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륙의 북소리(하권)
(초인을 기다리는 사람들)
----- 차 례 -----
작가 소개
28. 충의의 깃발을 들다
29. 기로에 서다
30. 홀한성의 전운
31. 국치(國恥)
32. 하늘이 통곡하다
33. 북풍(北風)
34. 나라를 바치다
35. 짓밟히는 고도
36. 추운 나라에서 온 사람들
37. 발해의 넋.
38. 천부경이 나타나다.
39. 떠도는 무인
40. 망국의 사람들
41. 대륙을 방랑하다
42. 무정한 세월
43. 대륙은 살아 있다.
44. 고원의 야생화
45. 풍운의 대륙
46. 사랑이 피어날 때
47. 사랑을 찾아서
48. 소년과 소녀
49. 오가촌의 비극
50. 솔빈의 열사들
51. 초인을 꿈꾸며
52. 에필로그
28. 충의의 깃발을 들다
상도방위군이 거란의 선봉군에게 대패했다는 소식은
바람처럼 홀한성으로 날아왔다. 홀한성은 거란군에
대한 공포와 두려움으로 발칵 뒤집혔다. 미처 피난을
가지 못한 성민들은 상도방위군에 일루의 희망을
걸었으나 그들이 패하자 사색이 되었다.
"거란군이 온다!"
"상도방위군이 거란군에게 대패했다!"
홀한성의 성민들은 그 소리가 죽음의 소리로
들렸다. 거란군에게 패하여 도망쳐 온 군사들의
비참한 모습에 성민들은 문을 꽁꽁 닫아걸고 집안에
숨었다. 번화한 저자나 골목에는 금세 인적이 텅 비어
차가운 겨울바람에 나뭇잎만 쓸려 다녔다.
그러한 가운데도 패전을 알리는 군사들의
말발굽소리는 쉬지 않고 들려왔다. 홀한성을 지키는
것은 몇몇 병사들일 뿐 조정 대신들과 이들을
지휘해야 할 장군들의 모습은 보이지 않기 시작한 지
오래였다.
"군사들이 보이지 않아....."
"군사들이 모두 달아났대."
"아니 군사들이 달아나면 우린 어떻게 해?"
"군사들을 지휘하는 장군들이 먼저 달아났대."
"그럼 홀한성은 누가 지키는 거야?"
"거란군이 성안으로 들어오면 재물을 모조리 빼앗고
여자들을 겁탈할 텐데 어떻게 하지?"
"달아나야지 어떻게 해?"
"거란군이 홀한성을 포위했다는데 어디로 달아나?"
성민들은 집안에 삼삼오오 모여서 수군거렸다.
그들의 얼굴에는 거란군에 대한 두려움과 죽음에 대한
공포가 짙게 드리워져 있었다.
"우리 군사도 10만이 넘는데 다 어디 가 있는
거야?"
"10만이 넘으면 뭘해? 부여에서 상경까지 오는
길에는 군사들이 하나도 없었다는 걸....."
"그럼 거란군이 부여에서 홀한성까지 들이닥칠
때까지 파죽지세로 달려왔다는 것이 사실인가?"
"그걸 말이라고 해? 거란군은 부여성에서 사흘을
지체했을 뿐 줄곧 홀한성까지 저항 한 번 받지 않고
달려왔다는 거야."
"어떻게 그럴 수가 있지?"
"조정에서 거란군이 침략하는 길을 잘못 알았기
때문이래. 거란군의 선봉은 발해군이 지키지 않는
길만 찾아서 질풍처럼 달려왔다는 거야."
"세작이 있었나? 어떻게 거란군이 우리 군사가
지키는 길목을 알고 있어?"
"얼마 전에 달아난 할저란 놈이 거란의 세작이래."
"제길 그 놈을 죽여야 하는데......"
성민들은 탄식을 했으나 소용이 없었다. 거란군이
지나오는 발해의 몇몇 부(府)는 거란군과 싸우기도
전에 두 손을 들어버렸던 것이다. 거란군이 부여부를
함락한 지 6일만에 1천리나 되는 발해의 영토를
무인지경으로 휩쓸고 홀한성까지 들이닥친 것은 몇몇
부가 싸우지도 길을 비켜버린 탓이었다.
그들은 거란과 싸우지 않고 슬그머니 길을 비켜
줌으로써 요의 황제 야율 아보기로부터 도독의 지위를
그대로 유지시켜 주겠다는 보장을 받았던 것이다.
조정이 무능한 탓이었다.
발해는 광활한 영토로 인해 각 부의 도독들이
병권까지 장악하고 있었고 중앙의 통제를 강하게 받지
않았다. 무능한 발해 조정에 충성을 했다가 자신들의
권력과 지위를 잃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나 난세에 영웅이 출현한다는 말이 있듯이
발해에도 충신과 열사는 있었다. 상도방위군이
격파되었다는 소식을 들은 홀한성 주위의 백성들은
처음엔 공포와 두려움에 떨었으나 이내 수 십명씩
혹은 수 백명씩 무리를 지어 홀한성으로 몰려왔다.
"홀한성은 거란군이 겹겹이 포위했다! 거란군이
홀한성으로 들어오면 우리를 모두 죽일 텐데 왜
앉아서 죽기를 기다리는가? 앉아서 죽을 바에야
싸우다가 죽자!"
"옳소!"
"상도방위군이 거란군에게 격파되었다! 나라가
위태로운데 아녀자처럼 집안에 숨어 있을 것인가?
침략자 거란군을 쳐부술 용사가 있다면 나를 따르라!
홀한성으로 갑시다!"
"홀한성으로 갑시다!"
"홀한성으로 가서 거란군을 쳐부수고 임금을
구합시다!"
"홀한성으로 갑시다!"
그들은 다투어 홀한성으로 몰려들었다. 홀한성에는
순식간에 나라를 구하려는 백성들이 구름처럼
운집했다.
"민병이 왔다!"
"집안에 틀어박혀 있으면 거란군에게 개죽음을
당한다!"
"우리도 민병과 함께 싸우자!"
"싸웁시다!"
"싸웁시다!"
집안에 숨어 있던 백성들도 비로소 녹슨 창과 칼을
들고 뛰쳐나왔다. 거란군이 포위한 홀한성을 탈출하여
달아날 방도는 전혀 없었다. 홀한성의 성민들은
이래도 죽고 저래도 죽을 바에야 싸우다가 죽자는
각오가 폭넓게 퍼졌다.
홀한성은 정규군이 아니라 민병들에 의해 새로운
전의가 불타 올랐다. 민병들은 정규군이 버리고
달아난 병기를 주워들고 무장했다.
민병들을 규합하여 홀한성의 수비에 나선 것은
인선황제의 동생인 대인열(大仁烈)이었다. 그는
인선황제의 동생이었으나 인선황제가 주색에 빠져
정사를 돌보지 않자 토문강 유역에 은거하고 있다가
나라가 위태롭게 되어 나타난 것이다.
"북우위 대장군 장영 장군이 왔다!"
민병들의 사기를 돋군 것은 북우위 대장군을 지낸
장영 장군이 나타나면서였다. 그는 커다란 장대에
충의(忠義)라는 붉은 글씨를 쓴 깃발을 매달고 나타난
것이다. 지휘할 장군이 없던 민병들은 그를 열렬히
환영했다.
"장영 장군 만세!"
"장영 장군 만세!"
민병들은 눈물을 흘리며 환호성을 질렀다.
"어서 오시오. 장군!"
인선황제의 동생 대인열은 장영을 진심으로
환영했다. 두 사람은 두 손을 뜨겁게 맞잡았다.
"감사합니다."
장영도 대인열을 진심으로 존경했다. 대인열이
포악한 인선황제의 동생이지만 위기에 빠진 나라를
구하기 위해 스스로 일어선 것은 장거가 아닐 수
없었다.
(내가 과연 이 나라를 위해 목숨을 버려야 하는가?)
장영 장군은 눈물을 흘리며 환영하는 민병들을
살피며 처참한 기분에 사로잡혔다. 인선황제는
백성들의 삶을 돌보지 않고 주지육림에 빠져 있었으며
대신들은 오로지 권력 다툼에 혈안이 되었다가 막상
거란군이 침략을 해오자 백성들보다 먼저 달아났던
것이다.
그들을 위해 민병들을 끌어 모아 거란의 대군과
싸워야 한다고 생각하자 전투욕이 일어나지 않았다.
게다가 인선황제는 그가 사랑하는 아내를 죽게 만든
원수이기도 한 것이다. 장영 장군은 그 생각을 하면
지금도 가슴속으로 찬바람이 불고 지나가는 것
같았다.
(그러나 이 나라는 황제의 나라가 아니야. 단군
왕검이 처음으로 나라를 여시고 부여, 고구려의
선인들이 숨결이 묻혀 있는 땅이야...... 이 성스러운
땅을 어떻게 거란의 오랑캐가 짓밟게 내줄 수 있다는
말인가.......?)
장영 장군은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인선황제나
대신들을 위해서가 아니라 선인들의 발자취가 깃든
땅을 위해, 선인들의 발자취를 천년의 장구한 세월이
흐른 뒤에도 남게 하려면 목숨을 버리더라도 싸워야
하는 것이다.
"장군께서 충의군을 지휘해 주어야 하겠소!"
대인열은 장영에게 충의군의 지휘를 맡겼다. 장영은
몇 번 사양하다가 충의군의 지휘를 맡기로 하였다.
장영 장군은 충의군을 각 성문에 배치하고 장수들을
뽑아 임명했다. 그들을 훈련시킬 만한 시간은 전혀
없었다. 그러나 죽기로 버틴다면 각 지역에 흩어져
있는 발해의 구원병들이 도착할 것이고 그때 성문을
열고 나가 싸우면 충분히 승산이 있다고 생각했다.
"거란군이 온다!"
"거란군이다!"
그때 성문을 지키는 병사들이 다급하게 소리를
질렀다. 벌써 거란의 선봉군들이 질풍처럼 달려오고
있었다.
(1만 군사는 족히 되겠군......)
장영은 성루에서 거란군을 살폈다. 거란군은 기세가
사나운 것으로 보아 정예 군사들인 것 같았다. 말을
모는 기병술은 날쌔고 빈틈이 없었다. 장영은 전신이
긴장되는 것을 느꼈다. 충의군들도 거란군사들이
노도처럼 달려오는 것을 보고 잔뜩 겁에 질린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러나 본진은 아직 도착하지 않았다. 거란의
선봉군이 진을 치기 전에 공격을 하면 예기는 꺾을 수
있을 것이다!)
장영은 비장한 각오를 했다. 그리고 대인열에게
성문을 열고 나가 거란군의 선봉을 공격하겠다고
말했다.
"거란의 선봉군을 감당할 수 있겠소?"
대인열이 근심스러운 얼굴로 물었다.
"염려하지 마십시오. 지금 거란 선봉군의 예기를
꺾으면 쉽게 공격하지 못할 것입니다."
"그럼 장군의 뜻대로 하시오!"
대인열은 장영 장군의 제안에 동의했다. 대인열이
동의하자 장영 장군은 군사들을 모아놓고 열변을
토하기 시작했다.
"듣거라! 거란의 선봉군이 우리 홀한성을 포위하기
위해 달려오고 있다. 누가 나와 함께 거란군의 선봉을
공격하여 예기를 꺾겠는가?"
"........"
장영이 목청을 높여 고함을 치는데도 선뜻 대답하는
병사들이 없었다.
"거란의 선봉군을 격파하지 않으면 우리는 여기서
떼죽음을 당한다! 여기서 죽을 것인가? 나가서 죽을
것인가?"
"......."
병사들은 여전히 앞으로 나서지 않고 서로의 눈치만
살피고 있었다. 대부분 민병들인 그들은 막상 전투가
눈앞에 닥치자 두려워지기 시작한 것이다.
"정녕 지원자가 없는가?"
"저희가 지원합니다!"
그때 충의군 중에 몇몇 늙은 병사들이 앞으로
나섰다. 장영은 그들을 보고 고개를 끄덕거렸다. 늙은
병사들이기에 죽음이 두렵지도 않았고 작은
전투이지만 전투에 참여해본 경험이 있는
병사들이었다.
"저희도 지원하겠습니다!"
그러자 젊은 병사들도 앞으로 나섰다. 얼추 헤아려
보니 1백명 안팎이 되어 보였다.
"나는 지금부터 성문을 열고 나가 적장 안단의 목을
베겠다. 너희들은 성문 앞에서 북을 치며 기세를
울리고 있다가 적장 안단이 죽고 거란군이
우왕좌왕하면 단숨에 거란군을 쳐부숴라! 알겠나?"
"예!"
병사들이 우렁차게 대답을 했다.
장영은 말을 타고 장창을 들고 성문을 나섰다. 그
뒤에는 약 1백명의 충의군들이 비장한 각오로 따라
나서고 있었다. 장영 장군에게 자원을 한다고는
했지만 벌판을 가득 메우고 달려오는 거란군을 보자
겁이 덜컥 났다.
"너희들은 무어냐? 항복하러 나오는 군사들이냐?"
거란군의 선봉장 안단은 장영이 거느린 군사를 보고
어리둥절했다. 발해군이 성문을 나왔으나 군사도
1백명 안팎밖에 되지 않았고 발해군은 한결 같이
백기를 들고 있었다.
"우리는 충의군이다!"
장영은 안단을 쏘아보며 낮게 말했다.
벌써 겨울 해가 설핏이 기울고 있었다. 서쪽 초원
위의 하늘에 핏빛의 노을이 지면서 어둠을 몰아오고
있었다.
"충의군?"
"그렇다!"
"허면 민병들이란 말이냐?"
"그렇다!"
발해군 장수의 대답은 얼음처럼 냉랭하기만 했다.
안단은 공연히 소름이 오싹 끼쳐오는 기분이었다.
그러나 일개 민병 장수에게 기가 죽을 수없어 안단은
크게 호통을 쳤다.
"군사들은 다 어디로 가고 민병들이 나왔느냐?"
"우리 충의군으로도 너희 오랑캐는 충분히 제압할
수 있다!"
"하핫....!"
안단이 갑자기 파안대소를 했다. 그는 장영 장군이
가소로워 보였다.
"이놈들아! 이게 누구의 머리인지 두 눈이 있으면
똑똑히 보아라!"
안단이 눈짓으로 신호를 하자 거란군사가 장대를
높이 치켜들었다.
(아!)
장영은 어금니를 꽉 깨물었다. 거란군사의 장대에
매달려 있는 것은 상도방위군 대장군 이종명의
머리였다. 이종명은 죽음이 억울한지 눈을 부릅뜨고
있었다.
"태상시 이종명 노상이야."
"대장군님이 전사했어!"
발해의 충의군들은 두려운 눈빛으로 웅성거렸다.
"이렇게 되기 싫으면 항복을 해라! 항복을 하면
목숨은 살려주겠......"
"적장 안단아! 무슨 개수작이냐? 호랑이를 맨손으로
때려잡는 발해의 용장 장영이 네 놈의 머리를 일합에
쳐서 장대에 매달겠다!"
안단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장영이 벽력 같이
호통을 치더니 말을 몰아 안단을 향해 달려갔다.
"죽고 싶으면 어서 오너라!"
안단도 장영을 향해 세차게 말을 몰기 시작했다.
"죽을 놈은 네 놈이다!"
장영은 큰 소리로 외치며 안단이 가까이 오자
말잔등에서 허공으로 날아올랐다.
"안단아, 간다!"
안단은 금방까지 말을 타고 달려오던 장영이
허공으로 솟구치자 깜짝 놀랐다.
"기다리고 있었다!
안단은 재빨리 말머리를 잡고 허공에서 내려오는
장영을 향해 창을 힘껏 찔렀다.
"흥!"
그러나 장영은 허공에서 몸을 빙그르 돌아서 안단의
머리를 향해 장창을 찍었다. 안단은 장영의 장창이
자신의 머리를 겨누고 다가오자 재빨리 머리를 옆으로
돌렸다. 그러자 장영의 창끝이 안단의 어깨를 깊숙이
찔렀다.
"으악!"
안단의 입에서 처절한 비명이 터져 나왔다. 장영은
그 순간 안단의 어깨에서 창을 뽑아 번개처럼 안단의
목을 후려쳤다. 그러자 안단은 재빨리 장영의 창을
피하고 말머리를 돌려 허겁지겁 달아나기 시작했다.
발해군사와 거란군사들은 너무나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라 입을 다물 수가 없었다. 그들은 넋이 나간
듯이 장영 장군만을 쳐다보고 있었다.
"안단이 달아났다!"
"적장이 달아났다!"
충의군들의 얼굴에 그때서야 환희의 빛이 떠오르게
시작했다.
"봐라! 적장 안단은 달아났다!"
장영은 창을 높이 들고 군사들에게 외쳤다.
"안단이 달아났다! 거란을 쳐라!"
"거란을 쳐라!"
성루에서 장영과 안단이 싸우는 것을 지켜보던
대인열도 병사들을 지휘하여 성밖으로 달려나왔다.
성루에서 북소리가 일제히 둥둥둥 울리고 병사들은 와
하는 함성을 지르며 거란군을 공격했다.
"돌격하라!"
장영은 충의군들에게 목이 터져라 외쳤다.
"돌격!"
충의군들이 사기가 충천하여 거란군을 향해
달려갔다. 안단이 장영의 칼에 부상을 당하고 달아난
것을 본 거란군은 의기소침해졌다. 발해의 충의군들은
그 틈을 노려 맹렬하게 돌진했다. 성에 있던 병사들도
질풍처럼 달려나와 거란군을 공격했다. 거란군은
삽시간에 수천 명의 병사를 잃고 10리 밖까지
퇴각했다. 그러나 발해의 충의군은 더 이상 추격할 수
없었다. 날이 어두워지고 있는 데다 거란의 본진이
홀한성을 향해 달려오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충의군은 성으로 되돌아와 성문을 닫아걸었다.
거란군은 어둠이 점점 짙어 오고 있는데도 홀한성을
겹겹이 에워쌌다.
................................................
1) 발해는 거란군을 맞아 정규군사들보다
피지배층인 백성(여기서는 서민)들이 더 열성적으로
싸움에 임했다. 발해가 멸망할 때까지 이들의
눈물겨운 투쟁은 침략군인 거란군에게 막대한 타격을
주게 된다. 발해의 성씨는 귀족층인 우성(右姓) 과
중간층인 서성(庶性)이 있는데 대부분의 인민들은
성이 없었다.
2) 거란군이 홀한성을 침략했을 때 끝까지 홀한성을
지킨 것은 인선황제의 동생 대인열이었다.
29. 기로에 서다
장영 장군의 예측대로 거란군의 선봉을 격파한 것은
예기를 꺾은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거란군은 일단
10리 밖으로 물러갔다가 다시 돌아왔다. 그때 마침
거란의 본진인 40만 대군이 달려왔기 때문에 그들은
용기백배하여 홀한성을 에워쌌다.
그러나 섣불리 공격을 하지는 못했다. 거란은
대군으로 홀한성을 에워싸자 진채를 설치하기
시작했다.
홀한성은 어둠 속에서 조용했다. 거란의 군진이
진채를 설치하느라고 분주한 것과는 전혀 딴판이었다.
거란의 대군이 성을 빽빽하게 에워싸고 있는 것을
모르기라도 하는 듯이 죽음 같은 정적 속에 파묻혀
있었다.
야율 아보기는 군진에 나가 발해의 상경을 둘러싸고
있는 홀한성을 살폈다. 거란의 대군이 별다른
저항조차 받지 않고 홀한성까지 한달음에 달려온 것은
그야말로 천운이었다.
발해는 결코 국력이 만만한 나라가 아니었다.
발해의 상비군은 10만이나 되었고 군사들도 용맹했다.
그러나 발해는 몇 대에 걸쳐 치열한 권력 다툼이
계속되어 국력이 피폐했다. 상비군은 있었으나 지휘
계통이 문란하여 효과적인 군대를 운용할 수 없었다.
게다가 발해의 조정은 정복전쟁을 회피하였다.
무관을 업수히 여기고 전쟁에 대한 대비를 전혀 하지
않고 있었다.
아보기가 한겨울인데도 대군을 동원하여 발해를
공략한 것은 그런 까닭이었다. 그는 부여부를 점령한
뒤 장군 안단에게 거란에서 가장 용맹한 1만 군사를
주어 홀한성까지 질풍처럼 달리도록 했었다. 발해가
대군을 동원하여 거란군의 침략을 막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서였다.
아울러 발해의 각 부에 서신을 보내 거란군에
대항하지 말 것을 통고했다. 거란군에 대항을 하면
살려두지 않을 것이나 대항하지 않으면 도독의 지위와
권력을 그대로 유지시켜 주겠다는 내용이었다.
아보기의 전략은 훌륭하게 성공했다. 발해의 각
부가 거란군과 싸울 것인가 말 것인가 망설이고 있는
사이에 안단의 선봉군에게 기선을 제압 당하고
말았다. 발해의 몇몇 부는 거란군이 지나가도록
길까지 비켜주었다.
그러나 안단은 의외의 복병을 만나 패퇴하고
말았다. 그가 발해의 정규군도 아닌 충의군의 이름
없는 장수에게 패하는 바람에 거란의 선봉군도
처음으로 패배를 당한 것이었다.
(그만하면 충분해......)
아보기는 안단이 자신의 임무를 훌륭하게 마쳤다고
생각했다. 문제는 홀한성을 수비하는 충의군을 어떻게
하면 단숨에 격파하느냐 하는 것이었다. 빠른 시간
내에 충의군을 격파하고 홀한성을 점령하지 않으면
머뭇거리고 있던 발해의 각 부에서 구원병들이 속속
들이닥칠 것이고 거란군은 큰 낭패를 당하거나 돌이킬
수 없는 패배를 당할 것이다.
전쟁에서의 패배는 국가의 멸망을 의미한다.
수(隨)나라가 고구려를 침략했다가
을지문덕(乙支文德) 장군에게 대패하여 돌아간 뒤
멸망한 일이나 당 태종이 고구려를 침략했다가 병을
얻어 죽고 측천무후가 중국을 통치하다가 멸망한 것도
전쟁에서의 실패 때문이었다.
전쟁은 국가의 흥망을 의미하는 것이다.
아보기는 그 까닭에 서정에서 포로로 잡은 조복,
당항, 토혼의 군사들과 돌궐군을 전위로 삼아 발해를
침략하게 된 것이다.
날이 밝으면 40만 대군을 폭풍처럼 휘몰아 홀한성을
공략해야 한다.
아보기는 어둠 속에서 또여진를 틀고 있는 홀한성을
노려보며 전의를 굳게 다졌다.
밤이 되자 날씨는 차디찼다.
정월의 혹한이었다. 바람은 황량한 벌판을 휘몰아쳐
달려와 근처에 있는 전나무 숲에서 미쳐 날뛰고
있었다. 전나무 숲에서 귀곡성 같은 바람소리가
들려왔다.
차가운 하늘에는 별들이 웅숭거리고 있었다.
"폐하."
그때 할저가 가까이 왔다.
"황숙. 아직 안 잤소?"
"바람이 차옵니다."
아보기는 할저를 돌아보며 얼굴을 찌푸렸다. 팔이
없어 소매가 덜렁거리는 할저의 모습이 흉해 보였다.
발해에서 세작질을 하다가 탈출할 때 장영이라는
장수에게 잘린 팔이었다.
"발해의 구원병들이 몰려오기 전에 홀한성을
점령해야 하오."
"날씨가 너무 차갑사옵니다. 옥체를
보존하시옵소서."
"발해를 공략할 계획을 세우고 있소. 며칠 내에
홀한성을 점령하지 않으면 우리는 큰 낭패를 당할
것이오. 구원병이 오기 전에 홀한성을 부숴야 하오."
"폐하."
"황숙은 마땅한 대책이 있소?"
"대책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군사가
발해군사를 압도하니 힘으로 밀어붙여야 합니다."
"황숙. 그렇지 않소. 쥐도 막다른 골목에 물리면
사람을 문다고 하지 않소? 발해군사들의 저항이
갈수록 심할 것이오."
"그러니 군사들에게 총진군령을 내려 홀한성을
공격하여야 합니다."
"상책이 아니오."
아보기는 고개를 흔들었다. 힘이 열 배 강하면 적을
공격하라는 것은 손자병법에도 있는 전술이었다.
그러나 그 병법이 반드시 최고의 전술은 아니었다.
"그만 돌아가서 쉬시오."
아보기는 할저에게 짤막하게 내뱉았다. 할저는
아보기의 삼촌이었으나 반란을 일으킨 일이 있었다.
그가 두 아들과 한쪽 팔을 잃기까지 하면서 발해
정벌에 큰공을 세웠으나 아보기는 할저가 언젠가는
배신을 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가 광대한
초원에 흩어져 유목생활을 하는 거란을 통일하고 중국
대륙을 정복하기 위해 야망을 불태울 때 그의 동족들,
특히 인척들이 배신을 하고 반란을 일으키고 있는
것이다.
할저가 무엇인가 말을 할 듯 머뭇거리다가
돌아갔다. 아보기는 할저가 돌아간 뒤에도 오랫동안
홀한성을 바라보며 깊은 생각에 잠겼다.
발해 정벌이 끝나면 누군가 자신을 암살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한시라도 발해 정벌을 늦출 수는
없었다.
발해의 황궁은 횃불이 대낮처럼 밝혀져 있었다.
어림군은 요소요소에서 파수를 서고 대신들의
발걸음은 분주했다. 황제가 정사를 보는 어림청에는
인선황제를 비롯해 3성 6부의 대신들, 원임대신들,
황실의 기라성 같은 종친들이 황망하게 모여서 거란의
대군을 격퇴하기 위한 대책을 숙의했으나 묘책이
나오지 않았다.
발해의 각 부에 황제의 어찰을 보내 홀한성을
구원하라는 명을 내렸으나 이틀 사흘이 지나도 군사는
오지 않고 있었다.
"어찌하여 상도를 구하러 군사들이 오지 않는가?"
인선황제는 구원하는 군사가 당도하기를 눈이
빠지게 기다리며 대신들에게 하문했다.
인선황제로서는 황제가 위태로운데 각 발해의 각
부에서 군사를 보내 구원하지 않는 까닭을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남해부에서는 아무 소식이 없는가?"
"그러하옵니다."
대신들이 민망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아무래도 사직을 구하라는 과인의 교지를
남해부에서 접수하지 않은 것 같다. 속히 구원 군사를
보내라는 어찰을 다시 보내는 것이 어떻겠는가?"
"망극하옵니다."
"두덕부에서도 소식이 없는가?"
"그러하옵니다."
"답답한지고! 두덕부도 과인의 교지를 받지
못했다는 말인가?"
인선황제는 울먹이는 듯한 목소리로 말하며
대신들을 살폈다. 일렁이는 불빛아래 허리를 잔뜩
숙이고 있는 대신들이 답답했다.
홀한성 밖에서 거란의 대군이 닥쳐와 진을 치고
있는데도 발해의 대신들은 속수무책일 뿐이었다.
그때 충의군이 결성되어 혹한의 추위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성을 방위하고 있다는 소식이
들어왔다.
"충의군이 얼마라고 하는가?"
인선황제는 귀가 번쩍 뜨였다.
"1만 안팎이라 하온데 대부분 퇴역한 노병이거나
사냥을 업으로 삼던 무지랭이 민병들이라고
하옵니다."
대신들은 충의군이 그다지 미덥지 못했다.
"겨우 1만?"
인선황제도 실망한 기색이 역력했다.
"구원 군사가 오지 않으니 이를 어찌할 것인고?"
인선황제는 암담한 얼굴로 대신들을 돌아보았다.
"대신들은 사직의 존망을 구할 대책이 전혀
없는가?"
인선황제는 기운없이 대신들을 채근했다.
"폐하. 어찌 대책이 없다 하겠사옵니까?"
그때 노대신 은계종(隱繼宗)이 입을 열었다.
은계종은 위해황제 때 어림군 대장군을 지낸 일이
있는 원임대신이었다. 위해황제 때 어림군 대장군을
지내며 발해의 많은 귀족들과 교분을 나누었으나
이도종과 장문일의 대립이 극심했을 때 어느 편에도
가담하지 않고 초연한 입장을 취했었다. 인선황제의
동생이면서도 정치 일선에서 은퇴해 있는 대인열과
교분이 두터웠다. 세간에서는 그들이 정치에
초연하다고 하여 신선이라고까지 불렀다.
그는 이미 백발이 성성했으나 나라가 누란의 위기에
빠지자 노구를 이끌고 어전에 나타난 것이다.
"은 노상(老相)! 대책이 있소?"
인선황제는 반색을 하고 은계종을 쳐다보았다. 다른
대신들도 웅성거리며 은계종을 쳐다보았다.
"옛말에 성을 나가 적을 공격하기는 어려우나
군신이 온 힘을 다해 성을 지키려 든다면 열 배의
적을 감당할 수 있다 했사옵니다. 이제 국가의 사직이
존망에 처했으나 충의군이 일어나고 백성들이 힘을
합해 적과 싸우고자 하니 마땅히 성을 굳게 지킨다면
멀지 않은 시간에 원군이 당도하여 적을 물리치게 될
것이옵니다. 청컨대 폐하께서 손수 충의군을
지휘하시어 난국을 타개하소서! 그리하면 성안의 모든
군사와 백성들이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거란군과
싸울 것이옵니다."
"그러하옵니다. 군신이 하나가 되어 적을 막아야
하옵니다."
용주(龍州:상경용천부 3부의 하나) 자사(刺使)
김신(金臣)도 인선황제가 앞에 나서서 거란과 싸울
것을 주장했다. 그는 거란군이 침략해 오자 직접
용주의 나졸들을 이끌고 이종명의 상도방위군에
편성되어 거란군과 싸웠었다. 그러나 이종명이 거란의
선봉군의 장군 안단에게 죽고 상도방위군이 패하자 온
몸이 상처투성이가 되어 후퇴했던 것이다.
"폐하께서 친히 충의군을 지휘하신다면 군사들의
사기가 더욱 높아질 것이고 인근의 백성들까지 몰려와
사직을 구하려 할 것이옵니다."
"짐에게 성에 나가서 싸우라는 말이오?"
인선황제는 몸이 부들부들 떨렸다. 황제에게
군사들과 같이 적과 싸우라는 은계종과 김신의 말이
마치 자신에게 죽으라는 말처럼 들렸다.
"폐하! 요왕 아보기는 천리 길을 달려와 지금
거란군의 행영에서 군사들을 지휘하고 있사옵니다."
"닥쳐라! 과인을 어찌 그따위 오랑캐와
비교하는가?"
인선황제는 벌컥 화를 냈다.
"임금에게 성밖으로 나가 싸우라는 신하는 지금까지
듣도 보도 못했다! 참으로 무엄하기 짝이 없구나!"
인선황제는 찬바람을 일으키며 어림청을 나가
버렸다. 그 뒤를 내관과 궁녀들이 줄줄이 따라나갔다.
대신들은 어안이 벙벙했으나 인선황제의 행차를 막을
수가 없었다.
"주안을 차려라!"
인선황제는 귀비(貴妃:왕비)의 궁전인 백련궁에
들어가자 궁녀들에게 술상을 차리라고 지시했다.
생각은 임소홍에게 가고 싶었으나 백련궁에는
효경(孝敬)왕후와 황태자, 그리고 비빈들이 불안한
얼굴로 모여 있었다. 사직이 위태로워지자 인선황제는
비로소 백련궁을 찾아온 것이다.
"폐하!"
궁녀들이 술상을 차려 오자 왕비가 손수 술을
따랐다. 황제는 단숨에 술잔을 비웠다. 왕비가
무엇인가 말을 할 듯 했으나 인선황제는 손을 들어
제지시키고 술만 연거푸 들이마셨다.
"아바마마."
황태자 대광현(大光顯)이 엎드려 있다가 간곡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대광현은 이미 20세를 넘겨
태자비와 세손까지 두고 있었다.
"무엇이냐?"
"대신들은 무엇이라고 하옵니까?"
"과인에게 성에 나가 싸우라고 한다!"
인선황제는 불쾌한 얼굴로 술을 마셨다.
"아바마마! 신도 대신들과 같은 생각이옵니다.
아바마마께서 손수 충의군을 지휘하시면 소자가
옆에서......"
"닥쳐라!"
"아바마마! 사직이 존망에 있사옵니다."
황태자 대광현은 엎드려 울음을 터뜨렸다.
"그렇다고 나보고 오랑캐의 군사들과 싸우란
말이냐? 내가 오랑캐 군사의 무지막한 칼에 죽어야
한단 말이냐?"
인선황제는 벌떡 일어나 술상을 발로 차고 백련궁을
나갔다. 황제의 시중들인 내관과 궁녀들이 또 다시
황황한 걸음으로 그 뒤를 따랐다. 그는 바람처럼
바쁘게 임소홍의 거처인 홍련궁으로 향했다.
"폐하! 어서 납시옵소서."
임소홍은 인선황제가 오자 재빨리 나붓하게 절을
했다.
"일어나라."
인선황제는 손수 임소홍의 손을 잡아 일으켰다.
가슴이 답답했다. 적군은 코앞에 닥쳐와 있으나
뚜렷한 대책은 없었다. 대신들의 주장은 황제가 손수
군사들을 거느리고 사나운 거란군과 싸우다가 죽자는
것이었다.
인선황제는 그것이 무섭고 두려웠다.
(괘씸한 놈들......)
머릿속에 대신들의 얼굴을 떠올리며 인선황제는
임소홍을 안고 침상으로 올라갔다. 그는 다짜고짜
임소홍의 옷을 벗기기 시작했다. 자신도 알 수 없는
노여움이 무섭게 꿈틀거리고 있었다. 인선황제는 다른
어느 날 보다도 더욱 격렬하게 임소홍을 껴안고
뒹굴다가 떨어졌다.
"어전회의는 어찌 되었사옵니까?"
인선황제가 그녀의 몸에서 떨어져 가쁜 숨을 몰아
쉴 때야 임소홍은 조용히 물었다.
"주전(主戰)이다."
인선황제는 씹어 뱉듯이 내뱉았다.
"주전이면 싸우자는 것이 아니옵니까?"
"그렇다!"
"거란은 수 십만 대군이라 하는데 싸우면 어찌
되옵니까? 차라리 거란에 항복을 하여 사직을
보존해야 하옵니다."
"항복?"
"거란은 비록 군사를 일으키고 있으나 사직을
보존케 할 것이옵니다."
"그럴까?"
인선황제는 귀가 솔깃해 졌다.
"폐하께서 손수 거란군의 행영에 나가 항복을
하시면 거란왕은 조공만 받고 군사를 물릴
것이옵니다."
"그렇게만 된다면 얼마나 다행이겠느냐? 허나 누가
그것을 보장하겠느냐?"
"요왕 아보기의 황숙인 할저이옵니다. 할저가 제게
사람을 보내 그렇게 청했사옵니다. 할저는 폐하께서
베풀어주신 은혜를 잊을 수 없다고 하며 그 은혜를
보답할 길을 찾다가 요왕에게 그렇게 건의한 바
요왕이 쾌히 승낙했다고 하옵니다."
"음....."
인선황제는 깊은 생각에 잠겼다. 귀가 솔깃한
말이었으나 섣불리 결정할 수가 없었다.
효경왕후의 백련궁은 초상집처럼 변해 있었다.
인선황제가 술상을 발로 차고 나갔기 때문이 아니라
거란군의 침략이 눈 앞에 닥쳤기 때문이었다.
궁녀들은 구석구석 모여서 불안한 얼굴로 수군거리고
왕비를 비롯한 황태자는 언제 들이닥칠지 모르는
거란군 때문에 무거운 한숨만 내쉬고 있었다.
발해는 바람 앞의 등불 같은 처지였다.
효경왕후나 황태자 대광현은 그 사실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인선황제는 군사들을 독려하여
거란군을 막을 생각조차 하지 않고 있었다.
"태자는 사직이 위태로움을 어찌 생각하는가?"
효경왕후는 황제가 임소홍의 거처로 가버리자 태자
대광현을 위로하고 넌지시 대광현의 의향을 물었다.
"어마마마. 충의군이 결성되었다고는 하나 거란의
대군을 막아내기에는 역부족일 것으로 사료되옵니다."
"허면 우리 황실은 모두 어찌 되겠는가?"
"발해 황실은 거란으로 끌려가게 될 것이옵니다."
태자 대광현은 비통한 음성으로 말했다.
"그리 되어서는 안된다."
효경왕후의 얼굴도 침통하게 변했다.
"어마마마."
"태자는 잘 듣거라. 발해의 사직이 존망에 있다는
것은 아녀자인 나보다도 태자가 더 잘 알고 있을
것이다. 형세가 이토록 위태로운데도 황제께서는 적을
막을 생각이 없는 것 같구나. 아무래도 사직을
보존해야 할 방도를 달리 찾아야 하겠다."
"어마마마. 무슨 말씀이시옵니까?"
"너는 사직을 이을 태자다."
"예."
"그러니 황제를 페하고 네가 대통을 계승해라."
효경왕후의 입에서 싸늘한 옥음이 떨어졌다.
"예?"
태자 대광현은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황제가 황음한 것은 온 세상이 다 아는 일이다!"
"어마마마! 아니되옵니다! 어찌 자식이 부왕을
폐한다는 말씀이옵니까?"
"황제는 황음하여 체통을 잃고 사직을 돌보지
않은지 오래다. 내가 어림군 대장군에게 밀지를 내릴
터이니 그렇게 알아라!"
"어머마마! 어마마마께서 그리 하신다면 소자는 이
자리에서 자진하겠사옵니다."
"뭣이?"
효경왕후가 깜짝 놀라서 태자 대광현을
내려다보았다. 대광현의 얼굴에서 굵은 눈물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어머마마. 어찌 소자에게 천고에 없는 불효자가
되라고 하시옵니까?"
"이 나라 사직을 보존해야 하지 않느냐?"
"허나 차마 그것은 할 수 없사옵니다."
태자 대광현은 효경왕후 앞에 엎드려 울음을
터뜨렸다. 그 모습을 물끄러미 내려다보던 효경왕후는
무겁게 한숨을 내쉴 뿐이었다.
바람은 새벽에도 세차게 불었다.
발해의 황궁이 새벽까지 어수선한데 비해 거란군의
진영은 내일의 싸움을 위해 군사들이 모두 잠들어
있었다. 물론 곳곳에 초병을 세우고 척후병까지
풀어놓은 채였다. 그러나 새벽이 되자 초병들과
척후병들은 모닥불 앞에 모여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
그때 요란한 꽹과리 소리가 울리며 사나운
말발굽소리가 들렸다.
"적이다!"
"발해군사다!"
초병들은 깜짝 놀라 적의 침입을 알리는 나팔을
불어댔다.
부우웅.
부우웅.
그러나 나팔소리가 얼마 울리기도 전에
발해군사들이 질풍처럼 달려와 닥치는대로 초병들을
도륙하기 시작했다.
"으악!"
거란의 초병들은 처절한 비명을 지르며
나무토막처럼 쓰러졌다. 발해군사들은 무인지경처럼
거란의 군진을 휩쓸고 있었다. 거란군사들은
발해군사들의 칼이 번쩍일 때마다 단말마의 비명을
지르며 죽어갔다.
"기습이다!"
"발해군사들이 기습을 해왔다!"
요왕 야율 아보기는 군진이 소란하자 잠자다가 말고
뛰어 일어났다. 여기저기서 거란군사들의 참혹한
비명소리가 들리고 있었다. 아보기는 후다닥 옷을
입은 뒤에 칼을 들고 행영 밖으로 뛰어 나갔다. 어둠
속에서 우왕좌왕하는 거란의 군사들과 질풍처럼
달리며 거란군사들을 도륙하는 발해군사들이 보였다.
(담대한 놈들이다!)
아보기는 발해군사들이 수 십 만이나 되는 거란군의
진영을 누비고 다니며 거란군을 도륙하는 것을 보고
감탄했다.
"당황하지 마라!"
"발해군은 얼마되지 않는다! 발해군을 포위하고
공격하라!"
거란군의 대원수 야율 덕광이 말을 타고 돌아다니며
우왕좌왕하는 거란군사들을 수습했다. 안단, 강묵기,
한연휘, 야율 우지, 야율 적로 같은 거란군의
장수들도 재빨리 군사들을 수습하여 발해군사들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그때 무수한 불화살이 어두운 하늘을 가르며
거란군의 진영으로 날아오기 시작했다.
"불화살이다!"
"불이야!"
"군막에 불이 붙었다!"
거란군은 우왕좌왕하며 발해군사들과 맞서 싸우려고
했다. 그러나 발해군사들은 불이 붙은 군막의 불을
끄랴, 귀병(鬼兵)처럼 동에 번쩍 서에 번쩍하며
거란의 군진을 휩쓸고 있는 발해군사들에게 감히
대적할 엄두를 내지 못하고 있었다.
발해군사들은 수많은 거란군사들을 도륙한 뒤
성으로 들어가 버렸다.
거란군은 공포로 온 몸을 떨었다. 거란군의
진영에는 목이 없는 수많은 군사들의 시체만 나뒹굴고
있었다.
................................................
1) 발해의 관료층은 거란군이 침공해 오자
투항주의로 일관했다. 황태자 대광현은 투항을
반대하고 수만 명의 무리를 이끌고 고려로 귀순했다.
그러나 대광현은 발해가 멸망한지 5년이 지나 고려로
귀순하여 그 동안 거란군에게 치열한 발해 부흥운동을
전개했을 것으로 추측된다.
30. 홀한성의 전운
날이 밝았다.
대륙의 겨울 아침은 지평선에서 해가 뜬다.
홀한성을 포위하고 있는 거란군의 진영이나 발해의
홀한성 성루에서도 지평선에서 붉게 솟아오르는
장엄한 태양이 보였다.
아름다운 태양이었다.
대륙에 생명을 잉태하게 하고 생명이 자라게 하는
태양이었다.
발해군과 거란군은 지평선에서 솟아오르는 장엄한
태양을 바라보면서 그 옛날 해뜨는 나라를 찾아 길고
긴 이동길에 올랐던 선조들을 생각했다.
그 무렵 그들은 하나의 종족에 지나지 않았었다.
그러나 이제는 대륙의 주인이 누구인지 가리는 한판
승부를 벌려야 했다. 한쪽은 떠오르는 태양처럼
욱일승천의 기세였고 다른 쪽은 기우는 석양처럼
처량한 낙조(落照)의 꼴이었다.
날씨는 차가웠다.
혹한은 해가 떴는데도 계속되고 있었다. 바람은
불지 않았으나 병사들의 입에서는 하얀 입김이
뿜어지고 코가 시뻘갰다.
거란군은 아침 일찍 홀한성 공략에 나섰다. 지난 밤
발해군사들의 기습으로 막대한 피해를 입은
거란군이었으나 시체를 수습하고 성의 공략에 나선
것이다. 아보기는 중군에서 군사를 직접 지휘했다.
홀한성의 공격에 선봉에 선 것은 강묵기와
아고지였다.
"홀한성을 쳐부숴라!"
거란군은 진격 명령이 떨어지자 일제히 성을 향해
활을 쏘아댔다. 거란군은 막강한 노포(弩砲:돌멩이를
쏘는 일종의 야포)부대와 노궁(弩弓:화살이 한꺼번에
여러 개 발사되는 수레)부대, 그리고 기사병(騎射兵),
공병(工兵), 천하무적이라는 철기병을 거느리고
있었다.
기사병들이 일제히 활을 쏘자 홀한성의 성벽 위로
화살의 비가 쏟아졌다. 다음은 노포부대의 돌멩이가
듣기에도 소름이 끼치는 쐐액 소리를 내며 발해의
충의군을 향해 날아왔다. 발해의 충의군은 거란군의
화살비와 노포부대의 돌멩이를 맞아 처절한 비명을
지르며 죽어갔다.
거란군은 성을 지키는 발해군사들이 주춤한 틈을
타서 사다리를 놓고 성을 기어오르기 시작했다.
"놈들이 성벽을 오른다!"
"성벽을 오르지 못하게 막아라!"
발해군사들은 성루에서 돌멩이를 굴리고 사다리를
밀어서 쓰러트렸다. 화살이 넉넉하지 않았기 때문에
부녀자들을 동원하여 돌을 주워 오게 하고 돌을 굴려
필사적으로 막았다. 거란군의 시체가 성 밑에 산처럼
쌓이기 시작했다.
"퇴각하라!"
거란군은 발해군사가 완강히 버티자 무수한 시체를
남겨 놓고 일단 뒤로 후퇴했다.
"활을 쏴라!"
"화살에 불을 달아라!"
거란군은 홀한성을 멀찌기 떨어져 포위한 뒤에
홀한성을 향해 불화살을 쏘아댔다. 그러자 불화살이
비오듯이 홀한성으로 날아 들어갔다. 거란군이 쏘아댄
불화살에 성안의 민가가 불타고 화염이 충천했다.
그러나 발해군사들은 추호도 굽히지 않았다.
"우리도 활을 쏴라!"
"활을 쏴라!"
발해군사들도 거란군을 향해 일제히 활을 쏘아댔다.
양군의 화살이 포물선을 그리며 빗발치듯 날아가고
날아왔다. 그러나 발해군사는 성벽이 방패가 되어
주었고 거란군사는 은폐할 곳이 없었다. 전나무를
잘라서 방어벽을 설치했으나 희생이 점점 늘어갔다.
"발해군사들의 반격이 만만치 않습니다."
거란군의 대원수 야율 덕광과 장수들이 아보기에게
퇴각을 건의했다.
"군사들을 일단 뒤로 물려라!"
아보기는 야율 덕광과 장수들의 건의를 받아들였다.
거란군사는 무수한 시체를 남기고 다시 뒤로
후퇴했다.
그러나 발해군사들의 피해도 만만치 않았다.
거란군은 3일 동안 계속 홀한성을 향해 파상적인
공격을 감행했다. 발해군사들은 동료들은 처절한
비명을 죽어 가는데도 용맹하게 싸웠다. 그들은 날이
갈수록 사기가 고조되어 가고 홀한성 주변에서는
충의군들이 야음을 타고 몰려왔다.
발해군사가 1백명이 죽으면 다음 날 어디선가 2백
명이 달려와 충의군에 가담했다.
그러나 발해의 조정은 투항을 논의하고 있었다.
투항에 가장 적극적인 것은 인선황제였다. 인선황제는
지난 밤 요왕 아보기로부터 친서를 받았는데 그것은
다음과 같은 것이었다.
.....그대 발해의 왕은 들으라. 우리 거란과 발해는
수 백년 전부터 인국의 정의를 두텁게 다져왔고
형제와 같이 지냈노라. 발해 고왕(高王) 때는 우리와
발해가 형제의 우의로써 당과 싸웠고 무왕(武王) 때
역시 우리의 힘에 의거하여 당을 치고 발해의 국토를
넓히지 않았는가.
그러므로 발해는 마땅히 우리를 형제의 나라로
대접하여 상국(上國)으로 섬겨야 하거늘 옛날의
정의는 다 어디로 가고 소국으로 감히 요와 맞서려
하는가.
과인은 천명(天命)을 받들어 거란의 8부를 통일하고
중원(中原)의 대강을 평정하였노라. 또한 친히
서정(西征)을 하여 멀리 당항, 토혼, 조복을 모두
굴복시키고 이제 너희 발해를 징계코자 하니
천시(天時)를 알거든 속히 성문을 활짝 열고 나와
나를 맞이하라.
그대가 행영(行營)을 찾아와 절하고 진심으로
아우로서의 예(禮)를 행할 양이면 내가 어찌 형으로써
그만한 아량을 베풀지 않겠는가. 발해의 사직을
온전히 두는 것은 물론이오, 대소신료들까지 나의
신하로 여기고 중하게 쓸 것이다. 또한 발해의 풀
포기 나무 한 그루 다치지 않을 것이로다.
허나 그대가 아직도 우매한 몇몇 주전론자들의 말에
귀를 기울여 우리 대요제국에 항거하고자 한다면 어찌
아우로써 볼 수 있겠는가. 나의 군대가 수십만이오,
그 군대가 한결 같이 범 같이 사납고 용맹하니 발해는
어린아이조차 살아 남지 못하리라.
내가 이처럼 좋은 약을 주고자 하니 발해의 왕은
병을 얻으려 하지 말고 몸에 좋은 약을 받으라.
인선황제는 그 편지를 받자 즉시 투항을 하고
싶었다. 요왕 아보기의 편지대로 거란군은 수십만이나
되었고 그들의 비위를 거슬리면 그야말로 발해는
어린아이조차 살아남지 못하게 될 것이었다. 그러나
대신들에게 먼저 그 말을 꺼낼 수 없어 군신들을 모아
놓고 대책을 논의했다.
발해의 대신들은 인선황제가 뚜렷한 전의(戰意)를
세우지 않고 있는 데다 거란의 대군이 홀한성을
에워싸고 있으므로 갈피를 잡지 못하였다. 투항론을
펴는가 하면 충의군이 거란군과 싸우고 있는 사이에
남문으로 해서 고려로 귀순하자는 주장까지 나왔다.
고려에 귀순하자는 귀순론은 후일 고려의 도움을 얻어
거란과 싸우자는 것이었으나 그다지 실효성도 없는
것이었다.
다만 태자 대광현만이 끈질기게 거란과 싸울 것을
주장하였다.
인선황제는 갈팡질팡하는 대신들의 의견을 듣고
있다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충의군이 성을 지키고 있다고 하나 얼마나 버틸 수
있겠는가? 공연히 아보기의 비위를 거슬렸다가는
백성들만 도륙 당할 것이니 백성들을 위하여 마땅히
투항을 의논해야 할 것이다."
인선황제는 백성들을 위하여 투항을 하는 것이
옳다고 자신의 흉중을 은근히 내비쳤다.
"그러하옵니다. 백성들이 더 이상 다치는 것은 차마
군신으로서 두고 볼 수 없는 일이옵니다. 요국에
투항을 하심이 마땅한 일인가 하옵니다."
대신들은 황제가 흉중을 내비치자 비로소 투항하는
것이 옳다고 주장하기 시작했다.
"폐하! 아니되옵니다."
태자 대광현이 투항하자는 대신들의 말에 강경하게
반대했다.
"태자는 거란의 대군을 물리칠 수 있는가?"
인선황제가 눈썹을 꿈틀거리며 태자 대광현을
쏘아보았다. 거란이 침략을 했을 때부터 황제와 태자
대광현은 날카롭게 대립하고 있었다. 아버지와 아들,
부자지간이지만 적의 침략 앞에서는 견해가 전혀
달랐다.
"신이 적을 무찌를 수 있을 지는 알 수 없사오나
어찌 죽음을 두려워하여 투항을 하겠사옵니까? 지금
이 시간에도 목숨을 걸고 싸우는 백성들이나 충의군을
대하기가 민망할 따름이옵니다!"
태자 대광현은 인선황제 앞에 엎드려 바닥에 이마를
찧으며 통곡을 했다. 그러나 인선황제는
요지부동이었다. 투항만 하면 목숨을 부지할 뿐
아니라 국왕의 지위를 그대로 누리며 살 수 있는데
굳이 적의 대군과 싸울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
"닥쳐라! 너 따위가 어찌 백성을 운운하느냐?"
인선황제는 끝내 태자 대광현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 인선황제는 이미 마음속에 투항하기로 결심을
했기 때문에 태자 대광현의 말이 귀에 들어올 리가
없었다.
태자 대광현에게 어림청에서 나가라고 명을 내린 뒤
인선황제는 마침내 투항을 결정하고 말았다.
"대신들의 의견이 한결 같고 무모한 전쟁으로
백성들이 무리 죽음을 할까 심히 염려된다. 이에
백성을 사랑하는 대신들의 의견을 수렴하여 요국에
투항하기로 하노라. 대신들은 속히 이 사실을 내외에
알리고 요국에 통지하라!"
인선황제는 교시를 내리고 어림청에서 퇴청했다.
백성을 위하여 투항한다는 교시가 어처구니 없었으나
일신의 안위에만 여념이 없는 대신들은 그 사실도
파악하지 못한 채 투항문의 초안을 잡기에 분주했다.
그들은 3성각(三省閣)에서 머리를 맞대고 회의를
했다. 각 부(府)와 의전(儀典)을 담당한 대신들도
투항하기 위한 옛 규례를 상고하기 위해 정신없이
뛰어 다녔다. 그리하여 마침내 다음과 같이 투항을
위한 결정을 했다.
1. 투항은 선조성 좌상이 요의 행영에 가서 알린다.
선조성 좌상을 수행하는 관리는 의부(義部:조선조의
예부)대신과 어림군이 맡는다.
2. 발해군은 요와의 투항 협의가 진행되는 동안
일체의 전투행위를 중지한다.
3. 투항에 반대하거나 이를 방해하는 행위는 역모로
다스린다.
4. 대소신료는 모두 어림청으로 나와 투항하는
황제를 수행한다.
5. 황궁내의 모든 보물은 요에 바친다.
6. 충의군의 대장을 맡고 있는 전 북우위 대장군
장영은 역적으로 쫓기고 있는 몸이라 즉시 잡아
처형해야 마땅할 것이나 선대의 공로를 참작하여
죽이지 않고 살려둘 것이니 속히 상도(上都)를
떠나라.
발해의 대신들은 전쟁에는 우유부단했으나 투항에는
누구보다도 빨랐다.
여섯 번째 항목은 장영에 대한 것인데 장영의
사람됨이 강직하여 투항을 반대할 것을 우려한
대신들이 특별히 넣은 항목이었다. 일부 대신들은
장영의 목을 잘라서 요왕에게 바쳐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했으나 그렇게 되면 충의군들이
반발할지도 모르므로 성을 떠나게 하는 것으로 낙착을
지은 것이다.
그들은 항복에 대한 제반사항을 결정한 뒤에
투항문의 초(秒)를 작성했다. 투항문의 초는 다음과
같은 것이었다.
......신(臣) 인선이 돈수구배(頓首九拜)하고
아뢰나이다. 신이 발해의 사직을 맡은 지 어언 20년,
태조 고왕께서 나라를 세운 지는 229년이 되었습니다.
허나 신이 미충하고 덕이 부족하여 이웃에 있는 상국
요와 교통하고 형제의 나라로 섬겨야 하는 것이
마땅한 일이었으나 우둔하여 이를 깨우치지 못하여 폐
하께서 몸소 대군을 이끌고 원정하여 어리석은 신을
깨우치니 감히 몸둘 바를 모르겠사옵니다.
사정이 이러한데 이제 무엇을 더 구구하게
아뢰겠사옵니까? 폐하께서는 존귀함이 하늘에 이르고
위엄이 사해를 덮으니 인중지룡(人中之龍)이요,
성인군자(聖人君子)라 할 것입니다.
폐하께서 누누이 말씀하셨듯이 저희 발해와 요는
형제국이었습니다. 청컨대 어리석은 아우가 형의
가르침을 깨닫지 못하여 교만하였사오니 형되는
입장으로서 인자로이 굽어 살펴주시옵소서. 저희
발해는 대소신료가 한결 같이 이 같은 뜻을 갖고
있사오니 저희의 구차한 목숨을 보존케 하시어 안락한
여생만 편히 보내게 하여 주옵소서.
이러한 입장을 굽어 허락하신다면 좋은 날을 골라
신이 손수 폐하의 행영에 나아가 엎드려 죄를 빌고자
하나이다
대신들이 쓴 항복문의 초안은 이처럼 비통한
것이었다. 대신들은 초안이 마련되자 어화원에 들어가
인선황제의 윤허를 받았다.
"속히 요에 알리도록 하라."
인선황제는 투항문의 초안을 보지도 않고 윤허를
내렸다.
인선황제의 윤허가 내리자 그들은 총총히
어림청으로 돌아왔다.
그들은 먼저 어림군 대장군을 불러 황제의 교시를
전했다.
"투항입니까?"
어림군 대장군 황보헌은 가슴이 철렁했다. 어느
정도 예상하고 있던 일이었으나 막상 닥치고 나자
가슴을 칼로 베이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성루에 백기를 내걸고 전투행위를 일절 중지하도록
하라는 어명이시오."
"알겠습니다."
황보헌은 침통한 얼굴로 대답했다.
"대장군의 일이 막중하오. 폐하의 교시에 반대하는
자들도 있을 터이니 그런 자들은 가차없이 처단하도록
하시오!"
"예."
"또한 요국에 투항을 할 때는 요국 황제폐하께서
진노하심이 없도록 대소신료들이 모두 나가서 투항을
해야 할 것이오. 대소신료들에게 빠짐없이 입궁하라
하시오!"
"삼가 명을 받들어 시행하겠습니다."
어림군 대장군 황보헌은 대신들이 시키는대로 할
수밖에 없었다. 인선황제의 교지를 받들고 황궁을
나오자 성내가 여전히 어수선했다.
황보헌은 어림군을 이끌고 장영에게 달려갔다.
장영이 지휘하는 충의군은 사기가 충천하여 거란군과
맹렬하게 싸우고 있었다. 비록 성밖에는 거란군이
성을 겹겹이 포위하고 있었으나 충의군은 조금도
위축되지 않고 있었다.
(어떻게 이 사람들에게 투항한다는 폐하의 교지를
전한다는 말인가?)
황보헌은 투항을 알려야 한다는 사실이 막막했다.
"어명이오!"
그러나 황제의 교지를 전해야 했다.
"충의군 대장군 장영은 어명을 받으시오!"
장영이 흠칫했다.
그러나 충의군의 입장이라 어명을 받지 않을 수
없었다.
"신 장영 삼가 어명을 받겠습니다."
장영은 교지를 들고 있는 황보헌 앞에 무릎을
꿇었다.
"전 북우위 대장군 장영은 나라의 대역죄인이다.
죄인의 몸이면 먼저 예부(禮部:형부)에 나와 죄를
청해야 할 터인데도 충의군을 이끌고 요국과
싸운다하니 해괴한 일이다. 마땅히 극형으로 다스려야
하겠으나 선대의 공로를 참작하여 인정을 베풀겠노라.
죄인 장영은 속히 상도를 떠나되 다시는 돌아오지
말라!"
무릎을 꿇고 황제의 교지를 듣고 있던 충의군들이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그들은 어림군 대장군 황보헌이
어명이라는 바람에 황제가 이제야 과오를 뉘우치고
장영을 상도방위군 대장군에 임명하리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런데 어명은 뜻밖에도 장영의 추방령이었다.
장영은 황보헌이 읽는 교지를 들으며 분노로 온
몸을 부르르 떨었다. 인선황제가 자신이 백의종군하는
것조차 방해한다고 생각하자 비통하기 짝이 없었다.
"알겠소이다."
장영은 한참 만에야 고개를 들고 황제가 있는
황궁을 쳐다보았다. 장영의 눈이 용광로처럼
이글거리고 있었다.
"대장군님!"
황보헌이 장영의 손을 잡았다. 장영은 만감이
교차하는 눈빛으로 황보헌을 쳐다보았다. 장영의 눈에
촉촉하게 물기가 고이고 있었다.
"면목이 없소이다!"
"아무 말씀도 마시오."
장영은 고개를 가로 저었다. 황보헌이 무슨 말을
할지 알고 있는 것이다.
"그럼 이만 돌아가겠소."
"배웅하지 않겠소."
장영은 짧게 끊어서 내뱉었다. 황보헌이 새삼스럽게
포권지례를 올리고 물러갔다.
"장군님!"
"장군님!"
황보헌이 돌아가자 충의군이 다투어 장영의 앞으로
몰려왔다. 그들은 황제가 장영을 상도에서 추방한다고
하자 분개하고 있었다.
"장군님! 어찌 이런 법이 있습니까?"
"장군님! 황궁에는 역적들만 있습니다! 그들을 먼저
처단하지 않으면 요와 싸울 수가 없습니다!"
"맞습니다! 황궁에 있는 역적들을 단칼에
쳐죽입시다!"
군사들은 분개하여 이구동성으로 외쳤다. 그러나
장영은 가만히 고개를 흔들고 있었다.
"내가 이 곳을 떠나면 그 뿐이다!"
장영은 입술을 깨물었다.
"장군님! 안됩니다!"
"장군님! 우리는 누구를 믿고 싸웁니까?"
