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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영화,리뷰,

내안의 노랑나비

by Casey,Riley 2023. 6.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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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 안 의 노 랑 나 비
이수광

                          차  례
작가소개
1. 노랑나비
2. 인육 사건
3. 다중 성격
4. 심리 분석
5. 도파민
6. 살인 사건 파일
7. 미지의 자아
8. 어린 양
9. 공포의 밤
10. 형사
11. 어둠
12. 예감
13. 욕망
14. 밤의 미로
15. 기억속의 장마
16. 마조히스트
17. 지옥에서 나온 살인자
18. 충격
19. 양들의 덫
20. 꿈꾸는 소녀
21. 또 다시 지옥
22. 보이지 않는 아버지
23. 어머니
24. 야수를 찾아서
25. 죽은 자의 말
26. 소굴
27. 내 영혼을 부르는 소리
28. 목격자
29. 용의자
30. 비명
31. 남편
32. 활동자아
33. 함정
34. 여자의 일생
35. 거미 여인
36. 범인이 아니다
37. 죽음의 게임
38. 노랑나비


  작가 소개
  - 1983년 중앙일보 신춘문예 당선
  - 1984년 삼성문예상 제 14회 수상
  - 1993년 한국 미스터리클럽 독자상 수상
  - 1994년 한국추리문학 대상 수상
  단편소설 [바람이여 넋이여] [불가사리][어떤얼굴]
  [버섯구름][접동새]
  [그림자를 찾는 여자] [ 투명한 눈] 외 다수
  중편소설 [홍도화] [저 문밖에 어둠이]
  장편소설 [우국의 눈] [사자의 얼굴] [나는 조선의 국모다]
  [대공항]외 다수
  스포츠 서울에  S.F [시간을 찾아서] 연재



  후론트 그라스에 빗발이 점점이 묻어나기 시작했다. 일기예
  보에 비가 온다고 했는데 정확하게  맞아 들어가고 있었다.
  나는 도로변에 차를 세우고 시트에 등을 기댄 채 담배를 피
  우고 있었다. 인적 없는 시골국도였다. 칠흑의  어둠이 밤바
  람에 치렁대는 만또자락을 펄럭이며 벌판에서  미쳐 날뛰고
  있었다.
  이런 밤이라면.
  이런 밤이라면 귀신도 무덤 속에서 뛰쳐나와 벌판을 돌아다
  니고 있을 법했다. 마치 지옥의 악귀들이  산발을 한 채 피
  냄새가 그리워 곡을 하고 있는 것 같은 음산한 밤이었다.
  나는 담배연기를 길게 내뱉았다. 파르스름하게 흩어지는 담
  배연기 사이로 노랑나비 한 마리가 달려오고 있었다.
  태희(兌姬)는 빗발이 뿌리는 길가에 우두커니  서 있었다.
  어둠이 만또자락을 펄럭이는 깊은 가을  밤. 어쩌면 시골국
  도는 코스모스가 찬비에 나부끼고  있고 드문드문 서  있는
  은행나무 가로수가 샛노란 은행잎을 떨구고 있을 것이다.
  인적은 완전히 끊어져 있고 차량은  드문드문 오가고 있다.
  차량의 전조등 불빛이 태희의 창백한 얼굴을 할퀴고 지나가
  곤 한다. 이따금 전속력으로 질주하는  차들이 태희의 몸에
  아스팔트 바닥에 괴어 있는 빗물을  튀기기도 한다. 그래도
  태희는 미동도 하지 않고 서 있다. 태희는 노출되어 있다.
  나는 이따금 안개처럼 희미한 기억 속에서 그  장면을 떠올
  린다. 얼마나 가슴 설레는  장면인가. 비록 낡은 영화의  한
  토막처럼 아슴한 기억 속에  존재하는 장면이지만 나는  그
  장면을 떠올릴 때마다 온 몸을 꿰뚫는 황홀한  전율에 몸을
  떤다.
  태희는 찢어진 우산을  쓰고 있다. 검은  색의 주름 치마는
  허벅지가 죄 드러나도록 짧고 블라우스는 가슴의 둥글고 탐
  스러운 융기를 블록하게 감싸고 있다.  허리는 가늘고 둔부
  는 풍만하다. 태희의  주름치마는 빗발에  젖어서 궁둥이에
  철썩 달라붙어 있다.
  목이 말라 온다. 나는  꿀꺽 하고 마른침을 삼킨다.  영리한
  독자들은 누군가 태희를 감시하고 있으리라는 것을 벌써 눈
  치챘을 것이다. 그렇다! 태희는 감시당하고 있다. 그러나 태
  희는 자신이 감시당하고 있다는 사실을 전혀 모른다.
  태희가 서 있는 국도에는  한순간 차량마저 지나가지  않는
  다. 태희는 담배를 한 대 꺼내 피운다. 담배를 피울 때 누군
  가 자신을 살피지 않는지 주위를  두리번거리고 피운다. 태
  희가 담배연기를 후 하고 내뿜자 파란 연기가  어둠 속으로
  흩어진다.
  멀리서 불빛이 깜박인다. 태희가 그  불빛을 발견하고 서둘
  러 담배연기를 두어 모금 빨아들였다가 내뱉고 담배를 논둑
  으로 버린다. 빨간 불빛이 어둠 속에서 타원으로 원호를 그
  리고 날아가다가 사라진다.
  태희의 공허한 눈이 국도에서 달려오는  불빛을 쫓고 있다.
  불빛이 가까이 오면서 차의 엔진음이  들려온다. 차의 엔진
  음과 전조등의 불빛으로 승용차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음 "
  태희의 붉은 입술 사이로 신음 한 마디가 흘러나온다. 차량
  의 전조등이 그녀의 몸에 쏟아지자 마치 남자의  애무를 받
  는 것처럼 다리를 벌리고 몸을 전율한다.
  전조등이 태희의 몸에서 거두어지며 요란한  엔진음도 떠나
  간다. 그 순간 태희의 눈빛이 표독하게 바뀌며 승용차를 쫓
  는다. 야수가 아니다, 그녀가 기다리는 야수가 아니다
  그때 끼익 하는 소리가 들리면서 승용차가 급브레이크를 밟
  는 소리가 들려온다. 태희의 반짝이는  눈이 승용차로 퍼부
  어진다. 태희의 눈은 마치 먹이를  포박하는 승냥이의 눈처
  럼 파랗게 이글거리고 있다.
  승용차가 후진등을 켜고 그녀의 옆으로  미끄러져 온다. 태
  희의 눈이 차안의 사내에게로 쏠린다. 그녀의 눈은 어느 새
  평온하다. 아니 지극히 부드럽게 풀어져 있다.  차안의 사내
  들이 재빨리 태희의 몸을 위 아래로 훑어본다.
  그녀는 몸을 가볍게 떤다. 추위 때문이 아니다. 사내들의 시
  선이 그녀의 몸을 훑자 또 다시 전신으로 번지는 짜릿한 쾌
  감, 그 쾌감을 감지하고 몸을 떠는 것이다.
  승용차의 앞좌석, 운전석과 동반석에 있던 사내들이 후닥닥
  차에서 내려 그녀를 덮친다. 한 사내는 넓은 손바닥으로 입
  을 틀어막고 다른 사내는  그녀의 등을 떠밀어서  뒷좌석에
  태운다. 제기랄 주먹으로 등짝이라도 한 대 갈기지
  태희는 입이 틀어 막혀 숨이 답답했다.  그러나 참을 만 했
  다. 태희를 따라 뒷좌석에 올라탄 사내가 태희의 입에 헝겁
  조각을 집어넣고 블라우스를 벗겨 손목을  묶었다. 그 동안
  운전을 하던 사내가 승용차를 끌고 농로로 달려들어갔다.
  태희는 거짓으로 반항하는 체하고 있었다.  부러 몸을 흔들
  고 두 발을 바둥거렸다.  입이 틀어 막히기는 했으나  으으,
  하는 신음소리를 지르는 것도 잊지 않았다.
  승용차가 멎었다. 전조등이  꺼지고 엔진도 꺼졌다.  사위는
  죽은 듯이 조용했다. 엔진이 꺼지자 차의 지붕을 때리는 빗
  소리가 요란했다.
  태희는 공포에 질린 눈빛을 하고 있었다.
  "조용히만 있어! 그럼 해치지는 않을 꺼야."
  뒷좌석에 있던 사내가 담배를 꺼내 물며 말했다. 태희의 눈
  으로 실망하는 표정이 빠르게 스치고  지나갔다. 사내가 성
  냥을 켜자 유황 냄새가 확 풍겼다.
  "알았어?"
  사내가 태희를 다그쳤다. 태희가 고개를 끄덕거리는 시늉을
  했다. 앞좌석에 있던 사내가 우산을 들고 밖으로 나갔다. 차
  문이 열리자 찬바람이 휘익 밀려 들어왔다. 사내가 뒤를 돌
  아보고 비에 젖은 태희의 치마를 위로 들추었다. 태희는 고
  개를 흔드는 시늉을 했다. 그러나 사내는 잔뜩 긴장하고 있
  었다. 사내의 얼굴이 이미 딱딱하게 굳어져 있었다.
  사내가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사내의 시선이 태희의 하얀 속옷에  머물러 있었다. 속옷이
  투명하여 체모까지 보였다. 사내의 손이  태희의 속옷에 닿
  았다. 태희는 그때서야 몸을 흔들며 반항하는 시늉을 했다.
  "잠자코 있어 이년아! 반항해야 너만 손해야!"
  사내가 악을 썼다. 태희는 더욱 격렬하게 몸을 흔들며 반항
  을 시도했다. 일순 사내의 얼굴에  당황하는 표정이 스치고
  지나갔다. 그는 한 손으로 태희를 저항하지 못하게 하고 한
  손으로 속옷을 벗기려 하고 있었다.
  "이 년이!"
  사내가 태희의 뺨을 후려쳤다. 태희는 뺨이  얼얼했다. 금세
  눈물이 핑 돌았다. 그러나 저항을 멈추지 않았다. 그러자 사
  내가 태희의 뺨을 또 다시 세차게  때렸다. 그리고 그는 태
  희가 멈칫하자 재빨리 태희를 깔고 앉았다.
  "으으 "
  태희는 비명을 지르면서 발버둥을 쳤다.  그러자 사내가 주
  먹으로 태희의 복부를 힘껏 내질렀다. 태희는 컥 하고 숨이
  막혀 왔다. 갑자기 눈앞이 캄캄해지면서 의식을 잃었다.
  태희가 눈을 뜬것은 두 번째 사내가 그녀의 몸에서 일을 치
  르고 났을 때였다. 그 사내는 일을 마치자 마자 후닥닥 옷을
  입고 밖으로 나갔다. 그리고는  더러운 일을 끝냈다는  듯이
  침을 칵 뱉았다.
  "어떻게 할까?"
  사내 하나가 물었다.
  "버리고 가지."
  "신고하지 않을까?"
  "무슨 낯짝으로 신고를 해?"
  "무슨 소리야?"
  "어떤 년이 배짱 좋게 나 일 당했습니다,  하고 경찰에 신고
  하겠니?"
  "하긴!"
  사내들이 낄낄대고 웃음을 터뜨렸다. 태희는  사내들의 얘기
  를 귓전으로 흘려듣고  있었다. 아무 것도  아니었다. 좀 더
  자극적이고, 좀 더 야수다운 사내들을 만나고 싶었으나 그들
  은 결코 야수가 못되었다.
  아아 오늘은 이것으로 만족할 수밖에 없어
  태희는 눈물을 흘리며 속으로 중얼거렸다. 뒷문이 덜컹 열리
  더니 사내들이 그녀를 끌어내렸다. 그녀는 농로 바닥에 팽개
  쳐 졌다. 사내 하나가 시동을 걸고 차를 후진시키는 동안 또
  한 사내가 그녀의 입에 물린 재갈을 풀고 손목에 묶은 블라
  우스를 풀어서 그녀의 나신에 내던졌다.
  부르릉.
  차의 시동이 걸리고 차가 빗속으로 빠르게 달아났다. 태희는
  갑자기 담배가 피우고 싶어졌다. 그러나 그녀는 미동도 하지
  않고 누워 있을 뿐이었다.
  태희의 나신으로 차가운 빗발이 장대질을 하고 있었다.
  태희는 오랫동안 그대로 쓰러져 있었다. 비는 계속 장대질을
  했고 그녀는 차가운 빗속에서 꼼짝도  하지 않고 누워 있었
  다
  나는 얼굴을 찡그렸다. 노랑나비를 찾아  나섰지만 노랑나비
  는 눈에 띄지 않고 있었다. 나는 손가락 사이에서 저절로 타
  버린 담배를 차창 밖으로 던졌다.
  나는 의식 속에서 빗속에서 꼼짝도  하지 않고 쓰러져 있는
  태희를 강하게 불렀다. 태희에게  노랑나비를 찾게 해야  했
  다. 그런데 왜 태희는 가을에 시골국도에 있는 것일까. 나는
  그 의문을 금세 풀어냈다. 내 어두운 기억 속의 한 장면. 태
  희라는 소녀가 시골국도에서 경찰에 잡혀가는 것을 본 일이
  있었다.
  그때가 가을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여름이었다. 날씨는 속옷이  끈적거릴 정도로
  후덥지근하고 지루한 장마가 시작되려 하고 있었다.
  날짜는 6월30일이었다.
  승용차에 키를 꽂고 돌리자 시동이 부드럽게 걸렸다. 태희
  는 윈도우 브러시를 작동시키고  여유있게 액셀레이터 페달
  을 밟았다.
  한 시간 후 태희의 승용차는 한 아파트 단지 앞 버스정류장
  이 보이는 도로변에 세워져  있었다. 태희는 담배를  피우며
  여유있게 기다리고 있었다. 빗발은 어느 사이에 장대질을 하
  고 있었고 버스정류장은 비 때문인지 시간이 오래되었기 때
  문인지 인적 하나 없이 덩그러니 비어 있었다.
  버스 한 대가 빗물을 튀기며 달려온  것은 5분쯤 되었을 때
  였다. 후론트 그라스로 우산을 든 사내 둘이 내리는 것이 보
  였다. 그들은 일행이 아닌 듯 따로따로 떨어져  아파트를 향
  해 걸음을 재촉하고 있었다. 태희는 그들이 보이지  않을 때
  까지 시선을 떼지 않았다.
  버스정류장이 다시 조용해졌다. 태희는 미동도 하지 않고 핸
  들을 잡고 앉아 있었다. 시간이 흘러갔다.
  태희는 여전히 미동도 하지 않고 앉아 있었다. 저 멀리 아파
  트단지가 어둠 속에서  마치 괴물들의 성채처럼  우뚝 솟아
  있었다.
  그때 헤드라이트의 강렬한 섬광이 백미러로 비쳐 오고 버스
  가 노면의 빗물을 튀기며 달려오는 것이 보였다.  태희는 비
  로소 자세를 바로 했다. 버스가 태희의 승용차 옆을 지나 정
  류장에 멎고 한 여자가 내렸다. 그 여자는 우산도 쓰지 않고
  있었다. 젊은 여자였다. 버스가 떠나고  여자가 아파트를 향
  해 달려가는 모습을 보자 아가씨였다.
  태희는 빠르게 여자를 향해 달려가서 차를 세웠다.
  "탈래?"
  젊은 여자를 향해 미소를 던졌다. 얼추 보았으나  살결이 희
  고 나이는 기껏해야 스물 한 두 살 정도 되어  보였다. 제법
  날씬한 몸매를 갖고 있었다.
  "괜찮아요."
  젊은 여자가 그녀를 쳐다보며 싱긋 웃었다. 미안하고 계면쩍
  은 표정이었다. 젊은 여자의 옷은 벌써 장대비에  흠뻑 젖어
  있었다. 옷자락이 몸에 찰싹 달라붙어 자극적이었다.
  "저 아파트에 살지? 비가 오는데 타!"
  "고맙습니다."
  그녀가 다시 한 번 권하자 젊은 여자가 재빨리 동반석에 올
  라탔다. 젊은 여자에게서 비 냄새가 왈칵 풍겨왔다.
  "거기 수건으로 빗물을 닦아."
  동반석 앞에 마른 수건이  있었다. 젊은 여자는  사양하다가
  수건으로 얼굴의 빗물을 훔친 뒤  긴 생머리를 문지르기 시
  작했다. 그러다가 젊은 여자는 수건을 떨어트리고 힘없이 고
  개를 떨구었다.
  순식간의 일이었다.
  태희는 아파트를 향해 가던 방향을  바꾸어 어둠 속으로 질
  주하기 시작했다
  나는 웃음이 슬금슬금 비어져 나왔다. 마침내 태희가 노랑나
  비를 잡은 것이다.
  "노랑나비 알지? 봄이 오면 제일  먼저 들에 나타나는 노랑
  나비. 넌 내 노랑나비야! 내 허락을  받지 않으면 아무 데도
  날아갈 수가 없어."
  그의 음성이 내 귓전을  울렸다. 잊어버리고 있던  목소리였
  다. 뼛속까지 증오하고 있던 목소리였다.  그러나 나는 이제
  그의 목소리가 더욱 생생하게 들려오는  것을 느낄 수 있었
  다. 과거에는 그가  어린 노랑나비를 가지고  유희(遊戱)를
  즐겼지만 이제는 내가 노랑나비를 잡아서 유희를 즐길 차례
  였다.
  날씨는 맑게 개어 있었다.  오득렬(吳得烈)은 커텐을 비집고
  들어오는 햇살에 눈을 부시시 떴다.  아침이다. 문득 여자의
  살 냄새와 함께 기분 좋은 화장품냄새가 코끝에  풍겼다. 오
  득렬은 그때서야 카페 '은성'의 마담  이정희(李貞姬)의 침대
  에 자신이 누워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이정희는 그의 옆구리에 얼굴을 바짝 들이밀고 자고 있었다.
  이정희의 풍성한 머리숱이 맨살을 간질러 왔다. 그러나 모처
  럼 여자의 머릿결이 몸에 닿아서인지 감미로웠다.
  (내가 여기서 잤군 )
  오득렬이 아침 일찍 눈을 뜬것은  여자의 살이 몸에 닿아있
  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오득렬은 침대 머리맡을 더듬어  담배를 찾아 입에  물었다.
  간밤에는 비가 억수처럼 쏟아졌었다.  그는 서(署)에서 나오
  자 갑자기 여자가 그리웠다. 밤  12시가 가까운 시간이었다.
  노래방 화장실에서 여자를 강간하고  살해한 범인을 검거하
  여 자백을 받느라고 그렇게 시간이 걸렸던 것이다.
  조서까지 작성하여 범인을 검찰에  송치하고 나자 몸뚱아리
  가 물에 젖은 솜뭉치처럼 무거웠다.
  충격적인 사건이었다. 피해자는  전문대 학생이었고  범인은
  군대에서 휴가를 나온 휴가병이었다. 그는 친구들을 만나 술
  을 마신 뒤에 노래방에 갔는데  소변이 마려워 화장실을 갔
  다가 화장실에서 미니  스커트를 입은 예쁜  여자가 나오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
  순간적인 성욕을 느낀  범인은 여자를 화장실에  밀어 넣고
  강간하려고 했다. 그러자 여자가 반항을  했다. 범인은 엉겁
  결에 여자의 얼굴을  주먹으로 때리고 머리를  화장실 벽에
  부딪쳐 실신시킨 뒤 강간했다. 그때  친구가 밖에서 불렀다.
  범인은 당황하여 친구에게 밖에서 기다리라고 한 후 여자를
  살펴보았다.
  여자는 피가 계속  흘러나오고 숨을  쉬지 않는 것 같았다.
  범인은 당황하여 여자를  안아서 화장실 밖의  이웃 주택집
  담으로 얹어서 밀어버렸다. 여자가 쿵 하는 소리와  함께 주
  택집의 담장 안으로 떨어졌다.
  범인은 다시 화장실로 돌아와  대걸레로 핏자국을 깨끗하게
  닦은 후 친구들과 함께 집으로 돌아갔다.
  사건의 개요였다. 오득렬은 닷새만에 그 사건을 해결한 것이
  다. 범인에게 살해된  여자의 사체가  묘하게 자극적이었다.
  오득렬이 이정희의 카페를 찾아온 것은 그 때문이었다.
  "벌써 깨셨어요?"
  오득렬이 라이터를 켜서 불을 붙여 연기를 빠는데 이정희가
  잠에서 깨었다.
  "응."
  오득렬은 담배연기를 길게 내뿜었다. 이정희가  부시시 일어
  나 재떨이를 찾아서 그의 배 위에 올려놓았다.
  이정희는 나신이다. 지난밤에 관계를 한 후 오득렬이나 이정
  희 모두 옷을 입지 않고 잤었다. 이정희의 크고 매끄러운 가
  슴이 커텐 사이로 틈입하는 햇살을 받아 투명해 보였다.
  "아침 차릴까요?"
  이정희의 손 하나가 그의  샅으로 들어왔다. 이정희는  잠이
  덜 깼으면서도 그에게 애정을 표시하고 있었다.
  "우유나 한 잔 마시면 되겠어."
  오득렬은 무심한 표정으로 대꾸했다. 이정희의  손이 부드럽
  게 그를 자극하고 있었다.
  "저녁에 또 올 거죠?"
  "  "
  오득렬은 이정희의 말에 선뜻 대답을 하지 않았다.  오늘 밤
  다시 오게 될지 어떨지 그 자신도 알 수 없었다.
  "약속했잖아요?"
  "  "
  "내가 싫어요?"
  "  "
  "난 자기가 너무 좋은데 "
  이정희는 서운한 표정이었다. 이정희는 요즈음 들어 부쩍 오
  득렬을 보채고 있었다. 오득렬의 부인이 교통사고로 죽은 지
  벌써 2년이 된 것이다. 이제는 오득렬의  부인으로 들어앉고
  싶어했다.
  이정희는 미인이었다. 강력계  형사라고는 하지만  밤낮없이
  살인사건 현장으로 뛰어다니고 잠복근무나 하는 오득렬에게
  는 과분한 여자였다. 게다가 오득렬은 경찰 경력 15년이지만
  소위 잎사귀가 네 개인 말단 형사에 지나지  않았다. 얼굴도
  잘 생긴 편이 아니었다. 어느 신문기자가 말한  것처럼 흉악
  범의 얼굴이나 형사의 얼굴이나 그  얼굴이 그 얼굴일 정도
  로 인상도 사나운 편이었다.
  나이도 서른 여덟 살이나 되었다. 이정희는 이제  겨우 스물
  아홉 살이었다. 서른 여덟 살이나 되는 오득렬과는  거의 10
  년 터울이 된다. 게다가 카페를 경영하면서 돈도  적지 않게
  모은 것 같았다. 그녀는 아파트가 두 채나 되고 일제 승용차
  까지 가지고 있었다. 오득렬에게 그 차를 선물하겠다는 것을
  오득렬이 거부한 적이 있었다.
  "미안해요. 제가 당신이 공무원이라는 사실을 생각하지 못했
  어요."
  이정희는 오득렬이 일제 차를  거부하자 공무원이기 때문에
  그러는 줄 알고 이번엔 국산 차를 한 대 뽑아서 오득렬에게
  주었다. 오득렬은 차마 그것까지 거부할  수 없었다. 이정희
  는 완전히 그의 여자가 되기로  작심했다는 듯 카페까지 처
  분하고 그의 아내로 들어앉겠다는 의중을 계속 비치고 있었
  다.
  "저녁에 꼭 오세요."
  이정희가 그의 배 위에 있는  재떨이를 치우고 얼굴을 묻었
  다.
  "알았어."
  오득렬은 이정희의 머릿결을 쓰다듬었다. 이정희의  손이 계
  속 장난을 하고 있었다.
  "당신을 사랑해요."
  "나도 그래."
  "정말예요?"
  "정말이야."
  "아이 좋아."
  이정희가 감동에 잠긴 표정으로 그의 얼굴을 쳐다보다가 상
  체를 그의 가슴에 얹었다. 따뜻하고 물컹한 가슴이었다.
  오득렬은 이정희가 자신의 뽀얀 가슴으로 상체를 압박해 오
  자 이정희와 함께 살아야지 하는 생각을 했다.  이정희는 마
  음 씀씀이도 고운 여자였다.
  오득렬이 이정희의 아파트를 나오자 날씨가  쾌청했다. 아파
  트단지 내에 조경용으로 심은 관상수들이 비에 씻기어 청정
  한 녹색을 띄고 있었고 하늘도 높고 맑았다. 그는 상쾌한 기
  분으로 서초경찰서로 출근했다.  서초경찰서 강력계가  그의
  직장이었다.
  "오 형사! 미수동(美樹洞) 현장에 가봐야겠어. 지난밤에 미수
  동에서 살인사건이 일어났는데 수사본부가 미수동 파출소에
  설치되었어. 우리 경찰서에서도 파견을 나가라는  경찰청 지
  시야. 노래방 사건이 끝났으니까  오 형사가 파견을  나가라
  구."
  강력계에 출근하자 김동수(金桐洙) 강력계장이 미수동  살인
  사건 파견 지시를 내렸다. 오득렬은 미수동 살인사건에 대해
  서는 전혀 알지 못했다.
  "큰 사건입니까?"
  오득렬은 자신에게 강서경찰서 관할인  미수동 파출소로 나
  가라는 김동수 계장의 지시에 얼굴부터  찌푸렸다. 수사본부
  가 설치되어도 대개 경찰서들은  자체적으로 형사들을 동원
  하여 수사를 했다. 인근 경찰서의 지원을 받는  경우는 엽기
  적 살인사건이나 중요한 사건이 발생했을  때뿐이었다. 화성
  연쇄살인사건의 경우는 경기도 모든  경찰서에서 베테랑 형
  사들이 차출되었고 나중에는 서울의  각 경찰서에서도 베테
  랑 형사들이 동원되어 수사를 했었다.
  "엽기적 사건이야. 젊은 여자가 살해되었는데 인육사건의 흔
  적이 있대. 아직 현장 조사중이라니까 빨리 가면  시체를 볼
  수 있을 거야."
  인육사건이라는 것은 시체를 먹었다는 의미가  되는 것이다.
  그야말로 엽기적인 살인사건이 아닐 수 없었다. 오득렬은 전
  신이 팽팽하게 긴장되는 것을 느꼈다.
  "그럼 나중에 전화 드리겠습니다."
  오득렬은 시체가 현장에서 없어지기  전에 검시에 참여하기
  위해 서둘러 강력계 사무실을 나왔다. 미수동 파출소를 거쳐
  사건 현장인 장미원(薔薇園)에 도착하자 정사복 경찰들과 기
  자들이 왁자하게 몰려와 있었다. 장미원은  관상수를 재배하
  는 수목원이었다. 그러나 울타리에 장미나무를  심어 사람들
  이 장미원으로 부르고 있었다.
  오득렬은 아는 형사들과  인사를 나누고 장미넝쿨  밑에 흰
  천으로 덮여 있는 시체를  들여다보았다. 감식은 이미  끝나
  있었다. 기자들 몇이 사진을 찍으려고  달려들었으나 전경들
  이 막아서 옥신각신하고 있었다.
  "수사중이라 더 이상 접근하면 안됩니다."
  "사진 몇 장 찍자는데 안되긴 뭐가 안돼?"
  "이따가 찍으십시오!"
  "젊은 친구가 대개 빡빡하네!"
  시체는 젊은 여자였다. 형사들이 시체의 모양을 사진에 담아
  두기 위해 옷을 모두 벗겼는지 나신이었다. 그러나 여기저기
  예리한 흉기로 난자되어 있었고 왼쪽 유부(乳部)는 물어뜯긴
  듯한 상처가 있었다.
  "왼쪽 유부가 이상한데 "
  오득렬은 면 장갑을 끼고 시체 앞에 한쪽 무릎을 굽히고 앉
  았다. 시체를 자세히 살피기 위해서였다.  유부는 가슴을 말
  하는 것이었다.
  "물어 뜯겼어."
  강서경찰서 강력계의 정재길(鄭在吉) 형사가 옆에 와서 말했
  다. 정재길 형사는 한때 오득렬과 같은 경찰서에  근무한 일
  도 있었다. 몸은 호리호리하지만 운동으로 단련된 사내였다.
  나이는 서른 일곱 살이었다.
  "인육사건인가?"
  사체의 왼쪽 유부는 살점이 떨어져 나가 있었다.  그러나 그
  렇게 크지는 않았다.
  "글쎄 "
  "강간했나?"
  "국부는 이상이 없대."
  "그럼?"
  "정액이 여자의 상체에서 검출되었어."
  "상체 어디?"
  "목과 안면."
  안면은 얼굴을 말하는 것이었다.
  "그래?"
  오득렬은 얼굴을 잔뜩 찡그렸다. 화성연쇄살인사건에도 정액
  이 여자의 상체에서 검출되어 수사진을 혼란에 빠트린 일이
  있었다. 국부는 처참하게 훼손되어 있어서 강간을 했는지 안
  했는지 전혀 확인을 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지금 눈앞에 있
  는 시체의 국부는 의외로 깨끗했다.  체모도 가지런했다. 육
  안이지만 강간을 당한 흔적은 보이지 않았다.
  "단서는 좀 나왔나?"
  "아무 것도 지난밤에 비가 억수같이 쏟아져서 단서가 있었
  어도 모두 떠내려갔을 거야."
  오득렬은 비가 억수 같이 쏟아지고  있을 때 이정희와 침대
  에서 뒹굴었었다.
  "피해자 신원은?"
  "밝혀졌어. 학생증이 장미원 입구에서 나왔어."
  오득렬은 시체에서 일어났다. 장미원에는 이름에  걸맞게 곳
  곳에 색색의 장미가 만발해  있었다. 장미꽃 향기가  사방에
  진동하고 있었다.
  "대학생인가?"
  정재길이 시체에 휜 천을 덮었다.
  "응."
  "사망시간은 지난밤이겠지?"
  시체의 상태를 육안으로 보아도 지난밤에 죽임을 당한 것이
  었다. 시체는 하루만 지나면 경직이 되고 이틀이  지나면 부
  패하기 시작한다. 그러나 여자의 시체는  완전히 경직되지도
  않았고 부패도 시작되지 않고 있었다.
  "그런데 피해자의 속옷이 없어."
  "속옷이 없다니?"
  "다른 옷은 다 있는데 이상하게 속옷이 없단 말이야."
  "팬티를 말하는 건가?"
  "응."
  "노팬티였겠지 "
  오득렬은 대수롭지 않게 대꾸했다.
  "설마?"
  "요즘 젊은 애들이 어떤지 알잖아?"
  정재길이 고개를 갸우뚱했다. 오득렬도 굳이  노팬티라고 주
  장하고 싶은 것은 아니었다. 연쇄 살인범들 중에는 피해자의
  소지품 한 가지를  반듯이 소지하려는 괴팍한  성격을 갖고
  있는 자들도 있었다.
  "여자의 왼쪽 유부 말이야."
  정재길이 오득렬을 단풍나무 밑으로  잡아끌며 화제를 바꾸
  었다.
  "이빨자국?"
  "그게 어디 이빨자국이야? 우리끼리니까 얘기지만 살점까지
  떨어져 나갔는데 단순한 이빨자국으로만 볼 수 없어."
  "그럼 정말 인육사건이라고 생각하나?"
  "아무래도 그런 것 같아."
  오득렬은 그 말을 믿을 수가 없었다. 야수파가  저지른 사건
  들에서도 인육을 먹었느니  먹지 않았느니 하여  화제가 된
  적이 있었다. 그러나 범인들은 완강하게 인육을 먹었다는 소
  문을 부인했고 결국은 흐지부지 되고 말았던 것이다.
  한국에서는 그런 일이 드물게 벌어지고 있었다. 한때  간 질
  환을 앓고 있는 환자들이 인육을 먹으면 낫는다는 출처불명
  의 소문이 퍼져 어린아이들을 살해하고 인육을 가져간 사건
  이 강원도에서 있었다. 그러나 인육을 먹으면 간질환이 낫는
  다는 것은 허무맹랑한 소문이었다.
  나환자들에게도 어린아이의  간을 먹으면  낫는다는 잘못된
  소문이 퍼진 적이 있었다.  그것은 나병을 천형(天刑)이라고
  생각하는 옛날 사람들이 나병  환자에게 아이들을 접근하지
  못하게 하기 위한 거짓말이었다.
  인육 살인사건은 외국에서도 있었다. 한 일본인 청년이 프랑
  스에서 네덜란드 유학생을 살해하여 인육을 먹은 사건이 발
  생했던 것이다. 그 사건은 전세계적인 화제가 되었고 범인은
  프랑스 경찰에 체포되어 종신형을  선고받고 지금도 프랑스
  의 상떼 감옥에서 복역하고 있었다.
  한국에서 그런 일이 발생했다면 너무나 무서운 일이었다.
  신경정신과 의사인 장기철(張基哲) 박사는 환자를  최면상태
  에 빠트리고 진료를 하다가  전율하는 듯한 공포를  느꼈다.
  환자는 한국에서는  드물게  다중인격(multiple personality)
  상태를 드러내 보이고 있었다. 처음에는 정신분열의 초기 단
  계인 우울증(정동장애: Afective Disorder)에서 나타난  현상
  인가 의심을 했었다. 다음엔 정신분열 상태를 말하는 해리장
  애(dissociative disorder)가 아닌가 하는  의심도 했었다. 그
  러나 그녀의 의식 속에는 성격이 전혀 다룬 자아(自我: ego)
  다섯 개가 뚜렷하게 존재하고 있었다.
  "박사님. 어때요?"
  최면에서 깨어난 환자가 생글거리고  웃으며 장기철 박사에
  게 눈웃음을 쳤다. 환자는  30대 여자라는 사실이  믿어지지
  않을 만큼 생기가 돌고 발랄했다.
  "심각한 걸."
  장기철 박사는 일부러 근엄한 표정을 꾸몄다. 정신질환를 앓
  고 있는 대개의 환자들은 의사들의  머릿속을 들여다 볼 정
  도로 영악하고 교활해서  여간 조심을 하지  않으면 오히려
  속내를 들키게 되는 것이다.
  "정말이요?"
  환자의 얼굴이 약간 어두워졌다.  어쩌면 어두운 저  얼굴도
  환자가 지어낸 표정인지도 알 수 없었다.
  장기철 박사는 한국에서 가장 저명한 신경정신과 의사의 한
  사람이었다. 그는  H대학 대학병원에서  병원장을 10년이나
  역임했고 심리분석에 대한 연구와  임상보고로 탁월한 업적
  을 남긴 바  있었다. 그가 남긴  저서로는 '심리분석의 허와
  실' '반프로이트적 꿈 해몽' '임상보고에 의한 다중인격의 고
  찰'로 세계적인 의사로 알려져 있었다. 특히 그는 최면학(催
  眠學)의 권위자였다. 정신질환의 경우 발병원인이 모호한 경
  우가 허다한데 그는 독특한 최면법으로 발병원인을 찾아 치
  료에 이용했다. 그러한 까닭에 그의 연구실은 후배 교수들이
  나 신경정신과 의사들이 자주 찾고 있었다.
  학교에서 정년퇴직한 뒤에는 경기도 여주의  미호천(美湖川)
  앞에 병원 겸 연구실을 짓고 연구에만 골몰하고  있었다. 그
  러나 병원에는 환자들이 별로 찾아오지  않아 두 명이나 되
  던 간호원들이 모두 떠나고 장기철 박사 혼자 남아 있었다.
  그는 한가할 때면 미호천으로 가서 낚시를 드리기도 했으나
  환자가 소문을 듣고 찾아오면 진료를 하기도 했다.  물론 진
  료도 혼자서 했다. 지금도  20여 명의 환자들이  정기적으로
  그를 찾아와서 진료를 받고 있었다.
  "내가 명색이 의사인데 환자에게 거짓말을 하나?"
  "제가 환자예요?"
  환자가 항의하는 시늉을 했다.
  "하하 "
  장기철 박사는 크게 소리를 내어 웃었다.
  "그럼 환자가  아니면 왜  나에게  찾아 와서  심리 상담을
  해?"
  "미국에서는 정신과 의사가  정신과 의사에게  심리 상담을
  하는 것이 일반화되어 있어요."
  "나는 미국에서 공부를 하지 않아 모르겠는걸."
  장기철 박사는 등줄기에 식은땀이 흐르는 것을 느끼며 미소
  를 잃지 않았다. 환자의 자아 중 하나는  상당히 폭력적이면
  서도 폭력을 기다리는 이율배반적인 형태를 보이고 있었다.
  "좋아요. 제가 환자라고 인정하죠."
  환자가 자기 자신을 수긍하는 태도로 나왔다. 장기철 박사는
  안락의자에 깊숙이 몸을 누이고 파이프에 담배를 끼워 입에
  물었다.
  "한 대 피울래?"
  "제가 피우는 거 어떻게 아셨어요?"
  환자가 눈을 살짝 흘기며 다리를 포갰다. 그러자  미니 스커
  트 아래 하얀 허벅지가 장기철 박사의 눈을 찔러왔다.
  "입에서 담배냄새가 나던 걸. 박하향이던데 "
  "제 입에 키스하신 것은 아니죠?"
  "어허 노인네를 희롱하면 벌받아요. 이것도 성희롱이라구 "
  장기철 박사는 환자를 나무라는 체했다.
  "노인네라고 성욕까지 없어지겠어요? 게다가 박사님은 이제
  60중반이시잖아요."
  "그만하자구. 내가 못 당하겠어."
  장기철 박사는 손사래 짓을 하고 환자에게 담뱃갑을 내밀었
  다. 그것은 박하담배가 아닌 일본제 마일드 세븐이었다.
  "마일드 세븐은 싫어요. 저에게 박하담배가 있어요."
  환자가 핸드백에서 박하담배를 꺼내 입에 물었다. 장기철 박
  사는 자신의 파이프에 꽃은 담배에  먼저 불을 붙이고 환자
  에게도 불을 붙여 주었다.
  "할 만해?"
  "네?"
  "자네가 하고 있는 일 말이야. 적성에 맞느냐구?"
  "어디 적성에 맞아서 하나요? 일이니까 하죠."
  "대학에도 나간다며?"
  "네. 일주일에 세 시간뿐이예요. 보따리 장사죠."
  보따리 장사라는 것은 시간강사를 말하는 것이었다.
  "하기야 대학에서 나오는 강사료는 몇 푼 안되지?"
  "그 돈보고는 애들 못 가르쳐요. 그저 젊은  애들과 같이 호
  흡한다는 기분으로 강단에 서는  거죠. 또 애들을  가르치기
  위해서는 저도 공부를 해야하구요."
  "그렇지. 애들을 가르치려면 선생도 공부를 해야해."
  장기철 박사는 담배연기를 길게 내뿜고 환자의 얼굴을 응시
  했다. 환자는 다섯 개의 자아 중 두 세 개는  스스로 인식하
  고 있었다.
  "학기말만 되면 왠 전화가 그렇게 오는지 "
  "전화?"
  "말도 마세요. 기집애들이고 남자 녀석들이고 점수 좀 잘 달
  라고 노골적으로 부탁을 해요. 박카스라던가  과일을 사들고
  찾아오는 녀석들도 있고 평소에는 잠자코  있다가 꼭 학기
  말 시험 때만 되면 전화를 한다니까요."
  "세상이 달라졌지."
  장기철 박사는 웃음을 터뜨렸다. 환자의 담배는 손가락 사이
  에서 저절로 타 들어가고 있었다. 환자가 자신의  얘기에 열
  중하여 담배를 빠는 것을 잊어버린  것이다. 정신질환자들은
  대개 한 가지 일에 몰두하면  다른 일은 잊어버리는데 환자
  도 지금 그런 상태였다.
  장기철 박사는 환자의  시선을 의식하며 담배를  입에 물고
  연기를 빨았다. 그러자 환자가 자연스럽게 가늘고 긴 담배를
  입에 물고 연기를 빨았다가 뱉았다. 환자의 담배연기가 진료
  실 안에 푸르게 흩어졌다.
  "김군은 잘 있나?"
  김군은 환자의 남편을 말하는 것이었다. 장기철 박사는 인편
  에 환자가 남편과 이혼했다는 것을 들었으나 일부러 모르는
  체하고 질문을 던진 것이다.
  "이혼했어요."
  "아니 왜?"
  장기철 박사는 깜짝 놀라는 시늉을 했다.
  "그냥이요."
  환자가 심드렁하게 대꾸했다.
  "남편이 바람을 피웠어?"
  "아니요."
  "그럼 자네가 바람을 피웠나?"
  "박사님도! 꼭 바람을 피워야 이혼을 하나요?"
  "설마 성격차이는 아니겠지?"
  "비슷해요."
  "요즈음 사람들은 걸핏하면 성격차이라고 이혼을 한단 말이
  야. 웬만하면 재결합을 하지 그래. 그 친구 부잣집 출신답지
  않게 성실하고 겸손하던데 "
  "관심 없어요.'
  "혹시 속궁합이 맞지 않는 것은 아니야?"
  속궁합이 맞지 않는다는 것은 섹스에 만족하지 못하는 것이
  아니냐는 질문이었다.
  "사람이 어디 그걸로 살아요?"
  환자가 눈을 하얗게 치뜨고 장기철 박사를 쏘아보다가 웃음
  을 깨물었다.
  "그것도 중요한 거야."
  장기철 박사는 정색을 했다. 환자는 장기철 박사의  말에 무
  의식적으로 몸을 꼬았다. 그러자 환자의 허벅지 안쪽이 더욱
  깊숙이 드러났다. 그러나 환자는  그 사실을 전혀  의식하지
  못하고 있었다.
  "박사님은 어떠세요?"
  환자가 갑자기 역습으로 나왔다.
  "나?"
  "박사님도 10년 전에 사모님을 사별하셨잖아요?"
  "나야  늙은 사람인데 "
  장기철 박사는 웃음으로 얼버무렸다. 장기철  박사도 부인을
  사별한 뒤에 바람을 피운 일이 있었다. 대개  술집 여자들이
  었으나 성욕을 처리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재혼은 내키지가
  않았다.
  "다음에 또 올까요?"
  환자가 생글생글 웃으며 장기철 박사를 쳐다보았다.
  "글세 "
  "그런 미적지근한 말씀이 어디 있어요?"
  "커피나 한 잔 마시러 오던지 "
  "술은 어때요?"
  "술도 괜찮지."
  "밤새도록 술을 마시게 해주시겠어요?"
  "하하 "
  "왜 웃으세요?"
  "심야 영업을 하는 술집에 가자는 말이야?"
  "저희 집에 오셔도 좋고 제가 선생님 댁으로 찾아가도 좋고
  "
  "아무 때나 병원으로 와.  저녁때쯤 미리 전화를  하고 오면
  저녁을 먹은 뒤에 술 한 잔 할 수 있을 테니까 "
  "네."
  환자가 담뱃불을 플라스틱 재떨이에 비벼 끄고 일어섰다. 장
  기철 박사도 안락의자에서 일어났다.
  "선생님. 다음에 뵐께요."
  환자가 허리를 깊숙이 숙였다.
  "멀리 안 나갈께."
  "네."
  환자가 진료실 밖으로 나갔다. 장기철 박사는 안락의자로 돌
  아와 앉으려다가 창으로 가까이 갔다. 환자가 밖으로 나가는
  모습을 보고 싶었다. 병원 앞에는 환자가 타고 왔을 것이 분
  명한 고급 승용차가 한 대가 주차되어 있었다.
  이내 환자가 병원 현관에서 나왔다. 환자의 하얀  색 니트와
  검은 색 스커트가 묘한 조화를 이루고 있었다.  환자는 병원
  건물을 힐끗 쳐다보고는 차에 올라탔다.
  이내 가벼운 시동소리와 함께 차가  병원 현관 앞을 미끄러
  져 정문을 향해 달려갔다.
  장기철 박사는 환자의 차가 보이지 않자 비로소 안락의자로
  돌아와 앉았다.
  (혹시 태희가 환자의 정신  속에만 존재하는 자아에 불과한
  것은 아닐까 ?)
  장기철 박사는 몸을 깊숙이  눕히며 골똘히 생각에  잠겼다.
  환자의 자아 중 하나인 태희는  이미 끔찍한 연쇄살인을 저
  지르고 있었다. 특히 환자의  폭력적인 자아가 흥분해  있을
  때는 피해자들의 인육을 먹으려는 증상까지 보이고 있었다.
  무서운 일이었다.
  그러나 그 자아가 활동을 하지  않는 자아라면 아무 문제도
  되지 않는 것이다. 그것은 환상이나 공상에 불과하고 그것이
  과격하다고 해도 한낱 정신에서만  이루어지기 때문에 피해
  자가 발생하지 않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활동하는 자아라
  면 상상할 수도 없는 끔찍한 사건이 발생할 것이었다.
  나를 소개하기로 하겠다. 나는 의사다. 신경정신과 심리분석
  의(分析醫) 서경숙(徐京淑). 그것이 나라는 존재다. 물론  조
  금 더 소개를 하면 34세의 이혼녀이고 범죄심리학을 전공하
  기는 했지만 우리 나라에서는 별로 쓸모가 없어서 신경정신
  과를 서울 압구정동에 개업을 하여  활동하고 있다. 어쩌다
  가 경찰의 요청으로 중요한 범죄를 분석하기도 하고 엽기적
  인 살인사건이 터지면 언론에서도 범죄심리학  전문의 서경
  숙이라는 이름으로 범인의 심리상태를 분석하여  기사로 취
  급한다.
  때때로 대학에 출강하기도 한다. 최근에는  몇 개 의과대학
  에서 범죄심리학 분야가 희소가치가 있어서 일주일에 한 시
  간씩 강좌를 개설했다. 경찰대학이나 경찰을 교육하는 수사
  학교, 사법연수원 등에도 출강한다. 그러나 그것은  매우 드
  문 일이다.
  지금 나는 진찰대에서 몸을 가늘게 떨고 있는  환자를 보면
  서 미간을 찌푸리고 있다. 환자는 최면에 빠져 있었다. 최면
  에 빠진 환자가 자신의 입으로  말한 것은 다섯 명의  야수
  같은 사내에게 겁탈을 당하고 농가에 팽개쳐져 있는 모습이
  었다. 그러나 환자는 몸을  떨고 있었다. 그 사건으로  인해
  공포에 질려서 몸을 떨고 있는 것이 아니라  쾌감 때문이었
  다.
  (이 환자는 겁탈을 당하는 것에서  오르가즘을 느끼고 있어
  )
  이해할 수 없는 현상이었다. 대개의  정신과 환자들이 복잡
  하고 다양한 증세를 보이고는 있지만 이 환자도  예외는 아
  니었다. 심한 우울증에, 어느 때는 조울증  증세를 보이기도
  했고 정신분열 증세까지 나타나고 있었다.  물론 자폐증 증
  세도 심심지 않게 나타났다.
  나는 창문을 내다보며 무겁게 한숨을  내쉬었다. 환자는 아
  직도 최면상태에 빠져 있었다. 내가 아무 질문도 하지 않았
  기 때문에 환자는 깊은 심연 속에 가라앉아 있을 것이었다.
  나는 문득 여자의 하체를 보고 싶은 기분이 들었다. 여자나
  남자나 오르가즘에 이르면 분비물이 나온다.
  진료실에는 그녀밖에 없었다.  환자를 안락하게  하기 위해
  창의 블라인드를 내려놓았기 때문에 밖에서  들여다볼 염려
  도 없었다. 나는 생각이 거기에  미치자 재빨리 안락의자로
  다가가서 여자의 스커트를 들추었다.
  (역시!)
  나의 예상대로였다. 환자의 스커트 속에서 여자의 비밀스러
  운 곳을 덮고 있는 하얀 속옷이  점액으로 젖어 있었다. 나
  는 못 볼 것을 보기라도 한 것처럼 재빨리 환자의 스커트를
  내렸다. 기분이 야릇했다.  나는 책상으로 돌아와서  담배를
  한 대 피워 물었다. 창문은 이중 겹창이었으나 병원이 도심
  에 위치해 있었기 때문에 차량의 엔진음과 경적음  같은 소
  음이 희미하게 들려오고 있었다.
  (도파민이 확장되어 있기는 한데 )
  대개의 정신과 환자들은  도파민(Domamine: 뇌 안의  신경
  전달물질)이 확장되어 있었다. 특히 우울증 환자들은 정상인
  들보다 훨씬 더  확장되어 있는 것이다.  그들이 정신 이상
  증세를 보이면서도 뇌파에 아무 이상이 없는 것은  그 까닭
  이었다.
  환자의 병명(病名)을 판단하기가 난처했다.
  나는 담배를 다 피운 뒤에 환자를 최면상태에서 깨웠다.
  "끝났어요?"
  환자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나를  쳐다보았다. 나는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제가 무슨 얘기를 했죠?"
  환자는 20대 초반의 아가씨답게 눈동자가 보석처럼 맑았다.
  살결은 눈(雪)처럼 하다. 30대의 나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젊다. 그녀가 짐승 같은  살인마들에게서 살아난 것
  도 저 맑은 눈빛과 깨끗한 살결  때문이 아닐까. 나는 문득
  그런 생각을 했다.  그들은 차마 이  아가씨를 살해할 수가
  없었는지도 모른다.
  여자들 중에 유난히 피부가 하얀 여자가 있는데  환자가 그
  랬다.
  "꿈 얘기 "
  "무슨 꿈인데요?"
  "지영이가 사랑하는 남자의 얘기 "
  나는 거짓말을 했다. 환자가 최면상태에서  한 얘기를 그대
  로 전해줄 수는 없었다.
  "인석씨요?"
  환자의 애인 이름이  박인석(朴仁錫)이었다. 그는  룸싸롱의
  웨이터였다.
  "응."
  "제가 인석씨를 사랑한다고 했나요?"
  "응."
  서경숙이 고개를 끄덕거리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환자의 얼
  굴이 어두워졌다. 환자는  한때 대인공포증에 걸려  있었다.
  환자는 살인마들에게서 겪은 악몽으로 인해  정신질환이 발
  생한 것이다. 환자가 아니라 누구라도 그런 상황에 처해 있
  었다면 정신분열이 일어나고도  남는다. 환자가 대인공포증
  을 치료받고도 다시 정신 이상 증세를 일으킨 것은 그 당시
  의 상황이 얼마나 끔찍했는지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
  나 그녀는 1년만에 대인공포증에서  탈출했다. 그녀는 다시
  그다지 떳떳하지 못한 직장에 나가기 시작했고 이름을 숨겼
  기 때문에 맑은 눈과 흰 살결로 인해  남자들로부터 환영을
  받을 수 있었다.
  박인석을 만난 것은 그 지음의 일이었다.
  "처음엔 도저히 믿어지지가 않았어요.  그렇게 예쁜 아가씨
  가 룸싸롱에서 호스티스로 일하다니 "
  박인석의 말이었다. 박인석은 키가 크고  얼굴이 기름한 청
  년이었다. 눈썹이 유난히 새카만 것  외에는 그다지 특징이
  없었다.
  내가 박인석을 처음 만난 것은 이지영(李智暎)이 그녀의 병
  원에 진찰을 받으러 오기 며칠 전의 일이었다.
  "무슨 일 때문에 오셨어요?"
  간호사의 안내를 받아 나의  책상 앞에 앉아서도  박인석은
  수줍은 듯이 머뭇거리기만 했다.
  "상담 좀 하러 왔습니다."
  박인석이 고개를 떨구고 겨우 말했다. 그 한 마디를 하는데
  도 무척 힘들어 보였다.
  "예에."
  나는 상냥하게 웃어 주었다. 신경정신과를  찾는 대개의 환
  자들이나 가족들은 의사들을 두려워하고 있었다. 어떤 환자
  들은 병원에 오는 것조차 싫어했다.
  "제가 결혼을 하려는 여자 때문에 왔습니다."
  "네에."
  "밤에 잠을 못 자고 괴로워합니다. 자다가 훌쩍거리고 울기
  도 하고 갑자기 큰 소리로 웃기도 합니다."
  "그러시군요. 심각한 증세 같지는 않으니 걱정하지 마세요."
  상투적이기는 하지만 나는 환자의 보호자가 될지도 모를 박
  인석을 위로했다.
  "정신병인가요?"
  "뭐 꼭 정신병이라고 할 수는  없죠. 그리고 현대사회에 약
  간의 정신적 문제를  가지고 있지  않은 사람이 어디  있나
  요?"
  "환자는 요양원 같은 곳에 입원을 하여 쉬고 싶어합니다."
  "물론 입원을 할 수도 있어요.  아무래도 입원을 해서 안정
  을 하면 한결 좋아질 테니까요."
  "좋은 요양원이 있습니까?"
  "일단 환자를 한 번 데리고 오시죠. 요양원에 입원하더라도
  진찰이라도 받아보는 것이 좋지 않겠어요?"
  "그럴까요?"
  박인석이 미심쩍어하는 투로 반문했다.
  이지영이 박인석의 손에 이끌려 내 병원을 찾아온  것은 그
  로부터 나흘 뒤의  일이었다. 나는 이지영을  처음 본 순간
  이처럼 깨끗한 아가씨가 정신질환이 있다니 하고 속으로 깜
  짝 놀랐다. 그러나 나를 더욱 놀라게  한 것은 이지영이 불
  과 24세인데도 룸싸롱에서 일한 지 4년이나  되는 닳고닳은
  호스티스라는 사실과 그녀가 저 유명한 야수파 사건의 중심
  에 있었던 여자라는 사실이었다. 그리고  그때서야 나는 이
  지영이 정신과 질환을 앓는 것을 이해했다.
  "가볼께요."
  이지영이 안락의자에서 일어나 고개를 숙여 보였다.
  "그래요. 약은 잘 먹고 있죠?"
  나도 의자에서 일어나 책상  위에 있던 이지영의  핸드백을
  집어주었다. 이지영이 핸드백을 받아 어깨에 걸며 상큼하게
  미소를 그렸다. 나는 이지영에게 신경안정제인  리튬 두 알
  과 리튬의 부작용을 해소하는 알약 두 알을  처방해 주었었
  다.
  "네."
  "부작용도 없는 약이니 꼬박꼬박 먹어야 해요."
  정신과 치료를 받는 환자들은  대개 약에 대해  신경질적인
  반응을 갖고 있었다. 장기적으로 약을  복용하면 치료가 되
  는데도 불구하고 자신은 다 나았다거나 자신은 정신병에 걸
  려 있지 않다는 환상을 가지고 약을 복용하는  것을 중간에
  서 포기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병이  재발되고 병원에 입원
  하는 악순환이 계속되는 것이다.
  "네."
  이지영이 문 앞에서 다시 인사를 했다.
  나는 이지영이 진료실 밖으로 나가자 간호사를 불러 차트를
  주고 다시 담배를 한 대 피워  물었다. 의사들은 대개 담배
  를 피우지 않았으나 정신과 의사들의 경우는 담배를 피우는
  의사들이 많았다. 일부  요양원과 병원에서는 환자들에게까
  지 담배를 피우는 것을 허용하고 있기도 했다. 흡연 행위가
  정신적인 질환을 갖고 있는 환자들에게는 위안이 되기도 하
  기 때문이었다.
  의자에 앉아서 담배연기를 길게  내뿜다가 나는 전  남편의
  둥글넓적한 얼굴을 생각하고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지방대
  학 한문학 교수인  나의 전 남편은  담배를 피우지 않았다.
  그래서인지 내가 담배를 피울 때마다 눈살을 찌푸리며 고개
  를 외로 꼬곤  했었다. 나도 남편  앞에서는 담배를 피우지
  않으려고 했으나 몸에 밴  습관으로 자신도 모르게  담배를
  빼어 물때가 있었다.
  (그것이 이혼 사유는 아니었어 )
  담배를 피우는 것 때문에 이혼을 하지는 않았다. 그는 아이
  를 원했고 나는 아이를 원하지 않았었다. 아니 그것만이 이
  혼 사유는 아니었다. 남편 쪽에서는 그것이 이혼 사유일 수
  도 있었으나 나는 아니었다. 나는 남편을 사랑하지 않았다.
  나는 창으로 가까이 걸어갔다. 블라인드를  살짝 걷고 밖을
  내다보자 박인석의 팔짱을 낀 이지영이  버스정류장을 향해
  하늘거리고 걸어가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여자는 술에 취해서 인사불성이었다. 민상호(閔相鎬)는 차의
  시동을 끄고 동반석의 여자를 옆눈으로 흘겨보았다. 여자는
  고개가 옆으로 떨어져 동반석의 차유리에 머리를 기대고 있
  었다. 감색 항아리 스커트가 허벅지까지  말려 올라가 있으
  나 그 안의 속옷은 보이지 않았다.
  여자의 허벅지가 자꾸  눈에 어른거렸다.  민상호는 여자의
  스커트를 걷어올리고 더 깊은  곳을 보았으면 하는  충동이
  불끈불끈 일어나는 것을 가까스로 억제하고 있었다.
  여자는 상의도 감색이었다. 투피스 정장 차림인  것이다. 상
  의 안에는 흰색의 깨끗한 셔츠를  받쳐입고 있었다. 셔츠의
  가슴께가 공처럼 둥글게 솟아 있었다.  덥석 움켜쥐어 보고
  싶은 가슴이었다. 문득 아랫도리가 뻐근했다.
  (제기랄!)
  민상호는 무겁게 한숨을 내쉬었다. 술집에서  나왔을 때 여
  자가 드라이브를 시켜달라고 했었다. 민상호는 자신이 과연
  운전을 할 수 있을지 걱정이 되었다.
  "선생님. 제가 술이 좀 취했습니다."
  민상호는 여자를 부축했다.  여자는 혀까지  잔뜩 꼬부라져
  비틀거리고 있었다.
  "야! 사내자식이 그까짓  술 몇 잔  마셨다고 운전을 못해?
  못하면 그만 둬! 내가 할 테니까 "
  여자가 시비조로 나왔다. 여자는 확실히 술에 취해 있었다.
  "선생님도 취하셨어요."
  "야 민상호! 나 멀쩡해 임마."
  "선생님!"
  "왜 그래? 나 똑바로 서 볼까?"
  "요즈음 음주단속이 아주 심합니다. 제가 모셔다 드릴 테니
  까 택시로 돌아가시죠."
  "야야 한 잔 더 하고 가자니까. 산정호수 쪽에 기가 막히게
  분위기 좋은 술집이 있어. 야  여자가 가자는데 사내자식이
  빼냐? 너 그것도 안 달렸냐?"
  여자는 술에 취해서 거침없이 내뱉고 있었다.
  "예?"
  "술을 마시기가 싫으면 드라이브나 하자. 임마 스승이 마시
  자는데 제자 놈이 꽁무니를 빼?"
  "산정호수 어디로 갑니까?"
  "일단 산정호수까지 가. 거기 가서 알려줄 테니까."
  민상호는 여자가 계속 술주정을 하자  에라 모르겠다, 하는
  심정으로 여자의 차에 탔다. 밤이라 자세히 알 수 없었으나
  여자의 차는 고급 외제 승용차였다.  여자에게서 열쇠를 받
  아 꽂고 돌리자 시동이 부드럽게 걸렸다. 조금 후진을 하자
  술이 취하긴 했어도 충분히 운전을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어때?"
  동반석에 앉은 여자가 요염한 눈빛을 뿌리며 물었다.
  "차가 아주 부드럽습니다."
  "차나 여자나 품위가 있어야  돼. 잘 알아 둬.  차나 여자나
  품위 있는 것을 올라타야 한다구 "
  여자가 담배를 꺼내 물며 중얼거렸으나  민상호는 백미러를
  보느라고 미처 뒤엣 말을 듣지 못했다.
  "예?"
  민상호는 큰소리로 물었다.
  "아무 것도 아니야."
  "뭘 올라 탄다구 하셨잖아요?"
  "임마. 차를 올라타지 뭘 올라타니?"
  여자가 깔깔대고 웃었다.
  민상호는 술을 마셨기 때문에 신경을 바짝 집중하여 운전을
  했다. 다행히 시내를 벗어날 때까지  음주단속도 없었고 시
  간이 늦어 차량이 드물어 운전을 하기가 수월했다.
