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책,영화,리뷰,

금빛 육체의 여자

by Casey,Riley 2023. 6. 25.
반응형

         금 빛 육 체 의 여 자
이수광


                          차  례
작가 소개
1. 욕망의 엘리베이터
2. 음모의 태동
3. 수렁에 빠진 여인
4. 사라진 손가락
5. 제2의 살인
6. 사창가의 소녀
7. 제3의 살인
8. 보이지 않는 손
9. 사건은 미궁으로
10. 제4의 살인
11. 시체 발굴
12. 죽음의 밀월 여행
13. 미로의 끝
14. 금빛 육체의 여자




         1. 욕망의 엘리베이터
  이진우는 담배가 손가락 사이에서 저절로 타들어가
  는 것도 잊어버리고 밤비가 소리없이  들이치는 유리
  창을 응시하고 있었다.
  봄비였다. 어둠이 까맣게 묻어나고  있는 유리창에
  빗방울들이 음산하게 날아와 부서지고는  하였다. 비
  가 그치고 나면 봄 기운이 더욱 완연해질 것이다. 이
  제 겨우 3월 중순이지만 날씨는  점점 따뜻해져 가고
  있었다. 벌써 양지 바른 땅의  개나리가 샛노란 꽃망
  울을 터뜨리고 주택가 담장 안의  백목련이 여인처럼
  화사하게 피어나고 있었다. 예년보다  열흘이나 빨리
  온 봄이었다.
  (만물이 소생하는 봄이라더니!)
  그는 밤비가 들이치는 유리창을 응시하면서 나른한
  기분을 느꼈다. 봄이 마치 자신에게만  오고 있는 것
  같았다. 그는 얼마 전부터 막연히  봄이 오면 자신에
  게 무엇인가 좋은 일이 찾아오리라는 예감을 느껴 왔
  었다. 그리고 거짓말처럼 그 예감이 들어맞았던 것이
  다.
  물론 그것은 어느 날 갑자기 행운의 여신처럼 찾아
  온 것이 아니었다. 그가 오랫동안 주도면밀하게 계획
  을 세우고 실천으로 옮긴 끝에 쟁취한 커다란 전리품
  이었다.
  장숙영.
  그가 쟁취한 여자였다. 그 여자는  미모의 중년 부
  인이었다. 마흔다섯이라는 나이가 믿어지지  않을 만
  큼 그 여자는 균형 잡힌 몸매와  팽팽한 탄력을 갖고
  있었다.
  지성으로 가꾸기도  하였겠지만 아이를  낳지 않은
  중년 부인의 몸은 처녀와 다를  바가 없었다. 오히려
  농익은 과육처럼 그 여자의 육체는  숨막히게 풍만하
  기까지 하였다.
  게다가 그 여자는 멀지 않아 막대한 재산을 상속받
  을 가능성이 있는 여자였다. 교통사고를 당해 식물인
  간처럼 겨우 명줄만 붙어있는 늙은 회장이 죽어 주기
  만 하면 그 재산이 모두 그  여자의 수중에 들어오는
  것이다. 그 여자가 한때 명성을 날리던 영화배우였다
  는 사실은 아무 것도 아니었다.
  그 여자를 쟁취하는 것은 그 여자의 재산을 쟁취하
  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늙은 회장이  죽어 주기를
  기다릴 필요도 없었다.
  (그런 장소에서 공략할 줄은 꿈에도 몰랐겠지)
  그 여자와의 대낮 정사를  생각하자 그는 새삼스럽
  게 하체가 뻐근해 왔다. 어떻게  그런 방법을 생각해
  냈는지 자신도 알 수가 없었다.  다만 그것이 장숙영
  에게 강렬한 인상을 심어 주었으리라는  것을 의심하
  지 않았다.
  이틀 전 일이었다. 장숙영이 또  회사에 출근을 했
  었다. 남편인 조일제 회장이 교통사고를  당한 뒤 장
  숙영은 l주일에 한 번씩 정기적으로 회장실로 출근을
  하고 있었다. 중역들의 업무 보고도  받고 밀린 결재
  서류에 조 회장 대신 서명을 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경영에 문외한인 장숙영은  복잡한 결재 서
  류의 내용을 제대로 파악할 수가  없었다. 그것은 전
  문성을 필요로 하는 일이었다. 그리하여 장숙영은 종
  합기획실 실장인 박현채를 불러 자문을  받기 시작했
  던 것이다.
  (굴러 온 복을 걷어차다니)
  그러나 오만한 성격의 박현채는 여자에게 굽신거리
  는 것을 몹시 싫어해 얼마 전부터 그 일을 과장인 그
  에게 시키고 있었다. 영리한 그는  그 기회를 자신이
  출세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라고 판단했다. 그리하여
  그는 여자에게 굽신대는 것을 조금도  주저하지 않았
  다. 그것은 좀처럼 얻기 힘든 기회였다.
  "기획실장은 어디 갔어?"
  처음에 장숙영은 박현채 대신  그가 회장실로 들어
  가 인사를 하자 미간부터 잔뜩 찌푸리고 화를 냈다.
  "실장님께서는 신규 사업 프로젝트  때문에 바빠서
  제가 대신 왔습니다."
  "그래?"
  장숙영의 눈꼬리가 사납게 찢어졌다.  그것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일이다.
  "그 사람 부회장 쪽 사람이었군!"
  장숙영이 씹어뱉듯이 말했다.
  "그렇지는 않습니다."
  "그럼 여자가 불러서 오지 않는 건가?"
  "하명하실 일이 있으면 제게  해 주십시오. 성의껏
  받들어 모시겠습니다."
  "알았으니 가서 일 봐요."
  장숙영이 차갑게 내쏘았다.  마치 너  따위는 필요
  없어, 하는 듯한 인상이었다.
  "왜? 내게 할 말이 있어?"
  장숙영이 나가서 일 보라고  하는데도 그가 머뭇거
  리고 서 있자 장숙영이 의아한 눈길로 그를 쳐다보았
  다.
  "예."
  "뭔데?"
  "실은 사모님을  존경하고 있었습니다.  그 말씀을
  드리고 싶었습니다."
  그는 일부러 숫기 없는 표정으로 머리를 긁는 시늉
  을 했다.
  "별 소리를 다 하네."
  장숙영이 어처구니 없다는 듯이 피식 웃었다.
  "사모님이 나온 영화를 모두 봤습니다."
  "그랬어?"
  "사모님은 영화 속에서 뵌 모습이나 실제 모습이나
  조금도 다름없이 아름답습니다."
  "괜히 듣기 좋은  소리 하지  마. 이젠  나도 늙었
  어"
  장숙영의 얼굴이 발그스름하게 홍조를  띠었다. 동
  서고금을 막론하고 여자는 아름답다는 말에 무력하다
  는 것을 실감할 수 있었다.
  장숙영도 예외는 아니었다.
  "아닙니다. 지금도 20대의 젊음을  갖고 계십니다.
  피부도 고우시고"
  "싱겁기는"
  장숙영이 밉지 않게 눈을 흘겼다.
  "가서 일이나 봐요."
  "예."
  장숙영이 당황해 하며 시선 둘 곳을  몰라 하자 그
  는 정중히 허리를 굽히고 그 방을 물러 나왔다. 그리
  고 1주일 후 회장실로 출근한  장숙영은 실장인 박현
  채를 부르지 않고 이진우를 지목해 불렀던 것이다.
  그는 내심 쾌재를 불렀다. 장숙영에게 접근하는 일
  은 일단 성공한 셈이었다.
  (이젠 2단계 공략을 시도해야 해)
  그것은 장숙영의 마음을 사로잡는 일이었다.
  그는 치밀하게 계획을 세웠다. 그리고 서서히 계획
  대로 밀고나갔다. 서두를 필요가 전혀 없었다.
  그것은 말(언어)의 연금술사처럼 정제된 말이 필요
  한 지난한 작업이었다.
  그는 언어로서 2단계 공략을 훌륭하게 성공시켰다.
  장숙영이 젊었을 때 얼마나 예뻤었는가, 장숙영이 출
  연한 영화에 관객들이 얼마나  몰려들었는가, 장숙영
  이 젊은이들을 얼마나 잠 못  이루게했는가 하는
  얘기는 장숙영의 미모에 대한 자부심을  교묘하게 이
  용한 것이었다.
  그가 장숙영에게 3단계 공략을 시도한 것은 장숙영
  이 마침내 자신의 페이스에 말려들었다고 생각되었을
  때였다.
  "이제 와서 드리는 말씀입니다만 그때는 저도 사모
  님 때문에 잠을 이루지 못했었습니다."
  "내가 뭘 어떻게 했길래?"
  "사모님이 나오는 영화를  본 날은  공상이 유난히
  많았습니다."
  "무슨 공상?"
  "사모님이 누나였으면 하는 공상,  사모님이 내 아
  내였으면 하는 공상들이었죠. 그런 공상을 하다가 밤
  을 홀딱 새울 때도 있었습니다."
  "사춘기 때니가 그렇지"
  "때때로 꿈 많던  소년 시절을  되돌아보면 그때가
  인생에서 가장 즐거웠던 때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
  니다."
  "그래. 나도  소녀 시절이  그리워 질  때가 있
  어"
  장숙영이 아련한 추억에 잠기는 표정으로 회전의자
  에서 일어나 창가로 걸어갔다. 햇살이  따뜻했다. 그
  는 장숙영의 옆으로 가까이 갔다.
  "누가 이런 말을 했지. 놓친 열차는 아름답고 추억
  은 슬픈 것이라고"
  "사모님도 슬픈 과거가 있었습니까?"
  "기쁜 일은 잊혀지지만  슬픈 일은  오랫동안 가슴
  속에 남아 있는거야"
  "그래도 지금은 행복하시죠?"
  "행복?"
  장숙영이 쓸쓸하게 도리질을 했다.  그는 장숙영의
  어두운 얼굴에서 시들어 가는 꽃의 비애를 발견했다.
  장숙영은 누군가 꺾어 주기를 기다리는 꽃이었다.
  "설마 불행하시다는 말씀은 아니죠?"
  "글쎄"
  장숙영은 그윽한 눈빛을 그에게 보내 왔다.
  "사모님."
  "응?"
  "행복은 스스로 노력하는 사람에게만 찾아옵니다."
  "말이야 좋지"
  "전 소년 시절에 사모님을  사랑했습니다. 물론 은
  막의 여주인공으로서  말입니다. 그리고  사모님처럼
  아름다운 여자의 가슴에 한 번 안겨 보았으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을 했었습니다."
  "영화배우가 뭐가 대단하다고"
  장숙영의 눈빛이 몽롱하게 풀어지고  있었다. 기꺼
  워하는 표정이 그녀의 얼굴에 역력히 나타나 있었다.
  "지금도 그 생각엔 변함이 없습니다."
  "애걔"
  "허락해 주신다면 사모님에게 안겨 보고 싶습니다.
  누님처럼, 아니 어머니처럼 따뜻한  사모님의 가슴을
  느껴 보고 싶습니다."
  그는 장숙영의 모성애까지 교묘하게 부채질한 뒤에
  장숙영의 가슴에 얼굴을 가져갔다.
  "어린애 같기는!"
  예상했던 대로 장숙영은 가벼운  몸짓으로 그를 밀
  어내려 하고 있었다.
  "누님!"
  "어머나!"
  "제가 무례해도 용서해 주십시오."
  그는 장숙영의 가슴에 얼굴을  대고 있다가 재빨리
  자신의 입술로 장숙영의 입술을 덮어 버렸다.
  "읍!"
  몽롱한 환상에 젖어 있던 장숙영이 깜짝 놀라 소리
  를 지르려 했을 때는 이미 그의  손이 장숙영의 스커
  트를 걷어올리고 있었다.
  "아, 안 돼!"
  장숙영은 황급히 그를 저지하려 했다. 그러나 그의
  손은 빠르고 거침없이 밀고 들어와  장숙영의 은밀한
  곳까지 유린하고 있었다.
  "이 과장, 이게 무슨 짓이야?"
  장숙영이 허리를  비틀며 그의  손에서 빠져나오려
  하였다. 가슴이 마구 뛰고 무릎이 떨렸다. 이런 일은
  예상하지 못했던 일이다. 아니 그녀의 내부에서는 은
  근히 이런 일을 기다리고 있었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녀는 둔부를 뒤로 잡아 뺐다.  그러나 그의 다른
  손이 그녀의 허리를 바짝 끌어안고 있었다.
  (아!)
  장숙영은 입을 벌리고 신음소리를 짧게 토해 냈다.
  눈 앞에서 아지랭이가 아른거리고 있었다. 봄이었다.
  햇살이 유리창을 뚫고 따갑게 쏟아져  들어오고 있었
  다.
  언뜻 이진우의 어깨 너머로  건너편 건물의 하강하
  는 엘리베이터가 내다보였다. 투명한 유리 상자 안에
  사람들이 빼곡하게 들어차있었다.
  엘리베이터는 아주 천천히 내려가고  있었다. 그녀
  는 엘리베이터안의 검은 옷을 입은  사내에게 신경이
  쓰였다. 그가 이쪽을 쳐다보고 빙긋 웃고 있었다. 비
  웃는 것 같은 미소였다. 그녀는 얼굴을 찡그렸다.
  이내 엘리베이터가 사라졌다. 어느  정도 내려가자
  시야에서 벗어난 것이다. 그녀는  이진우를 밀어내기
  시작했다. 이대로 당할 수는 없다고 생각하였다.
  (훙! 이 정도의 반항은 이미 예상하고 있었어!)
  이진우는 속으로 코웃음을 쳤다. 회장실 밖에는 비
  서실이 있었다. 장숙영이 소리를 지르면 비서실 직원
  들이 벌떼처럼 달려 들어올 것이다. 그러나 장숙영은
  소리를 지르지 않고 있었다.
  (소리를 지르면 저도 망신을 당하는 거니까!)
  소리를 지를 턱이  없었다. 오히려  장숙영의 몸이
  불덩어리처럼 달아오르고 숨이 가빠지고 있었다.
  이내 장숙영의 밀림이  질펀하게 젖어  왔다. 그는
  장숙영을 벽으로 밀어붙이고 하의를 끌어내렸다.
  "주, 죽여 버리겠어!"
  장숙영이 의미없는 말을 내뱉으며  그의 머리를 감
  싸안았다. 그러나 그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여자가 울음소리 같은 신음소리를 내지르면서 몸부
  림을 쳐댔다. 오랫동안  남자에 굶주려  있던 여자였
  다. 일단 사내를  받아들이자 여자의  욕망이 사내를
  삼켜버릴 듯이 격렬했다.
  사내가 밀어붙일 때마다 여자는  숨이 막히는 듯한
  쾌감에 몸부림을 치면서 신음소리를  내질렀다. 그런
  환희를 경험하기는 처음이었다. 여자는 몇 번이나 까
  무러칠 듯한 절정에서 신음하다가 마침내  사내의 발
  밑에 내팽개쳐지고 말았다.
  그것은 불과 이틀 전의 일이었다.  그는 자신의 방
  밑에 휴지 조각처럼 구겨져 있던 장숙영을 머리 속에
  떠올리고 희미하게 미소를그렸다. 이제  장숙영이 그
  를 찾아올 시간이었다.
  바람이 이는지 창문이 덜컹대고  흔들렸다. 새까만
  먹빛 어둠이 묻어나고 있는 유리창에는  여전히 봄을
  재촉하는 밤비가 들이치고 있었다.
  그는 창으로 바짝 다가섰다. 숲으로 둘러싸인 산장
  호텔 현관 앞에 검은색의 고급 외제 승용차가 미끄러
  지듯 달려와 멎는 것이 내려다보였다.
  장숙영이었다.
  그녀가 승용차에서 내리자 붉은  유니폼을 입은 사
  내가 재빨리 뛰어가 우산을 씌워 주고 있었다.
  (돈의 위력이야)
  그는 거의 꽁초만 남은 담배를 재떨이에 비벼 끄고
  기다렸다.
  6층이래야 잠깐이었다.
  이내 도어가 열리고 장숙영이  들어섰다. 장숙영의
  머리에 안개꽃같은 빗방울들이 묻어 있었다.
  "오래 기다렸어?"
  장숙영이 함빡 미소를 띠고 물었다. 나긋나긋한 목
  소리였다.
  "아닙니다."
  그는 장숙영이 레인코트를 벗는  것을 거들어 주었
  다.
  여전히 장숙영은 아름다웠다. 그는  장숙영을 뒤에
  서 안고 희고 뽀얀 목덜미에 입술을 문질렀다.
  "서두를 것 없어."
  장숙영이 도리질을 하며 말했다.
  장숙영이 투피스의 상의를 벗기 시작했다. 그는 장
  숙영의 스커트 호크를 따고 지퍼를  내려 주었다. 그
  녀의 스커트가 발 밑으로 흘러내려갔다.
  그는 장숙영의 둥근 엉덩이에  손을 얹고 어루만지
  기 시작했다.
  나이답지 않게 탄력 있는 엉덩이였다.
  "샤워했어?"
  "아니요."
  "여태 샤워도 안 하고 뭘 했어?"
  "사모님을 기다렸습니다."
  "왜? 내가 오지 않을까봐?"
  장숙영이 몸을 돌려 세웠다. 장숙영의 몸에서 샤넬
  향수 냄새가 희미하게 풍겨 왔다.
  "예."
  "나를 그렇게 믿지 못해?"
  "지난 번에 무례를 범해서 괴로웠습니다."
  "대범해. 어떻게 그렇게 대범할 수가 있지?"
  "사모님을 갖고 싶다는  생각 외에는  아무 생각도
  못했습니다."
  "몸만?"
  "마음두요."
  "이 과장은 근사한 몸을 갖고 있어."
  장숙영이 이진우의  가슴에 얼굴을  기대면서 말했
  다. 흡족한 표정이었다.
  그는 장숙영을 번쩍  안아 침대에  눕혔다. 장숙영
  이, 샤워부터 하고 응? 하고 속삭였으나 그는 서
  둘러 옷을 벗었다.
  장숙영이 거부할 듯하다가 스르르 눈을 감았다.
  "이 과장."
  "예."
  "나를 즐겁게 해 줄 수 있어?"
  "예."
  "여왕처럼 말이야"
  장숙영이 눈을 감은 채 중얼거렸다. 그는 노래하듯
  중얼거리는 장숙영에게 몸을 실었다.
  이내 두 사람은 격렬하게 부딪쳤고 피를 흘리며 벼
  랑으로 굴러떨어졌다.
  "이 과장."
  그가 장숙영의 몸에서 떨어져  일어나려고 하자 장
  숙영이 그를 은근한 목소리로 불렀다.
  "예."
  그는 거친 호흡을 고르며 대답했다. 등줄기가 땀에
  흥건히 젖어있었다.
  "우리는 서로 살을 섞었어.  그저 불장난이라면 아
  무 의미가 없는거야."
  "물론입니다."
  "내 말을 새겨 들어."
  "예."
  "회장님은 얼마 안 있으면  돌아가셔. 나는 어차피
  재혼을 해야 하구"
  ""
  "그 동안 나도 잠 못 이루는  밤이 많았어. 사내를
  안 여자가 독수공방으로 살 수는 없는 거야."
  ""
  "나는 건장한 남가가  필요해. 내 일생을  맡길 수
  있는 남자 말이야. 그저 불장난으로  그치지 않고 일
  생을 의지하면서 같이 살 수 있는 남자 말이야. 회장
  님이 돌아가시면 내가  재혼을 해도 죄가  되지는 않
  아. 무슨 말인지 알겠어?"
  "예."
  "이 과장같이 건장한 남자라면 더  바랄 것이 없겠
  지. 그러나 이과장은 가정이 있는 남자야. 오늘로 우
  리 관계를 끝내자구. 그게 이  과장의 가정을 위해서
  도 바람직해"
  "전 사모님을 놓치고 싶지 않습니다."
  "왜? 육체적 쾌락을 위해서?"
  "아닙니다."
  "그럼 부인하고 이혼할 수 있겠어?"
  "예?"
  "부인하고  이혼을  해야만  우리  관계는  떳떳해
  져"
  그는 장숙영의 말에 선뜻 대답할  수가 없었다. 장
  숙영이 그렇게까지 나오리라는  것을 미처  예상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것은 신중하게 생각해야 할 일이
  었다.
  "그 대답을 지금 꼭 듣자는 건  아니야. 깊이 생각
  해서 결정해."
  장숙영이 그의 얼굴을  들어서 제 가슴  위에 올려
  놓았다.
  "이 과장이 만약에  이혼을 하고  나하고 살겠다면
  나도 이 과장을 위해서 무엇이든 할 테야"
  그는 대답 대신 장숙영의 밍밍한 가슴을  한 입 베
  어 물었다.
  "아퍼."
  장숙영이 그의 어깨를 주먹으로 때렸다.
  "설마 나를 첩으로 거느릴 생각은 아니겠지?"
  "."
  "잘 생각해!"
  "."
  "난 성일 그룹의 막대한 재산을  상속받을 수도 있
  어. 내가 하기에 따라서"
  비로소 이진우는 장숙영이 만만한 여자가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것은 어떤 음모를 예비하고 있다는
  뜻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2. 음모의 태동
  유혜인은 눈을 찌르는  아침 햇살 때문에  눈을 떴
  다. 오늘도 늦잠을 잔 모양이었다. 집  안이 물 속처
  럼 가라앉아 있었다.
  봄이었다. 해가 중천에 뜨도록 잠을 잤는데도 몸이
  나른했다.
  마치 상쾌하지 못한 정사의 뒤 끝처럼 미처 배설하
  지 못한 찌거기들이 몸 한 구석에 찌뿌드드하게 남아
  있는 기분이었다.
  남편은 이틀째 집에 들어오지 않고 있었다. 남편이
  다니고 있는 성일 그룹 조일세 회장이 식물인간이 된
  뒤 남편은 그야말로 긴박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국내
  재벌 랭킹 25위의  성일 그룹 후계자  문제 때문이었
  다.
  남편은 후계자와는 거리가 먼 사람이었으나 후계자
  가 누가 되느냐에 따라 그의 지위와 출세도 순식간에
  달라지는 모양이었다.
  (상류사회로 진출하려고 발버둥치고  있군. 허지만
  그렇게 쉽지는 않을 거야)
  혜인은 가증스러운 남편의 얼굴을  머리 속에 떠올
  리고 낮게 중얼거렸다.  남편의 인두겁을  쓴 얼굴에
  침이라도 뱉고 싶었다.
  그는 욕망의 덩어리로  뭉쳐져 있는  사내였다. 그
  자신의 출세와 욕망을 위해서는 화약을 지고 불 속이
  라도 뛰어들 수 있는 그런 사람이었다.
  (그러나 내가 살아 있는 한 어림없어!)
  혜인은 아미 남편이  쓰는 전화에 도청  장치를 해
  놓고 있었다.
  그런 까닭으로 가만히 앉아서도  남편이 하는 짓거
  리를 속속들이 알고 있었다.
  혜인은 오래 전부터 남편과 방을 따로 쓰고 있었던
  것이다. 방을 따로 쓸 뿐 아니라 전화까지 따로 쓰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이혼을 하지 않는  것은 무엇 때
  문인지 알 수 없었다.
  오히려 혜인은 남편의 울타리 안에 있는 것을 만족
  해 하고 있었다. 남편을 증오하면서도 남편의 울타리
  안에 있는 것에 거부감을 느끼지 않는 그 이율배반적
  인 느낌은 남편도 비슷한 모양이었다.
  남편은 이따금 혜인의 침대로 기어올라와 허겁지겁
  욕망을 배설하고 내려가고는 했다. 혜인은 그럴 때마
  다 눈을 감고 잠자코 있었다.  남편과의 섹스에 전혀
  흥미가 일어나지 않았던 것이다.
  혜인은 언제나 무감각했다. 남편과의  잠자리를 거
  부하지 않는 것은 오로지 그의 아내라는 의무감 하나
  때문이었다.
  혜인은 침대에서 일어나 커튼을 걷어젖히고 창문을
  열었다. 벌써 정원의 넝쿨 장미들이  담장을 따라 기
  어올라가며 색색의 꽃봉오리들을  터뜨리고 정원수들
  이 싱싱한 녹향을 뿜어대고 있었다.
  5월이었다. 날씨는 오늘도 화창했다.  어느 집에선
  가 피아노를 치는지 매끄럽지 못한  선율이 끊어졌다
  이어졌다 하며 들려오고 있었다.
  (이제 배우는 솜씨군!)
  피아노의 선율은  [엘리제를 위하여]였다.  혜인은
  피식 웃고 나서 거실로 나갔다.  그리고 무엇에 이끌
  리듯 피아노 앞에 앉아 건반을 고르기 시작했다.
  베에토벤의 [월광곡]이었다. 교과서에 나오는 눈먼
  소녀와 그 오빠의 이야기 때문일까. 혜인은 [월광곡]
  을 칠 때마다 달빛이 하얗게 부서지는 오솔길을 악상
  을 가다듬으며 산책하던 배에토벤의 모습이  눈에 선
  하게 떠오르곤 했다. 그리고는 [월광곡]을 치면서 자
  신도 모르게 그러한 분위기에 빨려드는 것이었다.
  그때 혜인은  지하실에서 누군가  올라오는 기척을
  느끼고 홱 고개를 돌렸다. 그는  뜻밖에 지하실 방의
  오상수였다.
  "아직 일 안 나갔어?"
  엉거주춤 목례를 하는 상수에게  혜인은 의아한 눈
  길을 던졌다.
  "예."
  재빨리 고개를 떨어뜨리는 상수를  보고 혜인은 비
  로소 자신의 속옷이 훤히 내비치는 나이트 가운 차림
  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상수는 그런  혜인을 차마 마
  주 보고 있을 수 없는지 고개도 들지 못하고 있었다.
  "숙자에게 커피 좀 타 오라고 해."
  혜인은 웃음이 비어져 나오려는  것을 참고 상수에
  게 말했다.
  "저 어디 좀 나갔습니다."
  "어디?"
  "시골 친구를 만난다고 갔습니다."
  "그래?"
  숙자는 가정부였고 상수는 숙자의  시골 오빠였다.
  숙자가 상수를 데리고  와서 시골 오빠라고  했을 때
  혜인은 그것이 숙자의 남자를 일겉는  말이라는 것을
  전혀 몰랐었다.
  (요즘 아이들은 당돌해!)
  숙자와 상수가 기거하는 방은 차고와 붙어 있는 지
  하실 방이었다. 거실을 거치지 않고서도 따로 출입할
  수 있는 문이 있는데 상수가 거실로  올라온 것은 보
  나마나 주방에서 아침을 먹기 위해서일 것이다.
  "아침 먹었어?"
  "아직"
  상수가 계면쩍게 웃으며 머리를 긁었다. 혜인은 상
  수의 눈빛이 빠르게  자신의 몸을 더듬는  것을 보고
  역시 아이가 아니야, 하는 생각을 했다.
  "그럼 토스트를 구워서 같이 먹지"
  혜인은 피아노 뚜껑을 덮고  주방으로 들어가 아침
  식사 준비를 하기 시작했다. 남편이  있을 때도 상수
  와 숙자는 가족처럼 식탁에서 식사를  같이했기 때문
  에 그것이 새삼스러운 것은 아니었다.
  남편은 숙자까지  정부(정부)로 거느리고  있었다.
  혜인이 그 사실을 안  것은 남편이 쓰는  2층 서재의
  전화에 도청 장치를 설치하고서부터였다.
  남편은 원래 여자 관계가 복잡한 사람이었다. 신혼
  초에 혜인이그 사실을 알았을 때 혜인은 배신감에 치
  를 떨기까지 했었다. 그러나 시일이 흐르면서 무감각
  해지기 시작했고 남편을 아예 그런  인간으로 치부해
  버리게 되었던 것이다.
  (그는 개만도 못한 인간이야!)
  게다가 집에 있는 가정부까지 손을 댔을 때 혜인은
  배신의 단계를 넘어 모욕감까지 느끼게 되었다. 그리
  고 숙자가 시골 오빠라며 상수를 데리고 들어오자 남
  편에게 복수하는 기분으로 상수를 유혹해야지 하
  는 생각을 몇 번이나 마음 속으로 해보곤 했었다.
  그러나 혜인은 알량한 양심 하나가 언제나 그런 사
  악한 생각들을 무위로 만들곤 했다.
  혜인은 이따금 숙자와 상수를  내보내 버릴까 하는
  생각도 했었다. 남편과  숙자의 관계를  묵인하는 것
  자체가 죄악이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구실이 마땅치 않았고 남편도 숙자를  정리하려는 생
  각을 하고 있었다. 숙자가 나가면  상수는 저절로 따
  라나가게 될 것이다.
  (나는 남자 복이  지지리도 없는데  숙자는 나이도
  어린 것이 사내를 둘이나 거느리고 있으니)
  혜인은 그런 생각까지 해 보았었다. 그리고 숙자의
  처지가 은근히 부럽기까지 했다. 물론 그것은 부도덕
  한 일이었으나 인간의 본능에 충실한 것이 반드시 비
  난받을 일은 아니지  싶었다. 인간은  누구나 육체의
  쾌락을 향유해야 할 권리가 있는 것이다.
  상수는 주인 여자에게 아침을 얻어 먹어야 하는 것
  이 거북한지 거실에서 뭉기적거리고  있었다. 그러나
  혜인은 상수가 틈틈이  자신의 몸을 훔쳐  보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래, 실컷 훔쳐 봐라!)
  혜인은 상수의 은밀한 시선을  의식하자 몸이 떨리
  는 것을 느꼈다.  가벼운 흥분이  물결처럼 전신으로
  번지고 있었다.
  (내가 미쳤지.)
  혜인은 입 속으로 중얼거리며 고개를 흔들었다. 상
  수는 어린 남자였다. 어린 남자와  그런 짓을 한다는
  것은 얼마나 낯 뜨거운 일일까.
  "상수!"
  "예?"
  "다 됐어. 이리 와"
  "예."
  상수가 주방으로 건너와 식탁에 앉았다. 혜인은 상
  수 앞에 커피와  토스트 접시를 놓아 주고 상수의 맞
  은편에 앉아 커피를 음미하듯이 한 모금씩 마시며 그
  를 건너다보았다. 상수는 일부러 혜인을 외면하고 토
  스트를 먹는 데 열중하고 있었다.
  (식욕이 왕성하면 성욕도 왕성하다던데)
  혜인은 상수가 토스트 두 개를 게눈 감추듯이 먹어
  치우자 두 개를 더 구워서 접시에 놓아 주었다.
  "괜찮아?"
  "예?"
  "맛 말이야."
  "예, 맛있습니다."
  상수가 장난끼가 발동한 소년처럼 씨익 웃었다. 귀
  여운 미소였다.
  혜인은 문득 옷을 다 벗은 상수의  알몸을 머리 속
  에 그려 보았다.  혜인은 아직까지 어린  남자, 이제
  막 성인이 되어 가는 과정에 있는  소년의 나신을 한
  번도 본 일이 없었다.
  (기껏해야  어른들보다  살이  풋풋하고  부드럽겠
  지)
  혜인은 막연히 그렇게 생각했을  뿐이었다. 그것은
  혜인이 여학교 시절에도  종종 가슴 속에  품어 보곤
  하던 생각이었다. 사람들은흔히 남자들만  성적 충동
  을 갖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여자들도  예외는 아니었
  다.
  여자들도 사춘기를  거치면서 막연히  이성에 눈을
  뜨게 되고 젖무덤이 둥글게 솟아오르는  것과 비례해
  누군가 가슴을 만져 주거나그 이상의 짓을 해 주기를
  바라게 되는 것이다. 물론 그것은  오랜 인습과 순결
  보호의 차원에시 억압되고 있을 뿐이라는  것을 혜인
  은 경험을 통해 터득하고 있었다.
  (남자는 여자의 유방이나 엉덩이에 성적 충동을 느
  끼고, 여자는 남자의 억센 근육에  성적 호기심을 느
  끼는 거야. 여자라고 해서 다를 건 없어!)
  마찬가지로 남자가 여자의 옷을  벗기고 싶듯이 여
  자도 남자의옷을 벗기고 싶은 것이다. 자신이 상수의
  알몸을 머리 속에 그려보는 것은 음란한 짓이 아니라
  고 혜인은 스스로 만든 논리에 정당성을 부여했다.
  그러나 상수는 벌써 혜인이 두 번째 구운 토스트를
  다 먹고 커피를 마시고 있었다.  그리고 식탁에서 일
  어서려 하고 있었다.
  "좀 앉아 있어. 내가 뭣 좀 물어보려고 그래"
  혜인이 그런 상수를 재빨리 제지했다. 비로소 상수
  가 경계하는 눈빛으로 혜인을 쳐다보았다.
  상수는 키가 작고 체격도 연약했다. 얼굴은 눈썹이
  짙고 살빛이 하앴으나 눈은 볼품 없이 조그만 했다.
  "몇 살이야, 상수?"
  "스무 살입니다."
  "숙자는 열아홉 살이니까 잘 어울리겠네"
  ""
  "언제 결혼할 거야?"
  "아직 정하지  않았습니다. 군대도  갔다와야 하
  구"
  "그럼 군대 나갈 때까지 우리 집에 있을 거야?"
  ""
  "유리 아빠는 상수가 아직도 숙자의  친오빤 줄 알
  고 있어."
  상수가 고개를 떨구었다. 어느 집에선가 또 피아노
  소리가 끊어졌다 이어졌다 하며 들려오고 있었다.
  "오늘은 왜 일 안 나갔어?"
  혜인이 화제를 바꾸었다. 상수는 건설 현장의 미장
  공이었다.
  "4월 초8일이라 쉽니다. 사장이 불교 신자예요."
  "아!"
  혜인이 짧게 탄성을 내뱉었다.
  "그럼 숙자하고 같이 어디 놀러라도 가지 그랬어?"
  혜인이 가볍게 눈을 흘기는 시늉을 했다.
  "시골 친구를 만난다고 그래서요."
  "언제 들어와?"
  "오후에 들어온대요."
  "그럼 이 집엔 우리 둘뿐이네?"
  혜인은 요염하게 웃으며 상수를  떠보았다. 그러나
  상수는 잠자코 고개를 떨구고 있었다.
  "심심해 죽겠어."
  혜인은 토스트 조각을 천천히 떼어서 입 속에 넣으
  며 다시 한번 튕겨 보았다.
  "영화 구경이라도 가시지 그러세요?"
  "재미있는 영화 하는 데라도 있어?"
  "잘 모르겠어요."
  대화가 겉돌았다.
  "몸도 찌뿌드드하구"
  혜인이 한 손으로 자신의 어깨를 주물렀다.
  "누가 시원하게 어깨 좀 주물러 주었으면 좋겠어."
  "제가 주물러 드릴까요?"
  "그럴래?"
  혜인이 반색하는 시늉을 했다. 상수가 식탁에서 일
  어나 혜인의 등 뒤로 와서 어깨에 손을 얹었다. 혜인
  은 의자에 기대어 눈을 지그시  감았다. 그리고 조심
  스럽게 움직이는 상수의 손길을 음미하며  가상의 섹
  스를 즐기기 시작했다.
  그것은 혜인이 착안한 독특한  방법이었다. 남편이
  자신에게서 점점 권태를 느껴 외도를  하기 시작하자
  혜인은 그런 방법으로밖에 밤의 외로움을  달랠 수가
  없었던 것이다.
  "됐어."
  혜인이 상수의 손을  제지하며 말했다.  벌써 숨이
  가빠오고 있었다. 더 이상 상수의  손에 어깨를 맡겨
  두었다가는 자신도 제어할  수 없는 상태가  오고 말
  것 같았다.
  혜인은 상수가 눈치채지 않게  하기 위하여 느릿느
  릿 안방으로 걸어 들어온 뒤  재빨리 문을 잠그었다.
  그리고는 침대에 기어들어가 상수의 벌거벗은 나신을
  생각하며 자신의 은밀한 곳으로 손을 가져갔다.
  숙자가 몸을 기대 오자 뜨거운 육향이  훅 하고 끼
  쳐 왔다. 사람을 뇌살시길 것 같은 싱싱한 과육의 냄
  새였다.
  진우는 그 냄새에 취한 듯이 몸을 부르르 떨었다.
  혜인은 몸이 균형잡히고 살결이 매끄러웠으나 숙자
  는 몸이 뚱뚱하고 살결이 거칠었다. 그런데도 진우가
  숙자를 탐닉하는 것은 그놀라운 육향과  탄력 때문이
  었다.
  "어떻게 할 거야?"
  진우는 하체가 뻐근해 오는 것을 느끼며 재빨리 주
  위를 둘러보았다. 강가의 포플라숲은 인적 없이 조용
  했다. 화사한 5월의 햇살만이 무성한  포플라 잎새를
  연두빚으로 물들이며 깃발처럼 나부끼고 있었다.
  "아저씨 하라는 대로 할께요."
  숙자가 진우의 바지 혁대를 풀고 지퍼를 내렸다.
  "떼어 버려."
  "어디서요?"
  "어디서 떼긴 어디서 떼? 병원에서 떼지"
  "저 혼자서요?"
  숙자가 입술을 삐쭉 내밀었다.
  "그렇다고 내가 따라다닐 수는 없잖아?"
  진우는 화를 벌컥 내려다가  얼굴을 누그러뜨렸다.
  공연히 숙자의 비위를 거슬려 보았자 득될 게 없다고
  생각했다.
  "나 혼자 어떻게 가요?"
  숙자가 삐쭉 내민 입술을  진우의 얼굴로 가져오며
  말했다.
  "다들 혼자 가서 잘해."
  진우가 숙자의 입술을 피하지 않고 대꾸했다.
  "무섭단 말예요."
  "무서울 거  하나도 없어.  30분이면 깨끗이  끝
  나"
  "아저씨가 어떻게 알아요?"
  "아줌마도 그랬어."
  "아줌마도 애를 뗐어요?"
  숙자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물었다.
  "그래, 몇 번 계속해서 떼다가 애를 더 못 낳게 된
  거야."
  "왜요?"
  "자꾸 딸만 갖게 되니까 떼고 또 뗀 거야."
  진우는 거짓말을 해 버렸다. 숙자의 임신도 도무지
  믿을 수가 없었다.
  "무슨 소리예요?"
  "초음파 검사라는 것이 있는데,  뱃속에 있는 아이
  가 아들인지 딸인지 알아내는 검사야. 지금은 불법으
  로 되어 있지만  얼마 전까지만 해도  초음파 검사를
  해 보고 딸이면 모두들 떼어버렸어."
  "그런 얘기 들은 일이 있어요."
  숙자가 배시시 웃고 진우의  바지춤에서 그것을 꺼
  내 만지기 시작했다.
  진우는 하체가 뿌듯하게 일어서는  것을 느끼며 또
  다시 전면의 유리창으로 포플라숲을  살폈다. 다행히
  숲은 인적 없이 조용했다.
  "이뻐요."
  "뭐가?"
  "아저씨 이거요."
  숙자가 스커트를 걷어올리고 진우의  무릎 위로 냉
  큼 올라 앉았다. 진우는 시트  등받이에 쓰러지듯 기
  대었다.
  (노 팬티!)
  진우는 숙자의 창녀 같은 짓거리에 기가 질렸다.
  "이따가 병원 앞에 내려줄께 떼어."
  "병원비도 있어야 하잖아요?"
  "준비해 뒀어."
  "얼마요?"
  "백만원."
  "겨우 고거 준비했어요?"
  "그거면 충분해!"
  "우리 오빠 방 얻어 준다고 했잖아요?"
  "며칠 안으로 해 줄께."
  "정말에요?"
  "그래."
  "고마워요, 아저씨"
  숙자가 묘하게 입을 비틀며  웃더니 살찐 엉덩이를
  지그시 눌러왔다. 진우는  재빨리 숙자의  등에 팔을
  감고 눈을 감았다. 애초에 숙자를  건드린 것이 잘못
  이었다. 숙자가 그것을 미끼로  오빠라는시골 촌놈을
  집으로 끌어들이고 그 놈에게 방을 얻어 준다는 구실
  로 5백만원이라는 거액을  요구해도 어쩔  수가 없었
  다. 이미 진우는 자신이 깊은 수렁 속에 빠졌다는 것
  을 알고 있었다.
  (무서운 아이들이야!)
  진우는 이따금 그런 생각을  하고 모골이 송연해질
  때도 있었다.
  그러나 잘만 다루며  한 집에서 두  여자를 거느릴
  수도 있다고 생각하니 그렇게 억울한 것도 아니었다.
  숙자는 처녀가 아니었다. 진우는 숙자와 처음 교접
  했을 때 이미 그것을 알았고 숙자도  그 문제는 시인
  하고 있었다.
  "아!"
  숙자에 입에서 가늘게 신음소리가  새어나왔다. 숙
  자는 이미 하체가 질펀하게 젖어 있었다.
  (이건 건드리기만 해도 쏟아지는 기계군!)
  진우는 쓴웃음을  흘리며 비로소  숙자의 엉덩이를
  두 손으로 바짝 끌어당겼다.
  그날 오후, 진우는 성일 그룹  소유주인 조일제 회
  장의 대저택 앞에 차를 갖다 댔다.
  으리으리한 저택이었다.  엷은 황혼빛에  둘러싸인
  채 조 회장의  저택은 드넓은 언덕에  성채처럼 우뚝
  솟아 있었다.
  "어서 와, 이 과장."
  조 회장의 후처인 장숙영은  넓은 잔디밭에서 골프
  채를 휘두르고 있다가 진우를 향해  느릿느릿 걸어왔
  다.
  "오랫만에 뵙겠습니다."
  진우는 장숙영에게 허리를 깊숙이 숙여 인사했다.
  반소매의 브라우스와 짧은 반바지를  입고 있는 장
  숙영은 햇빛을 가리기 위해 차양 넓은 모자까지 쓰고
  있었다.
  (돈이 많으니까 늙지도 않는군.)
  진우는 탄력이 넘치는 장숙영의  알몸을 머리 속에
  떠올리며 의미심장한 미소를 그렸다.
  "그 동안 어떻게 지냈어?"
  장숙영도 끈적끈적한  눈길로 진우를  살피고 있었
  다.
  "사모님 염려해 주신 덕분에 잘 지내고 있습니다."
  "내가 뭐 도와준 게 있다구 우리 좀 걸을까?"
  "예."
  진우는 장숙영과 보폭을 맞추며  나란히 걷기 시작
  했다.
  "공증은 끝났습니다."
  "잘 됐어."
  "서류를 가져왔습니다."
  "그거야?"
  "예."
  진우는 들고 있던 서류 봉투를 장숙영에게 넘겨 주
  었다.
  "하자는 없겠지?"
  "물론입니다."
  "변호사는 누구야?"
  "김영일이라고 늙은 변호사입니다."
  "믿을 수 있는 사람이야?"
  "예, 반신불수로 앓다가 열흘  전에 죽은 사람입니
  다."
  "죽은 사람이 어떻게 공증을 해?"
  "브로커에게 명의를  빌려 주고  있었습니다. 워낙
  강직한 사람이라 명의  같은 것은 빌려  주지 않는데
  그에게 파락호인 아들이하나 있습니다. 그 아들이 명
  의를 빌려 주었지요."
  "나중에 문제가 생기지 않겠어?"
  "브로커에게 미끼를 잔뜩 물려 주었습니다."
  "수고했어."
  "별 말씀을"
  장숙영이 걸음을 멈추었다. 진우는  재빨리 주위를
  살핀 뒤 장숙영을 억세게 끌어안았다.
  "누가 보면 어쩔려고"
  장숙영이 눈을 흘기며 그를 밀어냈다.
  "뵙고 싶었습니다."
  "정말이야?"
  "예."
  "이 과장 집안은 어때?"
  "괜찮습니다."
  "이 과장 여자 문제는?"
  ""
  "전에 여직원을 건드린 일이 있지?"
  "그 여자는 다 해결했습니다."
  "그럼 아직도 해결하지 못한 여자가 있어?"
  "죄송합니다."
  "누구야?"
  "저희 집 가정부입니다."
  장숙영의 눈에 언뜻 경멸하는  듯한 눈빛이 빠르게
  나타났다가 사라졌다.
  "이 과장, 여자를 그렇게 좋아해?"
  "빠른 시일 내에 정리하겠습니다."
  "어떻게?"
  "돈으로 입을 막아 버리겠습니다."
  "괜히 봉 노릇 할 필요 없어."
  ""
  "이 과장이 알아서 잘해."
  "예."
  "그건 그렇구 이 과장,  내일부터 기획실장 자
  리에서 일해.
  박현채는 다른 부서로 보낼 테니까"
  "감사합니다."
  "우린 멀지 않아 부부가 될 사람들이야. 안 그래?"
  장숙영이 진우를 격려하듯이 어깨에  두 손을 얹었
  다. 진우는 장숙영의  눈이 마치  무서운 흡인력으로
  자신을 빨아들이는 것 같은 기분을 느꼈다.
  그룹 종합기획실 과장 이진우가 돌아가자 장숙영은
  정원의 의자에 앉아서 이진우가 가져온  서류들을 점
  검하기 시작했다.
  먼저 조일제 회장의 재산 상속에 대한 유언장 공증
  서류였다.
  유언장의 내용은 지금까지 준비되어 있는 유언장을
  모두 파기하고 새로운  유언장만이 효력을  갖는다고
  명시되어 있었고 변호사의 공증에 도장이  찍혀 있었
  다.
  유언장 내용은 장숙영 부인에게 55프로, 전처와 전
  처의 두 아들에게  각각 5프로씩  15프로가 할당하게
  되어 있었고, 창업 공신들인  중역들에게도 20프로를
  배당해 주게 되어 있었다.
  (20프로를 나누어 주니까 아무도 반기를 들지 않겠
  지)
  장숙영은 만족했다. 공증까지 거친  유언장의 내용
  은 완벽한 것이었다.
  나머지 서류들은 주식 위장에 관한 것이었다. 조일
  제 회장의
  막대한 재산을  그대로 상속받으면  세금으로 그냥
  넘어갈 것이 뻔한므로 주식을 위장 분산시켜 놓은 것
  이었다.
  (솜씨 하나는 빈 틈이 없군)
  장숙영은 이진우가 믿음직했다. 그의  단단한 근육
  질로 뭉쳐진 육체를 생각하자 새삼스럽게  무릎이 떨
  렸다. 그는 여자 문제가 복잡한 것이 흠이었다.
  (이 일만 끝나면 어떤 여자도  너에게 접근하지 못
  하게 할 거야. 너는 내 노예가 되어야 해)
  그럴려면 이진우가 만족할 만한  미끼를 던져 주어
  야 했다. 육체의 약속은  언제 깨어질지 알  수 없는
  것이었다. 남자는 여자의 육체에 쉽게 권태를 느끼는
  동물이었다. 그런 까닭으로 젊은  부인을두고 여직원
  과 놀아나고 그의 가정부까지 유린하다  못해 이제는
  자신에게까지 손을 뻗쳐 온 것이다.
  (사랑스러운 종마지)
  이진우는 키가 훌쭉하게 크고 얼굴도 잘 생긴 사내
  였다. 대학시절에 아마추어 복싱을  했으므로 언제나
  힘이 넘치고 있었다. 이진우가 여자 문제를 일으키고
  다니는 것도 넘치는 그 힘을 주체하지 못해서였다.
  장숙영은 비로소 야릇한 미소를  입가에 흘리며 저
  택을 향해 느릿느릿 걸음을 떼어 놓았다.
  식사 시간이었다. 봄날의 긴 해가  산 뒤로 넘어가
  서편 하늘에 불그스름한 황혼의 여진이  번지고 있었
  다.
  식탁엔 조일제 회장의 전담  간호원인 임수지와 운
  전기자 박희일, 비서 최인수, 문지기 오 영감이 앉아
  있다가 장숙영이 들어오자 재빨리 일어나는 체했다.
  박 기사와 최 비서는 장숙영의 먼 친척되는 사람들
  이었고 임 간호원은 병원에서 파견한  간호원으로 식
  물 인간이나 다름없는 조일제 회장을 돌보고 있었다.
  오 영감의 마누라인 상주댁과  가정부인 미자는 식
  탁을 차리기에 여념이 없었다.
  "회장님은 좀 어떠세요?"
  장숙영이 집 안에서도  하얀 가운을 입고  있는 임
  간호원에게 물었다.
  "여전하세요."
  "내가 보니까  회장님 안색이  안 좋아  보이던데
  "
  "그럼 내일 김 박사님을 오시라고 할까요?"
  "그래요. 어째 며칠 넘기지 못하실 것 같아"
  임 간호원이 어리둥절한 눈빛으로 장숙영을 쳐다보
  았으나 장숙영은 그 시선을 무시하고 최 비서를 향해
  입을 열었다.
  "최 비서는 오늘부터 퇴근하지 마세요."
  "예?"
  최 비서가 놀란 눈으로 장숙영을 쳐다보았다. 그는
  이제 신혼 3개월 젊은 사내였다.
  "회장님이 언제 임종하실지 몰라요."
  "회장님이 그렇게 위중하십니까?"
  "그런 건 아녜요. 그러나 만약의 사태를 위해 준비
  하고 있어야 해요."
  사람들이 비로소 무겁게 한숨을 내쉬었다. 벌써 창
  밖엔 어둠이 혓바닥을 길게 늘어뜨리고 가까이 와 있
  었다.
  그 시간 성일 그룹 종합기획실 과장 이진우의 집에
  서도 저녁 식사가 이루어지고 있었다.
  오랫만에 주인이 돌아온 탓인지  식탁이 풍성했다.
  그러나 그들네 사람은 식탁이 풍성한 까닭을 각자 다
  르게 생각하고 있었던것이다.
  주인 이진우는 모처럼 자신이  집에 돌아오자 아내
  혜인이 풍성하게 식탁을  준비한 것이라고  생각하며
  혜인에게 조금 미안하다는 생각까지 하고 있었다.
  그러나 안주인인  유혜인은 상수와의  가상 섹스가
  미진하면서도 흡족했다. 그 이율배반적인  느낌은 남
  편 몰래 혼외 정사를 즐긴듯한 짜릿한 쾌감 때문이었
  다. 그리고 언젠가는 가상으로서가 아니라 실제로 상
  수를 유혹하여 정사를 즐길 수  있으리라는 자신감도
  들었다.
  상수는 가난한 미장공인 자신이  갑자기 벼락 출세
  를 한 느낌이었다. 자취방도 변변하게  얻지 못한 자
  신에게 숙자라는 계집 어차피 결혼할  생각은 아니
  었다 이 생긴 일이며 얼굴이 못생기기는 했지만 주
  인 여자의 끈끈한 시선을 받았던  것이다. 적당히 기
  회를봐서 깔고 누를 생각이었다.
  기분이 좋은 것은 숙자도 마찬가지였다. 원래 숙자
  는 가정부가 아니었다. 그녀는 열여섯 살이 되던 봄,
  강화도에서 무작정 상경하여 사창가를 전전하다가 이
  진우의 집에 가정부로 들어와 있었던것이다.
  숙자가 상수를 시골 오빠라고  속이고 데리고 들어
  온 것은 집주인인 이진우를 협박하여  돈을 뜯어내기
  위해서였다. 벌써 옷을 사입어야겠다, 임신했다고 속
  이고 뜯어낸 돈도 3백 만원이나 되었다.
  이제 상수의 방을 얻어 준다는  구실로 5백 만원을
  울궈내면 고향으로 돌아가도 되었다.  고향에서 농사
  를 짓는 부모를 2, 3년 돕다가 어수룩한 시골 청년에
  게 시집을 가면  아무도 자신의 사창가  과거를알 수
  없는 것이다.
  게다가 낮에는 밖에서 주인  남자와 즐기고 밤에는
  상수와 그 짓을  하는 것도 짜릿한  쾌락을 동반하고
  있었다.
  거실에서는 딸  유리가 피아노의  건반을 두드리며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단테의 [파우스트]였다. 유리
  의 담임 선생이 뮤지컬로 작곡을 했다는 것인데 유리
  가 피아노 반주를 하게 되어 밤낮  없이 연습에 몰두
  하고 있었다.
  악마에게 영혼을 팔면 돈도 주고 여자도 준다.
  저 시뻘건 불은 너의 음탕한 탐욕이 아닌가
  국민학생에게는 어딘지 어울리지 않는 곡이고 가사
  였다.
  그러나 혜인은 일부러 만류하지 않았다. 그러한 일
  에 지나치게 민감한 반응을 보이면  남편으로부터 의
  심을 받을까 걱정이 되어서였다.
  저녁 식사가 끝났다. 설겆이를 마친 숙자가 지하실
  차고 옆 방으로 내려가자 혜인도 피로한 기색이 역력
  한 남편을 따라 침실로 들어갔다.
  거실에는 유리만이 남아서 악마에게 영혼을 판 [파
  우스트] 이야기를 노래로 부르고 있었다.
  성일 그룹 조일제 회장의 사망 연락을 받고 주치의
  김 박사가 정릉 저택에 도착한 것은 이튿날 새벽 6시
  경의 일이었다.
  김 박사가 허겁지겁 현관으로  들어서자 벌써 사람
  들이 몰려와 웅성거리고 있었다. 김 박사는 어수선한
  거실의 분위기를 피부로 느끼며 조일제  회장의 침실
  로 뛰듯이 걸어갔다.
  조일제 회장은 침대에 반듯하게  누워 있었고 부인
  인 장숙영이 시신을 부둥켜안고 울고 있었다. 그러나
  어깨를 들멱이면서 소리죽여 우는 울음이었다.
  "박사님 오셨어요."
  무슨 까닭인지 방 한 구석에서 안절부절 못하고 있
  던 임 간호원이 장숙영의 어깨를  조심스럽게 흔들자
  비로소 장숙영이 고개를 돌려 김 박사를 쳐다보았다.
  눈물에 흥건히 젖어  있는 얼굴이었다.  김 박사는
  그러한 장숙영의 모습에서 가슴이 찌르르  울리는 것
  같은 안쓰러움을 느꼈다.
  (울고 있는 얼굴이 더 예쁘군)
  장숙영은 한참이 지나서야 김  박사에게 자리를 비
  켜 주었다.
  김 박사는 천천히 조일제 회장의 시신을 살피기 시
  작했다. 식물인간이나 다름없었던 회장이었으나 이렇
  게 갑작스러운 죽음은 주치의인 김  박사도 예상하지
  못했던 일이다.
  그는 시체의 피부 경직 상태와 근육  이완 상태 등
  사체 검시를 사듯  면밀히 살폈다.  그것은 자그마치
  30분이나 걸린 세심한 진찰이었다. 그리고 그는 마침
  내 결론을 내렸다.
  (사인은 호흡장애야)
  조일제 회장은 병상에  누운 뒤에 한  번도 호흡기
  계통의 질환을 앓은 일이 없었다.  그렇다면 조 회장
  의 죽음은 타살일 가능성도 배재할 수 없었다.
  "박사님, 사인은 무엇이에요?"
  장숙영이 아직도 눈물이 그렁그렁한  눈으로 김 박
  사를 건너다보며 물었다.
  "아직 호흡장애를 일으킨 것 같습니다만"
  "환자에게 호흡장애가 올 위험성이  언제나 있었나
  요?"
  그것은 김 박사의 책임과도  관계가 있는 질문이었
  으므로 김 박사는 재빨리 부정해 버렸다.
  "그런 위험성은 거의 없었습니다."
  "그럼 회장님은 돌연한 변을 당하신 것인가요?"
  "돌연한 변은 아니고 항상 누구에게나 그런 위
  험성은 있습니다."
  "그럼 우리가 조금만  더 신경을  썼으면 회장님은
  돌아가시지 않을 걸 그랬군요."
  장숙영의 말이 주치의인 자신을  질책하는 것 같아
  김 박사는 입을 다물어 버렸다. 불쾌한 언사였다.
  "아무튼 아침 일찍 오시느라고 수고하셨어요. 제가
  커피를 대접할께 주방으로 오세요."
  장숙영이 먼저 침실을 나가자 김 박사는 매서운 눈
  으로 임 간호원을 쏘아보았다.
  "언제 돌아가신 걸 발견했어?"
  "네 시쯤예요."
  "잠도 이 방에서 자라고 그랬잖아?"
  "네, 여기서 잤어요."
  "그럼 누가 들어왔다 가는 거 봤어?"
  "못 봤어요."
  "이상한 일이잖아? 회장님은 호흡장애를 일으켜 돌
  아가셨는데 아무도  들어온 사람이  없다니 말이야
  "
  ""
  "임 간호원 나한테  숨기는 거 있어?  얼굴색이 안
  좋은데"
  "전 잠을 자는 바람에  모르겠어요. 누가 들어왔다
  갔는지"
  "그럼 저절로 호흡장애를 일으킨 것이군"
  "박사님."
  "왜?"
  "정말 호흡장애로 회장님이 돌아가셨어요?"
  "틀림없어."
  "사망진단서에도 그렇게 써 넣으실 거예요?"
  "의사의 소견은 거짓이 없어야 돼."
  "사실은 제가 회장님을 의자에  앉아서 간호하
  다가 깜박 잠이 들었어요. 너무  피곤했는지 눈을 떠
  보니까 제가  회장님 얼굴에  기대어 자고  있었어
  요 가슴으로 얼굴을 덮고"
  "뭐야?"
  김 박사는 놀라서 하마터면 크게 소리를 지를 뻔했
  다.
  "저 때문에 회장님이 돌아가신 건가요?"
  "그래, 임 간호원  때문에 숨이 막혀  돌아가신 거
  야!"
  "세상에!"
  "무슨 잠을 그 따위로 험하게 자?"
  임 간호원이 갑자기 얼굴을 감싸 쥐고 흐느껴 울기
  시작했다.
  김 박사는 임 간호원이 흐느껴 우는  것을 보고 낮
  게 한숨을 내쉬었다. 어처구니없는 일이었다.
  장숙영은 식탁에 석상처럼 앉아 있었다. 눈이 부어
  있는 것으로 보아 몹시 운 모양이었다.
  김 박사는 장숙영의 맞은편에 앉아서 담배 한 개비
  를 꺼내 입에물었다.
  "사인은 호흡장애고 호흡장애를 일으키게  한 것은
  임 간호원입니다."
  김 박사는 의사의 양심상 어쩔 수  없이 진실을 털
  어놓을 수밖에 없었다.
  "무슨 말씀이에요?"
  장숙영이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김  박사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임 간호원이 회장님 간호를 하느라고 의자에 앉아
  졸다가 그만 회장님에게 기대어 잠을 잔 모양입니다.
  모두 제 불찰입니다."
  "무슨 말씀인지 확실하게 해 주세요."
  "임 간호원이 잠을 자느라 기댄  곳이 회장님 얼굴
  이었습니다.
  잠결에 말씀드리기 거북합니다만  가슴으로 얼
  굴을 눌렀던 모양입니다."
  "그럼 가슴으로 회장님의 숨을  못 쉬게? 그건
  살인예요!"
  "진정하십시오, 사모님 임 간호원은 얌전한 아
  가씹니다."
  "아무리 그래도 어떻게 그럴 수가 있어요?"
  "응분의 처벌을 받도록 하겠습니다."
  "처벌이요?"
  "과실치사죄가 적용되면  몇년쯤  형을 살게  됩니
  다."
  "그런다고 회장님이 살아오시나요?"
  장숙영의 눈에서 또다시 눈물이 주르르 흘러내리는
  것을 보고 김 박사는 담배를  도로 집어넣고 말았다.
  이젠 미망인이 된 여자앞에서 담배를 피울 수가 없었
  다.
  "임 간호원도 고의는 아니었을 것입니다."
  그는 무겁게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어떻게 그런
  어처구니없는 일이 발생했는지 짐작조차 할  수 없었
  다.
  "어차피 오래 사실 분은 아니었어요."
  한참만에 장숙영이 처연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기왕지사 돌아가셨으니 일을 수습해야죠"
  "사모님 뜻에 따르겠습니다."
  김 박사는 죄인처럼 고개를 숙였다.  마치 꿈을 꾸
  고 있는 기분이었다.
  "임 간호원을 처벌받지 않도록  해 주세요. 돌아가
  신 회장님도 그런 걸 바라지는 않으실 거예요."
  "그렇게 양해만 해  주신다면 저로서는  더 고마울
  데가 없겠습니다."
  "회장님을 위해서예요."
  "예?"
  "회장님이 젊은 여자의 가슴 때문에  숨이 막혀 돌
  아가셨다면 세상의 조롱거리가 돼요.  사인도 바꾸어
  써 주세요."
  "사인을요?"
  "회장님이 조롱거리가 되지 않도록 말예요."
  김 박사는 장숙영의 말에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끄
  덕거렸다.
  그것은 성일 그룹과 죽은 조 회장의 이미지에 흠집
  을 남기지 않겠다는 미망인의 당연한 지적이었다.
  "그럼 심장마비로 써 넣겠습니다."
  김 박사는 장숙영의 말에 내심 탄복을 금치 못하면
  서 그렇게 대답했다. 그것으로 자신의 도의적인 책임
  도 어느 정도 덮어지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좋아요. 그리고 이  일은 불문에 붙일  테니 빨리
  임 간호원을 병원으로 데리고 가세요! 보기 싫어요!"
  김 박사는 다 식은 커피를 마시려다 말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사람이 죽었는데도  한가롭게 커피를
  마시려고 했던 자신이 미욱스럽게 생각되었다.
  장숙영이 불같이 화를 내고 있는 것은 당연한 일이
  었다.
       3. 수렁에 빠진 여인
  임수지는 호텔 침대에 옆으로 비스듬히 누워 창 밖
  을 내다보고 있었다.
  새까만 어둠이  먹빛으로 묻어나고  있는 유리창엔
  차가운 빗방울이 희끗희끗 날아와 소리없이 부서지고
  있었다. 위에서부터 줄지어 흘러내리는  빗물과 유리
  창에 부딪쳐 튀어오르는 비의 미세한  입자들은 그녀
  에게 어둠 속으로 뛰어나오라는 듯이 유혹의 붉은 혓
  바닥을 널름거리고 있었다.