발해의 충의군들은 장영의 앞에 꿇어 엎드려 통곡을
했다. 그러나 황제로부터 추방령을 받은 장영이었다.
장영은 밤중에 홀한성을 떠나기로 했다. 충의군들은
인선황제의 동생 대인열이 지휘하면 쉽게 무너지지는
않을 것이었다.
그날 밤 칠흑 같은 어둠을 가르고 말 한 필이
홀한성의 동문(東門)을 나왔다. 거란군은 어둠 속에서
한 필의 말이 나오는 것을 보고 벌떼 같이 달려들어
에워쌌다.
장영은 거란군이 에워싸는 것을 보자 갑자기 고개를
하늘을 향해 젖히고 앙천대소를 터뜨렸다. 그리고는
젖은 목소리로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남아로 태어나면 나라를 위해 죽는다
당당한 장부라면 죽음도 불사하리
시운(時運)이 닿지 않아 죽을 때가 되어도
열렬한 대의(大義)로 충(忠)만을 생각하라
장영은 짧은 노래를 마치자 거란군을 향해 세차게
말을 몰았다. 장영을 에워싸고 있던 거란군이
그때서야 창을 휘두르며 장영에게 달려들었다. 그러나
거란의 군사들은 장영의 상대가 되지 않았다. 장영의
앞을 막는 거란의 군사들은 피를 뿌리며 죽을
뿐이었다.
"누가 나가서 저 자를 죽여라!"
요왕 야율 아보기는 군진이 떠들썩하자 군사들의
삼엄한 호위를 받으며 행영에서 나와 장영이
거란군사들을 죽이는 것을 보고 좌우를 돌아보고 명을
내렸다.
"신이 나가서 저 자의 목을 베겠습니다."
아보기의 명령에 거란의 맹장 강묵기가 말을 타고
달려나갔다. 그러나 강묵기는 장영과 몇 합 부딪치자
금세 수세에 몰렸다. 그러자 한연휘, 안단, 야율
우지가 달려나가 일제히 장영을 공격했다. 장영은
거란의 맹장이 넷이나 덤벼들자 재빨리 뒤로 물러나
포위망을 뚫고 달아나기 시작했다.
거란군사들은 필사적으로 장영을 죽이려고 했으나
장영은 장창을 휘두르며 번개처럼 포위망을 뚫고 어둠
속으로 사라져버렸다.
31. 국치(國恥)
날이 밝자 눈발이 날리기 시작했다. 잿빛 하늘에서
흰 눈발이 어지럽게 날리는 것을 보며 충의군들은
구원군이 오기만을 눈이 빠지게 기다렸다. 거란군이
홀한성을 포위한지 이틀째 되는 날이었다. 그러나
홀한성 인근에 있는 군사들조차 꼼짝도 하지 않고
있었다. 그들은 거란의 대군에 놀라 뿔뿔이 흩어져
달아난 것이 분명했다.
충의군은 어지러운 눈발 속에서 아침을 지어먹었다.
거란의 군진에서도 아침을 짓는지 흰 눈발 사이로
푸른 연기가 모락모락 피어오르고 있었다. 눈발이
점점 자욱해져 군진에서 휘날리던 깃발들이 모두
백색으로 보였다.
어지러운 눈발을 헤치고 한 떼의 군마가 홀한성
성문을 나온 것은 오시가 가까웠을 때였다. 군마는
곧장 거란의 진영으로 달려오고 있었다. 군마는 모두
창을 들고 있었으나 창마다 흰 띠를 묶고 있었다.
싸울 의사가 없으니 적대행위를 하지 말라는
뜻이었다.
"누구냐?"
거란의 장수가 진영에서 달려나와 백기를 앞세우고
오는 군마를 가로막았다.
"사자(使者)요."
"직첩이 어떻게 되오?"
"어림군 대장군 황보헌이오."
"잠시 기다리시오."
거란의 장수는 황보헌 일행을 멈추게 하고 요왕
아보기의 행영으로 나는 듯이 달려갔다.
"폐하. 발해의 사자가 왔습니다!"
"사자의 직첩이 무엇이라고 하느냐?"
"어림군 대장군이라고 하옵니다."
"들여보내라!"
요왕 아보기의 명이 떨어졌다.
거란의 장수는 다시 황보헌에게 달려왔다.
"폐하께서 알현을 허락하셨소."
"고맙소."
황보헌은 아보기의 행영으로 인도되어 갔다.
아보기의 행영은 군사들이 삼엄한 호위를 하고
있었다. 황보헌은 군막 앞에서 무장을 해제 당하고
요왕 아보기의 군막으로 들어가 꿇어 엎드렸다.
"발해 대장군 황보헌이 폐하를 뵈옵니다."
요왕 아보기의 좌우에는 요의 대신들과 황태자 야율
배, 대원수 야율 덕광, 아고지, 한연휘, 안단,
강묵기, 야율 우지, 야율 적로 같은 맹장들이 갑옷을
입고 시립해 있었다. 아보기가 몸소 친정을 했기
때문에 대신들까지 전쟁터로 나온 모양이었다.
"일어나시오!"
아보기는 황보헌을 극진하게 예우했다. 발해의
황제가 투항의사를 나타내기는 했지만 성안에는
아직도 많은 충의군들이 요에게 적대행위를 하고
있었다.
"황송하옵니다."
"그래 발해의 왕은 편히 지내고 있소?"
"폐하의 성려에 힘입어 강령 하시옵니다."
"다행이군."
황보헌은 어좌에 비스듬히 기대앉아 있는 요왕
아보기를 넌지시 살폈다. 거란에서 태어난 불세출의
영웅이라는 아보기가 어떤 인물인지 궁금했던 것이다.
(역시 걸출한 인물이야......)
황보헌은 아보기의 용안을 살핀 뒤 속으로
감탄했다. 기질이 사나운 유목민인 거란 8부를
통일하고 중원까지 진출한 인물답게 호쾌한 영웅의
기상이 보였다.
"저희 폐하께서는 투항을 의논코자 대신으로 사신을
보내고자 하옵니다. 원컨대 투항문제를 사신과
협의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발해왕의 제의를 환영하는 바요."
"황송하옵니다."
"요와 발해는 전부터 인국의 정리를 두터이 해왔소.
이제 옛 정리를 회복코자 그대가 사자로 왔으니 짐은
두 손을 들어 환영하는 바이오. 작은 주연을 베풀어
노고를 위로하고자 하니 사양하지 마시오."
"대왕의 배려에 감읍할 따름입니다."
"황태자!"
아보기가 옆에 시립해 있던 황태자 야율 배를
불렀다.
"예. 폐하!"
야율 배가 고개를 숙이며 대답했다.
"황태자가 황보 장군을 극진히 대접하라!"
"삼가 명을 받들겠습니다."
요왕 아보기는 요의 황태자 야율 배에게 황보헌을
극진히 대접하라고 지시했다. 황보헌은 아보기의
행영을 물러 나와 황태자의 군막으로 갔다. 황태자의
군막에는 이미 주연이 차려져 있었다.
"저희 황제폐하께서는 대신들의 주청을 받아들여
요에 투항하고자 합니다. 이에 발해의 재상 선조성
좌상을 사신으로 파견하여 협의코자 하니 사신으로써
예우를 해주기를 청원합니다."
황보헌이 황태자를 향해 말하자 갑자기 둘째
왕자이며 거란군의 대원수에 임명된 야율 덕광이 눈을
부라리며 나섰다.
"무엄하다! 발해의 장수는 어찌하여 언사를 함부로
하는가? 자고로 천제는 한 분뿐이라는 것을 그대는
아는가? 지금 천하에 있어서 제를 칭할 만한 분이
어느 분이라는 것은 그대도 잘 알고 있을 터인데 감히
발해의 군왕을 황제로 칭하는가? 이는 대요제국
황제폐하를 능멸하려는 것이 분명하니 내가 너를
끌어내어 한 칼에 목을 베겠다!"
요의 둘째 왕자 야율 덕광은 당장이라도 황보헌의
목을 칠 기세였다. 황보헌은 입술을 깨물고 말했다.
"우리 발해는 태조 고왕 때부터 칭제를 하였소!
비록 우리의 사세가 부득하여 투항을 하기로 하였지만
아직 나라가 망한 것은 아니오!"
"닥쳐라! 네가 그래도 함부로 입을 놀리느냐?"
"투항하는 나라의 장수를 그렇게 핍박하는 것이
아니오! 내 비록 망국의 장수이기는 하나 어림군
대장군이오! 장수로써 전장터에서 죽지 못한 것도
억울한데 이런 핍박을 받을 수는 없소!"
황보헌은 분개한 나머지 벌떡 몸을 일으켰다.
"그만들 두시오!"
그때 황태자 야율 배가 옆에서 시비를 말렸다.
"아우는 발해의 장군을 핍박할 필요가 없다. 이제
투항하기로 하였으니 사소한 일에 왈가왈부할 일이
아니야!"
그러나 야율 덕광은 지지 않고 말했다.
"발해의 군왕이 투항을 하기로 하였으면 스스로
자신을 낮추어야 하는데 아직도 칭제를 하고 있으니
투항할 의사가 없는 것이 분명합니다!"
"황보 장군. 정말 그렇소?"
야율 덕광의 말에 야율 배가 날카로운 눈빛으로
황보헌을 쏘아보며 물었다.
"그렇지는 않습니다. 어찌 이와 같은 중대사를
가볍게 결정하겠습니까?"
황보헌은 야율 배를 쳐다보다가 얼굴을 찌푸렸다.
야율 배는 요의 황태자인데도 문약한 유생(儒生)으로
보였다. 그러나 야율 덕광은 둘째 왕자이면서도
아버지를 닮아 호랑이 같은 눈썹을 갖고 있었다. 야율
아보기의 대를 이어 야율 배가 왕위를 계승한다면
요국은 형제간에 왕위 계승 문제를 둘러싸고 치열한
권력투쟁이 일어날 것으로 보였다.
"내가 한 마디 묻겠소."
야율 덕광이 황보헌 앞으로 다가와서 눈알을
부라렸다.
"예."
"충의군에 장영 장군이 있소?"
"이미 성을 떠났습니다."
"성을 떠나다니?"
"우리 폐하께서 요의 선봉군을 무수히 죽인 것이
장영이라고 하여 떠나라는 어명을 내리셨소! 오늘
새벽에 장 장군은 성을 떠났다고 하오. 이로 미루어
보더라도 폐하께서 투항을 하려는 의도는 명백하오!"
"그럼 새벽에 우리 군사 수 백명을 죽이고 달아난
자가 장영이었소?"
야율 덕광이 얼굴에 비웃음을 가득 담아 내뱉았다.
야율 덕광은 거란의 군사가 벌떼처럼 에워싸고 있는
가운데도 단신으로 군영을 누비고 다니며 군사들을
죽이고 달아난 장수가 있다는 보고를 받았을 때 그
자가 발해에서 명성이 자자한 장영이라는 생각을
했었던 것이다.
"좋소!"
야율 덕광이 황보헌을 향해 오만하게 내뱉았다.
"사신을 보내라고 하시오!"
"우리 사신에 대한 신분보장을 해야 하오."
"그거야 당연한 일이지......사신의 신분보장에
대해서는 아무 걱정 마시오. 단 그대들 충의군은
아직도 우리에게 적대행위를 하고 있는 것 같소.
그대가 돌아가는 즉시 전투행위를 일절 중지하도록
하시오!"
"그렇게 하겠소."
"아울러 발해의 왕에게는 칭제를 할 수 없소."
"........"
"발해군사들의 모든 무기는 수거하여 무기고에
보관토록 하시오!"
야율 덕광의 말에 황보헌은 일절 대답하지 않았다.
그러한 문제는 사신들이 결정할 일이었다.
황보헌은 저녁 무렵에야 황궁으로 돌아왔다.
황보헌이 사신으로 갔다가 돌아오자 발해 조정은
다시 투항 논의를 했다.
이튿날 선조성 좌상이 대신들을 이끌고 요의
군영으로 가서 투항문제를 협의했다. 요왕 아보기는
선조성 좌상 일행을 극진히 대접하여 돌려보냈다.
선조성 좌상은 요의 군진에서 돌아오자 즉시 발해의
각 부와 군영에 파발을 보내어 투항을 알리고
거란군에게 대적하지 말라고 지시했다. 아울러
충의군에게는 무장해제를 지시했다. 충의군은 무장을
해제하라는 지시가 내려오자 벌떼처럼 들고일어나
웅성거렸다.
"무장을 해제하라니? 싸우지도 않고 항복하라는
말인가?"
"황제폐하께서 투항을 하기로 결정하셨다!"
"투항을 하다니 어찌 이럴 수가 있소?"
"우리는 투항을 할 수 없소!"
"그렇소 우리는 투항을 할 수 없소!"
"어명이오!"
눈은 더욱 자욱하게 내리고 있었으나 발해군사들은
땅을 치고 통곡했다.
그러나 황제가 투항을 하기로 한 이상 분하고
원통해도 어쩔 수가 없었다. 이윽고 홀한성 성루에
백기가 처처에 꽂혔다.
거란군의 진영은 홀한성에 백기가 꽂히자 환호성을
질렀다. 발해로서는 2백 년의 위업이 조종(弔鐘)을
고하는 날이었으나 거란으로서는 혹한의 겨울 원정이
성공하는 날이었다.
인선황제가 투항을 하기로 했다는 소문은 성내에
바람처럼 퍼졌다. 백성들은 집에서 뛰어 나와 황궁을
향해 엎드려 울음을 터뜨렸다. 성안이 온통
울음바다였다.
통곡은 황궁에서도 있었다.
먼저 효경왕후가 황제가 투항을 결정했다는
궁녀들의 얘기를 듣고 머리를 풀고 소복을 입은 뒤
선조들의 위패를 모신 사당 앞에서 통곡을 했다.
태자 대광현도 어림청에서 꿇어 엎드려 대성통곡을
했다.
................................................
1) 발해의 대광현은 대발로(대발로)라는 기록도
있다. 그러나 대발로는 둘째 왕자로 여겨진다.
32. 하늘이 통곡하다
인선황제가 요왕 아보기의 행영으로 투항을 하러
가던 날은 날씨마저 궂었다. 아침부터 바람이 불고
하늘이 잿빛으로 우중충하더니 사시(巳時:오전 9시 반
전후)가 되자 때아닌 겨울비가 을씬년스럽게 내리기
시작했다. 투항차비를 마치고 양의전을 나서려던
인선황제와 대신들은 처량한 눈빛으로 하늘을
쳐다보았다.
하늘이 울고 있다.
하늘이 투항하러 가는 인선황제의 발목을 잡기 위해
비를 뿌리고 있다.......
구죽죽하게 내리는 겨울비를 쳐다보며 대신들은
모두 그렇게 생각했다.
"하늘도 무심하시지......."
인선황제는 하늘을 원망했다. 사시가 지나고
오시(五時)가 가까워지자 빗발은 아예 행차를 할 수
없도록 거세어지고 바람까지 사납게 불고 있었다.
인선황제와 대신들은 양의전 처마 밑에서 비가
개기를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다. 대신들이 옥체를
보존하라며 양의전 안으로 들어가라고 권고했으나
인선황제는 넋을 잃은 사람처럼 하늘만 쳐다보고
있었다.
황제가 안으로 들어가지 않으니 대신들도 처마
밑에서 비를 피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대신들보다
더욱 곤란한 것은 대신 이하의 관리들이었다. 직급이
낮은 관리들은 황제를 호종하기 위해 양의전 앞에
도열해 있다가 고스란히 비를 맞았다. 관리들
뿐아니라 황제의 투항 행렬을 호위해야 하는
어림군들조 찬비를 그대로 맞았다.
망국의 황제요, 망국의 대신들이요, 망국의
군사들이었다.
그들은 망국의 설음을 너무나 절절하게 맛보고
있었다.
(어찌하여 날씨마저 궂은가......?)
인선황제는 전신을 엄습하는 한기에 온 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때 어림군 대장군 황보헌이 황급히 달려와
부복했다.
"폐하!"
황보헌도 겨울비를 흠뻑 맞고 있었다.
"무슨 일인고?"
인선황제는 비대한 체구에 어울리지 않게 처연한
낯색으로 황보헌에게 물었다.
"요의 행영으로부터 사신이 왔사옵니다."
"사신?"
"요 황제의 사신이라 하옵니다."
"들라 해라!"
"예."
인선황제는 그때서야 양의전으로 들어가 정좌했다.
대신들도 줄줄이 양의전으로 따라 들어가 시립했다.
이윽고 요왕 아보기의 사신이 군사들을 거느리고
양의전에 당도하여 날씨가 궂으니 발해왕이 요의
행영에 와서 투항하는 행사를 내일로 미룬다고
일방적으로 통고했다.
인선황제는 대신들에게 사신을 접대하라고 지시한
뒤 퇴청했다.
비는 오후 내내 계속 내렸다.
인선황제는 양의전에 조촐한 주안을 차리게 했다.
바람까지 을씨년스럽게 불고 있어서 몸이 으실으실
떨렸다. 인선황제는 혼자 앉아서 술을 마시기
시작했다. 밖에는 여전히 비바람이 사납게 몰아치고
있어서 앙상한 나뭇가지들이 아우성을 치듯이 비명을
질러대고 있었다.
인선황제는 또 다시 세차게 몸을 떨었다.
춥다.
을씨년스러운 겨울 비바람이 뼛속으로 스며들 듯이
춥다.
인선황제는 발해가 멸망하게 된 원인을 곰곰이
생각하기 시작했다. 그가 보위에 오른 것은
발해력으로 209년의 일이니 벌써 20년 전의 일이었다.
20년.
20년이면 강산이 두 번이나 변한다는 세월이었다.
그 20년의 세월동안 발해를 중흥시키지 못하고
멸망하게 만들었다는 생각을 하자 비로소 그는 자신의
지난 20년이 후회되었다.
그러나 후회를 해도 소용이 없었다. 이제 발해가
멸망하는 것은 시간의 문제일 뿐이었다. 남은 것은
발해가 멸망한 뒤에도 그의 지위를 그대로 누리는
것뿐이었다. 물론 수천 리의 영토를 지배하는 것도
허락되지 않을 테고 죄를 지은 대신들이 유배생활을
하는 것처럼 감시와 감독을 받게 될 것이다.
빗발은 밤이 되자 눈보라로 바뀌었다.
인선황제는 양의전에서 눈보라가 날리는 것을
우두커니 바라보았다.
대륙의 눈보라는 황량하고 쓸쓸하다.
인선황제는 몇 시간 동안이나 눈보라를 바라보다가
침상에 돌아와 누웠다. 임소홍도 부르지 않고 궁녀도
부르지 않았다. 모처럼 여자를 부르지 않고 혼자 눕자
수많은 생각들이 인선황제의 뇌리를 주마등처럼
스쳐가고 스쳐왔다.
문득 황태자 시절에 스승인 태자부(太子傅)
백현걸(白賢傑)이 읊어주던 시 한 구절이 생각났다.
차가운 눈으로 정사를 살피고
심신을 명경지수처럼 닦으면
풍우대작(風雨大作)하여도
안여태산(安如泰山)하리라
풍우대작이란 바람이 불고 비가 많이 온다는 뜻이고
안여태산이란 태산같이 마음이 든든하고 끄덕이
없다는 뜻이다. 백현걸은 백인걸의 형으로 학문이
뛰어나고 인품이 고아하여 인선황제가 태자로 있을 때
3년 동안이나 태자부를 했었다. 학(鶴) 같이 깨끗하고
고고하여 학대신이라는 별명으로까지 불렸었다.
갑자기 백현걸의 싯귀가 떠오른 것은 눈보라가 치고
있기 때문일 것이었다. 아니 어쩌면 백현걸의
가르침대로 냉정하고 이지적인 눈으로 정사를 살피지
않고 마음을 깨끗하게 하지 않은 탓일지도 모른다.
(그가 더 오래 살았으면 내가 이렇게 되지는 않았을
텐데.....)
인선황제는 자신이 방탕했던 것이 백현걸이 일찍
죽은 탓이라고 생각했다. 백현걸은 그가 황제로
등극하기도 전에 병으로 죽었던 것이다.
그는 새벽녘에야 겨우 잠이 들었다. 그러나 잠이
깊지 않았다. 잠이 들면 꿈을 꾸었고 꿈을 꾸면
기이한 사람들을 만났다. 밖에는 여전히 눈보라가
몰아치고 있었고, 차가운 눈(雪) 빛 때문에 이마가
선뜻선뜻했다.
꿈은 기이했다.
그는 처음에 무릉도원(武陵桃源)같은
세외선경(世外仙境)에 있었다. 그 곳은 지극히
아름다운 땅이었다. 산에는 태고의 숲이 울창하게
우거져 있었고 나무열매가 지천으로 열려 있었다.
사람들은 거기서 발가벗고 나무열매를 따먹으며 살고
있었다. 햇볕이 따뜻했기 때문에 옷을 입을 필요는
없었다.
사람들은 나무에 매달리기도 하고 사슴과 어울려
뛰어 놀았다. 그때 땅이 쿵쿵거리고 울리더니 불을
뿜어대는 거대한 짐승이 나타났다. 그것은 전설
속에서나 볼 수 있었던 용(龍)이었다.
사람들은 비명을 지르며 달아나기 시작했다. 그때
하늘에서 익룡(翼龍)이 나타나 사람들을 잡아먹기
시작했다. 하늘과 땅, 바다와 육지에 산처럼 큰
몸집의 공룡(恐龍)들이 나타나 사람들을 습격했다.
사람들은 공룡을 피해 이동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겨울이 왔다. 캄캄한 하늘에서 눈보라가 자욱하게
날리고 있었다. 사람들은 어떤 대륙을 걷고 있었다.
대륙의 모습은 지금과는 완전히 딴세계였다. 그는
처음에 이 곳이 사람들이 죽으면 간다는 황천(荒天)이
아닌가 하고 생각했다. 주위의 모든 것이 적막했고
사람들은 지팡이 하나에 의지한 채 멀고 황량한
대륙을 지친 걸음으로 횡단하고 있었다.
그는 사람들을 조용히 응시했다.
사람들은 한 무리를 이루고 계속 걷고 있었다. 그는
비로소 사람들이 어디론가 이동중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들은 미개인, 아니 원인(猿人)들이었다. 그들은
추위와 사람을 잡아먹는 공룡들을 피해 이동중이었다.
그는 그들이 대륙에 처음 왔다는 자신들의 조상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리고 겨울이 닥쳐왔다. 태양은 보이지 않고 모든
것이 얼어붙는 무서운 겨울이 오랫동안 계속되었다.
사람들은 그 겨울에 무수히 죽어갔다. 사람들은 거의
멸종 상태에 이를 정도로 죽었다.
그러자 사람들은 겨울을 피해 이동하기 시작했다.
세상에는 빛이라고는 없었고 사람들은 추위와
눈보라를 피해 이동을 계속했다.
꿈이 또 바뀌었다.
사람들은 마침내 해가 뜨는 대륙에 도착했다.
그들은 거기서 농사를 짓고, 사냥을 하고, 무리를
이루고 살게 되었다. 말을 하기 시작했고, 불을 다룰
줄 알게 되었고, 도구를 만들어 사용했다.
그리고 그 곳에 신인(神人)이 탄생했다. 그는
처음으로 나라를 열었고 환국(桓國)이라고
이름지었다. 환국은 하느님의 나라라는 뜻이었다.
그들은 2천년 동안 해가 뜨는 곳에서부터 해가 지는
땅까지 지배했다. 뒤이어 부여가 탄생했고 고구려가
탄생했다. 반도의 남쪽에는 백제, 신라도 나라를
열었다.
그들은 계속 번성했다.
그러나 백제와 고구려가 차례로 멸망했다. 고구려
멸망후 30년이 지났을 때 해가 뜨는 땅에서
천인(天人)이 일어났다. 천인은 당 나라의
압정(壓政)에 신음하는 고구려 유민들을 이끌고
고구려를 복국(復國)하였다. 그리고 자신들의 조상이
천군만마를 호령하며 말달리던 조상들의 땅을 모두
회복하였다. 그들의 영토는 광대하여 사방 9천리나
되었다.
천인은 고구려의 국호를 대진(大震)으로 바꾸었다.
이웃 나라에서는 그들을 발해라고 불렀으나 문화가
발전하고 나라가 융성해지자 해동성국이라 불렀다.
꿈은 계속해서 바뀌었고 새벽녘까지 계속되었다.
인선황제는 꿈을 꾸다가 몇 번이나 울었다.
꿈에는 선인들이 세우고, 선인들의 숨결이 살아
있는 땅을 오랑캐가 지배하고 있을 때도 있었다.
그리고 누군가가 말했다.
"1천년이 지나도 이 땅을 찾지 못하리라! 너희의
후손은 이 땅이 너희 선조들이 묻힌 땅인지도
모르리라!"
인선황제는 그 소리를 듣고 서럽게 울다가 꿈에서
깨어났다. 그러나 자신이 무엇 때문에 울었는지는
이해할 수 없었다.
날이 서서히 밝기 시작했다.
인선황제는 날이 완전히 밝으면 요왕 아보기의
행영으로 투항을 하러 가야 한다고 생각하자 가슴이
천근처럼 무거웠다. 그는 날이 밝지 않기만을 간절히
빌었다.
33. 북풍(北風)
비바람은 홀한성에서 7백리나 떨어진
중경두덕부에도 을씨년스럽게 몰아치고 있었다.
대인열은 중경두덕부의 철주(鐵州)를 지나고
있었다. 발해의 홀한성을 떠나온 지 열흘, 멀리
안변부, 막힐부를 돌아 남해부를 거쳐 쉬지 않고 말을
달려서 철(鐵)의 생산지로 당 나라에까지 널리 알려진
철주에 이른 것이다. 철주를 지나면 곧 바로 발해
건국의 성지(聖地), 중경이다. 중경에는 시조
대조영이 개국을 선언한 유서 깊은 동모산이 있었다.
(발해의 멸망을 하늘까지 슬퍼하는 것인가.......?)
대인열은 채찍으로 말을 후려치면서 암울한 하늘을
쳐다보았다. 하늘과 땅이 모두 잿빛이었다.
"황제(皇弟)께서 천리 길을 멀다하지 않고
달려오셨는데 우리가 어찌 잠자코 있겠소? 우리는
군사를 동원하여 거란을 치겠소!"
막힐부 도독은 대인열의 제의에 혼쾌히 승낙했다.
"군사를 얼마나 일으킬 수 있겠습니까?"
"지금 당장은 5천 뿐이오. 그러나 군세(軍勢)는
승리에 있는 것이오! 우리가 단 한 번의 전투라도
승리한다면 군사들이 구름처럼 몰려들어 군세가
당당해질 것이오! 장군도 알다시피 우리 발해국은
무수한 이족(異族)으로 이루어져 있소. 말갈족만 크게
나누어도 7부족인데다 사백력에는 또 얼마나 많은
이족들이 있소? 그들은 군사를 일으키지 않고 관망만
하다가 우리가 승리하면 그때서야 참여할 것이오!"
막힐부 도독 고남신(高南申)은 3월 중으로 군사를
일으키겠다고 대인열과 굳게 약속을 했다. 안변부와
정리부 도독도 거란을 치는데 합의하고 3월중에
군사를 일으키겠다고 하였다.
그러나 솔빈부 도독은 대인열이 만날 것을 요구하자
칭병을 핑계로 만나주지도 않았다.
(이 자는 기회주의자로군.......)
대인열은 씁쓸하여 남해부로 달렸다. 그러나
남해부도 석연치 않은 태도를 취하고 있었다.
(남해부의 도독은 군사를 일으킬만도한데 형님
때문에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으니.......)
대인열은 어두운 얼굴이 되었다. 남해부 도독
장여능(張汝能)의 청수한 얼굴이 다시 머릿속에
떠올라왔다.
"우리가 궐기를 하면 무슨 소용이 있겠소?"
남해부 도독부를 찾아가 궐기를 호소하는
대인열에게 장여능은 일언지하에 고개를 흔들었다.
"도대체 무슨 말씀입니까? 나라가 망하는데 보고만
있을 셈입니까?"
대인열은 분개하여 장여능을 쏘아보았다. 장여능은
50대의 사내였다. 문관이기는 했으나 병법도 어느
정도 알고 있었고 군사들도 정병이었다.
"설령 나라를 구한들 무슨 소용이 있소? 황제는
주지육림에 빠져 있고 조정 대신들은 자기 목숨만
살고자 투항주의로 일관하고 있소. 그러한 처지에
군사를 일으켜 왜 개죽음을 하겠소? 나는 못하오!"
"도독.......!"
"장영 장군은 충의군을 일으켜 홀한성에서 거란군과
죽음을 불사하면서 싸웠소! 그런데 임금과
조정대신들은 장군을 역적이라고 추방하지 않았소?"
".........."
장여능의 말에 대인열은 가슴이 아팠다.
"우리 군사들에게 무엇을 위해 죽어달라고
요구하라는 말이오? 썩어 빠진 나라요? 주지육림에
빠진 임금이오?"
"........"
"군사들이 죽어야 할 때는 딱 한 가지뿐이오!
나라가 바르게 다스려지고 임금이 백성들을 어버이
받들 듯 해야 할 때요!"
"도독! 이 나라 강토를 거란에게 빼앗겨야 한단
말이오? 9천리나 되는 이 광대한 영토를 거란에
빼앗기면 우리 민족은 그것으로 끝장이오! 거란은
우리 민족을 중국이나 거란의 오지로 강제 이주시킬
것이오! 한 번 나라를 뺏기기는 쉬우나 다시 찾기는
백년이 걸릴지 천년이 걸릴지 알 수 없는 일이오!"
대인열이 피를 토하듯이 열변을 토했으나 남해부의
도독 장여능은 군사를 일으키지 않겠다고 단호하게
말하였다.
대인열은 실망하여 남해부를 떠나오지 않을 수
없었다.
장여능의 말은 구구절절 옳은 말이었다. 나라를
회복한다는 명분으로 군사들을 죽음의 구렁텅이로
쓸어 넣는 것이 무모한 일인 것은 분명했다.
그러나 어떻게 나라가 망하고 있는 것을 지켜보고
있겠는가.......
대인열은 그것만은 견딜 수가 없었다.
대인열은 이내 철주의 가장 높은 산인
백사봉(白蛇峯)에 이르렀다. 대인열은 백사봉
정상에서 말을 멈추고 머리에 쓴 죽립(竹笠)을
비스듬히 치켜올리고 잠시 산 아래를 흐린 눈빛으로
내려다보았다. 마을은 백사봉 아래 산자락이 움푹
들어간 기슭에 점점이 흩어져 있었다. 석식(夕食)
때가 가까워져서인지 마을에서는 푸른 연기가
실타래처럼 피어오르고 있었다.
(중경이 얼마 남지 않았군........)
백사봉에는 철을 캐는 광산이 군데군데 있었고 철을
캐는 광부들로 인해 깊은 오지인데도 퇴락한 촌락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었다. 마을이 크지 않은데도 객잔의
붉은 깃발이 보이는 것은 철광 때문인 모양이었다.
백사봉 주위의 숲은 벌써 어둠침침했다.
비바람 탓이다.
상수리나무며 오리송은 잎사귀가 모두 떨어져
비바람이 들이칠 때마다 음산한 귀곡성을 질러대고
전나무와 소나무 같은 상록수들은 침엽(針葉)이 한결
선명한 녹빛을 띠었다. 때아닌 겨울비 탓이었다.
대인열은 죽립을 깊숙이 내려썼다.
하루종일 비를 맞으며 달려왔기 때문에 한기가
몸으로 스며들고 있었다.
"이랴!"
대인열은 채찍으로 힘껏 말을 후려쳤다. 말이 히힝
하는 울음소리와 함께 산을 달려 내려가기 시작했다.
마을에 내려가 쉬어야 했다. 말도 사람도 이제는
지쳐 있었다. 밤이 오면 비바람도 더욱 차가워질
것이고 그렇게 되면 비바람은 눈보라로 바뀔 것이다.
대륙의 눈보라는 살인적이므로 야숙을 할 수는 없다.
어두워지기 전에 거처할 곳을 찾아야 했다.
마을은 의외로 적막했다.
객잔은 문이 닫혀 있고 마을에서는 낯선 나그네를
쉬어 가게 하려고 하지 않았다. 모두들 빈방이 없다며
대인열에게 방을 내주지 않았다.
(사람들의 인심도 옛날 같지 않구나!)
대인열은 탄식을 했다.
대인열은 마을 사람들의 야박한 인심에 화가 났으나
그렇다고 그들을 살해할 수는 없었다. 대인열은 점점
어두워지는 하늘을 쳐다보며 마을을 떠났다. 이렇게
되면 들이나 산에서 야숙을 할 수밖에 없다. 다행히
건량과 술은 상경용천부와 중경 두덕부의 경계인
홍주(鴻州) 읍성에서 가지고 왔기 때문에 걱정이
없었다.
대인열은 마대(麻袋)에서 호리병을 꺼내 술을
벌컥벌컥 마셨다.
술을 마시자 비로소 한기가 가시고 몸이 떨리던
것이 진정되었다. 그러나 사방이 점점 어두워지고
있었다.
(어떻게 하지?)
대인열은 난감한 심정으로 하늘을 우러러보았다.
다음 마을까지 가려면 50리는 더 가야 했다.
(할 수없지.......)
대인열은 말에게 미안했으나 다음 마을까지 가지
않을 수없었다. 술병을 마대에 집어넣고 말에게
채찍질을 했다.
(마을인가?)
대인열이 불빛을 발견한 것은 사방이 캄캄하게
어두워졌을 때였다. 저 멀리 산기슭에 불빛이 하나
깜박거리고 있었다. 대인열이 더욱 빨리 말을 몰아
불빛을 찾아가자 버드나무 앞에 주(酒)자를 쓴
깃발까지 펄럭거리고 있었다.
주막이었다.
외지고 후미진 곳에 주막이 있는 것이 기이했으나
주막은 마방(馬房)까지 갖춘 제법 큰집이었다.
대인열은 마굿간에 말을 매고 술청으로 들어섰다.
그러자 허리가 꼬부라진 노인네가 나와 엉거주춤
인사를 했다.
대인열은 허리의 전대에서 은자를 꺼내 노인에게
주며 먼저 말에게 건초를 주라고 부탁했다. 노인의
음침한 눈이 대인열의 전대를 더듬었으나 대인열은
개의치 않았다. 술청에 딸린 부엌의 솥단지에서
고기를 삶는지 구수한 냄새가 술술 풍겨오고 있었다.
"어서 오세요."
그때 술청 한구석에서 손님들의 시중을 들던 주막
아낙네가 반색을 하며 달려왔다. 얼굴은 회칠을 한
듯이 분을 더덕더덕 발랐고 손님들과 대작을 하고
있었는지 눈 주위가 붉으스레했다. 대인열은 미간을
잔뜩 찌푸렸다. 아낙네가 미처 추스리지 않은 저고리
앞섶으로 여인네의 살찐 젖무덤이 허옇게 드러나
있었다.
"조용한 객방이 있소?"
대인열은 죽립을 벗고 주막 아낙네에게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주무시게?"
"요기도 하고 하룻밤 묵어가야 할 것 같소."
"그러시구려. 원정(遠程)을 하는 길손인 것 같은데
비를 흠뻑 맞았으니....... 아주 따끈따끈한 객방이
있어요."
"그럼 안내해 주시오."
"이리 따라 오시구려."
주막 아낙네가 궁둥이를 흔들며 안내하는 객방은
술청과 멀리 떨어져 있었다. 군불을 지폈는지
아낙네의 말대로 방이 따끈따끈했다.
"시장하니 저녁부터 주게."
대인열은 죽립을 벗어 벽에 걸고 검을 풀러 웃목에
놓았다.
"예."
아낙네가 머뭇거렸다.
"왜 그러고 있지?"
"은자를 먼저 주셔야지요?"
"그런가?"
대인열은 전대에서 은자를 꺼내 아낙네에게 주었다.
아낙네의 눈이 재빨리 대인열의 전대를 훔쳐보았다.
"멧돼지 고기가 있는데 주안상도 올릴까요?"
"그렇게 하게."
"저, 술치는 여자도 있는데......"
"이런 곳에도 술치는 여자가 있나?"
"여기가 이래도 중경 가는 길목이라 길손들이
많아요. 철주부(鐵州府)는 30리도 안되구요."
아낙네가 허리를 바짝 숙이고 교태를 부리는 바람에
가슴이 대인열에게 쏟아질 것처럼 기울었다. 대인열은
고개를 외면했다.
"여자는 그만 두게."
"웬만하시면 불러서 객고도 푸시고 말동무라도
하시지요. 아이가 병든 홀어머니를 모시고 있어서
돈이 필요해요. 세상이 어찌나 각박한지.......
공양하는 셈치고 부르세요."
아낙네의 입심이 걸기도 했지만 병든 어머니를
모시고 있다는 바람에 대인열은 여자를 부르라고
했다. 그러나 여자가 대인열의 객방으로 들어온 것은
한식경이나 지나서였다. 대인열이 주막 아낙네가
가지고 들어온 저녁을 마치고 혼자서 멧돼지 고기를
안주로 자작을 하고 있을 때였다.
"눈이 오는가?"
을씨년스럽게 내리던 비가 눈으로 바뀐 모양이다.
여인의 머리에는 눈꽃이 소담스럽게 피어 있었다.
"예."
여인이 선 채로 대답했다. 여인의 얼굴이 멀끔하고
키가 작은 것을 보면 부여부 지역의 말갈여인 같았다.
나이는 기껏해야 20세를 갓 넘긴 것으로 보였다.
"앉아라!"
"예."
여인이 다소곳이 앉았다.
"저녁은 먹었나?"
"예."
"멧돼지 고기가 제법 잘 익었구나. 개의치 말고
먹어라!"
대인열은 여인에게 멧돼지 고기를 권했다. 여인이
몇 번 사양하는 체하다가 허겁지겁 멧돼지 고기를
먹기 시작했다. 대인열은 여인이 멧돼지 고기를 먹는
것을 우두커니 쳐다보았다. 대인열의 시선을 느꼈는지
여인이 대인열을 힐끔 쳐다보고는 배시시 웃었다.
어딘지 순진무구해 보이는 웃음이었다.
대인열도 웃었다.
여인이 목이 메는지 자작으로 술을 따라 벌컥벌컥
마셨다. 대인열도 여인에게 이런저런 얘기를 물으며
술을 마셨다.
대인열은 술을 어느 정도 마시자 여인에게
이부자리를 펴게 하고 자리에 누웠다. 여인이 휙 하고
입김을 불어 호롱불을 끄고 옷을 벗기 시작했다.
대인열은 눈을 감았다.
밖에서는 이제 눈보라가 몰아치고 있었다. 대륙의
황량한 벌판을 달려온 눈보라가 아수라의 지옥에서
들려오는 귀곡성처럼 음산했다.
여인이 대인열의 옆에 와서 누웠다.
가슴은 탄력이 있고 살결은 매끈했다. 대인열은
따뜻하고 보드라우며, 탄력이 있는 여인의 살결에
넋을 잃고 빠져 들어갔다. 눈보라는 더욱 세차게
몰아치고 눈보라에 쫓겨다니던 산짐승들이 몇 번이나
문 앞을 서성거리다가 돌아갔다.
대인열은 여인과의 관계가 끝난 뒤에도 잠을 이루지
못했다.
눈보라는 밤새도록 그치지 않고 몰아치고 있었다.
대인열은 문밖에서 대륙이 떠나갈 듯이 아우성을
쳐대는 눈보라 소리를 들으며 온갖 사념에 잠기고
있었다. 그의 뇌리로 요왕 아보기에게 투항을 하는
인선황제의 비굴한 모습이 떠오르는가 하면
거란인들에게 핍박을 받는 발해 유민들의 비참한
모습이 떠오르기도 했다.
선인들이 세운 나라였다. 아득한 태고에 선인들이
추위를 피하고 해뜨는 나라를 찾아와 정착한 것이
언제인지는 알 수 없었다. 그것은 1만년이 넘는
억겁의 세월이었을 것이었다. 따지고 보면 발해의 땅
한 자락, 공기 한 줌에도 선인들의 한숨과 눈물,
그리고 대륙을 달리던 선조들의 씩씩한 기상이 묻어
있을 터였다.
그런데 인선황제가 선조들의 땅을 송두리째 거란의
오랑캐인 요에게 바치려고 하고 있는 것이다.
대인열은 그 생각을 하면서 잠을 이루지 못했다.
여인은 쎄근쎄근 코까지 골며 달디단 잠을 자고
있었다.
그러나 대인열은 잠이 깊지 못했다.
그의 평생은 오로지 나라를 위해 존재했었다. 먼
조상인 대무예왕이 그랬듯이 그는 천군만마를
호령하며 대륙을 누비고 싶었었다. 그러나 그의 꿈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발해는 문(文)을 숭상했다.
상무(尙武)는 문을 바쳐주는 존재에 지나지 않았다.
상무의 기풍을 버리자 발해는 국정이 혼란해졌다.
문이 승(勝)하면 나라가 태평해지리라고 생각했으나
그것은 환상이었다. 문이 승할수록 권력투쟁이
극심해지고 변방의 부족들은 발해의 통제에서 떨어져
나갔다. 회원부(懷遠府:연해주 연해지방),
안원부(安遠府:연해주), 동평부(東平府:흥개호 일대),
안변부(安邊府) 등 발해의 변방에 해당하는 지역들은
중앙에 간신히 조공만 바치고 있을 뿐 중앙의 지시를
거의 받지 않았다.
발해는 좀 더 강력하게 중앙에서 통제를 해야
했었다.
대인열은 새벽녘에야 잠깐 잠이 들었다.
이튿날 대인열은 말을 타고 다시 중경을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도독이 과연 충의의 깃발을 들것인지.......)
대인열이 중경을 찾아가는 것은 중경두덕부의 도독
대소현을 만나 담판을 짓기 위해서였다. 중경두덕부의
도독 대소현은 그와는 인척관계에 있었다. 그러나
거란군사들이 침략을 할 때 방어를 하지 않고 길을
비켜준 의심을 받고 있었다.
(대소현이 거란에 투항하지는 않았겠지.......)
대인열은 대소현을 믿고 싶었다.
대소현은 무인 출신이므로 군사들을 동원하여
궐기한다면 다른 부에서도 큰 호응이 있을 것이었다.
장령부를 비롯해 몇 개의 부만 협력한다면 거란
침략군을 격파하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도 아닐
것이었다.
대인열은 기필코 거란 침략자들을 몰아내리라고
생각했다.
문제는 인선황제였다.
인선황제는 민심을 잃었기 때문에 그를 앞세워
발해인들의 궐기를 호소할 수 없었다. 대인열로서도
인선황제가 달갑지 않았다.
태자 대광현이라던가, 발해 왕실의 새로운 왕손을
내세워 잃어버린 나라를 찾아야 했다.
그렇다.
새로운 발해의 왕손을 내세워 그를 구심점으로
거란과 싸워야 한다. 그렇게 되면 충성심이 약해진 각
부의 도독들도 혼쾌히 군사를 일으켜 호응해 올
것이다. 대인열은 그렇게 생각하자 용기가 솟아나기
시작했다.
"이랴!"
대인열은 눈이 하얗게 쌓인 벌판을 질주하기
시작했다. 그는 어느 사이엔가 하나의 점처럼 대륙 저
멀리로 사라지고 있었다.
34. 나라를 바치다
대인열이 중경을 향해 말을 휘몰아 달려가고 있을
때 인선황제의 투항행차는 양의전을 떠나고 있었다.
지난밤에 대륙이 떠나갈 듯이 휘몰아치던 눈보라는
그쳤으나 눈은 발목이 묻힐 정도로 쌓여 있었다.
인선황제는 황궁을 나서기 전 황궁을 침통한
눈빛으로 살펴보았다. 양의전, 어림청, 백련궁,
홍련궁, 어화원.......그리고 대궐의 숱한 전(殿)과
루(樓), 각(閣), 지(池)......모두 흰 눈이 켜켜로
쌓여 있었고 철마다 색색의 꽃을 피우던 나무가지에는
가지마다 설화(雪花)가 하얗게 피어 있었다.
아름다운 모습이었다.
인선황제는 무겁게 한숨을 내쉬었다.
인선황제는 일단 요왕 아보기에게 투항을 하면 다시
황궁으로 돌아올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다.
수모는 일시적인 것이다.
비록 잠시 동안 요왕 아보기에게 무릎을 꿇고 절만
하면 다시 돌아와 황제의 지위를 누릴 수 있을
것이다. 물론 해마다 조공을 바치고 상국으로 깍듯이
모셔야 할 것이다. 불모를 요구하면 황태자 대광현을
보내면 된다.
어리석은 그는 그렇게 믿고 있었다. 2백년을 넘게
유지해 온 선대의 위업을 하루아침에 무너뜨리는
결정을 하고서도 그는 자신의 안위만을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착잡한 기분을 떨쳐버릴 수는 없었다.
무엇인지 알 수 없는 야릇한 중압감이 그의 어깨를
무겁게 짓누르고 있었다.
그때 머리를 풀어헤치고 소복을 입고 통곡을 하던
효경왕후의 얼굴이 머릿속에 떠올라왔다. 인선황제는
효경왕후의 얼굴이 머릿속에 떠오르자 얼굴을
찌푸렸다.
(왕비를 진작 내쳤어야 하는데.......)
그는 어깨의 무거운 중압감이 효경왕후 때문으로
생각되었다. 효경왕후와 혼례를 올린 지 벌써 20년이
넘어 있었다. 그러나 국혼을 한 후 5년은 살갑게
지냈으나 그 이후에는 거의 동침을 하지 않았었다.
효경왕후가 틈만 나면 그에게 나라를 바르게 다스릴
것을 충간했기 때문이었다. 왕비의 충언이 귀에
거슬리자 자연스럽게 발길을 멀리하게 되었고 이제는
첫 번째 귀비인데도 데면데면하기까지 했다.
아침의 일이었다.
새벽녘까지 꿈자리가 어수선하여 선잠을 자던
인선황제는 임소홍의 거처인 홍련궁으로 침소를
옮겼다. 효경왕후는 인선황제가 임소홍의 품에 안겨
깊은 잠에 떨어져 있는데 불쑥 쳐들어왔다. 전에 없던
일이었다.
"나라를 망친 황제가 아직도 요의 계집을 끼고
주색에 빠져 있으니 참으로 통탄할 일이오!"
효경왕후의 눈에서는 파랗게 불꽃이 일어나고
있었다. 그 눈이 하도 매서워 황제는 대꾸조차
못했다.
"황제는 백성들의 울부짖음 소리가 들리지도 않소?"
"와, 왕비 이게 무슨 망발이오? 황제의 안전에서
이런 망발을 저지르고도 온전할 수 있을 것 같소?"
황제는 눈알을 부라렸다. 그러자 효경왕후가
깔깔대고 웃음을 터뜨렸다.
"여보시오 황제폐하! 나라가 있고 백성이 있어야
황제가 있는 법이오! 나라를 송두리째 들어다가 요에
바치고 무슨 놈의 황제요?"
효경왕후의 눈이 표독스럽게 빛났다. 황제는 찬물을
뒤집어 쓴 기분이었다. 손만 부들부들 떨고 있는데
임소홍을 향해 효경왕후의 질책이 쏟아졌다.
"네가 너를 일찍 죽이지 못한 것이 후회스럽다! 내
비록 악독한 왕비 소리를 듣는 한이 있어도 너를
죽여야 했거늘 통탄스럽기 짝이 없다!"
그 말을 마친 효경왕후는 찬바람을 일으키며
홍련궁에서 나가고 말았던 것이다. 어이없는
일이었다. 나라꼴이 뒤숭숭하니 왕비가 정신이 나간
모양이었다.
인선황제는 그 일을 다시 생각하자 입안으로 생목이
올라왔다. 이제는 왕비까지 자신을 무시하고 있는
것이다.
인선황제의 투항행차는 황궁에서부터 길게
이어졌다.
창에 백기를 매달은 어림군이 앞에 서고 뒤에는
인선황제의 어가, 그리고 발해 조정의 모든 관리들이
투항행렬의 뒤를 따랐다.
"폐하!"
"폐하!"
그러나 황궁을 나서자마자 투항행렬은 백성들의
제지를 받았다. 백성들은 언제 알고 나왔는지 눈이
쌓인 주작대로의 연도에 엎드려 통곡을 했다.
"비켜라!"
"길을 비켜라! 황제폐하의 행차시다!"
어림군은 인선황제의 투항을 가로막는 백성들을
창과 칼을 휘둘러 몰아내었다.
"폐하!"
"폐하! 오랑캐에게 투항을 하다니 어인
변괴이옵니까?"
그러나 백성들은 끈질기게 인선황제의 행렬을
가로막았다. 인선황제는 그때서야 눈시울이 뜨거워져
왔다. 어가가 백성들의 통곡을 뒤로 하고 외성에
이르자 성의 곳곳에 백기가 나부끼고 있었다. 요에
투항을 알리는 깃발이었다.
(항기가 처처에 꽂혔구나!)
인선황제는 가슴이 묵직해 왔다.
어가는 성문을 나섰다.
성루에 있는 충의군들의 눈에서는 비통한 눈물이
흘러내렸고 거란군의 진영에서는 환호성이 터졌다.
요의 군진에는 수많은 깃발이 펄럭거리고 장수와
군사들이 투항행렬을 구경하기 위해 도열해 있었다.
군진은 종(縱)으로 얼마나 뻗어 있는지 알 수
없었으나 횡(橫)으로는 10리가 넘게 뻗어 있었다.
(요는 과연 대군을 몰고 왔구나. 우리가 투항을
하지 않고 기필코 싸우기로 했으면 어찌 되었겠는가?)
인선황제는 눈이 하얗게 쌓인 벌판을 가득 메운
요의 대군을 보고 가슴이 서늘했다. 투항을 하지 않고
요와 결전을 치르기로 했다면 요의 대군에
발해군사들이 무리 죽음을 당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행영은 요의 군진 한가운데에 있었다.
인선황제는 군진 앞에서 어가를 내렸다. 군진
앞에서 요왕 아보기의 행영까지는 요를 상징하는
깃발을 창에 매달은 병사들이 무수히 도열해 있었다.
그리고 깃발 앞에는 요의 군사들이 완전무장을 하고
삼엄한 경비를 펼치고 있었다.
도산검림(刀山劍林)이었다.
인선황제는 손발이 떨려 대신들의 부축을 받아
걸었다.
"발해군왕 입궁이오!"
"발해군왕 입궁이오!"
요의 군사들은 백보(百步)를 지날 때마다 소리를
질렀다.
행영은 거대한 유르타(軍幕:이동이 쉽게 가죽이나
펠트로 이루어진 가볍고 둥근 천막)로 이루어져
있었다. 유르타 좌우에도 험상궂게 생긴 장수들이
창검을 들고 경비를 하고 있었다.
"발해군왕 대인선 현신(現身)이오!"
인선황제가 행영 앞에 이르자 요의 장수들이 목청을
길게 뽑고 소리를 질렀다.
그러자 유르타를 출입하는 천막이 걷혔다. 요왕
아보기는 유르타의 안쪽에 있는 어좌에 앉아 있었고
좌우에는 요의 문무대신들이 길게 시립해 있었다.
인선황제는 거적이 깔린 행영 앞에 엎드려 항서와
옥새를 바쳤다. 인선황제는 죄인을 자처하여 소복을
입고 머리를 풀어헤치고 있었다.
"어서 오시오!"
아보기는 어좌에서 일어나 행영으로 나와 인선황제
손을 잡아 일으켰다.
"죄인이 폐하를 뵈옵니다."
인선황제는 요왕 아보기에게 아홉 번 절을 했다.
발해의 대신들도 일제히 구배를 했다.
아보기는 친히 인선황제를 유르타 안으로 맞아들인
뒤 주연을 베풀고 발해의 대신들에게도 요의 벼슬을
내릴 것을 약속했다.
인선황제는 저녁이 되어서야 황궁으로 돌아왔다.
그는 심신이 지쳐서 양의전으로 들어오자 옥좌에
몸을 깊숙이 뉘였다.
"날씨도 궂은데 일을 무사히 마쳐 다행한
일이옵니다."
"그렇습니다. 요의 황제폐하께서 도량과 인품이
넓어 과연 대국의 천자라 할만 했습니다."
대신들은 다투어 요왕 아보기의 인품을 칭송했다.
요왕 아보기가 발해의 대신들까지 중하게 쓴다고
약속을 했기 때문에 그들은 자신의 신분이 보장된
것을 무엇보다 다행으로 여기고 있었다.
"과인은 쉬어야 하겠소. 경들은 요왕이 명한
군사들의 무장해제에 대해서 논의하도록 하시오."
인선황제는 피로한 듯이 한 마디를 남기고
양의전으로 돌아갔다. 요왕 아보기는 인선황제에게
발해군사들의 무장을 해제할 것을 지시했었다. 아직도
발해군사들은 무장을 해제하지 않아 거란군사들이
성안으로 들어갈 수가 없었다.
그러나 군사들의 무장해제는 용이하지 않았다.
인선황제가 요에 투항했다는 사실이 알려지자 발해의
충신들이 다투어 반발하고 나섰다.
어림군 대장군 황보헌은 투항하는 인선황제를
요왕의 행영까지 수행하고 돌아와 자결했다. 그는
부인 장씨와 두 아들의 목을 벤 뒤에 황궁을 향해
꿇어 엎드리고는 한바탕 통곡을 했다.
......신이 어림군 대장군의 직책을 맡아 마땅히
황제폐하를 위해 목숨을 바치고 나라를 근심해야 할
것이나 폐하께서 나라를 들어 요에 바치니 이제
근심할 나라가 없고 충성할 임금이 없나이다. 졸지에
나라 잃은 백성이요, 임금 없는 신민이라 살아서
무엇을 하오리까? 아내와 아들의 목숨을 끊어 조상의
제단에 바치고 부질없는 목숨을 끊어 나라 잃은
원통함을 달래려 하나이다......
황보헌은 한바탕 통곡을 한 뒤에 칼로 자신의 목을
찔러 절명했다. 황보헌이 자결했다는 소식이 알려지자
어림군들은 다투어 황보헌의 집을 찾아와 울면서 곡을
했다.
대신들의 자결도 잇따랐다.
이에 백성들은 또 다시 들고일어났다.
"우리가 두 눈을 시퍼렇게 뜨고 살아 있는데 투항이
웬일인가?"
"옳소!"
"선조 대조영이 나라를 세운 지 2백년이오! 2백년을
사해에 이름을 떨치고 풍요를 누려 온 발해국이오!
이제 종이 한 장으로 투항을 하겠다니 죽어서 조상을
어떻게 보겠다는 말이오!"
백성들은 무장을 해제하라는 어명도 듣지 않고
우르르 몰려다녔다. 어림군도 황보헌의 자결로
뒤숭숭했다. 그러나 인선황제가 계속 어명을 내리고
대신들이 무장을 해제하라고 지시하자 하나 둘 어명에
따랐다.
거란군은 홀한성에 있는 발해군의 공기가 흉흉하자
감히 홀한성으로 들어오지 못하였다. 그들은 계속해서
인선황제를 협박하여 무장을 해제하라고 촉구했다.
발해군사는 결국 무장이 해제되었다.
거란군은 발해군사의 무장해제가 완료되자
근시(近侍) 강말달(康靺達)을 시켜 무기고에 보관되어
있는 병기들을 압수하여 가져가려고 했다. 발해의
인선황제가 거란군의 행영에 가서 투항을 한지 5일째
되는 날이었다. 발해군사들은 그때까지도 투항을 하지
않고 완강하게 저항하고 있었던 것이다.
강말달은 병기를 가져가기 위해 군사들을 이끌고
홀한성으로 들어왔다.
홀한성 성안은 거란의 군사들을 피해 달아나는
발해인들로 어수선했다. 집집마다 대문을 꼭꼭
닫아걸고 바깥출입을 하지 않았다. 거리에는 찬바람만
휘몰아치고 있었다.
강말달은 군사들을 이끌고 주작대로를 행군하여
병기고를 향해 전진했다.
(발해의 상경성은 장안에 못지 않군......)
강말달은 홀한성 성안에 들어서자 압도되는 듯한
기분을 느꼈다. 비록 거란군의 침략으로 거리에는
인적이 끊어졌지만 각 방(房:동네의 단위)은
직사각형으로 구획이 되어 있었고 방마다 호화스러운
기와집들이 즐비했다.
주작대로는 황궁과 연결되는 관청로(官廳路)였다.
임금이 다니는 길이라고 해서 기하로(基下路)라고도
불렀다. 발해에서는 황제를 기하(基下)라고 부르기도
했다.
주작대로의 양쪽에는 발해의 3성(三省과) 6부(六府)
관청들이 우뚝우뚝 솟아 있었다. 그러나 각 관청에도
백기가 걸려 펄럭거리고 있었다.
황궁은 주작대로의 끝에 있었다.
강말달은 주작대로를 돌아서 병기고가 있는 있는
장서방(長西房)에 이르렀다. 장서방에는 군사들을
훈련시키는 현무원(玄武院)을 비롯해 병기고,
상도방위군의 둔영인 상도군영이 있었다.
강말달은 이내 병기고 앞에 이르렀다.
병기고 앞에는 발해의 군사들이 침통한 표정으로
도열해 있었다. 창에 백색 끈을 매달고 있었지만
무장을 해제하지 않은 채였다.
"너희들은 어찌하여 무장을 하고 있느냐?"
강말달은 눈썹을 찌푸리고 호령했다.
"우리는 병기고를 지키는 병사들이오! 불순한
자들이 행여 병기를 탈취할까봐 지키고 있는 거요."
발해의 장수인 듯한 자가 조용히 대답했다.
"너희들은 우리 요에 항거하려는 것이 아니냐?"
"아니오!"
"그렇지 않으면 무엇 때문에 무장을 하고 있느냐?"
"우리는 병기고를 지키고 있는 것뿐이오!"
"닥쳐라!"
강말달은 투항한 발해군사들에게 위엄을 보이고
싶었다. 큰 소리로 고함을 지르고 말채찍으로 발해의
장수를 후려쳤다. 발해 장수의 얼굴에 금세 시뻘건
채찍자국이 났다. 발해의 장수는 눈을 부릅뜨고
강말달을 쏘아보았다.
강말달은 발해 장수가 자신을 쏘아보자 흠칫했다.
발해 장수의 눈이 무섭게 이글거리고 있었다. 그러나
부하들 앞이라 내색을 하지 못하고 더욱 위세를
부렸다.
"이 놈이 어디를 보고 눈을 부릅떠? 당장 꿇어
엎드려라!"
강말달은 다시 발해 장수를 향해 말채찍을 힘껏
휘둘렀다.
"왜 이러는 거요?"
발해 장수는 노기를 참으면서 강말달을 쏘아보았다.
"꿇어라!"
"꿇을 수 없소!"
"뭐야?"
다시 말채찍이 날카로운 휘파람 소리를 내며 발해
장수를 향해 날아갔다. 발해 장수는 이번에도 피하지
않고 그대로 말채찍을 맞았다.
"투항한 무관에게 모욕을 주는 것이 아니오!"
"뭐야?"
"당신이 진정한 무관이라면 투항한 무관을 예우해야
할 것이오!"
"이 놈이 감히 저항을 해? 꿇어라!"
"못하오!"
"꿇어!"
"못한다!"
"이 놈이!"
발해 장수가 저항을 하자 강말달이 몸을 부르르
떨며 말채찍을 휘둘렀다. 발해 장수는 또 다시
말채찍이 날카로운 휘파람소리를 내며 날아오자
맨손으로 채찍을 움켜잡았다. 강말달은 말채찍을 힘껏
잡아당겼으나 발해 장수의 손에 잡혀 있는 말채찍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강말달은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네 놈이 죽고 싶어 환장을 했구나!"
강말달은 채찍을 놓고 칼을 뽑아 들었다.
"이래도 꿇지 못하겠느냐?"
"못한다!"
"정녕 죽고 싶으냐?"
"죽여 보아라!"
"그래?"
"장수가 전쟁터에서 죽지 못할 망정 무릎을
꿇겠느냐?"
