붉은 장미는 지다.
이수광
1
한밤중이었다. 대통령은 소접견실 창가에 서서 우두커니 밖을 내다보고 있었다. 비가 오고
있었다. 마른 나뭇잎에 추적대는 빗소리가 스산하게 가슴을 적셔왔다. 그는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근심거리가 좀처럼 잠을 이루지 못하게 하는 것이었다. 문득 빗발이 들이치는 창에
아내의 하얀 얼굴이 떠올라왔다. 아내가 비명에 죽은 것이 얼마나 되었을까. 74년 8월에 문
세광이라는 놈의 총탄을 맞고 절명했으니 벌써 3년이 가까워지고 있는 셈이다. 그는 낮게
한숨을 쉬면서 아내가 총탄에 맞아 피를 흘리던 생각을 하기도 했고 서울대학교 부속병원에
서 마지막 숨을 거두던 모습을 생각하기도 했다. 가슴아픈 일이었다. 대통령은 창문을 열었
다. 그러자 비바람이 쏴아 하고 얼굴을 때려왔다. 그때서야 답답하던 가슴이 시원해지는 느
낌이 들었다. 그는 담배에 불은 붙여 연기를 폐부 깊숙이 빨아들였다가 내뿜었다. 비가 그치
면 봄기운이 더욱 완연해질 것이다. 벌써 양지쪽에서는 파랗게 새싹들이 돋아나 봄꽃들이
다투어 피고 있었다. (선산에도 참꽃이 피었겠군...) 구미 선산은 그의 고향이었다. 그는 어린
시절 10리 길이 훨씬 넘는 학교 길을 오가면서 고향에서 참꽃이라 부르는 진달래 꽃잎을 따
먹던 생각을 했다. 고향인 선산의 산과 들에도 봄비가 내리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
자 가슴이 묵직해 왔다. 고향을 생각하면 이상하게 묵직한 통증이 가슴을 훑고 지나가곤 했
다. (나이가 들고 있기 때문이야...) 그는 낮게 한숨을 내쉬었다. 내일은 미국 대통령 안보 담
당 특별보자관인 브레진스키 박사를 만나야 한다. 그를 만나면 한국의 핵무기 개발에 대한
격렬한 토론이 벌어질 것이다, 미국은 한국 핵무기 개발을 중단시키기 위해 벌써 한국의 인
권문제를 공격하고 있었다. CIA(미국 중앙정보국)요원들은 대통령인 자신의 뒤까지 미행하
여 감시하고 있었다. (그러나 핵은 반드시 보유해야 해...) 그는 주먹을 움켜쥐고 눈은 부릅
떴다. 그의 의지는 그 어느 때보다도 단호했다. 내일 회담에서 결판을 내야 했다. 그는 다시
담배연기를 깊숙이 빨아들였다가 내뿜었다. 지난밤 꿈의 여자의 울음소리가 아직도 귀에 쟁
쟁하게 남아 있었다. 언젠가, 아니 아내가 죽기 전날 밤도 그런 울음소리를 들었던 것 같은
기억이 났다. 그는 천천히 고개를 흔들었다. 어쩐지 불길했다.
1997년 4월 5일 오후 3시, 서울. 박정희 대통령과 카터 미국 대통령 안보담당 특별보좌관
브레진스키의 극비 회담이 청와대 소접견실에서 열렸다. 날씨는 화창했다. 서울은 봄이 완연
했고 소접견실의 넓은 창으로 내다보이는 뜰에는 백목련이 화사하게 피어 있었다. 아직 진
달래나 개나리 같은 봄꽃들이 피지는 않았으나 햇살이 따뜻한 양지쪽으로는 벌써 파릇파릇
한 새싹들이 돋아나고 있었다. 대통령은 담장 밑에서 어른거리는 검은 양복의 경호원들에게
묵묵히 눈길을 주고 있다가 다시 브레진스키를 응시했다. 대통령은 침묵을 지키고 있었다.
브레진스키는 그 침묵이 몹시 고통스러웠다. 한국의 통치자, 이미 한국을 16년 동안이나 통
치해온 절대자인 그를 설득하는 것을 워싱턴을 출발할 때만 해고 간단한 일이라고 생각했었
다. 그러나 그는 완고하고 타협을 모르는 인물이었다. 소접견실의 분위기는 냉랭했다. 대통
령은 브레진스키를 경멸하는 눈빛으로 쏘아보고 있었다. 카터 미국 대통령의 정책 브레인들
-소위 조지아 사단의 가장 대표적인 인물인 브레진스키의 국제정세를 보는 안목에 실망한
표정이 역력했다. 브레진스키는 짜증이 났다. "대통령 각하. 카터 미국 대통령은 국민 1인에
게 세금 50달러 되돌려주기 정책을 선거공약으로 내세워 대통령에 당선되었습니다. 카터 대
통령은 국민들과 약속한 환불정책을 지키기 위해서 한국에 주둔하고 있는 지상군 철수를 단
행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그것은 미국 대통령 당선자인 지미 카터가 대통령 선거유세 때
미국 국민에게 1인당 세금 50달러를 되돌려 주겠다고 내세웠던 공약을 말한다. 미국에서는
그것을 카터의 '환불정책'이라고 불렀다. 그리고 그 환불정책을 실현시키기 위해서 카터의
정책 브레인들은 국방비의 과감한 삭감을 시도했다. 그 첫단계가 한국에 주둔하는 미지상군
의 완전한 철수였다. 그러나 미지상군 철수는 시작도 하기 전에 한국의 박정희 대통령으로
부터 강력한 반대에 부딪쳤기 때문에 브레진스키가 설득을 하기 위해 극비리에 한국을 방문
한 것이다. "각하께서 협조해 주신다면 카터 대통령은 한미 방위조약을 철저하게 지킬 것입
니다." 대통령은 여전히 침묵을 지키고 있었다. 브레진스키는 대통령의 근엄한 얼굴을 바라
보며 도무지 의중을 알 수 없는 인물이라는 생각을 했다. 반대파들을 무자비하게 탄압하는
독재자의 이미지가 그의 얼굴에서 엿보이긴 했으나 눈빛은 의외로 사려 깊고 고독해 보였
다. 2년 전 국민들로부터 사랑과 존경을 한 몸에 받던 영부인을 암살자의 총탄에 잃었기 때
문일까. 대통령의 얼굴은 침통해 보이기까지 했다. "대통령 각하, 각하의 의견을 말씀해 주
십시오." 대통령은 최근 국내로부터 강력한 도전을 받고 있었다. 미국을 비롯한 서구 유럽의
인권문제에 대한 비난, 국내의 지식인들과 종교인들, 그리고 학생들의 저항이 해를 거듭할수
록 격렬해지고 있었다. 대통령은 긴급조치를 선포하고, 반대파들을 영장 없이 마구 체포하고
구금했으나 장기집권을 반대하는 국민들의 열망은 식을 줄을 몰랐다. "미지상군의 철수는
한반도에서 힘의 공백상태를 만들 것입니다. 우리는 그 사실을 수차에 걸쳐 귀국에 주지시
켜 왔소. 미지상군 철수는 반대요." 대통령이 마침내 싸늘한 음성으로 내뱉었다. 그는 브레
진스키와 대좌하고 있는 것조차 불편한 기색이었다. "카터 대통령의 미지상군 철수 정책은
확고한 것입니다." 지상군 철수는 단순한 미지사군 철수만을 뜻하는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한국에 주둔하는 미지상군이 보유하고 있는 전술핵 1500기의 완전한 철수를 의미하는 것이
었다. "당신들도 라이샤워 교수와 같은 생각이오?" 미국 하버드 대학의 라이샤워 교수는 얼
마 전 일본에서 '한국이 적화되어도 일본은 염려 없다'라는 보고서를 발표한 일이 있었다.
미국방 예산을 절감하기 위해서 미지상군이 한반도에서 철수하고 그 뒤에 북한의 김일성이
남침하여 한국이 적화되어도 일본은 아무 걱정이 없다는 요지의 내용이었다. "그것은 라이
샤워 교수의 보고서에 지나지 않습니다." "주일 미대사 맨스필드도 그런 발언을 하지 않았
소?" "맨스필드의 사견입니다. 맨스필드도 사견이라고 해명했습니다." " 당신의 견해는 어떻
소?" "제 견해는 관계가 없습니다." "당신은 안보담당 특별보좌관이 아니오?" "그렇습니다.
미국 대통령 안보담당 특별보좌관으로서 당신의 견해를 말해보시오!" " 대통령 각하. 제가
한국에 온 것은 미지상군 철수에 한국이 동의한다는 약속을 받으려고 온 것입니다. 미 의회
의 상하원 합동군사위원회가 미지상군 철수에 대해 한국측의 동의를 요구하고 있습니다."
"나는 동의하지 않겠소." 대통령이 한마디로 잘라 말했다. 대통령의 이마에힘중이 불끈 솟고
있었다. "대통령 각하, 각하께서 동의하지 않아도 미지상군은 철수합니다." "그렇다면 이 자
리는 미지상군 철수를 통고하는 자리요?" "대통령 각하의 협조를 부탁드립니다." "협조라
구? 미스터 브레진스키! 카터 대통령에게 전하시오! 당신들이 지상군 철수를 감행한다면 우
리도 우리의 자주국방을 위해 비상대책을 강구할 수밖에 없다고 말이오! 포드 때는 포기했
지만 이제는 두 번 다시 포기하지 않겠소!" 대통령이 단호한 어조로 내뱉었다. 그는 화가 난
나머지 주먹을 부르르 떨고 있었다. "대통령 각하!" 브레진스키가 당황한 표정으로 더듬거렸
다. 대통령이 비상대책이란 제 2차 핵무기 개발계획을 말하는 것이었다. 한국은 이미 경상남
도 양산군 장안면 고리에 원자력발전소를 건설중에 있었고 충남 온산에는 '농업개발연구소'
라는 이름으로 위장을 한 핵물리 연구소까지 설치하여 과학자들은 대거 투입하고 있었다.
고리 원자력발전소는 미국 웨스팅 하우스사가 터빈 발전기를 제작하고 영국 잉글리시 이렉
트가 및 조지 윔피사가 나머지를 분담하여 건설하고 있었다. 원자력발전소가 가동되면 거기
서 핵연료(저농충 우라늄)를 태운 찌꺼기(플푸타늄 239)가 나오는데 이것을 고농축 시키면
핵무기의 원료가 되는 것이다. "각하, 그것은 전술핵에 관한 것입니까?" "말할 수 없소." "대
통령 각하, 분명하게 말씀해 주십시오." "말할 수 없소, 우리도 자주국방을 이룩하여 미국의
핵우산으로부터 독립해야 한다는 것 외에는 아무 것도 말할 수 없소!" 대통령의 얼굴에 냉
소가 떠올라 있었다. 브레진스키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한국이 또 다시 핵무기 개발을 시도
한다면 골치 아픈 일 이 아닐 수 없었다. 그가 대통령으로 모시고 있는 카터 대통령은 취임
한 지 3개월밖에 되지 않았음에도 의회와 공화당으로부터 강력한 도전을 받고 있었다. 카터
가 대통령에 입후보했을 때 내걸었던 '도덕정치'의 슬로건이 오히려 그의 발목을 죄고 있었
다. 국제 정치의 감각 부족이 바로 그것이었다. 그런데 한국이 핵무기 개발을 시도한다면 카
터에게는 치명적인 상처가 될 것이 분명했다. 미국은 한국의 안보보다 일본의 안보를 더 중
요시하고 있었다. 미국은 경제적으로 초강대국이 된 일본이 동북 아시아의 군사대국이 되길
원하고 있었다. "대통령 각하, 각하께서는 카터 대통령을 적으로 돌리려고 하십니까?" "나는
카터 대통령을 적으로 돌릴 생각을 추호도 없소." "그러나 각하께서 추구하고 게시는 비상
대책은 카터 대통령의 정책과 정면으로 배치됩니다." " 나는 우리 국민을 위해 자주국방을
하려는 것이오. 우리는 그 동안 무수한 어려움 속에서 상당한 경제발전을 이룩했소. 그러나
이 경제 발전도 북한에서 쏘는 미사일 한 방이면 잿더미로 변합니다. 미스터 브레진스키, 당
신네들도 연방정부 재정적자를 해소하기 위해서 지상철수가 필요하듯이 우리도 자주국방을
위해 비상대책이 필요한 거요." "대통령 각하, 북한은 남침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아무도
보장하지 못하오." "그러나 핵무기 개발을 시도하시면 미국은 각하의 지지를 철회할 것입니
다." "지상군 철수부터 중지하시오." "대통령 각하. 각하는 국내의 반대자들이 너무 많습니
다. 미국이 각하에 대한 지지를 철회하면 각하의 정권은 버티기 어렵습니다." 그것은 노골적
인 협박이고 위협이었다. 브레진스키는 대통령의 얼굴이 흙빛으로 변하는 것을 살피면서 마
른침을 꿀꺽 삼켰다. 어차피 한 번은 부딪쳐야 할 일이었다. 그렇지 않으면 이 조그만 나라
의 오만한 대통령은 미국에 적대행위를 계속할 것이다. "미스터 브레진스키!" 대통령의 얼굴
에 조소의 빛이 가득 떠올랐다. "나를 반대하는 자들은 내가 영구집권을 한다느니 총통이라
느니 하면서 비난을 하고 있소. 나도 그 사실을 알고 있소. 그러나 나는 자주국방만 이룩하
면 언제든지 물러날 각오가 되어 있소. 내가 영남대학교에 많은 투자를 하고 있는 까닭도
바로 그것이오." 그것은 대통령이 은퇴한 뒤에 영남대학교에서 교수로 봉직하겠다는 말로
브레진스키에게 들렸다. " 미스터 브레진스키, 나는 미국이 두 가지 중에 하나를 선택하기를
바라오. 하나는 지상군 철수를 중지하는 것이고 또 하나는 우리의 자주국방 게획에 방해를
하지 말라는 것이오. 이상이오." " 각하!" "미스터 브레진스키, 이제 그만 돌아가도록 하시
오." 대통령이 결연한 어조로 말했다. 브레진스키는 소파에서 천천히 일어났다. 그는 박대통
령에게는 어떠한 설득도 먹혀 들어가지 않으리라는 사실을 새삼스럽게 깨달았다. 이제 남은
방법은 하나 대통령이 선택을 요구한 두 가지 방법이 아니라 제 3의 방법-지식인들과 종교
인들, 그리고 학생들로부터 격렬한 저항을 받고 있는 포스트 박을 권좌에서 밀어내는 것뿐
이었다. (램버트가 바빠지겠군...) 도널드 램버트는 미CIA 한국 책임자로 한국의 야당과 재
야, 군부에까지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다. "각하,미국을 이빨 빠진 호랑이로 보지
마십시오." 브레진스키는 박대통령에게 가볍게 목례를 하고 접견실에서 걸어나갔다. 그는 대
통령이 미국을 가볍게 보고 있는 것에 화가 났다.
CIA는 세계 최대의 첩보기관이다. 게다가 CIA는 이미 한국의 대통령이 폭압정치를 계속
할 경우 임기 중반에 쿠데타로 실각할것이라는 보고서까지 제출해 놓고 있었다. 한국 군부
에 쿠데타의 기운이 팽배해 있다는 것을 감지했기 때문이다. 미CAI는 미국 대통령의 명령
만 떨어지면 제 3세계의 어떠한 지도자도 권좌에서 실각시킬 준비가 되어 있었다. 쿠데타,
암살, 학생혁명 등 모든 방법이 CIA의 극비 보고서에 망라되어 있었다. 그리고 그 대상에
있어서 한국도 예외는 아니었다. 박대통령은 브레진스키가 돌아가자 격렬한 분노를 삭이기
위해 담배를 두 대나 거푸 피운 다음 비서실장에게 호출했다. "비서실장, 오늘밤 8시에 병기
개발위원회를 소집하시오!" 병기개발위원회는 대통령 직속으로 설치되어 있는 비밀위원회였
다. 그곳에서는 해외에서 활약하던 우수한 과학자들이 모여 자주국방을 위해 한국형 미사일,
탱크, 헬리콥터를 개발하고 있었다. 이제 그 병기개발위원회에 핵무기 개발을 지시해야 하는
순간이 닥쳐온 것이다. (10년, 아니 빠르면 7년 이내에 우리도 핵무기를 보유해야 돼...) 대통
령은 봄볕이 깃털처럼 나부끼는 청와대 뜰을 내다보며 마음속에 굳게 다짐을 했다.
2
77년 11월, 앙상하게 헐벗은 홰나무 가지로 빗발이 쏴 소리를 내며 음산하게 들이쳤다. 빗
발이 칠 때마다 몇 개 남지 않은 나뭇잎들이 아우성을 치며 떨어졌다. 남자는 여자의 어깨
를 감싸안은 채 가을걷이가 채 끝난 황량한 들판을 난감한 눈빛으로 응시했다. 빗발이 좀처
럼 수그러들 기생이 보이지 않았다. 들판 한가운데 서 있는 홰나무 밑에서 잠깐 비를 피하
고 갈 생각이었으나 비는 한 시간이 넘도록 계속 퍼붓고 있었다. 오히려 사방이 어둑어둑해
지는 것이 그치기 전에 밤이 먼저 올 것 같았다. "어떻게 하지?" 그는 여자를 향해 물었다.
바람은 차가운 냉기와 함께 굵은 빗발을 여자의 몸에 들이치고 있었다. "인가도 보이지 않
으니..." 여자가 아무 대꾸도 하지 않자 남자가 들판 쪽으로 막막한 시선을 옮겼다. 여자가
몸을 떨고 있는 것이 그의 팔에 미세한 파장을 그리며 전해져 왔다. 여자는 새처럼 몸을 떨
고 있었다. "추워?" "네." "어떻게 하지?" 그는 난감해서 다시 물었다. 그러자 여자가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같은 말을 되풀이해서 묻는 남자가 우스웠던 것이다. 그는 죄책감을 가지
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그녀에 대해서, 아내에 대해서, 그리고 자신이 소속되어 있는 군대
라는 조직에 대해서. 그러나 그것은 그녀도 가지고 있는 것이다. 그녀는 남자에게 머리를 바
싹 기대고 황량하게 벌거벗은 들판을 응시했다. 이제 이 비가 그치고 나면 찬바람이 불고
겨울이 닥쳐올 것이다 가난하고 무력한 사람들에게 더욱 춥고 긴 겨울이. 그때 여자의 눈에
작은 움막이 비쳐졌다. "저기 원두막이 있어요." 여자가 손을 들어 들판의 한 지점을 가리켰
다. "그렇군!" 남자도 그것을 보았다. 다음 순간 그들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손을 잡고
원두막을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억센 빗줄기가 얼굴로 몸으로 마구 들이쳤다. "원두막이 있
으니까 인가도 있을 거예요!" "인가는 보이지 않아." "그럼 저기 산모퉁이에는 있지 않을까
요?" 남자는 대답을 하지 않았다. 그곳에 인가가 있다고 해도 빗속을 달려서 가는 것은 불
가능했다. 원두막은 오랫동안 사용하지 않을 듯 폐가처럼 음산했으나 그래도 비를 피할 수
는 있었다. 그들은 우선 원두막에 들어가 비를 피했다. 어디쯤인지도 알 수 없었다. 읍내의
한 음식점에서 점심을 먹은 뒤 택시를 타고 바닷가에 나간 것까지는 좋았으나 지름길로 온
다고 찻길을 떠나 돌아서 온 것이 잘못이었다. 바닷가에서 만난 더벅머리 총각이 공연히 히
쭉히쭉 웃으며 가르쳐준 지름길이었다. 검은 구름이 몰려들기 시작하자 서둘러 걸음을 떼어
놓았으나 더벅머리 총각이 가르쳐준 지름길은 두 시간을 걸어도 인가가 없었다. 일부러 그
들을 골탕 먹이기 위해 더벅머리 총각이 엉터리로 길을 가르쳐준 모양이었다. 그러나 더벅
머리 총각을 원망할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남자가 담배를 피워 물었다. 남자가 피우는 담배
연기가 푸르스름하게 흩어지며 여자의 몸을 감쌌다. 여자는 알싸한 그 냄새가 좋았다. 남자
의 담배냄새가 좋아지면 여자가 시집을 가게 된다고 엄마가 말했었지. 여자는 문득 그런 생
각을 하고 쓸쓸하게 웃었다. 냉기만도 아닌 것이 뼛속까지 스며들고 있었다. 서서히 밤이 내
리기 시작했다. 비는 밤이 되자 더욱 세차게 쏟아졌다. 이따금 우르르 우르르하는 소리와 함
께 번개가 번쩍이면서 어둠 속을 환하게 비추었다. 여자는 그럴 때마다 어깨를 흠칫흠칫 떨
었다. 섬광이 번쩍일 때는 여자의 눈이 파랗게 빛을 퉁기는 것처럼 보였다. "어떻게 하죠?"
이번엔 여자가 물었다. 남자는 대답을 하지 않았다. 천둥번개가 몰아치는 한 이곳을 벗어날
수는 없었다. 여자도 그것을 알고 있었다 그런데도 알면서 묻고 있는 것이다. "추워요." 여
자가 말했다. 그는 여자의 눈을 응시했다. 여자의 맑은 눈은 깊고 그윽했다. 여자의 반듯한
이마로 빗물 한 방울이 또르르 굴러 떨어졌다. "춥단 말예요." 여자가 샐쭉한 표정으로 눈은
흘겼다. 남자는 비로소 여자가 무엇을 원하는 지 알아차렸다. 여자는 그가 안아주기를 갈망
하고 있었다. "미안해." 남자가 여자의 어깨를 끌어당겨 가슴에 안았다. 여자가 다소곳하게
남자의 가슴에 안겼다. 또 뇌성이 울면서 어둠이 펄럭거리고 검은 상포처럼 나부꼈다. "옷이
모두 젖었어." 남자는 손이 여자의 어깨에서 등으로. 등에서 허리로 미끄러졌다. 여자가 아.
하고 신음을 삼켰다. 남자의 손이 여자의 둔부 위에 얹혀졌다. 여자가 고개를 들고 남자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그러자 남자는 자신의 입술로 여자의 입술을 덮쳐 눌렀다. 여자는 혀로
남자의 입술을 열고 재빨리 그것을 남자의 입안 깊숙이 밀어 넣었다. 섬광이 번쩍 하고 어
둠을 두 쪽으로 가르더니 벼락치는 소리가 귓전을 때렸다. 남자가 재빨리 여자를 안고 바닥
으로 쓰러졌다. 사방은 캄캄하게 어두웠다. 그러나 어둠이 하나로 뒤엉킨 젊은 육체를 갈라
놓지는 못했다. 남자의 상반신이 여자의 가슴 위에 실렸다. 남자는 여자를 서서히 흥분시켜
나갔다. 여자의 물걸레처럼 질펀하게 젖은 옷들이 벗겨지고 맨살이 모습을 드러냈다. 맨살도
빗물에 젖어 축축했다. 여자는 눈을 감고 자신의 육체를 남자에게 맡겼다. 이것은 여행이니
까. 여자는 눈을 감고 생각했다. 황량한 가을에서 겨울로, 겨울에서 봄으로 시간여행을 하는
것이다. 남자의 애무는 조심스럽고 정성스러웠다. 여자는 남자의 머리를 쓸어안아 가슴 위에
올려놓았다. 남자가 무례하게 여자의 가슴을 한 입 가득 베어 물었다. 여자가 몸을 꿈틀하며
허리를 비틀었다. 남자의 손 하나가 그녀의 깊숙한 곳을 애무하며 그녀를 뜨겁게 달구고 있
었다. 우르르 또 뇌성이 울면서 섬광이 어둠을 뚫고 내리꽂혔다. 여자는 눈을 떴다. 무엇인
지 모를 야릇한 느낌이 미칠 듯한 흥분 속으로 그녀를 이끌고 있었다. 여자의 입에서 신음
이 흘러나왔다. 그녀는 다리를 어둠 속으로 들어올렸다. 그 순간 남자가 그녀의 몸 속으로
밀고 들어왔다. "아!" 여자는 입을 벌리고 짧게 신음을 토해냈다. 무엇인가 그녀의 내부에
가득 찬 것이 심연을 헤치고 솟구쳐 오르는 기분이었다. 그녀는 남자의 등을 바짝 끌어안았
다. 눈앞에서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별들이 반짝이며 쏟아지고 몸 안에서는 금빛의 전류가
솟구쳐 어둠 속으로 퍼져나갔다. 여자는 다시 눈을 감았다. 남자의 반복 운동이. 귓전을 때
리는 빗소리와 뇌성이. 감미로운 감각으로 바뀌어 그녀의 전신에 물결치고 그녀를 풍선처럼
부풀어 오르게 했다. "아아..." 여자는 신음했다. 살을 물어뜯는 듯한 신음이었다. 남자와 하
나가 되었다는 사실이, 천둥번개가 몰아치는 캄캄한 밤이라는 사실이 여자를 견딜 수 없게
만들었다. "그, 그만..." 여자는 마침내 고개를 마구 흔들어대기 시작했다. 더 이상 남자를 그
녀의 몸으로 받고 있다가는 부풀어 오른 전신이 폭발해 버릴 것 같았다. "그, 그만... 그...
만..." 여자는 숨이 막히는 것 같았다. 입을 벌리고 고개를 흔들었지만 남자는 그럴수록 여자
를 강하게 밀어붙이고 있었다. 그녀는 울었다. 남자를 감당할 수가 없어 소리치고 울부짖었
다. 그러나 여자는 한순간도 남자의 등에 두른 팔을 풀면서 떨어지지 않았다. 그것은 미칠
듯한 흥분이었고 쾌감이었다. 여자는 허리를 들어 등을 활처럼 휘게 했다. 그러자 남자가 재
빨리 여자의 등을 안아서 일으켰다. 남자가 풀임처럼 쓰러지고 여자가 깃발처럼 갯벌에서
일어났다. 깃발은 어둠 속에서 군대를 이끌고 행진을 계속했다. 수천 군마의 말발굽소리가
갯벌에서 일어나 남자를 향해 달려갔다. 우르르, 또 뇌성이 울고 섬광이 하늘을 갈랐다. 함
께 여자의 몸 속에서도 번개가 치고 천둥이 울었다. 잠시 후 그들은 폭격을 당한 페허처럼
살풍경 하게 누워 있었다.
3
1979년 6월 21일, 워싱턴 한국 대사관 무관실의 전화벨이 요란하게 울렸다. 한국 대사관
무관 박천수 해군 준장은 무심결에 책상 위의 수화기를 들었다. 워싱턴은 초여름이지만 날
씨가 후텁지근했다. "무관실입니다." 그는 수화기에 대과 군인 특유의 딱딱한 영어로 말했
다."박천수 무관 바꿔 주십시오."전화를 걸어 온 사람은 미국인이었다. "실례지만 누구십니
까?" 그는 의혹이 가득한 목소리로 수화기에 대고 물었다. 수화기 저쪽의 목소리는 영어였
지만 어딘지 모르게 잔뜩 긴장하고 있는 느낌이었다. "박천수 무관에게만 얘기하겠습니다."
전화를 걸어 온 사람은 미국인이었다. "실례지만 누구십니까?" 그는 의혹이 가득한 목소리
로 수화기에 대고 물었다. 수화기 저쪽의 목소리는 영어였지만 어딘지 모르게 잔뜩 긴장하
고 있는 느낌이었다. "박천수 무관에게만 얘기하겠습니다." "박무관을 잘 압니까?" " 모릅니
다." "그렇다면 무슨 용무라도...제가 박천수입니다만..." "..."수화기 저쪽에서 침을 삼키는 소
리가 들려왔다. 박무관은 상대방을 긴장시키지 않기 위해 잠시 기다렸다. "먼저 전파 교란기
를 작동시켜 주시오." "도대체 무슨 일로...?" 하고 물으려다가 박천수 무관은 재빨리 도청바
지 정치인 전파 교란기를 작동시켰다. 전파 교란기를 알고 있는 사람이라면 보통 사람이 아
니라는 생각이 퍼뜩 뇌리를 스쳤기 때문이었다. 그는 전파 교란기가 삐 하고 작동을 하자
오케이 신호를 보냈다.
미국 CIA는 워싱톤의 한국대사관도 도청하고 있었다. 한국 대사관뿐만 아니라 CIA가 서
울의 청와대까지 도청하는 바람에 크게 외교문제가 되기도 했었다. 그후 한국은 주미 대사
관의 중요한 전화에 모두 전파 교란기를 설치했던 것이다. "중대 정보가 있습니다." "댁은
누구십니까?" "우선 이 정보를 살 것인지 안 살 것인지 그것부터 말씀해 주십시오." "어떤
정보입니까?" "핵연료 재처리 공장의 설계도입니다. 시공사양서도 있습니다." 그는 숨이 멎
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핵연료 재처리 공장의 설계도와 시공사양서! 그것이 과연 전화를
걸어온 사내가 팔려는 정보일까? 사내의 정체는 과연 무엇일까? 여러 가지 생각이 두서없
이 빠르게 머리 속을 스쳤다. "30분 후에 다시 걸겠습니다. CIA 에서 눈치를 챌지 모르니까
요." 찰칵 하고 전화가 일방적으로 끊겼다. 박천수 무관은 수화기를 놓고 잠시 생각에 잠겼
다. 이런 전화는 그가 미대사관으로 발령을 받은 지난 4월 이후 처음이었다. 박천수 무관은
한동안 생각에 잠겨 있다가 대사실로 올라가 보고를 했다. 김현식 주미대사가 심각한 표정
으로 그의 얘기를 들었다. "장군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김대사가 오히려 그에게 물었다.
"설계도와 시공사양서가 사실이라면 우리에게 꼭 필요한 것입니다." "그럼 일단 본국에 연
락을 취합시다. " "그게 좋겠습니다." 박천수 무관은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들은 즉시 지하
실의 통신실로 내려가 서울로 암호전문을 보냈다. 청화대와의 직접 통신이었다. 서울에서는
20분이 지나서야 회신이 왔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고 정보를 입수하라는 대통령의 특
명이었다. "무관실로 갑시다. "대사가 긴장된 표정으로 말했다. 시간이 별로 없었다. 그들은
서둘러 통신실로 나와 무관실로 향했다. 그들이 들어서자마자 전화벨이 울렸다. 박천수 무관
은 주먹으로 이마의 땀바울을 문지르고 수화기를 들었다. "제 이름은 당분간 M이라고 하겠
습니다." "예, 좋습니다." "어떻습니까? 정보를 사겠습니까?" "사겠습니다. 가격을 말씀하십
시오." "100만 달러입니다." "100만 달러라구요?" 박천수 무관은 입을 딱 벌리고 대사의 얼
굴을 쳐다보았다. 대사가 어림없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흔들었다. "100만 달러는 너무 많습니
다. 우린 그만한 돈을 줄 수가 없습니다. "이라크는 200만 달러를 주겠다고 했습니다." "이
라크가요?" "한 시간 후에 다시 전화하겠습니다." "잠깐만요, 한 시간은 너무 짧습니다. 본국
과 협의를 해야 하니까 하루만 시간을 주십시오." "..." "또 한 가지 설계도가 완벽한 것인지
아닌지를 검토를 해야 합니다." "설계도는 완벽합니다." "어느 공장의 설계도입니까?" "지금
을 말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설계도를 검토할 시간은 드리겠습니다. 돈은 그 뒤에 받아도
좋습니다." "하루만 시간을 주십시오." "좋습니다. 내일 이 시간에 다시 전화하겠습니다. 그
대신 M이라고 내 암호명을 말하면 즉시 전파교란기를 작동시켜야 합니다." "좋습니다." 전
화가 끊겼다. 이번에도 일방적이었다. 박천수 무관은 수화기를 내려놓고 이마에 흐르는 땀을
다시 주먹으로 문질렀다. 긴장을 한 탓인지 땀이 비오듯 흐르고 있었다. 핵연료 재처리공장
설계도는 본국의 병기개발위원회가 심혈을 기울여 연구를 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본국에서
는 핵무기를 제조하기 위하여 77년부터 미국과 유럽에 있는 핵물리학 분야의 과학자들을 적
극적으로 유치하고 있었으나, 그 분야에 있는 과학자들이 많지도 않을 뿐더러 어쩐 일인지
조국의 핵무기 제조에 소극적인 반응을 보이고 있었다. 이에 KCIA(한국 중앙정보부) 미국
상주 요원들의 최대임무는 핵무기 관련 정보를 입수하는 것으로 바뀌어 있었다. 그리고 그
것은 박대통령이 청와대에서 직접 관할하고 있었다. "장군, M이라는 사내의 정체가 무엇일
까요?" 김현식 대사와 박천수 무관은 M의 전화를 녹음한 테이프를 녹음기에 넣고 몇 번이
나 되풀이해서 들으며 의견을 교환하기 시작했다. 이런 극비정보는 대사관 직원들과 협의를
할 수가 없어 그들둘의 의논하여 결정을 내려야 했다. "아무래도 정보계통에 있는 사람 같
습니다." "핵연료 재처리공장의 설계도가 100만 달러의 가치가 있습니까?" "설계도만 완벽하
다면 100만 달러의 가치가 충분히 있을 거라고 봅니다. 이라크가 200만 달러를 지급하겠다
는 것은 사실일지 모릅니다." "그런데 M이라는 친구가 어떻게 그런 서류를 입수했을까요?
설계도와 시공사양서라면 분량도 적지 않을 텐데... 혹시 그쪽 계통에 근무하는 핵물리 과학
자가 아닐까요?" "그럴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전파교란기를 알고 있고 무관
실로 직접 전화를 건 것을 보면 정보계통에 있는 사람 같습니다." "혹시 마피아나 사기꾼들
의 짓은 아닐까요? 우리가 핵무기 관련 정보를 입수하는데 현안이 되어 있다는 것을 알고서
돈을 노린..." "대사님, 그런 놈들은 아닌 것 같습니다." "그럼 본국으로 일단 전문을 보냅시
다." "예, 암호전문을 보내고 설계도와 시공사양서를 확인할 수 있는 과학자들도 보내달라고
해야 합니다. 또 대사님께서는 100만 달러를 현금으로 준비하셔야 합니다. 100만 달러를 한
은행에서 인출하면 FBI(연방수사국)의 추적을 당하니까 미국에 지사를 개설한 우리 한국 기
업들의 협조를 얻어서 여러 곳에서 인출하도록 하십시오. 전 그 동안 이 작전에 투입할 우
리 요원들을 선발해 보겠습니다." "좋습니다." 대사가 고개를 끄덕거리고 손을 내밀었다. 박
천수 무관은 대사의 손을 굳게 잡았다.
M은 공중전화 부스를 나오자 '로즈클럽'을 향해 걸음을 떼어 놓았다. 모든 것이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었다. 그가 예상하던 대로 한국 대사관은 그의 제안을 거절하지 않았던 것이다.