  여자는 계속 주절거렸다. 자기의 남편이 부자라는  것, 자기
  남편도 혼자 산다는 것, 자기 남편이 외국 여행중이라 집이
  비어 있다는 것,  집은 어디어디 있다고  묻지도 않는 말을
  횡설수설 떠들어댔다.
  민상호는 여자의 말만 듣고도 이혼한 그녀의 남편  집이 어
  디 있는지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나는 그 집에 애정을 많이 쏟았어.  내가 어릴 때 살고 싶
  었던 집처럼 아름답게 꾸몄지. 베란다에는 화분을 놓고 커
  텐은 최고급으로 달고 침대는 원형 그의 서재는 도서관처
  럼 꾸미고 담도 일부러 얕게 했어.  장미넝쿨이 담장 위로
  기어 올라가게. 마당엔 잔디밭을 만들어 뒹굴며 놀 수 있게
  했구 그런데 그런 집에 그가 혼자  살아. 우습지 않아? 지
  금은 그가 외국 나가서 비어 있겠지만 도둑이 들어도 모를
  거야. 만약에 그 집을 터는 도둑이 있으면 수지  맞을 거야.
  그는 돈을 서랍에 넣고 다니거든 "
  여자는 그렇게 묻지도 않는 말을 주절주절 떠들다가 산정호
  수에 도착하자 잠이 들고 말았던 것이다.
  (이건 마치 나를 잡아 잡수 하는 거 아니야 ?)
  민상호는 차에 앉아서  담배 한 대를  피워 물었다. 여자는
  이혼녀였다. 여자와 관계를  갖는다고 해도  비난을 받거나
  가책을 느낄 필요가 없었다.
  게다가 여자가 그를 자극하고 있었다.  비록 제자라고는 하
  지만 나도 엄연한 성인이 아닌가. 그런데 성인 남자 앞에서
  술에 취해 몸을 가누지 못하는 것은 어떻게 해도 좋다는 의
  미인 것이다.
  여자는 미인이었다. 얼굴도 예쁘지만 어딘지 모르게 퇴폐적
  인 요염함이 얼굴에 서려 있었다. 아마 이혼녀인 탓인지 몰
  랐다. 남자를 알고 있는 여자의 몸은 자신이 원하지 않더라
  도 남자를 자극하는 것이다.
  생물학 시간에 종족 번식 본능에 대해서 배운 일이 있었다.
  여자나 남자나 종족 번식의 본능에 의해 성욕이 일어난다는
  것이다. 특히 도파민이 확장되어 있는 사람들에게서 욕구불
  만이 강하게 표출된다. 대체로 정동장애(우울증)의 정신질환
  을 앓고 있는 사람들 중에서 욕구불만이 강해  성에 집착하
  는 일이 잦다.
  임상 사례에서도 그런 사례가 자주 발견되곤 했다.
  민상호는 문득 노교수로부터 들은 얘기가  생각났다. 그 교
  수는 K대학 신경정신과 과장을 맡고 있었는데 하루는 어떤
  40대 남자가 찾아왔다. 그는 부인이 심한 우울증에 걸려 밥
  도 먹지 않고 울다가 웃다가 소리를 질러 찾아왔다고 했다.
  노교수가 그 남자의 부인과 몇 마디 얘기를 해보니 이미 우
  울증 단계를 넘어 심각한 조울증(조울症)에 걸려 있었다. 부
  인을 병원에 입원시키고  남자에게 성관계는  어떠했느냐고
  묻자 그는 주저하면서 망설이다가 하루에 세 번씩 요구했다
  고 하였다. 틀림없는 조울증 환자의 증상이었다.
  "하루에 세 번이면 하룻밤에 세 번이라는 말씀입니까?"
  "저는 컴퓨터 프로그램을 만드는 사람입니다. 그 무렵에 제
  생각에도 아내가 좀 이상한 것 같아서 집에서  일을 했습니
  다. 제가 없으면 자꾸 아내가 울고 걱정이  되었습니다. 그
  렇다고 뚜렷한 이유가 있는 것도 아니고 "
  남자는 부인으로 인해 몹시 괴로움을 당하고 있는  것 같았
  다. 남자가 더듬거리며 말한 것에 의하면 부인은 남자가 책
  상 앞에 앉아서 컴퓨터를 만지고 있으면 옆에  와서 남자의
  그것을 만지고 심지어는 입으로도 그것을 했다고 했다.
  남자는 부인이 욕망이 너무나 강해 부인이 세간에서 말하는
  색마가 아닌가 하는 생각까지 했다고  했다. 남자로서는 조
  울증에 걸린 환자들이 욕구불만을 섹스로 해소하려 하는 경
  향이 있다는 것을 모르고 있었다. 노교수가 부인의 뇌 검사
  를 해보니 확실히 조울증 환자의 특징인 도파민이 확장되어
  있었다.
  민상호는 여자도 지금 이 순간 도파민이 확장되어 있는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여자가  이혼으로 우울증에  걸려 있을
  수도 있었다.
  민상호는 피우던 담배를 창밖으로 던졌다. 밤이 오래되어서
  인지 주위는 인적 하나 없었고 지나는 차량조차 없었다. 여
  자는 입을 반쯤 벌린 채 자고 있었다.
  (나는 유혹을 당한 거야 )
  민상호는 서둘러 옷을 벗기 시작했다. 차안이라 불편했지만
  어쩔 수가 없었다. 민상호가 예상했던대로 여자는 저항하지
  않았다. 그가 불편한 가운데도 여자의  스커트를 위로 걷어
  올리고 속옷을 끌어내려도 전혀 의식하지 못하는 듯 가만히
  있었다. 그러나 막상 민상호가 그녀를  끌어안고 세차게 밀
  어붙이자 여자가 눈을 번쩍 떴다.
  "죄, 죄송합니다."
  민상호는 여자가 눈을 뜨자 도둑질하다가 들킨 것처럼 겁이
  덜컥 났다. 자신도 모르게 몸을 멈칫했다.
  "괜찮아."
  여자가 눈웃음을 쳤다. 이미 그들은 하나가 되어 있었다. 그
  녀의 손이 자연스럽게 그의 등으로 감겨 왔다.
  "본의는 아닙니다."
  민상호는 계속 변명을 했다.
  "띨띨하게 굴지 마."
  그러자 여자가 차갑게 내뱉았다.
  "예?"
  "나도 원하고 있어. 신세대가 왜 이래?"
  "그럼 "
  "기다려. 장화를 끼고 해야지. 난 하룻밤  즐기고 임신을 하
  고 싶지는 않아."
  여자가 핸드백에서 무엇인가 주섬주섬 꺼냈다. 그것은 뜻밖
  에 콘돔이었다. 여자는  그것을 익숙한  솜씨로 민상호에게
  씌웠다. 그리고 좌석을 조절하여 길게 누웠다.
  "괜찮지?"
  여자가 요염하게 눈웃음을 뿌렸다. 어둠  속에서 여자의 눈
  이 고양이의 눈처럼 파랗게 요기를 뿜고 있었다.
  "예."
  민상호는 기분이 미묘했다.  그러나 여자의  말을 거스르고
  싶지 않았다. 이내 두 사람은 하나가 되었고 차안에서 격렬
  하게 살을 섞었다.
  민상호로서는 뜨거운 경험이었다.
  창문이 바람에 덜컹대고 흔들렸다. 나는 조리대에서 파를 썰
  다가 말고 창문을 응시했다. 18층 아파트에서 듣는 바람소리
  가 대나무 숲을 흔드는  바람소리처럼 황량하고 을씨년스러
  웠다.
  창을 쳐다보자 캄캄하게 어두운  하늘에서는 구름이 장중하
  게 이동을 하고 있었다. 아파트가 18층 고층에  있었기 때문
  에 나는 마치 구름 위에 떠있는 듯한 기분을 잠깐 느꼈다.
  문득 경기도 서초경찰서의 인육 살인사건  파일이 생각났다.
  살인사건의 내용을 정리한 서류봉투에는 끔찍하게 살해되어
  있는 피해자의 사진도 여러 장 있었다.
  (하필이면 나에게 가져오다니 )
  신문은 인육사건이라고 연일 떠들썩했다. 미궁에  빠진 화성
  부녀자 연쇄살인사건의 충격이 채 가시기도 전에 야수파 사
  건이 발생했고, 그 사건이 잊혀질 만하자 막가파 사건, 막가
  파 사건에 이어 인육사건이 잇달아 터졌던 것이다.
  야수파 사건은 피해자들을 살해한  뒤에 소각로에서 불태운
  끔찍함으로, 막가파 사건은 피해자를 생매장하여  충격을 주
  었다. 인육사건은 인육을 먹은 사건이라  시민들에게 화제가
  되었다. 야수파, 막가파 사건은 모두  검거되어 사형이 선고
  되었는데 인육 살인사건은 아직도 범인이 검거되지 않고 있
  었다.
  나는 다시 파를 썰기 시작했다.  서초경찰서의 형사로부터는
  아직도 아무 연락이 없었다. 전 남편도 아직  학교에서 돌아
  오지 않고 있었다. 전 남편이 퇴근할 때를 대비하여 된장 찌
  개를 끓이고 있지만  아무래도 그의 퇴근시간이  늦어질 것
  같았다. 나는 파를 썰어서 된장 찌개에 넣고 가스를 낮게 조
  절했다. 그는 오래오래 끓인 된장 찌개를 좋아했다.
  (내가 도대체 뭘 하는 거지?)
  나는 문득 짙은 의혹에 사로잡혔다. 이혼한 전  남편을 기다
  리며 된장 찌개를 끓이고 그를 여전히 만나고 있는 내 자신
  이 한심하게 생각되었다. 다행히 전 남편은 아직  새 여자를
  사귀고 있지는 않았다. 이따금 배설을 하기 위해  직업 여자
  들을 만나기는 하는 눈치였으나 내  주위를 떠나지 않는 것
  을 보면 특별한 애인도 없는 것 같았다.
  내가 혼자서 저녁을 먹고 2층 서재의  올라온 것은 한 시간
  쯤 지났을 때였다. 나는 서초경찰서의 형사가 살인마의 정신
  을 분석하기 위해 의뢰한 파일을 살피기 위해 책상 앞에 앉
  았다. 고지식한 전 남편은 이런 끔찍한 내용이나  사진을 보
  는 것을 싫어할 터였다.
  집안은 조용했다. 나는 나이트 가운으로 옷을 갈아입은 뒤에
  담배를 물고 1회용 라이터로 불을 붙였다.
  10월1일 새벽 5시 10분. 이용길(53세: 퇴역 장교)은 아파트
  에서 나와 그가 가꾸는 장미원에  도착하여 장미원을 한 바
  퀴 돌다가 장미넝쿨 밑에 푸대자루에  덮여 있는 여자의 시
  체를 발견, 경찰에 신고했다. 신고자인  이용길의 진술에 의
  하면 시체를 덮은 푸대자루는 피에 흥건하게 젖어 있었다고
  했다.
  현장 조사 결과 시체로  발견된 피해자의 이름은 유미경(柳
  美京: 21세)으로 H대학교 영문과 2학년생이다.  유미경은 전
  날 밤(6월30일) 문학서클인 '솟대동아리'에서 학생들과  토론
  을 하고 뒤풀이로 술까지  마신 뒤 11쯤  귀가 하다가 변을
  당한 것으로 추정되었다. 현장 감식에 의하면 유미경은 상체
  가 곳곳에 난자되어  있었고 왼쪽 유부가  이빨자국이 박힌
  채 살점이 떨어져 나가 있었다.
  처음에 경찰은 시체가  살해된 뒤에 짐승이  물어뜯은 것이
  아닌가 하고 의심을 했으나  국립 과학수사연구소가 부검을
  한 결과 왼쪽 유부의 이빨자국이  짐승의 것이 아니라 인간
  의 치열이라는 단정을 내려 범인이 물어뜯은 것으로 추정했
  다.
  피해자는 옷이 모두 벗겨졌고 상체에서 다량의 정액이 검출
  되어 강간을 당한 뒤에 살해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국부
  에서는 강간 흔적이 없었다. 사인은 다량의 출혈에  의한 실
  혈사(失血死)이고 피해자의 옷가지나 유류품들이 전혀  발견
  되지 않는 점으로 보여 시체가  발견된 장소는 단순히 시체
  를 유기한 장소일 뿐 살해한 곳은 다른 장소로 추정된다.
  현재 경찰은 사건의 엽기성으로  보아 변태성욕자나 정신질
  환자의 범행일 것으로 보고 수사를 진행중이다
  나는 언론에서 이 사건을 인육사건이라고 부르는 것을 보고
  커다랗게 웃었다. 그들은 무엇인가 잘못 알고  있었다. 국립
  과학수사연구소의 부검 소견도 범인이 피해자를  강간한 뒤
  에 왼쪽 가슴을 이빨로 물어뜯었다고 했다. 물론 부검 소견
  은 정확한 것이었으나 그렇다고 해서 인육사건은 아닌 것이
  다.
  (이것은 말도 안되는 얘기야 )
  나는 머리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결코 인육사건이 아니었다.
  인육사건이라는 것은 매스컴의 선정적인 보도일 뿐이었다.
  수사는 피해자 주변부터 시작되었다. 이런 엽기적인 사건
  의 경우 대개 피해자 주변에 범인이 있는 경우가 자주 있는
  데 수사본부도 그  점에 착안을 했다.  우리는 먼저 피해자
  유미경의 주변 인물부터 수사에 들어갔다.  피해자 주변 인
  물들 중에 정신  병력(病歷)을 가지고 있는  사람부터 용의
  선상에 올려놓고 수사에 들어갔는데 피해자  유미경의 이복
  (異腹) 오빠 유진철(柳珍哲: 24세)이 첫 번째 수사대상에 올
  랐다.
  유진철은 조울증(燥鬱症) 환자로  J대학병원에 상당기간 입
  원한 일도 있었고 현재도 정기적으로 통원 치료를  받고 있
  다. 아울러 유진철이 상습적으로 이복  동생인 유미경을 성
  폭행을 한 혐의도 발견했다. 우리는  즉시 유진철을 연행하
  여 범행 일체를 자백 받았다
  나는 거기까지 읽다가 쓴웃음을 짓고  말았다. 경찰은 유진
  철이 정신 병력을 가지고  있고 유미경을 성폭행을  했다는
  이유만으로 증거도 없이 강제로 자백을 받아 유진철을 구속
  했으나 피해자 유미경의 안면에서 발견된 정액의 감정 결과
  혈액형도 달랐고 사건 당일 날 유진철이 호스티스와 여관에
  서 잠을 잔 사실이 확인되어 알리바이가 뚜렷했던 것이다.
  결국 언론으로부터 '강압수사, 증거도 없이 용의자 검거' 라
  는 타이틀로 두드려 맞고 수사본부장이  좌천되는 우여곡절
  을 겪어야 했다. 유진철이 유미경을 성폭행 했다는 것도 엉
  터리였다. 정신질환을 알고 있는 유진철이 경찰이 강압수사
  를 하자 꾸며댄 거짓말인 것이다.
  수사는 원점에서 다시 시작되었다. 형사들은 피해자 유미
  경의 행적조사에 착수했다. 그날 솟대동아리에 참석한 학생
  들은 유미경까지 7명이었다. 유미경을 비롯한 여학생이 3명,
  남학생이 4명이었다. 유미경의 안면에서  남자의 정액이 검
  출되었으므로 일단 여학생들을 제외하고 남학생들의 행적조
  사를 실시했다.
  첫 번째 조사  대상자는 최명호(崔明浩:  23세). 솟대동아리
  회장으로 영문과 3학년에 재학중이다.  그는 뒤풀이를 마친
  뒤 여학생들을 버스정류장까지 바래다주고 하숙집으로 귀가
  했다. 그러나 그의 하숙집에 돌아온 시간은 새벽  3시, 같은
  방 룸메이트인 김정식(金廷植: 22세)은 12시쯤에 귀가했다고
  거짓 진술을 했으나 하숙집 주인은 새벽  3시에 귀가했다고
  진술했다.
  김정식을 연행하여 추궁했다. 동아리 회원들의 진술에 의하
  면 김정식은 살해된 유미경과 애인 사이라고 했다.
  "유미경이 변심했나?"
  김정식과 유미경이 애인 사이라는  것을 밝힌 것은  성희경
  (成嬉景: 22세)이었다.
  "모르겠어요. 서로 싫어진 것이겠죠."
  성희경은 새침한 표정으로 말했다. 나중에 조사에서 밝혀진
  일이지만 성희경도 김정식과 애인 사이였었다.
  김정식은 5시간에 걸쳐 집중적으로 추궁하자 그  시간에 같
  은 동아리 회원인 이여란(李麗蘭: 21세)을 만나고  있었다고
  진술했다.
  "어디서?"
  "여관에서요."
  "그 여관 이름이 뭐야?"
  "화양리에 있는 장미 여관이요."
  "그럼 이여란과 장미 여관에 투숙했단 말이야?"
  "예."
  "유미경이 너의 애인이 아니었어?"
  "미경이와는 결별했습니다."
  "왜?"
  "그런 것까지 얘기해야 됩니까?"
  "임마 유미경이 잔인하게 살해되었잖아? 넌  일말의 가책도
  없어?"
  "미경의 살인사건에 난 아무런 책임이 없어요. 준태라면 또
  몰라도 "
  김정식은 불만이 가득한 목소리로 투덜거렸다.
  "준태가 누구야?"
  "미경이 애인이죠."
  김정식이 시니컬하게 웃으며 대꾸했다. 그도 유미경에게 좋
  은 감정을 갖고 있는 것 같지 않았다.
  "박준태! 니가 유미경이 애인이라며?"
  수사반은 박준태를 소환했다. 박준태(朴俊太:23세)는 동아리
  회원은 아니었다.
  "미경이가 내 애인이라구요? 난 겨우 몇 번 만난 일 밖에
  없어요."
  "몇 번 만났다는 것은 섹스를 했다는 뜻이야?"
  "그런 셈입니다. 미경이는 프리 섹스 신봉자였으니까요.
  나처럼 몇 번 만난 것을 두고 미경이 애인이라고 한다면
  미경이 애인이 수십 명은 될 겁니다."
  "유미경이가 그 정도로 문란했어?"
  "예."
  유미경이 주변을 조사하면 조사할수록 우리는 유미경에게
  실망을 할 수밖에 없었다. 아무리 성에 대해 자유로운
  신세대 대학생이라고 해도 그녀의 문란한 성생활은
  그야말로 철저한 엔죠이였을 뿐이었다.
  나는 서류를 책상 위에 던졌다. 유미경의 자유분방한 남자
  관계를 기록한 서류로 대학생들의 문란한 성생활을 알아볼
  수가 있었다. 어디 유미경뿐인가. 김정식도 그렇고 성희경을
  비롯한 솟대동아리 회원들 대부분이 섹스를 즐기고 있었다.
  (내 대학시절은 이렇지 않았어 )
  내가 다니던 대학시절에도 자유분방한 여학생들은 많았다.
  그들은 스스럼없이 교내에서도 남학생들의 팔짱을 끼고
  다녔고 데이트를 즐겼다. 그러나 섹스를 즐기지는 않았었다.
  나는 1층으로 내려와 장식장에서 양주를 한 잔 따라 소파에
  앉아서 한 모금 마셨다. 전 남편은 오늘밤 돌아오지
  않을지도 모른다. 대학교수니까 여학생들도 잘 따르고,
  학기말 시험이 끝나면 학점 때문에 전화를 걸어오는
  여학생들도 많다. 한문학이 교양과목이기는 하지만 학점은
  성적이 나쁜 여학생들의 약점이기도 하다.
  (평소에 전화도 하고 찾아오기도 하지 )
  전 남편과 이혼을 하기 전에 학기말이 끝날 때면
  학생들로부터 전화가 짜증스러울 정도로 자주 걸려오곤
  했었다. 학점을 잘 달라는 학생들의 전화였다. 캔으로 된
  청량음료나 건강음료를 사들고 오는 학생들도 있었는데
  채점기간이 끝나면 신기할 정도로 학생들의 전화가 뚝
  끊겼다.
  나는 서류봉투에서 살해된 유미경의 시체를 찍은 사진을
  꺼냈다. 사진은 모두 12장이나 되었다. 살해된 유미경의
  시체를 여러 각도에서 찍은 사진과 상처 부위를
  클로즈업하여 찍은 사진이었다.
  (사진이 더욱 끔찍해 )
  유미경의 오른쪽 유부에 선명하게 찍혀 있는 이빨자국을
  보면서 나는 눈쌀을 찌푸렸다.
  밖에서는 바람이 아우성을 치듯이 사납게 불고 있었다.
  수사반은 유미경이 다음과 같이 살해되었을 것으로
  추정한다. 물론 이것은 가상이다. 유미경은 버스정류장에서
  내리자 살인마에게 유인되었을 것이다. 살인마는 유미경을
  흉기로 위협하여 꼼짝 못하게 했을 것이고 어딘가 인적이
  없는 곳으로 끌고가서 옷을 벗겼을 것이다. 그리고
  유미경의 나신을 내려다보고 수음(手淫)으로 사정(射精)을
  한다. 시간은 자정이 가까운 시간일 것이고 그 시간에 비는
  억수 같이 쏟아지고 있었다. 살인마는 유미경의 안면에
  사정을 마친 뒤에 그녀의 하얀 가슴을 물었을 것이다.
  유미경은 처절한 비명을 지르며 몸부림을 친다.
  살인마는 깜짝 놀라 예리한 흉기로 유미경을 난자하기
  시작했을 것이다. 그리하여 피가 튀고 유미경의 처절한
  비명소리가 빗속에서 메아리쳤을 것이다. 물론 이것은 우리
  수사반의 여러 형사들이 사건을 분석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나는 세차게 고개를 흔들었다. 갑자기 머리가 어지럽고
  현기증이 일어났다.
  골목은 좁고 길었다. 더러운 쓰레기통, 연탄재와 음식 찌꺼
  기, 시궁창 썩는 냄새, 광고지가 다닥다닥 붙어  있는 전봇
  대
  태희는 공포에 질려 있었다. 골목은 악귀들이 살고 있는 것
  처럼 음산했다. 밤인가. 아니 볕이 쨍쨍하다. 어느 집 담장
  너머로 넝쿨장미가 핏빛으로 주렁주렁 열려  있고 피아노소
  리가 끊어졌다 이어졌다 하며 들려온다. 엘리제를 위하여인
  가. 아니 라벨의  볼레르이다. 볼레르. 단순하게  반복되는
  멜로디. 사랑과 슬픔의 볼레르라는 영화를 본  뒤로 태희는
  그 음악을 좋아했다.
  나는 골목을 투시한다. 마치 기억조차 희미한  낡은 흑백영
  화를 보듯이 의식의 흐름을 쫓는다.
  태희는 걸음을 서두르고  있다. 태희가 걸음을  서두를수록
  보도블록을 때리는 하이힐의 굽소리가 골목을  음산하게 울
  린다. 누군가 뒤를 따라오고 있다. 태희는 뒤따라오는 존재
  를 의식하고 가슴이 격렬하게  뛴다. 무엇인지 알 수  없는
  공포의 존재. 펄럭이는 만또자락
  숨이 차다. 다리가 후들거린다.
  나는 공포에 질린 태희의 눈동자를 응시한다.  태희의 갈색
  동공에 그가 있다. 나는  소름이 끼치는 듯한 전율을  느낀
  다. 그는 죽은 뒤에도 이따금 의식 속에 나타나  나를 공포
  에 떨게 한다.
  하늘은 잿빛이다. 골목에는 빗발이 뿌리고  있다. 전봇대의
  파르스름한 외등에 빗발이  날리는 모습이 보인다.  태희의
  옷은 빗줄기에 흠뻑 젖어 있다. 흰 원피스가 빗줄기에 젖어
  몸에 철썩 달라붙어 태희의 곡선을 도발적으로 내비치고 있
  고 머리와 얼굴로 빗물이 줄지어 흘러내린다.
  태희가 뛰는 것을 멈추고  담벽에 붙어 선다. 그가  가까이
  다가와 징그럽게 웃는다. 그의 투박한 손이  태희의 어깨를
  잡자 태희는 몸을 부르르 떤다. 등줄기를 차갑게 적시는 전
  율과 같은 공포, 절망감 태희의 눈은 그를  향해 호소하고
  있다.
  "미친 년!"
  갑자기 사내의 투박한 손이 태희의 머리카락을 움켜잡는다.
  태희는 외마디 비명을 지른다. 그 비명소리가 텅 빈 동굴을
  울리듯 허공으로 울려 퍼진다.
  "내 말을 듣지 않으면 모조리 죽여버릴 거야. 네 년의 어미
  까지 이 칼로 해치우겠어. 가슴을 도려낼 수도 있어!"
  사내의 말은 사내가 들고 있는 재크 나이프보다도  더 무서
  웠다. 그때 목덜미가 섬뜩했다. 사내는 어느 새  날이 파란
  재크 나이프를 태희의 목에 들이대고 있었다.  태희는 고개
  를 흔들었다. 엄마를 죽이지 마세요.  하라는대로 할께요
  태희는 그렇게 부르짖고 싶었으나 입이 열리지 않았다.
  "그럼 내 말대로 할 테야?"
  사내가 태희를 윽박질렀다.  사내의 눈에 흰자위가  가득한
  것을 보면서 태희는 간신히 고개를 주억거렸다.  찰칵 하고
  사내가 재크 나이프를 접었다. 태희는 눈을 감았다. 사내의
  손이 비에 젖은 태희의 원피스 위로 둔부를  쓰다듬다가 덥
  석 움켜잡았다.
  "이건 내 거야! 넌 내 노랑나비라구 "
  어디선가 볼레르가 희미하게 들려오기 시작했다.  단순하면
  서도 끊임없이 반복되고 있는  저 멜로디. 처음엔 들릴  듯
  말 듯 희미하게 들려오다가 장중한 코러스의 허밍으로 이어
  지면서 영혼을 두드리는  소리 태희는 눈물이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또 이렇게 당해야  하다니. 눈물이 빗물과  섞여
  볼을 타고 흘러 내려와 입으로 스며들었다.
  밖에는 비가 오고 있었다. 장마철이었다.  방에서는 곰팡이
  피는 냄새가 풍기고 있었다. 사내는 비가  쏟아지고 천둥번
  개가 몰아치면 더욱 발작을 했다.
  "어떤 놈이던지 손대게 하면 죽여버리겠어!"
  사내가 협박을 하면서 비에  젖은 태희의 원피스를  들추었
  다. 태희는 입술을 깨물고 속으로 부르짖었다.
  난 당신의 노랑나비가 아니야. 당신이 나를  죽여버리기 전
  에 내가 먼저 당신을 죽이겠어
  태희는 몸을 세차게 떨면서 도리질을 했다. 사내의 손이 빗
  물 때문에 미끌미끌한 허리께를 더듬어 속옷 자락을 끌어내
  렸다.
  "흐흐흐 "
  사내가 태희를 돌려세운  뒤에 벽으로 밀어붙였다.  태희는
  눈을 감았다. 이제 그가 그녀의 몸속으로 들어올 것이고 그
  녀는 저주하고 증오하면서도 그를 끌어안고 몸부림을 칠 것
  이다.
  그녀는 알고 있었다. 그녀의 몸이 그에게 길들여져 있고 그
  것이 짐승 같은 짓이라는 것을. 그녀는 그의 유희의 대상인
  한낱 노랑나비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그러나 노랑나비도 날개가  자라면 힘차게  날아오르리라는
  것을 그녀는 알고 있었다.
  나는 이지영에게 다시 최면술을 시술하여 그녀의 의식 세계
  를 들여다보기 시작했다. 성격이 단순하기 때문인지 이지영
  은 최면에 쉽게 빠졌고 숨김없이 자신의 의식  세계를 드러
  냈다. 나는 이지영이 최면상태에서 구술하는 내용을 기록하
  기 시작했다. 그녀의 의식세계를 연구하는 것은 범죄심리학
  적인 측면에서, 또 임상학적인 입장에서  상당히 중요한 학
  문적 자료가 될 것이었다.
  그후 여러 날이  흘러갔다. 지영은 여전히  그 일을 잊지
  못하고 있었다. 그 사건들이 끝나고  세상을 떠들썩하게 했
  던 그들이 모두 교수대에서 목이 매달려 사라졌으나 지영의
  기억 속에서는 여전히 그들이 살아 있었다.
  사람들이 지영을 보는 시선이 두려워 외출을 할  때는 모자
  를 쓰고 다니는 것도 여전했다. 그러나 지영을 알아보는 사
  람은 거의 없었다. 그래도 지영은  누군가 지영을 알아볼까
  걱정을 했다. 사건 직후에는 형사들이 지영을 보호했고 6개
  월이 지났을 때는 여형사가 1주일에 한 번씩 방문하여 지영
  이 이상이 없는지 확인하고 돌아가곤 했다.
  옛날의 동료들도 지영을 찾아왔다. 지영은 그 동안 몇 번이
  나 이사를 했다. 사람들이 지영을 보는 시선이 싫었다. 사람
  들은 언제나 지영의 등뒤에서 소곤거렸고 그 소리가 그들에
  게 납치되어 잔인한 범죄를  저질렀을 때보다 더욱  두려웠
  다.
  동료들은 지영에게 업소에 다시 나오라고 요구했다. 지영은
  그들의 요구를 거절했다. 그들이 진심으로 지영을 위로하기
  위해서 업소에 다시 나와 일을 하라고 제안을 한 것이 아니
  라는 사실을 지영은 알고 있었다.  그들은 지영을 동정하고
  있는 것이다. 세상에  어떤 사람이 살인을  한 여자와 같이
  일을 하고 싶겠는가. 비록 납치되어  저지른 일이라고 해도
  다섯 명의 사내에게 겁탈을 당하고,  그들의 위협에 평범한
  시민의 머리에 공기총을 쏜 여자와 같이 일을  하려고 하겠
  는가. 그러나 1년이 지났을 때 지영은 그런 업소에 다시 나
  가고 있었다.
  지영은 때때로 자신이 과연 짐승인가 하고 반문해  볼 때가
  있었다. 그 사건이 세상에 알려졌을 때 방송이나 신문 같은
  언론들은 일제히 인간이기를  포기한 짐승들 하고  보도를
  했었다. 사람들은 그와 같은 보도를 보면서  몸서리를 쳤다.
  지영도 몸서리를 쳤다. 그 사건이 일어나고 얼마 안되어 막
  가파 사건이 터졌을 때 지영은 그 사건을 다시 돌아보게 되
  었고 등줄기에 얼음이 닿는 듯 소름이 끼쳤던 것이다.
  지영이 처음으로 짐승이라는 의미의 말을 알게 된  것은 아
  주 오래 된, 어린 시절의 일이었다. 지영이  살던 시골에 오
  (吳) 주사(主事)라는 부잣집이 있었다. 오 주사는 한때 시청
  에서 서기 노릇을 한 뒤에 시내에서 양조장을 했다. 그  집
  은 인근이 알아주는 부잣집이었는데 오 주사는 서울 나들이
  가 잦았고 서울에 소실을 두고 있다는 소문도 파다했다.
  어느 날 오 주사가 서울에서 얼굴이 창백한 소녀 하나를 데
  리고 왔다. 어른들이 귀엣말로 소곤대는  소리에 의하면 그
  소녀는 오 주사가 서울에 두고 있는 소실의  딸이라고 하였
  다. 본가에는 오 주사 본처의 아들이 하나 있었다.
  본처의 아들은 열 아홉 살이라고 하였고 소실의 딸은 열 일
  곱이라고 하였다. 그들은 친남매보다 더울  잘 어울려 다녔
  는데 마을 사람들은 그들이 지나갈 때면 저러다가  상피 붙
  지 하고 혀를 찼다. 그러나 얼굴이  창백한 소실의 딸은 1
  년이 안되어 병으로 죽었다. 사람들의  말에 의하면 폐병이
  라고 하였다. 소실의 딸이 객혈을 하는  것을 본 사람도 있
  었고 병원에 다니는 간호사도 폐병이라고 하였다. 서울에서
  내려온 것도 요양을 하기 위해서라는 것이었다.
  그후 몇 년이 지났다. 오 주사의  본처가 시름시름 앓기 시
  작하자 서울에서 소실이 내려왔다. 오  주사의 소실도 얼굴
  이 병자처럼 하얀  여자였다. 그러나  허리가 나긋나긋하고
  궁둥이가 펑퍼짐한 여자였다. 동네 아낙네들은 그녀가 엉덩
  이를 실룩거리며 지나갈 때면 입술을 삐죽거리며 오 주사가
  소실로 들어 앉힐 만 하다고 우물가에서 수군거렸다.
  지영은 그 무렵 아홉 살인가 열  살이었다. 오 주사의 소실
  을 자주 볼 수는 없었으나 남색치마에 흰 저고리를 입고 대
  문 앞을 쓸거나 시골에서는 보기 힘든 울  소재의 원피스를
  입고 시내에 나가거나 외출했다가 돌아오는 오 주사의 소실
  을 이따금 볼 수  있었다. 예쁜 여자였다. 콧날은  오뚝하고
  눈빛이 서늘했다. 살결은 눈(雪)처럼 하다.  그러나 한 번
  도 말을 할 기회는 없었다.
  오 주사네 집은 우환이 계속되었다. 시름시름 앓던 오 주사
  의 본처가 죽고 얼마 후에는 오 주사마저 시난고난 앓기 시
  작했다. 사람들은 오 주사네  집에 살(煞)이 끼었다고  말했
  다. 그 무렵부터 동네에 이상한 소문이 나돌기 시작했다.
  오 주사의 아들과 소실이 그렇고 그런 사이라거나  오 주사
  의 아들과 소실이 읍내 여관에서 나란히 나오는  것을 보았
  다는 소문이었다. 사람들은  쉬쉬하면서도 입방아를 찧었고
  소문은 날개를 달고 동네에 파다하게 퍼졌다.
  그런데 그것은 소문이 아니었다. 어느 날 지영은 아버지 심
  부름으로 탁주를 한 되 받아 가지고 오다가  잎담배 밭에서
  들리는 이상한 소리에  걸음을 멈췄다. 어두운  밤중이었다.
  어둠이 잎담배 밭에 검은 상포처럼 드리워져 있어서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면 그 곳에 누가  있는지 알 수 없었을  것이
  다.
  지영은 가슴이 철렁했다. 어리디 어린  계집애인 지영은 무
  서움을 많이 탔다.  게다가 달이 구름  속에 들어가 있어서
  사방이 캄캄하게 어두웠다.  빗발이 뿌리려는지  살매 들린
  바람이 잎담배 밭 저 편의 포플러 잎사귀에서  검푸른 빛으
  로 살랑거리고 있었다. 거짓말이 분명하겠지만 동네의 어떤
  처녀가 그 곳에서 목을 매어 죽었다고 하였다. 그래서 비가
  오는 날이면 처녀의 울음소리가 들린다고 하였다.
  지영은 그 생각을 하고 겁이 덜컥  났다. 그때 숨을 몰아쉬
  는 거친 호흡소리와 무엇인가 목에 걸린 듯한 훅 하는 소리
  가 들려왔다. 지영은 잎담배 밭을 노려보았다.  가슴이 격렬
  하게 뛰었다. 그러한 상태가 조금만  더 계속되었다면 지영
  의 작은 가슴은 아마 파열했을 것이다. 그때 축축한 습기가
  묻어 있는 바람에 나부끼는 넓은 담뱃잎 사이로  하얀 몸뚱
  이 하나가 보였다. 여자였다.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알
  몸이었다.
  지영은 발이 땅에 달라붙은 듯 움직일 수가 없었다. 지영이
  그 상황을 파악한 것은 한참이 지났을 때였다. 누군가 그곳
  에 누워 있었다. 오 주사의 소실은 누워 있는 사람의 몸 위
  에서 발가벗은 나신으로 격렬하게 몸을 흔들어대고 있었다.
  가슴이 출렁대고 하얀 몸뚱이가 어둠  속에서 솟아올랐다가
  가라앉고는 하였다.
  지영은 걸음을 재게 놀리기 시작했다.  이상하게 얼굴이 화
  끈거리고 가슴이 마구 뛰었다. 지영은 그날 본 것을 아무에
  게도 말하지 않았다. 누구에게 어떻게  말해야 하는지도 알
  수 없었고 그것을 굳이 말해야  하는 것인지도 알 수  없었
  다. 지영은 그 비밀을  혼자 간직하고 싶었다. 지영은  어린
  계집애였다. 그런데도 여자의 몸, 오 주사 소실의 하얀 몸뚱
  이를 보았다는 사실을 혼자만의 비밀로 가슴속에 묻어 두고
  싶었다.
  동네를 발칵 뒤집어놓은 사건이 발생한 것은 며칠  뒤의 일
  이었다. 잎담배 밭에서 숨이 넘어가는  듯한 신음소리를 내
  지르던 오 주사의 소실이 그날부터 사흘 후에  목행천 다리
  밑에서 싸늘한 시체로 발견되었던 것이다.
  그날은 토요일이었다. 날씨는 따뜻했다.  학교에서 돌아오는
  데 아이들이 흥분해서 떠들며 목행천 다리로 뛰어가고 있었
  다. 지영은 아이들이 웅성거리며 몰려가는  바람에 무슨 까
  닭인지도 모르고 아이들을  뒤쫓아 달려갔다.  목행천 다리
  밑에는 벌써 동네 사람들이 잔뜩 몰려와 있었다. 지영은 어
  른들 틈을 비집고 들어가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살펴보았
  다. 그러자 가마니 밖으로 삐져 나와  있는 여인의 하얀 발
  이 먼저 보였다.
  시체는 가마니에 덮여 있었다. 그러나 가마니 한 장으로 여
  인의 몸을 모두 덮을 수 없어서 팔과 다리가 삐져  나와 있
  었고 가마니 밑으로 피가 흥건하게 괴어 있었다. 그때 어른
  들이 아이들이 보아서는 안된다고 사납게 눈을 부라리며 쫓
  았으므로 지영은 더 이상 자세하게 오 주사의  소실이 죽어
  있는 것을 볼 수 없었다.
  그러나 오 주사의 소실이 가슴을 칼로 난자  당해 죽었으며
  경찰이 조사한 결과 오 주사가 범인이라는 얘기와  오 주사
  가 소실을 살해한 이유는 아들과 소실이 짐승 같은 짓을 저
  질러 살해했다고 자백했다는 얘기가 파다하게  나돌아 지영
  은 어린 나이에도 짐승 같은 짓을 저지르면  죽임을 당하는
  구나 하고 생각했었다.
  지영은 목행천 다리 밑에서 죽어 있던 오 주사 소실 시체의
  얼굴을 보지 못했다. 지영이 지금까지  뚜렷이 기억할 수있
  는 것은 가마니 밖으로 삐져 나와 있던 하얀 팔과 다리, 그
  리고 가마니 밑에  흥건하게 괴어 있던  붉은 피 뿐이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잎담배 밭에서 본 오  주사 소실의
  하얀 알몸, 격렬하게 몸을 흔들  때마다 출렁대던 젖무덤과
  가마니 밖으로 삐져 나와 있던 하얀 팔다리가  기묘하게 합
  치된 영상이 눈앞에 떠오르곤 했다.
  지영은 그 영상을 머릿속에서 보면서 과연 오  주사 아들과
  소실이 짐승 같은 짓을 저질렀나 하는 의문을 가졌다. 그리
  고 그들이 잎담배 밭에서 벌인 정사가 아련히  떠오를 때마
  다 자신도 알지 못하는  아련한 흥분으로 인해  엑스터시에
  젖게 되는 것이다.
  해가 기울기 시작했다.  나는 병원에서  퇴근하여 아파트의
  베란다에 있는 흔들의자에 앉아서 천변의 포플러 숲을 바라
  본다. 여름날의 희디흰 햇살이 표백시킨 들과 산이 해가 기
  울면서 더욱 짙은 녹색이 되어 가고 있었다.
  장마가 한풀 꺾인 7월12일 오후 7시. 거리와 골목에는 직장
  에서 돌아오는 샐러리맨들의 걸음이 분주하고  한낮의 더위
  를 피해 집에서 놀던 아이들이 몰려나와 왁자하게  뛰어 놀
  고 있다. 집집마다 직장에서 돌아오는  남자를 위해 찌개를
  끓이고, 밥을 짓고 저녁을 준비하는 여인네들의 손이 분주
  하게 움직인다.
  하루의 일과에 지친 남자가 어깨를 늘어뜨리고 집에 돌아와
  샤워를 끝내면 여인들이 아이들을 부르는 소리가 들려온다.
  아이를 부르는 여인들의 소리는 어쩐지  짜증스럽기도 하고
  들떠 있는 것 같기도 하다.
  남편이 돌아왔기 때문일까.
  남편이 돌아왔는데 여자들의 목소리가 무엇  때문에 짜증스
  럽기도 하고 들뜨기도 하는 것일까.
  혹시 여자들이 욕구불만에 사로잡혀 있는 것이 아닐까.
  어쩌면 지난 밤 남편과의 섹스가 만족하지 못했는지도 모른
  다. 직장에서 지친 남편이 아내가 만족하기도 전에 일을 끝
  내고 돌아누워 하루종일 몸이 찌푸드하고  불쾌했는지도 모
  른다.
  허지만 이제 직장에서 돌아왔으니까.
  이제 다시 밤이 왔으니까. 여자들은  끈적끈적한 욕망의 향
  연을 펼치기 위해 들떠 있을 것이다. 가족들은 식탁에 둘러
  앉아 오순도순 저녁식사를 한다. 저녁식사가 끝나면 거실에
  서 TV를 보다가 얼음에 재인  수박이나 참외를 먹고, 밤이
  깊어지면 아이들부터 잠에 떨어질 것이다.  내일을 위한 안
  락한 휴식,  아이들은 천사처럼 평화롭게 잠을 잘 것이다.
  내가 살고 있는 아파트는 18층이었다.  나는 밤늦게까지 베
  란다에 앉아서 먼저 세 들어 살던 사람이 쓰다가 버린 흔들
  의자에 앉아서 사람들을 관찰한다. 나의 이웃들,  내가 꿈꾸
  어 오던 행복하고 단란한 이웃들. 선량한 사람들이 사는 모
  습을 관찰한다.
  때때로 부부가 잠자리를 같이 하는 것을 훔쳐볼 때도 있다.
  여름이라 사람들은 문을 열어 놓고, 아무도 보는 사람이 없
  으리라는 믿음을 가지고 알몸으로 뒤엉킨다.
  나는 언제나 불을 끄고 있다. 거실이며 베란다에 불빛 하나
  없기 때문에 부끄러움 없이 그  일을 하는 부부를 볼  수가
  있다. 물론 수치스럽거나  더러운 일이라는  생각은 추호도
  하지 않는다.
  사방이 너무나 조용하다.  멀리 큰길에서  차량이 지나가는
  엔진음이 희미하게 들린다. 밤 11시. 서울에서는  밤 11시가
  되어도 차량의 통행이 그치지를 안는다.  인적은 비교적 빨
  리 끊어진다.
  시간은 점점 흘러간다. 나는 이 아파트가 마음에 들었다. 다
  른 곳에서의 밤 11시라면 이렇게  조용하지는 않을 것이다.
  물속 같은 고요. 밤의 기이한 정적. 마치 땅  밑으로 지나가
  는 듯한 차량의 희미한 엔진음.  어쩌다가 아파트 광장으로
  들어오는 승용차의 불빛과 엔진음
  불과 10년 전이라면 내가 꿈도 꾸지 못했던  고요와 정적이
  다. 나는 다시 이지영에 대해서 생각한다. 이지영은 그 사건
  이 일어나기 전에도  룸싸롱 여급으로  일했었다. 독자들은
  이미 그 사건에 대해 어느 정도 알고 있을 것이다.
  일명 야수파 사건. 소나타급 이상의  승용차를 탄 부유층만
  골라서 납치하여 살해하고 암매장을 하거나  공기총으로 살
  해한 뒤에 소각로에서 불태워버렸던 짐승 같은 사내들이 저
  지른 끔찍한 사건들.
  이지영은 레스토랑 지배인 전택현(全擇顯)과 함께 납치되었
  다가 애인을 죽이는데 협조하고  천(千)씨 부부를 살해하는
  데 가담했었다. 그리고 야수파의 아지트를 탈출하여 경찰에
  신고하여 그들의 엽기적인 살인 행각을  만천하에 폭로하게
  만든 여인이다. 나는  최면으로 그녀의  의식세계를 완전히
  들여다본 것이다.
  바람이 일고 있었다. 하늘은 우중충한 잿빛이었다. 연립의
  3층에서 내려다보이는 천변의 포플러 잎사귀들이 검푸른 빛
  으로 살랑거렸다. 손 하나가 지영의  입에 담배를 물려주었
  다. 지영은 담배가 입에 물리자 습관적으로 빨았다. 마치 사
  내들의 작은 유두를  빨 듯이. 청년들이  성냥을 켜자 유황
  냄새가 입안으로 확 번졌다.
  지영은 쿨럭대고 기침을 했다.
  이게 담배도 못 피우나? 이년아 담배도 못 피우면서 룸싸롱
  에서 일했단 말이야? 담배를 못  피우는 것은 아니었다. 누
  군가 지영의 머리카락을 뒤로 잡아당겼다. 지영은 머리카락
  이 모조리 빠져나갈 것처럼 고통스러웠다. 지영의 시야에서
  구두를 신은 남자의 발이 허공에서 발버둥을 치고 있었다.
  아저씨였다. 아저씨가 괴로워하고 있었다. 지영도 괴로웠다.
  아저씨의 얼굴에 두꺼운 비닐이 뒤집어  씌워져 있었다. 야
  수가 이빨을 으르렁거리며 말했다.
  아저씨를 고통스럽게 죽게 하고 싶지 않으면 함께  목을 눌
  러.
  지영은 그렇게 했다. 비닐 안에 있는 아저씨의 눈이 지영을
  쳐다보고 있었다. 그의 눈이 금방이라도  비닐을 뚫고 튀어
  나올 것처럼 불거져 나와 있었다.  지영은 소름이 끼치도록
  무서웠다. 지영은 소리를 내어 엉엉 울었다.
  아저씨의 눈은 붉게 충혈되어 있었다.  언젠가도 그런 눈을
  본 적이 있었다. 룸싸롱 일을 마치고  소파에 누워 잠이 들
  었을 때, 모두  퇴근한 줄 알았는데  룸싸롱 지배인 전택현
  아저씨가 남아 있다가 지영의 스커트를  들추었다. 그때 아
  저씨의 눈이 그렇게 충혈되어 있었다.
  그 눈은 무엇인가 간절하게 원하고  있었다. 지금 아저씨의
  눈도 그때처럼 간절하게 원하고 있었다.  그때 그랬던 것처
  럼 그녀에게 무엇인가 애원을 하는 것 같기도  했고 절박하
  게 갈구하고 있는 것 같기도 했다. 그리고 고통스러운 표정
  이었다.
  목을 눌러!
  이년아, 목을 눌러! 꽉 누르란 말이야!
  아저씨를 고통스럽게 죽게 하지 않으려면 목을 눌러!
  사내들이 마구 발길질을 하며 지영을 다그쳤다.
  사내들의 구둣발이 지영의 궁둥이를 차고 허리를 내질렀다.
  그들의 눈이 희번득거리고 있었다. 지영은 허리가 쑤시듯이
  아파 왔다. 지영은 너무나 아파서  때굴때굴 구르다가 정신
  없이 아저씨의 목을 눌렀다. 이내  아저씨의 얼굴이 벌겋게
  상기되고 다리를 바둥거렸다. 아저씨가 온  힘을 다해 몸부
  림을 치고 있었다. 지영은 아저씨의  목을 누르면서 눈물을
  흘렸다.
  갑자기 가슴이 컥 하고 막혀 왔다.  시야에 붉은 빛이 가득
  해 지고 머리가 쪼개지는 것처럼  아프기 시작했다. 총성이
  귓전에 가득했다. 불꽃이 악마의 혓바닥처럼 널름거리고 살
  타는 냄새가 코를 찔렀다.
  살려줘! 살려줘!
  지영은 처절하게 비명을 질렀다.
  눈을 번쩍 떴다. 사방에 핏빛이 가득했다.  어디선가 악마의
  웃음소리가 들리고 공기총에 맞아 죽은 남자의 얼굴이 허공
  에 거꾸로 매달려 지영을 노려보고 있다. 지영은 이불을 뒤
  집어쓰고 비명을 지른다. 발작을 하듯이 비명을  지른다. 비
  닐을 덮어 씌워 질식사를 시킨  아저씨, 뒤통수에 공기총을
  쏘아 죽인 남자, 소각로에 태워 버린 여자. 지영을 차례차례
  짓밟아 버린 다섯 명의 야수들.
  무섭다. 소름이 끼친다. 갑자기 지영을 향해  후레쉬가 터진
  다. 형사들이 책상을 치며 다그친다.
  살인마! 살인마!
  우리 아빠와 엄마를 죽인 년!
  아이들이 도끼를 들고 지영을 쫓아온다.
  내가 네년의 머리를 도끼로  쪼개 버릴 거야!  어디로 도망
  가? 도망가지 말아!
  여자들이 소곤거린다.
  저 여자가 그 살인마들과 놀아난 여자래.
  귀를 틀어막아도 여자들이 소곤거리는 소리가  쉴새없이 등
  뒤에서 들려온다.
  저 여자가 경찰에 신고했다지?
  그녀는 종종걸음을 쳐서 집으로 돌아온다.
  얼마나 무서웠을까?
  여자들이 소곤거리는 소리는 연립주택의 층계에서도 들려온
  다.
  살인마들이 강제로 그 짓을 했대.
  지영은 문을 꼭꼭 닫아건다.
  몇이서?
  남자들도 그녀가 지나가면 힐끔거린다.
  다섯이 차례로 그 짓을 했단 말이야?
  그때 기분이 어땠을까.
  지영은 그때 기분을 생각해 본다. 그 때는 공포뿐이었다. 공
  포밖에 기억에 남는 것이 없었다. 그녀는 운다. 소리를 내어
  훌쩍훌쩍 운다. 그러다가 잠이 든다. 잠결인가 꿈결인가. 갑
  자기 벼락을 치는 것 같은 소리가 들려온다.
  네 년이 그 놈들과 그 짓을 한 것을 다 알아! 내가 네 년의
  가랑이를 찢어 놓을 거야.
  누군가 그녀의 가랑이를 벌렸다. 도끼가 허공에서 번뜩였다.
  시퍼런 도끼 날이 그녀의 머리를 향해 꽂힌다.
  으악!
  그녀는 처절한 비명을 지른다. 피가 사방으로  튄다. 머리에
  서 허연 뇌수가 쏟아져 나온다
  나는 이지영이 극심한 공포에  떨자 즉시 최면에서  깨웠었
  다. 이지영은 극심한 패닉(恐惶)에 이르러  있었다. 더 이상
  최면 속에 방치했다가는 심장이 터져 죽을지도 모르는 것이
  다.
  "깨어나요!"
  나의 주문에 이지영이 어깨를 움찔 하고 눈을 떴다. 그녀의
  이마에 구슬땀이 송골송골 맺혀 있고  호흡이 가빴다. 나는
  이지영의 흥분이 가라앉기를 기다려  담배 한 가치를  주었
  다.
  오늘 이지영에게 최면을 걸어 살핀 내용이었다.
  밤은 점점 깊고 푸르러지고 있다. 아파트단지는 하나 둘 불
  이 꺼지고 검은 상포(喪布) 같은 어둠이 덮여  온다. 칠흑의
  어둠이다.
  나는 흔들의자에 앉아서 잠을 청한다. 여름이라 흔들의자에
  앉아서도 잠을 잘 수 있을 것이다
  진료실로 들어서는 형사는 얼굴도 못생긴 데다 옷차림이 후
  줄그레 했다. 낡은 체크무늬 잠바에 검은  바지였다. 잠바는
  지퍼를 잠그지 않아 검은 셔츠가 드러나 있었다. 배는 약간
  부른 상태고 구두는 먼지가 뽀얗게 앉아 있었다. 얼마나 오
  랫동안 닦지 않았는지 오른쪽 구두코에는 막걸리 자국 같은
  흔적이 지저분하게 묻어 있었다. 그래도 진료실로 들어오면
  서 손을 흔드는 것을 보면 넉살이 좋은 사내였다.
  "마침 환자가 없으시군요."
  형사는 환자용의 안락의자에 털썩 궁둥이를 붙이고 앉았다.
  "진찰 받으시겠어요?"
  나는 얼굴이 살짝 얽은  형사의 얼굴을 쳐다보면서  미간을
  찌푸렸다. 어떻게 된 일인지 도무지  형사의 이름이 생각나
  지 않았다.
  "예?"
  형사가 깜짝 놀라는 시늉을 했다.
  "거기는 환자들이 진찰 받는 의자예요."
  "그렇습니까? 의자는 다 같은 거라고 생각했는데 아니군요.
  모처럼 편안한 의자에 앉아보나 했더니 "
  형사가 엉거주춤 궁둥이를 들었다. 그러나  나의 얼굴에 웃
  음기가 감도는 것을 보고는 다시 그대로 주저앉았다.
  "거기 앉으면 최면에 걸리는 수가 있어요."
  "최면이요? 하하 나 같은 사람을 최면 걸어서 무얼하죠?"
  "형사님의 과거를 속속들이 들여다보는 거죠."
  "내 속을요?"
  "지난 밤 무엇을 했는지도 알  수 있어요. 부인과 잠자리에
  서 어떻게 했는지 부인을 사랑하는지 안 하는지 "
  "정말 무섭군요. 그렇지만 여편네가 없는 처지니 속보일 일
  은 없을 겁니다."
  "결혼하셨다고 했잖아요?"
  "했었다고 했지요."
  "그럼 이혼?"
  "사별했습니다. 2년 전에 교통사고로 죽었습니다."
  "미안하군요. 공연한 질문을 해서 ."
  그때 윤 간호사가 커피 두 잔을 타 가지고 탁자  위에 놓고
  돌아갔다. 나는 탁자 앞의 소파에 가서 앉았다. 형사가 안락
  의자에서 일어나 탁자 앞에 와 앉았다.
  "사건을 좀 분석하셨습니까?"
  형사가 커피 잔을 들고 정색을 하고 물었다.
  "글쎄요."
  나는 말꼬리를 흐렸다. 인육 살인사건의  분석을 나에게 의
  뢰한 형사들이 속으로 우스꽝스러웠다.
  "범인은 어떤 작자 같습니까?"
  "내성적이고 심약한 자입니다. 늘  누군가에게 무시를 당하
  고 있다는 강박관념에 사로잡혀 있고  가족관계가 원만하지
  못한 자의 소행입니다."
  나는 형식적으로 대답해 주었다. 그래도 형사는 내 말을 의
  심하지 않고 수첩에 받아 적고 있었다.
  "가족관계가 원만하지 못하는 것은 무슨 뜻입니까?"
  "결손가정 출신이라는 뜻입니다."
  "결손가정이요?"
  "범인이 그런 환경에서 자랐다는 것입니다."
  "범인의 성장기를 말씀하시는군요."
  "네."
  나는 커피 한 모금을 마시고 소파에 편안하게 등을 기댔다.
  그리고 다리를 포개고 앉아서 형사를 쳐다보았다. 착각이었
  을까. 한순간 형사의 눈빛이 기이한 빛을 퉁기고 있었다. 내
  가 쳐다보자 형사가 당황한 표정으로 나를 외면했다.
  "왜 그런 분석을 하시죠?"
  "가슴이요."
  "가슴의 상처를 말씀하시는 건가요?"
  "네. 왼쪽 유부를 물어뜯은 것은  어머니에 대한 증오와 어
  린 시절에 대한 단절을 의미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
  머니를 사랑한다는 의식의 표출입니다."
  "좀 복잡하군요. 그러니까 어머니를 증오하면서도 사랑한다
  는 말씀 아닙니까?"
  나는 입가에 희미하게 미소를 지었다.
  "어머니에 대한 증오는 아버지에 대한 증오입니다."
  "어떻게 그런 논리가 성립이 되죠?"
  "인간의 의식구조는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복잡한 것입니
  다. 특히 표현되지 않은 잠재적인 의식은 표출 방법이 기묘
  해서 전문가가 아니면 알 수가 없습니다."
  "좋습니다. 범인의 현재는 어떻습니까?"
  "범인은 30대일 것이고 여자처럼 섬세한 성격을  가지고 있
  습니다. 가정은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범인이  가정을 가지
  고 있다면, 특히 범인에게 부인이 있다면 증오의 표현이 섹
  스로 바뀌어 부인에게 폭발했을  테니까 증오가 어느  정도
  해소되었을 거예요. 대개의 정신과적 질환을  갖고 있는 사
  람들은 욕구불만을 섹스로 해소하려는 경향이 있어요. 그러
  니 범인은 부인이 없는 30대의 남자라는 것이 확실해요."
  "30대의 정신질환자라 "
  형사가 혼잣말로 중얼거리며 고개를 갸우뚱했다.
  "바로 형사님 같은 경우죠."
  "예?"
  "허지만 형사님은 정신질환은 없겠죠?"
  나는 몸을 뒤로 젖히며 유쾌하게 웃어댔다. 그때 형사의 시
  선이 다시 나의 허벅지에서 불꽃을  일으켰다. 그러나 나는
  여전히 그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나는 형사가 돌아간 뒤에
  야 비디오에 찍힌 형사의 모습을 보고 형사가 왜 그런 표정
  을 지었는지 이해했던 것이다.
  나는 진료실에 비디오 카메라를 설치해  두고 있었다. 물론
  환자들은 그 사실을 전혀 모르고 있었고 나는  비디오에 찍
  힌 환자들의 모습을 되풀이하여 보면서  심리상태를 분석하
  는 것이었다.
  최면에 걸린 환자들의 기묘한 심리변화와 미세한 표정의 변
  화는 비디오로 찍어놓고 몇  번씩 관찰하지 않으면  분석할
  수가 없었다.
  비디오에는 내가 다리를 포개고  앉아 있는 모습까지  찍혀
  있었다. 앉을 때 조심을 하지 않아 속옷까지 드러나 있었다.
  (남자들은 치마 속에 눈이 벌개진다니까 )
  나는 형사가 나의 속옷을 보았다는 생각을 하자  조금 찜찜
  했다.
  "농담을 좋아하시는군요."
  형사가 멋쩍은 표정으로 웃었다. 형사의  미소는 의외로 선
  해 보였다. 얼핏 보았을 때는 사납고 차가워 보였는데 자세
  히 보자 짙은 눈썹에 우수가 드리워져 있었다. 아마 부인의
  사별이나 직장에서의 스트레스로 인한 것일 터였다.
  "범인의 활동 근거지는 어느 정도로 보십니까?"
  "피해자 주변이겠죠."
  "왜 그렇게 생각하시죠?"
  "범인은 피해자를 노렸어요. 어떤 면에서 관찰을 했다고 봐
  야죠. 그리고 시체를 유기한 장소도 범인이 알고 있는 곳이
  었어요. 그 곳은 대로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이지만 인
  적이 없는 곳이기도 해요."
  "시체가 유기된 지역을 잘 아십니까?"
  "우리 아파트에서 불과 1km 밖에 안 떨어진 곳이에요."
  나의 말에 형사가 고개를 끄덕거렸다.  나는 커피를 음미하
  듯이 천천히 마셨다. 형사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궁금
  했다.
  "유미경은 무척 고통스러웠을 것입니다."
  형사의 말에 나는 살해된  유미경의 모습을 생각하고  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녀는 살해당할 때 어떤 생각을 하고 있었
  을까. 나는 유미경의 생각을 알 듯 모를 듯했다.
  "수사는 얼마나 진행되었어요?"
  문득 수사의 진척 상황을 알고 싶어졌다.
  "저인망식 수사를 하고 있습니다."
  "저인망식이요?"
  "밑바닥부터 샅샅이 수색하는 것을 저인망식 수사라고 합니
  다."
  "그래서 범인의 윤곽이 잡혔나요?"
  "아직이요."
  "범인의 유류품은 아무 것도 찾지 못했나요?"
  "그런 셈입니다."
  나는 어쩐지 형사가 건성으로 대답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살해당한 유미경의 속옷을 찾을  수가 없습니다. 살인마가
  가져갔을까요?"