발해 장수의 얼굴에는 은은하게 비웃음기까지
번지고 있었다. 말채찍에 맞은 얼굴에서는 계속 피가
철철 흘러내려 옷을 낭자하게 적시고 있었다.
"에잇!"
강말달이 발해 장수가 칼로 발해 장수를 내리쳤다.
그러자 발해 장수의 얼굴에서 선혈이 왈칵 솟구쳤다.
발해 장수는 짧은 신음소리를 지르며 쓰러졌다. 발해
장수가 쓰러진 병기고 앞 길바닥에 금세 선혈이
흥건하게 괴었다.
강말달은 그래도 분이 풀리지 않는지 발로 발해
장수의 가슴을 밟고 칼로 복부를 내리 찔렀다.
"똑똑히 봤느냐? 대요제국에 저항하는 놈들은 모두
이 꼴이 된다! 알아들었느냐?"
강말달은 발해군사들을 노려보며 소리쳤다.
"알아들었느냐?"
"........"
"이 꼴이 되기 싫은 놈은 모두 무기를 내려놓아라!"
그러나 발해군사들은 대꾸없이 강말달을 노려보고
있었다. 강말달은 발해군사들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다는 것을 깨달았으나 물러설 수가 없었다.
그때 발해군사 하나가 갑자기 창에서 백기를
떼어내어 팽개치며 소리를 질렀다.
"우리는 대발해제국의 군사들이오! 비록 나라는
망했지만 장수가 죽는 것을 보고만 있을 것이오? 거란
오랑캐 놈들을 죽여 버립시다!"
"옳소!"
"옳소!"
한 군사의 열변이 기폭제가 되었다. 발해군사들은
강말달의 포악한 행동에 몸을 떨며 분노하고 있다가
벌떼처럼 들고 일어났다.
"오랑캐를 쳐부수자!"
"오랑캐를 쳐부수자!"
발해군사들이 격분하여 창에서 백기를 떼어 내고
거란군사들에게 일제히 달려들었다. 거란군사들은
물끄러미 강말달을 지켜보고 있다가 느닷없이
달려드는 발해군사들에게 도륙을 당했다.
발해군사들은 순식간에 거란군사들을 쳐죽이고
주작대로로 달려갔다.
"발해군사들은 모여라!"
"모여라!"
"발해군사들은 모여라!"
"모여라!"
발해군사들의 분노는 삽시간에 온 성안으로
확대되었다. 그들은 순식간에 수 천명을 규합하여
홀한성 외성으로 달려가 처처에 꽂혀 있는 백기를
내리고 대진국 깃발을 내걸었다.
"거란과 싸웁시다!"
"거란과 싸웁시다!"
발해군사들은 홀한성 성문을 닫아 건 뒤 황궁으로
쳐들어갔다. 그들은 살기등등하게 황궁문을 부수고
어림청으로 뛰어 들어갔다. 그러나 대신들이 황황히
달아나 버리자 인선황제의 침전인 양의전으로
달려갔다. 그러나 양의전에도 인선황제는 없었다.
군사들은 백련궁으로 몰려갔다.
"황제를 찾아라!"
"요부 임소홍을 죽여라!"
군사들은 칼을 뽑아들고 백련궁을 누비고 다녔다.
궁녀들이 비명을 지르며 달아나고 내관들이 군사들의
앞을 막아섰으나 분노한 군사들을 막을 수는 없었다.
"너희들은 뭣하는 군사들이냐?"
군사들이 살기등등하여 돌아다니자 효경왕후가
산발을 한 모습으로 나타나 군사들을 꾸짖었다.
"너는 누구냐?"
군사들은 효경왕후의 얼굴을 알지 못하였다. 소복을
입고 산발한 여인의 얼굴에서 얼음처럼 싸늘한 기품이
느껴졌으나 칼을 겨누고 위협을 했다.
"무엄하다! 어느 안전이라고 감히 흉기를
겨누느냐?"
그때 궁녀 하나가 효경왕후의 앞을 가로막으며
군사들에게 호령을 했다.
"그럼 귀비폐하라도 된다는 말이오?"
주춤한 군사들이 효경왕후의 얼굴을 다시 살피며
물었다.
"그렇다! 모두 무릎을 꿇어라!"
궁녀의 질책에 군사들이 서로 얼굴을 마주보다가
일제히 무릎을 꿇었다. 군사들도 효경왕후가 투항을
반대하기 위해 산발을 했다는 얘기를 전해 듣고
있었다.
"신들이 귀비폐하를 뵈옵니다!"
군사들은 효경왕후 앞에 엎드려 뜨거운 눈물을
흘렸다. 효경왕후의 눈에서도 눈물이 주르르
흘러내렸다.
"일어나라! 성밖에는 거란 오랑캐가 몰려와 있는데
군사들이 황궁에 쳐들어와 소란을 피우는 까닭이
무엇이냐?"
효경왕후가 차분한 음성으로 군사들에게 말했다.
"우리는 폐하를 찾고 있습니다!"
"폐하는 왜 찾느냐?"
"페하께 투항을 철회하라고 요구하러 왔습니다!
우리가 두 눈을 멀쩡히 뜨고 있는데 투항이
왠말입니까? 우리는 싸우다가 죽을 망정 투항을
하지는 않겠습니다!"
"그렇다면 홍련궁으로 가봐라! 너희들의 우국충정이
가상하기는 하나 무고한 사람을 해쳐서는 안된다!
알겠느냐?"
"예!"
군사들은 효경왕후의 말을 듣고 홍련궁으로 우르르
몰려갔다. 인선황제는 홍련궁에 임소홍과 함께
있었다.
"무, 무슨 일이냐?"
인선황제는 군사들이 살기등등한 모습으로 달려오자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요부 임소홍을 내놓으시오!"
군사들은 인선황제가 나타나자 주춤했다. 그러나
무릎을 꿇지는 않았다. 그들은 황제에 대한 두려움과
존경심이 사라진지 오래였던 것이다.
"이귀비를 왜 내놓으라고 하느냐?"
"요부 임소홍이 이 나라를 망하게 하였소! 우리는
임소홍을 죽여서 충신열사들의 원혼을 달랠 것이오!"
"안된다!"
"비키시오!"
군사들은 앞을 가로막는 인선황제를 뿌리치고
침전으로 달려들어갔다. 임소홍은 군사들이 자신을
죽이려고 달려온 것을 알아채고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도망을 치려고 황급히 시녀들의 옷을 빼앗아
갈아입다가 군사들에게 발각되고 말았다.
"이 년이 요부 임소홍이다!"
"임소홍을 죽여라!"
발해군사들은 살결이 내비치는 나삼만 입고 있는
임소홍의 머리채를 낚아채 댓돌 아래 팽개쳤다.
"그 년을 갈가리 찢어 죽여라!"
격분한 발해군사들은 임소홍을 다투어 난도질했다.
인선황제의 총애를 받으며 황궁을 주지육림으로
만들었던 임소홍은 흥분한 군사들에게 제대로
비명소리도 지르지 못하고 그렇게 도륙이 되었다.
팔다리가 잘리고, 가슴이 도려내지고, 국부가 흥분한
군사들에게 난도질되었다.
비참한 죽음이었다.
황궁의 앞뜰이 임소홍의 피로 질펀했다.
인선황제는 그 처참한 광경에 얼굴이 해쓱해져 온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임소홍을 살해한 군사들은 다시 인선황제를
에워쌌다. 내관들이 그 와중에도 인선황제를 보호하기
위해 흥분한 군사들의 앞을 가로막았다.
"내관 놈들은 비켜라!"
"무엄하오! 지엄하신 황제폐하요! 모두 흉악한
병기를 놓고 무릎을 꿇으시오!"
"닥쳐라! 이 놈아!"
군사들은 내관들에게 발길질을 하고 주먹으로
내질렀다. 그리고 칼등으로 후려치며 끌어냈다.
"왜, 왜들 이러느냐?"
인선황제는 부들부들 떨며 군사들에게 물었다.
"투항을 결정한 황제는 황제가 아니다!"
"맞소! 당금 황제를 폐하고 새로운 황제를
옹립합시다!"
"황태자 대광현이 거란과 죽음을 무릅쓰고 싸우자고
주장하였다니 황태자로 황제를 옹립합시다!"
"옳소!"
"황제를 양의전으로 끌고 갑시다!"
"갑시다!"
군사들은 인선황제를 홍련궁에서 강제로 끌고
나왔다. 인선황제는 난폭한 군사들에게 어깨를
떠밀리고 발로 채이며 양의전으로 끌려갔다.
양의전에는 군사들이 난입하자 달아났던 대신들도
돌아와 있었다.
"폐하는 어찌하여 거란 오랑캐에게 투항을 하였소?"
군사들은 인선황제를 신문하였다.
"사세 부득이 하여 투항을 결정할 수밖에 없었다."
"무엇이 부득이 하오?"
"거란은 군사가 수십만에 이른다! 아국이 어찌
대항할 수 있겠느냐? 아국이 끝까지 대항한다면
거란은 우리 백성들을 어린아이들까지 도륙하겠다고
하였다! 짐은 차마 우리 백성들이 오랑캐들에게 도륙
당하는 참상을 볼 수 없어 눈물을 머금고 투항하기로
결정한 것이다.! 짐인들 어찌 투항을 좋아서
하겠는가?"
"그러면 어찌하여 좀 더 일찍 거란 오랑캐의 침략에
대비하지 않았소?"
"거란이 침략해 올 줄 어찌 알았겠느냐?"
"거란이 호시탐탐 우리 발해를 노리고 있었던 것은
어린아이도 알고 있었는데 황제가 몰랐다는 말이오?"
"투항을 철회하시오!"
"투항을 철회하는 선전문(宣戰文)을 쓰시오!"
"선전문을 쓰시오! 대신들도 모조리 선전문에
연명하시오! 연명하지 않는 대신은 오랑캐로 보고
먼저 죽이겠소!"
발해군사들은 살벌하게 인선황제를 위협하여 요에
항전을 선언하는 선전문을 쓰게 했다. 황제는
부들부들 떨리는 손으로 항전을 선언하는 포고문을
썼다.
......부덕한 과인이 열성조의 위업을 물려받았으나
아둔하고 용렬하여 정사를 제대로 돌보지 못하였다.
이에 거란 오랑캐가 수십만 대군을 일으켜 아국의
옥토를 짓밟으니 누구라서 분개하지 않겠는가. 허나
목숨을 버려 수천리 강역을 지키려고는 하지 않고
투항을 먼저 결의했으니 진정 하늘에 부끄러울
따름이다. 다행히 충성스러운 군사들이 짐의 아둔함을
깨우쳐 결사항전을 결의하니 과인은 쾌히 윤허하노라.
요에 투항을 하기로 한 전날의 결의는 모두 무용한
것이니 이 선전문을 보는 즉시 아국의 모든 군사들은
창검을 들고일어나 요와 싸우라.
발해군사들의 강압에 의해 요와 항전을 하기로
했으나 사정을 모르는 백성들은 환호하며 홀한성으로
몰려들었고 이로 인해 홀한성에는 새로운 전운이
감돌기 시작했다.
대인열이 장령부에서 돌아온 것은 이 무렵이었다.
발해의 군사들은 대인열을 열렬히 환영하고 그에게
군사의 지휘를 맡겼다.
대인열은 무인이 아니었으나 군사들을 지휘하여
거란군과 싸움을 준비했다.
발해군사들은 또 다시 처절한 항전에 돌입했다.
이번에도 주축을 이룬 것은 충의군들이었다. 발해의
성민들은 발해군이 투항을 취소하고 거란군에 맞서
싸운다는 소식이 퍼지자 다투어 창과 칼을 들고
성으로 몰려왔다.
거란은 대군으로 홀한성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발해군은 민병들이었고 우수한 장수가 없었다.
게다가 군사 수효에 있어서도 월등하게 작았다.
그러나 발해군은 용맹했다. 거란군이 40만 대군으로
성을 에워싸고 공격을 하여 함락을 시킬 때까지 열흘
동안 처절한 혈투를 벌이다가 전원이 장렬하게
전사했다.
대인열도 마지막 전투에서 비참한 최후를 마쳤다.
거란군이 재차 공격을 시작한 지 열흘째 되는
날이었다. 불과 7천 여명의 작은 병력으로 발해군은
요의 40만 대군과 맞서 싸우다가 전사한 것이다.
A.D 926년. 발해력 229년 2월 정사일(丁巳日)의
일이었다.
................................................
1) 발해의 멸망은 여러 가지 원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하고 있다. 할저로 인한 발해군사 기밀의 누설이
현실적인 것이라면 발해의 문존무비 사상과 발해의
귀족층인 토족(고구려 유민)과 말갈인들 사이의
알력은 발해가 위기에 처해 있는데도 단결력을
발휘하지 못하는 결과를 낳는다. 또한 발해 귀족층의
부패, 인선황제의 황음한 생활도 요인이 되었을
것이다.
2) 그러나 발해 멸망의 가장 큰 원인은 발해가
2백년 동안 별다른 위협없이 태평한 세월을 보낸 데
있었고 그와는 달리 거란의 대초원에서
전제화(專制化)의 기운이 일어났기 때문이었다. 야율
아보기는 유목민들인 거란의 이러한 전제화의 물결을
타고 거란을 통일한 뒤 대륙 경영에 나서 요라는
대제국을 건설하게 되는 것이다.
35. 짓밟히는 고도
40만 대군으로 홀한성을 쳐부순 거란군은 물밀 듯이
성으로 밀려 들어왔다. 홀한성 성안은 거란군사의
입성으로 큰 소란이 일어났다. 거란군은 성으로
들어오자 마자 발해군사의 잔당들을 토벌한다며
성민들을 닥치는대로 도륙하기 시작했다.
"발해 놈들을 씨도 남기지 마라!"
"발해 놈을 살려두면 또 다시 우리에게 대항한다!
이 기회에 뿌리를 뽑아라!"
홀한성은 지옥으로 변했다. 거란군사들은 2, 3 명씩
무리를 지어 몰려다니며 재물을 약탈하고 부녀자들을
겁탈했다.
아보기는 거란군사들에 의해 홀한성이 초토화되자
당당하게 성으로 입성했다. 인선황제는 두 번째
투항에서 아보기 황제의 말 앞에 엎드려 용서를
빌었다.
"신 인선이 군사들을 다스리지 못하여 소란이
일어났습니다. 신이 대국 요에게 어찌 대항할 엄두를
내겠습니까? 이는 모두 용렬한 군사들이 창검으로
위협을 하여 일어난 결과입니다. 부디 폐하께서는
인선의 처지를 불쌍히 여겨 주시옵소서."
인선황제는 눈물까지 짜면서 용서를 빌었다.
"그대는 정녕 투항할 의도가 있는가?"
아보기는 날카로운 눈빛으로 인선황제를 쏘아보면서
물었다.
"신 인선이 어찌 일구이언을 하겠사옵니까? 신은
오로지 대왕의 자비만을 갈구할 뿐이옵니다."
인선황제는 다시 엎드려 이마가 땅에 닿도록 절을
했다.
"황숙은 어찌 생각하시오?"
아보기가 할저를 보고 물었다.
"거짓 투항을 하고 폐하께 대항한 인선의 죄는 죽어
마땅한 일이나 어찌 망국의 왕을 죽이리까? 이는
폐하의 성덕에 누가 될 것이니 살려주시는 것이 가한
줄로 아뢰오."
할저가 점잖게 말했다.
"태자 배는 어찌 생각하느냐?"
"신도 숙부님과 같은 생각이옵니다. 발해왕 인선을
살려주면 두 가지 이익을 얻을 수 있습니다."
"두 가지 이익? 그래 그 두 가지 이익이 무엇이냐?"
"하나는 폐하께서 망국의 군주 발해왕을 죽이지
않고 살려 두면 후세에 폐하의 성덕이 길이 남을
것이고 또 하나는 인선왕을 살려둠으로써 발해국이
멸망하지 않은 것 같은 효과를 얻을 수 있습니다.
무지한 발해의 백성들은 발해국이 멸망하지 않은 걸로
알고 저항을 하지 않을 것입니다."
"과연 절묘한 계책이로다!"
아보기는 황태자 야율 배의 말에 탄복을 하고
통쾌하게 웃었다.
"인선은 들으라!
"예!"
"과인이 너를 아우의 예로써 대하려고 했는데 너는
어리석은 군사들을 충동질하여 과인에게 대항을 했다.
이 죄를 묻는다면 죽어 마땅할 것이나 살려주기로
한다. 일어나 과인을 호종하라!"
"황공하옵니다."
아보기는 거란군의 인도를 받아 황궁으로 말을 타고
들어가고 인선황제는 걸어서 아보기를 호종했다.
주작대로와 황궁은 이미 거란군에게 완전히
제압되어 있었다. 주작대로 연도는 거란군들이
창검으로 무장하고 삼엄하게 경비하고 있었고 황궁의
성벽에는 요국의 깃발이 처처에 꽂혀 펄럭거리고
있었다.
"만세!"
"만세"
거란군사들은 아보기가 지날 때마다 창검을 흔들며
만세를 불렀다.
"대칸만세!"
"대칸만세!"
인선황제는 거란군사들의 환호성에 어깨가 더욱 축
늘어졌다. 아보기는 거란군사들의 환호성에 손을
흔들어 답하며 당당하게 발해의 황궁으로 입성했다.
그는 황궁의 정문인 승천문(昇天門:오봉문)으로
말을 타고 들어가 어림청으로 들어갔다. 어림청은
조선조 경복궁의 근정전(勤政殿) 같은 대궐이었다.
설날에 황제가 문무대신들의 하례를 받거나 등극할
때, 그리고 왕비를 맞아들이는 국혼(國婚) 같은
국가적인 큰 행사가 있을 때만 이용했다.
황제가 평소에 정사를 보는 곳은 양의전이었다.
아보기는 인선황제가 앉던 옥좌에 앉았다.
인선황제는 신하가 되어 월대에 시립했다.
"과인은 오늘 병오일을 기해 발해국 국명을
동란국(東丹國:동쪽 거란국이라는 뜻이다)으로 바꾸고
황태자 야율 배를 동란국 인황왕에 봉한다. 홀한성은
천복성(天福城)으로 바꿀 것이다. "
야율 아보기는 발해의 국호를 동란국으로 바꾸고
홀한성을 천복성으로 바꾸었다. 아보기가 발해의
국호를 동란국으로 바꾼 것은 거란의 이름을 남기려는
의도도 있었으나 발해가 아직도 존재하는 것처럼
보이기 위한 의도였다.
황태자 야율 배를 동란국 왕에 봉한 것은 요의
권력승계와 밀접한 관계가 있었다. 황태자라면
아보기의 뒤를 이어 장차 요의 황제가 될 인물이었다.
그러한 그를 동란국의 인황왕에 봉한 것은 미구에
닥칠지도 모를 왕자들간의 권력투쟁을 방지하기
위해서였다.
아보기는 야율 배가 황제의 재목으로는 부족하다고
생각했다. 기질이 사나운 거란의 여러 종족들을
이끌고 돌궐의 위협을 방지하고 중원을 경영하기
위해서는 둘째 왕자인 야율 덕광이 적임자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황태자 야율 배가 깜짝 놀라서 아보기를
쳐다보았으나 이내 고개를 숙이고 사례했다.
"지난 번 발해에서 투항한 대길만(大吉萬)은
우대상(右大相:우의정급)에 명하고 중경 두덕부의
도독 대소현은 좌차상(左次相:좌참찬급)에 명한다."
"황공하옵니다."
대길만과 대소현이 절을 하고 사례했다.
아보기는 이어서 발해 정벌에 공을 세운 거란의
장수들에게는 골고루 벼슬을 승차시키는 논공행상을
실시했다. 전쟁에서 공을 세운 장군들에게는
표기대장군(驃騎大將軍)을 비롯해
보국대장군(輔國大將軍), 충무장군(忠武將軍) 등의
훈급을 주고 토지와 황금을 하사했다.
"발해 황궁에 있는 보물창고를 열어 동정에 공을
세운 군사들에게 골고루 나누어 주도록 하라!"
아보기는 논공행상을 마친 뒤 홀한성 밖의 군영으로
되돌아갔다. 그는 아직도 할 일이 많이 남아 있었다.
발해의 홀한성을 점령하기는 했으나 지방을 완전히
토평한 것은 아니었다. 발해는 영토가 광대하여
변방에는 수많은 이족들이 있었고 특히 발해의
피지배층을 형성하고 있던 말갈족들은 대가 세서 발해
황실도 다스리기에 여간 골치를 썩힌 것이 아니었다.
발해의 지방은 부에 도독이 있었고 주에는 자사,
현에는 현승이 있었다. 현이 얼마나 되는지는 정확히
파악되지 않았으나 발해는 5경(五京) 15부(府)
62주(州)가 있었다. 현은 주 밑의 관아였다.
이 광대한 영토를 군대를 끌고 다니며 일일이
토평할 수 없는 것이다.
다음날부터 아보기는 인선황제를 시켜 발해 5경
15부의 도독과 자사를 홀한성으로 불러들이기
시작했다.
동란국의 왕이 된 요의 황태자 야율 배 인황왕은
양의전에서 발해 대신들의 하례를 받는 것으로 첫
정사를 시작했다. 발해의 대신들은 하나하나
양의전으로 불려와 숙배를 하고 충성을 약속했다.
그러나 발해의 멸망을 슬퍼하며 고려로 망명한
대신들도 있었다. 은계종 같은 대신들은 칭병을 하고
누워 있다가 야음을 틈타 홀한성을 빠져나가고
말았다. 김신은 후일 자신이 다스리던 현의 백성들을
대거 이끌고 고려로 망명했다.
인황왕은 발해 대신들의 인사가 끝나자 발해 황실의
점고를 받겠다고 말했다. 그 소식은 금세 백련궁의
효경왕후에게 전해졌다. 효경왕후는 치욕감에 몸을
부르르 떨었다.
"언제 점고를 받겠다고 하느냐?"
효경왕후가 싸늘한 목소리로 궁녀에게 물었다.
"내일이라고 하옵니다."
"알았다! 물러들 가라!"
효경왕후는 궁녀들을 물러가게 하고 잠시 골똘히
생각에 잠겼다. 인황왕에게 점고를 바치는 일은
치욕스러운 일이다. 그러나 망국의 왕비로 거절할
명분이 없었다.
36. 추운 나라에서 온 사람들
사방은 눈으로 하얗게 덮여 있었다. 백련궁의
담장과 기와, 누대를 비롯해 뜰의 나무들조차
흰눈으로 하얗게 덮여 있었다.
날씨는 차디찼다. 비가 그치면서 몰아치기 시작한
눈보라에 이어 무서운 혹한이 시작되고 있었다.
인선황제가 주색에 빠지기 시작하면서 찬바람이 불던
백련궁은 거란군사들에게 접수되어 숨조차 쉬지
못하고 있었다.
효경왕후는 날이 어두워지는 것도 모르고 무릎을
세우고 골똘히 생각에 잠겨 있었다. 2월이었다.
밖에는 바람이 칼날처럼 매섭게 불고 있었다.
백련궁은 물을 끼얹은 듯이 조용했다. 궁녀들은
살얼음 위를 걷듯이 조심조심 걸었다. 백련궁은
완연히 상가(喪家)처럼 돌변해 있었다.
"우린 이제 어떻게 되는 거지?"
"글쎄 말이야."
"거란의 황태자가 왕이 되었다며?"
"그렇대."
"그럼 우린 이제 거란 황태자를 모셔야 하나?"
"오랑캐를 어떻게 모셔?"
궁녀들은 삼삼오오 모여 자신들이 어떻게 될지 몰라
불안한 얼굴로 수군거렸다. 그것은 내관들도
마찬가지였다. 내관들도 두 셋씩 모여서 불안한
표정으로 귓속말을 했다.
"우린 이제 어떻게 되는 거야?"
"인황왕을 모셔야지 어떻게 해?"
"인황왕이 우리 가독부야?"
"이젠 가독부야......."
효경왕후는 사방이 캄캄하게 어두워진 뒤에도
어둠만을 노려보고 있었다. 인황왕이 발해 왕실의
점고를 받겠다고 한 것은 왕실의 여인을 노리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효경왕후에게는 정연공주가 있었다.
해가 바뀌었으므로 벌써 열 아홉 살이었다. 혼례를
올려주어야 했으나 정연공주는 발해의 풍속대로
자신을 납치해 가는 남자에게 시집을 가겠다고
하였다. 장난 끼가 발동한 탓인지 알 수 없었다.
발해의 풍속에는 아직까지도 약탈혼이 성행하고
있었다. 약탈혼은 인간족이 해뜨는 나라를 찾아
대륙까지 온 뒤에 줄곧 이어져 온 전통이었다.
특히 인간족들이 말을 타게 되고 유목생활이
굳어지면서 처녀를 납치하여 아내로 삼는 일이 전통이
되어 버린 것이다.
정연공주가 남자들에게 납치되어 아내가 되겠다는
것은 장난 끼가 발동한 탓도 있겠지만 무예를
좋아하는 탓에 당 나라의 유학(儒學)만 숭상하는 발해
귀족들의 자제를 경멸하고 있었다. 정연공주는
남자라면 호쾌한 기상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래도 과년한 딸이었다.
효경왕후는 인황왕이 정연공주를 노릴 것이라는
생각에서 벗어날 수가 없었다. 효경왕후는 정연공주를
피신시키지 못한 것을 깊이 후회했다.
"누가 정연공주를 불러오너라!"
효경왕후는 밖을 향해 낮게 지시했다.
"예."
밖에서 침을 삼키는 소리라도 들릴 것 같은 정적
속에서 궁녀의 낮은 대답이 들려왔다. 궁녀의 대답도
어쩐지 죽음의 냄새를 풍기고 있는 기분이었다.
"공주마마 드셨사옵니다."
이내 밖에서 궁녀의 목소리가 들렸다.
"들라 해라!"
효경왕후의 목소리는 여전히 차디찼다.
"예."
캄캄한 어둠 속에서 장지문이 열리고 하얀 옷자락이
어둠을 밀어내고 들어왔다.
"어머마마!"
정연공주가 약간 놀란 듯한 목소리로 효경왕후를
불렀다.
"앉아라!"
"어찌 불도 켜지 않으시고....."
"불은 켜서 무엇하겠느냐? 망국의 왕비라 불을 켜고
세상을 바로 볼 수가 없구나."
"어머마마!"
정연공주의 목소리에 울음이 섞였다.
"내일 인황왕이 왕실을 점고 한다는구나."
"저도 들었습니다."
"원수의 인황왕에게 절을 해야 한다니 기가 막힐
뿐이다."
"망국의 왕실이니 수모를 감당할 뿐이옵니다."
"얘야."
"예?"
"인황왕이 점고를 받으려는 것은 우리 왕실의
여자를 노리기 위함이다."
"저도 그리 생각하고 있사옵니다."
정연공주의 목소리가 가늘게 떨렸다. 어둠 속이지만
어깨까지 들먹거리고 있는 것이 효경왕후의 눈에도
뚜렷이 보였다.
"우느냐?"
"아니옵니다."
"어찌할 생각이냐? 너는 총명한 아이니 처신을
어떻게 해야할지 알고 있을 것이다."
"저는 이 나라의 원수를 갚고 죽을 생각이옵니다."
"원수가 누구냐?"
"거란의 대칸 야율 아보기입니다."
"장하다!"
효경왕후가 입술을 깨물었다. 효경왕후의
얼굴에서도 뜨거운 눈물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허나 죽는다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다."
"........"
"발해를 복국해야지......"
"어머니! 저는 궁중의 일개 아녀자인데 어찌.....?"
"태자 대광현은 총명하기는 하나 나약하다! 난세에
그와 같이 약하여 어찌 큰 일을 할 수 있겠느냐?"
"........."
"대륙을 달려야 한다."
"........."
"발해가 좀 넓은 땅이냐?"
".........."
"말을 타고 열흘을 달려도 끝이 보이지 않는
초원이며 수많은 부족들....... 천군만마를 호령하듯
그들을 호령해야 한다!"
"알겠습니다."
"점고가 끝나면 떠나라!"
"예."
"패물은 내가 준비해 두겠다."
"알겠습니다."
정연공주는 고개를 들고 효경왕후를 쳐다본 뒤에
몸을 일으켜 깊숙이 절을 했다.
이튿날 사시(巳時)에 양의전에서 발해 왕실에 대한
점고가 있었다.
인황왕은 옥좌에 앉아 있고 좌우에는 동란국
우대상과 좌차상에 새로 임명된 발해 왕족 대길만과
대소현이 시립해 있었다. 내관과 궁녀들도 인황왕
옆에서 시중을 들고 있었다. 발해에 거짓 귀순을 했던
할저는 인황왕의 뒤에서 교활한 눈으로 효경왕후를
살피고 있었다.
"발해군왕 인선비 효경왕후 현신이옵니다."
궁녀가 목청을 높여 외쳤다.
효경왕후는 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눈에서 파랗게
불이 일어나는 것 같았다. 다리가 후들후들 떨리고
가슴이 격렬하게 뛰었다. 그러나 그녀는 입술을
지그시 깨물고 참았다.
"인선비는 인황왕 전하께 사배(四拜)를 올리시오!"
왼쪽에 시립해 있던 우대상 대길만이 인황왕에게
충성심을 보이기라도 하려는 듯이 큰소리로 외쳤다.
효경왕후는 고개를 떨구었다.
옆에 있던 궁녀들이 효경왕후를 부축하여 절을
올리게 했다.
효경왕후는 궁녀들의 부축을 받아 네 번 절을 했다.
"고개를 들라!"
인황왕이 북방 민족 특유의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말했다.
"인선비는 고개를 들라시는 분부요!"
궁녀가 인황왕의 말을 반복했다.
"인선비는 지엄한 안전이니 고개는 아래로 하고
아미는 살짝 들도록 하시오!"
좌차상 대소현이 대길만에게 질세라 큰소리로
효경왕후를 다그쳤다.
효경왕후는 대소현의 지시에는 대꾸도 하지 않고
고개를 살짝 들었다.
인황왕은 30대의 사내였다. 북방 오랑캐의 왕자답게
키가 크고 체격이 당당했다. 눈빛은 불이라도 뿜을
듯이 형형했다.
"인선비는 전쟁으로 마음이 심란할 줄 아오.
물러가오."
인황왕이 효경왕후에는 관심이 없는 듯 낮게
내뱉았다.
"예."
"인선비는 물러가라는 분부시오!"
궁녀가 인황왕의 말을 반복했다.
효경왕후는 궁녀의 말에는 대답을 하지 않고 뒤로
물러 나왔다.
"정연공주 현신이오!"
그때 궁녀가 다시 목청을 높였다.
그 소리에 정연공주가 궁녀들의 시중을 받으며
양의전으로 들어왔다. 정연공주는 백설처럼 흰색의
주름을 많이 잡은 우단 겹상의(裳衣:겹치마)에 흰색의
유삼(둔부를 가리는 저고리)을 입고 있었다. 허리와
소매 끝에는 푸른색의 선( :단)을 둘러 아름답기
그지없는 모습이었다. 고구려인들의 전통의상이었다.
발해 왕실은 당 나라의 풍속을 받아들여 후대에
이르러 귀족들이 당 나라 의상을 주로 입었으나
정연공주는 고구려의 의복을 입은 것이다.
"정연공주는 무릎을 꿇고 인황왕 전하께 사배를
올리시오!"
정연공주가 양의전으로 들어오자 대길만이 큰소리로
말했다. 억지로 위엄을 부리고 있는 목소리였다.
"정연공주는 무릎을 꿇고 사배를 올리시오!"
궁녀도 낭랑한 목소리로 정연공주에게 말했다.
"무릎을 꿇지는 않겠다!"
정연공주가 차가운 목소리로 궁녀에게 말했다.
궁녀의 얼굴이 금세 벌겋게 상기되었다.
"정연공주는 어느 안전이라고 말을 함부로 하느냐?"
"네가 어제까지만 해도 나의 신하였거늘 오늘은
나에게 호령을 하느냐? 축생도 주인을 알아본다는데
너는 주인을 몰라보니 축생만도 못하구나!"
정연공주의 당당한 말에 궁녀는 몸을 파르르 떨고
거란의 대신들은 웅성거렸다. 할저는 빙긋이 웃고
있었다.
"정연공주는 어서 무릎을 꿇고 절을 올리시오!"
궁녀가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하여 다시 호통을 쳤다.
"발해 풍속에 여자는 절을 해도 무릎을 꿇지
않는다! 내가 발해의 공주이거늘 어찌 풍속을 외면할
수 있다는 말이냐?"
"발해 풍속이 그렇다면 절만 하도록 해라!"
인황왕도 당찬 정연공주의 태도가 마음에 들었는지
몸을 꼿꼿이 했다.
정연공주는 인황왕의 지시에 궁녀들의 부축을
받으며 절을 했다.
"고개를 들라!"
인황왕의 말에 정연공주가 고개를 들었다. 인황왕이
뒤에 서 있는 할저를 쳐다보았다. 할저가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정연공주는 요국 황제폐하의 행영에 가서 시중을
들라. 황제폐하를 잘 모셔야 너희 발해 왕족이 편히
지내게 될 것이다."
인황왕의 말이었다.
정연공주는 몸을 부르르 떨었다. 예상하고 있던
일이었으나 막상 인황왕의 지시가 떨어지자 천길
벼랑으로 추락하는 듯 다리가 후들후들 떨렸다.
"황송하옵니다."
정연공주는 간신히 입술을 달싹거려 대답했다.
그날 밤이었다.
발해 황궁의 내시들이 관 하나를 들고 거란군사들이
삼엄하게 포위를 하고 있는 황궁 문 앞으로 나오고
있었다. 거란군사들은 즉시 관을 에워쌌다.
"무슨 일이냐?"
거란군사들의 거만한 태도에 내시들은 몸을 벌벌
떨며 두려워했다.
"늙은 상궁이 죽어서 시체를 내가고 있습니다."
"뚜껑을 열어 보아라!"
"저......."
"왜 망설이느냐?"
내시들이 엉거주춤하자 거란군사들이 일제히 칼을
뽑아들었다. 내시들은 사색이 되어 관 뚜껑을 열었다.
그러자 악취가 확 풍기면서 생선 썩은 냄새가 왈칵
풍겼다. 거란군사들은 관을 들여다보려다가 말고
재빨리 코를 감싸쥐고 뒤로 물러섰다.
"뚜껑을 닫고 어서 내가라!"
거란군사들의 호통에 내시들은 황급히 관 뚜껑을
닫은 뒤 다시 관을 들고 성문을 나갔다.
"에이 더러운 놈들.......!"
거란군사들은 침을 칵 뱉았다.
관을 든 내시들은 황궁문을 빠져 나오자 어둠
속으로 바람처럼 달려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들은
날이 밝기가 무섭게 홀한성 성문을 빠져나가 어디론가
사라지고 말았다.
황궁이 발칵 뒤집힌 것은 사시경이 되었을 때였다.
야율 아보기에게 바치기로 한 정연공주가 달아나자
인황왕은 노발대발하여 추격대를 보냈다.
그러나 추격대는 정연공주를 찾을 수가 없었다.
더욱 놀라운 일은 태자 대광현조차 내시들로
위장하여 홀한성을 빠져나갔다는 사실이었다.
37. 발해의 넋.
거란군은 발해를 철저하게 약탈했다.
발해는 거란군의 침입으로 아비규환이 되었다. 많은
남자들이 거란군의 침략으로 싸우다가 죽었고 한
달간의 처절한 혈전을 치르고 홀한성에 입성한
거란군은 거란에 배타적인 인물들을 대대적으로
학살했다.
"동란국은 매년 요에 포(布) 15만 단(端), 말
1천필을 조공으로 바치라!"
요왕 아보기는 동란국의 인황왕에게 조공을
바치라는 명을 내렸다. 뒤이어 아보기는 상경용천부의
성민들을 요로 대대적으로 천사(遷徙:이주)시키기
시작했다. 그 무렵의 정복전쟁은 전리품으로 재물과
여자들만 약탈하는 것이 아니라 백성들까지 강제로
끌고 오는 것이 일반화되어 있었다. 정복지의
백성들을 끌고 오는 것은 정복지에서 백성들을
끌어내어 저항하는 세력을 약화시키기 위한 의도가
있었다.
아보기에 의해 발해인들은 9만 4천여 호(戶) 약
40만 명이 정든 땅에서 쫓겨나 산 설고 물 설은
거란으로 끌려가게 되었다. 40만 명이라면 결코 적은
숫자가 아니었다. 어린아이를 비롯해 노인과
부녀자들까지 머리에 이고 지고 군대에 쫓기어
천사되었다.
아보기는 2월이 저물어 가는 27일 자신이 발해를
정복하기 위해 이끌고 온 40만 대군중 10만명을
남기고 30만 대군과 발해의 백성들을 끌고 부여성으로
향했다. 부여성이 상경용천부에서 거란으로 가는
직통로였다. 물론 영주도를 향해서 갈 수도 있었지만
서경압록부와 장령부가 반발할 움직임을 뚜렷이
보이고 있었다.
그러나 정복전쟁은 끝났다.
아보기는 발해왕 인선황제의 항복을 받은 것으로
정복전쟁의 막을 내리기로 결심했던 것이다. 발해의
지방에서 일부 반발 세력이 저항을 한다고 해도
인황왕을 상경용천부에 주둔시켜 진압시키면 그
뿐이었다.
투항한 인선황제를 요로 끌고가면 발해는 조직적인
저항을 하지 못할 것이었다.
그는 이제 쉬고 싶었다.
요의 수도 상경임황부를 너무 오랫동안 비운 것도
걱정이 되었다. 반란을 일으킬만한 신하들은 모조리
이끌고 발해 원정을 나섰으나 안심할 처지는
못되었다. 거란인들은 전통적으로 군주에 대한
충성심이 약하고 부족제를 지켜온 민족이었다.
자신들의 부족을 강제로 지배하는 아보기에게 심심치
않게 반기를 들고 있었다.
홀한해의 기인이라는 장백성모(長白聖母)의 등장도
그의 회군을을 서두르게 했다.
며칠 전 상경용천부의 홀한해 폭포에 산다는
기인(奇人)이 홀한성으로 들어왔다. 홀한성의 저자에
퍼진 소문에 의하면 기인이 천부경을 얻었다고
하였다. 천부경은 전설 속의 책으로 조선족이
천신(天神)으로 받드는 단군 왕검이 나라를 처음 열기
위하여 하늘에서 내려왔을 때 상제(上帝)에게 얻은
하늘의 비서(秘書)로 알려져 있었다.
"폐하. 홀한성에 천부경을 갖고 있는 기인이
나타났다고 합니다."
이 소문은 군진에 있던 요왕 아보기의 귀에도
들어갔다.
"천부경을 갖고 있는 기인?"
아보기는 구미가 바짝 당겼다. 천부경은 천무일협
백인걸이 갖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었다. 그러나
백인걸은 인선황제에게 처형을 당해 죽으면서도
천부경을 내놓지 않아 할저도 천부경의 행방을
궁금해했었다.
기인이 천부경을 가지고 있다면 경천동지할
노릇이었다.
그것은 거의 전설이나 진배없는 얘기였다.
기인이 천부경을 이용해 구름을 부르고 비를 내리게
한다는 소문도 들려왔다.
"기인이 어디에 있다고 하느냐?"
"홀한해에 있는데 일반 사람들의 눈에는 띄지
않는다고 합니다."
"참언일 것이다!"
아보기는 신하들의 말에 코웃음을 쳤다. 나라가
망하면 이런저런 요설이 나돌게 마련인데 홀한성에도
허다한 소문이 퍼져 민심을 흉흉하게 하고 있었다.
"그 기인은 자기가 모습을 보여 주고 싶은
사람에게만 모습을 드러낸다고 합니다."
"어디에 산다고 하느냐?"
"홀한해에 산다고 합니다. 홀한해에서 어부 노릇을
하는데 보름과 초하루만 되면 첨성단(添星亶)이라는
바위에 올라 초인가(超人歌)를 부른다고 합니다."
"초인가라니 그게 무엇이냐?"
"초인을 기다린다는 발해의 노래로 단군과 같은
천인을 기다린다는 내용의 노래입니다."
"음."
아보기는 낮게 신음을 삼켰다.
"그러면 보름이 멀지 않았으니 홀한해 첨성단이라는
바위에 가서 매복하고 있다가 기인이 나타나면
잡아오너라!"
아보기는 야율 적로에게 지시하여 홀한해의 기인을
잡아오게 했다. 야율 적로는 보름이 되자 아보기의
호위무사 20명을 데리고 홀한해의 첨성단이라는
바위로 가서 매복했다.
홀한해는 사방 1백리가 넘는 큰 호수로 주위의
경치가 지극히 아름다웠다. 실바람이 불 때마다
잔물결은 파문을 일으키며 출렁거리고 실버들이
호수의 수면에 잠겨 있었다.
밤이 되자 과연 첨성단으로 흰옷을 입은 사람이
올라왔다.
야율 적로는 숨을 죽이고 기다렸다.
흰옷을 입은 기인은 평평한 바위에 앉아 품속에서
옥소를 꺼내어 불기 시작했다. 아름다운 소리였다.
옥소가 연주하는 곡은 서초패왕(西楚覇王)으로
항우(項羽)와 유방(留防), 두 영웅의 싸움을 그린
것이었다. 그러나 대부분은 항우와
우미인(虞美人)이라는 우희(虞姬)의 사랑이 기둥
줄거리로 되어 있었다.
옥소로 서초패왕을 연주하고 나자 기인은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저녁이 다가오니 산 빛은 어두운데
성은 허물어지고 다복솔만 우거졌네
황혼에 찬비가 내리니
후인(後人)은 머물 곳이 없구나
우거진 솔 밑에서 비를 긋노라니
몽중(夢中)에 초인이 왔도다
아, 아득한 옛날 그는 대륙을 달리던 선인(先人)
8조의 금법(禁法)으로 나라를 태평하게 하고
대륙을 다스렸네
부여를 일으킨 해모수
대륙을 넓혀서 광개토대왕
고토(古土)를 회복해서 발해의 대조영.....
노래의 목소리는 뜻밖에 여진따운 여인의
목소리였다. 야율적로는 천상에서 들려오는 듯한
노래소리에 숨을 죽였다.
문득 꿈에서 깨어나니
어디선가 소슬바람 불고
달이 구름 사이로 얼굴을 내밀었네
아, 월중(月中)에 씩씩한 선인의 자취를 묻노라
아, 달빛 처량한 밤에 초인(超人)을 그리노라
노래는 애잔하면서도 아름다웠다. 야율 적로는 홀린
듯이 그 노래를 들었다. 그때 노래소리가 뚝 그치더니
여인이 야율 적로가 있는 쪽을 날카로운 눈빛으로
쏘아보았다.
"누구냐?"
여인이 낭랑한 목소리로 물었다. 여인은 이미 야율
적로가 무사들을 데리고 매복한 것을 알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하핫.....!"
야율 적로는 낭랑하게 웃으며 화살처럼 여인 앞으로
뛰어나갔다. 여인이 몸을 벌떡 일으켰다. 기인은
뜻밖에도 20세도 안된 묘령의 소녀였다.
"네가 홀한해의 기인이냐?"
야율 적로는 반신반의하며 소녀를 쏘아보았다.
소녀는 백의를 입고 있었다. 눈은 이슬처럼
영롱했고 콧날이 오똑했다.
"흥!"
소녀가 냉랭하게 코웃음을 쳤다.
"그렇다면 어쩔 테냐?"
"요의 대칸께서 너를 보자고 하신다. 순순히
가겠느냐?"
"거란의 졸개들이로구나! 좋다!"
소녀는 순순히 야율 적로를 따라 홀한성의 거란의
군진으로 갔다.
야율 적로는 그녀를 요왕 아보기 앞으로 끌고 갔다.
"네 이름이 무엇이냐?"
요왕 아보기는 소녀를 행영으로 끌어내어 심문했다.
"나이가 많아 이름은 잊었고
장백산(長白山:백두산)에서 왔다고 하여 사람들이
장백성모라고 부르오."
"네 나이 몇이냐?"
"1백57세요."
그 말에 행영 좌우에 시립해 있던 요 나라의
장수들이 아연하여 실소를 터뜨렸다. 아보기도 빙긋이
웃고 있었다. 소녀는 기껏해야 15, 6세로 보였다.
"네가 정말 1백57세냐?"
"내가 어찌 거짓을 말하겠소?"
장백성모라는 소녀는 아보기를 향해 새침한
표정으로 내뱉았다.
아보기는 장백성모를 노려보다가 얼굴을 찌푸렸다.
장백성모가 엉뚱한 데가 있는 것 같기도 했고 자신을
조롱하고 있는 것 같기도 했다. 그러나 상대는 구름을
부르고 비를 내리게 한다는 일대기녀, 아보기는
조심스럽게 그녀의 신통력을 알아보기로 했다.
"네가 구름을 부르고 비를 내리게 하느냐?"
"그런 것은 하늘이 하는 일인데 인간이 어찌 흉내낼
수 있겠소?"
"홀한성에 네가 그런 일을 한다는 소문이
파다하다."
"모두가 말하기 좋아하는 사람들이 하는 말이오.
새겨들을 필요 없소이다."
"사람들이 너를 일컬어 홀한해의 기인이라고 했다.
네가 과연 그만한 명성을 들을만한지 알아보아야
하겠다."
"무엇을 알아보려 하시오?"
"이 나라를 누가 열었느냐?"
아보기의 말에 장백성모가 빙긋이 웃었다. 어떻게
보면 요염하기도 했고 학(鶴)처럼 탈속해 보이기도
하는 얼굴이었다.
"왜 대답을 하지 않느냐?"
"위서에 이르기를 지금부터 2천년 전에 단군
왕검이란 분이 있어 아사달에 도읍을 정하고 나라를
열어 조선이라고 부르니 요 임금과 같은 때였다
하였으므로 왕검이란 분이시오."
"뒤에는 누가 나라를 열었느냐?"
"부여의 해모수요. 그 분은 천제(天帝)의 아들로
다섯 용이 끄는 수레를 타고 하늘에서 내려와
흘승골성(訖升骨城:만주의 환인)에 나라를 열었소."
장백성모의 대답은 천부경에 있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장백성모가 천부경을 알고 있다는 증거가
되는 것이다.
"천부경을 가지고 있느냐?"
"가지고 있소."
"어디에 있느냐?"
"내 머릿속에 있소."
교활한 대답이었다. 아보기는 낮게 신음을 삼켰다.
장백성모가 결코 만만한 상대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복(卜)을 아느냐?"
"장백산에 있을 때 수행을 하여 조금 알고 있소."
"그럼 내 관상을 보라."
"대칸은 대초원의 영웅으로 거란을 통일하였소.
뿐만 아니라 서정(西征)을 하고 동정(東征)을 하여
위엄을 사해에 떨쳤으니 이제 무엇을 더 바라겠소?
득천(得天)할 때가 이르렀소."
"득천이라......"
아보기는 장백성모의 말을 듣고는 곰곰이 생각에
잠겨 있다가 고개를 끄덕거렸다. 득천이란 하늘을
얻는다는 뜻이니 죽음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아보기는 장백성모의 말을 천하를 얻는다는 뜻으로
해석했다. 그는 아직도 중원 남쪽을 완전히 통일하지
못했다. 당 나라가 멸망한 후 그 곳에는
한족(漢族)들이 송 나라를 세우고 있었다. 그의
마음속에서는 한족들이 세운 송 나라까지
정복하리라고 다짐하고 있었다.
"내가 바라는 것이 이루어지겠느냐?"
"오늘 이루어지리다."
"오늘?"
아보기는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대칸의 이름이 천세(千歲)까지 남을 것이오."
아보기는 고개를 갸우뚱했다. 그가 바라는 일이
오늘 이루어진다는 것을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러나
기분은 흡족했다. 게다가 이름이 후세까지 남는다는
것은 그만큼 이름을 크게 떨치리라는 뜻으로
해석되었다.
그러나 아보기의 행영에도 술사(術士)가 있었다.
술사는 장백성모가 말한 것을 재빨리 간파했다.
"폐하! 속지 마시옵소서. 장백성모가 득천한다는
것은 페하의 수(壽)를 말하는 것이옵니다. 폐하께서
오늘 하늘을 얻으니 이는 명을 달리하신다는 뜻인
것입니다."
"뭣이?"
아보기는 눈을 크게 떴다.
그때 장백성모가 고개를 높이 들고 앙천대소를
터뜨렸다.
"거란에도 술사가 있었다는 말이냐? 허면 어찌하여
아보기가 오늘 죽는다는 것을 몰랐느냐?"
장백성모는 거란의 술사를 조롱하고 있었다. 거란의
술사는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닥쳐라!"
"호호......"
"네가 감히 대요제국의 황제폐하를 우롱할 셈이냐?"
"그것이 하늘의 뜻이거늘 누가 거역을 하겠느냐?"
"황제폐하의 수가 그밖에 안 된다면 피할 수 있는
방법도 있을 것이 아니냐?"
"제갈량도 제가 죽을 줄 미리 알았으나 피하지
못했다. 천명은 거스를 수가 없는 법이다!"
아보기는 장백성모와 술사가 하는 얘기를 듣고는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저 년을 죽여라!"
아보기는 군사들에게 명령을 내려 장백성모를
죽이게 했다.
"호호호....."
그러나 거란군사들이 달려들기도 전에 장백성모는
번개처럼 허공으로 몸을 솟구치더니 아보기를 향해
몸을 날렸다. 동시에 장백성모가 요왕 아보기를 향해
팔소매를 흔들었다. 그러자 갑자기 날카로운 파공성과
함께 수 백개의 암기가 아보기를 향해 섬광처럼
날아가기 시작했다.
"자객이다!"
"대칸을 보호해라!"
요왕 아보기의 주위에 시립해 있던 무사들이 일제히
고함을 지르며 아보기를 막아섰다. 아보기의 군막은
순식간에 혼란에 빠졌다.
(아!)
아보기는 가슴이 철렁했다. 바늘 같은 가느다란
암기가 날카로운 살기를 뿜으며 날아오고 있었다.
그러나 무사들이 재빨리 방패를 들어 막자 파파팟
소리를 내며 방패에 꽂혔다. 암기에는 독이 묻어
있었는지 방패로 막지 못하고 암기에 맞은 병사들이
처절한 비명을 지르며 나뒹굴었다. 병사들의 입에서
검붉은 피가 왈칵 쏟아졌다.
"계집을 막아라!"
거란의 무사들이 재빨리 아보기를 겹겹이 에워쌌다.
"호호호.......너희들이 나를 막을 수 있겠느냐?"
장백성모는 허공에서 몸을 빙그르 돌면서 또 다시
암기를 발출했다.
"암기다!"
"묘강의 독침이다!"
"막아라!"
야율 적로는 무사들에게 외치고 장백성모를 향해
날아갔다.
"으악!"
"악!"
그러나 장백성모의 독침은 아보기를 죽이지 못하고
거란의 군사들만 죽이고 있었다. 장백성모는 아보기를
보호하던 군사들만 피를 토하며 죽어 나자뻐지자 옆에
있던 거란군사의 장검을 빼앗아 아보기를 향해
달려갔다.
"계집이 온다!"
"계집을 막아라!"
아보기는 벌벌 떨면서 군사들에게 지시했다.
군사들이 비로소 와 하는 함성을 지르며 장백성모를
향해 달려들었다.
"비켜라! 하루살이들아!"
장백성모는 거란군사들이 벌떼처럼 달려오자 장검을
힘껏 휘둘렀다. 장백성모가 장검을 휘두르자 갑자기
폭풍 같은 바람이 일어나고 흙먼지가 뽀얗게
일어났다. 무시무시한 검법의 위력이었다.
"악!"
"으악!"
거란군사들은 피보라를 뿜으며 나뒹굴었다.
거란군의 군진은 순식간에 아비규환으로 돌변했다.
장백성모는 거란군사들이 벌떼처럼 달려들고 있었으나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고 있었다. 백의를 표표히
날리며 달려오는 군사들을 빗자루질 하듯이
쓸어버리곤 했다.
거란의 군진에는 시체가 산처럼 쌓이고 피가 바다를
이루었다. 문자 그대로 시산혈해(屍山血海)의 참상이
벌어지고 있었다.
장백성모의 백의도 피로 흥건하게 물들어 홍의가
되어갔다.
(무서운 계집이다!)
야율 적로는 온 몸을 부르르 떨었다. 거란의
군사들은 파도가 몰아치듯이 장백성모를 공격하고
있었으나 장백성모는 염라사자처럼 거란군사들을
도륙하고 있었다.
"계집을 잡아라!"
"계집을 죽여라!"
거란군사들은 아우성을 치며 장백성모에게
달려들었다. 동료들이 무수하게 시체가 되어 나뒹굴고
있었으나 자객이 하나라는 사실이 거란군사들의
용기를 북돋웠다. 게다가 자객은 15, 6세밖에 안되어
보이는 소녀였다.
"자객을 죽이는 군사들에게 큰상을 내리겠다!"
야율 적로는 거란군사들이 장백성모를 잡지 못하자
화가 치밀었다.
"와!"
야율 적로의 말에 거란군사들은 함성을 지르며 더욱
세차게 공격을 퍼붓기 시작했다.
"오너라!"
장백성모는 입술을 깨물었다. 벌써 한 시진(時辰:약
두 시간)이나 거란군사들과 맹렬한 싸움을 했으나
거란군사들은 조금도 줄어들지 않고 달려들고 있었다.
"파천일황(破天一荒)!"
장백성모는 장검을 하늘로 번쩍 치켜들고 날카롭게
외쳤다. 하늘을 격파한다는 무시무시한 검식이었다.
장백성모가 들고 있는 장검에서 시퍼런 검강(儉鋼)이
뻗치더니 거란군사들을 쓸어갔다.
"으아아아악......!"
다음 순간 거란군사들이 처절한 비명을 지르며
나뒹굴었다. 거란군사들은 흠칫했다. 단 일식에
앞줄에 있던 거란군사들 수십 명이 핏줄기를 뿜으며
나뒹굴고 있었다.
장내는 처참했다.
팔이 잘려진 군사에서 다리가 잘려진 군사, 목이
달아난 군사, 내장이 쏟아진 군사........
그들의 몸에서 쏟아진 피로 땅바닥이 질척거릴
정도로 흥건했다.
(어린 나이에 저토록 고강한 무공을 지니고
있다니.......)
거란군사들은 경악했다.
거란군사들은 저승사자를 만나기라도 한 듯이
비로소 죽음의 공포를 느끼기 시작했다.
"파천이황!"
"파천삼황!"
장백성모는 거란군사들이 주춤한 틈을 타서
맹렬하게 초식을 전개했다. 그러자 산악을 무너뜨릴
것 같은 무시무시한 검풍이 거란군사들을 향해
몰아쳤다.
거란군사들은 황황히 뒤로 물러섰다.
"으아아아악.......!"
그러나 미처 피하지 못한 거란군사들은 피투성이가
되어 나뒹굴었다.
"아보기!"
장백성모는 거란군사들이 황급히 뒤로 물러서자
몸을 다시 공중으로 솟구치며 목소리에 공력(功力)을
실어 외쳤다. 그러자 거란군사들은 귀청이 떨어져
나가는 것 같은 통증을 느꼈다.
아보기는 그때까지도 거란 무사들의 호위를 받으며
진중에 있었다. 그때 장백성모가 허공으로 몸을
솟구치며 일성을 내질렀다. 아보기는 그 소리에
고막이 터질 것 같았다. 장백성모가 무림인들이
사용하는 공력을 실어 소리를 질렀기 때문이었다.
"도망가지 말고 내 칼을 받아라!"
장백성모는 허공으로 10장(十丈:사람 키의
열배)이나 솟구쳐 아보기를 향해 날아오고 있었다.
(아.....!)
아보기는 홀린 듯이 장백성모를 쳐다보았다.
"기다려라!"
그때 야율 적로가 허공으로 솟구치며 장백성모를
향해 날아갔다.
"비켜라!"
장백성모는 일성을 내지르며 아보기를 향해
팔소매를 휘둘렀다. 그러자 그녀의 팔소매에서 무색의
가루가 아보기를 향해 날아갔다.
아보기는 재빨리 머리를 숙였으나 문득 코 끝으로
향긋한 냄새가 느껴졌다. 아보기는 고개를
갸우뚱했다.
"아보기! 죽어라!"
그때 장백성모가 다시 아보기를 향해 몸을 날렸다.
"어림도 없다!"
장백성모와 야율 적로는 허공에서 일합을 부딪쳤다.
창!
검과 검이 부딪치는 날카로운 금속성이 울리며
불꽃이 튀었다. 장백성모는 야율 적로가 마주쳐 오자
재빨리 파천일황에서 파천오황까지 절초(絶초)를
내쏘았다. 그러나 야율 적로는 거란 제일의 무사였다.
장백성모의 절초를 가볍게 막아낸 뒤 거란의 독특한
무예인 파라밀무(婆羅密武) 오초를 시전했다. 그러나
장백성모도 야율 적로의 오초를 가볍게 막아내고
땅으로 내려섰다.
거란군사들은 그들이 땅으로 내려서자 원을 그리고
뒤로 물러섰다. 가공할 무예로 대결을 벌이고 있는 두
사람에게 방해가 되지 않기 위해서였다.
"음!"
장백성모는 낮게 신음을 삼켰다. 그녀는 야율
적로가 결코 만만한 상대가 아니라고 생각했다.
야율 적로는 조용히 장백성모를 응시했다.
장백성모의 얼굴은 이미 피로 범벅이 되어 있었다.
그러나 그녀의 눈빛은 한 점의 흔들림도 없이
고요했다.
(벌써 무상무념의 경지에 이르렀군........)
야율 적로는 감탄했다.
휙!
그때 허공을 가르는 파공성과 함께 장백성모가 또
다시 허공으로 솟아올랐다. 야율 적로는 장백성모를
뒤쫓는 척하다가 그대로 내려섰다. 그러자 원을
그리고 둘러서 있던 거란군사들이 일제히 활을
쏘았다.
궁수는 2천명이나 되었다. 그들이 쏜 화살이
허공으로 솟구쳐 오른 장백성모를 겨누고 빽빽하게
날아갔다.
장백성모는 거란군사들이 일제히 활을 쏘자 깜짝
놀랐다. 화살은 그녀를 향해 하늘을 빈틈없이 메꾸고
날아오고 있었다.
(흥!)
장백성모는 허공에서 몸을 한 바퀴 회전하더니 더욱
높이 솟아올랐다.
(아!)
야율 적로는 입을 딱 벌렸다. 신기에 가까운
무예였다.
그러나 야율 적로가 놀라고 있을 틈이 없었다.
장백성모는 벌써 거란군사들이 쏜 화살보다 더욱 높이
날아오르더니 갑자기 방향을 바꾸어 아보기를 향해
날아가고 있었다.
야율 적로는 장백성모를 향해 공력을 실어 힘껏
칼을 던졌다.
칼은 싸늘한 검기를 뿌리며 장백성모의 등을 향해
날아갔다.
"앗!"
장백성모는 등으로 싸늘한 검기가 뻗쳐오자 간신히
칼을 뒤로 돌려 막았다. 그러자 손목이 시큰하면서
칼이 떨어졌다.
쨍그랑!
장백성모의 칼이 땅바닥으로 떨어졌다.
"와!"
거란군사들이 함성을 지르며 장백성모에게
달려들었다. 장백성모는 거란군사들이 벌떼처럼
달려오자 장창을 휘두르며 달려오는 거란군사의 머리
위로 떨어졌다. 그러자 거란군사가 자신의 머리위로
내려오는 장백성모를 발견하고 장창을 위를 향해 힘껏
찔렀다.
장백성모는 창끝이 가슴 끝에 닿으려는 순간 갑자기
몸을 핵 뒤집었다. 그리고는 몸을 바짝 눕힌 뒤에
창대를 움켜잡고 거란군사의 뒤통수를 발로 찼다.
"억!"
거란군사가 창을 놓치고 비명을 지르며 나뒹굴었다.
장백성모는 장창을 들고 땅 위에 사뿐하게
내려섰다.
그녀의 얼굴은 땀과 피로 범벅이 되어 있었다.
그녀는 땅 위에 내려선 뒤에 잠시 가쁜 숨을 몰아
쉬었다.
