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안의 악마
-이수광 장편추리소설
----- 차 례 -----
1. 내 안의 악마 (1)
2. 내 안의 악마 (2)
3. 내 안의 악마 (3)
4. 내 안의 악마 (4)
5. 내 안의 악마 (5)
6. 내 안의 악마 (6)
7. 내 안의 악마 (7)
8. 내 안의 악마 (8)
9. 내 안의 악마 (9)
10. 내 안의 악마 (10)
11. 내 안의 악마 (11)
12. 내 안의 악마 (12)
13. 내 안의 악마 (13)
14. 내 안의 악마 (14)
15. 내 안의 악마 (15)
16. 내 안의 악마 (16)
17. 내 안의 악마 (17)
18. 내 안의 악마 (18)
19. 내 안의 악마 (19)
20. 내 안의 악마 (20)
21. 내 안의 악마 (21)
22. 내 안의 악마 (22)
23. 내 안의 악마 (23)
24. 내 안의 악마 (24)
블라우스의 단추를 하나 하나 풀고 있던
여자가 문득 손을 멈추고 자신의 가슴을
내려다보았다. 거울 속으로 흰 색의
브래지어가 감싸고 있는 여자의 가슴이
비쳐졌다.
사내는 창으로 얼굴을 바짝 가져갔다.
하체가 뻐근했다. 여자가 옷을 벗으려 하고
있었다. 나이가 몇 살인지 알 수 없었으나
뒷모습이 풍만하여 보기만 하는데도 가슴이
뛰고 얼굴이 화끈거렸다.
여자가 다시 천천히 블라우스의 단추를
풀기 시작했다. 사내는 낮게 신음을
내뱉었다.
(뭘 하려는 거지?)
쏘아보았다. 여자는 거울을 보면서 자신의
가슴을 두손으로 떠받치고 가볍게 흔들고
있었다. 그럴 때마다 묵직해 보이는 가슴이
자극적으로 출렁거렸다.
사내는 창에 얼굴을 바짝 밀착시켰다.
여자의 나신을 더욱 자세히 보고 있었다.
여자의 가슴은 팽팽했다. 젖무덤이
우유빛으로 하얗게 빛났다.
사내의 시신이 여자의 어깨에서 허리로,
허리에서 둔부로 미끄러져 내려갔다.
여자는 검은 색 스커트를 입고 있었다.
다리는 어깨 넓이로 벌린 채였다. 반구형의
둥그스름한 둔부가 풍만했다.
(죽여주는군.)
사내는 목이 말라오는 것을 느꼈다.
하복부가 팽팽하게 부풀어 바지를 뚫을
속으로 손을 넣어 그것을 움켜잡았다.
그것이 자신의 손바닥 안에서 생선처럼
불끈거렸다.
그때 여자가 자신의 스커트 안에 가만히
손을 밀어넣었다.
(남자 생각이 나나?"
사내를 고개를 갸우뚱했다. 여자가 하고
있는 짓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러니
혼자 살고 있는 여자니까 남자 생각이
날지도 모른다고 고쳐 생각했다. 여자도
동물적인 본능을 갖고 있다. 그러므로 혼자
있게 되면 문득문득 남자를 생각할 것이고,
남자의 그것이 자신의 몸속 깊숙히 들어와
주었으면 하고 갈망하고 있을지도 모르는
것이다.
(제대로 골랐어!)
원하고 있을 때 그것을 해 준다는 것은
얼마나 적절한 일인가. 사내는 의외로 일이
잘 풀린다고 생각했다.
그때 여자가 힐끗 고개를 돌렸다. 사내는
재빨리 창 밑으로 몸을 낮추었다. 여자가
침대 머리밑에서 담배를 꺼내 입에 물고
불을 붙였다. 사내는 엉금엉금 기어서
정원수 뒤로 몸을 숨겼다. 여자가 창으로
걸어오고 있었다.
(커튼을 치려는 모양이군......)
여자의 가슴을 창 앞에서 흔들렸다.
사내는 눈을 질끈 감았다가 떴다. 여자가
담배연기를 길게 내뿜으면서 창에 자신의
가슴을 바짝 밀착시켰다. 사내는 눈을 크게
떴다.
여자의 커다란 가슴이 창문에 압박되어
상태로 담배를 피웠다. 이상한 짓이었다.
여자가 창문을 열고 담배꽁초를 밖으로
던졌다. 사내는 여자의 얼굴을 쏘아보았다.
여자가 창문을 닫고 몸을 돌렸다. 사내는
정원수 밑에 주저앉았다.
여자가 잠이 들려면 얼마나 시간이
걸릴까. 그는 여자가 빨리 잠이 들었으면
싶었다. 사방은 칠흑처럼 캄캄했다. 바람이
불 때마다 정원수의 나뭇잎들이 우수수
떨어졌다. 가을이었다. 일기예보엔 밤낮게
비가 온다고 했었다. 그는 어두운 하늘을
쳐다보았다. 얼굴을 스치는 바람에 축축한
물기가 실려 있었다.
사내는 다시 창 밑으로 기어갔다. 멀리서
기적소리가 들려왔다.
여자가 스커트를 벗고 분홍색 잠옷을
소매에 두 팔을 끼고 어깨를 가볍게 흔들자
잠옷이 밑에까지 스르르 흘러 내렸다.
여자는 이제 잠을 자려는 모양이었다.
사내는 이제 여자가 잠들기만 기다리면
된다고 생각했다. 서두를 필요는 전혀
없었다. 여자는 혼자 살고 있었고 이 외딴
집에는 찾아오는 사람조자 없었다.
여자의 방에 불이 꺼졌다. 사내는 정원수
뒤로 돌아와 담배를 피우기 시작했다.
사내가 여자를 알게 된 것은 6개월
전이었다. 그는 고등학교를 졸업한 뒤
술집의 웨이터로 들어갔다. 그가 근무하는
술집은 술도 마시고 노래도 하는 그런
술집이었다.
여자들은 고용하지 않았으나 남자들은
인근 다방에서 여자들을 불러 춤을 추고
몰려와서 술을 마시고 춤을 추기도 했으나
대부분 손님들은 남자들이었다. 그리고
그들은 웨이터들에게 여자들을 조달해
달라고 부탁했다.
사내도 그 술집에서 웨이터로 근무하면서
다방의 아가씨들을 남자 손님들에게 조달해
주었다. 자연히 다방 아가씨들과 접촉이
잦아졌고 다방 아가씨들을 데리고 여관까지
출입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그가 그 술집을
그만두었을 때는 어느 정도 여자의 육체에
대해서 알게 되었다.
그는 술집을 그만둔 뒤 조그만
설비업소에 견습공으로 취직을 했다.
고등학교를 졸업해도 기술 한 가지는
가지고 있어야 먹고 산다는 것이 주위의
얘기였고, 그는 주위의 권고를 받아들여
설비업소는 보일러를 설치하거나
수리하는 것이 주된 일이었다. 수도와
세면대의 배관도 설비업소에서 하는 일
중의 하나였다. 그러나 그는 설비업소의
일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설비업소는 구멍가게 수준에 지나지
않았고 언제나 손과 작업복에 기름때를
묻혀야 했다. 그는 설비업소를 두 달 만에
때려치웠다. 그리고는 그때부터 하는
일없이 다방이나 술집, 당구장을
돌아다니며 빈둥거렸다.
여자를 알게 된 것은 그가 설비업소에서
배관 견습공으로 일하고 있을 때였다.
여자가 살고 있는 집에 보일러를 설치하게
되어 그는 기술자들과 함께 거의 일 주일
동안이나 그 집에 살다시피 하며 일을
되었고 찾아오는 사람이 없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여자는 나이를 짐작할 수가 없었다. 서른
살이 넘은 것 같기도 했고 20대 후반
같기도 했다. 가슴이 풍만하고 둔부에 살이
쪄서 보기에 좋았다. 균형 잡힌 몸매였다.
게다가 여자는 남자처럼 키가 컸다. 키가
큰 여자의 가슴이 눈앞에 바짝 다가왔을 때
그는 숨이 콱 막히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그것은 그가 화장실 겸 욕실에서 파이프
조립을 하고 있을 때였다. 그가 등 뒤에서
인기척을 느끼고 몸을 돌리자 여자가 바로
앞에 서 있었다. 그는 깜짝 놀랐다. 여자도
화들짝 놀라서 얼굴이 붉어졌다.
"미안해요."
그때 여자가 먼저 미소를 그렸다. 여자의
"아닙니다."
그는 수줍게 기름 묻은 손으로 머리를
긁었다. 일을 할 때 주인들이 지켜보는
것은 흔히 있는 일이었다. 그러나 몸이
닿을 정도로 등뒤에 바짝 다가와서
들여다보는 것은 처음 겪는 일이었다.
그는 멋적은 생각이 들어 허리를 숙이고
다시 파이프를 조이기 시작했다. 여자는
여전히 등 뒤에 서 있었다. 여자의 몸에서
살 냄새인지 화장품 냄새인지 알 수 없는
냄새가 은은하게 풍겼다.
(제기랄!)
그의 이마에서 구슬 같은 땀방울이
흘러내렸다. 초여름이었다. 아침인데도
날씨가 후덥지근했다.
등 뒤에 서 있는 여자에게서 거친
여자를 쳐다보았다. 여자의 눈빛이
야릇하게 빛나고 있었다. 기분이
이상해졌다.
여자가 희미하게 웃었다. 그는 고개를
돌리고 다시 일을 하기 시작했다. 여자의
호흡이 갑자기 가빠진 것을 이해할 수
있었다.
여자가 몸을 돌려 욕실을 나갔다. 그는
파이프를 조이면서 힐끗 뒤를 살폈다.
여자가 거실의 커튼을 걷고 창 앞에서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그는 담배 생각이
났지만 참기로 했다. 여자를 슬그머니 훔쳐
보았다. 여자는 정원을 내다보고 있었다.
여자가 내다보고 있는 정원에 붉은
장미꽃이 핏빛으로 피어 있었다.
그는 하체가 또 다시 뻐근해 왔다.
둔부와 허벅지의 곡선이 그대로 내비쳤다.
그는 자신도 모르게 마른침을 삼켰다. 목이
타는 듯한 갈증을 느꼈다.
그는 그 후에 이따금 그 여자 생각이
났다. 여자의 몸에서 풍기던 기이한 냄새,
역광을 받은 여자의 둔부와 허벅지의
곡선...... 그런 것들이 잠자리에 누워
있으면 자주 머리 속에 떠올라 왔다.
그는 여자의 옷을 벗기는 상상을 했다.
그 여자의 흰 몸뚱이, 나긋나긋한 육체의
촉감을 생각했다. 여자는 그보다 나이가
훨씬 더 많은 것 같았다. 그러나 여자가
연상이라는 사실을 생각하면 자신도 주체할
수 없는 흥분이 몸을 떨리게 했다.
지금까지 연상의 여자와는 자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실현하기를 결심한 것은 불과 사흘
전이었다. 그는 이틀 동안 여자의 집을
지켜 본 끝에 마침내 여자의 집 담을 넘은
것이다.
나뭇잎이 또 우수수 떨어졌다. 그는
어깨를 부르르 떨었다. 밤이 깊어질수록
기온이 떨어져 가고 있었다. 여자의 방에
불이 꺼진 지 한 시간이 지나 있었다. 그는
심호흡을 하고 창 밑으로 조심스럽게
걸어갔다. 여자는 이제 잠들었을 것이다.
그는 창 밑에서 걸음을 멈추고 안의 동정을
살폈다.
어디선가 개들이 요란스럽게 짖어대고
있었다. 멀리 떨어진 마을에서였다. 그는
숨소리까지 죽이고 개짖는 소리가 그치기를
기다렸다.
소리가 들렸다. 그는 창문을 조심스럽게
열었다. 여자는 쇠침대 위에서 잠들어
있었다. 그는 창을 넘었다.
방안은 훈훈했다. 한참동안 창 밑에
웅크리고 앉아 있자 방안의 사물들이
뚜렷이 윤곽을 드러냈다.
밖에서 빗발이 후드득대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는 쇠침대로 걸어갔다. 여자는
침대 위에서 반듯하게 누워 자고 있었다.
숨소리가 규칙적으로 들렸다. 여자가 숨을
쉴 때마다 복부가 상하로 고르게 움직였다.
그는 바지를 벗기 시작했다. 여자가 잠이
깨어 소리를 지른다고 해도 소용이 없을
것이다. 여자의 집은 인가와 멀리 떨어져
있으니까.
그는 알몸이 되었다. 하체는 벌써
그는 침대 위에서 잠들어 있는 여자를
내려다보며 호흡을 진정시켰다. 침착해야
했다. 몸의 곡선을 따라 여자의 잠옷
자락이 허벅지까지 걷어올려져 있었다.
그는 여자의 가슴께로 손을 가져갔다.
손바닥에 뭉클한 감촉이 느껴졌다.
그는 침대로 기어 올라갔다. 침대가
훌렁하고 흔들렸으나 여자는 잠에서 깨지
않았다.
"으음."
그가 여자의 가슴을 쓰다듬자 여자가
입을 벌리고 얕은 신음을 내뱉았다. 그는
여자의 가슴을 쓰다듬던 손을 멈추었다.
여자가 잠이 깰까봐 걱정이 되었다.
그때 여자가 끙 하는 소리를 내면서 몸을
돌려 침대 위에 엎드렸다. 그 바람에
드러났다.
그는 잠시 호흡을 가다듬었다. 얼굴이
화끈거리고 가슴이 두근거렸다. 창에
빗줄기가 떨어지는 소리가 나고 창문이
덜컹대고 흔들렸다. 바람이 거칠어지고
있었다.
그는 여자의 허벅지고 손을 가져갔다.
여자가 으음, 하는 신음소리를 내면서
다리를 오므렸다가 폈다. 그는 여자의
허벅지를 쓰다듬다가 둔부로 손을
가져갔다. 커다란 둔부는 팽팽하게 살이
붙어 있어 기분이 좋았다.
"음......"
여자의 입에서 다시 신음소리가
흘러나왔다. 잠결에 남자의 손을 느끼고
있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여자의
잡아당기기 시작했다. 그때 여자가 다시
돌아누웠다.
그는 여자의 몸 위에 재빨리 엎드렸다.
"누구......?"
여자가 눈을 번쩍 떴다.
"조용해 해!"
그는 여자를 향해 눈을 부릅떴다.
"왜, 왜 이래?"
"기, 기분 좋게 해줄께......"
여자가 그를 빤히 쳐다보았다. 여자의
눈빛은 언젠가처럼 몽롱하게 풀어져
있었다.
"정말이야?"
여자가 반색을 하는 표정으로 말했다.
그는 어리둥절했다. 여자에게서 그런
반응이 나타나리라고는 생각조차 못했었다.
그는 떨리는 목소리로 대꾸했다.
속으로는 이 여자가 단단히 남자에 굶주려
있었던 모양이라는 생각을 했다. 그렇다면
잘된 일이라고 생각했다.
"어떻게 해줄 건데?"
"기, 기분좋게......"
"나를 미치게 할 수 있어?"
"할 수 있어."
"그렇게 못하면 죽여 버릴 거야!"
"알았어. 얼마든지 그렇게 할 수
있어......"
여자가 갑자기 두손을 뻗어 그의 머리를
감싸안았다. 그의 얼굴이 여자의 가슴에
짓눌러졌다. 그는 두손을 이용해 여자의
잠옷을 풀어 헤치고 가슴을 꺼냈다.
(대단한 가슴이야!)
여자가 몸부림을 치듯 허리를 흔들며 그의
등에 두 다리를 감았다. 그는 여자의
가슴을 한입에 배어 물고 세차게 흡입했다.
"아!"
여자가 고개를 뒤로 젖혔다. 여자의
호흡이 가빠졌다.
그는 손 하나를 밑으로 가져가 여자의
둔부를 쓰다듬었다. 여자의 둔부에 있는 흰
속옷을 끄집어 내리고 다시 허벅지
안쪽으로 손을 가져갔다. 여자의 은밀한
곳에 있는 도톰한 부분을 찾기 위해서였다.
그때 그의 손에 무엇인가 불끈거리는 것이
느껴졌다.
(이, 이건......!)
그의 머리 속으로 불길한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그때 여자가 그의 손을 잡아
뿌리치고 재빨리 여자의 하체로 손을
가져가 그것을 움켜잡았다.
(아!)
사내는 눈앞에 아득해 왔다. 머리끝이
곧추서는 듯한 기분이었다.
"왜 그래?"
여자가 물었다.
그는 여자에게서 떨어져 침대 밑으로
뛰어내렸다.
"미안해요."
"기분좋게 해준다고 그랬잖아?"
여자가 침대에서 벌떡 일어났다. 여자의
두 눈이 섬뜩한 광기를 띠었다.
"미안해요."
그는 서둘러 옷을 입기 시작했다.
"안돼!"
끌어안았다.
"가야 돼요."
그는 울상이 되어 사정을 했다. 그러나
여자는 바지를 입으려는 그를 끌어안고
세차게 벽으로 밀어붙였다. 그의 머리가
벽에 쿵 하고 부딪쳤다.
샤워를 마치고 타월만 두른 채 여자는
침대로 돌아왔다. 사내는 침실 바닥에
그대로 누워 있었다. 다리에 바지 가랑이
한쪽을 낀 채였다.
여자는 사내의 다리에 한쪽만 끼어 있는
바지를 뽑아냈다. 사내는 눈을 멍하니
부릅뜨고 있었다. 여자는 무릎을 쭈그리고
앉아 사내의 눈을 감겨 주었다. 그리고는
사내의 이마에 입술을 얹었다가 뗐다.
여자는 희미하게 웃고는 거울 앞에 가서
앉았다. 창에는 비가 더욱 세차게 몰아치고
있었다. 바람이 불 때마다 찬비가 쏴아
소리를 내며 유리창을 흔들고 지나갔다.
여자는 30분쯤 걸려서 정성스럽게 화장을
했다. 간간이 붉은 장미, 흰 장미, 노란
장미, 분홍 장미......하고 음조도 맞지
않는 콧노래를 흥얼거리곤 하였다.
여자는 화장을 모두 끝내자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사내를 안아서 자신의
침대에 눕혔다. 그리고는 자신도 옷을 모두
벗고 쇠침대에 올라가 누웠다. 빗소리가
음악소리처럼 들려왔다. 여자는 침대에
눕자 사내의 팔을 당겨 자신의 가슴에 올려
놓았다. 사내의 체온이 아직 따뜻하게
느껴졌다.
여자는 사내의 귀에 귓속말로
소곤거렸다.
(내 품에 안겨서 잠을 자는 거야! 내가
재워 줄께......)
여자는 사내의 머리를 들어 자신의 팔
위에 얹어 팔베개를 해주었다. 여자는
빗소리를 들으며 잠을 잤다.
이튿날 아침 여자가 일어나자 사내는
입을 반쯤 벌린 채 자고 있었다. 여자는
출근 준비를 서둘렀다. 날씨는 쾌청했다.
비가 그치자 정원엔 나뭇잎이 수북히
떨어져 있었다.
여자는 아침식사가 끝나자 커튼을 치고
침실문을 굳게 닫았다. 찾아올 사람은
없었다. 그러나 현관문까지 겹겹으로
잠그고 대문까지 단단히 잠궜다.
사내가 잠에서 깨어나 달아나 버릴 것 같은
생각이 들어 불안하기 짝이 없었다. 그러나
여자가 퇴근했을 때 사내는 여전히 여자의
침대에서 혼곤히 잠들어 있었다. 여자는
만족했다.
그날밤 여자는 사내에게 여자처럼 화장을
해주고 귓속말로 사랑을 나누었다.
이튿날도 마찬가지였다. 여자는 그
사내로 인해 매일매일이 행복했다. 그렇게
사흘이 지나자 냄새를 피우기 시작했다.
여자는 사내를 안고 욕실에 가서 깨끗이
씻기고 사내의 온몸에 콜드 크림을 발라
주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사내는 더욱
냄새를 피우기 시작했다. 그러나 여자는
실망하지 않고 아침 저녁으로 정성스럽게
사내를 씻겼다. 그러나 결국 소용이 없게
되었다. 사내는 이제 악취까지 풍기고
있었다.
(넌 너무 지저분해......)
여자는 화가 났다. 냄새가 여간 지독하지
않았다. 여자는 그날밤 사내를 정원에
묻었다.
우---.
사람들이 흥분해서 일제히 소리를
질러댔다. 12월 31일 밤 11시 57분. 제야의
종을 치는 보신각 앞에는 타종하는 순간을
지켜보기 위해 수 많은 사람들이 입추의
여지도 없이 빽빽하게 모여 있었다.
사람들은 가벼운 설레임과 흥분 속에서
노래를 부르고 소리를 질러댔다.
날씨가 포근했다. 이 며칠 겨울답지 않은
따뜻한 날씨가 계속되더니 어두운
하늘에서는 간간이 눈발까지 날리고
있었다. 초저녁부터 거리로 몰려나온
시민들-특히 젊은이들은 기분 좋게 취해서
보신각 앞에 모여들어 묵은 해(年)를
사내는 어깨를 부르르 떨며 트렌치
코트의 깃을 바짝 올려 세웠다. 또 눈발이
날리고 있었다. 차가운 눈송이들이 얼굴에
닿을 때마다 차가움이 조금씩 느껴졌다.
사내는 취한 몸을 똑바로 가누면서 시린
눈빛으로 보신각 쪽을 응시했다. 인파
때문에 보신각이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사내는 갑자기 마음이 경건해지는
기분이었다. 이제 몇 분만 있으면 새해가
시작된다. 새해......새해가 오는 것을
수많은 사람들과 함께 거리에서 맞이하는
것은 얼마나 감격적인 일인가. 이제 묵직한
종소리와 함께 희망에 찬 새해가 밝아올
것이다.
희망에 찬 새해......지난 한 해는
나에게 참으로 즐거운 날들이었다.
사업도 어느 정도 기반을 잡았으니까.
조금전까지 술을 함께 마신 여경리 미스
홍을 여관 앞에서 놓친 것이 아쉽기는
했지만 기회가 오늘만은 아닐 것이다. 신정
연휴만 끝나면 갓 건져올린 생선처럼
펄떡거리는 고 계집애를 침대에 눕혀 버릴
기회는 얼마든지 있을 것이다.
우---.
사람들이 다시 아우성을 쳐댔다.
사람들의 소란 때문에 사내는 귓전이
먹먹했다. 무슨 일인가 하여 머리를 빼들자
강렬한 서치라이트가 사람들의 머리 위에
푸른 빛을 던지고 있었다.
(아하, 방송국의 카메라군......)
사람들은 카메라를 향하여 손을 흔들며
비명을 질러대고 있었다. 젊기 때문일
많은 사람들이 거의 모두 10대에서 20대
초반의 젊은이들이었다.
땡---.
이윽고 보신각의 첫 타종음이 묵직하게
울려퍼졌다. 사람들이 와 하는 함성을
지르며 이리 쏠리고 저리 쏠렸다.
아수라장이었다. 어깨와 어깨가 부딪치고
발들이 밟혔는지 젊은 여자의 날카로운
비명 소리가 들려왔다.
사내는 빙그레 웃었다. 미스 홍을 놓친
것은 아쉬운 일이지만 보신각을 찾아온
것은 잘한 일이었다. 모두들 연말 분위기에
들떠 있었다. 자정이 되기를 기다리느라고
근처 술집에서 술을 마시고 몰려나온
사람들은 고래고래 악을 쓰기도 하고
노래를 부르기도 했다.
갖고 있어......)
그는 연말인데도 보신각 앞에 개미떼처럼
몰려 있는 사람들을 둘러보며 그런 생각을
했다. 한국 사람들은 기이하게도
크리스마스나 연말이면 으레 도심으로
몰려나와 술을 마시고 흥청대는 것이다.
특히 연말을 망년회라고 하여 12월초부터
도심의 술집들이 미어터지곤 한다.
(강제로라도 끌고 갔어야 했는데......)
그는 다시 여경리 미스 홍을 생각했다.
미스 홍을 특별히 예쁜 아가씨라고 할 수는
없었다. 그러나 고등학교를 졸업한 지
2년이 채 안되었으므로 피부가 매끄럽고
팽팽했다. 그는 자신의 사무실에서 근무한
여경리들을 여러 명 건드렸다. 처음엔
여경리를 데리고 여관에 들어간 뒤에
해오지 않을까 하고 은근히 걱정했었다.
그러나 그런 일은 지금까지 한 번도
없었다.
오히려 경리를 그만두고 다른 직장에
나가면서 이따금 전화를 걸어오기도
하였다.
그는 그때부터 새로 들어오는 여경리를
유혹하기 시작했다. 그의 사무실에
여경리는 둘뿐이었다. 직원이 전부 40명인
설비회사였다. 보일러 시공이 전문인데
직원들은 거의 모두 현장에 나가서 일을
했다.
여경리는 하나는 전화를 받거나 손님을
접대하는 일을 담당했고 하나는 금전을
담당했다. 그는 사장실에 앉아서 결재만을
했다.
영업활동을 담당했다. 그는 그 분야의
베테랑 엔지니어였다.
미스 홍은 박전무가 소개한 아가씨였다.
얼굴이 미인이 아닌 대신 몸매는 젊은
아가씨답게 않게 푸짐했다. 요즈음 말로
연애 상대로는 걸맞지 않을지 몰라도
맏며느리감으로는 적당할 것 같았다.
(고 계집애 틀리없이 숫처녀일
텐데......)
얼굴이 예쁜 것도 아니고 몸매가 잘
빠지지도 않았으므로 애인이 있을 리가
없을 것이다. 아무리 성개방 풍조가
만연했다고 해도 만자 경험이 없으리라고
생각했다.
그는 서른셋이었다. 집에는 아내와 두
아이가 있었다. 그는 고등학교를 근근히
증권투자와 부동산투자에 손을 대게 된
것은 그가 살고 있던 집이 갑자기
재개발되어 땅값이 열 배 가까이 뛰었기
때문이었다.
그가 살고 있던 집은 2백 평쯤 되었는데,
남편을 일찍 잃은 어머니가 생선장사를
하여 번 돈으로 사들인 판잣집이었다.
어머니는 방이 많은 그 판잣집에 월세를
놓아 상당히 많은 돈을 저축을 하다가,
그가 스물넷이 되던 해에 죽었다. 2백 평의
땅과 상당한 적금이 고스란히 그의 차지가
되었던 것이다.
그가 아내를 만난 것은 종로의
재수학권에서였다. 그는 삼수까지 했으나
대학입시에 실패했고 아내는 재수를 하여
바로 합격했다.
전공했다. 아내의 권유에 의해 그는 증권에
손을 댔고 그것이 성공하자 부동산에 손을
댔다. 그리하여 그는 갑자기 졸부가
되었다. 그러나 그때부터 아내와 틈이
벌어직 시작했다.
땡---.
다시 종소리가 묵직하게 울려퍼졌다.
그때 사내는 코끝으로 톡쏘는 듯한 향기가
풍기는 것을 느꼈다. 앞에 있는 여자의
풍성한 머리숱에서 풍기는 향기였다. 젊은
여인이었다. 뒷모습이었지만 얼핏 20대
후반에서 30대 초반으로 보였다. 머리가
햅번형이기 때문인지 잘 알 수 없었다.
코트를 팔에 걸치고 있었다. 시선을
내려뜨려 둔부를 살피자 놀랄 정도로
풍만했다.
삼켰다. 갑자기 하체로 뻐근한 기운이
밀려왔다.
(대단한 여자야......)
사람들은 계속 함성을 지르며 사내를
밀어냈다. 사내는 사람들에게 떠밀려
여자의 뒤로 바짝 붙어섰다. 머리숱 냄새는
더욱 진하게 풍겨오고 있었다. 사람들은
점점 불어나 발디딜 틈조차 없었다.
(어어......)
사내는 난감했다. 사람들에게 떠밀려
그의 하체가 여자의 둔부에 바짝 닿아
있었다. 그런데다 단추를 잠그지 않은
트렌치 코트 사이로 그의 하체가 주책없이
팽팽하게 여자의 둔부를 찔러대고 있었다.
(제기랄!)
그는 얼굴이 화끈거렸다. 술 때문만이
부드러운 둔부의 촉감이 그의 하체를
긴장시키며 기분 좋은 쾌감이 전신으로
물결처럼 번지고 있었다.
(이거 이러다가 따귀 맞는 거 아닌가
모르겠네.)
그는 여자와 떨어지려고 그의 몸을 뒤로
뻗대었다. 그러나 그의 노력은 아무 소용이
없었다.
그는 당황했다. 그의 하체가 여자의
둔부에 닿게 하지 않으려고 애를 쓰면
쓸수록 그것은 더욱 여자의 둔부에 바짝
닿아 움직일 수가 없었다.
(에라 모르겠다......)
그는 자신의 하체를 뒤로 빼려는 노력은
중지했다. 오히려 그는 자신의 하체가 닿는
둔부의 촉감을 느긋하게 음미했다.
쏘아보았다. 그는 찔끔했다. 그러나 여자는
아무 소리도 하지 않고 고개를 앞으로 돌려
버렸다. 그의 하체는 여전히 여자의 둔부를
찔러대고 있었다.
"정말 멋 있죠?"
여자가 옆에 서 있는 뚱뚱한 사내에게
말했다. 사내는 비로소 여자에게 동행이
있다는 것을 알아차리고 가슴이 철렁했다.
"응, 대단해. 사람들이 이렇게 많을 줄은
몰랐어."
뚱뚱한 사내는 자기의 여자 둔부에 낯선
사내의 그것이 닿아 있다는 것은 전혀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다.
"몇 번 쳤죠?"
그때 여자가 둔부를 가볍게 비틀었다.
(어?)
전율이 전신으로 번져가는 것을 느꼈다.
여자도 자신의 둔부에 낯선 사내의 그것이
닿아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
"모르겠어. 사람들의 소음에 묻혀
종소리가 잘 안 들려."
"보신각 종은 서른세 번 치는 거죠?"
"응."
"아, 이제 다 친 모양이네요."
여자가 가볍게 탄성을 내뱉었다.
사람들이 와 하고 함성을 지르며 손을
흔들었다. 새해를 맞이하는 설레임과
흥분이 사람들을 들뜨게 하는 것 같았다.
"눈이 많이 와요."
여자가 하늘을 보며 들뜬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사내는 여자를 따라 하늘을
쳐다보았다. 어느 사이에 눈송이들이
있었다.
서설이었다.
사람들은 어지럽게 날리는 눈발을 맞으며
흩어지고 있었다. 사람들의 소음도 눈발에
묻히며 시위가 갑자기 조용해지고 있었다.
"우리도 가요."
여자가 뚱뚱한 사내의 팔짱을 끼고 그를
돌아보았다. 그는 여자를 응시했다. 여자가
눈을 찡긋했다.
(미친년!)
그는 담배를 꺼내 물었다. 여자가 그에게
윙크를 한 의미를 이해할 수 없었다.
담배에 불을 붙여 연기를 길게 내뿜었다.
뚱뚱한 사내와 여자가 팔짱을 끼고 멀어져
가고 있었다.
이내 보신각 앞이 덩그라니 보았다.
그는 보신각 종을 쳐다보았다. 종소리와
함께 새해가 시작되었다. 그러나 아직도
한밤중이었다. 날이 밝으려면 7~8시간은
요할 것이다. 그는 아내를 생각했다.
아내와 틈이 벌어지기 시작한 것은 재산이
늘어나면서 아내가 은연중 그를 무시했기
때문이었다.
그는 골목으로 꺽어들었다. 집으로 바로
들어가고 싶지 않았다. 한잔 더하고
싶었다. 오만한 아내의 얼굴을 생각하자
도저히 멀쩡한 얼굴로 들어갈 수 없을 것
같았다.
골목 중간에 술집이 하나 보였다.
유리창에 왕대포, 곱창, 낚지볶음 등의
붉은 페인트로 쓴 글자들이 보였다. 문을
열고 들어서자 술집은 썰렁하게 비어
"어서 오세요."
검정 앞치마를 두른 여자가 심드렁하게
인사를 했다. 졸리운 눈치였다.
"술 팔아요?"
"예."
"그럼 쐬주 한 병 주시오."
"안주는요?"
"아무 거나 빨리 되는 것으로 주고요."
의자에 걸터앉자 여자가 술병과 잔부터
내놓았다. 그는 피우던 담배를 바닥에
버리고 구둣발로 뭉갰다. 여자가 소주병을
따고 김치를 갖다 놨다. 그는 물컵의 물을
버리고 소주를 가득 따랐다.
"아주머니."
"예?"
"어째 이렇게 한가합니까?"
맥주집으로 가고 나이 든 사람들은 일찍
귀가했으니까요."
여자가 부스스한 얼굴에 미소를 그렸다.
그는 물컵의 소주를 반쯤 마셨다.
목젖이 뜨끔하면서 뱃속이 찌를 해왔다.
"안주해서 드세요."
여자가 물오징어를 삶으며 근심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그는 젓가락으로 김치를
집어 씹었다.
"괜찮습니다."
"왜 이렇게 늦으셨어요?"
"보신각 종치는 걸 보려구요."
그는 여경리 미스 홍을 후리려다가
늦었다는 얘기를 할 수 없어 그렇게
둘러댔다. 연말의 들뜬 분위기를 이용해
술을 먹인 뒤 여관으로 데려가려던 계획이
하겠지.
"아주머니."
"예?"
여자가 물오징어를 솥에서 꺼내놓고
칼질을 하다가 말고 그를 쳐다보았다.
"사실은 여자를 꼬시려다가 실패했어요."
"네!"
여자가 피식 웃었다.
"왜 웃으십니까?"
"어떤 여자인데요?"
"아가씨죠. 저녁 사 먹이고 술까지
사먹였는데 요게 늦었다면서 토끼처럼
달아났지 뭡니까?"
"그래서 화풀이 술을 마시는 거예요?"
"그런 셈입니다."
여자가 웃었다. 농담을 하고 있는 것처럼
그가 술집을 나온 것은 얼추 새벽 2시가
넘었을 때였다. 여자가 연신 하품을 해대자
그는 비로소 자리에서 일어났다.
밖에서 그때까지도 계속 눈이 내리고
있었다. 그는 골목길에서 비틀대며 걸었다.
갑자기 요의가 느껴져 전봇대 옆에 서서
바지의 지퍼를 내리는데 어디선가 왝왝하고
토하는 소리가 들렸다.
소변줄기가 시원하게 쏟아졌다. 그는
자신의 하체를 내려다보며 싱긋이 웃었다.
언제 보아도 그것은 그를 늘 만족시켰다.
여자들은 그의 거대한 심볼을 보고 경탄을
하곤 했다.
소변을 다 보자 그는 몸을 부르르 떨어
지퍼를 올렸다. 서너 걸음 앞에서 한
여자가 비틀대며 걷고 있었다. 그는 여자를
울 소재의 미니 스커트를 입고 있었다.
위는 헐렁한 스웨터 차림이었다. 역시
울이었다.
(술집 계집애인가?)
여자가 골목을 벗어나 큰길로 나섰다.
여자는 어디로 갈 것인지 망설이는지
건널목에 우두커니 서 있었다. 청계천
쪽으로 걸음을 떼어놓았다. 거리는 인적과
차량이 끊어져 조용했다. 자정 전까지는
화려하게 도심을 수 놓았던 불빛도 꺼져
어두운 빌딩숲 사이로 흰 눈발만 날리고
있었다.
(내가 새해 첫날에 무슨 짓을 하고 있는
것일까?)
사내는 갑자기 그런 생각을 했다.
여자는 공사장 앞에서 걸음을 멈추었다.
앙상하게 세워져 있어 음산한 느낌을
주었다. 공사장 앞에 외등이 하나 있어
파르스름한 불빛이 공사장 입구를 비치고
있을 뿐이었다.
여자가 어깨에 걸친 핸드백에서 무엇인가
찾아 입으로 가져갔다. 그는 여자를 가만히
응시했다. 여자가 신경질적으로 핸드백을
뒤지더니 입에 물었던 것을 팽개쳤다.
그는 여자에게 다가갔다. 여자는 그를
빤히 쳐다볼 뿐 말이 없었다.
"불을 빌려 드릴까요?"
그는 그렇게 말하면서 여자를 얼핏
살펴보았다. 나이를 쉽게 짐작할 수
없었다. 화운데이션을 더덕더덕 바르고
입술에 루즈를 강렬하게 바른 것을 보면
의외로 나이 먹은 여자인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런데도 하얀 면티를 떠받치고
있는 젖가슴이 묵직해 보일 정도로 컸다.
"네."
여자가 그를 살피며 대답했다. 그는
트렌치 코트 주머니에서 일회용 라이터를
꺼냈다. 여자가 핸드백에서 다시 담배 한
가치를 꺼내 입에 물었다. 그는 라이터를
켜서 불을 붙여 주었다.
"고마워요."
여자가 담배연기를 폐부 깊숙히
빨아들였다가 내뱉고 나서 말했다.
목소리가 특이했다. 마치 남자의
목소리처럼 굵으면서도 부드러웠다.
"천만에요."
그는 웃었다. 어쩌면 술집의 늙은
작부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담배 한 대 드려요?"
"아닙니다."
그는 자신의 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내
입에 물고 불을 붙였다. 여자와 머리와
어깨에 눈이 하얗게 쌓이고 있었다.
"춥지 않으십니까?"
여자가 몸을 부르르 떨자 사내가 물었다.
"약간 추워요."
여자가 어깨를 으쓱했다.
"코트를 빌려 드릴까요?"
"친절하시군요."
여자가 그의 얼굴에 담배연기를 길게
내뿜었다. 그는 코트를 벗어 여자의 어깨에
걸쳐 주며 내가 무슨 짓을 하고 있는
것일까, 나는 왜 집으로 돌아가지 않고
거리에서 이 짓을 하고 있는 것일까, 하는
생각을 했다.
"......"
여자는 아무 대꾸도 하지 않았다.
"이렇게 만난 것도 인연인데 술이나
마실까요?"
그는 여자의 어깨에 자연스럽게 팔을
얹었다. 여자가 저항하지 않을까
걱정했으나 여자는 오히려 그에게 바짝
기대왔다.
"지금까지 문을 연 술집이 있을까요?"
여자는 술 생각이 없는 것 같았다.
"하긴 그렇군요."
"......"
"여관에 가면 술을 팔 겁니다.
가겠습니까?"
"네."
여자가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는 여자의
그러나 여관은 쉽사리 눈에 띄지 않았다.
눈에 띈 여관도 빈 방이 없었다.
그들은 골목의 어느 한옥집 추녀 밑에서
눈을 피했다. 어두운 하늘에서 쉬지 않고
눈이 내리고 있었다.
"저......"
여자가 벽에 등을 기대고 서서 다시
담배를 꺼내 물었다. 그는 여자에게 불을
붙여 주었다. 여자가 하늘을 향해
담배연기를 길게 내뿜었다.
그가 물었다.
"댁을 뭐라고 부르죠."
그도 여자처럼 벽에 등을 기대고 서서
담배를 피워 물었다. 여자는 아무 대꾸도
하지 않고 하늘만 쳐다보고 있었다. 눈길을
오래 걸어다녀 지친 기색이 역력했다.
"그런 건 왜 물으세요?"
"혹시 술집에 나가지 않나 해서......"
"맞아요."
여자가 짧게 끊어서 대꾸했다. 그러나
기분 나쁜 기색은 아니었다.
"미스......?"
"M예요."
"M이오?"
"이름의 첫자예요."
그는 웃었다. M이라는 여자의 대답이
우스웠다. 마치 현실이 아니고 꿈이나
영화에서 만난 여자처럼 느껴졌다. M이
이름의 첫자라면 민이나 문, 명자의 성을
쓰고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거기는요?"
여자가 그에게 물었다.
"이순호?"
"이름이 촌스럽지요?"
이벤엔 여자가 웃었다. 그는 피우던
담배를 눈 속에 던졌다. 눈은 어느 새
발목까지 쌓여 있었다.
그는 여자의 손을 잡았다. 여자가 그를
빤히 쳐다보았다. 그는 여자의 얼굴로
자신의 얼굴을 가까이 가져갔다.
여자가 조용히 눈을 내리깔았다. 여자의
숨소리가 귓전으로 뚜렷이 들렸다. 그는
여자의 입술에 자신의 입술을 얹었다.
(골목이면 어떤가?)
그는 여자의 가슴을 손바닥으로 덮어
눌렀다. 물컹한 가슴이 손바닥에 가득히
잡혔다.
"아."
새어나왔다. 그는 벽으로 여자를 바짝
밀어붙이고 스커트를 걷어올렸다. 여자는
스커트 안에 실크시미즈를 입고 있었다.
그는 둔부를 쓰다듬었다.
"아이."
여자가 입술을 벌리고 허리를 비틀었다.
그는 여자의 둔부에 걸쳐져 있는 헝겁
조각을 손으로 움켜쥐고 밑으로
끌어내리려고 했다. 그때 여자가 그의 손을
잡았다.
"안돼요."
여자가 낮게 속삭였다.
그는 여자의 팬티에서 손을 떼고 여자의
눈을 들여다보았다. 여자의 눈이 몽롱하게
풀어져 있었다.
(흥!)
그저 해보는 소리에 지나지 않으리라고
생각했다.
그는 여자의 면티를 걷어올리고 그
속으로 손을 밀어넣었다. 여자의 따뜻하고
부드러운 가슴이 손에 잡혔다. 여자가 눈을
지그시 감았다.
그는 한 손을 다시 여자의 스커트 속에
밀어넣었다. 여자가 또 그의 손을 잡았다.
"왜 그래?"
그는 호흡이 가빠왔다.
"안돼요."
여자도 호흡이 거칠었다.
"당신도 원하고 있는 거 아니야?"
"원하고 있어요."
"하고 싶지?"
"하고 싶어요."
여자의 팬티를 다시 움켜쥐었다.
"그런데 왜 안된다는 거야?"
"여긴 길바닥이에요."
"새벽이야. 보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구."
"그래도 누가 지나갈지 몰라요."
"제길!"
"잠자코 계세요."
여자가 그를 바짝 끌어안더니 바지의
지퍼를 내렸다. 그는 여자의 입술에 자신의
입술을 부벼댔다. 여자의 손이 빠르게 그의
하체로 들어와 그것을 움켜쥐었다.
"음."
이번엔 그의 입에서 짧게 신음소리가
흘러나왔다. 남자는 벽에 기댄 채 눈을
지그시 감고 있었다. 여자도 눈을 감은 채
손을 기민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안았다.
"못 참겠어!"
그는 여자의 스커트 속으로 재빨리 손을
밀어넣었다. 이번엔 둔부 쪽이 아니라
앞쪽이었다. 여자가 깜짝 놀라 그를
제지하려 했으나 이미 틀려 버렸다.
소스라쳐 놀란 것은 오히려 사내였다.
(이, 이것은......!)
사내는 모골이 송연해져 있었다. 그는
자신도 모르게 여자의 스커트에서 손을
빼고 여자를 쳐다보았다. 여자의 눈빛이
기이하게 반짝거리고 있었다. 그는 가슴이
철렁했다.
"미안해요."
여자가 그에게 가까이 다가왔다. 그는
뒷걸음을 치다가 후다닥 달아나기
시작했다. 어디선가 여운을 끌면서
호루라기 소리가 길게 들려왔다.
(개새끼!)
허겁지겁 달아나는 사내의 뒷모습을
원망스러운 눈빛으로 쳐다보며 여자가 다시
벽에 들을 기댔다. 어지럽게 날리는 눈발이
마치 흰 꽃송이들이 날리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M은 우울한 눈빛으로 눈발이 자욱하게
날리는 어두운 하늘을 쳐다보았다. 그 눈발
사이로 한 소녀의 환영이 희미하게 떠올라
왔다. M은 명치끝을 지그시 눌렀다. 그
소녀를 생각할 때마다 명치끝이 싸하게
저리면서 묵지근한 통증이 전신을 훑고
지나가는 것이다.
(보고 싶어......)
M은 소녀가 눈발 속에 서 있기라도 한
듯이 입속으로 중얼거렸다. 그의 눈가로
아련한 그리움이 안개처럼 피어올랐다. 또
다시 명 치 끝이 싸하게 저려왔다. M은
손으로 눈 언저리를 문질렀다.
그때 멀리서 경찰 세단차의 싸이렌소리가
담배를 피워 물었다. 비로소 몸이 으슬으슬
떨렸다.
머리카락이 축축하게 젖어 있었다. 그는
코트의 깃을 바짝 올려 세웠다. 그것은
달아난 사내의 코트였다.
(흥!)
그는 코트 주머니에 손을 넣어 보았다.
가죽 장갑과 담배, 라이터, 손수건 같은
것들이 손에 잡혔다. 코트의 왼쪽
안주머니에는 지갑도 들어 있었다. 그는
지갑 속의 내용물들을 꺼내 골목의 외등에
비춰 보았다. 지갑엔 십만원짜리 수표
3장과 현금 7만 원, 주민등록증,
운전면허증, 신용카드가 세 개 들어
있었다. 금호상사 대표이사 이순호라는
명함도 들어 있었다. 주민등록증과 같은
(개새끼!)
M은 다시 침을 칵 뱉고 나서 눈 속을
걷기 시작했다. 큰길로 걸어나왔으나
차량이 끊어져 도심 속의 차도는 깨끗하게
비어 있었다. 하늘하늘 내리는 눈발 외에는
사방에 움직이는 것이라고는 아무것도
없었다.
그는 종로 쪽을 향해 걸었다. 택시가
있을 것이다. 택시를 타고 집으로
돌아가야지. 그러나 종로에는 택시는
다니지 않았다. 그는 지하철을 타기 위해
계단을 걸어 내려갔다. 의자에 앉아서 눈을
붙이고 있으면 새벽 첫차가 올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지하철 입구는 철제
셔터가 철벽처럼 가로막고 있었다.
"문이 닫혔어요."
젊은 여자가 M을 힐끗 쳐다보고 말했다.
두툼한 코트를 입고 있었지만 허벅지가
훤하게 드러난 짧은 미니 스커트를 입고
있는 것을 보면 술집에 나가는 호스티스로
보였다. 머리는 짧았고 큼직한 귀걸이까지
양쪽 귀에 걸고 있었다.
"재수 옴 붙었네."
M은 일부러 싱그러운 소리를 뱉으면서
벽에 등을 기댔다. 젊은 여자도 그녀
옆으로 와서 벽에 등을 기댔다.
"두 시간은 기다려야 문이 열릴 거예요."
M은 대꾸하지 않고 담배를 꺼내 입에
물었다. 그리고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라이터를 찾는 시늉을 했다.
"이걸로 붙이세요."
젊은 여자가 상냥곽을 건네주었다.
글자가 눈에 들어왔다. 까페 <뜰>이라고
인쇄되어 있었다.
"고마워."
M은 성냥을 켜서 담배에 불을 붙였다.
젊은 여자에게서 풍기는 화장품 냄새에
하체가 뻐근해 왔다.
"오늘 늦으셨어요?"
젊은 여자가 물었다.
"술꾼들 뒤치닥거리가 늘 그러잖아? 뜰에
나가?"
"네."
젊은 여자가 사근사근한 목소리로
대꾸했다. M은 성냥곽을 젊은 여자에게
건네주었다.
"오늘 매상 좀 올랐어?"
"매상은 많이 올랐어두 내 벌이는
신통찮았어요."
"집이 어디야?"
"휘경동이오. 언니는요?"
"나는 신설동이야."
"신설동이면 가깝네요. 걸어서 가도
되겠어요."
"눈이 많이 와서......"
M은 말 끝을 흐렸다.
"그래두 여기서 6시까지 기다릴 수는
없잖아요?"
"같이 갈까?"
"네?"
"우리 집에 가서 쉬었다가 가는 게 어때?
아가씨야말로 휘경동까지 걸어갈 수
없잖아?"
"문이 열릴 때까지 기다려야죠."
젊은 여자가 맥빠진 소리로 대답했다.
"언제부터 여기 있었어?"
"한 시간 전부터요."
"추웠겠다."
"추운 것보다 졸려서 혼났어요. 이런
데서 잠들면 죽는다는데......"
"어쩌다가 이렇게 늦었어?"
"귀찮은 놈팽이가 하나 있었어요. 어찌나
치근덕거리는지 간신히 뿌리치고 보니까
시간이 늦었어요."
"카페에서 자지 그랬어?"
"연말이라 차가 있으려니 했지요."
"그럼 카페로 다시 가지."
"벌써 문 닫고 퇴근해 버렸어요."
젊은 여자가 피우던 담배를 발 밑에
버리고 구둣발로 뭉갰다. M은 담배연기를
길게 내뿜으며 재빨리 주위를 살폈다.
주위에 인적이라곤 전혀 없었다.
"이름이 뭐야?"
"그냥 최라고 불러요."
"미스 최?"
"네."
젊은 여자가 M을 힐끗 쳐다보고 웃었다.
M은 미스 최 옆으로 바싹 다가갔다.
"언니는 어디서 근무하세요?"
"궁전."
"어디에 있어요?"
"무교동."
"카페예요?"
"아냐. 룸 싸롱이야."
"룸 싸롱은 경기가 어때요?"
"걸리면 큰 게 걸려. 팁은 보통 10만
원이구......"
M은 담배를 발 밑에 버렸다. 눈발이
보자 새벽 3시가 넘어 있었다. 여느때
같으면 연말연시 비상근무를 하는 경찰도
많을 텐데 눈이 내리고 있기 때문인지 개미
새끼 한 마리 보이지 않았다.
M은 옆 눈으로 젊은 여자를 훔쳐보았다.
귀걸이가 이색적이었다. 입술은 붉게
칠해져 있었다.
"미스 최!"
"네?"
"수입 좀 올렸어?"
"별로라니까요."
여자가 고개를 설래설래 흔들었다. 삶에
지친 기색이었다.
"나하고 같이 우리 집에 안 갈래?"
"글쎄요."
"어차피 같은 직업에 종사하는
처지잖아?"
여자가 M을 쳐다보았다. M은 눈웃음을
쳤다. 여자는 M의 웃음이 어쩐지 징그럽게
생각되었다.
"그냥 여기서 기다릴래요."
M은 눈빛이 싸늘하게 변했다.
"몇 살이지?"
"스물두 살요."
"좋은 나이네."
"언니는 몇 살이에요?"
"스물일곱."
"이런 생활 오래 하셨어요?"
"이젠 신물이 날 지경이야. 벼라별
인간이 다 있더라구......"
"정말 그래요."
"귀걸이가 참 예쁘네."
M은 귀걸이를 만지는 체하며 여자의
"길에서 산 거예요."
"얼마 주구?"
"5백 원이오."
"목걸이두?"
M의 손이 얼굴에서 목으로 내려왔다.
목걸이는 가슴까지 늘어져 있었다. M의
손이 가슴에 얹혀졌다. 여자가 M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그 손이 목걸이를 만지는
듯하다가 가슴을 쓰다듬었다.
여자가 M을 쳐다보았다.
"가슴이 팽팽하구나."
여자는 애매한 미소를 지었다. M의 손을
뿌리쳐야 할지 말아야 할지 망설이는 것
같았다.
"성형수술했어?"
"네?"
성형수술을 할까 해서 물어보는 거야."
여자의 눈이 M의 가슴을 쏘아보았다. M의
가슴은 묵직해 보일 정도로 컸다.
"가슴이 큰데요?"
"늘어졌어. 만져 봐."
여자가 얼굴을 찡그리며 머뭇거리다가
M의 가슴으로 손을 가져갔다. 공연히
손끝이 떨렸다.
"어때?"
"팽팽해요."
"정말?"
"네."
"웃 위로 만져서 그래. 속으로 손을
넣어서 만져 봐."
M의 눈빛이 야릇하게 빛났다. 여자는
어쩔 수 없이 여자의 하얀 면티 속으로
손을 넣어서 가슴을 만졌다.
"축 늘어졌지?"
"팽팽해요."
"괜히 그러는 거지?"
"아녜요. 정말 팽팽해요."
M의 손이 갑자기 여자의 스커트를
걷어올렸다.
"왜, 왜 그래요?"
여자가 깜짝 놀라 얼굴로 M을
쳐다보았다. M의 눈이 충혈되어 있고
숨소리가 가빠지고 있었다.
"기분 좋게 해줄께."
"이러지 마세요."
여자가 M의 손을 움켜쥐었다.
"기분 좋게 해준다니까."
"싫어요."
"돈을 줄께."
여자는 세차게 도리질을 쳤다. 서울
시내에 호모도 있고 레스비언도 있다는
얘기도 동료로부터 들었다. 그러나 직접
접촉을 한 것은 처음이었다.
"나한테 돈 많이 있어."
M이 애원조로 여자에게 사정을 했다. M의
손은 어느 사이에 여자의 스커트 속에
깊숙이 들어가 있었다. 여자가 M의 손을
뿌리치려고 했지만 M은 교묘하게 손을 놀려
여자의 은밀한 부분을 덮어 버렸다.
"가만히 있어. 응?"
"안돼요!"
여자는 허리를 옆으로 비틀었다.
"돈을 준다니까."
"싫어요."
"10만 원 줄께."
"싫다니까요!"
여자가 소리를 꽥 지르며 M의 가슴을
힘껏 떠밀었다. M은 갑작스러운 여자의
공격에 중심을 잡지 못하고 뒤로
나자빠졌다. 머리가 쿵 하고 계단 벽에
부딪쳤다. 눈에서 불이 튀었다. 젊은
여자는 그 틈을 이용해 재빨리 계단을 달려
올라갔다. M은 뒤통수를 만지며 간신히
몸을 일으켜 계단을 올라갔다. 젊은 여자는
어느 새 어둠속으로 사라지고 없었다.
눈발이 멎었다. 하늘은 비로소 번하게
밝아오려 하고 있었다. 눈이 내렸는데도
날씨는 포근했다. 허름한 양철지붕 위에
쌓인 눈이 소리없이 녹아서 처마 밑으로
떨어지고 있었다.
해장국집 골목이었다. M은 울 스커트를
위로 걷어올렸다. 하체가 팽팽하게 부풀어
있었다. 그는 어둠이 아직도 곳곳에 남아
있는 골목 끝을 내다보며 자신의 하체를
손으로 움켜쥐었다.
눈빛이 몽롱했다. 그는 자신의 하체를
스스로 자극하면서 여자의 벌거벗은 나신을
상상했다. 주체할 수 없는 성욕이 맹렬하게
솟구치고 있었다.
그때 골목 끝에서 두 남녀가 걸어오는
것이 보였다. 그는 재빨리 울 스커트를
밑으로 끌어내렸다.
