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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영화,리뷰,

이수광-나는 조선의 국모다 7

by Casey,Riley 2023. 6.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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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는 조선의 국모다 7
이수광



    제36장 피어라 녹두꽃아
  농민들의 함성은 얼어붙은 동진강을 녹일 것처럼 뜨거웠다.
"탐관오리의 목을 베라!"
"인민은 척양척왜의 깃발 아래 모여라!"
농민들은 거대한 함성을 지르며 고부군 군아를  향해 달려갔다. 한겨울이었다. 날씨는 쌀쌀
했다. 동진강이 얼어붙고 황량한 고부들에는 살을 에일 것 같은 바람이 불고 있었으나 농민
들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농민들에게 무기다운 무기가 있을 리가  없었다. 농민들은 대부분 죽창을  들고  있었고 칼
과 총을 갖고 있는 사람들은 극히  드물었다. 그러나 제폭구민, 보국안민의 깃발을 높이  든 
농민들은 두려운 것이 없었다.
대대로 관리들에게 억울한 세금을 내고 양반들에게 토색질을 당한 농민들은 동학의  후천개
벽, 사민평등 사상을 가슴으로 받아들였다.
그들은 곧장 고부읍 저자를 휩쓸고 고부 군아로  쳐들어갔다. 부녀자들은 머리에 수건을 동
여매고 남정네들의 뒤를 따랐다. 아이들은 까닭도 모른 채 막대기를 주워 들고 뒤를 따랐다.
 깃발은 하늘 높이 펄럭거리고 징소리, 꽹과리소리, 북소리는 온 고을을 진동했다.
 고부 군아의 나졸들은 농민군이 함성을 지르며 달려오자 저항 한 번 해보지 않고 혼비백산
하여 달아났다. 고부 군수 조병갑도 황황히 달아났다.
  "조병갑을 잡아라!"  "이속이나 관속들도 잡아 들여라!"
고부 군아의 나졸들이 달아나 버리자 농민군들은 군아를 접거하고 조병갑을 잡으려고  군아
를 샅샅이 뒤졌다. 그러나 급보를 받은 조병갑은 단속곳 차림으로   달아나 버린 뒤였고 아
전 나부랑이들만 농민들을 피해 이리 뛰고 저리 뛰고 있었다.
"조병갑을 놓치면 안된다!" "조병갑은 어떠한 일이 있어도 잡아 와야 한다!"
전봉준은 고부군 동헌에서 농민들에게 단호한 영을 내렸다.
  조병갑은 탐관오리로 원성이 자자한 인물이었다. 전봉준은  조병갑만은 어떠한 일이 있어
도 잡아서 처단하고 싶었다. 전봉준의 명령을 받은 농민들은 횃불을 밝히고 고부읍을  샅샅
이 뒤졌다. 그러나 조병갑은 농민들이 떼를 지어 몰려다니며  수색을 해도 그림자조차 발견
할 수 없었다. (조병갑을 본보기로 죽여야 했는데....)
전봉준은 조병갑이 달아났다는 보고를 받자 허전했다. 고부군수 조병갑에게는 씻지 못할 사
원까지 갖고 있었다. 아버지 전창혁을 장독으로 죽게 한 원흉이 바로 고부 군수 조병갑이었
던 것이다. 그러나 사사로운 원한에  집착하고 있을 시간이 없었다. 농민들은  기세등등하던 
군수 조병갑이 줄행랑을 놓자 잔뜩 고무되어 있었다. 농민들의 세상이 오기라도  했다는 듯
이 꽹과리와 징소리에 맞춰 덩실덩실 신명나게 춤을 추기까지  하였다. 순박하고 단순한 농
민들이었다.
  (폭정을 그치게 하는 것만으로는 아무 의미가 없어!)
전봉준은 농민들을 혁명으로 유도할 생각이었다. 농민들을  혁명으로 유도하지 않으면 동학
의 인내천 시천주 사상이 사민평등과 후천개벽으로 이어질 수 없었다.
전봉준은 먼저 고부군의 군기고를 열어 농민들에게 총과 칼, 창 따위의 무기로 무장하게 하
였다. 그러나 군기고의 무기가 턱없이 부족하여  대나무를 베어 죽창을 만들게  하였다. 고
부군 인근에는 대나무밭이 지천으로 널려 있었다. 이방이나 관속  중에 조병갑과  부화뇌동
하여 백성들을 착취한 자는 죄질이 악독한 자를 가려내어 목을 베었다.
다음은 백성들의 원성의 대상이 되었던 만석보에 사람들을 보내 보를 허물었다.
  "만세!" "만세!"
  보가 터져 물이 쏟아져 흘러내려 가자 농민들은 눈물을  흘리며 기뻐했다. 만세소리가 봇
물이 터지는 소리보다 더욱 크고 우렁찼다. 전봉준은 이어서 굶주리는 농민들에게는 조병갑
이 수세로 거두어들인 1천 4백 석의 양곡을 골고루 나누어주었다. "전장군 만세!" "녹두장군 
만세!"
  농민들은 전봉준을 어느 사이에 장군으로 부르기 시작했다.  고부읍은 3일 만에야 질서가 
잡혔다. 고부군에서 농민들이 봉기했다는 소식이 퍼져 나가자  인근  군에서도 동학을 중심
으로 농민들이  일제히 들고 일어나 호응해 왔다. 그리하여 3일 만에  고부군에 몰려든  농
민들의 숫자는 근 1만 명을 헤아리게 되었다.
[손화중 포 4,700명 김개남 포 1,200명 김덕명 포 2.000명]
  음력 3월 11일에서 13일까지 고부군 인근에서  몰려온 농민들의 숫자였다. 고부군의 농민
들까지 합하여 1만을 헤아리게된 농민들은 비로소 대오를 정리하여  백산에 주둔하고 격문
을 띄웠다. 농민들이 농민군으로 역사에 이름을 남기는 순간이었다.
[우리가 의를 들어 여기에 이르렀음은 그 본의가 결코 다른 데 있지  아니하고 창생을 도탄 
가운데서 건지고 국가를 반석 위에 두자 함이라. 안으로는 탐학한   관리의 머리를 베고 밖
으로는 횡포한 강적의 무리를 내치고자 함이다. 양반과 부호의 앞에 고통을 받는  민중들과 
방백과 수령 밑에서 굴욕을 받는  소리들은 우리와 같이 원한이 깊은  자라, 조금도 주저치 
말고 이 시각으로  일어서라. 만일 기회를 잃으면 후회하여도 믿지 못하리라.
갑오년 정월 호남창의 대장소 백산에서]
  이 때 전라감사는 김문현이 맡고 있었다.
  김문현은 고부군에서 농민들이 봉기하고 군수 조병갑이 인부도 챙기지 못하고  달아났다
는 급보를 받자 깜짝 놀랐다. 경황 중에도 전라 감영의  영병을  보내어 농민들을 해산시키
려고 하였으나 고부군 일대에서 봉기한 농민들의 숫자가 시시각각 불어나고 있어서  감영의 
영병으로는 토벌할 수가 없었다.
  김문현은 농민군에게 무리를 지어 군아를 습격하는 것은 도적들이나 하는 짓이라며  해산
할 것을 촉구하고 타이르는 말을 듣지 않으면 국법으로 다스리겠다고 엄포를 놓았다.
[우리는 오로지 교조의 신원을 허락하고 고부 군수 조병갑의 학정을 낱낱이 밝혀 엄벌에 처
하기를 바랄 뿐이다. 이와 같은  일이 이루어지기 전에는 결탄코 해산할  수 없다.]농민군은 
김문현의 제안을 단호하게 거부하고 농민군의 형세를 살피러 온 전라감영 영병들과  전투를 
하여 패퇴시켰다. 김문현은 도리 없이 구원을 청하는 장계를 조정으로 올렸다. 이때  한성에
는 고부군에 민란이 일어났다는 소문이 파다하게 퍼져있었다.
  조정에서는 김문현의 장계를 보고 조병갑을  잡아 의금부에서 문초하도록 하고  박원명을 
새 군수에 임명했다. 한편 장흥부사 이용태를 안핵사로 삼아 고부에 보내 현지 실정을 낱낱
이 조사하도록 했다. 농민군은 조병갑이 의금부에서 문초를  받게  되고 안핵사까지 내려오
게  되지 비로소 스스로 해산했다. 그러나 안핵사에 이용태가 임명된 것은 농민군의 봉기에 
불을 붙이는 결과가 되었다. 
  안핵사 이용태는 고부군에 도착하자 동학인들을 철저하게  탄압했다. 이용태는 호남 일대
에서 일어나는 민란이 대부분 동학인들의 사주로 일어난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는 새로 
부임한 고부 군수 박원명을 윽박질러 동학인들을 수색하여 처벌하라고 지시했다.
  "난민들이 모두 해산했는데  공연히 일을 벌려서는  안됩니다."박원명은 이용태의 지시를 
거절했다. "난군들은 군아를 습격한 역도들이오!  군수는 어찌하여 역도들을 두둔하는  것이
오?""조정의 지시가 난군들을 설득하여 해산시키라고 하였습니다. 또 본관은 폐정을 시정하
겠다고 농민들과 약조하였습니다. 고을 원이 신의를 저버리면 백성들이 누굴 믿고 따르겠습
니까?""역도들과 약조를 하다니 당치 않소!" "고을 원이 탐학하지 않았다면 어찌 오늘의 변
이 있었겠습니까? 또  봄철 농사 때가 닥쳤는데 동학인들을 잡아들인다고 관에서 소란을 피
우면 농사철을 놓칠까 염려됩니다.""군수가 하지 않겠다면 내가 하리다!"
  이용태는 강경하게 나갔다. 박원명은 자신의 힘으로는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하고 입을 다
물어 버렸다. 이용태는 안핵사의 임무를 부여받아 군사를 8백 명이나 거느리고 있었다.
"듣거라! 고부군을 이 잡듯이 뒤져서라도 난군의 주모자들을 모조리 잡아  들여라!"이용태는 
군사들에게 불같이 영을 내렸다. 군사들이라고 해야 정규 훈련을  받은 것도 아니고 대부분 
역졸 수준에 지나지 않아서 대오도 엉성하고 군율도 어수룩하기  짝이 없었다. 그러나 조정
에서 막강한 권력을 위임받은 그들은 닥치는 대로 고부군을  들쑤시고 다녔다. 곳곳에서 동
학인들이 체포되고 농민들의 재산이 약탈되기 시작했다.
  "동학도는 무조건 잡아 들여라!"
  "동학비도들을 발본색원하라!"
  안핵사 이용태의 지시는 무시무시했다. 이용태가 안핵사가 되어 고부에 나타난 지 열흘도 
안 되어 이용태에 대한 농민들의 원성이 하늘을 찔렀다.
  "안핵사라는 놈이 조병갑이보다 더한 악질 아녀?"
  "이용태가 동학인들의 씨를 말린다며?"
  "안핵사의 역졸들이 부녀자를 겁탈했대."
  "역졸들뿐인가? 안핵사라는 위인도 돈을 긁어모으기에 혈안이 되어 있다는 거야.""그러게 
해산하지 말고 곧 바로 한성으로 쳐들어가야  한다고 안혀?"농민들은 곳곳에서 수근거렸다. 
고부군의 동헌에는 매일같이  동학인들이 끌려와 태질을 당하였고 동학인들이 있는 마을은 
역졸들이 휘젓고 다녀 쑥밭이 되었다.
  (조병갑이보다 더 징한 놈이 나타나서 농민들을 수탈하는데 도대체  조정에서는 무엇들을 
하고 있는 거야....) 전봉준은 농민들이 안핵사 이용태의 역졸들에게 조병갑  때보다 더 심한 
학정에 시달리게 되자 가슴이 답답했다.  "이제는 더 이상 참고  있을 수가 없소! 안핵사의   
역졸들이 부녀자들을 겁탈하는 실정인데 무엇을 망설인다는 말이오?"
손화중, 김개남도 전봉준을 찾아와 분통을 터뜨렸다. "망국지변이오."
전봉준은 침통한 낯빛으로 대꾸했다. "통문을 띄웁시다!"
  "창의소를 차리고 다시 한번 봉기합시다! 이번엔 한성까지  짓쳐 올라가 조정을 혁신합시
다!"손화중, 김개남은 망설이는 전봉준에게 거듭 봉기할 것을 촉구했다.
  "여러분들이 봉기할 것을 원한다면 도리 없는 일이지요."전봉준은 마침내 봉기하는 데 합
의했다. (혁명이 아니면 아무 소용이 없어....)
  전봉준은 그들의 말에 동의하고 사발통문을 띄우면서도 착잡한 심정을 떨쳐 버릴 수가 없
었다. 농민들은 사발통문이 돌자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이 일제히  호응해 왔다. 안핵사 이용
태의 탄압이 극심했으나 재차 운집한 농민군은 다시 고부  군아를 습격하여 농민들의 원성
이 자자한  이용태를 추방하고 고부에 인접해 있는 백산에 창의소를 설치했다. 창의소는 큰 
뜻을 받드는 장소로 의병이라는 뜻과 같았다. 농민군은 중망에  의해 전봉준을 대장으로 선
출했다.
  "전봉준 대장 만세!" "녹두장군 만세!"
  전봉준은 농민들의 환호성에 답한 뒤 손화중, 김개남을 총관령에,  김덕명, 오시영은 총참
모에, 최경선은 영솔장에 임명했다. 이것이 남접의 농민군 제1차 봉기였다.
군대로서의 대오와 지휘체계를 대충 갖춘 농민군은 죽창을 들고일어났다 앉았다  하는 간단
한 제식훈련까지 하였다. (전설에 있는 말과 똑같은 모습이군....)
  전봉준은 죽창을 든 농민들이 제식훈련을 하는 모습을  말을 타고 응시하며 미소를 지었
다. 고부군에는 오래 전부터 출처불명의 입측백산좌측죽산이라는 말이 떠돌고 있었다.  이때 
농민군이 훈련을 하기 위해 일어서면 농민군이 입은 옷으로 산이 하얏게 덮여 백산이 되고 
농민군이 구령에 맞춰 일제히 앉으면 죽창이  빽빽하여 문자 그대로 죽산의 모습이  되었던 
것이다. 호남의 곡창이자 조선 왕조의 본향인 전라도에서 안핵사  이용태의 폭정에  반발하
여 농민들이 죽창을 들고 봉기했을 때 조정에서는 단순한 민란 정도로 여기고 안일한 대응
을 하고 있었다. 
  이때 김옥균이 상해에서 암살되었다는 급보가 청나라에서  조선으로 날아왔다. 조선은 즉
각 외무독판 조병직을 원세개에게 보내 김옥균의 시체를 조선으로 인도해 줄 것을 강력하게 
요구했다. 
  김옥균의 망명 생활은 몹시 비참했다. 그는 몇 번이나  재기를 시도했으나 물거품이 되었
고 오히려 일본 정부로부터 퇴거명령을 받았다. 일본을 떠나라는 추방령이었다. 김옥균은 미
국으로  가려고 했으나 여비가 마련되지 않아 이세산의 별장에 연금되었다. 그러나  거기서
도 오래 있지 못하고 소립원도로 추방되었다. 김옥균은 그때 저 유명한 시 한 수를 지어 남
겼다.
  [울적하게 이세산에 갇혀 있다가 하나님 뜻밖에 동풍을 보내시어 속박에서 벗어나 저자로 
나가는 길 소립원도 천리길 하룻만에 돌아가네.]
  김옥균은 절대고도인 소립원도에서 3년일 지낸 뒤에 다시 북해도로 추방되었다. 북해도에
서는 거의 2년 동안 연금상태에 있다가 1890년에 이르러서야 자유의 몸이 되었다. 김옥균은 
이 후 도쿄로 돌아와 재기를 위하여 몸부림을 치면서 일본의 낭인조직인 현양사와 흑룡회를 
접촉했다. 그리하여 김옥균은 구마모토의 현양사와 제휴하게 되었다. 제휴의 내용은  일조유
사시에는 현양사의 낭인 5백명이  선봉을 맡는다는 것이었다. 김옥균은  최후까지도 일본에 
의지하려는 태도를 버리지 않고 있었다.
  그러나 역사는 이미 김옥균을 필요로  하지 않고  있었다. 일본 정부의  태도는 김옥균의 
망명할 때부터 계속 냉담했고, 김옥균은 일본 정부의 눈을 피해  러시아와 미국과도 접촉하
려고 했으나 그것도 여의치 않게 되어 암살자 이일직의 마수에 걸려 일본을 떠나게 되었다.
김옥균은 일본에 청국 공사로 와 있던 이경방에게 이홍장과의  면담을 청했고, 이경방이 이
를 쾌히 허락하여 김옥균이 일본을 떠나게 되었던 것이다. 이경방은 이홍장의 양자였고,  김
옥균의 생각으로는 청나라의 실권자인 이홍장과 담판을 하여 권토중래를 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으나 부질없는 일이었다.
  김옥균은 음력 2월 21일 상해에 도착하여 미국과  영국 공동조계에 있는 호텔 동화양행에 
투숙했다. 이때 김옥균은 홍종우와 동행하고 있었다. 이일직이  일본에서 김옥균에게 접근하
여청나라와 일본을 오가면서 약종상을 한다고 속이고  영감이 궁색한 것 같으니 돈을  꾸어 
주겠다고 했던 것이다.
  김옥균은 이일직의 제안을 두말 없이  수락했다. 김옥균은 돈이 궁핍한  처지라 궁색하기 
짝이 없었다. 이일직은 자신의 돈이 상해의 외국은행에 예금되어 있으므로 홍종우를 동행시
켜 우선 1만 원을 인출해 주겠다고 하였다. 김옥균은  의심하지 않고 홍종우를 동해하게 하
였다. 2월 22일 김옥균은 동화양행의 2층 1호실에서 와다  노부지로오에게 마차를 세 대 빌
리라고 지시했다. 김옥균은 마차를 빌려 번화한 상해 시가지를 구경할  참이었다. 김옥균을 
선생님으로 깍듯이 모시고 있는 와다는 불길한 예감을 느끼며  김옥균의 방을 나갔다. 김옥
균의 방에는 김옥균과 홍종우가 함께 있었다.
  김옥균은 침대에 누워 있었다. 10년 동안이나 핍박을  받던 일본을 떠났다는 기분좋은 안
도감과 여행의 피로에 나른한 졸음을 느꼈다. 홍종우는 어딘지 모르게 불안하고 초조해  보
였다. 그러나 김옥균은 눈을 감은 채 왔다가 층계를 내려가는 발자국 소리를 듣고 있었다. 
날씨는 황창했다. 바람 한 점 없는 맑은  날씨였다. 상해는 이미 봄이 완연해 열어  놓은 창
으로 이국의 꽃향기가 조수처럼 밀려 들어왔다.
  홍종우는 김옥균이 눈을 감고 있는  것을 확인한 뒤에 권총을 뽑았다.  가슴이  격렬하게 
뛰고 있었다. 홍종우는 심호흡을 하고 김옥균을 향해 총구를 겨누었다. 그리고 벼락치듯  소
리를 질렀다. "대역죄인 김옥균을 처단한다!"
홍종우의 커다란 외침에 김옥균이 눈을 번쩍 떴다. "호, 홍군!"
김옥균이 떨리는 목소리로 외치며 손을 내저었다. 그러나 그  손짓이  멎기도 전에 독한 화
약 냄새와 함께 요란한 총성이 울려퍼졌다.  김옥균이 몸을 벌떡 일으켰다. 그 순간  탄환이 
김옥균의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그러나 치명적인 상처는 아니었다. 홍종우는 두 번째  방
아쇠를 당겼다. 요란한 총성과 함께 두 번째 탄환이 김옥균의 어깨 밑을 관통했다. 김옥균은 
그 충격으로 침대 위로 나뒹굴었다. 탕!
  그때 세 번째 탄환이 김옥균의 얼굴을 관통했다. 김옥균의  얼굴이 피투성이가 되고 피비
린내가 확 풍겼다. 혁명가로 파란만장한 삶을 산 김옥균은 이렇게 하여 숨을 거두었다.
홍종우는 권총을 침대 위로 내던졌다. 마차를 빌리러 가던 와다가 뛰어 들어오고 호텔 관계
자들이 헐레벌떡 달려왔을 때는 김옥균은 이미 숨이 완전히 끊어져 있었다.
일본 상해 총영사는 김옥균의 시체에 세 군데의  총창이 있었다고 일본 외무대신에게 보고
했다. 견골과 관골을 지나 뇌에  이른 총상이 치명적이었다는 보고였다. 김옥균은  혁명가의 
삶을 살았으나 죽음은 비참했다. 김옥균의 죽음은 곧 바로 청, 일, 조선에 긴급 전문으로 타
전되었고 일본과 조선은 김옥균의 시체를 인도받기 위하여 치열한 각축을 벌였다.
  일본은 이홍장에게 김옥균의 시체를 일본으로 인도해  달라고 강력하게 요구했다. 그러나 
이홍장은 이를 거절하고 김옥균의 시체와 홍종우를 조선으로 보냈다.
3월 9일이었다. 경기감사 김규홍의 보고로 김옥균의 시체가 월미도에 도착했다는 보고를 받
은 조선 조정은 김옥균을 일제히 성토하고 나섰다. 특히  영의정 심순택, 좌의정 조병세, 중
추부판사 김홍집, 중추부판사 정범조가 선두에 서서 김옥균을 규탄하는 차자를 올렸다.
[지난 번에 상해에서 온 전보를  받고 홍종우가 역적을 사살한 거사를  알았으나 역적의 시
체가 이제서 압송되어 진부를 판별하였으니 10년 동안 귀신과 사람이 격분해 하던 것이  비
로소 시원하게 풀리게 되었습니다. 비록 산 채로 잡아다가 처형하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꿇
어 앉히고 목을 벨 수는  있으니 법을 소급하여 시행하고 팔과 상운에게 시행한 전례를 더 
적용하여 반역을 음모하는 역적들을 경계하시기 바랍니다.]팔과 상운에게 시행한 전례는 능
지처참(육시)를 말하는 것이었다.
[지금 경 등의 간절한 청으로 말하면 피눈물을 흘리며 징계하고 성토한다는 것을  알 수 있
다. 제의한 대로 그대로 승인한다.]
  시원임 대신들이 올린 차자에 대한 고종의 비답이었다. 이날 사헌부와  사간원, 홍문관에
서도 같은 내용의 상소를 올리고 고종은 같은 비답을 내렸다. 이로 인하여 김옥균의 시체는 
죽인 뒤에도 양화진에서 목이 잘리는 비극을 당하게 되었다.
  [모밤대역부도죄인 김옥균당일양화진두부대시능지처참]모반을 일으킨  대역죄인 김옥균을 
당일 양화진에서  지체없이 능지처참하라는 지시였다. 그리하여 김옥균의 머리는 그날로 회
자수에 의해 잘려져 오가는 행인들의 구경거리가 되었다.
  한성에서 김옥균의 시체 인도와 그 시체에  대한 능지처참으로 뒤숭숭해 있을 때  호남의 
곡창지대인 고부군은 농민  혁명의 열기가 뜨겁게  타오르고 있었다. 절기는  농사철이었다.  
논에는 물을 대 써래질을 해야 했고 볍씨를 뿌려야 했다.  푸르게 웃자란  보리밭에는 김도 
매야 했다. 도 냉해를  입지 않게 짚을 덮었던 마늘밭에는 짚도 거두어야 했다. 그것뿐이 아
니었다. 사람이나 땅이나 한겨울을 푹 쉰  탓에 봄이 오면 눈코 뜰 새  없이 바빠지는 것이 
농민들이었다. 고추, 오이, 호박, 가지, 상치, 옥수수.... 여유가 있는 농민들은 참외도 심고 수
박도 심어서 한여름 그늘에서 먹었다.
  그렇게 봄철 일이 얼추 마무리되면 마을 사람들끼리 천렵을  가는 것이다. 시절이 좋으면 
사시사철 천렵을 가지만 시절이 어수선해도 봄철 천렵은 빼놓지  않았다. 부지런히 논일 밭
일을 하고 한가해지면 들로 산으로 나가서 자연의 정취에 흠뻑 취하는 것이었다. 그날은 아
녀자들까지 술을 마시고 춤을 추었다.
  그것이 농민들의 삶이었다. 그러나 갑오년 1894년은 그럴 수가 없었다. 천렵을 갈 만한 여
유도 없을뿐더러 새 세상을 만들자는 의욕이 팽배해 있었다.  3월 21일 고부 군아를 접수한 
농민군은 백산에 집결하여 4대 강령을 발표해 농민 혁명의 성격을 뚜렷이 했다.
1. 불살인불살물
2. 충효쌍전제세안민
3. 축멸왜이징청성도
4. 구병입경진멸권귀대진기강입정명분이종성훈
  이제는 단순한 민란이 아니었다. 농민군들이 봉기한 백산에는  속속  동학 교인들과 농민
들이 모여 들었다. 전라감사 김문현은 급히 한성으로 전문을 보냈다. 조선  조정에서는 전라
감사 김문현의 보고를 받자 전라감사가 제대로 대책을 세우지 않았다는 이유로 녹봉  3기분
을 건너 뛰는 처벌을 내렸다. 그러나 동학 농민군의 기세가  점점 커지자 4월 2일 홍계훈을 
양호초토사로 임명하여 장위영의 병력을 거느리고 호남으로 떠나도록 했다.
홍계훈은 4월 4일 경군 8백 명을 거느리고 청국 군함으로 인천을 떠나 4월 6일 군산에 도착
했고, 4월 7일 전주에 입성했다.
  그 사이에 동학 농민군은 부안, 금구를 점령하고  전라 감영에서 진압군으로 보낸 감영군 
250명과 보부상 수천 명을 황토치에서 대파하는 승전고를 울렸다. 4월 6일의 일이었다. 이어
서 4월 7일 정읍을 습격하여 군기를 탈취하고 보부상의 숙소에 불을 지른 뒤 삼거리에 집결
했다.
  농민군은 파죽지세였다. 이기지 않으면 죽는다는 절박한  상태에 있었기 때문에 전투에서 
결코 물러서지 않았다. 7일에 정읍을 친 뒤 흥덕, 고창을 점령하고 9일에는 무장을 함락시켰
다. 전봉준은 무장현 독산봉에 진을 치고  다시 창의문을 지어 반포했다. 이미  그를 따르는 
농민군은 수만 명이 넘고 있었다. 그러나 싸우지 않고 이기는 것이 최선의 목표였다. 전봉준
의 창의문은 혁명을 일으킬 수밖에 없는 실정을 도도한 문장으로 설명하고  있기도 했으나 
농민군에 가담할 것을  촉구하는 격문의 성격도 띠고 있었다.
이어서 전봉준은 손화중, 김개남과 상의하여 농민군을 통제하는 12개조의 기율을 발표했다.
1. 투항하는 자는 받아 들인다.
1. 곤궁한 자는 구제한다.
1. 탐욕한 자는 쫓아 낸다.
1. 따르는 자에게는 경복한다.
1. 도망자는 쫓지 않는다.
1. 굶주린 자는 배부르게 한다.
1. 교활한 짓을 하지 않는다.
1. 가난한 자에게는 베푼다.
1. 충성하지 않는 자는 제거한다.
1. 거슬리는 자는 타이른다.
1. 앓고 있는 자에게는 약을 준다.
1. 불효자는 죽여야 한다.
  기율을 선포한 농민군은 비로소 질서정연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무장현에서 노획한 관
군의 무기로 무장을 하여 기마병이 1백 명이나 되었고 대포와 총도 갖추고 있었다.
그들은 수비가 견고한 전주성을 그대로 두고  계속 남진하여 위세를 떨치며 동도를  규합했
다. 홍계훈은 전주에 이르자 김문현으로부터 농민군에 대한 보고를  받고 전주성 수비에 들
어갔다. 농민군은 점점 기세를 올리고 있었고 관군은 사기가 저하되었다.  홍계훈이 전주성
에 이르렀을 때 도망병이 속출하여 관군은 4백 7십 명밖에 남아 있지 않았다.
  홍계훈은 전투에 들어가기 전 병조판서 민영준에게 증원병을 요청하는 급보를 보내는  한
편 농민군과 내통하고 있는 전주 영장 임태두외  4명을 처형했다. 사기가 떨어지고  도망병
이 늘어가는 관군의 군율을 세우기  위한 고육책이었다. 그러나 농민군은  단숨에 영광까지 
짓쳐 들어갔다. 농민군이 파도처럼 밀어닥치면 관군이 뿔뿔이 흩어져 달아나 농민군은 전라
남도 일대를 무인지경으로 누볐다. 조선의 군사 체재는 감영과 수영, 진무영 등 몇몇 지방을 
빼놓고는 군사를 두고 있지않았다. 수만 명이나 되는 농민군이  밀어닥치자 고을 원이나 수
령들이 변변하게 대항조차 하지 못하고 달아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조선 조정은 홍계훈의 증원 요청을 받자 장위영 병사 3백 명과 강화 진무영 병사 5백  명
을 증파했다. 이때 조선 조정은 강온파가 갈라져 극심한 대립을 보이고 있었다. 동학 농민군
에 대한 강경파는 병조판서 민영준이었고 심순택, 김홍집,  조병세, 정범조 같은 시원임대신
들은 온건파였다. 특히 시원임대신들은 민영준이 청군에게  지원을 요청해야한다고 하자 격
렬하게 비판했다.
  "호남에서 온 전보를 보건대 동학의 무리들이 경군이 내려오자 뿔뿔이 흩어져 달아났다고 
합니다. 그러나 언제 다시 일어날지 모르니 불안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렇다고 청군을 
차병할 수는 없는 일입니다." 영의정 심순택의 말이었다.
"청나라의 군사를 차병하는 것은 전례가 있는데 어째서 안된다고 하오?"고종의 볼멘 대꾸였
다. 고종은 청군에게 진압을 요청하는 일외에 대책이 없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청군을 빌려 쓰면 군량을 부득불 우리가 바쳐야  합니다.""전하, 청군을 차병해서는 안되
옵니다." "전하, 차병 문제는 경솔하게 의논해서는 안되옵니다."조병세와 정범조도 반대했다. 
민영준은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하여 고개만 숙이고 있었다.
  "전하, 백성들의 형편이 쪼들리고 억울하여 수없이 신소를 했으나 언제 한 번이라도 속시
원하게 시정한 일이 있사옵니까?" 강직한 인물인 조병세는 고종의 면전에서  실정을 비판했
다. "이것은 전적으로 탐욕스럽고 포악한 정사를 견디지 못한 탓이오. 고을 원을  각별히 골
라서 임명하여야 폐단을 바로 잡을 수 있을 것이오." 고종의 대답은 판에 박은 듯했다. 원로
대신들의 의견도 몇 년을 두고 계속되어 온 것이었다.
  "오늘 백성들의 삶은 참으로 불쌍합니다. 세 칸 짜리  초가집에 사는 사람은 1년에 100여 
냥의 돈을 바치고, 5,6마지기 토지를 가진 사람은 4섬이 넘는 조세를 바침으로써 입에  풀칠
도  할 수 없으니 어찌 난을 일으키지 않겠사옵니까?" 조병세는 고종을 몰아 세웠다.
  "백성들이 난을 일으킨 것은 관리들이 잔인하고  포악하여 탐욕을 부려 도저히  살아 갈 
수 없기 때문입니다. 동학당이 무리를 규합하여 크게 일어난 것도  이 때문이옵니다."정범조
도 조병세에게 합세했다. 고종은 얼굴빛이 흙빛으로 변했다. 대신들이 뜻밖에 강경했다.
  "동학당의 괴수가 이미 성명이 드러났으니  기어이 포박하여 처단하면 추종하던  무리들
은 모두 흩어질 것이옵니다." 조병세의 말이었다.
"괴수 몇 놈은 기한을 정하여 체포하지만 혹시 평민들이 걸려 들면 어찌하옵니까?"심순택의 
간언에도 농민군에 대한 연민이 섞여 있었다.
  "만일 한 사람의 백성이라도 뜻밖에 걸려 든다면 이것이 어찌 백성을  위해 폐단을  제거
하는 일이 되겠소? 묘당에서 각별히 신칙하시오."  고종은 마지못해 시원임대신들의 간언을 
수락하고 농민군의 민론을 수렴하겠다는 윤음을 내렸다. 
  [임금은 말한다. 하늘이 백성을 낸 것은 살리기  위한 것뿐으로써 비가 오고 이슬이 내리
고 서리가  오며 눈이 내리는 것도 모두 너희 낮은 백성을 위한  것이다. 대체로 살기를 좋
아 하고 죽기를 싫어 하는  것은 인지상정인데 그 누가 안착하여  살기를 바라지 않겠는가. 
걸더듬질(수탈)에 지친 나머지 편안히 살 수 없고 죽음의 위협에 부대끼며 봉기한 것이리라.
내가 밤낮 걱정하고 애쓰면서 편안히 지낼 겨를이 없는 것은 오로지 백성들은 위한 것인데 
정사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고 혜택이 아래에 미치지 못하여 이 지경이 되었으니 통탄스럽
다. 전 군수 조병갑을 의금부로 체포하여   조사케 하고 안핵사 이용태를 멀고  먼  섬으로 
귀양보낼 것이다. 아울러 감사에게 엄정하게 신칙하여 탐학하고 포악한 고을 원들을 낱낱이 
조사하여 징치할 것이니 너희 낮은 백성들은 각자 고향애 돌아가 생업에 힘쓸 것이다.]고종
의 윤음이었다. 그러나 고부  군수 조병갑을 의금부에서  잡아 가두고 안핵사  이용태를 먼  
섬에 귀향을 보냈어도 농민군은 해산을 하지 않았다. 고종의 윤음도 이제는 소용이 없었다.
동학 농민군은 무인지경의 전라남도 지방을 휩쓸면서 남으로 남으로 내려갔다. 홍계훈의 경
군도 농민군을 따라 전주성을 비우고 남으로 남으로 내려가기 시작했다.
  남도 3백 리 길이었다. 홍계훈은 동학  농민군을 추격하면서 농민군의 잔당을  소탕했다. 
농민군은 텅 빈 관아를 습격하여 농민들에게 쌀을  나누어 주었으나 경군은 농민들에게  쌀
을 뺏아 군량으로 충당했다.  경군이 지나는 곳만다 농민들의 원성이 높았다.
동학 농민군은 경군과의 정면 충돌을 피하고 다시  북상하기 시작했다. 농민군은 지나는 곳
곳의 관아를 불지르고, 양곡을 농민들에게 나누어 주고, 양반과 탐관오리들을  처벌했기 때
문에 농민들로부터 절대적인 환영을 받고 있었다. 농민군은 영광에서 양반들의 식량을 징발
하여 함평으로 향했다. 성문을 지키던 관군은 1백 5십 명 남짓 되었으나 1만여 명에 이르는 
농민군을 당할 수  없었다. 관군은 농민군이 거대한 함성을 지르며 밀어닥치자 뿔뿔이 흩어
져 달아났다.
  그러나 동학 비도가 들어닥친다는 급보를 받고 동헌으로 몰려온 사림 1백여  명은 끝까지 
동헌을 지키려고 무장을 하고 성문을 굳게 닫아 걸었다.
"그대들은 우리의 적이 아니다! 우리는 오직 포악하고 잔인한 관리들을 처벌하기 위해 봉기
했을 뿐이다! 그대들이 동헌을 호위하고 있는 것을 보니 이 고을  현감이 바른 정치를 베푼 
것을 알 수 있다!"전봉준의 말에 유림은 스스로  물러갔다. 농민군은 동헌을 지키려는  유림 
사람들의 충성심에 감동하여 공형(각 고을의 호방, 이방, 수형리)을 잡아다가 대곤(큰 매) 5
대를 치는 것으로 관대하게 처벌했다.
동학 농민군은 다시 북상하기 시작하여 장성군 월평리 황룡촌에  이르렀다. 이때 경군의 일
대가 장성 갈재를 넘어오다가 농민군과 맞닥뜨리게 되었다.
음력 4월 23일(양력 5월 27일)이었다. 홍계훈은 본대를 거느리고 강진에서 농민군을 토벌하
고 있었다.
  농민군은 황룡강이 내려다 보이는 언덕에 진을 쳤다. 월산봉이었다.
  경군은 이학승, 원세록, 오건영의 영솔하에  함평을 떠나 23일에 황룡강에 이르렀던  것이
다. 오시 때였다. 농민군의 일부는 그늘에서 점심을 먹고  있었다. 경군은  농민군을 발견하
자 일제히 기습 공격을 감행했다. 농민군은 깜짝 놀라 대피하기에 급급했다.
"경군이다!" "경군이 몰려 왔다!"  경군은 대포를 쏘며 공격해  왔다. 순식간에 농민군 수십   
명이 흙더미와 함께 경군의 포탄에 맞아 허공으로 튕겨져 올랐다. 그때 대장군 깃발이 오르
면서 북소리가 둥, 둥, 둥... 울리기 시작했다. "대장군이다!"
  "녹두장군이다!"
  농민군들이 일제히 함성을 질러댔다. 월산봉 능선에 대장군깃발이 높게 솟아 바람에 펄럭
거리고 있었다. 깃발 밑에는 흰 옷을 입은 녹두장군 전봉준이 마상에 앉아 있었다.
  "녹두장군이 지켜 보신다!"  "녹두장군 옆에는 신동도 있다!"  "경군을 격파하라!"
농민군은 일제히 반격에 나섰다. 동학 농민군들 사이에는 녹두장군 밑에 7세와 14세의 하늘
에서 내려온 동자가 있어서 농민군을 돕고 있다는 전설 같은 이야기가 떠돌고 있었다.
  전세는 곧 역전되었다. 농민군은 장태를 굴리며 경군을 공격했다. 장태는 청죽을 얽어  닭
의 장태와 같이 만든 것으로 그 밑에 차바퀴를 붙인 것이었다. 장태를 만든 사람은 장흥 접
주 이방언이었다. 장태를 방패로 굴리며 농민군은 경군을 압박해 나갔다. 수에 있어서나  지
리적 조건에 있어서나 농민군은 월등히 우세했다.
  경군은 마침내 무수한 사상자를 내면서  패퇴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들이  함평 못미처 
까치골에 이르렀을 때 능선 양쪽에 매복하고 있던 농민군들이  갑자기 기습을 했다. 경군은 
대장인 이학승과 장교 이교응, 배근환이 전사를 하고 군사들도 1백여명이 몰살을 당했다.
농민군은 잠시 휴식을 취한 뒤  전주성을 공략하기로 하였다. 농민군은  4월 24일에 노령을 
넘고 26일엔 태인 원평점에 이르렀다. 이어서 27일에는 전주의 턱 밑인 금구에 도착했다.
  "전주성을 공략합시다!" "전주 감영을 쳐부수자!"
농민군은 기세등등하게 진군했다. 농민군은  한성까지 그대로 진격하자는  주장을 하기까지 
했다. 이때 조정에서는 전라감사 김문현을 파직하고 김학진을  임명하였다. 판관엔 민영승이 
그대로 유임되었다. 김학진은 4월 24일 고종에게 하직인사를 했다.
  "요즈음 전라도 지방은 백성들이 봉기하여 무법천지가  되었다 한다. 백성들이 이렇게 되
기까지는 탐오하는 관리들 탓이 크다. 임지에 부임하는 즉시 무마하고  경계할 것이다."고종
의 지시였다. "전하의 지시가 간곡한 만큼 신은 부임한  후에 전하의 성지를 받들어 끝까지 
타일러서 귀순하게 하겠사옵니다." 김학진의 대답이었다.
  "백성들이 봉기하여 농사철을 놓치니 민망하기 짝이 없는 일이다. 명색 없는 잡세를 걷지 
못하도록 철저하게 감독하도록 하라."
"백성들에게 해를 주는 잡세에 대하여 큰 것은 서면으로 보고 드리고  작은 것은 신의 감영
에서 폐단을 없애겠사옵니다."
"이러한 때에 감사의 임무를 맡기는 것은 공연한 일이  아니다. 경운 반드시 백성을 위하여 
고심하는  나의 뜻을 체득하고 분발하여 지시를 거행하라."
"미력을 다하여 전하의 신임에 보닥하겠사옵니다."
김학진은 머리를 조아려 대답했다. 그러나 그는 4월 27일이  될 때까지 전주에 부임하지 않
았다.
  동학 농민군은 4월 27일 금구를 떠나 전주에 이르렀다.  전주 감영은 신임 감사조차 없는 
상태에서 전 감사 김문편이 판관 민영승과 함께 동학 눙민군과 대적하게 되었다.
동학 농민군은 전주성의 서문과 남문 앞에서 일자진으로 대오를 편성하고 총공격을 하기 시
작했디.
"전주성을 쳐부숴라!"
"와아!"
녹두장군 전봉준의 명령에 농민군은 함성으로 화답했다.
"전주성을 점령하여 탐오한 감사의 목을 베라!"
"와아!"
"진군!"
"진군!"
오시 무렵이었다. 일자진을 형성한 농민군은 일제히 전주성을 향해 달려갔다.
둥!
둥!
북소리는 농민군의 사기를 북돋웠다. 깃발이 청천 하늘을 뒤덮고 함성이  천지를 진동했다. 
농민군은 성을 따라 흐르는 전주천을 건너 성으로 내달렸다.
김문현은 전주성의 4대문을 닫아 걸고 성민들을  동원하여 농민군을 방어하기 시작했다. 농
민군의 주력부대가 짓쳐들어오는 서문 일대의 민가 수백 채는 불을 질러서 농민군의 진격로
를 차단했다.
전투는 치열했다.
농민군은 단숨에 관군을 격파하고 성안으로 들어갔다. 감사 김문현은 전세가 불리하자 재빨
리 달아나고 판관 민영승은 태조 이성계의 위패와 영정만을 간신히 수습하여 탈출했다.
"만세!"
"만세!"
전봉준은 농민군의 환호 속에서 당당하게 입성하여 전주 감영의 선화당에 좌정했다.
이때 홍계훈의 경군은 농민군이 장성 황룡촌에서 경군을 격파했다는 급보를 받고  부랴부랴 
북상 금구에 도착한 뒤 4월 28일에 용머리까지 진출했다. 그러나 전주성은 이미 농민군에게 
함락되어 있었다.
조정에서는 전주가 함락되었다는 보고를 받자 3남염찰사에  엄세영, 양호순변사에 이원희를 
임명하여 급파했다.
홍계훈은 전주에 도착하자 봉산인  완산에 군사를 주둔시켰다. 완산은  왕성인 전주 이씨의 
근거지라고 하여 함부로 출입하지 못하는 봉산으로  되어 있었다.  그러나 전주성을 남쪽에  
두고 한눈에 내려다 볼 수 있는 전략적인 요충이었다. 농민군  쪽에서도 완산에  군사를 배
치해야 한다는 의논이 분분했으나 봉산이라고 하여 범접하지 않았더 srjt이다.
홍계훈은 완산에 경군을 주둔시킨 뒤에 전주성을 맹렬하게 포격하면서 탈환을 시도했다. 성
내의 민가가 잿더미가 되고 농민군은 사기가 저하되기 시작했다. 5월  1일과  5월 3일 농민
군은 성문을 열고 나가 완산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완산은 지리적 여건 때문에 철옹성 같았다. 농민군은 1천여 명의 사상자를 낸 뒤 전
주성으로 퇴각했다.
  전주부가 동학 농민군에게 함락되었다는 보고는 4월 28일에애 남로전선을 통한 전보로 조
정에 보고되었다. 도정은 비로소 사태의 심각성을 깨닫고 청나라에   원병을 청하는 문제를 
다급하게 논의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대부분의 조정 중신들은 청나라에 원병을 청하는 문제
를 반대했고 친군경리사겸 병조판서인 민영준만이 청나라에 원병을  요청해야 한다고 강력
하게 주장했다.  초토사 홍계훈도 농민군을 막지 못하였다고 하여 대신들의 탄핵을 받았다. 
그러나 초토사의 임무를 대신 할 사람이 없어서 홍계훈은 죄를 진 채 농민군을 토벌하라는 
지시를 받았다.
  민비는 청병 차병 문제가 결론이 나지 않자 민영준을 중궁전으로 불렀다.
"역도의 괴수가 누구라고 하느냐?"
민비의 새침한 눈빛에 민영준은 전신이 얼어붙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민비는 농민군을 토
벌하지 못하는 민영준에게 강한 불만을 갖고 있음이 분명했다.
"전봉준이라고 하옵니다."
민영준은 공손히 머리를 조아려 대답했다.
"전봉준?"
"예, 중전마마."
"전봉준을 따르는 무리가 수만 명이 넘는다고 하던데 도대체 병조에서는 무엇을  하고 있었
느냐?""송구하옵니다."
"송구하다는 말로 이 문제가 해결된다는 말이냐?"
"아뢰옵기 송구하오나 대원위 대감의 사주를 받았다는  말도 있고, 일본인들이 동도들을 조
종한다는 말도 있사옵니다."
"닥쳐라!"
민비가 연약한 손으로 연상을 후려쳤다. 민비의 눈에서 새파란 안광이 뿜어졌다.
"대원위가 이제 와서 어떻게 동도들을 사주하고 일본인들이 어떻게 동도들을 조종한다는 말
이냐?""성 안에 나도는 말이..."
"닥치라고 하지 않느냐? 대원군이 사주를 했다고  수만 명의 백성들이 일시에 봉기를  하느
냐?""..."
"내가 창의문을 읽었느니라!"
"송구하옵니다."
"병조판서는 나라의 안위를 지키는 막중한 직책이다."
"송구하옵니다."
"전주부가 함락되었다고 하니 참담하지를 않느냐?  초토사 홍계훈은 언제 전주부를  수복하
겠다고 하느냐?"
"아뢰옵기 송구하오나 또 대포와 증원병을 보내 달라고 요청하였사옵니다.""또 대포를?"
민비는 입을 벌리고 어처구니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남도의 비적들이 워낙 무리가 많아 초토사의 군사로는 감당하기 어렵다고  하옵니다.""아니
다! 대포를 보내라고 한 것은 전주성을 공격하려는 것이다."민비는 홍계훈의 얼굴을  생각하
는 듯 잠시 아득한 표정을 지었다.
"초토사가 아직 성을 공격하지 않은 것은 죄 없는 백성들이 죽음을 당하게 될까  봐 그러는 
것이다. 순변사가 가서 합세를 하면 수일 내에  평정을 할 수 있을 게야...."민영준은 민비의 
말에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민비의 말을 얼핏 이해할  수 없었다. 초토사 홍계훈은 병조
판서인 민영준에게 시급히 청군을  보내 동학 농민군을 토벌해야  한다고 파발마를 보내온 
것이다. 
민비의 생각처럼 호남의 상황이 간단치가 않았다. 민비가  홍계훈을  지나치게 신뢰하고 있
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물러 가라!"
민비가 쌀쌀맞게 내뱉았다.
"신 병조판서 물러 가옵니다."
민비의 말이 떨어지자 민영준은 황급히 머리를 조아리고 뒷걸음으로 중궁전을 물러 나갔다.
(저런 위인이 병조판서라니....)
민비는 민영준이 물러가는 뒷모습을 쏘아보다가 혀를 찼다. 그러나 민영준을 병조판서 자리
에서 내치고 싶지는 않았다. 병조판서로 마땅한 인물도 없으려니와  민씨 일족 중에서는 민
영익을 제외하고는 그나마 출중한 인물이었다.
"게 누구 있느냐?"
민영준이 물러 가자 민비는 밖에 있는 상궁들을 불렀다.
"김 상궁 대령해 있사옵니다."
"진령군 박소사를 들라고 해라."
"이유인도 들라고 하옵니까?"
"이유인은 그만 두어라."
이유인은 진령군 박소사의 수양아들이었다. 경남 김해 사람으로 궁천무뢰배였다.
"소인 김 상궁 명을 받자옵니다."
김 상궁이 물러 가는 소리가 들렸다. 민비는 김상궁이 물러가자  다시 민영준에  대한 생각
에 잠겼다. 민영준은 성격이 오만한 편이었다. 주인의 그런 성격을  닮아서인지 하인들도 교
만하여 벼슬이 낮은 관리들이 찾아가면 으레 거드름을 피우며 창피를 주었다.
민비도 그 소문을 들었다.
(이것들이 또 못된 짓을 해?)
민비는 민문의 추문이 들리자 진저리를  쳤다. 민비는 얼마 전에도  민형식  때문에 골머리
를 앓은 일이 있었다.
민형식은 여주 망나니로 소문이 파다하게  나돌고 있었다. 술을 미친 듯이  퍼 마시고 통제
사의 직위를 이용해 1백만 냥이나 백성들의 재산을 수탈해 원성이 높았다는 것이다. 소문은 
그것뿐이 아니었다. 민형식은 항상 칼을 옆에 두고 번쩍하면 사람을 쳐 죽이고 온갖 행패를 
부렸다고 하였다.
게다가 민형식은 여자 문제도 복잡했다.  대개 감사나 동제사가 부임을 하면  각 관속의 점
고를 받는데 기생들도 예외는 아니었다. 민형식은 기생 점고를  받으면서 눈여겨 둔 기생들
을 불러들여 풍마지희까지 즐겼다. 풍마지히는 기생들을  발가벗겨서 발정한 말처럼 놀아나
는 것이었다.
그는 성격이 광폭했다. 술을 바가지로 퍼 먹었으며 옆에 있는 사람까지도 술을  퍼 먹였다. 
군영의 감목관 한사람에게도 술을 퍼 먹여 죽게 하였다. 군사들이  감목관의 시체를 들어내
어 염습을 하는데 온 몸이 흔르흐늘해서 솜자루 같았다. 감사나 통제사, 고을 원이 백성들을 
착취하는 것은 수십 년동안 이어져 내려오는 악습이라 백성들은  으레 그러려니 했다. 그러
나 민형식 같은 자는 고금을 통해서 처음 나타난 자라고 해서 광적이라고 불렀다는 것이다.
민비는 그 소문을 듣고 민형식의 비행을 낱낱이 조사하게  했다. 사헌부의 감찰을 통해서였
다. 그러나 사헌부의 감찰은 민형식에 대한 소문이 모두  날조딘 것이라고 민비에게 보고를 
했다.
(그럴 리가?)
민비는 얼굴을 찌푸리고 고개를 흔들었다. 그러나 사실이 아니라는  데는 마땅히 징치할 명
분이 없었다.
(백성들이 우리 민문을 미워하고 있는 것인가?)
민비는 민형식에게 녹봉 3기를 건너 뛰는 처벌을  내렸다. 공직에 있는 공인의 입장으로 소
문에 오르내리는 것조차 옳지 못하다고 본 것이다.
민영준의 하인은 포도대장을 지낸 신정희를 시켜 잡아 죽였다.  민영준의 교만에 대한 경고
였다.
  그러나 그 시각 민영준은 고종의 경연에 참석하고  있었다.  고종의 경연에는 시원임대신
들도 모두 참석했는데 그날의 경연관은 근엄한 재상인 조병세였다.
"전하, 비도들이 이미 전주성을 함락한지라 청나라에 원병을 청해야 할 줄로 아옵니다."민영
준은 기회를 보아 고종에게 청군을 차병할 것을  아뢰었다. 조선의 군사로는 농민군을 대적
할 수가 없었다.
"비적들의 기세가 그토록 흉맹한가?"
"그러항보니다. 전주성은 경기전과 조경묘를 모신 곳이라 속히 실지를 회복하지 않을 수 없
음이옵니다."민영준은 전주가 이성계의 영정과  조선 왕조의 시조를  모신 곳이라는 사실을 
강조했다.
"청군을 꼭 차병해야 하는가?"
고종의 용안이 어두워졌다. 고종은 고개를 떨구고 있는 시원임대신들을  천천히  훑어 보았
다. 의견이 있으면 말해 보라는 뜻이었다.
"남도의 비도들이 일시적으로 기세를 떨치고 있으나 외병을 끌어들어야 할  만치  다급하지
는 않은 일이옵니다."
영의정 심순택이 점잖게 반대를 했다.
"비도들이 모였다 흩어졌다 하는 것이 대중없어서  기세가 어떤지 속단하기는 이른  일이옵
니다. 그러나 청군을 차병하면 일본도 잠자코 있지를 않을 것이옵니다."좌의정  조병세와 우
의정 정범조도 반대를 했다. 그것은 판중추부사인 김홍집도 마찬가지였다.
"시원임대신들이 모두 반대를 하고 있지 않는가? 경이 청국 공사관에  가서 청군 차병 문제
를 협의하도록 하라."
고종은 병조판서 민영준에게 차병 문제를 일임해 버렸다. 임오, 갑신 두 정변이  모두 청군
에 의해서 진압된 것이다. 골치 아픈 문제에 신경을 쓰고 싶지 않았다.
  민영준은 고종의 내락을 받자 곧장 청나라 공사관에  가서 원세개를 만났다. 원세개는 민
영준이 찾아 오기 전에 이미 이홍장에게 긴급  전문을 보내 군함의 파견을 요청한  일이 있
었다. 원세개는 민영준의 요청에 흔쾌히 수락했으나 일본과의 외교적인 마찰을 고려하여 신
중에 신중을 기했다.
4월 30일 조선 조정은 마침내 청군의 출병을 요청하는 조회문을 원세개에게 보냈다.
이에 청나라의 이홍장은 제독 엽지초에게 1천 5백명을 거느리고 인천으로 향하게  하고 뒤
이어 총병 섭사성에게도 9백 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조선으로 뒤따라가게 하였다. 섭사성은 
5월 5일 아산에 도착하고 엽지초는 5월 2일 인천에 도착했다가 5월 7일 아산에 도착함으로
써 아산에 집결한 청군의 숫자는 2천 4백 명이 넘게 되었다. 이에  앞서 일본도 5월 4일 병
력 출동을 조선에 통고했다.
  일본은 갑신정변의 실패 후 조선에서의 만회에 절치부심하고 있었다. 일본은 전봉준이 동
학 농민군을 이끌고 봉기하자마자 실정조사라는 명분으로 이치지 고스케 소좌를 조선에  파
견했다.
이즈음 부산에는 천우협이 결성되어  있었다. 천우협은 흑룡회의 두목  우치다 료헤이와 현
양사의 두목 도야마 미쓰로의 휘하에 있었다. 이들은 모두  사무라이들로 조선 침공의 전위
조직들이었다.
이때 일본은 중의원에서 내각의 행위에 대한 탄핵안이  상주되어  의결상태에 있었다. 일본 
내각은 이에 대립하여 의회 해산을 요구하기 위해 내각회의를 열고  있었다. 그러나 조선에
서 대리공사 스기무라 후카시로부터 청군이 조선에 출병한다는 긴급 전보가 날아와  이들은 
조선 문제로 정국의 돌파구를 찾기로 결정하였다.
총리대신 이토오 히로부미와 외무대신 무쓰 무네미스는 즉각 육군 참모총장  아리스 가와노
미야와 참모차장 가와카미 소로쿠중장을 호출했다.
"이제 우리는 청나라와 전쟁을 하지 않으면 안될 중대한 시점에 와 있소. 우리가 조선의 사
태를  방치한다면 우리는 두 번 다시 조선에 발 붙일 수가 없소."
이토오 히로부미의 비장한 말이었다. 무쓰 무네미스도  임오년과 갑신년의 실패를 만회하려
면 기선을 제압하지 않으면 안된다고 말하였다.
"군대는 충분히 준비되어 있소?"
"그렇습니다. 우리 일본군은 지금 당장이라도 출병할 수 있습니다.""좋소. 그럼 대본영을 설
치하고 출동 준비를 하시오!"
4월 29일 부랴부랴 조선 출병을 결정한 일본은 5월 1일에 휴가중에 있던 오토리 게이스케공
사를 귀임시키기로 결정하고 5월 2일에 대본영을 설치한 뒤 제 5사단에 동원명령을 내렸다.
5월 4일 일본은 일본군 출동을 조선에 통고했다. 조선은 일본의  군대 파견을  중지할 것을 
요청했다. 그러나 일본은 이에 불응하고 5월 6일 일본 공사 오토리 케이스케를 앞세우고 해
군 중장의 인솔하에 군함 야에야마 편으로  육전대 4백 2십명을 파견하여 인천에  상륙시켰
다.
"도대체 이런 방약무도한 놈들이 어디에 있는가?"
민비는 일본군이 인천에도 도착했다는 소식을 듣고는 펄쩍  뛰었다.  고종도 얼굴이 하얗게 
질려 시원임대신들을 어전으로 불러들였다. 사태가 긴박하여 민비도 편전에 발을 치고 앉았
다.
"일본군이 인천에 상륙했다고 하오. 경들은 속히 대책을  수립하시오."고종이 떨리는 목소리
로 대소 신료들에게 옥음을 내렸다. 침통한 표정을 짓고 있던 영의정 심순택이 낮게 헛기침
을 했다.
"전하. 신 등이 청군 차병의 불가함을 아뢰었던 것은  일본군이 입조하는 것을 우려했기 때
문이옵니다.""남도가 비적들로 들끓고  있는데 청군이라도 차병하지  않으면 무슨 수단으로 
토벌을 하오?""오늘의 사변은 관리들의 탐학이 극도에 이르렀기 때문이옵니다. 관리들의 탐
학을 근절하여 시폐를 혁신하는 것만이 비도들의 난을 가라앉히는 것이옵니다."
"영상은 참으로 답답하오. 목전에 일본군이 들어와  있는 사태를 얘기해야지 어째서 원론적
인 말씀을 하오?"
"황공하옵니다."
"병판도 대책이 없는가?"
고종이 민영준을 쏘아보았다. 청군 차병은 민영준이 주장했기 때문이었다.
"경은 청군 차병을 주청했으니 이에 대한 대책이 있었을 것이 아닌가?""황공하옵니다. 오토
리 게이스케 공사에게 철병을 요구해야할  줄로 아옵니다.""철병하라고 물러갈 그들이 아니
지 않는가?"
고종의 옥음이 높아졌다. 민비는 발 뒤에서 낮게 한숨을 내쉬었다. 조정 대신들이  일본군의 
파병에 아무 대책도 세우지 못하는 것이 답답했다.
"전하."
그때 판부사 김홍집이 입을 열었다.
"말씀을 하시오."
"일본군은 아무 명분도 없이 조선에  입조를 한 것이옵니다. 청나라는  우리 조선이 출병을 
요청하였기 때문에 외교적으로 아무 문제가 없으나  일본은 출병을 요청한 일이  없으므로 
불법적인 일이옵니다. 미국, 영국, 독일, 프랑스, 러시아  같은 열국 공사들에게 중재를 요청
하여 철병하게 하는 것이 상책인 줄로 아옵니다."
외교가다운 발상이었다.
"판부사 대감."
그때 발 뒤에 앉아 있던 민비가 입을 열었다.
"예. 중전마마."
"대감의 고견은 외교적으로 해볼 만한 방법이오.  허나 내 생각은 좀 다르오. 내  비록 구중
궁궐에 있는 아녀자에 불과하나 일찍이 춘추좌전도 읽고 사기도 공부하여 병법을 조금 알고 
있는데 아무래도 비도들과 강화를 맺는 것이 상책인 것 같소."
"중전마마. 강화라 하셨사옵니까?"
김홍집이 깜짝 놀라서 발 뒤에 앉아 있는 민비를 쳐다보았다.
그러나 민비는 발에 그림자만 어른거릴  뿐 얼굴이 보이지 dskgdkT다. 표정을  알 수 없었
다.
"그렇소. 강화요."
대신들이 일제히 얼굴을 마주보며 웅성거렸다. 비도들과의 강화는 상상도  할 수 없는 것이
었다.
"중전마마, 어찌하여 비도들과 강화를 맺으라 하시옵니까?"영의정 심순택이 항의했다.
"중전마마, 비도들은 성역이나 다름없는 전주성을 유린한 자들이옵니다. 분부 거두셔야 하옵
니다."병조판서 민영준도 심순택에게 동조했다.
"닥치시오! 경은 조선 천지가  청일의 전쟁터가 되기를  바라오?"민비는 민영준을 날카롭게 
다그쳤다.  대소신료들 앞이 아니라면 뺨이라도  올려부쳤을 것 같은 싸늘한 목소리였다.
"화, 황공하옵니다."
민영준이 몸을 부르르 떨었다.
"어찌 부면 비도들과 강화를 맺는 것이 굴욕적인 일이라고 볼 수도 있소. 허나 비도들이 스
스로 큰 의리를 세운다는 기치를 내세우고 봉기를 하였으니 명분을 주어서 물러 가게 해야 
할 것이오."대소신료들은 대답이 없었다. 민비의 제안은 대담하기 짝이 없는 것이었다.
"그동안 비도들은 조정의 혁신과 관리들의  탐학을 비난해 왔소. 또  청일 군대가 비도들을 
소탕하려 조선에 왔다고 하면 그들도 심상하게 보지는 못할 것이오."  민비의 예상대로였다.
동학 농민군은 청일 양국군이 조선에 들어와 전쟁을  할  태세라는 얘기를 듣자 큰 충격을 
받았다. 이때 초토사 홍계훈, 전라감사 김학진, 양호순변사 이원회가 강화를 제의해 오자 선
뜻 응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관군과 동학 농민군 사이에 전주화약이 맺어졌다.
1. 동학인과 조정은 숙원을 버리고 협조한다.
2. 탐관오리는 죄상을 철저히 조사하여 엄징한다.
3. 횡포한 부호들은 엄징한다.
4. 불량한 유림과 양반의 악습을 징계한다.
5. 칠반천인(노비, 백정, 기생 등의 천민)의 대우를 개선하고 백정 두상의 평양립을 없앤다.
6. 노비문서를 소각한다.
7. 청상과부는 개가를 허가한다.
8. 무명잡세는 실시하지 않는다.
9. 관리 채용은 지벌을 타파하고 인재를 고루 등용한다.
10. 왜와 간통하는 자는 엄히 징벌한다.
11. 공사채를 막론하고 기왕의 것은 일체 면제한다.
12. 토지는 평균으로 분작케 한다.
전문 27개 조항이라고 했으나 남아 있는 기록은 12개 조항뿐이었다.
농민군은 5월 7일 전주화약을 맺고 5월 8일 일체의 무기와 탄약을 반납하고 전주성에서 퇴
거했다.
경군도 한성으로 철수했다.
전라감사 김학진은 경군이 철수하자 치안을 확보하기 위해 전봉준을 초치하고 그와  정사를 
일일이 상의했다. 그리하여 전라도 53주에는 집강소를 설치하게 되고   사실상 농민군이 정
사를 보는 상황이 발생하게 되었다.
  그러나 일본군은 철수를 하지 않았다. 조선은 외무독판  조병직을 보내 재차 일본군의 철
수를 요구했으나 거류민들을 보호한다는 구실로 오히려 육전대를 입경 시켰다.
5월 9일에는 일본 육군 8백 명이 입경하고, 5월 13일에는 혼성여단 3천 3백 명이 인천에 상
륙, 5월 22일 입경하여 만리창과 아현리 일대에 주둔했다.
(하늘이 조선을 버리시려는 것인가?)
민비는 참담한 기분을 떨쳐 버릴 수가 없었다. 일본군의 출동을 방지하기 위해 동학 농민군
들과 강화조약까지 맺었던 것이다.
(이 일을 어찌해야 한단 말인가?)
민비는 유유하게 푸른 하늘을 쳐다보며 발을 동동 굴렀다.  일본군의 대규모 병력이 조선에 
상륙한 것이 불길하기만 했다.
  
    제 37 장 유유한 푸른 하늘아
  일본의 조국 침략 정책은 점점 노골화되기 시작했다. 일본의 혼성여단은 만리창과 아현리
에 주둔한 뒤 곧바로 무력시위에 들어갔다. 
  일본군은 기마대만 3백 명이었다. 착검까지 한 일본군  기마대가 삼엄한 대오로 성안에서 
행군을 하기 시작하자 개들이 사납게 짖어대고 아이들이 몰려  다녔다. 그러나 조선의 성민
들은 불안에 떨며 전전긍긍했다. 
  일본군이 입경한 이래 조선 조정은 혼란이 극에 달해  있었다. 조정 대신들은 우왕좌왕하
면서 오토리 공사의 눈치 보기에 급급했다. 외무독판 조병직만이 병중인데도 불구하고 외교
적인 노력으로 일본군을 철병하게  하려고 동분서주했다. 대신들은 속수무책이었다.  일본과 
청나라에 의해 총명한 대신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던 김홍집조차 대책을 세우지 못하고 있었
다. 
  대신들은 민영준의 실책만을 비판했다. 그의 오만한 성격 탓에 민씨 일족들로부터도 따돌
림을 받던 민영준은 병조판서의 직에 있었으나 일본군의 조선 입경에 대응할 수 없었다. 일
본군은 갑신정변 이후에도 계속 전비를  증강해 왔고 무기는 최신형이었다.  조선에 파견된 
군대도 최정예들이었다. 
  유명무실한 조선군은 일본군을 만나면 슬금슬금 꽁무니를 감추었다. 