그러나 거란군사들은 그녀가 쉴 틈을 주지 않았다.
그녀가 지친 기색을 보이자 또 다시 함성을 지르며
겹겹이 에워싸고 달려들었다.
(오너라!)
장백성모는 장창을 휘두르며 거란군사들을 향해
달려갔다. 그러나 거란군사들은 더욱 맹렬하게
달려들었다. 마치 성난 파도가 덮쳐 오듯이 사나운
기세였다.
장백성모는 몸에 완전히 피를 뒤집어 쓴 듯한
형상이었다. 그러나 그녀는 이를 악물고 싸우고
있었다.
"파천일황!"
그녀가 피를 토하듯이 외치며 장창을 휘두르자
거란군사들의 일진이 처절한 비명을 지르며 쓰러졌다.
그러나 이진이 다시 덮쳐왔다.
"파천이황!"
이진도 와르르 무너졌다. 그러나 장백성모도 이제는
비틀거리고 있었다. 그녀는 장창을 들고 있을 수도
없을 정도로 탈진했고 머리까지 피를 뒤집어써 눈조차
뜰 수 없을 지경이었다.
그녀는 장창에 의지하여 간신히 몸을 지탱했다.
그녀의 발 밑은 거란군사들의 시체와 피로
처참했다.
그때 쓰러져 있던 거란군사 하나가 벌떡 일어서며
그녀의 등을 칼로 힘껏 내리쳤다.
"윽!"
장백성모는 짧은 비명을 내질렀다. 등이 화끈하면서
피가 주르르 쏟아져 내렸다. 그녀는 이를 알고 몸을
돌리려고 했다. 그 순간 또 다른 거란군사가 그녀의
가슴을 겨누고 장창을 힘껏 찔렀다.
(아!)
장백성모는 가슴이 화끈하게 뜨거운 것을 느끼며
입안으로 비릿한 것이 가득 괴는 것을 느꼈다.
장백성모는 입안의 피를 왈칵 뱉으며 비틀거렸다.
"와!"
거란군사들이 함성을 지르며 장백성모에게 일제히
장창을 꽃았다.
(아보기! 나는 오늘 죽지만 너도 얼마 살지
못한다!)
장백성모는 온 몸에 무수한 장창이 꽂힌 채 눈을
부릅떴다.
장백성모는 그렇게 숨이 끊어졌다.
"지독한 계집이다! 어린 계집이 어떻게 이렇게
고강한 무예를 지니고 있다니........)
아보기는 장백성모의 시체를 살피고 두려움에 몸을
세차게 떨었다.
거란군은 장백성모를 밖으로 끌어내어 길바닥에
버렸다.
"미동이다!"
"미동이다!"
홀한성의 성민들은 장백성모가 미동이라는 것을
알아보고 소리를 지르며 돌아다녔다. 그들은
장백성모가 한때 미동이라고 불리던 소년이라는 것을
알아보았던 것이다. 게다가 누구의 입에서 나왔는지
알 수 없었으나 미동이 천무일협 백인걸 대장군의
손녀딸 백초란이라는 소문도 퍼졌다.
성민들은 백초란의 시체를 수습하고 홀한해에 있는
숲에 매달았다. 발해의 풍속은 사람이 죽으면 관에다
넣어서 묻는 것이 아니고 땅을 파고 세워 묻었다.
말갈에서 옛날부터 내려오는 풍속이었는데 나무에
매달아 놓을 때도 있었다.
백초란의 시체는 성민들에 의해 관에 넣어져
홀한해의 폭포 옆에 매달려 발해인들의 추모를
받았다. 발해인들은 거란군들이 떠난 뒤에 사당을
짓고 백초란의 충절을 기렸다.
아보기는 백초란으로부터 암살 당할 뻔한 위기에
몰린 뒤에 철군을 서둘렀다. 그는 30만 대군의 삼엄한
호위 속에서 요로 회군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는 부여성에 이르자 갑자기 급사하고
말았다.
................................................
1) 장백성모는 홍라녀의 전설에서 나오는 인물이다.
홍라녀가 장백성모에게 무예를 배운 것으로 나올 뿐
어떠한 인물이었는지는 구전(口傳)도 기록도 없다.
2) 요왕 아보기는 2월하순까지 홀한성 밖의
행영에서 발해 정벌에 대한 사무를 본 다음 대군을
이끌고 요로 돌아가다가 부여성에서 급사한다. 요사에
그 자세한 내막이 실려 있지 않은 것을 보면
독살되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야율 아보기가 죽자
황태자인 야율 배가 황제에 등극하지 않고 대원수로
발해를 정벌한 야율 요골(德光이라고도 부른다)이
황제로 등극하게 되는 것도 아보기가 독살되었을
가능성을 뒷밤침한다. 요사는 병사로 기록하고 있다.
3) 야율 아보기는 7월(일부 자료는 3월로 되어
있으나 잘못으로 보인다)에 거란으로 돌아가다가
부여성에서 죽은 것으로 되어 있다. 그렇다면
아보기는 발해를 공격한 12월부터 7월까지 내내
발해에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이는 발해가 2월에
거란에 항복을 했으나 발해의 저항 투쟁이 그만치
치열했으리라는 추정이 가능하다.
38. 천부경이 나타나다.
태자 대광현과 정연공주의 홀한성 탈출, 그리고
백초란의 야율 아보기 자격사건으로 홀한성은
어수선했다. 게다가 야율 아보기가 부여성에서 급사를
했는데도 발해 유민들의 천사가 계속되어
상경용천부를 뒤숭숭하게 했다.
백초란의 처절한 죽음은 발해인들의 가슴속에
저항의 불꽃을 피웠다.
발해가 멸망하자 비로소 발해인들은 곳곳에서
저항을 하기 시작했다. 발해의 유민들은 거란
침략군에 대항하여 처절한 투쟁을 전개해 나갔다.
할저는 장백성모에 대한 소문을 듣고 은밀히
장백성모의 뒤를 조사하기 시작했다. 무엇보다 관심을
끌고 있는 것은 장백성모가 발해의 전설에 나오는
인물인데도 누군가 그녀의 이름을 도용하여 요왕
아보기를 암살하려 했다는 사실이었다.
게다가 그녀는 불과 15, 6세에 지나지 않는데도
절정의 무공을 지니고 있었다.
발해에서 그만한 무공을 지니고 있는 사람이라면
백인걸밖에 없었다. 장백성모라고 자신의 거짓 신분을
밝히고 아보기에게 접근하여 암살을 하려 한 것은
백인걸의 손녀딸이라고 분명하다고 생각되었다.
할저는 비밀리에 장백성모의 뒤를 조사했다. 그리고
사람들이 그녀가 미동이라고 말하는 소리를 들었다.
(역시 그 계집이었어!)
할저는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그는 사람들을 풀어서 장백성모가 살던 홀한해를
샅샅이 뒤지기 시작했다. 장백성모라는 백인걸의
손녀딸에게 천부경, 또는 천부비록이라는 천서가
있으리라는 생각에서였다.
(천서만 내 손에 들어오면 천하는 내 것이다!)
장백성모, 아니 백초란은 신비스러운 계집애였다.
그는 어릴 때부터 절정의 무공을 익혀 발해를
돌아다니며 미동이라는 이름으로 불리고 있었다.
그녀의 뒤를 조사하면 조사할수록 할저는 신비스러운
그녀의 행각에 혀를 내둘렀다.
그러나 할저가 천서를 얻기 위해 홀한해를 뒤지고
있다는 소문이 순식간에 홀한성으로 퍼졌다. 홀한성은
신비의 책이라는 천부경 때문에 발칵 뒤집혔다.
홀한성의 숱한 사람들이 신비의 책을 찾아 홀한성으로
몰려왔다.
(소문이 퍼졌으니 어떻게 하지........?)
할저는 궁지에 몰렸다. 천서를 찾기도 전에
사람들의 표적이 되면 언제 어떻게 죽을지도 알 수
없는 일이었다.
(이렇게 되면 군사들을 풀어 조사할 수밖에
없지......)
할저는 인황왕 야율 배를 움직여 3만의 군사들을
홀한해에 풀었다. 홀한성에 잇는 한량들의 접근을
방지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군사들까지 풀어
홀한해를 샅샅이 뒤졌으나 백초란이 살던 집은 찾을
수가 없었다.
할저는 또 다시 골똘히 생각에 잠겼다.
(천서는 발해의 보물인데 어떻게 백인걸에게 들어간
것일까?)
할저는 천서가 백인걸에게 들어간 역사적 사실을
조사하기 시작했다. 발해는 오래 전부터
발해국사(渤海國史)를 기록하고 있었다. 발해
왕실에는 사실(史實)을 기록하는 사관(史官)이
있었다. 사관은 발해에서 일어난 중요한 일을
매일매일 기록하여 보관하고 있었다.
할저는 황궁의 서고를 조사하기 시작했다.
발해국사 위해황제편을 조사하자 천부경을
백인걸에게 하사했다는 기록이 전혀 없었다. 다만
황궁의 서고를 홀한해의 비밀스러운 곳에 지어 서고의
관리를 맡겼다는 기록이 있었다.
......즉위 5년, 홀한해에 비밀서고가 완성되었다.
기하(基下:황제)께서는 서고를 건축한
신부경(信府卿:공조판서) 대영찬(大寧瓚)의 노고를
치하하고 공사에 참여한 관리 및 인부들을 모두
흩으셨다. 이는 홀한해의 서고에 도적이 드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서였다. 서고는 금궁(禁宮)이라 하고
부마도위 백인걸에게 관리하라 하셨다.
기하께서 서고를 특별히 건축하신 것은 나라에 무슨
변이 있어 황궁 서고가 불에 탈것을 염려하셨기
때문이다. 기하께서 어느 날 꿈을 꾸셨는데 몽중에
거란이 침략하여 황궁을 불태우고 발해를 폐허로
만드는 흉몽이었다. 기하께서는 흉몽에서 깨어나자
매우 불길하다 하시고 발해 역사를 후세에 길이
남기기 위해 황궁밖에 은밀하게 서고를 지으라고
하셨다.
황궁 서고에는 천부경 같은 귀중한 서적과 역대
왕조의 치적을 기록한 발해국사가 있는데 이는 재물에
비교할 수 없는 보물이다.
발해국사 위해황제편에 있는 기록이었다.
(황궁의 비밀서고가 따로 있었군.......)
할저는 희미하게 미소를 지었다. 백인걸이 천부경을
어떻게 입수하고 인선황제가 내놓으라고 해도 거부한
까닭을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할저는 발해국사를 토대로 홀한해를 다시 수색하기
시작했다. 금궁을 찾아야 했다. 금궁의 규모는 결코
적지만은 않을 것이었다. 그런데도 금궁이 사람들의
눈에 띠지 않는다는 것은 기이한 일이었다.
(혹시 기문진을 설치한 것이 아닐까?)
할저는 홀한해를 수색하다가 고개를 갸우뚱했다. 그
정도 거대한 금궁이 사람들 눈에 띄지 않는 것은
참으로 기묘한 일이었다.
할저는 홀한해의 폭포로 향하는 사잇길을 걷다가
골똘히 생각에 잠겼다. 홀한해의 폭포로 오르는
사잇길은 병풍 속의 길처럼 좁고 가파랐고 깎아지른
협곡 사이에 있었다. 길 오른 쪽은 칠장(七丈)이 넘는
절벽이었고 왼쪽은 밑이 보이지 않는 천애(天涯)의
벼랑이었다.
안개는 천애의 벼랑에서 스멀스멀 피어오르고
있었다.
폭포로 오르는 관도와는 전혀 달랐다. 관도는
우마차가 다닐 정도로 넓었고 폭포의 경치를 감상하기
위해 시인묵객(詩人墨客)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고
있었다.
(역시!)
할저는 사잇길을 샅샅이 살피며 걷다가 희미하게
미소를 지었다. 사잇길의 중간쯤에 몇 개의
돌무더기가 있었는데 돌무더기 사이에 있는 길을 따라
가지 않고 다른 곳으로 발을 떼어놓으려고 하자
갑자기 사방이 캄캄해지며 일진광풍이 휘몰아쳐 왔던
것이다.
할저는 등줄기로 식은땀이 주르르 흘러내렸다.
재빨리 발을 빼자 거짓말처럼 어둠이 걷히고 바람이
그쳤다.
(진법이야......)
할저는 이마의 땀을 훔치고 돌무더기를 살폈다.
그러나 아무리 돌무더기의 위치를 살펴도 진법을
파홰할 묘안이 떠오르지 않았다.
그는 황궁으로 되돌아와 당 나라의 수도였던
장안으로 인편으로 편지를 보냈다. 장안에서 진법의
대가로 알려진 천룡장(天龍莊)의 장주
사도망(史都望)을 초청하는 편지였다. 천룡장은
별칭이 만서장(萬書莊)으로 불릴 정도로 수많은 책이
있었고 장주인 사도망은 토문지학과 천문지리에도
능통한 사람이었다.
사도망이 할저의 연락을 받고 홀한성에 도착한 것은
6월이 가까워왔을 때였다.
"이것은 태극오행기문진(太極五行奇問陣)입니다."
사도망은 진을 단숨에 알아냈다.
"어떤 진입니까?"
"태극을 오행에 배치한 것입니다."
"파홰할 수 있겠습니까?"
"그럼요. 기문진이란 원래 눈속임입니다."
"어떻게 파홰합니까?"
"태극의 원리는 원래 부드러움입니다. 음양(陰陽)의
조화로 무극(無極)에서 태극(太極)과 음양오행이
일어나 만물이 생성합니다."
말을 하면서 사도망은 진안으로 천천히 걸음을
떼어놓았다.
"제 발자국만 밟고 오십시오."
사도망은 조심스럽게 금(金:쇠)의 위치로 세 걸음,
목(木:나무)의 위치로 두 걸음, 수(水:물)의 위치로
다섯 걸음을 떼어놓았다. 마치 태극의 선(線)을 따라
돌고 있는 듯한 모습이었다.
할저는 조심스럽게 사도망의 뒤를 따랐다.
그렇게 한 시진을 사도망의 뒤를 따라 걷자 돌연히
안개가 걷히고 세외선경(世外仙境)이 눈앞에
펼쳐졌다..
"참으로 아름다운 곳이군요!"
사도망도 감탄하여 걸음을 멈췄다. 홀한해의 폭포로
오르는 사잇길에서 천애의 절벽으로 돌아가는 좁다란
오솔길이 안개 속에 나타나고 그 길이 끝나는 곳에
기화이초(奇花異草)가 만발한 한 채의 아담한 장원이
보였다. 장원 옆에는 꿈속에서나 볼 수 있는
신비스러운 나무들이 빽빽하게 우거져 있었다.
장원은 덩그라니 비어 있었다.
불과 방이 세 개뿐인 아담한 장원이었다.
그러나 장원의 대청에는 서고가 있어 무수한
고서(古書)들이 빽빽하게 꽂혀 있었다. 모두 발해와
고구려, 그리고 부여족, 숙신족, 조선족에 관련된
책들이었다.
(고족의 역사가 이 방에 모여 있었군......)
할저는 서고에 꽂힌 책들을 보고 감탄했다.
그러나 사도망은 서고의 책들은 거들떠보지도 않고
서고에 장치된 어떤 단추를 눌렀다. 그러자 우르르
하는 소리가 들리더니 서고가 뒤로 밀려나고 지하
석실(石室)로 돌아가는 계단이 보였다.
(비밀서고!)
할저는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계단으로 내려가자
커다란 석실에 더욱 많은 서고가 있었고 수 만권도 더
되어 보이는 책들이 가지런히 꽂혀 있었다.
"발해가 해동성국이라더니
명불허전(名不虛傳)이군요."
사도망도 감탄하여 입을 다물지를 못했다.
사도망은 재빨리 천부비록을 찾아냈다. 천부비록은
모두 15권으로 되어 있었다. 1권에서 13권까지는
조선족의 시조로 일컬어지는 단군 왕검이 조선이라는
나라를 개국한 이야기와 부여 고구려의 역사가
상세하게 서술되어 있었다. 14권과 15권은
천무비록이었다.
그러나 천무비록에 있는 천부경은 81자밖에 되지
않았고 무슨 뜻인지 전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천무비록은 무예와 군사에 대한 병법을 적은
책이었다. 무림인들이 무림천서, 또는 무림비서라고도
부르며 꿈에도 그리는 책이었다.
할저는 천부비록과 천무비록을 가지고 지하 석실을
나왔다.
"이 서실은 어떻게 하실 생각입니까?"
사도망이 금궁의 서고 앞에서 할저에게 물었다.
"없애야지요."
"이 책들은 굉장한 보물입니다. 조선족의 역사가
모두 기록되어 있는 사서(史書)지요."
"조선족의 역사를 지워버릴 것입니다."
"그, 그건......."
사도망이 경악한 얼굴로 할저를 쳐다보았다..
"그리고 귀하도 죽어 주어야겠소!"
"예?"
"내가 무림천서를 얻은 비밀을 알고 있는 유일한
인물이 당신이오!"
할저가 냉혹한 얼굴로 칼을 뽑아들었다. 그러자
사도망의 얼굴이 창백하게 변했다.
"대인!"
"잘 가시오!"
할저는 빙긋이 웃으며 사도망의 가슴을 향해 검을
푹 찔렀다. 사도망의 가슴에서 금세 선혈이 주르르
흘러내렸다.
"이 비열한 인간........"
사도망이 가슴을 움켜쥐며 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러나 할저가 가슴에 박힌 칼을 뽑자 왈칵 피를
토하고 꼬꾸라졌다.
할저는 사도망이 꼬꾸라지자 서고에 있는 책들을
꺼내 불을 질렀다. 책들은 모두 기름을 먹인
책들이었다. 불이 붙자 순식간에 시커먼 기름 연기를
피우며 화르륵 타기 시작했다.
"흐흐흐.......!"
할저는 징그럽게 웃고 장원을 빠져 나왔다. 단숨에
벼랑에 올라와서 절벽 아래의 장원을 내려다보자 벌써
불길이 맹렬하게 솟고 있었다.
"할저!"
그때 심장이 얼어붙을 것 같은 차가운 목소리가
등뒤에서 할저의 귓전을 때렸다. 할저는 깜짝 놀라
뒤를 돌아다보았다.
"아!"
그 순간 할저는 전신이 오그라드는 것 같은 공포를
느꼈다. 그의 앞에는 장영이 긴 창을 들고 냉막하게
서 있었다.
"장영!"
"내 이름을 잊지는 않았구나!"
"어, 어떻게 여길......."
장영은 할저의 말에 빙긋이 웃었다.
그는 불과 두 시진 전에 홀한성으로 돌아왔었다.
그는 홀한성으로 돌아오자 아내의 무덤부터 찾았다.
그런데 그가 아내의 무덤에 이르자 비석에 무덤 뒤에
있는 소나무 밑을 파보라는 글귀가 씌어 있었다.
장영은 소나무 밑을 팠다.
그러자 작은 상자가 나왔고 상자 안에 서찰이 한 장
들어 있었다.
........대장군님. 저는 아보기를 죽이러 갑니다.
아마 살아 돌아오지 못하리라고 생각합니다. 아보기
역시 살아 남지 못할 것입니다. 대장군님께
부탁드리고자 하는 것은 발해의 복국입니다.
대장군님께서는 그만한 역량을 갖춘 분이시니 거란에
인질로 끌려가실 정연공주님을 구출하여 대사를
도모하시기 바랍니다. 알고 계시는지 모르지만
홀한해의 금궁에는 황궁서고가 있고 귀중한 책들이
있습니다. 특히 천부경과 천무비록은 발해를
복국하는데 큰 도움이 될 것입니다. 서고로 들어가는
길은 태극오행기문진이 설치되어 있습니다. 누군가
진을 파홰하고 책을 꺼내 가기 전에 대장군님께서
먼저 취하십시오. 진을 파홰하는 방법은 다음과
같습니다.
서찰 밑에는 태극오행기문진을 파홰하는 방법이
씌어 있었다. 그러나 장영이 부랴부랴 서고로
달려왔을 때는 벌써 불길이 맹렬하게 솟고 있었다.
"한 발 늦었구나!"
장영은 탄식을 했다.
그때 서고에서 누군가 달려나오는 것이 보였다.
(저 자는 할저!)
장영은 서고에서 달려오는 사람을 보자 분노로
머리카락이 뻣뻣하게 일어서는 것 같았다. 그리하여
재빨리 몸을 숨기고 할저가 가까이 다가오기를
기다렸던 것이다.
"할저! 네 놈을 이곳에서 만날 줄은 몰랐다!"
장영은 냉랭하게 웃으며 할저를 향해 창을
겨누었다. 장영이 창을 겨누자 무서운 살기가
뿜어졌다.
"자, 장영!"
할저는 깜짝 놀라 칼을 뽑아 들었으나 장영의
상대가 못되었다. 게다가 할저는 이미 장영에게 팔
하나를 잃었던 것이다.
"흥!"
장영은 비웃음기를 얼굴에 가득 띄우고 창을 느리게
휘둘렀다. 기묘한 창법이었다. 할저는 다음 순간
무시무시한 압력이 자신을 향해 덮쳐오는 것을 느끼고
얼굴이 핼쓱하게 변했다. 재빨리 칼을 들어 장영의
창을 막으려고 했으나 장영의 창은 춤을 추듯 할저의
칼을 피하더니 가슴에 푹 꽂혔다. 순식간의 일이었다.
"헉!"
할저는 소스라쳐 놀랐다.
그러나 그것은 그의 최후의 비명이었다. 장영은
할저의 가슴에서 창을 뽑더니 얼이 빠져 있는 할저의
목을 후려쳤다.
쇠를 자르는 장영의 창이었다.
만년한철(萬年寒鐵)로 담금질을 한 창이라 일격에
할저의 목이 몸에서 떨어져 데굴데굴 굴렀다.
(이따위 모사에게 발해가 멸망하다니.......)
장영은 눈을 부릅뜬 할저의 머리통을 노려보며
비감한 심정에 사로잡혔다.
아내의 원수는 갚았다. 그러나
풍비박산(風飛雹散)이 난 집안이나 멸망한 조국을
생각하자 가슴이 터질 것 같았다. 장영은 할저의
머리통을 발로 차서 계곡으로 떨어트렸다.
39. 떠도는 무인
봄이 오고 있었다.
침략군과 함께 몰아친 엄동설한이 남쪽에 불어오는
훈풍에 의해 서서히 북쪽으로 밀려나자 전쟁으로
피폐한 대륙에 봄이 오고 시작했다. 광활한 대륙의
초원에 쌓인 눈이 녹고 파릇파릇 봄풀이 돋아나는가
하면 완만한 둔덕의 야산이나 정원의 나무들도 서서히
연두빛으로 물이 오르고 있었다.
봄이라고 하여 초목만이 먼저 파랗게 돋아나는 것은
아니었다.
대륙에도 파아란 잎사귀보다 먼저 꽃잎을 피우는
꽃나무들이 있었다.
잔설이 녹기 시작한 골짜기에 버들강아지가 눈을
틔운 것은 이미 오래 전의 일이었고 야산에는
할미꽃이 여기저기 피었다. 산수유꽃을 비롯해
개나리, 복사꽃, 목련도 바야흐로 봉오리가 터지려고
하고 있었다..
(발해가 이렇게 허무하게 멸망하다니.......)
장영은 아내 설문랑의 무덤 앞에 앉아서 봄볕이
나른하게 졸고 있는 관도를 내려다보았다. 관도에는
아직도 거란으로 강제로 이주되는 발해 유민들의
행렬이 끊이지 않고 있었다. 인황왕이 군사들을
파견하여 집들을 불태우고 농토를 짓밟아버려
발해인들을 이주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든 것이다.
발해의 모든 생활 근거지가 요령 땅으로 옮겨지고
있었다.
장영은 아내의 무덤 앞에서 일어나 느릿느릿 좁다란
산길로 접어들었다. 어디로 가겠다고 방향이나
목적지를 정해 놓은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지난 몇
달 동안 아내의 무덤 앞에 앉아서 술만 퍼마셨으나
달라진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그가 술을 마시고
비분강개한다고 해도 죽은 아내가 살아서 돌아올 리가
없는 것이다.
모두가 부질없고 속절없는 짓이었다.
천부비록과 천무비록을 손에 넣었으나 거들떠보고
싶지도 않았다. 그가 천부비록과 천무비록을 손에
넣은 것은 오로지 할저를 죽이기 위해서였다.
장영은 느릿느릿 걷다가 몸을 돌려 다시 한 번
아내의 무덤을 되돌아보았다.
이제 아내의 무덤을 떠나면 언제 돌아올 지 알 수
없는 일이었다. 어쩌면 다시 돌아오지 않게 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하자 가슴이 타는 것 같았다.
그러나 떠나야 했다.
어디론가 떠나야 했다.
장영은 죽장에 의지하고 다시 느릿느릿 걸음을
떼어놓았다. 그는 해가 설핏이 기울고 있는 방향으로
걸었다.
그의 모습이 이내 초원으로 가물가물 멀어져 갔다.
그날 이후 홀한성에서 장영을 본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수 많은 무림인들이 하늘의 비서라는
천부비록과 천무비록을 찾기 위해 홀한성과 홀한해
일대를 샅샅이 뒤졌으나 장영의 종적은 묘연했다.
사람들은 장영이 상경용천부를 떠난 것으로 보고
그를 찾아 흩어졌다. 특히 야율 할저의 죽음으로
동란국의 제2인자가 된 야율 우지는 거란의
무사들까지 풀어서 장영을 추격하게 했다.
중경두덕부의 흥주(興州). 두덕부의
수주(首州:도읍) 현주(顯州)로 상경용천부의 주민들이
강제로 이주되어 온 탓에 흥주도 뜻밖의 사람들이
차고 넘치어 왁자했다. 중경두덕부의 중경과 수주
현주는 발해의 시조 대조영이 당 나라의 추격을 피해
동모산에 웅거하고 나라를 연 탓에 처음부터
번성했으나 흥주는 두덕부의 오지였다.
주민들은 농사와 사냥으로 생업을 삼았으나 발해
우성이 아닌 서성(庶性)이 주로 모여 살았다.
그러나 발해를 침략한 거란의 강제 이주 정책으로
두덕부의 주민들은 대부분 요령성으로 옮기고
상경용천부를 비롯한 다른 발해 지방의 주민들이
중경두덕부로 옮겨와 흥주까지 흥청거리게 된 것이다.
흥주 일대에는 타지방에서 이주해 온 발해
이주민들이 처음 살던 주민들보다 훨씬 많아지는
기현상까지 일어났다. 게다가 발해인들의 동태를
감시하는 거란의 관리들과 군사들까지 어우러져
북새통을 이루고 있었다.
6월 하순의 어느 날.
흥주의 자사부가 있는 흥주성 성문으로 추레한
몰골의 사내가 나오고 있었다. 머리는 미치광이처럼
산발을 했고 옷은 풍상에 헤어지고 흙먼지가 쩌들은
누더기였다. 그는 죽장으로 땅을 탁탁 치며 성문을
나오고 있었다.
"뭐냐?"
흥주성의 파수를 보던 발해군사가 남루한 차림새의
사내를 막아섰다. 사내는 등에 괴나리봇짐도 하나
둘러매고 있었다.
"........."
사내는 아무 대꾸도 없이 걸음을 멈추고 파수병을
쏘아보았다. 파수병의 등뒤로 중경두덕부의 도독부로
향하는 관도가 보였고 관도 옆에는 짙푸른 수양버들이
길게 늘어서 있었다.
한낮인데도 관도는 인적이 끊어져 고즈넉했다.
인적이라고는 성문을 지키는 발해군사 넷과 거란군사
넷 뿐이었다. 발해군사는 거란에 투항한 군사들이었고
거란군사는 발해군사를 감시하는 군사들이었다.
"거지 아니야?"
사내의 몸에서는 술냄새가 짙게 풍겼다. 성안에
들어가서 술을 마시고 오는 모양이었다.
"........."
"등에 둘러맨 보따리는 뭐야? 보따리 풀러봐!"
파수병이 창대로 사내의 몸을 툭툭 치며 시비를
걸었다.
"죽기 싫으면 물러서!"
그때 사내의 입에서 낮고 싸늘한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파수병은 멈칫하여 사내를 쳐다보았다.
사내의 일신에서 풍기는 기묘한 분위기가 어쩐지
얼음처럼 차갑게 느껴졌다.
파수병은 자신도 모르게 뒤로 한 걸음 물러섰다.
"왜 그래?"
그때 한쪽 구석에서 쉬고 있던 거란군사가 창을
들고 사내에게 가까이 다가왔다.
"미치광이 같아......."
"등에 맨 보따리는 뭐야?"
"모르겠어."
"야! 보따리 풀러봐!"
거란군사가 사내의 몸을 창끝으로 쿡쿡 찔렀다.
그러나 사내는 미동도 하지 않고 있었다.
"이름이 뭐야?"
"살귀(殺鬼)!"
"뭐?"
"살귀라고 했다! 죽기 싫으면 물러서!"
"고족 놈이 어디라고 감히 대들어!"
거란군사가 창대로 사내를 힘껏 후려쳤다. 그러나
창대가 사내의 몸에 닿기도 전에 사내의 죽장이 번쩍
하고 허공을 갈랐다.
"악!"
그 순간 거란군사는 얼굴이 피투성이가 되어
나뒹굴고 있었다. 파수병들과 거란군사들은 단 일격에
거란군사가 나뒹구는 것을 보고 온 몸을 사시나무 떨
듯 했다.
사내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느릿느릿 관도를
걸어가고 있었다. 거란군사들은 사내의 뒷모습을
우두망찰하여 쳐다보고 있을 뿐 두 번 다시 덤벼들지
못했다.
사내는 관도를 계속 걸어갔다. 뒤따라오는 군사들은
없었다. 설령 뒤따라오는 군사가 있다고 해도 상관할
것 같지 않은 사내의 걸음새였다.
사내는 한 시진쯤 걸어서 관도에서 오른쪽으로
갈라지는 소로(小路)로 들어섰다.
소로는 작은 내를 따라 산기슭으로 향하고 있었다.
소로는 사람들의 왕래가 없는지 이따금 길이 끊어져
잡초가 무성했고 집들도 보이지 않았다. 논밭조차
없는 황무지였다.
그는 얕은 재로 올라섰다. 그리고 다시 산굽이를
돌아 산으로 걸어 올라갔다. 얼마쯤 계속 걸어가자
비로소 낡은 절 하나가 보였다.
폐사(廢寺)였다.
기와는 무너지고 법당에는 쥐가 드나들고 있었다.
사내는 법당에 들어가 벌렁 누웠다.
사내가 잠에서 깨어난 것은 밖에서 내리는 빗소리
때문이었다. 빗소리가 쏴아 하고 귓전을 때리고
있었다.
사내는 눈을 뜨고 우두커니 밖을 내다보았다. 벌써
사방이 어둑어둑해지고 있는 가운데 빗줄기가
장대질을 하듯이 절 마당으로 퍼붓고 있었다. 주인도
없는 절 마당에 핀 여름꽃들이 처량했다.
사내는 오랫동안 밖을 내다보다가 호로병을 끌어
당겨 술을 마시기 시작했다.
비는 밤에도 계속 내렸다.
쏴아아아아.......
밤새도록 빗소리가 귓전을 아귀처럼 후벼팠다.
사내는 해시(亥時:밤 9시에서 11시 사이)가 되자
삿갓 하나를 쓰고 밖으로 나왔다. 장대 같은 빗줄기가
그의 몸을 세차게 때렸다.
그는 낮에 오던 길을 되밟아 흥주성으로 갔다.
흥주성은 이미 성문이 굳게 닫혀 있었다.
(흥!)
사내는 이장(二丈) 높이의 성문을 바라보다가
코웃음을 치고 훌쩍 뛰어 올라갔다.
"누구냐?"
성루에서 파수를 보던 파수병이 날카롭게 소리를
질렀다.
그러나 파수병은 괴조(怪鳥)처럼 성곽을 넘어
성안으로 사라지는 검은 그림자를 언뜻 보았을
뿐이었다.
흥주의 자사부(刺史府).
흥주 자사인 고사금(高師今)의 거처에도 빗줄기는
장대처럼 퍼붓고 있었다. 시간이 오래된 탓인지
자사의 거소는 불빛이 하나도 없었고 자사의 거소에서
담장 하나 떨어진 안채에서만 쏟아지는 빗줄기 사이로
불빛이 아슴하게 흘러나오고 있었다.
그때 지붕에서 검은 그림자가 마당으로 펄럭거리고
떨어졌다. 그림자는 빗줄기를 고스란히 맞으며 불빛이
흘러나오는 자사의 방을 노려보고 있었다.
방에서는 자사 고사금이 여자를 발가벗겨 끌어안고
욕심을 채우기에 여념이 없었다.
그때 방문이 소리없이 열리고 검은 그림자가
들어섰다. 고사금은 여자를 끌어안고 욕심을
채우느라고 방문이 열리는 소리를 듣지 못했으나
찬바람이 휘익 불어 들어오고 빗소리가 갑자기 커지자
깜짝 놀라 여자에게서 떨어졌다.
"누, 누구냐?"
검은 그림자는 무심한 눈빛으로 여자를 쏘아보고
있었다. 서른을 갓 넘긴 여자가 발가벗은 채 침상
위에 누워 있었다.
육봉(肉峰)이 컸다.
허리와 둔부는 풍만했고 살찐 허벅지 사이의
계곡에는 다복솔이 우거져 있었다.
"에그머니!"
여자가 그때서야 기겁을 하고 발치의 홑이불을
끌어당겨 나신을 덮었다.
"자, 장군......!"
사내가 검은 그림자를 알아보고 무릎을 꿇었다.
"나를 아는가?"
사내의 눈빛이 크게 흔들렸다.
"소인이 먼 발치에서 한 번 뵈은 일이 있습니다."
"그래? 조정에 있었나?"
"아버님이 지부(병부)에서 낭장으로 있었습니다."
"그랬군......."
사내의 눈빛이 어두워졌다.
고사금은 발해의 우성 출신으로 아버지가 발해
조정에서 벼슬을 하고 있었다. 그의 아버지
고말가(高靺哥)는 지부의 낭장(郎將)이었으나
이도종의 정변이 일어나는 바람에 낭장직에서
쫓겨났었다. 고말가는 그후 대소현의 휘하로 들어갔고
대소현이 동란국 좌차상에 임명되자 또 다시 지부의
낭장직을 맡게 되었다. 고사금은 시정에서 잡배
노릇을 하고 있었으나 고말가의 후광을 입어 흥주
자사에 임명되었던 것이다.
발해의 왕성인 대소현이 거란에 충성을 맹세했듯이
발해의 명문거족인 고말가와 고사금도 거란에 충성을
맹세하고 얻은 벼슬이었다.
"고말가의 자제였군......."
"그, 그렇습니다."
"나를 만났다는 것을 누구에게도 발설하지 말게."
"명심하겠습니다."
고사금이 머리를 깊숙이 조아렸다. 사내는 고사금과
여자를 힐끗 쏘아보더니 바람처럼 방을 빠져나갔다.
"누구냐?"
그때 파수를 보던 병졸들이 무슨 소리를 들었는지
우르르 몰려왔다.
"괴한이다!"
"괴한이 침입했다!"
병졸들은 고함을 지르며 사내를 에워쌌다. 고사금이
허겁지겁 옷을 주워 걸치고 문틈으로 밖을 내다보자
사내는 세차게 쏟아지는 빗줄기 속에서 죽장을
반듯하게 들고 있었다. 병졸들이 에워싸고 있는데도
동요의 빛이 전혀 보이지 않고 있었다.
"누구냐?"
병졸들이 사내에게 창을 겨누고 물었다.
"살귀라고 한다!"
사내의 대답은 냉막했다.
"네 놈이 낮에 우리 군사를 죽인 놈이구나! 얘들아!
저 놈을 죽여라!"
병졸들이 사내에게 일제히 창을 겨누고 달려들기
시작했다. 사내는 추호도 흔들리는 빛이 죽장을
꼿꼿이 세워들었다가 허공에 원을 그렸다. 그러자
쌔액 하는 파공성과 함께 병졸들이 처참한 비명을
지르며 나뒹굴었다.
(아!)
고사금은 오금이 저려왔다. 신기에 가까운
무예였다. 그때 사내가 허공으로 몸을 솟구치더니
어둠 속으로 옷자락을 펄럭거리며 날아가기 시작했다.
고사금은 그때서야 몸을 부르르 떨었다.
(장영 장군이 여기에 나타나다니.......)
고사금은 사내가 어둠 속으로 완전히 사라지자
비로소 문을 열고 밖으로 나왔다.
장영 장군은 최근에 살귀라는 이름으로
중경두덕부에 소문이 파다했다. 장영 장군이 일부러
사람을 찾아다니며 살해하지는 않았으나 그를
건드리면 반드시 죽임을 당했다.
그는 거의 미치광이처럼 머리를 풀어헤치고
돌아다니며 술에 취해 살고 있었다.
"살귀가 내 방에 침입을 했었다! 너희들은 어떠한
일이 있어도 살귀를 잡아라!"
고사금은 대청 앞에 운집해 있는 군사들에게 살귀를
잡으라고 단호한 명령을 내렸다. 그러나 살귀가
장영이라는 사실만은 공개하지 않았다. 그는 장영
장군에 대해서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비록 시정에서
잡배 노릇을 하고 있었으나 그의 용맹은 귀가
따갑도록 들었던 것이다.
"예!"
군사들이 일제히 대답했다.
"가라! 가서 살귀를 잡아라!"
고사금의 명령에 군사들이 횃불을 들고 우르르
자사부를 빠져나갔다. 고사금은 군사들이 자사부
대문을 빠져나가는 것을 바라보다가 고개를 설래설래
흔들었다.
살귀!
거란군에게는 무서운 자였다.
그가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 지는 알 수 없었으나
그가 지나는 곳에는 반드시 시체가 뒹굴었다. 게다가
그가 무엇을 하던 위인인지 전혀 알 수 없어 세간의
화제가 분분했다. 그러잖아도 거란의 침략과
발해인들의 강제 이주, 동란국의 개국, 그리고
곳곳에서 발해의 잔당들이 반란을 일으키고 있어서
어수선하기 짝이 없는 세상이었다.
살귀의 등장은 민심을 더욱 뒤숭숭하게 하고
있었다.
서경압록부의 환주(桓州:집안).
언제부터인지 환주 저자에는 미치광이 같은 사내
하나가 죽장을 짚고 돌아다니는 것이 사람들의 눈에
자주 띄었다. 머리는 산발을 했고 옷은 땟국물이
흐르는 누더기를 걸치고 있었다.
"광인 아니야?"
"광인인가? 주귀(酒鬼)지......"
"주귀?"
"술귀신 말이야."
"원, 사람두......"
"그런데 참 이상한 녀석이야. 그렇게 술을 퍼
마시고도 생전 비틀거리지를 않으니........"
"어디 그것뿐인가? 돈이 어디서 생기는지 몰라도
구걸을 하지 않잖아?"
"그래. 그 점도 이상해......."
사람들은 그 사내가 지나갈 때마다 수군거리며
고개를 갸우뚱했다. 환주 저자에서는 어느덧 그
사내가 명물이 되어 가고 있었다. 세상이
어수선했으나 그는 아랑곳하지 않고 술만 퍼 마셨고
술을 퍼 마신 뒤에는 아무 곳에서나 쓰러져 잠을
잤다.
그러나 그가 머무르는 곳에는 반드시 무림인들이
나타났다.
그가 전 북우위 대장군 장영이라는 소문도 나돌았고
그에게 발해 최고의 보물인 천부비록과 천무비록이
있다는 소문도 나돌았다.
(장령부에나 가볼까?)
장영은 환주성을 벗어나 고갯마루에 올라서자 서쪽
초원을 우두커니 쳐다보았다. 장령부에서는 아직도
거란에 저항하는 발해인들이 처절한 투쟁을 하고
있었다.
중경두덕부의 흥주를 떠나온 지 이레 째였다.
이제는 다시 어디론가 정처없이 떠나야 했다.
야율 아보기의 죽음은 발해인들에게 기쁜
소식이었으나 인선황제는 거란으로 끌려가고 말았다.
망국의 군주라도 임금은 임금이었다. 발해인들은
인선황제가 거란으로 끌려가자 비분강개하기도 했으나
깊은 절망에 빠져 있었다.
(인선황제가 죽기 전에는 결코 발해를 위해 창을
들지는 않을 것이다.......!)
장영은 다시 눈을 부릅뜨고 주먹을 움켜쥐었다.
장령부의 저항군이 처절한 투쟁을 전개하고 있는
이상 마땅히 달려가서 도와주어야 했으나 인선황제가
살아 있는 한 발해를 위해 창을 들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장영은 볕이 쨍쨍한 한길로 느릿느릿 걸음을
떼어놓았다. 그의 시야에 거란으로 끌려가는
인선황제의 초라한 행렬이 가물거리는 아지랑이처럼
가물가물 피어오르고 있었다.
40. 망국의 사람들
발해인들은 처절한 대거란 저항 투쟁에 돌입했다.
발해인들이 본격적으로 저항을 하기 시작한 것은
무엇보다도 야율 아보기의 죽음이었다. 야율 아보기가
회군하다가 부여성에서 갑자기 죽자 요에는 새로운
황제가 즉위했고, 대칸으로 군림하던 야율 아보기의
위세에 바짝 웅크리고 있던 발해인들이 비로소 일제히
들고 일어났던 것이다.
야율 아보기가 죽자마자 안변부(하바로프스크),
막힐부(길림성), 정리부가 일제히 들고 일어나
거란군에게 맞서 싸우기 시작했다. 거란군은 발해의
저항이 본격화되자 거란에 투항한 발해인들을 내세워
저항군을 공격했다. 물론 본진은 언제나 거란군이
맡았고 발해에서 투항한 발해군들은 거란군의 본진
앞에 배치되어 저항군과 처절한 동족 살육전을
벌였다.
요서 쪽에서는 장령부가 거란군사들에 대하여
저항을 시작했다. 그러나 중경두덕부라던가
서경압록부에서는 장령부를 지원하지 않았다.
요서쪽의 장령부는 홀로 우세한 거란군과 싸울 수밖에
없었다.
안변부, 막힐부, 정리부는 군사도 많지 않았고
우수한 장수도 없어 3월이 가기 전에 거란군에게
전멸을 했다.
5월에는 남경남해부(함경남북도)의 부민들이 들고
일어났으나 역시 거란군을 당할 수가 없었다. 야율
아보기가 끌고 온 대군은 대부분 철수했는데도
불구하고 새롭게 인황왕에게 충성을 맹세한 발해군이
창끝을 발해의 저항군에게 들이댔다.
지평선에서 떠오른 태양이 중천으로 서서히
솟아오르며 대기가 뜨겁게 부풀어 오르기 시작했다.
한여름이었다. 대륙의 초원은 아침부터
후덥지근하고 보릿단을 태우는 것처럼 건조했다.
끝없이 광활하게 펼쳐진 초원은 허리까지 자란 잡초와
쑥대가 우거져 있었다. 이따금 산들바람이 불어오면
잡초와 쑥대밭은 녹색의 파도가 치듯 일제히
쓰러졌다가 일어나고 쓰러졌다가 일어나곤 하였다.
일찍이 영주도, 또는 조공도라고 불리며 사신들이나
상인들이 당 나라를 왕래하던 길이었으나 당 나라
멸망 이후 그 길은 갑자기 인적이 끊어져 황폐하게
버려져 있었다.
길을 따라 군데군데 자리하여 오가는 길손을
맞이하던 다점(茶店:찻집)이나 주막도 주인마저
떠나가 대부분 길가에 그냥 버려져 있었다. 다점이나
주막이 대개 그럴싸하게 집을 지어 놓고 길손을
맞이했던 것이 아니라, 깃발 하나에 다(茶)자나
주(酒)자를 써서 내걸고 평상과 의자 몇 개 놓는 것이
고작이었기 때문에 길손이 떨어지자 폐점을 한
모양이었다.
게다가 드물기는 하지만 거란족의 파오(包)나
유르타를 만들어 놓고 차와 술을 팔던 사람들도
있었다. 그러나 그들도 당 나라가 멸망하자 어디론가
떠나가 버려 주막이 있던 터에는 깃발만이 황량하게
나부끼고 있었다.
그러나 인적이 끊어졌어도 초원은 살아 움직이고
있었다. 풀밭은 잡초와 쑥대밭이 울창하게 우거졌고
얕은 둔덕의 나무들에는 한 여름의 매미가 시끄럽게
울어대고 있었다.
"이랴!"
"이랴!"
그때 상경용천부쪽의 초원에서 한 떼의 인마가
달려오기 시작했다. 그들은 말채찍을 세차게
휘둘러대고 있어서 상당히 다급한 용무가 있는
모양이었다.
"워!"
그들은 깃발이 나부끼는 주막 터에 이르자 일제히
말고삐를 잡아당겨 멈춰 섰다. 말을 타고 달려온
사람들은 모두 다섯이었는데 네 사람은
백의경장이었고 한 사람만이 홍의경장을 하고 있었다.
그들은 실망한 표정으로 흰 깃발을 쳐다보았다. 그
곳에는 주막이 있었던 듯 주(酒)자를 쓴 흰 깃발이
쨍쨍한 볕살 아래 축 늘어져 있었다.
"여기서 요기를 할려고 했더니 틀렸군요."
백의경장의 사내가 홍의경장을 한 여인을 쳐다보며
난처한 듯이 입을 열었다. 그들은 모두 지친 기색이
역력했다. 얼굴은 흙먼지와 땀방울로 범벅이 되어
있었고 백색의 옷도 흙먼지가 뽀얗게 앉아 있었다.
"얼마나 더 가야 해요?"
"장령부까지는 아직도 하룻길입니다."
"그럼 내일 오시나 되어야 도착하겠군요......"
홍의경장 여인이 죽립을 약간 위로 치켜올리며
하늘을 쳐다보았다.
그녀의 나이 대략 20세. 얼굴은 앳되어 보였으나
눈이 초롱초롱하고 범상치 않은 기품이 흐르고
있었다. 등에는 한 자루의 보검이 매어져 있었고
이마에는 구슬 같은 땀방울이 송글송글 맺혀 있었다.
"공주님!"
백의경장의 사내가 홍의경장 여인을 공손히 불렀다.
홍의경장의 여인.
그녀는 발해왕국 인선황제의 금지옥엽인
정연공주였다. 홀한성을 탈출한 어림군과 함께 발해의
저항군을 찾아 안변부, 막힐부, 정리부를 유랑하고
다니다가 그들이 거란군에 멸망하자 초원을 유랑하며
이 곳까지 오게 된 것이었다.
발해에서 아직까지 유일하게 거란군과 맞서 싸우고
있는 장령부를 찾아가기 위해서였다.
"네?"
"말도 지쳤을 테니 잠시 쉬었다가 가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그래야죠. 다행히 말이 먹을 목초는 많이 있군요."
정연공주가 말에서 훌쩍 뛰어 내렸다.
그러자 백의경장의 사내들도 일제히 말에서
뛰어내렸다.
날씨는 점점 더워지고 있었다. 우기가 시작될 때가
되었으나 파아란 하늘엔 새털구름만 흩어져 있을 뿐
윤기 하나 없이 매끄러웠다.
"공주님. 건량을 좀 드십시오."
백의경장을 한 사내, 해평(解平)이 조심스럽게
건량을 길섶에 펼쳤다. 솔빈부에서 사냥한 말린
사슴고기, 주먹밥, 그리고 가죽에 담긴 양젖이었다.
해평은 어림군 소속의 무관으로 정연공주에게
무예를 가리키던 장군이었다. 정연공주가 어릴 때만
해도 초로의 사내였으나 이제는 머리와 수염까지 하얀
백발의 노인이 되어 있었다.
나머지 세 사람은 해평 밑에 있던 어림군
군사들이었다.
"예."
정연공주는 사슴고기를 먼저 씹은 뒤 주먹밥 한
덩어리를 먹었다. 날씨가 후덥지근하여 목으로도 땀이
흘러내렸으나 시장기가 돌았다.
해평과 다른 군사들은 둘러앉아 술도 한 모금씩
마셨다.
정연공주는 식사를 마치자 잡초 위에 풀썩 몸을
눕히고 무겁게 한숨을 내쉬었다. 머리 위에서는
태양이 작렬하고 초원의 잡초들도 축 늘어져
시들시들했다.
(여자인 내가 과연 발해를 복국할 수 있을까.....?)
정연공주는 파란 하늘을 쳐다보며 상념에 잠겼다.
광대무변한 하늘을 보고 있자니 발해를 복국하는 것이
요원한 일처럼 여겨졌다.
그러나 선택은 없었다.
발해 왕실의 여인으로 태어난 이상 발해 복국의
꿈을 저버릴 수 없는 것이다.
황궁에 있을 때만 해도 정연공주는 광활한 대륙을
말을 타고 달리는 것이 소원이었었다. 사방 9천리나
된다는 발해의 광대한 영토, 그 넓은 땅을 준마를
타고 질풍처럼 달려보고 싶었었다.
발해의 영토에는 태산도 있고 끝이 보이지 않는
초원도 있었다. 상경용천부에는 경박호, 솔빈부에는
흥개호, 서경압록부에는 장백산의 천지(天池)와 같은
드넓은 호수가 있었다.
강으로는 압록강, 두만강, 토문강, 송화강, 목단강,
흑룡강, 우수리강, 아무르강......
부족도 수백이나 되었다.
크게 나누면 토족과 말갈 7부족으로 나눌 수도
있었으나 중국에서 흘러 들어온 한족(漢族)을 비롯해
헤아릴 수도 없이 많았다.
그러나 발해왕국을 이끌고 있는 것은 고구려족의
후예인 토족과 말갈족이었다.
발해왕국은 이 수많은 이족과 광활한 영토를 2백
여년 동안이나 통치해 왔던 것이다. 그리고 그 땅은
단군의 땅이었고, 부루(夫婁)라고 불리던 고조선,
전삼한, 부여, 예맥인들의 땅이었다. 그 땅을
후손들에게 물려주지 않고 거란에 빼앗긴다면 천년이
지나도 회복할 길이 없는 것이다.
(허나 그 짐은 내게 너무 버거워.........)
정연공주는 앵두 같은 입술로 한숨을 내뿜었다.
그들은 말에게 목초를 먹인 뒤 다시 장령부를 향해
달렸다. 그들은 밤에도 쉬지 않고 달렸다. 밤이
낮보다 시원했으므로 말도 지치지 않고 달릴 수
있었다.
이튿날은 뜻밖에 빗발이 뿌리기 시작했다.
밤에 보름달이 떴으나 새벽부터 검은 구름이
몰려들고 초원의 풀숲이 검푸르게 나부끼더니 빗발이
뿌리기 시작한 것이다.
(비가 오니 내 마음이 다 시원하네.......)
정연공주는 온 몸이 비에 후줄근하게 젖었으나
개의치 않았다.
그들은 비를 흠뻑 맞고 계속 달렸다.
그들이 거란군과 장령부의 발해 저항군이 마지막
전투를 치열하게 벌이고 있는 장령부 회발(回跋)
벌판에 도착한 것은 그날 신시(申時:오후 3시에서
5시) 경이었다.
"전투가 한참이군요!"
해평이 얼굴을 찌푸리며 수많은 군사들이 얽혀서
죽이고 죽는 벌판을 내려다보았다.
정연공주도 빗속에서 처절한 전투를 벌이고
전장(戰場)을 내려다보았다. 전투는 장령부의
발해군이 거란군에게 포위되어 사투(死鬪)를 벌이고
있었다.
거란군은 군사의 수효가 월등히 많았다.
그러나 장령부의 발해군은 죽음을 각오한 탓에
자신들의 수효보다도 월등히 많은 거란군과 치열한
싸움을 벌이고 있었다. 장령부가 거란군에게 저항을
하기 시작한 것은 지난 3월부터였다. 안변부, 막힐부,
정리부의 거란에 대한 저항 투쟁이 모두 그 달 안에
진압이 되었으나 장령부만이 3월부터 7월인 지금까지
장장 5개월을 버티면서 거란군과 싸우고 있었던
것이다.
장령부는 전통적으로 충성심이 강한 부였다.
서경압록부의 대원달이 반란을 일으켰을 때도
장령부는 군사를 일으켜 막으려 했고 거란의 침략이
시작되자 군사를 모으고 병기를 주조하기 시작하여
인선황제가 나라를 들어 항복했으나 구국(救國)의
깃발을 높이 들었던 것이다.
장령부의 수주(首州)인 하주는 군기방(軍器坊)까지
있었기 때문에 병기를 제조하는 것은 그다지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병사들은 다른 부에서도 속속 몰려왔다.
장령부 주위의 중경두덕부, 서경압록부의 도독들이
저항군을 조직하지 않자 분개한 군사들이 장령부로
몰려온 것이다. 특히 압록부에서는 7천명이나 되는
군사들이 몰려와 장령부의 저항군을 지원하는 바람에
거란군은 깜짝 놀라 대장군 강묵기와 아고지를
파견하여 진압하도록 했다.
장령부는 그렇게 하여 주위의 부(府)와 주(州),
현(縣)의 군사들이 모여 강력한 저항군이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거란의 우세한 병력으로 인해 전멸
직전에 있었다.
"발해군이 패하고 있습니다."
어림군에 속해 있던 군사들이 침통한 얼굴로
해평에게 말했다. 그들이 보기에도 장령부의 저항군은
거란군에게 포위되어 사투를 벌이고 있는 것이
여실했다.
"전멸하고 있어!"
해평도 침통한 낯빛이 되었다. 장령부에 기대를
걸고 왔으나 그들까지 전멸 상태에 이른 것을 보자
실망하지 않을 수 없었다.
"공주님!"
해평이 정연공주에게 바짝 다가왔다.
"보고 있어요."
정연공주는 군사들의 싸움에 시선을 못박은 채
토막을 내듯이 짧게 말했다.
"장령부는 틀린 것 같습니다."
"장령부가 무너지면 남은 곳이 어디 있어요?"
"현재 저항군이 남아 있는 곳은 장령부뿐입니다.
그런데 장령부가 저렇게 무너지고 있으니......."
"그럼 우린 어디로 가죠?"
"어디 산 속으로 숨었다가 후일을 도모하는 수밖에
없습니다."
"후일은 없어요!"
정연공주가 차갑게 말했다.
"공주님!"
정연공주는 발해군사들이 죽어가고 있는 전장터를
뚫어질 듯이 노려보고 있었다. 전장터에는 곳곳에
깃발이 부러져 있고 시체들이 나뒹굴고 있었다.
"나는 전장터로 가겠어요! 모두들 돌아가세요!
공연히 개죽음 할 필요는 없어요!"
"공주님! 무슨 말씀입니까?"
"발해를 복국하기는 틀렸어요!"
정연공주가 등에 맨 검을 뽑아들었다.
"그 동안 고마웠어요!"
정연공주는 검을 뽑아들자 말엉덩이를 힘껏
걷어찼다.
"이랴!"
해평이 깜짝 놀라 재빨리 만류하려 했으나
정연공주는 벌써 말을 휘몰아 함성이 요란한 전장터로
달려가고 있었다.
"공주님!"
해평은 황급히 소리를 지르며 정연공주의 뒤를
따르기 시작했다.
"이랴!"
"이랴!"
그러나 정연공주는 더욱 세차게 말을 몰아 전장터로
뛰어들고 말았다. 해평도 정신없이 말을 몰아
달려갔으나 정연공주는 죽음을 각오한 듯이
거란군사들 틈으로 뛰어들어 검을 휘두르고 있었다.
"발해의 정연공주가 왔다!"
"거란의 오랑캐들아 정연공주의 칼을 받아라!"
정연공주는 함성을 지르며 마구 칼을 휘둘러
거란군사들을 베어나갔다. 해평도 정연공주를
보호하기 위해 거란군사들 틈으로 달려들어 칼을
휘둘러댔다. 거란군사들은 처음에 발해의
구원군사들이 달려온 줄 알고 어리둥절했으나 말을
타고 달려온 군사는 불과 다섯이었다. 게다가 하나는
홍의경장의 계집이었다.
"발해의 공주가 왔단다!"
"홀한성에서 내시놈과 달아난 공주다!"
"공주를 잡아라!"
거란군사들은 와 하는 함성을 지르며 정연공주에게
달려들었다.
어리둥절한 것은 장령부의 저항군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아침부터 처절한 혈투를 벌여 왔었다.
장령부 회발(回跋城)에서 농성을 하며 거란군사들과
5개월째 싸웠으나 성을 포위한 거란군사들로 인해
식량이 떨어져 더 이상 견딜 수가 없었다.
저항군은 굶어 죽으나 나가서 싸우다가 죽으나
죽기는 마찬가지라고 생각하고 성문을 열고 나가
대혈전을 벌이게 되었던 것이다.
발해군에는 여자들도 많았고 어린이와 노인들까지
저항군에 가담하고 있었다. 젊은 군사들은 3월부터
시작된 전투에서 대부분 죽고 남아 있는 것은
노약자들뿐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추호도 투항의사를
보이지 않았다.
아침부터 시작된 전투에서 그들을 지휘한 것은
말갈계의 노장군(老將軍) 달능신(達能信)이었다.
달능신은 하주성에 남아 있는 9천의 병사들을 이끌고
성을 나섰다.
그러나 달능신은 전투가 시작된 지 한 시진도
안되어 적군의 화살에 맞아 죽고 말았다.
저항군은 장수를 잃고서도 맹렬하게 싸웠다.
정연공주가 나타난 것은 저항군이 불과 1백명 도
남지 않았을 때였다. 그것도 대부분 크고 작은 부상을
당해 거란군사들에게 도륙을 당할 처지에 있었다.
"공주님이 우리를 구하러 왔다!"
"공주님이 오셨다!"
저항군은 기쁨에 넘쳐 눈물을 흘리며 함성을
질렀다. 그러나 그들의 함성은 금세 실망으로
바뀌었다. 스스로 정연공주를 자처하며 나타난
홍의경장 여인은 불과 네 명의 백의인들을 끌고 왔을
뿐이었다.
"공주를 잡아라!"
"붉은 옷을 입은 계집을 잡아라!"
거란군사들은 정연공주를 향해 벌떼처럼
달려들었다.
"거란의 오랑캐들아 얼마던지 오너라!"
정연공주는 호기있게 소리를 지르며 거란군사들과
맞서 싸웠다. 그러나 거란군사들은 끝도 없이
정연공주를 향해 달려오고 있었다. 정연공주는 점점
지치기 시작했다. 거란군사들의 창과 칼에 찔린
상처도 수없이 많았다. 그녀는 온 몸이 피투성이가
되었다.
그러나 정연공주가 거란군사들과 정신없이 싸울 때
해평과 그녀를 보호하기 위해 따라온 어림군 군사
셋은 이미 처절한 죽음을 당한 뒤였다.
정연공주는 그 사실도 모른 채 말을 휘몰아
거란군사들 사이를 누비다가 누군가 말을 창으로
찌르는 바람에 앞으로 곤두박질을 치고 말았다.
거란군사들은 그 틈을 놓치지 않고 와 하는 함성을
지르며 정연공주를 에워쌌다.
(아, 분하다!)
정연공주는 거란군사들이 그물처럼 빽빽하게 그녀를
에워싸자 더 이상 싸울 수 없게 되고 말았다. 그녀는
힘이 다해 칼을 휘두를 수조차 없었다.
"죽여라!"
정연공주는 거란군사들의 창끝이 그녀의 가슴을
겨누자 눈을 질끈 감았다.
그때였다. 거란군사들의 후미가 갑자기
소란스러워지며 빽빽하게 정연공주를 에워싸고 있던
거란군들이 일제히 양쪽으로 갈라섰다. 정연공주는
눈을 번쩍 뜨고 거란군사들이 갈라진 쪽을
쳐다보았다. 거란군사들은 일부러 갈라진 것이 아니라
갑자기 흑마를 탄 장수 하나가 나타나서 무인지경으로
장창을 휘둘러댔기 때문에 죽지 않기 위해 자신도
모르게 길을 비켜 준 것이었다.