"해장국집이 문을 열었을까?"
"청진동은 4시만 되면 열어."
"오늘은 새해 첫날이야. 이 사람들도
새해를 맞이할 거야."
끌어안고 찰싹 달라붙은 채 걷고 있었다.
(여관이 있는 데를 찾아야 해. 되도록
으슥한 골목에 있는 곳으로......)
M은 청진동 해장국 골목을 벗어났다.
날은 상당히 밝아져 있었다. 그는 눈길을
바쁘게 걸어 한 골목 앞에 이르렀다. 골목
안에 여관이 하나 있었고, 여관을 옆으로
돌자 파지가 잔뜩 쌓여 있었다. 골목은
파지 저쪽으로도 계속되었다. 그 골목 끝에
인쇄소 간판이 보였다.
M은 장소를 물색한 뒤 여관 앞으로
나왔다. 여관에서는 대개 새벽에 사람이
나온다. 여관을 이용하는 사람들 대부분이
떳떳치 못한 짓을 저지르기 위해 여관을
이용하고 떳떳치 못한 짓을 저질렀기
때문에 밝은 대낮에 나오는 것이 아니라
M은 여관 옆 골목에 붙어섰다. 그의 머리
속에는 오직 여자의 벌거벗은 나신만
가득차 있었다.
M은 코트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었다.
차가운 돌맹이가 손에 잡혔다. 청진동
해장국집 골목에서 주워 놓은 것이었다.
그때 여관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M은 머리만 내밀어 여관에서 누가 나오는지
내다보았다. 여자였다. 청바지에 반코트를
입고 있었다. 그 여자는 습관적으로 주위를
살피고는 M이 있는 쪽으로 빠르게 걸어오기
시작했다.
M은 골목에서 나왔다. 여자가 빠르게
걸어오다가 M을 힐끗 쳐다보았다. 그러나
M이 여자의 행색을 하고 있어 안심이
되는지 그대로 걸어왔다.
여자였다. 이제 고등학교를 갓 졸업한 듯
얼굴이 앳되었다.
여자가 M을 쳐다보았다.
"너 저 여관에서 자고 나왔지?"
M은 여자를 윽박질렀다.
"그런데요?"
여자의 눈이 차갑게 빛났다. 네까짓게
뭔데 참견하느냐는 듯한 눈빛이었다.
"되바라진 년!"
"뭐예요?"
"네년이 같이 잔 놈이 누군지 알아?"
"......"
여자가 흠칫했다.
"저놈이 누군지 아느냐구?"
M은 여관 쪽을 손으로 가리켰다. 여자가
당황한 눈빛으로 여관쪽을 뒤돌아보았다.
돌멩이를 꺼내 여자의 머리를 후려쳤다.
여자가 어, 하는 소리를 지르며 앞으로
고꾸라졌다.
(됐어!)
M은 재빨리 주위를 휘둘러 보며 쾌재를
불렀다. 주위엔 아무도 없었다. 그는
쓰러진 여자를 부축해 들고 여관을 돌아서
파지가 있는 쪽으로 끌고 갔다.
여자가 알아들을 수 없는 신음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M은 여자를 파지 위에 내던졌다. 여자가
눈을 게슴츠레하게 떴다. M은 여자의
복부를 깔고 앉았다.
"왜, 왜 이래요?"
여자가 겨우 입을 열어 항의했다.
"시끄러워!"
짓을 했다구......"
"입 닥쳐!"
M은 여자의 뺨을 후려쳤다. 여자는
스카프를 목에 감고 있었다. M은 여자의
스커프를 벗겨 여자의 손을 뒤로 묶었다.
"사람 잘못 본 거 아니예요?"
여자가 공포에 질린 표정으로 M을
쳐다보았다.
"아니야."
M은 웃었다. 여자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M은 코트 주머니에서 가죽 장갑을
꺼내 여자의 입에 쑤셔넣었다. 그때서야
여자가 괴로운 표정을 지으면서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다.
M은 코트를 벗어 바닥에 깔았다.
그리고는 여자를 굴려서 코트 위에 눕혔다.
그는 여자에게 속삭이듯이 낮게 말했다.
서두른 탓인지 이마 위로 땀이 솟아올랐다.
그는 손등으로 이마의 땀음 문질러 닦았다.
서둘러야 했다. 날이 서서히 밝아오고
있었다.
그는 여자의 청바지 호크를 따고 지퍼를
내렸다. 여자의 분홍색 속옷이 새벽빛에
드러났다.
(아!)
M은 눈앞이 아찔해 왔다. 여자의 나신을
본 것이 언제인가. 얼마나 여자와 관계를
하고 싶었던가를 생각하자 가슴이 뛰고
얼굴이 화끈거렸다.
"10분만 잠자코 있으면 돼. 그렇지
않으면 죽일 거야."
여자가 발버둥을 치기 시작하자 M이 눈을
"알았어?"
M이 다그쳤다. 여자가 고개를
끄덕거렸다.
M은 여자의 청바지를 밑으로 끌어내렸다.
(대체 뭘하려는 거지!)
여자는 M의 행동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어쩌면 정신병자인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이거 들어!"
M이 여자가 둔부를 손바닥으로 때렸다.
여자가 둔부를 들었다. 그러자 청바지가
뱀껍질처럼 벗겨져 나갔다.
여자는 M을 쏘아보았다. 청바지를 벗긴
M이 그녀의 하체를 뚫어지게 내려다보고
있었다.
(미친년이야!)
여자는 머리끝이 곧추서는 듯한 기분이
벗겨냈다.
여자는 눈을 감았다. 자신의 하체가
새벽빛에 고스란히 드러나 있으리라는
생각을 하자 찬물을 뒤집어 쓴 것 같은
모멸감이 들었다.
그때 하체로 찬바람이 스치고 지나갔다.
여자는 온몸을 부르르 떨었다. 눈을 뜨자
M이 스커트를 걷어올리고 얇은 속옷을 벗고
있었다.
(세상에!)
여자는 자신의 눈을 믿을 수가 없었다.
(여자가 아니야!)
여자는 M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그녀의
시선은 M의 하체에서 가슴께로 올라갔다.
M의 가슴이 둥글게 솟아 있었다. 그것은
분명히 여자의 가슴이었다.
엎드렸다. 여자는 눈을 감고 M의 가슴이
자신의 가슴에 닿을 때의 촉감을 가만히
느껴 보았다.
(이 가슴은 여자의 가슴이야......)
여자는 머리 속이 혼란해졌다. 믿어지지
않는 일이었다.
여자는 문득 어떤 책에서 읽은 이야기를
생각해 냈다. 자세히는 기억할 수 없었으나
게이에 대한 것이었다. 이태원 어딘가에
여장 남자들이 시중을 드는 술집이 있는데
어떤 남자가 술에 취해 들어갔다가 혼이 난
경험담을 적은 얘기였다.
그 남자는 어떤 룸으로 안내되었다. 술과
안주를 시키자 웨이터가 들어와 '아가씨를
불러 드릴까요?' 하고 묻기에 그러라고
대답했다. 그러자 얼마 후에 원피스를 입은
아가씨는 가슴도 알맞게 솟아 있고 둔부도
보기 좋게 살이 붙어 있었다.
그는 기분이 흡족했다. 아가씨는 온갖
아양을 떨면서 그의 시중을 들어 주었다.
그는 아가씨의 가슴도 만지고 둔부도
토닥거리면서 유쾌하게 술을 마셨다.
아가씨는 그가 가슴과 둔부를 만지는 것은
허락했으나 원피스 자락을 걷어 올리고
사타구니를 더듬으려 하면 한사코
거부했다.
그는 여자의 가슴에 돈을 찔러 넣으면서
집요하게 여자를 공략했다. 그리고 앙탈을
하듯이 저항을 하는 아가씨의 손을
뿌리치고 원피스 속으로 손을 넣는데
성공을 했다. 그러나 다음 순간 그는
화들짝 놀라서 손을 빼고 말았다. 여자의
그 아가씨는 게이였던 것이다.
그는 어떻게 그 술집을 빠져나왔는지
기억이 하나도 없었다. 그뒤로는 그는
아가씨가 있는 술집엔 두 번 다시 출입을
하지 않았다.
(아!)
여자는 눈을 떴다. 남자의 그것이 자신의
몸속으로 깊숙히 침입해 들어오고 있었다.
그때 무슨 소리가 가까운 곳에서
들려왔다. M이 흠칫하여 움직임을 중단했고
여자는 그 소리에 바짝 귀를 기울였다.
쇳소리였다. 자세히 귀를 기울이자
셔터문이 올라가는 소리였다.
M이 여자의 몸에서 후다닥 떨어져
일어났다. M은 허겁지겁 울 스커트를
끌어내리고 골목 반대편을 향해 재빨리
배에서 쪼르륵 소리가 났다. M은
그때서야 어제 저녁부터 지금까지 한 끼도
먹지 않았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러나
식욕이 전혀 일어나지 않았다. M은
정신없이 걸었다. 햇살이 화창했다. 밤새
내린 눈이 햇살에 녹아 거리가 질퍽거렸다.
그래도 사람들은 거리로 몰려나와
돌아다니고 있었다. 새해였다. 남자들은
정장을 하고 여자들은 색색의 한복을 입고
있었다.
상점들은 철시를 하고 거리는 한산했다.
M은 울 스커트 안에서 그것이 팽팽하게
일어서 있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발정 난
암케처럼 그는 정신없이 거리를 걸었다.
이런 증세가 나타난 것은 지난
가을부터였다. 그는 밤마다 여자들을 찾아
노랗게 물든 포플라 숲과 노란 옷을 입은
소녀가 자리잡고 있었다. 그 소녀를 생각한
것은 비단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었다.
그러나 그 소녀에 대한 생각은 아련한
그리움뿐이었지만 뚜렷한 영상은 아니었다.
그러던 것이 지난 가을의 일이 있고서부터
광적으로 나타나고 있었다.
거리엔 여자들이 많았다. 그러나 그와
관계를 할 수 없는 여자들이었다. 언젠가
발정 난 암캐를 본 일이 있었다. 그 개는
숫놈과 교미를 하지 못하자 눈에서 진물이
흘러내리고 눈꼽이 지저분하게 끼어
있었다. 거울을 들여다보면 자신의 모습이
발정 난 암캐와 흡사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M은 공중전화 부스 앞에서 걸음을
멈추었다. 부스 안에서 한 여자가 전화를
(저 여자를 갖고 싶어......)
M은 여자의 둔부를 뚫어질 듯이
쏘아보았다. 여자의 둔부는 펑퍼짐했다.
뒷모습만 보아도 30대 초반의 여자라는
것을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애들 데리고 속초에 갔어. 속초가 그
사람 큰 집이잖아? 물론 본처도 데려갔겠지
뭐...... 그러니 우리 집에 놀러와. 우리
집에 나 혼자 뿐이야......"
여자가 갑자기 깔깔대고 웃었다.
"나 얼마 전에 이사했어. 아파트 아니야.
30평짜리 단독주택인데 전세야......"
여자가 둔부를 옆으로 흔들었다.
"첩같은 소리하네. 첩은 옛날 얘기구
계약동거야. 6개월 살아 주고 전셋돈이나
얻은 거지......남자들도 그 이상 살면
치자, 응? 쳇......야. 새해인데두 그
사람이 너한테 온단 말이야? 그 사람
명절도 안 지내니......? 신년하례? 그럼
회사의 신년하례 핑계 대구 너한테 온단
말이야......? 단단히 빠졌어! 하기야
너처럼 서비스 잘해 주면 어떤 남자가
달라붙지 않겠니. 잘해서 한 밑천 톡톡히
건져...... 우리 집?
M은 여자의 말에 귀가 솔깃해졌다.
"우리 집 장안동이야. 장안동 경남호텔을
지나 면목동 방향으로 꺾어 첫 골목으로
들어가면 파란 대문집이 있어. 그 근처에서
파란 대문집은 우리 집 하나니까 찾기도
쉬워. 택시 타고 경남호텔 가자고 하면 돼.
대문도 문패도 걸었어.
조영애......조영애가 누구냐구? 누군
여자가 키들대고 웃었다. M은 경남호텔
지나 면목동 방향 첫 골목, 파란 대문집,
조영애......하고 외웠다.
"그래. 우리가 본명을 쓰지 않으니까
잊어 버리는 것도 당연하지......얘. 나
대문도 못 잠그고 나왔어. 자물쇠가 고장이
났는데 철공소가 다 쉬니 어쩌니? 그냥
살짝 걸치기만 했어......
대낮에 무슨 도둑이니? 원래 열어 놓은
집에는 도둑이 안 들어온다더라......나
바람도 쐴 겸 점심 먹으러 나왔어.
신정이라 가게들이 문을 닫아서 점심 먹을
곳도 마땅찮아......롯데호텔 식당에 가서
점심 먹고 4시나 되어서 들어갈래."
그때 여자가 뒤를 돌아다보았다. M은
재빨리 고개를 돌려 여자를 외면했다.
다시 연락할께. 우리 그 사람은 내일
밤에나 올 거야. 여기 기다리는 사람이
있어서 그래. 끊었다가 다시 걸께......"
여자가 전화를 끊고 부스에서 나왔다.
M은 부스 안에 들어가 전화를 거는 체했다.
여자가 뒤에 서서 그가 전화를 끝내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M은 다이얼을 아무 곳에나 돌렸다.
"여보세요."
신호가 몇번 울린 뒤 떨어지자 수화기
저쪽에서 굵은 남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저예요."
"누구요?"
"저라구요. 왜 집에 들어오지 않는
거예요?"
"뭐라구요? 전화 잘못 거신 거
"집에 빨리 들어오세요. 지금 집에
들어오지 않으면 끝장인지 아세요!"
M은 일면식도 없는 수화기 저쪽의
사내에게 쌀쌀하게 내뱉고 수화기를
전화기에 쾅 하고 소리 내어 걸었다.
M은 일면식도 없는 수화기 저쪽의
사내에게 쌀쌀하게 내뱉고 수화기를
전화기에 쾅 하고 소리 내어 걸었다.
어떻게 해서 그런 생각이 떠올랐는지 알 수
없었다. 어느 새 그의 머리 속에는 오직
조영애를 손에 넣어야 하겠다는 생각만
가득차 있었다.
M은 공중전화 부스에서 나오자 곧 바로
택시정류장으로 걸어갔다. 조영애보다 먼저
그녀의 집에 도착할 생각이었다. 조영애의
집은 덩그라니 비어 있을 것이고 조영애는
호텔 식당에서 점심을 먹고 돌아올 것이다.
택시 정류장엔 사람들이 줄을 지어
있었다. M은 택시를 기다리는 시간이 몹시
초조했다. 손에서 끈적거리는 식은땀이
흐르고 가슴이 두근거렸다. 그러나
이번에야말로 실패하지 않아야 한다고
마음속으로 굳게 다짐을 했다.
택시는 거의 30분쯤 지나서야 탈 수
있었다.
"어디로 갈까요?"
노란 제복을 입은 택시 기사가 M에게
물었다. 머리가 희끗희끗 한 사내였다.
길이 질퍽대서인지 차들은 느릿느릿 서행을
하고 있었다.
"장안동에 가요."
"장안동 어디입니까?"
"경남호텔 앞이요."
파란 대문집이라고 대답을 할 뻔했다.
"어디 아프십니까?"
택시 기사가 백미러로 M을 살피며
물었다.
"아니오."
M은 손수건을 꺼내 눈가를 닦았다.
백미러에 비친 자신의 모습이 병자처럼
보였다. 얼굴은 핼쑥하고 눈은 충혈되어
있었다. 게다가 눈 언저리로 눈물인지
진물인지 모를 액체까지 지저분하게 흐르고
있었다.
택시가 경남호텔 앞에 도착한 것은
40분이 지나서였다. M은 경남호텔을 지나
첫골목으로 들어섰다.
골목 끝에서 색동 한복을 입은 소년이
걸어나오고 있었다. 국민학교 4,5학년 쯤
외면했다. 소년이 이상해 하는 눈빛으로
그를 쳐다보고 있었다.
파란 대문집은 골목 중간 쯤에 있었다.
M은 대문 앞에서 주위를 휘둘러 보고 나서
걸음을 멈췄다. 멀리서 소년이 M을
쳐다보고 있었으나 상관하고 싶지 않았다.
대문 기둥에는 <趙英愛>라는 문패도 걸려
있었다. M은 대문의 쪽문을 손으로 살짝
밀어 보았다. 쪽문의 쇳소리를 내며
열렸다. 쪽문 안으로 몸을 들이밀고 M은
대문을 닫았다.
대문 바로 안에 목재로 된 현관문이
있었다. M은 현관문의 손잡이를 잡아서
실린더를 돌리려고 했다. 그러나 실린더가
돌아가지 않았다.
(잠겼어!)
질러대고 싶은 심정이었다.
M은 벽을 따라 옆으로 돌았다. 두어 평쯤
되어 보이는 조그만한 정원이 나타났다.
창문이 닫혀 있나 살펴보았으나 창문엔
철망이 씌워져 있었다.
M은 창고문을 열었다. 창고는 캄캄했으나
전등 스위치를 올리자 삽, 곡괭이, 호미
같은 농기구가 보였다. 정원을 가꿀 때
쓰는 연장들인 모양이었다.
(지렛대가 있어야 하는데......)
지렛대는 공구 상사 옆에 있었다. M은
지렛대를 들고 창문으로 가서 철망을 뜯기
시작했다. 오래된 단층양옥이었다. 철망에
박힌 못은 녹이 슬어 있었다. 지렛대를
끼우고 살짝 힘을 주자 철망이 힘없이
떨어져 나갔다.
M은 유리창을 열고 문턱을 넘어
들어갔다. 응접실이었다. 실내가 훈훈했다.
오래된 집인데도 보일러가 설치되어 있는
모양이었다.
집은 조영애가 전화기에 대고 말한 대로
아무도 없었다. M은 주방으로 가서
냉장고를 열어젖혔다. 냉장고엔 우유와
식빵이 들어 있었다. M은 허겁지겁 식빵을
찢어 입 속에 쑤셔 넣고 우유를 마셨다.
비로소 시장기가 사라졌다.
M은 욕실로 갔다. 온수 파이프에서
따뜻한 물이 나오고 있었다. M은 코트를
벗고 푸득푸득 세수를 했다.
언제 몰려왔는지, 밖에서 아이들이
왁자하게 떠드는 소리가 여린 햇살과 함께
거실로 스며들어 왔다. M은 욕실에서 나와
침대가 놓여 있었고 창에는 분홍빛 커튼이
드리워져 있었다.
M은 침대에 걸터앉아 엉덩이를 흔들며
쿠션을 주어 보였다. 침대가 심하게
출렁거렸다. 쿠션이 아주 좋았다. 여자가
4시쯤 돌아온다고 했으니까 아직 시간
여유가 있었다. M은 차근차근 준비를
해두는 것이 좋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M은 주방으로 갔다. 주방엔 부엌칼로
과일 깎는 칼들이 조리대 옆에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여자는 생각보다 정리정돈을
잘하는 모양이었다.
M은 과도를 움켜쥐었다. 날이 파랗게 서
있는 칼이었다.
M은 과도를 들고 침실로 들어갔다.
서랍장에서 여자를 묶고 탄력 스타킹을
틀어막으면 될 것이다.
M은 주방으로 갔다. 냉장고를 열자
참외가 있었다. 아까 보아둔 참외였다.
금메달이라는 딱지가 붙은 참외였다. M은
참외를 꺼내어 껍질까지 으적으적 씹어먹기
시작했다. 거실의 진열장엔 양주도
가지런히 진열되어 있었다.
M은 모양이 예쁜 양주 한 병을 한 모금
마셨다. 목젖이 뜨끔하고 뱃속이 찌르르
했다. M은 양주병을 들고 살펴보았다.
양주병은 영어로만 적혀 있어 이름을 알 수
없었다. 양주를 한 모금 더 마신 뒤 담배를
피워 물었다.
4시쯤 돌아온다던 여자는 해가 기울고
있는데도 돌아오지 않고 있었다. 골목에서
왁자하게 떠들던 아이들도 모두 돌아갔는지
M은 침실에서 커튼을 들추고 밖을
내다보았다. 벌써 어둑어둑 땅거미가 지고
있었다.
(어떻게 된 거지......?)
M은 초조해지기 시작했다.
이내 어둠이 내리고 집집에 불이 켜지기
시작했다. M은 불을 켜지 않고 가만히
앉아서 기다렸다.
대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린 것은 거의
7시가 되었을 때였다. M은 침실에서 바깥의
동정에 바짝 귀를 기울였다. 여자가 대문에
빗장을 지르는 듯한 소리가 들리고
현관문을 여는 소리가 들렸다. M은 과도를
움켜쥐고 침실 문 옆에 바짝 붙어섰다.
여자가 거실의 불을 켰는지 문틈으로
희미한 빛이 스며들어왔다. M은 가쁜
침실문이 열렸다. 거실의 불빛을 등으로
받으며 여자가 들어와 코트를 벗기
시작했다. M은 여자의 등에 과도를 찔렀다.
"누, 누구예요?"
여자가 놀라서 소리를 질렀다.
"조용히 해!"
M은 남자의 목소리로 여자를 윽박질렀다.
"왜, 왜 이러는 거예요?"
"이 칼에 죽고 싶지 않으면 가만히
있으란 말이야!"
"가만히 있을께요. 제발 죽이지만
마세요!"
"이년아, 왜 이렇게 늦게까지 돌아다녀?"
M은 이렇게 말하면서 여자를 앞으로 돌려
손바닥으로 여자의 뺨을 후려쳤다.
엉겁결에 뺨을 얻어맞은 여자가 어리둥절한
"다, 당신은......"
M의 발길이 여자의 복부를 내질렀다.
여자가 외마디 비명을 지르며 복부를
움켜쥐고 앞으로 고꾸라졌다. M은 계속해서
여자를 발길로 내질렀다. 여자가 비명을
지르며 방바닥에 나뒹굴었다.
"사, 살려 주세요!"
여자가 두손을 모아 빌기 시작했다.
여자의 얼굴이 눈물에 젖어 번들거리고
있었다.
"조용히 할 거야?"
"네."
"정말이지?"
"네."
"옷 벗어!"
"네?"
"옷 벗으라구, 이년아!"
여자가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M을
쳐다보았다. 그러나 M이 손으로 뺨을 다시
후려치자 후다닥 옷을 벗기 시작했다.
여자는 코트 안에 밤색의 투피스를 입고
있었다. 여자는 투피스 상의를 먼저 벗고
이어서 스커트를 벗었다. M은 여자가 옷을
벗고 알몸이 될때까지 아무것도 하지 않고
기다렸다.
M이 샤워를 하는 소리가 침실까지
들려왔다. 조영애는 눈물을 주르르 흘리며
팔목을 묶은 스타킹을 풀려고 애를 썼다.
어처구니 없는 일이었다. 아니 악몽을 꾸고
있는 기분이었다.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는 것일까. 어떻게 남자도 아니고
여자도 아닌 사람이 존재할 수 있는
것일까. 조영애는 눈물을 흘리며 계속
팔목을 비틀어댔다. 그러나 양쪽 침대
귀퉁이에 묶여 있는 그녀의 팔목은 풀리지
않았다.
(믿을 수 없어......!)
입은 블라우스를 찢어 묶은 탓에 소리를
지를 수가 없었다. 기껏애야 끄윽끄윽 하는
조영애는 처참한 기분이 들었다. M에게
팔과 발을 침대 네 귀퉁이에 묶이고 강간을
당한 것은 그럴 수도 있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인구 1천만이 넘는 수도
서울에서는 성범죄가 그칠 날이 없었다.
세상이 폭력적으로 변하고 있었다.
조영애는 성을 상품으로 생각하고 사는
여자였다. 그녀는 자신이 갖고 있는 성을
팔아서 안락한 생활과 신분 상승을 추구해
왔다. 노동을 하는 것은 그녀의 성격에
맞지도 않았고, 성을 매개로 해서
벌어들이는 수입에 비교할 수도 없이
신통치 않았다.
게다가 성을 매개로 해서 돈을 버는 것은
즐거운 일이었다. 수 많은 남자들이 언제나
그녀 주위에 몰려들었다. 오로지 그녀가
남자들이었다. 조영애는 그런 생활을 거의
10년 동안이나 한 것이다. 이제는 남자들과
관계를 하는 것은 이골이 난 셈이었다.
남자에게 강간을 당했다고 해서 억울할
것도 없는 육체였다.
그러나 M에게 당한 것은 아무리 생각해도
치욕스러운 일이었다. M은 남자도 아니고
여자도 아니었다.
말은 들어봤지만 그런 사람이 존재한다고
생각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그것은 다만
소설이나 영화 속에 나오는 이야기일
뿐이라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M은 완벽한
양성이었다. 남자와 여자의 생식기 모두가
M의 몸에 완전하게 존재하고 있었다.
너무도 끔찍한 일이었다.
조영애는 눈을 감았다. 손과 발에 묶인
스타킹을 풀고 달아난다는 것은
불가능했다.
그때 욕실에서 콧노래 소리가 들려왔다.
장미가 곱다더니
꺾고 보니 가시뿐이네
붉은 장미 흰 장미
노란 장미 분홍 장미
M의 노래는 노래라기보다 그저 흥얼대는
것에 지나지 않았다. 들어보지 못한
노래였다.
(괴인이야!)
조영애는 자신도 모르게 속으로
중얼거렸다. 문득 M이 하던 말이 생각났다.
"내 이름은 M이야."
조영애는 입이 묶여 있어 아무 대꾸도
팬티까지 모두 벗기고 침대에 손발을 묶고
나서 한 말이었다.
나는 너를 갖고 싶어
장미 필 때를 기다린다
붉은 장미 흰 장미
노란 장미 분홍 장미
노래소리가 뚝 끊겼다. 그때 거실의
벽시계가 아홉 점을 쳤다. 조영애는 눈을
감았다. 샤워소리가 끊기고 욕실 문이
여닫히는 소리가 들렸다. M이 거실을 지나
침실로 들어왔다.
"아, 개운해......"
M이 여자의 목소리로 말했다. 조영애는
눈을 꽉 감았다. M의 얼굴을 쳐다보는 것이
"어때?"
M이 침대에 걸터앉았다. 침대가 출렁
하고 흔들렸다.
"샤워하지 않을래?"
M이 조영애의 둔부를 손바닥으로
토닥거렸다. M의 손바닥은 파충류처럼
차가웠다. 조영애는 눈을 감은 채 고개를
흔들었다.
"싫으면 관두라구."
M이 침대에서 일어나 화장대로 걸어갔다.
조영애는 실눈을 뜨고 M의 뒷모습을
노려보았다. M은 화장대 앞에 앉아서
드라이로 정성스럽게 머리를 말리고
있었다.
(뒷모습은 완전히 여자야......)
조영애는 흘린 듯이 M의 뒷모습을
M의 검은 머리는 샴푸와 린스를 해서인지
윤기가 사르르 흐르고 있었다. 탐스러운
흑발이었다. 살결은 우유빛으로 뽀얗게
빛났다. 피부조차 부드럽고 매끄러웠다.
어느 골목에서인지 장난감 폭죽이 터지는
소리가 타닥타닥 하고 들려왔다. 이따금
피융 하는 소리와 함께 장난감 화약이
요란한 소리를 내며 터졌다. 그 소리에
창문이 부르르 흔들렸다.
M은 머리 말리는 것을 끝내고 기초화장을
하고 있었다. 조영애는 M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M의 허리는 잘록했다. 둔부는
팽팽하게 살이 쪄서 누가 보더라도 여자의
둔부로 보였다. 야릇한 일이었다.
조영애는 문득 어떤 신문기사가 하나
생각났다. 성별(性別) 변경허가 1호라는
수술을 받은 뒤 법원에 <호적상 성별
변경허가 신청>을 내고, 호적의 성별을
남(男)에서 여(女)로 정정받아 결혼까지
해서 살고 있는 여자의 얘기였다.
성전환 수술이 특이한 일이기도 하자만
성전환 수술을 받은 여자(원래는 남자)가
남자와 결혼해서 행복하게 살고 있다는
기사에 몇번이나 되풀이해서 읽은 일이
있었다.
신문엔 당사자의 이름이 P씨로만
표기하고 있었다. P씨는 남자로 태어났지만
어릴 때부터 여자 아이들하고만 놀았다.
목소리가 계집애들처럼 가늘었다.
사춘기가 되었을 때 P씨는 남자 아이들만
보면 가슴이 뛰고 얼굴이 사과처럼
붉어졌다. 몸은 남자였지만 마음은
중학교를 중퇴한 뒤 P씨는 그럴 때마다
얼굴이 새빨개졌으나 자신의 몸 때문에
데이트 신청을 거절했다.
그러던 어느 날 P씨는 공장에서
야간작업을 끝내고 자취방으로 돌아오다가
불량배들을 만났다. 불량배들은 다짜고짜
P씨를 주먹으로 때리고 발로 찬 뒤 골목에
숨겨 놓은 봉고차에 태웠다.
인신매매단이었다.
그들은 필사적으로 저항을 하는 P씨를
찍어누르고 옷을 모두 벗겼다.
"아니 이거 사내 새끼 아니야?"
"이거 봐! 여기에 그게 달렸어!"
"나 이런 미친놈!"
불량배들은 P씨를 흠씬 두들겨 팬 뒤
길바닥에 내동댕이쳤다. 그뒤로는 P 씨는
수술을 했다. 의사는 P씨에게
성전환증이라는 진단을 했다.
성전환증은 일종의 질환이었다.
성도착이나 변태자와는 전혀 다른 질병으로
성전환 수술이 유일한 치료 방법이었다.
성전환 수술을 받으면 아이를 낳지는
못해도 원만한 부부생활까지 할 수 있었다.
P씨도 성전환 수술을 받은 뒤 남자와
결혼을 하여 행복하게 살게 되었다. P씨를
취재한 기자는 P씨의 자태가 일반 여자들과
조금도 다름없이 부드럽고 고울 수가
없었다는 말로 기사를 끝맺고 있었다.
조영애는 눈을 감았다. 피로가 엄습해
왔다. 그러나 앞으로 어떻게 될지 모른다는
불안감과 함께 공포 때문에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욕심을 채운 M이 그녀를 죽일지도
있었다.
M이 기초화장을 끝내고 침대로 걸어왔다.
"화장실에 가고 싶지 않아?"
조영애는 고개를 흔들었다. M의 머리에서
샴푸 냄새와 화장품 냄새가 풍겼다.
"널 죽이지는 않을 거야."
M이 침대에 걸터앉았다.
"난 네가 좋아."
M의 손이 조영애의 가슴을 쓰다듬었다.
조영애는 몸을 움찔하고 떨었다.
또 다시 폭죽이 터지는 소리가 들리고
창문이 흔들렸다.
"넌 이제 내 여자야."
"......"
조영애는 눈을 감았다. 입이 막혀 있어
숨 쉬기가 힘이 들었다. 게다가 M으로부터
그녀의 몸 속에 들어왔을 때 그녀는 자신의
하체가 찢어지는 것 같은 격렬한 통증을
느꼈었다. M의 그것은 정상인에 비교되지
않을 정도로 거대했다. 그녀는 격렬한
통증과 숨이 막히는 듯한 통증을 동시에
느꼈다.
M이 격렬하게 몰아붙이기 시작했을 때는
몇 번이나 숨이 막혔다. 심장이 터질 것
같았다.
M이 일을 끝내고 그녀의 몸에서 떨어져
일어났을 때 녹초가 되어 기진맥진했다.
신음소리조차 지를 수 없었다.
"난 너무 오랫동안 여자를 갖지
못했어......"
M이 중얼거렸다. M은 한 손으로 그녀의
허벅지를 만지고 있었다.
"어젯밤에 난 여자를 찾아헤맸었어.
사실은 남자도 상관이 없었지만......내
몸엔 여자와 남자가 공존하고 있으니까"
M이 손이 조영애의 도톰한 부분을
덮었다.
"나 같은 사람 처음 봤지?"
M의 손이 그녀의 하체를 애무하기
시작했다. 조영애는 두눈만 꿈벅거렸다.
M은 기분이 좋은지 말을 계속했다.
"난 괴인이야. 나 같은 사람은
반음양(半陰陽) 또는 남녀추니, 어지자지,
고녀(睾女)라고 해. 조선시대에 나 같은
사람이 딱 하나 있었어. 사방지라는
사람인데 몸은 여자처럼 곱게 생겼으면서
남녀의 생식기를 모두 갖고 있었어. 결국
그 사람 얘기는 임금 귀에까지 들어갔지.
얼마나 희한하겠어? 이 이야기는
조선왕조실록에도 있어......"
M의 호흡이 가빠지기 시작했다.
조영애는 눈을 감았다.
M이 조영애의 몸 위에 바짝 엎드렸다.
M은 눈앞에서 무수한 빛이 교차되고 있는
듯한 기분을 느꼈다. 조영애는 밑에 깔려
몸부림을 치고 있었다. 고통스러운
몸짓이었다. 그러나 M은 여자의 고통이
짜릿한 전율이 되어 전신으로 퍼져나가는
것을 느꼈다. 부드러운 육체였다. 아니
나긋나긋한 육체였다.
사방은 조용했다. 바람이 불 때마다
창문이 덜컹대는 소리가 들렸으나 방안의
스탠드의 불빛 때문에 아늑했다. 시간이
새벽이 가까워 오고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창틀이 바람에 심하게 흔들렸다.
밖에는 기온이 뚝 떨어져 있을 것이다.
눈이 내린데다 바람까지 심하게 불고
있으니 살을 에일 듯이 추울 것이다.
M은 그 생각을 하자 온몸이 부르르
떨리는 듯한 기분이었다.
(오늘은 축복받은 날이야......)
M은 어젯밤을 생각했다. 보신각 앞에서
만난 남자, 지하도에서 만난 여자. 그리고
여관 앞 골목에서 만난 계집애는
청바지까지 벗겨 놓고서도 관계를 하지
못했었다.
새해였다. 그러나 그는 거품처럼
끓어오르는 욕망 때문에 거리를 미친 듯이
헤매고 다녔었다. 한 번 욕망이 끓어오르기
충혈되고 눈 언저리에는 발정 난 암캐처럼
진물이 흘렀다.
그러니 오늘은 얼마나 행복한 날인가.
갖고 싶은 것을 가질 수 있다는 것은
얼마나 즐거운 일인가. 거품처럼
끓어오르는 욕망을 배설할 수 있다는 것은
얼마나 기쁜 일인가.......
여자의 입에서 커억, 하는 신음이
흘러나왔다. 여자의 눈 언저리로
번들거리는 물기가 흘러내리고 있었다.
M은 여자의 눈물을 보면서도 짐승처럼
계속 격렬하게 밀어붙였다. M의 눈에는
처음부터 여자의 눈물 같은 것을 보이지
않았다. 그는 오로지 행위에만 열중했다.
여자의 눈은 절박한 빛을 띠고 있었다.
마치 살려달라고 울부짖고 있는,
절박하기만 했다.
M은 그러한 여자를 철저하게 유린했다.
몇 번이고 계속해서 유린했다. 여자가
고통을 이기지 못해 혼절을 한 뒤에도 M의
공격은 계속되었다.
조영애는 거의 무의식 상태에서 M을
자신의 몸 속에 받아 들이고 있었다.
저항은 전혀 불가능했다. 이제는 허리를
비틀거나 몸을 흔들어 저항을 하는 것조차
불가능했다.
M이 격렬하게 밀어붙일 때에는 침대가
요란하게 흔들렸다. 그녀는 캄캄한 어둠
속으로 달아나려는 의식의 끈을 붙잡고
몸부림쳤다. 허리가 끊어질 것처럼
고통스러웠다.
조영애는 속으로 부르짖었다. 시간이
얼마나 되었는지 알 수 없었다. 캄캄한
어둠 속에서 의식이 희미하게 살아나자 M이
또 자신을 짓누르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입을 묶었던 스카프가 풀어지고 침대 네
귀퉁이에 묶고 있던 팔다리도 풀어져
있었다. 그러나 그녀는 손끝 하나 움직일
기력이 없었다.
하체는 이제 아무런 감각도 없었다.
M은 호흡이 짐승처럼 거칠었다. 마치
으르렁거리고 있는 짐승처럼 그녀를
유린하고 있었다. 조영애는 비감했다.
지옥이 있다면 이런 것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조영애는 눈물이 주르르
흘러내렸다.
하체의 고통이 다시 느껴지기 시작하면서
조영애는 공포에 젖은 눈으로 M의 눈을
올려다보았다. M의 눈이 광기로 번뜩거리고
있었다.
조영애는 몸을 부르르 떨었다. M의 몸이
땀에 젖어 불빛에 번들거리고 있었다. M의
커다란 가슴이 그녀의 눈앞에서 춤을
추듯이 출렁거렸다.
(이 자를 떼어내야 해......!)
조영애는 빠르게 그런 생각을 했다. M이
자신을 죽이지 않아도 섹스 때문에 자신이
죽을지도 모른다고 생각이 뇌리를 엄습해
왔다.
조영애는 허공을 더듬어 M의 젖가슴을
힘껏 움켜쥐었다. M의 젖가슴이 물컹했다.
M이 깜짝 놀라서 멈칫했다.
조영애는 M을 힘껏 떠밀었다. M이
나가떨어졌다. 조영애는 재빨리 반대편으로
몸을 굴려 침대 밑으로 굴러떨어졌다.
M에게서 달아나야 했다.
"이년이!"
조영애는 재빨리 몸을 일으켜 방문을
열고 현관문 쪽으로 달아나려고 했다.
그러나 M이 번개처럼 몸을 날려 발목을
잡는 바람에 소파 위에 나뒹굴었다.
"어디를 달아나!"
M이 헐떡거리며 쫓아와 조영애의 허리를
두 팔로 안았다.
"사, 살려 주세요!"
조영애는 발부둥을 쳤다. M이 그녀를
번쩍 안아서 소파 위에 내팽개쳤다.
"허튼 수작하지 말라고 그랬지?"
조영애는 소파 위에서 굴러 떨어져
"어디를 가?"
M이 조영애의 둔부를 발로 찼다.
"살려 주세요!"
조영애는 울면서 소리를 질렀다.
"넌 내여자야! 내가 만족할 때까지는
아무 데도 못 가."
M이 조영애의 머리카락을 움켜잡고
잡아당겼다. 조영애는 머리채가 잡힌 채
몸을 일으켰다. 머리카락이 몽땅 뽑혀져
나가는 것처럼 고통스러웠다.
"넌 내 여자야. 나는 너 같은 여자를
기다리기 위해 밤새도록 거리를 헤맸어.
너를 놓아 줄 수 없어......"
M이 헐떡거리며 조영애에게 말했다.
조영애는 팔뒤꿈치를 접어서 뒤로 힘껏
내질렀다.
M의 입에서 헛바람 빠지는 소리가
들리면서 M이 그녀의 머리카락을 놓고
자신의 복부를 움켜쥐었다. 조영애는 다시
현관 쪽으로 달려갔다. 다리가 휘청거리고
가슴이 격렬하게 뛰었다.
"후훗......"
M이 나직하게 웃으며 등 뒤로 다가왔다.
조영애는 현관문의 실린더를 움켜잡았다.
"소용없어!"
M이 등 뒤에서 조영애를 두 팔로
끌어안았다. 남자처럼 억센 팔이었다.
조영애는 현관문 실린더를 붙잡고 몸부림을
쳤다. 그러나 문은 열리지 않았다.
"소용없다니까!"
M의 손이 허리에서 가슴으로 더듬어
올라오더니 그녀의 유방을 움켜잡았다.
도망갈 생각하지 말고 내 말 잘 들어."
M이 하체를 그녀의 둔부에 바짝
밀착시켰다.
"헉!"
조영애는 현관문 실린더를 움켜쥐고 입을
딱 벌렸다. 눈앞이 캄캄해져 왔다. 거대한
M의 그것이 등 뒤에서 그녀의 몸 속으로
들어온 순간 숨이 컥 하고 막혔다.
고통스러웠다. 그러나 그 고통은
잠깐이었다. 그녀는 이 격렬한 운동을
시작한 것과 거의 동시에 발밑의 땅이
꺼지는 듯한 기분을 느끼며 의식을 잃었다.
바람은 아침이 되어도 계속 불었다.
하석주(河碩注)는 택시에서 내리자
습관적으로 주위를 휘둘러 본 뒤 골목으로
꺾어들었다. 날씨가 추웠다. 새해 둘째
날이었다. 눈이 채 녹기 전에 시베리아
한랭전선이 몰려오고 세찬 칼바람이 불어
거리는 빙판이었다.
하석주는 몸을 부르르 떨었다. 빙판길이
미끄러웠다. 바람은 살을 에일 듯이 매섭게
불고 있었다. 그러나 골목에 있는 파란
대문집에 들어가면 하루를 편안하게 쉴 수
있다고 생각하자 걸음이 가벼웠다.
그는 37세로 대기업체인 S전자의
경리부장이었다. 그가 다루고 있는 것은
회사나 마찬가지지만 회사의 경리부나
자금담당부서가 부동산을 다루고 있는 것은
공인된 사실이었다. 그리고 부동산투자에
적극적이지 못하면 유능한 회사라고 할 수
없었다.
하석주는 회사의 부동산을 다루면서
자신도 부동산투자에 나섰다. 그리하여
짧은 기간 동안에 그는 많은 돈을 벌었다.
그리고 그때부터 그는 바람을 피우기
시작했다. 여자는 어디에나 있었다. 술집,
다방, 이발소, 안마시술소......심지어
사우나에까지 안마사라는 이름의 여자들이
남자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들이 상품으로 내놓은 것은 자신들의
몸이었다. 젊은 여자, 나이 든 여자,
결혼한 여자......퇴폐 이발소에 근무하는
유부녀들이라는 신문 보도는 새삼스러운
것이 아니었다.
그는 걸음을 서둘렀다. 돈이 많은
사람들에게 여자들이 자신의 몸을 상품으로
내놓고 파는 것은 즐거운 일이었다. 농촌
총각들이 장가를 못 가 자살을 한다는
신문보도나 불륜으로 인해 살인사건이
발생했다는 보도에 사람들이 무감각해진
것도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었다.
모든 것은 돈으로 해결되는 세상이었다.
퇴폐 이발소나 안마시술소, 사우나에
근무하는 일부 여자들의 월 수입이 남편의
한달 벌이 보다 몇 배나 되었다. 퇴폐
이발소에 근무하는 여자들이 일제 단속에
걸렸을 때 경찰서 취조실에서 한 말은
대부분 남편의 수입이 쥐꼬리만해서였다는
아이들을 가르칠 수 없다는 것이었다.
(돈이 없으면 살 수가 없어......)
하석주는 대문 앞에서 걸음을 멈추었다.
대문 옆 기둥에 걸려 있는 문패가 오늘따라
낯설게 느껴졌다. 그는 대문 안으로 들어가
빗장을 질렀다. 현관문은 잠겨 있었다.
(대문은 열어 놓고 현관문을
잠그다니......)
그는 어처구니가 없었으나 현관문을
두드렸다. 현관문이 잠겨 있는 것을 보면
조영애가 외출한 것은 아닌 모양이었다.
그러나 그가 문을 계속해서 두드려도
안에서는 아무 응답이 없었다.
(아직도 자고 있나?)
시간은 벌써 10시가 가까워지고 있었다.
잿빛 하늘은 점점 낮게 가라앉고 있었다.
신년하례를 다녀온다고 했으므로 아내도
늘어지게 낮잠을 즐기고 있을 것이다.
그는 다시 현관문을 두드렸다. 그러나
안에서는 여전히 응답이 없었다.
(어떻게 된 거야?)
그는 짜증이 났다. 문을 좀 더 세차게
두드리다가 발로 찼다. 그래도 안에서는
아무 응답이 없었다. 그는 집 옆으로
돌아갔다. 날씨가 따뜻했으면 근처
다방에라도 가서 시간을 보내다가 올 수
있었으나 차디찬 바람 때문에 나가기가
싫었다.
(아!)
하석주는 집을 돌아 창문 쪽으로
걸어가다가 가슴이 섬칫해 왔다. 도둑을
방지하기 위한 철망이 뜯어져 있었다.
그는 창문을 넘어 거실로 들어갔다.
가슴이 쿵쾅거리고 뛰었다.
거실은 훈훈했다. 보일러가 자동으로
돌아가 사람이 없어도 항상 따뜻했다.
그러나 거실은 기묘할 정도로 조용했다.
벽시계의 초침 돌아가는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렸다. 그는 침실 문을 열었다.
"제기랄......!"
그 순간 그는 얼굴을 잔뜩 찡그렸다.
침대 위에 조영애가 벌거벗은 알몸으로
누워 있었다. 기분이 섬칫했다. 죽은
것일까? 조영애의 하체 쪽으로 핏자국이
보였다. 방안으로 들어서자 침대의 여러
곳에 핏자국이 떨어져 있었다. 조영애는
눈을 부릅뜬 채 미동도 하지 않았다.
(죽은 거야!)
그러나 죽음을 확인하지 않으면 안된다고
생각했다.
그는 조영애의 얼굴에 자신의 얼굴을
가까이 가져갔다. 조영애가 숨을 쉬고 있나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죽었어!)
조영애는 숨을 쉬지 않고 있었다.
하석주는 아득한 절망감이 들었다.
무엇인가 큰일이 일어난 것 같은데 어떻게
수습을 해야할지 종잡을 수가 없었다. 그는
조영애의 가슴에 손을 얹어 심장이 뛰는지
확인해 보았다. 조영애는 심장도 멎어
있었다. 그러나 조영애의 가슴에는 따뜻한
온기가 흐르고 있었다.
(죽은 지 얼마 안되었어!)
그는 조영애의 몸을 천천히 살폈다.
하체 주위에 핏자국이 엉켜 있었으나
그것이 사인이라고 보기에는 어려운 점이
있었다. 적어도 사람이 죽는다는 것은
병으로 죽기 전에는 크게 다치거나 칼에
찔려 피가 흥건하게 흘러야 한다고
생각했다.
(어떻게 하지?)
하석주는 거실로 나왔다. 사람이 죽으면
경찰에 신고해야 한다. 그러나 경찰에
신고하면 조영애와 떳떳히 못한 관계가
만천하에 폭로되는 것이다. 그것은 생각만
해도 끔찍한 일이었다.
그는 난감했다. 조영애와의 떳떳치 못한
관계가 폭로되면 아내로부터 이혼을 당할
것이고 회사로부터 권고사직을 당하게 될
것이다. 그렇다고 사체를 유기할 수도 없는
그는 담배를 꺼내 물었다. 손끝이
떨렸다. 이마에서는 자신도 모르게
식은땀이 흐르고 있었다.
그는 소파에 엉덩이를 붙이고 앉아
담배연기를 길게 내뿜었다. 여러 가지
생각이 두서없이 떠올라 왔다. 먼저 경찰에
신고했을 때 취조를 당하는 자신의 모습과
아내로부터의 경멸, 사람들의 조롱을 받는
자신의 모습이 떠올라 왔다. 다음엔 사체를
유기하는 자신의 모습이었다.
사체를 유기하는 것은 여러 가지 방법이
있었다. 가장 손쉬은 것은 사체를 정원에
묻는 것이고 다음은 사체를 토막내어
버리거나 야산에 묻는 것이었다. 그러나
어떤 방법이라도 경찰에 발각되면
사체유기죄는 물론 살인죄까지 뒤집에쓰게
(내가 혹시 착각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하석주는 얼핏 그런 생각을 했다.
조영애는 죽지 않았을 것이다. 잠시 기절한
것을 내가 죽은 것으로 착각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사람이 기절을 하면 숨까지
일시적으로 멎는 것이 아닐까. 그는 잠시
그런 생각을 했다.
(그래. 내가 착각을 하고 있는 것인지도
몰라.)
하석주는 담배를 재떨이에 비벼서 끈 뒤,
벌떡 일어나서 침실로 달려갔다. 그러나
조영애는 여전히 침대에서 미동도 하지
않고 있었다.
(그래. 착각일 리가 없지......)
그는 허망했다. 그는 조영애의 시신을
의해 죽었다. 그런데 죽음이란 무엇일까.
조영애의 영혼이 아직도 이 방안에 떠돌고
있는 것이 아닐까. 그런 생각을 하자 그는
시체 앞에서 경건해져야 하겠다고
생각했다.
이토록 죽음을 가까이에서 본 것은
처음이었다. 게다가 죽은 시체는 그와
떳떳한 관계는 아니었어도 지난 몇 달 동안
살을 섞어 온 사이였다. 그녀의 벌거벗은
나신 구석구석에 그의 입술 자국, 그의 손
자국이 선명하게 남아 있을 것이다.
그는 갑자기 비감해졌다. 조영애의
죽음이 도무지 현실처럼 느껴지지 않았다.
그러나 사태를 수습해야 했다. 조영애의
사체를 유기하는 것은 시체에 대한
모독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거실로 나와서
"예, 장안파출소 장순경입니다."
신호음이 떨어지자 젊은 남자의 굵은
목소리가 전화선을 타고 들려왔다. 그는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저......사람이 죽었습니다."
"예?"
"살인사건이 일어났습니다. 여자가
죽었습니다."
수화기 저쪽에서 바짝 긴장하는 듯한
기척이 느껴졌다.
"살인사건이오?"
"예."
"거기가 어딥니까?"
"경남호텔 지나 첫 골목에 있는 파란
대문집입니다. 조영애라는 문패가 걸려
있습니다."
"번지는 잊어 버렸습니다."
"전화번호는?"
"243에 668X번입니다."
"신고하신 분의 성함은?"
"하석주입니다."
"알겠습니다. 본서에 보고하고 곧
출동하겠습니다."
전화가 끊어지는 소리가 찰칵 하고
들렸다. 그는 힘없이 수화기를 내려놓았다.
불안했다.
그는 다시 담배를 피워 물고 침실로
들어가 조영애의 나신에 시트를 덮었다.
경찰이 수사를 하게 되면 시트를 벗겨
버리겠지만 조영애의 나신을 처음부터
그들에게 보이고 싶지 않았다. 조영애는
죽었지만 그의 여자였다.
그때 거실에서 전화벨이 요란하게
울렸다. 하석주는 거실로 뛰어나가
수화기를 들었다.
"하석주씨입니까?"
수화기 저쪽이 목소리는 퉁명스러운
남자의 것이었다.
"예."
"살인사건 신고하셨지요?"
"예."
"사체는 어디에 있습니까?"
"침실에 있습니다."
"어떻게 죽었습니까?"
"모르겠습니다."
"사체에 외상이 있나요?"
"없는 것 같습니다. 실례지만
누구십니까?"
"강력계 최형사입니다. 곧 출동할 테니까
"알았습니다."
찰칵 전화가 끊겼다. 하석주는 이마에
흐르는 땀을 손등으로 문질러 닦았다.
파출소에서 순경과 차석이 나온 것은
10분쯤 지났을 때였다. 순경은 24,5세로
보였고 차석은 40세쯤 되어 보였다.
"현장은 어디입니까?"
차석이 먼저 물었다. 하석주는 그들을
침실로 안내했다.
"시트를 걷어 보세요."
차석이 침대 앞에서 긴장한 표정으로
말했다. 하석주는 조영애의 시신에 덮어 둔
시트를 조금 벗겼다.
"어떻게 죽은 거죠?"
차석이 얼굴을 찡그리며 하석주에게
물었다.
"죽은 사람이 부인입니까?"
"아닙니다."
"그럼......?"
차석이 의아하다는 듯이 하석주를
바라보았다.
그는 머뭇거리지 않고 대답했다.
"내연의 관계입니다. 술집에 있는
여자인데 계약동거를 하고 있었습니다."
"언제 발견했습니까?"
"10시쯤입니다. 현관문이 잠겨 있길래
창문 쪽으로 가봤더니 철망이 뜯어져
있었습니다. 이 사람은 이렇게 죽어
있었구요."
동대문 경찰서 강력계 형사들은 거의 한
시간쯤 되어서야 들이닥쳤다. 최형사라는
사람은 키가 작고 빼빼 마른 사람으로
"범인은 철망을 뜯고 침입했어."
형사들은 1차 조사를 한 뒤 거실에 모여
구수회의를 했다.
"사인은 뭐죠?"
젊고 뚱뚱한 형사가 물었다. 그는
강형사라고 동료들에게 불리우고 있었다.
"글쎄......"
"국부가 손상된 것 외에는 외상이 없지
않습니까?"
"손목과 발목을 묶은 흔적이 있어."
"목을 조른 흔적은 없던데요."
"사인은 검시를 해봐야 알게 될 거야."
"사인은 분명치 않으니 살인사건이라고
볼 수도 없지 않습니까?"
"글쎄......"
"정사가 지나쳤던 게 아닐까요? 손목과
정사라고 볼 수는 없지 않습니까?"
"변태란 뜻인가?"
최형사가 하석주를 날카로운 눈빛으로
쏘아보았다. 하석주는 공연히 가슴이
철렁했다.
"세상이 그런 세상 아닙니까?"
"감식반 올 때까지 기초조사나 해
두자구."
최반장이 하석주를 손짖해 불렀다.
하석주는 최반장 앞으로 가까이 갔다.
"죽은 여자의 이름이 뭡니까?"
"조영애입니다."
형사들은 수첩에 일제히 메모를 하기
시작했다.
"몇 살이지요?"
"서른여섯입니다."
"예."
"언제부터 관계를 맺어 왔습니까?"
"한 6개월 되었습니다. 계약동거를
시작한 것은 4개월 전이구요."
"계약동거라는 게 뭡니까?"
"6개월 같이 살고 전세금을 주는
것입니다."
"전세금이 얼마지요?"
"2천5백만 원입니다."
"그럼 6개월 같이 살아 주면 2천5백만
원을 주는 것입니까?"
"예."
"직업이 뭡니까?"
"S전자 경리부장입니다."
"공금 횡령했습니까?"
"아닙니다. 그런 일은 한 번도 하지
"6개월에 2천5백만 원을 여자에게 줄 수
있다면 수입이 많아야 할 텐데요?"
"부동산 투자를 해서 돈을 아쉽지 않게
쓰고 있습니다."
최반장이 어이가 없어 입을 다물었다.
하석주는 담배를 꺼내 입에 물었다.
"어젯밤에 무얼 했습니까?"
"집에서 잤습니다. 어제 낮에 속초에
갔다가 올라와 몹시 피곤했습니다."
"부인이 피살자와의 관계를 알고
있습니까?"
"모르고 있습니다."
하석주는 담배연기를 길게 내뿜었다.
