 안돼. 어릴  때 형들이 그렇
  게 일러 주었는데도'
  그는 그 이튿날 정자 몰래 수퍼마키트 계약을  파기
  해 버렸다.
  "뭐라구요? 일을 이렇게 낭패를 시켜도 되는기여?"
  주인이 필펄 뛰었다. 구형주는  계약금을 한푼도 되
  돌려 받지 못했다.
  "계약서를 좀 주십시오. 그건 찢어버리는 게 좋겠어
  요."
  구형주는 혹시 뒤에 어떤 일이 생길지 몰라  계약서
  를 자기손으로 없애 버리려고 했다.
  "일 다 끝난 판에 그 까짓 거 찾아서 뭣에 쓴당? 내
  가 박박 찢어버릴 테니께 걱정들 말더라고."
  그가 막무가내로 나오는  바람에 구형주는 꼭  찢어
  없애야 한다고 다짐만 하고 그냥 왔다. 그러나 그것이
  뒤에 화근이 될줄 누가 알았으랴.
  구형주는 박정자와 헤어지고 돈을 챙겨 따로 도망을
  가야 한다고 생각했다. 지금 사는 집의 전세금을 정자
  몰래 빼내려고 했다.  그러나 정자가 그것을  모를 리
  없었다.
  "이봐, 형주씨, 나 몰래 전세금 빼서  도망치려고 했
  지?"
  빨갛게 달아오른 박정자가 길길이 뛰면서 대들었다.
  "이 비겁한 놈의 새끼. 내가 너 같은 놈을 사내라고
  믿고 잠옷 차림으로 야반도주해서 따라  오다니! 아이
  구 내 팔자야. 이 새끼야, 나를 여기 버리고 돈 다  움
  켜쥐고 어디로 도망치려고 했어?"
  박정자도 만만한  여자는 아니다.  고아원에서 자라
  눈치는 눈치대로 발달했다.
  열대여섯살 때부터 이 남자 저 남자의 아랫배에  깔
  리며 인생을 배운 민들레였다.
  "그래 너는 잘한 게 뭐냐? 나 몰래 황금  살롱에 전
  화해서 고자질했지? 내가 지금 무슨 짓을 하고 있다는
  것을 일일이 일러 바쳤지?  나를 그 독사 같은 남봉철
  에게 팔아 넘기려고 했지? 그래, 흥정이 잘 안되더냐?
  밤엔 히히닥거리며 엉덩이 돌리고 낮엔  고자질하느라
  전화기 돌리고"
  구형주도 만만히 물러서지는 않았다.  황금 살롱 이
  야기가 나오자 서슬이 퍼렇던 정자도 큰 소리를  치지
  않았다.
  "그래, 서로 못 믿게 된 마당에 이젠 깨끗이 갈라서
  자. 남은 돈 반씩 갈라! 두말할 것 없어."
  정자가 타협안을 내놓았다.
  "난 그렇게 못하겠어. 애당초 이 돈을 가지고 온 사
  람은 나야. 내 목을  걸고 뚱쳐온 돈이란 말야  넌 이
  집 전세금이나 빼서 가져."
  "뭐라고? 이 날강도 놈 같으니라구. 이 집 전셋돈이
  얼마냐? 돈 250만원에 나가 떨어지란 말이야?"
  "나야 지금 나서면 당장 굶을 판이지만 너는 사정이
  다르잖아?"
  "무슨 사정이 달라?"
  "밑천 팔면 되잖아. 엉덩이만 잘 돌려봐.  돈도 나오
  고 밥도 나올 텐데."
  "이 썅놈의 새끼!"
  정자가 열 손톱을 곤두새우고 구형주에게 덤볐다.
  달콤하던 사랑의 도피는 한 달도 못 가서 파탄이 나
  고 말았다.
  "이게 죽을려고 환장을 했군, 아주."
  구형주가 손바닥으로 정자의 뺨을  때렸다. 철석 소
  리와 함께 정자의 눈에는 불꽃이 튀었다.
  "이놈아, 너 죽고 나 죽자."
  정자가 형주의 팔을 물어뜯고 늘어졌다.
  "아야야. 이 잡것이!"
  형주가 발로 정자의  아랫배를 차버리자 정자가  문
  밖으로 나가 떨어졌다.
  "저 강도 놈이 사람 죽인다!"
  정자가 입에 거품을  물며 소리소리 지르자  형주가
  뛰어나와 마구 주먹질 발길질을 했다.
  "아이구, 선생님들이 워쩐 일루 이래싸시요."
  "어매, 이기 뭔 일이야?"
  주인집 부부가 쫓아와 말렸다.  점잖은 선생님 부부
  가 이럴 수 있느냐는 듯 너무나 놀라는 모습이었다.
  주인 부부의 선생님이란 말에 두 사람은 더 이상 날
  뛰지는 않았다. 일단은 휴전하고  다시 방으로 들어갔
  다.
  "전셋돈에다 내 한 오백 더 줄 터이니 그걸로 싹 끊
  자."
  형주가 타협안을 다시 내놓았다.
  "말하기도 싫어, 당신 같은 악질은 보기도 싫어."
  정자가 분이 풀리지 않아 타협에 응하지 않았다. 그
  들은 등을 돌려댄 채 밤을 보냈다.  그들이 도망 나온
  이후 옷을 벗지 않고 자기는 처음이었다.
  그 이튿날 새벽 느닷없이 형사 한 사람이  구형주의
  셋방으로 찾아왔다.
  밖에 나가 세수를  하려고 얼씬거리던 형주가  누가
  와서 주인 남자에게 자기 이름을 대는 소리를  엿들었
  다. 그는 남원서에서 나왔으며 구형주를 꼭 만나야 한
  다고 이야기했다.
  수퍼마키트에서 신고가 들어왔는데 아무래도 수상하
  단 말을 하더란 것이다. 형주는 슬그머니 방으로 들어
  가 우선 있는 가방과 통장을 챙겨들고 대문을  빠져나
  왔다.
  그는 뛰다시피 큰길을 향해 달렸다. 그러나 얼마 가
  지 않아 뒤쫓아오는 형사에게 들키고 말았다.
  "구형주, 거기 서지 않으면 쏜다!"
  형사의 고함을 들으며 그는  그대로 달렸다. 그러나
  얼마 가지 않아 그의 뒤통수에서 들리는 권총  소리는
  그의 걸음을 멈추게했다. 도주 한 달이  못 되어 경찰
  에 붙잡히고 만 것이다.
       25. 벗겨지는 흑막
  "반장님, 반장님"
  강형사가 숨이 턱에까지 차서 말도 제대로 하지  못
  하면서 우경감에게 뛰어왔다.
  "나 숨 안 넘어갔네. 천천히 해. 자넨 그  덤비는 버
  릇 때문에 무슨 일이든지 잘 안 풀려. 쯧쯧."
  추경감이 혀를 차면서 담배를 꺼내 물었다.
  "그래, 무슨 일이야?"
  "자하문장의 정필대 사건과 관련 있는 구형주란  자
  가 체포되었답니다. 남원서에서 검거했는데 어제 서울
  관할서로 이송되어 왔답니다."
  "구형주? 그게 누구야?"
  "히로뽕 밀매단인 남봉철파의 조직원이랍니다. 그날
  정필대가 피살될 때 그 여관에 있었던 놈입니다."
  "그럼 종업원 박철호가 도망간 것을 감추고 있던 그
  놈이야? 여자가 도망갔느니 어쩌느니 하던"
  "예, 맛습니다. 그 놈이 정필대 살해  사건과 관계가
  있을지 모릅니다. 그 놈은  자기 조직인 남봉철파에서
  쫓고 있었답니다."
  "자기 조직에서 왜?"
  "막대한 자금을 가지고 여자하고 도망을 쳤기  때문
  입니다."
  "음"
  추경감은 일어서서 실내를  두어 바퀴 돌며  생각에
  잠겼다.
  "하지만 그 놈을 우리가  데려다가 심문을 할  수는
  없지 않습니까? 그 놈이 정필대 사건과 관련이 있다면
  방태산 사건과도 분명히 관계가 있을 텐데"
  "정계의 뒷골목을 주름잡으며  정치를 돕기도  하고
  망치기도한 폭력 불법조직은 예나 지금이나 있는 법이
  야. 그 남봉철파도 어느 정치인과 선이  닿아 있는 것
  이 분명하다고 마약반에서 보고 있거든"
  "이 사건을 좀더 상부에서 다루어야 하지 않을까요?
  말하자면 정필대, 방태산,  남봉철 등을  통합수사하는
  수사본부 같은 것을 치안본부 차원에서"
  "이봐, 자네가 내무장관이야?"
  추경감이 핀잔을 주자 강형사는 혀를 낼름 내보이고
  는 입을 다물었다.
  "강형사가 최경감에게 양해를 얻고 그쪽 수사  기록
  을 좀 가지고 오지. 그리고 구형주를  직접 심문해 보
  는 것도 좋을 거야."
  "반장님이 최경감에게 전화  좀 넣어주십시오. 제가
  가 보고오겠습니다."
  강형사가 손때 묻은  수사 기록부를 들고  나가면서
  말했다.
  강형사는 구형주에 관한  신상 기록을 대강  훑어본
  뒤 그를면회 형식으로 불러내 몇 가지 심문을 했다.
  구형주는 전과 4범으로 폭력이  2건, 마약단속법 위
  반 1건, 사기 1건으로 되어 있었다. 이번에 구속된  죄
  명은 마약  불법소지였다. 그의  하숙집에서 소량이긴
  하지만 히로뽕이 발견되었기때문이다.
  그러나 경찰에서는 그것과는 상관 없이 정필대 피살
  사건의관련 여부를  집중적으로 캐고  있었다. 경찰이
  지금까지 그에게서 알아낸 정보는 별로 없었다.
  강형사와 만난 구형주는  아직도 풀이 꺾이지  않았
  다. 자기가 뚜렷하게 잘못한 것이 무엇이냐는 것이다.
  강형사는 경찰서 복도에 있는 밴딩머신에서 커피 두
  잔을 뽑아 들고 구형주와 마주 앉았다.
  "우리 커피 한잔 하면서 이야기 좀 할까? 난  이 경
  찰서에있는 사람이 아니고, 시경에  있는 강이란 사람
  인데"
  "강인지 강아진지 나하고는 상관 없는 일인걸."
  구형주는 커피잔을 들어 옆에 있는 쓰레기통에 주르
  륵 부으면서 말했다. 입가에는 싸늘한 냉소가 흘렀다.
  강형사는 피가  거꾸로 올라오는  모욕감을 느꼈다.
  당장 주먹으로 박살을 내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러나
  강형사는 심호흡을한 뒤 마음을 가라앉혔다. 구형주는
  커피를 버린 종이잔을  한 손으로 움켜쥐어  구겨버린
  뒤 그것을 책상 위에 올려놓았다. 강형사를 보고 이래
  도 약오르지 않느냐고 하는 것 같았다.
  "어때? 한잔 더 가져올까?"
  강형사가 저 녀석에게 져서는 안된다는 생각을 하며
  빙그레 웃었다. 강형사는 내심, 나도 이제 형사생활 십
  여년에 능구렁이가 다 되어 가는구나 하고 생각했다.
  "저한테서 알고 싶은 게 뭐요?"
  구형주는 강형사를 만만한 경찰관은 아니라고  판단
  한 듯 태도가 조금 달라졌다.
  "몇 가지만 묻겠는데 이건 어디까지나 참고  사항이
  야. 좀 협조해 주겠어?"
  "말해 보슈 담배 한 대 주시겠습니까?"
  강형사가 그에게 담배를 주고 불을 붙여 주면서  물
  었다.
  "왜 남봉철을 배신했나?"
  "난 형님을 배신한 것 아닙니다. 그냥 숨는 게 좋을
  것이라고 해서"
  "누가 그랬나?"
  "박철호가 여기 형사가 와 있으니 딴 곳에  가 있으
  라고 해서"
  "그날 자하문장 여관에는 무엇하러 갔었나?"
  "형님 심부름으로 갔었지요."
  "무슨 심부름이었나?"
  그 대목에서 구형주는 한참  생각했다. 강형사는 독
  촉하지 않고 기다렸다.
  "돈을 전하러 갔습니다."
  "돈?"
  "예."
  "누구에게?"
  "그 이름을 낸다면 나를 풀어 주어야 할 거요. 아니,
  그 전에 내가 한번 물어봅시다. 나를  무슨 죄로 이렇
  게 잡아넣은 겁니까?"
  "당신 집에서 히로뽕이 나왔다는 것 몰라?"
  "그건 핑계에 불과하고, 진짜 이유는 뭡니까?"
  "당신이 도망친 이유는 뭔가? 박정자하고 말이야."
  "정자는 어떻게 되었습니까? 나쁜 년 같으니라고."
  정자라는 말이 나오자 구형주는 흥분했다.
  "박정자는 아무 죄가 없어요. 당신을 남자라고 믿고
  따라간 것이 잘못이지."
  "그렇지 않아요. 그 년이 나를 따라 다니면서 내 행
  동을 일일이 형님에게 전화로 보고했단 말입니다."
  "그건 당신 오해야. 박정자는 황금  살롱에 있는 주
  마담한테만 전화를 했던 거야."
  "주마담이 형님 이건네 그게 그거지요, 뭐."
  구형주가 새끼손가락을 치켜들어 보이며 말했다.
  "그렇지 않아. 고아 출신인 박정자는 고아원에서 의
  남매를 맺은 동생이 있어. 학교에 다니고 있었는데 걔
  걱정이 되어서 주마담한테 돌봐 주라고 전화를 한  거
  야. 주마담한테 가명을써서 온라인으로  당신 몰래 돈
  도 부쳤어. 그러나 자기가 있는 곳은 절대 주마담한테
  말하지 않았더군. 주마담은 정자와  당신이 있는 곳을
  알아내 가지고 남봉철과 흥정을 한 판 벌여볼  심산이
  었지만, 박정자는 절대로 자기가 있는 곳을 밝히지 않
  았어. 박정자는 당신을 배신한 일이 없어. 당신에게 몸
  과 마음을 다 바친 착한 여자야."
  "강형사는 어떻게 그런 것을 알아냈어요?"
  "내가 황금 살롱에  붙어 살다시피  했지. 남봉철과
  차주호의 관계를 캐려고 말이야."
  "정자가 정말 내가 있는 곳을 대지 않았나요?"
  "정말이라니깐."
  "난 그런 줄도 모르고 정자야, 미안하다."
  구형주는 주먹으로 책상을 치면서 입술을 깨물었다.
  괴로워하는 표정이 역력했다.
