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녀 두번 살다
-이상우 장편추리소설
----- 차 례 -----
1.폭풍전야
2.바위 아파트
3.질투하는 파도
4.노총각 상무님
5.박대리의 비밀
6.파도에 묻힌 진실
7.정사는 폭풍을 타고
8.마담 백정미의 인생유전
9.인생의 뒤안길
10.유혈의 별장
11.뜻밖의 그림자
12.불륜의 낮과 밤
13.학창시절의 깊은 상처
14.용의자 다섯 남녀
15.사라진 부부
16.무인도의 악몽
17.악녀는 누구인가?
1.폭풍전야
주옥경에게는 정말 꿈만 같은 일이었다.
삼면으로 탁 트인 망망대해가 꼭 태평양
한복판의 절해고도에 와 있는 것 같은 착각을
일으키게 했다.
"이섬의 이름이 무엇이지요?"
옥경이 바위아래 바닷물에 살짝 담근 발을
찰싹거리며 즐겁게 물었다. 정강이까지 걷어
올린 청바지 밑의 쭉 뻗은 다리가 이글거리는
햇빛에 반사되어 눈부시도록 희다.
변정애 남편인 박대리는 흘긋, 옥경의
발목을 훔쳐보며 미소를 지었다.
"여긴 무인도일 뿐 아니라 무명도이기도
합니다. 여긴 태초의 자연 그대로죠. 누가
이름 같은 걸 붙일 필요가 없어요. 순수한
것을 금방 알 수
이름을 붙이면 그때부터 그 자연은 정복된
거랍니다."
"과연 시인다운 말씀이군요. 멋져요."
옥경이 미소를 던졌다. 어떻게 보면 끈적한
미소다.
박인구. 그는 단자회사의 대리직을 맡고
있는 30대 초반의 미남이다. 중학교 때부터
문학에 뜻을 두어 시인이 되겠다고 별렀지만
문단에 등단하지 못했다. 그러나 그는
언젠가는 시인이 되어 괴테처럼 대서사시를
쓰겠다고 늘 말했다.
"물렸어요, 저기......저기......"
옥경이 갑자기 소리를 쳤다.
박대리의 낚시가 출렁이기 시작했다.
박대리는 재빨리 낚싯대를 들어 올려 능숙한
솜씨로 릴을 감기 시작했다. 활처럼 팽팽하게
긴장감이 감돌았다.
"큰놈인가 봐요."
어느새 옥경도 박대리 곁으로 건너와 함께
낚싯대를 잡 아당길 듯이 붙어서서 애를
썼다.
박대리의 낚시에 걸린 것은 제법 큰
도미였다.
"나한테 걸리면 절대 도망갈 수 없지.
고기도, 여자도 말입니다."
박대리는 햇빛 아래서 파닥거리는 도미를
자랑스럽게 들어 보이며 말했다.
무인도고, 두렵도록 조용한 8월의 하오.
20대 후반의 젊은 유부녀 주옥경과 어릴
때부터 친구인 변정애의 남편 박인구.
이 섬에 단 두 사람 뿐이라는 것을 두
사람은 의식하기 시작했다. 육지에서
친구 남편과 한나절을 즐기고 있다는 것은,
두렵기도 하면서 스릴을 느끼기에 충분했다.
서로 표현은 하지 않았으나 야릇한 생각으로
가슴이 두근거리는 것을 느꼈다.
이런 기묘한 일이 생긴 것은 순전히
우연이었다.
여름 휴가를 어디로 갈 것인가 이 궁리 저
궁리하던 옥경은 마침내 학교 단짝이었던
정애와 의기가 투합되었던 것이다.
사람이 털털하고 모험을 즐기는 박인구가
바다 낚시를 제의했다.
낚시를 한 번도 가본 일이 없는 옥경의
남편 유현식은 처음에는 반대 의견을
내놓았다. 산으로 가자고 했다.
그러나 워낙 말솜씨가 좋은 박인구의
설득에 넘어가 두 부부가 이곳 태안반도의
까 놀랄 수
중허리 바닷가로 온 것이다.
조그만 어촌에 자리를 잡고 5박 6일의
휴가를 멋지고 오붓하게 보낼 꿈에 두 부부는
들떠 있었다.
어느 마당 널찍한 집에 민박을 들었다. 방
두 칸을 빌어서 임시 보금자리를 만들고 바다
낚시에 나섰다.
해변에서의 첫날은 아주 즐거웠다. 갯바위
틈새의 맑은 바닷물에서 제법 손바닥
크기만한 우럭바리들을 낚아 올려 바위
그늘에서 매운탕을 끓여 먹으며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그들 두 부부는 그날 밤 민박집 주인
아주머니로부터 20여 리 밖에 좋은 낚시터인
무인도가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곳은 이 마을에서 그집 주인만이 가지고
있는 조그만 발동선으로 갈 수 있다고 했다.
시겠네요?]
[물론입니다. 그래
그들은 날이 새면 무인도로 가서 하루를
즐길 것을 꿈꾸며 파도 소리를 벗해 어촌의
첫밤을 보냈다.
이튿날 새벽 제일 먼저 일어나 부지런히
낚시대며 버너를 챙기며 마당을 분주히
왔다갔다 한 사람은 낚시꾼 박인구였다.
"빨리들 일어나요, 신혼여행 온 것도
아닌데, 밤에 뭣들하고 아직 문도 안 여는
거요?"
박인구가 안채사람이 다 들을 정도의
큰소리로 떠들었다.
그러나 뜻 밖에도 정애가 배탈이 나버렸다.
어제 매운탕 회를 잘못 먹은 탓인지, 혹은
평소부터 몸이 약한 정애가 물을 갈아먹은
탓인지 배가 아파 꼼짝을 하지 못했다.
"어허, 이거 참 야단이네. 무인도에 있는
고기들이 크게 실망하겠는데......"
보아 안절부절못했다.
낚시꾼은 원래 아내 장사지내는 날도
낚시를 나간다는 우스갯소리가 있듯이 계획한
낚시를 못 떠날 때가 가장 실망스러운
것이다.
"내 걱정은 말고 오늘은 세분만
다녀오세요."
정애가 배를 움켜쥐고 방문턱에 걸터앉은
채 억지 웃음까지 띄우며 말했다.
결혼생활 6년밖에 안 되었지만 남편의
심정을 누구보다 잘 알기 떠문에 하는
말이었다.
"아냐, 당신을 두고 어떻게......"
박인구는 머리를 긁적이며 그렇게 말했지만
그것이 진심이 아니란 것을 정애는 잘
알았다.
봐서 갈 만하면 갈게요. 세 분이 가서 큰놈
좀 많이 낚아오세요."
"얘, 나두 안 갈래. 두분이 다녀오세요. 전
정애하고 같이 여기서 하루 보낼게요. 여보,
그렇게 해요."
옥경이 남편 유현식을 보고 말했다. 원래가
소심하고 빈틈없는 유현식은 한참 생각하다가
대답을 않고 박인구를 쳐다봤다. 어쩌면
좋겠느냐는 표정이다.
"뭐 우리야 다른 때도 기회가 있겠지만
...... 이럼 어때요, 유형과 미스 주만
다녀오시죠."
박인구는 옥경을 그렇게 불렀다.
"그건 말도 안 돼요. 난 낚시를 할 줄
모르는데, 전문가가 안 가면 됩니까?"
유현식이 고개를 저었다.
내놓았지만 내심은 조금씩 달랐다.
낚시꾼인 박인구는 꼭 가고 싶어
안달이었고, 호기심 많고 당돌한 여자인
주옥경도 은근히 가고 싶었다. 그러한 아픈
친구를 차마 혼자 두고 간다고 할 수가 없어
체면으로 남겠다고 우겼다.
그 때 마침 주인 아주머니가 끼어들어 쉽게
해결이 났다.
주인 아주머니가 정애를 돌볼 테니 세
사람이 다녀오라는 것이었다. 모처럼 얻은
황금 같은 휴가를 그냥 썩일 수 없는 것
아니냐는 것이었다.
그래서 세 사람이 조그만 주인집 통통배를
타고 이 무인도로 오게 된 것이다.
그런데 무인도에 다 도착해서야 문제가
생긴 것을 알았다.
"아차, 이거 야단났구나."
그는 뒷호주머니를 만져 보다가 당황한
표정이 되었다.
"여보, 무슨 일이에요?"
옥경이 근심스럽게 바라보았다.
"내 지갑, 아까 세수하다가 장독대 위에
그냥 두고 왔어. 그뿐 아니라 내 카메라도 안
가지고 왔어."
옥경도 내심 걱정이 되었다.
"누가 주워 놨겠죠 뭐."
"아냐. 거기 주민등록증이랑, 가계수표,
크레디트카드, 예비군수첩 그런게 다 들어
있어."
유현식은 사진 촬영에 남다른 취미가 있어
늘 카메라를 가지고 다녔다.
"내 다시 갔다 올게."
통통배의 주인 아저씨는 막 돌아가려고 배를
돌리고 있던 중이었다.
"아저씨, 잠깐만......"
유현식은 누가 말릴 틈도 없이 허둥지둥
뛰어가 배에 올라탔다.
"곧 돌아올게."
배 위에서 아내인 옥경을 향해 고함을
지르고 손을 흔들었다.
이렇게 해서 옥경과 박인구만이 섬에 남게
된 것이다.
그런데 금방 온다던 유현식이 좀체 오지
않았다. 어촌까지는 8킬로미터 남짓하기
때문에 무인도에서 빤히 보였다.
금방 손에 닿을 듯한 조그만 어촌이
그림처럼 바다에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었다.
두 사람은 아까운 시간을 그냥 보낼 수
곧 우럭바리며 도미 새끼들이 걸려들자
옥경도 재미를 붙였다.
두 사람은 고기로 찌개를 끓였다. 점심을
먹고 나도 유현식은 오지 않았다.
친구의 남편, 아내의 친구라는 서로의
관계를 간간히 느끼며 그들은 신혼 부부처럼
피크닢을 즐겼다.
"박선생님!"
옥경이 낚시 미끼를 다시 끼우기 위해 릴로
줄을 감으며 불렀다.
"응?......예?"
박인구는 무심코 <응>이라고 대답을 했다가
곧 말투를 고쳤다. 옥경을 아내로 착각했던
것일까?
"우리 정애 참 착하죠."
옥경이혼자말처럼 지껄였다.
표정이다. 어색한 분위기가 잠시 감돌았다.
"좋은 사람이지요. 외고집, 지나친 집착력,
그런 것이 장점이라면 장점이랄 수 있구요."
"그게 얼마나 여성적입니까. 박선생님은
외고집이라고 하셨지만, 그게 개성이라든지
줏대 같은 것 아니겠어요. 걔는 고등학교
때도 반에서 2등을 한 적이 없어요. 늘 1등을
했는데, 그 1등만으로 만족하는 게
아니었어요. 모든 과목에 자기보다 잘하는
아이가 있으면 견디지를 못했어요. 성적이
평균만 1등이라는 데 만족하지 않았거든요.
국어도 1등, 영어도 1등, 가사도
1등......말하자면 완벽주의자 같은......"
"그런 성질이 때로는 주위 사람을 피곤하게
할 때도 있답니다. 특히 남자들이 좋아하지
않는 면이 있거든요. 여자란 좀 어리숙한
콩심은 데 콩 나고 팥 심은 데 팥 나는
정도가 아니에요. 콩 두 알 심은 데서
콩나무가 두 그루 났느냐, 안 났느냐를 꼭
따져 보거든요."
"그게 얼마나 좋은 성격이에요. 무슨
일이든 얼렁뚱땅 넘기는 이상한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데요. 가정 주부란 그렇게 알뜰한
여자가 최고예요."
주옥경은 박인구가 은근히 아내한테 불만을
가지고 있다고 느꼈다. 그렇게 생각하니까
어쩐지 기분이 좋은 것 같았다.
"세상의 모든 남편들이 아내한테 만족하지
않는다고 어떤 선배가 말하더군요."
"글쎄, 꼭 그렇다고 말 할 수는 없겠지만
......어느 정도 만족하느냐 하는 것도 정도
문제가 아니겠어요.유형은 미스 주 같은
박인구는 정말 부럽다는 듯이 말했다.
"참 박선생님두. 저같은 사람이 뭐가
좋습니까? 전 정애한테 대면, 여왕과 시녀
같은 격차가 있어요. 미모며, 품위며,
성격이며......"
주옥경은 마음에도 없는 말을 마구
지껄였다.
"천만의 말씀, 내가 만일 다시 결혼할 수
있다면 미스 주 같은 여자와 하겠어요."
주옥경은 짐짓 놀란 표정을 했다. 그러나
기분이 나쁘지는 않았다. 옥경은 중학교
때부터 학교에서는 늘 변정애의 그늘에 가려
지냈다.
우선 성적이 정애한테는 족탈불급이었다.
옥경이 정애를 따라가려고 밤을 새며 기를
쓰고 공부도 해봤지만 항상 정애 성적을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눈이 조금 작기는 하지만 동그란 얼굴에
오똑한 콧날이며, 얇은 입술이 귀엽게 보이는
정애였다.
잘난 인물은 아니지만 귀여운 생김새였다.
거기다가 예절 바르고 뚜렷한 성격을
가졌기 때문에 학우들 중에는 크게 돋보였다.
거기 비해 인물도 잘생기고 체격도 훨씬
크고 쾌활한 옥경도 항상 학우들 앞에 앞장을
섰기 때문에 정애와 비교가 되는 면에서
돋보였다.
옥경은 그때부터 정애에 대한 라이벌 의식
같은 것을 어렴풋이 느꼈다.
무슨 일이든지 정애 때문에 안 되는 것
같다는 생각을 가끔 하게 되었다.
"그나저나 유형은 왜 아직 안 오죠?"
벌써 오후 2시께가 되었는데도 배는 보이지
않았다. 아내와 외간 남자를 무인도에
버려두고 나타나지 않는다는 것은 보통 일이
아니라고 박인구는 생각했다.
더구나 매사에 빈틈없고 꼼꼼하기로 이름난
유현석이 이럴 수는 없었다.
"어촌 동네가 더 놀기 좋은 모양이죠
뭐......"
옥경이 비웃듯이 말했으나 내심으로는
괘씸하게 생각햇다.
날씨는 갑자기 뭉게구름이 몰려오고 파도가
조금씩 일기 시작했다.
호수처럼 조용하던 바다가 바람을 타서인지
파도가 검은 바위에 부딪치며 흰 거품을
만들었다.
"우리 저기 나무 그늘에 가서 좀 쉬었다가
박인구가 옥경의 대답도 듣지 않고 먼저
일어서서 섬비탈의 아카시아 나무 그늘로
걸어갔다.
옥경은 아침에 가지고 온 캔맥주에
안주들을 챙겨 가지고 나무 아래
박인구의 곁으로 갔다. 곱게 보자기를 펴고
임시 식탁을 만든 뒤 캔맥주와 안주를
내놓았다. 바람이 차츰 세게 불어와 아카
시아 잎의 그늘이 춤추기 시작했다.
"몇 마리나 낚으셨어요?"
어색한 분위기를 깨기 위해 옥경이 먼저
캔맥주를 따며 말했다.
"노래미 두 마리, 우럭바리, 도미 한
마리를 낚은 것 같은데요.미스 주는?"
박인구도 캔맥주를 뜯어 한 모금 마시며
말했다.
흐르는 것 같았다.
"전 못생긴 고기 한 마리밖에 못 잡았어요.
어네스트 보그나인같은 그 고기
이름이......"
"우럭바리 말씀이군요. 하하하. 어네스트
보그나인이 왜 못생겼습니까? 하하하......"
박인구가 유쾌하게 웃었다.
"난 그 사람의 게걸스런 웃음이 싫어요.
인물도 미남은 아니잖아요."
옥경이 곱게 눈을 흘겨 보이며 말했다.
애교가 똑똑 떨어지는 눈길이라고 박인구는
생각했다.
"미스 주."
"예?"
"사방을 좀 둘러보세요. 망망대해가
아닙니까? 만약에 말입니다. 만약에 우리 두
없다고 한다면, 미스 주는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박인구가 짓궂은 웃음을 흘리며 말했다.
"어머! 어쩌면 박선생님은 그런 상상을 다
하세요."
그러나 옥경도 실은 내심으로 그런 생각을
안 한 것은 아니었다. 그 뒤의 일까지도 잠깐
상상했던 터라, 마치 속마음을 들킨 것 같은
기분이었다.
"성경에 말입니다. 이런 것이 있지요. 롯과
그 두 딸들의 이야기......"
"아이, 박선생님두. 불결해요."
옥경이 곱게 눈을 흘겼다.
"하하하. 미안합니다. 하지만 이건
어디까지나 만약에랍니다."
바람은 더 세게 불기 시작했다. 파도의
숨어 버렸다. 태풍이 닥칠 것 같은 불길한
날씨로 바뀌고 있었다.
옥경도 하얗게 부서지는 파도가 점점
커지는 것을 바라보며 가슴이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이렇게 파도가 일면 통통배로는
마을에서 여기까지 올 수 없으리란 생각이
들었다.
박인구는 만약에라고 했지만, 통통배와
남편이 내일 아침까지도 여기에 오지
못한다면 어떻게 되는 것인가?
옥경은 불안한 구름이 가슴속에도 두텁게
깔리는 것을 의식했다. 그러나 그 불안 속에
야릇한 호기심도 감추어져 있음을 느끼고는
스스로 놀랐다.
친구의 남편과 절해고도 무인도에서
하룻밤을 보내야 할지 모른다는 기대 반,
남녀 할 것 없이 누구나 가끔씩은 악마의
마음이 한쪽 구석에서 불쑥 튀어나오는
것일까. 지금 순간이 그런 심정 같았다.
"마을에서 무슨 일이 생긴 건 아닐까요?"
옥경이 공연히 얼굴까지 상기된 채 말했다.
"무슨 일이야 있겠습니까? 유형은 원래
낚시를 좋아하지 않는다고 하더군요. 그래서
낮잠이나 좀 늘어지게 자고 느긋하게
나오려고 그러는 것 아니겠어요?"
"정애가 혹시 더 아픈 건 아닐까요?"
"그 사람은 비위가 약해서 가끔 소화
불량이 일어난답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박인구는 주옥경을 안심시키려는 듯
태연하게 말했다.
그러나 시간이 갈수록 파도는 더
거세어지고 마침내 빗방울까지 떨어지기
육지와 떨어진 8킬로미터 사이는 도저히
배가 다닐 수 없을 것 같았다. 더구나
주인집의 그 통통배로는 어림도 없을
것이라고 옥경은 생각했다.
"빗방울이 떨어져요."
옥경은 불안이 가득한 얼굴로 박인구를
쳐다보았다.
"여름 날씨란 믿을 수가 있어야죠. 곧
그치겠죠 뭐......"
그러나 쾌활한 성격의 박인구도 다소
불안한 그림자가 얼굴을 스쳐가는 것을
옥경은 놓치지 않았다.
"비가 많이 오면 어떻게 하죠?"
"뭐 그럴 리는 없을 겁니다. 빗방울이 굵은
것으로 보아 지나가는 비 같습니다."
박인구는 낚시 도구를 챙겨 놓은 배낭을
나무 밑에 텐트를 쳤다.
흔히 캠핑 때 사용하는 그런 텐트가 아니고
위의 비만 막게 되어 있고 사방이 열린 그런
텐트였다.
"옷 적시기 전에 텐트에 좀 들어가
계시죠."
박인구가 권했다.
"이 정도 비에 옷이야 젖겠습니까? 비가 더
오면 피하죠."
옥경은 불안한 생각을 떨쳐 버릴 생각으로
바다에 나가 낚시를 드리웠다.
그러나 워낙 산더미 같은 파도가 밀어닥쳐
부서지는 바람에 낚시를 제대로 할 수가
없었다.
옥경은 낚시를 도로 거두고 텐트로 와서
털썩 주저앉았다.
사는 이윽고 무거운
발걸음을 돌려 조용히 별채를 빠져 나
"박선생님도 옷 젖기 전에 들어오세요."
옥경이 그렇게 말했으나 그건 무리였다.
남녀가 비를 피하기에는 좀 좁은 텐트였다.
두 사람이 억지로 들어앉자면 몸이 닿을 수
밖에는 없는 그런 텐트였다.
"제 걱정은 마십시오. 비 좀 맞으면
어떻습니까?"
박인구는 그대로 아카시아 나무 밑에 앉아
캔맥주를 마시고 있었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구름 뒤의 긴
해가 지면서 사방이 땅거미로 뒤덮이기
시작했다.
그러나 파도는 그치지 않고, 비도 세게
퍼붓는 것은 아니지만, 강풍에 굵은 빗방울을
흩날렸다.
"박선생님, 이제 우리는 어떻게 되는
거죠?"
옥경이 떨리는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갑자기 어둠과 함께 두려움이 왈칵 가슴에
와닿았다.
"어떻게 되기는 뭐가 어떻게 됩니까? 두
남녀가 무인도에서 하룻밤을 보내게 되는
거죠. 폭풍에 갇힌 절해의 고도에서 두 젊은
남녀는 어떻게 하룻밤을 보냈을까? 이건 소설
소재로 하면 아주 좋겠는데요."
박인구는 옥경을 안심시킬 심산인지 농담을
늘어놓았다. 그러나 옥경은 문득 절망한
남편의 얼굴이 눈앞에 클로즈업되었다.
2.바위 아파트
폭풍우는 시간이 갈수록 더욱 세차게
몰아쳤다. 어둠과 함께 빗방울도 굵어지고
기온도 내려갔다. 손바닥만한 천장뿐인 텐트
아래서 두 사람이 비바람을 피할 수는 없게
되었다.
박인구는 배낭 속에서 매트리스를 꺼내
왔다. 바람을 불어 넣어서 침대 대용으로 쓸
수 있는 것이었다. 열심히 바람을 넣어 제법
도톰하게 일어난 매트리스를 텐트 아래로
들고 왔다.
얇은 웃옷은 비에 젖어 뱀허물처럼 속살이
비쳤다.
"자, 이 위에 앉아 보십시오. 요즘
유행하는 물침대보다 훨씬 좋을 겁니다."
사람이 앉기에는 큰 불편이 없었으나
눕기에는 너무나 좁았다.
"이건 원래가 1인용인가 봐요."
옥경이 엉덩이를 붙이며 불안을 씻으려는
듯이 말을 걸었다.
+랜턴이 없으면 얼굴을 알아보기 힘들
정도로 어둠이 짙어졌다.
"그러지 마십쇼. 이래봬도 당당한
2인용이랍니다. 저하고 같이 앉아도
충분해요."
박인구도 웃음을 흘리며 슬그머니 매트리스
위에 올라앉았다.
워낙 좁아 서로 뒷등을 대다시피 하고
앉아야만 했다.
"2인용이라도 2인용 나름이지요. 부부용
2인용이 있고 남남끼리의 2인용이 있는 거
옥경이 일부러 큰소리를 내며 웃었다.
마치 그렇게라도 해서 불안을 떨어
버리려고 하는 것 같았다.
"이건 남녀 2인용입니다. 그게 부부인지
아닌지는 모르지만, 허허허......"
박인구도 멋쩍게 받아 웃었다. 웃음소리는
거센 파도소리에 묻혀 캄캄한 바닷속으로
사라졌다.
비바람이 거세게 몰아치자 새색시
앞치마만한 텐트가 맥을 추지 못했다. 온통
비를 훔뻑 뒤집어 쓴 판국이 되었다.
"이거 비바람이 너무 심하군. 이대로 밤을
새우다간 감기약값깨나 들겠는데요. 내 어디
보금자리가 없나 좀 살펴보고 오겠어요."
박대리가 그냥 있을 수 없었는지 랜턴을
들고 일어섰다.
"어디 비어 있는 아담한 초가삼간이 있는지
압니까? 내가 섬을 돌면서 좀 살펴보고 올
테니 기다리고 있어요."
박인구는 농담을 섞어 가면서 옥경의
두려움을 삭여 주려고 애를 썼다.
"불을 가져 가시게요?"
옥경이 불안해서 물었다.
"불이 있어야 보금자리를 찾아내죠. 걱정
마세요. 곧 올 테니까."
"깜깜한데 혼자 앉아 있으라고요? 아이
무서워요. 누가 오면 어떻게 해요."
"누가 와요? 하하하. 귀신이라도 좀 왔으면
좋겠어요. 하하하."
그건 그랬다. 무인도에 누가 올 리가
있는가? 이 무서운 폭풍우를 뚫고 올 사람이
있다면 남편일 것이라고 옥경은 생각했다.
도저히 저 파도를 이기며 이곳에 올 수
없다는 것은 옥경 자신도 잘 안다.
박인구는 억세게 퍼붓는 비바람을 뚫고 섬
비탈을 올라갔다.
불빛이 떨어지자 옥경은 갑자기 절대고독
같은 것이 느껴졌다.
서해에 홀로 떠 있는 무인고도. 캄캄한
칠흑과 같은 어둠과 폭풍우 속에 혼자 버려진
자신을 발견하는 것 같았다.
남편 유현식의 얼굴이 눈앞에 크게
다가왔다. 동시에 자기를 위해 폭풍우를 뚫고
산비탈을 오르는 박대리의 듬직한 모습도
함께 떠올랐다.
바다 건너 포구의 민박집에서 남편은
얼마나 애를 태울까? 박인구의 아내이자
친구인 정애는 얼마나 불안하고 안타까울까?
생각이 들었다.
"미스 주"
10여 분이 지난 뒤 폭풍우를 뚫고 우렁찬
박인구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동시에 비바람
속에 랜턴 불빛이 보였다.
"미스 주, 찾았어! 초가삼간이 아니라 아주
훌륭한 콘크리트 아파트를 한 채 찾았어!"
박대리가 사뭇 즐거운 듯 소리쳤다.
"아파트라구요?"
"응. 아니, 예. 아주 바위로 튼튼하게 지어
놓은 아파트랍니다."
"몇 평짜리예요?"
"반 평짜리는 될 겁니다. 호화 아파트죠."
"호호호. 한 평도 못 되는 호화
아파트라구요? 호호호."
옥경은 즐겁게 웃으며 텐트 걷는 일을
내놓았다. 텐트로 레인코트를 삼았다. 아니,
레인코트라기보다는 조선시대 여인들이 쓰던
쓰개치마 모양으로 텐트를 뒤집어쓰고 비를
피했다.
박인구는 매트리스를 머리에 이고 앞장서서
걸었다. 그 뒤를 옥경이 따랐다.
"미스 주."
"예?"
"한 손으로 내 허리띠를 꼭 잡아요.
잘못하면 넘어져요."
앞장서서 걷던 박인구가 잠시 발걸음을
멈춘 채 말했다.
옥경이 오른손을 내밀어 박인구의 잔등을
더듬었다. 비에 젖은 옷 밑으로 따뜻한
남자의 온기가 손끝에 와서 닿았다.
옥경은 감전이라도 된 듯 얼른 손을
"괜찮아요. 허리띠를 꼭 잡아요."
그러한 옥경의 소심한 행동을 박인구도
느끼고 있었던 모양이다. 옥경은 손을 뻗어
박인구의 허리띠를 꽉 움켜잡았다.
"자, 그러면 올라갑니다."
박인구가 비탈을 오르기 시작했다.
옥경은 텐트로 몸을 감쌌기 때문에 크게
젖지는 않았지만 박인구는 완전히 물에 빠진
생쥐꼴이 되고 말았다.
그들은 한참 동안 우거진 나뭇가지를
헤치기도 하고 넓적한 바위판을 건너기도
하며 조그만 산 능선 하나를 넘어갔다.
그러니까 포구 쪽에서와는 반대쪽이 되었다.
그곳 비탈을 내려가다가 박인구가 멈춰
섰다.
"여깁니다. 여기가 아파트 단지랍니다."
들어섰다.
바위 틈새에 굴 같은 모양으로 움푹 팬
곳이 있었다. 앞에는 큼직하고 잎이 많은
가죽 나무가 서 있어서 폭풍우를 잘 막아
주었다.
박인구의 말대로 그곳은 반 평 정도 되어
두 사람이 들어앉기에는 안성맞춤이었다.
박인구는 그곳에다 매트리스를 깔았다.
그리고 입구에는 나뭇가지 사이로 텐트를
걷어 비를 막았다.
"어떻습니까? 이 바위 아파트. 하룻밤
묵기는 아깝지 않아요?"
박인구가 흰 이를 드러내 보이며 웃었다.
옥경도 머리에 묻은 비를 손으로 털어 내며
미소를 지었다.
랜턴 불빛에 두 사람의 얼굴이 상기되어
"자, 시장할 텐데 우선 요기라도 좀
해야죠. 생선회를 할까요, 매운탕을 할까요?
아니면 지리를 만들까요?"
물에 빠진 생쥐 몰골을 한 박대리였지만
그래도 즐거운 듯 어깨를 들먹이며 버너에
불울 붙였다.
버너가 시뻘건 불을 뿜어냈다. 밖에서
휘몰아치는 폭풍에 대항이라도 하듯 맹렬한
불길을 토해 냈다. 밤에 보는 버너의 불길은
저렇게 무섭구나 하는 생각을 한 것은
옥경이만이 아니었다. 10여년을 등산이며
낚시를 다녔지만 밤에 버너를 켜본 것은
박인구도 처음이었다.
"전 매운탕이 좋겠어요. 그러니까 우럭바기
매운탕이 되나요? 아니 노래미 매운탕이
되나요?"
양념장 등을 꺼내며 즐거워했다. 모든 걸
잊어버리고 피크닉 나온 연인들 같다는
생각이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그들은 노래미며 우럭바기며, 도미며, 낮에
남은 것들을 모조리 쓸어 넣고 매운탕을 끓여
맛있게 나누어 먹었다.
"설거지는 내일 낮에 하고, 눈을 좀 붙이는
게 어......어떨까요. 난 이대로 앉아서 망을
볼 테니까......저어......"
박인구가 말을 더듬으며 권했다.
"여기서 혼자 자란 말씀이에요?"
옥경이 눈을 흘기며 박인구를 쳐다봤다.
갑자기 무슨 생각을 했는지 얼굴이 화끈
달아오르는 것을 느꼈다.
"그럼, 저어......"
박인구도 어색한 표정으로 머리를
긁적거리다가 갑자기 옥경의 손을 덥썩
잡았다.
"어머!"
"저어, 여기 이렇게......"
박인구는 옥경의 손을 끌어 매트리스 위에
옆으로 눕도록 만들려고 했다.
그러나 옥경은 야멸차게 손을 뿌리치고는
토라졌다.
"말로 해도 돼요."
"미, 미안합니다. 미스 주."
박인구는 다시 멋쩍어하며 머리를
긁적거렸다.
두 사람은 말없이 그냥 앉아 있었다.
비바람과 파도만이 아우성을 치고 있었다.
"이런 꼴을 내일 아침 정애한테 보여 주면
어떻게 되는 거예요?"
옥경은 여전히 화가 풀리지 않는 듯
그러나 말과는 달리 속마음은 야릇한 쾌감
같은 걸 느끼고 있었다. 학교 시절부터의
라이벌인 변정애의 보물을 자기가 뺏은 듯한
성취감과 복수감 같은 것을 느꼈다.
한편으로는 남편 이외의 남자와 은밀한
정사를 벌인다는 것이 얼마나 설레게 하는
일인가를 깨닫게 되었다.
그러나 그보다도 뒷덜미를 잡아당기는
강박관념은 남편한테 죄를 짓는다는
생각이었다.
대낮의 참사
사건의 현장은 처참했다. 잠겨져 있는
창문은 창틀만 남고 유리는 모두 박살이
나버렸다. 식당의 집기들은 폭격을 맞은 듯
찬장 유리도 박살이 났고, 오븐이며
전자레인지는 엿가락처럼 휘어져 버렸다.
서울 잠실에 있는 거상 아파트 5동 123호.
전용면적 48평짜리.주인은
한국단자주식회사의 박인구 대리. 그 아내인
변정애가 식당겸 부엌에서 가스 폭발사고로
중상을 입어 병원에 옮기는 도중에 숨진
것이다.
"집 안에 가스가 새고 있는 것을 모르고
가스레인지에 불을 붙이다가 폭발한 것
같습니다. 그러기에 항상 안전 점검을
게을리해서는 안 된다는 것 아닙니까."
강형사가 이곳저곳을 기웃거리는 추경감의
뒤를 따라다니며 설명했다.
"사고가 난 것이 정확히 몇 시야?"
추경감은 생각에 골똘히 잠긴 듯
"그게 확실치 않습니다. 2시쯤이라고도
하고, 3시쯤이라고도 하고......"
추경감이 고개를 휙 돌려 강형사를 빤히
쳐다봤다. 말도 안 된다는 뜻을 나타낼 때
추경감이 잘 짓는 표정이다.
"그게 말입니다......"
강형사가 무언가를 설명하려고 양손을
치켜들고 흔들었다. 그의 독특한 버릇이다.
"이 지경으로 큰 폭발사고가 났는데 들은
사람이 없단 말야? 이 아파트에는 귀머거리만
산단 말이야?"
추경감이 신경질을 냈다.
"굉장한 소리가 났을 테지만, 아무도
그것을 귀담아 듣지는 않았답니다. 그냥
자동차 타이어가 펑크 났으려니, 혹은
아이들이 폭음탄 장난을 했으려니 그렇게
모릅니다. 아파트촌 사람들은 바로 옆집
일에도 별로 관심을 안 가지거든요. 벽 하나
건너면 딴 세상이니까요."
"처음 발견한 사람은 누구야?"
"좀 일찍 퇴근한 남편인 박인구
대리랍니다. 지금 병원에 있습니다."
"그 사람은 나이가 몇이나 되었나?"
"예. 올해 우리 나이로 서른한 살이랍니다.
한국단자주식회사 대리라고 합니다. 그곳에
들어간 지는 3년쯤 됐다고 합니다."
"3년?"
추경감은 담배를 꺼내 물고 지포 라이터로
불을 붙이려고 애를 썼다. 그러나
철거덕거리기만 하는 고물 지포에선 좀체로
불이 켜지지 않았다. 강형사가 성냥불을 그어
대면서 말을 계속했다.
파격적인 일이죠. 하지만 이상할 건
없습니다. 그 회사는 박인구의 삼촌이
오너니깐요."
"삼촌?"
"예. 박인구는 아들 없는 그 삼촌의
양자랍니다. 삼촌은 바로 한국그룹의
회장인......"
"박팔수 회장이란 말이지?"
추경감이 말을 되받았다.
"그러면 박인구의 아버지, 즉 박팔수의
형은 뭣하는 사람인가?"
"예. 잘은 모르지만 별볼일 없는 재벌
총수의 형님인가 봐요. 그냥 놀기만 한대요."
"가스가 유출되는 곳은 발견했나?"
"그게 좀 이상합니다. 조금 전에 감식반이
여러 곳을 체크했지만 유출되는 곳은
"뭐야?"
추경감이 다시 강형사의 얼굴을 쳐다봤다.
"레인지가 잠겨 있는데 어떻게 가스가
샜는지 알 수가 없습니다."
"사고 현장에 처음 들어온 박대리의
이야기를 들어 보았나?"
"그 사람은 정신이 나가서 우선 부엌
바닥에 쓰러져 있는 아내변정애를 들쳐 업고
병원으로 뛰었기 때문에 다른 것은
거들떠보지 못했답니다."
"부주의로 가스레인지를 잠그지 않아 새고
있었다고 생각해 보란 말이야. 가스가 새어
나와 부엌에 가득 찬 것을 모르고 변정애가
다시 가스레인지 스위치를 돌리는 순간 불이
나며 폭발했다고 볼 수도 있지 않은가?"
"그렇다면 밸브는 누가 잠근 것입니까?"
"이 겨울에 누가 문을 열어 놓습니까?"
"그러면 단순한 부주의에 의한 가스
폭발사고 아냐."
추경감은 싱겁게 되었다는 듯이 입을
삐죽해 보이며 거실로 나왔다.
"그 부엌을 오늘 쓴 사람은 누구누구인가?"
추경감이 다시 거실 소파에 걸터앉으며
강형사를 보고 물었다.
"부엌은 늘 가정부인 경순이가
들락거리는데, 그애가 어제 시골에 갔답니다.
그래서 변정애 씨가 직접 밥을 지었다고
합니다."
"오늘 다녀간 사람은 없던가?"
"꼭 한 사람 있었습니다. 죽은 변정애의
동창생인 주옥경이라는 여자가 오전에
다녀갔다고 합니다."
"오전 10시께 왔다가 12시께 갔다고
합니다."
"이 집엔 그때 누구누구 있었나?"
"그러니까 주인인 변정애와 주옥경 두
사람뿐이었죠."
"그걸 어떻게 알아냈나?"
"헤헤헤 경감님두, 아파트 경비실은 뭣
때문에 있는 겁니까?"
추경감은 아무 말도 않고 담배만 뻑뻑
빨아댔다. 짧은 겨울해가 기울고 거실의
샹들리에 불빛이 현란했다.
"강형사님, 전화 왔습니다."
같이 와 있던 이곳 경찰서의 정복 순경이
전화기를 들고 왔다.강형사가 전화를 받았다.
"예? 뭐라구요? 약물 중독 같다구요?
그럼......"
벌떡 일어섰다
"경감님, 변정애의 사인이 가스 폭발이
아닌 것 같다는 얘기입니다. 사체검안을 한
의사들이 약물 중독의 흔적이 있다고 합니다.
자세한 것은 부검을 해봐야 안다고 합니다."
강형사는 갑자기 얼굴에 생기가 돌았다.
추경감도 얼굴의 주름자국이 더욱 깊어졌다.
며칠 뒤 변정애의 사인은 약물에 의한
사망이 아니라 가스 폭발로 밝혀졌다. 처음
약물 중독으로 보인 것은 그가 죽기 전
일종의 흥분 작용을 하는 환각제를 복용했기
때문이다. 가정 주부가 대낮에 무엇 때문에
그런 흥분제를 먹었는지 모를 일이었다.
추경감은 우선 변정애의 주변 인물부터
조사하기 시작했다.
그는 제일 먼저 사고 당일 변정애의
추경감은 구장 위의 산비탈에 있는
주옥경의 집을 찾기 위해 한참 헤매야 했다.
붉은 벽돌에 붉은 기와를 이은 기역자
구옥이 바로 주옥경의 집이었다.
옛날에 지은 집이라 좁은 마루에 입식
부엌도 아닌 재래식 부엌이 달려 있었다.
"그러니까 그날 변정애의 집에 가신 일부터
차근차근 좀 들려 주셨으면 하는데요......"
추경감은 변정애의 아파트와는 너무나
대조적인 주옥경의 집을 둘러보며 말을
꺼냈다.
주옥경이 뜨거운 커피 두 잔을 들고 와서
방바닥에 놓으며 추경감과 마주앉았다.
활달해 보이는 큰 눈에 동그스름한 뺨이며
시원한 이마가 꽤 미인으로 보였다.
"정애가 죽다니. 전 지금도 믿어지지가
지낸 사이예요. 걔가 글쎄......"
주옥경은 눈물을 주르륵 흘리며 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얼굴을 감싼 손가락 사이로
뜨거운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그 모습을
보고 있자니 괜히 추경감도 콧잔등이
시큰해졌다. 진실로 친구를 사랑하면 저렇게
뜨거운 눈물이 거침없이 나오는가 보다고
생각했다.
"예. 얼마나 상심하셨겠습니까? 뭐라고
위로의 말씀을 드려야 좋을지......"
추경감은 어쩔 줄 몰라 이 말 저 말을 마구
해댔다.
"절 위로하려고 여기까지 찾아오셨나요?"
갑자기 옥경이 울음을 딱 그치고 낭랑한
목소리로 추경감을 쳐다보았다.
갑자기 너무나 돌변한 옥경의 태도에
"예? 아, 아니 그게 아니고......"
"그럼 뭐예요. 용건만 간단히 말씀하세요.
아참, 그날 정애네 집에 갔던 얘기를 하라고
했지요. 예, 말씀드리지요. 우리 동창생 중
한 아이의 아빠가 사업에 실패해서 폭삭
망했대요. 그래서 걔가 1.5캐럿짜리
다이아몬드를 좀 팔아 달라고 했지 뭐예요.
금은방에 가서 팔기보다 친구한테 팔면 단 몇
푼이라도 더 건질 것 같다고
하길래......그걸 좀 살 수 없느냐고 가지고
갔었지요."
"그래서 팔았나요?"
"팔긴 뭘 팔아요. 정애는 그런 걸로 친구를
돕는다는 그런 짓은 하지 않는 애니까요.
자기 계산에 맞지 않는 일은 하지 않는
애랍니다."
목소리로 말하는 옥경을 쳐다보며 내심
착잡해졌다.
금방 울다가 금방 웃는 갈대와 같은
여자라고 하더니 정말 그런 여자도 있구나
생각했다.
한 2,30분 옥경과 이야기해 보았으나
추경감은 별 뾰족한 단서도 얻지 못하고
시경으로 돌아왔다. 시경 사무실에 들어서자
강형사가 중대한 발견이나 한 듯이 뛰어왔다.
"경감님, 중요한 사실을 알아냈습니다."
"무슨 사실?"
그러나 추경감은 놀라지도 않고 말을
되받았다. 강형사가 중대한 사실이라고 말한
것 중 정말 중대한 일은 이때까지 없었기
때문이다.
"그 변정애 부부하고 주옥경 부부는
가까우면서도 먼 사이라는 것을
알아냈습니다."
"가까우면서도 먼 사이? 하하하, 자네
언제부터 철학자가 됐나?하하하."
추경감이 너털웃음을 웃어댔다.
"경감님, 그게 아닙니다. 지난 여름 그 네
사람이 함께 여름 휴가를 다녀왔는데
그때부터 양쪽 집에선 툭하면 가정 분란이
일어났답니다. 그뿐 아니라 주옥경의 남편
유현식은 술만 취하면 박인구 부부를 죽여
없애겠다고 떠들었답니다."