  일본군은 그 동안 기함 미츠시마까지 조선 연해에 파견,  조선 연해는 6척의 일본 군함으
로 뒤덮여 살벌한 분위기를 연출하고 있었다. 
  "일본이 청일전쟁을 획책하고 있는 것이 분명하오! 독판은  서둘러 일본군을 철병하게 하
시오."
  민비는 조병직을 다그쳤다. 조병직은 병 때문에  고통스러워하면서 오토리 공사와 스기무
라 서기관에게 엄중하게 항의했다. 
  "조선은 지금 평온한 상태에 있소.  이것은 외국 거류민들도 모두  인정하고 있는 사실이
오."
  그러나 오토리 공사는 조선의 사태가 겉으로만  평온하기 때문에 철병할 수 없다고  잘라 
말했다. 이에 외국 공사들까지 오토리 공사를 규탄하기 시작했다. 
  오토리 공사는 사면초가에 몰렸다. 그는 어쩔 수 없이 일본군의 철병을 일본에  상신했다. 
그러나 무쓰 무네미스의 강력한 회신이 왔다. 
  <청국 및 조선으로부터 놀라움이 있으리라는 것은 충분히 예상하고 있었던 일이다.  일본
의 대부대를 아무 일도 하지  않고 헛되이 귀국시키는 것은 득책이  아니다. 공사는 일본군 
출병의 초지를 관철시키라.>
  전쟁에 대한 강력한 지시였다. 무쓰 외무대신의 지시는 계속 되었다. 
  <우리의 내정을 살피면 기호지세를 이루어 결코 중도에서 포기할 수 없다는 사실을 명심
해야 한다.>
  무쓰 외무대신의 말은 일본의 형편이 일본 국민과 군부의 강경한 여론 때문에 전쟁을 피
할 수 없다는 내용이었다. 
  (조선에 출정한 일본군을 그대로  철수시키는 것은 도저히 불가능한  일이군......)  오토리 
공사는 무쓰 외부대신의 회신이 내포하고 있는 뜻을  이해했다. 일본은 내각과 국민이 모두 
전쟁을 향해 치달리고 있었다. 
  무쓰 외무대신의 회신으로 오토리 공사의 철병안은  급변하여 강경하게 바뀌었다. 일본은 
조선에 출병을 했을 때 이미 청군이 일본군을 공격해 올  것이고, 이때 청군이 남하하면 일
본군은 북상하여 평양 근처에서 청군을 격파한다는 전략을 세우고 있었다. 
  그러나 아산의 청군은 교전할 움직임을 전혀 보이지 않았다. 일본은 초조해지기 시작했다. 
오히려 원세개는 열국 공사들을 동원하여 일본에 압박을 가하고 있었다. 
  일본은 이에 대해 청일이 조선의 내정을 공동으로 개혁하자는  제안을 했다. 그러나 청나
라는 이를 거부했고 일본은 조선에 엉뚱하게 내정 개혁을 요구하기 시작했다. 
  공동 개혁에서 단독 개혁으로 바뀐 것이었으나 조선은 안중에도  두고 있지 않았다. 단독 
개혁은 청일의 개전을 유도하기 위한 것이었다. 
  일본은 5월 19일 가토 마쓰오 서기관을 조선에 파견했다.  가토 서기관은 일본 내각의 극
비 훈령을 휴대하고 있었다. 
  <청군이 철수한다고 해도 우리는 조선에서 철수할 수 없다. 내친걸음이라 개전은 피할 수 
없다.>
  일본은 혼성여단을 조선에 주둔시키면서  후속부대를 대거 수송했다. 오토리  공사는 5월 
23일 고종을 알현하고 내정 개혁을 강력히 요구했다. 
  "오토리 공사! 일본이 조선에서 군대를 철수하지 않는 이유가 무엇이오?"  그날도 민비는 
고정의 뒤에 발을 치고 앉아 있다가 오토리 공사에게 몸을  떨며 호통을 쳤다. 조선의 상황
은 더욱 불리해져 가고 있었다. 조선의 대신들은 무력을 앞세운 오토리 공사의 요구에 속수
무책이었다. 민비는 발 뒤에 앉아 있다가 발끈하여 소리를 지른 것이다. 
  "중전마마!"
  오토리 공사는 당황했다. 조선의 왕비가 발 뒤에 앉아서  조선의 국사를 마음대로 좌우한
다더니 사실이었군, 하는 생각이 뇌를  강타했다. 그러나 대답을 해야  했다. 오토리 공사는 
고개를 숙이고 입을 열었다. 
  "중전마마, 일본군이 조선에 출동을 한 것은 조선을 위한 것이옵니다. 그리고 일본군만 조
선에 출병하고 있는 것이 아니지 않사옵니까?"
  "이 보시오 공사! 청군은 이미 철병을 하겠다는 의사를 분명히 표시해 왔소!"  민비의 날
카로운 목소리는 어전을 찌렁찌렁 울렸다. 
  "공사는 속히 일본군을 철수하시오!"
  "중전마마!"
  "일본이 군대를 철수하지 않는 것은 조선을 침략한 것이나 다름없소!"  "중전마마 오해이
시옵니다!"
  "공사가 아무리 외교적인 수식어를 동원해서 부정해도 소용이  없소."  "중전마마, 말씀이 
지나치시옵니다!"
  오토리 공사의 얼굴이 벌겋게 상기되었다. 오토리 공사는 민비가 정확하게 일본의 정책을 
꿰뚫어 보고 있는 것에 내심 당황했으나 변명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왕비가 마치 국왕처럼 행동하는군. 이것은 암탉이 우는 것이야......)  고종과 대신들은 민
비와 오토리 공사의 설전에 침묵을 지키고 있었다. 
  (국왕과 대신들은 기개가 없다. 그러기 때문에 암탉인 왕비가 우는 것이지만 여우같은 왕
비만 제압하면 조선은 그것으로 끝이야......!)
  오토리 공사는 그 와중에도 머리를 빠르게 회전시켰다. 
  "공사!"
  "예, 중전마마!"
  "그대가 일본을 위해 충성을 하는 것은 나무라지는 않겠소.  그러나 나도 우리 왕실과 억
조창생을 지켜야 할 의무가 있소." 
  "황공하옵니다." 
  "나는 이 나라 만백성의 어머니요." 
  "당연한 분부이시옵니다."
  "중전마마, 때가 되면 일본군은 철수할 것이옵니다. 그보다 시급한 것은  하루빨리 조선의 
내정을 개혁하는 일이옵니다."
  오토리 공사는 손수건을 꺼내어 이마의 땀을 훔쳤다. 
  "조선의 내정을 개혁하는 것은 조선에서 할 일이지  공사가 관여할 일이 아니오!"  "중전
마마, 일본은 이웃 나라를 돕고자 할뿐입니다."  "일본군을 철수시키시오!"
  민비의 언성이 다시 높아져 찬바람이 일기 시작했다. 조선의  대신들은 침조차 삼키지 않
고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여걸이다! 일본군의 무력 앞에서도 저렇게 당당하니......)  오토리 공사는  감탄했다. 그러
나 물러설 수가 없었다. 영국과  러시아는 이미 일본에  강력하게 철수를  요구하고 있었고 
일본  군부는 그의 등을 떠밀고 있었다.  일본의 내각도 개전 구실을 찾으라는 훈령을 거듭 
보내 오고 있었다. 
  "조선의 내정을 개혁하는 것은 조선을 위해서입니다. 일본은  이웃 나라인 조선을 위하여 
내정을 개혁하기를 요구하는 것입니다."
  오토리 공사는 궁색한 변명을 했다. 그리고는 조선의 개혁을  요구하는 장문의 국서를 올
리고 물러갔다. 
  고종은 5월 24일 경복궁으로 이어했다. 
  오토리 공사는 5월 25일 외무독판 조병직에게 질문서를  보냈다. 청한종속 문제로 개전의 
구실을 삼기 위해서였다. 
  <청군이 출병하면서 행문지조를 일본에 보냈는데 그  글에 "조선은 우리의 보호 속방"이
라는 귀절이 있다. 조선은 이 귀절을 승인하는가  승인하지 않는가.>  행문지조는 외교문서
이고, 오토리 공사가  거론한 조항은 청군이  출병하면서 천진조약에 의해  일본에 보낸 외
교문서에 들어 있었다. 오토리 공사가 이  문제를 거론한 것은  만약 조선이 속방이 아니라 
자주국이라고 회답하면 청국은 조선의 자주권을 침해하여 청군을  파견한 것이므로 조선에
서 철수시켜라, 조선에서 청군을  철수시키지 못하겠다면 일본군이 하겠다, 라고 하여 개전
할 구실로  삼고, 조선이 청나라의 속국이라고 인정하면  강화수호조규에 있는 조선은 자주
국이다 하는 구절은 일본을 속인 것인가, 하고 몰아 세울 작정이었다. 
  조선은 궁리 끝에 조선은 자주국이다, 하는 회신을 보냈다. 오토리 공사는 즉시 이 사실을 
일본에 통보했다. 조선이 그러한 회신을 보낸 것은 청나라의  원세개가 일본의 기세에 눌려 
속수무책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일본은 즉시 군사행동을 할 수가 없었다. 러시아와  영국이 조선 문제를 본격적으
로 거론했기 때문이다. 
  민비는 김홍집, 조병직 등을 내세워 외국의 중재를 요청했다. 그러나 영국은 일본이  영국 
상품에 대한 관세를 인하하고 영국 점령지인 상해로 진출하지 않는다는 일본의 비밀 보장을 
받고 슬그머니 물러섰다. 
  (국제 정치가 이토록 추악하다니......)
  민비는 파랗게 안광을 뿜으며 몸을 떨었다. 영국이 자국의 이익 때문에 배신을 했다고 생
각하자 치가 떨렸다. 그러나 조병직의 노력으로 러시아가 일본을  강경하게 몰아 세우고 있
었다. 
  주일 러시아 공사 히트로보는 무쓰와 이토에게 회견을 요구하고 일본군의 조선 철수를 요
청했다. 
  <청군의 파병은 전적으로 조선의 요청에 의한 것이다. 그러나 일본은 막대한 군병을 파견
하고 있으면서도 조선측의 내락을 받은 일이 없다. 조선의 내란은 이미 진정되어 조선은 각
국 공사들에게 이 사실을 통보하고 청군 및 일본군을 철수시키는 일에 대해 협조를 요청한 
바, 일본이 청군과 함께 조선에 주재하는 병력을 동시에 철수하지 않으면 중대한 책임을 져
야 할 것이다.>
  러시아의 태도에 일본은 황급히 개전을 연기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러시아는 일본
을 상대로 전쟁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시베리아 철도는 완공되지 않았고 러시아의 내정
도 혼란에 빠져 있었다. 일본은 이러한 사실을 현양사의 대륙 낭인들과 조선 낭인들에 의해 
입수하고 러시아가 종이 호랑이라는 사실을 간파했다. 
  청나라 또한 내정이 극도로 피폐해 있었다. 청나라의 이홍장은 광대한 영토를 효과적으로 
지배할 수 없었다. 오히려 이홍장의 적들은 서태후를 이용해 이홍장을 제거하려고까지 하였
다. 청나라에서도 권력 다툼이 치열했다. 
  서태후는 청나라의 절대적인 권력자였다. 남편인 함풍제가  죽자 아들이 동치제가 즉위하
게 되어 섭정의 자리에 앉아 권세를 휘둘렀고, 그 동치제가  1874년에 죽자 다시 조카인 광
서제를 즉위시키고 전권을 휘둘렀다. 강유위 등의 개혁운동을 쿠데타로 진압한 서태후는 의
화단의 난이 일어나자 오히려 이를 선동하여 열강의 중국 진출을 초래하고 청조 멸망의 원
인이 되었다. 
  그 서태후가 1894년 10월 10일이 회갑이었기 때문에 청나라는 잔치 준비에 연초부터 떠들
썩했다. 회갑연의 비용으로 1천만 원이라는 막대한 비용이 투입되고 있었다. 
  이홍장은 이러한 시기에 일본과 전쟁을 하고 싶지 않았다.  전쟁은 국론이 통일되어 있을 
때야 가능했다. 그러나 청나라는 영토가  광대했기 때문에 군제도 사병  비슷하게 양성하고 
있었다. 이홍장이 동원할 수 있는 군대는 이홍장 직계의 회군 소속의 북양군이  고작이었다. 
청나라가 일본에서 패한다면 이홍장은 재기 불능 상태에 빠질 염려가 있었다. 
  일본은 현양사의 낭인들, 첩자들을 통해 이러한 사실을 낱낱이 파악하고 있었다. 
  일본은 조선에 파견한 일본군의 철병  불가방침을 러시아에 통보했다. 이  무렵 청나라는 
영국의 조정을 거부했다. 청나라가 영국의 조정을 받아 들였다면 일본은 청나라에 도발하지
는 않았을 것이다. 일본은 청나라에 절교서를 보냈다. 
  이것은 일본의 외무대신인 무쓰 무네미스가 벌인 치열한 외교전의  결과였다. 그 동안 조
선에서는 오토리 공사가 조선에 내정 개혁안 5개조를 내놓고 본격적인 협박을 하고 있었다. 
6월 1일의 일이었다. 
  이에 앞서 초토사 홍계훈이 동학 농민군 토벌에 참여했던 경군을 이끌고 도성으로 돌아왔
다. 고종은 토벌에 참여한 군사들에게 술과 음식을 내리고 어전회의를 열었다. 
  "어제 지시한 바가 있지만 일체 개혁해야 할 점에 대하여 대소신료가 정신을 가다듬고 강
구하여 기어이 실지 성과를 거두어야 할 것이오."
  고종은 비감한 심정을 토로했다. 일본의 내정 개혁에 대한  협박으로 고종은 지난밤 잠을 
이루지 못했었다. 
  "오늘 나라의 형편이 참으로 위태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신 등이 전하의 지시를 받들어 
실행해야 하나 재능이 부족하여 황송할 뿐이옵니다."
  영의정 심순택도 비감한 심정을 억제하지 못하고 울분을 토로했다. 
  "이렇게 다른 나라의 모욕과 위협을 당하고 있으니 나라 형편이 어떤지 알 수  있으며 말
하기조차 부끄럽소. 오직 분발하고 정신을 차려야  강해질 수 있을 것이오."  "개혁에  대한 
지시를 여러 번  받았습니다. 그러나 아직까지도 세금  한 가지를 줄이거나 폐단 하나 고친 
적이 없으니 아무리 개혁을 하려 해도 할 수가 없사옵니다."  김홍집의 말이었다. 그러나 온
건 개화주의자라는 김홍집도 개혁에 대한 안을 내세우지 못하고 있었다. 
  일본이 내세운 5개 조항은 다음과 같은 것이었다. 
  1. 중앙 정부의 제도와 지방 제도를 개정하고 인재를 등용할 것.
  2. 재정을 정리하고 자원을 개발할 것. 
  3. 법률을 정비하고 재판법을 개정할 것.
  4. 국내의 민란을 진정하고 안녕을 유지하는 데 필요한 병력과 경찰을 신설할 것.
  5. 교육제도를 확립할 것. 
  세부 조항으로 나누면 모두 26개 항목이었다. 오토리 공사는  이 항목들을 3일 이내에 의
논하여 10일 이내에 실행하는 것을 갑,  6개월 이내에 실시하는 것을, 2년 이내에  실행하는 
것을 병으로 세분화했다. 그리고는 6월 7일까지 회답을 받고 싶다고 요구했다. 그러나  조선
에서는 아무 반응이 없었다. 오토리 공사는 다시 8일 정오까지 회답하라고 엄중하게 통고했
다. 
  조선 조정은 일본의 요구에 어쩔  수 없이 중추부판사 김홍집을  총리교섭통상사무겸찰에 
임명해 일본과의 교섭을 지휘하게 했다. 6월 9일 조선 조정은 내무독판 신정희와 협판 김종
한, 조인승을 내세워 회담하게 했다. 그리고 일본에 그 사실을 통지했다. 
  "무단으로 대군을 앞세워 인국의 왕성을 포위하여 총검으로 위협하는 행위는 국제적 신의
와 이웃 나라의 화친에 상처를 입히는 것이다. 회담을 하는 대신들에게는 의결의 전권이 주
어져 있지 않으므로 결정 사항은 모두 조정 대신들의 총의에 의하지 않으면 안된다."  조선
이 오토리 공사에게 보낸 통지문이었다. 통지문은  일본의 야만적인  행위를 규탄하고 있었
다. 조선 조정으로서는 마지막 발버둥 같은 것이었다. 
  6월 8일 남산 기슭에 있는 노인정에서 회담이 열렸다. 
  "타국이 내정 개혁을 일본이 기한부로 강요하는 것은 주권을 무시한 명백한  내정 간섭이
다. 나는 본 회담의 취지에는 전혀  찬성할 수 없으므로 단지 참고를 위해  청취할 뿐이다."  
신정희는 개회 인사에서 내정 개혁 요구에 찬성할 수 없다는 입장을 분명히 했다. 
  "이 회의는 내정 간섭이 아니라 개혁 권고이다. 조선  정부에서 실천할 의지가 있고 없음
에 관계없이 우리 일본의 목적 관철에  대한 신념은 추호도 변함이 없다!"   오토리 공사는 
무력을 동원하겠다는 뜻을 분명히 했다. 노인정 회담은 세  차례에 걸쳐 진행되었으나 조선
은 일본의 제안을 완강히 거부했다. 
  오토리 공사는 다시 4개조의 요구 사항을 조선에 통고했다. 
  1. 경부간의 군용전선 가설을 일본 정부 스스로 가설한다. 
  2. 조선 정부는 제물포조약에 의거해 즉시 일본군을 위한 병영을 건축할 것.
  3. 아산의 청군은 옳지 못한 명분으로 파병한 것이므로 즉시 철수시킬 것. 
  4. 청한수륙무역장정 등 조선의 독립에 저축되는 청나라와의 조선의 모든 조약은 즉시 폐
기할 것.
  조선으로서는 어떠한 것도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었다. 
  오토리 공사는 무쓰 외무대신에게 대조선 강경책을 상신했다. 
  <조선의 내정 개혁을 구실로 병력을  동원하여 조선 궁궐을 점령한  뒤에 개전의 구실을 
종속 문제에서 찾아야 할 것으로 사료됨.>
  이에 대해 무쓰의 회신도 강경했다. 
  <청일의 충동을 재촉하는 것이 오늘의 급선무이므로 어떠한 수단이라도 취하라.
  시기가 맞았으니 공사는 스스로 정당하다고 인정되는 모든 수단을 취하라.
  일체의 책임은 내가 질 터인즉 공사는 추호도 염려할 필요가 없음.
  공사는 이제 단호한 조치를 취할 필요가 있다. 
  공사는 충분히 주의하여 외국의 비난을 초래하지  않을 만한 구실을 택하여 실제  행동을 
취하라. 
  공사가 요구한 상신안 중, 군대를 동원하여 조선의 왕궁을  점령하는 것이 득책이 아니라
고 판단되면 결행하지 않아도 좋다.>
  무쓰가 오토리 공사에게 보낸 훈령들이었다. 그러나 조선에 주둔하고 있는 일본군의 기세
는 일본 정부보다 더욱 강경했다.  스기무라 서기관은 인천에서 혼성여단의  살벌한 기세에 
일본인이면서도 깜짝 놀랐다. 그는 그때  비로소 조선을 집어삼키기 위한  청일전쟁이 이미 
시작되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2  일본의 대조선 정책에는 언제나  정치인들에 대한 위협과 매수공작이  병행되고 있었다. 
일본의 경복궁 점령사건이 터지기 전후에도 매수공작이 치밀하게 전개되었다. 
  한편 일본군의 경복궁 점령이 임박해지자 혼성여단은  남산봉화대 밑에 포대를 설치했다. 
그들은 성을 허물어 군사도로를 만들고 부대를 주둔시켰다. 또한  북악산 중턱에 포를 설치
하여 경복궁을 사정거리 안에 넣어 버렸다. 
  이에 대해 조선의 외무대신 조병직이 격렬히 항의했으나 일본은 들은 체도 하지 않았다. 
  민비는 원세개를 경복궁으로 불러 들였다. 
  "원대인, 일본이 우리 경복궁을 둘러싸 버렸소. 대체 조선의 상국이라는  청나라는 어찌할 
작정이오? 원대인께서 대책을 말씀해 보세요!"
  민비의 음성은 울음이 터질 것 같았다. 
  "송구하옵니다. 일본은 저희 청국과의 개전을 할 요량인 듯 하옵니다."  원세개는 잔뜩 풀
이 죽어 있었다. 
  "청국과 개전을 하기 전에 우리 조선이 먼저 결판이 나게  생겼소! 일본이 조선을 침략하
면 청국에서 30만 대군을 보내 구원하겠다더니 모두 거짓이었소?"  "중전마마, 저희 대청제
국도 최선을 다하고 있사옵니다."  "최선을 다하고 있는 것이 이 꼴이란 말이오? 일본이 남
산과 북악에 포를 설치하지  않았소? 일본군이 포를 한 방만 쏘아도 경복궁은 불바다가 될 
것이라는 사실을 왜 모르시오?"  "중전마마! 조선은 개혁의 시기를 놓쳤습니다. 갑신정변 이
후 10년이 지났는데도 무엇 하나 개혁한 것이 없지 않습니까? 조정은 썩어 문드러져 탁상공
론이나 하고 있고 민씨 척당들은 매관매직이나 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이러한 때에 일본군
을 맞이하였으니  어찌 감당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청나라는 지금까지의 우의를 생각하
여 조선의 사태를 결코 방관하지 않을 것입니다. 증원군을  요청하였으니 곧 당도할 것입니
다."  원세개는 분연히 외치고 청군 막사로 돌아가 버렸다. 
  (저, 저런 발칙한 놈!)
  민비는 발을 동동 굴렀다. 그러나 마땅한 대책이 없었다. 
  일본군은 그 동안에도 용산 부근에 병영을  설치하고 포병중대를 왕궁 부근의 넓은  땅에 
배치했다. 이 포병중대의 배치는 왕궁의  점령과 한성 제압으로 아산에서  올라올지도 모를 
청군을 격퇴하기 위한 요지로서의 비중도 크게 차지하고 있었다.  성안의 조선군에 대한 위
압과 성밖의 청군으로부터의 공격에 대비한 양면작전이었다. 
  [우리 군사들은 이미 한성, 인천의 군사적 요충을 점령하고 막사를 설치하여 공격 명령만 
기다리고 있음.]
  일본군이 대본영에 보고한 내용이었다. 
  [또 한강의 수로를 장악하여 제해권을 아군이 갖는 동시에 한성  동서로의 제도로를 차단
하여 한성의 사활이 우리 손에 있음.]
  나가오카 가이시가 참모본부에 보고한 내용이었다. 
  [여단 목하의 책략은 먼저 아산에서 오는 청군을 치고 다음에 의주가도의 청군을 치는 책
략이다.]
  여단의 보고였다. 
  일본군은 6월 15일부터 행군을 하기 시작했다. 경복궁  점령의 예행연습인 동시에 조선인
들을 위협하기 위한 시위에 그 목적이 있었다. 
  6월 17일부터 조선의 4대문을 일본군의 지키기 시작했고 6월 18일에는 일본군이 왕궁 앞
에서 훈련을 하면서 총을 쏘아대는 바람에 조선인들이 놀라서 뿔뿔이 흩어져 달아났다. 
  원세개는 조선의 실정을 이홍장에게 알리기 위해 인천을 경유하여 청나라로 돌아갔다. 그
러나 그것은 청일전쟁으로부터의 도피였다. 
  일본의 동태가 긴박하게 돌아가자 민비는 초토사 홍계훈을 불렀다. 일본군이 들이닥칠 때
를 대비하여야 했다. 
  "원로에 고생이 많았소. 임오년에도 홍 정령관으로 인하여 죽을 목숨이 살았는데 이제 다
시 홍 정령관의 도움을 받아야 하겠소."
  민비는 홍계훈이 부복하자 눈물을 글썽이며 입을 열었다. 
  "황공하옵니다."
  "일본군이 도성의 4대문에 번을 서고  왕궁을 향해 대포를 겨누고 있소."   "중전마마, 신 
등이 불충한 탓이옵니다."
  "일본이 종사를 위협하고 있는데도 조정 대신들은 하나같이  대책을 세우지 못하고 있소. 
개혁 개혁하면서도 개혁을 실행하지 않으면서 모든 책임을 우리 민문에만 전가하고  있으니 
이런 무법한 일이 어디 있소? 내가 언제 개혁을 반대하기라도 하였소?"  "......"
  "나는 요즈음 잠을 이루지 못하고 있소. 주상전하는  어린애처럼 심약하고 어질기만 하시
어 왕정을 제대로 세우지 못하고 계시오. 사람들이 나를 일컬어 발을 치고 주상전하를 조정
한다느니, 민씨 세도를 부린다고 헐뜯는데 주상전하께서 동주철벽의 굳센 의지로 정사를 보
신다면 내가 무엇 때문에 정사에 참여하겠소? 모두 이 나라 종사와 주상전하를 위하여 온갖 
욕과 모함을 받고 있는 것을......"
  "......"
  "나도 평범한 궁중 아녀자로  지내고 싶소, 그러나 시국이  나를 그냥 두지 않는구려......"   
민비가 치마자락으로 눈물을 찍어냈다. 홍계훈이 언뜻 고개를 들자 대홍단 치마자락 속으로 
눈처럼 흰 속옷 한 자락이 보였다. 홍계훈은 재빨리 고개를 떨구었다. 
  "나라가 누란의 위기에 빠져 있소. 내 목숨이라도 바쳐서  백척간두에 선 우리 왕조가 반
석 위에 설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소......?"
  민비가 다시 눈물을 찍어내기 시작했다. 홍계훈은 목이 메여왔다. 
  "중전마마."
  홍계훈이 고개를 번쩍 들었다. 
  민비가 눈물에 젖어 있는 얼굴로 홍계훈을 똑바로 응시했다. 
  (아!)
  홍계훈은 가슴이 방망이질을 하듯이 뛰었다. 아름다운 얼굴이었다. 눈물에 촉촉이 젖어 있
는 두 눈이 한 쌍의 흑진주처럼 반짝거리고 있었다. 
  "홍 정령관!"
  민비의 목소리는 정인을 대하듯이 다감했다. 
  "예, 중전마마."
  홍계훈의 목소리가 격정으로 떨렸다. 
  "일본군을 물리쳐 주시오."
  "중전마마, 신 홍계훈 신명을 다 바쳐 일본군을 물리치겠나이다."  홍계훈이  머리를 깊숙
이 숙이고 대답했다. 
  "고맙소."
  민비가 애잔한 미소를 떠올렸다. 
  홍계훈은 경복궁에서 나오자 즉시 장위영과 총위영으로 달려가  군사를 소집했다. 6월 20
일 밤이었다. 한성은 칠흑같이 어두운 가운데 굵은 빗줄기가 장대질을 하고 있었다. 
  "장위영과 총위영 군사들은 듣거라! 일본군은 무엄하게도 우리의 국왕전하와 영명하신 중
전마마를 위협하고 있다!"
  홍계훈은 눈을 부릅뜨고 도열한 장위영 병사들과 총위영 군사들에게 소리를 질렀다. 
  "바야흐로 국가의 명운이 우리의 두 손에 달려 있다! 우리가  비록 일본군에 비해 숫자는 
적으나 죽기를 무릅쓴다면 무엇이 두렵겠는가?"
  "......"
  "제군들은 나와 함께 사생을 맹세하겠는가?"
  "맹세합니다!"
  군사들이 일제히 대답했다. 
  "우리가 비록 천류에 지나지 않는다 하더라도 국은을 입었는데 어찌 결사의  각오로 보국
충정을 맹세하지 않겠습니까? 우리는 죽기를 맹세합니다!"  "맹세합니다!"
  "좋다! 지금부터 장위영 군사들과 총위영 군사들은  왕궁 수비에 들어간다! 한 사람의 낙
오자도 없이 각 영관의 지휘하에 왕궁을 둘러싸라!"
  "복명!"
  "복명!"
  군사들이 일제히 대답을 하고 무기고로 뛰어갔다. 
  (하늘이여, 무너져 가는 이 왕조를 도우소서!)
  홍계훈은 캄캄하게 어두운 하늘을 쳐다보고 비감하게 외쳤다. 
  그러나 그 시각 일본군은 이미 행동을 개시하고 있었다. 일본 공사관에는 밤 10시부터 오
토리 공사, 스기무라 서기관, 오오시마 소장과 후쿠시마 중좌,  와다나베 소좌 등이 모여 있
었다. 
  억수같이 쏟아지는 빗줄기를 무릅쓰고 대원군이 있는 운현궁으로 가는 자도 있었고, 밀서
를 가지고 일본 공사관으로 들어오는 자도 있었고, 낭인들을 모으는 자, 만리창에서  달려온 
사자, 우위와 깊숙한  모자를 쓰고 왕래하는  무인, 등불 든  행인들에게 수하를 하는  병사
들...... 일본은 군민이 일체가 되어 조선의 왕궁 습격 준비에 부산했다. 
  6월 21일 새벽 0시 30분 오토리 공사는 마침내 혼성여단에 대해 경복궁 점령계획을 실행
하도록 지시했다. 경복궁 점령의 현지 지휘관은 보병 제21연대  연대장 타케다 히데노부 중
좌였다. 
  일본군은 새벽 4시가 되자 두 방향으로 경복궁을 향해 진격했다. 보병 11연대는 서대문으
로부터 진입하여 곧장 경복궁의 외곽을 둘러쌌다.  제21연대는 서소문으로부터 진입하여 일
대를 백악에 매복시키고 다른 일대를 경복궁의 동쪽  고지에 포진시켰다. 제21연대 1대대의 
대대장 모리 소좌는 영추문(경복궁의 서문)에 이르렀다. 
  그러나 영추문은 굳게 닫혀 있었다. 
  "오잇! 대포를 끌고 와라!"
  모리 소좌의 명령에 억수같이 쏟아지는 빗줄기를 뚫고 병사들이 대포를 끌고 왔다. 
  "쏴라!"
  모리 소좌는 계속 군도를 휘두르며 살벌한 명령을 내렸다.  영추문이 부서져 나가고 성곽
이 와르르 무너져 내렸다. 
  "돌격!"
  성문이 부서져 나가자 모리 소좌가 돌격 명령을 내렸다. 그러자 일본군이 와 하는 함성을 
지르며 영추문으로 달려들어갔다. 
  보병 제21연대도 영추문에 도착하여 제3중대를 경복궁의  서쪽에, 제6중대를 동쪽에 배치
했다. 그때 조선의 시위대(장위영) 병사들이 치열한 사격을 가해  왔다. 연대장 타케다 중좌
는 1중대를 더 투입하여 조선군에게 맹렬한 사격을 해댔다. 
  제11연대는 연대장이 니시지마 중좌였다. 니시지마 중좌는  용산의 일본군 막사를 지키고 
11연대의 제2대대를 출동시켰다. 제2대대는 용산 만리창 막사를  새벽 4시에 출발하여 광화
문으로 향했다. 하시모토가 지휘하는 일대는 창화문(북문) 일대로 진격했다. 
  그러나 그들이 창화문에 가까이 이르렀을 때 매복하고 있던 조선군들이 일제히 사격을 개
시해 왔다. 
  "적이다!"
  "조선군이다!"
  하시모토 소좌는 말 위에서 군도를  뽑아 들었다. 비 때문에  새벽 5시가 가까워지는데도 
사방이 칠흑처럼 캄캄했다. 조선군은 어둠 속에 은신하여 맹렬한 사격을 해댔다. 전위에  섰
던 일본군들이 피를 뿌리며 죽어갔다. 
  "오잇! 후퇴하지 말고 돌격하라!"
  하시모토 소좌는 군도를 휘두르며 악을  썼다. 그러나 일본군은 조선군의  치열한 사격에 
우왕좌왕하고 있었다. 
  "대포를 쏴라! 조선군을 대포로 박살 내라!"
  하시모토 소좌는 눈에 핏발을 세우고  일본군을 독려했다. 이내 요란한  포성이 울리면서 
창화문 일대에서 포탄이 작렬했다. 그러나  조선군은 꼼짝도 하지 않고  일본군을 격퇴하고 
있었다. 
  경복궁 시위대는 조선의 최정예 병사들이었다. 그들은 주력이  평양에서 훈련받은 5백 명
으로 편성되어 있었다. 일본군이 광화문과  영추문을 포탄으로 부수는 사이  비상소집 되어 
최초의 습격 지점인 창화문에 주력이 배치되어 필사적으로 일본군을 격퇴하고 있었다. 
  이 틈에 일본군 제21연대는 경비가 소홀해진 영추문을 돌파하여 건청궁으로 달려갔다. 건
청궁에는 고종과 민비의 침전인 곤령합이 있었다. 
  곤령합 밖에는 약 50명 안팎의 시위대 병사들이 번을 서고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일본군
이 달려 들어오자 뛰어 나가 치열한 전투를 벌이다가  일본군에게 전멸되었다. 곤령합을 지
키는 병사들이 일본군에게 순식간에 전멸을 하자 궁녀들과 환관들이 고종과 민비를 에워 샀
다.  "이럴 수가, 이럴 수가 있는가......?"
  고종은 당황하여 얼굴이 사색이 되었다. 궁녀들과 환관들이 비명을 지르며 아우성을 쳐댔
다. 일본군이 쏘는 탄환이 곤령합까지 빗발치듯 날아오고 있었다. 
  "멈춰라!"
  이내 일본군이 곤령합을 빽빽하게 에워싸자 모리 소좌가 사격중지 명령을 내렸다. 
  일본군은 궁녀들과 환관들을 밖으로 끌어내고 고종과 민비를 포로로 잡았다. 
  "폐하!"
  모리 소좌가 고종에게 부동자세로 거수경례를 했다. 그러나 일본군들은 고종에게 총과 칼
을 겨누어 위협적인 분위기였다. 
  (조선이 망하고 있는 게야......)
  민비는 피가 나도록 입술을 깨물었다. 
  "시위대에게 전투를 중지하라는 어명을 내리십시오"
  "전투중지?"
  "일본군은 이미 경복궁을 점거했습니다. 더 이상의 전투를 하는 것은 무모합니다."  "그렇
게 하라!"
  고종은 공포에 몸을 떨면서 어명을 내렸다. 
  고종의 전투중지 명령은 즉시 시위대에 하달되었다.  창화문 일대에서 치열하게 일본군을 
격퇴하고 있던 조선군 병사들에게는 청천벽력 같은 왕명이었다. 
  "전하!"
  "전하! 어찌하여 이런 왕명을 내리시옵니까?"
  시위대의 일부 병사들은 통곡을 하며 총통을 부수고 군복을 찢어버린 다음 경복궁을 탈출
했다. 
  시위대의 병사들은 신남영에 주둔하고 있다가 건춘문(경복궁  동문)으로 들어와 일본군과 
싸우고 있었다. 시위대의 무기로는 독일의 연발총도 있었고 전투의욕도 왕성했다. 이 때문에 
일본군은 관문각(동문 안)에서 시위대의 맹렬한 저항에 30분 동안이나 고전을 해야 했다. 
  시위대에 내린 고종의 전투중지 명령은 병사들에게 피눈물을 흘리게 했다. 그러나 국왕인 
고종의 왕명을 거역할 수는 없었다. 
  시위대 병사들은 백악 방향으로 철수하면서 일본군을 만나면 닥치는 대로 사살했다. 산발
적인 전투가 계속되었으나 시위대의 병사들은 경복궁을  탈출하여 평양으로 돌아갔다. 이들
은 청일전쟁이 발발하자 곧바로 청군에 가담하여 일본군과 맹렬하게 싸우게 된다. 
  일본군이 경복궁을 완전히 점령한 것은 6월 21일(양력 7월 23일) 오전 7시 30분이었다. 
  일본군의 경복궁 점령 소식은 한성의 조선군 각 부대에 전달되었다. 
  "일본군이 경복궁을 침입했다!"
  "일본군이 국왕전하를 볼모로 잡고 있다!"
  비통한 소식은 비바람처럼 각 부대로 날아왔다. 
  "일본군이 조선군을 해산시키려고 한다!"
  조선군은 크게 술렁거렸다. 
  "우리가 비록 보잘 것 없는 군사에 지나지 않으나 왕궁의 유린 소식을 듣고  어찌 이대로 
물러설 수 있는가? 죽기를 맹세하고 싸웁시다!"
  "옳소!"
  "일본군과 싸웁시다!"
  6월 21일 오후 1시 일본군 11연대가  친군 통위영을 접수하러 왔으나 조선군은  맹렬하게 
저항했다. 일본군은 통위영을 에워싸고 포격하여 점령했다. 
  6월 21일 오후 3시 30분에는 창경궁  홍화문 앞의 친군 총위영에서도 조선군은  맹렬하게 
저항했다. 그러나 일본군은 총위영까지 포탄을 쏟아 부어 점령했다. 
  일본군은 마침내 조선군의 무장해제에 착수하였다. 경복궁과 한성에 있던 각종 대포 30문, 
기관포 8문, 소총 3천 정, 방대한 수량의 탄약, 경복궁에 있는 수많은 보물을 약탈해 갔다. 
  "이 무기를 무엇 때문에 약탈해 가는가? 그대들은 군대인가 비적들인가?"  고종과 민비는 
일본군이 무기를 약탈해 간다는 보고를 받자 손수 무기고까지 나와서 일본군 장교를 비난했
다. 
  "우리는 상부의 명령에 따를 뿐입니다."
  "닥쳐라! 지금 외무독판이 일본 공사관에 가서 협상을 벌이고 있으니 약탈하는 것을 멈추
어라!"
  민비는 피눈물을 흘리듯이 절규했다. 그러나 일본군은 아무 대꾸도 하지 않았다. 조선군의 
무장해제로 한성과 경복궁에는 단 한 명의 조선군도 없는 비참한 상태에 몰려 있었다. 
  일본군이 경복궁에서 탈취한 각종  무기와 보물은 워낙  방대한 양이라 일본군  수송병이 
240명이 동원되었으나 그것도 부족해서 병참부에서 50명의 인원과 야전병원의 인원까지  동
원해서 운반했는데, 6월 21일과 6월 22일 이틀에 걸쳐서 운반했을 정도로 방대한 양이었다. 
  일본은 조선군의 무장해제를 전국으로 확대해 갔다. 
  한편 경복궁 점령과 동시에 대원군을 추대하는 공작도 병행되었다. 스기무라 서기관은 대
원군의 시종들에게 막대한 공작 자금을 뿌렸다. 그러나 대원군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일본은 경복궁을 점령하기 전부터 대원군 추대공작을 벌이고 있었다. 일본은 개화파(친일파)
를 지도할 마땅한 인재를 찾을 수가 없어서 대원군을 추대하려고 했던 것이다. 
  6월 20일 밤 운현궁에는 일본인들로 들끓고 있었다. 낭인 오카모토 류우노스케, 경부 하기
하라 히데지로오가 경관들을 이끌고 대원군의 방으로 쳐들어갔다. 
  대원군은 오카모토의 제의를 완강히 거부했다. 오카모투는 조선을 개혁하기 위해 민씨 일
족을 내쫓고 대원군에게 대정을 맡기겠다고 했다. 
  "그대들은 외국인이며 우리 조선 왕실에 이러쿵저러쿵 간섭을  해서는 안된다. 내가 그대
들의 말을 듣기는 하나 대답할 필요는 없다. 두 번 다시 말하지 마라!"  대원군은 오카모토
의 제안을 일언지하에 거절하고 입을  다물어 버렸다. 오카모토는  온갖 감언이설로 대원군
을 설득했으나 대원군은 요지부동이었다. 
  하기하라 히데지로오는 무력을 동원할 것을 요구했다.  그러나 오카모토는 하기하라를 제
지했다. 
  "이렇게 권고를 해도 응해 주시지 않는다면 이 설득의 대임을 맡은 저는 일본  정부에 사
회하기 위해 여기서 할복하겠습니다."
  오카모토는 날이 퍼런 일본도를 뽑아서 대원군 앞에 놓았다. 
  오카모토는 철저한 대륙낭인이었다. 일본에서의 활동 외에도 갑신정변에도 개입했고, 김옥
균이 상해에서 암살되었을 때는 일본에 돌아가 김옥균 시신의 귀환운동, 추모대회에 참여했
다가 동학 농민전쟁이 발발하자 급거 조선으로 돌아와 정보 취합에 열을 올리고 있다가 경
복궁 점령사건에 개입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대원군은 눈을 질끈 감고 미동도 하지 않고 있었다. 
  <대원군은 우리의 권언을 완강하게 거부하고  있음. 무리를 해서라도 대원군을  유인하여 
입궐하게 하려고 함. 명령을 기다림.>
  오카모토는 오토리 공사에게 전령을 보냈다. 
  <긴급을 요하므로 다소 무리가 있더라도 입궐하게 하라. 오로지 최대한으로 빨리 그 목적
을 달성하라.>
  오토리 공사에게서 오카모토에게 온 회신이었다. 
  오카모토는 계속해서 대원군을 설득했다. 그러나 대원군은 날이 꼬박 밝았으나 미동도 하
지 않았다. 
  운현궁에는 점점 많은 일본인들이 모여들었다. 일본의 군인, 공사관 직원,  경찰관, 민간인
들이 들이닥쳐 시끌벅적했다. 일본인들은 대원군을 강제로 끌고 가려고 가마까지 준비해 놓
고 있었다. 
  그때 스기무라 서기관이 들이닥쳤다. 
  "아무리 천언만어를 하여도 그대들의 권설에 따를 수 없다! 그대들은  나를 더 이상 이용
하려고 하지 마라!"
  대원군은 스기무라에게도 강경하게 거절했다. 
  (과연 조선의 호랑이, 아니 동양의 호걸이다! 75세의 노인인데도 우리가 밤을 꼬박 세우며 
설득했으나 자신의 뜻을 굽히지 않고 있지 않는가?)
  스기무라 서기관은 대원군에게 경외심을 느꼈다. 사람들이  대원군에게 태산 같은 위엄이 
있다고 말한 까닭을 이제서야 알 것 같았다. 그러나 머뭇거리고 있을 시간이 없었다. 스기무
라 서기관은 비장의 카드를 내놓았다. 
  이제 날이 밝았습니다. 새삼스럽게 다시  말하지 않겠습니다. 만약 우리의 권고에  따르지 
않으면 종사의 안위가 어떻게 될 지 알 수 없는  일입니다."  그것은 일본의 요구를 거절하
면 최악의 사태를 맞이할 것이라는 은근한 협박이었다. 대원군의  눈이 그때서야 크게 떠졌
다. 가슴까지 내려온 하얀 턱수염이 노기로 부들부들 떨렸다. 
  "그것은 무슨 뜻인가?" 
  대원군의 두 눈에서 살기에 가까운 안광이 폭사되었다. 스기무라는  그 눈빛에 전신이 오
그라드는 듯한 기분을 느꼈다. 
  "우리는 이미 군대를 동원하여 한성과 왕궁을 점령했습니다.  군대란 총칼을 사용하는 집
단이므로 무슨 짓을 저지를지도 모른다는 뜻입니다."
  "그대들의 목적이 무엇인가?"
  대원군은 어금니를 꽉 깨물었다. 
  "우리는 조선의 내정을 개혁하려는 것뿐입니다. 무리한 수단이 동원되기는 하였지만 이것
은 조선을 위한 의거입니다."
  "의거?"
  "그렇습니다. 의거입니다."
  "민란을 일으킨 자들도 의거라고 하더니 그대들도 의거인가? 망해 가는 이 나라에 충신열
사도 많고 의도 많구나!"
  대원군이 허공을 쳐다보며 앙천대소를 터뜨렸다. 마치  호랑이가 포효하는 듯한 목소리였
다. 스기무라는 기가 질려 멍청한 표정을 지었다. 
  "그대들이 스스로 의거라고 말한다면, 그대는 일본 황제를 대신하여 일이 성사된 후 우리 
조선의 땅을 촌지도 할양하지  않는다고 약속할 수 있는가?"   "저는 서기관의 신분입니다. 
저에게 그런 권한은 없으나 조선의  땅을 한 치도 할양할 계획이 없다는 것은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문서로써 약속할 수 있는가?"
  "약속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문서로 약속하라."
  "알겠습니다."
  스기무라는 즉시 종이와 붓을 준비하여 문서를 써서 대원군에게 바쳤다. 
  <일본 정부의 거사는 진실로 의거에서 나왔으므로 일이 성사된  후에 결코 한 치의 조선 
땅도 일본을 위해 분할하지 않을 것입니다.>
  대원군은 스기무라가 쓴 문서를 일람했다. 
  "나는 이제 그대의 문서를 믿고 입궐하겠다. 그러나 신하의 신분이기 때문에 국왕의 부르
심이 있지 않으면 입궐할 수 없다. 국왕의 윤지를 받아와라."  스기무라는 할 수 없이  호즈
미를 조의연의 집으로 급파하여,  조의연에게 국왕의 윤지를 받도록 했다. 
3  무대는 다시 일본군 점령하의 경복궁으로 돌아간다. 
  고종은 탈진하여 경복궁 곤령합의 어좌에 앉아 있었다. 곤령합을 빽빽하게 에워싼 일본군
은 민비까지 밖으로 내몰고 살기 등등한 눈빛으로 고종을  위협하고 있었다. 6월 21일 새벽
의 일이었다. 
  고종은 일본군들의 위협에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었다. 일본군에게는 미처  통역이 붙어 
있지 않은 상태였다. 곤령합까지 에워싼 일본군은 전투중지 명령만을  내리게 한 뒤 통역까
지 내보냈던 것이다. 
  빗발은 여전히 쏴아 소리를 내며 하얗게 쏟아지고 있었다.  하늘은 아직도 암울한 잿빛이
었다. 
  고종은 비통했다. 그의 옆에는 민비도 붙어있지 않았다. 
  경복궁을 점령한 일본군은 조선 왕실의 귀중한 보물을 약탈하기에 바빴다. 고종의 지시로 
전투를 중지한 시위대 병사들이 경복궁을 탈출한 뒤가 대궐에는 조선군 병사들이 하나도 없
었다. 일본군은 조선군 시위대가 없는 경복궁을 종횡으로 누비고 다니면서 어전인 곤령합까
지 군화발로 마구 짓밟고 있었다. 고종은 넋을 잃고 일본군의 무도한 만행을 지켜보고 있을 
뿐이었다. 
  일본군의 타케다 중좌는 칼을 뽑아 들고 고종을 윽박지르고  있었다. 그러나 고종은 일본
군 중좌가 무엇이라고 떠들어대는지 알 수 없어서 불안한 눈으로 번뜩이는 일본도만 쳐다보
고 있었다. 그때 우포도 대장인 안경수가 어전으로 달려 들러왔다.
  "전하!" 안경수가 고종의 어전에 부복했다. 
  "오! 우포도대장!" 고종의 큰 눈에서 눈물이 주르르 흘러내렸다. 
  "전하! 신의 불충이 하늘에  이르고 있음이옵니다. 신에게  마땅한 처분을 내리시옵소서."  
"이제 와서 그런 말이 무슨 소용이 있는가? 경은 일어에 통하니 일본군 장교가  무엇이라고 
하는지 알 수 있을 것이다."
  "전하! 황공하온 말씀이오나 일본군은 국태공 저하를 들게  하시어 만기를 주재하라 하고 
있사옵니다." "아버님을?" 고종의 얼굴이 핼쓱해졌다. 그때 유길준이  황급히 들어와 부복했
다.  "그러하옵니다."  "아버님을 무엇 때문에 입궐하라는 것인가?"
  "조선의 내정을 개혁하기 위해서라고 하옵니다."
  "조선의 내정을 일본에서 개혁을 해? 우리의 내정을 우리가  개혁한다고 하지 않았는가?"  
"일본은 조선을 믿고 있지 않사옵니다."
  "그러하옵니다. 전하께옵서는 임시로 대정을 국태공  저하에게 맡기셨다가 다시 광정하실 
수 있사옵니다."
  "전하. 오늘의 사변은 국태공 저하만이 수습할 수 있사옵니다. 서둘러 국태공 저하를 입궐
하게 하시옵소서."
  안경수와 유길준은 번갈아 가며 고종에게 주청하였다.  그들이 보기에도 대원군이 아니면 
오늘의 일이 수습되지 않으리라고 본 것이다. 
  "별전에서 중전을 들라고 하라."
  고종의 목소리가 처량했다. 안경수와 유길준은 서로 얼굴을 마주보았다. 고종이 이 다급한 
순간에도 민비를 찾고 있는 것인가, 고종이 왕비를 저토록 사랑하고 있는 것인가....... 그들은 
똑같이 그런 생각을 했다. 
  그때 소례복 차림인 민비가 궁녀 둘을 거느리고 어전에  나타났다. 일본군들이 재빨리 민
비의 앞을 총검으로 가로막았다. 
  "비켜라!"
  민비의 입에서 싸늘한 일갈이 터졌다. 일본군들은 주춤했다. 그러나 조선말을 알아듣지 못
하는 일본군들은 여전히 민비를 가로막고 있었다. 일본군의 총에  꽂혀 있는 대검은 민비의 
가슴께를 겨누고 있었다. 
  (아!) 안경수는 몸이 부들부블 떨렸다. 여차하면 일본군의 대검이 민비의  가슴을 찔러 버
릴지도 모를 순간이었다.  "비키라고 하지 않느냐?"
  민비가 다시 소리를 버럭 질렀다. 민비의 눈에서는 얼음이라도 녹여 버릴 것 같은 안광이 
무시무시하게 폭사되고 있었다.  "나는 이 나라의 왕비이자 국모니라!"
  민비가 자신의 가슴을 겨누고 있는 대검을 맨손으로 움켜잡았다. 
  "중전마마!" "중전마마!" 민비의 뒤에 서 있던 궁녀들의  입에서 뽀죽한 비명이 터져 나왔
다.  민비의 손에서 피가 주르르 흘러 내렸다.  "멈춰라!"
  그때 타케다 중좌가 황급히 소리를 질렀다.  "조선의 왕비다! 앞을 가로막지 마라!"
  "핫!" 타케다 중좌의 지시에 일본군이 민비에게서 총을 거두고 부동자세를 취했다. 
  "중전!" 고종이 어좌에서 몸을 일으켰다. 
  "중전마마!" "중전마마!"
  궁녀들이 마루 위에 쓰러지며 오열을 터뜨렸다. 안경수와 유길준도 눈시울이 뜨거워져 왔
다.  "나 아직 죽지 않았느니라. 울고 싶으면 나 죽은 뒤에 울도록 하라!"  민비가 궁녀들에
게 눈을 흘기고 고종의 옆에 가서 앉았다.  민비의 손에서는  아직도 선혈이 방울방울 떨어
지고 있었다.  "중전!" 고종이 목이 메인 음성으로 민비를 불렀다. 
  "전하." 민비는 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밖에는 여전히 천둥 번개를  동반한 세찬 빗줄기
가 몰아치고 있었다.  "대원군을 입궐하게 하여 대정을 맡기십시오."
  "아버님께서...... 중전을......"
  고종은 차마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대원군에게 정권을 맡기면  민비의 위치를 보장할 수 
없게 되는 것이다. 민비가 폐서인으로 축출될 수도 있고 죽음을 당할 수도 있는 것이다. 
  "전하. 신첩의 일은 조금도 심려하지 마십시오. 왕실과 조선을 위해서라면 이 한  목숨 기
꺼이 바치겠사옵니다." 민비의 눈에서 눈물이 주르르 흘러내렸다.  고종은 민비의 품에 쓰러
지듯  안기며 오열을 터뜨렸다. 
  <종사의 안위가 위급지경에 이르렀으니 국태공은  서둘러 입조하여 호국지책을 세우라.>  
고종은 마침내 대원군에게 입궐하라는 영을 내렸다. 오전 11시가 가까운 시간이었다. 대원군
은 왕명을 받고서야 근정전으로 입궐하여 고종을 만났다. 
  "아버님!" "주상!"
  고종이 대원군을 보자 엎드려 절을 하며 통곡을 했다. 대원군은 고종을 일으켜 세우며 같
이 오열했다. 
  <이제 정무는 모두 대원군에게 품결하여 처결하라.>
  고종은 일본군의 요구대로 정권을 대원군에게 위임했다. 
  그러나 조선 조정은 일본의 손아귀에 들어 있었다. 경복궁을  점령한 일본군은 각 궁문마
다 보초를 세우고 이름을 조사하여 대신들을 입궐시켰다. 김홍집, 김병시, 조병세, 정범조 같
은 원로대신들이 일본군의 허락을 받아  입궐했다. 그러나 친청당이라는 낙인이  찍혀 있는 
심순택은 조방(대신들이 조회를 기다리는 방)에  3일 동안이나 갇혀 있다가  간신히 입궐할 
수 있었다. 
  대신들이 문안을 끝내자 각 국 공사들이 들어와 고종에게 문안을 하였다. 
  외국 공사들은 한결같이 고종에게 불편한 일이 없느냐고 묻고,  일본군의 감시를 받고 있
는 고종은 불편한 일이 없다고 대답했다. 
  일본군은 경복궁을 점령하던 6월 21일 밤에 청일전쟁이 불가피하다는 사실을 알리는 선전
문을 대량 배포하였다. 그 선전문은 청일전쟁이 정의로운 전쟁이고  경복궁 점령은 조선 정
부 내에 내정을 혁신하려는 사람들이 대원군을 추대하기를 바라고 우리에게 병력을 빌었다, 
하는 내용으로 되어 있었다. 경복궁 점령 후에 있을지도  모를 조선인들의 반발을 무마하기 
위해서였다. 
  대원군은 대정을 위임받자 곧 조각에 착수했다. 군국기무처가 설치되고 영의정 겸 회의총
재에 김홍집이 임명되었다. 이른바 제1차 김홍집 내각이었다. 군국기무처는 10인 평의회  성
격을 띠고 있었다. 일본이 경복궁 점령 실행 과정으로 내세운 국왕의 연금, 대원군 추대, 민
비를 축으로 한 민씨 파의 추방, 친일 개화파의 등용이 군국기무처에도 그대로  적용되었다. 
민영준, 민영규, 심상훈, 민응식, 민영익 등이  모조리 파직되어 유배되고 그 후임으로  김학
진, 신정희, 조의연, 안경수, 어윤중, 김가진, 유길준 등이 임명되었다. 
  오토리 일본 공사는 군국기무처가 설치되자 무쓰 외무대신에게 긴급 보고를 했다. 
  <외무대신 각하.
  조선 정부는 이제야말로 우리 대일본제국의 수중지물이  되었습니다. 조선에서의 일은 안
심하고 각하의 일을 추진하십시오.>
  각하의 일이라는 것은 청일전쟁을 뜻했다. 일본이 군국기무처를 설치한 것은 철저한 배일
주의자인 대원군을 견제하기 위해서였다.  조선인들을 무마하기 위해  대원군을 추대했으나 
이제는 대원군을 견제하지 않으면 안되는 자가당착에 빠져 있었다. 
  그러나 일본은 경복궁 점령이 마무리되자 청일전쟁의 개전에 나섰다. 이미 청일전쟁을 염
두에 두고 대본영을 설치한 일본은 곧장 아산으로 혼성여단을 급파하는 동시에 조선 조정의 
구축의뢰를 요구했다. 구축의뢰는 일본군이 청군을 공격할 때 조선에서 모든 전쟁물자를 공
급하고 조선이 청나라에 선전포고를 하라는 내용으로 되어 있었다. 
  고종은 몸이 아프다는 핑계로 일본의 요구를 거절했다. 
  대원군과 외무독판 조병직은 차일피일 미루는 지연책을 썼다. 그러나 청군을 공격하기 위
해 아산만으로 진격하고 있던 혼성여단의 오오시마 여단장은 오토리 공사에게 의뢰  획득을 
계속해서 독촉했다. 
  <일본 군대가 통과하는 연도의 조선 지방관은 군량,  신탄, 운반자재 등을 주선하여 편의
를 도모해야 한다는 조선 정부의 공문 몇 장을 얻는 일에 대하여서는 일찍이 소관이 각하에
게 누누이 설명한 바 있으므로 각하께서도 잘 아시리라 믿습니다.  그런데도 이 쉬운 일 하
나 각하께서 제대로 처리해 주지 못했기 때문에 우리는 미증유의 곤란을 겪고 있습니다. 우
리는 지금 하루 분의 군량만을 가지고 출발하므로 도중에서 굶어 죽을 위기에 처해 있습니
다.>
  오오시마 여단장의 강력한 항의를 받은 오토리 공사는 다시 입궐하여 대원군의 머리에 칼
을 들이대고 위협했다. 조병직은 한사코 반대했으나 김가진, 유길준이 정론을 주창하고 이를 
반박하여 일시 논전이 불꽃을 튀겼다. 
  그러나 일본은 칼로 위협을 하여 의뢰를 획득했다. 일본이  격론 끝에 획득한 구축의뢰의 
내용은 일본군이 청군과 전쟁을 하니 조선인들이 일본을 도와주면 일본이 그 비용을 후하게 
갚아줄 것이라는 내용으로 되어 있었다.
  "아니 기껏 했다는 것이 이것인가?"
 "공사로부터 멍텅구리 같은 통첩을 받았다."
  오오시마 여단장은 오토리 공사에게 분통을 터뜨렸다. 
  그러나 일본군은 아산만으로 향하면서 조선인들을 대대적으로 징발하기 시작했다. 곳곳에
서 장정들과 소달구지가 징발되어 일본군의 탄약 수송과 군량 수송에 동원되었다. 
  "우리가 어떻게 왜놈들을 돕는다는 말인가?"
  "왜놈들은 우리 임금을 위협하고 있다고 한다. 임금이 왜놈의 포로가 되었는데 우리가 임
금의 원수를 갚지는 못할 망정 원수를 도울 수 있는가?"  "옳소! 우리가 왜놈들을 도와준다
고 해도 전쟁터에 이르면 향도(총알받이)로 선두에  세울 것이오! 우리 모두 집으로 돌아갑
시다!"
  일본군이 수원에 이르렀을 때 징발된 조선인들은 우마차  4백대를 끌고 도주하였다. 수원 
일대에 거주하는 조선인들도 일본군에게 징발 당하지 않기 위하여 우마를 끌고 모조리 달아
났다. 이에 책임을 통감한 코시 마사츠나 소좌는 끝내 할복 자살하고 말았다. 
  일본군은 다급해졌다. 수원을 지나  진위(대전부근)에 이르러서는 일본군이 징발부대까지 
동원했으나 탄약과 군량을 수송할 인부는 모두 달아나고 자취도 없었다. 
  <일본군에게 교부한 통리아문의 지시는 어쩔 수 없는 상황에서 내린 것이므로 각 지방관
은 인민을 우마와 함께 가능한 일본군 주둔지로부터 멀리 피난시켜라.>  조선 조정은 일본
에게 협조하는 척하면서 밀사를 지방으로  내려보내 협조하지 말 것을  지시했다. 진위에서 
일본군 징발부대가 조선의 농가에 들어가 우마를  징발하려고 했을 때 그 농가에는 이미 진
위 군수의 명령을 받은 관속이 농부에게 우마를 가지고 피신할 것을 지시하고 있었다. 
  일본군 징발부대는 관속을 포박하고 진위 군수를 무풍루의 기둥에 묶어 놓고 마구 구타했
다. 
  일본군은 식량 징발 문제에 대해서도  난관에 봉착하였다. 일본은 행군을  하면서 연도의 
농가에서 소, 돼지, 닭을 징발했으나 조선인들은 소를 강탈해 갔다, 닭을 훔쳤다,  하고 소리
를 지르며 저항했다. 
  징발에 반대하는 조선인들의 반발은 점점 광범위하게  번져갔다. 경부로의 조선인들 사이
에는 일본군에게 협조하는 자는 참살해야 한다는 말이 팽배하게 나돌았다. 
  원산에 상륙한 마츠야마의 제22연대는 7월의 불볕 더위 속에서 행군을 하여 3백여 마리가 
소가 무참하게 쓰러져 죽고 조선인 인부들은 일사병에 걸려 전진할 수가 없었다. 조선인 인
부들은 이 고생을 하느니 차라리 죽여 달라고 요구했다.  일본군은 군기를 세운다는 구실로 
조선인 인부의 목을 칼로 쳤다.  그러나 다른 인부들은 두려워 벌벌  떨면서도 짐을 지려고 
하지 않았다. 그들은 길가에 웅크리고 앉아서 죽음을 기다리고 있을 뿐이었다. 
  게다가 밤만 되면 조선인들은 무리를 지어 도망쳤다. 일본군은  생각하다 못해 조선인 인
부들을 10명 내지 20명 씩 조를 편성하고 일본군에게 채찍과 몽둥이를 주어 감시하게 하는 
고육책까지 써야 했다. 
  그러나 청일전쟁은 서서히 불붙고 있었다. 일본 대본영은 경복궁  점령 사건이 터지기 전
인 6월 18일 혼성여단장인 오오시마  소장에게 청국군이 증가하면 눈앞의 적을  섬멸하라는 
명령을 보냈고 사세보 항을 출발하는 연합함대에게 23일 이후 청국 수송선을 만나면 격침하
라는 지시를 내렸다. 
  일본 혼성여단이 아산에 도착하기 전에 사세보 항을 떠난 일본 연합함대가 먼저 청국 수
송선과 조우한 것은 6월 22일이었다. 일본의 연합함대는  선봉을 맡은 길야호, 추진주호, 낭
속호 등의 3척이었다. 그 뒤를 제1유격대의 송도호, 천대전호, 고천수호, 교립호, 엄도호, 제2
유격대로 갈성호, 천룡호, 고웅호, 대화호가 따르고 있었다. 모두 12척이나  되는 연합함대였
다. 
  6월 22일 일본 선발 함대는 아산만 앞바다에 있는  풍도 근해에서 청국 군함을 발견했다. 
청국 순양함 제원호와 포함 광을호였다. 이들은 천진으로부터 증원병을 싣고 오는 수송선을 
호위하기 위해 나와 있었으나 전투 명령은 받지 않고 있었다. 
  6월 23일 아침이 되자 일본 군함은 갑자기 청국 군함에 접근하여 함포사격을 하기 시작했
다. 당황한 청국 군함은 그때서야 허겁지겁 응전할 준비를 했으나 포탄은 이미 뱃전으로 날
아와 터지고 있었다. 제원호와 광을호는 일본 함대의 기습  공격에 변변하게 항전조차 하지 
못하고 침몰되었다. 그때 9백 5십 명의 청국 증원군을 태우고 청국 수송선 고승호가 들어왔
다. 일본 선발 함대는 고승호에도 맹렬한 함포사격을 해대서 고승호를 침몰시키고 8백 명의 
청국 수군을 수장시켰다. 일본 해군의 완전한 승리였다. 
  일본 육군인 혼성여단도 남하를 계속해 아산만의 바로 위에 있는 성환에서 청군을 맞닥뜨
렸다. 청군은 일본군이 남하한다는 정보를 입수하자 평야지대인 아산을 떠나 성환에 방어선
을 구축했다. 청군 병력은 3천 4백 명, 일본군 혼성여단은 약 4천 명에 이르렀다. 
  6월 26일 밤 일본군은 해전에서와  같이 기습공격을 감행했다. 일본군은  공격개시 1시간 
반만에 청군을 괴멸시켜 풍도 앞바다에 이어 청일전쟁의 서전을 승리로 장식하였다. 성환에
서 패배한 청군은 뿔뿔이 흩어져 평양으로  후퇴의 길에 올랐고 일본은 승전보가  전해지자 
흥분으로 들끊었다. 일본인들은 거리로 뛰어 나와 만세를 부르고 상점이 철시를 했다.  아이
들은 일청회담이 결렬되어 차례차례 시나가와를 떠나는 아즈마함......이라고 일본 해군을  찬
양하는 노래를 불렀다.  조선의 운명을 좌우할 청일전쟁의 서전이었다.
4  서전을 승리로 장식한 일본은 조선 조정의 개혁을  서둘렀다. 이른바 갑오경장이 실시되
고 대대적으로 관제 개력을 단행했다.  군국기무처를 설치하여 대소 정무를  총괄하는 한편 
내아문과 외아문을 폐지했다. 5백 년 동안 조선을 다스려 온 6조도 폐지되고 내무, 외무, 탁
지, 법무, 학무, 공무, 군무, 농사의 8개 아문을  설치했다. 영의정은 총리대신, 각 아문의 장
은 대신으로 부르게 되었다. 아울러 일본의 주도로 변법도 제정되었다. 
  1. 각국에 전권대신을 파견하여 자주 독립을 포고한다. 
  2. 청의 광서 연호를 정지하고 개국기년을 사용한다. 
  3. 사색당파를 폐지하고 귀천을 가리지 않고 인재를 뽑아 등용한다. 
  4. 문존무비를 폐지하고 품계에 의거한다. 
  5. 연좌율을 폐지한다. 
  6. 적실과 첩에 다들이 없을 때만 양자를 허한다. 