한국이 핵무기를 제조하려고 하고 있는 것을 그는 이미 오래 전부터 알고 있었다. 한국뿐
아니라 이스라엘, 이라크, 시리아, 파키스탄, 심지어 대만까지도 핵무기를 제조하려고 혈안이
되어 있었다. 인도가 실험용 원자로를 이용하여 핵무기 제조에 성공하자 분쟁상태에 있는
제 3세계권 국가들이 잇달아 핵무기 개발을 시도하고 있는 것이다. 핵무기를 제조하려면 핵
연료 재처리공장의 건설이 필수적인데 핵연료 재처리공장의 건설은 막대한 비용과 오랜 연
구가 필요했다. 한국이나 제3세계권 국가들이 독자적으로 그것을 건설하려면 짧게 잡아도 5
년이 필요한 것이다. 그러나 설계도와 시공사양서가 있으면 2년이면 충분했다. 한국이나 제3
세계권 국가들이 필사적으로 달려드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M은 휘파람소리라도 불고 싶
은 심정으로 로즈클럽의 문을 열고 들어섰다. 로즈클럽에서 이라크 IDIA(국방정보국)의 요
원인 압둘라와 '브라운연구소'의 제이콥스 박사가 만나기로 했던 것이다. 그의 여느 때와 마
찬가지로 입구가 잘 보이는 테이블에 가서 앉았다. 클럽엔 아직 사람들이 많지 않았다. 압둘
라와 제이콥스 박사도 보이지 않았다. 그는 선정적으로 엉덩이를 흔들며 가까이 온 웨이트
리스에게 브랜디를 한 잔 주문했다. 6시 40분. 비쩍 마르고 신경질적인 얼굴을 한 제이콥스
박사가 먼저 나타났다. 키가 작고 콧수염을 기른 압둘라는 5분 후에 나타나 제이콥스 박사
와 친구처럼 합석했다. M은 주머니에서 만년필을 꺼내 낙서를 하는 척했다. CIA에서 만든
그 만년필에는 100미터 밖에 떨어져 있는 작은 소리까지 도청할 수 있는 고성능 소형 도청
기가 내장되어 있었다. 만년필 끝에 있는 작은 구멍에서 소리를 잡아당겨 그의 귓속에 장치
되어 있는 이어피스로 전달하는 것이다. "어제는 어땠소? 내가 보여준 여자가 마음에 들었
소, 박사?" 압둘라의 말이었다. 압둘라는 이라크 육군 소령이었다. "그렇소, 요분질을 기막히
게 잘하는 여자였소." 제이콥스 박사가 억지 웃음을 지으며 대답했다. "얼마만큼 진척이 되
었소?" 압둘라의 목소리가 갑자기 낮아졌다. "내일이면 끝납니다." "내일 반출할 수 있겠
소?" "물론이오." "그럼 여기서 내일 돈과 교환합시다." "안됩니다." "무슨 소리요?" "내일
아침 100만 달러를 먼저 내 통장에 입금시키시오. 그러면 모레 오전에 설계도와 시공사양서
를 넘겨주겠소." "약속이 다르지 않소?" "내가 설계도와 시공사양서를 넘겨주면 당신들은 비
밀을 지키기 위해 나를 제거해 버릴 것이오. 나는 개죽음을 당하고 싶지는 않소." "좋소 ,
돈을 먼저 입금시키겠소. 그러나 설계도와 시공사양서가 가짜면 어떻게 하지요?" " CIA에
신고하시오. 그러면 CIA는 평생이 걸리더라도 나를 추적하여 제거할 것이오." 잠시 대화가
끊겼다. 웨이트리스가 그들에게 다가와 주문을 받고 있었다. "제이콥스, 이 아가씨 아름답지
않소?" 콧수염 압둘라가 농담을 던졌다. "아름답소, 특히 이 엉덩이가 멋지게 생겼군요." 웨
이트리스는 두 사내의 농담에 허리를 비틀며 깔깔대고 웃었다. 블론드 머리에 눈이 파란 여
자였다. "탄력이 좋게 생겼어." "가슴도 괜찮은 편이에요." 웨이트리스가 오히려 더 노골적이
었다. 제이콥스는 음탕한 눈빛으로 웨이트리스의 가슴을 훑어보고 손으로는 그녀의 엉덩이
를 슬슬 어루만졌다. "정말 만져보니까 촉감이 좋군." "남자들이 모두 그래요. 멋진 음악소
리를 내는 히프라고." "소문이란 대개 믿을 게 못되지." "그러면 한 번 음미해 보세요. 음악
소리가 나는 지 안 나는지..." "200달러요." "200달러라구?" "오페라를 감상하려면 그만한 관
람료를 내야죠. 특히 좋은 오페라를 감상하려면 말예요." 웨이트리스가 눈웃음을 쳤다. "좋
아 이따가 만나지." "10시에 영업이 끝나요. 돈은 선불이고요." "돈은 내가 내지." 콧수염 압
둘라가 재빨리 패스포트를 꺼냈다. 그 속엔 빳빳한 100달러 자리 지폐가 가득 들어 있었다.
"빳빳한 돈이군요." 웨이트리스가 탐욕스러운 눈빛으로 압둘라의 패스포트를 들여다보며 말
했다. "제이콥스씨를 잘 모시라고." "물론이예요. 이런 봉을 놓칠 리가 있겠어요?" 웨이트리
스가 100달러 지폐 2장을 받아서 가슴에 찔러 넣은 뒤. 주문을 받아 돌아가자 그들의 거래
는 다시 시작되었다. "물건은 어디서 넘겨 줄 거요?" "모레 아침 9시, 필라델피아 광장에서
넘겨주겠소." "거기는 사람이 많은 곳이오. 왜 하필 그런 곳에서 물건을 넘겨 주려는 거요?"
"그래야 당신들이 나를 죽이지 못할 거 아니겠소?" "철저하군." "난 이 일에 목숨을 걸었
소." "좋소, 당신 말대로 하리다. 대신 모레 오전 9시 필라델피아역 광장 공중전화 부스 앞
에서 설계도를 건네주시오 설계도를 확인한 뒤에 나머지 100만 달러를 입금시켜 주겠소."
"좋습니다." "이제 거래 얘기는 그만하고 술이나 마십시다." 때마침 웨이트리스가 그들이 주
문한 술을 가지고 왔다. 그들은 그때부터 술과 여자 얘기만 계속해서 떠들어댔다. M은 고성
능 도청기가 내장되어 있는 만년필을 주머니에 집어넣고 자신도 술을 마셨다. 압둘라는 9시
30분에 클럽을 나갔다. M은 압둘라를 미행할까 하다가 그만두었다. 그가 필요한 것은 핵연
료 재처리공장의 설계도와 시공사양서였다. 공연히 이라크 국방정보국 요원을 미행하다가
발각되면 모든 계획이 수포로 돌아가는 것이다. 압둘라는 이라크 국방정보국의 정예 요원이
었다. 제이콥스 박사는 10시에 클럽을 나섰다. M은 제이콥스 박사를 미행하기로 했다. 제이
콥스 박사는 클럽 건너편에 차를 세워 두고 있었다. 일산 도요타 1900인데 차가 낡은 것이
돈에 쪼들리고 있는 것 같았다.(그래, 돈에 궁하니까 설계도를 팔아먹겠지...) M은 차안에서
담배를 피우고 제이콥스 박사의 차가 떠나기를 기다렸다. 제이콥스 박사는 차안에서 웨이트
리스를 기다리고 있는 모양이었다. 제이콥스 박사가 핵연료 재처리공장 설계도를 이라크측
에 팔아 먹으려고 하는 것을 M이 알게 된 것은 불과 15일 전의 일이었다. 그는 처음에 제
이콥스 박사를 국가반역죄로 체포하려고 했었다. 그는 CIA요원으로서 첩보 임무를 제대로
수행하지 못하고 있었다. 시대의 변화에 늘 뒤쳐졌고, 냉혹해야 할 때에 냉혹하지 못해 한
직이나 다름없는 필리델피아 지부까지 밀려와 있는 처지였다. 최근 들어 그의 상관들은
CAI에서 그를 축출하려는 눈치까지 보이고 있었다. 그는 제이콥스 박사를 체포하여 공로를
세우면 상사들에게 인정을 받을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그 생각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그는 곳 깨달았다. 모든 공로는 언제나 상관들이 차지해 보리는 것이 현실이었다. 그가
국가 반역자를 체포한다고 해도 그 공로가 상관들의 몫이 될 것은 너무나 분명했다. 그는
자신이 소속되어 있는 CIA와 미국을 배신하기로 했다. 제이콥스 박사는 설계도와 시공사양
서를 2백만 달러에 이라크에 팔아 넘기려 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한국측에 1백만 달러밖
에 요구하지 않았다. 그는 제이콥스 박사가 설계도와 시공사양서를 '브라운연구소'에서 반출
할 때 탈취하기로 계획을 세웠고 그것을 한국을 비롯한 제3세계권 국가에 감쪽같이 팔아넘
길 작정이었다. 웨이트리스는 10시 15분에 클럽에서 나왔다. 그녀는 활달한 걸으므로 제이콥
스 박사의 차로 걸어가서 차창을 두드렸다. 차문이 열리고 웨이트리스가 조수석에 올라타
자 제이콥스 박사의 차는 털털거리며 움직이기 시작했다. M은 제이콥스 박사의 차를 곧바
로 미행하려다가 멈칫했다. 제이콥스 박사의 일산 도요타차를 검은 색 벤츠가 느릿느릿하게
따라가고 있는 것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압둘라야!) M은 머리끝이 곧추서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비로소 그는 압둘라가 만만한 사내가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는 천천히 압둘라
의 벤츠를 미행하기 시작했다. 압둘라는 로즈클럽을 떠난 지 15분만에 필라델피아시 동쪽에
있는 항구의 한 호텔 앞에 차를 세웠다. 선원들이 주로 이용하는 싸구려 호텔이었다. M은
압둘라와 제이콥스 박사가 눈치 차리지 못하게 호텔에서 멀찍이 떨어져 차를 세웠다. 그리
고 야간용 망원경으로 호텔을 살폈다. 이내 제이콥스 박사와 웨이트리스가 차에서 내려 호
텔로 들어가는 것이 보였다. 압둘라는 벤츠 안에서 꼼짝도 하지 않고 있었다. 그는 망원경에
서 눈을 떼지 않고 담배를 꺼내 물었다. 압둘라가 호텔 앞을 떠난 것은 30분이 지나서였다.
제이콥스 박사는 압둘라가 떠난 지 10분이 지나자 혼자 호텔에서 나와 이태리산 승용차 피
아트에 올랐다. 도요타를 호텔 앞에 세워 도고 있는 것은 압둘라를 따돌리가 위한 연막으로
보였다. 교활한 작자였다. M은 붉은 색의 피아트를 미행하기 시작했다. 제이콥스 박사는 혹
시 있을지 모를 미행자를 따돌리려는 의도인지 필라델피아의 금융가와 힐튼 호텔을 두 번이
나 돈 뒤에 흑인 거주지역으로 달려갔다. 그곳은 인구 2백만이 넘는 필라델피아시의 할렘이
었다. 아일린을 만나려는 모양이었다. 아일린은 뚱뚱한 흑인 여자로 '브라운연구소'의 교화수
로 일하고 있었다. 그는 제이콥스 박사가 아일린의 집으로 들어간 지 10분이 지나자 차에서
내려 아일린의 집으로 가까이 갔다. 가로등이 환하게 켜져 있어 창을 통해 아일린의 집을
들여다 볼 수는 없었다. 그러나 창 밑에 웅크리고 앉아서 도청을 하는 것은 가능했다. 그는
창틀에 도청장치를 부착했다. 건물용 고성능 도청기였다. 이내 안에서 깔깔대는 여자의 웃음
소리와 낮고 음침한 제이콥스 박사의 웃음소리가 도청기를 통해 들렸다. 그리고 키스를 하
는 듯한 소리와 여자의 비음이 들려왔다. (힌둥이와 검둥이가 그걸 하는 모양이군...) 그의
예상대로였다. 10분 쯤 지나자 여자의 뜨거운 신음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그는 담배를
피워 물었다. 흑인 거주지역은 밤이 깊어지자 인적이 끊어져 조용했다. 그는 우두커니 허공
을 쳐다보았다. 초여름밤의 필라델피아 하늘은 별들이 무수히 떠서 반짝이고 있었다. 아름다
운 밤이었다. 그는 안에서 들려오는 신음 소리에 다시 귀를 기울였다. 그들의 신음소리가 점
점 낮아지면서 후끈거리는 열기가 그대로 그의 귓전으로 전해져 왔다. 여자의 신음소리는
이내 울음과 비명으로 바뀌었다. 여자가 절정을 향해 달려가고 있는 것이 확실했다. 그는 씁
쓸하게 웃었다. 그는 제이콥스 박사와 흑인 여자 아일린의 정사가 완전히 끝나 잠이 든 것
을 확인한 뒤에 차로 돌아왔다. 시간은 벌써 자정이 지나 새벽이 가까워지고 있었다. 스는
차안에서 잠을 잤다. 제이콥스 박사를 한순간도 놓쳐서는 안되었다. 날이 밝자 제이콥스 박
사가 먼저 브라운연구소로 출근했다. 그는 브아운연구소까지 제이콥스 박사를 미행한 뒤에
공중전화로 한국대사관 무관실에 전화를 걸었다. 그리고 제이콥스 박사가 압둘라에게 선금
을 요구했듯이 한국대사관에 선금 20만 달러를 요구했다. 한국에서 100만 달러 이상을 받을
수는 없었다. 그 나라는 가난한 나라였다. 한국대사관은 그의 요구를 흔쾌이 승낙했다. 20만
달러는 현금으로 필라델피아 자동차 박물관 앞에서 건네 받기로 약속이 되었다. 모든 것이
생각보다 훨씬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었다.
박천수 무관이 델타항공편으로 워싱턴을 떠나 필라델피아에 도착한 것은 6월 22일 오전
11시였다. 그는 암호명 M과 약속한 대로 현금 20만 달러가 든 007가방을 들고 자동차 박물
관 앞으로 달려갔다. M이라는 사내의 정체에 대해 여러 가지 생각이 머리 속에서 교차했으
나 인단 부딪쳐 볼 수밖에 없었다. 그가 필라델피아 자동차 박물관에 도착한 것은 정확하게
11시 30분의 일이었다. M과 약속한 시간이었다. 그러나 M은 아직 도착해 있지 않았다. 그
가 손목을 들어 시계를 보려고 하는데 갑자기 베이지색 승용차 한 대가 그의 옆에 달려와
급브레이크를 밟았다. "타시오!" M이었다. 30대 중반의 키 작은 백인이었다. 그는 재빨리 승
용차에 올랐다. "미행은 없겠지요?" M이 승용차를 출발시키며 대꾸했다. "없습니다." 박천수
무관은 조용하게 대꾸했다. "먼저 내가 절대로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믿어주기 바
랍니다. 나는 현직 CIA요원이며 이름은 샘 오스틴입니다. 이번 핵연료 재처리 공장의 설계
도는 브라운 연구소의 제이콥스 박사가 반출하여 이라크에 팔아 넘기려 하고 있습니다. 오
늘밤 나는 제이콥스 박사로부터 이 설계도와 시공사양서를 탈취할 계획입니다." "CIA에서도
알고 있습니까?" "모릅니다." "제이콥스 박사는 어떤 방법으로 설계도와 시공사양서를 반출
할 계획입니까?" "그건 나도 모릅니다." "브라운연구소는 경비가 삼엄하지 않습니까?" "브라
은 연구소는 웨스팅 하우스사의 첨단무기 비밀연구소입니다. 자체 경비가 삼엄한 편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반출하지요?" "모르겠습니다. 오늘 반출하는 것은 확실합니다." 샘 오스틴의
승용차는 시내를 계속 돌고 있었다. "그럼 설계도와 시공사양서는 언제 건네줄 거요?" "내
일 아침입니다. 연락처를 알려 주면 전화를 걸겠습니다." 박천수 무관은 잠시 생각에 잠겨
있다가 명함 한 장을 꺼냈다. 명함엔 '은성전자 필라델피아 지사 매기 한'이라는 이름이 영
어로 박혀 있었고 전화번호가 박혀 있었다. "우리 요원입니다." "좋습니다." 샘 오스틴은 승
용차를 필라델피아역 광장에 세웠다. 박천수 무관은 현금 가방을 건네주었다. "20만 달러 맞
겠지요?" "맞습니다." 박무관이 차에서 내렸다. 피아트는 재빨리 역광장을 떠나서 차량의 물
결에 휩쓸렸다. 그 뒤를 크림색 승용차 한대가 곡예를 하듯 꼬리를 물고 늘어선 승용차 사
이를 누비며 따라가소 있었다. (매기 한이군...) 박무관은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샘 오스틴의
승용차를 미행하고 있는 것은 암호명이 파라다이스인 매기 한이었다. 한국 중앙정보부 뉴욕
요원이었다.
핵물리학자 제이콥스 박사는 자신의 책상 위에 여자용 내복상자를 조심스럽게 올려놓았
다. 사무실 벽시계가 5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6시까지는 이제 한 시간밖에 남아 있지 않았
다. 그는 내복상자의 장미를 다치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책상위에 떼어 놓았다. 그런 다음 상
자의 끈을 풀고 포장을 벗겼다. 긴장이 되는지 손끝이 떨리고 가슴이 뛰었다. 그는 담배를
입에 물었다. 긴장을 풀어야 했다. 라이터로 불을 붙여 연기를 깊이 빨아들였다가 내뱉고 상
자의 뚜껑을 열었다. 상자 안에서는 좋은 냄새가 풍기고 있었다. 상자 안의 옷에서 풍기는
냄새였다. 상자에는 피에르 가르뎅의 상표가 붙어있는 브래지어 3개와 팬티 3장이 들어 있
었다. 빅 사이즈였다. 빅 사이즈가 아니면 아일린 젤스키의 뚱뚱한 몸에 맞지 않을 것이다.
그는 붉은 브래지어를 상자에서 꺼냈다. 흑인들이 좋아하는 색이었다. 그 브애지어는 컵의
안쪽 바느질한 부분이 양쪽 모두 2cm쯤 벌어져 있었다. 그가 집에서 예리한 면도칼로 찢어
놓은 것이었다. 그는 자신의 캐비넷 비밀금고에서 손가락 크기의 베이지색 캡슐 6개를 꺼냈
다. 캡슐은 말랑말랑한 플라스틱으로 되어 있었다. 사용하는 사람에 따라 마음대로 형태를
바꿀수 있는 플라스틱이었다. 제이콥스 박사는 안에 들어있는 것이 망가지지 않도록 조심스
럽게 그것을 납작한 형태로 만들었다. 안에는 마이크로 필름이 들어 있었다. 우표딱지 뒤에
도 숨길 수 있는 얇고 작은 것이었다. 그가 라이터로 위장한 소형 카메라로 브라운 연구소
에 보관중인 '웨스팅 하우스사'의 핵연료 재처리공장의 설계도와 시공사양서를 낱낱이 찍은
것이었다. 그는 그것을 3개월이라는 오랜 시간에 걸쳐 찍었다. 그러나 이제는 그것을 연구소
의 삼엄한 경비를 뚫고 밖으로 반출해야 했다. 연구소는 경비가 철저했다. 외곽은 무장경비
원이 철통같이 경비를 하고 있고 현관 로비는 적외선 탐지기와 금속탐지기를 설치해 출입자
들을 체크하고 있었다. 먼지 하나 밖으로 세어 나갈 수 없는 경비 시스템을 갖고 있는 것이
다. 그는 캡슐을 브래지어 컵 속에 밀어 넣었다. 그리고 손으로 브래지어 컵을 만져 이질감
여부를 확인했다. 이질감이 느껴지면 아일린 젤스키가 눈치를 채는 것이다. 그러나 이질감은
미세했다. 일부러 브래지어를 뜯어서 조사하지 않으면 눈치챈다는 것은 불가능했다. 그는 캡
슐 6개를 모두 3개의 브래지어에 나누어 삽입한 뒤 접착제로 봉인했다. 그리고 그것을 상자
속에 집어놓고 다시 포장한 다음 장미를 붙였다. (이제 완벽하군!) 그는 상자를 책상 한쪽으
로 밀어놓고 안락의자에 기대앉았다. 아일린 젤스키는 연구소의 전화교환수였다. 외부에서
걸려오는 전화를 각 부서로 연결해 주고 연구소 내의 직원들이 외부로 거는 전화를 연결해
주는 것이 그녀의 일이었다. 연구소에서는 외부와 직접 전화를 하는 것을 철저하게 금지하
고 있었다. 그는 담배를 다 피운 뒤 복도로 나왔다. 교환실은 7층에 있었다. 엘리베이터에
올라타자 노랑머리의 윌튼 박사가 타고 있었다. "어디 가나?" 그는 윌튼 박사에게 친근하게
물었다. 윌튼 박사는 MIT공대 출신으로 핵원자이론이 전공이었다. "제키에게. 그건 누구 것
이야?" 재키는 윌튼 박사가 최근에 사귀는 여자였다. "아일린." "아일린 질스키?" "그래."
"제이콥스, 그 여자와 했나?" "물론이지." 제이콥스는 어깨를 으쓱하고 웃었다. 아일린 젤스
키와 관계를 맺기 시작한 것은 불과 한 달 전의 일이었다. 엘리베이터 안에서 그녀를 우연
히 만났을 때 그녀가 야릇한 눈빛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그리고 그녀가 다짜고짜 말했던 것
이다. 주위에 사람이 없기 때문인지도 몰랐다. "저를 음미하지 않겠어요?" 그것은 색기가 흐
르는 요염한 눈빛이었다. 제이콥스 박사는 한순간 망설였다. 아일린 젤스키는 흑인이었고 그
는 백인이었다. "특별한 경험을 해보세요." 특별한 경험? 피부색이 다른 여자를 경험하란 말
이지? 그래 그것은 매우 특별한 경험이 되겠군...하고 그는 생각했다. "오늘밤 우리 집으로
오세요." 아일린 젤스키는 눈을 찡긋하며 윙크를 했다. 제이콥스 박사는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때 그는 비로소 아일린 젤스키를 이용하자는 생각을 했다. 그것은 기발한 착상이었다. 그
리고 아일린 젤스키 같은 흑인 여자와 관계를 맺는 것은 처음이었다. 그는 그날밤 흑인 거
주지역으로 아일린 젤스키를 찾아갔다. 그리고 아일린 젤스키의 말대로 그녀의 육체를 음미
했다. 아일린 젤스키는 풍만한 여자였다. 침대에 올라가 그녀의 알몸을 끌어안자 더욱 그런
느낌이 들었다. 아일린은 부드러웠다. 온몸이 탄력 좋은 고무처럼 말랑말랑했다. 제이콥스
박사는 그녀와 정사를 하면서 형언할 수 없는 희열을 느꼈다. "맛이 어떤가?" 윌튼 박사가
야비한 목소리로 물었다. "고무질 같았어. 아일린은 아주 섬세한 여자야." 그는 윌튼 박사를
두들겨 패고 싶은 기분은 참으며 대꾸했다. "결혼할 예정인가?" "아니. "아일린 젤스키와 결
혼할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엘리베이터가 7층에서멎었다. 그는 엘리베이터 박스에서 나오자
곧장 교환실로 들어갔다. "하이!" 아일린은 혼자 교환실에 있었다 그녀의 동료들은 휴게실로
커피를 마시러 갔는지 보이지 않았다. "제이콥스!" 아일린은 뚱뚱한 뭄을 흔들며 반색을 했
다. "선물이야." 그는 내의상자를 아일린에게 주면서 책상에 걸터앉았다. "오. 이런 선물은
주다니..." 아일린이 감격한 표정을 지었다. 평생 선물 같은 것은 한 번도 받아보지 못한 여
자 같았다. "짐에 가서 뜯어봐." "고마워요, 제이콥스." "어젯밤 정말 황홀했어, 아일린은 멋
진 여자야." "제이콥스, 나도 즐거웠어여." "오늘밤 초대해 주지 않겠어? 이놈이 아일린은 사
랑하나봐." 그는 노골적으로 자신의 사타구니를 가리켰다. 아일린의 입에서 얕은 신음소리가
흘러나오며 검고 투박한 손이 그의 사타구니를 더음었다. "스테이크를 만들어 놓을게오. 8시
에 와요." "고마워, 아일린." 그는 책상에서 내려와 아일린의 입술에 가볍게 키스했다. 아일
린의 입에서 독한 담배 냄새가 났다. 제이콥스 박사는 5시 50분에 퇴근을 했다. 1층 엘리베
이터와 로비에 있는 적외선 탐지기를 지나 지하 주차장에서 차를 끌고 나온 뒤 연구소 앞
광장에 세워놓고 대기했다. 아일린이 적외선 탐지기를 통과하는 지 살피기 위해서였다. 6시
5분. 검은 투피스로 정장을 한 아일린이 비대한 몸은 흔들며 엘리베이터에서 내렸다. 그녀는
장미꽃이 붙어있는 내의상자를 자랑스러운 듯이 가슴에 끌어 안고 로비로 걸어나오고 있었
다. 그녀의 걸음이 유난히 당당해 보였다. (적외선 탐지기야...) 그는 바싹 긴장했다. 아일린
이 적외선 탐지기에 걸리면 모든 것이 끝장이었다. 미국이 아무리 넓다고 해도 FBI나 CIA
의 집요한 추적을 피할 수는 없었다. 거리면 그것으로 끝장이라고 보아야 했다. 아일린이 적
외선 탐지기 옆으로 가까이 왔다. 탐지기 옆에는 무장한 경비원이 둘이나 있었다. 아무 반응
이 없었다. 탐지기가 수상한 물체를 찾아내면 붉은 등이 켜지고 비상 사이렌이 울리게 되어
있었다. 그러면 정문이 자동적으로 닫히고 FBI가 출동하는 것이다. 그러나 아일린이 탐지기
를 완전히 통과할 때까지 탐지기는 고장이라도 난 듯이 조용했다. (성공이야!)제이콥스 박사
는 이마에 흐르는 땀을 손수건을 꺼내 닦았다. 그리고 승용차의 시동을 걸고 브라운연구소
의 정문을 통과했다.
시침과 분침이 정확하게 8시를 가리킨 순간 검은 색의 포르쉐 한 대가 필라델피아 흑인
거주지역 제3블록에 있는 붉은 벽돌 건물 앞에 멈춰 섰다. 제이콥스 박사는 포르쉐에서 1층
창의 커튼이 살짝 열렸다가 닫히는 것을 보았다. 아일린의 방이었다. 그는 차에서 내려 꽃을
들고 걸으면서 주위를 조심스럽게 살펴보았다. 미행자가 있는지 살피지 위해서였다. 그러나
필라델피아 흑인 거주지역은 여느 때와 다름없이 평온하고 조용했다. 그는 현관에서 차임벨
을 눌렀다. 3층 어느 창에서인지 왁자한 웃음소리와 록큰롤 음악이 미처럼 쏟아지고 있었다.
그는 멍청하게 3층을 올려다보았다. 흑인들이 록큰롤 파티라도 열고 있는 것일까. "하이."
아일린이 기다렸다는 듯이 현관문을 열었다. 그는 노란 장미를 아일린에게 건네주었다. "고
마워요." 아일린이 그의 볼에 가볍게 키스했다. 아일린에게서 짙은 향수 냄새가 났다. 그는
아일린을 다라 안으로 들어갔다. 아일린은 속살이 은은히 내비치는 검은 색 이브닝 드레스
를 입고 있었다. 가슴이 U자로 깊숙이 파여 있었다. "오늘은 우리 둘뿐이에요." 습관적으로
주위를 살피는 그에게 아일린이 교태를 부리며 말했다. "친척들은 없어?" "우리 친척들은
뉴욕에 있어요." "뉴욕?" "브루클린이요. 난 그곳을 벗어나려고 무척 노력했어요." 브루클린
은 뉴욕의 빈민가이자 사창가였다. 그는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녀가 창녀라는 것을 벌써부터
알고 있었다. "앉으세요." 그는 양복 상의를 벗고 식탁에 앉았다. 식탁엔 이미 포도주까지
준비되어 있었다. 아일린이 포도주의 병뚜껑을 따고 그의 잔과 자신의 잔에 포도주를 따랐
다. 3층 어느 방에선가 음악소리가 더욱 커지고 있었다. "시끄럽죠?" 아일린이 포도주 잔을
들면서 말했다. 그는 포도주 잔을 들어 아일린의 잔에 부딪쳐 건배했다. "우리 흑인들은 늘
시끌시끌해요." "나 같은 백인을 만나는 것을 이웃이 뭐라고 하지 않아?" "누구에나 즐길 자
유는 있어요. 여자들은 굉장히 호기심을 가지고 있어요. 백인 남자와의 잠자리는 어떤 것일
까 하고 말예요. 나에게 노골적으로 물어보는 여자도 있어요." "그러면 뭐라고 대답을 하
지?" "생각보다 좋다고 그랬죠." 아일린은 입을 크게 벌리고 소리를 내어 웃었다. "아일린은
어때?" "좋아요." "어떻게?" "하얀 장난감을 가지고 노는 것 같아요." 아일린이 만든 스테이
크는 연하고 부드러웠다. 제이콥스 박사는 CIA가 그를 체포하러 오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
각이 들어 현관쪽을 자주 힐끔거렸다. 영화에서 본 체포 장면. 암살장면들이 몇 번이고 계속
해서 머리에 떠올라 불안했다. 아일린은 유쾌했다. 그녀는 계속 먹고 마시면서 떠들어댔다.
제이콥스 박사는 스테이크를 썰면서 암살자가 쳐들어오는 장면을 머리 속에 그려보았다. 현
관문 밖 흑인들이 여기저기 멋대로 차를 주차시켜 놓은 광장에 검은 세단 한 대가 소리도
없이 미끄러져 들어온다. 암살자는 쇼트건(개머리판이 없는 자동소총)을 들고 있다. 얼굴은
흑인인지 백인인지 알 수 없다. 흑인일 수도 있고 백일일 수도 있다. 다만 암살자는 트렌치
코트자락을 펄럭이며 아파트 복도로 들어와 현관 벨을 누르고, 아일리린이 현관문을 열면
그녀의 커다란 입에 총구를 쑤셔 놓는다. 이내 총구가 불을 뿜는다. 아일린의 머리가 피투성
이가 되어 현관 바닥에 뒹군다. 암살자는 구둣발로 아일린의 시체를 밟고 그에게 가까이 온
다. 그는 암살자의 총구를 바라본다. 암살자의 총구가 그의 이마를 겨누고 있다. 그는 눈을
부릅뜬 채 총구를 바라보고 있다. 총구가 불을 뿜는다. 이마에 땅 하는 충격과 함께 피가 사
방으로 튄다. 총구는 계속 불을 뿜고 있다. 그의 가슴, 복부가 갈가리 찢어진다. 국가반역자
의 최후이다. 그는 이마의 땀을 주먹으로 훔쳤다. 암살자가 오면 그렇게 죽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 (아니야, 암살자를 죽이고서라도 탈출해야 돼.) 그는 상의 안주머니에 있는 권총을
생각했다. "더워요?" 아일린이 물었다. 그녀는 체격만큼 왕성한 식욕을 보이고 있었다. 조금
있으면 식욕처럼 성욕도 왕성해질 것이다. "날씨가 조금..." 그는 불안한 표정을 감추기 위해
계면쩍게 웃었다. 아일린이 고개를 갸우뚱하고 식탁에서 일어나 창을 닫고 에어컨을 틀었다.
이번엔 에어컨 모터가 돌아가는 소리가 그의 신경을 자극했다. "샤워를 하세요." 저녁식사가
끝나자 땀을 흘리는 그에게 아일린이 권했다. "설거지를 도와줄게." "우리 흑인들은 남자에
게 설거지를 하게 하지 않아요." "아일린은?" "전 설거지를 끝낸 뒤에 할게요." "그럼 내가
먼저 하지." 그는 거실에다 옷을 벗어놓고 욕실로 들어가 찬물로 샤워를 했다. 샤워를 끝내
고 거실로 나오자 아일린은 설거지를 끝내고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그는 아일린이 샤워를
하는 동안 침실로 들어가 내복 상자를 찾기 시작했다. 내의상자는 아직 뜯지도 않은 채 옷
장에 들어 있었다.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아일린이 잠들면 차에 있는 내의 상자와 바꿔치기
를 해야 돼.) 그러기 위해서는 아일린과 격렬한 정사를 해야 했다. 그는 침대에 누워 담배를
피웠다. 아일린이 목욕 타월을 두르고 침실로 들어온 것은 10분쯤 지나서의 일이었다. 그녀
의 몸은 완벽하게 검은 색이었다. 그러나 피부는 매끄럽게 윤기가 흐르고 탄력이 넘쳤다. 아
일린이 침대로 올라왔다. 찬물로 샤워를 한 탓에 몸이 차가웠다. 그는 새까만 아일린의 육체
를 다 팔로 안았다. 여전히 촉감은 좋았다. 3층에서는 음악소리와 웃음소리가 계속해서 들리
고 있었다. 그는 아일린의 커다란 유방에 손바닥을 얹어 둥글게 원을 그리며 애무하게 시작
했다. 아일린이 가늘게 몸을 떨었다. 백인 남자의 손이 가슴을 애무하다가 복부를 따라 내
려오고 있었다. 아일린은 풀잎처럼 몸을 떨며 반응했다. 그녀의 몸이 서서히 더워지고 있었
다. 몸은 육중했지만 남자에 반응하는 그녀의 감각은 언제가 한 템포 빨랐다. 그녀가 움직이
기 시작했다. 검고 윤기 흐르는 지느러미를 흔들며 유영하는 물고기처럼 그녀는 몸을 뒤틀
어 상체를 일으켰다. 그는 천장을 향해 반듯하게 누웠다. 아일린의 검은 유방이 그곳에 돌출
되어 있는 유두가 그의 입술을 간질렀다. 그는 입을 벌려 아일린의 유두를 받아 입 속에 넣
고 저작하기 시작했다. 아일린의 입에서 신음소리가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그는 핵연료 재처
리공장의 설계도를 생각했다. 그것은 지금 마이크로 필름에 담겨 아일린의 브래지어 속에
감춰져 있었다. 아일린에게 접근을 한 것은 오로지 마이크로 필름을 안전하게 운반하기 위
해서였다. 그러나 아일린의 육체는 훌륭했다. 검고 매끈매끈한 피부, 흑인 특유의 고무질 같
은 탄력은 백인들에게서는 결코 경험 할 수 없는 것이었다. 그는 물결 위에 나뭇잎처럼 가
볍게 흔들렸다. 아일린은 그를 자신의 몸에 가두고 리드미컬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마침내
아일린의 입에서 단내가 뿜어지고 신음소리가 잦아지기 시작했다. 아일린은 격력했다. 그는
절정을 행해 달리기 시작했다. 검은 피부의 여자와 관계를 했다는 사실이 마침내 국가의 반
역자가 되었다는 슬픔 같은 것이 그를 흥분시키고 있었다. 그리고 미CIA나 DIA로부터 추적
을 받을지도 모른다는 불길한 예감... 그때 그 예감을 적중시키기나 하려는 듯이 갑자기 현
관벨이 요란하게 울렸다. "누가 왔어." 그는 벨소리에 신경을 곤두세우며 아일린의 몸에서
떨어져 일어나려고 했다. 그러나 아일린이 재빨리 그의 허리에 두 다리를 감아서 꼼짝 못하
게 만들었다. "지나가는 아이들일 거예요." 아일린은 격력하게 몸을 흔들며 그를 놓치지 않
으려고 했다. "아니야, 계속 울리고 있어." "신경 쓰지 말아요." "안돼, 누군지 한번 살펴봐."
"아이참!" 아일린이 짜증을 부렸다. 그는 아일린에게서 떨어져 일어나 재빨리 팬티와 바지를
주어 입었다. 아일린은 화를 내며 침대에서 일어나 나이트 가운을 알몸에 걸치고 거실로 나
갔다. 아일린이 무엇이라고 떠드는것 같더니 비명소리가 들렸다. 그가 황급히 침실문을 열고
뛰어 나가자 아일린이 거실 바닥에서 나뒹굴고 있었다. 주먹으로 얻어맞았는지 입이 피투성
이였다. (아!) 제이콥스 박사는 절망감을 느꼈다. 침입자는 뜻밖에 콧수염 압둘라였다. 압둘
라가 돈을 주지 않기 위해 그를 살해하러 온 것이다. 압둘라의 손에는 소음기가 부착된 권
총이 들려있었다. "제이콥스 박사. 설계도는 무사히 꺼내 왔겠지?" 제이콥스 박사는 고개를
흔들었다. 비열한 압둘라에게 설계도를 넘겨줄 수는 없었다. "그래? 나에게 거짓말을 할 참
인가?" 압둘라가 아일린에게 권총을 겨누었다. 아일린은 영문을 몰라 압둘라를 멍청한 표정
으로 쳐다보고 있었다. 그녀는 자신의 가슴을 겨누고 있는 총구가 실감이 가지 않는 표정이
었다. 그때 슉하는 소리가 들렸다. 동시에 아일린의 왼쪽 유방에 구멍이 뻥 뚫리며 피가 왈
칵 솟구쳤다. 아일린이 상체를 반쯤 일으킬 듯 하다가 쿵 하고 쓰러졌다. 또 한 방의 탄환이
그녀의 이마를 뚫어버린 것이다. "이런 검둥이가 죽는 것은 너에겐 아무 것도 아닐 테지. 너
에게는 단순히 섹스 파트너였을 테니까...그러나 제이콥스, 네가 죽는다면 다르겠지?" 압둘
라의 권총이 제이콥스 박사를 겨누었다. 제이콥스 박사는 다리가 후들후들 떨렸다. 그는 절
망적인 눈초리로 압둘라를 응시했다. "마이크로 필름은 어디 있나?" "모른다." "네가 말하지
않으면 나는 너를 쏘고 그걸 찾을 꺼야. 조금 번거롭기는 하겠지만...흐흐흐." 압둘라가 음흉
하게 웃었다. 그는 등줄기로 식은땀이 흐르는 것을 느꼈다. 그것은 사실일 것이다. 압둘라가
그를 사살한 뒤에 아일린의 방을 수색하면 마이크로 필름은 손쉽게 찾을 수 있을 것이다.