  이번에는 형사가 나에게 질문을 했다.
  "속옷이요?"
  "말씀드리기는 뭣하지만 팬티가 없습니다. 노팬티는 아니었
  을 텐데 "
  "글쎄요."
  나는 형사의 질문에 어떤 대답을 해야할지 잠시 머릿속에서
  궁리를 했다.
  "특이한 케이스로군요."
  "수사반에서도 그 점을 가장 궁금해 하고 있습니다."
  "좀 연구를 해봐야 하겠어요.  정액에서 혈액형은 분석했나
  요?"
  "국립 과학수사연구소에서 분석중이니까 조만간 알게 될 겁
  니다."
  "정액 외에는 증거가 전혀 없나요?"
  "예. 치열을 떠놓기는 했습니다만 그것밖에는 없습니다."
  "치열이요?"
  나는 깜짝 놀랐다. 유미경의 가슴에서  경찰이 치열을 뜨리
  라고는 생가조차 못했었다.
  "예."
  "시체 부검은 어디서 했죠?"
  "국립 과학수사연구소에서 했습니다."
  나는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리고 나는  그때서야 형사의 이
  름이 생각나서 자신도 모르게 웃음을  깨물었다. 형사의 이
  름은 오득렬이었다.
  병원을 나오자 해가 기울기 시작하고  있었다. 여름 하오의
  햇살이 포플러 가로수에서  금빛으로 살랑거리고  사람들이
  더위에 지친 걸음으로 거리를 오가고  있었다. 오득렬 형사
  는 느릿느릿 걸음을 떼어놓다가 걸음을 멈췄다.
  무엇인가 뒷덜미를 잡아당기는  듯한 느낌이  들고 있었다.
  작렬하던 여름 태양이 시들시들 기울어가고 있는 도심의 거
  리는 기묘한 정적이 흐르고 있었으나 오득렬은 마치 누군가
  자신을 부르고 있는 듯한 기분이었다.
  오득렬은 고개를 돌려 병원을 뒤돌아보았다. 병원은 복합상
  가의 6층에 있었다. 그 순간 복합상가의 유리창들은 기우는
  석양빛을 받아 일제히 그 빛을 반사하고 있었다.
  (특이한 여자야 )
  그는 정신과 의사인 서경숙의 얼굴을 떠올리며 묘한 기분에
  사로잡혔다. 우리 나라에서  유일하게 범죄심리학을 전공하
  여 대형 사건이 터질  때마다 매스컴에 이름이  오르내리는
  여자, 30대 초반의 이혼녀, 미모의  독신, 어딘지 모르게 눈
  가에 어두운 그늘을 가지고 있는 여자
  그 여자가 자신의 관내에 병원을 개업하고 있다는  것은 분
  명히 행운이었다. 유미경을 잔인하게 살해한 범인은 그녀의
  말대로 30대의 정신질환을 가지고 있는 자일 것이다.
  그때 그는 병원의 창에 설치된 초록색 블라인드가  살짝 걷
  힌 듯한 기분이 들었다.  착각인지는 알 수 없었다.  그러나
  오득렬은 갑자기 가슴이  뛰고 얼굴이  화끈거렸다. 누군가
  자신을 감시하고 있다는 생각이 뇌리를 스쳤던 것이다.
  (내가 예민해 졌어 )
  그는 고개를 흔들고  택시를 잡아타고  미수동으로 향했다.
  그리고 미수동 파출소에  잠깐 들려  수사회의에 참여했다.
  미수동 파출소에 설치된 수사본부는 매일 오후  6시에 수사
  회의를 하고 있었다. 그러나 수사회의는  특별한 내용이 없
  었다.
  오득렬은 수사본부를 나와 느릿느릿 걸음을  떼어놓기 시작
  했다. 장미원쪽 방향이었다.  유미경의 시체가 버려진  곳이
  장미원이었다. 50대의 퇴역한 장교가 시(市)에서  공터를 불
  하 받아 정원수들을 키우고 있었다.
  장미원이라고 부르는 것보다는 수목원이라는 말이 적절하겠
  지만 시민들은 장미나무가 유난히 많아  장미원이라고 부르
  고 있었다. 넝쿨장미가 만발하는 5, 6월이면  장미원은 색색
  의 장미가 만개하여 온 동네로 꽃향기를 날려보내곤 했다.
  처음에 그 곳은 시의 변두리였었다. 그러나 변두리인 그 곳
  에도 아파트 붐이 일어나면서 거대한  아파트단지가 되었고
  장미원은 자연스럽게 아파트단지 주민들의 공원이 되었다.
  물론 사유지라 출입은  할 수 없었다.  그러나 허름한 50대
  부부가 아침마다 평상 앞에서 싱싱한 장미꽃을 팔았고 장미
  꽃을 사지 않더라도 고층에서 장미원을  내다보는 것만으로
  도 주민들은 만족했다. 주민들은 최근에 시에서 그 땅을 다
  시 사들여 공원으로 만들어 달라고 요구하고 있었다.
  오득렬이 장미원에 이르렀을 때는 해가 완전히 기울어 있었
  다. 이용길씨 부부는 아직도 퇴근하지 않고  있었다. 그들은
  하루의 일과를 끝낸 탓인지 허름한 들마루에 나란히 앉아서
  캔맥주를 마시고 있었다.
  "두 분의 오붓한 시간을 방해한 것 같습니다."
  오득렬은 공연히 장미원을 찾아온 것이 아닌가 하고 후회했
  다. 두 부부의 다정한 저녁 한때를  방해한 것 같아 미안했
  던 것이다.
  "아닙니다. 지금 막 일을 끝낸 참이었죠."
  다부진 체구의 이용길씨가 자리를 권하며 말했다. 이용길씨
  의 부인은 어느 새 맥주캔 하나를 따서  오득렬에게 권하고
  있었다. 오득렬은 두 손으로 맥주캔을 받았다.
  "참 좋으십니다."
  오득렬은 사별한 아내가  아련하게 그리웠다.  그도 아내와
  둘이서 베란다에 나란히 앉아서  맥주캔을 마신 일이  있었
  다. 석양 무렵이었을  것이다. 아내는 임신  중이었다. 술은
  태아에게 해롭다며 마시지 않으려고 하는 것을 그가 권했었
  다.
  오득렬은 그 시절이 아련하게 그리운 것이다. 맥주 한 모금
  에 얼굴이 불과해 진 아내, 아내의  잔뜩 부른 배에 얼굴을
  대고 느끼는 포근함
  '이렇게 사는 것이 행복인 것 같아요.'
  아내는 불과 17평 짜리 아파트에 살면서도 만족해  하고 있
  었다. 그는 아내의 블록한 배를 가만히 쓰다듬었다.
  "아이 "
  아내가 콧소리를 냈다. 오득렬은 죽은  아내의 블록한 배를
  생각하고 하체가 묵직해 왔다. 아내가  교통사고로 죽은 이
  후에 가장 난처한 것이 성욕의 처리였다. 이따금 적지 않은
  돈을 주고 직업 여자들을 찾아가서 성욕을 처리하기도 했으
  나 30대의 왕성한 성욕을 그런 여자들에게 찾아가서 처리하
  는 것은 한계가 있었다.
  최근에 그는 카페 은성의 마담 이정희와 내연의  관계에 있
  었다. 아내의 얼굴이 아련히 떠오를  때마다 이정희의 얼굴
  도 함께 떠올라 왔다. 오득렬은 조만간 이정희와 살림을 합
  쳐야 하겠다고 생각했다. 죽은 아내도 사랑스러운 여자지만
  이정희도 좋은 여자였다.
  "저희들에게 조사할 일이 있습니까?"
  이용길이 정색을 하고 물었다.
  "아닙니다."
  오득렬은 황급히 고개를 흔들었다. 이용길은 장교 출신이었
  으나 성격이 온순하고 조용했다. 사건이  일어난 당일에 이
  용길씨 부부는 결혼 25주년 기념으로  네덜란드를 여행했었
  다. 그들이 네덜란드를 여행한 것은  전세계에서 꽃 생산을
  가장 많이 하는 네덜란드의 꽃시장을 살피기 위해서였다.
  "그럼 ?"
  "실은 사건 현장에서 조용히 생각해 보기 위해 왔습니다."
  "네."
  이용길의 부인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녀도 여군  장교 출
  신이었다. 한때 상관과 부하로 같은 부대에서  근무한 일이
  있는데 눈이 맞아서 평생을 함께 하게 되었다.
  "그럼 저희들이 자리를  비켜드리겠습니다. 어차피  퇴근할
  참이었으니까요."
  "저는 조금만 있다가 가겠습니다."
  "그러시죠."
  이용길은 퇴근하기 전에 손전등을 가지고  와서 오득렬에게
  주었다. 오득렬은 그들이 검은 색 승용차를  타고 장미원을
  빠져나갈 때까지 우두커니 앉아 있었다.
  사방은 점점 어두워지고 있었다. 장미원의 넝쿨  숲에도 저
  녁 이내가 짙게 깔리고 도심의 차량 경적소리와  엔진음 같
  은 잡다한 소음들이 허공에서 떠돌고 있었다.
  (30대의 정신질환을 갖고 있는 남자 )
  범죄심리학자인 정신과 여의사의 말이었다. 이 거대한 도시
  에서 정신질환을 갖고 있는 남자는 모두 얼마나 될까. 오득
  렬은 범죄심리학자를 생각하다가 얼굴을 찌푸렸다.
  그 말을 할 때 남자처럼 유쾌하게 웃으며  여의사가 다리를
  포개자 하얀 가운 사이로 그녀의 붉은 속옷이  보였던 것이
  다. 속옷은 도툼한 부분을 아슬아슬하게 감싸고 있었다. 그
  는 당황하여 재빨리 시선을 거두어들였다. 그러나  그의 의
  지와 상관없이 시선은 자꾸 여의사의 비밀스러운 곳으로 쏠
  리고 있었다.
  오득렬은 담배를 피워 물었다. 여의사는 이혼을  했는데 성
  욕을 어떻게 처리하고 있을까. 그녀는 자신의  속옷이 노출
  되어 있다는 것을 전혀 의식하지 못했었다.
  (내가 왜 이런 생각만 하는 거지?)
  오득렬은 담배연기를 길게 내뿜고 들마루에서  일어나 유미
  경의 시체가 버려졌던  곳으로 걸어갔다. 유미경의  시체는
  장미원 입구에서 불과 50m밖에 떨어지지 않은  살구나무 밑
  에 버려져 있었다.
  오득렬은 시체를 보고 얼굴을 찌푸렸다. 젊은  여자의 나신
  이 피투성이로 죽어 있는 모습은 끔찍했다.
  (유미경은 솟대동아리 회원들과 뒤풀이를 마친 뒤 시내버스
  를 타고 귀가했어. 동아리 회장인 최명호가  시내버스 정류
  장까지 바래다주었으니까 거기까지는 아무 문제가  없었어.
  아니 버스에서 내릴 때까지도 문제가 없었어.  버스에서 내
  린 뒤에 유미경은 아파트를  향해 걸어갔고 아파트가  멀리
  떨어져 있었기 때문에 그녀는 10분쯤 걸어야  했어. 그래서
  그녀는 걸어가다가 살인마에게 걸려든 거야. 사망  추정 시
  간은 자정에서 새벽 2시쯤이라고 했으니까 살해된  곳은 분
  명히 이 근처야. 이용길씨가 발견한 것이 새벽  5시 10분이
  니 )
  살인마는 시체를 옮겨야 했으므로 차나 오토바이 따위를 소
  지하고 있어야 했다. 그리고 피가 흘러내리는  시체를 옮겼
  으므로 차나 오토바이에는 다량의 핏자국이 묻어 있을 터였
  다. 물론 차나 오토바이에 묻은 피는 깨끗하게 닦았을 것이
  다. 그러나 루미놀 시약을  뿌리면 얼마든지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오득렬은 거기까지 생각하자 한결 마음이 가벼워졌다. 그는
  장미원을 나와 유미경이 내렸을 버스정류장까지 걸어가기로
  했다. 거기서부터 피해자  유미경의 아파트까지 걸어가  볼
  예정이었다. 장미원에서 버스정류장까지는 도보로 20여분이
  나 걸렸다. 그러나 오득렬은 담배를 두  개피씩이나 피우며
  버스정류장까지 계속 걸었다.
  (이 버스정류장은 평범한 버스정류장에 지나지 않아.)
  아파트단지 입구의 버스정류장에는  몇몇 주민들이  버스를
  기다리고 있었다. 손님을 기다리는 빈 택시도 시동을 건 채
  한 대 정차해 있었다. 유미경이 내린  버스정류장이라고 생
  각되지 않았다. 버스정류장에서 아파트까지 상가가  줄지어
  있기 때문에 밤 11시라도 유미경이 살인마에게 걸려들 소지
  가 별로 없었다.
  (여기는 아니야 )
  유미경이 내린 버스정류장은 아파트 뒤쪽의 두 번째 버스정
  류장일 것이다. 입구 쪽에서 내리는 사람들이  뒤쪽에 이르
  려면 걸어서 15분이나 걸리기 때문에 뒤쪽에 사는 주민들은
  두 번째 버스정류장을 이용했다. 물론 거기서도 아파트까지
  는 10분이나 걸렸다.  유미경이 어느 정류장에서  내렸는지
  목격자들이 전혀 없었다.
  그는 두 번째 버스정류장으로 걸어갔다. 두  번째 버스정류
  장은 인적이 없었다. 유미경이 내린 버스정류장이라면 살인
  마에게 걸려들기 꼭 알맞을 정도로 한적한 곳이었다.
  그는 반대편 버스정류장으로 건너갔다. 이제는 집으로 돌아
  가야 했다. 시내로 들어가는 버스는 5분쯤  기다리자 왔다.
  승객이 얼마 되지 않는 버스의 창가에 앉아서  밖을 내다보
  자 어둠이 서리서리 내려 있었다. 버스가  아파트단지 쪽을
  지나자 이내 벌판이 나타났다. 벌판에는 웃자란  벼들이 싱
  싱한 녹향을 뿜고 있었다. 열어놓은 창을 통해 들어오는 공
  기도 시원하고 신선했다.
  나는 이따금 그 일이 시작되기 전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생
  각해 볼 때가 있었다. 왜 이 끔찍한 일이  이지영에게 일어
  났는지, 왜 하필이면 이런 일에 이지영이 말려들었는지, 그
  들은 왜 이지영을 범행대상으로 지목했는지, 그날 이지영이
  그를 따라 드라이브를 가지 않았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나는 여러 가지 생각을 하는 것이다. 물론 이제  와서 그런
  생각을 해도 아무 소용이 없고 부질없는 짓이라는  것을 모
  르는 것이 아니다. 그래도  생각을 하는 것이다.  이지영이
  그 길을 가지 않았다면, 이지영이 전택현과 함께  새벽 3시
  에 드라이브를 하지 않았다면 짐승 같은 야수파의  덫에 걸
  려 악몽은 꾸지 않아도 되었을 것이다.
  이지영 사건은 나의 아픈 과거까지 생각하게  하고 있었다.
  나는 내가 어린 시절에 겪었던 사건들, 무수한 폭력과 상처
  를 완전히 내 기억 속에서 지워버렸다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이지영 사건은 내 의식 속에 묻어 있던 그 사건들을
  다시 끄집어내기 시작한 것이다. 나는 이지영이 야수파에게
  당한 일을 들을 때마다 내 안에서 무엇인가  강력한 에너지
  가 솟구치고 잇는 것 같은 기분을 느꼈다.
  지영은 그날 오후 3시에 눈을 떴다. 지난 밤  새벽 4시까
  지 호텔에서 윤 대리라는 사내와 술을 마시며 잠을 잤기 때
  문에 속이 쓰리고 머리가 깨질 것처럼 지끈거렸다. 술을 마
  시고, 사내들과 노닥거리는 일이 지영의 직업이었기 때문에
  술 때문에 머리가 아픈 것은 아니었다.
  날씨 탓이었다. 6월인데 날씨는 숨이 막힐  것처럼 더웠다.
  아침부터 날씨가 후덥지근하여 잠을 제대로 잘  수 없었다.
  커텐을 치지 않은 창으로 불볕이 쏟아졌다. 지영은 땀을 뻘
  뻘 흘리며 잠을 잤다.
  지영의 방에는 같은 업종에서 근무하는  문미(文美)와 숙희
  (淑嬉)가 함께 자고 있었다. 문미는 지영과 함께 같은 업소
  에 나가면서 같은 방을 쓰는 아이지만 숙희는 잘 곳이 마땅
  치 않아 임시로 지영의 방에 와서 살고 있었다.
  문미는 열 아홉 살, 숙희는  지영보다 한 살 적은  스물 세
  살이었다. 숙희와 지영은 그런 업종에서는 노계(老鷄)에 속
  했다. 숙희와 지영은 같은  업소에서 일한 적도 많고  알게
  된 것도 벌써 3년 가까이 되었다. 숙희나 지영은 이제는 룸
  싸롱가의 일번지라고 할 수있는 강남에서 밀려나 강북의 변
  두리로 가야 할 판이었다.
  지영은 눈을 뜨자마자 머리맡을 더듬어 담배부터 찾아 입에
  물었다. 날씨가 푹푹 쪄서 숙희와 문미도 땀을 흘리며 잠을
  자고 있었다. 숙희는 배를  깔고 엎드려 자고 있고  문미는
  네 활개를 펴고 자고 있었다. 숙희는 집에서 입는 막치마라
  도 걸치고 있었으나 문미는 브래지어와 삼각형 속옷 차림이
  었다. 어린 나이에도 남자들의 손을 탄  젖무덤이 브래지어
  밖으로 빠져 나올 것처럼 풍만했다.
  (학교나 얌전히 다닐 일이지 )
  지영은 문미를 보고 혀를 찼다. 문미는  시골에서 고등학교
  를 다녔었다. 그러나 뚜렷한 이유도 없이 단지 공부가 하기
  싫다는 이유로 학교를 그만두고 집에서  빈둥거리다가 서울
  로 올라와 룸싸롱에서 일하고 있었다.
  (어린것이 젖통은 커서 )
  지영은 문미의 가슴을 만져보려다가 그만 두고 성냥을 켜서
  담배에 불을 붙였다. 그러자 유황냄새가 입안에  가득히 번
  졌다. 지영이 담배를 피우자 문미가 얼굴을 찡그렸다.
  지영은 시계를 보았다. 시계가 벌써 오후 3시 5분을 가리키
  고 있었다. 이제는 서서히 직장으로 출근할  준비를 해야한
  다. 퇴계로에 있는 룸싸롱 프린스까지 가려면 5시에는 집
  을 나서야 하는 것이다.
  "일어나!"
  지영은 문미를 흔들어 깨웠다. 숙희는 룸싸롱에  나가지 않
  으므로 내쳐 자도 상관이 없었다. 그래도  지영이 일어나라
  는 소리에 숙희가 먼저 부시시 잠을 깼다.
  "나 오늘 일 안 해."
  "알아. 문미보고 일어나라고 한 거야."
  "몇 시야?"
  이번엔 문미가 눈을 뜨고  물었다. 잠을 제대로 자지  못한
  문미도 눈이 충혈되어 있었다.
  "3시 넘었어."
  "언니. 나 더워서 잠을 한 숨도 못 잤어."
  "에어컨 하나 사자."
  "요즘 에어컨이 불티나게 팔려서 물건이 딸린다고 그러던데
  에어컨 꽤 비쌀 거야."
  "백만원 안팎이면 살 거야. 20평도 안되는 연립이니 충분하
  지 "
  지영의 단골손님 중에 에어컨 판매회사 영업부장이 한 사람
  있었다. 그가 에어컨이  필요하면 싼값에 사게  해주겠다고
  했었다.
  지영은 담배를 다 피운 뒤에 욕실로 들어가서  잠옷과 속옷
  을 벗어서 세탁기에 집어넣었다. 그때 문미가 욕실 문을 열
  었다.
  "언니."
  "왜?"
  "우리 냉면 먹으러 갈래?"
  "냉면?"
  지영은 샤워기를 틀려다 말고 멈칫했다.
  "고기도 좀 먹고 모처럼 시원한 냉면이나 먹자.  샤워는 그
  뒤에 해도 되잖아?"
  "너 요즈음 경기 좋은가 보다."
  "좋기는 "
  "어제 수입 좀 올렸어?"
  문미도 어제 외박을 했었다.
  "석 장 받았어."
  석 장은 자기앞 수표 석 장을 말하는 것이었다.
  "언니는?"
  "난 두 장."
  문미가 솔직하게 말했으므로 지영도 솔직하게 말했다. 어젯
  밤 문미를 데리고 나간 손님은 재개발조합 조합장이었고 지
  영이 따라간 손님은 우국건설의 최 상무였다.
  우국건설에서 재개발조합이 추진하는  조합 아파트  공사를
  수주하기 위해 로비를 벌이고 있었다. 벌써  재개밥조합 조
  합장만 세 번째 룸싸롱으로 모셔 술과 여자를  대접하고 있
  었다.
  어젯밤 50대의 조합장이 문미에게 눈독을 들이는 눈치를 보
  이자 약삭빠른 최 상무가 문미를 조합장에게 붙여주었고 최
  상무는 지영을 데리고 나간 것이다.
  그 조합장은 지영도 동침한  적이 있었다. 최 상무가  조합
  아파트 공사를 수주하기 위해 상견례를 가졌을 때였다.
  "수백억 공사가 걸린 양반이니까 미스 리가 잘  모셔야 돼.
  알았어?"
  최 상무는 그렇게 말하면서 지영의 셔츠 위로  젖무덤을 움
  켜잡았다가 놓았다. 그리고는 자기앞 수표 세  장을 지영의
  브래지어 속에 찔러 넣어 주었던 것이다.
  "도원에 가자. 언니 내가 살께"
  문미가 어리광을 부리듯이 졸랐다. 도원(桃苑)은 태릉 입구
  에 있는 갈비집이었다.
  "좋아."
  지영은 서둘러 샤워를 하고 옷을 입기  시작했다. 여름이라
  속에는 검은 색 팬티와 검은 색 브래지어를 했다. 스커트도
  검은 색이었고 셔츠는 배꼽 티였다. 셔츠 위에는 검은 색의
  망사 니트를 걸쳤다.
  스타킹은 살색의 얇은 밴드 스타킹을 했다.  팬티 스타킹을
  신으면 스커트 속으로 함부로 들어오는 손님들의 손을 방지
  할 수 있으나 여름이라 꽉 끼는 팬티 스타킹이 싫었다.
  숙희와 문미가 먼저 나갔다. 숙희는 방을  얻지 못했는데도
  차를 한 대 가지고 있었고 운전 면허증까지 있었다. 시동을
  걸고 에어컨을 틀기 위해 먼저 나간 것이다.
  현관문을 잠글 때 지영은 기분이 미묘했다.  숙희와 문미가
  분명히 먼저 나갔는데도 누군가 집안에 있는 듯한 기분이었
  다. 지영은 문을 열고 다시 집안으로 다시 들어갔다.
  기분이 께름칙한 것은 수돗물을 잠그지 않았거나 가스를 틀
  어 놓았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지영이 아니더라도  숙희나
  문미가 그랬을 수도 있었다. 그러나 가스도  수도도 이상이
  없었다. 창문도 닫혀 있었고 커텐까지 쳐져 있었다.
  지영은 고개를 갸우뚱했다.
  "언니!"
  연립 앞 골목에서 문미가 지영을 부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지영은 창을 통해 골목을 내려다보았다. 문미가  숙희의 차
  앞에서 손을 흔들고 있었다.
  "왜?"
  "빨리 내려와!"
  "알았어."
  지영도 손을 흔들었다. 지영은 현관문을 잠그고  다시 밖으
  로 나왔다. 계단을 내려가는데 누군가 또 다시 뒷덜미를 잡
  아당기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내가 왜 이러지?)
  지영은 불길했다. 누군가 지영을 밖으로 나가지  못하게 잡
  아당기고 있는 것 같았다. 지영은 세차게 고개를 흔들었다.
  지영은 귀신이나 영혼 같은 것은 믿지 않았다. 지영과 같은
  직업을 갖고 있는 여자들은 점도 잘 보러  다니지만 지영은
  결코 그런 일을 하지 않았다.
  "하여튼 언니는 대단한 슬로우 모션이야."
  지영이 차에 타자 동반석에 앉아 있던 문미가 나불거렸다.
  "간다?"
  선글라스까지 낀 숙희가 뒤를 힐끗 돌아보며 물었다.
  "그래."
  지영은 건성으로 대답하고 자신이 방금 나온  연립주택 3층
  을 쳐다보았다. 착각이었을까. 그때 지영은  창문에서 커텐
  이 펄럭거리는 것을 얼핏 보았다. 지영은 가슴이 섬뜩했다.
  창문은 분명히 닫았기 때문에 커텐이 펄럭거릴 까닭이 없었
  다. 지영은 세차게 고개를 흔들었다.
  "왜 그래 언니?"
  문미가 지영을 돌아보고 물었다.
  "아냐. 창문을 안 닫은 것 같아서 "
  지영은 말꼬리를 얼버무렸다.
  "내가 닫았어. 그리고 여름인데 열어 놓으면 어때?"
  문미가 종알거렸다. 창문을 닫은 것은 지영도  확인한 일이
  었다. 그런데 무엇이 펄럭거린  것인가. 지영은 차가  골목
  모퉁이를 돌기 전에 다시 한 번 창문을 쳐다보았다.
  아
  그때 지영은 창문에 흰옷을 입은 여자가 서 있는 것을 분명
  히 보았다. 그 여자는 지영에게 돌아오라고 손짓을 하고 있
  었다
  나는 영혼의 존재를 믿는다.  아니 악마의 존재를  믿는다.
  그러나 이지영은 믿지 않고 있었다. 그러나  믿지 않으면서
  도 이지영은 불길한 예감을 느끼고 있었다.
  무엇인지 알 수 없지만, 신비스러운 존재가  이지영에게 불
  길한 일이 닥치리라는 것을 예고하고 있었다.  그렇다면 그
  것은 도대체 무엇인가. 나는 고개를 흔들었다. 그것은 이지
  영이 그러한 지옥을 경험한 후에 일어난 생각인데  미리 예
  감을 느낀 것처럼 잘못 알고 있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나는 미국에서 심리학 공부를  하면서 인간 정신의  신비에
  놀라곤 했었다.
  지영은 얼굴이 어두워졌다.  지영은 고개를  앞으로 하고
  무겁게 한숨을 내쉬었다.
  "비가 온 댔어."
  문미의 종알거리는 소리에 지영은 시무룩하게 대꾸했다. 숙
  희의 차가 골목 모퉁이를 도는 바람에 흰옷을  입은 여자가
  누구인지 확인할 수 없었지만 그 여자는 죽은  지영의 언니
  였다. 언니의 영혼이다. 아니 언니의 영혼이라고 생각했다.
  "하늘이 멀쩡한데 무슨 비야?"
  "요즈음 일기예보는 정확해."
  "일기예보 들었어?"
  "응."
  "비올 확률이 얼마나 된대?"
  "90푸로."
  "와!"
  문미가 입을 벌리고 놀라는 시늉을 했다.
  숙희의 차가 큰길로  나섰다. 일기예보에서는  비올 확률이
  90푸로나 된다고 했는데도 거리에는 희디흰  햇살이 난무하
  고 있었다. 비가 올 것 같지 않은 날씨였다.  사람들의 어깨
  는 축 늘어져 있었고 마른 먼지가 풀썩풀썩  일어나고 있었
  다. 며칠째 계속되는 오뉴월 불볕더위였다.
  "장마가 시작되는 거 아니야?"
  모처럼 숙희가 입을 였었다. 숙희는 하얀 바지와 하얀 상의
  를 입고 있었다. 숙희의 하얀 피부와 잘 어울렸다.
  "장마는 다음 주부터라고 했는데 모르지."
  "날씨도 더운데 우리 내일 영화 구경이나 갈까?"
  "영화?"
  문미의 말에 숙희가 물었다.
  "날씨가 더울 때는 무서운 영화를  보는 거래. 카피 캣이라
  는 영화 들어왔던데 "
  "넌 돈 벌어서 다 쓰기만 할거니?"
  "쓰자고 버는 돈인데 뭐."
  문미가 입을 삐쭉 내밀었다.
  차는 어느 사이에 왕십리 로터리를 지나 한양대  쪽으로 달
  리고 있었다. 화양리 로터리에서 상계동  방향으로 빠질 모
  양이었다
  이지영은 깊은 잠 속에 빠져 있다.
  햇살이, 여름 하오의 따가운 햇살이  블라인드의 틈새로 스
  며들면서 안락의자에 누운 이지영의 얼굴에  기묘한 무늬를
  그리고 있다. 나는 이지영의 얼굴에  그려진 블라인드 무늬
  를 보고 죽음을 생각한다.  강렬한 여름의 햇살. 모든  것을
  하얗게 표백시키는 희디흰 햇살. 왜 눈이 시리게 밝은 햇살
  을 보고 죽음을 생각했을까.
  나는 그때 죽은 유미경을 생각하고  있었다. 이빨에 물어뜯
  긴 된 왼쪽 가슴, 가슴을 물어 뜯겼을 때 비명을 지르기 잔
  뜩 벌어진 입 문득 유미경의 알몸이 나로 바뀌고 살인마가
  나의 가슴을 이빨로 물어뜯는다. 나는  처절한 비명을 지른
  다.
  이번에는 내가 살인마로 바뀐다. 나는  살인마가 되어 유미
  경의 뽀얀 유방을 한  입 깨문다. 밍밍한 살덩어리,  입안에
  괴는 비릿한 피냄새
  최면에 걸려 안락의자에 누운 이지영이 입술을 비틀며 묘한
  신음소리를 낸다. 나는 화들짝 놀라 망상에서  깨어난다. 내
  손이 이지영의 오른 쪽 유방을 움켜쥐고 있다.
  "어린 시절 어디서 살았지?
  나는 다시 의사로 돌아간다. 평온하고  온화한 음성으로 이
  지영을 과거로 이끈다.
  "시 골 "
  이지영이 꿈꾸듯이 몽롱하게 대답한다.
  "과거로 어린 시절로 돌아가요.  천천히 초등학교 시절
  여름 "
  "네."
  "무엇이 생각나죠?"
  "담배밭 "
  이지영이 낮게 대답했다.
  지영이 어린 시절을 보낸 시골. 그 시골에서는 여름이 잎
  담배의 넓이처럼 지루하고 길었다. 6월부터  시작되는 여름.
  보릿단을 태우는 것 같은 숨이 턱턱  막히는 더위. 두엄 냄
  새. 밤꽃 향기 장마가 지면 집안이 온통 잎담배 찌는 냄새
  로 가득했다
  나는 이지영의 어린 시절에서 다시 그 날로  돌아오게 만든
  다. 그 날, 야수파에게  그녀가 납치되던 날,  그 날 그녀가
  무엇을 생각하고 있었는지 살펴 볼 생각이다.
  갈비집 도원은 태릉 입구에 있었다. 다리를 건너 오른 쪽
  으로 핸들을 돌리자마자 바로 도원이었다. 전에도 몇 번 왔
  었기 때문에 낯설지는 않았다. 점심때가 지나서인지 주차장
  은 한가했다. 차에서 내려 안으로  들어가자 그래도 테이블
  에 절반쯤 사람들이 앉아 있었다.
  지영은 방에 들어가 앉았다. 방에는  갈비집 특유의 냄새가
  배어 있었고 여름이라 눅눅했다. 시골에서도 장마철이면 늘
  맡곤 하던 냄새. 곰팡이 피는 퀴퀴한 냄새가 돼지갈비 냄새
  와 함께 그 방에도 배어 있었다. 지영은 그 시간 시골을 생
  각했다. 자신에게 위험이 닥쳐오던 날  그녀는 막연히 어린
  시절을 생각하고 있었다.
  장대질을 하듯이 퍼붓던  소나기가 잠시  꺼끔했다. 그러나
  칠금리 팽이산 뒤쪽 하늘에서 이따금  우뢰가 울었다. 지영
  은 배를 깔고 엎드려 방학숙제를 하고 있었고  지영의 언니
  는 툇마루에 앉아서 머리를 빗고 있었다. 집안은 곰팡이 피
  는 냄새가 가득했다. 장마  탓이었다. 8월 장마가  사흘이나
  계속되어 집안이 물걸레처럼 질펀하게 젖어 있었다.
  "언니 어디 가?"
  지영이 새 옷을 입고 머리를 빗질하는 언니를 보고 물었다.
  지영의 언니는 중학교를 근근히 졸업하고 집에서 놀고 있었
  다. 그녀는 지영이보다 여섯 살이 더 많았다.
  "그래."
  지영의 언니가 보일 듯 말 듯 미소를 지었다.
  "어디?"
  "서울."
  "서울에 왜?"
  "돈 벌러."
  "엄마가 돈 벌어 오래?"
  "아니."
  "그런데 왜 돈을 벌러 가는 거야?"
  "너 대학교에 보내 주려고."
  "나 대학교 안 가도 되는데 언니."
  "여자도 대학을 졸업해야 돼."
  "왜?"
  "지금은 얘기하고 싶지 않아."
  지영의 언니가 새침한 표정을 했다.  그때 지영의 아버지는
  충주 비료공장에 다니다가 병으로 죽었고  지영의 어머니가
  잎담배를 따거나 엮는 일 따위의 품앗이 일을  하며 지영의
  자매를 키우고 있었다. 그런데 지영의  어머니가 담배밭 주
  인 황씨를 만나면서 까닭없이 지영의 언니를 구박하고 있었
  다. 지영의 언니가 집을 떠나기로 한 것은 어머니의 구박이
  싫었기 때문일 것이었다.
  "엄마한테 얘기했어?"
  "아니."
  "언제 갈껀데."
  "지금."
  "가지 마라."
  그녀는 울상을 짓고 언니에게 말했다.
  "언니 없으면 난 어떻게 해?"
  "내가 돈을 많이 벌면 너를 데리러 올게."
  "나두 따라가면 안돼?"
  "안돼."
  지영의 언니가 야멸차게 잘라 말했다.  지영은 입술을 삐쭉
  내밀었다. 공연히 눈물이 삐져 나오려고 했다.  며칠 전부터
  언니가 수상쩍기는 했었다. 어머니가 눈이 뒤집혔다고 공책
  에 끄적거리기도 했고, 아버지가 보고 싶다고 써 놓기도 했
  었다.
  어머니가 황씨를 만나는 것은 지영도  몇 번 본 일이  있었
  다. 황씨는 사람들이 모두 잠든  밤중에 도둑고양이처럼 살
  금살금 어머니의 방으로 기어들었고 그럴 때면 언니가 부러
  큰소리로 기침을 했다.
  "망할 년!"
  어머니가 언니에게 들으라는 듯이 말했다.
  "저 것이 왜 그렇게 영악스러워?"
  "왜요?"
  "내가 올 때면 영락없이 기침을  해대거든. 어떨 때는 간이
  떨어지는 것 같더라니까."
  "내일 단단히 야단을 칠께요."
  "야단은 무슨 한창 예민한 나이인데 이리 오소."
  "아이."
  어머니의 교성이 들리면 지영의 언니는 이불을 푹 뒤집어썼
  다.
  지영이 어린 시설을 생각하고 있을 때 삐삐가 진동을 했다.
  허리춤에서 삐삐를 뽑아 번호를 보자 전택현의 핸드폰 번호
  가 찍혀 있었다. 지영은 갈비를 먹다가 말고 일어섰다.
  "어디 가?"
  문미가 고기를 뒤집다가 말고 물었다.
  "전화 좀 걸고 올게."
  "누구야?"
  "둥기."
  지영이 건성으로 대답했다. 둥기란 기둥서방을 바꿔서 부르
  는 그녀들의 은어였다. 지영의 둥기는 룸싸롱 지배인이었던
  전택현이었다. 지영은 그가 싫지도 좋지도 않았다.  그가 부
  인이 있는 서른 다섯 살이나 먹은 남자인데도  계속 만나는
  것은 그런 애매모호한 지영의 감정 때문이었다.
  "저예요."
  지영은 카운터의 전화로 전택현에게 전화를 걸었다.
  "집에 전화를 했더니 안 봤대?"
  "지금 밖이에요."
  "어디?"
  "태릉이요."
  "태릉? 거기서 뭐해?"
  "갈비 먹고 있어요."
  "좋겠다."
  그가 부러운 듯한 말투로  말했다. 지영은 후후 하고  웃었
  다.
  "왜 전화했어요?"
  "보고 싶어서."
  "피!"
  지영은 코웃음을 쳤다. 그러나 보고 싶다는 그의 말이 싫지
  않았다. 그는 오늘 밤 외박을 나가지 말라고 요구해  올 것
  이다. 그는 지영과의 관계가 룸싸롱 사장에게  알려지자 레
  스토랑으로 일자리를 옮겼다.
  "일 끝나고 데리러 갈께."
  "알았어요."
  지영은 경쾌한 목소리로 대답을 하고 전화를  끊었다. 문득
  하체에서 찌릿한 전율이 일어나 전신으로  물결처럼 번지고
  있었다. 지영은 그 감미로운 기분을 스커트  사이로 느끼며
  문미와 숙희가 앉아 있는 테이블을 향해 하늘거리고 걸어갔
  다.
  "뭐라 그래?"
  궁금증이 많은 문미가 물었다.
  "일 끝나면 데리러 오겠대."
  지영은 부러 짧게 끊어서 대답했다.
  "언니 그 사람 좋아 해?"
  "응."
  "그 사람 부인 있잖아?"
  "그러니 부담이 없지. 총각을 둥기로 만들면 괜히 시시콜콜
  참견하고 재미도 없어. 돈 벌어서 뜯기기 일쑤고 "
  "그래도 좋아하는 사람을 다른 여자와 같이  소유한다는 것
  은 별로야."
  문미가 자기 잔에 맥주를 따르며 말했다. 지영은 문미의 말
  에 얼굴이 어두워졌다. 문미의 말이 옳았다. 엄격한 의미에
  서 그는 지영의 소유가 아니었다.  잠자리를 같이 하고  나
  면 그는 새벽이라도 반드시 집으로 돌아가곤 했다.
  그때 지영은 생각했다. 이 사람과 함께 자고  싶다고. 그와
  함께 자고 그와 함께 아침을 먹고 부부들이 그러는 것처럼
  가끔은 사랑싸움도 하고 그에게  강짜를 부리고 싶기도  했
  다. 그러나 그는 지영의  소유가 아니었다. 그런데  남자를
  소유한다는 것이 맞는 말일까.
  "냉면 뭐 먹을래?"
  숙희가 화제를 바꾸었다.
  "응?"
  "물냉면 먹을래? 비빔냉면 먹을래?"
  "아무거나."
  지영은 건성으로 대꾸했다.
  지영은 언니의 가방을 들었다. 언니가 가방을 빼앗을 듯 하
  다가 그만 두었다. 대신  언니는 비닐 우산을 지영의  머리
  위에 씌워 주었다. 지영은 언니와 함께 말없이 충주 시내를
  향해 걷기 시작했다. 빗발이 또 후드득대고 있었다. 하늘은
  벌써 캄캄하게 어두워져 있었다. 먹구름이 단월평야 쪽에서
  몰려와 하늘을 덮어버린 탓이었다.
  빗발은 푸숫했다. 지영은 계속 걸었다. 논에는 벼들이 웃자
  라 있었다. 밭둑에 심은 옥수수는 지영의 키보다 더 커져서
  알이 영글어가고 있었다. 붉은 수염이 달린  옥수수가 통통
  했다. 지영은 문득 옥수수가 먹고 싶어졌다. 언니를 배웅하
  고 돌아오다가 주인 몰래 옥수수를 따서  쩌먹어야지. 지영
  은 그런 생각을 했다. 갑자기 시장기가 느껴졌다.
  충주 실업고등학교 앞의 다리를 건넌 뒤에 철길을  따라 걸
  었다. 냇물은 사흘 동안 계속된 장마로 붉은 흙탕물이 넘치
  고 있었다. 사람들이 비를 맞으며 장마에  떠내려오는 물건
  들을 건지고 있었다.
  평소 같았으면 지영은 냇가에서 사람들이  장마에 떠내려오
  는 물건들을 건지는 것을 구경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언니를 배웅 중이었다. 자세히 알 수 없었지만 그것이 언니
  와의 마지막이라는 것을 지영은 막연히 느끼고 있었다.
  충주 역에 이르렀다. 서울행 보통급행 열차는  아침과 저녁
  한 번씩 뿐이었는데도 역사에는 사람들이 별로 없었다.
  "잘 해라. 지영아."
  언니가 지영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지영은  언니의
  그 말이 무슨 뜻인지도 모르면서 고개를 끄덕거렸다.
  멀리서 기적소리가 뿌웅 뿌우웅 들려왔다. 열차가  제천 쪽
  에서 오고 있는 모양이었다. 언니는 서울행 표를 끊었고 지
  영은 언니가 표를 끊는 모습을 우두커니 쳐다보고 있었다.
  어쩐지 언니가 추워 보였다. 언니는 중학교 교복인 검은 스
  커트와 반소매의 흰 블라우스를 입고 있었다.  머리는 아직
  도 단발머리였다. 목뒤가 썰렁해 보였다.
  "이제 그만 가라. 조금 있으면  비가 더욱 많이 쏟아질  거
  야."
  표를 끊은 언니가 지영에게 돌아왔다.
  "괜찮아. 나는 비를 맞는 것이 좋은걸 뭐."
  그것은 사실이었다. 지영은  선머슴아처럼 곧잘 비를  맞고
  돌아다녔기 때문에 아버지가 그 놈의 기집애 꼭  사내 녀석
  같다니까. 사내로 태어날 놈이 잘못해서 기집애로 태어났어
  하고 너털거리고 웃곤 했었다. 에고 저 놈 하나만 고추를
  달고 나왔으면 얼마나  좋을꼬. 아버지는 이따금  방바닥이
  꺼져라 한숨을 쉬기도 했었다.
  "우산은 니가 가져가."
  "언니가 가져 가. 언니는 서울까지 가니까."
  "나는 기차를 타니까 괜찮아."
  "기차는 비가 새지 않아?"
  지영은 그때까지 한 번 도 기차를 타 본 일이 없었다.
  "그럼."
  언니가 고개를 끄덕거렸다. 지영은 언니에게서 우산을
  받았다.
  "내가 어디에 있던지 너를 지켜 줄게."
  이내 개찰이 시작되었다. 언니는 뜻도 모를  말을 중얼거린
  뒤 지영의 손을 꼬옥 쥐었다가 놓고는 눈물이  글썽하여 개
  찰구로 빠져나갔다. 아직도 기차는 오지 않고 있었다.
  지영은 언니가 떠나가는 모습을 보기 위해 시무룩하게 역사
  를 빠져 나왔다. 역 광장에서 달천리 쪽으로 조금만 걸으면
  달천평야가 펼쳐져 있었고  달천평야를 가로지르며  철로가
  끝없이 길게 누워 있었다.
  지영은 파란 비닐 우산을  쓰고 국도를 걸었다. 그만  해도
  아스팔트가 깔린 충주에서 청주로 가는 국도에는 빗물이 내
  를 이루고 있었다.
  이내 뿌연 빗발 사이로 달천평야가 나타났다.  지영은 열병
  을 하듯 길게 늘어서 있는 프라다너스 가로수  사이로 철로
  가 놓인 언덕을 바라보았다.
  아직 열차는 오지 않고 있었다.
  철로가 지나가는 논에도 벼들이 파랗게 웃자라  있었다. 지
  영은 초록색 들판을 보고 공연히 눈이 시려왔다.
  뿌웅.
  뿌우웅.
  기적소리가 길게 울려왔다. 이어서 열차가 덜컹대며 플랫트
  홈으로 달려왔다. 열차는 충주 역에 5분쯤  정차했다. 언니
  가 열차에 타는 모습을 볼  수도 없었고 언니가 어느  칸에
  탔는지도 알 수 없었다. 그래도 지영은 언니가 열차에 타는
  모습을 막연히 짐작할 수 있었다.
  언제부터인가 지영은 자신이 볼 수 없는 것, 자신이  알 수
  없는 것은 막연한 공상으로 이루었다. 지영은  유럽에 가보
  지 못했으나 유럽을 상상했고, 서울에 가보지  못했으나 서
  울이 어떤 모습일 것이라고 짐작했고, 천국에  가보지 못했
  으나 천국이 얼마나 좋은 곳이라는 것을 훤히 알았다.
  뿌웅.
  뿌우웅.
  열차의 기적소리가 빗발 사이로 처량하게  들려왔다 지영은
  그렇게 처량한 기적소리를  아직까지 들어본 일이  없었다.
  그 기적소리는 빗발이 뿌리는 달천평야의 잿빛 하늘에 퍼지
  면서 지영의 가슴을 더욱 쓸쓸하게 울렸다.
  덜컹덜컹
  열차가 레일 위를 굴러가는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그 소
  리가 점점 커지더니 마침내 충주 역사를 빠져  나온 열차의
  붉은 앞머리가 시야에 들어왔다. 피처럼 붉은  열차의 앞머
  리는 거대한 몸통을 이끌고  서서히 지영의 앞으로  달려와
  시야를 가득 채우고 멀어지기 시작했다.
  "언니 잘 가!"
  지영은 열차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언니가  그녀의 소리를
  들었는지 어쨌는지는 알 수 없었다. 지영은  달리는 열차에
  서 자신을 향해 손을 흔드는 언니의 환영을 보았다.
  "어디서든지 너를 지켜 줄게."
  열차가 점점 멀어져 가더니 이내 빗줄기 사이로  사라져 버
  렸다. 지영의 귓전에는 열차 바퀴가 레일 위를 덜컹대며 굴
  러가는 소리가 이명처럼 들리고 있었다. 아마  그것이 언니
  와의 마지막이라는 예감이  들었나 보았다. 지영은  갑자기
  눈물이 푹 솟았다.
  지영은 가족들을 생각할 때마다, 그들이 하나  둘씩 자신의
  곁을 떠나갔다는 것을  생각한다. 물론 사람들은  이런저런
  이유로 죽고 결국은 지영도 죽게 될 것이다. 그러나 지영의
  나이 스물 넷, 결혼을 했다면 남편이 있을 것이고  볼이 사
  과처럼 붉은 아이도 하나  쯤 있을 것이다. 그런데  지영은
  결혼을 하지도 못했고 아이도 없었다.
  지영은 외로웠다. 가족이 그리웠다. 지영이 어렸을 때 돌아
  가신 아버지가 그립고 빗속으로 사라진 열차를 타고 떠나서
  다시 돌아오지 않는 언니도 사무치게 보고  싶었다. 심지어
  아버지가 돌아가신 지 2년도 안 되어서 담배밭 주인 황씨와
  눈이 맞은 어머니마저 그리웠다. 지영이 룸싸롱 지배인이었
  던 전택현을 계속 만나는 것도 가족에 대한  절절한 그리움
  때문이었다.
  나를 사랑해?
  언젠가 그가 물었었다.
  아니.
  지영은 고개를 살래살래 흔들며 대꾸했다.
  그런데 왜 만나?
  아저씨가 내 가족 같으니까.
  별난 이유도 다 있네.
  가족이 있는 사람은 가족이 없는 사람의 그리움  따위는 모
  를 것이다.
  바람이 분다. 무성한 포플러 잎사귀가  살랑거린다. 하늘은
  점점 잿빛으로 물감을 묻혀 가고 있다.  거리가 어두워지고
  백미러에 비친 지영의 얼굴에도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워진
  다.
  "요즘엔 일기예보가 너무 정확하단 말이야."
  이번엔 뒷자리엔 앉은  문미가 종알거렸다. 문미는  갈비에
  냉면까지 잔뜩 먹어 다리를 쩍 벌리고 시트에  기대앉아 있
  었다. 식곤증이 나는 모양이었다. 팔을 벌리고 하품을 늘어
  지게 했다. 지영은 문미의 짧은 스커트 사이로 그녀의 속옷
  을 본다. 속옷은 노란 색이고 삼각형이라 도툼한 부분이 도
  발적으로 드러나 있었다.
  "언니 뭘봐?"
  문미가 눈을 샐쭉 흘겼다. 숙희는 차를 후진시킨 뒤 기어를
  바꾸고 있었다. 방향등이 오른쪽을 가리키며 찰칵칼칵 소리
  가 났다. 태릉 쪽으로 가다가 유턴을 하기 위해서였다.
  "보기는 "
  "볼 테면 자세히 봐라!"
  문미가 스커트 자락을 잡아서 위로 들추고  흔들었다. 지영
  은 어이가 없어서 피식 웃었다.
  "노골적으로 드러난 것은 아름다운 것이 아니야."
  숙희가 백미러로 뒤를 힐끗 살피고 말했다.
  "목욕탕에 같이 가면 보고 싶지 않은데 스커트를 입고 있으
  면 같은 여자라도 그 속을 보고 싶으니 신의 조화지 "
  숙희는 부처님 같은 말을 하고 있었다.
  "언니도 보고 싶어?"
  "얘가 누굴 변태인 줄 아나?"
  숙희가 재빨리 핸들을 오른쪽으로 꺾고  액셀레이터 페달을
  밟았다. 차가 부릉 하는 소리와 함께 큰길로  진입했다. 숙
  희는 큰길에 진입하자마자 방향등을 왼쪽으로 바꾸고 1차선
  진입을 시도했다.
  지영은 숙희의 말에 공감했다. 전택현도 지영이  옷을 벗고
  있을 때는 그다지 흥미를 느끼지 않았다.  무덤덤한 시선으
  로 지영을 보고 담배를 피울 뿐이었다. 그러나 지영이 스커
  트를 입고 있으면 공연히  궁둥이를 만지고 블라우스  위로
  가슴을 만지려고 했다. 전택현이 지영을 강제로  가졌을 때
  도 그랬었다.
  처음엔 가슴이 답답했다. 다음엔 알 수 없는,  그러나 기분
  좋은 전율이 하체를 짜릿하게 했다. 지영은 잠결에, 지영이
  룸싸롱 손님과 함께 외박을 한 것이리라고  생각했다. 손님
  과 함께 외박을 하면 대개의 손님들은 두 번씩 관계를 가지
  려고 한다.
  처음엔 너무 빨리 끝나서 아쉬웠을 것이다.  손님들은 술을
  마시고 샤워를 한 뒤에 다시 지영을 침대에 눕힌다.
  지영은 그때까지는 손님들의 요구를 순순히  들어주는 것이
  다. 손님들은 영계도 아닌  지영과 함께 자기 위해서  적지
  않은 돈을 투자했으니까. 적어도 돈의 가치만큼  상품이 되
  어야 한다.
  지영은 때때로 자신이  상품이라고 생각한다. 돈에  팔리는
  상품. 10만원 짜리가 되기도 하고 50만원 짜리가 되기도 하
  지만 돈의 가치만큼의 상품이 되어야 한다는 생각에는 변함
  이 없다. 그러나 새벽에, 지영이 한창 곤하게  잠들어 있을
  때, 손님이 한 번 더 지영을 갖기를 원하면  지영은 거절한
  다.
  피로해요.
  졸리워 죽겠어요.
  지영이 그렇게 말하면 대개의 손님들은  지영에게서 떨어져
  가버린다.
  그러나 손으로 지영을 자극하는 손님도 있다.  지영은 손님
  의 자극에 의해서, 지난밤의 술에 취하여 머리가 패는 듯이
  아프고, 목이 타는 듯한 갈증이 나지만 자극이 될  때가 있
  다. 그날도 지영은 손님이 자신을 자극하는  것으로 생각했
  었다.
  "미안해."
  낯익은 목소리가 말했다. 지영은 눈을 떴다. 뜻밖에 지영의
  스커트를 들추고 있는 사람은 룸싸롱 지배인이었다.
  "아저씨 "
  지영은 졸리운 목소리로 말했다.
  "미안해 경아야."
  전택현이 중얼거렸다. 룸싸롱에서 지영은 한경아(韓京阿)라
  는 가명을 사용하고 있었다.
  "아직 퇴근 안했어요?"
  지영은 자신의 팬티를 쥐고 있는 그의 손을  떼어내며 말했
  다.
  "너 때문에 퇴근 못했어."
  "왜요?"
  "너를 갖고 싶어."
  "내가 무슨 물건인가 "
  지영은 누운 채 머리카락을 뒤로 쓸어 넘겼다.
  "한 번만 갖게 해줘."
  전택현이 어린아이처럼 졸랐다.  지영은 쓴웃음이  나왔다.
  그는 상체에는 와이셔츠에 넥타이까지 매고  있었으나 하체
  에는 아무 것도 걸치지 않고 있었다. 그의 물건은  잔뜩 성
  이 나 있었다.
  지영은 그의 눈을 쳐다보았다. 그의 눈이  벌겋게 충혈되어
  있었다.
  "부탁이야."
  그가 계속 졸랐다. 지영은 무겁게 한숨을 내쉬었다. 룸싸롱
  같은 술집에 근무하다보면 지배인이나 웨이터들로부터도 몸
  을 요구받을 때가 있었다. 거절하면 그 자리에서 찬밥 신세
  가 되었다. 그들에게는 몸뿐이 아니라 이따금  돈까지 상납
  해야 좋은 손님이 있는 방에 들어갈 수가 있는 것이다.
  "장화 있어요?"
  "가져올게."
  그가 후닥닥 룸밖으로  달려나갔다. 지영은 그가  룸밖으로
  나가자 재빨리 스커트 안의 팬티를 돌돌 말아서 벗었다.
  "고마워. 정말 고마워 경아야."
  일이 끝나자 그가 땀을 흥건히 흘리며 말했다. 지영은 그의
  등을 힘껏 껴안았다.
  "아저씨. 내 애인이 되어 주세요."
  그가 몸속에 있을 때 고마움을 느낀 것은  오히려 지영이었
  다
  나는 담배를 피워 문다. 이지영 그녀가  야수파에게 죽임을
  당한 전택현과의 관계를 얘기하고 있었다. 나는  흡사 내가
  전택현과 섹스를 하는 듯한 착각을 했다.
  "기분이 어땠지?"
  "좋았어요."
  이지영이 졸음에 겨운 목소리로 대답했다.
  "어떻게?"
  "처음엔 귀찮았는데 차츰차츰 좋아졌어요."
  "황홀했나?"
  이것은 물론 환자에게 질문을 해서는 안되는 내용이었다.
  "황홀한 것은 아니고 "
  "지영이도 했나?"
  "네."
  "이제 그날 얘기를 해봐. 비가 오기 시작했다고 했지?"
  "네."
  안락의자에 누운 환자가 잠시  생각에 잠기는 듯한  표정을
  했다.
  후론트 그라스에 빗방울이 하나 둘씩 묻어나기 시작했다.
  지영은 차 유리창을 조금 열고 담배를 피우기 시작했다. 차
  창으로 들어오는 바람에도 축축한 물기가 묻어 있었다.
  지영은 전택현을 생각했다.  지영이 애인이라고  생각하는
  남자. 전택현은 비가 오는 것을 무척 좋아했다.  지영은 그
  때 자신이 그를 살해하는  일에 가담하게 되리라는  사실을
  꿈도 꾸지 못했었다. 그런데 그는 그 사실을 예감하고 있었
  을까.
  지영은 악몽 같은 그 사건이  끝난 뒤에 때때로 그  생각을
  했다. 그는 자신의 죽음을 예감했을까. 지영을 만나러 오면
  서 뭔가 불안한 예감을 느끼지는 않았을까.
  지영은 언니가 존재하는 것을 느낀다. 전에도  말했지만 지
  영은 영혼 따위는 믿지 않는다. 그런데도  언니가 존재하는
  것을 믿으니 아이러니일 수밖에 없다. 언니는 말했었다. 어
  디서든지 너를 지켜 줄게.
  비가 들이치고 있다. 숙희가 윈도우 브러시를  작동시켜 후
  론트 그라스에 안개꽃처럼 묻어 있는 빗방울들을 밀어낸다.
  지영은 피우던 담배를 차창 밖으로 던져버린다.
  "언니 3만원 벌금."
  입이 심심한 지 문미가 재잘댄다.
  "3만원이 아니라 5만원이야."
  숙희도 거들었다. 지영은 그들의 얘기에 피식 웃었다. 어느
  새 빗발이 제법 굵어져 있었다
  나는 이지영이 언니의 존재를  믿고 있는 사실에  주의력을
  기울였다. 이지영의 언니는 죽었다. 그런데도  이지영은 마
  치 언니가 영혼으로 존재하여 자신을 돌보는 것으로 생각하
  고 있었다. 어쩌면  이지영이 야수파의 소굴에서  극적으로
  탈출한 것도 언니의 영혼이 자신을 돌보고 있다는  믿음 때
  문이 아니었을까.
  인간의 심리에서 믿음은  절대적인 가치를 갖는다.  어떠한
  역경 속에서도 자신이 쓰러지지 않고 일어설 수  있다는 믿
  음을 가지는 사람이 다시 재기하고 종교를 절대적으로 믿는
  사람이 기적을 믿는 것도 같은 이유였다.
  거실에서는 라벨의 볼레르가 격정적으로 흐르고 있었다. 나
  는 흔들의자에 앉아  몸을 가볍게 흔든다.  다시 지옥 같은
  밤이 와 있었다. 어느 사이에 칠흑의 어둠이 아파트 광장을
  누지르고 끈적거리는 바람이 악마처럼 광장을  누비고 있었
  다.
  나는 프랑스 입셍 롤랑사(社)의 핑크색 실크 네글리제 차림
  이다. 지금 네글리제의 부드러운 천  사이로 악마가 음흉하
  게 촉수를 뻗쳐 온다. 나는 악마의 촉수를, 악마의 혓바닥을
  더 깊고 뜨겁게 느끼기 위해 다리를 벌린다.
  태희가 보이고 있다. 이지영의 의식세계를 들여다보기 시작
  하면서 다시 나타나고 있는 태희.  흑백사진처럼 희미한 실
루엣.
  나는 내 안에서 점점 뚜렷해지는 태희의 얼굴을  보면서 이
  지영을 생각한다.
  비가 퍼붓고 있기 때문일까. 초저녁부터 룸싸롱은 흥청대
  고 있었다. 룸마다 손님들이 가득 차는 바람에 여자들이 모
  자랐다. 지영은 지배인에게 부탁하여 집에서  쉬고 있는 숙
  희까지 불러 룸에 넣었다.
  "얘는 쉬지도 못하게 왜 불러?"
  숙희는 룸싸롱에 도착하자 공연히 지영에게 눈부터 흘겼다.
  "놀면 뭘해? 돈이나 벌지 "
  "여기 물 좋아?"
  "그날 재수지 물 좋은 데가 따로 있어?"
  지영은 숙희를 다룬 룸에 넣고 문미와 함께 5번  룸에 들어
  갔다. 5번 룸에는 비교적 매너가  좋은 30대의 의류 제조업
  자들이 술을 마시고 있었다. 지영이  문미를 데리고 들어간
  것은 그들이 자신보다 나이가 훨씬 어린 문미를  더 좋아하
  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소규모의 가내공장과 남대문 시장에
  점포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현금이 많았다.
  "어때? 외박할까?"
  지영의 옆은 앉은 박 사장이 두툼한 손으로  지영의 궁둥이
  를 두드리며 말했다.
  "벌써요?"
  지영은 눈을 휘둥그렇게 뜨는 시늉을  했다. 오늘밤은 지영
  의 애인인 전택현과 만날 예정이었다.  손님을 따라 외박을
  나갈 수가 없었다.
  "벌써가 뭐야? 술 더 취하기 전에 여관에 가야지 술 취하면
  괜히 하지도 못해."
  "애걔. 우리 아가씨  얘기 들으니까  박 사장님이 밤새도록
  보챘다던데요. 오죽하면 우리 아가씨가 코피를 쏟았을까."
  지영은 거짓말을 했다. 지영의 말에  박  사장은 기분이 좋
  은지 흥흥대고 웃고 문미가  호들갑을 떨며 어머,  어머, 박
  사장님. 정말 그렇게 쎄요? 나 박 사장님하고 외박할래 하
  는 바람에 좌중에 폭소가 터졌다.