  7. 남자는 20세, 여사는 16세가 되어야 혼인을 한다. 
  8. 부녀가 개가를 하는 것은 자유의사에 맡긴다. 
  9. 공사 노비제도를 폐지하고 인신의 매매를 금한다. 
  10. 조관의 의제를 간소화한다. 
  11. 평민이라도 국사와 관계되는 일이 있으면 기무처에 상서할 수 있다. 
  김병시는 김홍집과 함께 신내각 개혁안을 고종과 민비에게 상주하면서 눈물을 흘렸다. 강
직한 인물인 김병시는 5백 년 동안이나 이어 온 6조를 폐지하고 국권이 상실될 위기에 처한 
사실에 통분하고 있었다. 
  음력 7월 1일 청일 양국은 마침내 선전포고를 했다. 그러나  일본이 이와 같은 사실을 조
선에 통고한 것은 7월 9일의 일이었다. 
  (흥, 이것들이 아산전에서 승리를 했다고 기고만장해 있군!)  민비는 입술을  잘근잘근 깨
물었다. 
  민비는 요즈음 왕궁 깊숙한 곳에서 두문불출하고 있었다. 불볕 더위가 7월이었다.  뇌성을 
동반한 6월 장마가 대궐을 물걸레처럼 질펀하게 적시고 지나가자 풀잎 하나 까딱하지 않는 
염천이 계속되었다. 더위로 부풀어 오른 공기는 밤이 되어도  식지를 않고 사람들의 겨드랑
이로 땀을 흥건하게 흘러내리게 하고 있었다. 
  "무슨 놈의 날씨가 밤이 되어도 서늘해지지를 않느냐?"  민비는 걸핏하면  궁녀들에게 짜
증을 부렸다. 일본군들이  아직도 대궐에서 물러가지 않아 신경이 바짝 곤두 서 있었다. 
  "마마, 더우시면 목간이라도 하오심이......"
  궁녀가 조심스러운 기색으로 민비에게 아뢰었다. 
  "일본군들이 득실거리는데 무슨 목간이냐?"
  민비가 당치 않은 일이라는 듯이 눈을 흘겼다. 
  "마마, 밤이라 일본군들은 건청궁 밖으로 물러갔사옵니다."  "그래?"
  민비는 비로소 솔깃한 표정을 지었다. 대궐은 침전이며 누각마다  담장이 둘러 처져 있었
고 담장엔 또 사방에 월동문이 있었다. 구중심처인 국왕과  왕비의 침전이라 일본군들은 예
의를 갖춘답시고 건청궁 밖에서 숙직 겸 감시를 하고 있었다. 
  "목간물 준비할까요?" "그래라."
  민비는 쾌히 승낙을 했다. 일본군들의 눈치를 보느라고 며칠  동안이나 씻지를 못해 몸에
서 시지근한 땀냄새가 나고 있었다. (고이연 것들!)
  민비는 일본군들을 생각할 때마다 진저리를 쳤다. 일본군들 때문에 왕부의 권위가 모래성
처럼 무너지고 있었다. 궁원을 진동하던 궁녀들의 지분냄새도 없고 붉은 색 조복과 푸른 색 
조복을 펄럭거리며 오가던 당상관, 당하관들의 모습도 눈에 띄지 않았다. 그 대신 눈에 띄는 
것은 살벌한 눈빛을 하고 있는 일본군인들뿐이었다. 
  (흥, 조선을 멸하려면 나를 먼저 죽여야 할 것이다!)  민비는 그럴  때마다 입술을 깨물고 
모질게 결심을 했다.  일본군의 검은  군복, 각반, 군화를 볼 때마다  어떻게 하던지 국면을 
전환해야 하겠다고 다짐했다. 
  일본군 장교는 긴칼을 허리에 차고  단총(권총)까지 꼽고 거들먹거리고 있었다. 사병들은 
대검을 꽂은 장총을 등에다 대각선으로 메고 대오를 갖추어 삼엄하게 행군을 했다. 
  (저것이 어디 군대야? 살인 백정들이지......)
  민비는 속으로 일본군들을 비웃었다. 일본군들은 이따금 청궁 앞 녹원에서 실탄을 쏘아대
며 사격연습까지 했다. 조용하기만 하던 대궐이 일본군들의 사격연습으로 어수선했다. 
  "천하에 악독한 놈들이 아니냐? 대궐이  제 놈들 훈련장이라도 된다는 말이냐?"   민비는 
팡팡대는 총소리가 날 때마다 악을 쓰고 소리를  질렀다. 그러나 일본군의 사격훈련은 이틀
이 멀다하고 계속될 뿐 아니라 탄환이 이따금 건청궁의 곤령합 대들보에까지 날아와 궁녀들
이 일제히 비명을 지르고 하였다. 
  "마마, 목간물 준비하였사옵니다." "어디에  준비했느냐?" "옥호루 대청에 준비하였사옵니
다." "가자." "예."
  옥호루는 건청궁에 딸린 부속건물이었다. 민비가 궁녀들의  전도를 받으며 옥호루로 돌아
가자 큼지막한 함지박에 찬물이 가득했다.  "문을 닫아라."
  민비의 지시에 궁녀들이 문을 닫고 민비의 주위로 가까이 와서  흰 천을 펼쳐 막을 쳤다. 
민비는 흰 천 안에 들어가 옷을 훌훌 벗고 함지박에 몸을 담그었다. 
  "아이고, 시원하구나." 함지박의 물은 샘물을 길어서 시리도록 차가웠다. 시중하던 궁녀가 
옆에  쪼그리고 앉아 민비의 백옥 같은 나신을 씻기 시작했다  민비는 눈을 지그시 감고 자
신의 나신을 조심스럽게 씻는 궁녀의 나긋나긋한 손길을 음미했다. 
  "중전마마."
  그때 대전 상궁 김 상궁의 다급한 목소리가 천 밖에서 들렸다. 
  "어찌 되었느냐?" "조일맹약이 체결되었다고 하옵니다."
  "맹약이 체결되었다고? 그래 조정 대신들은 간도 쓸개도 없는 놈들이란 말이냐? 어찌하여 
그따위 맹약을 체결한단 말이냐?"
  민비가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조일맹약은 일본이  청일전쟁을 벌이면서 조선에서 군수물
자를 강제로 동원하기 위한 음모로 비롯된 것이었다. 일본은  조선에 군사동맹을 맺어 조선
과 일본이 공동으로 청나라와 싸울 것을 요구했으나 조선은 완강히 거부했다. 
  대원군은 일본에 의해 집정이 되었으나 실권이 전혀 없었다. 김홍집의 제1차 내각은 대원
군의 이름으로 발표되었어도 인선은 모두 스기무라 서기관의 조종으로 이루어졌던 것이다. 
  대원군은 러시아 공사 웨베르가 입궐하자 러시아의 중재로 청군과 일본군이 조선에서  철
수하게 해달라고 요구하는 한편 청군에 밀서를 보내어 청군의 승리를 기원하고 위기에 빠져 
있는 조선을 구해 달라고 부탁했다. 
  민비도 청군에게 밀서를 보냈다. 그러나 대원군이나 민비가 보내는 밀정은 곧바로 일본군 
정보망에 걸려 일본으로 보고되고 있었다. 일본이 조선에 군사동맹을 요구한 것은 대원군과 
민비가 약속이나 한 듯이 일본을 배척하고 친청정책을 쓰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대원군은 조선과 일본의 군사동맹을 반대했고 제1차 김홍집 내각이 성립되자 조일
맹약이라는 이름의 동맹조약이 체결되었던 것이다. 
  "골자가 무엇이라고 하느냐?"
  민비의 목소리가 옥호루의 대청을 찌렁찌렁 울렸다. 
  "여기 필사해 왔사옵니다."
  김 상궁이 숨을 죽이고 조일맹약 사본을 민비에게 내밀었다.  민비가 그것을 빼앗듯이 나
꿔채서 읽기 시작했다. 
  1. 본 맹약은 청군을 조선 영토 밖으로 철퇴시켜 조선의 자주 독립을 공고히 하고 조선과 
일본의 우의를 돈독히 하는 것을 근본으로 한다. 
  2. 일본은 이미 청국과 전쟁을 선포하였으므로  조선은 식량, 우마, 마초, 인부 등  일본이 
조선을 위하여 벌이는 전쟁에 협조하기 위하여 제반 지원을 준비하여 일본군에게 편의를 제
공한다. 
  3. 본 맹약은 청국과 화의가 이루어지면 폐기한다. 
  군수물자 동원에 대한 맹약서였다. "바, 발칙한 놈들 같으니......!"
  민비는 조일맹약의 필사지를 발기발기 찢어서  팽개쳤다. 김 상궁이 민비의  격노에 몸을 
사시나무 떨듯 했다. 음력 7월 26일의 일이었다. 
  일본군은 벌써 평양을 향해 북상하고 있었다. 청나라도 압록강을 통하여 평양으로 대군을 
집결시켜 30개 영 약 1만 5천의 대병력이 평양에 진을 쳤다. 일본은 조선에 파견한 5사단의 
후속부대를 원산에 상륙시킨 다음 제3사단을 인천으로 상륙시켰다. 5사단의 또 다른 부대는 
부산에서 상륙하여 경부로를 통해 평양으로 평양으로 북상하고 있었다. 
  일본은 조일맹약에 의거하여 조선인들을 강제로 동원하여 인부로 이용했다. 
  (어찌 조선인들이 일본군의 인부 노릇을 할 수 있다는 말이냐?)   민비는 각 지방에 밀사
를 보내어  일본군의 군사물자 징발에 협조하지  말라고 지시했다. 
그러나 민비의 밀사는 곳곳에서 일본군에게 체포되어 오토리 일본 공사에게 보고되었다. 
  (조선의 왕비가 기어이 말썽이군......)
  오토리 공사는 입맛이 씁쓸했다. 한낱 여자에 지나지 않는  민비가 일본의 대조선 정책에 
사사건건 제동을 걸고 있었다. 
  (조선의 왕비를 제거해야 돼......)
  민비의 정치적인 수완은 오히려 대원군을 능가하고 있는 실정이었다. 김홍집 내각이 성립
되어 있었으나 민비는 교묘하게 국왕인 고종을 이용하여 조정 대신들을 조종하고 있었다. 
  (이번 밀사 건은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돼!)
  오토리 공사는 주먹을 움켜쥐었다. 
  "전하, 우리 일본군은 지금 조선을 위하여 싸우고 있사옵니다. 그런데 전하께서 밀사를 보
내시어 일본군에 협조하지 말라고 지시하는 것은 무엇 때문에 그러는 것이옵니까? 전하께서
는 이 일을 반드시 해명해야 합니다!"
  오토리 공사는 입궐하여 눈을 부릅뜨고  고종을 위협했다. 고종의 옆에는  민비가 새침한 
표정으로 앉아 있었으나 오토리 공사는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과인은 금시초문이오."
  고종은 시침을 뚝 떼고 모른 체했다. 고종도 민비가 청군과 지방 관리들에게 밀사를 보내 
일본군에게 협조하지 말라고 지시한 것을 상세히 알고 있었다.  민비는 잠자리에서 혹은 대
궐의 후원을 거닐면서 고종에게 낱낱이 보고했던 것이다. 
  "전하! 전하께서는 우리 일본군이 청군과 전쟁을 하고 있는 틈을  타서 등을 치려 하시는 
것이 아닙니까?" "공사! 어찌 그럴 리가 있소?"
  "전하께서 이와 같은 일을 반복하시면 외신은 뒷일을 감당할 수가 없사옵니다."  "뒷일이
야 당연히 과인이 감당을 할 일이오!"
  "전하! 이는 명백한 배신행위이옵니다! 조선의  종사가 일본을 배신하고서도 명맥을 유지
하리라고 보십니까? 전하께서는 국제정세를 잘  살피셔야 안위를 도모할 수 있을  것이옵니
다!"
  오토리 공사의 노골적인 위협에 고종의  얼굴이 붉어졌다. 그때 민비가  갑자기 깔깔대고 
웃음을 터뜨렸다. 오토리 공사는 민비의 돌연한 웃음소리에 소름이  끼치는 듯한 전율을 느
꼈다. 
  "공사!" 민비가 정색을 하고 오토리 공사를 쏘아보았다. "예, 중전마마." 
  오토리 공사는 자신도 모르게 머리를 숙었다. 
  "공사의 태도가 참으로 방자하지 않소? 명색이 공사라는 위인이 그토록 무도한 말을 입에 
담을 수 있소? 공사 같은 위인을 일본  황제가 조선에 파견한 것은 일본 황제의 큰  실책인 
것 같소." "주, 중전마마!" "공사는 들으시오!"
  민비가 옥좌에서 몸을 벌써 일으켰다. 
  "일본인들은 청일전쟁이 조선의 자주 독립을 공고히 하기 위해 일으킨 전쟁이라고 하면서
도 오히려 일본군을 동원하여 조선을 핍박하고 있으니 이것이 이로에 맞기나 하오?"   민비
의 추궁은 폐부를 찌르는 비수처럼 날카로웠다. 
  "또 일본이 청나라와 전쟁을 하려면 청나라에 가서 할 일이지 무엇 때문에 조선에서 전쟁
을 하여 이 나라 청구 3천리를 전쟁터로 만드는 거요?"  "중전마마! 청군은 조선 땅에 주둔
하여 조선 내정을 간섭하고 있사옵니다."  "닥치시오! 내정 간섭이라면 오히려 일본이 더 극
렬하지 않소?"  "중전마마! 일본은 조선의 내정을 개혁하고자 할뿐이옵니다."  "조선의 내정
을 개혁하기 위해 지엄한 궁궐에 일본군이 들어와서 총질을 한단 말이오?"  "......"
  "또 조선군 시위대의 총기와 탄약을 모조리 압수하여 일본군 진영으로 끌고 간 것은 무슨 
까닭이오?" "내정이 개혁되면 무기는 반납할 것이옵니다."
  "흥! 그것뿐이라면 내가 말도 하지 않겠소.  일본군은 명색이 한 나라의 군대면서도  조선 
왕실의 보물을 모조리 노략질 해 갔으니 도적의 무리가 아니고 무엇이오?"  오토리  공사는 
이마로 비오듯이 땀을 흘렸다. 
  "공사는 들으시오!" "예."
  "일본군이 도적의 무리가 아니라면 조선 왕실에서  훔쳐 간 보물을 한 점도 빼놓지  말고 
반납하시오! 내가 일본군이 도적의 무리인지 일본 왕실의 군대인지 두 눈 똑바로 뜨고 지켜
볼 것이오!" "......!"
  "또한 일본에 조선의 내정에 간섭할 의향이 없다면 대궐에서 당장 일병을 철수시키시오!"  
"주, 중전마마!"
  "조속한 시일 내에 일병이 대궐에서 철수하지 않으면 이 사실을 만천하에 폭로하겠소! 공
사가 귀가 있어 내 말을  알아듣겠거든 그만 물러가시오!"  민비가  만천하에 폭로하겠다는 
것은 열국 공사들에게 일본군의 비행을 알리겠다는 뜻이었다. 일본이 청나라와 전쟁을 하는 
것은 국제사회에서 그다지  문제될 것이 없었으나 일본군이 보물을 훔쳤다는 것은 국제적인 
망신거리가 되는 것이다. 
  (혹을 떼려다가 혹을 붙였군......)
  오토리 공사는 일본 공사관으로 돌아오자 벌레 씹은 표정을  했다. 그러나 서두르지 않을 
수 없었다. 오토리 공사는 스기무라 서기관과 상의하여 일본군을  일단 경복궁 밖으로 철수
시켰다. 
  그러나 청일전쟁은 본격적인 대회전으로 치닫고 있었다. 
  음력 8월 13일 일본군의 선발부대가 중화를 돌파하고 대동강 연안에 이르렀다. 청군은 일
본군이 들이닥치자 5문의 크루프포로 일본군을 포격했다. 
  8월 15일 마침내 일본군의 본대가 대군을 이끌고 대동강에 이르렀다. 그러나 일본군은 대
본영의 지시에 의해 8월 16일까지 공격을 하지 않고 후속부대가 모두 도착할 때를 기다려 3
개 방향에서 동시에 입체적인 공격을 시작했다. 
  먼저 아산에서 청군을 격파하고 북상한 오오시마 소장의 혼성여단은 승리의 여세를  몰아 
개성을 거쳐 황주를 우회하여 평양성 동남쪽에 둔병, 청나라의 마옥곤이 지휘하는 청군에게 
대대적인 공격을 가하기 시작했다. 8월 16일 아침의 일이었다. 
  노츠 미치츠라 중장이 지휘하는 제5사단은 인천에 상륙한 다음 한성을 거쳐 질풍처럼 황
주를 지나 대동강을 건너 대동강 서쪽의 증산에 둔병, 8월 16일이 되자 평양성 서남 방면을 
기습했다. 청군에서는 위여귀 부대가 일본군 제5사단에 반격을 해왔다. 
  다치미 나오부미 육군 소장의 삭령지대는 보병 10연대와 9연대의 연합부대로 삭령에 주둔
해 있다가 평양성 북쪽으로 공격해 들어갔다. 
  원산에 상륙한 제3사단 제5여단 제18연대는 평양성 북쪽을 지나 의주로 통하는  서북로를 
점령, 청군의 보급로를 차단하는 동시에 배후를 유린하기 시작했다. 
  청군 1만 5천은 2만 명의 일본군에 포위되어 풍전등화의 위기에 몰렸다. 
  전투는 치열했다. 
  일본군은 포탄을 쏟아 붓듯이 청군 진영에 포격을 가했다. 
  먼저 청군 총사령관인 총통각군 섭지초가 지휘하는  평양성 현무문이 무너지기 시작했다. 
섭지초는 아산에서도 일본군 혼성여단에 격파되어 평양까지  후퇴해 온 패장이었다. 전투를 
하기 전부터 일본군에게 주눅이 든 섭지초에게는 작전을 수립할 능력도 없었고 청군의 사기
를 북돋워 일본군과 필사적인 전투를 벌일 의욕도 없었다. 
  마옥곤은 일본의 혼성여단을 맞이하여 치열한 전투를  해나갔다. 오오시마 소장의 혼성여
단은 청군의 완강한 저항에 부딪쳐 한  발자국도 전진하지 못하고 오히려 사상자가  늘어갔
다. 위여귀도 노츠 중장이 지휘하는 제5사단의  주력부대를 만나 필사적인 저항을 하고  있
었다. 
 그러나 청군의 총사령부라고 할 수 있는 섭지초의 부대가 무너지고 있었다. 
  다치미의 삭령지대는 현무문을 돌파하고 모란봉으로 올라갔다. 모란봉의 모란대는 청군의 
좌보귀, 풍승아, 강자강이 수비하고 있었다 
  다치미의 삭령지대는 청군을 행해 맹렬한 포격을 가했다. 청군도 일본군을 내려다보며 포
격을 가해 피아간의 전투가 하루동안 꼬박 계속되었다. 청군과  일본군의 시체가 산을 이루
고 피가 내를 이루었다. 문자 그대로 시산혈해였다. 
  그 와중에 조선군 8백여 명도 모란봉을 붉은 피로  적시며 죽어갔다. 그들은 대부분 일본
군들이 경복궁을 점령하고 조선군을 무장해제 했을 때 군복을 찢어 버리고 평양으로 달아난 
궁성 시위대들이었다. 
  그들은 청군과 합세하여 모란봉에서 장렬한 전사를 했다. 청군은  후퇴해도 갈 곳이 있었
으나 조선군들은 갈 곳이 없었다. 전투는 이튿날도 계속되었다.  8월 17일이었다. 팽팽한 접
전을 벌이던 청군과 일본군은 8월 17일이 되자 균형을  잃기 시작했다. 군대의 숫자나 화력
에 있어서도 일본군이 우세했으나 지휘관의 자질에 있어서도 일본군이 우세했다. 청군은 총
사령관인 섭지초가 전투 의욕을 잃고 우물쭈물하다가 퇴각 명령을 내림으로써 크게  동요를 
일으켰다. 
  좌보귀는 모란봉 전투에서 장렬한 전사를 했다. 
  8월 17일 청군은 평양성을 버리고 패주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청군은 패주조차 제대로 할 
수 없었다. 청군이 대포를 버리고 대오도 갖추지 않은 채 패주하기 시작하자 길목을 지키던 
사토 렌타로오 대좌가 지휘하는 일본군 18연대의 기습을 받아 2천여 명이 몰살을 당했다. 
  청군은 2, 30명 씩 무리를 지어 북으로 북으로 퇴각하여 압록강을 건넜다. 군량도  없었고 
지휘관도 없어서 청군 패잔병들은 닥치는 대로 조선인 농가를 약탈하고 부녀자들을  겁탈하
면서 퇴각했다. 
  일본군은 평양에서 청군을 대파하자 즉시 한성에 승전을 알리는 벽보를 붙였다. 일본군이 
벽보를 붙인 종로통에는 조선인들이 구름같이 모여들었다. 
  <금월 16일에 아일본황군이 평양성을 극복하여 청군 2만을 오살하니 무일인득면자라.  아
일본 황병은 사상 극히 경미하니라.  아일본 황병 만세.>  일본군이 붙인  벽보는 사람들이 
흩어지면 모조리  찢겨졌다. 조선인들은 일본인들을 뼛속 깊이 증오하고 있었다. 
  그러나 전쟁은 바다에서도 치열했다. 일본의 연합함대는  일본 육군이 평양성에서 대격전
을 치루고 승전고를 울렸을 때 압록강 하구인 발해만의 대동구에 도착해 있었다. 
  청국의 군함은 평양성의 대회전을 위해  육군 증원병을 상륙시키고 8월 18일  여순항으로 
돌아갈 준비를 하고 있었다. 청군 함정은 수송선까지 모두 14척이나 되었다. 전함 8척, 보조
함 2척, 수뢰정 4척의 막강한 함대였다. 
  일본 연합함대도 위세가 당당했다. 
  일본 연합함대는 순양함 4척, 콜베트함 2척, 최신  쾌속함 4척으로 편성되어 있었다. 해군 
중장 이토 스케유키가 총사령관이었고 해전의 총지휘는 쓰보이 코오소오 해군 소장이  맡고 
있었다. 
  8월 18일 낮 12시 50분, 일본 해군이 먼저 발포를 했다. 청국 해군도 즉각 대응 발포를 하
기 시작해 평화롭던 황해 바다는 삽시간에 포성으로 뒤덮였다.  물기둥이 하얗게 치솟고 포
연이 자욱하게 황해 바다를 뒤덮었다. 
  해전도 평양에서의 육전 못지 않게 치열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를수록 청군의 패색이 짙
어지기 시작했다. 육전에서도 마찬가지였으나 청군은 일본군보다  화력이 열세에 있었고 더
욱 중요한 것은 군사들이 현대적인 훈련을 받지 않았다는 사실이었다. 
  청국함대는 해전이 시작된 지 5시간만에 완전히 괴멸되고 말았다. 청국함대는 전함 4척이 
완파되어 침목되고 7척이 대파되었다. 
  일본의 연합함대는 2척이 대파되고 2척이 뱃전이 부서지는 손상을 입었을 뿐이었다. 인명 
피해에 있어서도 청국 해군은 1천여 명의 사상자를 냈는데 비해 일본군은 2백 7백 명의  사
상자를 냈을 뿐이었다. 
  이로 인해 일본은 조선의 전 국토를 수중에 넣은 데 이어 제해권까지 장악하게 되었다. 
  1) 일본군의 경복궁 점령과 청일전쟁은 [청일전쟁과 조선]을 기본바탕으로 했다.  (박종근 
교수)
  2) 일본군의 경복궁 점령에서 일본인들이  바라보는 조선에 대한 입장은  [민비암살]에서 
취했다. (쓰노다 후사꼬)



    제 38 장  비정한 산하
  빗발이 제법 굵어지면서 행인들의 발걸음이 부지런해졌다. 중추절인 추석을 지난 지 보름
이 채 못된 8월 하순이었다. 비가 내릴 계절이 아닌데도 아침부터 하늘이 낮게 가라앉기 시
작하더니 한낮이 되자 주택가에 서  있는 나뭇가지들을 흔들며 음산하게  바람이 불었었다. 
그리고 사방이 어둑어둑해진 지금 한 두방울씩 덜어지던 빗발이 굵어진 것이다. 
  (살인을 하기에는 좋은 날씨야. 비까지 이렇게 음산하게 뿌리니......)  박갑성은 무성한 홰
나무 잎사귀가 검푸르게 나부끼는 잿빛 하늘을 쳐다보며 차갑게  미소를 지었다. 부산의 일
본인 거주지역이었다. 일본식의 목조건물이 즐비해 잿빛의   기와집이나 초가집들이 옹기종
기 모여 있는 조선인 마을과 달리 이국정취를 물씬 풍기고 있었다. 
  (흥, 이곳은 완전히 일본놈 소굴이군......)
  박갑성은 오카베 집들이 즐비한 주택가를 쏘아보며  입술을 비틀었다. 일본인들은 빗방울
이 굵어지고 바람까지 불자 걸음을 서두르고 있었다. 기모노를 입은 일녀(日女)들은 게다짝
을 신고 종종걸음을 치고 일본 사내들의  정장인 하까마에 하오리를 입은 남자들은  뛰듯이 
빠르게 걷고 있었다. 
  (지금쯤 일녀가 무관 놈을 기다리고 있을 테지......)  박갑성은 저만치 야트막한 담장 안에 
은행나무가 열병을 하듯 늘어서 있는 단층 목조건물을 살폈다.  일녀의 오종종한 얼굴이 눈
앞에 어른거리고 단내를  풍기는 가쁜 입김이 귓전으로 느껴졌다. 
  (놈이 오늘도 밤외출을 할런지 모르겠군......)
  일녀의 남편은 부산 일본 총영사관 무관이었다. 군복을 입고  인력거를 타고 출퇴근을 했
다. 청나라와 전쟁이 한창 이어서인지 일녀의 남편은 밤에도  요정으로 돌아다니며 잦은 회
동을 했다. 
  (허나 제 놈의 여편네가 조선인과 놀아나고 있는 줄은 꿈에도 모르겠지......)  박갑성은 허
리에 찬 일본도를 힘주어 잡았다. 박갑성이 일본 무관의 여자를  담 넘어 들어가 겁탈한 것
은 불과 열흘 전의 일이었다. 그날도 오늘처럼 가을비가 황량하게 내리고 있었다. 
  박갑성은 남자가 없는 것을 확인한 뒤 일녀의 집 담장을 가볍게 넘어 들어갔다. 김옥균을 
미행할 때 걸핏하면 월장을 하던 가락이 있어서 담을 넘는 것은 간단하게 할 수 있었다. 박
갑성은 담을 넘자 불빛이 흘러나오는 처마 밑에 몸을 바짝 웅크렸다. 긴장하고 있었는지 가
슴이 뛰고 숨이 가빴다. 
  박갑성은 호흡을 진정시키기 시작했다. 안에서는 아무 기척이 없었다. 지붕을 때리는 빗소
리에 섞여 어디선가 개 짖는 소리만 희미하게 들렸다. 
  박갑성은 현관문으로 가까이 갔다. 현관문은 잠겨 있지 않았다. 조심스럽게 현관문을 여는
데 경첩이 삐익 하는 쇳소리를 냈다. 
  박갑성은 흠칫하여 안의 동정에 귀를 기울였다. 그러나 빗소리  때문에 듣지 못했는지 안
에서는 아무런 기척이 없었다. 박갑성은 일본도를 뽑아 들고 현관 안으로 몸을 들여놓았다. 
  그때 거실 왼쪽에 있는 방에서 일녀의 노래소리가 나지막하게 들려오기 시작했다. 
  <새벽빛이 밝아 오는 요시다야마
  황군의 구령소리 드높다네
  조국이 나를 불러 군인이 되니
  이 목숨 아낌없이 너에게 주마.>
  군가인 모양이었다. 박갑성은 일녀의 노래소리에 잠시 귀를 기울였다. 
  <어둠이 짙어 오는 요시다야마 
  황군이 고향으로 편지를 쓰네
  그리운 에이꼬 나의 여인아
  내 사랑 남김 없이 너에게 주마>
  박갑성은 다다미가 깔린 거실로 올라섰다. 
  <황군은 무적해군 무적육군
  그대의 넓은 가슴에 안기고 싶어......>
  박갑성은 일녀가 노래를 부르는 방문 앞에 우뚝 멈춰  섰다. 그때서야 인기척을 느꼈는지 
일녀의 노래소리가 뚝 끊겼다. 
  박갑성은 방문을 와락 열어 젖혔다. 
  "에그머니!"
  머리를 빗고 있던 일녀가 깜짝  놀라서 외마디 비명을 질렀다. 박갑성은  일본도를 든 채 
방안으로 성큼 들어섰다. 
  "누, 누구세요?"
  일녀의 눈이 화등잔만 해졌다. 일녀는 겁에 질려 엉덩이  걸음으로 뒷걸음질을 하여 벽에 
등을 기댔다. 박갑성은 일녀에게 칼을 겨누었다. 일녀는 몸을 떨며 박갑성을 살피다가  박갑
성의 눈이 자신의 허벅지를 더듬고 있는 것을 발견하고는 재빨리 치마자락을 끌어 당겨 허
벅지를 덮었다. 
  "이름이 뭐야?"
  박갑성이 차가운 눈빛으로 물었다. 
  "기, 기와꼬."
  "기와꼬?"
  "이시하라 기와꼬예요."
  "옷을 벗어라."
  박갑성이 일녀의 오종종한 얼굴을 쏘아보면서 차갑게 내뱉았다. 
  "아, 안돼요."
  일녀가 황급히 도리질을 했다. 
  "나를 화나게 할건가?"
  "왜 이러세요? 당신도 일본이면서 왜 이런 짓을 하죠?"  "난 일본인이 아니야."
  "그, 그럼 조선인?"
  "그래."
  박갑성이 일녀의 턱 밑에 일본도를 들이댔다. 일녀는 서른이 남짓해 보였다. 결코 젊은 나
이는 아니었다. 
  "사, 살려주세요!"
  일녀가 애원을 하면서 박갑성을 쳐다보았다. 박갑성은 비긋이 웃으며 일본도로 일녀의 치
마자락을 들췄다. 일녀의 종아리는 대부분의 일녀들이 그렇듯이 알짱다리였다. 
  "왜 이러세요?"
  일녀가 다시 치마자락을 여몄다. 
  "징발부대가 있었어. 군수물자를 강제로 징발하는  일본군들이었지......"  박갑성은 일본도
를 다다미 위에 꽂았다. 
  "그 징발부대가 조선인 농가에 침입해서 여자를 짐승처럼 짓밟고 살해했어."  "설마?"
  "징발부대는 모두 일곱 명이었어."
  "......"
  "일곱 놈이 조선이 여자 하나를 짓밟은 거야."
  박갑성은 옷을 훌훌 벗어 던지고 일녀에게 달려들었다. 아내의  피 묻은 하체와 낄낄대는 
일본군들의 야수 같은 얼굴, 울부짖는 아이들의 얼굴이 머릿속에 두서없이 떠올라 왔다. 
  "싫어요, 이러면 싫어요!"
  일녀가 발버둥을 치기 시작했다. 박갑성은 저항하는 일녀의 어깨를 찍어누르고 옷을 벗기
기 시작했다. 일녀는 필사적으로 저항을 했다. 그러나 일녀가 박갑성의 억센 힘을 당해낼 수
가 없었다. 앞이 터진 일녀의 기모노는  홑껍데기 천 조작에 지나지 않았다. 일녀의  기모노 
옷자락이 함부로 찢겨 나가고 통통한 속살이 드러났다. 일녀는  뜻밖에 희디흰 속살을 갖고 
있었다. 
  "아, 안돼!"
  일녀가 울부짖었다. 일녀의 얼굴이 눈물로 질펀하게 젖어 있었다. 
  "네 년을 죽여 버릴 거야."
  박갑성은 눈알을 부라렸다. 
  "안돼요."
  일녀가 지친 기색으로 대꾸했다. 박갑성은 재빨리 옷을 벗어 던지고 일녀의 알몸 위에 엎
드렸다. 일녀가 무릎을 오므리면서 다시 바둥거리기 시작했다. 
  "가만 있어!"
  박갑성이 눈을 부릅뜨자 일녀의 무릎이 펴졌다. 박갑성은 그 틈을 노려 일녀의 몸으로 재
빨리 자신을 밀어 넣었다. 
  "헉!"
  그러자 입을 딱 벌리며 일녀가 신음소리를 뱉았다. 박갑성은 얼굴 근육을 푸르르  떨었다. 
일녀가 허리를 비틀고 도리질을 하면서 고통스러워했으나 박갑성은 야수처럼 일녀를 짓밟았
다. 이내 일녀의 신음소리가 고통에서 희열로 바뀌기 시작했고 일녀의 두 손과 발이 뱀처럼 
박갑성의 등에 감겨 왔다. 
  (이 년이!)
  박갑성은 어처구니가 없었다. 그러나 박갑성이 더욱 놀란 것은  일이 끝나서 주섬주섬 옷
을 챙겨 입고 있을 때였다. 
  "저......"
  오종종한 얼굴의 일녀가 옷자락으로 자신의 비고를 가리며 박갑성을 빤히 쳐다보았다. 일
녀의 눈동자가 몽롱하게 풀어져 있었다. 
  "감사합니다."
  "뭐?"
  "나무라지 않으신다면 오늘처럼 즐거웠던 때가 없었다고 말씀드리겠습니다."  "......"
  "전 남자가 무엇인지 이제야 알았어요."
  "......"
  "또 와 주시기를 바랍니다. 당신이 오시기를 언제나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
  "당신이 하라는 일은 무엇이던지 하겠습니다. 명령만 내려주세요."  원래의 계획은 일녀를 
짓밟은 뒤에 죽여 버릴 작정이었다. 그러나 일녀가 무릎을 꿇고 절까지 하면서 말하자 박갑
성은 일녀를  죽이는 것을 뒤로 미루고 말았다.  그것이 열흘 전의 일이었다. 그 후에도 박
갑성은 두 번이나 일녀의 집에 숨어 들어가 정을 통했다. 
  (네 놈들도 부인을 잃고 피눈물을 흘려 봐야 돼!)
  박갑성은 찔레꽃처럼 하얀 아내의 얼굴이 떠오르자 명치끝을 지그시 눌렀다. 아내의 얼굴
이 떠오를 때마다 가슴이 바윗덩어리를 얹어 놓은 것처럼 답답했다. 
  박갑성은 천천히 걸음을 떼어놓았다. 
  따가닥 따각.
  발 밑에서 게다짝 끌리는 소리가  기분 나쁘게 귓전을 울렸다. 일본  무사들이 입은 옷을 
입어서인지 밑도 허전하고 서늘했다. 마치 헝겊 조작으로 몸을 가리고 걷는 듯한 이상한 기
분이었다. 
  박갑성은 걸음을 서두르기 시작했다. 어느 사이에 빗발이 더욱  굵어져 황토 먼지 날리는 
길바닥을 적시고 나뭇잎들을 살풍경 하게 흔들어대고 있었다. 
  아내가 죽은 것은 불과 두 달 전의 일이었다. 박갑성은  갑신정변이 피를 피로 씻는 보복
으로 막을 내리자 아내를 데리고 한성을 떠나 천안에 정착했었다. 천안 읍에서도 30리나 떨
어진 학실골 학실산 골짜기였다. 박갑성은 개화와 척화, 친일파 친정으로 나뉘어 권력  투쟁
을 일삼는 양반들에게 환멸을 느꼈다. 
  김옥균도 싫고 민영익도 싫었다. 
  박갑성은 아내와 함께 화전을 일구며 살았다. 완전히 세상을 등진 채 겨울이면 밭을 일구
고 봄이면 씨앗을 뿌렸다. 그의 아내는 그 동안 아이를 여섯이나 낳았다. 거의 해마다  아이
를 낳은 셈이었으나 셋은 병으로 죽고 셋이 살아 있었다. 
  박갑성은 밤이면 아이들과 함께 공부를  했다. 세상은 어수선했다. 일본과 청나라의  내정 
간섭이 갈수록 심해져 조선은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었다. 
  아이들에게 학문을 가르쳐야 쓸모가 있을지 없을지는 알 수 없었으나 흙을 일구면서 사는 
삶이 어쩐지 허허롭기만 했다. 
  그렇게 보낸 세월이 어느덧 10년이 가까워 오고 있는 것이다. 
  박갑성은 장년의 사내가 되었고, 눈빛이 깊고 그윽해졌다. 그러나 화전을 일구느라고 그의 
손발은 투박해지고 흙냄새가 물씬거렸다. 그의 아내도 손에 익지  않은 농사일로 손발이 부
르트고 살갗이 풋보리처럼 까칠해졌다. 
  그러나 박갑성은 아내를 진심으로 사랑했다. 아내의 몸에서 풍기는 질박한 흙냄새, 아내를 
안을 때마다 아내의 몸에서 풍기는 여린 흙냄새를 좋아했다. 
  "우린 이제 산골 아낙네에 산골 남정네예요."
  아내는 산골에 묻혀 사는 것이 헛헛한지 쓸쓸하게 말질을 하곤 했다. 
  "대처로 나가고 싶은가?"
  "이따금 사람이 그리울 때가 있어요."
  "대처로 나가면 시절이 어수선해서 흉한 꼴 당하기가 십상이야."  "아이들이 산골 무지랭
이가 되는 것 같아요."
  "더덕이나 캐러 갈까?"
  "날이 궂은 것 같은데......"
  "앞산이니까 한나절이면 댕겨 올걸."
  "하긴 애들 옷감이라도 끊어야 하니까 돈 될 것을  준비하긴 해야 해요."  아내는 봄이면 
산나물을 뜯고 더덕이며 도라지를 캐다가 천안  읍내에 내다 팔았다. 여름철엔 박갑성도 아
내와 함께 산등성을 타고  골짜기를 누비며 약초  나부랑이를 뜯어서  읍내 한약방에 넘겼
다. 그렇게 마련한 돈으로 아이들 옷감이며 등잔불을 밝힐 기름을 사곤  했다. 
여름 한철은 약초를 찾아 아예 산에서 살다시피 할 때도 있었다. 
  "올 여름도 엥간히 더운 걸."
  약초를 찾아 산등성을 몇 개 넘다보면 온 몸이 땀으로 후줄근하게 젖었다. 박갑성은 그럴 
때면 골짜기의 내를 찾아 몸을 씻곤 했다. 바위틈을 돌아  흐르는 깊은 계곡의 물이라 계곡
물은 시리도록 차갑기만 했다. 
  "날씨가 이렇게 더운 것을 보면 소나기가 한줄금 하겠어요."   인적 없는  계곡이었다. 아
내도 적삼의 옷고름을 풀고 젖무덤과 겨드랑이의 땀을 씻었다. 
  "그러지 말고 벗고 들어오지."
  "이 벌건 대낮에 어디라고 옷을 벗어요?"
  "산이 공연히 깊은 줄 알아? 우리 같은 산사람 벌거벗고 살라고 깊지......"  박갑성은 흐흐 
하고 웃었다. 
  "객적은 소리 말아요."
  그의 아내가 눈을 샐쭉 흘겼다. 
  "들어오면 내가 때를 밀어 주지.  어젯밤에 보니 시지금하게 땀내가 나대."   "설마? 정말 
벗고 들어가요?"
  "내가 설익은 밥 먹었다고 실없는 소리를 할까?"
  "누가 보믄 당신책임야요?"
  눈을 흘기는 아내도 싫은 기색은 아니었다. 아내는 몇 번이나 주위를 살피는 시늉을 하며 
미적미적 옷을 벗자 물 속으로 첨벙 뛰어 들었다. 
  "아이고 시원해라."
  "조금만 앉아 있으면 몸이 으실으실 떨릴 걸."
  "당신이 있는데 무슨 상관예요?"
  "내가 있다고 물이 차지 않은가?"
  "추워지면 당신한테 안아 달라고 하지요."
  박갑성은 천천히 걸음을 떼어놓았다. 아내가 커다랗게 웃는 소리가 이명처럼 귓전을 쟁쟁
하게 울렸다. 박갑성은 또 다시 가슴이 묵지근하게 아파 왔다. 
  날은 더욱 어두워져 있었다. 일본인 거주지역을 지나 일본인  상가가 있는 본정통에 이르
자 지등이 걸려 있는 요정과 유곽도 드문드문 보였다. 상가가 있는 거리는 일본인들의 왕래
가 더욱 번다했다.
  박갑성은 일본인 상가 모퉁이를 돌아서 일식집으로 들어가 저녁식사를 했다. 비바람이 점
점 을씨년스러워지고 있었다. 창문이 덜컹대며 흔들리고 빗소리가 스산했다. 
  박갑성이 술까지 마시고 일식집에서 나온 것은 얼추 두 시간이 지났을 때였다. 사방은 이
미 캄캄하게 어두워져 있었다. 골목과  거리마다 지등이 걸려 깜박거리고  파도소리가 더욱 
높아졌다. 
  박갑성은 일본인 주택지역으로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일본인 상가는 대부분 철시를 했고 
주택지역은 집집마다 불을 켜놓고 있었다. 
  박갑성은 홰나무에 등을 기댔다. 빗발이 굵어져 홰나무 잎사귀를 때리는 빗소리가 황량했
다. 술을 마셔서 춥지는 않았으나 으실으실 한기가 느껴졌다. 그의 몸을 감싼 옷은 이미  후
줄근하게 젖어서 종아리로 척척 감기고 있었다. 
  박갑성은 담배를 피워 물었다. 시간이 얼마나 되었는지는 알 수 없었다. 은행 나무집은 불
빛이 희미하게 켜진 채 조용했다. 박갑성은 담배 연기를 폐부 깊숙이 빨아 들였다가 내뱉았
다. 일본인들이 수입을 해서 다시 조선인들에게 팔고 있는 미국 담배였다. 그러나  박갑성이 
피우고 있는 담배는 일녀 기와꼬가 박갑성에게 선물한 것이었다. 
  그때 인력거 소리가 어둠 속으로 들려왔다. 박갑성은 담배를 비벼 끄고 허리에 찬 일본도
를 움켜잡았다. 인력거는 어둠 속을 빠르게 달려와 일녀 기와꼬의 집 대문 앞에 멎었다. 
  (무관 놈이 돌아왔군......)
  박갑성은 홰나무 뒤에 몸을 숨기로 군복을  입은 무관이 기와꼬의 집으로 들어가는  것을 
뚫어질 듯이 쏘아보았다. 인력거가 대문 앞에서 비를 맞고 대기하고 있는 것을 보면 무관은 
다시 출타할 것으로 보였다. 
  (오늘은 기어이 요절은 내고야 말겠어......)
  박갑성은 기와꼬의 집을 노려보며 차가운 미소를 지었다. 박갑성의 예상대로 무관이 기와
꼬의 집에서 나온 것은 얼추 30분이 지났을 때였다. 
  (놈들은 또 요정에 가서 흥청대고 마시겠지......)
  박갑성은 무관을 태운 인력거가 언덕 아래로 달려 내려가자 홰나무 뒤에서 나와 기와꼬의 
집으로 가까이 갔다. 담장은 어깨 높이 밖에 되지 않았다. 박갑성은 담장을 가볍게 뛰어  넘
은 뒤 처마 밑으로 달려가 바짝 붙어 섰다. 안에서는  불빛만 희미하게 흘러나오고 있을 뿐 
기척 없이 조용했다. 
  박갑성은 현관문을 열고 거실로 들어갔다. 
  "아!"
  인기척을 듣고 욕실에서 나오던 일녀 기와꼬가  몸을 부르르 떨었다. 기와꼬는 유까다(욕
의) 차림이었다. 
  "오셨군요. 늘 당신이 오기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
  "기와꼬는 이제 당신의 여자입니다."
  "......"
  "밤에 오시기가 어려우면 낮에 오세요. 낮에는 남편이  영사관에서 떠나지 않으니까 들킬 
염려가 없어요."
  "옷을 벗어!"
  박갑성은 눈빛이 몽롱하게 풀어져 있는 기와꼬를 노려보며 무뚝뚝하게 내뱉았다. 문득 자
신이 일녀의 욕정을 해소해 주는 건달이 된 것 같아  씁쓸했다. 일녀는 이제 박갑성보다 더
욱 대담해져 있었다. 
  "명령이시라면......"
  일녀 기와꼬가 눈웃음을 치며 유까다의 매듭을 풀었다. 그러자 유까다의 앞섶이 벌어지면
서 두 개의 탐스러운 육봉이 쏟아질 듯이 드러났다. 박갑성은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비를 맞으셨군요."
  기와꼬가 박갑성이 허리에 차고 있는 일본도를 풀러서 다다미 위에 내려놓았다. 
  "목욕을 하세요. 따뜻한 목욕물이 있어요."
  "목욕은 필요 없어."
  "새 옷을 드릴께요. 남편을 주려고 만든 새 옷이 있어요."  "그건 네 남편에게나 줘!"
  "당신에게 바치고 싶어요."
  기와꼬가 박갑성이 입고 있는 옷을 한 겹 한 겹 벗겼다. 박갑성은 기와꼬의 두 손이 빠르
게 옷을 벗기도록 맡겨 두었다. 
  "옷이 모두 젖었어요."
  기와꼬가 박갑성의 옷을 치우기 위해 무릎을 꿇었다. 박갑성은 기와꼬의 풍성한 머리숱을 
쓰다듬다가 하체로 쓸어안았다. 
  "아!"
  기와꼬의 입에서 신음소리 같은 탄성이 새어 나왔다.
  (너를 오늘 죽일 것이다!)
  박갑성은 일녀 기와꼬를 거실 다다미 위에 쓰러트렸다. 
  "목욕부터 하세요."
  기와꼬가 몇 번 저항하는 시늉을 하다가 가쁜 숨을 몰아 쉬며 박갑성에게 안겨 왔다. 
  일녀 이사하라 기와꼬의 죽음이 부산과 동래에 살고 있는 조선인들에게까지 알려진  것은 
이튿날의 일이었다. 기와꼬의 죽음은 삽시간에 부산과 동래 바닥을 휩쓸며 풍성한 화젯거리
를 만들었다. 
  죽음이 꼴불견이었다. 일녀 기와꼬는 옷이 몽땅 벗겨진 채  일본인 주택가의 언덕에 있는 
홰나무에 묶여서 죽어 있었다. 목이 졸린 탓에 별다른 상처가 없었다. 젊은 여인의 희고  포
동포동한 알몸은 비록 죽은 시체라고 해도 좋은 눈요기 거리였다. 
  일본인들은 분노로 몸을 떨었으나 조선인들은 쾌거라고 기뻐했다. 일녀 기와꼬의 알몸 시
체는 아침까지 홰나무에 매달려 대롱거리고 있었다. 무엇보다 일녀가 발가벗겨져 있는 시체
로 홰나무에 매달려 있었던 것이 말하기 좋아하는 사람들의 입방아를 찧게 했고, 소문은 꼬
리를 달고 퍼져 부산과 동래 바닥이 떠들썩하게 되었던 것이다. 
  "부산에서 왜년의 조리를 돌렸다며?"
  "조를 돌리다 뿐인가? 왜년이 발가벗겨져 있는데 그 꼴이 정말 볼만하더라구...... 무르익어 
터질 것 같은 육봉이며 방초가 우거진 계곡...... 내 생전 그렇게 좋은 구경은 처음 했네."  "
허어!"
  "어느 의혈지사가 그렇게 통쾌한 일을 했는지 몰라도 무더위에 소나기가 한  줄금 내리듯
이 시원했네."
  "사람들이 많이 보았는가?"
  "많이 보다 뿐인가? 부산 사람들은 남녀노소 가릴  것 없이 모두 보았네."  "조금 흉했겠
는 걸."
  "흉하긴 뭐가 흉해? 왜놈들이 조선에 들어와서 한 짓을 생각하면 그것은 아무 것도  아니
야."
  "도대체 그런 짓을 한 사람이 누구야?"
  "동학군이라는 사람도 있고 이름을 밝히지 않은  의혈지사라는 사람도 있고 그래."  일녀 
살인사건은 그날 하루종일 부산과 동래 바닥에 파다하게 나돌았다. 조선인들은 일녀를 죽여
서 홰나무에 묶어 놓은 사람을 서슴없이 의혈지사라고 부르고 있었다. 
  (조선 사람들은 모두 왜인을 증오하고 있는 거야......)  박갑성은  조선인들이 곳곳에서 수
군거리는 것을 보고 흡족한 생각이 들었다. 박갑성이 일녀 기와꼬를 죽인 것은 죽은 아내에 
대한 보복이었다. 그러나 조선인들은 일녀 기와꼬의 죽음에서 자신들이 당한 모욕과 수모를 
복수한 듯한 통쾌함을 느끼고 있는 것 같았다. 
  (이제 일본 영사관이 발칵 뒤집혔을 거야......)
  박갑성은 목침을 베고 누운 채 어두운 허공을 노려보며 생각에 잠겼다. 밤이었다.  어제부
터 내리기 시작한 비가 아직도 계속 내리고 있어서 바깥 출입을 할 수가 없었다. 비는 이따
금 쏴아 소리를 내며 흙벽을 들이치고 나뭇잎을 우수수  흔들었다. 비바람이 들이칠 때마다 
뒷곁의 나뭇가지들이 스산하게 몸을 떨고 있었다. 
  거리와 골목은 일본군으로 뒤덮여 있었다. 그들은 비가 오는데도 거리와 골목마다 늘어서
서 조선인들을 조사하고 검문했다. 동래에 있는 좌수영의 조선군들과 동래부 포졸들도 덩달
아 곳곳에서 기찰을 했다. 
  (흥! 네 놈들이 아무리 그래도 소용없어......)
  박갑성은 속으로 코웃음을 쳤다. 복지부동이라는  말이 있듯이 방에서 꼼짝  않고 있으면 
일본인들은 제풀에 나가떨어지고 말 것이다. 
  "방에 있소?"
  그때 방밖에서 인기척이 들렸다. 
  "누구요?"
  박갑성은 누운 채 밖을 향해 물었다. 
  "봉필이오. 마님이 건너오시랍니다."
  "마님이?"
  "비도 오고 하니 날궂이 삼아 건너 와서 술이나 한  잔 드시라는 마님의 전갈이오. 이 댁 
도령도 일본에서 돌아왔으니 일본 얘기도 듣고......"
  "알았소. 내 곧 건너 갈 테니 먼저 가시오."
  "그럼 빨리 오시오."
  "예."
  박갑성은 방에서 일어나 앉아서 공연히 늦장을 부렸다. 마님은  술집 주인 서옥년을 말하
는 것이고 도령은 일본에 유학을 갔다는 쇠돌을 말하는  것이었다. 서옥년이 경영하는 청솔
옥은 한때 일본인들로 번창했으나 부산에 일본인들이 경영하는 유곽과 요정이 생기면서  썰
물이 빠지듯이 손님이 줄고 말았다. 서옥년은 손님이 들어도  그만 들지 않아도 그만이라는 
식으로 청솔옥 경영에 신경을 쓰지 않고 있었다. 
  박갑성이 이 집에 온 것은  불과 보름 전의 일이었다. 박갑성은  청군이 아산을 공격하기 
위해 경성을 떠나 천안에 이르렀을 때 천안읍에서 일본군의 징발부대에 체포되어 탄약을 수
송하는 인부가 되었다. 일본군이 경성에서 징발한 조선인 인부들은  수원에 이르렀을 때 모
두 달아났기 때문에 그 뒤로는 일본군들의 감시가 더욱 삼엄해져 달아날 수가 없었다. 
  (이제는 일본군들의 탄약 수송까지 해주어야 하니 기가 막히군......)   박갑성은 비참한 기
분이었다. 그러나 위세당당한 일본군에게  개죽음을 당하지 않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는 일
이었다. 
  팽팽한 전투가 되리라던 예상과 달리 청군은 성환에서 대패하고 말았다. 청군은 증원군이 
집결한 평양으로 후퇴의 길에 올랐고 일본군은 승리를 자축하면서 청군의 뒤를 쫓았다. 
  (이 놈들은 천하의 악종이군......!)
  박갑성은 무섭게 눈을 부릅떴다. 일본군의 감시 때문에 탈출을 할 수는 없었으나 이를 악
물고 버티었다. 
  박갑성이 일본군의 감시를 피해 탈출한 것은 일본군이 경성에 이르렀을 때였다. 오오시마
의 혼성여단은 성환에서 청군을 격파하여 일본 민간인들로부터 대대적인 환영을 받았고  박
갑성은 그 틈에 일본군들의 눈을 피해 탈출했던 것이다. 
  박갑성이 천안에 이른 것은 8월 초순이었다. 낮이면 일본군  징발부대의 눈에 띌까 봐 산
에 숨고 밤에만 길을 재촉했으나 집에 도착하자 아내의 비참한 죽음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
다. 
  (이것은 꿈이지 생시가 아니야......)
  박갑성은 눈앞에 벌어져 있는 현실을 믿을 수가 없었다.  아이들은 울부짖고 있었고 그의 
아내는 하반신이 벗겨진 채 피투성이가 되어 죽어 있었다. 
  (내 눈에 흙이 들어가지 않는  한 반드시 피로써 이 복수를  할 것이다!)  아내의 시신을 
매장한 박갑성은 피눈물을 삼키며 맹세를 했다.  아이들의 말에  의하면 일본군이 들이닥친 
것은 박갑성이 도착하기 하루 전이었고 모두 일곱 명이나 된다고 했다. 그들은 울부짖는 아
이들을 마구 때리고 발로 차서 집밖으로 내쫓은 뒤 아내를 짐승처럼 짓밟았다는 것이다. 
  박갑성은 아이들을 아내의 친정에 맡기고 남으로 남으로 내려오기 시작했다. 처음엔 막연
하게 아내의 복수를 해야 한다는 생각만 했으나 남쪽으로 내려오면서 아내를 짓밟은 일본군
들처럼 자신도 일본 여인을 짓밟아야 하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던 것이다. 
  박갑성이 남쪽을 선택한 것은 북쪽에서는 청군과 일본군이 전투 준비를 하느라고  대대적
인 병력 이동이 줄을 잇고 있어서 잘못하면 또 다시 군수물자 수송을 동원하는 인부로 징발
될 것 같아서였다. 
  박갑성은 남쪽으로 내려오다가 대구에서 일본 상인 한 사람을  살해했다. 일본 상인이 조
선인 부녀자를 희롱하는 것을 보았기 때문이었다. 그것이 박갑성에게는 최초의 살인이었다. 
  박갑성은 그 일본 상인을 상해한 뒤 곧장 동래로 내려왔고 동래에서 미곡상을 하는 박 서
방을 만나 미곡상에서 잔신부름도 하고 전남과 경남 지방에서 쌀을 사오는 일도 함께 하게 
되었던 것이다. 
  (쇠돌이라는 청년이 이 집주인 여자의 아들은 아닌 것 같은데......)  박갑성이 밖으로 나오
자 비바람이 차갑게 얼굴을 때렸다. 박갑성은 뛰듯이 빠른  걸음으로 행랑채에서 안채로 걸
어갔다. 
  "어서 오게."
  박 서방이 무성한 턱수염을 쓰다듬으며 박갑성을 반겼다. 안채의 대청에는 주인인 서옥년
을 비롯하여 쇠돌이라는 청년, 박 서방, 추선, 봉필이 빙 둘러앉아 술을 마시고 있었다. 단란
한 가족과 같은 분위기였다. 그러나 쇠돌은 일본옷을 입고 있어서 이질감이 느껴졌다. 
  "비가 이틀을 계속 내리네."
  옥년이 박갑성에게 잔잔한 미소를 보내며 말했다. 한쪽 무릎을 세우고 있었으나 양반가의 
부인들처럼 기품이 있어 보였다. 오히려 양반가의 부인들에게서는 찾아볼 수 없는 후덕하고 
인자한 면모까지 풍기고 있었다. 
  "비가 내리고 나면 찬바람이 불 게야. 찬바람 불면 금세 겨울이지......"  박 서방이 어두운 
얼굴로 대답했다. 박갑성은 쇠돌이 따라주는 술을 두 손으로 받아서 천천히 마셨다. 
  "쌀을 많이 구입해 놓아야 할 꺼야." 
  "벼를 베고 탈곡을 하면 본격적으로 사들여야지. 그런데  동래까지 갖고 들어오면 일본군
들에게 모조리 징발될 테니 어떻게 하지?"
  박 서방이 서옥년의 얼굴을 근심스러운 표정으로 건너다보았다. 박  서방이 하고 있는 미
곡상은 일본 상인들의 농간으로 손해를 보게 되자 일본 상인들과의 거래를 끊고 조선인들에
게만 쌀을 팔고 있었다. 그러나 청일전쟁이 발발하면서 일본군이  박 서방의 미곡상에 들이
닥쳐 쌀을 모조리 싣고 가 군량을 삼았다. 그것뿐 아니라 쌀, 콩 같은 군량을 준비하라고 일
본군의 성화가 빗발치듯 했다. 그러자 동래와 부산 일대의  쌀값이 폭등하고 농민들은 곡식
을 숨기기에 여념이 없었다. 
  "쌀을 구할 수는 있을라나?"
  "못해도 한 백 가마는 구입할 수 있을 거야."
  "그럼 장산리에 쌓아 두지. 여기서 멀지도 않고 일본인들이 찾기도 쉽지 않으니까......"  "
그렇게 하면 되겠군. 전쟁이 끝날 때까지만  숨겨 두면 되니까."  서옥년의 말에 박  서방이 
고개를 끄덕거리며 대답했다. 
  "그런데 전쟁은 언제 끝나지?"
  "일본군이 계속 북상하는 것을 보면 쉬이 끝날 것 같지는 않구먼."  박 서방이 무겁게 한
숨을 내쉬며 술을 마셨다. 
  "일본은 여순을 공격한 뒤에야 전쟁을 끝맺을 것입니다."  쇠돌이 잠자코 앉아 있다가 비
로소  단언하듯 말했다. 아까부터 말참견을  하고 싶었으나 참고 있다가 한마디하는 기색이
었다. 
  "여순이 어디야?"
  "여순은 청나라의 군항으로 청군의 요새지입니다."
  "일본이 평양에서도 이겼다면서요?"
  추선이 박 서방을 향해 물었다. 
  "그러게 말이야. 청군이 압록강을 건너 만주로 달아났다잖아."   "일본군이 그렇게 강한가
요?"  
  "잘은 몰라도 청군은 1만여 명이 평양에서 몰살을 당했대."  "그래서 그런지 동래와 부산
에  있는 일본인들이 더욱  거들먹거리고 있어요. 일본인들은 조선이 저희 나라라도 되는지 
온통 휘젓고 다녀요."
  "그런데 일본이 조선을 돕기 위해 청나라와 전쟁을 한다는 것은  무슨 소리야?"  "조선이 
청나라와 속국으로 청나라의 지배를 받고 있었기 때문에 일본이 청나라를 내쫓고 조선을 독
립하게 한다는 것입니다."
  쇠돌이의 말이었다. 
  "청나라로부터 독립을 해?"  
  "또 한 가지는 조선 조정을 개혁해 개명한 정치를 한다는 것입니다."  "개명한 정치?"
  "세계는 우리가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빠르게 발전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조선은 아직도 
한밤중이니 일본이 무력을 동원해서라도 조선을 개명하게 하겠다는 것입니다."  "그럼 일본
이 조선의 정치를 간섭하는 것이네."
  추선의 말에 얼굴을 찡그리고 있던 서옥년이 빙그레 웃었다.  그러자 좌중은 잔잔한 웃음
의 물결이 번졌다. 
  "조선은 너무 부패했습니다. 조선이 망하는 것은 이제 피할 수 없는 대세입니다."  쇠돌이 
정색을 하고 말했다. 
  "조선이 망한다고?"
  "조선은 개화할 시기를 놓쳤습니다. 김옥균의 갑신정변이 성공했으면 사정이 훨씬 달라졌
을 것입니다."
 쇠돌의 말에 박갑성은 가슴이 묵지근하게 저려왔다. 
  "김옥균은 일본의 앞잡이였어."
  서옥년은 얼굴빛을 바꾸고 단호하게 말했다. 
  "조선은 일본의 힘을 빌리지 않고서는 개화할 수가 없습니다."  "일본이 조선의 개화를 도
와줄 거라고 생각하니?"
  "예. 일본만이 조선을 개화시킬 수 있습니다."
  "잘못된 생각이야!"
  서옥년의 얼굴이 차갑게 변했다. 좌중은 갑자기 썰렁한 냉기가 감돌았다. 
  "일본은 조선을 침략하고 있는 거야. 너는 지난  6월에 일본군이 대궐에 쳐들어가 나랏님
을 협박하고 조선군을 무장해제 시킨 것도 모른다는 말이냐?"  "일본은  조선을 도와주려고 
하고 있을 뿐입니다. 나라가  썩고  대신들이 부패했으니 개명한 정치를 해야  하지 않습니
까? 그러나 조선은 스스로의 힘으로 개명한 정치를 할 수 없습니다. 오히려 조선은 이웃 나
라를 위해 대규모의 군대를 파견하여 도와주고 있는 일본에 감사해야 합니다."
  쇠돌의 말에 박갑성은 주먹을 움켜쥐었다. 쇠돌의 말은 일본군이  경복궁을 점령할 때 조
선인들에게 뿌린 선전물의 내용과 흡사했다. 
  (이 놈은 완전히 왜놈이 되었군......)
  박갑성은 속에서 울화통이 치미는 것을 꾹꾹 억눌러 참았다. 
  "너는 일본에 있어서 조선의 실정을  잘 몰라! 조선을 돕는다는  일본인들이 한다는 짓이 
조선인 마을을 습격하고 재물을 노략질한다는 말이냐? 너는 일본인들에게 겁간 당해 울부짖
는 조선인들의 비참한 실정을 너무나 모르고 있어!"
  서옥년의 말은 싸늘했다. 박갑성은 불만이 가득찬 얼굴로 고개를  숙이고 있는 쇠돌을 쏘
아보면 속으로 웃었다. 
  "그리고 네 옷 꼬라지가 그게 무엇이냐? 네가 왜인이야?"  "......"
  서옥년의 언성이 높아지자 쇠돌은 고개를 떨군 채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건너가서 옷 갈아 입어!"
  서옥년의 목소리가 얼음장처럼 차가웠다. 쇠돌이 엉거주춤 몸을 일으켜 밖으로 나갔다. 
  좌중은 조용했다. 모두들 서옥년이 분개하고 있어서 입을 다문 채 빗소리를 듣고 있었다. 
3  옥년은 잠이 오지 않았다. 쇠돌이 때문에 날궂이 삼아 마련했던  술자리가 흥이 깨져 옥
년도 방에 돌아와 누웠으나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대청에서 박 서방을 비롯하여 천안에서 
왔다는 박갑성과 봉필이는 그대로 남아서 술추렴을 계속하고 있었다. 
  (쇠돌을 일본에 유학 보낸 것이 잘못인가?)
  옥년은 모로 돌아누우며 무겁게 한숨을 내쉬었다. 쇠돌이 아버지와 쇠돌이 어머니의 희미
한 얼굴이 머릿속에 떠오르면서 가슴이 묵지근했다. 
  세상은 청일전쟁으로 어수선했다. 일본은 여순에 집결하고 있는 청군과 전투를 치루기 위
해 20만 명이라는 대병력을 동원하고 있었고 상당수의 일본군은 이미 부산, 인천, 원산을 통
해서 상륙하여 북상하고 있었다. 관군과 전주화약을 맺고 해산했던 동학 농민군의 움직임도 
심상치 않았다. 그들은 경복궁이 일본군에  의해 점령되었다는 소식을 듣고는  분노로 몸을 
떨고 다시 궐기해야 한다고 통문을 돌리고 있었다. 일본군의  강제적인 인부 동원과 군수물
자 징발도 조선인들의 격렬한 반발을 불러 일으켰다. 
  호남의 농민들은 다시 관아의 무기를 탈취하여 무장하기 시작했고 대구에서는 폭동이  일
어나 일본인들과 조선인들이 집단 패싸움을 하여 조선인 6명이 죽고 일본인들의 다수가 부
상을 당하였다. 
  조선인들의 반일 감정이 격해지자 오토리 일본 공사는 일본군을 동원하여 경계에 나섰다. 
그러나 조선은 이미 평양 이남이 일본군의 수중에 완전히 들어가 있었고 조선 조정은 일본
의 지시대로 움직이는 형편이었다. 군국기무처에는 친일계 인물들이 대거 포진해 일본의 요
구대로 개화 정책을 수립해 나갔다. 
  이에 대해 대원군은 비난을 서슴지 않았다. 대원군은 조선 천지가 일본군들로 득실거리고 
있는데도 단호하게 일본을 거부하고 있었다. 
  일본은 대원군의 존재를 껄끄럽게 여기기 시작했다. 조선의 국왕인 고종과 왕비인 민비는 
정책 현안에 대해 재가만 내릴 뿐 정사를 간섭할 수가 없었다. 