  새벽이었다. 아침은 아직 멀리 있었다. 창 밖의 어
  둠은 서리서리 깊었고 그녀를 끊임없이  유혹하고 있
  었다. 자살에의 유혹이었다.
  그녀는 창에서 뛰어내를 자신의 모습과 아스팔트에
  낭자한 핏자국을 머리  속에 떠올려  보았다. 그리고
  형체도 알아볼 수 없을 만큼 으깨진 몸뚱이 그런
  것들을 생각하자 목구멍으로  무엇인가 뜨거운  것이
  치밀고 올라왔다.
  (억울해)
  그녀는 오늘 늙은 사내에게 스물세 살의 젊음을 빼
  앗기듯이 바쳤던 것이다. 그것은 아무리 생각해도 허
  무하고 억울한 일이었다.
  성일 그룹 조일제 회장의  장례는 아직도 계속되고
  있었다. TV 뉴스는 틈틈이 정계와 재계의 실력자들이
  조문하는 모습을 보여주었고,하얀 소복을  입은 미망
  인 장숙영과 성일 그룹의 중역들까기화면에  스쳐 가
  는 것이지만 보여 주었다.
  그가 죽은 지 이틀째 되는 날이었다. 장례는 5일장
  으로 치르고 장지는 이미 마련되어 있는 용인 땅으로
  결정되었으며, 성일 그룹후계자로는 미망인 장숙영이
  임시 주주총회에서 회장으로 추대될 것이라는 짤막한
  해설까지 이미 보도되었다.
  (이상해)
  수지는 조 회장의 죽음이  아무래도 석연치가 않았
  다.
  조 회장의 사인은 다행히  심장마비로 발표되어 있
  었다. 그것으로 수지 자신의 가슴에 짓눌려 호흡장애
  를 일으켜 조 회장이 죽었다는 것은  영원히 베일 속
  에 묻혀 버릴 것이다.
  조 회장은 어차피 6개월을 전후해  죽게 되어 있는
  노인이었다.
  다만 그 죽음이 돌연하고  이상한 방법으로 찾아왔
  을 뿐이었다.
  김 박사에게 조 회장을 가슴으로 짓누르고 잠을 잤
  다고 말한 것이 실수였다. 그 말만 하지 않았어도 이
  런 곤경에 처하지는 않았을 것이라고  수지는 생각했
  다. 그러나 그때는 몹시 당황해 있었다.
  어제 새벽, 그녀가 눈을 떴을 때 그녀는 자신이 망
  측하게 조 회장의  침대에 기어 들어가  있는 사실을
  발견하고 소스라쳐 놀랐다.
  게다가 그녀의 다리 하나가  식물인간인 조 회장의
  다리에 포개져있었고 조 회장의 손 하나가 그녀의 팬
  티를 내려뜨리고 비밀스러운 곳에 올려져  있었던 것
  이다.
  그녀가 눈을 떴을 때 맨 처음  깨달은 것은 망측한
  그 사실뿐이었다. 그녀는 흔들의자에 앉아서 잠을 자
  고 있어야 했다. 그녀는 매일같이  밤이면 조 회장의
  침대 옆에 흔들의자를 갖다 놓고 앉아서
  잠을 잤었다. 시간 맞춰 주사도  놓아야 했고 음식
  물을 떠 먹을 수없는 조 회장에게 링겔이나 포도당도
  투입해 주어야 했던 것이다.
  조 회장 전담 간호원으로 그녀가 처음  조 회장 집
  에 파견되었을때 그녀는  거의 잠을  자시 않았었다.
  죽음을 초조하게 기다리고있는 인간 앞에서  잠을 잔
  다는 것이 어쩐지 부끄럽게 생각되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그녀는 조 회장의 침대 옆에서 책을 읽기
  시작했다.
  우리나라 최초의 추리소설인  김내성의 [마인]으로
  부터 시작해 김성종, 이상우, 노원을 비롯한 중진 작
  가들과 한대희, 김상헌, 유우제 등  신예 추리작가들
  의 작품까지 두루 섭렵했다.
  그러나 시일이 흐르기 시작하자 그녀는 흔들의자에
  기대어 졸기 시작했다. 밤을 새우는  것은 잠시 고통
  스러운 일이었다. 낮에는조 회장의 부인인 장숙영 여
  사가 조 회장을 돌보기 때문에 그  시간에 충분히 잠
  을 잔다고 해도 밤에는 또 졸음이 쏟아졌다.
  원래 그녀는 잠이  많은 편이었다.  어제도 그녀는
  10시가 못 되어꾸벅꾸벅 졸다가 혼곤한  잠에 빠졌던
  것이다. 잠결인지 꿈결인지 누군가 자신의 가슴을 만
  지고 스커트 속으로 손을 넣어 허벅지를 더듬는 듯한
  기분이 들었었다. 그러나 비몽사몽의  일이긴 했어도
  그것은 그녀에게 즐거운 쾌락을 안겨 주었다. 아랫도
  리로부터 전신으로 번져 나가는 짜릿한  전율은 그녀
  가 이따금 꿈 속에서도 경험하는 그런 종류의 것이었
  다.
  그녀는 스물세 살의 처녀였다. 그러나  한 번도 남
  자 경험이 없었다. 언젠가 어두운 골목길에서 치한을
  만나 가슴을 움켜잡히고 희롱을 당한  것이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처음엔 그 경험이 더럽고 추한 것으로만 여겨졌다.
  그러나 시일이 흐를수록 그녀는 남자의  은밀한 시선
  과 은밀한 손길을 상상속에서 생각하게 되었다. 그리
  고 그러한 생각은  남자와의 행위로까지  발전하면서
  그녀의 몸을 떨리게 만들었다. 스물세 살의 젊은육체
  는 어느덧 남자를  받아들이기 위해 문을  열어 놓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식물인간이나  다름없는 조  회장의 침대에
  그녀가 스스로 기어  들어갔다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게다가 조 회장은 이미 죽어 있었다.
  그녀가 소스라치게 놀라 자신의 비밀스러운  곳에 얹
  혀져 있던 조 회장의 손을 치워 버리려고 했을 때 조
  회장의손이 차디차게 식어 있었다. 것이다.
  (이럴 수가!)
  그녀는 마치 무서운  꿈을 꾸고  있는 기분이었다.
  재빨리 침대에서 뛰어내려 수습할 준비부터 했다. 그
  런 상태로 조 회장 가족들에게 발견되면 자신이 살인
  자로 몰릴 것은 너무나 뻔한 일이었다.
  그녀는 먼저 침대를 정리하고 조 회장을 반듯이 눕
  혔다. 부릅떠져 있는  눈을 손바닥으로  내리 쓸어서
  감겨 주고 잔뜩 벌어져 있는입을 턱을  쳐서 맞춰 놓
  았다. 그러자 조 회장의 얼굴이  평온하게 잠든 표정
  으로 바뀌었다.
  그 다음에 그녀가 생각한 것은 주치의인 김 박사를
  어떻게 속이느냐 하는 점이었다. 다른 사람들은 모두
  속일 수 있어도 의사인 김 박사를  속이는 일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었다.
  조 회장의 사인은  그녀로서도 짐작할  수 없었다.
  그러나 입이 벌어져 있는 상태로 미루어 추측하면 호
  흡장애를 일으킨 것 같았다. 누군가 그가 숨을 쉴 수
  없도록 입과 코를 틀어막았을 것이다.
  (이것은 완벽한 음모야!)
  그녀는 경황 중에도 그 사실을 알아차렸다. 그리고
  그 음모에서 벗어나기 위해 조 회장의 얼굴을 침대에
  기대서 자다가 눌렀다고
  김 박사에게 거짓말을 했던 것이다.
  그것은 살인이라고 해도 고의적  살인은 아니었다.
  그런 까닭으로 실형을 선고받는다고 해도 2, 3년이면
  족하다고 나름대로 판단을내린 뒤의  일이었다. 그리
  고 그녀는 김 박사를 믿었다.  김 박사는양심적인 의
  사였다. 게다가 자신의 밑에 있는  간호원이 그런 사
  고를 저질렀다면 자신에게도 책임이 있는 것이다. 그
  책임에서 벗어나려면 그녀의  허물을 덮어  주리라는
  확신이 들었다.
  그녀의 예상대로였다. 김 박사는  마침내 사망진단
  서의 사인을 심장마비라고 적어넣은 것이다.
  (아아, 이제 됐어)
  그녀는 남 몰래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것으로
  조 회장 사건의 매듭이 지어진 것으로 그녀는 생각했
  다.
  "난 조 회장이 호흡장애를 일으켜  죽은 것을 이해
  할 수 없어."
  그러나 김 박사의 의혹은 풀어줄 수가 없었다.
  김 박사는 퇴근 무렵, 그녀를  진찰실로 조용히 불
  러 그렇게 말했던 것이다. 낮았으나 은근하고 위협적
  인 목소리였다.
  "이 사실을 알고 있는 사람은 장 숙영 여사와 미스
  임, 그리고 나뿐이야"
  ""
  "장 여사에게는 내가 미스 임 때문에 조 회장이 호
  흡장애를 일으켜 죽었다고 했어"
  "박사님!"
  "장 여사는 그런 일이 세상에 알려지면 좋을 게 없
  다고 불문에 붙인대. 나 역시 그런 일이 알려지는 게
  싫구. 그런 것을 낱낱이 밝히는  것은 젊은 아가씨의
  앞길만 막아 버리는 거니까"
  그의 손이 수지의 어깨에  얹혀졌다가 둔부로 미끄
  러져 내려왔다. 수지는 마치 송충이가 기어다니는 것
  같은 불쾌감을 느꼈다.
  그러나 그의 손을 제지할 수가 없었다.
  "전 조 회장님을 죽이지 않았어요."
  수지는 겨우 그렇게 대꾸했을 뿐이었다.
  "죽일 이유가 없으니까"
  김 박사도 그 점은 수긍하는 눈치였다. 그러면서도
  수지의 몸을 더듬으면서 가뿐 숨을 몰아쉬었다.
  "박사님!"
  "왜?"
  "꼭 이렇게 하셔야 돼요?"
  "수지를 갖고 싶어."
  "전 조 회장님을 죽이지 않았어요."
  "그 방엔 수지밖에 없었어. 수지가 그 점을 해명하
  지 않으면 수지는 살인자가 될 수밖에 없는 거야!"
  "박사님이 정 그러시면 호텔로 가요."
  "호텔?"
  "전 순결한 처녀예요. 이런 곳에서 처녀를 버릴 수
  는 없어요!"
  수지가 눈물을 글썽이면서 외치자  김 박사가 그러
  지 하고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리고 둘은 그 길로 곧
  장 호텔로 왔던 것이다.
  바람이 부는지 빗발이 쏴아  소리를 내며 유리창으
  로 날아왔다.
  창문이 덜컹대고 흔들렸다.
  (죽으면 모든 것이 끝장이야!)
  수지는 죽어야겠다는 생각을 지워버렸다. 죽는다는
  것은 미련한 짓이었고 음모를 꾸민 자를 도와주는 것
  이었다. 어떻게 하든지 살아서 진실을 밝혀야 했다.
  "박사님!"
  수지는 옆에 누워  있는 김 박사를  흔들어 깨우기
  시작했다. 진실을 밝히려면 김 박사의 조력이 필요하
  게 될지 모를 일이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김 박사와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있어야 했다.
  (진실이 밝혀지면 내 몸을 더럽힌  너도 댓가를 치
  르게 되고 말거야!)
  그녀는 입술을 깨물면서 그렇게  생각했다. 그리고
  는 김 박사를 또 다시 흔들어 깨웠다.
  "박사님!"
  김 박사가 마침내 눈을 게슴츠레하게 떴다.
  "아, 수지"
  "비가 와요, 박사님!"
  "정말 그렇군."
  김 박사가 창 쪽으로 눈을  돌리며 중얼거렸다. 나
  이답지 않게두 번씩이나 수지를 껴안고 뒹군 그는 피
  로한 기색이 역력했다.
  "미안해, 수지"
  수지가 담배를 입에 물려 주자 김 박사가 후회하는
  빛으로 입을 열었다.
  "왜요?"
  "늙은 것이 욕정에 눈이 멀어 수지를 더럽혔어. 정
  말 미안해, 수지"
  "괜찮아요."
  "응?"
  "박사님이 그런 생각 안하셔두 돼요. 전 평소에 박
  사님을 존경하고 있있어요."
  "수지, 그래도 난 너무 늙었어"
  "전 박사님처럼 나이 지긋한  분이 좋아요. 아빠처
  럼 포근하구,
  응석도 부릴 수 있구 박사님이 싫다고 할 때까
  지 박사님 곁에 있을래요."
  "수지를 이해할 수 없어."
  "박사님, 허락해 주세요. 네?"
  "수지가 좋다면"
  그가 한 모금 빤 담배를 재떨이에  비벼 끄고 수지
  를 두 팔로 안았다.
  "박사님, 눈 감고 계세요."
  "왜?"
  "제가 박사님을 즐겁게 해 드릴께요."
  "어떻게?"
  "입으로요."
  "처녀가 그런 것을 어디서 배웠어."
  "친구들과 함께 비디오로 봤어요. 눈 감으세요."
  "그만둬."
  "왜요?"
  "난 수지가 그러는 것이 싫어. 내가 비록 순간적인
  욕망 때문에 수지를 더렵혔다고 해도  수지는 자포자
  기하면 안 돼."
  ""
  "수지는 순결하고 영혼이 깨끗한  처녀야. 난 수지
  를 믿어. 내가 수지에게 못할 짓을 한 거야"
  김 박사가 침중한 목소리로  나직나직하게 말했다.
  진심으로 후회하는 빛이 얼굴에 가득했다.
  성일 그룹 조일제 회장의  장례식은 철저하게 불교
  식으로 거행되고 있었다. TV 뉴스를  통해 조일제 회
  장의 엄숙하고 호화로운 장례식을 지켜보면서 수지는
  무겁게 한숨을 떨구었다. 죽은 자는 말이없다고 누가
  그랬던가. 수지는 자신의 결백을 알고 있는 사람은죽
  은 조 회장과 범인뿐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범인은
  누구인지 알 수 없고 조 회장은  흙 속에 묻혔으므로
  아무도 자신의 결백을 믿어줄 사람이 없었다.
  처음부터 진실을 털어놓아야 했었다.  한순간의 판
  단 잘못으로 김 박사에게 거짓말을 둘러댄 것이 실수
  였다. 그것이 돌이킬 수 없는  상황으로 자신을 몰아
  넣은 것이다, 라고 수지는 생각했다.
  (음모에 걸려든 거야!)
  수지는 그런 생각이 들 때마다 입술을 깨물고 몸을
  떨었다. 그리고 자신을 그러한 곤경으로 몰아넣은 범
  인을 잡아야겠다고 마음먹었다.
  병원의 일은 한가했다. 한가하니까 잡념도 더 많았
  다. 오전에자신이 원장인 김 박사의 회진을 수행하는
  과장들을 따라 병원을  한바퀴 돌고나면  수간호원인
  수지 자신이 할 일은 별로 없는 편이었다. 물론 억지
  로 일을 만들어서 하려고 하면 얼마든지 일거리는 있
  었다. 그러나 수지는 그럴 필요성을 느끼지 않았다.
  수지는 조 회장이 죽은 원인이 무엇이고 자신이 왜
  그 음모에 말려들어야 했는지 그 까닭을 밝히기 위해
  절치부심했다.
  (내가 추리소설을  너무 많이  읽은 것이  탈이야
  )
  수지는 그 원인을 추리작가들에게  돌렸다. 추리소
  설을 너무 많이읽다  보니 자신도 모르게  조 회장의
  죽음에서 빠져나오기 위해  추리소설식으로 생각했던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더 깊은 수렁일뿐이었다.
  (조 회장의 시체에 무엇인가 증거가  남아 있을 텐
  데)
  김 박사도 발견하지 못했고  수지 자신도 발견하지
  못했으므로
  조 회장은 타인에 의해 목이 눌려  죽었거나 칼 따
  위의 흉기에 찔려죽은 것이 아니었다.  조 회장의 몸
  에는 외상이 전혀 없었다. 김 박사의 사인 분석이 호
  흡장애라고 했으니가 누군가 조 회장이  숨을쉬지 못
  하도록 입을 틀어막았을 가능성이 농후했다.
  (그때 조 회장은 반항을 전혀 못했을까)
  식물 인간이라고 해도 입을  틀어막고 있는 범인의
  팔을 움켜잡거나 옷자락이라도 찢었을지 모를 일이었
  다. 그러나 조 회장의 손은 빈  손이었다. 다만 자신
  의 팬티 속에  넣어져 있던 오른손  손가락들에 붉은
  핏자국이 묻어 있었을 뿐이었다.
  (혹시  그  핏자국이  범인의  핏자국이  아니었을
  까)
  수지는 그것이 자신의 생리 때문에 묻은 것으로 생
  각하고 물걸레로 깨끗이 닦아 버렸던 것이다. 어리석
  은 짓이었다.
  수지는 그 사실을  머리 속에 떠올리고  몇 번이나
  가슴을 쳤다.
  그때 자신이 조금만 침착했더라면  그 혈혼으로 범
  인을 추적할 수가  있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수지는
  과학수사가 발달해 혈액에서도  지문을 채취할  수가
  있었다. DNA라는 방법이었다.
  또 하나 수지가 미욱했다고  생각하는 것은 자신이
  어떻게 그렇게 깊은  잠이 들었느냐  하는 것이었다.
  자신이 조 회장의 침대에 기어들어간 것은 별개의 문
  제라고 해도 조 회장의 손이 자신의 팬티속에 들어와
  있었던 사실조차 까마득하게 몰랐었다는 것은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내가 수면제를 먹은 것인가)
  그러나 그러한 의문도 설득력이  없었다. 수면제를
  먹었다면 아침까지도 깨어나지 못했어야  했다. 새벽
  에 깨어날 정도의 수면제라면 아주 적은 양일 것이고
  누군가 자신을 안아  조 회장의 침대에  밀어넣을 때
  깨어나야 했던 것이다.
  (일단 조 회장의 집에 가 보는  게 좋겠어. 거기에
  내 책도 몇권 있으니까)
  조 회장 주위에 자신을 함정에 빠뜨린 범인이 있을
  것은 분명한 일이었다. 일단 그  범인과 맞닥뜨려 보
  아야 했다. 수지는 비로소 생기가 도는 것을 느꼈다.
  조 회장의 장례식이 끝나고도  이틀이 지나서 수지
  는 정릉에 있는 조 회장의 집을 찾아갔다. 김 박사가
  만나자고 했으나 수지는 사양했다.
  김 박사는 그 날 이후 자신의  행위를 몹시 후회하
  고 있었다. 그 자신의 추악한 욕망 때문에 순결한 처
  녀를 버려 놓았다는 죄책감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것
  이었다.
  "수지가 원하면 무엇이든 보상을  해 주겠어. 수지
  가 나  같은  늙은이라도 좋다면  결혼도  할 수  있
  어"
  김 박사는 몇 년  전 상처하고 혼자  살고 있었다.
  아들 둘이 있으나 하나는 미국으로 이민 갔고 하나는
  군대에 나가 있었다. 그런 까닭인지  그의 모습이 유
  난히 쓸쓸해 보일 때도 있었다.  그가 혼자서 우두커
  니 창 밖을 내다보고 있거나 담배가 손가락 사이에서
  저절로 타는 것도  잊어버리고 생각에 잠겨  있을 때
  수지는 그럴 때마다 김 박사가 안쓰러워 보였다.
  (당신을 원망하지는 않겠어요.)
  수지는 김 박사에 대한  증오가 차츰차츰 연민으로
  바뀌어져 갔다. 어쨌거나 수지에게는 김 박사가 첫번
  째 남자였다. 그리고 그는 자신의  추악한 욕망 때문
  에 수지를 더럽혔다고 진심으로 후회하고 있었다.
  수지는 후회하고 고뇌하는 김  박사의 인간적인 면
  모에 호감을 느꼈다. 조 회장  죽음의 진실을 낱날이
  밝힌 뒤에 그와 결혼하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고 생각
  했다.
  정릉 조 회장의 집은 조용했다. 이미 성일 그룹 회
  장에 추대된 장숙영은 퇴근하지 않았고  운전기사 박
  희일과 최인수 비서, 경비오 영감이  식탁에 앉아 저
  녁 식사를 하다가 그녀는 반갑게 맞이해 주었다.
  날씨가 더워지고 있는 탓인지  모두 간편한 반소매
  차림이었다.
  (팔에는 아무도 조 회장의 손톱에  긁힌 상처가 없
  어!)
  그것은 오 영감의 부인인  상주댁과 가정부 미자도
  마찬가지였다.
  "그래 어떻게 그 동안 한 번도 들르지 않습니까?"
  식사가 끝나 거실에서 커피를 마시던 박 기사가 은
  근한 눈길을 수지에게 보내며 물었다.
  "병원 일이 바빴어요."
  수지는 억지 미소를  띠고 대답했다.  아직 총각인
  박 기사는 조회장이 죽기 전에도 수지를 야릇한 눈빛
  으로 살피고는 했었다.
  "장례식에도 안 오시고"
  "김 박사님께서 참석하셨잖아요!"
  "좋은 일이 있으신 모양이지요?"
  "좋은 일이 뭐 있겠어요? 참 사모님은 늦으세요?"
  "예, 회사 중역들과 저녁식사를  같이 하신답니다.
  왜요?"
  "그  동안  신세를  졌으니까  인사라도  드릴려구
  요"
  "회장님께 말씀 전하죠. 미스  임이 인사차 들르셨
  다고"
  "회장님이요?"
  "이젠 사모님이 아니라 성일 그룹 회장님입니다."
  "정말!"
  수지가 몰랐다는 듯이 함빡 웃음을 지었다.
  "그 분 보통  양반이 아닌 모앙입니다.  우린 그저
  왕년의 영화배우라고만 생각했는데  결단력이며 경영
  능력이 뛰어나다고 모두들 감탄해요."
  "누가 옆에서 조언을 해 주겠죠."
  "물론 이 실장이 도와주기는 하겠지만  그 분 수완
  도 대단한 모양에요."
  "이 실장이 누구예요?"
  "모르세요?"
  "네."
  "전에 종합기획실  과장으로 있던  사람 있잖아요?
  여기도 몇 번 왔다갔는데"
  "아, 이진우씨요?"
  "맞아요. 그 사람이 종합기획실장으로 승진해서 회
  장님을 돕고 있어요"
  그 사람은 수지도 몇 번 본  적이 있었다. 먼 발치
  에서 장숙영과 얘기하는 것을 얼핏  보았지만 커다란
  키와 짙은 눈썹이 인상적인사람이었다.
  "사모님께서도 미스 임을 한 번 봐야겠다고 하더군
  요."
  "저를요?"
  "자세히는 모르지만 그 동안 수고를  해 주신 미스
  임에게 사례를 할 모양예요."
  "병원에서 월급 받는데요 뭐"
  "사모님 입장은 또 그런 게 아니지 않습니까?"
  "글쎄요."
  "봉투 하나 주시면  못 이기는 체  받아 넣으세요.
  사모님이 그러시는데 회장님 잘 돌봐 주시면 따로 사
  례를 하겠다고 애초부터 약속을 했대요."
  "그거야 인사 치례로  한 말씀이고  사실 저는
  회장님을 잘 돌보지도 못했어요."
  "사모님께서는  미스  임  칭찬을  많이  하시던데
  요?"
  "글쎄요."
  수지는 고개를 갸우뚱했다. 장숙영의  입장에서 조
  회장을 죽인 것이나 마찬가지인 자신에게  호감을 갖
  고 있다는 것이 납득할 수없었다.
  (입막음을 하려는 것인가?)
  그렇다면 장숙영이 주는 사례비를 받아 보면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장숙영이 턱없이  많은 사례비를 준
  다면 그것은 수지 자신의 입막음을 위한 사례비가 분
  명할 것이기 때문이었다.
  박 기사가 집까지 태워다 주겠다는 것을 굳이 사양
  하고 돌아오면서 수지는  그런 생각을  했다. 그리고
  그날부터 수지는 장숙영의 사례비를 기다리기 시작했
  다.
  박 기사를 통해 장숙영이  병원으로 사례비를 보내
  온 것은 수지가 정릉 장숙영의 집을 방문하고 돌아온
  사흘째 되던 날이었다.
  "꼭 받아 달라고 하시더군요."
  박 기사는  공연히 거들먹기리며  헤푸게 웃었으나
  수지는 봉투를 뜯어 액수부터 확인했다.  2백 만원이
  었다. 백만원권 자기앞 수표두 장이  흰 봉투에 가지
  런히 들어 있었다.
  (이것이 사례비로서 마땅한 금액인가?)
  수지는 한동안 그 액수의  많고 적음이 곤혹스러웠
  다. 평범한 사람들이면 1년 동안  식물인간을 간호해
  준 사례비라고 해도 병원에서 따로 월급을 받고 있으
  므로 많은 금액이었다. 그러나 재벌 그룹의 상속자
  인 장숙영에게 그만한 액수는 하잘 것 없을 것이다.
  "한 가지 물어봐두 돼요?"
  봉투를 건네 주고도 미적거리고  돌아가지 않는 박
  기사를 병원 근처의 다방으로 인도한  수지는 일부러
  매혹적인 미소를 날리며 박 기사를  똑바로 쳐다보았
  다.
  "예."
  박 기사가 반색을 하고 대답했다.  그는 수지와 함
  께 다방에 앉아  있는 것이 즐거운지  연신 싱글벙글
  웃고 있었다.
  "조 회장님 장례식 때 말예요?"
  "예."
  "사모님 팔 보신 일 있으세요?"
  "팔이요?"
  박 기사가 어리둥절한 눈으로 수지를 쳐다보았다.
  "사모님 팔에 혹시 손톱에 긁힌 자국 같은 것 없었
  어요?"
  "글쎄요."
  "잘 기억해 보세요."
  "경황 중이라 기억이 나지 않는데요."
  "장례식이 끝날 때까지  사모님은 내내  소매가 긴
  옷만 입고 있었지요?"
  "예, 흰 소복을 입고 있었으니까요"
  "그 뒤엔 보신 일 없어요?"
  "없습니다."
  "혹시 나중에라도 보게 되면 저에게  좀 알려 주실
  래요?"
  "그거야 어렵지 않지만 왜 그러십니까?"
  "비밀예요."
  "사모님 뒤를 캘 만한 일이라도 있습니까?"
  "네."
  수지가 다시 매혹적인 미소를 날려 보냈다.
  "그럼 전 사모님을 배신하게 되는 거 아닙니까?"
  "저에게 충성을 하시면 되잖아요?"
  "예?"
  "퇴근하신 뒤에 제가  술 한잔 사  드릴께요. 마침
  공돈도 생겼으니까요"
  "좋습니다."
  박 기사가 선선히 승낙했다.
  그날 밤 수지는 박 기사와 함께 극장식 레스토랑에
  서 식사를 하고 술을 마셨다. 박 기사는 얘기 틈틈이
  자신이 홀어머니 한 분을 모시고 있으며 어머니가 빨
  리 장가를 가라고 성화를 부린다느니  어머니가 개방
  적인 여자라 며느리 시집살이 시키지는  않을 것이라
  는 얘기도 했다. 은근히 수지에게  구애를 하고 있는
  인상이었다.
  수지는 일부러 박 기사의  얘기를 귀담아듣는 체하
  며 왜 여태 장가를 가지 않았느냐, 어떤 스타일의 여
  자를 좋아하느냐고 물으며 박 기사를  바짝 달아오르
  게 했다. 그리고는 마침내 집에 한 번 놀러오라는 박
  기사의 제안까지 승낙했다. 그러자 박  기사는 뛸 듯
  이 좋아했다.
  수지는 박 기사와 헤어지면서  선량한 사람을 이용
  하는 것이 가슴아팠으나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매멸
  차게 입술을 깨물었다.
  그러나 그 일은 수지의 의도대로  되지 않았다. 박
  기사가 섣불리 장숙영의 팔뚝을 조사하려다가 그녀에
  게 발각되어 해고당하였던 것이다.
  "어쩌다 그렇게 됐어요?"
  수지는 박 기사가 해고당한  것이 안타까워 그에게
  북악 스카이웨이의 갈비집에서 술을 대접했다.
  "장숙영이 정원에서 낮잠을 자고 있길래 소매를 걷
  다가 그만 들키고 말았습니다."
  "정원에서 낮잠을 자요?"
  "오늘이 일요일이지 않습니까? 정원에 있는 흔들의
  자에 앉아서 낮잠을 자더군요. 그래서 조심스럽게 팔
  뚝을 걷었는데 갑자기 깨어나는 바람에"
  "그럼 팔뚝의 손톱 자국은 확인했어요?"
  "예, 아무렇지도 않던데요"
  그렇다면 장숙영도 범인이라고 보기가 어려웠다.
  "실망하셨습니까?"
  박 기사가 정색하고 물었다.
  "아녜요. 저 때문에 해고까지  당하셨는데 제가 어
  떻게 해야 좋을지 모르겠어요."
  박 기사가 씁쓸하게  웃더니 술잔을 들어  입 속에
  쏟아부었다.
  "괜찮습니다."
  "제가 어떻게 보상을 해 드려야 할까요?"
  "보상이요? 그런 걸 바라고 미스 임을 도와드린 건
  아닙니다."
  "그래두"
  "미스 임이 도와주어야 할 게 한 가지 있긴 합니다
  만"
  "뭔데요?"
  "나에게 시집 오는 일입니다."
  "어머!"
  수지가 놀라서 탄성을 내뱉었다. 막연히 박 기사에
  게서 그런 제안이 나오리라는 것을  예상하지 못했던
  것은 아니었으나 그것은 너무나 빠른 고백이었다.
  "미스 임을 좋아하고 있습니다.  용기가 없어 지금
  까지 고백을 못하다가 술기운을 빌어  고백하는 것입
  니다."
  "전 자격이 없어요."
  "자격이 없는 것은 오히려 저입니다. 미스 임은 인
  테리고 게다가 미인이니까 사실 쳐다볼 입장도 못 되
  지요."
  "그런 뜻이 아니예요."
  수지는 황급히 박 기사의 말을 부정하며 고개를 흔
  들었다. 술기운 때문일까, 아니면 수지가  난생 처음
  이성으로부터 프로포즈를  받았기 때문일까.  수지는
  자신의 얼굴이 화끈거리고 가슴이 뛰는 것을 느꼈다.
  (내가 왜 이러지?)
  수지는 자신의 마음을 이해할 수  없었다. 박 기사
  는 말수가 적고 평범한 청년이었다.  조 회장의 집에
  서 1년 동안 같이 생활을  하면서 성실한 사람이라는
  생각은 했으나 한 번도 사랑의 감정을  느낀 적은 없
  었다.
  "참 장숙영의 팔뚝에  손톱 자국이  있는지 없는지
  그건 왜 알려고 그럽니까?"
  "다음에 말씀드릴께요."
  수지는 청주를 한 모금 마시고 대답했다.
  "그럼 그만 일어날까요?"
  "아직 제 답변 듣지 않으셨잖아요?"
  "어떤?"
  "박 기사님에게 시집 오지 않겠느냐는"
  "그냥 없었던 일로 하십시오."
  "왜요?"
  "내가 너무 욕심을 부렸습니다."
  "아이 실망스러워!"
  "그럼 예스입니까?"
  "어머!"
  "노오요?"
  "애걔!"
  수지는 밉지 않게  눈을 흘겼다.  그에게 시집이나
  갈까 하는  생각이 섬광처럼  뇌리를 때렸으나  선뜻
  네, 하는 대답이 떨어지지 않았던 것이다.
  술이 많이 취해 있었다. 박 기사가 좋아 보이는 것
  은 술기운과 그의  해고로 인한 놀라움  때문일 것이
  다.
  "그럼 뭡니까?"
  "고려해 보겠어요."
  "좋습니다."
  그가 너털거리고 웃어댔다. 수지는  술자리가 끝나
  자 그와 함께 나란히 북악 스카이웨이를 걸어 내려왔
  다.
  수지가 박 기사의 교통사고 소식을 접한 것은 이튿
  날 아침 조간신문을 통해서였다.
  수지는 병원에 출근하기 위해  손수 토스트와 계란
  후라이를 만들어 식탁에  앉아서 먹다가  조간신문의
  사회면을 보았던 것이다.  거기엔 뜻밖에  박 기사의
  얼굴이 큼직하게 실려  있었고 [사회  문제로 대두된
  뺑소니 차량]이라는 기사의 제목까지  커다랗게 찍혀
  져 있었다.
  (이럴 수가!)
  수지는 너무 놀라 입조차 다물어지지 않았다. 어젯
  밤 박 기사는 친절하게 수지를 아파트 앞까지 데려다
  주고 돌아갔던 것이다.
  그런데 교통사고라니! 신문엔 박 기사가 수지의 아
  파트에서 불과 500 미터 남짓  떨어진 대로에서 변을
  당했다고 씌어 있었으나 목격자나 사고  원인에 대해
  서는 전혀 언급이 없었다.
  (박 기사는 나 때문에 교통사고를 당했어!)
  수지는 신문기사에서 좀처럼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신문이 교통사고를 떠들썩하게  보도하고 있는  것은
  뺑소니 차를 사회문제화 시키려는 의도로 보였다. 가
  슴이 저리듯 아파 왔다.
       4. 사라진 손가락
  오후 6시쯤의 일이었다.
  해가 설핏이 기울고 있는  경기도 용인군 추계면의
  중부 고속도로와 구도로의 교차 지점인  버스 정류장
  에 용인군 시내 버스가 와서 멎자  등산복 차림을 한
  젊은 여자가 무거운 배낭을 등에 지고 내렸다.
  알맞은 키에 알맞은  몸매, 그리고  청바지와 붉은
  잠바를 입고 붉은 등산모까지 눌러 쓴  그 여자는 방
  금 내린 버스가 추계면 면소재지를 향해 사라지는 것
  을 바라보고 있다가 천천히 반대 쪽으로 걸음을 떼어
  놓았다.
  여자는 그 길을 느릿느릿 걸었다.  차도 인적도 없
  는 그 길 양쪽은 입 속까지 파랗게  물들 것 같은 들
  판이었고 늦은 봄의 기울어 가는 햇살이 들판과 길바
  닥에서 연두빛으로 반짝이고 있었다. 그림 같은 풍경
  이었다. 그리고 그 적막한 풍경을 헤쳐놓듯이 이따금
  뻐꾸기가 울어대고 있었다.
  이내 실 오른쪽에 진입로가 나타났다. 여자는 아스
  팔트로 깔끔하게 포장되어 있는 진입로로  방향을 바
  꾸었다. 멀지 않은  진입로의 끝에  고색창연한 한옥
  한 채가 우뚝 솟아  있는 것이 보였다.  아흔 아홉칸
  집이었다.
  (조 회장의 별장인가?)
  여자는 대궐 같은 집 앞에 이르러  잠시 걸음을 멈
  추었다. 아스팔트 진입로는 그 집으로 언결되어 있었
  다. 집 앞에는  뒷산에서 흘러내려오는  맑은 개울이
  가로 지르고 있었고 개울 위에  나무다리가 설치되어
  있었다.
  여자는 한동안 그 집을  우두커니 쳐다보다가 개울
  을 거슬러 왼쪽 산으로 올라가기 시작했다. 거기서부
  터는 인가도 없었고 길도 황토 흙길이었다.
  여자는 그 길을 따라 계속  올라갔다. 길은 올라갈
  수록 험해지고 숲이  울창해지고 있었다.  그러나 30
  분쯤 올라가자 넓은 공터가 나타났다.  그 공터에 커
  다란 묘지가 하나 있었다.
  봉분은 만들어진 지 얼마 되지 않은 모양으로 드문
  드문 잔디가 입혀져 있었고 대리석  비석까지 세워져
  있었다. 여자는 그 비석을 착잡한 시선으로 쳐다보았
  다. 만감이 교차하는 듯한 기분이었다.
  묘지 주위엔 관상수가 몇 그루  심어져 있었다. 그
  것도 심어 놓은 지 얼마 되지  않은 모양으로 잎사귀
  들이 말라 비틀어져 있었다.
  어딘지 살풍경한 모습이었다.
  여자는 무겁게 한숨을 내쉬고 봉분 뒤의 숲으로 올
  라가서 배낭을 내려놓고 앉았다.  그리고는 등산모를
  벗어 들고 부채질을 하기 시작했다.
  여자의 이마에 땀방울이 송글송글  맺혀 있는 것으
  로 보아 배낭이 상당히 무거웠던 모양이다.
  얼마 후 여자는 배낭의 작은 주머니를 열고 조그만
  양주병을 꺼내 한  모금 들이켰다.  목젓이 뜨끔한지
  여자는 마른 기침을 하다가 등산복  주머니에서 오징
  어 다리를 꺼내 씹기 시작했다.
  해는 벌써 산으로 넘어가 멀리 마음과 들에는 땅거
  미가 내리기 시작했고 숲에는 어둑어둑  어둠이 찾아
  오고 있었다.
  여자는 다시 양주병으로 목을 축였다. 그러기를 몇
  차례 되풀이하자 이내  여자의 얼굴에  발그스름하게
  취기가 돌았다.
  예쁘장한 얼굴이었다. 크고 맑은  한 쌍의 봉목(봉
  목), 우뚝 선콧날, 시원한 이마 그리고 물결처럼
  흔들리는 여자의 검은머리는 미인의 조건을 완벽하게
  갖추고 있었다.
  (무덤을 파헤치는 것은 윤리적으로  규탄받을 짓인
  데)
  여자의 얼굴이 침중했다. 미구에 일어날 일을 불안
  스러워하는 빛이 역력해 보였다. 여자는 무엇인가 두
  려워하고 있었다.
  산골짜기 어디쯤에선가  또 뻐꾸기가  울기 시작했
  다. 피를 토하는 듯한 애절한 울음 소리였다. 그러나
  그 울음소리는 숲의 정적을 깨뜨리며  건너편 산까지
  메아리치고 있었다. 저물어 가는  봄날의 어둑한산골
  풍경이 파르르 떨리는 느낌이었다.
  (어쩔 수 없어!)
  이윽고 여자는 배낭을 열고 배낭 속의 물건들을 하
  나하나 꺼내놓기 시작했다. 손도끼, 쇠망치, 플래쉬,
  야전삽, 곡괭이 (그것은수입품으로  자루가 낚시대처
  럼 늘어나게 되어 있었다), 목장갑,날이 섬뜩하게 예
  리한 비수 여자가  소지하고 다니기에는  어딘지
  수상한 것들이었다.
  여자는 그것들을 모두 꺼내 놓고 또다시 양주를 한
  모금 들이켰다. 그리고는 목장갑을 손에 끼었다.
  날이 완전히 어두워졌다. 아직 달은  뜨지 않고 있
  었다.
  여자는 야전 곡괭이를 완전하게  조립한 뒤 플래쉬
  를 들고 묘지로 내려갔다. 그리고  둥글게 솟아 있는
  봉분을 향해 큰 절을 했다.
  (잠을 깨우게 되어 죄송합니다.  그러나 진실을 밝
  히려니 어쩔 수가 없습니다)
  여자는 입술을 달싹여 그렇게  중얼거린 뒤 곡괭이
  로 봉분을 파헤치기 시작했다. 다행히 봉분이 만들어
  진 지 얼마 되지  않아 곡괭이를 몇 번  찍던 여자는
  삽으로 바꾸어서 흙을 퍼내기 시작했다.
  달이 떠오른 것을 삽으로 바꾸어서 흙을 퍼내기 시
  작했다.
  달이 떠오른 것은  여자가 흙을 퍼내기  시작한 지
  두 시간쯤 되었을 때였다.  여자는 그 동안  한 번도
  쉬지 않고 흙을 퍼냈으나 봉분을  편편하게 만들어놓
  은 데 그쳤을 뿐이었다.
  그것은 뜻밖에 몹시  힘이 드는  일이었다. 여자는
  삽을 팽개치고 배낭이 있는 곳으로 와서 다시 양주를
  들이켰다. 등줄기가 땀으로 축축하게 젖어 있었다.
  (무모한 짓이야!)
  여자는 문득 자기가  하고 있는  짓이 후회되었다.
  그러나 엎질러진 물이라는 생각이 들자  중도에서 포
  기할 수가 없었다. 그리고진실을 밝혀야 한다는 생각
  이 오기처럼 벌떡 일어났다.
  여자는 다시 삽질을 하기 시작했다. 마을 어디에선
  가 개들이 요란하게 짖어대고 숲으로  짐승이 지나가
  는 바스락 소리가 들릴 때마다 여자는 가슴이 철렁했
  다. 두려웠다. 심장은 삽질과 공포  때문에 콩알만해
  져 있었다.
  다시 두 시간이 흘러갔다. 여자의  삽 끝에 무엇인
  가 딱딱한 물체가 걸렸다.
  (관이야!)
  여자는 자신도 모르게 입술을 꽉 깨물었다. 딱딱한
  물체가 관이라고 생각한 순간 갑자기  뒷덜미가 서늘
  해져 왔던 것이다.  그 공포를 이겨야  했다. 그러기
  위해서 강심제 주사를 맞고 술까지 마셨던 것이다.
  여자는 더욱 부지런히 삽질을 했다. 이미 저질러진
  일이었다.
  이제 와서 포기한다고 해도 죄가 없어지는 것은 아
  닐 것이다.
  서서히 관의 모양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대리석 석
  관이었다.
  여자는 관이 완전히 드러나자  비로소 삽질을 멈추
  었다. 땀이 비오듯 흐르고 있었다. 여자는 천천히 가
  뿐 호흡을 진정시켰다.
  기슴이 마구 뛰고 있었다. 이제 관을 열어야 했다.
  여자는 손등으로 이마의 땀을 문질러 닦았다. 달이
  중천에 떠있었다.
  관 뚜껑을 밀어  보았다. 별달리  뚜껑이 움직이지
  않도록 장치를해 놓은 것도 없는데  뚜껑이 움직이지
  않았다.
  (여자 힘으로는 안 되겠어!)
  그러나 여자는 야전삽을 뚜껑 틈새에 밀어 넣고 곡
  괭이로 힘껏 잡아당겼다. 그러자 관 뚜껑이 끼익끼익
  하는 소리를 내며  밀려났다. 소름끼치게  기분 나쁜
  소리였다.
  여자는 비로소 곡팽이를 놓고 관 뚜껑을 힘껏 들어
  올린 뒤 옆으로 젖혀  내렸다. 관 뚜껑이  쿵 소리를
  내며 파헤쳐 놓은 흙 위에 떨어졌다.
  (아!)
  여자는 또 가슴이 철렁했다. 관  속에는 하얀 광목
  천으로 꽁꽁묶여 있는 시체가 반듯하게 누워 있었다.
  (머리가 산마루 쪽이군)
  여자는 다리가 후들후들 떨리는 것을 진정시키기라
  도 하듯이 과도를 손에 들고  시체를 노려보았다. 금
  방이라도 시체가 벌떡 일어나서 달려들 것 같은 공포
  가 엄습해 오고 있었다.
  여자는 깊게 심호흡을 했다. 터질  것처럼 뛰고 있
  는 가슴을 진정시키기 위해서였다.
  이내 여자는 시체를 향해 몸을 구부렸다. 그리고는
  과도로 광목천을 빠르게 잘라내기 시작했다.
  집안이 적막했다. 일요일인데도 남편은  회사에 출
  근하고 숙자는 제 방에서 늘어지게 낮잠을 자고 있었
  다.
  유리는 아침에 교회엘 갔으므로  점심 때나 되어서
  야 돌아올 것이다. 혜인은 침대에  누운 채 멀뚱멀뚱
  천정을 쳐다보았다. 무엇인가 잘못되어  가고 있는데
  도 무엇이 잘못되어 가고 있는지 알 수가 없었다. 마
  치 바보가 된 느낌이었다.
  혜인은 오랫동안 천정을 쳐다보고  누워 있다가 침
  대 밑에서 데이프들을 꺼내어 소형 녹음기에 넣었다.
  녹음기의 플레이 버튼을 누르자 이내 사모님이십니
  까? 하는 남편의 굵은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남편의
  전화에 도청 장치를 설치해서 녹음한  미니 테이프였
  다.
  "누구? 이 과장?"
  "예, 접니다."
  "그렇잖아도 전화를 기다리고 있었어. 내일이면 장
  례식이 끝나는데 왜 이렇게 꾸물거려?"
  전화기의 목소리는  약간 허스키한  여자의 것이었
  다.
  "서두르지 마십시오, 사모님"
  "이봐 이 과장, 어물어물하다가는 괜히 남 좋은 일
  만 시켜."
  "이제 추대식만 남았습니다."
  "다들 이의 없대?"
  "대주주들에게 그룹 주식 20 프로가  그 동안의 공
  로 형식으로 상속된다니까 사모님 추대를  이의 없이
  받아들이는 눈치였습니다. 건설 쪽의 박 전무는 찜찜
  해 하는 눈치였습니다만."
  "그 자가 왜?"
  "원래 그 사람은 부회장 쪽 사람입니다."
  "그래서 어떻게 했어?"
  "부회장도 창업 공신일  뿐이지 주식을  갖고 있는
  것은 별로 없습니다. 대세를 아는 부회장도 사모님을
  추대한다고 했더니 자기 자리를 보장해 줄 수 있느냐
  고 하더군요. 그래서 좋다고 했습니다."
  "그럼 내일 취임해도 되는 거야?"
  "안 됩니다."
  "왜? 또 무슨 문제가 있어?  성일 그룹의 상속자는
  이제 내가 아니야?"
  "사모님은 경영인이  아닙니다. 그  사람들이 등을
  돌리면 뜻밖의 암초를 만날 수도  있습니다. 그 사람
  들이 스스로 사모님에게  접근해 오도록  기다리십시
  오. 사람들은 권력이 있는 곳에  파리처럼 꾀어 들게
  마련 아닙니까?"
  "알았어."
  전화기 속의 여자가  낮게 한숨을  내쉬었다. 성일
  그룹의 상속녀 장숙영이었다. 혜인은 그 테이프를 수
  없이 되풀이해 들으면서 주먹 을 움켜쥐곤 했다.
  "내일 장례를 잘 치러야지요. 슬픈 표정만 짓고 계
  십시오."
  "그럼 만사 오케이야?"
  "예, 아 그리고 회장님은  정말 심장마비로 돌아가
  셨습니까?"
  "김 박사가 그렇다던데 왜 누가 의심해?"
  "아닙니다."
  "어차피 6개월을  전후해서 돌아가실  노인네였어.
  그런 노인네가 조금 일찍 돌아가신 게 뭐가 이상해?"
  "나중에 문제될 일은 없겠지요?"
  "무슨 문제?"
  "경찰이 사인을 조사하거나 뭐 그런 일은 없었습니
  까?"
  "없었어. 병들어 죽은 노인을 경찰이 뭐 하러 조사
  해?"
  "옳은 말씀입니다."
  "그런 걱정 말고 이 과장 여자 문제나 정리해"
  "정리하고 있습니다."
  "그런 막연한 말을  내가 어떻게 믿어?  그 여자를
  빨리 정리해야 부인하고도 이혼할 거 아니야?"
  "알겠습니다."
  "지금 나올 수 있겠어?"
  "괜찮으시겠습니까? 내일이 장례식인데."
  "괜찮으니까 나오라고 하지."
  "알겠습니다."
  찰칵, 전화가 끊겼다. 혜인은  스톱 버튼을 누르고
  담배를 한 개비 꺼내어 입에 물었다.
  남편은 이제 혜인과 이혼까지 준비하고 있었다. 그
  러나 혜인은 남편과 이혼을 한다는 것이 도무지 실감
  이 나지 않았다.
  (내가 아직까지도 남편을 믿고 있는 것인가?)
  혜인은 담배에 불을 붙여 연기를 피부 깊숙이 빨아
  들였다가 내뱉으며 그런 생각을 했다.
  가슴이 타는 것 같았다. 애정이  없는 남편과 이혼
  을 하는 것은 아쉬울  것이 아무 것도  없었다. 다만
  이혼녀라는 그 서먹한 어휘가 혜인을  외롭고 쓸쓸하
  게 만들 것 같았다.
  (갈 데까지 가 보는 거야.)
  담배 연기가 푸르스름하게 흩어지는 허공을 응시하
  며 혜인은 낮게 중얼거렸다.
  남편은 그녀의 얼굴에 신혼초부터 노골적인 불만을
  나타냈었다. 그녀가 남편을 혼인을  빙자한 간음죄로
  걸어 마음에도 없는 결혼을 성사시킨 탓이었다.
  혜인은 미인이 아니었다.  미인이 아닐  뿐 아니라
  추녀에 가까울 정도로 못생긴 편이었다. 그녀가 남들
  에게 자랑을 할 수 있는 것이란  희고 매끄러운 살결
  뿐이었다.
  그런 까닭으로 혜인은 어릴  때부터 외토리로 자랄
  수밖에 없었다. 얼굴이 못생긴 그녀를 아무도 친구로
  삼아 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녀가 남편을 만난 것은 대학교 4학년 때였다. 미
  인이 아니었던 탓에  변변한 남자 친구  하나 없었던
  그녀는 어느 날  키가 멀쑥하게 큰  남학생의 데이트
  신청을 받았고 불과 세 번의 만남 뒤에 그와 살을 섞
  고 말았다.
  그녀에겐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남자의 사랑을 받
  기 위해서라면 그녀는 무슨 짓이든지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리고 그 남학생은 그녀에게 최초의 남자였
  다.
  그녀는 그 남학생을 만나게  됨으로써 비로소 인생
  이 살아볼 만한 가치가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그러나 육체 관계가 잦아지자 남학생은  그녀에게 권
  태를 느끼기 시작했다.
  그는 처음부터 그녀에게 사랑 따위의 감정 같은 것
  은 갖고 있지  않았고, 그녀를  데이트에 끌어들이고
  육체 관계를 맺은 것은 순전히 성욕을 배설하기 위해
  서였다.
  그는 틈만 나면 그녀에게서 달아나려고 했다. 그러
  나 혼인을 빙자한 간음죄의 고리가 그의 발목에 족쇄
  를 채우고 놓아 주지않아 마지못해  그녀와 결혼했던
  것이다.
  (공연한 결혼이었어)
  혜인은 그와의 결혼을 후회했다.  그것은 하루하루
  가 고통의 세월이었다.
  혜인은 소형 녹음기의 테이프를  빼고 다른 테이프
  를 넣은 뒤 플레이 버튼을 눌렀다. 그것은 조일제 회
  장의 장례식이 끝난 뒤 남편과 장숙영의 통화를 도청
  한 것이었다.
  "오늘 수고 많이 했어."
  피로에 지친  듯한 장숙영의  목소리가 녹음기에서
  흘러나왔다.
  "저보다 사모님께서 무척 피곤하실 겁니다. 장례를
  치르는 일이 어디 보통 힘든 일이야지요."
  "알아 주니 고마워."
  장숙영의 목소리가 나긋나긋했다.
  "이제 목욕을 하고 푹 쉬십시오."
  "싫어."
  "사모님."
  "우리 만나. 만나서 목욕 같이 해"
  "주위에 눈이 있는데"
  "그럼 어떻게 해?"
  "며칠만 참으십시오."
  "싫어. 나 오늘 도무지 잠이 올 것 같지 않아."
  "알겠습니다."
  "나올래?"
  "예."
  "내가 먼저 가서 기다릴께."
  "알겠습니다."
  찰칵, 전화  끊기는 소리가  녹음기에서 들려왔다.
  혜인은 스톱 버튼을 누르고 테이프를 빼서 침대 밑에
  깊숙이 감추었다.
  그들이 만나서 무슨 짓을 했을지는 눈으로 보지 않
  았어도 훤히 짐작할 수 있었다.
  (더러운 인간들 같으니!)
  혜인은 지그시 입술을 깨물고  피우던 담배를 플래
  스틱 재떨이에 비벼 껐다.
  날이 우중충했다. 한바탕  비가 오려는지  창 밖의
  하늘이 잿빛으로 낮게 내려앉고 있었다.
  (비가 오면 상수한테 가 봐야지.)
  상수는 이틀 전 방 하나를 얻어 따로 나가 살고 있
  었다. 남편이 숙자를 통해 방 얻을 돈을  건네 준 모
  양이었다. 건설 현장의  미장공인 상수는  비가 오면
  일을 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혜인은 빗발이 떨어지
  기도 전에 우산을 들고 집을  나섰다. 다행히 상수는
  셋방에서 낮잠을 자고 있었다.
  "나야, 상수."
  혜인이 길 쪽으로 나 있는 유리창을 두드리자 속옷
  차림의 상수가 커튼을 젖히고 내다보다가  화들짝 놀
  라서 다시 커튼을 내렸다. 혜인은  쓴웃음이 나왔다.
  벽에 등을 기대고 서서, 내가  어린 총각을 찾아와서
  어쩌자는 것인가, 저 어린 총각과 불륜이라도 저지르
  자는 것인가 하는 생각을 하자 가슴이 저리듯 아
  파왔다.
  (내가 너무 초라해)
  그런 생각을 하자  혜인은 비참했다.  이내 상수가
  바지와 남방셔츠를 걸치고 밖으로 나왔다.
  "웬일이세요?"
  "지나가다가 들렸어. 어떻게 사나 볼려고."
  "들어오세요."
  상수가 경계하는 눈빛으로 혜인을 살피다가 머뭇머
  뭇 혜인을 방으로  안내했다. 세간다운  세간도 없는
  상수의 방은 작고 보잘 것 없었다.
  "방이 누추해서."
  상수가 더부룩한 머리를 긁으며 계면쩍게 웃었다.
  "총각 사는 방이 그렇지 뭐."
  "괜찮아. 대접 받으러  온 거  아니니까. 그냥
  놀러 왔어."
  상수의 작은 눈이 혜인의  얼굴을 빠르게 쏘아보았
  다. 혜인은 눈싸움이라도 하듯 그 눈을 응시했다.
  "숙자는 가끔 와?"
  "예."
  "빨리 결혼해야지."
  "아직 결혼할 생각 없습니다."
  "왜, 숙자한테 싫증이 났어?"
  "아녜요."
  "그럼 새로운 애인이 생겼어?"
  상수가 고개를 흔들었다. 잠시  대화가 끊겼다. 밖
  에는 비구름이 몰려오는지 갑자기 방  안이 어두컴컴
  해지고 있었다.
  "비가 오려나?"
  상수가 손바닥처럼 작은 창으로  밖을 내다보며 중
  얼거렸다.
  "금년엔 장마가 빨리 온대."
  혜인도 창 쪽으로 시선을 돌리며 대꾸했다. 상수는
  입을 다물고 있었다. 혜인도 마땅한  얘기 거리가 떠
  오르지 않아 우두커니 창만 내다보았다. 그러면서 갑
  자기 상수가 야수로 돌변해 자신을  겁탈하는 장면을
  머리 속에서 상상하기 시작했다. 물론 혜인은 반항을
  할 것이다. 그러나 상수는 남자이므로 마침내 혜인의
  반항도 소용없이 옷이 찢겨져 나가 겁탈을 당하게 될
  것이다.
  그러자 혜인은 자신도 모르게  짜릿한 전율이 하체
  에서부터 전신으로 번져 나가는 것을 느꼈다. 그것은
  상상만으로도 무릎이 떨리는 일이었다.  혜인은 서른
  네 살이었다. 서른네  살의 여자라면  육체의 욕망이
  가장 왕성할 때였다. 그런데도 남편과 잠자리를 함께
  한 것이 언제인지 기억조차 희미했다. 남편은 장숙영
  과 놀아나기에 여념이 없어 혜인을 안중에 두지 않은
  지가 오래였다. 게다가 남편과의 섹스엔 흥미가 전혀
  일어나지 않았다.
  혜인은 욕망이 걷잡을 수 없이 일어날 때면 손으로
  욕망을 해결했다. 그러나 수음은 언제나 미진하고 아
  쉬움만 더할 뿐이었다. 혜인은 자신의 육체가 남자의
  뜨거운 입김과 가뿐 숨소리를 원하고 있다는 것을 알
  고 있었다. 자신의 몸 속 깊숙이 들어와 있는 남자를
  느끼고 싶었다.  그리고 남자의  살과 남자의  체온
  올. 빗발이 후두둑  떨어지기 시작했다.  혜인은
  창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가 상수를 쳐다보았다. 상수
  는 무슨 큰 죄를 짓고 벌을  받는 아이들처럼 가만히
  앉아있었다.
  (상수가 겁탈해 주기를 바라고 있다니!)
  혜인은 자신이 혐오스러워 자리에서  일어났다. 상
  수를 찾아온 것은 공연한 짓이었다.
  "벌써 가시게요?"
  상수가 의례적인 인사치레를 했다.
  "다음에 또 들를께."
  "예."
  상수가 대문 앞까지 전송해 주었다. 혜인은 상수와
  헤어져 우산을 펴들고 느릿느릿 걷기 시작했다. 후두
  둑 떨어지던 빗발이 어느덧 굵은 빗줄기로 바뀌어 무
  서운 기세로 쏟아지고 있었다.
  "혹시 유혜인씨 아니십니까?"
  혜인이 낯선 남자로부터 인사를  받은 것은 집으로
  돌아오는 큰길의 횡단보도 앞에서였다.
  "그런데요?"
  혜인은 낯선  남자를 경계하는  눈빛으로 쳐다보았
  다. 결코 잘생긴 얼굴이라고 할 수 없지만 그 남자는
  옷차림이 평범하고 소탈했다.
  "저 허영만입니다."
  "허."
  기억에 없는 이름이었다.
  "허영만이요.  지영희의  전남편  되는  사람입니
  다"
  "아, 이제 생각나요."
  혜인이 입을 가리고 미소를 지었다. 지영희는 혜인
  의 대학 동창으로 학교 메이퀸으로까지  뽑힌 친구였
  다. 대학 졸업 후 결혼했으나 남편 되는 사람이 사기
  꾼이라 금새 이혼했다는 풍문을 들은 일이 있었다.
  "어떻게 저를 알아보셨어요?"
  "혜인씨를 어떻게 몰라 보겠습니까?"
  "무슨 말씀예요?"
  "헤인씨는 제 집사람 친구들 중에  몸매가 가장 아
  름다웠던 분입니다."
  "어머! 못하시는 말씀이 없어!"
  혜인이 눈을 흘겼다.
  "진심입니다. 결혼 전이나 후나  몸매가 조금도 변
  함이 없으시군요."
  "괜히 유부녀 희롱하지 마세요."
  "이럴 게 아니라 차라도 마시면서."
  "아녜요. 저 좀 바뻐요."
  혜인은 거짓말을 했다. 지영희의  남편이 사기꾼이
  라던 말이 얼핏뇌리를 스쳐왔기 때문이다.
  "그럼 다음에 마시기로  하고 제  명함이나 한
  장 받아 주십시오."
  그러면서 허영만이 수첩에서 명함  한 장을 꺼내더
  니 혜인에게 건네 주었다.
  "변호사 사무실에 있습니다. 하는  일은 법원 브로
  커 일이구요. 그럼"
  허영만이 소탈하게 웃고 휘적휘적  걸음을 떼어 놓
  았다. 혜인은 비로소 허영만의 명함을 자세히 들여다
  보고는 핸드백 속에 갈무리했다. 서울에는 비가 오고
  있다는데도 서해안의 작은 섬은 햇살이 충만했다. 조
  용한 파도소리와 순박한 섬 사람들, 짭쪼름한 소금기
  가 섞인 해풍, 고즈넉한 햇살.  섬은 별세계처럼
  평화롭기 짝이 없었다. 여형사 한유경은 젊은 의사와
  간호원 아가씨들이 낙도의 외로운 주민들을  무료 진
  료해 주는 모습을 지켜보면서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그들은 말 그대로 백의의 천사들이었다.
  "한 폭의 그림 같지요?"
  시경 여순경들의 봉사 모임인  [목련회] 총무를 맡
  고 있는 박영주 순경이 풋풋한 미소를 그리며 유경에
  게 말했다. 경찰 제복이 썩잘  어울리는 처녀 순경이
  었다.
  "정말 그래. 비록 한 달에 한 번 시간을 내서 무의
  촌 진료를 하는 거지만 보통 성의들이 아냐."
  젊은 의사와 간호원들은 [프란체스카]라는 사회 봉
  사 회원들이었다. 그들과 [목련회] 회원들이 뜻을 모
  아 무의촌 무료 진료를 시작해온 지 벌써 1년이 가까
  워 오고 있었다.
  "저 사람들을 볼 때마다 난 히포크라테스와 나이팅
  게일의 후예들은 다르구나 하는 생각을 해요."
  "처음엔 모두들 탐탁하게 생각하지 않았어."
  "사회 봉사가 너무  형식에 치우치고  있어서 그래
  요."
  "세상 인심이 가파라지고 있어.  범죄는 날로 증가
  하구."
  "범죄 양상도 달라졌잖아요. 전에는  배가 고파 도
  둑질을 했는데 이젠 유흥비를 마련하기 위해 강도 짓
  을 하고 살인을 아무렇게나 저지르고 있으니."
  "전통적인 농경사회에서 산업사회로 빠르게 전환되
  다 보니까 우리 사회가 비틀거리는  거야. 젊은 사람
  들이 저렇게 훌륭한 일들을 하고 있으니까 이제 살기
  좋은 사회가 될 거야."
  "한 형사님은 우리 사회의 미래를 희망적으로 보고
  계세요?"
  "박 순경은 비관적으로 봐?"
  "성실하게 살려는 사람들이 점점 적어지고 있는 것
  같아요."
  "여기만 해도 얼마나 많은데."