흑마를 탄 장수는 마술(馬術)이며 창법(槍法)이
번개같았다. 흑마 역시 수없이 전쟁터를 누빈
모양으로 히히힝 하는 우렁찬 말울음 소리를 내지르며
정연공주를 향해 질풍처럼 달려오고 있었다.
(아!)
정연공주는 자신도 모르게 흑마를 탄 장수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그의 창이 번쩍일 때마다
거란군사들은 단말마의 비명을 질러대며 추풍낙엽처럼
쓰러지고 있었다.
신기에 가까운 창법이었다.
흑마를 탄 장수는 도산검림이 빽빽한 거란군사들을
단숨에 흩어버리고 정연공주에게 달려왔다.
"그대가 정연공주요?"
눈이 부리부리한 사내였다. 정연공주는 자신도
모르게 전신이 얼어붙는 것 같았다.
"그렇소!"
흑마를 탄 장수가 다시 한 번 정연공주를 날카롭게
쏘아보았다.
"당신은 누구요?"
그러나 흑마를 탄 장수는 대꾸 한 마디 없이 갑자기
정연공주를 향해 상체를 기울이더니 번개 같이 허리를
낚아챘다. 정연공주는 깜짝 놀랐으나 그는 놀라운
힘으로 정연공주를 번쩍 안아서 흑마의 앞에 태웠다.
"윽!"
그때 화살 하나가 쌩 하고 바람을 가르며 날아와
정연공주의 가슴에 박혔다.
"이랴!"
흑마를 탄 장수가 질풍처럼 말을 몰았다.
거란군사들은 이 번에도 물결이 갈라지듯 일시에
옆으로 흩어졌다.
"거란의 오랑캐들아! 발해의 전 북우위 대장군
장영을 만나거든 두 번 다시 앞을 막지마라!"
장영이었다.
거란의 군사들은 장영이 전장터를 벗어나 저만치
언덕에서 호통을 치자 그제서야 정신이 들었다.
함성을 지르며 활에 화살을 재어 시위를 당겼으나
정연공주를 구출한 장영 장군은 그 말을 마치자 눈
깜짝할 사이에 초원 저쪽으로 사라져 가고 있었다.
"장영이 장령부에도 나타날 줄이야........."
거란의 토벌군 대장군 강묵기는 정연공주를
구출하여 초원으로 사라지는 장영 장군을 보면서
탄식을 했다.
"회발성의 살아 있는 자를 모조리 죽여라!"
강묵기와 아고지는 회발성을 접수하자 거란에
항쟁한 보복으로 피의 학살을 시작했다. 특히
회발성에 7천명의 군사를 파견하여 저항 투쟁을
지원한 서경압록부로 짓쳐 들어가 3천명의 군민들을
참수하고 개선했다.
발해인들의 저항운동은 일단 7월에 이르러 한 풀
꺽였다.
7월에는 철주(중경두덕부의 한 주)의 유민들도 들고
일어나 수많은 거란군사들을 죽인 뒤 급히 파견된
야율 우지와 안단에게 전멸되었다.
이로써 229년 동안 찬란한 대륙문화를 꽃피웠던
발해는 역사 속의 제국이 되었다.
그러나 저항의 불길이 완전히 끊어진 것은
아니었다. 발해인들은 틈만 나면 거란 침략자들에게
대항하여 투쟁을 전개했고 거란은 발해의 저항을
진압하기에 전력을 기울여야 했다.
41. 대륙을 방랑하다
강물은 햇살을 받아 은빛으로 반짝거리고 있었다.
날씨는 좋았다. 9월의 바람결이 서늘하고
청천하늘엔 흰 구름이 띠를 풀어놓은 것처럼 흩어져
있었다. 정연공주는 바위 위에 누워서 하늘을
쳐다보다가 하늘이 점점 깊고 그윽해지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하늘을 바라보고 있자니, 마치 자신이
광대무변한 하늘에 떠 있는 구름 덩어리처럼
여겨졌다.
가을이었다.
마을 사람들은 강에서 고기잡이를 하고 있었다.
고구려에서 시작된 천제(天祭)를 지내는 시기는
아직도 한달 여가 남았으나 가을 농사가 거의
끝나가고 있었다. 강이 가까운 들녘엔 벼들이 누렇게
고개를 숙이고 황금물결이 출렁거리는 논바닥엔 새를
쫓는 허수아비가 세워져 있었다.
훠이이이이.......
이따금 아낙네들이 새를 쫓는 소리가 산의 이쪽
저쪽에 부딪쳐 메여진가 되어 돌아왔다.
훠이이이이........
정연공주는 아낙네들의 새를 쫓는 소리에 아른아른
잠이 쏟아져 왔다. 양지쪽이라 볕이 따뜻했다.
(가을엔 천제를 지내고 구마대회를 열었지........)
10월에 열리는 천제는 한 해의 농사가 풍년이 되게
해준 하늘에 감사를 지낸다는 의미도 있었으나 일종의
잔치였다. 남자들은 목욕재계한 뒤에 새옷을 입고
천제를 지내는 산에 모이고 여자들은 음식을
만들었다. 천제가 끝나면 그때부터는 축제였다.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즐겁게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었다.
남자들은 구마대회를 열었다. 구마대회의 우승자는
나라에서 군사의 우두머리로 뽑았기 때문에 10월에
열리는 구마대회를 위해 말을 타고 초원을 누볐다.
그러나 거란은 발해인들에게 구마대회를
중지시켰다. 발해인들이 구마대회로 무술을 연마하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구마대회를 중지시킨 것이다.
(흥!)
정연공주는 자신이 누워 있는 바위 옆의 늙은
은행나무 가지가 흔들리는 것을 보고 쓸쓸하게
웃었다. 그녀를 구출한 장영이 돌아와 은행나무에
앉아 있는 것이 분명했다. 그는 어디론가 정처없이
떠났다가는 불쑥 돌아와 은행나무 가지에 앉아서
그녀를 물끄러미 내려다보고는 했다.
그러나 그것뿐이었다.
장영은 그녀에게 말을 시키는 법도 없었고 그녀가
불러도 대꾸조차 없었다.
기이한 사내였다.
정연공주는 장영을 생각하다가 갑자기 얼굴이
붉어졌다. 장령부의 벌판에서 장영에게 구출되기는
했으나 가슴에 박힌 화살의 상처 때문에 처녀의
가슴을 그에게 보이고 말았던 것이 다. 그나마
다행이었던 것은 정연공주가 혼절해 있었다는
사실이었다. 정연공주가 혼절해 있는 동안 장영은
그녀의 상의를 벗긴 뒤에 가슴에 박힌 화살촉을 뽑고,
피를 닦고, 약초를 이겨서 발라주었다.
백옥처럼 희고 아름다운 처녀의 가슴이었다.
젖무덤은 뽀얗게 희었고 유두 주위는 발그스레했다.
이제 비로소 꽃처럼 화사하게 피어나는 봉오리였다.
정연공주는 정신이 돌아왔을 때 자신의 옷이 벗겨져
있는 것을 알고 얼굴이 화끈거렸다. 낮선 사내에게
자신의 가슴을 보이고 말았다는 생각에 그녀는 사내를
똑바로 쳐다볼 수도 없었다. 그러나 가슴의 상처가
어느 정도 아물게 된 날까지 계속 치료를 받게 되자
부끄러움이나 수줍음이 어느 정도 가시고 그 사내에게
야릇한 감정을 느끼게 되었다.
정연공주가 사내의 정체를 알게 된 것은 이레째
되는 날이었다.
"나는 전 북우위 대장군 장영이라고 하오. 공주를
구하기 위해 부득이 옷을 벗기긴 했으나
청백지신(淸白之身)을 욕되게 하지는 않았으니
안심하시오."
장영은 그녀의 가슴을 깨끗한 물수건으로 닦고 옷을
입혀준 뒤 비로소 자신의 정체를 털어놓았던 것이다.
"장군님이셨군요. 보잘 것 없는 생명을 구해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정연공주는 얼굴을 붉히며 사례를 했다.
장영이 그녀를 데리고 와서 치료해 준 마을이
대륙과 반도가 강 하나로 경계를 이루고 있는 이
어촌이었다. 강은 두만강이었고 어촌의 이름은
월하촌(月下村)이었다.
뒤에는 산이 병풍처럼 둘러서 있고 앞에는 두만강이
가로막고 있어서 천험의 요새 같은 마을이었다.
발해가 오랫동안 전쟁을 하지 않은 탓도 있으나
마을은 지극히 평화로웠고 외지와의 연락은 여간해서
이루어지지 않았다.
"........"
정연공주의 사례에 장영은 아무 대꾸도 하지
않았다.
"전 발해의 공주예요. 장군은 무예가 뛰어난 분이니
저를 도와서 발해를 복국하도록 도와주세요."
"........."
"장군!"
"........."
"장군은 왜 아무 말씀도 안하시죠?"
"나는 발해의 역적이오. 내 아내는 역적으로 몰려
어림군으로 죽고 아들은 어디로 갔는지 행방조차
묘연하오! 그럼에도 거란이 침략하자 충의군을 이끌고
홀한성을 방위하려고 하였소! 허나 황제께서는 나에게
추방령을 내리셨소!"
장영은 분개한 얼굴로 고개를 번쩍 치켜들었다.
그의 두 눈이 증오로 무섭게 이글거리고 있었다.
"황제폐하께서는 거란으로 끌려가셨어요. 발해를
복국하면 장군의 역적 누명은 벗겨질 거예요! 공을
세워서 역적 누명을 벗도록 하세요!"
정연공주는 장영의 분노를 이해할 수 없었다.
장영이 예를 갖추어 자신에게 복종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럴 수 없소."
"장군은 내 명을 따르세요!"
정연공주는 장영에게 단호하게 말했다.
"하핫-----!"
그러자 장영은 앙천대소를 터뜨리고는 말을 타고
훌쩍 떠나가 버렸다. 정연공주는 그때서야 무엇인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녀는 장영의 증오가
어떤 것인지 이해하지 못했던 것이다.
(그가 발해의 복국을 도와주지 않는다면 내
혼자서라도 할 테야-----!)
정연공주는 은행나무에 앉아 있는 장영을 힐끗
쳐다보고는 입술을 깨물었다. 장영이 미우면서도
가까이 하고 싶은 기묘한 감정이 그녀를 혼란스럽게
했다.
그날 밤 정연공주는 월하촌 촌장을 찾아가 자신이
발해의 공주라고 신분을 밝혔다. 월하촌 촌장은
처음엔 긴가민가하다가 정연공주가 발해 황실의
문장(紋章)이 그려진 목걸이를 보여 주자 비로소
엎드려 절을 했다. 발해 황실의 문장은 말을 탄
무사가 사슴을 사냥하는 것이었다.
"늙은이가 삼가 공주님을 뵈옵니다."
월하촌 촌장의 얼굴에 감격의 눈물이 흘러내렸다.
"예를 거두세요. 우리는 복국을 해야 해요."
정연공주는 차분하게 말했다.
"복국이라고 말씀하셨습니까?"
"그래요. 거란의 오랑캐들이 이 나라를 짓밟게 그냥
둘 수는 없잖아요?"
"공주님의 말씀하시는 뜻은 잘 알겠습니다만 우리는
군사가 없습니다. 게다가 황제폐하께서는 거란에
인질로 잡혀 계시지 않습니까?"
"군사는 모으면 되는 것이고 인질로 잡혀 있는
황제는 구출하면 되요."
"태자님은 어디 계십니까?"
"행방을 알 수 없어요."
"알겠습니다. 공주님께서 저희처럼 비천한
사냥꾼에게 그와 같은 대임을 맡겨 주신다면 신명을
바쳐 공주님을 도와 발해를 복국하겠습니다."
월하촌 촌장은 진심으로 말했다.
월하촌 촌장의 이름은 위균(衛鈞), 농사와 수렵을
생업으로 하고 있는 월하촌에서 가장 용맹한
사내였다.
이튿날부터 월하촌은 전쟁준비로 어수선했다.
월하촌의 인가는 모두 27호, 어른 남자들은 스물
다섯밖에 되지 않았다. 그러한 병력으로 거란과 싸울
수가 없어서 촌장이 외지에 나가 동조 세력을 규합해
왔다. 동조 세력은 점점 불어나 한 달만에 장정들이
2백여 명에 이르게 되었다.
정연공주는 자신이 거느린 저항군을 대진국
부흥군이라고 명명하고 위균을 대진국 부흥군
표기장군에, 군사 60명을 이끌고 부흥군에 합류한
여상(茹常)을 군사(軍師)에, 군사 40명을 이끌고
합류한 안부구(安富仇)를 좌장군(左將軍)에 임명했다.
부흥군은 군사가 비록 2백여 명밖에 되지 않았으나
그래도 체재를 갖추어야 했다.
여상은 안원부 도독부에서 지부 낭중을 지내
병사(兵事)에 밝았고 안부구는 사냥꾼 출신이었다.
이어서 정연공주는 저항군의 근거지를 염주(鹽州)의
여진수(阿利水)로 옮겼다. 월하촌에서는 도저히
군비와 군량을 충당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염주의
여진수에서도 막대한 군비와 군량을 마련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염주의 자사는 발해인 이진언(李盡彦)이었으나
자신이 관할하는 여진수 유역에 수상스러운 사내들이
모여들고 있다는 소문을 듣고 염탐꾼을 보냈다.
그리고 그들이 발해의 복국을 꿈꾸는 유민들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자 안절부절하기 시작했다. 발해는
이미 거란에게 망했고 발해의 유민들은 곳곳에서
항전을 하고 있었으나 미미한 존재에 지나지 않았다.
망해버린 발해 유민을 공격하는 것은 쉬운 일이었으나
거대한 제국인 거란과 맞서 싸우는 것은 위험하기
짝이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염주에 있는 군졸들만으로 발해 부흥군을
공격할 수는 없었다. 두덕부에 있는 노주(盧州)에
주둔하고 있는 거란의 철기병을 불러와야 했다.
이진언은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병사 하나를 불러
거란군을 청하는 편지를 써서 주고 즉시 노주로
떠나보냈다.
그러나 이진언이 거란군을 청하는 군사를 노주로
보낸 지 한 시진도 되지 않아 여진수의 발해
부흥군으로부터 사신이 왔다. 사신은 좌장군에 임명된
안부구였다.
........염주 자사 이진언은 들으라. 천운이 이르지
못해 원수의 거란 오랑캐에게 투항한 대진국
인선황제의 혈손 정연이 천명을 받들어 대진을
복국하려 하노라. 염주 자사 이진언은 손수 군사들을
이끌고 나와서 여(余)를 맞이하여 거란 오랑캐를
치는데 일익을 담당하라. 만일 이에 불응할 시에는
염주 자사의 목을 쳐서 발해를 침략한 원수에게
협력한 죄를 물으리라.
안부구에게서 정연공주의 서찰을 받아 본 이진언은
얼굴이 사색이 되었다. 염주에는 5, 60명의 군졸들이
있었으나 발해의 부흥군과 맞서 싸울 수는 없었다.
그는 안부구에게 잠시 시간을 달라고 요구한 뒤에
뒷문으로 빠져나가 줄행랑을 치고 말았다.
(쓸개빠진 인간 같으니........)
정연공주는 군사들을 이끌고 염주로 무혈입성했다.
"공주님. 싸우지도 않고 승리했으니 경하
드립니다!"
"전도가 밝을 징조입니다!"
부흥군의 깃발을 앞세우고 염주에 입성한
부흥군들은 환호성을 울렸다. 염주의 백성들도 연도에
늘어서서 부흥군 일행을 대대적으로 환영했다.
정연공주는 염주에 남아 있는 군사들을 투항시켜
부흥군에 편입시키고 병기와 군량을 노획했다. 그때
노주에서 거란군이 몰려오고 있다는 보고가 들어왔다.
"거란의 군사들이 얼마나 된다고 합니까?"
정연공주는 군사인 여상에게 물었다.
"3백명은 족히 될 것이라고 합니다."
"철기병이랍니까?"
정연공주는 긴장된 얼굴로 물었다. 강묵기가
거느리는 거란의 철기병들은 무적의 군사들이었다.
"철기병은 아니고 그냥 기병이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거란군이 들어오는 길목에서 매복하고
있다가 칩시다!"
"예."
정연공주의 지시에 의해 부흥군은 염주에서
서쪽으로 30리나 떨어진 흑오산(黑烏山)
득오곡(得烏谷)에 매복을 했다. 흑오산은 산의 모양이
까마귀를 닮았다고 하여 생긴 이름이었다.
거란군은 부흥군이 매복을 완전히 마치고 한 시진도
되지 않아서 흙먼지를 일으키며 나타났다. 그들은
계곡 앞에서 매복을 염려한 듯 주위를 살피더니
질풍처럼 말을 달려 계곡을 빠져나가려고 했다.
"공격!"
정연공주는 거란군이 계곡으로 깊숙이 들어오자
보검을 뽑아들고 소리를 질렀다. 그러자 활에 화살을
재고 있던 부흥군이 일제히 화살을 날렸다.
"매복이다!"
"전속력으로 계곡을 빠져나가라!"
거란군 토벌군의 대장 포노리(蒲奴里)는 계곡에
매복한 부흥군들이 일제히 화살을 날리자 당황했다.
그는 군사들을 이끌고 수렵에 나왔다가 염주 자사
이진언을 만나 발해의 부흥군이 나타났다는 보고를
받았었다. 그러나 발해의 부흥군이 얼마 되지
않는다는 이진언의 말에 철기병을 동원하지 않고
사냥에 나선 군사들만 데리고 염주로 달려오던
길이었다. 그러나 매복에 걸리고 화살이 빗발치듯
날아오자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서둘러라!"
"전속력으로 계곡을 빠져나가라!"
포노리는 자신의 안전도 돌보지 않고 병사들을
독려했다. 토벌군은 포노리의 지시를 따라 전속력으로
계곡을 빠져나가려고 하였다. 일단 계곡만 벗어나면
오합지졸인 발해의 부흥군은 얼마던지 격파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러나 흑오산의 득오곡은 낙엽이 발목이 묻힐
정도로 쌓여 있었다. 토벌군이 말을 세차게
채찍질했으나 말들은 미끄러지고 넘어지기만 할뿐
달리지를 못했다.
"쏴라!"
정연공주는 목이 터져라 외쳤다.
거란의 토벌군은 우왕좌왕했다. 발해 부흥군의
화살이 빗발치듯 날아오고 있었으나 말들이 달리지를
못해 여기저기서 비명을 지르며 죽어갔다.
"후퇴하라!"
"퇴각하라!"
포노리는 그때서야 퇴각명령을 내렸다. 그러나
퇴각도 용이하지 않았다. 거란군은 불과 10여기만
살아서 도망을 갔고 포노리도 등에 화살을 세 대나
맞고 간신히 도망을 쳤다.
"만세!"
"만세!"
부흥군은 첫전투에서 승리하여 의기양양하여 염주로
돌아왔다. 거란군이 버리고 달아난 말과 병기를 모두
노획한 부흥군은 사기가 충천하였다.
그러나 불과 3백기로 부흥군을 토벌하려다가 간신히
살아서 도망을 친 포노리는 화살에 맞은 상처를
치료하지도 않고 토벌군 대장군 강묵기에게 달려갔다.
강묵기는 포노리의 보고를 받자 무적의 철기병
3천명을 거느리고 염주로 향했다.
강묵기가 3천의 철기군을 거느리고 염주로 온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부흥군은 일단 피하기로 하였다.
그들은 염주를 떠나 대륙을 방랑하기 시작했다.
부흥군이 제대로 군사력을 갖추기도 전에 거란의
막강한 토벌군을 만나면 개죽음을 할 것이 불을 보듯
뻔한 일이었기 때문이었다. 부흥군이 거란군과
당당하게 맞서 싸울 능력이 생길 때까지는 힘을
길러야 했다.
이내 겨울이 왔다.
부흥군은 진채도 없이 황량한 벌판에서 겨울을
맞이해야 했다. 참담한 일이었다. 무엇보다 다급한
것은 식량과 근거지였다. 정연공주는 벌판에서 겨울을
보낼 수 없다고 생각했다. 대륙의 겨울은 혹독하게
추웠다. 근거지없이 떠돌아다니다가는 벌판에서 모두
굶어 죽거나 얼어죽을 것이었다.
정연공주는 군사들을 이끌고 염주로 돌아가기
시작했다.
부흥군은 염주로 되돌아왔을 때 이미 5백여 명을
헤여진고 있었다. 그러나 대규모의 부흥군이
움직이므로써 토벌군인 거란군도 그들의 동태를 알게
되었다.
12월이 되자 토벌군의 강묵기는 마침내 철기병으로
쟁쟁한 명성을 날리고 있는 군사 3천명으로 다시
부흥군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돌격!"
부흥군은 전열을 가다듬을 사이도 없이 토벌군이
물밀 듯이 밀려들어오자 당황했다. 전투훈련을 받은
일도 없고 전투에 참여한 일도 별로 없는 그들은
우왕좌왕하며 토벌군들에게 쫓겨다니다가 도륙을
당했다. 게다가 토벌군은 거란의 막강한 철기병이었고
저항군은 대부분 민병이었다. 무적의 철기병과 민병의
싸움은 애초부터 상대가 되지 않는 것이었다.
처절한 살상이었다.
부흥군은 토벌군이 질풍처럼 달려올 때 허겁지겁
달아난 병사들만 간신히 목숨을 건졌으나 나머지는
무리 죽음을 당했다.
정연공주는 간신히 살아서 몇몇 군사들과 함께
월하촌으로 도망을 쳤다. 그러나 월하촌도 안심할 수
있는 고장은 아니었다. 토벌군은 월하촌까지 추격을
하여 부흥군을 도륙했다.
정연공주는 위균과 안부군의 도움으로 간신히
월하촌에서 탈출을 했다. 토벌군의 학살에 살아남은
사람들은 여상, 안부구, 위균을 비롯해 모두 17명밖에
되지 않았다. 그것도 하나 같이 부상을 당해
피투성이였다.
(이제 우리는 어디로 가야 하는가------?)
정연공주는 거란의 토벌군이 추격해 오지 않는
산기슭에 이르자 한숨을 토했다. 앞으로의 일이
아득하기만 했다. 겨울은 눈앞에 닥쳐와 있었고 5백
명이나 되는 군사들의 대부분을 잃은 정연공주는
처량하기 짝이 없었다.
(그는 왜 나를 돕지 않는 것일까.....?)
정연공주는 대륙을 유랑하며 장영의 얼굴을
하루에도 몇 번씩이나 머릿속에 떠올리며 슬픔에
잠겼다. 발해 부흥군을 여자인 자신이 거느리는 것이
너무나 벅찼다. 이렇게 어려울 때 장영이 도와주면
죽어도 좋을 것 같았다.
"공주님!"
어느 날 군사인 여상이 정연공주에게 다가와 낮게
불렀다.
"말씀하세요."
"이제 어디로 가야 합니까?"
"어디로든 가야 하겠지요."
정연공주는 우울한 얼굴로 대꾸했다. 어디론가 가야
하는 것은 사실이었으나 갈 곳이 없었다. 그러나
식량과 군막도 없이 황량한 벌판에서 밤을 세울 수는
없었다.
"어디 마을이라도 찾아야 할 것 같습니다."
여상이 말했다.
벌써 날이 어둑어둑해지고 있었다.
"마을이 있을까요?"
"여기서 30리쯤 가면 인가가 있습니다. 사냥꾼 몇이
모여 사는 모량촌(牟梁村)이라는 마을입니다."
"이런 벌판에 사냥꾼이 있어요?"
"얼마가지 않으면 장광재산맥이 나옵니다. 모량촌의
사냥꾼들은 장광재산맥으로 수렵을 다닙니다."
"그렇다면 다행이군요."
정연공주는 고개를 끄덕거렸다. 아무 희망도 없이
이동을 하는 것보다 일루의 희망이라도 갖고 이동을
하는 것이 조금이라도 나을 것이다.
그들은 지친 말을 끌고 계속 이동을 했다.
이내 밤이 왔다.
대륙의 밤은 별빛 하나 없이 캄캄했다. 다행히
기온은 겨울답지 않게 포근했다. 그들은 어둠 속에서
길을 찾아서 지친 몸을 끌고 억지로 이동을 했다.
그때 어두운 하늘에서 성긴 빗발이 후두둑 떨어지기
시작했다.
(아아 하늘도 무심하구나-----)
정연공주는 부상당한 군사들을 이끌고 장광재산맥
쪽으로 이동을 하며 탄식을 했다. 빗발이 점점 굵어져
살갗을 차갑게 적시고 있었다.
그들은 새벽녘에 여상이 말한 사냥꾼의 마을에
이르렀다. 그러나 그 곳은 마을이라고 부를 수도 없을
정도로 작은 마을이었다. 인가는 10여호 되었으나
모두 불타고 겨우 다섯 채만 남아 있었다. 거란군이
발해인들을 이주시키기 위해 불을 질렀다는 것이었다.
주민은 노인과 아이들까지 합하여 스물 셋 뿐이었는데
그들도 떠나려고 짐을 꾸려놓고 있었다.
"공주님을 뵈옵니다!"
"공주님을 뵈옵니다!"
그들은 비에 흠뻑 젖은 정연공주의 초라한 행렬에
울면서 절을 했다. 그들의 절을 받던 정연공주도
뜨거운 눈물이 흘러내렸다.
"공주님! 미천한 저희들도 데려가 주십시오."
그들은 정연공주를 따라다니며 발해의 부흥에
미력이나마 힘을 보태겠다고 애원을 했다. 비록
수렵을 하면서 어렵게 살고 있었으나 모량촌 주민들은
정든 고향을 버리고 떠나느니 정연공주를 따라가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물론 거란의 막강한
토벌군에게 쫓기며 발해를 부흥하는 일이 요원한
일이며, 가시밭길을 걷는 일이라는 것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 옛날 그들의 선조들이
대조영을 따라 대륙의 초원을 방랑하여 고구려의
후신인 발해를 복국했듯이 그들도 발해를 복국하는데
남은 여생을 기꺼이 바치기로 했던 것이다.
정연공주는 여상과 상의하여 모량촌 사람들까지
데리고 장광재산맥의 오지로 들어가기로 하였다.
이튿날 아침 정연공주는 모량촌 사람들까지 데리고
장광재산맥을 향해 길을 떠났다. 모량촌 주민들을
소개시킬 거란군들이 언제 들이닥칠지 알 수 없어
서둘러 떠나기로 한 것이다.
빗발은 새벽녘에 눈보라로 바뀌어 있었다. 그들은
자욱한 눈보라가 날리는 대륙의 벌판을 가로질러 길을
재촉했다.
42. 무정한 세월
무정한 것은 세월이다. 정연공주가 월하촌에서
부흥군을 모아 거란에 항쟁을 선언했다가 강묵기의
막강한 철기병에 대패하고 장광재산맥의 오지로
들어간지 어느덧 4년의 세월이 흘렀다.
발해는 한동안 평온했다.
거란군의 막강한 토벌군의 위세에 발해인들의
거란에 대한 항쟁도 한풀 꺾여 조용했다. 거란은
발해인들을 자국화하는 정책을 급속히 추진했다.
발해의 명문거족들을 포섭하여 동란국에 등용했고
지방 장관들도 발해인으로 임명했다. 발해인 10만호,
40만명을 요령 일대로 이주시켜 기미정책을 편 것도
발해 유민들의 저항을 무력화시키는 요인이었다.
야율 아보기의 장남 인황왕 야율 배는 정복자들과
달리 점령지 발해에 문치(文治)를 실시했다. 그는
정치나 전쟁보다 책을 더 좋아했는데 서적을 한꺼번에
1만 권씩 사들일 정도로 좋아했다. 야율 배의 이러한
행동은 요의 지배층으로부터 시기와 배척을 받았다.
요왕 태종은 야율 우지로 하여금 야율 배를 감시케
했다.
야율 우지는 발해인들의 저항이 만만치 않자
인황왕이 요의 수도 상경임황부에 입조한 틈을 타서
태종 야율 덕광을 설득하여 동란국의 수도를 상경에서
요양으로 옮겼다. 야율 우지가 동란국의 수도를
상경에서 요양으로 옮긴 것은 발해인들의 저항도
무력화시키고 인황왕이 요왕 야율 덕광에게 반대하지
못하도록 가까운 곳에서 감시하기 위해서였다.
동란국의 수도를 상경에서 요양으로 옮기자
인황왕은 야율 우지가 자신을 죽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고 후당(後唐)으로 망명해 버렸다. 이로 인해
동란국은 인황왕의 발해인 왕비 소(蘇)씨가 다스리게
되었다.
야율 우지는 동란국에서 실권을 휘둘렀다.
휘이잉.......
대륙의 북풍이 세차게 휘몰아칠 때마다 집 뒤의
울창한 삼림은 떠나갈 듯이 단말마의 비명을
질러댔다.
대륙의 동쪽.
목림강(牧林江) 유역의 계서(鷄西).
앞에는 사시사철 우쭐렁거리며 목림강이 흐르고
있고 뒤에는 장광재산맥의 첩첩 산들이 웅거하고 있는
북만주의(北滿洲)의 오지였다. 그러나 인가가
드문드문 있는 계서에서도 북쪽으로 50리(里)나
떨어져 있는 강안(江岸)에 초옥(草屋)이 한 채 세찬
바람에 날아갈 듯이 황량하게 서 있었다.
날이 번하게 밝아오는 새벽 무렵이었다.
날씨는 음산했다. 하늘은 눈발이라도 뿌릴 것처럼
우중충했다.
초옥은 사람이 살지 않는지 죽은 듯이 조용했다.
뒤에는 병풍처럼 산들이 둘러싸고 있었고 앞에는
목림강의 지류가 흐르고 있었다. 언뜻 보기에는
지극히 쓸쓸하고 황량하기 짝이 없는 풍경이었다.
그래도 초옥에서는 푸른 연기가 모락모락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아침을 짓는 연기였다.
스스스......
그때 숲에서 나뭇잎이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빠르게
들려왔다. 그와 함께 짙은 흑립에(黑笠)에
흑의(黑衣)를 입은 인영들이 번개처럼 숲에서
뛰어나와 초옥을 에워쌌다.
"흐흐흐......"
검은 인영은 모두 셋이었다. 그들의 눈은 뱀처럼
차가우면서도 음흉스럽게 이글거리고 있었다.
"대형!"
흑삼인 중 한 사내가 얼굴에 길게 흉터 자국이 있는
사내를 쳐다보며 입을 열었다.
"왜?"
대형이라고 불리운 사내가 음산한 목소리로
대꾸했다.
"저 집이 과연 발해 유민들이 연락처로 삼고 있는
집일까요?"
"둘째. 계서의 객잔에 있는 점소이의 연락이니
틀림없을 거야!"
"그렇다면 여기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산에 발해
부흥군의 근거지가 있겠군요?"
"이를 말인가?"
"그럼 어서 저 집을 습격하여 발해 부흥군의
근거지를 알아 냅시다."
"서두를 필요가 없네. 발해 부흥군을 지도하고 있는
정연공주에게는 천서가 있네. 천부경, 또는
천부비록이라고 하는 천서는 원래 홀한해의
비밀서고에 있었는데 요왕 아보기의 황숙 야율 할저가
손에 넣었다가 대장군 장영에게 뺏겼지......
정연공주는 거란으로 끌려가기 전에 탈출하여
부흥군을 이끌고 있는 중이야. 정연공주는 무예가
대수롭지 않았는데 천서로 인해 순식간에 고수가
되었다는 거야. 그녀가 사용하는 무예가 모두 천서에
있는 무예라고 하잖아......."
"발해 왕실에 진귀한 서적이 많다더니
사실이었군요."
"발해는 대륙을 지배했던 고구려를 계승한 나라야."
대형의 말에 둘째라고 불리운 흑삼인은 잠시 입을
다물었다. 고구려가 광대한 대륙을 지배했던 것은
그도 잘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가자!"
대형이라는 사내가 다른 사내들에게 손짓을 하고
재빨리 신형을 날렸다. 그러자 두 인영도 초옥을 향해
화살처럼 몸을 날렸다.
"호호호!"
그때 초옥에서 낭랑한 웃음소리가 들리더니 백영
하나가 번쩍 하고 그들을 향해 날아왔다.
"앗!"
대형이라는 사내가 깜짝 놀라 초옥 밖으로
내려섰다. 두 흑삼인도 대형이라는 사내를 따라
황급히 내려섰다. 백의 인영은 허공에서 한 바퀴 몸을
돌려 그들의 앞에 가볍게 내려섰다. 여자이지만
상승무공(上昇武功)을 익힌 것이 분명했다.
"음!"
흑삼인들은 무겁게 신음을 삼켰다.
"어디서 온 살수(殺手)들이냐?"
백의 여인이 흑삼인들을 날카롭게 쏘아보았다. 백의
여인의 초롱초롱한 눈에서 칼날처럼 싸늘한 광채가
뿜어지고 있었다.
"우리는 강남삼괴(江南三怪)라는 어른이시다! 너는
이름이 무엇이냐?"
"나는 비파녀(琵琶女) 초연경(楚燕暻)이다!"
"발해의 비파녀 초연경이 만년설(萬年雪) 속에서 핀
빙화(氷花)라고 하더니 과연
명불허전(名不虛傳)이로구나!"
강남삼괴가 초연경에게서 쏟아지는 냉기에 감탄하여
외쳤다. 비파녀 초연경은 비파녀라는 별명 외에
빙화라는 별명을 또 하나 남기고 있었다. 초연경이
항상 비파를 갖고 다니기도 하지만 얼음꽃처럼
쌀쌀하다는 뜻이었다.
강남삼괴가 초연경을 찾아온 것은 목림강 유역의
계서 일대에 발해인들로 보이는 사내들이 자주
출몰한다는 거란 세작들의 보고가 야율 우지에게
보고되었기 때문이었다. 야율 우지는 발해 부흥군이
장광재산맥 일대에 웅거했으리라는 추측을 하고
강남삼괴를 파견하여 발해 부흥군의 웅거지를 찾도록
지시했던 것이다.
강남삼괴는 야율 우지의 지시를 받자 계서의 객잔에
첩자를 심어 놓고 끈질기게 기다렸다. 그리고는
마침내 계서에서 50리 떨어진 초옥이 발해 부흥군들의
연락처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던 것이다.
정연공주는 모량촌에서 떠나 눈보라를 헤치고
장광재산맥으로 이동을 한 뒤 길이가 2천리가 넘는
장광재산맥을 종단하여 오지인 아소산(阿蘇山) 계곡에
웅거했다. 비파녀 초연경은 계서에 살고 있는
무림인이었는데 정연공주를 만나자 혼쾌히 발해의
부흥을 돕겠다고 약속하고 목림강 유역의 초옥에서
연락을 맡게 되었던 것이다.
정연공주는 발해를 복국하는 것이 세월이 흐를수록
어려워진다고 생각했으나 전날의 패배를 잊지 않았다.
그녀는 아소산 계곡에 수십 채의 초막을 짓고
군사들을 조련하기 시작했다. 아소산 게곡은 천험의
요새였다.
"네가 발해 부흥군의 연락책을 맡고 있느냐?"
"발해 부흥군이라는 말은 들어본 적도 없다!"
초연경이 냉소를 뿌리며 야멸차게 내뱉았다.
"우리는 무림의 삼살성(三殺星)
강남삼괴(江南三怪)다! 우리의 위명을 들었다면
순순히 자백해라!"
대형이라는 사내가 거드름을 피우며 말했다.
강남삼괴는 무림에서는 쟁쟁한 이름을 날리고 있었다.
그들의 살수가 워낙 잔인했기 때문에 강남 일대에서는
울던 아이도 강남삼괴가 온다면 울음을 그친다는
소문이 나돌 정도였다.
"흥! 강남삼괴인지 강남삼견(江南三犬)인지 그
더러운 이름을 내 알바 아니다!"
초연경이 일갈을 한 뒤에 깔깔대고 웃음을
터뜨렸다. 강남삼견이란 세 마리의 개를 말하는
것이다.
흑삼인들은 분노로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그렇다면 우리의 솜씨를 보여 주지!"
강남삼괴 중 일괴가 등에서 서서히 검을 뽑아
들었다. 나머지 이괴도 검을 뽑아 들고 초연경을
에워쌌다. 초연경은 청색 옥소(玉簫:퉁소)를 들고
강남삼괴를 조소하는 눈빛으로 쏘아보고 있었다.
"흐흐흐......오늘 강남삼괴는 무림에 명성이
쟁쟁한 비파녀 초연경의 살맛을 좀 보아야 하겠다!"
강남삼괴가 음탕한 웃음을 얼굴에 띄웠다. 그들의
눈은 끓어오르는 욕정으로 이글거리고 있었다.
강남삼괴는 초연경을 잡아 발해 부흥군의 근거지를
알아내는 것도 중요하지만 이 기회에 천하절색인
초연경의 몸을 농락해야 하겠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더러운 놈들!"
초연경의 얼굴이 차갑게 굳어지며 냉랭한 일갈이
터져 나왔다.
"흐흐.......강남삼괴가 아무리 무정하다고 해도
무림의 비파녀 초연경을 다치게 하고 싶지는 않다!
우리와 함께 극락을 가보는 것이 어떠냐?"
강남삼괴의 눈빛이 음흉하게 초연경의 몸을
더듬었다.
아름다운 여인이었다.
까만 눈은 한 쌍의 보석처럼 반짝거리고 콧날은
오똑했다. 입술은 앵두처럼 붉고 볼은 살짝 보조개가
패어 있었다. 살결은 눈(雪)처럼 투명했다.
빙기옥골(氷기玉骨)의 살빛이었다.
그러나 더욱 아름다운 것은 백의 유삼(儒衫)에
가려져 있는 그녀의 몸이었다. 유삼은 부드러운
어깨에서 흘러내려 봉긋한 가슴께를 덮고 다시 아래로
흘러내려 세류(細柳) 같은 허리를 지나 풍만한
둔부에서 아래로 부채살처럼 퍼지고 있었다.
고구려인들의 복식이었으나 뇌쇄적이었다.
강남삼괴의 눈이 충혈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오늘 네 놈들을 살려 보내면 무림의 비파녀가
아니다!"
"발해 부흥군의 근거지도 알게 되고 초연경과
운우지정도 나눌 테니 우리 형제는 오늘 염복(艶復)이
터졌다! 형제들 초연경의 야들야들한 몸을 다쳐서는
안되네."
"형님. 염려 마십시오!"
"흐흐흐......"
강남일괴가 징그러운 미소를 뿌리며 초연경을 향해
다가오기 시작했다. 그 순간 초연경의 눈이 번쩍
떠졌다.
(숲에서 살기가 뻗치고 있어!)
초연경은 숲에서 뻗치는 살기에 바짝 긴장했다.
강남삼괴를 상대하는 것은 아무 것도 아니었으나 숲에
있는 정체불명의 인물이 그녀를 바짝 긴장하게 하고
있었다.
"매화일검(梅花一劍)!"
그때 강남삼괴가 일제히 허공으로 솟구치며
초연경을 덮쳐왔다. 매화장(梅花壯)의 검법이었다.
매화가 허공에서 난무하듯 현란한 검기(劍氣)가
초연경을 향해 쏘아져 왔다.
"흥!"
초연경도 코웃음을 치며 허공으로 솟아올랐다.
"매화이검(梅花二劍)!"
그러자 강남이괴가 재빨리 초식을 바꾸어 초연경을
공격했다.
"파천일검(破天一劍)!"
초연경이 낭랑한 목소리로 외친 뒤에 허공에서
빙그르르 몸을 돌리며 옥소를 가볍게 내저었다.
그러자 초연경의 몸에서 향긋한 여인의 살 냄새가
풍기며 봄바람이 불듯 가벼운 바람이 일어났다.
(앗!)
강남삼괴는 처음에 부드러운 훈풍이 불어오자
어리둥절했다. 그러나 다음 순간 훈풍이 한 줄기
검기로 변해 엄습하자 소스라쳐 놀랐다.
"가라!"
초연경이 일성(一聲)을 터드리는 것과 동시에
초연경의 검기는 강남삼괴의 목을 스쳤다.
"헉!"
강남삼괴는 바람이 빠지는 듯한 신음소리를 뱉고
피화살을 뿜으며 곤두박질쳤다.
팟!
그때 요란한 파공성이 들리며 인영 하나가 초연경을
향해 날아왔다.
"기다렸다!"
초연경은 허공에서 몸을 돌려 날아오는 인영을 향해
옥소를 휘둘렀다.
"받아랏!"
그러자 음산한 쇳소리와 함께 초연경의 머리 위로
무수한 암기가 뿌려졌다.
"암기!"
초연경은 머리끝이 쭈뼛했다. 암기는 화살이
날아오듯 맹렬한 속도로 초연경을 향해 날아오고
있었다.
(유엽비도로군.....)
초연경은 입속으로 중얼거렸다.
유엽비도(柳葉飛刀)는 강북세가(江北世家)의 하나인
유가장(柳家壯)의 절학이었다. 그러나 유가장의 장주
유풍기(柳豊基)는 오래 전에 실종되었고 유가장의
절학은 실전되었다는 소문이 파다했다.
"파천일황!"
초연경은 낭랑한 기합성을 터뜨리며 옥소를
빛살처럼 뻗어 암기들을 후려쳤다. 그와 동시에
그녀를 향해 날아오는 암습자를 향해 일격을 가했다.
파팟!
그녀가 시전한 파천일황의 맹렬한 공세에 암습자의
유엽비도들이 우수수 떨어지거나 튕겨져 나갔다.
"앗!"
다음 순간 초연경은 소스라쳐 놀랐다. 그녀가 퉁겨
버린 유엽비도 하나에서 백색가루가 눈처럼 날리고
있었다.
(독이야!)
초연경은 재빨리 호흡을 중단했다. 암습자는
비열하게 유엽비도에 독가루를 매달아 놓았고 그녀가
후려치자 우수수 쏟아진 것이다.
"하핫.....!비파녀 초연경 오늘이 네 제삿날이다!"
그때 흑영(黑影) 하나가 앙천대소를 터뜨리며 검을
뻗어 왔다. 초연경은 호흡을 멈췄으나 검기가 뻗쳐
오자 허공에서 몸을 눕혀 피한 뒤 옥소로 흑영을 향해
무림천서의 절학 파천심공(破天心功)을 펼쳤다.
그것은 무림천서의 최고 무공으로 하늘을 놀라게
한다는 검법이었다. 비록 옥소이기는 하지만 검기는
바위를 쪼갤 정도로 엄청난 것이었다.
"으아악!"
그러자 처절한 비명을 지르며 흑영이 팔 하나를
떨어트리고 숲을 향해 쏘아져 나갔다. 초연경의
옥소에 팔이 잘라진 것이다.
흑영이 숲으로 달아나자 초연경은 눈발이 날리는
백사장에 사뿐히 내려섰다.
암습자의 팔을 자르기는 했으나 파천심공을
시전하느라고 독가루를 마셔 입속이 메스꺼웠다.
순식간에 독기운이 전신으로 퍼지는 것을 보면 극독인
모양이었다.
초연경은 모래사장 위에 가부좌를 틀고 앉았다.
운기조식으로 독을 체내에서 몰아내야 했다.
(아-----!)
그러나 그녀의 몸 속으로 틈입한 독은 빠르게
전신으로 번지고 있었다. 초연경은 독을 몰아내기가
불가능하다는 것을 깨닫고 비틀거리며 일어섰다.
그녀의 아름다운 몸에 벌써 푸른 반점이 돋아나고
있었다.
초연경은 비틀거리며 아소산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
아소산 발해 부흥군의 웅거지까지는 30리 길이었다.
살아서 그 곳까지 갈 수 있을지는 알 수 없었으나
거란의 세작들이 계서에서 활동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려야 했다.
사방은 조용했다.
하늘에서는 때마침 매화꽃 같은 눈송이들이
어지럽게 내리기 시작하고 있었다.
43. 대륙은 살아 있다.
아소산 계곡으로 오르는 길은 병풍 속의 길처럼
구불구불 이어지고 있었다. 사내들은 눈 속에서 몇
번이나 엎어지기도 하고 뒹굴기도 하며 걷는 비파녀
초연경을 조심스럽게 미행하였다. 비파녀 초연경이
발해 부흥군의 근거지에 도착하기 전에 죽지 않을까
염려되기도 했으나 비파녀 초연경은 쓰러질 때마다
끈질기게 다시 일어나서 아소산 계곡을 향해 걸어가고
있었다.
"대단한 인내력이군요."
사내 하나가 비파녀 초연경의 뒷모습을 살피며
우두머리인 듯한 사내에게 말했다. 그들은 거란군의
세작으로 목림강의 초옥에서부터 비파녀 초연경을
미행해 오고 있었다.
거란의 강묵기는 이미 1만의 철기병을 이끌고
계서에까지 와 있었다. 그러나 발해 부흥군의
근거지를 확실하게 알 수 없어 세작들로 하여금
근거지를 찾아내게 한 것이다.
그들이 발해 부흥군의 근거지만 찾아내면 곧 바로
철기병을 이끌고 공격할 준비를 갖추고 있었다.
"애착이지-----"
"애착이요?"
"자신들의 땅에 대한 애착, 나라에 대한 애착,
선조들에 대한 애착------"
비파녀 초연경이 아소산 계곡에 이른 것은 날이
저물기 시작했을 때였다. 사내들은 비파녀 초연경의
뒤를 따라 낮은 산등성에 올랐다. 그러자 멀리 첩첩
연봉들이 병풍처럼 둘러서 있는 평평한 분지가 보였고
분지 주위에 수십 채의 집들이 세워져 있는 것이
시야에 들어왔다. 분지의 일부가 산자락에 가려
전모는 보이지 않았으나 대단한 산채를 이루고 있다는
것을 한 눈에 짐작할 수 있는 규모였다.
어둑어둑한 하늘에는 여전히 매화ㄱ 같은
눈송이들이 자욱하게 날리고 있었다. 그러나 자욱한
눈보라 사이사이로 계곡의 분지에 퍼져 있는 집들에서
푸른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저녁을 짓는 연기인
모양이었다.
"음!"
사내들은 무겁게 한숨을 내쉬었다. 산채의 규모가
예상외로 큰 것에 놀라기도 했지만 아직도 발해의
부흥을 꿈꾸는 사람들이 저토록 많다는 사실이
새삼스러웠던 것이다.
"비파녀를 어떻게 할까요?"
"제거해!"
우두머리인 듯한 사내가 짧게 끊어서 말했다.
"예!"
그러자 사내들이 비파녀 초연경에게로 일제히 몸을
날렸다. 잠시후 비틀거리며 눈 쌓인 오솔길을
내려가던 비파녀 초연경의 입에서 짧은 비명이 터져
나왔다. 사내들은 비파녀 초연경의 시체를 계곡에
던져 버리고는 우두머리에게 되돌아왔다.
강묵기의 1만 철기병이 아소산 계곡으로 들이닥친
것은 비파녀 초연경이 죽은 뒤 열 하루나 지난 새벽의
일이었다. 비파녀 초연경이 죽은 날부터 내리기
시작한 눈이 사흘이나 계속 내렸고 그 뒤엔 다시 대륙
특유의 눈보라가 휘몰아치기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거란군이 겨울의 군사작전에 익숙했으나 눈보라
속에서 발해 부흥군을 토벌할 수는 없었다. 눈보라가
그치고 무릎까지 쌓인 눈이 어느 정도 녹을 때까지
기다릴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신호를 하면 제 일대가 공격한다! 부흥군들이
잠자리에서 일어나기 전에 모조리 도륙을 하라!"
강묵기는 부흥군의 진채를 완전히 포위하게 한 뒤
철기병에게 지시를 내렸다. 부흥군들에게 발각되지
않도록 말에 재갈을 물리고 말발굽에 씌운 가죽을
벗겨내자 말들이 용트림을 했다.
"제2대는 어떠한 일이 있어도 포위를 풀지 말고
도망치려는 자들을 죽여라!"
"옛!"
철기병들이 일제히 대답을 했다.
"돌격 준비!"
강묵기가 이내 군령을 내렸다.
"돌격 준비!"
"돌격 준비!"
그러자 강묵기의 부장들이 일제히 칼을 뽑아들고
복창을 했다.
"돌격 준비!"
철기병들도 일제히 칼을 뽑아들고 복창을 했다.
"돌격!"
강묵기가 동녘이 번하게 밝아오고 있는 부흥군의
진채를 노려보며 고함을 질렀다. 발해 부흥군의
진채는 새벽의 고요 속에서 깊이 잠들어 있었다.
"돌격하라!"
부장들이 먼저 산채의 고요를 깨트리며 뛰어나갔다.
그러자 철기병들이 와 하는 함성을 지르며 부장들의
뒤를 따라 부흥군의 진채를 파도처럼 덮치기
시작했다.
부흥군은 초옥에서 새벽의 단잠에 깊이 취해
있었다. 거란의 철기병들은 문짝을 활짝 열어 젖히고
미처 침상에서 일어나지도 않은 부흥군들을 도륙하기
시작했다.
"으악!"
"사람 살려!"
피가 난무하고 비명소리가 처절하게 울려 퍼졌다.
초옥에는 군사들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아소산의
분지에 진채를 마련한 부흥군은 가족들이 있는
군사들에 한해 가족들과 함께 기거하게 하고 있었다.
그러나 부흥군의 가족들이라고 해서 거란의 철기병이
눈감아 줄리 없었다. 그들은 새벽의 단잠 속에서
저승사자의 습격을 받아 처참한 몰골로 죽어갔다.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았다.
아이들은 아이들대로, 어른들은 어른들대로,
부녀자들은 부녀자들대로 거란 철기병의 잔인한 칼
아래 목이 떨어져 뒹굴고, 팔다리가 잘리거나 가슴을
찔려 죽었다.
"적이다!"
"거란의 철기병이다!"
소란한 소리에 놀라 잠에서 깨어난 위균과 여상,
안부구는 먼저 정연공주의 침상부터 찾았다.
"어찌된 일이오?"
그때쯤 정연공주도 침상에서 일어나 후다닥 옷을
주워 입고 무장을 끝낸 참이었다. 그러나
천지사방에서 들려오는 처절한 비명소리와 울음소리로
진채는 아비규환이었다.
"거란군의 습격입니다!"
여상이 사색이 된 얼굴로 대답했다.
"빨리 나가서 싸웁시다!"
정연공주는 칼을 들고 진채로 뛰어 나가려고 했다.
그러자 위균이 황급히 정연공주의 앞을 가로막았다.
"안됩니다!"
"안되다니요?"
"진채를 습격한 놈들은 거란의 철기병입니다!
그들의 손에 걸리면 살아날 수가 없습니다! 후일을
기약하기 위해 도망쳐야 합니다!"
"나를 따르던 군사들이 비참하게 죽어가고
있습니다! 그들을 버리고 어떻게 도망을 간다는
말입니까?"
"공주님이 살아야 그들의 죽음이 헛되지 않습니다.
공주님마저 저들의 손에 죽으면 우리가 지금까지 이를
갈고 피눈물을 흘리며 복국을 준비하던 일이 모두
헛수고로 돌아갑니다! 공주님께서는 반드시 살아
남으셔서 발해를 복국해야 합니다! 우리의 죽음을
헛되이 하지 마십시오!"
"맞습니다! 공주님은 살아 남으셔야 합니다!"
"공주님!"
"공주님! 저희들이 길을 열겠습니다!"
안부구와 여상도 한사코 정연공주에게 도망갈 것을
요구했다. 그 동안에도 거란의 철기병은 무인지경으로
부흥군의 진채를 누비며 발해 부흥군을 도륙하고
있었다.
"혹시나 이런 일이 닥치지 않을까 준비를 하고
있었는데 기어이 닥쳤습니다!"
위균이 정연공주를 초옥 뒤의 마굿간으로 안내했다.
정연공주는 피눈물을 흘리며 위균의 부탁대로 말에
훌쩍 올라탔다.
"공주님!"
"공주님!"
그때 철기병의 습격을 피한 수 십명의 부흥군들이
상기된 얼굴로 후다닥 달려왔다.
"잘 왔다! 우리는 공주님을 모시고 이 곳을
탈출해야 한다! 너희들이 혈로(血路)를 열어라!"
위균이 부흥군 군사들에게 지시했다.
"예!"
부흥군 군사들이 일제히 대답하고 말에 뛰어
올랐다. 사태는 다급했다. 진채 이 곳 저 곳에서는
이미 화염이 치솟고 있었다.
"가자!"
위균의 지시에 부흥군들이 칼을 뽑아들고 진채 앞의
넓은 마당으로 달려나갔다. 여상과 안부구는 말을
타고 정연공주의 옆에 붙어 섰다.
"이랴!"
정연공주도 말에게 세차게 채찍질을 해댔다.
그들은 순식간에 진채의 넓은 마당으로 달려나갔다.
진채의 넓은 마당은 이미 거란의 철기병들로 가득차
있었다.
"비켜라!"
발해의 부흥군은 정연공주의 탈출로를 뚫기 위해
칼을 휘두르며 거란의 철기병들을 덮쳤다. 거란의
철기병들은 발해의 부흥군들이 진채 뒤에서 갑자기
쏟아져 나오자 당황하여 양쪽으로 갈라졌다.
철기병들이 갈라지고 싶어 갈라진 것이 아니라 말들이
놀라서 길을 비킨 것이었다.
"이랴!"
그 틈을 놓치지 않고 정연공주는 질풍처럼 말을
달렸다. 정연공주의 말이 전속력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발해의 공주다!"
"공주를 잡아라!"
거란의 철기병들은 달아나는 말에 여자가 타고 있는
것을 발견하고 벌떼처럼 달려들었다.
"공주님을 보호해라!"
"공주님을 보호해라!"
위균은 목이 터져라 외쳐댔다. 그러자 발해의
부흥군들은 죽기를 각오하고 거란의 철기병들과 맞서
싸우기 시작했다. 위균과 안부구, 여상이 정연공주의
앞을 막는 거란의 철기병들을 닥치는대로 죽이자
그때서야 간신히 한줄기 혈로가 열렸다. 거란의
철기병의 잔혹한 창날을 피한 발해 부흥군들도
필사적으로 정연공주의 옆으로 몰려들었다. 그들은
정연공주의 옆으로 달려와야만 살아날 수 있다고
생각하고 허겁지겁 달려온 것이었으나 자연스럽게
정연공주의 보호막이 되었다.
"활을 쏴라!"
강묵기는 발해 부흥군이 대열을 이루고 탈출하는
것을 발견하고 부하들에게 활을 쏘게 했다. 그의
부하들은 활에 화살을 재고 있다가 강묵기의 명령이
떨어지자 일제히 화살을 쏘아댔다. 거란군의 화살은
탈출하는 발해 부흥군을 향해 빗발 치듯이 날아갔다.
정연공주와 발해 부흥군은 하늘을 가득히 메우고
날아오는 화살을 피하며 필사적으로 도주했다.
거란의 철기병들도 악착같이 추격을 했다. 그러나
발해 부흥군은 거란의 철기병보다 산에 더 익숙했다.
아소산에 웅거하고 해마다 수렵제를 연 탓에 아소산
곳곳이 눈에 익었다. 그들은 하늘을 빽빽하게 가린
전나무 숲으로 거란의 철기병을 유인하여 추격을
뿌리쳤다.
(아아 이제야 거란의 추격을 뿌리쳤구나------)
정연공주는 산등성이를 몇 개 넘고 10리를 족히
달린 뒤에야 고삐를 잡아당겨 말을 세웠다.
정연공주의 두 눈에서 뜨거운 눈물이 흘러내렸다.
부흥군의 신세는 처참하기 짝이 없었다. 정연공주를
따라온 부흥군은 불과 10여 기에 불과 했고 대부분이
큰 부상을 입고 있었다. 위균은 등에 화살이 세 개 나
박혀 있었고, 여상은 허벅지에서 선혈이 쉴새없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안부구는 죽었는지 보이지
않았다.
정연공주와 발해의 부흥군은 말에서 내려 상처를
치료하며 쉬었다. 그러나 그들이 한 시진도 쉬지
못했을 때 커다란 함성이 일어나며 거란군의 철기병이
몰려왔다.
"철기병이 추격해 오고 있습니다!"
정연공주는 주먹으로 눈물을 훔치고 단호하게
말했다
"이젠 더 도망갈 수도 없어요! 발해인답게 용감하게
싸우다가 죽기로 해요!"
정연공주는 보검을 뽑아들고 말에 올라타려고 했다.
"공주님!"
그러자 위균이 재빨리 정연공주의 앞을 막았다.
"억울하게 죽은 우리 부흥군의 복수를 하겠어요!"
"안됩니다!"
"난 싸우겠어요!"
"공주님! 도망쳐야 합니다!"
"어떻게 도망만 다녀요?"
정연공주의 눈에서 또 다시 눈물이 솟아나기
시작했다.
"공주님! 죄송합니다!"
그때 위균이 갑자기 정연공주의 후두부를 주먹으로
후려쳤다. 정연공주는 눈앞이 번쩍하는 것 같은
충격을 후두부에 느끼며 앞으로 꼬꾸라졌다. 그러자
위균이 재빨리 정연공주를 안아서 말에 태워 밧줄로
묶었다.
"누가 공주님을 모시고 탈출하겠는가?"
위균이 불안에 떨고 있는 부흥군들을 향해
절규하듯이 소리쳤다.
"내가 모시겠소!"
그러자 오른 쪽 허벅지에 일곱 치(寸)나 되는
도상(刀傷)을 입은 여상이 자원을 했다.
"상처가 괜찮겠소?"
"이미 죽음을 각오했소!"
"그럼 부탁하오!"
"살아서 만납시다!"
여상은 위균을 뜨거운 눈길로 마주보고 있다가
정연공주를 묶은 말에 올라탄 뒤에 채찍질을 힘껏
했다.
"이랴!"
말은 하늘이 보이지 않게 빽빽하게 전나무가 우거진
숲을 힘차게 달리기 시작했다. 말도 정연공주를
살려야 한다는 발해 부흥군의 염원을 알고 있기라도
한 듯이 전속력으로 나무와 나무 사이를 누비며
달리고 있었다.
위균은 여상과 정연공주가 탄 말이 숲에서 완전히
사라진 뒤에야 부흥군을 이끌고 말에 올라탔다. 그의
눈에서도 뜨거운 눈물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그들은
이제 점점 가까이 다가오고 있는 거란의 철기병과
싸우다가 하나도 살아남지 못하리라는 사실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대의(大義)를 위한 일이었다. 그들의
선인들이 이루었고, 그들의 선조들이 가꾸어 온 땅,
그래서 천년만년 후손들에게 물려주어야 할 광대한
영토를 그들은 거란 오랑캐에게서 찾아야 했고 그러기
위해서는 기꺼이 목숨을 바쳐야 한다는 사실을 가슴에
새기고 있었던 것이다.
44. 고원의 야생화
반도의 북단.
장백산(長白山)에서 뻗어 내린
낭림산맥(狼林山脈)의 거대한 연봉들이 신비스러운
웅자(雄姿)를 드러내고 있는 곳. 이름하여
개마고원(蓋馬高原) 일대는 태고의 원시림이
울창했다.
두운봉(頭雲峰).
사시사철 구름 위에 봉우리가 솟아 있는 험준한 산.
해발 2,487m의 거대한 영봉(靈峰)에 문득 두 개의
인영이 홀연히 나타났다. 산이 높고 거해서 구름조차
쉬어 넘는다는 두운봉에 사람 그림자가 나타난
것이다.
두 개의 인영은 산령(山嶺)에 올라서자 걸음을
멈추고 잠시 가쁜 호흡을 고르며 눈앞에 펼쳐진 산의
바다를 시린 눈빛으로 내려다보았다. 비록 한겨울이라
울창한 삼림은 나뭇잎이 모두 떨어져 앙상한 가지들만
하늘을 향해 뻗고 있었으나 즐비한 기암괴석이라던가
아름드리 거목이 어우러져 이룬 산세는 태고의 신비
그 자체였다.
(산들이 이토록 웅장하다니........)
정연공주는 자신도 모르게 숙연해졌다. 가도가도
끝이 없는 평원과 밋밋한 산세뿐인 대륙의 풍광만을
보아온 그녀에게 눈앞에 펼쳐진 산경(山景)은
경이롭기만 했다.
"공주님!"