  일본에 망명 중이던 박영효가 돌아온 것은 음력 7월 6일이었다. 김옥균이 암살된 것은 박
영효가 귀국하기 불과 4개월 전의 일이었고 박영효 자신도 김옥균이 암살된 지 한 달  후에 
조선에서 온 암살자로부터 살해당할 뻔한  일이 있었다. 그러나 박영효는  일본인들에 의해 
철저한 보호를 받으면서 인천에 도착하여 일단 일본인 거류지역에 몸을 숨겼다. 
  <박영효가 곧 귀국한다. 이 사람에게는 일본인들 중에 여러 종류의 사기꾼들이  관계하고 
있다는 정보가 입수되어 있다. 그러나 하야시 다다스 외무차관이 후쿠자와 유키치와 협의하
여 박영효를 혼자 귀국시키기로 하였다. 그러므로 공사는 박영효에게 접근하여 이용하는 방
법을 택하라.>
  일본의 외무대신인 무쓰 무네미스가 오토리 공사에게 보낸 훈령이었다. 조선 조정에서 활
약하고 있는 친일본당 인사들로는 조선을 요리하는 데 역부족이라고 느끼고 조선  정계에서
도 거물급인 박영효를 이용할 계획을 세운 것이다. 
  박영효가 귀국했다는 소문은 비밀스럽게 퍼져  나가기 시작해 민비의 귀에까지  들어가게 
되었다. 
  (박영효가 귀국을 하다니 기절초풍할 노릇이군......)  민비는 어처구니가 없어 쓴웃음이 나
왔다.  갑신정변이 실패로 돌아간 지   어느덧 10년이 되었으나 민비에게 박영효는  아직도 
철천지원수였다. 그런데 박영효가 일본을 등에 업고 귀국한 것이다. 
  (일본은 박영효를 무엇 때문에 귀국시킨 것일까?)
  민비는 박영효를 귀국시킨 일본의 저의를 헤아리느라고 골똘히  생각에 잠겼다. 7월 하순
이었다. 장마가 그치자 볕이 따가워지면서 하늘이 높고 맑아졌다. 대궐의 침전과 누각  사이
에 서 있는 나무들이며 숲이 어느덧 누르스름한 빛을 띠고  있었다. 낮이면 여름 내내 귓전
이 먹먹하도록 울어대던 매미 울음소리가 시들해지고 밤이면 가을의 전령인 풀벌레들이  섬
돌 밑에서 처량하게 울었다. 길고 지루한 여름이 서서히 물러가고 있었다. 
  (일본은 예상외로 군대가 강하다. 충남 아산에서  청군이 대패하고 풍도 앞바다에서 청나
라 수군까지 몰살을 당했으니 당분간은  일본이 득세를 할 것이다.  청나라와 일본으로부터 
온갖 모욕을 당하면서까지 연로정책을 추진해 왔는데 러시아가 이렇게 위급한 때에  꼼짝도 
안 하고 있으니 분해도 이제는 일본과 손을 잡는 척 할 수밖에  없어......)  민비는 박영효를 
이용할 계획을 세우고 곧바로 실행에 옮겼다. 
  박영효는 인천에 도착하여 두문불출하고 있었다. 10년만에  밟은 고국 땅이었으나 아무도 
반기는 사람이 없었고 사람들 앞에 나설 수가 없었다.  박영효는 국적으로 선포되어 있어서 
누군든지 박영효를 구이면 벼락 출세를 할 수 있었다. 
  박영효가 인천에서 노심초사하고 있을 때 한성으로부터 밀사가 찾아왔다. 
  "중전마마께서 이것을 전달하라고 하셨습니다."
  밀사는 어안이 벙벙한 박영효 앞에 보따리를 하나 던져 놓고 재빨리 사라졌다. 
  (중전마마라면 민비가 아닌가......?)
  박영효는 붉은 보따리를 앞에 놓고 여러 가지 생각에  잠겼다. 대궐에서 사용하는 것이라 
보자기는 호화스러운 비단이었으나 그 안에는 무엇이 들었는지 전혀 예측할 수가 없었다. 
  (설마 사약을 보내지는 않았겠지......)
  박영효는 기분이 이상했다. 그가 김옥균과 함께 갑신정변을 주도했기 때문에 아버지를 비
롯한 일가족이 역적이 되어 죽음을 당했고, 형 박영교를  비롯하여 동지인 홍영식도 비참한 
죽음을 당했었다. 그들이 청당이라고 하여  모살한 민태호, 민영목, 조영하, 윤태준,  이조연, 
한규직의 자손들 입장에서 보면 당연한 결과였으나 박영효는 비통하기만 했다. 
  박영효는 떨리는 손으로 보자기를 풀렀다. 그러자 보자기 안에서  붉은 빛이 영롱한 조복 
한 벌이 나왔다. 
  <중궁전하사품>
  조복에는 여섯 글자만 달랑 씌어 있는 서찰도 한 통 들어 있었다. 
  (민비가 나를 복권시키겠다는 뜻인가?)
  박영효는 민비의 진의를 파악하기 위해 이틀 동안이나 생각에 잠겨 있다가 의금부를 통해 
신소장을 올렸다. 
  <죽을죄를 지은 신 박영효는 원통하고 절박한 사유에 대해 성상께 아뢰옵니다. 
  신은 대대로 국록을 타먹는 가문의 후손으로서 신의 부자형제 때에 이르러서는 전하의 지
극한 총래를 입어서 온갖 광영을 누리게 되었는데 신의 부자는 이러한 은총에 감격하였으나 
보답할 바를 알지 못하였습니다. 
  신의 아비 원양은 신의 형제들을 늘 경계하기를 나라의 은덕에 보답하려면 위험과 어려움
을 피하지 말아야 한다고 했습니다. 신은 나이 어리고 식견이 얕아서 그 말을 듣고도 그 뜻
을 이해하지 못한 채 단지 임금의 은혜에 만 분의 일이나마 보답할 생각을 하였으나 사리에 
맞는가 맞지 않는가를 가리지 못하였습니다. 갑신년 겨울에 이르러 시국이 날로 간고해지고 
나라가 위태로워지는 것을 보고는 걱정되고 통분한 심정을 금할 수 없어서 이를 바로 잡으
려고 하였으나 충성을 다 하기도 전에 누명을 뒤집어써서 위로는 임금을 욕되게 하고 아래
로는 가문에 앙화를 미치게 하였으며 부모형제는 거의 다 죽고 보잘 것 없는 몸이 떠돌아다
니다가 다른 나라에 도망치기에 이르렀습니다 
  신이 지은 죄는 한 시각이라도 하늘과 땅  사이에 목숨을 부지할 수 없는 것이지만 신이 
한평생 마음에 다짐한 것은 유유한 푸른 하늘에 물을 수 있습니다. 
  일본에서 나그네 살이 하는 11년 동안 잠을 자도 편안치 않았고 음식을 먹어도 달지 않았
습니다. 처자를 두지 않고, 가무음곡을 즐기는데 참가하지 않은 채 밤낮으로 근심함과  황송
함에 싸여 오직 성상께서 이해하여 주시기만을 바랄 뿐이었습니다.  아울러 신의 이번 걸음
은 단지 전하의 용안을 우러러 뵈옵고 구구한 심정을 하소하려는 것이 첫째이고 부모형제의 
해골이나 수습하여 장사 지내는 것이  둘째입니다. 이 소원만 성취한다면  설사 구렁텅이에 
물러가서 죽은들 여한이 없겠습니다. 
  이번에 벌써 여러 날이 지났으나 깊은 대궐에 신의 정성이 미치지 못하니 삼가 머리를 땅
에 박고 엎드려 강음에서 처분을 기다리니  하늘같은 부모의 심정으로 신의 곤고한  마음을 
굽어보시고 신에게 결코 딴 생각이 없다는 것을 살피시어 법 맡은 관청으로 하여금 도망하
고 지시를 위반한 지를 논하게 한다면 도끼로 찍고 끓는 가마에 집어넣는 형벌이라도 달게 
받겠사옵니다. 
  당황망조하여 몸둘 바를 모르겠나이다.>
음력 8월 1일 박영효가 의금부를 통해 고종에게 올린  신소장이었다. 고종은 박영효의 신소
장이 올라오자 쓰다 달다 말없이 잠자코 있다가 이틀이 지난  음력 8월 4일 승선원(승정원)
을 통해 박영효의 사면령을 내렸다. 
  <갑신년에 박영효가 지은 죄를  논한다면 누구인들 죽여야 한다고  말하지 않겠느냐마는 
그의 마음을 살펴보면 사실 용서할 만한 점이 없는 것이  아니다. 이제 신소장을 보니 10년 
동안 떠돌아다니면서도 나라를 그리워하는 마음을 잊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겠다. 그의 
죄명을 특별히 지워버림으로써 조정의 관대한 뜻을 보일 것이다.>  민비의 계책에 의한 고
종의 지시는 승선원에서부터 맹렬한 반대가 시작되어 시원임대신들인 심순택, 김홍집,  조병
세, 정범조 등도 격렬한 반대를 했다. 그러나 이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고종과 민비의 완
강한 태도, 일본의 후원으로 박영효는 실로 10년만에 한성 땅을 자유의 몸으로 밟는 감격을 
누리게 되었다. 
  한성은 이미 일본의 수중에 들어가 있었다. 음력 7월 24일 일본군은 경복궁에서 철수했으
나 조선의 도읍 한성의 치안까지 일본군이 맡아 한성을 일본이 장악하고 있는 실정이었다. 
  군국기무처는 매일같이 법령을 만들어 내다시피 하고 있었다. 그 법령들의 대부분은 동학 
농민군이 주장하던 개혁안과 흡사했으나 조선인들로부터 커다란 반발을 샀다. 
  대원군은 군국기무처에서 의결한 안건을 일일이 심사하면서  수결을 놓지 않았다. 대원군
이 철저한 유도주의의 인물이라는 점도 있었으나 대원군은 친일본당이 입안하는 정책을  오
로지 감정적으로 무산시키려고 하였다. 
  민비는 그 기회를 노려 왕권 회복운동에 나섰다. 
  그러나 동학 농민군의 움직임이 점점 노골화되고 있어서 일본은 민비의 존재에 신경을 쓸 
여가가 없었을 뿐 아니라 음력 8월  17일로 예정된 평양성의 대회전을 차질 없이  수행하기 
위해 눈코 뜰 새가 없었다. 민비에 대한 문제도, 동학 농민군에 대한 문제도 평양성 전투 이
후로 미루어야 했다. 
  (동학 농민군이 일본군을 몰아낼 수 있을까......?)
  옥년은 빗소리를 들으며 억지로 잠을 청했다. 술을 마시고  있는 남정네들은 밤을 세우려
고 작정을 했는지 밤이 깊었는데도 술자리를 파하지 않고 있었다. 
  옥년이 한성 소식을 소상하게 알고 있는 것은 부산에  있는 일본인들을 통해서였다. 부산
과 한성에는 전보가 개통되어 있어서 일본인들은 부산에 앉아서도 한성 소식을 훤하게 알고 
있었고, 옥년은 일본인들을 통해 한성 소식을 알고 있는 것이다. 
  (나라가 혼란해......)
  옥년은 불안했다. 
  밖에는 여전히 비바람이 을씨년스럽게 몰아치고 있었다. 
  
    제 39 장 녹두꽃 떨어지다
  음력 8월이 이틀을 쉬지 않고 내린 가을비와 함께 물러가고 9월이 왔다. 음력 9월 3일 동
학 농민군은 각 지방에서 일본 상인을  살해하며 일본군과 소규모의 접전을 벌이기  시작했
다. 
  전봉준은 9월 13일 동지 손화중과 함께  농민군의 제2차 봉기를 선언하는 격문을  띄우고 
선봉에 섰다. 
  <일본이 개화라고 일컬어 애초부터 일언반사도  없이 민간에 전포하고, 한편으로  격서도 
없이 솔병하고 도성으로 들어와  야반에 왕궁을 격파하여 주상을  경동케 하였다고 하기에, 
초야의 사민들이 충군애국하는 마음으로  강개하지 않을 수 없어  의려(의용군)를 규합하여 
왜병과 접전을 하노라.
  본년 6월이래 일본군은 계속 조선에 상륙해 온 바,  이것은 반드시 아국을 병탄하려는 것
이니 어찌 이 나라의 신민된 자로 좌시할 수 있겠는가.>  동학 농민군이 전봉준을 중심으로 
재차 봉기하게 된 것은 전봉준이 관군에 체포되어 재판을 받을 때 설명한 바와 같이 일본군
이 조선 땅에 불법 침략을 자행하여 이를 몰아내기  위해 봉기한 것이었다. 
  동학 농민군은 홍계훈과 전주화약을 맺은 뒤 전라도 전 지역에 집강소를 설치하여 집강소 
농민통치를 실시했다. 신임 전라감사  김학진은 관민상화지책을 추구하여  동학의 집강소를 
공인하고 전봉준을 감영으로 초청하여 정사를 협의하기까지  하였다. 전봉준은 부하 20명을 
거느리고 전라도 각지를 순행하였다. 
  동학 농민군 진압의 명분으로 조선에 출병한 일본군이 느닷없이 궁궐을 침범한 사실에 전
라감사 김학진과 전봉준은 큰 충격을  받았다. 일본군은 궁궐을 침범하여  국왕을 연금하고 
곧바로 남진 성환에서 청군을 격파했다. 그러나 그후에도 일본군은 조선에서 철수하지 않고 
이번엔 북상하여 평양에서 청군과 대회전을 치룰 준비를 했고 조선을 위협하여 7월 26일 소
위 조일 공수동맹을 늑결(강제로 조약을 체결하는 것)하였다. 
  전봉준은 일본이 조선을 병탄하려는 야욕을 간파하고 일본군을 쳐부수고 일본인들을 조선
에서 축출하기 위해 다시 기병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청일전쟁의 향방도 알 수  없었고 농민군은 기병을 할 준비도  되어 있지 않았다. 
전봉준은 일본군과의 결전이 피할 수 없는 운명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군수물자와  군량미를 
준비하기 시작했다. 
  8월이 되어 평양성에서 일본군이 승리하여 전선이 압록강 건너에 형성되자 조선은 완전히 
일본군의 군화 아래 짓밟히게 되었다. 
  동학 농민군은 청일전쟁이 청나라의 승리로  돌아가 일본이 조선에서 물러가기를  은근히 
기대하고 있었다. 그러나 동학 농민군의  기대와 달리 대승을 거둔 일본은  그 여세를 몰아 
만주까지 진출할 기세였다. 
  전봉준은 일본의 승리에 실망하면서  일본이 청나라와 전쟁을 벌이고  있을 때, 일본군의 
후방을 공격하여 일본군을 조선에서 몰아낼 계획을 세웠다. 대원군도 동학 농민군의 간부들
에게 밀시를 내려 일본군을 구축할 것을 요구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소식은 일본 첩자들의 활동으로 일본군에게 낱낱이 보고되고 있었다. 
  <8월 20일 이래 전라도 각 읍으로부터 남원에 집합한 동학도의 무리가 수십 만 명으로서 
동헌에 도소를 두고, 각 면의 부호로부터 전곡(돈과 곡식)을 징출하여 남원에 수송했으며 각 
면으로부터 수십 석씩을 징발했고, 군기는 남원부의 무기와 산성의  무기를 모두 빼앗아 무
장하고 백성에 대해서는 조금도 해를 입히지 않았으며  지휘자는 김기범(김개남)이다.>  일
본 공사관 기밀 제75호(갑호)에 실린 일본 첩자들의 보고 내용이었다. 
  일본군은 이로 인하여 동학 농민군 토벌에 나서지 않을 수 없었고 조선군까지 강제로 끌
어 들여 토벌에 참여하게 하였다. 
  조선군을 무력화시킨 일본은 언제 화약고처럼 터질지 알 수 없는 농민군이 봉기하기만 하
면 그 즉시로 토벌할 계획이었다. 
  전봉준은 동학 농민군 내부에서 일어나는 항일 봉기의 요청을  뿌리칠 수가 없었다. 일본
군은 청일전쟁이 발발하자 경부로에만도 21개소의 병참부를 설치하여 군수물자 수송에 혈안
이 되어 있었다. 그러나 조선인들은 이에 조직적으로 저항을 했고 그 선봉에는 언제나 동학
인들이 있었다. 
  일본 언론들조차 이미 6월 28일부터 농민군 거병의 조짐이 보이고 있으며, 조금이라도 나
라를 걱정하는 조선인들은 궁중의 일은 물을 필요도 없이 우리가 먼저 일어나 일본군을 막
아야 한다는 기운이 팽배해 있다고 세세하게 보도하고 있었다. 
  실제로 음력 7월에 동학인들은 함창의 현감을 포박하여 인민을 무임으로 일본을 위해 사
역케 했다고 꾸짖어 현감은 도망가고 인민들은 현감의 말까지도 듣지 않게 되었다. 
  음력 8월에는 동학 농민군들의 재봉기  요구가 더욱 격화되었다. 충청도에서는  1천 명의 
동학 농민군들이 금강 부근에 모여 봉기할 움직임을 보이다가 흩어졌고 천안에서는  일본인 
6명을 살해한 다음 일본인들을 몰아내자는 방까지 붙였다.  관군과 일본군은 동학 농민군들
이 천안, 죽산, 공주 등에서 무기를 탈취할 움직임을 보이므로 무기고를 봉쇄하고  엄중하게 
지켜야 했다. 또 충청도 하담, 가흥 지방에서는 일본군  병참부대가 역부(인부)를 1백 명 모
집하여 고용하려고 했으나 농민군들이 들고일어나  일본군의 군수물자를 운반해 주는  자는 
매국노이므로 모두 죽이겠다고 하여 아무도 역부에 자원하지 않았다. 
  김개남은 음력 8월 25일 임실에서 봉기하여 남원으로 들어갔다.  이때 남원부사는 이미 1
개월 전에 달아나 버리고 전라좌도의 농민군 7만여 명이 남원 부중에 운집하여 재봉기를 요
구하고 있었다. 
  <이제 시세를 살피건대 왜와 청이 전쟁을 하고 있는데  어느 편이 승리하면 반드시 군대
를 우리에게 돌릴 것이다. 우리들은 비록 수는 많지만 오합지중이어서 쉽게 도망해  버린다. 
이 무리를 가지고는 종내 뜻을 이룰 수가 없다.>
  전봉준은 김개남이 봉기하려 한다는 소식을 듣자 즉각 달려가 김개남을 만류했다. 
  "큰 무리가 한 번 흩어지면 다시 모으기가 어렵소."
  김개남은 전봉준의 제안을 한 마디로  뿌리쳐 버렸다. 이때는 대원군도  농민군의 재봉기 
움직임에 우려를 표시하고 밀사를 전주 감영에 파견했다. 대원군의  밀지를 받은 전주의 농
민군들은 모두 성을 나와 해산하는 형식을  취했고 대원군의 밀사들은 남원을 향해  출발했
다. 
  전봉준이 김개남 설득에 실패하자 곧이어  손화중이 남원으로 달려가 김개남을  설득하기 
시작했다. 
  <우리들이 봉기한 것이 반년이나 되었다. 비록 전라도가 모두 호응한다고 말하지만  사족
(양반)으로 성망있는 자가 우리를 따르지 않고, 재산 있는  자가 따르지 않으며, 능문지사가 
따르지 않는다. 더불어 접장이라고 부르는 자들은 우천해서 화를 즐기고 있는 무리들뿐이다. 
그러므로 인심의 향배가 어떤지 알 수 있으며 일이 반드시 성공하기 어려울 것이다. 우리는 
사방에 산개하여 후일을 도모함이 더욱 옳다.>
  손화중은 김개남을 적극적으로 설득했으나 김개남은 듣지  않았다. 손화중과 전봉준은 김
개남의 설득에 실패하자 어쩔 수  없이 재봉기를 결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김개남이 남원 
일대에 7만여 명을 집결시킨 것이 전봉준과 손화중에게는 무언의 압력이 되었다. 
  9월 1일부터 농민군들의 산발적인 봉기가 일어나기 시작했다. 음력  9월 1일 금구 출신의 
대접주 김인배가 봉기하여 광양과 순천의 농민군과 함께 하동을 점령함으로써 농민군의 제2
차 봉기는 들불처럼 타오르기 시작했다. 9월초에는 경기도의 죽산과 안성에서까지 농민군이 
봉기하여 조선 조정은 황급히 장위영 영관 이두황을 죽산 부사로 경기영 영관 성하영을 안
성군수로 임명하여 농민군을 진압하게 했다. 
  전봉준은 고향 태인으로 돌아왔다가 9월 3일 금구 원평을 거쳐 전주 삼례에 도착 대도소
를 설치하고 9월 13일 전라도 53개 군현에 동학 농민군의 봉기를 호소하는 격문을 띄웠다. 
  전봉준의 격문이 돌자 기다리고 있었다는 전라도 23개 군현의 농민군이 무기고를 열고 일
제히 무장하는 한편, 삼례역으로 달려와 순식간에 삼례역 벌판은 농민군들의 흰옷으로 하얗
게 뒤덮였다. 이때 전라도 각지에서 일제히 봉기한 농민군은  약 11만 4천여 명에 이르렀으
나 각자의 고을에서 대접주나 집강의 지휘를 받아 삼례에는 불과 4천여 명이 집결하였다. 
  남원의 김개남 부대도 7만여 명에 이르고 있었으나 남원 일대의 전체 농민군을 말하는 것
이고 김개남이 직접 지휘한 농민군은 1만 명 남짓 되었다. 그러나 이들은 모두 남접 소속이
었고 북접은 농민군의 봉기에 소극적이었다.  교주 최시형을 비롯한 북접  지도부는 교조의 
신원운동만 하락할 뿐 국왕에게 충성해야 한다는 이유로 농민군의 봉기를 불허했다. 
  "제1차 봉기 때도 남접이 사(스승)의 지시를 따르지 않아  청일 양군이 조선 땅에 들어오
는 빌미를 만들었다. 그런데 2차 봉기를 또 한다니 이것은 도인(동학인)들을 어육으로 만드
는 결과밖에 되지 않을 것이다. 남접은 즉각 해산하라!"  "우리가 1차 봉기를 한 것은  북접
도 알다시피 신원금폭에 있었고 청일 양군이 들어온다고 하기에 스스로 관군과 화약을 맺고 
해산했다. 그런데도 일본군은  철병하지  않고 궁궐을 침범하여 주장을  경동케 했다. 어디  
그뿐인가? 일본군은 조선 땅을  청일의 전쟁터로 만들고 있으니 조선의 생민이라면 누구라
서 분개하지 않겠는가?"  "이 모든 사단이 남접으로 인해 비롯된 것이다."
  "작금의 일본은 임진년의 왜란(임진왜란)과 다를 바가 없다. 북접은 허황된 이론만 말하지 
말고 우리에게 동참하여 누란의 위기에 빠진 나라를 구하라!"  "남접은 국적이며 사문의 적
이다! 봉기를 철회하지 않으면 남접을 정벌할 것이다!"  남접과 북접은 팽팽한 대립을 하게 
되었고 급기야 북접은 벌남기를 내걸고 남접을 토벌할 계획을 세우기 시작했다. 
  (강력한 적을 앞에 두고 동학이 남북으로 갈라져 어쩌자는  것인가?)  전봉준은 오지영을 
북접 대도소에 파견했다. 오지영이 북접과 친분이 두터운 김방서와 유한필을 거느리고 보은
의 북접 대도소에 도착하자 북접의 김연국, 손병희, 손천민,  황하일 등 북접 두령들은 남접
을 토벌하기 위해 통문까지 지어 놓고 있었다. 
  <도로써 난을 지음은 불가한 일이다. 호남의 전봉준과 호서의 서장옥은 나라의 죄인이오, 
사문의 적이니 동도들은 마땅히 이를 징벌해야 할 것이다.>  북접의 통문을 본 오지영은 가
습이 컥 하고 막히는  기분이었다. 그러나 오지영은 열변을 토하며 북접의 지도부를 설득했
다. 
  "스승의 지시는 일월같이 밝아서 난으로 도를 호소하는 것이 옳지 않다는 것은 남접도 잘 
알고 있소. 그러나 작금의 실정은 일본이 조선을 병탄하려는  것이니 만큼 도에만 연연하고 
있을 수가 없소. 우리는 오로지 척왜의 깃발을 들고자 할뿐이데 도인이 왜적의 무리 앞에서 
내분을 보이는 것은 옳지 않소. 동학 도인은 하나로 단결하여 사생을 같이 해야 할 것이오."  
오지영의 설득에 손병희가 적극적으로 찬성하여 벌남기를 거두고 통문을 치운 다음  북접도 
보국안민의 깃발 아래 봉기하기로  하였다. 아울러 교주 최시형은  오지영을 양호도찰에 임
명하였다. 
  최시형은 음력 9월 15일 북접 산하의 동학인들에게 통문을 띄워 천산에 집결하라는 지시
를 내렸다. 이에 북접 산하의 동학인들이 구름같이 모여들어  수일 내에 6만여 명이 운집하
였다. 
  최시형은 손병희와 손천만에게 의거를 청하는 형식을 취하게 했다. 그리고는 그들의 청을 
수락하는 선언을 발표하였다. 
  <인심이 곧 천심이라, 이는 곧 천운의 소치이니 군(君) 등은 도중(道衆)을 동원하여 전봉
준과 협력하고 사원을 신(伸) 하며 오도(吾道)의 대원을 실현하라.>  이어서 최시형은 손병
희를 통령에 임명하여 북접 농민군을 지휘할 수 있는 통령기를 내려 주어 출전케 하였다. 
  전봉준은 9월 13일 격문을 돌린 뒤에도 1개월 정도 삼례에 주둔하여 농민군의 무장을 기
다리고 남북대연합이 성공하자 북접과 논산대회를 치루기로 하였다. 
  일본은 9월 25일 조선 조정을 제대로 요리하지 못하는 오토리 일본 공사를 이노우에 가오
루로 교체하였다. 9월 28일 조선에 부임한 이노우에 가오루는 동학 농민군 토벌을 적극적으
로 주도했다. 전임 오토리 공사에 의해 친일 내각으로 탄생한 김홍집 내각에 관군을 동원하
여 농민군을 토벌하도록 압력을 하는 한편 일본군을 대대적으로 동원하여 농민군 진압에 나
섰다. 
  동학 농민군은 오지영의 활약에 의해 남북대연합에 성공한 후 10월 12일 논산대화를 개최
하기로 했는데 이러한 사실은 순무영에 포착되어 즉시 조정으로 보고되었다. 
  조정에서는 호남과 호서의 비적들이 서로 연결되었다는 보고를 받자 깊은 우려를  표시하
고 강화 진무영 군사 2백 명을 선발하여 토벌하도록 지시했다. 
  전봉준은 논산대회를 개최하기 이하여 10월 6일 선봉대를 파견하고 손화중과  최경선에게 
농민군 7천 명을 지휘하여 광주와 나주 부근에 배치하게  했다. 일본군의 해안 침투와 호남 
일대의 집강소 체재를 유지하여 보급로를 안전하게 하기 위해서였다. 
  김복용의 선봉대는 음력 10월 7일  은진을 점령하고 곧장 북진하여 논산대회의  개최지를 
전진 보위하기 위해 한밭(대전)으로 진출하였다. 여기서 전봉준의 선봉대는 충청도 영병 80
여 명을 만나 단숨에 격파하고 영장 염도희를 생포하여 화형시켰다. 
  전봉준은 약 4천 명의 농민군을 거느리고 10월 11일 삼례를 출발 10월 12일 논산에  도착
하였다. 
  이때 전봉준의 격문을 보고 논산대회에 참가한  유생 이유상은 다음과 같은 기록을  남겼
다. 
  <10월 12일 논산포에 유진하고 있는데 높은 곳에 올라가 남쪽을 내려다보니 흙먼지가 충
천하고 총포가 숲과 같이 보여서 급히  전초대를 보내어 알아보게 하였더니 남군 16만  7천 
명이라고 하였다. 급히 전봉준을 청하여 찾아보고 병단을 물었더니  전 장군이 답하기를 며
칠 전에 북접의 호서군도  도회하겠다는 글을 받았으며  장차 북으로 향하겠다고  하였다.>  
전봉준은 논산에 도착하자 즉시 경군과 충청도 영병에 거병하는 뜻을 알리고  백성들에게도 
고시문을 발표하였다. 
  <일본과 조선이 개국 이후로 비록 인방이나 누대  적국이더니 성상의 인후하심으로 삼항
을 허개하여 통상 이후 갑신 시월의 사흉이 협적하여 군부의 위태함이 조석에 있더니 종사
의 흥복으로 간당을 소멸하고, 금년 시월의 개화 간당이  왜국을 체결하여 승야입경하여 군
부를 핍박하고 국권을 천자(오로지 빙자함)하며 우항  방백 수령이 무휼(어루만지고 근심해 
줌)하지 아니하고 살육을 좋아하며 생령을 도탄 하매,  이제 우리 동도가 의병을 들어 왜적
을 소멸하고 개화를 제어하며 조정을 청평하고 사직을 안보할 새 매양 의병 이르는 곳의 병
정과 군교가 의리를 생각지 아니하고 나와서 싸우매 비록 승패는 없으나 인명이 피차에 상
하니 어찌 불쌍치 아니하리요. 기실은 조선끼리 상전하지 하는 바 아니어늘 여기(언제나) 골
육상전하니 어찌 애닮지 아니 하리요. (생략)  일변 생각컨대 조선 사람끼리야 도는 다르나 
척왜와 척화(중국을 물리침)는 기의가 일반이라. 두어 자 글로 의혹을 풀어 알게 하노니 각
기 돌려보고 충군우국지심이 있거든 곧 의리로 돌아와 상의하여 척왜척화하여 조선으로  왜
국이 되지 아니케 하고 동심협력하여 대사를 이루게 하올새라. 
  동도창의소>
  고시 경군여영병 이교시민이라는 제목을 달고 있는 고시문이었다. 경군과 영병, 그리고 종
교가 다른 백성들이라도 우리 조선 민족이니 싸워서 피를 흘리지 말고 합심하여 왜적과 싸
우자는 내용이었다. 
  북접 농민군은 보국안민의 깃발 아래 보은으로 속속 집결했는데 정경수의 포를  선봉군으
로, 전규석의 포를 후군으로, 이종훈의 포를 좌익으로, 이용구의 포를 우익을 삼아 논산으로 
향하였다. 
  이들은 10월 10일 통령 손병희의 지휘로 보은을 출발하여 돈론촌에서 보은 관군과 격돌하
여 승리하고 농민군을 2대로 나누어  갑대는 영동과 옥천을 거쳐서  논산에 이르고, 을대는 
회덕의 지명에서 청주 관군과 조우하여 청주 관군을 격파한 뒤 논산에 도착했다. 
  김개남의 농민군은 논산대회에 참가하지 않은 채 독자적인 활동에 들어갔다. 전봉준은 김
개남에게 연달아 밀사를 보내어 후접이 되어 줄 것을 요청했으나 묵살하고 10월 14일 남원
을 출발하여 전주에 주둔하고 북상 준비를 했다 
  김개남은 전주에 주둔하면서 군수물자 징발에 비협조적인 고수 군수 양성환과 남원  부사 
이용헌을 살해했다. 
  논산에서 조우한 전봉준과 손병희는 곧 의기가 투하하여 결의형제를 맺는 한편  전봉준을 
총대장으로 추대하고 출진 준비를 갖추었다. 
  <동학군의 대본영은 논산포에 있었으며 호남 전봉준과 호서 손병희 양 대장이 서로 만나 
손을 잡으니 일면이 여구에 간담이  상조하고 의기부합되는지라. 드디어 형제의  의를 맺어 
사생고락을 동맹하니 전은 형되고 손은 제가 되었다. 이 달로부터 동탁에서 밥을 먹고 동장
에서 잠을 자고 기타 모든 일을 동일한 보조를 취하기로 결심하였다.>  오지영의 동학사에 
있는 기록이다. 
  전봉준은 10월 16일 동학 농민군 영수(총대장)의 이름으로  충청 감사 박제순에게 서찰을 
보냈다. 
  <복재간에 사람은 강기에 있어 만물의 영장이라고 일컫는 것이니, 식언하고 마음을  속이
는 자는 사람으로서 논할 수 없느니라. 하물며 바야흐로 나라가 어렵고 근심이 있는데 어찌 
감히 외칙과 내유로써 하여 하늘과 태양 아래  한 순간이라도 숨을 쉬고 목숨을 유지할 수 
있겠는가. 
  일본이 침략의 구실을 만들고 군대를 동원하여 우리 군부를 핍박하고 우리 백성을 근심케 
하니 어찌 참을 수 있겠는가. 옛날 임진왜란 때의 화에 오랑캐가 능침하여 대궐을 불태우고 
군친을 욕보이고 백성들을 살육했으니 천고에 잊을 수 없는 한이다. 초야에 있는 필부와 몽
매한 아동까지 아직도 울분을 잠재우지 못하고 있으니, 항차 각하는 대대로 녹을 먹는 고관
으로서 평민 소부보다 몇 배나 더하지 않겠는가. 오늘의 조정 대신들을 보건대, 망령되이 자
기 생명의 안전을 생각하며 위로는 군부를 협박하고  아래로는 백성들을 속여서 동이(일본)
에게 연장하여 남쪽 백성들에게 원을 펴서 망령되이 친병을 동원하여 선왕의 적자를 해치고
자 하니 참으로 어떤 뜻이며, 궁극적으로 무엇을 하려는 것인가. 이제 내가 하고자 하는  것
은 그것이 극히 어려운 것임을 진실로 알고 있으나, 일편단심 죽음을 각오하고 천하의 인신
된 자로서 두 마음을 품은 자를 소제하여 선왕조 5백  년 유육의 은혜로 사하고자 하니, 원
컨대 감사는 맹성하여 이로써 함께 죽으면 천만다행일까 하노라. 
  갑오 10월 16일 재논산 근정>
  양호창의영수 전봉준은 호서순상(충청 감사)에게  글을 올린다 하는 제목으로  되어 있는 
서찰이었다. 
  전봉준의 농민군과 손병희의 농민군은 일본군과의 대접전을 위해 10월 21일 마침내  공주
를 향해 진군을 했다.
  동학 농민군의 봉기는 논산대회를 기점으로 들불처럼 전국에 번져 나갔다. 비록 전봉준의 
농민군에 합류하지는 않았으나 강원도, 경상도, 황해도, 평안도, 함경도 등  전국에서 봉기하
여 조선 천지를 농민군의 깃발로 뒤덮었다. 
  황해도에서는 대접주 원용일, 최서옥, 박종현, 강성일 등이 지휘하는 농민군 수만 명이 장
연에서 봉기, 황해도 감영이 있는 해주를 점령하고 금천까지 진출하는 기세를 올렸다. 
  농민군들은 청일전쟁의 군수품을 징발하고 있는 일본군을 습격하여 2명을 사살하고  재령
에서는 일본 상인들을 처단하고 추방하였다. 
  경기도에서는 정경수, 임명준, 고재당, 전규석, 신재준 등이 안성, 양지, 이천, 양근에서 봉
기하여 수원을 위협했으므로 일본군은 부랴부랴 병력을 증파하여 수원을 방어하였다. 
  경상도에서는 화개, 남해, 사천, 곤양, 진주, 하동, 성주 등에서 농민군이  일제히 봉기하였
다. 경상도 남해에서는 동학 농민군 19명이 현청을 습격하여 갇혀 있는 동학인 16명을 석방
하고 그 동안 2백여 명으로 불어난 농민군과 함께 곤양으로 쳐들어갔다. 
  "가자!"
  "새 세상을 열자!"
  "탐관오리를 몰아 내자!"
  사천에서는 수백 명의 농민군이 노도처럼 동헌으로 쳐들어가 무기를 탈취하였다. 
  음력 9월 15일엔 하동에서도 농민군의 대대적인 봉기가  일어났다. 농민군들은 하동의 다
솔사에 수천 명이 운집하여 꽹과리를 치며 기세를 올린 뒤 총을 쏘면서 하동 읍성으로 진군
하였다. 
  그러나 하동은 다른 고사과 달리 관군의 저항이 완강했다.  하동에는 포수군 4백 명이 있
어서 치열한 전투가 벌어지게 되었고 농민군의 1진은 오히려 패배했다. 그러나 인근의 농민
군이 연합을 하여 총공격을 가해서 하동을 점령하고 말았다. 다른 곳보다 격렬한 전투가 벌
어졌기 때문에 피해도 극심했다. 하동의 민가가 대부분 불에 타고 농민군과 관군 수백 명이 
전사하였다. 
  하동의 농민군들은 곧바로 진주로  진격했다. 고성에서는 6백여 명의  농민군이 봉기했고 
진주 부내에서도 농민들이 술렁대기 시작하다가 하동에서 농민군들이 들어닥치자 안에서 호
응하여 진주성을 점령해 버렸다. 
  영호대접주 김인배가 1천여 명의 농민군을 거느리고 진주로 입성한 것은 9월 18일의 일이
었다. 
  농민군의 군진 전면에는 보국안민의 네 글자를 크게 쓴 붉은 깃발이 불이라도 뿜을 듯이 
기세 좋게 펄럭거렸다. 농민군들은 징을 울리고 꽹과리를 치면서 대집회를 열고 창원,  김해
로 진출하였다. 동학 농민군의 기세가 점점 맹렬해지자 일본군은 허겁지겁 부산 병참부대의 
일본군을 출동시켰다. 
  농민군들은 진주를 발판으로 사출, 단성, 산청, 진해 등을 파죽지세로  공격하여 점령했다. 
경상감영의 판관 지석영은 농민군들이 맹렬하게 경상도 지방을 유린하자 농민군들과 접촉하
여 협상하려고 했으나 일본군 첩보원들에게 탐지되어 곤욕을 치루었다. 
  지석영은 한때 형조참의까지 지냈으나 낙향해 있다가 일본군이 경복궁을 점령한 뒤에  청
나라를 두려워하지 말고 일본을 의심하지 말라는 논지의 상소문을  올린 일이 있었다. 음력 
7월 5일, 일본군이 경복궁을 점령한 보름 뒤의 일이었다. 특히 민비에게 세찬 비판을 가하여 
세상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 정사를 전횡하고 임금의 총명을 가리우며 백성들의  등을 쳐서 소란을 빚어내고 원
병을 불러들여 난을 일으키고는 먼저 도망친 간신 민영준은 신령스럽다고 하면서 임금을 현
혹시키고 기도한다는 핑계 아래 재물을 울궈내며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고 농간을  부렸으며 
요사스러운 계집은 이른바 진령군으로서 온 세상 사람들이 그의 살점을 씹어 먹으려는 자입
니다. 아, 저 더없이 고약한 큰 역적들에 대하여 하나는 귀양을 보내고 하나는 따지지  않으
면서 마치 사랑하고 비호하는 것같이 하니 백성들의 마음이 어찌 풀리겠습니까? 삼가 바라
건대 빨리 상방검으로 두 죄인을 처단하고 머리를 도성문에 달아매도록 지시한다면  민심이 
시원하게 여길 것입니다.>
  지석영의 상소 요지였다. 고종은 참작할 것이 있다, 하는 비답만 내려 시큰둥한 반응을 보
였다. 
  경상도의 농민군은 예천에서도 4, 5천 명이  봉기하여 9월 15일 예천을 점령하고,  용궁을 
거쳐 성주를 점령하고 상주에 이르러 허겁지겁 달려온 일본군과 대대적인 전투를 벌였다. 
  농민군이 성주와 하동을 공격할 때는 전투가 치열하여 성주는 민가 6백여 호가 불에 타고 
하동은 읍이 완전히 불바다가 되어 전투가 끝났을 때는 폐허가 되어 있었다. 농민군은 대구
와 안산의 전선을 모조리 파괴해 버렸다. 
  동학 농민군은 산악지대인 강원도 일대에서도 일제히 봉기하였다. 
  강원도에서 농민군이 봉기한 것은 평창이  처음이었다. 음력 9월 4일이  되자 원주, 영월, 
평창, 정선, 횡성, 홍천에서 농민군이 봉기하여 대관령을 넘어 강릉을 점령했다. 
  일본군은 황급히 24개 중대를 파견했고 양반과 유생들은 민보군을 조직하여 농민군에  대
항했다. 
  평안도에서는 상원에서 농민군이 봉기했고 함경도에서는 원산 부근에서 봉기하여  일본군
을 습격했다. 
  일본은 전국에서 농민군이 봉기하자 차제에 항일운동의 화근을 제거하기 위한 신속한  작
전에 들어갔다. 신임 이노우에 가오루 공사는 농민군을 토벌할  병력을 일본군 대본영에 요
구했고 이를 받아서 일본은 근대 무기로 무장한 후비보병독립 제19대대를 조선에 특파했다. 
  일본군은 이미 병참로를 경부로와 인천과 대동강로의 2개 선으로 구축하고 요새마다 병참
사령부를 설치한 뒤 1개 소대 내지 2개 소대씩을 주둔시키고 있었다. 
  일본군 제19대대는 대본영으로부터 농민군을 철저하게 발본하여 살육하라는 지시를  받고 
조선에 도착했다. 
  1. 동학당의 근거지를 찾아서 소멸(박멸)하라.
  1. 조선군과 협력하여 동학당을 철저히 소멸시켜 재흥하는 후환을 남기지 않도록 하라.
  1. 괴수는 생포하여 경성의 공사관으로 보내라. 
  1. 동학당과 조선 조정의 왕복문서를 압수하게 되면 공사관으로 보내라. 
  1. 일본군 사관이 조선군까지 지휘하라. 
  1. 조선군도 일본 군법을 지키게 하고 위반자는 일본군 군율에 따라 처단하라. 
  일본군은 조선군까지 지휘 명령하여 군권까지 장악하려는 속셈이 여실한 지시였다. 
  일본군은 농민군 토벌부대를 서로, 중로, 동로로 나누어서 진군토록 했다. 
  일본군은 동로분진중대를 먼저 출발시켜 광주, 장호원, 충주로 남하하게 했다. 강원, 충청, 
경상도 일대의 농민군을 전라도 지방으로 내몰아서 살육해 버릴 작전이었다. 서로와 중로의 
분진중대는 이보다 며칠 늦게 출발했다. 일본군의 병력은 5천 8백 명, 조선군은 경병 2천  8
백 명, 관군을 지원하는 민보군과 감영의 영병까지 모두  합해야 4천 명 수준으로 일본군과 
합하면 1만 명 안팎이었다. 이들은 동학 농민군을 섬멸하기 위하여 서서히 포위망을 좁히며 
남진하고 있었다. 
  음력 10월이 중순에서 하순으로 넘어갈 무렵이 되자 날씨가 제법 쌀쌀해졌다. 
  누렇게 고개를 숙여 황금빛으로 술렁거리던 들판도 가을걷이가 모두 끝나 황량하게  비었
고 추색이 완연하게 단풍이 들었던 산에는 나뭇잎이 모두 떨어져 바람소리가 음산했다. 
  충청도 천안의 남쪽 세성산도 바람이 불  때마다 앙상한 나무가지들이 우수수 몸을  떨며 
자지러지는 비명을 질러대고 있었다. 멀리 동북쪽에는 만뢰산과 흑성산이 위치해 있는데 그 
중앙의 목성산으로 지금 일본군과 관군이 새까맣게 몰려들고 있었다. 관군의 지휘관은 순무
영 선봉장 이규태였다. 
  전봉준과 손병희의 논산대회를 전진 보위하기 위하여 3천 명의 농민군을 거느리고 세성산
에 주둔한 김복용은 관군이 건편 목성산 쪽에 집결하기 시작하자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그러나 피할 수 없는 일전이었다. 전봉준 부대는 10월 21일 논산을 출발하여 공주로 진격
할 예정이었다. 하루 이틀만 버티면  전봉준의 대부대가 공주를 지나  천안으로 파죽지세로 
달려올 것이다. 그때까지만 관군과 일본군의 남진을 저지하면 되는 것이다. 
  농민군은 점점 숫자가 불어나고 있었다. 충청도 내포에 상륙한  경군과 일본군은 곧 바로 
천안을 공격하지 않고 홍주, 예산, 덕산의 농민군을 기습하여  목천(천안) 세성산 쪽으로 쫓
았다. 그리하여 충청도 서해의 농민군들이 영문도 모르고 일본군에게 쫓겨서 세성산으로 속
속 집결했다. 
  10월 20일 일본군도 천안에 도착했다. 순무영 선봉자 이규태는  세성산 일대의 지세를 낱
낱이 보고했고 일본군의 지휘와 명령을 받으면서 공격 작전을 짜기 시작했다. 
  일본군은 경군과 연합하여 중화기 부대를  세성산 정면에 배치하고 1개 소대를  세성산의 
동남쪽 기슭에, 2개 소대를 세성산 북쪽에 매복시켰다. 이곳은 모두 산세가 험준하여 접근하
기가 어려운 곳이었다. 그러나 일본군은  밤을 이용해 세성산의 동남쪽과  북쪽에 일본군을 
매복시키는 데 성공했다. 
  농민군도 같은 시작 작전 계획을 짜고 동, 남, 북쪽의 3면은 산세가 험준해 일본군과 경군
이 공격하지 못하리라는 판단 하에 서쪽에 대군을 배치, 전투가 시작되면 징을 울리고 꽹가
리를 쳐서 농민군들의 사기를 북돋우기로 하였다. 
  10월 21일 날이 밝자 갑오농민전쟁의 서곡이라고 할 수 있는 전투가 시작되었다. 
  일본군과 경군은 지세가 낮으막한 서쪽으로 중화기를 쏘아대며 맹렬한 공격을 하기  시작
했다. 일본군의 공격 신호는 나팔이었고 농민군의 항전 신호는 징과 꽹가리였다. 
  "축멸왜이!"
  "척양척왜!"
  세성산 토성은 금세 총연과 포연으로 자욱하게 뒤덮였다. 일본군과 경군의 대포에 아름드
리 소나무가 불타고 흙무더기가 공중으로 자욱하게 날아올랐다. 농민군은 화력이 우세한 일
본군과 경군을 맞아 필사적으로 저항하였다. 
  신명을 돋구던 징소리와 꽹가리 소리가 비장해지기 시작한 것은 전투가 시작된 지 두 시
간도 채 되지 않았을 때였다. 일본군과 경군은 대포로 농민군의 기선을 제압한 뒤 총공격을 
감행했다. 농민군은 일본군과 경군의 총공격이 시작되자  죽음을 무릅쓰고 맹렬히 응사하였
다. 그때 세성산 동남쪽으로도 일본군이 맹렬한 사격을 하면서 돌격해 왔다. 농민군은  서쪽
의 일본군과 경군을 방어하다가 황급히 동남쪽의  일본군에게도 농민군을 나누어 저항했다. 
그러나 양쪽에서 맹렬한 공격을 당하자 농민군의 전사자가 속출하기 시작했다. 
  (협공을 당하고 있을 필요는 없다. 일단 북쪽 기슭으로 철수하여 전열을 정비하자!)  농민
군 대장 김복용은 중군 김영우, 화포장 원금옥과 상의하여  농민군을 세성산 북쪽으로 철수
하게 하였다. 그러나 세성산 북쪽에는 이미 일본군 2개 소대가 매복하고 있었다. 그들은  농
민군이 후퇴하자 일제히 사격을 퍼부었다. 농민군은  일본군의 매복 공격에 우왕좌왕하다가 
속절없이 피를 뿌리며 죽어 갔다. 세성산 전투에서 농민군은 전사자 3백 70여 명, 부상자  4
백여 명에 이르는 막대한 희생자를 내고 참패하였다. 농민군  대장 김복용, 중군 김영우, 화
포장 원금옥 등은 생포되어 일본군에게 총살을 당했다. 
  김복용 부대가 일본군과 경군에게 참패했다는 비보는 곧바로 논산을 떠나 북상 중인 전봉
준과 손병희 부대에게 알려졌다. 
  (김복용 부대가 참패를 하다니 우리의 앞날이 순탄할 것 같지 않군......)  전봉준은 내색하
지 않았으나 불길한 기분을 떨쳐 버릴 수가  없었다. 그러나 공주로 진격을 늦출 수가 없었
다. 공주는 호서 지방의 요새로 백제의 도읍이 있던 천년 고도였다.  일단 공주를 점령해야 
천안 세성산에서의 패배를 만회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음력 10월 21일 전봉준과 손병희의 농민군 2만여 명은 논산을 출발하여 노성과 경천점에 
군영을 설치했다. 이때 논산에서 경천점에 이르는 수십 리  길이 농민군의 흰옷으로 뒤덮이
는 장관을 이루었다. 
  전봉준과 손병희는 공주를 3면에서  협공하기로 하고 1대는 이인역으로,  2대는 무너미를 
넘어 효포로, 3대는 대교로 진출했다. 
  전봉준이 지휘하는 농민군 제1대는 파죽지세로 이인역을 공격하여 순식간에 점령해  버렸
다. 이때는 일본군 주력부대가 공주에 도착하지 않아서 일본군 1개 중대, 경군 8백 명, 영병
과 민보군이 공주읍에서 동학군을 맞아 싸울 준비를 하고 있다가 전봉준 부대가 이인역으로 
진격해 오자 허겁지겁 방어를 하다가 패주하여 공주로 달아나 버렸다. 
  이인전투에서는 농민군이 대대적인 승리를  거두어 일본군과 관군은 사망  1백 2십여 명, 
부상자 약 3백 명에 이르는 막대한 피해를 냈다. 
  동학 농민군은 이인에서의 승전으로 사기가 충천하여 공주감영을 한눈에 내려다 볼 수 있
는 봉황산을 포위했다. 농민군의 다른 1대도 10월 24일 효포를 공격해서 점령했다. 
  효포전투는 농민군이 대규모로 공격을 시작하자 그 기세에 놀라 관군이 먼저 후퇴하고 뒤
따라 일본군도 허겁지겁 달아난 전투였다. 
  손병희가 지휘하는 농민군도 대교를 점령한 뒤 철수하여 전봉준 부대와 합류했다. 
  10월 24일 밤 농민군이 밝힌 횃불은 수십 리에 이어져, 관군은 첩첩 화광이 서로 비춘 것
이 수십 리가 되어 인산인해를 이루니 큰 강의 모래 숫자에 비길 수가 없다고 찬탄했다. 
  농민군은 10월 25일 새벽 6시를 기해 공주를 향해 진격을 하기 시작했다. 10월 24일의 전
투처럼 부대를 3대로 나누어 1대는 웅치에 있는 관군을 공격하고 2대는 능암산에 있는 일본
군을, 3대는 월성산에 있는 관군을 공격했다. 
  이들의 전투는 오후 1시까지 치열하게  전개되었으나 10월 24일 밤부터 일본군과  관군이 
대대적으로 증원되고 있었기 때문에 피아간에 백중지세를 이루었다. 
  농민군은 전투가 끝없는 소모전의 양상을 띠자 뒷산으로 철수했고 일본군도 공주로  돌아
가 버렸다. 
  <25일 이른 아침 일본군도 또한 웅치에 올라왔는데 적군  대장은 홍개를 날리면서 큰 가
마를 타고 남로로 올라오는데 그 기세가 조수를 덮쳐 오듯 사나웠다. 일본군과 관군은 동시
에 연달아 포를 쏘아대니 그 소리가 산골짜기를 진동하였다. 혈전 수 시간에 사상자가 매우 
많아 적들은 퇴각하였다.>
  조선의 관보에 실려 있는 기록이다. 
  <적의 세력은 과연 소문과 같이 산과 들을 덮어 헤아릴 수 없는 숫자였다. 소위 적장  전
봉준은 가마 타고 홍개를 휘날리며 깃발을 들고 뿔나팔을 불면서 벌떼처럼 3로로 진병해 왔
는데 반일(半日)을 치열하게 싸웠으나 승부를  가리지 못하였다. 오후 4시경에 헤아려  보니 
포살 70여 명, 생포 2명이었다.>
  순무선봉진의 기록이다. 일본군은 농민군의 피해를 전사자 6명, 부상자 미상이라고 보고하
여 양쪽의 기록이 모두 정확하다고 볼 수는 없다. 
  농민군은 웅치에서 30리 정도 떨어진 경천점까지 철수하여 전력을 보강하기 시작했다. 
  전봉준과 손병희는 경천점에 주둔하면서 탄약과 병력의  보강을 서둘렀다. 공주를 방어하
는 일본군과 관군의 세력이 의외로 만만치 않다고 판단한 전봉준은 공주에서 농민군의 사활
을 건 일전을 치룰 계획이었다. 
  전봉준은 전주로 진군하는 김개남 부대에 긴급하게 전령을 보내서 공주의 결전에  참가할 
것을 촉구했으나 김개남 부대는 금산으로 향하였다. 
  일본군과 관군도 전력을 강화하기 시작했다.  일본군은 동학 토벌의 임무를  띠고 조선에 
파견된 제19대대에 모든 병력과 화력을 공주로 집결시키라고 명령을 내렸다. 
  일본군은 사령부의 명령이 떨어지자 곧바로 남하하여  공주에 집결했다. 먼저 서로분진대
가 음력 10월 26일 공주에 도착했고 중로분진대와 제19대대 대대본부 병력이 대대장 미나미 
쇼오시로오의 지휘를 받으며 공주에 도착했다. 이로써 일본군은 대대 병력 1천 명이 공주에 
집결하여 농민군을 섬멸할 준비를 완전히 갖추게 되었다. 
  조선의 관군은 천안 세성산에서 김복용 부대를 참패시킨 이규태의 경군 2천 명도 공주로 
내려와 주둔했고 충청도 각 군의 관군이 합세하여 농민군에 대항하는 토벌군도 만만치 않았
다. 토벌군은 음력 11월 3일이 되자 군대를 3진으로 나누어  1진은 무너미, 2진은 이인, 3진
은 공주영에 주둔케 하여 1진을 후속부대로 배치했다. 
  무너미를 방위하는 관군의 지휘자는 경리청 영관 구상조였다. 
  이인을 방위하는 관군의 지휘자는 경리영 영관 출신의 서산군수 성하영이었다. 
  농민군은 11월 8일 공주를 향해 재차 공격을 감행했다. 
  날씨는 눈발이 날릴 듯이 우중충했다. 음력 11월 8일이면 초겨울, 나뭇잎들이 모두 떨어진 
공주 일대의 산과 들은 농민군과 토벌군으로 득실거렸다. 공주 봉황산에서 서쪽의 판치까지
는 약 30일, 태백산맥에서 갈라져 나온  차령산맥이 마지막 기세를 떨치고 있어서 백운,  만
례, 계룡 등의 연봉들이 빼어난 미태를 자랑하며 우뚝우뚝 솟아 있었다. 
  농민군은 오후 2시부터 일제히 공격을 감행했다. 농민군의 공격 신호는 전고였다. 
  둥......
  둥......
  북소리가 울릴 때마다 농민군은 비장한 각오로 전진을 했다.  북소리는 점점 속도가 빨라
지기 시작했고 그에 호응하듯 농민군은 와아 하는 함성을 지르며 토벌군을 향해 달려갔다. 
  전봉준 부대는 무너미에서 구상조가 지휘하는 경군과 맞닥뜨렸다. 
  "공격!"
  "왜놈들을 몰아 내라!"
  농민군은 노도처럼 사나운 기세로 구상조의 경군을  공격하였다. 구상조가 지휘하는 경군
은 농민군이 사나운 기세로 들이닥치자 사력을 다해 방어하려고 했으나 2시간도 못되어 공
주읍으로 패퇴하고 말았다. 
  전봉준 부대는 구상조의 경군을 추격하였다. 
  손병희 부대는 이인으로 진격하여 정면에서 총공격을 감행하는 한편 기습부대를 편성하여 
오실을 돌아 성하영의 경군을 포위하였다. 성하영의 경군은 농민군에게 포위되어 수많은 군
사가 피를 흘리며 죽어갔다. 그들은 악전고투를 하면서 필사적으로 포위망을 뚫으려고 했으
나 좀처럼 포위망을 돌파할 수가 없었다. 
  그러는 동안 날이 어두워지고 차가운 겨울비가 뿌리기 시작했다. 빗발은 사방이 캄캄해진 
뒤에 더욱 굵어져 농민군과 경군을 후줄근하게 적셨다. 
  농민군의 총성이 뜸해지기 시작한 것은 빗발 때문에 화승총으로 사격할 수 없었기 때문이
었다. 성하영의 경군은 그 틈을 노려 필사적으로 농민군의  포위망을 뚫고 공주성으로 퇴각
했다. 
  농민군은 승리의 여세를 몰아 공주성의  동남쪽인 향봉산까지 진출하여 공주성을  공격할 
준비를 갖추었다. 
  일본군과 관군도 서둘러 공주성 방어태세를 갖추기 시작했다. 공주에 주둔한 토벌군의 총
지휘자는 일본군 제19대대 대대장 미나미 소좌였고,  순무선봉진의 선봉장으로 파견되어 있
던 이규태는 미나미 소좌로부터 굴욕적인 질책을 받으면서 농민군을 토벌하지 않으면  안되
었다. 
  일본군의 강압에 의해 농민군 토벌에 나선 조선군은 일본군  장교의 지휘를 받아야 했고, 
이규태는 조선군을 대표하고 있으면서도 미나미 소좌에게 부하 취급을 받아 노예와 같은 굴
욕을 감수해야 했던 것이다. 이규태는 이러한 실정을 자신의  직속 상관인 순무사 신정희에
게 수없이 토로했으나 소용이 없었다. 
  일본군은 모리오 대위가 중대장인 일본군 1개 중대를 우금치에 주둔케 하고 통위영 영관 
오창성이 지휘하는 조선군을 금학동에, 구상조의 조선군을 웅치에, 통위영 영관 장용진의 조
선군을 봉수대에 배치했다. 
  이인에서 탈출한 성하영 부대는 일본군이 주둔하는 우금치의 능선에 총알받이로 내세우고 
공주 감영 영장 이기동이 지휘하는 관군은 봉황산에 배치했다. 
  음력 11월 9일, 간밤에 내린 비가 그치자 날씨가 더욱 쌀쌀해졌다. 농민군은 주먹밥 한 덩
어리로 배를 채우고 갑오농민전쟁사에 길이 남을  우금치 전투를 벌이기 위해 진을  출발했
다. 
 아침 10시였다. 농민군은 병력을 3개 부대로 편성하여 효포, 웅치, 우금치를 압박해 들어갔
다. 농민군의 주공격 목표는 우금치였으나 토벌군의 세력을  분산시키기 위해 3면으로 공격
을 시작한 것이다. 
  <적병은 3면으로 둘러싸고 수미가 30리나 되어 마치 상산의 뱀과 같아서 격하면 바로 응
했다.>
  조선의 관보 개국 503년 11월 29일자에 있는 기록이다. 
  <그 이튿날 초 9일 낮이 되어 적의 세력을 상세히 탐문하니 각 진이 서로 바라보는 곳에 
깃발이 가득히 꽂혀 있는데 동쪽으로는  판치 뒷산에서부터 서쪽으로는 봉황산  뒷기슭까지 
연달아 3, 40리에 걸쳐 산상에 진을 친 것이, 마치 사람으로 병풍을 두른 것 같아서  세력이 
심히 창궐하여 고립무원의 염려가 없지 아니하였다.>
  순무선봉진등록의 기록이다. 순무사정보첩도 농민군의 맹렬한 공격을 두려움에 떨면서 남
겼다. 
  <아 저 수만의 비류들은 둘러친 것이 연하여 4, 50리에 걸쳐서 길이 있으면 길을  싸워서 
빼앗고 높은 봉우리가 있으면 그것을 싸워서 점거하려고 성동추서하고 섬좌홀우 하면서  깃
발을 휘날리고 북을 두드리며 죽음을 무릅쓰고 앞을 다투어 기어오르는 것은 어떠한 의리이
며 어떠한 담략인지 언념정적에 등골이 서늘하였다.>
  농민군은 우금치에서 치열한 전투를 전개했다. 공주의  우금치는 감영으로 들어서는 길목
이어서 일본군과 관군도 필사적인 각오로 방어선을 펴고 대응을 했다. 
  일본군은 먼저 맹렬한 포격으로 농민군의 기선을 제압했고 곧  이어 일제히 사격을 했다. 
이에 맞선 농민군은 대부분 화승총으로 무장하고 있어서 화력이 일본군에 미치지 못하였다. 
그러나 농민군은 왜적을 몰아 낸다는 신념으로 동료들의 시체를 넘어서 계속 진격했다. 
  혈전이었다. 탄우가 빗발치고 농민군들이 흘린 피가 우금치산을 피로 물들였다. 문자 그대
로 시체가 산을 이루고 피가 바다를 이루는 처절한 전투였다. 
  그러나 농민군은 조금도 동요되지 않고 진격을 계속했다. 농민군은 일본군의 기관포 사격
을 피하며 전투 개시 40분만에 우금치 정상에서 전방 5백미터 앞에까지 밀어닥쳤다. 일본군
은 병력을 증원하여 농민군에 대항했다. 
  농민군은 일본군이 증강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약 2백 명이 우금치 정상 1백 5십미터까
지 약진했고 선두의 5, 6명은 백병전을  치룰 수 있는 일본군 코앞까지 육박했다.  농민군의 
주력 부대도 선봉대를 따라 파도처럼 우금치로 밀려갔다. 
  일본군은 혼비백산했다. 농민군은 쓰러지고 쓰러져도 꽹가리와  징을 치면서 공격을 감행
했다. 
  일본군은 우금치 정상에서 산마루에 나란히 서서 농민군을 사격하고 농민군의 탄환이  빗
발치면 산 뒤에 은신했다가 다시 일어나서 총을 쏘곤 하였다. 
  <일본군이 산마루에 나란히 서서 일시에 총을 쏘고 다시  산 속으로 은신했다가 적이 고
개를 넘고자 하면 또 산마루에 올라가서 일제히 총을 발사했는데 이렇게 하기를 4, 50차 하
니 시체가 산에 가득 찼다.>
  관보 11월 29일자 부록 우금지사에 있는 기록이다. 
  농민군은 우금치를 넘기 위해 4, 50회나 돌격을 감행했을 정도로 처절한 전투를 했다.  우
금치를 공격한 전봉준 부대는 2시간 40분 동안 일본군의 바로 앞까지 전진했다가 일본군의 
일제사격을 당해 쓰러지고, 전진했다가는 쓰러지는 돌격전을 되풀이했다. 
  미나미 일본군 제19대대 대대장은 조선군 50명을 차출하여 150미터 전방에서 일본군을 공
격하고 있는 농민군 왼쪽을 공격하게 했다. 농민군 선봉대는  정면과 좌측에서 치열한 사격
을 받게 되자 전방 5백미터 지점의 산으로 퇴각했다. 
  미나미 소좌는 일본군 1개 소대와 1개 분대를 차출하여 농민군 속으로 정면 돌격 명령을 
내렸다. 특공대였다. 농민군은 일본군 특공대가 일본군의 엄호사격을 받으면서 돌격해  오자 
이인 방면으로 퇴각하기 시작했다. 
  일본군은 퇴각하는 농민군의 추격을 조선군에게 맡기고 1개 중대를 급파 이인가도에서 농
민군의 퇴로를 차단하려다가 전봉준 부대가 아직도 막강한 전투력을 가지고 있는 것을 발견
하고는 산허리에 불을 지르고는 공주로 철수했다. 
  일본군은 공주 우금치 전투에서 농민군 전사 37명, 부상자  미상이라고 했으나 우금치 전
투의 실상은 은폐 축소하기 위한 것이었다. 
  전봉준은 체포되어 재판을 받을 때 전투를  치루고 나서 피해 상황을 점고하니 1만  명의 
농민군 중에 남아 있는 병사가 약 3천 명이었고 2차 접전 후 점고하자 겨우 5백 명이 남아 
있어서 패주하게 되었다고 대답을 했으므로 우금치 전투에서 수천  명이 전사, 또는 부상을 
당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일본군의 무기는 자연발화하는 장총으로 유효 사격거리가 5백보나 되었으나 농민군의  화
승총은 도화선에 불을 붙여 발사를  하면서도 유효 사격거리가 1백보에도 미치지  못하였고 
조준도 잘 되지 않았다. 농민군은 우금치 고개만 넘으면 공주로 진격할 수 있는데도 4, 50회
나 돌격전을 감행하고서도 끝내 패주할 수밖에  없었던 것은 이러한 무기의 격차  때문이었
다. 
  손병희 부대가 웅치에서 관군에게 패한 것은 11월 11일의  일이었다. 경리영 영관 구상조
는 경리영 영병들을 농민군으로 위장시켜 농민군에게 접근시킨 뒤 농민군들이 방심한  틈을 
타서 일제히 사격을 퍼부어 농민군들을 패퇴시켰다. 
  손병희 부대는 오실에서 패퇴하여 전봉준 부대와  합류했다. 전봉준은 손병희와 상의하여 
정전을 요구하는 고시문을 경군과 영병에게 보냈다. 