  "자, 당신은 큰 죄를 지은 게 없어요. 그러니까 사실
  대로만 이야기해 봐요 당신이 그날 자하문장에 간  것
  은 차주호 위원장을 만나러 간 것이지? 자민당 차주호
  말이야."강형사는 구형주의 마음이  혼들리고 있는 기
  회를 놓치지 않았다.
  "차주호는 아니고 미스 진이 거기 있다고 해서"
  마침내 구형주가 입을 열었다.
  "미스 진? 진유선? 차주호씨의 비서 말인가?"
  "예."
  "남봉철이 진유선에게 돈을 전해 주라고 했나?"
  "예."
  "얼마나 되었나?"
  "8천만원입니다. 순전히 알짜로."
  "알짜?"
  "예, 현찰 말입니다."
  "그런데 진유선이나 차주호를 만나기도 전에 총소리
  가 나고 소동이  났단 말이지. 놀란  박철호가 뛰어와
  형사가 와 있으니 빨리 도망치라고 했단 말이지?"
  "잘 아시는군요."
  "남봉철은 왜 차주호에게 돈을 보냈나? 전에도 그런
  일이 있었나?"
  "여러 번일 것입니다.  내가 가져간  것은 처음이지
  만"
  "왜 남봉철은 차주호에게 돈을 보내나?"
  "그야 형님에게 직접 물어보슈."
  "됐어요. 한 가지만 더 물어도 되겠어?"
  "또 뭡니까?"
  "정필대는 거기 무엇하러 갔나?"
  "정필대?  거기서 죽었다는 정치인 말입니까?"
  "그렇다네."
  "난 그런 사람 모릅니다."
  "누가 죽였는지 짐작 안 가?"
  "하하하. 지금 누가 형사요?"
  구형주가 크게 웃었다. 얼마나  크게 웃었던지 다른
  일 하던 경찰관들이 모두 쳐다보았다.
  "됐어요. 고마워요. 곰탕 한 그릇 시켜 줄까?"
  "좋지요."
  강형사는 곰탕 사식을 넣어주고 들뜬 기분으로 시경
  으로 돌아왔다.
  "뭣 좀 알아냈나?"
  추경감이 석간 신문을 뒤적이다가 물었다.
  "굉장한 것을 알아냈습니다."
  "무슨 일인데?"
  "정계의 흑막입니다."
  "아쭈, 허허허. 자네 뭐 잡지에 논픽션 쓸 일 있나?"
  "그게 아닙니다. 픽션이 아닙니다"
  "도대체 무슨 일이야?"
  추경감이 웃으면서 보던 신문을 접었다.
  "차주호 말입니다. 자민당의 제 13  지구 공천 예정
  자, 여당의 실력자, 차주호 말입니다.
  "그래서?"
  "그 차주호가 암흑가의 거물, 범죄  조직의 보스 남
  봉철과 손을 잡고 있었다는 겁니다."
  "차주호와 남봉철이라, 정치와 마약이라"
  그러나 추경감은 별로 놀라는 기색도 없이 혼잣말처
  럼 되뇌었다.
  "반장님, 정말입니다. 구형주가 그날 자하문장에  간
  것은 차주호의 여비서 진유선에게 비밀자금 8천만원을
  전해 주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구형주가 자백을 했어
  요. 구형주는 남봉철의 심부름을  갔다가 뜻밖의 살인
  사건이 나는 바람에 도망친  것입니다. 박철호의 충고
  를 받아들인 것이지요. 구형주는 견물생심, 돈을  보자
  엉뚱한 욕심이 생겨 황금 살롱의 박정자를 끌고  달아
  난 것입니다."
  강형사가 흥분해서 떠들었다.
  "구형주가 정필대를 죽이고 달아났다고 볼 수는  없
  을까?"
  "예? 구형주가 말입니까?"
  "더 이상한 것은 정필대와 차주호라는 같은  선거구
  의 라이벌 정치인이 무엇 때문에 조그만 여관에  같은
  시간에 들어 있었나 하는 거야. 이걸 좀 보게. 내가 방
  금 입수한 거야."
  추경감이 복사한 서류 뭉치 하나를 깅형사에게 던져
  주었다.
  "정보과의 보고서를 복사해 온 것이야. 잘 읽어봐."
  강형사가 서류를 뒤적여 보았다.  거기에는 마약 밀
  매조직 남봉철파와 여당 정치인 차주호의 추악한 뒷거
  래에 관한 조사 기록이 자세하게 나와 있었다.
       26. 지문의 수수께끼
  정권이 아무리 바뀌어도 친여적 입장에만 서 온  차
  주호도 보통 능수능란한 정치인은 아니었다.
  오랜 세월 여당권에서 처신한 관계로 공무원 사회에
  도 아주잘 통했고  요소요소에 자기 사람을  박아놓고
  있었다.
  남봉철과는 30여년 전부터 주종 관계에 있다시피 했
  다.
  그가 처음 정계에 발을 들여 놓았을 때 남봉철은 어
  느 실력있는 정객의 보디가드 역할을 잠시 하고  있었
  다. 그 정객의  비서일을 하던 차주호는  자연히 그와
  가까워지고 서로 가려운 곳을 긁어주는 관계를 형성했
  었다.
  남봉철은 그 정객이 은퇴한 뒤 다시 자기의  본업인
  주먹 세계로 돌아가고 새로운 후견자로 차주호를 업게
  되었다.
  남봉철은 자기 조직을 굳히고 그의 특기인 마약  밀
  매로 상당한 돈을 끌어모았다.
  남봉철이나 그의 부하들이 문제를 일으켰을 때는 차
  주호가 적극적으로 나서서 바람막이  노릇을 했다. 그
  대신 상당한 액수의 정치자금을 남봉철이 마련해 주었
  다.
  정계에서는 돈이 곧 파워다.  차주호는 풍성한 자금
  의 뒷받침을 얻어 자기 영토를 넓혀 나갔다.
  남봉철의 사업도 의외로 잘 되어 서로는 즐거운  합
  창을 하고있었다. 물론 이러한 야합을 아는 사람은 극
  소수였다.
  "그러니까 평소에도 별로 남의 눈에 뜨이지 않는 자
  하문장같은 조그만 장급  여관에서 수시로 돈을  주고
  받았단 말씀이죠? 그날도 남봉철의 심부름으로 구형주
  가 돈을 전하러 갔다가  그런데 말입니다. 구형주
  는 분명히 차주호의 여비서인 진유선에게 돈을 전하려
  고 했거든요. 그런데  차주호가 그곳에 가  있어야 할
  이유가 무엇입니까?"
  혼자 추리를 해  나가던 강형사가 고개를  갸웃거렸
  다.
  "차주호가 진유선을 데리고 남의 눈에 띄지 않는 수
  수한 여관으로 왜 대낮에 갔느냐, 그거 말인가?"
  "예."
  추경감이 빙긋이 웃으며 말했다.
  "임도 보고 뽕도 딴다는 말이 있지."
  "그러니까 젊은 여비서 진유선과 어쩐지 그  아
  가씨의 큼직한 눈,  긴 목덜미 등에  요염한 주부티가
  났어요. 그러니까젊은  여비서와 재미도  보고 그녀를
  시켜 돈도 수금하고"
  추경감은 책상 서랍에서  다시 복사된 서류  하나를
  꺼내 보이며 말했다.
  "이건 차주호의 아내가  간통으로 남편을  제소하고
  아울러 이혼 소송 및 위자료  청구 소송을 낸 기록의
  사본이야."
  "예? 차주호 아내가 간통으로 남편을? 그렇다면
  어째서 신문에도 안 나고 소문도 나지 않았습니까? 지
  금 재판이 진행 중인가요?"
  "차주호의 수완을 과소평가해서는  안돼. 자기가 간
  통죄로 피소되고 이혼 소송을 당했음에도 불구하고 철
  저하게 그 사실을 보완조치했으니까 말이야. 강형사도
  알다시피 신문방송기자들 입 막는 것이 얼마나 어려
  운 일인가? 아니, 어려운 일이  아니라 우리한테는 불
  가능한 일이지. 그런데 차주호는 그 일을  해냈으니까.
  매스컴에서는 감쪽같이 몰랐지."
  "매스컴뿐입니까? 우리도 몰랐는데"
  "우리야 분야가 다르니까  모를 수도  있지. 하지만
  정보 쪽이나 경찰에선 알고  있었겠지. 그런데 차주호
  가 그 입을 봉쇄했단 말야."
  "그래서 그 소송은 어떻게 되었습니까? 지금도 진행
  중입니까?"
  "아니야. 벌써 끝났어. 처가 소송을 취하했거든."
  "그런데 간통 대상은 누구였나요?"
  "진유선."
  "예? 그랬었군요."
  강형사는 처음 놀라움으로 눈을 크게 떴다가 다음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진유선이 어떻게 아직도 차주호 곁에  있나
  요?"
  "아마 정부로 인정을 했을 거야.  그의 아내와 모종
  의 밀약이나 타협이 이루어졌다고 보아야지."
  "아무리 세상의 어떤 아내가 남편의 비밀  여자
  를 인정한단 말입니까?"
  "그러니까 차주호의 수완을 과소평가하지 말라고 내
  가 얘기한 것 아냐!"
  추경감이 짜증스럽게 말했다.
  "정치라는 것은 참으로 추악한 뒷면이 있군요. 정계
  라는 데 발을 들여 놓지 않은  게 천만다행이야. 다음
  에 내 아들한테도 정치는 못하게 해야지."
  "쯧쯧, 장가도  안 간  사람이 아들은  무슨 아들이
  야?"
  "이래 보여도 때로는 세종이 아버지랍니다. 가짜 아
  버지 행세를 할 때는 강세종 아빠라고 하거든요."
  "정말 세종인지 네종인지 빨리 좀 태어났으면  좋겠
  군."
  추경감이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그러니까 방태산이나 정필대의 죽음이 정치적인 음
  모 때문이라는  것이 유력하군요.  말하자면 방태산은
  괴롭힘을 당하다못해 정필대를 죽였고, 차주호는 가장
  강력한 라이벌을 없애기 위해 방태산을 죽였다고 보면
  어떨까요? 차주호나 방태산은 상대방을 제거하는데 여
  자를 이용했을 가능성이 큽니다.  정치하는 자들은 왜
  모두 한결같이 여자를 그렇게 좋아하지요?"
  "여자 좋아하지 않는 남자 있어?"
  "하긴. 하지만 그렇게 맨날 간통죄니 혼빙이니 해서
  고소당하는 일이 별로 없지 않습니까? 하지만  13선거
  구 후보들을 캐보면 세명 중 두명이 여자 문제에 걸려
  있지 않습니까? 그 중 한 사람은 이혼 소송까지 당하
  고 말입니다."
  "원래 영웅호걸은 여색을 좋아한다고 하지 않던가?"
  "어쨌든 정필대를 죽인 범인과 방태산을 죽인  범인
  이 다르다고 볼  수도 있다는 겁니다.  우연의 일치로
  한 선거구의 출마 예상자가 잇달아 죽었다고 보면  어
  떨까요?"
  "그렇게 보기는 아무래도 이상한 점이 많아. 정필대
  피살 현장과 방태산  퍼살 현장에서 유사점이나  유사
  증거물을 찾은 것은 없나?"
  "몇 가지 있습니다. 둘 다  거의 나체이다시피 해서
  죽은 점, 그러니까 정사 도중이거나 그  이후 죽은 것
  같은 점, 그 다음은"
  "같은 지문이나 체모 같은 것이 발견된 것은 없나?"
  "있습니다. 두 곳에시 다 여자 것으로 보이는 긴 머
  리카락이 발견되었습니다. 감정 결과  갈은 사람의 것
  으로 생각됩니다.
  모두 혈액형은 A형이고 과학수사연구소의 분석결과
  90프로 같은 사람 것으로 해석되었습니다."
  추경감은 그 이야기를 듣고 있다가 급히 자기  수첩
  을 꺼내보았다.
  "뭡니까?"
  강형사가 눈을 크게 떴다.
  "아닌데 신지혜가 우리 집에 왔을 때 흘리고 간
  머리카락을 감정해 보았거든. 그건 AB형이야.  신지혜
  의 혈액형도AB형이거든. 그건 지문에서도 확인했어."
  "오명자는 어떻습니까?"
  "오명자? 그 여자는 A형이야. 방태산의 방에서도 그
  녀의 체모를 발견한 일이 있지."
  "방태산이 죽을 때 손에 쥐고 있던 머리카락도 A형
  이 아니었습니까?"
  강형사의 눈이 반짝였다.
  "그건 그래. 그러나  그것은 오명자의 머리카락이라
  고 보기는 힘들잖아. 같은 A형이긴 하지만"
  "하지만 꼭 아니라고 할 수도 없지 않습니까?"
  "그보단 오명자가 만약 범인이라면 가짜 머리카락을
  방태산의 손에 쥐게 해놓을 수도 있지 않은가?"
  "그럴 수도 있겠군요. 하지만 오명자가 그렇게 치밀
  한 범죄 계획을 세울 만한 여자라고  볼 순 없는데요.
  고등학교는 나왔지만 숙맥에 가깝고,  세상 물정도 잘
  모르는 가정부 스타일이거든요."
  "사람을 그렇게 과소평가하지 말라니깐."
  "그런데 반장님, 양쪽  현장에서 발견된  많은 지문
  중에는 유사한 지문이 하나 있습니다."
  "뭔데?"
  "혈액형 AB형, 지문 분류는 변형이랍니다. 감식반의
  의견은 특이한 지문이라고  합니다. 이  AB형의 변형
  지문은 유사한 것이, 정필대  사건의 현장과 방태산의
  선거사무실 두 군네 다 있었습니다."
  "뭐야? 그런 중요한 보고를 왜 이제 해?"
  "제가 기록을 분석하다가 우연히 보았습니다."
  "용의자의 지문과 대조해 보았나?"
  "물론입니다. 오명자와는 우선 혈액형이 다르고,  신
  지혜와는 혈액형은 같으나 지문  자체가 다릅니다. 신
  지혜의 지문은 가장 흔한  궁형입니다. 진유선과도 물
  론 다르고. 그날 자하문장에서  정사를 벌이던 운전사
  부부 김형진과 이혜원과도 물론 다릅니다."
  "자네는 왜 여자 지문만 대조해 보았나?"
  "아니예요. 박철호나 구형주, 차주호, 최장배, 방태산
  모두 대조해 보았습니다."
  "무슨 형의 지문이라고?"
  "변형이라고 합니다. 변형  중에도 처음  보는 파도
  무늬 지문이라던데요."
  추경감은 뒤로 돌아서서 서가에서 책 한 권을  뽑았
  다.