강형사는 두 손을 치켜들고 신나는
제스처를 취하며 떠들었다.
3.질투하는 파도
"유현식이 술만 취하면 박대리 부부를
죽이겠다고 입버릇처럼 말했다. 이거지?"
강형사의 말이라면 좀체 귀담아듣지 않는
추경감이 그 말만은 귀에 쏙 들어가는
모양이었다.
"예, 필경 무슨 곡절이 있는 일입니다.
그래서 제가 지난 여름그들 부부 두 쌍이
휴가 갔던 일을 자세히 캐냈습니다. 희한한
일이 있긴 있었더군요."
강형사는 추경감이 흥미를 보이자 더욱
신이 나서 떠들었다.
그리고 박인구 부부와 유현식 부부가
무인도를 두고 각각 짝을 바꾼 채 하룻밤을
보내야 했던 기막힌 사연을 열심히
멀거니 이야기를 듣고 있던 추경감도
대단히 흥미를 느꼈는지 입가에 천진스러운
웃음을 띠며 꼬치꼬치 캐묻기 시작했다.
"그래. 섬에 남아 있던 박인구와 주옥경은
배가 없어서 못 오고 갇힌 채 하룻밤을
보냈다고 치자. 그런데 이쪽 포구에 있는
주옥경의 남편, 그 이름이 뭐더라......"
"유현식......"
"그렇지. 유현식과 그 통통배의 사공은 왜
무인도로 그들을 데리러 가질 않았느냐, 이
말이야."
추경감이 담배를 소리나게 뻑뻑 빨면서
물었다.
"그게 말입니다. 후후후. 그게 참 공교롭게
되었다, 이 말씀입니다."
강형사는 혼자 못 참겠다는 듯이 웃음까지
추경감 앞으로 들고 와서 그 의자에 걸터앉아
이야기를 시작했다.
강형사의 설명은 대략 다음과 같았다.
지갑과 카메라를 찾기 위해 포구로 다시
돌아온 유현식은 민박집으로 혼자 올라갔다.
통통배 사공은 갯가에 그냥 기다리고
있게했다.
유현식은 장독대 근처에 가서 지갑을
찾았으나 보이지 않았다.우물가로 가보아도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는 다시 자기들 부부가
자고 나온 방으로 가보았으나 그곳에도
지갑은 없었다.
유현식은 당황해서 마당 이곳저곳을
기웃거리다 변정애가 있는 방문으로 다가가
미닫이 문을 확 열어 젖혔다.
변정애한테 물어 볼 생각에서였다.
방 안에서 날카로운 여인의 비명이 들렸다.
방 안에는 변정애가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완전한 누드로 누워 있다가 놀라 외친
것이었다.
변정애는 세 사람이 모두 섬으로 떠나자
무덥고 끈끈한 공기가 싫어 옷을 모두 벗어
젖히고 네 활개를 쭉 뻗고 방 안 가득히
드러누워 있었다. 미열이 있는 머리도 식힐
겸 한숨 자려고 하던 참이었다.
그러다가 느닷없이 문을 열어 젖히는
친구의 남편 앞에 완전히 무방비 상태로
벌거벗은 몸을 드러내 놓은 꼴이 되었던
것이다.
백옥같이 흰 피부에 어제 입었던 비키니
자국이 선명했다. 겨드랑이 밑에서부터 두
개의 젖무덤을 감싸듯 돌아가면서 새하얀
부푼 유방 위에 진달래꽃술 같은 젖꼭지가
매혹적이었다. 평평하고 탄력있는 배를 따라
아래로 흐르던 곡선은 히프 부분에 이르러
급류처럼 크고 둥근 곡선을 만들었다. 그
크고 둥근 곡선의 언덕에도 비키니 자국이
새하얗게 나 있었다. 배꼽 밑으로 내려가던
흰 살결에는 짙은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었다.
비너스의 언덕이었다.
거의 1초도 안 되는 짧은 순간에 유현식은
이 모든 황홀한 모습을 너무나 자세히 보았던
것이 마치 성능 좋은 자기 카메라에 천연색
사진을 담듯, 뇌리에 선명하게 인화를 하고
말았다.
순식간에 따가운 시선에 기습을 당한
변정애는 황급히 몸을 움츠리며 두 팔로
가슴을 싸안은 채 머리를 파묻고 엎드렸다.
정애가 비명을 지르며 몸을 웅크렸다. 마치
고슴도치가 털을 한껏 세우고 자기 몸을
최대한으로 숨기기 위해 웅크리는 모습과
같았다.
"미......미안합니다."
넋을 잃은 유현식은 말을 더듬으며 황급히
방문을 닫았다. 뜨거운 불을 얼굴에 퍼부은
듯 화끈 달아올랐다. 놀랍고 무안한 감정이
그를 더욱 당황하게 만들었다.
유현식이 어쩔 줄을 모르며 마당을 두어
바퀴 돌고 나자 방문이열리며 정애가 밖을
내다보았다.
어느새 스커트며 블라우스를 챙겨 입고
있었다. 남빛에 흰 체크무늬가 있는 폭이
넓은 스커트와 그 위에 받쳐 입은 스카이
블루의 담백한 블라우스가 정애를 더욱
아래 들길에 핀 키 큰 코스모스 같은
인상이었다
유현식은 너무 무안하고 멋쩍어 고개를
비스듬히 돌린 채 방문앞으로 다가갔다.
"유선생님, 왜 안 가셨어요?"
정애도 어색한 분위기를 깨려는 듯 큰
목소리로 말했다. 그러나 그녀도 고개를
옆으로 돌려 포구 앞의 바다에 시선을 던진
채 말했다.
"안 간 게 아니라 갔다가 도로
돌아왔습니다."
"어머! 그러셨어요? 모두 같이 오셨나요?"
정애가 놀란 표정을 지었다.
"아뇨. 저만 돌아왔습니다."
유현식이 툇마루에 슬그머니 걸터앉으며
말했다. 유현식이 다가와 앉자 정애는 공연히
가슴을 두 손으로 여미며 긴장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
변정애가 계속 이해하기 어렵다는 표정을
지었다.
"아, 저...... 정애 씨가 보고 싶어서 온
것은 아니고 말입니다 ......"
"예?"
그 말에 변졍애는 눈을 더욱 크게 뜨며
깜짝 놀란 얼굴이 되었다. 유현식은 농담을
한다는 것이 실수만을 연발하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유현식은 금세 자기가 말솜씨도 없고
유머감각도 부족하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제 지갑 못 봤습니까?"
"예?"
유현식은 당황해서 정애한테는 더욱 이해할
"제 지갑 혹시 못 보셨습니까? 아침에
세수할 때 저기......"
유현식이 말을 더듬거리며 대강 설명을
했다.
"아, 그것 때문에 돌아오셨군요. 그럼
그이와 옥경이는 섬에 있나요?"
변정애는 그제야 모든 것을 알겠다는 듯
안심하고 물었다.
"그럼요. 지금쯤 고기깨나 잡았을 겁니다."
"유선생님 지갑을 주인집 아주머니가
간수를 했을 거예요. 그것때문에 여기까지
도로 오시다니요."
"그럼 어떻게 합니까. 전화도 걸 수
없고......"
"하긴 그렇네요. 호호호"
변정애가 웃으면서 밖으로 나왔다.
"이상해요. 이젠 속도 편해지고 머리가
아주 맑아졌네요."
"그럼 같이 섬으로 갑시다."
"두 사람을 섬에 그냥 남겨 두고 우리는
다른 곳에 놀러 갈까요?"
정애가 장난기 어린 모습으로 유현식을
쳐다보며 물었다. 재미있어 죽겠다는
천진스런 표정이었다.
"예? 뭐라구요?"
그 말을 진짜로 곧이들은 유현식이
발걸음을 딱 멈추고 정애를 내려다보았다.
생글생글 웃는 볼이 너무나 복스럽고
예뻤다.
"호호호. 농담이에요. 유선생님이 옥경이를
얼마나 사랑하시는데, 될 법이나 한
일이에요? 호호호. 참, 유선생님도......그
변정애는 아주 재미있다는 듯이 계속
웃었다.
그들이 포구에 다시 왔을 때, 통통배는
그대로 있었으나 사공이 없었다.
그들은 근방에 소변이나 보러 갔으려니
하고 앉아 기다렸다. 그러나 사공은 좀체
나타나지를 않았다.
"이상한데. 이 아저씨가 어딜 가버렸을까?
여기 잠깐 기다리세요. 내가 다시 집에
가보고 오겠어요."
유현식이 일어섰다.
"저도 같이 갈래요."
변정애가 유현식의 팔을 잡으며 함께
일어섰다. 두 사람은 자연스럽게 팔짱을 끼고
집으로 올라왔다.
"이거 누가 보면......"
재미있다는 듯 생글생글 웃으며 현식의 팔에
매달리는 시늉을 했다.
그들이 집에 도착했을 때 집에는 동네 여자
서너 명이 마당에 와서 서 있었다.
수군수군하는 것이 심상치 않은 분위기였다.
유현식이 안방으로 가보았으나 주인집
부부는 보이지 않았다.
"사공 아저씨를 누가 못 보셨나요?"
정애가 마당에 서 있는 사람들을 향해
물었다.
"읍내에 갔어요. 세상에 이런 딱할
데가......"
한 여인이 혀를 끌끌차며 말했다.
"무슨 일이 있었나요?"
현식이 나서서 물었다.
"글쎄 이 집 딸이 갯벌 앞 벼랑에서 떨어져
병원으로 뛰어갔답니다. 이게 무슨 변고인지,
쯧쯧......"
늙수그레한 여인이 탄식을 했다.
국민학교에 들어갈까말까 한 딸이 그 집에
있는 것을 유현식과 변정애는 어제 저녁에
보았던 것이다. 큰 아들은 도시에 나가
학교에 다니고 막내딸만 데리고 있노라던
주인 아주머니의 말이 생각났다.
그 딸 아이가 아침 잘 먹고 나가 놀다가
벼랑에서 떨어져 중상을 입었다고 했다.
동네 근처 언덕배기에 바닷바람을 막기
위해 심어 놓은 방풍림지대가 있었다.
그곳에서 매미를 잡으려다가 나무 위에서
떨어졌다. 그리고는 언덕으로 굴러 갯벌에
나가떨어졌던 것이다.
그들 부부가 읍내병원에 가서 어린 딸을
다행히 딸의 목숨은 건졌다고 한다.
그러나 그때는 폭풍이 몰아닥치고 파도가
심해 도저히 배를 띄울 수 없는 상황이 되고
말았다.
하루종일 건너편 무인도만 바라보고 있던
유현식은 어두워져서 갈 수 없게 되었다는
사실을 알자 반 미치광이처럼 되어 안절부절
못했다.
변정애도 농담할 기분이 아니었다. 거센
파도가 뱀의 혀처럼 넘실거리는 저 너머
무인도에, 남편이 친구이며 젊고 매력적인
여인주옥경과 같이 있다는 것을 생각하자
미칠 것 같았다. 더구나 남편도 활달하고
모험을 즐기는 성격에다가, 주옥경 역시
외향적인 성격의 소유자다. 통이 크고 대담한
일을 잘 저지르는 여자다. 여고시절에도 다른
수학 여행 갔을 땐 미남 선생으로 이름난
국어 선생님을 꾀어 나이트클럽에 가서 밤을
새우고 온 솜씨였다.
이 두 남녀가 무인도에서 하룻밤을 보내며
무슨 놀라운 일을 저지를지 아무도 모르는
일이었다. 변정애는 손이 떨리고 입술까지
바싹바싹 탔다.
유현식도 끓어오르는 질투 때문에 머리를
감싸 쥐어야만 했다. 유현식은 그냥 앉아
견디기가 힘들었는지 포구를 왔다갔다
하다가비를 흠뻑 뒤집어쓴 채 돌아왔다.
그리고는 변정애의 방을 찾아가 노크했다.
변정애도 방 안에서 물에 빠진 생쥐 몰골을
한 유현식을 맞았다.
강형사의 이야기는 여기서 끝이 났다.
"그 뒤는 어떻게 됐단 말인가?"
한참 듣고 있던 추경감이 몹시 흥미를
느꼈던 모양이다.
"그 뒷이야기는 모릅니다. 아무도 그 이상
이야기를 하지 않으려고 하니까 말입니다."
강형사가 머리를 긁적긁적했다.
"하지만 그 뒤 섬과 포구 양쪽에서 일어난
일을 꼭 알아내고 말것입니다."
강형사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의문의 방문객
변정애 피살사건은 그 뒤 별로 진전을 보지
못하다가 근 일주일이 지난 뒤에 조그만 단서
하나를 강형사가 찾아냈다.
"경감님, 변정애가 죽던 날 아파트를
방문한 사람은 친구인 주옥경 혼자만으로 돼
있지 않습니까?"
"그래서?"
"그런데 그게 말입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그날 주옥경이 다녀간 직후에 어떤 남자가
변정애의 아파트를 찾아갔었습니다."
"뭐라고?"
추경감이 눈이 번쩍 뜨이는 모양이다.
"예. 정말입니다. 30대 초반으로 보이는
미남형 청년이 그 집을 방문했었습니다."
"강형사는 그걸 어떻게 알았나?"
"아파트 경비원이 말했습니다."
"경비원이? 아니, 그러면 그 녀석이
지금까지 허위 진술을 했단 말인가?"
추경감이 화를 벌컥 내며 말했다.
"그런 셈이죠."
"뭣 때문에 그 경비원이 거짓말을 했단
말이야?"
"이거죠."
동그라미를 그려 보였다.
"돈을 받고 거짓말을 했단 말이야? 나쁜
녀석 같으니라구."
추경감은 뜻밖에도 그 일에 몹시 흥분했다.
"그런데, 강형사는 어떻게 그걸 알아냈단
말인가?"
"그 녀석이 뭔가 뒤가 구린 데가 있는 것
같았습니다. 저를 볼때마다 주저주저하는
모습에다, 그날 누가 왔느냐고 물으면
주옥경밖에 안 왔다는 대답만을 했는데
그것이 수상했습니다. 필요 이상으로
주옥경이가 왔다는 것을 강조를 했거든요.
그래서 따지고 들었더니 처음엔 딱
잡아떼더라구요."
"그런데 어떻게 자백을 받았어?"
"그 녀석의 약점을 캐기 시작했지요.
알아내려면 꼼짝못할 약점을 캐내야
했거든요."
"아파트 경비원이 무슨 큰 약점이 있겠나?"
"작은 약점은 누구한테나 있는 법이지요.
녀석은 아파트 주민들이 가끔 주는 팁을 혼자
독식을 한 것이 몇 건 있더군요. 가끔 나들이
잘 하는 사모님이나 심부름 잘 시키는
아저씨들이 팁을 주는데 그것을 한달 동안
모았다가 경비원 넷이서 똑같이 잘라서
가진답니다. 그런데 녀석이 몇 번이나 혼자
독식을 해버린 것을 알아냈거든요. 그래서
그걸 일러바쳐 동료들한테 치사한 인간으로
망신당하게 하겠다고 했더니 손을 들더군요."
"그 사나이가 온 것을 왜 숨겼다고
하던가?"
"그 사나이한테 용돈을 받았다고 하더군요.
아니고 가끔 드나들었다고 하더군요."
"가끔 드나들어?"
"예. 특히 대낮에 그 집에 잘 드나들었다고
하던데요."
"흐흠......"
추경감이 몹시 흥미가 있는 듯 왼손으로
턱을 감싸쥐며 눈을 깜박깜박했다.
"그 사나이 정체가 뭐래?"
"그걸 아직 알아내지 못했습니다. 남편이
출근하고 없는 대낮에, 유부녀 혼자 있는
아파트를 출입하는 사람이라면 일단
비정상적인 일로 봐야 하지 않을까요?"
강형사가 수첩을 꺼내 뒤적거리며 말을
계속했다.
"더구나 경비원한테 돈까지 주면서 자기의
출입을 숨기고 말입니다."
변정애의 아파트를 방문했다면 그건 틀림없이
변정애의 죽음과 관련이 있다는 이야기
아닌가?"
"그렇습니다."
"그러면 그 사나이의 신원을 빨리 알아내야
하겠어."
강형사는 그 뒤 그 의문의 사나이를 캐기
시작했다. 우선 경비원한테 들은 인상을
중심으로 다른 목격자를 찾아보았다. 그러나
그것은 헛수고였다.
강형사는 주옥경을 비롯해 변정애와 가까이
지낸 동창생이며 아는 사람들을 찾아 넌지시
물어 보았으나 아무도 신통한 대답을 해주지
않았다. 그렇다고 함부로 변정애의 남편인
박인구한테 물어볼 수도 없었다.
강형사는 변정애의 유류품 중에서 단서를
우선 변정애의 핸드백에서 나온 조그만
전화번호 수첩을 꺼내놓고 그럴듯한 번호를
찾기 시작했다. 수첩에 적힌 전화번호는
80여개가 있었다. 대부분 여자 이름이 씌어
있어서 동창생이거나, 계원이라는 심증이
갔다.
여자 이름이 아닌 전화는 30여 개가
있었다. 강형사는 그 30여개 전화번호를 모두
직접 걸어 보기로 하고 하나하나 번호를
돌리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 전화도 대부분
아파트 부근의 슈퍼마켓이나 미장원,
헬스클럽 등의 전화번호였다.
딱 세 군데만이 남자가 전화를 받는
사무실이었다. 한 군데는 구청의
민원사무실이고 두 곳은 개인회사였다. 개인
사무실 두 곳중 한 군데는 사법서사
이사실이었다.
강형사는 적당한 핑계를 대고 그 두 곳의
위치를 알아낸 뒤 직접 찾아가 보기로 했다.
먼저 간 곳이 사법서사 사무실이었다.
합동사무실이라서 여러사람이 있었다. 나이
50을 훨씬 넘긴 듯한 대머리 남자 한 사람과
젊은 사법서사 세 명이 있었다. 그러나 그 네
사람은 모두가 의문의 사나이와는 거리가 먼
것 같았다.
강형사는 이번엔 을지로 입구에 있는
건설회사를 찾아갔다. 16층 높이의 현대식
건물 9층에 상무실이 있었다.
7층부터 11층까지 5개 층을 청주건설이라는
회사가 사용하고 있었다.
그는 9층 총무담당 상무실이라는 옆방에
있는 총무과를 먼저 들렀다. 그리고 이
네 명의 상무가 있었는데, 강형사가 전화를
한 상무는 관리담당인 배원기라는 것을
알았다.
강형사가 배원기 상무실에 들어서자, 문
입구에 앉아 있는 여비서가 막았다.
"누구를 만나러 오셨나요?"
"배원기 상무님을 뵈러 왔는데요?"
강형사가 말을 끝내기도 전에 문을 열려고
하자 여비서가 황급히 막아섰다.
"지금 안 계신데요. 무슨 용무로 오신
누구신지요?"
목이 길고 얼굴이 동그란 여비서의
목소리는 다부졌다.
"조금 전에 전화로 약속을 했어요.
잡지사에서......"
강형사는 우물우물하다가 잽싸게 문을 열고
들어갔다.
소파에 앉아서 책을 보고 있던 배원기
상무가 깜짝 놀란 듯 강형사를 쳐다보았다.
<틀림없이 이놈이구나!>
강형사는 속으로 쾌재를 부르며 배원기
앞으로 다가섰다.
"저, 배상무님이시죠?"
"그렇습니다만, 선생은?"
배원기는 여전히 경계의 빛을 늦추지 않고
대답했다.
"예. 이거 실례가 많습니다. 이렇게 불쑥
찾아뵙지 않으면 도무지 상무님을 뵐 수가
있어야죠. 제 소개부터 하겠습니다. 전
월간건설이라는 잡지사에 있는 취재부
차장입니다."
강형사는 거침없이 거짓말을 하면서 앉으란
말도 듣기 전에 소파에 털썩 주저앉았다.
봅니다."
배원기는 그제야 마음이 놓이는지 풀어진
표정이 되었다.
"갑자기 찾아뵌 것은 다름이 아니라, 저희
잡지에 의욕의 건설인이라는 페이지를 새로
마련했습니다. 그래서 제 1차로 배상무님을
인터뷰해서 싣기 위해 왔습니다."
강형사는 자기가 언제부터 이런 거짓말을
잘 꾸며댔는가 하고 스스로 놀랐다.
"제가 무슨......다른 훌륭한 분도 있을
텐데......"
배원기는 이렇게 말하면서 기분은 썩 좋은
모양이었다. 강형사는 천천히 배원기의
이력을 묻기 시작했다.
곧 변정애와의 관계가 어느 대목에선가
나올 것이란 기대를 하면서 질문을 계속했다.
4.노총각 상무님
"건축이란 예술입니다.예술 중에서도 어느
분야보다 웅대하고 다양한 예술입니다.
따라서 건축업에 종사하는 사람은
예술가입니다."
배원기는 강기자 아닌 강형사한테 자기
나름대로의 소신을 말했다.
"배상무님은 굉장한 미남이십니다."
강형사가 중간에 엉뚱한 말을 했다.
배원기의 개똥철학 같은 예술론을 막기
위해서였다.
"내가 그렇게 보입니까?"
배원기는 자기 말을 중간에서 뚝
잘랐는데도 하나도 기분 나쁜 기색이
아니었다. 오히려 미남이라는 말에 만족한
"사람들이 그렇게 얘기들 해요. 하지만
저는 저 자신이 미남이라든가 호남이라든가,
그런 생각을 해본 일은 한 번도 없어요.
허허허. 정말 내가 미남으로 보입니까?"
배원기는 그 말이 그렇게도 마음에 드는
모양이었다.
"학생 시절엔 여학생한테 연애편지깨나
받았겠습니다."
강형사가 점점 이야기를 핵심부분으로
접근시켰다.
"학생 시절? 하하하. 좋았죠. 연애편지
정도가 아니라 육탄공세까지 받았었죠.
하하하."
배원기는 생각만 해도 즐거워 어쩔 줄을
모르는 것 같았다. 지극히 침착하지 못한
기분파인 것 같았다.
지금도 어디든지 나타나기만 하면 대인기일
것 같은데요."
강형사는 이야기를 여기까지 끌고 왔다.
"그렇게 보입니까? 하하하. 역시 기자
나으린 기자 나으리야. 보는것이 정확하고
날카롭거든, 하하하."
"사모님도 미인이겠습니다."
"우리 마누라? 하하하. 어때요, 미인일 것
같습니까?"
"그럴 것 같은데요."
강형사가 의뭉스런 미소를 흘리며
대답했다.
"하지만 아직 미혼입니다."
배원기는 그 부분은 웃지도 않고 말했다.
"예? 그렇습니까? 하기야 상무님과 걸맞는
미녀를 구하기란 쉽지 않을 것입니다. 그렇지
강형사가 담배를 꺼내 물었다.
"그럼, 지금도 상무님을 사모해서 죽자살자
하는 미인들이 줄을 섰겠습니다그려."
강형사가 담배 연기를 천장으로 훅
뿜어내며 질투하는 듯한 제스처를 보였다.
"여자요? 소문난 잔치에 먹을 것 없다고,
노총각한테 접근하는 여자란 그리 많지
않답니다."
"겸손의 말씀이지요. 처녀에서 유부녀까지
상무님의 인품이나 외모에 반하지 않을
사람이 얼마나 되겠습니까? 그러지 말고 좀
털어놓으십쇼. 대기업 고급간부이며 미남인
노총각. 요즘 흔히 말하는 3사보다 조건이
월등 좋지 않습니까?
"3사라뇨?"
"왜, 신랑의 조건이란 것 있지 않습니까?
대인기인 3사 말입니다. 이 총각들한테
시집가자면 세 개의 열쇠, 즉 3키, 혹은 3k가
있어야 한다고 하죠. 아파트열쇠, 자동차
열쇠, 연구실 열쇠. 그런데 상무님처럼
외모까지 갖춘 분이라면 4k가 있어야
시집오겠는걸요."
강형사가 수다를 떨었다.
"4k라뇨?"
"금고 열쇠 하나를 더 가져야 상무님 같은
신랑 얻을 것 아닙니까? 후후후."
"하하하, 금고 키보다는 정조대 키가 훨씬
낫겠습니다. 하하하."
두 사람은 큰 소리로 웃었다.
"그러면 5k가 되겠군요. 후후후."
강형사가 따라 웃으며 흘금흘금 배원기의
표정을 살폈다. 그러나 배원기는 진짜
"좀 털어놔 보세요. 최근에 사귄 미인
이야기 말입니다. 유부녀와의 밀애 같은
로맨스가 있다면 얼마나 멋지겠습니까? 그건
쓰지않을 테니 한 번 털어놔 보십쇼. 상무님
같은 미남한테 그런 아름다운 스캔들이 없을
턱이 있습니까?"
"하긴 그래요. 나이 서른이 훨씬 넘도록
여자를 모른다고 하면 말이 되겠습니까?
처녀인지 유부녀인지 밝히지는 않겠습니다만,
서너 명과 연애를 해본 일이 있지요."
배원기가 제법 엄숙한 표정이 되면서 입을
열었다.
"지금도 진행중이십니까?"
"글쎄요. 알아맞혀 보시지요."
"그 여자가 혹시 미모의 유부녀?"
그러나 배원기는 빙그레 미소만 지어
"그 여자가 불의의 사고로 이 세상을
떠났다고 칩시다. 미남의 노총각과 미모의
유부녀가 이루지 못할 사랑 끝에 영원한
이별을 한다. 그것도 어느 날
갑자기......얼마나 그럴듯한 이야기입니까?"
강형사가 감정을 넣어 가면서 열심히
이야기했다. 그러는 동안에도 열심히
배원기의 표정 변화를 살폈다.
"소설이나 영화 같은 데 나올 만한
이야기로군요. 하지만 이 배원기는 유부녀를
건드리는 그런 치사한 사람은 아니랍니다."
"그렇겠군요. 이거, 미안합니다."
강형사가 멋쩍어하며 머리만 긁적긁적했다.
"기자 나으리, 그럼 이만할까요? 나는 다른
데 갈 시간이 돼서......"
배상무가 소파에서 일어섰다.
"아, 예. 이거 장시간 동안 고맙습니다.
미흡한 점이 있으면 다시 들르겠습니다.
사진도 찍고 해야 하니까. 기사를 쓴 뒤 다시
들르겠습니다."
강형사는 닥치는 대로 거짓말을 하고는
상무실을 나왔다.
"안녕히 가세요."
여비서가 뒤꼭지에 대고 쫓아내듯이 인사를
했다.
강형사가 사라지자 배원기는 여비서를 보고
신경질적으로 말했다.
"그 형사 녀석, 다시 오거든 나 없다고
그래."
"예? 그분이 형사예요?"
"그럼 기자도 수갑을 옷 속에 감추고
다니나?"
그러나 강형사는 배원기가 자기 정체를
강형사는 청주건설의 다른 과를 이곳저곳
돌아다니며 배원기 상무에 대한 여론을 들어
보았다.
그러나 여느 회사와는 달리 그를 나쁘게
말하는 사람은 별로 없었다. 보통
월급쟁이들은 자기의 상사에 대해 좋게
말하지 않는 게 통례였다. 그러나 배원기만은
나쁘게 말하는 사람이 없었다.
"배상무님요? 좋은 사람이죠. 젊고 패기
있고 미남에다가 일찍 출세했지요."
사원들은 대체로 이렇게 말했다.
"배상무님은 이 청주건설의 사주님과 무슨
관계가 있습니까?"
강형사가 총무과의 홍보담당이라는 젊은
사원을 붙들고 이것저것 물어 보았다.
"친척이라든지, 그런 걸 묻는 겁니까?"
? "예."
"30대 초반인데 어떻게 상무까지 됐느냐,
그 말씀이군요."
홍보담당은 눈치가 빨랐다.
"그런 질문이 됐나요?"
강형사가 멋쩍어했다.
"친척도 아무것도 아니랍니다. 배상무님은
원래 공무원이었습니다. 건설회사와 밀접한
관계가 있는 부처의 사무관이었지요.
행정고시 출신이랍니다."
"그런데 어떻게 해서......"
"잘은 모르지만 이 청주건설을 너무
봐주다가 이거 됐던가 봐요."
홍보담당은 손가락으로 목을 자르는 시늉을
했다.
"음......그렇게 됐군요."
"하지만 굉장히 샤프하고 똑똑한
쓰시는 건 아니겠죠?"
홍보담당이 갑자기 불안한 표정이 되었다.
"염려 마십시오. 나쁜 이야기는 쓰지 않을
테니까요. 그런데 한가지만 더 물어
보겠어요. 왜 여태 독신으로 있나요?"
"글쎄요. 그거야말로 프라이버시
아니겠어요?"
"사귀는 여자는 없나요?"
"그걸 전들 어떻게 압니까? 하지만 왜
없겠습니까?"
홍보담당이 빙긋이 웃으며 말했다. 뭔가
안다는 표정이었다.
"쓰지 않을 테니까 좀 얘기해 주십쇼."
강형사가 바싹 다가앉으며 말했다.
"소문에는 여러 여자와 사귄다는 얘기가
있어요. 바람둥이가 아니냐는 얘기도
결혼을 못 하는 것 같아요. 나도 배상무님이
데이트하는 건 몇 번 목격을 했는데......"
"목격을 해요? 잠실 쪽에서?"
강형사가 갑자기 엉뚱한 말을 해버렸다.
변정애의 아파트가 잠실에 있다는 생각
때문에 불쑥 나온 말이다.
"예? 그걸 어떻게 아세요?"
이번에는 홍보담당이 깜짝 놀랐다.
"틀림없군요. 본 일이 있군요?"
강형사는 귀가 번쩍했다.
"기자님도 보셨다니깐 말씀드리죠. 저희
집이 잠실 거상아파트에 있거든요. 그래서
전철 잠실역에서 내려서 집에 가는 길에 가끔
들르는 조그맣고 아담한 카페가 있답니다.
그런데 그 카페 구석 자리에서 어떤 여자와
데이트하고 있는 것을 여러 번
"그 카페 이름이?"
"레만 호."
"어떤 여자였습니까? 미인입니까?"
"글쎄요. 자세히는 못 봤지만 미운 얼굴은
아니고, 코가 오똑하고 눈과 입이 작긴
하지만 귀엽게 생긴 여자였어요. 어떻게 보면
처녀 같고 어떻게 보면 나이깨나 든 유부녀
같고......아니, 내가 무슨 얘기를 하는
거야. 이거 모두 안 들은 걸로 해주세요.
상무님 귀에 들어가면 큰일납니다."
홍보담당은 다시 불안한 표정이 되었다.
"걱정 마십쇼. 절대로 잡지에 쓰지 않을
테니깐요. 정말 고마워요."
강형사는 재빨리 그 자리를 빠져 나왔다.
그리고 잠실로 가는 전철역으로 뛰다시피
바삐 갔다.
지하 1층에 자리한 카페는 대낮이라 그런지
손님은 별로 없었다. 커피를 마시는 젊은 한
커플만이 앉아 있었다.
실내는 아늑하고 품위 있게 잘 꾸며져
있었다. 한가운데에 그랜드 피아노가 한 대
놓여 있고, 다색의 피아노 위에는 빨간 장미
한송이가 맑은 물컵에 꽂혀 있었다.
"누가 오시면 같이 드시겠어요?"
어느새 종업원이 강형사 앞에 와 섰다.
일행을 기다리는 걸로 알았던 모양이다.
"아뇨, 나 혼자 왔어요."
"그럼 뭘 드릴까요?"
"이 집에서 제일 비싼 음료수가 뭐지?"
강형사가 여종업원을 보고 반 농조로
말했다.
"낮엔 술을 팔지 않거든요. 그래서......"
게 있나?"
강형사는 여종업원의 아래위를 훑어보다가
의외로 어린 것을 발견하고는 말을 낮추었다.
"비엔나 커피라든가......"
"좋아요. 비엔나 커피 두 잔."
강형사가 손가락 둘을 펴보였다.
"예? 두 잔을 혼자 잡수시게요?"
"아니, 아가씨랑 둘이서 마시지."
강형사가 애교를 잔뜩 부리며 말했다.
"어머, 저한테도 사주시는 거예요!"
그래서 강형사는 여종업원을 한 테이블에
앉혔다. 그리고 배원기 상무에 대해 이것저것
캐물어 보았으나, 아가씨는 전혀 아는 것이
없는 것 같았다.
변정애에 대해서도 침이 마를 정도로
열심히 용모를 설명했으나 알지를 못했다.
해요."
그도 그렇다. 강형사는 공연히 비엔나 커피
두 잔 값만 물고 일어설 수밖에 없었다.
의혹의 눈초리들
주옥경은 뒤늦게 자기가 변정애 살해
용의자로 주목받고 있다는 것을 어렴풋이
느꼈다. 추경감이나 강형사로부터 여러 번
똑같은 질문을 되풀이해서 받은 데도 원인이
있지만, 남편인 유현식이나, 변정애의 남편인
박대리가 자기를 보는 눈이 이상해졌다는
것을 눈치챘다.
더구나 남편 유현식은 가끔 조심스럽게
무인도 바캉스건에 대해 질문을 했다.
어느 날인가, 안방에서 주말의 명화를 보고
있던 밤이었다. 토요일이라 내일은 남편이
필요도 없는 날이다.
옥경은 아껴 두었던 핑크빛 잠옷을 꺼내
입고 옷깃에 향수까지 약간 뿌렸다.
그리고 옅은 크림 화장을 한 뒤,
양치질까지 깨끗이 하고 안방으로 들어갔다.
남편은 잠옷바람으로 벽에 베개를 놓고
허리를 괸 채, 누운 것도 앉은 것도 아닌
엉거주춤한 자세로 텔레비전을 보고 있었다.
유현식은 그런 자세가 보기는 흉해도
자기한테는 편하다고 늘 말했었다.
옥경은 방문을 열고 살짝 웃어 보인 뒤
부엌으로 가서 맥주 한병과 마른 안주 두어
가지를 챙겨 가지고 다시 안방으로 갔다.
오랜만에 남편과 둘이서 맥주 한 컵씩을
마신 뒤 오붓하고 뜨거운 밤을 보내고 싶었던
것이다.
남편이 맥주병을 보고 반가워했다.
"떡이 아니라 술이에요."
옥경은 한껏 미소를 지어 보이며 허리를
꼬아 보였다. 공연히 어깨를 흔들어 유방이
분홍빛 잠옷 위로 출렁거려 보이게 했다.
남펴도 싫지는 않은 모양이었다. 술 한
잔을 단숨에 쭉 들이킨뒤 안주 대신 옥경의
입술을 쭉 빨았다.
"아이, 내 입술이 뭐, 오징어 대가린가요?"
옥경이 곱게 눈을 흘겨 보였다.
유현식은 발로 자그만 술상을 슬그머니
밀어 벽 쪽으로 붙였다. 동시에 팔은 옥경의
허리를 감아쥐고 지그시 잡아당겼다.
"아이, 영화 좀 보고요."
옥경이 발딱 일어나 전등 스위치 끈을
잡아당겼다. 환한 백열등이 꺼지고 붉고
"달빛 같죠?"
옥경이 유현식의 품에 안기며 귀뿌리에
입술을 대고 누가 들을세라 아주 낮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그때였다. 텔레비전 화면이 갑자기
바뀌면서 탁 트인 바다 장면이 나왔다. 거센
파도가 화면 가득히 몰려왔다. 그 기세는
마치 텔레비전에서 튀어나와 방 안을 덮칠 것
같았다.
그 장면을 물끄러미 보고 있던 유현식이
갑자기 자세를 후다닥 고치며 억센 두 손으로
옥경의 양팔을 꽉 쥐고 옥경을 노려보았다.
옥경은 이 돌연한 남편의 변화에 기겁을
했다. 하마터면 소리를 지를 뻔했다.
"당신 말야, 바른대로 말해. 지난 여름
휴가 갔을 때 박인구 놈하고 무슨 짓을
주옥경은 너무나 놀라 말이 나오지 않았다.
"......!"
"바른대로 말해. 전부터 박가 놈을 노리고
있었지? 나하고 결혼하기 전부터 박가 놈과
아는 사이였지?"
유현식은 갑자기 미친 사람 같았다. 평소에
과묵하고 꼼꼼해서 벙어리 컴퓨터란 말을
들어온 유현식의 이 돌연한 태도에 옥경은
자지러질 것 같았다.
"당신 지금 무슨 얘길 하는 거예요?"
"그 무인도에서 밤새우며 무슨 짓을 했어!
난 그날 밤만 생각하면 피가 거꾸로 도는 것
같단 말야."
"여보, 왜 이래요. 그 얘길 지금 와서 왜
꺼내는 거예요? 내가 몇 번이나 그때
설명했잖아요. 어쩔 수 없었다고......"
못해 나 몰래 만났지?"
"여보!"
옥경이 비명을 질렀다. 남편의 상상이
지나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질투 끝에 변정애 씨마저 죽여
버린 것이지!"
"여보......"
주옥경은 그만 울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그 이후 유현식은 한 번도 그 이야기를
꺼내지 않았다. 그러나 두 사람이 사랑을
나눌 때마다 그 생각을 한 번씩은 떠올리게
되었다. 그러니까 사랑의 행위도 자연히
어색한 구석이 생기지 않을수 없었다.
그런 데다가 변정애의 남편인 박대리마저도
태도가 이상했다.
옥경이 휴일 같은 날은 가끔 다른 친구들과
친구가 죽고 없는, 친구 남편이 혼자 사는
아파트를 무엇 때문에 유부녀가 찾아가느냐고
한다면 할 말은 없다. 그러나 두 부부는
그야말로 형제처럼 가깝게 지냈기 때문에
형수가 시동생을 보러 가듯, 혹은 처제가
형부를 보러 가듯, 그 집에 들러 이것저것
살림을 살펴 주었다.
때로는 밑반찬도 준비해 주고, 김치도
담가 주고 왔다.
그럴 때마다 박대리가 옥경을 대하는 것은
그 전과 같지 않았다. 옥경의 시선을 자꾸만
피하는 것 같았다. 그리고 옥경이 말을
걸어도 입을 꾹 다물고 좀체 답변을 하지
않았다.
그러다가 마침내 어느 날 거북한 말을
했다.
"저, 미스 주."
한참 주저하던 박인구가 입을 열었다.
그는 옥경을 늘 그렇게 불렀다.
"예."
"이거 내 말을 오해는 하지 말고 들어
주십시오. 저어......"
박인구답지 않게 말이 어둔했다. 쾌활하고
농담 즐기기로 이름난 박대리가 이상했다.
"뭐든지 말씀하세요."
옥경이 생긋이 웃으며 부동자세로 선 채
박대리를 쳐다보았다.국민학교 여학생이
교장선생님을 쳐다보는 자세였다.
"저......다음부터는 우리 집에 당분간
오지 않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박대리는 옥경의 시선을 피해서 딴 곳을
쳐다보며 말했다.
"예?"
같았다.
그날 집으로 돌아오며 옥경은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처음엔 충격으로 그냥 멍하던
가슴이 시간이 흐를수록 괘씸한 생각으로
변해 갔다. 옥경은 몇 번이나 주먹을 쥐었다
폈다 하며 분을 삭였다. 그 분한 생각은
며칠이 지나자 의심으로 변하기 시작했다.
<그렇지, 그럴지도 몰라. 박대리가 아내인
정애를 죽인 거야. 그리고 나서 양심의
가책을 받은 거야. 나를 보니까 더욱 그런
생각이 들겠지.>
<아니야. 박대리는 내가 정애를 죽였다고
생각하는 거야. 이러다가 정말
큰일나겠는데......>
옥경은 갑자기 겁이 덜컥 나고 가슴이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위해서는 박대리의 약점을 캐내야 해. 범인이
박대리라는 증거를 찾아내야 해. 찾아내지
못하면 만들어 내기라도 해야 한단 말이야.>
옥경은 이렇게 생각했다. 그리고는
박대리의 최근 행적에 대한 것을 캐기
시작했다.
주옥경은 박인구의 주변 인물이며 단골로
다니는 집들을 찾아다니면서, 박대리의
뒷조사를 하기 시작했다. 옥경은 스스로
이것이 추적, 혹은 탐문수사라는 것이라고
생각하며 쓴웃음을 지었다.
이렇게 근 일주일을 쏘다닌 보람이 제법
있었다.
박대리가 자주 다니는 술집 서너 군데를
알아냈다. 그리고 그 술집에 오면 꼭 찾게
된다는 아가씨 이름도 몇 명 알아냈다.
있다는 것을 발견하고는 놀랐다.
그중에도 이태원에 있는 한 룸살롱의
얼굴마담 백정미라는 여자와는 보통 사이가
아니란 것도 알아냈다.
남자들이란 뒤를 캐보면 모두가 이런
것인가 하고 환멸을 느끼기까지 했다.
백정미에 대해 이곳저곳의 연줄을 갖다대
더욱 자세한 것을 캐던 옥경은 마침내 이상한
것을 발견했다.
변정애가 죽던 날, 사고가 난 그 시간에
박대리가 잠적해 있었다는 사실이었다.
박대리의 후배이며 같은 직장 부하인
김민수라는 한국단자사원의 증언이었다.
평소에 잘 알고 지내던 옥경은 김민수를
통해 그날 낮의 상황을 자세히 들었다.
"그날 회장님 주재 회의가 갑자기 열렸는데
박대리를 아무리 찾아도 없었거든요."
"박필수 회장 말씀이죠? 회장 주재 회의에
대리까지 참석합니까?"
옥경이 김민수한테 물었다.
"박대리님이야 계급이 대리지 실제는
한국단자의 후계자 아닙니까."
김민수가 큰소리로 대답했다.
5.박대리의 비밀
그날 중역회의는 11시부터 시작되어 오후
3시가 넘어서야 끝났다. 박팔수 회장은 한 번
회의를 시작하면 끝날 줄을 몰랐다.
"그럼 점심도 굶고 말입니까?"
옥경이 김민수한테 물었다.