  정 순경이 목련처럼 화사한  미소를 그리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유경은  의사들과 간호원들이  주민들을
  모아 놓고 진료를 하는 마을회관 마당으로 천천히 걸
  음을 떼어 놓았다. 의사들은 청진기로 주민들을 진료
  하면서 처방전을 쓰고 간호원들은 의사의 처방에따라
  주사도 놓고 약을 조제하기도 했다. 여순경들은 그들
  의 일을 보조하고 있었다. 의사  앞에 나서기를 꺼리
  는 주민들을 설득하여  마을회관으로 인솔해  오기도
  했고 간단한 치료를 받고 돌아가는  주민들을 집까지
  부축해 주기도 했다. 언제나 그렇지만  그 섬에도 당
  장 병원에서 수술을 받아야 하는 주민이 둘이나 있었
  다.
  그런 경우에는 여순경들의 봉사 모임인 [목련회]와
  [프란체스카회]가 수술비를 부담하고 큰 병원에 입원
  시켰다. 그것은 적지 않은 재력이 필요한 일이었으나
  회원들은 기꺼이 성금을 내서 주민들을 도왔다. 유경
  이 성일 그룹 조일제 회장의 봉분이 파헤쳐졌다는 TV
  뉴스를 접한 것은 그날 밤 자정의 일이었다. 낙도 무
  료 진료 봉사를 마치고 서울에 돌아오자  이미 밤 10
  시가 되어 있었고, 회원들과 함께  다음달 봉사 일정
  을 짜고 집에 돌아오자 자정이 가까웠던 것이다.
  남편은 거실에서 명화극장을 보고  있었다. 유경이
  샤워를 하고 잠옷으로 갈아입은 뒤 거실로 나오자 명
  화극장은 끝나고 뉴스가 진행되고 있었다. 성일 그룹
  조일제 회장의 봉분이 파헤쳐졌다는 임시  뉴스의 속
  보로 조일제 회장의 봉분을 파헤친  범인을 수사하는
  형사들과 관이 드러나 있는 봉분을  카메라로 비추면
  서 경찰이 범행동기조차 파악하지 못하고  있다고 비
  난하고 있었다.
  "언제 저런 일이 있었어요?"
  유경은 남편 옆에 앉으며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점심 때쯤 해서 뉴스에  나오기 시작했어. 사건은
  어젯밤에 저질러진 것으로 파악되었구."
  "왜 저런 짓을 저질렀을까요?"
  "범인이 조 회장의 오른쪽 엄지손가락 하나를 잘라
  갔대."
  "손가락을요?"
  "TV 뉴스에도  오른손이 잠깐  보였어. 엄지손가락
  마디 하나가 없는 손이."
  "끔찍해요."
  "경찰은 족적 확인 결과 단독범이구 여자일 가능성
  이 많대."
  "여자가 어떻게 밤에 무덤을 파헤쳐요?"
  "내가 그런 걸 알면 형사하게."
  "이이는!"
  유경은 눈을 흘기며 남편의 팔을 꼬집었다.
  "아퍼!"
  남편이 엄살을 떨었다.
  "범인이 남긴 유류품은 없었대요?"
  "현장에 야전삽,  곡괭이, 손도끼,  양주병 따위가
  떨어져 있었대."
  "그럼 지문을 채취할 수 있었겠군요."
  "요즈음 지문 남기는 범인이 어디 있어?"
  "하긴."
  "게다가 무덤을 파헤친  정도면 전문가라고  볼 수
  있어."
  "맞아요."
  유경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관할 경찰서인 용인 경
  찰서가 벌집을 쑤신 것처럼 와글거리는  모습이 눈에
  어른거렸다.
  "당신은 어떻게 생각해요?"
  유경이 남편의 어깨에 얼굴을 기대며 물었다. 남편
  도 샤워를 했는지 비누 냄새가 상큼하게 풍겨 왔다.
  "뭐가?"
  "범행 동기요."
  "글쎄 엄지손가락에 다이아몬드 반지를  끼워 놓았
  던 것은 아닐테구. 원한에 의한  복수극일 것 같
  은데."
  "원한이 아무리 깊다고 죽은 사람의 시체에 손상을
  입혀요? 그것도 손가락 하나만?"
  "그럼 재벌 그룹의 암투인가?"
  "암투요?"
  "재산 상속을 둘러싸고 현 회장인 장숙영에 불만을
  갖고 있는 사람이 장숙영의 위신을  추락시키기 위해
  저지른 사건 같은 거말이야."
  "아닐 거예요."
  "왜?"
  "그렇다면 손가락은 왜 잘라 갔겠어요?"
  "그렇지. 그 놈의 손가락이 말썽이군."
  "범인은 그 손가락이 필요했을 거예요."
  "왜?"
  "그건 앞으로 수사를 해 봐야 알겠죠."
  "당신도 수사에 참여하나?"
  "내일 가봐야  알아요. 워낙  매스컴이 북을  쳐대
  니 이제 그만자요."
  유경이 TV를 끄고 거실의 불을 끄자 남편이 유경을
  번쩍 안았다. 유경은 남편의 목에  팔을 감고 행복한
  미소를 지었다.한 시간 후 유경은  땀에 흥건히 젖어
  침대에 누워 있었다.
  "부부란 참 이상해. 모르는  남자와 모르는 여자가
  만나서 같이 살을 섞으며 사는 건데 마치 내 살을 만
  난 것처럼 정겹기만 하니 말이야."
  남편이 유경의 가슴을 손으로 어루만지며 중얼거렸
  다. 남편도 이마에 땀방울이 송글송글 맺혀 있었다.
  "우리가 진심으로 사랑하기 때문에 그래요."
  "아기는 언제 낳을 거야?"
  "아기 갖고 싶어요?"
  "응."
  "당신만 허락해 준다면, 2, 3년 더 있다가 갖고 싶
  어요."
  "아기 낳은 뒤에도 형사 계속할 건가?"
  "그건 우리 아기한테 물어봐야죠."
  유경이 몸을 일으켜 남편의 얼굴을 내려다보았다.
  "잡시다. 내일 출근하려면 힘들 텐데."
  "먼저 주무세요."
  "왜?"
  "전 이렇게 당신을 보고 있다가 잘래요."
  "내가 어디로 도망 가나?"
  "당신을 보고 있는 게 좋아요."
  유경이 담뿍 미소를 지었다. 그러나 남편은 유경의
  얼굴을 가슴 위에 올려 놓고 눈을 감았다. 이내 남편
  이 고르게 코를 골며 잠이  들었다.유경은 남편이 잠
  이 들자 다시 얼굴을 들고  남편을 내려다보았다. 사
  랑스러운 남편이었다.유경은 남편의 입술에 축축하게
  젖어 있는 제  입술을 얹었다가 떼고는  남편의 팔을
  베고 누웠다. 비로소 나른한 피로와  함께 잠이 오기
  시작했다.
  이튿달 아침, 사무실에 출근하자  강력계 형사들도
  성일 그룹 조일제 회장의 봉분 파묘 사건으로 웅성거
  리고 있었다. 신문이 엽기적 사건이느니,  사라진 손
  가락의 행방은 어디로? 땅에 떨어진 인륜, 이젠 무덤
  까지 파헤쳐 따위의 기사를 큼직큼직하게 때려실
  어 더욱 뒤숭숭한 느낌이었다.
  "과장님 지시로 우리가 서울 쪽 수사를 전담하기로
  했어."
  과장실에 올라갔다가 내려온 이상진 주임이 형사들
  을 모아놓고 낮게 말했다.
  "한 형사, 최 형사,  강 형사는 성일  그룹 장숙영
  회장의 주변을 수사하고 나하고 조  형사, 박 형사는
  성일 그룹 임직원을 수사한다. 별도의 지시는 없으니
  까 각자 알아서 수사에 임하도록."
  "자료는 아무 것도 없어요?"
  유경이 이 반장을 보고 물었다.
  "그런 거 없으니까 빨리 출동이나 해."
  이 반장이 헤푸게  웃으며 내뱉었다.  계장 승진이
  내정되어 있어 기분이 좋은 모양이었다.
  "수산본부 설치할 거예요?"
  유경이 다시 물었다.
  "아직 결정되지 않았어."
  이 반장이 어깨를 으쓱하고 대꾸했다.
       5. 제2의 살인
  숙자는 절정의 끝을 향해  달려가려다가 흠칫했다.
  차가운 빗발이 흩날리는 창가에 언뜻  사람의 얼굴이
  나타났다가 사라졌기 때문이다. 공연히  가슴이 쿵쾅
  거렸다. 창 밖은 칠흑처럼 깜깜했다.
  (내가 잘못 봤을 거야.)
  그때 상수가 곤두박질치면서 몸을  부르르 떨었다.
  엉겁결에 무너져 내려오는 상수를 받아  안으며 숙자
  는 몸을 비틀었다. 창에 정신을  빼앗긴 것이 잘못이
  었다. 아차, 하는 사이에 상수는 저  혼자 깃발을 흔
  들고는 숙자의 가슴에 얼굴을 얹어 놓고 거칠은 숨결
  을 고르고 있었다. 바보 같은 짓이었다.
  "왜 그래?"
  숙자가 불만스러운 얼굴빛으로 상수의 등을 꼬집자
  상수가 볼멘소리로 말했다. 상수의  얼굴이 땀투성이
  였다.
  "난 아직 멀었단 말이야!"
  "아깐 됐다고 그랬잖아?"
  "아깐 아까고!"
  "오늘은 짜증만 부리는군. 내가  그 작자보다 못한
  모양이지?"
  상수가 숙자에게서 떨어져 누우며  빈정거렸다. 조
  금 전 격렬하게  싸운 앙금이 아직도  상수에게 남아
  있는 모양이었다. 숙자는 상수의 얼굴을 손톱으로 할
  퀸 것이 미안해 입을 다물고 정사  뒤의 뒷처리를 했
  다. 그 작자라는 것은 이진우를  말하는 것이 분명했
  다. 그러나 숙자는 속으로 코웃음쳤다.  사내들은 종
  종 자신이 초정력의 소유자이기를 원했다. 특히 정사
  때에 여자가 죽어 가는 시늉을해 주기를 바라고 있었
  다. 여자에게 군림하고 싶어하는 사내들의 못난 허영
  심이었다. 그것은 잘 나고 못 나고가 없었다.
  (너에겐 너대로의 맛이 있고  이진우에겐 이진우대
  로의 맛이  있는거야. 바보처럼  그걸 어떻게  비교
  해)
  벌거벗은 채 담배를 피워 물고 있는 상수를 흘겨보
  고는 숙자는 창으로  가서 밖을  내다보았다. 그러나
  창 밖 골목은 인적없이 빗발만 흩뿌리고 있었다.
  (역시 내가 잘못 본 모양이야!)
  숙자는 비로소 안심이 되었다. 아무래도 커튼이 바
  람에 날리는 것을 잘못 본 것 같았다.
  "뭘 해?"
  상수가 숙자의 등에 대고 소리를 질렀다.
  "더워서 그래."
  숙자는 쌀쌀맞게 대꾸했다. 숙자도 기분이 좋은 것
  은 아니었다. 이진우를 협박하기 위해 상수를 끌어들
  였는데 상수가 자기 몰래 이진우를 협박해 돈을 울궈
  냈던 것이다. 그 돈이 벌써  5백만원이나 되었다. 게
  다가 이진우는 공갈 협박죄로 상수와  숙자를 감방에
  집어넣겠다고 거꾸로 으름장을 놓고 있었다.
  "그 작자가 우리를 집어넣지는 못할 거야."
  상수가 조금 누그러진 목소리로 말했다.
  "그런 작자들은 체면  때문에 그런  일이 알려지는
  걸 쉬쉬 하거든 넌 어떻게 생각하니?"
  "내가 알께 뭐야?"
  "그럼 이대로 물러날 거야?"
  "미쳤어?"
  숙자는 창문을 닫아  걸고 커튼을 불빛  하나 새어
  나가지 않게 여몄다.
  "이번에 그 작자한테 돈을 받으면 다 너 가져."
  "인심 좋네!"
  "빈정거리지 마. 진심이니까 내가 가만히 눈치
  를 보니까그 작자 한 천만원쯤 내놀 것 같았어."
  "천만원이 누구네 강아지 이름인 줄 알아?"
  "제비족한테 걸린 여자들 봐라. 남편한테 알린다고
  하면 전세돈까지 빼서 갖다 바치잖아?"
  "내가 제비족이야?"
  "그렇다는 얘기야. 누가 제비족이랬어?"
  상수가 노여운 기색으로 말질을 했다. 얼굴의 손톱
  자국이 보기흉했다. 숙자는 대꾸없이  방바닥에 철버
  덕 주저앉아 담배를 피우기 시작했다. 어쩐지 가슴으
  로 차가운 빗줄기가 날리는 것처럼 쓸쓸했다.
  "미안해, 숙자."
  상수가 담뱃불을 비벼 끄며 말했다.
  "나중에 내가 돈 벌면 갚아 줄께."
  "뭘?"
  "5백만원."
  "일없어."
  "여기 전세돈 숙자가 다 가져."
  "."
  "나 며칠 있다가 지방에 갈 거야. 지방에 공사판이
  벌어졌어."
  "어딘데?"
  숙자가 비로소 얼굴을 풀고  상수를 똑바로 응시하
  였다. 상수는 반쯤 몸을 일으켜 벽에 등을 기대고 있
  었다.
  "낙산."
  "일하러 가는 거야?"
  "응. 아파트 신축 공사인데 한 2년 걸릴 것 같아."
  "난 어떻게 하구?"
  "뭘?"
  "나 혼자 이진우한테 어떻게 돈을 뜯어내?"
  "니가 알아서 해."
  숙자는 입을 다물었다. 과연 상수가 없어도 이진우
  한테 돈을 뜯어낼  수 있을지 없을지  그것을 헤아려
  보기 위해서였다. 어차피 상수와는 멀지 않아 헤어지
  려고 작심을 하고 있는 처지였다.  상수가 부산의 아
  파트 신축 공사장으로 가겠다는 것은 제 발로 떨어져
  나가겠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상수에게도 한 몫을  주어야 하니까 5백만
  원을 상수의 몫이라고  생각하면 내가 밑진  것은 없
  어)
  거기까지 생각하자 상수에게 화풀이할 필요가 없었
  다.
  "언제 떠나?"
  숙자는 담배를 재떨이에 비벼  끄고 앉은 걸음으로
  상수에게 가까이 갔다.
  "빠르면 사흘 후에 가게 될 거야."
  "서운해서 어떻게 하지?"
  숙자가 상수의 얼굴을 쓰다듬어  주며 안쓰러운 표
  정을 지었다.
  "다음에 만나면 회포 한 번 풀자구."
  상수가 빙굿이 웃었다.
  "그 동안 미안했어."
  "미안한 건 나도 마찬가지야."
  "부산에 가면 연락해. 언제 한 번 찾아갈께."
  "그래."
  상수가 고개를 끄덕거렸다. 숙자는  상수의 얼굴을
  물끄러미 응시하다가 상수의 머리를 안아서 가슴으로
  끌어당겼다. 그러자 상수가 숙자의 가슴을  한 입 가
  득 베어 물었다.
  (아!)
  숙자는 자신도 모르게 신음소리를 내뱉으며 상수를
  부둥켜 안았다. 숙자의  등이 활처럼  휘면서 그녀가
  방바닥으로 쓰러졌다.
  두 시간 후, 숙자는 가벼운  걸음으로 상수가 세들
  어 살고 있는  골목을 걸어나오고  있었다. 상수와의
  정사가 몸속에 있는 불순물을 모두 배설한 것처럼 개
  운했으므로 숙자는 걸음이 상쾌했다.  이런 기분이라
  면 세상을 한 번 멋있게 살아볼 수 있을 것 같았다.
  골목의 끝에 이르기 전 숙자는 상수의 셋방이 있는
  곳을 돌아다보았다. 그제서야 상수의 방에 불이 꺼지
  는 것으로 보아 상수는잠을 자려는 모양이었다.
  (그 동안 즐거웠어!)
  숙자는 손이라도 흔들어 주고  싶었으나 몸을 돌려
  걸음을 성큼성큼 떼어 놓았다. 혹시라도 이진우가 숙
  자의 지하실 방에까지 내려와 기다리고  있을까봐 걱
  정되었다. 이진우는 못생긴 마누라가 잠이 들면 때때
  로 숙자의 지하실 방까지 내려와 숙자와 정사를 치르
  고 돌아 가고는 했다. 마누라가 못생겼기 때문이다.
  (정말 추녀야.)
  그런데도 몸매 하나는 기가 막히게 아름다웠다. 같
  은 여자인 숙자가 보아도 유혜인의 알몸은 눈이 부실
  정도였다. 언젠가 욕조에서 유혜인의  알몸에 비누칠
  을 해 주던  숙자는 금빛으로 둘러싸인  듯한 그녀의
  나신에 몸이 떨리기까지 했었다.
  (얼굴만 예뻤으면 굉장했을 텐데.)
  그러나 그것은 숙자와 상관없는 일이었다.
  골목을 벗어나자 주택가 큰  길이었다. 어두컴컴한
  전봇대 밑에 택시 한 대가 서 있는 것을 보고 숙자는
  그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빈 택시였다.  어디가 고장
  이 났는지 운전기사로 보이는 사내가 플래쉬로 차 밑
  을 비춰 보고 있었다.
  "고장예요?"
  "아니요."
  사내가 퉁명스럽게 내뱉었다. 숙자는  별 아니꼬운
  사람도 다 있네, 하는 생각이 들었으나 내처 물었다.
  "그럼 이 차 가요?"
  "타시오."
  사내가 차바퀴를 바치고 있던  벽돌을 빼들고 택시
  의 뒷문을 열었다. 숙자는 사내가  열어준 문으로 차
  안에 들어가려고 허리를 구부리다가 뒤통수가 부서져
  나가는 듯한 통증을 느꼈다. 벽돌이었다.  벽돌이 갑
  자기 숙자의 뒤통수를  후려친 순간 숙자는  헉 하고
  헛바람 들이키는 소리를  내지르며 앞으로  고꾸라졌
  다. 그것뿐이었다. 숙자는 입에서 뜨거운  것이 쏟아
  져 나오는 것같은 기분을 느끼며  의식을 잃었다. 비
  로소 사내가 벽돌을 길바닥에 버리고 택시의 뒤 트렁
  크를 열었다. 그리고는 길바닥에 널부러진 숙자를 질
  질 끌고 가 트렁크에 밀어넣었다.
  숙자는 피투성이였다.  뒤통수를 쳤는데도  검붉은
  피는 숙자의 얼굴과  옷에 낭자했다.  사내는 비옷을
  벗어 재빨리 숙자의 몸에 덮고  트렁크를 닫았다. 잠
  시 후 노란 택시 한 대가 안암동 주택가를 벗어나 쏜
  살같이 달리기 시작했다.
  수지가 김 박사와 헤어져 아파트로 돌아오자, 은숙
  이 침대에 누워 책을 보고 있었다. 은숙은 수지의 유
  일한 친구였다. 지점토공예학원에서 만나  친구가 되
  었는데 내성적인 성격의 수지와는 달리  성격이 명랑
  하고 붙임성이 좋았다.
  "언제 왔니?"
  수지는 김 박사가 선물로 사 준  옷상자를 장롱 속
  에 넣으며 은숙에게 물었다. 은숙에게도 수지의 아파
  트 열쇠가 하나 있었다.
  "너 요즈음 연애하니?"
  그러나 은숙은  침대에서 일어나며  엉뚱한 질문을
  했다.
  "왜?"
  "수상해."
  "뭐가?"
  "화장하는 것이며 옷 입고 다니는  폼이 남자를 사
  귀고 있는 것같아."
  "그런 일 없어."
  수지는 웃으며 대꾸했다. 호텔에서의  김 박사와의
  정사가 가벼운 흥분으로 몸 속에  남아 있었다. 수지
  는 김 박사에게 순결을 뺏긴 이후  김 박사와 수시로
  육체관계를 맺어 왔다. 그것은 김  박사가 원할 때도
  있었고 수지가 원할때도  있었다. 김  박사가 자신의
  순결을 더럽혔다는 원망  같은 것은 이미  사라진 지
  오래였다. 어느덧 그녀는 김 박사를 이해했고 김박사
  도 수지를 사랑하고 있었다.
  "거짓말 마."
  외출복을 벗고  잠옷으로 갈아입는  수지의 몸까지
  살피며 은숙은 호들갑을 떨고 있었다.
  "남자 냄새가 나."
  "뭐?"
  "니 몸에서 남자 냄새가 난단 말이야."
  "얘 샤워했는데 무슨 남자 냄새가 나니?"
  "그렇지? 남자와 샤워했지?"
  "그래!"
  "어머, 얘 좀 봐!"
  은숙이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수지는  피식 웃고
  주방으로 나와 커피포트에 물을 올려 놓았다. 은숙이
  그런 수지를 졸졸거리고 따라와 식탁에 털석 앉았다.
  "어떤 사람이니?"
  "남자."
  "어떤 남자?"
  "의사."
  "좋겠다."
  "의사가 뭐가 좋니?"
  "넌 싫어? 싫으면 나한테 양보해라."
  "미쳤어. 주접 그만 떨구 뭐 마실래?"
  "커피."
  은숙이 마시는 것엔 관심도 없다는 듯이 수지의 얼
  굴을 감탄스러운 눈으로 쳐다보았다.
  "그 사람 언제부터 좋아했니?"
  "봄부터."
  "같이 잤어?"
  "그래."
  "어쩜!"
  "커피나 마셔."
  수지가 커피잔에 물을 부어 은숙에게 밀어 주었다.
  은숙이 커피한 스푼과 프림 두 스푼을  타서 젓기 시
  작했다. 수지는 커피에 흑설탕까지 넣어서 저었다.
  "언제 결혼할 거니?"
  "아직 몰라."
  "그러다가 임신하면 어떻게 할래?"
  "낳지 무슨 걱정이야!"
  "어머머!"
  "얘, 이제 그만 좀 물어.  아무리 친구래도 얘기하
  고 싶지 않은것도 있는 거야."
  "그럼 한 가지만 물어볼께."
  "뭔데?"
  "남자하고 잘 때 어땠어?"
  "괜찮았어."
  "겨우?"
  "우린 니가 생각하는 것처럼 처음부터 사랑으로 이
  루어진 관계가 아니었어. 난 사실  그 사람에게 순결
  을 강제로 뺏겼어. 그 사람은  순간적인 욕망 때문에
  내 순결을 뺏었던 거구 나중에 그 사람이 후회하
  고 용서를 빌었어 난 그래서 그 사람을 이해하게
  되었구 지금은 서로  이해하고 사랑하는  관계로
  발전되었어 나중에 다 말해 줄께."
  "그래."
  수지가 진지한 표정으로 얘기를 하자 은숙이 할 수
  없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수지는 은숙이 돌아
  간 뒤에야 비로소 책상 서랍에 감춰 두었던 손가락을
  꺼냈다. 그것을 현미경으로 자세히  들여다보자 손톱
  밑의 붉은 혈혼이  희미하게 드러나  보였다. 그러나
  혈혼은 이미 제 모습을 식별하기가 곤란했다.
  (전문가가 아니면 감식이 어렵겠어.)
  수지는 무겁게 한숨을  내쉬었다. 어렵게  구해 온
  조일제 회장의 엄지손가락 첫 마디였다. 루미놀 시약
  을 분무해 보면  혈혼이 형광빛으로  나타날 것이다.
  그러나 루미놀 시약을 어디 가서  구할 수 있겠는가.
  그것은 형사들이 사건을 수사할 때 혈혼을 찾기 위해
  쓰는 시약으로 과학수사연구소나 일선 경찰서 수사과
  에나 있을 것이다. 재벌 그룹 창업 회장의 무덤이 파
  헤쳐졌다 해서 경기도 경찰국과서울시 경찰국은 발칵
  뒤집혀 있었다. 게다가 매스컴은 연일 엽기적 사건이
  니 손가락 하나의 미스테리니 하고  대서특필하고 있
  었다. 섣불리 루미놀 시약 얘기를 꺼냈다가는 스스로
  호랑이굴 속으로 뛰어 들어가는 것이나 진배없었다.
  (장숙영하고 직접 부딪쳐 볼까?)
  박 기사의 죽음이  아무래도 석연치가  않았다. 박
  기자가 장숙영의 팔뚝을  걷어 보려 했다고  해서 박
  기사를 해고하고 그날 밤 박기사가  교통사고로 죽었
  다는 것은 공교롭기 짝이 없는 일이었다.
  (사건의 열쇠는 조 회장의 죽음이야. 그 사람이 어
  떻게 죽었는냐 하는 것만 밝혀지면 사건은 저절로 해
  결될 텐데.)
  밖에는 새벽비가 음산하게 흩날리고  있었다. 수지
  는 아파트의 창으로 비가 오는 것을  내다보며 조 회
  장의 죽음에 대한 추리를해 보기  시작했다. 먼저 외
  상이 전혀 없게 조 회장의 호흡을 막아버리려면 부드
  러운 물체로 덮어 씌워야 했다.  그것은 두꺼운 비닐
  종이일 수도 있고 베개일 수도 있었다.
  (그래, 베개로 숨을 막아 버리는 것은 오래 걸릴지
  모르니까 공기가 새어 나가지 않는 두꺼운 비닐 봉지
  같은 것으로 덮어씌웠을거야. 조 회장의 손톱에 있는
  혈혼은 비닐 봉지 같은 것으로 덮어씌웠을 때 무의식
  중에 범인의 팔을  움켜잡은 것이고  범인은식물
  인간이나 다름없는 조 회장이 전혀 반항을 하지 않으
  리라고생각하고 있다가 당한 것이고 그런데 나는
  왜 그런 일들을 까맣게 몰랐을까?)
  그것은 범인이 수지 자신에게  두 시간쯤 의식불명
  의 상태로 잠이 들게 특수 약물을  음식물에 섞어 먹
  게 한 것으로 추리할 수밖에 없었다.
  (범인은 누구일까?)
  도무지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장숙영의 팔뚝에
  손톱 자국이 없었다고 했으므로 장숙영이 범인이라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더구나 그  여자는 조 회장
  의 부인이었다. 조 회장을 살해할  만한 뚜렷한 동기
  가 없었다.
  (외부 침입자의 소행인가?)
  그러나 그것도 희박한 추리였다. 정문은 오 영감이
  밤낮없이 지키고 있었고, 현관이며 창들은 방범 장치
  가 완벽하게 설치되어 있었다. 외부 침입자가 있었다
  먼 경보기가 울려 식구들이 모두 깨어났을 것이다.
  (골치 아퍼 죽겠군.)
  수지는 두 손으로 머리카락을  쥐어뜯었다. 실마리
  가 조금도 풀리지 않고 있었다.
  장숙영은 거실에서 이진우, 최 비서와 함께 술잔을
  기울이고 있었다. 가슴이 답답했다.
  (감히 손가락을 잘라 가다니!)
  그것이 누구의 짓이든 장숙영은  분노로 치를 떨었
  다. 견딜 수가 없는 모욕이었다. 고인에 대한 면목도
  없을 뿐 아니라 매스컴이 연일 대대적으로 그 사건을
  보도하고 있어 얼굴조차 들고 다닐 수가 없었다.
  게다가 강력계 여형사로부터 오늘  하루 종일 취조
  에 가까운 심문을 받아 심기가 언짢았다.
  여형사는 여간 깐깐하지가 않았다.  나이도 젊었고
  용모도 장숙영이 무색할이만큼  뛰어났을 뿐  아니라
  질문 하나하나가 그녀의 가슴을 송곳으로  찌르는 것
  처럼 날카로웠기 때문이다.
  "호사다마라더니 회장님이 그런 봉변을  당할 줄은
  꿈에도 몰랐습니다."
  이진우가 브랜디를 한 모금 입으로 넘기며 말했다.
  "누군가 우리 그룹을 망쳐 놓으려는 음모가 아닐까
  요?"
  "무슨 뜻이야?"
  "어떤 놈이 계획적으로 우리 그룹 이미지에 먹칠을
  하고 있는것 같습니다. 우리 그룹의  제품이 안 팔리
  게 하려구요"
  "그런다고 물건이 안 팔려?"
  엉뚱한 소리 말라는 듯이 장숙영이 최 비서를 쏘아
  보았다.
  "회장님 의견은 어떻습니까?"
  이진우가 다시  브랜디를 목으로  넘기고 장숙영을
  쳐다보았다.
  "어떤 놈이 나를 질투하고 있어!"
  장숙영이 씹어뱉듯이 대꾸했다.
  "질투요?"
  "내가 회장에 취임한 것을 마땅치 않아 하는 놈 짓
  이야!"
  "그렇다면?"
  "아직 섣불리 추측하지 마.  경찰이 조사하고 있으
  니까"
  "경찰은 아직 단서도 못 잡고 있는 것 같습니다."
  "범인이 여자라면서?"
  "족적의 크기로  짐작한 것인  모양입니다. 족적의
  깊이도 얇구요."
  "깊이?"
  "젖은 땅을 남자가 밟았을 때의  깊이는 여자가 밟
  았을 때의 깊이와 다르답니다."
  "땅이 젖었었어?"
  "산소에 물이 약간 괴었었답니다."
  "좌청룡(좌청룡) 우백호(우백호)의  명당 자리라더
  니!"
  장숙영은 고운 아미를 접었다.  얼굴은 술기운으로
  발그스름했고 하얀 소복과  어울려 농염한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
  "시신 검시는 어떻게 됐어?"
  "별 이상이 없는 모양입니다."
  "그럼 매장해도 된대?"
  "예."
  "장례를 두 번씩이나 치러야 하게 생겼군"
  장숙영이 불만스럽게 내뱉고 브랜디를  한 모금 마
  셨다. 최 비서가 장숙영의 잔에  브랜디를 따르며 그
  녀의 몸에서 단내를 희미하게 맡았다.
  "장례는 언제 치르지?"
  "장례라기보다 매장이지요.  대학병원에서 시신이
  내려오면 바로 치를까 합니다."
  "이번엔 묘지기를 둬야겠어."
  "경비들 중에서 차출해 보겠습니다. 별장도 지키게
  할겸"
  "좋은 생각이야."
  장숙영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경찰은 이 사건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습니까?"
  "그쪽도 답답해 하는 눈치야."
  "이번 사건으로 협박 전화 같은 것은 없었습니까?"
  "없었어."
  "정신 이상자의 소행인가?"
  "정신 이상자가 할 일이 없어 남의 무덤을 파헤쳐?
  그리고 손가락은 뭣 때문에 잘라 가?"
  "그거 때문에 회사에서도 난리입니다."
  "손가락?"
  "예."
  "왜?"
  "회장님 엄지손가락에 싯가  3억원짜리 다이아몬드
  반지가 끼워져 있었는데 범인이 그  반지를 빼려다가
  안 빠지니까 손가락을 잘라 갔다는 것입니다."
  "미친 놈들!"
  "심지어 사모님도 빼려다가 못 뺐다는 소문까지 나
  돌고 있습니다."
  "그런 소문 내는 놈들 있으면 모조리 해고시켜! 이
  실장도 알다시피 우리 회장님은 노랭이에  가까울 만
  큼 인색한 양반이었어.
  그 양반이 내가 영화배우 할 때 선물한 3부 다이아
  반지가 최고의 사치였다. 그런 양반이  3억짜리 다이
  아 반지를 끼고 있었다는 것이 말이나 돼?"
  장숙영의 기세가  등등하자 이진우가  입을 다물었
  다.
  최 비서는 손으로 입을 가리고  하품을 했다. 벌써
  자정이 지나 있었다.
  "최 비서는 내려가서 자."
  장숙영이 최 비서를 흘겨보며 말했다. 그는 장숙영
  의 이종사촌 동생이었다.
  "예."
  최 비서가 기다렸다는 듯이  자리에서 일어나 고개
  를 꾸벅 숙여 보이고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잠시 대화가 끊겼다. 두 사람으로  창 밖으로 시선
  을 던지고 희끗희끗 날리는 빗발만  우두커니 응시하
  고 있었다.
  "가정부는 어떻게 하기로 했어?"
  "공갈협박죄로 집어넣겠다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물러나겠대?"
  "한 천만원쯤 집어주면 물러날 눈치였습니다."
  "그저 돈이군"
  ""
  "돈에 욕심을 부리면 돈 때문에 죽게 돼."
  장숙영이 소파에 머리를 기대고 눈을 감았다. 장숙
  영에게도 조회장의 무덤이 파헤쳐지고 손가락을 잘라
  간 것이 몹시 충격적인 모양이었다.
  "여형사가 만만치 않아."
  장숙영이 중얼거리듯이 말했다.
  "이 사건에 흥미를 느끼고 있는 눈치였어"
  "그래도 여자인데요? 수사엔 한계가 있을 겁니다."
  "여자의 관찰은 무서운 데가  있어. 게다가 계급이
  경위래"
  "경위요?"
  "경찰관이 경위까지  승진하기도 쉬운  게 아니야.
  더구나 그 나이의 여자가 말이야 사건 해걸을 많
  이 해서 특진을 한 거야.이 사건에서 손을 떼게 할
  까요?"
  "어떻게?"
  "통상적인 방법 있지 않습니까?"
  "뇌물?"
  "예."
  "어림없는 소리 마.  괜히 의심만 더  받아 이
  실장은 가정부 일이나 빨리 매듭져.  내가 그런 데까
  지 신경을 써야 돼?"
  "죄송합니다.
  "답답해, 모두가"
  "이번 주 안으로 매듭짓겠습니다."
  "그래, 나도 좀 평화롭게 살게 해 줘."
  "예."
  이진우는 짧게 끊어 대답하고 브랜디 잔을 비웠다.
  그리고는 장숙영의 뒤로 돌아가 어깨를  주무르기 시
  작했다.
  "아, 시원해"
  장숙영이 눈을 게슴츠레하게 뜨고 이진우를 올려다
  보았다. 장숙영의 눈에서  또 색기가  요동치고 있었
  다.
  "이혼은 언제쯤 할 거야?"
  "바로 하겠습니다."
  "딸은 어떻게 하구?"
  "유리는 제가 데리고 있을까 합니다만 사모님 의향
  을 따르겠습니다."
  "유리는 내가 키워두 상관 없어."
  "그렇게 해 주신다면 전 더 바랄 게 없겠습니다."
  "위자료는 얼마나 줄 거야?"
  "그건 아직 생각해 보지 못했습니다."
  "그 문제는 이 실장이 알아서 해."
  "예."
  이진우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거리고 장숙영의 어깨
  에서 가슴으로 손을 내려뜨렸다.
  "목욕하시겠습니까?"
  이진우가 장숙영의 가슴을 어루만지며 물었다.
  "주위에 눈이 있어"
  장숙영이 낮게 속삭였다.
  "그럼?"
  "오늘은 그냥 쉬어."
  "알겠습니다."
  "미안해, 이 실장"
  "아닙니다."
  이진우가 장숙영의 가슴에서 손을  떼고 양복 상의
  를 주워 입었다.  그러자 장숙영이  자리에서 일어나
  이진우의 목에 팔을 감고 입술을 문질렀다.
  이진우가 탄 승용차가 대문  밖으로 사라지는 것을
  본 장숙영은 그제서야 2층 침실로  들어가 소복을 훌
  훌 벗어 던지고 침실 옆에 있는  욕조에 따뜻한 물을
  받기 시작했다. 비가  오고 있어서인지  절기는 벌써
  초여름인데도 몸이 으시시 떨렸다.
  (이상한 일이야!)
  조 회장의 손가락을 잘라  간 일이 장숙영으로서는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욕조에 물이 가득 차자 장숙영은 온수 꼭지를 잠그
  고 속치마를 벗었다. 그러자 농익은  40대 여자의 나
  신이 요염하게 드러났다.
  조금 살이 씬 듯싶었으나 그래도 균형 잡힌 몸매였
  다.
  장숙영은 자신의 몸매를 과시하듯  거울에 비춰 보
  았다. 천성적으로 브래지어를 싫어하는  장숙영의 커
  다란 육봉 두 개가 아직도 탐스러웠으며 아기를 낳은
  일이 없는 허리는 잘록하고 둔부는 풍만했다.
  장숙영은 넋을 잃은 듯 거울 속에  있는 자신의 몸
  을 오랫동안 들여다보았다.
  그때 침실의 전화벨이 요란하게  울렸다. 장숙영은
  화들짝 놀라 침실 쪽을 쳐다보았다.
  (이 새벽에 누구일까?)
  침실 전화 번호를  알고 있는 사람은  손가락 꼽을
  정도였다.
  그 중에 가장 빈번하게 침실로 전화를 걸어오는 사
  람은 이 실장뿐이었다.
  "여보세요."
  장숙영은 망설이다가 침실로 나와 전화를 받았다.
  "장 회장이군요."
  전화기의 목소리는 뜻밖에 젊은 여자의 것이었다.
  "누구시죠?"
  "내가 누구인지 알 필요 없어!"
  여자의 목소리는 도전적이었다.
  "그럼 용건이 뭐야?"
  "조 회장을 죽인 게 너지?"
  "도대체 무슨 소리를  하고 있는 거야?  내가 무엇
  때문에 우리 회장님을 죽여?"
  상대방에서 멈칫하는 기색이 나타났다.
  "이봐, 요구하는 게 뭐야?"
  "난 진실을 알고 싶어."
  "무슨 진실?"
  "조 회장을 죽인 범인!"
  "도대체 우리 회장님을 누가 죽였다고  그 따위 잠
  꼬대 같은 소리를  하는 거야?  회장님은 심장마비로
  돌아가셨어!"
  "난 조 회장의 엄지손가락을 가지고 있어!"
  "뭐라구?"
  "왜 내가 조  회장의 엄지손가락을  가지고 있는지
  알아? 조 회장의 엄지손가락 손톱에  범인의 피가 묻
  어 있기 때문이야!"
  수화기 저쪽에서 여자가 갑자기 소름끼치는 소리로
  웃어댔다.
  장숙영은 그 웃음소리에 다리가 후들거렸다.
  "도대체 니가 원하는 게 뭐야?"
  "조 회장을 죽인 범인!"
  "그러지 말고 회장님 손가락을 돌려 줘. 그런 짓을
  하는 것은 고인에게도 죄가 되는 거야."
  장숙영은 애원을 하기 시작했다.
  "아가씨가 원하면 충분히 보상을 해 줄께."
  "웃기지 마!"
  찰칵, 전화가 일방적으로 끊겼다. 장숙영은 수화기
  를 든 채 우두커니 창 밖을 내다보았다. 그녀의 얼굴
  이 기묘한 모양으로 뒤틀렸다. 화가 잔뜩 났을 때 습
  관적으로 생기는 버릇이었다.
  경기도 화성군  우정면 멱우리  장안지라는 이름을
  갖고 있는 저수지  둑방에 노란 개인  택시가 달려와
  멎었다. 인적이 끊겨 있는 솔밭이었다.  밤인데다 음
  산한 비까지 내리고 있어 귀신이라도 나올 것처럼 으
  시시한 곳이었다.
  사내가 택시에서 내렸다. 그는 잠시 주위를 두리번
  거려 인적이 없는 것을 확인한 뒤에  솔밭으로 가 은
  닉해 놓았던 소형 승용차를 끌고 나왔다.
  그런 다음 승용차에서 내려 택시 뒤로 가 트렁크를
  열어젖혔다.
  거기엔 여자의 시체가 피투성이로 처박혀 있었다.
  그는 여자의 시체를 끌어내 택시 앞자리에 실었다.
  여자의 시체가 늘어져 있었기 때문에 그것은 조금 힘
  이 드는 작업이었다.
  그러나 그는  침착하게 여자의  시체에 휘발유까지
  골고루 뿌린뒤 성냥을 그어서 던졌다.  이내 펑 소리
  와 함께 불길이 치솟았다.
  사내는 빠르게 승용차에 탄  뒤 악셀레이터를 힘껏
  밟았다. 이내 승용차가 어둠 속으로 질풍처럼 달려가
  기 시작하였다.
       6. 사창가의 소녀
  날씨가 화창했다. 강화읍에서 좌측길로  빠지자 이
  내 치렁치렁 늘어진 수양버들이 사열받는 군인들처럼
  두 줄로 가지런히 늘어서 있었다.  들에는 얼추 모내
  기가 끝난 곳도  있었고 이제서 써레질을  하는 곳도
  있었다. 그러나 들은 온통 산뜻한 연두빛으로 반짝이
  고있었다.
  유경은 시야를  스쳐가는 목가적인  풍경이 흡족해
  카세트에 테이프를 밀어넣었다. 그러자  남미의 로맨
  틱한 사운드와 함께 [베사메무쵸]가 흘러나오기 시작
  했다. 남미의 전통 탱고 음악이었다.
  베사메 베사메 무쵸
  고요한 그날 밤 리라꽃 지던 밤에
  유경은 흥겹게 노래를 따라 부르기 시작했다.
  베사메 베사메 무쵸
  리라꽃 향기를 나에게 전해 다오
  베사메 무쵸야
  리라꽃 같이 귀여운 아가씨
  베사메 무쵸야
  그대는 외로운 산타 마리아
  베사메 베사메 무쵸
  고요한 그날 밤 리라꽃 지던 밤에
  베사메 무쵸야
  리라꽃 향기를 나에게 전해 다오
  베사메 베사메 무쵸
  그대는 정열에 불타는 시뇨리타
  베사메 무쵸야
  십자성 빛나는 남국의 그날 밤에
  둘이서 속삭이던 사랑을 잊었나요
  [베사메 무쵸]가 끝나자  [아마다미야]가 흘러나오
  기 시작했다.
  유경은 그  노래도 따라  부르려다가 강화경찰서의
  정 형사가 오른쪽으로 손짓을 해 재빨리 국도에서 샛
  길로 핸들을 꺾었다.
  "여기가 찬우물입니다."
  "찬우물이요?"
  "약수터로 유명한 곳인데 물 한  그릇 마시고 가지
  요."
  "그럴까요?"
  유경은 정 형사의 제안에 미소를 짓고 차를 약수터
  앞에 세웠다. 찬우물 약수라고 이정표가 세워져 있는
  조그만 우물에는 벌써 사람들이 물을 마시기 위해 줄
  을 지어 서 있었다.
  "꽤 유명한 약수터인 모양이죠?"
  유경은 줄 뒤에 서서 차례를 기다리며 정 형사에게
  물었다.
  "용범이와 양순이가 나무하고 산나물  뜯다가 마신
  샘물이요."
  정 형사가 빙그레 웃었다.
  "용범이와 양순이요?"
  "강화 도령 말입니다. 나중에  철종 임금이 되었다
  가 젊은 나이에 죽지요."
  "비운의 임금님 말씀이군요. 그  분이 여기 출신예
  요?"
  "여기서 농사짓고 나무 하고 살았답니다. 강화읍에
  는 철종 대왕이 살았던 집도 있습니다."
  "양순이는 누구예요?"
  "요즈음 말로 하면 철종 대왕이 사랑하던 여인입니
  다."
  정 형사가 전설이라도 더듬는 듯 눈길을 먼 산으로
  던졌다. 이내 차례가 왔다. 유경이  작은 표주박으로
  물을 떠서 마시자  목이 시원했다.  물맛은 산뜻하고
  깨끗했다.
  "어때요?"
  정 형사도 한 표주박을 떠서 마신  뒤 유경에게 물
  었다.
  "아주 좋아요."
  유경이 싱그럽게 미소를 그렸다.
  김숙자의 집은 강화읍 내가면 외포리에 있었다. 찬
  우물 고개에서 20분쯤 소요되는 거리였다.
  "계십니까?"
  정 형사가 김숙자의 집을 찾은 것은 외포리에 도착
  한 지 10분도 되지 않아서였다.  김숙자의 집은 황청
  리 쪽 길가에 있는 단층 스레트 집이었다.
  "누구세요?"
  이내 젊은 여자가 슬리퍼를 끌고 나와 대문을 열었
  다. 산달이 가까운 듯한 임산부였다.
  "경찰에서 나왔습니다."
  "경찰이요?"
  여자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는 정 형사와 유경을 번
  갈아 쳐다보았다.
  "김숙자양하고는 어떻게 되십니까?"
  "제 시누예요."
  "집에 어른들 계십니까?"
  "일하러 나가셨어요."
  "일이요?"
  "오늘 모를 내요."
  정 형사가 난처한 듯이 유경을 쳐다보았다. 임산부
  에게 김숙자의 죽음을 알려도 좋으냐는  듯한 뜻이었
  다.
  "모를 내는 곳이 어디예요?"
  "왜 그러시는데요?"
  "사실은 김숙자양이 죽었습니다."
  "에그머니!"
  여자가 놀라서 외마디 비명을 질렀다.
  "집에는 아무도 안 계십니까?"
  "네."
  "그럼 모를 내는 논 좀 가르쳐 주십시오."
  "차가 있으니까 차에 타시고."
  정 형사가 여자를 유경의 차로  안내해 태웠다. 유
  경은 핸들을잡고 여자가 손가락으로 가리켜  주는 길
  로 차를 몰았다.
  김숙자의 부모가 모내기를 하고  있는 논은 외포리
  입구의 벌판이었다. 여자가 논둑에서  소리를 지르자
  모를 꽂고 있던 젊은 사내와 초로의  사내가 모를 내
  다 말고 논둑으로 나왔다.
  "김숙자양이 죽었습니다."
  유경은 정 형사와 함께 먼저 김숙자의 부친에게 위
  로의 말을 건넨 뒤 김숙자의  죽음을 알렸다. 그러나
  그들은 너무나 뜻밖의  소식이어서인지 한동안  입을
  열지 못하고 있었다.
  "어, 어떻게?"
  "그저께 밤 그러니가 비가 많이  오던 밤 택시
  안에서 누군가에게 살해되었습니다."
  "택시 안에서요?"
  젊은 사내가 비로소  입을 열었다.  그는 임산부의
  남편인 듯 싶었다.
  "뒤통수에 돌로 얻어맞은 듯한 상처가 있었고 범인
  이 택시에불을 질러 택시가 거의 다 탔습니다"
  유경은 말끝을 흐렸다. 갑가기 초로의 사내 얼굴에
  서 굵은 눈물이 흘러내리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유경
  은 고개를 돌렸다. 언제나 그렇지만 가족이 죽었다는
  사실을 통고해 주는  일만큼 난처한  것이또 없었다.
  게다가 김숙자의 시체는 까맣게 타서  참혹하기 짝이
  없었다.
  다행히 쏟아지는 비 때문에 불길이 바로 꺼져 김숙
  자의 손 하나가 온전하게 남아 있었고  그 손으로 지
  문을 찍어 치안본부 컴퓨터로 피해자  신원을 밝혀냈
  던 것이다.
  그 나머지에 대해서는 아무 것도  알 수가 없었다.
  택시는 도난차량이었고 범인의 지문이나 단서는 하나
  도 남아 있지 않았다. 뒤트렁크의 낭자한 핏자국으로
  범인이 김숙자를 다른 곳에서 살해한 뒤 경기도 화성
  까지 유기했으리라는 짐작만 할 뿐이었다.
  "우리 애가 확실한가요?"
  초로의 사내가 침통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지문 대조 결과이니까 확실합니다."
  "우리 애는 어디에 있습니까?"
  "국립과학수사연구소에 있습니다.  검시가 끝나면
  보실 수 있습니다."
  "그럼 우리 애가 아닌지 확인도 할 수 없습니까?"
  초로의 사내가 울음이 섞인  떨리는 음성으로 물었
  다.
  "오늘 중으로 연락이 올  겁니다. 그것보다도 범인
  을 검거하게 협조를 해 주십시오. 우리는 김숙자양에
  대해서 아무 것도 아는 게  없습니다. 직장이 어디인
  지 무슨 일을 하고 있었는지,  어떤 사람들과 친했는
  지 그런 것들을 알지 못하면 수사를  할 수가 없
  습니다."
  임산부는 벌써 돌아서서 소리 죽여 울고 있었다.
  "김숙자양은 언제 서울에 올라갔습니까?"
  "3년 전에요."
  젊은 사내가 입술을 깨물고 서 있다가 대답했다.
  "최근엔 어디에 있었습니까?"
  "안암동이라고 했습니다."
  "공장인가요?"
  "가정집인 것 같았습니다."
  "가정집이면?"
  "숙자 말로는 가정부로 있다고 했습니다."
  "어느 집인지는 모릅니까?"
  "예, 집을 가르쳐 주지 않아서"
  "전화번호는요?"
  "모릅니다."
  젊은 사내가 고개를 흔들었다. 그도 차츰차츰 눈자
  위가 붉어지고 있었다.
  "그 집을 알 수 있는 방법이 있을까요?"
  "연희는 알지 모르겠어요."
  이번엔 임산부가  눈물이 글썽한  눈으로 유경에게
  말했다.
  "연희요?"
  "우리 아가씨와 서울에 같이 있던 아가씨예요."
  "그 아가씨는 어디 가야 만날 수 있죠?"
  "영등포에 있다는 얘기를 들었어요."
  "영등포 어디요?"
  "영등포 시장이라고 했는데"
  임산부가 주저주저하면서 입을 열었다.
  "영등포 시장 어디인지는 몰라요?"
  "네."
  "연희라는 아가씨 사진 있어요?"
  "집에 있을 거예요."
  "그럼 한 장만 빌려 주십시오."
  유경은 막막한 표정만 짓고 있는 그들에게 명함 한
  장을 건네준 뒤 다시 임산부를 데리고 김숙자의 집으
  로 돌아왔다. 임산부가  오래 걸리지  않아 김숙자의
  사진 몇 장과 연희라는 아가씨의 사진을 찾아 가지고
  나왔다.
  "이쪽이 우리 아가씨예요."
  김숙자는 살이 뚱뚱하게 찐  아가씨였고 연희(최연
  희)는 제법 예쁘장하게 생긴 아가씨였다.
  "저 우리 아가씨는 영등포에 있는 사창가에 있
  었대요."
  "사창가?"
  "영등포 시장 있는 곳에 그런 집들이 많대요."
  "어디서 그 얘기를 들었지요."
  "오빠가 한 번 찾아간 일이 있었어요. 허탕을 치고
  돌아왔지만"
  "알겠습니다."
  유경은 인사를 하고 정 형사와 함께  그 집을 물러
  나왔다.
  "서울 시경은 왜 이 사건에 개입을 했습니까?"
  강화읍으로 돌아오면서 정 형사가  궁금해 하는 낯
  빛으로 유경에게 물었다.
  "보통 살인사건하고는 다르기 때문예요."
  "어떤 점이요?"
  "살해한 뒤에 불을  질러 증거를  남기지 않으려고
  한 점이 그래요. 이건 계획적이고 연쇄살인사건의 서
  막일지도 몰라요."
  "그럴 가능성이 있겠군요."
  정 형사가 고개를 끄덕거렸다.
  유경은 정 형사를 강화읍에  내려주고 영등포를 향
  해 힘껏 액셀레이터를 밟았다.
  김숙자의 치명적인 사인은 두개골 파열이었고 몸이
  까맣게 타버려 얼굴조차 알아볼 수가 없었다. 전문적
  인 범죄 집단이나 계획적인 살인 음모에 의한 소행이
  분명했다. 그리고 한낱 예감에  불과했지만 김숙자의
  살해가 조일제 회장의 파묘 사건과  관련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유경이 영등포 시장에 도착한 것은 점심 때가 조금
  못 되어서였다. 유경은  관할 파출소를  찾아가 수사
  협조를 요청하고 시경에도 지원을  요구했다. 그러나
  이틀이 지나도 시경 지원팀과 관할파출소의 순경들은
  최연희와 김숙자에 대해서 아무 것도  알아내지 못하
  고 있었다.
  (이렇게 하다가는 한 달이 걸려도 못 찾겠군)
  아무래도 시장과 영등포역 일대의 사창가를 장악하
  고 있는 깡패들을 이용하는 것이  수월할 것 같았다.
  그러나 관할 파출소에는 사창가를 지배하는 깡패들의
  계보조차 파악되어 있지 않았다.
  (일반 업무로도 바쁘겠지)
  실망스러운 일이었으나 유경은 스스로 찾아 나서는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사창가와 깡패 조직은 언제
  나 불가분의 관계를 갖고 있었다.
  유경은 좁은 골목으로 들어섰다. 추녀가 낮은 집들
  이 이마를 맞대고 다닥다닥 붙어 있었다.
  (어디 한 군데 부숴 버려야 한 텐데)
  골목은 미로처럼 여러 갈래로 뻗어 있었다. 밤이면
  짙은 화장을 한 여자들이 큰 길까지 진출하는 적선지
  대였다. 청소년 출입을 금지한다는  관할 경찰서장의
  경고가 씌어 있는 팻말도 눈에 띄었다.
  왼쪽 골목으로 들어섰다. 시간이 이른데도 몇몇 아
  가씨들이 껌을 질겅길겅 씹으며 골목에서 사성거리고
  있었다. 모두들 무릎이  허옇게 드러난  짧은 치마를
  입고 있었다.
  유경은 그들을 지나쳐 사창가 골목을 한 바퀴 돌았
  다. 그러나 그렇게 해서 최연희를  찾는다는 것은 불
  가능한 일이었다.
  "놀다 가세요."
  그때 유경의 뒤에서 호객을 하는 아가씨의 앳된 목
  소리가 들려왔다. 유경이 고개를  돌리자 청스커트와
  흰 티셔츠를 입은 아가씨가 안경잡이  사내와 실갱이
  를 하고 있는 것이 보였다.
  "바쁘다니가 왜 이래?"
  "바쁘면 그 짓도 못하나?"
  아가씨는 안경잡이 사내의 팔에  찰싹 달라붙어 있
  었다.
  "서비스 잘해 줄께."
  "다리 쩍 벌리고 껌이나 길겅질겅 씹으면서"
  "난 안 그래. 놀아보면 알잖아?"
  "돈 없어."
  "싸게 해 줄께."
  "얼마?"
  "만원."
  "관둬!"
  "그럼 오천원만 내, 응?"
  "사람 약하게 만드네."
  안경잡이 사내가 못 이기는  체하고 아가씨의 팔에
  이끌려 골목으로 걸어 들어갔다.
  유경은 천천히 그들의 뒤를 따라갔다. 그들은 어느
  2층집 계단으로 올라가고 있었다.
  유경이 2층으로 올라가자 그들은  어디로 사라졌는
  지 보이지 않았다. 여인숙처럼 방들만 다닥다닥 붙어
  있었다.
  유경은 다시 계단을  내려왔다. 계단  옆의 대문을
  열자 어느 방에선가  여자의 소리 죽여  우는 소리가
  들려왔다. 유경은 천천히 여자의  울음소리가 들리는
  방으로 걸어갔다.
  (내 그럴 줄 알았어!)
  여자의 울음소리가 들리는 방은  건물의 맨 끝방이
  었다. 유경이 가까이 가자 우락부락한 사내들이 여자
  하나를 꿇어앉혀 놓고 머리를 쥐어박고 있었다. 날씨
  가 더워서인지 문은 열려 있었다.
  "실례 좀 합시다."
  유경은 건들대며  사내들을 꼬니보았다.  사내들이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으로 유경을  물끄러미 쳐다보고
  있었다.
  "뭐야?"
  네모 턱의 사내가 부리부리한  눈으로 유경을 쏘아
  보았다.
  "사람 좀 찾으러 왔어!"
  유경도 반말로 대꾸했다.
  "다른 데 가서 알아봐!"
  "여기 가서 알아보라던데?"
  "뭐야? 어떤 놈이 그딴 소릴 해?"
  "내가. 왜 뭐가 잘못 됐어?"
  유경은 턱을 꼿꼿이 들고 사내들의 약을 올렸다.
  "최연희라는 아가씨만 찾으면  조용히 사라지겠어.
  나도 바쁜 몸이니까"
  유경은 최연희의 복사한 사진을 방바닥에 던졌다.
  "아니 이게 보자보자 하니까!"
  "사진이나 봐 둬!"
  "건방진 수작 하지 마! 여기가 어딘 줄 알고?"
  "날씨가 덥더니 쥐약을 먹었나?"
  사내들이 낄낄대며 좁고 옹색한 마당으로 몰려나왔
  다.
  "야! 너 어디서 굴러 먹던 년이야?"
  네모 턱이 유경의  멱살을 잡으려고 손을  뻗어 왔
  다. 유경은 재빨리 그 손을 피하고 네모 턱의 아랫배
  를 무릎으로 올려찼다. 그러자 네모 턱이 어이쿠, 하
  는 소리와 함께 고꾸라져 왔다.
  유경은 네모 턱의 등을 힘껏 밟았다.
  "아쭈, 이거 한 가닥 하는데?"
  "계집년이 해봤자지!"
  사내들이 유경을 향해 우르르  달려들었다. 유경은
  몸을 풀 듯이 가볍게 움직이며 사내들을 주먹으로 후
  려쳤다. 조금쯤 소란을 피워도 상관이 없으리라고 생
  각했다. 어차피 기생충처럼  살고 있는  놈들이었다.
  이내 사내들이 좁은 마당에 나뒹굴었다.
  "너희들은 내 상대가 아니야!"
  유경은 쓴웃음이 나왔다. 그러나  그들은 여자에게
  당한 것이 믿어지지 않는지 다시 일어나 달려들었다.
  (안 되겠군!)
  "유경은 달려드는 사내 하나를  공중으로 튀어오르
  며 턱을 돌려차버렸다. 그러자 사내가 피화살을 뿜으
  며 시멘트 바닥에 나동그라졌다.  비명소리조차 없었
  다.
  사내들이 슬금슬금 꽁무니를 빼기 시작했다.
  "왕초 데리고 와!"
  유경은 사내들의 등에다 소리를 버럭 질렀다. 그새
  여자는 어디로 갔는지 보이지 않았다.
  유경은 그들의 방에 들어가 벌렁  누웠다. 방 안에
  서 시지근하게 시궁창 썩는 냄새가 풍겨왔다.
  유경은 눈음 질끈 감았다. 유경이 그들에게 도전적
  인 행동을 취한 것은 그들의 힘을  빌려 최연희를 찾
  기 위해 의도적으로 저지른 일이었다. 그들에게 유경
  이 형사라는 것을 밝히고 수사에 협조를 요청하면 튕
  겨 버릴 것은 뻔한 이치였고,  설령 수사에 협조한다
  고 해도 형식적인 협조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단시
  간 내에 최연희를 찾으려면 그들의 두목부터 손에 넣
  어야 했다.
  "이제 아무도 없어?"
  어느 방에선가 까르르 하고 웃는 앳된 아가씨의 웃
  음소리가 들려왔다.
  "왜 웃어?"
  "웃지도 못해?"
  "얘가 시래기밥만  먹었나, 왜  반말을 찍찍  내뱉
  니?"
  "그러는 아저씨는 왜 반말만 해요? 빨랑 옷이나 벗
  어요."
  "서비스 잘해 준다고 그랬지?"
  "걱정도 팔자네"
  다시 까르르 웃는 여자의  웃음소리에 이어 거칠어
  져 가는 호흡소리와 일부러 죽어가는 시늉을 하는 여
  자의 교성이 바람벽을 타고들려왔다.
  (저것이 인간의 참모습인가?)
  유경은 벌거벗은 인간의 모습을 보는 것 같아 씁쓸
  했다.
  이내 밖이 요란해 지더니 문이  덜컹 열렸다. 유경
  은 느릿느릿몸을 일으켰다.
  "아가씨가 날 보자고 했소?"
  깡마른 사내였다. 그러나 키가 훤칠하게 크고 눈매
  가 날카로웠다. 그  뒤엔 우락부락한  사내들이 잔뜩
  몰려와 있었다.
  (이 치가 두목인 모양이군)
  유경은 그 사내를 빠르게  살피며 고개를 끄덕거렸
  다.
  "용건은?"
  "사람을 찾고 있어요."
  "어디서 왔소?"
  "먼저 대결부터 하는 게 순서일 것 같은데"
  "구역을 확장하러 나왔소?"
  사내의 눈빛이 파랗게 불꽃을 튕겼다. 싸늘한 눈빛
  이었다.
  "글쎄"
  "설마 단독으로 온 건 아니겠지?"
  "혼자요."
  "대범하군!"
  "자신이 있으니까"
  "어느 파요?"
  "알 거 없소."
  "도도하시군"
  깡마른 사내가 피식 웃음을 흘렸다.
  "따라 오시오."
  유경은 방을 나와 사내들의  뒤를 껄렁대고 따라갔
  다. 그 방에서얼마 떨어지지 않은 건물의 지하실이었
  다. 겉보기보다 상당히 넓은 지하실엔 쇠파이프와 각
  목이 어지럽게 널려 있었고 한쪽 구석엔 여자들 둘이
  꽁꽁 묶여서 웅크리고 앉아 있었다.
  (납치당한 여자들인 모양이군!)
  유경은 미간을 찌푸렸다.
  "난 사무라이 박이라고 합니다. 일본도를 좋아하는
  데 아가씨가 허락한다면 일본도를 사용하겠소."
  사무라이 박이 빙그레 웃었다.
  "좋아요."
  "아가씨 성함은?"
  "한유경예요."
  "좋은 이름이군."
  사내 하나가 사무라이 박에게 헝겊에 감겨 있는 긴
  칼을 넘겨주었다. 일본도였다.
  사무라이 박이 헝겊을 풀자 날이 파랗게 선 일본도
  가 모습을 드러냈다. 신검이었다.
  유경은 등줄기에 땀이 솟는 것을 의식했다.
  "후회는 하지 마시오!"
  사무라이 박이 빙그레 웃더니  일본도를 두 손으로
  잡고 어깨 높이에서 유경을 향해 일자로 겨누었다.
  (기마검법!)
  유경은 재빨리 한 발을 뒤로 내딛고 왼손 주먹으로
  가슴을 보호한 뒤 오른손 주먹으로 일본도보다 한 뼘
  쯤 낮게 뻗었다. 방어와  공격을 동시에 할  수 있는
  자세였다.
  "먼저 공격하시오."
  "먼저 하세요."
  "그럼"
  사무라이 박이 왼쪽 발을  조심스럽게 옆으로 끌었
  다. 유경은 천천히 그의 반대쪽으로 발을 끌었다.
  "핫!"
  이내 사무라이 박의 입에서  날카로운 기합성이 터
  져나오면서 일본도가 허공에  반원을 그리고  유경의
  옆구리를 베어 왔다.