  <경군과 영병에게 고시한다. 
  양차의 교전은 후회막급이라. 당초의 거의는 척사원왜하는 것뿐이라. 경군이 사를 돕는 것
은 실로 본심이 아니고 영병이  왜를 돕는 것도 자의에서 나온  것이겠는가. 필경은 천리에 
동귀하리니 지금 이후로는 절대로 서로 쟁투하지 말고 부질없이 인명을 살해하지 말며 인가
를 불태우지 말고 함께 대의를 도와 위로는 보국가하고 아래로는 안민서 할 뿐이라. 우리가 
만약 기만하면 반드시 천죄가 있을 것이고 임금이 마음을 속이면 반드시 자멸할 것이니, 원
컨대 하늘을 가리키고 해에 맹세하여 다시는 상해가 없기를 바란다. 며칠 전의 쟁진은 길을 
빌리려 한 것뿐이다.
  갑오 11월 12일 창의소>
  그러나 전봉주의 호소가 동학 농민군을 뿌리째 뽑아 버리려는 일본군에게는 휴지  조각에 
지나지 않았고, 일본군에게 종속되어 있는 경군과 영병으로서도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었다. 
  농민군은 이때부터 북상하여 일본군을 몰아 내려는 위치에서 비참한 패배자의 위치로  바
뀌어 쫓기는 신세가 되었다. 
  김개남 부대는 10월 25일 전주를 출발하여 금산을 점령하고 현감 이용덕을 축출한 뒤 농
민군을 풀어서 적대자들에 대한 살육과 약탈을 허용했다. 김개남은  금산에 여러 날을 주둔
하고 있다가 11월 10일 진잠을 점령하고 11월 11일 회덕과 신탄진을 점령한 다음 청주로 출
발했다. 
  김개남 부대는 1만 명의 병력으로 11월 13일 청주성으로 진격했다. 일본군과 청주 영병은 
남문 밖 6백미터 지점에서 방어진을 구축하고 김개남 부대와 정면으로 격돌했다. 그러나 김
개남 부대는 5분도 버티지 못하고  퇴각하다가 신탄진 부근에서 대오를  정비, 추격해 오는 
일본군과 청주 영병을 맞아 한 시간 남짓 혈전을 치루었다. 그러나 김개남 부대는 이곳에서
도 일본군과 청주 영병에게 패해 후퇴의 길에 올랐다. 
  농민군은 공주에서 패배한 후 후퇴에  후퇴를 거듭했다. 동학 농민군이  전국에서 봉기한 
숫자는 5, 60만 명이나 되었으나 실제로 전투에 참여한 농민군은 5, 6만에 지나지 않았고 그
나마 조직이며 화력에 있어서 절대적인  열세에 있었다. 청주에서 패한  김개남 부대는 1만 
명이나 되었으나 불과 일본군 1개 소대와 청주 영병 60명에게 패하여 후퇴하게 된 것이  그 
단적인 예였다. 
  전봉준과 손병희가 지휘하는 농민군은 11월 14일 노성에서 전열을 가다듬고 있다가  일본
군과 관군의 기습을 받아 전면적인 후퇴를 하기 시작했다. 
  전봉준 부대는 논산의 소토산에서 다시 대오를 정비하려고 했으나 일본군 1개 중대, 장위 
영병 1개 대대, 통위 영병 1개 중대 등 약 1천여 명이 농민군 진영 안까지 맹렬하게 공격을 
가해 와서 30분 동안 치열한 전투를 하다가 강경으로 후퇴하였다. 
  일본군은 논산에서의 전투에서 농민군의 피해를 전사  20명, 부상자는 미상이라고 집계했
으나 관군은 익사자와 포로로 생포했다가 총살한 자까지 포함해서 약 3백 명이라고 발표했
다. 
  이 기록에서 일본군은 투항한 농민군까지 닥치는 대로 총살한 뒤에 기록을 은폐 축소하여 
보고했음을 알 수 있다. 
  전봉준 부대는 강경에서 김개남 부대를 만나 연합하여 추격군에 대항했으나 사기가  떨어
진 농민군은 대패하여 다시 후퇴의 길에 올랐다. 
  후퇴의 길은 비참했다. 날씨는 살을 에일 듯한 엄동설한이어서 농민군은 추위와 굶주림과
도 싸워야 했다. 
  전봉준 부대는 김개남 부대와 헤어져 계속 남하하여 전주에 주둔했다가 금구의  원평으로 
철수했다. 
  전봉준은 원평에서 병력을 보충하고 반격  준비에 들어갔다. 농민군은 원평의  산에 품자 
모양의 진을 설치했다. 
  11월 25일 일본군 1개 중대와 조선군 교도대가 농민군을 포위하고 맹렬한 공격을 가해 왔
다. 농민군은 지형이 유리했기 때문에 오전 9시부터 오후  4시까지 막상막하의 혈투를 전개
했다. 그러나 탄환이 점점 떨어져 가고 어두워지고 있었기 때문에 농민군은 태인으로  철수, 
태인에서 가장 높은 산인 성황산, 한가산, 도리산에서 최후의 일전을 치룰 준비를 했다. 
  11월 27일 아침 일본군과 관군은 또다시 맹렬한 공격을  가해왔다. 전봉준 부대의 농민군
은 전에 없이 용감하게 반격을 개시하여 고지로 기어올라오는 일본군과 관군에게 탄환을 비
오듯이 퍼부었다. 일본군과 관군은 하루종일  성황산으로 돌격했으나 1차, 2차 돌격이  모두 
실패하게 되자 패전하여 하산하게 되었다. 그러나 일본군과 관군은  탄약과 병력을 보급 받
고 제3차 공격에 나섰다. 이때는 이미 밤 9시가 지난  시각으로 전봉준 부대는 탄약이 고갈
되고 병사들이 하루종일 아무 것도 먹지 못해 극도로 지쳐 있었다. 
  전봉준은 그날 밤 농민군을 금구로 철수시키고 더 이상 승산 없는 싸움에 농민군을 내몰
아서 희생시킬 수 없다고 판단하여 눈물을 머금고 농민군을 해산시켰다. 전봉준이 제2차 농
민전쟁에 봉기하여 참여한 지 두 달 반만의 일이었다. 
  전봉준은 부대를 해산한 뒤 부하 3명을 데리고 음력 12월 2일 순창의 피고리로 갔다가 배
신자의 밀고로 사인 한신현 일파에게 붙잡혀서 교도대에게 넘겨졌다. 
  김개남은 태인에서 부대를 해산하고 태인군  산내면 종송리에서 강화 영병에게  체포되었
다. 
  <전봉준은 부하 2명과 함께 순창 피고리에서 한신현, 김영철, 정창욱 등과 민정들에게 기
습당하여 체포될 때 도망하지 못하도록 총개머리판으로 발과 다리를 심하게 타격 당하여 보
행이 불가능하게 되어버렸다. 전봉준은 순창에  유진하고 있던 경군 교도대에게  인도된 후 
나주를 거쳐 전주로 이송되었다. 전라 감사 이도재는 동학 농민군이 전봉준 구출 작전을 감
행하면 전봉준을 뺏길 염려가 있다고 판단 일본군에게 넘겨  경성으로 압송하게 하였다. 경
성에서도 동학 농민군의 세력이 구출작전이 있을 것을 염려하여 전봉준을 내내 일본 공사관 
감방에 투옥해 두었다. 이 때문에 재판 이전의 모든 비공식적 심문이 일본에 의해 독점되어 
진전되었다. 
  공식 재판과 심문은 5회 있었는데 초조는 1895년 음력 2월 9일, 재초는 2월 11일, 3초는 2
월 19일, 4초는 3월 7일, 5초는 3월 10일에 있었다.  재판정에 출두할 때도 전봉준은 보행불
능 상태였기 때문에 가마를 타고 출정하였다. 부당하게 일본  영사 우치다가 재판석에 임석
하여 심문했음에도 불구하고 전봉준은 일세의 영웅답게 당당히 응수하였다. 일본 영사의 외
심하에 갑오경장 정권의 법무아문 권설(임시특설) 재판소에서 1895년 3월 29일(양력 4월 23
일) 전봉준은 대전회통 형전  중의 <<군복기마 작변관문자 불득시참:  군복으로 말을 타고 
관문에 변란을 일으킨 자는 때를 기다리지 않고 참한다>>는 조항의 적용을 받아  사형선고
를 받고, 그날로 그의 동지들인 손화중, 최경선, 김덕명, 성두한 등과 함께  교수형이 집행되
었다. 전봉준은 교수대에 오르기 직전에 <<위국단침수유지:  나라 위한 붉은 정성 그  누가 
알리오>>라는 시구를 남겼다. 이때가 전봉준의 나이 41세의 장년이었을 때였다.>  동학 농
민군의 지휘자 전봉준, 손화중, 최영창 판결 선고서 원본에 있는 기록이다. 
  손병희 부대는 전봉준 부대와 후퇴를 거듭하여 금구의 원평  전투, 태인의 성황산 전투까
지 함께 격렬한 전투를 했으나 전봉준 부대가 해산하자 단독으로 남하하기 시작했다. 
  날씨는 점점 추워지고 일본군과 관군의 추격이 계속되었으나 손병희 부대는 굴복하지  않
고 남하하다가 장성의 갈현(칡고개)에서 일본군과 관군을 만나 혈전을 치루었다. 그러나 손
병희 부대는 일본군과 관군의 추격을 따돌리기 위해 북상하다가 임실의 조항리에서 동학 교
주 최시형과 해후했다. 
  손병희 부대는 교주 최시형을 모시고 북상하기 시작해 무주에서 민보군을 크게  격파하고 
충청도 땅으로 들어섰다. 음력 12월 12일 손병희 부대는 영동의 용산 장터에서 경리영 경군 
70명과 청주 영병 180명을 만나 격렬한 전투를 벌여 관군을 패퇴시켰다. 
  그러나 일본군은 동학 농민군의 씨를 말리기 위해 살을 에이는 혹한에도 불구하고 손병희 
부대를 계속 추격하였다. 손병희 부대는  일본군의 추격을 피해 보은의  종곡까지 후퇴하여 
야영을 했다. 음력 12월 18일 한겨울 산악지방의 날씨는 농민군들 대부분이 동상에 걸리 정
도로 혹독하게 추웠다. 손병희 부대는 군데군데 모닥불을 피워 놓고 잠을 잤다. 그러나 모닥
불을 발견한 일본군이 불의에 야습을 감행, 농민군을 당황하게 했다. 농민군은 일본군의  기
습으로 처음엔 고전했으나 곧바로 역습을 감행 대응한 전투로  발전했고, 시간이 흐르자 오
히려 일본군의 패색이 짙어져 갔다. 
  일본군이 농민군을 기습한 것은 새벽 3시였으나 날이 밝으면서 일본군은 죽음을 각오하고 
용감하게 싸우는 농민군에게 쫓기기 시작했다. 농민군은 아침  9시경 패주하는 일본군을 80
미터 전방까지 접근해서 혈전을 전개했다. 그러나 농민군은  탄약이 고갈되기 시작해 1선이 
무너지기 시작했고, 일본군은 그 기회를 역이용 반격에 나섰다. 
  손병희 부대는 더 이상 전투를 계속할 화력이 없어 청주 방면으로 후퇴하지 않으면 안되
었다. 일본군은 종곡전투에서의 농민군 피해자를 전사자 3백여  명 부상자 미상이라고 보고
했다. 그러나 종곡전투는 손병희 부대가 화력을 마지막으로 쏟아 넣고 7시간이나 치열한 혈
전을 치른 전투여서 사상자는 훨씬 더 많았다. 
  손병희 부대는 화양동을 거쳐 충주로 들어가려다가 일본군이 기다리고 있는 것을  발견하
고 음력 12월 24일 충주 못미처  외서촌에서 농민군을 해산하고 최시형과 손병희는  잠적했
다. 
  손화중 부대는 12월 1일 광주에서 해산했고 최경선 부대는 나주 부근에서 해산하였다. 
  최경선 부대의 잔류 동학 농민군들은  일본의 지시를 받은 관군에게 157명이  총살되었고 
63명도 투옥되었다가 모조리 학살되었다. 
  이 시기부터 일본군은 동학 농민군을  학살하는 데 병력을 동원하였다.  일본군은 전투가 
끝난 뒤에도 샅샅이 수색을 하여 농민군을 색출 학살했고,  포로가 된 농민군과 부상자들까
지 짐승처럼 야만스럽게 학살했다. 
  보성에서는 경군과 일본군이 주둔하여 농민군 수십 명을 체포하여 처단하고 경군은  장흥 
방면으로 떠났으나 일본군은 보성읍에 남아서  30여 명을 더 체포하여  총살했다. 일본군은 
이제 농민군 사냥꾼으로 변모해 있었다. 
  농민군은 일본군이 도처에서 학살을 자행하자 산 속으로 숨기도 하고 끝까지 저항을 하기
도 했다. 
  장성에서는 약 1천 명의 농민군이 일본군의 학살에 분개하여 해산하지 않고 장흥성 밖의 
벽사역을 점령해 버렸다. 이에 인근의  농민군들이 호응해 와 장흥부사를  난타하여 죽이고 
학살에 가담한 관리들을 총살했다. 
  이때 농민군에는 22세의 이소사라는 젊은 여인이 크게 용맹을 떨쳤다. 이소사는 마상에서 
농민군을 지휘하여 장흥부를 공격하는데 공을 세워 동학 여장부라는 이름으로 불리었다. 
  이소사가 지휘하는 농민군은 12월 7일 1만  명으로 불어나 강진읍을 점령하고 12월  13일 
장흥성을 제2차로 점령하려다가 긴급 출동한 일본군과 경군 교도대의 대병력과 혈전을 치루
다가 승리하지 못하고 후퇴하여 해산했다. 농민군 전사자의 수는 약 2백 명이었다. 
  농민군은 계속해서 산발적인 저항을 계속했다. 일본군은  나주에 대대본부를 설치하고 농
민군 학살 작전에 들어갔다. 
 호남 지방에서는 일본군이 농민군을 이 잡듯이 뒤져 학살했고 바다에서는 일본의 군함들이 
농민군의 해상 탈출을 저지하며 육전대를 상륙시켜 해안 지방까지 후퇴해 온 농민군을 학살
했다. 
  일본이 남해안에서 초계 활동을 하게 한 군함 츠쿠바호는 육전대를 전라도 좌수영에 상륙
시켜 농민군을 무차별 학살하고 광양까지 진출하여 또 다시 농민군을 대대적으로 학살했다. 
  일본군들은 농민군이 완전히 해산을 한 뒤에도 계속해서 학살을  자행했다. 이로 인해 전
라도 일대는 아비규환으로 변하고 농민들의 곡성이 그칠 날이 없었다. 
  농민군은 음력 12월 말경에는 대부분 해산했다. 나주에 주둔하던 제19대대는 음력 1895년 
1월 16일까지 토벌본부(학살본부)를 설치하고 학살을 자행하다가 용산으로 철수했다. 
  농민군의 마지막 항전이 이루어진 곳은 대둔산이었다. 농민군 중에서 끝까지 해산이나 항
복을 거부하고 죽음으로써 절개를 지킨 사람들은 소년 1명과 임신부 1명을 포함한 동학 간
부 26명이었다. 이들은 북풍한설이 몰아치는 음력 1월  대둔산의 한덕산으로 들어가 철벽같
은 요새를 구축했다. 
  대둔산은 충청남도 전라북도의 경계에서 충청남도  쪽으로 약간 치우쳐져 있는데  산세가 
험준하고 기암괴석이 많아 천연의 요새를 이루고 있었다.  주봉은 해발 878미터의 마천대였
다. 
  농민군은 한덕산 산정에 3채의 집을 지어 임신부와 어린 소년을 거처하게 하면서 추위도 
피했다. 그리고는 일본군의 습격을 대비해 돌을  쌓고, 총구멍을 내고 큰 돌과 거목을  쌓았
다. 
  음력 1월 8일 공주 감영에서 영병이 대둔산으로 농민군을  공격해 왔다. 공주 영병은 3일 
동안이나 농민군을 공격했으나 농민군이 구축한 요새가 깎아지른 듯한 절벽 위에 있는 데가 
농민군이 바위와 거목을 굴리면서 사격을 했기 때문에 접근조차 하지 못하고 패주했다. 
  농민군이 열세에 놓인 뒤로 급격하게 조직되기 시작한 민보군도 농민군을 토벌하려고  시
도했으나 막대한 희생자만 내고 철수하였다. 
  음력 1월 21일 공주의 영병들이 다시 공격을 했으나 농민군의 필사적인 저항에 부딪혀 철
수했다.
  음력 1월 23일엔 전주 감영에서도 관군들이 대포를 끌고 와서 한덕산의 농민군을 포격하
였다. 그러나 대포는 한덕산 산정까지  끌고 올라갈 수 없었고 밑에서  아무리 포격을 해야 
농민군의 요새에 미치지 못하였다. 
  일본군은 농민군이 난공불락의 요새에서 방어선을 구축하고 치열하게 항전하자  일본군과 
조선군 60명으로 특공대를 편성하여 농민군 토벌에 나섰다. 특공대는 1월 24일 새벽 5시 등
산용 사다리와 장비를 갖추고 3로로 나누어 한덕산을  올라가며 맹렬하게 전투를 재개했다. 
그러나 농민군의 저항이 더욱 치열해 일본군 특공대도 우수한 장비를 갖고 있는데도 불구하
고 전혀 손을 쓸 수가 없었다. 
  일본군 특공대는 정면 돌파를 포기하고 조선군에게  전면에서 맹렬한 사격을 하게 한  뒤 
한덕산의 뒤로 돌아가서 깎아지른 듯한 암벽을 타고 올라가기 시작했다. 
  농민군은 전면의 적과 치열한 전투를 하고  있다가 절벽을 타고 올라온 일본군이  불시에 
후면을 공격하자 용감하게 싸우다가  전원이 장렬하게 전사하였다. 농민군은  새벽 5시부터 
오후 2시까지 9시간 동안을 처절한 혈투를 벌였으나 어린 소년  1명만 남고 27, 8세의 임신
부까지 합해 25명이 전사하였다. 접주 김석순은 한 살쯤 되는  어린 여아를 안고 암벽의 계
곡으로 뛰어 내려 자살함으로써 일본군에게 굽히지 않는 절개를 보여 주어 토벌에 나선 일
본군까지 숙연하게 하였다. 
  제2차 농민전쟁에서 일본군과 관군에 의해 희생된 농민은 전사자와 학살자를 포함해서 약 
30만 명 안팎에 이르렀다. 
  1) 동학 농민군의  제2차 봉기는 서울대  신용하 교수의  {동학과 갑오농민전쟁연구(일조
각)}를 인용하면서 참고로 했다. 



    제 40 장 불꽃의 여인
  동학 농민군이 제2차 봉기를 했을 때 일본군은 청나라의 여순까지 진출하여 치열한 격전 
끝에 여순을 점령하고 대학살에 들어갔다. 일본군은 중국인 부녀자들까지 마구 학살하는 만
행을 저질러 저 문명의 피부에 야만의  근골을 가진 민족이라는 비난을 유럽으로부터  받았
다. 이때 일본군에게 학살당한 중국의 비전투원이 6만 명이나  되어 그 피가 강을 이루면서 
여순 앞바다로 흘러들었다고 했다. 
  여순전투 이후 미국, 영국, 러시아 등은 적극적으로  청일전쟁에 개입하였다. 특히 미국은 
일본이 청나라의 영토를 계속 침략한다면 일본에게 오히려 불리한 결과를 초래하게 될 테니 
속히 강화하라고 촉구했다. 일본은 미국과 유럽 여러 나라의  강화회담 촉구를 구실을 붙여 
외면하고 강화를 차일피일 미루다가 이듬해인 1895년에야 회담을 체결했다. 이때 일본은 강
화회담의 조건으로 타이완(대만)을 할양 받아 타이완을  영유하면서 동아시아의 남방기지로 
활용했다. 
  일본은 해군 대장 가바야마 스케노리를 타이완 총독에 임명하고 근위사단을 파견하여  타
이완을 통치하였다. 타이완에서는 주민들이 독립공화국을 선포하고 일본군에게 격렬한 저항
을 했으나 일본의 침략 정책은 추호도 흔들리지 않았다. 일본은  이때 이미 동양 지배의 야
욕을 꿈꾸고 있었다. 오토리 공사의 후임으로 조선에 온 이노우에 공사는 동학 농민군을 토
벌하는 한편 조선 조정을 친일화시키는 데 혈안이 되었다. 그는 대원군을 견제하기 위해 설
치한 군국기무처가 대원군의 반발로 제대로 행정을 펴나가지 못하고 조선인들로부터도 시큰
둥한 반응을 얻자 대원군을 퇴진시킬 결심을 했다. 
  이노우에 공사는 9월 28일 조선에 부임하자 곧바로 신임장을 바치고 단독 알현을 청했었
다. 이때 이노우에 공사는 자신이 고종에게 상주하는 내용이  모두 중대한 국사라는 이유를 
들어 왕비가 동석할 것을 요구했다. 조선 왕조의 정책을  좌지우지하는 사람이 국왕인 고종
이 아니라 민비라는 것은 이미  공공연한 비밀이었고, 일본의 1급  정객인 이노우에 공사가 
민비의 동석을 요구한 것은 그 사실을 공식적으로 인정하고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래, 내가 너희들이 만나자면 못 만날 것 같은가?)  민비는 오연하게 서서 입술을 깨물
었다. 조선의 왕비가 외국인을  만나는 것은 궁중 법도로 금지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미 전
례가 있었다. 게다가 세상이 점점 개명해지고 있는 것이다. 
  일본은 6월에 경복궁을 무력으로 점령하여 조선의 민심이 흉흉하자 왕실 위문사로 일본의 
추밀원 고문관 사이온지 긴모치를 특사로 파견했었다. 전임 일본  공사 오토리의 제안에 의
해서였다. 
  <일본군의 경성 입성이래 주민의 다수가 성외로 도망가고  일반인의 생활은 심히 곤란하
다. 이때 일본이 조선 왕가를 위문하고 빈민을 구휼하기 위한 특사를 파견하는 것이 양국의 
친선에 도움이 되리라고 본다.>
  일본이 조선 왕실에 위문사를 파견한  것은 오토리의 이러한 제안  때문이었다. 사이온지 
위문사 일행은 고종을 알현하고 의례적인 인사를 나눈 후에  왕비와의 회견을 강청했다. 이
때 이미 민비의 명성은 일본 조야에까지 파다하게 퍼져 있어서 사이온지 일행은 민비의 미
모와 총명이 어떤지 직접 보고 싶었던 것이다. 
  외부대신 김윤식은 조선에서는 왕비가 외국 사신을 접견하는 관례가 없다고 하면서  단호
하게 거절했다. 그러나 사이온지 일행의 요구가 워낙 강경해  민비는 발을 반쯤 걷어올리고 
궁녀 둘을 다시 그 앞에 앉아서 민비의 몸을 가린 뒤에야 접견을 허락했다. 
  이노우에 공사가 민비의 동석을 요구한 것은 이러한 배경이 작용하고 있었다. 
  음력 10월 7일 이노우에 공사는 알현을 허락 받고 경복궁의 집경당으로 들어갔다. 
  "폐하, 신이 지난 번 신임장을 제정하면서  알현을 청했을 때 왕후폐하께서도 임어하시기
로 약조하셨사옵니다. 황공하온 말씀이나 왕후폐하께서도 임어하셨는지요?"  이노우에는 민
비가 보이지 않자 단도직입적으로 고종에게 물었다. 
  "중전도 함께 했소."
  고종이 얼굴을 찌푸리며 대답했다. 이노우에는 그때서야 집경당 안을 살피다가 어좌 왼쪽 
방에 왕비가 장지문을 열어 놓고 발을 드리운 채 앉아 있는 것을 발견했다. 
  "황공하옵니다. 외신이 미처 황후폐하를 뵙지 못하였사옵니다."  이노우에는  민비를 향해 
정중히 허리를 숙여 인사를 했다. 
  "공사께서 알현을 청한 까닭을 전하께 주청하시오."
  민비의 대꾸는 냉랭했다. 이노우에는 민비의 대꾸가  비수처럼 차갑다는 것을 의식하면서 
옷깃을 여미고 입을 열었다. 
  "폐하. 조선에서 일본의 협력으로 개명한 정치를 위해 내정 개혁을 실시하고 있으나 아무
런 실지 효과를 거두지 못하고 있사옵니다. 군국기무처를 폐지해야 하옵니다."  "군국기무처
는 귀국에서 설치하고자 요구하지 않았소?"  "허나 군국기무처에서 재가를 올리는  것은 모
두 국태공 저하께서 배척하고 있사옵니다."  "......"
  "국태공 저하께서는 한고조가 천하의 인심을 얻은 뒤에야 3장의 법령을  만들었다는 고사
를 내세워 내정 개혁안을 비토하고 있사옵니다."
  "국태공도 일본이 옹립한 분이오. 내가 이래라 저래라 할 입장이  못되오."  "또한 국태공 
저하께서는 청군과도 내통하였사옵고 법무협판 김학우를 암살했다는 소문도 있사옵니다."
  "아버님께서 김학우를 암살했다는 말이오?"
  "시중에 소문이 파다하옵니다."
  김학우가 괴한들에게 피살된 것은 음력 10월 3일 밤이었다. 김학우는 친일 개화파의 중진
으로 함경도 경성에서 태어나 청나라와 일본을 떠돌면서 개화를 받아들이고 갑오경장이  실
시되자 법무협판에 발탁되어 활발한 개화정책을 펴고 있었다.  그러나 김가진, 김학우, 유길
준, 안경수 등이 추진하던  급진 개화정책은 조정의 대신들은  물론 백성들로부터도 격렬한 
비난을 받았다. 이들을 지원하는 일본조차 일본당은  조진당의 반쪽 개화주의자라고 못마땅
해하고 있는 처지였다. 조진당은 조급하게 앞으로만 나아가는 무리라는 뜻이었다.
  김학우는 10월 3일 밤 전동 집에서 술을 마시고 있다가 느닷없이 김학우가 누구냐면서 뛰
어들어온 괴한에게 자격을 당해 숨이 끊어졌던 것이다. 
  고종은 이노우에 공사의 말에 아무 대꾸도 하지 않았다. 민비도  입을 다문 채 발 틈으로 
어른거리는 이노우에의 얼굴을 살피고 있었다. 이노우에는  고종과 민비로부터 아무 대꾸가 
없자 마른침을 삼키고 입을 열었다. 
  "국태공 저하께서는 이제 물러나셔야 하옵니다."
  "......"
  "폐하. 일본은 지금 청나라와 교병 중에 있는데도 불구하고 내무대신의 요직에 있는 신을 
조선 공사로 파견하였사옵니다."
  "......"
  "신은 강화조약을 체결한 이후 조선에 대해 상세히 알게 되어 내각으로부터  대소사를 위
임받고 조선에 부임하였사옵니다. 조선은 지금까지의 공사와 신을 동일시하지 말고 무슨 일
이든지 상담해 주셨으면 하옵니다."
  "......"
  "신은 곧 바로 제2차 내정 개혁안을 폐하께 상주하고자 하옵니다."  "군국기무처에 의논하
오."
  고종의 대답은 냉랭했다. 민비는 발 뒤에서 얕게 헛기침을 했다.
  "폐하, 이는 국왕이신 폐하께서 전결해야 할 중대한 사안입니다."  "공사!"
  그때 옆방에서 민비의 날카로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노우에가 흠칫 하여 고개를 돌리자 
민비가 발을 걷고 이노우에를 차가운 눈빛으로 쏘아보고 있었다. 
  "예. 왕후폐하."
  "국태공을 옹립한 것은 일본이 한 일이오. 이제 와서 국태공을 퇴진시키겠다고 우리 전하
께 상주하고 있으니 그처럼 무도한 일이 어디 있소?"
  "왕후폐하. 그것은 오로지 일본이 조선을 돕기 위한 고육지책이었습니다. 이제는 전하께서 
국정을 담당하셔야 하옵니다."
  "당치 않은 소리! 이제 와서 국태공을 퇴진시키는 것은 전하와 국태공의 부자지간을 이간
질하는 것에 지나지 않소. 자세한 사정을 알 리 없는  사람들은 내가 또 시아버지인 대원군
을 내몰았다고 할 것이 아니오?"
  "왕후폐하, 국왕폐하와 왕후폐하는 이 나라의 지존이시옵니다. 당연히 두 분  폐하께서 권
한을 행사해야 할 것으로 아옵니다."
  "공사!"
  민비가 어이없다는 듯이 소리를 내어 웃었다. 
  "지금 조선 왕실의 형편이 어떤지 몰라서 하는 소리요? 밖으로는 일본군에게 포위되어 있
고 안으로는 군국기무처니 내각이니 하여 모든 정사가 거기서  처결되고 있소. 전하와 나는 
국사에서 소외되어 구중궁궐 깊은  곳에서 유유자적하고 있소."  "일본군이  조선에 들어와  
있는 것은 청국병을  내치고 동학도를 토벌하기  위해서이옵니다."
  "그래 동학도를 얼마나 토벌했소?"
  민비의 얼굴에는 다분히 이노우에 공사를 멸시하는 듯한 표정이 나타나 있었다. 
  "아직 정확한 보고를 받지 못하여 말씀을 올릴 수가 없사옵니다."  "내가 듣건대 일본군이 
우리 농민들까지 마구 학살하고 있다고 합니다!"  "왕후폐하."
  "공사, 내가 일본이 우리 양민들을 학살하고 있는 것을 모를 것이라고 생각하오?"  "왕후
폐하! 그것은 모두 와언이옵니다. 일본군은 군기가 엄격하여 추호도 그런 일을 저지르지 않
습니다."
  "이노우에 공사는 일본에서도 신임이 두터운 대신이고 서양에까지 학식이  알려진 대신이
라는 얘기를 들었습니다. 그러나 작금의  일을 생각해 보면 이노우에  공사는 부끄러워해야 
할 것입니다."
  "왕후폐하!"
  이노우에 공사의 얼굴에 불쾌한 표정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 이제 일본이 조선을 침략하려고 한다는 것은 누구나 알고 있습니다. 이미 일본 군대 수
만 명이 조선 강토를 짓밟았으니 누구라도 그 사실을 짐작하지 못하겠습니까? 우리 전하와 
나는 조선을 지키기 위해 몸부림을 쳤습니다만은 부질없는 일이 되어 열성조에 부끄러울 뿐
입니다."
  민비의 목소리는 어느덧 처연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아마... 유유한 푸른 하늘이 조선을 버리려 했기 때문일 테지요."  "왕후폐하, 일본은 조선
을 도와서 반드시 자립자강을 하게 할 것입니다."  "공사, 누가 그 말을 믿겠소?"
  "외신이 목숨을 걸고 맹세하옵니다."
  "달콤한 속삭임이 독이 된다는 것을 내가 왜 모르리... 그만 물러가오."  "예, 외신은 국왕
폐하께 한 마디만 아뢰고 물러가겠사옵니다."  "무슨 말이오?"
  고종이 고개를 외로 꼬고 있다가 비로소 이노우에 공사를 쳐다보았다. 
  "영명하신 왕후폐하의 말씀을 잘 들었습니다. 왕후폐하께서 언제나 일본을 원수로 여기고 
일본을 경계하고 있는 것도 분명히 알게 되었사옵니다. 왕후폐하께서는 일본이 대원군을 옹
립하였으니 퇴진시키는 것도 일본이 하라고 하셨사옵니다. 외신이 어찌 왕후폐하의 명을 받
들어 모시지 않겠사옵니까? 왕후폐하의  명으로 대원군을 퇴진시키겠사옵니다."   이노우에 
공사는 고종에게 단호하게 말했다. 
  (나의 명으로 대원군을 퇴진시키겠다고......?)
  민비는 이노우에 공사의 역습에 얼굴이 창백하게  변했다. 그러잖아도 시아버지와 반목을 
하고 민씨 세도를 부린다는 소문에 골머리를  앓고 있는데 일본까지 그 소문을  이용하려고 
하고 있는 것이다. 
  "공사!"
  민비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이노우에 공사를 쏘아보았다. 
  "외신, 물러가옵니다."
  그러나 이노우에 공사는 재빨리 머리를 숙여 보이고 어전에서 물러 나갔다. 
  (괘, 괘씸한 놈!)
  민비는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그러나 이노우에 공사는 일본 공사관으로 돌아가자 총리대
신 김홍집, 외부대신 김윤식, 탁지부대신 어윤중을 불러 놓고 대원군을 퇴진시키겠다고 통고
했다. 
  "대원군을 퇴진시키겠다니요?"
  총리대신 김홍집은 얼굴이 창백하게 질려서 이노우에  공사의 냉정한 얼굴을 쳐다보았다. 
대원군은 조선의 국부와 같은 존재였다. 일본이 청일전쟁을 벌이기  위한 사전 포석으로 경
복궁을 점령했을 때 대원군을 끌어 들여놓고  이제 불필요한 존재가 되자 가차없이  제거해 
버리려는 것이다. 
  "총리대신 각하, 대원군은 일본을 배신했습니다!"
  "공사 각하,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우리는 조선의 독립을 위해 청나라와 싸우고 있습니다.  그런데 대원군은 청나라와 내통
하여 우리를 몰아내려고 했습니다. 여기 증거가 있습니다!"  이노우에 공사가 공사관 접견실
의 탁자 위에 서찰 한 통을 내던졌다. 김홍집은 탁자 위의 서찰을 대하자 가슴이  철렁했다. 
그 서찰은 대원군이 평안감사 민병석에게 보낸 것이었다. 
  청일전쟁의 발발이 임박해지자 조선 조정에서는 평안감사에 민병석을 임명하여  비밀리에 
청군을 돕도록 하였다. 그러나 청일전쟁 발발 직전 경복궁을  점령한 일본은 평안감사 민병
석을 파면하게 강요하고 새로운 평안감사에 김만식을 임명하게 하였다. 조선 조정은 일본의 
강압에 의해 김만식을 평안감사로 임명했으나 김만식은 청군이 진을 치고 있는  평양성으로 
들어갈 수가 없어서 40일 동안이나 부임하지 못하였다. 
  민병석은 김만식이 일본에 의한 감사라고 하여 감사직을 인계하지 않고 평양성이  일본군
에 함락될 때까지 감사의 임무를  보면서 청군을 물심양면으로 도왔다. 그것뿐이  아니었다. 
조선의 국왕인 고종, 당대의 여걸인 민비도 비밀리에 청군에게  서신을 보내어 일본을 물리
쳐 줄 것을 희망했다. 일본군의 경복궁 점령으로 굴욕감을 이기지 못한 조선의 지배층은 지
위고하를 막론하고 청나라로 기울어져 있었다. 
  민병석이 평안감사직을 김만식에게 인계하지 않은 것도 그런 까닭이었다. 
  그러나 그들의 희망과 달리 평양대회전은 청나라의 참담한 패배로 끝이 났고 일본군은 민
병석의 집무처인 평양 감영 선화당에서 고종과 민비, 그리고  대원군의 서신을 노획하여 일
본 공사관으로 보내 정력적으로 이용하게  하였다. 이노우에 공사가 김홍집을  향해 내던진 
서찰이 바로 그 중의 하나였다. 
  <기림순상>
  김홍집은 첫머리의 낯익은 필체를 보고 가슴이 뛰고 손이 떨렸다. 선이 굵고 활달한 필체
는 대원군의 필적이라는 것을 누구나 간파할 수 있는 것이었다. 
  <현금의 정세가 암담하여 종사의 안위가 위태로우니 어찌 필설로 논할 수 있겠는가. 이렇
게 참담한 형세를 눈으로 보고 있자니 하루인들 편할 날이 없다. 
  도신(감사)은 각골명심하여 누란의 위기에 빠진 종사를 구할 계책을 세우라. 듣자니 천사
(청군)가 기치창검을 갖추고 기림(평양)에 유곡했다 하니 하루바삐 왜군을 격파하고 입경하
여 종사를 보위하기를 갈망하노라. 
  금일 일본의 강요에 의해 김만식을 기림 도백으로 보내기는 하나 그것이 어찌 금상(고종)
의 진심이겠는가. 공은 이러한 사정을 촉지하여 기림에서 왜국은 격파하고 개선하기를 고대
하노라.>
  대원군의 서찰을 두 번이나 되풀이해서 읽은 김홍집은 말없이 김윤식에게 건네주었다. 
  "왕후폐하께서도 대원군을 퇴진시키라는 명을 내리셨소."  "왕후폐하께서요?"
  "그렇소. 대원군은 조선의 내정 개혁에 방해물이 될 뿐이오!"  이노우에 공사의 말은 전에 
없이  단호했다. 김홍집은 얼굴을 찌푸렸다. 대원군이  개력에 걸림돌이 되고 있는 것은 김
홍집도  절실하게 느끼고 있었다. 그러나   대원군을 퇴진시키는 것이 일본의 강압에  의한 
것이라고 생각했을 때 가슴이 타는 것 같았다. 
  (이 놈들이 결국 나를 내치는군!)
  대원군은 김홍집으로부터 이노우에 공사의 말을 전해 듣고 주먹을 불끈 쥐었다. 
  (뭐? 왕후폐하의 명이라고?)
  이노우에 공사의 말에 의하면 민비가 자신을 퇴진시키라고 했다는  것이다. 처음 그 말을 
들었을 때 대원군은 머리끝이 곧추 서는 듯한 분노를 느꼈으나 곧바로 이노우에 공사의 계
책이라는 것을 깨닫고는 허탈했다. 
  (어쩌면 우리 사이의 은원은 모두 다른 사람들이 조작한 것인지도 몰라...)  대원군은 비감
했다. 그러나 한성 장안이 일본군의 총칼 아래  들어가 있는 이상 이노우에 공사의 퇴진 압
력에 굴복할 수밖에 없었다. 대원군은 뜬눈으로  밤을 세우고  운현군의 아재당으로 대소신
료들을 불렀다. 
  "국운이 쇠진하여 마침내 일본이  조선을 좌지우지하는 비참한  지경까지 이르고 말았소. 
이제 와서 여가 무슨 말을 하여 이 참담한 실정을  모면할까마는 마지막 당부가 있소."  대
원군은 열려 있는 장지문을 통해 아재당 뜰에 운집한 대소신료들을 착잡한 시선으로 쓸어보
았다. 아재당의 넓은 뜰은 기침소리 하나 들리지 않을 정도로 조용했다. 
  10월 21일 어느 해 보다 일찍 닥친 초겨울 추위가 제법 맵고 찼다. 충청도 목천 세성산에
서는 동학 농민군과 조일 합동 토벌군이 치열한 전투를 벌이고 있었으나 대원군은 의미심장
한 하야성명을 발표하고 있었다. 
  "여는 어느덧 70을 넘겼소. 부귀영화를 한 몸에 누리며 풍운의 한 시대를  살았소. 한때는 
내가 아니면 이 나라 억조창생을 도탄에서 구하지 못하리라는 결기도 있었으나 모두가 부질
없는 짓이라는 것을 깨달았소. 하늘이 이 나라를 버리고 있는 듯하오."  대원군의  목소리는 
어느덧 비탄에 잠겨 있었다. 
  대신들이 알고 있듯이 우리 성상께서는 심성이  어질어 난세를 이끌 군왕의 재목은  못되
오. 여는 시세가 여의치 못해 국정에서 손을 떼로 야로로 돌아가게 되었소. 왕법은 원래  한 
곳에서 나와야 하는데 지난 몇 십년 조선의 국운이 혼돈하여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는 실정
이라 성상의 지친인 여가 만난을 무릅쓰고 기울어져 가는 종사를 바로 잡으려고 했으나 그 
또한 뜻한 대로 이루어지지 않았음은 여러 대신들이 더 잘  알고 있을 것이오. 대세는 이제 
크고 작은 정무를 모두 일본 공사의 의향대로 처리할 수밖에 없소."  대원군은 눈을 지그시 
감았다. 
  "국권이 일본의 수중에 있소."
  "......"
  "허나 그대들이 지조  있는 신하들이라면 반드시  국권을 튼튼히 할  수 있으리라 믿소."   
"......"
  "와신상담하여 외로우신 금상 전하께 충성을 바치고 청구 삼천리 조선 강토를  왜적의 손
에서 구하는 일에 신명을 바치기를 바라오. 나는 눈을 부릅뜨고 그대들을 지켜보겠소."   대
원군이 입을 다물었다. 아재당 뜰에 운집한  대소신료들은 아무 대꾸도 할 수 없었다.  일본 
공사의 강압에 의해 조선의 대소 정무가 좌우되고 있는 것을 그들이라고 모를 리가 없었다. 
총리대신 김홍집은 의정부로 돌아오자 착잡한 심정을 떨쳐 버릴  수가 없었다. 조선의 개화
는 지지부진했다. 대원군 집정 시절 10년,  꽁꽁  닫혀 있던 쇄국의 문이 열렸으나  조선은 
개화된 문명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임오군란을 맞이했고, 성급한 개화당인 김옥균 등에 의해 
갑신정변까지 겪게 되었으나 자립자강을 하지 못하고  끝내 오늘의 치욕을 당하게 된  것이
다. 
  "도대체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일까?"
  김홍집은 조선이 누란의 위기에 처한 까닭을 이해할 수 없었다. 
  "국태공 저하께서 하야하시고 다시 국왕폐하께서  대정을 친재하시게 되었소. 여러분들도 
알다시피 이는 일본의 강압에 의한 것이오."
  김홍집은 대신들을 모아 놓고 자신의 착잡한 심정을 피력했다. 
  "우리가 이러한 치욕을 당하고 있는 것은 개명한 정치를  하고 있지 못하기 때문이오. 비
록 일본의 요구로 내정을 개혁하게 되었으나 시설한 것은 반드시 힘을 써서 실효를 거두어
야 할 것이오."
  김홍집의 목소리도 비감했다. 
  "우리들은 이미 변법(갑오경장)을 실시한 소인이 되어  청나라와 옛것을 숭상하는 사대부
들로부터 비난을 받고 있소. 그러나 그들의 비난이 두려워  개혁을 등한시하여 나라를 그르
치는 죄인이 된다면 후세까지 역사의 죄인으로 남게 될 것이요. 한때의 부귀와 권세를 위해 
나라를 파는 죄인이 되지 말고  이 나라를 개혁하는 일에 온갖  열성을 다해야 할 것이오."  
김홍집의 어투는 마치 안간힘을 쓰고 있는 것 같았다. 
  쏴아, 바람이 불 때마다 대궐의 후원으로 나뭇잎이 쓸려 다니는 소리가 음산하게  들렸다. 
철이 걸맞지 않게 빗발까지 뿌리고 있어서 날씨가 더욱 스산했다. 
  (비가 그치고 나면 한결 추워질 테지...)
  민비는 우울한 생각에 잠기며 몸을 한 차례 부르르 떨었다. 초겨울이었다. 저 아래 남쪽에
서는 동학비도들이 탐관오리를 몰아내고 일본을 쫓아버리겠다고 창의문을 돌리고 거병을 하
여 조일 토벌군과 치열한 접전을 벌이고 있었다. 
  (때가 아니야, 동학도 척양척왜도 때가 아니야...)
  민비는 고개를 절래절래 흔들었다. 임오군란이 청나라와 일본을 끌어 들였듯이 동학 농민
군의 봉기는 조선을 청일 양국의 전쟁터로 만들고 있었다. 그러나 조선으로서는 속수무책이
었다. 왕실은 힘이 없고 대소신료들은 나라를 부강하게 하려는 의지도 신념도 없었다.  대소
신료들이 기껏 하는 일이라고는 나라가 누란의 위기에 빠져 있는 데도 권력 쟁탈뿐이었다. 
  (준용이 사건도 결국 모함이 아닌가?)
  이준용 사건은 대원군의 친손 이준용이 왕위찬탈음모를 꾸몄다는 것이다. 그 일은 경무사
(경찰청장급) 이윤용이 발설을 하여  동학 농민군의 봉기와 청일전쟁으로  어수선한 정가에 
커다란 회오리를 일으켰었다. 이윤용은 대원군의 서녀를 아내로 맞이했으므로 대원군에게는 
사위가 되었고 이준용에게는 고모부가 되었다. 그러나 급진 개화  정책에 걸림돌이 되고 있
는 대원군 계열을 제거하기 위해 그런 음모를 꾸민 것이다. 급진 개화주의자들인 김가진, 김
학우, 조희연, 안경수 등과 함께 군국기무처의 소장 핵심 세력이었다. 그들은 거의 매일같이 
의안을 올렸는데 이 의안이 대원군에  의해 거부되어 불만을 사고 있었다.  이에 소장 개혁 
세력은 이준용을 왕위찬탈음모 사건에 엮어 넣어 대원군을 퇴진시킬 계획이었던 것이다. 
  경무사 이윤용은 영의정 김홍집에게 먼저 왕위찬탈음모 사건을 통고했다. 
  김홍집은 정청인 수정전에서 이윤용의 보고를 받고 가슴이 답답함을 느꼈다. 이준용은 대
원군의 손자이고 고종에게는 조카가 되는 것이다. 서장자 이재선마저 안기영의 옥사에 말려
들어 사약을 받았는데 이제는 이준용까지 죽음의 위기에 처한 것이다. 
  변법(갑오경장)을 반포한 후 정무는 사실상 군국기무처의 총재인 김홍집이 다스리고 있었
다. 그러나 군국기무처는 국회의 역할을 하고 있어서 모든 안건이 군국기무처에서 토의되고 
심의되었다. 김홍집이 고종 다음 가는 권력자요, 행정 수반이라고 해도 실질적인 권한은  별
로 없었다. 
  김홍집의 뒤에는 언제나 일본이 감시의 눈초리를 번뜩이고 있었다. 
  대원군 역시 김홍집에게는 커다란 부담이었다. 대원군은  일본이 사실상 조선을 지배하고 
있는데도 일본을 배척하고 있었다. 일본의 침략행위에 배알이 있는 사람이라면 마땅히 일본
을 배척해야 했으나 대원군은 굽혀야 할 때도 굽히지 않고 있었다. 
  급진 개화주의자들은 때를 만난 듯이  작당을 하고 몰려다니며 개혁을  부르짖고 있었다. 
물론 깊은 어둠 속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조선의 처지는 한시바삐 개혁을 해서 자강의 길을 
찾아야 했다. 그러나 급진 개화주의자들은 일본의 위세를 등에  업고 국정을 혼란스럽게 만
들고 있을 뿐이었다. 
  "변법을 반포한 자는 종사의 죄인이다!"
  "변법인들은 금수와 같은 자들이다!"
  "김홍집은 가양이의 괴수다!"
  산림에 은거해 있는 유림은 김홍집을 일본의 앞잡이라고 몰아  세웠다. 김홍집은 그런 소
문을 들을 때마다 가슴이 미어 터지는 것 같았다. 고종 5년인 1868년, 26세에  김굉집이라는 
이름으로 문과에 급제하여 정계에 발을 들여놓은 지 어언 20여 년이란 세월이 흘렀으나 관
운은 순탄한 편이었다. 무엇보다 그가  처신을 깨끗하게 하여 부침이  거듭하는 정계에서도 
승진을 거듭하여 영의정까지 이르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영의정이란 막중한 위치에 있었
으나 김홍집은 마음껏 뜻을 펼 수가 없었다. 
  정국이 너무나 어지러웠다. 조선은 사실상 일본의 지배하에 놓여 있는데도 국론이 분열된 
채 끈질긴 모함과 파쟁으로 일본에 대한 대항은 꿈조차 꾸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한 시기에 경무사 이윤용이 처조카인 이준용을 왕위찬탈 음모 사건에 엮어 넣어 정국
을 회오리치게 하고 있었다. 김홍집은 이준용의 왕위찬탈음모 사건을 수습하기 위해 부산하
게 움직였다. 
  경무사 이윤용은 영성장 이병휘, 의정부 도헌 이태용, 내부참의 박준양, 대원군의 문객 정
인덕, 양호지방 선무관 박동진, 박세강을 잡아 들여 검거 선풍을 일으키고 있었다. 
  김홍집은 고종을 배알하여 박종진과 박세강은  참형에 처하도록 상주하고 나머지  운현궁 
계열의 인물들에게는 원악도로 유배하라는  유배를 받아냈다. 김홍집의  노력으로 이준용의 
목숨을 구한 것이다. 
  "허......! 이런 못된 것들이 있나? 경무사 이윤용이가 감히 흥선의 손자를 무고해? 대체 영
의정 김홍집이라는 자는 무엇을 하는 위인이야?"
  대원군은 이준용을 구한 김홍집의 노력을 헤아리지도 않고 펄펄 뛰었다. 
  "당장 경무사 이윤용을 파직하도록 해라!"
  대원군의 서슬 퍼런 위세에 급진 개화주의자들은 숨을 죽였고 이윤용은 해임되었다. 
  파쟁의 결과였다. 
  민비는 이준용의 왕위찬탈음모 사건이 이윤용의 해임선에서 수습되자 이윤용을 다시 이용
할 기회가 있으리라고 생각했다. 지금은  일본이 군대를 앞세워 조선의  왕실까지 위협하고 
있지 않은가. 강한 것에 강하게 대항하는 것은 무모한 짓이라고 생각했다. 
  (계절이 바뀌듯, 욱일승천하는 일본의 기세도 꺾일 날이 있을 것이다!)   민비는 침전에서 
두문불출했다. 일본의 방자한 침략행위에  잠자코 있는 것은 치욕스러운 일이었으나 지금은 
침묵을 지키고 있는 것이 상책이었다. 
  날이 어두워지기 시작했다. 비는 아직도 그치지 않고 대궐의  잿빛 기와지붕 위에 추적대
는 빗발을 뿌리고 있었다. 점점 저물어 가는 서쪽 하늘을 시린 눈빛으로 쳐다보면서 민비는 
어금니를 물었다. 가슴이 베어져 나가듯 이 참담한 정국, 일본의 침략에 도대체 어떻게 대처
해야 하는가. 
  찬바람이 냉기를 풍기며 불어 왔다. 민비는 향원정 앞에  서서 비바람에 나부끼는 버드나
무를 초점 없는 시선으로 응시했다. 초겨울이라 그런지. 버드나무도 잎사귀를 모두 떨군  채 
앙상하게 나부끼고 있었다. 
  대원군은 결국 정계를 은퇴했다. 이제는  고종이 다시 친정하는 형태였으나  모든 정무가 
군국기무처에서 논의되었고 국왕인 고종은 형식적인 재가만  하고 있었다. 입헌군주제니 내
각제니 하는 말이 무성했으나 군국기무처는 사실상 급진 개화주의자들과 일본에 의해  조종
되고 있었다. 
  군사적으로 조선을 지배하기 시작한 일본은 경제적인 수탈에 혈안이 되어 있었다. 일본은 
청일전쟁의 발발로 막대한 전비가 필요했을 뿐 아니라 조선을 식민지화하려는 계책에  골몰
하고 있었다. 
  동학 농민군은 조일 합동 토벌군에 의해 와해되어 가고 있었다. 조일 합동 토벌군은 동학 
농민군을 전라도 지방으로 몰아 넣고 토끼 사냥을 하듯 몰살시키려고 하고 있었다. 
  (결국 농민군은 비참하게 죽게 되겠지......)
  민비는 농민군의 비참한 최후가 눈에 보이는 듯했다. 농민군은  시기도 잘못 선택했고 군
사들의 조직, 훈련이 제대로 되어 있지 않았다. 이제는  전쟁의 개념이 옛날과 달랐다. 재래
전은 명분과 신념, 군사의 숫자와 작전이 전쟁의 승패를 갈랐으나 이제는 조직과 훈련, 그리
고 막강한 화력이 전쟁의 승패를 좌우하고 있는 것이다. 
  (농민군은 서둘렀어, 게다가 걸핏하면  나를 비판하는 일본과  잘난 사대부들의 주장이나 
다를 바 없는 주장을 하고 있지 않는가...?)
  민비는 동학 농민군들도 탐탐하지 않았다. 동학  농민군의 봉기는 신원금폭에서 시작되어 
척양척왜로 발전해 있었다. 그러나 그 근간에는 중궁이 무당  나부랑이들을 끌어 들여 정사
를 좌지우지하고 고종을 차마폭으로 휘어 감아 나라를 망하게  한다는 비판이 깔려 있었다. 
국왕에 대한 충성심이 강한 자들이라면 국모에  대한 비판을 삼갔을 것이라는 것이  민비의 
생각이었다. 
  민비는 청일전쟁이 하루빨리 끝나고 동학 농민군도 신속히 토벌되기를  바랐다. 그 두 가
지 일이 모두 마무리되어야 조선에 주둔할 명분이 없어진 일본군이 철수하리라는 생각 때문
이었다. 
  그러나 한반도를 둘러싼 정세는 민비의 기대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일본 공사 이노우에는 대원군을 퇴진시킨 지 이틀 만인 10월 23일 어전회의를 열 것을 요
청하고 제2차 내정 혁신안 20조를 제안했다. 경복궁 사정전에서 였다. 대원군이 온갖 비난을 
무릅쓰고 경복궁 중건을 완공하여 청년 국왕이 정무를 보던 것이었다. 
  총리대신 김홍집을 비롯하여 외부대신 김윤식, 탁지부대신 어윤중, 궁내부대신 이재면, 학
부대신 박정양, 농상부대신 엄세영,  통위사(친군영) 이준용이 금관조복  차림으로 시립하고 
군국기무처의 의원들인 김가진, 안경수, 조희연 등도 품계에 따라 시립했다. 
  "주상전하 납시오!"
  대전 내시가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외치자 대신들이 일제히 허리를 숙였다. 쾌청한 날씨였
다. 비가 그치고 나자 추워지리라는 예상과 달리 초겨울 볕이 한결 따뜻했다. 
  이내 국왕인 고종이 궁녀들의 전도를 받으며 사정전으로 들어왔다. 자그맣고 단단한 체구
였다. 그러나 총기가 없어 보이는 용안은 순하다 못해 어눌해 보이기까지 했다. 거친 세파를 
헤쳐나가기에는 의지도 신념도 없어 보이는 나약한 얼굴이었다. 
  고종이 어좌에 앉았다. 대신들 중에 누군가 잔기침을 하여  어전의 무거운 침묵을 깨뜨렸
다. 
  "모두 입궐하였는가?"
  고종이 대신을 굽어보며 풀기 없는 어음으로 물었다. 
  "그러하옵니다."
  총리대신 김홍집의 대답이었다. 
  "일본 공사가 또 내정 개혁안을  제안한다고 한다. 경들은 이  문제를 충분히 토의하였는
가?"
  "그러하옵니다."
  "그렇다면 일본 공사를 들라고 하라."
  고종의 어음은 냉랭했다. 온화한 목소리가 아니었다. 
  이네 이노우에 일본 공사와 스기무라 서기관이 들어왔다. 그러자  통역을 맡게 될 윤치호
가 고종의 앞에 와 시립했다.  이노우에 일본 공사는 예복인 까만  양복에 훈장을 주렁주렁 
달고 있었고 스기무라 서기관은 훈장을 달고 있지 않았다. 
  "국왕폐하. 초겨울의 날씨가 참으로 화창합니다. 이는 조선의 내정 개혁에 밝은 징조인 듯 
싶습니다. 외신은 폐하의 왕실과 조선이 하루빨리 내정 개혁을  완수하여 번영된 나라가 되
기를 바랍니다."
  이노우에 공사는 의례적인 인사말에도 내정 개혁의 의지를 강력하게 내비쳤다. 고종은 윤
치호의 통역이 끝나기를 기다렸다가 시큰둥하게 내뱉았다. 
  "지난번에도 개혁을 했는데 또 개혁을 하자는  것이오?"  "폐하. 지난번의 개혁은 의안만 
무성했지 실지 성과는 없었습니다."  "이번의 개혁은 어떤 것이오?"
  "명실상부하게 조선을 개혁하는 내용이옵니다."
  "공사의 말대로 개혁을 하면 조선이 번영을 할 수 있겠소?"  "외신은 반드시 그렇게 되리
라고 믿사옵니다."
  "그럼 어디 들어봅시다."
  고종은 짧고 간략하게 내뱉았다. 불쾌한 음성이며 얼굴 표정이었다. 대신들은 숨을 죽이고 
이노우에와 고종의 대화를 듣고 있었다. 
  "그럼..."
  이노우에 공사가 품속에서 서찰 한 장을 꺼내어 펴들었다. 
  "제2차 내정 개혁안이옵니다."
  이노우에 공사가 약간 허리를 굽혔다가 폈다. 고종은 아무 대꾸도 하지 않고 늘어서 대신
들을 물끄러미 응시했다. 
  "제1조, 정권은 한 원류로부터 나와야 한다."
  이노우에 공사의 목소리가 가볍게 떨렸다. 내정 개혁안의  제1조는 당연한 것이기에 아무
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그러나 정권이 한 원류에서 나와야 한다는 제1조는 대원군에게 
두 번 다시 정권을 위임하지 않는다는 뜻이 내포되어 있는 것이었다. 
  고종은 무겁게 침묵을 지켰다. 
  이노우에 공사가 낮게 헛기침을 하고 다시 입을 열었다. 
  "제2조, 국왕은 정무를 친재할 권리를 보유하고 아울러 법령을 지킬  의무를 가진다."  이
노우에 공사의 일본말을 알아들은 대신들도 있었고  알아듣지 못하는 대신들도 있었다. 
그러나 이노우에 공사의 일본말을 알아들은  대신들이 술렁거리기 시작하자 고종이  얼굴을 
찌푸렸다. 그리고 윤치호의 통역이 끝나자 고종은 얼굴을 붉혔고 대신들은 일제히 웅성거리
기 시작했다. 
  "이노우에 공사. 제2조는 부당한 것 같소."
  총리대신 김홍집이 먼저 반론을 제기했다. 국왕이 정무를 친재하는 것도 당연한 일이었으
나 법령을 지켜야 한다는 것은 왕도를 펼친 이래 들어본  일조차 없는 것이었다. 국왕은 절
대권력자였다. 국왕의 말이 곧 법인데 그것을 지키라고 하는  것은 국왕의 권위를 부정하는 
것이나 다름없는 일이었다. 
  "그렇습니다. 이노우에 공사는 제2조를 거론하지 않는 것이 좋겠소."   외부대신 김윤식도 
김홍집을 거들었다. 
  "외부대신 각하. 제2조에서 국왕도 법령을 지켜야 한다는  것은 세계 여러 나라가 취하고 
있는 대목입니다. 조선은 암둔한 과거에 얽매여 선진 문명제국이  어떤 법률을 취하고 있는
지 모르고 있습니다. 일본도 이와 같은 조항을 헌법에  삽입하여 일본국의 황제께서도 법령
을 지키고 있다는 사실을 명심하십시오!"
  이노우에 공사의 마지막 말은 쇠라도 자를 것처럼 단호했다. 
  "우리 백성들은 결코 이 조항을 용서하지 않을 것이오."  "외부대신  각하. 인민들은 세계 
정세를 제대로 알지 못하고 있습니다."  "폐하께서도 이 조항을 승인하시지 않을 것이오."
  "제2조가 반포된다고 해도 국왕폐하께서는 결코 어려움이 없을 것입니다. 이는 조선의 국
왕도 법을 지킨다는 상징일 뿐입니다!"
  이노우에 공사가 언성을 높였기 때문에 김윤식은 더 반박하지 않았다. 
  이노우에 공사는 계속해서 내정 개혁안 20조를 커다란  목소리로 읽었다. 제3조부터 17조
까지는 그런 대로 받아들일 수 있었으나 제18조는 일본인 고문관을 각 부처에 채용할 것을 
명시하고 있었다. 
  (제18조는 고문관이라는 작자들을 내세워 조선 조정까지 감시하자는 수작이 아닌가?)  민
비는 이노우에 일본 공사가 제안한  제2차 내정 개혁안 20개조를  살피며 몸을 떨었다. 
조선의 내정 개혁은 형식에 지나지 않는 것이고 가장 중요한 것은 제2조와 제18조였다. 
  (그러니까 제18조에 명시된 조항에 의거하여 채용한 일본인 고문관들로부터  조선을 식민
지화하는 정책을 추진한 뒤 제2조를 내세워  국왕이 반대하지 못하게 하려는 수작이야......!)  
민비는 이노우에 공사의 흉계를 간파하고 있었다. 민비로서는  제2조와 제18조가 가장 눈에 
거슬리는 조항이었다. 
  그러나 막강한 일본군의 거느리고 있는  일본 공사의 요구였다. 조선  조정에서도 고문관 
제도 때문에 의견이 분분했으나 군대를 거느리고 있는 이노우에 공사의 제안을 거부할 수는 
없었다. 
  이노우에 공사의 제안은 10월 29일 시행되었다. 고종의 윤허가 내리자 제2차 내정 개혁안 
20개 조를 곧바로 조보에 실어 반포하였다. 
  "전하. 이러다가는 조선이 일본의 꼭두각시가 될까 두렵사옵니다."  민비는 곤령합의 부속
건물인 옥호루에서 고종에게 근심스럽게 말하였다. 10월 그믐밤이었다. 고종은 고개를  잔뜩 
떨군 채 짜증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 민비의 나이  어느덧 44세, 고종의 나이 43세였다. 
고종이 12세에 소년왕으로 등극했으므로 벌써 즉위 31년이었다. 소년왕에 등극한 뒤부터 30
년이 지난 지금까지 하루도 편한 날이 없는 파란의 연속이었다. 고종은 심신이 지쳐 있었다. 
  민비는 아무 대꾸가 없는 고종의 용안을 물끄러미 응시하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다행히 전하께서 손수 정무를 친재하시게 되었습니다."  "......"
  "어떻게 하던지 일본  공사의 손에서 좌지우지되는  정사를 전하께서 다스리셔야  하옵니
다."
 "......."
  "그러기 위해서 친일당 일색인 조정을 혁신해야 하옵니다."  "조정 대신들을 우리 사람으
로 바꾸면 무엇을 하겠소? 이 나라 전 강토가 일본군의  지배하에 있는데......"
  고종이 비로소 우울한 눈빛으로 민비를 쳐다보며 대꾸했다. 
  "그렇다고 이대로 주저앉아 있을 수는 없지 않사옵니까?"  민비가 고종 앞으로 무릎을 바
짝 당겨 앉으며 말했다. 
  "부질없는 일이오."
  고종이 민비의 얼굴을 외면하며 심드렁하게 대꾸했다. 민비의 눈이  또 다시 투지에 불타
고 있었다. 고종은 민비의 그 강렬한 눈빛에 두려움마저 느끼고 있었다. 
  "전하."
  "중전. 나는 이제 조용히 살고 싶소."
  "조용히 살고 싶으시다니요?"
  "나라 안이 너무 혼란하오. 동학  농민군, 일본군... 조정 대신들조차  파당을 지어 개혁을 
해야 한다고 일본에 붙어서 군주를 핍박하고 있는 중이오. 말이 좋아 개혁이고 개명한 정치
를 하자는 것이지 저들이 어찌 임금을 생각이나 한단 말이오? 두고 보면 알겠지만 옥균 보
다 더 흉악한 역적들이 저들 중에서 나올 것이오."
  "그러기에 조정 대신들을 충성스러운 신하들로 바꾸자는 것이  아니옵니까?"  "지금 조정 
대신들을 임명하는 것은 내가 아니라  일본이오. 총리대신이 대신들과  협의하여 나에게 형
식적인 재가를 받지만 사실은 일본 공사가  임명하는 것이나 다를 바 없소."  "전하.  제2차 
내정 개혁안 제1조는 정권은 한 원류에서 나와야 한다고 되어 있고 제2조는 전하께서 정무
를 친재하신다고 되어 있사옵니다."
  "그것은 눈속임하기 위한 조문에 지나지 않소."
  "전하. 과연 그 조문이 사문화된 조문인지 신첩이 시험해 보겠사옵니다."  "중전이?"
  "그러하옵니다. 우선 5부 대신을 바꿔서 일본 공사가 어떻게  나오는지 보겠사옵니다."  "
중전. 그것은 무모한 일이오. 군대를 동원하여 대궐을 침범한 일본인데  대신들을 중전이 마
음대로 임명하면 분명 중전을 해치려고 할 것이오. 중전은 자중자애하시오."  "전하. 욕되게 
살아서 무엇을 하겠사옵니까?"
  "중전!"
  "전하. 모든 일은 신첩이 처리하겠사옵니다."
  고종은 민비의 태도가 단호해 보이자  더 이상 만류하지 않았다. 이튿날은  음력 11월 초 
하루였다. 고종은 영의정이자 군국기무처 총재인 김홍집에게도 알리지  않고 5부 협판을 임
명해 승정원을 통해 발표했다. 
 <탁지아문 협판 한기동
  법무아문 협판 이건창
  공무아문 협판 조인승
  내무아문 협판 이용직
  농상아문 협판 고영희>
  고종이 군국기무처에 알리지도 않고 임명한 협판들이었다.  한기동은 우의정을 지낸 한계
원의 아들이고 이건창은 불란서 군선이  강화도에 침입했을 때 자결한  이시원의 손자였다. 