"웬걸요. 점심은 회의 도중에 김밥 같은 걸
시켜서 먹는답니다. 우리 회장님은 회의를 할
때는 사전에 예고를 하는 법이 없답니다.
느닷없이 회의를 소집하기 때문에 약속이
있던 중역이나 외출중인 이사들은 혼이 나곤
하지요."
"그래서 그날은 박대리가 끝내 참석을 못
했나요?"
"그랬던 것 같아요. 박대리가 11시께 점심
하곤 했다. 희대의
색한이었다는 카사노바와 로
약속이 있다면서 나갔지요. 나가면서 급한
일이 있으면 연락하라고 삐삐 넘버를
적어놓고 갔거든요."
"삐삐가 뭐예요?"
"무선호출기 말입니다. 허리에 차고 다니는
개패라는 거지요. 필요할 때 이쪽에서 전화로
넘버를 돌리면 삐삐 소리가 나지요."
김민수가 까맣고 조그맣게 생긴 비눗갑
같은 것을 내보였다.
"그래서 박대리를 삐삐로 급히 불렀지요.
한 서너 번 불렀을 때 전화가 걸려 왔어요."
"박대리한테서요?"
"아뇨. 웬 젊은 여자가 전화를 걸어서 저를
찾지 않겠어요? 그러더니 박인구 씨를
찾았느냐고 물어요. 그래서 제가 좀 바꿔
달라고 했더니, 지금 화장실에 계시니까
나오면 전화를 한다고 했어요. 그리곤 거기가
"그래서 연락이 안 되었나요?"
옥경이 침까지 꼴깍 삼키면서 물었다.
"1시가 훨씬 넘어서 내가 다시 삐삐로
불렀지요. 그랬더니 2,3분 후에 다시 그 젊은
여자가 전화를 걸어 왔어요. 또 찾느냐는
거예요. 찾고 무엇이고 아직 연락이 안
됐다고 했더니 그쪽에서 되려 이상해하는
거였어요. 내 전갈을 받고 회사로 간다면서
12시께 나갔다는 거예요. 그리고 급히 가느라
삐삐도 거기 두고 갔으니 박대리가 오거든
이태원으로 연락해 달라고 하더군요."
"예? 이태원으로요?"
주옥경이 깜짝 놀라며 외쳤다. 옥경이
지나치게 놀란 표정이 되어 큰 눈을 더욱
크게 뜨자 김민수가 도리어 어리둥절해서
쳐다보았다.
"왜 그렇게 놀라십니까? 그 여자를
아십니까?"
주옥경은 이 사람이 얼굴마담 백정미를
모른다고 생각했다.
"아뇨. 그래서 어떻게 되었나요? 박대리는
끝내 찾지 못했나요?"
"그게 말입니다. 참 이상도 하단
말입니다."
김민수가 이 대목에 와서 혼자 고개를
갸웃거렸다.
"뭐가 이상해요?"
"저는 그래서 박대리가 들어오기만
기다리고 있는데 중역회의가 끝날 때까지 못
본 것입니다."
"그런데 뭐가 이상해요?"
"이사회의가 끝나자 박대리가 그 방에서
나오는 게 아니겠어요?"
옥경이 또 놀랐다.
"그럼 이사회의에 참석하고 있었단
말입니까?"
"분명히 그랬습니다. 몇 시쯤 들어갔는지는
모르겠는데 어느새 회의실에 들어가 있었던
것이에요. 아마도 빠르면 11시께고, 늦으면
3시께일 것입니다. 하여튼 회의에 참석을
했으니까요."
"그럼 이태원의 그 여자는 뭐예요?"
"글쎄 말입니다."
주옥경이 잠깐 혼자 생각해 보았다.
박인구는 점심 시간에 이태원의 백정미
집에 들렀을 것이다. 거기서 간단히 점심을
먹고 나왔을 것이다. 아니, 삐삐를
떨어뜨린것을 보면 옷을 벗었거나 입었다고
상상할 수 있다. 그렇지 않으면 허리띠에
것이다. 대낮에 백정미의 방에서 허리띠를
풀었다면 뻔한 일 아닌가.
박인구는 백마담과 대낮의 정사를 즐긴 뒤,
김민수가 첫번째 삐삐를 불렀을 때 진짜
샤워를 하고 있었기 때문에 대신 전화를
했는지도 모른다. 아니면, 박대리가 일을
끝내고 백정미의 집에서 나간 뒤였는지도
모른다. 백정미가 둘러대느라 거짓말을 했을
수도 있다.
평소 박인구와 백정미는 전화로 온갖
이야기를 다 나누는 사이였으니까
전화번호쯤은 서로 외워 가지고 있었을
것이다.
백정미의 집에서 나온 박인구는 곧장
회사로 들어가 김민수가 보지 않는 다른
문으로 회의실에 들어갔을 수도 있다. 아니면
것을 보지 못했을 것이다. 여기까지 생각하던
옥경은 고개를 흔들었다.
아니, 백정미의 집에서 나온 박대리는 곧장
잠실 집으로 갔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변정애를 어떻게 한 뒤에 회사로 돌아와
일부러 김민수 눈에 띄지 않게 회의실에
갔을지도 모른다.
아니면 처음부터 백정미의 집에는 들르지도
않고 알리바이만 만들게 해놓고 곧장 잠실
집에 들러 일을 저지른 뒤 회사로 돌아갔을
가능성도 있다. 그날 이사회가 있다는 것을
미리 알고서 김민수와 백정미를 이용한 것일
수도 있다. 박대리 같은 능수능란한 사람이
삐삐를 백정미 집에 실수로 놓고 다니지는
않았을 것이라고 주옥경은 생각했다.
"아주머니는 언제 뵈어도 처녀 같아요."
가만히 들여다보며 나직한 목소리로 말했다.
"예? 막 놀리시는 거예요?"
옥경도 기분이 나쁘지는 않았다. 끈끈하고,
어쩌면 약간 탐욕스럽기까지 한 김민수의
시선이 얼굴에 달라 붙는 것 같았다. 옥경은
표정을 바꾸면서 더 끈끈하게 달라붙는
시선을 떼어 냈다.
"우리 차 한 잔 더 마셔요."
옥경이 큰소리로 말했다. 분위기를 바꾸고
싶었다.
두 사람이 마주앉은 대한투자건물의 지하
다방은 형광등 불빛이 꼭 햇빛처럼 밝았다.
주옥경은 정애의 집에서 김민수를 여러 번
보았다.
김민수는 마치 박대리의 비서나 되는
것처럼 늘 행동했다. 나이나 계급으로
보면 꼭 비서와 사장님 사이 같았다.
박대리가 재벌그룹의 후계자가 될지 모른다는
위치 때문에 자연히 그런 관계가 성립된 것
같았다. 김민수는 자기보다 오히려 한두 살
아래인 듯한 변정애한테도 깍듯이 사모님
대접을 했다.
정애와 옥경이 함께 있는 자리에서
정애한테는 꼭 사모님이라고 불렀지만
옥경이한테는 그냥 아주머니라고만 불렀다.
옥경은 그럴 때마다 몹시 언짢아했다.
김민수 같은 속물이 메스껍도록 미웠다. 그뿐
아니라 항상 마음속에 지니고 있던 패배감
같은 것이 되살아났다. 그것은 정애와 함께
자란 학창 시절부터 정애한테서 느끼던 그
패배감이었다.
학창 시절의 패배감이 시집가서까지
약오르는 일이었다.
학창 시절 공부에서 지고, 대학 시절
사랑에서 지고, 시집간 뒤또 남편
경쟁에서까지 졌다고 옥경은 생각했다.
박대리는 재벌그룹의 후계자인데 유현식은
전자제품 대리점의 점원에 불과하다는 것이
너무나 속상했다. 그러기에 김민수 같은
속물한테도 차별 대우를 받아야 한다는 것이
늘 마음에 걸렸다.
"실례했어요. 바쁜데 미안합니다."
옥경이 자리에서 일어서며 김민수한테 작별
인사를 했다.
"뭐 급하지 않으면 저녁이라도 제가
대접하고 싶은데요."
김민수가 엉거주춤 따라 일어서며 말했다.
"아녜요. 빨리 가봐야 해요. 우리 그이하고
일찍 나와 시간 보낼 데가 없어서 그냥 들러
본 거예요."
옥경은 터무니없는 거짓말을 둘러댔다.
자기가 일부러 김민수 같은 하찮은 사내를
만나러 다니는 사람이 아니란 것을 말해 주고
싶었다.
"그럼 대리님이라도 만나 보시렵니까?"
김민수가 깍듯이 대리님이라고 하는 것은
물론 박인구를 말하는 것이다.
"아니에요. 시간이 없어서 그래요. 제가
들렀단 말 하지 말아 줘요. 오늘 고마웠어요.
다음에 정식으로 우리 만나 한 잔 해요."
옥경이 생긋 웃어 보였다.
"예? 정식으로 한 잔 해요? 좋지요. 제가
사겠습니다. 아주 분위기 있는 곳을 제가 잘
알거든요."
홍조까지 띠었다.
옥경은 지하 다방을 나와 곧장 이태원으로
갔다. 버스 속에서 시계를 보니 5시
반이었다. 백정미가 경영하는 살롱은 아직
다방일 것이란 생각을 했다. <주간 다방>이란
대개 해가 떨어져야 술집으로 바뀌기
때문이다.
옥경의 그 생각은 맞았다. 살롱은 6층
건물의 지하에 따로 출입구가 있었다.
지하 살롱은 겉보기와는 아주 달랐다.
넓은 홀과 사방에 세련된 인테리어로
커버한 룸 같은 것이 여러개 있었다.
가운데는 스탠드 바처럼 생긴 메인
테이블이 둥그렇게 마련되어 있었다. 거기서
칵테일이나 맥주 같은 걸 미희들이 서브하게
되어 있었다. 낮에는 단정하게 차려입은
웨이터 두 사람만이 차를 나르고 있었다.
옥경은 비엔나 커피 한 잔을 시키면서
웨이터한테 말을 걸었다.
"백마담 아직 안 나오셨나요? 백정미 마담
말이에요."
"예, 백마담 말씀이죠? 저기 내실에
계신데요."
미소년인 웨이터가 생글생글 웃으며
친절하게 대답했다.
"좀 만났으면 좋겠는데요."
"예, 친구분이신가요?"
"친구는 아니지만......"
옥경은 무작정 만나 보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제가 말씀드릴게요."
미소년은 더 이상 묻지 않고 안으로
들어갔다.
여인이 옥경이 앞에 나타났다.
이마 위는 머리를 잘라 단발머리인데 양쪽
뺨으로는 생머리를 길게 늘어뜨린 독특한
헤어스타일의 여인이 심각한 표정으로 옥경이
앞에 와서 섰다. 옥경은 살롱 마담이라고
해서 혼자 상상하던 여인과는 너무도 다른
모습의 여인이 나타나 잠시 멍멍했다.
"제가 백정미인데요. 찾으셨나요?"
백정미는 경계하는 빛까지 역력했다.
"예, 안녕하세요. 이거 초면에
미안합니다."
옥경은 가볍게 목례를 하며 웃어 보였다.
그리고 맞은편에 앉으라는 시늉을 했다.
요란한 헤어스타일에 짙은 화장, 그리고
치기까지 도는 화려한 옷차림에 세련된
미소를 잃지 않고 애교가 철철 넘치는 사람.
옥경은 백정미를 보면서, 상상이 빗나간 데에
속으로 적이 놀랐다.
여고생 같은 헤어스타일에 약간 우수가
깃들인 듯한 표정, 그리고 전혀 화장기가
없는 풋풋한 얼굴. 검은 줄이 들어간 회색
원피스 차림이 그녀의 표정과 아주 잘
어울렸다. 헤세의 소설에 나오는 지성미
넘치는 여주인공과 비슷한 분위기를 가진
여인이라고 옥경은 생각했다.
"저어, 처음 뵙겠습니다. 미스 박이라고
해요. 지나가다가 입구에 여종업원 모집이란
광고를 보고......"
옥경이 처음부터 마음속으로 생각하고 있던
거짓말을 했다. 살롱을 들어서면서 계단
입구에 붙어 있는 쪽지를 보았기 때문이다.
"응, 그랬어?"
180도 달라졌다. 경계하는 듯한 표정이 말짱
가시고 교활한 여우 같은 웃음이 금방 얼굴에
가득 찼다. 백정미는 옥경의 맞은편에 의자를
바싹 당겨 놓으며 앉았다. 그리고 찬찬히
옥경의 얼굴이며 몸매를 살폈다.
"미스 박이라고 했지?"
금방 반말이 튀어나왔다. 옥경은 아니꼽기
짝이 없었지만 그냥 참았다.
"예, 박옥자라고 해요."
"물론 진짜 이름은 아닐 테고......몇
살이지?"
옥경은 더욱 아니꼬웠지만 전혀 내색을
하지 않았다.
"올해 여섯이에요."
"음. 조금 나이가 많긴 하지만, 경험은
얼마나 돼? 방석집에 있었어?"
"그럼 다방에 있었나?"
"아뇨."
"그럼?"
"인천서 룸살롱에 있었어요."
옥경은 내친 김에 거짓말을 해댔다.
"그래? 얼마나 있었어, 미스 박?"
백정미는 능숙한 솜씨로 담배를 꺼내 피워
물었다. 담배를 꼬나무는 폼이나 성냥을
그어대는 모습이 아주 세련되었다. 서양
영화에 나오는 한 장면처럼 멋있게 담배를
피워 물며 다리를 꼬고 앉았다.
그녀의 행동 하나하나가 옥경에게는
처음부터 거부감을 주었다. 그녀가 친구인
변정애의 자리를 빼앗으려는 여자라는 생각이
들자 더욱 거부감을 느꼈다. 아니, 그보다
박대리의 정부라는 것이 더 반감을 느끼게
박대리는 옥경의 남편도 애인도 아니다.
그런데 친구인 변정애의 라이벌이란 것보다
박대리의 정부라는 생각이 더 반감을 느끼게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물장사판에 뛰어든 게 몇 년이나
되었느냐니까?"
옥경이 잠시 생각에 잠기자 백정미가
담배연기를 훅 옥경의 얼굴에 뿜으며 말했다.
"5,6년 되어요."
그녀가 말을 탕탕 놓는 게 몹시 화가
났지만 그냥 참고 있었다.
"응, 그런데 왜 그만뒀나? 인천서 말이야."
"이 직업이 뭐 한 곳에만 붙어 있게
만드나요?"
"응, 알겠어, 남자들이 그냥 두질 않지.
미스 박처럼 얼굴이 반반하면 더욱 그렇지.
그래 집은 어디야? 인천서 먹고 자고......"
"아뇨. 한남동에 방을 얻었어요."
"혼자?"
"......"
"알겠어. 저 얼굴에 뭐 혼자 있지는
않겠지. 어디 좀 일어서 볼까?"
옥경이 일어섰다.
"한 바퀴 돌아 봐."
"예?"
"그 자리서 그냥 뒤로 돌아서 봐."
백마담은 옥경의 몸매를 보려는 것이었다.
옥경은 수치심으로 얼굴이 확 달아올랐으나
참았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뒤로 돌아서
보였다. 히프를 한껏 흔들며 몸매를 보여
줬다.
"아주 멋져. 어쩜 몸매를 그렇게 잘
가꿨어. 특히 나이 지긋한 손님을 살살
주옥경은 자신이 완전히 인육시장의 노예가
된 것같이 느껴졌다. 거짓으로 잠깐 이 짓을
하는데도 이런 모멸감을 느끼는데 이 직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은 얼마나 수치감과 절망감을
참고 견딜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미스 박, 내 맘에 아주 쏙 들었어. 자,
우리 저쪽 방에 가서 한잔하며 얘기하지."
백정미는 마담이 여급을 거느리는 듯한
당당한 태도로 일어서서는 앞장서 한쪽
구석으로 들어갔다.
옥경은 마음속으로 화도 났지만 은근히
호기심도 생겨서 그녀를 따라갔다. 살롱 뒤에
조그만 내실이 있었다. 백마담이 평소
거처하는 방 같았다. 그리 크지 않은 방에
전깃불이 켜 있었다. 정갈하게 정돈된 간단한
가구 틈에, 화려한 레이스 커버로 덮인
침대 옆에 대나무 바구니 모양의 전기
스탠드가 있고, 그 옆에는 조그만 티크
무늬의 경대가 자리잡고 있었다. 문간 쪽에는
조그만 간이 소파 두 개와 티 테이블이
보였다. 그 뒤에 조그만 도어가 있었는데, 그
안은 욕실 겸 화장실인 것 같았다.
"거기 좀 앉아요."
백정미는 간이 소파를 옥경에게 권하며
냉장고를 열고 양주컵 두 개와 시버스리걸 한
병과 얼음 그릇을 들고 왔다.
그리고는 능숙한 솜씨로 온더록스 두 잔을
만들었다.
그 동안 옥경은 방 안의 이것저것을 열심히
살폈다. 침대의 발치에 놓인 조그만
텔레비전, 그 옆의 VTR, 냉장고, 비키니
옷장, 그런 것들이 간결하면서도 편리하게
사방을 둘러보던 옥경의 눈이 이번엔 앞에
놓인 티 테이블로 왔다. 손바닥만한 티
테이블엔 유리가 깔려 있었다. 그 유리를
내려다보던 옥경은 하마터면 큰소리를 지를
뻔했다. 유리 밑에는 백마담과 박대리가
나란히 앉아 찍은 컬러사진이 한 장 들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박대리는 왼손으로
백정미의 어깨를 감싸고 한껏 파안대소를
하는 모습이었다. 백정미는 수줍게 웃으면서
박대리의 얼굴을 쳐다보고 있는 그런
사진이었다.
가슴에서 뭔가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것
같은 분노의 감정이 일었다. 귓볼이 화끈하게
달아올랐다. 주먹으로 사진의 면상을
내리치고 싶은 충동을 일으켰다. 그 두
사람의 모습이 그렇게 추하고 비열하게 보일
따지고 보면 박인구와 옥경은 아무런
사이도 아니다. 단순히 친구의 남편일
뿐이다. 그런데 왜 그 사진을 보며 그렇게
분노를 느껴야 하는지 자기도 알지 못했다.
죽은 정애가 불쌍해서 그런 것일까? 옥경은
자기 마음을 스스로에게 물어 보았다.
그런 줄도 모르고 죽어간 불쌍한 정애
때문에 분노 같은 걸 느끼지 않는다고는 말할
수 없었다. 그러나 그보다는 강렬한 질투가
일었다는 것이 옳을 것 같았다.
그렇다면 박인구가 젊은 여자를 정부로
얻었는데 왜 자기가 질투를 해야 하는
것일까? 박인구가 주옥경의 남자였단 말인가?
"자, 우리 만남을 축하해요."
백정미가 온더록스 잔을 옥경이 앞에
내밀었다. 옥경은 이글이글 타는 눈을
잔을 받았다. 그리고 한 모금 마셨다.
혀끝부터 화끈했다.
"기본은 두 장, 그 외 팁은 손 안 대요.
오늘 밤부터 나올 수 있지?"
"오늘 밤부터?"
옥경도 화가 나서 반말로 응수를 했다.
"볼일 있으면 내일 밤부터라도 괜찮아.
집이 마땅치 않으면 내 살림집에 와서 함께
살아도 좋아. 아파트지만 빈 방은 여러 개
있으니까."
"왜 그렇게 후한 대접을 하죠?"
이번엔 옥경이 약간 빈정대듯이 말했다.
"맘에 들었어. 솔직히 말해 요즘 반반한
애들 구하기 힘들어. 미스 박만한 애 놓치고
싶지 않아서 그래."
옥경은 어처구니가 없었다. 이번엔 완전히
따지면 백정미보다 자기가 더 위일지 모른다.
그런데 이런 세계에선 그런 것이 다 소용없는
것 같았다. 몸을 팔아 사는 판에서 나이는
따져 무엇하는가 싶은 생각이 들었다.
"내 점잖고 부티나는 단골들 많이 붙여 줄
테니까 잘 붙들어. 너도 언제까지 이 짓 할
수 없잖아. 빨리 돈 벌어 손털고 일어나란
말이야. 너만한 인물이면 좋은 데 시집갈
수도 있어. 까짓거 이런데 굴러다녔다고 재벌
2세 사모님 안 되라는 법 있니?"
백정미는 이번엔 완전히 투정조로 나왔다.
자기 신세타령 같았다.
"생각해 보고 다시 올게요."
주옥경은 잔을 다 비우고 일어섰다.
박대리와의 관계며, 정애가 죽던 날의 일을
물어 보고 싶었으나, 꺼내지 않았다. 다음에
"가려고? 밤에 나오니?"
백정미가 오히려 놓치면 안 된다는 듯
옥경에게 바싹 달라붙었다.
"연락할 전화번호라도 적어 놓고 가."
"염려 말아요. 내일 밤 다시 오겠어요."
주옥경은 일부러 생긋 웃어 보이며, 그녀를
안심시킨 뒤 그 집을 나왔다.
갑자기 울분이 가슴에 치밀어 올랐다.
옥경은 길모퉁이에 있는 공중전화 부스로
갔다. 남편 유현식한테 전화를 걸기
위해서였다.그냥 집에 들어갈 기분이 도저히
나지 않았다. 남편이 전화기에 나오자
큰소리로 말했다.
"이봐요. 오늘 우리 근사한 레스토랑에서
외식하고, 1류 호텔 침대에서 하룻밤 자요."
6.파도에 묻힌 진실
밖에서 외식을 하고 근사한 호텔에서
하룻밤을 보내자는, 뚱딴지 같은 옥경의
제안에 유현식은 어리둥절한 모양이었다.
한참 동안 수화기에서는 숨소리밖에 들리지
않았다.
"여보세요."
답답해진 옥경이 꽥 소리를 질렀다.
"귀청 떨어지겠어. 근데 당신 지금 어디
있는 거야?"
"어딘 어디예요. 공중전화 부스 속이지."
"그 공중전화가 어디 있는 거야?"
"이태원 로터리예요. 나이아가라 호텔
앞에......"
"그 호텔 2층에 가면 근사한 양식집이
있어. 거기 가서 저녁 사먹고 그 호텔서
하룻밤 자."
남편이 뜻밖에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정말이에요? 그럼 당신 이리로 오시는
거예요? 호텔 로비에서 기다릴까요?"
"누굴 기다려?"
"당신 말예요."
"좋아하네. 내가 거긴 왜 가? 좋아하는
사람 있으면 그렇게 해보란 얘기야. 정
상대할 사람이 없으면 박대리라도 불러 내지
그래."
유현식의 목소리는 여전히 차고 가라앉은
쇳소리였다.
"예? 당신 지금?"
옥경은 기가 막혔다.
"바람이 났으면 바람이나 타고 다녀. 왜
나한테 전활 걸고 지랄이야."
목소리로 쏘아붙이고는 전화를 달깍 끊어
버렸다.
"이봐욧. 여보세욧."
그러나 응답이 없었다. 주옥경은 약이 올라
얼굴이 벌겋게 되었다. 피가 거꾸로 도는 것
같았다. 죄 없는 수화기를 팽개치듯 내려
놓고는 전화부스를 뛰어나왔다.
"자기 아니면 이 세상에 남자가 없는 줄
알아? 흥, 박대리하고 가라고......누가 못
갈 줄 알아."
옥경은 아무리 중얼거려도 분이 풀리지
않았다. 한동안 뜸하던 그의 신경병이 다시
도진 건 아닌가 하는 생각도 해보았다.
툭하면 지난 여름 태안반도 무인도에서 생긴
일을 들추곤 했기 때문이다.
옥경이 무인도에서 그날 밤 박인구와 함께
포구마을에서 변정애와 무슨 일을 했단
말인가?
다 같은 입장에서 하룻밤을 보낸 것인데 왜
자기만 그렇게 시달려야 하는가 하고
생각하니 더욱 화가 치밀었다.
옥경은 화를 삼키기 위해 핸드백의 줄 끝을
쥐고 오른손으로 풍차를 돌리듯 빙빙 돌리며
걸었다. 국민학교 아이들이나 함직한
행동이었다.
옥경이 그런 어울리지 않는 모습으로 한참
걷고 있을 때 자동차의 클랙슨 소리가 길게
나더니 차 한 대가 옥경 앞에 바싹 다가와
섰다. 인도를 걷고 있는 옥경 옆에 너무 차를
대는 바람에 차바퀴가 인도의 시멘트 블록을
긁기까지 했다.
먼지투성이에 여기저기 벗겨진 낡을 대로
고물이었다.
옥경이 발을 멈추자 녹슬어 덜그럭거리는
차 문이 열리고 누군가 내렸다. 강형사였다.
"이게 누굽니까? 주옥경 씨 아닙니까?"
강형사가 머리를 굽신하며 반색을 했다.
그 순간 주옥경은 미행을 하고 있었구나
하는 직감이 머리를 스쳤다. 미행을 당했다고
생각하자 몹시 불쾌했다.
"서울이란 참 넓고도 좁은 곳이군요.
여기서 주옥경 씨를 만나다니......"
강형사는 몹시 반가운 듯 활짝 웃음을 띠며
인도로 올라섰다.
주옥경은 불쾌했지만 그렇다고 노골적으로
불쾌한 표정은 짓지 않았다. 이 사나이가
무엇 때문에 자기를 미행하고 있었는지
그것이 알고 싶었다.
에스코트해 주셨군요."
"예?"
강형사가 이번에는 어리둥절한 듯 옥경을
쳐다보았다.
"제가 저 빌딩에 들어갔다 나올 때까지
차를 여기 세워 두고 기다리셨나요? 그리고
제가 공중전화를 걸 동안도 지켜보고
계셨겠군요. 아무튼 저를 보호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전 그런 걸 미행이라고는 추호도
생각지 않아요."
주옥경이 미소를 띠면서 부드러운 음성으로
가시 돋친 낱말을 주워섬겼다.
그제야 강형사는 옥경의 말뜻을 알아들은
듯 빙그레 웃었다.
"그건 전적으로 오햅니다. 저는 저쪽
자동차 면허시험장에서 운전면허증을 바꿔
갱신하는 날이거든요. 자, 이거 오늘
날짜인데 좀 보시겠어요?"
강형사가 주머니에서 지갑을 꺼내고 그
지갑에서 다시 조그만 면허증을 꺼내
주옥경의 코밑에 들이밀었다. 주옥경은
면허증을 들여다보지는 않았으나 강형사의
말이 정말 같았다. 무엇 때문에 형사가
자기를 하루 종일 미행하며 다닌단 말인가?
자기는 변정애의 살해 용의자권에서 벗어난
사람이라고 스스로 다짐해 보며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아이, 미안해요. 전 또 좋다가 말았군요.
전 강형사님이 절 지켜 주기 위해 하루 종일
에스코트를 해주는 줄 알고 기분이
좋았는데......"
주옥경은 비로소 진정한 웃음을 띠어
보였다.
"제가 왜 주옥경 씨를 지켜 줘야 합니까?
결혼하신 유부녀인데......"
강형사도 능글맞게 대꾸했다.
"혹시 또 알아요? 변정애처럼 누구한테
죽음을 당할지......"
"변정애 씨가 살해된 겁니까? 가스
폭발사고로 죽은 것 아닙니까?"
강형사는 더욱 능청을 부렸다. 그러나
그것이 경찰이 생각하고 있는 진짜 수사
방향인지 아닌지 주옥경은 분간할 수가
없었다.
"아무튼, 이거 보통 우연한 인연이
아닌데......저기 가서 차나 한 잔
하실까요?"
강형사가 호텔을 가리켰다.
"좋아요."
올라탔다. 차 안에서 담배냄새가 확 풍겼다.
그러나 자동차 안은 겉보기보다는 훨씬
깨끗하고 정갈하게 정돈되어 있었다. 시트도
깨끗하게 빨아 풀먹인 여인의 앞치마처럼
청량감이 들었다.
"이거 차가 고물이라서 모시는 게
송구스럽습니다. 조금만 참으십쇼."
강형사가 공손하게 말하며 사이드
브레이크를 막 내리자 곁에 교통경찰
오토바이가 와서 섰다.
"미안합니다. 주차 위반입니다. 면허증 좀
볼까요?"
교통순경은 거수 경례를 정중하게 한 뒤
손을 내밀었다.
주옥경은 재미있는 구경거리가 생겼다고
생각하면서 두 경찰관의 얼굴을 번갈아
강형사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지갑을 열어
무언가를 교통순경한테 보여 주었다.
오토바이 순경은 눈을 둥그렇게 뜨더니 다시
차려 자세로 경례를 하고는 도망치듯
가버렸다.
옥경은 그 모습이 몹시 우스웠다.
한편으로는 신이 나기도 했다. 교통순경은 늘
거리의 염라대왕이라고 생각했는데, 그
염라대왕의 사자가 쩔쩔매면서 도망치듯 가는
모습에 공연히 신이 난 것이다. 괜히 어깨가
우쭐해지기도 했다. 옆에 탄 끗발 좋은
사람이 마치 자기 남편이나 되는 것처럼
생각되었기 때문이었다.
"호호호,교통순경도 꼼짝못할 때가 있군요.
호호호,아이 신나."
주옥경이 큰소리로 웃었다.
두 사람은 어마어마한 샹들리에가 짓누르듯
내려다보고 있는 넓은 커피숍에 마주앉았다.
눈처럼 흰 양장 차림의 여인이 까만 그랜드
피아노를 두들기고 있었다.
"이런 집은 커피값이 꽤 비싸죠?"
주옥경이 어마어마하게 높은 천장이며
연못으로 장식된 뒷마당경치를 둘러보며
말했다.
"저도 이런 어마어마한 데는 잘 안 다니기
때문에 잘 몰라요. 하지만 제까짓 게 비싸
봤자 커피값 아니겠어요?"
"호호호. 그렇긴 그렇네요."
얌전하게 나비넥타이를 맨 미남 청년이
다가왔다. 주문을 받으려는 것이다.
"커피."
"저두요."
주옥경이 따라 말했다.
"무슨 커피를 하시겠습니까?"
웨이터가 머뭇거리며 물었다.
"그냥 커피. 왜 그건 안 팔아?"
강형사가 되물었다.
"예. 오후부터는 보통 커피는 팔지
않는데요."
"그럼 특별 커피는 파나?"
"예."
"어떤 게 특별 커피야?"
"비엔나, 아이리시......"
"응, 비싼 커피 말이지. 알았어. 난
비엔나를 줘."
강형사가 웨이터의 말을 막고 주문했다.
"저두요."
주옥경이 따라 말했다. 웨이터가 가고 나자
주옥경이 물었다.
"비엔나 커피란 건 꽤 비싸죠? 여기선 한
2,3천 원 받을 걸요."
"글쎄요. 음, 여기 요금표가 있군요.
비엔나라, 3천5백원에, 세금, 봉사료
50퍼센트를 합치면 4천 2백 원이나
되는데......"
"어마?"
주옥경이 입을 딱 벌렸다.
"후후후. 자장면 여섯 그릇 값이군요.
후후후."
"호호호......"
두 사람은 그저 웃을 수밖에 없었다.
"유현식 씨하고, 부부끼리 가끔 이런 데
들르십니까?"
유현식 이야기가 나오자 주옥경의 입가에서
웃음이 싹 가셨다.
"그인 너무 멋이 없는 남자예요. 더구나
"이상해지다뇨?"
"의처증이 생겼는지, 쓸데없는 걸 꼬치꼬치
캐묻고 난리예요. 정말 지겨워 죽겠어요."
"뭘 그렇게 꼬치꼬치 캐묻나요? 혹시 지난
여름 바캉스건을 따지는 건 아니겠죠?"
강형사가 비수로 허리를 찌르듯 말로
기습을 했다.
"지난 여름 바캉스건이라뇨? 옳아, 무인도
사건 말씀이군요. 아니 그 일에 관심을 가진
사람들이 왜 그리 많아요?"
주옥경은 불쾌했다. 그러나 겉으로는
나타내 보이지 않으려고 애를 썼다.
"또 누가 관심을 가지고 있나요?"
"저의 남편......매일 그 일을 캐물어서
미치겠어요. 아무 일도없었다고 몇 번이나
설명해도 곧이듣지 않는 것 같아요. 아니,
가끔 터무니없는 상상을해가지고 나한테
따지고 들어요. 자기가 상상으로 각본을 써
가지고는 그렇게 그렇게 된 것 아니냐고
따지거든요."
"상상의 각본을 쓰다뇨?"
강형사는 말꼬리를 놓치지 않았다.
"말도 안 되는 소리예요.더 생각하기도
싫은 불쾌한 일이에요."
"어떤 얘긴데 그렇게 불쾌해요?"
그때 커피를 가지고 왔다. 두 사람은
한동안 말없이 커피만 마셨다.
"유현식 씨는 상상력이 풍부하신 분인가
보죠. 그런 분이 대체로 예술가적 소질이
많은 분이랍니다. 마음씨도 착하구요."
강형사가 언짢아하는 주옥경을 위로하듯
말했다.
"어떤 상상이길래 그러십니까?"
"글쎄 지난 여름 바캉스 때 무인도에서
박인구 대리와 제가 하룻밤을 부득이하게
함께 보냈는데......뻔히 알면서 그 일을
두고 그이가 혼자 상상에 상상을 붙여서
따지는 거예요. 그 상상이 시간이 갈수록
더욱 극적으로 바뀌고 이야기가 더 길어져요.
마치 오동나무처럼 그 상상이 자라 이젠
숲속에 자기가 갇힌 것 같아요."
"......"
강형사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듣고만
있었다.
"그이의 각본을 한 번 들어 볼래요? 나 참
기가 막혀서......"
"어디 좀 들어 봅시다."
"아녜요. 그만둘래요. 말도 안 되는
남편이라는 관계 외에는 아무 관계도 없어요.
유리알처럼 깨끗하단 말입니다. 그날 밤
무인도의 폭우 속에서도 그이는 신사답게
행동했고 절도를 지켰어요. 아무 일도
없었어요. 바위틈에서 저를 편안히 쉬게 하고
그는 밖의 하늘만 가린 텐트 밑에서 밤을
새우다시피 했어요.
전 그 상황에서 잠이 오질 않았어요.
박인구 씨는 대리란 직책을 갖고 있고 젊은
남자예요. 친구의 남편이기 이전에 한 사람의
남성이에요. 순간적인 감정으로 어떤 일을
저지를지 모르잖아요.난 소설이나 영화
속에서 그런 불길한 일들을 많이 봤거든요.
그래서 우선 걱정이 되었어요. 어느 순간에
박대리가 내 곁으로 다가올지 모르잖아요.
하지만 솔직히 말하면 마음 한구석에선
있었는지도 몰라요.
어쨌든 바위굴 앞에 누워 있는 박대리가
가장 신경 쓰이는 일이었어요. 그 다음은
바다 건너편에 있는 남편 생각이었어요. 지금
혼자 이쪽을 쳐다보며 얼마나 안타까워할까
하는 연민의 정이라고나 할까요. 어쨌든
남편이 얼마나 불안해하고, 걱정하고 있을까
하는 생각이 온통 머리를 꽉 채우더군요. 그
다음은 정애의 얼굴이 시야를 꽉 메웠어요.
정애는 나한테 둘도 없는 친구예요. 고교
시절부터 단짝이었어요. 모르는 학생들은
동성연애하는 것 아니냐고 놀리기도 했을
정도니까요.
그런 정애의 남편을 무인도에서 내가 잡아
놓고 있다는 죄책감이 덮쳤어요. 내일 날이
하느냐 하는 생각으로 잠을 이룰 수가
없더군요. 멋진 젊은 남자와 폭풍우 속의
로맨스란 상상할 수 없었단 말예요."
주옥경은 마침내 혼자 흥분하여 주위의
사람들을 전혀 의식하지 않는 듯 큰소리로
계속해서 말했다.
"그런데 말예요. 왜 사람들은 그 진실을
믿어 주지 않아요?"
"누가 믿지 않습니까?"
"우선 제 남편이 믿으려고 하지 않아요.
아니 믿는 것 같아요. 그런데도 가설을
만들어 놓고 진실을 부수려고 하고 있어요.
죽은정애도 반신반의하는 것 같았어요. 그뿐
아니에요. 더욱 기가 막힌 것은 정애의 남편
박인구 대리도 그날 이후, 저한테 이상하게
대하는 것 같아요."
강형사가 줄담배를 피워대면서 놓칠세라
말을 재촉했다.
"마치 그날 밤 이후, 뭐라고 할까요. 제가
마치 자기 사람이 된듯한 태도를 취했어요.
둘이 있을 땐 반말짓거리 같은 것을 하기도
하고 자기 아내처럼 심부름을 시키기도 했죠.
특별히 나를 위해 주는 것도 같고......암튼
남자가, 이거 실례입니다만......남 자가
정복한 자기 여자를 다루는 듯한 태도를 가끔
보였어요. 나 참 기가 막혀서. 그게 글쎄
말이나 됩니까?"
주옥경은 흥분했는지 냉수를 벌컥벌컥
들이켰다.
"그런데 유현식 씨는 어떻게 생각하고
있다고요? 그가 만들었다는 그 상상의 각본을
좀 들려줄 수 없어요?"
아닐 뿐 아니라, 불쾌해서 상상하기도
싫어요."
주옥경의 태도는 여기서부터 단호했다.
"저 아직 점심도 안 먹었어요. 제가 점심
대접하면 안 될까요?"
주옥경이 갑자기 분위기를 바꾸며 상냥하게
말을 건넸다.
"점심이라뇨? 저녁 때가 다 되었는데,
점심도 안 잡수셨다고요?"
두 사람은 호텔 커피숍을 나와 곁에 있는
간이음식점으로 들어가 간단히 저녁을
때웠다. 식사 후 강형사는 그 고물차로
주옥경을 시청 앞 정거장까지 태워다 주었다.
그리고는 유현식의 사무실로 찾아갔다.
마침 퇴근하기 위해 전자제품 대리점을 막
나서려던 유현식과 마주쳤다.
"누구시더라?"
유현식은 주춤하면서 강형사를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나 강형삽니다. 시경에 있는......"
"아, 예. 이거 미안합니다. 제가 워낙 사람
보는 눈이 어두워서......그런데 여긴
웬일이십니까?"
유현식은 못 알아보아서 참으로 미안하다는
태도를 취했다.
"지나가다가 유형 생각이 나서 들렀지요.
지금 퇴근하시는 길입니까?"
강형사가 유형이라고 한 말에 그는
친밀감을 느낀 모양이었다.
"예, 방금 퇴근하려는 길입니다. 별로 바쁜
일 없으면 저녁이나 같이 할까요?"
"저녁보다는 이거 한 잔 어떻습니까?"
해보였다.
"전 술은 못 합니다만......그럼 한 잔만
할까요."
두 사람은 허름한 족발집으로 들어갔다.
입구에 쌓여서 전시되어 있는 돼지
족발들은 손때가 묻어 반들반들해 보였다.
소주잔을 마주하고 앉은 강형사는 방금
주옥경과 헤어졌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아무
말도 않고 우선 소주를 두어 잔 쭉 들이켰다.
"변정애 씨의 사인은 확실히
밝혀졌습니까?"
한참 동안 강형사만 바라보고 있던
유현식이 침묵을 깨고 말했다.
"글쎄요, 어떻게 보면 사고사인 것도
같습니다만, 전 분명히 살인사건이라고
생각합니다. 누군가가 변정애한테 약물을
먹인 뒤 증거를 없애기 위해 가스 폭발로
화재를 일으킨 것이라고 봅니다. 아주 잔인한
살인범의 소행이죠."
"참으로 끔찍한 일이군요. 그래 범인의
윤곽은 잡으셨나요?"
유현식은 술 대신 안주만 집어먹으며
말했다.
"금품을 노린 사건 같지는
않고......원한이나 애정 문제에 얽힌
사건처럼 보이는데요."
강형사는 애정 문제라는 말을 할 때
목소리를 높였다. 그러면서유현식의 표정을
흘금흘금 살폈다.
유현식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계속 안주만
집어먹었다.
"아주머니는 안녕하신가요?"
"예?"
"아, 예. 잘 있습니다."
"주옥경 씨는 변정애의 죽음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고 있던가요?"
"어떻게 생각하다뇨?"
유현식은 뜻밖의 질문에 조금 당황하는 것
같았다.
"변정애의 사생활에 대해 가장 잘 아는
사람은 주옥경 씨 아니겠습니까? 변정애의
남자관계라든지, 박대리의 여자관계 같은
것도 주옥경 씨가 가장 소상하게 아는 사람
아니겠습니까?"
"그럼 강형은 변정애의 죽음과 내 아내가
무슨 관계가 있다고 생각하시는 겁니까?"
유현식이 버럭 화를 냈다. 그는 퉁명스럽게
말하고는 소주를 단숨에 마셔 버렸다.
유현식이 술을 잘 못한다는 것을 강형사는
"아니, 내 말은 그런 뜻이 아닙니다.
절대로 오해는 하지 마십시요. 다만 지난
여름 무인도 바캉스사건 이후로......"
여기까지 말한 강형사도 잠시 입을 다물고
술을 마셨다.
서로 주거니 받거니 술잔이 몇 번 오가고
소주가 세 병째 식탁위에 올라왔다.
술이 올라 얼굴이 약간 붉게 물든 유현식이
말을 시작했다.
"무인도 무인도하고 자꾸 말하지 마십시오.
형사면 형사지 남의 상처는 왜 건드리는
겁니까."
유현식의 말에는 술기가 섞여 나왔다.
"그놈의 무인도에서 무슨 일이 있었기에
그럽니까? 오늘 저녁 한번 털어놔 보십시오.
자, 유형, 우리 딱 한 병만 더 합시다."
병을 다시 주문했다.
"그 일만 생각하면 이 유현식의 가슴이
찢어집니다. 다 폭풍이원수지요. 아니 바다가
원수지요, 바다가......당신과 나 사이에저
바다만 없었다면......"
유현식은 갑자기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제멋대로 편곡을 해가며 노래를 다 부른
유현식이 갑자기 흐느껴 울었다. 그러다가
울음 섞인 푸념을 하기 시작했다.