  "문국진 박사 著, 新법의학'이란 책이었다.
  추경감은 책 중의 지문 감식에 관한 곳을 넘겨서 훑
  어보았다.
  우리나라에서는 지문 감식에 함부르크식 지문법  또
  는 로셔(rosher) 방법이라고 부르는 지문 감식법을 조
  금 개량해서 사용하고 있는데, 그 분류는 대체로 궁상
  문(弓狀紋 Arch), 제상문(路狀絃 Loop), 와상문(渦狀紅
  Whorl), 변체문(變體紋 Accidental)의 4가지라고 한다.
  그 중 변체형은, 앞에 예시한 세  가지와는 전혀 다
  른 모양을 하고 있는 것을 말한다고  한다. 지문이 선
  으로 되어 있지 않은 경우도  가끔 있고 지문 형성의
  삼각점, 즉 델타가 여러 개 있는 경우도 있다고 한다.
  지문의 혈액형 강식은 지문 자체로는 알 수 없고 지
  문에 묻어 있는 분비물, 엄밀히 말해  땀이나 침 같은
  성분을 분석해서 알아낸다고 한다.
  "이 특이한 AB형 지문은 딴 것으로 분류할 수 없어
  서 변형이라고 하지 실은 변형 중의 변형이라는  것이
  감식과 이경위의 설명입니다."
  "그 숙제를 좀더 풀어보게. 지문  주인이 누군지 말
  야. 안되면 과학수사연구소에 가서 알아봐."
  "거기선 지문 감식을 하지 않는데요."
  "그러나 전문가는 있을 것 아냐?"
  추경감이 짜증을 냈다. 한참 천장을 보고 있던 그가
  갑자기 벌떡 일어섰다.
  "가자."
  그는 신들린 사람처럼 외쳤다
  "예? 어딜 갑니까?"
  강형사가 놀라 눈이 동그레졌다.
  "차주호 사무실로. 제 13 선거구의 유력한 용의자가
  차례로 피살된다? 그렇다면 다음 차례는 누구냐?"
  "그야 그거 그렇군요."
  강형사가 뛰어나가  고물 프레스토를  끌고 나왔다.
  두 사람은 차주호 자민당 위원장 사무실로 달렸다. 차
  가 자하문 고개 근방에 이르렀을 때였다.
  "차 세워?"
  추경감이 길가의 무엇을 보았는지 명령했다.
  강형사가 차를 세우자 추경감은 아무 말도 않고  차
  에서 내려길 옆에 있는 포장마차 같은 곳으로  걸어갔
  다. 자세히 보니 마차가 아니고, 어린이들 상대로 만두
  며 떡볶이 등을 파는 노점상이었다.
  추경감이 노점 안을 들여다 보더니 손짓으로 강형사
  를 불렀다.
  강형사는 추경감이 무슨 짓을 하려는지 알고는 빙긋
  이 웃으며 걸어갔다.
  "자네 백원자리 있지?"
  "참 반장님도, 지금 우리가"
  "알았어. 내가 자하문장 사건으로 이 곳을 드나들며
  얼마나 먹고 싶어했는지  몰라. 오늘은 큰  마음 먹었
  지."
  추경감은 아주머니가  집어주는 떡볶이를  젓가락에
  꽂아 맛있게 먹기 시작했다. 강형사는 어이가 없어 하
  면서 돈을 치렀다.
  이럴 때는 어린아이인지 수사반장인지 분간이 안 갔
  다.
  추경감은 어릴 때  어머니가 해주던 떡볶이의  맛을
  잊을 수없다고 늘 말했다.
  그는 생김새가 나이와  어울리지 않게 동안으로  생
  겨, 만약 유난히 많은 주름살만 없다면 그를 어른으로
  보기 어려웠을 것이다. 그의 얼굴에 나타난 선하고 천
  진난만한 웃음은 누구에게나 친근감을 주었다.
  그래서 그런지 그는 때로 어린아이 같은 장난을  곧
  잘 즐겼다.
  길 가다가 떡볶이 몇백원어치를 사먹는 것은 약과이
  고, 어린이들 노는 틈에 끼어 닭싸움  같은 것을 벌이
  며 즐거워하기도 했다.
  혐의자들 만나 심문을 할 때도 날카롭기는커녕 어리
  숙한 사람이 길을 물어보듯이 했다. 그러나 그의 허술
  한 심문이 오히려 상대방의 헛점을 더 잘 찾아내었다.
  상대가 이쪽을 형사라는 생각을 갖지 않게 할 뿐 아니
  라 자기 방어 태세를 갖추지 않도록하기 때문이었다.
  추경감과 강형사가 차주호의 사무실에 도착했을 때,
  그는 자리에 없고 여러 사람이 그를 만나기 위해 기다
  리고 있었다.
  방을 지키고 있는 것은 진유선과 활동장 두  사람이
  었다.
  "차위원장님 어디 가셨나요?"
  안면이 있는 추경감이 물었다.
  "중앙당에 가셨어요. 오후 늦게나 오실걸요. 또 어디
  서 살인사건이 났나요?"
  진유선은 약간은 빈정대는 듯한 말투였다.
  "아뇨."
  추경감과 강형사는 차주호의 근황에 대해  꼬치꼬치
  캐물어보았으나 별다른 이상이 없는 것 같았다.
  "우리가 너무 신경과민이었나?"
  추경감이 쓴 입맛을 다셨다. 자기 육감이 빗나간 것
  은 이번이 처음은 아니었지만 어쩐지 꺼림칙한 마음은
  그대로 남아 있었다.
  "앞으로 그럴 가능성은 충분합니다. 계속 주시를 해
  야합니다."
  강형사가 차에 오르며 말했다.
       27. 여자의 눈물
  남산 중턱에 자리잡은  호화 호텔의  프라이비트룸,
  음식점이었다.
  우아한 아치 모양의  베이지색 커튼 아래로  서울의
  야경이 명멸하고 있었다.
  찬란한 네온사인과 자동차의 불빛이 마치 챠플린 시
  대의 무성 영화처럼 바쁘게 움직였다.
  은은한 조명등 아래 은박을 넣은 고급스러운 찻잔들
  이 놓인 구석 테이블에 신지혜는 자리 잡았다. 초대된
  손님은 정필대의 미망인 송희 여사, 오명자씨, 그리고
  신지혜의 보이프랜드 곽진 이렇게 세 사람이었다.
  서로 인사를 나눈 뒤 약간 어색해진 분위기를  바꾸
  기 위해 신지혜가 먼저 입을 열얼다.
  "송여사에게는 정말 송구해요. 진작 사과를  드려야
  했는데 이름을 도용한 것은 정선생님을 위해서 한
  일이라고 제딴엔 생각합니다."
  신지혜가 정중한 말투로 사과를 했다. 빨간  베레모
  와 길고 윤기나는 검은 머리가 갸름한 그녀의  얼굴과
  잘 어울렸다. 부드러워 보이는 얼굴 인상과는 달리 그
  녀의 눈은 날카로웠다.
  "결국 살리지는 못했지요. 근데 우리 그이가 위험하
  다는 것은 어떻게 알았나요?" 송희도 담담한 목소리로
  말했다.
  신지혜는 그 말에 대답은 않고 엉뚱한 말을 했다.
  "미스터 곽은 내일 스테이트로 돌아간답니다.  아무
  래도 여기보다는"
  "스테이트라니?"
  오명자가 말허리를 끊고 물었다.
  "응, 미국이란 뜻이야."
  송희가 대신 대답을 했다.
  "전 아무래도 동물들 틈에 끼어 살아야 편안한가 봐
  요."
  곽진이 어색하게 웃으며 말했다.
  "이이는 수의학 박사이고 대학 동물원에 근무하거든
  요."
  신지혜가 구겨진 곽진의  옷깃을 펴주면서  말했다.
  그 모습은마치 다정한 아내가 남편에게 하는 것과  같
  다고 오명자는 생각했다.
  "여기는 제 조국이긴 하지만 동방예의지국이 아닙니
  까? 예절 차리기도 어렵고 아무렇게나 굴러도  흉
  보지 않는 야생 동물의 세계가 좋은 것 같아요.  그게
  제 생리에 맞는다고할까요.  아니, 그러고 보면  나도
  동물 쪽이 더 가까운 것 아냐? 하하하."
  곽진은 혼자 소리를 죽여 가며 웃었다. 송희도 오명
  자도 소리내지 않고 웃으며, 바보처럼 솔직한  사나이
  도 다 보았다는 표정이 되었다.
  "사람 중에서 동물에 가장 가까운 사람은 곽선생님,
  실례, 곽선생님이라고 치고, 호호호 동물  중에서
  사람에 가장 가까운 동물은 누구예요?"
  송희가 웃음을 섞어가며 말했다.
  "누구냐는 것은 좀 이상한데요. 아무리 사람에 가까
  워도 동물은 동물이니까. 하하하."
  "그렇군요."
  모두가 웃었다.
  "에에, 사람에 가장 가까운 동물은  유인원(類人猿)
  종류이지요. 침팬지, 원숭이, 고릴라, 오랑우탕"
  "오랑우탕이 가장 가깝다는 말이 있지요."
  이번엔 신지혜가 거들었다.
  "그렇습니다. 오랑우탕이란 동남아 어느 나라의  말
  로 '숲속의사람'이란 뜻이라니까요."
  "침팬지나 오랑우탕은 담배도  피우고 사과도  깎고
  한다는 그것이 손입니까 발입니까?"
  이번엔 오명자가 물었다.
  "글쎄요? 그것 참 묘한 질문이군요. 동물에는  팔이
  나 손이 없는데 그러나 그 놈들의 것은 문명히 팔
  이고 손이거든"
  곽진이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 자기 팔이며  손을
  쳐들고 오랑우탕 흉내까지 냈다.
  "하지만 두 다리와 두 팔은 인간에게만 있는 것  아
  녜요?"
  송희가 말했다.
  "오랑우탕 같은 놈은  원래 인간이었는데  하느님의
  저주를 받아 털부성이가 되고 말도 못하게 되어  숲속
  으로 쫓겨갔다고합니다. 그 놈은 사람의 손과 거의 비
  슷한 것을 가지고 있어요. 손가락도 다섯이고  그
  손으로 특히 술을 잘 마셔요. 하지만 학문적으로는 손
  이나 팔이라고 하지 않고 앞발이라고한답니다."
  곽진이 장황하게 설명했다.
  "오랑우탕이 술을 좋아한다구요? 우리도 오늘 밤 술
  좀 마셔요. 전 어쩐지 취하고 싶어요."
  신지혜가 세 사람을 돌아보며 말했다. 동의를  구하
  는 눈치였다.
  그렇게 해서 화이트호스가 병째로 테이블에 나왔다.
  신지혜는 술을 스트레이트로  서너 잔 연거푸  마셨
  다.
  "미스 신, 왜 이래?"
  곽진이 조용히 우려를 나타냈다. 그러나 지혜는  못
  들은 척했다. 지혜는 자기한테는 정필대를 뺏어간  송
  희를 맨 정신으로 보고 있을 수 없었다. 지혜가  처음
  송희를 이곳에 불러낸 것은 자기가 송희 이름을  팔고
  추경감을 찾아간 것을 사과하기 위한 것은 아니었다.
  도대체 어떻게 생긴 여자이길래 자기에게서  정필대
  를 뺏어 갔는지를 알고 싶었다. 그리고 미망인이 되어
  괴로워하는 표정도 보고 싶었던 것이 솔직한 심정이었
  다. 송희 혼자만을 부르기가 뭣하니까 오명자를  둘러
  리로 앉혔다. 그러나 지혜가 본 송희는 상상과는 달랐
  다.
  자기보다 훨씬 여성답고 우아하게 보였다. 우선  용
  모부터 열등감을 느끼게 했다.
  그뿐 아니라 남편을 잃고 심의와 비탄에 젖어  있을
  줄 알았는데 전혀 그렇지 않았다. 담담한 표정에 가끔
  흘리는 미소가 전혀 괴로움이나 마음 속의 어떤  갈등
  음 느끼지 않는 것 같았다.
  신지혜는 그런 여자와 맨 정신으로는 더 앉아  있기
  가 힘들었다. 패배감을 감추기가 어려웠다. 그래서 마
  구 술을 마셔댔다.
  오명자는 한 잔을 겨우 받아 마시고는 얼굴이  앵두
  처럼 빨갛게 되었다.
  "전 술을 못해요."
  송희는 웃는 얼굴로 술잔을 사양한 뒤 사이다를  따
  로 시켜마셨다.
  신지혜는 그 모습을 보기가 조금은 괴로웠다.
  "송여사는 돌아가신 부군 생각이 가끔 나시지  않으
  셔요?"
  지혜가 약간 오른 취기를 이용해 송희의 아픈  곳을
  찔러 보았다.
  "어차피 헤어져야 하는 것이 사람의 운명  아니겠어
  요? 그이와는 다른 부부보다 조금 먼저 헤어졌을 뿐이
  지요."
  그녀는 담담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누가 그런 짓을  했는지 송여사는 짐작이  가지요?
  범인이 여자일지도 모르잖아요?"
  지혜가 약간 흐트러진  발음으로 약을 올리려고  했
  다.
  "우리 그런 이야기는 그만두고 딴 얘기 해요.  여긴
  식당이잖아요."
  송희의 모습은 조금도 흐트러지지 않았다.
  "오명자씨, 당신이 좀 이야기해 보아요. 당신  여류
  탐정질 잘 하잖아!"
  신지혜의 말은 이제 완전히 시비를 거는 투였다.
  "내가 뭘"
  오명자는 신지혜의 시비에 걸려들지 않으려고  몸을
  사렸다.
  "당신 방태산 뒷조사하고 다녔잖아? 방태산, 천하의
  색마, 죽을 때도 곱게 못 죽고 아랫도리를 드러내  놓
  은 채 죽었지. 그 놈은 우리 미혜의 원수"
  "미스 신, 왜 이래?"
  보다 못한 곽진이 화를 냈다.
  "흠, 동물 왕국의 왕자님, 동물의 세계에도  증오와
  복수가 있나요?"
  신지혜는 이제 완전히 취해 있었다.
  "송희씨, 당신은 승리자야. 위대한 승리자.  남편은
  잃었어도 남편을 얻었었지. 그리고 통쾌한 남편의  복
  수도 해치웠지."
  "얘 명자야, 우리 그만 일어서자."
  참다 못한 송희가 자리에서 일어서고 말았다.
  "실례합니다. 저희들 먼저 가겠어요. 신지혜씨,  술
  깨시거든 다시 만나요, 우리."