  "난 정력 센 남자가 좋더라."
  "이년아. 박가만 센지 알아? 나는  박가보다 두 배나 더 세
  다."
  문미의 파트너인 강 사장이 문미의 어깨를 덥석 끌어안으며
  내뱉았다.
  "정말?"
  문미가 교태를 부렸다. 문미의 손이  거침없이 파트너의 바
  지춤을 더듬고 있었다.
  "내가 언제 거짓말하는 거 봤어?"
  "그런데 왜 까딱도 안 해?"
  "뭐?"
  "내가 만지는데도 고개만 팍 숙이고 있는데요?"
  "그럼 그 놈이라고 아무 때나 뱀대가리처럼  고개를 쳐드는
  지 알아?"
  "피! 거짓말! 강 사장님은 고개 숙인 남자야."
  "좋아, 그럼 이따가 외박 나가자."
  "좋아요."
  지영은 술을 훌쩍 마시고 박 사장에게 잔을 넘겨주었다. 박
  사장은 벌써 얼굴이  불콰해 있었다.  위스키는 임페리얼이
  두 병째였다. 안주가 세 개 들어왔으므로 술값이 1백만원이
  넘었을 것이다. 다른 룸싸롱에서는 그 정도면 술값이 2백만
  원이 넘지만 지영이 일하는 프린스는 비교적 술값이 저렴한
  편이었다.
  "외박 나갈래?"
  박 사장이 다시 지영의 귓전에 입김을 불어넣었다. 그의 손
  이 스커트 안으로 들어와서  지영의 궁둥이를 더듬고  있었
  다. 그는 정말 외박을 하고 싶은 것일까.
  "벌써요?"
  지영은 같은 말을 되풀이했다. 아직 9시밖에 되지 않았는데
  외박을 하면 오늘 장사는 그것으로 끝이 아닌가. 박 사장과
  강 사장이 돌아가도 아직 한 파트는 손님을 더 받을 수있는
  것이다.
  "넌 벌써밖에 모르니?"
  "12시는 되어야죠."
  "그럼 12시까지 뭘하란 말이야?"
  "호텔 잡아 놓고 기다리세요."
  "얘가 누구 안달하는 꼴을 볼려고 이러나."
  "그럼 악단 불러서 우리 노래해요."
  "싫다!"
  박 사장이 체신머리없게 머리를 흔들었다.
  "니가 싫다니까 안마시술소에나 갈란다."
  "애걔."
  지영은 부러 입술을 삐쭉 내미는 시늉을 했다. 일부 안마시
  술소에는 젊디젊은 아가씨들이 몸을 팔고 있다고 했다
  지영이 그날 박 사장을 따라갔으면  어떻게 되었을까. 나는
  나중에 그날의 일을 생각하고 운명이라는 것이 정말 작용하
  고 있구나 하는 생각을 했었다. 그날  박 사장이 외박을 요
  구했을 때 지영이 따라 갔었다면 결코 야수파를  만나지 않
  았을 것이다. 그런데 지영은 박 사장의 요구를 거절했다. 오
  로지 전택현을 만나기 위해서. 지영이 그날 박 사장을 따라
  갔다면 전택현도 비참하게 살해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지영은 박 사장의 팔짱을 끼었다. 박 사장이 브래지어 속
  에 자기앞 수표 한 장을  찔러 넣어 주기도 했지만  다음에
  다시 오라는 뜻이었다. 박 사장은 지영의  팔짱을 낀 채 룸
  싸롱 입구의 계단을 비칠대며 올라갔다.  밖에는 빗발이 흩
  뿌리고 있었다. 지영은 박 사장에게 우산을  펴주었다. 그리
  고 우산으로 앞을 가리고 박 사장의 귓볼에  가볍게 키스를
  했다.
  "자기 안녕."
  지영은 그의 귓전에 감미롭게 속삭였다.
  "그래 다음에 또 오마."
  박 사장이 손을 흔들고 빗발이 뿌리는 어둠  속으로 휘적휘
  적 걸어갔다. 껑충하게 키가 큰 그의 걸음이 휘청대고 있었
  다.
  지영은 몸을 부르르  떨었다. 무슨 일인지  알 수 없었으나
  갑자기 등줄기가 서늘한 한기가 엄습해  오고 있었다. 그때
  저만치 골목에 있는 전봇대 앞에 흰옷을 입은  여자가 언뜻
  지영의 시야에 비쳤다. 앙증맞게 키가 작은  여자였다. 지영
  은 자신의 눈을 의심했다.
  아아 저 여자는 누구인가.
  빛 바랜 검은 스커트를 입고 위에는 낡은  부라우스를 걸치
  고 스산한 빗줄기를 맞고 있는 여인
  지영이 10 여년  전에 충주역에서 서울로  떠나 보낸 여인.
  흩뿌리는 빗줄기 사이로 열차를 타고  사라진 여인. 지영의
  언니. 지영은 왜 그때 언니가 전봇대 앞에 서 있는 듯한 환
  영을 보았는지 모른다.
  언니는 울고 있었다. 어디서든지 지영을  지켜 주겠다던 언
  니. 그 언니가 박 사장을 따라가라고 지영에게 속삭이고 있
  었다.
  (내가 술에 취했어 )
  지영은 세차게 고개를 흔들었다. 이미 오래 전에 죽어 버린
  언니가 보이는 것은 술기운 탓이리라.  지영은 그렇게 생각
  하며 전봇대 쪽을 다시 노려보았다.  그러나 빗줄기가 점점
  세차게 뿌리고 있는 전봇대 앞에는 깊은 어둠뿐이었다.
  담배연기가 푸르게 흩어진다. 문미가 담배연기로  도너츠를
  만들어 내뿜고 있다. 지영은 창도 없는  여자들 대기실에서
  길게 다리를 뻗는다. 박 사장과 강 사장이 돌아간  뒤에 룸
  몇 개가 비어 버렸다. 초저녁에 흥청대던  손님들이 가버리
  자 갑자기 손님이 뚝 끊어졌던 것이다.
  "초저녁엔 흥청대더니 웬일이야? 비오는 날은  공치는 날이
  라더니 "
  문미가 손님이 없는 것을 한탄했다. 3호 룸에  들어갔던 윤
  희(潤姬)와 장미(薔薇)는 화장을 고치고 있었다.
  "그럴 줄 알았으면 강 사장이나 따라 외박을 할걸."
  "초저녁에 무슨 외박이니?"
  장미가 심드렁하게 문미의 말을 받았다.
  "오늘 공치면 어떻게 해?"
  "외박도 너무 자주 나가면 몸버려."
  "어차피 이런 짓 할  바에야 돈이나 버는 거지  뭐 언니도
  박 사장이 외박하자고 그랬지?"
  문미가 지영에게 질문을  던졌다. 지영은 담배를  플라스틱
  재떨이에 비벼 껐다.
  "하긴 언니는 애인을 만날 꺼니까 잘 된 셈이지."
  "언니 애인 있어?"
  윤희가 지영을 돌아보고 물었다. 윤희는 스커트를 걷어올리
  고 팬티를 갈아입고 있었다. 윤희가 들어간 3호  룸의 손님
  이 손장난이 심해 팬티가 다 젖었다는 것이다.
  "순 개새끼야."
  윤희는 손님이 가자마자 지배인이 눈을  흘기는데도 불구하
  고 룸싸롱 입구에 소금을 뿌렸다.
  5호 룸에 윤희와 장미, 그리고 지영이 배정을 받은 것은 11
  시가 조금 지났을 때였다. 손님들은 다른 곳에서  1차로 술
  을 마셨는지 눈 주위가 불그스레했다. 그러나  혀가 돌아가
  지 않고 몸이 비틀거리지 않는 것을 보면  만취하지는 않은
  것 같았다.
  "미스 한이에요. 잘 부탁 드립니다."
  처음 오는 손님이었기 때문에  지영부터 차례로 인사를  했
  다.
  "응. 넌 내 옆에 앉아라."
  40대의 머리가 벗겨진 남자가 지영을 지목했다.  흰 와이셔
  츠에 넥타이를 단정하게 매고 있었다. 지영은 그의 옆에 앉
  았다. 그의 몸에서 허브 냄새가 강하게 풍겼다.
  "미스 정이예요. 이름은 윤희구요."
  윤희도 인사를 했다.
  "미스 정은 내 옆에 앉아."
  체구가 작은 사내가  윤희를 지목했다. 장미는  자연스럽게
  몸이 호리호리한 사내의 파트너가 되었다. 몸이 호리호리한
  사내는 머리가 하ㅇ다. 지영은 파트너에게 양주를 따랐다.
  "드세요."
  지영이 파트너에게 몸을 기대며 말했다.
  "응."
  파트너가 한 손으로 지영의 어깨를 감싸안았다.
  "우리 집 처음이시죠?"
  장미도 파트너에게 몸을 기대며 눈웃음을 뿌렸다.
  "그래. 너도 한 잔 해라."
  장미의 파트너가 단숨에 술잔을  비우고 장미에게 빈  잔을
  넘겨주었다.
  "고맙습니다. 앞으로 자주 찾아주세요"
  장미가 두 손으로 공손히 술잔을 받았다.
  "너희들이 잘 하면 자주 찾아오는 거지."
  "서비스 잘해 드릴께요."
  "정말이야."
  "그럼요."
  "어디 "
  장미의 파트너가 장미의 가슴을 만졌다.
  "어머!"
  장미가 깜짝 놀라는 시늉을 했다. 지영의  파트너는 지영의
  허벅지 위에 손을 얹어 놓고 있었다. 그의  손은 투박했다.
  지영은 그의 손이 허벅지를 쓰다듬고 때때로 스커트 안으로
  침입하는 것을 막지 않았다. 어차피 룸싸롱에  오는 손님들
  은 여자들의 시중을 받기 위해 오는 것이다.
  임페리얼 한 병이 금세 비었다. 술 한 병을 더 시키고 나자
  손님들이 여자들에게 옷을 벗을 것을 요구했다.  시간은 벌
  써 12시가 가까워지고 있었다. 일단 손님들의  요구를 들어
  주기 위해 장미부터 차례로 부라우스를 벗었다.
  "이것도 벗어. 거추장스럽게 그건 왜 걸치고 있니?"
  여자들은 브래지어를 벗었다. 손님들은 이제 과육처럼 탐스
  럽게 열린 여자들의 가슴을 희롱하며 술을 마실 것이다.
  그날 밤, 지영이 마지막으로 들어간 룸싸롱의  손님들은 여
  자들을 철저하게 희롱했다. 여자들은 최후의 옷조각까지 벗
  기운 채 술을 마셨고 그것이 여자들의 일과이기도 했다. 그
  러나 지영은 그날 그들에게 화를 냈고 그들도  지영에게 화
  를 냈다.
  "이것들이 비싼 돈 내고 술 마실 땐 그만한  가치를 해야지
  뭐하는 짓들이야?"
  지영의 파트너는 지영에게 눈알을 부라렸다. 지영은 고개를
  숙인 채 대꾸하지 않았다. 그래도 그들이 술을 다  마실 때
  까지 버티었고 끝내 외박을 하자는 요구를 거절했다
  아파트의 어두운 광장에 음습하고  축축한 바람이 불고  또
  빗발이 후드득대고 있었다. 나는 밤이 깊어갈수록 머릿속이
  투명해진다. 이지영은 가혹한  운명을 비켜갈 기회가  여러
  번 있었다. 그런데도 그녀는 그 기회를 놓친  것이다. 기이
  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악마가 그녀를 원했기 때문인가 ?)
  이지영은 전택현을 사랑하지 않고 있었다. 이지영은 전택현
  을 있으면 좋고 없으면 그만일 정도의 기분으로  만나고 있
  었다. 전택현에 대한 호칭이 애인을 말하는 것이 아닌 아저
  씨로 나타나고 있는 데서도 그 점은 뚜렷했다.
  그런데도 그녀는 전택현을 만나기 위해 가혹한 운명의 길로
  한 발 한 발 걸음을 떼어놓고 있었다.
  나는 흔들의자에 앉아서 어둠을 응시한다. 이  거대한 도시
  의 아파트단지. 광장에 먹물처럼 번지고 있는  어둠의 끝을
  응시한다. 어둠 속에서 돌아다니는 듯한 악의 정령들. 밤의
  세계에 존재하는 알 수 없는 것들. 공기의 미세한 파동처럼
  소리없이 다가와 우리를 불안에 떨게 하는 것들.
  나는 이번엔 야수파들을 생각한다. 그들은 교수대에서 짧은
  생을 마쳤다. 그들은 교수대에  섰을 때 무슨 생각을  했을
  까. 혹시 이지영을 생각하지는 않았을까. 아니면 그들이 살
  해한 천씨 부부를 생각했을까.
  그들은 죽었다. 나는 죽은 그들이 영혼이  되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영혼이 되었다면 구천을 헤매고 있을까.
  갑자기 관자놀이가 뛰기  시작한다. 공기총을 맞은  천씨의
  머리에서 핏방울이 산비(散飛)한다. 나는 얼굴이  붉어지고
  가슴이 격렬하게 뛴다. 총을  갖고 싶다. 총으로  누군가를
  쏘고 싶다.
  언론에서는 이지영에게 호의적이었다. 이지영이 야수파에게
  납치되었다는 것, 그들의 강제에  의해 살인을 했다는  것,
  그들 5인에게 윤간을 당했다는 것, 그들의 소굴에서 죽음을
  무릅쓰고 탈출하여 경찰에 신고했다는 사실  때문에 이지영
  이 저지른 범죄를 정당방위라고 하였다.
  이지영이 그 사건으로 충격을 받아 대인공포증에 걸려 있다
  는 기사도 썼다. 제법 그럴 듯한 분석이다.  허지만 그들이
  모르는 것이 있다. 이지영이 그들에게 납치되어, 비록 공포
  에 질려 살인에 가담했지만, 오랜 시일이 지난 후에 아무런
  죄의식을 갖고 있지 않다는 것을 그들은 모르고  있는 것이
  다.
  문득 하체로 짜릿한 전율이 번져 온다. 살인과 욕망은 같은
  것인가. 야수파들을 생각할 때마다 나는 하체에  원천을 둔
  감미로운 감각이 점점 깊어지면서 황홀한 쾌감으로 바뀐다.
  하체로 손을 가져간다. 여러 남자들의 손이 스쳐간  그 곳.
  다복솔이 있는 은밀한 숲. 도툼한 언덕. 떨리는  손이 샘을
  찾는다. 남자들의 단검(短劍)이 깃발을 꽂는 곳.
  다리를 벌리고 눈을 감았다. 어둠 속에서 거대한 단검이 보
  인다. 감은 눈썹 위로  안개가 자욱하게 내리기  시작한다.
  마침내 공포와 쾌감이  손끝에서 춤을 춘다.  수음(手淫)이
  다. 나는 어릴 때  경험했던 공포와 쾌감을 수음을  통해서
  만나기 시작한다.
  미 스 테 리 특 급
  밤 11시. 태희가 옷을 갈아입었다. 태희의 얼굴은  아직 확
  실치가 않다. 태희는 여전히 나에게 실루엣이고  나는 태희
  를 동경한다. 태희는 지금  젖은 팬티를 세탁기 속에  넣고
  새 것으로 갈아입는다. 착용감이 부드러운 실크 팬티였다.
  스커트는 힙 라인이 잘 살아나는 부드러운 울 소재였다. 남
  자들은 둥근 곡선에서  성욕을 느낀다고 누군가  그랬었다.
  여자들의 둥근 젖가슴, 여자들의 둥근 힙. 구형(球形)이 남
  자들을 자극한다고 했었다.
  태희가 문을 열고  계단을 조심스럽게 내려간다.  현관문은
  잠그지 않는다. 밤에 잠을 잘 때도 잠그지  않는다. 혹시라
  도 야수가 찾아들지도 모르니까. 짐승처럼 포악하고 잔인한
  야수. 언제부터인가 태희는 야수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
  나 야수가 찾아들지 않아 태희는 야수의 눈에 잘 띄기 위해
  거리로 나서는 것이다.
  골목은 조용했다. 태희는  골목에서 야수를 기다리는  것을
  포기했다. 야수는 인가가 있는 곳에 찾아오지 않는다. 처음
  엔 술집에 드나드는 야수를 낚기 위해 술집  근처를 배회했
  다.
  그러나 소용이 없었다. 다음엔 주택가 골목을 배회했다. 그
  것도 소용이 없었다. 태희는  계속해서 걸었다. 밤  12시가
  되자 거리엔 술 취한 젊은이들이 하나 둘씩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 태희는 일부러 그들의 앞에서  걸어다녔다. 그들
  이 야수가 되어 주기를 바라며. 그러나 그들은 태희를 안중
  에 두지 않고 비틀대며 걸어가고 있었다.
  (야수가 없어 )
  태희는 실망했다.
  태희는 부르튼 다리를 끌고 집으로 돌아왔다.
  한 번은 야수를 만날 뻔한 일이 있었다.  골목 끝에서였다.
  태희는 그날도 야수를 찾아 거리를 배회하고  있었다. 누군
  가, 짐승보다 더욱 잔인하고 포악한 자가 태희를 납치하고,
  그들이 그랬던 것처럼 자신을 겁탈하고, 이지영이 그랬듯이
  공포에 울부짖는 사람을 죽이게 해주기를 바라고 있었다.
  태희는 골목 끝에 있었다.  밤은 오래 되었고 인적은  없었
  다. 가을이었다. 바람이 불 때마다 우수수 떨어진 나뭇잎이
  골목으로 골목으로 쓸려 다니고 있었다.
  그는 골목에서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몸이  비틀거리는 것
  을 보면 술을 마신 모양이었다. 태희는 몸이 달아오르기 시
  작했다. 무엇보다 그가 술이 취했다는 사실이  태희를 기쁘
  게 만들었다. 술 취하면 짐승이 된다고 하지 않는가.
  아아 짐승을 만나고 싶다.
  태희는 그의 옆으로 또박또박 걸어갔다. 담배를  피우던 그
  가 힐끗 태희를 쏘아보았다. 태희는 그의 시선에,  그가 자
  신의 몸을 훑어보는 시선에 전율을 느꼈다.
  아아 나를 납치해 줘.
  태희는 속으로 그렇게 부르짖었다. 그러는 동안  태희는 그
  의 옆을 지나쳤고 그가 자신을 쏘아보고 있는  것을 감지했
  다.
  다가와, 나에게 다가와.
  태희는 주술을 외듯이 속으로 부르짖었다.
  나에게 다가와서, 내 머리채를 낚아채고 골목 끝에 있는 어
  둠 속으로 데리고 들어가. 내 뺨을 갈겨도 좋다. 내 등짝을
  주먹으로 후려쳐도 좋다. 날이 시퍼런 비수를  내 목덜미에
  들이대도 상관하지 않겠다. 아아 나를 어둠  속으로 데리고
  들어가서 구둣발로 작신작신  짓밟아 줘. 이빨이  부러지고
  갈비뼈가 부러진들 무슨 상관이랴.
  그러나 부질없는 바람이었다.
  그는 태희의 등을 향해 침을 한 번 칵 뱉았을 뿐이었다.
  태희는 그가 점점 멀어지자 공연히 눈물이  흘러나왔다. 골
  목 끝에 서 있던 그 사내는 결코 야수가 아니었다.
  미 스 테 리 특 급
  단색 화면. 낡은 흑백영화의 한 장면. 그는 지금 밧줄에 묶
  여 있다. 그의  흰자위가 가득한 눈이 여자를 향해  도저히
  믿을 수 없다는 눈빛을 보내고 있다.
  이 줄을 풀러!
  그가 태희에게 위협적으로 말한다.
  내가 너를 먹여 살렸어. 먹여 살린 은혜도 모르고  이게 무
  슨 짓이야? 이건 배은망덕이야.
  태희는 그의 눈빛을 보고 소름이 오싹 끼쳐 온다. 흰자위가
  가득한 그의 눈빛만 보아도 태희는 숨이 멎어버릴  것 같은
  공포에 질린다. 태희는 그 공포에 대항하기  위해 채찍으로
  그의 등을 후려친다.
  이 개 같은 년!
  그가 몸을 움찔한 뒤에 이를 악물고 눈을 부릅뜬다. 태희는
  공포를 이기기 위해 다시 한 번 그의 등을 채찍으로 후려친
  다.
  휘이익.
  채찍이 허공을 가르며 그의 등에 찰싹 달라붙는다. 그가 아
  구구하고 비명을 지른다. 그의 등에 뱀허물  같은 채찍자국
  이 맺힌다. 금세 그의 등에서 선혈의 핏방울이 방울방울 솟
  구친다.
  이 년이 사람 잡네!
  그가 희극적으로 소리를 지른다.
  내가 네 년을 죽여버릴 거야! 네 년을 갈기갈기  찢어 죽일
  거야!
  그가 악에 바쳐 바락바락 소리를 지른다.
  넌 짐승 같은 인간이야! 개새끼라구!
  태희가 거침없이 욕설을 내뱉는다. 공포를 이기는  것은 공
  포와 맞서서 대항하는 것뿐이다.
  이 새끼야! 엉금엉금 기어! 기란 말이야!
  태희는 욕설과 함께 사내에게 달려가 발길로 내지르고 채찍
  으로 마구 후려친다. 그가 비명을 지르고 데굴데굴 구른다.
  손목을 묶인 사내가 엎드려 있을 때는 구둣발로  밟기도 한
  다.
  왜, 왜 이러는 거야?
  그의 눈빛이 비로소 공포에 휩싸인다.
  이런 건 재미없어! 다른 방법을 찾으라고 이건  내가 좋아
  하는 방법이 아니야.
  그는 몸을 부들부들 떨면서 태희를 향해 애원을  하듯이 말
  한다. 그의 눈이 공포로 얼어붙어 있다.
  이 년이 미친 거야. 이 년이 제 정신 아니야.
  그는 교활한 눈동자를 굴리며 그렇게 생각할  것이다. 그는
  언제나 태희를 발가벗겨 놓고 채찍으로 휘갈긴 뒤에  그 짓
  을 했었다. 미치지 않고는 그런 짓을 할 수가 없었다. 그럴
  때마다 쾌감은 그의 몫이었고 고통은 태희의 것이었다.
  그런데 태희가 상대역을 바꾸려고 하고 있었다.
  그는 갑자기 소름이 끼치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내가 누군지 알고 이런 짓을 하는 거야?
  그가 눈을 부릅뜨고 태희에게 위협을 했다. 그의 한 마디면
  태희는 오줌을 질질 싸며 무서워했었다. 그러나  지금 태희
  의 입언저리에는 그를 조롱이라도 하듯이  미소가 대롱대롱
  매달려 있었다.
  너를 알고 말고. 지난 10년  간 나를 괴롭혀 온  짐승 같은
  놈이야. 내가 너를 어떻게 모르겠어? 꿈에 네  놈이 나타나
  기만 해도 머리카락이 곤두서고 소름이 끼친단 말이야.
  태희의 눈빛이 그렇게 말하고 있다. 그러나 우둔한 그는 태
  희의 눈빛이 말하는 의미를 알지 못한다.
  나는 이 날을 기다려  왔어. 네 놈에게도 고통이  무엇인지
  가르쳐 주겠어, 고통이 정말 좋은 것인지 맛을 봐
  밖에는 빗발이 장대질을 하고  있었다. 뇌성을 동반한  7월
  장마였다.
  우르르.
  어두운 하늘에서 잇달아 푸른 섬광이 내리꽂히고 벼락을 치
  는 소리가 고막을 때린다. 태희는 그  소리를 반추하기라도
  하듯이 그의 등에 채찍을 갈겨댄다.
  으아악!
  그의 처절한 비명소리. 밀가루  반죽처럼 허연 등짝.  그의
  등짝이 갈라지고 채찍에  살점이 달라붙는다. 비,  빗소리,
  그리고 천둥과 번개
  태희는 어머니를 생각하고 있었다. 그는 걸핏하면 어머니의
  옷을 벗기고 매질을 했다. 어머니를 문고리에 묶어 놓고 매
  질을 한 일도 있었다. 그리고 그는 태희를 부르곤 했다.
  노랑나비야. 네가 컸다는 것을  알고 있다. 자  무서워하지
  말고 이리 온.
  그가 뱀처럼 사악한 미소로 태희를 부른다.
  너를 때리지는 않겠어. 물론 내 말을 듣지 않으면  저 년처
  럼 묶어 놓고 때려줄 거야. 매를 맞고 싶지는 않겠지?
  태희가 고개를 끄덕거린다.
  매를 맞고 싶지는 않아. 그는 포악한 자니까 사정없이 나를
  때릴 거야.
  태희는 공포에 질려 있다.
  오늘부터 너에게 즐거운 일을 가르쳐 주겠어.
  갑자기 뜨거운 눈물이 볼을 타고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태
  희는 목울대까지 치밀고 올라온 울음을 간신히 삼켰다.
  그 동안은 만지기만 했지. 여자가 되는  방법은 가르쳐주지
  않았어. 네가 이렇게 빨리 큰 줄은 몰랐거든. 이거  봐. 궁
  둥이도 토실토실하고 가슴도  커졌잖아? 그럼 여자  구실을
  해야하는 거야.
  태희는 몸을 떨었다. 태희의 몸을 훑고 지나가는 그의 손이
  송충이가 달라붙는 것처럼 징그러웠다.
  이건 아프지도 않고 고통도 없어. 아주 즐거운 일이라구.
  그의 벌레 같은 손이 태희의 몸을 더듬다가  원피스 옷자락
  을 벗겼다. 태희는 그가 원피스를 벗기지  못하도록 본능적
  으로 몸을 웅크렸다.
  아니 이년이 반항을 해?
  갑자기 그가 화를 벌컥 내더니 넓은 손바닥으로  태희의 뺨
  을 후려쳤다. 태희는 눈에서 불이 번쩍이는 것  같았다. 뺨
  이 얼얼한 통증은 다음에 왔다.
  태희는 두 눈을 감싸쥐고  울음을 터뜨렸다. 극심한  공포,
  패닉으로 몸이 사시나무처럼 떨리고  아무 것도 생각할  수
  없었다. 그러자 그가 태희의 원피스를 확  잡아채서 찢어버
  렸다. 그때 하체로 뜨거운 것이 왈칵 쏟아졌다.
  이런 병신 같은 년! 밖에 나가서 비에 씻고 와!
  그가 태희를 발길로 내질렀다. 태희는 그의  발길에 복부를
  얻어맞아 떼굴떼굴 굴렀다.
  빨리 씻고 오지 않으면 이 칼로 죽여버릴 거야!
  태희는 엉금엉금 기어서 밖으로 나갔다. 밖은 캄캄했다. 하
  늘에서는 장대 같은  소낙비가 억수처럼 쏟아지고  있었다.
  도망을 쳐야 했다. 허지만 도망을 칠 수가  없었다. 도망을
  치면 그가 어머니를 죽일 것이다. 어머니는  병들어 죽어가
  고 있었다. 죽어가는 어머니를 두고 도망을 칠 수 없었다.
  우르르 쾅!
  어두운 하늘이 두 조각으로 갈라지며 또 다시  뇌성이 고막
  을 후려쳤다.
  빨리 들어와!
  그가 문 앞에서 소리를 버럭 질렀다. 그녀는 빗속에서 오들
  오들 떨다가 사내에게 뛰어 들어갔다.
  이리 와!
  사내가 그녀를 번쩍 안아서 짚단 위에 팽개쳤다. 그러나 그
  것은 결코 즐거운 일이 아니었다. 하체가 찢어지는 것 같은
  고통, 그의 입에서 풍기는 구취(口臭), 악마의  숨결, 공포
  와 죄악감, 더러움 그것뿐이었다.
  바람소리가 들려온다. 저  황량하고 어두운 벌판을  달려와
  방의 창문을 두드리는 음산한 바람소리, 악마의 숨소리, 악
  마가 부르는 소리
  태희는 울었다. 그 더러운 일이 끝난 뒤에 수치스러움과 죄
  악감에 사로잡혀 몸을 떨며 울었다.
  미 스 테 리 특 급
  김호성(金昊誠)은 여자의  아파트로 들어서면서  멈칫했다.
  여자는 그를 위해 보라색  계통의 화사한 이브닝  드레스를
  입고 있었다. 물론 속이 은은하게 내비치는 천연 실크의 네
  글리제였다. 속에는 한 번도 입지 않았던 노란 색의  새 브
  래지어와 팬티를 입고 있었다.
  김호성이 그녀의 몸을 속속들이 알고 있기 때문에 오늘밤의
  쾌락을 위해서 굳이 브래지어나 팬티 따위는 입고  있지 않
  아도 상관이 없었다. 그러나 그를 위해서, 아니  그를 자극
  하기 위해서 일부러 그것들을 입은 것이 분명했다.
  여자의 아파트는 가장 높은 층의 아파트니까 누군가 들여다
  보는 일 따위도 없을 것이다.
  채찍도 준비되어 있고 나이롱줄도 준비되어 있었다. 준비는
  완벽하게 갖춰져 있었다. 아파트는 방음벽이 설치되어 있어
  서 다이너마이트가 터져도 밖으로 들리지 않는다.
  "아름답소."
  김호성은 현관으로 들어서면서 여자에게 장미꽃  한 다발을
  건네주었다. 여자는 장미꽃보다 자신의 몸을 빠르게 훑어보
  는 그의 시선에 짜릿한 쾌감을 느낀다.
  "고마워요."
  여자가 눈웃음을 치며 말했다. 여자의 눈에는  이미 광기가
  번뜩이고 있다. 김호성은 여자의 눈에서 번들거리는 욕망을
  발견하고 섬뜩한 공포에 휩싸인다. 그러나 여자에게는 내색
  하지 않는다.
  "앉으세요."
  여자가 김호성의 코트를 받은 뒤에 식탁으로  안내한다. 식
  탁에는 잠시 후 벌어질  파티를 위해 성찬이 차려져  있다.
  김호성이 식탁에 앉고 여자는  김호성의 코트를 옷장에  건
  뒤에 식사 수발을 들기 시작한다.
  김호성은 식욕이 왕성하다. 여자가 준비한  장어구이, 철갑
  상어 알 캐비아, 곰  발바닥 요리 술은 소주지만 그  안에
  장어 쓸개를 탔다. 양주를 준비할 수도  있었지만 김호성은
  기이할 정도로 소주만 마신다.
  "같이 식사를 합시다."
  김호성이 여자에게 식사를 권한다.
  "아네요. 당신이 먹는 것만 봐도 저는 흡족해요."
  "나 혼자 먹으니 "
  "제 걱정은 마시고 많이 드세요."
  여자가 김호성의 말허리를 잘라 버린다. 그  말에는 무서울
  정도의 단호함이 있다. 김호성은 고개를 끄덕거리고 묵묵히
  식사를 한다. 그는 천천히 음식을 저작한다. 여자는 이따금
  김호성의 수저 위에 반찬을 얹어 준다. 그럴 때  보면 여자
  는 지극히 평범하고 온순하다.
  김호성은 식사를 하면서 여자가 언제나 이런 상태로 평정을
  유지하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을 한다.  그러나 그것은
  여자의 위장일 것이다.  김호성은 여자가 얼마나  교활한지
  너무나 잘 알고 있다.
  식사가 끝났다. 김호성은 얼굴이 불콰하다.  식사를 하면서
  곁들인 반주로 서서히 취기가 오르고 있다.
  여자가 식탁을 치우는 동안 김호성은 거실의 소파에 앉아서
  느긋하게 커피를 마신다. 거실의 창에는 두껍게  커텐이 처
  져 있다. 그러나 침실, 여자가 특별히 도안한  침실은 소름
  끼치는 쾌락의 도구들이 준비되어 있을 것이다.
  때려줘요!
  여자가 처음 그런 말을 했을 때 김호성은 자신의 귀를 의심
  했었다.
  뭐라구?
  때려 달라구요! 마구 때려 주세요!
  농담하는 거야?
  아네요. 진심이에요. 전 마조히스트예요.
  여자가 눈알을 번뜩이며 소리를 질렀다. 그때  그는 등줄기
  가 오싹할 정도로 놀랐었다.
  그런 짓은 못해.
  그는 단호하게 말했다.
  난 사디스트가 아니야!
  그는 여자의 몸에서 떨어져 일어났다.
  병신!
  그러자 여자가 싸늘하게  내뱉았다. 여자의 눈빛이  파랗게
  불꽃을 튕기고 있었다.
  김호성은 그 생각을 하면  머리끝이 빳빳하게 일어서는  것
  같다. 그러한 여자에게 적응하기 위해 얼마나  많은 시간이
  필요했던가. 그러나 여자를 이해하는 데는 더  많은 시간이
  필요했다.
  (사랑하는 것과 이해하는 것과는 분명히 달라 )
  김호성은 때때로 두 사람이 진정으로 사랑하는가 하는 의문
  에 빠질 때가 있었다. 그럴 때마다 김호성은 고개를 흔들었
  다. 여자가 그를 사랑하지 않듯이 그도 여자를 사랑하지 않
  았다. 단지 그들은 서로를 이해하고 있을 뿐이었다.  두 사
  람 사이에 아기가 없는 것도 다행한 일이었다.
  휘이익
  바람소리가 날카롭게 허공을 가른다. 채찍이 허공에서 춤을
  추고 여자의 등짝에 핏자국을 그린다. 채찍에서는 핏방울이
  방울방울 묻어난다. 여자는  등에서 채찍이 작렬할  때마다
  비명을 지르고 고통에 비례하여 쾌감을 느낀다.
  때려줘!
  더 세게 때려줘!
  여자가 달팽이처럼 등을 바짝 웅크린 채 고통으로 처절하게
  신음한다. 아니 그것은 고통에 의한 신음이  아니라 희열에
  의한 신음이다. 남자의 채찍이 포물선을 그으며  여자의 등
  을 때릴 때마다 여자의 입에서 농익은 과일의  단내가 풍긴
  다.
  김호성은 채찍을 휘두르면서 간간이 여자를  구둣발로 차고
  데굴데굴 구르는 가슴팍을 짓밟기도 한다.
  처음엔 그 일이 몹시 고통스러웠다. 여자의  등에 선명하게
  찍히는 채찍자국, 고통인지 희열인지 알 수 없는 여자의 신
  음
  그러나 김호성은 이제 그것을 분별한다. 채찍에  맞아 신음
  하고 비명을 지르는 여자가  쾌감으로 몸을 떠는  순간까지
  의식한다. 김호성은 서서히 사디스트가 되어 가고  있는 것
  이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창밖에서 별빛이 사위어  가고 있
  었다. 여자가 침대에서 일어나 담배를 피워 문다. 김호성은
  혼곤히 잠이 들어 있었다. 침대 위에 네 활개를  펴고 잠이
  든 김호성의 나신을 보면서 여자는 비로소 못할  짓을 했다
  는 생각을 한다. 그와 이혼을 한 것은 얼마나 잘한 일인가.
  그에게 이 어둡고 음산한 악의 세계에서 살게 하는 것은 옳
  지 않은 일이다.
  거울을 본다.
  거울에는 채찍자국이 가득한 여자 등이 있다.  온통 핏자국
  으로 얼룩진 등짝. 김호성의 채찍은 옷을 입었을 때 노출되
  지 않을 등에만 있다. 김호성의 채찍 솜씨가 갈수록 늘어가
  고 있다는 증거다.
  당신은 좋은 남자야.
  여자는 담배연기를 길게 내뿜고 침대에서 잠들어 있는 김호
  성을 향해 흥건한 미소를 보낸다. 그는 내일 아침까지는 결
  코 깨어나지 않을 것이다.
  미 스 테 리 특 급
  마지막 전철이었다. 윤형숙(尹亨淑: 22세)은 지하철에서 내
  리자마자 서둘러 개찰구로  달려 올라갔다. 지하철을  탔을
  때부터 화장실이 급했었다. 그러나 화장실이 급한  것도 급
  한 것이지만 빨리 볼일을 보지 않으면 지하철역의  문을 닫
  을까봐 걱정이 되었다. 동생의 말에 의하면  언젠가 공장에
  서 야간작업을 끝내고 마지막 지하철을 타고 돌아오다가 화
  장실에 들렸다가 셧다문이 닫히는 바람에  지하철에서 밤을
  새웠다고 했었다.
  형숙은 동생이 거짓말을  했다고 생각했다. 동생은  사귀는
  남자가 있었다. 그 남자와 여관에서 자고  지하철에 갇혔다
  고 엉뚱한 거짓말을 했을 터였다. 동생의  핸드백에서 콘돔
  이 나오는 것을 보면 이미 그 남자와 깊은 관계를  맺고 있
  을 것이다.
  형숙은 개찰구에 표를 넣고 나오자마자 화장실을 찾기 위해
  사방을 두리번거렸다. 표를 파는 매표창구에는 불만 환하게
  켜져 있을 뿐 사람이 없었다. 형숙의 뒤를 따라  마지막 지
  하철에서 나온 승객들마저 종종걸음으로 밖으로  나가자 매
  표구 근처가 텅 비어 있었다.
  (제기랄!)
  공중전화와 화장실 위치를 알려주는 안내  표지판에는 화장
  실이 50m 전방에 있다고 표시되어 있었다. 50m면 얼마나 먼
  거리인가. 그녀는 당장 요의가 급했다.
  형숙은 화장실을 향해 종종 걸음을 쳤다.  화장실까지 가는
  길은 의외로 음습하고 멀었다. 마치 살인자가 숨어 있는 것
  처럼 등줄기가 으스스했다.
  그녀는 가슴이 뛰기 시작했다. 이상한  일이었다. 화장실을
  향해 걸어갈수록 점점 서늘한  공포가 뒤에서 엄습해  오고
  있었다. 사방은 너무나 조용했다. 그녀의  하이힐 구둣소리
  가 사방의 벽을 울리고 있었다.
  그냥 밖으로 나갈까.
  그녀는 공연히 머리끝이 오싹해 왔다. 그러나 이제 와서 그
  냥 밖으로 나갈 수는  없었다. 밖에 나간다고 해도  어디서
  요의를 처리하겠는가. 약혼자와 맥주를 마신 것이 잘못이었
  다. 그가 여관에서 같이 자자고 할 때 못이기는  체 따라갈
  걸 하는 생각도 들었다. 그러나 완고한 아버지가 집에서 기
  다리고 있었다.
  형숙은 걸음을 서두르기 시작했다. 화장실로 가까이 갈수록
  공포는 더욱 심해졌다.
  그녀는 머리를 흔들었다.
  내가 공연히 무서워하고 있는 것 뿐이야.  화장실에 치한이
  있다고는 하지만 이런 밤에 무슨 치한이 있겠어
  그녀는 스스로를 위로했다.
  하이힐 소리가 가까워지고 있었다. 살인자는 피우던 담배를
  재빨리 변기통에 집어넣었다. 하이힐 소리가  가까워질수록
  숨소리도 거칠어졌다. 여자다, 화장실로 또박또박,  어쩐지
  바쁘게 걸어오는 듯한 하이힐  소리는 분명히 젊은  여자의
  것이다.
  긴장된 순간이 흐르고 있었다. 살인자는 침이  마르는 듯한
  기분이었다. 그러나 오관을 훑고 지나가는 긴장감과 초조감
  에 섞여 알 수 없는 쾌감 하나가 전류처럼 혈관으로 흐르고
  있었다.
  살인자는 눈을 질끈 감았다가 뜬다.
  불안과 초조한 순간이 지나고  여자가 살인자가 숨어  있는
  옆의 화장실로 들어왔다.
  살인자는 혈관이 확장되고 맥박이 세차게 뛰기 시작했다.
  살인자는 조심스럽게 문을 열고 나가 옆의 화장실  문을 열
  어 젖힌다. 여자는 속옷을  내리고 변기 위에 앉아  있다가
  화들짝 놀란다. 여자가 살인자를 향해 언뜻 미소를 짓는다.
  여자는 살인자가 화장실에 아무도 없는 줄 알고 문을 연 것
  으로 생각한 것이리라.
  다음 순간 여자의 동공이 확대되고 입이 잔뜩 벌어진다. 살
  인자의 장갑을 낀 손이 여자의 입을 틀어막고  예리한 칼이
  눈앞에 뻗어와 있다.
  소리지르지 말라는 뜻일 것이다.
  형숙은 그렇게 생각하고 공포에 질린 눈으로 살인자를 쳐다
  보았다. 살인자의 손이 빠르게 티셔츠를 위로 걷어 올렸다.
  형숙은 전신으로 소름이 쫙 돋았다. 살인자는  그녀의 브래
  지어까지 위로 가져가더니 그녀의 가슴으로  얼굴을 가져갔
  다.
  "아 악!"
  다음 순간 형숙은 처절한 비명을 질렀다. 그러나 입이 틀어
  막혀 소리는 입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살인자가 여자의 가슴에서 얼굴을 떼었다. 어디선가 미세한
  소리가 들리고 있었다. 그때 살인자가 멈칫하는  순간을 이
  용해 여자가 발버둥을 쳤다. 여자의 발이  살인자의 정강이
  를 걷어차고 입을 틀어막은  손을 떼어내기 위해  격렬하게
  몸부림을 쳤다.
  (남자 화장실이야 !)
  살인자는 신경을 바짝 곤두세웠다. 틀림없이 남자 화장실에
  누군가 들어와 있었다.
  여자가 더욱 세차게 발버둥을 치기 시작했다.  살인자는 여
  자의 얼굴을 쳐다보지도 번개처럼 여자에게 칼을 휘둘렀다.
  머뭇거리고 있을 시간이 없었다.
  그때 남자 화장실 쪽에서 물이 흘러내리는 소리가 뚜렷하게
  들려왔다. 살인자가 화장실에서 살그머니 나오자 반대편 남
  자 화장실에서 일을 끝내고  허리띠를 채우던 남자가  깜짝
  놀란 표정을 짓고 있었다.
  살인자는 남자를 향해  번개처럼 달려갔다. 남자가  공포에
  질려 다시 화장실로 뒷걸음질을 치고 있었다.  남자는 어리
  석게도 비명을 지를 생각조차  못하고 몸을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살인자의 칼이 허공을  그었다. 남자의 얼굴에서  피보라가
  일어나고 남자의 비명소리가 화장실 벽에  처절하게 메아리
  쳤다.
  살인자는 화장실을 뛰어 나왔다.
  매표구 앞을 지날 때 고개를 푹 숙이고 걸으면서 매표구 창
  구를 살폈으나 아무도 없었다. 살인자는 비틀대면서 계단을
  걸어 올라가기 시작했다. 이제 잠시 후면  지하철의 셧다문
  이 잠길 것이고 시체는 내일 아침까지 발견되지  않을 것이
  다.
  밖은 시원했다. 지하철의 눅눅한 습기도 없고  한낮의 혼탁
  한 매연도 없었다. 살인자는 천천히 걸었다. 밤이지만 거리
  에는 드문드문 사람들이 오가고 차량의 물결도 끊임없이 흐
  르고 있었다. 다만 깊은 밤이라 차량들이  빠르게 질주하고
  있었다.
  네온사인은 하나 둘 꺼지고 있었다. 술에  취해 비틀거리며
  걸어가는 젊은이들도 보였다.
  살인자는 차를 세워 놓은 곳에 이르렀다. 이제는 집으로 돌
  아가기만 하면 그만이다. 살인자는 자동차 키를  꺼내 도어
  를 열려다가 얼굴을 찡그렸다. 누군가 차 뒤에다 구토를 한
  것이다. 차 뒤에서 고약한 악취가 풍기고 있었다.
  살인자는 키로 자동차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레인코
  트와 모자를 벗고 시동을 걸어서 얼마 가지  않았는데 저만
  치 앞에 비틀거리며 걸어가는 젊은 여자가  보였다. 후론트
  그라스와 백미러로 주위를  살폈으나 인적은 전혀  없었다.
  여자는 미니 스커트에 흰 블라우스를 입고 있었다.
  살인자는 가슴이 뛰기 시작했다.
  지하철에서는 너무 서둘렀다. 여자를 살해할 때  남자 화장
  실에서 물 흐르는 소리가 들려 계획했던 짓을  모두 실행할
  수 없었다. 이제는 계획을 실행에 옮겨야 했다.
  살인자는 여자 가까이 접근했다. 술에 취했는지  여자는 비
  틀거리고 있었다. 살인자는 유리창을 내렸다.
  "태워 줄까?"
  살인자는 웃으며 여자에게 말했다.
  "흥! 야타족이신가?"
  여자가 몸을 꼬며 말했다. 여자의 눈이 무엇 때문인지 젖어
  있었다.
  "싫으면 관두고 "
  "싫다고는 안했어."
  여자가 반발하듯 재빨리 차문을 열고 동반석에 올라탔다.
  때마침 주위에 인적은 전혀 없었다. 살인자는  후론트 그라
  스와 백미러로 주위를 살핀 뒤 차를 출발시켰다.
  미 스 테 리 특 급
  이정희와 살림을 합친지  이틀째 되는 날이었다.  결혼식은
  당분간 올리지 않기로 하고  오득렬은 이정희와 합친  것이
  다. 아이들도 이정희를 잘 따르고 이정희도  아이들을 좋아
  했다. 모든 것이 기분 좋을 정도로 순탄했다.
  그날 아침 오득렬은 눈을 뜨자 이정희를 안은 채 무심코 리
  모콘으로 TV를 켰다가 깜짝 놀랐다. TV 아침 첫  뉴스가 지
  하철 역구내 화장실에서 발생한 살인사건을  보도하고 있었
  다.
  (이젠 지하철역에서 조차 살인사건이 일어나나?)
  오득렬은 TV 화면에  시선을 못박았다. 살인사건  현장에는
  경찰관들과 사복형사들, 그리고 기자들이 벌떼처럼  몰려들
  어 북새통을 이루고 있었다. 시체는 TV 화면에 잡히지 않고
  있었다. 그 대신 여자 화장실 변기 근처의 흥건한 핏자국과
  남자 화장실 바닥에 낭자하게  괴어 있는 핏자국을  번갈아
  비추며 흥분한 목소리로 아나운서가 방송을 하고 있었다.
  오늘 새벽 12시 20분경. 지하철 OO역 화장실에서 두 건의
  살인사건이 발생하여 시민들을 충격 속에  몰아넣고 경찰을
  긴장시키고 있습니다. 최초의 발견자인 역무원 하승만(河承
  萬: 26세)씨에 의하면 지하철의 셧다문을 내리기 위해 막차
  가 지나가고 30분이 지나서 역구내를 순찰하다가 남자 화장
  실에서 30대 남자 시체를 발견하여 경찰에 신고했다고 합니
  다. 살해된 피해자 오철구(吳哲九: 34세)씨는 H건설회사 자
  재과장으로 동료들과 회식을 하고 술을 마신 뒤에  차를 끌
  고갈 수 없어서 지하철로 귀가 중이었다고 합니다.
  한편 여자 화장실에서 살해된 윤형숙씨는 경찰이 남자 화장
  실에서 발견된 오철구씨 살인사건을 수사하기  위해 도착한
  뒤에 발견되었습니다. 윤형숙씨는 변기에 앉아서  살해되었
  는데 온 몸이 예리한 흉기로 난자되어 있었습니다.
  경찰은 피해자들의 소지품이  없어지지 않고 그대로  있고,
  윤형숙의 왼쪽 유부에 이빨자국이 선명하게 찍혀  있고, 남
  자 화장실과 여자 화장실에서 거의 동시에 두  사람이 살해
  된 사실을 중시, 정신병자의 소행이 아닐까  추정하고 목격
  자 탐문수사에 나섰습니다. 출근길의 시민들은  지하철역에
  서 시민들이 살해되었다는데 충격을 받아 지하철의 방범 활
  동을 강화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한편 두 건의 살인사건이 발생한 OO역 인근 골목에서 또 다
  른 여자 변시체가 발견되어 경찰이 수사에  나섰습니다. 피
  살된 여자는 조미란(조미란: 19세)양으로 Y여자 전문대학 1
  학년입니다. 경찰은 피살된 조미란양이 성폭행을 당하고 오
  른쪽 유부가 이빨에 물어뜯긴  상처가 있는 사실에  수사의
  초점을 맞추고 지하철 살인사건과 동일범의  소행이라고 추
  정하고 있습니다
  TV 뉴스는 정가 소식으로 바뀌었다. 오득렬은  화면에서 정
  답게 악수를 하는 정치인들의 얼굴을 건성으로 보면서 소름
  이 끼치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연쇄살인이었다. 살인마는
  지하철에서 여자를 살해한 뒤에 다시 남자를  살해했고, 지
  하철에서 빠져 나와 조미란을 살해했다. 두  여자의 가슴에
  이빨이 물어뜯긴 자국이 있다는 것은  동일범의 소행이라는
  명백한 증거인 것이다.
  (어쩌면 이빨에 물어뜯긴 것이 아닐지도 몰라. 이빨에 물어
  뜯긴 것이 아니라 장미원 살인사건처럼  인육을 먹었는지도
  몰라 )
  오득렬은 출근준비를 서둘렀다.
  "벌써 나가요?"
  이정희가 눈을 뜨고 그를 쳐다보았다.
  "사건이 터졌어."
  그는 서둘러 옷을 입기 시작했다.
  "아침 차릴게요."
  "아니야. 나가서 먹을게."
  "그럼 우유라도 한 잔 드세요."
  이정희는 오득렬이 마다했으나 굳이  우유 한 잔을  따라서
  오득렬이 마시게 했다. 오득렬은 우유를 마신  뒤에 이정희
  의 볼에 키스를 해주고 밖으로 나왔다.
  인육을 먹었다는 것은 그의  생각에 지나지 않는지도  몰랐
  다. 살인자로서도 인육을 먹고 싶은 마음은  없을지도 모른
  다. 다만 자신도 모르게,  어쩌면 이성을 상실한  상태에서
  그런 짓을 저질렀는지 모른다. 이 부분에  대해서 정신과의
  사를 만나면 좀 더 자세히 알아봐야 할 것이다.
  오득렬은 경찰서로 출근하려다가 살인사건이 일어난 00지하
  철역으로 향했다. 그의  관할은 아니지만 살인사건  현장을
  찾아가 보면 안개처럼 희미한 범인의 윤곽이 좀  더 확실해
  질 것이다.
  지하철 00역은 어수선했다. 이미 TV에서 보도된 탓에 각 신
  문사와 방송국 기자들이 잔뜩  몰려와 있었고 지하철  관계
  자, 관할 경찰서의 형사들로 시끌벅적했다.
  "오 형사가 웬일이야?"
  오득렬이 살인사건이 일어난  화장실 근처에서  기웃거리자
  그의 얼굴을 알고 있는 서울시 경찰청  감식계장 최만득(崔
  萬得)이 손짓을 해 불렀다.  그는 현장 감식의  베테랑으로
  수많은 살인사건에 임장(臨場)하여 스스로 자신이  본 시체
  가 1만 구(具)는 넘을 것이라고 했다.
  "출근길에 뉴스를 들었습니다."
  "아직도 탐정소설 쓰나?"
  최 계장이 약간 비웃는 듯한 투로 물었다. 악의가  있는 것
  은 아니었으나 오득렬은 머쓱했다. 오득렬은 한때 추리소설
  을 쓴다고 당직을 할 때마다 책상 위에서  원고지를 끄적거
  려 동료들의 눈총을 받았었다.
  "바빠서 쓸 새가 있습니까?"
  "난 형사 소설가 하나 탄생하나 했지 "
  "어떻습니까?'
  "뭐가?"
  "이 번 사건이요?"
  오득렬은 최 계장과 얘기를 하면서 자연스럽게 화장실로 걸
  음을 떼어놓았다. 화장실  주위에는 이미 노란  수사라인이
  설치되어 있었고 '수사중'이라는 붉은 패찰이 걸려 있었다.
  오득렬은 수사라인을 넘어서 화장실로 들어갔다.
  "살인사건이 다 그렇잖아?
  최 계장도 수사라인을 넘어서 화장실로 들어왔다.
  "범인의 이빨자국이 있습니까?"
  "있었어."
  "어떤 상태입니까?"
  "물은 상처야."
  "물은 상처라면 그냥 이빨로 물은 것입니까?"
  "보고 싶어?"
  최 계장이 입술을 비틀며 묘하게 웃었다.
  "예?"
  "시체는 이 근처 병원에 있어.  부검을 할 필요는 없을  것
  같아. 외상이 뚜렷하니까."
  여자 화장실의 변기 주위에는 TV에서 본 것처럼  아직도 핏
  자국이 흥건했다. 오득렬은 눈살을 찌푸렸다.  언제 보아도
  살인사건 현장에서 보는 핏자국은 역겨웠다.
  "변기 위에 앉아서 당했습니까?"
  "그런 것 같아. 시체가  변기에서 앞으로 꼬꾸라져  처박혀
  있었어. 여자는 용변을 보다가 살해를 당했어. 팬티가 무릎
  까지 끌어내려져 있었으니까."
  "성폭행은?"
  "당한 흔적이 없어. 남자 화장실에 사람이 나타났기 때문인
  것 같아."
  "그러니까 여기서 살해를 하고 있는데 남자  화장실에서 소
  리가 들려 살인자가 미처 성폭행을 할 시간이  없었다는 거
  군요."
  "물론이야. 여자가 비명을 질렀겠지."
  "여자를 살해한 살인마는  남자 화장실로 달려가  순식간에
  목격자까지 죽였고 "
  "대충 그래."
  최 계장이 피식 웃었다.
  "살인자의 유류품은 좀 건졌습니까?"
  "없어."
  "살해된 여자나 남자가 반항을 못한 모양이죠?"
  "못한 것 같아. 담배꽁초와 족적이 좀 있기는  하지만 수많
  은 시민들이 사용하는 화장실인데 꼭 범인의 것이라고 단정
  할 수는 없잖아?"
  "범인의 옷에 피가 튈 수도 있겠군요."
  남자 화장실 벽에는 여기저기 피가 튀어 있었다. 살해된 남
  자의 몸에서 피가 뿜어진 것이다. 그렇다면  살인자의 몸에
  도 피가 묻어 있을 가능성이 있었다.
  "그렇기야 하지."
  최 계장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오득렬은 최 계장과 함께  시체가 보관되어 있는  병원으로
  향했다.
  "참 이 근처에서 또 살인사건이 일어났던데요?"
  "자세히도 아는군."
  지하철 역 밖으로 나오자 오득렬은 담배 한 대를 피워 물었
  다. 최 계장은 담배를 피우지 않고 있었다.
  "시체는 어디에서 발견되었습니까?"
  "골목이야."
  "성폭행을 하고 살해를 하려면 상당히 시간이  걸릴텐데 목
  격자도 없는 모양이지요?"
  "없어."
  "묘하군요."
  "이쪽으로 가자구."
  최 계장이 큰길을 따라 걷다가 골목으로 방향을 바꿨다. 그
  골목은 아파트 쪽으로 향하는 골목으로 여기저기 차들이 주
  차되어 있었다.
  "저기가 현장인 모양이군요."
  오득렬은 정사복 경찰이 몰려있는 골목을 눈으로 살피며 말
  했다.
  "그래."
  최 계장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피해자가 반항을 했습니까?"
  "아니야. 반항한 흔적이 전혀 없어."
  "그럼 면식범의 소행인가요?"
  "이 현장은 살인한 현장이 아니라 시체를 유기한 현장인 것
  같아."
  "그럼 시체를 살해한 뒤에 여기에 버렸다는 말씀입니까?"
  "응."
  살인자가 시체를 유기한 현장은 골목의 쓰레기통 옆이었다.
  그러나 현장에는 살인자의 유류품이 하나도 떨어져 있지 않
  았다. 오히려 피해자의 유류품마저 시체가 유기된 장소에서
  한참이나 떨어진 장소에서 발견되어 형사들을 어리둥절하게
  했다.
  "시체가 발견된 상태는 어땠습니까?"
  "상체는 아무 것도 걸치고 있지 않았어. 하체는  속옷이 벗
  겨진 상태고 가슴에는 이빨에 물어뜯긴 상처가 있어 다른
  옷가지들은 모두 찾았는데 속옷 하나를 못 찾았어."
  최 계장이 어처구니없다는 듯이 웃었다.
  "팬티 말입니까?"
  미수동 장미원에서 시체가 발견된 유미경도 팬티를 끝내 찾
  지 못한 것이다. 그 바람에 미수동 장미원 살인사건은 속옷
  살인사건이라고도 불리고 있었다.
  "어떻게 알아?"
  최 계장이 깜짝 놀란 표정을 했다.
  "미수동 사건도 그렇습니다."
  "인육 살인사건 말이야?"
  "예."
  오득렬은 몸을 부르르 떨었다. 피해자 조미란의  속옷이 없
  어졌다면 그가 예상했던대로 연쇄살인이었다. 살인자가  네
  건이나 살인을 저지른  것이다. 윤형숙의 속옷을  가져가지
  않은 것은 미처 그럴 시간이 없었고 오철구는 남자였다.
  "범인이 한 놈이라고 생각하나?"
  "이빨에 물어뜯긴 상처가 공통으로 있는 것을  보면 범인이
  한 놈이라고 생각합니다."
  시체가 유기되었던 장소에도 핏자국이 말라붙어 있었다. 형
  사들은 범인이 떨어트렸을지도 모를 머리카락  한 올이라도
  있나 해서 확대경으로 근처를 샅샅이 뒤지고 있었다.
  "정말 그렇다면 큰일이지. 하룻밤에 세 건의 살인사건을 저
  지를 정도의 흉악한 놈이라면 앞으로 어떤 일을  저지를 지
  모르니까 "
  최 계장이 근심스러운  얼굴로 대꾸했다. 오득렬도  고개를
  끄덕거렸다. 살인자가 윤형숙을 계획적으로 살해한 뒤에 오
  철구를 살해한 것은 자신의 살인 행위가 발각될  것을 염려
  하여 본능적으로 저지른 것으로 추정할 수 있었다.
  그러나 두 건의 살인을 저지르고 또 다시  조미란을 살해한
  것은 살인자가 얼마나 포악하고 대범한지 행동으로 말해 주
  는 것이다.
  룸싸롱에서 나오자 빗발이  더욱 세차게 쏟아지고  있었다.
  지영은 룸싸롱 입구에서 우산을 들고 우두커니 하늘을 쳐다
  보았다. 하늘에 구멍이 뚫린 듯이 비가 세차게 쏟아지고 있
  었다.
  새벽 2시. 룸싸롱의 영업까지  끝난 골목은 인적이  사라져
  조용했다. 지영은 어쩐지 골목이 낯선 듯한 기분이 들었다.
  언제나 그렇지만 하루의 영업이 끝난 새벽 2시에서  3시 사
  이가 가장 피곤했다.  손님들의 술시중을 들면서  하룻밤을
  보낸다는 것이 이력이 난 뒤에도 솜뭉치처럼 무겁게 어깨를
  짓누르고 있었다.
  이맘때면 여자들도 술에 취하게 되고 술 취한  손님과 실랑
  이를 하며 여관이나 호텔에 가기 위해 미리  화대를 챙기는
  일도 수월하지만은 않았다.  손님들은 가능한 적게  주려고
  하고 여자들은 가능한 많이 뜯어내려고 하는 것이  밤의 세
  계의 변함없는 풍속이었다.
  그러나 오늘은 손님들과 외박을 하지 않기로  했다. 지영은
  외박을 거절하느라고 시달려야  했다. 비만 오지  않는다면
  길바닥에 주저앉아 잠을 자고 싶었다.
  그때 헤트라이드 하나가 달려오며 크락숀을 울렸다. 지영은
  재빨리 헤드라이트 쪽을 쳐다보았다. 전택현의 차가 그녀를
  향해 미끄러져 오고 있었다. 지영은 전택현을 향해 손을 흔
  들었다.
  "빨리 타!"
  전택현이 미끈한 검은 차체를 정지시킨 뒤 동반석의 유리창
  을 내리고 지영을 향해 소리를 질렀다.
  "응!"
  지영은 활짝 웃고 재빨리 차로 달려가 동반석의  문을 열고
  올라탔다. 전택현의 몸에서 비릿한 비 냄새가 풍겼다.
  "오늘은 외박하자는 손님 없었어?"