그때 쨍그랑 하고 창문이 깨지는 소리가 들렸다. 압둘라가 권총을 떨어뜨리면 벽으로 튕겨
졌다가 그대로 주저앉았다. 벽이 핏자국으로 흥건했다. 총소리가 전혀 없었던 것을 보면 창
밖에서 압둘라를 쏜 저격자도 소음총을 사용한 것이 분명했다. 제이콥스 박사는 그때서야
재빨리 엎드려서 주방으로 기어갔다. 그는 눈이 뒤집힐 지경이었다. 누군가 창문을 열고 거
실고 뛰어 들어오는 소리가 들렸다. 그는 양복 상의에서 권총을 꺼내 격발장치를 풀었다. 침
입자를 죽이지 않으면 죽는다. 그는 권총을 쥔 손에 힘을 주고 거실의 동정에 귀를 기울였
다. 거실은 조용했다. 창 밖 어디에선가 경찰세단의 사이렌 소리가 희미하게 들렸다. 그때
침입자가 주방문을 걷어차고 뛰어 들어왔다. 동시에 슉하는 소리가 귓전을 스쳤다. 다음엔
아랫배가 화끈했다. 그는 권총의 방아쇠를 당겼다. 연발식이었다. 총소리가 요란하게 울리면
서 침입자가 튕겨져 나갔다. 박사는 그때서야 비로소 자신의 아랫배에서 뜨거운 피가 흘러
나오고 있는 것을 깨달았다. 그는 눈앞이 캄캄해지는 것을 느끼며 앞으로 꼬꾸라졌다. 박천
수 무관과 매기 한은 차에 앉아서 아일린 젤스키의 아파트를 감시하다가 요란하게 유리창이
깨지는 소리를 들었다. 집안에서 쿵쾅거리는 소리가 잇달아 들려왔다. 무엇인가 일이 크게
잘못된 모양이었다. 박천수 무관은 차에서 내려 아일린 젤스키의 아파트 쪽을 쳐다 보았다.
아파트 주위가 갑자기 조용해져 있었다. 그러나 곧이어 아파트의 창들에 불이 켜지며 소란
스러워지기 시작했다. "어떻게 된 거지." 그는 옆에 와 서는 매기 한을 쳐다보며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그는 샘 오스틴을 미행하여 여기까지 왔던 것이다. 그러나 뜻밖에 아랍인 압
둘라가 나타나 아일린 젤스키의 아파트로 들어가고, 창 밑에 숨어서 아파트 안을 감시하던
샘 오스틴이 유리창을 깨고 창으로 뛰어 들어갔던 것이다. 게다가 경찰세단의 사이렌 소리
가 가까워지고 있었다. 총성이 울리기를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이 경찰이 출동을 하고 있는
것이다. "총격전이 벌어진 모양입니다." "이상한 일이야. 무엇인가 잘못된 것 같군." "우선
차에 타는 게 좋겠어요." "그러지." 박천수 무관은 매기 한을 따라 차에 올라탔다. 벌써 아
일린 젤스키 아파트 앞에 경찰세단이 들이닥치고 있었다. "샘 오스틴이 당한 게 아닐까요?"
"글쎄, 명색이 CIA요원인데 당했을까?" "경찰이 어떻게 이렇게 빨리 오죠?" "누군가 신고를
했겠지." "젤스키 양이 신고를 했을까요?" "모르지." 박천수 무관은 고개를 흔들었다. 불과
10여 분 안에 일어난 일들이 그는 도무지 믿어지지 않았다. 그것은 첩보영화를 보는 것처럼
드라마틱할 뿐 아니라 순식간에 전개된 일이었다. " 아일린 젤스키 아파트 앞에 점점 많은
구경꾼들이 몰려들고 있었다. "우리도 가까이 가보는 게 어때요? 구경꾼처럼 말입니다." "그
래, 어떻게 된 일인지 알아야 해." 그들은 아일린 젤스키의 아파트 앞으로 느릿느릿 걸어갔
다. 경찰세단이 계속 들이닥치고 있어 아파트 앞은 몹시 혼란스러웠다. 그들은 웅성거리는
구경꾼들 틈에 끼어 아파트를 살피기 시작했다. 아파트 안으로 들어갈 수는 없었다. 그러나
어떻게 된 까닭인지는 알아야 했다. "순찰 159호 피터슨 경사다." 그때 아일린 젤스키의 아
파트에서 정복 경찰관이 뛰어 나와 승용차에 설치되어 있는 무전기로 본서에 다급하게 보고
를 하고 있는 것이 보였다. 박천수 무관은 일부러 정복 경관의 뒤에 바짝 접근해서 귀를 기
울였다. "여기는 순찰차 159호 피터슨 경사다. 본부 나와라! 흑인 거주지역 제3블록 아일린
젤스키의 아파트에서 살인 사건이 발생했다. 현재까지 사망자 세명, 부상 한 명이다. 사망자
는 흑인 여자 아일린 젤스키, 아랍인으로 보이는 신원 미상의 사내 한 명, 50의 백인 사내
한 명 등 모두 셋이다. 세 사람 모두 총에 맞아 살해되었다. 부상자는 30대의 백인 남자로
소음총을 소지하고 있었다. 복부를 총탄이 관통해 위독한 상태다. 즉시 앰뷸런스를 보내주기
바란다. 본부! 반복한다. 여기는 159호 순찰차의 피터슨 경사다! 즉각 앰뷸런스를 보내고 현
장감식반을 출동시켜라!" 박천수 무관은 정복 경관이 본서에 보고하는 소리로 아일린 젤스
키와 제이콥스 박사, 그리고 이라크 국방정보국의 압둘라가 사망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부
상자는 샘 오스틴으로 생각되었다. "비상망이 쳐지기 전에 떠나야겠어." 그는 매기 한의 귀
에 낮게 소곤거렸다. 설계도와 시공사양서가 어떻게 되었는지는 알 수 없었으나 일단 돌아
가서 대책을 세우는 수밖에 없었다. 조금 있으면 흑인 거주지역엔 필라델피아 지방경찰과
FBI 수사관들이 벌떼처럼 몰려 올 것이다.
4
서울 청와대. 박정희 대통령은 우아한 마호가니 책상 앞에 상체를 바싹 내밀고 앉아 있었
다. 그는 담배갑 포장지를 찢고 마지막 남은 담배를 입에 물로 지프 라이터로 불을 붙였다.
집무실의 벽시계가 5시 30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그는 담배 연기를 폐부 깊숙이 빨아들였다
가 길게 내뱉은 다음 책상 위에 인터폰 버튼으로 손을 가져갔다. "각하, 경호실입니다." 그
는 둥글고 짤막한 손가락이 인터폰 버튼을 가볍게 누르자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이 경호실장
으 탁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끝나면 궁정동으로 가겠소." 그는 무뚝뚝하게 인터폰에 대고
말했다. "준비하겠습니다. 각하." "병기개발위원장도 부르시오." "예, 각하." 경호실장의 목소
리는 스타카토로 토막토막 끊어지고 있었다. 그는 인간미가 풍기지 않는 경호실장의 목소리
가 귀에 거슬렸다. 그러나 지금은 그 목소리를 탓하고 있을 처지가 아니었다. 그는 푸르게
흩어지는 담배 연기 사이로 창 밖을 물끄러미 응시했다. 오후 6시가 가까워지고 있었지만
길고 긴 여름날은 아직도 한낮이었다. 도심 어디쯤에서인지 이따금 차량의 경적음이 들려올
뿐 청와대는 물 속처럼 조용히 가라앉아 있었다. 그는 책상 위에 보고서를 다시 들여다보았
다. 가슴이 타는 것 같았다.
6월 22일 밤. 필라델피아 흑인 거주지역 제 3블록에 있는 아일린 젤스키의 아파트에서 M
캡슐을 반출할 것으로 보이는 '브라운연구소'의 제이콥스 박사, 아일린 젤스키양, 이라크 국
방정보국의 압둘라 소령이 총격전 끝에 3명 모두 사망하고 CIA요원인 샘 오스틴은 복부를
관통당해 필라델피아 빈센트 병원으로 옮겨져 응급수술을 받았으나 이튿날 아침 10시 병원
에서 사망했습니다. 필라델피아 지방방송과 미국 3대 네트윅은 아일린 젤스키의 아파트에서
일어날 살인사건이 '브라운연구소'의 비밀을 빼내려는 국제 첩보전이라고 보고 있습니다.
FBI와 CIA는 필라델피아 일원에 비상을 치고 국제 스파이들을 찾아내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습니다. 다행스러운 것은 CIA나 FBI가 M캡슐에 대해서 전혀 눈치채지 못하고 있으며 아
직 M캡슐을 발견하지 못한 것 같습니다. 현재 아일린 젤스키의 아파트는 FBI가 철통 같은
경비를 하고 있어서 우리 요원들이 잠입하여 M캡슐을 회수할 수는 없습니다. 각하, 중앙정
보부에도 알려지지 않은 유능한 정보원을 시급히 지원해 주시기 바랍니다. M캡슐은 우리가
확보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각하, 도청에 주의하십시오. 워싱턴의 한국대사관은 도청을 당
하고 있습니다. 중앙정보부도 믿을 수 없습니다. 주미대사 김현식의 보고서였다. 핵연료 재
처리공장의 설계도와 시공사양서를 마이크로 필름으로 찍어 브라운연구소에서 반출한 것을
1백만 달러라는 거액을 주고 사려고 했으나 중간에서 사고가 터진 것이다. 20만 달러도 날
라간 상태였다. 그는 다시 인터폰을 눌렀다. "각하, 비서실입니다." 이번엔 비서실장의 낮고
조용한 목소리가 인터폰을 통해 들려왔다. 4성 장군답지 않게 목소리가 낮고 조용한 사람이
었다. "들어오시오." 그는 담배연기를 길게 내뱉고 말했다. 청와대의 뜰은 인적 없이 조용했
다. 담쪽의 잘 가꾸어진 수목이나 푸른 잔디 위에도 희디흰 햇살만 난무할 뿐 인적은 그림
자도 찾아볼 수 없었다. "각하, 부르셨습니까?" 김실장이 집무실 도어를 열고 들어와 공손히
머리를 숙였다. 그는 잠자코 고개를 끄덕거렸다. 가까이 오라는 뜻이었다. 김실장은 조심스
럽게 대통령 앞으로 가까이 다가갔다. "서특보에게 유능한 첩보원을 한 사람 차출해서 나에
게 데려오라고 하시오." "첩보원이라면 아무래도 중정에서..." 중정이란 중앙정보부를 말하는
것이었다. "중정은 안돼." "그럼 첩보사령부가 어떨까요?" "첩보사령부도 안됩니다. 얼굴이
전혀 알려지지 않은 사람이라야 합니다. 영어에도 능통해야 하고... 서특보라면 그런 사람을
찾을 수 있을 거요." 서종원 대통령 안보 담담 특별 보자관은 국방부 정보국장을 역임해 중
정못지 않게 정보에 밝았다. 대통령이 서특보에게 그런 임무를 맡기는 것은 뭔가 긴밀한 일
을 추진하고 있는 것이라고 비서실장은 생각했다. "김실장." "예, 각하." "김실장, 내가 77년
부터 제 2차 핵무기 개발을 시도하고 있다는 것을 CIA에서 알고 있겠지?" "예, 어렴풋이..."
"그렇군, 내가 극비리에 추진하고 있는데도 CIA가 알고 있었어." 대통령이 한탄 비슷하게
중얼거렸다. 미국은 이제 노골적으로 그의 핵무기 개발을 비난하며 그에게 대통령직에서 물
러나라고 요구하고 있었다. "CIA조직은 광범위합니다." "그 말은 우리 정부에도 CIA요원이
숨어 있다는 뜻이오?" "예, 각하." "하긴 어디 정부뿐이겠소? 그들은 청와대에서 프락치를
심어 놓은 것 같소." "청와대까지요?" "그리고 도청까지 하는 것 같소." 대통령이 침통한 표
정으로 내뱉었다. 도청이라면 일반적으로 전화도청을 의미한다. 그러나 현대 첩보전에서의
도청은 인공위성이나 전자도청기까지 동원하고 있었다. "그럼 중정을 시켜 조사는 하는 것
이 어떻습니까?" "중정엔 그런 전문가가 없소." 인공위성을 통해 도청을 하는 것은 중정에
서도 방지할 수가 없는 것이다. 한국의 과학기술은 아직도 걸음마 단계에 있었다. 김실장도
그 점을 실감했다. "그럼 첩자라도 색출해내야 되지 않습니까?" "첩자를 어떻게 색출한단
말이오?" "그 정도는 중정에서 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됩니다." "그렇지 않소." 대통령이 쓸
쓸하게 웃으며 고개를 흔들었다. 대통령은 중정까지도 믿지 않는 것 같았다. 일반적인 정치
사찰이나 안보에 대한 정보 활동은 중정의 고유 임무였다. 그리고 그 부분에 있어서는 중정
도 최근까지 괄목할만한 설과를 얻고 있었다. 그러나 미국이나 CIA에 대한 것이라면 중정
도 그다지 손을 쓰지 못하고 있었다. "그럼 국방부 정보국은 어떻습니까?" "국방부 정보
국?" "국방부 정보국에는 모사드에서 교육받은 장교들도 있습니다." "유능한 사람이 있소?"
"예." "그럼 불러오시오." "예." 김실장은 공손히 허리를 숙이고 집무실을 나갔다. 대통령은
집무실 담당 여직원에게 담배를 가져오라고 지시한 뒤 한 손으로 이마를 짚었다. 머리가 지
끈거렸다. 필라델피아 흑인 거주지역에 있는 M캡슐을 감쪽같이 가져와야 하는데 그것이 용
이하지가 않았다. 여직원이 담배를 가지고 왔다. 그는 담배의 포장을 뜯고 한 개피를 꺼내
입에 물었다. 카터 행정부의 노골적인 내정간섭과 국회의원 총선거에서 여장보다 득표율이
1.1% 앞선 야당 신민당의 정치 공세가 6월부터 계속되고 있었다. 5월 30일 전당대회에서 선
명야당을 내세워 중도통합론의 이철승 의원을 누르고 총재에 당선된 김영삼이 파상적인 정
치공세를 펴고 있었다. 여기에 종교계까지 가세하고 있는 것이다. 카톨릭 안동교구에서 발생
한 오원춘 사건은 카톨릭측으로부터 맹렬한 비난을 받고 있었다. 인천의 동일방직에서는 여
성노동자들이 쟁의를 진압하는 경찰에게 오물을 투척하기까지 했다. 도시산업선교회와 카톨
릭 노동청년회의 움직임도 심상치 않았다. 미국은 그의 임기 후반이 되면 쿠데타가 일어날
지도 모른다는 경고를 계속해 오고 있었다. 그것은 군부의 젊은 장교들에게 마치 쿠데타를
일으키라고 부추기는 메시지 같기도 했다. 그는 낮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가 야당과 반체제
인사에 대한 탄압을 계속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그는 임기 중에 핵무기를 개발
을 완료하고 싶었다. 그러나 미국의 강력한 반대에 부딪쳐 있는데다 국내 정세까지 혼란했
다. 긴급조치9호를 발동했는데도 지식인, 언론인, 문인, 종교인, 대학생 등 그의 반대자들은
지칠 줄 모르고 항쟁을 계속하고 있었다. (내가 정치 감각이 무디어진 것인가?) 반대자들에
대해서는 적당한 매도 주고 당근도 주어야 했다. 그런데 그것이 안되고 있었다. 정보부채 탓
이었다. 미국이나 서구유럽에서는 끈질기게 구속자들을 석방하고 긴급조치9호를 해제하라고
촉구하고 있었다. (참신한 인사들을 등용해야 할 텐데.) 정보가 부족하다는 것은 그를 둘러
싸고 있는 청와대 직원들이나 내각에 인물이 없다는 뜻이었다. 전면적인 개각이 필요한 시
기로 생각되었다. 내각뿐 아니라 당쪽이도 개편이 필요했다. 당이나 유정희 쪽에도 국민들에
게 신선함을 줄만한 인물이 부족했다. (어쨌든 마이크로 필름을 먼저 가져와야 돼.) 핵무기
를 개발하는데는 몇 가지 단계가 있었다. 제일 먼저 원자력발전소의 건설이 필수적이고 원
자력발전소의 핵연료로 쓰이는 우라늄 저농축공장이 필요했다. 다음 단계는 원자력발전소에
서 사용한 핵연료 찌꺼기를 플루토늄 239로 농축하는 공장이 필요한 것이다. 플루토늄 239
에 뇌관만 설치하면 그것이 바로 가공할 핵무기 원자탄이었다. 그러자니 핵무기 제조공정에
있어서 가장 어렵고 막대한 시설비가 드는 것이 핵연료 재처리 공장이었다. 다행히 미 웨스
팅 하우스사의 브라운연구소에서 근무하는 제이콥스 박사가 그 설계도와 시공사양서를 마이
크로 필름에 담아 반출하려는 음모가 CIA요원 샘 오스틴에게 적발되었고. 샘 오스틴은 그
것을 탈취하여 한국에 팔려다가 의문의 총격전에 휘말려 살해되었던 것이다. (유능한 첩보
원이 필요해...) 그는 입에 문 담배에 지프 라이터로 불을 붙여 담배 연기를 길게 내뿜었다.
정보에 대한 것이 국가 경영에도 이토록 지대한 영향을 미치리라는 사살을 지금에야 알게
된 것이 그는 후회스러웠다. 이럴 줄 알았으면 좀더 일찍 이스라엘 모사드(비밀첩보부)같은
첩보부를 창설했을 것이다. "각하, 정보부장의 긴급 보고입니다." 그때 인터폰에서 경호실장
의 탁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전화야?" "예." "이쪽으로 돌리시오!" "예, 각하." 그는 책상 위
의 수화기를 들었다. 그러자 우직한 정보부장의 목소리가 수화기를 타고 들려왔다. "각하,
정보부장입니다." "무슨 일이오?" "온산연구소에 침입한 CIA요원들을 미국대사관에서 석방
해 달라고 합니다." 온산연구소는 온산에 있는 '농업개발연구소'를 말하는 것으로 핵무기 연
구가 그곳에서 진행되고 있었다. 그런데 사흘 전 경비병들이 관광객으로 위장한 한국인 2명
을 체포했는데 조사 결과 그들은 CIA 요원들이었다. 미국 영주권을 갖고 있는 교포들이었
다. "누구야?" "도널드 램버트라고 CIA한국 책임자입니다." "그놈들은 우리 영역을 침입했
어. 단단히 조사를 해서 재판에 회부하시오!" 미국의 요구가 있어도 해서 석방한다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짓이었다. 놈들은 한국의 국가 기밀을 탐지하려고 한 1급 스파이들인 것이다.
"각하, 그러나..." "뭐요?" "그들은 석방하지 않으면 미국에 있는 우리 요원들이 모조리 소탕
됩니다. 놈들은 대단한 작자들이 못되니..."대통령은 얼굴을 잔뜩 찌푸렸다. 이 친구가 미국
에 또 관대하게 나오는군. 하고 그는 속으로 생각했다. 그러나 정보부장의 말대로 놈들을 석
방하지 않으면 미국에 파견되어 있는 우리 요원들이 모조리 소탕될 가능성은 있었다. 전에
도 그런 일이 한 번 있었다. 미국의 요구를 들어주지 않자 그들은 보복이라도 하듯이 미국
에 있는 중앙중보부 요원들은 체포하여 한국으로 추방했던 것이다. 또 그렇게 당할 수는 없
었다. 게다가 필라델피아에서 마이크로 필름을 찾아와야 하는 중요한 시기인 것이다. "석방
하시오." 그는 무뚝뚝하게 내뱉었다. "알겠습니다. 각하." 찰칵 하고 전화가 끊겼다. 대통령
은 수화기를 내려놓다 말고 아차 하는 표정을 지었다. 그는 다시 인터폰을 눌렀다. "정보부
장에게 연결하시오."그는 비상전화가 연결되는 동안 안락의자에 걸터앉았다. 이내 정보부장
이 다시 전화에 나왔다. "놈들은 석방한 뒤에 감시하시오." "예?" 정보부장의 목소리에 의혹
이 잔뜩 실렸다. "CIA한국 책임자가 도널드 램버트라고 그랬지?" "예. 도널드 램버트입니
다." "도널드 램버트도 철저하게 감시하시오. 미행. 도청,,,수단 방법을 가리지 마시오!" "예."
"도널드 램버트가 접촉하는 한국인들도 체크해서 보고하시오. 특히 도널드 램버트가 접촉하
는 정치인과 군부의 장교들은 뒷조사를 해서 나에게 보고하시오!" "예, 각하!" "임자! 알아들
었소?" "예, 각하!" 정보부장이 석연치 않은 기색으로 대꾸를 했다. 그러나 그는 아무 설명
도 하지 않고 전화를 끊었다. 최근에 미국대사관에 글라이스틴 대사와 CIA 책임자인 도널
드 램버트가 한국 군부의 고위 장성들과 잦은 접촉을 갖고 있다는 정보가 들어오고 있었다.
거기엔 그가 알지 못하는 어떤 음모가 도사리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그가 피우던 담배를
재떨이에 비벼 끄고 창가로 걸어갔다. 해가 서서히 기울고 있었다.
6월 24일 주한 이스라엘 대사 아이작 비숍은 자신의 전용차로 공항으로 되돌아가며 깊은
생각에 감겨 있었다. 날이 어두컴컴했다. 빗발이 추적대고 있지는 않았으나 잿빛 구름 덩어
리들이 빌딩들 위로 나지막하게 내려앉고 있었다. 한국인들이 장마라고 부르는 우기가 닥쳐
온 것이다. 서울을 병풍처럼 둘러싸고 있는 아름다운 산들과 거리의 가로수들도 물기에 젖
은 비바람 때문에 검푸르게 살랑대고 있었다. 한차례 장대비가 쏟아질 것 같은 기세였다. 그
러나 그는 지금 서울의 우기를 걱정하고 있을 때가 아니라는 생각을 했다. 그는 조금 전 비
원에서 한국의 박정희 대통령을 만나고 일본으로 돌아가는 길이었다. 비원은 박정희 대통령
이 좋아하는 고궁이었다. 그는 오전까지 도쿄의 주일 이스라엘 대사관에서 정상적인 대사업
무를 보고 있었다. 그러나 주일 대사관으로부터 비밀리에 연락을 받고 KAL편으로 부랴부랴
한국으로 날아와 그들이 포스트 박이라고 부르는 박정희 대통령을 만나고 돌아가는 길인 것
이다. (이건 도박이야.) 한국의 포스트 박은 1979년이 되자 국내외적으로 곤경에 처해 있었
다. 1972년 10월. 비상계엄을 선포하여 총통제. 또는 영구집권 음모라는 유신헌법을 만든 뒤
부터 국민들의 거센 저항을 받지 시작하더니 급기야 미국으로부터도 비난을 받고 있었다.
게다가 야당까지 전에 없이 강해져 있었다. 긴급조치라는 서슬이 퍼런 칼을 휘두르는데도 I
당이 강력하게 정권타도를 외치는 그 이면에는 어딘지 모르게 미국이 한국의 야당을 부추기
고 있는 인상이 강했다. 어쩌면 미국은 이미 포스트 박의 제거 공작을 개시하고 있는지도
알 수 없었다. (그러나 우리가 손해볼 일은 없지 않은가?) 미지상군이 철수하면 한국은 자
주국방이 필요하듯이 이스라엘도 아랍민족 한가운데서 살아 남으려면 미국의 보호를 받으며
아랍민족과 전쟁을 할 수는 없었다. 포스트 박이 이스라엘 비밀첩보부의 협조를 얻으려고
하는 것은 필라델피아데 감춰져 있는 M캡슐에 들어있는 무기 관련 정보를 이스라엘과 공유
하는 것이었다. 이스라엘으로서는 결코 손해 되지 않는 거래였다. (어쨌든 이 일은 본 국에
알려야 해.) 그는 차창에 묻어나기 시작하는 빗방울을 내다보면서 굳게 결심을 했다. 3시간
후, 주일 이스라엘 대사관에 도착한 아이작 비숍 대사는 지하 통신실로 내려가 텔아비브의
이스라엘 비밀 첩보부장 아후메스 스마니에를 수상 관저로 호출했다. 그는 이스라엘 내각수
반으로서 중대한 결정을 내려야 할 처지에 있었다. 주한 이스라엘 대사 아이작 비숍-그는
주일 이스라엘 대사를 겸임하고 있었다.-이 지급으로 보내온 암호 전문은 이스라엘 자주국
방 문제를 일거에 해결할 수 있는 엄청난 것이었다. 물론 M캡슐에 들어있는 마이크로 필름
만으로 핵무기를 단숨에 제조할 수는 없을 것이지만, 핵무기를 개발하는 시간과 경비를 상
당 기간 단축할 수 있는 것이었다. "어떻게 생각하나. 스마니에?" 그는 졸리운 표정으로 앉
아 있는 스마니에에게 대답을 요구했다. 스마니에가 자신의 말을 제대로 듣고 있었는지 의
심스러웠으나 스아니에가 전세계 첩보원들 중에 가장 우수한 첩보원의 한 사람이라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는 일이었다. "한국이 왜 우리에게 공동 작전을 요구하는지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비숍 대사의 얘기로는 KCIA의 해외공작이 서투르기 때문이라는거야. 해외공작
이 완벽하지 않으면 미국이 포스트 박을 제거할지도 모른다는 거지. 자네 미국이 53년에 이
란에서 저지른 사건을 기억하나? 포스트 박은 그걸 우려하고 있는 거야." 53년에 미국이 이
란에서 저지른 사건이란 미국 CIA가 이란의 모사데크 정권을 전복시키려고 팔레비 왕조를
복귀시킨 사태를 말하는 것이다. 1951년, 이란의 민족주의자인 모사데크는 영국과 미국의 합
작회사인 '앵글로 이란석유회사'가 이란의 석유자원을 마음대로 주무르는 것에 불만을 품고,
팔레비가 왕비를 데리고 로마로 관광여행을 떠난 틈을 타 정권을 접수하고 석유회사를 국유
화시켰었다. 이에 이란 주재 CIA책임자인 '커미르'가 공작을 꾸며 군중들과 일부 군인들을
조종해 모사데크 정권을 전복시키고 미국에 망명했던 팔레비 국왕을 복귀시켰던 것이다. 미
국의 이익을 위해서 CIA가 제3세계의 민족주의 정권을 전복시킨 대표적인 예였다. 데모나
군부 쿠데타를 조종해 미국이 제3세계의 정권을 전복시켜 온 것은 이미 공공연한 비밀이었
다. 그런 까닭으로 세게의 유수한 첩보학교와 미국의 CIA는 '시위촉진법'이라든가 '시위대
조종법'같은 것을 정규 과목에 넣어 훈련시키고 있었다. "우리 모사드가 해볼만한 일이 아닌
가? 이 일은 우리에게도 막대한 이익이 돌아오네." "각하의 지시라면 하겠습니다." "아니 우
리 이스라엘의 이익을 생각해야 하네. M캡슐이 우리 손에 들어오면 우리의 국방이 확고해
지는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야. 이미 우리 이스라엘 핵무기 개발위원회를 설립해서 독자적으
로 연구를 하고 있니 않나? M캡슐이 우리 손에 들어온다면 그 AHRVYRKI 상당기간 앞당
겨지네." "알겠습니다. 각하!" "포스트 박이 축출되기 전에 해야 하네." "명심하겠습니다." 스
마니에는 소파에서 벌떡 일어나 부동자세를 취했다. "돌아가도 좋아." 그는 스마이에를 향해
손을 내저었다. 이제 이 사살을 주일대사 겸 주한 이스라엘 대사인 아이작 비숍에게 통보해
야 했다. 스마니에는 믿을만한 인물이었다. 그는 이스라엘 비밀첩보부 모사드를 창설하고
1950년부터 1960까지 모사드를 이끌며 시계 최고의 첩보기관으로 끌어올린 이세르 하렐의
직속부하였다. 이세르 하렐은 은퇴한 지 오래되었지만 나치 전범 아이히만 소령을 20년 동
안이나 추적하여 체포하고, 아르헨티나의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이스라엘 수도 텔아비브까
지 호송하여 전세계를 경악시킨 전설적인 인물이었다. 스마니에도 이세르 하렐 못지 않은
화려한 경력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69년 12월 24일 특공대를 이끌고 프랑스 세브르 항구에
정박 중인 포함 5척을 탈취하여 3천 마일이나 되는 지중해를 돌아서 이스라엘의 하이파 항
구까지 끌고 온 일도 있었고, 이스라엘에서 홍해를 건너 이집트의 미사일 기지에 잠입, 소련
제 샘 미사일을 헬리콥터로 유유히 실어 D는 등 그의 첩보 능력은 상상을 불허할 정도였다.
다만 그가 은회할 나이인 57세를 지났다는 점이었다.
5
서울 동대문구 용두동. 시립 동대문도서관을 돌아 어둠과 빗줄기를 뚫고 지프차 한 대가
전통 한옥 앞에 멈춰 섰다. 이무영 소령은 지프가 골목 끝에 멈춰서 서자 재빨리 지프에서
뛰어내렸다. 빗줄기가 세차게 쏟아지고 있었다. 장마였다. 아침까지도 불볕 더위가 기승을
부리더니 오후가 되자 다시 비구름이 몰려들고 마침내 빗줄기가 장대질을 해대기 시작한 것
이다. 세상이 온통 물걸레처럼 질천하게 젖어 있는 느낌이었다. 그는 지프의 운전병이 거수
경례를 하고 돌아가자 판자대문을 두드리기 시작했다. 서둘러야 했다. 에어 프랑으 805편이
11시 30분에 김포에서 이륙할 예정이었다. 불과 2시간밖에 여유가 없었다. "누구세요?" 빗소
리에 섞인 아내 경옥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야, 빨리 문 열어." 그는 다급하게 외쳤다. 장
대비가 마당의 함석챙을 두드리는 소리가 밖에까지 요란했다. 이내 대문의 빗장이 풀리고
아내가 얼굴을 내밀었다. 그는 어리둥정한 표정을 짓고 있는 아내의 얼굴을 힐끗 쳐다보고
가슴을 쏘아보았다. 아내의 블라우스 앞섶 단추가 모두 풀려 있었다. 그는 눈살을 지푸렸다.
브래지어도 하지 않은 아내의 허연 젖무덤이 열려진 옷깃 사이로 그대로 드러나 있었다. 젖
이 가득한 묵직한 가슴이었다. 그의 시선을 의식한 아내가 재빨리 블라우스 앞섶을 여몄다.
"명지 젖을 먹이고 있었어요." 명지는 태어난 지 두 달밖에 안된 그의 딸이었다. "나 여행
준비 좀 해줘." "여행이오?" "내의만 몇 벌 간단히 싸. 다른 건 아무것도 필요없어." "어디로
여행을 가는데요?" "11시 30분에 김포공항에서 비행기를 타야 돼." "네?" 아내가 눈을 동그
랗게 뜨고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그 표정이 껴안아 주고 싶도록 예뻤다. 아내는 스튜어디스
출신이었다. 얼굴이 예쁜데다 몸매도 늘씬했다. "중요한 임무를 맡았어." 그는 마루 끝에 걸
터앉아 워커 끈을 풀면서 아내가 놀라는 것도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무슨 일인데요?" "국
가기밀이야." 그러자 그의 아내가 쀼루퉁한 표정을 지었다. 국가기밀이라는 말에는 그의 아
내로서도 더 이상 알려고 할 수가 없었다. 그는 국방부 정보국에 근무하고 있었다. 그는 마
루로 올라섰다. 아이는 마루에서 잠이 들어 있었다. 그는 무릎을 구부리고 아이의 이마에 가
만히 입술을 얹었다. 아이의 몸에서 젖냄새가 풍겨왔다. "뭐해? 준비하지 않고..." "언제 돌
아와요?" "모르겠어."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고 언제 돌아오는지도 몰라요?" "오늘은 프랑스
로 갈 거야. 내일은 아마 미국으로 갈 거고...대통령 각하께서 직접 지시한 임무야." "대통령
께서요?" 그의 아내가 다시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그럼 당신이 대통령을 직접 만났어요?"
"응." "언제요?" "지금 청와대에서 대통령 각하와 저녁을 먹고 오는 길이야." "세상에!" 그는
안방으로 들어가 군복을 벗기 시작했다. 그의 아내가 긴가민가하는 표정으로 그를 빤히 쳐
다보았다. "왜 그래?" "무슨 일인지 좀 자세히 얘기해 줘요." "얘기할 수 없어. 국가기밀이라
는 것밖에는... 미국에 가서 어떤 물건을 인수해 오는 거야." "무슨 물건인데요." "모르겠어.
현지에 가야만 알 수 있어." "중요한 물건이에요?" "우리 나라의 안보에 관계되는 중요한 물
건이래." "위험한 일인가요?" 그는 아내의 얼굴을 멀뚱히 쳐다보았다. 비로소 그는 자신의
임무가 생명에 관계되는 것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떠올랐다. 퇴근 시간 직전에 청와대 안
보담당 특별보좌관실로부터 전화가 걸려오고, 국방부 정보국장조차 모르게 대통령을 만나느
라고 임무의 위험 여부는 신경조차 쓰지 못했던 것이다. "미국이니까 위험한 일은 아닐 거
야." 그는 아내를 안심시키기 위해 거짓말을 했다. 갑자기 이번 임무에서 살아 돌아오기 어
려울지도 모른다는 불길한 예감이 뒤통수를 엄습해 왔다. "미안해." 그는 아내에게 진심으로
말했다. 이제 아내와 작별을 해야 했다. 도대체 이게 무슨 영문인가. 대통령은 어쩌자고 일
개 정보장교에 불과한 자신에게 극비 임무를 맡긴 것일까. 그는 대통령의 의도를 알 수가
없었다. 분명한 것은 서둘러야 한다는 사실뿐이었다. "전화하실 거예요?" "안돼." 그는 강하
게 고개를 흔들었다. 극비임무를 수행하면서 사사로이 집에 전화할 수는 없었다. 그의 아내
가 울상을 지었다. 그는 아내를 가볍게 껴안았다. 아내가 그의 가슴에 얼굴을 묻으며 흑 하
고 울음을 터뜨렸다. "차가 올 꺼야." "언제요?" 그는 아내의 눈에서 흐르는 눈물을 손으로
닦아주었다. 아내의 몸에서도 젖 냄새가 희미하게 풍기고 있었다. "가방을 챙겨 줘." "싫어
요." "멀리 떠나는 사람한테 눈물을 보이는 게 아니야 ." "사랑해 줘요. 당신을 갖고 싶어
요." 그의 아내가 간절한 눈빛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그의 아내가 간절한 눈빛으로 그를 쳐
다보았다. "시간이 없어." 그는 물기에 젖어 있는 아내의 눈을 들여다 보면서 말했다. 이제
곧 차가 올 것이다. 그때까지 기껏해야 10여분. 10분 안에 사랑의 행위를 하기엔 너무 짧은
것이 아닐까. 그러나 아내가 간절하게 원하고 있었다. 그는 아내의 블라우스를 헤치고 입술
을 가져갔다. 아내의 가슴은 아기를 낳기 전에는 그 혼자의 것이었다. 그러나 이제는 딸과
나누어 가져야 했다. "아." 그의 입술이 아내의 유두를 조심스럽게 깨물자 아내가 그의 머리
를 감싸안았다. 그는 목구멍으로 달콤한 유액이 흘러 넘어가는 것을 느꼈다. 그때 골목 입구
에서 클랙슨 소리가 들려왔다. "차가 왔어." 그가 아내의 가슴에서 떨어지면서 말했다. 차가
예상보다 훨씬 빨리 도착한 것이다. "사랑해요." 아내가 그의 입술에 격렬하게 입술을 부벼
댔다. "미안해." 그는 아내에게서 떨어져 서둘러 군복을 벗고 양복으로 갈아입었다. 그의 아
내고 황급히 가방을 챙겼다. 준비가 모두 끝나자 이무영 소령은 정보국에 근무하는 정미경
중위의 집으로 전화를 걸었다. 그는 어리둥절해 하는 정미경 중위에게 극비임무를 수행하러
외국으로 떠난다는 것. 정미경 중위가 그와 청와대의 연락을 담담해야 한다는 것. 그의 연락
을 기다리기 위해 정보국에서 비상 대기할 것. 암호 사용에 대한 것을 10분이나 통화했다.