  송희는 약간의 미소까지 지으며 끝까지 침착하게 자
  리를 떠났다.
  곽진은 너무 많이 마셔 흐늘거리는 신지혜를 렌트카
  에 싣고 호텔로 갔다.
  "야, 꽉진!"
  침대에 모로 쓰러져 있던 신지혜가 소리를  질렀다.
  넥타이를 풀고 있던 곽진이 놀라서 돌아다보았다.
  "야! 미스터 곽, 나 옷 좀 벗겨줘. 너, 여자 옷 벗
  기는 것 즐겁지?"
  평소에 안 하던 짓을 하는 신지혜를 곽진은  어처구
  니가 없어 바라보고 있다가 천천히 다가가 옷저고리의
  단추를 풀었다.
  "스커트도 벗겨."
  신지혜가 눈을 지그시 감고 얼굴은 천장을 향한  채
  사지를 곽진에게 내맡겼다.
  곽진은 부지런히 지혜의 웃옷을 벗겨냈다.
  "브라쟈, 팬티도 벗기란 말야!"
  지혜는 여전히 눈을 뜨지 않은 채 명령만 하고 있었
  다.
  곽진은 아무 소리도 않고 시키는 대로 했다.
  술기운이 전신에 퍼졌는지 지혜의 온몸은 뜨겁게 달
  아 있었다.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모습으로 침대
  위에 비스듬히 기대 누운 지혜는 다음 명령을 내렸다.
  "야 곽진, 이리 와. 나를 가져."
  곽진은 그녀의 나신이 마치 고야의 '벗은 마야 부인
  '의 포즈같다는 생각을 했다.
  술이 취해 사지를 늘어뜨리고는 있었으나 하얀 시트
  위에 누운 그녀의 자태는 명화를 무색하게 하는  고혹
  적인 모습이었다.
  곽진은 아릅답고 우아한 그녀의 나신을 보면서 성욕
  같은 추한 생각은 전혀 들지 않았다. 아름다운 예술품
  을 볼 때 느끼는것 같은 감동을 느끼기까지 했다.
  "야! 곽진 뭐하는 거야? 빨리 덤벼들란 말야."
  지혜는 정말 평소에 하지 않던 거친 말을 마구 해댔
  다.
  곽진이 다가가 조용히 지혜를 껴안았다.
  지혜는 기다렀다는 듯이 곽진을 꼭 껴안았다.
  "미스터 꽉!"
  그녀는 약간 목멘 목소리로 불렀다.
  "응?"
  "나 죽고 싶어. 정말 나 죽고 싶단 말야."
  지혜는 갑자기 울음을  터뜨렸다. 어깨를  들먹이며
  서럽게 울기 시작했다.
  울음을 참기 위해 호기를 부리고 떠들다가 더  참지
  못해 마침내 터뜨리고 만 것 같았다.
  "난 뭣 때문에 사는지 모르겠어요."
  지혜는 뜨거운 눈물을 펑펑 쏟으며 울었다.  곽진이
  손으로 지혜의 눈물을 닦아 주었다. 부드러운  손길로
  어깨를 어루만져 주었다.
  한참 울고 난 지혜는 곽진을 밀어내고 침대  담요로
  몸을 가리면서 말했다.
  "미안해요."
  그녀는 한참 있다가 다시 조용한 목소리로 말을  이
  었다.
  "처음 서울에 올 때는 분노로 불타고 있있어요.  방
  태산, 정필대, 내 손으로 망하게 만들고 말  것이라고
  맹세했었지요. 십년이 걸리고  백년이 걸려도  복수할
  생각을 했지요. 하지만 이렇게 쉽게 그 꿈이 이루어질
  줄은 몰랐어요. 두 사람의 원수는 없어졌어요. 그런데
  왜 복수의 통쾌감이란 게 없지요? 누가 죽였든 그들은
  죽었잖아요. 그런데 왜 시원하지 않는 거죠? 왜  이렇
  게 허무한 거죠? 난 더 이상 견딜 수 없어요.  차라리
  서울에 오지 말 걸 그랬어요."
  "시간이 가면 감정이 정리될 거야. 너무 충격이  커
  서 그럴거야."
  곽진이 침대 곁에 걸터앉아 담배를 피워 물면서  말
  했다.
  "미스터 곽, 내일 가지요?"
  "응, 뭣하면 지혜와 더 있을 수도 있어."
  "아녜요. 가세요. 나도  결심했어요. 서울에 살  수
  없을 것 같아요. 다시 미국으로 가겠어요. 여기 일 마
  무리지은 뒤 따라갈께요. 괜찮죠?"
  곽진은 대답 대신 그의 입술을 지혜에게 포갰다.
  곽진은 천천히 그녀를 끌어당겨 안았다. 침대  머리
  맡의 전등 스위치를 끄며 담요를 걷고 들어갔다. 지혜
  는 다시 평온을 찾은 듯했으나 곽진을 맞으며 다시 뜨
  겁게 달아올랐다. 그녀의 여성은 매끄럽게 그를  받아
  들였다.
       28. 강변의 데모가
  "반장님, 이것 보셨습니까?"
  강형사가 방금 나온 석간 산문을 들고 들어오며  말
  했다. 껌을 질겅질겅 씹고 있있다.
  "자네 지금 뭘 씹나?"
  "껌인데요. 담밸 끊었습니다. 오늘부터. 이번엔  진
  짜 끊습니다."
  강형사가 추경감 앞에 신문을 펼쳤다. 주먹만한  시
  커먼 활자가 추경감의 눈을 찔렀다.
  '히로뽕 밀수 남봉철파 검거, 세명 구속,  다섯명은
  수배' 기사의 내용은 구형주가 검거됨으로써 밀수  조
  직이 드러나고 총조직책을 비롯한 주요 인물들을 검거
  했으며 지방조직책 다섯명을 수배 중이라는 것이었다.
  남봉철파는 오래 전부터 전국적인 조직망을 갖추고 일
  본으로부터 히로뽕을 밀수해서 각 지역책을 통해 전국
  에 보급해 오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들 내부의 불화로 밀수 자금 8천만원을 가지고 이
  탈했던 구형주가 남원에서 검거됨으로써 조직의  전모
  가 밝혀졌다는 것이다. 그들이 십여년간 거래한  히로
  뽕의 양은 수백억원어치에 이를 것으로 추측하고 계속
  여죄를 캐고 있다고 되어 있었다.
  "구형주의 애인인  박정자는 풀려났다고  하더군요.
  밀수에 직접 가담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히로뽕을 소
  지하거나 운반한 일이 없어서 그냥 범인 은닉으로  불
  구속 입건했다고 합니다."
  ""
  추경감은 강형사가 열심히 설명을 했으나  시큰둥한
  반응만 보였다.
  "그런데 반장님, 좀  이상하지 않습니까?  구형주가
  가지고 달아난 돈은  분명히 차주호에게 주려던  검은
  정치자금인데도 밀수 자금이라뇨? 그리고 남봉철의 배
  후는 왜 아무 이야기도 없습니까?"
  "자네와는 상관없는 일이야."
  추경감은 강형사를 쳐다보지도 않고 담배만 뻑뻑 빨
  면서 퉁명스럽게 말했다.
  "왜 상관이 없습니까? 정필대씨의 피살과 밀접한 관
  계가 있습니다. 정필대씨 사건은 또한 방태산씨  피살
  과 관계가 있구요. 반장닝, 제가 좀 알아본 것이 있습
  니다. 구형주와 진유선을 다시 만났거든요. 거기서 중
  요한 것을 알아냈습니다. 그날, 정필대가 피살되던 날
  자하문장에서 정필대와 차주호가 만나기로 약속했었답
  니다. 두 사람이 말입니다. 어떻습니까? 놀랍지  않습
  니까? 그렇다면 수수께끼가 좀 풀립니다. 차주호는 정
  필대에게 8천만원을 주고 후보 사퇴를 요구할  작정이
  었습니다. 정필대는 그린벨트 갈비집 업자로부더 몹시
  시달리고있었으니까요. 자칫 하다가는 교도소 가고 패
  가망신 당할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 제 13  선거구에
  서 사퇴하는 대신 돈을 받아 해결하려고 했다는  추리
  가 가능합니다. 정필대와 차주호가 만날 약속이  있었
  다는 것은 진유선이 증언을 했으니까요. 어때요? 놀랍
  지 않습니까?"
  강형사가 열을 올리면서 떠들었다. 그러나 웬일인지
  추경감은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방태산이 정필대를 죽였다고만 생각했는데  이렇게
  보면 차주호가 죽였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차주호가
  평소 안면이 있는 진유선을 그날 자하문장에서 정필대
  방에 들여 보내고 육체 공세를 펴는 척하면서 옷을 다
  벗긴 뒤 권총으로 살해하고, 총의 지문을 지우고 자살
  한 것처럼 해놓고 나와 버렸다고 할 수 있지요.  그렇
  게 되면 8전만원은  굳어지니까요. 8천만원이  아니라
  몇십억이었는지도 모르죠. 8천만원을 남봉철한테 보내
  라고 한 것은  계약금조로 쓰려고 했는지도  모르잖아
  요.
  그때 진유선의 손과  옷에서 화약반응 검사를  하지
  않은 게 최경감의 실수였습니다. 진유선이 총을  쏘았
  다는 꼼짝 없는 증거가 잡힐 텐데 말이죠."
  추경감은 강형사의 설명을  도무지 귀담아 듣는  것
  같지 않았다. 강형사가 추경감의 태도가 보통  때와는
  전혀 다르다는 것을 느낀 것은 한참 뒤였다. 차주호에
  관한 정보 때문에 너무 흥분해서 눈치채지 못했었다.
  "반장님, 무슨 일이 있었습니까?"
  강형사가 목소리를 낮추고 걱정스럽게 물었다.
  "우리 그 집에 가서 쐬주 한잔 할까?"
  한참만에 추경감이 겨우 입을 열었다.
  "좋죠 한강 나루 말씀이죠?"
  강형사가 일어서서 추경강의 낡은 점퍼를  옷걸이에
  서 떼어다주었다. 평소에는 강형사가 하지 않던  짓이
  었다.
  두 사람은 강변도로를  따라 횟집에 도착할  때까지
  한 마디말도 하지 않았다.
  "향어회가 어떻습니까?"
  강형사가 주문하러 온  총각을 세워 놓고  추경감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아무거나"
  추경감은 돌아보지도 않고 말했다.
  강형사는 슬금슬금 눈치를 보면서 추경감에게  술잔
  을 권했다.
  한숨만 푹푹 내쉬던 추경감이 소주 두 병을  비우고
  나서야 겨우 입을 열었다.
  "강형사, 잘 들어. 나 이제 은퇴해야 할까봐."
  추경감이 쓸쓸히 웃었다. 술기가 올라 동그란  코끝
  이 빨갛게 되었다.
  "예? 아닌 밤중에 홍두깨라더니 무슨 말씀이세요?"
  강형사는 정말 놀랐다. 7, 8년을 추경감 밑에서  일
  했지만 그런 약한 말을 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이제 너무 늙었나 보아. 옛날 같으면 그 이야기 듣
  고 싸웠을 텐네, 국장한테  아무 말도 못하고  나왔거
  든."
  추경감은 연거무 술잔을  입에 쏟아 넣으면서  말했
  다.
  "무슨 일이 있었나요?"
  "자네 정필대 사건에 관심을 갖지 말게. 더구나  차
  주호에 관한 것은 더 캐지 말게. 자네 사건과 직겁 관
  계도 없고 말이야. 상부에서 처리할 테니."
  "반장님"
  강형사는 추경감이 국장으로부터 무슨 압력을  받았
  는지 금방 짐작이 갔다.
  "내 말을 잘 들어. 이번 우리가 맡은 방태산 사건은
  정필대 사건과 꼭 관계가 있다고 볼 수도 없어.  더구
  나 차주호 같은 여당의 실력자가 개입된 정치  사건은
  아니란 말이야. 내 생각에는"
  "반장님, 더 참을 수 없습니다. 사표 쓰면 그만  아
  닙니까. 사표 쓰면"
  강형사는 주먹으로 식탁을 치면서 치솟는 분노를 참
  으려고 했다.
  "내 생각에는 방태산 사건은 여자와 관련된  사건이
  거나, 개인적인 잇권 문제와 관련이 있는 것 같아."
  "반장님, 정말 그렇게 약해지셨습니까?"
  "내가 뭐라고 했나? 차주호를 과소평가해서는  안된
  다고 했지?"
  "저 오늘부터 옷  벗겠습니다. 그리고 시민  세종이
  아빠로서 살인사건의 배후를 캐내고 말겠습니다. 제길
  헐, 제길헐"
  강형사는 거의 울부짖듯이 말했다.
  "가능한 한 정치인들이 다치지 않도록 하라는 거야.
  틀림없는 증거가 나와도 먼저 상부에 보고하고 보안을
  철저히 하라고 하셨어. 그리고 우리 관할이 아닌 정필
  대 사건은 손대지 말라는 엄명이 있었어."
  "그래, 아무 말씀도 않고 그냥 물러났나요?  천하의
  추경감님이"
  "자, 오늘은 직업 같은  것 다 버리고 술이나  실컷
  마시자구. 이봐요, 여기 소주 다섯 병 더"
  추경감은 술이 웬만히  올랐는지 혀가 잘  돌아가지
  않았다.
  그들은 그날 밤 얼마나 많이 마셨는지 모른다. 그곳
  에 있던 손님들이 다 가고 종업원들이 하품을  하면서
  눈총을 주었지만 버티고 앉아 횡설수설하면서 술을 마
  셔댔다.
  기다리다 못한 종업원들이 쫓아내다시피 해서야  두
  사람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두 사람은 비틀거려  걸음
  을 잘 걷지 못하면서 서로가 서로를 부축해  주겠다고
  아우성을 쳤다.
  "아, 자유롭다. 이젠 자유다. 끄윽"
  강형사가 횟집을 나와 캄캄한 강을 바라보며 소리소
  리 질렀다.
  "어어, 이 친구 술취했나 벌써? 야, 강군, 우리 3차
  가자"
  "끄윽, 헤헤헤 반장님도, 이제 1차 끝났는데  3차가
  뭡니까? 끄윽 2차지요, 2차"
  강형사가 손가락을 추경감  앞에 펴 보이면서  말했
  다. 2차라고하는 그의 손가락은 3개가 펴졌다.
  "강군, 이제 우린 짭씨가  아니란 말야. 반장이  뭐
  야, 반장이"
  "그럼 뭐, 뭐라고 부르나요? 끄윽."
  "추형, 조오치, 추형이라고 불러, 강군."