아내가 이 일을 알게 되면 어떤 표정을
지을까, 그는 아내에게만은 이 일이
알려지지 않았으면 싶었다.
합니까?"
"예?"
"행위 말입니다. 여자를 묶어 놓고
즐기기도 하나요?"
"아닙니다. 그런 일은 없었습니다."
"때리기도 합니까?"
"한 번도 그런 일은 없었습니다."
"오늘 새벽에 이 여자와 관계를 하지
않았습니까?"
"안했습니다."
"솔직히 말해야 합니다. 정액검사를 하면
다 드러나요!"
유형사라는 사람이 하석주를 윽박질렀다.
"믿어 주십시오. 죽은 여자는 저의
첩이나 마찬가지인 여자입니다. 제가 무엇
때문에 새벽에 찾아와서 관계를
"죽은 여자와 제일 가까운 사람이
누구요?"
"모르겠습니다."
"죽은 여자를 따라다니는 사람
없었어요?"
"없었습니다."
하석주는 고개를 흔들었다. 최형사라는
사람이 그를 물끄러미 쏘아보다가 자리를
비켰다.
"당신 전과 있어?"
"없습니다."
형사들은 최형사라는 사람이 자리를
비키자 하석주를 범인 취급하기 시작했다.
"날씨도 추운데 애태우지 말고 다 털어
놓으라구."
"전 털어 놓을 것이 없습니다."
원씩이나 주려고 했어?"
"따뜻한 여자였습니다."
"뭐가?"
"......"
"뭐가 따뜻한 여자냐구 묻지 않아?"
"꼭 이렇게 해야 합니까?"
하석주는 갑자기 눈물이 핑 돌았다.
"제가 범인 같습니까? 왜들 이러십니까?"
"6개월에 2천5백만 원씩이나 준다는 게
말이 안되잖아? 이 여자가 특별한
여자인가? 막말로 금테라도
둘렀냐구......"
"그만 해!"
최형사가 들어오다가 유형사에게 눈을
부릅떴다. 유형사가 머쓱하여 고개를 외로
꼬았다. 하석주는 손수건을 꺼내어 눈물을
"부탁이 있습니다. 제 아내에게는 비밀로
해주십시오."
하석주는 최형사라는 사람에게 부탁을
했다. 그는 형사반장이니까 자신을
위기에서 구해 주리라는 생각했다.
"왜요?"
그러나 최형사의 반응은 냉담했다.
"아내가 이 일로 충격을 받는 것이
싫습니다."
"그게 아니라 부인한테 이혼을 당할까봐
두려운 게지."
유형사가 빈정거렸다.
"제가 다니는 회사에도 비밀로
해주십시오."
하석주는 유형사를 상대하지 않고
최형사에게 말했다. 최형사는 아무 대답도
감식반은 오후 1시가 되어서야
들이닥쳤다. 그들은 시체부터 세밀하고
철저하게 검안(檢案)했다.
"국부가 상당히 훼손되어 있습니다.
외상은 거의 없구요."
감식반 반장인 최경사라는 사람이
돋보기로 조영애의 국부를 살피며 말했다.
감식반 한 사람은 비디오로 조영애의
시신을 촬영하고 있었다.
"어느 정도입니까?"
최형사가 눈빛을 빛내며 물었다.
"이물질에 의한 훼손은 아닌 것
같고......정액 양성 반응이 침대
여기저기서 나오고 있습니다."
"윤간이가요?"
상처와 흡사합니다. 국부가 상당히 발달해
있는데도 이런 상처가 생긴 것은 성기가
예상외로 컸기 때문입니다. 질이 완전히
파괴되었습니다."
최형사가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었다.
믿어지지 않는다는 표정이었다.
"사인은요?"
"과격한 정사에 의한 심장마비라고
추측됩니다. 기도가 막혔거나......"
감식반은 조영애의 시신을 검안한 뒤
정액과 지문을 채취하고 머리카락,
담배꽁초, 범인의 것으로 보이는 체모
20여개를 수거했다. 그리고 지문과 정액을
감식차량에서 분석한 결과 범인은 1명이고,
조영애의 사인은 과격한 정사에 의한 국부
파열과 심장마비라고 잠정 결론을 내렸다.
폭행했는데 조영애는 범인의 커다란 성기를
감당하지 못하고 죽었다는 것이었다.
하석주는 그 얘기를 듣고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는 것일까, 범인의 성기가
얼마나 크기에 조영애가 감당하지 못하고
죽은 것일까, 하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
와중에도 조영애가 범인의 성기를 몸속에
받아들일 때 어떤 기분을 느꼈을까 하는
생각을 했다. 조영애가 범인의 등을
끌어안고 허우적대다가 숨이 끊어지는
상상을 하자 다시 비감해져 왔다.
"없어진 물건이 있는지 확인해
보십시오."
최형사라는 사람이 하석주의 등을
두드렸다.
그 거리의 건물들은 하나 같이 우중충한
벌집 구조를 이루고 있었다. 건물이
낡은데다 철로변에 위치하고 있어서
주거용으로 적합치 않았다. 그래도 가난한
사람들, 시장의 장사치들, 공장의
노동자들, 술집에 다니는 사람들이
개미처럼 바글거렸다. 건물의 유리창마다
흙먼지가 잔뜩 달라붙어 있었고 깨어진
유리창을 베니어 합판으로 틀어막은 곳도
있었다. 그것들은 한여름에도 열리지 않는
붙박이 유리창이었다.
골목은 더러웠다. 여기저기 연탄재가
쌓여 있고, 취객들이 방뇨하고 토해 놓은
배설물과 음식 찌꺼기들이 함부로 버려져
풍겼다.
건물의 반대편에는 물이 마른 하천이
있었다. 그 하천은 장마가질 때만 물이
넘쳤고 평소에는 근처의 건물에서 버린
생활하수가 악취를 풍기며 흘러가고 있을
뿐이었다. 게다가 사람들은 그곳에다
쓰레기까지 갖다 버리고 있었다.
M은 철도 건널목을 건너 개천둑을 따라
걸었다. 여름엔 둑길이 제법 시원하기까지
했으나 한겨울인 지금은 을씨년스럽기만
하였다.
M은 개천둑을 따라 계속 걸었다. 10분쯤
개천둑을 걷자 포플라숲이 보였다.
나무들은 차가운 겨울 하늘 아래 앙상한
가지를 뻗고 있었다. M은 포플라숲을 지나
다리를 건넜다. 다리 건너편 넓은 벌판
있었다. M이 살고 있는 집이었다.
M은 코트에서 담배를 꺼내 물었다.
바람이 세차게 불고 있어서 담뱃불을
붙이는 것이 쉽지 않았다. 담뱃불을 붙이고
시계를 보자 오후 2시였다.
가방을 들고 있는 손이 시려왔다.
이순호의 가죽장갑을 조영애의 집에 놔두고
왔던 것이다. 가방을 들고 조영애의 집을
나온 조금 후에야 M은 비로소 장갑을 두고
나온 것을 알았으나 다시 들어갈 수는
없었다.
멀리서 기적소리가 들렸다. M이 고개를
돌리자 하행선 열차가 서울에서 덜컹대며
달려오고 있었다. 중앙선을 달리는
주황색의 무궁화호였다. 열차가 천변의
다리를 건널 때는 와랑대는 소리가 유난히
M은 담배연기를 길게 내뿜고 열차가
달려가는 것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가방이 제법 묵직했다. 열차는 기적소리를
길게 울리며 저 멀리 황량한 벌판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M의 눈가에 문득 아련한 그리움이
안개처럼 피어났다. 열차가 보이지 않자
M은 다시 집으로 걸음을 떼어 놓았다.
대문은 잠겨 있었다. 대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대문 안에서 낑낑거리고 있던
누렁이가 달려와 M의 다리를 핥아댔다.
"가만 있어!"
M은 개를 쫓고 현관으로 들어갔다.
거실은 썰렁한 냉기가 돌고 있었다.
보일러가 꺼진 채 그대로 있었다. M은
가방을 거실에 놓고 1층과 2층의 방들을
않나 해서였다. 다행히 침입자가 들어온
흔적은 없었다. M은 기분이 좋아졌다.
M은 보일러의 스위치를 넣었다. 목욕을
하고 싶어졌다. 그러나 물이 따뜻해지려면
30분은 기다려야 할 거라고 생각했다.
M은 가방을 들고 침실로 들어갔다.
코트를 벗어 낡은 장롱 속에 넣고 쇠침대에
올라가 누웠다. 온몸이 솜뭉치처럼
피곤했다. 그러나 쉽사리 잠이 오지
않았다.
M은 침대에서 일어나 주방으로 갔다.
주방에 먹다 남은 쏘세지가 있었다. 그는
그것을 가지고 침실로 들어가 가방에서
양주병을 꺼냈다. 조영애의 집에서 가져온
것이었다. M은 구석에 있는 석유난로에
불을 붙였다. 방안이 조금 따뜻해졌다.
마신 뒤 쏘세지를 으적으적 씹었다.
그리고는 가방 속의 옷가지들을 꺼내기
시작했다. 대부분 속옷과 스커트,
블라우스들이었다. M은 그것들을 차례차례
분류했다.
팬티는 모두 삼각형으로 열일곱 장이나
되었다. 어떤 것은 속살이 훤히 내비치는
것도 있었고 어떤 것은 장미꽃이 수 놓아진
것도 있었다.
시미즈는 세 벌이었고, 블라우스는 네
벌, 스커트는 일곱 벌이었다. 브래지어는
한 번도 착용하지 않은 것이 두 개였다.
팬티 한 장을 집어서 코끝에 대보았다.
면 냄새가 향긋하게 풍겼다. 마치 조영애의
살 냄새를 맡기라도 하듯이 몸을 떨면서 그
냄새를 오랫동안 음미했다.
뱃속이 찌르르 했다. 울 스커트와 재킷을
벗어 한쪽에 개어 놓았다. 그리고는
스타킹을 벗고 팬티도 벗어서 침대 밑에
쑤셔 넣은 뒤 조영애의 팬티 한 장을
입었다.
기분이 야릇했다. M은 석유난로를 끄고
다시 쇠침대에 올라가 누웠다. 방안이
아직도 썰렁했으나 이불을 뒤집어쓰자
냉기는 그런대로 견딜 만했다.
따뜻한 물이 나오기 시작하자 그는 욕탕
속에 들어가 나른해진 몸을 풀었다. 목욕이
끝나자, M은 눈을 감고 잠을 청했다.
창문이 덜컹대고 흔들렸다. 바람이 허공을
달리며 아우성을 치고 있었다.
M은 선잠을 잤다. 잠이 깊지 않아서
머리맡이 어수선했다. 유리창을 흔들어대는
바람소리에 섞여 고향에서 울리는 징소리
같은 것이 들렸다. M은 점점 잠의 깊은
나락 속으로 빠져들었다.
M은 한밤중에 잠깐 동안 눈이 떠졌다.
바람소리가 더욱 거칠어져 있었다. 창문이
덜컹대는 소리에 집이 떠나갈 것 같았다.
M은 우두커니 허공을 쳐다보다가 다시
잠을 잤다.
이튿날 M은 날이 훤하게 밝은 뒤에야
잠에서 깨어났다.
날씨가 차가웠다. 유리창에는 성에가
하얗게 끼어 있었다. M은 침대에서
일어나자 아침 준비를 서둘렀다. 연휴가
끝난 것이다. 이제는 공장에 출근을 해야
했다. 밥통에는 찬밥이 그대로 있었다. M은
찬밤에 고추장과 김치를 넣고 비볐다. 밥이
없었다.
M은 아침식사가 끝나자 욕실에 들어가
이를 닦고 찬물로 세수를 했다. 7시가
지났는데도 밖은 캄캄했다. 겨울이라
해뜨는 시간이 늦은 것이다.
M은 세수를 끝내자 서둘러 화장을 했다.
날씨가 추웠으나 바람이 그친 것만 해도
다행이었다.
출근 준비가 끝나 집을 나올 때 M은 몇
번이나 문이 잠겼는지 확인을 했다. 언젠가
도둑이 들어와 TV와 카세트를 가져가고
옷장을 마구 흩뜨려 놓았던 적이 있었다.
M은 그때 군중들 앞에서 알몸을 드러낸 것
같은 모멸감을 느꼈었다.
버스를 탄 것은 8시가 되었을 때였다.
날은 그때서야 부옇게 밝아오고 있었다.
내다보았다. 마음속으로 이제 또 지겨운
하루가 시작되었구나, 나는 언제나 이
지겨운 생활을 그만둘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을 했다.
공장 앞에 도착한 것은 8시30분이었다.
M이 정문 안으로 들어서자 마자 작업시작을
알리는 벨소리가 요란하게 울렸다.
"아줌마는 오늘도 시계바늘일세."
경비원 전씨가 정문을 들어서는 M에게
수작을 붙였다. 정문 경비실엔 공장장이
앉아서 출근하는 여공들을 내다보고
있었다. 여공들이 지작을 자주하자
공장장이 정문 경비실에 나와 앉아 있는
것이다. M은 경비 전씨의 말에 아무 대꾸도
하지 않고 작업실로 들어갔다.
옷을 갈아입을 필요는 없었다. M은 벽에
작업실도 추웠다. 스팀은 미지근하게
들어오고 있을 뿐이었다.
"아유, 추워. 이 자석은 공무실에만
스팀을 쌩쌩하게 넣고 현장은 왜 이렇게
춥게 만들어?"
M의 맞은편 미싱기에 앉아 있는
권숙자(權淑子)가 몸을 부르르 떨며
신경질을 부렸다. 보일러 기사를 욕하는
소리였다. 권숙자는 스물일곱 살의
노처녀였다.
M은 스위치를 넣고 미싱기를 돌리기
시작했다.
"에너지 절약이란다."
권숙자의 옆에 앉아 있는
김정분(金貞分)이 빈정거렸다. 마흔두살
먹은 여자로 몸이 뚱뚱했다.
게 별건지 알아? 현장 따뜻하게 해서 생산
능률 올리면 그게 생산성 향상이지. 기름
몇 방울 아끼는 게 생산성 향상이야?"
"아침부터 열 올리지 마."
여기저기서 미싱기 돌아가는 소리가
드륵드륵 들려왔다. 권숙자도 입으로는
떠들면서도 미싱기를 열심히 돌리고
있었다. 봉급이 능률제인지라 청바지를 한
벌이라도 더 만들어야 봉급이 많아지는
것이다.
그들이 만들고 있는 것은 흑마표
블루진이었다. 원단을 직물공장에서
공급받아 재봉을 하여 <원일실업>에
납품하면 원일실업 레테르를 붙여 전국적인
매장을 통해 판매하는 것이다.
"어제 뭐 했어?"
한영숙(韓英淑)이 물었다. 한영숙은 서른두
살의 과부였다. M이 서른다섯 살이라고
거짓말을 했기 때문에 깍듯이 언니라고
부르고 있었다.
"집에 있었어."
M은 심드렁하게 대꾸했다.
공장의 누구와도 가깝게 지내지 않는
것이 M의 철학이었다. 공장 사람들은
조금만 관심을 주어도 집으로 찾아오기
때문에 가깝게 지내지 않고 있었다. 공장
사람들과 가깝게 지내면 자신의 비밀이
탄로날까봐 두려웠다.
"어제 나 남자 만났어."
한영숙이 얼굴을 붉히며 낮게
소곤거렸다. 한영숙답지 않은 짓이었다.
"남자?"
M은 별로 놀라지도 않고 한영숙을
쳐다보았다. 한영숙이 남자를 만나는 것은
새로운 소식도 아니었다.
"응."
한영숙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래서 파마도 하고 화장도 한
모양이지?"
M은 공연히 가슴속이 허전해 왔다.
한영숙은 얼굴이 예쁘장한 여자였다.
스물두 살에 결혼을 하여 스물세 살에
남편이 고통사고로 죽은 뒤 지금까지
혼자서 살고 있었다. 얼굴이 예쁜 탓에
주위에 남자가 많았다. 공장 안에 한영숙이
공무부장과 여관에 들어가는 걸 봤다느니,
공무부장과는 끝나고 생산부장과 놀아나고
있다는 말도 나돌았다.
"응."
"응, 몇달."
"좋아해?"
"그럼."
"결혼할 거야?"
"그쪽에서는 결혼하재."
"몇 살된 남자인데......"
"스물여섯."
"남자가 나이가 더 적네?"
"응, 그 사람은 총각이야."
"좋겠다. 총각하구 연애해서......"
M은 더 이상 관심을 보이지 않고 다시
미싱기를 돌리기 시작했다. 생산부
사무실에서 생산부장 김인구(金仁九)가
내려와 이쪽으로 걸어오고 있었다.
"언니 이따가 점심 때 얘기 좀 해."
한영숙이 귓속말로 M에게 말했다.
M이 의아한 얼굴로 한영숙을 돌아보았다.
"그냥 상의하고 싶어서 그래."
생산부장이 주위를 살피다가 한영숙에게
슬그머니 흰 종이쪽지를 주고 검사부로
걸어갔다. M은 여전히 못 본 척했다.
그런데 한영숙이 울상을 짓고 있었다.
"왜 그래?"
"만나재. 만나자는 쪽지야."
한영숙이 종이쪽지를 두손으로
구겨쥐었다. 얼굴이 흙빛으로 변해 있었다.
이내 점심시간이 되었다. M은
구내식당에서 점심을 먹은 뒤 한영숙을
따라 옥상으로 올라갔다.
"언니, 나 어떻게 하면 좋아?"
한영숙은 옥상으로 올라가자 발을 동동
굴렀다. M은 아무 대꾸없이 한영숙을
"김부장님이 결혼하지 말래."
김부장은 생산부 김인구 부장을 말하는
것이었다.
"왜?"
"결혼하면 죽여 버린대."
"......"
"김부장은 너무 무서운 사람이야. 정말로
나를 죽여 버릴지도 몰라."
M은 한영숙의 어깨를 다독거렸다.
"그냥 협박하는 거야."
"내가 결혼을 하면 나 하고 자기 하고의
관계를 그 사람한테 폭로할지도 몰라."
"괜찮아."
"정말 괜찮을까?"
"그 사람도 가정이 있는 사람이야.
가정이 있는 사람이 어떻게 그런 짓을
"언니!"
한영숙이 울음을 터뜨렸다. M은 한영숙을
안아서 어깨를 두드려 주었다. 한영숙의
몸에서 좋은 냄새가 풍겼다. M은 갑자기
하체가 뻐근해져 오는 것을 느꼈다. 여자의
지분 냄새에 그것이 팽팽하게 일어서고
있었다. 견딜 수 없는 유혹이었다.
(이 여자를 죽이고 싶어......)
M은 숨이 가빠왔다.
가슴이 뛰고 얼굴이 화끈거렸다. 그러나
그것을 억제해야 했다. 기다리다 보면
기회는 반드시 찾아오는 법이었다.
"그 사람 오늘밤에 우리 집에 온대."
"만나지 마."
"어떻게 안 만나?"
"밖에 나갔다가 늦게 들어가면 되잖아?"
"끈질긴 사람이군."
"언니가 우리 집에 가서 같이 잘래?"
"안돼."
"왜?"
"나 오늘 할 일이 있어."
M은 거짓말을 했다. 할 일이 있어서가
아니었다. 한영숙과 같이 자는 것은 상관이
없었으나 한영숙에게 자신의 비밀이
밝혀질까봐 두려웠기 때문이었다.
작업은 8시가 되어서야 끝이 났다.
잔업을 2시간이나 했던 것이다. 공장은
작업이 밀려 있었다. 겨울이었다. 청바지
소모가 많은 계절이었다. 그러나 잔업을
했기 때문에 식권을 나누어 주었으므로
저녁을 하지 않아도 되었다. M은 사내
식당에서 저녁을 먹고 퇴근했다.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철도 건널목
못미처서 버스를 내린 뒤 걸어서 집으로
돌아왔다. 집은 보일러가 돌아가지 않아
썰렁했다. M은 보일러의 스위치를 넣고
집안을 세밀히 살폈다. 집에 침입자가
있는지 없는지 살피는 것은 이제 그의
일과가 되어 있었다.
보일러가 30분쯤 돌아가자 실내가
훈훈해지기 시작했다. M은 목욕을 한 뒤에
손수 커피를 끓여 마셨다. 아직 잠을 잘
시간이 아니었다.
M은 성서를 꺼내 읽기 시작했다. M이
좋아하는 성서는 요한의 묵시록이었다.
묵시록 중에서도 특히 12장에 나오는
<여자와 용>을 좋아했다.
M은 소리를 내어 그 부분을 읽어
한 여자가 태양을 입고 달을 밟고 열두
개의 별이 반짝이는 월계관을 머리에 쓰고
나타났습니다. 그 여자는 뱃속에 아이를
가졌으며 해산의 진통과 괴로움 때문에
울고 있었습니다. 또 다른 표징이 하늘에
나타났습니다. 이번에는 커다란 붉은 용이
나타났는데 일곱 개의 머리와 열 개의 뿔을
가졌고 머리마다 왕관이 씌워져
있었습니다.
그 용은 자기 꼬리로 하늘의 별 삼분의
일을 휩쓸어 땅으로 내던졌습니다.
그리고는 막 해산하려는 그 여자 앞에 서서
여자가 아기를 낳기만 하면 그 아기를 삼켜
버리려 하고 있었습니다.
마침내 그 여자는 아들을 낳았습니다. 그
분이었습니다. 별안간 그 아기는 하느님과
그 분의 옥좌가 있는 곳으로 들려 올라갔고
그 여자는 광야로 도망갔습니다. 그곳은
하느님께서 천이백육십 일 동안 그 여자를
먹여살리시려고 마련해 두신 곳이었습니다.
M은 그곳을 두 번이나 되풀이해서
읽었다. 한 여자가 태양을 입고 달을 밟고
열두 개의 별이 반짝이는 월계관을 쓰고
나타났다는 귀절을 읽은 때는 자신도
모르게 기분이 유쾌했다. 그 여자는 만국을
다스릴 아기를 낳았다, 라는 귀절에서는
자신의 배가 불러오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M은 성서 읽기가 끝나자 조영애의 집에서
가지고 나온 가방에서 내용물들을 꺼냈다.
어제 낮에 일일이 확인한 것들이었다. M은
M은 옷을 모두 벗고 알몸이 되었다. 그는
팬티부터 차례차례 여러 가지 옷들을 입어
보았다. 옷은 모두 비싼 것이고
면제품이어서 착용감이 황홀할 정도였다.
M이 그 옷들을 모두 입어 보는데는 두
시간이나 걸렸다.
M은 소꼽장난과 같은 그 일을 모두 마친
뒤에야 쇠침대에 누웠다. 자정이 가까워져
있었다. 바람은 불지 않았으나 이따금 언
하늘이 갈라지는 소리가 들렸다.
이튿날 아침 M이 공장에 출근하자
한영숙은 고개를 푹 숙이고 있었다. 왼쪽
눈이 시퍼렇게 멍이 들어 있었다. 여자들이
귓속말로 김부장 짓이야, 한영숙이가
결혼을 한다니까 저렇게 두들겨
팼대......하고 수근거렸다.
있었다. M에게 무슨 말인가 할듯하다가
그만두곤 했다.
그날밤 M은 교회에 갔다. 손에는 두툼한
성경책과 찬송가책을 들고서였다. M이
교회에 다니기 시작한 것은 불과 3개월
전부터였다.
"성도 여러분! 이제 7년 대환란이 눈앞에
닥쳐왔습니다. 회개하십시오! 회개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십시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태양처럼 붉은 옷을 입고
달을 밟고 서 있는 여인의 몸을 통해
재림할 것입니다.
그때 이 세상은 암흑 천지가 되어
일시적으로 악마의 제자인 적 그리스도가
출현할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적 그리스도가 되려고 합니까? 아니면 우리
성도 여러분 회개하십시오!
회개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십시오!
나는 예수 그리스도의 성령을 받았습니다!
성령의 이름으로 여러분에게 명령합니다!
회개하십시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만이 들림을 받아 새 예루살렘을
도성을 볼 수 있는 영광을 얻을 것입니다!"
목사의 설교는 언제나 그렇듯이 침을
튀길 듯이 격렬했다. 신자들은 목사가
주먹을 쳐들고 흔들 때마다 아멘,
아멘......하고 소리쳐 외쳤다.
"기도합시다!"
목사가 눈을 감고 주먹을 모아쥐었다.
광분한 것처럼 아멘을 소리치던 신자들이
일제히 무릎을 꿇고 두 손을 모았다.
"하나님 아버지! 오늘 우리 성도들이
따르려 하나이다. 거룩하신 하나님 아버지!
악의 구렁텅이에 빠져 신음하는 우리
죄인들을 긍휼히 여기시고 7년 대환란이
닥치기 전에 우리를 새 예루살렘 도성으로
들어올려 주소서. 우리는 당신이 성령을
보내어 약속하신 10월8일에 당신 나라로
들어올려지기를 간절히 비옵나이다......"
기도가 끝나면 찬송가 차례였다.
신자들은 북과 밴드의 반주에 따라 악을
쓰듯이 찬송가를 불러댔다. 목사와
신자들이 뿜어대는 열기에 교회가 떠날갈
것 같았다.
M은 그때쯤 교회를 슬그머니 빠져나왔다.
M이 교회에 나가고 있는 것은 예수를
믿어서도 아니고 목사의 설교가 좋아서도
아니었다. M은 목사와 교회의 신자들이
싶어 교회를 나가고 있을 뿐이었다.
(사람들은 성령이라고 하면 무조건
믿어......)
이상한 현상이고 이상한 열기였다.
"나 이제 공장 그만둘 거야."
이튿날 공장에 출근하자 한영숙이 M에게
다가와 귓속말로 속삭였다.
"왜?"
M은 주위를 살핀 뒤 낮게 물었다.
사람들은 미싱 작업에만 열중하고 있었다.
"그 사람한테 얘기했어."
"무슨 얘기?"
"김부장 얘기. 귀찮게 군다고 했어.
그랬더니 그 사람이 자기 방에 와서 그래."
"그럼 그 사람 방에 있을 거야?"
"응, 나 그 사람이 좋아."
"언제 그만둘 건데?"
"이달 말까지만 일하고 그만둘 거야.
공장장님이 이달까지만 일해 달래."
M은 고개를 끄덕거렸다. 한영숙이
앞으로도 한 달 가까이 같이 일할 수
있다는 사실에 이유를 알 수 없는 안도감이
들었다.
"언니는 시집 안 가?"
"나는 그냥 혼자 살 거야."
"보일러가 기사가 언니를 좋아하는
눈치던데 마음에 들면 같이 살지 그래?"
M은 쓸쓸하게 웃으며 고개를 흔들었다.
보일러 기사 이동일(李東一)의 얼굴이
눈앞에 떠올라 왔다. 이동일은 서른네 살의
청년이었다. 눈섶이 짙고 입술이 두툼했다.
"키도 크고 괜찮잖아?"
"언닌 참 이상해. 내가 그 사람 소개해
줄께 놀러올래?"
"니가 만나는 남자?"
"응."
"내가 니 남자를 만나서 뭘해? 괜히
쑥스럽기나 하지......나중에 결혼한 뒤에
보자."
한영숙은 M의 대꾸에 더 이상 얘기하지
않았다. M은 미싱기를 돌리면서 한영숙의
남자에 대해서 생각했다. 한영숙의 남자는
젊고 결혼하지 않은 총각이다. 한영숙이
예쁘장하게 생겼다고는 해도 결혼까지
하려고 결심한 이유가 이해되지 않았다.
한영숙은 남자 관계가 복잡한 여자였다.
첫번 결혼에 실패했다고 하지만 복잡한
남자 관계로 인해 공장에서도 소문이 좋지
소문까지 공장에 나돌았었다. 그런
한영숙과 결혼을 하려고 결심한 남자는
누구일까. 그 남자는 한영숙에게서 어떤
매력을 느꼈기에 결혼까지 하려고 한
것일까. 이런 생각이 머리 속을 어수선하게
했다.
점심시간이 지났다. 날씨는 여전히 살을
에일 듯이 추웠다. M은 재봉을 하다 말고
이따금 윤기없이 매끄러운 하늘을 창밖으로
쳐다보았다. 유난히 추운 날씨였다. 스팀이
계속 들어와도 작업장의 온도는 영상
10도를 넘지 못했다. 손이 시리고 하체로
찬바람이 솔솔 돌았다.
M은 작업이 끝나자 곧장 집으로
돌아왔다. 몸이 으슬으슬 떨렸다. 감기
기운이 있는 것일까. M은 열차소리를
번이나 잠에서 깨고 다시 잠이 들곤 했다.
열은 점점 심해져 갔다.
M은 잠이 들면 꿈을 꾸었고 꿈을 꾸면 흰
옷을 입은 여인을 보았다. 여인은 어둠
속에서 하얗게 솟아오르고 있었다.
꿈은 계속해서 되풀이되었다. 방이 자꾸
어둠 속에서 떠오르고 있었다. M은 자신이
공중으로 들어올려지는 듯한 기분을
느꼈다. 마치 그 어떤 신비한 힘에 의해
자신이 공중으로 들어올림을 당하고 있는
기분이었다.
이따금 하체가 뻐근하게 느껴질 때가
있었다. 그럴 때면 흰 옷을 입은 여자가
발가벗은 알몸이 되어 있었다. M은 여자의
가슴 위에 붙어 있는 두 개의 두 개의
커다란 유방과 허벅지 사이에 붙어 있는
갔다.
"누, 누나......"
M은 그럴 때마다 헛쇠를 하듯이
중얼거리며 허공에 대고 손을 흔들었다. 흰
옷을 입은 여자는 그의 사촌 누나였다.
포플라숲이었다. 누나가 한 겹 한 겹 옷을
벗고 있었다. M은 포플라 등걸에 숨어서
누나의 알몸을 훔쳐보았다.
달빛은 포플라 잎사귀를 헤치고 누나의
알몸에 하얗게 부서셔 내렸다.
누나가 강으로 달려갔다. 모래밭을
달려가는 누나가 요정처럼 아름다웠다. M은
누나가 옷을 벗어 놓은 곳으로 걸어갔다.
강에서 풍덩 하는 소리와 함께 물장구를
치는 소리가 들렸다.
M은 누나의 옷을 조심스럽게 가슴에
풍겼다.
꿈이 바뀌었다. 누나가 그를 끌어안고
하얗게 웃고 있었다. M은 하체로 짜릿한
전류가 흐르는 것을 느꼈다. 정신없이
누나의 가슴에 얼굴을 가져가 젖가슴을 한
입 베어물었다.
"이 미친 놈!"
그때 어머니가 갑자기 나타나 몽둥이로
그의 등짝을 후려쳤다. 고개를 돌리자
어머니는 간 곳이 없고 마을 사람들이
모여서 그를 손가락질하며 깔깔대고
있었다. 그는 알몸이었다.
그는 포플라숲을 마구 달리기 시작했다.
사람들의 웃음소리가 더욱 크게 들렸다.
그를 비웃는 소리였다. 등줄기로 식은땀이
흥건하게 흘러내렸다.......
M은 이마에 맺혀 있는 식은땀을 주먹으로
문지르고 낮게 한숨을 내쉬었다. 사방이
칠흑처럼 어두웠다.
(난 저주를 받았어......)
M은 천장을 쏘아보며 그런 생각을 했다.
다음날 M은 공장에 출근을 하지 않았다.
열이 점점 높아져 갔다. 아울러 하체가
팽팽하게 부풀어서 수그러들지를 않았다.
M은 눈이 충혈되고 진물이 흘러내렸다.
그 다음날도 M은 결근을 했다. 약방에서
감기약을 조제해 먹었으나 아무 소용이
없었다. M은 자신의 몸에서 일어난 변화가
무엇 때문인지 그때서야 깨달았다. 그것을
억제하려고 했으나 소용이 없었다.
M은 어둠이 내리자 집을 나와 거리로
진물이 계속해서 흘러내리고 있었다. 그는
자신의 몸 속에 악마의 피가 흐르고 있는
것을 알았다. 그것은 광기처럼 격렬하게
뛰고 있었다.
M은 버스를 탔다. 가능한 한 집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서 일을 저지르기 위해
시외버스를 탔다. 경찰이 수사를 하더라도
사건 현장과 멀리 떨어져 있는 것이
유리했다.
M은 창가에 앉았다. 철도 건널목
근처에서 버스를 탔을 때는 사람들이 얼마
없었으나 점점 사람들이 많아졌다. 하루의
일을 끝내고 돌아가는 사람들이었다.
M은 버스 안의 승객들을 천천히 살폈다.
승객들이 빽빽하게 들어차 있었다. 버스가
출발한 지 한 시간쯤 되자 마침내 승객들은
M은 한 여자에게 시선을 고정시켰다. 그
여자는 M의 자리에서 두 번째 앞에 앉아
있었다. 파마머리가 풍성했고 이어링을
하고 있었다. 이어링은 노란 색으로 금줄이
달려 있었다. 희고 뽀얀 목덜미 부분이
규칙적으로 움직이고 있는 것을 보면 껌을
씹고 있는 모양이었다.
어깨는 둥글고 부드러웠다. 20초반의
아가씨로 보였다.
아가씨가 몸을 일으켰다. 버스
종점이었다. M은 승객들을 따라 버스에서
내렸다.
아가씨는 어떤 남자와 팔짱을 끼고
시외버스 터미널을 빠져나갔다. M은 실망을
했다. 남자는 터미널에서 아가씨를
기다리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30분쯤 벗어난 곳이었다. 터미널을 나온
M은 오른쪽으로 꺾어 들었다. 술집이
즐비했다. <워터루>라는 카페 아래 미니
스커트를 입은 한 여자가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었다. M은 골목에 서서 그
여자를 쏘아보았다. 그 여자가 마음에
들었다.
30분쯤 기다렸을 때 여자가 기다리는
남자가 나타났다. 40대의 뚱뚱한 남자였다.
여자는 팔짝거리고 뛰어가 남자의 팔에
매달렸다.
M은 다른 골목으로 걸어갔다. <낙원
카바레>라는 네온싸인이 눈에 들어왔다.
카바레는 복합건물의 3층에 있었다.
M은 골목에서 담배를 피워 물었다.
카바레이기 때문인지 남자들과 나이 많은
M은 카바레 입구를 쳐다보았다. 카바레
뒤로 여관이 즐비했다. M은 여관 골목으로
들어갔다. 카바레 앞에서 기다리는 것은
무망한 일이었다.
여관 골목을 계속 걸어가자 터미널이
나타났다. M은 의정부행 버스를 탔다.
버스는 구리시를 벗어나 먹골 쪽으로
꺾어들었다. 배밭이 많은 곳이었다. M은
중간쯤에서 버스를 내렸다.
버스정류장은 한적했다. 불빛이 반짝이는
것으로 보아 마을은 한참이나 멀리 떨어져
있는 것 같았다. M은 그곳이 마음에
들었다. 어둠이 기분좋게 시위를 감싸고
있었다. 밤바람이 몹시 매서워 M은 옷깃을
올리고 웅크렸다.
장윤주(張潤珠)는 얼굴을 뒤로 젖히고
눈을 감았다.
드레스를 풀어 헤친 사내의 입술이
그녀의 젖무덤에 닿았다. 장윤주는 벽에
등을 기댄 채 사내의 머리를 두 손으로
감싸안았다.
"천천히......"
장윤주가 가쁜 헐떡거리며 속삭였다.
사내가 그녀의 가슴을 한입 가득히
베어물자 몸이 부르르 떨렸다. 전율과 같은
쾌감이 하체 깊은 곳에서 물결치듯 빠르게
전신으로 번지고 있었다.
"서두르는 것은 싫어......"
장윤주는 그녀의 가슴에서 사내의 얼굴을
사내가 뒤에서 두 팔로 장윤주를 안아
왔다. 사내의 축축한 입술이 그녀의
목덜미를 적셨다.
"얘기해 줘."
그의 손이 앞으로 뻗어나와 장윤주의
가슴을 움켜쥐었다.
"무슨 얘기?"
"아무 얘기나. 아무 얘기나 듣고 싶어."
"사랑해."
장윤주는 손을 뻗어 뒤로 가져갔다.
관능적인 감미로움이 또 다시 하체에서
전신으로 물결치듯 퍼져나갔다.
"사랑해."
"아이."
장윤주는 그의 바지 혁대를 한 손으로
풀었다. 입에서 단내가 훅 풍겼다.
그녀의 드레스 자락을 허리 위로
걷어올리며 입술을 부벼댔다. 장윤주는
벽에 등을 버티고 서서 두 손으로 그의
바지 지퍼를 내렸다. 그의 혀가 입술을
열고 안으로 들어왔다.
장윤주는 결코 세차게 빨아들이는 짓은
하지 않았다.
바지가 흘러 내려갔다. 장윤주는 그의
와이셔츠 단추를 풀기 시작했다. 그의 손은
허벅지에서 안쪽 깊숙한 곳으로 들어오며
그녀를 흥분시켜 나갔다.
"샤워부터 해......"
장윤주는 무릎은 끓었다. 남자는 스스로
와이셔츠를 벗고 내의를 벗었다.
"다리가 튼튼해. 멋져......"
장윤주는 그의 다리를 쓰다듬었다.
장윤주의 손이 남자의 허벅지를 애무하다가
삼각형의 속옷 위에 머물렀다. 남자의
그것은 이미 줄무늬의 팬티를 뚫어버릴
듯이 팽팽하게 솟아 있었다.
"사랑해."
장윤주의 그곳으로 자신의 얼굴을
가져갔다. 남자의 손이 그녀의 머리를
감싸안았다.
장윤주가 남자의 둔부를 걸쳐져 있는
삼각형 속옷을 끌어내렸다. 남자는 그리스
조각처럼 체격이 단단했다. 장윤주는 홀린
듯이 그것을 바라보고 있다가 남자의 몸을
쓰다듬기 시작했다.
"음."
남자의 입에서 신음이 스타카토로
흘러나왔다. 드레스가 미끄럼을 타듯이
그녀의 등에 현란한 꽃무늬를 그려 나갔다.
장윤주는 벽에 가슴을 바짝 밀착시켰다.
다리가 후들거리고 떨려 의지할 곳이
필요했다.
남자의 손이 그녀의 둔부에서 허벅지로,
허벅지에서 둔부로 쉴새없이 여행을 했다.
장윤주는 남자의 손을 잡아서 자신의
은밀한 곳을 덮어 누르게 했다. 그곳이
남자의 강한 자극을 원하고 있었다.
"애무해 줘."
그녀가 속삭였다. 남자의 손이 속옷 위로
그녀의 도톰하고 보드라운 부분을
쓰다듬었다.
"아......"
여자의 얼굴이 뒤로 젖혀졌다.
남자가 그녀를 돌려 세웠다. 그녀는
남자를 갖고 싶다, 남자의 그것을 자신의
몸 속에 넣고 싶다......, 그러한 욕망이
그녀의 내부에서 강렬하게 회오리치고
있다.
최천식(崔天植) 형사는 눈을 감은 채
여자가 가쁜 호흡을 고르는 소리를 들었다.
피가 튀는 것처럼 격렬한 정사였다. 시간이
얼마나 되었을까. 12시가 지났으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장안동 파출소에 설치되어 있는
수사본부를 나온 것은 9시, 형사들과 함께
저녁을 먹고 간단하게 술추렴을 하자
10시30분이 지나 있었다.
동료 형사들과 헤어져 집으로 향하던
최형사는 눈앞에 히프를 살랑살랑 흔들며
걸어가는 여자의 뒷모습에 자신도 모르게
허리 아래 반구(半球)형의 팽팽한 둔부가
자극적으로 흔들리고 있었다.
(제기랄!)
최형사는 바지 앞섶이 볼록해지는 것을
깨달으며 걸음을 돌렸다. 아내가 죽은
뒤에도 섹스에 대한 욕망은 시도 때도 없이
불쑥불쑥 일어나 그를 괴롭혔다.
조영애의 피살사건은 공전을 거듭하고
있었다. 무엇보다도 조영애의 사인이
맹랑하기 짝이 없었다. 조영애의 사체를
부검한 국립과학수사연구소의 부검 팀이나
감식반의 의견은 한결 같았다.
사망 원인 : 과도한 정사에 의한
심장마비. 질 내부다 완전히 파괴되었음.
막대기나 기타의 흉기에 의한 파괴가
보임.......
어처구니 없는 일이었다. 범인은 한
차례도 아니고 여러 차례에 걸쳐 조영애를
폭행했고, 현장에서 채취된 정액의 양도
보통 사람의 몇 배에 해당된다는
소견이었다.
현장에서는 정액은 물론 범인의 지문이
여러 개 채취되었고 체모도 수거되었다.
정액과 체모에 의한 검사로 범인의
혈액형은 AB형으로 판명되었다. 그러나
목격자가 전혀 없었다. 범인의 지문 역시
전과자 조회를 했으나 확인이 되지 않고
있었다.
피해자 주변에 대한 수사도 뚜렷한
진척이 없었다. 하석주는 알리바이가
달랐다.
조영애의 남자 관계는 복잡했다. 내연의
관계를 맺고 있는 하석주 외에도 2명의
사내가 정기적으로 만나고 있었다. 그러나
그들에게서도 혐의점을 찾을 수가 없었다.
"사건은 간단해. 범인은 변태성욕자야.
성기가 보통 사람들보다 몇 배나 크고
조영애와 면식 관계가 없어. 무엇보다
철망을 뜯고 침입했다는 사실이 그걸
증명하잖아? 성기가 유난히 큰 놈을 찾아.
그놈이 범인이야."
본서의 수사과장은 간단하게 결론을
내렸다.
"성기가 얼마나 큰 놈입니까?"
형사 중에 짖궂기로 소문난 이형사가
실없는 질문을 던졌다.
수사과장이 투명스럽게 내뱉었다. 장안동
파출소에서 수사회의를 하던 형사들은 그
소리에 일제히 웃음을 터뜨렸다.
"목욕탕을 집중적으로 수사해. 여자를
죽일 정도로 성기가 큰 놈이면 금방 알아낼
수 있을 거야."
그러나 목욕탕에 대한 수사도 별다른
진전이 없었다.
"아......웬일이야?"
장윤주는 싸롱 <초우>를 경영하고
있었다. 최형사가 도착했을 때 셔텨문을
내리고 있었다.
"보고 싶어서."
최형사는 시원스럽게 패여 있는 장윤주의
가슴께로 시선을 던지며 싱겁게 웃었다.
장윤주는 드레스 안에 아무 것도 걸치지
"싱겁기는."
장윤주가 눈을 흘기며 웃었다. 그리고 두
손으로 가슴을 가렸다.
"그건 왜 가려?"
"뭐?"
"가슴 보라고 가슴을 열어 놓은 거
아니야?"
"기가 막혀!"
장윤주가 입을 가리고 밝게 웃었다.
"술 마실래?"
"주면 마시지."
"나하고 우리 집에 가."
"집에 아무도 없어?"
"응."
그렇게 해서 장윤주의 차를 타고
길음동까지 온 최형사였다. 최형사가 싸롱
6개월쯤 전의 일이었다. 동료 형사들과
소주파티를 마치고 혼자서 2차를 마시러간
곳이 초우였다.
싸롱 초우는 룸 카페와 비슷한
술집이었는데 카운터에 30대의 까만
드레스를 입은 여자가 앉아 있었다.
장윤주였다. 최형사는 젊은 아가씨를
불러주겠다는 것을 굳이 마다하고 장윤주와
대작을 했다.
그리고 그들은 그날밤 여관에 함께 갔고,
최형사는 여자가 생각날 때마다 장윤주를
찾아가곤 했다.
장윤주가 침대에서 빠져나가 욕실로
들어갔다. 최형사는 눈을 감은 채 욕탕에
물 받는 소리를 들었다. 편안했다.
"샤워 안할래?"
"먼저 해."
"이리 들어와. 내가 씻어 줄께."
"아냐, 먼저 해."
"이리 들어오라니까!"
"어떻게 샤워를 같이 하니?"
"별꼴이야. 살까지 같이 섞고 내외하는
거야?"
장윤주가 키들거리고 웃어댔다. 최형사는
침대 머리맡에서 담배를 찾아 입에 물었다.
"담배 한 대 피우고."
최형사는 라이터로 불을 붙여 담배연기를
길게 내뿜었다. 욕실에서 샤워기를 트는
소리가 들렸다.
담배를 다 피우고 욕실로 가자 장윤주는
샴푸로 머리를 감고 있었다.
"뭐해?"
힐끗 쳐다보았다.
"하긴 뭘해?"
"물이나 뿌려 줘."
장윤주가 샤워기를 불쑥 내밀었다.
최형사는 샤워기를 받아서 장윤주의 머리에
물을 뿌려 주기 시작했다.
"괜찮네!"
샤워기에 머리를 헹군 장윤주가 눈웃음을
쳤다.
"뭐가?"
"자기 체격 말이야. 보기보다는 근육이
단단해."
"새삼스럽기는!"
"여기에 누워."
장윤주가 큰 타월을 욕실 타일바닥 위에
깔았다. 최형사는 장윤주가 시키는 대로
감았다. 장윤주가 그의 몸 위에 샤워기를
틀었다. 비가 내리듯 따뜻한 물이 그의 몸
위에 쏟아졌다.
"이런 거 물어 봐두 괜찮아?"
장윤주가 샤워기를 끄고 그의 몸 위에
비누칠을 하기 시작했다.
"뭐?"
"장마담의 과거......"
"내 과거? 술집 여자 과거를 알아서
뭘해?"
"그냥."
"특별한 거 없어. 자기가 상상하는 거나
크게 다르지 않을 거야."
"남자를 얼마나 알아?"
비누칠을 하던 장윤주의 손이 흠칫했다.
"대답해 봐."
술집 주인 노릇 7년 했으니까......이제
됐어?"
"변태성욕자도 경험 있어?"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남자들 중에 성기가 유난히 큰 사람도
있었어?"
"별일이네. 그런 건 왜 자꾸 물어?"
"수사에 도움이 될까 해서 그래. 며칠
전에 여자가 죽었는데 성기에 의해 질이
모두 파괴되었다는 거야. 도무지 믿어지지
않는 일이라서 그런 예가 있나 하고 물어
보는 거야."
"남자들 성기 다 비슷비슷 해. 목욕탕에
가보지도 않았어?"
"변태적으로 큰 사람은 없나?"
"난 못 봤어."
"없어."
장윤주가 쌀쌀하게 내뱉고 다시 그의
몸에 비누칠을 하기 시작했다. 최형사는
공연한 것을 물었구나 하고 후회했다.
기묘한 사건이었다. 과장은 수사본부에
얼굴을 한 번 내민 뒤 전화로만 수사를
독촉했다. 계장은 그에게 수사를 완전히
일임하고 이렇다 저렇다 말이 없었다.
그러나 수사본부에 소속된 형사들은
조영애가 살해되었다는 사실조차
긴가민가했다. 성기에 의해 질이 파괴되고
과도한 정사에 의한 심장마비사라는 부검
결과를 놓고 우발적 살인, 또는 자연사라고
보고 있었다.
그러나 최형사는 다른 형사들과 생각이
달랐다. 최형사는 조영애의 시신을 본 순간
무엇인가 차가운 것이 목덜미에 얹혀지는
듯한 기분을 느꼈었다. 그것은 예사로운
사건이 아니라는 불길한 예감이었다.
그러나 그것이 무엇인지는 알 수 없었다.
그는 막연히 가슴이 떨리는 듯한 공포를
느꼈었다.
장윤주는 정성스럽게 그의 몸에 비누칠을
하고 있었다. 욕실의 오렌지 불빛 때문인지
새침하던 그녀의 얼굴이 화사해 보였다.
미인이었다. 머리를 숏 커트로 처리하여
얼굴이 단정해 보였다. 몸매는 균형이 잡혀
있었다.
"이봐."
최형사는 장윤주를 나직하게 불렀다.
"응?"
장윤주가 고개를 돌려 그를
내려다보았다.
"자기 돈 많아?"
"돈은 왜?"
"그냥 물어보는 거야."
"많지 않아."
"그럼 내가 이런 말해두 되겠군. 돈
때문에 이런 소리를 한다고 하지는 않을
테니까......장마담 나하고 살림하지
않을래?"
"살림?"
"같이 살자구."
"동거?"
"아니."
"그럼 결혼?"
"그래."
장윤주가 어이없다는 듯 최형사를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왜 그런 생각을 했지?"
"목욕탕에서 프로포즈하는 사람 생전
처음 봤네."
"대답해 봐."
"자기가 손해볼 텐데?"
"무슨 손해?"
"술집 여자와 결혼하면 체면이 깎일 거
아니야? 사회적 체면이라는 거 있잖아?"
"그런 거 상관없어......"
"사람 여러 가지로 감동시키네."
"장마담 좋은 여자야. 세상을 살면서
좋은 여자를 만나는 것은 그리 쉽지 않아."
"그만둬!"
"천천해 생각해 봐."
최형사는 다시 눈을 감았다. 장윤주의
손이 그의 몸 구석구석을 누비고 다녔다.
최형사는 장윤주의 손이 누비고 다니는
느낌이 들었다.
장윤주와 결혼을 하고 싶다는 생각을 한
것은 그녀와 처음 만났을 때부터 한
것이었다. 그러나 그녀가 술집 여자라는
사실이 그를 망설이게 했었다.
"이젠 장마담이 누워."
장윤주가 그의 머리까지 감기고 나자
최형사는 장윤주를 타월 위에 눕혔다.
"씻겨 줄 거야?"
"그래."
"오래 살다보니까 형사 나리의 목욕
시중을 다 받아보네."
"형사도 인간이야."
"난 수컷으로 보이는데?"
"수컷이기도 하구......"
장윤주가 웃음을 깨물었다
뿌린 뒤 비누칠을 하기 시작했다. 여자의
몸을 비누로 씻어 주는 것은 처음이었다.
아내가 그런 짓을 부그러워 하기도 했지만
최형사가 시도한 일조차 없었다.
그런데 이 여자에게 비누칠을 하고 있는
것은 무슨 까닭일까. 이렇게 해서라도 이
여자를 소유하려는 욕심이 내게 있기
때문이 아닐까. 최형사는 그렇게 생각했다.
"아까 그 얘기......"
장윤주가 알몸을 그에게 맡기고 조용히
있다가 문득 입을 열었다.
"무슨 얘기?"
"성기 때문에 질이
파괴되었다는......자기도 알잖아? 여자의
질은 신축성이 뛰어나다는 거......"
"그래서 형사들도 대부분 그 얘기를 믿기
"문득 생각이 났는데 내가 아는 사람
중에 그런 경험을 한 여자가 있었어."
"어떤 경험인데."
"그 여자는 콜걸인데 호텔에서 한 흑인을
만났대. 그런데 그 흑인의 성기가 어찌나
큰지 몸 속에 들어오자 숨이 컥하고 막히는
기분이 들더래. 그 여자는 관계가 끝나자
초죽음이 되어 호텔에서 나왔는데 제대로
걸을 수조차 없었대.
흑인을 받을 때도 반은 기절한 상태에서
받았다는 거야. 그 뒤로는 두 번 다시
외국인 상대로 콜걸노릇을 하지
않았대......"
"외국인이라면 그럴 수도 있겠지."
조영애를 살해한 범인이 그렇다면
외국인이라는 말인가, 하는 생각이
"이제 나가 있어."
"응?"
"나가 있으라구. 내가 씻고 나갈께.
냉장고에 맥주 있는데 꺼내 마셔.
마른안주는 찬장에 있어."
최형사가 침실로 돌아오자 삐삐가 울리고
있었다. 최형사는 거실로 나와 다이얼을
돌렸다. 삐삐에 나타나 있는 번호는
구리시의 것이었다.
"예, 강력계 유형사입니다."
"동대문 경찰서 최천식입니다. 그쪽에서
삐삐 쳤습니다."
"아, 예......우리 계장님께서
치셨습니다. 잠깐만 기다리십시오."
젊은 형사의 목소리였다. 최천식 형사는
수화기를 든 채 잠시 생각에 잠겼다. 구리
경찰서 강력계라면 그의 동기인
송만길(松萬吉)이 계장으로 있는 곳이다.
"최형사?"
목소리가 굵직했다. 예상했던 대로
송만길이었다.
"그래 최야. 이 밤중에 왜 삐삐까지 치고
난리야?"
"미안해. 골치 아픈 사건이 하나
생겨서......그쪽에서두 우리와 비슷한
사건을 수사하고 있다기에 확인해
보려구......"
"어떤 사건인데?"
"강간살인사건이야."
장윤주가 타월을 허리에 감고 거실로
나왔다. 최형사는 장윤주의 나신을
물끄러미 응시했다.
"흔한 사건이잖아?"
믿어지지가 않아. 사인이 거대한 성기에
의해 일어난 것이라니......이봐 듣고
있어?"
"듣고 있어."
장윤주가 의아한 눈빛으로 그의 옆에
와서 앉았다. 최형사는 장윤주의 어깨를
안았다.
"성기가 커서 여자의 질이 걸레처럼
찢어져 죽었다는 거야. 자네 관할지에서
일어난 사건이 비슷하다며?"
"그래."
최형사는 바짝 긴장했다. 구리시에서
일어난 사건과 조영애 피살사건이 동일한
사건이란 말인가, 어째서 이렇게 지저분한
사건이 정초부터 일어나는 것일까, 하는
생각을 했다.
"어디로? 구리시?"
"그래. 구리시 종합병원에 시체가
안치되어 있어. 내일 아침 일찍 부검을
하려고 하니까 미리 봐두는 게 어때?"
"지금 차가 있어야지."
"택시를 타고 와."
"이 사람아, 형사가 무슨 돈이 있어서
택시를 타고 다녀? 여기서 구리시까지 택시
요금이 얼마나 나오는지 알아?"
"제가 모셔다 드릴께요."
그때 장윤주가 그에게 어깨를 기대며
말했다. 장윤주도 송만길의 얘기를 들은
모양이었다.
"활동비에서 빼......"
"알았어. 지금 가겠네. 어디로 가면
되나?"
"그럼 서로 갈께. 전화 끊어."
최형사는 수화기를 내려놓았다. 장윤주가
그의 얼굴을 쳐다보며 배시시 웃었다.
냉동박스에서 꺼낸 시체는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알몸이었다. 최형사는 시체를
보고 낮게 신음을 뱉았다. 젊은 여자였다.
피부가 살아 있는 것처럼 탄력이 넘치고
매끄러워 보였다. 냉동박스에서 꺼낸
탓인지 푸른 빛을 띠고 있었다.
"어때?"
"너무 젊군. 이렇게 젊은 여자가
죽다니......"