경옥으로서는 도무지 알 수 없는 내용의 통화였다. "가야겠소." 통화가 끝나자 이무영 소령
은 아내를 조용히 응시했다. "명지 백일 전에는 돌아오세요?" "글쎄." 이무영 소령이 말끝을
흐렸다. 그 자신도 알 수 없는 일이었다. "다녀오세요." "미안하오." 그는 아내를 으스러질
정도로 껴안은 뒤 가방을 들고 대문을 나섰다. 골목 입구에 검은 승용차 한 대가 빗속에 서
있었다. 그는 승용차까지 가방을 들고 뛰었다. 빗줄기가 여전히 세차게 쏟아지고 있었다. 그
는 승용차에 올라타자 재빨리 뒤를 돌아다보았다. 박쥐우산을 든 그의 아내가 대문 앞에 나
와 빗줄기 속에 서 있었다. (잘 있어!) 그는 아내를 향해 낮게 중얼거렸다. "출발할까요?" 운
전석에 앉아 있는 사내가 그에게 물었다. "갑시다." 그는 한숨처럼 말했다. 사내가 시동ㅇ르
걸고 차를 출발시켰다. 로열 프린스였다. "그 가방은 제게 맡겨 주십시오." 차가 신설동 로
터리에서 신호대기에 걸렸을 때 운전석에 앉아 있는 사내가 말했다. "여기엔 내의밖에 없습
니다." "소령님이 필요하신 내의는 제 가방 속에 있습니다." 사내가 007가방을 들어보이며
말했다. '모두 준비했습니다. 탑승권, 여권, 내의, 세면도구... 모두 프랑스제로 준비했습니다."
"난 외제를 좋아하지 않습니다." "소령님의 정체를 위장하기 위해서입니다. 소령님이 한국제
품만 사용한다면 누구나 다 소령님을 한국인이라고 생각할 겁니다. 소령님은 알제리계 프랑
스인으로 위장해야 합니다." "알제리?" "알제리를 모르십니까?" "아닙니다. 대충은 알고 있
습니다. 한때는 프랑스 식민지였고 알제리 독립운동으로 유명한 곳이지요." "다행이군요."
차가 다시 출발했다. 그는 프론트 글라스로 세차게 쏟아지는 빗줄기를 응시했다. 이 빗줄기
속에서 비행기가 뜰 수 있을지 의심스러웠다. "이번 임무가 무엇인지 알고 계십니까?" 그는
운전석의 사내를 우두커니 쳐다보았다. "실은 정보부장께서 몹시 궁금해하십니다. 대통령 각
학께서 무엇인가 추진하고 계시는데 우리 정보부는 모르고 있기 때문입니다." "저도 아직
모릅니다." "그래요?" 운전석의 사내가 믿어지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파리에서 누군
가를 만나야 한다는 것밖에는 모르고 있습니다. 그 사람이 임무를 설명해 줄 거라고 하더군
요." 그는 운전석의 사내에게 거짓말을 했다. 대통령이 정보부장에게까지 그의 임무를 말하
지 않은 이상 그의 입으로 발설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상당히 중대한 임무인 모양이군
요?" "글쎄요." "정말 어떤 임무인지 모르십니까?" "이 질문은 안들은 것으로 하겠습니다."
이무영 소령은 단호하게 잘라 말했다. "미안합니다. 실은 정보부장님께서 어떤 임무를 맡고
프랑스로 가는지 알아내라는 지시를 해서...제 본의는 아닙니다." "극비 임무라고만 하십시
오." "알겠습니다. 정말 미안합니다." 운전석의 사내는 몇 번이나 사과를 했다. 그는 중앙정
보부 해외 7국의 정태수라고 자신을 소개했다. 그들이 김포공항에 도착한 것은 11시 10분이
었다. 그는 중앙정보부 정태수 수사관에 의해 탑승 수속도 밟지 않고 에어프랑스 805편에
탑승했다. 그의 좌석 옆에는 외국인이 앉아 영자신문을 보고 있었다. 40대의 뚱뚱한 금발머
리 사내였다. 이무영 소령은 좌석을 확인하고 창가에 앉아서 안전벨트를 맸다. 이륙시간이
가까웠다. (임무를 마치고 금방 돌아올게.) 그는 아내가 옆에 있기라도 하듯이 눈을 감고 중
얼거렸다. 미국에서의 임무가 얼마나 위험한 일인지는 짐작도 할 수 없었다. 이내 비행기가
활주로를 미끄러져 어두운 밤하늘로 솟아올랐다. 눈을 뜨자 표시등에 빨간 불이 꺼져 있었
다. 이륙이 끝났다는 신호였다. 그는 담배를 피워도 좋다는 아나운스먼트가 흘러나오자 담배
를 꺼내 입에 물었다. 프랑스산 '입셍 로랑'이었다. 그가 즐겨 피우는 군인 담배 '화랑'은 공
항에서 꺼내놓았던 것이다. 그는 담배에 불을 붙여 연기를 길게 내뿜었다. 흡연석이었다. 기
내에 매달린 스피커에서 삐 하는 신호음이 들리더니 기장의 불어 아나운스먼트가 흘러나오
기 시작했다. 에어프랑스를 이용해 주시는 탑승객 여러분에게 행운과 축복을 기원한다는 내
용과 11시 30분 김포공항을 이륙한 에어프랑스 805편은 현재 고도 5천 피트로 한국 영공을
날고 있다는 내용이었다. 그는 담배를 피우며 기내를 천천히 둘러보았다. 기내는 호화스러웠
다. 직물 시트의 부드러운 탄력과 붉은 카펫, 오렌지 빛의 실내등, 검은 색 스커스의 주황색
상의로 정장을 한 미끈한 몸매의 스튜어디스들... "필요한 것 있으세요?" 그때 스튜어디스
한 명이 옆자리의 사내에게 다가와 허리를 숙였다. 그러자 희고 뽀얀 가슴이 앞으로 쏟아질
듯이 기울어졌다. "코냑 한 잔." 옆자리의 사내가 불어로 대답했다. "네." 스튜어디스가 활작
웃으며 구부렸던 몸을 폈다. 그러자 쏟아질것 같던 두 개의 커다란 가슴이 셔츠 속으로 다
시 들어가버렸다. "괜찮은 가슴이지요?" 스튜어디스가 가버리자 옆자리의 사내가 그에게 말
을 걸며 낄낄거렸다. "예." 이무영 소령은 얼굴을 붉히며 불어로 대답했다. "불어를 잘하시
는군요." "대학에 다닐 때 불문학은 전공했습니다." 그가 말하는 대학시절이란 육군사관학교
시절을 말하는 것이었다. "그럼 까뮈를 좋아하십니까?" "아닙니다. 앙드레 말로를 좋아합니
다." "아, 행동주의 문학을 좋아하시는군요?" "예." 그러나 그것은 이미 10년이나 전의 일이
었다. "내 이름은 다니엘 오페이죠. 그냥 오페이라고 부르십시오." 그가 손을 내밀었다. "내
이름은 이무영입니다." 이무영 소령은 내키지 않았으나 금빛 털이 듬성듬성 나 있는 다니엘
오페이의 손을 잡았다. 어쩐지 옆자리의 사내가 의도적으로 접근을 해오고 있는 것은 아닌
가하는 의심이 들었다.
따가운 햇볕은 그녀의 이마에서 구슬 같은 땀을 솟아 나오게 하고 있었다. 그녀는 차이카
나(이라크인들의 집) 앞에 있는 노변 테이블에 앉아 카키색 모자를 벗어 부채질을 하며 골
똘히 생각에 잠겨 있었다. 고적 탐사 작업은 이제서야 본격적인 궤도에 오르고 있었다. 최근
엔 북부 이라크에서 느부갓네살 왕조의 것으로 여겨지는 암벽화들이 속속 발견되고 있었다.
한때 중동 최대의 왕조로 기원전 이스라엘을 멸망시키기까지 했던 바빌론제국의 유물들은
북부 이라크에 잔뜩 묻혀 있었다. 그러나 그녀는 급히 귀국해야 했다.
샤론. 네 어머니가 위독하니 급히 돌아와야 하겠다. 네 어머니와 사이가 좋지 않은 것은
알지만 어머니가 돌아가시기 전에 화해를 하는 것이 좋겠구나. 네 어머니는 너에게 맥도널
드 주식을 상속시키겠다는구나. 늦지 않기를 바란다. 삼촌 하워드 데닝스가.
짤막한 편지였다. 편지 속에는 프랑스 파리행 항공권도 들어 있었다. (드디어 하워드 데닝
스가 나를 찾는군.) 그녀는 손등으로 이마의 땀을 훔쳤다. 5년만의 일이었다. 나치 전범이었
던 게슈타포 구스타프 중령을 노르웨이까지 추적 체포하여 이스라엘로 압송했던 '액소더스
작전'을 마친 뒤로 처음이었다. 이스라엘 비밀첩보부 '모사드'의 이름을 전세계에 떨친 그 작
전 이후 당시 첩보원들은 뿔뿔이 흩어져 자취를 감추었었다. 그런데. 하워드 데닝스가 그 옛
날의 부하들을 다시 소집하고 있는 것이다. 물론 하워드 데닝스는 본명이 아니었다. 그의 본
명이 무엇인지는 그녀도 모르고 있었다. 그녀가 샤론 데닝스라는 이름으로 텍사스 주립대학
'중동문화연구소'에서 연구원으로 근무하는 동안 하워드 데닝스는 남부 조지아주 주립대학에
서 영문학 교수로 위장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들은 모두 모사드의 A국(아메리카 담당)소
속이었다. 모사드의 조직이 모두 그렇듯이 A국도 평상적인 정보활동을 하는 조직과 극비활
동을 하는 조직으로 나누어져 있었다. 물론 그들은 극비조직에서 활동을 하고 있었다. 멀리
북쪽 평원에서 차소리가 들리더니 먼지 구름이 뽀얗게 달려오는 것이 보였다. 평원은 작렬
하는 태양으로 하얗게 표백되어 있었다. 이라크인들이 모스크(사원)을 향해 기도하는 시간이
었다. 이내 흙먼지 속에서 딱정벌레처럼 작은 지프가 보였다. "샤론, 지프가 와요." 차이카나
안에서 차를 마시며 더위를 식히던 제니가 뛰어나오며 외쳤다. "보고 있어요." 샤론은 미소
지으며 탁자위에 찻잔을 들어 입으로 가져갔다. 오렌지 꽃에서 추출한 중동지역의 커피였다.
색은 백색이었다. 안에서 왁자한 소리가 들리더니 클레인 박사와 일행이 쏟아져 나왔다. 샤
론을 전송하기 위하여 탐사반의 캠프에서 이곳까지 나와 있는 사람들이었다. "모두들 잘 있
어요. 그 동안 고마웠어요." 샤론은 그들과 인사를 나누기 시작했다. "샤론, 도착하면 연락
해." "네, 그럴께요." "어머니가 빨리 회복되기를 빌게." 샤론은 차아카나 앞으로 몰려나온
사람들과 일일이 악수를 했다. 강렬한 태양 때문에 모두들 백색 터번을 쓰고 있었다. 지프차
를 운전하고 온 사람은 이라크인 모하메드였다. 그는 햇볕을 막기 위해 선글라스를 쓰고 있
었다. 그녀는 가방을 지프 뒤에 싣고 조수석에 올라탔다. "정확한 시간에 왔군요." 그녀는
모하메드에게 상냥하게 인사를 건넸다. "우리는 약속을 철저하게 지키지요." 모하메드가 흰
이를 드러내놓고 씨익 웃었다. "바그다드까지 얼마나 걸리지요?" "6시간이요." 모하메드가
지프의 엑셀레이터 페달을 밟으며 말했다. 차가 속력을 내기 시작하자 그녀는 상의 포켓에
서 색이 없는 안경을 꺼내 썼다. 흙먼지가 자욱하게 일어나면 눈을 뜰 수가 없었다. 차이카
나 앞에서 사람들이 손을 흔들었다. 그녀는 차이카나 앞의 사람들을 향해 손을 흔들며 비장
한 기분을 느꼈다. 5년만의 소집. 그것은 분명 그녀가 상상할 수도 없는 중대한 임무가 될
것이라는 사실을 의심할 수가 없었다. 그녀는 무겁게 한숨을 내쉬었다.
이무영 소령이 프랑스 파리에서 이스라엘 비밀첩보부 샤론 데닝스와 첫 접선을 한 것은
파리 시간으로 6월 24일 오후 3시의 일이었다. 그는 파리의 특급호텔 리츠에 투숙했다. 2114
호실이었다. 그 방은 프랑스의 한국대사관에서 예약한 방이었다. 그는 오후 1시에 그 방에
투숙을 했고 샤워와 식사를 마친 다음 간편한 스포츠 웨어 차림으로 거리로 나왔다. 이스라
엘 비밀첩보부원 샤론 데닝스를 접선하기 위해서였다. "당신은 미행을 당하고 있어요." 샤론
데닝스는 패션거리의 한 양장점에서 점원으로 위장하고 있었다. 어깨까지 치렁치렁 내려오
는 머리가 검고 에메랄드처럼 파란 여자였다. "미행이오?" 이무영 소령이 어리둥절한 표정
으로 샤론 데닝스를 쳐다보았다. 파리에서 미행을 당한다는 것은 이해할 수 없었다. "우리가
당신을 리츠호텔에서 여기까지 걸어오게 한 것은 당신에게 미행자가 있는지 감시하기 위해
서였어요. 당신을 미행하고 있는 사람은 CIA요원 쥬드 넬슨이에요. 한때 일본 파견관으로
있던 사람이죠." 샤론 데닝스가 소파 밑에서 한 장의 사진을 꺼냈다. "보세요." "이, 이 사람
은..." 이무영 소령은 사진을 들여다보다가 화들짝 놀랐다. 사진 속의 인물은 뜻밖에 에어프
랑스 805편에서 바로 그의 옆자리에 앉아 있던 금발의 뚱뚱한 사내였다. "어, 어떻게 이런
일이?" "KCIA에 CIA의 이중 첩자가 있다는 증거예요." 샤론 데닝스가 차갑게 웃었다. "믿
을 수가 없는 일입니다." "쥬드 넬슨은 지금 이 근처 어디에선가 당신이 나올 때를 기다리
고 있을 거예요." "그럼 어떻게 하지요?" "미행을 따돌려야죠. 여기서 소르본느 방향으로 4
백 미터쯤 걸어가면 이레느라는 작은 카페가 있어요. 뒤를 돌아보지 말고 그 카페로 들어가
서 바로 뒷문으로 나가세요. 뒷문으로 나가면 골목에 밤색 승용차가 대기하고 있을 거예요.
그 차를 타면 운전사가 안전한 장소로 데려다 줄 거예요." "알겠소." "이 쇼핑백을 가지고
가세요. 그래야 여기가 우리 거점이라는 사실이 들통나지 않아요." 이무영 소령은 샤론 데닝
스가 건네주는 쇼핑백을 들고 양장점을 나와 소르본느 쪽으로 걷기 시작했다. CIA요원 쥬
드 넬슨이 미행을 하고 있는 것 같아 뒤통수가 간지러웠으나 뒤돌아볼 수가 없었다. 그는
서두르지 않고 천천히 걸었다. 카페 이레느는 금방 찾을 수 있었다. 유리창이 모두 검은 색
으로 선팅이 되어 있어. 밖에서는 안이 들여다보이지 않았다. 그는 곧장 뒷문으로 걸어갔다.
골목엔 샤론 데닝스가 말한 대로 밤색 승용차가 시동을 걸어놓고 대기하고 있었다. 그는 승
용차에 올라탔다. 그가 올라타자 승용차는 즉시 골목을 떠났다. 그는 승용차의 시트에 기대
어 눈을 감았다. 자신이 미행을 당했다는 사실에 기분이 착잡했다. 더구나 CIA요원이 자신
을 미행한 것이 중앙정보부에 잠입해 있는 CIA의 이중첩자 때문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
자 씁쓸한 기분까지 들었다. 승용차가 멈춘 곳은 파리의 빈민가인 라스디냐끄가에 있는 피
부미용실 간판이 붙어있는 건물 앞이었다. "3층에 있는 피부미용실로 올라가시오." 50대의
운전기사는 한 번도 뒤를 돌아다보지 않고 말했다. 그는 승용차에서 내려 3층으로 걸어 올
라갔다. 건물은 낡고 더러웠다. 군데군데 페인트가 벗겨지고 먼지가 뽀얗게 앉아 있었다.
"기다리고 있었소." 피부미용실의 도어를 열고 들어가자 40대의 비쩍 마른 사내가 그에게
다가와 손을 내밀었다. "당신은 멕시코인으로 변장시키라는 지시를 받았소." 이무영 소령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이렇게 된 이상 이스라엘 비밀첩보부에 모든 것을 맡길 수밖에
없었다. 피부미용실의 사내는 변장술에 뛰어난 기술을 갖고 있었다. 이무영 소령의 짧은 머
리를 30분도 안되어 곱슬머리고 바꾸어 놓았고, 얼굴색은 커피색으로 눈썹은 속눈썹까지 여
자처럼 짙고 길게 이식한 다음 코를 높였다. "이 변장술에 사용한 약품은 특수약품이라 샤
워를 하거나 비를 맞아도 지워지지 않습니다." 피부미용실의 사내는 변장이 모두 끝나자 손
을 씻으며 말했다. 샤론 데닝스는 그가 변장을 모두 끝낸 뒤에 나타났다. "여권을 만들어야
하니까 사진을 찍어야 돼요." 그들은 이미 위조여구너 전문가까지 확보해 놓고 있었다. 이무
영 소령이 샤론 데닝스와 함께 거리로 나온 것은 오후 6시였다. 샤론 데닝스는 프랑스산 르
노를 운전하여 그를 세느강으로 안내했다. "비행기는 내일 아침 노스웨스트편을 예약했어요.
위조여권을 만들려면 시간이 걸리니까요." 그들은 차에서 내려 세느 강변을 걷기 시작했다.
6월이라 세느강변에는 산책하는 아베크족들이 많았다. "일단 우리의 일을 의논하는게 좋겠
어요." "어떤 일 말입니까?" "미국에 들어갈 때 우리는 애인이나 약혼자로 위장을 해야 돼
요. 아무 관계도 없는 남자와 여자가 함께 다닐 수는 없잖아요?" "물론이지요." "그래서 우
리는 파리에서 만난 애인으로 위장을 하는 게 좋겠어요. 이의 있나요?" "없습니다." "그럼
내가 당신 팔장을 끼겠어요. 이곳에서 팔짱을 끼지 않은 젊은 사람들은 하나도 없어요." 샤
론 데닝스의 말대로였다. 세느강을 산책하는 아베크족들은 거의 모두 팔짱을 끼고 있었고,
즐겁게 얘기를 하다가 포옹을 하거나 키스를 하는 모습이 눈에 띄었다. "자연스럽게 하세
요." 샤론 데닝스는 이무영 소령의 팔짱을 끼는 대신 허리에 팔을 감았다. 이무영 소령은 샤
론 데닝스의 어깨를 가볍게 안았다. '먼저 당신이 누구로 변장하는지 외워 두세요. 당신은
멕시코시티에서 목재상을 하다가 그만두고 지금은 무역상을 하는 산 호세라는 사람이에요.
무론 그 사람은 실존하는 사람인데 이 임무가 끝날때까지 우리 요원들이 리용에 데리고 가
서 감금하고 있을 거예요. 나이는 서른 둘이고 바람둥이라 결혼은 하지 않았어요." 샤론 데
닝스의 말에 이무영 소령은 피식 웃었다. " 이제 내 소개를 할게요. 내 이름은 샤론 데닝스
이고 이스라엘 비밀첩보부 A국 소속이에요." "내 이름은 이무영이고 한국국방부 정보국 소
속입니다." "결혼했나요?" "예." "아이는요?" "딸이 하나 있소. 샤론 데닝스양은요?" "샤론이
라고 불러 주세요. 결혼하지 않았어요." "왜 결혼을 하지 않았어요?" "비밀첩보부에 근무하
면서 가정을 돌볼 수는 없으니까요." 샤론 데닝스는 쓸쓸한 기색으로 세느강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이무영 소령도 걸음을 멈추고 해가 기울고 있는 세느강 서편 하늘을 응시했다. "한
국은 경치가 무척 아름답다고 하던데 정말 그런가요?" "예." "한국 얘기 좀 해주세요." "지
금은 우기입니다. 한 보름쯤 계속해서 비가 오지요. 그것보다 샤론은 사랑하는 사람이 없습
니까?" "글쎄요." 샤론 데닝스가 웃으며 고개를 흔들었다. "얼굴이 미인이라 좋아하는 사람
들이 많았을 것 같군요." "열아홉 살에 좋아하는 남자가 생겼었어요. 그러나 그는 시리아와
의 6일 전쟁 때 전사했어요." "그 사람을 아직도 사랑하나요?" 그들은 다시 걷기 시작했다.
"이따금 생각이 나요. 얼굴은 점점 잊혀져 가고 있지만..." "그 뒤론 사랑하는 남자가 생기지
않았어요?" "임무때문에 오래 사귈 수가 없었어요. 평범한 남자들은 비밀첩보부에 근무하는
여자를 좋아하지도 않구요." "비밀첩부부를 그만두면 되지 않습니까?" "전 이런 일이 좋아
요. 부인은 어떻게 생겼나요?" 샤론 데닝스가 화제를 바꾸었다. 이무영 소령은 아내 경옥을
만나던 일을 잠깐 생각했다.
그가 경옥을 처음 만난 것은 5년 전의 일이었다. 경옥은 그때 대학 4학년이었고 그는 수
도경비사령부 정보장교로 근무하고 있었다. 어느 날 그는 아파트의 베란다에서 광장을 내려
다보고 있었다. 4월이었다. 날씨가 화창했다. 판잣집들이 다닥다닥 붙어있는 창신동 산동네
에도 햇살이 깃발처럼 나부끼고 봄바람이 따뜻하게 불어왔다. 그때 그는 아파트의 광장을
또박또박 걸어오는 젊은 여자를 발견했다. 멀어서 자세히 보이지는 않았으나 너무나 아름다
운 여자였다. (정말 멋진 아가씨군. 가까이 오면 자세히 보아야지.) 그는 그런 생각을 하며
여자를 내려다보았다. 이내 여자가 가까이 오더니 갑자기 고개를 들고 그를 쳐다보았다.
(아!) 그는 자신도 모르게 얼굴이 화끈거리고 가슴이 격렬하게 뛰는 것을 느꼈다. 여자는 눈
이 부시게 예뻤다. (저 여자가 내 아내가 되어주면 얼마나 좋을까?) 그가 그런 생각을 하는
동안 여자는 남자의 시선을 피해 고개를 떨어뜨리고 걸음을 재게 놀리기 시작했다. 그는 여
자가 완전히 시야에서 사라질 때까지 시선을 떼지 않았다. 그리고 여자가 시야에서 사라지
자 가슴속이 텅 비어 버린 것 같은 기분을 느꼈다. 그 날밤 그는 좀처럼 잠을 이룰 수가 없
었다. 눈만 감으면 여자의 아름다운 얼굴이 머리 속에 떠올라 지워지지 않았다. 여자를 다시
만날 기회는 좀처럼 오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틈만 나면 아파트의 베란다에서 여자가 지나
가기를 기다렸다. 여자는 4월이 거의 다 지나가서야 모습을 나타냈다. 그는 멀리서 여자의
아름다운 모습이 보이자 재빨리 아파트의 광장으로 뛰어 내려갔다. 여자는 벌써 저만치 앞
서 걸어가고 있었다. 그는 여자의 뒤를 따라가기 시작했다. 여자를 따라가서 어쩌자는 것은
아니었다. 다만 그는 여자의 아름다운 얼굴을 오래오래 보고 싶었다. 여자는 시영아파트 위
동네 사람들이 공원집이라고 부르는 잣나무집에 살고 있었다. 여자가 육중한 철대문 안으로
사라지자 그는 터덜터덜 걸어서 집으로 돌아왔다. 여자의 집이 상상도 할 수 없는 부자라는
사실이 그를 의기소침하게 만들었다. 그러나 그러면 그럴수록 여자에 대한 그의 사랑은 불
타올랐다. 여자를 다시 만난 것은 사흘쯤 뒤의 일이었다. 그는 부대에서 퇴근하는 중이었고
-그는 영외 거주를 하고 있었다.-여자는 총총 걸음으로 걸어 내려오는 중이었다. (아!) 그는
멀리서 여자의 얼굴을 확인하는 순간 가슴이 세차게 뛰었다. 여자는 점점 가까이 걸어오고
있었다. 그때 어떤 생각 하나가 그의 뇌리를 번개처럼 떠올랐다. 그는 바쁘게 걸어오는 여자
의 앞을 가로막았다. "충성!" 그는 어리둥절해 하는 여자에게 다짜고짜 거수경례를 올려붙였
다. 여자가 영문을 알 수 없어 하면서도 손으로 입을 가리고 웃었다. "육군 중위 이무영입니
다." "무슨 일이에요?" 여자가 한 걸음 뒤로 물러서며 물었다. 목소리도 낭랑했다. "애인은
구하고 있습니다." 여자가 풋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대한민국이 인정하는 사나이니까 믿어
도 좋을 것입니다." "정말이에요?" "그렇습니다. 대한민국 육군은 전세계 육군 중에서 최고
의 정예입니다." "정말 애인을 구하세요?" "예, 그럿습니다." "그럼 따라오세요." "예?" "지금
친구들 만나러 가는 길이에요. 거기 가면 애인이 필요한 여자들이 많이 있어요." "알았습니
다." "따라오세요." 여자가 턱을 꼿꼿이 들고 앞서서 걷기 시작했다. 그는 황급히 여자를 향
해 뛰어가서 보폭을 맞추어 걷기 시작했다. 여자는 성격이 쾌활했다. 그는 여자와 함께 걸으
면서 많은 얘기를 했다. 여자의 이름은 임경옥이었고 나이는 스물 셋, 집이 크고 넓어 동네
에서 공원집이라고도 부르는 잣나무집의 둘째딸이었다. 그녀의 친구들 모임은 학교 서클모
임이었다. 그녀는 친구들에게 그를 대한민국이 인정하는 사나이라고만 소개했다. 어떻게 만
났다거나 애인을 구한다거나 하는 소리는 하지 않았다. 친구들과 헤어지자 그들은 음악이
있는 레스토랑에서 저녁을 먹고 생음악을 연주하는 맥주홀에 가서 생맥주까지 마셨다. "장
교님, 팔 좀 빌려주시겠어요?" 돌아오는 길에 여자는 스스럼없이 그의 팔짱을 끼었다. "애인
이 되어 주시겠습니까?" "저만을 사랑해 주신다면요." "물론 경옥씨만을 사랑하겠습니다."
"맹세할 수 있어요?" "좋아요." 여자가 그의 어깨에 머리를 기대며 행복한 표정을 지었다.
여자의 머리칼에서 향긋한 냄새가 풍겼다. 그렇게 해서 그들은 만났고 5년간의 열애 끝에
결혼했던 것이다. "아름다운 사랑이군요." 샤론 데닝스가 감동에 젖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
들은 천천히 걸어서 근처에 있는 식당으로 들어갔다. 파리도 이제 서서히 어둠이 내리고 있
었다. 그들은 10시쯤에야 이스라엘 비밀첩보부에서 예약해 놓은 호텔로 찾아갔다. 파리 에펠
탑이 한눈에 내다보이는 전망 좋은 방이었다. 이튿날 아침, 그들은 아침 일찍 일어나 공항으
로 향했다. 공항엔 이미 이스라엘 비밀첩보부 요원이 위조여권을 가지고 나와 대기하고 있
었다. 그들은 탑승 수속을 마치고 뉴욕행 비행기에 탑승했다. 첨보 747기 902편이었다. 아나
운스먼트는 대개의 항공사들처럼 안전띠를 맬 것과 이륙할 때 금연을 해달라는 것이었다.
스튜어디스 스커트는 초미니였다. 이내 비행기가 활주로 위를 미끄러지기 시작했다. 이무영
소령은 기창을 스치는 공항 풍경을 물끄러미 응시했다. 미국으로 가는 길이 예상외로 늦어
지고 있었다. 그는 조용히 눈을 감았다. 그가 긴장하고 있다고 생각했는지 샤론 데닝스가 슬
그머니 그의 손을 잡았다. 그는 눈을 뜨고 샤론 데닝스를 쳐다보았다. 샤론 데닝스가 조용히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거렸다. 정미경 중위의 조야한 얼굴이 눈앞에
떠올라왔다. 정미경 중위에게 이별의 말도 제대로 전하지 못하고 온 것이 가슴이 아팠다. 정
미경 중위는 그를 사랑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는 아내가 있는 남자였다. 정미경 중위도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그와 헤어지려고 하지 않았다. (용서받을 수 없는 일이야...)
그것은 대한민국 엘리트라는 자부심을 갖고 있는 대다수의 젊은 장교들에게 모욕을 주는 것
이나 다름없었다. 그는 그 사실 때문에 고통스러웠다.
6
미국 필라델피아 D.C. 미CIA 로버트 리치 필라델피아 담당관의 사무실엔 살벌한 기운이
감돌고 있었다. 필라델피아 흑인 거주지역에서 일어난 살인사건으로 전 미국이 떠들썩했고
워싱턴에서는 사건 내용을 묻는 전화가 빗발치고 있었다. 아파트의 주인인 아일린은 물론
침입자로 여겨지는 이라크 국방정보국의 압둘라 소령, 웨스팅하우스사의 제이콥스 박사가
현장에서 총격전으로 즉사하고, CIA요원이 샘 오스틴까지 총에 맞아 중상을 당한 뒤 병원
으로 긴급 후송되었으나 끝내 사망하고 말았던 것이다. 샘 오스틴만 살아 있었어도 살인사
건의 내막을 밝힐 수 있었으나 관련자들이 모두 죽어 수사는 벽에 부딪혀 있었다. 일반적인
살인 사건이라면 필라델피아시 경찰관이나 FBI만으로도 충분히 수사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라크 국방정보국의 압둘라 소령과 CIA요원인 샘 오스틴이 죽은 것이다. 그들은 무엇인가
중대한 문제와 관련이 있는 것이 분명했다. CIA가 이 사건에 개입하는 이유도 그 때문이었
다. "워싱턴입니다." 비서 캐서린이 그의 책상에 놓여있는 전화기를 눈짓으로 가리키며 말했
다. 로버트 리치는 재빨리 수화기를 들었다. "부국장일세." "로버트 리치입니다." "방금 전에
샘 오스틴이 죽었다는 보고를 받았네. 샘 오스틴은 이 사건에 대해서 아무 것도 얘기하지
않았나?" "샘 오스틴은 이틀 동안 산소마스크를 쓰고 있다가 죽었습니다. 유언도 남기지 못
했습니다." "샘 오스틴은 무엇 때문에 아일린 젤스키의 집에 간 거야?" "보고한 대로입니다.
샘 오스틴이 무엇 때문에 아일린 젤스키의 집에 갔는지 전혀 알 수 없습니다." "샘 오스틴
의 최근 임무는 무엇이었나?" 로버트 리치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샘 오스틴은 5일 전부터
휴가 중이었다. "휴가 중이었습니다." "언제부터?" "5일 전입니다." "휴가를 내기 전에 무엇
을 하고 있었지?" "요인 감사입니다." "누구 담당이었나?" "이라크의 석유업자 핫산입니다."
"핫산?" "이라크 혁명평의회 위원인 카말 핫산 장군의 동생입니다. 현재 필라델피아 시내
북쪽 이스턴호텔 7층을 모두 전세내어 여자들과 놀아나고 있습니다." 부국장이 잠시 입을
다물었다. 로버트 리치는 그의 말을 기다리며 창밖을 내다보았다. 필라델피아의 날씨는 6월
답지 않게 찌뿌드드했다. " 아일린 젤스키의 집을 수색했나?" "FBI 수색 반이 한 번, CIA
수색 반이 두 번 수색했습니다." "그런데도 아무 것도 나오지 않았나?" "예." "그렇다면 제
3의 인물이 아일린 젤스키의 집에서 이미 어떤 물건을 회수해 간 것이 아닌가? 우리가 모르
는 어떤 물건 말일세." "제3의 인물이 침입한 흔적은 없습니다." "그래?" "FBI가 분석한 모
양인데 아일린 젤스키와 제이콥스 박사는 저녁식사를 함께 한 뒤 섹스를 했습니다. 아일린
젤스키의 질 속에서 정액은 나오지 않았지만 제이콥스 박사의 페니스에 젤스키양의 질 분비
물이 묻어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섹스를 하고 있었다고 봐야지요. 그때 압둘라 소령이 현관
의 벨을 눌렀고 젤스키양이 문을 열자 주먹으로 얼굴을 때린 뒤 소음 총으로 아일린 젤스키
의 가슴을 쏘았습니다. 그리고 샘 오스틴이 소음 총으로 창밖에서 압둘라 소령을 사살하고
거실로 뛰어들었습니다. 제이콥스 박사는 그 순간 주방으로 달려가 양복 상의에서 권총을
꺼내 샘 오스틴을 쏜 것입니다. 그러나 정확하게 맞추지 못해 샘 오스틴이 제이콥스 박사를
죽인 것입니다. 필라델피아 시경찰국의 피터슨 경사가 그때 도착해 제3의 인물은 침입할 시
간도 없었고 침입한 흔적도 없습니다. 족적이며 지문 조사에서도 제3의 인물은 나타나 있지
않습니다." "피터슨 경사는 어떻게 그렇게 빨리 출동했지?" "그 날밤 아일린 젤스키양이 사
는 아파트 3층에서 흑인들의 댄스파티가 열렸는데 음악이 굉장히 시끄러웠다고 합니다. 2층
에서 사는 노파가 신고를 하여 출동을 했다가 사건 현장을 목격했답니다." "굉장한 우연이
로군." 부국장의 빈정거리는 소리가 수화기를 통해서도 뚜렷이 들렸다. "제이콥스 박사가 하
는 일은 무엇인가?" "웨스팅하우스사의 브라운연구소에서 비밀병기를 연구하고 있었습니다.
핵무기 쪽이었다고 합니다." "아일린 젤스키는?" "브라운연구소의 전화교환수였습니다." "전
화교환수와 핵무기 연구원...뭔가 냄새가 나긴 나는군." 부국장이 콧소리를 내어 웃었다. 국
장과 달리 부국장은 CIA에서 잔뼈가 굵은 냉혹한 인물이었다. 실제로 전 세계 각 도시에서
첩보활동을 하는 CIA요원들을 지휘하는 컴퓨터 인간이라는 별명을 가진 부국장이었다. "리
치!" "예." "아일린 젤스키의 아파트는 감시하고 있는가?" "예, FBI 수사관 2명, 필라델피아
시경찰 6명, 우리 요원 두 사람이 감시하고 있습니다." "FBI는 철수시키도록 하게. 필라델피
아 시경찰도 정복 2명만 남기고 철수시키게." "예?" "대신 우리 요원들을 요소요소에 배치시
키게. 무슨 말인지 알겠나?" "예, 알겠습니다." 그는 비로소 부국장이 말하는 의도를 알아차
렸다. 부국장은 적을 유인하게 위해 함정을 파고 있는 것이다. "이 사건의 지휘관으로 솔리
스트 폴을 파견했네. 지금쯤 필라델피아에 도착해서 활동하고 있을 걸세. 그가 요구하는 것
을 무엇이든지 다 지원하게." 로버트 리치는 숨이 멎는 것 같았다. 코드네임(암호명) 솔리스
트 폴...CIA에서 가장 냉혹하고 가장 잔인한 살인마. 로버트 리치는 그 이름만 듣고서도 피
냄새가 풍겨오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브라운연구소를 나온 솔리스트 폴은 우두커니 필라델피아 자동차 박물관 쪽을 바라보았
다. 박물관 앞 광장 오른쪽에 노란 색의 스쿨버스 한 대가 서 있었고 아이들이 버스에서 내
려 두 줄로 서서 박물관 안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아이들을 인솔하고 있는 사람은 늘씬한
금발머리 여인이었다. 멀어서 얼굴은 알아볼 수 없었지만 몸매는 균형이 잡혀 있었고 풍만
한 엉덩이가 규칙적으로 흔들리고 있었다. 폴은 냉혹한 얼굴에 잔인한 미소를 떠올렸다. 늘
씬한 여교사와 아이들, 그리고 박물관. 그것은 참으로 평화롭고 목가적인 풍경이었다. 날씨
는 후텁지근했다. 유전이 많은 북부 공업도시 필라델피아의 하늘은 잿빛으로 흐려 있었다.
스모그 현상 때문이었다. 유전지대와 정유공장에서 뿜어내는 매연이 필라델피아의 도심까지
뒤덮고 있었다. 혹한의 시베리아와는 비교도 할 수 없는 도시였다. 그는 시베리아에서 태어
나고 그곳에서 자랐다. 그는 1961년에 미국에 왔다. CIA요원이 된 것은 1968년의 일이었다.
그는 1966년부터 월남에 파병되어 있었는데 그곳에서 CIA월남 담당 과장인 마이클 폭스에
게 발탁되었던 것이다. 마이클 폭스는 현재 나토 책임자였다. 그는 느릿느릿 걸음을 떼어놓
았다. 그에게 맡겨진 임무. 아일린 젤스키의 아파트에서 일어난 살인 사건을 해결해야 했다.