문명이 쟁쟁하여 그 할아버지의 그 손자라는 칭송이 자자했다. 
  그러나 민비가 이노우에 공사의 반응을 떠보기 위해 임명한 5부 협판은 관보에 그 내용이 
실리자 곧바로 거센 공격을 받아야 했다. 김홍집을 비롯한 김윤식, 어윤중 등이 얼굴이 벌겋
게 상기되어 분노를 터뜨렸고 김가진, 안경수 같은 소장 개혁파들은 펄쩍 뛰었다. 
  (조선의 왕비가 나를 떠보려는 수작이 아닌가?)  
  이노우에 일본 공사는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조선의 왕비가 여걸이라는 소문이 파다했고 
조선의 정책이나 대신들에 대한 인사권을 왕비가 쥐고 흔든다는 소문이 거짓이 아니라는 사
실을 실감할 수 있었다. 
  (이 기회에 왕비를 꼼짝 못하게  만들어 버려야겠어. 왕비가 정사에  관여하는 한 일본의 
정책이 도무지 조선에 먹혀들지 않아......)
  이노우에 공사는 곧바로 경복궁으로 입궐하여 고종  알현을 요구했다. 고종은 사정전에서 
이노우에의 알현을 허락했다. 총리대신 김홍집을 비롯한  대신들이 좌우에 시립했고 민비는 
고종의 뒤에 발을 치고 앉아 있었다. 
  "폐하. 외신은 어제 나온 관보를 보고 놀랍기 그지없었습니다. 폐하께서 윤허하신 내정 개
혁 20개조에는 분명히 관리의 임명에 대한 것은 법률로 만들어 그에 따라 임명한다고 되어 
있습니다. 헌데 폐하께서는 그 법률이 만들어지기도 전에 다섯 대신을 임명하셨습니다. 폐하
께서는 외신이 제안하여 윤허하신 내정 개혁안을 스스로 파기하시는 것이옵니까?"   이노우
에 공사는 첫 마디부터 고종을 강경하게 몰아붙였다. 
  "공사는 말이 지나친 듯 하구려. 공사가 제안한 내정 개혁안 제1조에는 정권은 한 원류로
부터 나와야 한다고 되어 있고 제2조는 국왕은 정무를  친재한다고 되어 있소."  고종은 이
노우에 공사의 말에 불쾌한 표정으로 반박했다. 
  "폐하. 그러나 제2조에 국왕도  법령을 준수해야 한다는 구절이  못박혀 있지 않습니까?"   
"그것이 대신들 임명하는 것에 대한 조항이오?"
  "그러하옵니다. 협판은 대신들이 협의하여 총리대신이  임명하고 폐하께서 재가하는 것이
옵니다."
  "그렇다면 국왕은 대신들조차 임명하지 못한다는 말이오?"   "폐하. 세계 여러 나라가 그
렇게 하고 있습니다! 폐하께서도 세계 정세를 숙지하고 계셔야 합니다!"
  이노우에 공사가 언성을 높였다. 고종이 얼굴 근육을 푸르르 떨었다. 고종의 입에서  비통
한 신음이 새어 나왔다. 
  "나더러 허수아비 왕 노릇을 하라는 말이군."
  "이 모든 것이 폐하와 조선을 위한 것입니다."
  "그만 두시오!"
  "폐하! 5대신의 임명을 취소하십시오."
  "나는 조선의 국왕이오! 공사는 외신으로서 지나치지 않소?"  "폐하!"
  고종의 말에 이노우에 공사가 긴장한 표정으로 고종을 쏘아보았다. 고종의 반발이 예상외
로 강경하다고 새각했으나 이노우에 공사는 계속 밀어붙였다. 
  "말해 보시오!"
  고종의 대꾸는 냉랭했다. 
  "폐하께서 5대신의 임명을 취소하지 않으면 외신은 호남 지방에서 동학  농민군을 토벌하
고 있는 일본군을 철수시키겠습니다. 
  "공사! 그것은 우리 조선이 처음부터 요구하고 있던 일이오."  "폐하!"
  "일본군을 서둘러 철수시키면 고맙겠소."
  "폐하! 호남에서 철수한 일본군은 오늘이라도  경성으로 들어올 수 있습니다! 폐하께서는 
일본군이 경성에 들어와 주둔하는 것을 바라십니까? 설마 지난 6월의 일을 잊지는 않으셨겠
지요?"
  이노우에 공사의 말에 대신들이 먼저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고종은 그때서야 얼굴이 흙빛
이 되었다. 
  "공, 공사......"
  고종이 떨리는 목소리로 이노우에 공사를 불렀다. 
  (이제는 발 뒤에 앉아 있는 왕비를 꼼짝 못하게 해야 돼!)  이노우에 공사는 속으로 음흉
한 미소를 지었다. 
  "폐하. 5대신의 임명을 취소하시겠습니까?"
  "취, 취소하겠소."
  고종이 맥빠진 목소리로 대꾸했다. 
  "여러 가지 상황을 유추해 보면 5대신의 임명에는  간과하지 못할 부분이 있습니다. 국왕
폐하께서는 내정 개혁을 실천하려는 의지가 뚜렷한데 반해 왕실은 그렇지가 못합니다! 아니 
오히려 음험한 수단을 사용하여 개혁을 방해한 사례가 적지  않습니다. 일본 속담에 암탉이 
울면 국가와 집안이 망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폐하께서는 이  속담을 어떻게 생각하고 계십
니까?"
  이노우에 공사는 어른이 아이를 나무라듯 고종을 힐책하고 있었다. 
  "일본 속담은 아는 바 없소!"
  고종은 이노우에 공사를 외면하고 대꾸했다. 고종의 손이 표나게 떨리고 있었다. 
  "우리는 조선의 내정을 개혁하기 위하여 많은 공을  들였습니다. 청나라의 속국에서 해방
시키기 위해 청나라와 전쟁도 불사했고 조선을 안정시키기 위해 농민군까지 토벌하고  있습
니다. 그러나 왕비폐하께서 이면 공작으로 정치에 참여하고 있어서 국정의 혼란이 가중되고 
있습니다. 왕비폐하의 국정 참여를 금지시켜야 합니다!"  이노우에 공사는 직접적으로 민비
를 공격했다. 어전회의에 나올 때 민비를 공격하기로 단단히 벼리고 나온 것이 분명했다. 
  "발을 거두어라!"
  그때 민비가 차가운 목소리로 궁녀들에게 지시했다. 
  "예. 중전마마!"
  궁녀들이 재빨리 민비 앞에 드리워진 발을 거두었다. 고개를  숙이고 있던 대신들의 시선
이 일제히 민비에게 쏠렸다. 이노우에 공사도 고개를 들고 민비를 쳐다보았다. 
  민비는 소례복 차림이었다. 첩지머리에 봉황장(비녀)을 꽂았고 옷차림은 다홍색 저고리와 
대홍단 스란치마, 그리고 초록색 당의를 받쳐입고 있었다. 옷차림이며 머리 모양이 간결하고 
단촐했으나 오연하게 앉아 있는 민비의 모습은 조선의 왕비와 국모로서의 위엄이  서리서리 
뻗치고 있었다. 
  "공사!"
  민비의 어음은 낭랑했다. 
  "예. 왕후폐하"
  이노우에 공사는 허리를 깊숙이 숙였다. 
  "나는 오늘 이 시간부터 정치에 간여하지 않겠소. 내가  한낱 부녀자의 몸으로 정치에 간
여를 한 것은 왕실과 세자에 대한 우려 때문이었소. 암탉이 울어 민망하기 짝이 없구려.  허
나 수탉이 울지 못하면 암탉이라도 울어야 하지 않겠소?"  민비의 목소리는 낮고  부드러웠
으나 이노우에 공사는 허를 찔린 듯한 기분이었다. 민비의 말은 이노우에 공사가 말한 일본 
속담을 교묘하게 이용해서  반박한 것이다. 차가운 독설이다. 
  (조선의 왕비가 허를 찌르는 데 명수라더니 틀린 말이 아니었군......)  이노우에 공사는 내
심 감탄했다.
  "이제 내정 개혁안을 살펴도 그렇고 세계 여러 나라의 실태를 보아도  그렇고 왕후폐하께
서는 정치에 간여해서는 안됩니다! 왕후폐하께서 또 다시 정치에 간여하는 폐단이 생긴다면 
외신은 결코 용납하지 않겠습니다!"
  그러나 이노우에는 더욱 강경하게 밀어붙였다. 민비는 몸을 부르르 떨었다. 이노우에 공사
의 말은 완전한 협박이었다. 
  "공사! 나는 분명히 정치에 간여하지 않겠다고 말하였소. 왕실과 국가가 융성해지고  국왕
의 권위가 지켜진다면 궁중 부녀자인 내가 무엇 때문에 정치에 간여하겠소? 공사가 어떻게 
조선의 왕실을 융성하게 할 지 지켜보고 있겠소."
  "이는 한 마디 가벼운 말로 약조가 될 수 없습니다.  후일의 증거를 삼기 위해 증표를 남
겨야 합니다."
  "증표?"
  "그러하옵니다."
  이노우에 공사는 한 발자국도 물러서지 않았다. 민비는 입술을 깨물었다. 눈에서는 파랗게 
독기가 뿜어졌다. 
  "여기에 다섯 대신들이 있소. 이들이 증인인데  무슨 증표가 필요하오?"  "외신은 증표가 
있어야만 안심하겠습니다."
  이노우에 공사의 완강한 요구에 의해 결국 5대신서언이 작성되었다. 
  <우리 다섯 대신은 숙연히 맹세한다. 청국의 간섭을 배제하고 독립의 근기를 세우며 중흥
의 흥업을 익찬하고 왕실을 봉호하여 국시를 정하되 불굴불요의 결심으로 만난을  극복하고 
역행불기한다. 
  왕실 척리가 대정에 간섭을 하더라도 조정 각 대신은 이를 거절하고 정출다문하는 숙폐를 
교정한다.>
  다섯 대신이 이노우에 일본 공사에게 맹세한 내용이었다. 
  그것뿐이 아니었다. 이노우에 공사의 요구에 의해 음력 11월  13일 고종은 금릉위 박영효
의 직첩을 돌려주고 다시 서용할 것을 반포했다. 아울러  갑신정변의 연루자들을 모두 서면
하여 서광범, 이규난, 정난교 등이 거리를 활보하게 되었다. 갑신정변이 일어난 지 10년,  김
옥균이 암살된 지 불과 9개월 뒤의 일이었다. 
  음력 11월 21일 제2차 김홍집 내각이 성립되어 내무에 박영효, 범무에 서광범이 임명됨으
로써 정국은 파고가 높아지게 되었다. 
  이어서 12월 12일이 되자  고종은 대원군과 종친, 그리고  대소신료들을 거느리고 종묘에 
나가 홍범14조를 반포하고 독립을 서고했다. 
  <유 개국 503년 12월 12일에 밝히 황조열성의 신령에 고하오니 짐소자가 종의 큰 위업을 
이어 지킨 지 서른 한 해에 오직 하늘을 공경하고  두려워하며, 오직 우리 조종을 의지하고 
자주 큰 어려움을 당했으나, 그 위업을 버리지 아니하여 짐소자가 감히 가로되 능히 하늘마
음을 누림이라 하리오, 진실로  우리 조종이 돌아보시고 도우심으로  말미암아 오직 크오신 
우리 태조께서 우리 왕가를 세우시고 후손을 도우시어 503년을 지내더니 짐의 대에 와서 시
운이 크게 변하고 문화가 더욱 통장한지라 우방이 진심으로 도와주고 조정의 이론이 일치하
여 오직 자주하고 독립하여 국사를 굳게 하고자 함이라. 
  짐소자가 어찌 감히 하늘의 시운을 받들어 우리 조종이  지키신 왕업을 보전하지 않으며, 
어찌 감히 분발하고 가다들어 우리 조종의 공렬한 빛을 더하지 아니하리오.>  신하들 앞엣 
고문축을 외는 고종의  어음은 비통했다. 대원군도 고종의  떨리는 목소리를 들으며 가슴이 
미어지는 것 같았다. 말이 좋아 독립소고문이었다. 일본 공사 이노우에  가오루와 서기관 스
기무라도 한쪽에 서서 조선 왕조의 장엄한 행사를 지켜보고 있었다. 
  <이제부터는 다른 나라에 의거하지 않고 국운을 융성하게 하며 생민의 복을 지어서 자주
하고 독립하는 대업을 굳게 할지라. 생각컨대 혹시라도 예에 빠지지 말며 안일한 버릇에 파
묻히지 말며 순전히 우리 조종의 넓으신 지혜를 쫓으며 나라의 정사를 이정하며 적폐를 바
로 잡을지니 짐소자가 열 네 가지 큰 법을 가지고 우리 조종의 하늘에 계신 신령께  맹세하
여 아뢰고 이후로 조종이 끼치신 공렬을 자뢰하여 능히 공을 이루게 하고 혹시라도 어김이 
없게 할지니 신령은 굽어살피소서>
  이어서 고종은 홍범14조를 큰 소리로 낭독하였다. 홍범14조는 헌법에 가까운 혁신적인 내
용이었으나 자력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일본의 강압적인 수단에 의해 이루어진  것이었
다. 특히 절대적인 군주시대에 왕권이 터무니없이 약화됨으로써 일본의 침략 정책이 노골화
되리라는 것을 시사하고 있었다. 
  (이것은 일본이 조선을 병합하려는 수작에 지나지 않아. 허나 내가 살아 있는 한, 내가 시
퍼렇게 두 눈을 뜨고 살아 있는 한 일본은 결코 조선을 병합하지 못할 것이다!)  민비는 독
립서고문과 홍범14조를 보고  어금니를 꽉 물었다. 홍범14조의  3조에는 왕비나 후궁, 종친
이나 척신이 정사에 관여하는  일은 용납하지 않는다, 라고  되어 있었다. 민비의 정치 행위
를 노골적으로 금지시킨 것이었다. 
  왕실에 대한 존칭도 바뀌었다. 
  1. 주상전하는 대군주폐하로 한다. 
  1. 왕대비전하는 왕태후폐하로 한다. 
  1. 왕비전하는 왕후폐하로 한다. 
  1. 왕세자저하는 왕태자전하로 한다. 
  1. 왕세자빈저하는 왕태자전하로 한다. 
  조선의 왕실의 지위를 격상시킨다는 조치였으나 일본이나 청나라가 황제, 황후,  황태자라
른 존칭을 사용하고 있는 점에  비하면 어정쩡한 것이었다. 마치 조선  왕조가 국권을 갖고 
있는 것도 아니고 빼앗긴 것도 아닌 현실과 흡사한 것이었다. 
  민비는 어둠 속에서 허공을 노려보았다.  마침내 갑오년이 눈보라 속에서  저물고 을미년
(1895) 새해가 밝았다. 갑오년은 폭풍과 같은 한 해였었다. 정초부터 동학의 바람이 불기 시
작하더니 김옥균 암살, 제1차 동학농민봉기, 청일의  각축, 경복궁 점령사건, 갑오경장, 청일
전쟁, 제2차 동학농민전쟁, 제2차 김홍집 내각 성립... 그리고 대원군의 등장과 퇴진... 민비에
게는 어느 것 하나 수월하지 않는 사건들뿐이었다. 그것은  민비 개인에게 있어서나 역사적 
사실에 있어서나 커다란 족적으로 기록될 대사건들이었다. 
  을미년도 정초부터 어수선했다. 청나라로부터의 독립 선언과  홍범14조에 의한 발빠른 개
혁으로 조정의 대신들조차 방향을 잡지 못하고 우왕좌왕하고 있었다. 
  민비는 왕권의 약화에 잠을 이루지 못했다. 왕권의 약화는  왕조의 몰락을 의미하는 것이
다. 
  (이렇게 당하고만 있을 수는 없지 않는가? 우리 대에 와서 왕조가 무너지는  것을 보고만 
있을 수는 없지 않은가?)
  민비는 눈을 부릅뜨고 이를 갈았다. 왕조가 모래기둥처럼 무너지는 것을 두 눈 뜨고 보고 
있을 것이 아니라 몸부림이라도 치고 발버둥이라도 쳐야 하는 것이다. 
  민비는 무너져 가는 왕조를 지탱하기 위한 계책을 찾기에 분주했다. 
  "게 누구 있느냐?"
  민비는 문득 고개를 번쩍 들고 밖을 향해 소리를 질렀다. 
  "김 상궁 대령해 있사옵니다."
  문 밖에서 시령상궁의 황급한 대답이 들렸다. 
  "날이 어두워지지 않았느냐? 방에 불을 켜라!"
  "예. 중전마마."
  시령상궁이 재빨리 방에 들어와 촛불을 켰다. 민비는 그때서야 연상 위에 펼쳐 놓은 서책
으로 시선을 던졌다. 춘추좌전이었다. 이미  몇십 년을 읽은 책이라 표지가  너덜너덜했으나 
민비는 아직도 애지중지하고 있었다. 이따금  책비상궁이 읽어 주기도 했으나  민비는 거의 
대부분 혼자서 읽었다. 
  춘추좌전은 언제나 민비에게 지혜를 빌려주었다. 
  (힘이 없으면 외교로라도 일본의 기세를 꺾어야 해.  세계 열강들의 힘을 빌어 일본을 조
선에서 내쫓는 거야......)
  민비는 그날 밤 그런 결심을 했다. 바람은 그날 밤에도 살을 에일 듯이 불었다. 민비는 뜬
눈으로 밤을 세우며 계책을 세우느라고 골몰했다. 민비의 나이는 어느덧 45세, 왕조의  운명
이 자신의 연약한 몸에 달려 있다고 생각하자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1895년이 되자 청일전쟁은 막바지를 향해 치닫기 시작했다. 지난  해 10월 24일 압록강을 
도하한 일본군 제1군은 10월 26일에 구련성을 점령했고 12월 13일엔 해성을 점령했다. 일본
군 제2군은 10월 24일에서 10월 26일 사이에 요동 반도에  상륙, 11월 6일 금주성을 점령하
고 11월 21일 여순구까지 점령함으로써 일본을 명실상부한 강대국의 대열에 올려놓고  있었
다. 
  신흥제국 일본은 파죽지세로 청나라를 위협하고 있었다. 
  이에 당황한 청나라는 영, 미, 독, 불, 러 5개국에  휴전 조정을 의뢰했다. 이에 미국이 먼
저 조정에 나섰다. 
  <일본이 계속해서 청나라의 영토를 무제한으로 점령한다면 세계  열강의 간섭을 받게 될 
것이다. 일본은 속히 청나라와 강화를 맺을 것을 미국은 권고한다. 이를 거부하면 일본은 지
금부터 더욱 불리해질 것이다.>
  미국은 일본과 청나라 두 교전국에 우호적이고 공정한 입장을 취하겠다면서 휴전할  것을 
강력하게 요구했다. 
  <교전이래 대일본국의 군대는 도처에서 승리를 하고 있다. 그러나 일본은 군사력을  바탕
으로 정당한 결과의 한계를 벗어날 의도는 추호도 없다. 이번 전쟁의 책임은 청나라에 있고 
청나라는 마땅히 이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한다.>
  외교적인 수사로 채워져 있었으나 전쟁에서 승리를 하고 있는 일본은 청나라에  전쟁으로 
일본이 막대한 피해를 보았다면서 배상을 요구했다. 
  <일본국이 청나라에 요구하고 있는 배상의 조건은 무엇인가.
  일본국은 청나라에 강화의 조건으로 요동반도의 할양과 전비 배상을 요구한다.>  승전국 
일본의 요구는 대담했다. 이러한 가운데도 일본의  연합함대는 1월 11일 위해위에서 청나라 
정여창의 북양함대를 괴멸시켰다. 정여창은  일본 연합함대로부터  항복하라는 최후 통첩을 
받자 비통한 마음을 억누를 길이 없어서 아편을 먹고 자결했다. 총병 장문선,  양용림, 북양
함대 참모장 유보섬이 그 뒤를 따랐다. 
  <대청제국의 북양함대 제독으로 항복을 하는 것은 비통하여 참을 수 없다. 그러나 항복하
지 않고 계속해서 싸우는 것은 인명의 손실만 입을 뿐이다. 내가 죽은 뒤에 나의 관인을 사
용하여 항복 문서를 쓰라.>
  북양수사제독 정여창이 자결하자 청나라 해군은 마침내 일본에 항서를 썼다. 청나라가 요
동반도를 내주고서라도 강화를 청하지 않으면 안되게끔 궁지에 몰린 것이다. 
  음력 2월 5일 청의 서태후와 광서제는 이홍장을 강화회담 전권대신에 임명하였다. 수행원
은 마건충 등 38명이었다. 
  이들은 2월 18일 천진을 떠나 2월  23일 일본의 시모노세키에 도착했고 2월 24일  회담에 
들어갔다. 
  일본은 전승 분위기에 들떠 있었다. 청일전쟁의  명분은 가증스럽게도 청나라로부터 이웃 
나라인 조선의 독립을 쟁취해 준다는 것이었으나 일본인들의 관심은 오로지 영토의  할양과 
배상금을 받을 생각에 골몰해 있었다. 일본 군부의 육군은 피를 흘려 점령한 요동반도가 대 
러시아의 전략적 요충지이므로 이를 반드시 할양 받으라고 요구했고, 해군은 대만을 영유해
야 한다고 총리대신인 이토오 히로부미와  외무대신인 무쓰 무네미쓰에게 강력하게  주장했
다. 
  일본은 이때 이미 군부가 내각의 부담이 되고 있었다. 일본  내각은 강력한 힘을 갖춘 군
부의 눈치를 살피며 회담에 임했다.  그러나 회담은 지지부진하여 음력  3월 23일에야 겨우 
체결되었다. 강화조약의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은 것이었다. 
  1. 청국은 조선국이 완전한 독립국임을 확인하고 조선국이 청국에 바치던 각종 전례를 폐
지한다. 
  1. 청국은 일본국에 요동반도와 대만, 팽호도를 할양한다. 
  1. 청국은 일본에 고평은 2억 냥을 7년에 걸쳐 전쟁 배상금으로 지불한다. 
  청국으로서는 굴욕적인 강화조약이었다. 조선은 청나라가 일본에 항복이나 다름없는 조약
을 체결하자 청나라 사신을 맞이하던 영은문을 헐어 버렸다. 이 자리에는 후일 독립문이 세
워져 조선인들의 독립 의식을 고취하게 된다. 
  청일 강화조약이 체결됨으로써 전쟁은 끝이 났다. 일본은 약 6개월의 전쟁에서 중국의 광
활한 영토인 봉천성 남부의 요동반도와 대만, 팽호도를 할양  받고 전쟁 배상비로 2억 냥의 
은까지 챙기게 됨으로써 막대한 이익을 얻게 되었다. 
  그러나 일본이 얻은 가장 큰 이익은 조선이라는  고깃덩어리였다. 강화조약 1조에서 조선
이 독립국임을 확인한다는 조문은 청나라를  배제하고 일본이 조선을 독식하겠다는  의미가 
내포된 것이었다. 
  그러나 국제정세가 일본의 의도대로 돌아 가지만은  않았다. 청일전쟁을 예의주시하고 있
던 러시아, 독일, 프랑스가 요동반도가 일본에게 할양되자 일본에 강력한 항의문을 보내  왔
다. 
  <일청 양 교전국이 체결한  시모노세키 강화조약에는 요동반도를 일본이  영유하게 되어 
있다. 이는 청국의 수도인 북경을 위협할 뿐 아니라 조선의  독립을 위태롭게 할 것이 명백
하다. 이에 우리 3국은 극동의 평화를 항구하게 유지하기  위해 이 조약의 요동반도 할양건
을 철회할 것을 요구한다.>
  이른바 3국간섭의 요지였다. 일본은 발칵 뒤집혔다. 일본 외무대신 무쓰 무네미쓰는  강화
조약이 체결되기 전부터 이것을 어느 정도 예상하고 있었다. 
  정세는 일본에게 유리하지 않았다. 러시아는 1894년부터  막강한 해군력을 일본과 청나라
의 근해에 주둔시키고 있었다. 러시아의 극동함대는 24시간 내내 출항하여 전투를 할 수 있
다는 정보가 만주 일대에 파견되어 있는 첩보원들로부터 속속 들어오기도 했다. 
  이토오 히로부미와 무쓰 무네미쓰는 고심했다. 일본이  3국간섭에 강력하게 저항한다면 3
국과 전쟁의 위험을 감수해야 했다. 그러나 요동반도를 쉽사리 포기할 수도 없었다.  요동반
도를 포기하게 되면 6개월 남짓 일본 육해군이 피로 얻은 승리와 일청 강화조약으로 환희하
고 있는 일본인들의 승전자축 분위기에 찬물을 끼얹는 격이었다. 
  일본은 긴급하게 천황 앞에서 어전회의를 열었다.  어전회의에서 총리대신 이토오 히로부
미는 세 가지 안을 내놓았다. 
  1. 전쟁도 불사하는 각오로 단호하게 러, 불, 독의 3국간섭을 거부한다. 
  2. 열국회의를 열어 요동반도 문제를 그 회의에서 처리한다. 
  3. 3국의 권고를 수용하여 요동반도를 포기한다. 
  이토오 히로부미와 육군대신 야마카타, 해군대신 사이고는 심각한  회의 끝에 제1안을 버
렸다. 일본은 이미 8개월이나 전쟁을 치룬 상태였다. 일본 육군의 정예부대는 대부분 요동반
도에 있었고 해군은 팽호도에 정박하고 있어서 일본 국내는 군대가 없는 공백 상태에 있었
다. 청나라와의 전쟁으로 육군은 승전은 했지만 막대한 손실을  입었고 해군도 장병과 군수
물자가 모두 피폐해 있는 상태였다. 
  일본 어전회의는 요동반도 때문에 3국 연합해군을 상대로 전쟁을 할 수 없다고 결론을 내
렸다. 지금으로서는 러시아와 단독으로 전쟁을 한다고 해도 승리를  자신할 수 없는 처지였
다. 
  제3안도 일본으로서는 선뜻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조건  없이 요동반도를 포기하는 것은 
승전 분위기에 들떠 있는 일본 국민의 감정을 무시하는 처사였다. 
  일본 어전회의는 결국 제2안으로 3국과 협상을 하기로 했다. 
  그러나 러시아의 항의는 더욱 격렬했다. 영국 대사도 러시아가  일본과 전쟁을 벌일 준비
를 하고 있으니까 조심하라는 충고를 해왔다. 
  일본은 마침내 러시아에게 백기를 들고 말았다. 
  <일본제국 정부는 귀국 정부의 우의 있는 충고에  의거하여 요동반도를 영구히 점령하는 
것을 포기할 것을 약속한다.>
  일본인들은 분노했다. 일본인들의 전승 분위기에 찬물을 끼얹은 요동반도 포기 소식이 알
려지자 일본인들은 격렬하게 항의했다. 
  "이토오 내각은 할복하라!"
  "전쟁에는 이겼으나 외교에는 졌다!"
  "군인들의 피값을 배상하라!"
  거리에는 일본 내각을 비난하는 시민들로 들끓었다. 곳곳에서 관청이 불에 타고 일본인들
의 분노의 함성이 터져 나왔다. 
  <우리는 지금 러시아와 전쟁을 벌일 만치 강력한 군대를 갖고 있지 못하다. 병력의  후원
이 없는 외교는 정당한 명분이 있어도 종종 실패를 한다.  우리가 오늘 굴욕적인 외교를 하
지 않을 수 없는 것은 이 때문이다. 우리는 힘을 길러  장차 러시아와 대적해야 한다.>  일
본의 외무대신 무쓰 무네미쓰는 일본의  여론을 러시아에 대한 적개심으로  유도했다. 이에 
따라 일본인들의 적개심은 러시아를 향해 불타 올랐다. 일본인들은 한결같이 청나라와의 전
쟁을 승리하고서도 요동반도를 할양 받지 못하게 된 것에 분통을 터뜨렸다. 
  이때 일본인들이 느낀 굴욕감과 분노는 오랫동안 일본인들의 가슴에 강렬하게 남아  있었
다. 
  <언젠가는 러시아에게 본때를 보여 주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러시아를 압도할  만한 
군사력을 갖추어야 한다!>
  일본의 언론기관들도 일제히 대러시아 적개심에 불을 질렀다. 일본인들은 이를 악물고 허
리띠를 졸라맸다. 일본은 이때부터 군사력 확장에 박차를 가했다. 일본의 군사 예산은  해마
다 갑절씩 늘어나 10년 후인 1905년에는 마침내 러일전쟁을 일으켜 승리하게 되는 것이다. 
  일본이 3국간섭에 굴복을 하자 조선에서도 러시아의 입지가 강화되기 시작했다. 청나라까
지 꼼짝 못하게 만든 일본을 은근히 두려워하고 있던 조선인들은 이제 일본인들을 경멸하기 
시작했다. 일본 공사 이노우에 가오루의 위세를 등에 업고  내정 개혁을 한다며 안하무인격
으로 행동하던 친일파 대신들의 입지는 급격하게 흔들렸다. 특히  일본에서 10년 가까이 망
명해 있다가 귀국하여 내부대신과 법부대신이 된 박영효와 서광범의 입장은 미묘하였다. 
  경복궁 옥호루에서 은둔 생활을 하듯 조용히 지내던 민비는 국세정세가 자신에게  유리하
게 돌아가고 있다는 사실을 간파했다. 민비는 정치 감각이 뛰어난 여인이었다. 민비는 이 무
렵 외국 선교사들과 열국공사들을 위한 연회를 자주 열었다. 외국 선교사들과 열국공사들은 
미비의 정보통이었다. 그러나 명분 없이 이들을 만날 수가 없어서 민비는 연회를 베풀어 이
들을 만났다. 
  이때 민비를 만난 이들은 영국 여행가  이사벨라 비숍, 감리교 선교사 안네 벙커,  힐리아 
언더우드 부인 등이었다. 
  <그리하여 왕비로부터 전용 알현실에서 만나자는 초청을 받게 된 기쁨을 누리게  되었고, 
미국의 의료 선교사로 왕비의 시의요, 진짜 친구였던 언더우드 부인과 동행하게 되었다. (중
략) 우리는 도착하자 누런 명주가 걸려 있는 간소한 방에서 커피와 다과를 대접받았다. (중
략) 짙은 분홍색 벨벳 의자 앞에  국왕과 세자, 그리고 왕비가 서 있있고,  언더우드 부인이 
나를 소개하자 준비되어 있는 의자에 앉으라고 말하였다. 당시  왕비는 40세가 넘었으며 몸
이 가늘고 미인이었다. 검고 윤이 나는 머리카락에 피부는 진주가루를 사용함으로써 창백하
였다. 눈은 차고 날카로웠고 그것은 훌륭한 지성의 소유자임을 나타내 주는 것이었다.>  영
국의 여행가 이사벨라 비숍 여사의 민비에 대한 인상기였다. 
  <그녀는 훌륭한 여성으로 친절한 마음씨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굳센 의지와 가한 성격의 
소유자였다.>
  감리교 선교사 벙커 부인의 인상기였다. 
  <물론 나는 왕비에게서 깊은 흥미를 느꼈다. 좀 창백하고 바싹 마른 얼굴에 생김새가  날
카로웠고 사람을 꿰뚫어 보는 듯한 총명한 눈을 갖고 있어 첫눈에는 아름답다는 인상을 느
끼지 못하였다. 그러나 그녀의 얼굴에서 힘과 지성, 그리고 강한 개성을 갖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이야기를 나누면서 보니까 생기발랄함과  소박함, 재치 같은 것들이 그녀의  용모를 
환희 비춰주고 있었고, 단순한 겉모습의 아름다움보다 훨씬 큰 매력을 느끼게 해주었다.  그
가 매우 아름답게 보일 때 나는 비로소 그녀가 조선의 왕비임을 깨달았다.>  선교사 언더우
드 부인이 남긴 기록이었다. 이 무렵 민비를  알현한 외국  여인들은 대체적으로 민비를 가
냘픈 몸매에 사교적이고, 이성적인 여인이면서도 강한  힘을 갖고  있는 여인이라고 평가하
였다. 
  3국간섭에 의해 러시아의 위력을 알게  된 민비는 조심스럽게 인아거일 정책을  추진하기 
시작하였다. 민비는 러시아의 웨베르 공사 부부를 자주 대궐로  불러 연회에 참석하게 하였
고 연회 도중 비밀리에 회동하였다. 이로 인하여 친로파  대신들이 등장하게 되었으니 이들
은 이윤용, 이범진, 이완용 등이었다. 이범진은 포도대장을 지내면서 천주교인들을 탄압하여 
낙동 염라대왕이라는 별명으로 불렸던 이경하의 아들이었고 이윤용은 대원군의 사위면서 이
완용과는 배다른 형제 사이였다. 
  민비는 이들을 앞세워 웨베르 공사 부부와  접촉하여 이노우에 일본 공사를 궁지에  몰아 
넣기 시작했다. 
  "이이제이라고 합니다. 일본이 언제부터 동양의 패자가 되었는지 알 수 없으나 강하면 꺾
어지게 마련입니다."
  경복궁의 옥호루. 곤령합의 부속건물인 민비의 침전  옥호로에서는 모처럼 민비와 고종이 
마주앉아 화기애애한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밤이었다. 음력 3월. 대궐이 후원과 숲에는 색색의 꽃들이 만개했고 바람은 여인네들의 지
분냄새처럼 상쾌하게 뺨을 간질렀다. 
  "그렇소. 일본이 급전직하 벼랑에서 굴러 떨어지리라고는  누가 생각인들 했겠소?"  고종
도 기분이 좋아 파아대소를 터뜨렸다. 
  "신첩은 일본이 이러한 일을 당하리라는 것을 오래 전부터 예측하고 있었사옵니다."  "중
전에게 선견지명이 있었다는 말이오?"
  "외국 공사들과의 잦은 연회가 어찌 공연한 것이겠사옵니까?"  "허면 중전이 외국 공사들
을 움직여 3국간섭을 하게 했다는 말씀이요?"  "전하! 그럴  리가 있사옵니까? 신첩은 대궐 
깊숙한 곳에 있는 일개 아녀자일 뿐이옵니다."  "외국 공사들과의 잦은 연회가 공연한 것이 
아니었다고 하지 않았소?"  "그렇기는 합니다만 외국 공사들과 국제 정세를 토론한 것에 지
나지 않습니다."  "중전이라면 능히 외국 공사들에게 의뢰하여 일본을 꺾을 수   있을 거요. 
나는 중전을 믿소."
  "전하. 그렇지가 않사옵니다."
  "중전은 이성적이고 강한 여자요."
  "전하. 강한 것은 꺾인다고 하지 않았스옵니까?"
  "중전은 이 나라의 국모요. 중전이 꺾이면 이 나라가 무너질 거요."  "전하."
  민비의 눈에 이슬이 맺히기 시작했다. 조선의 왕비, 그 화려하고 영광스러운 자리에  있었
으나 민비는 하루도 마음 편한 날이 없었다. 
  "전하. 내일은 각국 공사들이 이노우에 일본 공사를 궁지에 몰아  넣을 것입니다."  "각국 
공사들이?"
  "이노우에 공사는 사면초가에 몰릴 것입니다."
  "허허..."
  고종은 민비의 손을 덥썩 잡으며 기분 좋은 웃음을 날렸다. 아름다운 여인이 활기차게 이
야기하는 것처럼 듣기 좋은 소리도 없다. 고종은 생기에 빛나는 민비의 얼굴을 바라보는 것
만으로도 흡족했다. 
  이튿날 민비가 말한 대로 열국 공사들이 외부대신 김윤식을 찾아와 강력한 항의문을 전달
했다. 
  <조선 정부는 철도, 전신, 광산 등의 중요한 사업을 장기간의 약정으로 어느 한 나라에만 
부여하고 있다. 이것은 명백히 불공평하며 조선의 이익을 위해서도 바람직하지 않다. 왜  입
찰 등의 공정한 방법으로 이들  사업을 담당할 나라를 결정하지 않는가.  조선 정부는 이를 
시정하기 바란다.>
  열국 공사들의 항의문을 받은 외부대신 김윤식은 항의문을 이노우에 공사에게 보여  주었
다. 이노우에 공사는 열국 공사들의 항의문을 보고 벌레 씹은 표정을 지었다. 열국 공사들의 
항의문에 반박할 명분이 없었다. 
  "우리는 열국 공사들의 항의를 수용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김윤식은 이노우에 공사의 
눈치를 살피며 말했다. 청일전쟁 발발  이후 일본은 온갖 방법으로 조선을 위협하여 이권을 
챙겼으나  3국간섭이 시작되어 일본의 입장은  벼랑에서  굴러 떨어지듯 약화되고  있었다. 
그러나 조선에게는 그래도 일본이 위협적인  존재가 아닐 수 없었다. 
  "외부대신 각하도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사실이 그렇습니다. 철도 부설, 금광 채굴권이 모조리 일본에 있으니까요."  "외부대신 각
하. 일본은 조선을 위해 피를 흘렸습니다. 조선에서 그만한  대가는 양보해야 되리라고 생각
합니다."
  "열국 공사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좋을 대로 하시지요."
  이노우에 공사는 화를 내고 돌아가 버렸다. 외부대신 김윤식은 열국 공사들에게 선처하겠
다는 요지의 회답을 보낸 뒤 일본에 넘어가 있던 각종 이권 사업을 러시아를 비롯한 외국으
로 분산했다. 
  <평안도 운산의 광업권 미국인 모르스에게 허가. 
  경인철도 부설권 미국.
  함경북도 광산 채굴권 러시아.
  경의철도 부설권 프랑스. 
  압록강, 울릉도 벌목권 러시아.
  강원도 금성군 당현 금광 채굴권 독일.>
  일본으로서는 조선의 경제까지 지배할 수 없게 되자 이를  갈았다. 특히 경인철도 부설권
은 병력과 군수물자 수송로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일본이 1894년에 반강
제적으로 따낸 것이었으나 청일전쟁으로 군사비가 막대하게 소요되어 철도부설에 착수할 수
가 없었다. 조선은 철도부설의 지연을 이유로 일본에게 준  부설권을 취소하고 미국에 넘겼
던 것이다. 
  "이는 모두 조선의 왕비가 꾸민 음모입니다."
  "남자도 아닌 여자가 이런 일을 꾸몄다면 놀라운 일이 아닌가?"   "첩보원들의 보고에 의
하면 왕비에게서 모든 계책이 나온다고 합니다."  "왕비가 대일본제국의 방해물이라는 말인
가?"
  "그렇습니다."
  스기무라 서기관의 보고에 이노우에 공사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스기무라 서기관
은 조선에 온 지 10년이나 되는 전문 외교관으로 조선의 문제에는 가장 정통한 인물이었다. 
  (조선이 훌륭한 왕비를 갖고 있는 것은 틀림없어......)  이노우에  공사는 왕비의 이지적인 
얼굴을 머릿속에 떠올리며 그녀로 인해 대조선  정책이 차질을 빚고 있다는 사실에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조선의  왕비는 결코 만만한 여인이 아니었다. 왕비로서의 미모와 위엄
도 뛰어났으나 여자로서는  드물게 강인함까지 갖추고 있었다. 
  (동양의 여걸이라고 불러도 손색이 없는 여인이야......)  그러나 일본의 장래, 그가 추진하
고 있는 대조선 정책에는 강력한  반대자였다. 조선의  왕비를 제거하지 않으면  그의 정치 
생명도 온전하지 못할 것이 분명했다. 
  이노우에 공사는 민비를 살해하는 방법을 머릿속에서  그리기 시작했다. 창밖에는 조선의 
민가에서 풍기는 꽃냄새가 진동을 하고 있었다. 
  을미년인 1895년에도 정국은 급변하고 있었다. 제2차 김홍집  내각은 이노우에 공사의 내
정 개혁안을 토대로 활발하게 개혁을 추진해 나갔다. 거의  매일같이 직제와 관제가 개정되
었고 서품령, 각령, 부령, 훈령,  고시가 쏟아져 나왔다. 이러한 개혁이  너무 빨리 추진되어 
일반인은 물론 관리들까지 갈피를 잡지 못하고  우왕좌왕하였다. 그리하여 조정에서는 개혁
을 실시하고 있었으나 지방에서는 개혁이 전혀 시행되지 않았다. 
  게다가 정국은 파당 싸움이 치열했다. 1월 하순 내부대신 박영효와 법부대신 서광범을 암
살하려는 음모를 꾸민 혐의로 조용승, 고종주, 김국선 등이 검거되어 파란을 일으키기  시작
했다. 그러나 사건은 거기서 그치지 않고 꼬리를 물고 터졌다. 
  이준용 계열이 동학당과 결탁 왕실 및 조정을 전복하고 이준용을 국왕으로 옹립하려 했다
는 역모사건이 처음 터진 것은 청일전쟁이 한창인 지난  해 8월이었다. 경무사 이윤용이 대
원군 계열을 제거하기 위해 허엽, 이병휘 등을 내세워 이준용 옹립 음모사건을 꾸몄으나 오
히려 대원군의 강한 반발에 부딪쳐 이윤용이 해임된 일이 있었다. 그러나 이윤용은 급진 개
혁파의 지원으로 경무사에 재등장함으로써 그러잖아도 어수선한 조선의 정가에 파란을 일으
켰다. 
  조선의 조정은 이미 원로대신의 반열에  오른 김홍집, 김윤식, 어윤중  같은 온건 개혁파, 
박영효, 서광범 같은 망명파, 안경수, 김가진, 이윤용, 이완용, 조희연 등의 소장 개혁파가 있
었다. 급진 개화주의자들이라고 불리는 소장 개혁파들은 다시  이윤용, 이범진, 이완용 등의 
러시아파로 갈라져 각축을 벌이고 있었다. 
  이준용의 두 번째 음모는 김학우 암살사건의 범인들이 체포됨으로써 구체적으로 거론되기 
시작했다. 김학우 암살 혐의로 체포된 최형식, 이여익, 장덕현, 김한영, 최형순이 심문관들의 
가혹한 고문에 견디다 못해 사건의 진상을 자백하기 시작한 것이다. 
  1. 청일전쟁이 일어난 뒤의 내우외환을 수습하고, 국권을 수호하기 위해서 국왕을  폐위시
키고 이준용을 국왕에, 대원군을 섭정에 추대한다. 
  2. 위의 음모에 필요한 병력은 동학군 및 통위영  영병들을 동원하여 국왕과 세자를 시해
한다.  
  3. 김홍집, 조희연, 김가진, 김학우, 안경수, 유길준,  이윤용 등을 암살하고 이준용 계열의 
내각을 구성한다. 
  4. 일본군에 의해 동학군이 북상할  수 없게 되면 계획을 바꾸어  고종주, 전동석, 최형식 
등의 행동대로 요인 암살부터 시작한다. 
  심문관들이 밝힌 이준용 옹립 음모사건의 내막이었다. 심문관들은 이로 인해 김학우가 암
살되고 박영효, 서광범 등을 암살하려 했다고 밝혔다. 
  "종정경 이준용은 이름이 죄인들의 공술에서 나왔으니 조사하는 것이 합당한 만큼 법무아
문으로 하여금 잡아오게 하는 동시에 특별재판소를 설치하여 신문을 해야 할 줄 아옵니다."  
총리대신 김홍집과 법부대신 서광범은 3월 24일 고종을 찾아가 이준용 체포를 요구했다. 
  "주모자는 누구누구인가?"
  "이 음모를 주도한 것은 박준양, 이태용 등이옵고 동조한 자들은  한기석, 김국선, 고종주, 
임진수, 허엽, 박동진, 전동석, 최형식 등이옵니다."
  "그들이 어떻게 역모를 획책했다는 말인가?"
  고종이 불쾌한 표정으로 서광범을 쏘아보았다. 
  "종정경 이준용은 지난 해 6~7월경에 동학당이 곳곳에서 들고일어나 인심이  흉흉한 때를 
타서 박준양과 이태용의 모의에  찬동하여 한기석, 김국선과 비밀  모의하고 즉시 동학당에 
모의를 통고하여 경성을 습격하라고 하였사옵니다. 그리하여  성안의 백성들이 놀라서 소동
을 피우고 대군주폐하가 난을 피하여 다른 곳으로 피해 갈 것이니 그 틈을 타서 대군주폐하
와 세자전하를 시해한 다음  왕위를 찬탈하여 이준용을  국왕으로 옹립하려 했다고  하옵니
다."
  서광범이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고 대답했다. 
  "동학 비도들은 모두 토벌되지 않았는가?"
  고종은 서광범의 보고를 미더워하지 않는 눈치였다. 왕위 찬탈 운운하는 보고를 하는데도 
얼굴빛 하나 변하지 않고 있었다. 
  "그러하옵니다. 하여 죄인들은 요인 암살부터 하기로 음모를  바꾸어 전 법무협판 김학우
를 암살 할 것으로 아옵니다."
  "김학우는 죽을 만했다고 하지 않는가?"
  "폐하!"
  "김학우는 짐을 능멸한 일본 공사의 수족이었어..."
  "폐하!"
  "죄인들을 구금하라! 허나 이준용은 안된다! 이준용은 국태공 저하의 친손주이자 짐의 조
카이니라."
  "폐하. 역모에 이름이 거론되었사옵니다. 종정경을 구속하지 않으면 국법을 무시하는 일이 
되옵니다."
  "국법?"
  고종의 얼굴이 핼쓱하게 변했다. 고종은 서광범의 국법이라는  말에 지난해에 5부 협판을 
임명했다가 이노우에 일본 공사로부터 수모를 당한 일을 머릿속에 떠올렸던 것이다. 
  "이준용이 정녕 역모에 가담했는가?"
  "그러하옵니다."
  "그렇다면 도리 없는 일이지..."
  고종은 낙담한 표정으로 이준용의 체포를 윤허했다. 법부대신 서광범은 대궐을 물러 나오
자 경무사 이윤용에게 이준용의 체포를 명했다. 
  "대군주폐하의 윤허를 받으셨습니까?"
  이윤용은 통쾌한 표정으로 서광범을 펴다보았다. 
  "이를 말인가? 이제는 그대의 원한이 풀리게 되었다."  "이준용을 체포하는 것이 어찌 소
인의 원한을 푸는 것입니까? 이는 대원군을 견제하는 것이옵니다."
  "그만하고 속히 이준용이나 잡아들이게."
  "경무관 이규완을 보내겠사옵니다. 이준용은  대원군과 함께 있으니  대찬 인물이 아니면 
이준용을 체포할 수가 없습니다."
  "그런 일은 경무사가 알아서 해야지..."
  서광범은 냉랭하게 쏘아 부쳤다. 이준용의 체포를 주장하긴 했으나 유쾌한 기분은 아니었
다. 
  이윤용은 서광범의 지시를 받자 곧바로 경무관인 이규완을 불러 이준용을 체포해  오도록 
명령했다. 이규완은 갑신정변 때 김옥균 등에게 포섭되어 친청파 대신들을 살해했던 인물이
었다. 박영효를 뒤따라 귀국하여 경무관(경찰청 차장급)으로 활동하고 있었다. 
  "종정경을 체포하라는 말씀입니까?"
  "법부대신의 지시일세."
  "대군주폐하의 윤허를 받았습니까?"
  "받았네."
  "알겠습니다."
  이규완은 순검 30명을 데리고 운현궁으로 달려갔다.  이규완이 순검들을 거느리고 운현궁
에 나타나자 운현궁이 발칵 뒤집혔다. 이규완은 예의를 갖추어 대원군에게 이준용을 체포하
겠다고 말했다. 
  "뭣이?"
  대원군은 이규완의 말을 듣고 온 몸을 부들부들 떨며 진노했다. 
  "역모이옵니다!"
  이규완은 순검들에게 운현궁을 에워싸게 했다. 
  "역모라니? 네 놈들은 걸핏하며 역모라는 명목으로 내 자식들을 죽이려 하는구나! 역모라
는 것은 가당치도 않다! 준용이가 무엇이 아쉬워 역모를  꾸민다는 말이냐?"  "죄인들의 공
술에서 이름이 나왔습니다!"
  "닥쳐라! 네 놈들이 이노우에의 사주를 받은 것이 아니냐?"  "저하! 당치 않으신 부분이십
니다."
  "허면 네 놈과 같이 온 저 가양이는 누구냐?"
  대원군이 턱짓으로 순검들 틈에 섞여 있는 일본인을 가리키자 이규완은 흠칫했다. 일본인
은 1894년 7월에 설치된 경무청의 고문관 호시 토루였다. 이때 조선 조정의 각 부처에는 일
본인 고문관들이 임명되어 있어서 그들에 의해 개혁 정책이 결정되고 있었다. 
  호시 토루는 일본의 자유당 영수로 중의원 의장을 지내는 등 막강한 영향력을 갖고 있는 
인물이었다. 물론 조선에서 돌아간 뒤의 일이었으나 의옥사건에 연좌되어 의원직을 제명 당
하기도 하는 등 다채로운 경력의 소유자였다. 정우회 결성  때는 자유당을 이끌고 참가하여 
연립내각의 체신대신을 지내고 도쿄  시의회 의장을 역임한  뒤 책사로서 명성을  날리다가 
1901년 반대파에 의해 척살된다. 
  "그는 법부와 경무청의 고문관이옵니다."
  "물러가라! 준용을 체포하는 것은 일본의 음모다!"
  "저하! 우리는 왕명을 시행하고 있사옵니다!"
  이규완은 대원군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순검들에게 이준용을 체포하도록 지시했다. 순검들
은 이규완의 지시가 떨어지자 끌려가지 않으려고 발버둥을 치는 이준용을 마구  구타하면서 
포박을 지워 끌고 갔다.
  "준용아, 준용아..."
  대원군은 피눈물을 흘리면서 통곡을 했다. 이미 80을 바라보는 대원군이었다. 몸은 늙었으
나 정신은 아직도 또렷했다. 국왕인  고종에게 실망하자 장자 이재면의  아들인 이준용에게 
모든 희망을 걸고 있었다. 그러나  외손 이준용이 왕위찬탈 음모사건에  연루되어 끌려가고 
있는 것이다. 대원군은 체면도 차리지 않고 이노우에 일본 공사에게 석방을 탄원했다. 
  <지난 3월 24일 본국 순검  30여 인이 운현궁에 침입하여 본인의  조손을 매질하며 끌고 
갔다. 내가 단언하건대 나의 조손 준용은 역모를 꾀한 일이 없는데 귀국인이 발행하는 한성
신보는 사실도 확인하지 않고 죄를  몰고 있다. 나는 귀국이 추천을  한 법부대신이 가혹한 
고문을 일삼으며 공정한 재판을 하지 않을 것을 우려하는 바니 귀 공사는 각국 공사들이 공
동으로 참여하는 재판을 하여 옥석을 가려주기 바란다.>  대원군의 서신은 비장하기까지 했
다. 그러나 이노우에 일본 공사의 회신은 냉담했다. 
  이준용에 대한 선고 공판은 열국 공사들이 비상한 관심을 기울이고 있는 가운데 4월 19일
에 열렸다. 재판장은 법부대신 서광범, 판사  이재정, 조신희, 장박, 임대준, 간여 검사  안영
수, 김기룡이었다. 
  서광범은 판결문에서 적도율 모반죄를 적용하여 박준양, 이태용, 고종주에게 교수형, 인명
률 모살죄를 적용하여 전동석, 최형식에게 교수형을 선고했다. 
  이준용, 한기석, 김국선은 교수형에 해당되었으나 1등을  감하여 종신유형을 선고했다. 나
머지 관련자들도 모조리 종신유형에서 10년까지의 유형이 선고되었고 이준용은 다시  2등을 
감하여 10년 유형으로 형을 확정했다. 배소는 강화도의 교동부로 지정했다. 
  "내가 준용이를 만나 볼 것이다! 이 놈들이 준용이를 죽이려는 음모가 아니고 무엇이냐?"  
대원군은 이준용이 강화도의 교동부에 유배되기 위하여  서강에서 배를 탈 때  마포나루로 
달려갔다. 마포나루래야 공덕리 별장에서 한달음인 것이다. 그러나 대원군이 마포나루에  이
르렀을 때 순검들이 달려와 대원군을 강제로 연행하여 공덕리 별장에 연금시켜 버렸다. 
  "이 놈들아! 이 못된 놈들아......!"
  대원군은 가슴을 치고 땅을 치며 통곡했다. 동양의 호걸이라는  별명을 갖고 있던 대원군
이었으나 사랑하는 손자가 절해고도로 끌려가게 되자 피눈물을 흘리고 있는 것이다. 
  조선의 정국이 어지럽고 혼란한 탓인지 1895년의 여름은 폭염으로 시작되었다. 봄철에 비 
몇 방울 뿌린 것이 고작으로 극심한 가뭄이  몇 달째 계속되어 밭작물이 타 죽고 논바닥이 
말라 들어갔다. 
  불볕 더위가 계속되자 인심이 흉흉해지기 시작했다.  한성과 원산 일대에서는 서양인들이 
어린아이들을 잡아다가 삶아 먹는다는 괴이한 소문까지 퍼져 민심을 더욱 뒤숭숭하게 했다. 
  그러잖아도 어수선한 세상이었다. 
  정국은 계속 표류하고 있었다. 
  이준용 왕위찬탈 음모사건은 조선의 조정에도  권력의 변화를 몰고 왔다. 박영효,  서광범 
등이 이준용을 사형에 처해야 한다고 주장한 반면 김홍집, 김윤식 등은 이준용의 사형에 반
대를 했다. 이들의 대립과 반목은 재판이 끝날 때까지도 계속되었다. 
  "이 종정경은 국태공 저하의 친손이오. 국태공 저하의  친손을 공술에서 이름이 나왔다고 
하여 사형에 처할 수는 없소!"
  "국법은 누구에게나 똑같이 적용되어야 합니다. 종친이라고 해서 형을 사면 받을 수는 없
소."
  "종정경은 역모에 가담하지 않은 것이 분명하오!"
  "죄인의 공술에서 이름이 나오지 않았소?"
  "죄인의 공술에서 이름이 나온 것은 경무청에서 고문을 했기 때문이오. 그 정도 고문이면 
누구든지 거짓 자백을 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오."
  김홍집과 박영효는 한 치의 양보도 없이 팽팽하게 대립을 했다. 이들의 대립은 국왕의 왕
권을 인정하느냐, 인정하지 않느냐의 갈등이었다. 김홍집은 국왕을 내각의 위에 두고 있었고 
박영효는 내각이 정치와 행정의 중심에 있어야 한다는 사상을  갖고 있었다. 게다가 갑신정
변 때의 앙금도 정치계의 두 거물을 반목하게 하였다. 
  그러나 김홍집과 박영효의 대립은 국왕의 재가 과정에서 이준용이 10년 유형으로  결정되
어 싱겁게 끝나 버렸다. 박영효는 어전에서까지 이준용의 사형을 강력하게 주장하여 고종과 
민비로부터 미움을 받았다. 
  고종과 민비는 이준용을 사형시키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이준용의 왕위찬탈 음모사건은 
파당 싸움의 일환으로 빚어진 조작극 냄새가 강했다. 게다가 운현궁에서 부대부인 민씨까지 
대궐로 입궐케 하여 이준용의 누명을 벗겨 달라고 울면서 애원했다. 
  "어머님. 준용에게 저는 작은어머니입니다.  비록 이 나라 조선의  왕비요, 국모라고 해도 
어찌 장조카를 죽게 놔두겠습니까?  조금도 심려하지 마십시오."  민비는  부대부인 민씨를 
위로한 뒤로  돌려보냈다. 그러나 이준용을 무죄로  방면할 수는 없었다. 이준용의 왕위 찬
탈 음모사건에는 일본 공사 이노우에까지 개입하고 있었다. 
  민비는 특별재판소법을 개정하게 하여 이준용의 형을 감면하게 했다. 
  (일본은 왕실을 무력하게 만들고 있는 거야...)
  민비는 일본이 교묘하게 조선 왕실의 목을 조이고 있다고 생각했다. 
  4월 23일 군부대신 조희연이 박영효와의 갈등으로 여러 가지 죄를 쓰고 파면되었다. 이에 
김홍집이 사퇴하여 제2차 김홍집 내각이 붕괴되고 박영효가 총리대신 서리에 임명되었다. 
  이때부터 일본의 영향력은 급속하게 쇠퇴하여 민비가 다시 정치의 전면에 등장하기  시작
했다. 민비는 5월 1일 궁내부 특진관 제도를 설치하여  민영환, 민응식, 심상훈 등 민비에게 
충성하는 인물들을 다수 포진시켰다. 
  국왕은 왕권을 회복하기 시작했다. 
  음력 5월 8일 학부대신 박정양이 총리대신에 임명되었다. 학부대신엔 이완용,  군부대신엔 
신기선, 외부협판에 서재필, 주일전권 공사에 고영희가 임명되었다. 
  일본 공사 이노우에 가오루는 초조해지기 시작했다. 3국간섭이  시작되기 전만 해도 조선
은 그의 수중에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였었다. 그러나  3국간섭이 시작되면서 친일 개화당임
을 자처하던 조선의 소장 개혁파들까지 등을 돌리고 있었다. 지난 해 9월 28일 조선에 부임
했을 때만 해도 그의 위세는 조선의 국왕을 능가하고 있었다. 
  일본군의 경복궁 점령사건으로 조선 국왕을 볼모로 만들다시피 하여 조선의 국정을  좌지
우지했고 인사권마저 휘둘러 온 일본이었다. 
  이노우에는 조선 주재공사로 부임하자 동양의 호걸인 대원군을 퇴진하게 했고 제2차 내정 
개혁안을 내세우면서 왕비까지 내정에 간섭하지 못하도록  하였다. 이노우에는 사실상 조선
의 국왕 노릇을 했던 것이다. 
  그러나 3국간섭은 그가 들인 모든 공을 허사가 되게  하였다. 러시아 공사 웨베르는 기회 
있을 때마다 조선 국왕을 알현하여 정치적인 의견을 개진하였다.  웨베르 공사의 부인도 민
비와 잦은 접촉을 했다. 그들이 무슨 음모를 꾸미는지 알  수 없어 이노우에는 초조하고 불
안했다. 
  이노우에는 청일전쟁에서 일본이 승승장구하고 있던 지난 해 9월, 전임 공사 오토리 게이
스케의 미적지근한 조선 정책을 비웃으며, 조선을 일본의 뜻대로  마음대로 요리할 수 있는 
인물은 자신뿐이라는 우월감을 가지고 조선에 부임했었다. 그리고 조선에 부임한 뒤에도 자
신감에 넘쳐서 조선의 내정을 일본의 뜻대로 개혁해 나갔다. 
  그러나 3국간섭은 그의 위세를 하루아침에 뒤흔들어 놓고 말았던 것이다. 모든 것은 러시
아 공사 부부, 그리고 민비에 의해 주도되고 있었다. 
  이노우에는 오랫동안 고심하다가 대조선 강경책을 바꾸었다.  러시아가 이빨을 드러내 놓
고 발톱을 날카롭게 세우고 있는 현실에서 조선을 무력으로 핍박할 수는 없었다. 
  이노우에는 고종과 민비에게 새롭게 접근하기 시작했다.  군사적인 위협까지 서슴치 않으
면서 민비를 정치에 참여하지 못하게 했으나 태도를 급변하여 민비의 정치 참여를 허가하고 
극심한 재정난에 허덕이고 있는 조선에 3백만 원의  차관을 제공하겠다고 약속했다. 민비에
게 고개를 숙이는 것은 굴욕적인 일이었으나 노련한 외교관인 그로서도 어쩔 수 없는 선택
이었다. 
  음력 5월 19일 이노우에 공사는 일시적으로 귀국을 했다. 조선에 거류하는 일본인들은 이
노우에의 외교 정책을 노골적으로 비판하고 있었다. 일본인들은 불만이 높았다.  이노우에가 
한낱 부녀자인 조선의 왕비를 제대로 다루지 못하여 조선 정책이 실패하고 있다고 격렬하게 
비난하고 있는 실정이었다. 이노우에의 대조선 정책은 대원군을 배제하고 조선의 왕비를 억
압하는 것이었으나 3국간섭 이후 왕비의 정치 간여를 승인하고 오히려 조선 왕실에 불궤를 
도모하는 자가 있으면 일본군을 동원해서라도 왕실을 보호하겠다고 하여 일본인들의 분노를 
사게 되었던 것이다. 
  일본인들은 이노우에에 이어 민비까지 격렬하게 증오하고  있었다. 조선에 고문관으로 파
견되어 있던 니오 코레시케, 오카모토 유우노스케, 호시 토루, 쿠스노세 유키히코 등은 내밀
하게 협의하여 왕비를 제거해야 된다는 것에 합의했다. 
  <일본의 장사 등도 ㅁㅁ를 제거해야 한다고 합의했다.
  한성에 재류하는 일본 민간 지사들은 팔을 걷어붙이며 내밀히 건곤일척의 가슴이  후련한 
대사를 계획하게 되었다.>
  ㅁㅁ는 민비의 복자고 대사는 민비를 시해하는 것이었다. 
  <동아를 구하고 조선을 구하는 단 하나의 방법은 민비를 매장하는 데에 있다. 민비를  죽
여라! 민비를 매장하라!>
  당시 조선에 들어와 있던 일본인들의 일치된  부르짖음이었다. 이러한 일본인들의 노골적
인 증오는 일본인들과 친밀하게 지내던 박영효에게도 전달되고 민비까지 알게 되었다. 그러
나 결정적인 증거가 없어서 망설이고 있을 때 전 경기감사 심상훈이 박영효가 왕비를 죽이
려 한다는 보고를 해왔다. 
  "뭣이? 금릉위가 또 불궤를 도모했다는 말이냐?"
  궁내부 특진관 심상훈의 보고를 받은 민비는 피가 역류하는 듯한 기분을 느끼며 벌떡 일
어섰다. 
  "그러하옵니다."
  심상훈은 몸을 떨며 대답했다. 민비는  애증이 분명한 여자였다. 그녀의 눈에서  쏟아지는 
안광이 칼날처럼 싸늘한 냉기를 뿌리고 있었다. 
  "소상히 말하라! 금릉위가 어떻게 불궤를 도모하다고 하더냐?"  "아뢰옵기 송구하오나 근
간에 왕후불목하여 일본인 장사들과 연합하여 왕후폐하를 불일내에 시해한다고 하옵니다."
  왕후불목이라는 것은 왕후와 사이가 좋지 않다는 뜻이다. 
  "증거가 있느냐?"
  "통위영 군사를 지낸 일이 있는 한재익이란 자의 고변이옵니다. 한재익의 말에 의하면 사
사키 유우키치라는 자로부터 들었다고 하옵니다."
  "허면 틀림없는 사실이 아니냐? 이, 이런 금수만도 못한 놈 같으니......!"  민비가  벌떡 일
어나서 연상을 발로 힘껏 걷어찼다. 연상  위에 있던 춘추좌전이 방바닥에 나뒹굴고 연상이 
벽에 부딪쳐 부서졌다. 
  "게 누구 있느냐?"
  민비가 밖을 향해 악을 쓰듯이 소리를 질렀다.
  "김 상궁 대령해 있사옵니다."
  "훈련대에 사람을 보내어 금릉위를 잡아들이라고 일러라!"  "중전마마. 금릉위라 하셨사옵
니까?"
  "그렇다! 금릉위가 역모를 도모했으니 지체없이 잡아들이라고 일러라!"  "삼가 존명하옵니
다."
  김 상궁이 황망히 물러가는 기척이 들렸다. 음력 윤 5월 14일의 일이었다. 그러나  박영효
는 훈련대의 장교 우범선으로부터 민비가 자신을 체포하라고 했다는 전갈을 받고 황급히 일
본 공사관으로 도피했다. 
  고종은 그날 사정전에 대신들을 소집하여 박영효가  반역을 꾀했음을 선언했다. 대신들은 
묵묵부답 아무 대꾸가 없었다. 이때 이미 일본인들이 민비를  시해하려 한다는 소문이 파다
하게 퍼져 있었고, 일부 대신들은 일본인들의 주장에 동조하여  왕비를 제거해야 한다고 맞
장구를 친 사람들까지 있었던 것이다. 
  이 무렵 대궐의 호위를 맡고  있는 부대는 시위대였다. 시위대는 미국인  퇴역 장군 맥이 
다이가 교관으로 초빙되어 훈련을 맡아서 병사들이 우수했다. 내부대신 박영효는 궁궐 호위 
임무를 시위대 대신 일본군이 교관으로 있는 훈련대로 교체하려고 하였다. 훈련대에는 이두
황, 우범선 등이 지휘관으로 있었다.  시위대에는 교관이 맥이 다이 장군이었으나  민영익의 
가신이었던 현흥택(연대장)이 지휘관으로 있었다. 