  전택현이 차를 출발시키며 물었다. 전택현의 차는  비록 중
  고지만 그래도 그랜저 신형이라 승차감이 좋았다.
  "내가 거절했어."
  지영은 도리질을 했다. 시트에 등을 기대자 편안했다.
  "나하고 약속 때문에?"
  "응. 오늘은 아저씨와 지내고 싶었어."
  지영은 눈웃음을 쳤다. 전택현은 오늘 밤 지영을 요구할 것
  이고 지영도 그것이 싫지 않았다.
  "고맙다. 초밥 먹을래?"
  전택현이 선하게 웃으며  말했다. 인상이 동네  아저씨처럼
  순박한 사람이었다.
  "왠 초밥이야?"
  차는 벌써 룸싸롱 골목을 벗어나 왕십리 쪽으로  달리고 있
  었다
  "너 생각하고 내가 샀어. 뒤에 있어"
  전택현이 턱짓으로 뒷좌석을  가리켰다. 지영은 몸을  돌려
  검은 비닐봉지에 담긴 뒷좌석의 초밥 도시락을 꺼냈다.
  "고마워 아저씨."
  지영은 진심으로 말했다. 지영이 전택현을 자주  만나는 것
  은 이런 작은 배려가 고맙기 때문이었다. 지영은 이런 작은
  배려조차도 사람들에게서 받은 일이 없었다.
  "서강이라는 일식집에서 만드는데 상당히 맛있어."
  "어디 있는 집인데?"
  "서소문."
  도시락을 펼치자 깔끔하게 담은 생선초밥이 나왔다. 지영은
  생선을 덮은 초밥을 하나 집어서 입에 넣었다. 초밥이 약간
  차갑기는 했지만 맛은 상큼했다.
  "간장 찍어 먹어."
  "응. 아저씨도 줄까?"
  "그래. 하나만 입에 넣어 줘 봐."
  전택현도 레스토랑에서 일하느라고 시장했는지 사양하지 않
  았다.
  지영은 간장을 따라서 초밥을 찍은 뒤에 운전을  하는 전택
  현의 입에 넣어주었다.
  "이 집은 확실히 생선에서 향내까지 풍겨."
  전택현이 입을 우물거려 초밥을 씹으며 말했다.
  "아저씨. 아 해!"
  지영은 다시 초밥에 간장을 찍어 들고 말했다
  "너 먹어. 나 아직 입에 있어."
  "아이 입 벌려!"
  "얘가 고집 하나는 못 말린다니까."
  전택현은 사양하면서도 싫지 않은 듯 지영을 향해  입을 벌
  렸다. 지영은 재빨리 전택현의 입에 초밥을 넣어주었다. 그
  다음엔 지영이 자신의 입에 초밥을 넣고  우물우물 씹었다.
  전택현의 말마따나 초밥에서 생선  향내가 풍기는 것  같았
  다.
  밖에는 어느 사이에 비가 그쳐 가고 있었다.
  차는 어린이 대공원을 지나 올림픽대교를 향해 달리고 있었
  다.
  "어디로 가는 거야?"
  "미사리쪽."
  "그때 그 러브 호텔?"
  "응. 비교적 아늑하고 깨끗한 집이야."
  미사리쪽에 그들이 자주 이용하는 아담한 러브 호텔이 있었
  다. 낮에는 미사리  조정경기장도 내려다보여 전망이  좋은
  러브 호텔이었다.
  "아니 저 새끼가!"
  미사리 조정경기장 입구로 차가  방향을 꺾고 얼마  달리지
  않았을 때 전택현이  갑자기 급브레이크를 밟았다.  지영은
  그 바람에 상체가 앞으로 쏠려 유리와 머리를 부딪쳤다.
  "아저씨 왜 그래?"
  지영은 깜짝 놀라 전면을 주시했다. 급브레이크를  밟고 선
  전택현의 차 앞에 비상등을 밝힌 차 한 대가 서 있었다.
  "야 이 새끼야! 갑자기 끼여들면 어떻게 해? 죽고  싶어 환
  장했어?"
  전택현이 유리창을 내리고 악을 썼다. 평소에는  욕을 하지
  않는데 운전대만 잡으면 사나워지는 전택현이었다.
  앞의 승용차에서는 젊은 청년들이 둘이 내리고 있었다.
  "아저씨 그냥 가."
  지영은 어쩐지 기분이 좋지 않아 전택현을  만류했다. 시간
  은 벌써 새벽 3시가 가까워지고 있었다. 피곤하기도 했지만
  사고도 나지 않았는데 시비를 가리고 싶지 않았다.
  그때 뒤에도 포터 화물차 한 대가 달려와 멎었다. 전택현의
  차는 샌드위치처럼 가운데 끼어 버린 꼴이 되었다.
  "이봐 운전을 잘해야지?"
  청년들이 전택현의 차로 가까이 와서 소리를 질렀다.
  "뭐야? 너희들이 갑자기 끼여들고 무슨 소리야?"
  "이 자식이 어디서 큰소리야? 그랜저만 끌고 다니면 다야?"
  청년 하나가 갑자기 주머니에서 가스총을  꺼내 전택현에게
  쏘았다. 가스총에서 매캐한 연기가 뿜어지고 전택현이 쿨럭
  쿨럭 기침을 했다.
  "엄마!"
  지영은 외마디 비명을 질렀다.
  전택현이 눈을 감은 채  차문을 열고 뛰어 나갔다.  그러자
  청년들이 기다렸다는 듯이 전택현을 주먹으로  마구 때리며
  포터 화물차에 강제로 끌고가 태웠다.
  "그 사람 왜 잡아가요? 그 사람 내 친구란 말예요!
  지영은 청년들을 향해 악을 썼다. 청년들이  전택현을 끌고
  가는 것에 겁이 나기도 했지만 뭔가 착각을  일으킨 것이라
  고 생각했다.
  "이년아, 떠들지마!"
  다른 청년이 전택현의 승용차에 올라타  야구방망이로 지영
  을 위협했다. 청년은  야구방망이로 지영을 쿡쿡  찔러대고
  있었다. 지영은 얼굴을 찡그리고 야구방망이를 밀어냈다.
  "왜들 이래요?"
  전택현의 승용차에 또 다른 청년이 올라탔다.  지영은 가슴
  이 철렁했다.
  "입 닥치고 있어! 떠들면 이 방망이로 때려죽일 거야. 알았
  어?"
  오른쪽 청년이 지영에게 눈을 부릅떴다.
  "네."
  지영은 고개를 끄덕거렸다. 갑자기 소름이 오싹 끼쳐왔다.
  "눈을 감아! 눈을 뜨면 죽여버릴 거야!"
  청년 하나가 다시  야구방망이로 지영의 허벅지를  찍었다.
  지영은 재빨리 눈을 감았다. 청년 하나가 전택현의 차 핸들
  을 잡았다. 부르릉  하고 전택현의  차가 시동이  걸리더니
  앞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이들은 뭘하는 사람들일까 ?)
  지영은 겁이 덜컥 났으나 기껏해야 몸이나 돈을 요구하겠지
  하고 생각했다. 청년들이 탐을 낼 만치 돈을 가지고 있지는
  않았으나 몸이라면 까짓거 줘 버리면 그만이다.  어차피 룸
  싸롱에 나가서 몸을 팔고 있는 처지인 것이다. 지영은 두서
  없이 그런 생각을 했다.
  차는 어디론가 20분쯤 달려갔다. 지영은 그 시간이 마치 지
  옥으로 향해 가는 것처럼 길고 무서웠다. 청년들은 차가 설
  때까지 말이 없었다. 지영은 차가 어디로 가고 있는지 전혀
  짐작할 수 없었다. 그러나 그들이 한적한  곳으로 전택현과
  지영을 끌고가고 있다는 것은 막연히 눈치챌 수 있었다.
  이내 승용차가 멎었다.
  지영이 눈을 뜨자 청년들이 전택현을 포터 화물차에서 끌어
  내어 마구 때리고 있었다. 청년은 데굴데굴  구르면서 비명
  을 질렀고 그러자 누군가 전택현의 왼쪽 허벅지를  칼로 찔
  렀다.
  "악!"
  전택현이 처절하게 비명을 질렀다.
  (나, 나쁜 놈들!)
  지영은 공포 때문에 이빨이 덜덜 떨렸다.  전택현이 비명을
  지르고 이어서 전택현이 고통에 찬 신음소리를 내질렀다.
  "시끄러워 이 새끼야!"
  청년들이 전택현을 발로 찼다.
  "그 새끼 입에 재갈 물려!"
  누군가 명령을 내리자 청년들이 전택현의 입에 강제로 재갈
  을 물렸다. 그리고 그들은 전택현의 손발을  묶어서 승용차
  의 트렁크에 실었다.  전택현은 트렁크에 실리지  않으려고
  발버둥을 쳤으나 청년들이 마구 때리자 어쩔 수 없었다.
  "이 계집애도 재갈 물려!"
  청년들이 지영에게도 손발을 묶은  뒤 입에 테이프를  붙였
  다.
  그리고 그들은 서울을 벗어나 남쪽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아영은 커텐을 걷었다. 밖에는 눈이 하얗게 내리고 있었다.
  첫눈이었다. 벽난로에서는 장작이 활활 타고  있었다. 거실
  이 훈훈했다. 아영은 벽에 기대어 산장으로  들어오는 오솔
  길을 눈으로 살폈다. 오솔길에도 눈이 하얗게  내리고 있기
  때문일까. 아직도 그가 오지 않고 있었다.
  아영은 쓸쓸해졌다. 문득 그가 오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생
  각이 그녀의 뇌리를 엄습해 오고 있었다.
  "아가씨!"
  하녀가 나직하고 조용한 목소리로 그녀를 불렀다.
  "그 분은 두 시간이나 더 있어서야 오세요. 아직 10시도 되
  지 않았어요. 게다가  눈이 이렇게 오니  더 늦을 수도  있
  죠."
  "늦지 않을 거예요."
  아영이 잘라 말했다.
  그는 결코 늦는 일이 없었다.
  "그래요. 그 분은 늦지 않으시죠."
  하녀가 공손히 대꾸했다.
  "아가씨 목욕물을 데워 놨어요. 우선 목욕이라도 하시죠."
  "난 목욕이 싫어."
  아영은 신경질적으로 말하고 하녀를 쏘아보았다. 그러자 하
  녀가 깜짝 놀란 표정을 했다. 늙은 하녀였다. 젊었을 때 청
  상과부가 된 이후 그녀의 집에서 평생을 가정부로  보낸 여
  자였다.
  아영에게는 유모와 같은  여자였다. 그래서 그런지  아영은
  걸핏하면 그녀에게 신경질을 부렸었다.
  "제가 씻어 드릴께요."
  하녀가 노염을 타지 않는 얼굴로 말했다.
  "왜 사람은 매일 같이 씻어야 할까?"
  아영은 투정을 부렸다.
  "그 분에게 사랑을 받으시려면 깨끗하게 씻으셔야죠."
  "피!"
  "아버님이 지난밤에 오셔서 선물을 주고  가셨어요. 목욕을
  하시면 그 선물을 드릴께요."
  "정말 아빠가 오셨었어? 아빠는  유럽 여행을 하고  계시잖
  아?"
  "어젯밤에 잠깐 들리셨다가 가셨어요."
  "벌써?"
  아영은 얼굴을 찡그렸다. 아영의 아버지는 재벌그룹의 회장
  이었다. 그는 언제나 회사의 일로 유럽 출장이 잦았고 아영
  이 잠을 잘 때 잠간씩 들렸다가 선물 하나씩을 놓고 가고는
  했다.
  "아가씨가 잠자는 모습을 오랫동안 보시고 가셨어요."
  하녀가 측은하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아영은 동정을  하는
  하녀의 얼굴이 싫어서 화제를 바꾸었다.
  "무슨 선물인데?"
  "말씀드릴 수 없어요. 아가씨께서 목욕을  하시고 아침식사
  를 하시기 전에는 "
  이번에는 하녀가 단호한 표정으로 말했다.
  "알았어요. 그럼 얼른 목욕을 할 꺼예요."
  아영은 말을 마치자 부리나케 옷을 벗기  시작했다. 하녀가
  서둘러 옷을 벗는 아영을 보고 깜짝 놀라서  얼굴을 붉혔으
  나 아영은 상관하지 않고 옷을 벗어서 던진 뒤에 욕실로 뛰
  어갔다.
  "원, 우리 아가씨는 꼭 어머님을 닮으셨다니까 "
  하녀는 그녀가 벗어 던진 옷가지들을 챙기며 고개를 설레설
  레 흔들고 있을 것이다.
  욕조에는 이미 물이 하나 가득 받아져 있었다. 아영은 수증
  기가 피어오르는 욕조의 물에  샤넬 향수와 물비누를  쏟아
  붓고 욕조에 몸을 담갔다. 욕조를 휘젓자  비누거품이 하나
  가득 일어났다.
  "아가씨!"
  하녀가 욕실의 문을 열고 들어왔다. 물의  온도가 알맞은지
  물어보려는 것이었다.
  "물은 알맞으니까 걱정하지 마세요."
  아영은 눈을 감은 채 쾌활하게 말했다.
  "다행이네요."
  하녀가 함초롬히 웃었다.
  "내 다리 어때요?"
  아영은 비누거품 밖으로 두 다리를 내놓으며 하녀에게 눈을
  찡긋했다.
  "예뻐요?"
  "네, 아가씨 다리는 세상에서 제일 예뻐요!"
  "피!"
  "정말예요."
  "옷이나 갖다가 주세요."
  "벌써 다 씻었어요?"
  "네."
  "음악을 틀어 드릴게 10분만 씻으세요. 그렇게 빨리 욕조에
  서 나오면 물이 아깝죠."
  "딱 10분예요?"
  "그러세요."
  하녀가 웃으며 밖으로 나가자 아영은 눈을  감았다. 따뜻한
  물에 몸을 담그고 있자 졸음이 스르르 몰려왔다. 그러나 거
  실에서 경쾌한 음악이 흘러나오기 시작하자  아영은 콧노래
  를 부르며 목욕을 하기 시작했다. 그녀가  좋아하는 스코틀
  랜드 무곡이었다.
  아영이 목욕을 마치고 밖으로 나왔을 때도 밖에는  눈이 펄
  펄 내리고 있었다. 아영은 못을 갈아입은 뒤 아버지가 갖고
  온 선물 상자를 풀었다. 아버지의 선물은  언제나 그렇지만
  옷이었다.
  "치 또 옷이야."
  아영은 아버지가 사 온 옷을 입지도 않고 팽개쳤다. 아버지
  가 사 온 옷은 하얀 밍크코트였다.
  아영은 아침을 먹기 시작했다. 목욕을 한  탓인지 시장기가
  돌았다. 아침을 먹은 뒤에는 시간이 조금  빠르기는 했지만
  빨간 스포츠카를 손수 운전하고 역으로 그를 마중 나갔다.
  "저 아가씨가 별장집 딸이지?"
  "맞아. 어머니를 닮아서 그런지 살결이 눈처럼 하야네."
  "어쩜 저렇게 예쁠까?"
  읍내 사람들은 아영이 빨간 스포츠카를  역광장에 주차시키
  자 힐끔거리며 수군거렸다.
  "아가씨가 말괄량이라지?"
  "말괄량이지만 마음씨는 얼마나 착한데? 이  아랫동네에 사
  는 김씨 아줌마가 병에 걸렸다는 얘기를 듣고  치료비를 선
  뜻 내놓았대."
  "착한 것도 엄마를 닮았네."
  "그것뿐인지 알아? 돌이네가  교통사고로 아버지가  죽었잖
  아?"
  "그렇지."
  "그래서 돌이 엄마가 취직 자리를 부탁했더니  서울에 있는
  아버지 공장에 취직을 시켜주었다지 뭐야."
  "얼굴만 예쁜 게 아니라 마음씨까지 예쁘네."
  아영은 동네 사람들이 수군거리는 소리가 간지러웠다. 열차
  가 도착할 시간은 아직도 30분이나 남아 있었다. 아영은 사
  람들의 시선이 귀찮아서 역 근처에 있는  다방에 들어갔다.
  시골 다방은 한적하면서도 어둠침침했다. 그래도 창가에 앉
  자 천지사방을 물들이며 하얗게 내리는 눈이 보였다.
  아영은 다방의 의자에 앉아서 눈발이 자욱하게 날리는 밖을
  언제까지나 응시하고 있었다.
  신문은 지난밤의 살인사건을 대서특필하고 있었다. 한 밤의
  지하철역에서 일어난 살인사건, 남자 화장실과 여자 화장실
  에서 각각 한 구의 시체가 발견되어 발칵 뒤집혔던 것이다.
  대중이 이용하는 교통수단이었다. 살인사건이야 어디서든지
  일어날 수도 있지만 지하철 역 화장실에서 일어난 살인사건
  이라 시민들을 충격 속에 몰아 넣은 모양이었다. 게다가 지
  하철역 인근에서도 또 시체가 발견되어 경찰을 긴장시킨 것
  이다. 물론 단서는 전혀 나오지 않고 있었다.
  나는 신문을 집어 던졌다. 신문이 지나치게  호들갑을 떨고
  있다. 그러나 그들의 호들갑으로 인육 살인사건에  대해 세
  세히 알 수 있었다. 신문이 이 정도로 대대적으로 보도하리
  라고는 미처 생각하지 못했었다.
  커피를 한 잔 비우고 담배를 두 개피나 피웠을 때야 환자가
  들어왔다. 환자는 30대 이혼녀였다. 이혼을 한 뒤에 우울증
  에 시달려 자살만 생각하고 있었다. 우울증은  30대 여성들
  에게 많이 일어나는 증상으로  이혼과 같은 큰일을  당했을
  때 발병 빈도가 높았다.
  "좀 어떠세요?"
  나는 환자가 의자에 앉기를 기다려 물었다.
  "약을 먹은 뒤에 잠만 자고 있어요. 아침저녁으로  계속 잠
  만 쏟아져요."
  환자가 잠을 자는 것은 신경을 무디게 하는  안정제 때문이
  었다. 우울증 환자들은 신경이 날카롭기 때문에  대부분 불
  면증에 시달리고 있었다.
  "곧 괜찮아질 꺼예요."
  "일을 하기가 싫어요."
  "조금씩 하세요. 즐거운 생각을 가지고 최면  요법을 시술
  해 드릴까요?"
  최면 요법은 장기철 박사에게 배운 것이었다.  환자를 최면
  에 빠트려놓고 잠재의식에서 우울한 생각을  몰아내고 즐거
  운 생각을 갖게 하는 것이었다.
  "네."
  환자는 나에게 치료를 받으며 증세가 상당히 호전되고 있었
  다. 이미 두 번이나 자살을 시도했던 중증의 우울증 환자였
  다.
  나는 환자가 승낙을 하자 최면 요법을 시술했다.
  이지영이 온 것은 그 환자가 돌아간지 10분쯤  되었을 때였
  다.
  "안녕하세요. 선생님."
  "어서 와요."
  나는 이지영을 반갑게 맞이했다.
  "오늘 약속한 날이었던가?"
  "네 오늘 월요일이잖아요?"
  "아 그렇지. 내가 깜박했어."
  나는 이지영을 환자용의 안락의자에 눕게 했다.  조명은 환
  자가 편안하게 최면에 빠질 수 있도록 어둡게 조절했다. 그
  녀에게 편안한 상태가 되도록 음악도 잔잔하게  틀었다. 그
  리고 이지영에게 주사기로  약물까지 투여했다. 그  약물은
  이지영을 최면에 빠트리는데 도움이 되는 약물이었다.
  "내가 열까지 세면 잠을 자는 거야."
  나는 약효가 퍼질 때를 기다려 최면을 걸기 시작했다.
  "하나 둘 셋 "
  이지영이 완전히 최면에 빠진  것은 5분쯤 지났을  때였다.
  나는 이지영이 완전히 최면에 빠진 것을 확인한  뒤에 이지
  영에게 질문을 하기 시작했다.
  "그 자들이 어디로 끌고 갔지?"
  이지영은 안락의자에 편안하게 누워 있었다. 호흡이 일정하
  여 복부가 위아래로 고르게 움직였다.
  "처음엔 어디로 끌려가는 지 몰랐어요."
  이지영의 안면 근육이 가볍게 떨렸다.
  "무서웠나?"
  "무서웠어요. 밤새도록 무서워서 떨었어요."
  "울었어?"
  "네. 울었어요."
  "도망칠 생각은 하지 않았어?"
  "울면서도 도망칠 생각을 했어요."
  "그런데 왜 도망을 치지 않았어?"
  "손발이 뒤로 묶여 있었어요. 그리고 달리는 차안이었고 "
  "비는 계속 왔나?"
  "새벽에 그쳤어요."
  "검문을 당하지는 않았어?"
  이지영이 잠시 생각하는 표정을 했다. 나는  이지영의 얼굴
  을 주시했다.
  "네."
  이지영이 마침내 대답을 했다.
  "얼마나 달려갔지?"
  "다섯 시간이나 여섯 시간쯤 "
  "그 뒤엔 어떻게 했어?"
  "어떤 농가로 끌고 들어갔어요."
  "어떻게 생긴 집이야?
  "1층 슬라브 집예요"
  "그 집에 끌려 들어간 다음에는 어떻게 되었어?"
  "우리는 창고로 끌려갔어요."
  "창고?"
  "그 집엔 별채로 창고가 지어져 있었어요. 담은  아주 높았
  고 창고엔 지하실이 있었어요."
  소위 말하는 소각로가 건설되어 있는 창고였다.
  "그래서 지하실에 갇혔어?"
  "네."
  나는 잠시 진료실을 서성거리기 시작했다. 야수파의 지하실
  에 대해서 자세히 묻고 싶었으나 지하실 얘기를  하자 악몽
  이 되살아나는 듯 이지영이 몸을 움찔움찔 떨고 있었다.
  "그 뒤에 어떻게 되었어?"
  "10분쯤 지나서 그들이 저를 옆방으로 불렀어요."
  "그들은 모두 몇 명이지?"
  " 다섯이요 여자까지 여섯이 있었어요."
  "여섯?"
  "여자가 한 명 있었어요."
  매스컴에는 야수파들과 함께 구속된 여자가  단란주점 종업
  원이라고 했었다. 그녀는 야수파의 부두목격인 강영진(姜營
  震)의 애인으로 그녀가 술집에 진 빚 1천만을  강영진이 갚
  아 주고 빼내왔다는 것이다. 야수파들의 농가에서  밥도 짓
  고 빨래도 했다고 했다. 그녀의 이름은 이연숙(李延淑)이었
  다.
  "옆방으로 불러서 무얼했어?"
  "저에 대해서 이것저것 물었어요."
  "이것저것 어떤 거?"
  "나이 이름 직업 그런 거요."
  "그 다음엔?"
  "밥을 먹으라고 했어요."
  "그래서 밥을 먹었어?"
  "아니요."
  "그랬더니 그들이 뭐라고 했지?"
  "여기 끌려온 여자들 모두가 처음엔 너처럼 잘난 척하고 밥
  을 먹지 않다가 결국 죽고 말았어. 너도 죽기  싫으면 시키
  는 데로 밥을 먹어 했어요."
  "그래서 밥을 먹었어?"
  "아니요. 난 포기했으니 죽이던지 살리던지  마음대로 하라
  고 했어요. 죽어도 아쉬울 것 없는 인생이라고 했어요."
  "왜 그런 말을 했지? 그들이 무섭지 않았어?"
  나는 이지영이 그런 상태에서  야수파를 상대로 그런  말을
  할 수 있다는 사실이 믿어지지 않았다.
  "우리처럼 술집에 다니는 여자들에게는 자포자기를 할 때가
  많아요. 그때도 무섭기는 했지만 남자들이니까 겁탈밖에 더
  하랴 했어요. 겁탈은 당해 봤자 무섭지도  않았고 또 그때
  는 그들이 살인마라는 사실을 몰랐어요."
  나는 고개를 끄덕거렸다. 이지영의 말은 옳은 것이었다. 이
  지영은 그때까지도 그들이 희대의 살인마라는  사실을 모르
  고 있었다.
  "계속해 봐."
  "그러자 그들이 왜 포기하냐? 하고 의아해 했어요."
  "그래서?"
  "당신들도 나처럼 술집에서 몸을 팔아 보아라. 나  같은 신
  세에 오래 살고 싶은 생각이 있겠느냐 했어요."
  "울면서?"
  "네. 울면서 그렇게 말했어요."
  "그랬더니?"
  "그들은 갑자기 짐승으로 변했어요."
  "짐승?"
  "저를 겁탈했어요."
  "다섯이 전부?"
  "네."
  이지영의 얼굴에서 그때 상황을 생각하는지  눈물이 주르르
  흘러내렸다. 나는 손수건으로 이지영의 눈물을 닦아주었다.
  "지옥 같았어?"
  "네 지옥 같았어요."
  "그 뒤엔 어떻게 되었지?"
  "전 다시 지하실에 갇혔고 계속 자신들의 일에 가담하라는
  협박을 받았어요."
  "그들의 일이 어떤 일이었지?"
  "사람을 죽이는 일이요."
  "그들이 그랬어?"
  "네. 그들은 지하실에서 일곱인가 여덟인가  죽였다고 했어
  요."
  "그것이 사실인가?"
  "모르겠어요."
  "무섭지 않았어?"
  "무서웠어요. 그때는 정말 소름이 끼쳤어요."
  이지영의 팔에 소름이 쫙 돋았다. 나는 재빨리 이지영을 진
  정시키기 시작했다.
  "무서워할 필요 없어. 그들은 모두 경찰에 잡혀서 사형선고
  를 받아 형이 집행되었어 "
  이지영을 고통과 공포 속에 몰아넣었던 야수파들은 이미 경
  찰에 체포되어 재판을 받아 사형이 집행된  것이다. 이제는
  그들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었다.
  "그래도 그들의 얼굴이 생각나요."
  이지영이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나는 무겁게  한숨을 내
  쉬었다. 이지영은 지옥 같은 그들에게 갇혀  있다가 열흘만
  에 탈출하여 그들을 경찰에 신고했던 것이다.  이지영이 그
  들에게 계속 협조했다면 야수파들은 아직도 짐승 같은 짓을
  저지르고 있었을 것이다.  만약에 그렇게 되었다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죽게 되었을까.
  "그들이 지금도 무서워?"
  "네."
  "그들이 꿈에 보이나?"
  "네. 꿈에 보여요."
  "꿈에 나타나서 무엇을 하지?"
  "사람을 죽이라고 그래요."
  "사람 누구?"
  "아저씨요."
  이지영이 아저씨라고 말하는 것은 그녀의  애인이었던 전택
  현을 말하는 것이었다. 나는 오늘은 이지영에게  질문을 하
  는 것을 그만 두기로 했다. 이지영에게  비록 최면상태에서
  지만 지나치게 공포에 휩싸이게 할 수는 없었다.
  "이제 깨어나 깊은 잠에서 깨어난다 깨어난다 내가  하
  나 둘 셋! 하면 깨어난다 하나 둘 셋!"
  내가 이지영의 앞에서 셋 하고 소리를 지르자  이지영이 깜
  짝 놀라서 최면에서 깨어났다.
  나는 담배를 피우며 이지영의 얼굴을 살폈다.  이지영은 어
  느 사이에 평온한 얼굴로 돌아와 있었다.
  어머니는 아버지에게 역마살이 끼었다고 했다. 영희는 아버
  지의 얼굴을 잊어버렸으나 언제나 바람처럼  왔다가 바람처
  럼 가버리던 아버지의  모습을 희미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그것은 상상 속에서 본  모습이었으나 영희의 기억  속에는
  언제부터인가 실제로 아버지가 왔다 간 것처럼 각인되어 있
  었다.
  어머니의 말에 의하면 아버지는 전국의 장판을 따라 떠도는
  장돌뱅이었다. 그러나 어머니의 말이 어디까지  사실인지는
  알 수 없었다. 그 무렵 영희는 여섯 살밖에 안되는 어린 계
  집애였다.
  어머니는 집떠난 아버지가  돌아오기만을 하염없이  기다렸
  다. 밭에서 김을 매다가도 동구앞 느티나무가 서 있는 고갯
  길을 시린 눈길로 바라보았고 까치가 울기만 해도 삽짝밖에
  나가 고갯길을 쳐다보곤 했다.
  "아버지가 오셨다 가셨다."
  그러다가 어느 날은 참빗으로 영희의 머리를 곱게 가르마를
  타서 댕기를 땋아 주며 쓸쓸하게 웃곤 했다.
  "언제?"
  영희는 아버지가 왔다 간  것이 마냥 서운하여  어머니에게
  투정을 부리곤 했다. 영희가 모르게 아버지가  왔다 갔다는
  것이 믿어지지 않았다.
  "우리 영희가 꿈나라 갔을 때 "
  "꿈나라?"
  "영희가 이불 속에서 곤하게 잘 때 아버지가 오셨다가 가셨
  어."
  "그러면 나를 깨우지 그랬어?"
  "영희가 깨웠는데도 일어나지를 않더구나."
  어머니가 시름에 겨워 대답했다. 어쩐지 영희의  질문에 건
  성으로 대답하고 있는 것 같았다.
  "그런데 왜 아버지는 벌써 가셨어?"
  "아버지는 돈을 벌어야 하니까."
  "돈을 벌어서 뭐하는데?"
  "우리 영희 호강시켜 주지. 우리 영희 예쁜 옷도 사주고 우
  리 영희 유럽 여행도 시켜주고 "
  "유럽이 어디야?"
  "유럽은 백설공주와 일곱 난쟁이가 사는 곳이야."
  "아버지가 내 선물 사 오셨어?"
  "그럼."
  어머니가 조잡한 선물상자를 영희 앞에 내놓았다.  그 상자
  에는 커다란 인형이 들어 있었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그날
  은 어린이 날이었다. 아버지는 어린이날에 맞춰서  집에 들
  렸다가 영희의 선물을 주고 훌쩍 가버린 것이다. 그러고 보
  면 어머니의 입을 통해 아버지가 오는 날은  영희의 생일이
  라던가 어린이날, 추석, 설날, 크리스마스  같은 날이었다.
  아버지는 그런 날에는 한 번도 영희의 선물을 잊지 않았다.
  "아버지는 왜 내가 잠을 잘 때만 오실까?"
  영희는 궁금하여 그렇게 묻곤 했다. 아버지의 얼굴을 한 번
  이라도 보고 싶었다.
  "내가 아버지에게 가서 그렇게 말해 볼까?"
  "엄마는 아버지가 어디 계신지 알아?"
  "그럼 아버지는 서울에서 큰 회사를 하고 계신 걸."
  어머니의 입에서 아버지가 서울에서 큰 회사를 하는 사람으
  로 바뀐 것은 1년 뒤의 일이었다. 영희가 일곱 살이 되었을
  때였다. 영희는 그때부터 회사를 하는 아버지에  대해서 생
  각하기 시작했다.
  "회사가 뭐하는 데야?"
  "물건을 만들어 파는 곳이야. 아버지 밑에 직원만  수백 명
  이 넘는단다."
  "그럼 나도 엄마 따라 아버지 만나러 갈래."
  "그건 안돼. 아버지는 너무  바빠서 너를 만날 수가  없어.
  그리고 서울이 얼마나 머니? 너는 다리가 아파서 서울에 갈
  수가 없어 "
  "엄마가 업고 가면 안돼?"
  "안돼요. 엄마가 힘들어서 서울까지 영희를 어떻게 업고 가
  니? 그 대신 엄마가 아버지를 만나면 이번엔 꼭  영희가 안
  잘 때 우리 영희를 보러 오시라고 말씀 드릴게."
  "알았어."
  영희는 어머니의 말에 기운없이 대답했다. 사실  얼굴도 모
  르는 아버지를 찾아가고 싶은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영희
  는 동네의 아이들이 제 아버지를 따라 다니는  모습을 보고
  아버지란 저렇게 생긴 사람이구나 하고 생각했을 뿐이었다.
  어머니는 아버지를 만나러 갈 때면 옷을 곱게 차려 입고 아
  버지가 좋아한다는 인절미 떡을 해서 머리에 이고 고갯길을
  넘어가곤 했다.
  "에이그. 지극 정성이지. 혼례도 못 올린 처지에 저렇게 옥
  바라지를 하니 "
  사람들은 고갯길을 허이허이  넘어가는 어머니의  뒷모습을
  향해 혀를 차고는 했다.
  "요즈음 여자가 아니야."
  "영희 아범이 그렇게 좋은가?"
  "번듯이 혼례를 올리고도  남정네가 옥살이를 하면  도망을
  가는 게 여자라는데 영희 어멈은 거꾸로야."
  "열녀지 "
  영희는 사람들이 무슨 말을 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영희야 니 아버지 어디 있는지 알아?"
  사람들은 때때로 그렇게 묻기도 했다.
  "서울이요."
  영희는 앙증맞게 대답했다.
  "쯧쯧 "
  영희가 그렇게 대답하면 사람들은 측은하다는 듯이 혀를 찼
  다. 영희는 사람들이 혀를 차는 까닭을 이해할 수 없었다.
  "영희 아버지 서울에서 무얼해?"
  "큰 회사를 해요."
  "그런데 왜 영희를 보러 안 오지?"
  "언젠가 우리를 데리러 오신댔어요."
  "그럼 영희는 아부지 따라 서울 가서 살게 되나?"
  "네. 서울에 있는 아부지 집은 대궐처럼 크고 으리으리하대
  요. 하인들도 엄청 많고요."
  "하기야 영희 아버지가 사는 집은 큰집이지 "
  사람들은 그렇게 말하며 씁쓸하게 웃었다. 영희는 사람들이
  말하는 큰집의 의미를 알지 못했다.
  어느 날이었다. 그날은 어머니가 하얀 옷을  입고 아버지를
  만나러 갔다. 영희가 그날의 어머니 모습을  뚜렷하게 기억
  하고 있는 것은 어머니가 그날 따라 유난히 눈이 부시게 하
  얀 옷을 입고 아버지를 만나러 갔기  때문이었다. 아버지를
  만나러 가는 어머니의 얼굴도 금방이라도 울음이 터질 것처
  럼 슬퍼 보였다. 다른 때는 아버지를 만나러 가는 어머니의
  얼굴이 화사하게 피고 봉숭아물을  들인 듯 붉어지곤  했었
  다.
  영희는 쓸쓸했다. 어머니의 그렇게 슬픈 얼굴을 본 일이 없
  었다.
  어머니가 돌아온 것은 해가 서산으로 뉘엿뉘엿 기울 무렵이
  었다. 영희가 아이들과 땅따먹기 놀이를 하고  있었는데 어
  머니가 기운 없는 모습으로 걸어오는 것이  보였다. 영희는
  어머니를 향해 쪼르르 달려갔다.
  "엄마!"
  "영희로구나."
  어머니가 울음을 참으며 영희를 와락 끌어안았다.
  "아버지 만났어?"
  "그럼!"
  "아버지 언제 온대?"
  "글쎄 "
  "열 밤만 자면 온대?"
  "그럼 오고 말고 "
  어머니의 목소리에는 너무나 기운이 없었다.
  그날 밤이었다. 영희가 무슨 소리엔가 잠이  깨자 어머니가
  옆으로 돌아누워 소리를 죽여 흐느껴 울고  있었다. 영희는
  어머니가 우는 까닭을 이해할 수 없었다.  어머니는 오랫동
  안 소리를 죽여가며 서럽게 울었다. 잠이 깼다는 것을 어머
  니가 알면 안될 것 같아서 영희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날이 밝았다.
  영희는 아침이 깨자 지난밤의 일을 까마득하게  잊었다. 어
  머니가 울던 것이 마치 꿈처럼 아득했다.
  그날부터 어머니는 마치 넋이 나간 사람 같았다.
  어머니는 하루종일 툇마루에 우두커니 앉아  잊기만 할뿐이
  었다. 영희는 어머니에게 말을 붙일 엄두가 나지 않았다.
  어머니가 며칠째 넋 나간 사람처럼 앉아 있자  동네 사람들
  이 찾아왔다.
  "산 사람이나 살아야지. 영희를 봐서라도 그렇게 넋을 놓고
  있으면 어떻게 해?"
  "그 사람은 그렇게 죽은 것이 차라리 다행이야.  거기서 평
  생을 살 바에야 죽는 게 낫지 공연히 영희 어멈  창창한 앞
  길 막을 일 있어? 마음 독하게 먹어. 죽은 사람에게는 안되
  었지만 병으로 죽은 게 천만다행이야. "
  동네 사람들의 말에 어머니가 치맛자락으로 눈물을 찍었다.
  영희는 동네 사람들이 말하는 '그 사람'이 누구인지  알 수
  없었다.
  "화장했어?"
  "네."
  "뼛가루는 강에 뿌리고?"
  "네."
  어머니의 눈에서 다시 눈물이 솟았다.
  "기운을 내요. 젊은 색시가 무얼하면 못 살겠어? 아무 것도
  모르는 영희를 생각해야지 "
  어머니가 영희를 데리고 서울로  이사를 한 것은  그로부터
  열흘이 지났을 때였다.  영희는 서울에서 학교에  들어갔고
  어머니는 일을 나갔다. 영희는 어머니가 무슨  일을 하는지
  알지 못했으나 어머니의 입에서는 이따금  술냄새가 풍기곤
  했다.
  영희가 어머니를 따라 이사를 간 곳은 말만  서울이었지 서
  울에서 가장 가난한 사람들이 산다는  난곡동 버스종점에서
  도 산 쪽으로 한참  떨어진 곳이었다. 판잣집이었다.  벽은
  브록크로 쌓았고 지붕은 판자를  얼기설기 놓은 뒤  루핑을
  덮어서 비를 막았다. 그래도 어머니는 시골 땅을 팔아서 아
  무짝에도 쓸모 없는 난곡동 땅을 2천평이나 샀다.  그 땅이
  온통 돌투성이었고 산골짜기에 있었기 때문에  땅값이 헐값
  이었던 것이다.
  어머니는 그 집에서 아파트 건설 현장에 일을 나갔다. 처음
  엔 도배공의 데모드(허드레 일꾼)를 했으나  다음엔 미장공
  데모드, 그 다음엔 타일공의 데모드를 했다.
  도배공의 데모드는 일거리가 많지 않아  때려치웠고 미장공
  의 데모드는 일이 너무 힘들어서 그만 두었다. 타일공의 데
  모드는 임금도 높았고 일거리도 많았다. 그리고  일이 힘들
  지 않아 어머니에게는 맞춤한 일거리였다.
  영희는 그 집에서 바둑이와 살았다.
  어머니가 산 집이 마을에서 한참이나 떨어져 있었기 때문에
  아이들도 놀러 오지 않았고 영희도 동네로 아이들에게 놀러
  갈 수가 없었다. 영희는 그 곳에서 초등학교  1학년에 들어
  갔는데 학교에서 돌아오면 집 앞에서 바둑이와 놀았다.
  바둑이만이 영희의 유일한 친구였다.
  볕은 따뜻했다. 집 뒤의 산은 언제나 푸른빛을 띠고 있었고
  집에서 조그만 걸어가면 개울물이 졸졸거리고 흘러갔다. 영
  희는 이따금 바둑이를 데리고 개울에 가서 놀았다.
  배가 고프면 어머니가 아침에  일을 나가기 전에  차려놓은
  밥상에서 찬밥 한 덩어리를 입 속에 쑤셔  넣었고 피곤하면
  툇마루에 앉아서 잠을 자거나 상상의 나래를  폈다. 영희는
  상상 속에서 언제나 아버지를 만나고 있었다.
  아버지는 영희에게 예쁜 인형과 아름다운 옷들을 선물했다.
  영희가 학교에서 돌아올 때면 버스종점 옆의 분식집 솥에서
  김이 무럭무럭 나는 만두를  보고 침이 꼴깍꼴깍  넘어가곤
  했는데 아버지는 만두까지 사다 주곤 했다.
  상상 속에서 영희의 집은 그림처럼 아름다웠고 하인들도 많
  았다. 영희는 백설공주처럼  하인들의 시중을 받으며  살았
  다.
  어머니가 술을 마시고 돌아오는 날이 잦아졌다.
  영희는 어머니가 변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어머니는 옛날처
  럼 영희에게 아버지 얘기를  해주지도 않았고 영희  때문에
  귀찮아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어느 날 어머니가 낯선 사내를 집으로 데리고 들어왔다.
  "우리와 함께 살 아저씨다."
  어머니는 어쩐지 영희에게  미안한 기색으로 말했다.  눈이
  부리부리한 사내였다. 머리는 더부룩했고 수염이 꺼칠했다.
  손바닥이 영희의 얼굴만치나 넓직했다.
  "네가 영희냐?"
  사내가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 탁한  목소리였다. 영희는
  고개를 끄덕거렸다.
  "네 어미에게 얘기는 들었다. 서로 잘 지내보자."
  사내가 염색한 군복바지를 주섬주섬 뒤지더니 동전 한 닢을
  꺼냈다.
  "어서 받아야지 "
  쭈삣거리는 영희를 어머니가 채근했다.
  "옜다!"
  사내가 동전을 영희를 향해 던졌다. 영희는 어머니가 두 번
  째 채근을 한 뒤에야 동전을 주워 주머니에 넣었다. 어머니
  의 얼굴에는 웃음꽃이 가득히 피어 있었다.
  그 사내는 영희네의 단칸 판잣집에 열흘만에 방을  하나 더
  달아매서 두 칸 집으로 만들었다. 영희는  학교에서 돌아오
  면 그 사내가 일을 하는 것을 우두커니 지켜보았다. 어머니
  는 치맛자락을 말아 쥐고 다람쥐처럼  날렵하게 돌아다니며
  사내의 일을 거들었다.
  "가서 탁주 한 되 받아 오너라."
  사내는 술을 좋아했다. 일을 하다가도 틈만  나면 영희에게
  막걸리를 받아 오라고 시켰다. 영희는 사내가  시키면 주전
  자를 들고 깡충깡충 뛰어서 버스종점 옆에 있는 술도가에서
  막걸리를 받아왔다.
  "거 참 시원하다."
  사내는 영희가 막걸리를 받아오면 큰 사발에 따라서 벌컥벌
  컥 마셨다. 그리고는 입가를 두툼한 손바닥으로  쓱 문지르
  고는 김치 한쪽을 집어서 입에 넣고 우물우물 씹었다.
  영희는 그럴 때면 바둑이를 데리고 개울에 가서 놀았다. 사
  내는 술이 얼큰해지면 어머니를 무릎에 앉힐 것이고 어머니
  는 아이 영희가 보는데 어쩌고 하면서 허리를 꼬다가 못이
  기는 체 사내의 무릎에 앉을 것이 뻔하기 때문이었다.
  영희는 웬일인지 어머니가 사내의 무릎에 앉는 것이 서글펐
  다.
  "젠장 보면 좀 어때?"
  사내는 퉁명스럽게 내뱉기 일쑤였다. 그러면서 사내는 두툼
  한 손으로 어머니의 궁둥이를 만지거나 치맛자락을 들출 것
  이었다.
  "아이 참!"
  "내가 싫은 감?"
  "누가 싫댔어요?"
  "싫으면 떠나고!"
  "다 알면서 왜 그래요?"
  "나도 붙어 있을 계집이 없어서 임자한테 붙어 있는  게 아
  니야. 내가 얼굴은 이래두 아랫도리 힘이 장사라서 나 없으
  면 죽겠다는 계집이 숫하게 많아."
  "아, 알았어요. 영희가 보는데 "
  어머니가 쩔쩔매며 말했다.
  "영희야 개울에 가서 놀아라."
  사내가 영희에게 눈을 흘겼다. 영희는 입술을  깨물며 개울
  가로 달려갔다. 어머니와 사내가 하는 짓이  어떤 짓이라는
  걸 어렴풋이 짐작할 수 있었다.
  "그 사내가 영희 새 아버지냐?"
  버스종점에 사는 사람들은 영희가 지나가면  그렇게 묻고는
  했다.
  "아니요."
  영희는 그럴 때마다 고개를 숙이고 대답했다.
  "그럼 뭐 하는 사람이야?"
  "우리 집 하인예요."
  영희는 당돌하게 동네 사람들에게 말했다.
  "잉?"
  영희의 말에 동네 사람들의 입이 쩍 벌어졌다.
  "우리 아버지 하인예요."
  "느이 아버지가 어디 있는데? 느이 아버지 죽지 않았어?"
  "우리 아버지는 서울에서 큰 회사를 하고 있어요."
  "허허 "
  사람들은 영희의 대꾸에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너털대고 웃
  었다.
  "쟤 엄마가 요즈음 발바닥에 불이 났어."
  "발바닥이 아니라 거시기에 불이 났을 거야."
  "응?"
  "산에 나물하러 올라갔다가 내려오던 사람들이 그러는데 벌
  건 대낮에도 엉켜 있더래."
  "세상에!"
  "본 사람이 하나 둘이 아니라는 걸 보면 불이  나고도 남을
  거야."
  버스종점 근처에 사는 여자들도 영희가  지나가면 기다렸다
  는 듯이 수군거리곤 했다. 영희는 그들이 무슨 말을 하는지
  잘 알지 못했으나 그런 말을 할 때면  얼굴이 화끈거리고는
  했다. 그래서 영희는 언제나 사람들 앞을 지날 때면 고개를
  푹 숙이고 지나갔다.  어머니는 달라져 있었다.
  시골에서 영희에게 아버지 얘기를 해주던  어머니가 아니었
  다. 영희는 언제나 어머니의 얘기를 들으며 잠을 잤고 뒤꼍
  의 대나무 숲에서 바람이  목을 매듯 자지러지면  어머니의
  가슴을 파고들곤 했었다.
  어머니는 잠결에도 영희를 바짝 안아서 얼굴을 가슴에 닿게
  했다. 어머니의 가슴에서는  언제나 포근한 젖냄새가  풍겼
  다. 영희는 잠결에도 어머니의 크고 둥근  가슴을 만지작거
  렸다. 그러면 어머니가 젖꼭지를 영희의 입에  물려주곤 했
  다.
  "우리 아기가 엄마 젖 생각이 나나?"
  영희는 잠결에 도리질을 하면서 어머니의  젖꼭지를 뱉어냈
  다.
  그러나 이제는 어머니와 같이 잘 수가 없었다. 영희는 사내
  가 달아맨 윗방에서 쓸쓸하게  잠을 잤고 밤마다  어머니와
  사내가 끌어안고 뒹구는 이상한 소리를 들어야 했다.
  창밖의 대나무 숲에서는 음산한 바람이  자지러지는 비명을
  지르고 있다. 세상이 떠나갈 듯이 요란한  바람소리는 야수
  파들에게 살해된 피해자들이 지르는 비명소리처럼 공포스럽
  고 처절하다. 내가 어릴  때도 많이 들었던  바람소리였다.
  저 어두운 벌판을 달려와 대나무 숲에서 피를  토하듯이 자
  지러대는 비명을 지르는 바람소리가 들릴 때면 어머니가 나
  를 안아서 젖을 물렸었다.
  물론 나는 어머니의 젖을 먹지는 않았다. 나는 일곱 살이나
  되는 계집애였다. 그래도 어머니는 자꾸 나에게  젖을 먹이
  려고 했었다.
  나는 침대에 누워 눈을 감는다.
  나는 지금도 어머니의 크고  둥근 가슴, 내 얼굴이  닿으면
  한없이 따듯하고 포근한  가슴, 어머니의 가슴에서  풍기는
  희미한 젖냄새가 아련하게 그리워진다. 그런데 내가  이 여
  관을 찾아온 것은 무엇 때문인가.
  나는 그 까닭도 알지 못한다.
  허름한 여관의 구석방. 사방이 대나무 숲으로  둘러싸여 바
  람이 일 때마다 여관의 창으로 댓잎이 바람에  쓸리는 아우
  성소리가 음산하게 들려온다. 나는 그 소리에 마치 내가 저
  깊은 땅속으로 가라앉는 듯한 현기증을 느낀다.
  나는 벌떡 일어나 앉는다. 공연히 여기까지  내려왔다는 후
  회스러움. 지금이라도 서울로 올라가자는 이율배반적인  생
  각. 아아 그러나 여기까지 왔는데 왜 다시 서울로 올라가는
  가. 여관의 구석구석에 배어 있는 들큼하면서도  퀴퀴한 냄
  새. 무수한 땀냄새와 정액 냄새. 뭇남자와 여자들의 퇴폐적
  인 그 냄새가 나를 이렇게 흥분시키고 있지 않는가.
  나는 서울로 올라가자는 나의 생각에 반발이라도 하듯이 서
  둘러 옷을 벗기 시작했다. 마치 옷을 벗어야 서울로 올라가
  자는 나의 또 다른 생각을 지울 수 있기라도 하듯이.
  나는 금세 슈미즈 차림이 되었다. 여름이라 몸에 걸친 투피
  스를 벗어 던지자 간단하게 슈미즈 차림이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나는 그 간단한 동작으로 이제 다시  서울로 올라가
  야겠다는 생각을 하지 않게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나는 다시 침대에 누웠다.
  여관방은 캄캄했다. 내가 투숙한 여관방이  2층이었지만 빗
  발이라도 뿌리려는지 하늘에는  별빛 하나 없었다.  간간이
  섬진강 강파도 소리만 들리고 있었다.
  나는 여관의 더러운 침대에  누워 이지영을 생각하고  있었
  다. 이지영의 말에 의하면 야수파의 농가, 별채의  창고 지
  하실에서도 대나무를 스치는 바람소리가 지옥에서 들려오는
  바람소리처럼 끝없이 들려왔다고 했었다.
  이지영은 그 소리가 악마가 울부짖는 것 같았다고 했다.
  이지영은 야수파 다섯 명에게 겁탈을 당한 뒤에  다시 지하
  실에 갇혔다. 지하실은 아직 수리 중에 있었다.  그러나 그
  지하실에 그녀의 애인인  전택현이 갇혀 있었다.  전택현은
  농가로 끌려올 때 야수파들에게  매를 맞고 왼쪽  허벅지를
  칼에 찔려 고통스러운 신음을 내뱉고 있었다.  그러나 사흘
  째가 되자 전택현은 탈진하여 신음조차 제대로 지르지 못하
  고 있었다.
  "사흘 동안 놈들이 아무 짓도 안했어?"
  나는 야수파들이 사흘 동안  이지영에게 무슨 짓을  했는지
  궁금했다.
  "아저씨와 나에게 이것저것 물었어요."
  "어떤 거?"
  "아저씨는 직업과 이름, 돈이 얼마나 있느냐고 물었어요."
  "그래서?"
  "아저씨가 직업은 레스토랑  지배인이고 돈은 없다고  했어
  요. 살고 있는 집이 전세라고 하자 그들은 화를  벌컥 냈어
  요."
  "왜 화를 냈지?"
  "그들은 아저씨에게 돈을 뺏으려고 납치한 건데  돈이 없다
  고 하자 헛일 했다고 화를 낸 거예요."
  야수파들이 전택현과 이지영을 납치한 것은  돈이 목적이었
  다.
  "그리고는?"
  "그들은 아저씨에게 돈도 없는 놈이 왜 그랜저를 끌고 다니
  느냐고 발로 차고 때렸어요."
  야수파들은 전택현이 그랜저를 타고 다닌다고 돈이 많은 사
  람으로 생각한 모양이었다.
  "지영이에게는 무얼 물었지?"
  "저에게도 직업, 이름, 나이 같은 것을 물었어요."
  "그래서 사실대로 대답했어?"
  "네."
  "그랬더니?"
  "네 인생도 불쌍하다고 그랬어요."
  나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네 인생이 불쌍하다는 것은 무엇
  을 의미하는 것일까. 그 말은 야수파가  이지영에게 동병상
  련을 느꼈다는 말일 것이다.
  "그 다음엔?"
  "또 그 짓을 "
  "겁탈?"
  "네."
  내 머릿속에 이지영을 겁탈하는 야수파들의 짐승 같은 모습
  이 그려졌다. 그때 이지영은 어떻게 하고 있었을까. 이지영
  은 그들에게 겁탈을 당했을 때 기분이 어땠을까.
  "그때 기분이 어땠어?"
  "네?"
  "겁탈을 당할 때 기분 "
  "모르겠어요. 무서웠어요."
  이지영이 진저리를 쳤다.
  "그 뒤엔 사흘 동안 지하실에만 갇혀 있었어?"
  "네."
  "그들에게 저항은 하지 않았나?"
  "아뇨. 너무 무서웠어요. 처음엔 죽이려면 죽이라고 소리를
  지르고 발악을 했지만 점점 겁이 났어요.  그들이 지하실에
  서 7, 8명을 죽였다고  하고 말을 듣지 않으면  죽이겠다고
  해서 "
  그 말을 하는 이지영의  얼굴에서 눈물이 주르르  흘러내렸
  다. 그런 상황에서 소리를  지르고 발악을 하는 것이  과연
  가능했을지 알 수 없었다.  나는 그런 의문에  사로잡혔다.
  그러나 야수파들이 7, 8명을 죽였다고 말한 사실을 먼저 확
  인하고 싶어졌다.
  "7. 8명을 죽였다고?"
  "네."
  "어떤 사람들을 죽였는지 알아? 누구를 죽였는지 기억할 수
  있어."
  "배신자를 죽였대요."
  "배신자?"
  나는 고개를 갸우뚱했다. 그들이 배신자라고 하는  것은 야
  수파의 조직원이었던 송영근(宋營根)을 말하는 것이다.  송
  영근은 야수파를 결성한 뒤에 야수파를  이탈하겠다고 하여
  두목 김영태(金泳泰)가 살해하라고 지시했던 것이다.  야수
  파들은 김영태의 지시에 의해 송영근을  살해하여 불갑산에
  암매장했었다.
  "또 누구를 죽였다고 했지?"
  "충남 두개역 부근에서 스물 세 살 가량의 여자를 죽였다고
  했어요."
  "그 여자는 왜 죽였대?"
  "야수파를 결성하고 살인을  실습하기 위해 죽였다고  했어
  요."
  이지영의 말에 나는 가슴이 섬뜩했다. 그들은  사람을 죽이
  는 것을 무슨 장난처럼 여기고 있었다.
  "그리고는 아무 짓도 안했어?"
  "저에게 술을 먹였어요."
  "술을?"
  "네."
  "무슨 술?"
  "맥주와 소주를 섞어서 토할 때까지 마시게 했어요."
  나는 눈을 질끈 감았다. 내 머릿속으로  이지영에게 강제로
  술을 마시게 하는 야수파들의 흉폭한 얼굴이  떠올라 왔다.
  그 곳은 지옥 같았을  것이고 이지영은 울부짖으며  강제로
  소주와 맥주를 뒤섞어 마셨을 것이다.
  "아가씨는 죽는다! 그러나 큰 고통없이 죽여주겠다."
  "이런 여자를 죽일 필요는 없다. 우리와 함께  일하도록 하
  자."
  "난 여자를 믿지 않아. 지금까지 하던 방식대로 하자."
  야수파들은 이지영에게 술을 먹이면서도 이지영을 죽이자느
  니 살려서 같이 일을 하게 하자느니  하면서 옥신각신했다.
  이지영은 거의 제정신이 아니었다. 그들이 술을  쏟아 붓듯
  이 퍼 먹였기 때문에 나중에는 몸을 가눌 수도 없었다.
  이지영은 다시 지하실로 끌려왔다. 그녀는 술을  너무나 마
  셨기 때문에 지하실에 돌아와서도 토하고 배를 움켜쥐고 뒹
  굴었다.
  "우리 말을 들어. 그렇지 않으면 죽을 거야."
  김광삼(金光三)이 지하실까지 따라와 이지영에게 말했다.
  "우리와 같이 있는 이연숙이 봤지? 그 여자도  너처럼 술집
  에 다녔었어. 우리  야수파 조직원인 강영진의  애인이지만
  우리에게 협조하고 있으니까 살아 있잖아?"
  "나도 협조하면 살려줄 거예요?"
  "그래. 난 너를 죽이고 싶지 않아. 네가 우리에게 협조하겠
  다고 약속하면 살려주겠어. 네 애인인 아저씨는 오늘 밤 죽
  는다. 아저씨를 죽일 때 협조해."
  "아저씨를 살려주면 안돼요?"
  "살려줄 수는 없어. 아저씨를 살려주면 우리 비밀이 발각이
  돼. 대신 네가 협조하면 고통없이 죽여줄 수는 있어."
  "혀, 협조할께요."
  "좋아. 다른 놈들은 너를 죽이라고 하지만 난  너를 죽이고
  싶지 않아. 내가 올라가서 놈들을 설득하겠어."
  김광삼이 농가로 올라갔다. 이지영은 전택현에게  엉금엉금
  기어가서 울었다.
  "아저씨!"
  "지영아. 어차피 나는 죽을  것 같아. 놈들이 하는  얘기를
  들으니까 나를 살려 둘 것 같지는 않아."
  "아저씨 나 어떻게 해요?"
  "너는 어떻게 하던지 살아야 해. 살아서 반듯이  경찰에 신
  고 해. 그리고 내가 죽으면 우리 집사람에게 미안하다고 전
  해 줘 "
  "허지만 아저씨를 죽이는데 협조해야 한대요."
  "어차피 죽을 거니까 괜찮아. 고통없이 죽으면 돼."
  전택현이 울었다. 이지영도 목을 놓아 울었다. 그때 김광삼
  이 다시 지하실로 내려왔다. 그리고 이지영을  끌어내어 말
  했다.
  "오늘 밤 아저씨를 죽이기로  했다. 우리 조직원들은  네가
  아저씨를 죽이는데 얼마나  협조적인가 봐서 살려  주겠대.
  그러니 네가 잘해야 돼."
  "아, 알았어요."
  이지영은 울면서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때 야수파가 비닐봉
  지를 가지고 우르르 지하실로 내려왔다. 이지영은  술에 취
  하기도 했지만 엉금엉금 기어서 벽에 기댔다. 온 몸이 사시
  나무처럼 떨렸다.
  야수파들이 전택현의 얼굴에 비닐봉지를 씌웠다.  전택현은
  금세 얼굴이 시뻘개지고 팔다리를 바둥거렸다.
  "자 고통없이 죽게 하려면 빨리 목을 눌러!"
  강영진이 눈을 부릅뜨고 이지영에게 말했다. 이지영은 엉겁
  결에 전택현에게 기어갔다. 전택현의 눈은 금방이라도 튀어
  나올 듯이 부릅떠져 있었다. 그러나 이지영을  발견한 전택
  현의 눈은 무엇인가 간절히 호소하고 있는 표정이었다.
  (지영아. 빨리 죽여 줘 )
  전택현의 눈빛은 그렇게 말하고 있는 것 같았다.
  "빨리 목을 눌러!"
  강영진이 또 다시 호통을 치자 이지영은 전택현의  목을 향
  해 두 손을 가져갔다.
  나는 어둠 속에서 담배를 피워 물었다.
  이지영이 애인인 전택현의  목을 누르는 모습,  비닐봉지에
  둘러싸여 질식해 죽어가고 있는 전택현의 얼굴이 어둠 속에
  서 하얗게 솟아오르고 있었다.
  이지영은 자신과 살을  섞던 애인을 살해하는데  가담했다.
  물론 강제에 의한 것이었으나 어쨌든 살인인 것이다.
  "아저씨를 살해하는데 가담했는데 죄책감이 들지 않아?"
  "그건 어쩔 수 없는 일이었어요. 내가 죽이고  싶었던 것은
  아니에요."
  "그들을 미워하니?"
  "누구요?"
  "야수파들!"
  "네. 허지만 그들은 사형선고를 받고 죽었어요."
  "죄값을 받았다고 생각하는 거야?"
  "그런 건 모르겠어요."
  "지금도 그들이 무서워?"
  "악몽을 꾼다고 했잖아?"
  "이상해졌어요. 나는 꿈속에서 그들과  한 편이 되어  있을
  때도 있어요."
  "이제 악몽을 꿀 필요없어. 그들은 죽었어."
  "알아요."
  이지영이 낮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나는 담배연기를 길게 내뿜었다. 밖에는 여전히  음산한 바
  람이 대나무 숲에서 자지러지고 있었다.