CIA요원 1명과 이라크의 국방 정보국 압둘라 소령이 살해되었기 때문에 FBI도 그 사건에
지대한 관심을 갖고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CIA요원 샘 오스틴을 수사할 수 있는 입장에
놓여 있지 않았다. CIA가 그들의 수사를 중지시켰던 것이다.
제이콥스 박사는 브라운연구소의 연구원이었다. 그가 핵무기 제조에 대한 전문가라면 핵
무기 관련 서류를 반출했을 가능성이 높았다. 다만 그 관련 서류가 무엇인지 확인할 방법이
없었다. 연구소 측에서는 없어진 서류가 전혀 없다고 한다. 경비나 감시도 삼엄한 편이었다.
그런 경비와 감시를 뚫고 서류를 반출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했다. 사건이 일어나던 날도
제이콥스 박사와 아일린 젤스키의 동정에는 특별히 수상한 점이 없었다. 제이콥스 박사가
아일린 젤스키에게 내의 상자를 선물했을 뿐이었다. 내의 상자도 적외선 탐지기를 통과했지
만 아무런 이상이 없었다. 솔리스트 폴은 담배를 꺼내 피우며 골똘히 생각에 잠겼다. 아일린
젤스키와 제이콥스 박사와의 관계도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이었다. 아일린 젤스키는 뚱뚱한
전화교환수에 지나지 않았다. 뉴멕시코에서 태어났지만 어린 시절 부모를 따라 뉴욕으로 온
뒤 브루클린에서 소녀시절을 보냈다. 브루클린은 악명 높은 사창가였다. 그녀는 그곳에서 16
세부터 창녀 생활을 하다가 26세 때 포주가 되었고 30세 때 콜로라도로 이주를 했다. 그곳
에서 매춘 업을 할 예정이었으나 콜로라도의 법률이 엄격해 여의치 않았다. 그녀는 필라델
피아도 다시 이주했다. 그러나 필라델피아도 그녀가 매춘 업을 하기에 여의치 않았다. 그녀
는 필라델피아 경찰에 체포되어 재판을 받고 교도소에 수감되었다. 그리고 1년 후 출감한
그녀는 그녀의 재판 때 변호를 맡았던 흑인 국선 변호사의 알선을 브라운연구소의 전화교환
수로 취업을 한 것이다. 그녀는 브라운연구소에서 성실하게 일했다. 그녀는 과거 때문에 결
혼을 하거나 친구를 사귈 수는 없었으나 그녀는 사창가 생활을 되풀이하지 않았던 것이다.
(아일린은 외로웠던 거야.) 남자는 브루클린 시절에 수없이 경험했을 것이다. 그러나 최근
수년 동안 남자를 접촉하지 못한 것이 백인인 제이콥스 박사의 덫에 걸리게 된 요인이 되었
을 것이다. 제이콥스 박사가 이라크 국방정보국과 접선을 한 사실은 FBI의 조사에 의해 드
러나 있었다. 제이콥스 박사와 압둘라 소령이 로즈 클럽이라는 술집에서 자주 만난 것이 종
업원들에 의해 확인되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샘 오스틴은 무엇 때문에 그 중대한 사실을 책
임자인 로버트 리치에게 보고하지 않았던 것일까? 그는 그 의문에 해답을 내릴 수가 없었
다. 다만 제이콥스 박사가 이라크 국방정보국과 접촉한 이유는 조금이나마 추정할 수 있었
다. 제이콥스 박사는 얼마 전부터 도박에 손을 대 재산을 모두 날렸고, 부인으로부터 이혼까
지 당해 막대한 위자료와 아이들의 양육비가 필요했다. 그는 술과 도박, 그리고 여자를 좋아
하는 전형적인 미국인이었다. 그가 이라크 측으로부터 막대한 돈을 받고 비밀서류를 팔려고
했을 가능성은 충분히 있었다. 폴이 필라델피아 흑인 거주지역에 도착한 것은 12시 가까운
시각이었다. 폴은 시장기가 느껴졌으나 아일린 젤스키의 아파트를 향해 걸어갔다. 그는 흑인
거주지역에서 식사를 하고 싶지 않았다. 아일린의 아파트에는 정복 경관이 두 명이나 현관
을 지키고 있었다. "뭐요?" 그가 현관문을 열려고 하자 경관들이 그를 가로막았다. "여기는
살인사건이 일어난 곳이오. 텔레비전 뉴스도 보지 못했소?" "안에는 누가 있소?" 그는 경관
의 말에 차갑게 대꾸했다. "법무부에서 나왔소?" 정복 경관이 비로소 멈칫하는 기색으로 그
의 얼굴을 살폈다. "CIA요. 워싱턴에서 왔소." "아, 조금 전에 이곳 CIA가 철수했는데... 이
번엔 살해된 사람 중에 CIA요원이 있다면서요?" "안에는 누가 있소?" "아무도 없습니다."
"아일린 젤스키의 가족들은 없소?" "어제 뉴욕에서 동생이라는 여자가 장례를 지내기 위해
왔습니다. 지금 모텔에 머물고 있습니다." "열어 보시오." 경관 한 사람이 주머니에서 열쇠
를 꺼내 현관문을 열었다. 그는 아파트의 거실로 들어섰다. 아파트의 거실 회색 카펫엔 시체
들이 쓰러져 있던 자리마다 석회가루로 하얗게 표시를 해놓았고 붉은 핏자국이 여기저기 말
라붙어 있었다. 핏자국은 벽에도 선명하게 뿌려져 있었다. "단서 같은 것은 좀 나왔소?" "거
의 없습니다." "수색은 철저히 했소?" "물론입니다. FBI와 CIA가 먼지 하나 남기지 않고 수
색했습니다." "FBI가 가져간 것이 있소?" "없습니다." 그는 거실을 지나 침실을 살피기 시작
했다. 침실은 FBI 수사관들이 마구 수색을 한 탓인지 옷가지들이 사방에 흩어져 있었다. 그
는 침실 한쪽 구석에 내의상자를 발견했다. 내의상자엔 브래지어와 팬티가 두 세트 들어 있
었다. (제이콥스 박사가 선물한 내의상자군.) 그는 팬티와 브래지어를 자세히 살폈으나 특별
히 수상한 점을 발견할 수 없었다. 폴은 아일린 젤스키의 아파트를 나와 필라델피아 CIA본
부인 항만노동조합 건물은 찾아갔다. 로버트 리치를 만나기 위해서였다.
7
박천수 무관은 공항을 나오는 이무영 소령을 발견하자 찜찜한 기분이 들었다. 필라델피아
시내엔 이미 FBI와 CIA요원들이 거미줄처럼 깔려 있었고 아일린 젤스키의 아파트도 겉으로
보기엔 정복 경관 2명이 지키고 있는 것처럼 보였으나 요소요소엔 CIA요원들이 배치되어
있었다. 그런데 본국에서는 달랑 햇병아리 정보장교를 한 명 파견한 것이다. "잘 왔네." 그
는 매기 한과 함께 로비를 나온 이무영 소령의 손을 잡고 흔들었다. 눈빛은 예리했으나 첩
보 능력이 어느 정도인지는 도무지 가늠할 길이 없었다. "워싱턴은 별일 없나?" 그는 이무
영 소령을 워싱턴으로 데리러 갔던 매기 한에게 물었다. "이상한 전문 하나가 접수되었습니
다." "어떤 전문?" "이 소령의 행방을 KCIA로 낱낱이 보고하라는 것입니다." "KCIA로?"
"부장의 특명입니다." 박천수 무관은 고개를 갸우뚱하며 이무영 소령을 쳐다보았다. 이무영
소령은 그들의 얘기에 아무 관심도 없는지 공항을 빠져나가는 검은머리의 여자를 쳐다보고
있었다. "이상한 일이군. 이번 작전은 대통령 각하께서 주관하고 계시는데..." 이무영 소령이
쳐다보고 있는 여자는 검은 선글라스를 쓰고 있었다. "보고해도 상관이 없겠지. 우리는
KCIA소속이니까." 그들은 공항을 빠져나가 승용차에 올라탔다. 매기 한이 핸들을 잡았다.
"흑인 거주지역을 지나가세. 아일린 젤스키의 아파트를 한 번 봐두어야 하니까." "알겠습니
다." 매기 한이 시동을 걸고 차를 출발시켰다. "매기 한에게 자세한 얘기는 들었나?" "대충
들었습니다 변동된 사항은 없습니까?" "아일린 젤스키의 아파트에 경비가 강화되었네. 겉으
로 보기엔 정복 경고나 2명만 지키고 있지만 CIA요원들과 FBI수사관들이 곳곳에 배치되어
감시를 하고 있네. 아일린 젤스키의 아파트는 요새가 되었어." "이라크의 움직임은 없습니
까?" "없네." "M캡슐은 아직 아일린 젤스키의 아파트에 있습니까?" "거의 확실하다고 보네.
CIA와 FBI가 아일린 젤스키의 아파트를 요새처럼 지키는 것을 보면 그들도 M캡슐을 찾지
못한 것 같아." "M캡슐은 모두 몇 개입니까?" "6개야." "얼마만한 크기입니까?" "마이크로
필름이 들어있는 캡슐이니까 아주 조그마한 것이라고 보아야 하네. 마이크로 필름은 우표딱
지 뒤에도 감출 수 있도록 작고 얇아." "숨길 곳이 아주 많겠군요." "그래서 CIA와 FBI도
찾지 못한 것이 아닌가 생각하네." 이무영 소령은 고개를 끄덕거렸다. 매기 한이 운전하는
자동차는 어느덧 흑인 거주지역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저길세." 박천수 무관이 붉은 벽돌
건물을 눈으로 가리켰다. 이무영 소령은 재빨리 박천수 무관이 가리키는 붉은 벽돌 건물을
쳐다보았다. "저기 경관이 두 명 모이지?" "예." "왼쪽 1층일세." 아일린 젤스키가 살던 아파
트는 이방인이 보기에도 허름하고 보잘 것 없었다. 광장에 주차되어 있는 차들도 대부분 낡
고 초라한 것들이었다. 이무영 소령은 눈살을 찌푸렸다. 건물은 7층인데 옥상으로 침입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서인 듯 옥상에도 사람의 그림자가 어른거리고 있었다. (침입하기가 수
월치 않겠군.) 이무영 소령은 속으로 생각했다. 게다가 M캡슐이 어디에 숨겨져 있는지, 어
떤 모양을 하고 있는지도 알 수 없었다. 그는 막막한 기분을 느꼈다. "우리 요원들이 이곳에
얼마나 있습니까?" "워싱턴과 뉴욕에서 차출한 인원까지 모두 12명이네." "CIA에 노출되어
있는 인물들입니까?" "거의 대부분...그러나 CIA는 아직 우리가 개입되어 있는 것을 모르고
있네. 우리가 개입할 시간도 없이 일이 저질러졌지만." "한 바퀴 더 돌까요?" 매기 한이 백
미러를 들여다보며 물었다. "좋은 생각이야." 박천수 무관이 대답했다. "자네 혼자 왔나?"
"한국에선 혼자 왔습니다." "그럼?" "프랑스에서 같이 온 일행이 있는데 지금쯤 필라델피아
에 도착해 있을 겁니다." "누군가?" "그쪽에서 밝히지 말라고 요구했습니다." "대통령 각하
도 알고 계시나?" "대통령 각하께서 계획한 일입니다. 우리 정보가 CIA쪽에 새어 나간다고
걱정을 하고 계십니다." "CIA는 도청 능력이 뛰어나니까." "대통령 각하께서는 이중첩자가
KCIA에 있다고 하셨습니다." "이중첩자가?" 박천수 무관이 눈이 휘둥그렇게 떴다. "아일린
젤스키의 방은 비어 있습니까?" "비어 있네, 뉴욕에서 동생이 왔는데 모텔에 머물고 있는
모양이야." "이름이 모죠?" "이자벨 젤스키, FBI수사관 1명과 CIA요원 한 명이 미행하고 있
어." "직업은요?" "뉴욕 브루클린의 창녀야. 언니를 닮아서 몸이 뚱뚱해." 그 동안 승용차가
다시 아일린 젤스키의 아파트 앞을 통과했다. "어디에 머물겠나?" "숙소가 준비되어 있습니
까?" "사실은 은성전자 대리점에 있네. 숙소는 독신자 직원 아파트를 비워 놓았으니깐 그
아파트를 사용하면 되네." "그럼 먼저 사무실로 가시지요." 이무영 소령이 덤덤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러지." 박천수 무관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이무영 소령은 핸들을 잡고 있는 매기
한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응시했다. 매기 한은 교포 3세였다. 얼굴이며 피부색이 완전한 백인
이었다. 몸매는 젊은 아가씨답지 않게 풍만했다. 사내를 많이 거친 여자라는 것을 몸매만 보
고도 느낄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녀는 묵묵히 운전만 하고 있었다. 운전이 능숙했다. 날씨는
비가 내릴 듯이 찌뿌드드했다. 필라델피아 KCIA는 은성전자 대리점 지점장 실을 임시 사무
실로 이용하고 있었다. 사무실에 들어서자 40대의 한국인 사내가 그들을 맞이했다. "KCIA
워싱턴 책임자일세." 박천수 무관이 그 사내를 이무영 소령에게 소개했다. "정기택입니다."
"이무영입니다." 그들은 가벼운 악수로 인사를 나누었다. "변장술이 대단하군요." 정기택
KCIA워싱턴 책임자는 이무영 소령이 프랑스에서 변장을 하고 왔다고 얘기하자 감탄을 했
다. 매기 한과 박천수 무관은 이미 그의 변장을 알고 있었다. "난 오후에 워싱턴으로 돌아가
네." "대사관을 너무 오랫동안 비웠어. 그리고 나는 첩보가 전문이 아니야." "..." "필요한 것
이 있으면 정과장에게 말하게. 매기 한도 자네를 도울 걸세." "잘 알겠습니다." 대답을 한
뒤 이무영 소령은 새삼스럽게 정기택을 쳐다보았다. 정기택은 3년째 워싱턴과 뉴욕에서 정
보활동을 해 왔다고 하였다. 눈매가 날카롭고 몸이 다부져 보였다. "그럼 어디 가서 식사나
할까?" 시간은 낮 12시가 가까워지고 있었다. 그들이 밖으로 나오자 빗방울이 후두둑 떨어
지기 시작했다. 그러나 한국의 장마처럼 빗줄기가 굵고 억세지는 않았다. 그들이 차가운 빗
줄기를 맞으며 근처에 있는 차이나타운으로 몰려갔다. "여기 만리장성이라는 중국집이 이곳
에서는 제일 유명합니다." 보이의 안내를 받아 방으로 들어서자 정기택이 박천수 무관을 사
석으로 안내했다. 이무영 소령은 청요리가 준비되는 동안 밖으로 나와 샤론 데닝스에게 전
화를 걸었다. 샤론 데닝스는 이미 필라델피아 중심 가에 있는 '올림 포스 호텔'에 도착해 있
었다. "산 호세입니다." "샤론입니다." "무사히 도착했군요?" "네, KCIA의 형편은 어때요?"
"KCIA는 현재 아무 작전도 세워 놓지 않았습니다." "그들도 M캡슐이 어디에 숨겨져 있는
지 전혀 모르나요?" "전혀 모르고 있습니다. 아일린 젤스키의 아파트 어딘가에 숨겨져 있으
리라는 추측만 하고 있습니다." "FBI와 CIA가 철저하게 수색을 했을 거 아녜요?" "그들도
찾지 못한 것 같다고 합니다." "M캡슐은 모두 몇 개죠?" "6개입니다." "제이콥스 박사가 틀
림없이 반출했나요?" "예, 그건 거의 확실한 것 같습니다." "좋아요. 그럼 제이콥스 박사의
그날 행적에 대해서 좀 알아 봐주세요. 이쪽에서도 나름대로 알아볼 테니까요." "좋습니다."
"4시에 필라델피아 흑인 거주지역 1블록으로 나오세요. 거기서 아일린 젤스키의 아파트까지
걸으면서 계획을 세워요. 오늘 저녁에 이라크가 움직인데요." "이라크가요?" "바그다드에 있
는 우리 요원으로부터 온 연락이니까 틀림없는 정보예요." "알겠습니다." "그럼 4시에 만나
요." 찰칵 전화가 끊겼다. 이무영 소령은 수화기를 내려놓고 방으로 돌아갔다. 그는 새삼스
럽게 이스라엘 비밀첩보부의 조직이 상당히 우수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제이콥스 박사의
그날 행적을 알고 있습니까?" "오전 행적은 알지 못하네. 우린 점심때가 되어서야 겨우 제
이콥스 박사의 얼굴을 확인했네." 박천수 무관의 대답이었다. "샘 오스틴이 CIA를 배신하고
제이콥스 박사의 M캡슐을 탈취하여 우리에게 팔려고 했어요. 그날 아침 11시 30분에 샘 오
스틴과 무관님이 만나서 20만 달러를 건네주었어요. 전 그 장소에 대기하고 있다가 샘 오스
틴을 미행하고 샘 오스틴이 제이콥스 박사를 미행하는 걸 알았어요." 매기 한이 설명을 덧
붙였다. "제이콥스 박사는 브라운연구소에서 하루종일 움직이지 않았나요?" "아녜요. 점심
때 브라운연구소에서 나와 5번가에 있는 그의 아파트에 들렸다가 갔어요. 멀어서 자세히 부
이지는 않았지만 무슨 선물상자 같은 것을 가지고 브라운연구소로 되돌아갔어요." "선물상
자요/" "내의상자 같은 것이었어요. 퇴근할 때 아일린 젤스키가 브라운 연구소에서 가지고
온 것을 보면 아일린 젤스키에게 선물을 했나봐요." "그 외에 다른 일은 없었나요?" "없었어
요." 매기 한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때 주문을 한 청요리가 들어왔다. 그들은 대화를 멈추
고 청요리를 먹기 시작했다. 식사 동안에 대화는 거의 없었다. 이무영 소령은 식사를 하면서
줄곧 제이콥스 박사가 브라운연구소에서 M캡슐을 어떻게 반출했을까 하는 생각만 했다. 그
들이 차이나타운의 청요리 집에서 나온 것은 1시 30분이었다. 그는 매기 한의 안내로 필라
델피아 시내를 한 바퀴 돌았다. 필라델피아는 전혀 낯선 도시였다. 육군 대위 시절 영어군사
학교에 6개월간 유학했을 때 워싱턴과 뉴욕, 시카고, 로스앤젤레스를 돌아보긴 했으나 필라
델피아는 처음이었다. 매기 한은 차분하고 조용한 아가씨였다. 미국인과의 혼혈이라 머리도
금발이고 눈빛이 파랬으나 얼굴은 동양형이었다. 그들은 필라델피아 시내를 한 바퀴 돈 뒤
흑인 거주지역 1블록으로 갔다. 3시 50분이었다. 매기 한이 차를 끌고 사라지자 샤론 데닝스
가 건물 모퉁이에서 레인코트 차림으로 모습을 나타냈다. "날씨가 좋지 않군요." 그는 샤론
데닝스의 머리 위에 박쥐우산을 씌워주었다. 샤론 데닝스가 그의 팔짱을 끼었다. "걸으면서
얘기해요." 흑인 거주지역은 한가했다. 낡고 우중충한 벽돌건물, 깨진 보도 블록, 페인트가
벗겨진 잔디밭의 철책... 아파트의 베란다에는 그래도 색색의 꽃이 친 화분들이 놓여 있었다.
"이라크는 어떤 방법으로 아일린 젤스키의 아파트에 침입합니까?" "방법까지는 몰라요. 필
라델피아 이스턴호텔까지 레오니 핫산이라는 이라크 국방정보국 간부가 본부를 설치하고 공
작을 지휘하고 있어요. 오늘밤 9시에 침입한대요." "이라크는 M캡슐을 찾으려고 혈안이 되
었군요." "KCIA는 아직도 아무 계획을 세우지 않았나요?" "KCIA의 이번 공작은 대통령 특
명으로 제가 지휘하게 되어 있습니다." "M캡슐이 어디에 있는지 알아냈어요?" "아닙니다."
"그러다가 이라크에게 M캡슐을 뺏기면 어떻게 하죠?" "이라크까지 쫓아가서라도 찾아야죠."
샤론 데닝스가 피식 웃었다. 그들은 1블록을 건너 2블록을 걷기 시작했다. 흑인 거주지역의
아파트들은 모두 똑같은 형태로 건축되어 있었다. "우린 9시 이후에 아일린 젤스키의 아파
트에 침입하는 게 좋겠어요." "어떻게요?" "이라크가 어떤 방법으로 침입할지는 모르겠어요.
그러나 이라크가 아무리 유능하다고 하더라도 CIA에 적발될 게 틀림없어요." "그러면 경비
가 강화되지 않을까요?" "아녜요. 이라크 요원들이 체포되거나 사살되면 CIA는 안심하게 될
거예요. 원래 이번 사건은 이라크에 의해 발단이 되었으니까 제3의 세력이 있으리라는 상상
은 못할 거예요." "그렇군요." "내 생각에는 옥상으로 해서 아일린 젤스키의 아파트로 침입
하는 게 좋겠어요. 오늘밤 비바람이 몹시 심하게 분다니까 잠복해 있는 CIA요원들의 눈에
띄지는 않을 거예요." "좋습니다. 준비는 어떻게 하지요?" "우리가 소음총과 적외선 투시경
을 준비할게요. KCIA에선 로프와 마취총을 준비하세요. 고성능 워키토키도 필요해요. 도청
방지 장치가 되어 있는 것으로요. 로프로 벽을 탈 수 있겠죠?" "예." 그들은 이내 아일린 젤
스키의 아파트가 있는 제3블록에 이르렀다. 아일린 젤스키의 아파트 앞 광장은 겉으로 보기
에 평온하고 조용했다. 광장에 주차되어 있는 낡은 차들. 출입구로 드나드는 흑인들, 그들
중엔 분명히 주민으로 위장한 FBI 수사관들과 CIA요원들이 섞여 있을 것이었다. "지도를
그려서 작전 계획을 세워야 하니까 잘 봐두세요." 샤론 데닝스의 말이었다. 그들은 주위에
잠복해 있는 CIA요원들과 FBI수사관들이 눈치채지 않도록 6블록까지 천천히 걸어갔다가 되
돌아 온 다음, 이번엔 샤론 데닝스의 차로 1블록에서 6블록까지 갔다가 되돌아 왔다. 아일린
젤스키의 아파트 주위의 시설물들을 완전히 눈에 익히기 위해서였다. 그들이 샤론 데닝스가
머물고 있는 울림포스호텔에 도착한 것은 5시 15분이었다. 샤론 데닝스는 레인코트를 벗고
거실의 탁자 위에 지도 한 장을 폈다. 아일린 젤스키가 살고 있는 필라델피아 흑인 거주지
역의 지도였다. "여기가 아일린 젤스키의 아파트예요. 출입구가 모두 4개 있죠." 샤론 데닝
스가 지도의 한 지점을 가리키며 설명을 시작했다. "이라크는 9시에 행동을 개시해요. 어떤
방법으로 침입할지 모르지만 소란이 일어날 거예요. 우린 그 틈에 첫 번째 출입구로 잠입.
출입구를 지키고 있는 CIA요원을 제거하고 옥상으로 뛰어 올라가는 거예요." " 옥상에 저격
수가 있을 거 아닙니까?" "저격수도 우리 손으로 제거해야 돼요. 문제는 옥상에서 호프를
타고 아일린 젤스키의 아파트로 내려갈 때와 나올 때예요. FBI 수사관들이나 CIA요원들에
게 발각되면 우리는 로프에 매달려 벌집이 될 테니까요." "아주 위험한 작전이군요." "위험
한 작전이 가장 안전한 작전이 될 수도 있죠." "이 작전에는 얼마나 시간이 소요될까요?"
"그건 알 수 없어요." "탈출 방법은요?" "아일린 젤스키의 아파트는 요새화되어 있으니까 다
시 옥상으로 올라오기는 힘들 거예요. KCIA요원들은 2블록과 3블록에 대기시키세요. M캡
슐을 찾은 다음 즉시 워키토키로 요원들을 아파트 입구로 출동시켜 탈출해야 해요. 그들이
우리 탈출을 지원해야 합니다." "잘못하면 흑인 거주지역이 전쟁터가 되겠군요." "전쟁엔 반
드시 이겨야 해요." 샤론 데닝스가 어깨를 흔들며 웃었다. 이무영 소령은 샤론 데닝스와 헤
어져 호텔에서 나오자 매기 한을 전화로 불렀다. 매기 한과 함께 준비해야 할 것이 많이 있
었다.
솔리스트 폴은 레오니 핫산이 머물고 있는 이스턴 호텔 7층에서 엘리베이터를 내렸다. 필
라델피아 시간으로 밤 8시였다. 그는 엘리베이터에서 내리자 검은 안경을 쓴 2명의 경호원
을 발견했다. 폴은 호흡을 죽이고 그들이 가까이 오기를 기다렸다. 키가 작달막한 것이 모두
아랍인들로 보였다. 그들은 재빨리 권총을 겨누고 그에게 다가왔다. 그는 두 손을 어깨 높이
로 들었다. "무슨 일이야?" 오른쪽에 있는 사내가 날카롭게 소리를 질렀다. "레오니 핫산을
만나러 왔소." 그는 무표정하게 대답했다. "당신은 누구야?" "솔리스트 폴이오." "솔리스트
폴?" 오른쪽에 있는 사내가 고개를 갸우뚱했다. 솔리스트 폴은 입가에 냉소를 떠올렸다. "바
그다드에서 카말 핫산 장군의 명령을 전하러 왔소." 사내들이 흠칫하는 표정을 지었다. "몸
수색을 해야겠소." 왼쪽에 서 있던 사내가 권총을 허리춤에 집어넣고 그에게 가까이 왔다.
오른쪽에 있는 사내가 경계심을 풀어버리고 그의 얼굴을 주시하고 있었다. 그는 왼쪽에 있
는 사내가 몸수색을 하기 위해 가까이 오자 재빨리 주먹으로 명치끝을 내지르고 오른쪽에
있는 사내를 향해 몸을 날려 구둣발로 턱을 찼다. 두 사내가 거의 동시에 억 하는 비명을
지르며 카펫 바닥에 나뒹굴었다. 순식간의 일이었다. 그는 빠르게 매그넘 45구경을 뽑아 두
사내에게 겨누었다. "움직이지 마! 움직이면 죽는다!" 사내들은 엉거주춤 몸을 일으키려다가
소음 장치가 붙어있는 매그넘 45구경을 겁먹은 표정으로 응시했다. "7층엔 너희들 말고 몇
명이나 있어?" "둘이오." "누구누구야?" "레오니 핫산과 여자요." "다른 놈들은 어디 갔어?"
"아일린 젤스키의 아파트로 갔소." "거긴 뭣하러 갔나?" "뭔가 찾으러 갔소." "그게 뭐지?
다 알고 있으니까 죽기 싫으면 속이지 마!" "M캡슐이오." "M캡슐이 뭐지?" "마이크로 필름
이오." "마이크로 필름엔 무엇이 들어 있지?" "모르오." "M캡슐이 아일린 젤스키의 아파트
에 숨겨져 있나?" "모르오." "정말 모르나?" 그는 권총의 총구를 오른쪽에서 나뒹굴고 있는
사내의 입에 쑤셔 넣고 왼쪽에 있는 사내에게 물었다. "모, 모릅니다." "대답을 안하면 죽이
겠다!" "저, 정말 모릅니다." 그 순간 그의 관자놀이가 꿈틀하고 움직였다. 그가 방아쇠를 당
길 때면 습관적으로 일어나면 근육 떨림이었다. 그러자 슉 하는 소리와 함께 사내의 입에서
붉은 피가 왈칵 쏟아졌다. 그는 얼굴을 찡그렸다. 금세 피냄새가 역하게 풍기고 있었다. "모,
모릅니다. 정말 우리도 모르고 있습니다." 그의 차가운 눈빛이 왼쪽 사내를 향하자 사내가
몸을 부르르 떨었다. "레오니 핫산은 어디에 있나?" "특실입니다. 복도 끝입니다." "무얼하고
있지?" "여, 여자와 자고 있습니다." "좀 쉬는 게 좋겠어." 그는 권총을 공포에 질려 있는 사
내의 머리를 후려쳤다. 사내의 머리에서 퍽 하는 소리가 나면서 사내가 카펫 바닥에 나뒹굴
었다. 그는 몸을 일으켰다. 복도는 조용했다. 그는 소음총을 들고 복도 끝으로 빠르게 걸어
갔다. 레오니 핫산이 있는 방은 도어가 잠겨 있지 않았다. 소리없이 도어를 열고 들어가자
침실 쪽에서 뜨거운 교성이 들려오고 있었다. 그는 침실 문을 걷어차고 안으로 뛰어 들었다.
"누, 누구야?" 알몸의 사내가 놀라서 후닥닥 침대 밑으로 굴러 떨어졌다. 여자는 빠르게 침
대 시트를 끌어당겨 나신을 가렸다. "레오니 핫산! 움직이지 마라!" 그는 옷을 입으려고 하
는 사내에게 차갑게 말했다. "넌 누구야?" 사내가 엉거주춤 그를 향해 물었다. "솔리스트 폴
이다. CIA의 살인 면허를 갖고 있다. 묻는 말에만 대답해라. M캡슐은 어디에 있나?" "모른
다." "아일린 젤스키의 아파트에 아직도 있나?" 레오니 핫산이 얼굴을 찡그렸다. "M캡슐에
는 무엇이 들어있나?" "마이크로 필름이다." "무엇을 찍은 마이크로 필름인가?" "말할 수 없
다." 솔리스트 폴은 소음총을 침대 위에 누워있는 여자를 향해 겨누었다. 여자의 얼굴이 하
얗게 질려 있었다. "마이크로 필름으로 무엇을 찍었나?" "..." "대답해라!" "난 외교관이다.
외교관에는 면책특권이 있다." 그때 솔리스트 폴의 소음총이 슉 하는 소리를 냈다. 여자의
나신을 가린 하얀 시트가 금방 피로 흥건히 젖었다. 그의 총탄은 연달아 두 번이나 여자의
복부를 관통한 것이다. "다시 묻겠다. 마이크로 필름으로 무엇을 찍었나?" 솔리스트 폴이 탄
창을 갈아 끼웠다. 레오니 핫산은 비로소 소름이 오싹 끼쳤다. "핵연료 재처리공장 설계도와
시공사양서이다." "어디에 숨겨져 있나?" "그건 우리도 모른다. 제이콥스 박사만 알고 있다.
그가 죽었기 때문에 우리도 어디에 숨겨져 있는지 모른다." 레오니 핫산은 빠르게 대답하고
있었다. "샘 오스틴은 왜 죽었나?" "모른다. 그는 우리를 미행하고 있었던 것 같다." "샘 오
스틴이 미행하고 있었던 것을 몰랐나?" "몰랐다. CIA가 우리의 계획을 알고 있는 줄은 제이
콥스 박사도 우리도 몰랐다." "제3자가 개입했나?" "제3자는 모른다. 우리는 CIA까지도 눈
치채지 못하게 하고 있었다." "핵연료 재처리공장의 설계도와 시공사양서는 무엇 때문에 필
요하지?" "핵무기를 제조하기 위해서다." "핵무기? 그렇다면 핵무기 설계도가 필요한 것이
아닌가?" "핵무기는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것처럼 간단하게 제조할 수가 없다. 핵무기를 제
조하는 기술이 있다고 하더라도 핵무기의 원료가 되는 플루토늄 239가 없으면 제조할 수가
없다. 플루토늄 239는 핵연료를 고농축하여 만든다. 그러나 핵연료를 재처리하는 것은 막대
한 시설과 기술이 필요하다." "그래서 브라운연구소에서 핵연료 재처리공장의 설계도와 시
공 사양서를 제이콥스 박사가 마이크로 필름으로 찍어서 반출했나?" "그렇다." "자세히 알려
줘서 고맙군." "쏘지 마라! 쏘지 마!" 그러나 솔리스트 폴의 얼굴에 냉소가 가득 떠오른 순
간 레오니 핫산은 자신의 가슴을 움켜쥐면서 카펫 바닥에 나뒹굴었다. 그의 손으로 끈적거
리는 피가 흥건하게 묻어나고 있었다. "자. 잔인한 놈." 에오니 핫산은 안간힘을 쓰며 외쳤
다. 그러나 냉혹한 솔리스트 폴의 총구에서 또 다시 슉 하는 소리가 들리고 이마에 뭔가 박
히는 것 같은 충격을 느낀 순간 레오니 핫산은 숨이 끊어지고 말았다. 솔리스트 폴의 두 번
째 총탄이 레오니 핫산의 이마를 정확하게 관통한 것이다. "솔리스트 폴이다. 이스턴 호텔 7
층으로 시체처리반을 보내라." 솔리스트 폴은 레오니 핫산의 숨이 끊어진 것을 확인한 후
CIA의 로버트 리치에게 전화를 걸었다. "시체는 몇 구인가?" "넷이다." "도살을 했군." 로버
트 리치가 탐탁지 않은 기색으로 말하고 전화를 끊었다.
8시 40분에 샤론 데닝스는 흑인 거주 지역 링컨로 2번가에 나타났다. 이무영 소령은 샤론
데닝스를 만나 그녀의 차에서 장비를 확인했다. 비바람은 점점 거칠어지고 있었다. 그들은
장비 확인이 끝나자 차에서 내려 3번가로 걸어갔다. 아일린 젤스키의 아파트가 있는 제 3블
록이었다. "여기가 좋겠어요." 그들은 광장에 주차되어 있는 링컨 콘티넨탈 옆에 몸을 바짝
웅크리고 앉았다. 아일린 젤스키의 아파트는 불이 꺼진 채 조용했다. 이무영 소령은 가방 속
에서 야간침투용 안경을 꺼내 썼다. 가로등이 없는 3번가의 광장은 칠흑처럼 어두웠다.
"KCIA는 얼마나 대기하고 있어요?" "6개조가 대기하고 있습니다." "한 번 확인해 보세요."