  "추형, 헤헤헤 그거 좋죠. 전 형이라곤 없는 외동인
  데 끄윽, 형님 한 분 생겼네, 추반장님!"
  "또 반장이래."
  "아. 아니죠, 추형. 거 근사한네 추형! 끄윽."
  강형사가 넘어지는 추경감을 일으켜 세우려고  안간
  힘을 쓰면서 소리소리 질렀다. 그러나 일으켜  세우는
  것이 아니라 같이 잡고 넘어지는 모습이었다.
  "전우의 시체를 너엄고 넘어"
  갑자기 추경감이 강을 향해 목청껏 노래를 불러대기
  시작했다.
  "낙동강아 자알 있거라, 우리는 저언진한다아"
  강형사도 큰 소리로 따라 불렀다. 두 사람은 비틀거
  리며 행군하는 시늉을 냈다.
  "우리 사일구 때 데모하면서 이 노래를 불렀지.  그
  때 내가 대학생이었거든. 우리 데모 학생의  주제가였
  지"
  추경감이 노래를 다 부른 뒤 중얼거렸다.
  "그때 패기는 다 죽었어, 다 죽어."
  "일송정 푸른솔은 늙어, 늙어"
  강형사가 갑자기 선구자의 노래를 불러댔다. 음치에
  가까운 그의 노래는 멜로디라기보다는 악을 쓰는 목청
  이라고 하는 것이 옳았다.
  노래를 다 부르고 난 강형사가 강변에 털썩  주저앉
  으며 말했다.
  "이건 제가 대학 다닐 때 데모가였습니다. 끄윽. 그
  땐"
  "요즘은 데모 주제가가 무엇이지?"
  추경감도 노래를 따라 부른 뒤 속이 좀 후련한지 강
  가에 널부러져 앉으면서 말했다.
  "요즘은 진군가, 광야에서 뭐 그런 거랍니다. 끄윽.
  자 일어나세 총칼을 들고, 착취와 억압을 뚫고 어쩌구
  저쩌구"
  강형사의 음치는 한참  동안 계속되었다.  그러다가
  이번에는 추경감의 팔을 붙들고 엉엉 울기 시작했다.
       29. 오명자의 고백
  두 정치인의 피살 사건은 그 다음부터 엄중한  검찰
  의 지휘 하에 들어갔다. 처음부터 검찰의 지휘를 받은
  것은 물론이지만 수사는  거의 경찰 자율적으로  해왔
  다. 그러나 이제부디 매일  수사 보고를 하고  지휘를
  받아 행동하게 했다. 그뿐 아니라 대외적인 발표는 일
  체 경찰에서 하지 못하게 했다. 특히  신문기자들에게
  어떤 정보도 제공해서는 안된다는 엄명이 내려졌다.
  소주 한잔 마신 김에 이까짓 수사관 생활  집어치우
  면 되지 않느냐고  객기를 부리던 추경감과  강형사는
  우리가 언제 그랬느냐는 듯이 다시 자기 일에  충실해
  졌다.
  "반장님, 오명자의 집을 수색하라구요? 영장을 받았
  나요?"
  강형사가 불만에 가득 찬 표정이다.
  "검찰의 지시야. 오명자가 방태산을 살해했다면  어
  딘가에 흔적이 있을 것이란 이야기야. 피묻은 옷 같은
  것이 있는지 몰라. 현장의 정황이나 여러 가지 객관적
  증거로 보아 오명자 범인설이 전혀 근거 없는 것은 아
  니야."
  "근거는 무엇입니까?"
  "오명자는 방태산의 비위를 조사하고 다녔어.  그의
  과거 행적까지 여기저기 다니며 캐고 있었단 말야. 둘
  째, 그녀는 방태산과 정사를 벌였어. 사무실이나 근처
  여관 등에서. 방태산은 그녀에게 놀고 있는 남편을 취
  직시켜 준다고 꼬였던 것이지.
  그러나 취직을 시켜줄 것 같지도 않고, 돈도 넉넉히
  주지도 않았어. 비겁한 수작에 걸려 성적인  노리개가
  되었다는 것을 뒤늦게 알았지. 그뿐 아니야. 정필대의
  아내 송희로부터 방태산에게  원수를 갚게 해  달라는
  부탁을 받았어. 송희는  방태산이 정필대를  죽였다고
  믿고 있거든."
  "저도 그것이 가장 타당성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방
  태산 아니면 차주호가 정필대를 죽였을 것으로 생각됩
  니다. 차주호가 죽였다면 자기 측근인 남봉철의  조직
  을 이용했을 가능성이 큽니다. 방태산도 차주호의  짓
  일 가능성이 있습니다. 또 하나 유력한 용의자는 신지
  혜라는 여자입니다. 그녀는  정필대나 방태산을  죽일
  만한 이유가 충분히 있으니까요."
  "어쨌든 오명자를 제1의 용의자로 보고 집이나 측근
  을 좀더 수사해 봐."
  걍형사는 쓴 입맛을 두어번 다시며 마지 못해  밖으
  로 나갔다.
  강형사는 상부에서 관심을 같지 말라는 차주호에 관
  해 꼭 무엇이 있는 것 같은 육감을 떨쳐버릴 수가  없
  었다.
  그는 퇴근하는 길에 차주호의 임시 선거 사무실  부
  근을 가보았다. 선거 사무실로 올라가는 뒷계단이  잘
  보이는 맞은편 생맥주집에 앉아 맥주 1천씨씨를  시켜
  놓고 멍하니 생각에 잠겨 있있다. 추경감이나  검찰에
  서 하지 말라는 짓을 하고 있는 자신이 우스워서 강형
  사는 혼자 피식 웃었다.
  '난 천생 형사로 늙어 죽으란 것인가 보아. 이게 무
  슨 청승이람.'
  그가 찬 맥주잔을 단숨에 비우고 일어나려고 생각했
  다.
  계단에는 이제 전혀 인기척이 없었다. 차주호나  진
  유선이 벌써 퇴근하고 없는지도 몰랐다. 강형사는  씁
  쓸한 표정으로 비어홀을 나왔다.
  강형사는 그 이튿날도 그 비어홀에 다시 갔다. 그곳
  을 출입하는 자들의 꼬투리를 잡고 싶었다. 그가 은근
  히 바란 것은 정부의  고위층이나 경찰의 고위  간부,
  검찰 간부 등이 그곳을 출입하는 모습을 목격하는  일
  이었다. 그러나 차주호와 함께 어깨를 나란히 하고 계
  단을 걸어 나오는 고위층은 아무도 없었다.
  하기야 높은 사람들이 은밀한 장소에서 약속하고 만
  나지 이런 선거사무소에 찾아오는 것은 거의 있을  수
  없는 일이란 것을 그가 모를 리 없었다.
  강형사가 나흘째 비어홀에서 1천씨씨롤 마시던 날이
  었다.
  '아니 저건'
  모두가 퇴근하고 없을 법한 무렵에 계단을 내려오는
  여인은 뜻밖에도 오명자였다.
  나지막한 키에 동그란 얼굴, 붉은 줄무늬의  브라우
  스와 블루진 치마가 부지런한 인상을 그대로 풍겼다.
  '오명자가? 그렇다면'
  강형사는 여러 가지  상상을 하면서 그녀를  뒤쫓기
  시작했다.
  그녀는 큰길로 한참 걷다가 지하철 정거장으로 들어
  갔다. 고물 프레스토를 몰고 가던 강형사는 길옆 아무
  곳에나 차를 세우고 지하도로 급히 뛰어갔다.
  그러나 오명자는 밀물처럼 쏟아지는 인파에 섞여 어
  디로 가버렸는지 도저히 찾을 길이 없었다.
  강형사는 닭 쫓던 개가 되어 포기하고 말았다.
  "반장님, 분명히 오명자였습니다.  그 여자가  무엇
  때문에 차주호의 사무실을 들랑거릴까요?"
  "자네는 왜 쓸데없는  짓을 하나? 차주호  위원장에
  관한 일은 싹 잊어버리라고 내가 하지 않았나? 그런데
  무엇 때문에 다시 차주호 사무실을 감시했단 말인가?"
  추경감이 말은 그렇게  해도 사실은 대단히  흥미기
  있어 한다고 강형사는 판단하고 말을 계속했다.
  "두 가지로 볼 수 있습니다. 방태산이 죽어  직장을
  잃자, 할 수 있는 일이 표 줍는 것이니, 자주호를  찾
  아가 선거운동원으로 취직했거나, 아니면 처음부터 차
  주호의 운동원이었는데 방태산에게 위장 취업해서  그
  곳의 정보를 빼내 주었거나"
  "방태산을 죽일 수도 있지."
  추경감이 거들었다.
  "그렇습니다. 바로 그겁니다."
  "그렇다면 빨리 오명자의 집이나 수색을 해봐."
  "알겠습니다. 지금 당장 가보죠."
  강형사는 갑자기 신이 나서 뛰다시피 사무실을 나갔
  다.
  그가 오명자의 집에 도착했을 때 그녀는 막  외출을
  하려던 참이었다.
  "이거 집에까지 찾아와서 죄송합니다."
  달동네 꼭대기 단칸방에 세들어 있는 오명자의 허술
  한 집 대문간에서 강형사가 인사를 나누었다.
  "저한테 꼭 볼일이 있다면 요앞에 있는  인삼찻집에
  가서 이야기하기로 해요"
  오명자는 자기 집,  집이라기보다는 방에  강형사가
  들어오는 것이 싫은 눈치였다. 사는 모습을 보이고 싶
  지 않았던 것이다.
  "저, 아저씨가 안에 계신가요?"
  강형사가 주저했다.
  "아뇨, 그인  벌써 1주일째  집에 들어오지도  않아
  요."
  "그러면 잠깐 방에 들어가서 이야기 좀 할까요?"
  강형사가 앞장서서 대문으로 들어가자 그녀는  아주
  난처한 얼굴로 뒤따라 들어갔다.
  "누추해서 들어오실 만하지 않아요. 이불도 개지 않
  았는데"
  "괜찮습니다. 잠깐이면 됩니다."
  강형사가 얇은 미닫이문을  열었다. 그녀의  말대로
  좁은 방에는 이불이 펴진 채로 그냥 있었다.
  방안에는 조그만 장식장겸 화장대가 하나 놓여 있고
  지저분한 살림살이 틈에 텔레비젼이 비좁게 앉아 있었
  다. 구석에는 캐비넷 비슷한 볼품 없는 낡은 장이  하
  나 놓여 있었다.
  "꼭 그러시다면 좀 들어오세요."
  오명자가 각오를 한 듯 방안의 이불을 구석으로  밀
  치면서 자리를 권했다. 그리고 얼른 부억으로 나갔다.
  부억이래야 옆집과 벽 사이에 플라스틱으로 하늘을 가
  린 조그만 공간에 불과한 곳이었다.
  그녀는 캔쥬스 한 통을 양철 쟁반에 받쳐들고  들어
  왔다.
  "대접할 게 없어서. 목마르실 텐데 좀 드시죠."
  오명자가 캔을 공손하게 강형사 앞에 놓았다.  강형
  사가 마지못해 캔을 집어들어 뚜껑을 땄다.  미지근한
  촉감이 그 흔한 냉장고도 없는 집이란 것을  실감하게
  했다.
  강형사는 오명자의 사는 모습이 생각했던  것보다도
  휠씬 어렵다는 것을 알았다.
  "요즘은 어딜 나가시나요?"
  "뭐 이곳 저곳 다녀요. 남의 집 잔칫일도 거들어 주
  고"
  그녀는 헐렁한 스웨터의 옷깃을 여미며 대답했다.
  "차주호씨 선거일은 도와주지 않나요?"
  "예?"
  오명자는 약간 놀란 듯했으나 곧 담담한 말투로  대
  답했다.
  "아뇨."
  "한 가지만 물어보고 가겠습니다."
  "말씀하세요."
  "방태산이 죽던 날, 마지막으로 그  사람을 만난 사
  람이 오명자씨라는 것은 알고 있지요?"
  "글쎄요. 제  뒤에 또  누가 왔는지도  모르겠는데
  요"
  "그걸 캐려는 것이 아니구요, 그때  입고 있던 옷이
  어떤 것이었나요?"
  "옷이라구요?"
  오명자는 고개를 갸웃거리고 한참 생각하는 것 같았
  다.
  "아, 생각나요. 분홍색 브라우스하고 검은  스커트였
  어요."
  "그게 지금 있습니까?"
  "있어요. 하지만 그걸 왜"
  오명자는 강형사를 한참 쳐다보다가 얼굴이  일그러
  졌다.
  "제가 방태산을 죽였다고 생각하시는 거죠?  그렇다
  면 그때 입었던 내 옷에 피가 묻었을 것이라고 생각하
  는군요? 천만의 말씀예요. 그 뒤에 그 옷은 제가 물에
  빨았으니까 설사 피가 묻었어도 남아 있겠어요?"
  "꼭 그렇다는 것은 아니구요. 오히려 아주머니가 범
  인이 아니라는 것을 밝히자면 그 옷이 좀  필요하거든
  요."
  "그 말은 범인이란 것을 밝힐 수도 있다는  말 아니
  예요? 필요하면 가지고 가셔요."
  오명자는 갑자기 뾰로통해져서 낡은 장을 열고 분홍
  색 브라우스와 검고 통이 좁은 스커트를 내놓았다.
  "다른 것을 좀 살펴보아도 좋습니까?"
  강형사가 내친김에 옷장문을 활짝 열고  들여다보며
  말했다. 브레지어, 팬티,  스웨터 등이  어지럽게 널려
  있었다. 강형사는 한참 동안 이것 저것을 뒤져 보았다.
  경대 겸용으로 쓰는 궤짝 같은 것의 서랍을  열어보
  았다. 거기에 큼직한 서류 봉투가 하나 있었다. 강형사
  가 꺼내 보았다. 방태산에 관한 기록이 잔뜩 나왔다.
  "이게 뭡니까?"
  오명자는 그것을 한참 내려다보고 있다가 각오한 듯
  말을 시작했다.
  "방태산 위원장의 죄상을 적어 놓은 거예요. 정필대
  씨 부인한테서 얻었어요."
  "왜 이것을 얻었습니까?"
  "송희는 제 친구니깐요."
  "이것 제가 좀 가져가도 되겠습니까?"
  "맘대로 하세요."
  오명자는 체념한  듯했다. 강형사는  오명자의 옷과
  그 기록을 가지고 돌아왔다. 이 옷에  혈흔 반응이 있
  는지 과학수사연구소에 감식을 의뢰했다.
  오명자에 대한 수사  보고를 받은 추경강은  약간의
  혼란에 빠졌다.