"그 바다 때문에 난 마누라를 잃은 겁니다.
박인구란 놈,세상에 그럴 수가 있습니까?
제놈 마누라의 친구인데 그럴 수가
있습니까?"
"유형, 차근차근 이야기를 해요. 그래
박인구란 녀석이 그날 밤 어떻게 했다는
겁니까?"
강형사는 절호의 기회를 놓칠 수 없다는 듯
유현식의 손을 잡고흔들면서 말을 재촉했다.
7.정사는 폭풍을 타고
"강형사."
유현식이 혀꼬부라진 소리로 강형사의
어깨를 치면서 불렀다.
"그날 밤 무인도 얘기부터 해봐요."
강형사도 약간 취기가 올랐으나 직업
의식이 다시 고개를 내밀었다.
"서울대공원에 가보셨지요?"
유현식이 엉뚱한 질문을 했다.
"언젠가 가본 기억이 납니다. 코끼리
열찬가 뭔가 하는 더럽게 비싼 차 타고
바가지 하나씩 사썼지. 후후후, 마누라도
바가지 하나, 나도 바가지 하나, 세종이도
바가지 하나......"
"세종이가 누구야?"
"우리집 맏상주. 그래서 바가지 세 개
사쓰고 구경다녔지."
"거기서 호랑이 우리 봤지?"
유현식이 장난꾸러기 어린애처럼 입가에
야릇한 웃음을 흘리며손가락으로 강형사의
얼굴을 겨누었다.
"봤지."
"사나운 호랑이 한 마리가 자기 왕국을
유유히 거닐고 있었지.쳐진 울타리 안은
호공의 왕국. 아무도 범접할 수 없는
절대적인국경선. 그 왕국에 토끼 한 마리를
집어 던져 넣었다고 합시다. 어떻게
되었겠어요?"
"그야 당장 덥썩 잡아 냠냠 해버렸겠지
뭐."
강형사도 술이 취해 두 손을 휘저으며
"틀림없이 그렇게 되었겠지?
틀림없이......"
유현식은 강형사에게 무슨 다짐이라도
받아야 되겠다는 듯이 다잡아 물었다.
"그래, 호랑이 아이큐가 아무리 두 자리
숫자라고 한들, 그래, 굴러들어온 떡을 그냥
버리겠어?"
"틀림없지?"
"그럼."
"바로 그렇게 된 거야. 박인구라는 야수가
지키고 있는 무인도에 주옥경이란 토끼를
집어 던져 넣었으니, 어떤 호랑이가 그냥
두겠어? 목사 호랑이, 스님 호랑이도 그냥
두지는 않았을 거야. 그런데 천하의 건달
오입쟁이 박인구가 굴러들어온 토끼를 얌전히
살려 보냈을 것 같아? 강형사는 어떻게
"아니 어떻게 생각한다기보다......그건
어디까지나 추측이지, 추측......"
강형사는 어물어물할 수밖에 없었다.
"추측이 아니에요. 나는 호랑이한테도
들었고 토끼한테도 들었어요."
유현식은 갑자기 큰소리를 쳤다.
"내 들은 대로 얘기해 볼까?"
유현식이 양팔을 걷어 올리고 소주를 급히
입에 털어넣고는 이야기를 시작했다.
"그날 밤, 폭풍이 치고 비가 쏟아지자
박인구는 텐트를 치기 시작했지. 주옥경이도
텐트를 치는 작업을 거들었어. 하지만
갑자기쏟아진 비 때문에 텐트를 다 친 뒤엔
두 사람에게 텐트가 필요없었어. 이미 두
사람 다 물에 빠진 생쥐처럼 되었으니까
말이야. 두사람은 서로의 모습을 바라보며
벌 위에 캐주얼복 한 가지만을 입었으니
육체의 깊고 얕은 곳이 모두 물에 젖은 옷
위로 투영되었더란 말이야."
그리고 계속된 유현식의 이야기는 대략
다음과 같았다.
얇은 블라우스 위로 분홍빛의 브래지어가
너무도 선명히 솟아올랐다.
옷은 팔이며 어깨며 잔등에 착 달라붙어
마치 투명옷을 입은 것처럼 옥경의 상체가 잘
드러났다.
청바지 차림이어서 아랫부분은 살갗이
비치지 않았으나, 둔중하고 육감적인 히프며
앞의 깊은 계곡이 윤곽을 잘 나타내 보였다.
박대리는 게걸스런 웃음을 입가에 흘리며
옥경의 이런 모습을 천천히 즐기는 것
같았다.
겸연쩍어하던 옥경은 오히려 그 시선에
야릇한 쾌감 같은 것을 느낀 탓인지 몸을
더욱 매혹적으로 뒤틀어 보였다.
박대리 역시 물에서 건져 놓은 듯한 모습
그대로였다. 물에 젖은 셔츠를 벗어 버리자
러닝 셔츠가 몸에 착 달라붙은 채 드러났다.
앞가슴 부분의 굵고 검은 털이 러닝 셔츠
밑에서 마치 꿈틀거리는 선처럼 선명하게
보였다.
짧은 반바지는 팬티만 입은 모습과 같았다.
옥경은 앞에 앉은 건장한 남자의 모습을
보면서 문득 남편 유현식을 생각했다.
샌님처럼 핼쑥한 얼굴, 항상 겁에 질린
듯한 무기력한 눈동자,타협을 절대로 불허할
것 같은 고집스런 입술, 허약하고 긴 허리,
볼품없는 앙상한 가슴. 그러나 남편과 실팍한
자신만만하게 내밀고 있는 박대리를 자꾸만
비교하게 되었다.
"어때요. 옷을 벗어서 우선 빗물을
짜버리고 입는 게 어떨까요?"
박대리가 음흉한 제의를 해왔다.
"아이, 그래도 여기서 어떻게......"
"하하하. 괜찮아요. 감기들어 고생하는
것보다야 낫지 않습니까?"
여름철이라고 하지만, 하오가 되자 기온이
내려가고 더구나 비를 흠뻑 맞은 후여서
으슬으슬 춥기까지 했다.
"벗어 주세요. 난 돌아앉아 있을
테니......"
주옥경은 몇 번 망설이다가 블라우스를
벗어 박대리한테 건네주었다.
박대리는 물에서 건진 듯한 옥경의
상체를 훔쳐 보았다.
희고 탄력 있는 어깨며 기다랗고 가는 목이
더없이 매혹적이었다. 핑크빛 브래지어가
힘겹게 감싸고 있는 터질 듯한 가슴, 소나기
지난 뒤 화단의 싱싱한 달리아 꽃송이처럼
생동감이 넘쳐 흘렀다.
두 손으로 앞가슴을 감싸고 옆으로
돌아앉은 옥경의 얼굴은 부끄러움과 야릇한
기대감으로 발갛게 달아올랐다.
박인구는 그러한 옥경의 가슴속을 빤히
들여다보듯 회심의 미소를 짓고 있었다.
"우선 물기를 대강 짜냈으니 어깨에
걸치세요."
박대리가 블라우스를 펼쳐 들고와 옥경의
어깨에 걸쳤다.
"고마워요."
옥경은 고개를 숙인 채 박대리를 쳐다보지
않았다.
"자, 바지도 벗어요."
"예?"
옥경이 기겁을 하며 다리를 오므렸다.
"내 돌아앉아 있을 테니 청바지만 벗어
줘요. 그러다가 정말 병이라도 나면 어떻게
됩니까. 자, 어서 벗어요."
박대리는 심술궂게도 뒤로 돌아앉아 한
손만 내밀었다.
"박선생님, 정말 돌아보면 안 돼요."
"알았어요."
옥경은 마침내 바지를 벗어서 박인구 손에
넘겨주었다.
그리고는 두 무릎을 세우고 가슴을
정강이에 딱 붙였다. 자기 몸의 면적을
최대로 줄여 보이려고 노력했다.
무방비로 노출될 수 밖에 없었다.
작은 잎새 모양의 레이스가 달린 흰색
팬티와 윤기 흐르는 두 다리가 조화를 잘
이루었다. 희디흰 허벅지의 살결 밑에는 맑은
핑크빛이 약간 받쳐져 생기가 돌았다. 두
팔로 감싼 미끈한 다리가 한껏 수줍음을
머금었다.
"자, 이제 일어서서 입어 보세요."
옥경이 무릎 사이에 파묻고 있던 얼굴을
들다가 깜짝 놀랐다.
박인구가 청바지를 들고 자기를 내려다보며
서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의 눈빛은 보통 남자의 눈빛이 아니었다.
더구나 친구 남편의 눈빛은 아니었다.
이글거리는 눈동자에서 쏘아내는 듯한
시선이 반라가 된 옥경의 피부에 따갑게
옥경은 떨리는 가슴을 두 손으로 안고 그
자리에서 무릎만 세우고 일어섰다.
한 손으로 박인구가 건네주는 청바지를
받으려는 순간이었다.
갑자기 박인구가 옥경을 끌어안았다.
"미스 주!"
뜨거운 숨결이 귀밑에서 속삭였다.
"이러심 안 돼요. 이거 놔요."
옥경은 너무나 놀란 나머지 두 손으로
박인구의 육중한 가슴을 떠밀어 내려고 애를
썼다. 그러나 두 팔에서 힘이 스스로 빠져
나가고 말았다.
다음 순간 박인구의 입술이 옥경의 입술에
포개졌다. 억센 두 팔이 놀라 파닥이는
옥경의 가슴을 으스러지게 껴안았다.
"이러심......"
숨결을 받아들였다.
박인구는 보드라운 옥경의 입술을 빨면서
옥경의 등뒤로 팔을 돌려 브래지어의 끈을
풀려고 했다. 그러나 아무리 애를 써도 끈이
풀리지가 않았다.
"호호호......"
참다못해 주옥경이 웃음을 터뜨렸다.
"이게 어떻게 된 거야?"
박인구가 멋쩍어하며 옥경의 촉촉히 젖은
얼굴을 내려다봤다.
"앞이에요."
옥경이 상기된 얼굴에 미소를 지으며
브래지어 앞쪽을 턱으로 가리켰다. 박인구가
앞가슴 사이를 손가락으로 건드리자
브래지어가 기다렸다는 듯이 툭 풀려 버리고
스프링이 튀듯 탄력에 넘친 가슴이
숨이 막히는 듯 목에 굵은 핏줄까지 솟았다.
더 기다릴 수 없다는 듯 박인구는 옥경을
바닥에 쓰러뜨렸다. 옥경은 허물어지듯 바닥
위에 쓰러지고 말았다.
뜨겁게 달아오른 박인구의 손이 가늘고
가냘픈 옥경의 목줄기를 부드럽게 더듬기
시작했다. 손끝은 긴장으로 약간씩
떨리기까지 했다.
"옥경이......"
박대리가 신음을 토하듯 속삭였다. 늘 미스
주로만 불러 오던 박대리가 처음 쓴
호칭이었다.
"우리 이래도 되는 거예요? 난 몰라요. 난
몰라요."
주옥경은 거의 의미 없는 말만을
되풀이했다.
일은 꼭 일어나야 할 일이 일어나는
것뿐이야. 좀더 빨리 일어나지 않은 것이
안타까웠어."
"전, 뭐가 뭔지 모르겠어요."
옥경은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이를 악물었다.
남편과의 사이에서 전혀 느껴 보지 못한
강렬하고도 새롭고 경이로운 세계로의 문이
열리고 있었다.
두 사람의 가쁜 숨결은 무인도의 파도가
삼키고 있었다.
갑자기 빗줄기가 굵어지고 바람이 거세게
불기 시작했다. 격렬한 비바람이 연약한
텐트를 통째로 날려 버릴 듯 몰아쳤다.
무인도는 몰아치는 강풍과 퍼붓는 소낙비,
몰려와서 부서지는 성난 파도로 단 1초도
토했다. 비명을 질렀다.
얼마가 지났을까, 갑자기 폭풍우가 뚝 멎어
버렸다. 텐트 속의 옥경은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며 일어나 앉았다.
"미안해......"
박인구가 돌아앉은 채 백 속에서 비에 젖지
않은 담배를 꺼내 피워 물며 말했다.
"난 어떡해요. 무슨 낯으로 그이를 봐요.
무슨 심장으로 정애를 만나요."
뜨거운 눈물이 얼굴을 가린 주옥경의
손가락 사이로 쏟아져 나왔다.
유현식의 이야기는 대강 이와 같은
것이었다.
"꼭 옆에서 지켜본 사람처럼 이야기를
하는구먼. 유형은 소설가나 영화감독이
되었으면 성공할걸 그랬어."
내밀며 칭찬인지 핀잔인지 알 수 없는 말을
했다.
"소설가나 시인은 박인구 그놈이 되려고 한
거요. 시시하게 그따위 놈이니까 그런 짓이나
하고 다니지."
유현식이 술잔을 단숨에 비우고 상 위를 쾅
쳤다.
"그래 어떻게 그렇게 자세하게 그날 있었던
일을 알고 있나요?"
강형사는 취중에도 물을 건 다 물었다.
"그야 들었으니까 알지. 누가 그때 장면을
촬영을 해놨겠어요, 녹음을 해놨겠어요?"
"누구한테 들었나요?"
"그 무인도에 있었던 사람이 누구 누구요?
들었다면 누구한테서 들었는지 뻔한 것
아니오? 아니, 당신 그렇게 머리가 안
다니시오? 후후후, 천하 돌대가리 형사도 다
만났네. 허허허."
유현식은 속이 후련한 듯 큰소리로
웃어댔다.
그날 밤 강형사는 더 이상 묻지 않고
유현식과 헤어졌다. 술에 취한 거의
인사불성에 가까운 유현식을 집까지 태워다
주고 돌아갔다.
다음 날 강형사는 전날 있었던 일을 하나도
빼지 않고 추경감에게 보고했다.
"그러면 강형사는 유현식의 말이 맞다고
생각하는 거야?"
추경감이 강형사의 말을 귓전으로 흘려
버리려고 했다.
"꼭 맞다고는 생각지 않지만, 유현식도
자기 나름대로의 근거가 있는 이야기
강형사는 은근히 화가 나서 추경감에게
대들 듯이 말했다.
"그 사람은 지금 질투에 눈이 어두워 좀
이상하게 된 사람이야.박인구에 대해
열등감을 느끼고 있었던 데다 그런 묘한
일까지 생기고 나니 제정신이 아닌
사람이야."
추경감이 아무데나 담뱃재를 톡톡 털고
제자리를 맴돌면서 말했다. 무언가 딴 생각에
골똘히 잠긴 것 같았다.
"유현식이 박인구한테 열등감을 느끼고
있었다고요?"
"그것도 눈치 못 챘어?"
"뭣 때문에 열등감을 느낍니까?"
"우선 신분이 다르잖아. 유현식은 장래성이
그리 좋지 않은 전자제품 대리점의 말단
단자회사대리지만 대재벌의 후계자가 될
가능성이 큰 왕자님 아닌가. 우선 행동하는
게 틀려. 박인구는 무슨 일이든지 자신에
넘쳐 행동을 하지만 유현식은 모든 일을
주저하고 소극적으로 처리해. 스테이터스가
다르면 그렇게 행동으로 표현되는 거야."
"후후후. 경감님도 영어를 다 쓰시네요,
후후후."
강형사가 어린아이처럼 웃었다.
"다음에 유현식은 항상 주옥경보다는
변정애가 낫다고 생각하고 여기서도 열등감을
느꼈어."
"어째서 변정애가 주옥경보다 낫다는
겁니까? 활달한 성격이나, 용모나 어디를
봐도 주옥경이 훨씬 낫지요."
"이런 맹추 같으니라구. 누가 용모나
거야. 내가 보기에는 두 사람 다 출중한
미인임에는 틀림없어. 그러나 변정애는
변정애대로 개성적인 용모를 가지고 있고
주옥경은 주옥경대로 자기 특유의 미모를
가지고 있는 거야. 그러니까 보는 사람의
눈에 따라 어느 사람이 더 미인이냐 하는
것이 정해지지. 어쨌든 유현식은 자기
아내보다 변정애가 더 예쁘고 좋은 여자라고
생각했던 거야. 대개의 남자들은 자기
아내보다 남의 아내가 더 예뻐 보이거든.
강형사는 어때?"
추경감이 빙그레 웃으며 강형사를
쳐다봤다.
"에이 경감님도. 제가 무슨 아내가
있습니까?"
"허허허. 참, 아직 장가도 못 간
추경감이 유쾌한 듯 큰소리로 웃었다.
"변정애는 유현식 자신처럼 성격이
침착하고 꼼꼼하거든. 학교다닐 때의 성적도
주옥경보다는 항상 앞서 있었단 말야. 호기심
많고 당돌하면서도 서글서글한 주옥경과는 퍽
대조적이지. 자기 성격을 많이 닮은
변정애를, 유현식은 훨씬 좋은 여자라고
생각한 거지. 마누라에 대한 열등 의식은
그렇게 해서 생긴 걸 거야."
"그 열등 의식이 거짓말을 하게 된 것이다,
이 말씀이군요."
"말하자면 그렇게 된 것 같네. 열등 의식은
마침내 피해 의식을부르게 되거든. 박인구가
자기 아내인 주옥경을 좋아하는 것이 아닐까,
자기 몰래 두 사람이 밀애라도 하는 것이
아닐까 하고 늘 생각하던 차에 그런 일이
확신하게 된 거지."
"그러나, 경감님, 경감님의 그 말씀도
상상에 불과한 것이지요.정말로 유현식이
생각하는 것 같은 무인도의 정사가 실제로
있었다고 볼 수도 있는 것 아닙니까?"
추경감은 그 말에는 대답하지 않았다.
한참 동안 담배만 피우면서 창 밖을
내다보고 있던 추경감이 강형사를 돌아보면서
말했다.
"변정애가 살해되던 날 유현식은 무얼 하고
있었나?"
"예? 새삼스럽게 그걸......"
"빨리 기록을 가져와서 좀 봐."
강형사가 서류철을 뒤졌다. 그러나 그
부분을 찾아내지 못했는지 호주머니에서
수첩을 꺼냈다. 몇 년이나 가지고 다녔는지
너덜너덜했다. 수첩에 깨알같이씌어진
글자들을 한참 맞추어 본 뒤 추경감을 보고
말했다.
"그날 대리점에서 근무를 했군요. 아침에
출근했다가 거래처 몇군데를 거쳐, 전자제품
본사에 들러 영업과장과 점심을 먹고
오후3시쯤 다시 대리점으로 돌아왔군요."
"그거 다 확인해 본 거야?"
추경감이 퉁명스럽게 물었다.
"아닙니다, 확인은 하지 않았습니다만
본인의 이야기니까 틀림없는 것 같습니다."
"저런......자네 형사 노릇 몇 년 했나?"
추경감이 돌연 볼멘 목소리로 말했다.
"예?"
"그런 걸 확인해 보는 것은 기본 중에도
기본 아닌가?"
범인이라고 생각합니까?"
"생각하다니? 용의점이란 누구한테라도
있는 거야. 자네 오늘 왜 그렇게 바보 같은
소리만 계속하나?"
"저는 유현식이는 범인일 수 없다고
보는데요."
강형사도 고분고분 핀잔만 받고 있지는
않았다.
"어째서 그렇게 생각하나?"
"그냥입니다. 그냥 육감입니다. 형사한테도
육감이란 게 있지 않습니까?"
"자알 논다."
경감이 더 상대할 수 없다는 듯이 웃었다.
"유현식 씨 같은 꽁생원은 그런 끔찍한
일을 저지를 수 없습니다. 그는 어떤 억울한
일이 있더라도 혼자 끙끙 앓다가 병이 났으면
더구나 아내의 친구를뚜렷한 이유도 없이
죽인단 말입니까? 말도 안 됩니다."
"사람이란 경우에 따라 엄청나게 변할 수도
있어. 더구나 질투에 눈이 어두워진다든지
열등감으로 이성을 잃을 경우엔 어떤
극단적인 행동도 할 수 있는 거야. 더구나
박인구가 아내인 주옥경을 품안에 넣었다고
생각한다면 변정애를 충분히 죽일 수도 있지.
특히 내성적이고 소극적인 사람이 한번
작심을 하면 더 무서운 법이야."
"그렇지만 그건 아무래도......"
"쓸데없는 말대꾸하지 말고 지금이라도
빨리 그날 유현식의 알리바이를 다시 알아봐.
본점의 영업과장과 점심을 먹은 시간이
중요한 것 같으니까 그것부터 확인해 봐."
추경감은 그 말만 남기고 어디론지 급히
혼자 나갔다.
8.마담 백정미의 인생유전
"박선생님, 혹시 백정미라는 마담을
아세요?"
주옥경의 느닷없는 질문에 박인구 대리는
어안이벙벙한 모양이었다. 혹시 자기가 잘못
들은 것이나 아닌가 하고 다시 물었다.
"지금 뭐라고 말씀하셨습니까?"
박대리가 찻잔을 입으로 가져가다가 말고
주옥경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백, 정, 미. 백정미라는 살롱 마담
말입니다."
주옥경은 박대리를 정면으로 쳐다보며
말했다. 이런 뻔뻔한 사람이 다 있느냐는
듯한 눈초리였다.
박대리는 깔끔한 듯 금세 얼굴색이 변했다.
그리고 탄성처럼 백정미라는 말을 두어 번
되뇌었다.
"잘 모르는 사람이에요?"
옥경이 시선을 떼지 않고 다그치듯 물었다.
박대리는 시선을 마주치지 않으려고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그리고 커피를 냉수 마시듯
꿀꺽꿀꺽 소리를 내며 마셨다.
"뭐,모르시면 말씀 안 해도 괜찮아요. 전,
정애가 아니니까요."
옥경은 입가에 비웃음을 머금으며 말했다.
옥경이 퇴근 시간 가까운 오후에 박대리
사무실 근방에 와서 박대리를 불러낸 것은
이런 일을 따져 보려던 것이 아니었다.
정애가 죽은 뒤 어떻게 지내는가도
궁금했고, 살인범의 수사진행도 알고 싶었기
번보고 싶었다고 하는 것이 옳았다. 옥경은
여자란 아무리 싫은 남자라도 자기를
좋아한다고 말하면 그를 좋아하게 된다는
어느 소설의 구절이 생각났다.
옥경은 박대리를 일부러 피하거나
싫어하지는 않았다. 솔직히 말해
유현식보다는 한 수 위의 사나이라고 은근히
생각하고 있었다. 박대리 또한 평소에 옥경을
대하는 태도나 시선이 예사롭지 않았다.
옥경이야말로 남자가 생애를 걸고 사랑해 볼
만한 여자라고 늘 생각해 왔었다.
그러나 옥경은 다방에서 박대리와 마주앉자
정애의 얼굴이 문득떠올라서 괴로웠다.
정애의 남편과 감미로운 음악을 들으며
마주앉아 차를 마신다는 것이 갑자기
죄스럽게 느껴졌다.
?않고 방
안에만 있으니까 주인 아주머니도 답답해
보였던 모? / 옥경은 그러한 자기 감정을 위안받으려고
박대리의 나쁜 모습을 상상해 냈다. 백정미와
살롱의 지하, 컴컴한 내실에서 추잡하게
육욕을 탐닉하는 그런 사나이로 상상해
보았다. 그래서 자신도 모르게 백정미를
아느냐는 말이 불쑥 튀어나온 것이다.
"대답 안 하셔도 돼요. 제가 뭐 정애도
아니잖아요. 죽은 아내의 친구에
불과하죠......"
옥경이 계속 빈정댔다.
"압니다. 백정미를 알고말고요."
그러나 박대리는 뜻밖의 대답을 했다.
"백정미는 내 애인이었습니다."
"애인이었다구요?"
"예. 분명히 애인이었습니다."
"그럼, 헤어졌단 말인가요?"
"물론입니다."
"언제부터요?"
"지금부터, 아니 미스 주가 백정미라는
이름을 말했을 때부터 나는 헤어지겠다고
결심했습니다."
"예?"
"사람들이 애인이니 정부니 하고 말하지만
실은 나한테도 그럴만한 사정이 있는
겁니다."
"하긴 처녀가 아기를 낳아도 사정은 있다고
하더군요."
옥경이 화가 나서 큰소리로 떠드는 바람에
다방에 있던 다른 손님들이 두 사람을
쳐다봤다.
"우리 딴 데로 갑시다."
박대리가 벌떡 일어섰다. 카운터로 가서
차값을 계산하고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앞장서서 걸어 나갔다.
같았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박인구를 따라
나섰다.
"여기 잠깐만 서계십시오. 제가 차를
가지고 오겠습니다."
다방에서 나오자 박인구는 옥경을 보도
위에 세워 둔 채 회사 건물 쪽으로 바삐
걸어갔다.
박대리는 금방 자기 차를 몰고 와서 옥경이
서 있는 인도 옆에 세우고 도어를 열었다.
"빨리 타요. 여긴 정차 금지 지역이라
들키면 딱지 떼요."
주옥경은 내키지 않았지만 차에 올랐다.
"우리 조용한 데 가서 저녁이나 먹으면서
얘기 좀 합시다."
박대리는 옥경의 의견을 아예 무시한 채
자기 마음대로 차를 몰고 한남대교를 건너
"어디까지 가시려는 거예요?"
옥경은 마음을 조금 가라앉힌 뒤 조용한
목소리로 물었다. 멀리 한강의 잔잔한 파도가
석양에 물들어 황금빛을 반사하고 있었다.
"오늘 같은 날은 숲속에 있는 식당이
제격이지요."
박대리도 마음의 여유를 찾았는지 웃어
보이며 말했다.
"혹시 저를 백정미 같은 여자로 생각하는
건 아니겠죠?"
"천만의 말씀. 절도 있고 자존심 강하기론
이 세상에서 어느 여자가 미스 주를
따르겠습니까?"
"빈정대는 거예요?"
"천만의 말씀입니다. 제가 뭐 미스 주를 안
것이 어제 오늘 일입니까? 유형만 없었더라면
박대리는 능숙한 솜씨로 핸들을 꺽으며
웃지도 않고 사뭇 진지한 어투로 말했다.
차는 과천으로 가는 국도로 접어들었다.
서울 경계를 지나 한 2,3분 갔을 때 양쪽에
울창한 숲이 나왔다.
차는 오른쪽 숲속 작은 길로 들어섰다.
<백일농장 입구>
조그만 간판이 보였다.
"이게 누구 농장이에요?"
겨우 차 한 대가 들어갈 만한 차도로
들어서자 옥경이 물었다.
"장사꾼 농장이죠."
"예?"
"식당하는 장사꾼 농장이라니깐요. 이름이
농장이지 안에 들어가면 영업하는
식당이랍니다."
나타났다. 2층집 주변으로는 방갈로 같은
초옥이 여기저기 숲속에 흩어져 있었다.
"어서 오십시오."
단정하게 나비넥타이를 맨 청년이 튀어나와
인사를 했다.
집 주변 빈터에는 자가용 차들이 꽉 들어차
있었다. 숲속에 이런 식당이 있으리라고는
상상도 못 할 그런 풍경이었다.
"둘이서 식사할 거야. 제일 조용한 곳
부탁해."
박대리가 청년을 보고 말했다. 청년은
박대리를 처음 본 것이 아닌 듯했다.
"전에 그곳으로 안내하죠."
청년이 앞장서서 2층집 옆을 돌아 숲속
방갈로로 향했다. 상수리 나무 같은 큰 고목
밑에 조그만 방갈로가 나왔다.
청년이 싱글싱글 웃으며 방갈로 문을
열었다.
아늑한 방 안에는 식탁이 놓여 있고 너댓
사람이 앉을 수 있는 의자가 놓여 있었다.
식탁 위에는 장미꽃 한 송이가 꽂혀 있었다.
한 줄기 석양빛이 숲을 뚫고 긴 그림자를
드리웠다.
청년은 두 사람을 안내해 놓고는 부리나케
내려갔다.
"여길 자주 오셨나 보죠."
옥경이 권하는 의자에 앉으며 말했다.
"몇 번......"
"백정미 씨하고 왔나요?"
옥경이 웃으면서 말했다. 아까처럼
빈정대는 말투는 아니었다.숲속의 방갈로
분위기가 옥경의 감정을 바꾸어 놓았는지도
"몇 번은......"
박대리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이 말했다.
"무엇을 준비해 드릴까요?"
청년이 엽차와 젓가락 등속을 챙겨 와서는
주문을 받으려고 했다. 박대리는 등심
불고기와 맥주를 주문했다.
맥주 한 병을 다 비울 때까지 박대리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석양이 숲속에서
완전히 빠져 나가고 방갈로 천장의 백열등에
불이 켜진 뒤에야 박대리가 먼저 입을
열었다.
"백정미가 어떤 여자인지는 아십니까?"
"살롱의 마담이죠. 깜찍하게 예쁘고,
말솜씨 좋고 장사수완 좋은 여자 같더군요."
"잘 보셨습니다."
"박대리님과 보통 사이가 아니란 것을
옥경이 핵심을 찌르는 질문을 했다.
"집사람 말입니까? 천만에요. 그 사람이
알았다면 가만 있었겠습니까? 벌써 간통죄로
교도소 문이 닳도록 드나들었을 겁니다."
"그러면 정애는 몇 년 동안이나 눈치를
채지 못했단 말이군요.아니 몇 년 동안이나
정애를 속였단 말씀이죠."
"뭐, 꼭 속였다기보다......"
박대리가 우물쭈물 받아넘겼다.
"비겁해요. 남자들은 왜 그렇게 비겁한지
모르겠어요. 아내가 싫으면 싫다고 분명히
밝히고 행동하면 안 되나요?"
"그렇게 되면 남편을 용서할 아내가 어디
있겠습니까? 시끄럽지않게 하고 싶으니까
그런 거죠."
옥경은 박대리의 이 말에 환멸을 느꼈다.
없는 이중인격자들이란 생각이 들었다.
"남자들은 동시에 두 여자, 세 여자를
사랑할 수 있나요?"
옥경이 한참 동안 아무 말도 않다가 맥주를
한 잔 들이킨 뒤 말했다.
"옛 속담에 열 여자 마다할 남자 없다고
했습니다."
"박선생님도 그 속담의 주인공이십니까?"
주옥경이 경멸스런 눈초리로 박대리를
쳐다보았다.
"꼭 저만 주인공이라고 할 수는 없지요.
여자도 그런 경우가 있는 것 아닙니까?
역사에도 나오지만......"
"예?"
주옥경이 비명처럼 너무나 큰소리를 냈기
때문에 박인구가 말을 잇지 못하고 뚝
"박선생님. 참 비겁하군요. 전 지금까지
박선생님을 그런 분으로 안 보았어요."
"허허허. 용서하십시오. 말을 하다가
보니까 그렇게 된 것입니다. 하지만 백정미를
사귀게 된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만한 이유라뇨?"
"그건 말씀드릴 수가 없습니다. 하지만
우리 부부는 우리 부부대로 그만한 이유가
있었습니다."
"아니, 정애는 그 사실을 모른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옥경이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다시
물었다.
"물론입니다. 그러나 우리 부부의 일과
관련된 일 때문에 내가 백정미란 여자를
"무슨 내용인지 자세히 얘기할 수는
없나요?"
"더 이상 이야기할 수가 없습니다. 오늘은
우리 조용히 저녁이나 들도록 합시다."
"전 꼭 그 이야기가 듣고 싶은데요."
주옥경은 쉽게 단념하지 않았다.
"안 됩니다."
그러나 박대리는 도무지 그 이상은
이야기를 하려 들지 않았다.
입장이 난처해지니까 슬쩍 엉뚱한 이야기를
한 것이나 아닌가 하고 옥경은 생각해
보았다. 그러나 아무래도 그들의 배경에는
옥경이가 모르는 무슨 비밀이 있는 것만
같았다.
그날 밤은 박대리의 말대로 옥경이 더 이상
묻지 않았다. 그들은 밤이 깊어진 뒤에야
옥경은 며칠 동안을 박대리와 정애와
백정미에 관한 생각을 하면서 보냈다.
그 세 사람 사이에 무슨 비밀이 있는지
도무지 짐작을 할 수가 없었다.
더구나 정애의 죽음과 그 일이 무슨 관계가
있는 것만 같은 생각이 자꾸 들었다.
며칠을 보낸 주옥경은 더 참지를 못하고
이태원 살롱으로 백정미를 찾아가 보았다.
"백마담 말씀인가요? 여길
그만두었는데요."
전에 언젠가 왔을 때 본 청년이 옥경을
보고 이렇게 말했다.
"그만두다뇨?"
"그만두는 게 그만두는 거죠. 아가씨는
한국 말도 모르나요?"
청년이 옥경의 아래위를 뚫어지게 훑어보며
"백마담이 이 살롱 주인 아녜요?"
주옥경은 청년의 말이 쾌씸했지만 자기를
아가씨라고 해주는 바람에 화도 내지 않고
조용히 말했다.
"아무리 주인이라도 딴 사람에게 넘기면
남의 것 아닙니까?"
"그럼 이 살롱을 팔았단 말입니까?"
"글쎄, 팔았는지 그냥 줬는지는 모르지만,
하여튼 주인이 바뀌었단 말입니다. 아가씨는
백마담한테 빚준 것이라도 있나요?"
"아뇨."
"그럼 뭐 꼭 찾을 것도 없잖아요. 그런
여자들은 어차피 떠돌이 물장사 아닙니까?
인생은 나그네길......"
청년은 말끝에 유행가 곡조를 뽑아댔다.
"어디로 갔는지 혹시 모르시는지요?"
청년은 계속해서 노래만 불러댔다.
옥경은 어처구니가 없어 그 모양만 빤히
쳐다보다가 살롱을 나와 버렸다.
옥경이 살롱에서 나서자 보도 위에는
뜻밖에 강형사가 서 있었다.
"주여사, 안녕하세요."
강형사는 뜻밖이라는 듯 깜짝 놀라며
인사를 했다. 그러나 뜻밖이라서 놀랐다는 그
제스처가 너무나 어설퍼서 그것이 연극이라는
것을 금방 알 수 있었다.
"또 저를 미행하고 있었군요."
옥경이 몹시 기분이 나빠 쏘아붙였다.
"미행이라뇨. 천만의 말씀입니다. 그건
정말 억울합니다."
강형사가 당황해서 어쩔 줄을 몰라했다.
"전번처럼 또 우연히 여기서 만났다고 하실
작정이세요?"
"아......아닙니다. 실은 저 지하 살롱에
좀 가려고 하던 참입니다."
강형사가 금방 주옥경이 나온 곳을
가리키며 말했다. 그것도 엉겁결에 하는 말
같았다.
"대낮에 그곳은 왜 갑니까? 강형사님은
대낮에도 술을 잘 하시나 보죠?"
주옥경이 한껏 비꼬는 투로 말했다.
"그게 아니라 마담을 좀 만날까
해서였습니다."
강형사가 멋쩍게 머리를 긁적이며
대답했다.
"마담을 만나요? 백정미 말이에요?"
"예? 아니 옥경 씨가 백정미를 어떻게
아세요?"
강형사가 이번에는 정말 깜짝 놀라는 것
"강형사님이야말로 백정미 마담을 어떻게
아세요?"
"헤헤헤, 저야 직업이 형사 아닙니까? 설마
백정미 씨가 주옥경씨 친구는 아닐 테지요."
강형사가 입가에 웃음을 흘리며 말을
계속했다.
"이렇게 길가에서 미인을 만났으니 얼마나
영광입니까? 주간지에 난 오늘의 운세가 어찌
요상하다 싶었지요. <남쪽에서 미인을
만나리라> 그렇게 되어 있던걸요. 헤헤헤."
강형사가 일부러 너스레를 떨었으나
주옥경은 하나도 우습지가 않았다.
"저기 다방에 들어가 차 한 잔 하시지
않겠습니까?"
한참 우물쭈물하던 강형사가 제의를 했다.
"좋아요."
건너에 있는 호텔 커피숍으로 들어갔다.
강형사가 왜 아직도 자기를 미행하고
있는지 알고 싶기도 하고, 백정미를 어떻게
해서 알고 있는지도 알고 싶었다.
"강형사님. 솔직하게 대답해 주세요. 뭣
때문에 내가 외출할 때마다 미행을 하시는
겁니까? 내가 변정애를 죽인 살인범이라고
생각하고 계시는 겁니까?"
주옥경이 커피를 시켜 놓고 마시지는
않았다.
"이번은 정말 미행한 것이 아닙니다.
백정미가 나타나기를 기다린 겁니다. 그런데
기다리는 백정미는 안 나타나고 엉뚱하게
주옥 경 씨가 나타나니까 놀랄 수밖에요.
제가 좀 묻겠는데, 백정미는 뭣 때문에
만나러 왔습니까?"
"백정미가 살인 용의자인가요?"
주옥경은 묻는 말에는 대답하지 않고
오히려 질문을 했다.
"그건 아무도 모릅니다. 백정미가 변정애를
죽였다고 생각하십니까? 그럴 만한 동기가
있습니까?"
"동기야 그만하면 충분하지요. 한 남자를
두 여자가 사랑한다는 것이 동기 아녜요?"
"알고 계셨군요. 주옥경 씨가 어떻게
그것까지 알게 되었나요?"
강형사가 적이 놀라는 표정이다.
"강형사님은 어떻게 해서 알고 있나요?"
"저야 직업이 형사 아닙니까?"
"그럼 백정미가 지금 그곳을 그만두고
사라졌다는 것도 아시겠네요?"
"물론입니다. 그래서 혹시 그곳에 다시
나타나지 않나 해서 기다린 것이랍니다. 정말
주옥경 씨를 미행한 것은 아닙니다. 오해하지
말아 주십시오."
옥경은 강형사의 말을 듣고 있자니 그것이
사실인 것 같은 생각도 들었다.
"왜 백정미를 찾나요? 백정미가 왜
그곳에서 사라졌나요?"
주옥경은 궁금하던 것을 한꺼번에 물었다.
"들켰기 때문입니다."
"들키다뇨?"
주옥경의 눈이 둥그래졌다.
"배원기한테 들켰기 때문입니다."
"예! 배원기라고요?"
주옥경은 더욱 눈이 둥그래졌다.
"아니, 옥경 씨가 배원기를 어떻게
아십니까?"
"청주건설 상무라는 사람 아녜요?"
"저런? 주옥경 씨는 모르는 사람이
없군요."
이번에는 강형사가 정말 감탄하는
표정이었다.
"배원기와 백정미가 무슨 관계가 있었나요?
박대리와 배원기와 백정미와......혹시
삼각관계 같은......"
주옥경은 열심히 머리를 회전시키며 세
사람의 관계를 생각해 봤다. 어떻게 된
영문인지 알 수가 없었다.
"뭣이 들켰다는 말씀인지요?"
"백정미가 원래는 배원기의 품에 있던
사람입니다."
"예? 배원기의 애인이었다구요?"
"애인이라기보다는 정부라고 하는 게
옳을까요?"
"배원기 상무는 총각인데 정부는 무슨
주옥경이 아니꼽다는 듯이 말했다.
"하하하. 죄송합니다. 그럼 애인이라고
해두죠. 어쨌든 백정미가 배원기를 배신하고
박대리한테로 가버렸거든요."
"설마 그럴 리가......"
"제가 조사한 대로 말씀드리는 겁니다.
백정미는 원래 성남에서 조그만 경양식집을
하고 있었어요. 경양식집을 차리기 전에는
서울의 요정에서 호스티스 노릇을 했대나
봐요. 주로 일본인 관광객을 상대했다고
하더군요."
강형사는 백정미의 행장에서부터 박대리와
관계를 가지게 된 경위를 자세히 설명하기
시작했다.
뛰어난 미모와 남자를 사로잡는 그녀의
말솜씨에 어울리게, 그녀는 어려운 길을 헤쳐
자랐기 때문에 출생의 비밀에 대해서는
아무도 알지를 못했다.
백이라는 성은 그가 인천의 고아원에 있을
때 그곳 여자 원장이 자기 성을 따서 붙여 준
것이었다.
정미가 자라서 국민학교를 마칠 무렵 어느
아들딸 없는가정으로 입양이 되어 갔다.
입양된 가정에서 중학교까지 다니며 얌전하고
행복하게 자랐다. 중학교 3학년이 되면서
정미는 처녀티가 나기 시작했다. 출중한 그의
아름다움이 피어난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그녀를 불행하게 만드는
씨앗이 되었다. 어느 봄날 참으로
어처구니없는 일이 일어났다.
9.인생의 뒤안길
중학교 3학년생인 백정미는 퍽 조숙한
편이었다. 고등학교 3학년 여학생한테서
봄직한 몸매를 그대로 드러냈다.
훤칠하게 큰 키에 볼록한 가슴,
버들가지처럼 야들야들한 허리 등 한마디로
잘 빠진 몸매였다.
키는 비온 뒤의 죽순처럼 하루가 무섭게
쑥쑥 자라고 가슴이며 히프가 팽팽해지자
작은 옷이 꼭꼭 끼어 신체의 굴곡이 선명하게
드러났다.
등하교 때마다 지나가는 남학생들이
흘금흘금 눈길질을 했다. 남학생뿐 아니라
젊은 남자들도 곁눈질을 하며 지나갔다.
정미는 조숙한 데다가 풍기는 분위기마저
가끔 어른스러운 농담을 자주 거는가 하면
남자 선생님을 당황하게 하는 질문도
거침없이 퍼붓고는 혼자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한마디로 말해 맹랑한 아이였다.
이러한 정미의 맹랑한 모습은 그의
양아버지 눈에도 이상하게 비추어졌다.
40대 초반의 양아버지 변일중은 젊을
때부터 알아주는 바람둥이였다. 미혼 시절에
하도 함하게 몸을 굴리고 이 여자 저
여자한테로 옮겨 다녔기 때문에 몹쓸 성병에
걸리고 마침내는 아기를 낳을수 없는
지경에까지 이르렀던 것이다.
그 바람기는 나이가 들어도 변하지 않고
마침내 양딸인 정미를 이상한 눈으로 보기
시작했다.