이무영 소령은 고성능 워키토키를 오픈시키고 KCIA요원들과 일일이 연락을 했다. 6개조 12
명이 모두 계획대로 안전한 위치에 대기하고 있었다. "저기 FBI 수사관들이 있어요." 샤론
데닝스가 담뱃불이 반짝이는 광장 한 지점을 가리켰다. "아일린 젤스키의 아파트 앞에는 필
라델피아 시경찰이 있고요." "건너편에 있는 사람들은 CIA인 것 같습니다. 저쪽 가로수 뒤
에 2명, 건물 모퉁이에 2명이 은신하고 있습니다." "그럼 모두 8명이군요." "어딘가 보이지
않는 곳에도 또 CIA가 은신하고 있을 겁니다." "옥상에서 로프를 타고 내려오면 집중사격을
당하겠어요." "일단 옥상으로 올라가 대기하는 게 좋겠습니다." "좋아요." 이무영 소령은 손
목 시계를 보고 무전기를 오픈 시켰다. "독수리 나와라. 여기는 비둘기. 20시 55분. 행동을
개시한다. 움직이면 안된다. 이상이다." "가요." 샤론 데닝스가 레인코트의 깃을 바싹 여미고
3번가의 제1출입구로 빠르게 걸음을 떼어놓기 시작했다. 이무영 소령은 가방을 들고 샤론
데닝스의 뒤를 따르기 시작했다. 3번가의 아파트 첫번째 출입구엔 양복을 입은 흑인 사내가
신문을 보는 척하며 의자에 앉아 있었다. 샤론 데닝스가 가까이 가자 사내가 의자에서 일어
나려는 자세를 취했다. 그러나 다음 순간 퍽하는 소리와 함께 사내가 다시 의자에 주저앉았
다. 샤론 데닝스가 레인코트의 주머니에서 마취총을 꺼내 쏘았던 것이다. "올라가요." 그들
은 7층까지 뛰어서 올라갔다. 옥상으로 향하는 비상구에도 한 명의 사내가 앉아서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그러나 그 사내도 샤론 데닝스의 마취총에 의해 잠재워졌다. 옥상엔 비바람
이 몰아치고 있는데도 한 명의 저격수가 자동소총을 들고 광장을 감시하고 있었다. "저 친
구는 내가 잠재우지요." 이무영 소령은 광장을 내려다보는데 열중한 저격수를 겨누고 마취
총을 쏘았다.J 저격수가 풀썩하고 쓰러졌다. 그는 무전기에 대고 지시를 했다. "가로수 2개
를 뽑았다. 첫 번째 진입로에 가로수 2개를 새로 심어라." "알았다." 가로수 2개를 뽑았다는
것은 보초를 제거했다는 뜻이고 새로 심으라는 것은 KCIA요원을 보초 대신 배치하라는 뜻
이었다. "어떻게 된 일이지요?" 그들은 옥상에서 광장을 내려다보았다. 광장은 아직도 조용
하기만 했다. "아직 모르겠어요." 샤론 데닝스가 얼굴에 흐르는 빗물을 손등으로 훔쳤다. 비
바람이 차갑게 얼굴을 때리고 있었다. 그때 아일린 젤스키의 아파트 앞에 승용차 한 대가
굴러 와서 멎었다. "왔어요." 샤론 데닝스가 낮게 소곤거렸다. 승용차에서 흑인 남자와 여자
가 내리고 있었다. "누구죠?" "이자벨 젤스키인 것 같습니다. 남자는 누구인지 모르겠습니
다." 흑인 사내와 흑인 여자가 건들대며 아일린 젤스키의 아파트 출입구로 들어서자 경관들
이 그들을 제지했다. 그들은 한동안 옥신각신하다가 안으로 들어갔고 곧이어 냉동차 한 대
가 광장으로 들어왔다. 냉동 차에서는 두 명의 사내가 내려 차 뒷문을 열고 고깃덩어리를
꺼내 어깨에 짊어지고 아파트의 출입구에서 나와 주위를 경계하기 시작했다. "어떻게 된거
죠?" 샤론 데닝스가 의아한 듯이 물었다. "경관이 바뀌었습니다. 이라크 요원들이 경관들을
처치하고 옷을 바꿔 입은 것 같습니다." "어떻게 알죠?" "옷은 바꿔 입었지만 신발은 바꿔
신지 않았습니다." "아." 샤론 데닝스가 감탄했다는 표정을 지었다. "아일린 젤스키의 동생은
아파트로 들어갔을까요?" "들어갔겠죠." "CIA나 FBI 수사관들은 눈치를 채지 못한 것 같군
요." "아닙니다. CIA나 FBI 수사관들은 이라크 요원들이 M캡슐을 회수해 나오기를 기다리
고 있을 겁니다." "그럼 잠시 상황을 지켜 보는게 좋겠군요." "예." 이무영 소령은 얼굴을 때
리는 차가운 빗방울을 주먹으로 훔치며 대답했다. 비바람이 몰아치는 어둠 속에서 FBI 수사
관들과 CIA 요원들이 아일린 젤스키의 아파트로 접근하고 있는 것이 뚜렷이 보이고 있었
다. 그는 링컨로 일대에 대기중인 KCIA요원들에게 다시 지시가 있을 때까지 움직이지 말라
고 명령을 내렸다. 상황은 긴박했으니 섣불리 움직일 수가 없었다. 그는 얼굴을 때리는 비바
람 속에서 아일린 젤스키의 죽음과 제이콥스 박사. 이라크 국방정보국의 요원인 압둘라 소
령의 죽음을 잠깐 생각했다. 무엇보다도 샘 오스틴의 죽음이 한국으로서는 가장 큰 손실이
었다. (제이콥스 박사는 M캡슐을 어디에 숨긴 것일까?) 마이크로 필름은 문자 그대로 조그
만 것이어서 우표딱지 뒤에도 숨길 수 있고 사람의 몸 속에 수술을 하여 집어놓을 수도 있
다. 그러므로 그것을 찾아낸다는 것은 숨긴 사람이 아니고서는 불가능한 일이나 마찬가지였
다. (그날 제이콥스 박사는 아일린 젤스키에게 선불 상자를 주었어 여자의 내의가 들어있는
선물상자... 브라운 연구소로 들어갔다가 다시 나온 내의상자... 제이콥스 박사는 왜 하필이면
그날 아일린 젤스키에게 선물을 했을까... 그것도 아파트가 아닌 사무실에서...혹시 M캡슐을
우표딱지 뒤에도 숨길 수 있으니까 얼마든지 가능해...그렇다면 내의상자 어디에 숨긴 것일
까...팬티? 브래지어? 그래 브래지어컵이 공간이 많으니까 거기가 숨기기 제일 좋을 거야!)
이무영 소령은 갑자기 머리 속이 환해지는 느낌이 들었다. "샤론." "네." "M캡슐이 어디에
숨겨져 있는지 알 것 같습니다." "그래요?" "내 생각엔 아일린 젤스키의 브래지어컵에 숨긴
것 같습니다." "브래지어컵이요?" "제이콥스 박사는 그날 아일린 젤스키에게 팬티와 브래지
어 3세트를 선물했습니다. 피에르 가르뎅 상표가 붙은 것으로 말입니다. 그 내용은 신문에도
나와 있습니다. 그런데 그 내의상자는 브라운 연구소까지 들어갔다가 나왔습니다. 아시다시
피 브라운 연구소는 경비가 삼엄합니다. 적외선 탐지기까지 있으니까요. 결국 숨길만한 곳은
브래지어컵밖에 없다는 결론이 나옵니다." "정말 놀라운 생각이에요! 포스트 박이 왜 당신을
이곳에 파견했는지 알겠어요." 샤론 데닝스가 갑자기 그를 포옹하고 입술을 비벼왔다. "아직
확실한 것은 아닙니다." 그는 계면쩍게 웃으며 샤론 데닝스의 푸른 눈을 응시했다. "아녜요.
틀림없이 그곳에 숨겼을 거예요." 샤론 데닝스가 다시 그의 입술에 자신의 입술을 포갰다.
"샤론." 그는 조용히 샤론 데닝스의 포옹을 풀었다. 이스라엘 여인과의 뜨거운 입맞춤은 처
음이었다. "당신을 갖고 싶군요." "원하신다면..." 샤론 데닝스가 웃었다. "우린 동지니까요."
그때 아일린 젤스키의 아파트에서 총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이무영 소령이 재빨리 광장
을 내려다보자 이라크 요원들과 미국측 요원들간에 격렬한 총격전이 벌어지고 있었다. "어
떻게 하지요? 시간이 흐를수록 이라크가 불리해질 텐데요." "글쎄요." "일단 이라크를 탈출
시켜야 해요. 그래야 미국측에서 이라크를 추격해요." "좋습니다. 그럼 KCIA를 동원하죠."
"어떻게요?" "기다려 보십시오." 이무영 소령은 무전기를 꺼내 링컨로 2번가에 대기중인
KCIA 요원들에게 급히 지시를 내리기 시작했다. "1조와 2조에게 명령한다. 1조와 2조는 지
금 즉각 링컨로 3번가에서 이라크 요원들과 총격전을 벌이고 있는 CIA와 FBI의 뒤를 기습
하라. 이라크 요원들이 단 한 명이라도 탈출하면 즉각 철수한다! 이상이다!" KCIA의 1조와
2조가 그의 명령을 받고 3번가에 나타난 것은 2분도 걸리지 않아서였다. 그들은 승용차에
탄 채 FBI와 CIA요원들의 뒤에서 무차별 위협사격을 했다. "완전히 전쟁터가 되었군요." 샤
론 데닝스가 엎드려서 말했다. 이라크 요원들이 그 틈을 노려 냉동차에 올라타 질주하기 시
작했다. "1조와 2조, 즉시 철수하라!" 그는 KCIA에 무전기로 다시 지시했다. 어물어물하다
가는 KCIA가 개입하고 있다는 것을 미국에서 알게 되는 것이다. "로프를 내려요!" 샤론 데
닝스가 외쳤다. 그는 재빨리 로프를 아일린 젤스키의 아파트로 내렸다. 이라크 요원들이 탄
냉동차는 이미 광장을 빠져나가고 있었고 FBI 수사관들과 CIA 요원들이 집중사격을 하면서
추격전을 벌이고 있었다. KCIA의 1조와 2조 요원들은 이미 링컨로 1번가로 사라지고 없었
다. "내가 먼저 내려가겠습니다." 이무영 소령은 재빨리 가죽장갑을 끼고 로프에 매달렸다.
로프를 잡고 벽을 타는 것은 자신이 있었다. 그는 공수특전단 출신이었다. 이무영 소령은 거
미처럼 민첩하게 로프를 타고 아래로 내려가기 시작했다. 벌써 골목과 거리에서 경찰 사이
렌 소리가 희미하게 들려오고 있었다. 서둘러야 했다. 그는 아일린 젤스키의 아파트까지 내
려가 발로 유리창을 깨고 안으로 뛰어들었다. 아파트의 거실은 캄캄했다. 이내 샤론 데닝스
도 로프를 타고 내려와 합류했다. 침실은 마구 어질러져 있었다. 그들은 야시경으로 침실을
수색하여 마침내 브래지어를 찾아냈다. "여기를 아무도 지키지 않으니 이상하군요. 마치 우
리들이 찾아오기를 기다리는 것처럼..." 이무영 소령은 아일린 젤스키의 아파트에 아무도 없
는 것이 의아했다. "어서 M캡슐을 찾아요. 어물거리고 있을 시간이 없어요." 샤론 데닝스가
그를 재촉했다. 그는 샤론 데닝스의 재촉에 서둘러 브래지어를 찾아 컵 안쪽을 뜯었다. "있
어요!" 예상했던 대로였다. 브래지어 컵 하나에 플라스틱 M캡슐이 하나씩 모두 6개가 고스
란히 들어 있었다. 샤론 데닝스가 환성을 질렀으나 그는 묵묵히 M캡슐을 회수하여 품속에
넣었다. 이해할 수 없는 현상이었다. "이제 나가요! 서둘려야 해요!" 샤론 데닝스가 소리를
질렀다. "알았소." 그는 무전기로 첫 번째 출입구에 대기하고 있는 KCIA요원들에게 철수하
라고 지시했다. 그리고 링컨로 1번가에 대기중인 3조에게 링컨로 3번가로 오라고 지시하고
4, 5, 6조는 링컨로 4번가에 대기했다가 미행자가 있으면 방해하라고 지시했다. 그들이 아일
린 젤스키의 아파트 출입구를 나왔을 때 벤츠 메르세데츠 한 대가 광장으로 질주해 왔다.
그들은 메르세데츠를 향해 재빨리 달려갔다. 어디선가 총성이 요란하게 울리고 있었다. 그들
은 벤츠 메르세데츠가 속도를 줄이자 빠르게 올라탔다. 총성이 점점 가깝게 들리고 있었다.
"갑시다!" 그는 핸들을 잡고 있는 요원에게 지시했다. 백미러로 뒤를 살피자 회색의 머큐리
한 대가 뒤쫓아오고 있었다. "4조에게 지시한다. 추적당하고 있다. 링컨로 4번가에서 방해하
라." "알았다. 오버!" 4조의 목소리는 잔뜩 긴장하고 있었다. 링컨로 4번가 교차점을 지날 때
머큐리는 간격을 바짝 좁혀 쫓아오고 있었다.
솔리스트 폴은 한 손으로 핸들을 잡고 한 손으로 쇼트건을 들고 앞차를 겨누었다. 그가
이스턴 호텔에서 레오니 핫산을 처치하고 아일린 젤스키의 아파트로 돌아왔을 때 벌써 이라
크 요원들과 미국측 사이에는 총격전이 벌어지고 있었고, 냉동차를 탄 이라크 요원들의 배
후의 지원을 받아 탈출을 하고 있었다. 그는 이라크 요원들을 추격하려다가 광장에 세워 둔
머큐리에 숨어서 잠복했다. 이라크 국방정보국의 수준으로 M캡슐을 찾아낸다는 것은 불가
능하게 생각되었고 제3의 세력이 존재할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의 예
상은 적중했다. 아일린 젤스키의 아파트는 7층까지 모두 비어 있었다. 이라크 국방정보국이
나 제3의 세력이 침입할 가능성이 많았기 때문에 주민들을 소개시켰던 것이다. 아일린 젤스
키의 아파트에서 사내와 여자가 빠르게 뛰어나오고 벤츠 메르세데츠가 정확하게 광장으로
달려들어 오자 가슴이 뛰는 것을 느꼈다. 비로소 상대방이 만만치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솔
리스트 폴은 쇼트건의 방아쇠에 손가락을 걸었다. 앞차를 계속 추적할 수는 없었다. 일단 위
협사격이라도 해서 앞차를 세워야 했다. 그때 머큐리의 뒤에 강한 충격이 왔다. 그가 깜짝
놀라 급브레이크를 밟고 머리를 숙이자 머리 위로 총탄이 빗발치고 있었다. (제기랄!) 그는
머리를 숙인 채 액셀레이터를 힘껏 밟고 핸들을 오른쪽으로 강하게 틀었다. 그 순간 뒤에
오던 차가 머큐리를 스쳐 지나갔고 총탄 하나가 그의 어깨를 스쳤다. 어깨가 화끈거렸다. 그
러나 그는 핸들을 다시 왼쪽으로 틀면서 쇼트건의 방아쇠를 당겼다. 쇼트건이 불을 뿜었다.
그를 추격하던 회색 도요타가 곡예 운전을 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의 쇼트건은 곡예를 하
는 도요타의 차 뒷유리를 박살내고 운전하는 사내의 등을 관통했다. 도요타는 왼쪽 인도의
가로수와 정면으로 충돌했다. 그는 머큐리의 브레이크를 밟았다. 벤츠 메르세데츠는 놓쳤으
나 같은 조직이 분명한 도요타를 잡은 것이 그나마 다행이었다. 그는 머큐리에서 내려 도요
타로 접근하려다가 깜짝 놀라 재빨리 아스팔트 바닥에 엎드렸다. 폭음과 함께 도요타가 산
산조각이 되어 날아가고 있었다. 강력한 폭발이었다. 그는 점점 가까워지고 있는 경찰 사이
렌 소리를 듣고서야 아스팔트 바닥에서 일어났다. 도요타의 잔해가 여기저기 볼썽사납게 흩
어져 있었다.
6월 26일 밤 9시에서 10시 사이에 필라델피아 흑인 거주지역 링컨로에서 일어난 총격전은
미국을 발칵 뒤집어 놓았다. 미국의 시민들은 이 사건이 TV뉴스에 보도되자 커다란 충격을
받았다. 방송은 정규 프로그램을 중단하고 필라델피아 사건을 신속하게 보도했다. '필라델피
아 흑인 거주지역에서 이라크 국방정보국과 미국 CIA와 FBI 수사관들 사이에 시가전을 방
불케 하는 총격전. 미국은 무법천지' '필라델피아 주민들 밤새 공포에 떨어' '며칠 전 4명의
살인사건이 일어난 브라운연구소 전화교환수인 아일린 젤스키의 아파트 앞에서 또 다시 격
렬한 총격전, 사망 7명, 부상 5명, 자동차 1대 폭발!' '아일린 젤스키의 아파트에는 무엇이 있
나?' 이런 내용들이었다. 이 사건은 CIA를 통해 즉각 워싱턴으로 보고되었고 워싱턴은 다시
G7(선진 7개국 정상회담)회담에 참석하기 위해 일본을 방문중인 카터 대통령에게 보고되었
다. 이에 카터 미국 대통령은 일본 영빈관에서 필라델피아의 로버트 리치에게 직접 전화를
걸었다. "도대체 아일린 젤스키의 아파트에는 무엇이 있는 거요?" 대통령은 화가 나 있었다.
로버트 리치는 긴장된 표정으로 솔리스트 폴을 쳐다보았다. "핵연료 재처리 공장의 설계도
를 찍은 마이크로 필름이 숨겨져 있었습니다." "그럼 핵무기 설계도 도난 사건이오?" "예.
웨스팅하우스사 브라운연구소의 제이콥스 박사가 이라크에게 포섭되어 마이크로 필름을 반
출했습니다. 그래서 이라크 국방정보국 요원인 압둘라 소령, 제이콥스 박사, 아일린 젤스키,
CIA요원인 샘 오스틴이 총격전 끝에 죽었습니다. 그것이 1차 사건입니다." "그런 2차 사건
은 어떻게 된 거요?" "아일린 젤스키의 아파트에 숨겨져 있는 마이크로 필름을 회수하기 위
해 이라크가 어젯밤 9시에 기습을 했고 감시중이던 우리 CIA와 FBI수사관들이 대항해 총격
전이 벌어진 것입니다. 이라크 요원 셋이 사살되었고 우리 요원들이 순직했습니다. 부상은
FBI수사관 둘입니다." "사망자가 또 있소?" "현재 조사중입니다만 자동차 폭발로 KCIA요원
둘이 사망했습니다." "KCIA라니?" "한국 중앙정보부 요원들입니다." "그럼 한국이 이 사건
에 개입했소?" "마이크로 필름을 그들이 회수한 것 같습니다." "음." 대통령이 짧게 신음을
토했다. "현재 서울에 있는 우리 CIA요원들에게 한국이 개입하고 있는지. 마이크로 필름이
들어있는. M캡슐을 어떤 루트로 해서 한국으로 가져가려고 하는지 긴급 조사 명령을 내렸
습니다." "잘했소. 어떤 일이 있어도 M캡슐을 다시 찾아오시오. 알겠소?" "예, 각하." 찰칵
전화가 끊겼다. 로버트 리치는 수화기를 내려놓고 낮게 한숨을 내쉬었다. 창으로 아직도 비
바람이 계속해서 몰아치고 있었다. 을씨년스러운 밤이었다. "대통령 각하께서는 뭐라고 하시
오?" 솔리스트 폴이 침울한 목소리로 물었다. "어떤 일이 있어도 M캡슐을 한국으로 보내지
말라고 하셨소." 로버트 리치가 담배를 꺼내 물며 대꾸했다. 그의 눈엔 또다시 가로수와 부
딪치자 대폭발을 일으킨 일산 도요타 승용차의 모습이 선명하게 떠오르고 있었다. 그것은
승용차가 가로수와 부딪혔기 때문에 폭발을 한 것이 아니라 차에 타고 있던 KCIA요원들이
체포당할 위기에 몰리자 강력한 폭발물을 터뜨린 것이 분명했다. 차가 폭발했을 때 잔해가
사방으로 날아가고 KCIA요원들이 거의 형체도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참혹하게 분시되어
버린 사실로 그 짐작을 뒷받침했다. 그러나 폭발물의 파편은 현장에서 찾을 수가 없었다. 그
들은 플라스틱 폭약을 터뜨린 것이다. 로버트 리치는 솔리스트 폴의 머큐리 뒤를 바짝 뒤쫓
고 있었기 때문에 그 사실을 똑똑히 목격할 수 있었다.
8
비는 밤에도 계속해서 내리고 있었다. 정미경 중위는 커피를 손수 끊여 마시며 줄기차게
퍼붓고 있는 빗줄기를 창가에서 바라보았다. 서울은 장마권에 들어있었다. 며칠째 장대 같은
빗줄기가 퍼붓다가 멎고 멎었다가는 퍼붓고는 하였다. 이무영 소령이 미국으로 떠난 지 일
주일. 프랑스에서 이스라엘 비밀첩보부 요원인 샤론 데닝스와 접선했다는 암호 전화가 한
통. 필라델피아에 도착했다는 전화가 한 통 오고는 그만이었다. 이무영 소령의 M캡슐 운반
공작이 성공했는지 어쨌는지 전혀 알 길이 없었다. 청와대에서는 매일같이 대통령이 직접
전화를 걸어왔다. 대통령의 전화는 한결같이 어떻게 되었는가, 그들은 무사한가. 라는 것이
었다. 그녀의 대답은 항상 기다리십시오.였다. 그 이상은 대통령이 아무리 궁금해해도 대답
을 할 수가 없었다. 국방부 정보국 전화라고 해서 도청을 당하지 않으리라는 보장이 없었다.
미국은 한때 청와대까지 도청을 했고 KCIA와 정보사령부는 국내의 중요 인물들에 대한 도
청을 빠짐없이 하고 있었다. 이무영 소령과 그녀에게는 암호 전화를 할 수 있는 시스템이
갖추어져 있었다. 이 암호 전화는 청와대의 대통령 안보담당 특별보좌관과 다시 연락되고,
특별보좌관이 직접 대통령에게 보고하게 되어 있었다. KCIA와 국내에 잠입해 있는 미국
CIA의 도청을 방지하기 위해서였다. 이것은 이무영 소령이 떠나기 직전에 만든 시스템이었
다. 그녀는 천천히 커피잔을 입으로 가져갔다. 빗줄기가 여전히 세차게 쏟아지는 서울의 밤
하늘이 어둡고 음침해 보였다. 국방부 청사 건너 미8군사령부가 들어서 있는 미군기지 내의
울창한 수목들에도 빗줄기는 세차게 쏟아지고 있었다. "첩보전에는 적도 아군도 없어." 국방
부 정보국이 미국을 상대로 첩보전을 하게 되리라는 것은 일찍이 상상조차 해본 일이 없었
다. 미국은 우방이고 혈맹이었다. 6.25때는 수많은 사상자를 내면서 한국을 도와 싸웠고 휴
전이 된 뒤에는 경제원조로 궁핍한 난민을 돕고 전후복구에 기여했다. 그러나 시대가 달라
져 미국은 어느 사이에 동반자. 또는 경쟁자 관계가 된 것이다. 그녀는 그러한 역사의 아이
러니의 비애를 느꼈다.
그녀는 창문을 조금 열었다. 그러나 세차게 쏟아지는 빗소리가 귓전을 요란하게 때렸다.
국방부 청사 앞의 아스팔트 통행금지 시간이라 그런지 덩그런 비어 있었다. 국방부 위병소
위에 세워져 있는 희미한 수은등만이 장대질을 하는 빗줄기 속에서 처량하게 서 있었다. 그
녀는 창문을 닫고 라디오를 켰다. 새벽 4시 20분. 다른 방송은 모두 끝나 있었으나 대북방송
을 하는 KBS와 기독교 방송은 방송을 계속하고 있었다. 그녀는 기독교 방송에 주파수를 맞
췄다. 기독교 방송에서 '산업전사 여러분에게'라는 방송을 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밤을 새워
철야작업을 하거나 야간근무를 하는 공장 노동자들을 청취대상으로 하는 유일한 프로그램이
었다. 라디오에서는 때마침 "산업 전사 여러분, 오늘 하루도 얼마나 힘들고 고달프셨습니까?
이 시간 전국에서 철야 작업을 하고 계시는 산업 전사 여러분들과 함께 듣고 싶다는 노래를
청해 오신 분이 계십니다." 하는 여자 아나운서의 달콤한 멘트가 끝나자 이어서 노래가 흘
러나오고 있었다. 위키 리의 '저녁 한때 목장 풍경'이라는 노래였다. 그녀는 그 노래를 나지
막한 목소리로 따라 부르기 시작했다. 정보국 사무실은 텅 비어 있었다.
끝없는 벌판 멀리 지평선에
노을이 물들어 오면
외로운 저 목동의 가슴속엔
아련한 그리움이 솟네
뭉게구름 저편 산너머로
기러기 떼 날으로...
그때 테이블 위에 전화벨이 요란하게 울리기 시작했다. 그녀는 재빨리 라디오를 끄고 수
화기를 들었다. "헤라클레스요." 헤라클레스는 이무영 소령의 암호명이었다. "비너스예요."
그녀는 떨리는 가슴은 진정시키며 자신의 암호명을 댔다. "84번부터 시작하겠소." 84번이라
는 것은 조지 오웰의 '1984년'을 말하는 것이었다. 그녀는 재빨리 백지에 메모를 하기 시작
했다. "대문자. B..." 대문자 B는 제2자을 가리킨다. "다라..." 다라는 34페이지를 의미했다.
앞숫자가 10자리, 뒷숫자가 1자리였다. "7... 9... 12... 14... 17...에서 20... 32... 41... 56..." 아라
비아 숫자는 단어의 표시였다. 84에 대문자 B, 다라, 7을 배열하면 조지 오웰의 1984년 제 2
장 34페이지의 7번째 단어를 의미하는 것이다. 그녀가 이무영 소령이 불러주는 암호 숫자를
백지 3장에 모두 적는 데는 15분이나 걸렸다. 그녀는 이무영 소령과 암호 전화가 끝나자 조
지 오웰의 1984년 을 펴놓고 암호를 해독하기 시작했다.
"M캡슐은 무사히 회수했다. M캡슐 회수작전에서 2명의 KCIA요원이 희생되었다. 우리는
M캡슐을 가지고 플로리다 주의 마이애미로 간다. M캡슐의 진위 여부를 확인하기 위해 핵
물리학 전문가가 필요하다. 대기중인 핵물리학자와 건축기사를 마이애미로 보내기 바란다.
우리가 마이애미 공항에서 영접하겠다. KCIA엔 M캡슐을 워싱턴 한국대사관으로 가져간다
는 위장보고를 했다. 지금 워싱턴 일대에 CIA가 극비 비상망을 치고 있다. 이스라엘에서는
마이크로 필름을 판독하는 전문가와 장비가 오고 있다. 이상."
암호 전화의 내용이었다. 정미경 중위는 그것을 단숨에 해독하여 두 번이나 되풀이해서
읽었다. 가슴이 뻐근했다. 마침내 이무영 소령 팀이 M캡슐을 회수하는데 성공한 것이다. 정
미경 중위는 암호를 해독한 종이를 가슴속에 찔러 넣었다. 벌써 날이 희미하게 밝아오고 있
었다. 세차게 내리던 빗줄기도 가는 세우로 바뀌어 흩날리고 있었다. "퇴근한다. 차를 준비
해." 그녀는 인터폰을 눌러 정보국에 배치되어 있는 운전병 이일병에게 지시했다. 그리고 테
이블 위를 깨끗이 정리했다. 그녀가 위병소로 걸어나가자 이 일병이 지프차의 시동을 걸어
놓고 있었다. 그녀는 지프에 올라탔다. "집으로 가십니까?" 그녀는 고개를 끄덕거렸다. 지프
가 이내 국방부 위병소를 빠져나가 삼각지 로터리를 건넜다. 그녀가 연희동 집에 도착한 것
은 6시 15분이었다. 그녀는 군복을 벗어놓고 운동복으로 갈아입었다. 그녀가 신촌에 있는
'서울 헬스클럽'에 도착한 것은 6시 50분이었다. 그녀는 헬스클럽의 문을 열고 들어갔다. 그
건물은 5층 복합건물이었다. 1층이 수영장. 2층이 여자 사우나, 3층이 에어로빅 강습실, 4층
이 남자들 헬스클럽이었다. 5층은 건물 관리 사무실과 건축사 사무실이 들어 있었다. 그녀는
붉은 카펫이 깔린 계단을 느릿느릿 올라가기 시작했다. 6시 55분이었다. 아침이라 계단으로
오르내리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그녀는 잠시 기다렸다. 6시 59분, 마침내 4층에서 반백의
사내가 타올을 목에 두르고 걸어 내려오기 시작했다. 대통령 안보담당 특별보좌관이었다. 2
군 단장과 육군 참모총장까지 지낸 4성 장군 출신이었다. 그녀는 재빨리 거수경계를 했다.
계단에는 아무도 없었다. "음." 서특보가 온화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거렸다. "연락이 왔습
니다." 그녀는 품속에서 쪽지를 꺼내 서특보에게 건네주었다. 서특보는 그것을 재빨리 운동
복 주머니 속에 찔러 넣었다. 누군가 3층에서 내려오고 있었다. 그녀는 서특보를 지나쳐 3층
으로 올라가기 시작했다. 서특보는 뒤에서 인기척이 나자 서둘러 계단을 내려갔다. 3층에서
내려온 사람은 에어로빅 회원이었다. 새벽 6시 타임을 마치고 돌아가는 모양이었다. 그녀는
3층 계단의 창으로 헬스클럽 입구를 내려다보았다. 검은 세단 한 대가 헬스클럽 입구에서
대기하고 있는 것이 보였다. 서특보의 차였다. 이내 서특보가 입구에서 걸어나와 세단에 올
라탔다. 세단에 미끄러져 굴러가기 시작했다. 미행자는 없었다. 서종원 대통령 안보담당 특
별보좌관은 세단에 올라타자 정미경 중위가 준 쪽지부터 꺼내 읽기 시작했다. 며칠째 줄기
차게 내리던 빗줄기가 그쳤으나 거리는 아직도 눅눅했다. "음." 그는 정미경 중위가 건네준
쪽지를 읽으며 낮게 신음을 토했다. 마침내 성공한 것이다. 이무영 소령 팀이 대통령의 기대
를 배신하지 않고 M캡슐을 손에 넣는데 성공한 것이다. 그는 마치 전쟁에 승리한 것처럼
마음이 흥분되는 것을 느꼈다. 그는 세검정 자택으로 돌아오자 청와대 비서실에 직통전화를
걸었다. 비서실장은 이미 출근해 있었다. "서특보입니다." 그는 조용히 말했다. 비서실의 전
화도 청와대 경호실에 의해 도청되고 있었다. 경호실은 대통령을 경호한다는 구실로 전화를
도청하기도 하고 통제를 하고 있기도 했다. 청와대 경호실을 거치지 않고서는 대통령과 직
접 통화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물론 대통령과 독대를 하는 것도 철저하게 통제도
고 있었다. 대통령은 인의장막에 둘러싸여 있는 셈이었다. 대통령을 아끼는 사람들은 모두
그 점을 우려했다. 게다가 대통령은 장기집권까지 하고 있었다. 군부의 소장 장교들도 그 점
에 강한 불만을 갖고 있었다. 대통령이 임기 중반을 넘기면 쿠데타로 실각할 것이라는 풍문
도 그런 까닭에 나돌고 있었다. 그러나 서특보는 대통령이 핵무기를 생산할 때까지 만이라
도 건재하기를 바랬다. 핵무기는 인류 최악의 무기이지만 그 가공할 위력 때문에 전쟁 억제
력을 갖고 있는 것도 사실이었다. 한국이 핵무기를 보유하게 된다면 북한이 남침을 해올 우
려도 없을 뿐 아니라 언젠가는 필사적으로 재무장을 하게 될 일본의 침략을 걱정하지 않아
도 되는 것이다. M캡슐만 한국에 가져오게 되면 대통령의 임기 중에 핵무기를 생산할 가능
성은 충분했다. 그렇게 되면 대통령의 꿈인 자주국방이 이루어지고 대통령은 자신의 약속대
로 향리로 돌아가 조용히 여생을 보내게 될 것이다. "아침부터 웬일입니까?" 비서실장의 목
소리였다. 비서실장은 4성 장군을 지내고 자유중국 대사로 대만에 나가 있다가 돌아온 사람
이었다. 전형적인 군인답지 않게 차분하고 조용한 성품의 사내였다. "각하께서는 일어나셨습
니까?" "예, 지금 정보부장과 독대를 하고 계십니다." "정보부장이요?" 그가 놀라서 물었다.
'예, 미국에서 중대정보가 들어왔답니다." 그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미국에서 들어온 중대정
보라면 이무영 소령이 보낸 위장정보가 틀림없을 것이다. "얼마나 시간이 걸릴 것 같습니
까?" "글쎄요, 한 시간쯤...대통령 각하께서는 정보부장과 아침을 함께 하실 계획입니다."
"..." "각하께서는 천주교 안동교구의 오원춘 사건은 원만하게 해결하라고 지시하고 있습니
다. 오원춘 사건은 아시다시피 경찰과 과잉 충성으로 문제가 커진 사건 아닙니까?" "알겠습
니다." "뭐 대통령 각하에게 보고 드릴 일이라도 있습니까?" "아닙니다. 이따가 내 방에 와
서 차나 한잔합시다. 청와대에 같이 근무하면서도 얼굴을 본 지 꽤 오래되지 않았습니까?"
"예. 그렇지요." "8시 30분에 오십시오." "예. 그렇게 하겠습니다." 비서실장과 통화를 끝내자
서특보는 서둘러 옷을 갈아입고 아침 식사를 했다. 그때 청와대 경호실에서 전화가 걸려왔
다. "서특보입니다." "나 경호실장입니다." 그는 잠시 심호흡을 했다. 경호실장이 도청을 한
것이 분명했다. "예, 말씀하십시오." 그는 바짝 긴장을 했다. 경호실장은 대위 출신이었다.
그러나 서특보는 전방부대의 사단장을 역임한 야전군 사령관에 육군 참모총장까지 지낸 4성
장군이었다. 한낱 대위 출신의 경호실장에게 고새를 숙이고 싶지 않았으나 경호실장은 청와
대를 장악하고 있었다. "우리 차나 한잔합시다." 경호실장이 오만하게 말했다. "좋습니다."
그는 조용히 대꾸했다. "8시 30분에 내 방으로 오겠소?" 그는 잠시 숨을 멈췄다. 8시 30분은
비서실장과 만나기로 한 시간이었다. "좋습니다." 그는 일단 대답을 했다. "그럼 기다리겠습
니다." 찰칵하고 전화가 끊겼다. 서특보는 수화기를 내려놓고 입맛을 다셨다. 대통령에게 보
고할 일이 난감했다. 그는 식사를 그만두고 골똘히 생각에 잠겼다. 무엇인가 대책을 세우지
않으면 안되었다. 그는 정원으로 나와 서성거리기 시작했다. 정원에서는 그의 아내가 잡초를
뽑고 있었다. "식사는 안 하세요?" 그의 아내가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 그는 피우던 담배
를 잔디 밭 위에 버리고 구둣발로 밟았다. 비가 그친 하늘에서 햇살이 눈부시게 빛나고 있
었다. "담배를 어디다 버려요?" 그의 아내가 가볍게 눈을 흘겼다. 그는 아무 대꾸도 하지 않
았다. "저 오늘 동창회에 나가요." "동창회?" "대학동창들 모임이 있어요. 오후엔 새마을 부
녀회에도 나가야 하구요." "다 늙은 사람이 그런데는 뭐하러 그렇게 쫓아다녀?" 그는 아내
가 바깥으로 돌아다니는 것이 싫어 퉁명스럽게 내뱉었다. 그때 그의 머리 속으로 어떤 생각
하나가 섬광처럼 스쳐왔다. "당신 오늘 낼 일 좀 해야겠어." "당신 일이오?" "난 오늘 8시
30분까지 사무실로 출근해야 해. 내 대신 여기서 당신 할 일이 있어." "애들 시키지 그래요.
비서를 시키든지." "이건 비밀리에 해야 하는 일이야." "무슨 일인데요?" 비로소 그의 아내
가 그를 똑바로 쳐다보았다. 그는 시내의 한 아파트에서 대기하고 있는 건축기사 한 사람과
핵물리학자 두 사람을 오전 중에 미국에 파견해야 하는 까닭은 아내에게 간단히 설명했다.
그의 아내는 그가 두 번씩이나 되풀이 설명을 한 뒤에야 겨우 알아들었다. 정치나 정보에
대해서는 문외한인 아내였다. "그럼 이 사람들에게 오전 중으로 미국 플로리다의 마이애미
로 떠나라고 전하란 말이에요?" "그래. 그 아파트는 우리가 비밀리에 전세를 얻은 아파트야.
그 사람들은 집주인이 누군지 모르니까 집주인이라고 하면 문을 열어줄꺼야." "무슨 일인데
간첩 접선하듯 그래요?" "국가안보에 관한 일이야. 그 사람들이 물어보면 마이애미 도착하
면 누군가 마중을 나갈 거라고만 해. 항공편을 로스앤젤레스까지는 대한항공. 로스앤젤레스
에서는 팬암을 이용하라고 하구." "전화로 하지 그러세요?" "전화는 도청을 당할 염려가 있
어." "그럼 종이에 적어 주세요." "그러지." 그는 아내를 거실로 데리고 들어가 메모지에 M
캡슐을 확인하러 미국으로 떠날 과학자들에게 전할 말을 썼다. 일개 아녀자인 아내에게 그
런 일을 시키는 것이 걱정스러웠으나 오히려 상대방이 예상하지 못한 방법을 동원하는 것이
상책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커튼 사이로 들어온 햇살이 대통령 책상 위에 기묘한 무늬를 그리고 있었다. 오전 10시.
청와대 대통령 집무실은 기침소리 하나 없이 조용했다. 서특보는 메모지를 읽고 있는 대통
령을 지그시 응시했다. 대통령은 그것을 두 번이나 되풀이해서 읽고 있었다. "임자. 마침내
성공했구먼." 대통령이 마침내 환한 표정을 지으며 담배를 꺼내 물었다. "예, 각하." "그럼
빨리 대기중인 과학자들을 마이애미로 보내야지." "각하. 송구스럽습니다만 제가 이미 조처
했습니다." "뭐라고? 임자가 조처했어?" 대통령이 불쾌한 표정으로 얼굴을 찡그렸다. 대통령
은 그를 차갑게 쏘아보고 있었다. "죄송합니다. 각하! 워낙 시급한 사안이라 제가 결정을 내
렸습니다. 지금쯤 김포공항에서 출국했을 겁니다." "잘했어." 대통령이 빈정거리는 투로 말
하고 창가를 걸어갔다. 서특보는 창가에 서서 쓸쓸하게 담배를 피우고 있는 대통령의 뒷모
습을 착잡한 기분으로 응시했다. 대통령도 이제는 늙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작지만 다부진
체격을 갖고 있었고 사리판단이 분명하던 대통령이었다. 그러나 이제는 늙고 왜소해 보일
뿐 아니라 사고력까지 흐려진 것 같았다. (영부인을 잃은 것은 큰 손실이었어.) 1974년 8월.