  오득렬 형사는 최만득 계장과  함께 시체가 안치되어  있는
  병원으로 향했다. 외국처럼 시체공시소가 없어서  지난밤에
  살해된 세 구의 시체는 일단 관내의 종합병원  영안실의 냉
  동박스에 안치되어 있었다.
  오득렬이 최 계장과 함께 종합병원 영안실에 입구로 들어서
  자 피해자 가족들인 듯 여러 사람이 영안실  입구에서 오열
  하고 있었다.
  (졸지에 날벼락을 만난 격이지 가족이 살해되었으니 )
  오득렬은 공연히 콧날이 시큰해 왔다.
  시체가 안치되어 있는 영안실은 서늘한 냉기가 감돌고 있었
  다.
  "계장님께서 직접 오셨군요."
  영안실에도 형사가 배치되어 있었다. 관할 경찰서의 유기태
  (柳己胎) 형사였다. 오득렬은 최 계장의 소개로  담당 형사
  인 유기태와 인사를 했다. 유기태는 키가  작달막했으나 눈
  매가 날카로웠다.
  "시체 좀 꺼내 보자구."
  "부검은 안할 겁니까?"
  "그거야 수사본부가 구성되어 봐야지."
  "그렇군요."
  지하철역 살인사건과 조미란 살인사건은 아직도 수사본부가
  설치되어 있지 않았다.
  유 형사가 눈짓을 하자 병원의 영안실 직원이  손에 목장갑
  을 끼었다.
  "어떤 거부터 엽니까?"
  영안실 직원이 유 형사를 보고 물었다.
  "차례로 열어요. 어차피 다 봐야 할 테니까 "
  유 형사의 말에 영안실  직원이 냉동박스의 손잡이를  잡아
  당겼다. 그러자 흰 천으로  덮여 있는 여자의 시체가  나왔
  다.
  "누구의 시체지요?"
  오득렬이 유 형사를 보고 물었다.
  "윤형숙입니다."
  "화장실에서 죽은 여자요?"
  "예."
  윤형숙은 긴 생머리였다. 살아  있을 때 머리를 뒤로  묶은
  그대로였다. 눈은 감고 있었다.
  "그거 벗겨 봐요."
  유 형사가 영안실 직원에게 말했다. 그러자  영안실 직원이
  말없이 시트를 벗겼다.
  "음."
  오득렬은 자신도 모르게 나직하게 신음을 삼켰다. 윤형숙의
  전신은 예리한 칼자국이 얼굴부터 흉측하게 나  있었다. 아
  직 시체의 피를 닦지 않아 얼굴이며 몸이  온통 피투성이었
  다.
  "끔찍해."
  최 계장이 일부러 진저리를  치는 시늉을 했다. 그는  이미
  새벽에 윤형숙의 시체를 꼼꼼히 살폈을 것이다.
  "칼자국이 꽤 많군요."
  오득렬은 윤형숙의 사체를 자세히 들여다보았다.  윤형숙의
  사체를 사진을 찍듯이 머릿속에 정확하게 새겨 두어야 수사
  를 할 때 도움이 되는 것이다.
  윤형숙은 키가 보통이었고  몸매는 통통했다. 그래도  젊은
  여자답게 비교적 균형이 잡혀 있었다. 가슴이 유난히 커 보
  이기는 했으나 몸이 통통한 탓이었다.
  "칼을 많이 사용한 솜씨 같지 않아?"
  "이 정도면 범인의 옷에 피가 많이 묻어 있을 텐데 "
  "당직하던 형사들에게 현장 주변을 탐문하라고 지시했어."
  "피해자 주변도 수사하고 있습니까?"
  "형사들이 지금 출근 중이야. 출근하고 사건 개요 설명하고
  어쩌고 하면 한나절은 되야 할걸."
  "피해자 가족들에게는 연락했습니까?"
  "했어. 가족들이 새벽에 와서 확인했어. 입구에서  울고 있
  는 사람들이 윤형숙이 가족들이야."
  감식반이 사진을 찍기 위해서  그랬는지 사체는 옷이  모두
  벗겨져 있었다. 오득렬은  윤형숙의 왼쪽 가슴께를  유심히
  살폈다. 왼쪽 가슴께에 짐승에게 물어뜯긴 듯한  커다란 상
  처가 있었다. 오른쪽은 희고  깨끗했다. 남자의 손이  닿지
  않은 가슴이었다. 그녀가 처녀라는 것을 입증이라도 하듯이
  유두도 부풀어 있지 않았다.
  "연쇄살인 같군요."
  오득렬이 윤형숙의 왼쪽 가슴에 시선을 못박고 말했다.
  "이빨자국?"
  최 계장이 물었다.
  "예."
  "먼저 사건들과 똑같은가?"
  "똑같습니다."
  "그럼 연쇄살인이군요."
  유 형사가 옆에서 신음처럼 말했다.
  "그럼 치열을 떠야 하겠는 걸. 이번 사건은  치열이 증거가
  되겠어."
  최 계장이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치열도 증거가 되나요?"
  유 형사가 고개를 갸우뚱하고 최 계장을 향해 물었다.
  "외국에서는 치열이 증거가 된 일이 있어. 우리 나라에서도
  불에 탄 시체의 신원을 확인할  때 치열이 단서가 된  적도
  있었구 "
  오득렬은 윤형숙의 하반신을 살폈다.
  윤형숙의 하반신은 깨끗했다.
  "칼이 아주 예리한 것 같은데 어떤 종류입니까?"
  "상처의 깊이나 폭, 예리함으로 봐서 일반적인 나이프 종류
  는 아닌 것 같아.  병원에서 쓰이는 메스나 이발소용  면도
  칼, 그리고 도살용의 칼이  아닐까 싶어. 특수하게  제작된
  칼인지도 모르고 "
  "피해자 유류품은요?"
  "그건 우리 서(署)에 있어. 서에 가 볼래?"
  "다른 시체 좀 보구요."
  오득렬의 말에 유 형사가 다시 영안실 직원에게  눈짓을 했
  다. 영안실 직원이  윤형숙의 시체를 냉동박스에  집어넣고
  그 옆의 박스를 꺼냈다. 남자 화장실에서  살해된 오철구의
  시체였다.
  "이 친구 술에 취해 있었던 것 같애. 그렇지 않으면 공포에
  질려 있었던지 별다르게 반항도 못해 보고 살해되었어."
  오철구의 시체도 예리한 칼에 의해 난자되어  있었다. 오철
  구는 키가 작고 몸이 바짝 마른 편이었다.
  "같은 칼인가요?"
  "같은 칼이야. 폭, 깊이,  예리함이 윤형숙의 사체에  있는
  절창과 똑같아. 딱 한군데 자창이 있기는 하지만 "
  절창(切創)은 칼을 그은 상처, 자창(刺創)은 칼을  찌른 상
  처를 말하는 것이었다. 경찰 수사용어였다.
  "역시 범인은 한 사람이군요."
  "칼의 모양이 똑같아."
  최 계장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다음 사체를 보지요."
  오득렬이 무겁게 말하자 영안실 직원이 오철구의 시체를 집
  어넣고 조미란의 사체를 꺼냈다. 조미란의 사체도 윤형숙과
  비슷했다. 다만 조미란의 사체는 윤형숙의 사체보다 칼자국
  이 적은 대신 이빨자국은 더욱 선명했다.
  "어때?"
  최 계장이 오득렬을 보고 물었다.
  "역시 다른 피해자들과 똑같습니다."
  "음."
  이번엔 최 계장이 무겁게 신음을 토했다.
  "이 사체는 성폭행을 했습니까?"
  "정액이 채취되었어."
  "그럼 성폭행을 했군요."
  "글쎄. 그게 아주 묘해."
  "묘하다니요?"
  "부검을 해봐야 알겠지만 정액이 두 군데서 채취되었어. 조
  미란의 국부와 목과 안면에서 채취되었어."
  "어떻게 그런 일이?"
  "문제는 조미란의 국부와  목과 안면에서 상당량의  정액이
  채취되었다는 점이야."
  "예?"
  "그러니까 조미란은 두 사람과 관계를 했을 수도 있다는 뜻
  이야. 관계를 했는지 성폭행을  당한 것인지 현재는 알  수
  없지만 하나는 체외 사정을 한 것  같아 게다가 조미란은
  술에 상당히 취해 있었어 이  사체는 반듯이 부검을  해야
  돼. 그래야 성폭행 여부를 알 수 있어. 범인이 몇 명인지도
  알 수도 있고 "
  최 계장이 곤혹스러운 표정으로 조미란의 하복부를 살폈다.
  노련한 수사관이나 감식반은 사체의 하복부만  보고서도 성
  폭행 여부를 아는데 그것이 놀랄 정도로  정확했다. 체모에
  정액이 묻어 있는지 여부, 질액이 분비되었는지 여부, 체모
  의 모양 등으로 피해자의  성폭행 여부를 판단하는  것이었
  다.
  "육안으로 보기에도 국부에 정교의 흔적이 남아 있지?"
  "예."
  오득렬이 보기에도 조미란의 하복부는 정교의  흔적이 여실
  하게 남아 있었다. 조미란의 체모는 마찰을 당한 듯 눕혀져
  있었고 질액이 묻어 함부로 뒤엉켜 있었다.
  영안실을 나오자 또 한 가족이 몰려와 영안실  입구에서 전
  경들과 옥신각신하고 있었다. 조미란의 가족들이었다. 그들
  은 울부짖으면서 영안실로 들어가려고 하고  있었고 전경들
  은 상부의 지시라며 필사적으로 막고 있었다.
  "졸지에 변을 당했으니 가족들이 저러는 것도  무리는 아니
  지 "
  최 계장이 혀를 찼다.
  오득렬은 최 계장과 헤어지자 잠시 깊은 생각에 잠겼다. 벌
  써 오전 11시가 넘고 있었다. 그는 서초경찰서를 향해 지하
  철 역을 향하면서 살인마의 광기를  느낄 수 있을 것  같았
  다. 한낮의 태양이 머리 위에서 내려쬐고 있는데도 그는 서
  늘한 공포를 느꼈다.
  바람이 일자 대나무 숲이  또 다시 울기 시작했다.  때때로
  대나무 숲은 댓잎이 서로  몸을 비비면서 교성을  지르기도
  하고 살점이 떨어져 나가듯 처절하게 비명을 지른다.
  살려 줘
  살려 줘
  대나무 숲이 바람에 몸을  떠는 소리가 마치  야수파들에게
  죽임을 당한 피해자들의 절규처럼 처절하다. 나는  어둠 속
  에서 소리를 내어 훌쩍훌쩍 운다. 영희도 얼마나 살려 달라
  고 몸부림을 쳤던가.  그런데도 사내는 짐승처럼  낄낄대며
  영희를 때렸었다.
  아아 불쌍한 영희.
  살려 줘
  살려 줘
  야수파에게 살해당한 레스토랑 지배인 전택현도  속으로 그
  렇게 울부짖었을 것이다.  그러나 야수파는 전택현이  돈이
  없다는 것을 알자 곧바로 살해했다.
  "그들은 아저씨의 시체를 어떻게 했어?"
  나는 이지영에게 전택현의 시체를 어떻게  처리했는지 물었
  다. 살인을 하고 나면 시체의 처리가 가장 골치  아프게 되
  는 것이다.
  "교통사고로 위장했어요."
  "교통사고? 어떻게?"
  "아저씨를 비닐로 덮어서 질식하여 죽게 만든 뒤에 또 목을
  졸랐어요. 그리고 포터 화물차에 실은 뒤 인적이 없는 여우
  고개로 올라가서 그랜저에 아저씨의 시체를 넣고  20m 아래
  로 굴렸어요."
  여우고개는 어디쯤일까. 그랜저에 실린 전택현의 시체가 벼
  랑으로 굴러 떨어지는 모습을 상상해 보았다.  그러나 그런
  모습은 영화에서만 보았기 때문에  얼핏 상상이 되지  않았
  다. 영화에서는 벼랑에서 떨어지면 대부분의 차들이 폭발을
  하여 불길에 휩싸였다. 그렇게 되면 시체가 흔적도 없이 타
  버릴 것이다.
  "불에 타버렸어?"
  "아니요."
  벼랑에서 굴러 떨어진 차들이 불길에 휩싸이는 것은 영화적
  인 기교에 지나지 않는 모양이었다.
  "경찰이 교통사고로 인정했나?"
  "네. 다음날 교통순경들이 와서 조사를 하고는 운전 미숙으
  로 벼랑으로 굴렀다고 처리해 버렸어요."
  어리석은 경찰들이었다. 그때 경찰이 좀 더  세밀하게 조사
  를 했다면 천씨 부부는 살해되지 않았을 것이었다.
  쏴아아아
  얼마나 오랜 시간이 지난 것일까. 대나무 숲에 비가 내리는
  소리에 나는 잠이 깨었다.  나는 부스스 눈을 뜨고  허공을
  응시했다. 여관방은 캄캄했다. 황천이 있다면  이렇게 캄캄
  한 것일까. 대나무 숲에 빗발이 추적대는 소리가 캄캄한 어
  둠 속에서 을씨년스럽게 들려오고 있었다.
  쏴아아아
  나는 댓잎을 때리는 빗소리를 듣고 있었다.  빗소리에 섞여
  죽어가는 자들의 비명소리,  지옥에서 악귀가 울부짖는  것
  같은 아우성이 희미하게 들려왔다.
  나는 무엇에 홀린 듯이 침대에서 일어났다.  어느 방에선지
  술 취한 여인네가 까르르 웃는 소리가 들리더니  이어서 벽
  을 차는 듯한 소리, 왜 이래 ? 쳇 돈 몇 푼  주고 또 하자
  는 거야 뭐야 ? 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주섬주섬 옷을 입고 복도로 나왔다.  어느 여관방에서
  남녀의 거친 숨소리가 더욱 가파라지고 있었다.
  음귀(淫鬼) 같은 것들.
  나는 입술을 비틀며 웃었다.
  밖에는 차가운 빗발이  흩날리고 있었다. 빗발이  목덜미를
  때리자 살갗이 푸숫했다. 나는 여관 앞마당에 세워 둔 차의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차의 후론트  그라스에도 빗물
  이 줄지어 흘러내리고 있었다.
  시동을 걸고 윈도우 브러시를 작동시켰다. 여관  뒤의 대나
  무 숲이 어둠 속에서 비바람에 미친 듯이 나부끼고 있는 것
  이 보였다. 나는 대나무 숲에 얼핏  아귀(餓鬼)들이 매달려
  있는 듯한 환상을 보았다.
  수많은 아귀들이 대나무 가지 끝에 매달려서 낄낄대고 있었
  다.
  나는 악마의 소굴로 차를 출발시켰다.
  야수파들은 모두 일곱 명이었다. 이지영이 야수파에게 납치
  될 때 두목 김영태는 10대 소녀를 강간한  혐의로 구치소에
  수감 중이었다. 그는 세 살 때 아버지가 죽자  어머니 최필
  례와 함께 서울로 올라가 가발공장, 봉제공장  등을 전전하
  다가 고향인 지리산으로 돌아왔었다. 그의 나이는  스물 일
  곱 살이었다.
  강영진은 악마의 소굴에서 집이 불과 5백m밖에 떨어져 있지
  않았다. 그는 부모가 생존해 있었으나 어릴 때 집을 가출해
  막노동판을 전전하다가 야수파 두목 김영태를 만났다.
  강영진은 김영태가 구속되자 야수파의 사실상  두목 노릇을
  했고 성격이 포악했다.  야수파의 소굴에 죽음의  지하실을
  건설하고 시체를 태우는 소각로를 만든 것은 강영진의 머리
  에서 나온 것이었다.
  김광삼은 아버지가 죽은 후 어머니와 동생들과 함께 가난하
  게 살아온 전형적인  결손 가정출신이었다. 그도  먹고살기
  위해 노동판에서 막노동꾼으로 전전하다가 야수파들을 만났
  다.
  문동철(文東哲) 역시 아버지의 사망으로 어머니와  어린 동
  생들을 부양하기 위해 어린 나이에 막노동판을 전전했다.
  야수파의 유일한 여자인 이연숙은 아버지의  주벽으로 매를
  맞고 자랐고 아버지가 삼청교육대에 끌려가자  어머니가 가
  출해 친척들의 손에서 자라게 되었다. 그녀는  결국 단란주
  점에서 일하게 되었고 거기서  강영진을 만나 그의  애인이
  되었다. 강영진은 이연숙이 술집에 지고 있던 빚 1천만원까
  지 갚아 주고 빼내왔다.
  강칠성은 이들과 달리 고향이 충남이었다. 그는 어릴 때 어
  머니가 가출하자 아버지의 손에 자랐고  막노동판을 전전하
  다가 야수파에 가담했다.
  그들의 공통점은 한 결 같이 결손가정이라는 것과 가난하다
  는 것이었다. 이들이 가장 비싼 음식을 먹어 본 것은 6천원
  짜리 뷔페가 최고였고 취조하던 형사들이  잡탕밥을 시켜주
  자 이렇게 맛있는 음식은 처음 먹어본다고 눈물을 흘리기까
  지 했다.
  나는 그들의 환경을  생각하다가 무겁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들이 인면수심의 포악한 야수들이 된 이면에는 불행한 과
  거가 있었다. 그들의 의식에는 사회의 냉대에  대한 삐뚤어
  진 증오만이 가득차 있었던 것이다.
  야수파의 소굴이 가까워지기 시작했다.
  전조등의 밝은 불빛에 지리산 산자락에 퍼져 있는  시골 농
  가들이 들어오기 시작하고 있었다. 나는 소각로까지 갖추고
  살인 행각을 일삼았던 야수파의  소굴을 놓치지 않기  위해
  바짝 긴장했다.
  야수파의 소굴을 꼭 한 번 보고 싶었었다.
  야수파의 소굴에는 억울하게 죽은 영혼들이  극락정토로 가
  지 못하고 원혼이 되어 떠돌고 있을 터였다.
  야수파의 소굴은 내가 20분쯤 인적 없는 길을  달리자 어둠
  속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근처에 인가는 없었고  야수파의
  소굴도 불이 꺼져 캄캄했다.
  나는 차를 세우고 야수파의 소굴이 되었던 농가를 쳐다보았
  다.
  농가는 1층 슬라브 집이었다.  그러나 농가의 주위로  2m에
  가까운 담이 처져 있어서 안이 들여다보이지  않았다. 죽음
  의 소각로를 만들었던 별채 창고도 담 위로  희미하게 지붕
  만 보이고 있을 뿐이었다.
  나는 담배를 꺼내 물었다. 살인자들이 활개를  치던 농가의
  지붕에도 빗발이 을씨년스럽게 뿌리고 있었다.
  문득 야수파들이 처음 체포되었을 때 기자들과 회견을 하던
  포악스러운 모습이 떠올랐다.
  "강남의 백화점 고객 명단을 가지고 있나?"
  "그렇다."
  "어디서 구했나?"
  "청계천에서 브로커에게 샀다."
  "얼마에 샀나?"
  "5백만원을 주었다."
  "그런 정보가 있다는 것을 어떻게 알았나?"
  "청계천에서 구하지 못하는 것이 어디  있나? 청계천에서는
  미사일도 구할 수 있다. 백화점 고객 명단을 청계천에서 구
  할 수 있다는 것은 개도 안다."
  "범행 시기는 언제로 잡았나?"
  "여름이 끝나면 하려고 했다."
  "돈 많은 사람을 범행대상으로 꼽았나?"
  "그렇다. 하루에 5백만원씩 쓰는 사람, 특히 제일  많이 쓰
  는 사람부터 순서대로 해치우려고 했다. 룸싸롱과  러브 호
  텔도 싸그리 쓸어버리려고 했다."
  "돈 많은 사람을 왜 싫어하는가?"
  "당신도 돈이 없어 봐라."
  "범행은 어디서 배웠나?"
  "영화나 비디오에서 주로 배웠다. 소설에서도 봤고 "
  "추리소설이 살인교과서인가?"
  "웃기지 마라. 누가  추리소설보고 살인을 하는가.  우리는
  이미 수많은 영화나 비디오에서 살인하는 것을 수백 번이나
  보고 자랐다. 이제 그것은 상식에 속한다."
  나는 담배연기를 길게 내뿜었다. 대학교수가 아버지를 살해
  한 사건이 터졌을 때 추리소설이 그의 서가에서 발견되었다
  고 해서 한 방송국이 '추리소설은  살인교과서'라고 보도를
  하여 추리작가들이 방송국을 고발한 사건이 있었던 것이다.
  빗발이 점점 굵어지기 시작했다.
  나는 악마의 소굴로 다시 시선을 보냈다.
  악마의 소굴이 하얗게 쏟아지는 빗줄기를  고스란히 맞으며
  어둠 속에서 웅크리고 있었다. 나는 악마의 소굴이 마치 나
  를 부르는 듯한 환상에 빠져들고 있었다.
  달빛은 마치 사금파리 조각을 깔아놓은 듯이 마당에서 하얗
  게 반짝이고 있다. 영희는 사금파리 조각을  밟듯이 달빛을
  밟고 마당으로 나선다. 영희는 하얀 달빛 사이로 마치 그녀
  를 부르는 듯한 휘파람소리를  듣는다. 이상한 일이다.  왜
  이렇게 사방이 조용하면 휘파람소리가 들려오는 것일까.
  어머니가 사내에게 매를 맞았을 때, 영희가 그 사내에게 매
  를 맞았을 때, 그 사내가 잠이 들고나면 영희는  매의 고통
  과 슬픔에 못 이겨 잠을 이루지 못했었다.
  그럴 때면 어디선가 휘파람소리가 들려오곤 했다.
  영희는 처음에 착각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매의  고통을
  견디다 못해 훌쩍이고 있으면 그녀를 위로라도 하듯이 어디
  선가 휘파람소리가 들려오곤 했었다.
  어머니와 함께 살림을 시작한 사내는 알콜  중독자였다. 그
  는 걸핏하면 어머니를 두들겨 패기 시작했고 어머니는 매일
  같이 눈물과 한숨 속에서 살아야 했다.
  영희도 매를 맞기 시작했다. 사내는 뚜렷한 이유도 없이 영
  희와 어머니를 두들겨 팼다.
  "내가 죽일 년이야."
  사내가 술에 취해 잠이 들면 어머니는 영희를  끌어안고 소
  리를 죽여 흐느껴 울었다.
  "엄마, 우리 이사 가."
  영희는 울면서 사내와 헤어지라고 어머니에게 말했다.
  "어떻게 이사를 가니?"
  어머니는 영희의 말에 고개를 저었다. 어머니는  사내를 두
  고 이사를 가는 것을 반대했다.
  "아저씨가 밖에 술을 마시러 나간 뒤에 몰래 이사를  가 버
  리면 되잖아?"
  "그가 우리를 죽일 거야."
  어머니는 포악한 사내가 영희와 어머니를  죽여버릴 것이라
  고 걱정을 했다.
  "아저씨 눈에 띄지 않는 곳으로 도망을 가면 되잖아?"
  "그는 어떻게 하든지 우리를 찾아낼 거야."
  "도망을 가지 않으면 우리는 아저씨한테 맞아 죽어."
  "아저씨가 나쁜 사람은 아니야. 아저씨는 원래 좋은 사람이
  었어. 그런데 술이 나쁘게 만들고 있는 거야."
  어머니는 한사코 사내를 위해 변명을 했다.  영희는 그때서
  야 어머니가 사내가 무서워서 이사를 가지 않는  것이 아니
  라 아예 사내와 헤어질 생각이 없다는 것을 알았다. 어머니
  는 사내에게 매를 맞으면서도 사내와 혼인신고를  했고, 혼
  인신고를 하던 날 동네 사람들을 초대하여 술잔치까지 벌였
  었다.
  "내가 이제는 너의 아버지다!"
  사내는 기분이 좋았는지 손님들이 돌아가자  평상에 앉아서
  갑자기 영희의 팔을 낚아채 무릎에 앉혔다.  그리고 영희의
  궁둥이를 넓은 손바닥으로 두드렸다. 영희는 궁둥이를 두드
  리는 사내의 손이 마치 송충이가 달라붙는 것처럼 징그러웠
  다.
  "궁둥이에 살이 붙은 것을 보니 영희가 많이 컸어 "
  사내가 영희의 궁둥이를 두드리다가 둥글게 쓰다듬었다. 영
  희는 사내의 손이 궁둥이를 스치자 소름이 오싹 끼쳤다.
  "이젠 우리가 함께 잘 살아보는 거야."
  사내가 영희의 귓전에  술냄새가 풍기는 입김을  불어댔다.
  사내의 입김이 뜨겁게 영희의 귓전으로 쏟아졌다.
  "내가 너의 아버지란 말이야. 아버지 "
  사내가 영희를 끌어안았다. 의식적인지 아닌지 알  수 없었
  으나 사내의 투박한 손이 영희의 가슴을 만지고 있었다.
i
  영희는 사내의 손을 뿌리쳤다. 사내의 손이  가슴을 만지자
  영희는 찬물을 뒤집어쓴 것 같았다. 그러자 사내의 손이 다
  시 영희의 가슴을 세차게 쥐었다.
  영희는 가슴이 아파  얼굴을 찡그렸다. 사내가  의도적으로
  영희의 가슴을 움켜쥐고 있었다.
  "아 아 파 요."
  영희는 눈물이 찔끔 흘러나왔다. 그러나 사내는  영희의 말
  을 못들은 체 하고 있었다.
  "아, 아프단 말이예요!"
  영희는 팔 뒤꿈치로 사내의 옆구리를 내질렀다.  그렇게 하
  지 않으면 사내의 손을 뿌리칠 수 없을 것 같았다.
  "이년이!"
  사내가 버럭 화를 내며 영희의 뺨을 세차게 후려쳤다. 영희
  는 뺨이 얼얼했다.
  "이년이 안아 주는데도 제 애비를 주먹으로 쳐?  이년 이거
  순 악종 아니야!"
  사내가 언성을 높이면서  영희에게 눈을 부릅떴다.  영희는
  사내가 소리를 지르자 겁이 덜컥 났다. 사내를 주먹으로 친
  일은 없었다. 사내가 영희의 가슴을 움켜쥐자  뿌리치기 위
  해 옆구리를 내질렀을 뿐이었다. 그리고 그렇게  세게 내지
  른 것도 아니었다.
  사내가 소리를 지르자 어머니가 부엌에서  설거지를 하다가
  말고 무슨 일인가 싶어 밖을 내다보았다.
  "왜 그래요?"
  어머니가 조심스러운 기색으로 사내에게 물었다.
  "예쁘다고 안아 주는데 이년이  주먹으로 닐 쳤어!  세상에
  지 애비를 주먹으로 치는  년이 어디 있어? 이년은  우리가
  같이 사는 것에 불만을 가지고 있어."
  사내가 능청스럽게 거짓말을 했다.
  영희는 사내를 쏘아보았다. 사내가 그런 거짓말을 할 수 있
  다는 것이 믿어지지 않았다.
  "아저씨는 이제 영희 아버지야. 아버지한테 공손해야지 "
  어머니가 영희를 나무랐다.
  "아저씨가 내 궁둥이를 만졌어요."
  영희는 어머니가 사내를 두둔하자 화가 났다.  그러나 차마
  가슴을 만졌다고는 할 수 없었다.
  "이년아! 애비가 딸년 예쁘다고 궁둥이 좀 두드린  것이 뭐
  가 잘못이야?"
  "영희도 많이 컸어요. 다 큰 아이 궁둥이를 만지니 그런 말
  을 하지요 "
  어머니가 사내를 가볍게 나무랐다.
  "뭐야? 아니 이것들이 작당을 해서 나를 무시하고 있어? 에
  라이 이 더러운 것들아!"
  사내가 평상에 있던 술상을 마당으로 홱  집어던졌다. 술상
  이 부서지면서 그릇들이 와장창 깨졌다.
  "좋은 날인데 왜 이래요?"
  어머니가 마당으로 달려나왔다.
  "흥? 좋은 날? 그래 좋은 날에 서방을 무시해?"
  "당신 취했어요?"
  "취했다구? 그래 취했다! 취했다구 무시하는 거야? 취한 놈
  맛 좀 볼래?"
  사내가 어머니의 머리채를 잡고 흔들다가 팽개쳤다. 어머니
  가 아구구 하는 비명을 지르며 마당에 처박혔다. 이번엔 사
  내가 오도카니 서 있는 영희의 멱살을  잡아서 패대기쳤다.
  영희는 비명을 지르며 마당으로 나뒹굴었다. 그러자 사내가
  구둣발로 영희를 마구 짓밟았다.
  영희는 울음을 터뜨리고 비명을 질렀다. 어머니가 영희에게
  달려와 영희를 감싸안았다. 이번엔 사내의 구둣발이 어머니
  의 등과 궁둥이에 쏟아졌다. 영희는 사내의  구둣발에서 놓
  여나자 재빨리 대문께로 달아났다.
  "거기 안 서?"
  사내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 영희는 달아나다가  말고 멈춰
  섰다. 사내가 소리를 버럭 지르자 가슴이  철렁하면서 걸음
  이 떨어지지 않았다. 영희는 공포에 질린 눈으로 사내를 쳐
  다보았다.
  "사단은 네 년 때문에 일어난 거야! 이리 와!"
  영희는 쭈삣거리며 사내를  향해 가까이 다가갔다.  사내의
  명령을 거역할 수가 없었다.
  사내의 눈은 하얗게 뒤집혀  있었다. 술을 너무 많이  마신
  탓이었다. 그는 동네 사람들이 권하는 대로 술을 마셨고 동
  네 사람들이 돌아간 뒤에도 계속해서 술을 퍼 마셨었다.
  사내가 마당에 세워져 있던 장작을 주워 들었다.
  "영희야 달아나!"
  어머니가 사내의 다리를 잡고 소리를 질렀다.  사내가 장작
  으로 때리면 죽을지도 몰랐다. 영희는 냅다  달아나기 시작
  했다. 사내에게 잡히면 장작으로 얻어맞아야  했다. 뒤에서
  어머니의 비명소리가 들렸다. 사내가 장작으로 어머니를 마
  구 두들겨 패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영희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개울가로 도망갔다.
  "이년아 네년이 도망가야 어디까지  도망가? 오늘 네  년을
  때려 죽이지 않으면 사람 새끼가 아니다!"
  술에 취한 사내가 장작을 들고 영희를 때려  죽이겠다고 개
  울까지 좇아 왔다. 영희는 재빨리 가시나무 덤불 뒤에 숨었
  다. 그러자 사내가 비틀대며 가시나무 덤불로  가까이 걸어
  왔다. 영희는 숨이 막히는 것 같았다.
  "나쁜 년 "
  사내가 갑자기 바지춤을 내리더니 무엇인가 꺼냈다. 가시나
  무 덤불 사이로 내다보자  사내는 그것을 만지며  징그럽게
  웃고 있었다. 영희는 재빨리 눈을 감았다. 사내가 의도적으
  로 자신의 그것을 영희에게 보여주고 있었다.
  사내가 가시나무 덤불을 향해 소변을 보기 시작했다.
  "좋다! 네 년이 도망을  갔다 이거지? 그렇다면 결코  집에
  돌아오지 못한다!"
  볼일을 끝낸 사내가 비틀대며  다시 집으로 돌아가고  있었
  다.
  (아버지가 보고 싶어. 우리 진짜 아버지는 나를  사랑해 주
  실 거야 )
  영희는 주먹으로 눈물을 씻으며 생부를 생각했다. 어머니가
  언제나 그랬었다. 너의 아버지는 서울에서 큰  회사를 하고
  있다고. 자라면서 영희는 그 말에 반신반의했으나 사내에게
  매를 맞고 도망을 치면 언제나 생부에 대해 생각했다. 생부
  가 사무치도록 그리웠다.
  (아버지 )
  생부를 생각하자 영희는 또 다시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생부에 대한 생각을 하다가  영희는 가시덤불 속에서  잠을
  잤다. 영희가 잠이 깬 것은 배가 고팠기  때문이었다. 영희
  가 시장기에 놀라 눈을 뜨자 이미 사방이 캄캄했다. 게다가
  차가운 빗방울까지 흩뿌리고 있었다. 어느 사이에  밤이 와
  있었다.
  영희는 조심조심 집으로 향해 걸었다. 추위와  배고픔 때문
  에 몸이 으실으실 떨렸다.
  안방에는 불이 환하게 켜져 있었다.
  영희는 조심스럽게 부엌으로  들어갔다. 부엌에 먹을  것이
  남아 있을 것이고 저녁을 짓기 위해 불을  피웠을 것이므로
  온기도 있을 거였다. 영희의 방은 안방을  거쳐서 들어가야
  하므로 방에는 들어갈 수가 없었다.
  부엌의 부뚜막 위에는 밥상이 차려져 있었다.  어머니가 영
  희가 돌아올 것을 알고 밥상을 준비해 둔 것이 분명했다.
  영희는 부엌에 쪼그리고 앉아서 밥을 먹기 시작했다.
  안방에서는 어머니와 사내의 두런대는 소리가  들려오고 있
  었다. 사내가 뭐라고  말했는지 어머니가 간드러지게  웃고
  있었다. 이어서 사내가 기분 좋을 때 흥흥대는 소리도 들려
  왔다.
  (어머니와 사내가 그 짓을 하는 거야 )
  영희는 얼굴을 찡그렸다. 이상하게 가슴이 컥  하고 막혀오
  는 것 같았다. 그때 영희는 자신도 모르게 밥그릇을 떨어트
  렸다. 사기 대접이 깨지는 소리가 쨍그랑 하고 났다.
  "부엌에 누구 온 거 아니야?"
  사내의 목소리가 부엌과 안방  사이의 쪽문을 통해  들려왔
  다. 영희는 숨을 죽이고  짚덤불 옆으로 몸을 바짝  웅크렸
  다.
  "오긴 누가 왔겠어요."
  어머니의 대답이었다.
  "부엌에 누구야?"
  사내가 다시 소리를 질렀다. 어쩐지 영희에게  들으라고 일
  부러 그러는 것 같았다.
  그때 쪽문이 덜컥 열렸다. 영희는 몸을 더욱 웅크리고 쪽문
  을 쳐다보았다. 사내가 쪽문에 나타나 부엌을  살피고 있었
  다. 사내는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알몸으로 부엌을 살
  피고 있었다. 영희는 숨소리까지 죽였다. 사내의 옆으로 안
  방의 모습이 얼추 보였다.  어머니가 이불 위에 누워  있었
  다.
  "누구 왔어요?"
  어머니가 물었다.
  "아냐."
  사내는 영희를 보았을 것이 틀림없었다. 그러나  사내는 오
  히려 못 본 체하고 있었다.
  "문 닫아요."
  "더운데 열어 놓지 "
  "누가 보면 어떻게 해요?"
  "보긴 누가 본다고 그래?"
  "영희라도 부엌에 들어오면 "
  "문을 열어놓으면 영희가 들어오는 것을 금방 알  수 있지.
  문을 닫아놓으면 오히려 영희가 들어오는 것도 모르잖아."
  사내가 어머니의 위에 엎어졌다. 영희는 눈을 질끈 감았다.
  사내는 일부러 영희에게 보이기 위해 부엌 쪽문을 열어놓은
  것이다.
  영희는 부엌에 웅크리고 앉아 귀를 틀어막았다.  사내와 어
  머니의 거친 호흡소리, 짐승이 뒤엉키는 듯한  소리를 듣지
  않기 위해서였다. 그 대신 영희는 가슴 속 저  깊은 곳에서
  들려오는 휘파람소리를 듣기 시작했다.
  쏴아아아
  바람이 대나무 숲을 스치는 소리 사이사이로 또  쓸쓸한 휘
  파람소리가 들려온다. 영희는 달빛이 하얗게 부서지는 대나
  무 숲을 바라본다.
  언제부터인가, 사내에게 매를 맞고 집 바깥으로  쫓겨 나오
  면 어디선가 휘파람소리가 들려오곤 했었다. 개울가에 있을
  때 그리고 부엌에 웅크리고 있을 때도 그녀는 휘파람소리를
  들었다.
  비가 오는 날도 그랬고, 달이 밝은 날도 그랬고, 살을 에일
  듯이 추운 날도 그녀는 사내에게 매를 맞은  뒤에는 반드시
  어디선가 들려오는 휘파람소리를 들었다.
  그 까닭은 알 수 없었다.
  매도 계속 맞았다. 이유는 없었다. 아니 사내는  알콜 중독
  자였다. 그는 술에 취하면  그녀를 두들겨 팼다.  어머니는
  그에게 모진 매를 맞으면서도 그를 떠나지 않았다. 아니 매
  를 맞으면서도 어머니는 그와 잠자리를 같이 했다.
  한 번 매질을 시작한 사내는 습관을 들이듯  그녀에게 매질
  을 계속했다. 오히려  어머니에게보다 그녀에게 더  매질을
  했다.
  "영희야. 넌 아무래도 여길 떠나야 할까부다."
  어머니는 영희가 매를 맞은  뒤에 영희를 끌어안고  울면서
  그렇게 말했다.
  "엄마도 같이 떠나요."
  "난 안돼."
  어머니가 단호하게 말했다.
  "왜요?"
  "이 집은 내 집이야. 내 집을 두고 어떻게 떠나니?"
  "전 떠나지 않겠어요."
  "네가 여기 있으면 무슨 짓을 당할지 모른다."
  어머니가 영희에게 말했다.  그러나 어머니가 모르는  것이
  있었다. 어머니가 그런 말을 했을 때 영희는 이미 사내에게
  짓밟힌 뒤였다.
  "네 어미에게 말하지 마. 네  어미에게 말하면 둘 다  죽일
  거야!"
  영희는 사내의 협박 때문에 어머니에게 말을 할  수가 없었
  다. 말을 한다고 해도 어머니가 아무 도움이 되지  않을 것
  같았다. 영희는 그 일을  처음 당한 뒤에 달아나려고  했었
  다. 그러나 사내가 영희가 달아나면 어머니를 죽여버리겠다
  고 했다.
  "네 년이 달아나면 네 어미를 죽여버리겠어! "
  사내는 기회 있을 때마다 짐승처럼 으르렁거리며 영희를 다
  그치곤 했었다. 영희는 사내의 말이 귀에 못이  박혔다. 사
  내는 어머니를 죽이고도 남을 위인이었다.
  "그런 짐승 같은 자식은 죽여버려야 돼!"
  태희가 이를 갈았다.
  "네 아버지가 아니면 내가 죽였을 텐데 "
  "내 아버지가 아니야."
  영희는 단호하게 말했다. 그 사내를 한 번도 아버지라고 생
  각한 적이 없었다.
  "니 엄마와 같이 살잖아?"
  "그래도 아버지는 아니야!"
  영희는 어금니를 꽉 깨물었다.
  "그래 계부지."
  "계부도 아니야!"
  "그럼 뭐야?"
  "짐승!"
  "그래 짐승이야."
  태희가 사내처럼 영희의 등을 두드리며 웃었다.  태희는 영
  희보다 다섯 살이나 위인 불량소녀였다. 동네를 돌아다니며
  여자아이들에게 옷이나 돈 따위를 빼앗아서  영희에게 주었
  다.
  "이거 아영이 옷이잖아?"
  아영이는 영희와 같은 반의 부잣집 아이였다.  아영이의 아
  버지가 아영이를 데리고 집앞을  산책하는 것을 넋을  잃고
  본 적이 있었다. 그때  영희는 아버지란 저런  사람이구나,
  내가 아영이가 되어 저 사람의 따듯한 사랑을  받았으면 얼
  마나 좋을까 하고 생각했다.
  "입어. 그 애는 아버지가 옷을 잘 사주니까 괜찮아."
  태희는 어느 날 코스모스가 핀 시골국도에서 경찰에 체포되
  었다. 태희를 성폭행하려는 남자를 칼로 찔러  죽였기 때문
  이었다.
  감식반 최 계장이 예상했던대로 살인자의 유류품은 전혀 남
  아있지 않았다. 게다가  살인사건이 밀실에서 일어난  것이
  아니라 대중들이 이용하는  공공장소에서 일어나  유류품을
  찾는 작업이 더욱 어려웠다. 살인자의 유일한  유류품은 피
  해자 조미란의 목과 안면, 그리고 국부에서 발견된 두 종류
  의 정액뿐이었다. 담배꽁초가 수 십개 발견되었으나 그것은
  지나가는 사람들도 버릴 수 있는 것이어서 그다지  증거 능
  력을 가지지 못했다.
  "이건 외제로군."
  최 계장이 필터에 푸른 색 줄이 있는 담배를 들여다보며 말
  했다. 살렘(Salam)이라는 미국 담배였다.
  "박하담배야."
  최 계장이 다시 중얼거렸다. 오득렬은 그 담배를 피운 적이
  없어서 잠자코 있었다. 한국에서도 한때 수정이라는 박하향
  이 풍기는 담배를 생산했으나 최근에는 생산이 중지되어 있
  었다.
  오득렬은 서초경찰서 강력계로 돌아왔다. 그러나 그는 곧바
  로 새로 구성된 인육 살인사건 합동수사본부로 배치되었다.
  장미원 살인사건과 인육  살인사건이 동일범의  소행이라는
  확신이 서면서 두 곳에 수사본부를 설치하느니 가장 최근에
  발생한 살인사건 현장이 있는 성동경찰서 관내 행당 파출소
  에 수사본부를 설치하기로 한 것이다.
  수사본부에는 40명의 인원이 배치되었다. 전에 없는 대규모
  의 수사 인력이었다. 수사본부장에는 성동경찰서장, 부본부
  장에 성동경찰서 강력과장이 임명되어 있었다.
  수사본부에는 특이하게 여형사 셋이 배치되었다.
  "정액을 검사했는데 목  중위의 혈액형은 B형이야.  국부의
  혈액형은 O형이구 유전자 배열도 밝혀졌는데 용의자만  잡
  으면 검거할 수 있을 것 같아."
  그날 오후에 최 계장은 전화로 오득렬에게 국립 과학수사연
  구소의 정액검사 결과를 알려주었다.
  "그럼 범인이 둘이라는 얘기 아닙니까?"
  오득렬은 골치가 아파 왔다.
  "그런 셈이야."
  "부검했습니까?"
  "조미란은 부검했어."
  "강간했습니까?"
  "응. 했대. 국부가 훼손된 흔적이 없는 것으로 미루어 피해
  자는 격렬하게 반항을 하지는 않았을 거래."
  "그럼 면식범 두 명과 관계를 했다는 말씀입니까?"
  "글쎄. 국과수에서도 그 부분이 수수께끼라는군."
  최 계장과 통화를 끝난 뒤에 오득렬은 담배를  피우며 한참
  동안 창밖을 응시했다. 기묘한 일이었다.  조미란의 사체에
  서 두 종류의 정액이  검출되었는데도 강간한 흔적이  없다
  니. 한 놈은 조미란을  죽여 놓고 자위행위를 했다는  말인
  가.
  오득렬로서는 도무지 납득이 되지 않았다.
  수사본부는 활발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형사들은 피해자 주
  변과 현장 주변의 우범자, 정신병력 소유자, 목격자 탐문수
  사로 나누어 수사를 벌였다. 오득렬은 목격자  탐문수사 팀
  에 합류하여 수사에  나섰다. 그러나 한밤중이었기  때문에
  목격자가 거의 없었다.
  여형사들도 부지런히 뛰었다.  그들은 각각 남자  형사들과
  파트너가 되어 현장에 투입되었으나 여성  특유의 직관력으
  로 맹렬하게 대시했다.  그들 중에 오진주(吳眞珠)  형사는
  검은 색 외제 승용차가 살인사건이 일어난 00지하철역 근처
  골목에 주차되어 있는 것을  본 목격자를 찾아내는  개가를
  올렸다. 목격자 탐문수사에 나선지 사흘째 되던 날이었다.
  "오 선배님이 좀 도와주세요."
  때마침 오진주 형사와 파트너가 되어 있던 성북경찰서 강력
  계 형사가 관내에 살인사건이 발생하여  빠져나가는 바람에
  오진주 형사가 오득렬에게 같이 심문할 것을 요구했다.
  "왜 하필이면 나야?"
  "선배님 종씨잖아요?"
  퉁명스럽게 말하는 오득렬에게 오진주 형사는  생글생글 웃
  으며 말했다.
  "그렇다면 할 수없지. 미인과의 동행이니 싫지도 않고 "
  오득렬은 속으로 목격자를 만나보고 싶은  생각이 굴뚝같던
  참이라 겉으로는 그렇게 말했으면서도 못이기는  체 오진주
  형사를 따라나섰다. 목격자 수사본부에 나오는 것을 꺼려하
  여 커피숍에서 만나기로 했던 것이다.
  "이름이 어떻게 되세요?"
  질문은 오진주 형사가 먼저 시작했다. 목격자들은  이미 커
  피숍에 도착해 있었다.
  "권혁진입니다."
  오득렬은 목격자의 이름부터 수첩에 메모했다. 권혁진(權爀
  珍)은 20대 초반으로 키가 크고  꽁지머리였다. 첫인상부터
  가 탐탁하지가 않았다.
  "나이는요?"
  오진주 형사는 마치 인터뷰를 하고 있는 것처럼  질문을 하
  고 있었다.
  "스물 한 살이요."
  권혁진은 오진주가 심문을 하자 당황한 표정이었다. 권혁진
  도 여형사의 심문을 받는 것이 처음이었을 터였다.
  "직업?"
  "피자 배달원이요."
  "차번호를 봤어요?"
  "아니요."
  "그런데 어떻게 외제 승용차가 주차되어 있는 걸 알았죠?"
  오진주 형사의 질문이 날카로워지기 시작했다.
  "제가 좀 술이 취해서 오바이트를 했어요."
  "차에다가요?"
  "차 뒤에요. 오바이트를 하면서 보니까  외제 승용차더라구
  요. 그래서 차를 한 번  발로 찼어요. 차가 좀  찌그러졌을
  거예요."
  권혁진이 머리를 긁었다.
  "차종이 뭐죠?"
  "샤브라고 써 있었어요."
  "운전하는 사람을 봤어요?"
  "저는 못봤구 친구가 봤어요. 제 등을  두드려주고 있었어
  요."
  "여자 친구요?"
  "예."
  이내 권혁진의 여자 친구가 불려왔다. 권혁진의  여자 친구
  는 허벅지가 죄드러난 하얀 색의 초미니 스커트에  하얀 색
  배꼽티를 입고 있었다. 머리는  붉게 염색을 하고  있었다.
  이름은 차은숙(車恩淑)이고 나이는 스물 세 살이었다. 화장
  품 대리점에 근무하고 있었다.
  "그날 확실히 외제 승용차 봤어요?"
  "네."
  "차번호를 봤어요?"
  "못 봤어요."
  차은숙은 껌을 질겅질겅 씹으면서 대답했다.
  "운전하는 사람은 봤어요?"
  "네."
  "어떻게 생겼어요?"
  "잘 생겼어요. 머리는 무쓰를  발라서 뒤로 넘겼구  얼굴이
  하어요. 바바리 코트를 입었는데 여자처럼 예쁘게  생겼
  어요."
  "몇 살쯤 되었죠"
  "20대 후반이요."
  "어디서 와서 차를 탔어요?"
  "지하철에서 나와 차를 탔어요.  우리는 지하철 옆에  있는
  술집 계단에 앉아 있었어요. 얘가 술에 취해서 등을 두드려
  주고 있었어요. 그런데 그 사람이 지하철에서 나와 차로 갔
  어요. 그리고 얼마 가지 않아서 차를 세우고 "
  "차를 세우고?"
  "어떤 여자가 지나가는데  유리창을 내리고 뭐라고  그랬어
  요. 그러자 그 여자가 뭐라고 대꾸했는데 그 소리는  못 들
  었어요."
  "그래서 탔어요?"
  "네."
  "그 여자 옷 기억할 수 있어요?"
  "네. 하얀 블라우스와 검은 스커트를 입고 있었으니까요."
  조미란도 하얀 블라우스와 검은 스커트를 입고  있었다. 그
  렇다면 검은 색의 외제 승용차에 탄 여자가  조미란이 확실
  할 것이다.
  "남자 얼굴 기억할 수 있어요?"
  "아뇨. 잘 생겼다는 것밖에는 몰라요."
  "키는 어느 정도 되었어요?"
  "165정도 "
  한경숙의 얘기에 의하면 검은 색 샤브 승용차를 탄 자가 범
  인일 가능성이 충분했다.
  "오 형사님 더 물어 볼 것 있으세요?"
  오진주 형사가 오득렬을 보고 물었다. 오득렬은  고개를 흔
  들었다. 경찰학교에서 제대로 배웠는지 오진주는 필요한 것
  을 모두 물어보았던 것이다.
  오득렬은 목격자들을 만난 뒤에 깊은 생각에  잠겼다. 범인
  은 외제 승용차 샤브의 주인이 유력해 보였다. 그를 찾으면
  조미란에게서 검출된 정액으로 유전자를 대조해 볼 수가 있
  다. 그런데 조미란에게서 검출된 정액은 두  사람의 것인데
  샤브 승용차의 주인이 범인이라면 한 사람은  누구인가. 오
  득렬은 그 의혹을 버릴 수가 없었다.
  그러나 일단 샤브 승용차의 주인부터 수배해야  했다. 의외
  로 살인마는 목격자의 눈에  띄어 꼬리를 드러낼  가능성이
  높아진 것이다. 오득렬은  오진주 형사와 함께  수사본부로
  돌아와 목격자인 권혁진과 차은숙의 진술을  수사본부에 보
  고하고 샤브 승용차의 주인을 수배할 것을 요구했다.
  "샤브 승용차 한 대가 도난신고가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이틀에 걸쳐 샤브 승용차 주인을 수배했을  때 의외
  로 샤브 승용차 한 대가 도난신고가 되어 있다는 보고가 들
  어왔다.
  "샤브의 색깔이 뭐야?"
  "검은 색 승용차입니다."
  검은 색 승용차라면 그  차가 범행에 이용되었을  가능성이
  높았다.
  "차 주인은?"
  "정신과의사입니다."
  "정신과의사?"
  "이혼한 정신과의사인데 여자입니다."
  경찰청 상황실에 근무하는 경찰의 말에 오득렬은 경찰 범죄
  심리학 분석의를 머릿속에 떠올렸다. 어딘지 모르게 퇴폐적
  인 분위기를 풍기기고 있는 여자. 30대의  아름다운 여의사
  를 머릿속에 떠올리자  갑자기 아랫도리가 묵직해져  왔다.
  그녀는 의자에 앉아 있는 자세가 묘하게 자극적이었다.
  "도난 당한 차는 찾았나?"
  "아직이요."
  "그러 그 차를 집중적으로 수배해."
  "예."
  오득렬은 경찰청 상황실에 도난 당한 샤브 승용차를 수배하
  라는 지시를 내리고 여의사를 만나기 위해 경찰서를 나서려
  다가 정문 앞에서 수사본부의 제2반 박준일(朴俊一) 반장을
  만났다. 오득렬은 박 반장에게 꾸벅 인사를 했다.
  "아, 오 형사. 마침 잘 만났어."
  "예?"
  "조미란의 친구들을 오라고 했는데 같이 만나지 않겠어?"
  박 반장의 파트너는 이상길 형사인데 비번이었다.
  "조미란의 친구들이요?"
  "그날 밤 조미란하고 같이 술을 마신 친구들을  찾았어. 친
  구들 중에 관계를 가진 자들이 있는지 조사를  해보려구 그
  래. 이 앞에 커피숍에 있어."
  "왜 조사실로 부르지 않았습니까?"
  "조사실은 좀 겁이 난대."
  박 반장이 피식 웃었다.
  "예. 좋습니다. 같이 가시죠."
  조미란과 함께 술을 마신 친구들은 여자 하나에  남자 둘이
  었다. 그들은 이미 커피숍의 어두컴컴한 구석에  앉아 있었
  다.
  "각자 이름을 말해 봐."
  박 반장이 담배를 꺼내 피우며 말했다. 오득렬도 담배를 꺼
  내 물고 불을 붙여 연기를 길게 내뿜었다.
  "전 강인철입니다. 얜 최종호구 얜 김선경입니다."
  몸이 다부져 보이는 강인철(姜仁鐵)이 먼저  자신을 소개하
  고 최종호(崔宗浩)와 김선경(金仙京)의 이름을 차례로 말했
  다. 강인철과 최종호는 K대학 3학년이고  김선경은 Y여자전
  문대학 1학년이었다. 조미란까지 그들 넷은  미팅에서 만나
  계속 관계를 유지해 왔다고 했다. 강인철과  김선경이 애인
  관계, 최종호와 조미란이 애인 관계로 그들은  항상 커플끼
  리 어울려 여행을 다니고 술을 마시고 노래방도  같이 다녔
  다고 했다.
  "조미란이 죽던 날 무얼했어?"
  "1차로 술을 마시고 노래방에 갔습니다."
  박 반장의 질문에 강인철이 대답했다.
  "어디서 술을 마시고 어느 노래방에 갔는지  구체적으로 말
  해. 몇 시부터 몇 시까지 있었고 누구와 있었는지 "
  박 반장의 말에 강인철이  쭈삣거리며 사건이 일어나던  날
  그들이 술을 마신 집과 노래방에 갔던 집, 그리고 다시 2차
  로 호프집에 가서 맥주를 마신 얘기를 했다.
  그들은 오후 6시30분쯤 화양리에 있는 '티파니 커피숍'에서
  만나 한 30분쯤 얘기를 한 뒤 뒷골목에  있는 '우리옥'이라
  는 한식집에서 저녁을 먹으며 소주를 마셨다.  그들이 먹은
  음식은 '불낙' 3인분이고 소주는 세 병을 마셨다. 조미란은
  소주를 반병쯤 마셨다. 그들이 우리옥이라는 한식집에서 나
  온 시간은 9시20분쯤이었다.  식당에서 일하는  아주머니가
  청소를 하고 있어서 빨리 나가라는 신호로 알고  일찍 나오
  고 말았다고 했다.
  노래방은 전철을 타고 행당동까지 와서  '칠갑산 노래방'이
  라는 집에서 한 시간 동안 노래를 불렀다. 그때  시간이 11
  시가 가까워지고 있었다. 그들은 노래방에서 나와 전풍호텔
  맞은 편에 있는 '비엔나 호프집'에 들어가서 생맥주를 마셨
  다. 그때 김선경은 술에 몹시 취하여 탁자 위에  엎드려 괴
  로워하고 최종호가 술 깨는 약을 사러 밖으로 나갔다.
  조미란은 술 몇 잔에 떨어진다고 김선경의 흉을  보다가 화
  장실에 들어갔다. 최종호는  약을 사러갔으나 약방이  모두
  문을 닫아서 허탕을 치고 돌아왔다.
  김선경 때문에 그들은 술을 더 마시지 않고 밖으로 나왔다.
  그때가 12시가 가까운 시간인지 지난 시간인지 정확하게 기
  억하지는 못했다. 강인철은 김선경을 집에 데려다주기 위해
  택시를 잡았고 최종호도 같은  방향이라 셋이 함께  택시를
  탔다. 조미란은 걸어서 10분이면 충분한 거리라  그냥 걸어
  가기로 했다.
  강인철은 최종호가 먼저 내리자 김선경의  집앞에까지 갔다
  가 여관에 들어갔다. 아침에 일어나 보니  뉴스에 조미란이
  살해되었다고 나와서 망설이다가 자진하여 신고를  하게 되
  었다고 했다.
  오득렬은 강인철의 얘기를 들으면서 뭔가  미심쩍다고 생각
  했다. 조미란은 살해되기  전에 누군가와 성관계를  가졌었
  다. 강인철의 얘기대로라면 미처 성관계를 가질  시간이 없
  게 되는 것이다. 물론 살인자에게 납치된 뒤에 성관계를 가
  질 수도 있기는 했다.
  오득렬은 박 반장에게 눈짓을 하고 강인철을 따로  다른 자
  리로 불렀다.
  "너 지금 거짓말하고 있지?"
  "아, 아닙니다."
  "너 피 한 방울만 뽑아서 혈액검사 하면 그대로 들통이 나.
  죽은 조미란에게서 정액이 검출되었어. 혈액형도 분석했구.
  너 B형 아니야?"
  "아닙니다. 전 A형입니다."
  강인철의 얼굴이 사색이 되어 대답했다.
  "괜히 나중에 고생하지 말고 지금 솔직히 털어놔."
  "사실은 "
  "다른 애들한테 말하지 않을 테니까 털어놔. 잘못하면 니가
  살인 누명을 쓰게 돼."
  "사실은 호프집에서 술을 마시다가 존호가 약 사러갔을 때
  미란이가 화장실을 간 일이 있습니다."
  "그래서?"
  "그 시간이 꽤 오래 걸렸습니다."
  "얼마나?"
  "20분쯤 "
  "아니 20분 동안이나 화장실에서 나오지 않았는데 가보지도
  않았어?"
  "여자들이 화장실에 간 거니까 오래 걸리 수도 있다고 생각
  했습니다."
  "그러지 말고 솔직하게 털어놔."
  "실은 미란이가 좀 늦게 나왔으면 했습니다."
  "왜?"
  "전 선경이를 페팅하고 있었습니다."
  "뭐?"
  "페팅이요. 애무를 했어요."
  "김선경이 반항하지 않았어?"
  "처음엔 뿌리치다가 애무가 깊어지자 "
  "받아들였어?"
  "네. 전에도 한 번 그런 일이 있어서 "
  "결국은 그래서 여관엔 갔다는 거군."
  오득렬은 기분이 미묘했다. 수사를 하다보면 일반적인 상식
  으로는 도무지 납득할 수 없는 일도 많이  겪지만 강인철과
  김선경 같은 경우는 처음이었다.
  "네."
  그러나 그것은 김선경의 일이지 조미란과 직접 관련된 것은
  아니었다.
  "조미란이와는 아무 일도 없었어?"
  "예. 미란이는 종호 애인인데 제가 어떻게 건드립니까?"
  "너 아는 사람중에 외제 승용차 갖고 있는 사람 있어?"
  "작은아버지가 "
  "무슨 차야?"
  "일제 닷산입니다."
  "그 외엔?"
  "없습니다."
  "조미란의 가족에 대해서도 좀 알아?"
  "약간이요?"
  "조미란의 가족이나 친지들 중에도 외제 승용차  갖고 있는
  사람 있어?"
  "없습니다."
  "대학교수들 중에는?"
  "없습니다."
  "최종호나 김선경은?"
  "걔들도 없을 겁니다."
  강인철이 고개를 떨구고 대답했다. 오득렬은 강인철을 노려
  보다가 담배를 비벼 껐다.
  "아 비엔나 호프집에서 맥주 마실 때 아는 얼굴 있었어?"
  "없었습니다."
  강인철이 고개를 흔들었다.
  "뭐 좀 건진 것 좀 있어?"
  강인철과 그들을 일단 돌려보내고 마주앉자 박 반장이 피로
  한 듯이 의자에 등을 기대고 물었다.
  "없습니다."
  "피해자 주변에서 일어난 사건은 아닌 것 같애."
  "그런 것 같습니다."
  오득렬은 맥없이 대꾸를 했다. 사건은 점점  미궁으로 빠지
  고 있었다. 매스컴에서는 인육 살인사건이니 어쩌니 하면서
  북을 치고 있었다. 매스컴이 북을 치자 경찰 상부에서도 짜
  증부터 부리고 있었다.
  박 반장과 헤어져 오득렬은 행당동 전풍호텔  앞으로 갔다.
  그 곳은 조미란의 시체가 유기된 현장에서 얼마  되지 않는
  곳이어서 오득렬은 천천히 걸어갔다. 강인철 등이  술을 마
  셨다는 비엔나 호프집은 전풍호텔 맞은 편에 있어서 찾기가
  쉬웠다.
  4층 복합건물이었다.
  지하실은 노래방, 1층은 대형 약국, 2층은  비엔나 호프집,
  3층은 당구장, 4층은 헬스클럽이 있었다.
  비엔나 호프집은 오전이라 아직 문을 열지 않고 있었다. 오
  득렬은 헬스클럽으로 먼저 올라갔다. 헬스클럽은  오전인데
  도 건장한 30대 남자 둘과 50대의 남자 하나,  그리고 가정
  주부들로 보이는 여자 셋이 운동을 하고  있었다. 헬스클럽
  은 운동기구들도 낡았고 실내도 어수선해 관원들이 적은 것
  같았다.