따지고 보면 백정미와 변일중의 사이는 피
그러나 이름이나마 부녀간으로 정하고 나면
딴 마음이 생기지 않는 것이 짐승 아닌
사람의 당연한 도리이다.
그러나 변일중에게 사람의 판단이나,
사람의 눈을 가지라고 하는 것이 아예
무리일지 몰랐다.
슬금슬금 기회만 엿보던 변일중은 마침내
결정적인 기회를 잡았다.
변일중의 아내가 집을 비울 일이 생겼다.
친정 어머니가 시골집 장독대에서 넘어져
크게 다쳤다는 소식이 왔다. 아내는 허둥지둥
차비만 챙겨 가지고 시골집으로 내려갔다.
아파트에는 그날부터 변일중과 백정미만이
남게 되었다.
바로 그날 밤. 학교에서 돌아온 정미가
욕실에서 샤워를 했다.학교에서 배드민턴
돌아오면 거의 매일 샤워를 하는 편이었다.
정미가 콧노래를 부르며 한창 샤워를 하고
있을 때였다. 슬그머니 욕실 문이 열리고
누군가 들어왔다.
문을 잠그지 않은 것이 잘못이었다.
"아니......"
백정미는 너무 놀라 어쩔 줄을 몰라했다.
평생에 그렇게 놀라보기는 처음이었다. 뭐가
어떻게 돌아간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한참
동안 정신을 잃고 있던 백정미는 울면서
옷가지를 챙겨 들고 한밤중에 그 집을
뛰쳐나오고 말았다.
학생복 차림으로 길거리에 나왔으나 갈
곳이 없었다.
무턱대고 이곳저곳 밤길을 걸어다니다가
피곤하고 지쳐 더 이상 걷기가 싫어지자 어느
한기로 몸이 오싹했지만 워낙 잠이 퍼부어
그냥 비몽사몽간을 헤매고 있을 때였다.
"이봐 학생, 학생......"
누가 몸을 흔들어 깨웠다. 정미는 간신히
눈을 떴다. 희미한 가로등 빛에 낯선 청년의
얼굴이 보였다.
"학생, 이런 데서 자면 어떡해? 집이
어디야?"
청년이 근심스러운 듯이 물었다.
"......"
정미는 그냥 멀거니 청년만 쳐다보고
대답을 하지 않았다. 집이 있다고 할 수도
없고, 없다고 할 수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처녀가 이런 곳에서 자면 어떻게 해.
통금시간이 아직 안 풀렸으니 어딜 갈 수도
없고......가만 있자......"
듯하더니 다시 말했다.
"우리 공장이 여기서 멀지 않으니 우선
공장 숙직실로 가서 이야기하자. 걸을 수
있지?"
청년이 고개를 끄덕이며 물었다.
정미도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정미는 그렇게 해서 청년의 공장으로 갔다.
골목길로만 걸으며 방범대원을 피해 갔다.
말이 공장이지, 찌그러져 가는 빈민가에
이상한 솥 같은 것만 몇 개 걸려 있고,
고약하게 썩는 냄새 같은 것이 코를 찌르는
그런 곳이었다. 공장 뒤에 쥐구멍만한 작은
방이 하나 있었다. 다 떨어진 비닐 장판이
연탄불에 군데군데 타서 얼룩이 져 있었다.
정미는 그 이상한 공장 뒷방에서
새우잠으로 날을 새웠다.
새벽녘이 되자 어디서 자고 왔는지 청년이
문 밖에 와 있었다.
"학생, 이리 나와 봐."
청년은 문을 열지 않은 채 굵은 목소리로
정미를 불러냈다.
정미는 교복을 입은 채로 잤기 때문에 옷도
갈아입을 필요 없이 머리만 손가락 빗질을
대강 하고 공장으로 나왔다.
"이름이 뭐지?"
청년은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정미예요."
"성은?"
"잘 모르지만 백이라고 부르기도 해요."
"잘 모르지만......?"
청년의 눈이 둥그래졌다.
"네."
"......?"
따서 그냥 백이라고 해요."
"음, 그랬었구나."
청년은 측은한 표정으로 정미를
건네다보았다.
정미의 눈에 청년은 유순하고 착한
사람처럼 보였다.
"몇 살이니?"
"열일곱이에요."
정미는 두 살을 올려서 말했다. 그렇게
말해도 워낙 성숙해 보였기 때문에 이상하게
보지 않았다.
"배고플 테니 우선 우거지 국밥이나 한
그릇 먹으러 가자."
청년이 앞장서서 공장을 나갔다. 두 사람은
해장국을 파는 청진동까지 걸어가서 선짓국을
두 그릇 시켜 맛있게 먹었다. 저녁도 굶었던
정신없이 선짓국을 퍼넣는 정미의 모습을
청년은 미소를 지으며 흐뭇한 표정으로 보고
있었다.
"나는 길가야."
"예? 무슨 길인데요?"
정미가 엉뚱한 질문을 했다.
"성이 길이란 말이야. 길동주. 동주는 내
이름이고......"
"아, 예."
그제야 정미도 마주 웃어 보였다.
"아저씨는 무슨 공장을 하세요?"
정미는 내내 궁금하던 것을 물어 보았다.
그러나 청년은 대답하지 않았다.
길동주가 하는 공장은 접착제 공장이었다.
주로 공업용 접착제를 만들어 유명 상표를
몰래 가져다 붙여 도매하는 일을 혼자서 하고
정미는 그날부터 학교도 집어치우고 청년을
거들어 그 집에서 살았다.
그러자니 자연히 청년과 공장 뒷방을 함께
사용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그들은
마침내 부부 아니 부부가 되고 말았다.
그때의 몇 년이 백정미에게는 꽤나 즐거운
세월이었다. 비록 남의 상표를 훔쳐서 파는
떳떳하지 못한 일을 했지만, 서로를 아끼고
사랑하는 마음은 순수했다.
그러나 그들에게 시련의 날은 오고 말았다.
가짜 상표를 만들어 판 것이 들통나 마침내
길동주가 경찰에 잡혀가 감옥살이까지 하게
된 것이었다.
처음 길동주가 구치소에 있을 때는 열심히
면회를 가면서 찾아다녔으나 형을 받고 난
뒤부터는 길동주가 소식을 끊어 버려 어느
백정미는 길동주가 자기를 잊게 하려고
일부러 그렇게 한 것이라고 생각했다.
다시 외톨이가 된 백정미는 그가 자란
고향과도 같은 인천으로 갔다. 거기서 어느
칼국수집의 아르바이트 학생으로 취직을
했다.그녀가 거짓말을 하기 시작한 것은
이때부터였다.
백정미는 그후 몇 년간을 계속 대학생
행세를 하면서 다녔다.
그것이 동정을 받아 지내기도 편했고
취직도 잘 되었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칼국수집 종업원으로부터 어느
선박회사의 구내식당 경리로 자리를 옮겼다.
그것도 몇 달 하지 못하고 다방으로, 카페로
자주 옮겨 다니다가 마침내는 룸살롱으로,
요정으로 옮기고, 일본관광객이나 미국상사
인생의 뒤안길을 샅샅이 뒤지고 다니는
꼴이 되었다.
그 동안 돈도 제법 모으고 야간학교도
다니고, 일본인의 현지처노릇도 몇 달씩이나
했다.
그러다가 모은 돈은 건달들한테
사기당하고, 이 남자 저 남자한테 속아 생을
포기할까 하는 생각도 몇 번씩이나 했다.
그러다가 몇 년 전에 만난 사람이 배원기
상무였다.
친구들과 함께 인천에 놀러 나왔다가
연안부두 근처의 룸살롱에서 배원기 상무를
처음 만난 것이다.
배원기는 훤칠한 키에 서글서글한 눈매를
가진 백정미가 첫눈에 들었다.
백정미도 능란한 화술에 어딘가 순진한
배원기는 술좌석에서 친구들을 다 버리고
혼자 빠져 나와 백정미를 데리고 서울로
와버렸다.
혼자 있는 배원기의 아파트로 백정미를
데리고 갔다.
그날 밤부터 배원기의 손아귀에 백정미가
쥐어 있었다.
두 사람은 힘을 합쳐 이태원에 지하 살롱을
차렸다.
살롱은 백정미가 운영을 하게 되었다.
백정미는 배원기에게 결혼을 하자고 졸랐다.
백정미는 살롱 같은 것에는 신물이 났으니
이제 집어치우고 살림이나 하는 한 사람의
아내가 되고 싶다고 했다.
그러나 배원기의 생각은 달랐다.
출중한 미인이기는 하지만 산전수전 다
일생의 반려자로 삼고 싶지는 않았다. 한때
같이 즐기는 여자로 끝내고 싶었던 것이다.
아니 끝낸다기보다는 그런 여자를 옆에 두고
싶었던 것이다.
풍부한 잠자리 기술은 특출했다.
어떤 남자든지 침대 위에서는 백정미한테
감탄하지 않는 사람이 없을 정도였다.
그러한 여자를 배원기는 멀리 떨어진 곳에
숨겨 두고 싶었다.
그래서 실제로 배원기는 백정미를 자기
아파트에 오지 못하게 했다. 처음 백정미를
데리고 갔던 아파트를 팔아 버리고 이사를 한
뒤 백정미한테는 새 아파트 위치를 가르쳐
주지 않았다.
백정미는 그런저런 일들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러나 이태원 룸살롱을 차릴 때
참고 지냈다. 결혼을 요구했다가 거절까지
당했지만 그냥 참았다.
그 무렵에 살롱을 자주 드나들던 박인구를
알게 된 것이다.
활달한 성격에 통이 큰 박인구가 금방
백정미의 마음에 들었다.
회사 고객들과 함께 두어 번 드나들던
박인구가 어느 날 대낮에 느닷없이 백정미를
찾아왔다.
"여, 백장미, 화장 안 한 모습이 더
매혹적인데. 밤에 보는 모습보다 백 배는 더
아름다워."
박인구는 백정미를 백장미라고 불렀다.
"아이 부끄러워요. 아직 세수도 못 했는데.
이렇게 예고도 없이 불쑥 찾아올 수 있어요?"
백정미는 12시가 다 되었지만 아직 기동도
판이었다.
박인구는 다짜고짜 백정미를 두 팔로 덜렁
안아다가 침대 위에 팽개치듯 집어던지고는
위에서 양팔을 벌려 정미의 양 팔목을 위에서
누르며 목덜미에 키스를 퍼부었다.
백정미는 박인구의 밑에 깔린 채 기분좋게
박인구의 대낮 입맞춤을 받아들였다.
그들은 천천히 단추를 풀며 한낮의 정사를
즐겼다. 마치 익숙한 부부가 서로를 즐겁게
해주듯 두 사람의 정사는 자연스럽고 뜨겁게
이루어졌다.
처음엔 그냥 박인구의 입술을 받아들이면서
양손은 바닥에 늘어뜨린 채 수동적이기만
하던 백정미는 자신의 몸이 서서히
달아오르는 것을 느꼈다.
자신의 입술을 밀고 목구멍 깊숙이
뜨거워지는 것 같았다. 마침내 자기 혀로 꼭
깨물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이번에는 백정미가 자기 혀를 내밀어
박인구의 혀 위로 쳐들어갔다. 그때까지
가만히 있던 두 손이 박인구의 등뒤로 올라가
어깨를 가볍게 쥐었다. 그리고 고개를 쳐들어
박인구의 얼굴에 자기 얼굴을 더
밀착시키려고 애를 썼다.
마침내 두 손으로 박인구의 볼을 껴안고
뜨거운 숨을 내뿜었다.
박인구의 목이며 어깨며 등은 탄탄한
근육질로 싸여 있었다. 금방 조율한 바이올린
줄처럼 탄력이 넘쳤다.
땀이 송송이 배나와 백정미의 손바닥에
끈끈하고 짜릿한 감촉으로 전해왔다.
그러는 사이에 박인구는 우악스런 한쪽
움켜쥐었다. 백정미는 그가 너무 세게 젖을
움켜쥐었기 때문에 아프기까지 했으나 그
아픔은 기분을 자극하는 상쾌한 아픔이었다.
젖가슴의 아픈 듯한 쾌감이 뱃가죽을 타고
하체의 은밀한 곳으로 연결되었다. 마치
다이너마이트의 도화선이 뇌관을 향해 불을
당기는 것과 같았다.
박인구의 손은 천천히 젖무덤을 애무하다가
이번엔 배를 쓰다듬으며 밑으로 움직였다.
마지막 보루처럼 남아 있던 조그만
헝겊조각인 팬티가 박인구의 손 앞에
뱀허물처럼 벗겨져 나갔다.
박인구의 손이 삼각지대에 닿자 백정미는
고압선에 감전된 듯 꿈틀거렸다.
백정미는 더 참을 수 없다는 듯 신음소리를
토하며 박인구를 몸으로 재촉했다.
싸안았다.
그러나 박인구는 서둘지 않았다. 그는
천천히 입술을 옮겨 백정미의 목을 괴롭혔다.
귀밑에서 목줄기로 옮겨가는 박인구의 젖은
입술이 백정미의 모든 신경을 다 일깨워
놓았다. 사자가 대뇌의 통제를 벗어나
제멋대로 꿈틀거리기 시작했다. 입술이
바싹바싹 마르는 것 같았다.
박인구는 목에서부터 애무의 입술을
가슴으로 옮겼다. 팽팽하게 긴장해 있던
핑크빛 젖꼭지에 박인구의 입술이 닿자
백정미의 목에서 끙 하는 신음이 터져
나왔다. 박인구를 껴안은 백정미의 작은 손이
파르르 떨렸다.
그러나 박인구는 더욱 천천히 움직이면서
백정미를 괴롭혔다.
애무하다가 천천히 밑으로 움직였다. 그
동안에 박인구의 두 손도 쉬지 않고 백정미의
소중한 풀밭과 히프를 괴롭히고 있었다.
뜨거운 숨결을 뿜으며 밑으로 움직이던
박인구의 입술이 백정미의 배꼽에 이르자 딱
멈추었다.
박인구의 날렵한 혀가 그곳에서 활발하게
움직였다. 또 한 번 백정미의 입에서 탄성이
터져 나왔다.
이번에는 박인구도 더 기다릴 수 없다는
듯이 그의 입술이 바로 비너스의 언덕으로
내려갔다.
"엄마아......"
백정미의 등이 허리처럼 굽으며 몸부림을
쳤다. 두 팔이 박인구의 머리카락을 쥐고
잡아당겼다.
백정미는 고문을 더 견딜 수 없다는 듯
애원을 했다. 두 다리가 바둥거렸다.
"정말이야?"
박인구도 숨이 턱까지 꽉 찬 채 말했다.
"응! 시키는 대로 다 할게, 제발, 제발 좀
살려 줘요. 응?"
그제사 박인구는 천천히 백정미 위에 몸을
실었다.
박인구의 뜨거운 남성을 마음속 깊이까지
받아들이며 백정미는 또다시 깊은 신음을
토해 냈다.
두 평 남짓한 조그만 방에 격렬한 파도가
일기 시작했다.
두 맹수가 싸우는 것 같은 신음소리가 방
안을 가득 채우고 창 틈으로 새나갔다.
백정미는 손톱자국이 나도록 박인구의 등을
않으려는 일엽편주처럼 발버둥을 치며
울었다.
"살려 줘, 살려 줘요."
백정미는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목놓아
고함을 쳤다. 두 다리와 두 팔이 허공을
휘저으며 발악했다. 목에 굵은 핏줄이 터질
듯이 튀어나왔다.
백정미는 마침내 이 세상 최후 같은 심연
속에 빠지고 말았다.그 깊고 깊은 쾌락의
심연, 차라리 고통이라고 해야 할 쾌락의
심연은 겨우 헤어나오자 또 빠지고, 또
빠지고 했다. 그녀의 절정은 너댓 번이나
계속되었다.
"이제 그만 놔줘요. 살려 줘요."
백정미는 마침내 기진맥진해서 헛소리처럼
떠들었다.
배춧잎처럼 녹초를 만든 뒤에 여유 있게 노를
걷어 올렸다. 놀라운 힘과 기술이었다.
"박선생님은 사람이 아니에요."
꼼짝도 않고 반듯이 누운 채로 겨우 정신을
차린 백정미가 말했다. 희고 풍만한 육체는
땀으로 범벅이 되어 있었다.
"사람이 아니면?"
박인구는 지극히 만족한 듯이 옆으로
비스듬히 누운 채 담배에 불을 붙이며
말했다.
"수퍼맨이란 거 있지요? 아니 수퍼맨의
형님쯤 되는 것 같아요.어쩌면 그렇게 멋질
수가 있어요. 정말 난 죽는 줄 알았어요.
당신 사모님은 밤마다 이렇게 당하고도 아직
살아 있어요?"
백정미는 진심으로 박인구의 놀라운 힘에
그 이후부터 백정미의 마음은 배원기로부터
박인구에게로 옮겨졌다.
"그러면 백정미와 배원기의 관계는 어떻게
되었나요?"
백정미의 인생유전을 듣고 있던 옥경이 빈
찻잔을 양손으로 만지작거리며 물었다.
"더블 플레이라는 게 있지요."
강형사가 능글맞게 빙긋이 웃으며 말했다.
"예? 아이 불쾌해"
주옥경은 정말 불쾌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니까 배원기와의 관계는 자연히
멀어지고, 박인구와 가까워졌던 것이죠.
종내에는 까놓고 박인구를 받아들였으니까요.
우리 차 한 잔씩 더 시켜 먹읍시다."
강형사가 느닷없는 제의를 했다. 주옥경도
그냥 고개만 끄덕였다. 조금 있다가 주스 두
"박대리가 백정미를 애인으로 만드는 데는
상당한 사연이 있는것 같던데......"
주옥경이 강형사를 보며 넌지시 말문을
열었다.
"놀랍군요. 주옥경 씨는 박인구에 대해
거의 모르는 것이 없군요. 그 얘긴 어디서
들으셨어요?"
강형사는 진심으로 감탄한 듯했다.
"확실한 내용은 모르지만 그런 사정이 있는
것 같았어요."
주옥경은 박인구가 하던 말을 되살려 내며
대답했다. 그 이유는 말하지 않았지만
박인구는 백정미를 애인으로 삼을 만한
이유가 있다고 말했었다.
"누구한테 들으셨나요?"
"들은 건 아녜요. 육감이란 것이
육감이라는 것이 더 정확하대요. 호호호."
"나도 그것은 아직 확신이 없습니다.
그러나 박인구가 배원기에 대한 복수로
백정미를 홀린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어요."
"홀려요?"
"예, 말이 지나쳤나요? 박인구가 상당한
거액을 백정미한테 여러 차례에 걸쳐
건네주었더군요. 2천만원짜리 보석
반지며......"
"예? 2천만 원짜리 반지도 있나요?"
주옥경의 눈이 둥그래졌다. 놀란 눈이
서서히 질투에 불타는 눈으로 변해 가고
있었다.
"몇 억짜리도 있다고 합니다. 주여사는
그런 것 몇 개 없나요?"
"저희 아빠 같은 가난한 월급쟁이가 2천만
원짜리가 뭣니까? 2천 원짜리 유리 반지나
끼고 다니지요."
주옥경은 왼손가락에 낀 옥색 반지를
들어서 펴보이며 말했다.
"어쨌든, 여러 가지 정황으로 보아
박인구가 백정미를 결사적으로 유혹한 것만은
틀림없어요."
"무엇 때문이었을까요?"
"남자가 여자를 홀리는 데 이유야 한
가지밖에 더 있습니까? 남자가 여자를 향한
최종 목표란 다 뻔한 것이라고 사람들이
말하잖아요? 내가 너무했나? 실례했어요."
강형사는 자기 말이 빗나간 것을 뒤늦게
느끼고는 손으로 목덜미를 긁으면서
겸연쩍어했다.
"강형사님도 참 순박한 데가 있어요. 아직
총각이라고 했죠?"
"필요에 따라서는 총각도 되고 세종이
아버지도 됩니다."
"세종이가 누구예요?"
"제 아들입니다."
"예?"
"아직 태어나지는 않았지만......거짓말이
필요할 때는 세종이아버지라고 합니다.
다음에 장가들어 아들을 낳으면 세종이라고
할겁니다."
"왜 세종이에요?"
"세종대왕처럼 훌륭한 사람이 되라고
그렇게 지은 겁니다. 세종대왕이 알면
야단치겠죠? 후후후."
강형사는 유쾌하게 웃었다.
"그건 그렇고, 박대리가 왜 배원기한테
"후후후. 듣고 보니 기분이 나쁜 것도
아니군요. 후후후."
강형사는 얼굴까지 붉히며 한참 웃고는
입을 열었다.
"배원기가 박인구의 처인 변정애와 밀애를
한 것 같습니다."
"예?"
주옥경이 입을 딱 벌렸다.
"이건 아무런 증거를 잡지 못했습니다만 내
육감으로는 틀림없는 것 같습니다. 변정애가
어떤 경로로 배원기를 알게 되었는지는
모르지만 상당히 오래 전부터 두 사람이 다른
사람의 눈을 피해 만난 것 같습니다. 꼬리가
길면 반드시 밟히는 법이죠. 이것을 박인구가
눈치챈 것 같습니다.
박인구는 눈치를 채고도 변정애한테
모르는 척하고 있으면서 변정애가 고백해
오거나 돌아서기를 기다렸는지도 모릅니다.
아니, 그보다 그런 어마어마한 일을
표면화시켜 결혼생활을 깨버리는 것에 겁이
났는지도 모르구요. 사람들이 자기 몸에 큰
병이 발견될까 봐 겁이 나서 병원에
진찰받으러 못 가는 심리하고 비슷하다고
할까요."
"그건 말도 안 돼요. 상대가 자기 아내인데
질투와 분노의 감정도 없단 말이에요?"
"왜 질투나 분노가 없었겠습니까. 그러나
박인구 같은 사람이면 한순간은 참을 수도
있는 사람입니다."
"정말 그런 사람이 있을까요?"
주옥경은 믿기 어렵다는 표정을 지었다.
"어쨌든, 박인구는 참은 것 같습니다.
있었지요. 그때 마침 숨겨 놓았던 배원기의
여인 백정미를 발견했던 겁니다."
"아이 말도 안 돼. 남자들의 세계는 그런
거예요?"
주옥경이 벌레 씹은 듯한 얼굴로 말했다.
"왜요?"
"남자와 여자란 일 대 일이라야 연애감정이
싹트는 것 아녜요? 한꺼번에 두 여자를 두고
동시 연애를 할 수 있는 거예요? 그런것이
남자의 세계라면 남자란 정말 동물과 다를
바가 없군요."
"허허허. 남자라고 다 그런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대다수의 남자는 그런 일을 그렇게
어렵게 생각하지 않는 것 같더군요. 가령
결혼해서 아내를 두고 있는 남자들이
지방이나 해외에 출장가서는 이름도 성도
싹 잊어버리거든요. 요즘 그런 유부녀도
많다고 하던데요."
"그야 세상엔 별의별 여자들이 다
있으니까......정신병자는 빼고 이야기해요.
그런데 배원기와 정애가 몰래 사랑을 나누고
있었다는 것은 확실한 증거를 잡고 하시는
말씀이세요?"
주옥경은 따지듯 물었다.
"이거, 추경감이 아시면 기밀 누설했다고
내 모가지를 자를 텐데......어쨌든 심증만은
가지고 있습니다. 주로 박인구가 출근하고
없는 사이, 즉 대낮에 변정애와 배원기가
몰래 만난 것 같습니다. 만나는 장소가
대여섯 군데로 제한되어 있는 것 같더군요.
주로 변정애 씨의 아파트 근처에 있는
호텔이나 카페 같은 데서 만난 것
같았습니다."
"대낮에 호텔방에서 만난단 말입니까?"
"호텔에 꼭 뭐 방만 있습니까? 후후후."
강형사는 무엇이 유쾌한지 큰소리로
웃었다.
"그들은 꼭 호텔이나 음식점에서만 만난
것은 아닙니다. 변정애의 안방에서도 가끔
만났는지 모릅니다."
"예?"
주옥경은 몇 번째 놀라는지 몰랐다.
강형사는 옥경이 놀랄 만한 이야기를 여러
차례 털어놓았다.
정말 추경감이 알면 그냥 두지 않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배원기가 정애의 아파트에 찾아왔단
말입니까? 그것도 박대리가 출근하고 난 뒤에
정애의 침실로 찾아왔다는 겁니까?"
"확실하지는 않지만 그랬던 것 같습니다.
더구나 변정애가 살해되던 날도 그 집을
방문했는지 모릅니다. 난 지금 그것을 캐고
있는 중입니다. 아이구, 이거 큰일났네. 지금
한 말은 전부 취솝니다. 주여사, 없었던 걸로
해주세요."
강형사는 코메디 흉내를 내며 말했으나
그것은 진정인 것 같았다.
10.유혈의 별장
"반장님, 빨리 현장으로 가보셔야죠?"
강형사는 허둥대며 말했다. 사건이 나면
침착해야 한다고 추경감이 늘 말했지만
강형사는 사건이 날 때마다 허둥거리는
버릇은 여전히 고치지를 못했다.
추경감은 강형사의 그런 모습을 물끄러미
쳐다보고 있다가 빙그레 웃으며 담배를 꺼내
물었다.
강형사는 자기가 늘 허둥거리다
핀잔받았다는 것을 그때야 느끼고
멋쩍어했다.
"형사생활 8년에 못 고친 버릇이 이
촐랑대는 버릇입니다. 반장님, 미안합니다."
"그래 현장이 어디라고?"
어디랍니다."
"현장도 모르면서 어떻게 간다는 거야?"
추경감이 입을 삐죽 내밀어 보였다. 그럴
때는 꼭 어린애 같았다.
"감식차 기사가 압니다. 우린 감식차만
따라가면 됩니다."
"또 강형사가 핸들 잡는 거야?"
"저만한 운전수 또 있습니까? 싫으시면
감식차를 타세요."
"계집애처럼 삐치기는......쯧쯧."
추경감은 그러면서 앞장서서 사무실을
나섰다.
남태령 너머 경기도 과천 막계동에 있는
박인구의 별장에서 백정미가 발견되었다.
그냥 발견된 것이 아니라 피살된 것으로
보이는 시체로 발견된 것이다.
20여 일 만에 거기서 시체로 발견된 것이다.
추경감과 강형사, 그리고 시경의 감식차는
근 한 시간 만에 현장에 도착했다.
서울대공원의 짙푸른 숲을 바라보는 언덕
위에 단층집 별장이 있었다.
널찍한 마당에 나지막한 담과 빨간 기와
지붕이 정겨운 시골풍경 같았다. 담 안에는
조그만 살림집이 별도로 있었다.
별장은 큼직한 거실과 부엌,식당, 그리고
침실이 두 개 있었다.거실 옆에는 홈 바가
간단하게 설치돼 있었고 침실과 거실 사이에
제법 큼직한 욕실이 있었다.
백정미의 시체 주변은 추경감이 도착했을
때까지 잘 보존되어 있었다.
백정미는 목욕탕 바닥에 반듯하게 누운 채
눈을 뜨고 잠든 상태로 죽어 있었다. 왼쪽
바닥을 반 이상 적셔 끔찍한 광경을
이루었다.
주위엔 박살난 도자기 파편들이 흩어져
있고 얼굴은 잠든 듯 평온했다. 얇은 연두색
잠옷을 걸치고 있었는데 잠옷이 워낙 얇아
안에 브래지어나 팬티를 입지 않았다는 것을
금방 알 수가 있었다.
젖가슴께 불그스름한 두 개의 꼭지가 잠옷
위까지 비쳤으며 아랫도리의 비너스 언덕도
짙은 색깔로 비쳐 보였다.
현장에는 과천 경찰서의 정사복 경찰관들이
여러 명 나와 있었다.
"누가 제일 면저 발견했습니까?"
추경감이 상냥하게 인사하던 과천서의
사복형사를 보고 물었다.
"예. 이 집에 사는 전씨가 발견했습니다.
거실 구석에서 불안에 떨고 있던 어리숙한
중늙은이는 허리를 굽신거리며 추경감 앞에
나왔다. 다리를 약간 저는 것 같았다.
"몸이 불편하십니까?"
추경감이 부드럽게 물었다.
"배냇병신이라서 그렇습죠."
전씨가 불안한 얼굴로 대답하며 추경감을
쳐다보았다.
한쪽 눈이 흰자위뿐이었다. 절름발이에다가
애꾸였다.
"이 별장하고 무슨 연고가 있습니까?"
추경감이 묻자 그 대답은 과천서 형사가
했다.
"이 별장에 딸린 밭을 가꾸고 여기서
별장을 지키는 박씨네 고용원입니다."
"박씨네?"
아버님이 사두었던 땅인데......"
"알겠어요. 그래 당신이 시체를 발견하게
된 경위를 설명해 보십시오."
"예. 저는 여편네가 입원해 있는 서울에
갔다가 하룻밤 자고 아침에 왔는데 안채에서
아무 기척이 없어 들어와 봤더니 글쎄, 이런
변이......"
"그럼 당신은 어제 저녁에 이곳을 떠났다가
오늘 아침에 왔단 말인가요?"
강형사가 물었다.
"그렇습니다."
"당신이 떠날 때 이 별장에는 누가
있었나요?"
"박선생과 저 여자가 있었습죠. 박선생이
자꾸 서울 여편네한테 가보라고
권해서......"
"박선생이란, 박인구 대리 말인가요?"
"예."
추경감과 강형사는 깜짝 놀랐다.
"박대리는 지금 어디 있나?"
추경감이 물었다.
"회사에서 일하고 있겠죠 뭐."
강형사는 쉽게 대답했다.
"전씨의 아주머니는 어디가 어떻게
편찮으신가요?"
"그 여편네는 평생 애물이랍니다.
어지럼병이 있어 툭하면 쓰러지는
통에......"
전씨는 괴로운 얼굴로 대답했다.
"저 여자와 박인구 씨는 언제 여기
왔나요?"
추경감이 다시 물었다.
"저 사모님은 어제 처음 보았습니다. 어제
오시더군요. 차는 박선생님이 직접 몰고
왔습죠."
"그럼 박선생은 언제 갔나요?"
"그걸 제가 어떻게 압니까? 오늘 아침에
와보니까 집이 이 모양이......"
"이 집엔 전씨 외에는 아무도 살지
않습니까?"
"저와 할망구 둘이만 사는데......"
검사관들이 재빨리 초동수사를 시작했다.
플래시가 좁은 목욕탕에서 계속 터졌다.
추경감은 그 동안 거실 이곳저곳을
돌아보았다.
별장치고는 수수했다. 고급스런 가구 같은
것은 없고 모두가 실용적으로 장식돼 있었다.
벽에는 조선조 때 것으로 추측되는 민화가
여러 장 걸려 있었다. 식탁이며 소파도 극히
거실에는 더블베드가 놓여 있었는데 시트가
반쯤 벗겨져 있고 그 밑에 여자의 브래지어며
팬티, 블라우스, 스커트 등이 제멋대로
흩어져 있었다.
조그만 탁자에는 칵테일 글래스잔 두 개가
놓여 있었는데, 하나는 비어 있고 하나는
양주가 조금 남아 있었다.
안주가 있었던 흔적은 없었다. 추경감은 그
글래스의 지문을 채취하고 남은 양주를
감정하도록 일렀다.
탁자 옆에 백정미 것으로 보이는 핸드백이
놓여 있었다. 회색 뱀가죽으로 된 큼직한
백인데 제법 고급으로 보였다.
추경감은 그것을 주워 열어 보았다.
손수건이며 화장품 따위가 얼른 눈에 띄었다.
백 안에 있는 작은 주머니에 명함 같은 게
룸살롱 전화번호를 넣은 백정미 자기 명함,
박인구의 명함, 배원기 상무의 명함 등이
나왔다.
"강형사 이것 좀 들고 다녀."
추경감은 명함을 도로 집어 넣고 백을
강형사한테 주었다.
"예? 제가 여잡니까? 이런 걸 들고......"
여기까지 이야기하다가 추경감의 표정이
변하자 아무 소리 하지 않고 백을 받아
어깨에 메었다.
두어 시간 걸려 검증이 거의 끝났다.
"왼쪽 팔의 동맥을 예리한 칼로
잘랐더군요. 직접적인 사인은 그것
때문이랍니다."
감식반의 김경위가 추경감한테 대강 설명을
했다.
흔적이 있는데 도자기로 맞은 것인지,
넘어지며 도자기에 부딪쳐 다친 것인지 알
수가 없습니다."
"그렇다면 스스로 팔의 동맥을 끊어
자살했다고 볼 수 있는 것 아닌가?"
추경감이 의문을 제기했다.
"글쎄요. 꼭 그렇지 않다고는 말할 수
없으나,유서가 없다든지,머리 뒤의
타박상이라든지, 죽어 있는 장소 등 여러
가지 정황이 자살했다고 보기는 힘든 것
같습니다."
"전씨가 이 집에 들어올 때 문은 잠겨
있었나요?"
강형사가 전씨를 돌아보며 물었다. 문이
잠겨 있었다면 자살의 가능성도 있는 것이다.
"현관 문과 목욕탕 문이 열려 있었습죠."
추경감은 강도들의 짓이 아닌가 해서 물어
보았다.
"정신이 없어 자세히 보지는 못했습니다만
없어진 건 없는 것 같습니다. 여긴 뭐 값나갈
만한 물건은 아무것도 두질 않으니까요."
"추행당한 흔적은 없습니까?"
"그건 부검을 해봐야 알겠지만 특별히 그런
흔적은 없습니다."
김경위가 설명했다.
"박인구한테 연락을 했나?"
추경감이 강형사를 보고 말했다.
"제가 전화를 했습죠."
전씨가 대답을 했다.
"이리로 온다고 하던가?"
"아뇨. 간단히 알았다고만 하더군요."
전씨는 이해할 수 없다는 듯이 고개를
그 말은 추경감이나 강형사도 납득이 가지
않았다. 애인이 죽었다는데 알았다고 간단히
대답만 하는 남자가 있을까? 그리고 현장에
나타나지도 않는다는 것은 뭔가 석연찮은
데가 있다고 생각되었다.
추경감과 강형사는 서울로 돌아오는 차
속에서 창 밖을 내다보며 계절을 처음으로
느꼈다.
어느새 나무들의 누릇누릇한 단풍잎이 눈에
띄었다. 8월 하순인데 벌써 가을의 전령이
서울 교외까지 온 것 같았다.
"이번 사건은 경기도 관내서 일어난 건데
왜 우리가 해야 합니까?"
강형사가 핸들을 잡은 채 나직이 말했다.
"왜, 잘못했나? 백정미의 소재를 수배한
것은 우리 서울 시경이었어. 그리고 변정애
추경감이 차분하게 말했다.
"백정미의 죽음이 변정애 피살사건과
관계가 있다고 보십니까?"
"나는 그렇게 본다네. 우선 변정애의
남편인 박인구가 양쪽에 다 관련이 되어 있지
않은가?"
"제 생각으론 배원기라는 자가 관련이 있지
않을까 하고 생각하는데요."
"배원기?"
"예. 그 청주건설 상무라는 자 말입니다.
그자는 변정애와 통정했을 가능성이 높은
자입니다. 말하자면 가정 주부인 변정애의
애인이기도 하고 백정미의 애인이기도
합니다. 노총각으로 있으면서 이 여자 저
여자를 자유롭게 농락하는 그런 건달이지요.
이 작자가 백정미를 박인구한테 뺏기니까
백정미와 그 별장에서 하룻밤을 즐긴 뒤
새벽녘에 서울로 갔을 겁니다. 박인구가
나가기를 기다리고 있던 범인이 별장으로
들어가 백정미를 죽인 것 아닐까요? 그놈이
바로 배원기일 가능성이 크다 이겁니다.
반장님, 제 생각이 어때요?"
강형사가 히죽히죽 웃으며 코미디 흉내를
냈다.
"좌우간 박인구를 만나 뭐 좀 알아봐. 그
녀석한테 무슨 열쇠가있을지 모르니까."
"그 친구도 보통내기는 아닙니다. 배원기와
함께 바람둥이로 친다면 막상막하겠지요.
배짱 좋고 넉살 좋고......"
"허우대도 좋은 편이지."
강형사는 추경감을 시경 앞에 내려놓고
박인구를 만나러 단자회사로 갔다.
없었다.
막계동 별장으로 갔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강형사는 다시 배원기를 만나러 갔다. 어쩐지
그가 범인일 것이라는 생각이 자꾸 들었다.
변정애도 그 녀석이 죽였을 것이란 생각을
강형사는 오래 전부터 하고 있었다.
배원기는 자기 집무실에서 결재서류를
만지작거리고 있다가 강형사를 맞이했다.
"여, 이거 기자 나으리가 웬일이십니까? 또
나를 인터뷰할 일이라도 생겼나요?"
배원기가 빈정댔다. 강형사가 배원기를
처음 만났을 때 건설잡지의 기자로 사칭했던
것이 아직도 분한 모양이었다.
"아이 상무님도. 그 건은 이제 싹
잊으십시오. 만날 적마다
그러시니......형사란 직업이 그런 것
아닙니까?"
강형사가 머리를 긁적긁적하며 먹쩍게
웃었다.
"그건 농담이오. 자 앉으십죠. 시원한 거나
한잔 합시다."
배원기가 인터폰을 눌러 비서한테 주스를
부탁했다.
"그래 오늘은 무슨 일이 있어서 여기까지
귀한 걸음을 하셨나요?"
"그냥 지나가다 들른 겁니다. 차나 한잔
얻어 마실까 하고요."
강형사가 담배를 꺼내 물었다.
배원기는 강형사의 얼굴에서 무언가를
읽으려고 애를 썼다.
"바쁘신 분이 그냥 놀러 들렀을 리는 없고
무슨 일이 또 생겼나요?"
배원기도 두 번은 속지 않겠다는 표정이다.
강형사는 그렇게 말하며 배원기의 얼굴
표정을 놓치지 않고 살폈다.
"백장미?"
"백장미가 아니고 백정미입니다."
"글쎄 누구더라......"
시치미를 떼는 게 틀림없다. 강형사는
배원기의 얼굴에서 흠칫하는 작은 충격을
읽어 낼 수가 있었다.
"이태원에서 룸살롱을 하는 백마담
말입니다."
"아,백마담, 알지요. 그 집에 바이어들과
함께 몇 번 갔었지요. 그집 마담 이름이
백장민가 백정민가였지요. 이제 기억이
납니다.아주 깨끗하고 매너 좋은
미인이었지요. 요즘 통 연락이 없던데 어떻게
되었는지 모르겠습니다그려."
끄집어냈다. 당황하고 있다는 증거였다.
강형사는 그러한 배원기의 표정을 하나도
놓치지 않고 다 읽었다.
"최근에 백정미를 만난 일이 혹시 없나요?"
"최근에요? 통 그런 일이 없는데요."
그때 주스를 들고 비서가 들어왔다.
배원기는 아가씨가 잔을 놓고 나갈 때까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있었다.
"몇 달 전에 그 집에 두어 번 가보고는
근래는 통 갈 일이 없어서......그런데 그건
왜 물으십니까?"
비서가 나가자 배원기는 몹시도 궁금했다는
듯이 물었다.
"죽었습니다."
"예?"
"백정미가 박인구의 별장에서 죽었습니다."
뜨고 강형사를 한참동안 쳐다보았다.
"박인구가 누굽니까?"
"변정애의 남편이지요."
강형사가 비웃듯 말했다.
"변정애는 누굽니까?"
이번엔 정말 모른다는 표정이다. 강형사는
이마를 주먹으로 쥐어박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이렇게 엉큼한 녀석이 있나. 다 아는 일을
이렇게 시치미를 딱뗄 수 있단 말인가.>
강형사는 속으로 이렇게 생각하며 다시
물어 보았다.
"한국그룹의 후계자로 지목되어 있는
박인구 대리를 모른단 말입니까? 그리고
잠실에 살고 있는 가정 주부, 보통 가정
주부가 아니죠. 굉장한 미인인 변정애를
모르시다뇨?"
강형사가 화가 나서 한껏 빈정대 주었다.
"허허허. 강형,이거 너무 비행기 태우지
마십시오. 사람의 마음을 붕 뜨게 하는 것도
따지고 보면 일종의 고문입니다. 고문한다는
것이 뭐 별겁니까? 꼭 육체의 고통만 주는
것이 고문은 아닙니다. 허허허."
배원기는 웃으면서도 가시 돋친 말로
대꾸를 했다.
"고문이라뇨. 아예 그런 말씀 마십쇼. 그
말 저희 반장님 귀에 들어갔다간 모가집니다,
모가지."
강형사는 일부러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죽는 시늉을 했다. 이친구한테 순순히
했다가는 아무것도 알아낼 수 없다는 것을
알았다.
어젯밤에는 약주를 하셨나요?"
"백정미가 어젯밤에 죽었습니까? 피살된
것이로군요. 하지만 전 죽이지 않았으니
헛수고하지 마십쇼."
갑자기 배원기의 태도가 달라지며 단호하게
말했다.
"제가 물은 건......"
"알겠습니다. 그건 말할 수 없으니
용서하십시오. 프라이버시에관한 이야기는
답변하지 않아도 되는 줄로 압니다. 미스 구,
손님가신다."
배원기는 벌떡 일어서며 큰소리로 말했다.
"그럼 또 찾아 뵙겠습니다."
강형사는 쫓겨나다시피 배원기의 방을
나오고 말았다.
"아가씨, 여기 주차장이 어디 있어요?"
강형사가 나오면서 비서를 보고 물었다.
자기 차는 그냥 큰길가에 세워 놓고 있었다.
"지하 1,2층이 주차장이에요."
"기사들 대기실은 어딘가요?"
"지하 1층 엘리베이터 서는 곳
왼쪽이에요."
"고마워요."
강형사는 곧 지하 1층 기사들 대기실로
갔다.