문세광의 흉탄에 육영수 여사를 잃은 뒤부터 대통령은 변한 것이다. "햇살이 참 좋군." 대통
령이 창밖에 시선을 준 채 말했다. 비가 그친 뒤의 청와대 뜰은 청정하게 푸른 기운을 더욱
띠고 있었다. "그들을 잘 보호하시오." "예. 각하." 그는 고래를 숙여 대답했다." "마이애미는
언제 도착할 것 같소?" "내일 밤이나 되어야 도착할 것입니다. 이스라엘 쪽에서도 그 시간
이 되어야 도착할 것으로 보입니다." 대통령이 침묵을 지켰다. 그는 마른침을 삼켰다. "정보
보장이 들어왔었소." "비서실장에게 들었습니다." "미국에 있는 우리 공작원이 M캡슐을 회
수했다고 보고를 하더군. 워싱턴으로 M캡슐이 오고 있는데 CIA에서 비상을 치고 있다는
거야. 그러면서 M캡슐을 LA영사관으로 보내는 게 어떠냐고 의향을 묻더군." "..." '그래서
이무영 소령이 워싱턴으로 무사히 잠입할 방법이 있느니 걱정하지 말라고 그랬지." 대통령
이 엷게 소리를 내어 웃었다. "오원춘 사건을 잘 해결하라고 지시했소." "..." "카톨릭이 그렇
게 강하게 나오리라고는 나도 예상하지 못했던 일이오." 대통령에게 반기를 들고 있는 것은
카톨릭뿐이 아니었다. 학계와 문화계. 노동계 할 것 없이 양심적인 지식인들이 노골적으로
대통령의 통치에 반기를 들고 있었다. 민심은 이제 대통령을 떠나고 있었다. 그는 대통령에
게 그 말을 하고 싶었으나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대통령은 대통령을 둘러싸고 있는 인의장
막부터 제거해야 했다. "그만 물러가겠습니다." 그는 대통령이 아무 말이 없자 공손히 허리
를 숙이고 대통령의 집무실을 나왔다. 그는 청와대의 특별보좌관실로 돌아오자 책상에 앉아
담배부터 한 대 피워 물었다. 가슴이 답답했다. (어쨌거나 자주국방은 이루어야 해.) 자주국
방을 위해서 핵무기의 보유는 필수적이야. 그는 담배를 두 대나 거푸 피우고 나서야 청와대
를 나왔다.
9
솔리스트 폴은 워싱톤 CIA본부에서 슈퍼컴퓨터 모니터를 체크해 나가기 시작했다. 서울
의 KCIA로부터 이무영 소령이 워싱턴 한국대사관으로 M캡슐을 가져올 것이라는 보고가
들어와 있었다. 이무영 소령은 M캡슐을 한국 대사관으로 가져와 외교행낭으로 한국으로 운
반하려는 계획이 분명했다. 외교행낭은 국제관례상 검색이 불가능했다. 외교행낭을 검사하거
나 외교관을 체포하면 국제적인 비난을 받게 되는 것이다. 어떻게 하든지 이무영 소령이 워
싱턴으로 잠입하는 것을 막아야 했다. "워싱턴에 비상망을 쳤나?" 부국장이 그의 어깨를 툭
치며 물었다. "예, CIA요원들을 풀어서 공항과 고속도로를 완전히 봉쇄했습니다." 컴퓨터 모
니터에는 계속 '이상 없음'이라는 보고만 들어오고 있었다. 컴퓨터는 전국의 공항과 항공 탑
승자 명단과 렌트카 대여 상황까지 체크하고 있었다. "한국대사관은 어떤가?" "조용합니다."
"대사관의 전화는 모두 도청하고 있나?" "예, 전화뿐만 아니라 한국 대사관실과 무관실도
도청을 하고 있습니다." "대사 관저와 무관 관저는?" "대사관 고위 직원들과 거처는 모두 도
청하고 있습니다." 부국장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솔리스트 폴은 담배를 꺼내 물로 불을 붙여
연기를 내뿜었다. 자신도 알 수 없는 이상한 불길함이 뇌리를 엄습하고 있었다. "KCIA요원
들은 어디 있나?" "정기택과 매기 한이 워싱턴으로 오고 있답니다." "그들을 체포할 건가?"
"M캡슐을 회수하기 전에는 체포할 수 없습니다. 그들이 아니면 이무영 소령을 찾을 수가
없습니다." "그들도 이무영 소령의 행동대원인가?" "정기택은 KCIA의 정규 요원이고 매기
한은 정기택의 애인입니다. KCIA요원이기는 하지만 특별히 위험한 공작은 수행한 적이 없
습니다." 매기 한이 애송이라는 뜻이었다. "M캡슐을 회수하지 못할 가능성도 있나?" 부국장
의 질문에 솔리스트 폴은 대답하지 않았다. 첩보전이라는 것은 상대적이라 고밖에 할 수 없
다. 상대방이 우수하면 이쪽에서 실패할 것이고 상대방이 약하면 이쪽에서 승리할 것이다.
"대통령이 M캡슐에 지대한 관심을 갖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나?" 그는 어깨를 으쓱했다.
그것은 상식에 속하는 얘기였다. "대통령은 포스트 박을 제거할 계획을 세우라고 CIA에 지
시했네." "계획입니까?" "M캡슐을 회수하지 못할 때는 계획이 아니라 명령이 떨어지겠지."
"그런 일은 아마 없을 것입니다. 서울까지 쫓아가서라도 M캡슐을 회수해 오겠습니다." "하
원 비밀군사위원회에서 예산까지 배정 받았네." 그것은 놀라운 일이었다. 하원 비밀군사위원
회에서 예산까지 통과되었다면 멀지 않은 장래에 한국엔 정변이 일어날 것이다. "어떤 방법
을 동원합니까?" "여러 가지 방법을 모두 검토하고 있네. 학생 데모로 실각시키는 방법. 군
부 쿠데타로 포스트 박을 축출하는 방법, 암살자를 파견해서 저격하는 방법..." "암살자를 파
견하면 한국인들의 미국에 대한 감정이 나빠질 텐데요." "그래서 우리 같은 고급 첩보원이
필요한 거야. 국가에서 공연히 우리에게 봉급을 주고 있는지 아나?" 부국장이 어깨를 흔들
며 웃었다. 그는 CIA에서 주류쪽에 속하는 인물이었다. 국제정세를 분석하고 정변을 일으키
는데 능숙했다. 요인을 암살하거나 상대 첩보원을 제거하는 것은 비주류인 그들의 몫이었다.
승진을 하거나 정계로 진출할 수도 없었다. 그들에게는 다만 얼마나 유능하냐 하는 등급만
있을 뿐이었다. "이미 암살자가 결정되었습니까?" 솔리스트 폴은 부국장을 빤히 쳐다보았다.
물론 그것은 부국장과 몇몇 간부들밖에 알지 못하는 극비사항일 것이다. "왜? 궁금한가?"
부국장이 빙긋이 웃었다. "포스트 박을 저격할 만한 요원이 있습니까? 한국은 대통령 부인
이 저격을 당한 뒤 경호가 철통같습니다. 접근하는 것이 쉽지는 않을 겁니다." "시저도 암살
되었네. 적은 항상 내부에 있어." "경호실입니까?" "글쎄..." "총기를 휴대하고 대통령에게 접
근할 수 있는 곳은 경호실과 중앙정보부뿐이지요." "그래, 맞아." 부국장이 그의 어깨를 두
드리며 묘한 웃음을 흘렸다. 그는 다시 슈퍼컴퓨터 모니터를 응시하기 시작했다. 부국장에게
더 이상 자세하게 물어보면 수상하게 생각할 것이다. "자네 임무에 따라 상황이 달라지네.
자네가 M캡슐을 무사히 회수하면 포스트 박을 제거하려는 공작은 자연히 소멸되네." 부국
장이 그의 어깨를 두드리고 컴퓨터실을 걸어나갔다. 그는 부국장의 뒷모습을 잠깐 응시하다
가 고개를 흔들었다. 부국장은 그가 M캡슐을 회수하는 것과 관계없이 포스트 박 제거 공작
을 진행할 것이다. 한국이 M캡슐을 빼앗겼다고 해서 핵무기 개발계획을 포기하지 않을 것
이 분명한 이상 미국의 포스트 박 제거 계획은 확고 부동하다고 밖에 할 수 없는 것이다.
그는 슈퍼컴퓨터 모니터를 응시하다가 밖으로 걸어나갔다.
중대 정보를 입수했으므로 트로시 칼슨에게 알려야 했다. 트로시 칼슨은 그의 연락책이었
다. CIA본부를 나오자 백악관이 한눈에 보였다. 햇빛 속에서 하얗게 빛나고 있었다. 그는
담배를 꺼내 물고 CIA본부에서 두 블록 떨어져 있는 이태리 피자파이 집으로 들어갔다. 이
태리인이 경영하는 피자 집이었다. 그는 피자파이와 커피를 시켰다. 점심 시간이 지난 뒤라
피자파이 집은 한산했다. 그는 피자파이가 나오는 동안 유리창으로 밖을 물끄러미 내다보았
다. 거리도 조용했다. 따가운 햇볕 아래 차량이 물결처럼 흐르고 있을 뿐 보도를 오가는 사
람들도 거의 없었다. 웨이트리스가 피자파이를 가지고 왔다. "중대 정보가 있어." 그는 웨이
트리스에게 낮게 소곤거렸다. 그의 접선책 트로시 칼슨이었다. 실내엔 영화 '추억의 장미' 주
제가인 '로즈테토(The Rose Tattoo)'가 감미롭게 흐르고 있었다. 헤리 워렌이 불러 전 세계
에 널리 알려진 노래였다. "준비할께요." 트로시 칼슨이 낮게 대답했다. 그는 고래를 끄덕거
리고 피자파이를 먹기 시작했다. 실내는 한가했다. 그는 밖을 내다보았다. 거리에서 피자집
을 살피고 있는 사람은 없었다. 이따금 관광객인 듯 한 떼의 동양인들이 인솔자의 안내로
지나가고 있을 뿐이었다. 트로시 칼슨이 행주치마를 벗어놓고 화장실을 향해 걸어갔다. 그는
커피를 한 모금 마시고 천천히 테이블에서 일어났다. 아무도 그를 주의해 보는 사람이 없었
다. 그는 화장실로 자연스럽게 걸어갔다. 트로시 칼슨은 남자 화장실에 들어가 그를 기다리
고 있었다. "무슨 일이에요?" 그는 화장실문을 안으로 걸어 잠갔다. "CIA에서 포스트 박 제
거계획을 세우고 있어." "포스트 박이요?" "박정희 대통령 말이야." "CIA에서 왜 그런 짓을
저지르죠?" "모르겠어." "누구에게서 나온 정보예요?" "부국장, 벌써 하원 비밀군사위원회에
서 예산까지 승인한 모양이야." "어떤 방법으로 제거하는데요?" "여러 가지 방법이 다 동원
되는 모양이야. 암살, 학생 데모, 군부 쿠데타." 그녀가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자세한 것은
다른 루트를 통해서 알아봐." "미국은 한국의 우방이잖아요." "미국의 이익과 맞아떨어질 때
만 한국은 우방이야. 국제사회에서 영원한 우방은 없어." "포스트 박이 미국에 무얼 잘못했
죠." "핵무기 개발." "M캡슐을 회수하면 그만이잖아요?" "포스트 박은 M캡슐을 뺏겨도 핵
무기 개발 계획을 포기하지 않아. 결국 미국의 짐이 되니까 제거되는 거야." "이해할 수 없
군요." 트로시 칼슨이 고개를 갸우뚱했다. "W에게 보고해." W는 트로시 칼슨을 통해 그에
게 명령을 내리는 사람의 코드네임이었다. "이런 정보는 W에게 보고할 수 없어요. 언제 어
떤 방법으로 제거하는지 알아야 돼요." "그건 다른 루트를 통해서 알아보라니까." "M캡슐을
회수할 수 있어요?" "워싱턴 일대에 비상망을 치고 있어." 그는 트로시 칼슨을 벽으로 돌려
세우고 재빨리 스커트를 걷어 올렸다. 트로시 칼슨의 하얀 엉덩이는 눈이 부셨다. "뭐하는
거예요?" "너를 갖고 싶어." "미쳤어요?" "딱딱거릴 거 없어. 어차피 너도 굶주리고 있는 처
지 아니야? 궁한 사람끼리는 서로 돕는 거야." "그래도 이런 짓은 싫어요." 트로시 칼슨이
강하게 도리질을 했다. "트로시!" 솔리스트 폴이 여자의 둔부에서 얇은 헝겊조각을 끌어내리
고 하체를 밀착시켰다. 여자가 낮게 한숨을 내쉬었다. 솔리스트 폴은 변태였다. 초조하고 긴
장이 될 때면 여자를 취했다. 여자가 흰 타일 벽에 두 손을 기대고 섰다. 그녀는 눈을 감고
솔리스트 폴이 짐승처럼 자신을 유린하도록 내버려두었다. 시간이 길지는 않을 것이다. 그녀
가 솔리스트 폴과 지금까지 관계를 가진 것은 모두 세 번이었다. 그 세 번이 모두 10분 안
에 끝났었다. 그것은 사랑의 행위가 아니라 단순한 배설이었다. 솔리스트 폴이 이태리 피자
집을 나온 것은 정확하게 30분이 지나서였다. 두 블록을 느릿느릿 걸어서 CIA본부 내의 중
앙 컴퓨터실로 돌아오자 부국장이 기다리고 있었다. "어디 갔었나?" 부국장의 눈빛이 차가
웠다. 그는 어깨를 으쓱했다. "피자파이를 먹으러 갔었습니다." 솔리스트 폴은 나른한 기분
으로 대꾸했다. 트로시 칼슨의 하얀 엉덩이가 다시 눈앞에 어른거려 왔다. "이태리 피자파
이? 한가하군." "무슨 일이 있습니까?" "정기택과 매기 한을 발견했어." "지금 어디 있습니
까?" "조지타운 구의 모텔에 있어. 키트모텔 305호실이래." "어떻게 알았습니까?" "도청에
걸렸어. 박천수 무관에게 전화를 했어. 전파교란기를 작동했지만 도청과가 발신지를 추적했
어. 이무영 소령의 전화를 기다리고 있대." "그럼 정기택과 매기 한만 감시하면 이무영 소령
을 잡을 수 있겠군요?" "물론이지. 지금 즉시 출발하게." "사람들을 데리고 가야지요?" 솔리
스트 폴이 인원을 차출해 달라는 표정으로 부국장을 쳐다보았다. 혼자서 두 사람을 감시할
수는 없었다. "선발대는 먼저 출발했네." 부국장이 웃으며 말했다. "책임자는 누굽니까?" "물
론 자네지." "아니 선발대의 책임자 말입니다." "리무스." "닥터 리무스 말입니까?" "그래. 한
때 자네의 부하였지. 월남이었던가?" "맞습니다." 그는 석연치 않은 기분으로 고개를 끄덕거
렸다. 닥터 리무스는 최근까지 동독의 베를린에서 치과의사로 개업을 하고 있었다. 물론 그
는 CIA의 대동독 스파이였다. 그는 한때 12명의 스파이들을 거느리고 활발한 정보활동을
했었다. 그러나 어느 날 그의 스파이 12명은 동독 비밀경찰에 모조리 체포되었고 고문과 처
형을 당하는 비운을 맞이했다. CIA내부에서 활동하는 KGB가 그의 정체를 파악했기 때문이
었다. 그는 가까스로 동독을 탈출하여 워싱턴으로 돌아왔으나 그 일로 인해 KGB에 깊은 원
한을 갖고 있었다. 그때 체포된 스파이들 중에는 그가 사랑했던 여자가 있었던 것이다. '나
기'라는 이름의 여자였다. 나기는 동독 비밀경찰에 체포된 뒤 고문과 더러운 짓까지 당한 것
으로 알려져 있었다. 전례가 없던 일이었으나 그녀의 시체는 공개되었다. 대동독 스파이들에
대한 경종을 울리기 위한 짓이었다. 시체는 참혹했다. 아름다운 가슴은 짓이져지고 국부는
참혹하게 훼손되어 있었다. 팔다리는 마디마디 골절되어 있었다. 일반인들은 그것이 살인마
의 소행이라고 막연히 짐작을 했으나 CIA에서는 동독 비밀경찰 짓이라는 것을 금방 알아차
렸다. 몸서리쳐지는 일이었다. 닥터 리무스는 그 일에 대한 복수를 맹세했다. 그는 복수를
하기 위해 동독으로 다시 잠입시켜 주기를 CIA에 원했으나 CIA는 허락하지 않았다. 닥터
리무스는 차선책으로 CIA에 잠입해 있는 KGB요원을 타깃으로 삼았다. 그리하여 닥터 리무
스에게 걸려든 여자가 제니 파커였다. 소련 이름은 안나 리프티코바였다. 안나 리프티코바는
닥터 리무스의 애인 나기와 똑같은 방법으로 고문을 당하고 강간을 당한 끝에 살해되었다.
살해한 방법도 엽기적이었다. 안나 리프티코바는 가슴이 도려내지고 국부가 훼손되어 죽었
다. 처참한 죽음이었다. 물론 그 죽음도 공개되었으나 살인범은 체포할 수가 없었다. 연방
수사국은 결코 살인범을 체포할 수가 없었다. 그들은 CIA가 무엇때문에 KGB요원을 그토록
잔인하게 살해했는지, 살해한 뒤에 왜 시체 처리반을 보내 시체를 없애 버리지 않았는지 끝
내 알 수가 없었다. 물론 닥터 리무스가 그 사건으로 인해 CIA로부터 자체 견책을 당해 6
개월 동안 수감되었던 사실도 알 수 없었다. 솔리스트 폴은 그 생각이 떠오르자 닥터 리무
스와 함께 다시 일을 해야 한다는 사실이 싫었다. 그것은 생각만 해도 끔찍한 일이었다.
밤 10시. 워싱턴의 밤 공기는 시원하고도 상쾌했다. 조지타운구. 조지타운 대학이 있고, 포
토맥강이 흐르는 시가는 번화가로 곧게 뻗어 있었으나 18세기 풍의 붉은 벽돌건물이 즐비했
다. 그곳에 키티모텔이 들어서 있었다. 5층의 낡은 건물이었다. 솔리스트 폴은 차에 앉아 키
티모텔 건너편에 있는 건물을 우두커니 바라보았다. 역시 고풍스러운 붉은 벽돌건물이었다.
엑소시스트라는 소설에 모델이 되었고 영화촬영까지 이루어진 건물이었다. 그래서인지 으스
스한 분위기가 풍기고 있었다. "전혀 움직이지 않는군요." 뒷자리에 앉아 있던 리무스가 음
침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는 공연히 뒤통수가 서늘한 느낌이 들었다. "빠져나가지는 못
할 거야." "필라델피아에서는 놓쳤지 않습니까?" "나는 그때 이라크 놈들을 도살하고 있었
어." 그는 리무스에게 강한 사내라는 인상을 심어 주기라도 하려는 듯 '도살'이라는 말에 악
센트를 주어 말했다. "이무영 소령의 얼굴은 봤습니까?" "멀리서 희미하게 보았어. 변장한
얼굴이지만." "여자는요?" "마찬가지야." "매기 한은 아니었습니까?" "매기 한은 내가 얼굴
을 알아. 몸매도 전혀 다르고." 리무스가 입을 다물었다. 그는 키티모텔 주변에서 빈틈없이
매복을 하고 있는 요원들에게 무전기로 다시 한 번 위치를 확인했다. 키티모텔을 둘러싸고
있는 요원들은 모두 24명이나 되었다. 2인 1조씩 12개조가 건물 주변과 옥상. 그리고 정기택
과 매기 한이 투숙하고 있는 305호실 옆의 304호실과 306호실까지 투입되어 있었다. 이 정
도라면 개미 새끼 한 마리 빠져나갈 수 없을 것이다. "자네 나기를 사랑했나?" 그는 백미러
로 리무스의 얼굴을 살피며 물었다. "글쎄요." 리무스가 허공을 쳐다보았다. 눈빛이 뱀처럼
차가웠다. "자네가 제니 파커를 살해한 것은 나기의 복수라고 하더군." 제니 파커는 안나 리
프니코바의 미국 이름이었다. CIA요원들은 그녀를 제니, 또는 파커양이라고 부르곤 했었다.
"나기의 복수만은 아니지요." "그럼?" "내 부하가 12명이나 체포되었습니다. 모두 고문당하
고 재판도 없이 처형당했어요. 원래 스파이는 처형을 하지 않는 것이 국제 관례입니다." "그
책임을 제니 파커가 질 수는 없지 않나?" "공산주의는 잘못된 사상입니다. 잘못된 사상을
위해 일을 하는 것은 옳지 않아요. 나는 비밀 경찰 제도를 싫어합니다." "스파이는 비밀 경
찰이 아닌가?" "CIA에 발을 들여놓은 것을 후회하고 있습니다." 그는 차창 밖으로 담배 꽁
초를 던졌다. 리무스의 마음속에는 아직도 용암처럼 끓어오르는 분노가 자리잡고 있었다. 그
때 차안에 설치되어 있는 도청장치에 빨간 불이 깜박거리기 시작했다. 전화가 왔다는 신호
였다. 그는 재빨리 도청수신 장치의 버튼을 눌렀다. 전화벨이 3번을 계속해서 운 뒤에야 수
화기를 드는 소리가 들려왔다. "헬로우." 매기 한의 목소리였다. "이무영이요." 전화를 걸어
온 사람은 악센트가 없는 동양인의 목소리였다. "하이!" 여자가 반색을 했다. "그쪽에 감시
자는 없소?" "없는 것 같아요. 이곳은 아주 조용해요. 언제 워싱턴으로 올 거죠?" "지금은
들어갈 수가 없소. 워싱턴에는 CIA요원들이 거미출처럼 깔려 있소. 오늘 아침 워싱턴에 잠
입하려다가 실패했소. 공항이며 고속도로에 CIA요원들이 잔뜩 깔려 있다는 정보요." "우리
처럼 워싱턴으로 들어올 걸 그랬어요." "어떻게 워싱턴으로 잠입했소?" "영구차를 이용했어
요. 포토맥강 하류에서는 보트를 이용했구요." "좋은 방법이군." "지금 어디에 계세요?" "시
카고요." "그럼 시카고 영사관으로 들어가지 그러세요? 시카고 영사관도 외교관 특권이 인
정되잖아요?" "시카고 영사관도 CIA가 감시하고 있소." "그럼 어떻게 하지요? 무슨 방법이
라도 있나요?" "2, 3일 안으로 계획을 세워 워싱턴으로 잠입하겠소. 박천수 무관에게 전화를
해서 대사님 귀국준비를 하게 하시오. 대사님이 갑자기 귀국을 하면 CIA가 수상하게 생각
할지 모르니까 귀국 이유가 그럴 듯해야 하오. 그리고 박천수 무관에게 전화를 할 때는 반
드시 전파교란기를 작동하라고 하시오. CIA의 도청을 조심해야 하오." "명심할께요." "다시
전화하겠소. 식사를 할 때 외에는 그 방을 떠나지 마시오." 찰칵하고 전화가 끊겼다. 솔리스
트 폴은 전화국에 배치되어 있는 요원을 불러 전화의 발신지를 물어보았다. "볼티모어 공중
전화입니다." 볼티모어시는 워싱턴에서 불과 50킬리미터밖에 떨어져 있지 않은 작은 도시였
다. "놈은 워싱턴 가까이에 있었군." 솔리스트 폴은 낮게 중얼거리며 생각에 잠겼다. 이무영
소령이 시카고라고 말한 것은 도청을 당할 가능성이 있기 때문인 것 같았다. "볼티모어에
가봐야 하지 않을까요?" 리무스가 물었다. "우리가 볼티모어에 도착할 때쯤이면 놈은 이미
볼티모어를 떠났을 거야. 놈은 보통 만만한 첩보원이 아니야." "그래도 가봐야 할겁니다."
"그렇다면 자네가 가는 게 어때?" 그는 리무스를 떼어버리고 싶어 그렇게 물었다. "그러지
요. 가겠습니다." 리무스는 뜻밖에 선선히 대꾸했다. 정기택과 매기 한은 그 날밤에 움직이
지 않았다. CIA 암호해독반이 이무영 소령과 매기 한이 통화한 내용을 분석했으나 특별히
이상한 것은 없었다. 솔리스트 폴은 리무스가 볼티모어로 떠난 뒤에 시트에 기대어 3시간쯤
잠을 잤다. 잠을 더 잘 수 있었으나 CIA도청반이 도착해 305호실 벽에 조그만 구멍을 뚫고
무선 도청 마이크를 집어넣었던 것이다. 수신가능 거리가 2백 미터나 되는 강력한 것이었다.
"시험을 해보시죠." 도청반 요원은 그의 차에 있는 무전기와 주파수를 맞춘 뒤에 씨익 웃었
다. "무슨 일이 있나?" 그는 졸린 눈으로 시계를 보았다. 새벽 한 시가 훨씬 넘어 있었다.
"들어보세요." 도청반 요원은 여전히 웃고 있었다. 그는 그때서야 비로소 무전기에서 흘러나
오는 기묘한 신음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뭘하는 거지?" 그는 어리둥절하여 도청반 요원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무전기에서는 여자의 간드러진 교성까지 들려오고 있었다. "어떻습니
까?" "뭐가?" "성능말입니다." "괜찮군." 침대에서 정사를 하는 남녀의 신음소리까지 잡아낼
수 있다면 CIA의 도청장비는 분명 우수한 것이다. 그는 무전기에서 흘러나오는 신음 소리
가 점점 잦아지는 것을 느끼며 도청반 요원에게 그만 가보라는 손짓을 했다. "조금 있으면
침대에서 정사를 하는 장면까지 찍을 수 있는 소형 카메라가 개발됩니다. 카메라 크기가 성
냥갑 정도밖에 안되죠." 도청반 요원이 어깨를 흔들며 차로 걸어갔다. 무전기에서는 살과 살
이 부딪히는 낯뜨거운 마찰음까지 들려오고 있었다. 그는 담배를 피워 물었다. 여자는 유난
히 소리를 많이 지르고 있었다. 이따금 벽을 치는 듯한 소리도 들렸다. TV소리도 조그맣게
배경으로 깔리고 있었다. 그는 담배 연기를 길게 내뿜었다. 제니 파커, 안나 리프니코바의
얼굴이 아련하게 기억 속에 떠올라왔다. 그는 가슴이 싸하게 저려 오는 것을 느꼈다. "힘들
어?" 무전기에서는 사냐의 거친 호흡소리가 들리고 있었다. "괜찮아요." 여자는 가쁜 호흡을
진정시키고 있는 기색이었다. "힘들면 내가 위에서 할께." "아녜요." 여자가 깔깔대고 웃었
다. "당신은 멋있어요. 부드럽고요. 마치 여자와 하는 거 같아요." "여자와 해 본 적도 있
어?" "없어요. 우리 얘기하면서 천천히 해요. 밤새도록 하고 싶어요. 당신 몇 번이나 할 수
있죠?" "글쎄. 4번?" "설마?" "그럼 한번 시험을 해볼까?" "좋아요." 여자가 다시 깔깔대고
웃었다. 그리고 둘의 호흡이 거칠어지고 여자의 입에서 신음소리가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그
는 어두운 하늘을 쳐다보았다. 조지타운 대학 건물 위의 하늘에 별들이 아름답게 떠서 반짝
거리고 있었다. (안나...) 그는 어두운 하늘을 쳐다보고 낮게 중얼거렸다.
정기택과 매기 한은 다음날 아침 10시까지 늘어지게 잠을 잤다. 그 동안 전화를 걸어온
사람도 없었고 찾아온 사람도 없었다. 볼티모어로 떠난 리무스는 이무영 소령에 대한 추적
이 아무 효과가 없다는 보고를 솔리스트 폴에게 해왔다. 정기택과 매기 한은 오후에 포토맥
강 제방을 따라 한 시간 가까이 산책했다. 산책 때에도 만난 사람은 전혀 없었다. 그날 밤
이무영 소령에게서 다시 전화가 걸려왔다. 이번엔 정기택이 전화를 받았다. "어떻게 된 일입
니까?" 정기택이 짜증스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미안합니다." "워싱턴으로 잠입하기가 그렇
게 어렵습니까?" "아차 하면 지금까지의 수고가 모두 수포로 돌아갑니다. 섣불리 잠입할 수
가 없습니다." "그럼 박천수 무관을 이무영 소령에게 가게 하면 어떻겠습니까? 박천수 무관
도 외교관 면책특권이 있지 않습니까?" "여러 가지 방법을 고려하고 있으니까 기다려야 합
니다." "아닙니다. 우리는 위험하니까 정 선생과 매기 한이 가지고 잠입해야 합니다." "M캡
슐은 이무영 소령님이 가지고 있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나와 접선을 해야 합니다. 접선
방법을 알려 드리겠습니다. 밤 9시에 수화기 곁을 떠나지 마십시오." "알겠습니다." 전화가
다시 끊겼다. 전화의 발신지는 이번엔 피츠버그시였다. 솔리스트 폴은 무전으로 리무스를 불
러 피츠버그 일대에 대한 수색을 지시했다. 밤 9시에 이무영 소령으로부터 다시 전화가 걸
려왔다. "10시 30분에 매기 한을 워싱턴 남쪽 30킬로미터 지점에 있는 나폴리 휴게소로 보
내십시오. 그곳 주차장에서 매기 한이 오른쪽 가슴에 흰 장미꽃을 달고 있으면 프랑스제 푸
조 76년형이 도착할 것입니다. 푸조 76년형의 색깔은 검은 색. 차 넘버는 WK42-1875입니
다. 기억했습니까?" "예, 기억했습니다." "미행을 조심하십시오. 미행이 있으면 푸조 76년형
은 나타나지 않습니다." 정기택이 긴장된 음성으로 대답하고 전화를 끊었다. 뒤이어 정기택
이 매기 한에게 전화내용을 설명하는 소리가 무전기의 스피커를 통해 들려왔다. 그는 전화
국에 대기하고 있는 요원을 불러 전화의 발신지를 물었다. "버지니아의 윌리엄즈 버그입니
다." 요원은 짤막하게 대답했다. "공중전화인가?" "예, 윌리엄즈버그시 시청 왼쪽에 있는 공
중전화입니다." "알았네." 그는 무선전화기를 끊고 잠깐 생각에 잠겼다. 이무영 소령은 워싱
턴 D.C.부근에 잠복을 하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그런데도 CIA는 이무영 소령의 그림자조차
찾지 못하고 있었다. "정기택과 매기 한을 미행한다. 1조부터 8조는 워싱턴 남쪽 101번 도로
30킬로미터 지점에 있는 나폴리 휴게소로 출동한다. 9조에서 12조까지는 정기택과 매기 한
이 출발하면 눈치채지 않도록 교대로 미행한다. 이상." 그는 무전기로 주위에 잠복해 있는
CIA요원에게 지시를 했다. 그리고 한국대사관을 둘러싸고 있는 CIA요원들의 책임자인 코넬
리에게 연락을 했다. "한국대사관은 조용한가." "조용하네." "우리는 지금 워싱턴 남쪽 나폴
리 휴게소로 출동하네. 이무영 소령과 매기 한이 거기서 접선하기로 했어. 우리의 이목을 그
쪽으로 쏠리게 하고 한국대사관으로 잠입할지 모르니 단단히 준비를 하게." "알았네." "워싱
턴으로 들어오는 고속도로와 공항도 완전히 봉쇄하라고 이르게. 포토맥강도 유의하고." 그가
코넬리와 통화를 끝내자 정기택과 매기 한이 키티모텔에서 나오고 있는 것이 보였다. 그들
은 주위를 살피면서 재빨리 건물 앞에 주차되어 있는 도요타1900에 올라탔다. "그들이 출발
한다." 그는 무전기로 9조에게 연락을 했다. "앞지르겠습니다." 9조의 요원이 무전기로 응답
을 했다. 다음 순간 크라이슬러사의 패밀리카가 시동을 걸고 있는 도요타 승용차를 지나쳐
쏜살같이 달려갔다. 도요타 1900보다 일정한 간격을 유지하면서 앞서가려는 것이다. 미행은
일반적으로 상대방을 뒤에서 추적하는 것이다. 그러나 상대방의 목적지를 알고 있을 때는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면서 앞서가기도 한다. 이내 도요타1900이 워싱턴 시내의 번화가를 향
해 달리기 시작했다. 그 뒤를 10조의 냉동회사 트레일러가 천천히 따라가고 있었다.
고개를 들자 별빛이 쏟아질 것처럼 가까이 느껴졌다. 달은 떠 있지 않았다. 서리서리 깊은
어둠이 깔려 있는 벌판 한가운데로 101번 하이웨이가 남쪽으로 곧게 뻗어 있었다. 나폴리
휴게소는 우측에 서 있는 단층 건물이었다. 매기 한은 오른쪽 가슴에 장미 한 송이를 달고
건물 앞에 서 있었다. 정기택은 차안에 앉아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10시 25분. 전화로 이무
영 소령이 약속한 한 시간은 아직도 5분이나 남아 있었다. 늦은 시간이라 그런지 101번 하
이웨이는 오가는 차들이 별로 없었다. 그는 밤공기가 서늘하게 살 속으로 파고들어 오는 것
을 느꼈다. 여름이지만 워싱턴의 밤공기는 가을 날씨처럼 선선했다. "78년형 회색 링컨 콘티
넨탈 시속 120킬로미터로 접근 중." 무전기에서 CIA요원이 보고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나폴
리 휴게소를 가운데 두고 남과 북 1킬로미터 지점에서 CIA요원들이 나폴리 휴게소로 가까
이 오는 차들을 스피드건과 야시경을 이용하여 감시하고 있었다. "링컨 콘티넨탈 통과." 나
폴리 휴게소의 옥상 위에도 CIA요원들이 잠복하고 있었다. "77년형 머큐리 세이블 워싱턴
방향으로 접근 중. 시속 100킬로미터." 링컨 콘티넨탈이 그의 시야를 스쳐가고 반대 방향에
서 머큐리 세이블이 달려오기 시작했다. 머큐리 세이블은 하얀 색이었다. 그는 나폴리 휴게
소 쪽을 응시했지만 매기 한이 초조한 듯 손목을 들어 시계를 보고 있었다. 그는 차에 장치
되어 있는 디지털 시계를 응시했다. 10시 31분이었다. (어떻게 된 거지?) 스파이들에게 약속
시간은 생명 같은 것이었다. 그는 뒤통수를 엄습해오는 불길한 기분을 느꼈다. "검은 색 캐
딜락 120킬로로 접근 중." 그는 다시 도로를 응시했다. 필라델피아에서 M캡슐을 감쪽같이
뺏긴 지 벌써 이틀째인 것이다. 이 정도의 시간이라면 KCIA가 M캡슐을 충분히 서울로 호
송하고도 남을 시간이었다. 그러나 서울의 KCIA에서는 아직도 M캡슐이 서울에 도착하지
않았을 뿐아니라 이무영 소령을 통해 워싱턴의 한국대사관으로 잠입할 계획이라는 보고를
해 왔었다. 위장 보고는 아니었다. 위장 보고라는 것이 밝혀지면 KCIA에서 이중첩자 노릇
을 하고 있는 KCIA요원의 신분이 CIA에 의해 폭로될 것이고 포스트 박의 분노로 인해 재
판도 거치지 않고 처형될 것이다. 해외 7국장. 오기철, 한국 중앙정보부에 있는 CIA의 이중
첩자였다. 그는 정보부장 김인규의 심복이기도 했다. 검은 색 캐딜락이 빠르게 그의 시야를
지나갔다. 그는 다시 매기 한 쪽을 쳐다보았다. 매기 한은 나폴리 휴게소의 불빛을 받으며
미동도 하지 않고 서 있었다.
10
플로리다 마이애미 비치. 이무영 소령은 잔디밭에 누워 별빛이 영롱하게 반짝이는 밤하늘
을 쳐다보고 있었다. 아름다운 남국의 밤이었다. 별장 안에서는 한국에서 온 과학자들이 M
캡슐에서 꺼낸 마이크로 필름을 특수 현미경으로 확인하고 있었다. 벌써 다섯 시간째 계속
되는 작업이었다. "참 좋은 밤이군요." 옷자락이 풀잎을 스치는 소리가 들리더니 샤론 데닝
스의 맑은 목소리가 풍경소리처럼 귓전에 울렸다. 그는 누운 채 샤론 데닝스를 쳐다보았다.