그때 장년의 사내가 신음을 삼키듯이 낮게 입을
열었다. 그는 푸른 유삼을 입고 있었는데 죽립을
깊숙이 눌러쓰고 있었다. 그러나 죽립 아래 두 눈은
불을 뿜을 듯이 형형했다.
"네?"
정연공주가 재빨리 몸을 돌려 사내를 쳐다보았다.
장광재산맥의 허리인 아소산에서 강묵기의 철기병에게
습격을 받아 부흥군의 죽음을 각오한 희생으로 혈로를
뚫고 구사일생으로 살아난 정연공주는 또 다시 거란의
철기병들이 추격해 오자 위균에 의해 정신을 잃고
말에 태워졌었다. 정연공주가 정신을 차렸을 때는
아소산을 몇 십리 벗어난 뒤였고 어느 허름한
농가였다. 정연공주는 그때서야 자신이 살아났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러나 비참하기 짝이 없었다. 자신을 따르던
수많은 발해 부흥군들의 죽음, 위균과 안부구의
눈물겨운 희생을 생각하자 가슴이 미어지는 것
같았다. 그들이 정연공주를 추격하던 거란의
철기병들에게 죽음을 당했으리라는 것은 명약관화한
사실이었다.
정연공주와 여상은 농부들에게 상처를 치료받고
다시 그곳을 떠났다. 그들을 생각하자 정연공주는
얼굴이 어두워졌다.
"장백산 천지에서 뻗어 나온 산맥이라 기골이
장대하군요."
사내가 감회에 젖은 표정으로 말했다.
"그래요. 중원에도 아마 이만한 산은 없을 거예요."
"마을이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풍광이 이렇게 수려한데 마을이 없을라구요. 이런
곳에서 모든 시름을 잊고 살았으면 좋겠군요."
정연공주가 사내에게 꽃잎이 피어나듯 부드러운
눈빛을 실어 보내며 웃었다. 그러자 사내가 정색을
하고 말했다.
"공주님! 복국의 꿈을 잊으시면 안됩니다. 지하에
묻힌 수많은 영령(英靈)들이 공주님께서 대발해국을
복국하시기만을 손꼽아 기다리고 있을 것입니다."
사내의 말은 엄숙하기까지 했다.
정연공주는 사내의 말을 듣자 금세 쓸쓸한 표정을
띄었다. 사내의 말이 가슴을 찌른 듯 그녀의 얼굴
표정이 처연해지고 있었다.
정연공주는 그 말에 입술을 삐쭉 내밀어 반발하는
시늉을 했다.
"가요!"
정연공주가 먼저 나는 듯이 몸을 날렸다. 사내는
씁쓸한 기색으로 정연공주가 날아가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다가 곧 그 뒤를 따랐다. 두 인영은
앞서거니 뒤서거니 험준한 두운봉을 바람처럼 날아서
내려가고 있었다.
때는 A.D 930년 12월.
이 해는 대고구려 유민들이 말갈족과 함께
해동성국(海東聖國)이라는 발해국(渤海國)을 건국하여
찬란한 문화를 229년 동안 꽃피우고 거란의 요 나라에
멸망한 지 4년이 되는 해의 12월이었다.
정연공주와 앞서거니 뒤서거니 두운봉을 내려가고
있는 사내는 여상이었다. 그는 발해의 복국을
실현하기 위해 절치부심하고 있는 정연공주의 신변을
그림자처럼 따라다니며 보호하고 있었다.
그들은 이내 마을이 한 눈에 내려다보이는 송림에
이르렀다. 마을은 제법 거촌(巨村)이었다. 계곡을
건너 넓다랗게 펼쳐진 들판 저쪽 산기슭에 집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었다.
"어떻습니까?"
장영이 정연공주를 보고 물었다.
"마을이 아주 평화로워 보여요."
"공주님. 그럼 여기서 후일을 도모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장군이 좋다면 나는 상관없어요."
"공주님!"
"장군의 뜻에 따른다고 했잖아요."
"공주님은 단군님으로부터 이어지는 대고구려와
발해국의 법통을 이을 유일한 혈손입니다! 내 뜻에
따르는 것이 아니라 공주님의 기개로 복국을
실현시켜야 합니다."
"아무튼 칼을 숨기고 촌장부터 만나요."
정연공주가 먼저 등에 맨 보따리를 풀러 검을
숨겼다. 그러자 여상도 보따리를 풀러 검을 숨겼다.
"가시지요."
여상이 계곡을 향해 가볍게 몸을 날렸다. 그러자
여상의 몸이 일장 깊이는 족히 될만한 청계(淸溪)를
향해 날아갔다. 여상은 청계에 이르자 가볍게 물을 찬
뒤에 건너편 바위 위에 사뿐히 내려섰다.
정연공주도 바람을 가르는 듯한 소리를 내며 청계를
건넜다.
촌장집은 마을 가장 안쪽에 있었다.
"소인은 요동(遼東)에서 온 발해 유민으로
여상이라고 합니다."
여상은 촌장에게 공손히 인사를 했다.
"저는 이 마을의 촌장으로 오(烏)씨 성을 쓰고
있습니다. 마을에 오씨들이 많아서 오가촌이라고
부릅니다."
촌장은 허연 수염을 쓰다듬으며 그들을 반갑게
맞이했다. 촌장은 그의 둘째 아들 내외, 그리고
부모를 일찍 여읜 어린 손자와 함께 살고 있었다.
손자는 큰아들 내외의 아이였다. 그러나 큰아들
내외는 병으로 죽고 둘째 아들 내외가 촌장을 모시고
살고 있었다.
오가촌이 비록 두운봉의 심산유곡에 있는
마을이었으나 4년 전만해도 발해의 영토에 속해
있었다. 행정상으로는 능이현(能耳縣:현은 발해의
행정제도로 현재의 郡에 해당된다)
노암리(櫓岩里)였다. 발해국의 남경남해부에 소속되어
있었다.
"이 아이는 소인의 동생입니다."
여상은 촌장에게 정연공주를 여동생으로 소개했다.
신분을 숨기기 위해 거짓말을 한 것이다.
"어르신을 뵙습니다."
정연공주도 공손히 인사를 했다.
"두 분의 모습이 참으로 아름답습니다."
"대륙에서 거란인들의 핍박이 심해 이 곳까지 오게
되었습니다. 이 곳에서 여생을 의탁해도
괜찮겠습니까?"
여상은 조심스럽게 촌장의 눈치를 살폈다.
"우리도 발해인입니다. 비록 오랑캐에게 유린을
당했으나 어찌 동족을 마다하겠습니까? 천년 만년
함께 사시지요."
오가촌 촌장은 그들에게 저녁을 대접한 뒤 밤에는
마을 사람들을 불러 술자리를 열어주었다. 여상과
정연공주를 마을 사람들에게 소개시키는 자리였다.
그리고 술자리가 끝나자 초옥 한 채까지 마련해
주었다. 1년 전까지 노부부가 살았으나 약초를 캐던
바깥 노인이 호변(虎變)을 당해 죽은 뒤 안노인까지
시름시름 앓다가 죽어 비어 있다는 집이었다.
방은 두 칸이었다.
북방의 집답게 방에는 침상이 있었고 침상에는
모피까지 깔려 있었다.
이튿날 신새벽에 눈을 뜬 정연공주는 마을을 살피기
위해 초옥을 나와 계곡으로 향하다가 자신도 모르게
걸음을 우뚝 멈췄다.
"아!"
날이 번하게 밝아오는 계곡에는 상의를 벗은 한
사내가 차가운 물 속에 온몸을 잠그고 있었다. 물
속에서 상체만 내밀고 있었으나 사내는 월하촌에서
그녀를 버리고 떠나간 장영 장군이 분명했다.
"장군!"
"공주님!"
장영도 해연이 놀란 기색이었다. 계곡에서 수련을
하다가 말고 후다닥 나와서 정연공주 앞에 무릎을
끓었다.
"예를 차릴 필요 없어요."
정연공주는 장영의 손을 잡아 일으켰다. 그리고는
자신을 억제하지 못하고 장영의 가슴에 안겨 엉엉
울었다. 장영은 우두커니 허공만 쳐다보고 있었다.
정연공주는 장영을 초옥으로 데리고 와서 여상을
소개했다.
"장군님을 뵙습니다."
여상은 명성이 쟁쟁한 장영에게 공손히 절을 했다.
"고생이 많았소!"
장영은 착잡한 얼굴로 여상의 인사를 받았다.
정연공주는 자신이 월하촌에서 군사를 일으킨
이야기며, 강묵기의 철기병에게 염주에서 쫓겨난 일과
아소산에서 구사일생으로 살아난 이야기를 모두
장영에게 하였다. 장영도 월하촌을 떠나 거란과
몽골의 대초원을 여행하고 돌아온 이야기를 했다.
그리고 거란이 욱일승천의 기세에 있어서 지금은
발해를 부흥하는 시기가 아니라고 말했다.
"그럼 언제나 부흥을 할 수 있습니까?"
여상이 안타까운 얼굴로 물었다.
"적어도 50년은 지나야 할 것이오."
"어째서 50년이 지나야 합니까?"
"한 시대가 지나야 하기 때문이오! 지금은 야율
아보기가 죽었으나 야율 덕광이 강력한 통치를 하고
있는 시기요. 중국도 혼란에 빠져 있어 우리에게는
불리하오!"
"무슨 말씀이신지 잘 모르겠습니다. 깨우쳐
주십시오!"
"거란은 요라는 대제국을 건설하여 중원까지
진출하려 하고 있소. 중원에 송(宋)이라는 나라가
일어났으나 거란의 위세에 옛날의 당 나라만 못하오.
오히려 송 나라가 요에 조공을 바치고 있는 실정이오!
우리가 발해를 부흥하려면 돌궐과 중원이 강력해져
거란을 괴롭혀야 하오! 우리는 그 틈을 노려 돌궐이나
중원과 연합하여야만 발해를 부흥할 수 있을 것이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대륙에는 수많은 유목민족들이 있소. 크게는 말갈,
돌궐, 거란이 있으나 자세히 따지면 수백 수천 개의
부족이 있소. 이들은 대개 칸이라는 족장에 의해
지도되는데 각 부족이 그 칸의 영도아래 독립적으로
살아가고 있소! 민족의 사활이 걸린 큰 전쟁이
일어나면 대칸들이 협의하여 군사를 일으키지만
끊임없이 자신들의 이익에 따라 이합집산을 하고
있소. 우리는 이들과 손을 잡아야 하오!"
장영의 말에 여상과 정연공주는 자신들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거렸다. 장영의 말은 이로가 정연했다.
발해 유민들만으로 이미 대제국을 건설한 거란과 맞서
싸운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유목민이 많은 초원과 대륙의 패자가 되는 것은 수
많은 칸을 어떻게 이용하느냐에 따라 달라진다.
힘으로 칸을 누루지 못하면 초원의 생리에 따라
이들과 동맹을 맺어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개성이
강한 각 부족과 동맹을 맺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닐 것이다.
그때 촌장집에서 아침을 차려놓고 그들을 초대했다.
그들은 촌장집에 가서 아침 식사를 한 뒤에 마을
사람들과 함께 수렵에 참가했다. 대륙과 달리
오가촌만 해도 농사가 생업이었으나 겨울이 닥치면
그들은 오랜 전통인 수렵을 멀리하지 않았다.
수렵이 끝난 것은 해질 무렵이었다.
오가촌은 수렵에서 잡은 멧돼지로 잔치를 벌렸다.
주연이 무르익고 곡식으로 담은 탁주가 여러동이째
비워졌다. 초원에서 마시는 마유주(馬乳酒)와는 전혀
다른 맛이었다.
장영은 모처럼 대취하여 잠자리에 들었다. 잠결인지
꿈결인지 장영은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여체들에게 둘러싸여 있었다. 여체의 감촉이 하체가
뻐근하도록 부드러웠다. 장영이 어찌어찌하여 눈을
뜨자 꿈이었다. 사방은 칠흑처럼 캄캄했고 문밖에서는
마른 나뭇잎을 때리는 스산한 겨울비소리가 들리고
있었다.
(내가 이런 꿈을 꾸다니-----!)
장영은 눈을 뜨고 우두커니 천정을 쳐다보았다.
아내가 죽은 지 얼마나 된 것일까. 아내가 죽은 뒤 단
한 번도 여자를 가까이 하지 않았으므로 여체가
그리워진 것일까. 장영은 문득 발해국의 유명한 시인
양태사(揚泰師)의 시 한귀절이 떠올랐다. <밤에
다듬이 소리 듣고>라는 제목의 시였다.
서릿 기운 가득한 하늘에 달빛 비치니 은하수도
밝은데
나그네 돌아갈 일 생각하니 감회가 새롭네
홀로 앉아 지새는 긴긴 밤 근심에 젖어 마음 아픈데
홀연히 이웃집 아낙네 다듬이질 소리 들리누나
바람결에 그 소리 끊기는 듯 이어지는 듯
밤 깊어 별빛 낮은데 잠시도 쉬지 않네
나라 떠나와서 아무 소식 듣지 못하더니
이제 타향에서 고향의 소리를 듣는구나
방망이가 무거운지 가벼운지
다듬이돌 평평한지 아닌지 알 수가 없구나
멀리 타국에서 가녀린 몸에
땀 흘리는 모습 측은히 여기며
밤 깊도록 옥 같은 팔로 다듬이질 하는 모습 보는
듯하네
나그네에게 따뜻한 옷 지어 보내려고 하는 일이지만
그대 있는 방 찬 것이 걱정이구려
비록 예의 잊어 묻기는 어렵지만
속절없이 원망하는 그대 마음 모르기야 하겠는가
먼 이역에 가있네 그래도 새로 사귄 사람 없지
한 마음이기를 원하네 그러면서 길게 탄식하네
이때 홀로 규중으로부터 탄식 소리 들리니
이 밤
그 누가 아름다운 눈동자에 눈물 고이는 까닭
알겠는가
생각하고 또 생각하네
마음은 이미 그대에게 젖어 있는데
또 들리누나 괴로운 이 마음
차라리 잠들어 꿈 속에서 찾아 가고 싶지만
다만 근심으로 잠 못드누나
양태사가 일본에 사신으로 갔다가 이웃에서 들려
오는 다듬이질 소리에 가슴이 뭉클하여 고향에 있는
부인을 생각하며 썼다는 시였다. 서정성과 부인에
대한 애틋한 사랑으로 발해인들의 사랑을 받고 있는
시였다.
그때 밖에서 얕은 기침소리가 들렸다. 장영은
자신이 잘못들은 것이 아닐까하여 문밖의 동정에 바짝
귀를 기울였다.
"장군님!"
정연공주였다.
"공주님!"
장영은 침상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때 문이 스르르
열리며 정연공주가 조용히 방으로 들어섰다.
"야심한데 어쩐 일이십니까?"
"겨울비가 쓸쓸하게 내리고 있는 탓인지 잠이
오지를 않아요."
"그럼 불을 켜겠습니다."
장영은 화로를 뒤적거려 불씨를 찾아 등잔에 불을
붙이려고 했다.
"켜지 마세요."
그러자 정연공주가 장영을 막았다.
"공주님!"
"장군!"
"-------"
"제 몸을 장군께 바치겠어요. 당돌하다고 생각하지
마시고 받아주세요!"
"공주님! 왜 이러십니까?"
"장군을 사모하고 있어요!"
정연공주가 입술을 깨물며 서 있다가 장영의
가슴으로 무너지듯이 안겨왔다. 장영은 얼떨결에
정연공주를 받아 안았다.
"공주님! 안됩니다!"
장영은 다급하게 외쳤다. 정연공주는 몸부림을
치듯이 장영의 가슴팍을 파고들고 있었다.
"아무 말씀 마세요."
"공주님!"
"저는 장군을 사랑해요."
"이러시면 안됩니다. 공주님은 고귀한 신분입니다!"
장영은 정연공주를 떼어내려고 했다. 그러나
정연공주는 그럴수록 더욱 완강하게 장영을 향해
달려들고 있었다. 정연공주의 뭉클한 여체가 그를
할수록 장영은 두 다리에 힘이 빠지고 있는 듯한
기분을 느꼈다.
"공주님!"
장영은 정연공주를 으스러지도록 껴안았다.
밖에는 아직도 봄비가 촉촉하게 내리고 있었다.
(난 장군을 사랑해요. 이제는 더 이상 견딜 수가
없어요.)
정연공주는 입속으로 중얼거리며 자신의 육체를
장영에게 내던지고 있었다. 당돌하고 어이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고육지책이었다.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무정한 이 사내는 결코 나의 남자가 되지 않을
것이다........
정연공주는 그런 생각을 하면서 점점 몸이 더워져
오는 것을 느꼈다.
해(年)가 바뀌었다.
정연공주가 장영을 만난 지 4개월. 겨울이 지나고
봄이 오자 오가촌을 떠나는 한 사내가 있었다.
장영이었다.
장영은 황야봉(皇倻峰:해발 1,873m)에 올라서자
우울한 눈빛으로 저 멀리 흰 띠처럼 흐르고 있는
이승강을 내려다보았다. 이승강은 이승령(해발
1,851m) 앞강으로 장진강과 부전강이 합류하여
압록강으로 흘러드는 지류였다.
바닥이 들여다보일 정도로 맑은 강에는 물고기들이
자맥질을 하고 물가에는 연두빛으로 물이 오른
버들가지가 실바람에 하늘거리고 있었다.
4월이었다. 개마고원은 이제서야 봄이 오고 있었다.
그만해도 북쪽인 탓도 있지만 지대가 고원(高原)인
까닭이었다. 개마고원은 전 지역이 해발 1천m에서
2천m나 되었기 때문에 봄은 늦게 오고 겨울이 유난히
빨리 닥쳤다.
여름에는 우기가 오랫동안 계속되어 강우량이
유난히 많고 겨울에는 혹한이 몰아치는가 하면 눈이
한 길씩 쌓이곤 했다. 그렇게 쌓인 눈은 3, 4월이
지나서야 녹기 시작하고 9, 10월이 되면 또 다시 눈이
내렸다.
그 일대에서 가장 높은 두운봉에 올라서서 남쪽을
바라보면 푸른 동해 바다가 아득하게 하늘과 맞닿아
있고 북쪽을 바라보면 구름 위에 장백산(白頭山)
영봉이 아스라히 보였다. 서쪽에는 한 폭의 아름다운
선경(仙境) 같은 부전고원(赴戰高原)이 펼쳐져
있었다.
개마고원에는 후치령(후치령:해발 1,335m),
백산(白山:2,475m),검덕산(儉德山:2,150m),
대덕산(大德山), 서인령(西麟嶺) 운수령(雲水嶺),
능이령(能耳嶺:), 청산령(晴山嶺:2,084m) 등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산들과 산봉우리들이 있었다.
그 뿐 아니라 개마고원에는 고산식물이 많아 화초도
기화이초를 피우고 밀림과 계곡은 한없이 깊고
험준했다. 천리송이 하늘을 덮고 있는가 하면
이깔나무, 감비나무, 붕비나무, 자작나무, 황철나무가
빽빽하게 우거져 있었다.
그러나 마을이 있는 노암리 오가촌은 다른 촌락들과
다를 바가 없었다. 봄이면 살구꽃, 복사꽃이 집집마다
흐드러지게 피고 산중턱에는 벚꽃이 하얗게 피어
바람이 불 때마다 진한 꽃향기를 마을로 날려보냈다.
호수와 계곡에는 고산지대 특유의 민물고기들이
살았다. 물이 맑아야만 사는 청살어, 뜻쟁이, 존개를
비롯해 몸길이가 4, 5자나 되는 자치도 서식하고
있었다. 자치는 비늘이 검은 점에 붉은 점이 섞여
있는데 맛은 닭고기 같았다.
농사는 보리, 감자, 조, 콩 따위를 심었는데 드물게
밭벼를 심어 쌀 농사를 짓는 사람들도 있었다.
장영은 오가촌이 마음에 들었다.
오가촌은 한 폭의 그림 같은 마을이었다. 이런
마을에서 정연공주와 함께 평생을 산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이 얼핏 장영의 뇌리를 스치고
있었다. 그러자 가슴이 묵직하게 저려왔다.
정연공주는 발해의 부흥을 원하고 있었다.
정연공주가 스스로 자신의 청백지신을 장영에게
맡긴 것도 오로지 발해의 부흥이라는 원대한 목표가
있기 때문이었을 것이었다.
(그렇다! 나는 이제 발해를 부흥하여 정연공주에게
바치겠다!)
장영은 단호한 결심을 하고 오가촌을 떠나고 있는
참이었다. 그것은 10년이 걸릴지 20년이 걸릴지 알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반드시 이룩해야 할 원대한
야망이었다.
장영은 걸음을 서두르기 시작했다.
하늘이 점점 낮게 가라앉기 시작하고 있었다.
잘못하면 이승강을 건너기도 전에 비를 만나게 될 것
같았다.
장영의 예상대로였다.
장영이 이승령 영마루에 올라서자 성긴 빗발이
흩뿌리기 시작했다. 장영은 죽립을 깊숙이 눌러썼다.
빗발은 나뭇잎을 때리며 음산하게 날리고 있었다.
장영이 이승강 나루에 도착한 것은 캄캄한
밤중이었다. 장영은 나루의 인가를 찾아 들어가 쉬고
이튿날 이승강을 건넜다.장영이 압록강을 건너고
대륙을 횡단하여 흑수(黑龍江) 유역에 도착한 것은
초원에도 봄이 완연하게 무르익었을 때였다.
................................................
1) 개마고원에 대한 묘사는 게릴라 유격대장
김봉(金峰)의 수기인 <불타는 개마고원>에서
참고했다. 자유사(自由社) 발행으로 출판되어 있다.
2) 양태사의 시는 송기호 저(著) 도서출판 솔의
<발해를 찾아서>에서 인용했다.
45. 풍운의 대륙
흑수의 도도한 물줄기를 따라 내려가며 끝없이
펼쳐진 대초원, 흑수말갈인들이 '신성한 땅'이라고
부르는 쑤이화( 化) 초원에 요란한 말발굽소리와
함께 갑옷과 투구가 햇볕에 번쩍이는 일단의 병사들이
나타났다. 흑수 유역에 흩어져 양을 방목하던
흑수말갈인들은 갑자기 나타난 병사들에 기겁을 하고
놀라 달아나기 시작했다. 병사들의 행렬은 위풍이
당당했다. 기치창검은 하늘을 찌를 듯 했고 병사들이
울리는 취악(吹奏)소리는 초원을 진동하고 있었다.
흑수말갈족의 하나인 나이만(乃 )족의 젊은 족장
걸목아(乞木兒)는 전령(傳令)의 다급한 보고에
전사(戰士)들과 함께 재빨리 말을 타고 초원으로
달려갔다.
"요의 황제다!"
"요의 황제가 오고 있어!"
언덕에서 기치창검이 삼엄한 병사들의 행군을
바라보던 전사들이 불안한 기색으로 수군거렸다.
기치창검이 삼엄한 병사들은 요 황제의 행군을 알리는
선봉대가 분명해 보였다. 갑옷이 번쩍거리는 것도
그렇고 색색의 깃발이 청천하늘에 나부끼고 있는 것도
요의 황제가 행군을 하고 있다는 표시였다.
요의 선봉대 뒤에는 요가 자랑하는 철기병들이
거대한 군단을 이루고 달려오고 그 뒤에는 요 황제의
장막이 분명한 하얀 유르타가 오고 있었다.
"대칸에게 알려야 해!"
"대칸에게 알립시다!"
흑수말갈인들은 얼굴빛이 하얗게 질린 채 허겁지겁
말머리를 돌려 대칸의 동영지(冬營地)로 달리기
시작했다. 흑수말갈의 대칸은 흑수말갈족 중 제일 큰
부족인 아노자(阿魯刺)족의 찰자적아(札刺赤兒)였다.
찰자적아는 거란의 황제가 대규모의 기마군단을
끌고 오고 있다는 소식에 긴급하게 부족회의를
열었다.
"요의 황제가 흑수까지 온 이유는 무엇이라고
하는가?"
흑수말갈의 대칸 찰자적아는 각 부족을 거느리고
있는 칸들을 돌아보며 침중한 얼굴로 물었다.
"사냥을 하기 위해서라고 합니다."
요의 기마군단이 자신들의 동영지를 지나가는 것을
방관만 하고 있다가 허겁지겁 칸들의 회의에 달려온
나이만족의 칸 걸목아가 재빨리 대답했다.
"사냥? 단순히 사냥을 하기 위해서 여기까지 왔다는
말인가?"
"그렇습니다."
"군사는 얼마나 되는가?"
"5만은 될 것 같습니다."
"5만의 군사를 이끌고 사냥을 해?"
"우리를 공격할 의도는 없는 것 같습니다."
"어째서?"
"그들의 행군 속도가 너무 느립니다."
그때 전방을 정찰하고 있던 대칸 찰자적아의
숙위여전사(宿衛女戰士) 우보금(宇寶錦)이 황급히
달려왔다. 우보금은 찰자적아의 어머니가 데리고 온
여동생으로 나이만족의 전사에게 시집을 갔으나
남편이 죽은 뒤 찰자적아에게 돌아와 있었다.
우보금은 탄력 있는 육체를 갖고 있는 불과 27세의
과부라 초원의 전사들에게 열렬한 구애를 받고
있었다. 그러나 우보금은 전사들의 구애를 거절하고
찰자적아를 그림자처럼 따라다니고 있었다.
아노자족의 전사들에게는 우보금이 찰자적아의
여자라는 소문이 파다했다.
"대칸께 아룁니다!"
"무슨 일이냐?"
"요 황제의 행정관이 오고 있습니다."
"행정관?"
흑수말갈의 부족장들은 우보금의 보고에 의아한
얼굴로 서로 마주보며 웅성거렸다. 그러나 그들이
놀라고 있을 사이도 없이 요란한 말발굽소리와 함께
요의 행정관이 들이닥쳤다.
"요 황제폐하의 전언이오! 영명하신 대요제국
황제폐하께서는 흑수말갈의 대추장 찰자적아 칸께
양1만 두, 말 1천 필, 비단 3백 단을 하사하신다는
전갈이오. 찰자적아 칸께서 황제폐하를
친영(親迎)하여 수수하라는 전언이오!"
요의 행정관의 전언은 뜻밖에 요의 황제가 겨울을
맞이하여 어려움을 겪고 있을 찰자적아에게 물자를
공급한다는 내용이었다. 찰자적아의 얼굴에 안도하는
빛이 스치고 부족장들의 얼굴에도 희색이 감돌았다.
요의 행정관이 돌아가자 그들은 요의 황제를
영접하기로 결론을 내렸다. 그러나 조심을 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그들은 각 부족의 전사들을 소집한
뒤에 요의 황제가 둔영을 하고 있는 쑤이화 초원으로
달려갔다.
흑수말갈은 강인한 민족이었다. 발해의 중흥기인
대무예왕시절에 발해에 예속되어 1백년 남짓 발해의
지배를 받았으나 그 후엔 독자적인 활동을 하고
있었다. 거란은 흑수말갈이 강인한 민족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병합하는 것보다 회유하는 정책을
써왔다.
요의 태종 야율 덕광이 대규모의 군사들을 이끌고
쑤이화의 초원에 나타난 것은 이들을 회유하여 발해의
부흥군들을 공격하기 위해서였다. 지난 10년 남짓
발해의 유민들은 잠잠했으나 최근에 솔빈부 일대에서
대규모의 발해 부흥군이 일어나 요를 공격할 것이라는
세작들의 보고가 들어왔던 것이다. 게다가 발해
부흥군을 이끌고 있는 것은 발해 최고의 명장이라는
전 북우위 대장군 장영이라는 장군이었다. 그는 이미
3만이나 되는 대규모의 군사를 거느리고 있었다.
이들이 초원의 전사들과 연합하면 순식간에 10만으로
늘어날 수도 있었다.
양들은 초원 위에 구름처럼 흩어져 있었다. 요의
태종 야율 덕광은 호화로운 유르타에서 나와 말을
타고 작은 언덕에 올라 초원을 굽어보았다. 초원에도
가을이 짙어 오는지 풀밭이 누르스름한 빛을 띠어가고
있었다. 초원에 흩어져 사는 유목민들이 동영(冬營)을
준비해야 하는 계절이었다.
"흑수말갈의 대칸이 오고 있소?"
야율 덕광은 옆에 서 있는 동란국 대장군 안단을
힐끗 쏘아보며 물었다. 안단은 야율 아보기를 따라
발해를 멸망시킨 후 동란국에 계속 머물러 있었다.
야율 덕광이 동란국왕 인황왕을 견제하기 위해 야율
우지와 함께 동란국에 심어놓은 심복이었다.
"아직 보이지 않습니다."
안단이 턱 수염을 가지런히 쓰다듬으며 대답했다.
안단은 거란인들과 달리 턱수염을 기르고 있었다.
야율 아보기를 따라 수많은 전쟁터를 누빌 때는
구레나웃만 길렀으나 나이가 들면서 턱수염까지 기른
것이다.
바람에 나부끼는 은빛 수염은 10만 군사를 거느리는
대장군으로서의 위엄이 당당해 보였다.
"대칸의 휘하에는 전사가 얼마나 되는가?"
"10만이 가깝다고 합니다."
"10만이나 된다고?"
야율 덕광이 어두운 얼굴로 물었다.
"그렇습니다."
안단의 대답은 간결했다.
"흑수의 말갈인들이 그토록 많은가?"
"평소에는 가축을 기르기 위해 목초지대를 따라
이동을 하기 때문에 불과 수천 명밖에 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전쟁이 일어나면 흑수의 크고 작은 말갈부족이
대칸의 휘하로 몰려들기 때문에 전사만 10만이
넘습니다. 거기에 전사들의 가족까지 합하면 대칸이
있는 야영지(野營地)는 순식간에 수십만이 넘는
유목도시로 변합니다."
"그렇겠지."
야율 덕광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필요에 따라
거대한 유목도시가 생겨나는 것은 비단 흑수말갈의
야영지만이 아니었다. 대부분이 유목민족인 돌궐이나
거란도 목초를 따라 이동을 하다가 대칸의 명령이
떨어지면 순식간에 대칸의 야영지로 몰려들기 때문에
거대한 유목도시가 눈 깜짝할 순간에 생겨나는
것이다.
유목도시의 특징은 건물이 아니라 사람이었다.
중국에서 때때로 수십만 군사를 일으켜 유목민족을
공격해도 성과를 거둘 수 없는 것은 그들이 언제나
구름처럼 모였다가 구름처럼 흩어지기 때문이었다.
일반적인 전쟁이나 정복은 도시를 파괴하거나 도시에
군사를 주둔시켜 지배를 할 수 있으나 유목도시는
파괴할 것도 없고 지배할 것도 없는 것이다. 중국이
전쟁에서 승리하여 기껏 빼앗아 갈 수 있는 것은 양과
말 같은 가축이요. 파괴하는 것은 유르타와
파오뿐이었다.
그러나 유목민들은 목초지대를 따라 이동을 하여
금방 재기를 하곤 했다. 그리하여 중국의 역대
제왕들은 중국 북쪽의 방대한 유목민들을 공격하는
것보다 회유하는 정책을 주로 써왔고 반발하는
유목민들을 다른 유목민들을 이용하여 제거하는
방법을 썼다. 이이제이(以夷制夷)라는 말이 생겨난
것도 그 때문이었다.
"찰자적아가 오고 있습니다."
안단이 야율 덕광의 옆에 바짝 다가와 속삭였다.
지축을 울리는 말발굽소리와 함께 초원에 수많은
전사들의 무리가 횡대로 달려오고 있었다. 평소에는
양을 치는 초원의 목동들이지만 전시에는 용사로
변하는 초원의 전사들이었다.
찰자적아는 초원의 전사들을 멈추게 하고 말에서
내려 유르타로 뚜벅뚜벅 다가오기 시작했다.
찰자적아를 호위하고 있는 것은 걸목아였다.
"1만은 되겠습니다."
안단이 야율 덕광에게 낮게 속삭였다. 야율 덕광은
아무 대꾸도 하지 않고 어영(御營)인 유르타로 돌아가
옥좌에 앉았다. 유르타는 앞이 터져 있어서
찰자적아와 걸목아가 오고 있는 것이 한 눈에 보였다.
"흑수말갈의 대칸 찰자적아가 황제폐하를
뵈옵니다!"
이내 찰자적아가 유르타 앞에 와서 우렁우렁한
목소리로 외치고 무릎을 꿇었다.
"어서오시오 대칸!"
야율 덕광은 옥좌에서 일어나 찰자적아를 정중하게
맞아들여 옆에 앉게 하고 형제로써 대우하며 환담을
했다. 그리고 다른 족장들까지 불러 크게 주연을
베풀었다. 뿐만 아니라 찰자적아가 거느린 초원의
전사들에게 술과 고기를 하사하여 마음껏 즐기게
했다. 주연은 이튿날까지 계속되었는데 흑수말갈의
족장들에게는 요에서 데리고 온 아름다운 미희들이
시중을 들게 하였다.
찰자적아는 야율 덕광의 환대에 감읍하였다. 게다가
양 1만 마리, 말 1천 필, 비단 3백 필까지 하사하여
찰자적아를 기쁘게 하였다.
그러나 그러한 물품에는 대가가 따르고 있었다.
야율 덕광은 사흘에 걸친 주연이 끝나자 흑수말갈의
대칸 찰자적아에게 솔빈부의 발해 부흥군을
공격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삼가 명을 따르겠습니다."
찰자적아는 앞 뒤 생각할 겨를도 없이 혼쾌히
대답을 했다. 받은 것이 있으면 주어야 하는 것이
당연한 도리라고 생각하여 선뜻 대답했으나 발해
부흥군들을 공격하려고 초원의 전사들을 소집하려고
하자 여러 곳에서 반발이 일어났다. 발해 부흥군과
아무 원수진 일도 없는데 공연히 군사들을 동원하여
그들의 원한을 살 필요가 없다는 것이 반발 이유였다.
"요 황제의 지시다! 우리가 요 황제 지시를
이행하지 않으면 요에 대항하는 것과 무엇이 다른가?
요 황제는 군사를 일으켜 반드시 우리를 공격할
것이다! 발해 부흥군이 두려운가? 요 황제가
두려운가?"
찰자적아는 반발하는 부족들을 이끌고 솔빈부로
쳐들어갔다. 찰자적아가 소집한 초원의 전사들은
5만이나 되었다. 그러나 그들은 미리 눈치를 채고
매복하고 있던 발해 부흥군에게 걸려 비참한 패배를
당하고 말았다.
"흑수의 오랑캐들아! 솔빈이 어디라고 감히
넘보느냐?"
찰자적아뿐 아니라 초원의 전사들의 간담을
서늘하게 한 것은 발해 부흥군의 장영 장군이었다.
장영 장군은 새카만 윤기가 흐르는 흑마를 타고 동에
번쩍 서에 번쩍 하며 초원의 전사들을 닥치는대로
도륙했다. 장영 장군의 긴 창이 번쩍일 때마다 초원의
전사들은 목이 달아나고 팔다리가 잘린 시체가 되어
뒹굴었다.
무시무시한 사내였다.
초원의 전사들은 그의 이름만 들어도 벌벌 떨었다.
찰자적아는 계략을 써서 발해 부흥군을 공격하기로
했다. 그 계략은 우보금의 머리에서 나온 계략이기도
했다. 우보금은 침상에서 찰자적아와 운우지정을 나눈
뒤 찰자적아가 잠을 이루지 못하고 엎치락뒤치락하자
장영을 암살할 계획을 세운 것이다.
솔빈부에 둔영하고 있는 장영에게 흑수말갈의
타르쿤(江中)족인 1백명의 유목민들이 양떼를 이끌고
의탁을 청해온 것은 그로부터 사흘 뒤의 일이었다.
스스로를 타르쿤족의 칸 어가몽(魚可蒙)의 아내라고
밝힌 우보금은 어가몽이 사냥을 떠난 틈을 타서
이웃의 부족인 쿠추(古出)족의 칸 오소몽(烏素蒙)이
핍박을 하고 있으니 남편이 사냥에서 돌아올 때까지만
보호해 달라고 했던 것이다. 장영은 우보금의 말을
듣고 쾌히 허락했다.
우보금은 교태가 넘치는 미인이었다.
머리에는 사슴 가죽으로 만든 모자를 썼고, 옷은
유목민 특유의 복장인 저고리와 바지를 입었으나
호랑이 가죽으로 만든 조끼를 입었고 발에는 가죽으로
만든 신발을 신고 있었다. 우보금의 신분이 예사롭지
않다는 것을 말해 주는 차림이었다. 다만 허리에
반월도(半月刀)를 차고 있어서 유목민이라는 것을
증명하고 있었다.
우보금이 발해 부흥군의 둔영으로 온지 이틀 뒤
쿠추족의 전사 1천여 기가 솔빈부까지 나타나 장영의
발해 부흥군을 정찰하였다. 그러나 발해 부흥군이
3만이나 되는 대규모의 군단이라 겁을 먹었는지
정찰만 하다가는 돌아갔다. 우보금은 쿠추족이
나타나자 부족들을 이끌고 장영의 군막 옆에 파오를
쳤다. 장영의 부장들이 우보금을 장영의 군막에서
멀리 떨어지게 하려고 하였으나 우보금은 쿠추족이
자객을 보내 자신을 해칠지 모른다고 하면서 한사코
장영의 군막 옆에만 파오를 치려고 했다. 우보금과
부장들이 옥신각신하는 소리가 들리자 장영이
군막에서 나와 부장들을 제지했다. 결국 우보금은
장영의 군막 옆에 1백 명의 부족들을 이끌고 둔영하게
되었다.
46. 사랑이 피어날 때
하늘은 구름 한 점없이 푸르기만 했다.
정연공주는 채마밭에서 푸성귀를 뜯다가 눈이
시리게 푸른 하늘을 쳐다보았다. 딸이 책을 읽는
소리가 들리지 않고 있었다. 딸도 더위에 지친
것일까. 정연공주는 푸성귀를 담은 소쿠리를 들고
집으로 돌아가기 시작했다. 사위가 물 속처럼 조용한
7월이었다. 어느 집에선가 낮닭이 울고 그 소리에
놀랐는지 영고네 집에서 누렁이가 컹컹대고 짖어댔다.
(누가 오나?)
정연공주는 걸음을 멈추고 마을 어귀를
눈어림하였다. 정연공주의 눈에 정인을 기다리는
그리움이 절절하게 묻어나고 있었다. 그러나 희디흰
햇살이 난무하는 마을 어귀는 인적이 완전히 끊어져
있었다. 더위와 가뭄 탓일 터였다. 뇌성을 동반한 7월
장마가 시작될 만도 한데 빗방울 한 번 떨어지지 않는
가뭄이 한 달째 계속되고 있었다. 밭작물이 시들시들
말라죽고 건조한 대기에 숨이 턱턱 막혔다.
(이 더위에 누가 올려구.......)
정연공주는 시름에 젖은 얼굴로 걸음을 재촉하기
시작했다. 싸리나무 울타리를 돌자 마루에서 딸
여진(女眞)이 책을 읽는 소리가 다시 들리기
시작했다. 천부비록의 별책격인 천무비록이었다.
천부비록은 모두 15권으로 한인들이 대륙에 이동을
하여 나라를 세우고 다스린 이야기가 상세하게
서술되어 있었다.
......천제(天帝)의 명을 받들어 이 책을 후세에
남긴다.
천부비록의 첫장엔 그렇게 씌어 있었다.
정연공주는 처음에 그 책을 읽고 무슨 뜻인지 알 수
없어 고개를 갸우뚱했다.
......우리 겨레는 하늘에서 내려온 천손(天孫)으로
하늘의 원기를 타고났으나 사람들이 어디서 나왔는지
근본을 모르고 뿌리를 알지 못해 중화(中華)가 큰
민족인 줄 알고 그를 숭배하는 사조가 만연한지라
천제께서 이를 개탄하시며 뿌리 찾을 일이 시급하다,
우리의 상고(上古)를 낱낱이 기록하여 대대손손 알게
하라 하시니 황송하여 몸둘 바를 모르겠다. 이제
상고의 기록들을 찾아 적노니 하나도 거짓이 없고
보탬이 없노라. 무릇 이 책을 세세에 전하라......
정연공주는 그때서야 그 말이 천부비록을 남긴
사람이 천부비록을 남기게 된 사연을 적은 것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천부비록은 역사를 기록한
책이었다.
정연공주는 싸리나무 울타리 옆에 멈춰 서서 딸이
천무비록을 읽는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천무비록은 천부비록의 14권과 15권째의 책이었다.
천부비록이 민족의 상고사에 대한 기록인데 반해
천무비록은 각종 군사(軍事)에 관한 기록이었다.
군사의 양성, 군대의 진법(陣法), 무예를 연마하는
비법들이 상세하게 적혀 있었다. 특히 천무비록의
기문진법은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현묘했다. 2천년
전에 조선이 중국을 지배했던 일이 결코 전설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여진이 책을 잘 읽는군-----)
정연공주는 여진의 책을 읽는 소리에 가슴이 뿌듯해
왔다. 여진은 장영과의 사이에서 낳은 딸이었다. 딸은
벌써 아홉 살이 되어 있었다. 장영은 그때 떠나서
아직까지 돌아오지 않고 있었고 정연공주는 노암리
오가촌에서 혼자서 딸을 키우고 있었다.
......해뜨는 대륙에 도착한 족두의 무리들은
자신들이 마침내 해뜨는 나라를 찾았다는 것을
알았다. 해는 구름을 뚫고 높고 장엄하게 솟아 있는
산 위에서 떠오르고 있었다. 그들은 그 산의 모습이
험준할 뿐 아니라 머리 부분이 하얗기 때문에
성산(聖山)이라고 생각했다. 그리하여 그들은 성산을
향해 엎드려 신령한 마음으로 절을 했다......
여진이 책을 읽는 소리가 뚝 끊겼다.
정연공주는 아미를 모으고 얼굴을 찡그렸다. 초막
앞 계곡에서 딸 여진보다 다섯 살이나 위인
사내아이가 죽적(竹笛:피리)을 불고 있었다. 오가촌
촌장의 손자 오수불(烏秀佛)이었다.
(저 녀석이 또 나타났군......)
정연공주는 얼굴을 찌푸리고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딸이 책을 읽는 것을 그친 것은 수불의
피리 소리를 들었기 때문일 터였다.
"여진아."
정연공주는 마당으로 들어서며 딸을 불렀다.
"네?"
여진이 책에서 눈을 떼고 정연공주를 쳐다보았다.
"나가서 놀고 싶으냐?"
"네."
여진이 냉큼 대답했다.
"그럼 나가서 놀아라."
"네."
여진이 머리를 숙여 보이고는 재빨리 삽짝밖으로
달려갔다.
정연공주는 낮게 한숨을 내쉬었다.
여진은 벌써 계곡에 있는 수불에게 한달음으로
달려가고 있었다.
여름이었다. 날씨는 후덥지근했다. 이마에 땀방울이
송글송글 맺히고 겨드랑이에서는 시지근한 땀냄새가
풍겼다. 정연공주는 여진이 보던 책을 갈무리하고
삽짝을 나섰다. 아무래도 더위 때문에 계곡에서
목욕이라도 해야할 것 같았다.
정연공주는 옥소를 들고 가볍게 산을 오르기
시작했다. 오가촌 사람들은 오수(午睡)를 즐기는지
조용했다. 오가촌은 여름철엔 물고기를 잡고
겨울철이면 사냥을 했다. 봄가을엔 농사를 지었다.
험준한 산기슭에 마을이 있었기 때문에 외지인이
찾아오는 일도 없고 관병이 출몰하는 일도 없었다.
마을을 벗어나자 정연공주는 경신술을 사용하여
두운봉까지 단숨에 날아 올라갔다. 두운봉 정상에
기문진을 설치했기 때문에 진이 변했는지 살펴보기
위해서였다. 천부비록을 노리는 무림인들이 많아 언제
습격을 받을 지 알 수 없어 진을 설치했던 것이다.
무림인들은 마을로 오지 않았다.
무림인들은 은밀한 것을 좋아하는 그들의 습성대로
언제나 산을 타고 왔다. 그래서 정연공주는 산에다가
무림인들이 함부로 들어오지 못하도록 기문진을
설치했던 것이다.
(진은 그대로 있군......)
두운봉에 설치한 진은 그대로 있었다.
정연공주는 진을 세심하게 살핀 뒤에 산을 타고
내려오다가 계곡으로 들어섰다. 계곡에는 마을
사람들이 청룡소(靑龍沼)라고 부르는 작은 폭포가
있었다.
폭포는 두 길 남짓밖에 되지 않았으나 물줄기가
세차고 소가 깊었다. 옛날에 이무기가 승천한 소라는
얘기가 마을 노인들을 통해 전해져 내려오고 있었다.
(보는 사람이 없으니 목욕을 해야지........)
정연공주는 옷을 훌훌 벗고 소로 뛰어들었다. 소의
물도 얼음처럼 시원했다. 정연공주는 인어처럼 헤엄을
치다가 낮게 한숨을 쉬었다.
그녀의 육체가 속절없이 시들어가고 있었다.
이제 여인으로서 농염하게 무르익은 그녀의
육체였다. 허나 주인을 찾지 못해 시들어가고 있었다.
장영이 떠난 지 벌써 10년이었다.
10년이라면 얼마나 길고 긴 세월인가.
그가 10년이라는 길고 긴 세월을 대륙에서 발해의
부흥을 위해 절치부심하고 있을 생각을 하자
정연공주는 그를 따라나서지 않은 것이 후회되었다.
사람의 삶이란 무엇인가.
어느 여름날 아침 영롱한 새벽 이슬에 젖어 꽃이
피었다가 지듯이 사람의 삶도 그렇게 아름답게
피었다가 지는 것이 아닐까. 발해의 부흥도, 대륙을
호령하던 선인들의 땅을 되찾으려는 야망도 한낱
부질없는 꿈이 아닐까.......
정연공주는 그런 생각을 했다.
장영이 사무치게 그리웠다. 10년 전 장영과
오가촌에서 보낸 몇 달은 꿈과 같은 날들이었다.
정연공주는 장영을 열렬히 사랑했다. 장영의 깊고
그윽한 눈빛이 자신에게 머물고 있으면 가슴이 뛰고
얼굴이 화끈거렸다. 장영을 처음 만났을 때부터
정연공주는 장영의 여자가 되고 싶어졌다. 그의 크고
넓은 가슴에 안기고 싶었고 그를 위해 옷을 벗고
싶었다.
그러나 장영은 그를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그들은 어떤 의미에서 동지였다.
정연공주는 장영의 도움을 받아 발해국을
되찾으려는 야심을 갖고 있었다. 그러나 장영은
발해국에 아무런 미련도 없는 것처럼 보였다. 나라를
빼앗긴 것이 원통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인선황제가
미웠기 때문이었다.
발해를 되찾으려면 장영의 도움 없이는 불가능했다.
그러나 장영은 그녀를 도우려고 하지 않았다.
정연공주는 혼자서 발해국을 부흥하기 위해
월하촌에서 군사를 일으켰다. 그러나 정연공주의
야망은 아소산에서 거란의 철기병을 만나 여지없이
깨어지고 말았다. 수많은 부흥군과 부흥군의 가족들을
잃고 피눈물을 흘리며 두만강을 건너 오가촌으로 오자
장영이 있었다.
정연공주는 염치불구하고 장영의 침실을 찾아갔다.
그녀는 장영의 여자가 되고 싶은 욕망이 너무나
간절했다. 장영이 이미 혼례를 올린 사내였으나
부인이 죽었기 때문에 그녀의 사랑을 방해할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장영은 그녀를 받아들였다.
정연공주는 장영을 자신의 몸속 깊이 받아들이며
신음했고 울었다. 자신의 몸 구석구석에서 일어나는
관능의 불꽃에 의해 그녀는 뜨겁게 타올랐다.
그러나......
그러나 그는 그녀에게 사랑의 선물로 발해를 바치기
위해 대륙으로 떠난 것이다. 그것이 벌써 10년 전의
일이었다.
정연공주는 가슴이 타는 것 같았다. 그의 사랑이
얼마나 크고 절절한 지 알 수 있었다.
(아이가 벌써 아홉 살인데......)
장영이 아직도 돌아오지 않는 것은 발해를 부흥하는
일이 그만큼 어렵기 때문일 터였다.
"어떻게 된 일이지?"
그때 숲속에서 사람들이 두런대는 소리가 들려왔다.
정연공주는 깜짝 놀라 소에서 나와 옷을 주워 입었다.
"가도가도 길이 나오지 않으니 꼭 귀신에 홀린 것
같네."
"대낮에 무슨 귀신인가?"
"벌써 몇 시진 째 헤매고 있지 않은가?"
"산이 깊으니 길을 잃은 것 뿐이야."
"이렇게 길을 헤매다가 하루해가 지겠네."
"아직도 해는 많이 남았어......."
정연공주는 나무 뒤에 숨어서 두런대는 사람들이
가까이 오기를 기다렸다. 두런대는 사람들은 모두 4,
5인 쯤 되어 보였는데 발해의 유민들 같았다. 등에
활과 화살통을 맸으나 거란군 같지도 않고 무림인
같지도 않았다.
"우리 그만 되돌아 가세."
"되돌아 가자구?"
"길을 잃고 헤매느니 오던 길로 되돌아가는 게
낫지...... 밤이 되어 짐승이라도 만나면 큰 일이
아닌가?"
"그것두 그렇긴 한데....."
"고려가 우리의 귀순을 반겨 줄지도 알 수 없구."
"우리 솔빈부를 찾아 갈까?"
"솔빈부?"
"솔빈부에 전 북우위 대장군 장영 장군이
있다잖아?"
"글쎄........."
두런대던 사내들은 나무 그늘에 털썩 주저앉아 쉬기
시작했다. 그들은 고려로 가기 위해 두운봉을 넘어
오다가 정연공주가 설치한 진에 걸려 길을 잃고
헤매는 중이었다. 그 진은 무림인들조차 파홰하기
어려운 태극무영진(太極無影陣)이었다. 진안에 발을
들여놓아도 아무런 느낌이 들지 않고 길만 잃고
헤매게 되어 있었다. 그러므로 진이라고 생각하지도
못했다.
(그가 솔빈부에 있었군.......)
사내들이 장영을 입에 올리자 정연공주는 가슴이
싸하게 저려왔다. 장영에 대한 애절한 사랑이
가슴속에서 솟구치며 그녀의 눈에서 맑은 눈물이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장영 장군은 거기서 뭘한대?"
"뭘하긴 뭘하겠어? 복국투쟁을 하지......."
"복국을 할 수 있을까?"
"벌서 3만 군사가 몰려들었대. 조만간 장영 장군이
거란에 항쟁을 선포할 것이라는 소문이 파다해......"
정연공주는 그들의 말을 통해 장영이 여전히 복국
투쟁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가세."
"어디로?"
"어디긴 어디야? 발해로 돌아가지......."
"동란국으로 돌아가자는 말이야?"
"그래. 동란국으로 돌아가자구. 나라가 바뀌나
임금이 바뀌나 우리들 사는 삶이 달라질 건 없어."
"허긴 그래."
"동란국에도 우리 관리들이 많잖아? 게다가
동란국의 왕비가 발해의 소(蘇)씨구......."
"도읍이 동평(요양)으로 옮겼으니 상경은 텅 비었을
것이 아닌가?"
"비기도 했지.......이주하다가 도망친 사람도
많지만......"
"그럼 우리가 상경에 들어가서 살까?"
"거란이 어디 그렇게 호락호락한 줄 알아? 상경에
군사를 두고 되돌아오는 사람들은 모두 죽이고 있대."
"그럼 상경에 들어갈 수도 없잖아?"
"그러니까 솔빈부로 가는 것이 제일 안전해."
"장영 장군이 전쟁 준비를 하는데 뭐가 안전해?
조만간 전쟁터로 돌변할 텐데......."
사내들이 무겁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들의 얘기를
가만히 들어보니 여간 처지가 난감한 것이 아니었다.
정연공주도 나직하게 한숨을 내쉬었다.
정연공주는 사내들 앞으로 걸어나갔다.
"누, 누구요?"
정연공주가 나무 뒤에서 걸어 나오자 사내들이 깜짝
놀라서 몸을 일으켰다.
"저는 이 아래 마을에 사는 사람예요. 여러분들
얘기를 본의 아니게 엿들었어요."
".........."
사내들은 대꾸없이 서로 얼굴만 쳐다보았다.
"보아하니 고려로 귀순하려다가 길을 잃은 분들
같군요."
"그렇소."
사내 중 하나가 고개를 끄덕거리며 정연공주의
위아래를 살폈다.
"굳이 고려까지 가서 귀순할 필요는 없어요. 이
밑에 마을도 인심이 후하고 농사를 지을 만한 땅이
있어요. 촌장님께 잘 말씀 드리면 정착하게 해줄
거예요."
"정말 그렇소?"
"네. 한 번 따라와 보세요."
"그럼 폐를 좀 끼칩시다. 사례는 후하게 하겠소."
"좋아요."
정연공주는 웃으며 그들을 안내하여 오가촌으로
들어왔다. 그리고 오가촌 촌장에게 안내하여 살 곳을
마련해 달라고 부탁했다.
"나무가 자라서 우거지면 새가 깃드는 법, 어찌
찾아온 손을 내쫓겠소? 다행히 이 곳은 첩첩 산중이라
좀처럼 찾아오는 사람도 없고 전쟁도 없소."
촌장은 웃으며 그들을 환영했다.
길손들은 몇 번이나 사례를 한 뒤에 하루를 머물고
가족들을 데리고 오겠다며 두운봉을 넘어 대륙으로
돌아갔다. 두운봉까지 그들을 전송한 정연공주는
무겁게 한숨을 내쉬었다. 두운봉 산자락도 지극히
아름다웠으나 대륙의 초원이 그리워지고 있었다. 벌써
10년의 세월이 흐른 것이다.
(솔빈부로 그이를 찾아가야겠어.......)
정연공주는 첩첩이 이어진 북쪽 산봉우리의 바다를
바라보며 문득 그 생각을 했다. 장영이 어디 있는지
몰랐을 때는 마냥 그가 돌아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었으나 이제는 기다릴 필요가 없었다.
인생이 몇 번씩 되풀이하여 돌아오는 것은 아니다.
이 귀중한 인생을 소비할 수는 없다. 나도 그의
사랑을 받고 딸 여진도 아버지를 알아야 한다.......
그 생각을 하자 정연공주는 즉시 마을로 돌아와
떠날 준비를 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정연공주는
쉽사리 오가촌을 떠나지는 못했다. 무엇보다도 어린
여진을 데리고 가느냐 남기고 가느냐 하는 것을
결정하기가 어려웠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발해의
보물인 천부비록도 문제였다. 천부비록을 가지고
다니다가 무림인들이나 거란인들에게 뺏기면 발해를
복국하는 것은 영영 불가능할 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정연공주는 한 달 동안을 망설이다가 마침내 장영을
찾아가기로 결심을 했다.
여진은 오늘도 촌장의 손자와 놀고 있었다. 떠날
준비를 마치고 앞의 계곡으로 찾아가자 여진과 수불은
진법 놀이를 하고 있었다.
(기가 막히군.......!)
정연공주는 어이가 없었다.
정연공주가 여진에게 가르친 무예와 진법을 수불이
고스란히 여진에게 되가르치고 있었다. 여진이
천무비록에서 읽은 구결(口訣)을 수불에게 얘기하고
수불이 구결을 쉽게 풀어 오히려 여진에게 가르치고
있는 것이다.
정연공주는 수불을 가만히 쏘아보았다. 수불은 아직
어린 소년이기는 하지만 신비스러운 소년이었다. 책은
한 번만 훑어보면 모두 외웠고 어린아이답지 않게
활도 잘 쏘았다. 그 옛날 대고구려의 시조인 주몽이
물동이를 이고 가는 여자의 물동이를 쏘아 깨트린
뒤에 다시 활을 쏘아 그 구멍을 메꾸었다는 일화가
전해지고 있었으나 수불의 활 솜씨는 이미 주몽을
능가하고 있는 기분이었다. 게다가 어딘지 모르게
신비스러운 귀기(貴氣)가 얼굴에서 풍기고 있었다.
(사내 녀석이 어쩌자고 저렇게 뛰어날까?)
정연공주는 수불에게 시새움까지 느꼈다.
정연공주가 수불에게 뛰어난 자질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은 불과 몇 달 전의 일이었다. 한 번은
정연공주가 두운봉까지 올라갔다가 내려오는데 소나무
가지가 마을 입구에 몇 개 꽂혀 있었다. 정연공주 는
무심하게 발을 들여놓았다가 가슴이 철렁하도록
놀랐다.
소나무 가지 사이로 발을 들여놓자 마자 하늘이
캄캄해지면 비가 뿌리고 천둥 번개가 몰아치는
것이었다.
(멀쩡한 날에 비라니........?)
정연공주는 의아하여 하늘을 쳐다보았다. 그러나
하늘은 이미 칠흑처럼 어두워져 있었고 천둥 번개
사이 사이로 아수라의 울부짖음이 들려왔다.
(아, 이것은 진이었구나........!)
정연공주는 뒷덜미가 서늘해 왔다. 정연공주는
처음에 그 진이 딸 여진가 설치한 것인 줄 알았었다.
그 진의 이름은 천부현무진(天府玄武陣)으로,
천부경을 쓴 단군이 하늘의 별이 움직이는 것을 보고
만들었다는 전설 속의 진이었다. 정연공주는 전 날
밤에 잘 이해를 하지 못하는 딸 여진을 삼경(三更)이
될 때까지 붙잡고 가르쳤던 것이다.
정연공주는 간신히 그 진을 파홰하고 딸 여진을
찾았다.
그러나 그녀의 딸 여진은 진에는 관심도 없이
수불과 깔깔거리고 놀고 있었다.
"여진아. 네가 이 진을 설치했느냐?"
"아니요. 수불 오빠가 설치하고 저보고 파홰하라고
했는데 저는 파홰하지 못했어요."
"수불이 설치했다고........?"
"네."
딸 여진의 대답에 정연공주는 땅이 까지는 듯한
실망감을 느꼈다. 그러나 자질이 부족한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그것은 지난 봄의 일이었다.
정연공주는 이따금 수불과 딸 여진이 바뀌어
태어났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는 생각을 했다.
그러나 왕재(王才)는 천운(天運)이 있어야 한다.
뛰어나게 총명하거나 무예를 잘하지 않더라도
하늘의 덕을 얻으면 왕재가 되는 것이다.
어쩌면 수불이 자라서 여진의 우익을 담당할 지도
모르는 것이다. 정연공주는 그 생각을 하자 수불을
미워하지 않기로 했다. 수불이 여진을 돕거나 돕지
않거나 하늘이 정할 일이라고 생각했다.
정연공주는 여진을 집으로 데리고 들어와 꿇어
앉혔다.
"여진아."
"네?"
"나는 오늘 멀리 길을 떠날 것이다.
"........."
"네 아버지를 찾아 발해의 솔빈부로 간다. 별 일은
없겠지만 그래도 무슨 일이 있을지 몰라 당부하니
내가 백일이 지나도 돌아오지 않으면 솔빈부로
아버지를 찾아오너라!"
"네."
"네 아버지 이름은 발해국 전 북우위 대장군
장영이다. 그러나 네 아버지가 장영이라는 것을
함부로 말하고 다니면 너는 거란군에게 죽는다!"
"조심하겠습니다."
여진이 어린아이답지 않게 다소곳이 대답했다.
"네가 보던 책은 발해 최고의 보물이다! 그 책은
군사에도 요긴하게 쓰이는 책이니 잘 간수하도록
해라! 무슨 일이 있을지 몰라 폭포 옆에 있는 동굴에
숨겨 두었으니 솔빈부로 찾아올 때는 반드시 그 책을
가지고 오너라!"
"네."
여진은 긴장된 얼굴로 대답하고 있었다.
"침식 문제는 촌장님께 부탁해 놓았다. 이것은 네
아버지의 신물이다."
정연공주는 소중하게 간직하고 있던 장영의 단검을
여진에게 주었다. 대무예왕 때 발해를 오늘의 강성한
나라로 만들었던 장문휴 대장군이 사용하던
단검이었다. 대무예왕이 직접 장문휴 대장군에게
하사한 것을 대대로 장씨 가문의 장자(長子)에게만
물려주어 장영에게까지 내려온 것이었다.