  그는 정필대와 방태산의 죽음을 정치적인 음모로 믿
  고 있었기 때문이다.
  "만약에 오명자가 방태산을 죽였다면 그것은 차주호
  의 사주를 받았을지 몰라. 그녀가 최근 차주호 선거사
  무실을 드나든다고 했지?  그렇다면 전부터  차주호와
  오명자가 선이 닿아 있었는지도  몰라. 방태산은 정필
  대를 죽이고 차주호는 다시 방태산을 죽이고"
  "반장님은 왜 차주호를  자꾸 끌어들이려고  하십니
  까?"
  강형사가 슬그머니 약을 올렸다.  그 말에 추경감은
  아무 대꾸도 하지 않았다.
  오명자의 옷가지를 감식한 과학수사연구소에서 놀라
  운 통보를 해왔다. 그녀의 브라우스 옷 소매와 스커트
  가장자리에서 혈흔을 찾아냈다는 것이다. 일단 사람의
  피가 뭍었던 옷은 빨더라도 그 혈흔이 남아 있는 경우
  가 많다는 것이었다.
  "빨리 오명자를 연행해  오고 구속영장  신청하라고
  해."
  추경감이 지시를 했다. 그러나 그의 마음 한 구석에
  는 무엇인가 미심쩍은 것이  있었다. 사건을 해결했다
  는 후련한 생각은 전혀 들지 않았다.
  연행되어 온 오명자는  자기가 위기에 처해  있다는
  것을 아는것 같았다.  그는 송희에게 전화를  해 자기
  처지를 설명했다. 그러나 그녀는 비교적 냉담했다.
  "자, 오명자, 솔직하게 털어놓는 것이 좋을 거요."
  취조실의 딱딱한 테이블에 마주앉은 강형사가  심문
  을 시작했다.
  "뭔가 잘못 아셨어요. 절대로 방태산을 죽이지 않았
  단 말이에요."
  "증거가 이렇게 있는데도 말이야. 그곳에서 당신 음
  모가 발견되고 지문이 나오고, 또 방태산의 피가 묻은
  옷이 발견되었는데 무얼  감추려고 그래요?  자, 누가
  시킨 일인지만 대보아요. 시킨 사람을 대면 죄가 훨씬
  가벼워지거든."
  "정말 제가 안 죽였어요."
  오명자는 울먹이며 대답했다.
  "차주호씨는 언제부터 알았나요?"
  "요즘이에요. 방위원장 사무실을  닫고 나자 수입이
  없어서 막연했어요. 그래서 차주호 위원장님 사무실을
  찾아가 일당 운동원을 시켜 달라고 했는데"
  오명자가 말을 멈추었다.
  "그래서?"
  "그랬는데, 저는 방태산  운동원을 했으니까 어렵다
  고 했어요. 그 대신 차씨 운동원이란  것은 싹 감추고
  여기 저기 다니며 차씨 이야기가 나오면 칭찬해  주는
  비밀 운동원을"
  "말하자면 바람잡이군."
  "예, 그래서 다른 사람 없을 때  거기 가서 일당 타
  오곤 했어요. 이건 정말이에요."
  강형사는 거짓말 같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럼, 왜 당신이 그날 밤 입었던 옷에 방태산의 피
  가 묻었지? 어떻게 설명할 거요?"
  "사실은 흑 흑"
  오명자가 갑자기 얼굴을 감싸고  울기 시작했다. 범
  인이 중요한 고백을 할 때 흔히  취하는 태도였다. 강
  형사가 잔뜩 긴장해서 그의 고백을 기다렸다. 한참 울
  고 난 오명자는 손등으로 눈물을 씻으며 입을 열었다.
  "다 말씀드릴께요. 그날 밤 저는  방씨한테 또 당한
  뒤 급히 옷을 입고 그곳을 나왔어요."
  "그때 방대산씨는 어떻게 하고 있었나요?"
  "옷도 입지 않고 소파에 드러누워 담배를 피우고 있
  었어요."
  "아래는 벗고 위는 런닝셔츠만 입은 채로?"
  강형사의 물음에 오명자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요?"
  "전 허둥지둥 지하에 있는 라면  식당에 갔죠. 배도
  출출하고 해서 라면 한 그릇을 먹고 돈을 주려고 보니
  얼마나 정신이 없었는지 핸드백을  안 가지고 왔었죠.
  그래서 저는 할 수 없이 도로 사무실로 갔지요."
  "잠깐, 그때 경비원이 보지 않았나요?"
  "지하층과 위층 다니는 비상계단에는 경비원이 없어
  요."
  "음"
  "그래서 사무실에 들어갔더니  글쎄, 피투성이가 되
  어 얼마나 놀랐는지 몰라요.  저는 거기서 어물거
  리다가는 틀림없이 범인으로 몰릴 것 같아 빨리  핸드
  백을 가지고 지하 계단으로  해서 가버렸지요. 가슴과
  다리가 떨려 어떻게 나왔는지도 몰라요. 집에 가서 보
  니 제 옷에 피가 묻어 있어서 밤에 빨았지요."
  "이야기 잘 했어요."
  "전 무슨 벌을 받나요?"
  오명자는 속이 후련하다는 듯 강형사를 쳐다보았다.
  그러나 강형사는 그녀의 말이 거짓인지 진실인지 분
  명한 판단이 서지 않았다.
       30. 사라진 부부
  오명자의 이야기를 듣고 난 강형사는 혼란을 일으켰
  다. 어떻게 보면 오명자가 방태산을 죽인  것 같지 않
  다는 생각이 점점 굳어졌다.  그러나 아직은 오명자가
  완전히 무혐의란 생각은 없었다.
  오명자 아닌 다른 숨어  있는 여인이 또 있지  않을
  까? 정필대를 죽인  사람이 여자라면,  그와 동일범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강형사는  하기 시작했다. 정필
  대 사건 때 자하문장에 있었던 여자들을 생각해  보았
  다. 뚱뚱한 여관집 주인 아주머니, 종업원 미스 조, 그
  리고 황금 살롱의 미스 권, 운전사 부부, 차주호의  여
  비서 진유선 이렇게 모두 다섯 사람이었다. 모두가 특
  별히 범인이란 생각은 들지 않았다.
  한참 생각에 잠겨 있던 강형사는 문늑 운전사  부부
  생각이 머리에 떠올랐다. 두 사람이 다 택시 기사인데
  밤일을 교대로 하기 때문에 잠자리 할 시간이  없어서
  낮에 잠깐 여관을 이용해서 부부 행위를 갖는다고  했
  었다. 집에는 낮에도 아이들과 다른 식구가 있어서 그
  렇다고 했었다. 그때 강형사는 그 말이 우습기도 하고
  딱하게 들렸을 뿐 별로 이상하게는 생각지 않았었다.
  그러나 그것이 위장이었는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
  다. 수사기록을 꺼내 김형진과  이혜원 부부의 주소를
  보았다.
  거기서 강형사는 이상한 것을  발견했다. 이 부부의
  집이 신지혜가 사는 아파트와 같은 동이었다.
  '우연의 일치 치고는'
  강형사는 후닥닥 뛰어 일어났다. 김형진의 아파트로
  차를 몰았다.
  김형진이혜원 부부의 아파트는 신지혜의 아파트보
  다 한층 아래에 있었다.
  강형사가 초인종을  눌렀으나 아무  대답이 없었다.
  빈 집이었다.
  강형사는 경비실로 내려가 사정을 알아보았다.
  "김형진씨 부부 말입니까? 그 택시 기사 부부  말씀
  이죠?"
  "그렇습니다."
  "글쎄요, 여기 떠난 지 꽤 오래 되는데요. 남편이 죽
  고 나서 혼자는 택시 하기  힘들다고 전세금 빼 가지
  고"
  "남편이 죽었어요?"
  "예,  트럭하고  택시가  정면으로  충돌하는 바람
  에"
  "그게 언젭니까?"
  "아니, 친척이시라면서 그럼 김씨가 죽은 것도 몰랐
  단 말입니까?"
  경비원이 별 사람도 다 보았다는 투였다.
  "작년에 와 보고 안  와서 언제 사고가  났었나
  요?"
  강형사가 어물어물했다.
  "두어 달 되었지요. 그러니까 전세  계약을 새로 한
  다음날이니까"
  경비원이 일지를 넘겨보다가 말했다.
  "두 달 조금 넘었군요."
  "그래요?"
  강형사는 더욱 혼란을 일으켰다.  정필대가 죽은 것
  은 아직 한달 밖에 안되었다. 그렇다면 그날 자하문장
  에 나타난 김형진은 누구란 말인가?
  "아주머니는 저 이혜원씨는 어떻게 되었나요?"
  강형사가 경비원에게 다시 물었다.
  "이사를 갔지요. 아직  주민등록을 떼  가지 않았기
  때문에 어디로 갔는지는 모르지만"
  "그 집과 가까운 친척이나  누구 아는 사람은  없나
  요?"
  "그거야 제가 어떻게 압니까?  아니, 선생님이 친척
  되신다고 하지 않았어요?"
  "실례했습니다."
  강형사는 또 하나의 의문을  안고 수위실을 나왔다.
  어떻게 해서라도 이혜원을 찾아서 진상을 알아내야 한
  다는 생각이 들었다.
  강형사는 김형진, 이혜원이 거래하던 주유소며 자동
  차 부속품점 등을 찾아다니며 수소문했으나 그녀의 행
  방을 알 수가 없었다.
  마지막으로 그는 혹시나  해서 동회에 들러  그들의
  주민등록카드를 보았다.
  "아니, 이건"
  주민등록 카드를 보던 강형사는  깜짝 놀랐다. 거기
  붙어 있는 사진은 분명히 그날 자하문장에서 본  이혜
  원 부부가 아니었다.
  얼굴에 까막딱지투성이이고 입이  작고 눈이 큰  그
  여자와는 전혀 다른 얼굴이었다.
  강형사는 사무실로 돌아와 그 이야기를 열심히 추경
  감에게 했다.
  "자네는 쓸데없는 짓만  하고 다녀.  정필대 사건은
  우리 일이 아닐 뿐 아니라, 그곳은 더 캐지 말라고 내
  가 이야기했잖아!"
  마음씨 좋은 추경감이 아주  짜증스럽게 말했다. 추
  경감이 그렇게 기분 나빠하는 것을 본 것은  처음이었
  다.
  "그래도"
  "방태산 살인범이나 잡아!"
  "그건 잡아다 놓지 않았습니까?"
  "뭐야? 오명자는 구속영장이 기각됐어. 수사가 엉망
  이래."
  "예? 영장이 기각되었다구요?"
  강형사는 입이 딱 벌어졌다.
  "그러니까 빨리 돌려  보내고 딴 데  가서 좀  알아
  봐."
  추경감은 목덜미가 벌겋게 달아올랐다. 입술이 실룩
  거렸다.
  그가 몹시 화가 날 때 나타나는 특징이었다.
  "기껏 잡아다 놓으니까 영장기각이라. 이제 또 인권
  이니 뭐니 하고  신문이 떠들게 생겼군.  이래 가지고
  어떻게 형사 노릇을 한단 말이야."
  강형사도 화가 나서 혼잣말처럼 불평을 늘어놓았다.
  "오명자에 관한 증거 보완을 해봐. 어딘가에 오명자
  가 버린 흉기가 있을 거야."
  추경감이 너무 화를 냈던 것이 미안했던지 부드러운
  말로 이야기했다.
  "그보다는 배후를 더  캐보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차주호와 오명자의 관계를 명확히 밝혀야 한다고 생각
  합니다. 오명자는 차주호의 하수인에 불과하다고 저는
  믿고 있으니까요."
  강형사가 추경감의 눈치를 슬금슬금 보아 가면서 말
  했다.
  "그건 밝혀진 것 아냐. 나도 알아보았는데 오명자와
  차주호의 관계는 비밀 선거 운동원 외에 다른  무엇은
  없어. 방태산 사건과 차주호를  결부시키지 말라고 했
  잖아."
  "진실을 밝히는 것이 우리의 사명입니다. 만약"
  "그게 선입견이란 것이야. 이건 정치적 사건이 아니
  야."
  "알겠습니다."
  강형사는 추경감을 더 화나게 하고 싶지는 않았지만
  어딘가 미심쩍은 데는 있었다.
  정필대를 직접 제거시킨 것은 차주호이고, 방태산을
  간접적으로 제거시킨 것도 차주호가 아닐까 하는 생각
  이 머리 속을 맴돌았다. 그렇지 않다면 방태산이 정필
  대를 제거시키고 차주호는방태산을 제거시켰는지도 모
  른다는 생각도 들었다. 오명자는  차주호의 도구에 불
  과했을지 모른다고도 생각했다.
  강형사는 자하문장의 의문의 여인 이혜원을 찾기 위
  해 며칠을 돌아다녔으나 찾을 수가 없었다.
  오명자에 대한 증거 보완도 더 진전이 없었다.
  차주호의 선거 사무실을 감시해 보았으나  오명자는
  거기에 더 이상 나타나지 않았다.
  끈질기게 오명자를 추적하던 어느날 그녀가  신지혜
  와 만나는 장면을 목격했다. 그들이 어느 카페에 들어
  가 이야기를 나누는 것을 뒷자리에서 들키지 않게  지
  키고 앉아 엿들었다.
  "그래, 풀려났다니  다행이군요.  큰일날 뻔했어요."
  신지혜가 오명자를 위로했다.
  "아직 완전히 풀린 건 아녜요.  아직도 나를 의심하
  는 것 같아요. 남편에게 알려지지 않아 얼마나 다행한
  일인지 모르겠어요."
  "참 댁의 남편은 그 뒤 취직을 했나요?"
  "예, 하긴 했습니다만 송희씨의 시숙이 자기 회
  사에 취직을 시켜  주었는데 뭐 주차  관리원인가
  뭔가를 하라고 했는데 1주일도 안 나가고  그만두었어
  요."
  "저런 왜요?"
  "일류 대학 나와 가지고 국민학교 나온 사람들 하는
  일을 한다는 것은 국가적 낭비라나 어쨌다나"
  "호호호, 재미있는 분이네요."
  "정말 우습지요. 호호호."
  두 여자는 한참 동안  웃어댔다. 쓸데없는 이야기인
  것같이 느꼈지만 강형사는 끝까지 들었다.
  "곽진씨는 돌아가셨나요?"
  "내일 미국으로 돌아가요.  나도 웬만하면 미국으로
  갈까 하는 생각이 들어요."
  "여기 강의 자리를 맡아 두었다면서요?"
  "어째 시들한 것 같아요  부모형제 다 떠나고  없는
  곳에서 살자니 허무하기만 하고 여기서 더 할  일
  도 없을 것 같아요."