문을 열고 들어서자 너댓 명의 기사들이
웃통을 벗어 젖힌 채 고스톱을 하느라
정신들이 없었다.
"저,배상무님 기사가 누굽니까?"
강형사가 고스톱판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천 원짜리가 제법 쌓여 있었다.
"전데요? 누구시죠?"
구레나룻에 수염이 거뭇거뭇한 젊은 녀석이
"저어, 시경에 있는 강형삽니다. 잠깐 물어
볼 말이 있는데요."
"교통과서 오셨어요?"
그는 퍽 겁먹은 얼굴로 말했다.
"아닙니다. 교통 위반 때문에 그러는 게
아닙니다. 그냥 개인적으로 좀......"
그제야 그는 슬그머니 화투장을 놓고
일어서서 강형사를 따라 나왔다.
"한 가지만 물어 보겠습니다. 어제 저녁
배원기 상무가 어디 갔다 오셨습니까?"
그는 강형사를 한참 쳐다보다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모르겠는데요. 어제 퇴근할 때 자동차
열쇠를 달라고 해서 드리고 저는 곧장
퇴근했습니다."
"전에도 그런 일이 있었나요?"
수가 없지요."
"잘 알겠습니다. 미안합니다. 가보십시오."
강형사는 별수없이 시경으로 돌아오는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배원기가 어젯밤에
운전수를 따돌리고 자기가 차를 몰고
나갔다면 뭔가 떳떳치 못한 일을 했을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다음 날 백정미에 대한 검시 결과가
나왔다.
초동검사 때 이미 밝혀진 것처럼 뒷머리에
강력한 혈액 응고 현상이 있어는데 그것은
둔기를 맞았거나 벽 또는 바닥에 세게 부딪힌
흔적이었다.
직접적인 사인은 그것이 아니고 왼쪽
팔목의 혈관을 끊었기 때문에 거기서 혈액이
빠져 나가 사망한 것이었다. 사망 시간은
남자와 잠자리를 같이한 흔적이 나타났으나
강제로 추행을 당한것 같지는 않았다.
반항한 흔적도 전혀 없었다. 도어나 술잔
등에서는 몇 개의 지문을 채취했으나 그것은
모두 백정미의 것과 박인구 지문 들뿐이었다.
집 안에서 없어진 물건 같은 것은 없었다.
"박인구를 좀 족쳐 볼까요?"
강형사가 난감한 표정으로 말했다.
"족치다니? 자네 그 말버릇 좀 고칠 수
없나? 우리가 뭐 일제 때 고등계 형사들인가?
족치다니, 누가 누굴 족친단 말야!"
추경감이 하도 화를 내는 바람에 강형사는
고개만 푹 숙이고 아무 말도 하지를 못했다.
"박인구는 내가 벌써 만나 보았어. 그
친구가 죽인 것 같지는 않아. 바보가 아닌
다음에야 자기 별장에 여자를 데리고 가서
함께 잔 뒤 죽여 놓고 간단 말야?"
추경감은 여전히 불쾌한 어조로 말했다.
"없어진 백정미를 어디서 만났다고
하던가요?"
강형사가 물었다.
"그냥 그 호텔 커피숍에 들렀다가 우연히
만났다더군."
"그 말을 믿어요? 그 녀석 아주 엉뚱하기
짝이 없는 놈이야. 반장님처럼 그렇게 점잖게
해서는 볼 놈이 아닙니다. 내 이 녀석을
그냥......"
강형사가 벌떡 일어서서 뛰어나가려고
했다.
"어딜 가려는 거야?"
"그 녀석을 만나 족치......아니 좀 따져
보려는 겁니다."
강형사가 급히 대답하며 돌아섰다.
강형사의 뒤꼭지에다 대고 추경감이
말했다.
"단자회사 사무실에 있겠죠 뭐."
"거봐! 좀 덤비지 말아요. 거긴 가봤자
헛수고야. 지금 잠실 자기 집에 있을 거라구.
오늘이 토요일이라는 거 잊었어?"
강형사는 추경감의 말을 알아들었다는 듯
손을 들어 보이고는 그냥 나가 버렸다.
형사가 반장한테 하는 행동치고는
어처구니없는 짓이었다.
그러나 마음씨 좋은 추경감은 그저 빙그레
웃기만 했다.
강형사는 아파트 앞에 차를 세우자마자
곧장 현관으로 뛰어 들어갔다. 안면이 있는
경비원이 절을 꾸벅했다.
박인구는 추경감의 말대로 아파트 안에
온더록스를 한 잔 천천히 마시고 있었다.
"강형사, 여기까지 웬일이십니까?
앉으시죠. 한잔 하실까요?"
박인구는 지극히 평온하고 담담한 목소리로
말했다. 애인을 죽인 혐의를 받고 있는
사람이 저렇게 침착할 수 있을까 하고
강형사는 속으로 생각했다. 포커 페이스라는
게 이런 거구나 하는 생각까지 들었다.
"이거 편히 쉬는데 미안합니다. 나도
온더록스로 할까요?"
"이봐요, 아줌마."
박인구가 부엌 쪽을 향해 소리치자
중늙은이로 보이는 뚱뚱한 가정부 아주머니가
나왔다.
"이런 것 한 잔 더요. 아까 내가 따르던
양주 얄죠?"
아주머니는 아무 말 않고 부엌으로 내려갔다.
그리고는 조금 후에 온더록스 한 잔을 만들어
가지고 왔다. 얼음이 잔 위까지 올라오도록
가득 넣은 잔이었다.
"백정미에 관한 이야기라면 추경감한테 다
했으니까 더 할말이 없어요."
박인구가 먼저 입을 막으려 했다.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딱 한 가지만
더 물어 보고 가겠습니다."
강형사도 물러서지 않았다.
"그 한 가지라는 게 뭔가요?"
"백정미는 누가 죽였습니까?"
"예? 그걸 저한테 묻는 거요?"
"예."
박인구는 기가 막히다는 듯 입을 딱 벌린
채 한동안 말문을 열지 못했다. 그러다
"그럼 대답해 드리죠. 난 죽이지
않았습니다. 이젠 됐어요?"
"안 죽였다면 왜 그 집에서 가버렸어요?
같이 자기 위해 그 별장에 간 것 아닙니까?"
"물론이죠. 젊은 여자를 데리고 별장 같은
곳에 갈 때야 같이 자러 가는 것 외에 뭐가
있겠어요. 하지만 우리는 초저녁에 이미 다
잤습니다. 나는 밤 11시께 이곳 아파트로
돌아왔지요."
"뭣 때문에 젊은 애인을 별장에 혼자
남겨둔 채 아무도 없는 집으로 돌아온단
말입니까?"
"애인이라구요? 백정미가 제 애인이란
말입니까?"
박인구는 의외로 불쾌한 표정을 지었다.
"그럼 조강지첩니까?"
"후후후. 애인? 참으로 웃기시는군요.
어쩌다 하룻밤 같이 잔 술집 마담이 애인은
무슨 애인입니까?"
"어쨌든, 뭣 때문에 다시 서울 아파트로
돌아왔지요?"
"미국에 국제전화를 걸 일이 있었습니다.
로스앤젤레스에서 사업을 하는 고모님께 급히
연락해야 할 일이 있는데 고모님은 새벽이
아니면 연락이 안 되거든요. 새벽이란 LA
시간 말입니다. 그러자면 우리 시간으로 밤
11시나 12시께 전화를 해야 되거든요."
"별장에서 하면 안 됩니까?"
"거기에 전화가 없다는 것은 초동수사 때
봐서 아실 텐데요."
박인구가 다시 비웃듯이 말했다. 그러고
보니 별장에서 전화를 본 기억이 없는 것
"혼자 와버려도 백정미가 아무 소리
않던가요?"
"나 만나서 볼일 다 봤는데 무슨 불만이
있겠어요. 남은 건 침대에서 아침까지 진짜
자는 일밖에 안 남았는데, 그까짓 남자
없어지면 어때요?"
"처음엔 어디서 만났습니까?"
"그냥 우연히 M호텔 로비에 일이 있어
들렀다가 만났어요. 나도 몰래 이태원 살롱을
청산하고 어딜 가버렸기 때문에 그 동안 통
어디 있는지 알 수가 없었어요. 그런데 그날
오후 우연히 로비서 만났던 겁니다. 우리는
한참 앉아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가
교외에 나가 저녁이나 먹으려고 함께
나왔지요."
"그래서 같이 과천 쪽으로 나오셨나요?"
먹고 나니까 오후 7시쯤 되었더군요."
"그 뒤에 막계동 별장으로 곧장 갔습니까?"
"아니, 한 가지만 묻고 가신다더니,
처음부터 다 이야기하게 만드는군요."
박인구가 빙긋 웃으며 말했다.
"내친 김에 계속 말씀해 보시죠."
강형사도 히죽이 따라 웃으며 담배를 꺼내
권했다. 박인구는 권하는 담배를 사양하지
않고 받아서 한 모금 깊숙이 빨았다 토한 뒤
말을 이었다.
"별장에 도착했을 때는 8시 반쯤
되었더군요. 우리는 조용한 분위기를 맘껏 좀
즐기기 위해 집을 지키고 있던 전씨를 서울로
보냈죠. 마침 전씨 여편네가 병원에 입원하고
있던 터라 전씨는 얼씨구 잘됐다고 생각하며
가더군요. 난 잠바를 거실에 벗어 던지고
마시며 뒹굴었지요."
박인구는 마음을 달리 먹은 듯 그때의
모습을 자세히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전씨를 서울로 쫓아보낸 박인구와 백정미는
울창한 숲에 싸인 풀밭에서 마냥 즐거웠다.
정원에 켜진 야외등에는 하루살이 같은
벌레들이 와글거렸다. 늦여름이어서 그런지
바람이 제법 서늘했다.
칵테일 술잔을 마주 들어 분위기를 즐기던
박인구가 술잔을 풀밭에 아무렇게나 던져
버리고 백정미를 다급하게 끌어안았다.
그리고 뜨거운 숨결을 백정미의 귀밑
목덜미에 불어넣었다.
"음!"
백정미가 가볍게 신음을 토했다. 백정미는
쉽게 달아오르는 여자였다. 대개 쉽게
백정미는 그렇지 않았다. 쉽게
달아오르면서도 아주 뜨겁고 오랫동안 정열을
가지고 있었다.
오히려 남자들을 리드하여 깊은 사랑을
만들었다. 줄을 당겼다 늦추었다 하면서
하늘에 떠오른 남자를 완전히 장난감으로
만들어버렸다. 섹스에 있어서는 천재적인
재주를 가진 여자였다.
백정미는 거친 숨결을 내뿜으며 박인구의
목을 결사적으로 끌어안았다. 신음과 숨결을
함께 뿜어내면서 백정미의 한쪽 손이
박인구의 남성을 더듬었다.
박인구는 얇은 백정미의 블라우스 밑으로
손을 집어넣었다. 브래지어를 우격다짐으로
벗겨 올리고 손바닥을 유두에 밀착시켰다.
"미스터 박!"
"응?"
박인구도 모음이 정확하지 않은 발음으로
대답했다. 그의 손은이제 스커트를 걷어
올리고 있었다. 까칠한 잔디가 부드러운
허벅지 살과 맞닿았다.
"누가 봐요."
"보긴 누가 봐."
"그래도, 여긴......"
두 사람은 어우러진 채 마침내 풀밭에
쓰러졌다. 쓰러진 게 아니라 박인구가
쓰러뜨렸다고 하는 게 옳을 것이다.
그들의 이런 모습을 엉성한 담 밖에서 훔쳐
보고 있는 그림자가 실제로 있었다.
그들은 그런 것쯤은 염두에도 두지 않았다.
누가 보면서 큰소리를 내어 웃는다고 해도
그들 귀에는 들리지 않을 지경이었다.
손바닥만한 팬티를 잡아 끌어내리려 바쁘게
손을 움직였다. 박인구의 손가락이 드디어
까칠하게 느껴지는 팬티 속 풀밭에 닿자
백정미가 몸부림치듯 꿈틀거렸다. 더욱
거세게 박인구의 상체에 매달렸다. 숨결이
한결 뜨거워지고 박인구의 바지 속에 들어와
있는 백정미의 손이 옥죄어 왔다. 그러다
갑자기 자기의 무릎에 힘을 주며 다리를
오므려 붙였다. 팬티를 벗기지 못하게 한
것이었다.
"여기선 안 돼요."
백정미가 갑자기 속삭였다.
"왜 그래?"
"......"
백정미는 잠시 침묵했다.
울창한 주위의 숲에서 싱싱한 아카시아
냄새가 풍겨 왔다. 정원등 아래의 푸른
잎사귀들은 은빛으로 빛났다. 풀벌레 소리가
오케스트라처럼 정원 분위기를 고조시켰다.
"누가 볼지도 몰라요."
박인구는 얼른 백정미를 안아올렸다.
그리고 황급히 별장 안으로 들어갔다. 침대
위에다 백정미를 집어던지고는 자기 옷부터
벗었다.
그 동안에 백정미는 이미 팬티까지 다 벗고
있었다. 그리고는 박인구를 기다리지도 않고
달려와 목을 안고 늘어졌다. 불덩이처럼
뜨겁게 달아오른 몸이 물에 올라온 생선처럼
파득거렸다.
그들은 침대 위에 함께 쓰러지며 처음에는
천천히 자제하면서 시작했다.
초저녁의 별장이 뜨거운 숨결과 금방 터질
듯한 팽배감으로 가득 찼다.
포플러 나무의 가지 끝에 매달린 것 같은
풋풋한 관능은 수만 가지의 촉감을 세우며
백정미의 땀구멍 하나까지 간지럽혔다.
천천히 커튼을 나부끼게 하던 초저녁의
미풍은 얼마 가지 않아 강풍으로 변하고 그
강풍은 마침내 산하를 다 휩쓸 듯한 폭풍으로
자라고 있었다.
박인구는 미친 듯이 날뛰는 폭풍 속 파도를
타는 한 폭의 돛배가 되어 거센 파도에
빠지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썼다. 두 어깨를
뜨거운 돛배에 꼭 붙인 채 넘어지지 않으려
애를 썼다.
그 긴박함 속에서도 한쪽 손은 팽팽하게
긴장된 백정미의 유두를 놓치지 않았다.
그의 입술은 활화산처럼 용암을 쏟으며
백정미의 희고 여린 목덜미를 짓누르고
있었다.
마지막 하소연을 하며 바둥대기 시작했다.
폭풍은 촌각의 여유도 주지 않고 두 남녀를
휩쓸어 버렸다.
한껏 부푼 고무풍선은 더 견딜 수 없어
터지고 말았다.
땀에 흠뻑 젖은 박인구는 샤워를 할 생각도
않고 반듯하게 누워 담배를 피워 물었다.
백정미도 뜨거운 탕 속에서 갓 나온
사람처럼 긴 숨을 뿜으며 늘어졌다.
"어떻게 된 거야? 지금까지 어디 숨어
있었어?"
박인구가 가만히 정미의 손을 잡으며
말했다.
"숨긴 왜 숨어요? 내가 뭐 죄 지은 게
있나요, 숨게......"
백정미는 코방귀를 뀌듯 시큰둥하게
"그럼 어디 있었어?"
"일본 좀 갔다 왔어요. 골치도 아프고 해서
현해탄 바람 좀 쐬고 왔죠."
"일본?"
박인구가 백정미 쪽으로 돌아누우며
물었다. 손을 백정미의 가슴 위에 얹고 땀에
젖은 유방을 움켜쥐었다.
"왜요? 난 뭐 외국물 좀 마시면 안 되나요?
일본 온천 관광지를 다니며 실컷 놀다 왔죠.
남녀 혼탕이란 데, 거기 못 가봤어요. 얼마나
재미있을까, 호호호."
백정미가 상상만 해도 즐겁다는 듯
간드러지게 웃었다.
"이태원 살롱은 왜 집어치웠지?"
"흥, 불쾌해서 그 얘긴 끄집어내기도
싫어요."
시늉을 했다.
"왜 불쾌해?"
"그 살롱 차릴 때 배가 놈이 좀 거들었다고
글쎄......"
"배가 놈이 누구야?"
"배원기 상무 말예요. 당신도 알잖아요.
째째한 사나이......"
"응, 청주건설 배상무. 아, 배상무야말로
천하의 멋쟁이지. 여자들 눈물깨나 흘리게 한
미남 아냐."
"쳇, 미남들 다 죽고 없어요?"
"그래 그 배상무가 어떻게 했다는 거지?"
"그 배가 놈이 나 몰래 살롱을 처분해
버렸지 뭐야. 아이구 치사하고 더러워서, 그
따위 놈도 사내라고. 요즘 염라대왕도 배가
부른가 봐."
있길래?"
"누군 누구야, 나하고 배가 놈하고 두 사람
이름으로 돼 있었지. 그 새끼가 두 사람
이름으로 계약할 때부터 어쩐지 미심쩍다
했더니만......"
"그런데 정미도 모르게 해치웠단 말이야?"
"누가 아니래요. 내 도장을 가짜로 새겨
가지고 프리미엄까지 받아 먹고 딴 년한테
넘겼지 뭐예요."
"그건 인장 위조 아냐."
"위존지 위장인지 모르지만 너무너무
치사한 새끼라 더 생각하기도 싫어요."
"그래도 그 녀석 그냥 둬서는 안 되겠군.
내 이 녀석을 그냥!"
박인구가 주먹을 불끈 쥐었다.
"아이구, 이불 밑에서 만세 좀 부르지
그 이야기 그만해요. 미스터 박!"
갑자기 백정미의 말투가 흐물흐물해지더니
손이 박인구의 아래를 더듬기 시작했다.
"아니 또?"
박인구가 감탄했다.
"부끄럽게 무슨 말을 그렇게 해요."
백정미는 몸을 돌려 박인구의 가슴을 파고
들어오며 다시 뜨거운 숨을 뿜어내기
시작했다.
박인구도 백정미를 받아들이고 두 손의
손바닥으로 야들야들한 백정미의 등을
쓰다듬었다.
별장의 침실에서는 태풍이 지나간 지 반
시간도 안 되어 또 다시 바람이 서서히 일기
시작했다.
"지금 몇 시야?"
갑자기 생각난 듯 손목시계를 찾아 들었다.
박인구는 시간을 확인한 후 황급히 샤워를
했다.
"왜 그래요?"
샤워를 하고 나와 주섬주섬 옷을 입고 있는
박인구를 보고 말했다.
"지금 서울 집에 가야 돼."
"예?"
백정미는 어이가 없다는 듯이 박인구를
쳐다보았다.
"미국에 꼭 전화해야 할 일이 있어. 정미는
여기서 자고 가. 내일 저녁에 여기서 다시
만나자고."
백정미는 맨몸에 잠옷만 걸쳐 입고 따라
나서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박인구는 이렇게 해서 그 별장을 나와
박인구와 백정미의 이러한 정사 장면을
누군가가 처음부터 지켜본 사람이 있었을지도
모른다.
혼자 덩그러니 남은 백정미가 샤워를 하기
위해 욕실로 발을 들여 놓는 순간 그
그림자가 갑자기 기습을 해 백정미를 목욕탕
바닥에 쓰러뜨려 기절시키고는 그곳에 있는
면도칼로 혈관을 끊었을 것이다.
그림자는 백정미의 죽음을 확인한 뒤
자기가 만졌던 도어 손잡이, 면도날 등에서
지문을 깨끗이 지우고 유유히 사라졌을지도
모른다.
박인구의 이야기는 대체로 이러했다. 물론
그중에는 상당한 거짓말이 섞여 있을
것이라고 강형사는 생각했다. 그러나 그 이상
더 따질 수가 없었다.
"혹시 범인으로 짐작되는 사람은 없나요?"
강형사가 물었다. 박인구는 능글맞게
웃다가 톡 쏘듯 말했다.
"내가 죽였다면 좋겠지요?"
"예? 사람 놀리지 마쇼."
강형사는 히죽 웃고 말았다. 하는 수 없이
그 집에서 일어섰다. 나오면서 부엌을 흘끗
보았다.
부엌은 깨끗하게 수리를 해놓고 있었다.
주방 기구들도 새것으로 모두 갖춘 듯 윤기가
흘렀다. 변정애가 가스 폭발로 목숨을
잃었을때의 처참한 모습은 찾을 수 없었다.
11.뜻밖의 그림자
강형사는 뜻밖의 수확을 얻어냈다.
백정미가 피살된 과천 막계동 별장 부근을
샅샅이 뒤지다가 사건이 있던 날 밤 그곳을
배회하던 사람이 있었다는 것을 알아냈다.
별장 입구에 조그만 동네가 있는데 그
동네의 구멍가게 아주머니가 수상한 사람이
별장 근처에서 서성거리는 것을 보았다고
말했다.
또한 서울대공원의 동물사 직원으로 동물들
사료를 만드는 사람이 그 동네에 여러 명
살고 있는데 그중의 한 사람이 퇴근하다가
수상한 사나이의 모습을 봤다고 증언했다.
두 남녀가 증언한 사람은 모습이 유현식과
비슷했다.
들고 가 이 사람이냐고 다져 물었다.
중키에 마른 편인 체구, 조그만 입, 좁은
이마, 순하게 생긴 얼굴 등이 그들이 말하는
인상과 꼭 같았기 때문이다.
그들은 사진을 보고 틀림없다고 말했다.
"그 사람은 어깨에 플래시가 달린 카메라를
메고 있었어요. 그리고 파이프에 담배를
끼워서 피우고 있었거든요. 무언가
찾으려는듯 별장 주변을 열심히 살피고
있었어요."
구멍가게 아주머니의 증언이었다.
"자세히는 못 봤지만 그 남자가 지나가기
전에 웬 여자가 그곳에서 얼씬거리는 것
같았어요. 날이 어둑어둑해서 멀리 있는 곳은
잘 안 보여 그게 남잔지 여잔지 지금
생각하니 구분이 잘 안 가요. 사람이 아니고
사나이가 뒤쫓아가는 것 같은 생각이
들더군요. 하지만 그 사람이 이 사진에서 본
사람 같다는 것 외에는 확실한 기억이
없는걸요."
대공원 직원이라는 사나이가 여러 번
고개를 갸웃갸웃 해가면서 퍽 신중하게
이야기했다.
강형사는 너무나 큰 단서를 잡아 가슴이
두근두근 뛰었다. 그는 우선 추경감한테
전화로 보고를 하고는 유현식의 대리점으로
달려갔다.
그러나 이미 퇴근시간이라 유현식이 퇴근한
지 한 시간도 넘었다고 했다.
강형사는 다시 유현식의 집으로 달려갔다.
마침 유현식은 주옥경이 차려다 준 밥상을
마루에 놓고 저녁밥을 먹고 있었다.
놀랐다.
"아니, 이 시간에 강형이 웬일이오?"
유현식이 밥숫가락을 든 채 강형사를
멍하니 쳐다봤다. 주옥경은 강형사를 보자
그냥 가볍게 목례만 할 뿐 아무 말도 건네지
않았다.
"저녁 좀 얻어먹을까 해서 왔지요."
강형사가 넉살좋게 팔을 벌려 보이며
말하고는 좁은 마루로 올라섰다.
"여보, 저녁......"
유현식이 주옥경을 쳐다봤다. 주옥경도
난처한 듯 유현식을 바라보았다.
"아닙니다. 아니에요. 저녁밥은 벌써
먹었습니다. 그냥 지나가다가......"
"정말 저녁은 자셨나요?"
주옥경이 물었다.
생각이 나서 들렀지요. 커피나 한 잔
타주시면 영광이겠습니다. 아주머니 커피
솜씨가 일품이거든......"
"아냐. 귀한 손님이 오셨으니 술상 좀
봐와요."
"당신 핑계 김에 또 술독에 빠지시려는
거죠?"
옥경이 눈을 흘겨 보였다.
"우리 딱 한 병만 할 테니까, 소주 사다
놓은 것 있지?"
주옥경이 하는 수없이 술상을 봐왔다.
"자, 우선 목부터 축이고......"
유현식은 술상을 보자 얼굴에 담뿍 웃음을
담고 즐거워했다. 이빨로 소주병 뚜껑을 연
뒤 자기 잔에 먼저 한 잔 따라 훌쩍 마신뒤
강형사 잔에 술을 따랐다. 그리고는 다시
작으로 한 잔을 따라 훌쩍 마셔 버렸다.
"야, 참! 두꺼비 너 오랜만이다."
유현식은 두꺼비가 그려진 소주병을 들고
말을 알아듣는 사람을 대하듯 말했다.
그리고는 마치 술병이 귀여운 아기라도 되는
것처럼 매만졌다.
"백정미가 참 안됐단 말야."
강형사가 혼자말처럼 중얼거렸다. 주옥경이
신경을 곤두세우고 강형사의 입을 쳐다봤다.
그러나 유현식은 관심이 없는 듯 술병만
기울였다.
"백정미가 어떻게 됐나요?"
주옥경이 성급하게 물었다.
"죽었어요."
"예?"
주옥경이 깜짝 놀랐다.
"누가 죽었어요?"
술을 훌훌 마시다가 유현식이 물었다.
"박인구 씨의 애인이죠. 유형은 본 일이
없나요?"
강형사가 말했다.
"박군 애인이라구요? 박군은 술집마다
애인이 있는데 그건 어느 술집이오? 하지만
모조리 실속없는 애인이던걸요. 손목도 한 번
못잡아 보는 게 무슨 애인입니까? 후후후."
유현식이 혼자 웃었다.
"좀더 자세히 말씀해 보세요."
주옥경이 차분해진 목소리로 강형사를
재촉했다.
"과천 서울대공원 옆에 있는 박인구 씨
별장 아시죠. 박인구의아버님이
마련한......"
"예. 알아요. 우리 부부를 초대해서 여러
"흥! 그게 무슨 별장이야. 그냥 집이지.
별장이라면 좀 멋있는구석이 있어야지......"
유현식이 또 빈정댔다.
"그래서요?"
주옥경이 유현식의 말을 무시하고 강형사를
독촉했다.
"거기서 박인구와 밀회를 한 뒤 피살체로
발견됐습니다."
"세상에 그럴 수가......도대체 누가 그런
끔찍한 짓을 했습니까?"
"그걸 알면 벌써 잡았지요. 혹시 의심나는
것 없나요?"
강형사가 유현식의 얼굴을 유심히 살피며
물었다. 그러나 유현식은 그 일에 관심이
없는 듯 라이터만 만지작거리며 마당 밖에
시선을 던지고 있었다.
"백정미가 죽은 게 16일 날 밤인데 지난주
목요일이죠. 그날밤 유형이 혹시 과천 가신
것 아닙니까?"
강형사가 단도직입적으로 허를 찌르려고
들었다.
"나요?"
그때야 유현식이 강형사를 힐끔 돌아보며
말했다.
"예."
"글쎄. 그날 뭘 했나? 몇 시쯤요?"
"저녁 8시 이후입니다."
"저녁 8시라구요? 그런 기억 없는데요."
유현식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곳에서 그 시간에 유형을 목격한 사람이
있는데요. 그것도 두 사람씩이나."
강형사가 날카로운 시선을 유현식의
얼굴에서 떼지 않으며 말했다.
모르죠."
"갔는지도 모른다구요?"
"그래요. 오늘 한 일도 잘 모르는데 지나주
일을 어떻게 압니까? 그 사람들이 그랬다면
내가 거기 갔는지도 모르죠."
유현식이 너무나 어긋나게 나오는 바람에
더 할 말이 없었다.
"그래서 설마 내가 백장민지 백정민지를
죽였다고 생각하는 것은 아니겠죠? 현명한
강형사님이 말야. 후후후."
어떻게 보면 유현식은 술주정을 하는 것
같기도 했다.
"유선생. 지금 농담할 때가 아닙니다."
강형사가 정색을 하고 말했다.
"나도 농담하는 것 아닙니다."
"확실히 그곳에 갔습니까? 잘 좀 기억을
강형사가 진지한 얼굴로 유현식의 얼굴을
들여다보며 다짐했다.
"정말이오. 내가 목요일에 그곳에 갔었소.
그리고 별장 안에 들어가 자고 있는 백정미의
목을 졸라 죽였소. 이제
속시원하지요?박인구의 여자라면 나는 다
죽이기로 작정한 사람이오."
유현식은 웃지도 않고 말했다. 아무래도
제정신이 아닌 것 같았다.
"백정미는 목 졸려 죽은 게 아니랍니다."
"한 번 죽는 건 마찬가진데 목 졸려 죽으나
총 맞아 죽으나 마찬가지 아니겠어요. 자,
백장미는 죽었으니 이제 끝난 일이고 우리는
술이나 합시다. 야, 강형사 참 오랜만이야!"
그것은 완전히 주정이었다. 소주를 두
병이나 마셨으니 주정이 나올 때도 됐다.
유현식이 손가락을 세워 보이며 사정했다.
"이제 그만 하세요. 강형사님은 말짱하신데
벌써 취하셨어요."
주옥경이 술을 더 가져올 생각을 않았다.
"딱 한 병......"
그러나 유현식은 계속 치켜든 손가락을
주옥경의 코밑에 가져다 대고 졸랐다. 하는
수 없다는 듯 주옥경이 부엌 찬장에서 소주
한병을 다시 꺼내 왔다.
"강형, 우리 이제 한 병 하신 뒤 2차
갑시다. 2차는 내가 내지요."
유현식의 말이 어눌해지기 시작했다.
"아니 무슨 걱정 있어요? 백장미 그년
죽었지 않습니까. 내가 죽였지요. 형사가
죽인 범인 알았으면 일 끝난 것이지 또 무슨
일이 남았단 말입니까? 자 한 잔......"
농담이라도 그런 말은 하지 마세요."
주옥경이 보다못해 유현식의 어깨를 쿡
찌르며 말했다.
"나 농담하는 것 아냐. 진짜 거기 갔었어.
카메라를 들고 갔었지. 서울대공원 맹수
찍으러 갔다가 그 별장에 갔었지. 그런데
백장미 혼자 있더란 말야. 그 백장미라는
야생동물을 내가 싹 했지."
유현식은 어깨를 흔들흔들하면서 손으로
목을 자르는 시늉을 해 보였다.
"맹수 사진을 찍으러 갔다구요?"
강형사가 눈이 둥그래졌다. 그곳 주민
남녀의 증언도 카메라를 메고 있었다고 했다.
"그럼요. 사람 뺨치는 인물 좋은 맹수가
얼마든지 있지."
"저이는 동물 사진 찍기를 좋아해 가끔
주옥경이 강형사한테 설명하며 한쪽 벽에
무질서하게 수없이 붙어 있는 동물 사진들을
가리켰다. 호랑이,코끼리,기린,타조 등의
갖가지 모습이 벽이 비좁도록 붙어 있었다.
"그날은 휴일도 아닌데 사진 찍으러 갔단
말입니까?"
강형사가 두 사람을 번갈아 보면서 물었다.
"휴일보다야 평일이 훨씬 사진찍기 좋죠.
요즘이야 8시가 돼도 날이 훤하니까 퇴근 후
사진 찍기가 그만이지. 어때? 강형 내일
나하고 같이 한번 안 가겠어? 자 한
잔만......"
강형사는 술잔을 받아들면서 열심히 머리를
회전시키고 있었다.동물사진을 찍으러
서울대공원에 갔다가 나오면서 백정미와
박인구의 모습을 발견하고 미행을 했을
뒤 박인구가 가고 나자 별장으로 들어갔을
것이다. 남의 정사장면을 훔쳐보며 잔뜩
흥분해 있던 유현식이 자기와도 정사를
요구했을 것이다. 그러나 백정미가 완강히
거부하자......여기까지 생각하던 강형사는
고개를 흔들었다. 그런 우발적인 살인이라면
기절시킨 뒤 혈동맥을 끊어 실혈(失血)로
사람을 죽게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더구나 그 별장에서 유현식의 지문은
하나도 발견하지 못했던 것이다.
그렇다면? 동물 사진 찍기를 마친 유현식이
평소에 가본 일이 있는 별장에 혹시
박인구라도 있나 해서 들렀다가......
강형사는 여러 가지로 추리를 해보았으나
딱 들어맞는 것이 없었다. 우선 유현식이
백정미를 죽일 동기가 성립되지 않았다.
버리겠다고 했는데 무슨 특별한......?"
강형사가 옥경의 눈치를 슬금슬금 보며
유현식한테 물었다.
"그 녀석 여자 잡숫는 데는 도사요,도사.
술집 여자고, 부하 직원이고,가정부고,처녀고
없어요. 닥치는 대로랍니다. 친구 여편네도
슬쩍......"
유현식은 혀꼬부라진 소리를 뚝 그치고
옥경이를 쳐다보았다. 옥경이를 한참
노려보던 유현식의 눈초리가 사나워졌다.
옥경은 그것을 눈치챘는지 슬그머니
일어서서 밖으로 나가 버렸다.
강형사도 슬그머니 일어서서 나와 버렸다.
"흥! 다들 가는구나, 가! 가라고. 모두 다
가란 말이야!"
유현식이 혼자 고래고래 고함을 질렀다.
않았다.
"강선생님."
강형사가 대문을 나서자 기다리고 있던
주옥경이 나직이 불렀다.
"저, 잠깐만 시간 내주시겠어요?"
"시간요! 내고말고요. 주여사 같은 미인이
시간 있느냐는데 거절할 남자가 어디
있어요?"
"저기 버스 정거장 앞에 2층 다방이
있어요. 거기서 기다리세요. 금방 갈게요."
옥경은 이렇게 말하고 다시 집으로
들어갔다.
조금 뒤 두 사람은 시골 다방보다 더
지저분하고 김치 냄새 같은 것도 나는 좁은
다방에 마주앉았다.
"백정미를 정말 우리 그이가 죽였다고
주옥경이 먼저 말을 꺼냈다. 집에서
허드레로 입는 모양 없는 옷을 걸치고 화장도
안 했지만 주옥경은 역시 귀티나고 예뻤다.
"글쎄요. 어쨌든 유현식 씨가 그 시간에
거기 간 것만은 확실하다고 해야겠지요.
하지만 범인이라는 증거는 아무것도
없습니다.더구나 유현식 씨가 백정미를
죽여야 할 이유가 없어요."
"그러면 백정미는 누가 죽인 것일까요?"
"우선 몇 사람이 용의선상에 오를 수 있죠.
첫째, 그날 밤 같이사랑을 나눈 박인구가 제
1의 용의자고,자기를 배신하고 딴 남자품으로
달아났다고 생각하는 배원기가 강력한 두번째
용의자이지요. 다음은 백정미가 어릴 때
도망쳐 나온 집의 양아버지 변일중도
용의자이지요. 그 다음 네번째는 유현식 씨
강형사가 금방 불붙인 담배를 재떨이에
비벼 끄고 다시 새담배를 꺼내 물면서
말했다.
"박대리님은 뭐라고 그래요?"
"누가 내가 죽였소 하는 사람 있습니까?"
"그날 밤 백정미와 무얼 했대요?"
주옥경이 강형사의 입을 쳐다봤다.
"뭐하긴요. 남녀가 단둘이 외딴 별장에서
무슨 짓을 했겠어요?"
"그야 추측일 뿐이잖아요. 실제로 박대리가
자기 입으로 뭘 했다고 말 안 했나요?
백정미하고 잤대요?"
주옥경이 다그치다시피 물었다. 강형사는
주옥경이 그 부분에 너무 신경을 쓴다는
인상을 받았다.
"자기 입으로 그럽디다."
"잤다고 그럽디다."
"자요? 그냥 잠만 잤단 말예요?"
주옥경이 집요하게 물었다.
"남녀가 잔다는 게 뭐 베개 베고 코고는
일입니까? 그네들은 밖의 풀밭에서부터
시작해서 안방 침대에서 끝나는 사랑 놀음을
실컷 즐겼다고 하던데요."
강형사가 싱글싱글 웃으며 말했다.
이상한 것까지 꼬치꼬치 캐묻는다고
생각했다.
"그랬군요. 박대리가 자기 입으로
그랬나요?"
"물론이죠. 아니 그걸 유현식 씨가
목격했을지도 모르잖아요?"
"세상에 그럴 수가 있나. 정애만 불쌍하게
됐지. 아내 죽은 지 몇 달이나
주옥경이 화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숨결까지 가빠졌다. 탁자위의 커피잔을 잡은
손이 부르르 떠는 것 같았다.
"그 사람이야 워낙 멋쟁이라서 그런 일은
다반사 아닙니까? 아까 유형도 그렇게
이야기하던데요. 죽은 변정애 씨도 남편이
바람둥이라는 것쯤은 알고 있던 것 아닙니까?
하물며 죽은 뒤에야 그런 남편 못 본 척하지
않겠어요?"
"죽은 정애를 생각해서도 박대리는 그러면
못써요. 정애가 자기를 얼마나
사랑했는데......남자들이란 다 그
모양이에요?"
화가 난 주옥경의 화살이 강형사를
겨누었다.
"아아, 아닙니다. 우린 그 일에 상관없는
사람들입니다."
강형사가 손을 내젓자 옥경은 자기가 너무
흥분했던 것을 멋쩍게 생각했다.
"미안해요. 공연히 남의 일로 흥분했네요.
그래 백정미는 그 동안 어디 있었다고
하던가요?"
"박인구는 그날 낮에 호텔 로비에서 우연히
만났다고 하더군요.어디서 무얼 하다가
왔는지는 아직 알 수가 없어요."
옥경과 강형사는 커피를 잔에 남겨둔 채
헤어졌다.
12.불륜의 낮과 밤
"배원기와 변정애의 관계에 대해서 더
알아본 것이 없나? 아무래도 백정미를 죽인
제 1의 용의자는 배원기 같단 말야. 우선
동기가 충분하거든. 룸살롱까지 차려
주었는데, 자기를 배신하고 딴 남자품으로
가버렸는데 그냥 있을 쓸개 빠진 남자가 어디
있겠어."
추경감이 담배 연기를 천장을 향해 계속
뿜어대면서 말했다.
"저도 그 점은 여러 번 생각해 봤어요. 거
참 묘한 일이죠. 배원기는 박인구의 처인
변정애를 뺏고, 박인구는 배원기의 애인인
백정미를 뺏고......"
강형사는 신기한 것을 발견한 것처럼
"박인구와 백정미가 보통 아닌 관계에
있었다는 것은 사실이지만 배원기와 변정애가
관계가 있었다는 것은 자네 생각일
뿐이야.박인구와 백정미가 관계가 있었다는
것도 술집마담과 단골 고객 사이라고
생각한다면 별로 이상할 것이 없어. 세상에
그런 일이란 얼마든지 있으니까."
"경감님도 젊을 때 술집마담과 탈선한
경력이 있습니까?"
강형사가 히죽이 웃으며 말했다.
"예끼 이 사람. 우리 집사람이 맹호라는
것쯤 자네도 알잖아. 내가 소실적에 내
친구들은 내 마누라를 보고 망원경 가진
맹호라고 했다네."
"하하하. 망원경 가진 맹호라고요? 그
맹호가 망원경으로 경감님을 늘 감시하고
강형사가 허리를 잡고 웃었다.
"이 사람아, 사모님보고 어린애 부르듯
맹호 맹호 하지 말게."
"죄, 죄송합니다. 하하하."
강형사는 웃음을 그칠 줄 몰랐다.
"그 망원경 가진 맹호를 어떻게 속이고 딴
여자와 놀아난단 말인가?"
"엄처시하에서 용케 살아나셨습니다.
하하하."
"자네도 이제 장가들어 보게나......"
추경감은 창 밖을 내다보며 긴 한숨을
쉬었다.
"반장님은 변정애와 배원기가 아무 관계가
없는 것처럼 말씀하셨지만, 그것은 그렇지
않습니다. 변정애가 남편 몰래 배원기와
재미를 본 것은 사실입니다. 내가 확인을
강형사가 웃음을 그치고 정색을 하고
말했다.
"자네가 그들이 놀아나는 장면을 보았단
말이야?"
"본 거나 같습니다. 배원기가 제 입으로
이야기한 것이니깐요."
"뭐! 제 입으로 이야기했다고?"
"대체로 남자들이란 한 여자를 함락시키면
그 전가를 과시하고 싶어 못 견디는 것
아닙니까? 내가 그 콧대 센 여자를
꺽었노라고 여기저기 다니며 기회만 있으면
떠벌이지요. 그것이 보통 남자들의 속성
아닙니까? 배원기도 그런 남자랍니다. 자기가
기막힌 유부녀를 꺽었노라고 자랑을
했었지요. 배원기도 박인구 못지않은
바람둥이인데 그 점이 박인구와 다릅니다.
절대 입을 열지 않습니다. 백정미와의 관계는
자기가 살인혐의를 쓸 판이니까 분 것이기
때문에 예욉니다. 그러나 배원기는 자랑삼아
그 이야기를 떠벌였지요."
"그래서 배원기 주위의 사람들로부터 그
이야기를 들었단 말이지."
"그렇습니다. 배원기 사무실 사람들한테
취재를 했죠."
"그러나 사람들은 남의 이야기하기를
좋아하지 않나. 그게 어디까지가 참말이고
어디까지가 거짓말인지 알 수 없지 않은가?"
추경감은 계속 회의적이다.
"잠실에 있는 거상아파트 아시죠? 변정애와
박인구가 사는 아파트 말입니다."
"그래. 변정애가 죽었을 때 가봤지."
"그 거상아파트 5동 123호가 변정애의
124호가 누구 아파트인지 아십니까?"
"바로 건너편? 그때 우리가 참고 진술을
받을 때 그 집은 비어있다고 하지 않았나.
주인이 아파트만 사놓고 서울에 살지
않는다고 그랬던 것 같은데......"
추경감이 양미간을 찌푸리며 눈을 지그시
감고 말했다. 그가 기억을 더듬어 낼 때 쓰는
버릇이었다.
"맞습니다. 그 주인이 누구냐 하면 바로
배원기 상무입니다."
"그래?"
추경감이 눈을 크게 떴다.