장영은 그 칼을 아들 유에게 물려주려고 했으나
뜻밖의 변을 당하는 바람에 물려주지 못했던 것이다.
"이것은 나의 신물이다."
정연공주는 자신의 목에 걸려 있는 목걸이도 벗어서
여진의 목에 걸어 주었다. 발해 황실의 문장(紋章)이
그려져 있는 것이었다.
정연공주는 여진에게 당부를 마친 뒤 작별을 하고
오가촌을 떠나기 시작했다. 그녀는 여진을 남기고
떠나게 되어 불안한 마음과 사랑하는 정인 장영을
찾아간다는 설레임이 교차하여 상기된 얼굴로
두운봉을 향해 걸음을 재촉했다.
정연공주가 두운봉에 올라서서 뒤돌아보자 오가촌의
정겨운 풍경이 한 눈에 내려다보였다.
................................................
1) 인황왕은 발해의 우성인 고씨, 대씨, 소씨 등
3명의 왕비를 갖고 있었다. 인황왕의 부인인 고씨와
대씨가 소씨가 국정을 맡은 동란국 5년에 잇달아
죽었을 리는 없고 정략적 차원에서 3명의 부인을
두었던 것이 아닌가 싶다.
2) 좌차상 대소현은 발해 멸망이후 동란국에서
상당한 권력을 행사했다. 이는 거란이 발해의
귀족들을 회유하려는 정책에서 까닭을 찾아볼 수도
있으나 대소현이 발해가 멸망하기 이전에 이미 거란
황제 야율 아보기에게 협력하고 있지 않았나
추정되기도 한다.
47. 사랑을 찾아서
정연공주가 장영을 찾아 오가촌을 떠난 지 사흘.
정연공주는 마침내 나룻배를 얻어 타고 두만강을
건넜다.
(드디어 나는 대륙에 왔다.......)
정연공주는 눈앞에 광활하게 펼쳐진 대륙을
응시하며 가슴 뻐근한 감회에 젖었다. 실로 10년만에
밟아보는 대륙 땅이었다. 오가촌 역시 발해의
영토였으나 풍경은 전혀 달랐다. 눈이 시리게 펼쳐진
대륙의 초원과 반도의 첩첩 산은 사람으로 치면
남자와 여자처럼 다른 것이다. 대륙이 호방한 남자의
기상이라면 반도의 첩첩 산은 아기자기하고
교태스러운 여자일 터였다.
솔빈부까지는 닷새면 갈 수 있을 것이다.
물론 동경용원부 화룡(火龍)에서 말을 한 필 사야
했다.
정연공주는 나룻배에서 내리자 화룡 쪽으로 총총히
걸었다. 해는 어느덧 뉘엿뉘엿 기울고 있었다.
시장기가 돌았으나 마을까지는 아직도 20리 길이 남아
있었다.
"어디까지 가시오?"
나룻배를 함께 탔던 늙수그레한 사내가 정연공주의
옆으로 따라 붙으며 수작을 붙였다. 눈빛이 매우
교활해 보이는 사내였다. 말투에 돌궐말이 섞인 것을
보면 돌궐계의 인물인 모양이었다.
"화룡까지 갑니다."
"아, 화룡에서 말을 한 필 사시려는군......"
"어떻게 아십니까?"
정연공주는 사내의 말에 가슴이 철렁했다. 그러자
사내가 누런 이를 드러내고 씽긋 웃었다.
"인사가 늦었시다. 나 이진몽(已珍蒙)이라는
사람이올시다."
"거란인이군요?"
"그렇소!"
"야율씨가 아닌 것을 보면 황족은 아니겠고......"
정연공주는 이진몽을 힐긋 쳐다보았다. 어쩐지
이진몽이 예사로운 사람 같지 않았다.
"잘 맞추었소. 나는 동란국의 사신을 따라 고려에
갔다가 간신히 구사일생으로 살아 돌아오는 길이오."
이진몽의 말에 정연공주는 깜짝 놀라서 이진몽을
다시 쳐다보았다.
"고려 태조는 우리 요제국을 원수의 나라로 보고
있었소."
"그렇다고 사신을 죽이나요?"
"사신을 고려 영토에 발도 못들이게 하고 군사를
보내 죽이려고 하였소. 우리 사신 일행은 허겁지겁
달아났는데 이번엔 고려 백성들이 무더기로 달려들어
사신 일행을 쳐죽였소. 그런데 그 고려 사람들의
무예가 어찌나 신출귀몰한 지 나만 간신히 살아서
돌아오는 길이오!"
이진몽이 설래설래 고개를 흔들었다. 고려 사람들이
당한 일이 여간 고약스러웠던 것이 아닌 모양이었다.
"내가 짐작컨대 머지않아 우리 요제국과 고려는
전쟁을 하게 될 거요."
"언제요?"
정연공주는 거란과 고려가 전쟁을 하면 그 틈에
발해를 재건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다.
"지금은 요제국이 중원을 완전히 정벌하지 못했지만
중원 정벌이 끝나면 반드시 고려를 정벌하러 대군을
파견할 거요."
"고려와 화친을 맺지요. 반도에 있는 나라인데
전쟁을 할 필요가 있나요? 고려를 정복한다고 해도
다스리기가 여의치 않을 텐데......"
"맞소. 그러나 고려와 우리 요제국은 물과 기름의
사이요. 고려는 요제국이 발해를 멸망시킨 것에
분개하고 있었소. 고려나 발해가 모두 고구려족의
후예들이니 그럴 만도 하지만 고려가 북벌 정책을
취하면 요제국에게는 무서운 위협이 되오. 뿌리가
깊어지기 전에 베어버려야 하오."
"고려를 잘 모르시는군요. 수 나라나 당 나라가
모두 고구려를 정벌하려고 국력을 과다하게 소비하여
멸망한 사실을 알면 쉽게 고려를 치지 못할 거예요."
"맞소. 노형도 군사에 대해 탁견을 가지고
계시군요."
"천만의 말씀입니다. 학문이 짧아 겨우 이름 석자를
쓸 뿐입니다."
"어디서 공부를 하였소?"
"어릴 때 당 나라에서 자랐습니다."
"그렇군요. 당 나라에서 공부를 했으니 군사에
대해서 논할 수 있지......사실 이러한 국제정세를
논할 수 있는 사람은 그리 흔하지 않은 법이오. 혹여
관직에 생각이 있으면 우리 요제국으로 오시오. 우리
폐하께서는 비록 적국의 사람이라고 해도 인재를
소중히 하는 분이니까 내가 적극 추천하겠소."
"말씀만 들어도 감사합니다."
이진몽과 얘기를 하는 동안 정연공주는 이내 화룡에
이르렀다. 날은 이미 어둑어둑 저물었고 정연공주는
이진몽과 함께 마장(馬場)을 한 바퀴 돌아 객잔에
들었다. 마장은 이미 철시를 하여 말을 살수가
없었다.
정연공주는 이진몽과 함께 저녁을 먹으면서 거란,
동궐, 후당, 고려에 대해서 많은 얘기를 했다. 그의
얘기에 의하면 거란의 발해 정복은 성공했으나
발해로부터 얻은 소득은 그다지 없어 실패한
정복이라고 하였다. 발해의 동쪽은 요제국에서 통치를
하기가 불가능했고 거란의 남쪽에는 새로운 적을 얻게
되었다는 것이다.
발해의 동쪽이 통치가 불가능하다는 것은 솔빈부,
안변부, 안원부, 회원부, 정리부가 거란에서 너무
멀어 반란을 일으킬 때마다 군사를 보내 정벌을 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거란의 남쪽에 새로운 적을 얻었다는 것은 고려를
말하는 것이었다. 고려의 진취적인 기상과 높은 문화
수준을 감안하고, 거란에 대한 적개심으로 볼 때
미래의 강적이라는 얘기였다. 거란은 특히 고려가
고구려의 후예임을 표방했기 때문에 공포에 가까운
두려움을 느끼고 있었다.
정연공주는 이진몽과 많은 얘기를 나누고 헤어져
잠자리에 들었다.
그러나 쉽사리 잠이 오지 않았다. 정연공주는
창문을 열고 밖을 내다보았다.
하늘에는 달이 밝았다.
음력 8월이었다. 한낮은 아직도 찌는 듯이 더웠으나
밤에는 바람결이 서늘하고 풀벌레 우는 소리가 귓전에
잉잉거렸다.
풀벌레는 가을의 전령이었다.
정연공주는 문득 아버지 인선황제와 어머니
효경왕후를 생각했다. 아버지에 대해서는 특별히
애틋한 느낌이 들지 않았으나 어머니는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가슴이 아팠다.
아버지 인선황제는 거란으로 끌려간 뒤에 처음 몇
년 동안은 항복한 발해왕에 대한 대우를 받았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 거란 황제 태종에게 살해되었다는
소문이 들렸다.
아버지가 죽었으므로 머나먼 타국 땅에서 어머니
혼자 곤고한 삶을 살고 있을 생각을 하자 정연공주는
가슴이 미어지는 것 같았다.
정연공주는 교교한 월광을 뿌리는 달을 쳐다보며
장영을 생각했다. 달이 점점 밝아지기 시작하면
가을이 온다고 그랬던가. 정연공주는 가슴속으로도
가을이 오기 시작하는 기분이었다.
대륙에서 보는 달은 첩첩 산간에서 보는 달과
달랐다.
대륙에서는 달이 일찍 뜨기도 하지만 산간에서 보는
달보다 더욱 크고 밝았다.
정연공주는 새벽녘에야 겨우 잠이 들었다.
아침에 눈을 뜨자 날이 훤하게 밝아 있었다.
"얘기 참 잘 들었소."
이진몽을 만나자 정연공주는 포권을 하고 인사를
했다.
"원정 조심하시오."
이진몽도 포권을 하고 인사를 했다.
정연공주는 마시장에 가서 말을 사서 솔빈부로
달리기 시작했다.
북쪽으로 갈수록 가을은 점점 완연해지고 있었다.
나뭇잎들이 누르스름한 빛을 띠기 시작했는가 하면
산골짜기와 계곡에는 아침마다 안개가 자욱하게
피어올랐다.
화룡을 출발한 지 사흘만에 정연공주는 솔빈부에
이르렀다.
솔빈부는 말이 유명한 고장이었다. 솔빈부에 있는
흥개호 호수 주위의 방대한 목초지대는 목초의 질도
우수했고 비도 적당히 내려 말을 방목하기에는 가장
좋은 조건을 갖고 있었다.
당 나라까지 <솔빈의 말>이라고 불릴 정도로
솔빈부는 품종이 좋은 말과 목초지대를 갖고 있었던
것이다.
장영은 익주에서 군사들을 조련하고 있었다.
정연공주는 병사들이 구마대회로 무예를 연마하는
것을 보고 가슴이 뜨거워져 왔다.
정연공주가 나타나자 장영은 시린 눈빛으로
정연공주를 쳐다보았다. 정연공주는 자신도 모르게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여기는 어떻게 왔소?"
정연공주가 울기를 그치자 장영이 비로소 입을
열었다.
"드릴 말씀이 있어서 왔어요."
"잘 왔소."
장영은 그윽한 목소리로 정연공주를 반겼다. 장영의
목소리도 감정을 억제하지 못해 떨리고 있었다.
"당신에게 딸이 생겼어요."
"딸이라니 무슨 말이오?"
"당신이 떠나간 뒤에 딸을 낳았어요."
"어떻게 그런 일이?"
장영은 도무지 믿어지지 않는 기색이었다.
그러나 정연공주가 차분하게 지난 얘기를 하자
무겁게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혼자서 고생이 많았겠구려."
장영의 말에 정연공주의 얼굴이 붉어졌다.
정연공주는 얼른 화제를 바꾸었다.
"군사를 조련하고 계시더군요."
정연공주는 장영과 함께 나란히 흥개호 호수를
걸었다. 장영이 발해 복국을 위해 군사를 조련하고
있는 것이 흐뭇했다.
"그렇소. 더 이상 복국을 미룰 수는 없었소."
"오면서 보니까 익주는 온통 발해군사들로 가득차
있더군요."
"익주자사 이태흠은 의로운 인물이오."
"그럼 익주자사가 동조하고 있는 건가요?"
"익주자사와 설자패의 부족이오."
"설자패의 부족이라니 누구를 말하는 거예요?"
"익주자사 이태흠의 전임 자사인 설자패의 부족을
말하는 것이오. 그는 말갈(靺鞨)계로 족인들의 사랑을
받았소. 특히 홍의녀 살미라와의 애절한 사랑으로
유명한 인물이오. 저기 흥개호 주변에 있는
자련당이라는 정자의 현관과 기둥에 써 있는 시도
설자패가 쓴 것이오."
정연공주는 장영과 함께 나란히 자련당이라는
정자에 올랐다. 자련당에 올라서자 흥개 호수의
빼어난 경관이 한 눈에 보였다. 수면은 석양빛을 받아
금빛으로 반짝거리고 가까운 상류 쪽에서는 어부들이
물고기를 잡고 있었다.
한가롭고 평화로운 풍경이었다.
"설자패의 부족은 거란이 침략했을 때 발해를 돕지
않았소. 솔빈부 도독이 설자패의 억울한 죽음을
해명하지 않고 오히려 설자패의 정인인 살미라를
처형했기 때문이오."
"말갈인들은 설자패와 살미라의 일로 발해에 반감을
갖고 있었군요."
"그렇소. 말갈인들은 매우 특수한 부족이오.
말갈인이나 우리 고구려 부족은 처음엔 모두 한
부족이었소. 말갈을 물길(勿吉)7부라고 부르는 까닭도
다 그 때문이오. 옛날에 우리는 신조선, 불조선,
말조선으로 불린 때가 있었소. 다른 이름으로는 진한,
번한, 마한이었소. 헌데 이 3조선이 분리되고 흥망을
거듭하면서 숙신이니, 읍루니, 부여니 하는 이름들이
생겨났소. 이 이름들이 변하여 물길로 되고......
발해가 건국할 때 시조 대조영께서는 말갈인 추장
걸사비우와 함께 당 나라에 고구려 부흥 투쟁을
하였소. 그리고 걸사비우가 죽자 그의 족인들을
이끌고 발해를 건국하게 된 것이오. 그런데 발해
조정은 점점 말갈인들을 조정에서 축출하기 시작했소.
말갈인들은 초원과 산 같은 황무지로 쫓겨났고
2백년이 흐르는 동안 발해의 피지배층이 된 것이오."
"발해의 멸망은 말갈인들을 끌어안지 못한 탓도
있겠군요."
"엄격하게 따지면 그렇소. 말갈인들은 발해를
자신의 나라라고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에 거란의
침략에 대항하지 않은 것이오."
"그런데 솔빈부의 말갈인들이 어떻게 하여 우리편에
가담하게 되었어요?"
"내가 살미라의 복수를 했소."
"살미라의 복수를?"
"내가 발해 복국투쟁에 참여할 것을 요구하자
그들은 먼저 살미라의 복수를 요구해 왔소. 그래서
나는 기꺼이 솔빈부 도독 해초경을 죽였소."
정연공주는 고개를 끄덕거렸다.
해초경은 발해가 멸망한 뒤에도 솔빈부 도독 자리를
그대로 지키고 있었다.
장영의 얘기를 듣고 있는 동안 어느덧 날이
어두워져 왔다. 정연공주는 장영의 인도로 군막으로
가서 저녁을 대접받았다. 그러나 군막에서 머물 수는
없었다. 그때 익주자사 이태흠이 사람을 보내와
주연이 마련되었다며 정연공주와 장영을 초대했다.
주연에는 익주자사 이태흠과 말갈인 추장
막예개(莫曳皆), 설자패의 인척인 설굴막(薛窟莫),
장영의 부장(部將)인 양승(楊承), 아극돈(阿克敦),
오소경(烏昭慶), 그리고 우보금이 참석하였다.
정연공주는 손님의 신분으로 와 있다는 우보금의
존재가 어쩐지 마음에 걸렸다. 그러나 우보금에
대해서 이것저것 따질 수 있는 형편이 아니라 내색을
하지 않았다.
주연은 밤늦게까지 계속되었다. 취흥이 도도해지자
아극돈과 오소경이 일어나 발해의 춤을 추었다.
발해의 춤은 전통적으로 검무(劍舞)였다.
정연공주는 몹시 기분이 좋았다.
검무를 마친 아극돈과 오소경이 정연공주와
장영에게도 쌍룡유무도(雙龍遊武圖)의 검무를 추도록
권고했다. 정연공주가 얼굴을 붉히며 장영을 쳐다보자
장영은 빙그레 웃고 있었다. 쌍룡유무도는 고구려에서
전해져 온 그림으로 남녀 무사(武士)가 서로 어울려
춤을 추고 있는 그림이었다. 그림의 제목이
쌍룡유무도였는데 발해에서는 그 그림에 춤을
창안하여 남녀 무사가 춤을 추곤 했다. 수많은
사람들이 어울려 추는 군무(群舞)인 답추(踏追)와
함께 발해를 대표하는 춤이었다.
"장군 추시겠어요?"
"영광입니다. 공주님."
정연공주는 장영이 쾌히 허락하자 칼을 뽑아들고
나섰다. 장영도 검을 들고 나섰다.
이내 악공들이 발해금(渤海琴)을 연주하기
시작했다. 정연공주와 장영은 발해금에 ㅁ추어 검무를
추기 시작했다. 좌중은 물을 끼얹은 듯이 조용해져 두
사람의 춤사위에 시선을 바짝 모았다.
달빛이 흐르는 듯이 유연한 춤이었다. 장영이
정연공주의 가슴을 향해 칼을 쭉 뻗으면 정연공주는
활처럼 허리를 뉘었고 장영의 칼은 정연공주의 허리를
안 듯이 뻗었다. 음악이 격렬해지면 칼로 베고 찌르는
동작도 경쾌했고 칼을 피하며 허리를 흔드는 동작이
남녀의 사랑처럼 격렬하게 어우러졌다.
좌중에서는 탄식이 절로 흘러 나왔다.
아름다운 동작이었다. 비록 검무에 응용한 것이지만
남녀가 사랑을 할 때의 동작이 유연하게 어우러지고
있었다. 정연공주와 장영이 천무비록을 연마한 무예의
고수들이라 보는 사람들은 눈이 황홀할 지경이었다.
특히 쌍룡이 승천하는 모습을 응용한 부분은 춤의
절정이었다. 먼저 정연공주가 칼을 공중으로 곧추
세우고 몸을 회전하면서 솟구치기 시작하자 장영은
따라서 솟구치며 그녀의 허리를 칼로 베는 듯, 혹은
그녀의 가슴과 둔부를 애무하는 듯, 혹은 옷을
벗기려는 듯 바짝 달라붙어 검을 휘둘러댔다.
이에 정연공주는 앙탈을 하듯, 교태를 부리듯
허리와 둔부를 흔들며 장영의 칼을 막았다.
그리고는 남녀가 마침내 합체(合體)를 이룬 듯 두
사람이 나란히 칼을 뻗고, 공중회전을 하였다.
정연공주와 장영의 검무가 끝나자 좌중에서 일제히
박수가 터졌다.
정연공주와 장영은 허리를 깊숙이 숙여 인사를 하고
좌중에 돌아와 앉았다.
밤이 더욱 깊었다.
정연공주는 자사부의 별채에서 잠을 자게 되었다.
방은 아늑하고 깨끗했으나 정연공주는 쉽사리 잠이
오지 않았다. 들창에는 달빛이 교교하고 봉당
뜨락에서는 풀벌레가 애잔하게 울고 있었다.
정연공주는 침상 위에서 나삼 차림으로
엎치락뒤치락했다. 잠이 오지 않았다.
그때 문 앞에서 인기척이 나더니 장영이 낮은
기침을 했다.
"나요."
정연공주는 깜짝 놀라 침상에서 일어났다.
"들어가도 되겠소?"
"네."
정연공주는 낮게 대답했다. 갑자기 얼굴이
화끈거리고 가슴이 뛰었다.
이내 문이 열리고 장영이 들어왔다.
"그 동안 미안했소."
방으로 들어온 장영이 정연공주를 와락 껴안았다.
정연공주는 꿈결인 듯 장영의 품에 안겼다. 장영이
자신을 받아들인다고 생각하자 온 몸이 구름처럼
두둥실 떠오르는 기분이었다.
정연공주는 그날 밤 또 다시 장영의 여자가 되었다.
10년전 오가촌에서 장영을 자신의 남자로 만든 것은
억지에 의한 것이었으나 이제는 순전히 그의 의지에
의한 것이었다.
정연공주는 침상에 누워 눈을 감았다.
장영이 그녀의 몸 속으로 들어오자 그녀는 이를
악물고 신음했다. 환희와 쾌락이 그녀의 온 몸을
헤집고 있었다.
그것은 놀라운 감동이었다.
그녀는 몇 번이나 신음을 했고 울었다.
이튿날 그녀는 상쾌한 기분으로 눈을 떴다. 옆에는
그녀의 사랑하는 남자가 누워 있었다.
(이 이도 벌써 귀밑이 희어졌네........)
정연공주는 장영의 귀밑에 흰머리가 듬성듬성 나
있는 것을 발견하고 가슴이 아팠다.
아침을 먹은 뒤에는 연무당에서 구마대회가 열렸다.
정연공주도 말을 타고 구마대회에 참석했다. 군사들의
환호성과 북소리를 들으며 죽방울을 쳤다.
정연공주는 한 달을 익주에서 머물렀다. 그리고 한
달이 지나자 딸 여진을 데리러 가기 위해 말을 타고
장영의 전송을 받으며 익주를 떠났다.
(우보금은 이상한 여자야......)
정연공주는 솔빈부를 떠나며 우보금의 얼굴이
머릿속에 떠올라 기분이 우울해졌다. 우보금의 하얀
얼굴이 마치 자신의 뒤통수에 머물러 있는 것 같은
이상한 기분이었다.
(남편이 찾아 왔으니 곧 떠나겠지.......)
우보금의 남편이라는 사내가 1백 50명이나 되는
부하들을 이끌고 장영의 둔영을 찾아온 것은 이틀
전의 일이었다. 그는 아내인 우보금을 보호해 준
장영의 은혜에 보답한다며 사냥에서 잡은 멧돼지
5마리, 양 3백 마리, 마유주 50자루를 바쳤다.
장영은 우보금의 남편이라는 사내가 바치는 양과
마유주를 사양했으나 사내가 한사코 받을 것을 청하는
바람에 억지로 거두었다. 그리고 우보금과 사내에게
며칠이라도 좋으니 둔영에서 머물다 가라고 말했다.
장영의 둔영 옆에는 그리하여 2백5십명이나 되는
흑수말갈의 전사들이 포진하게 되었던 것이다.
정연공주는 그 점이 걱정이 되었다.
그러나 장영을 만난 사실을 생각하면 자신도 모르게
얼굴에 미소가 피어났다.
(이제 그의 사랑을 얻었으니 나에게 무슨 소망이
남아 있으랴.......)
정연공주는 흐뭇했다. 장영을 생각하기만 하면
가슴이 벅차고 뿌듯했다. 이제 남은 것은 딸 여진을
데리고 익주로 돌아와 발해를 복국하는 것뿐이었다.
정연공주는 그날 밤 솔빈부의 화주(華州)에서
유숙했다. 지방이 낯설고 가야할 길이 멀어서인지
그날 밤도 정연공주는 쉽사리 잠이 오지 않았다. 창을
열고 밖을 내다보자 달빛이 뿌옇게 흐르는 하늘에
철새가 떼를 지어 남쪽으로 날아가는 것이 보였다.
(한낱 날 것들도 따듯한 고장을 찾아가는군.......)
정연공주는 창에 턱을 괴고 밤을 세웠다.
이튿날 날이 밝자 정연공주는 말을 타고 남쪽으로
계속 달려 그날 저녁때는 솔빈부와 동경용원부의
경계인 목주(木州)에 이르렀다. 목주는 솔빈부와
동경용원부, 그리고 정리부의 경계에 있어서 3부의
길목이었다. 유목민들도 자주 오가고 상인들도 끊이지
않고 왕래하여 읍이 번화했다.
정연공주는 임녹원(林綠園)이라는 객잔에 들었다.
술과 음식을 팔기도 하고 숙소도 제공하는 제법 큰
객잔이었다.
정연공주는 저녁을 마치자 일찍 잠자리에 들었다.
어제는 장영을 생각하느라고 잠을 이루지 못했으나
오늘은 하루종일 말을 탔기 때문인지 몸이 노곤했다.
정연공주가 눈을 뜬것은 밖이 갑자기 소란했기
때문이었다. 정연공주는 침상에서 일어나 밖을
내다보았다. 그리고는 깜짝 놀라 후다닥 옷을 주워
입기 시작했다. 밖에는 수많은 거란군사들이 빽빽하게
임녹원을 에워싸고 있었다.
"이 곳에 발해의 정연공주가 있다! 누구던지
정연공주를 보는 즉시 죽여라!"
말을 탄 거란군 장수가 군사들에게 지시하고 있는
소리였다.
(어떻게 된 일이지?)
정연공주는 기분이 좋지 않았다. 그러나 어떻게
하던지 탈출을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창문을 살짝
열고 밖을 내다보는데 군사들이 와 하는 함성을
지르며 임녹원으로 뛰어들기 시작했다.
"흥!"
정연공주는 코웃음을 치면서 창문을 열고
거란군사들을 향해 몸을 날렸다.
(장영 장군 휘하에 세작이 있어........)
정연공주는 장영이 걱정이 되었다. 그러나 장영을
걱정하고 있을 시간이 없었다.
"정연공주가 여기 있다!"
"정연공주를 잡아라!"
거란군사들은 벌떼처럼 정연공주를 에워싸고
달려들었다.
"파천일황!"
정연공주는 벌떼처럼 달려오는 거란군사들을 향해
날카로운 일성을 내지르며 검을 휘둘렀다. 그러자
앞서 달려오던 거란군사들이 처절한 비명을 내지르며
나뒹굴었다. 임녹원 객잔의 앞마당이 금세 피비린내로
진동하고 피투성이가 된 거란군사들의 비명소리로
아수라장이 되었다.
"정연공주를 잡아라!"
"정연공주는 혼자니 두려워하지 마라!"
거란군사들은 잠시 주춤했다가 또 다시 벌떼처럼
달려들었다.
"파천이황!"
정연공주는 연속해서 천무비록의 절정무공을
발출했다. 거란군사들은 정연공주가 절정무공을
발출할 때마다 추풍낙엽처럼 쓰러졌다.
그러자 거란군사들은 더 이상 달려들지 못하고 멀리
떨어져 활을 쏘아댔다. 정연공주는 화살이 빗발치듯
날아오기 시작하자 거란군사들을 향해 번개처럼
날아갔다. 거란군사들은 정연공주가 날아오자 겁을
집어먹고 후다닥 갈라섰고 정연공주는 그 틈에
마굿간에 매어 두었던 말을 풀러 타고 어둠 속으로
질주하기 시작했다.
"추격해라!"
"정연공주가 달아나고 있다!"
거란군사들이 말을 타고 쫓아오기 시작했다.
"흥!"
정연공주는 거란군사들이 쫓아오는 것을 보고
웃었다. 거란인들도 유목민들이므로 말을 잘 탔다.
그러나 구마대회로 마술을 단련한 정연공주는
말타기만은 자신이 있었다.
"이랴!"
정연공주는 말을 향해 힘차게 채찍질을 했다. 말이
히히힝 하는 울음소리와 함께 어둠 속으로 질풍처럼
달리기 시작했다. 그녀는 캄캄한 대륙의 초원을
가로질러 두운봉의 오가촌을 향해 질풍처럼 말을
몰았다.
48. 소년과 소녀
낮달이 서쪽 하늘에 희끄무레하게 걸려 있었다.
수불은 낮달이 뜬 서쪽 하늘을 쳐다보다가 내일은
비가 오리라고 생각했다. 해가 설핏이 기울고 있는
서쪽 지평선 위의 하늘에 노을이 지지 않고 있었다.
노을이 지지 않는 것은 비가 내릴 것이라는 징표였다.
"내일은 비가 오겠는 걸......"
수불은 옆에 쪼그리고 앉아 있는 여진을 쳐다보고
낮게 중얼거렸다.
"하늘이 멀쩡한데 무슨 비야?"
마당에서 벼를 수수짚게로 털던 두운네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말했다. 두운네의 마당엔
오가촌의 아낙네들이 벼를 털기 위해 모여 있었다.
모두 두운네처럼 어리둥절한 표정이었다.
아낙네들은 오늘 하루종일 남정네들이 논에서 벤
벼의 낟알을 수숫대를 꺾어서 집게를 만들어 ㅎ어내는
일을 하고 있었다. 낟알을 ㅎ어낸 뒤엔 볕에 말려서
절구로 찧어야 했다.
"하늘이 맑기만 한데......"
영고네도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
"지금 비가 오면 아무 쓸모도 없어."
"그러게......."
"정말 비가 오겠니?"
"네."
"그럼 논에 있는 나락단을 다 걷어야 할 거
아니야?"
"멀쩡한데 무슨 비야?"
"수불이가 비가 온다면 틀림없이 왔잖아?"
"그래두 하늘을 보고 말해. 하늘이 저렇게 맑은데
무슨 비야? 괜히 헛고생하지 말고 덮어놓기나 해...."
"그럴까?"
두운네가 엉거주춤 엉덩이를 들고 일어섰다가 다시
주저앉았다. 수불은 그냥 씨익 웃기만 했다. 여진은
수불과 서쪽 하늘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여진으로서도
비가 올지 오지 않을지 알 수 없는 일이었다.
수불이 두운네 마당에서 일어나 바깥으로 나갔다.
여진도 수불을 따라 두운네 마당을 나왔다.
"내일 정말 비와?"
여진은 두운네 집에서 멀리 떨어져 영고네 집 앞에
이르자 수불에게 물었다. 영고네의 퇴락한 초가엔
하얀 박덩어리가 세 개나 여물어 있었다.
"비가 올 것 같애."
수불이 짐짓 심각한 표정을 꾸미며 대답했다.
"하늘엔 구름도 없는데.......?"
여진은 믿어지지 않는다는 표정이었다.
"멀어서 구름이 보이지 않지만 지평선 저 쪽엔
비구름이 있을 거야."
"어떻게 알지?"
"우리 나라의 비구름은 대개 서쪽에서 오고 있어.
비구름이 중원을 지나 대막에서 만들어지는데
비구름이 가까이 있으면 노을이 지지 않아. 비구름이
햇빛을 막아버리니까.....그러나 노을이 지는 것은
햇빛을 막지 않았다는 증거야......."
여진이 고개를 갸우뚱했다. 수불의 말을 믿어야
할지 말아야 할지 알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수불의 말은 대부분 그대로 들어맞아 마을의 노인들도
그의 말을 믿고 있었다.
"비가 오는 것은 또 소리로도 알 수 있어."
"소리로?"
"소리가 가까이 들리면 비가 온다는 증거야."
"왜?"
"구름이 낮게 깔려 있으면 구름이 소리를 반사해.
구름이 없으면 무한한 하늘로 소리가 퍼져 올라가지만
구름이 가로막혀 있으면 반사를 하니까 구름이 보이지
않아도 구름이 하늘에 있다는 걸 알 수 있는
거야......."
여진으로서는 여전히 아리송한 얘기였다.
"그것뿐이 아니야. 날씨가 다른 날보다
후덥지근해도 비가 온다는 증거야."
"설마?"
"소리처럼 땅에서 솟는 지열(地熱)도 구름에
반사되어 다시 우리 땅으로 돌아와. 그러니까 지열이
멀리 가서 식지 않고 우리 주위를 돌기 때문에 더욱
후덥지근해지는 거야."
"........."
"그래서 옛날 노인들은 소리가 가까이 들리면 비가
오려나...... 하고 하늘을 쳐다보고 날씨가
후덥지근해도 비가 오려나.......하고 하늘을
쳐다보는 거야."
여진은 어깨를 으쓱했다. 수불의 말을 가만히 듣고
있자니 모두가 옳은 것 같았다.
수불의 말대로 밤중에 비가 오기 시작했다. 여진은
잠자리에서 일어나 창문을 열고 추적추적 가을비가
내리는 것을 우두커니 내다보았다. 밖은 아직도
어두웠다.
(수불 오빠는 정말 신기한 오빠야........)
여진은 빗소리를 들으며 수불을 생각했다.
잠을 자려고 했으나 좀처럼 잠이 오지 않았다.
어머니가 떠난 지 벌써 두 달이 가까워지고 있었다.
그러나 어머니는 아직도 돌아오지 않고 있었다.
여진은 어머니가 찾아간 아버지에 대해서 잠깐 생각해
보았다. 아버지는 무얼 하는 사람일까. 어머니는 왜
무슨 일이 있으면 솔빈부로 아버지를 찾아오라고
신물을 남긴 것일까.......
여진은 이런 저런 생각을 하다가 침상에 돌아와
누웠다. 아직 밤이 얼마나 깊었는지 알 수 없었다.
밖에는 마른 나뭇잎을 때리는 빗소리가 그치지 않고
계속되고 있었다.
여진은 빗소리를 듣고 있다가 잠이 들었다.
여진이 잠이 깬 것은 날이 완전히 밝았을 때였다.
날이 밝으면서 비가 그쳤다. 그러나 하늘은 금세라도
다시 빗방울이 뿌릴 것처럼 낮고 어둠침침했다.
여진은 마당으로 나와 찌푸퉁한 하늘을 이고 있는
두운봉을 쳐다보았다. 만산홍엽을 이룬 두운봉의
단풍이 비 때문에 더욱 선연하게 붉었다. 마치
불이라도 붙은 듯이, 비단이라도 펼쳐 놓은 듯이
두운봉이 울긋불긋했다.
(어쩌면 저렇게 붉을까.......)
여진은 넋을 잃은 듯이 두운봉을 쳐다보다가
계곡으로 가서 푸득푸득 세수를 했다. 집에서 세수를
해도 되지만 일부러 계곡을 찾아간 것이다.
간밤에 비가 왔는데도 계곡은 청계라는 이름이
어울릴 정도로 깨끗했다. 물이 맑아서 바닥이
들여다보이는 계곡에는 크고 작은 물고기들이 유영을
하고 있었고 이따금 나뭇잎들이 떠내려오곤 했다.
여진은 물에 비친 자신의 얼굴을 들여다보고 생긋
웃었다. 그러자 물 속에 있는 여진도 생긋 웃었다.
여진은 물 속에 있는 자신을 손으로 훔쳐보았다.
그러자 물에 파문이 일어나면서 얼굴이 사라졌다.
"여진아!"
그때 수불이 여진을 부르러 왔다.
"오빠!"
여진은 계곡 가에서 일어나 수불에게 깡충깡충
뛰어갔다.
"아침 먹어야지......."
수불이 싱그렇게 웃었다.
"오빠 정말 비가 왔어."
"내가 언제 거짓말하든?"
"오빠는 어떻게 그런 걸 다 알아?"
"그런 건 다 책에 있어. 그리고 세상을 오래 산
노인들도 알고......."
"책에?"
"니가 보고 있는 천부비록이라는 책에 다 있어."
"난 못 봤는데.......?"
"단군세기에 보면 단제께서는 서천(西天)에 노을이
지는 것을 보시고 밤에 비가 오리라는 것을 아시고
군사를 움직이지 않으셨다, 라는 기록이 있어. 또
단제께서는 나뭇잎이 바람에 흔들리는 모양을 보고도
비가 오는 것을 아셨고, 소리가 가까이 들리는 것이나
제비가 벌레를 물으러 들판을 날아다니는 것,
개구리가 집으로 들어오는 것을 보고도 비가 온다는
것을 아셨지........그래서 풍백과 우사를 거느렸다는
기록이 생긴 거야."
"난 왜 그런걸 모르지?"
"책을 읽어도 그냥 읽으니까 그래. 나중에 또
얘기하고 밥이나 먹으러 가자."
수불이 여진의 손을 꼬옥 쥐었다. 따뜻한 손이었다.
여진은 수불에게 손을 잡혀 촌장집에 가서 아침을
먹었다.
오가촌 촌장인 오속리(烏屬利)는 책이 많았다.
여진은 아침을 먹은 뒤에 수불과 함께 서방(書房)에서
책을 보다가 밖으로 나왔다. 밖에는 또 다시 가느다란
실비가 내리고 있었다.
"오빠네 성은 참 이상하다."
"왜?"
"성을 왜 까마귀 오(烏)자로 쓰고 있어?"
"까마귀가 어때서?"
"까마귀는 흉조잖아?"
"까마귀가 왜 흉조야?"
"신라에서는 까마귀를 흉조라고 그런대."
"예맥에서는 까마귀가 길조야."
"예맥?"
"여기가 옛날엔 예맥(濊貊)땅이었어. 한때는
옥저(沃沮)라는 이름을 갖고 있기도 했구......"
"예맥과 옥저가 나라야?"
"나라지......."
수불이 부처처럼 의미를 알 수 없는 기이한 미소를
지었다.
"비가 오는데 동굴에나 갈까?"
여진이 수불의 손을 잡아끌었다.
"책보러?"
"응."
"그래."
동굴은 계곡 건너의 숲속에 있었다. 여진은 수불의
손을 잡고 계곡의 통나무 다리를 건너 숲으로 갔다.
어느 사이에 빗방울이 점점 굵어지고 있었다. 푸숫한
가을비가 옷 속으로 스며들어 몸이 으실으실 떨렸다.
그러나 동굴에는 마른 나뭇잎을 깔아 놓아 따뜻했다.
그 시간 오가촌에는 무시무시한 혈풍이 불어닥치고
있었다.
"오가촌을 에워싸라!"
"오가촌에 있는 자들을 단 하나도 남겨 놓지 말고
몰살시켜라!"
오가촌 입구로 갑자기 수많은 군사들이 달려오더니
학살을 자행하기 시작했다. 오가촌은 수 십년
동안이나 병화(兵禍)를 겪은 일이 없었고 최근에는
군사들을 구경한 일조차 없었다. 오가촌 사람들은
수많은 군사들이 기치창검을 번뜩이며 나타나자
멀뚱멀뚱 바라보기만 했었다.
"군사들 아니여?"
"군사들이 우리 마을에 웬일이지?"
오가촌 촌민들은 군사들을 보고도 피할 생각을 하지
않고 웅성거리기만 했다.
"저 것들을 죽여라!"
"모조리 죽여라!"
거란 장수 강묵기의 명령에 와 하는 함성을 지르며
거란군사들이 달려들기 시작했다. 오가촌 촌민들은
그때서야 허둥지둥 달아나려고 했으나 거란군사들의
창과 칼에 속절없이 처절한 비명을 지르며 죽어갔다.
"사람 살려!"
"모두 도망쳐요!"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눈에 띠는 대로 죽이는
거란군사들을 피해 오가촌 사람들은 울부짖으며 이리
뛰고 저리 뛰었다.
"아이고 이게 무슨 일이야?"
"아가야!"
오가촌 촌민들에게는 청천하늘에 날벼락이었다.
그들은 영문도 모르고 거란군의 창칼에 피투성이가
되어 죽어갔다. 도망을 갈 수는 없었다. 거란군이
오가촌을 빽빽하게 에워싸고 살육을 시작했기 때문에
그들의 창칼을 피할 수 없었다.
여진과 수불은 말울음소리와 사람들의 비명소리에
놀라 동굴 앞으로 뛰어 나왔다. 그리고 그들은 수많은
군사들이 마을을 에워싸고 사람들을 죽이는 것을
발견했다.
"오빠!"
여진이 수불을 쳐다보며 울상을 지었다.
"저 놈들은 거란놈들이야!"
수불이 눈을 부릅뜨고 마을을 에워싼 거란군사들을
내려다보았다.
"거란?"
"발해를 멸망시킨 오랑캐래."
수불이 동굴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가 활을 들고
뛰어 나왔다. 수불의 등에는 화살통이 매어져 있었다.
"오빠!"
여진이 겁먹은 표정으로 수불을 쳐다보았다.
"넌 여기서 천부오행진(天府五行陣)을 설치하고
있어. 그 진은 설치할 줄 알지?"
수불의 얼굴에 단호한 결의가 나타났다.
"응."
"난 내려갔다가 올께."
수불이 굳은 표정으로 말하고 마을로 달려 내려가기
시작했다. 여진은 발을 동동 구르며 수불이 달려
내려가는 것을 보다가 돌멩이를 주워 모아 진을
설치하기 시작했다.
수불이 마을 가까이 달려 내려왔을 때 거란군은
학살을 거의 끝내고 마을에 불을 지르고 있었다.
마을에는 화염이 충천하고 초가집이 타는 냄새로
진동을 하고 있었다.
"사, 사람 살려!"
그때 계곡과 가까운 영고네집 앞의 짚가리에서
거란군사가 영고네를 찍어누르고 있는 것이 보였다.
영고네는 옷이 벗겨져 있었고 거란군사는 아랫도리를
내리고 영고네를 누르며 헐떡거리고 있었다.
(짐승 같은 놈들......!)
수불은 화살통에서 화살을 꺼내 활에 재고
거란군사를 향해 겨누었다. 그리고는 시위를 팽팽하게
당겼다가 놓았다.
쉭.......
화살이 허공을 가르고 날아가 거란군사의 허여멀건
엉덩이에 박혔다. 명중이었다. 거란군사가 풀쩍 뛰어
오르더니 쓰러졌고 영고네가 알몸인 채로 계곡을 향해
달려오기 시작했다.
"계집이 달아난다!"
"계집을 잡아라!"
거란군사들이 영고네가 계곡으로 달려오는 것을
우르르 달려왔다. 영고네는 논둑길을 달리며 엎어지고
넘어지며 데굴데굴 구르다시피 달려오고 있었다.
수불은 다시 활에 화살을 쟀다. 그리고 이번엔
영고네를 뒤쫓아오는 거란군사를 향해 겨누었다.
쉬익........
화살이 바람을 일으키며 날아가 거란군사의 얼굴에
박혔다. 거란군사가 처절한 비명을 지르며 얼굴을
싸쥐고 논바닥에 나뒹굴었다.
"매복이다!"
"매복이 있다!"
거란군사들은 동료가 화살을 맞고 나뒹굴자
주춤했다. 그 틈에 영고네는 계곡까지 달려와
비틀비틀 통나무 다리를 건너기 시작했다.
"매복은 한 놈이다!"
그때 거란군사들이 수불을 발견하고 와 하고
달려오기 시작했다. 수불은 이번엔 한꺼번에 화살 세
대를 활에 매기고 시위를 당겼다. 그리고 통나무
다리를 건넌 영고네에게 소리를 질렀다.
"아줌마! 통나무 다리를 계곡에 빠트려요!"
그러나 영고네는 반쯤 정신이 나갔는지 그대로
달려왔다.
수불은 화살통에 있는 화살을 모조리 쏘고 영고네를
데리고 동굴로 돌아왔다. 동굴 앞에는 여진이 이미
천부오행진을 설치하고 기다리고 있었다.
49. 오가촌의 비극
정연공주가 오가촌에 당도했을 때 오가촌은 이미
쑥대밭이 되어 있었다. 정연공주는 불탄 흔적만 남은
오가촌의 풍경에 망연자실했다. 가을이라 시체들이
썩지는 않았으나 마을 곳곳에 널부러져 있는 시체는
참혹하기 짝이 없었다. 짐승이 물어뜯은 듯한
이빨자국과 까마귀가 눈을 파낸 듯한 시체의 끔찍한
모습, 말라붙은 핏자국에 달라붙은 파리 떼는 차마
눈뜨고 볼 수 없는 참상이었다.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을까........?)
정연공주는 입을 벌린 채 한동안 다물지를 못했다.
그러나 다음 순간 여진의 생사가 걱정이 되어
부리나케 초옥으로 달려갔다. 정연공주는 어린 여진이
변을 당했을 것 같아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그러나
그녀의 집은 불에 타버린 뒤였고 여기저기 집이 탄
잿더미만 시커멓게 남아 있었다.
(설마 불에 타버린 것은 아니겠지.........?)
정연공주는 시체를 샅샅이 살피기 시작했다. 시체는
집집마다 몇 구씩 나왔다. 노인의 시체에서부터
어린아이의 시체까지 집집마다 무리 죽음을 당해
있었다.
여자들도 예외는 아니었다. 여자들은 함부로 옷이
벗겨져 있어서 무지막지한 사내들에게 겁탈을 당한
것으로 보였다. 여자들 중에 유일하게 보이지 않는
것은 영고네뿐이었다.
영고 아버지와 영고 할아버지 할머니, 그리고 어린
영고까지 시체가 되어 쓰러져 있었으나 영고네는
보이지 않았다.
(영고 엄마는 살아 있는 모양이야........)
영고네 집을 샅샅이 살핀 뒤 정연공주는 그렇게
결정을 내렸다. 그리고 그때서야 조금 안심을 했다.
영고네가 살아 있다면 여진도 살아 있을 가능성이
있는 것이다. 게다가 촌장집의 손자 수불이의 시체도
보이지 않았다.
수불이는 총명한 녀석이었다. 누구에게 배웠는지는
알 수 없었으나 활도 잘 쏘았고 나이에 어울리지 않게
천문지리에도 능통했다.
그 녀석이 살아 있다면 여진도 살아 있을 터였다.
여진이 그림자처럼 수불이를 따라 다녔기 때문이었다.
(혹시 동굴에?)
정연공주는 동굴을 생각하자 정신이 번쩍 들었다.
아이들은 동굴엘 잘 갔고 정연공주는 솔빈부로 떠나기
전에 동굴에 책을 감춰두었던 것이다. 생각이 거기에
미치자 정연공주는 이미 허공으로 몸을 솟구치고
있었다.
정연공주는 바람을 가르며 허공을 날 듯이 달렸다.
계곡의 통나무 다리를 건너서 동굴 입구로 달려가자
천부오행진이 설치되어 있었다. 여진이나 수불이가
설치한 것이 분명했다.
정연공주는 진의 생문(生門)을 찾아 동굴로
들어갔다. 동굴에는 아이들이 없었으나 사람이 머문
듯한 흔적이 여기저기 있었다. 화섭자를 켜들고 동굴
안을 살피자 천부경은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진이 파괴되지 않은 것을 보면 동굴에 침입자는
없는 것 같은데.......)
정연공주는 짙은 의혹에 사로잡혔다.
수불이와 여진이가 보이지 않는 것은 두 아이가
살아서 동굴을 나와 오가촌을 떠날 수도 있는 것이다.
게다가 이런 일이 닥칠 것을 예상이라도 하듯이
그녀가 여진에게 장영의 신물까지 주면서 무슨 일이
생기면 솔빈부로 찾아오라고 했던 것이다.
(그래, 아이들은 지금쯤 솔빈부를 향해 가고 있을
거야.)
정연공주는 수불이가 총명한 아이이므로 변을
당하지는 않았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자 다소
마음이 놓이면서 다른 의문이 머릿속에 떠올라왔다.
그것은 거란군이 어떻게 하여 오가촌의 존재를 알게
되었느냐 하는 것이었다. 게다가 오가촌이 존재한다고
해도 뚜렷한 대요(對遼)항쟁 의사가 없는 평범한
마을사람들을 거란군이 무엇 때문에 잔인하게
살해하고 불태워버렸느냐 하는 것이었다.
(이들은 나를 노리고 온 거야........)
정연공주는 거란군이 천부비록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알려진 자신을 노린 것이라고 생각했다.
천부비록은 발해의 보물이므로 누구나 욕심을 내고
있었다.
그러나 의문은 풀리지 않았다.
정연공주는 그 동안 오가촌에서 10년이나 숨어
있었다. 그러나 10년 동안 거란군은 한 번도 침입을
하지 않았고 오가촌 사람들도 그녀가 발해의 공주라는
사실을 까맣게 모르고 있었다. 게다가 그녀는 한 번도
바깥출입을 하지 않아 외부인과 단절되어 살았었다.
그녀가 만난 외부인이라고는 요의 사신이라는
이진몽이라는 사내와 길을 잃고 헤매던 발해
유민들뿐이었다.
(이진몽이 요의 첩자는 아닌 것 같고........)
그렇다면 발해 유민들뿐이었다.
거란군의 첩자들이 발해 유민을 가장하여
침투하려다가 진 때문에 길을 잃고 헤매었거나 발해가
멸망한 뒤에 거란에 붙어버린 배신자들일 것이었다.
정연공주는 동굴을 나왔다.
그녀는 수불이와 여진이가 거란군의 추격을
받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거란의 밀정은 곳곳에
은신해 있었다. 그녀가 솔빈부에서 장영을 만나고
돌아오다가 객잔에 머물고 있을 때도 거란군들이
습격을 했었고 오가촌까지 습격을 받았던 것이다.
수불이와 여진이가 거란군의 공격을 받을 가능성은
너무나 많았다.
정연공주는 마음이 초조해졌다.
그녀는 두운봉으로 단숨에 달려 올라갔다.
두운봉에서 두만강까지 가는 길은 산이 험하고 계곡이
많아서 말을 타고 갈 수가 없었다. 솔빈부에서 돌아올
때도 화룡의 객잔에 말을 맡기고 강을 건넜던 것이다.
그녀는 경공술을 이용하여 계속 달렸다.
개마고원 일대는 벌써 단풍이 진 곳도 있었고 눈이
내린 곳도 있었다. 산아래는 아직도 녹음이
푸르렀으나 중턱에는 타는 듯이 붉은 단풍이 들고
산꼭대기에는 흰 눈이 하얗게 내린 곳도 있었다.
정연공주는 이틀만에 두만강에 이르렀다. 두만강에
이르기까지는 곳곳에 진이 설치된 흔적이 있었고 그
진을 파괴한 흔적도 있었다.
(추격자들도 기문진에 능통한 자가 있어!)
정연공주는 진이 파괴당한 것을 보고 불안해졌다.
정연공주는 진을 설치하고 파괴한 흔적을 세심하게
살피기 시작했다. 그리고 진들이 모두 파괴하기 쉬운
평범한 진이라는 사실을 발견하고 의아했다.
그것은 추격자들에게 도망가는 흔적을 남기고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마치 나는 이쪽으로 도망갈
테니 이쪽으로 따라오라는 식이었다.
정연공주는 절레절레 고개를 흔들었다. 아이들 하는
짓이 위험스럽기 짝이 없었다.
두만강의 건너편 나루에는 뱃사공이 한가하게
낚싯대를 드리우고 길손을 기다리고 있었다. 길손이
없을 때는 낚시로 고기를 잡아 생계를 삼는
모양이었다.
"사공!"
"사공!"
정연공주가 목청을 높여 소리를 지르고 손짓을 하자
사공이 낚싯대를 걷고 배를 저어 오기 시작했다.
정연공주는 사공이 배를 저어 오는 동안 건량을 꺼내
식사를 했다.
사공은 뜻밖에 허리가 구부정한 초로의 노인이었다.
그래도 무엇이 흥겨운지 연신 콧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이내 배가 나루에 닿았다. 정연공주는 펄쩍 뛰어
배에 올라탔다. 그러자 늙은 사공이 삿대로 방향을
잡은 뒤에 다시 오던 물길로 되돌아가기 시작했다.
사공이 노를 젓는 소리가 삐걱삐걱 들렸다.
정연공주는 배가 강 중간쯤에 이르자 사공에게 어린
아이 둘이 강을 건너지 않았느냐고 물었다. 그러자
늙은 사공은 눈을 끔벅거리고 있다가 사흘쯤 전에
어떤 여자와 아이 둘이 강을 건넜다고 말해 주었다.
"그 아이들은 어디로 간다고 하던가요?"
"글쎄요......"
늙은 사공은 노를 저으며 정연공주의 위아래를
살폈다.
"잘 생각해 보세요!"
정연공주는 늙은 사공에게 단호하게 말했다.
"솔빈부로 간다고 그러던군요."
"솔빈부요?"
정연공주는 고개를 갸우뚱했다. 강을 건넌 아이들이
수불이와 여진이가 분명했다.
"아이들 차림은 어땠습니까?"
"사내아이가 책 같은 것을 등에 지고 있더군요."
"어떻게 책이라는 것을 아시죠?"
"아이들이 말하지 않았으면 제가 어떻게
알겠습니까? 저희들끼리 얘기하는데 천부경이
어쩌고저쩌고 하면서 솔빈부로 가야만 아버지
어머니를 만날 수 있다고 그러더군요."
"그렇군요."
정연공주는 고개를 끄덕거렸다. 아이들이
천부경이라는 말까지 했다면 수불이와 여진이
틀림없는 것이다.
사공이 노를 저으며 다시 뱃노래를 흥얼거리기
시작했다.
정연공주는 우쭐렁거리며 흐르는 강물을 우두커니
내려다보았다. 아이들이 천부경이라는 말을 함부로
입에 담았다면 추격자들에게 정체를 발각 당할 염려가
있었다. 서둘러 뒤를 쫓아가지 않으면 아이들의
목숨이 위험할 터였다.
(아이들이라 목숨이 위태로운지도 모르고 그런 말을
함부로 하고 있으니........)
그때 사공이 노래를 멈추고 그녀를 빤히
쳐다보았다.
"참, 아이들이 동행하고 있는 여자분에게 영고
아주머니라고 그러더군요."
"영고 아주머니요?"
"예."
"영고 아주머니라는 여자는 행색이 어땠습니까?"
"말도 아니었어요. 애들과 남정네가 거란군사들에게
죽었다고 계속 울기만 하더군요. 아이들이 그
여자분을 오히려 위로하고 있었어요. 특히 사내
녀석이 여간 총명하지 않더군요. 사내 녀석도 부모와
할아버지가 죽었다는데도 어른처럼 의연하던군요."
"아이들 뒤를 쫓아가는 사람들은 없었나요?"
"많았지요. 거란군사들을 비롯해 무림인사들까지
해서 수백명은 족히 될 겁니다."
"그들은 어디로 갔습니까?"
"모두 솔빈부 쪽으로 향해 갔습니다."
"자세한 사정을 가르쳐 주셔서 고맙습니다."
정연공주는 뱃사공에게 깍듯이 인사를 했다.
이내 배가 나루에 닿았다. 정연공주는 배가 나루에
닿자마자 펄쩍 뛰어 내린 뒤에 화룡을 향해 번개처럼
달려갔다. 화룡에 가야만 말을 구할 수 있었다.
(이 애들이 제발 아무 일도 없어야 할 텐데......)
정연공주는 화룡의 객잔에 도착하자 곧 바로 말을
찾아서 솔빈부를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사방은 이미
캄캄하게 어두워져 있었다. 그러나 조금도 지체할
수가 없었다.
"이랴!"
"이랴!"
정연공주는 관도로 질풍처럼 말을 몰았다.
밤이 되자 대륙의 날씨는 차가워졌다. 관도라고는
하나 길도 제대로 보이지 않았고 성(城)이 있는 곳은
성문이 닫혀 있어서 돌아가야 했다.
정연공주는 새벽까지 쉬지 않고 말을 달렸다.
"아이쿠!"
정연공주는 질풍처럼 말을 몰다가 말이 갑자기
꼬꾸라지는 바람에 말등에서 떨어져 나뒹굴고 말았다.
말이 초원의 관도에 패어 있는 웅덩이를 잘못 디딘
것이다.
(어쩐지 불길해........)
정연공주는 쓰러진 말을 일으키며 가슴이 뛰는 것을
느꼈다. 말과 정연공주가 다친 곳이 없어서
다행이었으나 불길하기 짝이 없었다. 정연공주는
뒤통수를 엄습하는 불길한 기분을 떨쳐버리지 못한 채
다시 말에 올라타고 솔빈부로 세차게 말을 몰기
시작했다.
50. 솔빈의 열사들
솔빈부 경계로 들어서자 물색(物色)이 완연히
달라졌다. 수불은 등에 진 책을 연신 추스르며 드넓은
초원을 시린 눈빛으로 쳐다보았다. 대륙이라 어느
곳이나 목초가 무진장으로 있었지만 솔빈부의
목초지대는 말이 좋아하는 풀들이 끝없이 펼쳐져
있었다.
풍광이 수려한 고장이었다. 햇살은 따뜻하고
바람결은 서늘했다. 겨울이 가까이 오고 있는데도
양지쪽으로는 풀들이 푸릇푸릇했고 갈색 털에 윤기가
흐르는 말들이 군데군데 모여서 한가하게 풀을 뜯고
있었다.
싱개호 호수로 흘러 들어가고 싱개호 호수에서 흘러
내려오는 청계(淸溪)가 흐르는 냇가에는 열병하는
병사들처럼 수양버들이 길게 늘어서 있었다. 그러나
수양버들도 이미 노랗게 물이 들어 소슬바람이 불
때마다 잎사귀들이 하늘하늘 떨어지고 있었다.
"익주는 아직 멀었을까?"
여진이 지친 기색으로 수불을 쳐다보며 물었다.
오가촌에서 두만강까지는 줄곧 걸었고, 화룡에서
마차를 세 내기도 했고 말을 빌려 타기도 했으나 걸은
것도 여러 날이었다. 어린 나이의 여진이 견디기에는
너무나 멀고 먼 여정이었다.
"이제 하루만 더 가면 될 꺼야."
수불이 영고네를 힐끗 쳐다보며 대꾸했다. 수불
자신도 발바닥이 부르트고 종아리가 부었으나
여진에게 내색을 하고 싶지 않아 그렇게 대꾸한
것이다.
영고네도 지친 기색이 역력했다. 그러나 수불을
더욱 안타깝게 하는 것은 영고네가 그날 이후 한
마디도 하지 않고 있는 것이었다. 영고네는
거란군사들에게 옷을 벗기고 겁탈을 당할 찰나에
간신히 도망을 쳐서 동굴로 들어온 뒤에 그 자리에서
혼절을 했었다.
영고네는 두 시진이 지난 뒤에야 눈을 떴으나
눈물만 주르르 흘릴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수불이 거란군사가 동굴 앞에서 웅성거리다가 마을로
물러간 것을 확인하고 계곡에서 물을 떠다가 먹였으나
여전히 말을 하지 못했다. 거란군사들은 마을을
에워싸고 무엇인가 열심히 찾고 있었다.
"아줌마가 왜 저러지?"
여진이 의아한 눈빛으로 영고네를 살피며 수불에게
물었다.
"충격을 많이 받은 모양이야."
수불은 영고네가 이지를 상실한 것이라고 생각했다.
수불은 동굴에서 나와 마을을 살폈다. 거란군사들은
밤이 되어도 돌아가지 않고 횃불을 켜들고 웅성거리고
있었다. 일렁거리는 횃불의 그림자가 이리저리
몰려다니는 것을 밤새도록 볼 수 있었다.
거란군사들은 이튿날이 되어서야 기치창검을
앞세우고 물러갔다. 수불은 거란군사들이 마을에서
완전히 물러간 뒤에도 한동안 마을로 들어가지
않았다. 거란군사들이 물러가는 척하면서 마을
어디엔가 매복을 하고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내 생각이 옳았어........)
수불의 예상대로였다.
거란군사들은 물러가는 척하고는 밤이 되자
소리없이 마을로 기어 들어와 숨었다. 수불은
거란군사들이 지쳐서 떨어질 때까지 기다리기로 했다.
천무비록에 있는 병법에는 기다리는 것도 훌륭한
전략이라고 씌어 있었다.
거란군사들은 하룻밤을 꼬박 매복했다가 날이 밝자
마을에서 물러갔다.
"이제 완전히 물러간 거야?"
여진이 수불에게 다가와서 몸을 부르르 떨며
물었다. 동굴에서 아무 것도 먹지 못하고 이틀 밤을
지새운 까닭에 배고프고 추웠다. 특히 알몸의
영고네는 입을 것이 없어서 더욱 추웠을 것이었다.
"그런 것 같아."
수불은 까마귀와 독수리 떼가 마을 위에서 낮게
선회하고 있는 것을 보고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럼 얼른 가서 옷을 가져와."
"그래."
수불은 영고네와 여진을 동굴에 남겨 두고 혼자서
마을로 들어갔다. 다행히 마을엔 거란군사들이 하나도
없었다. 수불은 마을 위의 하늘을 선회하고 있는
까마귀 떼와 독수리 떼를 쫓지 않고 마을로 달려갔다.