  "어떻게 오셨습니까?"
  오득렬이 클럽으로 들어서자 사무실에 앉아서 스포츠신문을
  보고 있던 청년이 물었다.
  "경찰서에서 나왔어."
  "예?"
  "뭣 좀 알아볼려고 그래."
  청년이 깜짝 놀란 표정을  짓자 오득렬은 잠바  주머니에서
  신분증을 꺼내보였다.
  "무슨 일이신데요?"
  청년이 신분증을 대충 살피고 오득렬을 다시 쳐다보았다.
  "여기서 근무하나?"
  "네."
  "직책이 어떻게 돼?"
  "총무입니다."
  "이 사람 본적 있어?"
  오득렬은 조미란의 사진을 꺼내 청년에게 내밀었다. 사체의
  얼굴만 찍은 사진이었다.  청년은 조미란의 사진을  자세히
  들어다보고는 고개를 흔들었다.
  "모르겠습니다."
  "이 근처에서 살인사건 일어난 거 알지?"
  "예. 지하철역에서도 일어났고 "
  "그날 여기 몇 시까지 문 열었어?"
  "우리 체육관은 밤 10시까지입니다. 제가 대충 청소를 하고
  문을 닫은 것이 밤 10시 15분입니다."
  "문을 닫고 집으로 돌아가나?"
  "예."
  "여기서 자는 사람은 없어?"
  "없습니다."
  "여기서 운동하는 사람 중에 외제 승용차 갖고 있는 사람
  있어?"
  "잘은 모르지만 없는 것 같습니다. 그랜저는 한  사람 있지
  만 "
  헬스클럽의 총무는 운동을 하는 사람이어서인지  성격이 단
  순해 보였다.
  "비엔나 호프집은 몇 시에 열지?"
  "보통 2시정도 되면 엽니다."
  "그날 퇴근하다가 골목에 주차되어 있던 외제  승용차 혹시
  못 봤어?"
  "못 봤습니다."
  오득렬은 운동을 하는 사람들에게도 외제  승용차가 주차되
  어 있는 것을 못 봤느냐고 물었으나 그들은  오전에 운동을
  하기 때문에 한결 같이 못 봤다고 대답했다.
  오득렬은 당구장으로 내려왔다.
  "여기는 몇 시에 문을 닫습니까?"
  당구장 주인은 40대 여자였다. 몸은 바짝  마르고 신경질적
  인 인상이었다.
  "밤 12시정도 됩니다."
  "혹시 이런 사람 보셨습니까?"
  오득렬은 조미란의 사진을 당구장 주인에게 보였다.
  "못 봤어요."
  당구장 주인이 고개를 흔들었다.
  "이 근처에서 살인사건 일어난 거 아시죠?"
  "예."
  "그날도 밤 12시까지 문을 열었습니까?"
  "예."
  "정확하게 몇 시에 닫았습니까?"
  "밤에는 우리 시동생이 여길 지켜서 정확한 것은 모르겠어
  요."
  "시동생 좀 불러주실 수 있겠습니까?"
  "예."
  당구장 여주인은 마뜩찮은 기색으로 오득렬을  위아래로 훑
  어보았다. 그러나 어디론가  전화를 걸어주었다.  오득렬은
  당구장 여주인의 시동생이 올 때까지 당구장을 천천히 살폈
  다. 당구장에는 몇몇 젊은이들이 당구를 치고 있었다. 오득
  렬은 그들에게도 조미란의 사진을 내보였으나  모두들 모른
  다고 고개를 흔들었다.
  당구장 여주인의 시동생은 여자가 전화를 걸자 20분만에 헐
  레벌떡 나타났다. 그는 키가 크고 눈빛이 사납게 생긴 청년
  이었다. 오른쪽 팔에는 해골 모양의 문신까지  새겨져 있었
  다.
  "이름이 어떻게 됩니까?"
  "조홍구라고 합니다."
  "몇 살이지요?"
  "스물 일곱이요."
  조홍구(趙洪九)가 어쩐지 불안한 기색으로 대답했다.
  "전과 있어요?"
  "두 번 있습니다. 폭력과 강간으로 각각 한 번씩 "
  조홍구가 당구장 여주인을 힐끗 쳐다보자  여주인이 고개를
  돌려 외면했다. 조홍구는  당구장 여주인의 눈치를  살피고
  있었다.
  "다른 곳에서 얘기할까?"
  "예."
  오득렬은 조홍구를 데리고 옆  건물 지하에 있는  다방으로
  들어갔다.
  "이 여자 알지?"
  오득렬은 다방에 앉자 마자 조미란의 사진을 들이대고 추궁
  했다. 오득렬에게는 범죄자를  만나면 금방 알아볼  수있는
  육감 같은 것이 있었다. 조홍구에게서도 그런  것이 느껴지
  고 있었다.
  "예."
  조홍구가 순순히 대답했다.
  "실은 사건이 터지고 벌써 찾아가 뵐려고 했습니다. 그렇지
  만 전과도 있고 지은 죄도 있어서 "
  조홍구가 더듬거리며 자백하기 시작했다.
  "조미란이 강간했어?"
  "예? 아니 어떻게 그 사실을?"
  조홍구가 깜짝 놀라서 오득렬을 쳐다보았다.
  "임마! 형사 노릇 괜히 하는지 알아? 척 보면 알아!"
  "죄송합니다. 그만 눈이 뒤집혀서 "
  "어떻게 된 사연이야?"
  "그날 제가 술을 좀 마셨습니다. 형수와 싸우고 그날 따라
  손님도 없고 그래서 혼자서 소주를 훌쩍훌쩍  마시고 있는
  데 열어놓은 문으로 젊은 여자가 계단을 올라오는  게 보이
  더라구요. 그래 어디로 가나 봤더니 우리  화장실로 들어가
  더라구요. 가만히 생각해보니 2층 화장실 수도가 고장이 나
  서 3층을 사용하려는 모양이었어요."
  "그래서?"
  "저는 문을 살짝 열고  화장실을 살폈습니다. 그랬더니  그
  여자가 스커트를 걷어올리고 다리를 씻더라구요. 나중에 알
  고 봤더니 누가 구토를 한 것이 묻어서 씻는  것 같았어요.
  아래층은 조용하고 여자의 하얀 허벅지는 눈에 들어오고
  에라 모르겠다 하고 화장실로 뛰어들어가  일을 저질렀습니
  다."
  "여자가 반항하지 않았어?"
  "죽이겠다고 하니까 잠자코 있었습니다."
  "그럼 화장실에서 그 짓을 했어?"
  "예."
  조홍구가 고개를 푹 숙였다. 오득렬은 조홍구를  잠자코 노
  려보았다. 조홍구가 거짓말을 하고 있는 것 같지는 않았다.
  그러나 강간을 했다는 것이 밝혀진 이상 구속하지  않을 수
  없었다.
  "수갑 채울까?"
  "형사님 좋을대로 하십시오."
  조홍구가 체념한 표정으로 말했다.
  "수갑 채우지는 않을 테니까 일단 경찰서로 가자. 도망치면
  살인죄로 수배되니까 알아서 하고 "
  "예."
  오득렬은 조홍구를 데리고  성동경찰서로 들어가  유치장에
  넣은 뒤 수사본부 부본부장에게 일단 보고를 했다.
  "하나는 건졌군."
  부본부장이 그만해도 다행이라는 듯이 엷게 웃었다.
  "선배님. 점심 식사 같이 해요."
  수사본부를 나오는데 오진주 형사가 달음질을  치듯이 따라
  왔다. 그녀는 다짜고짜 오득렬의 팔짱을 끼었다.
  "왜 그래? 이거 누구 목잘리는 거 볼려고 그래?"
  오득렬은 기겁을 했다.
  "아무래도 선배님을 따라다녀야 건수를 올릴 것 같아요."
  오진주 형사가 하얀 이를 드러내고 싱긋 웃었다.
  오득렬은 오진주 형사와 점심을 먹은 뒤에 함께  비엔나 호
  프집으로 갔다. 비엔나 호프집은 그때서야 문을  열고 영업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러나 비엔나 호프집에서는  특별히
  건질 것이 없었다.  오득렬은 지하실의 노래방까지  탐문을
  한 뒤 근처의 모든 점포를 뒤졌다. 혹시라도 목격자가 있나
  해서였다. 그러나 목격자는 끝내 찾을 수가 없었다.
  "나를 쫓아와도 허탕이잖아?"
  오진주 형사에게 미안하여 오득렬은 저녁을 사주었다.
  "사건 현장에서 박하담배  꽁초가 나왔는데 그것도  주의를
  해야할 것 같아요."
  "그럴지도 모르지."
  오득렬은 고개를 끄덕거렸다.
  오진주 형사는 저녁을 얻어먹은  뒤 한사코 자신이  맥주를
  한 잔 사겠다고 하였다. 오득렬은 오진주에게  이끌려 근처
  의 호프집에서 500cc맥주 두 개를 마신 뒤 조미란의 시체가
  쓰러져 있던 곳으로 갔다. 생각 같아서는  이정희를 찾아가
  같이 자고 싶었으나 수사본부에는 야간근무  지시까지 떨어
  져 있었다.
  나는 지금 병원에서 퇴원하여 이지영에게 들은 이야기를 낱
  낱이 기록하고 있다.  이지영을 안락의자에 눕히고  최면을
  걸어서 들은 이야기다. 이지영은 최면 속에서  악마의 소굴
  에서 살아 나온 이야기를 거짓없이 나에게  들려준 것이다.
  이것은 물론 경찰조사보다 더 정확한 기록이다.
  "천씨 부부가 살해된 것은 언제지?"
  "아저씨를 죽인 뒤 사흘쯤 지나서였어요. 그들이 밖으로 나
  가서 천씨 부부를 납치해 왔어요. 마치 아저씨와 나를 납치
  하듯이 "
  "그들을 왜 납치했대?"
  "돈이 많을 거라고 생각했대요. 그들은 외제 승용차를 가지
  고 있었으니까요."
  "어떤 차지?"
  "검은 색 볼보요."
  "비싼 차군."
  나는 내 승용차 샤브를  생각했다. 볼보도 샤브 못지  않게
  좋은 차였다. 나는 며칠 전에 샤브 승용차를 도난 당했다고
  신고했는데 아침에 경찰로부터 연락이 왔다. 샤브 승용차를
  찾았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 차가 살인사건에  이용되어 조
  사중이므로 지금은 찾아갈 수 없다고 했다.
  "차는 어디서 잊어버렸습니까?"
  내가 도난신고를 했을 때 담당경찰이 던진 질문이었다.
  "아파트 앞에 세워뒀는데 없어졌어요."
  "도난방지 경보기가 부착되어 있지 않았나요?"
  "네. 꼭 좀 찾아주세요. 그 차는 1억원이 가까운 차예요."
  "차 한 대가요?"
  경찰이 놀란 표정으로 나를 빤히 쳐다보았다.
  "네. 세금까지 포함하면 그 정도 되요. 내가 남편과 이혼을
  할 때 위자료조로 아파트와 함께 받은 것이지만  우리 나라
  시가로는 그렇게 나가요.  찾아주시면 사례를 잊지  않을께
  요."
  나는 눈웃음까지 치며 말했던 것이다. 그 경찰은 차를 찾는
  데 무척 애를 먹었으며 그 점에 대해서 알아달라고 말했다.
  나는 물론 조사가 끝나면 사례를 할 예정이라고 말했다. 내
  가 사례를 하겠다고 그래서  그런지 경찰은 나에게  최대한
  정중하게 말하고 있었다.
  "그들은 돈 많은 사람을 싫어하나?"
  "네."
  "왜 그러지?"
  "네?"
  "왜 돈 많은 사람을 싫어하지?"
  "나두 돈 많은 사람이 싫어요."
  나는 이지영의 말을 깊이 생각했다. 돈 많은 사람을  왜 돈
  없는 사람들은 싫어할까. 나는 아직 그 점을 이해하지 못하
  고 있었다.
  "그들이 천씨 부부를 납치할  때 지영인 무엇을 하고  있었
  어."
  "전 갇혀 있었어요."
  "어디에?"
  "지하실이요."
  "참 지하실에는 소각로가 만들어져 있다고 했지?"
  "네."
  "그때는 소각로가 다 만들어졌나?"
  "네."
  "무섭지 않았어?"
  "전 지하실의 소각로가 무엇을 하는 곳인지 몰랐어요. 그저
  창고에 불을 때는 아궁이라고 생각했어요."
  그렇다면 무서울 이유도 없었을 것이다.
  "천씨 부부가 잡혀온 뒤엔 어떻게 했지?"
  "누굴요?"
  "지영이."
  "저에게 술을 마시게 하고  같은 편으로 만들었어요.  제가
  같은 편이 되겠다고 하니까 밥도 먹게 하고 자기들과 어울
  리게 했어요."
  "감시는 하지 않았나?"
  "천씨 부부를 죽일 때까지 계속 감시했어요."
  "섹스는?"
  "네?"
  "그들은 지영이와 계속 섹스를 했어?"
  "네."
  이지영이 입술을 깨물고  대답했다. 이지영의 눈가에  다시
  눈물이 맺혔다. 나는 이지영이 괴로워하는 것을  보고 질문
  을 멈추었다. 이지영은 열 사흘 동안이나 그들에게 갇혀 있
  었다. 야수들은 열 사흘  동안 이지영을 감금한 채  섹스의
  대상으로 삼은 것이다.
  "천씨 부부는 어떻게 죽였어?"
  "먼저 천씨에게 시켜서 돈을 가져오게 했어요."
  천씨는 수입 의류를 판매하는 회사의 사장이었다.  그는 프
  랑스와 이태리의 고급 여성의류를 수입하여  백화점에 납품
  하여 많은 돈을 벌었다. 야수들은 천씨를 심문하여 그 같은
  사실을 알아내고 천씨에게 회사로 전화를 걸도록 해 자신들
  의 통장에 입금시키게 했던 것이다.
  "돈을 얼마나 입금시켰지?"
  "2억원이요."
  "천씨의 회사에 그렇게 많은 돈이 있었어?"
  "수입 의류를 납품하는 회사라 현찰이 많았대요."
  "돈이 입금된 뒤에 바로 죽였나?"
  "네."
  "어떻게 죽였어?"
  "천씨와 부인에게 공기총을 쏴서 죽였어요."
  그것은 신문에도 나온 얘기였다.
  "지영이도 천씨의 머리에 공기총을 쐈어?"
  "네. 그들이 시켰어요."
  이지영이 몸을 부르르 떨며 대답했다. 이지영은  자신이 공
  기총으로 천시 부부를 살해하던  모습을 생각하고 있는  것
  같았다.
  "그들은 왜 지영이에게 공기총을 쏘게 했지?"
  "나도 살인자로 만들어야 배신을 하지 않는다고  총을 쏘게
  했어요."
  "그래서 망설이지 않고 쐈나?"
  "아뇨. 무서워서 못 쏘겠다고 하니까 강제로 술을  먹게 했
  어요."
  "그럼 술을 마시고 천씨의 머리에 총을 쐈어?"
  "네."
  "천씨 부부를 소각로에서 태웠다고 했는데 봤어?"
  "못 봤어요."
  "그럼 그때 지영인 무엇을 하고 있었어?"
  "농가에 있었어요."
  나는 고개를 끄덕거렸다. 창의 블라인드를 살짝  걷고 밖을
  내다보자 병원 앞에 오득렬  형사가 서 있는 것이  보였다.
  그는 무엇인가 망설이고 있는 듯 우두커니 서 있었다.
  나는 이지영을 최면에서 깨어나게 했다.
  "수고했어요. 점점 좋아지고 있는 것 같아요."
  나는 이지영에게 미소를 지어 주었다.
  "선생님 덕분에 요즈음엔 잠을 잘 자요."
  이지영이 수줍은 듯이 웃으며 말했다.
  "그 사람과 결혼도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이지영이 핸드백을 챙겨 들고 말했다.
  "그럼 조금만 더 안정되면 결혼도 할 수 있어."
  "안녕히 계세요."
  "잘 가요."
  나는 이지영이 인사를 하고 밖으로 나가자 안락의자에 앉아
  담배를 피워 물었다.
  오득렬 형사가 진료실로 들어온 것은 내가 다음  환자를 일
  부러 오랫동안 시간을 끌면서 진료를 마쳤을 때였다.
  "바쁘신데 방해를 하고 있는 건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오득렬 형사는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말했다.
  "괜찮아요. 앉으세요."
  나는 환자용의 소파를 가리켰다.
  "차를 도난 당하셨더군요."
  "네."
  나는 안경을 위로 치켜올리며 미소를 지었다.  오득렬 형사
  와 팽팽한 대결을 하고 있다고 생각하자 묘한  긴장감이 느
  껴졌다. 형사가 나를 탐색하고 있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마침 찾았다고 연락이 왔어요."
  "실은 그 차가 살인에 이용된 것 같습니다."
  "경찰한테 들었어요."
  "형사들이 왔다가 갔습니까?"
  "아뇨. 교통계에 도난 신고를 했는데  담당경찰이 찾았다고
  연락을 해주더군요. 살인사건에 관련되었다고 조사가  끝난
  뒤에야 차를 찾을 수 있댔어요."
  "예. 아마 그렇게 될 겁니다."
  오득렬 형사는 무엇인가 망설이고 있는 것 같았다. 그는 입
  을 열려다가 다시 다물고 있었다.
  "무슨 궁금한 점이 있으세요?"
  "아니요. 그런 차는 값이 얼마나 나가나 잠깐  생각했을 뿐
  입니다."
  "1억 가까이 나가요. 차 값은 그렇게 안되지만 관세니 뭐니
  해서 그 정도 되죠."
  "병원이 잘 되시나 보죠?"
  "네?"
  "그렇게 비싼 차를 사시고 유지비도 꽤 나가죠?"
  "그런 셈이에요. 차는 내 돈으로 산 것이 아니고 전 남편에
  게서 위자료로 받았어요."
  나는 그렇게 말을 하고 아차 하고 후회를 했다.  나는 나로
  인해 전 남편까지 경찰의 조사를 받게 되는 일이 싫었다.
  "퇴근하시면 무얼하십니까?"
  "학생들과 술을 마시기도 하고 집에 돌아가 책을 보거나 TV
  를 보거나 그러죠."
  나는 웃음을 깨물었다. 문득 오득렬 형사가  나에게 데이트
  를 신청하려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아 참 대학에도 나가시죠?"
  나는 일주일에 세 시간 범죄심리학에 대해서 대학에서 강의
  를 하고 있었다. 물론  아직은 시간강사에 지나지  않았다.
  범죄심리학이 우리 나라에서는 드문 분야였기  때문에 대학
  에서 강의 요청을 해왔던 것이다.
  "시간강사예요."
  나는 수줍은 표정으로 얼굴을 붉히며 대답했다.  누가 나에
  게 칭찬의 말을 하면 나는 아직도 얼굴이 붉어졌다.
  "학생들과 자주 어울리시나요?"
  "가끔이요. 젊은 학생들과 어울려 세상 돌아가는 얘기를 하
  다보면 나도 젊어지는 것 같아요."
  "술은 많이 하십니까?"
  형사가 뜬금없이 술에 대해서 질문을 했다.
  "조금이요. 왜요?"
  "언제 저에게도 술 한잔 사주십시오."
  "좋아요."
  오득렬 형사의 말에 나는 유쾌하게 웃었다. 그때 나는 오득
  렬 형사의 시선이 나의 스커트 사이로 들어와 있는 것을 발
  견하고 재빨리 스커트를 내렸다.
  나는 이따금 스커트를 나도 모르게 걷어올리는 습관이 있는
  데 환자들을 진료할 때도 그런 일이 있어서  환자들이 당황
  해 했다. 의사의 입장에서는 바지를 입어야 하는데 나는 환
  자들을 편안하게 한다는 심리학적 이유로 스커트를 즐겨 입
  었다.
  집에서는 아예 스커트도 입지 않고 돌아다녔다.  집에 아무
  도 없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몸에 무엇을 걸치는  것이 나는
  갑갑하여 싫었다.
  "이지영씨는 좀 어떻습니까?"
  형사가 이번에는 이지영에 대해서 물었다.
  "아주 좋아지고 있어요."
  나는 거짓말을 했다. 이지영이 좋아지고 있는  것은 분명했
  으나 의식의 내면 깊은 곳에서 폭력적인 자아가  서서히 모
  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그 자아가 본격적인  모습을 드러내
  면 야수파보다도 더 끔찍한 살인사건이 발생할 것이다.
  "악몽을 꾸거나 하지는 않는답니까?"
  "네. 최근에는 악몽을 꾸지 않고 아주 잘 잔대요."
  "그거 정말 다행이군요."
  오득렬 형사가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때 오득렬 형사의 눈빛이  다시 날카롭게 나의  스커트를
  스쳤다. 스커트가 또 걷혀  올라간 모양이다. 그러나  나는
  일부러 스커트를 내리지 않는다.
  나는 문득 오득렬 형사를 유혹해 볼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노랑나비가 내 눈앞에서 날개짓을 하며 날아오르고 있었다.
  조홍구는 국립 과학수사연구소에서 정액을 채취하여 검사
  한 결과 조미란을 강간한 범인이라는 것이  입증되었다. 그
  러나 조홍구는 조미란을 살해한 혐의에 관해서는 완강히 부
  인했고 목격자인 강인철도 그날 밤에 본 얼굴과  전혀 다르
  다고 확인 진술을 했다.
  (살인자는 못 잡고 강간범만 잡았으니 )
  묘한 일이었다. 그렇다면 조미란은 조홍구에게 강간을 당
  한 뒤에 집으로 돌아가다가 살인자에게  납치되었다는 결론
  이 나오는 것이다. 강인철과 김선경의 진술에  의하면 조미
  란은 강간을 당하고 불과 한 시간도 안되어  살인자의 승용
  차를 탔다고 밖에 할 수 없었다. 납득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수사는 계속되었고 차량 전문  절도범에게로 확대
  되었다. 조미란을 샤브 승용차에 태운 사내가 차량 전문 절
  도범일 가능성이 높았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샤브  같은 고
  급 승용차는 도난방지 장치가 잘 되어 있어서  웬만한 실력
  으로는 그런 차를 훔치지도  못할 뿐아니라 설사  훔친다고
  해도 운전을 하면서 여자를 납치하는 일도 용이하지 않았을
  것이다.
  (혹시 여의사의 남편과 관련이 있지 않을까?)
  여의사는 전 남편에게 위자료로 차를 받았다고  했다. 그
  렇다면 전 남편에게 다른 키가 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오득렬은 그 생각을 하자 즉시 여의사의 전  남편에 대해
  서 조사하기 시작했다. 오득렬이 이틀에 걸쳐  조사를 해본
  결과 여의사의 전 남편은 상당한 재력가였다.  그의 가족은
  50대 재벌그룹이었고 그의 형이 그룹의 회장이었다.
  여의사의 전 남편, 김호성은 40대의 사내였다. 그는 계열
  사의 회사를 경영하는 가족들과 다르게  지방대학에 한문학
  교수로 재직하고 있었다. 그러나 직접 경영에  참여하고 있
  지는 않았으나 상당한 주식을  가지고 있어서 돈에  구애를
  받고 있지는 않아 보였다.
  (섣불리 조사부터 할 수는 없고 )
  오득렬은 김호성을 조사하는  것이 난감했다. 그는  일단
  김호성의 주위를 조사하기로 했다.
  김호성은 여의사와 이혼을 한 뒤에 혼자서  살고 있었다.
  가족들과 가까이 지내지도 않았고 사람들과의  별다른 접촉
  도 하지 않고 있었다. 조금 특이한 성격이었다.
  (두 사람 다 특이한 사람들이군 )
  오득렬은 여의사를 생각하고 얼굴을 찡그렸다.  여의사를
  만날 때마다 함부로 걷혀 올라간 스커트 때문에  그녀의 흰
  속옷 자락을 보았었다.
  여의사는 자신의 스커트가 걷혀 올라간 것을 의식하지 못
  하는 것 같았다. 의사 같은 전문직에 근무하는 여자들은 대
  개 깔끔하기 마련인데 의사 가운에 얼룩이 묻어  있을 때도
  있었다.
  "실례합니다."
  오득렬은 김호성을 조사하기 시작한지 닷새만에 퇴근하여
  차에서 내려 대문으로  들어가려는 김호성을 불러  세웠다.
  김호성은 국산 승용차 포텐샤를 자가 운전하고 있었다.
  "예."
  김호성은 무슨 일이냐는 표정으로 오득렬을  쳐다보았다.
  오득렬은 40대인데도 머리가 반백이었다. 몸은  호리호리한
  편이었다.
  "서(署)에서 나왔습니다."
  "서요?"
  사람들은 서라고 하면 얼핏 알아듣지 못했다.
  "경찰서요."
  "무슨 일이십니까?"
  "뭐 좀 알아볼려고 나왔습니다. 시간이 있으십니까?"
  "예. 좀 들어오시죠."
  김호성은 2층 주택에 살고 있었다. 집안에는 아무도 없는
  듯 조용했다. 1층에서 2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의  벽에는 성
  화(聖畵)가 두 점 걸려 있었다. 하나는 천국을 묘사한 것인
  듯 아름다운 여자들이 사슴과 어울려 잔디밭에서 뒹굴고 있
  었고 다른 하나는 지옥을 묘사한 듯 반인반수의  괴물들 모
  습이었다.
  김호성은 오득렬을 응접 소파에 앉게 한 뒤 손수 주스 두
  잔을 가지고 왔다.
  "서경숙씨를 아시죠?"
  오득렬의 질문에 김호성이  경계하는 눈빛으로  오득렬을
  쳐다보았다.
  "예. 이혼한 아내요."
  "언제 이혼하셨습니까?"
  "꽤 오래되었습니다. 3, 4년 그런데 무슨 일입니까?"
  "부인에게, 아니 서경숙씨에게 위자료조로 차를 주셨습니
  까?"
  "샤브요?"
  "예."
  "주었습니다."
  김호성이 망설이지 않고 대답했다.
  "그 차가 살인사건에 이용되었습니다."
  "  "
  김호성은 뒤통수를 한 대 맞은 듯한 표정이었다. 그는 담
  배를 꺼내 물고 불을 붙여 연기를 빨았다.
  "어떻게 살인사건에 이용됩니까?"
  김호성이 담배연기를 내뱉은 뒤 오득렬에게 물었다.
  "서경숙씨가 도난신고를 했는데  도난신고를 한 지  얼마
  안되어 살인사건이 터졌지요."
  오득렬은 말을 하면서 김호성의 표정이  어떻게 변하는지
  세심하게 살폈다. 형사들은 용의자들과 얘기를 할  때 표정
  이 어떻게 변하는지 그것부터 살피곤 했다.
  "그럼 아내가 관련이 되어 있습니까?"
  "범인은 남자입니다."
  "남자요?"
  김호성이 곤혹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피해자에게 성폭행을 했으니까요."
  "예에."
  김호성이 다행스럽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주억거렸다.
  "혹시 여벌로 키를 가지고 계십니까?"
  "예?"
  "일반적으로 승용차 키는 세 개 아닙니까? 샤브를 서경숙
  씨에게 주실  때 하나쯤  남겨두시지 않았느냐는  말씀입니
  다."
  "예. 제가 사용하던 키는 제가 가지고 있습니다."
  "지금도 가지고 계십니까?"
  "2층 서재에 있을 것입니다. 가져와 볼까요?"
  "예. 확인해 보십시오."
  김호성이 소파에서 일어나  2층으로 올라갔다.  오득렬은
  김호성이 2층으로 올라가자 주스를 한 모금  마시고 거실을
  세세히 살폈다. 혹시라도 살인에 관련된 증거가  있지 아나
  해서였다. 그러나 김호성의 거실은 수상스러운  것이라고는
  아무 것도 없었다.
  김호성은 10분쯤 지나서야 내려왔다.
  "이상한 일인데요. 키를 찾지 못하겠습니다."
  김호성이 난처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어디에 두셨습니까?"
  "서재의 제 서랍에 두었습니다."
  "확실합니까?"
  "예."
  "그 키를 마지막으로 본 것이 언제입니까?"
  "6개월쯤 된 것 같습니다."
  "6개월이라 "
  "아 6개월 전에 도난을 당한 일이 있었습니다. 제가 독일에
  갔을 때인데 돌아와보니 누군가 침입하여 물건들을 훔쳐 갔
  습니다."
  "무엇을 훔쳐 갔습니까?"
  "카메라, 시계, 보석, 그리고 현금 한  5백만원이 있었습니
  다. 집사람이 입던 속옷이 여기저기 흩어져 있었고 주식을
  넣어두는 금고가 있는데 그 열쇠가 금고 열쇠인 줄 알고 훔
  쳐 간 것 같습니다."
  "도난신고는 했습니까?"
  "예."
  "절도범은 잡혔습니까?"
  "예."
  "그럼 도난 당한 물건도 찾으셨겠군요?"
  "열쇠를 훔쳐 갔는지는 몰랐습니다."
  김호성의 진술은 진실해 보였다. 오득렬은  김호성에게 도
  난사건을 담당한 형사의 이름을  물은 뒤에 김호성의  집을
  나와 경찰서로 달려갔다.  그러나 김호성의 집  도난사건을
  수사한 형사는 관내 마장 파출소 소장으로 발령이  나 있었
  다.
  오득렬은 터덜터덜 마장 파출소로 찾아갔다. 오득렬은 소장
  과 인사를 나누고 찾아온 이야기를 간단하게  설명했다. 그
  소장의 이름은 민원식(閔元植)이고 한때 베테랑  형사로 이
  름을 날린 수사전문 경찰이었다. 경찰관이 진급을  하면 일
  단 대민업무 근무를 하게 하는데 민원식 소장이  그 케이스
  인 것 같았다. 오득렬은 민원식 소장의 제의로 근처에 있는
  다방으로 들어갔다.
  "범인은 누구였습니까?"
  레지가 차 주문을 받고  돌아가자 오득렬이 성급하게  물었
  다.
  "김호성씨의 전 부인이 정신과의사 겸 대학강사인데  그 제
  자였습니다."
  "제자요?"
  "참 이상한 일이 아닙니까? 하필이면 전 부인의  제자가 절
  도범이라니 "
  민원식 소장은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담배연기를 길게
  내뿜었다.
  그가 절도사건을 신고 받은 것은 6개월쯤 전의 일로 성동경
  찰서 수사계장으로 있을 때였다. 김호성은 50대 재벌그룹인
  서교그룹 회장의 동생으로 대학교수에 지나지  않았으나 서
  교그룹 회장이 성동경찰서 서장과 동창이고 여러 가지 물질
  적인 지원을 많이 해주고 있어서 수사계장인 민원식이 직접
  수사에 나서게 되었다.
  민원식이 서장의 지시를 받고 현장에 출동하자 집이 난장판
  이었다. 여기저기 흙묻은 구두 발자국이 찍혀  있었고 안방
  의 장롱이 함부로 열려 있었다. 서랍장도 마구 뒤졌는지 그
  안에 있던 여자의 속옷이 방바닥에 어지럽게 널려 있었다.
  "지문 좀 찾아봐. 족적도 뜨고 "
  민원식은 먼저 잃어버린 물건의 목록을  작성하고 김호성의
  집을 출입할 수있는 사람들을 조사했다. 그리고  범인의 것
  으로 보이는 몇 개의  지문을 떠서 조회하라고  경찰청으로
  보냈다.
  물론 그 과정에서 이혼한 전 부인과 그의  가족들까지 조사
  했다. 그러나 그녀의 이혼한 가족들에 대해서는  특별한 혐
  의점이 없었다. 서경숙은 부모가 모두 죽어서 고아였다.
  "전 부인을 왜 조사했습니까?"
  오득렬은 고개를 갸우뚱했다. 단순한 절도사건에 이혼한 전
  부인 서경숙이 개입되어 있으리라고는  생각도 할 수  없었
  다.
  "어쩐지 아는 사람의 소행인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아는 사람의 소행이었습니까?"
  "그런 셈입니다."
  서경숙의 뒤를 조사했으나 마땅한 혐의점이 없어 고민에 빠
  져 있을 때 지문 감식결과가 나왔다. 지문의 주인은 서경숙
  이 강의를 나가는 H대학의 심리학과  학생이었다. 민원식은
  즉시 학생을 연행하다가 조사했다. 그의  이름은 민상호(閔
  相鎬)였다. 민상호는 절도사건을 처음 저지르는 초보자답게
  여기저기 지문을 남겼던 것이다.
  "왜 그 집을 털게 되었어?"
  민원식은 민상호를 다그쳤다.
  "그냥 돈이 좀 궁했습니다. 집도 비어 있었고 "
  민상호는 증거가 드러났기 때문인지 순순히 자백을 하기 시
  작했다.
  "그 집이 서경숙  교수의 전 남편  집이라는 걸 알고  있었
  어?"
  "예."
  "어떻게 알았어?"
  "서 교수님과 술을 마시다가 이런저런 얘기를 했는데 서 교
  수님이 이혼하고 혼자 사는 얘기를 하다가 남편이 김호성이
  며 지금 외국 여행중이라는 얘기를 했습니다.  김호성 교수
  가 서교그룹 동생이라는 얘기도 했구요. 돈을 많이 갖고 있
  는 남자라고 했습니다. 나중에 생각해보니까 한  번 털어도
  되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래서 그만 나도 모르게 "
  민상호는 자신의 잘못을 인정한다는 듯 고개를 깊숙이 숙였
  다.
  "민상호는 구속되어 있습니까?"
  "아닙니다. 훈방했습니다.'
  "절도범을 훈방해요?"
  "실은 김호성 교수와 서경숙 교수가 한 번 실수니까 용서해
  달라고 했습니다. 게다가 전과도 없는 초범이구  학생 신분
  이라 훈방을 하기로 했지요. 피해자 쪽에서  처벌을 원하지
  도 않았고 "
  민원식의 얘기를 듣고 보니  오득렬이라도 훈방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운이 좋았군요"
  "그런 셈이죠. 민상호가 살인사건과 관련이 있습니까?"
  "그건 아직 모르겠습니다. 혹시  민상호가 훔친 물건  중에
  자동차 열쇠는 없었습니까?"
  "없었습니다."
  "민상호는 지금 어디 있습니까?"
  "학교에 다니고 있을 겁니다. 주소를 적어 드리지요."
  민원식 소장은 주머니에서 수첩을 꺼내 민상호의 주소를 펼
  쳤다. 오득렬은 민원식  소장이 불러주는 민상호의  주소를
  수첩에 옮겨 적었다.
  장기철 박사는 안락의자에 우두커니 앉아서  TV화면을 보고
  있었다. 그것은 텔레비전 프로그램이 아니라 환자를 최면상
  태에 빠지게 하고 환자의  내면을 들여다보는 모습을  찍은
  비디오 화면이었다. 환자는 자신이 비디오로 찍히고 있다는
  것을 전혀 모르고 있었다.
  "그를 어떻게 했지?"
  장기철 박사는 화면에 비치지 않고 소리만  들리고 있었다.
  비디오 카메라가 환자가 누워 있는 진찰대만 비추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지 하 실 에 가두었어요."
  환자는 말을 하기가 싫은 듯 띄엄띄엄 얘기를 하고 있었다.
  무의식 속에서이기는 했으나 환자는 그에 대해서 말하는 것
  을 두려워하고 있었다.
  "왜 그를 지하실에 가두었지?"
  "복수 "
  "복수?"
  "  "
  "괜찮아. 나에게 모두 말을 하겠다고 약속했잖아?"
  "선생님도 비밀을 지키겠다고 약속하셨죠?"
  환자의 말에 장기철 박사는 머리가 쭈뼛해지는 기분이 들었
  다. 최면에 걸린 환자들은 시술자에게 결코  반문하거나 자
  기 의사를 말하지 않는 것이다.
  "그럼. 나는 어떤 일이  있어도 비밀을 지킬 거야.  그러니
  그런 걱정을 할 필요는 없어. 그러니 나를 믿어야 돼. 나를
  믿지?"
  장기철 박사는 환자가 혹시 완전히 최면에 걸리지  않은 것
  이 아닌가 하는 의심이 들었다.
  "믿어요."
  환자가 희미하게 웃으며 말했다. 마치 조소를 하고 잇는 듯
  한 표정이었다. 장기철 박사는 지금 이 장면을 몇  번째 보
  고 있었다. 처음엔 환자가 웃고 있는 것을 미처  보지 못했
  으나 몇 번 반복해서 보자 보일 말 듯 미소를 짓고 있는 것
  을 알 수 있었다.
  "복수가 무슨 뜻이지?"
  "그가 나에게 한 짓을 그대로 해주는 거요."
  "그가 어떤 짓을 했는데?"
  "저를 지하실에 가두고 "
  "그 집에 지하실이 있었나? 판잣집이었다고 했잖아?"
  "그 동네에 개발 붐이 일어나서 우리가 살던 집도 2층 양옥
  으로 지었어요. 나머지 땅은 팔고 그는 부자가 되었어요."
  "그 집은 원래 어머니 것이 아니었나?"
  "어머니 것이었어요."
  환자의 눈에 눈물이 글썽해 졌다. 어머니라는  말이 환자의
  누선(淚腺)을 자극한 모양이었다.
  "그런데 어떻게 하여 그의 것이 되었지?"
  환자는 결코 그를 계부나 아버지라고 부르지  않았다. 그는
  화자에게 그저 저주스러운 사내일 뿐이었다.
  "어머니가 죽었으니까요."
  환자의 대답은 간단명료했다. 장기철 박사는 화제를 바꾸었
  다.
  "그가 왜 지하실에 가두었지?"
  "그는 나를 때리고 싶어 했어요."
  "때린다고? 왜? 무슨 잘못을 했나?"
  "그는 때리는 것에 희열을 느끼고 있었어요."
  환자의 얼굴에 공포와 분노의 복잡한 표정이  나타났다. 장
  기철 박사는 그 표정을 주의 깊게 살폈다.
  "어떻게 때렸지?"
  "제 옷을 벗기고 손을 묶고 허리띠로 마구 때렸어요 "
  환자는 그 때의 두려움을  생각하는지 몸을 부들부들  떨었
  다. 장기철 박사는 환자가  발병을 한 것이 계부의  학대에
  의한 것이라는 심증이 굳어지자 가슴이 저려왔다.
  "그 다음엔?"
  "저를 애무하고 "
  환자의 계부는 비인간적인 짓을 환자에게  반복적으로 저지
  른 것이 분명했다.
  "그리고?"
  "짐승 같은 짓을 저질렀어요."
  환자의 얼굴에서 눈물이 주르르 흘러내렸다. 장기철 박사는
  무겁게 한숨을 내쉬었다. 인간에게는 야수와 같은 포악성만
  있는 사람이 있는데 환자의 옷을 벗기고 허리띠로  때린 그
  가 그러한 부류의 사람인 것 같았다. 환자는 그로  인해 정
  신병이 발작했고 비극적인 인생을 살게 된 것이다.
  "그래서 복수를 했어?"
  "네."
  "어떻게 복수를 했어?"
  "그를 지하실에 가두고 옷을 벗기고 허리띠로 때렸어요.
  그리고 그가 상처 때문에 데굴데굴 구르자 그를  묶어 놓고
  "
  "묶어 놓고 어떻게 했어?"
  "그가 나한테 한 짓을 그대로 했어요."
  "똑같이 복수했군."
  "네."
  환자의 대답은 당연하다는 투였다. 일말의 가책이나 부끄러
  움 같은 것은 전혀 없었다.
  "그는 어떻게 반응했지?"
  "펄펄 뛰며 저를 죽이겠다고 했어요."
  "그래서 어떻게 했어?"
  "그를 풀어 줄 수가 없었어요."
  "그럼 계속 지하실에 묶어 두었나?"
  "네. 묶어 두고 때리고 그걸 했어요."
  환자가 입술을 깨물었다.  장기철 박사는 손등으로  이마의
  땀을 훔쳤다. 날씨가 덥지도 않은데 이마에 구슬 같은 땀방
  울이 맺혀 있었다. 비인간적인 학대를 받은 환자도 이제 비
  인간적으로 변해 있었다. 무서운 일이었다.
  "그는 어떻게 되었지?"
  "결국 그는 죽었어요."
  "그를 죽였어?"
  "제가 죽인 것이 아니고 그가 죽었어요."
  "자살했다는 말이야?"
  "병으로 죽었어요."
  환자의 얼굴에 다시 그를 조소하는 듯한 야릇한  미소가 떠
  올랐다. 환자가 진실을 숨기고 있는 인상이었다.
  (환자가 나를 조롱하고 있어 )
  그는 어쩌면 환자에게 살해되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를 묻었나?"
  "네."
  "어디에?"
  "  "
  환자가 대답을 하지 않았다. 환자의 얼굴 근육이 푸르르 떨
  렸다. 환자는 몇 번이나 입을 열었다가 다물기를 반복했다.
  환자는 그를 묻은 장소를 말하는 것에 두려움을  느끼고 있
  었다.
  "어머니는 어떻게 되었지?"
  장기철 박사는 화제를 환자의 어머니에게로 바꾸었다. 환자
  가 발병을 한데에는 어머니의 책임도 있는 것 같았다.
  "죽었어요."
  "어떻게?"
  "굶어서 "
  "굶다니 땅을 팔아서 부자가 되었잖아?"
  환자와 환자의 어머니가 살던  집은 개발 붐이  일어나면서
  땅값이 수십 배로 뛰었었다. 그리하여 환자네 가족은 2층집
  을 지었고 나머지 땅을 팔아서 졸부가 되었던 것이다.
  "그가 여자를 데리고 집에  오기 시작했어요. 그럴  때마다
  어머니와 나를 두들겨 패고 지하실에 가두고 밥도 주지 않
  았어요. 어머니는 결국 시름시름 앓다가  죽었어요. 그래서
  난 복수를 꿈꾼 거예요. 어떻게 하던지 그를 죽이겠다고 결
  심했어요 "
  "어머니는 그를 용납했나?"
  "어머니는 점점 마조히스트가 되어 갔어요."
  마조히스트는 피학성을 말하는 것이다. 환자의 어머니는 그
  에게 학대를 받으면서도 성관계를 계속 유지했고 그녀는 차
  츰차츰 학대를 받고서야  오르가즘에 이르는  마조히스트가
  되어 간 것이다. 남편으로부터 학대를 받는  상당수의 여자
  들이 마조히스트라는 사실은 통계적으로도 증명이  되고 있
  었다.
  "그래서 학대를 받으면서도 그와 계속 살았군."
  장기철 박사는 무겁게 한숨을 내쉬었다.
  "네."
  "어머니도 자네가 그로부터 학대를 받고 성관계를 강요당한
  사실을 알고 있었나?"
  "네."
  "언제부터?"
  "아주 나중에요."
  환자가 소리를 내어 울기 시작했다. 장기철  박사는 테이프
  를 껐다. 테이프는 거기서 끝이었다. 환자의 감정이 격해져
  있었기 때문에 안정을 시킬  필요가 있어서 그날은  거기서
  최면을 중단한 것이다.
  장기철 박사는 다른 테이프를 비디오에 넣었다.  그것은 환
  자를 최면상태에 빠트린 뒤에  환자의 의식에 잠재해  있는
  자아를 불러낸 것이었다. 이내 TV 화면에 다시 환자의 얼굴
  이 떠올랐다.
  "너는 누구지?"
  "태희 "
  환자가 스스로를 태희라고 말했다. 환자의 얼굴은  차
  갑고 딱딱하게 굳어져 있었다. 환자가 태희라고  말한
  순간 근육까지 변하고 있었다.
  "영희를 알고 있나?"
  "그 앤 바보야."
  환자가 도전적으로 내뱉았다.  환자의 자아는  난폭했
  다. 환자의 자아가 스스로 자신을 태희라고  인정하고
  있었고 영희를 부정하고 있었다.
  "왜 바보지?"
  "맨날 계부에게 두드려  맞고 있어.  병신 같은  년이
  야."
  태희라는 자아는 영희를 경멸하고 있었다.
  "영희가 두드려 맞고 있는 것을 봤어?"
  "두드려 맞기만 하는 줄 알아? 후후 "
  "그럼?"
  "그 계집애는 계부에게 두드려  맞고 계부와 그  짓도
  했어?"
  "그 짓이 뭐지?"
  "남자와 여자가 하는  짓이지 뭐야? 늙은이가  그것도
  몰라?"
  태희라는 자아는 장기철 박사까지도 경멸하고 있었다.
  장기철 박사는 은은한 분노를 느꼈다.
  "영희가 스스로 원했나?"
  "영희가 왜 그런 짓을 원하겠어?"
  "그럼?"
  "다 계부의 강압에 의한  것이야. 그 자는  짐승이야.
  처음엔 영희를 애무만 했어. 영희는 계부의 손이 벌레
  처럼 징그러웠지만 무서워서 저항을 할 수가  없었어.
  그러다가 결국은 그 짓까지 당하게 된 거야."
  "그 짓은 한 번 뿐이었나?"
  "늙은이 같으면 한 번만 그 짓을 하고 말겠어? 그  작
  자는 몇 년 동안 영희를 괴롭혔어 결국 영희에게  죽
  었지만 "
  "영희가 그를 죽였나?"
  "영희의 비밀을 알려고 하지마. 괜히 늙은이까지 죽게
  된다구 "
  "영희가 나를 죽이려고 하나?"
  "영희에게 물어 봐!"
  환자의 자아가 날카롭게 소리를 질렀다.
  "인육사건을 알지?"
  장기철 박사의 질문에 환자가 갑자기 긴장하기 시작했
  다.
  "신문에서 봤어."
  "신문에서 말고 직접 보지 않았어?"
  "뭘 본단 말이야?"
  환자의 얼굴이 잔뜩 경계를 하고 있었다.
  "인육사건의 피해자."
  "흥!"
  "인육사건 네가 저지른 거 아니야?"
  "내가 저질렀다면 어쩔 테야?"
  "인육을 먹었나?"
  "미친 놈!"
  환자의 자아는 극도로 흥분하고 있었다.
  "누가 미쳤다는 거야?"
  "늙은이!"
  "입이 거친 거 아니야? 노인네에게 "
  "흥!"
  환자의 자아가 코웃음을 쳤다. 장기철 박사는  환자가
  인육사건에 대해서 대답할 의사가 없다는 것을 깨달았
  다. 자아가 강해서 최면이 제대로 걸리지 않는 것  같
  았다. 장기철 박사는 화제를 바꾸었다.
  "넌 남자를 좋아하지?"
  "남자를 좋아하는 것이 아니라 노랑나비를 좋아해."
  "노랑나비는 뭘 의미하지?"
  "섹스."
  "넌 섹스를 좋아하는구나."
  "그건 누구나 마찬가지잖아? 늙은이는 섹스를 싫어해?
  노랑나비가 싫어?"
  환자의 얼굴에서 야릇한 비웃음기가 떠오르면서  갑자
  기 스커트를 휙 걷어 올렸다. 그러자 환자의 살찐  허
  벅지와 함께 삼각형 속옷이 드러났다. 장기철  박사는
  깜짝 놀랐다. 환자가 최면 중에 자신의 스커트를 걷어
  올린다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이런  일
  은 임상학적으로도 보고된 일이 없었다.
  "늙은이! 여길 보고도 하고 싶지 않아?"
  "그만 둬!"
  장기철 박사는 벌컥 화를 냈다. 그러자 환자가 요란하
  게 웃어댔다. 장기철 박사는 환자의 웃음소리에  소름
  이 오싹 끼치는 것을 느끼며 후회를 했다. 환자를  자
  극해서는 안되었다.
  "하고 싶으면 해! 욕망이 일어나는데도 왜 못하지? 노
  랑나비를 갖고 싶은데 왜 못 가져?"
  "이봐 진정해."
  "이것도 내가 스스로 벗기를 바라는 거야?"
  환자가 자신의 하얀 속옷을 벗으려는 시늉을 했다.
  "진정해. 난 너의 적이 아니야. 난 너를 도와주는  사
  람이야."
  장기철 박사는 진땀이 흘렀다.
  "설마 늙어서 그 짓을 할 힘이 없는 것은 아니지?"
  "그만!"
  장기철 박사는 눈을 질끈  감았다. 환자의 하얀  속옷
  자락이 눈앞에 어른거리며 아랫도리가 묵직했다.
  "왜 그래?"
  환자의 자아가 깔깔대고 웃음을 터뜨렸다.
  "피곤할 거야. 그만 자."
  "피곤하지 않아. 늙은이와 계속 얘기하고 싶어 "
  "그만 자."
  "나를 잠들게 하면 늙은이를 죽여버릴 테야 "
  환자의 목소리가 점점 낮아지면서 얼굴이  평화로워지
  기 시작했다. 환자의 자아가 최면 속에서 잠들기 시작
  하고 있는 것이다.
  장기철 박사는 태희라는  자아가 나타난 테이프를  껐
  다. 테이프는 거기까지가 끝이었다. 태희라는  자아가
  워낙 광포하여 더 이상 대화를 할 수가 없어서 최면을
  걸어 환자의 비밀을  캐내려는 시도를 포기했던  것이
  다.
  장기철 박사는 담배를 파이프에 끼워서 입에  물었다.
  곤혹스러운 일이었다. 도대체  환자는 어째서  그토록
  광포한 자아를 가지게 된 것일까. 태희라는 자아는 실
  제 생활에 있어서도 광포한 것일까. 파이프에 끼운 담
  배에 불을 붙이면서 장기철 박사는 손끝이 가늘게  떨
  렸다. 태희라는 자아가 두려웠다.
  (태희라는 자아는 현실 생활에서도 활동하고 있어 )
  의식 속에만 있는 자아가 아니었다. 태희라는  자아는
  실제 행동으로 자신의 스커트를 걷어올린 것이다.  그
  것은 태희라는 자아가 활동하고 있다는 명백한 증거였
  다.
  담배연기를 길게 내뿜으며 장기철 박사는 창으로 미호
  천을 내다보았다. 미호천에 석양이 자맥질을 하고  있
  었다.
  장기철 박사는 담배를 다 피운 뒤에 다른 테이프를 넣
  었다. 그 테이프는 아영이라는 자아가 나타나고  있는
  테이프였다. 태희라는 자아와 달리 아영이라는 자아는
  순결하고 아름다운 소녀였다.
  "너는 누구지?"
  "아영이라고 해요."
  환자가 조용하면서도 상냥한 목소리로 말했다. 애교가
  철철 넘치는 목소리였다.
  "아영이가 누군데?"
  "음 부잣집 소녀 "
  "어디서 살지?"
  "2층 양옥집에 아름다운 커텐이 있고 하녀도 있어요
  저는 예쁜 옷을 입고 창밖을 내다보거나 그림을 그
  려요 하녀가 저에게 목욕을 시켜주고 아버지는 선물
  을 보내 주죠 "
  "아버지는 어디 있지?"
  "서울 "
  환자는 꿈꾸는 듯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아버지는 서울에서 무얼하지?"
  "회사 "
  "아영이와 같이 살고 있지 않나?"
  "아버지는 바빠요. 회사일 때문에 유럽 여행을 하기도
  하고 내가 잠잘 때 집에 와서는 선물을 놓고 가요 "
  "어머니는 어디 있지?"
  "몰라요."
  환자의 얼굴이 갑자기 차갑게 굳어졌다. 어머니에  대
  해서 반발하는 듯한 표정이었다.
  "어머니가 없나?"
  "  "
  "어머니가 죽었나?"
  "네."
  환자의 목소리가 모기소리처럼 가늘어졌다.
  "어떻게 죽었지?"
  "병으로 "
  "영희를 알고 있니?"
  "알아요."
  "영희는 어떤 아이지?"
  "영희는 불쌍한 아이예요."
  아영이라는 자아도 영희를 알고 있었다. 그러나  영희
  를 측은해 하고 있었다.
  "왜?"
  "매일 같이 계부에게 두드려 맞고 그 짓을 당했어요."
  환자의 눈에서 눈물이 주르르 흘러내렸다. 환자는  감
  정이 격해지는지 어깨까지 들먹거리고 있었다.
  장기철 박사는 무겁게 고개를 끄덕거렸다. 환자의  모
  든 자아는 그녀의 계부와 관련이 있었다. 태희,  아영
  이라는 자아가 모두 영희라는 소녀가 계부에게 폭행과
  강간을 당함으로써 나타난 것이다. 그녀는 극심한  공
  포와 수치심을 견디다 못해 정신이 분열된 것이었다.
  태희라는 자아는 그론 인한 반작용으로 광포해지고 아
  영이라는 자아는 아버지, 생부로부터 도움을 받으려는
  청순가련형의 소녀로 나타나고 있었다. 아버지의 선물
  은 단순한 선물이 아니라 도움을 바라는 강력한  절규
  인 것이다.
  사내는 란제리 가게 앞 전봇대 옆에서 담배를 물고 서
  있었다. 얼굴이 얽어 있고 눈빛이 사나워 보이는 인상
  이었다. 바지는 검은 색이고 상의는 허리까지  내려오
  는 헐렁한 자켓이었다. 자켓 안에는 흰 티를 받쳐입고
  있었다.
  민상호는 본능적으로 그가 좋지 않은 일로 찾아왔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제가 민상호입니다."
  민상호는 불안한 기색으로 사내를 쳐다보았다.
  "나하고 얘기 좀 할까?"
  사내는 다짜고짜 반말이었다.
  "저 무슨 일이신데요?"
  민상호는 조심스럽게 사내에게 용무를 물었다.
  "경찰이야."
  "예?"
  민상호는 가슴이 철렁했다. 사내의 눈이 민상호의  아
  래위를 빠르게 훑었다. 민상호는 그 시선에 주눅이 들
  어 전신이 오그라드는 것 같았다.
  사내가 상의 안주머니에서 신분증을 꺼내보였다. 민상
  호는 사내가 내민 신분증을 들여다보았다. 신분증에는
  서초경찰서 강력계 오득렬 형사라고 씌어 있었다.  사
  내가 신분증을 다시 자신의 주머니에 갈무리했다.
  "살인사건을 조사하고 있어. 이 옆에 어린이 놀이터가
  있는데 같이 갈까?"
  "예."
  민상호는 겁먹은 목소리로 대답하고 사내를  따라나섰
  다. 살인사건이라는 바람에 다소 안심이 되었다. 살인
  사건과 관련된 일을 저지른 일은 한 번도 없었다.  형
  사가 무엇인가 잘못  알고 찾아왔을 것이라고  생각했
  다.
  어린이 놀이터는 오후라 그런지 초등학교 아이들이 몰
  려와 그네를 타고 있었다. 민상호는 형사의  지시대로
  밴취에 앉았다. 형사는 그의  앞에 서서 담배를  빼어
  물고 있었다.
  "매스컴에서 인육 살인사건이라고 부르는 지하철역 살
  인사건 알지?"
  형사가 추궁을 하듯이 질문을 시작했다.
  "예."
  "그날 뭐 했어?"
  "학교에 가고 "
  "밤에 말이야."
  "집에서 비디오를 보다가 잤습니다."
  "밤 11시에서 새벽 2시 사이에 비디오 봤어?"
  형사의 목소리는 얼음처럼 싸늘했다. 목소리가 낮았으
  나 찌르듯 날카로웠다.
  "정확한 시간은 생각나지 않지만 그 시간에 집에 있었
  습니다."
  "집에 누구랑 있었어?"
  "저 혼자요."
  "가족들은 없어?"
  "저 혼자 자취하고 있습니다."
  "그럼 그 시간에 비디오 봤다는 거 누가 확인해 줄 수
  있어?"
  형사는 민상호의 알리바이를 캐고 있는 것 같았다. 민
  상호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민상호가 자취를 하는 아
  파트는 시영 아파트였다. 계단을 따라 2층까지 올라오
  면 양쪽 집으로  출입하는 현관문이 하나씩  있었으나
  앞집과는 별로 내왕을 하지 않았다.
  그 집에는 택시운전을 하는 30대 남자가 살고 있었다.
  여자가 성격이 괄괄하고 술을 잘 마셔 부부 싸움이 잦
  았다. 여자는 춤바람까지  나 있었다. 아이들은  딸만
  셋이었다. 큰딸이 중학교 1학년 막내딸이 초등학교  2
  학년이었다.
  "잘 모르겠어요."
  "비디오는 언제 빌렸어?"
  "그 전날이요."
  "그런데 그날 보지 않고 다음날 봤어?"
  "테이프를 세 개 빌렸어요. 두 개는 그날 보고 한  개
  는 다음날 본 거예요."
  "테이프를 한꺼번에 세 개씩 빌려?"
  "테이프 하나 빌리는데 3백원이라서 "
  오득렬 형사가 담배연기를 길게 내뿜었다.
  "운전할 줄 알아?"
  "예."
  "샤브 운전해 봤어?"
  "샤브라면 "
  "외제 승용차 말이야."
  "한 번 운전해 봤어요. 저희 대학에서 강의하는  서경
  숙 교수님에게 외제 승용차가 있어서 "
  "인육사건이 일어나던 날 그 차 운전했지?"
  "아닙니다. 제가 운전한 것은 6개월쯤  전이었습니다.
  그때 교수님과 술을 마시고 드라이브를 했는데 교수님
  이 저에게 운전을 하라고 해서 제가 한 번 해봤어요."
  "그 여자가 교수야?"
  "시간강사지만 교수님으로 부르고 있습니다."
  "몇 시에?"
  "밤입니다."
  "어디로 갔어?"
  "산정호수요."
  "갔다가 바로 왔어?"
  "예."
  민상호는 거짓말을 했다. 그는  그날 그 여자  교수와
  차안에서 격렬한 섹스를 했었다. 여자 교수는 놀랄 정
  도로 열정적이었다. 처음에는 술에 취해서 수동적이었
  지만 나중에는 민상호가 지쳐 떨어질 정도로 그  여자
  가 더 적극적이었다.
  (콘돔까지 준비하고 있는 것을 보면 남자 관계가 복잡
  한 여자야 )
  민상호는 그때 그렇게 생각했다. 그러나 그 이후는 두
  번 다시 그런 기회를 가질 수가 없었다. 민상호는  그
  무렵 돈이 필요했고 그 여자 교수의 남편 집에 침입하
  여 도둑질를 했다가 경찰에 체포되었던 것이다.  물론
  그 여자와 그 여자의 남편이 처벌을 원하지  않는다고
  하여 민상호는 간신히 구속을 면하고 훈방되었었다.
  그 뒤로는 여자 교수와 멀리했다. 그 여자도 의식적으
  로 그를 멀리하고 있었다.
  (차안에서는 나를 잡아먹을 듯이 요란을 떨더니 )
  민상호는 그 여자가 자신을 멀리하자 조금  서운했다.
  그러나 그 여자에 대해서 더 이상 신경 안 쓰기로  했
  다. 이따금 연상의 여자인 그 여자의 희고 풍만한  몸
  뚱이가 머릿속에서 하얗게 떠오르기는 했으나  자신의
  상대가 아니라고 생각했다.
  민상호는 어쩐지 그 여자와 만난 뒤로 일이  재수없게
  꼬이는 것 같았던 것이다.
  "그때 열쇠를 돌려줬어?"
  "돌려주고 자시고 할 것도 없었어요. 그냥 차에  꽃은
  채 쉬다가 돌아왔으니까요.  교수님에게 확인해  보세
  요. 그런데 왜 그 차가 문제가 되죠?"
  "살인마가 그 차를 운전하는 것을 본 목격자가 있어."
  "그럼 그 차 주인에게 물어 보시죠. 그 차 주인이  범
  인일 수도 있지 않습니까?"
  민상호는 처음으로 항의하는 투로 말했다.
  "그 차 주인은 여자야."
  "여자도 살인할 수 있지 않습니까?"
  "피해자들은 성폭행을 당했어."
  민상호는 입을 다물었다. 피해자들이 성폭행을 당했다
  면 범인은 여자가 아닌 것이다.
  "게다가 그 차는 사건이 일어나기 전에 도난신고가 되
  어 있었어."
  "그럼 그래서 저를 의심하는 건가요?"