최형사는 건성으로 혀를 잤다. 형사생활
20년에 여자의 시체를 본 것은 헤라릴 수
없이 많았다. 그러나 이토록 깨끗한 시체를
보는 것은 손가락을 꼽을 정도였다.
"자네는 나가 있게."
직원에게 말했다. 영안실 직원이 최형사를
힐끗 쳐다보고 밖으로 나갔다.
"외상이라고는 여기밖에 없어.""
송만길이 음모가 무성한 여자의 국부를
가리켰다.
"어디서 죽었나?"
"구리에서 의정부로 가는 외곽도로에
과수원이 많이 있어. 먹골이라고 배밭이
유명한 곳인데 냇둑에서 죽었어."
"몇 살이지?"
"스물여섯."
"결혼했나?"
"미혼이야. 약혼을 한 상태인데 아깝게
세상을 떴지."
"살인이라고 어떻게 단안을 내렸나?"
"손이 묶여 있었어. 입에 재갈이
발견되었는데 피가 꽤 많이 흘러내렸어.
여기에도 피가 맺혀 있지 않나?"
여자의 국부에 검붉은 피가 응고되어
있는 것을 가리키며 송만길이 말했다.
핏자국은 허벅지에도 묻어 있었다.
"그렇다고 살인이라고 단정할 수는 없지
않나? 단순히 강간을 했는데 충격으로 죽을
수도 있잖아?"
"강간만 했다고 해도 피해자는 죽었어!"
송만길이 단호하게 말했다. 여자를 죽게
한 범인에 대해서 분노를 느끼고 있는 것
같았다.
최형사는 담배를 꺼내 물었다.
"조영애하고 비교했을 때 상태가 어때?"
최형사는 담배에 불을 붙여 연기를 길게
내뿜었다.
"특징은 없나? 범인에 대해서?"
"없어."
"없어진 물건은?"
"여자의 내복이 모두 없어졌어."
"내복?"
"팬티 말이야. 브래지어와 시미즈도
없어지고......"
"희한하군."
송만길도 담배를 꺼내 물었다.
"이 여자에게서는 어떤 특징이
발견되었나?"
최형사는 송만길에게 라이터로 불을 붙여
주었다. 송만길이 담배연기를 깊숙히
빨아들였다가 내뱉었다.
"현장에서 팬티를 발견하지 못했어."
"노팬티인가?"
그렇지, 우리 나라에서 노팬티를 하는
여자는 거의 없을 거야."
"모르는 소리하지 마. 여관 쓰레기통에
여자 팬티가 얼마나 나오는지 알아?"
"싱거운 소리 말아."
"정말이야, 이 친구야. 요즈음 여자들
여관에서 그 짓하고 나서 팬티 정도는
쓰레기통에 죄 버린대."
송만길이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동일범의 소행이라고 봐도 되겠지?"
"글쎄......"
"형사들이 모두 긴가민가 하고 있어.
성기가 얼마나 크기에 여자가 죽느냐는
거지. 어떤 친구는 여자가 최고의 기분을
느끼고 죽었을 거라는 우스개 소리도 하고
있어. 호사가들의 입에 오를 만한 사건이
"얼굴은 어땠어?"
"얼굴?"
송만길이 무슨 뜻이냐는 듯이 눈을
꿈벅거렸다.
"처음부터 이렇게 잠든 듯이 죽어
있었나?"
"글쎄......"
"잘 생각해 봐."
"이제 생각나는군. 눈을 부릅뜨고
있었어. 입은 잔뜩 벌어져 있었구......"
"자네 영화 좋아해?"
"아니."
송만길이 고개를 흔들었다.
"20년쯤 전에 <헌팅파티>라는 영화가
있었어. 정확하게 얼마 전의 영화인지는
기억이 나지 않지만......캔디스 버겐하고
거야.
그런데 열차 안에서 진 해크만이 캔디스
버겐과 정사를 하는 장면이 한 30초쯤
나왔어. 전후 사정은 기억이 나지 않지만
캔디스 버겐이 입을 벌리고 벌떡 일어나는
장면이 있었어. 나는 그 장면이 무슨
뜻인지 이해를 하지 못했어. 그런데 결혼을
하고 얼마 후에야 그 장면의 의미를
깨달았어.
그 장면은 진 해크만과 캔디스 버겐이
정사를 하는 장면이었고, 진해크만이
그것이 캔디스 버겐의 몸 속으로 들어가자
입을 딱 벌리고 놀라는 장면이었던 거야.
진 해크만이 그것이 캔디스 버겐이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컸기 때문이야."
"......"
성기가 커서 여자가 입을 딱 벌릴 정도로
놀라는 일이 있을 수 있을까
하고......우습지 않나? 이 여자 하고
조영애가 성기에 의해 죽었다는 것이
믿어지지 않네."
"이 여자의 국부를 자세히 보게."
송만길이 정색을 했다. 최형사는 음모가
무성한 여자의 국부를 다시 자세히
들여다보았다.
"검시의에 의하면 음모가 완전히
젖었다고 하네."
"질 분비불에 의해서?"
"아니야. 질 분비물은 공포가 엄습하면
극소량밖에 분비되지 않는다니까 남자의
정액일세. 정액이 여자의 질을 채우고도
넘쳐서 음모가 젖고 여자를 강간할 때
소나기 같았을 거라고 하네."
최형사는 갑자기 구역질이 올라오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정말 지저분한 사건이야."
송만길이 최형사의 기분을 눈치챘는지
고개를 흔들었다. 그의 얼굴에도
곤혹스러워 하는 표정이 나타나 있었다.
"변태성욕자 짓이야."
"아니야. 변태성욕자의 짓이 아니라
비뇨기에 문제가 있는 자의 짓이야."
"비뇨기?"
"생각해 봐. 여자가 죽을 정도의 큰
성기를 갖고 있는 자라면 온전한 관계를 할
수 없으니까 이런 짓을 하는 거 아니겠어?
변태성욕자라면 여자를 희롱했을 거야.
그런데 범인은 단순하게 강간만 했어.
흔적도 없어. 강간이 목적이었어......"
"팬티가 없어진 것은?"
"그건 우리가 더 조사를 해야지."
송만길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최형사는
송만길과 밖으로 나왔다. 영안실 직원이
철제의자에 앉아 있다가 벌떡 몸을
일으켰다. 얼굴의 부스스한 것을 보면
졸리운 모양이었다.
"시체를 냉동박스에 넣게."
영안실 직원이 대꾸 한 마디 없이
냉동실로 들어갔다.
"기분 나쁜 친구군."
송만길이 쓰레기통에 담배꽁초를 버리고
침을 뱉았다. 최형사도 담배꽁초를 버렸다.
"피살자 신원은 어떻게 되나?"
"오미숙."
"피살자 주변은 깨끗한가?"
"깨끗해."
그들은 영안실을 나와 병원 로비를 걸어
올라갔다.
"범인이 피살자를 살해한 것은
계획적이라고 보나?"
"피살자가 살해된 곳은 피살자의 집에서
3백 미터밖에 떨어지지 않은 곳이야. 버스
정류장에선 2백 미터 떨어진
곳이구......범인이 피살자를 타게트로
삼지 않았다면 살해하기도 어려운 곳이지.
우리는 범인이 피살자 주변에 있다고
보네."
"주변이라면 어디를 말하나?"
"우선 피살자가 살고 있는 마을과 버스
정류장 주변을 저인망식으로 훑어볼
"다음엔?"
"피살자의 직장과 피살자가 잘 가는 곳을
수사해야지......조영애 수사는 어떤
식으로 하고 있나?"
"지금까지는 조영애를 중심으로
수사했어."
"소득이 있었나?"
"없었어."
"앞으로는 어떻게 할 작정인가?"
"비뇨기과를 중심으로 수사할 작정이네."
"비뇨기과엔 왜?"
"범인이 성기가 유난히 큰 자라는 검시
결과가 나왔지 않은가? 그 정도로 성기가
큰 자라면 비뇨기 계통에 질병이 있을
확률이 많다는 것이 검시의나 부검의
소견일세."
송만길이 혀를 찼다. 병원 복도의
자판기에서 커피를 뽑아 마시고 있던
장윤주가 그들이 가까이 오자 소파에서
몸을 일으켰다.
"누군가?"
"애인."
"뭐?"
"왜? 난 애인이 있으면 안되나?"
"살인사건을 수사하는 형사에게 애인이
있다는 얘기는 처음 들었네......더구나
저렇게 멋쟁이 애인이 있다니 놀랍군."
송만길이 코를 벌름거리며 웃었다.
"커피 한 잔 하겠나?"
"애인 잘 둔 턱인가?"
"아무렇게나 생각하게."
"제가 뽑을께요."
있다가 재빨리 자판기에 동전을 투입했다.
"초면에 폐가 많습니다."
송만길이 넙죽 허리를 숙였다.
"저희 집에 놀러 오세요."
장윤주가 인사를 꾸벅했다.
"벌써 살림 차리셨습니까?"
"술집 하고 있어요."
"감사합니다."
장윤주가 건네주는 커피잔을 받으며
송만길이 다시 허리를 숙였다.
"약혼자 쪽엔 아무 이상이 없나?"
그들은 벤치에 나란히 않았다. 새벽이라
그런지 병원 로비는 폐가처럼 적막했다.
"이상없어."
"사건이 일어난 것은 언제인가?"
"어젯밤, 사망시간이 밤 11시쯤이라니까
"그럼 그저께 밤이군."
최형사가 정정을 했다.
"그래, 그저께 밤이지. 벌써
새벽이니......"
"어떻게 발견되었나?"
"아침에 학교에 가던 고등학생이
발견했어."
"남학생?"
"아니 여학생."
"그 학생 기절을 했겠구먼."
"파랗게 질렸더라구."
그들은 천천히 커피를 마셨다. 장윤주는
최형사의 옆에 다소곳이 앉아 텅 빈 복도를
응시하고 있었다. 어디쯤 응급실이 있는지
고통스러워 소리를 지르는 남자의 목소리와
조금만 참으세요. 진통제 놨으니까
들렸다.
"난 가겠네."
최형사가 커피잔을 들고 벤치에서
일어섰다. 송만길도 일어서고 장윤주도
일어섰다.
"오느라고 수고했네."
송만길은 병원 정문까지 배웅을 했다.
"눈이 오려나?"
장윤주가 병원 주차장에 세워 놓은 차를
끌고 나오는 동안 최형사는 어두운 하늘을
우두커니 쳐다보았다. 하늘은 별빛 하나
없이 캄캄했다. 그는 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내 입에 물었다. 어디선가 부엉이 우는
소리가 부우우 하고 들려왔다.
착각이었을까. 최형사는 어두운 하늘에서
괴조가 날개를 푸드득거리면서 날아가는 것
서늘해져 왔다.
아파트의 베란다에 빗발이 쏴아 하고
들이치기 시작했다. 남자는 빗소리를
들으며 가만히 누워 있었다. 평화로운
아침이었다. 여자는 그의 옆에 누워
있었다. 여자도 빗소리를 듣고 있었다.
"비가 오면 일하기 나쁘지?"
여자가 잠에 취한 목소리로 다정하게
말했다.
"겨울비야."
남자가 피로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아직도 창밖은 어두웠다. 건너편 아파트의
창에 하나 둘 불이 켜지는 것을 보면
사람들이 아침 준비를 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여자가 고개를 들고 물었다.
"아니야, 나가서 먹을께."
"사실은 반찬도 없어."
여자가 헤실거리고 웃고 있었다. 남자는
팔을 뻗어 침대 머리맡에 담배를 찾아 입에
물었다. 편안했다. 여자는 그의 하체에
손을 넣어 두고 있었다.
"출근해야지."
"조금만."
"자주 올께."
남자가 여자를 달랬다.
"안돼."
"왜?"
"이젠 당신 집이야. 여기서 살아."
여자가 몸을 일으켜 남자가 물고 있는
담배에 불을 붙여 주었다. 남자는 여자의
얼굴을 가져갔다. 여자의 살이, 밍밍한
살덩어리가 그의 입속으로 가득히 빨려
들어갔다.
"나 하고 결혼할 거야?"
남자가 여자의 가슴을 뱉어내고 물었다.
"왜 하필 나 같은 여자하고 결혼을
하려고 그래?"
"좋으니까."
"난 담배도 피우고 술도 마셔. 과거도
복잡한 여자구."
"그런 거 상관 없잖아? 서로 이해하면
되는 거야."
여자가 생각하는 표정을 지었다.
"나 요즈음 정말 살맛 난다."
"나 출근할께."
남자가 침대에서 일어나 주섬주섬 옷을
일어나서 남자가 옷을 입는 것을 거들어
주었다.
"커피도 못 끓여 주고 미안해."
여자가 속삭였다. 남자는 여자를 안아서
입술을 포갰다가 뗐다.
"우산 가지고 가."
여자가 시트로 나신을 가리고 말했다.
"저녁 때 올께. 늦을 거야."
남자가 구두를 신고 말했다. 우산을
가지고 가라고 했으나 남자는 가죽점퍼의
깃만을 세우고 아파트를 나갔다. 아파트의
현관문이 둔중한 소리를 내며 닫히자
남자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여자는 그때서야 담배를 입에 물고 불을
붙였다. 빗소리가 가지런했다. 여자는
담배연기를 길게 내뿜은 뒤 창으로 갔다.
가로질러 가고 있는 것이 보였다.
최형사는 장윤주의 아파트를 나오자
택시를 타고 장안동 파출소로 갔다. 날은
그때서야 희미하게 밝아지고 있었다.
파출소엔 조형사가 먼저 출근해 있었다.
"별일 없나?"
조형사가 책상에서 일어나는 것을 다시
앉게 하며 최형사가 물었다.
"예."
"주변 우범자나 불량배들은 어때?
"어젯밤에 육손이를 만나 협조를
해달라고 했습니다."
"협조를 하겠다고 그래?"
"예, 최선을 다해서 알아보겠다고
하더군요."
두목이었다. 장안동에 중고 자동차
매매시장이 생기고 유흥업소들이
우후죽순처럼 생기자 강남에서 진출한 신흥
조직폭력배였다. 최형사는 본서의 강력계로
전화를 걸어 계장과 수사에 대해서 잠깐
통화했다. 계장은 수사본부에 전권을 맡길
테니 시일 끌지 말고 빨리 해결하라고
했다. 최형사는 구리시 여행원 살인사건
간단히 보고했다.
"그럼 연쇄살인이라는 얘기야?"
계장은 바짝 긴장하고 있었다.
"현재로서는 그렇습니다."
"매스컴에 노출되지 않게 잘 수사해.
사건이 지저분해서 기자들이 냄새를 맡으면
큰 소란이 일어날 거야."
"예."
아직까지 단순 강간살인사건으로 알고 취재
경쟁을 벌이지 않고 있었다.
형사들이 장안동 파출소에 모두 모인
것은 9시가 약간 지났을 때였다. 비는
그때까지도 계속해서 내리고 있었다. 창
밖이 비 때문에 을씨년스러워 보였다.
"1조와 2조는 목격자 탐문수사를
계속하구 3조와 4조는 비뇨기과를
수사한다."
"비뇨기과요?"
3조에 소속되어 있는 강형사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물었다. 3조엔
김형사도 소속되어 있었다.
"범인은 성기가 유난히 큰 놈이야. 그런
놈들은 비뇨기 계통의 질병이 있을
것이라는 게 검시의나 부검의들의
"도대체 성기가 얼마나 크다는 것입니까?
성기 때문에 여자가 죽다니......"
"기록에 의하면 30센티 짜리도 있네."
"죽여 주는군."
형사들이 킬킬거리고 웃어댔다.
"3조는 장안 3동까지 비뇨기과를 맡구
4조는 6동까지 맡아. 비뇨기과가 흔치
않으니까 관내 파출소를 이용하면 쉽게
찾을 수 있을거야. 장안동에 없으면
전농동, 답십리, 면목동, 제기동, 용두동,
신설동까지 확대하구......"
"비도 오는데 난리났네."
형사들이 투덜거렸다.
"1조, 2조는 탐문수사를 강화해. 어떻게
일 주일이 지났는데도 목격자가 나타나지
않지?"
꿀먹은 벙어리처럼 입을 다물고 있었다.
최형사는 수사회의를 마친 뒤 유형사와
함께 파출소를 나섰다. 경남호텔 뒷골목에
비뇨기과가 하나 있었다 우선 그곳을
찾아갈 작정이었다.
"반장님, 검시의나 부검의가 잘못 알고
있는 거 아닙니까?"
"왜?"
"어떻게 남자의 성기에 의해 여자가
죽습니까?"
"구리시에서도 여자가 같은 방법으로
죽었어."
"그럼 동일범의 소행입니까?"
"아직 확신할 수는 없어도 가능성이
많아."
비뇨기과는 복합 건물의 3층에 있었다.
유형사가 간호사에게 찾아온 까닭을
간단하게 설명하자 간호사가 원장에게
안내해 주었다. 원장은 40대의 사내로
금테안경을 쓰고 있었다.
"저희가 수사에 대해 도움이 될 게
있을까요?"
원장이 내민 명함에는 성심 비뇨기과
원장 박성일(朴成一)이라고 박혀 있었다.
최형사는 자신의 명함도 원장에게
건네주었다.
"몇 가지 알아볼 게 있어서요."
"예."
원장은 의혹이 가득찬 눈빛으로 최형사와
유형사를 번갈아 쳐다보았다.
"며칠 전 장안동에서 살인사건이
발생했습니다. 30대의 여자가 죽었는데
외상은 거의 없고 국부만 훼손되어
거대한 성기에 의한 쇼크사라고 합니다.
그런일이 있을 수 있을까요?"
"거대한 성기에 의한 쇼크사라는 것은
의문이 가지만 섹스 중에 쇼크사는 더러
있습니다. 복상사와 복하사가 그런
것이죠."
"복상사는 알겠는데 복하사는 뭡니까?"
원장의 얼굴에 미소가 떠올랐다.
형사들이 찾아왔을 때 긴장하고 있던
표정이 누그러지고 있었다.
"섹스를 하다가 밑에서 죽는 것을
말하죠."
"여자들입니까?"
"아닙니다. 거의 남자들이죠."
"복하사라고 하지 않습니까?"
"요즈음 사람들이 어디 정상위의 섹스만
"복상사와 복하사의 사인은 뭡니까?"
"심장마비로 인한 호흡장애입니다."
"성기에 의한 것이 아닙니까?"
"아닙니다. 평소 심장 계통의 질환이나
고혈압 계통의 질환이 있는 사람들이
과도한 섹스를 하게 되면 그런 현상이
옵니다."
최형사는 입을 다물고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그러하면 조영애가 심장 계통의
질환을 앓고 있었던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뇌리를 스쳤다.
"여기서 성기 확대 수술도 하지요?"
"예, 대개 임포환자들에 대해서 시술을
해줍니다. 한때 바람 피우는 남자들 사이에
유리구슬을 박아 달라는 주문이 많았는데
지금은 거의 그런 일이 없습니다. 부작용도
원장이 근엄한 표정으로 얼굴을
바꾸었다.
"성기 확대 수술을 하면 어느 정도 크게
됩니까?"
"보통 사람 정도지요."
"보통 사람이 큰 것을 원하면 더 크게도
됩니까?"
"예, 물론 됩니다."
"어느 정도로요?"
"보통 사람의 1.5배에서 2배 가까이
되지요. 그러나 큰 것이 좋은 것은
아닙니다. 큰 것은 여자만 고통스럽게
하지요. 일반적으로 큰것이 좋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런 수술을
받은 사람들은 대개 후회를 합니다. 남녀의
정사는 애정을 바탕으로 이루어져야 더 큰
"그런 사람과 관계를 해서 여자가 죽을
수도 있을까요?"
"없습니다."
원장이 단호하게 말했다. 최형사는
담배를 꺼내 물었다. 원장이 얼굴을
찡그렸으나 상관하지 않았다.
"성기에 의해 여자가 죽을 정도면 얼마나
커야 할까요?"
"글쎄요."
원장이 담배연기를 손으로 쫓았다.
"그런 일이 있을 수 있다면 30센티는
되어야 하겠죠. 굵기도 대단해야 할
테구......여자가 몹시 고통스러울
것입니다."
"그런 사람이 더러 있습니까?"
"없습니다. 특이하게 큰 사람이 있긴
"어느 정도입니까?"
"20센티를 약간 넘을 정도입니다."
"그런 사람과 관계를 한다고 해서 여자가
죽는 일은 없겠지요?"
"없습니다. 알다시피 여자의 질은
신축성이 뛰어나니까요."
최형사가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는
새삼스럽게 남자의 성기를 중심으로 수사를
해야 하는 사실이 짜증스러워졌다.
"예를 들어 성기가 30센티가 되는 남자가
있다면 질병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질병이죠. 이상 현상이니까요."
"검시의나 부검의들 얘기로는 정액의
양도 보통 사람과 비교해 엄청나게
많았다고 합니다. 그런 일이 가능합니까?"
원장은 고개를 갸우뚱했다.
것은 드문데......아마 정액을 생산하는
기관에도 이상이 있겠지요. 평소에도
사정을 하게 된다고 봐야 합니다. 몽정을
할 때처럼......그렇지 않으면 관계를 하기
전에 집중적으로 생산될 수 있습니다.
관계를 하려고 하는 욕망도 정액이
집중적으로 생산될 대 강렬해집니다."
"싸이클이 있다는 얘기입니까?"
"그럴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지요."
최형사는 비뇨기과 원장의 말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러면 진료 환자가 밀려
있는 원장을 마냥 붙들고 있을 수가 없어
협조에 감사한다는 얘기를 하고 밖으로
나왔다.
시장기가 느껴졌다. 최형사는 빗발이
가지런히 내리는 잿빛 하늘을 쳐다보다가
아침 겸 점심이었다. 유형사도 반 숟갈도
뜨지 않았다면서 설렁탕을 맛있게 먹었다.
그들이 두 번째로 찾아간 곳은 마장동에
있는 비뇨기과였다. 그러나 그 비뇨기과도
성기가 유난히 큰 환자를 진료한 기록은
없었다.
"이거 완전히 구름 잡는 격입니다."
마장동의 비뇨기과를 나온 유형사가
거리에 오가는 행인들을 쳐다보며 우울하게
내뱉았다. 오후가 되어서인지 거리엔
찬비가 내리는데도 행인들이 많았다.
모두들 활기에 차 있었다. 겨울인데도
허벅지가 드러난 짧은 미니스커트를 입은
아가씨들, 가방을 둘러멘 남녀 학생들,
검은 우산을 쓴 신사복의 사내들, 잿빛
거리에 물결처럼 흐르는 차량.......
떼어놓았다. 목덜미를 때리는 빗발이
차가웠으나 그냥 걸었다.
"이렇게 비를 맞고 돌아다닐 겁니까?"
유형사가 볼이 부운 얼굴로 항의를 했다.
"젊은 사람이 비 좀 맞고 뭘 그래?"
"이거 산성비입니다. 몸에 좋을 게 하나
없어요."
"내일은 차를 배정해 달라고 해야겠어."
경찰병원 비뇨기과에서도 뚜렷한 소득은
올릴 수 없었다. 최형사와 유형사는 실망한
얼굴로 파출소로 돌아왔다. 파출소에선
탐문수사를 맡은 강형사가 20대 청년을
닥달하고 있었다.
"뭐하는 친구야?"
최형사가 소파에 걸터앉으며 물었다.
"불심검문에 걸렸습니다. 가방에 여자
강형사가 담배를 꺼내 물며 대답했다.
"너 어디 살아?"
유형사가 청년이 머리를 쥐어박았다.
"전농동이오."
청년이 유형사를 힐끗 쳐다보고
대답했다. 22,3세쯤 되어보이는 앳된
얼굴이었다. 뒷머리를 길러서 계집애처럼
묶고 있었다. 최형사는 얼굴을 찡그렸다.
남자들의 패션이 점점 여성화되어 가고
있었다.
"이거 어디서 났어?"
유형사가 책상 위에 있는 검은 색 팬티를
집게손가락으로 들어올렸다. 삼각형으로 된
팬티인데 앞부분은 속살이 내비치게
디자인이 되어 있었다.
"제 꺼예요."
"샀어요."
청년이 우물우물 대답을 했다.
"어디서?"
"시장에서요."
"어느 시장?"
"전농동이오."
"같이 가 볼래?"
"......"
청년이 입을 다물었다. 입가에
두려워하는 기색이 여실히 나타나고
있었다.
"너 직업 있어?"
"학원 다니고 있어요."
"무슨 학원?"
"재수학원이오."
"이 팬티 어디서 났어?"
"그런데 왜 이자식아 샀다고 거짓말을
해?"
"......"
"어느 여자 친구 거야?"
"대학생이오. 옛날에 재수학원에 다닐 때
만났어요."
"이름이 뭐야?"
"남지숙이오."
"왜 이런 걸 가지고 다녀?"
"여자 팬티를 가지고 다니면 재수가
좋다고 해서......시험에 합격하라고
주었어요."
"후기대 시험 볼 거야?"
"예."
유형사가 입맛을 다셨다. 후기대 입시는
이틀 앞으로 다가와 있었다. 강형사는
뮼?璨?걸터앉아 담배만 피우고 있었다.
공연히 불심건문을 하여 끌고 왔다는
표정이 역력했다.
"강형사?"
"예?"
강형사가 자세를 바로하고 최형사를
쳐다보았다.
"데리고 나가서 여자 친구에게 확인하고
맞으면 돌려보내."
"예."
강형사가 담배를 재떨이에 비벼 껐다.
"야!"
그때 유형사가 무슨 생각을 했는지
청년을 불렀다.
"너 이름 뭐라구 그랬지?"
"유정열이오."
"너의 아버지 뭘해?"
"장사해요."
"무슨 장사?"
"불고기집이오."
"너 이리 와 봐."
"예."
"바지 좀 내려 봐, 임마!"
유형사가 청년을 윽박질렀다. 유형사는
다혈질적인 성격이었다. 심심찮게 연행해
온 피의자들을 윽박지르거나 쥐어박아서
말썽이 자주 일어나곤 했다.
"왜요?"
청년이 겁 먹은 표정으로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밖에서 안 보이니까 벗어 봐!"
형사들이 일제히 청년을 쏘아보았다.
파출소 차석도 호기심이 가득한 눈빛으로
청년과 유형사를 번갈아 살피고 있었다.
청년이 머뭇거리다가 바지의 호크를 풀고
지퍼를 내렸다. 최형사는 얼굴을 찡그렸다.
청년은 바지 속에도 노란 색의 여자 팬티를
입고 있었다.
"갈 수록 태산이군."
유형사가 빈저거렸다.
"그것도 내려."
"왜요?"
"내리라면 내려, 이 자식아!"
유형사가 또 청년의 머리를 쥐어박았다.
청년이 뒤를 힐끗 쳐다보고 팬티를
끌어내렸다.
"평범하군."
유형사가 청년의 성기를 들여다보고
실망한 표정을 지었다. 청년의 성기는 잔뜩
위축되어 있었다.
유형사가 청년에게 말했다. 청년이
팬티를 끌어올리고 바지를 추켜올렸다.
"강형사!"
최형사가 눈짓을 했다.
"알겠습니다."
강형사가 의자에게 일어나 청년을 데리고
나갔다.
2조의 정형사팀이 파출소로 돌아온 것은
거의 6시가 가까웠을 때였다.
"뭣 좀 소득이 있었나?"
"글쎄요. 목격자가 나타나긴 했는데 좀
맹랑해서......"
정형사가 피로한 기색으로 소파에 털썩
앉았다. 정형사의 바지가랑이가 잔뜩 젖어
있었다.
"맹랑하다니?"
"몇 학년?"
"4학년인데 여자가 그 집에 들어가는
것을 봤답니다. 나이가 서른 안팎이고 노란
옷을 입었다더군요."
"언제?"
"사건이 일어나던 날 낮이랍니다. 3시쯤
인가 되었는데 기억이 분명치 않답니다."
"얼굴을 봤대?"
"보긴 봤는데 기억이 나지 않는답니다.
그 아이가 분명히 기억하는 것은 털로 된
노란 옷과 회색 코트 그리고 충혈된
눈뿐이랍니다."
최형사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국민학생이 목격한 여자가 사건과 어떤
연관을 맺고 있을까 생각해 보았으나
현재로서는 전혀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예, 그렇습니다. 그 점을 몇 번이나
확인했는데 젖가슴이 풍만하더랍니다."
"국민학생이 그런 말을 해?"
"아닙니다. 그건 제 말이구 그 아이는
가슴이 아주 컸다고 그랬습니다."
"그럼 범인을 목격한 것은 아니잖아?"
"그런 셈입니다. 사건과 연관이 있을지는
몰라도 범인이라고 볼 수는 없습니다."
"그럼 그 여자를 수배해 봐."
"예."
"그리고 담배 한 대 피우고 나서 나가봐.
그 아이를 다시 만나서 그 아이가 목격한
여자의 그림을 그려 와."
"몽타지를 그리란 말씀입니까?"
"아이들인데 몽타지가 그려질 수 있겠어?
그건 불가능한 일이고 여자가 입은 코트,
것들을 그려 오라구......그래야 수배할 수
있지 어떻게 수배를 해?"
"그림 솜씨가 신통찮아서......"
정형사가 난처한 표정으로 말끝을
흐렸다.
"아이는 어디 살아?"
"사건이 일어난 집에서 꽤 떨어져
있습니다. 친구네 집에 오락을 하러 가다가
봤답니다."
"오락?"
"컴퓨터 오락 있지 않습니까?"
"어쨌거나 다시 가서 여자의 특징을
자세히 알아 와. 뭣 하면 이리로
데려오구."
"이리로 데려오지요."
정형사가 담배를 꺼내 물고 밖으로
것이 자신이 없는 모양이었다.
"어떻게들 생각해?"
최형사가 형사들을 돌아보고 의견을
물었다.
형사들은 잠자코 허공만 쳐다보고
있었다.
"저녁 먹고 다시들 나가보자구. 이번엔
다방, 술집, 당구장, 오락장으로
돌자구......"
최형사가 형사들을 다그쳤다. 비가 오고
있어서인지 형사들은 우울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정형사가 노란 옷을 입은 여자를
보았다는 소년을 데리고 온 것은 형사들이
저녁식사를 마치고 다시 파출소로 돌아와
출동준비를 하고 있을 때였다. 정형사는
소년의 어머니와 생기 발랄한 젊은
아가씨까지 함께 데리고 의기양양하게
파출소 문을 열고 들어와 형사들을
어리둥절하게 했다.
형사들은 멀뚱히 젊은 여자를
쳐바보았다. 여자의 풍성한 머리숱에는
빗방울이 안개꽃처럼 묻어 있었다. 여자의
생식 때문인지 파출소 안이 훨씬 환해진 것
같았다.
"이 소년인가?"
"예."
정형사가 이마의 빗물을 훔치며
대답했다.
"우리 반장님이십니다."
정형사가 소년의 어머니에게 최형사를
소개했다. 최형사는 소년의 어머니에게
목례를 했다.
"좀 앉으십시오. 번거롭게 오시게 해서
죄송합니다."
최형사는 소년의 어머니에게 의자를
권했다. 소년의 어머니가 머뭇거리다가
파출소의 소파에게 질문을 던졌다.
"회색이었어요."
소년이 망설이지 않고 대답했다.
"어느 정도의?"
"우리 이모 차 색깔하고 비슷해요."
여자가 말참견을 했다.
"어떤 모양이지?"
이번엔 최형사가 물었다.
"우리 아빠 것하고 똑같아요. 색깔만
달라요."
"남자 코트예요."
"남자 코트?"
최형사가 이상하다는 듯 물었다.
"분명해요."
"코트의 단추를 잠갔었니?"
"아니오. 단추를 잠그지 않았으니까 노란
옷을 입을 걸 알죠."
"그래, 털로 된 옷이라고 했는데 어떻게
생긴 옷이지?"
"에 밑에는 짧은 치마구요. 위에는
궁둥이까지 내려오는 스웨터였어요. 털실로
"울 스커트와 울 스웨터예요. 멋쟁이들이
입은 옷이죠."
여자가 형사들에게 설명을 해주었다.
최형사가 고개를 끄덕거렸다.
"스웨터의 단추는 잠겨 있었니?"
이번엔 여자가 소년에게 질문을 했다.
소년은 잠깐 동안 생각하는 표정을
지었다.
"안 잠갔던 것 같아."
"스웨터 안이 무슨 색이었지?"
"흰 색."
"스웨터 안에 하얀 면티를 받쳐
입었어요."
형사들은 여자가 설명해 주는 것을
수첩에 기록했다.
"다리는 무슨 색이었어?"
"구두는?"
"이모 같은 거."
"굽이 높지 않은 구두군......머리는?"
"파마머리."
"키는 어느 정도였지?"
"이모보다 조금 더 커."
"여자치곤 큰 키예요."
형사들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얼굴은 어떻게 생겼지?"
"얼굴은 생각이 안 나!"
소년은 고개를 저었다.
"눈이 충혈되어 있었다며?"
"눈이 빨갰어. 눈가로 더러운 진물 같은
게 흘러내리고......"
여자가 스케치북에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형사들은 여자가 스케치북에
소년이 옆에 서서 여자가 그리는 그림에
그렇지 않아, 여기는 이렇게 생겼어,
치마가 짧다니까......하고 얘기를 했고
그럴 때마다 여자는 그림을 재빨리
수정했다. 여자는 패션디자이너이기
때문인지 소년이 목격했다는 노란 옷을
입은 여자를 화폭에 10분도 안되어
그려냈다.
"비슷하니?"
여자가 소년에게 물었다.
"응."
소년이 대답했다. 형사들은 여자 주위에
모여 그림을 들여다보았다. 연필로
스케치했기 때문인지 그림의 인상이 뚜렷이
머리 속에 들어오지 않았다.
"어때요?"
"눈에 확실하게 들어오지 않지만 수사에
도움이 될 겁니다."
최형사는 여자로부터 그림을 넘겨받았다.
그림 속의 여자는 30대의 풍만한 여자였다.
이 여자가 과연 사건의 열쇠를 쥐고 있을
것인가 생각해 보았다. 암담하기만 했다.
그림 속의 여자를 머리 속에 떠올릴 수가
없었다.
"여자가 더러운 진물 같은 것을 흘리고
눈이 충혈되어 있었다는 것은 무슨
뜻일까요?"
소년과 여자들이 돌아가자 형사들은
둘러앉아 수사회의를 하지 시작했다.
그들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담배를 꺼내
물고 자욱하게 연기를 피워댔다.
"눈이 충혈되고 더러운 진물 같은 게
아닐까요?"
강형사의 말이었다. 강형사는 여자
속옷을 가방 속에 넣고 다니는 청년을 여자
친구에게 데리고 가서 확인을 하고 돌아와
있었다. 청년의 여자 친구가 마치 날나리
같았고 소태 씹은 표정으로 투덜거리고
있던 참이었다.
"아팠다구......?"
"눈이 충혈되고 진물이 흘렀다니까
아팠다고 봐야 하지 않겠습니까?"
강형사가 자신없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최형사는 그럴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노란 옷을 입은 여자는 병을 앓고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노란 옷을 입은 여자가
조영애를 찾아간 것은 무엇 때문이었을까.
최형사는 꼴똘히 생각했으나 그 까닭을
그러나 사건의 단서는 의외의 장소에서
나타났다. 그것은 최형사와 형사들의
장안동 일대의 유흥업소를 찾아다니며
성기가 큰 남자의 행방을 탐문하고 있을
때였다. 마장동 하천 둑길에서 길을 가던
여대생 30대 전후의 여장남자에게 강간을
당할 뻔한 사건이 터진 것이다.
그 사건은 즉각 동대문 경찰서로
보고되었고 동대문 경찰서에서는 장안동
파출소로 연락을 취했던 것이다. 최형사는
형사들과 함께 즉각 현장으로 달려갔다.
사건 현장에는 이미 장안동 파출소의
순경들과 형사들이 출동해 있었다.
"전 그 사람이 여자인 줄 알았어요.
여자인 줄 알고 아무 경계도 하지
않았는데......"
있었다. 최형사는 여대생을 물끄러미
살펴보다가 정복을 입은 경찰관을 한적한
곳으로 데리고 갔다.
"여대생인데 강간을 당할 뻔했습니다.
범인은 저 여학생의 옷을 벗기고 강간을
하려다가 지나가는 행인에게 발각되어
도망을 쳤답니다."
"여장남자라고 하던데......?"
"예, 범인은 스커트를 입고 있었답니다.
스커트를 걷어올리고 여학생에게
달려들었다는 것입니다."
"범인의 얼굴을 봤답니까?"
"어두운데다 비까지 오고 있어서
확실히는 못 봤답니다."
"옷은 무슨 색이라고 하던가요?"
"노란 색이라고 하더군요."
"확실하답니다."
최형사는 입을 다물었다. 노란 옷을 입은
여자가 의외의 장소에서 나타난 것이다.
최형사는 다시 여대생이 있는 곳으로 갔다.
여대생은 옷이 흙투성이였다. 범인에게
저항을 하느라고 흙 위를 뒹굴었던 것
같았다.
"누가 이 학생을 구했습니까?"
"접니다."
여대생을 위험에서 구출한 사람은 20대의
청년이었다.
"범인을 봤습니까?"
"자세히는 못봤습니다."
"어떻게 해서 발견하게 되었죠?"
"예. 친구들과 술을 마시고 돌아오다가
깜박하여 정류장을 하나 지났습니다.
소리가 들려서 저쪽을 봤더니......여자가
쓰러져 있고 남자가 그 위에 올라타
있어서......"
"그래서 어떻게 했습니까?"
"소리를 질렀습니다. 불이야,
불이야......하구요."
"아니 왜 불이라고 소리를 질렀습니까?"
"도둑이나 강도가 나타났다고 소리를
지르면 사람들이 도와 주려오지 않는다는
얘기가 생각나서......"
청년이 멋적은지 쥐위를 돌아보면서
머리를 긁었다. 최형사는 쓴 웃음이
나왔다.
"그랬더니 범인이 도망을 가던가요?"
"예, 저를 한참동안이나 쏘아보다가
달아났습니다. 손이 칼이 들여
있었습니다."
"여장남자라고 하던데 그렇습니까?"
"예."
"노란 옷을 입고 있었나요?"
"예."
최형사는 고개를 끄덕거렸다. 여대생을
강간하려고 범인이 노란 옷을 입은
여장남자라면 조영애의 집에 나타난 노란
옷을 입은 여자와 동일인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사건은 그것으로 끝난 것이
아니었다. 노란 옷을 입은 여장남자는 그날
밤에만 두 건이나 더 강간미수 사건을
저질러 형사들을 긴장시켰다.
두 번째의 사건은 새벽2시 서초동
룸싸롱에서 퇴근하는 호스티스를 골목에서
강제로 추행하려다가 미수에 그쳤고,
세번째는 노현동 여관 앞에서 여관에서
나오는 유부녀를 추행하려다가 미수에
그쳤다. 그것은 새벽 4시에 일어난
일이었다.
(범인이 발작 상태에 있는
것인가......?)
최형사는 노란 옷을 입은 여장남자가
어둠 속을 배회하며 여자들을 찾아 헤매고
있을 생각을 하자 소름이 오싹 끼쳐왔다.
하석주는 기분이 언짢았다. 마침내
경찰에서 집으로 전화가 걸려 온 것이다.
이런 일이 있으리라고 예상 못한 것은
아니었으나 아내와 함께 잠자고 있을
시간에 전화가 걸려온 것이 신경이 쓰였다.
그러나 전화를 받지 않을 수도 없는
일이었다.
"커피 좀 끓여."
하석주는 아내에게 휴대폰을 건네받자
아내를 밖으로 내보낼 생각부터 했다.
아내에게 조영애 살인사건을 알려 주고
싶지 않았다. 언젠가는 알려지고 만다
하더라도 가능한 한 그 시간을 늦추고 싶은
것이 그의 심정이었다.
그의 아내가 불만 섞인 표정을 지었다.
"커피 한 잔 끓이가가 뭐가
어렵다구......끓이기 싫으면 그만둬. 안
마실 테니까."
그는 신경질을 부리는 체했다. 그러자
그때서야 그의 아내가 비대한 몸을 흔들며
거실로 나갔다.
"여보세요."
그는 아내가 거실로 나가자 수화기에
대고 낮게 말했다.
"하석주씨 되십니까?"
수화기 저쪽의 목소리는 최형사의
것이었다.
"수사본부의 최형사입니다."
"아, 예......몰라 뵈서 죄송합니다."
"낮에 회사에 전화를 드렸더니 출장을
들어오신다고 해서 이렇게
집으로......너무 늦게 전화를 드렸지요?"
"아닙니다. 괜찮습니다."
하석주는 짧게 끊어서 대꾸했다.
밤11시가 넘어 있었다. 이 시간에 전화를
한 최형사의 용건이 무엇일까 하는 생각이
빠르게 뇌리를 스쳤다.
"지금 수사본부로 좀 나와
주시겠습니까?"
"지금이오?"
"예, 하부장님께서 직접 보시고 확인을
해주셔야 할 일이 생겼습니다."
"그게 뭡니까? 내일 하면 안되겠습니까?"
하석주는 몹시 피곤해 일어나기가
싫었다.
"이런 일은 빠를수록 좋습니다.
전화가 일방적으로 찰칵 끊겼다.
하석주는 휴대폰을 들고 멍하니 생각에
잠겼다. 불쾌한 일이었다. 그러잖아도
경찰이나 형사를 싫어하는 하석주는 조영애
피살사건이 터지자 매일같이 형사들을
만나다시피 해야 했다.
그것도 강력계의 형사들로부터 취조
비슷하게 질문을 당하게 되자 거부감이
더욱 크게 일어났다. 그렇다고 겉으로
드러내놓고 싫은 내색을 할 수도 없었다.
어쨌거나 그는 2천5백만 원이라는 거금을
주고 조영애와 계약동거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
박봉에 시달리는 형사들이 그를 곱지
않는 눈으로 볼 것은 당연한 것이다.
형사들이 그의 아내나 회사에 조영애와의
일이었다.
그는 잠옷을 벗고 캐주얼 진 바지를 꺼내
입은 뒤 가죽점퍼를 걸쳤다.
"어디 가요?"
양말을 신는데 그의 아내가 커피 쟁반을
들고 들어오며 눈을 동그랗게 떴다.
"응, 파출소에."
"파출소요? 아니 파출소는 왜요?"
"장안동 파출소에 동대문 경찰서 강력계
형사들이 와 있어. 그 근처에 사는
조영애라는 여자가 죽었는데 술집
마담이야. 회사에서 접대 문제로 몇 번 간
적이 있어서 아는 여자인데 나도 조사를
받아야 하나 봐."
"세상에!"
"나는 죄 없으니까 상관없어. 술집에
"괜찮겠어요."
그의 아내가 근심스러운 투로 물었다.
그는 아내가 들고 있는 쟁반에서 커피잔을
들어 한 모금 마셨다.
"괜찮아. 참고인 진술만 받으면
된다니까."
"오빠한테 전화할까요?"
"이런 일 갖고 무슨 전화를 해?
처갓집에서 술이나 먹으러 다니는 줄
알겠네."
그는 커피를 후루룩 마셨다.
"뜨거워요."
그의 아내가 얼굴을 찡그렸다. 그는
커피를 마시고 현관으로 나가서 구두를
찾아 신었다.
"뭣하면 오빠한테 전화하세요."
배웅했다.
"쓸데없는 소리하지 말아!"
그는 아내를 윽박지르고 엘리베이터
속으로 들어갔다. 어제 하루종일 비가
내렸는데도 날씨가 겨울답지 않게
포근했다. 그는 승용차로 광장을
빠져나가면서 백미러로 뒤를 살폈다. 그의
아내가 아파트 경비실까지 나와서 팔짱을
끼고 서 있었다.
(재수가 없으려니까 정초부터 이게 무슨
꼴이야."
그는 난폭하게 차를 몰았다.
장안동 파출소 안에는 형사들과 순경들
외에도 노란 색의 울 스커트와 울 스웨터를
입은 젊은 여자가 소파에 앉아서 형사들과
무엇인가 얘기를 나누고 있었다. 그는
새삼스럽게 최형사와 인사를 나누고
머뭇거렸다.
"앉으십시오."
최형사가 철제의자를 가리켰다. 하석주는
두어 번 사양하다가 철제의자에 앉았다.
"담배 태우시겠습니까?"
최형사가 담배갑을 그에게 내밀었다.
"감사합니다."
그는 최형사의 담배갑에서 담배 한
가치를 꺼내 물고 불을 붙였다.
"이 옷 보신 일 있습니까?"
최형사는 그가 담배연기를 두 번이나
뱉았을 때야 나직한 목소리로 물었다. 다른
형사들은 담배를 피우면서 그를 주의 깊게
살피고 있었다.
"어떤 옷 말입니까?"
그는 최형사의 질문을 이해할 수 없었다.
최형사가 눈짓으로 여자를 가리켰다.
그는 최형사의 눈짓에 따라 여자를
쳐다보았다. 여자는 노란 색의 울 스커트와
울 스웨터를 입고 있었고, 그 안에는 하얀
면티를 받쳐입고 있었다.
"아니오."
그는 고개를 흔들었다. 여자가 입은 옷은
젊은 아가씨들이 입는 옷이었다.
"이런 옷을 입은 사람을 본 적이
없습니까?"
"없습니다."
"아는 사람 중에 이런 옷차림을 하고
다니는 사람을 본 적은 없습니까?"
"없습니다."
최형사가 난감해 하는 표정을 지었다.
형사들의 얼굴에도 실망하는 표정이 스치고
"혹시 조영애의 옷 중에 이런 옷은
없었습니까?"
"글쎄요, 한 번도 입는 것을 본 일이
없어서......"
"조영애와 친한 사람들 중에는
없습니까?"
"모르지요. 그 여자와 친한 사람은 별로
알지 못합니다."
"조영애를 찾아서 이 집에 오는 여자들은
몇이나 됩니까?"
"두 셋쯤 됩니다."
"그 여자들 연락처를 알고 있습니까?"
"예, 전화번호를 알고 있습니다."
"그럼 전화를 좀 해주십시오."
"지금이요?"
"예."
"곤란하면 전화번호를 주십시오. 우리가
하겠습니다."
"이 옷과 사건이 무슨 관련이 있습니까?"
그는 최형사를 쏘아보았다. 젊은 여자가
입고 있는 옷이 사건과 무슨 관련이 있는지
알 수 없었다.
"이 옷은 조영애가 피살되기 전날
조영애의 집을 찾아온 여자가 입었던
옷입니다. 어떤 소년이 그 사실을
목격했습니다. 이 아가씨가 그 소년의
이모인데 일부러 그런 옷을 구해 와서
우리를 도와 주고 있는 것입니다. 말로
어떤 옷을 입었다고 하는 것보다 실제로
이렇게 옷을 보여 주면 기억이 더욱
확실해질 수 있으니까요. 우리는 그 여자가
정말 여자인지, 아니면 여장을 한 남자인지
"여장남자요?"
"어저께 서울 시내 세곳에서 여장을 한
남자에게 여자들이 강간당할 뻔한 사건이
세 건이나 있었습니다. 그런데 피해자들의
말에 의하면 범인이 여장남자라는
것입니다. 게다가 범인이 노란 옷을 입고
있었다고 해서 동일인인지 아닌지 확인을
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하석주는 그때서야 비로소 최형사의 말을
이해했다. 최형사는 조영애를 찾아온
여자가 여장남자일지도 모른다는 뜻으로
말하고 있었다.
"알겠습니다."
하석주는 먼저 최성숙(崔星淑)에게
전화를 걸었다. 최성숙은 조영애와 친한
여자로 조영애의 집에도 몇 번 놀러온 일이
"이거 밤중에 전화를 드려 죄송합니다.
조영애씨와 함께 사는 하석주입니다."
"누구라구요?"
수화기 저쪽의 목소리는 찢어질 것처럼
신경질적이었다.
"하석주요. 장안동의 조영애씨
모릅니까?"
"알아요. 그런데 무슨 일이에요?"
최성숙이 반색하는 기색도 없이 쌀쌀하게
내쏘았다. 하석주는 기분이 불쾌했다.
"1월1일날 조영애씨를 만나지
않았습니까?"
"만나지 않았어요."
"혹시 울 스커트와 울 스웨터를 가지고
있습니까?"
"뭐라구요?"
"그런 옷 없어요. 용건이 뭐예요?"
"조영애씨가 죽었습니다."
수화기 저쪽에서 침을 삼키는 듯한
소리가 들렸다. 최성숙이 놀란 모양이었다.
"언제요?"
"1월2일 새벽 4시경입니다."
"왜 죽었어요? 교통사고가 났나요?"
"아닙니다. 살해되었습니다. 그런데
조영애씨가 살해되기 전날인 1월1일 낮에
노란 울 스커트와 울 스웨터를 입은 여자가
조영애의 집으로 들어가는 것을 본
목격자가 나타났습니다. 경찰에서는 그
여자가 사건과 연관이 있으리라고 생각하고
그 여자를 수배하고 있는 듯합니다. 그런
여자를 알면 좀 가르쳐 주십시오. 노란
옷을 잘 입는 여자 말입니다."
여자가 한결 누그러진 목소리로
대답했다. 여자도 조영애의 죽음에 충격을
받은 모양이었다.
"잘 알겠습니다."
그는 전화를 끊었다.
"그 집이 어디쯤 됩니까?"
최형사가 하석주에게 물었다. 하석주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최성숙이 살고 있는
아파트가 어디인지 몇번 들었었다. 그러나
얼핏 생각나지 않았기 때문에 시간이
걸렸다.
"잠실 동현 아파트라고 했는데......동현
아파트 B동 521호인지 2호인지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
"그 정도면 됐습니다."
"왜 그러십니까?"
하석주는 입을 다물었다. 형사들이
한밤중에 최성숙의 아파트를 가택 수색을
하는 것이 마땅치 않았다. 그러나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하부장님께서는 다른 여자에게 전화를
해보십시오."
"예."
하석주는 조영애의 동료인
이현주(李現珠)에게 다이얼을 돌렸다.
그러나 이현주는 벨이 일곱 번을 울려도
받지를 않았다. 아무도 없는 모양이었다.
"받지를 않는데요?"
하석주는 최형사를 쳐다보았다. 최형사는
유형사와 강형사에게 최성숙의 집을
수색하라고 지시하고는 또 다른 데를 걸어
보라고 퉁명스럽게 말했다. 하석주는
이옥정도 조영애의 동료였다.
"이옥정씨 댁이죠?"
신호음이 두번만에 떨어지자 하석주는
수화기에 대고 낮게 말했다. 유형사와
강형사가 이거 수색영장도 없이 어떻게
가택 수색을 하지? 한밤중에 쇼하게
생겼네......하고 투덜거리면서 밖으로
나가고 있었다.
"예, 그런데요?"
수화기 저쪽의 목소리는 간드러진 여자의
목소리였다.
"이옥정씨 계십니까?"
"네, 제가 이옥정인데 누구시죠?"
"하석주입니다."
"하......아, 하부장님이시군요.
웬일이세요? 우리 집에 전화를
"여쭤 볼 게 있어서 이렇게 전화를
걸었습니다. 밤늦게 정말 죄송합니다."
"아녜요. 우리야 지금이 초저녁이죠."
이옥정의 목소리를 술에 취한 듯 혀가
잔뜩 꼬부라져 있는 음성이었다.
"1월1일 조영애를 만났습니까?"
"1월1일이요?"
"예, 새해 첫날이라 기억하기 좋을
것입니다."
"설날 말씀하시는군요. 만나지
않았어요."
"혹시 털실로 짠 노란 스커트와 스웨터를
가지고 있지 않습니까?"
"아니오."
"친구분들이나 동료들 중에 그런 사람
없습니까?"
"실은 조영애가 죽었습니다."
"어머!"
수화기 저쪽에서 짧게 놀라는 소리가
들렸다.
"언제 죽었어요?"
여자가 착 가라앉은 목소리로 물었다.
"1월2일입니다."
"설날 다음날이오?"
"예."
"어떻게 죽었죠?"
"살해되었습니다."
"그럼 장례식은 어떻게 했어요?"
"가족들이 장례를 치루었습니다. 시골에
오빠 내외가 살고 있었습니다."
하석주는 조영애의 장례식을 잠깐
생각했다. 조영애는 결혼을 하지 않고 혼자
부모는 어릴 때 죽었기 때문에 시골에 사는
오빠 내외가 버스에 올라와 빈소도 차리지
않고 부검이 끝나자 경찰의 허락을 받아 곧
바로 벽제에 가서 화장을 했던 것이다.
"왜 저에겐 알리지 않았어요?"
이옥정의 목소리엔 울음이 섞여 있었다.
이따금 훌쩍거리는 듯한 소리가 전화선을
타고 들려왔다.
"경황이 없었습니다."
하석주는 자신도 모르게 눈시울이
시큰해져 왔다. 조영애의 죽음이 비로소
사실처럼 여겨졌다.
"범인은 잡혔나요?"
"아닙니다. 경찰이 지금 수사를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조영애가 죽기 전날 낮에
어떤 여자가 조영애의 집을 찾아왔다고
찾아온 여자는 노란 색의 울 스커트와
스웨터를......"
"잠깐만요. 그날이 설날인가요?"
이옥정이 하석주의 말 허리를 잘랐다.
"예."
"영애는 그날 낮에 집에 없었어요."
"집에 없었어요?"
하석주는 깜짝 놀랐다.
"점심 때쯤해서 저한테 전화를 했었어요.
혼자서 밥해 먹기가 싫어 점심을 사
먹으려고 나왔다고 하면서......저에게
만나자고 하는 것을 제가 싫다고 했어요.
영애는 점심 먹고 영화 한 편 보고 집으로
들어가겠다고 했는데......"
"그럼 노란 옷을 입은 여자는 조영애가
없는 틈을 이용해 집에 침입한 것이군요."
"고맙습니다. 그럼 안녕히 주무......"
"잠깐만요. 그 노란 옷을 입은 여자
말예요."
하석주가 전화를 끊으려고 하자 이옥정이
짧게 소리를 지르며 말을 계속했다.
"예?"
"노란 옷 입은 여자 얘기 조영애한테
들은 기억이 나요."
"언제요?"
"그날 낮이오. 영애는 그날 종로에 있는
공중전화 부스에서 저에게 전화를 걸었는데
뒤에 노란 옷을 입은 여자가 전화를
끝나기를 기다리고 있었대요. 그런데 얼굴
표정이 아주 기분 나빴다는 거에요.