  "얍!"
  유경도 힘차게 일성을 토하며  일본도를 피하고 오
  른손 정권을 힘껏 내질렀다.
  (멋진 검법이군)
  유경은 내심 사무라이 박의 칼솜씨에 탄복했다.
  사무라이 박이 이번에는 일본도를 머리 위로 치켜올
  렸다.
  (기초는 제대로 배웠어)
  유경은 그렇게 생각했다.  사무라이 박이  다시 핫!
  하는 기합을 터뜨리는  것과 동시에 일본도가  유경의
  머리를 가를 듯이 내려오고, 유경이 그것을 피하자 재
  빨리 방향을 바꾸어 가슴을 찔러 왔다. 유경은 빠르게
  몸을 활처럼 휘었다. 그러자 일본도의 칼 끝이 가슴을
  스치고 지나갔다.
  (기가 없어)
  유경은 재빨리 그 점을  간파했다. 그것은 사무라이
  박이 정신이 해이해져 바른 수련을 하고 있지  않다는
  증거였다.
  "핫!"
  사무라이 박이 연속적인 공격을 해 왔다. 빠르고 정
  확한 솜씨였다. 유경은 춤을  추듯이 경쾌하게 움직이
  며 사무라이 박의 일본도를  피했다. 그리고는 공중에
  서 위로 몰아 가볍게 내려섰다. 그러자 사무라이 박의
  일본도가 유경의 목을 노리고 쉿 하는 바람소리를  일
  으키며 날아왔다.
  "얍!"
  유경은 다시 허공으로 붕 떠올라 공중회전을 한  뒤
  에 사무라이 박의 왼쪽 어깨를 살짝 밟고 지하실 바닥
  에 내려섰다.
  "솜씨가 놀랍소!"
  사무라이 박이 일본도를 공격해 오려다가  멈칫하고
  말했다.
  "댁도 보통이 아니요."
  유경이 조용히 대답했다.
  "어릴 때부터 연마한 솜씨 같은데"
  "돌아가신 아버지에게 배웠어요."
  "무술의 이름은?"
  "가내 무술이라 이름이 없어요."
  "그만 합시다."
  "좋아요."
  사무라이 박이 일본도를 거두자 유경도 주먹을 풀었
  다.
  "아가씨가 원하는  여자는 우리  애들이 찾아올  거
  요."
  "벌써 사람을 시켰군요."
  "그렇소. 무슨 일을 하고 있소?"
  "경찰예요."
  "그럼 여형사?"
  "그래요."
  "대단한 솜씨입니다. 예사로운 분이  아니라고 생각
  했는데"
  사무라이 박이 조용히 미소를  지었다. 하얀 치열이
  고르게 드러나 보기에 좋았다.
  "저 두 아가씨는 납치되어 온 아가씨죠?"
  "예."
  "이런 일을 하는 것이 사회악이라는 걸 모르시진 않
  을 텐데요."
  "사람마다 사는 방법이 다르니까요."
  "내가 데려가겠다면 어떻게 하시겠어요?"
  "어쩔 수 없지요. 공무를 집행하는 분이니까요"
  "고마워요."
  사무라이 박이 눈짓을 하자 우락부락한 사내들이 여
  자들을 풀어서 유경 앞으로 데리고 왔다. 여자들은 이
  제 겨우 17, 8세 정도 되어 보이는 앳된 소녀들이었다.
  벌써 상당히 매를 맞았는지 군데군데 피멍이 들어  있
  었다.
  이진우의 집에는 부인  유혜인과 딸 유리가  거실에
  앉아서 바둑을두고 있었다.
  유경은 가정부 김숙자가 살해당한 경위와  영등포에
  서 김숙자의 친구 최연희를 통해 김숙자가 이 집에 가
  정부로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되어 찾아왔다고 유혜인에
  게 간단히 설명했다. 유혜인은  잠시 김숙자의 죽음이
  믿어지지 않는지 망연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범인은 누구예요?"
  "지금 수사 중에 있습니다."
  "용의자라도 찾았나요?"
  "전혀"
  "좀 앉으세요."
  유혜인이 유경에게 소파를  권한 뒤 주방에  들어가
  주스 두 잔을 내왔다. 오렌지 주스였다.
  "김숙자는 이 댁에서 가정부로 일하고 있었죠?"
  "예."
  "사건이 발생하던 날밤, 그러니까  그저께 밤이
  되겠죠. 김숙자는 몇 시에 집을 나갔어요?"
  "저녁 설겆이가 끝났을  때니까 8시쯤 되었을  거예
  요."
  유혜인이 낮게 한숨을 내쉬었다. 눈 가에 어두운 그
  늘이 깃들어 있었으나 은은한 향기가 풍겨질 것  같은
  그런 분위기의 여자였다.
  옷차림은 물방울  무늬의 남빛  원피스였다. 반소매
  아래 드러난 맨살이 희고 매끄러웠다.
  "어디로 갔는지 알고 계십니까?"
  "상수라는 시골 오빠에게 갔을 거예요. 안암동 산동
  네에 방을얻어 사는 미장공예요."
  "친오빠가 아니죠?"
  "네, 애인예요."
  유혜인이 빠르게 말했다.
  "가출 신고를 냈습니까?"
  "들어오지 않은 지 이틀밖에 되지 않아서 내지 않았
  어요."
  "그럼 찾아보기는 했나요?"
  "상수에게 가  봤는데 그날  밤 열두시쯤  돌아갔대
  요."
  "상수는 어떤 청년이죠?"
  "무슨 뜻예요?"
  "성실한 청년이었느냐, 아니면 질이  나쁜 청년이었
  느냐 그런 말씀입니다."
  "글쎄요"
  유혜인이 모호한 표정을 지었다.
  "숙자는 어떻게 죽었어요?"
  "두개골 파열이 치명적인 사망 원인이고 경기도  화
  성군까지 끌고가 시체를 불에 태웠습니다."
  "끔찍하군요."
  유혜인이 몸서리를 쳤다.
  "혹시 짚이는 사람이 없습니까? 김숙자를 살해할 만
  한"
  "모르겠어요."
  "김숙자와 삼각 관계에 있는 남자는 없습니까?"
  유혜인이 망설이는  듯하다가 없어요,  하고 고개를
  흔들었다.
  "부군께서는 어떤 일을 하고 계시죠?"
  "남편이요?"
  "예."
  "왜, 제 남편이 범인인가요?"
  "아닙니다. 참고로 알아두려는 것뿐입니다."
  "성일 그룹에 다니고 있어요."
  여자가 방어적인 자세로 말했다.
  "직위는?"
  "종합기획실장예요."
  "그럼 이진우씨?"
  "알고 계세요?"
  여자가 놀라서 반문했다.
  "김숙자가 살해되던 날 밤 장숙영 회장댁에서 뵈었
  습니다. 조일제 전회장 파묘 사건을 수사하러 갔다가
  비서들과 대책회의를 하고 있는 이진우씨를 만났었지
  요. 아마 그날 늦게 귀가하셨지요?"
  "새벽에 귀가했어요."
  유경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상수라는 청년이 있는 곳 좀 가르쳐 주세요."
  "네."
  유혜인이 안으로 들어가더니 원피스에 벨트를 매고
  스타킹을 신고 나왔다. 그러자 유혜인의 몸매가 한결
  더 돋보였다.
  (아무렇게나  옷을  입었는데도  저렇게 아름답다
  니!)
  유혜인은 뛰어난 몸매의  여자였다. 오상수는  일을
  나갔는지 방에 없었다. 유경은 유혜인을 돌려 보내고
  오상수가 세들어 사는 방이있는 골목에서부터 주택가
  입구까지 천천히 걸어 내려와 보았다.
  이미 이틀이나 지나 버렸지만 범인이 떨어뜨렸을지
  도 모를 단서나 피해자 유류품을 찾기 위해서였다.
  (쇠망치로 뒤통수를  내려쳤으며  가져갔을 것이고
  돌멩이로 때렸으면 이 근처에 버렸을 거야!)
  범인은 택시까지 훔쳐서 범행에 이용했으므로 택시
  가 들어올 수  있는 주택가 입구가  범행 현장이었을
  가능성이 유력했다.
  주택가 진입로는 시멘트로 포장되어 있었다. 그러나
  흉기로 사용했을 만한 돌멩이는 눈에 띄지 않았고 시
  멘트 벽돌 한 장이 길바닥에 버려져 있었다.
  (핏자국이 없어.)
  유경은 벽돌을 들여다보면서 실망감을 느꼈다. 설령
  그 벽돌에 피가 묻었었다고 해도 그날  밤 비가 왔기
  때문에 씻겨 내려갔을 것이다.
  (루미놀 시약을 뿌려 볼까?)
  유경은 그 벽돌을 종이에 싸서 차에 실었다.
  오상수가 돌아온 것은 밤 9시가 되어서였다. 유경이
  이미 오상수의 방을 샅샅이 수색하고 난 뒤의 일이었
  다.
  "운전 면허 있어요?"
  "없습니다."
  "조사하면 금방 드러나니까 기짓말하면 안 돼요."
  오상수가 운전을  하지 못한다면  범인에서 제외될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미장공인 그의 처지로 치밀하
  게 살인계획을 세우는 일도 여의치 않을  것 같은 생
  각이 들었다.
  "김숙가가 여기서 나간 것이 몇 시예요?"
  "열두시쯤 되었을 겁니다."
  "김숙자가 애인이라던데"
  "네."
  오상수가 숫기 없이 대답했다.
  "김숙자가 왜 죽었다고 생각해요?"
  "모르겠습니다."
  "그럼 김숙자를 누가  죽였는지 짐작할  수 있겠어
  요?"
  ""
  "애인인 김숙자가 죽었는데 슬프지도 않아요?"
  "사랑하지는 않았습니다."
  "무슨 소리예요?"
  "숙자는 그 집 주인 남자하구두 그런 짓을 하고 있
  었습니다."
  "그런 짓?"
  그것은 김숙자와 이진우가 육체  관계를 갖고 있다
  는 뜻이었다.
  그러나 사건이 발생하던 날  밤 이진우는 장숙영의
  집에 있었다.
  (동기는 충분한데 알리바이가 성립되는군)
  이진우가 김숙자와의 관계를 청산하기 위해 그녀를
  살해했을 가능성이 충분했다.
  "김숙가가 이진우를 협박했나?"
  "."
  "돈을 내놓지 않으면 유혜인씨에게 폭로하겠다구?"
  "예."
  오상수가 망설이다가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렇다면
  이진우가 청부살인을 저질렀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었다.
  유경은 오상수와 헤어져 수사본부로 돌아오면서 카
  폰으로 이진우를 찾아 수사본부에 출두할  것을 요구
  했다.
  (조일제 회장의 파묘 사건도 미궁에 빠지고 있는데
  김숙자 사건까지 미궁에 빠뜨릴 수는 없어!)
  이진우가 수사본부에 나타난 것은 밤 11시가 다 되
  어서였다.
  "김숙자 살해 소식 들었습니까?"
  유경은 이진우를 취조실로  불러들여 단도직입적으
  로 물었다.
  "예, 집 사람한테 들었습니다."
  "어떻게 죽었는지두요?"
  "두개골 파열 그리고 시체를 불에 테워 버렸다
  고 하더군요."
  "정확하게 알고 계시군요."
  "끔찍한 일입니다."
  "김숙자와 육체 관계를 갖고 있다고 하던데?"
  "예."
  "동기는 충분한 셈이군요. 김숙자와의 관계를  청산
  하려면 없애버리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이니까요."
  "제가 그렇게 잔인한 사람으로 보이십니까?"
  "글쎄요"
  "그렇다면 수사를 돕는 의미에서 더 상세히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한 형사님께서 저를 어떤 인간으로 평
  가하든 그것은 자유입니다만, 전  이 시대 그리고  이
  사회의 보편적인 사람의 하나입니다. 출세에 대한 욕
  망도 강하고 여자를 소유하려는 성욕도  유별난 편입
  니다. 숙자는 저를 협박했습니다. 돈올 뜯어내기 위해
  서 말입니다. 지금까지 김숙자와 오상수에게 천5백만
  원쯤 뜯겼습니다. 제 형편으로는 그렇게 많은 액수가
  아닙니다만 정리하려고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전 장숙
  영 회장과 결혼할 예정입니다."
  "조 회장님의 미망인 말씀예요?"
  "그렇습니다."
  "어떻게 그 분과?"
  유경은 차마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조 회장의 장례
  가 끝난 지이제 겨우 한 달 남짓 되었던 것이다.
  "우린 전부터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빨리 정리하
  려고 했는데 공교롭게도 일이 터진 것입니다. 설마 제
  가 살해했다고 의심하는건 아니겠죠?"
  "동기는 충분하잖아요?"
  이진우가 어처구니없다는 듯이 실소를 터뜨렸다. 유
  경도 피식웃고 말았다.
       7. 제3의 살인
  혜인은 황망히 시선을 창 밖으로 던졌다. 갑자기 눈
  물이 핑 돌아견딜 수가 없었다.
  "사랑이 없는 결혼은  무덤 속이나 마찬가지야.  더
  늦기 전에 헤어져야 해."
  남편의 말은 한 마디 한 마디가  비수가 되어 혜인
  의 가슴을 찌르고 있었다. 조만간 그런 날이 오리라는
  것을 예상하지 못한 것은 아니었으나 막상 남편의 입
  에서 그런 말이 나오자 혜인은 설움이 목울대를 타고
  올라왔다.
  "당신이 원하는 게 있으면 말해 봐."
  혜인은 눈물을 삼키기 위해 입술부터 깨물었다.
  "나도 오랫동안 생각했어. 그 동안 여러 가지로  당
  신에게 괴로움을 끼쳐 준 것은 진심으로 사과할께."
  "결국 이런 날이 왔군요."
  혜인은 쓸쓸하게 웃었다.
  "위자료 같은 것은 조금도 걱정하지 마."
  "유리는 어떻게 할 거예요?"
  "내가 데리고 갈까 해."
  "내가 키우겠어요."
  "장숙영과 합의했어. 호적에 입적시키기로"
  "유리만은 안 돼요."
  "유리의 장래를 위해서도 그게 좋아."
  "내가 키우면 유리의 장래가 어떻게 되기에요?"
  "그럼 유리를 내 호적에 입적시켜  놓을 테니까 키
  우는 건 당신이 키워"
  "번거롭게 뭣하러 그래요?"
  "그래야 당신이 자유로워져."
  "무슨 뜻예요?"
  "새 출발할 때 유리가 방해되는 수도 있어. 그때 유
  리를 나에게 보내"
  "자상하군요."
  "내일이라도 수속 밟을까?"
  "좋을 대로 하세요."
  "우리는 곧바로 재혼신고를 하게 될 거야. 식은  나
  중에 올리더라도"
  "좋으시겠군요."
  "정말 미안해."
  "한 가지만 묻겠어요."
  "뭔데?"
  "당신 숙자 죽였어요?"
  "아니, 내가 왜 숙자를 죽여?"
  "당신이 장숙영과 결혼하는 데 방해가 되잖아요?"
  "돈으로 해결하려고 했어.  난 그렇게 잔인한  놈은
  아니야"
  "그렇다면 숙자를 죽인 사람이 누구죠?"
  "경찰이 밝혀내겠지"
  "오상수가 의심을 받고 있어요."
  "상수가 왜?"
  "그날 밤 숙자와 대판 싸웠대요."
  남편이 잠시 생각하는 표정을 지었다.
  "난 관련이 없어."
  "조일제 회장의 무덤을 파헤친  사건하고도 관련이
  없어요?"
  "없어. 난 이해할 수가 없어. 왜  그런 일이 일어났
  는지"
  "당신도 말려들고 있다는 기분을 느끼지 못해요?"
  "무슨 소리야?"
  "누군가가 이상한 짓을 저지르고 있어요."
  "지금 그런 일에 신경 쓸 때가 아니야. 내일부터 수
  속 밟겠어. 이 집도 차도 당신에게 주고 평생 동안 생
  활비를 대줄께동의해?"
  "네."
  헤인은 입술을 깨물고  고개를 끄덕거렸다.  어차피
  남편하고 결혼생활을 지속할 수 없으리라는  것은 혜
  인도 각오하고 있던 터였다.
  그러나 이 젊은 나이에 이혼녀라니.
  혜인은 눈물이 주르르 쏟아져  침실로 들어오고 말
  았다. 남편에게울고 있는 모습을 보이기가 싫었다.
  이내 남편이 집을 나가는 소리가 들렸다. 혜인은 커
  튼 사이로남편이 정원을 걸어 나가 대문을 여는 것을
  보았다. 그리고 남편이 대문을 나가고 대문이 닫혀지
  자 비로소 침대에 쓰러져 소리내어 울었다.
  (내가 무엇을 잘못 했다고 이혼을 당해?)
  혜인은 남편과  장숙영을 간통죄로  고발해 버릴까
  하고도 생각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남편이 자신
  에게 돌아오리라는 보장이  없었다. 남편은  결혼하기
  전부터 이미 혜인에게서 떠나 있었던 것이다.
  (남편의 말대로 새 출발을 해야 해)
  혜인은 그런 생각도 해 보았다. 그러나 누구와 어떻
  게 새 출발을 해야 할지 막막했다. 남자들은 못 생긴
  혜인의 얼굴을 거들떠 보지도않을 것이다. 혜인은 그
  런 생각을 하다가 다시 침대에 쓰러져 울곤했다.
  허영만에게서 전화가 걸려온 것은  혜인이 우는 것
  도 지쳐 멍하니 침대에 엎드려 있을 때였다.
  "여보세요"
  혜인은 가라앉은 목소리로 전화를 받았다.
  "저 허영만입니다."
  "그런데요?"
  "괜찮으십니까?"
  "네?"
  "전화로 말씀드리긴  거북합니다만 실은  남편께서
  저희 사무실에 이혼 수속을 의뢰했습니다."
  ""
  "듣고 계십니까?"
  "네."
  혜인은 가슴이 미어지는 것 같았다. 하필이면 혜인
  의 동창생 전남편인 허영만 사무실에 이혼 수속을 의
  뢰한 남편의 저의를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남편
  이 허영만이 누구인지 모른다는 생각이빠르게 머리를
  스쳐오자 우연 치고는 너무도 공교로운  일이라는 생
  각이 들었다.
  "다른 분도 아니고 해서 정말  이혼할 의향이 있는
  지 확인하려고 전화드렸습니다. 보통 부부 싸움들 심
  하게 하고는 이혼한다고 변호사 사무실  찾아오는 일
  이 많거든요."
  "수속 밟아 주세요."
  "그럼 진심으로 이혼하실 겁니까?"
  "네."
  "아니 왜요?  이혼하면 여자가  손해를 많이  보는
  데"
  "상관하지 마세요."
  "딸은 이진우씨가 데려간다던데 동의하십니까?"
  "네."
  "아주 자유로운 몸이 되셨군요."
  "전화 끊겠어요."
  "잠깐만요."
  "왜요?"
  "저녁때 시간 좀 내실 수 있겠습니까?"
  ""
  "제가 술 한잔 사겠습니다."
  ""
  "울적할 때는 술이  최고입니다. 저도 이혼을  당해
  봐서 압니다. 그러나 혼자 사는 것이 그렇게 나쁘지도
  않더군요. 술 마시고 싶으면 술 마시고 춤추고 싶
  으면 춤추고"
  "끊겠어요."
  "이따가 다시 전화드리겠습니다."
  허영만과 통화를 끝내자 혜인은  울적한 마음이 조
  금 가셔지는 것을 느꼈다. 문득 이혼한 남자인 허영만
  을 만나는 것도 그렇게 나쁘지 않으리라는 생각이 들
  었다.
  혜인은 샤워를 하기 위해 욕탕으로 들어갔다. 찬 물
  을 시원하게 뒤집어쓰고 나면 마음이 개운해질 것 같
  았다.
  유리가 학교에서 돌아온 것은  혜인이 샤워를 끝내
  고 혼자 앉아서 커피를 끓여 마시고 있을 때였다. 유
  리를 보자 혜인은 다시 마음이 착잡해졌다.
  "엄마, 기분 안 좋아?"
  "조금."
  혜인은 씁쓸하게 웃었다. 유리에게 이혼 얘기를 해
  주어야 할지 말아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그럼 쇼핑해."
  "쇼핑?"
  "영화에서 보니까 여자들은 울적할 때 쇼핑을 하는
  거래."
  "너두 갈래?"
  "백화점?"
  "그래."
  "엄마, 나 백화점에서 수영복 사 줘."
  "벌써?"
  "친구들하고 실내 수영장 가기로 했어."
  "언제?"
  "이번 일요일."
  "그래."
  혜인은 고개를  끄덕거리며 이것이  너와의 마지막
  쇼핑이 되겠구나, 이제 너는 장숙영을 엄마라고  불러
  야 돼 하고 입 속으로 중얼거렸다. 왜 유리를 자
  신이 키우겠다고 요구하지 않았는지 혜인은  그 까닭
  을 이해할 수 없었다.
  김 박사에게서 루미놀 시약을  건네 받은 임수지는
  서둘러 아파트로 돌아왔다.  조 회장의  엄지손가락에
  루미놀 시약을 뿌려 반응을 보기 위해서였다.
  루미놀 시약은 어렵게 구한 것이었다. 김 박사가 과
  학수사연구소에 재직하는 법의학 박사로부터 얻어 온
  것인데 그는 김 박사의대학 동창이었다.
  "임수지씨!"
  수지가 아파트의 층계를  걸어 올라가  2층 복도에
  이르렀을 때였다. 낯선 사내가 복도에 서 있다가 수지
  를 불러 세웠다.
  ""
  수지는 걸음을 멈추고 낯선  사내를 힐끗 쳐다보았
  다. 그는 수지와 일면식도 없는 사람이었다.
  "임수지씨가 맞죠?"
  사내가 수지를  아래위로 훑어보며  가까이 다가왔
  다. 눈빛이 기분나쁘게 음침한 사람이었다.
  "그런데요?"
  수지는 불길한 예감이 엄습해  오는 것을 느끼면서
  낮게 대답하였다.
  "서에서 나왔습니다."
  ""
  "박 형사라고 합니다."
  수지는 비로소 사내가 말한  서가 경찰서를 줄여서
  말하는 것이라는 걸 깨닫고 가슴이 철렁했다.
  "조용히 얘기 좀 했으면 하는데"
  사내가 빠르게  주위를 살피고  앞장서라는 턱짓을
  했다. 수지는 이제는 다 틀렸구나,  하는 생각을 하면
  서 앞장서 아파트의 출입문을 열고  사내를 들어오게
  했다.
  그는 허름한 여름 잠바와 칙직한 검은색 바지를 입
  고 있었다. 어딘지 산뜻하지 못한 차림이었다.
  (박봉의 형사라 옷이 깨끗하지 못한 모양이야)
  다른 때 같았으먼 사내를 경멸했을 것이다. 그러나
  지은 죄가있는 수지는 사내보다 자신이 훨씬 더 초라
  하게 생각되었다.
  "아가씨를 찾는 데 얼마나 오래 걸렸는지 알아?"
  사내는 아파트에 들어서자마자 수지에게 눈을 부릅
  뜨고 호통쳤다. 수지는 일단 범행 사실을 부인해 봐야
  겠다고 생각했다.
  "무슨 말씀이세요?"
  "시치미뗄 거야?"
  "전 죄지은 일이 없어요."
  "조일제 회장의 무덤을 파헤치고 손가락을 잘라 왔
  잖아?"
  "그런 일 없어요!"
  "뭐야?"
  갑자기 사내의 손바닥이 수지의 뺨을 후려쳤다. 목
  장갑을 낀 손이었다. 수지는 자신도 모르게 얼굴을 감
  싸 쥐었다. 턱이 떨어져나갈 것처럼 얼얼했다.
  "왜 거짓말을 해?"
  사내의 손바닥이 또다시 수지의 뺨을 후려쳐 왔다.
  손으로 얼굴을 감싸 쥐고 있었기 때문에 사내의 손바
  닥은 수지의 손등에서 불똥을 튕겼다. 그러나 수지는
  벌렁 나자빠졌다. 사내의 손바닥이 정신이 얼얼할 정
  도로 억세었다.
  "일어나!"
  사내가 사납게 소리쳤다. 수지는 억지로 몸을 일으
  키면서 눈시울이 뜨거워져 왔다.
  (나쁜 자식!)
  수지는 손등으로 솟아나오는 눈물을 훔쳤다. 형사들
  이 사람을 마구잡이로 팬다는 것을 소문으로 들은 일
  이 있었으나 수지가 당해보기는 처음이었다.
  "조 회장 무덤 니가 파헤쳤지?"
  ""
  "왜 파헤쳤어?"
  "조 회장님 손가락이 필요했어요."
  "손가락?"
  "조 회장님은 심장마비로  죽은 게 아녜요.  누군가
  숨을 못 쉬게 입과 코를 틀어막았어요!"
  "그럼 조 회장이 살해되었단 말이야?"
  사내가 상상도 못  했딘 일이라는 듯이  눈을 크게
  떴다.
  "조 회장님 엄지손가락에 피가 묻어 있었어요. 범인
  이 조 회장님의 입과 코를 틀어막았을  때 식물 인간
  이나 다름없던 조 회장님이 범인의  팔을 움켜잡았던
  거예요. 범인이 상상도 하지 못했던 일이지만 의학적
  으로는 가능한 일예요."
  "그러니까 조 회장의 엄지손가락에 범인의 피가 묻
  어 있었단 말이지?"
  "네."
  "그럼 왜 그때 경찰에 신고하지 않았어?"
  "그렇게 되면 제가 범인으로 몰렸을 거예요."
  "왜 범인으로 몰려?"
  수지가 입을 다물었다. 사내는 수지를 힐끗 노려보
  더니 담배를 꺼내 피우기 시작했다.
  "왜 범인으로 몰리느냐고 물었어!"
  사내가 목소리를 낮추어 말했다. 그러나 여전히 위
  압적인 목소리였다.
  "전 조 회장님 전담 간호원으로 일하고 있었어요."
  "그런데?"
  "그날 밤 깜빡 잠이 들었다가 깨어 보니까 조 회장
  님 침대에 제가 누워 있었어요."
  "옷을 벗고?"
  "아녜요. 옷은 입고 있었어요. 그런데 조 회장님 손
  이 제 팬티 속에 들어와 은밀한  곳에 얹혀 있었
  어요. 조 회장님은 이미 죽어 있고"
  "조 회장은 식물 인간이나 다름없다고 그랬잖아?"
  "누군가 저에게 특수 약물을 먹이고 그렇게 만들어
  놓은 거예요."
  "이거 어지러워서 무슨 소리인지 모르겠군. 누가 왜
  그런 짓을 꾸몄지?"
  "조 회장님이 죽어서 이득을 보는 사람예요."
  "장숙영?"
  "네."
  사내가 무겁게 고개를 끄덕거렸다. 수지는 재떨이가
  없어 주방에서 빈 접시를 가지고 나와  사내 앞에 놓
  았다. 사내가 접시에 담배를 비벼 껐다.
  "그런데 장숙영은  왜  아가씨를 음모에  끌어들였
  지?"
  "조회장님의 죽음을  자연사로 위장하기  위해서예
  요."
  "어떻게?"
  "조 회장님은 겉보기에 외상은  없었지만 호흡장애
  를 일으킨 것이 분명해 보였어요. 경찰이 사인을 조사
  하게 될까봐 김 박사에게  올가미를 씌운 거예요. 김
  박사는 제가 과실로 조 회장님을 죽게  만든 것을 알
  면 부하 직원이니까 사망원인을 다르게 진단하리라고
  생각한 거죠. 내가 실수을 한 것은 김 박사의 실수나
  마찬가지니까 김  박사의 명예에도  손상이 갈  거구
  요."
  "그렇다고 그런  식으로  사망진단을 하면  어떻게
  돼?"
  "어차피 멀지 않아 죽을 노인네였어요."
  사내가 무엇을  생각하는지 잠시  생각하는 표정을
  지었다. 수지는 형사의 시선을 피해 우두커니 창 밖을
  내려다보았다.
  이제 어떻게 해야  좋을지 수지는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수지의 머리 속에 떠오르는 것은 수갑,  법원,
  감옥 그리고 사람들의 손가락질뿐이었다.
  "조 회장 손가락 어디 있어?"
  수지가 안방으로  들어가 조그마한  반지갑을 꺼내
  왔다. 반지를넣어 두는  아주 작은  상자였다. 사내가
  반지갑을 열자 엄지손가락 마디 하나가 나왔다.
  "이걸로 어떻게 하려고 그랬어?"
  "루미놀 시약을 뿌려  혈액 반응을  보려고 그랬어
  요."
  "왜?"
  "범인을 잡으려구요."
  "왜 범인을 잡으려고 했어?"
  "진실을 밝히기 위해서예요."
  "장숙영에게 협박했지?"
  "돈을 요구한 일은 없어요."
  "그럼 뭘 요구했어?"
  "조 회장님을 살해한  것을 자백하라고  했을 뿐예
  요."
  사내가 고개를 갸우뚱했다.
  "여기서 혼자 살아?"
  "네."
  "어떻게 이 아파트를 마련했어?"
  "전
셀뮈?"
  "이 아파트를 수색해야겠어."
  "왜요?"
  "그런 것까지는 알 필요 없어."
  수지는 입을 다물고 말았다. 이제는 사내의 말에 고
  분고분 따르는 수밖에 달리 도리가 없었다.
  사내는 수지가 침실로 쓰는  안방에 들어가 닥치는
  대로 뒤지기 시작했다. 장롱의 옷들을 꺼내서 팽개치
  고 서랍장에서 내복들을 꺼내 땅바닥에  마구 어질러
  놓았다.
  수지는 참담한 기분이 들었다. 아무리 형사라도 저
  럴 수가 있을까. 나는 이제 저 형사의 손에 끌려가면
  몇 년이나 감옥  생활을 해야 할까  하는 생각이
  머리 속을 스쳐오자 갑자기 눈 앞이 흐릿해졌다. 비감
  했다.
  사내는 주방과 거실, 화장실까지 샅샅이 뒤진  다음
  수지를 안방으로 불러들였다.
  "공범 있지?"
  "없어요."
  "그럼 여자 혼자서 어떻게 무덤을 파헤칠 수 있어?
  더구나 오밤중에"
  "강심제를 맞고 술을 마셨어요."
  "그래서 공포가 사라졌어?"
  "조금은요."
  "정말 혼자서 무덤을 파헤쳤어?"
  "네."
  "그 말에 책임질 수 있어?"
  "네."
  "그럼 니가 무덤을 파헤지는 걸 안 사람이 있어?"
  "아무도 없어요."
  "친구들에게 알리지도 않았어?"
  "네."
  "좋아. 그럼 벽을  향해 돌아서. 몸  수색을 해야겠
  어"
  수지는 사내가 시키는 대로 벽을 향해 돌아섰다.
  "손 올리고"
  수지는 두 손을 올려  벽을 짚었다. 그러자  사내의
  손이 빠르게 어깨에서부터 수지의 몸을 더듬어 갔다.
  "손 내려."
  수지는 손을 내렸다.
  "손 뒤로 내밀어."
  수지가 손을 뒤로 내밀었다. 그러자 사내가 빠르게
  수지의 두 손을 묶어 버렸다.
  "왜, 왜 이래요?"
  "너를 체포하는 거야."
  "체포?"
  수지는 그 말  한마디에 다리에 맥이  풀리는 것을
  느꼈다. 공연히 두 다리가 후들거리고 떨렸다. 사내가
  수지의 몸을 바로 세웠다. 그리고는 다시 앞가슴에서
  부터 더듬어 나갔다.
  수지는 질끈 눈을 감았다. 사내의 손이 뱀처럼 징그
  럽다고 생각했다. 그때 사내가 수지의 입에 무엇인가
  끈적거리는 것을 철썩 붙였다.
  (형사가 아니야!)
  수지는 눈을 부릅뜨고  사내를 쳐다보았다.  비로소
  온 몸에 소름이 꽉 끼쳐왔다.
  사내가 수지의  어깨를 움켜쥐고  침대로 잡아끌었
  다. 수지는 끌려가지 않으려고 있는 힘을 다해 버티었
  다.
  (하느님!)
  입이 테이프로 틀어막혀 소리를 지를 수가 없었다.
  "바둥거려 봤자 소용이 없어."
  격렬하게 저항을 하다가 수지가 방바닥에 나동그라
  지자 사내가 그녀의  머리카락을 움켜쥐고  잡아당겼
  다. 수지는 머리카락이 몽땅 뽑혀져 나가는 것처럼 고
  통스러웠다.
  "돼먹지 않게 왜  남의 손가락을 자르고  그래? 넌
  천벌을 받은거야"
  그를 형사로 안 것이  잘못이었다. 수지는 눈  앞이
  캄캄했다.
  "이건 경찰에 신고하지 말라는 뜻이야. 경찰에 신고
  하면 다시와서 네년을  찢어 죽이겠어  신고하지
  않으면 아무 일도 없을거구"
  사내가 하얗게 웃었다. 수지는 더욱 발버둥쳤다. 눈
  에서는 피눈물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잠자코 있어, 이년아!"
  사내의 주먹이  갑자기 수지의  가슴에 쇠망치처럼
  내려꽂혔다.
  (윽!)
  수지는 가슴이 터져나가는 것  같은 고통에 무릎을
  세웠다. 이번엔 사내의  발이 수지의  배를 짓눌렀다.
  수지는 창자가 끊어져 나가는 것 같았다.
  "반항을 하면 너만 손해야! 일어나서 침대로 가!"
  사내의 발이 수지의 둔부를 걷어찼다. 수지는 엉금
  엉금 기어서 침대로 올라갔다.
  (이럴 수는 없어!)
  사내가 수지의  스커트를 위로  걷어올리고 팬티를
  벗겨냈다. 수지는 고개를 옆으로 돌리고 눈을 감았다.
  비감했다.
  사내가 옷을 벗는 소리가 들렸다. 사내는 서두르고
  있었다. 이내 침대가 출렁하고 흔들리면서 사내가 침
  대로 올라왔다.
  (내가 살아나기만 하면 너를 반드시 죽일 거야!  이
  추악한 인간 감히 형사를 사칭하고 내 몸을 더럽
  혀? 네 놈의 눈에서도 피눈물이 나오게 할 거야!)
  수지는 팬티를 뽑아  내고 있는 사내를  향해 이를
  갈았다.
  혜인은 머리를 감고 드라이로 말리면서도 허영만을
  만날 것인가 하고 망설였다. 사실은 허영만을 만나는
  것보다 친정 식구들에게 남편과 이혼하는  일부터 알
  려야 했다. 그러나 그렇게 되면 친정식구들은 이혼을
  결사적으로 만류할 것이다. 그것은 혜인에게 이중으로
  고통을 주는 일이었다. 오히려 이혼이 완전히 끝난 뒤
  에 알리면 그러한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이다.
  머리가 웬만치 마르자 혜인은  빗질을 하고 얼굴에
  기초 화장을 하기 시작했다. 밤이라 화장이 조금 짙어
  도 상관없을 것 같았다. 파운데이션을 바르고 눈썹을
  그렸다. 눈썹 밑에는 연두색 아이섀도우를 했다. 그리
  고 입술은 진홍빛 루즈를 발랐다.
  화장이 대충 끝나자 혜인은  속옷까지 모두 갈아입
  었다. 유리와 백화점에서 쇼핑을 할 때까지도 혜인은
  허영만을 만날 생각이 추호도 없었다. 그러나 속옷을
  판매하는 내의류 코너를 지날 때 혜인은 자신도 모르
  게 걸음을 멈췄다.
  (속옷이나 몇 벌 사야지)
  왜 그런 생각을 했는지 혜인은 알 수 없었다. 다만
  마네킹에 입혀져 있는 속옷들이 그날 따라 유난히 시
  선을 끌었을 뿐이다.
  (속옷도 패션 시대라더니)
  속옷들은 색상도  다양하고 디자인도  여러 가지였
  다. 혜인은 속옷들을 고르며 새삼 세상이 발전하고 있
  는 것을 깨달았던 것이다.
  혜인은 국부만 겨우 가릴 정도로 야한 디자인의 노
  란색 팬티와 노란색  브래지어를 착용했다.  그것들은
  의외로 착용감이 좋았다.
  겉옷은 노란색 원피스를 입고  허리엔 가죽 벨트를
  맸다. 투피스로 정장을 할까 하고도 생각했으나 어딘
  지 촌스러운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다.
  약속 장소인 레스토랑 [궁전]에 발을 들여 놓자 허
  영만은 벌써 나와 있었다.
  "제가 너무 늦었어요."
  혜인은 약속 시간에 늦은 것을 먼저 사과했다.
  "아닙니다. 저도 지금 막 도착했습니다."
  허영만은 정장을 하고 있었다.
  "저녁은 어떻게 하셨습니까?"
  "아직"
  혜인이 엷게 미소를 그렸다.
  "그럼 무엇으로?"
  "전 돈까스가 좋겠어요."
  "왜 비후스테이크나 생선은 싫습니까?"
  "네, 제 입맛엔 그게 제일 좋아요."
  "아주 서민적이시군요. 그럼 저도 그걸로  하겠습니
  다."
  허영만이 웨이터에게 식사와 맥주  두 병을 주문했
  다.
  헤인은 천천히 레스토랑  내부를 둘러보았다.  호텔
  레스토랑이라 실내 장식이  호화스러웠고 웨이터들도
  옷차람이 산뜻했다.
  (좋은 레스토랑이야)
  혜인은 울적해지는 것을 느끼며 그런 생각을 했다.
  이내 맥주가 나왔다.
  "한 잔 하시겠습니까?"
  "네."
  허영만이 혜인의 잔에 맥주를 따랐다. 혜인은 허영
  만의 잔에 맥주를 따라 줄까 하다가 그만두었다. 아직
  남편 이외의 남자에게 한 번도 술을 따라 준 적이 없
  었다.
  허영만은 그런 일에 관심이 없는 듯 자기가 스스로
  따라서 반쯤 마셨다. 혜인은  한 모금을 마시고 잔을
  놓았다.
  "사무실은 잘 되세요?"
  "그저 먹고 살 만합니다. 경리 아가씨 하나만  데리
  고 하는 일이라서"
  "변호사님은요?"
  "명의만 빌리고 있는 실정입니다."
  "그럼 재판엔 참여하지 못하겠네요?"
  "브로커 노릇만 하지요."
  "어머!"
  혜인이 백치처럼 웃었다. 허영만은 울적한 표정으로
  반쯤 남은 맥주를 마저 비웠다.
  "이혼을 어떻게 그렇게 손쉽게 결정하십니까?"
  "언젠가는 헤어져야 할 형편이었어요."
  "부인께서 요구하셨습니까?"
  "아뇨."
  허영만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혜인은 시선을  돌려
  레스토랑 출입구 쪽을 쳐다보았다. 가슴이 또 타는 듯
  이 아파 왔다.
  남편이 혜인을  사랑하지 않았듯이  혜인도 남편을
  사랑하지 않았다. 유리를 낳을 때까지는 그래도 남편
  의 사랑을 얻기 위해 혜인은 모든 노력을 기울였으나
  남편에게서 그녀에게 돌아오는 것은 얼굴이 못생겼다
  는 경멸뿐이었다. 혜인은 남편에게서 그런 말을 들을
  때마다 가슴이 찢어지는 것 같았었다. 그런데도 막상
  이혼을 한다고생각하자 자신이  한없이 초라해  지는
  기분이었다.
  "잊으십시오."
  허영만이 조용히 말했다. 혜인은 무겁게 한숨을 내
  쉬었다.
  "여행도 하시고 취미 활동도 하시고 그러십시오."
  "이혼 수속은 언제 다 끝나지요?"
  "오늘 서류를 집어넣었으니까  2, 3일 안으로  끝날
  겁니다."
  "잘 됐어요."
  "위자료는 2억을 지급한다고 되어 있더군요."
  "그렇게 많이요?"
  "모르고 계셨습니까?"
  "네."
  "그럼 위자료 문제도 합의하지 않고 이혼에 동의했
  습니까?"
  "잘해 주리라고 믿고 있었어요."
  "이진우씨를 지금도 사랑하십니까?"
  "아니요."
  혜인은 고개를 흔들었다.  남편을 사랑한다는  것은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그런데도 이진우씨를 믿을 수 있습니까?"
  허영만이 이해할 수 없다는 듯이 고개를 흔들었다.
  "부부란 원래 그런 거 아녜요?"
  "지금 이혼을 하고 있는 마당이 아닙니까?"
  "그래도 한때 살을 섞고 살았었어요."
  "자기 남편을 살해하는 여자도 있는데 놀라운 일이
  군요."
  "누가 그런 끔찍한 짓을 해요? 싫으면 헤어지면 그
  만이지"
  "그런 사람들이 의외로 많습니다."
  허영만이 또 스스로 맥주를 따라 마셨다. 혜인도 맥
  주잔을 비웠다. 저녁식사는 조용히 그리고 빠르게 진
  행되었다.
  "이따금 전화를 드려도 괜찮겠습니까?"
  "이젠 혼자 사는 여자예요."
  "제가 조언 하나 드릴까요?"
  "조언이요?"
  "남자나 여자나 혼자 늦게 집에  들어갈 때가 제일
  쓸쓸합니다.
  아무도 반갑게  맞아 주는  사람이 없으니까요
  그때 술을 마시거나  춤을 추러 다니게  되면 타락의
  길로 빠집니다. 그때를 조심하십시오."
  "조심할께요."
  혜인이 쓸쓸히 웃었다.
  "낚시 좋아하십니까?"
  집으로 돌아오는 길이었다. 괜찮다고 해도 굳이 집
  까지 바래다주겠다면서 허영만이 집 앞에까지 따라와
  묻는 말이었다.
  "낚시요?"
  "전 가끔 가다 혼자서 낚시를 떠나곤 합니다.  사람
  도 사귀고 시름을 달래기도 하죠."
  혜인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낚시를 다니는 것도 얼
  핏 괜찮겠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들어와서 차 한 잔 하시겠어요?"
  혜인이 대문 앞에서 허영만을 보고 말했다. 그에게
  저녁을 얻어먹었으므로 차라도 한 잔  대접하는 것이
  인사일 것 같았다.
  "집에서요?"
  "네."
  "아직은 안 됩니다."
  "다른 뜻은 없어요."
  혜인이 재빨리 허영만의 상상이  비약하는 것을 제
  지했다.
  "공연히 이웃들의 의심을 받습니다. 이진우씨에게도
  미안하구요."
  "그럼 할 수 없죠 뭐"
  "이 근처에 찻집 없습니까?"
  "있어요."
  "그럼 거기 가서 한 잔 사십시오. 시간도 이르고 집
  에 들어가봐야 기다리는 사람도 없고"
  허영만이 발 끝으로 땅을 찼다. 고독해 보이는 모습
  이었다.
  "우리 애가 기다리고 있을 거예요."
  혜인은 미소를 지으며 거절했다.
  "그러면 다음에 얻어 마시기로 하죠."
  허영만이 소탈한 표정으로 말했다.
  "오늘 저녁 고마웠어요."
  "아닙니다. 제가 즐거웠습니다."
  혜인이 고개를  숙여 인사하자  허영만도 엉거주춤
  목례를 했다.
  유리는 비디오로 중국 무협영화를 보고 있었다. 어
  릴 때부터 유난히 중국 무협영화를  좋아하던 아이였
  다.
  "아직 안 잤구나."
  혜인은 유리에게 미안한 느낌이  들어 머리를 쓰다
  듬어 주었다.
  "응."
  "재미있니?"
  "응, 엄마도 옷 갈아입고 나와서 봐."
  유리가 TV 화면에서 시선도 떼지 않고 대꾸했다.
  "제목이 뭔데?"
  "태평공주."
  "태평공주?"
  "측천무후 속편이야."
  "그래 옷 갈아입고 나올께, 아이스크림 냉장고에 있
  는데 먹었어?"
  "응."
  혜인은 안방으로 들어가 잠옷을  갈아입고 다시 나
  왔다. 그러나 유리가 보고  있는 비디오는 별로 보고
  싶은 생각이 없어 2층의 남편 서재로 올라갔다. 여전
  히 마음이 착잡했다.
  (저 사람이 아직도!)
  창문 앞에서 담배를 꺼내 물고 불을 붙이려다가 혜
  인은 깜짝 놀랐다. 허영만이 아직도 골목에서 서성거
  리고 있었다.
  (왜 안 돌아가지?)
  혜인은 담배에 불을 붙여 연기를 폐부 깊숙이 빨아
  들이며 골목을 내려다보았다. 허영만도 골목에서 담배
  를 피우고 있었다. 고독하고 쓸쓸해 보이는 모습이었
  다.
  수지는 눈을 떴다. 그  사내는 이미 돌아가고  없었
  다. 그는 무슨 생각을 했는지 수지의 입에 붙였던 반
  창고도 떼어 주고 손도 풀어주어 그녀는 자유롭게 움
  직일 수 있었다. 그러나 수지는 꼼짝 않고 침대에 누
  워 있었다. 마치 구겨서  버린 휴지 조각처럼 그녀는
  침대위에 내팽개쳐져 있었다.
  (누굴까?)
  그녀는 그 생각에 골몰했다. 사내의 정체를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한 가지 분명하게 알 수 있는 사실은
  사내가 형사가 아니라는 것뿐이었다.
  (혹시 장숙영이 시킨 사람인가?)
  장숙영 정도의 머리가 좋은  여자라면 조일제 회장
  의 손가락을 가지고 위협하는 자신을  쉽사리 짐작했
  으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가 이름을 말하지 않았어도 장숙영은 목소리로
  도 짐작할 수 있었을 것이다.
  (손가락을 뺏겼으니 이제 어떻게 하지?)
  몸을 뺏긴 것도 억울하긴 했으나 여자의 몸으로 공
  포에 떨면서 조일제 회장의 무덤을 파헤치고 잘라 온
  손가락이었다. 그것을 뺏긴  것이 무엇보다도  억울했
  다. 그녀는 요즈음 그  손가락으로 조 회장을 살해한
  범인을 잡으려는 일에만 몰두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 실마리가 될 수 있는  손가락을 뺏긴 것
  이다. 그러나 그 사내가 조 회장의 손가락을 가져가므
  로 해서 조 회장이 계획적인 음모에 의해 살해되었다
  는 것이 더욱 뚜렷하게 입증된 셈이었다. 단지 그 사
  내가 조 회장이 살해되었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는 것
  으로 봐서는 음모자가 아니라 하수인이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손가락은 뺏겼지만 범인의 얼굴은 본 셈이야. 비록
  하수인에 지나지 않지만)
  그것만으로 위안을 삼을 수밖에 없었다. 정릉 장숙
  영의 저택을 숨어서 지키고 있으면 언젠가는 그 사내
  가 나타나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수지는 침대에서 억지로 몸을 일으켰다. 하체가 쓰
  리고 얼얼했다. 김 박사에게 호텔에서 순결을 뺏길 때
  의 느낌과는 또 달랐다.
  김 박사는 부드럽고 따뜻한  사람이었으나 그 사내
  는 야수처럼 저돌적인 사람이었다.
  (내 팔자도 기구하지)
  수지는 근처 목욕탕에서 그  사내의 흔적을 씻어내
  며 그런 생각을 하였다. 수지의 아파트는 시영 아파트
  여서 목욕탕이 없었기 때문이다.
  수지가 목욕을  끝내고 아파트로  돌아오자 은숙이
  와서 침대에누워 자고 있었다. 오이 맛사지를 하는지
  얼굴에 빠꼼한 틈도 없이 오이가 다닥다닥 붙어 있었
  다.
  수지는 은숙이 깨어나지 않도록  소리나지 않게 옷
  을 갈아입고 밖으로 나왔다. 혼자서 술에 흠뻑 취하고
  싶었다.
       8. 보이지 않는 손
  사건 현장에 들어서자 피비린내가  역하게 코를 쑤
  셨다. 유경은 안면이 있는 형사들과 인사를 나누며 미
  간을 잔뜩 찌푸렸다.
  현장은 난장판으로 어질러져 있었다. 범인이 장롱을
  뒤진데다가 형사들이 범인이 남긴 증거와  단서를 찾
  으려고 마구잡이로 여자의 옷들을 어질러  놓았기 때
  문이다.
  "왜 이렇게 늦었어?"
  면도칼 이상진 반장이 짜증스러운 기색으로 유경에
  게 신경질을 부렸다.
  성일 그룹 조일제 회장의 파묘사건, 김숙자  살인사
  건이 아직도 해결되지 않고 있는데 또 살인사건이 터
  졌다는 불만이 가득한 말투였다.
  "강도 짓인가요?"
  "아직 모르겠어."
  "너무 많이 어질러 놔서 정신이 없네요."
  유경은 설레설레  고개를 흔들며  방바닥에 쓰러져
  있는 시체를 들여다보았다. 시체는 침대에서 살해되어
  굴러떨어진 듯 침대와 방바닥이 선혈로 낭자했다.
  "흉기는 과도야."
  이 반장이 화장대  위에 놓여 있는  피묻은 과도를
  턱으로 가리켰다. 거기엔 범인이 피웠을 것으로 추측
  되는 담배 꽁초까지 몇 개 모아져 있었다.
  "저거뿐예요?"
  "응."
  "피해자 신원은요?"
  "간호원이야. 임수지라고 H종합병원에 근무하고 있
  었대"
  "혼자 살고 있었나요?"
  "그럼 처녀가 혼자 살지 둘이 살아?"
  "현장 수사는 다 끝난 모양이죠?"
  "끝났어."
  "다른 형사들은요?"
  "목격자 좀 찾아보라고 했어."
  피해자가 살해당한 곳은 피해자가  살고 있는 잠실
  시영 아파트 안방이었다. 침실 겸용으로 쓰는 조그마
  한 방이었으나 벽에 걸려있는 풍경화, 화장대의  못난
  이 인형, 지점토로  만든 아름다운  꽃, 나이팅게일의
  초상 판넬 등은 혼기에 이른 처녀의 방답게 수수하고
  아늑했다. 피해자의 성격이 깔끔한 모양이었다.
  "방이 아주 깨끗해요."
  "그래서 방 구경만 하고 있을 거야?"
  "네?"
  "빨리 수사해, 수사!"
  "감식이 끝나야지요."
  "뭐 느껴지는 거 없어?"
  "치정살인은 아닌 것 같아요."
  "그럼 단순 강도 살인사건이야?"
  "그럴 가능성이 많아요."
  유경은 목장갑을 끼고 시체를 살피기 시작했다. 피
  해자는 오이 맛사지를 하다가 살해되었는지 얼굴에도
  오이 조각이 몇 개 달라붙어 있었고 침대와 바닥에도
  꽤 많이 떨어져 있었다.  반항한 흔적은 보이지 않았
  다. 가슴과 복부에 각각 깊은 자상이 있었는데 복부는
  옆으로 반쯤 갈라져 있었다. 내장이 드러나 보이는 끔
  찍한 모습이었다. 그러나 피해자를 폭행하지는 않았는
  지 옷이 모두 입혀져 있었다.
  "부검을 해야겠죠?"
  "해야지"
  "피해자 가족들은 어디 있어요?"
  "마산에 있대. 연락을 했으니까 지금쯤 올라오고 있
  겠지"
  시체는 눈을 부릅뜨고 죽어 있었고 턱이 떨어져 나
  가 있었다.
  유경은 시체의 아래턱을 올려쳐서 맞춰 놓았다. 눈
  도 위에서 쓸어서 감겨 주자 비로소 피해자의 얼굴을
  확실하게 알아볼 수 있었다.
  "미인이군."
  이 반장이 침통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폭행당한 흔적은 없었어요?"
  "정액 검출을 해 보면 알 수 있을 거야. 지금으로서
  는 알아볼 수가 없잖아?"
  "아가씨가 처녀면 혈혼이 있었을 거 아녜요?"
  "없었어."
  이 반장이 고개를 흔들었다. 유경은 피해자의 스커
  트를 위로 들추고 흰 팬티를 무릎으로 끌어당겼다. 여
  자가 범인에게 폭행을  당했는지 살펴보기  위해서였
  다.
  "사망 시간이 꽤 요래  된 것 같은데  육안으로 알
  수 있겠어?"
  이 반장이 가까이 와서 유경에게 물었다. 남자의 정
  액은 배설후 열두 시간이 지나 버리면  여자의 몸 속
  에 흡수되거나 증발해버리기 때문에 하는 말이었다.
  그러나 여자의 질에서 나온  분비물이 체모를 흥건
  하게 적셔 버리면 여자의 체모는  보숭보숭하지 않고
  엉켜 있거나 말라붙어  있게마련이다. 게다가  남자의
  체모도 떨어져 있을 것이다.
  "어때?"
  "폭행을 당한 것 같지는 않아요."
  "그럼 폭행도 하지 않고 여자를 살해했단 말이야?"
  "네."
  유경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여자의 체모  상태로는
  폭행을 당한 것 같지는 않았다. 그러나 침대를 확대경
  까지 동원해 면밀하게  살피자 체모 몇  올을 찾아낼
  수가 있었다. 유경은 그것을 비닐 봉지에 넣고 밀봉했
  다.
  그러나 그것이 여자의 것인지  범인의 것인지는 육
  안으로 식별할 수가 없었다.
  "과학수사연구소에 보내야겠어요."
  "그래 봤자 혈액형밖에 더 나와?"
  "DNA 지문법이 있잖아요?"
  "그거 우리나라에서도 실용화되었나?"
  "금년부터 수사에 활용할 수 있다는 공문이 왔었어
  요."
  "그래?"
  DNA 지문이란 염색체 위에 존재하는 핵산으로 사
  람의 손가락에 있는 지문처럼 똑같은 것이 하나도 없
  는 유전자 지문을 말하는 것이었다. 특히  DNA 지문
  은 혈혼과 정액,  모발, 체모, 여자의  질분비물에서도
  검출할 수 있어 범죄 수사에 탁월한 효과가 있었다.
  "아직 감식반은 안 왔나요?"
  "응."
  유경은 시체의 몸에서 수거한 체모를 흰 종이에 쌌
  다.
  "제일 처음 발견한 사람이 누구예요?"
  유경이 거실로 나오며 웅성거리고 있는 사람들에게
  질문을 던졌다. 거실에는 관할 경찰서 수사과 형사 두
  명이 담배를 피우고 있었고 파출소에서  나온 순경은
  현관을 지키며 출입자들을 통제하고 있었다.
  "저기 있어요."
  관할 경찰서의 형사가  턱짓으로 주방을  가리켰다.
  주방에 피해자와 비슷한 나이 또래의  여자가 불안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아가씨가 신고했어요?"
  유경은 주방으로 들어가 젊은 여자에게 물었다.
  "네."
  아가씨가 겁 먹은 얼굴로 대답했다.
  "피해자하고는 어떤 사이예요?"
  "병원에서 같이 일하고 있어요."
  "그럼 간호원?"
  "네."
  "피해자와 친했어요?"
  "네, 같은 아파트 단지에 살아서 가끔 놀러  와
  서 음악도 같이 듣고 지점토 공예도  같이 하고 그랬
  어요."
  "애인 있어요?"
  "누구요?"
  "피해자요."
  "없어요."
  젊은 여자가 고개를 흔들었다. 평범한 인상의 여자
  였다.
  "피해자가 왜 죽었다고 생각해요?"
  "전 모르겠어요."
  "강도가 들어온 것  같아요? 아가씨가 보기엔  말예
  요"
  "잘 모르겠어요."
  "그럼 어떻게 피해자가 살해된 것을 발견했는지  자
  세히 얘기해봐요. 아가씨가 최초의 목격자니까"
  "거실에 있는 분들에게 다 말씀드렸는데요?"
  젊은 여자가 한숨을 떨구며 말했다. 이미  형사들에
  게 꽤나 시달린 모양이었다. 그러나 범인이 검거될 때
  까지 최초의 목격자로서 증언을 계속해야 할 것이다.
  "난 다른 경찰서에 소속돼 있어요."
  유경이 쌀쌀맞은 표정으로 내뱉었다.
  "아침에 같이 출근하려고 벨을 눌러도 대답이  없어
  서 들어와봤더니 수지가 죽어 있었어요. 그래서  바로
  경찰에 신고한 거예요."
  간단명료한 대답이었다.
  "문이 열려 있었어요?"
  "닫혀 있기는 했지만 잠겨 있지는 않았어요."
  "그때가 몇 시였죠?"
  "7시쯤 되었어요."
  "항상 그렇게 일찍 출근해요?"
  "네."
  "피해자를 마지막 본 게 언제예요?"
  "어제 오후 퇴근  무렵이요. 수지가 내가  근무하는
  응급실로 왔었어요. 같이 퇴근하자구요."
  "그래서 같이 퇴근했나요?"
  "아뇨, 전 그때 응급실  일이 바뻐 같이 퇴근할  수
  없었어요."
  "아가씨는 몇 시에 퇴근했어요?"
  "8시쯤이요."
  "그 뒤엔 만나지 않았어요?"
  "전화만 걸어보고 말았어요."
  "몇 시에요."
  "10시쯤 되었을 거예요."
  "그때 피해자가 전화를 받던가요?"
  "아뇨."
  유경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피해자와 같은  병원에
  근무하는 젊은 간호원에게서는 수사에 도움이 될 만한
  것은 아무 것도 얻어들을 수가 없었다.
  "벙원에서 피해자는 근무를 잘 하는 편이었어요?"
  "네, 원장님이나 과장님들 평판이 아주 좋았어요."
  "성격도 좋았겠군요."
  "네."
  "됐어요."
  유경은 고개를 끄덕거리고 거실로 나왔다. 그제서야
  감식반이 왁자하게 들이닥쳤다.
  "동일 수법의 전과자나 주변 우범자들을 수배해야겠
  지?"
  이 반장이 안방에서  나오며 유경에게 넌지시  물었
  다. 확신이 서지 않는다는 듯한 표정이었다.
  "강도사건 같아요?"
  "글쎄"
  "목격자가 있겠죠 뭐. 아파트 단지니까."
  "한 형사는 어떻게 생각해?"
  "범행 수법이 잔인해요."
  "무슨 뜻이지?"
  "임수지를 반드시 죽여야 했던 것 같아요. 무슨  일
  이 탄로나거나  임수지가  범인의 얼굴을  알고  있든
  가"
  "한 형사도 이젠 베테랑이 되었군."
  이 반장이 입을 비틀며 웃었다. 유경은 씁쓸하게 웃
  고 안방으로 들어가 보았다.
  "어때요?"
  유경이 감식반의 최 경사를 보고 물었다.
  "지문은 나오지 않는걸"
  "단독범예요?"
  "현재까지는"
  "폭행했어요?"
  "강간?"
  "네."
  "안 했어."
  "사망 시간은요?"
  "어젯밤 8시를 전후해서 살해당한 것 같아.  가슴을
  찌른 것이 치명상인데  완전히 죽이기 위해  아랫배를
  한번 더 찔렀어. 보통 잔인한 놈이 아니야. 그리고 정
  확한 솜씨를 가지고 있구"
  "반항한 흔적은 있었어요?"
  "없었어. 자다가 변을 당한 모양이야."
  "강도 짓인가요?"
  "글쎄"
  최 경사가 고개를 갸우뚱했다. 화신이 서지  않는다
  는 듯한 표정이었다.
  "집 안에 옷을 어질러 놓은 것을 보면 강도를  당한
  것 같기도 한데"
  최 경사가 어깨를 으쓱하며 중얼거렸다. 유경은  다
  시 안방을 나왔다. 감식반에 방해가 되지 않기 위해서
  였다.
  "식사나 하러 갈까?"
  "생각이 없어요."
  "시체를 보더니 밥맛이 없어진 모양이군"
  "네."
  유경이 쓸쓸하게 웃었다.  언제나 그랬지만  시체를
  목격하면 하루 온종일 시체의 참혹한 모습이 눈에  어
  른거려서 식사를 할 수가 없었다.
  "그럼 나나 갔다 와야지"
  이 반장이 혼잣말로 중얼거리며 거실을 나갔다.
  유경은 거실에 우두커니 서 있다가 옆방으로 들어가
  보았다.
  그 방도 형사들이 들쑤셔 놓아 난장판으로 어질러져
  있었다.
  혼자 사는 처녀의 방답게 방은 정결한 분위기를  풍
  기고 있었다.
  티크 원목으로 만든  책상에는 수를 놓은  책상보가
  깨끗하게 씌워져 있었고 책꽂이에는 교양서적들이  가
  지런히 꽂혀 있었다.
  (임수지는 상당히 이지적인 여성이었어)
  유경은 젊은 여성의 향긋한 체취가 느껴지는 방에서
  망연히 서있었다. 그러한 여자가 죽임을 당했다는  것
  이 비감했다.
  거실로 나오자 목격자 탐문수사를 나갔던 최 형사와
  박 형사가 돌아와 있었다.
  "어떻게 됐어요?"
  "30대 남자를 목격한 여자가 한 명 있었어요.  얼굴
  은 자세히 기억나지 않지만 이 앞 복도에서  서성거리
  고 있더래요."
  "몇 시쯤이요?"
  "7시쯤이래요."
  7시쯤이면 임수지가 퇴근해서 돌아올 시간이었다.
  "그럼 범인이 임수지가 퇴근하는 것을 기다린  셈인
  가요?"
  "글쎄요."
  최 형사가 애매한 표정을 지었다.
  "그렇다면 임수지에 대해서 잘 아는 사람인  모양인
  데"
  "반장님 어디 가셨습니까?"
  감식반이 조사를 하고 있는 안방을 들여다보고 나온
  박 형사가 유경에게 물었다.
  "식사하러 가셨어요."
  "이 양반 식사도 안 하고 다니시나?"
  시간은 이미 오전 10시가 가까워지고 있었다.
  "몽타지 작성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예."
  "다행이네요."
  "그거 어디 믿을 수가 있나요?"
  최 형사가 담배를 꺼내 물며 말했다.
  "뭐 나온 거 있답니까?"