"배원기란 자는 행정고시에 합격할 정도로
머리가 영리한 친구죠. 이재에도 밝아
여기저기 부동산을 샀다 팔고 해서 상당한
재산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배상무가 잠실
가끔 나타난 이유도 그곳에 사둔 자기
아파트가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 근방
아파트에 사는 청주건설의 홍보 담당이라는
녀석을 내가 살살 꼬셨더니 있는 것 없는 것
다 털어 놓더군요. 그 녀석 말에 의하면
배원기가 변정애를 알게 된 것은 그 아파트
때문이었답니다."
이때까지 서서 이야기하던 강형사가 의자를
끌고 와 추경감 앞에 바싹 다가앉으며
이야기를 늘어놓기 시작했다.
재작년 가을. 배원기가 당첨된 아파트에
처음 구경을 갔다. 아파트가 완공되기 전에
샀기 때문에 지은 뒤에는 처음 가보는
것이다.
거상아파트 5동 124호. 즉 12층 4호를 혼자
찾아 갔었다. 12층이란 건 알았는데 새
않았었다.
자기 아파트인 124호인 줄 알고 무심코
현관문을 확 잡아당겼던 배원기는 깜짝
놀랐다.
"어맛! 누구예욧."
현관문을 열자 거실에서 거의 벗은 채
운동을 하고 있던 젊은 여자가 깜짝 놀랐다.
브래지어와 팬티만 걸친 20대 후반의 젊은
여자는 건강한 다갈색 피부를 자랑하며 바퀴
없는 자전거 타기를 하고 있었다. 얼굴과
부드러운 어깨며 탄력 넘쳐 보이는 배에 땀이
송송이 배어 있었다.
얼른 보기에도 눈에 확 들어오는
미인이었다.
그 여자가 변정애였다.
"이거 미, 미안합니다."
그러나 눈은 흘금흘금 변정애의 날씬한
나신을 살피고 있었다.
"저는 124호 주인입니다. 124호 아닌지요?"
배원기는 나가지 않고 그대로 현관에 선 채
변정애의 육체를 감상하면서 물었다.
변정애가 천천히 자전거 안장에서
내려섰다. 그리고 몸을 가릴생각은 전혀 않고
오히려 두 팔을 위로 올려 치렁치렁한 긴
머리를 뒤로 치켜올리며 배원기 앞에
마주섰다.
팔이 위로 올라가자 브래지어 속의 양감
좋은 유방이 출렁거렸다. 겨드랑이에 돋은
체모가 하얀 살갗과 대조적이었다.
긴 목과 잘록한 허리가 날렵하게 보였다.
"여긴 123호예요. 4호는 건너편 집이에요."
변정애가 온화한 얼굴에 약간의 미소를
"이거 미, 미안합니다. 그러고 보니 이웃
사촌이군요. 이따가 놀러 오겠습니다."
배원기가 문 밖으로 사라질 때까지
변정애는 꼼짝않고 거실에 똑바로 서 있었다.
그리고 며칠 뒤 대낮에 배원기가 카페 레만
호에서 변정애를 불러냈다. 전번 일을
사과한다는 명목으로 함께 저녁을 먹었다.
그렇게 만난 것이 너댓 번 되었다.
그러다가 박인구가 출장가고 없는 어느 날
변정애는 배원기 차를 타고 인천으로
드라이브를 갔다. 월미도 횟집에서
서해바다에 지는 노을을 바라보며 맥주를
마셨다.
"해가 지는 모습은 언제나 장렬하게
보이지요."
"난 괜히 눈물이 날 것 같아요. 저걸 좀
슬퍼지거든요."
"변여사는 마음씨가 너무 고와서 그래요."
"변여사라니요. 아이 쑥스러워요. 그렇게
부르니까 제가 갑자기 늙은 사람처럼
느껴져서 싫어요. 저 이제 스물일곱이에요."
"이거 미, 미안합니다. 그럼 앞으로 정애
씨라고 부르겠습니다.허허허."
두 사람은 어둠이 짙어질 때까지 월미도
바닷가를 걸었다. 비릿한 냄새가 해풍에
실려왔다. 그러나 두 사람은 그 냄새가
오히려 상쾌했다.
"정애 씨!"
배원기가 슬그머니 변정애의 손목을
잡았다.
"그냥 점잖게 걸어요."
변정애는 그렇게 말하면서도 말과 행동은
바싹 붙어서서 걸었다. 배원기의 팔꿈치에
포근하고 따스한 변정애의 유방이 느껴졌다.
"난 처음 본 순간부터 정애 씨의 전기에
감전된 한 마리 노루가 되었답니다. 그날
정애 씨의 당당하고 매혹적인 모습이 나를
꼼짝못하게 고압 전류로 감전시켜
버렸거든요. 어쩌면 정애 씨는 무서운 전류를
상대방한테 쓸 수 있는 전기메기 같은 신비를
가졌는지도 몰라요."
배원기가 나직하고 굵직한 목소리로
말했다.
"저도 배선생님 앞에서는 고양이 앞의 쥐가
돼버린걸요. 사람을 몸살나게 하는
미남......"
"배선생님이 뭣니까. 앞으로 미스터 배라고
해요."
가녀린 정애의 허리를 안았다.
서로의 체온을 서서히 느꼈다.
두 사람은 그날 밤 비치 호텔에서 처음으로
서로의 소중한 것을 주고받았다.
그뒤 그들의 관계는 한 번 무너진 둑이
되고 말았다.
변정애가 죽기 얼마 전에는 잠실의 그들
아파트에서까지 대낮의 뜨거운 사랑을
펼쳤다.
박인구가 출근하고 나면 배원기는 거꾸로
거상아파트로 출근하는 꼴이었다. 변정애
아파트의 맞은편인 124호는 낮 한때만 남녀가
사는 집이 되었다. 배원기와 변정애는 그 빈
아파트에서 대낮이면 마음껏 사랑을
불태웠다.
아무에게도 침범당하지 않는 절대적인
들여다보지 않는 철저한 밀실이었다.
나중에는 배원기를 변정애의 아파트 안방
침실까지 끌어들였다.
낮에는 미남이며 우람한 육체와 끝없는
정열을 가진 배원기와 뒹굴던 침대 위에서
밤엔 남편인 박인구의 육체를 받아들였다.
비록 육욕의 노예가 되어 천하에 둘도 없는
불륜을 저질렀지만,정애는 갈등으로
괴로워했다.
양심의 가책과 육욕 속을 헤매는 젊은
여인의 고뇌였다.
"이봐, 그건 자네 해석이지. 실제는 어떻게
생각하고 있었는지 모르잖아?"
강형사의 그럴듯한 이야기를 듣고 추경감이
핀잔을 주었다.
"누가 그들 관계를 본 것도 아닌데 어떻게
그렇게 소상하게 이야기할 수 있단 말인가?
자네 학생 때 문학공부했다고 했지. 어쩐지
엮는 솜씨가......"
"반장님. 절대 이건 창작이 아닙니다.
정말입니다."
강형사가 소매를 걷어 올리며 믿어 달라는
제스처를 했다.
13.학창 시절의 깊은 상처
63빌딩 스카이 라운지. 까마득하게
내려다보이는 서울의 야경은 장난감을
들여다보는 것 같았다. 검은 한강 위에 선을
그은 듯한다리 위의 불빛들. 명멸하는 작은
불빛을 달고 천천히 흘러가는 한강 유람선의
모습은 서울의 밤을 아름답게 장식하고
있었다. 줄지어 달리는 자동차의 홍수는 마치
떼지어 나는 개똥벌레를 연상케 했다.
실내에는 보이 조지가 열창하는 <예스터
데이>가 흐느끼듯 흐르고 있었다.
구석자리 조그만 분수대 앞 테이블에
마주앉은 주옥경과 박인구. 유난히 머리를
짧게 깍은 주옥경의 얼굴은 몹시 창백해
보였다. 근심 있는 듯한 모습으로 다소곳이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먼저 전화를 건 사람은 주옥경이었다.
그녀는 한순간 근사한 곳에서 가슴을
두근거리게 하는 멋있는 남자와 함께 저녁
식사를 즐기고 싶은 막연한 허영심이
발동했는지도 몰랐다.
아니, 그보다도 가슴 답답한 현실로부터
도망치고 싶은 평범한 가정 주부의 한때
환상이 하늘 높게 치솟았는지도 몰랐다.
지나치게 비좁고 낡은 구식의 단독주택.
손바닥만한 마당의 수도꼭지 곁에는 작은
화단이 있고, 그곳에는 비틀어진 맨드라미가
가을을 아쉬워하듯 서 있는 곳. 바로 그곳이
주옥경이 사는 집이었다.
고된 생활에 찌들어 무엇 하나 신선감을
주지 않는 좁은 마루와 답답한 방. 소꿉장난
차는 욕실 겸 화장실이 그녀의 실내
공간이었다.
게다가 매일 곤드레가 되어 들어오는
불만에 가득 찬 월급쟁이 남편의 저녁
밥상머리에 앉아 온갖 주정을 다 받아 주어야
하는 따분한 일과도 그녀는 참아내기
힘들었다. 딱딱한 요 위에서 기계처럼 똑같은
포즈로 순식간에 끝내 버리는 남편과의
잠자리는 더욱 권태를 일으키게 했다.
그녀는 이렇게 살다가 허무하게 죽어가는
게 아닌가 하는 두려움마저 들었다.
무엇인가 정적을 깨는 변화가 와야 한다고
옥경은 생각했다. 최근 들어 더욱 심해진
남편 유현식의 주정 반 진담 반의 신경질은
더 이상 받아 주기가 괴로웠다.
"서울의 야경도 볼 만하죠? 파리
한참 동안 말없이 양식만 먹고 있던 두
사람 사이의 정적을 깨며 박인구가 입을
열었다.
"예."
주옥경은 간단히 대답만 하고 고개를 숙인
채 여전히 음식만 먹고 있었다.
"미스 주 좀 야윈 것 같은데......"
"그렇게 보여요?"
"무슨 근심이라도 또 생겼나요? 너무
고민하면 그 예쁜 얼굴 다 버리십니다."
박인구가 묵직한 저음으로 여자들이 듣기
좋아하는 말을 했다.
"저 같은 게 무슨 예쁜 얼굴입니까?"
옥경이 그제야 생긋 웃으며 대답했다.
"요즘 유형은 어떻게 지내나요?"
"그이 얘긴 꺼내지도 마세요. 매일
버린 것 같아요."
"예? 돌아 버리다뇨?"
"글쎄 어떻게나 사람을 못살게 구는지 정말
견디기 힘들어요. 지금은 툭하면 글쎄
박선생님과 제 관계를 털어 놓으라고
조르는거예요. 여름 휴가 때 무인도에서 생긴
일을 고백하라는 거예요.그건 정말
고문이에요. 고문치고는 가장 지독한 고문일
거예요. 어쩌다가 여름 휴가 한 번 같이 간
것이 이토록 괴로운 일을 만들었는지......전
요즘 정말 죽고 싶은 생각밖에는 없어요.
정애는 저세상에서 얼마나 편할까......"
주옥경은 눈물을 글썽이며 말했다. 스푼을
가만히 놓고 핸드백에서 손수건을 꺼냈다.
"쯧쯧. 이렇게 귀여운 미스 주를 눈물
흘리게 하다니. 유형은 거 몹쓸 사람이군
박인구는 보기가 민망한 듯 농담으로
분위기를 맞추려고 했다.
"난 미수 주를 처음 봤을 때 정말
아찔하더군요. 남자를 당황하게 하는 독특한
매력이 있었거든......"
박인구는 옥경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엉뚱한 이야기만 늘어 놓았다.
"미인이란 개성입니다. 미인이란 절대로
객관적인 기준이 없습니다. 개성이 어느
정도냐 하는 것이 미를 결정짓는 가장
기본적인 조건이거든요."
주옥경은 웃지 않을 수 없었다.
"나야 정애한테 대면 여왕과 시녀 차이
아니에요?"
"물론이죠. 미스 주가 여왕이고 정애는
여러 시녀 중의 하나라고 할까?"
아니에요."
주옥경은 곱게 눈을 흘겼다. 금방 기분이
바뀐 모양이었다.
"우리 여기서 저녁 식사 마치고 강변도로로
드라이브 가요. 아니 디스코 홀에 가요. 아니
아니, 카바레가 좋을 것 같아......"
옥경의 태도가 금방 바뀌자 박인구가
오히려 신기한 듯 미소를 머금고 옥경을
쳐다보았다.
저녁을 먹고 난 두 사람은 로얄 프린스에
나란히 앉아 올림픽 대로를 달리기 시작했다.
핸들을 잡고 아무 말 없이 차를 몰던
박인구가 옆으로 흘긋 주옥경을 쳐다보며
말했다.
"미스 주, 담배 한 대 피우고
싶은데......"
"담배야 내 와이셔츠 포켓에 있지. 불 좀
붙여 주시겠어요?"
옥경이 박인구의 양복 저고리 속으로 손을
넣어 가슴을 더듬었다. 곧 와이셔츠 포켓에서
담뱃갑을 꺼냈다.
그리고 한 개비를 꺼내 입에 물었다.
그리고는 박인구의 저고리호주머니에서
라이터까지 꺼내 불을 붙여 한 모금
빨아들였다. 금방 기침이 나왔다.
"자요."
옥경이 불붙은 담배를 박인구의 입에 물려
주었다.
차가 흔들리는 바람에 옥경의 상체가
박인구의 어깨에 쓰러졌다. 박인구가
왼손으로 옥경의 어깨를 잡고 자세를 바로
일으켜 주며 빙긋이 웃었다.
옥경이 엉뚱한 질문을 했다.
"그 사람 이야기는 그만 합시다."
박인구가 노골적으로 불쾌하다는 듯이
말했다.
"미안해요."
옥경은 입을 다물고 말았다. 달리는 차량의
홍수가 한강물을 불빛으로 출렁이게 했다.
옥경은 왠지 모를 뿌듯한 성취감 같은 것이
느껴져 깊은 숨을 들이마셨다.
지금 옆에서 행복한 기분으로 드라이브를
즐기고 있는 상대가 변정애의 남편이라는
것이 옥경을 무의식중에 즐겁게 하는지도
몰랐다. 친구의 보물을 마침내 손아귀에
넣었다는 기분이라고 할까? 항상 지기만 하던
자기가 상대방의 가장 소중한 것을 가지게
되었을 때 갖게 되는 그런 느낌이었다.
단짝이었다. 여고 때부터, 대학에 다닐때,
결혼한 뒤에도 그들이 둘도 없는 단짝이라는
것을 모두들 알고 있었다.
결혼한 뒤에도 만나는 고등학교 시절의
선생님이 변정애를 보고 주옥경이라고
부르기도 하고 주옥경을 보고 변정애라고
부르기도 했다. 두 사람이 너무 단짝으로
지냈기 때문에 선생님까지 혼동을 했던
것이다.
겉으로 보기엔 둘도 없는 단짝이고, 실제로
그들은 서로를 위해 못해 줄 일이 없을
정도로 가까운 사이였지만 내면으로는 무서운
라이벌 의식이 불타고 있었다.
고등학교 1학년 때 한 반에서 만난 그들은
학교 배치고사에서1,2등을 했다. 변정애가
1,2점 차이로 수석을 차지하고 주옥경이
가까워졌다. 그러나 옥경은 내심으로 다음
학기에는 꼭 자기가 수석을 뺏을 것이라고
결심하고 있었다.
그해 반장 선거에서 옥경은 정애한테 또
지고 말았다. 정애가 반장으로 뽑히고 옥경은
부반장이 되었다. 다른 학생들은 모두 두
콤비의 당선을 부러워했다. 공부 잘하고,
얼굴 예쁘며 부자 집안이고, 선생님들의
귀여움을 독차지하는 그들이 반장,
부반장까지 나란히 하게 된 것을 부러워했다.
그래서 변정애, 주옥경에게 <B.j커플>이라는
별명까지 붙여 주었다. B.j란 변정애,
주옥경이란 성의 이니셜이었다.
그러나 주위의 그런 부러움과는 반대로
주옥경의 가슴속엔 질투의 불꽃이 활활 타고
있었다. 무엇 때문에 꼭 정애보다 한 계단씩
원망스러워 견딜 수가 없었다.
다음 학기에는 꼭 수석을 뺏고 말리라
주옥경은 별렀다. 하루 3,4시간밖에 자지
않고 코피를 쏟으면서 시험 공부를 했다.
덕택에 시험 성적이 월등 좋아졌다. 그러나
정애는 그보다 항상1,2점 더 앞서 있었다.
수석은 결국 뺏지 못했다.
옥경은 그날 집으로 돌아오며 얼마나
울었는지 눈이 퉁퉁 부었을 정도였다.
성격이 활달하고 남 앞에 나서기를
좋아하는 옥경과는 반대로 정애는 성격이
꼼꼼하고 수줍음을 잘 탔지만, 한번 마음먹은
일은 끝까지 해내는 끈질감과 외고집이
있었다.
고등학교 2학년 때의 일을 옥경은 아직도
잊지 못한다.
앞의 허름한 여관에 단체로 들었다.
새벽 동이 틀 무렵 남몰래 석굴암을
다녀오자고 약속한 정애와 옥경이 어둑어둑한
새벽길을 헤치며 열심히 석굴암에 올랐다.
해가 뜨기 전 석굴암에 다다른 그들의 어깨는
땀으로 축축하게 젖었다.
그들이 동해의 장엄한 해돋이를 보려고
산모퉁이를 돌아섰을 때 거기에는 그들보다
먼저 온 남학생 두 사람이 바위에 걸터앉아
있었다.
"안녕하십니까?"
그중의 한 남학생이 말을 걸었다.
"안녕하세요. 서울서 오셨군요."
주옥경이 남학생의 인사를 받았다.
"어어! 우리가 서울서 온 걸 어떻게
아셨죠?"
삼천리지."
옥경이 웃어 보였다.
"하하하. 그렇게 됐나요? 댁에서도 서울서
오셨나요?"
그중에 이목이 비교적 수려하게 생기고
얼굴이 하얀 남학생이 일어서며 말했다. 한
학생은 여드름투성이인 데다 평평한 코며
넓적한 입이 별로 볼품없는 얼굴이었다. 키도
옆 학생보다는 훨씬 작았다.
"우린 서울 M상고 3학년입니다. 야간부에
다니죠. 난 김명걸, 이 친구는 하정복이라고
합니다."
학생은 모자를 벗어 들고 꾸벅 절하는
시늉을 했다.
"우린 서울 K여고에 다녀요. 전
주옥경이고, 얘는 같은 반에 있는......"
말했다.
"얘, 우리 너무 늦었어, 빨리 가."
옥경은 말을 채 끝내지도 못하고 그
학생들한테 목례만 하고 정애에게 끌려 산을
내려왔다.
"너 왜 그렇게 서두니?"
"서둘긴. 모두 아침밥 먹고 우릴 찾을 것
아냐. 단체 생활에서 우리끼리만 떨어져 나가
봐. 얼마나 욕먹겠어."
정애가 새침해진 것 같았다.
"알았어. 그럼 빨리 가자. 아까 그 남학생
근사하지? 우리 산팅이나 한 번 할까?"
옥경이 못내 미련이 남는 듯 여관 마당에
들어서며 말을 계속했다.
"오다 보니까 저쪽 모퉁이에 M상고
학생들이 든 여관이 보였어."
정애가 물었다.
"산에서 하는 미팅이 산팅이지 뭐니. 우린
석굴암 앞에서 했으니까 굴팅인가? 굴팅?
호호호, 거 재밌다."
옥경이 허리를 잡고 웃었다.
그런데 그날 밤 뜻밖에도 정애가 아침의 그
M상고의 잘생긴 학생인 김명걸과 데이트를
하는 것이 옥경이에게 목격되었다.
여관 앞의 K호텔 디스코 클럽에 우연히
호기심으로 들렀던 옥경이 정애와 김명걸을
보고 만 것이다.
<저런 앙큼한 계집애 좀 봐. 아침엔 관심
없는 듯 싹 돌아서더니 날 따돌리고 저
녀석을 몰래 만나. 흥, 어디 두고 보자.>
가슴속에서 불덩이 같은 게 부글부글
끓어올라 견딜 수 없어 옥경은 두 사람이
갔다.
"경치 좋습니다."
옥경을 발견하자 정애는 깜짝 놀란 것
같았다. 그러나 금새 시침을 딱 떼고 말했다.
"명걸 씰 우연히 여기서 만났어. 너 파트너
없니?"
"나? 저기 파트너 있어. 그럼 나중에 봐.
또 만나요."
옥경은 울컥 화가 치밀었으나 얼른
얼버무리고 나와 버렸다. 화가 나서 견딜
수가 없었다.
수학여행을 어떻게 보냈는지 모를 정도로
기분을 잡쳤다.
그러나 그 건은 경주에서 끝난 것이
아니었다. 나중에 서울에 와서도 정애는
명걸이를 몰래 만나곤 했다. 옥경을 가끔
정도는 안중에 없는 것 같았다.
옥경은 자존심이 상해서 더 이상 그들의
데이트 장소에 따라나가지를 않았다.
정애와의 묘한 관계는 그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한 번은 방송국에서 청소년 시간에 학교
소개 겸 학생들의 퀴즈게임 녹화를 하러
왔었다.
거기서 정애와 옥경은 나란히 텔레비전에
출연했었다. 이 퀴즈게임에서도 공교롭게
옥경이 지고 말았다.
정애한테 한 발씩 뒤지는 이 악몽은 그들이
대학에 들어가서도 그치지 않았다.
명문대학에 두 사람이 함께 합격했다.
선생님이나 학생들은 모두 두 사람의 합격을
축하해 주었다. 두 사람은 합격의 기쁨을
잡았다. 그러나 옥경의 속셈은 겉모양과는
달랐다. 정애는 떨어지고 자기만 합격했어야
한다는 꿈을 여러 번 꾸어 보았다.
그들의 대학생활 첫번째 미팅에서부터
불꽃튀는 경쟁이 시작되었다.
그들의 첫 미팅은 사관학교 졸업반 학생을
상대로 해서 단체로 이루어졌다.
같은 테이블에 앉은 여러 사람 중에 한
사관학생을 주옥경이 점찍었다. 그리고
접근하려고 애를 썼다.
피동규라는 그 사관학생은 클래식 음악에
조예가 깊었다. 떡 벌어진 어깨며 일자로
다문 입은 의지의 표상 같았다.
후리후리한 키와 너그러운 마음씨가 한껏
마음에 들었다.
옥경은 몇 번 데이트를 하면서 피동규와
자기를 그가 기다려 주지 않는다면 대학을
집어치우고라도 결혼하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여러 번 데이트를 하면서 연극 구경도 가고
디스코 테크도 드나들며, 한강변을 산책도
했다.
대학생활은 시작부터 꽃터널을 지나듯
향기롭고 달콤하고 즐거웠다.
그러나 피동규는 그렇게 여러 번 데이트를
하면서도 한 번도 옥경을 사랑한다는 말을
하지 않았다. 손목조차 잡지 않았다.
나중에는 옥경 자신이 안달이 났다. 데이트
시간에 맞추어 나갈때마다 오늘은 자기가
먼저 사랑한다고 고백을 해버려야겠다고
다짐을 했다.
그러나 막상 피동규를 만나고 보면
어느 날이었다. 피동규가 값비싼 양식집으로
옥경을 초대했다.
"이렇게 비싼 것 막 먹어도 돼? 동규 씨
한달 용돈 오늘 밤에 다 쓰는 것 아냐?"
옥경은 즐거워 훨훨 날 것 같은
기분이었다.
"중요한 얘기가 좀 있어서 그래. 우리
포도주 한잔 하며 마음 좀 차분히 가진 뒤
얘기 나누자고."
동규는 정말 침착한 모습으로 잔을 조용히
들어 올려 마주치며 말했다.
"저어, 나 약혼할까 해."
옥경에게 그것은 너무나 반가운 말이었다.
옥경은 금방 얼굴이 확 달아오르고 가슴이
두근거렸다. 포도주 잔을 든 손이 가늘게
떨렸다. 마침내 프로포즈를 해오는 것이라고
보여 주고 싶었다.
"어머! 난 아직 아무런 마음의 준비도 안
했는데......"
옥경이 떨리는 목소리로 고개를 숙이고
말했다.
"저어. 그게 아니고......"
그러나 동규의 음성은 여전히 차분했다.
"미스 주 미안해요. 아무래도 이 이야기를
미스 주한테 제일 먼저 해야 할 것
같아서......약혼할 여자를 우리 부모한테
벌써 소개했거든......"
"예?"
이 무슨 청천벽력인가. 옥경은 아직도
피동규의 부모를 만난 일이 없었다. 그럼
자기 아닌 다른 여자와 결혼하겠다는
이야기가 아닌가? 옥경은 자기 귀를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동규 씨 지금 뭐라고 말씀하셨어요?
누구와 약혼을 한다구요?"
"옥경 씨도 잘 아는 여자랍니다. 옥경 씨도
알면 축하를 해줄 것입니다. 암요, 제일 먼저
축하를 해주시겠지요."
동규는 시종 침착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 여자가 도대체 누굽니까?"
"변정애 씨입니다."
"예?"
옥경은 앞이 캄캄해지는 것을 느꼈다.
세상에 이런 기막힌 일이 일어날 수 있단
말인가?
"정애라구요?"
옥경의 입에서 이번에는 떨리는 목소리가
나왔다.
"정말 축하합니다."
안 나타내려고 애를 썼다. 그러나 분노로
일그러진 입술과 배신에 대한 끓는 반감은
눈에서 지울 수가 없었다.
자기와 여러 차례 만나 데이트를 하면서 한
번도 변정애에 대해 이야기한 일이 없었다.
쾌씸하기 짝이 없었다. 남자란 모두 이런
족속인가 싶기도 했다.
그러나 그보다 더 쾌씸한 것은 정애였다.
매일이다시피 자기와 만나면서 어쩌면
피동규에 대해 그렇게 감쪽같이 속일 수
있다는 말인가?
물론 피동규를 처음 만날 때 자기 혼자
만난 것은 아니었다. 변정애하고 같이
만났었지만, 그렇게 뒷구멍으로 호박씨를
까버리다니. 주옥경은 분통이 터져 죽을 것만
같았다. 변정애는 음흉하고 감쪽같은
아니었지만, 이번 일만은 결정적인
일격이었다.
그뒤 주옥경은 남자라면 상대를 하지
않았다. 남자 문제를 쏙 빼버리고 나니
정애와 별로 겨룰 일도 없었다.
그러나 그들이 졸업반 마지막 학기가
되었을 때 다시 그들 사이에 남녀 문제가
생기기 시작했다.
피동규와 약혼한다고 하던 정애는 오래가지
않아 그와 헤어져 버렸다. 근 1년 동안
이곳저곳을 다니며 사랑을 나누던 정애는,
피동규가 사관학교를 졸업하고 전방에
배치되자 처음엔 몇 번 면회를 가다가 그
횟수가 점점 뜸해지기 시작했다.
다시 1년이 지나자 두 사람은 헤어지고
말았다. 서로가 서로의 집안이며 마음이며,
결혼도 하기 전에 권태기가 와버린 것이었다.
그동안 뜸하던 옥경과 정애의 관계는 다시
가까워지기 시작했다.
그때 그들 앞에 나타난 남성이 유현식과
박인구였다.
유현식과 박인구는 물론 서로 모르는
사이의 총각들이었다.
유현식은 주옥경의 사촌 오빠와 친구였다.
유현식은 그의 아버지가 정부의 고관을
지내다 은퇴하여 시골에 살고 있는 뼈대있는
집안의 막내였다. 생김새부터 조용한 인상에
귀공자 타입이었다.
귀한집 자녀들이 흔히 풍기는 마음이
여리고 좀 약헤 보이는 모습을 그대로
나타냈다.
주옥경은 유현식이 퍽 마음에 들었다.
것은 그를 처음 보았을 때부터였다. 현식은
대학을 졸업한 뒤 군복무를 마치고 나와 막
취직자리를 찾고 있었다. 그의 집안이
시골에서는 꽤 부자로 알려져 있고 아버지가
고관을 지냈기 때문에 생계에는 걱정이
없었다. 주옥경은 그의 배경이나 자라온
환경으로 보아서 장래가 대단히 창창한
남자라고 생각했다.
그 무렵 변정애가 박인구와 연애를 하기
시작하고 그를 주옥경과 유현식에게
소개했다.
변정애가 여행을 가다가 고속버스
휴게실에서 만난 청년이라고 했다. 박인구는
낡은 포니 승용차를 타고 휴가를 즐기다
서울로 돌아오는 길이었다. 단자회사의 말단
사원이라고 했다.
훤칠한 인물이며 서글서글한 매너, 그리고
시원시원한 말솜씨에 홀딱 반해 버렸던
것이다.
네 사람은 가끔 어울려 데이트를 즐겼다.
주옥경은 장래성 없는 단자회사의 말단
사원보다는 어마어마한 집안의 귀공자인
유현식이 훨씬 낫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마침내 네 사람은 각각 커플을 이루었다.
그러나 세월이 갈수록 주옥경은
유현식보다는 박인구 쪽이 훨씬 장래성 있는
남자라고 생각되었다.
유현식은 취직 자리를 구하지 못해 아버지
친구가 하는 전자제품 대리점의 말단
사원으로 들어갔다.
그 동안 박인구는 단자회사의 대리가
되었을 뿐 아니라, 그가 어마어마한 재벌인
밝혀졌다.
주옥경은 자기의 선택이 너무나 빗나갔다는
것을 알자 스스로에게 얼마나 화가 났는지
몰랐다.
결국 여자의 종착역이라고 할 수 있는
선택에서조차 변정애에게 짐으로써 마지막
패배까지 맛보았다고 생각했다.
변정애와 여전히 다정한 처녀 때의 친구로
지내기는 했으나 옥경을 괴롭히는 열등감은
정말 그녀를 견디기 힘들게 만들었다.
자동차는 올림픽도로의 끝까지 오자 다시
테헤란 길로 접어들기 시작했다.
"어딜 가시는 거예요?"
주옥경이 꿈에서 깨어난듯 박인구의
옆얼굴을 쳐다보며 물었다.
박인구와 이렇게 나란히 차에 앉아 서울의
더없이 통쾌하고 기뻤다.
"남태령으로 해서 과천 별장에나 갈까요?"
박인구가 담배를 입에 문 채 말했다.
"막계동 별장 말예요? 백정미와 함께 깨가
쏟아졌다는 그 보금자리......"
주옥경이 곱게 눈을 흘기며 말했다. 그러나
운전을 하는 박인구는 옥경의 얼굴은
쳐다보지 않고 말했다.
"그건 오햅니다."
"오해라구요?"
"사람들은 남의 이야기하기를 본래
좋아하죠. 좌우간 우리 거기 가서 좀 쉬면서
이야기합시다."
자동차는 사당동 쪽으로 접어들기
시작했다. 멀리 남태령 위로 헤드라이트
행렬이 줄을 잇고 있었다.
14.용의자 다섯 남녀
"큰일났군. 이것 좀 봐."
석간 신문을 보던 추경감이 강형사에게
신문을 집어 던지면서 한 말이었다. 그리고는
발을 책상 위에 올려놓으면서 의자를 벌렁
뒤로 젖혔다. 손깍지를 베개 삼아 멀뚱멀뚱
천장을 쳐다보며 무슨 생각에 잠기는
듯했다.
"뭐가 났어요?"
"사회면을 좀 봐. 변정애 피살사건도
오리무중인데 백정미 피살사건까지 났잖아.
거기 연관된 두 사람의 여인이 죽었는데도
범인의 윤곽조차 못 잡는 경찰은 도대체 뭘
하느냐는 기사가 장황하게 나 있다네. 어제
저녁 M신문 정기자가 나하고 한잔 하면서
"후후후. 그거 뭐 사실 아닙니까?"
강형사가 신문을 들여다보며 혼자 웃었다.
"강형사는 변정애와 백정미 두 살인사건에
무슨 연관이 있다고 생각하나?"
"반장님, 백정미는 피살된 것이니까
살인사건이라고 할 수 있지만 변정애의
사망이야 사고인지 살인인지 명확치
않잖아요."
강형사가 웃음을 거두고 정색을 하며
말했다.
"만약 둘 다 살인사건이 확실하다면 범인은
동일범일 수도 있는 것 아닐까?"
"하지만 살인 수법이 전혀 다릅니다. 한
사람은 자기 집에서 가스 폭발로 죽었고, 한
사람은 별장에서 혈관을 끊어 죽었다는 게
어쩐지 한 사람 짓은 아닌 것 같은데요."
낮에 주옥경이 그 집을 다녀갔다고 했지?"
"그랬어요. 그건 본인도 시인했고 경비원도
그렇게 얘기를 했죠. 하지만 주옥경이 낮
12시께 그곳을 다녀간 바로 뒤에도 남자가
변정애를 만나고 간 것이 확인됐잖아요.
그러니까 변정애는 그 뒤에 죽었거나, 아니면
그를 마지막으로 만난 그 남자가 수상하다
이겁니다."
"그 마지막 남자가 누구야?"
"그건 아무래도 배원기 같습니다. 경비원이
낯익은 사람이라고 말했고 인상을 설명한
것도 그와 비슷했습니다. 남편인 박인구도 그
시간에 회사에서 외출하고 없었습니다만,
박인구는 백정미가 죽고 없는 이상 박인구의
알리바이도 전적으로 받아들일 수는
없습니다."
"어쨌든 주옥경이 변정애의 아파트를
다녀간 뒤에 들어간 남자가, 즉 배원기가
변정애를 부엌에 몰아넣고 도시가스 밸브를
열었겠지. 그런 다음 성냥불 같은 것을 켜서
부엌으로 집어 던졌다고 할 수도 있잖을까."
"그렇게 무모하게 하지는 않았을 겁니다.
그렇다면 밸브가 열려 있어야 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사건 직후에 초동수사 때 봤지만
가스의 밸브는 그대로 잠겨 있었습니다.
밸브는 부엌의 가장 구석자리 가스가
들어오는 입구 파이프에 붙어 있었습니다.
가스 레인지의 스위치는 켜져 있었지만
밸브가 잠겨 있었으니 소용없는 스위치였죠."
"폭발 사고를 확인한 뒤 밸브를 잠그지
않았을까?"
"글쎄요. 범인이 폭발사고 후 다시 와서
"그러면 말이야......"
추경감은 말을 하다 말고 벌떡 자리에서
일어섰다. 무슨 좋은 생각이 떠오른
듯싶었다.
"우리는 이때까지 그 도시가스가
폭발했다고만 생각하고 있었지. 그런데 그게
아니고 다른 데서 가스를 가지고 와서
폭발시킬 수도 있는 것 아닐까?"
추경감은 급히 담배를 꺼내 물면서 고물
지포라이터를 꺼내 들었다.
"후후후, 경감님도. 가스가 무슨 얼음
덩어리입니까? 남의 부엌에 가지고
다니게......"
"그야 플라스틱이나 고무풍선 같은 용기에
담아 가지고 와서 풀어 놓을 수도 있지?
아닌가? 내가 너무 바보 같은 소리를 하나?"
있었다.
"그 전날 그 집을 다녀간 사람은 없었나?"
"왜요, 더러 있었습니다. 월부책 장사가 그
집을 다녀갔고 주옥경도 다녀갔습니다.
그리고 저녁 무렵에 경비원과 가스공사
직원이 다녀갔더군요."
"가스공사 직원은 왜 다녀 갔는가?"
"가스관 공사를 하고 난 뒤 가스가 잘
들어오나 보러 갔다고 합니다."
"뭐? 가스관 공사를 했다고?"
"예, 그러나 변정애의 집과는 직접 관계가
없었습니다. 그 아파트로 들어가는 도로변의
파이프를 손봤다니까요. 그것을 손본 뒤
경비원과 함께 밤늦도록 집집마다 다니며
가스가 잘 나오나를 점검하고 갔다더군요."
"주옥경은 그날 뭣 때문에 갔다던가?"
봤답니다. 변정애와 둘이서 점심은 먹지
않았다고 하더군요."
"다시 한번 정리를 해보자. 변정애를 죽일
수 있는 동기가 있는 사람은 첫째 그의 남편
박인구지. 박인구는 백정미와의 불륜의
관계가 탄로나 추궁받았을지도
모르고......또한 변정애가 무인도 사건으로
주옥경과의 관계에 의심과 질투의 눈을 하고
있었으니까 두 사람 관계가 원만하다고 볼 수
없겠지. 그렇다면 살인 동기가 성립된다고 할
수 있겠고.
다음은 배원기. 불륜의 관계를 더 이상
유지하기 힘들다고 판단한다면 변정애는
귀찮은 존재가 되는 것이지. 그뿐 아니라
백정미를 박인구한테 뺏겼으니까 복수하려고
할 수도 있겠고......
죽이면 자기가 그 위치를 뺏을 수 있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 그뿐 아니라 여자의
질투는 무슨 짓이라도 할 수 있으니까.
그러나 백정미가 변정애를 죽였다면 백정미는
누가 죽였느냐 하는 문제가 생긴단 말야.
넷째 용의자는 주옥경이야. 주옥경은 학창
시절부터 쌓이고 쌓인 피해 의식이 변정애를
두려운 존재로 만들어 버렸지. 거기다가
무인도 사건 후 변정애와 자기 남편이
자기들을 고의로 무인도에 가둬 놓고
변정애와 하룻밤을 즐겼다고 의심을 하기도
하거든."
"아니 주옥경이 그런 생각을 한단
말입니까?"
강형사가 듣고 있다가 그건 억지란 듯이
말했다.
느꼈어? 유현식이 그날 고의로 지갑을 포구의
민박집에 떨어뜨려 놓았고, 변정애는 섬에 안
가려고 꾀병을 했다고 가끔 생각하더군.
유현식과 변정애가 눈이 맞아 짜고 그렇게
했다고 의심하지. 더구나 유일한 교통 수단인
통통배를 움직이지 못하게 하려고 배 주인의
딸을 언덕에서 떨어뜨려 다치게 했는지도
모른다고 옥경은 생각하고 있단 말야....."
"정말 그랬다면 치밀한 밀회 작전이군요.
하지만 변정애가 그런 정도로 유현식을
좋아했을까요?"
강형사는 여전히 그것은 추경감의
억측이라고 생각했다.
"다섯째 용의자는 유현식."
"아니, 유현식이 변정애와 몰래 사랑을
나눌 정도라면 왜 죽입니까?"
"예? 그런 명언도 있어요? 누가 말한
겁니까?"
"추경감의 명언이야, 후후후. 어쨌든
유현식이 변정애를 죽일 수도 있는 거야.
변정애가 갑자기 유현식의 사랑을 받아들일
수 없다고 했다든가, 반대로 이혼하고 자기와
결혼하자고 했을 가능성이 있거든."
"그러나 그건 변정애와 유현식이 불륜의
관계가 있다고 생각했을 때의 일이지요. 제가
보기엔 유현식과 변정애는 지극히 정상적인
관계, 즉 아내의 친구로 대한
것밖에는......"
"형사의 눈이 저 모양이라니까,
쯧쯧쯧......자네가 늘 주장하는 육감이라는
게 다 어디 갔어?"
"그러면 백정미를 죽인 사람은 누굽니까?"
"그야 제 1의 용의자는 같이 재미를 본
박인구.두번째는 배신당한 배원기. 세번째는
그곳을 서성거린 유현식, 네번째는 주옥경."
"유현식이 범인이라면 동기가 성립되지
않는데요?"
강형사가 말했다.
"우리가 모르는 무슨 동기가 있는지도
모르지. 유현식이는 원래가 지나치게
내성적인 성격에다 가끔 엉뚱한 오해를
해가지고 그것을 사실처럼 믿는 그런 성격이
있어. 쉽게 말해 사이코라는 것 있지?
비정상적인 정신상태......"
"그 성질이 무인도 사건 이후 더욱
심해져서 주옥경이 고통스럽다고 하더군요."
강형사가 맞장구를 쳤다.
"백정미를 죽인 용의자는 또 있을 수 있어.
양아버지인 변일중이라는 영감 말이야......"
"아니 그 영감이 아직도 살아 있나요?"
"물론이지. 인천에서 두 내외가 아직도 그
집에서 살고 있지. 그런데 참으로 희한한
것은 말이야, 그 변일중이 누군지 알아?"
"누군 누구예요. 양딸이나 건드리는
치한이지......"
"그가 바로 죽은 변정애의 삼촌이야."
강형사는 눈이 둥그래졌다.
"그게 정말이에요? 세상에 그런 일이
그렇게 얽힐 수가 있어요? 그렇다면 박인구는
변일중의 조카와 살면서 변일중의 딸을, 비록
양딸이지만 딸을 또 애인으로 삼은 거군요."
"그렇게 되나? 어쨌든 그런 관계로 보아
변정애와 백정미가 서로 아는 사이인지도
모르지. 어릴 때 보지 않았겠어? 그리고
안 들으니까 어떻게 할 수도......"
그때 감식과에서 서류 통보를 가지고 왔다.
백정미 피살사건에 대한 감식 결과였다.
서류를 뒤적이던 추경감이 깜짝 놀란 듯
소리를 쳤다.
"아니 이럴 수가!"
"무슨 일입니까?"
강형사가 더 놀라 추경감의 책상으로
뛰어갔다.
"이것 좀 보게."
추경감이 흥분한 목소리로 서류의 한 곳을
손으로 짚었다.
"그 1차 흉기인 도자기 말야. 자도기든가?
왜 백정미의 뒷머리를 때려 박살이 나버린 그
도자기 조각에서 주옥경의 지문을 발견했다는
거야. 도자기 조각을 맞추어 봤더니 여러
그 도자기를 두 손으로 받쳐 들었던
흔적이지. 여자가 사람의 머리를 후려치자면
두 손으로 잡고 치켜올렸을 것 아닌가. 바로
그런 형태로 지문이 묻어 있었다 이거야."
추경감은 두 손으로 물건을 받쳐 드는
시늉을 해보이며 말했다.