  "하긴"
  "처음부터 오지 않아야 했던 걸  그랬나 봐요. 그냥
  잊어버리고 그곳에 사는 건데"
  "두 분은 결혼하실 건가요?"
  "아직 확실하게 정한 것은 아무것도  없어요. 그 동
  안 고마웠어요. 우리 미혜가  저승에서도 댁에게 감사
  할 거예요."
  "제가 뭐 한 일이 있나요?"
  "이것 생활에 보태 쓰셔요. 우리 돈인데 전 이제 미
  국으로갈 테니까"
  "아이, 이렇게까지"
  두 사람은 한참 동안 이런저런 이야기를 더  계속했
  지만 강형사에게 정보가 될 만한 것은 별로 없었다.
  강형사가 시경으로 들어오다가 석간 신문을 사 보았
  다.
  국회의원 등록이 끝났다는 뉴스가 크게 나 있었다.
  서울 13 선거구에서는 자민당의 차주호를 비롯해 방
  태산이 출마하려던 보수당, 민족당  등 정당마다 후보
  를 내놓았다.
  매일같이 떠들던 남봉철 사건은 이제 자취를 감추었
  다.
  두 명은 끝내 잡지를 못한 채 남봉철, 구형주 등 네
  명만 기소되었다는 것이  신문에 나온 마지막  뉴스였
  다.
  끝내 차주호 등 정치인과의 연관 여부는 밝혀지지가
  않았다.
  "반장님, 남봉철 사건은 이것으로 이제 끝입니까?"
  강형사는 그때 화가 치밀어 추경감에게 은근히 시비
  를 걸었다.
  "왜?"
  "어째 영화를 보다가 만 것 같아서요."
  "싱겁긴. 쓸데없는 소리 그만하고 오명자 증거 수집
  이나 열심히 더 해봐."
  "그런 건 해서 뭣합니까? 나쁜 놈 도와주는  정치인
  들이 국민 대표 되겠다고 큰소리나 뻥뻥 치고  다니는
  세상인데"
  "이봐, 그건 강형사 일이 아니잖아? 모든 사람은 자
  기가 맡은 일을 열심히 하는  것이 세상 잘 돌아가게
  하는 일이야."
  "그냥 해본 소립니다."
  강형사가 양보를 할 수밖에 없었다.
  "이상한 지문이란 거 아직 과학수사연구소에서 회보
  오지 않았나?"
  "내일쯤 올 겁니다."
  "방태산 사무실 바닥에서  발견된 석필  가루, 마늘
  가루 등 이상한 물건들이 무엇인지 통보 안 왔어?"
  "그것도 며칠 안에 연락이 올 겁니다."
  "요즘 신지혜와 송희는 특별한 움직임 없었나?"
  "특별히 이렇다 할 보고 거리는 없었습니다."
  "오명자와 송희가 자주 만난다든지 그런 낌새는?"
  "오명자는 송희보다 신지혜를 자주 만나는 것  같았
  습니다."
  "신지혜를?"
  추경감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무리 요즘 젊은이들이지만 이해하기 어려운 점이
  많아. 신지혜란 여자만 해도  미국에서 박사 학위까지
  받았다는 최고의 인텔리가"
  "예?"
  "정필대와 죽고 못살게 붙어 지내다가 싹  돌아서서
  이번엔 딴 남자를 미국에서 여기까지 불러내서"
  "그야 정필대가 신지혜를 속이고 배신했으니까 그렇
  지요."
  "아무리 그렇더라도, 1년도 못 가  그럴 수가 있어?
  오명자는 또 뭐야. 자기 몸을 남자와  악수 한번 하듯
  이 마구 내던지고 다니니"
  "오명자는 입에 풀칠하기 위해 하는 짓이구요. 그보
  다 그런 여자의 약점을 이용해 야욕을 채우는  남자들
  이 더 나쁘다고 보아야지요."
  "굶어죽는 한이 있어도 아무튼 강형사는 제대로
  된 여자 하나 고르자면 힘들겠어."
  두 사람은 마주 보고 빙긋이 웃었다.
       31. 밝혀지는 진실
  "반장님, 이건 말도 안됩니다. 이런 일이 있을 수 있
  습니까?"
  강형사가 흥분해서 떠들며 사무실로 들어왔다. 손에
  는 얄팍한 서류 몇 장을  들고 그것을 왼손으로 탁탁
  때리고 있었다.
  "무엇이 못마땅해서 또 그래?"
  추경감은 거들떠보지도 않고 무엇인가를 열심히  메
  모하고 있었다.
  "반장님, 이것 좀 보십시요."
  추경감이 쳐다보지도 않자 강형사가 경감의 책상 앞
  에까지 뛰어가 서류를 들이밀려다가 주춤했다. 추경감
  은 볼펜으로 여자의 얼굴 하나를 그려놓고 머리  모양
  을 열심히 다듬고 있었다.
  그 솜씨가 꼭 국민학교 저학년의 그것처럼 보여  강
  형사는 혼자 쿡쿡  웃었다. 어쩌면 그림읕  저렇게 못
  그릴까? 노래 못하는사람을 음치라고 하는데 그  말이
  미술에도 통한다면 추경감은 '미치'일  것이라고 강형
  사는 생각했다.
  "반장님!"
  "왜 그래? 남 예술작업 하는데"
  그제야 추경감은 볼펜을 놓고 강형사가 들이민 서류
  를 들여다보았다.
  "아니?"
  추경감이 놀라 눈을 크게 뗬다.
  "오랑우탕이라고? 하하하, 농담은 아니겠지?"
  그것은 과학수사연구소에서 온  회보였는데, 문제의
  변체형 지문이 사람의 것이 아니라 오랑우탕 지문이란
  것이었다.
  "아니, 그 수수께끼가 정필대와 방태산 양쪽 살
  인 현장에 담아 있던 그 AB 혈액형 지문이  오랑우탕
  것이란 말이야? 하하하. 이것이 뭐  에드가 앨런 포우
  의 '모르그가의 살인'인줄 알아?"
  (모로그가의 살인이란 1841년 미국 작가  에드가 앨
  런 포우가 쓴 역사상 최초의 추리소설로, 범인이 오랑
  우탕이란 것을 탐정 듀팽이 밝혀낸다.)
  "그러나 이것은 틀림없답니다.  변체형의 파도 무늬
  동물 지문이랍니다. 혈액형은 A8형이구요."
  "오랑우탕도 혈액형이 사람하고 같은가?"
  추경감이 어처구니 없다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
  었다.
  "오랑우탕이 나타나 정필대를  권총으로 쏘아  죽이
  고, 또 방태산의 사무실에도 나타나 옷을  벗긴 뒤 칼
  로 난자해 죽인 다음 창문을 타고 유유히  사라졌다고
  해봐. 국장님이 우리를 몽땅 정신병자로 볼 것 아냐."
  "검찰에서도 드디어 수사반이 돌았다고 하겠지요."
  "하하하"
  "헤헤헤"
  두 사람은 어이가 없어 웃지 않을  수 없었다. 한참
  웃고 있던 추경감이 갑자기 엄숙해졌다.
  "아니야, 그럴 수 있어. 그럴지도 몰라."
  "그럴 수 있다니요?"
  강형사도 웃음을 그치고 침을 꿀꺽 삼켰다.
  "가짜 지문 만약 오랑우탕의 손가락 가죽을 벗겨 골
  무처럼 낀다든지, 장갑을 만들어 끼고 이것 저것을 만
  진다면"
  추경감의 눈이 반짝 빛났다.
  "그렇군요."
  "거기다가 자기 침을 살짝 묻혀 지문을 만든다면 틀
  림없는 혈액형이 나타나게 되지.  원래 지문 자체에서
  는 혈액형을 알수 없고 거기 묻어 있는 땀 같은  체액
  으로 구분하는 것이거든."
  "그렇다면? 혈액형 AB형은 바로"
  강형사의 눈이 반짝였다.
  "그렇다 신지혜다. 신지혜하고 같이 다니는 남자, 그
  뭐지?"
  추경감과 강형사는 얼굴이 벌겋게 상기되었다.
  "그 녀석은 동물 전문 의사지. 그러니까 오랑우탕으
  로 지문 정도 만드는 것은 누워서  떡 먹기야. 동물학
  자가 아니면 할수 없는 짓이야."
  추경감은 흥분해서 목소리까지 떨렸다. 반장이 그렇
  게 흥분한것을 강형사는 본 일이 없었다.
  "그리고 또 있어. 빨리 가보자."
  "어디로요?"
  "어딘 어디야, 범인 잡으러 가는 것이지."
  두 사람은 뛰다시피 사무실을  나갔다. 강형사가 고
  물 프레스토를 바퀴에 불이 나도록 밟았다.
  그들이 신지혜의 아파트에 도착한 것은 오후  2시께
  였다.
  급히 계단을 올라가며 강형사가 물었다.
  "그러나 아직 풀리지 않은 수수깨끼는 많은데요."
  "그건 신지혜에게 물어봐."
  그들이 신지혜의 아파트에 도착해 초인종을 눌렀다.
  긴장한 두 사람이  현관문을 뚫어지게 바다보고  있었
  다.
  문이 열리지 않았다. 강형사가  다시 초인종을 눌렀
  다. 그러나 아무 소식이 없었다. 이상한 예감이 든  추
  경감이 현관문을 밀어보았다. 그냥 열렸다. 두  사람은
  조심스럽게 안으로 들어갔다.
  인기척이 없었다. 두 사람은  거실에 올라서면서 비
  로소 이사를 간 빈 집이란 것을  알았다. 여기저기 쓰
  레기 같은 것이 그냥 흩어져 있고 살림살이는  하나도
  없었다.
  원래 신지혜가 자취를 하며 임시로 있던 집이라  가
  구 같은 것은 별로 없었지만 이사 가고 난 뒷  모습은
  더욱 황량했다.
  "떠났구나!"
  추경감이 낭패스런 얼굴이 되었다.
  "우리가 한 발 늦었어요."
  방문과 부엌문을 열어보며 강형사가 따라 말했다.
  "여기저기를 좀 잘 살펴봐. 무엇인가  남긴 것이 있
  을지도 몰라."
  추경감은 침실로 쓰던 방을 세밀하게 살피면서 강형
  사에게 말했다.
  욕실을 살피고 있던 강형사가 뛰어왔다.
  "반장님, 이것 보십시오."
  그는 여자의 가발 하나를 들고 왔다 머리카락이  생
  머리 모양을 하고 길게 늘어진 가발이었다.
  "그것 어디서 났어?"
  추경강이 반갑게 말했다.
  "욕실 쓰레기통에 있었습니다. 신지혜가 쓰던 것 아
  닐까요?"
  "그게 틀림없이 혈액형 A형의  사람 머리털로 만든
  것일 거야. 방태산의 손에 쥐어 주었던 머리칼이 이걸
  거야."
  추경감이 가발을 만져보면서 말했다.
  "신지혜가 처음 나를 만나러  왔을 때는 진짜  자기
  머리였겠지. 그러다가 짧게 머리를  깎아버리고 이 가
  짜 머리를 쓰고다녔다고 보아야 돼."
  "머리털 가지고 머리깨나 썼군요."
  "다른 것도 없나 좀 찾아보게."
  추경감은 다시 침실을 수색하기 시작했다. 침실에는
  침대가 그냥 놓여 있었다. 그는 침대를 뒤집어 바닥을
  보았다. 아무것도 없었다. 다시 머리맡에 놓인  서랍을
  열어보았다.
  "이것이다!"
  추경감이 소리쳤다. 그는 골무처럼 생긴 것을 두 개
  집어들었다. 새끼손가락 끝에 끼어보았다. 그리고 자세
  히 들여다보았다.
  그것은 사람의 손마디처럼 생긴  가죽 골무였다. 끝
  에는 선명하게 지문 같은 것이 보였다.
  "이것이야. 오랑우탕의 손가락, 아니 발가락  가죽으
  로 만든지문 골무야. 괘씸한 사람들 같으니,  박사씩이
  나 해 가지고 겨우 머리를 쓴다는 게"
  "정말 놀라운 일이군요."
  강형사도 신기한 듯 골무를 받아들고 이리저리 살펴
  보면서 말했다.
  "자, 이것들을 증거물로 잘 보관해. 그리고  빨리 신
  지혜와 곽진을 찾아내야 해."
  "곽진은 며칠 전에 미국으로 돌아갔습니다. 어제 제
  가 체크를 해 보았거든요."
  "뭐야?"
  추경감이 깜짝 놀라 소리를 질렀다.
  "그러면 신지혜도 출국한 것 아냐?"
  추경감이 밖으로 나가며 말했다.  두 사람은 아파트
  경비실로급히 달려갔다.
  "그런데 반장님"
  "잔말 말고 빨리 따라와."
  추경감이 계단을 뛰다시피 내려갔다.
  "이봐요, 우리 경찰관인데 말 좀 물어봅시다."
  추경감이 늙수그레한 경비원에게 급히 물었다. 경비
  원은 두 사람을 번갈아 보고 있다가 틀림없다는  판단
  을 얻었는지 벌떡일어서며 말했다.
  "무슨 말씀인지요?"
  "이 위에 신지혜라는 아가씨 있지요?"
  추경감이 물있다
  "예, 미국서 오신 박사님 말이죠?"
  "그렇습니다 그 아가씨 어니로 이사갔나요?"
  "중대한 범인입니다."
  강형사가 덧붙였다. 경비원은 조금 놀라는 표정으로
  대답했다.
  "갔는데요!"
  "가다니요? 어디를요?"
  "미국 간다고 떠났는네요.  영 이사간 겁니다.  조금
  늦으셨어요."
  "예?"
  두 사람은 동시에 얼굴이 일그러졌다.
  "언제요?"
  "두어 시간 됐나요. 비행장에 간다던네요. 이  집 전
  세금을 갑자기 어제 빼더니"
  추경감과 강형사는 경비원의  말을 다 듣지도  않고
  밖으로 뛰어나왔다. 강형사가 다시 프레스토의 악세레
  이터를 죽어라고 밟았다. 차가  올림픽 도로로 올라섰
  다.
  "김포 공항까지 얼마나 걸릴까?"
  "지금 차가 별로 밀리지 않으니까 3, 4십분 걸릴 겁
  니다."
  "전화를 거는 게 어떨까?"
  "이 차엔 무선전화 같은 건  없습니다. 지금 내려가
  서 공중전화 찾아다니고 어쩌고 하면 직접 가는  것보
  다 더 불확실합니다.  수배 시간이 더  걸릴지도 몰라
  요."
  강형사의 판단이 옳은 것 같았다.