  박 형사가 안방 쪽을 힐끔거리며 물었다.
  "없어요."
  "이거 또 사람 잡게 생겼군"
  박 형사도 담배를 꺼내 물었다. 유경은 그들이 피우
  는 담배 연기가 싫어 주방으로 들어갔다.
  "그냥 앉아 있어요."
  유경은 식탁에 앉아 있던 젊은 간호원이 일어서려는
  것을 제지하고 마주 앉았다.
  "동료가 죽어서 상심이 크겠어요."
  "전 지금도 믿어지지가 않아요."
  "아가씨 이름이 어떻게 되죠?"
  "왜요?"
  "참고로 알아두려는 것뿐예요."
  "김연주예요."
  "죽은 임수지의 가족 관계는 어떻게 돼요?"
  "부모님이 계시고 오빠  두 분이 있어요.  아버님은
  중학교 교장선생님이고  오빠들은 건설회사에  다니고
  있어요. 큰 오빠는 결혼을 했구요."
  "동생도 있어요?"
  "없어요."
  김연주가 고개를 흔들었다.  임수지의 가족  관계가
  그렇다면 누구에게 원한을 샀을 것 같지도 않았다.
  "임수지를 죽인 칼 본 일이 있어요?"
  "네, 그건 수지가 과일 깎을 때 쓰는 칼이에요."
  범인은 흉기조차 소지하고 들어오지 않았다는  증거
  였다. 그것은 범인이 그만큼 대범하거나 임수지의  면
  식범이라는 추리가 성립되는 것이었다. 단순 강도사건
  이 아니었다.
  장숙영은 몸의 물기를 말끔히 닦은 뒤 거울에  자신
  의 나신을 비쳐 보았다. 배에 군살이 약간 붙은  듯했
  으나 아직도 그녀의 몸은 탄력이 넘쳐 흐르고 있었다.
  (이 정도면)
  장숙영은 자신의 몸매 정도면 남자들을 얼마든지 뇌
  쇄시킬 수있을 것이라고 스스로 생각하며 빙긋이 미소
  를 흘렸다. 자신감에 넘칠  때 그녀가 입술을  비틀며
  웃는 일은 거의 습관적이었다.
  그녀는 겨드랑이에 프랑스제 향수를 한 방울씩 뿌렸
  다. 그리고 욕탕에서 나와 가뿐한 걸음으로 침실로 걸
  어갔다.
  이진우는 침대에 반듯하게 누워 있었다. 부인  유혜
  인과의 이혼이 마음 속에 어두운 그림자를 던지고  있
  는지 그는 호텔에 들어올 때부터 내내 우울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우린 어차피 한 배를 탄 몸이야!)
  장숙영은 침대에 누워 있는 이진우를 흘겨보고 그런
  생각을 했다. 이혼 때문에  그런 표정을 짓고  있다면
  돼먹잖은 수작이었다.
  게다가 이진우는 여자 관계가 복잡한 사내였다.  회
  사의 여직원, 가정부 그리고 술집 여자들  이
  진우가 건드린 여자는 헤아릴 수도 없이 많았다. 그런
  데도 장숙영이 그를 좋아하는 이유는 뛰어난 기교  때
  문이었다. 그는 여자를 황홀하게 만들 줄 아는 사내였
  다.
  "샤워 안 해?"
  장숙영이 침대에  걸터앉으며 사근사근한  목소리로
  물었다.
  "아침에 하고 나왔습니다."
  이진우가 무뚝뚝한 목소리로 대꾸했다. 어딘지 성가
  셔 하는 듯한 말투였다.
  (건방진 자식!)
  장숙영은 눈꼬리를 샐쭉하게 찢어서 이진우를  노려
  보았다. 이진우는 아예 눈까지 감고 있었다.
  "기분 나쁜 일이라도 있었어?"
  "아니요."
  "그럼 왜 그래?"
  "괜히 착잡해요."
  "이혼 때문에?"
  "그 사람한테 못할 짓을 한 것 같습니다.  조강지처
  를 버리면 벌을 받는다던데"
  이진우는 목소리까지 착 가라앉아 있었다.
  "애정도 없는 결혼 생활이랬잖아?"
  ""
  "그렇게 후회스러우면 이혼 취소하지 그래?"
  "후회하는 것은 아닙니다."
  이진우가 눈을 뜨고 일어나 앉았다.
  "술 좀 마실래?"
  "예."
  장숙영이 침대에서 일어나 거실로 나갔다. 호텔  특
  실이라 가정집처럼 침실과 거실이 따로 있었고 욕탕도
  따로 있었다.
  (혹시 김숙자를 저 자가 죽인 것이 아닐까?)
  거실의 냉장고에서 브랜디와 잔을 꺼내면서  장숙영
  은 문득 그런 생각을 했다. 이진우의 집 가정부인  김
  숙자를 죽일 만한 동기가 이진우는 충분했다.  그러나
  그날 밤 늦게까지 이진우는 그녀와 함께 있었다. 그리
  고 김숙자를 죽여서 경기도 양평까지 끌고 갈  충분한
  시간도 없었다.
  (내가 공연히 의심을 하지)
  김숙자에게는 미장공 애인이 있었고 그날 밤 그  애
  인과 동침한 사실까지 드러나 미장공이 경찰의 집중적
  인 조사를 받고 있었다.
  "안주가 있습니까?"
  이진우가 거실로 나오며 물었다.
  "치즈하고 햄이 있는데?"
  "그만하면 안주는 좋군요."
  "맥주도 있어."
  "전 위스키를 마시겠습니다."
  "나도 위스키를 마실 거야."
  장숙영이 이진우를 돌아보고 헤푸게 웃었다. 이진우
  도 억지 웃음을 띠며 소파에 앉았다. 호화롭고 사치스
  러운 소파였다.
  "임수지가 죽은 거 아십니까?"
  이진우가 장숙영이 따른 브랜디를 스트레이트로  한
  모금 마신 뒤에 장숙영을 보고 물었다.
  "임수지?"
  "회장님 전담 간호원으로 있던 아가씨 말예요."
  "그 아가씨가 죽었어?"
  장숙영이 브랜디잔을 입으로 가져가려다 말고  화들
  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모르고 계셨습니까?"
  "몰랐어."
  장숙영은 금시초문이라는 표정이었다.
  "오늘 석간 신문에 났어요."
  "난 못 봤는데"
  "사회면에 쬐그맣게 났어요."
  "왜 죽었대?"
  "강도를 당한 것으로 추정한다고 씌어 있었어요."
  "범인은 잡혔어?"
  "아직 안 잡혔어요.  경찰은 동일 수법의  전과자나
  주변 불량배들의 소행으로 보고 수사하고 있대요."
  장숙영은 이진우의 얘기가 생경하게 들렸다. 임수지
  가 강도에게 살해당했다는  것은 상상도 못했던  일이
  다. 그러잖아도 조일제 회장의 파묘 사건으로  뒤숭숭
  하던 참이었다. 누군지 정체를 알 수 없는 여자로부터
  세 번씩이나 협박 전화가 와서 며칠 동안 뜬눈으로 밤
  을 새우다시피 했던 것이다. 한 번만 더 그런 협박 전
  화가 걸려왔다면, 그래  내가 죽였어, 니가  요구하는
  게 뭐야? 하고 장숙영은 범인에게 소리친 뒤에 범
  인의 정체를 밝힐 작정이었다.
  (임수지가 죽은 까닭은 무엇일까?)
  막연한 생각이었지만 장숙영은 파묘 사건의  범인으
  로 임수지를 의심하고 있었다. 다만 1년 남짓  임수지
  를 옆에서 지켜보았기 때문에 온순한 임수지의 성격으
  로 그런 일을  저지르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생각했을
  뿐이었다.
  (어쨌든 임수지가 죽은 것은 나에겐 행운이야. 내가
  한 일은 이제 완전하게 증거가 없어진 샘이니까)
  누군가 자신을 거들어 주고 있는 기분이었다.
  "술이나 마시죠."
  이진우가 자신의 잔에 스스로 브랜디를 따르며 말했
  다.
  "그래."
  장숙영은 담뿍 미소를 짓고 브랜디잔을 입으로 가져
  가 천천히한 모금을 마셨다. 그러자 목젖이  뜨끔하면
  서 뱃속이 찌르르했다.
  "우리 결혼은 언제 하지?"
  이진우도 브랜디를 한 모금 마신 뒤 장숙영을  쳐다
  보았다.
  "천천히 하지 뭐"
  "이혼을 서두르라고 해 놓고"
  불만스러운 말투였다.
  "아직 회장님 49제도 안 지냈어."
  "그럼 아직도 한참 있어야 하겠군요."
  "주위 사람들 눈도 있고 하니까 가을쯤 하자구"
  장숙영이 이진우를 달래듯이 말했다.
  "사모님이 저를 배신하는 건 아니겠지요?"
  "우린 한 배를 탄 몸이라고 그랬잖아?"
  "괜히 걱정이 되어서요."
  "살까지 섞고서도 의심해?"
  장숙영이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어쩐지 사모님 앞에서는 자꾸 어린애가 되는 것 같
  아요."
  "어머!"
  "정말입니다, 사모님!"
  "아니 이렇게 큰 어린애도 있어?"
  장숙영이 쾌활하게 웃음을 터뜨리자 이진우도  씨익
  웃었다.
  "그럼 우리 아기 목욕 좀 시켜 줄까?"
  "사모님께서요?"
  "아직도 사모님이야?"
  장숙영이 밉지 않게 눈을 흘겼다. 이진우는  장숙영
  의 손에 이끌려 욕탕으로 걸어가면서 비로소 아랫도리
  가 뻐근해져 오는 것을느꼈다.
  "자, 여기서 옷을 벗고"
  장숙영이 그를 욕실 앞아서 걸음을 멈추게 하고  바
  지의 혁대를 풀어 옷을 벗기기 시작했다. 그는 장숙영
  이 하는 대로 가만히 서 있었다. 전에는 그가  장숙영
  의 옷을 차례차례 벗겨 주고 몸을 씻겨주었었다. 처음
  에는 그것이 성적 쾌감을 유발시켜 주었으나 언제부터
  인지 자신도 모르게 성적 쾌감이 오히려 저하되고  있
  었다. 마치 그는 노예가 여주인의 몸을 씻겨 주는  것
  처럼 굴욕감을 느끼기 시작했던 것이다.
  (지까짓게 뭐가 대단하다고!)
  한때 영화배우로 명성을 날리기는 했으나 모두 지나
  간 일이었다. 이진우는 까닭없이 장숙영에게 혐오감을
  느꼈다.
  장숙영은 눈치가 빠른  여자였다. 이진우가  자신의
  목욕 시중드는 것에  싫어하는 기색을 보이자  재빨리
  자신이 이진우의 목욕시중을 들어주기 시작했던  것이
  다.
  (보통 여자는 아니야!)
  옷이 다 벗겨지자  장숙영이 소리나지 않을  정도로
  이진우의 볼기짝을 손바닥으로 때렸다. 그것이 신호이
  거나 하듯이 이진우는 욕실안으로 성큼성큼 걸어 들어
  갔다.
  "샤워부터 해."
  타올을 욕탕 앞에 벗어 던진 장숙영이 알몸으로  욕
  실로 들어와 샤워 꼭지를 틀었다. 찬물이었다. 시원한
  물살이 기분 좋게 맨살을 적셔 왔다.
  (내가 무슨 짓을 하고 있는 것일까?)
  장숙영이 그의 몸에 비누칠을 하고 손바닥으로 문지
  르기 시작했다. 그는 장숙영의 손이 지나가는  곳마다
  전류처럼 짜릿한 기운이  번지는 것을 느끼며  가슴이
  저려 왔다.
  이혼 수속을 밟고 있는 아내 혜인 때문이었다. 그녀
  의 몸매는 눈이 부시게 아름다웠다. 그런데도  이상하
  게 혜인에게는 애정이가지  않았다. 얼굴이  못생겼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혜인은 불감증이었다.
  그는 혜인의 불감증을  치료하려고 무진 애를  썼었
  다. 그러나 혜인의 울타리는 너무나 견고해 그에게 실
  망만을 안겨 주었다. 그는다른 여자를 찾기  시작했고
  끝내 장숙영의 정부가 되었던 것이다.
  "아!"
  장숙영의 입에서 짧은 신음소리가 새어나왔다. 장숙
  영이 갑자기 비누 거품이 잔뜩 묻은 그의 몸에 자신의
  몸을 밀착시켜 오며 몸을 부르르 떨었다.
  (음란하기는!)
  이진우는 장숙영의 육체에 역겨움을 느끼면서도  서
  서히 몸이 달아오르는 것을 느꼈다. 장숙영을 돌려 세
  웠다. 장숙영의 몸도 비누 거품으로 미끌미끌했다. 그
  것이 그들 두 사람에게 야릇한 흥분을 유발시키고  있
  었다.
  장숙영이 욕조를 두 손으로 짚고는 허리를 구부리고
  둔부를 쳐들었다. 그는 살찐 장숙영의 둔부에  하체를
  밀착시키면서 장숙영의 늘어진 젖가슴을  움켜쥐었다.
  장숙영이 허리를 비틀면서 교성을 토했다.
  그는 격렬하게 장숙영을 뒤에서 밀어붙였다. 호흡이
  가뻐 왔다.
  그는 짐승처럼 헐떡거렸다.
  밤이 오래 되었다. 이제는 서서히 새벽이 오는 시간
  이었다. 호텔의 창으로 내려다보이는 네온사인들도 희
  미하게 빛을 잃어가고 있었다. 새벽이 가까워오고  있
  는 증거였다.
  침대에 바듯하게 누워서 잠이 든 이진우는 붉은  스
  탠드의 불빛에 생명이 없는 미이라처럼 보였다.  고독
  해 보이는 인상이었다. 꽉다문 입술과 우뚝하게  솟은
  콧날, 짙은 눈썹 그리고 단단한 근육질로  뭉쳐져
  있는 그의 몸은 여자들의 오금을 저리게 하기에  충분
  했다.
  다른 날 같았으면 장숙영이 먼저 잠이 들었을  시간
  이었다. 그러나 간밤은 쉽사리  잠을 이룰 수가  없었
  다. 밤이 깊어질수록 오히려 정신이 말똥말똥했다.
  이진우와의 정사가 만족스럽지 못해서가  아니었다.
  그는 여자를 다룰 줄 아는 사내였다. 그와 정사를  하
  고 나면 장숙영은 언제나 흡족했다. 간밤의 정사도 장
  숙영을 황홀하게 했었다. 욕실에서 한번, 침대에서 한
  번 두 번의 정사는 그녀를 발 끝까지 불타게 했었
  다.
  술을 마셨다. 새벽은 점점 가까워지고 있었다. 그녀
  는 빈 술잔을 들고 창가에 섰다.
  도대체 임수지를 죽인 범인은 누구일까?
  그 생각을 지워 버릴 수가 없었다. 여러 가지  정황
  으로 미루어 조일제 회장의 묘를 파헤친 자는  임수지
  로 여겨지고 있었다. 그러나 여자 혼자서 밤중에 무덤
  을 파헤치고 시체의 손가락을 잘라 갔다는 것은  의문
  이 남는 일이었다.
  과연 임수지가 그토록 강심장을 갖고 있느냐,  하는
  점이었다.
  또 설령 임수지가 조 회장의 손가락을 잘라  갔다면
  그 손가락이 어디에 있느냐 하는 것도 의문이 아닐 수
  없었다. 평범한 강도에게 살해당했다면 경찰수사 과정
  에서 그 손가락이 나왔어야 했다. 그러나 그런 얘기는
  일언반구도 없지 않았는가.
  (평범한 강도에게 살해당한 것이 아니야!)
  장숙영은 그렇게 생각했다. 누군가 계획적으로 임수
  지를 살해한 것이 분명했다. 다만 임수지를 죽인 목적
  을 알 수 없을 뿐이었다.
  이진우의 가정부 김숙자의 죽음도 이상한 것은 마찬
  가지였다.
  살해 동기로 미루어 짐작한다면 아진우가 가장 유력
  했고 이진우의 부인 유혜인도 용의자에서 제외시킬 수
  가 없었다.
  그러나 경찰은 김숙자의 애인 오상수만  집중적으로
  수사하고 있었다. 어딘지 맥이 빠졌거나 맥을 잘못 짚
  고 있는 수사였다.
  (만약에 제 3의 인물이 있다면)
  그것은 소름이 오싹 끼치는 일이었다. 그녀는  다시
  술을 따라마셨다. 취기 때문에 다리가 후들거리고  있
  었다. 독한 양주였다.
  그녀는 술잔을 비우고 침대로 걸어가 쓰러지듯이 몸
  을 던졌다.
  머리가 아팠다. 골이 패듯 마구 쑤시고 있었다.
  이진우가 덮고 있는 침대 시트를 걷어치웠다.  이진
  우가 꿈틀하고 몸을 뒤적였다.
  그녀는 이진우의 몸  위에 기어올라가 바짝  옆드렸
  다. 아무래도 그냥은 잠이 올 것 같지가 않았다.
  아침 햇살이 따갑게 내려쬐고 있었다. 이제는  완전
  히 여름 날씨였다.
  성일 그룹 본사 건물은 소공동 빌딩가에 위치해  있
  었다. 건물 외벽과 현관  로비가 모두 자주색  이태리
  대리석으로 장식되어 있는 21층 고급 빌딩이었다.
  유경은 성일 그룹 본사 빌딩 건물을 우두커니  올려
  다보다가 낮게 한숨을 내쉬었다. 아직은 이른  시간이
  었다. 그러나 출근하는 직원들은 꾸역꾸역 건물  안으
  로 밀려 들어가고 있었다. 대기업의 직원들답게  모두
  미끈하게 생긴 사람들이었다.
  (어떻게 할까?)
  유경은 현관 앞 화분대의 팬지꽃과 접시꽃들을 바라
  보며 생각에 잠겼다. 출근하자마자 형사의 방문을  받
  아야 하는 그들의 입장이 머리 속에 떠올랐기  때문이
  다. 그러나 더 이상 망설이고 있을 수가 없었다.
  유경은 출근하는 사람들  틈에 끼어 천천히  걸음을
  떼어 놓았다.
  현관 로비에 제복을 입은 경비들이 서 있었으나  유
  경을 제지하지는 않았다. 아마 성일 그룹의  여직원쯤
  으로 생각한 모양이었다.
  유경은 엘리베이터를 타고 17층까지 내처 올라갔다.
  17층에 회장실과 비서실,  그리고 종합기획실이  있었
  다. 일단은 이진우를 만나고 싶었다.
  재벌 그룹의 본사 빌딩답게 엘리베이터도 깨끗했다.
  17층에서 내린 유경은 복도에 카핏이 깔려 있는  것을
  발견했다. 장숙영이 취임하고 나서 깔아 놓은  모양이
  었다.
  "어떻게 오셨어요?"
  종합기획실로 들어서자 화병에 수국을 꽂고 있던 여
  직원이 유경을 돌아보면서 물었다.
  "실장님 좀 뵈러 왔는데요."
  "어디서 오셨다고 전해 드릴까요?"
  "한유경이 찾아왔다고 전해 주세요."
  "네."
  여직원이 [실장실]이라고 명패가 붙어 있는 방을 노
  크하고 들어가더니 다시 나왔다.
  "들어오세요."
  여직원이 유경에게 담담한 기색으로 말했다. 유경은
  여직원의 뒤를 따라 실장실로 들어갔다.
  "어서 오십시오."
  회전의자에 앉아 있던 이진우가 황급히 자리에서 일
  어나며 유경을 향해 손을  내밀었다. 유경이 그  손을
  가볍게 잡았다가 놓았다.
  "바쁘신가요?"
  그가 가리키는 소파에 앉아서 유경이 지나가는 투로
  말했다.
  "예, 항상 업무가 밀려 있으니까요."
  "그럼 질문을 빨리 하겠습니다."
  "그러시죠."
  그가 고개를 끄덕거리고 탁자 위의 담배 케이스에서
  담배 한 개비를 꺼내  물었다. 그의 몸에서  프랑스제
  샤넬 향수의 냄새가 희미하게 풍기고 있었다.
  (어젯밤 장숙영과 호텔에서 같이 잤다는 조  형사의
  보고가 틀림없군)
  장숙영과 이진우에게는 김숙자 살해사건 이후  계속
  미행을 따라붙이고 있었다.
  "임수지 아시죠?"
  "그럼요, 회장님을 l년 동안이나 돌봐준 아가씨입니
  다. 어제 신문을 보니까 참혹한 죽음을 당했더군요."
  "알고 계시니 다행입니다."
  "범인 검거했습니까?"
  "아직 못했습니다."
  "회장님께서도 그러니까 조 회장님의  사모님께
  서도 그 얘기를 들으시고 몹시 황망해 하고 계십니다.
  조 회장님 파묘사건, 김숙자 살인사건, 임수지 살인사
  건이 모두 우리 성일 그룹과 관련되어 있으니까요."
  "임수지는 어떤 아가씨였습니까?"
  "자주 보지는 못했지만  성실하고 명랑한  아가씨였
  죠."
  "애인이나 교제하는 남자는 없었습니까?"
  "없었던 걸로 기억합니다."
  "조 회장님이 돌아가신 뒤 상속은 합법적으로  이뤄
  졌습니까?"
  "무슨 뜻입니까?"
  이진우의 얼굴에 갑자기 경계하는 듯한 빛이 스치고
  지나갔다.
  "조 회장님은 교통사고를 당해 식물인간이나 다름이
  없었다고 들었습니다. 그런 분이 어떻게 재산  문제를
  상속시킬 수 있었을까요? 유언도 남기지 않고  돌아가
  셨다는데"
  "옳은 말씀입니다."
  이진우가 담뱃불을 붙이고 연기를 깊숙이  빨아들였
  다가 길게 내뱉었다.
  "사실 서류상의 상속 문제는 그럴 수도 있을 것입니
  다. 그러나 조 회장님이 아무 유언도 없이 돌아가셨다
  고 해도 실질적인 상속자는 장숙영 여사입니다.  그리
  고 상속 서류는 저명한 변호사의 공증까지 마친  합법
  적인 것입니다."
  "제 말씀은 조 회장님이 언제 그런 유언장을 남기셨
  느냐 하는 점입니다."
  "제가 알기로는 6개월 전쯤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때는 유언장을 남길 만큼 정신이 온전했었나요?"
  "예, 업무 보고도 간간이 받으셨으니까요."
  그렇다면 조일제 회장의 재산을 둘러싼 음모는 아닐
  것 같았다.
  그쪽 방향으로 실낱같은 희망을 걸었던 유경은 맥이
  빠지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공증 서류에 서명한 변호사는 누구입니까?"
  "김영일 변호사입니다."
  "김영일 변호사면 한때 대법원 판사를 지냈던?"
  "알고 계셨군요. 아주 청렴하고 강직한 분이지요."
  유경은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런 사람이 공증을  했
  다면 유언장은 조금도 하자가 없을 것이다.
  "유언장 사본을 보여 드릴까요?"
  "아니 괜찮습니다. 여기 조 회장님 인척들이 근무하
  고 있습니까?"
  "많지는 않습니다.  625 때 단신 월남하셨기 때문
  에 그래도 조 회장님께서는 사돈의 팔촌이라도 인
  척은 반드시 돌봐 주셨습니다. 상무이사로 계신  분이
  한 분 있고 건설회사에 영업부장으로 있는 사람이
  한 사람 있습니다."
  "상무이사로 계신 분은 어떤 분입니까?"
  "5촌당숙으로 조성환이란 분입니다.  법 없이도  살
  수 있는 분이죠"
  "건설회사의 영업부장은요?"
  "8촌동생쯤 되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조준구입니
  다."
  "조 회장님 전처 쪽의 친척은 없나요?"
  "있습니다. 처남이 성일  섬유의 사장이고 동서  한
  분이 성일 엔지니어링의 사장입니다."
  "그 분들 인사 카드 좀 볼 수 있을까요?"
  "그러지요."
  이진우가 책상으로 돌아가 인터폰을 눌러  인사부장
  을 찾고 그들의 인사기록 카드를 기획실로 가져오라고
  지시하는 동안, 유경은 이진우가 사건과 무관할지  모
  른다는 생각을 했다.
  "이건 개인적인 이야기인데 솔직하게 말씀드리지 않
  을 수 없습니다."
  이진우가 인터폰을 끊고 소파로 돌아와 진지한 표정
  으로 유경을 건너다보았다.
  "무슨?"
  "곡해가 있을지 몰라 미리 말씀드리는 겁니다. 김숙
  자 사건만 아니면 제가 이런 궁지에 몰리진 않았을 텐
  데 전 지금 제 아내와  이혼 수속을 밟고 있습니
  다."
  ""
  "저도 그것이 최선의  길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만
  사실 애정이 없는 결혼 생활은 무덤 같은 것입니다."
  "사랑했기 때문에 결혼했던 것이 아닌가요?"
  "아닙니다. 아내가 저를 혼빙죄로 걸어 고소하는 바
  람에 어쩔수 없이 결혼했습니다. 물론 사랑하지  않으
  면서도 아내를 범했던 제 불찰이 크지요."
  "결혼한 뒤에 서로 용서하고 이해할 수 있지 않았을
  까요?"
  "그런데 그렇지 못한 것이 인간입니다. 막상 아내와
  결혼했지만 아내가 죽이고  싶도록 밉더군요.  아내의
  못생긴 얼굴이 더욱 못생겨 보이구요 어느 날  술
  에 취해 결정적인 실수를 하고 말았습니다. 신혼 때였
  죠. 그날 따라 아내가 저를 요구해 왔습니다."
  ""
  "전 아내를 뿌리쳤습니다. 그런데 아내는  그날따라
  욕망이 몹시 강했던 모양입니다. 제가 잠자리를  거부
  하는 것이 술 때문에 그러는 줄 알고 자꾸 보채는  것
  이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벌떡 일어나  소리쳤습니다.
  너같이 못생긴 여자하고 누가 그 짓을 하느냐고  말입
  니다 너하고는 그 짓이 하고 싶어도 얼굴  때문에
  못하겠다, 차라리 보자기를 씌워 놓고 하면 모를까 그
  냥은 못하겠다 그러자 아내가 슬그머니  침대에서
  일어나 방을 나갔습니다."
  "어떻게 그런 말을?"
  "제 실수였지요. 그 말은 제가 군대에 있을 때 동료
  들끼리 우스갯소리로 하던  말이 생각나서 쓴  것입니
  다. 남자들끼리만 있다 보니까 음담패설을 많이  하게
  되고, 어느 사창가에 들어갔다가 얼굴이 하도  못생긴
  창녀를 만나 보자기를 씌워 놓고 그 짓을했다는  얘기
  를 하며 웃었던 기억이 났던 것입니다."
  ""
  "그날 이후 아내는 저를 남편으로 받아들이지  않았
  습니다. 저는 아내의 마음을 풀어 주려고 무진 노력을
  했습니다만 소용이 없었습니다."
  ""
  "어느덧 아내는 불감증에  걸렸고 우리의  잠자리는
  점점 삭막해졌습니다."
  ""
  "제가 아내와 이혼하는 것은 아내에게도 새  출발을
  할 수 있는 기회를 만들어 주기 위해서입니다."
  그것은 유경에게 이진우의 궁색한 변명으로 들렸다.
  "김숙자와의 관계는 어떻게 설명할 수 있겠어요?"
  "지금 생각하면 숙자가 저를 유혹했던 것이  아닌가
  여겨집니다.
  영악한 그 아이는  우리 부부관계가 원만하지  않은
  것을 알고 허벅지가 드러난 짧은 스커트를 입고  부엌
  일을 한다든가 낮잠을 잘 때 방문을 열어 놓고 자기가
  일쑤였지요. 제가 그 애의 방에 들어갔을 때도 조금도
  저항하지 않았습니다."
  ""
  "제가 왜 이런 말씀을 드리고 있는 줄 아십니까?"
  "용의자 혐의를 벗어나기 위해서겠죠."
  "그것도 맞는 말씀입니다만 전 제가 혐의를 벗는 것
  보다 하루빨리 범인이  잡히게끔 수사에 협조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전조만간 장숙영 회장과 결혼할  생각
  입니다. 그런데 이런 일이 자꾸 터지면 장숙영 회장은
  저를 다시 보게 될 것입니다."
  "유혜인씨와 재결합할 의사는 없나요?"
  "아내는 결코 저를 받아들이지 않을 겁니다."
  "장숙영 회장을 사랑하세요?"
  "예."
  "어떤 점을요?"
  "모든 점을 다 사랑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장숙영 개인뿐만  아니라 그녀가 갖고  있는
  지위와 재산까지도 사랑한다는 대답이었다.
  그때 인사부장이 고 조일제 회장 인척들의 인사기록
  카드를 가지고 들어왔다. 유경은 그것들을 꼼꼼히  살
  펴본 뒤에 되돌려 주었다.
  "필요하시면 복사해 드리겠습니다."
  "괜찮습니다."
  유경은 고개를 흔들었다.  그들의 인사기록  카드로
  수상한 점을 찾아낸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었다.
       9. 사건은 미궁으로
  수사본부가 설치되었다. 임수지 살인사건  수사본부
  는 그녀가 전세로 세들어 살고 있는  잠실 시영 아파
  트 인근 파출소에, 김숙자 살인사건 수사본부는  안암
  동 주택가 파출소에 설치되어 관할  경찰서의 수사과
  형사들이 배치되었고 시경 강력계 3반 팀을 지휘부로
  본격적인 수사를 나섰다. 그러나 두 군데의 수사본부
  는 주변 우범자나 불량배, 전과자들을 상대로  탐문수
  사와 행적수사로 역할이 제한되었고 사건  관련자 수
  사는 시경 강력계 3반이 전담하고 있었다.
  수사본부라고는 하지만  두 개의  수사본부는 시경
  강력계 3반을 보조하는 역할을 맡고 있었다.
  이상진 형사반장은 우선 성일  그룹의 주변 인물들
  부터 수사에 착수했다. 그는 고  조일제 회장의 인척,
  전처와 두 아들, 그리고  사업상 경쟁관계에 있는  기
  업, 인간적인 원한을 맺은 일이 있는가에 대해서 중점
  을 두고 수사를 시작했다.  그것은 꽤나 오랜 시일과
  인내심을 필요로 하는 작업이었다.
  먼저 이 반장은 조일제 회장의 전처인 마인숙을 용
  의자로 떠올려보았다. 그것은 김숙자와 임수지의 연쇄
  살인이 어떤 의미에서든지 성일 그룹과  무관하지 않
  으리라는 사실을 전제로 한 것이었다.
  마인숙은 50대외 뚱뚱한 여자였다. 20년 전  조일제
  회장과 이혼하면서 받은 위자료로 여관을  시작해 지
  금은 제법 커다란 호텔을 몇 개  소유한 유한 마담이
  었다. 게다가 부동산  투자까지 서슴지않아  강남에선
  큰 손으로까지 불려지고 있었다.
  돈 많고 혼자 사는 여자들이 대개  그렇듯이 그 여
  자도 남자 관계가 문란했고 조일제  회장에게 이혼을
  당한 것도 남자 관계로 인한 것이었다.
  "우린 그 사람과 인연을 끊은 지 벌써 20년이나 되
  었어요."
  강남의 노른자위 땅에 위치해  있는 그녀의 사무실
  을 이 반장이 방문했을 때 그녀는  이 반장에게 퉁명
  스럽게 그렇게 말했다.
  "나하고 그 사람하고는  아무 관련도 없어요.  내가
  이제 와서 그 사람 재산에 흥미를  가질 까닭도 없구
  요."
  "조일제 회장이 어떤  분이었는지 말씀해  주실 수
  있지 않을까요?"
  "이젠 거의 잊어버렸어요."
  "한때 같이 살던 분 아닙니까?"
  "형사님, 여자에겐 지나간 남자는 아무 의미가 없어
  요."
  "그 분의 성격 같은 것도 기억나지 않습니까?"
  "그런 것이 도움이 되겠어요?"
  "그럼 제게 도움이 될 만한 얘기를 아무 것도 해주
  실 수 없습니까?"
  "20년이 지났어요. 이젠 그 사람 주변 사람들도  모
  두 바뀌었구요. 내가 그 사람에 대해서 무엇을 알겠어
  요?"
  "아드님들은 어떻게 지내고 계십니까?"
  "큰 애는 미국에서 박사학위 코스를  밟고 작은 애
  는 영국에 유학중예요."
  "아드님들이 훌륭하시군요."
  "그 애들 키우느라고 고생 좀 했지요. 내 유일한 희
  망이었으니까요."
  "왜 재혼을 안 하십니까?"
  "혼자 사는 게 편해요."
  "조일제 회장은 재산을 두 아드님에게 상속시킨 것
  이 아니라 장숙영씨에게 상속을 시켰는데  왜 그랬을
  까요?"
  "내가 미웠기 때문이겠죠."
  "여사님께서도 조일제 회장을 미워하셨습니까?"
  "그런 기억은 없는 것 같아요."
  마인숙은 덧붙여서 조일제 회장의 인척들을 조사해
  보아야 시간만 낭비할 뿐이라고 이  반장에게 충고까
  지 했다. 그들은 천성이 착해 범죄를 저지를 만한 위
  인이 못 된다는 것이었다.
  이 반장이 두 번째 조사를 한 사람은 성일 그룹 부
  회장 황인구였다. 그는 이미 머리가 희끗희끗한 백발
  의 노신사였고 실제 성일그룹을 움직이는 실력자이기
  도 했다. 그리고  그는 전문  경영인이었다. 장숙영은
  성일 그룹의 소유자였으나 경영에는 문외한이었다.
  "장 회장이 꽉 막힌 여사는 아닙니다. 자신이  문외
  한이라는 것을 알고 경영을 사실상  나에게 일임하고
  있지요."
  그를 만난 것은 성일 그룹 본사  빌딩 16층 부회장
  실에서였다.
  재벌 랭킹 25위의 성일  그룹을 이끄는 실력자답지
  않게 성품도 겸손하고 허탈했다.
  "성일 그룹과 관련되어 있는 일련의 사건들을 어떻
  게 생각하십니까?"
  "아직 그런 증거가  구체적으로 드러나  있는 것은
  아니잖습니까?
  김숙자 살인사건도 그렇고 임수지 살인사건도 우리
  그룹이 관련되어 있다는 명확한 증거가 없습니다. 제
  생각엔 경찰이 지나치게 민감한 반응을 보이는 것 같
  습니다."
  "그럼 조일제 회장님의 파묘 사건은요?"
  "그 점이 참으로 애매합니다. 왜 하필 창업자의  손
  가락을 잘라갔는지."
  "사내의 반응은 어떻습니까?"
  "조용합니다. 제가 재빨리 진화시켜 버렸습니다."
  "진화요?"
  "한때 사내 분위기가 어수선했지요. 매스컴이  연일
  대대적으로 보도해서."
  그는 파이프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이 반장은 담배
  생각이 간절했으나 노인 앞에서 차마 딤배를 피울 수
  가 없었다.
  "장숙영 회장과의 관계는 어떻습니까?"
  "비교적 원활한 편입니다."
  "비교적이라고 하시면?"
  "이따금 인사 문제에 개입을 해서 소유와 경영
  은 별개인데 말입니다. 이  성일 그룹은 사실 장숙영
  개인의 회사라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 그룹에
  서 일하는 모든 직원,  그리고 그들 가족의  회사라는
  인식을 가질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일종의 주인 의식
  을 가져야 한다는 뜻이죠.  전 회장님의 뜻도 그랬었
  고."
  "장숙영 회장이 동감하던가요?"
  "물론입니다."
  "조일제 회장의 유언장에 의문점은 없습니까?"
  "없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변호사 공증까지  마친
  것이니까요."
  "이진우씨는 어떤 사람입니까?"
  "이 진우?"
  "종합기획실장 말입니다."
  "그 친구 똘똘한 편이지요. 인사성도 바르고 사
  생활이 문제가 있긴 합니다만."
  "장숙영 회장과 결혼할 예정이라던데요?"
  "사생활 문제라서 언급하지 않겠습니다."
  그러나 성일 그룹 부회장인  황인구의 얼굴 표정이
  탐탁치 않아하는 기색이었다.  이 반장은  그에게서도
  별다른 용의점이나 수상한 점을 발견할 수 없었다. 그
  것은 성일 그룹 중역들과 고 조일제 회장의 인척들도
  대개 비슷했다.
  (역시 회사는 무관해)
  이 반장은 막막한 기분을  느끼며 오상수를 또다시
  연행하여 취조했다. 파묘 사건을 수나하고 있는 용인
  경찰서도 실마리조차 잡지 못하고 있는  것은 마찬가
  지였다.
  "김숙자는 어떻게 알게 되었어?"
  오상수는 눈이  작았으나 몸은  막노동판에서 일한
  탓에 건장한 편이었다.
  "우연히."
  "우연히 어떻게?"
  "포장마차에서 술을 마시다 자꾸  저에게 눈웃
  음쳐서."
  "김숙자가 먼저?"
  "예."
  "어디서?"
  "대광중고등학교 뒤에 있는 포장마차요."
  "언제?"
  "한 1년 됐어요."
  "얼마나 만났어?"
  "자주 만났어요. 애인도 없구 그래서."
  "사건이 일어나던 날 밤 같이 잤지?"
  "예."
  "김숙자가 나간 건 몇 시쯤이야?"
  "열두시쯤이요."
  "니가 방 얻어 살고 있는 걸 아는 사람은 누구누구
  야?"
  "숙자가 가정부로 있던 주인 아주머니와 아저씨죠."
  "유혜인씨도 자주 왔어?"
  "두 번이요."
  "이진우씨는?"
  "한 번 왔다 갔어요. 전 못 봤는데 숙자가 이진우씨
  가 운전하는 자가용을 타고 왔었으니까요."
  "이진우씨가 김숙자를 죽인 거 아니야?"
  "전 모르겠어요."
  "잘 생각해 봐."
  "모르겠어요."
  오상수에게서도 마땅한  혐의점을 찾을  수가 없었
  다. 오상수의방은 사건 발생 다음날 한유경 형사가 샅
  샅이 수색했고 사흘째 되는 날은  감식반까지 동원해
  혈혼이라든가 피 묻은  옷을 찾으려고했으나  단서는
  아무 것도 나오지 않았었다.
  "제일 친한 사람이 누구야?"
  "예?"
  "너하고 가장 친하게 지내는 사람들 말이야?"
  그것은 오상수가  친구나 친지를  동원해 김숙자를
  살해했을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하는 질문이었다.
  "미장 최씨, 숨이 박씨, 목수 윤씨."
  그들은 대개 오상수보다 나이가 서너 살씩 위인 사
  람들이었다.
  그리고 그들은 행적이 뚜렷했다. 이 반장은 오상수
  를 단념하고 유혜인을 찾아갔다.
  "그날 밤 이진우씨는 몇 시에 귀가했습니까?"
  "한시 반쯤이요."
  유혜인은 몸매가 아름다운 여인이었다. 얼굴이 추녀
  에 가까울 정도로 못생긴 것이 흠이었으나 몸매 하나
  는 완벽하다고 할 만큼 아름다웠다.
  "수색 좀 해도 되겠습니까?"
  "영장 가지고 있으면요."
  "거절입니까?"
  "네."
  "수사에 협조해 주실 줄 알았는데 실망스러운 일이
  군요."
  "경찰이 내 집을 마구 뒤지는 것을 용납할 수 없어
  요."
  유혜인의 태도는 뜻밖에 완강했다. 이 반장은 벽에
  부딪히는 듯한 절망감을 느꼈다.
  "수색을 해도 무슨 근거가 있어야 하지 않겠어요?"
  "옳은 말씀입니다."
  "그럼 근거가 있다는 말씀예요?"
  "동기가 충분하지 않습니까?"
  "동기요?"
  "이진우씨는 김숙자와 육체 관계를  갖고 있었습니
  다. 한 지붕 아래 젊은 부인을 두고서 말입니다."
  유혜인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그런데 이진우씨는 김숙자가  거추장스러웠습니다.
  자주 돈을 요구했으니까요."
  "그럼 제 남편이 용의자예요?"
  "부인도 배제할 수는 없습니다."
  "저까지두요?"
  "부인이 김숙자를  증오했을 것은  인지상정이니까
  요. 증오가 자라면 살인을 생각하게 될 것이고."
  유혜인이 어처구니없다는 듯이 쓰게 웃었다.
  "그래도 수색은 거부하겠어요."
  "장롱과 신발장만 수색하겠습니다."
  "왜요?"
  "헐혼이 있나 없나 확인하기 위해서입니다."
  "좋아요."
  유혜인이 오랫동안  망설이고 있다가  안방으로 이
  반장을 안내했다. 이 반장은 유혜인이 불쾌하지 않도
  록 천천히 그리고 조심스럽게 장롱의 옷들을 모두 살
  펴보았다. 그러나 수상한 점은 어느 곳에서도 찾아볼
  수가 없었다.
  "뭐가 나왔어요?"
  유혜인이 한심하다는 듯이 이 반장을 보고 물었다.
  "아니요."
  이 반장은 신발장 안까지 면밀히 살핀 뒤에 고개를
  흔들었다.
  "반장님도 딱하세요. 만약에 나나 유리 아빠가 사람
  을 죽였다면 집에 보관하고 있을 것 같애요?"
  옳은 말이었다. 이 반장은 입맛을 다시며 유혜인의
  집을 물러나올 수밖에 없었다.
  후드득 빗발이 유리창에 들이치고 있었다. 장마비였
  다. 혜인은 이 반장이 나가자 침대에 다시 누웠다.
  유리가 학교에 가고 친정  식구들마저 없는 집안이
  가라앉은 듯이 조용했다. 이혼한 뒤 집안이 더욱 적막
  하게 느껴졌다.
  혜인은 비로소 남편의 자리가  그토록 큰 것이었던
  가 하는 생각을 했다. 그를 사랑하지 않은 것은 분명
  한 사실이었다. 그런데도 그가 버티고 있었던 집안이
  적막하다고 생각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어떻게 하든지 이혼은 피해야  한다던 친정 어머니
  의 말이 생각났다. 이혼했다는 것을 친정에 알리자 맨
  먼저 달려온 사람은 친정어머니였다. 어머니는 다짜고
  짜 눈물부터 찍어내면서 이 미련한것아, 어쩌자고  이
  혼을 해? 하면서 혜인을  나무랬다. 모든 잘못이
  여자인 혜인에게 있다는 투였다. 그러나 혜인은 한 마
  디도 변명을 하지 않았다. 어차피 어머니의 봉건적인
  사고방식으로는 혜인을 이해할 수가 없을 터였다.
  그 다음에 찾아온 사람은 남동생 부부였다. 그들은
  혜인에게 왜 이혼했느냐고  시비조로 따지고  들었다.
  혜인은 그 질문에 적절한 답변거리를  준비하지 않은
  것을 뼈저리게 후회했다.
  그것은 혜인의 친구들에게도 마찬가지였다.  어떻게
  소식을 들었는지 평소에 연락조차 하지  않고 지내던
  친구들이 전화를 걸어와 얘, 너 이혼했다며? 그래 어
  쩌다 그렇게 됐니? 위자료는 넉넉히받았어? 하고
  수다를 떨어댔다. 혜인의 이혼이 그들에게는 한낱 호
  기심의 대상밖에 되지 않는 모양이었다.
  혜인은 그런 전화가 싫었다. 가족들이 몰려와 혜인
  을 위로한답시고 법석을 떠는 것도  혜인에게는 짜증
  스럽기만 했다. 그것은 이혼으로 가슴앓이를 하고 있
  는 혜인을 더욱더 고통 속으로 몰아넣었을 뿐이었다.
  혜인은 또다시 담배를 꺼내  입에 물었다. 이혼  후
  늘어난 것은 술과 담배뿐이었다.
  혜인이 담배를 배우게 된  것은 남편으로부터 너같
  이 못생긴 여자하고 누가 그 짓을 해? 차라리 보자기
  를 씌워 놓고  하라면 모를까  그냥은 못하겠어!
  하는 모욕적인 언사를 들었을 때부터였다.
  혜인은 태어나서  지금까지 그토록  모욕적인 말을
  들은 적이 없었다. 얼굴이 못생긴 걸로 따지면 혜인만
  못한 여자도 얼마든지 있었다. 그런데도 남편이 그런
  말을 한 것은  혜인이 혼빙죄로 고소한  탓에 억지로
  결혼할 수밖에 없었던 앙금이 남아  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혜인은 그 말을 들었을 때 처음엔  무슨 뜻인지 몰
  라 어리둥절했었다. 그러나 그 의미를 분명하게 깨달
  았을 때는 찬물을 뒤집어쓴 듯한 기분이었다.
  (잔인한 사람, 어떻게 그런 말을.)
  그것은 혜인의 가슴을  갈가리 찢어 놓은  것 같은
  말이었다.
  혜인은 남편의 침대를 슬그머니 빠져나왔다. 갑자기
  눈물이 쏟아셔 견딜 수가 없었다. 혜인은 정원으로 나
  가 벤치에 쪼그리고 앉았다. 가을이었다. 바람이 제법
  소슬했다. 바람이 일 때마다 우수수 낙엽이 떨어지곤
  했다.
  (술김에 한 소리일 거야!)
  시간이 흐르자 추위가 엄습해 오기 시작했다. 혜인
  은 그때라도 남편이 찾아와 내가 잘못했어, 술김에 한
  소리인데 뭘 그렇게 화를내고 그래, 추운데  들어가자
  구 하고 혜인을 따뜻하게 안아주기만  하면 남편
  을 용서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리고 은근히 남편이  데리러 나오기를  기다렸다.
  부부 싸움이란 칼로 물배기라고 하지 않는가. 따지고
  보면 남편에게 매를  맞고 사는 여자도  얼마나 많은
  가.
  그런 생각을 하자  자신이 미웁스럽게  생각되었다.
  남편은 회사일로 스트레스가 쌓인 데다가  술까지 마
  셔 만사가 귀찮았을 것이다. 술 마신 개라고 하는 말
  도 있지 않은가. 내가 지나쳤어.  여자가 그걸 요구하
  는 것은 음란한 짓이야.
  헤인은 그런 생각을 하였다.
  밤이 깊어 갔다. 기온이 점점 떨어져 몸이 떨려 왔
  다. 그러나 헤인은 정원에 쪼그리고 앉아서 남편이 데
  리러 나오기만을 기다렸다. 그렇게만 되면 그녀는 남
  편의 가슴에 안겨서 모든 설움을 다 잊을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러나 남편은 끝내 혜인을 데리러 나오지 않았다.
  그녀는 비로소 남편의 무정함에 치를 떨고 가슴 속에
  증오와 미움을 키웠다.
  대문의 초인종 벨이 울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혜인
  은 그 소리가 꿈 속에서 들려오는  듯 우두커니 비오
  는 창밖을 내다보았다.
  (이 빗속에 누가 온 것일까?)
  벨 소리는 재촉하듯 계속 들려오고 있었다. 혜인은
  느릿느릿 일어나 거실로 나갔다.
  "여보세요."
  하이폰 수화기를 통해 남자의  굵은 목소리가 들려
  왔다.
  "누구세요?"
  "서에서 나왔습니다."
  "서가 어디예요?"
  "경찰서요."
  남자의 목소리가 퉁명스러웠다.
  "들어오세요."
  혜인은 하이폰에  설치되어 있는  대문 자동개폐기
  버튼을 눌러주고 안방으로 들어가 원피스를  걸쳐 입
  었다. 혜인이 다시 거실로 나오자 형사들은 이미 거실
  까지 들어와 있었다.
  (정말 예쁘게 생겼어.)
  혜인은 빗방울들이  안개꽃처럼 머리에  묻어 있는
  여형사를 쳐다보며 자신도 모르게 감탄했다. 여형사처
  럼 예쁜 얼굴만 갖고 있었다면 남편에게 버림받는 일
  따위는 없었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자  가슴이 미어지
  는 것 같았다.
  "집을 수색하러 왔습니다."
  여형사가 망설이는 듯하다가 입을 열었다.
  "왜요?"
  "김숙자 살인사건이 아직 해결되지 않았습니다."
  "남편이 용의자인가요?"
  "용의자라고 할 수는 없어도 동기는 충분하니까요."
  "수색영장 가지고 왔어요?"
  "아닙니다."
  여형사가 크고 맑은 눈으로  혜인을 쳐다보며 말했
  다. 사람을 빨아들일 듯이 매혹적인 눈이었다.
  (눈도 예쁘네!)
  혜인은 자신이 더욱 초라한 느낌이 들었다.
  "우리나라 경찰은 언제나 이런 식이군요."
  "왜요?"
  "조금 전에도 반장님이 수색하고 갔어요."
  "그래요?"
  여형사는 의외라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사건을 수
  사하는 형사들끼리도 공조체제를  갖추고 있지  않은
  모양이었다.
  "그렇지만 내가 다시 수색해야겠어요."
  "필요없어요. 형사들이라고 무조건 내 집을  뒤지는
  건 싫어요."
  "수색영장 가지고 올까요?"
  "당연할 일 아녜요?"
  "협조해 주실 줄 알았어요."
  여형사의 얼굴에 실망하는 빛이 스치고 지나갔다.
  "혹시 아직도 이진우씨를 보호하시려고  그러는 건
  아니겠죠?"
  "우린 이혼했어요."
  "왜 이혼에 동의했죠?"
  "그러면 이혼하지 말아 달라고 매달려야 해요?"
  "나 같으면 그렇게 해서라도 남편을 붙잡겠어요."
  "한 형사님이나 그렇게 하세요."
  "다음에 또 찾아뵙지요."
  여형사가 아쉬운 표정으로 형사들을 데리고 나가자
  혜인은 비로소 가만히  한숨을 내쉬었다.  형사들에게
  또 다시 집을 수색하게 할수는 없었다.
  혜인은 형사들이 대문 밖으로 완전히 나간 것을 확
  인한 뒤에야 안방으로 돌아와 침대 밑에서 남편의 전
  화를 도청한 녹음 테이프들을 꺼냈다. 이제 그것은 아
  무짝에도 소용없는 것들이었다.
  혜인은 헌 신문들을 현관 앞에 꺼내  놓고 불을 질
  렀다. 이내 불길이 맹렬히 타오르기 시작했다. 혜인은
  테이프들을 하나하나 불길속으로 던졌다.
  "뭘 태우시죠?"
  그때였다. 밖으로 나간 여형사가 벽 모퉁이에서 돌
  아나오며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여형사는 대문을 나
  갔다가 담을 뛰어넘어 들어온 모양이었다.
  (보통 여자가 아냐!)
  혜인은 공연히  가슴이 철렁했으나  태연한 표정을
  지었다.
  "헌 테이프 태우는 거예요."
  "태울 거면 날 주세요."
  "그럴 수 없어요."
  그러나 여형사는 벌써 발로 불을 끄고 있었다.
  "이게 무슨 짓예요?"
  혜인의 얼굴이 핼쓱해져 소리를 질렀다.
  "유혜인씨도 범인 용의자로 지목되어 있다는 걸 아
  세요?"
  "뭐라구요?"
  "범인은 항상 의외의 장소에 있죠."
  "흥! 아마 단단히 잘못 짚었을 거예요."
  "그럴까요? 두고 보면 알겠죠."
  여형사가 불을 끄고 테이프들을 주워 모았다. 그리
  고는 혜인의 동의도 구하지 않고  형사들을 들어오게
  했다.
  "수색해요!"
  여형사가 형사들에게 단호한 어조로 말했다.
  "왜들 이래요?"
  혜인이 형사들을 막아서며  소리을 질렀다.  그러나
  소용없는 짓이었다. 우락부락한 형사들은 그녀를 난폭
  하게 밀쳐 버리고 현관으로들어가고 있었다.
  (깨끗이 당했어!)
  혜인은 입술을 깨물었다.
  "입회하시죠."
  여형사가 혜인을 날카롭게 쏘아보며 말했다.
  박 형사와 최 형사가 수상하다고 끄집어내 온 것은
  뜻밖에 여자의 마스터 베이션 도구들이었다. 유혜인은
  결혼 생활을 하면서도 자위 행위를 하고 있었던 모양
  이다.
(이진우와의 관계가 원만하지 않았다는 증거야.)
  혜인은 낮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 밖에도 유혜인은
  포르노 비디오 테이프와 남자들의 성기가 크로즈업되
  어 있는 외설스런 잡지까지 몇 권 갖고 있었다.
  "저 여자 변태인 모양이지요?"
  최 형사가 주방에 있는  유혜인을 힐끔거리며 유경
  에게 소곤거렸다. 유혜인은 수색이 시작되사마자 주방
  에 들어가서 나오지 않고 있었다.
  "왜요?"
  "결혼한 여자가 어떻게 이런 것들을 가지고 있습니
  까? 더구나 여자가."
  "여자의 자위도 정상적인 거예요."
  "정상적이라구요?"
  박 형사가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이런 건 문제될 거 없어요. 잘 챙겨서 돌려 주도록
  해요."
  "테이프나 틀어보죠."
  최 형사가 유혜인의 소형  녹음기에 유혜인이 불태
  워 버리려던 테이프 하나를 집어넣고  플레이 버튼을
  눌렀다.
  "저, 이 실장입니다."
  이내 녹음기에서  남자의 목소리가  먼저 흘러나왔
  다.
  "아, 이 실장!"
  가볍게 탄성을 내뱉는 것은 여자의 목소리였다.
  "누구죠?"
  "이진우와 장숙영입니다. 전화를 도청한 녹음  테이
  프에요."
  최 형사와 박 형사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서로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뉴스 보셨습니까?"
  "봤어.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이야, 이 실장?"
  "저도 뉴스를 보고 깜짝 놀랐습니다. 누가 감히  회
  장님 묘를 파헤쳤는지."
  "누구 짐작 가는 사람 없어?"
  "없습니다."
  "이 실장이 한 번  조사해 봐. 누군가 우리를  골탕
  먹이려 하고있어."
  "사모님하고 저하고의 관계를 알고 있는 사람이 있
  습니까?"
  "없어."
  "이상한 일이군요."
  "이 실장 부인이 눈치채고 있는 것 아니야?"
  "그럴 리가 없습니다. 또 눈치를 챘다고 해도  여자
  가 뭘 어떻게하겠습니까?"
  "이 전화 엿듣고 있지는 않겠지?"
  "제 방에 따로 있는 전화입니다. 아래층까지 안  들
  립니다."
  "이 실장, 우리가 벌을 받고 있는 걸까?"
  "벌이라뇨?"
  "우리가 사랑하고 있는 거 말이야."
  "사랑이 무슨 죄가 됩니까?"
  "나이 든 여자가 젊은 사내의 육체를 그리워하니까
  그게 죄지. 이 실장  나쁜 사람이야. 왜  나를 이렇게
  만들었어"
  "사모님을 좋아하기 때문입니다."
  "나쁜 사람!"
  "용인에 가 보셔야지요."
  "나 혼자는 무서워서 못 가겠어."
  "제가 모시겠습니다."
  "그럼 지금 집으로 와."
  "네."
  찰칵. 전화가 끊겼다. 전화의 내용으로  보아 고 조
  일제 회장의 묘가 파체쳐진 직후 나눈 통화인 모양이
  었다.
  "저예요, 아저씨."
  두 번째 테이프는 젊은 여자의 목소리가 먼저 흘러
  나왔다.
  "어다서 전화하는 거야?"
  "집 앞 공중전화요."
  "이봐, 숙자! 어쩌자고 자꾸 이래?"
  "전 돈이 필요해요."
  "그래서 협박하는 거야?"
  "협박이 아녜요. 좀 도와달라는 거예요."
  "그게 어디 도와달라는 거야?"
  "아저씨가 내 옷 벗길 때 뭐라고 그랬어요? 무엇이
  든지 다 도와주겠다고 그랬잖아요?"
  "돈도 줄 만큼 줬잖아?"
  "아저씨, 너무 인색하게 그러지 말아요!"
  "자꾸 이러면 나도 그냥 있지 않겠어!"
  "이번 한 번예요. 아저씨가 섭섭하게 대해 주지  않
  으면 저도 고향으로 내려갈 거예요."
  "얼마가 필요해?"
  "천만원이요."
  "천만원이 누구네 강아지 이름인 줄 알아?"
  "깨끗이 청산해 드릴께요."
  "좋아. 2芟3일 안으로 만들어 주지."
  "고마워요, 아저씨."
  "끊어."
  "아저씨!"
  "왜?"
  "이따가 제 방으로 오세요. 마지막으로 멋지게 서비
  스해 드릴께요."
  "알았어."
  찰칵, 전화가 끊겼다. 형사들이 무겁게 한숨을 내쉬
  며 담배를 꺼내 물었다.  유경은 다 돌아간 테이프를
  꺼내고 다른 테이프를 집어넣었다.
  "이진우씨죠?"
  역시 젊은 여자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그렇습니다만"
  이진우가 머뭇머뭇하는 기색으로 전화를 받고 있었
  다.
  "요즈음 장숙영 여사하고 재미가 좋으시다면서요?"
  여자의 목소리에는 비아냥끼가 묻어 있었다.
  "용건이 뭐요?"
  "조일제 회장님을 누가 죽였어요?"
  "그 분은 심장마비로 돌아가셨어요."
  "누가 그랬죠?"
  "사망전단서에 그렇게 나와 있습니다."
  "그래요?"
  "조 회장님 죽음에 이상한 점이라도 있습니까?"
  "조 회장님은 타살되었어요."
  "뭐라구요?"
  "그 증거가 조 회장님 오른손 엄지손가락예요."
  "도대체 무슨 소리요?"
  "내가 그 손가락을 가지고 있어요!"
  "뭐요?"
  "당신이 조 회장님을 살해했죠?"
  "무슨 뚱딴지 같은 소리를!"
  "당신은 그날 해질 무렵 조  회장님 댁을 방문했었
  잖아요?"
  "난 바로 돌아왔어."
  "돌아가는 척하고 정원에 숨어 있었는지 어떻게 알
  아요?"
  "우리 집 사람이 증인이요! 내 딸, 가정부 모두
  가 증인이요!"
  "가정부는 이미 죽었고  당신 딸과  아내는 가족예
  요! 가족끼리 무슨 음모를 꾸몄는지 알게 뭐예요!"
  "닥쳐!"
  "내일 또 전화할 테니까 잘 생각해 보세요!"
  찰칵, 다시 전화가 끊겼다. 테이프는 계속 겉돌아가
  고 있었다.
  "파묘 사건의 범인이 여기 숨어 있었군요."
  박 형사가 담배 연기를 길게 내뿜으며 말했다.
  "목소리만 가지고 범인을 추리할 수 있겠어요?"
  유경이 좌우로 고개를 흔들었다. 그것은 결코 용이
  한 일이 아닌 것이다.
  "아무래도 주변 인물일 테니까 유력한 단서는 잡은
  셈입니다."
  "그래요. 이만한 것도 큰 수확예요."
  "다른 테이프도 넣어 보지요."
  유경이 고개를 끄덕거리고 또  다른 테이프를 집어
  넣었다.
  "자네, 장 회장하고 어떤 관계인가?"
  이진우가 수화기를 들고  여보세요, 하자  다짜고짜
  굵은 남자의 목소리가 고막을 때려 왔다.
  "아, 윤 기자로군."
  이진우가 너털거리고 웃어댔다.
  "웃지 말고 대답해 봐!"
  "도대체 왜 그러는 거야?"
  "자네, 그룹 내막에 대해서는 훤히 알고 있지?"
  "그래, 알고 있다고 할 수 있지."
  "그럼 장 회장이 재산을 상속받은 게 합법적인가?"
  "합법적이지. 뭐가 잘못되어 있어?"
  "그럼 조 회장이 이중인간인가?"
  "무슨 소리야?"
  "몇년 전 조 회장이 우리 신문과 인터뷰한 거 기억
  나?"
  "그래, 내가 주선했었지."
  "그때 조 회장이 자기가 죽은 뒤엔 재산을 모두 사
  회에 환원시키겠다고 했어."
  "그래서?"
  "그런데 환원시킨 게 아니라  장숙영에게 물려줬잖
  아?"
  "난 또 뭐라구 그런데 니가 왜 그 문제에 신경
  을 쓰냐?"
  "우리 신문에 인터뷰한 게 엉터리가 되었으니까 그
  러지 임마!"
  "야, 혈압 높이지 말고 언제 술이나 한 잔 마시자."
  "왜? 좋은 일이라도 있어?"
  "친구 사이에 좋은 일 있어야 술 마시냐?"
  "술은 관두고 장숙영이 인터뷰할 수  있게 주선 좀
  해라."
  "목적은 결국 거기 있었구나?"
  "빠른 시일 내에 연락해 줘."
  "알았어. 2. 3일 안으로 해 줄께."
  "그렇게 빨리?"
  "내가 누구냐?"
  "알았어, 임마. 니 색시한테 안부나 전해 다오."
  "그래."
  나머지 테이프들은 불  때문에 재생이  불가능했다.
  유경은 녹음기의 스톱 버튼을 누르고  테이프를 꺼내
  어 갈무리했다.
  "저 여자는 어떻게 할까요?"
  "일단 연행하는 게 좋지 않겠어요?"
  "이거 가지고  범인이라는  증거는 성립되지  않는
  데."
  "저 여자는 많은 비밀을 알고 있는 것 같아요. 집에
  서는 취조에 순순히 응하지 않더라도  유치장에 넣어
  두면 생각이 달라질 거예요."
  "그럼 연행하지요."
  박 형사가 주방으로 들어가 유혜인을 끌고 나왔다.
  유경은 유혜인의 눈이  표독스럽게 자신을  쏘아보는
  것을 보고 그 눈길을 피했다.
  "갑시다!"
  박 형사가 유혜인의 등을 떠밀었다.
  비가 줄기차게 내리고 있었다. 철창 사이로 장대질
  을 하듯 쏟아지는 빗줄기를 내다보며  혜인은 입술을
  꽉 깨물었다. 불결하고 언짢았다. S서는  새로 신축한
  건물인데도 유치장은 벌써 더러운 오물이 마룻바닥에
  묻어 있었고 유치인들이  내뿜는 땀내로  후덥지근했
  다.