그 노란 옷을 입은 여자가 눈으로 자신의
몸을 더듬는 것 같다는 거예요. 그래서
한 후 다시 저에게 전화를 걸었어요."
"미안하지만 좀 바꿔 주십시오."
그때 최형사가 하석주에게 가까이
다가왔다.
"이옥정씨, 여기 파출소인데 담당
형사반장님이 좀 바꿔달라고 합니다."
"그러세요."
이옥정이 쾌히 승락했다. 하석주는
최형사에게 수화기를 건네주었다.
"밤늦게 죄송합니다. 최형사라고 합니다.
몇 가지 물어보려고 하는데 괜찮겠습니까?"
"네."
이옥정이 긴장된 목소리로 대답했다.
"조영애씨가 공중전화를 하는데 노란
옷을 입은 여자가 뒤에 서 있었다고
하셨지요?"
"조영애씨가 노란 옷을 입은 여자의
인상착의를 전화로 얘기하던가요?"
"네. 키가 크고 가슴이 크다고 그랬어요.
그리고 눈이 충혈되어 있고 더러운 진물
같은 게 흘러내리고 있었대요. 가슴만
아니면 남자처럼 생긴 여자래요."
"얼굴이 남자처럼 생겼다고 하던가요?"
"그게 아니고 체격이 남자 같았다는
거예요. 여자 운동선수들 있죠? 그런
여자들 같더래요."
"그밖에 다른 얘기는 없던가요?"
"조영애씨가 그 후에 다시 전화를 하지
않았습니까?"
"안했어요."
"고맙습니다. 다음에 다시
연락드리겠습니다. 밤 늦게 미안합니다.
최형사가 전화를 끊었다. 하석주는
담배를 피우면서 최형사의 얼굴을 물끄러미
응시했다.
"강간미수범과 소년이 목격한 노란 옷을
입은 여자가 동일인인 것 같아."
최형사가 한숨을 쉬듯이 낮게 내뱉었다.
"뭐라고 그럽니까?"
형사들이 궁금한 낯빛으로 최형사를
쳐다보았다.
"조영애가 1월1일 낮에 노란 옷을 입은
사람을 보았대."
"어디서요?"
"조영애가 공중전화를 거는 뒤에 서
있었대. 노란 옷을 입은 것과 키가 큰 것은
일치하는데 가슴이 문제군......"
"가슴이오?"
여장남자가 아닌 것 같기도 하고......"
"강간을 당할 뻔한 여자들은 뭐라고
그러죠?"
"무서워서 가슴은 보지도 못했대."
하석주는 속으로 웃었다. 형사들의
생각이 어쩐지 우습기 짝이 없었다.
조영애를 찾아온 노란 옷을 입은 여자는
여장남자가 아니라 여자라는 생각이
들었다.
"강간미수범과 우리가 찾는 여자는 다른
인물일 것입니다. 목격자가 소년뿐이라고
해도 남자인지 여자인지 구별을
못하겠습니까? 소년이 목격한 사람은
틀림없이 여자입니다."
강형사의 말이었다. 하석주는 강형사의
말에 동의했다.
하석주는 다음날도 수사본부가 설치되어
있는 파출소로 불려갔다. 그는 몹시 짜증이
났다. 그러나 형사들 앞에서 짜증난 표정을
지울 수가 없어 담배만 계속 피워댔다.
형사들은 수사 방향을 제대로 잡지 못해
갈팡잘팡하고 있었다.
그들이 가장 곤혼스러워 하는 것은
강간미수범과 노란 옷을 입은 여자가
동일인이냐 아니냐 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아무도 결론을 내리지 못하고 있었다.
하석주가 수사본부가 설치되어 있는
장안동 파출소를 나온 것은 새벽2시가
되었을 때였다. 그는 차를 몰고 아파트로
돌아오며 여러 가지 생각에 잠겼다.
문제를 생각하게 하고 있었다. 죽음이
아름다울 까닭은 없지만 조영애의 죽음은
확실히 비참한 것이었다.
그는 조영애의 죽음에 대해서 계속
골똘히 생각해 보았다. 조영애가 과연
남자의 성기에 의해 심장마비로 죽은
것일까, 하는 생각에서는 자신도 모르게
고개가 흔들어졌다.
그럴 가능성은 거의 없다고 생각했다.
남자의 성기가 얼마나 크기에 그런 일이
일어날 수 있는 것일까.
(경찰은 지저분한 쪽으로 사건을 끌고
가고 있어......)
그는 경찰의 수사 방향이 미덥지가
않았다. 조영애가 심장마비로 죽은
것이라면 살인이 아니다. 물론 조영애는
범인은 조영애를 강간한 것이지 살인을 한
것이 아닌 것이다.
그는 경찰이 강간사건을 굳이
살인사건으로 몰로 가는 저의를 알 수가
없었다. 경찰은 아직 뚜렷한 용의자조차
찾아내지 못하고 있었다. 경찰이 기껏
찾아낸 용의자는 노란 옷을 입은
여자뿐이었다.
수사반장인 최형사는 그 여자를 범인으로
지목하고 있었다. 여장을 한 남자라는 것이
그의 생각이었다. 그러나 그 여자를 목격한
소년의 얘기는 전혀 달랐다. 그 소년의
이모-이름이 허숙영이었다-도 반대 의견을
갖고 있었다.
여자가 남자로 분장을 하는 것은 한계가
있다는 것이 허숙영의 주장이었다.
노처녀였으나 눈빛이 맑고 살결이
깨끗했다.
허숙영의 얘기는 상당히 논리적이었다.
허숙영은 노란 옷을 입은 여자가 성적인
질병을 갖고 있으며 그 증거로 눈이
충혈되고 더러운 진물이 눈가를 흘러내린
것을 들었다.
그러나 노란 옷을 입은 여자가
범인이라고 단정을 짓는 것은 위험한
일이라고 했다. 다만 노란 옷을 입은
여자가 중성(中性)이라는 가정을 한다면
여자로 분장하는 것이 손쉬울 것이라고
했다.
"중성이라는 것은 어떤 상태를 말하는
것입니까?"
형사들은 허숙영의 말에 의아한 표정을
"중성이라는 것은 문자 그대로 남자도
아니고 여자도 아닌 상태를 말이죠."
"그런 상태의 사람이 있습니까?"
"많아요. 이태원에 가면 게이들이
여자처럼 분장을 하고 남자들의 술 시중을
드는 술집도 있어요. 얼굴도 여자 같고
가슴도 여자처럼 나와 있어요."
"그럼 노란 옷을 입은 여자가 게이일
가능성이 있다는 것입니까?"
"그래요. 그 증거로 여자가 남자처럼
키가 크다는 사실을 들 수 있어요."
형사들이 허숙영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그들은 남자가 여자로 변장을 하고 거리를
돌아다니는 생각을 하고는 쓴 웃음을
지었다. 그러나 허숙영의 의견을 전혀
무시할 수가 없었다.
"네."
"게이들이 여장을 하면 여자와
똑같습니까?"
"네, 똑같아요. 게이들은 변태나
도착증에 의해 게이 노릇을 하는 사람도
있지만 더러는 성전환증이라는
정신질환적인 병을 앓고 있어요."
"성전환증이란 병도 있습니까?"
"성전환증은 염색체에는 전혀 이상이
없으면서도 여자가 되려는 성격이 강한
병이에요. 이 병은 성전환 수술이 유일한
치료 방법이래요."
"그래서 심심찮게 성전환 수술 얘기가
신문에 나오나......"
형사들은 호기심이 가득한 눈빛으로
허숙영의 얘기에 귀를 기울였다. 하석주도
"성전환 수술을 하면 부부 생활도
가능합니까?"
"가능하대요. 성전환 수술을 한 뒤에
남자와 결혼해서 행복한 결혼 생활을 하는
사람도 있다니까요."
"아이도 낳을 수 있나요?"
"아이는 못 낳는대요."
"그것 참 기묘한 일이군......남자와
남자가 결혼을 해서 살다니......"
"성전환 수술을 받은 남자 아니, 여자는
처음부터 여자로 태어난 사람이나 조금도
다름없이 곱고 아름답대요."
"세상엔 기이한 일도 많아......"
"아가씬 어찌 그리 잘 알죠?"
강형사가 감탄했다는 어조로 말했다.
"비슷한 추리소설을 읽고 공부 좀
"하여간 대단하십니다."
"자네들도 공부 좀 해."
최형사가 핀잔조로 말하자 모두 입을
다물었다.
"그럼 이렇게 하자구. 노란 옷을 입은
여자가 게이일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으니까 내일부터 게이들이 많은 이태원과
낙원동 일대를 수사하는 거야......"
형사들은 최형사의 얘기에 아무 반론도
제기하지 않았다. 허숙영도 입을 다물고
있었다.
하석주는 그들의 얘기에 반박하고
싶었으나 꾹 참았다. 그는 사건을 수사하는
입장이 아니라 수사를 받고 있는
입장이었다.
하석주가 아파트로 돌아오자 그의 아내가
아내에게 미안한 생각이 들었으나 욕실엔
들어가 샤워를 하고 침대에 올라가 누웠다.
"어떻게 되었어요?"
"뭐가?"
"오늘도 수사본부에서 조사를 받았어요?"
"응."
그는 아내가 옷을 벗는 것을 물끄러미
응시하면서 건성으로 대꾸했다.
"범인을 잡기 어려운 모양이죠?"
그녀는 하품을 길게 하며 침대에 올라와
누웠다. 몸무게가 70키로가 넘는 거구라
침대가 출렁하고 흔들렸다.
"범인이 게이일 가능성이 많대."
"게이요?"
"여자 행세하고 다니는 남자들 있잖아?"
"그 징그러운 남자들 말예요?"
그는 옆으로 돌아누웠다. 창으로 달빛이
비쳐들고 있었다. 그는 아파트의 빌딩 숲
위에 걸려 있는 희뿌연 달을 멀뚱히
쳐다보았다. 조영애의 죽은 나신이 그 위에
겹쳐져 떠올라 왔다. 그는 낮게 한숨을
내쉬었다.
"왜 그래요?"
"뭐?"
"왜 한숨을 쉬어요?"
"그냥."
"죽은 여자와 친했어요?"
"그 여자가 있는 술집에 자주 간
셈이었어. 여자가 아주 싹싹했어......"
그는 어느 정도 아내에게 사실을
얘기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터무니 없이
거짓말을 하면 아내는 더욱 의심을 하게 될
"예뻤어요?"
"글쎄......나이 먹은 여자를 예쁘다고
할 수 있을까......"
"몇 살인데요?"
"서른을 조금 넘겼을 거야. 그냥 편안한
여자였어."
"남자들은 편안한 여자가 좋은
모양이죠?"
"직장에서 스트레스를 많이 받잖아.
게다가 집에서까지 여편네들의 잔소리를
듣는 것은 질색을 하지. 가정불화가 대개
어디서부터 출발하는지 알아?"
"내가 어떻게 알아요?"
그의 아내가 다시 길게 하품을 했다.
"가정불화는 여자들의 잔소리에서부터
싹이 트는 거야. 요즈음은 우리 나라 30대
남자들의 한결 같은 고민이 여편네의
신경질이래......"
"나도 그래요?"
그의 아내가 겨드랑이 밑으로 바짝 파고
들어왔다. 아내의 커다란 가슴이 그의
허리를 짓누르고 있었다. 그는 아내의
어깨를 감싸 안았다. 어디선가 자동차
소리가 희미하게 들렸다.
"당신은 편해."
그것은 사실이었다. 그의 아내는 웬만한
일에는 화를 내거나 신경질을 부리지
않았다. 그의 아내는 뚱뚱한 몸집만치나
성격도 두루뭉실한 편이었다.
그가 그런 아내를 두고 바람을 피운 것은
조영애가 유별나게 미인이라서도 아니었고
조영애의 몸매가 날씬하게 균형이 잡혀
까닭도 없이 조영애와 계약동거를 했을
뿐이었다.
그는 여자도 돈과 같은 것이라고
생각했다. 많으면 많을수록 좋은 것이
황금이듯이 여자도 아내 하나로 만족을 할
수 없었다. 그는 아내가 옆에 있을 때도
언제나 마음 한구석이 허전한 것을 느꼈다.
조영애는 그 허전한 구석을 메꿔 주는
여자였다.
달이 아파트의 숲보다 낮게 내려앉는
것을 보고 그는 눈을 감았다. 피곤한
하루였다. 그는 아내의 체취를 느끼며
조영애를 생각했고, 조영애를 생각하면서
아내의 살 냄새를 맡았다. 그러다가
아스라한 잠 속으로 빠져들었다.
그는 잠결에 자신의 몸을 더듬는 아내의
아내는 그를 애무하면서 가쁜 숨소리를
뱉어내고 있었다. 그는 피곤하다는 듯이
짜증을 부리고 옆으로 돌아누웠다.
아내와 관계를 하고 싶지 않았다.
조영애의 죽음이 자꾸 생각났다. 그녀의
벌거벗은 나신, 국부에 응고되어 있던 붉은
핏자국, 누군지 알 수 없는 사내에게
무참하게 짓이겨지고 있는 조영애의
고통스러운 얼굴을 생각하자 그는 섹스에
대한 생각이 말끔히 사라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는 달팽이처럼 자꾸 몸을
웅크렸다.
그러나 그의 아내는 집요했다. 전에 없던
일이었다. 그의 아내는 아이들처럼 보채며
그를 흥분시키려고 했다.
"나 오늘 피곤해. 내일 아침 일찍 회사에
출근해야 하니까 그냥 잡시다."
그는 아내에게 사정을 했다.
"나 그냥 못 자겠어요. 도무지 잠이 안
와요."
"피곤해서 그래. 벌써 새벽이라구."
"미안해요."
"피곤하다니까!"
그는 아내의 손을 뿌리치며 짜증을
부렸다.
"그럼 당신은 그냥 잠을 자요. 내가
할께요."
"마음대로 해."
그는 낮게 한숨을 내쉬고 몸을 반듯이
눕혔다. 그의 아내가 도저히 그냥 물러설
것 같지 않았다.
"고마워요."
그의 아내가 기쁨에 넘쳐서 말했다.
던졌다. 아내의 속옷도 그곳에 수북히 쌓여
있었다.
그는 천장을 향한 채 눈을 감았다.
그리고 그는 무방비 상태로 팔과 다리를
벌렸다.
그의 아내가 거구의 몸을 이끌고
그에게로 올라왔다. 그는 눈을 떴다. 그의
아내는 그에게 등을 돌린 채 그의 하체로
얼굴을 가져가고 있었다. 어둠 속에서도
아내의 등과 둔부가 하얗게 빛났다.
(아!)
그는 눈을 질끈 감았다. 그의 아내가
입과 혀를 이용해 그를 자극하고 있었다.
그는 서서히 부풀기 시작했다.
"어때요?"
그의 아내가 가쁜 숨을 몰아쉬며 물었다.
"좋아."
그는 건성으로 대꾸했다. 아내의 기분을
거스르고 싶지 않았다. 그의 아내는 전에
없이 적극적이었다. 그러나 그는 적극적인
그의 아내에게 화답을 하지 않았다. 그의
아내가 입과 혀를 이용해 그를 장대처럼
일으켜 세우고, 그를 자신의 몸 속에
가두고 요란하게 엉덩이를 흔들어댈 때도
그는 눈만 질끈 감고 있었다.
그의 아내는 격결했다. 그러나 30분쯤
지나자 온몸을 떨면서 소리를 지르다가
그의 몸 위로 엎어졌다. 그는 그때서야
땀으로 흥건히 젖어 있는 아내의 등을
쓰다듬어 주었다.
건너편 아파트의 창에는 불빛이 두세 개
이젠 보이지도 않았다.
그는 담배연기를 길게 내뿜었다. 잠이
완전히 달아나 있었다. 몇시나 된 것일까.
그의 아내는 네 활개를 펴고 누워 코를
골며 자고 있었다. 잠버릇이 험한
아내였다.
그는 정사 뒤의 포만감에 취해서 혼곤히
자고 있는 아내의 몸을 내려다보았다.
몸집이 큰 아내였다. 땀을 흥건히 흘릴
정도로 격렬한 정사를 치른 뒤라 그의
아내는 속옷까지 걸치지 않고 잠들어
있었다. 원래부터 정사 뒤에는 아무 것도
걸치지 않고 잠을 자는 습관을 갖고 있는
아내였다.
그는 아내의 가슴과 하체를 물끄러미
들여다보다가 이불을 덮어 주고 거실로
같았다. 그는 거실의 장식장에 진열되어
있는 양주병을 꺼내 주방으로 들어갔다.
컵을 꺼내 양주를 반쯤 따른 뒤 한 모금을
마셨다.
뱃속이 찌르르 울렸다. 그는 계속 양주를
마셨다.
조영애의 죽음이 다시 머리 속에 떠올라
왔다. 조영애는 어떻게 그렇게 간단하게
죽은 것일까. 사람이 죽은 뒤에는 어떻게
되는 것일까. 조영애의 영혼은-영혼이
존재한다면-자신의 육체가 낯선 사내들에
의해 부검되고 마침내는 불길 속에
던져졌을 때 어떤 기분이었을까. 그는
뜨겁다고 비명을 지르는 조영애의 얼굴을
생각했다. 조영애의 영혼이 울부짖으며
아우성을 치고 있는 듯한 기분이었다.
조영애의 부검은 국부와 심장을 중심으로
해서 실시됐다는 것이 경찰의 얘기였다.
해부는 의사들이 메스를 들고 필요한
부분을 절개하고 떼어내어 현미경으로
관찰하는 것이다. 물론 다시 봉합을 하지만
의사들의 조영애의 국부를 도려내어
질(膣)을 검사하는 상상을 하자 몸서리가
쳐졌다.
(다음 일요일엔 절에 가서 불공을 드려
주어야겠어......)
조영애는 독실한 불교 신자였다.
조영애의 얘기에 의하면 사람이 깨달음을
얻지 못하면 윤회의 나락에 빠진다고 했다.
조영애가 깨달음을 얻지 못하고 죽은 것이
분명한 이상 절에 가서 극락왕생을 빌어
주는 것이 그의 도리라고 생각했다. 그렇게
차고 음산한 바람이 유리창을 흔들고
지나갔다. 한영숙은 뜨거운 커피잔을
두손으로 감싸쥐고 창밖의 어두운 하늘을
쳐다보았다. 그녀는 불길한 예감을 지워
버릴 수가 없었다. 그것은 밖에서 부는
바람보다 더욱 음산하게 그녀의 뇌리를
지배하고 있었다.
창밖은 캄캄했다. 한겨울이라 7시가 조금
지났을 뿐인데도 사방이 칠흑처럼
어두웠다.
(오늘은 결판을 내야 해......!)
김인구는 이미 그 여관에 도착해 있을
것이다. 악마와 같은 놈이다. 그러나
어떻게 하든지 그를 만나서 관계를
한영숙은 뜨거운 커피를 마시며 김인구의
잔인한 얼굴을 생각하고 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 동안 김인구에게 몸을 바치고
돈까지 바친 일을 생각하자 치가 떨렸다.
(내가 그런 놈을 만난 것은
실수였어......)
한영숙은 자신이 어리석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후회를 해도 소용없는 일이었다.
이제는 찰걸머리처럼 달라붙어서 떨어지지
않는 김인구와 당당하게 맞서는 길밖에
없었다.
한영숙은 커피를 마시고 집을 나섰다.
김인구가 기다리고 있는 여관은 그녀의
집에서 걸어서 10분도 걸리지 않는 한길
건너편 골목에 있었다.
한영숙은 큰길로 나서자 걸음을 재게
있어서인지 거리는 차량도 인적도 없이
한산했다. 이따금 보이는 사람들은 바람에
떠밀리듯 종종걸음을 하고 있었다.
이내 여관이 보였다. 1층과 2층은
목욕탕이고 3층부터 4층이 여관이었다.
김인구는 곧장 4층에 방을 잡아 놓고
있었다. 그녀는 여관에 들어서자 곧장
김인구가 기다리고 있는 4층으로 올라갔다.
"요즈음 재미가 좋다지?"
김인구는 침대에 반쯤 몸을 눕히고 TV를
보고 있었다. 여관의 TV는 초저녁인데도
포르노 비디오 테잎을 방영하고 있었다.
방안에 TV에서 흘러나오는 신음소리가
가득했다.
"재미는 무슨 재미예요?"
한영숙은 퉁명스럽게 대꾸했다.
"알고 있으면서 왜 물어요?"
한영숙은 TV화면에서 계속되는 남녀의
정사에 얼굴을 찡그렸다. TV화면이
징그럽게 느껴졌다.
"어때? 이 테잎 괜찮지?"
"왜 만나자고 했어요?"
한영숙은 TV화면에서 시선을 떼고
쌀쌀하게 내뱉았다. TV화면에서는 외국
여자가 입을 딱 벌리고 괴성을 지르고
있었다.
"그냥."
"난 바빠요. 용건 없으면 그냥
가겠어요."
"가고 싶으면 가라구."
김인구가 피식 웃었다. 한영숙은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이제는 더 이상
생각했다. 그러나 어떻게 얘기를 꺼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흥분되지?"
김인구가 TV화면과 그녀를 번갈아
쳐다보며 이죽거렸다.
"관심없어요."
"저 여자는 굉장할거야. 두 남자를
한꺼번에 상대하고 있으니까말야......"
"이제 우리 만나지 말아요?"
"뭐?"
김인구의 얼굴이 험악하게 일그러졌다.
한영숙은 가슴이 뜨끔했다.
"이제 우리 관계를 청산해요!"
"누구 맘대로?"
"내 맘예요. 이제는 두 번 다시 만나지
않겠어요."
"건방 떨구 자빠졌네."
김인구는 그녀의 얘기를 상대하려고도
하지 않았다. 한영숙은 난감했다. 마음
같아서는 여관문을 걷어차고 나가 버리고
싶었으나 그렇게 되면 김인구가 또 다시
달라붙을 것이 틀림없었다.
"이젠 나를 놔 줘요!"
"흥!"
"나는 결혼을 할 작정이에요."
"미친년! 한 번 결혼했으면 됐지 두 번
결혼을 해! 너 같은 년을 누가
데려간다든?"
"누가 데려가든 상관할 거 없어요!"
"이년이 기차 화통을 삶아 먹었나! 왜
소리를 빽빽 질러......"
김인구가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물러섰다.
"넌 아무 데도 못 가. 내가 싫다고 할
때까지 내 말을 들어야 해, 알았어?"
김인구가 그녀의 어깨를 움켜잡았다.
"이거 놔요?"
한영숙이 김인구의 손을 뿌리쳤다.
김인구가 피식 웃었다.
"이봐. 내가 왜 당신 결혼을 반대하는지
알아? 좋아, 일단 결혼은 하라구......"
"그럼 왜 자꾸 만나자는 거예요?"
"당신이 좋아서 그러지."
김인구가 유들유들 웃으며 다가왔다.
한영숙은 뒷걸음을 쳤다. 갑자기 공포가
뒤통수를 엄습해 왔다. 가슴이 두근거리고
숨이 가빠왔다.
"이봐. 우리 멋진 밤을 보내자구!"
휘청거리는 듯한 느낌을 느끼며 김인구를
쏘아보았다. 김인구가 한 손으로 그녀의
가슴을 움켜쥐었다. 그녀는 다시 얼굴을
찡그렸다.
"이게 누구 거라고 그랬어?"
"아파요!"
"누구 거라고 그랬어?"
김인구가 눈을 부릅떴다. 한영숙은 눈을
감아 버렸다. 김인구의 눈을 똑바로 쳐다볼
수가 없었다.
"왜 대답을 안해, 이년아?"
갑자기 김인구가 그녀의 뺨을 세차게
후려쳤다. 그녀는 눈물이 핑 돌았다. 뺨이
얼얼했다.
"때리지 말아요!"
한영숙은 울음 섞인 목소리로 외쳤다.
좀 맞아 볼래?"
김인구의 주먹이 복부로 날아왔다.
그녀는 헉 하는 신음소리를 삼키면서 카펫
바닥 위로 나뒹굴었다. 김인구가 그녀의
머리칼을 움켜쥐고 잡아일으켰다. 그녀는
머리가 몽땅 뽑혀나가는 것 같은 통증을
느끼며 가까스로 몸을 일으켰다. 눈물이
주르르 쏟아졌다. 악마 같은 놈이었다.
"때리고 싶으면 맘대로 때려요! 경찰에
고발하겠어요!"
"이년이!"
김인구가 다시 그녀의 뺨을 후려쳤다.
그녀는 다시 카펫 바닥 위에 나뒹굴었다.
김인구가 발길로 그녀의 복부와 가슴팍을
사정없이 내질렀다. 그녀는 비명소리를
지르며 카펫 바닥 위를 데굴데굴 굴렀다.
달팽이처럼 몸을 바짝 웅크렸다.
이러다가 김인구에게 맞아 죽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자 겁이 덜컥 났다. 우선은
이 자리를 모면해야 한다, 김인구에게
잘못했다고 용서를 빌자, 한영숙은 그렇게
생각했다.
"잘못했어요. 제가 잘못했어요. 부장님,
다시는 안 그럴께요."
한영숙은 재빨리 무릎을 끓고 두 손을
싹싹 빌었다.
"건방진 년!"
김인구가 그때서야 발길질을 멈추었다.
"옷 벗어!"
김인구가 담배를 꺼내 물고 소리를
질렀다. 한영숙은 천천히 옷을 벗기
시작했다. 이렇게 된 이상 어쩔 수가 없다.
않는 거야.
그는 블라우스와 스커트를 벗어 던지고
김인구를 쳐다보았다. 김인구는 왕자처럼
버티고 서서 담배연기를 뿜어대고 있었다.
"일어나."
한영숙은 기계처럼 몸을 일으켰다.
"내 옷을 벗겨."
김인구가 말했다.
한영숙은 김인구의 바지에서 혁대를 뽑고
지퍼를 내렸다. 와이셔츠는 김인구가
스스로 벗었다. 김인구의 바지를 밑으로
끌어내리자 줄 무늬 팬티가 드러났다. 줄
무늬 팬티는 이미 볼록하게 솟아 있었다.
"저것처럼 해."
김인구가 TV화면을 턱짓으로 가리켰다.
TV화면에서는 외국 여자가 남자의 성기를
한영숙은 눈앞이 캄캄해 왔다. 그러나
이미 저질러진 일이었다. 그녀는 김인구의
팬티를 밑으로 끌어내렸다. 그러자
김인구가 그녀의 머리채를 잡아서 자신의
하체로 가져갔다.
(더러운 놈!)
한영숙은 이를 갈면서 김인구가 지시하는
대로 따랐다.
김인구가 야수 같은 욕심을 완전히
채우고 그녀에게서 떨어져 누운 것을 얼추
한 시간이 지났을 때였다.
"넌 역시 내 마음에 들어. 그러니 내가
너를 절대로 놓아 줄 수 없지......"
한영숙은 김인구와 나란히 누운 채
허공을 응시했다. 이 짐승 같은 사내와
헤어져야 하는데 그럴 수가 없다. 한영숙은
"그 자식과 결혼할 거야?"
"네."
"그 자식이 어디가 좋아서 결혼하려는
거야."
"그 사람은 나에게 친절해요."
"결혼하고 싶으면 해. 그러나 내가
부르면 아무 때나 나와."
"싫어요."
"싫어도 소용없어."
"이젠 나를 놓아 주세요. 부장님은
사모님이 계시고 가족이 있잖아요."
"허튼 수작하지 마."
김인구는 잔인한 사내였다. 아니
무지막지한 사내라고 하는 편이 더
적절했다. 그는 공장의 사주인 사장의
동생이기 때문에 공장에서도 거칠 것이
나이는 불과 서른다섯밖에 되지
않았는데도 공장의 간부들에게 독재자처럼
군림했다. 공장 간부들은 김인구가 보기
싫어서 공장을 떠나는 사람이 많았다.
공장에 남아 있는 간부들은 김인구를
사장처럼 받들거나 아부를 하면서 지냈다.
김인구는 여자 문제가 복잡했다.
언젠가는 김인구의 부인이 김인구가 다른
여자와 함께 여관을 드나드는 것을
목격했었다.
그때 김인구는 수 많은 행인들이 보는
앞에서 부인을 사정없이 두들겨 팼다.
부인은 이혼을 청구하고 친정으로 가버리자
처갓집까지 쫓아가서 두들겨 팼다.
처갓집에서 김인구를 경찰에 고발했다.
그러나 김인구는 경찰서에서 하룻밤을 자고
두들겨 팼다. 고등학교에 다니는 처남은
이빨리 부러지고 대학1학년인 처제는 눈이
시퍼렇게 멍이 들었다.
장모는 김인구가 떠밀어 버리는 바람에
엉덩방아를 찧고 닷새를 누워서 지냈다.
김인구의 장인은 오래 전에 죽고 없었다.
그 이후 김인구의 부인과 친정 식구들은
김인구에게 벌벌 떨었다. 김인구는 사람이
아니라 짐승이라고 생각했다. 그런 인간은
건드리지 않고 모르는 체하는 것이
상책이라고 생각하고 두 번 다시 상종을
하지 않았다.
김인구는 별종 인간인 셈이었다.
김인구의 처갓집 식구들처럼 아예 건드리지
않는 것이 나을지도 모른다.
"세상엔 여자들도 많잖아요."
"여자가 어디 나뿐이에요?"
"여러 소리하지 마."
"저에게 필요한 게 뭐예요?"
"네 육체."
"돈이 필요한 거 아녜요? 여태까지
잠자코 있다가 내가 결혼한다니까 달라붙는
것은 돈 때문이죠?"
"미친년!"
"난 돈 같은 것은 없어요. 공장에 다니는
여자가 무슨 돈이 있어요."
"네년이 왜 돈이 없어?"
김인구가 반쯤 몸을 일으켜 한영숙을
쏘아보았다. 한영숙은 기가 막혔다. 그녀가
갖고 있는 것은 남편이 죽을 때 남김
허름한 집 한 채가 전부였다. 한영숙은
김인구가 혹시 자신의 집을 탐내고 있는
되면 어쩔 수 없이 사생결단을 내야 한다.
"부인은 재미가 없나 보죠?"
"무슨 소리야?"
"그러니 나 같은 여자에게 달라붙어서
떨어지지 않죠."
한영숙은 김인구에게 매를 맞을 각오를
하고 약을 올리기 시작했다.
"계집을 재미로 데리고 사는지 알아?"
"그럼 왜 데리고 살아요?"
"그냥 데리고 사는 거야."
한영숙은 공장에서 바로 옆에 앉아 일을
하는 여자를 머리 속에 떠올렸다.
공장에서는 그 여자를
한영옥(韓英玉)이라고 불렀으나 실제
이름은 차연숙(車娟淑)이었다.
한영숙이 그 여자를 알게 된 것은 그
그때 이미 미싱사였고 차연숙은 그녀
밑에서 미싱을 배웠다. 나이는 차연숙이
위였다.
"그렇게 싱거운 대답이 어디 있어요?"
한영숙은 비로소 무서운 결심을 했다.
김인구는 짐승 같은 자였다. 그런 자는
법도 소용이 없었다. 죽여 없애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이었으나 김인구를 죽일
자신이 없었다. 그 대신 김인구에게 새로운
여자를 붙여주리라고 생각했다. 김인구에게
어울릴 만한 마땅한 여자가 하나 있었다.
그 여자라면 김인구가 바짝 달라붙으리라고
생각했다.
차연숙은 이상한 여자였다.
그 여자는 가족도 없이 혼자서 살고
있었다. 얼굴이 예쁘장한 편은 아니었으나
눈빛이 음침하여 병든 사람처럼 보였다.
그러나 남자처럼 큰 키에 가슴이 묵직해
보일 정도로 컸고 둔부는 펑퍼짐하게 살이
붙어 있었다.
공장에 취업을 하면 이력서와
주민등록등본을 내게 되어 있었다.
주민등록등본은 세금 공제 때문에 필요한
것이었으나 차연숙은 몇 번이나 재촉을
받고서도 주민등록등본을 내지 않았다.
"미안하지만 누구 주민등록등본 하나 뗄
수 없을까?"
어느날 차연숙이 난처한 얼굴로
한영숙에게 사정을 했다.
"난 주민등록등본을 뗄 수 없어서 그래.
고향에서 도망을 쳐서 나왔는데 어떻게
주민등록등본을 떼러 고향에 가겠어?"
줄까?"
"그랬으면 얼마나 좋아?"
차연숙이 반색을 했다. 한영숙은 다음날
자신의 사촌 언니인 한영옥의
주민등록등본을 떼어다가 차연숙에게
주었다. 그런 일은 흔히 있는 일이었다.
차연숙은 그때부터 한영숙의 사촌 언니
한영옥 행세를 하기 시작했다.
한영숙은 그것이 인연이 되어 차연숙의
집에까지 놀러 가게 되었다. 차연숙의 집은
일제 때 지은 목조 2층집이었다. 정원에는
이름모를 커다란 나무들과 장미꽃이 만발해
있었다. 북쪽으로는 벽과 창을 통해 담쟁이
넝쿨이 2층까지 뻗어 있어서 고풍스러운
느낌을 주었다.
그러나 그 넓은 집에 식구가 아무도
있었다.
"내 옆에서 일하는 미싱사 알아요?"
"누구?"
"한영옥이오."
"혼자 사는 여자 말이군. 맨날 노란 옷만
입고 다니는......"
김인구는 한영옥이 혼자 사는 것을 알고
몇 번 집적거린 적이 있었다. 그러나
한영옥이 야멸차고 냉랭하게 대해 더 이상
접근을 하지 못하고 포기했었다.
"네."
"그 여자가 왜 혼자 사는지 알아요?"
"몰라."
김인구가 고개를 흔들었다. 한영숙은
김인구의 관심을 한영옥에게 돌려 버려야
하겠다고 생각했다. 한영옥은 혼자 살고
관계를 맺어도 아무 상관이 없을 것이다.
또 김인구가 한영옥과 관계를 맺으면
한동안 자신에 대해서는 잊어 버릴 것이다.
그 틈에 결혼도 하고 멀리 달아나 버리면
그만일 것이다.
"첫사랑에 실패했대요."
한영숙은 우습지도 않은데 일부러 소리를
내어 웃었다.
"첫사랑?"
"아직도 처녀래요."
"남자 경험이 전혀 없다는 말이야?"
김인구가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러니 남자들이 접근만 하면 질겁을
하죠."
"이상한 여자군."
"그래도 남자한테 관심은 있나
"무슨 관심?"
"은근히 나한테 물어보곤 해요. 남자와
같이 사는 것이 좋으냐, 어떻게 남자
앞에서 옷을 벗느냐......그런 얘기를 하곤
해요. 그런 것을 보면 남자한테 관심이
있는 게 아니겠어요?"
"웃기는 여자군."
"그런 여자가 한 번 남자한테 빠지면
정신 못차린데요."
"그렇겠지......"
김인구가 말끝을 흐렸다. 호기심이
동하는 눈치였다.
"관심 있어요?"
"없어."
"혼자 사는 여자인데두요?"
"정말 혼자 살아?"
살아요?"
"식구들 없어?"
"없어요. 집도 아주 외따로 떨어져
있어요. 그 집이라면 사람이 죽어도 모를
거예요."
한영숙은 김인구를 은근히 부추겼다.
"여자는 한 번 당하면 꼼짝
못하다면서요?"
"대개 그렇지. 특히 처녀들은 강간을
당해도 창피해서 고발을 하지 않아."
"한영옥은 고발도 못할 거예요."
"왜?"
"그 여자 이력서 가짜예요. 이름도
가짜구요."
"정말이야?"
"무슨 사정이 있나 봐요. 회사에 이력서
낼 때 우리 언니 주민등록등본을 떼어서
냈어요. 자꾸 피치 못할 사정이 있다고
조르길래 내가 언니 것을 떼어다가
주었어요."
"왜 그러지?"
김인구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무슨 죄를 지었겠죠."
"죄?"
"그러니까 주민등록등본을 떼지 않지 왜
그러겠어요? 내일 주민등록등본을 다시
떼어오라고 그래 보세요. 그 여자 표정이
확 달라질 거예요."
김인구가 고개를 끄덕거렸다. 한영숙이
김인구의 얼굴을 들여다보자 어떤 결의를
다지는 표정이 역력했다. 한영숙은 자신의
음모가 성공했다고 생각되자 속으로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그럼 진짜 이름이 뭐야?"
"차연숙이에요."
"차연숙?"
"마음이 동하죠?"
"그래."
김인구가 기분 좋은 웃음을 떠뜨렸다.
한영숙은 만족하여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어둠이 켜켜로 쌓인 창밖에는
바람이 세차게 불고 있었다.
이튿날. 김인구는 생산부 사무실로
들어오는 차연숙을 보고 가슴이 두근거리는
것을 느꼈다. 그는 서류를 들여다보는
체하면서 차연숙의 몸을 옆눈으로 빠르게
더듬었다.
(좋은 몸이야......)
김인구는 내심 감탄했다. 그러나
차연숙이 조심스럽게 책상 앞으로 걸어올
때까지 계속 서류를 검토하는 척했다.
차연숙의 몸에서 짙은 화장품 냄새가
풍기고 있었다.
"부장님 부르셨어요?"
차연숙이 머뭇거리며 그를 불렀다. 그는
고개를 들고 차연숙을 쳐다보았다.
그러나 커다란 키에 가슴이 풍만해
김인구는 숨이 막히는 듯했다.
"아, 바쁜데 오라고 해서 미안해요.
일하기가 힘들지요?"
김인구는 차연숙에게 너그러운 미소를
띄워 보냈다. 차연숙은 의아한 표정으로
김인구를 살피고 있었다.
"괜찮아요."
"에 오라고 한 것은 한영옥씨
주민등록등본을 다시 내야 할 필요가
있어서예요."
"......"
차연숙의 큰 눈이 김인구를 뚫어질 듯이
쏘아보았다. 김인구는 그 시선을 무시했다.
자신의 내심을 간파당한 것 같아 가슴이
뜨끔했다.
주민등록등본을 다시 떼어 오세요."
"이유가 뭐죠?"
차연숙이 어리둥절해 하는 표정으로
물었다.
"한영옥이 본명이 아니지 않아요?"
"네?"
차연숙의 눈이 크게 떠졌다. 깜짝 놀라
당황하는 기색이었다.
"진짜 이름이 어떻게 되죠?"
차연숙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우리 공장에 남의 주민등록등본 내고
다니는 사람 많으니까 걱정할 필요는
없어요. 주민등록등본만 본인의 것으로
떼어 오면 되니까......"
"......"
"이상하게 생각할 것 없어요. 세금
공제하지 않아요? 주민등록등본을 내는
것은 갑근세를 공제할 때 자료로 쓰기
위해서라구요. 그런데 남의 주민등록등본을
내면 엉뚱한 사람이 세금을 내는 꼴이
되죠. 게다가 연말정산 때 혜택도 받지
못하고 주민등록등본상에 또 수입이 있는
사람이 있으면 종합소득세까지 내어야
해요."
"......"
"본명이 어떻게 되죠?"
"차연숙이에요."
"차연숙이라......예쁜 이름이군요."
김인구는 싱긋 웃으며 볼펜으로 가만히
책상을 두드렸다. 차연숙은 당황하여
어찌할 바를 모르는 표정이 역력했다.
"주민등록등본을 꼭 다시 떼어 와야
"주민등록등본이 제대로 되어 있지
않으면 세무서에서 나와서 우리를
괴롭힙니다. 대단한 것도 아닌데 공연히
트집을 잡아서 소란을 피우지요."
"집이 아주 멀어요."
"어딘데요?"
"저 남쪽 섬이에요. 목포에서 배로
8시간을 가야 돼요."
"그럼 주민등록 주소가 거기로 되어
있나요?"
"네."
"이거 난리났네......"
김인구는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차연숙은 안절부절 못하고 있었다.
차연숙이 저 정도로 어찌할 바를 모르고
당황하는 것은 무슨 사연이 있으리라고
성공한 셈이었다.
"주민등록등본을 다시 내지 않으면
안되나요?"
"안될 것은 없지만......내는 것이 좋지
않겠어요?"
"그냥 다니게 해주세요."
"......"
"일은 열심히 하고 있어요."
"글쎄요."
"부장님이시니까 그런 정도는 봐 주실 수
있잖아요?"
"봐 주는 것은 어렵지 않아요. 그러나
사소한 일이기는 하지만 법을 어기는
일입니다."
"봐 주시지 않으면 전 공장을
그만두겠어요."
"네."
"그럼 이렇게 하기로 합시다. 지금은
작업시간이고 주위의 눈도 있고 하니
이따가 점심 먹고 공장 앞 다방에서 차를
마시며 그 사연을 들어봅시다. 사연에 피치
못할 사정이 들어 있는 것이라면 봐
드려야지요."
차연숙이 그를 물끄러미 응시했다. 그의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파악하려는 듯한
태도였다.
"한 가지 궁금한 게 있어요."
차연숙이 김인구를 조심스럽게 살폈다.
"뭐죠?"
"어떻게 제가 한영옥이 아니라는 것을
아셨죠?"
"그게 뭐 중요한가요?"
"대답을 해주세요."
"이따가 만나서 자세히 얘기합시다."
김인구는 손을 내저어 더 이상 말하지
않겠다는 뜻을 표시했다. 주민등록등본을
남의 것으로 떼어 위장취업을 하는 일은
흔하게 있는 일이었다.
18세 이하의 여자들은 노동부의
근로감독이 심하기 때문에 공장에서 취업을
시키려고 하지 않았다. 그러면 여자들은
18세가 넘은 친척이나 이웃 여자들의
주민등록등본을 떼어다가 이력서와 함께
공장에서 제출하고 취업을 하는 것이다.
공장에서는 그런 사정을 뻔히 알면서도
묵인을 하기 일쑤였다. 일단 서류상으로
18세가 넘으면 노동부의 근로감독은
느슨했다.
주민등록등본으로 위장취업을 하는 것은
대부분 집에서 가출했기 때문에 주소를
알리지 않기 위해서였다. 대개 결혼을 한
여자들이지만 남편과 부부 싸움을 하고
뛰쳐나온 여자들이 많았다. 그 여자들은
남편이 찾아오는 것을 방지하기 위하여
위장취업을 하고 있었다.
"왜 가르쳐 주지 않으세요?"
차연숙이 따지듯이 물었다. 목소리가
나지막했으나 얼음 같은 냉기가 실려
있었다. 김인구는 공연히 가슴이 서늘해져
오는 것 같았다.
"이따가 얘기하자니까......"
김인구는 신경질을 부리는 체했다.
그러나 차연숙의 풍만한 가슴께로 시선이
가자 자신도 모르게 목이 타는 듯한 갈증을
가슴일 것이라는 생각을 했다.
"이 앞에 있는 다방 알지요?"
"네."
"됐어요. 그럼 가서 일해요."
차연숙이 머뭇거리다가 등을 돌렸다.
김인구는 차연숙의 풍성한 둔부를
탐욕스러운 시선으로 쏘아보았다. 차연숙은
할 말이 더 있는 듯 머뭇거리다가 내키지
않는 걸음으로 생산부 사무실을 나가고
있었다.
(이상한 분위기의 여자야......)
김인구는 차연숙이 나가자 비로소 담배를
피워 물었다. 창밖의 하늘은 윤기 하나
없이 매끄러웠다. 유리알 같은 하늘이었다.
그는 창밖의 하늘을 쳐다보면서
담배연기를 길게 내뿜었다. 날씨는 아직도
불었지만 하늘은 쾌청했다.
그의 예상과는 달리 차연숙은 다방에
나타나지 않았다. 그를 하릴없이 다방
아가씨들 엉덩이만 두드리며 노닥거리다가
공장으로 돌아왔다.
(괘씸한 년......!)
그는 차연숙에게 희롱을 당한 기분이
들었다. 작업현장에 몇 번이나 내려가
차연숙의 등을 쏘아보았으나 차연숙은
그에게 일별도 던지지 않았다. 그는 점점
화가 났다.
이튿날 그는 차연숙을 다시 생산부
사무실로 불러 주민등록등본을 떼어 오라고
지시했다. 그러자 차연숙은 그에게 흰
봉투를 내밀었다. 사표였다.
(이년 봐라......!)
오자 만만하게 상대할 여자가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에게는 또 하나의
무기가 있었다. 그것은 퇴직금이었다.
퇴직금 지급을 질질 끌면 차연숙은
꼼짝없이 올가미에 걸려들 것이다.
"아니 왜 갑자기 사표를 냈죠?"
김인구는 차연숙의 사표를 받아 들고
음흉스럽게 물었다.
"사정이 생겼어요."
차연숙이 눈을 내리깔고 대답했다. 큰
키의 여자가 눈을 내리깔고 다소곳이
대답을 하자 김인구는 묘한 기분이 되었다.
그러나 내색을 하지 않았다.
"무슨 사정이죠?"
"......"
"내가 알면 안되는 사정인가요?"
"그냥 그렇게 알아 주세요."
"주민등록등본 때문인가요?"
"......"
차연숙은 대답을 하지 않았다. 김인구는
볼펜으로 책상을 두드렸다.
"뭐 사정이 생겼다면 어쩔 수 없지요. 정
그러면 퇴직금이 나올때까지만 계속해서
근무해요."
그의 형은 본사에 상주하면서 일 주일에
두세 번 공장을 방문해 작업 현황을
살피고는 했다.
그런데 오늘은 그를 사장실로 불러
간부들이 보는 앞에서 마구 욕을 해댔던
것이다. 생산이 지난 달보다 떨어진 것은
사실이었으나 생산부장이라는 놈이 무엇을
하고 있느냐, 기집년들 꽁무니 쫓아다닐
공장 말아먹지 말고 일 좀 똑바로 해
이새끼야......하고 정신없이 욕설을
퍼부었다.
그의 형은 사장이지만 종업원들에게까지
마구 욕을 해서 종업원들이 뒤로
<안하무인>, <욕사장>이라고 손가락질을
받는 사람이었다.
김인구는 기분이 나빴다. 욕을
잘하기로는 김인구도 형에 못지 않았다.
그들 형제의 대화는 공적인 장소가 아니면
상소리와 욕설이 반이 넘었다. 그런데 그의
형은 어제 공장의 간부들이 보는 곳에서도
마구 욕을 해댔던 것이다.
김인구는 얼굴이 붉으락푸르락 했으나 꾹
참았다. 그는 전과가 있었다. 형이 동대문
시장에서 재단사로 땀을 흘리며 일하고
제비족 노릇을 했다.
그러다가 꼬리가 드러나 경찰에
체포되었고 교도소 신세를 졌다. 그가
교도소에서 나왔을 때 형은 조그만
봉제공장을 차려 사장이 되어 있었다.
그러나 종업원은 12명뿐이었다.
그가 두번째 교도소에 들어갔다가 나왔을
때 형은 종업원을 70명이나 거느리고
있었다. 그는 형의 봉제공장에 생산부
주임으로 취업을 했다. 형은 그때 을지로에
사무실을 냈고 공장을 감독할 사람이
필요했던 것이다. 형은 의심이 많은
사람이었다.
그는 형에 의해 계장으로, 계장에서
과장으로, 과장에서 부장으로 빠르게
승진했다. 그러나 여자들에 대한 그의 나쁜
공장의 여자들을 감언이설로 유인했다.
공장에서의 작업 감독은 공장장이나 다른
간부들이 했다. 그의 형은 공장의 간부들에
대한 감독을 그에게 맡겼으나 그는 여자들
꽁무니만 쫓아다녔던 것이다.
(그런데 이년은 왜 출근을 하지 않았지?)
김인구는 한영숙에게 짜증이 났다.
어찌된 일인지 한영숙이 출근을 하지 않고
있었다. 차연숙을 유혹하라고 부추긴 것도
한영숙이었다. 그런데 당사자가 결근을 한
것이다.
(이년이 그놈하고 만나고 있나?)
한영숙은 스물네 살의 청년과 사귀고
있다고 했다. 김인구는 아직 그 청년의
이름이 무엇인지, 그 청년의 직업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있었다. 그러나
바보스러운 구석이 있는 여자였다.
한영숙이 스물네 살짜리 청년과 결혼을
해도 언제든지 불러낼 자신이 있었다.
그는 공장을 나오자 한영숙의 집으로
성큼성큼 걸어갔다. 사방은 이미 캄캄해져
있었다. 날씨가 여전히 추웠다. 밤이 되자
기온이 곤두박질 치고 있었다.
한영숙의 집은 공장에서 불과 20분
거리에 있었다. 걸음을 서두르자 금방
한영숙의 집에 도착할 수 있었다.
(어떻게 된 거지?)
한영숙의 집은 캄캄하게 불이 꺼져
있었다. 대문은 굳게 잠긴 채였다. 그는
담배를 꺼내 물고 대문을 흔들어 보았다.
안에서는 아무런 기척이 없었다.
이웃집에서 개들만 사납게 짖어댔다.
김인구는 화가 나서 담 옆으로 돌아갔다.
담을 넘어서 안으로 들어갈 작정이었다.
한영숙의 집은 기와집이었다. 담은
블록벽돌이었으나 나지막했다. 그는 담배를
입에 문 채 담을 넘었다.
현관문은 잠겨 있지 않았다. 현관 안으로
들어서자 어디선가 비린내가 희미하게
풍겨왔다. 그는 얼굴을 찡그렸다. 사방을
휘둘러 보았으나 비린내가 어디서 풍기는지
알 수 없었다.
그는 마루로 올라가 벽을 더듬어 불을
켰다. 마루는 썰렁했다. 그는 안방 문을
열어 젖혔다. 안방도 썰렁했다. 안방도
차가운 냉기가 돌았다.
(이년이 어딜 갔지?)
안방에는 한영숙이 옷을 갈아입고 치우지
있었다. 이부자리도 깔아 놓은 채였다.
그는 마루의 소파에 털썩 앉았다.
응접탁자의 재떨이에 담배꽁초가 두 개
있는 것이 눈에 띄었다. 한영숙은 담배를
피우지 않았다. 누군가 다른 사람이
한영숙의 집에 와서 담배를 피우고 간 것이
분명했다.
(이건 여자가 피운 모양인데......)
담배 꽁초의 필터 부분에 붉은 것이 묻어
있었다. 루즈 자국이었다.
김인구는 건물 밖의 불을 켜고 마당을
살펴보기 시작했다. 어디선가 풍기는
비린내가 역했다.
(아니 저건......)
김인구는 대문 쪽을 살피다가 가슴이
철렁했다. 대문 바로 앞에 삽살개 한
한영숙이 키우던 개였다. 김인구는
삽살개가 죽어 있는 대문 앞으로 다가갔다.
비린내는 피 냄새였다.
(누가 이렇게 잔인하게 죽였지?)
김인구는 모골이 송연해져 왔다. 개는
목이 반쯤 잘려나가 있었다.
(한영숙이가 이렇게 만든 것은 아닐
텐데......)
김인구는 서둘러 마루와 마당의 불을
끄고 한영숙의 집을 나왔다. 기분이
께름칙했다. 마치 누군가의 함정에 빠져든
듯한 기분이었다.
김인구는 일부러 한영숙의 집과 멀리
떨어진 술집에 들어가서 술을 마시기
시작했다. 그리고 한영숙에 대한 생각에
잠겼다.
전의 일이었다.
한영숙과 관계를 갖기 전에도 그는
공장의 몇몇 여자들과 관계를 맺었었다.
공장의 여자들은 춤을 추는 것을 좋아했다.
그가 점 찍은 여자에게 저녁이나 함께
하자고 불러내어 술을 먹인 뒤에 춤추러
가자고 하면 여자들은 두말 없이
따라나왔다.
그는 여자들의 허리를 안고 블루스를
추었다. 음악이 요란하고 조명이
어둠침침한 곳에서 블루스를 추는 것은
여자들을 교묘하게 자극하기 위해서였다.
그렇게 몇 번만 여자를 데리고 스탠드바나
카바레를 돌면 여자들은 여관으로
자연스럽게 따라왔다.
한영숙도 그런 과정을 거쳐 그와 관계를
(개를 죽인 것은 누구일까?)
김인구는 그 점이 잔뜩 신경이 쓰였다.
외국영화에서 보면 집에서 기르는 동물이
죽어 있는 것은 반듯이 어떤 사건이 일어날
징조나 경고가 대부분이었다.
한영숙의 집에 있는 개가 죽어 있는 것도
그런 징조이거나 누군가 자신에게 보내는
경고 같아 불안했다.
개는 예리한 칼로 목이 베어져 죽어
있었다. 소름끼치도록 끔찍한 일이었다.
(한영숙은 어떻게 된 것일까?)
김인구는 한영숙이 집에 없는 것도
수상했다. 강도가 들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으나 한영숙의 집에는 값 나가는
물건도 없었다. 강도가 침입한 것 같지는
않았다. 그러나 아무리 생각해도 무슨
김인구는 혼자서 소주 한 병을 비우고
집으로 돌아왔다.
한영숙은 이튿날도 출근하지 않고
있었다. 김인구는 하루종일 한영숙의
생각에만 골몰했다. 그러나 뚜렷한 대책이
있을 수가 없었다.
김인구는 작업반장을 불러 한영숙이 무엇
때문에 결근을 하는지 알아보라고
지시했다.
"대문이 잠겨 있습니다."
작업반장이 한영숙의 집에까지 다녀와서
보고를 했다.
"들어가 보지 않았나?"
"대문이 잠겨 있는데 어떻게
들어갑니까?"
작업반장이 볼멘 소리로 대꾸했다.
"옆집 사람의 얘기로는 어젯밤에도 누가
대문을 두드렸다고 합니다."
"누가?"
"내다보지 않아서 누군지는 모른다고
합니다."
"됐어."
김인구는 작업반장에게 돌아가서 일을
하라고 지시했다. 그날밤 김인구는 다시
한영숙의 집을 찾아갔다. 한영숙의 집은
캄캄하게 불이 꺼져 있었다.
그는 담을 넘어 안으로 들어갔다. 안에는
여전히 인적 하나 없이 싸늘한 냉기만
감돌았다. 그는 마루로 올라가 불을 켰다.
마루에 신발 자국이 어지럽게 흩어져
있었다. 그는 바짝 긴장하여 신발자국을
살폈다.
안방엔 장롱의 옷가지들이 내장처럼
쏟아져 있었다. 누군가 방을 뒤진 것이
분명했다. 그것은 다른 방들도
마찬가지였다. 방안은 신발 자국과 흩어진
옷가지들로 살풍경하기까지 했다.
(도대체 어떻게 된 거야?)
그는 눈앞에 벌어져 있는 상황을 믿기
어려웠다. 그러나 한영숙이 어디론가
사라졌고 집에 도둑이 든 것만은 확실했다.