  "벌써 비행기가 떠나지 않았을까?"
  "대개 출국은 두 시간 전에  수속을 하니까, 경비원
  말이 정확하다면 아직 안 떠났는지 모르죠."
  "조심해!"
  앞서 가던 차를 추월하려다 그들의 차가 기우뚱해지
  자 추경감이 주의를 주었다.
  "그런데 반장님, 아직 안 풀리는 숙제가 있습니다."
  "뭔데?"
  "신지혜가 그럼 방태산과 정사를 벌였단  말입니까?
  그 사무실에서요? 그랬다면 신지혜의  체모, 즉 AB형
  의 체모가 거기서 발견되어야 했을 겁니다."
  "그렇지 않아. 신지혜와 방태산은 서로 알지 못하는
  사이야.
  신지혜는 방태산을 알지만 방대산은 신지혜를  모르
  거든. 그날밤 오명자와 방태산이  책상 위에서 정사를
  벌인 뒤 오명자는 급히 나가고, 방태산은 느긋한 포만
  감으로 소파에 누워 담배를 피우고 있었지. 옷도 걸치
  지 않고 말이야. 그때 숨어서 그들의  모양을 보고 있
  던 신지혜가 들어온 거야."
  "그렇다면 일대일의 상태에서 방태산이 신지혜의 칼
  에 찔려죽었단 말입니까? 말도 안돼요."
  "그렇지. 그러나 살인 현장에서 발견된 활석 가루와
  마늘 가루 등을 소홀히 넘겨선 안돼.  활석 가루와 마
  늘 가루, 고추 가루 등은 가스총에서 나오는 물질이야.
  가스총에서 뿜어내는  가스의 성분이  바로 그것이야.
  그것을 뒤집어쓰게 되면 콧물 재채기가 나고 수초  동
  안 정신을 못 차리고 쓰러지게 돼. 그때 칼로 찌른 거
  야."
  "그랬군요. 과연 우리 반장님이십니다. 그러나 또 풀
  리지 않는 수수께끼가 있어요."
  "또 뭐야?"
  추경감이 담배를 꺼내  물고 지포 라이터를  켜려고
  철거덕거렸다. 그러나 고물 지포라이터는 좀처럼 불이
  켜지지 않았다.
       32. 경감님 미안해요
  김포 공항 하오 3시 30문.  서울발 뉴욕행 유나이티
  드 에어라인 808편이 금방 이륙을 시작했다.
  벨트를 매고 허리를  꼿꼿이 세운 신지혜는  약간의
  현기를 느껴 눈을 감았다.
  지옥으로 떨어지는 듯한 난감한 심정을 참고 견뎌야
  만 했다.
  비행기는 채 5분도 안 가 평온을 회복했다. 자기 고
  도를 찾은 것이다.
  지혜는 벨트를 풀고 눈을 떴다. 창  밖을 내다 보았
  다. 늦가을의 오색 물결이 추상화처럼 발 아래 펼쳐졌
  다.
  구릅 사이로 잠깐잠깐 보이는 조국이 웬지 안타깝게
  만 느껴졌다.
  이제 무슨 미련이 있어 여기 다시 올 것이냐고 마음
  속으로 되뇌어 보있지만 언젠가 먼 훗날엔 그래도  저
  강산에서 늙어가고 묻혀야  한다는 생각은 영  떨쳐낼
  수 없었다.
  이제 모든 것은 끝나고 곽진과 결혼해서 새로운  미
  국 생활을 펼친다는 것이 어쩐지 즐거운 일만은  아닌
  것 같았다.
  울적하고 착잡한 기분을 잊으려고 지혜는  지나가는
  서비스 박스에서 신문 한  장을 집어들었다. 석간이었
  다.
  '자민당 전국서 압승'
  어마어마하게 크고 시커먼 활자가 눈에 들어왔다.
  개표기 거의 끝나가는 국회의원 선거의 결과가 자세
  하게 보도되었다.
  신지혜는 개인별 득표가 실린 면을 펼쳤다. 제일 먼
  저 서울 13 선거구를 보았다.
  '차주호 (자민) 62,337 (당)'
  그 외의 후보들인 보수당,  민족당은 차주호 득표의
  3분의 1도 되지 않았다.
  화제 기사 속에는 차주호가 전국 최다 득표 10명 중
  의 한 사람이라고 소개되어 있었다.
  신지혜는 쓴 웃음을 입가에 담으며 신문을 접었다.
  그녀는 서울에서의 석 달을 다시 회상해 보았다.
  어머니 아버지가  다 돌아가시고,  피붙이라고는 한
  사람도 없는 조국이었다. 그녀는  방태산에 대한 복수
  를 꼭 해야 한다고 생각했었다. 미혜의 애절한 편지를
  생각하면 지금도 분노로 가슴이 떨리고 눈물이 쏟아질
  것 같았다.  그녀는 정필대에게  미국에서부터 도움을
  청했었다. 방태산을 매장시킨 뒤 결혼할 것이라고.
  그러나 신지혜가 서울에 도착했을 때의 사정은 달랐
  다.
  미국 있을 때 철저하게 가면을 썼던 정필대의  모습
  을 본 것이다. 신지혜는  정필대의 배신을 알면서부터
  사람이 달라졌다.
  그것은 세상이 어떤 것이란 것을 신지혜에게 가르쳐
  주었던것이다.
  그녀는 며칠 동안 방황하다가 복수의 칼을 갈기  시
  작했다.
  이 세상에 믿을 수 있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다. 그
  렇다면나도 이대로 물러설 수만은  없다. 미혜처럼 나
  는 패배하고 싶지않다. 이렇게  신지혜의 걸심은 굳어
  졌다.
  그녀는 정필대에게 먼저 화살을  겨누었다. 그를 믿
  고 몸과 마음을 즐겁게 바쳤던 미국 생활을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피가 끓는 노릇이었다.
  사랑의 깊이가 깊으면 깊은 만큼 증오의 깊이도  깊
  다는 누군가의 말이 옳다고 그녀는 생각했다.
  그녀는 곽진을 불러 자기의  계획을 설명했다. 그러
  나 곽진은 너무 엄청난 일에 놀랐다.  그런 짓을 해서
  는 안된다고 말렸다.
  "복수란 가장 어리석은  사람들이 하는  짓이야. 그
  짓을 해서 얻는 것이 무어야? 달리 생각할 수 없어?"
  그러나 신지혜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정 날 도와줄 수  없다면 그냥 미국으로  돌아가도
  좋아요. 내 혼자라도 이 일을 해내고 말 테니까."
  신지혜의 고집을 꺾지 못한다고 생각한 곽진은 그녀
  를 돕기로 결심했다.
  그날부터 두 사람은 정필대에 대한 정보 수집을  시
  작했다.
  그가 차주호로부터 꾸준히  사퇴 압력을 받고  있으
  며, 방태산과는 심히 불편한 관계에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우리 손으로 처치하지 않아도 곧  무너질 것 같아.
  정필대는 차주호의 조직으로부터 제거당하거나 방태산
  의 손에 죽을 가능성이 커."
  정필대에 관한 많은  정보를 캐낸 곽진이  신지혜를
  달래기 시작했다.
  "구태여 우리가 위험한"
  "듣기 싫어요. 곽진씨가 그렇게 비겁한 줄은 몰랐어
  요! 우리가 그를  가만히 보고만 있어도  그는 언젠가
  죽어요. 다른 사람이 죽이지 않으면 병들어 죽거나 늙
  어서 죽어요. 문제는 내 손으로 그를 제거해야 한다는
  데 있어요."
  신지혜의 뜻을 곽진은 돌려놓을 수가 없었다.
  "알았어요. 미스 신 뜻대로 해요."
  신지혜는 그날부터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자기가 미
  처 손대기 전에 정필대가 누구한테 당해서는 안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뿐 아니라 나중 일을 생각해서 자기 자신이  용의
  자가 되지않는 방법을 생각했다.
  '그렇다. 미리 예고를 하는 일이다.'
  신지혜는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추경감을 찾아 갔었
  다. 경찰관이 감시를 한다면 섣불리 정필대를 누가 죽
  이지 못할 것이다.
  그뿐 아니라 자기가  경찰관이 미행하고 있는  틈에
  들어가 그를 없앤다면 이건 얼마나 멋있는 복수인가를
  생각해냈다.
  "그건 무모한 짓이야."
  곽진이 신지혜의 뜻에 동의하지  않았다. 그러나 때
  는 이미 늦어 있었다.  신지혜는 추경감으로부터 감시
  승낙을 받아낸 뒤였기  때문이다. 신지혜는 D  데이를
  마침내 정했다. 정필대와 차주호가 자하문장에서 만난
  다는 것을 알아냈던 것이다.
  그들은 부부로 가장할 것을  모의했었다. 그들 아파
  트 아래층에 있는 운전사 부부가 자기 택시를  세차할
  때는 부부가 함께 아파트 마당에 나간다는 사실을  알
  고 그 틈에 그 집에 침입, 주민등록증을 훔쳐냈다.
  그들은 사진을 바꿔 붙이고 김형진과 이혜원으로 가
  장했다.
  곽진은 먼저 그 여관에 들어가 있고 신지혜는  여관
  밖에서 서성이다가 정필대가 들어가는 것을 보고 슬쩍
  뒤따라 들어갔다.  정필대가 어느  방에 들어가는가를
  알기 위해서였다.
  지혜는 정필대가 들어가는  방을 확인한 뒤  곽진이
  들어 있는방으로 갔다.
  "왔어요. 준비하고 있어요."
  신지혜는 두근거리는 가슴을 달래며 핸드백에 든 권
  총을 다시 한번 만져 보았다. 곽진이  옛날 친구를 통
  해 암시장에서 구입한 것이었다.  소유 경로를 캐내지
  못하게 권총의 넘버를 미리 줄로 지워 버렸었다.
  지혜는 노크도 하지 않고 정필대가 있는 방의  도어
  를 왈칵 열고  들어갔다. 방바닥에 벌렁  누워 담배를
  피우고 있던 정필대가 깜짝 놀라 벌떡 일어나 앉았다.
  "놀랐죠? 저예요. 신지혜."
  지혜는 방긋이 웃으며 정필대  곁에 앉았다. 그녀는
  이 남자를 가장 망신스럽게 죽이는 방법이 무엇인가가
  얼른 머리에 떠올랐다.
  "어? 지혜?"
  정필대는 놀라서 어쩔 줄을 몰라했다.
  "우리 아무 말도 하지 않기로 해요. 그냥 정 선생님
  이 보고 싶어서  뒤를 밟아 다녔을  뿐이에요. 여기서
  딴 여자를 만나자는 것은 아니죠?"
  신지혜는 숨돌릴 여유도  주지 않고 그에게  키스를
  퍼붓고 끌어안았다.  무슨 영문인지  모르는 정필대는
  신지혜가 하자는 대로 끌려갈 수밖에 없었다.
  "지혜, 저어"
  "아이."
  지혜는 그가 입을 열지 못하게 하고 그의 옷 단추를
  풀기 시작했다. 우선 급한 일이 있으니 이야기는 다음
  에 하자는 듯한 공격법이었다.
  당황하던 정필대는 곧 불 같은 여인 신지혜의  요구
  대로 따라갔다. 바지는 제 손으로 벗어 버렸다. 완전히
  발가벗은 정필대의손이 지혜의  젖무덤을 움켜쥐었다.
  어느새 달아오른 그는 지혜의 입술을 물고 늘어졌다.
  지혜는 살그머니 한 손을 뻗어 백 속에서 권총을 끄
  집어냈다.
  차거운 금속의 촉감이 그녀에게 살의를 돋구어 주었
  다.
  "야, 정필대, 이 쓰레기만도 못한 놈!"
  신지혜가 갑자기 소리를 치면서 정필대를  떠밀어냈
  다.
  "아, 아, 아니"
  정필대가 신음처럼 외치며 뒤로 넘어질 듯 엉거주춤
  기대 앉았다.
  "배신자! 나는 너를 살려둘 수 없어. 네가 나를 죽였
  듯이 나도 너를 죽일 거야. 어쩌면  사람을 그렇게 잔
  인하게 속일수 있단 말인가?"
  신지혜의 눈에서 매서운 살기를 느낀 정필대는 얼굴
  이 하얗게 질려버렸다. 손으로  신지혜의 권총 구멍을
  막으려고 했다.
  "탕!"
  그때였다. 신지혜는 정필대의 관자놀이를 쏘아 그를
  쓰러뜨린 뒤 권총에서  지문을 닦아내고 그것을  그의
  왼손에 쥐어 주있다
  신지혜는 핸드백에서 오랑우탕 손가락 가죽으로  만
  든 골무를꼈다. 자기 지문을 지운 뒤  골무 끝 지문이
  있는 부분에 침을 묻힌 뒤 몇 군데 지문 자국을  남겼
  다.
  추경감이 풀지 못한 의문의 AB형 지문을 남긴 것이
  다. 그녀는 재빨리 그 방을 나와 곽진에게로 돌아갔다.
  곽진은 옷을 다 벗은 채 이미 샤워까지 끝내고 누워
  있었다.
  신지혜가 재빨리 옷을 벗어 큼직한 백 속에  집어넣
  고 머리에 썼던 가발을 벗어 함께  백 속에 감추었다.
  화장 도구를 꺼내 얼굴 모습을 고친 뒤 옷을 벗었다.
  그 모두가 눈 깜짝할 사이에 이루어진 것이었다.
  가발을 벗고 화장을 고치자 짧은 숏커트 머리에  까
  막 딱지가 잔뜩 앉은 모습이 전혀 딴 여자로 보였다.
  지혜가 벌거벗은 곽진을 껴안았을 때 그는 긴장해서
  근육이 굳어 있었고 피부는 얼음처럼 차거웠다.
  그들이 어설픈 자세를 취하고 있을 때 강형사가  나
  타났던 것이다.
  신지혜는 그때 곽진의 굳은 육체를 생각하며 빙긋이
  웃었다.
  "미혜야, 이제야 네 앞에 떳떳할 수 있구나."
  신지혜는 미혜의 밝고 티없던  얼굴을 떠올렸다. 그
  리고 비겁하게 허우적거리며 최후를 마치던  방태산의
  얼굴을 떠올렸다.
  "비겁한 사나이, 불쌍한 사나이"
  신지혜는 다시 혼자  중얼거리며 창 밖을  내다보았
  다. 하얀 구름이 솜털처럼 비행기 밑에 깔렸다.
  그 희고 부드러운  구름 위에 추경감의  천진스러운
  웃음을 그려 보았다.
  "추경감님, 미안해요. 어쩔 수 없었단 말이에요."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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