  박영효는 궁궐 시위대를 훈련대로 교체하여 조선의 왕실과 러시아 등 외국과의 접촉을 감
시시키려고 계획했던 것이다. 시위대 교체안은 내각의  각의에서 통과되어 형식적으로 고종
의 재가를 받아 놓고 있었다. 그러나 군부대신이 고종에게 시위대를 훈련대로 교체하겠다고 
보고하자 고종은 진노한 얼굴로 이를 거부했다. 
  "대궐을 훈련대가 호위하는 것은 짐이 바라는 바가  아니다. 지금처럼 시위대에게 경호시
키도록 하라!"
  "폐하. 이는 이미 폐하께서 윤허하신 일이옵니다."
  "군부대신은 똑똑히 들으라! 지난 해 6월이래 반포된 칙임과 칙령은 짐의 뜻이 아니다. 시
위대 교체는 물론 지금까지의 내정 개혁안은  일본의 강압에 의한 것이었으니 짐은  취소할 
것이다!"
  상황은 급변했다. 일본 공사관은 발칵 뒤집혔다. 스기무라 서기관은 황급히 일본으로 급전
을 보내 대책을 문의했으나 일본에 체류하고 있던 이노우에 공사는 박영효를 보호할 필요가 
없다는 냉담한 전문을 보내 왔다. 박영효, 신응희, 이규완, 정난교 등은 이로 인하여 또 다시 
눈물을 머금고 일본으로 2차 망명길에 올라야 했다. 
  "내부 협판으로 있던 유길준을 지나치게 믿은 것이  잘못이었어. 내가 왕비를 제거하려는 
계획을 유길준에게 말했더니 그가 왕에게 밀고하여 조국에서 쫓겨나게  된 거야."  후일 박
영효는 독립운동가인 이기에게 자신이  민비를 제거하려 했다는 것이  사실이라는 것을 토
로했다고 전해진다. 그러나 박영효의  민비 제거설은 민비의 음모설, 대원군에  의한 무고설 
등 여러 가지가 전해지고 있으나 어느 것도 확실치 않다. 
  다만 이로 인하여 서재필은 외부 협판직을 사임하고 유길준이 의주부윤으로 좌천됨으로써 
구미파와 러시아파인 정동파가 조정을 장악하게 되었다.  이들은 정도클럽을 만들어 빈번히 
접촉하면서 친일 세력을 견제하였다. 
  고종은 5월 17일 각의 석상에서 모든 정무는 짐이 당친재지할 것이라는 어명을 내리고 5
월 20일에는 일본의 강압에 의해 개혁된 신제도, 신법령에 모순이 있는 것은 재검토를 하겠
다는 조칙을 관보에 발표하게 했다. 
  일본인들은 분노했다. 조선의 국왕이 허수아비 노릇을 하고 있다가 강하게 나온 이면에는 
러시아가 도사리고 있다는 결론을 내렸다. 그리고 러시아를 끌어들이고 있는 것은 민비라고 
생각했다. 일본인들은 민비를 더욱 증오했다.  실제로 그러한 보고가 일본 공사관으로  속속 
들어오고 있었다. 
  이노우에 일본 공사는 이러한 조선의 실정을 일본에서도 상세하게 보고 받고 있었다. 
  (민비를 제거하지 않으면 일본은 요동반도를 빼앗겼듯이 조선도  뺏기고 말 것이다! 그렇
게 되면 조선을 얻기 위해 일본군이 흘린 피는 무용지물이 될 것이다!)  이노우에는 마침내 
민비 시해를 결심했다. 이노우에는 총리대신  이토오 히로부미,  외무대신 무쓰 무네미쓰와 
함께 일본에서 초헌법적  권리를 누리고 있는 원로회의 7인중  1인이었다. 이노우에 자신도 
이미 내무대신을 역임한 바 있는 일본 정계의 중진이었다. 
  "일본의 온건한 대조선 정책으로는 도저히 러시아에 대항할  수 없습니다. 이제는 비상수
단을 사용하여 러시아와 조선의  관계를 끊어서 조선을  고립시키는 것이 유일한  방법입니
다."
  이노우에는 원로회의에서 비상수단을 제안했다. 비상수단은 두말할  것도 없이 민비를 시
해하는 것을 의미했다. 
  "그 방법밖에 없는가?"
  "궁중의 대표이며 조선에서 가장 극렬한 배일주의자인 왕비를 제거하는  것은 러시아와의 
관계를 끊는 것에도 목적이 있지만 더 중요한 것은 조선의 국왕을 꼼짝 못하게 하기 위해서
입니다. 왕비가 시해된다면 심약한 조선의 국왕은 조선을 일본에 바쳐서라도 목숨을 구걸하
게 될 것입니다."
  "외교적인 문제는 없겠는가?"
  "외교적인 문제는 외교적으로 해결하면 됩니다."
  "백작은 조선 공사직을 사임하겠다고 했는데 누가 그 일의 적임자이겠는가?"  "미우라 고
로오 자작이 적임일 것입니다."
  이노우에는 일본 육군 중장 출신의  미우라 고로오를 추천했다. 이토오  히로부미와 무쓰 
무네미쓰 등 일본의 원로회의는 이에 대해 반박하지 않았고,  미우라 고로오는 무인 출신이
라는 이유로 사양하다가 이노우에의 재촉을 받고서야 조선 공사직을 수락했다. 
  이노우에는 음력 6월 4일 조선에 귀임하였다.  조선에서는 박영효의 왕비시해 음모사건으
로 박정양 내각이 붕괴되고 7월 5일 제3차 김홍집 내각이 성립되었다. 
  음력 7월 13일 미우라 일본 공사가 조선에 부임하여 7월 15일 이노우에와 함께 신임장을 
제출하기 위해 장안당에서 고종을 알현했다. 조선쪽에서는  총리대신 김홍집과 외부대신 김
윤식이 시립했고 통역도 시립했다. 
  "폐하. 이번에 조선 공사로 부임한 미우라 고로오 자작입니다."  이노우에가  미우라 공사
를 고종에게 소개했다. 
  "그렇소? 원로에 고생이 많았소."
  고종은 덕담으로 미우라 공사의 인사를 받았다. 미우라는 키가  크고 얼굴이 길쭉한 말상
이었다. 고종은 미우라 공사의 첫인상이 그다지 마음에 들지 않았다. 
  "폐하. 외신은 오랫동안 군인으로 있으면서도 뚜렷한 무공을  세우지 못한 무능한 군인입
니다. 모쪼록 폐하의 훌륭한 지도편달을 바라옵니다."
  "공사는 겸손한 사람이구려."
  "외신은 외교에 대해서는 문외한이옵니다. 앞으로  국왕폐하의 부르심이 없으시면 관저에
서 불경이나 필사하면서 조선의 아름다운 풍광을 즐길까 하옵니다."   민비는 발 뒤에 앉아
서 고종에게 낮은 목소리로 조언을 하고 있었다. 미우라 고로오는  발 뒤에 앉아 있는 민비
를 조심스럽게 살폈다. 저 여인이었던가,  저 여인이 조선의 국정을 좌지우지하면서  당대의 
재상이라고  일컬어지는 이노우에  백작을 꼼짝달싹  못하게 한  여인인가......
  미우라 고로오는 민비를 향하여 조용히 입을 열었다. 장차  민비를 제거해야 하는 선봉이 
되어야 하는 미우라 고로오는 가슴이  무거웠다. "왕후폐하. 외신이 듣자니  왕후폐하께서도 
불도에 정진하고 계신다는 말씀을 들었습니다. 외신이  관음경을 청사하게 되면 왕후폐하께
도 헌상할 예정이옵니다."
  미우라 고로오는 심중의 흉계를 감추고 정중하게 허리를 숙였다. 
  민비는 그때서야 어렴을 반쯤 걷고 통역을 통해 미우라 고로오에게 부드럽게 대꾸했다. 
  "일본국의 국왕을 대리하는 막중한 공사의 임무를 띠고 조선에 와서 경전을 필사하겠다니 
공사의 불심이 예사롭지 않은 듯 싶습니다. 이 나라의 관습으로 왕비가 외국 사신을 정식으
로 접견할 수는 없지만 인 국의 도리로써 조선을 도와주시기 바랍니다."  민비는 일국의 왕
비답게 위엄을 갖추고 미우라 고로오에게 당부하였다. 
  시해될 운명에 놓인 민비와 시해를 지휘해야 할 입장에 놓인 미우라 고로오의 첫 대면은 
서로에게 강렬한 인상을 남겼던 것이 분명했다. 
  "신임 일본 공사는 불경이나 필사하겠다고  했지만 군인 출신이라 그런지 섬뜩한  살기가 
느껴진다."
  민비는 미우라 고로오를 접견하고 나서 불길한 심정을 시령 상궁에게 토로했다. 
  "왕후폐하는 듣던 대로 좀체로 빈틈이 없고  현명한 왕비라는 인상이 느껴졌다."  미우라 
고로오도 민비에 대한 인상을 주위의 인물들에게 토로했다. 민비와 미우라 고로오. 
두 사람은 서로에 대한 첫 인상을 가슴 속 깊이 각인 시켰던 것이다. 
  1) 민비에 대한 외국인들의 인상기(비숍, 벙커, 언더우드 부인)는  {명성황후시해사건}에서 
발췌했다. 



    제 41 장  민초도 잠이 들다
  해가 설핏이 기울기 시작했다. 옥년은 서쪽 하늘이 불그스레하게  물들어 오는 것을 바라
보다가 슬그머니 손을 들여다보았다. 손에서 여린 흙냄새가 풍겼다. 
  박갑성. 그 이상한 사내가 죽은 것이다. 박갑성은 제2차 동학농민전쟁이 발발하자  봉필을 
데리고 떠났다가 겨울에야 돌아왔었다. 그때는  한성에 올라가 있던 옥순도  돌아와 있었고 
일본으로 건너갔던 쇠돌이까지 돌아와 있을 때였다. 
  "그 사람이 동학 농민군이 되어 일본군과 싸웠다는 것이 사실일까?"  박 서방이  흐린 눈
빛으로 마을쪽을 더듬으며 입을 열었다. 옥년은 박 서방을 따라 보릿단 태우는 냄새가 풍기
는 마을로 우둑히 시선을 보냈다. 
  벌써 저녁을 짓고 있는 것일까. 산굽이를 도는 비탈쪽의, 땅에 붙어버린 듯한 퇴락한 초가
와 무너진 흙담이 대부부인 마을에서 저녁 짓는 연기가 모락모락 피어오르고 있었다. 
  "봉필이가 다 봤다잖아."
  옥년은 맥빠진 소리로 대꾸했다. 박 서방이 허허 하고 공허한 웃음소리를 냈다. 
  "아무리 생각해도 알 수 없는 사람이야."
  "그건 왜?"
  "천안에 아이들까지 있는 모양인데 왜 동래 바닥에서  헤매다가 죽었는지......"  "역마살이 
낀 모양이지."
  "봉필이 그러는데 박갑성이 일본 여자들을 살해하고 다닌 것 같다는군."  "설마?"
  "박갑성의 보퉁이 속에 일본옷이 있더래."
  "일본옷?"
  "지난 가을 박갑성이 떠나기 바로 전에 일본 동화은행 부산지점장의 부인  다케코라는 여
자가 겁탈을 당할 뻔한 사건이 있었잖아? 그때 그 여자가 일본옷을 입은 조선인이 범인이라
는 진술을 했대."
  "......"
  "그리고 박갑성이 동래에 오기 전에는 그런 사건이 없었고 떠난 뒤에도 그런 사건이 없었
어. 어디 그 뿐인가? 박갑성이 돌아오자 다시 그런 사건이 일어나기 시작한 것을 보면 박갑
성이 아무래도 의심스러워."
  박 서방의 말에 옥년은 속으로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랬던가. 박갑성이 동래와 부산  바닥
의 일본 여자들을 공포에 떨게 한 살인자였던가. 그러나 박갑성이 죽었으므로 그 사실을 확
인할 길이 없었다. 
  "아무튼 박갑성이가 보통 사람은 아니었어."
  "......"
  "난 박갑성이가 살인자라도 싫지가 않아."
  "......"
  박 서방이 엉덩이를 털며 일어섰다. 옥년도 풀숲에서 엉덩이를 들고일어나며 박갑성의 봉
분을 휘둘러보았다. 떼를 입히지 않은 황토 봉분이 쓸쓸해 보였다. 
  "조선인들은 누구나 박갑성이 한 일을 잘했다고 할꺼야."  "잘했으면 뭘 해? 이젠 죽어서 
땅 속에 묻혔는데..."  옥년은 박 서방의 앞에 서서 산을 내려가기 시작했다. 박갑성이  죽은 
것은 호열자 때문이었다. 관북지방이 평안도 의주에서 창궐한 호열자는 음력 6월  1일 현재 
4천여 명의 인명을 빼앗고 전국으로 확산되었다. 조정에서는 음력 윤 5월 14일 호열자 예방
규칙 15조를 만들어 공포했으나 죽음의 신은 전국에서 요원의 불길처럼 번지고 있었다.  조
정은 계속해서 6월 4일엔 호열자  소독규칙, 호열자 예방 및  소독집행규정을 공포하고 6월 
13일 궁내부에 위행국을 설치하기까지 하였다. 
  "괴이한 질병이 성행하여 치료해야 할  조치를 취하지 않을 수  없다. 궁내부에 위생국을 
둘 것이다."
  고종이 내각에 지시했으나 호열자를 예방하거나 치료할 의약품은 전혀 없었다. 일단 호열
자에 걸리면 속절없이 죽어야 하는 것이 조선인들의 실정이었다. 박갑성은 호열자에 걸리자 
눈을 하옇게 까뒤집고 물만 찾다가 사흘만에 죽었다. 
  (모두가 버러지 같은 삶을 살고 있는 거야...)
  옥년은 산을 내려오며 착잡한 심정을 떨쳐 버릴 수가 없었다. 사람의 삶은 무엇인가 고귀
해야 하는데 버러지나 다를 바가 없는 것 같아 허망하기만 한 것이다. 
  옥년은 집에 돌아오자 목침을 베고 누워서 골똘히 생각에 잠겼다. 지난 해 삼남지방 일대
를 휩쓴 동학 농민전쟁도 옥년에게는 실망스럽기만 했다. 북접과 남접이 연합하여 논산에서 
기세를 올릴 때만 해도 옥년은 농민군이 일본인들을 몰아내고 탐관오리들을 처단하려니  생
각했었다. 그러나 농민군은 공주 우금치 전투 이후 한 번도  승리다운 승리를 한 적이 없었
다. 토벌군이 없는 무주공산이나 다름이 없는 읍이나 성을 공격하여 한때 점령을 해도 곧바
로 일본군과 관군의 합동 토벌군이 밀어 닥쳐서 농민군을 패퇴시켰다. 
  농민군은 삼남지방에서 벌떼처럼 일어났으나 농민들의 기대에 부응하지는 못했다. 농민군
들은 수없이 토벌군과 싸웠으면서도 한 발짝도 앞으로 전진하지 못하고 후퇴만 거듭했다. 
  전투는 가을 내내 계속되었다. 제2차  농민전쟁이 추수가 얼추 끝난  뒤부터 시작된 탓도 
있었으나 농민들의 항쟁이 줄기차게 계속되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대부분 농민들만 죽음
의 구렁텅이로 빠져 들어갔다. 아침이면 농민군들의 시체가 들과  계곡에 산처럼 쌓이고 피
가 내를 이루며 흘러갔다. 
  후퇴의 길은 비참했다. 농민군들이 척양척왜의 깃발을  들고일어났을 때는 군량의 보급이 
원활했으나 농민군이 밀리기 시작하면서 군량조차 제대로 확보할 수 없었다. 
  게다가 날씨는 점점 추워지고 있었다. 산과 들을 붉게  물들인 나뭇잎이 우수수 떨어지고 
들판은 황랑하게 비어 갔다. 농민군들은 길거리에서 뒹구는 나뭇잎처럼 쓰러지고 죽어 갔다. 
  겨울이 왔다. 농민군들은 토벌군에 이어  혹독한 추위와도 싸워야 했다. 게다가  나뭇잎이 
모두 떨어진 겨울 숲에는 수십, 수백 명, 또 수천 명이 될 때도 있는 농민군이 숨을 곳이 없
었다. 
  섣달 초이틀 농민군 대장 전봉준이 순창군 피노리에서 체포되었다는 소식이 들리고  초사
흘에는 농민군 거두 김개남이 태인에서 체포되었다. 북접의 통령 손병희만이 북접군을 해산
하고 제2대 교주 최시형과 함께 잠적을 했을 뿐이었다. 
  농민군은 그로 인해 무수한 인명의 희생을 낸 채 완전히 해산되었다. 그러나 관군과 일본
군은 농민군의 뿌리를 뽑기 위해 마을마다 철저하게 수색을 하여 학살을 자행했다. 
  호남과 영남 곳곳에서 마을 주민들이 무수히  학살되었다. 사민평등과 후천개벽을 이루려
던 농민들의 염원이 물거품처럼 스러지고 죽음만이 이어졌다. 농민들은 피로 산하를 적시며 
시체로 나뒹굴었다. 
  (죽음은 비참해......)
  옥년은 무겁게 한숨을 내쉬었다. 사방은  이미 캄캄하게 어두워져 있었고  어느 방에선가 
여자들의 왁자한 웃음소리에 섞여 일본군 군가소리가 들리고 있었다.  요즘 들어 술이 얼큰
해지면 아무 곳에서나 군가를 불러대는 일본인들이었다. 
  (청일전쟁에 승리한 뒤로 기고만장해졌어......)
  일본 군가는 부산과 동래 바닥에 파다하게  퍼져 아이들이 무슨 소리인지도 모르고  따라 
부를 정도였다. 
  <지나를 각성시키려 출정을 했네
  용맹한 병사들이여 앞으로 가자>
  지나를 각성시킨다는 것은 중국을  반성시킨다는 것이었다. 외국에서는  청일전쟁을 욕의 
전쟁으로 명명했으나 일본인들은 정의의  전쟁이라고 불렀다. 청일전쟁을  수행하는 요지는 
동아시아의 평화를 위해 조선의 독립을 쟁취한다는  것이었다. 조선은 스스로 청나라로부터 
독립을 쟁취할 힘이 없기 때문에 이웃 나라인 일본이 대신 전쟁을 수행하는 것이고, 그것은 
하늘이 준 직분이라는 것이었다. 
  <조선을 구하려면 지나로 가자
  용맹한 병사들이여 지나로 가자>
  옥년은 그런 노래소리를 들을 때마다 얼굴을 찡그렸다. 
  "자나?"
  그때 문 밖에서 박 서방의 탁한 목소리가 들렸다. 옥년은 자리에서 일어나 앉았다. 
  "자긴."
  "자지 않으면서 불도 켜지 않고 뭘해?"
  박 서방이 문을 열고 방으로 들어왔다. 옥년은 그때서야 호롱불에 불을 밝히고 심지를 돋
구었다. 방안에 금세 석유 기름냄새가 가득하게 퍼졌다. 
  "그저 누워 있었어."
  옥년은 박 서방의 눈길을 피하며 대답했다. 
  "저녁은?"
  박 서방은 옥년의 앞에 털썩 앉았다. 
  "아직..."
  옥년은 말끝을 흐렸다. 
  "나도 저녁 전인데 같이 할까?"
  "우리가 내외라도 되나?"
  "그만치 살 섞고 살았으면 내외할  만도 하지 뭘 그래?"   "다 늙어서 내외하고 살면  뭘 
해?"
  옥년이 피식 웃음을 깨물었다. 어느 방에서인지 기녀의 간드러진 일본노래가 들리고 있었
다. 일본에서 유행한다는 [사요나라 요코하마]라는 노래였다. 
  <천우학 기모노의 요코하마 아가씨
  능금처럼 붉은 볼에 아름다운 눈동자
  아 그러나 사요나라. 사요나라 요코하마.
  꽃잎이 떨어지듯 사랑이 떠났네.>
  반주는 사미센이라는 일본 악기로 가야금과 비슷한 것이었다. 
  "운선이 제법 일본 창가를 잘 하는군."
  박 서방이 기녀 운선의 노래에 귀를 기울이고 있다가 불쑥 입을 열었다. 
  "옥순이는 무얼 하고 있어?"
  옥순이 한성의 종현 성당에서 내려온 것은 박갑성이 죽기 이틀 전의 일이었다. 옥순은 뜻
밖에 뱃속에 누구의 씨인지도 모르는 아이를 갖고 있었다. 
  (이 아이가, 평생 동정을 지키겠다던 이 아이가 어떻게 된 것일까?)  옥년은 옥순이 뱃속
에 아이를 갖고 있는 것을 알았을 때 하늘이 무너지는 듯한 충격을 받았다. 옥순의 삶도 가
시밭길과 고난의 연속이었다. 불과 여덟 살의 어린 나이에 어머니와 동생을 잃고 죽음의 고
비를 수없이 넘기며 중국을 거쳐 프랑스에서 눈이 멀어  돌아온 옥순이었다. 그러나 옥순은 
그때까지도 동정을 지키고 있었고 새벽  이슬처럼 맑은 영혼을 소유하고 있었다. 옥년은 그
러한 옥순을 볼 때마다 옥순에게서 그윽한 꽃향기가 풍기는 것 같았었다. 
  (나는 옥순에게서 성모 마리아의 모상을 보았었어!)
  그러나 옥순은 뱃속에 아이를 갖고 있었다. 옥년은 옥순의 둥그스름하게 부른 배를 볼 때
마다 눈앞이 캄캄하고 땅이 꺼지는 것 같았다. 
  "아기 아버지는 누구니?"
  "몰라요."
  "아기 아버지가 누군 지도 모른다는 말이냐?"
  "저는 눈이 보이지 않아요.  눈이 보이지 않는  제가 애 아버지가  누군지 어떻게 알겠어
요?"
  "소리라도 들었을 거 아니야?"
  "아무 것도 기억하지 못해요."
  "네가 나에게 거짓말을 하는 것은 아니겠지?"
  옥순은 그 말에 대꾸하지 않았다. 
  옥년은 옥순의 나이를 가만히 헤아려 보았다. 옥순이 병인년(1866)에 여덟 살이었으니 을
미년(1895)인 지금은 서른 일곱 살일 것이다. 여자 나이 서른 일곱이라면 결코 적은 나이는 
아니었다. 
  "아이를 낳을 거냐?"
  "낳지 않으면 어떻게 하겠어요?"
  "애를 지우지 그래?"
  "애를 어떻게 지워요?"
  "한약을 쓰면 지울 수가 있어. 좀 위험하긴 하지만 혼례도 올리지 않은 여자가 애를 낳을 
수는 없잖아?"
  "애를 지우는 것은 사람을 죽이는 일예요."
  "네가 동정을 지키지 못하게 된 것이 안타까워서 그래."  "모두가 천주께서 안배하신 일일 
거예요."
  "천주께서 왜 너에게 그런 시련을 주신다는 말이냐?"  옥년은 얼굴을  찡그리고 명치끝을 
눌렀다. 옥순이 당한 불행을 생각하자 가슴이 미어지는 것 같았다. 
  (천주께서 이 아이에게 운우지정을 알게 하려고 시련을 주었다는  말인가?)  옥년은 얼핏 
그런 생각을 하였다. 여자로 태어나서 남자와 그 짓 한 번 해보지 못하고 죽는 것은 얼마나 
허전한 일일까, 그래서 옥순이 믿는 천주가  그런 일을 안배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다
소 엉뚱한 생각이었다. 
  "어디서 주문을 외고 있겠지."
  "주문?"
  "그 기도인가 뭔가 하는 것 말이야. 옥순이 그 짓을  하고 있을 때는 마치 천상선녀가 내
려와 있는 것 같더라구. 얼굴에서는 환하게 빛이 나는  것 같구......"  옥순은 동래에 내려온 
이래 호젓한 산과 들을 찾아다니며 줄곧 기도를 하고 있었다. 
  (선녀처럼 깨끗한 아이를 어떤 몹쓸  놈이 그렇게 만들었는지 원......)  옥년은  옥순을 볼 
때마다 혀를 찼다. 참으로 기이한 일이었다. 옥순의 어머니와  동생을 죽게 만든 일이며, 진
천 주막에서 옥순을 구해 준 일, 이창현과의 해후......
  순아를 시켜 저녁상을 반주까지 곁들여 들어오게 한 뒤 옥년은 박서방과 함께 저녁을 들
었다. 
  "미곡상은 어때?"
  "그만하지. 동래와 부산 바닥의 상권도  일본인들이 잡고 있으니까... 여기도 예전만  못하
지?"
  "추선이와 봉필이 잘 하고 있어. 예전만 못하지만......"   옥년은 박 서방이 하는 미곡상이
며 술집 일에 완전히 손을 놓은 처지였다. 
  "쇠돌이 아버지는 소식이 없나?"
  "없어."
  "임자가 쇠돌이 맡아 키운 지 얼마나 되었어?"
  "쇠돌이 스물 살이 넘었으니 20년이 넘은 셈이지..."  "이젠 아들 같겠구먼."
  "일본에 유학을 보냈더니 완전히 왜놈이 되었어."
  옥년이 상을 밀어 놓으며 고개를 흔들었다. 쇠돌이 왜놈처럼 변해 정이 떨어진 것이다. 
  "쇠돌이에게 재산을 다 물려 줄 건가?"
  "재산?"
  "쇠돌이 지난 번 그러더군. 미곡상이며 이 술집, 그리고 장산리의 땅이 모두  자기 것이라
구..."
  "내 그 놈이 그런 소리를 할 줄 알았어."
  "그럼 아닌가?"
  "지난 번 내가 쇠돌이에게 분명히 일러두었어. 쇠돌이 어머니가 죽은 일이며 쇠돌이 아버
지가 쇠돌이를 나에게 맡기고 동학에 들어간 얘기를 하던 뒤끝에 인연을 끊자구 얘기했어."  
"인연을 끊어?"
  "나두 처음엔 쇠돌이를 아들처럼 생각하고 키웠어. 어떻게 하던지 쇠돌이를 큰 인물로 만
들려고 일본에 유학까지 보낸 거구... 그런데 일본에 유학을 보냈더니 왜놈이 되어서 돌아왔
지 뭐야? 조선놈이 왜놈 옷을 입고 거들먹거리는 행태가 눈꼴이 시어서 볼 수가 없었어. 그
래서 일년치 학비를 주어 일본에 보내고는 내 앞에 나타나지 말라고 잘라 말했어."  "......"
  "하라는 공부는 안 하고 일본에서도 유곽이나  출입하고 있는 모양이다."  옥년이 쓸쓸하
게 한숨을 내쉬었다. 옥년이 쇠돌에게 매정하게 야단을 쳐서 일본으로 쫓아 버린 것은 쇠돌
이 일본옷을 입고 거들먹거려서가 아니라 일본인의 양자가 되어 일본군에 입대하겠다고  했
기 때문이다. 옥년은 그때 땅이 꺼지는 듯한 절망감을 느꼈었다. 쇠돌이  양자로 들어가겠다
는 일본인은 경웅의숙의 교수로, 경웅의숙의  설립자인 후쿠다 유키치의 제자라고 했다. 후
쿠다 유키치는 청일전쟁이 일본의 승리로 돌아가자  기쁨을 이기지 못해 눈물을 흘린다, 하
고 말할 정도로  국수주의자가 되어 있었다. 쇠돌이는 조선인이면서도  후쿠다 유키치의 영
향을 받은 것이 분명했다. 
  (그래 내 속으로 낳은 자식이 아니니 혈육이 끈끈한 정도 없겠지...)  옥년은 그렇게 생각
하였다. 
  박 서방이 담배를 한 대 물고 있을 때 옥년은 상을 밖으로  물렸다. 상을 내기 위해 마루
로 나오자 달빛이 환했다. 오늘이 6월 보름인가. 5월이 윤달이었으니 6월이 많이 늦었겠군... 
혼잣말로 중얼거리며 달바라기를 하다가 옥년은 또 다시 한숨을  내쉬었다. 내가 왜 이러는 
것일까. 내가 왜 이렇게 심란한 것일까. 쇠돌이가 나에게 무엇이기에 이토록 가슴이 아픈 것
일까. 옥년은 달빛이 몸으로 젖어드는 듯한 기분을 느끼며 방으로 들어왔다. 
  박 서방은 이부자리도 펴지 않고  잠들어 있었다. 옥년은 이부자리를 편  뒤에 옷을 벗고 
누웠다. 불을 끄자 달빛이 창호지에 조수처럼 푸른빛으로 밀려와 있었다. 
  옥년은 억지로 잠을 청했다. 
  옥년이 잠을 깬 것은 누군가 자신의 가슴을 더듬고 있는  듯한 기분 때문이었다. 눈을 뜨
자 박 서방이 투박한 손으로 그녀의  가슴을 어루만지고 있었다. 옥년은 다시 눈을  감았다. 
박 서방에게 뜨거운 열정이 일어나지는 않았으나 그렇다고 박 서방이 싫지도 않았다. 
2  세상이 떠나갈 듯이 아우성을 치며 쏟아지던 빗발이 잠시 주춤한 틈을 타서 옥순은 방문
을 열고 밖으로 나왔다. 비는 그쳐 있었으나 날씨가 후덥지근했다. 겨드랑이와 등줄기로  땀
이 끈적거리는 것을 보면 구름장들이 낮게  내려앉아 있고 빗줄기가 다시 퍼부을  모양이었
다. 옥순은 서쪽 하늘이 새카맣게 몰려온 먹구름을 찾기라도 하듯이 보이지 않는 눈으로 허
공을 더듬었다. 
  몇 시나 된 것일까. 관군에게 잡혀 간 봉필이와 박 서방은 어떻게 하고 있을까. 집 안팎은 
이틀을 내리 쏟아진 비에 질펀하게 젖어 있었고 방에서는 눅눅하게 곰팡이 피는 냄새가 나
고 있었다. 
 옥순은 가슴이 답답했다. 눈이 보이지 않는 것은 이력이  붙어서 견딜 수 있었으나 뱃속의 
아이를 생각하자 가슴에 바위 덩어리를 얹어 놓은 듯이 답답했다. 
  (그런데 누가 봉필이와 박서방을 관가에 고발한 것일까?)  옥순은 마루 끝에 엉덩이를 내
려놓고 앉았다. 동한 난민이라면서  관군들이 봉필과 박 서방을 개  패듯이 두들겨 패며 끌
고 간 것은 어제  아침의 일이었다.  옥순은 그들이 관군에게 끌려 간 것이  자신의 뱃속에 
원하지 않은 아이를 갖게  된 것처럼 편치 않았다. 관군들에게  동학 난민이라고 지목 받는 
이상 봉필과 박 서방은 살아서 돌아올 것 같지 않았다. 
  동래와 부산은 일본군의 주둔지나 다름이 없어서 농민군은 한 번도 동래와 부산에 입성한 
일이 없었고 그 까닭으로 농민군에 가담한 농민들도 많지 않았다. 그러나 제2차 농민전쟁이 
끝났을 때 관군과 일본군은 동래와 부산에서도 농민군 색출작업을 대대적으로 벌여  무수한 
인명을 살상했었다. 
  그 바람은 동지섣달 칼바람보다 더욱 무서운 죽음의 바람이었다.  그 죽음의 바람은 피비
린내와 함께 동래와 부산 바닥을 휩쓸었다. 
  관군과 일본군은 동네 사정에 훤한 사람  하나를 앞잡이로 끌고 다니며 농민군과  농민군 
가담자들을 색출하였다. 그러나 반듯이 농민군과 농민군 가담자들만 색출한 것은  아니었다. 
관군과 일본군들은 앞잡이가 이 마을에는 농민군과 농민군 가담자가 없다고 하면  앞잡이를 
말채찍으로 때리고 총개머리판으로 두들겨 팼다. 앞잡이들은  관군과 일본군에게 맞아 죽지 
않기 위해 억지로 죄없는 농민들을 찍어댔다. 
  "관군보다 일본군이 더 잔인해."
  "관군이야 뭐니뭐니 해도 조선인 아닌가? 아무려면 죄없는 제  백성을 총칼로 죽이겠어?"  
"관군을 지휘하는 것이 일본인이라며?"
  "조정이 일본의 꼭두각시 노릇을 한다잖아."
  "조정이?"
  "일본군이 대궐을 점령하고 임금을 볼모로 잡고 있대. 대신들을 임명하는 것도 모두 일본 
공사가 한대."
  "그럼 나라를 빼앗겼다는 말인가?"
  "그러니 관군이 일본군의 지휘를 받지?"
  사람들은 두 셋만 모이면 불안한  표정으로 수군거렸다. 일본군에게 호남과  영남의 서쪽 
해안 마을, 특히 동학이 크게 일어났던 마을은 농민군에 가담을 했거나 하지 않았거나를 막
론하고 반듯이 젊은 남자 몇 명  이상 죽이라는 할당량이 배정되었다는 소문까지  흉흉하게 
나돌았다. 
  사람들은 일본군을 살인귀처럼 무서워하기  시작했다. 일본군이 나타나면  사람들은 뒤도 
돌아다보지 않고 산으로 달아났다. 
  그래도 일본군들은 산까지 뒤져서 조선인들을 학살했다.  남정네들이 모두 도망간 마을은 
부녀자들을 겁탈하고 살해했다. 그것이 작년 12월에서 금년 1월의 일이었다. 
  그 뒤로 한동안 조용했는데 관군이 느닷없이 봉필과 박 서방을 잡아간 것이다. 
  (그런데 쇠돌이 정말 일본에서 돌아온 것일까?)  옥순은 추선의 말이 미심쩍었다. 쇠돌이
일본에서 돌아왔다면 옥년을 찾지 않을 까닭이 없는 것이다. 추선은 며칠 전 옥년과 옥순이 
저녁을 먹고 있는 방에 들어와 그것  참 알 수 없는 일이네, 하면서  쇠돌을 보았다고 했던 
것이다. 
  "쇠돌을 봐?"
  옥순은 내심 가슴이 뜨끔했다. 그러나 추선에게 찌르듯이 물은 것은 옥년이었다.
  "낮에 본정통에 갔는데 요리집에 들어가는 쇠돌이를 본 것 같아요."  "봤으면 본 거지 같
은 것은 뭐야?"
  "쇠돌이가 동래에 있을 리가 없잖아요?"  
  "잘못 보았겠지."
  "그럴 거예요. 아무려면 쇠돌이가 일본옷을 입고 일본칼을 차고 있겠어요?"  "일본옷이야 
작년에도 입고 왔었어."
  옥년은 기분이 나쁜지 추선의 말을 듣자 금방 밥숟갈을  놓아버렸다. 그러나 옥순은 옥년
과 추선에게 눈치를 채이지 않으려고 끝까지 밥을 뜨고서야  자리에서 일어났다. 쇠돌이 옥
순의 뱃속에 있는 아이의 아버지였다. 
  (천주께서 무엇을 이루려고 하시는지 나도  몰라. 어머니와 동생의 비참한 죽음,  멀고 먼 
프랑스까지 데리고 가서 내 눈을 멀게 한 뒤에 조선으로  돌려보낸 일, 그리고 동정을 지키
려는 내 가냘픈 희망까지 꺾어 버리신 천주의 뜻이  무엇인지 나는 몰라...)  옥순은 쇠돌에
게 겁탈을 당했을 때 눈물조차 나오지 않았었다. 
  그것은 지난 2월 어느 날의 일이었다. 옥순은 기도를 마치고 온 몸 가득히 충만한 은혜와 
평화를 느끼며 혼곤한 잠에 빠져들었었다. 
  옥순이 잠을 깬 것은 갑자기 치마가 들쳐지는 듯한 기분을 느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눈
이 보이지 않는 옥순은 누가 자신의 치마자락을 들추었는지 전혀  알 수가 없었다. 다음 순
간 옥순은 누군가 자기의 속곳을 끌어내리고 있다는 것을 알고 가슴이 철렁하여 반사적으로 
속곳을 움켜쥐었다. 
  "누, 누구요?"
  옥순은 다급하여 소리를 질렀다. 그러나 사내는 보이지 않고 헐떡거리는 숨소리만 들려왔
다. 옥순은 필사적으로 속곳을 움켜쥐었다.  무엇을 지켜야 하는지는 전혀 의식하지  못하였
다. 다만 사내가 가쁜 숨을 몰아 쉬면서 속곳을 무릎  쪽으로 잡아당기고 있었기 때문에 옥
순은 필사적으로 그것을 움켜쥐고 있을 뿐이었다. 
 (아!)
  그때 사내가 옥순의 무릎을 깔고 앉았다. 옥순은 두 손에 맥이 탁 풀렸다. 사내는  알몸이
었다. 사내의 알몸을 옥순이 맨살에 접촉해 본 것은 처음이었다. 
  옥순이 멈칫해 있는 사이에 사내가 옥순의 속곳을 재빨리 벗겨 냈다. 옥순은 그때서야 사
내의 가슴팍을 떠밀며 바둥거리기 시작했다. 
  (이것은 악몽이야, 나는 지금 꿈을 꾸고 있는 거야......)  옥순은 몸부림을 쳤다. 사내의 하
체가 그녀의 하체로 밀착되어 왔다. 사내의 손은 어느 사이에 그녀의 가슴을 움켜쥐고 있었
다. 옥순은 자신의 가슴을 움켜쥐고 있는  사내의 손을 필사적으로 떼어 내려 했다.  그러자  
사내가 재빨리 옥순의 무릎을 벌리고  그 사이로 자신의 무릎을 밀어 넣었다. 
  (아, 안돼!)
  옥순은 절망적인 상태에서 입 속으로 부르짖었다. 무엇인가 거대하고 강한 느낌이 그녀의 
몸으로 밀고 들어오면서 하체가 찢어지는 듯한 통증이 느껴졌다. 옥순은 어금니를 깨물면서 
신음소리를 안으로 삼켰다. 
  옥순이 자신을 겁탈한 사내가 쇠돌이라는 것을 알게 된 것은 그로부터 사흘 뒤의 일이었
다. 한밤중에 또 다시 그 사내가 옥순의 방에 침입을 했고, 그날은 옥순의 방에서 자고 가기
까지 했던 것이다. 
  옥순은 자신을 겁탈한 사내가 쇠돌이라는 것을 알게 된 다음날 동래를 떠나 한성으로 올
라갔다. 무엇보다 옥년을 대할 면목이 없었다. 
  옥순이 동래에 내려온 것은 자신의 배가 차츰차츰 불러  왔기 때문이었다. 아이의 아버지
인 쇠돌이를 찾기 위해서가 아니라 옥년이라면 자신이 누구의 아이를 뱃속에 갖게 되었든지 
상관하지 않고 몸을 의탁하게 해 줄 것이라는 믿음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녀의 믿
음대로 옥년은 옥순을 받아 주었던 것이다. 
  우르르. 하늘에서 뇌성이 우는 소리가 들려왔다. 옥순은 얼굴을 들고 보이지 않는  눈으로 
하늘을 더듬었다. 우르르. 하늘 어디쯤에서인지 땅울림 같은 뇌성이 울리더니 꽈당하고 벼락
치는 소리가 귓전을 때렸다. 옥순은 깜짝 놀라 손바닥으로 귀를 막았다. 
  "비가 어지간히도 오네."
  그때 궐련 타는 냄새가 나며 옥년의 음성이 들렸다. 옥순은 소리가 나는 쪽으로 돌아앉았
다. 
  "아직 안 주무셨어요?"
  "날씨가 뒤숭숭해서 잠이 와야지..."
  "장마철이에요. 한 열흘은 장하게 올 거예요."
  "올해도 물난리가 나지  않을는지 모르겠다.  윤달이 낀  6월이니 장마철도  지난 셈이지 
뭐..."
  옥년의 목소리가 심란하게 들렸다. 박 서방이 관군에게 잡혀가서 그런 것일까. 따지고  보
면 옥년도 팔자가 기구한 여자였다. 
  궐련 타는 냄새가 다시 코끝으로 강하게 풍겨 왔다. 옥년이  궐련 연기를 폐부 깊숙이 빨
아 들였다가 내뱉은 것이 분명했다. 
  "한성에서는 서교도에 대한 탄압이 없니?"
  "네. 지난해에 복권이 되었어요."
  "복권?"
  "지난해에 신정유서를 발표하여 갑오경장이  시작되었잖아요? 대군주폐하께서 12월  16일 
칙령을 내리시어 억울하게 죄로 몰린 사람들을 밝히 살펴 석방하고 이미 죽은 자에게는 그 
벼슬 이름을 돌려주라고 하셨어요."
  고종은 1894년 12월 16일 총리대신 김홍집, 탁지부대신  어윤중, 법무대신 서광범, 내무대
신 박영효를 배석시킨 가운데 천주교 교인들에 대한 공식  사면령을 내렸다. 고종의 천주교
인들 사면령은 억울하게 죄를 지은 사람들에 대한 사면과 복권에 포함된 것이었으나 공식적
으로는 최초의 것이었다. 이날 세도정치의 기틀을 세운 사람이라는 평을 들은 홍국영에서부
터 천주교인 남종삼, 홍봉주, 신철균, 대원군 계열의  정현덕을 비롯하여 갑신정변의 주역들
이 모두 사면되거나 복권되었던 것이다. 
  "한성에 기거할 집은 마련해 놓았어?"
  "집을 마련해 놓지는 않았으나 의탁할 곳은 여러 집 있어요."  "그럼 내일 아침 일찍 떠나
거라."
  "예?"
  "봉필과 박 서방이 잡혀 간 일이 예사롭지가 않아..."  "......"
  "아무래도 이 일은 나를 해꼬지 하기 위한 것 같아."  "그럼 잠시 몸을 피하시지요."
  "소용없는 일이다. 누군가 내 목숨을 노린다면 피한다고 될 일이냐?"  "누가 아주머니 목
숨을 노려요?"
  "모를 일이지. 누가 버러지 같은 내 목숨을 필요로 하는지......"   옥년이 쓸쓸하게 웃었다. 
옥순은 옥년의 말을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러나 옥순은 옥년이 무엇인가 막연히 불안을 느끼
고 있다고 생각했다. 
  옥순이 방에 돌아와 누운 것은 꽤 오랜 시간이 지나서의 일이었다. 옥년과 이런저런 얘기
를 하다가 방으로 돌아오자 천둥 번개에 이어 잠시 멎었던 빗발이 다시 장대질을 하기 시작
했다. 옥순은 장대질을 하는 빗소리를 들으며 이부자리를 펴고 누웠다. 뱃속의 아이  때문인
지 금세 졸음이 쏟아져 왔다. 옥순은 이내 혼곤한 잠 속으로 빠져들었다. 꿈도 없는  달디단 
잠이었다. 
  비는 하늘이 뚫어지기라도 했는지 밤새도록 퍼부었다. 
3  비는 이튿날도 계속해서 내렸다. 밤을 지새며 천둥 번개가 몰아치고 빗발이 장대질을 하
더니 날이 밝자 바람까지 음산하게  불어댔다. 옥년은 바람벽에 들이치는  빗소리를 들으며 
선잠을 잤다. 머리맡이 어수선했다. 
  (이것도 업보야......)
  옥년은 번하게 밝아 오는 창호지를 응시하며 돌아누웠다. 창호지가  밝아 오는 것을 보면 
이미 날이 밝았을 것이다. 비만  내리고 있지 않다면 아침 햇살이  부채살처럼 퍼져 풀섶의 
이슬을 말리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빗발이 쉴새 없이 장대질을 하고 있어서 방안은 아직도 
어둠침침했다. 
  (비까지 이렇게 장하게 내리고 있으니...)
  옥년은 옥순을 떠나 보낼 생각을  하자 가슴이 저렸다. 문득 유두례의  집을 떠나던 일이 
머릿속에 떠올라왔다. 그것은 벌써 20년이나 전의 일이었다. 그때도 빗발이 추적대고 있었고 
옥년은 미명의 새벽에 옷보퉁이 하나를 가슴에 보듬어 안고 유두례의 집을 떠났던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사정이 바뀌어 있었다. 옥년은 떠나는 입장에서  따나 보내는 입장으로 바
뀌어 있는 것이다. 
  (눈조차 보이지 않는데 갈 수가 있을까?)
  옥년은 공연히 옥순을 떠나 보내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구심이 일어났다. 바가 억수같이 
쏟아지고 있었다. 게다가 옥순은 눈이 보이지 않았고 뱃속에 아이까지 갖고 있었다. 그런 몸
으로 장대질을 하는 빗속에서 원행을 해야 한다는 것이 걱정스러웠다. 
  "저..."
  문 밖에서 얕은 기침소리에 이어 옥순의 목소리가 들렸다.  옥년은 재빨리 일어나서 치마 
저고리를 걸쳐 입고 마루로 나왔다. 옥순이 길 떠날 행장을  차리고 마루에 오도카니 서 있
었다. 삿갓에 바지 저고리 차림의 남장이었다. 
  "아침은 먹었니?"
  "예."
  옥년은 옥순의 어깨 너머로 바깥 하늘을 쳐다보았다. 하늘은  여전히 잿빛으로 낮게 내려
앉아 있었고 굵은 빗줄기가 장대질을 하듯이 퍼붓고 있었다.  마당은 붉은 흙탕물이 도랑을 
이루며 콸콸대고 흘러가고 담 밑의 화초들-백일홍, 분꽃, 봉숭아 같은 여름꽃들은 장대비에 
짓이겨져 죄다 쓰러져 있었다. 
  "길이 먼데 어서 떠나."
  옥년은 옥순의 손을 꼬옥 쥐었다가 놓았다. 질기디 질긴  인연도 이것으로 마지막이 될지 
모른다고 생각하자 가슴속에서 뜨거운 것이 치밀고 올라왔다. 
  "예."
  옥순이 고개를 숙여 보였다. 
  "이건 어음과 엽전이다. 어음은 한양  부호 이덕유의 어음이니 큰  객주에 가면 언제든지 
바꿔 쓸 수 있을 게야. 한양 근처에 논밭이나 마련하고 집이나 한 칸  마련해서 살아라."  "
전 이런 것 필요 없어요."
  "뱃속의 아이를 생각해야지."
  옥년은 어음과 엽전이 든 돈주머니를 억지로 옥순의 손에  쥐어 주었다. 옥순은 마지못해 
돈주머니를 받아서 바지춤을 풀어헤치고 속주머니에 넣은 뒤 바지춤을 맸다.
  "그럼..."
  옥순이 허리를 숙여 다시 인사를 했다. 
  "그래."
  옥년은 눈물이 글썽하여 고개를 끄덕거렸다. 옥순이 마루 끝에  앉아서 짚신을 발에 꿰고 
지팡이를 집어들었다. 옥년도 마루를 내려서서 신발을 신었다. 옥순이 지팡이로 빗물이 도랑
을 이루며 흘러가는 마당을 찍으며 대문을 향했다. 
  옥년은 치마자락으로 눈두덩을 찍어눌렀다. 
  (비라도 그칠 것이지...)
  옥순이 대문을 나서자 옥년은 대문의  무설주에 기대서서 빗속으로 더듬거리며  떠나가는 
옥순의 뒷모습을 망연히 응시했다. 세찬 빗줄기는 이미 옥순의  작은 몸뚱이로 사정없이 들
이쳐서 몸이 걸레처럼 젖고 있었다. 
  (불쌍한 것...)
  옥순은 빗속으로 점점 멀어져 가고 있었다. 옥년은 옥순이 빗줄기에 가려 보이지 않게 된 
뒤에도 한참 동안이나 대문간에 못박힌 듯 그대로 서 있었다. 옥순이 보이지도 않는 눈으로 
비바람 속을 헤매고 있을 생각을 하자 옥년은 가슴이 미어지는 것 같았다. 
  옥년이 옥순을 서둘러 떠나 보낸 것은 쇠돌이 때문이었다. 옥년은 제 속으로 낳은 아이가 
아닌데도 쇠돌에게 어미와 같은 정을 쏟으며 키웠었다. 쇠돌을 볼 때마다 비참하게 죽은 쇠
돌네가 생각났고 쇠돌네에 대한 애련한 기억이 쇠돌이를 애지중지하게 했던 것이다. 
  그러나 쇠돌이는 변해 있었다. 어린 나이에 일본에 유학을 보낸 것이 잘못이었다.  쇠돌이
는 조선인들을 멸시하는 일본인들을 그대로 흉내  내어 조선인들을 야만인이니, 미개인이니 
하고 비웃었다. 쇠돌이는 자신이 마치 일본인인 듯한 착각에 빠져 있었다. 
  옥년은 그런 쇠돌이에게 가슴속으로 찬바람이 불고 지나가는 것 같은 실망감을 느꼈다. 
  옥년이 다른 조선인들처럼 일본인들을 무조건 증오하고 있는 것은 아니었다. 옥년은 동래
에 술집을 차린 뒤에 일본인들로부터 돈을 벌었다. 조선인들이 옥년을 가리켜 왜년이라거나 
왜놈에게 몸을 파는 짐승 같은 계집이라고 손가락질을 해도 상관하지 않았다. 한 끼의 잠자
리, 하룻밤의 잠자리를 위해서 헌 속곳 벗듯이 헐겁게  몸을 팔아온 옥년이었기에 일본인들
을 마다하지 않았다. 특히 마쓰다는 옥년에게 잊을 수 없는 일본인이었다. 마쓰다는  옥년에
게 많은 돈을 벌게 해주었고 일본까지 여행시켜 주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 후에 온 일본인들은 조선을 착취의 대상으로 보고 있었다. 일본 상인들은 어떻
게 하던지 조선인들을 속여서 막대한 이익을  얻으려고 했고 이제는 그것도 모자라  조선의 
땅덩어리를 송두리째 집어삼키려고 하고 있었다. 
  쇠돌이는 일본의 유력한 인사에게 들었다며 옥년에게 조선을 집어삼키려는 일본의 야욕을 
자랑스럽게 말한 일이 있었다. 
  "조선과 일본의 역사적 관계는 새삼스럽게 말할 필요가 없습니다. 조선의 위치는 동쪽 끝
에 있어서 해륙의 요충을 접하고 일본의 국방과 경제에 지대한 관계가 있습니다. 조선을 얻
고 잃음은 일본군의 흥망성쇠를 결정하기에 족합니다. 지난 해  청국과 병력으로 맞서 일본
군이 피를 흘리고 뼈를 갉아 내기를 굳이  마다하지 않았던 것은 바로 이와 같은 까닭입니
다. 일본은 조선을 결코 놓치려 하지 않기 때문에 진작부터  일본과 가까이 지내는 것이 좋
습니다."
  "그것은 매국하는 일이야."
  "매국이오? 조선은 망해야 합니다. 이  나라가 어디 인민들의 것입니까?  이 나라는 일부 
양반들과 관리들의 것입니다. 양반이나 관리가 아니면 짐승처럼 살다가 죽는 것입니다. 양반
들은 세금을 내지 않아도 괜찮고 부녀자를 겁탈해도 괜찮으니 우리네는 무슨 희망으로 살아
가겠습니까? 이런 나라는 일찍 망해버리는 것이 좋습니다."   뜻밖에 쇠돌의 낯빛은 단호하
게 굳어 있었다. 옥년은 어떤  말로도 쇠돌이를 돌아서게 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네 아버지는 왜놈을 물리치기 위해 동학에 들어가 있어."  "아버지가 동학에 들어갈 때는 
일본인들이 이 땅에 들어오지도 않았습니다."  "네가  일본군에 들어간다면 네 아버지와 적
이 되는 것이야. 그리고 조선인이 일본군에 들어가서 무얼 하겠다는 거야?"
  "전 일본인이 될 것입니다. 조선은 제 뜻을 펴기가 너무 좁은  나라입니다."  "네 뜻이 도
대체 무엇이냐?"
  "북방 경영입니다."
  "북방 경영?"
  옥년은 어리둥절했다. 북방 경영이란 말은 쇠돌에게서 처음 듣는 말이었다. 
  "후쿠다 유키치 선생은 일찍부터 탈아론을  주장했습니다. 일본의 총리대신이나 외무대신
도 후쿠다 유키치 선생에게 영향을 받아 북방 경영을 계획하게 된 것입니다. 탈아론과 북방 
경영은 일본 조야의 일관된 정책으로 아시아에서 벗어나 세계의 강대국이 되자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조선을 발판으로 중국으로 뻗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나는 세계의 대세 
같은 것은  모른다. 그러나 조선인이 일본인이  되겠다는 것은 용납할 수 없다."
  "......."
  "네가 꼭 일본인에게 양자로 들어가서  일본 군대에 들어가겠다면 나하고 의절할  생각을 
해라."
  옥년은 쇠돌에게 단호하게 선언했다. 일본인들이 양산군  청송리 일대에 상륙하여 조선인 
부락을 노략질하고 부녀자들을 겁탈한 것을 생각하면 지금도 치가  떨렸다. 옥년도 그 사건
에 연루되어 동래부 구류간에 한 달 동안이나 갇혀 있으면서 모진 고문을 당했던 것이다. 
  "전 반드시 일본 군대에 입대하겠습니다."
  쇠돌이 입술을 깨물고 있다가 벌떡 일어섰다.
  "그렇다면 내일 아침 일본으로 떠나거라!"
  옥년은 피가 역류하는 듯한 기분을  느끼며 차갑게 내뱉았다. 그것으로 끝이었다.  쇠돌은 
이튿날 일본으로 떠났고 옥년은 쇠돌이 떠나기  전 일년치 학비를 봉필을 통해  건네주고는 
다시는 옥년 앞에 나타나지 말라고 했던 것이다. 
  그런데 그 쇠돌이 일 년이 채 못되어 동래로 돌아왔다는 소문이 들리고 봉필과 박 서방이 
갑자기 관군에게 잡혀 간 것이다. 동학 농민군이 진압된 지 6개월이 지난 이제 와서 그들이 
관군에게 잡혀 간 것은 관군의 뒤에 일본군이 있고, 일본군을 사주한 인물이 쇠돌이라고 밖
에 생각할 수 없었다. 
  옥년은 그 생각을 하자 머리털이 곧추 서는 듯한 기분이었다. 
  (네 놈이 나를 어떻게 하는지 두 눈 부릅뜨고 볼 것이다!)  옥년은 쇠돌이의 배신이 믿어
지지 않았다. 물론 일본인의 양자가  되어 일본군대에 들어가겠다는 쇠돌에게  먼저 의절을 
선언한 것은 옥년이었다. 그러나  옥년은 일본인의 양자가 되겠다는 쇠돌을 용납할 수가 없
었다. 
  쏴아. 바람이 더욱 사나워지면서 빗발이 대문간에 서 있는 옥년에게까지 몰아쳐왔다. 옥년
은 빗줄기가 하얗게 쏟아지고 있는 신작로를 넋을 놓고 바라보았다. 비바람 속에 헤매고 있
을 옥순을 생각하자 옥년은 가슴이 조각조각 찢어지는 것 같았다. 
  "이리 오너라!"
  관군이 옥년을 잡으러 몰려 온 것은 옥순을  떠나 보내고 나서 한 시간도 못되었을 때였
다. 옥년은 신식 군대의 옷을 입고 어깨에 총을 멘  관군이 들이닥치자 옥순을 떠나 보내기
를 잘 했다고 생각했다. 
  "무슨 일이오?"
  옥년은 관군의 우두머리에게 물었다. 관군들은 비를 흠뻑 맞은 채 대문간에 서 있었다. 
  "서 소사를 잡아오라는 사또의 명이시다."
  "무슨 죄목으로 잡아오랍디까?"
  "무슨 죄목인지 몰라서 묻는가? 봉필이라는 작자가 동학군에 가담하고 미곡상을  하는 박 
서방이 동학군에 쌀을 대주었다는 것이 다 드러났다."
  관군의 우두머리가 관군들에게 옥년을  포승줄로 묶으라고 지시했다.  옥년은 관군들에게 
포승줄로 묶이면서 입술을 깨물었다. 이런 일이 닥치리라는 것을 막연히 짐작하고 있었으나 
막상 관군들에게 묶이는 몸이 되자 가슴이 타는 것 같았다. 
  "가자."
  관군들이 총대로 옥년의 등을 떠밀었다. 옥년은 관군들에게 등을  떠밀려 대문을 향해 걸
음을 떼어놓았다. 여자들이 불안한 눈길로 마루 끝에 서서 옥년을 살폈으나 옥년은 아무 말
도 하지 않았다. 여자들에게 해줄 말이 아무 것도 없었다. 
  밖에는 빗발 때문에 캄캄했다. 관군들은 대문 밖으로 나서자  옥년을 총대로 마구 후려쳤
다. 
  "뛰어!"
  "빨리 뛰란 말이야!"
  옥년은 관군들에게 총대로 얻어맞으며 세찬 빗줄기 속을 달리기 시작했다. 관군들은 비를 
맞지 않기 위해 옥년을 마구 후려 패고 있었다. 
  (더러운 놈들!)
  옥년은 피가 나도록 입술을 깨물었다. 옥년은 치마를 입고 있었고, 치마는 금세  빗줄기에 
흠뻑 젖어 몸에 척척 감기고 있었다. 관군들의 달음질에 맞춰 뛸 수가 없었다. 길바닥도  빗
물이 넘쳐 발목이 묻혀 첨벙거리고 뛰어야 했다. 
  "어이쿠!"
  옥년은 동래부 관아 못미처에서 발을 헛디뎌 엎어졌다. 그러자  관군들이 옥년의 등과 궁
둥이를 마구 발길로 찼다. 
  "빨리 일어나!"
  옥년은 관군들의 발길질을 그대로 당했다. 
  옥년은 동래부 구류간에 갇혔다. 
  비는 옥년이 구류간에 갇혀 그날 저녁부터 맑게 개었다. 옥년은 무릎을 세우고 앉아서 구
류간의 창살 너머로 달을 쳐다보았다. 6월 보름을 지난 지 사흘, 구류간에서 보는 달빛은 희
다못해 푸르스름했다. 
  옥년은 창살 너머로 푸른빛을 뿌리고 있는 달을 오랫동안 쳐다보았다. 잠이 오지  않았다. 
관군은 옥년을 구류간에 집어넣고는 아무 심문도 하지 않고  있었다. 죄목이 무엇인지 설명
도 전혀 없었다. 
  옥년은 흙벽에 등을 기대고 무겁게  한숨을 내쉬었다. 지팡이에 의지하여  비바람 속으로 
떠나가던 옥순의 초라한 모습이 자꾸 눈에 밟혔다. 
  (옥순이의 모습이 어찌 그리고 내 모습을 닮았을까...)  옥년은  그런 생각을 했다. 구류간
에 갇히자 생각이 더욱 많아지고 투명해졌다. 옥년은  벽에 기대앉아서 많은 생각을 했다. 
  옥년이 지금까지 살아 온 이 세상은 허전하고 쓸쓸하기만  한 것이었다. 옥년은 오랜만에 
자신의 일생을 뒤돌아보았다. 그런 생각을 처음 한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자신의 덧없는 삶
을 처음부터 끝까지 뒤돌아 본 것은 구류간에 갇힌 뒤로 처음이었다. 
  (나는 정말 사람답게 살아 본 적이 없는 것 같아...)  옥년은  자신의 생애가 쓸쓸했다. 거
렁뱅이를 따라 다니던 시절부터  박달을 만나 살을 섞고 살던  일, 유두례와 이행리와의 만
남, 추위와  굶주림... 동래까지 흘러와서 배고픔을 면하기는 하였으나 사람답게 살아 본 적
은 한 번도 없었다. 
 (나는 결국 버러지로 태어나서 버러지로 죽는 거야...)   옥년은 그 생각을 하자 목이 메였
다. 
  (역시!)
  추선이 동래부 구류간으로 옥년을 찾아 온 것은 6월  하순이 가까워지고 있을 때였다. 옥
년은 추선으로부터 쇠돌이 술집과 미곡상을 모두 일본 상인에게 팔아버렸다는 얘기를  듣고
는 눈을 질끈 감았다. 
  (그래, 내 짐작대로 쇠돌이 꾸민 일이었어...)
  옥년은 맥이 풀려 벽에 등을 기대고 앉아서 우두커니  허공을 쳐다보았다. 자신도 모르게 
자꾸 웃음이 비어져 나오고 있었다. 
  옥년은 그날 밤 구류간에서 끌려 나왔다. 달도 없이 캄캄한 밤이었다. 관군들은 옥년을 포
승줄로 묶어서 동래서 수구문 밖으로 끌고 갔다. 
  추선이 옥년의 시체를 찾아낸 것은 이튿날 석양 무렵이었다.  추선이 동래부 구류간에 면
회를 가자 옥졸들이 지난밤에 동학 죄인들과 함께 관군에게 끌려나가 처형되었다고  알려주
었던 것이다. 그러나 어느 곳에서 처형이  되었는지 알 수 없었다. 추선은 발이  부르트도록 
동래성 밖을 헤매고 다니다가 수구문 근처의 한 도랑에서 총에 맞아 죽은 옥년의 시체를 발
견했다. 
  (동학 죄인이라면서 문초 한 번 하지 않고 총살을 했군...)  추선은 비감했다. 
  옥년은 왼쪽 앞가슴 쪽에 총탄이 관통해 있었다. 
  (모두가 한 줌 흙이야...)
  추선은 핏자국이 말라붙은 옥년의 앞가슴에 들끓고 있는 파리떼를 쫓을 생각도 하지 않고 
도랑뚝에 쪼그리고 앉아서 노을이 지고 있는 서편 하늘을  쳐다보았다. 하늘은 핏빛으로 붉
게 물들어 있었다. 
........................................
  1) 북방경영은 야마베 겐타로의 {한일합병사}에서 인용했다. 

    제 42 장  나는 조선의 국모다
  청량한 가을 아침이었다. 일본 공사 미우라 고로오 육군 중장은 다다미 위에서 눈을 뜨자 
유까다(욕의) 한 겹을 몸에 걸친 채 창가로 다가갔다. 그는 아침에 일어나면 먼저 커튼을 젖
히고 북악을 바라보는 것이 버릇이 되어 있었다. 북악은 준평원  상에 솟아 있는 잔구로 인
왕산, 북한산, 남산과 함께 한성을 둘러싸고 있는 병풍 같은 산이었다. 그 북악 아래 조선의 
왕궁 경복궁이 웅자를 자랑하며 우뚝 솟아 있었고, 그 경복궁의 수십, 수백 채나 되는  전각 
어느 곳엔가에는 미우라 일생 일대의 사냥감인 여우가 살고 있었다. 
  (여우라, 정말 적절한 별명이군...)
  미우라는 커튼을 젖히며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여우는 일본인들이 조선인 왕비 민비에게 
붙인 별명이었다. 민비는 확실히 여우라는 별명이 어울릴 정도로 화사하고 아름다운 여인이
었다. 45세라고는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하얀 피부에 눈은  푸른빛이 느껴질 만큼 서늘하게 
맑았다. 미우라는 민비를 처음 대면했을 때 민비의  나이가 25, 6세로밖에 생각되지 않았다. 
첫 대면에서 민비는 미우라 공사에게  잘 부탁한다는 의례적인 인사만  부드럽게 말하였다. 
그러나 빈틈없이 총명해 보였다. 
  (내가 저 아름다운 여인을 제거해야 하는 책임자란 말인가?)  미우라 공사는 그때 처음으
로 조선 공사로 부임해 온 자신의 위치가 후회스러웠다. 
  그가 조선 공사로 부임한 것은 내무대신을  역임하고 조선 공사를 지낸 이노우에  백작의 
추천에 의해서였다. 미우라 공사는 이노우에와 같은 고향인 야마구치 번사 출신이었다. 미우
라는 1881년 4장군 상주사건을 일으킨 바 있었다. 서남전쟁 이후의 국회개설운동,  훗카이도 
유물개척사관 불하문제에 분노한 일본 육군 장성들이 천황에게 직접 상주하여 재결을  요구
하여 군인이 정치에 개입했다는 비난을 받은 사건이었다. 일본  육군 당국은 군기를 위반했
다고 하여 처벌을 주장했으나 마땅한  조항이 없어 흐지부지 되었다. 그러나  그 사건 이후 
미우라에게는 강경파라는 별명이 붙어 버렸다. 조선 공사의 부임  추천을 받은 미우라는 일
본 내각에 3개항의 기본정책을 제시하고 승인을 요구했다. 
  <대 조선정책 1안: 조선을 동맹의 독립국으로 하여 장차 일본 단독으로 조선 전토의 방위 
및 개혁을 담당한다.>
  미우라의 제1안은 조선의 보호국화를 요구하는 정책이었다. 조선을 일본의 식민지로 만들
겠다는 정책이었으나 열강의 간섭을 초래할 우려가 있었다. 
  <대 조선정책 2안: 조선을 열강과 공동 보호의 독립국으로 한다.>  제2안은 조선을 열강
과 공동으로 식민지화하자는 정책이었다. 
  <대 조선정책 3안: 가까운 장래에 한 둘의 강대국과 교전을 피할 수 없다면 이를 지양하
고 그 강대국과 조선을 분할 점령한다.>
  제3안은 러시아와 조선을 반으로 나누어 통치하자는 정책으로 미우라는 이 세 가지 정책
을 제시하면서 곤란을 돌보지 않고  목숨을 조선 땅에 바칠 결심이다,  하고 단호한 의지를 
나타내고 있었다. 