그는 한영숙의 집을 나오자 무작정 걷기
시작했다.
김인구가 차연숙을 발견한 것은 한영숙의
집을 나와 20분쯤 걸었을 때였다. 차연숙은
공장 근처의 버스 정류장에서 무거운
가방을 들고 서 있었다.
버스를 기다리는 눈치였다. 김인구는
반가운 마음이 들어 차연숙에게 가까이
가려다가 그만두었다. 차연숙의 집이라도
알아두어야 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김인구는 차연숙의 뒤를 미행하기
시작했다. 차연숙이 버스를 타자 그는
택시를 탔다.
차연숙은 버스를 타고 30분쯤 달려서
창포동 철도 건널목 못미처서 내렸다.
김인구도 택시를 내렸다.
차연숙이 철도 건널목을 향해 걸어갔다.
김인구는 느릿느릿 차연숙의 뒤를 따라
걸었다.
차연숙은 일정한 보폭으로 걸음을 떼어
놓고 있었다.
(어디를 갔다가 오는 거지?)
김인구는 차연숙의 행동이 의심스러웠다.
차연숙이 공장 부근에서 서성거릴 까닭이
없었던 것이다. 어쩌면 차연숙이 한영숙을
만나고 오는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차연숙과 한영숙은 바로 옆자리에서 일을
하는 처지라 남달리 친할 것 같았다.
한영숙이 언니 한영옥의 주민등록등본까지
떼어 주어 차연숙이 위장취업까지 할 수
있도록 도와준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그래, 이것들이 서로 짜고 나를 골탕
먹이려는 거야......)
김인구는 여러 가지 생각이 떠올랐다.
어차피 차연숙의 집은 알아둘 필요가
있었다. 차연숙과 한영숙이 자기를
빼돌리고 한영숙을 스물네 살 먹은 청년과
결혼시키려고 한다면 단단히 본때를 보여
주리라고 생각했다.
철도 건널목 앞에서 걸음을 멈췄다. 달빛을
마주보고 서 있는 차연숙의 뒷모습이
신비스러워 보였다.
차연숙이 담배를 피워 물었다. 열차가
덜컹대며 달려와 철도 건널목을 지나갔다.
차연숙의 머리카락과 옷자락이 펄럭거렸다.
(한영숙의 응접탁자 위에 있던
담배꽁초는 차연숙이 피운 게
분명해......)
열차가 지나가자 차연숙이 철도 건널목을
건너 냇둑을 따라 걷기 시작했다. 김인구는
느릿느릿 차연숙의 뒤를 따라 걸었다. 이내
포플라숲이 보이고 다리가 하나 나타났다.
차연숙이 다리를 건넜다. 김인구도
조심스럽게 다리를 건넜다.
차연숙이 그 집으로 들어갔다. 김인구는
개가 요란하게 짖어댔다.
김인구는 재빨리 뒤로 물러섰다.
차연숙의 집에 개가 있으리라고는 생각조차
못했다.
(내일은 돼지고기를 한 근 사 가지고
와야겠어......)
김인구는 차연숙의 집에서 멀리 떨어져
담배를 피우며 차연숙의 집에 침입할
계획을 세웠다.
M은 어둠 속에서 담뱃불이 반짝이는 것을
2층 창으로 내다보았다. 공장 앞에서부터
미행을 해온 김인구가 피우는 것이
분명했다.
(따라올 줄 알았어......)
M은 어둠 속에서 차갑게 웃었다.
때 M은 김인구가 어떤 흉계를 꾸미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김인구는
한영숙이 그랬던 것처럼 아직도 그를
여자로 생각하고 있었다. 내일 밤에는
고기를 사 가지고 침입할 것이 분명했다.
그것은 한영숙의 자백으로도 입증할 수
있었다. 한영숙은 지금 지하실에 갇혀
있었다. 어젯밤 한영숙을 집으로 데리고
와서 과도로 위협을 하자 한영숙이 눈물을
찔끔찔금 흘리며 자백을 했던 것이다.
(내일은 김인가 침입하기 쉽도록 개를
죽여 버려야겠어......)
M은 어둠 속에서 음침한 눈을 반짝이며
생각했다
담뱃불이 멀어져 가기 시작했다.
김인구가 돌아가고 있었다. M은 기분이
좋았다. 오늘밤 한영숙을 데리고 유희를 할
생각을 하자 온몸이 흥분되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이튿날은 날씨가 한결 따뜻해졌다.
김인구는 공장에 출근하자 작업 현장부터
한 바퀴 돌았다. 한영숙이 출근했나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한영숙의
자리는 여전히 비어 있었다.
(이 계집이 도망을 친 모양이군......)
김인구는 불쾌했다. 한영숙이 배신을
했다고 생각하자 씁쓸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한영숙의 집에 죽어 있던 개와
어지러운 신발자국을 생각하자 강도가
침입했는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경찰에 신고할 생각은 들지 않았다. 그는
전과가 두 번이나 있었고, 한영숙과 내연의
관계를 맺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한영숙을
경찰이 수사를 하기 시작하면 그런 일이
낱낱이 드러날 것이다. 게다가 피해자라고
할 수 있는 한영숙이 나타나지 않고
있었다. 일단 한영숙이 나타나야 모든 것이
명백해질 것이므로 그때까지 모른척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점심 때 작업반장이 생산부 사무실로
올라와서 한영숙을 퇴사자로 처리하고 새
사람을 써야 하겠다고 보고를 했다. 무단
결근 사흘째였다. 김인구는 내일까지
한영숙이 출근하지 않으면 퇴사자로 처리해
버리라고 지시했다. 미싱기를 놀릴 수가
없었다.
한영숙은 봉급 날이나 되어서야 나타날
것이 분명했다. 공장의 생산직 여사원들은
대부분 사표를 따로 내는 일없이
공장에서도 그런 일이 다반사로 일어 났기
때문에 여자들이 3,4일 무단결근을 하면
퇴사자로 처리해 버렸다.
여자들은 월급날이 되면 그때서야 사표를
들고 경리부에 와서 월급을 찾아가는
것이다. 한영숙도 그런 여자들처럼
월급날이 되면 어슬렁거리고 나타날
것이다.
차연숙은 열심히 일을 하고 있었다.
먼지가 뽀얗게 일어나는 작업 현장에서
정신없이 미싱기를 돌리고 있었다.
김인구는 작업 현장을 돌면서 차연숙의
뒷모습을 몇 번이나 뚫어질 듯이
쏘아보았다.
(건방진 년!)
날씨는 흐렸다. 바람은 불지 않았으나
눈이 올 것 같았다.
퇴근시간이 되었다. 김인구는 공장 근처
식당에서 소주를 곁들여 저녁을 먹고
차연숙의 집으로 향했다. 사방은 이미
캄캄하게 어두워져 있었다. 김인구는 철도
건널목을 건너고 냇둑을 지나 다리를
건넜다.
차연숙의 집은 어둠 속에서 무슨
짐승처럼 웅크리고 있었다. 불이 켜지지
않은 것을 보면 차연숙이 아직 돌아오지
않은 모양이었다.
김인구는 대문 옆 담으로 걸어가서 등을
기대고 섰다. 차연숙이 돌아오기 전에 담을
넘어 들어갈 수도 있었으나 차연숙이 언제
돌아올지도 알 수 없었고 동행이 있을지도
몰라 섣불리 담을 넘을 수가 없었다.
차연숙의 집에서 기르고 는 개 생각이
났다. 고기를 사 올 작정이었으나 깜빡
잊고 왔다. 그는 걱정이 되었다. 다시
돌아가기는 싫었다. 어쨌든 기다려 보자.
무슨 수가 생기겠지.
어두운 하늘에서 희끗희끗 날리기
시작하고 있었다. 그는 눈발이 날리는
하늘을 쳐다보면서 한영숙의 집에 있던
개를 다시 생각했다. 그 개가 끔찍하게
죽어 있는 까닭을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이게 언제나 돌아오려고 이러지?)
김인구는 무료해지기 시작했다. 눈발이
점점 굵어지고 있었다. 천지사방에 흰
눈발이 자욱해졌다.
차연숙이 나타난 것은 거의 한 시간이
붙어섰다. 차연숙은 담배까지 물고
성큼성큼 걸어오고 있었다.
차연숙은 대문 앞에서 담배꽁초를 버리고
구두 뒤축으로 밟았다. 남자들 같은
행동이었다.
이내 차연숙이 열쇠를 꺼내 대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차연숙이 열쇠로 대문을
열고 들어간 것을 보면 안에는 아무도 없는
것이 분명했다.
김인구는 다시 담을 따라 돌아갔다. 집
뒤쪽으로 돌아가자 앙상한 정원수가
보였다. 김인구는 담을 넘어 정원으로
들어갔다. 어찌된 일인지 개도 짖지 않고
있었다.
거실 옆방에 불이 하나 켜져 있었다.
다른 방들은 모두 불이 꺼져 어둠침침했다.
있어 집은 으스스한 느낌을 주고 있었다.
김인구는 정원수 밑에 몸을 숨겼다. 개가
짖지 않는 것이 이상했으나 오히려 잘된
일이라고 생각했다.
눈이 기분 좋게 내리고 있었다. 눈은
마치 흰 꽃잎이 나풀거리며 떨어지는 것
같았다.
김인구는 소리를 내지 않고 창밑으로
기어갔다. 창에는 커튼이 쳐져 있었다.
그러나 커튼 사이로 침대에 누워 있는
여자가 희미하게 보였다.
그 방은 침실인 모양이었다. 그러나
조명도가 낮은 스탠드만 켜져 있어 방안의
사물들이 모두 희미해 보였다.
방문이 열리고 차연숙이 침실로
들어왔다. 차연숙은 침대에 누워 있는
돌아서더니 거울 앞에서 옷을 벗고 있었다.
스커트의 호크를 따고 지퍼를 내리자
스커트가 밑으로 스르르 흘러 내려갔다.
차연숙은 흰색 속옷을 입고 있었다.
삼각형이었다.
김인구는 자신도 모르게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차연숙은 그 상태로 투피스 상의를 벗고
하얀 면티를 걷어올려 위로 벗었다. 그러나
브래지어를 한 등이 드러났다.
(뭘 하려는 짓이지?)
차연숙은 브래지어를 벗자 거울을
오랫동안 들여다보고 있었다. 거울 속에
차연숙의 크고 둥근 가슴이 비쳤다. 그러나
차연숙의 얼굴이 희미했다.
그때 차연숙은 자신의 스커트를 다시
스위치를 올렸다. 차연숙의 침실이 갑자기
환해졌다.
(저, 저 여자는 한영숙......)
김인구는 침실이 환해지자 침대에 누워
있는 여자가 한영숙이라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내 그럴 줄 알았어!)
한영숙은 집을 비워두고 차연숙과 같이
있는 것이다.
(제 년이 나를 피해 도망쳐
봤자지......)
김인구는 기분이 좋아졌다. 그는 잔인한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것은 두 여자를
모두 그의 여자로 만드는 일이었다.
그때 차연숙이 창을 향해 몸을 돌렸다.
그는 재빨리 몸을 낮추어 바짝 엎드렸다.
어둠 속을 기어서 정원수 뒤로 몸을
숨겼다.
차연숙은 창을 열고 사방을 휘둘러보고
있었다. 무슨 기척을 들었거나 불길한
예감을 느낀 모양이었다.
차연숙이 다시 창문을 닫았다. 이번엔
커튼으로 창문을 완전히 가려 안이
들여다보이지 않았다.
김인구는 어두운 하늘을 쳐다보았다.
눈발이 점점 굵어지고 있었다. 그는 안에서
보이지 않는 방향으로 돌아가 앉아 담배를
꺼내 피우기 시작했다. 차연숙의 침실에
불이 꺼지고 거실에 불이 켜졌다. 거실은
커튼이 열려져 있어 안이 다 보였다.
차연숙은 잠옷으로 갈아입고 거실에 나와
소파에 앉아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김인구는 차연숙이 공장에 다니는 까닭을
이해할 수 없었다. 차연숙의 집은 2백 평이
넘어 보였다. 게다가 집안의 가구들도
비교적 호사스러운 것들이었다.
김인구는 오랫동안 차연숙의 거실을
들여다보았다. 차연숙은 담배를 다 피운 뒤
거실의 불을 끄고 텔레비젼을 틀었다.
침침했지만 여전히 거실 안이 보였다.
김인구는 눈발이 어지럽게 날리는 하늘을
쳐다보며 몸을 부르르 떨었다. 눈발이
날리는 포근한 날씨인데도 몸이 떨렸다.
차연숙은 쉽사리 잠이 들 것 같지
않았다. 김인구는 난감했다. 차연숙이 잠이
들 때를 기다리는 것은 몹시 지루했다.
어쩌면 밤 12시가 될 때까지 기다려야
할지도 모를 일이었다.
한영숙은 자고 있었다. 차연숙이 소리를
지르면 한영숙까지 깨어나서 덤벼들지도
모를 일이었다.
차연숙이 주방에서 술을 꺼내다가 마시기
시작했다. 눈을 벌써 정원에 하얗게 쌓이고
있었다.
(안되겠어!)
김인구는 담을 넘어 밖으로 나왔다.
대문을 두드릴 작정이었다. 차연숙의
사표를 수리하지 않겠으며 주민등록등본을
다시 떼지 않아도 좋다고 말하기 위해
왔다고 하면 차연숙은 그다지 의심하지
않을 것이다.
김인구는 심호흡을 하고 나서 대문을
두드렸다. 사방은 칠흑처럼 캄캄하고
주위에 인가라고는 없었다. 대문을 사납게
"누구세요?"
현관문이 열리고 차연숙이 얼굴을
내밀었다. 차연숙은 잠옷 위에 코트를
걸치고 있었다.
"김부장이오."
김인구는 부드러운 목소리로 가장하여
대답했다.
"누구요?"
"생산부의 김인구요."
"어머! 부장님께서 왠일이세요?"
차연숙의 목소리가 탄력있게 들렸다.
"지나가다가 들렸소. 할 말도 있고
해서......"
"그래요?"
차연숙이 슬리퍼를 끌고 나와 대문을
열었다. 차연숙의 눈이 빠르게 대문 밖을
대문 안에 발을 들여 놓았다. 일단
들어가면 차연숙이 내쫓지는 않으리라고
생각했다.
"눈이 아주 많이 와요."
김인구는 머리의 눈을 털었다.
"들어오세요."
차연숙이 대문을 닫았다. 김인구는
대문을 닫는 차연숙을 따라 현관 안으로
들어갔다. 일은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었다.
"차 한 잔 드릴까요?"
"아니오. 금방 가야지요."
"앉으세요."
차연숙이 소파를 가리켰다. 김인구는
소파에 앉았다. 응접 탁자 위에 양주병과
양주 잔 그리고 마른 안주가 놓여 있었다.
공장에 다니는 신분으로는 어울리지 않는
"술을 마시고 있었어요."
차연숙이 계면쩍은 표정으로 말했다.
"그러세요?"
김인구는 부드러운 미소를 그렸다.
침실문은 반쯤 열려 있었으나 한영숙은
기척도 없이 자고 있었다.
"저기......사표는 내지 않은 걸로
하겠어요. 그러니 그만두지 말고 그냥
다니도록 해요."
"주민등록등본을 다시 떼어야 하잖아요?"
"괜찮소. 사정이 있는 모양인데 굳이
내라고 할 수는 없지요. 내가 알아서
하겠소."
"술 한 잔 하시겠어요?"
차연숙이 눈을 반짝거렸다.
"주면 마시겠소."
차연숙이 미소를 짓는 주방으로
들어갔다. 김인구는 양주병이 상호를
살펴보았다. 그것은 시바스 리갈이었다.
이내 연숙이 얼음을 넣은 양주잔을 가지고
나와 양주를 반쯤 따랐다.
"고맙소."
김인구는 양주잔을 받아 한 모금 마셨다.
"혼자 사시오?"
"네."
"결혼을 안했습니까?"
"안했어요."
"그럼 쓸쓸하겠군."
"그래서 밤이면 이렇게 술을 마셔요.
담배도 피우고......"
차연숙이 눈웃음을 쳤다. 끈적거리는
웃음이었다.
"남자요?"
"이렇게 눈이 오는 밤이면 남자가
생각나지 않소?"
김인구는 추파를 던졌다.
"남자 관심 없어요."
"그래도 외롭지 않소?"
"외로워도 운명이려니 하고 살아가고
있어요. 한때는 좋아하는 사람이 있기도
했지만......두 번 다시 남자를 사귀지
않기로 작정했어요."
"그래요?"
"남자는 모두 늑대니까요."
"......옳은 말이오. 저 방엔 누가
있나요?"
김인구가 눈짓으로 침실로 가리켰다.
차연숙이 힐끗 뒤를 돌아다보고는 피식
"한영숙이에요."
"아니 공장에 결근을 하고 여기 와
있소?"
김인구는 놀란 얼굴을 했다.
"저녁에 왔어요. 결혼하기로 한 남자와
사흘동안 같이 지냈어요. 잠이 오지
않는다면서 수면제를 먹고 잠들었어요.
불면증이 있나 봐요."
한영숙이 불면증이 있는 것은
금시초문이었으나 잘된 일이라고 생각했다.
한영숙이 수면제를 먹고 잠이 들었다면
자신이 차연숙을 겁탈해도 아무것도 모르고
잠을 잘 것이다.
"드시죠."
"네."
김인구는 자신이 먼저 술을 한 모금 마신
많이 마시면 일을 치르기가 한결
쉬우리라는 계산이 섰다. 차연숙은 그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자기의 양주잔에 있는
술을 단숨에 비웠다.
김인구도 술잔을 비웠다.
차연숙이 먼저 김인구의 잔에 술을
따르고 자신의 잔에 술을 채웠다.
"혼자 오셨어요?"
"예."
"어떻게 우리 집을 아셨어요?"
"한영숙에게서 들었소."
"그런 것 같았어요."
차연숙이 짐작하고 있었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김인구는 양주잔을 들어
천천히 입으로 가져가려다가 멈칫했다.
갑자기 눈꺼풀이 무거워지면서 잠이
위에 올려 놓았다. 차연숙의 얼굴이 점점
희미해져 가고 있었다. 그는 눈꺼풀을
밀어올리려고 기를 썼으나 소용이 없었다.
그는 옆으로 비스듬히 쓰러졌다.
"왜 그러세요?"
"수, 술에......"
"술이 어때요?"
"술에......수면제가......"
갑자기 차연숙의 웃음소리가 높다랗게
들려왔다. 차연숙이 코트를 벗어 것이
보였다.
어쩌면 착각인지도 알 수 없었다.
김인구는 눈을 감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썼다. 잠이 들면 안된다. 어쩌자고 이런
상태에서 잠이 드는 것일까.......
차연숙이 김인구 앞으로 다가서서 잠옷을
상반신이 그대로 드러났다. 김인구는 눈을
감았다. 아니 저절로 눈이 감겼다.
김인구는 깊은 수면 상태에서 누군가
자신의 옷을 벗기고 있는 듯한 기분을
느꼈다. 그는 억지로 눈을 뜨려고 했으나
눈이 떠지지 않았다.
텔레비젼에서는 방송이 끝났는지 쏴아
하는 소리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마치 비가
내리는 소리 같았다.
그는 간신히 눈꺼풀을 밀어올렸다.
눈꺼풀이 천근처럼 무거웠다. 그의 몽롱한
시야에 여자의 커다란 가슴 두 개가 바짝
다가와 있었다. 희고 뽀얀 가슴이었다.
김인구는 꿈을 꾸고 있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꿈을 꾸고 있으니까 눈앞에 있는
여자가 흐릿해 보이는 것이리라.
무거워지면서 깊은 수면이 찾아오고
있었다.
"하마터면 불이 날 뻔했어요."
여자의 달콤한 목소리가 귓전에
뿌리쳤다. 김인구는 기분이 좋아졌다.
무엇인가 부드러운 것이 자신의 몸에
휘감기고 있었다.
"당신이 피우던 담배가 소파에 떨어져 내
집을 다 태울 뻔했다구요......"
그의 몸에 감기고 있는 것은 여자의
나긋나긋한 육체였다.
"부장님!"
"......"
"내 집에 오신 걸 환영하겠어요.
부장님은 여자를 매우 좋아하시죠?"
여자가 깔깔대고 웃었다. 여자의
기분이었다. 공기가 축축한 물기에 젖어
있었다.
의식이 맑아져 오기 시작했다.
그래. 밖에는 눈이 오고 있었어. 온
세상을 하얗게 만들기 위해 흰 눈이
푸짐하게 내리고 있었어. 그런데 나는
여지서 무엇을 하고 있을까.
그는 눈을 떴다. 눈꺼풀이 무거워졌다.
어디선가 비린내가 풍겨왔다. 흥얼대는
여자의 노랫소리도 들리고 있었다. 그는 그
노랫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그는 그때서야 자신의 입에 테이프로
봉해져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숨을 쉬기가
답답했다. 팔과 다리도 묶여 있었다.
(내가 꿈을 꾸고 있는 것인가?)
그렇게 생각했다. 의식이 점점 맑아져
왔다. 그는 자신이 차연숙을 미행해 왔고
차연숙과 술을 마시다가 잠이 들었다는
것을 생각해 냈다.
(한영숙의 짓이야......)
김인구는 한영숙이 자신의 마수에서
벗어나기 위해 이런 짓을 저지르고 있다고
생각했다. 한영숙을 지나치게 괴롭힌
탓이었다. 쥐도 궁지에 몰리면 고양이를
무는 것이다.
욕실 쪽에서 다시 노랫소리가 들렸다.
기분이 좋아서 부르는 노랫소리였다.
붉은 장미 흰 장미
노란 장미 분홍 장미
그곳에서 피 냄새가 풍기고 있었다. 문은
반쯤 열려 있었다.
오렌지색의 불빛이 열린 문 사이로
거실을 따뜻하게 비추고 있었다. 그러나
소파에 가려 욕실이 보이지 않았다. 그는
거실 바닥에 쓰러져 있었다.
김인구는 몸을 굴려 소파에서 벗어났다.
비로소 욕실 안이 희미하게 들여다보였다.
먼저 여자의 등이 보였다. 여자는 등을
이쪽으로 향한 채 웅크리고 무언인가를
칼로 썰고 있었다.
(무엇을 하는 거지?)
김인구는 가슴이 서늘해져 왔다. 여자는
삼각형의 팬티 하나만을 걸친 나신이었다.
이따금 칼로 썬 것을 입 속에 넣고
우물우물 씹기도 했다.
김인구는 자신의 머리 속에 떠오른
생각을 부정했다. 그것은 생각만 해도
끔찍한 일이었다.
여자가 고개를 돌려 뒤를 돌아다보았다.
김인구는 가슴이 철렁했다. 여자의 입가에
피가 흥건하게 묻어 있었다. 김인구는
재빨리 눈을 감았다.
여자가 거실로 나오는 기척이 들였다.
김인구는 가슴이 격렬하게 뛰었다. 눈을
뜨자 여자가 주방으로 들어가서 커다란
양은손을 가지고 나와 욕실로 들어가는
것이 보였다.
김인구는 눈을 부릅뜨고 여자가 하는
짓을 노려보았다.
여자는 토막이 난 고깃덩어리들은
양은솥에 담고 있었다.
김인구는 비로소 여자가 무엇을 하는
있는지 알았다. 그는 격렬하게 뛰던 가슴이
진정되는 것을 느꼈다. 여자가 양은솥을
들고 나와 주방으로 갔다. 그는 눈을
감았다.
"자는 척하고 있는 거 알고 있어!"
여자가 주방에서 나오더니 김인구의
옆구리를 발로 걷어찼다. 김인구는 눈을
번쩍 떴다.
"다음은 네 차례니까 기다리고
있어......"
여자가 입꼬리를 비틀며 높다랗게
웃었다. 김인구는 소름이 오싹 끼쳤다.
여자의 눈이 광기로 번들거리고 있었다.
여자가 다시 한 번 그의 옆구리를
걷어차고는 욕실로 들어갔다. 여자는
뿌려가면서 피 묻은 욕실 바닥을 씻어내고
있었다. 여자의 커다란 엉덩이가
흔들거리고 있었다.
김인구는 눈을 감았다. 여자는 제 정신이
아닌 것 같았다. 그러나 김인구는 입이
테이프로 봉해지고 손발이 묶여 있어
꼼짝도 할 수가 없었다.
여자가 거실로 나왔다.
그는 눈을 뜨고 여자를 쳐다보았다.
(저럴 수가!)
김인구는 자신의 눈이 의심스러웠다.
그의 눈은 빠르게 여자의 가슴과 하체를
번갈아 살피고 있었다. 믿을 수가 없는
일이었다.
"난 더러운 것은 질색이야. 목욕을 시켜
줄 테니까 얌전히 있어......"
칼끝으로 그의 옷을 베어내고 있었다.
손발을 묶어 놓아 옷을 벗기기가 용이하지
않은 탓에 그의 옷을 칼로 조각조각
베어내는 것 같았다.
(이 여자는 미쳤어......!)
김인구의 가슴속에 암담한 절망감이
엄습해 들어왔다.
한영숙은 지하실 출입문이 닫히는 둔중한
소리를 들었다. 차연숙이 공장에 출근을
하려는 모양이었다. 그러나 그녀는 꼼짝을
할 수가 없었다. 그녀는 쇠기둥에 손과
발이 꽁꽁 묶여 있었다.
지하실은 캄캄하게 어두웠다. 눈을 뜨고
사방을 휘둘러 보았으나 지하실엔
잡동사니만 잔뜩 쌓여 있었다. 도망을
그녀는 소리조차 지를 수 없었다. 입이
테이프로 봉해져 있어 숨을 쉬는 것도
어려웠다.
(김인구는 어떻게 되었을까?)
김인구가 차연숙에게 잡힌 것은 어젯밤의
일이었다. 한영숙은 김인구가 차연숙에게
잡힌 것도 모르고 잠을 자고 있었다.
그러나 무엇 때문인가 눈을 뜨자 거실에서
이상한 신음소리가 들리고 있었다.
한영숙은 꿈을 꾸는 기분이었다. 간신히
눈을 떴으나 몸을 움직일 수가 없었다.
거실에서는 신음소리가 계속 들리고
있었다. 남자와 여자가 격렬한 정사를
벌이는 신음소리였다.
(누굴까?)
한영숙은 의아했다. 그러나 몸을 움직일
무거웠다.
거실에서 들리는 신음소리는 착각인지도
모른다. 이 밤중에 차연숙이 누구와 정사를
하겠는가, 아니 착각이 아니라 꿈일
것이다, 라고 한영숙은 생각했다.
거실의 신음소리가 조용해졌다. 한영숙은
천근처럼 무거운 눈꺼풀을 밀어올리고
침대에서 내려섰다. 다리가 후들거리면서
떨리고 눈이 자꾸 감겼다.
침실문은 반쯤 열려 있었다. 한영숙은
거실을 향해 조심스럽게 걸어갔다.
거실의 응접소파 뒤에 김인구가 누워
있고 차연숙이 그 위에 올라가 괴성에
가까운 신음소리를 질러애고 있었다. 마치
동물이 울부짖는 듯한 소리였다.
(아!)
차연숙의 밑에 깔린 채 꼼짝도 하지 않고
있었다.
(김인구도 당했어......!)
한영숙은 소름이 오싹 끼쳤다.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는 것일까. 어떻게
인간이 남자도 되고 여자도 될 수 있는
것일까.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한영숙은 눈앞에서 일어나고 있는 현실이
믿어지지 않았다. 이럴 수는 없다, 이것은
분명히 꿈이야......하는 생각이 머리 속을
지배했으나 눈앞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은
엄연한 현실이었다.
(괴인이야. 아니야, 인간의 모습을 한
악마야......)
한영숙은 차연숙에게 잡히던 날 밤에
그의 알몸을 확실하게 보았다. 그는 뜻밖에
놀라운 일이었다.
"믿어지지 않지?"
차연숙은 그녀를 조롱하듯이 빙긋이
웃었었다. 옳은 말이었다. 그녀는 도무지
차연숙의 몸에 있는 두 개의 생식기를 믿을
수가 없었다.
세상이 복잡하다 보니까 여자처럼 생긴
게이들이 있다는 소문을 들은 일은 있었다.
그들 중에는 살결이 여자처럼 희고 가슴이
둥글게 솟아나온 자도 있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생식기가 두 개라는 것은 소문조차
들은 일이 없었다.
그녀는 엉금엉금 기어서 침실을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어떻게 하던지
도망을 쳐야 했다. 차연숙은 정사에 골몰해
있기 때문인지 한영숙이 침실을 빠져나오는
한영숙은 거실로 조심스럽게 기어나갔다.
한겨울인데도 등줄기로 식은땀이 흥건하게
흘러내렸다.
텔레비젼은 켜진 채였다. 그러나 방송이
끝나 쏴아 하는 소리가 흡사 비가 내리는
소리 같았다.
차연숙의 나신에는 텔레비젼의 우유빛
광선이 달빛처럼 하얗게 부서지고 있었다.
그것은 기괴하기 짝이 없는 모습이었다.
한영숙은 자신의 처지도 잊고 차연숙의
정사 장면을 훔쳐보았다. 그러나 차연숙의
정사는 그녀에게 아무런 느낌도 주지
못했다. 그것은 짐승들이 교미를 하는
것처럼 아무 의미가 없었다.
그녀는 현관을 향해 기어갔다. 그러나
현관문은 자물쇠로 잠겨 있었다.
한영숙은 암담한 절망감을 느꼈다.
그때 차연숙이 힐끗 뒤를 돌아보았다.
한영숙은 가슴이 철렁했다. 차연숙이
김인구의 몸에서 떨어져 일어나 그녀에게
가까이 왔다. 그녀는 머리끝이 곧추서는
듯한 공포를 느꼈다.
"밖에 나가고 싶어?"
"......"
차연숙의 눈에 광기를 뿜었다.
"눈이 오는 것을 보고 싶은 모양이지?"
차연숙의 눈가에 잔인한 미소가
감돌았다. 한영숙은 아무 대꾸도 할 수
없었다. 그녀의 눈에는 차연숙의 몸에 있는
두 개의 생식기만 보였다.
"그럼 밖에 나가서 눈 오는 것을
구경해."
불어 들어왔다. 한영숙은 재빠르게 밖을
내다보았다. 어두운 하늘에서 흰 눈발이
자욱하게 날리고 있었다.
"어서 나가!"
차연숙이 그녀를 발로 찼다. 한영숙은
현관 밖으로 굴러떨어졌다. 마당에는 눈이
하얗게 쌓여 있었다.
차연숙이 뒤따라 나와 한영숙의 손과
발을 묶었다. 한영숙은 꼼짝도 할 수
없었다. 자신도 모르게 눈물만 주르르
쏟아졌다.
차연숙이 한영숙의 입에 테이프를
붙였다. 한영숙은 숨을 쉬기가
고통스러워졌다.
차연숙은 미친 사람 같았다. 한영숙의
입에 테이프를 붙이더니 한영숙의 머리채를
목에 개목걸이를 채웠다.
"눈 속에서 잠이 들면 죽으니까 움직여야
돼."
차연숙이 깔깔대고 웃고는 현관문을
닫았다. 눈발이 날리는 어두운 하늘을
쳐다보았다. 여전히 눈꺼풀이 무거우면서
졸음이 쏟아져왔다. 머리 속에는 차연숙이
대한 공포가 가득했으나 졸음은 죽음에
대한 공포마저 쫓아 버리고 있었다.
그녀는 눈을 감았다. 자욱한 눈발이 금세
그녀의 몸 위에 하얗게 쌓였다. 추위로
온몸이 떨리기 시작했다.
차연숙이 현관문을 열고 나온 것은 거의
한 시간이 지났을 때였다.
차연숙은 눈에 묻혀 꽁꽁 얼어버린
한영숙을 개줄째 끌고 들어가 주방의 식탁
김인구는 지하실로 끌고 갔는지 보이지도
않았다.
차연숙은 양은솥에서 무엇인가 꺼내서
게걸스럽게 뜯어먹고 있었다. 양은솥에서
된장국 냄새가 풍겼다.
한영숙은 졸음이 쏟아져 왔다. 얼었던
몸이 녹기 시작하자 눈꺼풀이 더욱
무거웠다. 차연숙이 이따금 그녀의
옆구리를 발길로 내질렀으나 혼곤하게 잠이
쏟아졌다.
(내가 공연한 짓을 했어......)
한영숙은 김인구와 차연숙을 맺어주려고
음모를 꾸민 것을 후회했다. 김인구에게서
벗어나려고 음모를 꾸몄으나 일이 엉뚱하게
얽힌 것이다.
신음소리가 들려왔다. 한영숙이 눈을 뜨고
어둠 속을 살피자 계단 밑에 희끄무레한
물체가 보였다. 김인구였다.
(바로같은 사람......)
김인구도 쇠기둥에 묶여 있었다. 그러나
고개가 꺾어져 있는 것을 보면 잠을 자고
있는 모양이었다. 이따금 끄윽끄윽 하는
신음소리가 들리는 것은 테이프로 입이
봉해져 있어 숨을 쉬기가 곤란하기 때문일
것이다. 차연숙이 김인구에게 수면제를
먹인 모양이었다.
(그 여자는 우리를 사육하려는 거야!)
한영숙은 그 생각을 하자 비감해졌다.
한영숙 자신도 사흘 동안이나 차연숙에게
수면제를 받아먹고 낮에는 잠만 잤던
것이다. 죽음처럼 깊은 잠이었다. 이제는
(이럴 수는 없어!)
한영숙은 어떻게 해서든지 탈출을 해야
하겠다고 생각했다. 차연숙은 인간이라고
할 수 없었다. 남자도 아니고 여자도 아닌
중성이기 때문이 아니라, 생각 자체가
동물적인 욕구뿐이기 때문에 인간이랄 수
없었다.
그러나 아무리 궁리를 해도 탈출할
방법이 없었다.
밤이 되었다. 차연숙이 공장에서 돌아와
한영숙을 살피러 지하실로 내려왔다.
한영숙은 눈을 감고 잠이 든 체했다.
그러나 아무 소용이 없었다. 차연숙은
쇠기둥에 묶어 놓은 개줄을 풀러 한영숙을
거실로 끌고 올라갔다.
바람이 헐벗은 나뭇가지 끝에서 부르르
몸을 떨었다. 그 소리는 마치 한겨울 깊은
밤중에 골목을 쓸고 지나가는 삭풍처럼
음산했다.
최천식 형사는 차에서 내리자 멀리 한강
쪽을 시린 눈빛으로 쳐다보았다. 도심 속의
이국, 이태원의 풍경은 한겨울 저녁
무렵이라 그런지 나뭇가지 끝에서 목을
매달고 있는 바람소리처럼 을씨년스러웠다.
거리는 인적이 거의 없었다. 차가운 날씨
탓이었다. 이따금 거리를 오가는 외국인들,
백인과 흑인들, 그들을 힐끔거리며
지나가는 젊은 아가씨들도 어깨를 잔뜩
움츠리고 있었다.
최형사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사건이
발생한 지 어느덧 한 달이 지나고 있었다.
그런데도 범인에 대한 뚜렷한 단서는
잡히지 않고 있었다.
최형사는 담배를 피워 물고 꼴똘히
생각에 잠겼다. 게이들이 많이 나타난다는
술집을 찾아다니기 전에 머리 속의 생각을
정리해두기 위해서였다.
그는 이따금 범인에 대해서 혼자서
생각에 잠기곤 했다. 그는 범인이 노란
옷을 입고 있고 눈가에서 더러운 진물이
흘러내렸다는 점에 주목하고 있었다.
게다가 범인은 하룻밤에도 세 명의 여자를
추행하려다가 미수에 그쳤었다. 그것은
범인이 발작 상태에 있다는 것을 의미했다.
그는 범인이 조만간 또 다시 여자들을
의심하지 않았다. 어쩌면 범인이 이미
상당수의 여자들을 추행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성에 관련된 사건들은 여자들이
신고를 하지 않기 때문에 겉으로 드러나는
일이 드문 것이다.
(범인은 오늘밤에라도 나타날 거야.
범인이 발작 상태에 있는 것이 분명한 이상
죽은 듯이 숨어 있지는 않을 거야......)
범인이 여자들을 찾아 거리를 배회하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자 최형사는
바짝 긴장이 되었다.
그는 간판을 살피면서 걷기 시작했다.
게이들이 출입하는 술집 <가스등>을 찾기
위해서였다. 가스등은 세기의 미녀라는
에바 가드너가 주연을 맡았던 영화였다.
천장에서 들리는 발자국소리, 천천히
공포에 질린 에바 가드너의 커다란
눈....... 이미 오래 전에 본 흑백영화지만
아직도 몇몇 장면이 머리 속에 뚜렷이
각인되어 있었다.
게이들이 자주 모인다는 술집 이름이
가스등이라는 것은 누구가 그 영화를
보았다는 증거였다.
최형사는 어깨를 움츠리고 계속 걸었다.
그러나 가스등은 보이지 않았다. 그는 길을
건너 반대편 간판들을 살피기 시작했다.
(저기군!)
술집 가스등은 지하실에 있었다. 붉은
카펫이 깔린 계단을 내려가자 밤색의
출입문이 있었고, 그것을 열고 들어가자
어둠침침한 출입구 쪽에 카운터가 있었다.
"어서 오세요."
여자가 쉰 목소리로 인사를 건넸다. 화장을
두껍게 바른 여자였다.
최형사는 눈을 감았다가 뜨고 실내를
천천히 살폈다. 술집 가스등은 홀과 룸을
모두 갖추고 있는 술집이었다. 안쪽에
무대와 악기가 있는 것을 보면 밤에는
춤까지 출 수 있을 것 같았다.
"혼자세요?"
카운터에 앉아 있는 여자가 물었다.
"예."
최형사는 건성으로 대꾸했다. 홀 가운데
테이블에 손님인지 종업원인지 알 수 없는
여자들이 모여 앉아서 자욱하게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3호실로 모셔."
카운터의 여자가 말했다.
테이블에 앉아 있던 붉은 원피스를 입은
여자가 최형사를 3호 룸으로 안내했다.
커튼으로 칸막이가 되어 있는 조그만
룸이었다.
"뭐 드시겠어요?"
여자가 껌을 질겅질겅 씹으며 물었다.
얼굴이 말상이었다. 키도 큰 편이었다.
"맥주 하고 안주."
"무슨 안주로요?"
"마른 안주로 줘요."
"여자는 필요 없으세요?"
"이 집에 여자도 있나?"
"저는 여자도 아닌가요?"
붉은 원피스의 여자가 생긋 웃었다.
"여자가 필요하지만 나이 든 여자가
좋겠군."
물었다. 붉은 원피스의 여자도 게이로
보였다.
"얼마나 나이 많은 여자요?"
"이 집에서 제일 나이 많은 여자."
여자가 눈을 깜박거렸다.
"이 집에서 내가 제일 나이 많아요."
"카운터에 안자 있는 여자는?"
"마담이오?"
"그래."
"마담이 나보다 두 살 더 많기는 하죠."
"40대로 보이는데?"
"서른다섯밖에 안되었어요. 고생을 많이
해서 겉늙어 보이는 거예요."
"그래? 그럼 둘 다 들어와요. 얘기나 좀
하자구."
"정말이에요?"
"그래요."
"고마워요."
여자가 웃으며 재빨리 밖으로 나갔다.
최형사는 씁쓸하게 웃으며 사방을
휘둘러보았다. 룸이라고는 하지만 싸구려
벽지가 발라져 있고, 탁자며 소파도
허름하기 짝이 없었다. 영업이 잘 안되는
모양이었다.
밖에서 붉은 원피스의 여자가 "언니 맥주
하고 마른 안주. 그리고 언니도
들어오래."하는 소리가 들렸다. 그러자
홀의 테이블에 앉아 있는 여자들이 "어머,
둘씩이나 끼고 술을 마신대?
웬일이니?"하며 왁자하게 웃는 소리가
들렸다.
최형사는 담배연기를 길게 내뿜었다.
이내 여자가 룸으로 들어와 최형사 옆에
앉았다.
"담배 피워두 돼요?"
여자가 원피스 앞 가슴에서 담배를
꺼냈다.
"피워요."
최형사는 붉은 원피스 밑의 여자
허벅지에 시선을 주었다.
"어딜 봐요?"
여자가 눈을 흘기며 그의 얼굴에
담배연기를 내뿜었다. 최형사는 시선을
거두고 쓰게 웃었다.
"아가씨 성은 어떻게 되지?"
"미스 리요."
"여기 오래 있었나?"
"오래 있지는 않았어요. 한 6개월
"게이인가?"
여자가 그를 쏘아보았다. 그때 마담이
맥주와 안주를 가지고 들어왔다. 또 한
여자가 마담을 뒤따라 들어와 잔을 놓고
나갔다. 마담은 건너편에 앉았다.
"난 실은 술을 마시러 온 것이 아니고
알아볼 게 있어서 온 사람이오."
"형사예요?"
붉은 원피스의 여자가 기분 나빠 하는
표정을 지었다. 마담은 얼굴을 찡그리고
있었다.
"마담도 게이인가?"
"그래요."
마담이 씁쓸한 얼굴로 대꾸했다.
"난 살인사건을 수사하고 있소."
최형사는 명함을 꺼내 마담과 붉은
"술이나 한 잔씩 마시면서 얘기하자구.
나를 경계할 필요는 없어요."
붉은 원피스가 명함을 들여다본 뒤
맥주병을 따서 최형사의 잔에 먼저 따랐다.
마담은 곤혹스러운 얼굴로 명함만
들여다보고 있었다.
"여기 근무하는 종업원들이나 출입하는
게이들 중에 혹시 노란색의 울 스커트와 울
스웨터를 자주 입고 다니는 여자 없소?"
최형사는 붉은 원피스가 따라준 맥주를
한 모금 마신 뒤 마담과 붉은 원피스의
잔에 술을 따랐다.
"없어요."
마담이 먼저 고개를 흔들었다.
"그런 사람 본 일 없어요."
붉은 원피스도 같은 대답을 했다.
최형사는 표정을 될수록 부드럽게 했다.
"울 스커트는 잘 입어야 모양이 나요.
우리처럼 남자가 여장을 할때는 입기 힘든
옷이에요."
"왜 입기가 힘이 들지?"
"히프의 선이 살아나지 않아요. 울
스커트는 히프가 크고 아름다운 여자들이
입는 옷이에요. 그 속에는 시미즈도 받쳐
입어야 하구요."
붉은 원피스의 대답이었다.
"이런 질문은 마담이나 아가씨를
난처하게 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수사를
하기 위해 하는 것이니까 오해하지 말고
대답해 주기 바래요. 왜 게이를 하고
있지?"
붉은 원피스가 마담을 쳐다보았다.
때부터 여자가 좋고 여자들처럼
행동했어요."
마담이 낮게 한숨을 내쉬고 대답을 했다.
"사춘기가 되었을 때는 여자에게서는
호기심을 느끼지 못하고 남자에게서만
호기심을 느꼈어요."
마담이 담배를 물었고 붉은 원피스가
불을 붙여 주었다. 마담은 담배연기를 폐부
깊숙히 빨아들였다가 내뱉은 뒤 말을
계속했다.
"그러나 성전환 수술을 하는 건 쉬운
일이 아니죠. 수술비가 수천만 원이나
드니까요. 그래서 우리 같은 사람들은 게이
노릇을 하게 되는 거예요."
"신체적인 변화는 어떻지?"
"어떤 변화요?"
된다던가......그런 변화는 일어나지
않나?"
"천차만별이에요."
"무슨 뜻이지?"
"가슴이 커지고 둔부가 풍만해지는
사람도 있어요."
"......"
"염력(念力)이란 말 들어보셨어요?"
"염력?"
최형사는 의아한 얼굴로 마담에게
반문했다. 처음 들어보는 말이었다.
"초능력과 같은 것이에요. 일종의 자기
최면이죠. 우리에게 유방이 생기고 히프가
풍만해지는 것은 여자가 되고 싶어 하는
염력 때문이죠."
최형사는 고개를 끄덕거렸다. 마담의
"그럼 성기는 변하지 않나?"
마담과 붉은 원피스가 얼굴을 붉혔다.
"어떤 변화요?"
"예를 들어 게이들은 여자가 되고
싶어하는 염력이 강한 사람들 아니오? 그런
사람들도 성기가 발기를 하는가?"
"진짜 게이라면 안하죠."
"그럼 다시 원점으로 돌아가야 하겠군.
노란 울 스커트를 입고 다니는 게이는
없나?"
"없어요."
"혹시 게이들 중에 성기가 유난히 큰
사람 있다는 말 못 들었소?"
"게이들은 대부분 성기가 작아요."
"그래도 잘 생각해봐요."
"얼마나 큰 사람인데요?"
"어머나!"
"세상에 그렇게 큰 사람이 어딨어요?"
마담과 붉은 원피스가 일제히 입을
벌렸다.
최형사는 자신도 모르게 쓴 웃음이
나왔다. 노란 옷을 입은 여자, 어쩌면
게이인지도 알 수 없는 그 여자를 찾는
일이 결코 쉽지 않으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최형사는 한 시간쯤 지나서 술집
<가스등>을 나왔다. 가스등의 여자들, 아니
게이들에게서 뚜렷한 소득을 얻지는
못했으나 노란 옷을 입은 여자를 찾는 일을
포기할 수는 없었다.
어두워진 거리에는 인파가 한결
많아졌다. 날씨가 쌀쌀한데도 불구하고
네온싸인이 불야성처럼 빛나는 이태원
오가고 있었다.
최형사는 <소라>라는 술집으로 들어갔다.
그 집도 게이들이 모이는 술집이었다.
그러나 그 집에서도 노란 옷을 입은 여자에
대한 것은 아무것도 알아낼 수 없었다.
최형사는 다시 허리우드 극장 뒤의
낙원동으로 갔다.
그곳의 <을파소>라는 술집, <티파니>,
<웨스턴>, <사계>가 모두 게이들이 모이는
술집이었다. 그러나 그곳에서도 노란 옷을
입은 여자가 찾을 수가 없었다.
최형사가 노란 옷을 입은 여자에 대한
조그만 정보를 얻게 된 것은 신초에 있는
술집 <헌트>에서였다. 헌트도 게이들의
출입이 많은 곳이었다.
그날은 하늘이 잿빛으로 흐리고 때아닌
동안 몰아치던 강추위에 꽁꽁 얼어붙었던
길바닥이 녹고 거리가 질척거렸다. 거리엔
색색의 우산들이 부유하듯 떠다니고
있었다.
"노란 옷을 입은 여자를 본 것은 벌써
10년쯤 전이었어요. 그가 노란 옷을 입었기
때문에 기억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네
하고 다른 곳이 많았기 때문에 기억하고
있어요."
그 술집은 음산한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 마치 일본 소설가 가라 쥬로오의
<무도회의 수첩>에 나오는, 시체를 놓고
앉아서 술을 마시는 술집처럼 술집 내부가
어둡고 음침했다.
"어떤 점이 그렇습니까?"
"그는 겉보기에는 완전히 여자였어요."
헌트의 주인은 30대 초의 젊은 게이였다.
그는 앞가슴이 훤하게 패인 검은 색
원피스를 입고 있었다.
"어떻게 만났습니까?"
"밤무대에서 만났어요."
"밤무대요?"
"우리처럼 성전환증을 앓고 있는
사람들은 밤무대에서 여자 무용수로 춤을
추는 것이 예정된 코스예요."
"그 사람 이름을 기억합니까?"
"우리 같은 사람들은 모두 가명을
사용하고 있어요. 가명은 차연숙이었는데
본명은 기억나지 않아요."
최형사는 차연숙이라는 이름을 수첩에
메모했다.
"그 사람의 고향은 모릅니까?"
"충남 어디라고 들었는데 기억이 나지
"그 사람하고 친했습니까?"
"친한 것은 아니고 동병상련의 정을
느끼고 있었어요."
헌트 주인의 눈빛은 깊고 부드러웠다.
얼굴에 화운데이션을 두껍게 바르기는
했지만 피부도 깨끗한 편이었다. 앞가슴도
여자처럼 둥글게 솟아나와 있었다.
"가슴이 여자처럼 큰데......?"
"수술했어요."
헌트 주인이 얼굴을 붉히며 살짝 눈을
흘겼다.
"성전환 수술을 했나요?"
"아녜요. 유방 확대 수술만 했어요.
성전환 수술은 돈도 많이 들고 잘해 주지
않아요."
"게이들이 대부분 유방 확대 수술을
"요즈음은 우리 같은 사람들이
아니더라도 유방 확대 수술이 일반화되어
있어요. 실리콘 주입 방법이 도입된 뒤로
가슴이 작아서 걱정하는 사람은
없어졌어요."
최형사는 고개를 끄덕거렸다. 몇 가지
궁금한 점이 있었으나 그는 천천히
알아보기로 하고 헌트 주인을 살폈다. 헌트
주인의 몸매는 확실히 가슴과 둔부, 허리의
선이 부드러웠다.
"피부가 깨끗한데......"
"그건 여성 호르몬 주사를 맞았기
때문이에요."
"호르몬 주사?"
"그래요."
헌트 주인이 눈웃음을 쳤다. 그것도
"아까 차연숙이 우리네와 다른 곳이
많았다고 했는데 어떤 점이 달랐지요?"
헌트 주인이 다시 얼굴을 붉혔다.
"그는 성기가 아주 컸어요."
헌트 주인이 목소리를 잔뜩 낮추어
대답했다.
"얼마나 컸습니까?"
"글쎄요......"
헌트 주인이 눈빛이 야릇하게 반짝이며
다리를 꼬았다.
"보통 사람보다 컸나요?"
"네."
"어느 정도로요?"
최형사는 바짝 긴장했다. 노란 옷을 입은
여자, 성기가 유난히 큰 게이....... 그는
조영애의 살인범이 희미하게 윤곽을
"팔뚝만 했어요."
"팔뚝......"
"그때 우리는 그 사람의 성기를 말과
비교하며 말 뭐라고 그랬어요."
"그 사람의 나신을 본 적 있나요?"
"언뜻 보았을 뿐이에요."
"그럼 게이 노릇하기가 힘들었겠군요."
"네. 그래서 밤무대 여자 무용수 노릇도
얼마 못했어요."
최형사는 고개를 끄덕거렸다. 노란 옷을
입은 여자의 기괴한 모습을 어렴풋이나마
연상할 수 있었다.
"그 밖에 기억나는 것은 없습니까?"
"그 사람은 영동에 있는 성형외과에서
성전환 수술을 하겠다고 그랬어요. 지금쯤
성전환 수술을 했는지도 모르죠."
"병원 이름은 모르겠어요. 성전환 수술을
하겠다고 한 것뿐이니까요......"
"......"
"우리는 불행한 사람들이에요."
헌트 주인이 쓸쓸하게 말했다.
최형사가 헌트를 나온 것은 밤 10시가
지나을 때였다. 거리는 찬바람과 함께
진눈깨비가 날리고 있었다. 최형사는
어두운 하늘을 쳐다보면서 착잡한 생각에
잠겨들었다.
세상은 요지경이다. 겉으로 보기에는
거리를 오가는 수 많은 사람들이 남자와
여자로 뚜렷이 구분되고 있지만 그 내막은
기괴했다. 도대체 무엇이 인간들을
기괴하게 만들고 있는 것일까. 신인가,
악마인가?
최형사는 진눈깨비 속을 느릿느릿
걸으면서 인간의 어두운 운명을 희롱하고
조종하는 것이 있을지도 모른다고 막연히
생각했다.
빗발은 이튿날에도 계속 뿌렸다. 음산한
겨울비였다. 최형사는 형사들이 수사본부로
모두 출근을 하자 노란 옷을 입은
여자-차연숙에 대해서 브리핑을 했다.
형사들은 최형사의 브리핑이 계속되는 동안
묵묵히 입을 다물고 있었다. 그러나
브리핑이 끝나자 일제히 질문을 던졌다.
"그럼 노란 옷을 입은 여자가 여장을 한
남자라는 말 아닙니까?"
"맞았어. 여장 남자야."
최형사는 좌중을 둘러보며 대답을 했다.
"그런데 가슴은 여자처럼 크고 둔부는
풍만하구요?"
강형사의 질문이었다.
"실제로 그런 일이 있을 수 있습니까?"
"있대. 범인을 검거해 보면 증명이 될
거야."
"그거 참......!"
강형사는 도저히 믿어지지 않는다는 듯이
설레설레 고개를 흔들었다.
"또 다른 질문?"
"차연숙이 가명이라면 어디서 그 여자,
아니 남자를 찾습니까?"
유형사의 질문이었다.
차연숙은 그 당시 성전환 수술을 하려고
했대. 만약에 차연숙이 성전환 수술을
하려고 병원엘 갔으면 어떤 형태로든지
병원에 기록이 있겠지......"
"어느 병원이오?"
"성형외과."
차연숙의 성기가 팔뚝만 하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조영애의 사인이 거대한
성기에 의한 심장마비로 소견이
발표되었고......이것은 차연숙이 성전환
수술을 하지 않았다는 증거 아닙니까?"
"맞았어."
최형사는 고개를 끄덕거렸다. 유형사의
지적은 날카로웠다.
"게이들을 접촉해 본 결과 그들 모두에게
여자가 되고 싶어 하는 강렬한 욕구가
있다는 걸 알았어. 비록 성전환 수술을
하지 않았다고 해도 병원을 찾아갔을
거야."
"그럼 가능성을 가지고 수사를 해야
합니까?"
"그래. 가능성을 가지고 수사를 해야 해.
버리니까."
형사들이 웅성거렸다. 최형사는 형사들이
웅성거리고 있는 이유를 알 수 있어 빙그레
웃었다. 최형사까지 8명의 인원으로 전국의
성형외과를 샅샅이 조사하는 것은 한계가
있는 것이다. 그러나 성형외과는 일반
병원과 달리 대도시에서 개업을 하는 점을
감안하면 그다지 어려운 작업도 아니리라고
생각했다.
"우선 서울에 있는 성형외과부터
착수해."
형사들이 애꿎은 날씨를 투덜거리며
밖으로 몰려 나간 것은 거의 10시가
되어서였다. 최형사는 본서로 들어가
강력계 박성민(朴成民) 계장에게
지금까지의 수사 상황을 보고했다.
거 아니야?"
박계장은 회전의자에 앉아서 묵묵히 듣고
있다가 얼굴을 잔뜩 찌푸렸다. 강력계
형사로 30년 가까이 근무한 박계장도 이런
사건은 처음 본다는 표정이었다.
"사건을 수사하는 우리들도 반신반의하고
있습니다."