  혜인은 벽에 등을 기대고 무릎을 세웠다. 이혼을 당
  한 것도 서러운데 유치장 신세까지 지고 있는 자신의
  처지가 초라하기만 했다.
  (몇 시나 되었을까?)
  시계를 가져오지 않은  것이 잘못이었다.  유치장은
  혜인이 들어올 때도 이미 어둠침침했었다. 날이 저물
  어서가 아니라 비가 오고 있기 때문이었다. 천정에 알
  전구가 하나 켜져 있었으나 촉수가 낮아 침침하게 죄
  인들의 군상을 비추고 있을 뿐이었다.
  (어째서 취조도 하지 않을까?)
  혜인은 눈을 감았다. 유치창에 가둬 놓고 취조도 하
  지 않는 형사들의 수작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저 여자들은 왜 들어왔대?"
  "면도사들이래."
  "면도사?"
  "퇴폐 이발소 면도사 말이야."
  "가정주부 같은데?"
  눈을 감고 있자 한쪽 구석에서 소곤대고 있는 여자
  들의 말소리가 들려왔다.
  "그러니까 문제지.  가정주부들이 면도사  한답시고
  그걸 팔고있대."
  "세상에!"
  "남자들이 원하면 손으로도 그걸 해 주고 입으로도
  그걸 해 준대.  어떤 때는 거기로  해 주기도  하고
  ."
  "그러니 전부 성병에 걸렸지."
  여자들이 혀를 찼다.  혜인은 쓴웃음이  나왔다. 그
  여자들은 상습도박 혐의로 붙들려온 여자들이었다.
  "그러나 저러나 우린 어떻게 한대?"
  "즉결에 넘긴대."
  "즉결이 뭐야?"
  "판사가 마음 내키는 대로 이틀에서  한 달까지 판
  결을 때리는 거야. 벌금을 때리기도 하구."
  "큰일 났네. 우리 애 아빠 알면 쫓겨나는데."
  "걱정도 팔자네. 요즈음 누가 고스톱쳤다구  여편네
  를 쫓아내? 카바레서 제비족하고 춤추다가 걸려도 못
  쫓아내는데."
  "석이 아빠 성질이 어디 보통이야?"
  "그래 봤자 뺨따귀 몇 대  올려붙이기밖에 더 하겠
  어? 즈네들은 고스톱 안 치나?"
  그때 철창문이 덜컥 열리더니  형사의 손에 떠밀려
  젊은 여자가 하나 들어왔다. 검은 옷을 입고 있는 여
  자였다. 여자는 들어오자마자 철창에 매달려 울기 시
  작했다.
  "왜 저래?"
  "초상이라도 났나?"
  여자들이 궁금한 낯으로 철창에  매달려 있는 여자
  를 쳐다보았다. 제법 예쁘장하게 생긴 여자였다.
  "거 좀 조용히 해요!"
  철장 밖에서 유치장을 감시하고  있던 경비 순경이
  빽 소리를 질렀다.
  "아저씨, 집에 보내 주세요. 애기 아빠 알면 이혼당
  해요!"
  여자가 울면서 말했다.
  "그런 걸 왜 도둑질을 해요?"
  "다시는 안 그럴께요!"
  "다시는 안 그런다면서 벌써 몇 번째요?"
  "아저씨, 한 번만 더 용서에 주세요."
  "내 소관 사항이 아니니 좀 기다리고 있어 봐요!"
  "난 몰라!"
  여자가 마룻바닥에 철버덕 주저앉더니 서럽게 울기
  시작했다.
  애초로운 모습이었다.
  혜인은 다시 눈을 감았다. 공연히 가슴이 저리듯 아
  파 왔다.
  "생활이 어려워 보이지도  않는데 왜  도둑질을 했
  어?"
  상습도박 혐의로 붙들려온 여자  하나가 울고 있는
  여자에게 가까이 가서 소곤거렸다.
  "뭘 훔쳤어?"
  "알 거 없어요."
  "원, 도둑질한 주제에 쌀쌀맞기는!"
  "뭐에요? 내가 도둑질을 하든 말든  무슨 상관인데
  나서요?"
  "젊은 년이 기차 화통을 삶아  먹었나 왜 딱딱거리
  고 지랄이야?"
  "뭐? 지랄?"
  그와 동시에 철썩하고 뺨을 갈기는 듯한 소리가 들
  렸다.
  "아니, 이 년이 사람을 치네!"
  혜인이 눈을 뜨자 두 여자는 벌써 엉거붙고 있었다.
  상습도박 혐의로 들어온 여자가 젊은  여자의 머리채
  를 휘어잡고 젊은 여자는 상습도박 혐의로 들어온 여
  자의 브라우스를 움켜쥐고 있었다.
  "그래, 이 년아, 쳐라 쳐, 돈 벌어 놨음 쳐!"
  "조용히 못해! 경찰서 안에서 싸우면 3년 징역이야!
  3년 동안 콩밥 먹고 싶어?"
  순경이 철장을 흔들며 악을 썼다. 그러나 두 여자는
  순경이 철창문을 열고 들어와서 떼어놓을  때까지 머
  리카락을 쥐어뜯고 얼굴을 할퀴었다.
  젊은 여자가 석방된 것은 한 시간쯤 뒤의 일이었다.
  그 여자는 생리 때마다 도벽이 있어 백화점에서 물건
  을 훔치고는 했는데 무역회사 영업부장의 부인이라고
  했다.
  "흥! 우리도 달거리 때 고스톱  치면 안 잡아 가두
  나?"
  상습도박 혐의로 걸려 들어온  여자가 그런 소리를
  하자 유치장안에 한바탕 웃음의 물결이 일어났다. 혜
  인도 어처구니가 없어 피식 웃었다.
  혜인이 취조실로 불려간  것은 그날  저녁 6시경의
  일이었다. 취조실엔 여형사가 냉랭한 표정으로 의자에
  앉아 있었다.
  "녹음 테이프를 왜 태우려고 그랬어요?"
  "이젠 쓸모가 없기 때문예요."
  "왜 쓸모가 없어졌어요?"
  "이혼하기 전에는 그 테이프를 증거로 간통죄로 고
  발할 수 있었지만 이젠 이혼을 했으니까요."
  "그럼 간통 현장을  잡기 위해서  전화를 도청했어
  요?"
  "네."
  "간통 현장은 잡았어요?"
  "잡을 필요가 없었어요."
  "간통죄로 고발하지도 않았고?"
  "."
  "조일제 회장의 무덤을 파헤 쳤다는 여자가 누구예
  요?"
  "모르겠어요."
  "진심예요?"
  "네."
  "목소리도 몰라요?"
  "네."
  "이진우씨는 알고 있는 눈치였어요?"
  "모르는 것 같았어요."
  "협박 전화가 몇 번 왔지요?"
  "두 번이요."
  "무슨 내용이었어요?"
  "조일제 회장을 누가 죽였느냐는 것이었어요."
  "그럼 조일제 회장이 살해되었다는 얘기예요?"
  "모르겠어요."
  "나한테 하고 싶은 말 있어요?"
  "없어요."
  그것뿐이었다. 그녀가 눈짓을 하자 옆에 있던 형사
  들이 혜인을 데리고 나가 다시 유치장에 밀어넣었다.
  장숙영은 정릉 저택의  2층 욕실에서  샤워를 하고
  있었다. 유경은 장숙영이 샤워를 다 하고 나올 때까지
  2층에 있는 거실에 앉아서 기다렸다.
  "기다리게 해서 미안해요."
  장숙영이 풍만한 나신에 목욕  타올을 두르고 나온
  것은 유경이 10분 남짓 비오는 정원을 물끄러미 내다
  보고 있을 때였다.
  "괜찮습니다."
  유경이 일어서며 가볍게 목례했다.
  "웬일예요?"
  "몇 가지 여쭤볼 말씀이 있어서요."
  "그래요? 들어오세요."
  장숙영이 화사하게 웃으며 방으로 들어갔다. 유경도
  천천히 뒤따라 들어갔다. 장숙영의 집을 샅샅이 수색
  해 보고 싶었으나 그녀의 지위 때문에  차마 그럴 수
  가 없었다.
  "수사는 잘 진행되고 있어요?"
  장숙영이 목욕 타올을 벗으며 유경을 향해 말했다.
  "답보 상태에 빠져 있습니다."
  유경이 등을 돌리며  대답했다. 같은  여자끼리라도
  아무 것도 걸치지 않은 장숙영의 알몸을 보고 있기가
  민망해서였다.
  "빨리 범인이 잡혀야  할 텐데  나한테 물어볼
  건 뭐예요?"
  "조 회장님의 사라진 엄지손가락에 대해서입니다."
  "찾았어요?"
  "못 찾았습니다."
  "그럼?"
  "혹시 엄지손가락 때문에 협박전화를  받으신 일이
  있습니까?"
  장숙영이 장롱에서 속옷을 꺼내 입다가 멈칫 했다.
  유경은 장숙영의 행동을 보고 협박전화를  받은 것이
  틀림없다고 생각했다.
  "대답해야 돼요?"
  "수사에 도움이 되니까요."
  "받은 일이 있어요."
  장숙영이 시미즈를 꺼내서 걸치며 태연한 표정으로
  말했다.
  "어떤 내용이었습니까?"
  "회장님 엄지손가락을 자기가 가지고  있다고 그랬
  어요."
  "왜 엄지손가락을 가지고 있다고 그러던가요?"
  "모르겠어요. 그냥 안심하고 있으라고 하더군요."
  "안심이요? 무슨 뜻이죠?"
  "나도 무슨 뜻인지 모르겠어요."
  "정직하게 대답해 주세요."
  "내가 거짓말을 하고 있다고 생각해요?"
  "남자였나요?"
  "네."
  "몇 번이나 그런 전화가 왔죠?"
  "한 번이요."
  "딱 한 번밖에 없었습니까?"
  "네."
  장숙영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유경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장숙영의 말이 사실이라면 범인은 여자와 남
  자 둘이라는 결론이 되기 때문이었다.
  "조일제 회장님은 어떻게 돌아가셨는지요?"
  "무슨 소리예요? 아직도 모르고 계시나요?"
  "살해되시지는 않았어요?"
  "심장마비로 돌아가셨어요. 사망진단서에도  그렇게
  나와 있구요."
  "혹시나 해서 물어보는 거예요."
  장숙영이 불쾌한 기색을 띠었다. 유경은 심문을 바
  꾸었다.
  "여자로부터 협박 전화는 없었나요?"
  "없었어요."
  장숙영이 단호하게 대답했다.
  "어디 외출하실 건가요?"
  유경은 시미즈 앞자락으로 허옇게  삐져 나와 있는
  장숙영의 풍만한 가슴에서 눈길을 떼지  않고 질문했
  다. 이미 딱지가 아물었지만 장숙영의 가슴엔 이빨로
  깨문 듯한 자국이 하나 있었다.
  "네."
  장숙영이 요염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이진우를 만나는 거겠지. 저 왼쪽 가슴의  이빨 자
  국은 이진우가  새겨놓은 사랑의  이빨 자국일  것이
  고)
  S서 유치장에 가둬  놓은 유혜인의 초라한  얼굴을
  생각하며 유경은 그렇게 생각했다.
  "이진우씨가 이혼을 했더군요."
  "네."
  "알고 계셨나 보지요?"
  "우린 결혼할 사이니까요."
  "너무 빠른 것 아닌가요? 조 회장님이 돌아가신 지
  몇 달 되지도 않았는데."
  "맞는 말예요. 사실 비난받을 얘기지만 우린 회장님
  이 돌아가시기 전부터 관계를 갖고 있었어요. 그 사람
  도 나도 도의적으로  비난을 받아도 할  말이 없다고
  생각해요."
  "그러시면서 왜?"
  "난 회장님하고 결혼한 뒤 여자로서 마땅히 누려야
  할 부부 생활의 즐거움을 누리지 못했어요. 그런데 그
  사람이 그걸 눈뜨게해 줬어요. 어떻게 생각하면 추악
  한 짓인지도 모르지만 난한 번도  추악한 짓이라
  곤 생각하지 않았어요. 한  여자로서 당연히 누릴 수
  있는 권리라고 생각해요."
  "."
  "난 이제 마흔셋예요. 세상 눈치 다 보고 살다 보면
  금새 내 육체는 시들어 버릴 거예요. 한 형사는 내가
  나쁘다고 생각해요?"
  "그렇지는 않습니다."
  "이해해 주니 고마워요."
  "유혜인씨는 지금 S서 유치장에 있습니다."
  유경은 화제를 바꾸었다.  장숙영의 반응을  떠보기
  위해서였다.
  "왜요?"
  장숙영이 놀라서 입을 반쯤 벌렸다.
  "수상한 점이 있어서 조사를 받아야 됩니다."
  "어떤 점이요?"
  "이진우씨의 전화를 모두 도청했습니다."
  "어머!"
  "유혜인씨도 용의자 혐의를 벗어날 수는 없습니다."
  "중요한 단서라도 나왔나요?"
  "아직은 모르겠습니다. 불에 탄 테이프가 몇 개  있
  는데 그것만 재생되면 뭔가 단서가 나올 거라고 생각
  됩니다."
  "그렇군요."
  장숙영이 어두운 얼굴로 고개를 끄덕거렸다.
  "나갈 거면 같이 나가요."
  장숙영이 이내 얼굴 표정을  바꾸고 유경에게 말했
  다.
  "화장은 안 하세요?"
  "미용실에 가서 할래요. 머리도 만질겸."
  "이진우씨를 만날 건가요?"
  "네."
  장숙영이 부끄럽다는 듯이 교태를 부리며 웃었다.
  "회사에서 늘 만나지 않으세요?"
  "만나도 여자의 마음은 그렇지 않은 거예요."
  유경은 장숙영의  말에 웬일인지  구역질이 올라올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장숙영이 무엇인가 속이고 있
  는 듯한 기분이었다.
  서울 시경 강력계의 이상진  형사반장은 담배를 두
  대나 거푸 피우면서 골똘히 생각에 잠겼다. 서울 시내
  일원의 방화사건, 미장원 강도사건, 구로구 룸살롱 살
  인사건이 연달아 터지면서 경찰은 초상집  같은 분위
  기였다. 매스컴은 연일 [실종된 민생치안] [경찰은 무
  엇을 하고 있나]하면서 두드려댔고  위에서도 범인을
  빨리 검거하라는 독려 전화가 부리나케  걸려오고 있
  었다. 벌써 각 경찰서의  수사 고위 간부들이 경고를
  당했고 사건을 상부에  은폐 또는 축소  보고한 일부
  경찰 간부가 직위해제당하여 옷을 벗은  경우까지 있
  었다. 수사를 잘못 했대서가 아니라 사건을 은폐하거
  나 축소한데 대한 고위층의 분노였다.
  (경찰의 사기가 땅에 떨어지고 있어!)
  그것은 20년 가까이 경찰에  몸담고 있는 그에게는
  고통스러운 일이었다. 범죄가 다양해지고 대담해지면
  서 사건을 쫓는 수사력이 점점 한계를 드러내고 있었
  다.
  피해자 주변의 우범자, 불량배,  면식범을 연행하여
  닥달하는 과거의 수사 방법은 이제 거의 고전적인 수
  사 방법이 되었던 것이다.
  범죄는 전혀 엉뚱한 형태로  나타나기 일쑤였고 범
  인도 예상 못한 곳에 숨어 있었다.
  룸살롱 살인사건의 잔혹성, 주택가 연쇄방화사건 등
  일련의 사건들은 모방범죄까지 불러 일으키면서 시민
  들을 불안에 떨게 하고있었다.
  성일 그룹 조일제 회장의 파묘사건, 김숙자, 임수지
  살인사건은 엄밀히 따지면 연쇄사건이라고 할  수 있
  었다. 피해자 모두가 크든  적든 성일 그룹과 관계가
  있는 사람들이었기 때문이다. 무엇인가 실마리가 풀릴
  것 같으면서도 풀리지 않는 상태가 몇 달째 계속되고
  있었다.
  "앉아요."
  최 형사가 이진우를 취조실로 데리고 들어왔다. 그
  는 유혜인이 연행된 그날 밤 한유경  형사에 의해 장
  숙영과 호텔에 있다가 연행되어 왔었다.
  "이름."
  이 반장은 이진우가 취조실  의자에 앉자 표정없이
  내뱉었다.
  "제 이름을 몰라서 물으십니까?"
  "이름을 말하라고 그랬어!"
  "나 참!"
  "말하기 싫어?"
  이진우가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그를 물끄러미 쳐다
  보았다.
  "유혜인을 데리고 와."
  "예."
  최 형사가 밖으로 나갔다.
  "아니, 제 아내도 여기 들어와 있습니까?"
  이진우가 놀라서 소리쳤다.
  "누가 당신 아내야?"
  "예?"
  "당신들 이혼했다며? 이혼했다면서 무슨 아내야?"
  이진우가 이 반장을 쏘아보다가  고개를 외로 꼬았
  다. 아니꼬와하는 기색이었다.
  "김숙자는 당신을 협박한 그 다음날 살해되었어!"
  "벌써 몇 번이나 말씀드렸습니다."
  "김숙자를 죽이지 않았다고?"
  "예."
  "당신은 동기가 충분해. 장숙영과 결혼하기 위해 김
  숙자를 죽인거야!"
  "전 알리바이가 성립되고 있습니다."
  "청부 살인을 할 수도 있잖아?"
  "예?"
  "누구에게 살인을 맡겼어?"
  "그런 일 없습니다."
  그때 최 형사가 유혜인을 데리고 들어왔다. 유혜인
  은 이진우와 시선이 마주치자 재빨리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옆에 앉으시오."
  이 반장이  유혜인에게 이진우의  옆자리를 가리켰
  다. 유혜인이 조심스러워하며 이진우의 옆자리에 앉았
  다.
  (저런 여자와 이혼을 하다니!)
  그는 유혜인이 다소곳하게 의자에  앉는 것을 보고
  는 배알이 뒤틀렸다.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자구. 이름."
  "이진우."
  "나이?"
  "서른여섯입니다."
  "장숙영인 언제부터 알게 되었어?"
  "."
  "육체 관계를 맺은 것 말이야?"
  "꼭 이렇게 해야 됩니까?"
  "장숙영까지 이 자리에 불러 와?"
  그가 책상을 쾅 내려쳤다.
  "봄입니다."
  "정확하게!"
  "3월 말경입니다."
  "어디서 첫 관계를 맺었어?"
  "그런 일이 사건과 무슨 관련이 있습니까?"
  "대답해, 이 새끼야!"
  "사무실입니다."
  "어느 사무실?"
  "회사 안에 있는 회장실입니다."
  "거기 침대가 있어?"
  "없습니다."
  "그럼 어떻게 그 짓을 했어?"
  "서서."
  "뭐야?"
  고개를 숙인 유혜인의 어깨가 들먹거려지기 시작했
  다. 소리를 죽여 울고 있는 모양이었다.
  "김숙자하고는?"
  "숙자의 지하실 방에서."
  "반항하지 않았어?"
  "잠들어 있었습니다."
  "그럼 당신이 덮친 뒤에도 자고 있었어?"
  "나중에 생각해 보니까 잠든 체하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말려들었단  말이지? 어린  계집애한테
  ."
  "죄송합니다."
  "나한테 죄송할 것은 없어."
  그가 유혜인을 안쓰러운  눈빛으로 살피며  물었다.
  이제 유혜인은 가늘게 소리내어 울고 있었다.
  "당신의 인생관은 뭐야?"
  "그런 것까지 알아야 합니까?"
  이진우가 붉어진 눈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역시 한 형사가 옳았어. 이진우는 마음이  여린 사
  람이야!)
  이 반장은 자신도 모르게  한유경 형사의 관찰력에
  탄복했다.
  "대답하기 싫으면 관둬!"
  "."
  "조 회장의 손가락을 잘라 간 여자는 누구야?"
  "모르는 여자입니다."
  "목소리를 잘 생각해 봐."
  "그러잖아도 오랫동안 생각해 봤습니다. 그런데  전
  혀 알 수가 없었습니다."
  "손가락을 왜 잘라 간 거야?"
  "모르겠습니다."
  이진우가 고개를 흔들었다. 역시 이들의 연행은 아
  무 소득도 없었다.
  "이 사람들 내보내."
  이 반장이 최 형사에게 지시하고 담배를 꺼내 물었
  다.
  "석방입니까?"
  "석방이야."
  "나갑시다."
  최 형사가 그들을 데리고 취조실 밖으로 나갔다.
  이 반장은 밤비가 쏟아지는 창으로 가서 밖을 내다
  보았다. 본격적인 장마가 시작된 모양이었다. 잠시 뜸
  해지는가 싶던 빗줄기가 또 억수같이  쏟아지고 있었
  다.
  "수고하셨어요."
  한유경이 비 냄새를 풍기며 취조실로 들어섰다. 그
  녀의 손에  자동판매기에서 뽑은 커피가 두  잔 들려
  있었다.
  "왜 이런 일을 나한테 시켰어?"
  이 반장은 한유경의 손에서 커피 한 잔을 받아들며
  한숨을 내쉬었다.
  "느낌이 어때요?"
  "가슴이 찡해서 혼났어."
  "면도칼답지 않게 그만한 일 가지고 뭘 그러세요?"
  "도대체 그 두 사람한테 한  형사가 알아내려고 한
  게 뭐야?"
  "아무 것도 없어요."
  "말도 안 되는 소리 그럼 왜 이틀 동안이나 저
  사람들을 유치장에 처넣어 뒀어?"
  "반성 좀 하라구요."
  "반성?"
  이 반장은 피식 웃음이 나왔다. 그것이 진실이라면
  어이없는 짓이었다.
  "장숙영인 어때?"
  "독이 오른 것 같아요."
  "독이 올라?"
  "이진우가 연행되자 화가 이만저만 난 게 아녜요."
  "아무래도 장숙영 쪽을 더 캐야겠어."
  "연행할까요?"
  "좀더 생각해 보구."
  이 반장은 심각한 표정으로 고개를 흔들었다. 그녀
  를 연행하는 것은 매스컴의 표적이 되기 때문이었다.
       10. 제4의 살인
  장숙영은 소녀처럼 창틀에 엉덩이를 올려놓고 앉아
  서 하늘을 쳐다보았다. 아직  달이 뜨지 않아 하늘이
  깜깜했다. 그러나 깜깜한 하늘엔 별들이 빼곡하게 들
  어차서 반짝이고 있었다.
  아침 저녁으로 바람이 서늘해진  것을 보면 가을이
  성큼 다가와있는 모양이었다.  별빛이 보석처럼  맑았
  다. 벌써 가을의 전령인  풀벌레들이 창 밑에서 울고
  맨드라미, 개꽃, 코스모스 같은  가을꽃들이 화려하게
  피고 있었다.
  (이제 새로 시작하는 거야.)
  그녀는 혼인 전야의 처녀들처럼 잠을 이룰 수가 없
  었다. 내일이면 이진우와 결혼하는 날이었다. 이미 이
  진우와 수 없이 육체 관계를가져  남자의  육체에 대
  한 두려움 같은 것은 전혀 없었다. 오히려 그와의 섹
  스를 머리 속에 떠올리면 몸이 부르르 떨리도록 황홀
  했다. 지난 몇 달 동안 그녀는 그와 함께 수 없이 알
  몸으로 뒹굴었었다. 호텔에서, 승용차 안에서,  그리고
  회장실 벽에 기대 서서 선채로 그 짓을 한 것도 여러
  번 있었다. 그러나 그 어느 경험도 그녀를 만족시키지
  않은 것은 한 번도 없었다.
  (난 너무나 오랫동안 그것의 즐거움을 몰랐어!)
  그것은 죽은 조 회장 때문이었다. 그녀가 한창 영화
  배우로 이름을 날리고 있을 때 조  회장은 40대의 중
  후한 사내였었다. 그는 이미 전처와 이혼하여 혼자 살
  고 있었고 그녀에게 조심스럽게 접근해왔다.
  어릴 때 아버지를 여의고 홀어머니 손에서 자란 그
  녀는 아버지처럼 부드럽고  따스한 그에게  매료되어
  주위의 만류도 뿌리치고 스스로 그의  후처가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애초에 잘못된 결혼이었다. 그는 그
  녀보다 나이가 스무 살이나 더 많았고 겉보기와 달리
  허약한 몸을 갖고 있었다.
  그리고 그가 세월이 흐르면서  섹스에 흥미를 잃어
  가고 있는 것에 반비례해 그녀는 더욱 왕성해지고 있
  었다.
  그것이 비극이었다. 그녀는  남편 조  회장으로부터
  육체의 기쁨을 전혀 얻을  수가 없었다. 신혼 시절엔
  그래도 조 회장이 그녀를 안아주기도 했으나 신혼 시
  절이 끝나자 독수공방 외로운 밤만이  유령처럼 그녀
  에게 남아 있었다.
  그것은 부부가 아니었다. 조 회장은 아내로서 그녀
  를 맞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곁에 다는 예쁜 인형으로
  그녀를 맞아들였을 뿐이었다.
  인형이란 생명이 없어야 했다. 그러나 그녀에겐 생
  명이 있었다.
  그것이 비극이었다.
  조 회장은 나이가 들면서 점점 그녀에게 흥미를 잃
  었으나 그녀는 오히려 왕성하게 조  회장을 요구하고
  있었다. 그것은 결코 그녀가 음란했기 때문이 아니었
  다. 그녀의 젊디젊은 육체가 비로소 문을 열기 시작했
  기 때문이다.
  조 회장은 그녀의 욕망에 겁을 냈다. 원래가 허약한
  체질인 그는 나이가 들자 더욱 움츠러들었다. 그리하
  여 젊은 아내와 방을 따로 쓰게 되었다.
  조 회장과 방을  따로 쓰고 나서부터  그녀는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조 회장은  그녀에게 첫 남자였다.
  첫 남자와 방을 따로 쓰는 것은  버림을 받은 것처럼
  허전하고 쓸쓸한 일이었다.
  어느 날 그녀는 스스로 조 회장의 침실로 찾아갔다.
  그리고 어린아이 젖을 먹이듯이 그녀의  가슴 한쪽을
  조 회장의 입에 물려 주었다. 그러자 그가 무거운 눈
  꺼풀을 들어올리며 그녀의 엉덩이를 손바닥으로 쓰다
  듬었다.
  (내 사람, 아아.)
  그녀는 눈물이 나올 것처럼 기뺐다. 그러나 그 기쁨
  의 시간은 지극히 짧았다. 그녀가 미처 절정에 오르기
  도 전에 조 회장이 지쳐서 쓰러졌기 때문이다. 그리고
  조 회장은 이내 잠이 들었다.
  (난 어떻게 하라구!)
  그녀는 허망했다. 조 회장을 마구 흔들어댔으나 조
  회장은 시체처럼 쓰러져 자고 있을 뿐이었다.
  (원래가 허약한 사람이었어!)
  1년여 전, 조 회장은 교통사고를 당해 식물  인간이
  되었다. 그것으로 그와의 인연도 끝난 셈이었다.
  이진우를 만난 것은 조 회장이 식물 인간이 되었을
  때였다. 그녀는 회장실 벽으로 밀어붙여져서 선 채로
  그 짓을 당했었다.
  어떻게 당했는지는 기억조차 분명하지 않았다. 다만
  그녀는 반항한다고 했는데도 그는 그녀의  반항을 간
  단하게 무위로 만들었던 것이다. 오히려 그녀 쪽에서
  팔다리로 그의 몸을 휘감고 있었다는 것을 깨달은 것
  은 훨씬 뒤의 일이었다.
  모든 것이 끝났을  때 그녀는 회장실  바닥에 휴지
  조각처럼 구겨져 있었다. 그녀는 그에게 짐승처럼 당
  한 사실이 도무지 믿어지지가 않았다. 어떻게 그럴 수
  가 있는가 하는 생각만이 한동안 그녀의 머리 속에서
  맴을 돌았다.
  수치스러운 일이었다. 병상에 있는 조 회장의 얼굴
  이 떠오르기도 했다. 그녀는 이진우를 해고해 버려야
  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자 그에  대한 미움과 증오보다
  그리움이 무럭무럭 자라나기 시작했다. 특히 짐승저럼
  그녀를 짓밟아 버린 그의 강인한 육체가 더욱 그리워
  지기 시작했다.
  그녀는 마침내 결단을 내렸다. 그것은 그와 함께 육
  체의 쾌락에 몸을 던지는 일이었다. 조 회장은 어차피
  멀지 않아 죽을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내일이면 나는 그의 아내가 되는 거야!)
  그것은 생각만 해도 가슴이 떨리는 일이었다.
  밤이 깊어 가고 있었다. 창문을 닫고 침대에 누웠으
  나 좀처럼잠이 오지 않았다.
  장숙영은 침대에서 일어나 거실로 나갔다. 술이라도
  한 잔 마셔야 잠이 올  것 같았다. 거실의 탁자  위에
  낮에 마시던 양주가 반병  남아 있었다. 그녀는 양주
  뚜껑을 열고 병째로  입으로 가져가 한  모금을 마셨
  다. 목젖이 뜨끔하면서 금새 뱃속이 찌르르했다.
  문득 그녀는 이 넓은 집에 자기 혼자뿐이라는 사실
  을 기억해냈다. 그러나 내일, 아니 신혼여행에서 돌아
  오는 1주일 후부터는 이진우와 둘이 있게 될 것이다.
  문지기인 오 영감 부부는 대문 옆  별채에서 자고 있
  을 것이고 개인 비서인 최 비서는  출퇴근을 하고 있
  었다. 가정부 미자는 선을 본다고 시골에 내려가 있었
  다.
  (빨리 날이 밝았으면 좋겠네.)
  그녀는 다시 양주를 들이켰다. 취기가 서서히 올라
  왔다. 그러나
  장숙영은 그 양주를 다 마신 뒤에야 침실로 들어가
  쓰러지듯이 침대에 누웠다.
  장숙영이 눈을 뜬 것은 누군가 자신의 뺨을 세차게
  후려갈겼을 때였다. 엉겁결에 눈을 뜨자 부엌칼을 든
  여자가 침대 앞에 버티고서 있었다.
  "누, 누구야?"
  장숙영은 벌떡 일어나려다가 소스라쳐 놀랐다. 어느
  사이에 자신의 두  손이 스타킹으로 뒤로  묶여 있었
  다.
  "경고하겠어! 먼저 소리를 지르면 이 칼로 네 목을
  찔러 버린다는 걸 명심해!"
  여자가 어둠 속에서 부엌칼을  장숙영의 목에 갖다
  댔다.
  "아, 알았어요."
  "침대에서 내려와!"
  장숙영은 재빨리 침대에서 내려와  무릎을 꿇고 앉
  았다.
  "내가 누군지 알아?"
  "모, 모르겠어요."
  "임수지야."
  "뭐라구?"
  장숙영이 놀라서 소리쳤다. 임수지는 죽었는데 하는
  생각이 퍼뜩 머리에 떠올랐다.
  "내 아파트에서 죽은 여자는 임수지가 아니었어!"
  "어떻게 그런 일이? 경찰도 임수지가 죽었다고
  발표를 했는데."
  "내 친구였어. 내  친구가 오이 맛사지를  하느라고
  침대에 누워 있다가 깜박 잠이 들어 변을 당한 거야.
  얼굴에다가 오이 조각을 더덕더덕 발랐는데다가 어두
  워서 범인이 난 줄 알았던 거야
  불을 켤 테니까 확인해 봐!"
  여자가 스탠드의 불을 켰다. 스탠드의 불빛은 둥근
  갓 때문에 여자의 얼굴을 환하게 비추어 주지는 않았
  으나 임수지라는 것을 금새 알아볼 수 있었다.
  "아!"
  장숙영은 자기도  모르게 입을  벌리고 신음소리를
  토했다. 그 여자는 임수지가 분명했다.
  "난 새벽에야 내 친구가 죽은 것을 알았어. 김 박사
  님하고 그날 밤 같이 있었으니까. 그 분과 술을 마시
  고 있었지."
  "김 박사?"
  "조 회장님 주치의이신 H종합병원 원장님 말이야."
  "아!"
  "난 내 친구가 죽은 것을 발견했을 때 처음엔 경찰
  에 신고하려고 했어. 그러나 내가 살아 있는 것을 범
  인이 알면 또 나를  죽이러올 거라는 생각이 들었어.
  그래서 죽은 친구를 내가 죽었다고  경찰에 신고한거
  야. 임수지인 내가  임수지가 강도에게  살해당했다고
  경찰에 신고한 셈이지. 다행히 경찰은 전혀 의심
  하지않았어."
  장숙영은 술이 말짱하게 깨는 기분이었다.
  "이제부터 너를 심문할  거야. 너를 심문한  내용을
  이 녹음기에 모두 녹음해서 증거로 경찰에 제시할 거
  야."
  "도대체 왜 이러는 거야?"
  "넌 나를 무서운 음모에 끌어들였잖아?"
  "설령 그렇다고 하더라도 너한테 불이익이 간 것은
  하나도 없잖아?"
  "없다고? 너 때문에  나는 김 박사에게  내 처녀를
  바쳤어?"
  "김 박사에게?"
  "김 박사가 조  회장님의 사망원인을  가지고 나를
  의심했어. 그래서 난 처녀를 바쳐야 했던 거야!"
  "그건 고의가 아니었어!"
  "상관없어. 김 박사님은 좋은 분이고 이 사건만  매
  듭지어지면 난 그 분과 결혼할 거니까."
  "뭐라구? 그럼 왜 나를 괴롭히는 거야?"
  "진실 때문이야. 니가 조 회장님을 죽였다는 사실을
  밝혀내고 싶어!"
  "수지, 이러지 마! 이러는 건 나를 죽이는 거야! 나
  를 살려 줘!"
  "진실만 말해!"
  임수지가 녹음기의 버튼을 눌렀다.
  "수지, 나도 불쌍한 여자야! 나  내일이면 결혼한단
  말이야!"
  장숙영의 눈에서  뜨거운 눈물이  쏟아지기 시작했
  다.
  "조 회장님을 어떻게 죽였어?"
  "우리 협상해, 응?"
  장숙영이 애원하기 시작했다. 그녀는 비로소 임수지
  때문에 자신의 일생이  끝장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급했다.
  "수지, 나 좀 살려 줘!"
  "진실을 말하면 생각해 보겠어."
  "정말이야, 수지?"
  "갑자기 당신이 불쌍하다는 생각이 들었어."
  임수지가 차겁게 내뱉었다. 그것은 장숙영에게 진실
  을 말하게 하기 위한 거짓말이었다. 그러나 지푸라기
  라도 잡아야 하는  장숙영은 그 말을  철석같이 믿었
  다.
  "말해 봐!"
  임수지가 재촉했다.
  "난 그 무렵 이진우씨를 만나고 있었어. 이진우씨를
  만나고 내 인생은 송두리째 달라졌어."
  "그래서 이진우씨가 조  회장님을 죽이라고  한 거
  야?"
  "아니야. 그 사람은 몰라."
  "그럼?"
  "조 회장님 유언장 때문이었어. 그 분은 죽은  뒤에
  그 분의 전재산을  사회에 환원시키겠다고  유언장을
  남긴 거야. 난 이진우씨를 놓치고  싶지 않았어. 언젠
  가 나한테서 떠날지도 모를 이진우씨를  잡아두기 위
  해서는 무엇인가 미끼가 필요했어. 그래서 조회장님을
  죽이기로 하고 유언장을 위조했어."
  "조 회장님을 어떻게 죽였어?"
  "베개로 얼굴을  덮었어.  숨이 막히면  죽겠지  하
  고 그런데 식물인간이나  다름없던 조  회장님이
  반항을 했어."
  "조 회장님 손에 묻은 피는 어디서 난 거야?"
  "베개로 얼굴을 덮자 조 회장님이  내 가슴을 밀어
  내다가 내 가슴을 손톱으로 찍은 거야."
  "상처가 깊었지?"
  장숙영이 태연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임수
  지는 재빨리 장숙영의  잠옷을 허리께까지  벗겨냈다.
  그러자 장숙영의 풍만한  가슴이 출렁거리듯  나타났
  다.
  "이거야?"
  임수지가 장숙영의 왼쪽 가슴을 손가락으로 찌르며
  말했다. 거기에 이빨 자국  같은 손톱 자국이 아직도
  남아 있었다.
  "그래."
  "그런데 왜 나를 조  회장의 침대 속에  집어 넣었
  어?"
  "김 박사가 사인을 의심할 것 같아서 그랬어."
  "나에게 뭘 먹였어?"
  "수지가 졸고 있을  때 수면제를 투여했어.  깨어날
  때는 회복제를 주사했구."
  "그랬군."
  임수지가 비로소 사태를 이해할  수 있겠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이제 나를 용서해 줘."
  장숙영이 애원했다.
  "용서?"
  장숙영의 얼굴에 임수지가 침을 뱉었다. 문득 장숙
  영은 임수지가 자신을 용서해 주지  않을지도 모른다
  는 절망감이 들었다.
  "남편을 죽인 독부를 어떻게 용서해 줘? 내가 용서
  한다고 해도법이 너를 용서하지 않을 거야."
  "수지!"
  장숙영은 천길 벼랑으로 떨어지는 것 같았다.
  "내 친구는 누가 죽였어?"
  "몰라. 그건 내가 저지른 일이 아니야!"
  장숙영은 어떻게 하든지 위기를 벗어나야 하겠다고
  생각했다.
  임수지 몰래 등 뒤로 묶여 있는 손을 풀기 위해 조
  심스럽게 손목을 틀었다. 처음엔 움직일 것 같지도 않
  던 손목이 점차 느슨해지고 있었다.
  "거짓말하지 마!"
  "정말이야."
  "거짓말하면 이 칼로 얼굴을 그어 버리겠어!"
  임수지가 부엌칼을  장숙영의 얼굴에  바짝 들이댔
  다.
  "정말이야. 믿어 줘!"
  "그어 버려?"
  "수지!"
  "빨리 자백해!"
  "아니야, 정말 아니야!"
  임수지가 부엌칼로  장숙영의 가슴을  지그시 눌렀
  다. 장숙영은 살이 찢어지는 고통에 외마디 비명을 질
  렀다.
  "엄살 떨지 마! 가죽을 조금 찢었을 뿐이야!"
  "아니야 난 아니야!"
  칼 끝에 선혈이 배어났다. 그와 함께 장숙영의 손목
  도 자유로워지고 있었다.
  (그래, 조금만 더 참자)
  장숙영은 입술을 깨물었다. 칼 끝이 다시 장숙영의
  왼쪽 가슴에 닿고 있었다.
  "빨리 말하지 않으면 깊이 찔러 버리겠어!"
  임수지가 악을 썼다.
  "말할께 찌르지 마!"
  장숙영이 다급하게 외쳤다. 시간을 벌어야 했다.
  "나 물 한 잔만 마시게 해 줘."
  "물이 어디 있어?"
  "욕실에 있어!"
  임수지가 망설이는 듯하다가 욕실의  문을 열고 들
  어갔다. 장숙영은 그 틈을 놓치지 않고 재빨리 느슨해
  진 손목을 스타킹 끈에서 빼냈다. 그리고 그녀는 침대
  머리맡에 있는 청동 조각작품 [춤추는소녀]를 집어들
  었다. 청동으로 제작된 것이라 묵직했다.
  그녀는 그것을 집어들고 욕실 문 옆에 바짝 붙어섰
  다. 가슴이 터질 것처럼  뛰고 다리가 후들후들 떨렸
  다.
  이내 임수지가 한 손에는 부엌칼을 들고 한 손에는
  물컵을 든채 욕실에서 나오기 시작했다. 장숙영은 재
  빨리 임수지의 머리  위에 청동 조각  작품을 내려쳤
  다.
  퍽! 하는 소리와 함께  임수지의 머리에서 피가 튀
  었다. 임수지가 비틀거리며 그녀를  쳐다보았다. 금새
  선혈을 뒤집어쓴 임수지의 얼굴에 소름이 쫙 끼쳤다.
  그녀는 다시 청동 조각 작품을 임수지의 얼굴에 내
  려쳤다. 이미제 정신이 아니었다.
  유혜인은 남편을 생각했고 장숙영을  머리 속에 떠
  올렸다. 그들이 알몸으로 뒹굴고 있는 상상을 하자 가
  슴 밑바닥에서 찬 바람이 부는 느낌이었다.
  이상한 일이었다. 남편  이진우와는 완전히  남남이
  되었다고 여기면서도 그의 얼굴이 머리  속에 떠오르
  면 가슴이 아팠다.
  "춤추시겠습니까?"
  허영만이 은근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밴드가 왈츠를
  연주하고 있었다.
  "네."
  혜인은 고개를 끄덕거렸다.  허영만이 그녀의  손을
  이끌고 플로어로 나갔다.  손이 우악스러운  사람이었
  다.
  "춤을 잘 추시는군요."
  허영만이 몸을 밀착시켜 오며 말했다. 그의 입에서
  술 냄새가 풍겼다.
  "잘 추지 못해요."
  혜인은 그의 손에 허리를 안긴 채 대답했다. 이따금
  그의 손이 혜인의 둔부를 스치듯 쓰다듬고 있었다.
  그래도 혜인은 그의 손을 뿌리치지 않았다. 그녀는
  자신이 어떻게 되어 가고 있는지 갈피를  잡을 수 없
  었다. 이혼녀라고 해서 아무 사내에게 창녀처럼 몸을
  맡겨도 좋은가 하는 생각을 해 볼 때도 있었다. 언젠
  가 허영만이 반드시 몸을 요구해올 것 같았다.
  "요즈음은 어떻게 지내십니까?"
  "그냥 집에서 빈둥거려요."
  "재혼하실 의향은 없으십니까?"
  "아직은 없어요."
  "재혼을 하실 생각이 들면 저도  좀 생각해 주십시
  오."
  "어머!"
  혜인이 손으로 입을 가리며 웃었다.
  "정식으로 프로포즈하겠습니다."
  음악이 블루스로 바뀌었다.  혜인은 허영만의  넓은
  가슴에 안겨  있었다.
  "사실 나 같은 인간이  유헤인씨에게 프로포즈한다
  는 것은 주제도 모르는 짓이죠."
  "왜요?"
  "전 지금까지 사기꾼  노릇이나 하고  살아 왔거든
  요."
  "그래도 정직하신 것 같아요."
  "그렇게 봐 주시면 정말 고마운 일입니다."
  혜인은 허영만의 어깨에  가만히 얼굴을  기대었다.
  문득 이 사내와 재혼하는 것도 나쁘지 않으리라는 생
  각이 들었다.
  "제 프로포즈 받아 주시겠습니까?"
  허영만이 하체를 바짝 밀착시켰다. 어둠침침한 조명
  이었다.
  "너무 빠른 것 같아요."
  "전 허락하신 걸로 알겠습니다."
  "어머!"
  "내일이라도 식을 올립시다. 피차에 재혼이니까  굳
  이 예식장에서 거창하게 식을 올릴 필요는 없구 살림
  부터 차리지요."
  "안 돼요."
  "제가 싫으십니까?"
  "싫다기보다."
  "아직 결심이 서지 않았습니까?"
  "네."
  음악이 빠른 템포의  디스코로 바뀌었다.  허영만이
  혜인의 손을 이끌고 자리로 돌아왔다. 무대에 반라의
  디스코걸이 요란하게 몸을 흔들어대고 있었다.
  "술 더 하시겠습니까?"
  "네."
  허영만이 그녀의 잔에 맥주를 따랐다. 그녀는 천천
  히 맥주를 마셨다. 이미 술기운 때문에 혀가 말을 듣
  지 않고 있었다.
  "내일은 시골에 갑니다."
  "왜요?"
  "추석도 가깝고 해서 벌초라도 하려구요."
  "벌써 추석이 가까워졌나요?"
  "세월이란 화살 같은 것이죠."
  "고향이 어디에요?"
  "경상도 상주입니다. 부모님은 모두 돌아가시고  가
  까운 친척도 없습니다."
  "외로우시겠어요."
  "예."
  허영만이 쓸쓸한 표정으로 웃었다. 블루스로 바뀌자
  혜인은 허영만의 손에 이끌려 다시 춤을 추었다. 술기
  운 때문인지 허영만이 마치 오랫동안  사귄 사람처럼
  포근하게 여겨졌다.
  "영희하고는 왜 헤어졌어요?"
  "그 여자는 불나비 같은 여자였습니다.  메이퀸으로
  뽑힌 전력이 있어서인지 미모에 대한  자부심이 유난
  히 강했어요. 결혼한 여자가 뭇사내들과 어울려 웃고,
  떠들고, 춤추고 언제나 여왕처럼 받들어 주기만을
  원했죠."
  "사랑했어요?"
  "이젠 미움밖에 남아 있지 않습니다."
  "영희를 못 본지 오래 되었어요."
  "이미 갔답니다."
  "그랬군요."
  혜인은 비로소 허영만의 눈가에  서려 있는 고독한
  그림자를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언제 제주도나 한 번 갑시다."
  "그때가 오기를 기다릴께요."
  혜인은 자신의 마음이 점점 허영만에게 기울어지고
  있는 것을 느꼈다.
  "그만 일어날까요?"
  "네."
  시간은 벌써 열한시를 지나 있었다. 그들은 카바레
  를 나와 천천히 번화가의 거리를 걸었다.
  "팔짱 좀 끼어 줄 수 없습니까?"
  허영만이 장난스럽게 웃으며 팔을 내밀었다.
  "어머!"
  혜인이 하얗게 웃어댔다. 술기운  때문이었다. 다리
  에 맥이 풀려 몸이 비틀거려졌다.
  "애인 이렇게 구박하는 것 아닙니다."
  "애걔."
  혜인은 헤푸게 웃으며 허영만의 팔에 매달렸다. 그
  러면서 그녀는 여자는 이렇게 해서  무너지는 것이구
  나 하는 생각을 했다.
  "밤이 외롭습니다."
  집 앞 골목에서였다. 허영만이 고독한 표정을 지으
  며 불쑥 그렇게 내뱉었다.
  "여자 생각이 날 때도 많구."
  "그럴 때는 어떻게 하세요?"
  "이해해 주시리라 믿고 말씀드리죠. 사실은  거리에
  나가 여자를 삽니다."
  "."
  "건강한 남자가 여자 없이 산다는 것은 무리죠."
  "."
  "혜인씨."
  "네?"
  "저와 결혼해 주십시오."
  "아직 그런 생각 못해 봤어요."
  "지금이라도 할 수 있지 않습니까?"
  "왜 그렇게 빨리."
  "제가 자꾸 창녀를 찾아가게 만들지 마십시오."
  "어른들하고 상의도 해 봐야 돼요."
  "전 혜인씨가 허락한 걸로 알고 있겠습니다."
  "아이."
  혜인은 고개를 숙였다. 나이답지 않게 얼굴이 붉어
  지고 가슴이 울렁거렸다.
  "혜인씨!"
  허영만이 혜인을 안았다.
  "오늘 밤 혜인씨를 갖고 싶습니다."
  "안 돼요."
  "우린 철부지들이 아닙니다. 우리의 젊음도 얼마 남
  지 않았구요."
  "좀 시간을 주세요."
  "혜인씨!"
  "너무 빨라요. 우린 몇 번 만나지도 못했어요."
  혜인이 더듬거리며 말했다.
  "그럼 패팅만이라도 허락해 주십시오."
  "모, 몰라요!"
  혜인이 숨이 막혀  왔다. 이런  경험은 처음이었다.
  허영만이 혜인의 둔부를  쓰다듬고 가슴을  주물러댔
  다. 혜인은 입술을 깨물었다.
  금방이라도 무너질 것 같았다.
  (아!)
  허영만이 혜인의 스커트  속으로 손을  밀어넣었다.
  혜인은 눈을 감았다. 허영만의 손이 혜인의 스커트 속
  에서 민첩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거, 거기는"
  다리가 비틀리고 하체가 질펀하게 젖어 왔다. 허영
  만이 혜인의 팬티를 억지로 끌어내렸다.
  "안 돼요!"
  혜인이 날카롭게 소리를 질러댔다. 왜 그랬는지 알
  수 없었다.
  허영만이 주춤하면서 혜인을 쏘아보았다. 그의 눈빛
  은 뜻밖에 섬뜩했다.
  "미안해요."
  혜인은 스스로 제 팬티를 끌어올렸다.
  "좋습니다."
  "다음에."
  혜인이 고개를 숙이고 말했다.
  "정말 미안해요."
  "아녜요."
  허영만이 무겁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 대신 결혼하는 날 그냥 두지 않겠습니다."
  "네."
  "결혼 준비 서두릅시다!"
  허영만이 얼음처럼 차겁게  내뱉었다. 이미  혜인을
  수중에 넣은 듯한 그런 태도였다. 혜인은 그러한 히영
  만의 위세에 눌린 듯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거렸
  다.
  허영만이 그녀의 허리를 조용히 안았다. 그녀는 잠
  자코 있었다.
  허영만의 입술이 그녀를 향해 내려왔다.
  혜인이 허영만과 헤어져 집으로 돌아오자 전화벨이
  요란하게 울리고 있었다. 수화기를 들자 뜻밖에 전남
  편이었다.
  "웬일이세요?"
  혜인은 갑자기 가슴이 미어지는 것 같았다.
  "나 내일 결혼해."
  남편의 목소리가 가라앉아 있었다.
  "좋으시겠군요."
  "비꼬지 마."
  "왜 전화했어요?"
  "어떻게 지내는지 궁금해서 당신에게  정말 미
  안해."
  "미안해 할 거 없어요. 나도 새 출발을 하기로 했으
  니까요."
  "새 출발?"
  "재혼할 거예요."
  "누구와?"
  "허영만씨요."
  "그 사람 질이 나쁜 사람이야."
  "나에게는 잘해 줘요."
  "거짓일 거야."
  "나에게 신경쓰지 마세요. 우린 이제 남남예요."
  "혜인이!"
  "위자료 잘 쓰겠어요."
  "허영만하고의 재혼은 다시 생각해. 그 사람은"
  "그만두세요!"
  혜인은 앙칼지게 내쏘고 전화를 끊어버렸다. 공연히
  눈물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장숙영은 독한 양주를 거푸 들이켰다. 그런데도 전
  혀 취기가 오르지 않았다.
  집에 사람이 없었던 것이 다행이었다. 임수지도 그
  틈을 노리고 들어은 것이 분명했다. 다만 임수지가 어
  떻게 들어왔는지 그것을  알수가 없었다.  어찌되었든
  임수지는 죽어 있었다. 살인을 한 것이다.
  그녀는 방바닥에 쓰러져 있는  임수지의 시체를 보
  았다. 그녀의 시체에서는 아직도 피가 꾸역꾸역 흘러
  나오고 있었다. 피비린내가 방 안에 가득 했다.
  (내가 어쩌다 이런 짓을)
  장숙영은 몸서리를 쳤다. 시뻘건 피는 자신의 몸에
  도 여기저기 묻어 있었다.
  (어쨌든 시체를 치워야 해)
  장숙영은 그 방법을 골똘히 생각했다. 그러나 그 방
  법이 도무지 머리 속에 떠오르지 않았다. 벌써 새벽이
  었다. 안개가 내리는지  창 밖이  희뿌연했다. 정문에
  켜 놓은 수은등 때문일 것이다.
  (어떻게 하지?)
  시체를 흔적도 없이 치워 버려야 했다. 어디론가 인
  적이 없는곳에 갖다  버리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일
  것이다. 그러자면 시체를 토막내어야 했다. 그러나 시
  체를 토막내는 일은 너무 끔찍해 자신이 없었다. 그리
  고 만에 하나 발각되면 그 엽기성  때문에 경찰이 눈
  에 불을 켜고 수사를 할 것이다.
  (돌멩이를 묶어 강에다 버려?)
  그것도 어려운 문제였다.  무엇보다 시체를  강까지
  끌고 갈 일이 아득했다.
  (뒤뜰에다 묻을까?)
  그렇게 되면 시체와 함께 같이 사는 셈이었다. 역시
  끔찍하고 무서운 일이었다.
  시간이 자꾸 흘러갔다. 그래도 묘안은 떠오르지 않
  았다. 장숙영은 자신의 살인을 뼈저리게 후회했다. 조
  회장을 살해한 것이 가장 후회스러운 일이었다. 그를
  살해하지 않았다면 임수지를 죽이게 되는  일도 일어
  나지 않았을 것이다.
  식물 인간이나 다름없는 상태에  있었으므로 조 회
  장은 그녀가 죽이지 않았더라도 죽었을 것이다. 유언
  장만 해도 장숙영이 평생 먹고 살  만큼의 재산은 남
  겨 놓고 있었다. 욕심이 화근이었다.  그 재산을 송두
  리째 삼키려고 한 것이 그녀를 살인마로 만든 것이었
  다.
  (내가 어리석었어!)
  그녀는 자신이 증오스러웠다. 조 회장을 죽이기 전
  조금만 다시 생각했더라면 하는 후회에  가슴이 미어
  질 것 같았다.
  (이젠 어쩔 수 없어)
  그녀는 임수지를 집 뒤 정원에다 묻을 수밖에 없다
  고 생각했다.
  그 시체가 썩어서 없어지면 아무도 모를 것이다. 생
  각이 거기까지 미치자 그녀는 서둘러  임수지의 시체
  를 침대보로 둘러쌌다.
  그리고 지하실로 내려가 삽을 찾아 집 뒤 정원으로
  달려갔다.
  아직 어둠이 가까이 있었다. 날이 밝기 전에 임수지
  를 완전히 묻어 치워야 했다. 그녀는 서둘러 땅을 팠
  다.
       11. 시체 발굴
  성일 그룹 조일제 회장  파묘사건은 영구 미제사건
  으로 빠져가고 있었다. 그것은 김숙자 임수지 두 여인
  의 살인사건도 마찬가지였다. 세 사람이 기묘하게 관
  련되어 있으면서도 똑같이 범행 동기나  범인 용의자
  까지 확보할 수가 없었다.
  (계획살인이 분명한데 단서를 잡을 수가 없어)
  유경은 김영일 변호사 사무실을 찾아가면서 골똘히
  생각에 잠겼다. 현재까지  사건은 완전범죄의  형태를
  띠어 가고 있었다. 그렇게 되면 밑바닥부터 다시 훑어
  보는 수밖에 없었다.
  (유력한 단서라고 남아 있는 것은  범인의 협박 전
  화뿐이야. 그런데 누가 협박 전화를 한 것일까?)
  이진우에게 협박 전화를 한  것은 여자의 목소리였
  고 장숙영에게 협박 전화를 한 것은 남자였다. 그러나
  장숙영에게 여자도 협박전화를  했다는 것을  배제할
  수는 없었다. 그것은 장숙영이 숨기고 있었다면 얼마
  든지 가능한 일이었다. 게다가 협박 전화의 내용도 장
  숙영이 정확하게 진술했다고  액면 그대로  받아들일
  수는 없는 일이었다.
  (장숙영은 무엇인가 숨기고 있어)
  사건의 관련자인 장숙영과 이진우에게 협박 전화가
  오다 말았다는 것도 이상한 일이었다. 그것을 장난 전
  화라고 하기엔 도무지 석연치 않은 점이 있었다. 그들
  이 이미 협박한 사람을 찾아서 타협을 했거나 협박자
  를 죽여 없애 버렸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는 없었다.
  (그렇다면 임수지가?)
  임수지가 그들을 협박했다면  그들에게 살해되었을
  확률이 높았다. 단순 강도 살인사건이 아니었다.
  김영일 변호사 사무실을  이미 석 달  전에 이사를
  가고 없었다.
  그 자리에 새로 입주해  있는 변호사는 황인숙이라
  는 40대의 여자 변호사였다.
  "어디로 이사 갔지요?"
  "이사를 간 게 아닌데"
  황인숙 변호사가 고개를 갸우뚱했다.
  "그럼?"
  황인숙 변호사는 이지적이고 세련된 용모의 여자였
  다.
  "언제요?"
  "4월 말경인가요? 그 무렵쯤 되었을 거예요."
  "무슨 일로 돌아가셨죠?"
  "병으로 돌아가셨어요. 워낙 연로하신 분이라"
  황인숙 변호사가 화사하게 웃으며 유경을 쳐다보았
  다. 4월 말경이면 조일제 회장이 죽기 보름 전쯤의 일
  이었다.
  "정확히 날짜를 알 수 있을까요?"
  "변호사협회에 전화를 해 보면 알 수 있을 겁니다."
  "부탁 좀 드리겠습니다."
  "좋아요."
  황인숙 변호사가 손수 다이얼을 돌리며 변호사협회
  에 전화를 걸었다.
  "수고하십니다. 저 김영일 변호사님이 돌아가신  날
  짜가 어떻게 되죠? 4월 27일이요? 네, 알겠습니다."
  유경은 고새를 끄덕거리고 수첩에 메모했다.
  "김영일 변호사님 집주소 좀 알아봐 주세요."
  "네 여보세요! 김영일 변호사님  집주소 좀 부
  탁합니다."
  김영일 변호사의  집주소를 알아내는  데는 시간이
  조금 걸렸다.
  그러나 이내 유경은 김영일  변호사의 집주소를 수
  첩에 적고서 법원골목을 빠져나올 수 있었다.
  (오늘은 장숙영과 이진우가 결혼하는 날인데)
  유경은 덕수궁 앞에서 잠시 망설였다. 결혼식은 성
  북동 골짜기에 있는 고급 음식점에서  회사 중역들과
  친지들끼리 모여서 하기로 되어 있었다.
  (가 볼까?)
  날씨는 가을 날씨답게  쾌청했다. 어느 새  9월이었
  다. 아침엔 안개가 자욱하게 끼었으나 시간이 지나가
  맑게 개어 있었다.
  유경은 성북동으로 차를 몰았다. 유경도 한때 성북
  동에서 산 적이 있었다. 조용하고 깨끗한 동네였다.
  주택가를 벗어나면 숲들이 울창했고 군데군데 요정
  이 자리잡고 있었다. 장숙영과 이진우가 결혼하는 음
  식점도 한때는 기생이 2백여 명이나  있던 큰 요정이
  었다. 골짜기와 나무 밑에 정자가 있고한옥들이 즐비
  하여 기생들의 웃음소리가 그치지 않던 곳이었다.
  그런 곳에서 재벌의 결혼식을 보아 두는 것도 나쁘
  지 않으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유경이 도착했을 때는  벌써 그들의 결혼식
  이 끝나 피로연이 시작되고 있었다. 음식점 정원에서
  하는 피로연이었다. 날씨가좋았기 때문이다. 한쪽에서
  는 악단이 은은하게 실내악을 연주하고  있었고 장숙
  영과 이진우는 하객들에  둘러싸여 축하  인사를받고
  있는 중이었다.
  유경은 하객들 틈에 섞여서 음료수를 한 잔 마셨다.
  미끈하게 생긴 웨이터들이 부지런히 돌아다니며 하객
  들에게 음료수와 술을 대접하고 가든  테이블에 호화
  스러운 음식을 차리고 있었다.
  장숙영과 이진우는 한껏  행복해 보였다.  이진우는
  검은색 정장에 넥타이까지 검은 것을 매고 있었고 장
  숙영은 새하얀 실크 드레스 차림이었다. 희고 뽀얀 가
  슴이 반쯤 드러난 대담한 디자인의 드레스였다.
  (아름다운 모습이군!)
  유경은 장숙영의  풍만한 몸매와  드레스에 감탄했
  다.
  "신랑이 너무 젊은 것 같지 않아?"
  "신부도 그만하면 젊어 보이는데 뭘."
  "젊은 신랑을 얻었으니 얼마나 좋을까?"
  "좋기두 하겠다!"
  "나두 저런 신랑이나 하나 얻었으면"
  유경의 옆에서 40대의 중년  여자들이 낮게 소곤거
  리며 깔깔대고 있었다.
  "신혼여행은 어디로 간대?"
  "제주도로 간대."
  "나 같으면 하와이나 괌으로 가겠어. 이왕이면 외국
  으로 가지 뭘 볼께 있다고 제주도로 가"
  "아이고 이 여편네야, 신혼여행에 보긴 뭘 봐? 오늘
  밤 당장 불이날 텐데!"
  여자들이 다시 까르르 웃어댔다. 나이 먹은 여자들
  이라 입담이 걸쭉했다.
  이내 장숙영이 돌아다니며 하객들에게 인사하기 시
  작했다. 유경은 자리를 피해 줄까 하다가 축하 인사를
  건네야 할 것 같아 그냥서 있었다.
  "오셨군요."
  장숙영의 얼굴은 핼쓱하게 질려 있었다.
  "축하드려요."
  유경은 장숙영에게 손을 내밀었다. 장숙영이 유경의
  손을 잡으며 미소를 지었다.
  "고마워요."
  "정말 아름다우세요."
  "괜한 말씀 나이가 먹은 여자라 보기에 흉했을
  거예요."
  그러나 정작으로 흉한 것은  장숙영의 긴 손톱이었
  다. 모양을 내느라고 붉은 매니큐어를 발랐으나 순결
  한 신부의 이미지와는 어딘가 동떨어져 보였다.
  "어쩜 이렇게 고와요?"
  "꽃 같애 꽃!"
  "어디 꽃도  그냥 꽃이야?  향기 그윽한  꽃이지
  !"
  여자들이 장숙영을 둘러싸고 호들갑을 떨기 시작했
  다. 장숙영은 여자들에게 상냥하게 인사하고 다른 하
  객들을 찾아가서 머리를 조아렸다.
  "젊은 신랑 물었으니 오늘 밤 잠은 다 잤지!"
  여자들이 또 왁자하게 웃음을 터뜨렸다.
  유경은 슬그머니 그 자리를 빠져나오고 말았다. 웬
  일인지 유경은 허전하고 쓸쓸했다.
  하늘도 찌뿌드드하게 흐려 있었다.
  유경은 다시 시내로 차를 몰았다. 김영일 변호사의
  집은 종로구 인사동 뒷골목의 오래된 한옥이었다. 집
  은 꽤 컸으나 손질을 하지 않아 초라해 보였다.