"어쩐지 그런 것 같았어요. 그 여자가
박인구의 여자들한테 무섭게 질투를
했거든요. 당장에 살인범으로 체포해
오겠습니다."
강형사가 와이셔츠 소매를 걷어 올리며
흥분해서 떠들었다.
"이봐, 너무 서둘지 마. 거기서 지문이
나왔다고 해서 꼭 살인했다고 생각할 수는
없어."
"반장님도 무슨 농담을 그렇게 하십니까?
"방증 수사가 더 필요해. 어쨌든 주옥경의
신변을 확보하는 게 좋겠어."
"염려 마십시오. 그 사건 이후부터 죽
미행을 붙여 두었으니까요."
강형사가 전화기를 붙들고 여기저기 걸기
시작했다. 몇 군데 한참 통화를 하더니
추경감을 보고 낭패한 듯 말했다.
"반장님. 이거 어렵게 됐는데요. 주옥경이
어제 오후부터 자취를 감춰 버렸습니다.
유현식도 소재를 찾을 수 없는데요."
"뭐라고? 담당한 놈들은 뭘 하고
자빠졌어?"
추경감이 화를 벌컥 냈다.
"빨리 찾아내. 제가 뛰어 봤자 벼룩이지."
유현식과 주옥경은 왜 갑자기 어제 오후
자취를 감추어 버렸을까?
않는 이유를 모르겠다는 것이었다. 대리점
사장이 강형사에게 귀띔을 했다. 유현식은
어제 없어진 것이 아니라 벌써 이틀째 출근을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유현식과
주옥경이 함께 없어진 것이 아니라 유현식이
먼저 자취를 감추고 그 이튿날인 어제
주옥경마저 없어진 것이 아닐까.
강형사는 담을 넘어 안으로 들어갔다.
현관문도 굳게 잠겨 있었다. 강형사는 동네의
여러 구멍가게와 세탁소 등을 두루 다니며
주옥경에 대해 물어 보았다. 그러나 아무
소득이 없었다.
지친 다리도 쉴 겸 근처 약방으로
들어갔다. 그곳에서 드링크류 한 병을 사서
마셨다. 그리고는 흰 가운을 입고 얌전히 서
있는 여약사에게 주옥경을 아느냐고 물었다.
뜨였다. 좀더 자세히 캐물었다.
"어제 혹시 주옥경 씨를 보셨습니까?"
"어제요? 그게 어제든가?"
여약사는 한참 기억을 더듬다 말을 이었다.
"맞았어요, 어제군요. 네, 우리 가게에
들렀어요."
"그래요? 정말입니까? 어딜 간다고
하던가요?"
강형사가 다급하게 물었다.
"글쎄요. 어딜 가긴 가는 모양이더군요.
차비한다고 돈을 꿔갔으니까요."
"차비한다고 돈을 꿔가요? 어딜 간다고
말은 안 하고요?"
"왜 그런 걸 자꾸 묻죠?"
여약사는 지나치게 꼬치꼬치 캐묻는
강형사를 수상히 여기는 것 같았다.
.
차가 이사장 집 문앞
"저는 경찰관입니다. 주옥경 씨에 대한
실종 신고가 들어와서 그럽니다."
"뭐요? 실종 신고라구요? 어제 여기
들렀는데 무슨 실종 신곱니까?"
여약사는 매우 놀라는 표정을 지었다.
"어제 오후부터 소식이 없습니다. 그래
어디로 간다고 말하던가요?"
"글쎄 그 이야기는 하질 않고 급히 시골에
좀 다녀와야 할 일이 생겼는데 돈이라곤
수표밖에 없으니 5만원만 꿔달라고 하더군요.
그러고 보니 몹시 당황하는 것 같기도
했어요. 만 원짜리 석 장과 천 원짜리 스무
장을 빌려 가지고 갔거든요. 그게 아마 2시쯤
된 것 같은데요."
"대단히 고맙습니다."
강형사는 시경으로 돌아오며 누가 유현식을
납치한 뒤 주옥경을 빨리 오라고 연락한 것이
틈耐?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유현식과 주옥경을 하루 사이를 두고
차례로 불러낸 것은 무엇 때문일까? 누가
그런 짓을 했을까? 강형사는 이런저런 생각
속에서 헤어나지를 못했다.
15.사라진 부부
주옥경이 행방을 감추기 전날 밤이었다.
강형사는 주옥경이 박인구와 함께 63빌딩에서
저녁을 먹은 뒤에 강변도로를 드라이브하다
과천 쪽으로 사라지는 것까지 추적했다는
담당 형사의 보고를 받았다. 그렇다면
박인구는 무엇인가 알고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예감이 들었다. 그래서 즉시 박인구를 만나러
갔다.
박대리 사무실 지하 다방에서 커피 두 잔을
주문해 놓고 그들은 마주앉았다.
"그날 밤 과천 쪽으로 해서 어디로
갔습니까? 혹시 막계동 별장에 가신 것은
아닙니까?"
강형사가 사무적인 딱딱한 말투로 물었다.
아내의 친구입니다. 내가 아무리 막돼먹은
놈이지만 남편이 엄연히 있는 여자를 데리고
밤중에 별장에 간단 말입니까?"
박인구는 화를 벌컥 냈다. 강형사는 그가
진짜 화를 내는 건지 화난 척하는 건지 잘
분간할 수 없었다.
"뭐 나쁜 뜻으로 이야기한 것은 아닙니다.
무분별한 청소년들도 아니고 그렇게 철없는
불장난이야 하겠습니까? 다만 그날 밤 무슨
특별한 일이 없었나 해서 물어 본 것입니다.
아내의 친구와 저녁 한 끼 같이 먹을 수도
있는 일이고, 집까지 태워다 줄 수도 있는
일이죠. 꼭 집이 아니라고 해도 볼일 볼 곳에
데려다 줄 수도 있구요. 그런데 내가 알고자
하는 것은 무슨 일 때문에 밤에 주여사가
박대리를 만나자고 한 것이냐 하는 점입니다.
사람이 만나야 되지 않느냐 하는 점입니다."
강형사의 질문은 날카로웠다.
"그야 남편한테 털어놓을 수 없는 고민이
있을 수도 있는 것 아닙니까? 예를 들면
남편에 관한 이야기 같은 것 말입니다."
박인구는 담배를 꺼내 강형사에게 권한 뒤
자기도 한 대 피워 물었다.
"그날 밤 주여사가 남편에 관해 뭐라고
상의를 해왔습니까?"
강형사의 말투가 조금 누그러졌다.
"말하자면 그런 셈이지요. 유형이 최근에
와서 지나치게 신경질을 내서 견디기
힘들다고 하더군요. 조그만 일에도 사사건건
트집을 잡는다고 합디다. 그러나 그런 일은
얼마든지 견딜 수 있지만 의처증까지 생겨
미스 주를 너무 못살게 한다고 하더군요.
털어놓으라고 했답니다. 아무리 아무 일도
없다고 해도 믿질 않는다는 거죠. 지난 여름
태안반도 무인도에 피서 가서 보낸 하룻밤을
그렇게 악몽으로 생각할 수 없다 이겁니다.
툭하면 그날 밤 박인구와 무슨 짓을 했는지
대라고 한답니다. 누가 먼저 프로포즈를
했느냐, 그 전부터 어쩐지 수상하더라 하고
터무니없는 트집을 잡는다고 하더군요.
심지어 침대 위에서 부부 행위를
시작하다가도 갑자기 중단하고 벌떡 일어서서
박인구와 자기를 비교해서 말해 보라고
윽박지르곤 한답니다. 견디다 못해 미스 주는
친구인 정신과 의사한테 가서 상의까지
해봤다고 하더군요. 의처증 초기 증세라고
한다던가......어쨌든 미스 주는 더 견디기
힘들어서 이혼까지 생각했다고 하더군요."
"꼭 상의라기보다는 하소연을 하러 왔다고
하는 게 옳겠지요. 그런데 내가 보기엔 평소
유형은 아주 정상적이었습니다. 남자가
질투에 눈이 어두우면 그렇게 되는가 보죠.
그런데다 이상하게 생각되는 것이 하나
있었습니다. 유현식 씨가 가끔씩 죽은 제
아내 이야기를 했다는 점이죠."
박인구가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네? 그건 또 무슨 이야기입니까?"
"글쎄요, 이거 얘기해도 될지. 너무
쑥스러워서. 저어, 제 아내의 몸에 대해
툭하면 얘기를 하더라 이겁니다."
"몸에 대해?"
"예. 아내 친구의 몸매에 대해 이러쿵
저러쿵 이야기하는 것이 참으로 괴이한 일
아닙니까? 예를 들면 미스 주보다 살갗이
민망한 이야기를 가끔 한다 이겁니다. 그런데
그 말이 사실과 부합이 되거든요. 제 아내의
벗은 모습을 보지 않고는 할 수 없는
이야기를 한다 이겁니다."
"거참 재미있는 이야기군요."
강형사는 빙그레 미소를 지으며 맞장구를
쳤다.
"우리들, 다시 말해 나와 미스 주가
무인도에 갇혀 하룻밤을 보낼 때 무인도 포구
민박촌에 있었던 유현식과 내 아내는 뭣을
했느냐 하는 것이 미스 주의 관심사이기도
합니다. 미스 주는 그 일을 깨름칙하게
생각하고 있더군요."
"그래서 주옥경 씨는 유현식과 이혼할
결심을 했다는 겁니까?"
"모르겠어요. 여자들이란 속이 상하면 무슨
"여자만 그런가요?"
"하긴 남자도 그런 사람이 많지요."
강형사는 다시 딱딱한 어조로 이것저것을
묻기 시작했다.
"그래 주옥경이 그 일로 박대리를
찾아왔다고 합시다. 그럼 남태령을 넘어서 간
곳은 어딥니까?"
"어딘 어디겠어요, 과천이지. 과천
시내까지 들어가 어느 조용한 카페에서 차
한잔 마시고 도로 돌아 나왔답니다. 미스
주를 장위동 자기 집까지 데려다 줬을 때는
거의 12시가 다 되었더군요. 골목 입구에서
내려 주고 난 집으로 들어갔죠. 이제 속
시원합니까?"
박인구는 말을 마치자 강형사를 쳐다보며
양손을 벌리고 어깨를 추켜올려 보였다. 서양
"주옥경과 유현식이 어디로 갔다고
생각하십니까?"
"글쎄요. 전혀 짐작가는 곳이 없는데요."
"여러 가지 얘기 고맙습니다. 혹시 유현식
씨나 주옥경 씨한테서 무슨 연락 있으면
전화해 주십시오."
강형사는 다시 시경으로 돌아왔다.
아무것도 손에 쥔 것이 없었다.
"뭣 좀 알아냈어?"
의자에 앉아 뭔가를 먹고 있던 추경감이
강형사를 보고 말했다.
"지금 반장님 뭘 잡수시는 겁니까?"
"땅콩과자. 하나 먹어 봐. 아주
고소한데......"
추경감이 먹던 과자를 한 움큼 쥐어 강형사
앞에 내밀었다. 혼자 몰래 과자를 먹다 들킨
"아니 반장님, 이건 꼬마들이 먹는 과자
아닙니까?"
강형사가 어이없어하며 그냥 서 있었다.
"그래, 어른이 먹어도 고소해. 나 하루만
담배를 끊어 보려고 이걸 대신 사왔지."
"담배는 왜 끊으십니까?"
"의사가 안 좋대. 기관지가 꺽꺽해서
병원에 갔더니 그러더군."
"원 반장님도 참......"
강형사는 웃으면서 과자를 받아 입에
넣었다.
"그래 뭣 좀 건졌어?"
"건지긴 뭘 건집니까. 그냥 기다려 보는
거죠, 뭐."
"난 말야, 아무리 생각해도 유현식이
납치된 것 같아. 납치범들은 유현식이 목적이
유현식을 납치해 놓고 유현식으로 하여금
주옥경을 불러내게 할 수도 있는 것 아닌가.
주옥경은 수표가 아닌 현찰을 가지고 시골에
간다고 했으니까 서울 근방에 있는 것은 아닌
게 분명해. 그리고 쫓기고 있었던 것도
어렴풋이 알 수 있어."
"도대체 누가 무엇 때문에 그런 짓을
합니까?"
강형사가 두 손을 벌려 보였다.
"글쎄 그걸 알 수가 없단 말야. 혹시
변정애나 백정미의 살인범을 알고 있기
때문에 입을 막으려고 불러냈는지도 몰라."
"그렇다면 살려 보내지는 않겠군요. 제발
그런 추리는 좀 맞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그때였다. 옆방의 정보과 형사가 들어왔다.
"강형, 우리 방으로 전화가 왔는데,
"박대리? 알았어. 왜 전화를 그쪽으로
했지."
강형사는 겅중겅중 뛰다시피 옆방으로
갔다가 한참 만에 돌아왔다.
"무슨 일이야? 박대리라면 박인구 아닌가?
어서 말해 봐."
추경감이 궁금해 못 견디겠다는 듯이
재촉했다.
"그저께 밤에 주옥경이 한 말이 생각나서
전화를 했다고 하더군요. 유현식이 언젠가는
주옥경을 죽일 것이라고 얘기했답니다.
변정애와 박인구를 죽인 뒤 자기를 배신한
아내 주옥경도 죽일 것이라고 술만 취하면
그렇게 얘기하더랍니다."
"그야 술주정뱅이의 주정 아닌가. 우리도
그 얘기는 알잖아."
"그런데 언젠가는 꼭 그 태안반도 무인도에
가서 아내인 주옥경에게 그날의 일을
되풀이시키겠다고 했답니다."
"그날의 일을 되풀이시키다니?"
"바캉스 때 박인구와 함께 하룻밤 보낸 일
말이죠. 말하자면 그날 밤 박인구와 주옥경이
한 일을 재현하는 현장 검증을 하겠다는
얘깁니다. 그런 뒤에 같이 바다에 빠져
죽어야 한다고 말했답니다."
"뭐라고? 같이 죽는다고? 동반 자살? 강제
동반 자살? 이거 큰일났군!"
추경감이 갑자기 당황해하며 일어섰다.
"아니 왜 이러십니까?"
"왜라니? 지금 몇 시야? 오후 2시군. 빨리
서산으로 가자."
"예?"
끌어내서 태안반도의 그 무인도로 갔을 거야.
어젯밤에 갔다면 벌써 무슨 일을
저질렀을지도 몰라. 태안반도 어디라고
했지?"
"서산군 팔봉면 어송리라는 포굽니다."
"빨리 서둘러."
두 사람은 출장 준비를 서둘렀다.
"자동차로 가자면 시간이 얼마나 걸릴까?"
"한 네 시간은 잡아야 할 겁니다."
"이거 너무 늦는데. 그게 어느 경찰서
관할인가? 서산서 관할이지. 우선 서산
경찰서에 연락해 어송리 앞 무인도로 사람을
보내라고 하지."
강형사도 급히 서둘렀다. 서산 경찰서와
통화를 마친 강형사가 말했다.
서해에는 파도가 높아 배가 무인도까지 갈 수
있느냐가 문제랍니다. 마지막 태풍이 지금
서해로 접근하고 있는 상황이거든요."
추경감은 잠시 망설이다가 결정한 듯
돌아서며 말했다.
"그럼 헬리콥터를 부탁해서 타고 가자.
태풍은 저녁 무렵에 접근한다고 했으니까 그
전에 닿으면 되거든......"
16.무인도의 악몽
주옥경이 남편 유현식의 시외 전화를 받은
것은, 혼자 막 점심식사를 끝낸 뒤의
집에서였다.
유현식은 전날 회사 수금 관계로 대전
방면에 출장을 간다면서 나갔었다. 그는 지금
서산읍에 있다고 했다. 주옥경을 보고 그리로
급히 오라는 전화였다.
교외로 나온 김에 해변가에 나가서
오붓하게 하룻밤을 즐기자는 내용이었다.
옥경은 유현식이 가끔 그런 낭만을 즐길 줄
아는 사람이라는 것을 잘 아는 터였다.
때로는 기발하고 엉뚱한 제의로 옥경을
즐겁게 해준 일도 한두번이 아니었다.
결혼하기 전 옥경이 유현식과 첫 경험을
변정애와 박인구, 그리고 주옥경과 유현식,
이렇게 네 사람은 어느 봄 휴일, 유성으로
나들이를 갔었다.
비록 고물이었지만 박인구의 차에 네
사람이 타고 들뜬 나들이 기분으로 경부
고속도로를 달렸다.
그날 밤 유성에 있는 어느 호텔의 디스코
홀에서 하루를 마무리 하는 스케줄을 가졌다.
서로 어울려 신나게 디스코 춤을 추었다.
잘 못 마시는 맥주를 서너 잔 마셨기 때문에
옥경은 얼굴이 화끈 달아오르고 가슴이 콩콩
뛰었다.
얼마 동안 신나게 춤을 추던 유현식이
슬그머니 주옥경의 팔을 잡아당겼다.
"우리 밖에 나가 바람 좀 쐴까요?"
그래서 두 사람은 변정애와 박인구 몰래
했다.
주차장 근방 나무 밑에 와서였다. 유현식이
주옥경을 슬그머니 끌어안고 입을 맞추었다.
옥경은 황홀했다. 가슴이 더욱 쿵쿵
뛰었다. 유현식은 뜨거운 숨을 내뿜으며
주옥경을 으스러지게 껴안았다.
그리고는 주옥경의 허리를 안아 들어
올리고는 곁에 있는 고급차의 문을 열고
안으로 밀어 넣었다.
"누구 차예요?"
옥경이 놀라 물었다.
"몰라."
유현식이 차 안으로 들어오며 문을 쾅
닫았다.
옥경과 현식은 주인도 모르는 그 차 안에서
불편한 줄도 모르고 첫 관계를 가졌다.
나지 않았다. 그러나 그때 일만 생각하면
옥경은 가슴이 콩콩 뛰고 황홀했다.
그날 밤 두 사람은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다시 디스코 홀로 돌아가 변정애,
박인구와 어울렸다.
유현식은 고지식하고 꼼꼼했지만 사랑을
나누는 데는 가끔 멋을 알았다. 특히
분위기를 즐기는 낭만이 있었다. 그는 평소
생각과는 어울리지 않게 사랑 행위에서는
구도자적 자세 같은 것이 있었다.
주옥경은 남의 자동차 속에서의 그들 첫
관계를 생각하며 유현식이 있는 서산 호텔로
갔다.
오랫동안 쌓인 불편한 부부관계를 씻어 낼
좋은 기회라고 생각했다.
"우리 여기까지 왔으니 기왕이면 어송리
어송리 포구라면 그들이 지난 여름에 갔던
문제의 무인도가 있는 곳이었다.
"거기 가서 우리 그 섬에 한 번만 더 가봐.
거기서 우리 옛날 일 다 씻어 버립시다."
유현식이 진지한 표정으로 권유했다.
그렇게 해서 주옥경과 유현식은 어송리
포구로 갔다.
그들이 포구에 닿았을 때는 이미 늦여름
해가 서해로 기웃해졌을 때였다. 태풍이 곧
닥칠 것을 예측하여 마을에서는 지붕이며
담장 단속이 한창이었다.
옥경 부부는 지난 번 왔을 때 묵었던 그
통통배의 주인집으로 찾아갔다. 주인집
부부는 첫눈에 옥경부부를 알아보았다.
"지금 태풍이 온다는데 그 무인도에 가서
어떻게 하시려구요?"
어이없다는 듯 두 사람을 쳐다보았다.
여주인도 별 미친 사람들 다 보겠다는
표정이었다.
"염려 마십시오. 텐트 같은 것은 다 준비를
해왔거든요. 아무리 거센 바람이 분다고
하더라도 저 섬을 통째로 떠메고 가지는 못할
것 아닙니까?"
유현식이 하도 진지하게 이야기하는 바람에
통통배 주인도 생각을 바꾸고 포구로 나갔다.
세 사람은 통통배를 타고 금방 무인도에
닿았다. 통통배는 내일 다시 오기로 하고 그
자리에서 돌아가 버렸다.
주옥경과 유현식은 갑자기 고도에 둘만
버려졌다는 불안감 같은 것이 엄습해 왔다.
"태풍이 온다는데 정말 괜찮을까요?"
주옥경이 불안한 표정으로 유현식에게
"그날 밤에도 태풍이 불었잖아?"
유현식의 말이 갑자기 달라졌다. 옥경은
그의 음성에 울분 같은 것이 숨어 있다고
느꼈다.
"좀 부드럽게 얘기할 수 없어요?"
주옥경도 불평 섞인 말을 했다.
"부드럽게? 그래 박인구란 놈이 부드럽게
말을 하더라 이거지. 그 오입쟁이 놈이 말만
부드럽게 했겠어? 키스도 부드럽게 했겠지.
그리고 당신 옷도 부드럽게 벗겼겠지!"
"아니 무슨 말을......"
주옥경은 어이가 없었다. 어이가 없어 입을
딱 벌린 주옥경의 얼굴은 서서히 불안한
표정으로 바뀌었다.
"지금부터 그날 밤 박인구란 놈이 당신한테
한 짓과 똑같은 짓을 내가 해보일 거야.
그놈한테 했던 것처럼 해야 돼. 나쁜 놈
같으니라고. 그 일이 끝나면 내일 아침엔
우리에게 아무것도 없는 거야. 모든 것을 저
엄청난 바다가 다 삼켜 버리겠지. 우리
부부의 애증도,장래도,과거도,저 바다가 다
삼켜 버릴 거야. 그래야만 당신은 깨끗한
사람이 될 거구, 당신은 정숙한 유현식의
아내로 다시 태어나는 거야. 당신 같은
악녀가 두 번 살게 되는 거지!"
유현식의 눈이 붉게 충열되었다. 지금
자기가 하고자 하는 일이 자기 일생에 있어서
가장 엄숙한 사명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여보, 당신 정말 왜 이러는 거예요. 우리
버너로 저녁밥이나 지어 먹어요."
유현식이 미리 준비해서 륙색에 넣어 온
텐트며, 버너 따위를 꺼내면서 옥경이
"옳지. 그때 저녁밥부터 지어 먹었다
이거지. 좋아. 그래 그대로 해보자."
유현식은 미친 듯이 움직이며 륙색에서
나온 바캉스 용품들을 거칠게 다루었다.
광기어린 이상한 분위기가 작은 무인도를
꽉 채웠다.
주옥경의 불안한 얼굴은 점점 더 짙은
공포로 변해 갔다.
밥을 짓는 손이 가늘게 떨렸다.
그런 묘한 분위기 속에서 두 사람은 밥을
짓고 국을 끓여 저녁밥을 먹었다.
겉으로 보기에는 다정한 부부가 아무도
없는 무인도에 와서 마음껏 즐기는 모습
같았다.
밥을 지을 수 있도록 유현식이 모두 준비를
해가지고 왔다. 유현식은 주옥경과 함께 이런
같았다.
날이 차츰 어두워지자 옥경은 더욱
불안해졌다. 어디로 도망칠 수도 없다는
긴박감에 사로잡혔다. 유현식이 평소 여기서
박인구와 옥경이 저지른 잘못을 확인한 뒤
함께 바다에 빠져 죽자고 하던 말이 걸렸다.
지금 유현식이 하는 행동으로 보아 충분히
그렇게 할 사람 같았다.
그날 밤은 악몽이었다.
유현식은 자기가 상상한 대로 옥경이 응해
줄 것을 요구했다.
유현식은 그날 밤 주옥경이 박인구를 먼저
유혹했다고 주장했다. 옥경의 유혹을
뿌리치지 못한 박인구가 마침내 바위 굴에서
주옥경과 뜨겁게 한몸이 되었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대로 해보라고 강요했다.
"당신 정말 미쳤군요. 우린 그날 밤 아무
일도 없었단 말예요. 내 솔직하게 다
털어놓을게요. 그날 밤 박대리가 나한테
접근한 건 사실이에요. 하지만 내가 만약
그냥 놔두지 않으면 저 바위에서 바다에
뛰어내려 죽겠다고 위협을 했어요. 당신이
바다 저편에 있는데......정말 몸을
더럽히기보다는 죽는 게 낫다고 생각했어요."
옥경은 애원조로 설명을 했지만 유현식은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쓸데없는 소리 그만하고, 그때처럼 해봐.
어떻게 했어? 먼저 스커트를 벗었겠지?"
유현식은 완전히 제정신이 아니었다.
완력으로 주옥경의 스커트를 잡아당기자 폭이
북 찢어졌다.
않았어요."
"그렇지, 청바지였지. 그러면 이게
청바지라고 치고 벗어 봐. 벗어!"
유현식이 우악스럽게 계속해서 스커트를
찢어 냈다.
"왜 이래요, 여보!"
옥경은 마침내 울음을 터뜨리며 유현식의
양팔을 붙잡았다.
"응, 알았어. 울면서 옷을 벗었다 이거지.
그래 울어,계속 울어대란 말이야."
주옥경은 더 이상 어떻게 할 수가 없었다.
참으로 비참한 무인도의 밤이 깊어갔다.
박인구 역할을 자청한 유현식은 완전히
정신병자가 되어 밤새도록 주옥경을
괴롭혔다.
주옥경은 새벽녘이 되자 저항할 힘도
풀려 산발이 되었다.
억센 풀 위와 자갈밭에서 거칠게 나오는
남편을 벗은 채로 받아들여야 했기 때문에
등과 히프가 긁혀서 상처 투성이가 되었다.
고함을 질러도 누가 도와줄 사람이 없는
절해고도였다.
옥경은 차라리 빨리 죽어 버리는 게 덜
괴로울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날이 새면
정말 자신을 끌고가 저 바위 위에서 함께
바다로 뛰어내릴지도 모른다고 옥경은
생각했다.
악몽의 밤이 지나가고 햇볕이 무인도를
밝혔다. 기진 맥진한 옥경은 이슬 젖은 바위
위에 누운 채 꼼짝하지 못했다.
찢겨서 너덜너덜해진 속치마로 간신히
아랫도리만을 가리고 있었다. 유현식도
않았다. 유현식이 눈을 떴을 때는 오후 서너
시나 되어서였다.
주옥경은 섬의 뒤쪽 바위 끝에 앉아서
까마득하게 펼쳐진 바다를 바라보고 있었다.
몸을 날리면 금세 넓은 바다가 두 손을 벌려
편안하게 자기를 받아줄 것 같았다.
주옥경은 빨리 바위 아래로 몸을
날려야겠다고 생각했다.
발 아래 바다도 무엇에 분노를 느꼈는지
거센 파도를 그치지 않고 몰아붙였다.
산더미 같은 파도가 주옥경이 앉아 있는
바위를 향해 무서운 기세로 덤벼들다가 흰
거품이 되어 산산이 부서져 나가곤 했다.
태풍이 가까이 왔음을 알리는 파도였다.
어제 옥경 내외를 실어다 준 작은 통통배로는
올 수도 없을 것 같았다.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경찰 헬리콥터가
마침내 주옥경과 유현식을 무인도에서 발견한
것이었다.
헬리콥터는 주옥경이 앉아 있는 뒤의
평평한 바위 위에 내려앉았다. 문이 열리고
강형사와 두 사람의 정복 경찰관이
뛰어내렸다.
"주옥경 씨!"
강형사가 뛰어가 거의 탈진 상태에 있는
옥경을 부축했다. 유현식도 두 사람의 정복
형사가 부축해서 올라왔다.
그들 부부와 세 경찰관은 다시 헬리콥터에
올라 태풍이 금방 밀어닥치려는 섬을 빠져
나왔다. 서울까지는 단숨에 도착했다.
17.악녀는 누구인가?
"인생의 라이벌이었던 변정애를 죽이고
싶었겠지요. 하지만 어떻게 그렇게 할 수가
있단 말이오. 더구나 백정미는 박인구한테
혐의를 씌우려고 죽였지요? 아니면 질투요?"
서울의 시경으로 돌아온 강형사는 옥경을
취조실로 데리고 가 심문하기 시작했다.
"난 아무도 죽이지 않았어요. 뭔가 오해를
하고 있는 것 같군요."
대답하는 주옥경은 안색 하나 변하지 않고
태연했다.
"이제 올 때까지 다 온 겁니다. 내가
증거를 대기 전에 다 털어 놓으십시오."
"정말 난 아무짓도 안 했어요.
무인도에서도 박대리와 나쁜 짓 하지
"난 그런 것엔 흥미 없어요. 변정애와
백정미를 죽인 이야기만 하라 이겁니다."
강형사가 책상을 치면서 벌컥 화를 냈다.
그래도 대답이 없자 강형사가 다시 말을
이었다.
"좋아요. 그렇다면 내가 얘기하지요.
주옥경 씨, 당신은 변정애씨의 남편인
박인구와 눈이 맞아, 지난 여름 바캉스
이후부터 밀회가 잦았던 거요. 그래서 질투에
눈이 어두운 나머지 친구인 변정애를 죽일
결심을 했던 거죠. 변정애를 죽이기 위해
당신은 교묘한 가스 폭발사고를 생각해 냈던
거구요. 변정애의 부엌에 들어가 가스 밸브를
몰래 열어 두었죠. 가스를 부엌에 가득 차게
한 뒤 다시 가스 밸브를 잠가 놓고 가버리면,
그뒤 가스가 찬 줄도 모르고 가스레인지에
뻔하죠. 그러면 가스 사고로 죽은 것처럼
되니까 들킬 염려도 없단 말입니다."
"말도 안 돼요."
주옥경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내 말을 더 들어 보시죠. 주옥경 씨,
당신은 변정애가 가스 폭발로 죽기 전날도 그
집에 갔더군요. 그날 범행을 실행에 옮기려고
했으나 마침 그 아파트에 가스파이프 공사를
하고 있었기 때문에 가스가 나오지 않았죠.
그래서 일단 범행을 뒤로 중지하고......"
"억측하지 마세요. 그날 제가 정애한테 간
건 틀림없지만 그런 목적으로 간 건 아녜요.
그냥 그쪽에 들렀다가 들어가 본 거예요."
"거짓말 마십쇼. 당신은 그때 친구의
보석을 팔아 준다는 핑계로 갔지요. 그랬다가
가스가 나오지 않는 바람에 그냥 돌아왔던
있나 없나 전화로 확인했죠. 그러곤 낮에
가기로 약속을 하고 문제의 D데이 날 그 집에
찾아갔던 거요.
그 집에 가자마자 먼저 부엌에 들어가 가스
밸브와 가스레인지 스위치를 돌려서 열어
놓은 뒤 나왔지요. 거실에서 주스 한 잔을
얻어 먹은 뒤 한 시간 가까이 놀다 다시
부엌에 들어가 가스레인지와 밸브를 잠가
놓고는 부리나케 집으로 가버린 거요.
현관에서 주옥경 씨를 전송한 변정애는
부엌으로 들어갔겠죠. 점심 준비를 하려고
가스레인지의 스위치를 누르는 순간 폭발해
버린 거요. 그때까지 부엌 안에 가스가 가득
차 있었다는 것을 몰랐거든. 가스는 무색
무취니까 말이야."
어느새 강형사는 반말투가 되어 말을
"그 뒤 변정애와 늘 대낮의 정사를 즐기던
배원기가 그 집에 찾아갔다가 처참한 광경을
보고 혼비백산해서 달아나 버린 거지.
비겁하기 짝이 없는 놈이야. 자기 애인이 그
모양으로 죽어 있는데 도망을 치다니. 남편
몰래 외간 남자를 끌어들여 대낮에 음탕한
짓을 한 변정애도 악녀지만 그 사나이는 더
악남이야. 악남이란 말이 있는지 모르지만.
그 악녀를 죽이기까지 한 당신은 보통 악녀는
아니고. 한 여자만 죽여도 살아나기 힘들
텐데 두 여자씩이나 죽이고 두번 살기를
바라는 건 아니겠지. 내 말이 틀려요?"
강형사는 심히 꾸짖는 투로 말했다.
"아녜요.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마세요.
난 정애를 죽이지 않았단 말예요. 흐흐흑."
마침내 태연하던 주옥경이 울음을
"그렇담 백정미를 죽인 증거를 대죠.
당신은 변정애를 죽인 뒤 박인구와 사련을
즐겼지요. 그런데 백정미라는 라이벌이
나타나자 질투에 눈이 어두워졌던 거죠.
당신이 백정미를 죽이기 전날도 과천
별장에서 박인구와 사랑 놀음을 했죠. 15일
밤 수요일이군요."
강형사가 수첩을 꺼내보며 말했다.
"말도 안 돼요. 그날 거기 간 건 남편과
셋이었어요."
주옥경이 울음을 그치고 항변했다.
"어쨌든, 그 이튿날 즉 16일 밤에 박인구가
백정미와 그곳에서 정사를 즐길 것이란
의심이 들어 찾아갔던 거죠. 그들의 불타는
베드신을 몰래 보고 있자니 눈에 불이
튀었겠죠. 그래서 박인구가 일을 끝내고
항아리로 백정미의 뒤통수를 쳐서 기절시키고
욕실에 있던 면도날로 혈관을 끊은 거요."
"말도 안 돼요."
주옥경은 계속 똑같은 소리를 외쳤다.
"그리고는 문고리며 면도날 등 모든 곳의
지문을 다 지우고 현장을 떠나는 침착성을
보였지요. 하지만 한 가지 실수를 했어요.
산산조각이 난 도자기에 주옥경 씨의 지문이
있는 것을 몰랐지요. 도자기 파편 속에서
당신의 두 손 지문을 찾아 냈단 말입니다.
이래도 더 할 말 있어요?"
주옥경은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고 울면서
소리쳤다.
"마음대로 생각하세요. 그러나 나는 아무도
죽이지 않았어요. 난 남편말고는 아무도
사랑한 일도 없어요."
"주옥경 씨 말이 맞아요. 주옥경 씨는
아무도 죽이지 않았어요. 이거 용서하십시오.
우리가 뭔가를 잘못 알았던 겁니다."
추경감은 옥경의 앞으로 와서 벗겨진
머리를 숙이며 정중히 사과를 했다.
"옛? 아니 이거 어떻게 된 겁니까?"
그 광경에 놀란 사람은 강형사였다.
"범인은 박인구 대리야. 지금 체포하러
갔어."
"아니 어또게 된 겁니까?"
"박인구는 평소 변정애와 배원기의 관계를
어렴풋이 알고 몇 번 추궁을 했지. 그러나
앙큼하기 짝이 없는 변정애가......"
"죽은 사람은 욕하지 마십시오. 제
친구예요."
주옥경이 고개를 떨구면서 말했다.
없다고 딱 잡아뗐을 뿐 아니라 오히려
백정미와 박인구의 관계에 대해 확증을
제시하면서 간통죄로 두 사람 다 쇠고랑을
채우겠다고 했지. 그뿐 아니라 박대리의
삼촌인 박팔수 회장이 박대리가 지저분한
남녀 관계로 말썽을 일으키면 후계자로 삼지
않겠다고 말했었지. 만약 아내로부터
간통죄로 고소라도 당해 봐. 재벌 후계자
자리는 그냥 날아가는 것이지. 곤경에 빠진
박인구는 마침내 아내를 죽이기로 결심한
거야. 가스 폭발로 위장해서 죽이기 위해
계획을 짰지.
박인구는 어느 날 아침 우연히 아내와
주옥경이 전화하는 걸 엿들었어. 주옥경이
낮에 아파트로 온다는 내용의 전화를 듣고는
회심의 미소를 지었지. 출근 직전 부엌에
거야."
"그건 말도 안 됩니다. 가스를 새게 하자면
밸브만 여는 게 아니라 레인지 스위치까지
열어야 하는데, 나중에 변정애가 그걸 모르고
발화 스위치를 열었단 말입니까?"
"처음부터 가스 레인지 스위치는 잠겨
있었던 거야. 박인구가 밸브에서 가스
레인지까지 연결된 플라스틱 파이프에
송곳으로 구멍을 내놨거든. 그러니까 가스가
계속 새고 있었지만 변정애는 그걸 몰랐던
거야. 우리 현장 검증 때는 플라스틱
파이프가 산산조각이 나서 전혀 거기에는
신경을 안 썼던 것이 큰 실수야. 그리고
그때는 밸브가 잠겨 있었기 때문에 거기에
신경을 쓰지 않았었지.
하지만 나중에 파이프 조각에서 뚫린
아니었지. 폭발이었다면 구멍에 플라스틱이
녹은 흔적이 있어야 하는데 여기에는 그런
흔적이 없어. 즉 사람이 뚫은 거지."
"그걸 박인구가 뚫었다고 볼 수가
없잖아요?"
"변정애가 아침을 지을 때는 괜찮았거든.
주옥경이 올 때까지 그 집에 있던 사람은
박인구와 변정애 둘뿐이었지. 변정애가
자살하려고 구멍을 뚫겠나?"
"그렇다면 우리가 갔을 때 밸브가 잠겨
있었던 것은 왜 그랬나요?"
"그것 때문에 우리가 혼란을 일으켰지.
그것은 변정애가 죽은 직후 그 집을 방문했던
변정애 애인 배원기였지. 배원기는 평소처럼
대낮의 정사를 즐기려 그 집에 들렀다가 사고
현장을 보고 기겁했지. 우선 가스 폭발사고란
옮기려고 생각했지. 그러나 그렇게 되면
자기의 정체가 드러나고 변정애와의 관계가
탄로난다는 생각이 들었지. 그래서 생각을
고쳐 먹고 가스 밸브 등 모든 곳의 지문을
닦아 내고 달아나 버린 거지."
"나쁜 놈 같으니라구."
강형사가 주먹을 불끈 쥐었다.
"그럼 백정미도 주옥경이 죽인 게
아닙니까?"
강형사가 다시 물었다.
"물론이지. 백정미도 박인구가 죽인
거라네. 백정미는 변정애가 죽고 나자 자기가
정실로 들어갈 것을 요구했지. 한국그룹의
후계자인 박인구의 본처가 되는 게 마담
백정미의 꿈이었거든. 그러나 박인구는
백정미를 즐기는 상대로는 생각해도 아내로
과천 별장으로 유인해서 주옥경이 죽인
것처럼 해놓고 자기가 죽인 거지."
"그럼 그 도자기 지문은......?"
강형사가 물었다.
"박인구란 자가 보통 머리 잘 쓰는 친구가
아니거든. 사건 전날 주옥경과 유현식을 그
집에 초대했지. 거실에 놓여 있는 도자기를
가리키며 주옥경에게 저 도자기가 중국
명나라 때 것이니 한번 보라고 이야기를
했거든. 주옥경은 멋도 모르고 그 도자기를
들고 이곳저곳 살펴봤단 말이야. 그래서
주옥경의 지문이 거기에 묻게 한 것이지.
자기가 범행을 할 때는 장갑을 끼고 했으니까
지문이 나올턱이 없었던 거야."
"이런 나쁜 놈!"
강형사가 소리쳤다.
크게 벌렸다.
"그러니까 철저하게 주옥경 여사를 중간에
놓고 이용해서 범행을 한 것이지."
"반장님은 그런 걸 어떻게 다
알아내셨습니까?"
"그러니까 반장이지. 형사와 경감의 차이
아니겠어?"
"참 반장님도."
"범행이 있던 날 밤 유현식 씨가 과천
박인구의 별장 근처에서 얼씬거렸다는 자네
정보를 얻은 뒤 그걸 집중적으로 추적해
봤지.유현식 씨가 카메라를 가지고 있었다는
것을 예사로 보지 않았어.그래서 유현식 씨가
단골로 필름을 맡기는 현상소를 알아냈지. 그
가게에 가서 그날 찍은 필름을 샅샅이
뒤졌지. 그랬더니 과연 그날밤 별장의 거실을
추경감이 책상 서랍에서 컬러 사진 한 장을
꺼내 책상 위에 내놓았다. 박인구의 별장
거실이 나와 있었다. 몇 개의 소파와 바닥에
흩어진 도자기 파편들이 보였다.
"이건 사건이 난 뒤의 사진이군요."
강형사가 말했다.
"그렇다네. 유현식 씨는 박인구가 이미
백정미를 죽인 뒤에 그곳에 갔기 때문에
현장을 목격하지는 못했지. 아무도 없는 거실
바닥을 그냥 한 커트 찍은 거야."
"그렇다면 이게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이 사진은 범행 직후 찍은 것 같단 말야.
박인구가 아직 이 별장에 머물고 있을 때인
것 같아. 여기 소파 위에 있는 하늘색 잠바를
잘 보게. 이 잠바는 박인구의 잠바야. 사건
후 우리가 현장에 갔을 때 이 잠바는
별장으로 와서 우선 거실에서 잠바부터
벗었던 거야. 물론 나중에는 내의까지 다
벗었겠지만 그건 침실에서의 일이고.
백정미를 죽이고 혈관을 끊는 범행을 하는
동안은 이 잠바가 그냥 소파에 얹혀 있었을
것 아닌가.
아마 이 사진이 찍힌 순간은 박인구가 범행
뒤 욕실에 가서 손을 씻었거나 아니면 침실로
가서 내의를 입고 있는 순간이거나 했을
거야. 깨진 도자기 파편이 사건 후란 것을
말해주지. 그리고 이 푸른 잠바는 박인구가
아직 별장에 있다는 증거지. 그뒤 이 잠바를
입고 별장을 떠나 서울로 갔거든. 범행
다음날 박인구가 이 잠바를 입고 서울에
있었던 것이 확인됐단 말야."
주옥경은 남편 유현식을 부축하고 시경
정문 앞 계단을 나오면서 하늘을 쳐다봤다.
푸르다.
"추경감은 바보야!"
주옥경은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빙긋이
웃었다.
"별장의 푸른 잠바는 박인구만 입고
다니나? 내가 똑같은 걸 가져다 슬쩍 던져
두고 사진 찍히게 한 건 아무도 모르겠지.
정애네집 가스파이프에 내가 구멍을 내서
함정을 파둔 것도 아무도 모를 거야.
박대리는 죽어야 해. 그런 사람은 그때
무인도에서 없어졌어야 한단 말야."
주옥경은 경쾌한 걸음으로 인파 속으로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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