"어떻게 기자들이 냄새를 맡지 않았지?"
"형사들에게 함구령을 내렸습니다."
"왜?"
"기자들이 알면 큰 난리가 납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남자의 성기가 너무 커서
여자가 죽었다고 하면 사회면 톱이 될
것입니다. 주간지 기자들, 여성지
기자들......생각만 해도 끔찍합니다."
"......"
어떻겠습니까? 여자가 절정의 순간에
죽었으니 얼마나 행복했겠느냐는 등 온갖
화제가 만발할 것입니다. 게다가 일부
정신없는 여자들이 범인을 찾으려고
아우성을 치겠지요."
"무슨 소리야."
박계장이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여자가 죽을 정도로 남자의 성기가 크니
그런 남자와 관계를 하고 싶어 안달을 할
것입니다."
"예끼, 이 사람!"
박계장이 파안대소를 했다. 최형사도
웃었다. 물론 그것은 최형사의 농담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나 사람들의 마음속에
있는 원시적 본능이 어떤 것인지 최형사는
알고 있었다.
살인죄로 기소가 가능하겠나?"
그것은 최형사도 가장 우려하고 있는
점이었다.
"어떻게 하든지 입증을 해야지요."
"어떻게?"
"아직 그 부분은 연구하고 있습니다."
"내 생각엔 공연히 헛수고를 하고 있는
것 같아. 설사 범인을 체포해서 검찰에
송치한다고 해도 검찰에서 살인죄 부분에
기소를 하지 않을 수도 있어."
"강간죄라도 기소해야지요."
"그 강간죄라는 것도 그래, 목격자가
전혀 없잖아?"
"강간사건은 목격자나 증거가 없어도
기소가 가능합니다. 또 피살자의 손발이
묶인 흔적, 피의자의 음모와 정액, 창의
증거로 제출될 것입니다."
"그래도 맹점이 있어."
박계장이 얼굴을 찡그렸다.
"성기 때문에 여자가 죽었다는 것
말입니까?"
"그래. 재판이 시작되면 불꽃이 튀는
공방전이 일어날 거야."
최형사는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것은
최형사는 인정하고 있는 점이었다.
"그와 똑같은 사건이 또 일어났나?"
"그렇지는 않습니다."
"그럼 연쇄살인도 아니야."
최형사는 박계장의 얼굴을 멀뚱히
쳐다보았다. 박계장이 말하고 있는 의도를
알아차릴 수 없었다.
"연쇄살인이 아니라는 것은 무얼
"모르겠습니다."
최형사는 솔직하게 대답했다.
"조영애가 범인의 성기 때문에 죽었다고
치자구. 그렇다면 그와 똑같은 사건이 또
일어났거나 일어나야 돼."
"무슨 뜻입니까?"
"범인의 성기 때문에 여자가 죽었다면
범인과 관계하는 여자는 모두 죽어야
한다구."
"......"
"이해가 가나?"
"아니오."
"그러면 조영애는 범인의 성기 때문에
죽은 게 아니야. 범인이 그동안 다른
여자들과도 관계했다고 가정했을 때 그
여자들도 모두 죽었어야 된다는 논리가
최형사는 갑자기 흉기로 뒤통수를
얻어맞은 듯한 기분이 들었다. 범인은
조영애의 집에 침입하고 강간까지 한
것이다. 그러한 범인이 사건이 일어난 지
한 달 여동안 다른 여자와 관계를 하지
않았다고 볼 수 없었다.
다른 여자와 관계를 했다면 그 여자도
반드시 죽어야 하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조영애의 죽음은 우연한 심장마비라고밖에
볼 수 없었다.
(내가 엉뚱한 방향으로 수사를 몰고 간
것인가?)
최형사는 눈앞이 아득해 왔다.
경찰병원이나 국립과학수사연구소의 부검
소견을 과신한 결과라고 볼 수 있었다.
아니 그들의 소견에는 잘못이 없다고 볼
심장마비나 기도가 막혀 죽을 수도 있고,
국부가 완전히 훼손된 것도 사실이다. 다만
그것이 죽음에 이르는 간접적 원인일 뿐
직접적인 원인은 아닌 것이다.
(그렇다면 강간을 한 것뿐인데 조영애가
죽은 것인가?)
최형사는 머리가 지끈거리가 시작했다.
"어떻게 생각해?"
박계장이 인터폰을 눌러 차를 가져오라고
시킨 뒤 최형사를 쳐다보았다.
"사체를 유기할 수도 있지 않습니까?"
"사체를 유기해?"
"범인이 다른 여자들과 관계를 맺었다면
다른 여자들도 죽음을 당했을 수도 있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사체를 유기하는
방법밖에 없지요."
말이지?"
박계장이 빙그레 웃으며 최형사를 건너다
보았다. 최형사를 비웃는 듯한 투였다.
그때 여순경이 자판가에서 뽑은 커피 두
잔을 가지고 들어왔다.
"그럴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습니다."
"소설 쓰나?"
여순경이 커피잔을 놓고 나가자 박계장이
노골적으로 빈정거렸다.
"조만간 범인이 체포될 것입니다. 그때
모든 사실이 밝혀지겠죠."
"아무튼 조속한 시일 내에 매듭을 짓도록
해. 사건 같지도 않은 것을 가지고 왜
그렇게 질질 끌어?"
최형사는 할 말이 없어 입을 다물었다.
박계장은 강력계 형사답지 않게 성품이
성품이 조용하고 차분해 얌전이라는
별명으로 불리고 있었다. 그러나 그가 맡은
수사는 언제나 빈틈없이 처리되었다. 그런
까닭으로 그는 얌전이라는 별명 외에
깐깐이라는 별명으로도 불리웠다.
최형사는 박계장을 성북경찰서 시절부터
상사로 모셨다. 서로가 성격을 잘 아는
데다가 일 처리하는 솜씨를 신뢰했다.
박계장이 조영애 피살사건이 공전을
거듭하고 있는데도 질책을 하지 않는 것은
그런 까닭이었다.
최형사는 동대문경찰서를 나오자
장윤주에게 전화를 걸었다. 수사본부엔
차가 두 대가 배정되어 있었으나 강형사와
조형사가 끌고 다녔고 정형사는 자신의
차를 구입해서 몰고다녔다. 수사본부에
준 것이었다. 장윤주의 차를 타고
성형외과를 찾아다닐 수밖에 없었다.
"어떻게 된 거예요?"
장윤주는 비가 오고 있기 때문인지
분홍색 원피스에 검은 스웨터를 걸치고
있었다. 따뜻하고 편안해 보이는
옷차림이었다.
"신세 좀 지려고 불렀어."
최형사는 운전석 옆에 올라탔다.
"무슨 신세요?"
"성형외과를 찾아다녀야 하는데 차가
있어야지."
"성형외과는 왜요?"
"뭐 좀 조사할 게 있어."
"수사예요?"
장윤주가 눈쌀을 찌푸렸다.
"난 또 점심이라도 사 주려고 불러내는
줄 알았네."
"뭐 점심 한 그릇이야 못 사 줄까."
"그럼 아예 점심을 먹고 시작해요."
"그래 어디 가까운 중국집으로 가자구."
"중국집이요?"
"왜 그래? 짜장면을 먹으면 목에
걸리기라도 하나?"
"아뇨. 목에 걸리는 것이 아니라 소화가
되지 않을까봐 걱정돼서요."
장윤주가 깔깔대고 웃음을 터뜨렸다.
최형사는 장윤주가 웃는 까닭을 알고
자신도 웃었다. 장윤주가 차를 출발시켰다.
최형사는 와이퍼가 밀어내는 프론트
글라스의 빗물을 바라보며 차연숙에 대해서
골똘히 생각하기 시작했다.
계속되었다. 그러나 차연숙에 대한 병원
기록은 서울 시내의 어느 성형외과에서도
찾을 수가 없었다.
"아무래도 차연숙은 성형외과를 찾아간
일이 없는 것 같습니다."
저녁 때가 되어 지친 표정으로
수사본부로 돌아온 형사들은 이구동성으로
말했다.
"그럴 수도 있겠지......"
최형사도 지친 표정으로 말했다.
성형외과를 중심으로 차연숙을 찾으려는
시도는 실패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비도 오는데 날궂이나 하지요."
"날궂이?"
"두꺼비나 깝시다. 모처럼 목에 낀 때도
벗길 겸 삼겹살이나 구워서......"
찬성했다.
"그래. 술이나 한 잔 하자구."
최형사도 찬성을 했다. 그들은 파출소
차석까지 가세하여 장안동 파출소 옆에
있는 술집으로 몰려갔다. 1층은 정육점이고
2층은 술집이었다. 정육점과 술집이 같은
주인이어서 고기의 양도 많이 주고 질도
좋은 고기를 준다는 것이 사람 좋은 파출소
차석의 얘기였다.
"난 여태까지 형사 노릇을 해도 이런
사건은 처음 봤어."
술이 한 순배씩 돌자 유형사가 먼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는 대학병원
성형외과를 찾아다니느라고 녹초가
되었다며 술을 거푸 두 잔이나 들이마셨다.
"그래도 성기 절단 사건만은 못할걸."
"그건 좀 지저분한 사건이지."
"이건 지저분한 사건 아닌가? 여장남자,
생각만 해도 아찔해."
"옛날엔 여장남자가 흔치 않았는데 이젠
술집까지 생겼나 봐."
"그래도 밤무대 무용수들 중에
여장남자가 있다는 것은 몰랐을걸."
최형사도 그들의 대화에 끼어들었다.
"밤무대 무용수들 중에 여장남자가
있다는 말입니까?"
"성전환증 환자들이 거치는 예정된
코스가 밤무대 무용수래."
"설마?"
"아니 그럼 삼각형 속옷을 입고 춤을
추는 여자가 남자란 말입니까?"
형사들이 일제히 놀란 표정을 지었다.
차연숙도 밤무대에서 활동을 했대."
"아니 남자가 어떻게 여자 속옷을 입고
춤을 춥니까? 그러면 앞부분이 볼록하게
솟아나와 금방 들통이 날 텐데......"
"밤무대 무용수들 중에 한복을 입고 춤을
추는 여자도 있어."
"그래도 이건 너무 하는데......"
"세상이 요지경입니다. 물질만능 풍조가
팽배해 세상이 썩었습니다. 종교가 성행을
하는 것은 세상이 어지러울 때라고 하는데
지금 우리 나라 형편이 그렇지 않습니까?"
파출소 차석도 얼굴이 불콰해지자 대화에
끼어들었다.
"종교가 기승을 부리다니 무슨
뜻입니까?"
조형사가 어리둥절하여 차석을
"우리 나라는 종교 천국이라고 합니다.
종교가 성행하는 것은 사람들이 종교에서
위안을 받으려고 찾기 때문이죠. 그만큼
사람들의 삶이 정신적으로 황폐했다는
증거입니다."
"맞습니다. 오대양사건,
종말론......마치 소돔과 고모라나
다름없이 세상이 타락했습니다."
"소돔과 고모라에 의인이 열 명만 있어도
하느님이 벌하지 않는댔잖습니까? 그런데
그 열 명의 위인이 없어서 소돔과 고모라가
멸망한 거라구요."
"소돔과 고모라엔 동성연애까지
성행했답니다."
"성서에 그런 기록이 있습니까?"
종교 얘기가 나오자 형사들은 갑자기
"있지요. 롯의 집에 소돔 시민들이
몰려와 소리를 지르는 장면이 있습니다.
오늘밤 너의 집에 온 손님들이 어디
있느냐? 그자들 하고 재미를 보게
끌어내어라......하는 장면인데 성서
학자들은 이 장면이 소돔과 고모라 시대에
이미 동성연애가 성행했다는 증거라는
것입니다."
"갑자기 웬 동성연애야? 자 술들이나
마시자구."
정형사가 파출소에 들렀다가 그들이 있는
곳으로 달려온 곳은 술자리가 한참
무르익었을 때였다.
"수고했네. 뭐 좀 소득이 있었나?"
최형사는 정형사에게 술부터 따라주었다.
"예. 차연숙의 과거를 알아냈습니다."
"영동에 있는 한 신경정신과에서
알아냈습니다."
"신경정신과?"
형사들이 일제히 놀란 표정을 지었다.
"영동에 있는 성형외과에 갔더니 10년쯤
전에 차연숙이라는 여자가
찾아왔었답니다."
"그래서 성전환 수술을 했대?"
"아닙니다. 우선 정신과 치료부터
받으라고 했다고 합니다."
정형사가 술을 한 잔 쭉 들이킨 뒤
고기를 집어서 고추장을 찍은 뒤 입으로
가져갔다.
"이 사람 술이 고팠나보군."
유형사가 정형사의 잔에 술을
채워주었다.
하는 것이랍니다."
"본명은 안 밝혔대?"
"의사가 본명을 밝히라고 했으나 한사코
거부하더랍니다. 그래서 정신과 감정을
받게 했는데 거기서 차연숙의 고향, 과거,
본명이 밝혀졌습니다."
"본명이 뭐야?"
"차병학이라고 합니다."
"주소지는?"
"서울 대방동으로 되어 있는데 그건
가짜였습니다. 지금 확인하고 오는
길입니다."
"그럼 고향은?"
"충남 강경입니다."
"강경?"
"논산에서 가까운 곳입니다. 강경읍
이토리라고 합니다."
"그럼 강경으로 가 보아야 하겠군."
"읍사무소에 전화를 걸어 놨습니다.
숙직하는 사람들에게 강경읍 이토리의
주민들 중에 차병학이라는 사람이 있는지
확인해 달라구요."
"잘했네."
최형사는 흡족했다. 차연숙의 본명이
차병학이라는 것을 알아낸 것은 커다란
성과였다.
M은 비가 내리는 창을 물끄러미
응시했다. 겨울비였다. 이따금 바람이 불
때마다 차가운 빗발이 후두둑 유리창을
때리고 달아났다.
그는 가슴이 묵직하게 저려왔다. 비가 올
때마다 자신의 몸 안에서 일어나는 광포한
욕망을 잠재우기 위해 얼마나 빗속을 미친
듯이 헤매었던가 생각하자 찬 바람이
가슴을 훑고 지나가는 기분이었다. 그는
그의 몸 안에서 일어나는 욕망이
어디서부터 비롯되는지 알 수 없었다.
한 번 욕망이 일어나면 주체할 수가
없었다. 그는 자신의 몸 안에 흐르는
핏속에 광기가 들어 있다고 생각했다.
때부터 저주를 받았다고 생각했다. 그것은
그의 의지와는 아무 상관도 없는 일이었다.
낙엽이 바람에 우수수 날리는 가을 밤,
바람이 불고 비가 오는 밤, 눈이 사락사락
내리는 깊고 푸른 밤......M은 자신의 몸
안에서 솟구치는 광기와 처절한 싸움을
벌여야 했다.
그럴 때마다 M은 살빛이 눈(雪)처럼 하얀
소녀, 사촌 누나인 연숙을 생각했다.
연숙을 생각하면 기이하게 가슴이 저리고
눈앞이 흐릿해져 왔다.
연숙은 얼굴이 창백한 소녀였다.
가슴앓이를 하고 있었다.
M은 연숙을 생각하며 수 많은 불면의
밤을 보냈었다. 멀리서 연숙의 목소리만
들려도 가슴이 두근거리고 얼굴이
피해야만 했다.
연숙이 밖에 나가면 그는 연숙 몰래 방에
들어가 그녀의 속옷을 꺼내 냄새를 맡기도
하고 그 옷을 입어 보기도 했다.
그때 그는 몸 속에 기이한 변화가
일어나고 있었다. 그는 여자처럼 가슴이
커지고 둔부에 살이 찌기 시작했다. 그러한
변화는 그가 전혀 예상치 못한 것이었다.
그는 자신의 몸에서 일어나는 변화에
깊은 슬픔을 느꼈다. 그의 몸에 일어나는
변화를 눈치챈 사람은 그의
어머니뿐이었다. 그의 어머니는 그의
하체에 일어난 변화에 절망했고, 그 절망이
깊어져 자살하고 말았다.
그것은 M이 연숙을 범하고 난 직후의
일이었다.
있었다. 그는 자신의 내부에서 일어나는
광포한 욕망 때문에 밤마다 강가의
포플라숲을 헤매고 다녔었다.
그날 밤은 달이 높이 떠 있었다. 달은
희다 못해 푸르스름한 빛을 포플라
잎사귀에 뿌리고 있었다. 무더운
여름이었다. 무성한 포플라 잎사귀에
달빛이 하얗게 쏟아져 잎사귀들이 은빛으로
살랑거렸다.
M은 포플라숲에 웅크리고 앉아 포플라
잎사귀 사이로 달을 쳐다보았다. 달은
차츰차츰 높이 떠오르고 강파도 소리가
은은하게 들려왔다.
그때 M은 모래밭을 걸어오는 한 소녀를
보았다. 연숙이었다. 연숙이 나지막한
목소리로 노래를 부르며 포플라숲으로
M은 포플라 나무 뒤에 몸을 숨겼다.
연숙이 점점 가까이 오자 가슴이
두근거리고 얼굴이 화끈거렸다.
연숙은 포플라숲으로 들어오자 주위를
둘러보고는 옷을 벗기 시작했다. M은
가슴이 방망이질을 하듯이 뛰었다. M은 눈
한 번 깜짝이지 않고 연숙이 옷을 벗는
것을 지켜보았다.
숨이 막혔다.
달빛이 연숙의 몸에 하얗게 쏟아지며
연숙의 몸을 요염하게 보여주었다.
젖가슴이 둥근 부분과 허리 그리고
삼각분기점에 생긴 명암까지 선영하게
보였다.
연숙은 옷을 벗자 달빛 속으로 토끼처럼
달려갔다. 모래밭을 지나자 어두운 강물
M은 비실거리며 포플라숲에 주저앉았다.
눈이 충혈되고 숨이 가빴다. 그는
고통스러워 하며 하체를 움켜쥐었다.
연숙이 강에서 나온 것은 10분쯤 지났을
때였다.
M은 연숙이 수건으로 몸을 닦고 옷을
입으려 할 때 짐승처럼 달려가 덮쳤다.
그의 눈은 충혈되고 눈가로 더러운 진물이
흘러내렸다. 연숙이 몸부림을 치며 저항을
했으나 불가항력이었다. 그는 미친 듯이
연숙을 찍어 눌렀다.
"악마! 너는 악마야!"
연숙은 울면서 소리를 질렀다. 그리고
연숙은 다음 날 아무 말도 없이 서울로
떠나 버렸다.
어머니가 죽은 것은 그 다음 달의
입고 죽어 있었다. 사람들은 어머니가
강물에 빠져 죽었다고 하였다. 그러나 알
수 없는 일이었다.
M은 그후 고향을 떠났다. 고향에서는
그에 대한 소문이 파다하게 퍼져 있어서 살
수가 없었다.
M은 서울에 올라오자 봉제공장에 시다로
취직을 했다. 창신동에 있는
봉제공장이었다. 그러나 그 봉제공장에서
일을 하는 재단사가 추근거리기 시작하자
2개월만에 그만두고 전자회사에 취직을
했다. 그러나 그 전자회사도 오래 다니지
못했다. 그는 계속 공장을 전전했다.
그러다가 M은 밤무대의 여자 무용수로
일을 했다. 그러나 남자들 등쌀 때문에 그
무용수조차 1년밖에 하지 못하고 다시
M이 자신의 핏속에 흐르는 광기를
폭발시킨 것은 지난 가을일이었다. M은
그동안 자신의 내부에서 꿈틀대는 광포한
욕망을 간신히 억제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의 집에 보일러를 설치하던 배관공이
침입해 왔을 때 그의 광기는 폭발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때부터 거리를 배회하며 자신의
욕망을 배출시킬 대상을 물색하게 되었다.
배관공만 아니었으면 그의 광기는 폭발하지
않았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빗발이 더욱 굵어지는 빗소리가
요란해졌다. M은 창문을 열었다. 쏴아 하는
바람소리와 함께 차가운 비의 입자들이
얼굴을 푸숫하게 때렸다.
(이번 겨울엔 비가 많이 오는군......)
증거였다. 그는 노란 옷을 입은 연숙을
잠깐 생각했다. 연숙은 그때 서울로 돌아간
후 두 번 다시 강경을 찾아오지 않았다.
그는 서울로 올라온 후 한동안 연숙을
찾아 헤맸었다. 그러나 연숙을 두 번 다시
만날 수 없었다.
M은 창문을 닫고 커튼을 여몄다. 거실의
벽시계가 두 점을 치고 있었다. 새벽
2시였다.
M은 스탠드를 켰다.
침대 위에 누워 있는 김인구는 이미
뻣뻣하게 경직되어 있었다. 시체의
경직현상이 일어나고 있는 것이다. 시체는
24시간이 지나면 경직이 풀린다. 그러한
과정을 거치고 나면 시체가 부패하기
시작하는 것이다.
M은 침대에 누워 있는 김인구의 시체를
아무 감정없이 내려다보았다. 그는 여자를
못살게 굴었다. 그래서 죽었다. 그러나
안아주었으므로 죽음이 편안했으리라고
생각했다.
M은 스탠드를 끄고 2층으로
걸어올라갔다. 2층에서 어두운 벌판을
내다보기 위해서였다.
최형사 일행이 봉고차를 빌려 충남
대전과 논산을 거쳐 강경읍에 도착한 것은
정형사로부터 차병학(車炳學)의 본적지가
강경읍 이토리(二土里)라는 보고를 받은
다음날 정오였다.
그들은 먼저 강경읍사무소로 몰려갔다.
강경 읍사무소 직원들은 서울에서 형사대가
지었으나 이내 차병학의 주민등록표를 꺼내
보여 주었다.
차병학의 주민등록표는 세대주가
차현태(車峴泰)로 되어 있었으나 1979년
사망한 것으로 되어 있었고, 처(妻)
김정자(金貞子)는 1982년에 사망한 것으로
되어 있었다. 차병학은 그들의 자(子)로
되어 있었으나 행불(行不)로 표시되어
있었다.
차병학의 출생 연도는 1966년이었다.
"1966년 출생이니까 우리 나이로
28세군......"
최형사는 주민등록표를 들여다보며
중얼거렸다. 안경을 쓴 읍사무소의
여직원은 까닭없이 긴장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언제입니까?"
"주민등록증을 발급하는 18세 때예요. 그
이전에 행방불명이 되었으나 주민등록
미발급자를 정리하다가 행방불명이라는
것을 알게 된 거예요."
"그럼 주민등록을 발급받지 않았습니까?"
"네, 한 번두요."
"이런 경우 어떻게 됩니까? 그냥
행방불명으로 처리하고 맙니까?"
"네, 본인이 언제 나타날지 모르니까
사망으로 처리하지 못해요."
"말소시키지는 않습니까?"
"아뇨."
"차병학의 친척은 없습니까?"
"그건 모르겠어요."
단발머리의 여직원이 살레살레 고개를
들어가 임시 회의를 했다. 차병학이
행방불명으로 처리되어 있으므로 그의
행적을 쫓는 일이 난감했다.
"일단 이토리고 가보지요."
"이토리로 가서 어떻게 하게?"
"차병학에 대해서 알고 있는 사람들이
있을지 모르지 않습니까? 틀림없이 있을
겁니다."
"아직도 그런 사람이 있을까?"
"대개 이장이나 나이 많은 사람들은 알고
있지 않을까요? 마을마다 터줏대감
하나씩은 있으니까요."
"그렇지."
최형사는 고개를 끄덕거렸다. 핸들을
잡고 있던 정형사가 읍사무소에 다시
들어가 이토리 이장의 이름과 약도를
허만길(許萬吉)이었고 이토리는 부여
백마강 줄기인 이토강가에 있었다.
서해쪽으로 광활한 논산평야가 펼쳐져
있고 동쪽으로는 논산훈련소가 연무대가
있었다.
"전 이장을 맡은 지가 3년밖에 되지
않아서 떠난 사람들에 대해서는 잘
모릅니다."
허만길은 30대 후반의 사내로 양계장을
하고 있었다. 이토리에서 살기 시작한 것은
9년 전이라고 했다.
"그럼 이토리에서 오래 산 사람은
아시겠어요?"
"예, 저 산을 넘어가면 양돈을 하는
심형태라는 분이 2대째 살고 있는
분입니다."
"우리보다 7,8년 아래입니다."
"그럼 27,8세 되겠군요?"
"예."
"고맙습니다. 수고하십시오."
이토리 허만길 이장의 양계장을 나와
야산을 넘자, 강경읍 사람들이
이토강이라고 부르는 백마강이 잔잔히
흘러가고 있는 것이 보였다. 백마강은
부여에서 강경에 이르는 동안 여러 산의
내(川)가 합류하여 대하를 이루고 장항을
향해 흘러가고 있었다. 심영태의
양돈농장은 야산 골짜기에 위치하고
있었다.
"차병학은 저보다 한 살 위였습니다."
심영태는 느닷없이 형사들이 들이닥치자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으나 차병학의
하자 거실로 형사들을 안내하고 부인에게
차를 내오라고 하였다. 심영태의 집은 2층
양옥으로 별장처럼 호사스럽게 꾸며져
있었다. 형사들은 거실의 장식장과 가구를
살피며 "이젠 우리 농촌도 살만한
모양이야. 집앞에 중형 세단도
있던데......"하고 귓속말로 수군거렸다.
"차병학이 어디에 살고 있는지 알고
계십니까?"
"서울에 산다는 얘기만 들었습니다."
"어디쯤인지는 모르구요?"
"예, 그건 모릅니다."
"차병학이 여장남자라고 하는데 어릴
때도 그렇게 하고 다녔습니까?"
그 질문에 차병학이 곤혹스러운 표정으로
입을 다물었다. 형사들은 궁금한 낯빛으로
"이상한 소문이 나돌았었습니다."
이윽고 심영태가 무거운 한숨을 내쉬고
입을 열었다.
"어떤 소문이오?"
"차병학이 여자도 아니고 남자도
아니라는 소문이었습니다."
"여자도 아니고 남자도 아니라는 것은
중성을 말하는 것입니까?"
"반음반양이라고 들어보셨습니까?"
"아니오."
최형사는 고개를 흔들었다. 심영태가
형사들을 쳐다보자 형사들도 일제히 고개를
흔들었다.
"남녀추니라고도 하지요."
"그것도 처음 들어보는 말입니다."
"사방지는요?"
심영태가 빙그레 웃었다. 형사들이 못
들어 본 것이 당연하다는 투였다.
"몇 해 전에 조선왕조실록이라는
TV드라마가 방영되었지요. 거기 설중매
편에 보면 사방지라는 여자가 나오죠.
여자의 몸에 남자의 생식기가 있는 것을
반음반양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유방이 여자처럼 발육되어 있고
둔부가 풍만하다거나 여자의 목소리를
낸다고 해서 여자라고 할 수는 없지요.
여자와 남자를 구별하는 것은
생식기입니다."
형사들이 반론을 제기했다.
"제 말씀은 차병학의 몸에 남자와 여자의
생식기가 다 있었다는 것입니다."
"예?"
심영태의 말을 잘못 들은 것이 아닌가 하여
형사들을 쳐다보았다. 그러나 형사들도
모두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차병학은 괴인입니다."
"괴인이오?"
"생각해 보십시오. 어떻게 인간의 몸에
남자와 여자의 생식기가 다 들어
있겠습니까?"
"아니 그럼, 그게 사실이라는 말입니까?"
"차병학의 생식기를 직접 확인하지는
못했습니다. 그러나 그런 소문이 파다하게
나돌았습니다."
그때 심영태의 부인이 주방에서 커피를
내왔다. 형사들은 일제히 심영태의
부인에게 사례를 했다.
"저 읍내 좀 나갔다가 올께 키 좀
심형태의 부인이 심영태에게 말했다.
"그래, 올 때 애들 데려고 와."
심영태가 허리춤에서 자동차키를 뽑아
주며 대꾸했다. 심영태 부인은 "커피잔
당신이 치워요."하고 심영태에게 눈웃음을
치며 말한 뒤 형사들에게 목례를 하고
밖으로 나갔다. 귀염성 있게 생긴
여자였다.
"부인이 운전도 하시는 모양이지요?"
유형사가 궁금한 빛으로 물었다.
"예, 아이들 학교 때문에 배웠습니다.
농촌도 이제는 살만 합니다만 교통이
문제입니다. 하루에 서너 번밖에 다니지
않는 버스를 기다리고 있을 수도
없고......허긴 뭐 우리 어릴 때는
걸어다녔습니다만 요즈음은 스피드 시대라,
밖에서 자동차의 시동 걸리는 소리가
들리더니 엔진소리가 멀어져 갔다.
"차병학은 언제 이토리를 떠났습니까?"
최형사가 화제를 바꾸었다.
"열다섯인가 열여섯 살 때입니다."
"그 뒤엔 만나지 못했습니다."
"7년쯤 전에 왔었습니다."
그 말에 형사들은 긴장했다.
"그때 모습이 어땠나요?"
"차병학은 열세 살 때부터 여자 모습을
하고 있었습니다. 열세 살이 되던 해에
갑자기 앞가슴이 커져 문 밖 출입을
안했지요. 7년 전에 왔을 때는 완전한
아가씨였습니다. 저도 믿어지지 않는
일입니다마는 앞가슴이 묵직해 보일 정도로
컸으니까요."
형사들이 서로 얼굴을 마주보며
웅성거렸다.
"그때 무슨 일로 차병학이 왔습니까?"
"땅을 팔아달라고 왔었습니다."
"땅이 있었나요?"
"예, 부모에게 물려받은 땅이 논밭, 임야
합쳐 2만 평 정도 있었습니다."
"상당히 많군요?"
"예, 아버지가 농사를 많이 지었었죠."
"누가 땅을 팔아주었습니까?"
"오상호라는 사람과 타지 사람이 나누어
샀습니다."
"부모는 무슨 일로 죽었습니까?"
"차병학의 아버지는 병으로 죽고
어머니는 자살했습니다."
"자살이오? 왜 자살을 했습니까?"
"유서를 남기지 않아 왜 자살했는지는
서울에서 내려와 있었는데 차병학이 강간을
했다는 말이 돌았습니다. 사람들은 그 일로
충격 받아서 차병학의 어머니가 자살했다고
하는데 내막은 알 수 없지요."
심영태의 얼굴에 다시 곤혹스러운 표정이
떠올랐다. 최형사가 담배를 권하자 그는
사양하지 않고 받아 물었다. 최형사는
그에게 불까지 붙여 주었다.
"차병학의 몸에 두 개의 생식기가 있다는
것을 본 적이 있는 사람이 있을까요?"
"글쎄요. 너무 오래 전의
일이라서......"
"차병학은 여기서 학교에 다녔나요?"
"예, 국민학교에 다녔습니다."
최형사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차병학을
추적할 만한 단서가 전혀 없었다.
있습니까?"
"예, 있습니다."
"어디쯤 됩니까?"
"저쪽 강가에 있습니다."
"좀 안내해 주시겠습니까?"
"예, 그러지요."
최형사와 형사들은 커피를 마신 뒤
심영태를 따라 밖으로 나갔다. 형사들은
심영태를 둘러싸고 걸으면서 이것저것
질문을 했으나 사건에 도움이 될 만한
얘기는 들을 수 없었다.
차병학이 살던 집은 전통 한옥이었다.
집을 지은 지 오래된 모양으로 흙벽이
떨어지고 기와 지붕에 잡초까지 자라
있었다. 마당은 어제 내린 비로
질척거렸다.
차병학이 살던 집에는 40대의 사내가
살고 있었다. 이름이 오상호(吳相澔)라고
했다. 최형사는 오상호의 안내를 받아
마루에 올라가 앉았다.
"차병학에 대한 소문은 우리도
들었습니다."
최형사가 찾아온 까닭을 얘기하자
오상호는 한동안 생각에 잠겨 있다가 입을
열었다. 오상호는 그 무렵 차병학의 바로
앞집에 살고 있었으며 차병학과 함께
학교에 다녔다고 했다.
"차병학에 대해서 자세히 얘기해
주시겠습니까?"
"차병학은 어릴 때부터 계집애
같았습니다. 나하고 한 5,6년 나이 차이가
나기 때문에 동생처럼 지냈습니다."
있다는 것을 아셨습니까?"
"예."
"직접 확인했습니까?"
"직접 확인하지는 못했습니다.
여름철이면 이 마을 아이들은 강에 가서
멱을 감는데 차병학은 한 번도 옷을 벗고
멱을 감지 않았습니다."
"그럼 헛소문일 수도 있겠군요?"
"아닙니다. 직접 본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 마을에 살고 있습니까?"
"읍내에서 사진관을 하고 있는 친구가
봤다고 했습니다. 읍사무소 입구에
있지요."
"어떻게 확인을 했다고 합디까?"
"차병학은 어머니가 자살한 후 강가에
있는 포플라숲을 자주 배회했습니다. 그때
벗겼다고 합니다."
"이 집을 차병학에게서 사셨다면서요?"
"예, 논도 모두 제가 샀습니다. 밭과
산을 대전에서 사업한다는 타지 사람이
샀구요."
"그때 차병학을 보셨겠군요?"
"예, 정말 놀랍게 변해 있더군요. 여기서
떠나기 전에도 여자처럼 변해 있었습니다만
땅을 팔기 위해 내려왔을 땐 완전한
아가씨였습니다. 나는 그의 사촌 누나가
아닌가 해서 몇 번이나 얼굴을 다시 보곤
했지요.
"차병학과 얘기도 나누었습니까?"
"어떻게 지내는지 무엇을 하고 지내는지
뭐 그런 얘기를 나누었습니다. 읍내에서
술을 마셨는데 여자하고 앉아서 마시는지
난감하더군요."
오상호가 어처구니 없다는 표정으로
웃었다. 최형사도 쓴 웃음이 나왔다.
"그때 차병학은 어떤 옷을 입고
있었습니까?"
"노란 옷을 입고 있었습니다. 그때는
몰랐는데 지금 생각해 보니까 차병학의
사촌 누이가 입었던 옷과 똑같은
것이었습니다. 제가 사촌 누이가 아닌가
하고 의심을 했던 것도 그 까닭입니다."
"차병학의 사촌 누이는 어떤
소녀였습니까?"
"글쎄요......아주 예쁜 소녀였다는
것밖에는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
"사촌 누이가 이 마을에 살았습니다."
"병이 있어서 휴양차 내려와
"무슨 병입니까?"
"가슴앓이라고 했는데 폐병이 아닌가
싶습니다."
"차병학이 사촌 누이와는 연락이
됩니까?"
"전혀 안됩니다."
최형사는 잠시 입을 다물었다. 심영태의
얘기대로라면 차병학은 사촌 누이 차연숙을
사랑한 것이라고 볼 수 있었다. 아니
차연숙을 강간한 뒤에 그 소녀를 잊지 못해
노란 옷을 입고 다닌다고 볼 수 있었다.
차병학의 정신 속에 차연숙을 사랑하는
마음과 차연숙처럼 예쁜 소녀가 되고 싶어
하는 마음이 교묘하게 자리잡고 있는 것은
아닐까.
"차병학의 땅을 사셨다고 했는데 대금은
"아닙니다."
"대금은 1년에 걸쳐 지급했습니다."
"그럼 대금을 지불하기 위해 자주
만났습니까?"
"아닙니다. 처음 계약할 때만 만났고 그
뒤엔 온라인으로 보냈습니다."
최형사는 눈이 번쩍 띄었다.
"온라인 번호를 가지고 계십니까?"
"글쎄요. 너무 오래 돼서,
찾아보겠습니다."
"미안하지만 온라인 번호 좀 찾아봐
주십시오."
"예,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오상호가 은행 온라인 번호를 찾기 위해
안방으로 들어가자 형사들은 일제히 담배를
피워물었다. 여러 가지 생각이 형사들의
않았다.
한참 후 오상호가 무통장입금증을 몇 장
들고 나왔다.
"여기 있습니다."
"H은행이군요?"
"예."
최형사는 온라인 번호와 H은행 지점
이름을 수첩에 적었다. 차병학의 통장은
차연숙으로 되어 있었고 지점은 H은행
창포동 지점이었다.
"창포동이면 구리시 쪽이군......"
최형사는 형사들과 함께 오상호의 집을
나와 강경읍으로 들어갔다. 그들은
강경읍에서 설렁탕으로 뒤늦은 점심을 먹은
뒤 읍사무소 옆의 제일칼라를 찾아갔다.
그러나 제일칼라 주인은 출장중이어서 만날
"주인이 밤이나 되어야 돌아온다니까
먼저 서울로 올라들 가게. 내가 주인을
만나고 올라갈께."
"우린 서울에 가서 무엇을 하지요?"
"H은행 창포동 지점을 찾아가 봐. 아직도
차병학이 차연숙이라는 이름으로 통장을
개설하고 있는지 알아보라구."
"예, 알겠습니다."
최형사는 형사들을 먼저 서울로
올려보내고 자신은 강경읍에 남았다.
그는 천천히 강경 읍내를 걸으며 생각에
잠겼다. 여러 가지 생각이 머리 속에
떠올라왔다. 차병학이 과연 살인자인가,
그가 정말로 남자와 여자의 생식기를 모두
갖고 있는가 하는 것이었다.
노란 옷을 입은 여자가 걸음을 멈췄다.
하석주도 길옆으로 붙어서며 걸음을
멈추었다. 철도 건널목이었다. 열차가
덜컹대며 달려오고 있었다. 열차의 굉음이
점점 가까워지면서 헤드라이트 같은 푸른
섬광이 여자의 전신을 환하게 비추었다.
하석주는 손목을 들어 시계를 보았다. 밤
8시5분이었다. 여자가 핸드백을 뒤져
담배를 꺼내 입에 물었다. 열차가
기적소리를 길게 토하면서 여자의 앞을
지나가기 시작했다. 불빛이 환한 차창으로
승객들이 보였다. 어둠 때문에 열차는 마치
차창만 달려가고 있는 것 같았다.
하석주도 담배를 피워 물었다. 여자는
크고 둔부가 풍만했다. 조영애가 살해되기
전날 소년이 목격했다는 노란 옷을 입은
여자와 똑같은 인상착의였다.
열차가 건널목을 지나갔다. 열차의 차창
불빛이 어둠을 끌고 멀리 사라져 가고
있었다.
하석주는 담배연기를 길게 내뿜었다.
여자가 건널목을 건너고 있었다. 하석주는
느릿느릿 여자의 뒤를 따라 걸었다. 어둠
때문에 앞서가는 여자의 뒷모습 윤곽이
흐릿해 보였다.
마치 그림자가 어둠속을 걸어가고 있는
듯한 기묘한 기분이었다. 그러나 사방이
칠흑처럼 어두운 것은 다행이었다. 어둠
때문에 여자는 그가 미행하는 것을 전혀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다.
하석주도 발자국 소리를 죽이면서 여자를
따라 걸었다.
하석주가 여자를 발견한 것은 시내의 한
백화점 앞에서였다. 오후 5시경이었다.
짧은 겨울 해가 기울이면서 빌딩숲 사이로
어둠이 내리기 시작하고 네온싸인에 하나
둘 불이 들어오고 있었다.
하석주는 백화점을 향해 들어가다가
회전도어를 열고 나오는 여자와 마주쳤다.
젊은 여자였다. 하석주는 어디서 본 듯한
여자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그는
무심히 지나치고 백화점 안으로 들어갔다.
아내의 생일이었기 때문에 아내를 지하
1층에 있는 커피숍에서 만나 쇼핑을 하고
저녁을 함께 하기로 했던 것이다.
(설마 그 여자일 리가......)
앞에 도착했을 때야 노란 옷을 입은 여자가
조영애 피살사건의 유력한 용의자와
인상착의가 흡사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여자는 무엇보다 노란 색의 울 스커트와 울
스웨터를 입고 있었다.
하석주는 조영애가 피살되기 전날
조영애의 집을 찾아온 노란 옷을 입은
여자가 있었다는 얘기를 경찰로부터 듣고
그때부터 길 가는 여자들을 유심히 살피는
버릇이 생겼었다. 경찰의 수사는 지지
부진했고 그는 그것이 견딜 수가 없었다.
조영애의 죽음에 왠지 모르게 자신이
책임이 있는 것만 같았다.
그러나 노란 옷을 입은 여자는 쉽사리
발견할 수가 없었다. 물론 노란 옷을 입은
여자가 살인자가 아니더라도 사건과 관련이
일이었다.
처음에는 단순하게 노란 옷을 입은
여자가 사건과 관련이 있겠지......하고
막연하게 생각했던 것이 시간이 흐를수록
구체화되고 있었다. 그런데 백화점 앞에서
노란 옷을 입은 여자를 만난 것이다.
(만약에 사건과 관련이 있다면 놓쳐서는
안되잖아?)
생각이 거기까지 미치자 그는 자신도
모르게 백화점 밖으로 뛰어 나왔다. 다행히
여자는 백화점 앞에서 서성거리고 있었다.
그는 여자를 자세히 살펴보았다. 여자는
육감적인 몸매를 갖고 있었다.
그는 여러 가지 생각을 했다. 경찰에
연락을 해야 할까 하는 생각과 여자가
사건과 관련이 없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그때 여자가 지하철을 향해
걸어내려갔다. 그는 여자를 따라 지하철을
내려갔다. 여자는 자동판매기 앞에서 1구간
표를 뺐다. 그는 여자가 표를 뺄 때 여자의
뒤를 바짝 다가갔다. 여자의 몸에는 좋은
냄새가 풍겼다.
그때 여자가 힐끗 뒤를 돌아다보았다.
그는 여자를 똑바로 응시했다. 여자의
눈빛이 깊고 그윽했다. 그의 시선이 자신도
모르게 여자의 가슴께로 흘러내려갔다.
(남자가 아니야......)
하석주는 여자의 가슴을 보고 그렇게
생각했다. 여자의 가슴은 묵직해 보일
정도로 컸다. 상습적으로 여자들을
추행하기 위해 여장을 하고 다니는 남자의
행색이 아니었다. 최형사가 잘못 짚은 것이
관련이 있을지는 몰라도 여장남자가 아닌
것이 분명했다.
(술집 여자인가......?)
하석주는 가슴이 울렁거리는 듯한 기분을
느끼며 과연 이 여자가 조영애 사건과
관련이 있을까 하고 생각해 보았다. 여자의
옷차림은 세련되어 있었다.
여자가 개찰구에 표를 밀어 넣었다. 그는
천천히 여자의 뒤를 따라 걸었다. 기분이
이상했다.
지하철을 기다리면서 그는 신문을 하나
샀다.
이내 지하철이 왔고 여자가 지하철을
탔다. 그는 사람들에게 떠밀리다시피 하여
지하철에 올라탔다. 러시아워 시간이라
지하철은 초만원이었다.
사람들이 빽빽하여 멀리 떨어져 여자를
감시할 수가 없었다. 지하철이 출발하자
그의 몸이 사람들에게 떠밀려 여자의 몸에
닿았다.
그는 자신의 하체가 여자의 몸에 닿지
않게 하려고 노력했다. 쓸데없이
여자로부터 치한이라는 오해를 받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지하철이 역에 도착하고
출발할 때마다 그의 하체가 여자의
부드러운 둔부에 밀착되었다가 떨어지곤
하였다.
(이거 큰일 났네......)
그는 진땀이 흘렀다. 여자의 둔부에 의한
자극으로 하체가 팽팽하게 일어서고
있었다.
(꼼짝없이 치한이 되게 생겼으니......)
있었다. 그는 여자의 둔부로부터 오는
자극과 냄새에 기분이 좋아졌다.
(이 여자는 사건과 아무 관련이 없을지도
몰라......)
그는 다시 이런 생각을 했다. 노란 옷을
입은 여자가 사건과 관련이 있다는 것은
나이 어린 소년의 목격자 진술뿐이었다.
그러나 소년의 진술이 틀릴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는 일이었다.
무엇보다 소년이 노란 옷을 입은 여자를
목격했다고 해도 사건 발생 시간과 목격한
시간이 거의 하룻동안이나 차이가 나고
있었고, 남자가 여자로 변장을 했을지도
모른다는 추측도 타당성이 없을 것 같았다.
그의 하체에 닿는 둔부는 완전한 여자의
것이었다. 분명히 여장남자가 아니었다.
가까운 창포동이었다. 그는 지상으로
올라오자 또박또박 걸어가는 여자의
뒷모습을 잠시 응시했다.
그는 여자의 뒤를 따라 걷기 시작했다.
밖은 이미 캄캄하게 어두워져 있었다. 그는
여자가 눈치채지 않도록 멀리 떨어져서
조심스럽게 걸었다.
그 거리는 네온싸인도 거의 없는
빈민가였다. 건물들은 우중충했고 골목에는
더러운 쓰레기가 나뒹굴고 있었다. 그는
담배를 꺼내 물었다. 이 여자는 조영애
살인사건과 아무 관련이 없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그의 머리 속을 지배하고 있었다.
그는 담배에 불을 붙여 연기를 길게
내뿜었다. 기분이 이상해졌다. 노란 옷을
입은 여자, 하체에 닿았던 둔부의 야릇한
그는 문득 여자를 겁탈하는 자신의
모습을 상상했다. 여자를 겁탈하는 것은
영화나 드라마를 통해 수 없이 보았었다.
그때마다 여자를 겁탈하는 사내들에게
분노를 느끼기도 했지만 당하고 있는
여자의 선정적인 모습에서 성적 충동을
느낀 것도 사실이었다.
어쩌면 남자들이 여자에게서 그런
본능적인 충동을 느끼는 것은 자연스러운
현상일지도 모를 일이었다. 다만 그런
본능적인 충동을 이성으로 억제하고 있을
뿐이었다.
그는 한 통계가 생각났다. 그 통계는
여자들이 당한 강간사건을 사례별로 분석한
것으로 강간을 한 사내들끼리 조사하여 그
원인을 밝혔었다.
되는 것은 여자들이 노출이 심한 옷을 입고
있었기 때문이 아니라 강간을 한 사내가
있는 곳에 여자가 있었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런 까닭으로 여자들은 남자와 둘이 있는
자리를 피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는 노란 옷을 입은 여자를 생각했다.
그 여자는 점점 인적이 없는 곳으로
걸어가고 있었다. 가까이 다가가서 여자의
스커트를 걷어올리고 간단하게 강간을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러나 그는 고개를 흔들었다. 자신의
위치에서 여자를 강간한다는 것이 얼마나
무모한 짓인지 그는 잘 알고 있었다.
멀리서 기적소리가 들려왔다. 그는
피우던 담배를 발 밑에 버리고 구둣발로
밟았다. 기적소리와 함께 열차의 덜컹대는
여자가 낮은 언덕 위에서 걸음을
멈추었다. 여자의 전신으로 푸른 섬광이
비치고 있었다.
(저기는 철도 건널목......)
하석주는 눈을 크게 떴다. 여자가 갑자기
뒤를 돌아다 보았다. 하석주는 재빨리
골목에 바짝 붙어섰다. 여자가 건널목을
건너자 열차가 요란한 굉음과 함께 철도
건널목을 지나가기 시작했다. 하석주는
망연히 열차를 바라보았다.
(이상한 여자야......)
열차가 지나간 뒤 하석주는 철도 건널목
위로 달려 올라갔다. 여자가 보이지
않았다.
(어디로 사라졌지......?)
하석주는 사방을 휘둘러보며 여자를
않았다.
(내가 귀신에 홀린 것 같군......)
하석주는 그곳에서 담배를 두대나 연거푸
피우고 나서 포기하고 돌아섰다.
그의 아내는 이미 집에 돌아와 있었다.
그는 아내에게 회사에서 급한 일이 생겨
약속을 지키지 못했다고 사과했다. 그의
아내는 화가 잔뜩 나서 안방에 들어가 문을
잠궜다.
그는 거실에서 우두커니 허공을
쳐다보았다. 그의 아내가 화를 내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는 저녁도 먹지 않고 주방에서 술을 한
잔 마신 뒤 소파에 앉아서 잠을 잤다. 여러
가지 생각이 오고 갔으나 무엇 하나
뚜렷하게 정리되는 것이 없었다.
벽시계가 네 점을 치고 어느 교회에서인지
새벽종을 치는 소리가 들렸다. 창밖은
아직도 캄캄했다.
그는 담요를 걷고 옆에서 자고 있는 그의
아내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그의 아내는
모로 쓰러져 자고 있었다. 그가 거실에서
자는 것을 알고 담요를 꺼내다가 덮어 준
후 자신도 옆에서 잔 모양이었다.
(그래도 아내가 제일이군......)
그는 가슴이 뭉클해 왔다.
그는 담요를 아내의 몸에 덮어 주고
주방에 들어가 손수 커피를 끓여 마셨다.
새삼스럽게 노란 옷을 입은 여자를
미행하던 간밤의 일이 생각났다. 기이한
일이었다. 철도 건널목에서 여자가
감쪽같이 사라지다니!
잠을 자서인지 잠자리가 어수선하고
꿈자리가 사나웠었다.
어려서 고향에서 듣곤 했던 무당이
굿거리를 하면서 치는 장구소리가 귓전으로
들려왔다. 해마다 여름철이면 아이들이
하나씩 빠져 죽는다는 고향 마을의 방죽,
야산의 잡목숲, 잡목숲을 지나가는 음산한
바람소리가 귓전을 어수선하게 했다.
눈을 뜨면 거실이었고 눈을 감으면 다시
꿈을 꾸었다.
노란 옷을 입은 여자와 관계를 하는 기분
좋지 않은 꿈도 꾸었다. 노란 옷을 입은
여자가 옷을 벗고 헐떡이기도 했고 칼을
들고 그에게 달려들기도 했다.
(이상한 여자야......)
그는 커피를 마신 뒤 담배를 피웠다.
그러다가 <트윈픽스>라는 영화가
생각났다. 그 영화에서 FBI수사관 쿠퍼가
살인 용의자를 보안관을 함께 미행하다가
놓친 일이 있었다. 그때 쿠퍼 수사관이
보안관에게 이렇게 말했다.
"그자들은 들어간 곳으로 다시 나오게
되어 있어."
그는 자신만만하게 말했다. 그리고 쿠퍼
수사관의 예상대로 살인용의자들은 길목을
지키고 있자 다시 나왔던 것이다.
(노란 옷을 입은 여자도 철도 건널목에서
사라졌으니까 거기를 지키면 다시 나타날
거야......)
그는 기분이 좋아졌다. 노란 옷을 입은
여자가 창포동 건널목에서 사라진 것은
집이 그 근처라는 증거였다. 그곳을 지키고
섰다.
그는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거실로
나왔다. 그의 아내는 소파에서 잔뜩
웅크리고 자고 있었다.
그는 안바운을 열어 놓고 그의 아내를
안았다. 몸이 뚱뚱하고 체중이 많이 나가
아내를 안아다가 침대에 눕히는 것은
무척이나 힘이 들었다. 그러나 그는 아내를
안아서 침대에 눕힌 뒤 살그머니 아파트를
나왔다.
새벽공기는 차가웠다. 그는 자동차의
시동을 걸고 히터를 틀었다. 차를
출발시키기 전에 아파트를 쳐다보자 거실에
불이 환하게 켜져 있었다.
(아내가 잠이 깼군......)
그는 기분이 언짢아졌다. 마치 아내에게
그는 액셀러레이터를 힘껏 밟았다.
아내를 속인 것은 조영애와의 관계로
족하다고 생각했다. 이제 조영애 사건만
해결되면 두 번 다시 그런 짓을 저지르지
않으리라고 생각했다.
그는 청진동 쪽으로 차를 몰았다. 차
안의 디지탈 시계가 5시17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겨울이었다. 거리는 칠흑의 어둠에
묻혀 있었고 차들은 거의 없었다. 그는
청진동 골목 앞에 차를 주차시키고
<전주집>이라는 해장국집으로 들어갔다.
조영애와 몇 번 같이 가본적이 있는
집이었다.
해장국 한 그릇을 먹고 나오자 6시가
가까워져 있었다. 그는 창포동 철도
건널목으로 차를 몰았다.
카세트 테잎을 틀었다. 아내가 좋아하는
복음성가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그는
복음성가를 싫어 했으나 아내를 태우고
다닐 때는 언제나 그 테잎을 들었다.
아내는 그 테잎 중에서 <주여 이
죄인이>라는 노래를 좋아했다. 아내의 말에
의하면 "벌레만도 못한 내가 용서받을 수
있나요?"라는 가사가 가장 좋다고 했다.
그는 그럴 때마다 쓴웃음을 웃곤 했다.
인간이 과연 벌레만도 못한 존재인가 하는
의심이 들었으나 거기에 대한 결론을 내릴
수 없었다.
그가 창포동 철도 건널목에 도착한 것은
7시 경이었다. 해는 그때까지도 뜨지 않고
있었다.
여자가 나타난 것은 거의8시가
걸어온 뒤 철도 건널목을 건너서 버스
정류장을 향하고 있었다. 이번에도 여자는
노란 울 스커트와 울 스웨터를 입고
있었다.
(노란 옷에 광적인 집착을 하고 있는
여자군......)
그는 노란 옷을 입은 여자가 탄
시내버스를 미행했다. 여자는 버스를 타고
30분쯤 달려서 어느 공장 앞에서 내렸다.
(저 공장에 다니고 있었군......)
공장 정문까지 바짝 차를 들이대고 보니
여자가 출근 카드를 경비실에 내는 것이
보였다. 여자는 뜻밖에 여공으로 일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그는 회사에 돌아가 일을 처리하고 저녁
5시에 다시 그 공장 앞에서 기다렸다.
여자인지 확인하고 싶어졌다.
여자는 7시에 공장에서 나왔다. 그는
여자가 버스를 타러가는 동안 차를 타고
먼저 철도 건널목으로 달려갔다. 거기서
기다리고 있다가 걸어서 여자를 미행할
작정이었다. 여자는 7시30분이 되어서야
철도 건널목에 나타났다.
그는 천천히 여자의 뒤를 미행하기
시작했다. 여자는 냇둑을 따라 한참 걷다가
포플라숲을 지나고 다리를 건넜다. 다리를
건너자 벌판 한 가운데 2층 양옥이 하나 서
있었다.
(저기가 여자의 집이군......)
그가 예상한 대고 여자는 핸드백에서
열쇠를 꺼내 대문 안으로 들어갔다. 그는
한참이 지난 뒤에야 대문 앞에까지
조심스럽게 걸어갔다. 여자의 집은 확인이
된 셈이었다. 그러나 이제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하는 생각을 하자 갑자기
난감해졌다.
그는 여자의 집앞에서 한 시간 동안이나
서성거리다가 돌아오고 말았다. 그것이
어젯밤의 일이었다.