  "실례합니다."
  대문을 두드리자 화장기 없는  젊은 여자가 얼굴을
  내밀었다.
  입고 있는 옷차림과 네모난 얼굴에 삶의 권태가 묻
  어 있는 듯한 여자였다.
  "어떻게 오셨어요?"
  "여기가 김 변호사님 댁이죠?"
  "아버님은 돌아가셨어요."
  "몇 가지 여쭤볼 게 있어서 왔어요."
  "어디서 오셨는데요?"
  "경찰에서 나왔습니다."
  "들어오세요."
  여자가 대문을 막아  서 있다가 비켜  주는 시늉을
  했다.
  "아녜요, 몇 가지  여쭤보고 바로 가야  돼요. 성일
  그룹 조일제 회장님 아시죠?"
  "이름은 들어본 것 같은데요."
  "실은 그 분이  돌아가시기 직전  김 변호사님께서
  유언장에 공증을 하셨거든요?"
  "아버님은 2, 3년 동안 활동을 안 하셨어요."
  "왜요?"
  "병환 때문에 반신불수로 누워 계셨어요."
  "그럼 어떻게 공증을 하셨죠?"
  "아버님 몰래 우리 애 아빠가  명의를 빌려 주었어
  요."
  "누구에게요?"
  "허영만씨라고 들었어요."
  "그 사람 연락처 같은 거 갖고 있나요?"
  "아뇨."
  "그럼 남편 되시는 분은 어디 계시죠?"
  "요즈음 사업을 한다고 밖으로 돌아다녀서"
  여자가 잘 모르겠다는 듯이 고개를 흔들었다.
  "성함이 어떻게 되시죠?"
  "저요?"
  "아뇨, 남편 되시는 분이요."
  "김성진예요."
  "저녁엔 들어오시나요?"
  "예."
  "그럼 김성진씨가 들어오시는 대로 서울 시경 강력
  계로 출두하라고 하세요. 알았죠?"
  "예."
  여자가 불안한 기색으로 고개을 끄덕거렸다. 유경은
  인사동 골목을 빠져나오자 카폰으로 이  반장을 찾아
  허영만을 수배해 달라고 부탁했다.
  (재산 상속에 문제가 있어!)
  김영일 변호사라는 이름을  믿었던 것이  실수였다.
  변호사 명의를 허영만이라는 인물이 소유하고 있으리
  라는 것은 상상도 못했던일이다.
  재산 상속에 흑막이 있는 것이 분명했다. 그리고 그
  것은 조일제 회장의 죽음, 그의 파묘 사건과도 관련이
  있을 것이다.
  (혹시 조일제 회장도 살해당한 것이 아닐까?)
  그것도 가능성이 충분한 일이었다. 일단 조일제 회
  장의 주치의인 김 박사부터 만나 보아야 했다. 유경은
  H종합병원으로 빠르게 차를 몰았다.
  김 박사는 마침 오후의 회진을 끝내고 쉬고 있었다.
  "무슨 일로?"
  유경이 명함을 내밀자 김 박사는 의외라는 듯이 유
  경과 명함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단도직입적으로 묻겠습니다."
  "예."
  "조일제 회장의 사망 원인은 무엇이죠?"
  "호흡장애입니다."
  "사망진단서에는 심장마비라고  써 넣지  않았습니
  까?"
  "장 여사가 그렇게 원했습니다."
  "장 여사요?"
  "장영숙씨 말입니다."
  "왜요?"
  "사연이 좀 있습니다."
  김 박사는 곤혹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다가 임수지
  로 인해 조일제 회장이 호흡장애를  일으켜 죽었다는
  사실을 상세하게 설명을 해주었다.
  "상식적으로 그런 일이 가능해요?"
  유경은 아미를 잔뜩 찌푸리고  김 박사를 쏘아보았
  다.
  "젖먹이 아이가 엎드려서 잘못 자면  숨이 막혀 죽
  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조일제 회장은 젖먹이 어린애가 아녜요!"
  "식물인간이나 다름없었습니다. 얼굴에다가  베개만
  얹어 놓아도 숨이 막혀 죽을 수  있는 상태에 있었지
  요."
  "그럼 전혀 움직이지 못하는 상태였단 말예요?"
  "그렇습니다."
  유경은 말문이 막히고 말았다. 어떻게 식물인간 옆
  에서 졸다가 식물인간을 가슴으로 눌러서 죽일 수 있
  다는 말인가. 그것은 상식적으로도 납득할 수 없는 얘
  기였다.
  "김 박사님은 그 얘기를 믿을 수 있으세요?"
  "임수지는 정직한 아가씨입니다."
  "그런데 장숙영은 무엇 때문에 임수지의 과오를 불
  문에 붙인 거죠?"
  "조일제 회장이 간호원의 가슴에 깔려 죽었다면 세
  상의 조롱거리가 된다고 했습니다. 또 임수지에게 고
  의가 없었을 거라고 했구요."
  "그래요?"
  "게다가 조일제 회장은 6개월을  넘기지 못할 거였
  으니까 조금 일찍 돌아가신 것뿐이라는 거죠."
  "상당히 대범한 여자군요."
  유경은 비웃듯이 말했다. 그러나 그 이상 김 박사에
  게 추궁할 얘기가 떠오르지 않아 원장실을 나오고 말
  았다.
  "여보세요."
  유경이 복도에서 엘리베이터를 기다리고 있을 때였
  다. 간호원한 명이 병실에서 나오다가 유경을 발견하
  고는 허겁지겁 뒤쫓아왔다.
  "형사님이죠?"
  "네, 그런데요."
  "임수지가 죽었을 때 병원에 조사  나오신 것을 봤
  었어요."
  "그랬어요?"
  유경은 무슨 말을 하려는가  싶어 간호원의 얼굴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저 임수지가 정말 죽었어요?"
  "예?"
  "어저께 임수지를 봤어요."
  "무슨 말씀이죠?"
  "퇴근하는데 지하철 역에서 말예요, 저의  집이
  정릉이거든요 을지로 3가에서 지하철을 갈아타려
  고 하다가 지하철을 놓쳤어요. 제가 막 도착하자마자
  지하철 문이 닫히고 떠나는 거예요."
  "그래서요?"
  "그런데 지하철 차창에 임수지가  이쪽을 내다보고
  서 있는 거예요. 아주 빠른 순간에 지하철은 지나갔지
  만 임수지가 틀림없었어요."
  아가씨가 흥분해서 외쳤으나 유경은 고개를 흔들었
  다. 세상엔 비슷한 사람이 하나 둘이 아닌 것이다. 게
  다가 임수지가 죽은 것은 유경 자신이 직접 목격했던
  것이다.
  "임수지는 죽었어요."
  "전 틀림없이 임수지를 봤어요!"
  "잘못 봤을 거예요."
  유경은 엘리베이터가 내려오자 아가씨에게 손을 들
  어 보이고 엘리베이터에 올라탔다. 그러자 간호원 아
  가씨도 재빨리 엘리베이터에 올라탔다.
  "어떻게 확인해 볼 수 없을까요?"
  "임수지는 이미 땅 속에 묻혔어요. 그리고 가족들도
  확인했구요."
  "시체를 꺼내 볼 수 없을까요?"
  "예?"
  "제 눈으로 확인하고 싶어요."
  "벌써 썩었을 텐데요."
  "그럼 어떻게 하지?"
  아가씨가 울상을 지었다.
  유경은 피식 웃음이 나왔다.
  "방법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예요."
  "어떤 방법인데요?"
  "우리 사무실에 임수지가 죽었을 때의 모습을 사진
  으로 찍어둔 것이 있어요. 살인사건이 일어나면 피해
  자의 상태부터 정밀하게 사진을 찍어두니까요."
  "그럼 그걸 좀 보여 주세요."
  "그래요."
  유경은 H종합병원에서 나와 간호원 아가씨를 차에
  태우고 시경으로 그대로 내달렸다.
  형사들은 무겁게 입을 다물고 있었다. 누구 하나 섣
  불리 입을 열려고 하지 않았다. 임수지의 아파트에서
  죽은 여자가 임수지가 아니라는 사실은  그들에게 너
  무나 커다란 충격을 주었던 것이다.
  모두들 침통한 표정만 짓고 있었다.
  유경과 함게 강력계 사무실에  나타난 간호원 아가
  씨는 그들이 여태껏 임수지로만 알고 있던 시체의 사
  진을 임수지가 아니라고 한 마디로 증언했던 것이다.
  그리고 그 아가씨는 형사들과  함께 자신의 집으로
  가서 임수지와 함께  찍은 사진을 가지고  왔던 것이
  다.
  "이 아가씨가 임수지란 말예요!"
  간호원 아가씨가 손가락으로 가리킨  사진 속의 여
  자는 파마 머리였고 시체의 사진은 숏커트 형식의 상
  고머리였다.
  "이제 생각났어!"
  이 반장이 불쑥 무릎을 쳤다.
  "그때 임수지의 아파트에서 임수지의  친구라고 하
  던 여자, 그 여자가 임수지였어!"
  "맞습니다!"
  "그 여자였습니다!"
  형사들이 비로소 맞장구를 쳤다.
  "시체를 발굴해야겠어!"
  "임수지 가족들도 연행해야 돼요. 가족들은  임수지
  가 죽은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면서도  신고를 하지
  않았잖아요?"
  "그래, 박 형사와  조 형사가  마산에 가서  연행해
  와!"
  "알겠습니다."
  박 형사와 조 형사가 서둘러 출장준비를 했다.
  "한 형사는 테이프에서 장숙영을 협박한 여자가 임
  수지인지 아닌지 확인해 봐! 난 계장님한테 보고하고
  올 테니까 나머지는 출동준비하고 대기해"
  유경은 유혜인이 도청한 테이프를 녹음기에 집어넣
  고 간호원 아가씨에게 확인시켜 보았다.
  그러나 간호원 아가씨는 목소리는 정확하게 기억하
  지 못하고 있었다.
  "가짜 임수지 매장지가 어디죠?"
  유경은 한숨을 내쉬고 최 형사에게 물었다. 병원에
  가서 임수지의 동료들에게 확인해 보고 시체 발굴 장
  소로 뒤따라 가기 위해서였다.
  "동두천예요."
  "동두천이요?"
  "우리가 도착할 때쯤이면 깜깜해질  거요, 아마. 가
  을이라 해가 일찍 떨어지니까."
  그렇다면 한밤중에 시체를 발굴하는 고역을 치러야
  할 것이다.
  "그럼 동두천 경찰서에 연락해 놓으세요."
  "알았어요."
  "갑시다, 아가씨."
  유경은 간호원 아가씨를 데리고 다시 H종합병원으
  로 달리기 시작했다.
  비로소 사건의 실마리가 풀려가는 기분이었다.
  "아가씨 때문에 이 사건이 해결될지도 모르겠어요."
  유경이 간호원 아가씨에게 진심으로 고마워하며 말
  했다.
  "그랬으면 좋겠어요."
  아가씨가 밝게 웃었다.
  "이름이 어떻게 돼요?"
  "김경희예요."
  "좋은 이름이네요."
  "형사님은요?"
  "한유경요."
  "결혼하셨죠?"
  "어떻게 알았어요?"
  "짐작으로요. 결혼하시고 이런 일 하는 거 무척  힘
  이 들죠?"
  어른스러운 질문이었다.
  "그래도 보람을 느껴요."
  "이상해요. 임수지는 참 착한 아가씨인데"
  "그래도 죽지 않아서  다행예요. 임수지 대신  죽은
  여자는 불행하지만"
  "누가 죽였을까요?"
  "아직은 모르겠어요."
  H종합병원에 도착하자 벌써  해가 기울고  있었다.
  유경은 김경희를 시켜 간호원들을 모두  대기실로 모
  이게 한 뒤 녹음기 테이프를 돌렸다.
  "임수지예요!"
  "맞아요!"
  "틀림없어요?"
  "네."
  간호원들이 마치 합창을  하듯이 일제히  대답했다.
  임수지가 전화협박범이라는 것이 확인된 셈이었다.
  "고마워요, 여러분!"
  유경은 그녀들에게 인사하고 간호원 대기실을 나왔
  다. 그러자 김경희가 또 따라왔다.
  "형사님!"
  "왜 그래요?"
  "저두 따라가면 안 될까요?"
  "이봐요, 묘지를 파서 시체를 꺼내는  거예요! 여자
  가 무섭지않아요?"
  "형사님도 여자잖아요?"
  "나 이게 일에요!"
  "제가 가면 도움이 될지도 몰라요. 시체가 누군지도
  알아야 하잖아요?"
  "좋아요."
  유경은 김경희를 승용차에 태우고는 동두천을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비가 올려나 봐요."
  의정부를 지날 무렵 날이 완전히 어두워졌다. 김경
  희가 차창으로 어두운 하늘을 내다보며 말했다.
  "어떻게 알아요?"
  "별이 하나도 없어요."
  "비가 오면 안 되는데"
  유경이 걱정스럽게 중얼거렸다. 비가 오는 산 속에
  서 묘지를 파헤쳐야 할 일이 걱정되었다. 그러나 임수
  지는 여자 혼자서 조일제 회장의 묘를 파헤치지 않았
  는가 하는 생각을 하자 다소 위안이 되었다.
  "임수지하고 친했어요?"
  "그냥 병원에서 같이 근무한 것뿐예요."
  "임수지하고 특별히 친한 사람 있어요?"
  "없어요. 전에 다 조사하셨잖아요?"
  옳은 말이었다. 가짜 임수지 살인사건이 처음 발생
  했을 때 그녀의 교우 및 애인  문제에 대해서도 철저
  하게 조사를 했었다. 그러나 그녀는 거의 교우 관계가
  없는 내성적인 처녀였었다.
  "성일 그룹 조일제 회장 파묘사건 알아요?"
  "네, 신문에서 봤어요."
  "임수지가 조일제 회장의 손가락을 잘라  간 것 같
  은데"
  "임수지가 어떻게 그런 일을 했을까요?  여자 혼자
  서"
  "그래서 공범이 있는지 조사를 해야 돼요."
  "여자가 혼자서 밤에 무덤을 파헤칠 수 있을까요?"
  "그게 문제예요."
  동두천에 들어서자 김경희의 예상대로 빗방울이 떨
  어지고 있었다. 동두천 경찰서에는 경비과의 순경 한
  사람이 유경을 기다리고있었다.
  "우리 반장님 언제 지나갔지요?"
  "한 30분쯤 됐습니다."
  "그럼 어딘지 안내 좀 해 주세요."
  "예."
  순경이 사이드카를 타고 앞서 달리기 시작했다. 유
  경은 천천히그 뒤를 따라갔다.
  가짜 임수지의 시체가 매장되어  있는 곳은 동두천
  북쪽 교외의낮은 야산에 있는 공동묘지였다. 벌써 형
  사들이 전기까지 가설해놓고 인부들을 동원해 무덤을
  한창 파헤치고 있었다.
  "이거 원 빗발까지 날리고 있으니"
  이 반장이 유경이 가까이  오자 하늘을 쳐다보면서
  근심스럽게 중얼거렸다. 비가  쏟아지기 전에  무덤을
  완전히 파헤쳐야 한다는 뜻이었다.
  "테이프의 여자는 확인됐어?"
  "네, 임수지가 틀림없어요."
  "그럼 임수지가  조 회장의  무덤을 파헤친  것이
  군"
  "그런 것 같아요."
  "그런데 테이프엔 임수지가 무엇  때문에 장숙영을
  협박했는지는 안 나와 있잖아?"
  "임수지를 빨리 검거해야겠어요."
  "응."
  이 반장이 무겁게 고개를 끄덕거렸다. 유경은 인부
  들이 파헤치는 봉분을 들여다보았다.
  아직 봉분은 반도 파헤쳐져 있지 않은데 빗발이 점
  점 굵어지고 있었다.
  "저 아가씨는 왜 데리고 왔어?"
  "본인이 따라오겠다고 해서 데리고 왔어요."
  "요즈음 아가씨들은 겁이  없어. 비 오는데  뭐라도
  걸치게 해 주지."
  "네."
  유경이 차에서 코트와 우산을  꺼내서 다시 올라오
  자 인부들이 관이 나왔다며 웅성거리고 있었다. 유경
  은 김경희에게 코트를 걸쳐주었다.
  "고마워요, 형사님."
  "괜찮아요."
  유경이 웃으며 대답했다. 인부들이 관을 끌어올리기
  시작했다.
  목재로 만든 관이었으나 재료가  좋은 것인지 관은
  전혀 손상이 없었다.
  "자, 열어 봐요."
  이 반장이 인부들에게 말했다. 인부들이 삽 끝과 지
  렛대를 이용해 관 뚜껑을 열어젖혔다.
  유경은 자신도 모르게 관으로 바짝 다가섰다. 시체
  는 하얀 광목천에  둘러싸여 삼줄로 꽁꽁  묶여 있었
  다.
  "볼 테야?"
  이 반장이 칼을 꺼내며 유경에게 물었다. 시체가 혹
  시 썩었을지 모르니 보지 말라는 뜻이었다.
  "네."
  "요즈음 여자들은 심장이 워낙 튼튼해서"
  이 반장이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었다.
  "심장에 털이 났습니다."
  인부 한 사람이 농짓거리를  던지가 잔뜩 긴장하고
  있던 형사들이 왁자하게 웃음보를 터뜨렸다.
  "이게 무슨 냄새지?"
  이 반장이 칼로 시체를 묶은 삼줄을 자르며 중얼거
  렸다.
  "포르마린 냄새예요."
  "포르마린이면 방부제잖아?"
  "시체에 방부 처리를 한 모양예요."
  "우선 얼굴이나 확인하자구"
  삼줄을 자르고 광목천을 벗기가  시체의 얼굴이 드
  러났다. 시체는 방부 처리가 완전하게 되어 있어 놀랄
  정도로 제 모습을 그대로 갖추고 있었다.
  "방부 처리가 너무 잘 되어 있군."
  "포르마린 때문에 눈이 따가울 정도예요."
  "임수지가 아니지?"
  "아가씨에게 확인해 보도록 하죠."
  이 반장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러나 그것은 확인
  할 필요도 없는 일이었다.
  "임수지가 아니예요."
  김경희가 시체를 확인하고 고개를 흔들었다.
  "일단 시체를 서울로 옮기자구."
  "예."
  "산 속에서 이러고  있으니 너무 으시시해.  자, 관
  뚜껑을 다시닫고 서울로 옮깁시다. 하산 준비들 해!"
  이 반장이 인부들과  형사들에게 지시했다.  유경은
  김경희와 함께 착잡한 기분으로 산을  내려가기 시작
  했다. 이제는 밤을 새워 시체의 신원을 밝히는 수사를
  해야 했다.
  다 식은 커피잔을 앞에 놓고 시경  강력계 팀은 치
  안본부의 통고를 초조하게  기다리고 있었다.  모두들
  눈꺼풀이 무겁게 내려감겼으나  긴박한 상황  때문에
  잠을 잘 수가 없었다.
  "이젠 임수지가 어디로 갔는지 알아내야 돼."
  이 반장도 피로에 지친 기색으로 입을 열었다.
  "지하철 4호선을 탔다고 했으니까  그쪽 방향인 것
  만은 분명해요."
  "그러나 4호선을 이용할 수 있는 범위가 보통 넓은
  게 아니잖아?"
  이 반장이 난색을  나타냈다. 지하철 4호선  구간을
  이용할 수 있는 지역을 모조리 수사한다는 것은 현재
  로서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만한 인력도 없고 시간도 없었다.
  "전부 수사를 할 필요는 없을 거예요."
  "그럼?"
  "임수지와 어떤 형태로든 관련이 있는 사람들 중에
  4호선 구간에 거주지가 있는 사람들을 조사하자는 것
  이죠."
  "그것도 좋은 방법이 되겠군."
  이 반장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혹시 임수지가 장숙영의 집에 간 것이 아닐까요?"
  최 형사가 담배를 두 대째 피우고  있다가 불쑥 입
  을 열었다.
  "거긴 왜?"
  "글쎄요, 왜인지는 모르지만 불쑥 그런 생각이 들었
  습니다."
  "형사의 육감이야?"
  이 반장이 피식 웃었다. 강력계 5반에서 지원을  나
  온 형사들도 실실거리고 웃어댔다.
  "장숙영의 집을 수색해 볼까요?"
  최 형사가 형사들이 웃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고 다
  시 입을 열었다.
  "영장도 없이 어떻게 수색해?"
  "우리가 언제 영장 가지고 수색했습니까?"
  "쓸데없는 소리 마. 그 집엔 지금 주인도 없어."
  "이번 사건은 모두 장숙영과 관련이 있습니다. 그런
  데도 우리는 한 번도 장숙영의 집을 수색하지 않았지
  않습니까?"
  "하고 싶으면 최 형사 혼자서 해."
  "정말입니가, 반장님?"
  "사람 참!"
  "제게 허락만 해 주십시오. 아니 묵시적으로 동의라
  도 해 주십시오."
  "한 번 수색해 봐요, 반장님."
  유경도 거들었다. 장숙영의 재산 상속에 문제가 있
  다면 그 집에  결정적인 단서가 숨어  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모두들 어떻게 생각해?"
  이 반장이 형사들의 시선을 물었다. 썩 내키지 않아
  하는 기색이었다.
  "찬성합니다."
  "저두요."
  "수색하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습니다."
  형사들이 이구동성으로 찬성했다. 이 반장은 그래도
  턱만 만지작거리고 앉아 있었다.
  유경은 창 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창 밖의  어두운
  하늘에서는 가을비가 을씨년스럽게 흩날리고 있었다.
  마산에 급파된 박 형사와  조 형사에게서는 아직도
  아무런 연락이 없었다. 마산에 도착하지 못했거나 도
  착했더라도 임수지의 가족을 찾지 못한 모양이었다.
  그때 전화벨이 길게 울렸다.
  "치안본부인데요."
  경비전화였다. 강력계 5반의 윤재천 형사가  수화기
  를 이 반장에게 넘겨 주었다.
  "수고하십니다."
  형사들이 일제히 이 반장을 주시했다.
  "지문 확인이 되었습니까? 예 누굽니까?"
  유경은 재빨리 메모 준비를 했다.
  "박은숙, 23세  잠실 시영  아파트  47동  203
  호 세대주와 호주는 박주천  알았습니다. 예,
  수고하셨습니다."
  이 반장이 수화기를 내려놓았다.
  "메모했지?"
  "네."
  "시체의 이름이 박은숙이야. 지문을 찍어서  컴퓨터
  에 입력시켜 찾아낸 거니까 틀림없을 거야. 누가 가서
  가족을 데려다가 시체를 확인시켜"
  "장숙영의 집 수색은 어떻게 할 거예요?"
  "해야지. 자, 출동하자구!"
  이 반장이 잠바를 걸치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벨을 세 번이나 눌러도 안에서는 응답이 없었다. 윤
  형사가 철제로 만들어진 현관문을 발로 찼다.
  "누구요?"
  그제서야 투박한 남자의 목소리가 문틈으로 새어나
  왔다.
  "경찰예요!"
  유경이 문틈에 대고 악을 썼다.
  "무슨 일이요?"
  "문부터 열어 주세요."
  "신분증 좀 보여 주시오."
  "빨리 열어요!"
  윤 형사가 화가 나서 문을 두드렸다.
  "댁들이 경찰인지 어떻게 믿어요?"
  "나 이런! 이 집에 박은숙이라는 여자 있지 않소?"
  "그 애는 집에 없소!"
  "그 아가씨 소식을 갖고 왔소!"
  "잠깐 기다려요."
  그제서야 아파트 출입문이  열렸다. 문을  요란하게
  걷어차서인지 가족들이 모두  잠옷 차림으로  현관에
  나와 있었다. 강도들의 침입에 대비하고 있는지 박주
  천은 야구 방망이까지 손에 들고 있었다. 땅딸막한 몸
  집의 50대 사내였다.
  "시경 강력계에서 나왔습니다."
  윤 형사가 침통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무슨 일로?"
  박주천이 의심스러운 눈빛으로  윤 형사를  살폈다.
  새벽에 비를 맞고 들이닥친 낯선 사람들이 아직도 미
  심쩍은 모양이었다.
  "박은숙씨가 따님 되십니까?"
  "예."
  "말씀드리기 어렵습니다만 따님이 변을 당하셨습니
  다. 지난 6윌 이 옆 임수지의 아파트에서 살해되었습
  니다."
  "그, 그럴리가!"
  "우, 우리 딸이 누구에게 살해되어요?"
  잠옷을 잔뜩 여미고 있던  부인이 눈을 휘둥그렇게
  뜨며 소리를 질렀다.
  "죄송합니다. 아직 범인은 검거하지 못했습니다."
  "틀림없이 우리 은숙인가요?"
  "지문을 대조해서 신원을 찾아낸  거니까 틀림없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아녜요!"
  부인이 외마디 비명 같은 소리를 질렀다. 부인의 눈
  에서 벌써눈물이 폭포처럼 쏟아지고 있었다.
  "우리 은숙이가, 은숙이가 죽을 리 없어요!"
  부인이 마룻바닥에 쓰러지며 울음을 터뜨렸다. 그러
  자 중학생으로 보이는  소년과 고등학생으로  보이는
  소녀가 부인의 몸을 끌어안고 같이 울기 시작했다. 박
  주천의 눈에도 눈물이 그렁그렁 괴어 있었다.
  유경은 등을 돌렸다.  그들이 끌어안고  몸부림치는
  모습을 차마보고 있을 수가 없었다.
  "이러시면 안 됩니다."
  윤 형사가 착잡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시체를 확인하셔야 합니다."
  "어디 있습니까?"
  박주천이 주먹으로 눈을 씻으며 물었다.
  "경찰병원에 있습니다."
  "잠깐 기다려 주십시오. 옷을 입고 나오겠습니다."
  윤 형사와 유경은  박주천이 옷을 입는  동안 현관
  밖에서 기다렸다.
  "정말 이런 소식을 전하는 것은 싫습니다."
  윤 형사가 붉어진 눈으로 말했다. 유경이 손수건을
  꺼내어 눈을 닦았다.
  박주천이 옷을 입고 밖으러 나온 것은 한참이나 걸
  려서의 일이었다. 박주천의 부인이 경찰병원까지 따라
  오겠다는 것을 만류하느라고 그가 시간을  끌었기 때
  문이다.
  경찰병원까지는 채 20분이  걸리지 않았다.  유경은
  박은숙이 살해된 경위와 이제서야 신원이  밝혀진 까
  닭을 그에게 간단히 설명해주었다.
  박주천은 사려 깊은 사내였다. 경찰을 탓하지도 않
  았고 범인을 증오하지도 않았다. 오직 딸의 죽음만을
  애통해 했다.
  "임수지를 알고 계십니까?"
  박주천과 경찰병원에서 박은숙의 시체를 확인한 뒤
  유경이 자동판매기의 커피를  빼서 그에게  대접하며
  물었다. 그는 이제 어느  정도 충격에서 벗어나 있었
  다.
  "딸의 친구들은 대개 모릅니다."
  "따님은 무슨 일을 하고 있었어요?"
  "학생이었습니다. 졸업반이었는데"
  "어느 학과죠?"
  "간호학과입니다."
  "따님이 행방불명되었을  때 가출신고를  냈었습니
  까?"
  "네, 가출신고도 내고 학교로 찾아다니기도  했었습
  니다."
  "임수지라는 여자가 살해되었다는 얘기는 들으셨나
  요?"
  임수지의 아파트와 박은숙의 아파트는 아파트 건물
  두 동 정도가 떨어져 있었다.
  그때 조금만 더 관심을 갖고 있었다면 딸의 죽음을
  일찍 알 수도 있었을 것이다.
  "간호원이 죽었다는 얘기를 들었지만  우리 애라고
  는 생각도 못했었습니다."
  "집에까지 모셔다 드리겠습니다."
  "우리 애는 어떻게 할 겁니까?"
  "장례를 치르셔야지요."
  "우리가 데려가도 됩니까?"
  "날이 밝은 뒤에 데려가세요."
  박주천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유경은 그를  태우고
  다시 잠실 시영 아파트 단지로 달리기 시작했다.
  유경이 정릉 장숙영의 저택에 도착했을 때 이 반장
  일행은 1차수색을 완전히 끝내고 구수회의를 하고 있
  었다.
  "그러니까 한 번 정리를 해 보자구. 이 피 묻은  여
  자 잠옷은 레이스나 천의 질감으로 봐서 장숙영의 것
  이야. 피의 응고 상태나 바랜 상태를 봐도 2, 3일밖에
  된 것이구"
  이 반장이 여자 잠옷을 들어 보이며 형사들에게 설
  명하고 있었다. 1층 거실이었다.
  유경은 조심스레 그들에게 다가갔다.
  "박주천씨 만났어?"
  이 반장이 유경과 윤 형사를 향해 물었다.
  "예."
  "박주천씨 딸이 맞아?"
  "예."
  "그 집도 충격이 크겠군."
  이 반장이 씁쓸한 표정으로 고개를 흔들었다.
  "어디서 나왔어요?"
  유경이 피 묻은 여자 잠옷을 살피며 물었다. 레이스
  가 달린 하얀 슬립으로 상당히 고급스러운 것이었다.
  "지하실 보일러 안에서 나왔어. 가동만 했으면 흔적
  도 없이  타버렸을 텐데  다행이 가동을 하지  않았
  어"
  "하늘이 도왔군요. 이것밖에 안 나왔어요?"
  "2층 침실에서 루미놀 반응이 나왔어. 걸레로  닦아
  낸다고 했지만 여의치가 않았겠지."
  "그렇다면 누군가를 살해했다는 얘기네요."
  "현재로는 임수지가 유력해."
  "왜요?"
  "김경희라는 간호원이 임수지를 본 것이 그저께 저
  녁 때야. 게다가 상계 방향의 4호선 지하철을 탔다니
  까 이쪽엘 왔다고 할 수가있어."
  "그렇죠."
  "임수지는 밤중에 장숙영의 침실을  침입했다가 거
  꾸로 장숙영에게 죽은 거야."
  "흉기는 뭐예요?"
  "찾아내지 못했어."
  "빨리 찾아야겠군요."
  "다시 한번 수색하자구.  이번엔 먼지 하나  남기지
  않고 수색해야돼"
  이 반장이 피로한 기색도  없이 형사들을 독려하자
  형사들이 다시 뿔뿔이 흩어져 갔다.
  "아, 그리고 최  형사는 감식반 좀  불러. 검시의도
  부르구!"
  "이 시간에요?"
  최 형사가 놀라서 이 반장을 멀뚱히 쳐다보았다.
  "빨리 부르기나 해!"
  "예."
  최 형사가 머리를 긁으며 대답했다. 유경은 형사들
  과 함께 2차 수색에 참여했다.
  그러나 장롱,화장대, 침대 밑까지  샅샅이 수색했으
  나 이렇다하게 수상한 것은 찾아낼수가 없었다.
  "시체를 어디다가 유기했지?"
  이 반장이 1층 거실을 서성대며 중얼거렸다. 형사들
  은 피로와 졸음 때문에 모두 소파에 쓰러지듯이 주저
  앉아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유경은 창밖을 우두커니 응시했다. 빗발이 을씨년스
  러웠다. 이따금 바람이 부는지 창문이 덜컹대며 흔들
  리고 있었다.
  (사람을 죽여 놓고 신혼여행을 떠나다니)
  유경은 장숙영의 정신 상태를 이해할 수가 없었다.
  "최근 2, 3일 사이에 이 집에 누가 왔다 갔어요?"
  이 반장이 대문을  지키는 영감 부부를  향해 다시
  질문하기 시작했다.
  "온 사람은 이 실장님과 최 비서밖에 없습니다."
  50대 후반으로 보이는 영감이  쉰 목소리로 대답했
  다. 불안한 기색이 역력해 보이는 얼굴이었다.
  "임수지 알지요?"
  "임수지요?"
  "조 회장 간호하던 여자 말이요."
  "예."
  "그 여자가 들어온 적 있어요?"
  "없습니다."
  영감이 고개를 흔들었다.
  "진짜요?"
  "예."
  "그 말에 책임져야 돼요? 거짓말하면  나중에 어떻
  게 되는지 알지요? 아저씨 징역 살아야 돼요, 징역!"
  이 반장이 위협까지 했으나  영감은 완강하게 부인
  했다. 이 반장이 고개를  갸우뚱하며 그럼 담을 넘어
  들어왔나, 하고 중얼거렸다.
  "담이 워낙 높아서 남자도 못 넘어 들어옵니다."
  영감이 어림없는 소리 말라는 듯이 쓰게 웃었다.
  "그럼 어디로 들어왔다는 말이요?"
  "들어온 사람이 없다니까요."
  "이 집에서 사람이 죽었어요!"
  이 반장이 소리를 꽥 질렀다.
  "아저씨, 대문은 항상 아저씨가 지키고 있어요?"
  유경이 보다 못해 영감에게 질문을 던졌다.
  "예."
  "식사할 때는 어떻게 해요?"
  "식사할 때는 잠궈 두고 합니다."
  "집을 손질할 때는요? 정원에 있는  나무를 가지치
  기하거나 소독같은 거 할 때 말예요."
  "그때도 잠궈 둡니다."
  "이 집에 들어오는 방법이 전혀 없겠어요?"
  윤 형사도 영감에게 질문을 던졌다.
  "없습니다."
  "시체를 숨겨둘 만한 곳은요?"
  "없습니다. 땅에 묻기 전에는요."
  "땅에?"
  이 반장이 놀라서 소리쳤다.
  "그렇다면 암매장한 것인가?"
  이 반장이  중얼거리자 형사들이  동요를 일으키기
  시작했다. 그것은 가능성이 충분한 얘기였다.
  "밖에 나가서 한 번 찾아보자구. 모두 일어나!"
  이 반장이 지시를 내리자  형사들이 웅성거리며 일
  어섰다. 유경은 코트의 깃을 바짝 세웠다.
  밖에는 비바람이 불고 있었다.
  "어두워서 찾을 수 있겠습니까?"
  "금방 날이 밝아."
  최 형사가 어깨를 떠는 시늉을 하자  이 반장이 한
  마디로 잘라버렸다. 영감이 시키지도 않는데 플래쉬를
  찾아왔다.
  유경은 자신의 차에서 비상용 플래쉬를 꺼내 윤 형
  사와 함께 수색에 나섰다.
  "넓기도 되게 넓네."
  윤 형사가 엄두가 나지 않는다는 듯이 정원을 휘둘
  러보면서 중얼거렸다. 정원은 넓은 잔디밭까지 합해서
  7,8백평은 족히 되어 보였다.
  그러나 정원 수색에서는 시체를  매장할 만한 곳을
  찾을 수가 없었다.
  "시체를 보일러에 넣고 태워 버렸나?"
  최 형사가 비에 젖은 머리를 손으로 털며 중얼거렸
  다. 모두들 비에 흠뻑 젖어 있었다.
  이내 날이 밝았다. 그때서야 시경 감식반이 왁자하
  게 들이닥치고 검시의와 간호원이 왔다. 그러나 감식
  반은 할 일이 있었으나 검시의는 할 일이 없었다. 검
  시의를 돌려 보내고 감식반과 함께 다시 수색이 시작
  되었다.
  시체를 찾는 작업도 다시 시작되었다. 유경은 시체
  를 찾는 작업에  참여했다. 금속탐지기와  경찰견까지
  동원한 작업이었다.
  그러나 시체는 끝내 찾을 수가 없었다. 금속탐지기
  가 부엌칼하나를 집 뒤 숲에서 찾아냈고 감식반이 루
  미놀 반응이 뚜렷하게 나타난 청동 조각 작품을 찾아
  냈을 뿐이었다. 그것이 흉기로 쓰인 듯하다는 것이 감
  식반의 견해였다.
  "인부들을 동원해서라도 이 집을  모두 파헤쳐야겠
  어."
  이 반장이 비장하게 입술을 깨물었다.
  "모두 나가서 해장국이라도 먹고 와!"
  "수색영장 청구해 두는 게 좋겠어요."
  "계장님에게 보고했어. 영장 가시고 온대."
  "장숙영도 신병을 확보해야 돼요."
  "아직 괜찮아."
  이 반장이 그럴 필요 없다는 듯이 고개를 흔들었다.
  유경은 만일을 위해서 신병을 확보해야 돼요, 하고 건
  의하고 싶었으나 입을 다물고 말았다. 갑자기 드레스
  를 입은 화사한 모습의 장숙영이  머리속에 떠올랐기
  때문이다.
  유경이 형사들과  함께 길음시장에  나가 해장국을
  먹고 돌아오자인부들이 속속  도착하고 관할  경찰서
  수사 관계자들과 시경 수사과계장이며 과장이 도착해
  있었다.
  임수지의 시체가 인부들에 의해  발굴된 것은 그날
  점심 때가 조금 지나서의 일이었다. 시체는 얼굴이 짓
  이겨진 채 장숙영의 집뒤뜰에 묻혀 있었다.
       12. 죽음의 밀월 여행
  장숙영과 이진우가 비행기로 제주도에 도착한 것은
  그날 저녁 6시경의 일이었다. 그들은 도착하자마자 제
  주시 중심가에 있는 특급  관광호텔 K호텔에 여장을
  풀고 식사부터 했다. 호텔 안에 있는 일식 식당에서였
  다.
  "장어 요리는 최고의 스태미너석이래."
  장숙영이 장어 요리를 주문하고  나서 이진우를 향
  해 요염하게 웃었다. 그녀의 얼굴엔 아직도 시울에서
  의 결혼식으로 인한 가벼운 피로와 흥분이 남아 있는
  것처럼 보였다. 얼굴이 복숭아빛으로 발그스름한 것이
  그 증거였다. 그것이 장숙영을 더욱 색정적으로 보이
  게했다.
  이진우는 장숙영의 말에 환하게 웃었다. 이제 법률
  적으로도 완전히 장숙영을 소유했다는 정복감과 함께
  성일 그룹을 마침내 수중에 넣었다는  기쁨이 충만한
  미소였다. 이내 장어 요리가  나왔다. 일본여자들처럼
  기모노 차림을 한 아가씨 둘이서  장어를 정성스럽게
  굽고 정종을 따뜻하게  데워서 두 사람의  잔에 따랐
  다. 실내 장식까지 완전히  일본 흉내를 낸 식당이었
  다. 창호지를 바른 쇼지문 뒤에서는 일본의 엔가인'요
  꼬하마'가 감미롭게 흐르고 있었다.
  "듭시다."
  이진우가 잔을 들고 말했다. 장어는 이미 숯불 위에
  서 지글지글 타고 있었다.
  "응."
  장숙영이 또 요염하게 웃으며 잔을 부딪쳐 왔다. 장
  숙영은 억지로 행복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녀는 불
  안하기 짝이 없었다. 막상결혼식을 무사히 끝내고 제
  주도까지 밀월 여행을 오기는 했지만  금방이라도 형
  사들이 자신을 체포하러  올 것 같아  불안하기 짝이
  없었다.
  임수지를 살해하던 생각, 피투성이로 죽어 나자빠진
  임수지를 뒤뜰에 질질  끌고 가서 묻던  생각을 하면
  자신도 모르게 진땀이 났다.
  "오늘 하루 종일 얼굴색이 안 좋은 것 같습니다."
  그때 이진우가 근심스러워하는  표정으로 장숙영을
  살폈다.
  "내가?"
  장숙영은 화들짝 놀라 재빨리 억지 미소를 지었다.
  "무슨 걱정이라도 있습니까?"
  "아냐, 걱정은 무슨 걱정"
  장숙영은 황급히 고개를 흔들고 술을 마셨다. 눈치
  빠른 이진우에게 헛점을 보일 수는 없었다. 비록 결혼
  을 했다고 하더라도 자신이 살인자라는 것을 알면 이
  진우는 그 즉시 돌아서 버릴 것이다.
  그녀가 이진우를 위해서 조일제  회장을 죽이고 임
  수지를 살해했다는 것을  그는 결코 믿지  않을 것이
  다. 그에게 인형처럼 행복한  표정을 짓고 있어야 했
  다.
  "아 해봐."
  "왜요?"
  "어서 아 해봐."
  이진우가 의아한 표정으로 입을 벌렸다. 그러자 장
  어 한 점을  젓가락으로 집고 있던  장숙영이 그것을
  이진우의 입 속에 넣어주었다. 이진우는 시중드는 아
  가씨들의 시선을 의색해 거북해 하면서도  그것을 입
  속에 넣고 우물우물 씹기 시작했다.
  "맛있어?"
  장숙영이 교태를 섞으며 물었다. 행복한 신부의 표
  정이었다.
  "예."
  이진우가 아가씨들의 눈치를 살피며 대답했다. 그러
  자 아가씨들이 입을 가리고 웃었다.
  "흉보지 말아요."
  장숙영이 아가씨들을 향해 웃으며 말했다.
  "저희들이 왜 흉을 보겠어요!"
  아가씨들이 고개를 숙이고 대꾸했다. 그러면서도 아
  가씨들은 손으로 입을 가리고 웃고 있었다.
  "저봐, 웃으면서"
  장숙영이 밉지 않게 눈을 흘겼다.
  "그럼 저희들은 잠시 나가 있을께요."
  "미안해요."
  아가씨들이 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나갔다. 그러자
  장숙영이 눈을 감고 이진우를 향해 입술을 내밀었다.
  이진우의 입술이 스치듯이 장숙영의 입술에 얹혀졌다
  가 떨어졌다.
  "아이 좋아"
  장숙영이 황홀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이진우는 천
  천히 술을 따라 마셨다. 문득 장숙영이 조금 이상하다
  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대수롭게 생각할 필요는 없
  을 것이다. 젊은 남자와 결혼한 나이먹은 여자의 델리
  킷한 감정이 저런  표정을 짓게  할 수도  있을 테니
  까 이진우는 그렇게 생각했다.
  이진우의 마음도 착잡했다. 우여곡절 끝에 장숙영과
  결혼에 성공하긴 했으나 아내 혜인의  얼굴이 떠오르
  면 가슴으로 묵지근한 통증이 지나가곤 했다.
  장숙영과 이진우가 시가지를 구경하기 위하여 거리
  로 나온 것은 한 시간쯤 지난 뒤의 일이었다. 거리는
  이미 칠흑 같은 어둠이  덮여 있었다. 가을이라 해가
  짧은 탓이었다.
  "비가 올려나 봐."
  장숙영이 이진우의 팔에  매달려 걸으며  속삭였다.
  칠흑같이 어두운 하늘에 별이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이따금 스산하게 불고 있는 바람도 물기에 젖어 축축
  했다. 그러나 거리는 관광지답게  흥청대고있었다. 대
  개 신혼 여행을  온 젊은 부부들이  다정하게 팔짱을
  끼고 남국의 풍물에 흠뻑 취해 있었다.
  "태풍도 불 것 같은데요."
  이진우가 검푸르게 나부끼는 야자수 가로수를 쳐다
  보며 중얼거렸다.
  "이맘 때는 항상 태풍이 불어."
  사람들은 그것을 계절풍이라고 했다.
  "피로하지 않아요?"
  "자기와 같이 있으니까 하나도 피로하지 않아."
  "정말이요?"
  "정말이잖구!"
  장숙영이 야자수 나무에  등을 기댔다.  번화가에서
  멀리 벗어나 거리는 인적없이 조용했다. 간간이 헤드
  라이트를 밝힌 차들이 무섭게 빠른 속도로 질주해 가
  고 있을 뿐이었다.
  "뽀뽀해 줘!"
  장숙영이 눈을 감고 중얼거렸다. 어런애 같았다. 이
  진우는 봉긋하게 솟아 오른 장숙영의  풍만한 가슴을
  보고 있다가 얼굴을 내려뜨려 장숙영의 입술에 제 입
  술을 얹었다.
  (아!)
  장숙영은 온 몸이 공중으로  떠오르는 듯한 기분을
  느꼈다. 이진우의 손이 브라우스 위에서 가슴을 어루
  만지고 있었다.
  (난 이 사람의 손만 닿아도 불덩어리가 되나 봐.)
  장숙영은 이진우의 목에 두 팔을 감고 전신을 내맡
  겼다. 갑자기 이진우를 몸  속 깊이 받아들이고 싶었
  다.
  "호텔로 돌아가고 싶어."
  장숙영이 애원조로 말했다.  이진우의 손이  둔부를
  쓰다듬고 있었다.
  "그래요."
  이진우가 선선히 승낙했다. 벌써 빗방울이 한두 방
  울씩 떨어지고 있었다. 이제 조금 있으면 낙엽이 우수
  수 떨어질 것이고 춥디추운 겨울이 올 것이다.
  임수지.
  그 여자를 죽인 것이 잘못이었다. 아니 애초에 조일
  제 회장을 죽인 것이 실수였다. 그것이 장숙영 그녀의
  인생을 벼랑으로 밀어붙이고  있었다. 조일제  회장만
  죽이지 않았으면 결혼하기 전날 밤  임수지로부터 위
  협을 받지도 않았을 것이고 그녀를 죽여서 뒤뜰에 묻
  어야 하는 일도 없었을  것이다. 경찰은 무엇을 하고
  있는 것일까. 경찰은 아직도 내가 조일제 회장을 죽이
  고 임수지를 살해한 것을 모른다는 말인가.
  아니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경찰은 이미 내가 범인
  이라는 사실을 포착했을 것이고 지금쯤  이 제주도로
  형사대를 파견했을지도 모를 것이다.
  장숙영은 호텔의 고급스러운 침대에  누워 온통 그
  생각뿐이었다. 형사대, 수갑, 재판, 그리고 교수대
  그런 것들을 생각하면 장숙영은 손바닥에서 끈적끈적
  한 땀이 배어났다.
  "샤워하지 않겠어요?"
  이진우가 욕실에서 허리에 타올을 걸치고 나왔다.
  "아침에도 샤워했어."
  그녀는 이진우를 향해 어설픈  미소를 날려 보내고
  침대에서 일어나 창가에 섰다. 밤비가 유리창에 소리
  없이 들이치고 있었다. 가을비였다. 어둠 속을 헤집고
  희끗희끗 날아오는 빗방울들이 차갑게 느껴졌다.
  "괜찮겠어요?"
  이진우가 등 뒤에서 그녀를 안았다. 두 손으로 동그
  라미를 그리듯이 가슴을 어루만지다가 분홍빛 한복의
  옷고름을 풀고 저고리를  벗겨냈다. 치마는  어깨끈만
  밀었는데도 스르르 발 밑으로 흘러 내려갔다.
  "뭐가?"
  "기분말예요. 새색씨답지 않게 쓸쓸해 보여요. 중년
  여자의 델리킷한 감정인가요?"
  "글쎄"
  그녀는 희미하게 웃었다.
  "서로 사랑하면서 살아요. 중년 여자의 사랑은 몸으
  로 하는 거래요."
  이진우가 그녀의 목덜미에 입술을 가져다 댔다. 뜨
  거운 입술이었다.
  "몸으로?"
  "예."
  그녀는 가슴을 안고 있는 이진우의 단단한 팔에 입
  술을 서너 번 찍었다. 타올이 흘러 내려간 그의 아랫
  도리가 그녀의 핑퍼짐한 둔부를 자극하고 있었다. 그
  녀는 서서히 몸이 더워져 왔다.
  "오늘 나를 행복하게 해 줄 수 있겠어?"
  그녀가 브래지어를 풀고 있는  그에게 애원조로 말
  했다.
  "오늘뿐이 아니라 언제나 행복하게 해 줄께요."
  "난 오늘이 젤 소중해."
  "왜요?"
  "오늘 최고로 행복해지고 싶어."
  그가 그녀의 몸을 돌려 세우고 무릎을 꿇었다. 그의
  혀가 그녀의 발등에서부터 부드러운 깃털이  되어 위
  로 거슬러 올라왔다. 그녀는 눈을 질끈 감고 그의 머
  리를 감싸 안았다. 뜨거웠다. 그가 뜨거운 불덩어리가
  되어 그녀의 차디잔 몸을 녹이고 있었다.
  그래 타자. 재가 될 때까지 미련없이 타 버리자. 그
  녀는 그렇게 생각하며 그를 감싸안은 팔에 잔뜩 힘을
  주었다.
  "숨 막혀요."
  그가 그녀의 하체에서 얼굴을 떼며 말했다. 아직도
  그녀의 몸엔 얇은 속치마가 한 겹 걸쳐져 있었다.
  "진우는 정말 나를 사랑해?"
  몸을 일으킨 이진우가 그녀의  속치마를 가볍게 벗
  겨 내었다.
  "오늘은 평소답지 않네요."
  "오늘은 우리가 결혼을 한 첫날이잖아?  진짜 행복
  이 뭔지 알고싶어"
  "어떻게요?"
  "그걸 진우가 가르쳐 줘."
  장숙영이 안달을 하듯이  중얼거렸다. 마치  벼랑에
  서 있는 듯한 절박한 목소리였다.
  그러나 이진우는  그녀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 그녀를 안아 침대에 눕히고 제 몸을 실었다.
  "서두르지 마."
  장숙영이 그를 제지했다.
  "왜요?"
  "불을 꺼."
  "이대로가 좋아요."
  이진우가 멈출 수 없다는  듯이 격렬하게 밀어붙이
  고 있었다.
  그녀는 이진우를 밀어낼 듯하다가 그만두었다. 이진
  우가 짐승이 되어  가는 것과 반대로  그녀는 오히려
  불길이 점점 꺼져 가고  있었다. 죽은 자들 때문이었
  다. 죽은 자들, 조일제 회장과  임수지의 유령이 허공
  에서 떠돌고 있는 것 같았다. 등줄기를 식은땀이 뻗쳤
  다.
  그때 이진우가 후드득 무너져 내려왔다. 그녀는 깜
  짝 놀라서 이진우의 등을 꼬집었으나  이진우는 눈에
  초점이 갈라진 채 몸을  부르르 떨고 있었다. 그녀는
  눈을 감아 버렸다.
  밤이 얼마나 오래 되었는지  알 수 없었다.  밤비가
  여전히 소리없이 유리창에  들이치고 있었다.  그녀는
  침대에 걸터앉아 어둠이  먹빛으로 두껍게  착색되어
  있는 유리창을 응시하였다.
  이진우는 침대에 시체처럼 쓰러져 자고 있었다. 그
  도 피곤했던 모양이다. 누가 업고 가도 모를 만큼 그
  는 혼곤히 잠들어 있었다.
  그의 벌거벗은 나신이 빈 껍데기처럼 허해 보였다.
  누군가 그랬었다. 삼라만상이  모두 허상이듯  인간의
  육체 또한 허상이라고.
  존재하는 것은 그 물질이  아니라 인연의 소산이라
  고. 그녀는 문득 이진우의 살을 뚫고 그 안이 들여다
  보이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한 겹 살 속의 내장이
  아니라 그가 가지고 있는 무형의 욕망, 탐욕까지 세세
  히 들여다볼 수 있을 것 같았다.  이진우, 그는 빈 껍
  데기에 지나지 않았다. 아니  빈 껍데기조차 아닌 공
  (공)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는 좀처럼 잠이 오지 않았다. 금방이라도 형사
  대가 들이닥칠것 같은 공포와 조 회장과 임수지의 영
  혼이 허공에서 우두커니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는 것
  같은 기분은 이제 어느 정도 사라져 있었다.
  술기운 때문이 아니었다.  그녀는 자신의  생애, 꿈
  많은 소녀 시절과 영화배우  시절, 그리고 나이  많은
  조 회장과 결혼하여 함께 살던 생활이며, 이진우를 알
  고부터 육체의 욕망에 허덕이던 일들이 모두 한낱 물
  거품 같다는 것을 깨달았던 것이다.
  (신혼 여행이 끝나 서울로 돌아가면 경찰에 자수하
  자)
  그녀는 그렇게 생각했다.  자수했다고 해서  그녀가
  교수형을 면하게 되리라고는 생각되지 않았다. 그러나
  그것이 두렵지는 않았다.
  다만 그때를 위해 자신의 육체를 아쉬움 없이 불태
  우리라고 생각했다. 욕망이 아니었다.  그것은 욕망에
  대한 아쉬움을 버리기 위한 행위였다.
  그런데 이진우의 육체가 왜  이렇게 빈 껍데기처럼
  허해 보이는것일까. 그녀는 그 사실이 비감했다. 그러
  나 천천히 이진우에게 다가가서 그의 살을 느끼기 시
  작했다. 따뜻한 인간의 살이 그리웠던 것이다.
  이진우가 힘겹게 눈꺼풀을 밀어올렸을  때 처음 본
  것은 장숙영의 희멀건 젖가슴이었다. 두 개의 밍밍한
  살덩어리가 장난을 치듯이  그의 얼굴을  간지럽히고
  있었다. 그는 자신도 모르게 얼굴이 찌푸러졌으나 살
  덩어리 하나를 입 속에 가득 넣었다.
  "아, 아퍼!"
  여자가 그의 얼굴에 쓰러 지며 외쳤다. 그는 여자의
  몸에 짓눌려 숨이 막혔다. 살덩어리를 뱉었다. 여자가
  희미하게 웃는 것이 보였다. 조소하는 것 같기도 하고
  기꺼워하는 것 같기도 한 이상한 미소였다. 어떻게 보
  면 여자의 미소는 신비롭기까지 했다.
  그는 어디선가 그 오묘한 미소를 본 것 같았다. 자
  비롭고 그윽했다. 아니 조는 듯 눈을 지그시 내려감고
  있었다. 욕망과 탐욕이  전혀없는 무념무상의  미로였
  다. 그리고 그 미소에 동화되었다고 생각한 순간 그는
  여자의 몸 속에 들어가 있는 자신을 발견했다.
  이상진 반장과 한유경 형사가  제주시 번화가의 특
  급 관광호텔, K호텔 1706호실에 들어섰을  때 현장은
  이미 피비린내로 가득 차 있었다.
  그들은 얼굴부터  잔뜩 찌푸리고  현장을 통제하고
  있는 순경들에게 신분증을 내보였다. 현장은 관할 제
  주경찰서의 수사과팀과 감식반, 그리고 호텔 종업원들
  로 받들여 놓을 틈조차 없었다.
  "서울에서 오셨군요."
  현장을 지휘하고  있는 사내는  제주경찰서 윤대섭
  수사과장이었다. 땅딸막한 체구의 사내였으나 눈빛이
  형형했다.
  "연락 받으셨지요?"
  이 반장이 수인사를 나눈 뒤 그렇게 물었다.
  "예."
  "어떻게 되었습니까?"
  "아주 끔찍합니다."
  그가 말도 말라는 듯이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며 그
  들을 침실로 안내했다.  K호텔 1706호실은  호화로운
  스위트 룸이었다. 바닥에깔려 있는 붉은 융단과 거실
  의 응접 소파, 스낵 바,  상제리아, 집기와 가구, 모든
  실내 장식이 초호화판이었다.
  그것은 침실도 마찬가지였다. 시체는 사치스러운 침
  대에 한 구가 쓰러져 있었고 침실 벽 앞에도 한 구가
  쓰러져 있었다. 두 구의  시체엔 하얀 광목천이 덮여
  있었으나 광목천도 피로 흥건하게 젖어  있었고 벽도
  피로 범벅이 되어 있었다. 죽기 전 벽을 짚고 몸부림
  친 것 같았다.
  "지독하군!"
  이 반장이 시체를 들여다볼 엄두도 내지 못하고 침
  통하게 중얼거렸다. 유경은 손수건을 꺼내어 입을 틀
  어막았다. 속이 미슥거려토할 것 같았다.
  "감식은 끝났습니까?"
  "거의 다 끝났습니다."
  "어떻게 된 것입니까?"
  "동반자살입니다. 여자가 잠자는 남자를 먼저  살해
  하고 자신도 자살한 것입니다."
  "그런데 왜 이렇게 끔찍한 방법을 동원해 자살했습
  니까?"
  "그 점이 석연치 않기는 합니다."
  이 반장이 침실 바닥의 시체에 덮여 있는 광목천을
  벗겼다. 장숙영이었다.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장
  숙영의 아랫배가 피투성이가 된 채 죽어 있었다. 죽으
  면서 자신의 아랫배를 만졌는지 두  손도 피투성이였
  다.
  "흉기가 뭐죠?"
  유경이 제주경찰서 수사과장에게 물었다.  수사과장
  이 유경을 힐끗  쳐다보고 이 반장에게  시선을 옮겼
  다. 이 여자는 누구냐는 듯한 표정이었다.
  "아참, 우리 한유경 형사를 소개하지 않았군요."
  이 반장이 그 눈치를 알아차리고 재빨리 유경을 수
  사과장에게 소개했다. 유경이 목례를 했다.
  "그렁 여형사?"
  "예."
  "어떻게 강력사건에 직접 뛰어들고 있습니까?"
  수사과장이 새삼스럽게 호기심이  가득한 눈빛으로
  유경을 살폈다.
  "베테랑 형사입니다. 무술도 보통이 아니구요."
  이 반장이 피식 웃으면서 대꾸했다. 수사과장이 고
  개를 끄덕거렸다.
  "흉기는 과일 깎는 과도입니다. 이 호텔에 있던  거
  랍니다."
  "지문은 재취되었나요?"
  "예, 장숙영 것이 채취되었습니다."
  수사과장이 문갑 위에 수기해  놓은 과도를 가리켰
  다. 칼도 핏자국이 낭자했다.
  "벽의 핏자국은 어떻게 해서 생겼죠?"
  "벽의 핏자국은 감식 결과에 의한 것인데 이진우를
  살해한 장숙영이 자신의 복부를 찔렀으나  잘 들어가
  지 않자 벽에  칼자루를 대고 자신의  몸을 밀어냈기
  때문에 생긴 자국이랍니다."
  "이야, 어떻게 그럴 수가 있지?"
  이 반장이 믿어지지 않는다는  듯이 고개를 흔들었
  다.
  "장숙영은 이진우를 죽였기 때문에 이미 제 정신이
  아니었을 거랍니다. 고통없이 빨리 죽고 싶어 그 방법
  을 택했다는 것이 감식반의 얘기입니다. 칼로 찌른다
  고 바로 죽는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그래도 너무 끔찍해요."
  "70년대에 프랑스에서도 이런 일이 있었습니다.  우
  리나라 프랑스대사가 대사관 관저에서 부엌칼로 자살
  을 한 사건 기억나시죠? 이름은  잊었지만 워낙 고위
  층 인사라 프랑스와 우리나라에서 커다란  화제가 되
  었었죠. 자살 방법도 독특했고 결국 프랑스경찰과
  우리나라 경찰이 합동수사를 했었는데 대사가 부엌칼
  칼자루를 벽에 대고 자신의 몸을  밀어서 자살했다는
  결론이 나왔습니다. 이 사건도 그 사건과 유사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타살의 흔적은 없습니까?"
  이 반장이 미심쩍은 표정으로 수사과장을 쳐다보았
  다.
  "없습니다. 문도 잠겨 있었고 외부에서 침입한 흔적
  이 전혀 없습니다."
  "투숙객들의 동태는 어떻습니까?"
  "외국인을 제외한  내국인들을 일일이  체크했는데
  수상한 사람이 전혀 없습니다."
  "밀실 살인인가?"
  이 반장이  혼잣말로 중얼거리며  침대에 반듯하게
  누워서 죽어있는 이진우의 시체에 덮여  있는 광목천
  을 벗겼다. 이진우의 시체도 알몸이었고 왼쪽 가슴에
  핏자국이 흥건했다.
  "정확하게 찔렀군!"
  이 반장이 담배를 꺼내 물며 신음처럼 토했다. 심장
  을 정확히 찔렀다는 말이었다.
  (여자 솜씨가 아니란 말이야)
  유경은 이 반장의 속마음을 헤아릴 수  있을 것 같
  았다. 이 반장도 장숙영과 이진우의 자살을 의심하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장숙영과 이진우의 죽음을 유경이 알게 된 것은 오
  늘 낮의 일이었다. 장숙영의 저택 뒤뜰에서 마침내 임
  수지의 시체를 발굴한 이반장이 치안본부를  통해 제
  주 도경찰국에 장숙영과 이진우의 신병을 확보하라는
  긴급지시를 내리자, 제주 도경찰국은 뜻밖에 장숙영과
  이진우가 동반자살을 했다고 보고해 왔던 것이다. 이
  반장과 유경은 그 보고를 받자마자 그  즉시 김포 공
  항으로 달려가 제주도로 날아온 것이었다.
  "정액 검출은 가능하겠습니까?"
  이 반장이 감식반을 보고 물었다.
  "그럼요."
  "사망 시간은 언제쯤으로 추정됩니까?"
  "새벽 2시에서 3시쯤으로 추정됩니다."
  "그 밖의 단서나 뭐 수상한 것은 없습니까?"
  "없습니다."
  "그럼 정말 자살인가?"
  현재로서는 자살로 결론을  내릴 수밖에  없습니다.
  유서도 있으니까요."
  "그래요?"
  감식반이 비닐 봉지에 수거해  놓았던 유서를 꺼내
  보였다. 이반장은 목장갑을 끼고 그것을 읽기 시작했
  다.
  제주경찰서 수사과장님께
  먼저 본의 아니게 소란과 물의를 일으키게 되어 송
  구소러운 마음 금할 길이 없습니다. 이 사건을 서울시
  경 강력계 팀에 이첩해 주십시오. 그들이 처음부터 이
  사건을 수사해 왔으니 마무리도 그들이  지어야 하겠
  기에 이 유서를 남깁니다.
  과장님, 제가 이렇게 엄청난 일을 저지르게 된 것은
  이진우씨와의 불장난이 시초였습니다. 이진우씨의 젊
  은 육체를 알게 되자 눈에 보이는  것이 없어졌고 그
  와의 결합을 위해서는 어떠한 희생도  감수해야 하겠
  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입니다.
  여자의 사랑, 여자의 욕망은 참으로 무서운  것입니
  다. 저는 이진우씨를 혼자 차지하기 위해 김숙자를 살
  해했고 임수지를 그 여자의 아파트에서 죽였습니다.