  미우라의 정책에 대해 일본 내각은 아무 확답도 해주지  않았다. 미우라는 공사직을 사퇴
하고 아타미에 틀어박혀 버렸다. 
  그러나 일본의 내무대신인 노무라 야스시와  야마가타 아리모토의 설득에 의해  미우라는 
조선 공사로 부임하게 되었다.
  "3대 정책은 함부로 결정을 내릴 수 없는 중대한 사안이다.  일단 조선 공사로 부임하라."  
야마가타의 제안을 들은 미우라는 역정을 냈다. 
  "도대체 내각에서 아무 정책도 제시해 주지 않으면서 공사로 부임하라는 것은  무슨 까닭
인가?"
  "우리는 청나라의 전쟁에 10만의 군대를 파견했다. 지금  또다시 러시아와 교전하기 위해
서 군대를 동원할 수는 없다."
  "그렇다면 나 혼자서 러시아와 대적하라는 것인가?"
  "그렇다. 그대는 3대 정책을 제시하면서 조선 땅에  목숨을 바칠 결심이라고 소신을 밝히
지 않았는가? 총리대신께서는  그대의 소신을 듣고  몹시 기뻐하고  계신다."  "총리대신께
서?"
  "그렇다. 총리대신께서는 그대에게 이노우에 백작을 만나라고 하셨다."  "알겠다."
  미우라는 그날로 이노우에 가오루를 만났다. 이노우에  가오루는 미우라에게 조선의 정세
를 상세하게 설명을 한 뒤 조선의 공사직을 수락할 것을 촉구했다. 
  "나는 외교관이 아닌 군인이다. 군인인 내가 지금 조선  정책이 혼란스러울 때 조선에 공
사로 가는 것은 온당한 일인가?"
  "조선은 전문 외교관이 아닌 무인 공사가 필요하다."  "무슨 뜻인가?"
  "조선엔 여우가 한 마리 살고 있다. 이 여우를  사냥해야 하는데 전문 외교관이 필요하다
고 보는가?"
  "여우란 누구를 말하는가?"
  "러시아를 끌어들이고 있는 조선의 왕비다."
  미우라는 그때 숨이 멎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조선의 왕비가 여걸이라는 소문은 일본 조
야에까지 파다하게 퍼져 있었다. 
  "총리대신께서도 허락하신 일인가?"
  "물론이다."
  "그렇다면 문서로 약조할 수 있는가?"
  "이 일은 일본을 위하여 하는 것이다. 사사로운 욕심으로  하는 일이 아닌데 어찌 문서로 
약조하기를 바라는가?"
  "조선의 왕비를 제거하는 것은 평생 군인의  길을 걸어온 나의 명예와 관계되는 일이다."   
"그대의 명예가 일본보다 소중한가?"
  이노우에의 날카로운 질책에 미우라는 얼굴이 창백하게 변했다. 
  "좋다. 그렇다면 조선에 부임하겠다."
  "여우를 사냥하는 일은 스기무라 1등 서기관과 협의하기  바란다. 이것을 조선 공사로 부
임하는 그대에게 위임하는 것은 총리대신 각하의 뜻이기도 하다."  총리대신은 이토오 히로
부미였다. 
  미우라는 그렇게 하여 전혀 문외한인 군인  출신으로 조선 공사로 부임하게 되었던  것이
다. 조선 공사로 부임하는 미우라를 위해 도쿄의 제국호텔에서 일본 내각의 전 각료가 참석
하는 성대한 송별식이 열렸다. 일개 공사로 부임하는 외교관의  송별식으로 전례가 없는 파
격적인 것이었다. 
  (이것은 마치 출정식 같군...)
  미우라는 전 각료의 성재한 송별식에  어깨가 무겁게 느껴졌다. 조선의  왕비를 제거하는 
것은 그것이 일본의 국익이 되는 것은 틀림없는 일이었으나 그 자신의 장래는 보장할 수 없
는 것이었다. 어쩌면 일본을 위해 자신은 희생양이 될지도 모르는 것이다. 그러나 우직한 군
인인 미우라는 기꺼이 그 짐을 떠맡을 각오로 조선 공사로 부임한 것이다. 
  (이것은 내가 일본에 바치는 마지막 봉사가 되겠지...)  미우라는 이따금 그런 생각을 하였
다. 조선의 왕비인 민비를  제거하는 것은 일본 조야에서 지난해 말부터 은밀하게 거론되고 
있었다. 그러나 직접적인  동기는 조선이 일본을 배척하고 친러 정책을 쓰기 시작했기 때문
이었다. 3국간섭 이후 더욱 두드러진 조선의 인아거일 정책은 조선의 독립을 위해 청나라와 
전쟁까지 불사했다는 자부심을 갖고 있던 일본을  여지없이 모독하는 것이었다. 일본인들은 
일본 최대의 적인 러시아보다 조선을 더욱  증오하였고 그 증오심의 대상의 중심엔  언제나 
러시아와 조선의 연결 고리인 민비가 있었다. 
  일본인들은 민비를 철저하게 증오하였다.  일본 젊은이들의 피값으로  빼앗은 요동반도를 
러시아의 간섭으로 청나라에 되돌려 주고 입안에 넣은 것이나 마찬가지인 조선이라는  땅덩
어리를 다시 뱉어내야 하는 현실에  격렬하게 반발했다. 특히 조선에  거류하는 일본인들의 
분노는 미우라가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더 격렬했다. 일본  본토에서는 조선 문제를 정치인
들만이 심각하게 논의하고 있었으나 조선에서는 상인들까지 민비를 제거해야 한다고 날뛰고 
있었다. 
  맹목적인 애국심이었다. 일본의 군부도 이 기회에 조선을 병합해야 한다는 여론이 드높았
다. 그러나 일본 내각은 신중했다. 조선을 병합하는 것은 손바닥 뒤집기보다 손쉬운  일이었
으나 러시아를 비롯한 열강의 간섭을 초래할 우려가 있었다. 
  일본 내각은 열강의 간섭을 받지 않고 조선을 지배하려는 계획을 극비리에 세우기 시작했
다. 그 계획안은 여러 가지가 모색되었으나 마지막으로 결정된 것이 민비의 제거였다.  물론 
그것은 공식적인 논의의 대상이 아니어서 각류들 중에서도 총리대신 이토오 히로부미와  이
노우에 가오루가 그 중심 역할을 했다. 
  미우라는 조선에 도착한 뒤에 그 사실을 숨기기 위해 은인자중하며 불경에 몰두하는 척했
다. 그러나 뒤로는 민비에 대한 정보를 수집하고 여우를 사냥하는 방법에 대해서 골똘히 연
구했다. 무엇보다 러시아를 비롯해 열강 공사들의 동정에 촉각을 곤두세웠다.
  미우라는 3성장군 출신답게 치밀한 계획을 세우기 시작했다. 
  그는 처음에 민비에게 강한  반감을 가지고 있는 대원군에게  궐기를 촉구하고, 민비에게 
폭발 직전의 불만을 갖고 있는 훈련대를 조종하여 정변을  결행하도록 하려고 했었다. 그렇
게만 되면 일본은 뒤에서 공작만 해도 되기 때문에 열강들로부터 간섭을 받을 우려도 없었
다. 
  훈련대는 2월에 창설된 조선의 군대로 병력은 약 8백 명이었고, 일본 장교들이 조련을 했
기 때문에 친일 군대였다. 제1대대장 이두황,  제2대대장 우범선, 중대장 남만리, 이범래  등 
지휘관들도 친일본당 인물들이었다. 
  민비는 친일 군대인 훈련대를 장악하기 위해 연대장에 홍계훈을 임명했으나 홍계훈  혼자
서는 이들을 장악할 수가 없었다. 홍계훈은 훈련대 장악이  실패로 돌아가자 마침내 훈련대 
해산을 민비에게 건의하기에 이르렀다. 훈련대는 박영효에 의해 궁궐 수비를 전담하려고 했
으나 민비에 의해 거부되었고,  민비는 왕비암살 음모를 획책했다는  구실로 박영효 체포를 
지시했던 것이다. 
  훈련대의 제2대대장 우범선과 제1대대장 이두황은 민비가 훈련대를 해산하기 위해 경무청 
순사들과 훈련대 병사들과의 충동을 조장하자 일본군과 일본 공사관에 구원을 요청하고  있
는 실정이었고, 훈련대 병사들은 민비에게 불만이 높아 폭발 직전에 있었다. 
  미우라는 훈련대 병사들에게 폭동을 유발시키려 했으나 조선 병사들로서는 실패할 가능성
이 높다고 생각되어 일본군 수비대를 주력으로 동원하게 되었다. 
  미우라는 민비 시해의 계획을 공사관 1등 서기관 스기무라 후카시, 궁내부 고문관 오카모
토 류우노스케, 군부 고문관 쿠스노세 사치히코 중좌, 한성신보 사장 아다치 겐조와 함께 세
웠다. 오카모토 류우노스케는 갑신정변에도 가담한 인물이었다. 
  아다치 겐조는 구마모토현 출신이었다.  그는 이노우에 가오루의  후원으로 한성신보사를 
설립하여 일본의 조선 침략 여론을 유도하고 우익 낭인을 거느리고 있는 야심 많은 정치인
이었다. 이노우에 가오루로부터 민비를 제거할 때 미우라 공사를 도우라는 특명을 받았으나 
미우라 공사가 조선에 부임하고서도 아무런 움직임이 없자 공사관을 방문하여 따졌다. 
  "여우사냥은 조만간 실행할 것이다. 이미 방략서까지 준비하고 있다."  미우라  공사는 비
로소 아다치에게 민비 시해 계획을 털어놓았다. 
  "여우사냥을 빠를수록 좋습니다."
  "아다치군. 아다치군은 구마모토현 출신의 장사들을 다수 거느리고 있지"  "그렇습니다."
  "자금은 누구에게서 받고 있나?"
  "이노우에 백작 각하로부터 받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번 일에 목숨을 버려도 괜찮겠군."
  미우라의 말에 아다치 겐조는 숨이 막히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조선의 왕비를 살해하는 
데 목숨까지 버려야 하는가. 어차피 이런 모험이 없이는 이노우에 백작의 신임을 얻을 수는 
없으니까... 아다치 겐조는 재빨리 그런 생각을 하면서 할복하는 시늉을 했다. 
  "여차하면 할복을 하겠습니다."
  "좋아."
  미우라는 그때서야 빙그레 웃었다. 
  "자네에게 우리 일본제국을 위해 죽을 수 있는 장사들이 얼마나  되는가?"  "30명은 됩니
다."
  "알았네. 그렇다면 별도의 지시가 있을 때까지 자중하고 기다리게."  미우라는  아다치 겐
조를 돌려보낸 뒤  민비 시해 방략서를 꼼꼼하게  검토하기 시작했다. 
민비 시해의 기운은 점점 무르익어 가고 있었다. 
  음력 8월 14일(양력 10월 2일) 미우라는 쿠스노세 중좌를 불러  군대 동원을 협의하고 수
비대 대장 마야바라 쓰토무 소좌에게도 군대를 동원할 것을 지시했다. 수비대의 중대장들에
게는 비밀이 새어 나가지 않도록 결행 당일 통고하도록 했다. 
  음력 8월 14일 한가위 전날이었다. 한성엔 둥근 달이 높이 떠올랐고 조선인들은 집집마다 
송편을 빚고 명절을 지낼 준비를 하느라고 부산했다. 그러나  일본의 공사관은 조선의 왕비
를 시해하기 위한 음모를 꾸미기에 혈안이 되어 있었다. 
  영사 경찰의 동원은 하기하라 히데지로오 경부에게 맡겼다. 
  민간인을 동원하는 것은 아다치 겐조가 담당했다. 아다치 겐조는 구니토모 시게아키, 히라
야마 이와히코, 고바야카와, 국민신문 특파원 기쿠치 겐조  등을 동원하였다. 이들은 신문사
에 관계하고 있던 인물들로 일본에서도 뛰어난 지식인들이었으나 민비 시해에 기꺼이  가담
하였다.
  오카모토 류우노스케와 호리구치 구마이치는 대원군 추대와 궁궐 침입의 대임을 맡겼다. 
  1. 조선군 훈련대와 대원군을 이용한다.
  2. 일본군 수비대가 대원군을 호위해 궁궐로 공격해 들어간다. 
  3. 대원군의 정사 간여를 막기 위해 사전에 약조를 해 둔다. 
  미우라는 이와 같은 계획을 세워 놓고 오카모토 류우노스케와 호리구치 구마이치를  대원
군에게 보내 대원군을 회유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대원군은 이를 완강하게 거부하여 계획을 
수정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1. 여우사냥의 총지휘는 미우라, 스기무라, 오카모토,  쿠스노세, 마야바라, 하기하라, 아다
치 등이다. 
  2. 여우사냥의 무력은 일본군 수비대가 주력을 담당한다. 
  3. 현장에서 여우를 사냥하는 것은 사복으로 위장한 낭인들이 담당한다. 
  4. 한성신보는 여우사냥이 끝나면 이를 대원군과 훈련대의 주모설로 여론을 유도한다. 
  3항의 낭인들은 단순한 건달들이 아니었다. 조선 조정의  일본인 고문과, 영사 경찰, 한성
신보의 기자 등 쟁쟁한 인물들이었다. 
  (이들이 지사들이기는 하지만 여우를 사냥하는 것은  아무래도 역부족인 느낌이 있다. 사
냥이라면 전문 사냥꾼이 해야 하는 것이 아닐까......?)  미우라는 지사라고  자부하는 낭인들
에게 민비 시해의 중차대한 임무를 맡기는 것이  어쩐지 불안했다. 그는 전형적인 군인이었
다.  말만 앞세우는 민간인들을 그다지 신뢰하지  않았다. 
  (여우를 사냥하는 것은 역시 우리 일본군이 해야 돼...)  미우라는 고심 끝에 훈련대의 교
관으로 활동하고 있는 미야모토 타케타로오 소위를  차출하여 비밀 지시를 내렸다. 
  "미야모토 소위! 귀관에게 특별 임무를 부여한다! 귀관은 지금  즉시 별동대를 편성하라!"  
"각하! 별동대의 임무는 무엇입니까?"
  "별동대는 여우사냥 작전의 현장 감독 및 살해를 담당한다!"  "각하! 여우사냥 작전의  살
해는 민간인 지사들이 담당하기로 하지 않았습니까?"  "민간인들을 믿을 수가 없다! 민간인
들이 우왕좌왕할 때 귀관이 신속하게 살해하라!"  "알겠습니다."
  "물러가라!"
  "핫!"
  미야모토 소위가 부동자세로 거수경례를 하고 물러갔다. 미우라는  음력 8월 22일을 결행
일로 잡았다. 그들은 계획이 누설되지 않게 하기 위하여  오카모토와 쿠스노세 중좌를 일본
으로 귀국시키는 것처럼 위장하여 인천으로 보내 대기시켰다. 한성에 있는 조선인들 사이에
도 일본인들이 왕비를 시해하려 한다는 불온한 소문이 파다하게 나돌고 있었다. 
  민비가 총명한 여인이라면 받드시 이에 대한 대책을 세우고 있을 것이었다. 
  고바야카와 히데오는 한성신보의 편집장이었다. 그는 운명의  날이 가까이 다가오자 궁궐
의 내부를 정탐하기 위해 경복궁의 정문 광화문을 지키는 시위대의 병사들에게 뇌물을 주면
서 잠입을 시도했으나 끝내 실패하고 말았다. 고바야카와의 보고를 받은 미우라는 계속해서 
정탐하도록 지시했다. 
  (어쨌든 우리는 이미 궁궐에 수많은 첩자들을 파견하고 있으니 여우를  사냥하는 것은 어
려운 일이 아니야...)
  미우라는 고색창연한 궁궐쪽을 바라보며 기분이 유쾌해졌다. 이제 며칠 있지 않으면 그의 
지휘로 조선의 왕비가 역사의 무덤 속으로 사라진다는 생각을 하자 온 몸이 짜릿한 전율 같
은 흥분이 번져나갔다. 
  그는 침상을 돌아보았다. 침상 위에는 그가 일본에서 데리고 온 젊은 기녀 아마기 모모꼬
가 유까다 차림으로 잠들어 있었다.  얇은 이불 한 장을 걸쳤으나  그것은 여체의 매끄러운 
곡선에서 흘러내려 침상에서 뒹굴고 있었다.  모모꼬의 유까다는 함부로 걷혀  있어 포실한 
허벅지가 우유빛으로 드러나 있었다. 
  (여인으로 완숙하지는 않지만 꽃봉오리처럼 싱그러운 느낌이 있군...)  미우라는 하체가 뻐
근해 오는 듯한 기분을 느꼈다. 모모꼬는  이제 열 아홉 살이었다. 그러나 일찍부터  기루에 
들어가 남자들의 손에 길들여진 탓에  가슴이며 둔부가 풍만하게 발달해  있었다. 미우라는 
조선에 공사로 부임할 때 모모꼬를 하녀로 위장하여 데리고 들어왔었다. 
  미우라는 커튼을 여미고 모모꼬에게 다가갔다. 간밤에도 모모꼬를 품에 안았으나 또 다시 
춘정이 동하고 있었다. 
  미우라는 모모꼬의 허벅지에 슬그머니 손을 얹었다. 
  미우라의 투박한 손은 모모꼬의 비경을 찾아 탐색을 시작했다.  모모꼬는 유까다 안에 아
무 것도 걸치지 않고 있었다. 미우라의 손은 조금도 방해를  받지 않고 금세 모모꼬의 계곡
과 숲을 점령하고 샘을 찾았다. 
  "아,"
  모모꼬의 입이 벌어지고 탄성이 흘러나왔다. 벌어진 입술 사이로  일본인 특유의 하얀 덧
니가 보였다. 
  미우라는 모모꼬의 유까다 앞섶의 옷고름 매듭을  풀렀다. 유까다의 옷자락을 풀어헤치자 
모모꼬의 하얀 몸뚱이, 희고 뽀얀 젖무덤  두 개와 군살이 없는 복부, 그리고  삼각분기점의 
숲이 미우라의 눈에 그대로 노출되었다. 
  "각하..."
  미우라가 유까다를 벗고 모모꼬 위에 엎드리자 모모꼬가 게슴츠레한 눈을 떴다. 
  "모모꼬. 나를 또 받을 수 있겠나?"
  "각하. 저는 상관이 없습니다만은 각하께서 무리를 하시는 게..."  "간밤에 고통스러워하는 
것 같았어."
  "각하께서는 힘이 넘치시는 분이니까요. 저는 간밤에 무척 행복했습니다. 각하께서는 저를 
미칠 것 같은 쾌락으로 이끌어 주십니다."
  "그렇다면 다시 한 번 그러한 쾌락을 맛보게 해주지."  "각하..." 
  모모꼬가 미우라의 등에 팔을 감았다. 그러나 미우라가 행위에 들어가기도 전에 다급하게 
목조계단을 올라오는 발자국소리가 들렸다. 
  "각하. 누군가 올라오는 것 같습니다."
  "걱정마라. 급한 일이 아니면 돌려보낼 테니..."
  "아, 각하..."
  모모꼬의 입이 크게 벌어졌다. 창호지 한 장으로 가린 쇼지문 밖에서 계단을 올라오는 발
자국소리가 들리는데도 미우라는 그녀의 몸을 헤집고 깊숙이 들어오고 있었다. 
  "각하!"
  "누구냐?"
  "스기무라 서기관입니다."
  "무슨 일인가?"
  "군부대신 안경수가 찾아왔습니다."
  "기다리라고 하게!"
  미우라는 짜증스럽게 내뱉았다. 그러나 스기무라 서기관은  물러가지 않고 미우라를 재촉
했다. 
  "각하! 다급한 일입니다. 조선의 국왕이 훈련대를 해산한다는 조칙을 8월 20일자로 내렸습
니다. 
  "뭐야?"
  미우라는 그때서야 모모꼬의 알몸에서 떨어져 일어나며 소리를 버럭 질렀다. 
  "군부대신이 승인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알았네!"
  미우라는 다급하게 나신에 하오리와 하카마를 걸쳐 입고 1층으로 내려갔다. 1층 응접실엔 
조선의 군부대신 안경수가 도착하여 차를 마시고 있었다. 
  "민영준이 궁내부에 입궐하는 것과 음력 8월 20일자로 훈련대 해산을  결정했음으로 공사 
각하의 승인을 바랍니다."
  "왕후폐하의 결정이십니까?"
  "대군주폐하의 결정입니다."
  "대군주폐하의 결정이라면 반대할 수 없지요. 왕후폐하께 잘 말씀드려 주십시오."  미우라
는 부드럽게 응대하여 안경수  군부대신을 돌려보냈다. 그러나  안경수가  돌아가자 미우라
는 스기무라 서기관과 함께 심각하게 훈련대 해산 문제를  논의하기 시작했다. 민비의 제거
는 음력 8월 22일로 예정되어  있었다. 그러나 훈련대가  8월 20일에  해산된다면 훈련대를 
이용하려는 계획이 수포로 돌아가는 것이다. 민비를 시해하는 결행일을 앞당기지 않으면 안
되었다. 
  "결행을 앞당겨도 수비대 동원은 지장이 없겠나?"
  미우라는 수비대 대장 마야바라 쓰토무 소좌를 불러서 수비대 동원이 가능한지 확인했다. 
  "각하. 수비대는 지금 당장이라도 결행할 수 있도록 만반의 준비를 갖추고 있습니다."  마
야바라 소좌의 대답으로 결행일이 8월  20일(10월 8일) 새벽으로 결정되었다. 이때부터 일본 
공사관은 분주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인천에 대기하고  있는 오카모토와 쿠스노세 중좌에
게 급히 한성으로 돌아오라고 전보를 치고  마야바라 소좌, 하기하라 경부, 아다치  겐조를 
소집하여 구체적인 지시를 하기 시작했다. 
  한성신보사의 편집장 고바야키와가 두 번째로 경복궁 주의를 정찰하고 돌아오자 신문사는 
이미 30명 정도의 낭인들이 몰려들어 웅성거리고 있었다. 그들은  잔뜩 흥분한 목소리로 오
늘 밤 쳐들어간다, 오늘 밤 여우의 하문을 검사하기로 했다! 하며 칼을 준비하고 총을 소제
하고 있었다. 모두들 비장할 정도로 긴박감에 휩싸여 있었다. 
  고바야카와 히라야마는 일본에 있는 가족들에게 보낼 유서를 작성했다. 그들은 조선의 시
위대가 수비하는 궁궐의 경비를 뚫고 돌진해야 하는 까닭에  흥분 속에서 유서를 작성했다. 
그러나 일본군 수비대가 그들을 보호하여 민비가 있는 침전까지 데려다 주기로 했으므로 죽
음에 대한 공포심은 그다지 느끼지 못하였다. 
  가을 해는 짧았다. 정동 골목에 땅 그림자가 길게 깔리기 시작하면서 정동 일대에 수상스
러운 일본인들의 발길이 부쩍 잦아졌다. 
  유서를 쓰고 칼을 간 고바야카와에게 사장인 아다치가 찾아왔다. 
  "오늘의 작전에 우리 신문사의 전원이 참석할 수는 없다. 고바야카와군. 내일 신문을 발행
하기 위해서는 편집장인 자네가 남아야 하네."
  고바야카와에게는 청천벽력과 같은 지시였다. 
  "지금에 와서 제가 어떻게 빠질 수 있습니까?"
  고바야카와는 분개하여 격렬하게 항의했다. 
  "고바야카와군! 신문은 반드시 발행해야 하네!"
  "저는 빠질 수가 없습니다!  여우사냥에 제가 빠진다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입니
다!"
  "고바야가와군이 정 빠질 수 없다면 구니토모군 주필인 자네가 남게."  아다치 사장은 주
필인 구니토모에게 남으라고 지시했다. 그러나 구니토모는 여우사냥에서 자신을 빼놓겠다면 
신문사를 사직하겠다고 단호하게 말하였다. 아다치 사장은 고민 끝에 민비를 살해하는 일이 
성공하든 실패하든  내일 아침 8시까지 신문사로 돌아오라는  조건으로 고바야카와를 거사
에 참가시키기로 하였다. 
  날은 어느덧 캄캄해져 있었다. 
  한성신보사의 아다치 사장은 8시쯤에 집으로 돌아와 부인 유키코와 함께 식사를 같이 했
다. 유키코는 이제 20세로 3개월 전에 남편을 따라 조선에 들어와 살고 있었다. 
  "오늘 밤 나는 조선의 왕궁에  들어가 왕비를 살해하는 대사에  참여하기로 했소. 걱정은 
조금도 할 필요 없소. 일본군 수비대가 우리를 호위할 테니..."   "조선의 왕비를 살해하신다
구요?"
  유키코는 놀라서 소리를 질렀다. 
  "조선의 왕비를 제거하는 것은 일본의 지사라면 누구나 꿈꾸고 있는 일이오. 재수가 없으
면 죽을지도 모르기 때문에 당신을 한 번 더 안고 싶소."  "왜 하필 조선의 왕비를..."
  "시간이 없소."
  유키코가 불안한 표정으로 말했으나 아다치 사장은 성급히 유키코를 쓰러뜨리고 옷을  벗
겼다. 조선의 왕비를 살해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이 아다치의 어깨를 무겁게 짓누르고 있었다. 
  "당신..."
  유키코는 어찌된 영문인지 잘 알 수 없었다. 낮부터 신문사의 공기가 심상치 않다는 것은 
눈치챌 수 있었으나 조선의 왕비를 살해하는  일에 남편이 가담한다는 것은 상상도  못했던 
일이었다. 
  "가만있어..."
  아다치는 거칠게 유키코를 다루었다. 전에 없던 일이었다. 그러나 그의 뇌리에는 오늘  밤 
내가 죽을지도 알 수 없는 노릇이야, 내가 죽으면 스무 살밖에 안된 유키코는 다른 놈의 품
에 안기게 될 거야... 하는 생각이 빠르게 스쳐 가고 있었다. 그런 까닭으로 아다치는 자신의 
아내를 겁탈이라도 하듯이 조급하고 거칠게 다루어 10분도 안되어 행위를 끝내 버렸다. 
  "미안해."
  아다치가 아내 유키코와 헤어져 공사관으로 가자 미우라 공사와 스기무라 서기관이  아다
치에게 오카모토와 충돌하지 말 것을 지시했다. 오카모토는 아다치  등과는 사이가 좋지 않
았다. 아다치는 공사관을 나와 신문사에 도착했다. 어느덧 시간은 10시가 지나 있었다. 아다
치는 낭인들을 거느리고 용산으로 달려갔다. 일본은 용산에서 일본군 병참부와 일본 경찰서
를 두고 있었다. 
  오카모토가 용산에 도착한 것은 8월 19일의 자정  무렵이었다. 아다치와 오카모토는 미우
라 공사에게서 받은 방략서를 가지고 한참동안  논의한 뒤에 공덕리에 있는 대원군의  별장 
아소정으로 향하였다. 
  음력 8월 19일이 지나 8월 20일 0시 30분 경이었다. 조선의  명절인 한가위를 지난 지 닷
새가 되었으나 달은 밝고 하늘은 물처럼 맑았다. 
  밤이 깊었는데도 조선의 민가에서는 이따금 다듬이질 소리가 들려 오고 있었다.
  일본인들은 긴 그림자를 밟으며 공덕리를 향해 바쁘게 걸음을 떼어놓았다. 그들의 행장은 
각양각색이었다. 양복을 입은 사람, 일본도를 어깨에 멘 사람, 일본도를 허리에 찬 사람,  짚
신을 신거나 조리(나막신)를 신은 사람도 있었고, 검은 비단 하오리(남자  기모노 위에 덧입
는 일본 웃옷)에 하카마(남자 기모노 위에 덧입는 하의) 차림의 정장을 한 사람도 있었다. 
  그들은 긴 그림자를 밟으며 한 시간 남짓 걸어서 버드나무 가로수가 길 양편으로 늘어서 
있는 공덕리의 아소정 담장 밑에 이르렀다. 
  미우라 고로오 일본 공사가 민비 시해 결행일을 앞당김으로써 일본군 수비대도  긴박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일본군 수비대 대장 마야바라 소좌는 각  중대장을 비상소집 하여 민비 
시해의 명령을 내렸다. 이날 참석한 수비대의 중대장들은  제18대대 제1중대 중대장 후지토 
요조오 대위, 제2중대 중대장 무라이 타카무네 대위, 제3중대 중대장 마키 마사스케 대위 등
이었다. 
  마야바라 소좌는 이들에게 <<여우사냥>> 방략서에 의한 작전 명령을 내렸다. 
  "제1중대는 용산 방면으로 행군하여 대원군 일행을 만나 1소대를 전위로 삼고  잔여 소대
는 조선군 훈련대의 후위가 되어 대원군을 호위 입궐하라!"   마야바라 소좌는 잔뜩 긴장한 
표정으로 서 있는 후지토 대위를 쏘아보았다. 
  "핫!"
  후지토 대위가 빳빳하게 부동자세를 취했다. 
  "제2중대는 시라키 중위, 타케나가 소위로 하여금 사다리를 휴대하여 경복궁 북쪽의 제문
을 경비하고 있다가 광화문에서 총소리가 나면 즉각 제문을 돌파하여 조선의 국왕과 세자를 
볼모로 잡으라!"
  "핫!"
  무라이 대위가 군도를 힘주어 잡으며 대답을 했다. 
  "여우사냥의 최대 목표는 조선의 왕비를 제거하는 일이다! 조선의 왕비를 제거할 때는 수
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도록 하나 가능한 일본군은 직접 살해하지 말고 민간인들을 보호하여 
왕비의 침전까지 인도한 뒤 민간인들이 척살하도록 하라!"  "핫!"
  "이미 제군들에게 작전의 개요를 설명한 바 있지만 <<여우사냥>>은 오로지 조선군 훈련
대와 대원군의 주도로 이루어지는 것으로  위장해야 한다! 따라서 무라이  중대장은 훈련대 
제1대대장 이두황에게 지시하여 훈련대 병사들과 함께 건춘문을 수비하라!"  "핫!"
  무라이 대위가 다시 부동자세로 대답했다.
  "제3중대는 광화문 및 그 양측의 경비를 맡고 1소대는 미우라 공사 각하의 입궐  때 호위
를 담당한다! 나머지 소대는 사다리를 준비하였다가 왕궁에 돌입하다!"  "핫!"
  마키 대위도 부동자세로 대답했다. 
  "어느 중대든지 건청궁에서 조선의 국왕을  포로로 만들면 시위대에 왕명을 내리게  하여 
전투를 중지하게 한 뒤 무장해제 하라!"
  "핫!"
  이번엔 각 중대장들이 일제히 대답했다. 
  "질문 있나?"
  "없습니다!"
  "좋다! 각 중대는 작전개시하라!"
  "핫!"
  마야바라 소좌의 명령에 일본군 중대장들이 일제히 대답했다. 
  일본군 수비대 제2중대장 무라이 대위는  즉시 조선군 훈련대로 달려가 야간훈련을  해야 
한다면서 대대장 이두황과 우범선에게 훈련대를 동원할 것을 요구했다. 이두황은 무라이 중
대장의 명령에 훈련대 중대장 이범래, 남만리에게 지시하여 훈련대 병사들을 동원하도록 했
다. 
  훈련대의 총책임자인 연대장 홍계훈에게는 알리지도 않은 채였다. 
  날은 이미 음력 8월 19일을  지나 8월 20일 새벽이었다. 일본군들은  완전무장한 채 한성 
장안의 요소요소에 배치되었다. 공덕리에서  대원군의 행렬이 도착하면  그대로 경복궁으로 
쳐들어 갈 예정이었다. 
  그러나 대원군의 행렬은 행동개시 시간이 되었는데도 좀처럼 나타나지 않고 있었다. 그것
은 대원군을 추대하는 일에 뜻밖에 시간이 걸렸기 때문이었다. 일본인들은 대원군에게 최대
의 정적인 민비를 제거하겠다고 하면 대원군이 흔쾌히 따라나설 것이라고 생각했으나  대원
군은 민비 제거를 완강하게 거부했다. 오카모토와 아다치 등은  온갖 방법을 동원하여 대원
군을 설득하려고 했으나 끝내 실패하고 말았다. 오카모토와 아다치, 호리구치 등은 대원군을 
설득하는 사이에 날이 밝으려고 하자 대원군을 강제로 끌어내어 가마에 태웠다. 
  아다치가 이끄는 낭인 패거리들이 행렬의 앞에 서서 대원군의 가마를 인도했다. 방략서에
는 남대문에서 가까운 고개에서 일본군 수비대와 합류하기로 하였으나 예정된 시간이  상당
히 흐른 뒤여서 서대문으로 곧장 달려들어갔다. 
  대원군 일행이 서대문 바깥의 대로에 이르자 우범선이 이끄는 훈련대 2대대가 도로 좌측
에 정렬하여 일행을 맞이하였다. 일본 수비대의 사관(장교) 수 명도 훈련대 병사들을 지휘하
고 있었다. 그러나 일본군 수비대의 본진은 약속 장소가 달라지는 바람에 미처 도착하지 않
고 있었다. 
  대원군 일행은 그곳에서 한 시간  정도 기다려야 했다. 날은 어느덧  훤하게 밝아 오려고 
하고 있었고 부지런한 조선인들이 하나 둘씩 모습을 나타내어 이들을 괴이한 눈빛으로 살피
고 있었다. 
  이내 일본군 수비대 본진이 도착했다. 마야바라 소좌의 지휘로  이들은 신속하게 돌격 대
형을 편성하여 앞으로 달려갔다. 그들은 구보로 서대문을 지나  정동 가로를 달려 경복궁의 
광화문 앞에 이르렀다. 그들은 작전 시간이 지체되었기 때문에 모두 헐떡거리고 있었다. 
  광화문 앞에는 쿠스노세 중좌가 말을 타고 도착해 있었다. 
  광화문의 성벽과 장안의 요소요소에는 이미 일본군이 대원군이 쓴 것으로 위장한  고시문
이 나붙어 있었다. 
  <여는 말한다. 근일에 간신배들이 국왕의 영총을 흐리고 있는 탓에 유신의 대업을 성취하
기가 어렵게 되었다. 이에 여는 대궐에 들어가 국왕을 보익하려 하노니 만약 그대들 백성이
나 병사들 가운데서 여의 앞길을 막는 자가 있으면 필연코 대죄로 다스릴 것이다. 
  이에 고유한다.
  개국 504년 8월 20일 
  국태공>
  대원군의 고시문은 훈련대의 동원을 용이하게 하고 민비 시해의 책임을 대원군과  훈련대
에 떠넘기기 위한 술책이었다. 
  하기하라 경부는 순사들을 지휘하여 사다리를 타고 광화문 옆의 석벽을 넘어가  광화문을 
열었다. 일본군 수비대는 와 하는 함성을 지르며 경복궁 안으로 돌진하였다. 그 뒤를 대원군
의 가마가 따르고, 야간훈련에 동원된 것으로만 알고 있던 조선군 훈련대, 일본군  수비대가 
함성을 지르며 돌진했다. 
  그때 훈련대의 연대장 홍계훈과 군부대신 안경수가 나타나 훈련대의 궁궐 침입을  저지하
기 시작했다. 일본군은 홍계훈을 피살했다. 홍계훈은 여덟 발의 총탄을 맞아 광화문  앞에서 
즉사했다. 
  비슷한 시간 궁궐 수비를 담당한 시위대의 연대장 현흥택은 새벽 4시에 일본군의 침입을 
알게 되었다. 그는 시위대의 교과 맥이 다이 장군에게  비상사태를 알리는 한편 시위대에게 
비상경계령을 내렸다. 
  광화문에서 최초의 총성이 울린 것은 새벽 5시경이었다.  현흥택은 시위대 병사들을 신무
문(북쪽 문) 쪽으로 배치시켰다. 신무문은 북악산 남쪽에 위치한 경복궁의 북문이었다. 그와 
함께 춘생문과 추성문 쪽에서도 요란한 총성이 들려왔다. 
  현흥택은 맥이 다이 장군과 함께 일본군 수비대를 저지하기  위해 필사적인 저항을 했다. 
그러나 시위대는 변변한 무기가 없었기  때문에 일본군을 효과적으로 방어할  수가 없었다. 
시위대의 병력은 5백 명 가량 되었으나 그날 궁궐을 수비하던 병사들은 3백 명 정도밖에 되
지 않았다. 게다가 3백 명의 병사들도 절반이나 비무장 상태였다. 
  그러나 현흥택을 더욱 분노하게 한 것은 시위대 병사들이 신무문에서 치열한 전투를 하고 
있는 동안 광화문을 돌파한 일본군 수비대가 어느 사이에 고종과 민비, 그리고 세자가 있는 
건청궁을 제압하여 고종과 세자를 포로로 만들었던 것이다. 
  고종은 경복궁 점령 때와 마찬가지로 시위대 병사들에게 전투  중지 명령을 내렸다. 목숨
을 버릴 각오를 하고 일본군을 방어하고 있던 시위대 병사들은 통곡을 하면서 전투를 중지
했다. 일본군은 재빨리 시위대의 무장을 해제하고 포로로 만들었다. 
  현흥택도 일본군에게 포로가 되어 군화발로 마구 짓밟혔다. 
  <이제 일본군대는 모두 왕과 왕비의 처소로 돌진하여  포위하였는데 일본인 몇몇은 일본
옷에 칼을 잡고 있었으며 일본 정규군은 어깨에 총을 메고  있었다. 그들이 나를 잡아 손을 
등뒤로 묶고 계속 폭행을 하면서 왕비의 소재를 추궁했다. 내가 모른다고 대답하자 나의 이
름을 물었다. 내가 시위대연대장 현흥택이라고  대답하자 나를 내실로 끌고  가면서 왕비가 
어디에 있는지 말하라고 협박하였다. 너희들이 죽인다고 해도 왕비가  어디 있는지 말할 수 
없다고 하자 나를 폐하께서 계신 방으로 끌고 가 폐하의 앞에서까지 왕비가 거기에 있으면 
말하라고 강요했다. 여전히 모른다고 말하자 각 감청으로 끌고  가 계속 폭행하면서 왕비의 
소재를 신문하였다. 나는 끝까지 이를  거부하였는데 처음부터 끝까지 나를  폭행한 자들은 
물론 일본인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대군주의  처소에 있던 많은 일본인들이  함성을 질렀고 
그제서야 일본인들은 나를 놓아두고 옥호루로 달려갔다. 그 후에는 일본인들은 아무도 나에
게 왕비의 소재를 묻지 않았다. 나는 의심이 들어 내실로  달려가 무슨 일이 있었는지를 살
펴보았다. 나는 대군주폐하가 그 곳의 바깥 건물인 장안당으로 옮겨진 것을 보았다. 나는 또 
그 곳의 안쪽 건물인 곤령합 옥호루에 왕비로 보이는 여인이 죽은 채로 누워 있는 것을  보
았다. 그때 나는 일본인들에 의해 거기서 내쫓겼다. 조금 후에 일본인들이 근처의 동쪽 숲에
서 피살된 왕비의 시신을 불태우고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현장에 달려가 보았는데, 타고 있
는 시신의 옷자락은 분명히 부인의 것이었음을 내 눈으로 똑똑히 보았다.>  일본 수비대의 
감시를 피해 미국 공사관으로 탈출한 현흥택이 대리공사 알렌에게 알린 내용이었다. 경복궁
으로 노도처럼 진입한 일본군은 미쳐 날뛰고 있었다. 그들은  조선의 국왕과 왕비의 침전인 
곤령합을 점거한 채  닥치는 대로 칼을 휘둘렀다. 고종과  왕세자 척은 공포 때문에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일본인들은 곤령합의 안팎을 누비고 다니며 궁녀들의 머리채를 잡아끌고 나
와 발길로 내지르고 마루 아래로 내던졌다.  궁녀들은 비명을 지르며 울부짖었다. 이 사실은 
궁궐의 전기기사인 러시아인 사바턴에 의해 목격되었다. 
  왕세자 척에게는 3명의 일본인들이 달려들었다. 척은 일본인에게  상투가 잡히고 옷이 찢
겨졌다. 낭인들 중에 하나는 불경하게도 왕세자 척의 목을  칼등으로 내리쳐 왕세자를 혼절
시키기까지 하였다. 
  건청궁 일대는 아비규환이었다. 
  일본군 수비대는 이 와중에도 외교적인 문제를 고려하여 고종과 왕세자를 장안당으로  옮
긴 후 곤령합을 완전히 포위했다. 조선군 훈련대는 우범선과 이두황, 남만리, 이범래의 지휘
를 받으며 시위대의 무장을 해제하고 대궐의 외곽 경비에  나섰다. 그들은 훈련대가 조만간 
해산되리라는 소문을 들었기 때문에 시위대의 무장해제를 기꺼이 맡았다. 
  "일본군이 총을 쏘며 대궐로 들어왔는데 무슨 영문이지?"  그러나 일말의 불안도 없지 않
았다.  훈련대 병사들은 대궐의 외곽을  경비하면서도 낮은 목소리로 귀엣말을 주고받았다. 
  "일본군이 대원군을 옹립한대. 대군주폐하를  둘러싸고 있는 소인배를  몰아 내고 유신의 
대업을 성취하겠다는 대원군의 고시문이 성문에 붙어 있었어."  "그럼 이 일이 대원군이 주
도한 일인가?"
  "잘은 모르네만 대원군과 일본이 중전마마를 몰아내기로 밀약을 했대."  "중전마마를?"
  "그래."
  "허! 이런 낭패가 있나?  그럼 우리가 중전마마를  시해하는 일에 동원된  것이 아닌가?"  
훈련대 병사들은 비로소 엄청난 사실을 알게 되어 몸서리를 쳤다. 
  옥호루는 이내 일본군에게 에워싸였다. 일본군들은 옥호루를  삼엄하게 에워싼 뒤 낭인들
과 일본군 별동대를 옥호루 안으로 들여보내 민비를 살육하게 했다. 
  민비는 그때 옥호루 안에 숨어 있었다. 일본군이 광화문과  신무문을 돌파했을 때 의화군 
강이 뛰어들어와 피난할 것을 권고했다. 그러나 민비는 궁중의 어른인 조대비가 연로하시어 
피난할 수가 없다, 또 피난을 하기에는 너무나 늦었으므로 이 자리에서 죽겠다... 하고  피난
하라는 제안을 거절했다. 
  "나는 조선의 국모이니라. 내 비록 원수의 왜인들에게  죽을지는 모르겠으나 의화군은 나
를 두고 속히 피신하라!"
  민비는 목소리는 처연했으나 태도는 의연했다. 
  의화군 강은 눈물을 머금은 채 민비를 설득하는 것을  포기하고 궁궐을 빠져나갔다. 민비
는 옥호루의 넓은 뜰에 학처럼 외롭게 서 있었다. 
  옥호루는 곤령합에 딸린 부속 건물로 ㄱ자 형태의 낮은 담장 안의 북쪽에 위치해 있었다. 
  대문은 모두 4개가 있었으나 일본군들이 보초를 서면서 출입을 차단하였고 옥호루 안 뜰
에도 40명의 일본군이 민비가 시해될 때를 기다리며 도열해 있었다. 
  일본 낭인들과 미야모토 소위는 별동대를 이끌고 옥호루의 방을  모조리 뒤져 나갔다. 그
들은 일본군의 삼엄한 보호 아래 옥호루에서도 궁녀들의 머리채를 끌고 나와 마당에 내동댕
이쳤다. 궁녀들은 비명을 지르며 울부짖었다. 
  <궁녀의 이야기로는 소란한 사태에 놀라 궁녀들이 왕비의 방으로 몰려들었는데 궁내부대
신 이경직도 그리로 달려왔다. 일본인 몇 명이 이 방으로 쳐들어왔고 이경직이 왕비의 앞을 
가로막았지만 일본인 폭도의 칼에 맞고 살해되었다. 공포에 질린  왕비가 자신은 단지 거기
를 찾아온 방문객일 뿐이라고 말했으나 다른 궁녀들도 같은 말을 되풀이하자 한 일본인 흉
한이 왕비를 내동댕이치고 구둣발로 가슴을 세 번이나 내리 짓밟고 칼로 찔렀다.>  왕세자 
척의 증언이었다. 이러한 사실은 영국 영사관의 힐리어가 북경에  있는 오코너에게 보낸 보
고서에서도 확인할 수 있었다. 
  <건천궁의 앞뒷문을 통해 일본군의 엄호 아래 침입해  들어온 민간복장의 일본인들은 한 
무리(조선군 훈련대 복장을 한 일본군)의 군인들과 함께 일본군 장교와 사병들이 경비를 서 
주었다. 그들은 곧바로 왕과 왕비의 처소로 가서 몇몇은 왕과 왕세자의 측근 인물들을 붙잡
았고 다른 사람들은 왕비의 침실로 향하였다. 이미 궁내에  있던 궁내부대신 이경직은 서둘
러 왕비에게 급보를 알렸고 왕비와 궁녀들이 잠자리에서 뛰쳐나와 숨으려 하던 순간이었다. 
그때 살해범들이 달려 들어오자 궁내부대신은 왕비를 보호하고자 그의 두 팔을 벌려 왕비의 
앞을 가로막아 섰다. 살해범들 중의 하나가 왕비를 식별하고자  손에 왕비의 사진을 가지고 
있었다고 하지만 그의 보호행위는 살해범들에게 왕비를 식별케 한 단서를 제공하였다. 궁내
부대신은 그들의 칼날에 양팔목을 잘리는 등 중산을 입고 쓰러져 피를 흘리며 죽었다. 왕비
는 뜰 아래로 뛰어 나갔지만 붙잡혀 넘어뜨려졌고 살해범은 수 차례 왕비의 가슴을 짓밟은 
뒤에 칼로 거듭 왕비를 찔렀다. 분명히 실수가 없도록 해치우기 위해 왕비와 용모가 비슷한 
여러 궁녀들도 살해되고 있었는데, 그때 여시의가 앞으로 나서서 손수건으로 왕비의 어안을 
가렸다. 한 둘의 시신이 숲에서 불태워졌지만 나머지 시신은 궁궐 밖으로 옮겨졌다.>  이렇
게 하여 조선의 왕비, 조선의  국모인 민비는 조선군의 보호를 받지  못한 채 일본인들에게 
비참하게 시해된다. 1895년 음력 8월 20일 새벽 6시경이었다. 
  어떻게 이럴 수가 있을까. 어찌하여 하늘은 조선을 버리시는 것일까. 민비는 극심한  의식
의 혼란이 진정되어 가자 동녘 하늘이 밝아 오는 것을  보았다. 하늘은 박명 속에서 서서히 
남빛으로 밝아 오고 있었다. 
  (아!)
  민비는 온 몸을 전율했다. 의식이  좀 더 맑아져 오자 어디선가  궁녀들이 소리를 죽이며 
흐느끼는 울음소리가 들리고 아랫도리로 차가운 냉기가 흐르는 것을 분명하게 의식할 수 있
었다. 민비는 가슴을 저며 내는 듯한  슬픔을 느꼈다. 아랫도리가 서늘한 것은 그들이  옷을 
벗겨 버린 것이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이들은 주재국의 왕비에 대한 예의조차 없는 야만인들이란 말인가?)  민비는 비참했다. 
  일본군들이 옥호루에 들이닥치던 일이 또다시 머릿속에 떠올라 왔다. 그들은 옥호루를 물
샐틈없이 에워싼 뒤 낭인들을 옥호루로  들여보냈었다. 민비는 그들에 의해  옥호루에 대청 
마루에서 훈련대의 교관인 일본군 사관에게 가슴을 짓밟히고 군도에 찔렸었다. 
  (그래. 나는 죽어 가고 있는 거야...)
  민비는 그렇게 생각했다. 
  의식은 차츰차츰 명료해지고 있었다. 그러나 몸은 어두운 꿈속의 일이기라도 하듯이 꼼짝
을 할 수가 없었다. 마치 가위에 짓눌린 것처럼 의식은  분명했으나 손가락 하나 움직일 수
가 없었다. 
  일본인들은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그들이 낮게 호령하는 말소리와 발자국소리,  허리
에 찬 칼이 무엇엔가 부딪치는 싸늘한 쇳소리... 그리고 무엇인지 알 수 없는 잡다한 소리들
이 계속해서 어지럽게 들려 왔다. 민비는 다시 머릿속이 혼란해지기 시작했다. 어두운  혼미
가 그녀를 캄캄한 나락으로 굴러 떨어지게 하고 있었다.  민비는 캄캄한 나락으로 내동댕이 
처지고 있는 의식의 끈을 놓치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쓰면서 나는 정녕  죽어 가고 있는가, 
하늘은 어찌하여 조선을 버리시려는 것인가 하고 거듭 생각했다. 처참한 기분이었다. 
  민비도 일본인들이 자신을 죽이려 한다는 사실을 오래 전부터  알고 있었다. 일본은 지난 
해의 경복궁 점령 때도 대원군을 앞세워 그녀를 죽이려고 했었고 금년에는 박영효를 내세워 
궁궐 시위대 병사들을 훈련대로 교체한 뒤 그녀를 죽이려고 했었다. 그러나 사전에 이를 금
지한 민비가 고종을 방패로 물리쳤던 것이다. 
  (지나간 30년이 나에게 하루도 편한 날이 아니었어......)  민비는 왕비로 간택되어  대궐에
서 보낸  나날을 회상해  보았다. 16세의  어린 소녀였던 1866년 3월 21일, 마을마다 집집마
다 복숭아꽃이며 살구꽃이  흐드러지게 피고 진종일 흙바람이 자욱하게 불고 있을 때 그녀
는 조선의 왕비가 되었었다. 
  꿈결처럼 오래 전의 일이었다. 
  그로부터 10년은 조선의 왕비가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좌불안석의 나날이었다. 고종은 이
귀인을 총애하여 민비를 가까이 하지  않았었다. 그러나 민비는 오로지 고종만을  사랑했다. 
고종이 그녀에게는 첫 남자였고 유일한 남자였다. 고종이 이귀인의  처소인 영보당에 가 있
을 때면 그녀는 긴긴 밤을 책을 읽으면서 보냈다. 책만이 그녀의 유일한 위안이었다. 
  돌이켜보면 그녀의 삶은 파란의 연속이었다.  그녀가 왕비가 되던 해에  불어닥친 천주교 
박해의 피바람, 병인양요, 호열자, 경복궁 중건, 신미양요......
  그러나 그러한 것들보다 그녀의 가슴을 더욱 에이게 하는 것은 가족들의 비참한 죽음이었
다. 그녀는 첫 번째 낳은 아들을 대변불통증상이라는 희귀한 병으로 낳은 지 사흘만에 잃었
다. 민비는 그때 살점이 떨어져 나가는 듯한 슬픔을 느꼈었다. 
  두 번째 민비가 낳은 아이는 공주였다. 그러나 그 공주도 태어난 지 불과 8개월만에 차디
찬 시체가 되어 그녀의 곁을 떠났다. 
  (내가 낳은 아이는 어째서 이렇게 단명하는 것일까?)  공주를 잃었을 때 민비는 울음조차 
나오지 않았다. 
  민비가 세 번째 낳은 아이는 세자 척이었다. 세자는 다행히 잦은 병치레를 했으나 아직까
지도 건강했다. 그러나 부왕인 고종을 닮아  유약하기 짝이 없었다. 게다가 혼례를 올린  지 
10년이 가까이 되었는데도 후사가 없어서 민비에게 가슴앓이를 하게 했다. 
  민비는 그 후에도 왕자 하나를 더 낳았으나 그 아이도 세상에 나온 지 며칠만에 죽었다. 
  민비의 친가도 비참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아버지인 민치록의 뒤를 있기 위해 양자로 들어 
온 민승호가 열살 난 아들,  그리고 민비의 생모인 한창부부인 이씨와  함께 대원군이 보낸 
자기황이 터져 일가족이 떼죽음을 당했던 것이다. 
  임오군란 때도 많은 민씨 일족들이 죽음을 당해야 했다.  대원군은 장호원으로 피신한 민
비의 국장까지 선포했었다. 그러나 민비는 청나라와 대원군의 전횡을 반대하는 대신들에 의
해 다시 대궐로 환궁할 수 있었다. 
  갑신정변은 세자빈의 아버지인 민태호와  민영목을 자객들에게 죽게  만들었다. 민영익은 
우정국에서 죽음의 고비를 넘긴 후 정치에서 손을 떼고  말았다. 고종이나 민비가 불러야만 
별입시를 했으나 벼슬은 사양했다. 
  갑신정변은 일본군이 동원되는 선례를 남김으로써 일본의 조선 정책에 중대한 영향을  미
쳤다. 일본은 그 이후 항상 1개 대대 병력을 조선에 주둔시켰다. 
  문득 코끝으로 역한 피비린내가 풍겨 왔다. 민비는 옆구리와  아랫배에 맹렬한 통증을 느
끼고 얼굴을 찡그렸다. 총소리는 이미 멎어 있었고 대궐의  숲 어디에선가 새들이 지저귀는 
소리가 들려왔다. 평화로운 가을 아침이었다. 민비는 동공을 움직여 옥호루 대청을 살펴보았
다. 자신이 죽어 가고 있다는 사실이 믿어지지 않았다. 
  (나는 정말 죽어 가고 있는 것일까?)
  민비는 엉뚱한 생각에 잠겼다. 이것은 꿈이 아닐까. 꿈이니까 사방이 이렇게 물 속처럼 조
용하지, 누가 나를 깨워 주어야 할텐데.  누군가 나를 이 악몽의 구렁텅이에서 건져내  주지 
않는다면 나는 정말 죽어 버릴 거야...
  일본인들이 그녀를 죽이기 위해 음모를 꾸미기 시작한 것은 지난해 가을부터였다. 이노우
에 가오루라는 자가 일본 공사로 부임하여 제2차 내정 개혁안을 강제로 추진하고 왕비 일족
을 정사에 간여하지 못하도록 홍범14조에 못박아서  종묘에 고한 것은 사실상 민비를  죽인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민비는 그때 속으로 울었다. 이노우에  가오루에게는 웃으면서 우리 왕실과  세자에 대한 
우려만 없다면 구중궁궐의 부녀자인 내가 무엇 때문에 국사에 간여를 하겠습니까? 내가 국
사에 간여하는 것은 오로지 왕실과 국가의 융성을 바라기 때문입니다... 하고 말하였으나 속
으로는 피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일본은 국론이 통일되어 있었다. 갑신정변 때 타케소에 공사가  조선에 있던 청군의 내습
으로 조선을 친일화시키려던 정책이 실패로 돌아가자 10년 동안 절치부심, 군대를 양성하여 
청일전쟁을 일으켜 승리하고 조선을 송두리째 집어삼키려고 하고 있었다. 
  그러나 조선은 국론이 통일되어 있지 않았다. 임오군란과 갑신정변 같은 커다란 정치적인 
소용돌이를 겪었으면서도 대신들은 파당을 짓고 개혁은 아래로 내려갈수록 거센 반발에  부
딪쳤다. 백성들은 개혁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척양척왜만 부르짖고 있었다. 
  대원군의 존재도 조선의 개혁에는 커다란 부담이었다.  대신들이 고루한 사림은 척양척왜
를 위하여 곧잘 대원군을 정치의 전면에 등장시켰다. 
  국왕이 심약했기 때문이었다. 
  고종은 정치적인 식견도 없고 소신도 갖고 있지 못했다. 고종이 소년왕일 때는 섭정 조대
비와 대원군이 국정을 다루었고 고종이 친정을 하게 되었을 때는 홍순목, 이최응 등의 원로 
대신들에게 의존해서 정치를 해나갔다. 
  (우리 전하는 너무나 유약하셔...)
  민비는 보다 못해 민승호를 내세워 고종을 보좌하게 했고,  민승호가 죽자 민규호를 내세
워 고종을 돕게 했다. 그러나 민승호, 민규호로 이어지는 민문의 세도는 부패를 부를 수밖에 
없어서 끝내는 임오군란까지 야기하게 되었던 것이다. 
  민비는 임오군란이 수습되자 민문의 부패를 철저하게  막으려고 하였다. 그리하여 세자빈
의 생부인 민태호까지 사형에 처하려고 하였으나 세자와 세자빈의 애원으로 용서하고  말았
다. 그러나 민태호는 결국 불과 2년 후에 일어난 갑신정변 때 김옥균과 박영효에 의해 비참
한 죽음을 당하게 되었던 것이다. 
  (왕권만 약화시키지 않았다면 김옥균도 그렇게 죽지는 않았을 거야......)  민비는 김옥균을 
신임했었다. 그러나 김옥균과 박영효는  독립을 쟁취한다는 명분으로 고종을 기만하고 일본
군을 끌어들여 대신들을 여섯이나 살해했을 뿐 아니라 신정령을  반포하여 국왕을 허수아비
로 만들려고 하였다. 
  (왕권이 약화되는 것은 곧 국권이 약화되는  것이야!)  민비는 김옥균이 신임을 배신했다
는 것을 알았을 때 왕권이 흔들리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민비는 왕권이 흔들리는 것만
은 용납할 수가 없었다. 왕권이 흔들리는 것은 왕조가 흔들리는 것을 의미했고 왕조가 흔들
리는 것은 조선이 흔들리는 것이었다. 
  민비가 김옥균에게 10년 동안이나 이를 갈다가  자객을 보내 암살한 것은 그런  까닭이었
다. 
  그것은 왕조를 지키기 위한 몸부림 같은 것이었다. 
  박영효를 발탁한 것은 그가 왕족이기도 했지만 일본인들과 절친했기 때문이었다. 10년 동
안 일본에 망명해 있었기 때문에  민비는 박영효가 세계 정세에도  해박하리라고 믿었었다. 
게다가 왕족이므로 왕권을 약화시키는 일에는 앞장서지 않으리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박영효는 오히려 왕권을 약화시키고 내각을 강화시키는 일에 몰두하고 있었다. 박
영효는 왕권의 약화가 국권의 약화를 부른다는 사실을 간과하고 있었다. 
  민비는 박영효를 제거하기로 하였다. 일본인들은 3국간섭 이후 조선까지 인아거일 정책을 
펴자 민비를 제거해야 한다고 흥분해서 날뛰었다. 일본 거류민들은  두 셋만 모이면 조선의 
왕비가 하문으로 국왕을 사로잡아 국정을 어지럽힌다느니, 조선의 왕비가 벼슬을 돈에 팔고 
미신을 좋아하며 날이면 날마다 대궐에서 굿판을  벌인다고 아우성이었다. 심지어는 일본인
들 사이에는 조선의 왕비 하문이 명기니 한 번 구경이나 하자는 추악한 음담패설까지 서슴
없이 해댔다. 
  (아무리 섬나라 근성이기로서니 스스로 문명인이라는 자들이 이토록 야만스러울  수 있는
가?)
  민비는 기가 찼다. 일국의 왕후에게 그러한 불미한 소문을  퍼뜨리고 있는 일본인들의 추
태에 이를 갈았다. 
  (일본인들을 반드시 이 땅에서 내쳐야 해!)
  민비는 이노우에 공사에게 자신의 시해설에 대해 강력하게 항의했다. 이노우에 공사는 민
비의 추궁에 쩔쩔매면서 그 어느 누구도 왕후폐하와 왕후폐하의 왕조에 위해를 가할 수 없
게 하겠다고 맹세를 했다. 
  민비는 이노우에 공사의 말을 믿지 않았다. 
  민비는 일본의 강압을 단호하게 뿌리치기 시작했다. 그것은 일본의  강압에 의한 내정 개
혁을 부정하는 것에서부터 비롯되었다. 고종은 궁궐의  수배를 시위대에서 훈련대로 바꾸자
는 박영효의 요구를 거부했다. 그러잖아도 궁궐에 일본의 첩자들이 득실대고 있는 실정이었
다. 궁궐의 수비를 훈련대에 맡기면 국왕이 일본의 포로가 되는 것이다. 
  민비는 그것을 용납할 수가 없었다. 
  민비는 음력 8월 10일 칙령  제1호를 제3차 김홍집 내각을 통해  반포했다. 칙령 제1호의 
내용은 궁내부대신과 조정관리들의 복장 규정을 구제도로  환원한다는 것이었다. 칙령의 내
용도 일본을 깜짝 놀라게 했으나 칙령 제1호라는 것은 일본이 경복궁을 점령한 이래 152호
까지 반포되어 있던 칙령을 일본의 강압에 의한 것이라고 부정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조선의 왕비를 죽여야 해!)
  일본인들로서는 민비에게 앙심을 품지 않을  수 없었다. 민비를 제거하지  않고서는 조선 
정책이 계속 실패하게 되는 것이다. 
  갑자기 눈앞이 캄캄해져 왔다. 민비는 누군가 자신의 얼굴에  얇은 헝겊 조각을 덮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하늘이시여!) 
  민비는 캄캄한 어둠 속에서 부르짖었다. 내가 정말 죽은 것인가 하는 생각이 다시 빠르게 
뇌리를 스쳤다. 사람은 목숨이 끊어진 뒤에도 두 시간 정도  영혼이 죽은 육신을 떠나지 않
는다는데 정말 그런 것인가, 나는 이미 일본인들에게 무수히 난도질을 당하고 치욕스럽게도 
옷이 벗겨지지 않았는가. 나는 이미 죽은 것이고 영혼만 남아 있는 것이 아닌가...
  다시 사람들의 왁자한 발자국소리가 들리더니 누군가 이불로 그녀를 둘둘 말았다. 그녀는 
소리를 지르고 싶었으나 소리를 지를 수가 없었다. 그녀는 누군가 자신을 이불에 말아서 어
디론가 옮기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민비는 가슴이 뻐근해 왔다.  나는 일국의 왕비인데, 
나는 이 나라 조선의 왕비인데 하는 생각이 뇌리를 스치면서 진한 슬픔이 목울대를 타고 올
라왔다. 
  민비는 슬프게 울기 시작했다. 
  누군가 그녀를 장작더미 위에 올려놓았다.  얼굴에 덮었던 수건이 언제  떨어져 나갔는지 
붉게 물든 단풍숲 사이로 동녘이 푸르게 밝아 오는 하늘이 보였다. 청량한 가을 아침이었다. 
사위가 죽은 듯이 조용했다. 이맘때면 수많은 전각과 누각, 정과 당을 수백 명 궁녀들이  분
냄새를 풍기며 바삐 오갈 시간인데도 기이할 정도로 사방이 고요했다. 
  문득 민비의 얼굴로 낙엽 한 닢이 팔랑거리며 떨어졌다. 
  민비는 그 나뭇잎을 떼어내고 싶었다. 그러나 그것은 의지뿐이었지 손 끝 하나 움직일 수
가 없었다. 
  (이게 무슨 냄새일까?)
  그때 민비는 코를 톡 쏘는 이상한 냄새를 느꼈다. 누군가 그녀에게 석유를 뿌리고 있었다. 
민비는 그 냄새가 소름이 끼치도록 싫었다. 
  민비는 일본인들이 하는 짓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뜨거운 불길이 확 치솟자 민비
는 그때서야 머리끝이 곧추 서는 듯한 공포를 느꼈다. 
  (이럴 수가, 이럴 수는 없어......!)
  민비는 소름이 오싹 끼쳐 왔다.  불길은 점점 맹렬하게 치솟아 민비의  몸을 감싼 이불로 
번지고 있었다. 민비는 다급하게 고종을 부르기 시작했다. 
  전하......!
  전하......!
  그러나 민비의 목소리는 입 밖으로 새어 나오지 않았다. 민비는 하늘을 우러러보았다.  윤
기 없이 매끄러운 하늘이, 점점 푸르게 밝아 오는 하늘이  그녀의 눈앞에 바짝 내려와 있었
다. 민비는 하늘을 향하여 절규하듯 처절하게 울부짖었다. 
  전하......!
  그러나 맹렬한 불길은 이미 그녀의 살점을 태우기 시작하고 있었다. 
....................................
  1) 현흥택의 기록, 왕세자 척의 기록, 힐리어의 보고서는 모두 {명성황후시해사건} 중에서 
이문원 교수의 민비 시해의 배경과 구도에서 발췌하였다. 
  2) 조선군 훈련대는 민비 시해에 참가하였으나 주도적인  역할을 하지 못했다. 그러나 권
재형의 보고서에 의하면 우범선, 이두황, 남만리, 이범래 등은  민비 시해 음모를 사전에 알
고서도 시해에 참가했던 것으로 평가된다. 
  3) 명성황후의 호칭은 생존시에는 왕비, 또는 왕후로 표기한다. 그러나  이 소설에는 민왕
비를 줄여서 민비로 통일했다. 민비가 일반적으로 널리 인식되어  있어서 그 인식을 바꾸기
가 어려웠다. 
  4) 명성황후는 사후 2년 후에 추증된 시호다. 고종 역시 사후 추증된 이름이지만 이 소설
에서는 생존시에도 사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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