거란군사들이 멀리서 매복을 하고 있다면 까마귀 떼와
독수리 떼를 쫓는 것을 발견하고 수상하게 여길
것이었다.
(나쁜 놈들!)
마을엔 살아 있는 사람들이 하나도 없었다.
오가촌 촌장인 수불의 할아버지와 작은아버지
내외도 비참하게 죽어 있었다. 수불의 할아버지와
작은어머니는 마당에서 창으로 찔려 죽어 있었고
작은어머니는 하반신이 벗겨진 채 안방에서 죽어
있었다.
수불은 할아버지의 시체 앞에서 망연자실했다.
작은어머니의 시체는 더욱 처참했다. 그러나 수불은
할아버지와 작은아버지 내외의 시체를 어찌해야
좋을지 알 수 없었다. 수불은 사람이 죽은 것을 거의
본 일이 없었다. 사냥철이 되면 어른들을 따라 사냥을
다녔기 때문에 짐승이 죽은 것은 무수히 볼 수
있었으나 사람이 죽은 것은 처음이었다. 아버지
어머니가 병으로 죽었으나 수불이 어릴 때여서
기억조차 나지 않았다.
수불은 사람들의 시체도 짐승의 시체와 다르지
않다고 생각했다.
수불은 할아버지의 시체 앞에서 이상하게 눈물이
나오지 않았다. 수불은 할아버지와 작은아버지 내외의
죽음이 실감되지 않았다. 작은어머니가 하반신이
벗겨져 죽어 있는 것도, 할아버지가 피투성이가 되어
죽어 있는 것도 꿈처럼 생각되었다.
수불은 눈을 부릅뜨고 죽은 작은어머니의 모습이
너무나 끔찍하여 시체에 가까이 접근하는 것조차
두려웠다. 그러나 수불은 이를 악물고 할아버지와
작은어머니의 시체에 가까이 접근하여 절을 했다.
할아버지와 작은 아버지, 작은 어머니의 장례를
치를 수는 없었다. 마을에 살아 남은 사람이라고는
아무도 없을 뿐아니라 거란군사들이 언제 되돌아올지
알 수도 없는 것이다.
(할아버지 지금은 그냥 가겠습니다.)
수불은 마음속으로 할아버지의 시체에 인사를 했다.
(허나 제가 장성하면 반듯이 할아버지의 원수를
갚겠습니다!)
수불은 마음속으로 굳게 결심을 했다.
수불은 할아버지와 작은 아버지 내외의 시체를
버려둔 채 집으로 뛰어들어가 옷을 꺼냈다. 다행히
수불의 집은 불타지 않아서 옷이 그대로 있었다.
먹을 것은 거란군사들이 모조리 가져갔는지 보이지
않았다.
수불은 두툼한 겨울옷을 챙겨 가지고 동굴로
돌아갔다. 그러나 여진이 배가 고프다고 칭얼거려
다시 마을로 돌아와 먹을 것을 찾았다. 거란군사들이
먹을 것을 모조리 약탈해 갔으나 불타지 않은 집에
쌀이 조금 남아 있었다. 밭에는 김장용의 커다란
무우도 있었다.
수불은 무우를 뽑아 가지고 계곡에서 씻은 뒤
동굴로 돌아왔다.
여진이와 영고네는 배가 고팠는지 허겁지겁 무우를
깨물어 먹었다. 수불도 무우를 깨물어 먹었다.
수불은 이튿날 아침 여진이와 영고네를 데리고
솔빈부를 향해 떠나기 시작했다. 여진의 어머니가
무슨 일이 있으면 솔빈부로 찾아오라고 신물을 주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거란군사를 조심해야 했다.
수불은 길을 떠나면서 곳곳에 기문진을 설치하기
시작했다. 거란군사들의 추격을 방지하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진을 파홰하기 좋게 평범한 진만을 설치하여
추격자들을 안심하게 하였다. 수불이 추격자들을
따돌린 것은 두만강 건너 화룡현에서였다.
화룡현은 반도에서 대륙으로 들어가는 관문이었다.
화룡에서 상경용천부로도 가고 솔빈부로도 가고, 멀리
장령부로 가는 길목이기도 했다. 수불은 두만강의
뱃사공에게 일부러 장령부로 간다고 하고 솔빈부로
길을 틀었다. 혹시라도 추격자가 있으면 장령부
쪽으로 유인을 하기 위해서였다. 그리하여 수불은
여진이와 영고네를 데리고 무사히 솔빈부에 이르게 된
것이다.
"좀 쉬었다가 갈까?"
수불이 여진을 돌아보며 물었다. 수불은 막상
솔빈부에 이르자 근심이 되었다. 여진의 아버지라는
장영을 찾아왔으나 그가 자신들을 반겨 줄지도 알 수
없었고 여진의 어머니가 솔빈부 익주에 있는지도 알
수 없었다. 설사 그들이 있다고 해도 여진은 몰라도
자신까지 반겨 주리라는 확신이 없었다.
게다가 여진은 발해의 왕족이었다.
수불은 여진의 어머니가 갖고 있는 책이나 여진의
어머니에게서 풍기는 신비스러운 분위기에 막연히
고귀한 신분일 것이라고만 생각했었다. 그러나 여진의
어머니가 발해의 공주라는 것을 알았을 때 수불은
자신도 모르게 가슴이 묵직해 왔다.
(허나 지금은 망국의 왕족일 뿐이야.........)
수불은 발해가 멸망한 왕조라는 사실에 자위를
했다. 발해는 이미 멸망을 했고 멸망한 발해를 자신이
부흥시켜야 하겠다는 웅지(雄志)가 수불의 가슴속에서
꿈틀거리고 있었다.
"응. 쉬고 싶어."
여진이 길섶에 털썩 주저앉았다.
수불도 책을 내려놓고 풀섶에 앉았다. 종아리가
땡기고 발바닥에서 불이 나는 것 같았다. 영고네는
아프지도 않는지 우두커니 길바라기만 하고 있었다.
날은 벌써 뉘엿이 기울고 있었다.
"가자."
수불이 약 반다경(半茶更)을 쉰 뒤에 몸을
일으켰다. 여진도 억지로 몸을 일으켰다.
"오늘은 어디 인가를 찾아서 쉬어야 할 꺼야."
수불은 계속 걸었다.
마을이 나온 것은 사방이 캄캄하게 어두워졌을
때였다. 그들은 허름한 객잔의 봉로방에서 하루를
묵었다.
이튿날 객잔의 주인에게 건량을 마련해 달라고 한
뒤에 수불은 여진이와 영고네를 데리고 다시 길을
떠났다. 길을 잘 알지 못했기 때문에 오가는
사람들에게 일일이 물어야 했다.
수불이 화주에 이른 것은 정오가 훨씬 지났을
때였다. 수불은 객잔에 들어가 점심을 먹은 뒤 다시
화주를 출발했다. 다행히 화주에서 마차를 세 낼 수가
있었다. 그들이 화주성을 벗어나 익주를 향해 길을
잡았을 때 관도에서 거란의 대군을 만날 수 있었다.
거란의 대군은 수많은 깃발을 앞세우고 보무당당하게
익주를 향해 가고 있었다. 군사들은 대부분
기마병이었고 뒤에는 군량을 실은 마차와 병기를 실은
마차가 따르고 있었다.
"저 많은 군사들이 어디로 가는 것일까?"
"이 길은 익주로 가는 길이니까 익주로 가는
거겠지......."
"그럼 어머니가 있는 익주로 가는 거야?"
여진이 의아한 눈길로 물었다.
"그럴 거야."
수불도 다소 불안한 기색으로 대답했다.
거란군사들은 그날 밤에 싱개호 호수에서 둔병을
했다. 수불은 거란군사들이 둔병을 하는 군막을
일일이 세어 보았다. 군막은 모두 5백여 개나 되었다.
군막 하나에 20명의 군사들이 들어 있다면 약 1만
명의 군사들인 셈이었다. 군량과 군수물자를 운반하는
군사들까지 합하면 대략 1만 2천쯤 되어 보였다.
수불은 마부를 재촉하여 밤에도 계속 익주를 향해
달렸다.
51. 초인을 꿈꾸며
그날 밤 장영은 평소와 다름없이 군막에서 잠자리에
들었다. 그러나 다른 때와 달리 쉽사리 잠이 오지
않았다. 장영은 엎치락뒤치락하며 이런 저런 생각에
잠겼다. 군사들이 모두 잠든 탓인지 밖에서는 초원의
마른 풀을 스치고 지나가는 바람소리가 을씨년스럽게
들리고 있었다.
(우보금이 떠날 때가 되었지.......)
남편이 사냥에서 돌아왔으므로 우보금이 자신들의
동영지(冬營地)를 찾아가리라고 생각했다. 장영이
우보금을 보호해준 것은 흑수말갈의 유목민들에게
좋은 인상을 남기기 위해서였다. 흑수말갈은
유목민들이기는 하지만 발해나 거란 어느 쪽에도
치우치지 않고 있었다. 거란에는 형식적으로 조공을
바치고 신하인 척하고 있으나 그것은 군사력
때문이었다.
흑수말갈의 유목민들에게 좋은 인상을 남기면
거란을 칠 때 그들과 연합을 할 수도 있고 연합을
하지 않더라도 발해 부흥군이 거란과 싸울 때 배후를
공격당할 염려는 없는 것이다.
장영이 우보금 일행을 보호해 준 것은 그러한 이유
때문이었다. 최소한 우군(友軍)을 만들지 못하면
적이라도 만들지 않아야 하는 것이다.
(우보금은 초원의 꽃이야.......)
장영은 우보금의 풍만한 몸을 생각하며 피식
웃었다. 우보금의 풍만한 몸은 사내들을 뇌쇄 시킬
정도로 매혹적이었다. 그러나 정연공주와 비교하면
초원에 흩어진 들꽃이었다. 정연공주도 이미 여인으로
성숙하여 몸이 풍만하게 무르익었으나 난초처럼
청초한 향기를 풍기고 있었다.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고 했는데........)
장영은 정연공주가 변함없이 아름다운데 놀랐다.
그리고 정연공주가 자신의 딸을 낳아서 키우고 있다는
사실도 흐뭇했다. 그러나 그 딸이 벌써 아홉 살이라니
믿어지지 않았다. 장영이 오가촌을 떠난 것이 엊그제
같은데 벌써 10년이란 세월이 흐른 것이다.
따지고 보면 10년이 결코 짧은 세월이 아니었다.
장영은 발해를 부흥하기 위해 대륙의 초원과 산맥을
10년이나 누비며 다녔던 것이다. 때로는 눈보라가
열흘 동안이나 몰아치는 들판을 헤매기도 했고 초원에
흩어져 있는 수많은 유목민들의 춘영지(春營地),
하영지(夏營地), 동영지를 찾아다니며 발해의 부흥을
위해 온갖 노력을 했던 것이다.
장영이 솔빈부에 3만이라는 대규모의 발해 부흥군을
모을 수 있었던 것은 10년이라는 긴 세월 동안 뼈를
깎는 노력을 한 탓이었다. 이제 안원부 쪽에서 오는
군량만 도착되면 거란을 공격할 수 있을 것이었다.
물론 3만의 군사로 거란을 멸망시킬 수는 없었다.
그러나 처음 시작은 3만에 지나지 않지만 부흥군이
거란군과의 전투에서 이기면 투항한 군사들을
부흥군에 편입시켜 5만, 10만, 20만의 대군단을
편성하게 되는 것이다.
거란도 불과 수만명의 군대에 점령한 부족의
군사들을 편입시켜 수십만의 군대를 만들었고 발해를
공격했을 때도 투항한 부족들의 군사들이 선봉에
편성되어 거란을 위하여 싸웠던 것이다.
(모든 것이 잘 되고 있어.......)
장영은 만족하여 눈을 감았다.
그 시간 우보금의 파오는 캄캄하게 불이 꺼져
있었다. 그러나 우보금의 파오에는 이미 초원의
전사들 중에서도 가장 용맹한 전사들만 가려 뽑은
전사들이 발해 부흥군 입초병(立哨兵)들의 눈을 피해
속속 모여들고 있었다. 그들은 장영의 살해조로 뽑힌
전사들이었다.
"전사들은 모두 깨어 있는가?"
우보금이 어둠 속에서 들고양이처럼 눈을 빛내며
살해조 전사들에게 물었다. 살해조는 모두 7명이었다.
"예. 모두 깨어 있습니다."
살해조 전사들이 낮게 대답을 했다.
"별동대는?"
"별동대도 칼을 뽑아들고 준비하고 있습니다."
별동대는 살해조 전사들이 실패할 경우에 대비하여
편성한 특공대였다. 역시 초원의 전사들 중에서
무예가 뛰어난 자만 50명을 선발하여 편성하였다.
나머지 2백명의 전사들도 각자의 파오에서 일어나
완전무장을 하고 일어나 있었다.
"좋아. 내가 장영의 군막 앞에 있는 초병들을
제압하겠다. 성공하면 즉시 너희들이 장영의 군막으로
달려와 살해한다! 장영이 깨어 있어서 너희들이
실패할 경우 별동대가 장영의 군막을 에워싸고
암살하도록 한다! 알겠지?"
"예!"
우보금의 말에 전사들이 비장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우보금의 파오에 모인 살해조는 잠시 후에 벌어질
사태에 바짝 긴장하고 있었다.
이윽고 어느 전사의 파오에서 각적(角笛)이 울렸다.
각적은 낮고 애잔했으나 어둠에 잠긴 발해 부흥군의
군막까지 감미롭게 울려 퍼지고 있었다.
우리가 처음 만난 것은 부르한(不咸)의 초원
봄풀이 파랗게 돋아난 춘영지였네
그대는 초원의 들꽃처럼 아름다웠지
양떼를 몰고가는 초원의 여인아
아아호흘레이 아아호흘레이
아아호흘레이 아아호흘레이
우리가 헤어진 것은 쑤이화의 초원
눈보라가 몰아치는 겨울이었네
봄이 오면 만나리라 기약을 했지
그러나 다시 만날 수없네
아아호흘레이 아아호흘레이
아아호흘레이 아아호흘레이
초원에서 유목민들 사이에 널리 불리고 있는
'야생화'라는 노래의 멜로디였다. 유목과 농경,
그리고 수렵을 생업으로 삼고 있는 발해인들에게도
낯익은 노래였다. 누군가 파오에서 그 노래를
뿔피리로 불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 뿔피리 소리가 우보금의 전사들에게
행동개시를 알리는 신호라는 것을 발해 부흥군들은
까맣게 모르고 있었다.
뿔피리 소리를 신호로 먼저 움직이기 시작한 것은
파오에 있는 우보금의 전사들이었다. 우보금의
전사들은 뿔피리 소리가 그치자 파오에서 소리없이
기어 나와 장영의 군막을 에워싸기 시작했다. 10월
그믐이었다. 사방은 칠흑처럼 캄캄했다.
우보금은 전사들이 장영의 군막을 에워쌌다는
신호를 보내 오자 옷을 훌훌 벗고 반나의 몸이
되었다. 그녀가 걸친 것은 얇은 나삼 한
자락뿐이었다. 그녀는 파오를 나오자 장영의 군막
가까이 갔다. 장영의 군막 앞에는 두 명의 보초가
모닥불을 피워 놓고 번을 서고 있었다.
모닥불이 타는 소리가 타닥거리고 불빛이
일렁거렸다.
우보금은 바짝 긴장했다.
그녀는 일부러 보초의 눈에 띄게 파오의 뒤로
돌아갔다. 그리고 엉덩이를 까고 앉아서 보초의
귀에까지 분명하게 들리게 소피를 봤다.
보초는 우보금이 파오 뒤로 돌아가는 것을 보았다.
우보금은 얇은 나삼 한 자락만을 걸치고 있어서
풍만한 몸뚱이가 그대로 내비칠 것만 같았다. 보초는
자신도 모르게 아랫도리가 묵직해 왔다. 그때 파오
뒤로 돌아간 우보금이 소피를 보는 소리가 쏴아 하고
들려왔다.
보초는 우보금이 소피를 보는 하얀 엉덩이를
생각하고 빙긋이 웃었다.
이윽고 소피보는 소리가 그쳤다. 그러나 우보금은
파오로 돌아오지 않고 있었다. 보초는 의아해지기
시작했다. 우보금이 파오 뒤에서 무엇을 하고 있는지
궁금했다. 바람소리인지 짐승의 소리인지 알 수
없었으나 야릇한 신음소리 같은 소리도 얼핏 들렸다.
(설마.......?)
보초는 엉뚱한 생각을 하고 고개를 갸우뚱했다.
그는 동료 보초에게 눈짓을 하고 파오 뒤로 천천히
걸어갔다. 우보금이 무엇을 하는지 확인해 봐야
하겠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러나 파오 뒤로 돌아간 보초는 살해조 전사들에게
불귀의 몸이 되고 말았다. 살해조 전사중 하나가
재빨리 보초의 옷을 갈아입고 장영의 군막 앞으로
걸어갔다. 장영의 군막 앞에 있는 보초는 변장한
전사를 힐끗 쳐다보고는 고개를 떨어트렸다. 그는 선
채로 졸고 있었다.
변장한 전사가 졸고 있는 보초의 뒤로 돌아가서
왼손으로 입을 틀어막고 오른 손의 단도로 목을 땄다.
보초는 괴로워하며 바둥거리다가 이내 숨이 끊어졌다.
변장한 전사의 신호에 우보금과 살해조 전사들이
달려왔다. 그들은 장영의 군막 안을 향해 바짝 귀를
기울였다. 군막 안은 조용했고 가늘게 코를 고는
소리가 들리고 있었다.
"내가 먼저 찌를 테니 일제히 장영을 찌른다!
알았지?"
"예!"
"들어가자!"
우보금이 먼저 군막 안으로 몸을 들이밀었다.
그러자 살해조 전사들이 그림자처럼 뒤를 따라 군막
안으로 들어갔다.
(아!)
군막 안으로 들어온 우보금은 전신이 얼어붙는
듯했다. 장영은 침상 위에 반듯하게 누워 있었으나
눈을 뜨고 있었다.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전신으로
식은땀이 주르르 흘러내렸다. 그러나 다음 순간
가늘게 코를 고는 소리가 들려오자 후 하고 안도의
한숨을 불어냈다.
(눈을 뜨고 자고 있었군.......)
우보금은 살해조 전사들에게 눈짓을 하고 칼을 높이
치켜들었다. 그리고는 장영의 가슴을 향해 힘껏 내리
찔렀다.
"누, 누구냐?"
장영의 가슴에 칼이 깊숙이 박혔다. 그러나 장영은
가슴에 칼이 박혔는데도 몸을 벌떡 일으키며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우보금은 가슴이 철렁했다.
"네, 네 년이!"
장영이 눈을 부릅뜨고 두 손을 뻗어 우보금의 목을
움켜쥐었다. 우보금은 숨이 컥 하고 막히는 것을
느끼며 칼을 쥔 손에 힘이 빠졌다. 다음 순간
우보금의 목이 부러지는 소리가 우드득 하고
들려왔다. 우보금은 자신의 귀로 그 소리를 들으며 눈
앞이 캄캄해 왔다.
살해조 전사들은 그때서야 장영을 향해 칼을
휘두르기 시작했다. 그들은 닥치는대로 장여을 칼로
찔렀다.
"이, 이것들이.......!"
장영이 이미 축 늘어진 우보금을 내팽개쳤다. 그는
비틀거리며 자신의 가슴에 칼이 박힌 것을 보았다.
그리고는 자신의 가슴에 박힌 칼을 뽑아들었다. 그의
가슴에서 피가 폭포처럼 쏟아지기 시작했다.
살해조 전사들은 장영이 가슴에 칼이 박히고서도
죽지 않자 겁이 덜컥 났다. 그들은 자신도 모르게
뒤로 뒷걸음질을 쳤다. 가슴에서 붉은 피를 흘리고
있는 장영이 그들을 향해 뚜벅뚜벅 다가오고 있었다.
"너희 놈들 결코 살아서 돌아가지 못할 것이다!"
장영이 살해조 전사들을 노려보며 칼을 뻗었다.
그러자 바람을 가르는 파공성이 폭풍처럼 일어났다.
살해조 전사들은 장영이 칼을 뻗자 무시무시한 검기가
자신들을 향해 뻗쳐오는 것을 느꼈다. 순식간의
일이었다. 살해조 전사들은 순간적으로 장영의 칼을
막으려고 했으나 무용한 일이었다.
살해조 전사들은 처절한 비명을 지르며 장영의 칼
아래 쓰러졌다.
수불의 일행이 익주에 도착한 것은 동이 훤하게
터올 무렵이었다. 영고네와 여진은 마차에서 잠이
들었으나 수불은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수불은 익주성에서 성문이 열리기를 기다렸다가
성문이 열리자마자 파수를 보는 병졸에게 장영 장군을
찾았다.
"너는 누구냐?"
파수병은 의아한 눈길로 수불의 위아래를 살폈다.
수불이 나이에 어울리지 않게 당돌하다 싶은
눈치였다.
"우리는 오가촌에서 왔습니다. 장영 장군님께
오가촌에서 딸 장여진이 찾아왔다고 전해 주십시오."
"장영 장군님의 딸이라고?"
"여기 신물이 있습니다."
수불은 여진에게서 발해 황실의 문장이 새겨진
단도를 달라고 하여 파수병에게 주었다. 파수병이
그래도 의혹이 가시지 않는 눈길로 수불과 여진을
살핀 뒤에 영고네를 훑어보더니 우두머리를 데리고
나왔다.
우두머리는 여진의 얼굴을 찬찬히 살피더니
성안으로 데리고 들어갔다. 장영 장군의 군막은
익주성의 넓은 벌판에 세워져 있었다. 그러나 발해
저항군의 군막은 어딘지 모르게 어둡고 무거운
분위기가 흐르고 있었다. 이제 겨우 날이 밝고
있는데도 병사들은 군막에서 나와 삼삼오오 모여서
불안한 얼굴로 웅성거리고 있었다.
(무슨 일이 있는 것일까? 군영이 마치 초상집
같으니.......)
수불은 군영의 분위기를 살피며 가슴이 무거워져
왔다.
그러나 여기저기서 풀을 뜯고 있는 말들은 건장해
보였고 군막의 처처에는 진국(震國)의 깃발인
천기(天旗)가 꽂혀서 바람에 펄럭거리고 있었다.
"들어 오너라."
그때 장영 장군의 군막에서 우두머리가 나왔다.
수불은 여진의 손을 잡고 장영 장군의 군막으로
들어갔다. 장영 장군은 침상에 누워 있었고 곁에는
부장(副將)으로 보이는 사내들이 침통한 얼굴로 서
있었다. 수불과 여진이 군막으로 들어가자 사내들이
옆으로 비켜주었다.
"네가 여진이냐?"
장영 장군이 눈을 뜨고 여진을 쳐다보았다. 장영
장군의 눈 빛이 희미했다.
"네."
여진이 맑은 눈빛으로 장영 장군을 내려다보았다.
수불도 장영 장군을 조용히 살폈다.
(아, 정말 위엄이 넘치는 장군이구나!)
수불은 장영을 보고 한 눈에 용맹한 장군이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귀밑의 머리카락이 희끗희끗했으나
전신에서 풍기는 기도는 무언중에 사람을 압도하고
있었다.
"내가 장영이다."
장영이 만감이 교차하는 눈빛으로 여진을 살폈다.
"아버님을 뵈옵니다."
여진이 무릎을 꿇고 절을 했다. 그러자 장영이
처량한 눈빛으로 고개를 흔들어 여진을 만류했다.
"일어나거라!"
장영이 여진의 손을 꼬옥 잡았다.
"어머니를 닮았구나!"
장영 장군은 말을 하는 것도 무척 힘들어 보였다.
그는 한 마디 한 마디를 할 때마다 숨이 차서
헐떡거렸다.
"이런 모습으로 너를 만나게 될 줄이야......"
장영의 얼굴에 회한의 표정이 스치고 지나갔다.
"네 어머니가 너를 데리러 갔는데 만나지
못했느냐?"
"네."
"어머니에게 아무 일이 없어야 할텐데......."
장영 장군이 눈을 꼬옥 감았다.
"남경남해부 오가촌에 사는 오수불이 장군님을
뵙습니다."
수불은 그때서야 공손히 인사를 했다.
"정연공주에게 얘기는 들었다. 네가 오가촌의
신동이라는 소년 수불이로구나."
"부끄럽습니다."
"우리 여진을 부탁한다. 너희들이 발해의 희망이
되어야 할 것이다!"
장영의 간절한 눈빛으로 수불을 응시했다.
"장군님께서는 어디가 불편하십니까?"
"그렇다!"
장영이 다시 눈을 감았다가 떴다.
"정연공주를 만나지 못했느냐?"
"만나지 못했습니다."
"정연공주는 너희들을 데리러 오가촌으로 갔다.
그럼 너희들끼리 오가촌에서 여기까지 왔느냐?"
"예. 거란군사들이 오가촌을 침략하여 마을이
모조리 불탔습니다. 마을에서 살아 남은 사람이라고는
저희 셋 뿐입니다."
"같이 온 여인은 누구냐?"
"마을 아주머니입니다. 거란군사들에게 욕을 당해서
정신이 온전치 못합니다."
"음......."
장영이 고개를 끄덕거리고 다시 눈을 감았다.
수불은 장영이 눈을 뜰 때를 기다렸으나 장영은 눈을
뜨지 않고 있었다. 그러자 익주성 성문에서 수불과
여진을 데리고 왔던 우두머리가 여진의 어깨를 잡고
밖으로 이끌었다.
"장군께서는 흑수말갈인들의 계략에 빠져 암습을
당했다! 공주님을 기다리느라고 초인적인 힘을
발휘하여 스스로의 운명을 늦추고 계신 것이다.
그러한 판에 너희들이 찾아온 것이다!"
우두머리의 말에 수불은 비로소 사태를 이해할 수
있었다. 장영 장군은 죽어가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여진은 장영이 죽어 가는 사실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 장영의 가슴에 커다란 상처가 있었으나
이불로 덮여 있어서 상처를 보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수불은 우두머리가 안내해 준 군막에 들어가 아침을
먹은 뒤 쉬었다. 밤새도록 마차를 타고 달려왔기
때문에 몹시 피곤했던 것이다.
장영이 숨을 거둔 것은 그날 오후의 일었다.
수불이 구슬프게 울리는 각적의 소리에 눈을 뜨자
밖이 어수선했다. 수불이 군막 밖으로 나오자
군사들이 장영의 군막 앞으로 모여들고 각 군막에서
각적을 불고 있었다.
(장영 장군이 운명하셨구나........!)
수불은 직감으로 장영 장군이 죽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정연공주가 도착한 것은 장영 장군이 숨을 거둔지
불과 한 시간밖에 되지 않았을 때였다. 정연공주는
군영에 도착하자마자 비보를 듣고 장영의 군막으로
달려가 통곡을 터뜨렸다. 그러나 통곡을 하고 있을
시간이 없었다. 병사들은 장영의 죽음으로 침통한
분위기에 휩싸여 있었고 정찰을 나갔던 병사들이
흑수말갈족으로 보이는 기마군단이 솔빈부를 향해
오고 있다는 보고가 들어왔기 때문이었다.
군사들은 출전을 하기 위해 바쁘게 움직이고
있었다. 정연공주는 갑옷을 입고 칼을 허리에 찼고
장영 장군의 부장들과 심각하게 전략을 논의하고
있었다. 수불이 그들을 옆에서 지켜보자 부장들은
장영 장군이 죽은지 얼마 되지 않아 군사들이
의기소침해 있기 때문에 흑수말갈족과 싸우는 것이
불리하므로 일단 군사를 철수하자고 주장하고 있었다.
장영의 부장들은 각각의 부족들을 이끌고 있었다.
그들이 철수하기로 하면 발해의 부흥군은 일거에
와해되는 것이다.
"우리는 10년을 기다려 왔어요! 그런데 이제 와서
군사를 철수하면 다시는 군사들을 모을 수가 없어요!
흑수말갈족은 우리와 싸우고 싶어 싸우는 것이 아니라
거란의 이이제이 수법에 말려들어 싸우는 것이니
그들이 비록 5만의 군사라고 해도 우리가 한 번만
물리치면 다시는 덤벼들지 못할 거예요! 게다가
장군의 원수를 갚아야 해요! 장군의 원수들이 군사를
이끌고 눈앞에 있는데도 비겁하게 도망을 치란
말예요?"
"시기가 좋지 않습니다! 군사들의 사기가 너무
떨어져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여기 모인 대부분의 군사들은 장영
장군의 명성을 듣고 모인 군사들입니다. 장영
장군께서 돌아가신 이상 그들의 사기를 북돋워야 할
대책을 먼저 세워야 합니다!"
"대책은 흑수말갈을 싸워서 이기는 거예요! 그들은
이미 우리에게 한 번 패했던 군사들예요!"
"그때는 장영 장군이 계셨기 때문입니다!"
"좋아요! 떠날 부대는 모두 떠나도록 하세요! 나
혼자서라도 흑수말갈과 싸우겠어요! 나하고 함께
흑수말갈과 싸울 분들은 지금 곧 각자의 군막에
돌아가서 출전준비를 하세요!"
정연공주가 눈물에 젖은 얼굴로 단호하게 말했다.
장영의 부장들은 침통한 얼굴로 장영의 군막을
떠났다.
"공주님!"
수불은 정연공주를 빤히 쳐다보았다.
"왜?"
"병법에 승산이 없을 때는 싸우지 말아야 한다고
했습니다."
"지금은 승산이 없을 때란 말이냐?"
"그렇습니다! 군사들은 사기가 떨어져 있습니다.
게다가 흑수말갈족은 우리보다 군사가 수효가
많습니다!"
"전투란 군사의 수효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부장들조차 전투를 회피하고 있습니다!"
"장영 장군의 시체가 아직도 따뜻하다! 그가
10년이나 걸려 모은 군사들을 철수시키면 우리는 두
번 다시 군사를 모을 수 없을 것이다! 그런데 철수를
해야 한다는 것은 있을 수가 없다! 그가 어떻게 눈을
감겠느냐?"
"정히 그렇다면 선제공격을 해야 합니다!"
"선제공격?"
"흑수말갈은 우리를 공격하기 위해 이주령 앞의
벌판에 둔병을 하고 있을 것입니다. 그들은 동이
훤하게 터오는 새벽에 우리를 공격할 것입니다.
그러니 그들이 공격하기 전에 우리가 먼저 기습을
해야 합니다!"
"생각해 보마!"
정연공주는 수불의 말을 듣고 옳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군사를 움직이는 것을 어린아이의 말을 듣고
할 수가 없었다. 장영은 수불의 말을 듣고 척후병을
보내어 흑수말갈의 기마군단이 벌써 이주령 앞의
벌판까지 진출하여 둔병하고 있는 것을 확인했다.
흑수말갈의 군사들은 수불이 예상한대로 익주 가까이
접근해 왔으면서도 발해군사들을 공격하지 않고
둔병을 하고 있었다. 발해군사들이 잠이 든 새벽녘에
일제히 공격을 하려는 것이 분명했다.
(수불은 장차 큰 인물이 될 녀석이야.......)
정연공주는 손수 흑수말갈 군사들의 동태를 살핀 뒤
수불에게 감탄했다. 정연공주는 지형을 세세히
살폈다. 흑수말갈 군사들은 새벽의 공격을 위해 숲
속의 군막에서 쉬고 있었다. 불침번을 서는
파수병들은 얼마 되지 않았고 말들도 서서 잠을 자고
있었다.
(역시 선제공격을 해야겠어........)
정연공주는 흑수말갈 군사들의 동태를 살핀 뒤
군막으로 돌아왔다. 정연공주는 날이 어두워지자
군사들을 이끌고 흑수말갈군의 진영을 향해 이동해
갔다. 흑수말갈군의 척후병들이 있을지 알 수
없으므로 군사들이 탄 말발굽에는 헝겊을 씌워 소리를
나지 않게 했고 말의 입에도 재갈을 물렸다. 군사들이
창을 다루는 기술도 익숙하지 못해 모두 칼을 들게
했다.
흑수말갈군의 진영은 쥐 죽은 듯이 조용했다.
군데군데 모닥불을 피우고 있었으나 군막이 깊이
잠들어 있었다.
수불은 말을 한 필 얻어 타고 발해군사들의 진을
조심스럽게 따라갔다. 수불이 발해군사들이 싸우는
것을 보고 싶다고 하자 정연공주가 허락을 해주었던
것이다.
"우리는 지금부터 거란군 진영을 공격한다!
흑수말갈군 진영에 도착할 때까지 절대로 소리를 내지
말라! 선봉은 설굴막의 1진 5천명이 서고 2진 5천명은
양승이 지휘한다! 양승은 선봉군의 뒤를 바짝 따르고
있다가 선봉군이 지치면 군사들을 지휘하여
흑수말갈군을 공격한다! 3진은 막예개 추장이
지휘한다! 역시 5천명으로 2진이 지친 듯하면
공격하라! 4진은 오소경이 지휘한다! 오소경은 1만
명의 군사를 흑수말갈군이 퇴각하기 쉬운 길목인
이주령에 매복시킨다! 아극돈 역시 5천명의 군사로
흑수말갈군의 군량을 지키는 군사들을 공격한다!
흑수말갈군이 불리하면 군량을 불지를지 모르므로
불을 지르기 전에 빼앗아야 한다! 총공격은 오소경의
매복이 끝난 다음에 시작한다! 오소경은 매복을
마치는 즉시 불화살로 신호를 하라! 알았나?"
정연공주가 부장들을 돌아보고 군령을 내렸다.
"알겠습니다."
부장들이 일제히 대답을 했다.
"나는 선봉군에 참여한다!"
정연공주의 얼굴에 굳은 결의가 나타났다.
"오소경은 즉시 군사들을 이끌고 이주령으로 가라!"
정연공주가 군령을 내리자 오소경이 군사들을
이끌고 이주령으로 달려가기 시작했다. 말발굽에
헝겊을 씌웠기 때문에 소리가 전혀 없었다.
수불은 정연공주가 부장들에게 지시를 하는 것을
보고 미소를 지었다. 정연공주는 흑수말갈군의 본진을
향해 파상공격을 하는 한편 퇴로를 차단하여
흑수말갈군을 몰살시키고 병기와 군량을 빼앗으려는
계획이었다.
이주령으로 떠난 오소경이 불화살을 쏘아 올린 것은
거의 한 시진이 지났을 때였다.
"불화살이 올랐다! 공격!"
정연공주가 칼을 뽑아들고 군사들에게 지시를
내렸다. 긴장된 표정으로 흑수말갈군의 진영을
노려보고 있던 군사들도 일제히 칼을 뽑아 들었다.
"가자!"
정연공주가 먼저 말에게 힘껏 발길질을 하고
흑수말갈군의 진영을 향해 달려갔다.
"공주님의 뒤를 따르라!"
설굴막도 칼을 뽑아들고 거란군의 진영을 향해
달려가기 시작했다.
"가자!"
"가자!"
발해의 군사들은 칼을 높이 치켜들고 흑수말갈군의
진영을 향해 질풍처럼 달려가기 시작했다.
말발굽소리는 거의 없었다. 흑수말갈의 군사들은
발해군사들이 군막 가까이 이를 때까지 전혀 눈치
채지를 못했다.
"적이다!"
"발해군사들이다!"
불침번을 서던 병사들이 어둠 속에서 검은
그림자들이 질풍처럼 달려오는 것을 발견하고
다급하게 소리를 지르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미 때가
늦은 뒤였다. 발해군사들의 칼이 사방에서 번쩍거릴
때마다 불침번을 서던 흑수말갈 군사들이 처절한
비명을 지르며 추풍낙엽처럼 쓰러져 갔다.
"적이다!"
흑수말갈 군사들은 황급히 군막에서 뛰쳐나왔다.
그러나 군막으로 뛰어 나오는 병사들은 속절없이
죽음을 당했다.
"흑수말갈 군사들을 몰살해라!"
"대장군님의 원수를 갚아라!"
"한 놈도 남기지 마라!"
정연공주는 흑수말갈군의 진영을 질풍처럼 누비며
발해군사들을 독려했다. 설굴막도 군막과 군막 사이를
누비며 흑수말갈군사들을 도륙하기 시작했다.
처절한 살륙전이었다.
흑수말갈의 군사들은 잠자리에서 미처 일어나기도
전에 들이닥친 발해군사들에 의해 떼죽음을 당했다.
그러나 흑수말갈군사는 5만이나 되었다. 그들은
발해군사들에게 도륙을 당하면서도 차츰차츰 질서를
회복하기 시작해 진영을 갖추고 발해군사들과 맞서
싸우기 시작했다.
발해군사들은 닥치는대로 거란군사들을 도륙하고
있었다. 그러나 흑수말갈 군사들이 진영을 갖추기
시작하자 숫자와 무예에서 밀리기 시작했다. 흑수말갈
군사들은 초원의 전사들인 정병이었다. 그들은 재빨리
대오를 짜고 발해군사들을 반격하기 시작했다.
"물러서지 마라!"
"물러서지 마라!"
정연공주와 설굴막은 주춤하는 발해군사들을 목이
터져라 독려했다. 그때 발해의 1진이 뒤로 밀리기
시작한 것을 발견한 양승의 2진이 와 하는 함성을
지르며 흑수말갈군을 향해 노도처럼 달려오기
시작했다.
흑수말갈군사들은 전세를 회복할 지음에 요란한
함성이 일어나며 발해의 2진이 노도처럼 밀려오자
덜컥 겁이 났다.
"적이 또 온다!"
"발해의 구원군이다!"
흑수말갈 군사들은 뒤로 주춤주춤 물러나기
시작했다. 발해군사들은 그 틈을 노려 또 다시
맹렬하게 흑수말갈 군사들을 공격했다. 발해군사들의
칼이 번쩍일 때마다 흑수말갈 군사들의 목이 떨어지고
팔다리가 떨어져 나갔다.
피가 튀고 비명소리가 드높았다.
뒤로 밀리기 시작한 흑수말갈 군사들은 필사적인
저항을 했다. 발해군사와 흑수말갈 군사들은 날이
훤히 밝을 때까지 사투를 벌였다. 그리고 그들은
이주령 쪽으로 도주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주령에는
이미 오소경의 군사들이 매복을 하고 있었다.
오소경의 군사들은 흑수말갈 군사들이 피투성이가
되어 허겁지겁 퇴각을 해오자 길목을 막고 흑수말갈
군사들을 공격했다. 흑수말갈 군사들은 진퇴양난에
빠져 도주하다가 이주령에서 몰살을 당했다. 가까스로
몇 명의 군사가 살아서 도망을 쳤으나 그들이 진을
치고 있던 숲은 온통 피로 흥건했다.
발해군사들은 흑수말갈군을 완전히 괴멸시켰다.
흑수말갈의 1만이나 되는 군사가 떼죽음을 당하다시피
했고 군량과 병기를 모두 노획했다.
그러나 발해군사들도 피해가 막대했다. 비록
선제공격을 하여 흑수말갈군을 괴멸시켰으나
발해군사들도 수천 명이 죽거나 부상을 당했다.
발해의 부흥군이 흑수말갈군의 군량과 병기를 모두
노획하여 둔영지로 돌아온 것은 짧은 겨울 해가
설핏이 기울고 있을 때였다. 전투는 동이 틀 무렵에
끝났으나 병기와 군량을 회수하는데 적지 않은 시간이
걸렸던 것이다.
정연공주는 발해군사들의 승전을 치하하고 충분히
쉬도록 했다. 밤새도록 흑수말갈군과 혈전을 치른
발해군사들은 크고 작은 부상과 죽음에 대한 공포로
지쳐 있었다. 정연공주는 우보금의 남편이라는 자가
가지고 왔던 마유주를 병사들에게 마시게 했다.
우보금은 장영의 손에 목이 부러져 죽었으나 전사들은
마유주와 파오까지 팽개치고 모조리 달아났던 것이다.
병사들은 피에 젖은 차림인 채로 마유주를 퍼
마셨다. 그리고 군막에 들어가 골아 떨어졌다.
수불은 저녁을 먹고 군막에 돌아와 눈을 감았다.
정연공주와 여진은 장영 장군의 군막에서 울고
있었다. 여진도 장영이 죽은 것을 알고는 소리를 내어
울었다. 장영은 10년 만에 만난 여진의 아버지였다.
그러나 여진은 아버지를 만나자마자 사별하게 되었던
것이다.
장영은 비탄에 잠긴 그들 모녀의 모습을 지켜볼
수가 없어 슬그머니 군막으로 돌아왔던 것이다.
그러나 쉽사리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수불이 직접
전투에 참여하지는 않았으나 서로가 서로를 죽이는
전투가 너무나 끔찍했다. 전장터에는 시체가 산을
이루고 있었고 피비린내가 진동을 하고 있었다.
발해의 부흥군들이 병기를 노획하기 위해 시체 사이를
누비고 있는데도 피냄새를 맡은 까마귀떼가 하늘을
까맣게 메우고 까악 까악 울고 있었다.
소름이 끼치는 흉칙한 울음소리였다.
까마귀떼는 사람들이 물러가고 나면 시체를 파먹을
것이 분명했다. 그 생각을 하자 수불은 잠이 오지
않았다.
수불은 몇 번이나 엎치락뒤치락하다가 잠이 들었다.
수불은 비몽사몽간에 누군가 자신을 부르고 있는
소리를 들었다. 수불이 깜짝 놀라 눈을 뜨자 사방이
칠흑처럼 캄캄한 가운데 세찬 눈보라가 몰아치고
있었다. 차가운 눈보라에 군막이 날아갈 듯이
펄럭거리고 허공을 달리는 바람소리가 지옥의
아귀들의 울부짖음처럼 음산했다.
"수불아!"
"수불아!"
할아버지의 목소리였다. 수불은 재빨리 침상에서
일어나 군막을 나갔다. 밖에는 눈보라가 눈을 뜰 수
없을 정도로 세차게 몰아치고 있었다.
"할아버지!"
수불은 어둠 속을 향해 소리를 질렀다. 할아버지가
보이지 않았다.
"어서 천부비록을 챙겨서 북쪽으로 달아나거라!"
그때 할아버지의 목소리가 다시 들려왔다.
할아버지는 저 멀리 초원의 언덕에 하얀 옷을 입고 서
있었다. 그때 요란한 말발굽소리가 들리더니 언덕
너머에서 거란의 철기병들이 말을 타고 나타났다.
"할아버지!"
"어서 달아나거라!"
"할아버지!"
거란의 철기병들이 말을 타고 달려오자 할아버지가
안개처럼 희미해지더니 어둠 속으로 사라져버렸다.
수불은 몇번이나 할아버지를 소리쳐 부르다가 잠과
꿈에서 깨어났다.
한밤중이었다. 사방은 캄캄했으나 눈보라는
몰아치지 않고 있었다.
(꿈이었어.......!)
수불은 등줄기로 식은땀이 흘러내리는 것을 느꼈다.
기이한 꿈이었다. 그러나 할아버지의 목소리가 너무나
생생했다. 수불은 침상에서 일어나 군막을 나왔다.
군막 바깥도 캄캄하고 조용했다. 군사들은 모두 잠이
들었는지 기척 하나 없었고 보초를 서는 병사들은
군막 앞에서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
수불은 군막 앞에서 한참동안이나 사방을 살폈으나
이상한 점을 발견할 수가 없었다. 사방은 지극히
평화롭기만 했다.
수불은 다시 군막으로 들어왔다. 그러나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할아버지의 얼굴이 너무나 생생했고 할아버지의
목소리가 생시인 듯 귓전에 쟁쟁했다.
(천부비록을 챙겨서 달아나라고 하셨는데......)
천부비록은 아직도 수불의 군막에 있었다. 장영
장군이 의외의 죽음을 당하고 흑수말갈족이 갑자기
쳐들어오는 바람에 수불이 미처 정연공주에게 전달해
주지 못했던 것이다.
(그래. 일단 할아버지 말씀을 따라야 해!)
수불은 그렇게 생각했다. 할아버지가 꿈에 나타난
것은 결코 예사로운 일이 아닐 것 같았다.
수불은 천부비록을 등에 지고 다시 군막을 나왔다.
그리고 꿈속에서 보았던 언덕으로 달려가기 시작했다.
발해 부흥군의 둔영지에서 언덕까지는 거의 5리나
되었다. 그러나 수불은 무엇에 끌리듯이 정신없이
달려갔다.
(아!)
수불은 언덕에 이르자 눈앞이 캄캄해져 왔다. 어둠
속에서 초원을 가득히 메우고 소리없이 달려오고 있는
거대한 기마군단, 그것은 죽음의 사자로 악명이 높은
거란의 철기병이었다. 그들은 발해의 부흥군들이
흑수말갈과의 싸움에 지쳐 있을 때를 노려 기습
공격을 하고 있는 것이다.
(공주님께 알려야 하는데......)
그러나 수불은 발이 땅에 얼어붙은 듯 꼼짝을 할 수
없었다. 거란의 철기병들은 이미 언덕에 도착하여
발해 부흥군의 군영을 향하여 질풍처럼 달려가고
있었다. 말발굽에는 헝겊을 씌웠는지 수만의 말들이
발해 부흥군의 군영을 향해 달려가고 있는데도 전혀
소리가 나지 않고 있었다.
(틀렸어......)
수불은 절망을 했다.
이내 거란의 철기병들이 노도처럼 발해 부흥군을
덮치기 시작했다. 발해 부흥군의 군막에서 처절한
비명소리가 들리고 군막이 불타기 시작했다. 수불은
언덕에 엎드린 채 발해 부흥군들이 거란의
철기병들에게 비참하게 죽어 가는 것을 지켜보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동녘이 훤하게 밝아 오기 시작했다. 강묵기가
이끄는 거란의 철기병들은 발해 부흥군을 완전히
몰살시키고 나서도 사흘이 지나서야 철수를 했다.
그들은 발해 부흥군의 부상자들을 찾아내어
닥치는대로 살해했고 시체들은 불을 질렀다. 그리고
근처 인가로 달아난 부흥군을 수색하여 학살했다.
거란의 철기병들이 익주 벌판에 머물러 있는 사흘이
발해인들에게는 지옥의 날처럼 끔찍했다.
그들은 익주의 젊은 남자들을 발해 부흥군이라는
누명을 씌워 학살했고 젊은 부녀자들은 발해 부흥군의
여자라는 이유를 들어 겁탈을 했다. 익주성은 거란
철기병의 만행으로 울음소리가 그치지를 않았다.
골목과 골목에는 발해인들의 시체가 여기저기
나뒹굴었다.
수불은 사흘 동안이나 초원에 꼼짝도 하지 않고
숨어 있다가 거란의 철기병들이 철수를 하자 발해
부흥군의 군영지로 달려갔다. 그들이 물러간 솔빈부
익주 벌판에는 발해 부흥군의 시체가 산처럼 쌓여
있었고 피비린내가 진동을 하고 있었다.
처절한 모습이었다.
하늘에는 시체를 파먹으려는 까마귀 떼가 날아와
낮게 선회하고 있었다.
수불은 시체들을 뒤지며 정연공주와 여진의 시체를
찾기 시작했다. 철기병들이 발해 부흥군의 군영지를
에워싸고 도륙을 하는 바람에 포위망을 뚫고 달아난
부흥군은 5천도 되지 않았다. 발해 부흥군은 2만
명이나 그날 밤에 목숨을 잃었던 것이다.
발해 부흥군의 시체는 거의 모두 불에 타고 화염에
끄실려 얼굴을 제대로 알아볼 수 없었다.
(공주님은 불에 타신 거야......)
수불은 낮고 찌푸퉁한 하늘을 쳐다보며 속으로
중얼거렸다. 정연공주와 여진의 시체는 수불이
이튿날까지 찾아 헤맸으나 찾을 수가 없었다.
여기저기 불에 탄 시체더미만 산처럼 잔뜩 쌓여
있었다.
수불이 정연공주와 여진의 소식을 들을 수 있었던
것은 시체더미 속에서 겨우 숨이 붙어 있는 한 병사에
의해서였다. 그 병사는 전신이 불에 타서 진물이
흐르고 있는데도 마지막 숨을 몰아쉬며 수불에게
정연공주와 여진의 소식을 알려주었다.
"공주님은 거란군에게 사지가 찢겨서
돌아가셨어...... 거란군들이 공주님의 옷을 모두
벗기고 농락한 뒤에 사지를 네 마리의 말에
묶고...... 사방으로...... 말을 달리게 하셨어......
공주님의 딸은......산 채로 불길 속에
던져지고......"
그 병사는 겨우 그 말을 남기고 숨이 끊어졌다.
(너무나 비참해......)
수불은 시체가 가득히 널린 초원을 돌아보며 자신도
모르게 뜨거운 눈물이 흘러내렸다. 거란군들에게
농락을 당하는 정연공주의 모습과 불길 속에서 비명을
지르는 여진의 애처로운 모습이 몇 번이나 머릿속을
스쳐가고 스쳐오곤 하였다.
그는 천천히 초원으로 걸음을 떼어놓기 시작했다.
사방은 이미 캄캄하게 어두워져 있었고 하늘에서는
눈발이 어지럽게 날리고 있었다. 수불은 계속 걸었다.
이제는 시체만 잔뜩 널려 있는 솔빈부 익주 벌판을
떠나야 했다. 물론 어디로 가야 할지 목표가 정해져
있는 것도 아니었다. 그러나 어디론가 떠나지 않으면
안되었다.
벌판 어디쯤에선지 피냄새를 맡은 늑대의
울음소리가 아련하게 들려오고 있었다.
수불은 어깨를 잔뜩 움츠렸다. 하늘에서
매화꽃송이처럼 내리고 있는 눈송이들이 목덜미를
푸숫하게 적시고 있었다.
그때 어디선가 북소리가 둥둥 울리기 시작했다.
수불은 걸음을 멈추고 그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그러나 그 북소리는 수불의 가슴 속 깊은 곳에서
울리는 북소리였다.
(그래. 나에게는 천부비록이 있으니 반드시 발해를
부흥할 거야!)
수불은 눈을 부릅뜨고 주먹을 움켜쥐었다. 수불의
눈에 북소리에 맞춰 대륙의 초원을 질풍처럼 달리는
발해 부흥군들의 씩씩한 모습이 아련히 떠오르고
귓가에는 북소리가 더욱 우렁차게 들리고 있었다.
수불은 눈보라가 몰아치는 캄캄한 초원으로
성큼성큼 걸음을 떼어놓기 시작했다. 그의 앞날이
어둠 속에서 몰아치는 눈보라처럼 결코 순탄하지는
않을 것이라는 것은 그 자신이 더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북소리에 발을 맞추어 점점 힘차게
걸음을 떼어놓고 있었다.
52. 에필로그
발해의 멸망은 A.D 926년의 일이었다. 그러나
발해국의 멸망이후에도 발해인들의 저항은 끈질기게
계속되었고 이 저항은 발해를 계승하는 새로운 나라의
건설로 이루어졌다. 수많은 발해의 영웅들이 대륙에
나타나 국가를 건설했는데 각 국가의 건국 연대는
자세히 전해지지 않고 있다. 그러나 국가가 존재했던
기록이 요사(遼史)에 남아 있다.
먼저 정안국(定安國)은 발해가 멸망한지 46년만인
A.D 972년에 국왕 열만화(烈萬華)가 여진(女眞:말갈)
사신을 통해 송(宋) 나라에 표(表)를 올리고 예물을
바쳤다는 기록이 나오므로 그 이전에 나라를 세웠음을
알 수 있다. 열만화는 오현명(烏玄明)과 정안국을
세우고 송에 사신을 보내어 발해의 원수인 요를
공격하자고 제안했던 것이다. 그러나 신흥국가인 송은
거란을 공격할만한 군사력을 갖추지 못해 이 제안은
실패로 돌아갔다.
그들이 정안국을 세운 곳은 서경압록부(어떤 기록은
흑룡강 동쪽이라고도 한다) 일대였다.
정안국이 언제 멸망하였는지는 알 수 없으나
정안국인(定安國人) 골수(骨須)가 A.D 1,018년,
발해가 멸망한 지 92년 만에 고려로 망명했다는
기록이 나오므로 이 시기에 멸망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문헌에 약 45년간 존재하고 있다.
다음은 연파(燕頗)가 세운 연(燕) 나라가 있다.
그러나 연파는 A.D 975년에 황룡부(黃龍府:농안
일대)에 나라를 세웠다가 거란군에게 토벌되어
오사국(烏舍國)으로 도망을 친다.
오사국이 언제 건국되었는지 역시 정확한 기록이
없다. 그러나 문헌에 의하면 연파가 도망을 친 연대가
975년이므로 그 이전에 이미 건국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오사국은 매우 강대한 나라였다. 오사국은 국왕을
'오사성부유부발해섬부왕(烏舍城浮喩府渤海 府王)'이
라고 불렀는데 부장(部長:족장) 오소도(烏昭度)는
거란과 치열한 투쟁을 전개했다. 오사성은 오사국의
도읍을 의미하는 것이고 부유부는 부여부의 다른
이름으로 추정된다. 섬부왕은 국왕에 대한 칭호로
여겨진다. 그러므로 오사국의 건국지는 부여부 일대로
생각된다.
오사국의 국력이 막강했기 때문에 송 나라는
오사국과 연합하여 거란을 칠 것을 제안했으나 송
나라가 비굴하게 군사를 일으키지 않아 오사국도
거란과의 투쟁을 중지하고 오히려 송 나라와
적대관계에 놓이게 되었다.
송 나라는 오사국이 조공을 바치지 않자
여진(말갈)에게 조서를 내려 오사국 사람 1인을
죽이는데 견(絹:비단) 5필을 주겠다는 비겁한
술수까지 부렸다.
A.D 995년 오소도는 연에서 도망친 연파와 함께
거란에 부속되어 있던 옛 발해의 영토 철리(鐵利)를
공격하였다. 요는 이이제이(以夷制夷) 전략으로
해(奚)족의 왕 화삭노(和朔奴)를 보내 오사국을
공격하였다.
오소도는 오사성에서 해족과 거란의 수십만
군사들에게 포위되었으나 필사적인 투쟁 끝에 대승을
거두었다. 요는 비참한 패배를 하고 철군했다. 이후
요는 오사국을 더 이상 정벌하지 못하고 형식상
조공을 바치는 속국으로 인정하게 된다.
그러나 여진을 충동하여 오사국을 공격하게 하는
전략은 계속 구사하고 있었다. 오사국은 이리하여 송
나라와 거란, 그리고 여진으로부터도 위협을 받는
간고한 처지에 놓이게 된다. 그리하여 국왕
오소도(또는 오소경이라는 설도 있다)의
가족(처자)들이 남경(南京)의 여진에게 사로잡혀 요로
끌려가는 비참한 상태를 당하게 된다.
A.D 1,114년 오사국은 여진족이 일으킨 금(金)
나라가 급격히 세력을 강화하고 있을 때 금 나라에
병합되고 만다. 오사국은 문헌상 약 139년이나
존재하고 있다.
흥료국(興遼國)이 건국된 것은 A.D 1,029년의
일이었다. 발해의 왕씨성인 대연림(大延琳)이 군사를
일으켜 나라를 세우고 국호를 흥료, 연호를
천경(天慶)이라 하였다. 대연림은 고려에 사신을
보내어 함께 요를 공격할 것을 제안하여 고려가
군사를 일으켜 거란과 싸웠으나 승리하지 못했다.
A.D 1,030년 8월, 대연림의 부하인 비장(裨將)
양상세(楊祥世)가 거란에 항복하고 밤에 몰래 남문을
열고 거란군들을 끌어들여 국왕 대연림이 거란에
사로잡혀 흥료국은 멸망하였다.
약 1년간 존재했으나 고려와 연합하여 거란을
공격하는 등 상당히 진취적인 국가였다.
A.D 1,115년 2월, 요주의 발해인 고욕이 군사를
일으켜 스스로를 대왕이라고 칭했다. 이에 3월에
거란이 고욕을 토벌하려고 했으나 고욕이 오히려 이를
격파했다. 4월에 거란이 다시 토벌군을 보내 왔으나
고욕은 이들도 격파하여 명성을 날렸다. 그러나 6월에
고욕이 사로잡힘으로써 고욕의 대 거란 투쟁은
4개월만에 끝이났다.
A.D 1,116년 1월, 발해인 고영창(高永昌)이 군사를
일으켜 거란에 항쟁을 선언하고 국호를
대발해국(大渤海國), 연호를 융기(隆起)라고 하고,
스스로 칭제(稱帝)하여 황제가 되었다. 고영창은
동경(東京)에 도읍한 뒤 순식간에 요동 50주(州)를
병합하여 거란을 깜짝 놀라게 하였다.
거란은 5월이 되자 재상(宰相) 장림(張琳)에게 10만
군사를 주어 고영창을 공격하게 했다. 고영창은
장림에게 패배하여 금 나라에 구원을 요청했으나 금
나라는 오히려 대장 알노(斡魯)를 파견하여 고영창을
공격하였다. 고영창은 패배하여 장송도(長松島)로
도주했다. 그러나 고영창의 부하인 달불야(撻不野)가
배신을 하고 고영창을 사로잡아 금 나라에
항복하므로써 대발해국은 멸망하게 되었다.
한편 발해가 멸망하자 고려로 귀순한 발해 유민들은
거란이 고려를 침공할 때 혁혁한 무공을 세운다.
993년 거란의 소손녕(蕭孫寧)이 80만 대군을 거느리고
고려를 침공했을 때 발해 출신의 중랑장
대도수(大道秀)는 안융진(安戎鎭:청천강 이남)에서
거란의 선봉군을 격파하는 대승리를 거두는 것이다.
이어서 1,010년 거란은 고려의 내정이 혼란한 틈을
타서 40만 대군을 일으키고 고려를 침공하였다.
거란의 제2차 고려 침입 때는 발해 출신의 대장군
대회덕(大懷德)이 곽주에서 불과 수천명의
군민(軍民)으로 거란군을 곽주에서 20일 동안이나
방어하며 거란군의 남진을 지체시켰다.
이로 인해 거란군은 막대한 타격을 입게 되었고
고려는 막강한 방어태세를 갖추게 되었던 것이다.
발해국의 피지배층을 형성하며 귀족층인 고구려
유민과 함께 발해국의 구성원이었던 말갈족은 이후
여진이라는 새 이름을 갖게 된다. 여진은
생여진(生女眞)과 숙여진(熟女眞)으로 나뉘어 진다.
여진은 원래 통구스계의 만주 일대에 있던 여러
부족으로 농경민족과 수렵민족, 그리고 유목민족들이
있었다. 중국 한(漢)의 시대에는 읍루(相婁),
후위(後魏) 시대에는 물길(勿吉), 수당(隨唐) 때에는
말갈(靺鞨)로 불리다가 발해가 멸망하자 요에 속하여
여진으로 불리게 된다.
1,115년 생여진에서 걸출한 인물 아골타(阿骨打)가
등장하여 여러 부족을 통일하고 나라를 세우니 이
나라가 금(金) 나라였다.
명(明) 나라 때는 여진을 여직(女直)으로 불렀는데
건주여직(建州女直)에서 누르하치[奴兒哈赤]가
탄생하여 청(淸)의 시조가 된다. 그의 성은
애친각라(愛親覺羅)였다. 이들이 모두 발해의
후손들이라고 보았을 때 여진을 오랑캐로 보어온
우리의 역사관이나 청 나라가 조선(朝鮮)을 침략한 일
등은 역사의 아이러니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역사는 되풀이 된다. 고조선, 부여, 고구려, 그리고
발해에 이르기까지 한민족이었던 말갈에서 파생한
민족들이 금 나라를 세우고 청 나라를 세웠듯이
지금은 만주라고 불리는 대륙에 중국 공산당 정부가
세워져 있고 연길을 비롯한 연해주 일대에 조선족들이
모여 살고 있다.
발해가 역사 속으로 사라진지 어언 1천년......
이제 그 옛날 선인들의 자취는 막막하기만 하지만
발해의 영광을 꿈꾸고 대륙을 지배하던 초인(超人)을
아득한 홍진(紅塵) 속에서 기다려본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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