  민상호는 비로소 형사가 자신을 왜 찾아왔는지 이해할
  수 있었다. 살인마는 서 교수의 샤브 승용차를 훔쳐서
  살인에 이용했다. 그렇다면 그 차를 운전할 만한 사람
  이 의심을 받는 것은 당연하다. 민상호는 그렇게 생각
  하자 갑자기 머리끝이 일제히 일어서는 것 같았다. 그
  는 자신이 살인범으로 의심을 받고 있다는 사실에  가
  슴이 철렁했다.
  "그럼 그 목격자를 대질시켜 주십시오."
  "차 열쇠를 돌려주었다고 했지?"
  "예. 차에서 뽑은 일도 없습니다."
  형사가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그는 민상호를 어떻게 심
  문할지 머릿속에서 궁리하고 있는 것 같았다.
  "김호성씨 알지?"
  "예."
  형사의 말에 민상호는 다시 가슴이 철렁했다.  김호성
  은 서 교수의 전남편이었고 민상호는 그의 집에  침입
  하여 절도를 한 일이 있었다. 형사는 뒷조사를 충분히
  한 모양이었다.
  "그 집에서 차 열쇠를 훔치지 않았어?"
  "훔치지 않았습니다."
  민상호는 잘라 말했다.
  "조사하면 다 드러나."
  "얼마든지 조사하십시오. 전 정말 인육 살인사건에 아
  무 관련이 없습니다."
  민상호는 자신의 입장을 단호하게 말했다. 어영부영하
  다가는 살인범으로 몰릴 수도 있다는 사실을 생각하자
  두려웠다.
  "좋아. 내일 수사본부로 나와. 목격자와 대질하고  정
  액채취를 해보면 확실하게 드러나니까 "
  형사가 수사본부의 위치와 전화번호가 적힌 쪽지를 민
  상호에게 내밀었다.
  "아침 10시까지 찾아올 수 있겠지?"
  "예."
  민상호는 쪽지에 적힌  수사본부의 위치를  확인했다.
  수사본부는 행당동 파출소에 설치되어 있었다.
  "그럼 내일 만나 "
  형사가 무뚝뚝하게 내뱉고 어린이 놀이터를 나가기 시
  작했다. 민상호는 어린이 놀이터를 빠져나가는 형사의
  뒷모습을 우두커니 지켜보았다. 형사는 빠르게 어린이
  놀이터를 빠져나가 큰길 쪽으로 걸어가 버렸다.  그가
  사라진 어린이 놀이터에는 희디흰 햇살만 난무하고 있
  었다.
  장기철 박사는 환자의 비디오를 모두 분석하자 그것을
  노트에 기록하기 시작했다. 그는 이제 확실히 알고 있
  었다. 살인마는 환자의 의식 속에 있는 활동자아였다.
  사방은 벌써 캄캄하게 어두워져 있었다. 그가  환자를
  최면상태에 빠트려놓고 비디오로 찍은 테이프를  모두
  살피고 나자 어느 사이에 캄캄하게 어두워져 있었다.
  환자는 어머니와 함께  대나무 숲이 있는  지리산의
  한 시골에서 살고 있었다. 어떤 이유인지 알 수  없으
  나 환자의 아버지는 교도소에서 복역하고 있었고 환자
  의 어머니는 어린 딸에게 아버지가 장사를 하고  있다
  고 거짓말을 했고 그것이 나중에는 서울에서 큰  회사
  를 하고 있다는 거짓말로 바뀌었다.
  어린 환자의 의식  속에서도 어머니의 거짓말에  의해
  아버지가 회사의 사장이라는 인식이 박히기 시작했다.
  어느 날 교도소에서  복역하던 환자의 생부가  병으로
  죽었다. 어머니는 흰옷을 입고 교도소를 찾아가서  유
  골가루를 강에 뿌리고 돌아온 뒤 슬프게 운다. 그러나
  딸에게는 아버지가 사 준 것이라며 인형을 사  가지고
  온다. 환자의 의식에서 생부가 여전히 살아있는  것으
  로 나타나는 것은 그 때문이다.
  환자의 자아중 하나는  커다란 저택에서 살고  하녀를
  거느리고 있다. 생부는 그녀가 잠들었을 때만  나타나
  서 선물을 주고 간다. 환자가 생부를 본 일이 한 번도
  없기 때문에 환자가  잠들었을 때만 생부가  나타나는
  것이다.
  그 자아의 이름은 아영이라는 소녀다.
  환자의 어머니는 대나무  숲이 있는 지리산  골짜기를
  떠나 서울 난곡동으로 이사를 한다. 그녀는 생활을 위
  해 건축현장의 데모드(막노동꾼)를 하다가 환자의  계
  부를 만나 살림을 차리게 된다.
  환자의 어머니는 오랫동안 환자의 생부가 교도소에 있
  는 바람에 금욕생활을 한다. 그녀는 남자에 대한 성적
  욕구를 오랫동안 억제해 왔으나 환자의 계부를 만나자
  그 욕구가 폭발한다. 환자의 어머니가 계부에게  학대
  를 받으면서도 헤어지지  않고 딸이 비참하게  폭행을
  당하는 것을 알고서도 막지 못한 것은 오로지  비정상
  적인 성욕 때문이다. 그녀의 성욕은 결국  마조히스트
  로 변하고 자신과 딸의 일생까지도 망치는 결과를  초
  래한다.
  계부는 알콜 중독자다. 그는 어머니에게 폭력을  휘두
  르고 환자를 학대하기 시작한다.
  계부가 그녀의 신체에 손을 댄 것은 아홉 살 정도  되
  었을 때다. 그 무렵 계부는 그녀의 엉덩이에 손을  대
  는 정도로 그쳤다. 환자는 계부가 자신의 신체에 손을
  대는 것이 불쾌했지만 폭력적인 계부에게 저항하지 못
  한다. 이 무렵 계부와 어머니의 성행위를 자주 목격하
  게 된다.
  열 한 살쯤 되었을 때부터 계부가 그녀에게 폭력을 휘
  두르기 시작한다. 그녀는 이때부터 폭력에 대한  공포
  를 갖게 된다. 어머니는 그녀가 계부에게 폭행을 당하
  는데도 방관한다. 그녀는  어머니에게 무의식  속에서
  무수히 구원을 요청하지만 어머니는 들어주지 않는다.
  어머니가 그녀의 구원  요청을 묵살하자 그녀의  의식
  속에서 어머니에 대한 증오가 자라기 시작한다.
  계부로부터 폭행을 당하는 자아는 영희라는 소녀다.
  환자의 의식 속에는 서서히 생부에 대한 생각이  자리
  잡기 시작한다. 계부에게 구타를 당하고 흐느껴  울면
  서 생부의 부정(父情)을  그리워한다. 생부는  그녀가
  고통을 당할 때마다 의식 속에서 나타나 그녀를  안아
  주고 그녀에게 선물을 준다. 환자는 자신이 예쁘고 아
  름다운 소녀라는 환상에 빠지고 이름까지 아영으로 바
  꾼다. 환자의 의식 속에  있는 순결한 소녀의  자아는
  이때부터 나타난 것이다.
  장마가 억수 같이 쏟아지던 어느 날 그녀는  계부에게
  강간을 당한다. 그것은 10대 후반 무렵이었을 것이다.
  이때부터 그녀는 계부를 철저하게 증오하고 계부를 죽
  여버리겠다고 생각한다. 계부는 점점 이상정신의 소유
  자로 바뀌어 가고 어머니마저 계부의 학대로 죽게  되
  자 환자는 혼자서 계부의 온갖 폭행과 성의  노리개로
  전락하면서 이상성격이 나타나기 시작한다.
  이때 태희라는 자아가 등장한다. 태희는 성격이  포악
  하고 복수를 하는 자아다. 태희라는 자아는 계부의 구
  타와 강제적인 성행위가 격렬해질수록 그와  비례하여
  점점 강력한 자아가 된다. 태희라는 자아는  계부에게
  속수무책으로 당하고 있는 영희라는 자아를  경멸하기
  까지 한다
  장기철 박사는 노트에 필기를 하다가 말고 잠시  쉬었
  다. 태희라는 자아가 탄생한 것을 생각하자 인간이 사
  회적 동물이라는데 새삼스럽게  생각이 미친  것이다.
  태희라는 자아는 환자의  의식 속에서 돌출한  가공의
  자아가 아니었다.
  환자가 살고 있던  동네에 태희라는 불량소녀가  살고
  있었다. 이 소녀는 얼굴이 우락부락하게 생긴데다  남
  자들과도 잘 어울렸고 담배까지 피웠다. 이따금  동네
  를 지나가는 아이들에게 시비를 걸고 주먹질을 하기도
  했다.
  그러다가 어머니와 동거를 하는 남자가 자신을  성폭
  행하려고 하자 칼로 찔러  죽였다. 환자는 그  소녀를
  동경했다. 무엇보다 환자가 그 소녀를 동경한 것은 성
  폭행하려는 남자를 칼로 찔러 죽인 것이었다.
  그 뒤부터 환자의 의식 속에는 태희라는 소녀의  자아
  가 자리잡기 시작하고 있었다.
  아영이라는 자아도 저절로 탄생한 것이 아니었다.  환
  자가 다니던 초등학교에 아영이라는 아이가 다니고 있
  었다. 그 아이는 부잣집  아이였고 언제나 예쁜  옷만
  입고 학교에 다녔다. 아영이라는 자아의 말에  의하면
  그녀의 아버지는 회사의 사장이라고 했다. 환자는  계
  부로부터 구타와 성행위를 강요받게 되자  반작용으로
  스스로를 아영이라는 아이로 생각하게 되었고  그것이
  아영이라는 자아로 발전을 한 것이다.
  영희는 그녀 자신이었다.
  환자는 계부를 살해했다. 그것은 태희라는 자아가  영
  희라는 자아를 눌러버리고 환자의 의식 속에서 완전히
  자리잡고 있었을 때였다. 환자는 자신을 괴롭히는  계
  부를 살해하는 꿈을 꾸다가 마침내 살해하게 된  것이
  다.
  문제는 언제 영희가 서경숙으로 바뀌었느냐는 데 있었
  다. 처음에 장기철 박사는  그 문제로 상당히  고심을
  했었다. 영희를 비롯해 태희, 아영이라는 자아가 모두
  실재하지 않는 자아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었다.
  그러나 그것도 영희의 자아를 통해 금세 드러났다.
  영희는 계부를 살해한 뒤에 그 집을 팔고 이사를 했던
  것이다.
  그녀가 이사를 한 마을에  노인 부부가 살고  있었다.
  그 노인 부부는 가난했으나 아들이 월남전에서 전사한
  후에 그 연금으로 부부가 외롭게 살고 있었다. 그런데
  그 옆으로 영희가 이사를 하게 되었고 노인 부부는 영
  희를 관심 있게 살펴보게 되었다. 그들이 보기에 영희
  는 매우 착실한  소녀였고 혼자서 끗끗하게  살아가고
  있었다. 할머니가 영희를 만나보니 고아라고 했다.
  할머니는 할아버지와 상의하여 영희를 입양하게  되었
  다. 영희도 외로울 때라 쾌히 승락했다. 영희는  그때
  할아버지의 성을 따라 서경숙으로 입양을 했고 두  노
  부부의 지극한 보살핌을 받으며 학교에 다녔다.
  영희는 철저하게 자신의 과거를 숨겼다.
  세월은 빠르게 흘러갔다. 영희는 대학에 입학했고  심
  리학을 전공했다. 그녀가 대학 2학년일 때 할아버지가
  세상을 떠났고 대학 4학년 때는 할머니마저 세상을 떠
  났다.
  그때 영희는 첫  번째 해리(정신분열) 증상이  나타났
  다. 그러나 그 증상은  가벼웠고 장기철 박사의  최면
  요법으로 치료가 되었던 것이다.
  서경숙이 장기철 박사를 찾아온 것은 그때의 인연  때
  문이었다. 장기철 박사는 그때 태희라는 자아는  미처
  발견하지 못했었다.
  영희는 그후 미국으로 유학을 갔고 6년만에 돌아와 신
  경정신과를 개업했던 것이다.
  김호성과 결혼을 한 것은 미국 유학시절이었다.  그들
  은 외국에서 유학생활을  하면서 외로움을 느껴  서로
  자주 만나다가 결혼까지 하게 되었던 것이다.
  두 사람의 이혼은 뚜렷한 이유를 알 수 없었다.  서경
  숙은 그 문제에 있어서는 기이할 정도로 최면상태에서
  도 입을 열지 않고 있었다
  장기철 박사가 분석한 서경숙, 아니 서영희의  일생이
  었다. 계부에 의한 학대가 한 인간의 성격 형성에  얼
  마나 지대한 영향을 보여주는지 극명하게 나타난 사례
  였다.
  쏴아아아
  밖에는 장대비가 세차게 쏟아지고 있었다. 창밖의  나
  뭇잎에 빗발이 들이치면서 나뭇잎들이 검푸르게  몸을
  떨고 있었다. 사방이 캄캄하게 어두워져 있었다. 아파
  트 광장은 인적이 끊어지고 가난한 사람들이 몰려  사
  는 시영 아파트의 창들도 하나 둘 불이 꺼져 가고  있
  었다. 밖은 캄캄한 어둠의 바다가 심연처럼 펼쳐져 있
  었다.
  민상호는 빗발이 세차게 장대질 하는 창밖을 우두커니
  내다보았다. 서경숙이 전화를 받지 않고 있었다. 수사
  본부에 다녀온 뒤로 몇 시간째 계속 전화를  해댔으나
  외출중이라는 메모만 나오고 있었다.
  민상호는 서경숙을 이해할 수 없었다. 그 여자는 나쁘
  게 생각하면 퇴폐적인 여자고 좋게 생각하면 자유분방
  한 여자였다.
  그 여자로부터 인육  살인사건에 대한 설명을  들어야
  했다. 인육 살인사건에는 그 여자가 어떤  형태로든지
  관련되어 있었다.
  그는 생각조차 못했던 살인사건에 말려들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서경숙의 외제 승용차가 살인사건에 이용된
  것도 이해할 수 없었다. 그 차가 살인사건에 이용되었
  다고 하더라도 차의 주인인 서경숙이나 그녀의 전  남
  편이 의심을 받아야 했다. 그런데 엉뚱하게 그가 의심
  을 받고 있는 것이다.
  (함정에 걸렸어 )
  민상호는 자신이 빠져나오기 어려운 늪에 빠졌다는 것
  을 직감할 수 있었다. 인육 살인사건의 피해자들은 강
  간을 당한 흔적이 있었다.  그 까닭에 서경숙은  용의
  선상에서 벗어나 있었다.
  (목격자까지 내가 살인마와 비슷하다고 진술을 하다니
  )
  인육 살인사건의 유일한 목격자는 조미란이 외제 승용
  차에 납치 당한 것을 보았다는 차은숙이란  여자였다.
  그 여자는 민상호가 살인마와 인상착의가  비슷하다고
  진술을 했다.
  "확실해?"
  "똑같은지는 모르겠지만 비슷한 것 같아요."
  차은숙은 형사가 다그치자 인상착의가 비슷하다고  말
  했다.
  "자세히 보란 말이야!"
  "어두워서 정확하게 보지는 못했어요."
  난처한 것은 형사들이었다. 비슷하다는 목격자의 진술
  만으로는 민상호를 살인범으로  구속할 수가  없었다.
  그들은 번갈아 가며 민상호를 다섯 시간 동안이나  닦
  달하고 윽박지르며 취조를 했으나 민상호는 살인을 완
  강하게 부인했다.
  형사들은 민상호의 혈액과  정액을 채취하기로  했다.
  민상호의 혈액과 정액을 채취하여 국립  과학수사연구
  소에 보내 피해자의 안면에서 채취된 정액의 유전자와
  대조를 해볼 생각이었다. 그리고 치열도 떴다.
  민상호는 일단 석방되었다.
  그러나 그의 혈액과 정액에서 분석한 유전자와 피해자
  의 안면에서 채취한 정액의 유전자 배열이 같은  것으
  로 밝혀지면 꼼짝없이 살인범이 되는 것이다.  지문은
  3천만 명에 하나 꼴로 같은 사람이 있을 수 있지만 유
  전자는 2억 명에서 3억 명까지 같은 사람이 한 사람도
  없다.
  그는 인육 살인사건의  피해자 조미란을 만난  일조차
  없었다. 그러므로 안면에서 채취된 정액은 분명히  그
  의 것이 아니었다. 그러나 그런데도 불구하고  민상호
  는 웬일인지 불안했다.
  (내게 서 교수와 관계를 했을 때 그녀는 콘돔을  사용
  했어. 만약에 그 여자가 콘돔 속의 정액을 보관했다가
  피해자의 안면에 뿌렸다면 )
  그 생각을 하자 민상호는 소름이 끼쳐왔다.
  그녀는 의사였다. 일반인들은 정액을 보관할 수  없겠
  지만 그녀는 의사이므로 정액이 부패하거나 마르지 않
  도록 보관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의학적으로는  얼마든
  지 정액의 보관이 가능하다. 국내에도 정자은행이  생
  기고 임신을 하지 못하는 여자들이 그 정자를  공여받
  아 임신을 하는 일도 비일비재했다.
  (그렇지만 그 여자가 살인을 할 이유가 없지 않은가?)
  민상호는 자신의 생각을 부정하려는 듯 고개를 흔들었
  다.
  서 교수는 자유분방한 삶을 살고 있었다. 그녀는 의사
  로서 안정된 직업이  있었고 대학에도 출강하고  있었
  다. 남편과 이혼을 했지만 자유롭게 연애를 하면서 즐
  거운 삶을 살고 있었다. 민상호를 유혹하여  차안에서
  관계를 한 것만 봐도 그녀가 얼마나 자유로운  연애를
  하고 있는지 알 수 있을 터였다.
  그런 여자가 인육 살인사건 같은 끔찍한 짓을  저지를
  리가 없는 것이다.
  아파트 광장에 갑자기 불빛 하나가 달려왔다.  차량의
  전조등이었다. 아파트의 주민중 누군가 지금 귀가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민상호는 담배를 피워 물었다. 벌써 새벽 2시였다. 서
  경숙이 그에게 전화를 하기에는 늦은 시간이었다.
  차량의 전조등이 꺼졌다. 그러나 차에서는 아무도  내
  리지 않고 있었다. 민상호는 자신이 잘못 본 것이  아
  닌가 하고 고개를 갸우뚱했다.
  민상호는 담배연기를 길게 내뿜었다. 이제는 자야  할
  시간이었다. 텔레비전은 오래 전에 끝나서 지지거리는
  소리가 나오고 있었다. 민상호는 리모컨으로 텔레비전
  을 껐다. 텔레비전의 우윳빛 광선으로 거실이  희미하
  게 윤곽을 드러냈으나 텔레비전을 끄자 갑자기 사방이
  캄캄해졌다.
  그는 거실의 소파에 누워서 잠을 청했다. 신경이 예민
  해져서인지 거실의 벽시계 초침 돌아가는 소리가 유난
  히 크게 들려오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시간이 흘러가
  자 서서히 잠에 빠져들고 있었다.
  밤부터 내리기 시작한 비로 거리가 온통 질펀하게  젖
  어 있었다. 오득렬은 아침 일찍 국립  과학수사연구소
  를 찾아갔다. 국립 과학수사연구소에서 피해자의 안면
  에서 채취한 정액의 유전자와 민상호의 혈액 및  정액
  유전자의 분석 결과가 아침 일찍 나온다고 했던  것이
  다.
  "어서 오시오."
  국립 과학수사연구소에는 김민규(金民奎)  이화학과장
  이 직접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혈액과  정액을
  집중적으로 분석하는 사람이었다. 유전자의  권위자이
  기도 했다.
  "비가 오는데  수고가 많으십니다.  결과가  어떻습니
  까?"
  오득렬은 정중하게 인사를 했다.
  "잘됐습니다. 유전자 배열이 똑같아요."
  "그럼 민상호를 구속해도 되겠습니까?"
  "물론입니다. 헌데 기이한 것이 있습니다."
  "기이한 것이라뇨?"
  "조미란의 안면에서  채취한 정액말입니다.  사정한지
  하루가 채 안된 상태에서 채취한 것 아닙니까?"
  "그렇다고 봐야죠."
  오득렬은 김민규 과장이  묻는 뜻을 정확하게  헤아릴
  수가 없었다.
  "어쩐지 보관된 정액 같습니다."
  "무슨 뜻입니까?"
  "정액이 싱싱하지 않다는 거죠."
  오득렬은 김민규 과장을 멀뚱히 쳐다보았다. 속으로는
  이 양반이 지금 무슨 헛소리를 하는 거야? 하는  생각
  이 치밀었으나 내색하지 않았다.
  "거 왜 채소 같은 것을 냉장고에 오래 보관해 두면 부
  패하지는 않지만 신선도는 떨어지지 않습니까? 피해자
  의 안면에서 채취한  정액 상태가 선도가  떨어진다는
  말씀입니다. 국부의 정액과  전혀 다르다는  말씀입니
  다."
  "아니 과장님. 정액으로  그런 것까지  알 수  있습니
  까?"
  "오 형사. 내가 정액 분석만 20년을 한 사람입니다."
  김민규 과장이 과장된 몸짓으로 웃었다.
  "그건 저도 잘 알고 있습니다. 문제는 민상호가  범인
  이냐 아니냐 하는 것입니다."
  "정액의 선도가 떨어진다고 해도 그것은 틀림없이  민
  상호의 것입니다."
  "그럼 뭐가 문제가 되는 거죠?"
  "돌아가서 민상호를 구속할 거 아닙니까? 민상호를 구
  속하면 정액을 좀  채취해서 보내주십시오.  민상호가
  금방 사정한 정액과 어떻게 다른지 비교해 볼  생각입
  니다. 피해자에게서 하루 안에 채취된 정액이  선도가
  떨어진 일은 지금까지 없었습니다."
  오득렬 형사는 김민규 과장의 말을 납득할 수가  없었
  다. 과학적인 것은 전문이 아니지만 김민규 과장이 귀
  신 씨나락 까먹는 소리를 하는 기분이었다. 그러나 머
  뭇거리고 있을 시간이 없었다. 오득렬은 김민규  과장
  으로부터 유전자 분석표를 받아 가지고 민상호를 구속
  하기 위해 국립 과학수사연구소를 나왔다.
  "민상호를 구속하러 갑니다. 유전자 배열 분석표가 민
  상호가 범인이라는 것을  입증하고 있습니다.  유전자
  코드가 똑같답니다."
  오득렬은 카폰으로 수사본부에 연락을 했다.
  "수고했네. 민상호가 범인이라는 거지?"
  "예. 수사본부에 가서 자세한 내용은 설명 드리겠습니
  다."
  "그럴 필요없어. 지금 즉시 민상호의 아파트로  가게.
  민상호가 자살을 했어."
  "예?"
  "민상호는 어제 수사본부에 연행되어 조사를 받은  뒤
  수사망이 좁혀져 오자 자살을 했어."
  민상호는 맥이 탁 풀리는 기분이었다.
  "어떻게 자살을 했습니까?"
  "베란다에서 목을 매달았어. A4용지로 유서를 남겼대.
  시체가 아직도 베란다에 매달려 있어. 나도  현장으로
  출동하니까 자네도 그쪽으로 오라고 "
  "알겠습니다."
  오득렬은 카폰을 끄고 경광등을 달았다. 그리고  사이
  렌을 요란하게 울리면서 민상호의 아파트가 있는 안암
  동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아침이라 차들은 밀리지  않
  았다. 그러나 비까지 계속 내리고 있어서 그가 안암동
  의 아파트에 이르렀을 때는 한 시간이나 지나 있었다.
  사건 현장에는 이른 아침인데도 시민들이 우산을 쓰고
  빽빽하게 몰려나와 있었다.  정사복 경찰들도  가득했
  다. 기자들은 정사복 경찰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이
  리 뛰고 저리 뛰며 카메라 셔터를 눌러대기에  분주했
  다. 방송국 기자들은 민상호의 시체를 향해  카메라의
  앵글을 맞추느라고 여념이 없었다. 북새통 같은  사건
  현장이었다. 민상호의 시체는 아파트의 2층  베란다에
  대롱대롱 매달려 있었다.
  "어유 끔찍해. 오래 살다 보니까 베란다에 목을  매는
  사람이 다 있네."
  젊은 여자가 몸서리를 쳤다.
  "빨리 시체를 끌어내리지 경찰들은 왜 사진만 찍고 있
  어?"
  "증거를 수집하기 위해서야. 내가 추리소설에서  봤는
  데 수사를 위해서 시체의 사진을 수백 통씩  찍는다는
  거야?"
  "인육 살인사건 범인이라며?"
  "인육 살인사건?"
  "시체를 먹었다는 사건 말이야!"
  "아유 끔찍해!"
  여자들은 낮게 소곤거리며  진저리를 쳤다.  오득렬이
  구경꾼들을 헤치고 앞으로 나가자 수사본부  형사들이
  몰려와 있었다. 감식반의 최 계장도 보였다.
  "웬만치 하고 시체를 끌어내려. 시민들이 구경을 하고
  있는데 시체를 계속 매달아두고 있을 수는 없잖아?"
  최 계장의 지시로  경찰이 민상호의 시체를  끌어내렸
  다. 오득렬은 형사들과 함께 재빨리 민상호의  시체로
  다가가서 살펴보았다. 민상호의 시체는 특별한 외상이
  없었다. 나이롱줄을 목에  감았기 때문에  나이롱줄에
  의한 상처가 목 주위에 깊이  패어 있었고 목을 매어
  죽은 사람들의 특징인 혀가 길게 빠져 나와 있었다.
  "시체는 감식반에 맡기고 아파트로 올라가 보지."
  오득렬은 최 계장을  따라 민상호의 아파트로  올라갔
  다. 민상호의 아파트는 벌서 수사본부 형사들이  샅샅
  이 수색을 하고 있었다.
  "뭐가 나왔어?"
  최 계장이 질문을 던졌다.
  "피 묻은 옷이 침대 밑에서 나왔습니다. 범행에  쓰인
  듯한 메스도 나왔구요."
  유 형사가 대답을 했다. 그들은 민상호의  아파트에서
  나온 증거품들을 투명한 비닐봉지에 담고 있었다.  민
  상호는 그것만 보더라도 범인이 틀림없을 것 같았다.
  "진작 수색을 할걸 그랬어."
  최 계장이 오득렬에게 말했다.
  "오늘쯤 압수 수색영장을 발부 받아 수색할려고  그랬
  습니다."
  그것은 사실이었다. 그러나 민상호는 자살을 한  것이
  다. 마치 닭 쫓던 개가 지붕을 쳐다보고 있는  꼴이었
  다.
  "유언장은 어디 있어?"
  "여기 있습니다."
  형사로 발령을 받은 지 6개월만에 수사본부로  파견된
  장한나 여형사가 대답했다. 장한나 여형사는 스물  두
  살밖에 안되는 처녀였다. 얼굴이 예쁘장했지만 태권도
  3단의 무술 실력자였다.  운동을 해서 몸매가  탄력이
  있었다. 오진주 형사와 함께 수사본부에 파견된 세 명
  의 여형사들 중 한 명이었다.
  유언장은 A4용지로 한 장으로 되어 있었다.  컴퓨터로
  작성한 것이다. 오득렬은 눈으로 유언장의 내용을  읽
  기 시작했다.
  수사망이 압축되고 있어서 자살한다. 후회는  없다.
  어차피 이렇게 될 것으로 생각했다. 다만 언젠가는 수
  사망이 좁혀져 올 것이라고 생각했으나 예상보다 빨리
  왔다는 느낌이다. 우리 나라 수사경찰의 실력에  감탄
  했다.
  떠나는 마당이니 시원스럽게  밝히고 가겠다.  장미원
  살인사건, 지하철 역 살인사건, 조미란 살인사건은 모
  두 내가 저질렀다. 이유는 없다.
  장미원 살인사건의 유미경은 내가 귀가 길에 데이트를
  신청하자 그대로 응했다. 우리는 캔맥주를 사들고  우
  산을 쓰고 밤길을 걸었다. 나는 장미원 근처에 이르렀
  을 때 야수로 돌변 유미경을 강간하려고 했다. 그러자
  유미경이 거칠게 반항하여 살해했다. 어쩔 수 없었다.
  나는 유미경의 시체를  인적이 없는 장미원으로  끌고
  갔다. 그리고 그녀의 옷을 모두 벗기고 얼굴을 내려다
  보며 자위를 했다. 얼굴에서  정액이 검출된 것은  그
  때문이다.
  한 번 살인을 하자 자꾸  살인에 대한 유혹이 일어났
  다. 나는 그 유혹을 견디다 못해 00지하철 역 여자 화
  장실에 들어가 범행대상자를 기다렸다. 막차가 지나갈
  시간이었다. 얼마 되지 않아 윤형숙이 들어왔고  내가
  그녀에게 일을 저지르려고 할 때 남자 화장실에서  인
  기척이 났다. 나는 당황하여 윤형숙을 살해한 후에 남
  자 화장실로 달려가 그도 살해했다.
  그후 나는 00지하철역을 나와 차로 갔다. 서경숙 교수
  의 샤브 승용차다. 나는 그 차를 훔쳤다. 열쇠는  6개
  월쯤 전에 남편의 집에서 훔친 것이다.
  내가 그 차의 시동을 걸고 출발했을 때 한 여자가  비
  틀대며 걸어오는 것이 백미러로 보였다. 그 여자는 조
  미란이었다. 어쩐 일인지 그 여자는 울고 있었고 태워
  다 주겠다고 하자 차에 무엇에 홀린 듯이 올라탔다.
  나는 술에 취한 그녀를 태운 뒤 인적이 없는 골목으로
  데리고 가서 유린했다. 그리고 살해한 뒤에 골목에 버
  렸다. 내가 여자들의 얼굴에 사정을 한 것은 한  여자
  의 비난 때문이었다.
  언젠가 나는 동네 아줌마와 관계를 맺은 일이  있는데
  그 아줌마는 나의  그것이 작다고 불만을  털어놓더니
  나를 만나 주지 않은 것이다. 나는 그후 여자의 그 곳
  으로는 관계를 할 수가  없었다. 나는 모욕감  때문에
  그 여자를 죽이려고 했으나 그 여자가 어디로  이사를
  가버려서 찾을 수가 없었다.
  내가 인육을 먹었다는 것은 거짓말이다. 나는 결코 인
  육을 먹지 않았다. 내가 피해자들의 왼쪽 유부를 물어
  뜯은 것은 나를 모욕한 그 여자에 대한 증오의 표시인
  것이다.
  그 여자는 지금쯤 공포에 질려 있을 것이다. 나는  그
  여자가 나를 모욕했을 때 왼쪽 가슴을  물어뜯었었다.
  그 여자는 비명을 질렀고 다시는 나를 만나지 않게 된
  것이다.
  그 여자가 누구인지는 굳이 밝히지 않겠다. 다만 내주
  변을 수사한다면 경찰이 밝힐 수도 있을 것이다.
  나는 죽는다. 이것으로 내 얘기는 끝이다
  유언장의 내용은 수사망이 압축되고 있어서 자살을 한
  다는 것과 인육 살인사건을 어떻게 저질렀는지 상세하
  게 기록하고 있었다. 죽음을 앞에 두고 있어서인지 상
  당히 오만했다. 살인사건을  묘사한 부분에  있어서는
  범인이 아니면 도저히 알 수 없는 부분까지 적혀 있었
  다.
  "범인이 틀림없는 것 같군."
  "그런 것 같습니다."
  최 계장의 말에 오득렬은 무겁게 고개를  끄덕거렸다.
  민상호가 한 유부녀로부터  성기가 왜소한 것에  대한
  비난을 받고 사건을  저질렀다는 생각을 하자  어이가
  없었다.
  사건은 끝이 났다.
  오득렬은 민상호의 아파트까지 쫓아 들어와서  취재경
  쟁을 벌이는 형사들을 피해 밖으로 나왔다. 이제는 퇴
  근하여 이정희와 침대에서 잠을 자야 하겠다고 생각했
  다. 이정희가 경영하는 카페는 오후가 되어서야  문을
  열기 때문에 아이들을  학교에 보낸 이정희는  아직도
  자고 있을 것이다. 이정희가 카페로 출근하기 전에 서
  둘러 집으로 돌아가야 했다.
  "선배님."
  아파트를 나오자 오진주 형사가 차에 앉아 있다가  오
  득렬을 불렀다. 오득렬은 오진주의 차로 들어가  동반
  석에 앉았다.
  "이렇게 사건이 끝나니 허망해요."
  그것은 오득렬 형사도 마찬가지였다.
  "이제 무엇을 하죠?"
  "나는 집에 들어가서 옷을 갈아입어야겠어."
  "네에."
  오진주 형사가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러나  오득렬이
  옷을 갈아입어야겠다는 말을 오진주 형사는 결코 이해
  하지 못할 것이다.
  밖에는 아직도 빗발이 거칠게 쏟아지고 있었다.
  신문은 인육 살인사건을 대서특필했고 방송은 연일 그
  사건으로 북을 치고 있었다. 자신의 성 콤플렉스에 의
  한 한 정신병자의 엽기적인 살인사건, 수사망이  압축
  되자 베란다에서 스스로 목을 매달아 자살, 이러한 범
  인이 등장한 배경은  우리 사회가 갈수록  가파라지고
  있기 때문
  신문과 방송은 나름대로 범인 민상호의  심리상태까지
  분석하면서 신문 독자들과 방송 시청자들의  호기심을
  경쟁적으로 부채질했다. 특히 세인의 관심을 끈  인육
  살인사건이라고 보도하면서 살인마가 인육을 먹었는지
  먹지 않았는지는 살인마가 자살을 함으로써 영원히 밝
  혀지지 않는 비밀이 되었다고 보도했다.
  다만 한 신문이  사회면 귀퉁이에 조그맣게  살인마가
  자살을 한 것에 대해 의혹을 제기했다. 민상호의 가족
  들이 민상호는 살인마가  아니다, 민상호는  누군가에
  의해 타살이 된  것이다 라는 주장을 했다는  정도의
  기사였으나 시민들이나 경찰의 관심을 끌지는  못하고
  있었다.
  (이건 진실이 아니야 )
  장기철 박사는 신문과 방송을 보면서 짙은 의혹에  사
  로잡혔다. 그는 서경숙의 의식 속에 있는  자아로부터
  살인마가 누구인지 확실하게 알아냈던 것이다. 그러나
  증거가 없었다. 게다가 늙은 그가 사건을 직접 수사할
  수도 없었다.
  (계부의 시체를 어떻게 했는지 알아내기만 하면 돼 )
  장기철 박사는 거기까지 생각하다가 깜짝 놀랐다.  진
  료실 문으로 서경숙이 들어오고 있었다.
  "서, 서 교수!"
  "안녕하세요?"
  서경숙이 입술을 비틀며 하얗게 웃었다. 장기철  박사
  는 소름이 오싹 끼치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연구 많이 하셨어요? 늦게까지 불을 켜놓고 일을  하
  시니 "
  서경숙이 환자용의 안락의자에 털썩 앉았다. 서경숙은
  레인코트를 입고 있었다. 밖에는  또 비가 오고  있는
  모양이었다. 서경숙의 노란 레인코트가 비에 젖어  번
  들거리고 머리에 하얀 안개꽃 같은 빗방울이 묻어  있
  었다. 장마철이라 비가 그쳤다가 내리고 그쳤다가  내
  리고 있었다.
  "밖에 비가 오나?"
  장기철 박사는 책상 위의 노트를 접어서 서랍에  갈무
  리했다. 서경숙의 눈에 띄면 안되는 것이었다.
  "네. 장마가 지려나봐요."
  서경숙의 눈이 몽롱하게 풀어져 있었다. 얼굴은  벌겋
  게 상기되어 있었다. 서경숙은 정상적이지 않았다.
  "비가 오는데 이 먼 곳까지 웬일이야?"
  장기철 박사는 억지로 얼굴에 미소를 띄웠다.
  "박사님을 뵙고 싶어서요?"
  "나를?"
  "네."
  "설마 늙은이에게 데이트 신청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니
  겠지?"
  장기철 박사는 농담을 했다. 서경숙의 긴장을 하고 있
  는 마음을 안정시키기 위해서였다.
  "언젠가 술을 마시고 싶으면 오라고 하셨잖아요?"
  "내가 그랬었나? 핫핫 "
  장기철 박사는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그런데 머리가 깨어질 것처럼 아파요. 진통제 좀  주
  세요."
  서경숙이 눈을 감고 안락의자에 털썩 주저앉았다.  무
  슨 일 때문인지 알 수 없었으나 몸을 가누기도 어려워
  보였다. 장기철 박사는 서경숙의 의식이 분열  상태에
  빠지고 있는지 모른다고  생각했다. 정신분열  상태를
  보이고 있는 환자들은 의식의 혼란이 올 때면  머리가
  깨질 듯이 아플 때가 종종 있었다.
  "좀 쉬면 괜찮지 않겠어?"
  환자가 진통제를 달라고 덥석 줄 수는 없었다. 환자가
  일부러 그의 의중을 살피기 위해 연극을 하고  있는지
  알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아네요. 몹시 아파요."
  서경숙은 눈물까지 흘리고 있었다.
  "머리만 아파?"
  장기철 박사는 짐짓 걱정스런 표정을 했다.
  "온 몸이 떨리고 추워요."
  서경숙이 몸을 부르르 떨었다.
  "혹시 비를 맞아서 감기가 걸린 것 아냐?"
  "모르겠어요. 빨리 약 좀 주세요."
  서경숙이 재촉을 했다.
  "알았어. 일단 진찰 좀 하고 "
  장기철 박사는 체온계를 서경숙의 입에 물리고 청진기
  를 서경숙의 가슴에 댔다. 체온계는 40도에  육박하고
  있었고 심장은 불규칙하게 뛰고 있었다. 서경숙은  감
  기 몸살에 걸린 것이 분명했다.
  "열이 아주 높아."
  "감기인 모양예요."
  "심장도 불규칙적으로 뛰고 "
  "약을 조제해 주세요. 주사도 놔주시고 "
  서경숙이 눈을 감은 채 중얼거렸다.
  "조금만 기다려."
  장기철 박사는 더 이상 망설이지 않고 약제실로  들어
  가 감기약을 간단하게 조제했다. 그리고 환자가  최면
  에 빠지도록 주사기에  최면제까지 넣었다.  환자에게
  감기약을 주사하는 척하면서 최면에 빠트릴  생각이었
  다. 그는 이 기회에  환자의 활동자아에 대해서  더욱
  확실히 파악하고 활동자아가 살인을 한 사실을 밝혀야
  겠다고 생각했다.
  서경숙은 장기철 박사가 돌아오자 스커트를  엉덩이에
  서 내리고 주사를 맞을 준비까지 하고 있었다. 장기철
  박사는 서경숙의 엉덩이에 혈관주사 두 대를 넣고  약
  을 복용하도록 했다. 서경숙은 알약을 단숨에 입에 털
  어 넣고 물을 마셨다.
  "박사님. 잠깐만 쉴께요."
  서경숙이 안락의자에 등을 기대어 눈을 감았다.
  "내가 재워 줄까?"
  "네. 그래 주시면  더욱 빨리 잠들  수 있을 것  같아
  요."
  "그럼 내가 열까지 세면 잠을 자는 거야 "
  "최면은 걸지 마세요."
  서경숙이 희미하게 웃으며 말했다.
  "약속할게."
  장기철 박사는 서경숙이 의외로 쉽게 걸려든다고 생각
  했다.
  "내가 열을 세면 자는 거야. 하나 둘 셋 "
  장기철 박사는 천천히 숫자를 세었다. 서경숙은  장기
  철 박사가 숫자를 세기 시작하자 지그시 눈을 감았다.
  장기철 박사를 신뢰하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장기철
  박사의 숫자 세기가 열에 가까워질수록 서경숙은 사지
  에서 긴장이 풀리면서 고개가 옆으로 꺾어지기 시작했
  다.
  " 아홉 열 "
  장기철 박사가 열을 세자 서경숙의 고개가 옆으로  완
  전히 꺾어졌다.
  "태희 있나?"
  장기철 박사는 서경숙이 완전히 최면에 빠진 것을  확
  인한 뒤에 태희라는 자아를 불러냈다.
  "네."
  태희라는 자아는 의외로 손쉽게 나타났다. 전에는  태
  희라는 자아를 부르기 위해 무척 애를 먹었었다.
  "내가 누구지?"
  "장기철 박사님 "
  "내가 묻는 말에 솔직하게 대답할 수 있지?"
  "네."
  "태희가 인육 살인사건의 범인이지?"
  서경숙의 눈썹이 가늘게 꿈틀거렸다. 태희라는 자아가
  자신에게 불리한 대답을 하지 않으려고 망설이고 있는
  것 같았다. 장기철 박사는 서경숙을 뚫어질 듯이 주시
  했다. 밖에는 장대 같은 비가 쏴아 하고 쏟아지고  있
  었다.
  "솔직하게 얘기한다고 했잖아?"
  "네."
  "태희가 범인이지?"
  "네."
  서경숙이 기어 들어가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장기철
  박사는 비디오 카메라를  힐끗 쳐다보았다.  서경숙의
  자백은 비디오로 낱낱이 녹화되고 있었다.
  "유미경을 살해했나?"
  "네."
  "어떻게 살해했어?"
  "버스정류장에서 내리는 유미경에게 다가가서  태워주
  겠다고 했어요. 그랬더니 유미경이 차에 탔어요. 수건
  에 마취제를 묻혀 놓고 비에 젖은 옷을 닦으라고 했어
  요."
  "그래서 유미경이 수건으로  얼굴을 닦다가  마취되었
  어?"
  "네."
  "조미란도 살해했어?"
  "네."
  "조미란의 얼굴에서 남자의 정액이 채취되었다는데 그
  건 어떻게 된 거야?"
  "민상호를 유혹하여 관계를 했어요. 그때 콘돔을 사용
  하여 그것을 보관했었어요."
  "그럼 보관했던 콘돔의 정액을 조미란의 얼굴에  뿌렸
  단 말이야?"
  "네."
  "왜?"
  "범인을 남자처럼 보이게 하기 위해서요."
  "민상호가 자살했는데 어떻게 된 거지?"
  "그는 살해되었어요."
  "누구에게?"
  "저에게요."
  "왜 그를 죽였어?"
  "그를 살인마로 만들어야 내가 의심을 받지  않으니까
  요."
  "멀쩡한 사람을 살인범으로 만들어 살해한 일에  양심
  을 가책을 받지 않았나?"
  "흥!"
  서경숙이 코웃음을 쳤다. 장기철 박사는 다른  질문을
  했다. 애초에 반응을 기대하고 한 질문은 아니었다.
  "민상호를 죽였다는 것을 내가 어떻게 믿지? 민상호를
  죽였다는 증거가 있나?"
  "그런 건 없어요. 내가 증거를 남길 정도로 그렇게 어
  리석은 줄 알아요?"
  "그렇다면 난 자네가 민상호를 죽였다는 것을 믿지 않
  겠어."
  "상관없어."
  서경숙의 입을 통해  민상호를 죽였다는 증거를  찾는
  것은 불가능할 것 같았다.
  "계부를 죽였지?"
  "그래. 죽였어."
  서경숙이 반말을 하기 시작했다. 서경숙의 의식에  있
  는 태희라는 자아가 서서히 흥분하고 있었다.
  "어떻게 죽였어?"
  "말하고 싶지 않아."
  "그럼 어디에 묻었어?"
  "산에 "
  "어느 산?"
  "난곡동의 뒷산 "
  "무슨 표시가 있나?"
  "있지. 난곡동 버스정류장에서 길을 따라 산으로 올라
  가면 중턱쯤에 몇 개의 묘지가 있어. 그 묘지들  가장
  아래쪽에 묻고 측백나무를 심었어."
  "왜 측백나무를 심었지?"
  "그냥. 이유는 없어."
  "지금도 측백나무가 있나?"
  "있어. 난 거기에 유미경과 조미란의 속옷을  묻었어.
  그들을 살해할 때 쓴 칼도 묻고 "
  장기철 박사는 고개를 갸우뚱했다. 서경숙이 그런  짓
  을 저지른 것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태희처럼
  광포한 자아가 저지른 짓이기에 의심을 하지  않았다.
  그는 이것으로 서경숙이 살인자라는 증거는 충분히 확
  보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이제 그만 잠을 자 나하고 한 얘기는 모두 잊어버려
  잊어버리는 거야 잊어버릴 수 있지 ?"
  "물론이야. 난 모든지 할 수 있어 "
  "잊어버리는 거야 "
  "잊어버렸어."
  서경숙이 졸음에 겨운 목소리로 대답했다.
  장기철 박사가 서경숙을  최면에서 깨운 것은  30분쯤
  지났을 때였다. 서경숙은  최면에서 깨어나자  장기철
  박사를 향해 밝게 웃었다.
  "제가 얼마나 잤어요?"
  "한 시간 좀 어때?"
  장기철 박사는 담배를 피워 물었다.
  "괜찮아요. 머리가 맑아졌어요."
  서경숙은 기분이 좋아 보였다.
  "술 사주신다고 하셨죠?"
  "그랬지. 마시겠어?"
  "아네요. 다음에 사주세요. 오늘은 감기 기운도  있고
  다음에 사주세요."
  "그래 비도 오고 하니까 "
  "다음에 찾아 뵐께요."
  서경숙이 안락의자에서 일어났다. 장기철 박사도 의자
  에서 일어났다.
  "벌써 가게?"
  "네."
  서경숙이 허리를 굽혀 인사를 했다. 장기철 박사는 엉
  거주춤 인사를 받았다. 서경숙은 무엇이 갑자기  생각
  난 듯 밖으로 나가고  있었다. 장기철 박사가  창으로
  밖을 내다보자 서경숙이 무엇에 쫓기듯이 걸음을 빨리
  하여 차에 올라타고 있었다. 그녀는 시동을 걸었고 이
  내 외제 고급 승용차가 빗속으로 달려가 버렸다.
  장기철 박사는 한참동안 서경숙이 빗속으로 사라진 밖
  을 내다보다가 의자에 주저앉았다.
  (내일은 새벽 같이 난곡동에 가봐야겠어 )
  밖에는 비가 세차게 쏟아지고 있었다. 이러한  빗속에
  서 난곡동의 산으로 찾아가 볼 수가 없었다. 물론  경
  찰에 신고할 수도  있었으나 서경숙이 거짓말을  하고
  있는지도 알 수 없었다. 정신질환을 앓고 있는 사람들
  은 때때로 환상 속의 일을 현실처럼 얘기할 때가 있었
  다.
  장기철 박사는 의자에 앉아서 잠을 잤다.
  이튿날 날이 밝자 장기철 박사는 곡괭이와 삽을  준비
  하여 트렁크에 실었다. 비는 그쳤으나 사방은  비구름
  이 잔뜩 몰려와 있었다. 장마철이라 언제 비가 쏟아질
  지 알 수 없어 그는 레인코트까지 준비했다.
  첫새벽이었다. 아침 7시경에야 장기철 박사는  난곡동
  버스정류장에 도착했다. 그는 차가 올라갈 수 잇는 곳
  까지 차를 끌고 올라갔다. 소나기가 쏟아질 것처럼 하
  늘이 어두컴컴한 탓인지 산길은 인적이 전혀 없었다.
  서경숙의 말대로 산 중턱쯤에  무덤이 몇 개  있었다.
  무덤 밑에는 측백나무도 한 그루 보였다.
  (저기에 계부를 믿었다고 했어 )
  시체는 이미 썩어서  흙이 되었겠지만 뼛조각은  남아
  있을 터였다. 게다가 서경숙은 그 곳에 조미란의 속옷
  과 살해할 때 사용한  칼을 묻었다고 했었다.  그것을
  찾아내기만 하면 서경숙이 범인이라는 명백한  증거가
  되는 것이다.
  차 트렁크에서 곡괭이와 삽을 꺼냈다. 측백나무  밑에
  이르자 하늘에서 파란 섬광이 번쩍이기 시작했다.
  (제기랄!)
  장기철 박사는 짜증이 났다. 어두컴컴한 하늘에서  천
  둥번개가 몰아치고 있었다. 산 뒤쪽에서 우르르. 우르
  르 하는 뇌성이 울더니 파란 섬광이 산너머에  내리꽂
  히고 벼락치는 소리가 귓전을 울렸다.
  장기철 박사는 서두르기 시작했다. 날씨가 좋지  않았
  다. 그는 나이에 걸맞지  않게 부지런히 곡괭이  질을
  한 뒤에 흙을 퍼내기 시작했다. 숨이 가빠왔다.  그러
  나 서경숙은 그것들을 얼마나 깊이 묻었는지 한  시간
  을 파도 시체나 살인의 증거품들이 나오지 않고  있었
  다.
  (하기야 살인에 관련된 것들을  얕게 묻을 리가  없지
  )
  깊이 파서 묻었을 것이다.  장기철 박사는 땀을  뻘뻘
  흘리며 삽질을 했다. 숨이 차면 잠시 쉬고 다시  삽질
  을 했다. 다행히 흙이 부드러워서 삽질을 하기가 수월
  했다. 한 시간이 지나자 커다란 구덩이가 하나 만들어
  졌다.
  그때 그는 등뒤에 인기척을 느꼈다. 장기철 박사가 재
  빨리 뒤를 돌아다보자 서경숙이 서 있었다.
  "서, 서 교수 "
  장기철 박사는 가슴이 철렁했다.
  "걸려들었군요."
  서경숙이 하얗게 웃고 있었다. 눈이 광기로  번들거렸
  다. 장기철 박사는  소름이 오싹 끼쳐왔다.  서경숙이
  손에 들고 있던 몽둥이를 장기철 박사를 향해  내리쳐
  왔다. 장기철 박사는 눈을 질끈 감았다. 서경숙이  내
  리치는 몽둥이를 미처 피할 틈이 없었다. 눈앞에서 별
  이 반짝이는 것 같은 강한 충격이 뒤통수에 느껴졌다.
  그는 캄캄한 무명을 느끼며 자기가 판 구덩이로  처박
  혔다.
  "스스로 무덤을 파다니 "
  서경숙이 피묻은 몽둥이를 구덩이에 집어 던졌다.  하
  늘에서는 다시 성긴 빗발이 뿌리고 있었다.  서경숙은
  장기철 박사의 연구실에서  훔쳐 온 비디오  테이프와
  진료 차트를 구덩이에 던져 넣었다. 그녀는 최면에 걸
  린 척하며 장기철 박사를 산  속까지 유인해 온 것이
  다.
  서경숙은 장기철 박사의 삽으로 구덩이를 메꾸기 시
  작했다. 구덩이를 메꾸고 비가 오고 나면 시체를 묻은
  흔적조차 남아있지 않을 것이다.
  우르르.
  하늘에서는 천둥번개가 몰아치고 있었다.
  이제 이지영에 대해서  얘기해야겠다. 아니  오득렬
  형사에 대해서 먼저 얘기하는 것이 순서일지  모른다.
  오득렬 형사는 인육 살인사건이 마무리되자 카페 은성
  의 마담과 결혼을 했다. 처음엔 새삼스럽게 식을 올리
  는 것이 쑥스러워 살림만 합쳤으나 이정희가 면사포를
  쓰고 싶어하는 것  같은 눈치를 보이기에  웨딩마치를
  올리기로 했다는 것이다.
  "바쁘지 않으시면 참석해 주십시오."
  오득렬 형사는 계면쩍은 표정으로 청첩장을 놓고 갔
  다. 나는 그 청첩장을 한참동안이나 들여다보았다. 이
  정희와 오득렬. 이름부터가 잘 어울리는 한  쌍이라고
  생각했다.
  한동안 세상을 떠들썩하게 했던 인육 살인사건은 내
  의도대로 마무리되었다. 경찰은 민상호가 범인이 아니
  라는 사실을 전혀 의심하지 않고 있었다. 유언장도 있
  었고 장기철 박사가  죽은 뒤이기는 하지만  유미경과
  조미란의 속옷까지 발견되었던 것이다.
  오득렬과 이정희의 그들의 결혼식은 무덥고  지루한
  장마철이 지나고, 선선한 바람이 부는 9월도 지나  길
  가의 가로수가 노랗게 물들어 바람이 불 때마다  낙엽
  이 하늘거리고 떨어지는 10월 첫째 일요일에 거행되었
  다. 날씨는 청명했다.  하늘은 높고 맑았고  결혼식이
  열리는 수유리의 웨딩가든 앞에는 붉은 사루비아가 농
  염하게 피어 있었다.
  나는 화사하게 정장을 하고 그들의 결혼식에 참석했
  다.
  "참석해 주셔서 정말 고맙습니다."
  오득렬 형사는 검은 턱시도 차림이었다.
  "새신랑이 너무 멋지군요."
  나는 오득렬 형사와 악수를 했다. 그는 내 손이  사
  람을 죽인 피냄새가 배어 있는 손이라는 사실을  모른
  채 내 손을 반갑게 잡았다. 나는 속으로 웃었다. 오늘
  밤 그는 살인마와 악수한 손으로 순결한 신부의  알몸
  을 애무하게 될 것이다.
  "감사합니다."
  "신부가 정말 예뻐요."
  나는 그의 귓전에 뜨거운 입김을 불어넣었다.  아마
  아무도 없는 한적한 곳이었다면 축축하고 뜨거운 혀를
  그의 귓바퀴를 간질렀을 것이다. 확실히 그의 신부(新
  婦)는 질투가 날 정도로 어여뻤다. 나는 그들의  결혼
  을 마음껏 축복해 주었다.
  돌아오는 길에 나는  어쩐지 조금 쓸쓸하고  서글펐
  다. 그러나 나도 그의 신부처럼 어여쁜 적이  있었다.
  나도 면사포를 썼었고 나에게 면사포를 씌워 준  그는
  아직도 살아 있었다. 그리고 한때 그의  노랑나비였던
  내가 쓸쓸하고 외롭다고 하면 언제든지 달려와서 나를
  위로해 준다.
  이지영은 이제 나의 병원을 찾아오지 않는다.  나는
  그녀의 병이 모두 치료되었다고 말해 주었다.  야수파
  들로 인해 공포를 느낄 필요도 없고 악몽을 꿀 필요도
  없다고 말해 주었다. 물론 그것은 내가 끈질기게 그녀
  의 의식에 주입을 시킨 결과였다.
  그러나 나는 그녀의 의식 속에 광포한 자아를  하나
  숨겨 놓았다. 언젠가 그 자아는 폭발을 할 것이고, 그
  자아가 폭발하면 세상은 전율하게 될 것이다.
  가을이 갔다. 가을은 소리없이 왔다가 창문을  흔드
  는 스산한 바람소리가 되어  떠나갔다. 그 가을  내내
  나는 나뭇잎이 바람에 몸을  떠는 소리를 들었다.  그
  소리가 이명처럼 귓전에 쟁쟁하게 남아 있을 무렵  겨
  울이 하얀 눈과 함께 왔다.
  눈은 세상을 하얗게 물들이며 쏟아졌다. 블라인드를
  걷자 병원의 창으로도 세상을 하얗게 덮고 있는  눈송
  이들이 보였다. 아이들과 강아지들이 뛰어다니고 젊은
  아베크족들은 팔짱을 끼고 눈길을 걷고 있었다.
  그 겨울에 나는 평화로웠다.
  살인과 원초적 욕망에 대한 죄악도 하얀 눈 속에 묻
  혔다고 생각했고 실제로 나는 지극히 평범하면서도 명
  망 높은 정신과의사 노릇을 충실히 했다. 논문도 꾸준
  히 발표했다. 그해 겨울  나는 박사 학위를  받기까지
  했다.
  모든 것이 순탄했다.
  그러나 내 안의  노랑나비가 사라졌다고 말할  수는
  없다.
  해가 바뀌고 다시 또 해가 바뀌었다. 사람들은 인육
  살인사건에 대해서 완전히  잊었다. 심지어  나까지도
  그 살인사건에 대해서 잊고 있었다.
  그러나 세상은 순환하는 것이다. 종교에서는 윤회라
  고 하지만 과학에서는 반복이라고 한다.
  어느 날 젊은 작가 한 사람이 나를 찾아왔다.  그는
  인육 살인사건을 소재로  소설을 쓰고 싶으니  나에게
  협조해 달라고 간절히 부탁했다. 그가 얼마나  간절하
  게 부탁을 하는지 나는 그가  내 심장을 달라고 해도
  망설이지 않고 주었을 것이다.
  나는 그의 눈빛이 좋았다. 그의 눈빛은 깊고 투명했
  다. 나는 아직까지 그렇게 맑은 눈을 본 일이 없었다.
  그가 커피를 사겠다고 했을 때 나는 병원의  환자들
  진료까지 미루고 커피숍으로 따라 갔다.
  여름이 오고 있었다. 날씨는 후덥지근했다.  뉴스에
  서는 장마전선이 북상하고 있다고 했다. 그러나 내 가
  슴속에는 벌써 사루비아가 농염하게 피어나고 있었다.
  "나는 인육 살인사건의 범인이 따로 있다고  생각합
  니다. 살인마가 자살을 하는 경우는 유사한 사건에 있
  어서 그 예가 없습니다."
  그는 인육 살인사건을 거론했다.
  "왜 그렇게 생각하세요?"
  나는 웃으며 그렇게 물었다.  그가 무슨 말을  해도
  옳게 생각되었다.
  "아직 자세히 모르겠어요."
  "왜  인육  살인사건에  관심을 가지게  되셨죠?"
  "여자의 가슴을 깨물은 범인의 심리상태가 궁금했기
  때문입니다. 참 정신과의사니까  분석하실 수  있겠군
  요. 왜 살인마는 피해자들의 가슴을 깨물었을까요?"
  "실은 저도 그 점이 무척 궁금해요."
  "자살한 민상호를 잘 아신다면서요?"
  "알죠. 저의 제자나 마찬가지니까요."
  "그에게서 그런 얘기를 못 들으셨습니까?"
  "못 들었어요."
  내 대답에 그는 실망한 표정이었다. 그러나 나는 그
  사실을 언젠가 그에게 말해 주리라고 생각했다.  내가
  피해자들의 왼쪽 가슴을 물어뜯은 것은 특별한 이유가
  있어서가 아니었다. 아니 한 가지 이유가 있었다.  그
  것은 나를 학대하고 괴롭힌 그 사내가 걸핏하면  그렇
  게 나의 가슴을 물어뜯었기 때문이었다.
  그날은 그것으로 끝이었다. 나는 닷새 후에  그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에게 전화를 걸지 않고서는  도저히
  견딜 수가 없었다. 나는 그를 만나고 싶었고 그를  내
  몸속으로 받아들이고 싶어 미칠 지경이었다.
  우리는 그날 고급 레스토랑에서 저녁식사를 하고 술
  을 마셨다. 그는 내가 술에 취하자 호텔로 데리고  갔
  다. 나는 그를 위해 기꺼이 호텔로 따라갔다.
  호텔에 들어서자마자 그는 나를 벽으로  밀어붙이고
  혀를 내 입안에 깊숙이 밀어 넣었다.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는 내 스커트 자락을 걷어 올렸다. 나는 벽
  에 기댄 채 그의 손을 뿌리치려고도 하지 않았다.  그
  는 내 두 다리를 벌리고 그 사이로 얼굴을 가져왔다.
  이튿날부터 장마가 지기  시작했다. 나는  한밤중에
  아파트를 나와 차를 끌고 거리를 배회하기  시작했다.
  인구 1천만이 사는 대도시 서울. 자정이 가까운  시간
  에 꽃가루를 흘리며 밤거리를 방황하는 여자들은 얼마
  든지 있었다.
  나는 어젯밤에 그에게 한 말을 생각했다.
  "나는 임신하고 싶지는 않아요. 내 핸드백에 장화가
  있는데 그것을 끼고 해요."
  영리한 독자들은 내가 왜 그런 말을 했는지 이미 눈
  치챘을 것이다. 그를 만난 다음 날부터 내 안의  노랑
  나비가 깊고 깊은 동면에서 깨어나 날개짓을 하고  있
  었다. 어느 새  여름이 돌아와 있었고  장마철이었다.
  잿빛 하늘에서는 오늘밤도 파란 섬광이 번쩍이고 뇌성
  이 울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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