  오늘 이러한 일을 결행하는  것은 김숙자와 임수지
  의 망령이 꿈에 자주 나타나고 수사망이 시시각각 좁
  혀져 오고 있는 듯한 예감 때문입니다. 오늘 제가 이
  일을 결행하지 않으면 조만간 형사대의  손에 체포될
  것 같은 불안감을 견디시 못하고 저는 미쳐 버릴지도
  모릅니다. 손목에 차디찬  수갑이 채이고  뭇사람들의
  손가락질을 받으며 교수대로 걸어가야 하는  일은 생
  각만 해도 끔찍합니다.
  과장님, 저는 이제  죽습니다. 저를  동정하지 말아
  주십시오. 저는 죽음의 길에 이진우씨를 동반자로 삼
  으려고 합니다. 제 죽음의 길이 외롭지 않기 위해서입
  니다.
  저의 재산은  이진우씨의 딸  이유리에게 상속되길
  희망합니다.
  법적으로 따지더라도 이진우씨와  제가 결혼했으므
  로 그의 딸이 재산을 상속하는 것은  아무 문제가 없
  을 것입니다. 살인자라도 재산을 상속시켜 줄 권리는
  있을 테니까요. 그 아이는  이미 우리 부부의 호적에
  입적되어 있습니다.
  이진우씨를 데려가겠습니다. 그를 혼자 차지하기 위
  해 살인을 했는데 그를 남겨 두어 다른 여자의 품 속
  으로 가게 하고 싶지는않습니다.
  그를 사랑합니다. 미치도록 사랑합니다.  그래서 그
  를 데려가고자 합니다.
  장 숙 영
  유서는 백색 종이에 타이프로  찍혀 있었고 이름만
  펜으로 서명이되어 있었다. 이 반장이 그것을 다 읽고
  유경에게 넘겨 주자 유경도 전율하는 듯한 광기를 느
  끼며 천천히 그 유서를 읽어 내려갔다.
  "어떻게 생각해?"
  유경이 그것을 다 읽고 나자 이  반장이 무겁게 한
  숨을 떨구면서 물었다.
  "완전히 미친 것 같아요."
  "검토해 볼 필요가 있지 않겠어?"
  "어디 이상한 점이라도 있어요?"
  "글쎄 막연하긴 하지만 유서의 내용이 너무 광
  적이야."
  "죽음을 앞에 둔 여자의 유서니까 그럴 법도 하죠."
  "시체를 부검해 볼까?"
  "그러면 과학수사연구소로 옮겨야 돼요."
  "제주도에도 종합병원이 많아."
  "그래도 과학수사연구소는 장비가 많아요."
  "좋아. 그럼 내가  저 친구들에게 시체를  옮기도록
  해야겠어. 항공사하고도 교섭을 해야 하구"
  "서둘러야 해요."
  이 반장이  웨이터들을 심문하고  있는 제주경찰서
  수사과장을 향해 걸어갔다.
  유경은 천천히 장숙영과 이진우가  벗어 놓은 옷가
  지들을 살폈다. 문득 그들이  죽음을 앞에 두고 벌인
  섹스의 향연이 머리 속에 떠오르자 인간의 정신이 이
  토록 황폐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장숙영과
  이진우의 죽음은 아무리 좋게 생각해도 미치광이들의
  몸부림으로만 여겨졌다.
  유리창엔 벌써 어둠이 서리서리  내리고 또 밤비가
  들이치고 있었다. 태풍주의보가 내려져 있었으나 아직
  우리나라는 태풍 영향권에는 들어 있지  않은 모양이
  었다. 비바람이 그다지 거칠지 않았다.
  그러나 태풍이 불어닥치기 전에  시체를 서울로 호
  송해야 했다.
  제주 쪽의 수사는 어차피  제주경찰에 일임할 수밖
  에 없었다. 비행기가 뜰 수 있을지 걱정되었다.
  유경이 눈을 뜬 것은 날이 훤히 밝았을 때였다. 새
  벽녘에 마침내 태풍이  상륙했는지 창문이  덜컹대며
  흔들리고 음산한 비바람 소리가 허공을  달려가고 있
  었다.
  유경이 눈을 뜬 것은 그 비바람  소리 때문인 모양
  이었다. 사방이 어수선했다. 그러나 몸은 가뿐했다. 48
  시간 동안 잠 한숨 못 자고  돌아다니다가 자정이 되
  어서야 겨우 집에 들어온 유경은 현관에서 남편의 품
  에 쓰러지듯 기대어서 눈을 감았었다. 긴장의 끈을 풀
  어버리자 갑자기 졸음이 쏟아졌던 것이다.
  "그래도 집은 잊어버리지 않고 찾아왔군!"
  남편은 어처구니가 없는지 소리내어 웃음을 터뜨렸
  다.
  "미안해요, 여보."
  유경은 감겨 오는 눈꺼풀을  밀어올리고 겨우 그렇
  게 대꾸했다.
  "나 좀 눕혀 줘요."
  "아주 파김치가 되었어."
  "요즈음같이 바빠서는 형사 생활 못 하겠어요. 집에
  서 살림이나 할래요."
  "내일 아침이면 언제 그랬냐 싶게  기운이 나서 사
  건 현장으로 뛰어갈 사람이"
  남편이 유경을 안아다 침대에 눕혔다.
  "집이 젤 좋아요. 당신두 좋구"
  유경이 눈을 감은 채 잠꼬대처럼 중얼거렸다.
  "옷을 벗고 자야지."
  그러나 유경은 몸을 움직일 수가 없었다. 아니 움직
  이기가 싫었다. 그리고는 이내 죽음처럼 깊은 잠 속으
  로 빠져들었다. 언제 남편이  유경의 옷을 벗겨 주고
  얇은 이불 한 자락을 덮어 주었는지  전혀 기억이 나
  지 않았다. 꿈인 듯 생시인 듯 남편의 자리를 더듬어
  남편이 옆에 있는  것을 확인하고 달디단  잠 속으로
  빠져들었던 것이다.
  (집은 역시 아늑하고 좋아)
  유경은 침대에 누워 기지개를 하고 일어났다. 가운
  을 걸치고 주방으로 나가자 남편이 커피 포트에 물을
  끓이고 있었다.
  "이제 일어났어?"
  "네."
  "웬만하면 하루 쉬지 그래. 이러다가 하나밖에 없는
  여편네 얼굴도 잊어버리겠어."
  "미안해요. 이 사건 끝나면 1주일쯤 휴가낼께요."
  유경은 남편을 뒤에서 안고 얼굴을 그의 넓적한 등
  에 기댔다.
  그의 몸에서 풋풋한 가을 냄새가 풍겼다.
  "성일 그룹 사건 매스컴이 난리더군 엽기적 자
  살사건이다, 광적인 죽음이다, 추악한  욕망이 저지른
  사건이다 장숙영 자살사건을  태풍 뉴스보다  더
  크게 매스컴에서 보도하고 있어.
  여론도 분분하구."
  "매스컴이 오죽 좋아하겠어요."
  "당신은 그 사건을 수사하고 있으니까 내막을 훤히
  알고 있을테지"
  "궁금해요?"
  "별루"
  남편이 유경을 향해 몸을 돌리며 고개를 흔들었다.
  "끔찍했어요."
  유경이 남편의 목에 팔을 감고 진저리를 쳤다. 남편
  이 유경의 허리를 감싸안았다.
  "보고 싶었어요."
  "마치 몇 년 동안 헤어져 있던 사람 같군"
  "정말예요. 이번 사건처럼 잔인하고 끔찍한  사건은
  처음에요."
  "그럼 형사 그만둬."
  "싫어요."
  "욕심은!"
  남편이 유경의 입술에 가볍게  입맞춤하고 나서 눈
  을 흘겼다.
  "당신을 사랑해요."
  "행복하군."
  "정말예요!"
  남편의 입술이 다시 유경을 향해 내려왔다. 유경은
  눈을 감고 남편의 입술을 천천히 받았다. 달고 향기로
  운 입술이었다.
       13. 미로의 끝
  허영만이 법원가 주변 다방에서 기웃거리다가 형사
  들에 의해 임수지 살인사건 수사본부에  연행되어 온
  것은 장숙영과 이진우의 자살사건이 있은 지 5일만의
  일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수사본부를 해체하기로 결정
  한 날이기도 하였다.
  가증스럽게도 허영만은 김영일 변호사의 명의를 빌
  려 브로커 노릇을 하다가 3개월  전에 변호사 사무실
  을 그만두고 조그만 사법서사 사무실을  개업해 놓고
  있었다.
  그는 사법서사 자격증이 없었기  때문에 그 분야에
  서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사법서사를 한 명 고용하여
  사무실을 열고 그는 소장으로 앉아 있었다.
  그 동안 수사본부는 장숙영과  이진우의 타살 협의
  를 찾기 위하여 제주 도경과 공조체제를 갖추고 정밀
  한 수사를 폈으나 뚜렷한 혐의점을 찾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장숙영과 이진우가 결혼식 피로연을 끝내고 공항으
  로 가던 시간부터 제주도 특급 관광호텔 스위트 룸에
  서 사건을 일으킬 때까지 그들의 전루 행적, 주변 인
  물들의 동태, 호텔의 투숙자를 조사하고 장숙영과  이
  진우의 시체를 국립과학수사연구소에서  부검까지 했
  으나 끝내 혐의점을 찾을 수가 없었다.
  결국 장숙영과  이진우의 죽음은  자살로 형사들의
  의견이 집약될 수밖에 없었고, 상부에서도 수사본부를
  빨리 해체하라는 성화가 빗발치고 있었다.
  인구 1천만이 넘는  수도 서울은  연일 강력사건이
  꼬리를 물고터지고 있었다. 경찰 상부에서는 서경 강
  력계 3반이 하루 빨리 수사본부를  해체하고 다른 사
  건들을 수사하라고 성화였다.  이젠 사건을  수사하고
  있는 형사들도 수사본부를  해체하는 것이  불가피한
  일로 받아들이고 있었다.
  허영만은 별다른 특색이 없는  평범한 인상의 사내
  였다. 눈이 작고 이따금 흰자위가 동공을 덮어 버리면
  서 기이한 빛이 뿜어지고는 했으나  수상스러운 생각
  은 들지 않았다. 그는  얼굴에 나뭇가지에 긁힌 듯한
  상처가 있었다.
  "얼굴의 상처는 뭐요?"
  형사들이 둘러싸고  있는 가운데  취조가 시작되었
  다. 조 형사가먼저 질문을 던졌다.
  "성묘하러 갔다가 나뭇가지에 긁혔습니다. 몇 년 동
  안 찾아보지 못했더니  어떻게나 잡동사니들이  많이
  우거졌는지추석이 며칠 남지 않아서요."
  그가 형사들의 눈치를  살피며 더듬더듬  대답했다.
  형사들이 둘러싸고 있어서  중압감을 느낀  모양이었
  다.
  "어디요?"
  "예?"
  "성묘를 한 곳이 어디냐구?"
  "상주입니다."
  "경상도 상주?"
  "예."
  "언제 갔다 언제 왔소?"
  "l5일 낮에 갔다가 16일 아침에 올라왔습니다."
  "잠은 어디서 잤소?"
  "차 안에서 잤습니다."
  "차 안?"
  "술이 좀 취했었습니다. 시골길에 차를 끌고 나오다
  간 사고를 낼 것 같아 길가에 세워 두고 잤습니다."
  "성묘는 누구와 같이 했소?"
  "저 혼자서요."
  "그럼 알리바이가 증명되지 않잖아?"
  "그 마을의 누군가가 제가  차 안에서 자는  걸 본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니 조사해 보십시오. 설마 한 사
  람인들 없겠습니까? 차를 농로에  세워 뒀었는데
  그리고 제가 살해할 만한 동기가 어디있습니까?"
  옳은 말이었다. 허영만이 그들을 살해할 동기가 전
  혀 없었다.
  그것은 또 하나의 벽이었다.
  "당신 조일제  회장의 유언장에  공증했지? 김영일
  변호사의 명의를 빌려서 말이야!"
  이번엔 이 반장이 질문을 던졌다. 그것은 유경이 묻
  고 싶은 질문이기도 했다.
  "예."
  "조 회장의 유언장에 당신이 무슨 자격으로 공증을
  해?"
  "그것은 김 변호사님의  허락을 받고서  한 일입니
  다."
  "그 양반은 반신불수로 누워 계시다가  돌아가셨어.
  그런데 어떻게 공증을 해?"
  "제가 전화로 그  분의 허락을 받았습니다.  웬만한
  건 다 그렇게 처리했습니다."
  "성일 그룹의 소유권이 걸려 있는  건데 그게 웬만
  한 거야?"
  "서류엔 아무 하자가 없었습니다."
  "죽은 자는 말이 없다 이거지?"
  이 반장이  빈정거리듯이 허영만을  쏘아보며 말했
  다. 허영만의 말투가 어느 새 유들유들해지고 있었다.
  "죄송합니다. 허지만 제가 조일제 회장의  유언장에
  거짓으로 공증을 해서  무슨 득을  얻겠습니까? 물론
  사례금을 몇 억씩 받을수 있겠지요. 그렇다고 해도 제
  가 장숙영과 이진우를 죽일 필요가 있을까요? 오히려
  그것을 미끼로 돈을 뜯는 게 상식적인 일이겠지요. 그
  리고 장숙영과 이진우는 제주도에 있었습니다. 제주도
  가는 방법이야 비행기하고 배밖에 더 있습니까? 탑승
  자 명단을 확인하면 금방 알 수 있습니다."
  유경은 미간을 잔뜩 찌푸렸다. 허영만은 점점 얼굴
  이 자신에 찬 표정으로 바뀌어 갔으며  반대로 이 반
  장은 흙빛으로 바뀌어가고 있었다.
  (저 사내의 얼굴에 생긴 상처가  장숙영의 손톱 자
  국이었으면 좋으련만!)
  그러나 과학수사연구소에서는  장숙영의 손톱에서
  아무런 흔적도 발견할 수 없었다는 것이다.
  (아무래도 내가 과학수사연구소에 한 번 가 봐야겠
  어)
  유경은 허영만을 취조하고 있는  형사들 몰래 슬그
  머니 수사본부를 빠져나왔다.  그리고 신정동에  있는
  과학수사연구소를 향해 악셀레이터를 힘껏 밟았다. 어
  떤 범죄든지 미궁으로 빠져서는 안 되었던 것이다.
  장숙영의 사체를 부검한 과학수사연구소의 법의학2
  과장 최규영박사는 마침 지하 해부실에 있었다. 안내
  하는 직원을 따라 해부실에 들어선  유경은 기분부터
  섬했다.
  해부실은 갖가지 도구와 기구들, 그리고 이  곳에서
  부검을 한 주요 범죄자들의 뇌와 사체까지 유리 진열
  장 안에 고란히 보관되어 있었다.
  "규모가 어마어마하네요."
  최규영 박사와 건성으로 인사를  나눈 유경은 딴청
  을 부렸다.
  최 박사는 키가 작고 깡마른 사내였으나 단정한 옷
  차림과 부드러운 눈빛을 가지고 있었다.
  "여기는 처음인가요?"
  그는 목소리도 따뜻했다.
  "네."
  "강력사건 담당이면 자주 찾아와야지요."
  "이런 데 근무하시는 게 무섭지 않으세요?"
  "시체는 정직해요. 비록  입을 열어 말은  못하지만
  몸으로는 말을 하지요. 시체와 교감이 통할 때 말이에
  요. 여기는 웬일이에요?"
  "장숙영의 시체를 보러 왔어요."
  "시체와 얘기하려고요?"
  "네, 범인이 누군지 좀 물어봐야겠어요."
  "장숙영의 죽음을 타살로 보는 거예요?"
  "네."
  최 박사가 빙긋이 웃으며 고개를 흔들었다.
  "정액 검출은 어떻게 되었어요?"
  "질 속엔 이진우의 것밖에 없었어요."
  "피는요?"
  "피는 장숙영의 본인 것뿐이고."
  "이진우씨 거는요?"
  "없었어요."
  "박사님, 그 점이 이상하지 않아요? 장숙영은 이진
  우를 먼저 찌르고 그 칼로 다시  자신을 찔렀단 말예
  요. 웬만하면 장숙영의 몸에 이진우의 피가 한두 방울
  묻어 있어야 하잖아요?"
  "장숙영이 워낙 피를 많이 흘렸어요."
  "위는요?"
  "위도 깨끗해요. 음식물 찌꺼기밖에 없었어요."
  이내 장숙영의 사체가 보관되어  있는 냉동실에 이
  르렀다. 장숙영의 사체는 전라로 유리관 속에 박제된
  곤충처럼 보존되어 있었다.
  복부는 해부한 뒤 다시 봉합한 흔적이 드러나 있었
  고 국부도 메스를 댄 흔적이 뚜렷이 드러나 있었다.
  (사체를 해체해  놓지 않은  것만 해도  다행이군
  )
  유경은 장숙영의 사체를 내려다보며 참담한 기분이
  되었다.
  "손톱에서 혈혼은 나타나지 않았어요?"
  "그런 것이 나타났으면 왜 통보해 주지 않았겠소?"
  "손톱은 박사님이 깎았어요?"
  유경이 장숙영의 짧은 손톱을  응시하며 최 박사에
  게 물었다.
  "아니, 처음부터 손톱이 짧았어요."
  "그래요?"
  유경은 고래를 갸우뚱했다. 장숙영의 짧은 손톱으로
  는 허영만을 할퀼 수 없으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왜? 이상한 점이라도 있소?"
  "허영만이라는 용의자가 하나 있어요. 그런데  얼굴
  에 손톱인지 나뭇가지인지 긁힌 자국이  하나 있거든
  요?"
  "그 자국이 이  사체가 할퀴었을  가능성이 있다는
  말이지요?"
  "네."
  "이런 손톱으로는 얼굴에 상처가 나지 않아요."
  "그렇겠는데요?"
  유경은 최 박사의 말에 실망스러워 낮게 한숨을 내
  쉬었다.
  "그 사람 알리바이는 어때요?"
  "비교적 알리바이도  성립되고 있어요.  정확하지는
  않지만 왜요?"
  "장숙영의 손톱이야 깎아 버릴 수도  있잖아요? 증
  거를 없애기 위해서"
  그것은 유경에게 쇠망치로 뒤통수를 후려치는 듯한
  충격을 주는말이었다.
  (그걸 몰랐다니!)
  장숙영은 손톱을 기르고 그  손톱에 붉은 매니큐어
  를 발랐었다.
  그것은 장숙영이 이진우와 결혼하던  날 성북동 음
  식점에서 장숙영과 축하 인사를 나누며  유경이 직접
  본 것이었다.
  그런데 그 손톱을 장숙영이  밀월여행 중에 깎았다
  는 것이 가능한 일인가?
  유경은 그 의문에 대해서 고개를 흔들었다. 그럴 가
  능성은 거의없는 일이었다.
  "박사님, 그런데 허영만은 제주도를 왕래한  흔적이
  없거든요. 제주도엘 가려면 주민등록을 제시해야 되잖
  아요? 공항이라든가 항만에서 카페리를 이용하더라도
  말예요?"
  "이제 봤더니 한 형사도 꽉 맥혔군!"
  "네?"
  "그 정도는 남의  주민등록으로도 얼마든지  할 수
  있어요."
  "그렇군요!"
  유경은 자신도 모르게 탄복했다. 늙은 생강이 맵다
  더니 최 박사의 말은 모두 합리적이었다.
  과학수사연구소를 나와 수산본부로 전화를 걸자 허
  영만에게 별다른 혐의점이 없어 석방했다는  것과 수
  사본부를 해체하는 기념으로 간단한 소주  파티를 열
  기로 했다는 사실을 조 형사가 알려주었다.
  "반장님 좀 바꿔 주세요."
  "잠깐 기다리세요."
  그러나 기다릴 필요도 없었다. 이내 이 반장이 수화
  기 저쪽에서, 본부에 안 들어올 거야? 하고 물어왔다.
  목소리가 가라앉아 있는 것으로 보아 이 반장도 기
  분이 개운한 것은 아닌 모양이었다.
  "저 제주도에 좀 갔다 와야겠어요."
  "제주도엔 왜?"
  "K 호텔 1706호실에 가서 잠 좀 자고 싶어서요."
  "선문답하지 말고 무슨 일이야?"
  "아직은 정확하게 말씀드릴 수가 없어요.  허영만에
  게 미행 좀 붙여 주세요."
  "수사본부 해체했어."
  "며칠만 끌어 주세요."
  "그럼 먹다 남은 소주와 오징어는 어떻게 하구?"
  "네?"
  "수사본부 해체 기념으로 먹는 건데 해체하지 않으
  면 먹지 말아야 하잖아."
  "반장님두!"
  "농담이구, 제주도에 가면 대어 낚을 자신 있어?"
  "가 봐야죠."
  "알았어. 하여튼 소신껏 해봐.  우리가 이대로 주저
  앉을 수는 없잖아?"
  "고마워요."
  유경은 전화를 끊고 공항으로 차를 몰았다. 제주도
  에 가서 어떻게  하든지 장숙영의 손톱을  찾아야 했
  다.
  유경이 KAL기 편으로 제주도에 도착한 것은  해가
  뉘엿뉘엿 기울고 있을 무렵이었다. 이 반장이 연락을
  해 놓았는지 제주 공항엔 이미 제주경찰서 윤대섭 수
  사과장과 형사들이 유경을 마중 나와 있었다.
  "연일 수고가 많으십니다."
  수사과장이 사람 좋게 웃으며  유경을 짚차로 안내
  했다.
  "어디로 가십니까?"
  "K호텔이요."
  짚차가 K호텔을  향해 공항을  빠져나오자 유경은
  땅거미가 내리기 시작하는 차창 밖을  응시하며 비장
  한 생각이 들었다. 막상 비행기를 타고 제주도까지 날
  아오긴 했으나 K호텔에서 장숙영의  손톱을 찾을 수
  있을지 걱정이 앞섰던 것이다.
  1706호실은 다행히 현장이 그대로 보존되어 있었다.
  유경은 확대경을 동원해 제주경찰서 수사과 형사들과
  함께 장숙영의 손톱을 찾기 시작했다.
  제주경찰서 형사들은 유경이 제주도까지 날아온 이
  유가 장숙영의 손톱을 찾기 위해서라는 것을 알자 모
  두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을지었다.
  그러나 그들은 장숙영의 손톱을 찾는 데 묵묵히 협
  조해 주었다.
  그것만이 사건을 푸는 유일한  열쇠라는 것을 그들
  도 인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 작업에는 밤을 꼬박  새워야 했다. 호텔  스위트
  룸이 유난히 크고 넓기도 했지만 손톱같이 미세한 물
  체를 확대경을 들이대고 찾아야 하는  작업이 용이하
  지가 않은 탓이었다.
  그 작업은 이튿날도  계속되었다. 그러나  장숙영의
  손톱은 끝내 찾을 수가 없었다.
  (틀렸어!)
  유경은 암담한 기분으로 서울로  돌아올 수밖에 없
  었다. 그것으로 장숙영과 이진우의 죽음이 자살로 결
  정되리라는 생각을 하자 허망했다.
  차임벨 소리가 계속해서 울리고 있었다. 혜인은 침
  대에 누워 그 소리를 듣고 있었다. 일어나기가 귀찮았
  다. 우두커니 눈을 뜨고  있었으나 목이 타는 갈증과
  함께 머리가 지끈거렸다. 술 때문이었다. 그녀는 지난
  밤에도 물 마시듯이  술을 퍼 마셨고  아침에도 눈을
  뜨자 또 술을 퍼 마셨었다.
  그것은 며칠째 계속되는 혜인의 일과였다. 술을 마
  시지 않고는견딜 수가 없었다.
  (죽어서까지 나를 괴롭히다니!)
  혜인은 장숙영과  이진우의 동반자살에  이를 갈았
  다. 엄격히 말하면 이진우는 동반자살을 한 것이 아니
  라 장숙영에게 살해당한 것이었다. 그러나 두 사람의
  벌거벗은 죽음은 그 충격적이고 엽기적인 끔찍함으로
  인해 세상의 화제거리가 되었다. 특히 매스컴은 연일
  그 사건을 대대적으로  보도하면서 광기의  죽음이니,
  욕망의 엘리베이터를 타려다  추락한 현대인의  애정
  모랄이니 하면서 가혹하게 매도하고 있었다. 죽으면서
  까지도 그들은 혜인에게 모욕을 준것이었다.
  제주도 특급 관광호텔 K호텔의  스위트 룸에서 피
  투성이로 나뒹굴고 있는 그들의 시체가 처음 TV화면
  에 비쳤을 때 혜인은 숨이 컥 막혔었다. 아니야, 저럴
  리가 없어 하고 중얼거렸으나 한마디도  말이 되
  어 입 밖으로 나오지는 않았다.
  혜인은 입을 벌리고 주먹으로  가슴만 치다가 그대
  로 혼절하고 말았던 것이다.
  혜인이 다시 눈을 뜬 것은 30분쯤 지나서의 일이었
  다. 유리가 옆에 앉아 울면서 수저로 물을 떠서 입에
  흘려 넣고 있었다. 혜인은 그제서야 눈물이 주르르 쏟
  아져 유리를 끌어안고 통곡했다. 그리고 기자들이 들
  이닥쳤던 것이다.
  혜인은 한국, 특히 서울에 그렇게 많은 기자들이 있
  으리라고는 상상조차 하지 못했었다.  ENG 카메라를
  들이대는 방송국 기자들과 신문기자들,  주간지, 여성
  지 온갖 매스컴의 기자들이 혜인을  에워싸고 질
  문공세를 퍼부었다. 그러나 혜인은 그들의 질문에 한
  마디도 답변할 수 없었다.
  친정 식구들이 뒤늦게 소식을 듣고 몰려왔다. 그들
  이 혜인 대신 기자들의 질문에 답변해 주었다. 그리고
  그들이 혜인을 지켜 주었다. 형사들도 몇 번 찾아왔으
  나 혜인에게 위로의 말만 건네고 돌아갔다. 성일 그룹
  중역들도 몰려왔으나 그들 역시 혜인에게  위로의 말
  을 건네는 것밖에 달리 할 일이 없었다.
  혜인은 매일 술을 마셨다. 유리를 친정으로 보낸 뒤
  혜인은 적막한 집에서 혼자 술로 위로를 삼았던 것이
  다.
  차임벨 소리가 또 들려왔다. 호르르 호르르 새가 우
  는 듯한 소리였다.
  혜인은 그대로 누워 있으려다가  혹시 유리가 왔을
  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 거실로 나가 하이폰 수화
  기를 들었다.
  "아 계셨군요."
  그러나 방문자는 유리가  아니었다. 하이폰  수화기
  저쪽의 목소리는 독특한 저음의 허영만이었다.
  "웬일이세요?"
  혜인은 머리가 지끈거려 한 손으로 이마를 짚고 얼
  굴을 찡그렸다. 속이 미슥거리고  다리가 후들거렸다.
  며칠째 계속 술만 마신탓이었다.
  "좀 뵙고 싶습니다."
  "오늘은 안 되겠어요."
  혜인은 장숙영과 이진우의 죽음을 허영만이 어떻게
  생각할지 몰라 망설이다가 거절했다. 아직은 그를 만
  나고 싶지 않았다.
  "얼굴만 보고 가겠습니다."
  "다음에 오세요. 아니 제가 전화드릴께요."
  "괴로운 심정은 이해하고 있습니다. 허지만 전해 드
  릴 것도 있고 해서요."
  "뭔데요?"
  "문부터 열어 주십시오."
  "들어오세요."
  혜인은 다시 한 번  망설이다가 대문 자동개폐기의
  버튼을 눌렀다. 문득 기자들이 찾아오지 않은 것만 해
  도 다행이라는 생각이들었다.
  허영만은 산뜻한 캐주얼  차림이었다. 그리고  그의
  손에는 안개꽃이 한 다발 들려 있었다.
  "고마워요."
  혜인은 그에게서 안개꽃 다발을  받아 안으며 가슴
  으로 묵지근한 통증이 전해져 오는 것을 느꼈다. 비록
  전남편이라고 해도 그가죽은 지 1주일도  안 되어 허
  영만에게 꽃다발을 받고 있는 자신의  처지가 기구하
  게 생각되었다.
  "마음 고생이 많았지요?"
  허영만이 수더분한 미소를 띠고 말했다. 혜인은 지
  그시 입술을 깨물었다. 공연히 눈시울이 뜨거워져 오
  고 있었다.
  "무척 가슴이 아펐으리라고 생각했습니다."
  "그 사람들은 죽으면서까지 저를 괴롭혔어요."
  눈물이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가슴이 미어질 것처럼
  아펐다.
  "이젠 잊으십시오."
  "잊을 수가 없어요."
  혜인은 손등으로 눈물을 닦았다. 왜 그 앞에서 울고
  있는지 자신도 알 수 없었다.
  "추태를 보여서 죄송해요."
  "아닙니다."
  "고향엔 잘 다녀오셨어요?"
  "예."
  "얼굴에 상처는 어쩌다 생겼어요?"
  "잡동사니가 많아서 안개꽃을 꺾다가  조금 긁
  혔습니다."
  "어머!"
  허영만이 빙그레 미소를 그렸다.
  "진작 찾아오고 싶었지만 남들의 눈이 있어서 이제
  왔습니다."
  "와 주신 것만 해도 고마워요."
  혜인은 안개꽃을 화병에 꽂고  주방에 들어가 커피
  포트에 물을 올려 놓았다.  그리고 다시 거실로 나와
  그와 마주 앉았다.
  "제 꼴이 말이 아니죠?"
  허영만이 고개를 흔들며 빙그레 웃었다. 혜인은 그
  것이 다른 어떤 위로의 말보다도 고맙게 느껴졌다.
  "잠깐만 앉아 계세요."
  혜인은 커피 두 잔을 타 가지고  나와 다시 허영만
  과 마주 앉았다.
  "유리는 어디 갔습니까?"
  "친정에 가 있어요."
  "외갓집이요?"
  "네."
  벌써 짧은 가을 해가 기울어 거실에 어둑한 저녁빛
  이 깃들고 있었다.
  문득 혜인은 찬 비가 한 차례  뿌리고 이내 가을이
  깊어지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되면 바람이 일
  지 않아도 나뭇잎들이 우수수 떨어질 것이고 추운 겨
  울이 닥쳐올 것이다. 이혼녀에겐 유난히 춥고긴 겨울
  이.
  그런 생각을 하자 혜인은 가슴이 싸하게 저려 왔다.
  "아름답습니다."
  "네?"
  "혜인씨 말입니다. 어두운 저녁빛에 감싸인  모습이
  아주 우아합니다."
  "괜한 말씀을"
  혜인은 고개를 떨구었다. 부끄러워서가 아니라 그의
  말이 어쩐지 공허하게 들렸다.
  "혜인씨!"
  그가 정색을 하고 혜인을 불렀다. 혜인은 골이 패는
  것처럼 지끈거려 다시  한 손으로 이마를  짚고 그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우리 재혼 서두릅시다."
  "전 아직 준비가 안 되었어요. 유리 아빠도  저렇게
  죽고"
  "그 사람은 이제 혜인씨와 아무  상관이 없는 사람
  입니다. 물론 돌연한 죽음은 안타까운 일입니다만 악
  몽이라고 생각하고 잊으십시오."
  "이 가을은 지나야겠어요.  우리가 이럴 때  재혼을
  하면 남들이 뭐라고 그러겠어요?"
  "그럼 혼인신고라도 해놓는 게 어떨까요?"
  "혼인신고요?"
  "전 혜인씨가 어디론가 날아갈까봐 불안합니다.  그
  래서 하루빨리 내 사람을 만들고 싶은 것입니다."
  ""
  "나쁜 놈이라고 해도 할 수 없습니다. 내 마음 속엔
  오직 혜인씨뿐이니까요."
  ""
  "혼인신고만이라도 해놓겠습니다. 괜찮지요?"
  "그런 형식적인 것은 허 선생님께 맡길께요."
  혜인은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거렸다. 머리가 지끈거
  려 허영만의 집요한 구애를 거부하기가 귀찮았다. 어
  쩌면 될 대로 되라는 생각이 들었는지도  알 수 없었
  다.
  "고맙습니다."
  허영만이 혜인의 손을 덥썩 움켜쥐었다. 혜인은 그
  손을 빼려고 했으나 허영만이 갑자기  손을 잡아당기
  는 바람에 허영만의 가슴에 쓰러지듯 안기고 말았다.
  "혜인씨!"
  허영만이 혜인의  귓전에 뜨거운  입김을 불어넣었
  다.
  "네?"
  혜인은 백치처럼 대꾸했다.
  "사랑합니다."
  허영만이 책을 읽듯이 중얼거리며  혜인을 안고 소
  파 위에 쓰러졌다. 혜인은 가슴이 철렁했으나 차마 허
  영만을 거부할 수가 없었다.
  그와의 결혼약속이 족쇄처럼 혜인의 뇌리를 짓누르
  고 있었다. 그리고 그것은  이제 이 사내를 받아들일
  수밖에 없구나, 하는 절망감으로 바뀌고 있었다.
  허영만의 얼굴이 혜인의 얼굴 가까이 내려왔다. 혜
  인은 눈을 감았다. 허영만의 입술이 혜인의 입술을 점
  령하고 손 하나가 무릎 위를 더듬고 있었다.
  혜인은 점점 더 깊은 곳을 찾아 올라오는 허영만의
  손을 의식하면서 문득 자신도 알 수  없는 비애가 가
  슴 밑바닥을 적시는 것을 느꼈다.
  날씨가 쾌청했다. 완연한 가을이었다.  사무실 유리
  창으로 내다보이는 높고 푸른 하늘에  시선을 못박은
  채 허영만은 만족한 미소를  지었다. 이제 모든 것이
  그의 뜻대로 이루어져 있었다.
  성일 그룹.
  허영만은 그 막강한 재벌  그룹의 실질적인 총수가
  된 것이다.
  법적으로는 이진우의 딸 이유리의 대리인에 지나지
  않았으나 실질적으로 그는 성일 그룹을  움직이는 유
  일한 실력자였다.
  원래 이유리의 법정 대리인은 유혜인이었다. 이유리
  가 만 20세가 될 때까지 유혜인이  성일 그룹을 관리
  하게 되어 있었으나 유혜인이그 권리를  그에게 위임
  했던 것이다. 그는 유혜인의 두 번째 남편이었기 때문
  이다.
  (이젠 수사본부도  해체되었으므로  내가 장숙영과
  이진우를 살해한 것은  영원히 비밀 속에  묻혀 버릴
  수밖에 없겠지)
  그는 담배를 꺼내 입에  물고 불을 붙였다.  간밤에
  유혜인과의 정사를 벌이던  생각을 하자  새삼스럽게
  아랫도리가 뻐근해 왔다.
  그날 유혜인의 집에서 처음으로 정사를 벌인 후 거
  의 매일이다시피 유혜인과 육체 관계를  맺었으나 그
  는 언제나 황홀하기만 했다.
  유혜인은 아름다운 몸을 갖고  있는 여자였다.  그
  여자의 나신은 눈이 부실 지경이었다. 이진우가 그러
  한 유혜인을 팽개쳐 버리고 장숙영과 놀아난 것은 그
  녀의 막대한 재산에 눈이 멀었기 때문일것이다.
  그는 담배 연기를 폐부  깊숙이 빨아들였다가 내뱉
  었다. 푸르스름하게 흩어지는 담배 연기 사이로 장숙
  영과 이진우를 살해하던 일이머리 속에 떠올라 왔다.
  그는 장숙영과  이진우가 성북동  고급 음식점에서
  재혼하던 날이미 제주도 K호텔에 투숙해  있었다. 그
  들이 여행사를 통해 항공권과 K호텔 스위트 룸 1706
  호실을 예약한 것을 확인한 그는  1703호실에 투숙한
  뒤 1706호실에 비밀리에 침입했다.
  출입문을 여는 것은 그다지 어려운 것도 아니었다.
  그는 그때를 대비하여 만능열쇠를 준비해  두었고 그
  것으로 간단하게 1706호실의 출입문을 열었던 것이다.
  장숙영과 이진우는 벌거벗은 채  혼곤히 잠들어 있
  었다. 그는 준비한 거즈  수건에 마취제를 흠뻑 묻혀
  이진우의 코에 들이대어 이진우를 마취시킨  뒤 그것
  으로 장숙영까지 마취시켰다. 그리고 거실에 있는 과
  도를 찾아 이진우의 심장을 정확하게 겨누고 찔렀다.
  그러자 이진우의 눈이 부릅떠지고 그의  팔이 경련을
  일으켰다.
  그러나 그것은 잠깐뿐이었다.  이내 이진우는  숨을
  거칠게 몰아쉬다가 잠이 들고 말았다.
  그는 비로소 조용히 심호흡을 했다. 장숙영은 여전
  히 마취에서 깨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그는 장숙영을
  안아 일으켰다. 그들을 자살처럼 보이게 만들려면 한
  침대에 나란히 눕혀 놓고 죽일 수가 없었다.
  장숙영을 침실 벽으로 끌고 갔다. 그때 장숙영이 게
  슴츠레하게 눈을 떴다.
  (이, 이런!)
  등줄기로 식은땀이 뻗쳐 왔다. 마취가 덜 된 모양이
  었다. 그러나 머뭇거리고 있을 수가  없었다. 그는 재
  빨리 장숙영의 복부와 가슴에 정신없이  과도를 찔러
  댔다. 장숙영이 무어라고 비명을 지르며 팔을 허우적
  거렸다. 얼굴이 따가왔다. 장숙영의 손톱이 얼굴을 할
  퀸 모양이었다.
  이내 장숙영이 피투성이로  죽어 나자빠졌다.  그의
  몸도 피투성이였다. 그는 다시 장숙영을 일으켜 그녀
  의 손에 피를 잔뜩 묻혀 벽에 찍어 발랐다. 장숙영이
  괴로워하면서 죽은 흔적을  남겨 놓게  하기위해서였
  다. 그리고 그는 장숙영의 손톱을 손톱깎이로 모조리
  깎아버렸다. 장숙영의 손톱에 그의 혈혼이 묻어 있을
  까봐서였다.
  그가 1706호실을 나온 것은 그로부터 두 시간쯤 뒤
  의 일이었다.
  1706호실 출입문 시린다를 버튼을  눌러 놓고 닫았
  으므로 문은 저절로 안에서 잠긴 꼴이 되었다. 일종의
  밀실살인인 셈이었다. 적어도 내일 오전 11시, 호텔에
  서 청소를 하기 위해서 체크할 때까지는 아무도 출입
  하지 않을 것이다.
  날이 밝았다. 그는 뜬눈으로 밤을 새운 뒤 제주공항
  으로 가서 서울행 첫 비행기를 탔다. 주민동록은 김영
  일 변호사의 아들 김성진의 것이었다. 그와 함께 술을
  마시고 그가 인사불성으로 취했을 때 훔친 것이었다.
  그가 예상했던  대로 매스컴은  장숙영과 이진우의
  죽음을 광기에 의한 자살이니, 추악한 욕망의 화신 장
  숙영이라는 식으로 대대적으로 매도하기 시작했다. 여
  론도 충격적으로 그들의 죽음을 받아들이고 있었다.
  처음엔 자살이 아니라 하여 의심을 하고 있던 형사
  들도 두 손을 드는 기색이었다. 그들이 유일하게 희망
  을 걸고 있던 과학수사연구소의 부검  결과도 신통한
  것이 없었기 때문이다.
  (완전범죄지)
  그는 빙긋이 미소를 지었다. 오랫동안 계획했던 일
  이었다. 이진우가 조일제 회장의 유언장에 공증을 해
  달라고 했을 때 그는 직감적으로 그 유언장이 위조한
  것이라는 걸 알아차렸다.  그것은 장숙영과  이진우가
  빈번하게 호텔에서 만나고 조 회장의  묘가 파헤쳐지
  면서 의심할 여지가 없어졌다.
  그는 조 회장의 묘를 파헤친 범인을 찾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것이 마침내 임수지 짓이라는 걸 알고 임수
  지를 해치워 버렸다.
  처음엔 그  손가락으로 장숙영과  이진우를 협박할
  생각이었으나 유혜인을 만나면서 성일 그룹을 통째로
  삼키려는 계획을 세웠던것이다.
  김숙자를 살해한 것도  그러한 이유였다.  김숙자로
  인해 장숙영과 이진우가 결합을 하지 않게 되면 그의
  계획이 모두 수포로 돌아가기 때문이었다.
  (결국 내가 승리한 것이지)
  그러나 만족감보다도  지금 기묘한  허탈감이 그의
  가슴을 빗줄기처럼 적시고 있었다. 그것은 그의 첫사
  랑인 지영희 때문이었다.
  지영희.
  E여대 3학년 재학 시절 메이퀸으로까지 뽑혔던  여
  자, 미모와 명성을 얻었던 탓에 영희의 주변엔 언제나
  사내들이 들끓었다. 그것은 그와 결혼한 뒤에도 마찬
  가지였다. 처음 얼마  동안은 새색시답게  다소곳하던
  그녀는 차츰차츰 외출을 하기 시작했고  화장이 짙어
  져갔다. 그녀는 사내들에 둘러싸여 담배를 피우고 술
  을 마셨다. 그녀는 사내들의 여왕이었다.
  부부 싸움이 잦아졌다.  그녀는 그에게도  여왕처럼
  군림하려고 했다. 그녀가 외출한 때마다 그의 가슴은
  찢어지는 것 같았다. 그리고 그들의 사랑이 깨어지리
  라는 것을 예감했다.
  예감은 운명처럼 적중했다. 불나비처럼 밤이면 밤마
  다 외출하던 그녀는 마침내 그에게  이혼을 요구했고
  돈 많은 재미교포를 따라 미국으로 이민을 갔던 것이
  다.
  그때 노크 소리가 들렸다. 그는 안락의자에 비스듬
  히 기대어 회장실 출입문을 지그시 쏘아보았다. 보나
  마나 비서실의 미스 최일 것이다.
  "들어와."
  그는 무겁게 입을 열어 노크 소리에 응답했다. 아래
  것들에게 위엄을 보일 필요가 있었다.
  "오랫만이에요."
  그러나 화사하게 미소를 지으며  들어온 여자는 뜻
  밖에 강력계 여형사 한유경이었다. 그리고 그녀의 뒤
  를 우락부락한 남자 형사들이 줄줄이  따라 들어오고
  있었다.
  "어, 어쩐 일이십니까?"
  그는 놀라서  벌떡 일어나려다가  그대로 주저앉았
  다. 공연히 당황한 표정을 짓다가 그들에게 꼬투리를
  잡히면 그것으로 끝장나는  것이었다. 태연한  표정을
  짓고 있어야 했다.
  "아주 경기가 좋으시군!"
  여형사의 말은 어쩐지 빈정거리고 있는 것 같았다.
  "한가하신 모양이지요? 우리 사무실을 다 찾아주시
  고"
  "그래 무슨 자격으로 그 자리에 앉아 있는 거요?"
  "예?"
  "성일 그룹 회장 자리 말이요. 얘기나 한 번 들어봅
  시다!"
  "무, 무슨 말씀을 그렇게?"
  등줄기로 식은땀이 주르르  흘렀다. 여형사의  말이
  사뭇 도전적이었다. 태도가 당당한 것으로 보면 무엇
  인가 꼬투리를 잡았는지도 알 수 없는 일이었다.
  "그 자리는 기업가가 앉는 자리요. 재벌 그룹  총수
  자리가 그렇게 호락호락한 자리인 줄  아시오? 그 자
  리에 앉을 수 있는 사람은 피와 땀을 흘려 기업을 일
  으킨 사람이나 전문 경영인밖에 없소. 당신같은 살인
  마는 안 돼!"
  "뭐요?"
  "허영만 당신을 살인범으로 체포하겠소!"
  "무슨 소리야? 내가 누굴 죽였다는 말이야?"
  허영만은 안락의자에서  벌떡 일어나  소리를 버럭
  질렀다. 있을수 없는 일이었다.
  "체포해요!"
  여형사가 서릿발처럼 차갑게 소리를 질렀다. 그러자
  우락부락한 남자 형사들이 허영만에게 달려들어 수갑
  을 철거덕 채웠다.
  "비서! 비서! 변호사한테 연락해!"
  허영만은 눈이 뒤집힐 것 같아 비서실을 향해 악을
  썼다. 그러나 형사들이 어떻게 손을 써 놓았는지 아무
  도 들어오지 않고 있었다.
  오히려 펄펄 뛰고 있는  허영만이 가소롭다는 듯이
  여형사의 깔깔대는 웃음 소리만 성일  그룹 회장실을
  가득히 울리고 있었다.
  "허영만!"
  여형사가 웃음을 그치고 허영만을 싸늘하게 쏘아보
  았다.
  "당신은 결정적인 실수를 했어!"
  "무, 무슨 실수를?"
  허영만은 반신반의하며 여형사를  바보처럼 쳐다보
  았다.
  "그 첫번째 실수가 유혜인과의 재혼이야.  유혜인씨
  와 재혼하면 성일 그룹의 막대한 재산이 당신에게 돌
  아오지만 당신은 너무 서둘렀어. 그건 결국 장숙영과
  이진우를 살해한 동기를 우리에게 가르쳐  준 셈이었
  으니까 당신도 그걸  알고 있었지만  유혜인씨의
  마음이 변할까봐 재혼을 서두른 거야."
  ""
  "두 번째 실수는 장숙영의 유언장이야. 그 유언장엔
  장숙영 자신이 임수지를  아파트에서 죽였다고  되어
  있는데 아파트에서 당신 손에 죽은 것은 임수지가 아
  니라 박은숙이라는 처녀였어.  임수지는 장숙영의  집
  2층 침실에서 장숙영에게 살해되었으니까 장숙영
  이 그걸 모른다는 건 말이 되지 않아."
  ""
  "세 번째 실수는 장숙영의 손톱이야. 장숙영은 죽기
  직전까지 빨간 매니큐어를 바른 손톱을  기르고 있었
  어. 그런데 죽은 뒤엔 손톱이 모두 짧게 깎아져 있었
  지. 과연 왜 그랬을까?"
  "그걸 내가 어떻게 알겠소?"
  허영만이 발악을 하듯이 소리를 빽 질렀다. 여형사
  는 개의치 않고 얘기를 계속 이어갔다.
  "그건 장숙영이  당신에게 살해당할때  반항하다가
  얼굴을 할퀴었기 때문이야.  당신은 장숙영의  손톱에
  당신의 혈혼이 묻었기 때문에 손톱을 모두 깎아 비린
  거야. 내 말이 틀렸어?"
  "그럴 듯한 추리요. 아니 당신 말대로 내가  장숙영
  을 죽이고 내  얼굴의 상처가 장숙영의  손톱에 할퀸
  자국이라고 칩시다. 도대체 그 증거가 어디 있소?"
  "막바지에 몰리니까 이제 증거 타령이군"
  "증거도 없이 사람을 범인 취급하는 게 아닙니다!"
  "내가 증거가 없다는 것을 어떻게 알았지?"
  허영만이 갑자기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형사들의
  눈도 유경을 뚫어지게 쏘아보고 있었다.
  "당신이 그 손톱을 모조리 없앴기 때문에?"
  "있으면 제시해 보시오!"
  허영만이 우물우물하다가 겨우 그렇게 대답했다. 여
  형사의 말이 정곡을 찌르는 말이었기 때문이다.
  "당신은 장숙영의 손톱을 깎은 뒤  행여 그것이 감
  식반의 눈에 띄어 증거가 될까봐 깨끗이 쓸어서 가지
  고 나갔어. 호텔 침실에서 말이야그런데 그만 그
  것을 가지고 나가다가 바닥에 하나를 떨어트렸지. 당
  신도 모르는 사이에 손톱이란 게 워낙 작아서 떨
  어져도 잘 표시가  나지 않으니까 당신도  몰랐던 거
  야"
  "거, 거짓말이야!"
  허영만의 얼굴에 진땀이 비오듯 흐르고 있었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그 손톱에 당신의 혈혼이 잔뜩
  묻어 있었어. 바로 이거야."
  여형사가 주머니에서 손바닥 크기의 셀로판 종이를
  꺼내어 허영만에게 흔들어 보였다.
  허영만은 제 눈을 의심하며  스카치 테이프로 셀로
  판 종이에 붙여놓은 조그마한 여자 손톱을 자세히 들
  여다보았다. 그리고 눈 앞이 캄캄해져 왔다.
  "국립과학수사연구소 범의학2과장이 이걸 장숙영의
  손톱이라고 감정을 했어. 물론 손톱의 피는 허영만 당
  신 것이구"
  허영만의 얼굴에  당황한 표정이  역력하게 나타났
  다. 그는 여형사가 제시하는 증거에 꼼짝없이 발목을
  잡힌 사실을 믿을 수가 없었다. 그토록 조심하며 장숙
  영의 손톱을 호텔에서 가지고 나온다고나왔는데 바닥
  에 하나가 떨어져 있었다니!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는지 알 수 없었다.
  "더 이상 증거가 필요해?"
  여형사가 낮고 차분한  목소리로 물었다.  허영만은
  그 소리가 마치 자신에게 사형을  선고하는 재판장의
  목소리처럼 들렸다.
  "그렇다면 한 가지 더 알려 주지."
  형사들이 서로의 얼굴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그들도
  이 엄청난 사실에 반신반의하고 있었다.
  "당신은 김성진의 주민등록으로 제주도에  갔다 왔
  어. 공항에서는 김성진의 주민등록을 제시했지만 K호
  텔에선 또 가명으로 프론트에 서명했어. 그래서 우리
  가 깜빡 속았던 거야"
  "맞았오!"
  허영만이 이내  허탈한 표정으로  머리를 감싸쥐며
  괴로운 듯이 내뱉었다.
  유경은 재빨리 주머니  속의 녹음기를  작동시켰다.
  이제 그의 자백을 낱낱이 녹음해야 했다.
  "장숙영과 이진우를 살해한 것을 인정해?"
  "인정하오."
  "박은숙을 살해한 것도 당신이지?"
  "박은숙?"
  "임수지 대신 그 여자의 아파트에서 살해당한 처녀
  말이야!"
  "난 그 여자가 임수지인 줄 알았소. 임수지에게  손
  가락을 뺏은 뒤 아무래도 미심쩍어 아파트에 다시 들
  어갔던 거요. 그런데 아파트엔 불이 꺼져 있었고 침대
  엔 여자가 누워 있었소.  그래서 그 여자가 임수지인
  줄만 알고 있었던 거요."
  "김숙자는?"
  "내가 죽였소."
  "왜?"
  "장숙영과 이진우의 결혼에 방해가 됐기 때문이오."
  "박은숙(임수지 )을 죽인 이유는?"
  "역시 마찬가지요. 임수지는 조일제 회장의  손가락
  을 가지고 장숙영과 이진우를 협박하고 있었소. 원래
  조일제 회장은 자기의 전재산을 사회에 환원시키겠다
  고 유언장을 남겼었는데 장숙영이그 재산이  탐이 나
  서 조일제 회장을  죽이고 유언장을  위조하여나에게
  공증을 의뢰한 것이오. 물론 사례금은 두둑이 받았소.
  그런데 나중에 돌아가는 꼴을  보니까 이진우가 유
  혜인과 이혼하고 장숙영과  결혼하려고 하더란  말이
  오."
  "그래서 장숙영과 이진우를 죽이면 그 재산이 이진
  우의 딸 이유리에게 상속되리라는 것을  알고 유혜인
  에게 접근한 거  아니야? 이유리는  나이가 어리니까
  법정 대리인으로 유혜인이  선임되리라는 계산  아래
  교활하게 유혜인을 유혹한 것이구 세상이 그렇게
  어리석은 줄 알았어?"
  "당신만 아니었으면 성공했을 거요."
  유경은 고개를 흔들었다. 아직도 여러 가지 의문점
  이 남아 있었으나 일단 그를 연행하고 나서 취조해야
  했다.
  그는 살인마였다.
  "연행해요!"
  형사들이 허영만을 안락의자에서  우악스럽게 끌어
  냈다. 그가 살인자라고 확인된 이상 형사들에게서 인
  간 취급을 받을 수는 없었다.
       14. 금빛 육체의 여자
  청명한 가을이었다. 맑고  높은 하늘이  유리알처럼
  매끄러워 보였다. 바람이 일 때마다 노란 은행나무 잎
  사귀가 우수수 보도 위에 떨어져 뒹굴었다. 가드레일
  안쪽의 좁고 긴 화단에는 농염하게 붉은사루비아꽃과
  눈이 시리게 청초한 국화꽃이 무더기 무더기 피어 있
  었고 또 한쪽에는 시들은 가을 햇살들이 옹기종기 모
  여서 수선거리고 있었다.
  가을 공기는 유난히 차고 맑았다. 서울시경 강력계
  3반의 이상진 형사는  보도 위에서  수선거리는 가을
  햇살 한 자락을 밟고 서서 가슴  속이 공허하게 비어
  오는 것을 느꼈다. 언제나 사건을 매듭짓고 나면 만족
  감보다도 까닭을 알 수 없는 비애가 가슴을 적시곤했
  다.
  허영만 사건도 마찬가지였다. 인간의 추악한 욕망이
  빚은 연속살인사건이라고 단순한 결론을 내리기는 했
  지만 어딘지 석연치 않은 데가 있었다. 인간이 자신의
  욕망을 위해서 그토록 잔인해질 수 있는 것인가 하는
  것이 그의 가장 큰 의문점이었다.
  허영만은 전형적인 살인마였다. 국립과학수사연구소
  의 최규영 박사의 말에 의하면, 그의 뇌구조가 살인을
  저지를 수밖에 없는  구조로 되어 있을  것이라고 했
  다. 선천적으로 뇌염색체에 이상이 있었거나 어릴 때
  뇌질환을 앓아 뇌염색체가 변질되었을 가능성을 배제
  할 수 없다는 것이다.
  바꾸어 말하면 허영만이  악마라는 주장이었다.  저
  깊은 땅 속에서 불어오는 한 줄기  어두운 운명의 바
  람처럼 그는 악의 세계에서 이 땅에  보낸 저주의 밀
  사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는 이미 구속영장이  집행되고 검찰에 송
  치되어 재판을 기다리고 있었다. 재판이 끝나면 곧바
  로 법정 최고형인 사형을 선고받아  교수형이 집행될
  것이다.
  증거는 넉넉했다. 그의 자백에 의해 장숙영과 이진
  우를 살해할 때 입었던 피 묻은 옷도 그의 집 마당에
  서 파냈고 김숙자를 살해할 때 끼고 있던 목장갑, 박
  은숙을 살해할 때 신었던 운동화  그 운동화에서는
  루미놀 시약 반응으로 박은숙의 혈혼이 검출되었다
  임수지의 아파트에서 찾은 조일제 회장의 엄지손가락
  마디 하나까지 재판이 시작되면 증거로  제출될 것이
  다. 그리고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그의 임의성 자백이
  었다. 그것은 한유경 형사에 의해 소형 녹음기에 모두
  녹음되어 있었다.
  허영만이 김영일 변호사의 아들 김성진의 주민등록
  증으로 김포공항에서 비행기를 타고 제주도  특급 관
  광호텔 K호텔에 투숙했던 것과  김성진이 허영만 대
  신 경상도 상주에서 성묘를 하고 온  사실도 이미 낱
  낱이 밝혀져 허영만의  알리바이도 이제는  깨어지고
  없었다. 그것은 한유경 형사가 허영만에게 제시한 결
  정적인 증거, 장숙영의 피 묻은  손톱 때문이었다. 허
  영만은 그 손톱을 보자 모든 것을포기하고 범행을 자
  백했던 것이다. 그 손톱만 아니었으면 이 사건은끝내
  미궁 속에 빠져 버리고 말았을 것이다.
  문득 그의 코 끝에 여자의 톡 쏘는 듯한 화장품 냄
  새가 풍겨 왔다. 고개를 돌리자 여형사 한유경이 그의
  뒤에 서서 화사하게 웃고 있었다. 아름다운 모습이었
  다.
  (언제 보아도 예쁘군)
  그는 가슴이 찌르르 울리는 것 같은 기분을 느끼며
  천천히 걸음을 떼어 놓았다. 한 형사도 보폭을 맞추며
  따라왔다.
  "제주도에 갔을 때는 허탕쳤다고  하더니 장숙영의
  손톱 어디서 구했어?"
  "장숙영의 손톱이요?"
  "허영만이가 그것 때문에 모두 자백했잖아?"
  "장숙영의 손톱이 어디 있어요?"
  한 형사가 걸음을 멈추고  입언저리에 야릇한 미소
  를 떠올렸다.
  "허영만을 자백시킨 손톱 말이야?"
  "그거 장숙영의 거 아녜요."
  "무슨 소리야?"
  이상진 반장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한 형사를 쳐다
  보았다. 이사건을 매듭지을 수 있었던 결정적인 증거
  가 장숙영의 손톱이었는데 그것이 장숙영의  것이 아
  니라면 누구의 손톱이라는 말인가. 그는 이해할 수 없
  었다.
  "그건 제 거였어요."
  "뭐라구?"
  "장숙영과 이진우의 결혼식에 참석한  일이 있었는
  데 그때 장숙영과 악수를 나누었어요. 내키지는 않았
  지만 축하한다고 말예요.
  그런데 빨간 매니큐어를 칠한  손톱이 좀 흉측스러
  운 것 같아 인상에 남았어요."
  "그래서?"
  "그런데 장숙영의  사체를 국립과학수사연구소에서
  보니까 손톱이 짧게 깎아져 있었어요."
  "그러니까 누군가 장숙영의 손톱을 깎아 버렸단 말
  이지?"
  "네."
  "그런데 그걸  어떻게  허영만의 짓이라고  생각했
  어?"
  "허영만의 얼굴에 손톱으로 할퀸  자국이 있었잖아
  요?"
  "그건 성묘할 때 나뭇가지에 긁힌  거라고 했잖아?
  그때는 알리바이도 입증되었었구"
  "그 점이 우리를 포기하게 했던 건 사실에요.  하마
  터면 허영만을 그냥 놓아줄 뻔했죠  그런데 허영
  만이 유혜인과 결혼을 서두르는 바람에  새로운 사실
  에 눈을 뜬 거예요."
  "그게 뭐야?"
  "허영만이 장숙영과 이진우를 살해하게  된 동기를
  발견하게 되었으니까요. 허영만은 유혜인만 손에 넣으
  면 성일 그룹의 막대한 재산이 자신의 수중에 들어온
  다는 것을 알고 처음부터 치밀하게 계획을 세웠던 거
  예요."
  "그런데 어떻게  허영만이 그토록  쉽게 자백했지?
  더구나 그 손톱이 장숙영의 것이라고  완전히 믿었잖
  아?"
  "손톱 깎아 보셨죠?"
  "그걸 말이라고 물어?"
  "손톱을 깎을 때 보통 주의해서  깎는다고 해도 한
  두 개는 으례 톡 튀어서 어디론가 달아나요. 물론 방
  구석 어딘가에 떨어져 있게 마련이지만  아무리 눈을
  씻고 찾아도 안 찾아질 때를 이반장님도 경험했을 거
  예요. 전 그 점에  착안해서 허영만을 유도했던 거예
  요. 허영만은 치밀한 자여서 현장에 손톱을 하나도 남
  기지 않았어요. 그런데도 제 손톱에 물감을 칠해서 장
  숙영의 손톱이라고 들이대자  반신반의하면서도 그런
  줄 알았던 거예요. 자기가 정말로 장숙영의 손톱을 흘
  린 줄 알았던 거죠. 그런 일은 흔히 있을 수 있는 일
  이니까요"
  "믿어지지 않는군"
  이상진 반장은 설레설레  고개를 흔들었다.  그토록
  교묘하게 허영만을 유도한 한 형사에게  탄복을 금할
  수 없었다.
  "그래서 우선 분위기부터 잡았던 거예요."
  "분위기?"
  "허영만의 사무실, 그러니까 성일 그룹 회장실에 형
  사들을 우르르 데리고 들어간  것도 그랬고, 니가  한
  짓 다 알고 있어, 하는 식으로 허영만에게 수갑을 채
  워 겁을 준 것도 분위기를 잡기 위해서였어요. 사람들
  은 일단 손목에 수갑이 채이면 자포자기하게 돼요."
  이상진 반장은 고개를 끄덕거렸다. 옳은 말이었다.
  "어디 가서 술이나 한 잔 할까?"
  "유부녀 유혹하지 마세요. 전 저녁 약속이 있어요."
  "누구와?"
  "우리 그이와요."
  한 형사가 어깨를 으쓱하고 미소를 그렸다.
  "그 친구가 부러운걸"
  이상진 형사는 고개를 끄덕거렸다. 젊은 부부의 건
  전한 사랑을 얼마든지 축복해 줄 수 있을 것 같은 생
  각이 들었다. 젊은이들의  아름다운 사랑이야말로  이
  사회를 튼튼하게 받쳐 주는 버팀목일  것이기 때문이
  다.
  "유혜인씨는 어떻게 지내?"
  "충격을 받아 병원에 입원해 있어요."
  "안됐군."
  "그 여자도 죄가 있어요."
  "무슨 죄?"
  "남편을 바른 길로 인도하지 못한 죄요."
  "그 여자의 힘으로는 불가능한 일이었어.  이진우는
  욕망의 엘리베이터를 타려고  혈안이 된  사내였으니
  까"
  한유경 형사가 천천히  걸음을 떼어놓기  시작했다.
  그녀는 이상진 반장의 따뜻한 시선을 등에 받으며 가
  을 풍경 속으로 하늘하늘  사라져 가고 있었다. 우수
  수, 또 바람이 일기 시작했다.
        끝

반응형

'책,영화,리뷰,' 카테고리의 다른 글

나는 조선의 국모다(중)  (0) 2023.06.25
나는 조선의 국모다(상)  (0) 2023.06.25
남자에 대한 한 보고서  (0) 2023.06.24
악녀시대  (0) 2023.06.24
악녀 두번 살다  (0) 2023.06.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