(오늘은 여자의 집에 들어가 봐야겠어.)
하석주는 또박또박 걸어가고 있는 여자의
뒷모습을 노려보며 그렇게 결심했다.
현대칼라의 주인은 키가 작고 선량한
인상의 사내였다. 최형사가 명함을 내밀자
그는 금방 경계하는 표정을 지으면서
자신도 지갑에서 명함을 꺼냈다. 그의
명함엔 현대칼라 대표
박세준(朴世俊)이라고 박혀 있었다.
"몇 가지 여쭤볼 게 있어서
찾아왔습니다."
최형사는 박세준이 커피를 시키겠다는
것을 그만두게 하고 그를 다방으로
불러냈다. 사진관 안에서는 드나드는
사람이 많아서 차병학에 애해서 자세히
묻기가 어려웠다.
"그런 일이 있었군요."
피살사건을 수사하다가 여기까지 오게
되었다는 얘기를 듣고 비로소 안도하는
표정이 되었다.
"단도직입적으로 물어보겠습니다. 어릴
때 차병학의 옷을 발가벗겼다고 하던데
사실입니까?"
"잘 생각이 나지 않습니다."
박세준이 갑자기 곤란한 표정을 지었다.
"박세준씨에게 손해되는 일은 없으니까
안심하고 얘기하십시오."
"......"
"우린 박세준씨가 차병학의 옷을
벗겼다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부정해도
소용 없습니다."
"......"
"수사에 협조하는 셈치고 사실을 얘기해
"어릴 때 일입니다."
"옷을 벗긴 것은 사실이지요?"
"예."
박세준이 마지 못해 낮게 대답했다. 그의
얼굴에 불안한 표정이 감돌고 있었다.
"왜 옷을 벗겼습니까?"
"여자인지 남자인지 확인해 보려고 그런
짓을 했습니다. 다른 뜻은 전혀
없었습니다."
"그럼 벗겼다는 얘기군요?"
"예."
"벗겨보니 남자던가요? 여자던가요?"
"그게......"
박세준이 다시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최형사는 박세준의 얼굴을 날카로운 빛으로
쏘아보았다. 어서 대답을 해보라는 무언의
"믿지 못하시겠지만 남자도 아니고
여자도 아니었습니다."
최형사는 바짝 긴장하면서 박세준을
주시했다.
"차병학은 두 개의 생식기를 모두 가지고
있었습니다."
"어느 시간이었습니까?"
"밤이었습니다. 차병학은 포플라숲을
배회하는 습관이 있었는데 우리가 그때
덮친 것이지요."
"그런 밤이라 자세히 볼 수 없었겠군요?"
"아닙니다. 우린 후라쉬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자세히 볼 수 있었습니다. 남자
생식기는 복부 바로 아래 있었고 여자
생식기는 그 밑에 약간 떨어져
있었습니다."
왔으므로 최형사는 질문을 멈추었다.
박세준은 홍차를 주문했고 최형사는 커피를
주문했다.
"그럼 고환은 어디에 있었습니까?"
"고환은......잘 생각이 나지 않습니다.
옆에 있었던 것 같기도 하고......"
박세준이 우물거렸다.
"혹시 잘못 본 것이 아닙니까?"
"아닙니다. 모두 다 봤으니까요."
"그때 본 사람들이 몇이나 됩니까?"
"다섯입니다."
"몇 살 때였습니까?"
"몇 살 때인지는 기억이 나지 않지만
차병학이 사촌 누이를 강간하고 어머니가
자살한 바로 뒤의 일입니다."
"그럼 나이가 들었을 때군요?"
때의 일일 겁니다."
"건드리진 않았나요?"
"건드리다뇨. 모두 놀라서 도망가
버렸죠."
박세준이 담배를 꺼내 입에 물었다.
최형사도 담배를 피우며 다시 생각에
잠겼다. 반음반양의 인간이 현실적으로
존재한다고 생각하자 끔찍한 느낌이
들었다.
최형사가 박세준과 얘기를 마치고 다방을
나온 것은 밤 9시가 되었을 때였다. 그는
혼자서 버스정류장 쪽을 향해 걸으며
차병학이 살던 이토리 방향을 눈으로
어림해 보았다. 이토리 쪽은 칠흑의 어둠에
묻힌 채 조용했다.
최형사는 이상한 한기가 전신으로
수 없는 차가운 손이 목덜미에 슬그머니
얹혀지는 기분이었다.
최형사는 걸음을 멈추었다.
그는 강경에서 논산까지 버스를 탔고
논산에서 서울까지는 열차를 탔다. 그가
서울에 도착한 것은 새벽 1시였다.
서울역에는 장윤주가 차를 가지고 나와
있었다. 강경을 떠나기 전 수사본부에
전화를 걸었는데 장윤주도 그곳으로 전화를
걸었던 모양이었다.
"피곤하시지요?"
장윤주는 그를 위해 드링크까지 준비해
두고 있었다.
"괜찮아. 열차에서 잤더니 피곤하지
않아."
최형사는 운전석 옆에 올라탔다.
"응."
"노란 옷을 입은 여자는 찾았구요?"
"찾은 셈이야."
최형사는 간단하게 대꾸했다. 내일은
몹시 바쁜 하루가 될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튿날 수사본부에 출근하기 위해 눈을
뜨자 눈이 하얗게 내려 있었다. 최형사는
장윤주가 지어 주는 아침을 먹고
수사본부로 출근했다.
"어떻게 H은행 창포동 지점은 알아
보았나?"
"예, H은행 창포동 지점의 예금원장을
모두 뒤졌는데 차병학이나 차연숙의 계좌는
7년 전 것밖에 없었습니다."
정형사가 대답했다.
"예."
"예금원장의 주소는 어디로 되어 있어?"
"창신동인데 봉제공장이었습니다."
"봉제공장?"
"봉제공장과 관련이 있을 것 같아 조사를
했는데 종업원 신상카드가 없었습니다. 그
공장에 가장 오래 다녔다는 공장장도 그런
사람이 기억나지 않는답니다."
"7년 전이면 밤무대 여자 무용수로
진출했을 무렵이 아니야?"
"모르지요. 밤무대에 진출하기 전에
봉제공장에서 시다 노릇을 했는지......
시골에서 상경하는 여자들 대부분이
봉제공장 시다로 들어가던
시절이었으니까요."
"그럼 왜 모르지?"
곳으로 옮기는 일이 흔하다고 합니다."
최형사는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럴
가능성은 충분했다.
최형사는 강경읍에서 현대칼라 주인
박세준을 만나고 온 얘기를 했다. 형사들이
웅성거리면서 "세상을 살다 보니까 별놈의
일이 다 있군.", "어떻게 한 사람의 몸에
남녀의 생식기가 다 있지......?"하고
믿어지지 않는다는 표정들을 지었다.
"범인을 검거하면 하체부터 벗겨
봐야겠군."
"생식기가 둘이면 어떤 것을 이용하지?"
"어떤 것을 사용하다니?"
"예를 들어 소변을 볼 때 남자의
생식기로 소변을 보느냐 여자의 생식기로
소면을 보느냐는 거지......"
"아마 남자의 생식기로 소변을 볼걸?"
"그런 왜?"
조형사의 말에 형사들이 일제히 조형사를
쳐다보았다. 최형사도 조형사를 멀뚱히
쳐다보았다. 얘기가 이상한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었으나 최형사도 궁금한 것은
사실이었다.
"노란 옷을 입은 차병학이 조영애를
강간했잖아? 그러니 남자의 생식기가
활동을 하고 있는 거라구......"
"그렇지만 외모는 완전히 여자라는 거
아니야?"
"그럼 자네는 여자 생식기를 사용한다고
생각하나?"
"난 두 개를 다 사용할 것만 같아."
"미쳤군. 그럼 남자하고도 관계를 하고
아니야?"
"누가 알아? 그런 일이 있을지......"
"차병학이 남자의 생식기를 사용한다면
여자의 생식기는 퇴보했을 거야."
형사들은 그 문제로 옥신각신했다.
최형사는 그들의 얘기를 듣고 있다가
대화를 중단시켰다. 그 문제는 차병학을
체포하면 결론이 저절로 나올 것이다.
차병학을 체포하는 일이 급선무였다.
"자 이제 차병학을 어떻게 찾느냐 하는
것이 문제인데 누구 좋은 생각 없어?"
최형사는 따분한 표정을 짓고 있는
형사들을 둘러보았다. 그러나 형사들은
약속이나 한 듯이 입을 다물고 있었다.
"차병학을 범인이라고 생각하나?"
"가능성이 많다고 봅이다."
"차병학을 찾을 수 있는 묘안이 있는
사람?"
"형사들은 여전히 대꾸가 없었다."
"강형사."
"예?"
"강형사는 좋은 생각 없어?"
"없습니다."
강형사가 콧구멍을 후비다 말고 잘라
말했다.
"차병학이 은행은 창포동 지점을
이용했으면서 주소를 창신동으로 한 이유가
무엇인지 생각해 볼 필요가 있을 겁니다."
이형사였다. 형사들의 시선이 일제히
이형사에게 쏠렸다.
"전 차병학이 은행은 창포동 지점을
이용하고 조소는 창신동으로 했던 것은
아닌가 생각합니다.
은행은 누구나 직장이나 집에서 가장
가까운 곳을 이용합니다. 돈을 입금하거나
찾을 때 일일이 먼곳까지 가는 것은
부담스러우니까요. 창포동의 다른 은행들을
조사해 보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좋은 생각이야. 또 다른 의견은?"
"차병학이 봉제공장에 다녔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습니다. 창포동 일대의
봉제공장도 수사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강형사의 얘기였다.
"창포동 일대의 버스정류장도 수사를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차병학이 노란
옷을 입은 여자에게 집착을 하고 있었다면
누군가 본 사람이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사랑하는 마음과 차연숙처럼 예쁜 여자가
되고자 하는 마음이 동시에 존재하는 것
같습니다. 노란 옷을 입은 차병학의 모습이
그의 행적에서도 눈에 띄었으니까 창포동
어디에선가 본 사람이 있으리라고
생각합니다."
"좋아. 그럼 지금부터 조별로 나누어
나가자구. 6시까지 다시 모이기로
하고......"
최형사는 형사들을 나누어 수사 지시를
한 뒤 자신도 창포동 버스정류장을 향해
갔다. 그곳에서 노란 옷을 입은 여자,
차병학에 대한 탐문수사를 할 작정이었다.
M은 대문을 요란하게 흔드는 소리에 하던
일을 멈추었다. 기분이 섬칫했다.
누구일까? 찾아올 사람이 전혀 없다는
생각을 하자 불길한 느낌이 공포로 바뀌어
목덜미를 엄습해 왔다. 그는 재빨리 잠옷을
걸치고 침실문을 잠궜다.
그는 2층으로 뛰어 올라왔다. 대문 앞에
사내 하나가 서 있었다. 경찰일까? 경찰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과 혼자라는 생각이
마음을 놓이게 했다.
마침내 한영숙도 죽었다. 테이프로 입을
봉해 놓았기 때문에 호흡장애를 일으켜
죽은 것이 분명했다. M은 한영숙의 시체를
지하실에다 안아다가 침대에 눕히고 있던
다시 대문을 흔드는 소리가 들렸다.
"누구세요?"
M은 1층으로 뛰어 내려와 현관문을 열고
대문을 향해 소리를 질렀다.
"뭣 좀 여쭈어 보려고 그럽니다. 대문 좀
열어 주십시오."
"무슨 일인데요?"
M은 난처했다. 대문을 흔드는 사내의
정체를 알 수가 없어 불안했다.
"직접 뵙고 말씀드리겠습니다. 10분만
시간을 내주십시오."
"안돼요."
"그렇지 않으면 담을 넘어
들어가겠습니다. 댁이 혼자 살고 있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댁은 누구세요?"
짓을 하려는 사람이 아닙니다."
"혼자예요?"
"혼자입니다."
M은 대문을 열었다. 그러자 가죽점퍼를
입은 사내가 불쑥 안으로 들어왔다. 사내의
말대로 대문 뒤에는 아무도 없었다. M은
대문을 발로 밀어 닫았다.
"무슨 일인지 얘기해 보세요. 왜 여자
혼자 사는 집에 와서 소란을 피우죠?"
M은 팔짱을 끼고 하석주를 쏘아보았다.
"미안합니다."
하석주의 눈길이 잠옷 사이로 빠져나와
있는 M의 묵직한 가슴에 머물렀다. M은
차가운 눈빛으로 하석주의 음흉한 시선을
떼어 버렸다.
"1월1일날 조영애의 집에 갔었지요?"
가슴이 털컥 내려앉는 것 같았다.
"조영애가 누구예요?"
그러나 M은 아무 내색도 하지 않고
하석주의 질문을 되돌려 보냈다.
"조영애를 모릅니까?"
하석주가 따지듯이 물었다.
"몰라요."
M은 계속 버티었다.
"조영애의 집에 들어가는 걸 본 사람이
있는데요?"
"난 조영애가 누군지도 몰라요."
"경찰이 댁을 찾고 있습니다."
"노란 옷을 입고 있기 때문입니다."
"노란 옷이오?"
"울로 짠 스커트와 스웨터 말입니다.
어제 입고 있었지요?"
M은 고개를 끄덕이고 현관 안으로
들어갔다. 그러자 하석주가 머뭇거리다가
따라 들어갔다. 거실엔 푸른 빛의 전등이
켜져 있어 실내가 푸른 안개에 싸여 있는
느낌이었다.
"1월2일 날은 무엇을 했습니까?"
"연휴라 집에 있었어요."
"1월1일은요?"
"집에 있었어요."
M은 응접탁자에 있는 담배갑에서 담배를
꺼내 입에 물었다. 그러자 하석주가 재빨리
라이터로 불을 붙여 주었다. M은
담배연기를 길게 내뿜었다.
"혼자 살고 있죠?"
하석주가 거실을 휘둘러보며 물었다. M은
그가 경찰이 아닌 것은 분명하다고
"혼자 살아요."
M이 웃으며 대답했다. 하석주는 M의
미소에 가슴이 찌르르 울리는 것을 느꼈다.
M은 알몸에 속살이 훤히 내비치는 잠옷을
입고 있었다. 속에는 흰 색의 브래지어와
삼각형의 검은 색 속옷을 입고 있었다.
푸른 불빛에 여자의 속옷이 선정적으로
내비쳤다.
"차 한잔 드시겠어요?"
"좋습니다."
"거기 앉아서 기다리세요."
M은 하석주를 소파에 앉게 한 후
주방으로 들어갔다. 하석주라는 사내가
여기까지 찾아온 까닭을 알 수 없어
불안했다. 경찰의 끄나불일 수고 있고 아닐
수도 있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것은
왔느냐 하는 점이었다.
(여차하면 죽여 버릴 수밖에 없어......)
M은 조리대 위에 놓인 부엌칼을 응시하며
속으로 결심을 했다. 거기엔 과일 깎는
과도도 있었다.
그는 커피 주전자에 물을 넣고 가스
레인지를 틀었다. 커피를 타는 손이
후들거리고 떨렸다.
(일단 수면제로 잠을 재워야 해......)
M은 커피잔에 수면제를 타기 위해
수면제가 들어 있는 벽찬장 설합을 열었다.
그때 등 뒤에서 인기척이 들렸다. 하석주가
주방까지 따라 들어오고 있었다.
"거실에서 기다리시지 그래요?"
"괜찮습니다."
M은 수면제를 타는 것을 포기했다.
없었다.
"집이 좋은데요?"
"부모가 물려준 집이에요."
"무슨 일을 하십니까?"
"공장에 나가요. 경찰인가요?"
"아닙니다."
하석주가 웃었다. 유도심문을 하려는
계획으로 보였다.
M은 2층에 있는 가스총을 생각해 냈다.
적당한 기회에 그것을 가져다가 하석주를
쏘면 간단하게 제압할 수 있을 것이었다.
하석주를 묶어서 지하실로 끌고 가 심문을
하면 자세한 내막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조영애가 누구에요?"
M은 등 뒤의 하석주에게 건성으로
물었다.
"그런데 그 여자가 어떻게 되었기에 나를
찾아온 거죠?"
"죽었습니다."
"죽어요? 왜요?"
"살해되었습니다."
"어머나!"
M은 깜짝 놀라는 표정을 짓고 하석주를
돌아보았다. 하석주가 우울한 낯빛을 하고
있었다.
"노란 옷을 입은 여자는 조영애가 죽기
전날 조영애의 집을 찾아갔었습니다. 무엇
때문인지는 알 수 없어도 노란 옷을 입은
여자가 사건의 열쇠를 쥐고 있는 게
분명합니다. 경찰은 범인이 여자로 변장을
했을 거라고 추측하고 있습니다."
"그럼 난 아니겠네요?"
없습니다."
"내가 남자 같아 보여요?"
하석주가 고개를 흔들었다. 그때 물이
끓어 M은 가스 렌인지를 끄고 주전자의
물을 커피잔에 따랐다.
"드세요."
M은 커피잔을 식탁에 올려 놓았다.
"고맙습니다."
하석주가 주방 식탁 의자에 앉았다. M은
하석주를 마주보고 앉았다.
"그런데 우리 집엔 어떻게 오게 된
거죠?"
"어제 백화점에서 우연히 봤습니다.
그래서 뒤를 미행하다가 철도 건널목에서
놓쳤습니다."
"왜 나를 미행했어요?"
"노란 옷을 입은 여자가 범인인가요?"
"노란 옷을 입은 여자가 사건의 열쇠를
쥐고 있습니다. 경찰이 그렇게 주장하고
있습니다."
"왜요?"
"얼마 전에 서울에서 여자들이 셋이나
강간을 당할 뻔했습니다. 그런데 강간범이
그 여자와 같은 노란 색의 옷을 입고
있었습니다. 경찰은 강간범과 조영애
살인사건의 열쇠를 쥐고 있는 여자가
동일인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럼 내가 강간범이겠네요?"
"그렇지는 않습니다. 강간범, 아니
강간미수범은 여자로 변장한
남자이니까요."
"경찰에도 알렸나요?"
"왜요?"
"노란 옷을 입은 여자가 범인이라는
확신이 서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럼 왜 나를 미행했어요?"
"범인은 아니더라도 조영애와 관련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난 조영애가 누군지도 몰라요."
"정말 모릅니까?"
"네."
"그럼 노란 옷을 입은 것은 우연의
일치인가요?"
"네."
하석주가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러나 M의
대답에 수긍하는 기색은 아니었다.
"그 잠옷 백화점에서 샀습니까?"
하석주가 M이 입고 있는 분홍색 잠옷을
살피며 물었다. M은 가슴이 뜨끔했다.
그것은 조영애의 집에서 훔쳐가지고 나온
것이었다.
"네."
하석주가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M은
하석주를 살려 두어서는 안되겠다고
생각했다.
"잠깐만 앉아 계세요. 2층에 올라갔다가
올께요."
M은 하석주를 혼자 남겨 두고 주방으로
나와 2층으로 올라갔다. 하석주가 경찰에
알리지 않고 집으로 찾아온 것이
다행이었다. 경찰은 아직도 자신의 정체를
파악하지 못한 것이 분명했다. 다만 경찰이
노란 옷을 입고 있는 여자를 추적하고 있는
이상 그 옷을 계속 입고 다닐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꺼냈다. 스타킹과 나일론줄은 사용하지
않는 방에 있었다. 그것을 들고 1층으로
내려오자 하석주가 주방에서 나와 욕실에
들어가 있었다.
M은 심호흡을 한 뒤 욕실 문틈에다 대고
가스총을 쏘았다. 하석주가 켁켁대다가
후다닥 거실로 뛰어나와 얼굴을 감싸고
뒹굴었다. M은 재빨리 하석주를 깔고 앉아
두 손을 스타킹으로 묶었다.
김지숙(金芝淑)은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남편이 또 다시 외도를 한다는
생각을 하자 오장육보가 뒤집어지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남편이 외도를 하는 것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었다. 그러나 이번엔
경우가 달랐다. 남편과 계약동거를 하던
조영애가 살해되었고 아직도 그 범인이
잡히지 않고 있었다. 그런데도 남편이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외도를 하고 있는
것이다.
(더러운 인간 같으니......)
그녀는 남편에게 환멸을 느꼈다. 남편이
구제할 수 없는 더러운 인간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제는 더 이상 남편을 용납할
모르는 체하고 있었던 것은 가정을 잃지
않으려는 그녀의 몸부림 같은 것이었다.
(이제는 어쩔 수가 없어......)
그녀는 입술을 깨물었다. 남편은 노란
옷을 입은 여자의 집에 들어가서 돌아오지
않고 있었다. 회사까지 결근을 한 것을
보면 그 여자에게 단단히 빠진 모양이었다.
김지숙은 외출 준비를 하기 시작했다.
밖에는 바람이 세차게 불고 있었다. 거리의
간판이 펄럭대고 허공을 가르는 바람소리가
요란했다. 마치 지옥에서 들려오는 악귀의
비명처럼 음산한 바람소리였다.
김지숙은 블르우스를 벗었다. 남편이
외도를 하고 있는 것이 자신의 뚱뚱한 몸
때문이라고 생각하자 어떤 슬픔 하나가
가슴 깊은 곳에서 목울대를 타고 올라왔다.
보기에도 흉하게 느껴질 정도로 뚱뚱했다.
남자들이 호기심이라곤 느낄 수 없을 것
같은 그런 몸이었다. 가슴은 잔뜩 늘어지고
둔부는 볼품없이 축 쳐져 있었다. 배는
음식을 먹지 않아도 잔뜩 불렀다.
"우리 결혼하자."
남편의 말이 이명처럼 귓전을 울렸다.
남편이 강원도 철원의 전방부대에서
사병으로 근무하고 있을 때였다. 한 번
면회를 와 달라는 남편의 편지를 몇 번이나
받고서도 모른 체하고 있다가 갑자기
생각이 나서 면회를 갔을 때 느닷없이
남편이 한 말이었다.
"나 같은 여자가 어디가 좋아서?"
김지숙은 그때 얼굴이 붉어지는 것을
느끼며 그렇게 대답했었다. 남편의 말이
"니가 어때서?"
"보기 싫잖아? 돼지처럼 뚱뚱하기만
하고......"
"괜찮아. 넌 뚱뚱한 것이 아니라
보기좋게 살이 찐 거야."
"얘가 사람 감동시키네."
"넌 맏며느리 감이야."
"그 말이 여자들에게 얼마나 모욕적인
것인지 알아?"
"정말 모욕적인 말이라고 생각해?"
"그럼 모욕적이잖구? 뚱뚱해서 좋다는
여자가 어디 있어?"
김지숙은 웃으며 대답했다. 어쩐지 몸이
붕 뜨고 있는 듯한 기분이었다.
전방에는 눈이 하얗게 내리고 있었다.
아침부터 내리기 시작한 눈은 저녁 무렵이
남편을 면회오면서 김지숙은 얼마나
아름다운 눈인가, 이 눈을 맞으며 사랑하는
사람을 만났으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을 했었다.
남편은 사랑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같은
대학을 다니고 같은 과를 다녔기 때문에
친구처럼 스스럼없이 지내긴 했으나
사랑하는 사람은 아니었다. 그런데 남편의
말이 그녀의 가슴을 울리기 시작한 것이다.
"이러다가 차 끊어지겠네."
"그럼 오늘 돌아갈 생각이었어?"
"돌아가지 않고 내가 여기서 뭘해?"
"전방에 있는 애인을 찾아온 여자가
어떻게 그냥 돌아가니?"
"그럼?"
"애인에게 자신의 순결을 바치고 울면서
돌아가는 거야."
"미쳤어!"
"너 오늘 내 여자가 되어 주라, 응?"
"군에 와서 못된 것만 배웠군."
"나하고 결혼하기 싫으니?"
"별일이네!"
김지숙은 졸라대는 남편을 웃어 넘겼다.
그러나 그녀는 그날밤 서울로 돌아가지
않았다. 남편에게 사랑을 느낀 것은
아니었으나 그녀는 갑자기 스물셋이라는
나이가 부담스러워졌다.
여관은 가까운 곳에 있었다. 손바닥처럼
작은 창, 캐시미론 이불과 얼룩이 묻어
있는 벽지......그녀는 그날밤 허름한
여관의 골방에서 스스로 남편을 위해 옷을
벗었다. 그것은 영낙없는 3류
멜로드라마였다.
남편이 있는 전방부대를 어김없이
찾아갔다.
남편은 그녀와 약속한 대로 제대를 하자
그녀와 결혼을 했다. 결혼 생활은
평탄했다. 남편은 직장과 가정에 모두
충실했다.
남편이 외도를 하기 시작한 것은 부동산
붐이 일어나면서부터였다. 남편은 회사에서
부동산을 관리하기 시작하면서 부동산에
눈을 떴다. 그는 회사의 공금까지 이용해
부동산 투자에 손을 댔다. 그리하여 그는
불과 10년도 안되어 막대한 부를 축적하게
되었다. 남편 자신도 놀랄 정도의
성공이었다.
그러자 남편이 외도를 하기 시작했다.
이따금 남편의 와이셔츠에 묻어 있는 지분
외도를 한다는 것을 증명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녀는 모른 체했다. 남편이
직장에서 일을 하다 보면 술집 여자들과
어울릴 때도 있을 것이고 그 여자들과
잠자리를 같이 할 때도 있으리라고
생각했다. 그것을 잘못 터뜨리면
가정이라는 울타리가 파괴되는 것이다.
그녀는 남편의 외도를 너그럽게 이해하려고
했다.
그러나 조영애의 죽음은 남편에 대한
생각을 달리하게 되었다. 남편이
조영애라는 여자와 계약동거를 하고
있었다는 오빠의 얘기를 들었을 때 그녀는
천길 벼랑으로 떨어지는 듯한 기분이었다.
분노와 배신감에 몸을 떨었다.
그녀의 오빠는 검찰청에 있었다.
들락거리기 시작하자 그녀는 남편 몰래
오빠에게 전화를 걸어 무슨 일인지 알아봐
달라고 부탁했었다.
"이미 엎질러진 물이다. 이 사건으로 니
남편도 충격을 받았을 테니 모르는 체하고
있어라. 니 남편도 혼이 났으니까 이젠
외도를 하지 못할 거야."
조영애의 자살사건을 자세하게
알아가지고 온 오빠는 그녀에게 자제하라고
말했다. 그녀는 오빠의 말에 동의했다.
남편이 술집 여자와 계약동거까지 하고
있었던 것은 분통이 터질 노릇이었으나
조영애라는 여자는 죽음을 당한 것이다.
죽은 여자 때문에 가정의 평화를 깨트리고
싶지 않았다. 남편도 그 사건으로 충격을
받아 더 이상 바람을 피우지 못할
그러나 남편은 조영애 살인사건이
해결되지도 않았는데 또 바람을 피우고
있었다. 상대는 이름도 정체도 모르는 알
수 없는 여자였다. 그녀는 어젯밤 남편의
뒤를 미행했었다. 남편이 창포동 철도
건널목을 건너 냇둑을 따라 걷기 시작했을
때 그녀는 남편의 뒤를 밟고 있었다.
남편은 다리를 건너 2층집으로 들어갔다.
남편이 대문 안으로 들어간 뒤 벽에 바짝
붙어서서 안을 살폈다. 남편은 잠옷만 입은
여자를 따라 거실로 들어가고 있었다.
(아!)
그녀는 다리가 후들후들 거렸다. 당장
대문 안으로 뛰어들어가 여자의 머리채를
휘어잡고 싶었다. 그러나 그녀는 용기가
나지 않았다. 자신도 모르게 눈물이 주르르
집으로 돌아오고 말았다.
그것이 어젯밤의 일이었다.
그녀는 뜬눈으로 밤을 새웠다. 이제나
저제나 남편이 돌아오기를 기다렸으나
남편은 새벽이 되어도 돌아오지 않았다.
(이제는 외박까지 한단 말인가?)
잠옷을 입은 여자와 남편이 알몸으로
껴안고 뒹구는 상상을 하자 눈이 뒤집힐 것
같았다.
이내 날이 밝았다.
그녀는 아이들에게 아침을 먹여 학교로
보낸 뒤 남편의 회사에 전화를 걸었다.
그러나 남편은 회사에 출근하지 않았다는
것이 직원의 대답이었다.
(아예 그 집에서 살림을 차릴 작정인가?)
그것은 용납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녀는
퇴근 시간이 되면 남편이 돌아오겠지 하고
희망을 걸었으나 남편은 밤이 되어도
돌아오지 않고 있었다.
(그 집에 가서 끌고 와야 돼......)
그녀는 마침내 그런 결정을 내렸다.
그녀는 블라우스를 벗고 집에서 입는
막치마를 벗은 뒤 청바지와 점퍼를 입었다.
시간이 벌써 10시가 가까워지고 있었다.
그녀는 아파트를 나왔다. 아파트의
광장은 바람이 세차게 불고 있었다. 넓은
광장에 휴지조각이 날고 바람소리가
요란했다. 그녀는 점퍼 깃을 세우고 허리를
잔뜩 숙인 뒤 걸음을 재촉했다.
택시는 큰길로 나와서야 겨우 잡을 수
있었다. 바람이 불고 있기 때문인지 거리엔
인적이 거의 없었다.
택시가 창포동에 도착했을 때 운전기사가
뒤를 돌아다보며 말했다. 창포동 일대에
정복을 입은 경찰관들이 2인 1조씩 짝을
지어 검문을 하고 있었다. 그녀는
운전기사의 말에 아무 대꾸도 하지 않았다.
창포동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전혀 알
수가 없었다.
"우리 차를 세우라는데요."
운전기사가 백리러를 향해 말했다.
그녀는 자세를 바로하고 앉았다.
"어디로 가는 거요?"
정복 경찰관이 택시를 세우고 물었다.
운전기사가 힐끗 뒤를 돌아다보았다.
"철도 건널목까지 가요."
김지숙은 낮게 대답했다.
"창포동 주민입니까?"
"그럼 창포동엔 무슨 일로 오셨습니까?"
"남편을 찾아왔어요."
"남편 이름이 어떻게 됩니까?"
"하석주요."
"좋습니다. 통과하십시오."
정복 경관이 가도 좋다는 손짓을 했다.
택시가 출발했다. 그녀는 곳곳에 배치되어
있는 경관들을 휘둘러보았다. 기분이
이상했다.
"사복조까지 배치되어 있습니다."
"사복조가 뭐예요?"
"사복을 입은 경찰관을 말하는 겁니다.
대개 형사들을 일컫는 말이죠......"
그녀는 아, 하고 고개를 끄덕거렸다.
경찰관이 무엇 때문에 창포동 일대에 깔려
있는지 알 수 없었다. 이내 택시가 철도
지불하고 택시에서 내렸다. 경찰관들은
건널목에서도 사복을 입은 사내와 함께
서성대고 있었다. 사복을 입은 사내는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여기서부터 차병학의 행적이 끊어졌단
말이지?"
"예."
"그럼 이 철도 건널목 근처에 산다는
얘기인데......"
"버스정류장에서 신문을 파는 아줌마가
그러는데 늘 철도 건널목 쪽을 향해서
갔답니다."
"큰일 났군......집집마다 확인할 수도
없고......"
"내일 낮이면 체포할 수 있을 겁니다."
김지숙은 그들을 향해 똑바로 걸어갔다.
"아주머니."
그녀가 철도 건널목을 건너 냇둑을 따라
걸으려 할 때 경찰관이 불렀다. 그녀는
걸음을 멈추고 경찰관을 쳐다보았다.
"이 마을에 사십니까?"
"아녜요."
"이 마을엔 무슨 일로 오셨습니까?"
"친척을 만나러 왔어요."
김지숙은 거짓말을 했다. 경찰관들이 왜
자꾸 이런 것을 묻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친척 중에 차연숙이란 사람 있습니까?"
"없어요."
"차병학은요?"
"없어요."
"친척집이 어딥니까?"
어두워서 보이지 않아요."
"거기도 집이 있었군요."
경찰관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김지숙은
경찰관들과 헤어져 걸음을 서둘렀다.
바람이 세차게 등을 떠밀고 있었다.
북풍이었다.
포플라숲에 이르렀을 때는 앙상한
나뭇가지에 바람이 목을 매달고 있었다.
나뭇가지들을 스치는 바람소리가 악귀들이
미쳐 날뛰는 부르짖는 소리처럼 음산했다.
김지숙은 뛰듯이 포플라숲을 지나갔다.
발이 천근이나 되는 것처럼 무거웠다.
김지숙은 어둠 속을 내달려 다리를 건넜다.
남편에 대한 분노 때문에 무섬증도 치밀지
않았다.
2층집은 캄캄하게 불이 꺼져 있었다.
김지숙은 대문을 두드렸다. 잠옷을 입은
여자가 나오면 머리채를 잡아서 땅바닥에
처박으리라고 생각했다. 2층집에 불이 꺼진
것은 남편과 계집년이 알몸으로 껴안고
뒹굴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 생각을
하자 눈에서 불이 일어나는 것 같았다.
김지숙은 대문을 더욱 요란하게
두드렸다. 그러나 안에서는 아무런 응답이
없었다. 어두운 하늘을 가르는 바람소리만
악마가 발악을 하는 것처럼 요란했다.
(이것들이 그짓에 미쳐 문을 두드려도
모르는 거야......)
김지숙은 집을 돌아갔다. 집 뒤쪽에 담이
낮은 곳이 있었다. 김지숙은 담을 넘어
안으로 들어갔다. 갑자기 도둑질을 하러
들어간 것처럼 가슴이 뛰고 다리가
그녀는 현관 쪽으로 돌아갔다. 그러나
현관문도 굳게 잠겨 있었다.
(더러운 인간들......!)
김지숙은 벽을 돌아서 창으로 갔다.
창문은 잠겨 있었으나 장갑을 낀 손으로
때리자 쨍그랑 하고 깨어졌다. 그녀는
창문을 열고 방안으로 들어갔다.
그 방은 침실이었다. 벽은 더듬어 전등
스위치를 올리자 침대에 두 사람이 누워
있었다. 남자와 여자였다. 시트를 머리까지
뒤집어 쓰고 있어서 얼굴은 알아볼 수
없었으나 남자와 여자의 발이 시트밖으로
빠져나와 있었다.
(내가 이럴 줄 알았어!)
김지숙은 격렬하게 가슴이 뛰었다.
남편이 다른 여자와 함께 침대에 나란히
부들부들 떨렸다. 김지숙은 입술을 깨물고
침대의 시트를 획 젖혔다.
(아!)
김지숙은 자신도 모르게 시트를
떨어뜨리며 입을 벌렸다. 침대에 누워 있는
사람은 남편이 아니었다. 큰 실수를 한
것이다. 그녀는 눈을 질끈 감았다가 떴다.
남자와 여자는 발가벗은 나신이었다.
남자와 여자의 국부가 환한 불빛에 그대로
노출되어 있어 야릇한 느낌이 들었다.
그녀는 숨이 멎는 것 같았다.
남자와 여자의 국부를 이토록 자세히 본
것은 처음이었다. 그녀는 자신의 처지도
잊고 얼굴을 붉혔다.
(어떻게 된 거지?)
김지숙은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남자와
게다가 유리창까지 깨뜨렸는데도 꼼짝도
하지 않고 있었다. 잠을 자고 있는 것이
아니었다.
(혹시 이 사람들이......)
김지숙은 갑자기 등줄기가 서늘해져
왔다. 그녀는 다리가 후들후들 떨렸다.
(저것은 시체다!)라는 생각이 머리를
스치자 달아나야 한다고 생각했으나 걸음이
떨어지지 않았다. 누군가 뒷덜미를 잡아
당기고 있는 듯한 기분이었다.
그때 지하실 쪽에서 물건이 넘어지는
듯한 소리가 쿵하고 들렸다. 그와 함께
남편의 목소리 같은 괴로운 신음소리가
들려왔다. 김지숙은 재빨리 거실로
뛰어나갔다.
거실은 어두웠다. 침실에서 켜놓은
가구들을 희미하게 비추고 있었다. 거실
한쪽에 지하실로 내려가는 계단이 보였다.
소리는 그쪽에서 올라오고 있었다.
곧 지하실에서 무엇인가 질질 끌고
올라오는 듯한 소리가 들렸다. 김지숙은
거실벽에 바짝 붙어섰다. 가슴이 격렬하게
뛰어 심장이 터져 버릴 것 같았다.
"어떻게 하지?"
김지숙은 사방을 휘둘러보았다. 무엇인가
무거운 것을 끌고 올라오는 듯한 소리가
점점 가까워지고 있었다. 김지숙은
응접탁자 위에 놓인 유리 재떨이를
집어들었다.
이내 지하실 계단에 그림자가 하나
나타났다. 그림자는 계단을 한 걸음 한
걸음 올라오고 있었다. 잠옷을 입은
남자의 다리는 양손으로 움켜잡고 힘겹게
위로 끌고 올라오고 있었다. 숨소리가
거칠었다.
(저, 저 사람은......!)
여자가 끌고 올라오는 것은 남편이었다.
김지숙은 유리 재떨이를 움켜쥐고 여자의
뒤로 다가갔다. 가슴이 격렬하게 뛰고
있었으나 숨소리를 삼키고 여자의 뒤통수를
힘껏 내리쳤다. 여자가 헉 하는 소리를
내면서 남편 위로 고꾸라졌다. 머리가
터졌는지 피 냄새가 확 풍겼다. 김지숙은
자신도 모르게 뒷걸음을 쳤다.
그때 여자가 끙 하는 신음소리와 함께
몸을 일으켰다. 김지숙은 머리끝이
쭈볏해져 왔다. 여자가 그녀를 향해 몸을
돌리더니 피식 웃었다. 소름이 오싹 끼치는
김지숙은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온몸이
사시나무 떨리듯 마구 떨렸다.
"누구라도 상관없어! 내 집에 들어온
이상 내 여자야......!"
여자가 잠옷을 벗어 던졌다. 김지숙의
눈이 여자의 크고 묵직한 가슴에서 밑으로
흘러내렸다.
(오! 하느님!)
김지숙은 눈앞이 캄캄해져 왔다. 여자의
하체에는 남자의 거대한 생식기가 달려
있었다. 그것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던
일이었다. 아니 도저히 믿어지지 않는
현실이었다.
"여기를 어떻게 알고 왔어?"
그의 입에서 쇳소리가 흘러나왔다.
김지숙은 뒷걸음을 쳤다 그가 징그럽게
있었다. 김지숙은 제정신이 아니었다.
허겁지겁 뒷걸음을 치다가 응접소파에 걸려
나동그라지고 말았다. 머리가 쿵 하고 거실
바닥에 부딪쳤다.
"네년처럼 큰 여자는 처음이야......"
그가 김지숙의 복부를 깔고 앉았다. 그의
입에서 역한 입냄새가 풍겼다.
(이렇게 당할 수는 없어!)
김지숙은 그의 가슴을 힘껏 떠밀며
발버둥을 쳤다. 그러나 그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의 손이 김지숙의
가죽점퍼를 벗기고 블라우스를 잡아챘다.
그러자 블라우스의 단추가 후두둑 떨어져
나갔다.
김지숙은 흰 브래지어를 하고 있었다.
그의 손이 브래지어를 잡아채려고 하자
그의 손힘은 거셌다. 그는 김지숙의 손을
뿌리치고 뺨을 후려쳤다.
그때 그가 "억!"하는 소리를 지르며
옆으로 굴러떨어졌다. 남편이 유리
재떨이를 들고 비틀거리고 있었다.
"여보!"
김지숙이 벌떡 일어나며 소리를 질렀다.
남편의 몸은 피투성이였다.
"어서 도망가!"
남편이 소리를 지르다가 옆으로 풀썩
쓰러졌다. 김지숙은 그를 내려다보았다.
그가 몸을 일으키고 있었다.
김지숙은 주방으로 달려갔다. 조리대
위에 칼이 있는 것이 보였다. 김지숙이
재빨리 그것을 들고 뛰쳐나오는데 몽둥이가
그녀의 어깻죽지를 후려쳤다.
바닥으로 나뒹굴었다.
최형사가 형사대를 이끌고 차병학의 집
대문 앞에 도착했을 때 안에서 요란한
비명소리가 들려왔다. 최형사는 그 소리를
들으며 가슴이 섬칫했다. 대문은 굳게 잠겨
있었다. 형사들이 대문을 마구
흔들어댔으나 안에서는 아무 응답이
없었다.
"담을 넘어 들어가!"
최형사는 형사들에게 날카롭게 지시했다.
기분이 좋지 않았다. 뭔가 좋지 않은 일이
생긴 것 같은 기분이었다.
최형사가 차병학의 집을 찾은 것은
창포동 일대에 대한 탐문수사를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창포동에서는 의외로 노란
버스정류장, 수퍼마켓, 철물점,
미장원에서 사람들은 노란 옷을 입은
여자를 보았다고 진술했다. 그러나 그
여자가 어디에 사는지 알고 있는 사람들은
아무도 없었다.
사람들은 막연히 노란 옷을 입은 여자가
창포동에 살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고
진술할 뿐이었다.
최형사는 오후가 되자 창포동 전 주민에
대한 조사를 시작했다. 겨울이라 해가 짧아
창포동 주민들에 대한 조사가 끝나기도
전에 밤이 왔다. 최형사는 창포동 파출소의
지원을 받아 행인들에 대한 검문까지
실시했다. 그러나 아무 소득이 없었다.
그가 저녁을 먹고 돌아오자 하석주의
부인이 철도 건널목 쪽으로 갔다는 보고가
달려갔다. 철도 건널목에는 유형사와
창포동 파출소 순경 둘이 검문을 하고
있었다.
"하석주 부인이 지나가는 것을 봤나?"
"하석주 부인이 누굽니까?"
"어떤 여자가 남편을 만나러 간다면서
이리로 오지 않았어?"
"친척집에 간다는 여자가 택시를 타고 온
적은 있습니다."
유형사는 하석주의 부인을 모르고
있었다.
"어디로 갔어?"
"저쪽 냇둑으로 갔습니다."
"형사들 불러. 모두 이쪽으로 오라고
해!"
"왜요?"
형사들이 유형사의 무전 연락을 받고
달려온 것은 10분도 걸리지 않아서였다.
최형사는 그들과 함께 냇둑을 따라 달리기
시작했다. 냇둑은 차가 들어갈 수 없는
좁은 길이었다. 이내 포플라숲이 나타났고
포플라숲을 지나자 다리가 하나 있었다.
"저기 집이 하나 있습니다."
유형사가 헐떡거리며 소리를 질렀다.
다리를 건너자 어둠 속에 2층 양옥집이
무슨 성채처럼 우뚝 솟아 있었다.
"누구네 집인지 아십니까?"
최형사가 창포동 파출소 순경에게
물었다.
"잘 모르겠습니다."
"이 근처에 또 집이 있습니까?"
"이 집 하나뿐입니다."
비명소리가 들려왔다.
"문을 두드려!"
최형사가 다급하여 소리를 질렀다.
그러나 안에서는 아무런 응답이 없었고
최형사는 담을 넘어 들어가라고 형사들에게
지시했던 것이다.
"들어오십시오."
담을 넘어 들어간 강형사가 대문을
열었다. 정형사와 강형사는 이미 창을 통해
거실로 들어간 뒤였다.
"현관이 잠겨 있습니다."
안에서는 치고 받는 듯 가구가 부서지는
소리가 들리고 비명소리가 범벅이 되어
들렸다.
"발로 차봐!"
최형사는 답답했다. 유형사가 현관문을
"옆으로 들어가!"
집 모퉁이를 돌자 창문이 열려 있었다.
유형사와 최형사는 창을 넘어 안으로
들어갔다. 침대 위에 벌거벗은 남자와
여자가 나란히 누워 있었다.
"시체입니다."
유형사가 긴장된 표정으로 말했다.
거실에서 괴로워하는 신음소리가 들리고
있었다.
"강형사 같습니다."
"조심해."
거실은 어두웠다. 유형사 뒤를 바짝 따라
거실로 나가지 피비린내가 진동을 했다.
(대형사고야!)
최형사는 바짝 긴장했다. 손바닥이
끈적거렸다.
"강형사 어디 있어?"
유형사가 어둠 속을 향해 조심스럽게
외쳤다.
"여기야."
강형사가 괴로워하는 표정으로 말했다.
"정형사는?"
"난 여기 있어!"
정형사는 벽쪽에 웅크리고 있었다.
"왜들 그래? 다쳤어?"
"다쳤어."
"심해?"
"눈을 뜨지 못하겠어."
최형사는 벽을 더듬어 전등 스위치를
찾기 시작했다.
"강형사는 어때?"
"옆구리를 찔렀습니다."
"범인은?"
마침내 전등 스위치를 찾았다. 전등
스위치를 현관문 바로 옆에 붙어 있었다.
최형사가 전등 스위치를 올리자 금세
거실이 환하게 밝아졌다.
(세상에!)
최형사는 입을 딱 벌렸다. 거실은
여기저기 피가 낭자했다. 정형사는
두손으로 얼굴을 감싸쥐고 있었고 강형사는
옆구리를 움켜쥐고 있었다.
"앰뷸런스 불러!"
최형사는 유형사에게 낮게 지시하고
권총을 뽑아들었다.
"이게 어떻게 된 거야?"
이형사와 파출소 순경들이 들어와 코를
싸쥐며 소리를 질렀다.
"앰뷸런스 불러!"
2층으로 뛰어올라갔다.
"조심해!"
최형사도 2층으로 뛰어올라갔다. 가슴이
쿵쾅거리고 뛰었다. 범인은 의외로 흉악한
자였다.
"여기 있다!"
유형사가 2층 거실로 들어서다가 흠칫
하고 걸음을 멈추었다. 최형사도 걸음을
멈추었다. 범인은 2층 거실 벽에 바짝 붙어
하석주 부인의 머리채를 움켜쥐고 있었다.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알몸이었다.
(괴인이다......!)
최형사는 온몸을 부르르 떨었다.
"움직이지 마!"
유형사가 범인을 향해 권총을 겨누었다.
최형사도 권총을 겨누었다.
"가까이 오지 마!"
범인의 오른 손에는 피가 뚝뚝 떨어지는
과도가 들려 있었다. 그는 그 과도를
하석주 부인의 목에 대고 있었다. 여차하면
찔러 버릴 것 같은 자세였다.
"차병학! 칼을 내려 놔!"
유형사가 다시 소리를 질렀다. 유형사의
얼굴로 식은땀이 주르르 흘러내렸다.
"차병학! 모든 것은 끝났어! 발악해도
소용이 없어!"
"어서 칼을 내려 놔!"
"칼을 내려 놓지 않으면 쏜다!"
하석주 부인은 정신을 잃었는지 눈빛이
몽롱했다.
"이년을 죽이겠어!"
차병학이 낮게 으르렁거렸다. 최형사는
"살인을 하면 안돼!"
"이년을 죽여 버릴 거야!"
"그 여자를 건드리면 네놈을 쏠 거야! 자
어서 칼을 버려!"
"흐흐흐흐......"
그때 범인이 희미하게 웃었다. 범인의
눈이 잔뜩 충혈되어 있었다. 범인이 갑자기
하석주 부인을 거실 바닥에 팽개쳤다.
"이젠 칼을 버려!"
최형사는 이마에서 흐르는 땀을 손등으로
닦았다. 가슴이 격렬하게 뛰고 있었다.
범인이 자신의 가슴에 칼을 들이댔다.
"뭐하는 짓이야?"
범인은 칼자루를 벽에 닿게 하고는
자신의 가슴을 힘껏 밀어붙였다. 범인의
가랑이 사이로 피가 주르르 흘러내렸다.
뤌鞭캅@?일이었다.
(자, 자살을 하고 있어......!)
최형사는 범인의 등을 향해 권총을 겨눈
채 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때 유형사가
몸을 날려 범인을 나꿔채서 거실 바닥에
내팽개쳤다. 범인이 쿵 하고 거실 바닥에
쓰러졌다. 범인의 왼쪽 가슴엔 이미 과도가
자루까지 박혀 있었다.
"어떻게 하지요?"
유형사가 최형사를 쳐다보았다. 최형사는
아무 대꾸도 하지 않았다. 범인은 죽어가고
있었다.
최형사는 담배를 연거푸 두 대나 피웠다.
사건은 끝이 났다. 아직도 조사해야 할
것이 많이 있었으나 범인은 스스로 목숨을
끊고 말았다. 기이한 살인자였다.
밖에는 바람이 점점 심하게 불고 있었다.
바람소리 때문에 머리속이 어수선했다.
"정형사와 강형사를 병원으로
후송했습니다."
유형사가 몸서리를 치며 말했다. 범인의
가슴에서 흘러내린 피 때문에 2층 거실이
비린내로 진동을 하고 있었다.
"차도 없는데 어떻게 후송했어?"
앰뷸런스는 아직도 도착하지 않고
있었다.
유형사가 담배를 피워 물었다.
"하석주 부인은 어떻게 되었어?"
"중상입니다. 범인이 난도질을
했습니다."
"죽을 것 같은가?"
"모르겠습니다. 정형사랑 같은 봉고차로
보냈는데 제정신이 아니더군요."
"하석주 부인이 왜 여기까지 왔지?"
"하석주가 범인에게 잡혀 있었던
모양입니다. 거실에 쓰러져 있었는데 못
보셨습니까?"
"못 봤어."
"하석주는 타박상이 심합니다. 범인에게
매를 많이 맞은 모양입니다."
"죽지는 않겠지?"
"예. 약물 중곡이 심하긴 합니다만 죽을
"약물 중독?"
"자꾸 잠을 자려고 그럽니다."
"수면제를 먹인 모양이군......"
최형사는 낮게 한숨을 내쉬었다.
"감식반을 불렀습니다. 시체도 두 구나
있고 해서......"
"잘했어."
최형사는 고개를 끄덕거렸다. 유형사는
범인의 시체를 물끄러미 내려다보다가
최형사 옆에 와서 앉았다. 범인은 이미
숨이 완전히 끊어져 있었다. 과도가 범인의
심장을 정확히 찌른 탓에 숨이 끊어지는데
3분도 걸리지 않았던 것이다.
"참 이상한 사건입니다."
유형사가 창밖의 음산한 바람소리를 듣고
있다가 무겁게 입을 열었다. 최형사는 아무
했다.
"시체 두 구는 신원이 밝혀졌나?"
"지문을 떠봐야 할 것 같습니다."
"그런데 왜 시체 두 구를 침대에 눕혀
놓았을까?"
"시체를 희롱했겠지요. 차병학은
정상인이 아니니까요."
"내일은 정원을 파헤쳐야겠어."
"정원이오?"
유형사가 의아해서 최형사를 쳐다보았다.
"바닥이 푸석푸석한 게 최근에 파엎은 것
같아. 이런 자들은 사체를 유기하는 일이
많아."
"그럼 포크레인과 인부들을 불러야
하겠군요."
최형사가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들은
내려다보았다.
"과도가 심장을 정확하게 찌른 것을 보면
이런 날이 오리라고 예상하고 미리 계산을
해둔 모양이야......"
범인은 눈을 부릅뜨고 죽어 있었다. 입은
반쯤 벌어진 채였다.
"위에만 보면 남자라고 생각할 사람이
아무도 없을 겁니다. 가슴이 저렇게
크니......"
"어떻게 이런 사람이 태어날 수 있는지
모르겠어."
"사람이 아니라 괴물입니다."
"보기 흉한데 뭘루 덮어. 꿈에
나타날까봐 무섭군."
"예."
최형사가 유형사가 커튼을 찢어 범인의
내려갔다. 형사들은 집안을 샅샅이 뒤지고
있었다.
잠시 후 가방을 들고 도착한 감식반원 두
명이 피살자들의 지문을 뜨기 시작했다.
지문은 곧 떠졌고 그들은 그 지문을 들고
곧 돌아갔다.
오후 세 시경에 감식반으로부터 연락이
왔다. 남자의 신원이 밝혀진 것이다. 전과
2범의 김인구라는 자였다.
마침내 모든 게 밝혀졌다.
"남자는 김인구라는 사람이고 여자는
한영숙입니다."
"시체는 또 없나?"
"없습니다."
"사인은 뭐야?"
"외상이 없어서 모르겠습니다. 검시를
"김인구는 뭐하는 자야?"
"전과 2범으로 흑마표 청바지를 짜는
공장의 생산부장입니다. 형이 사장이라고
그럽니다."
"한영숙은?"
"그 공장의 미싱사입니다."
"차병학에 대해서는 나온 거 없어?"
"그 공장에 한영옥이라는 이름으로
위장취업을 하고 있었습니다."
"회사 이름이 뭐야?"
"원일통상입니다."
"노란 옷이 나왔나?"
"나왔습니다. 노란 옷이 세 벌이나
되었습니다."
최형사는 고개를 끄덕거리고 밖을
내다보았다. 어둠이 칠흑처럼 덮여 있는
악귀들이 미쳐 날뛰는 소리처럼 들렸다.
그는 비감했다.
수사는 이튿날까지 계속되었다. 범인은
스스로 목숨을 끊었으나 그가 저지른 범죄
행각을 수사하고 피해자들의 인적사항,
범행 동기, 범인의 심리 상태까지 낱낱이
조사해야 했다.
기자들은 새벽에야 들이닥쳤다. 최형사는
기자들이 범행 현당을 다치지 않도록
주의시키면서 범인의 사진을 찍게 했다.
감식반은 조영애의 집에서 채취한 지문과
범인의 지문이 일치한다는 사실도 연락해
왔다.
바람은 계속 불었다. 최형사는
포크레인과 인부들을 불러 정원을 파헤치게
했다. 포크레인은 냇둑을 따라 들어올 수가
기자들이 뚫어 놓은 길이였다.
"저 친구들은 지옥이라도 마다하지 않고
따라다닐 겁니다."
이형사의 말에 최형사는 모처럼 피식
웃었다.
정원에서 시체 한 구가 나온 것은 거의
점심 때가 되었을 때였다.
최형사는 세 구의 시체를
국립과학수사연구소로 보냈다.
국립과학수사연구소는 김인구와 한영숙의
사인은 호흡장애로 인한 질식사로 통보해
왔고, 정원에서 판 시체는 시신이 부패하여
사인불명이라고 통보를 해왔다.
수사는 그것으로 종결이 되었다.
매스컴은 차병학이 갖고 있는 두 개의
생식기에 대해서 집중적으로 보도했다.
차병학의 생식기를 한동안 화제거리로
삼았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자 매스컴도
세인들도 차병학을 망각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차병학을 잊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것은 정신병원에 입원을 한
하석주의 부인과 병원에 입원했다가 한
달만에 퇴원한 하석주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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