아름다운 여자였다. 문득 샤론 데닝스를 안고 싶다는 욕망이 그의 내부에서 일어났다. 샤론
데닝스는 그가 원하기만 하면 언제든지 자신의 육체를 기꺼이 그에게 맡길 것이다. 그러나
그는 서울에 있는 아내와 어린 딸의 얼굴을 생각했다. 샤론 데닝스를 품에 안는 것은 그들
엑 죄를 짓는 일이었다. "마치 내 조국 이스라엘에서 바다를 보고 있는 것 같아요." 샤론 데
닝스가 그의 옆에 무릎을 세우고 앉았다. 샤론 데닝스의 몸에서 아이보리 비누 냄새가 풍겨
왔다. 별장에서 샤워를 하고 나온 모양이었다. "얼마나 진척이 되었습니까?" "다섯 개를 확
인했어요. 필름 하나에 20컷이나 들어 있어 확인하는 데 오래 걸리는 모양이에요." 그는 전
문가가 아니라 마이크로 필름에 들어있는 설계도와 시공사양서를 확인할 수 없었으나 과학
자들은 완벽한 설계도라고 감탄을 하고 있었다. 필라델피아 브라운연구소의 제이콥스 박사
가 놀랄 정도로 정확하게 찍었다는 증거였다. "20컷이나 들어 있으니 전부 120컷이나 되는
셈이군요." "그래요. 제이콥스 박사가 얼마나 고생을 하면서 찍었는지 알 것 같아요. 그런데
우리 손에 들어와 있으니..." "샘 오스틴이 CIA를 배신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샘 오스틴은
무엇 때문에 CIA를 배신했는지 모르겠습니다." "돈 때문이라고 했다면서요?" "글쎄요. 돈
때문에 자신이 몸담고 있던 국가 조직을 그렇게 간단히 배신할 수 있을까요?" 이무영 소령
은 M캡슐을 탈취하면서 내내 가슴속에 품고 있던 의문을 제기했다. "어느 나라에나 반역자
는 있게 마련이에요." 샤론 데닝스가 조용히 대답했다. "CIA가 우리의 유인작전에 말려들어
워싱턴 일대에서 헤매고 있는 것도 이해가 가지 않고요. CIA같은 거대한 조직이 아무리 L
국 땅이 넓다고 해도 우리를 찾아내지 못하는 것도 이상하지 않습니까?" "당신의 작전이 워
낙 절묘했기 때문에 그래요." "믿어지지가 않습니다." "당신은 당신 자신의 능력도 믿지 못
하나요?" 샤론 데닝스가 웃으며 고개를 흔들었다. 그는 바다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바다는
어둠에 덮여 검푸른 빛으로 출렁거리고 있었다. 어디선가 밤새가 우는 소리도 들렸다.
"KCIA엔 스파이가 있어요." "..." "우리가 KCIA와 같이 움직였다면 벌써 미CIA에게 제거되
었을 거예요. 필라델피아에서도 우리의 행적이 CIA에게 모조리 보고되고 있었으니까요. 미
국은 KCIA 어느 부서에서 담담하고 있어요?" "해외 7국이오." "그럼 해외 7국에 스파이가
있겠군요." "..." 이무영 소령은 샤론 데닝스의 말에 대꾸하지 않았다. KCIA에 스파이가 있
다는 것은 가슴 아픈 일이었다. "정기택과 매기 한은 어떤 것 같아요?" "모르겠소." "그들이
스파이 같지 않아요? 당신은 대통령이 파견했는데도 그들은 당신을 이미 알고 있었어요."
"그들을 처형해야 한다면 내 손으로 하겠소." 이무영 소령은 무뚝뚝하게 말했다. "우린 M캡
슐을 안전하게 한국까지 가져가야 돼요." M캡슐을 위해서 그들을 반드시 제거해야 한다는
의미의 말이었다. 이무영 소령은 낮게 한숨을 내쉬었다. 정기택을 그의 손으로 제거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정기택이 CIA의 스파이라고 한다면 하수인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당신이
제거할 필요는 없어요." "무슨 말이오?" "CIA를 이용해서 제거하는 방법이 있어요. 솔리스
트 폴은 아주 잔인한 자예요. 그자가 M캡슐 회수 작전의 책임자니까 정기택과 매기 한을
제거해 버릴 거예요." "솔리스트 폴이 누구요?" "악명 높은 CIA요원이예요. 암살자죠." "솔
리스트라면?" "독주자란 뜻이죠. 혼자서 완벽하게 해치운다는 뜻이에요." "그렇게 우수한 자
가 아직도 우리의 행적을 찾아내지 못한 이유는 뭘까요?" "또 그 얘기세요?" 샤론 데닝스가
잔잔하게 웃으며 그를 내려다보았다. 그는 샤론 데닝스의 푸른 눈을 응시했다. 그녀가 무엇
을 생각하고 있는지 표정을 읽을 수가 없었다.
그는 화제를 바꾸었다. "한국은 작년부터 핵무기 개발을 시도했습니다. 외국에 나가 있는
많은 과학자들을 한국으로 유인하여 핵무기 개발에 박차를 가했죠. 거기엔 세계적인 다국적
기업인인 이스라엘의 아이젠보고씨도 개입했고요. 한국은 핵무기의 연료인 플루토늄 239를
입수하거나 플로토늄 239를 생산할 핵연료 재처리공장을 건설하는데 현안이 되다시피 했습
니다. 결국 미국 내에 있는 많은 핵물리 과학자들이 한국으로 속속 구국하기 시작하자 미국
의 CIA와 DIA(국방정보국)에서 이상하게 생각하기 시작했죠. 그들은 마침내 미국에서 활동
하고 있는 한국인 과학자들을 블랙리스틀를 만들어 감시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들이 여행을
할 때면 요원들이 따라붙어 감시를 했고. 어디를 가도. VIP 못지 않게 정중한 대우를 했습
니다. 전화를 도청하고. 서신을 감시하고. 교제하는 사람들을 사살했습니다." "그건 북한에서
경원하 박사를 데려갔기 때문이에요." 경원하 박사는 미국의 '로스알라모연구소'에서 핵폭탄
제조에 참여했고. 캐나다에서 대학교수로 재직하다가 핵무기에 관련된 비밀서류 수백 장을
가지고 북한으로 망명한 사람이었다. "그 사건도 알고 있군요. 물론 그런 점도 있겠지요. 어
쨌든 미국은 우리 나라의 저명한 과학자 이휘소 박사를 살해했습니다." 이휘소 박사는 서
울 경기고등학교 2학년 때 검정고시를 치러 서울대학교에 진한한 후 도미. 물리학을 전공해
28세 때 펜실베니아대학교 정교수로 채용되었을 정도로 뛰어난 수재였다. 그가 사망한 것은
불과 42세의 한창 나이 때였다. "그는 어떻게 죽었지요?" 샤론 데닝스가 관심을 기울이며
물었다. "일리노이 주에서 교통사고로 죽었습니다." "그렇다면 살해된 것이 아니잖아요?"
"겉으로 보기엔 평범한 교통사고였습니다. 그러나 사고가 난 지점은 왕복 8차선 도로 중간
에 역시 8차선 넓이의 완충지대가 있고 그 안에 가로수까지 심어져 있어서 반대편에서 오던
차가 완충지대를 뛰어넘어 이휘소 박사의 승용차와 충돌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입니
다. 당시 한국에서 노벨상 수상자가 나온다면 최초의 수상자는 이휘소 박사일 것이라는 말
이 나돌 정도로 세계적인 권위의 핵물리학자였습니다." "그럼 이휘소 박사를 CIA가 살해했
다는 말인가요?" "이휘소 박사가 죽자 미국 특수 비밀기관이 살해했다는 말이 파다하게 나
돌았지요." "증거가 있나요?" "그런 일을 하는데 증거를 남기는 조직이 있습니까?" 이무영
소령이 시니컬하게 웃으며 반문했다. "그래요. 증거를 남길 리가 없지요." 샤론 데닝스가 고
개를 끄덕거리며 수긍했다.
이무영 소령은 잔디밭 위에 일어나 앉아 담배를 피워 물었다. 어디선가 밤새가 우는소리
와 파도가 모래톱을 핥는 소리가 규칙적으로 들렸다. "바다에 들어가지 않겠어요?" 샤론 데
닝스가 웃으며 그에게 물었다. "밤에요?" "밤이라 더욱 낭만적이잖아요?" "글쎄요." 이무영
소령은 담배연기를 길게 내뿜었다. 별장 안에서는 지금 마이크로 필름을 과학자들이 확인하
고 있다. 그런데 한가하게 수영을 즐길 수 있을 것인가. 별장에는 두 명의 이스라엘 요원이
보초를 서고 있기는 했다. 그리고 미국의 휴양도시 플로리다 남동부의 마이애미 비치에 어
제 다시 올 수 있을지도 알 수 없는 일이었다. "첩보원의 생활은 비침한 거예요." 샤론 데닝
스가 자신도 담배를 피우며 말했다. "항상 위험한 일을 해야 하고...자신의 뜻과 상관없이 사
람을 죽여야 하고...그러다가는 비참한 죽음을 당하게 되죠." "..." "첩보원들이 은퇴할 때까지
살아 남는 것은 정말 기적 같은 일이에요. 초조... 긴장... 공포... 그리고 감시당한다는 불안감
의 연속..." "..." "별이라는 소설 아세요?" "별이오?" "프랑스 작가 알퐁스 도테의 별 말이예
요. 목동은 별 얘기를 하고 주인 아가씨는 그 얘기를 들으며 잠이 들고... 그러자 젊은 아가
씨의 머리 냄새에 어린 목동은 사랑을 느끼게 되죠." 그것은 이무영 소령도 여러 번 읽은
소설이었다. "우린 그런 낭만을 가꿀 여유도 없군요." 샤론 데닝스가 다시 쓸쓸하게 웃었다.
이무영 소령은 샤론 데닝스의 쓸쓸한 말에 가슴을 울리는 것을 느꼈다. 이 여인. 전세계 최
고의 첩보기관이라고 하는 이스라엘 모사드의 일급 첩보원인 샤론 데닝스도 첩보원 생활에
비애를 느끼고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언젠가 나를 갖겠다고 했죠?" 그는 고
개를 끄덕거렸다. "지금이 그 기회라고 생각하지 않으세요?" 이무영 소령은 아무 대꾸 없이
피우던 담배를 손가락을 이용해 해안도로로 튕겼다. 어둠 속에서 담배 꽁초가 빨간 원을 그
리며 날아가다가 떨어졌다. 이무영 소령은 잔디밭에서 일어나 별장 앞을 가로지르는 해안도
로를 건넜다. 거기서부터는 은모래가 깔린 백사장이었다. 샤론 데닝스가 뒤따라왔다.
그들은 백사장 위에서 신발을 벗었다. 이무영 소령은 샤론 데닝스가 보는 앞에서 셔츠를
벗었다. 그의 체격은 당당했다. 샤론 데닝스가 야릇한 눈빛으로 그의 몸을 훑어 보았다. "체
격이 좋군요." 샤론 데닝스가 말했다. 그는 망설이지 않고 바지를 벗었다. 호텔의 침대에서
도 팬티차림으로 같이 잔 적도 있었다. 서로가 자세히 알지 못했기 때문에 살을 섞지는 않
았으나 그런 밤을 보내는 것은 상당히 고통스러운 일이었다. 더블 침대라고는 하지만 자다
가 보면 여자의 살이 닿기 일쑤였고 거품처럼 일어나는 욕망을 억제하기가 어려웠다. 그는
또 다시 그런 기회가 온다면 욕망을 억제하지는 않으리라고 생각했었다. 샤론 데닝스도 빠
르게 옷을 벗었다. 그녀는 순식간에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알몸이 되었다. "어때요? 괜
찮은가요?" 샤론 데닝스가 그의 앞으로 다가오며 물었다. 눈부시게 아름다운 육체였다. "아
름답소." 이무영 소령은 진심으로 말했다. 샤론 데닝스의 육체, 특이 크고 둥근 젖무덤이 어
둠 속에서도 하얗게 빛나고 있었다. "그것도 벗지 그러세요." "좋소." 이무영 소령은 고개를
끄덕거리고 마지막 남은 속옷까지 벗어 던졌다. "우린 원시인이 되었군요." 샤론 데닝스가
웃으면 그의 목에 팔을 감았다. "그런 것 같소." 이무영 소령은 속으로 웃었다. 샤론 데닝스
가 상체를 밀착시키며 그의 입술을 덮쳐 눌렀다. 그는 온몸이 후끈 달아올랐다. 여자의 체취
가 그를 뜨겁게 달구고 있었다. 그는 여자를 안은 채 모래 사장으로 쓰러졌다. 그녀는 강한
U자였다. 그녀는 암거미처럼 그를 포박하고 공격을 해왔다. 그는 무저항자였다. 그녀의 거칠
고 강한 공격에 그는 꼼짝없이 당하는 먹이 사슬이었다.
그는 눈을 감았다. 여자의 입김이 뜨겁게 퍼부어지자 등으로 모래알들이 따갑게 박혔다.
등이 쓰라렸다. 얼핏 눈을 뜨자 여자의 어깨너머로 별빛이 흔들리고 있었다. 여자는 울기 시
작했다. 여자는 울면서도 움직임이 빨랐다. 땀으로 온몸이 흥건히 젖었다. 그는 아련한 기분
속에서 자신의 몸이 급속히 부풀고 있는 것을 느꼈다. 샤론 데닝스는 동양 여인들과 전혀
달랐다. 동양 여인들이 한 떨기 수선화라면 샤론 데닝스는 동물적이었다. 샤론 데닝스와의
행위에서 그는 감미로움보다 독한 꽃가루 냄새를 맡았다. 샤론 데닝스는 행위를 즐기는 것
이 아니라 끝없이 욕구를 분출하고 있었다. 그는 행위가 끝나자 바다로 뛰어들었다. 밤바다
에서 수영을 하는 것은 독특한 운치가 있었다. 샤론 데닝스도 바다로 뛰어들었다. 그들은 앞
서거니 뒤서거니 밤바다를 헤엄쳐 나갔다. 물결은 생각했던 것보다 차가웠으나 격렬한 섹스
를 끝낸 뒤라 견딜만 했다. 그들은 30분쯤 수영을 함께 하고 백사장으로 나왔다.
솔리스트 폴은 담배를 세 대째 피워 물었다. 매기 한은 아직도 나폴리 휴게소 앞에서 이
무영 소령을 기다리고 있었다. 밤 11시 벌써 약속 시간에서 30분이나 지난 것이다. 매기 한
은 계속 시계를 들여다보고 있었다. 초조한 기색이 역력했다. (이것들이 미행을 눈치챘나?)
미행을 눈치챘다면 당연히 접선을 중단할 것이다. 그렇게 본다면 이무영 소령도 첩보의 귀
재라고 할 수 있다. 결코 만만히 보아서는 안 된다. 솔리스트 폴은 가슴이 묵직하게 저렸다.
(혹시 우리 정보가 누설되고 있는 것이 아닐까?) 솔리스트 폴은 여러 가지 생각이 떠올랐
다. 예감이 불길했다. 정보가 누설되면 이무영 소령을 추적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는 매기 한을 다시 쳐다보았다. 매기 한이 담배를 꺼내 물고 있었다. 어둠 속에서 라이터
를 켜서 담뱃불을 붙일 때 매기 한의 얼굴이 뚜렷이 보였다. "리무스의 전화입니다." 그때
차안에서 앉아 있던 원이 그에게 다가와서 소리쳤다. 그는 피우던 담배를 구둣발로 끄고 차
로 돌아갔다. 리무스의 전화는 CIA본부로 온 것인데 CIA본부에서 그에게 연결한 것이다.
"어떻게 되었습니까?" "나타나지 않았어." "그럴 거예요. 정기택과 매기 한에게 전화를 건
놈은 이무영 소령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리무스의 말에 가슴이 철렁했다. "전화를 건 놈을
잡았나?" "예." "어떤 놈이야?" "한국 해병대 출신으로 미국에 이민 온 놈입니다. 월남에 근
무할 때 흑인 여자와 결혼해서 미국에 왔는데 지금은 윌리엄즈버그에서 슈퍼마켓을 경영하
고 있습니다." "어떻게 잡았지?" "공중전화에 묻어 있는 지문을 채취하여 잡았습니다. 마침
전과 기록이 있더군요." "놈은 이무영 소령의 하수인인가?" "하수인은 아니고 한국의 안보에
관계되는 중대한 일이라고 협조를 부탁하더랍니다." "놈을 철저하게 취조하게." "예." "가족
관계는 어때?" "흑인 여자와 함께 살고 있습니다. 그녀는 놈과 결혼하기 전엔 라나 터너라
는 이름을 쓰고 있었는데 지금은 라나 박이라고 합니다. 놈의 이름은 박상현입니다." "여자
쪽은 어때?" "그 여자도 KCIA와 관계가 있는 것 같지는 않습니다." "이무영 소령은 어디
있다던가?" "플로리다로 갔을 거라고 합니다." "플로리다? 그 말을 믿을 수 있나?" "거짓말
을 하는 것 같지는 않습니다." "이무영 소령쪽에서도 연막을 칠 수 있겠지?" "물론 그럴 수
도 있습니다." "좋아. 일단 플로리다 주의 CIA에 긴급수배를 내려." "알겠습니다." 리무스가
먼저 전화를 끊었다. 그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이무영 소령이 M캡슐을 가지고 워싱턴으로
잠입한다는 정보는 위장정보가 분명했다. KCIA안에 있는 CIA의 첩보원이 겉돌고 있거나
이무영 소령이 그의 존재를 알고 있다고 보아야 했다. KCIA의 정보는 믿을 것이 못되었다.
"매기 한이 접선을 포기한 모양입니다." 요원이 그에게 소곤거렸다. 매기 한은 피우던 담배
를 손가락으로 퉁겨 버리고 승용차로 돌아가고 있었다. (이렇게 되면 정기택과 매기 한도
이용을 당하고 있는 건가?) 그는 그 사실까지도 단정을 내릴 수가 없었다. 정기택과 매기
한을 체포하여 추궁하면 간단하게 그 사실을 알 수 있겠지만 그렇게 되면 이무영 소령과의
접촉이 끊어지는 것이다. 정기택과 매기 한이 이무영 소령을 추적할 수 있는 유일한 접선책
이었다. "우리도 철수한다." 정기택과 매기 한이 탄 승용차가 워싱턴을 향해 되돌아가기 시
작하자 솔리스트 폴은 무전기로 요원들에게 지시를 내렸다. "다시 모텔로 갑니까?" "그래.
키티모텔로 간다." 그는 착잡한 기분으로 대꾸했다. 차안에 있는 디지털 시계의 숫자판이 11
시 30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이무영 소령이 워싱턴으로 잠입하지 않습니까?" 옆에 앉은 요
원이 그에게 물었다. "모르겠어." "만약에 이무영 소령이 워싱턴으로 잠입하지 않는다면 워
싱턴 일대에 친 비상망을 해제해야겠지요?" "아직 플로리다에 있다는 증거는 없어. 어느 거
이 연막인지 알 수 없다고." "KCIA에 있는 우리 요원에게서는 그런 정보가 안 들어옵니
까?" "한국에 있는 포스트 박은 이번 공작에서 KCIA를 완전히 배제했어." "포스트 박이 사
람을 쓰는 용병술이 뛰어나군요." "그의 용병술은 정평이 나 있어." 그들이 키티모텔에 있는
조지타운 구에 도착한 것은 밤 12시가 훨씬 지나서였다. 그는 요원들을 다시 키티모텔 주위
에 배치했다. 정기택과 매기 한은 모텔에 도착하자 곧바로 말다툼을 시작했다. "이무영 소령
은 도대체 어떻게 된 거죠?" 매기 한은 단단히 화가 나 있었다. "우리가 미행을 당한 것 같
아." "미행을 당했다고요? 우리가 여기 있는 걸 어떻게 알고 미행을 해요? 또 누가 우릴 미
행하겠어요?" "그렇지 않으면 이무영 소령이 왜 나타나지 않았겠어?" "이무영 소령이 우리
를 이용하고 있는 것이 분명해요." "이용을 해?" "이무영 소령은 CIA의 이목을 우리에게 쏠
리게 한 뒤 M캡슐을 가지고 서울로 돌아간 게 분명해요." "그럴 리가 없어." 정기택은 매기
한의 말을 완강하게 부정하고 있었다. 솔리스트 폴은 두 사람의 대화를 도청하면서 정기택
이 이무영 소령의 치밀한 계획에 의해 움직이고 있지 않다는 것을 확신할 수 있었다. "당신
의 위치는 KCIA에서 어느 정도예요?" "그런 왜 물어?" 정기택이 반문했다. "당신은 나에게
무언가 숨기고 있는 거 아녜요? 당신과 이무영 소령이 한 편 아니에요?" "무슨 소리야? 우
리 모두 같은 편이라고. 게다가 우린 서로 사랑하고 있어. 나는 당신을 사랑한다고." "그런
데 왜 이무영 소령과 같이 온 여자가 누군지 말해 주지 않아요?" "나도 그 여자가 누구인지
몰라. 그 여자의 얼굴을 알고 잇는 사람은 이무영 소령뿐이야. 워싱턴에 있는 한국대사관의
박천수 장군도 그 여자가 누구인지 몰라." "나에게 숨기려 해도 소용이 없어요. 난 내일 아
침 여길 떠나겠어요. 이건 마치 꼭두각시 같잖아요?" "맘대로 해!" 정기택과 매기 한은 입을
다물고 조용히 있었다. (매기 한이 CIA의 첩보원인가?) 솔리스트 폴은 매기 한의 태도를 이
해할 수가 없었다. 매기 한은 정기택을 이용해 이무영 소재를 확인하고, 이무영 소령과 행동
을 같이 하고 있는 여자의 정체를 밝히려고 유도심문을 하고 있었다. (매기 한! 네가 CIA요
원이라면 리프티코바 같은 꼴을 만들어주겠다!) 그는 속으로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가슴이
북지근했다. 그는 리프니코바를 사랑했었다. 리무스가 그녀를 죽인 것은 어리석은 짓이었다.
이무영 소령으로부터 전화가 걸려온 것은 새벽 4시의 일이었다. 정기택과 매기 한은 화해를
한 뒤 침대에 나란히 누워 있었다. "이무영 소령입니다." 그는 무전기에 바짝 귀를 기울였
다. "어떻게 된 일입니까?" 정기택이 항의하듯 물었다. 이무영 소령은 무엇을 하는지 잠자코
있었다. 다음 순간 무전기에서 선풍기 모터 같은 돌아가는 소리가 들려왔다. 전파교란기를
작동하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그는 재빨리 전파교란기에서 발생하는 방해 전파를 제거하는
버튼을 눌렀다. 비로소 전화의 도청음이 깨끗해지기 시작했다. "미행이 있었나요?" "미안하
지만 미행이 있었는지 어쨌는지 확인하지 않았습니다. 난 처음부터 약속 시간에 나갈 생각
이 없었습니다. 전화를 건 것도 내가 아닙니다." "도대체 무슨 소리입니까?" "우리는 정기택
수사관을 감시하고 있을지도 모를 CIA를 따돌리기 위한 계획을 세웠을 뿐입니다." "그럼 난
그 계획의 도구가 되었습니까?" "그렇습니다." "어처구니없는 일이군요. 그렇다면 왜 그 애
기를 해주지 않았습니까? 그 얘기를 해주고도 CIA를 따돌릴 수 있지 않습니까?" "미안합니
다. 이쪽에서 의견이 일치되지 않아 그랬습니다." "같이 일을 하고 있는 여자는 누굽니까?"
"미안하지만 그것은 밝힐 수 없습니다. 그 쪽에서는 철저하게 비밀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정기택이 낮게 신음소리를 토했다. "오늘 아침 10시. 마이애미행 비행기를 타십시오. 워싱턴
내셔널 공항의 델타 항공사에 두 분의 좌석을 예약해 놓았습니다. 마이애미 국제공항에 도
착하면 즉시 택시를 타고 비스켓인만의 마이애미 비치로 가서 해안에 있는 프랑스인 마담
프랑소와즈의 별장을 찾아가십시오. 그 집을 우리가 일 주일 동안 빌렸습니다. 마이애미 국
제공항의 택시기사들에게 말하면 누구나 다 알고 있습니까." "그런데 왜 우리가 마이애미
비츠로 가야 합니까?" "당신은 마이애미 비치에서 우리와 접선을 하여 M캡슐을 인수 받은
뒤, 맥시코에서 여름 휴가를 즐기러 오는 한국대사 최영한 장군에게 넘겨주어야 합니다. 주
월 한국군 사령관을 지낸 최영한 장군 알고 있겠죠?"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왜 이 일을
당신이 직접 하지 않지요?" "우리는 또 다른 임무가 있습니다. 우리는 KCIA에 있는 제 5열
을 찾아내 제거해야 합니다. 그건 이 M캡슐 공작과 함께 내가 대통령으로부터 직접 부여받
은 임무입니다." 정기택이 낮게 한숨을 쉬는 소리가 들렸다. "최영한 주멕시코 대사는 플로
리다에 와 있습니까?" "내일 밤 플로리다에 도착할 예정입니다. 플로리다 마이애미 다운타
운의 윌러드 가든 호텔 2075호실이 예약되어 있습니다." "알겠습니다." "정기택씨. 감시당하
고 있을지 모르니까 주의해서 키티모텔을 빠져 나오십시오. 이 전화도 도청을 당하고 있을
지 모릅니다. 전파교란기를 작동시키긴 했지만 완벽한 것은 아닙니다. 마이애미 비치에 도착
하면 다시 연락하겠습니다." 찰칵 전화가 끊겼다. 솔리스트 폴은 전화가 끊기자 전화국에 있
는 요원에게 발신지를 물어보았다. 발신지는 마이애미 '윌러드 가든호텔'이었다. "윌러드 가
든호텔에 연락해서 주멕시코 한국대사 최영한 장군이 2075호에 예약되어 있는지 알아봐."
그는 본부에 있는 요원드에게 지시를 했다. 정기택과 매기 한은 이무영 소령과의 통화 내용
을 가지고 낮게 수군거리고 있었다. "최영한 한국대사가 2075호실을 예약한 것이 확인되었
습니다." 본부 요원의 보고였다. "우리도 플로리다에 가야겠네. 마이애미행 비행기편을 예약
해놓게." "몇 시 비행기입니까?" "아침 10시 델타항공." "지금 새벽인데 예약이 가능하겠습
니까?" "우리가 내셔널공항에 도착할 때까지 예약을 마쳐!" "몇 사람입니까?" "여섯 사람."
"알겠습니다." 그는 본부 요원과의 통화가 끝나자 부국장에게도 전화로 보고를 했다. 부국장
은 그의 마이애미행을 승낙했다. "난 잠깐 쉬다가 올 테니까 계속 감시를 하고 있어." 그는
옆에 앉아 있는 요원에게 차를 맡기고 밖으로 나왔다. 새벽 공기가 제법 차가웠다. 그는 조
지타운대학 쪽으로 느릿느릿 걸었다. 주멕시코 대사 최영한 장군이 마이애미로 오는 것을
이용하여 M캡슐을 인수받은 뒤 멕시코로 돌아갔다가 다시 한국으로 가져가려는 것이 분명
했다. 상당히 세련되고 놀라운 계략이었다. 공중전화는 조지타운 대학 입구에 있는 건물 모
퉁이에 있었다. 그는 주위를 확인한 뒤 공중전화 부스로 들어가 이태리 피자파이집으로 전
화를 걸었다. 그의 접선책인 트로시 칼슨에게 전화를 해야 했다.
이무영 소령은 안국현 박사를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그는 MIT공대 출신으로 한국의 농업
개발연구소에서 근무하고 있는 핵물리학자였다. "설계도와 시공사양서는 복사를 한 것처럼
완벽합니다." 안국현 박사가 맥주를 쭉 들이킨 뒤 말했다. "이 정도면 핵연료 재처리공장을
지울 수 있습니까?" "예, 충분합니다. 기술적인 문제가 있긴 하지만 극복되리라고 봅니다."
건축기사 김충길씨의 말이었다. 그는 중동의 요르단에서 팬타곤(국방성)을 건설한 건축기사
였다. "그럼 플루토늄 239는 언제쯤 생산됩니까? "공장 건설이 2년쯤 걸릴 것입니다. 가동이
되기 시작하면 3개월이면 생산할 수 있습니다." "앞으로 3년이면 우리도 핵무기를 보유하게
되겠군요." "3년이면 충분합니다." 최영길 박사의 말이었다. 그는 예일대 출신이었다. "아무
튼 수고들 하셨습니다." 이무영 소령이 진심으로 말했다. "플로리다에 오시기도 쉽지 않을
텐데 며칠 푹 쉬시다가 귀국하십시오." "우리는 안전합니까? CIA에서 감시를 할 것 같은
데..." "실은 CIA의 이목을 분산시키기 위한 작전이 진행중입니다. 이 집만 떠나면 안전합니
다." "샤론 데닝스란 여자는 믿을만한 여자입니까?" 샤론 데닝스는 별장에서 자고 있었다.
그들은 M캡슐 확인작업이 모두 끝나자 맥주병을 들고 잔디밭으로 나왔던 것이다. 새벽 4시
였다. 이제 몇 시간만 있으면 날이 부옇게 밝을 것이다. "그 여자는 우리를 배신할 이유가
전혀 없습니다." "그 여자가 CIA의 이중첩자라면 우린 CIA의 손바닥 안에서 놀아나고 있는
것이 아닙니까?" "샤론 데닝스는 그럴 만한 여자가 아닙니다. 이스라엘 비밀첩보부 1급 요
원입니다." "이스라엘과 미국은 전통적으로 유대 관계가 깊습니다. 미국은 이스라엘을 중심
으로 중동에서 교두보를 확보하고 있습니다." 이무영 소령은 안국현 박사의 말을 끄덕거렸
다. 중동에서 이스라엘 안보는 미국 없이 불가능했다. 또 미국의 정계와 재계를 장악하고 있
는 것도 유태인들이었다. 그러나 샤론 데닝스가 CIA의 이중첩자일 가능성은 거의 없었다.
이번 공작은 한국과 이스라엘. 국가대 국가의 밀약에 의해 이루어지고 있는 것이다. 밀약을
깨트리면 국제사회에서 신용을 읽게 되는 것이다. 그러한 첩자를 파견할 리가 없는 것이다.
오히려 이중첩자가 있다면 한국의 중앙정보부에 있을 것이다. "이제 그만 여기를 떠나시는
게 좋겠습니다. 몇 시간 뒤면 CIA요원들이 감시를 할겁니다." 그는 세 사람의 과학자를 향
해 말했다. "우린 어디로 갑니까?" "마이애미 다운의 호텔에 예약을 해두었습니다. 제가 모
시겠습니다." 그들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 소지품을 챙겼다. 이무영 소령은 과학자들이
소지품을 챙기는 동안 차를 끌고 나왔다. 이무영 소령이 마이애미 다운 타운에 있는 호텔에
과학자들을 태워다 주고 돌아오자 샤론 데닝스는 그때까지 침대에서 자고 있었다. "그들은
떠났어요?" "그래. 떠났어." 그는 침대 속에서 자고 있는 샤론 데닝스를 깨워 옷을 입혔다.
잠시 후면 CIA요원들이 들이닥칠 것이고, 비록 체포당하지는 않더라도 감시를 당하게 될
것이다.
11
1979년 6월 30일 오후 7시. 미국 남부 플로리다주의 휴양 도시 마이애미 비치. 한 동양인
사내가 언제부터인지 남쪽 별장지대의 잔디밭에 있는 로링체어에 앉아서 한가하게 몸을 흔
들고 있었다. 우기가 닥쳐오자 후덥지건한 열대성 기후가 바다 저편에서 육지로 불어오고
있었다. 그러나 사내가 반쯤 몸을 눕혀서 로링체어를 흔들고 있는 잔디밭은 물을 뿌려 싱싱
했고 사내의 뒤로는 하얀 목조 건물과 망그로우브숲이 무성해 싱싱한 녹향을 뿜어대고 있었
다. 잔디밭 바로 앞의 해변 순환도로에는 조깅을 하는 사람들이 간간히 경쾌한 옷차림으로
달리고 있었다. 조지아주 출신의 땅콩장수 지미 카터가 미국 대통령에 당선된 뒤로 선풍처
럼 번지고 있는 달리기 운동이었다. 지미 카터는 이제 남부인들의 우상이 되어 있었다. 바다
는 조용했다. 한낮엔 수많은 사람들이 바다에서 뒹굴었으나 해가 기울기 시작하자 사람들이
빠져나가 푸른 물결만이 넘실대고 있었다. 사내가 앉아 있는 로링체어에서 1백 미터쯤 떨어
진 야자수 그늘 아래엔 베이지색 왜건이 몇 시간 전부터 움직이지 않고 서 있었다. 플로리
다에서 흔하게 볼 수 있는 차였다.
...국적 한국, 이름 정기택, 나이 36세, KCIA 미국 주재 수사관... M캡슐을 인수하여 최영
한 멕시코 대사에게 전해 주게 되어 있는 사내였다. 솔리스트 폴은 망원경으로 사내의 모습
을 살피면서 골똘히 생각에 잠겼다. 이무영은 필라델피아에서 탈취한 M캡슐을 무엇 때문에
워싱턴으로 직접 가져가지 않고 멀고 먼 플로리다까지 가지고 왔다가 다시 최영한 주멕시코
대사에게 주려고 하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이무영 팀이 미국의 CIA나 FBI의 추적을 피
하기 위해서 이러한 방법을 동원한다는 것은 요령부득이었다. 여기엔 무엇인가 함정이 있는
것이 아닐까. 솔리스트 폴은 오랜 첩보원 경험에 의해 그것을 직감적으로 느꼈다. 그러나 서
울의 중앙정보부엔 CIA의 이중첩자 오기철이 있었다. 그는 해외7국 소속이었으나 정보부장
의 직계 인물인 까닭에 청와대에서 진행되고 일까지 소상히 알고 있었다. CIA가 입수하는
서울의 정보는 모두 그에게서 나오는 것이었다. 그는 이미 필리델피아 흑인 거주지역 자동
차 폭발로 죽은 KCIA요원들 신분을 확인해 주었고, 거기서 마이크로 필름을 회수한 사내의
정체까지 파악해 놓고 있었다. 그는 한국국방부 정보국 소속의 이무영 소령이었다. KCIA요
원들과 달리 그는 베일에 싸여 있는 인물이었고 이번 공작을 실질적으로 지휘하고 있는 인
물이었다. 그러나 그와 함께 아일린 젤스키의 아파트에서 M캡슐을 탈취해 간 여자 첩보원
의 정체에 대해서는 전혀 알 수 없었다. 그것은 KCIA의 최고 책임자까지도 모르고 있는 극
비사항이었다. 그는 5시간째 동양인 사내를 감시하고 있었다. M캡슐이 동양인 사내에게 넘
겨지고 그것이 주멕시코 대사 최영한의 손에 들어가기 전에 회수해야 했다. FBI는 물론 플
로리다 주 경찰까지 눈치채지 못하게 해야 했다. 지난번 필라델피아 사건으로 미국 여론은
CIA해체론까지 일어날 정도로 악화되어 있었다. 대통령 예비선거에 나선 카터의 인기는 5%
나 하락하고 있었다. 이 상태로 라면 카터가 재선에 당선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것으로 보였
다.
동양인 사내는 트랜지스터를 조그맣게 틀어놓고 있었다. 트랜지스터에서는 비지스의 '캘리
포니아 드림'이 흘러나오고 이내 뉴스가 나오기 시작했다. 동양인 사내. 정기택은 로링체어
에서 한가롭게 몸을 흔들며 뉴스를 듣고 있었다. 카터 대통령의 한국 방문에 대한 것이었다.
6월 28일 일본의 도쿄에서 열린 G7(선진 7개국)정상회담에 참석했던 카터 대통령이 귀국길
에 2박 3일 예정으로 한국을 공식 방문. 한국의 박정희 대통령과 인권문제와 미지상군 철수
문제에 대한 협의를 하고 있다는 내용이었다. (그러나 실제 문제는 한국의 전술핵에 대한
것이지...) 뉴스에는 행간이 있다. 뉴스와 뉴스 사이에 보도되지 않는 것. 국민들이 알지 못
하는 비밀협상 같은 것을 행간이라고 하는 것이다. 정기택은 눈을 지그시 감고 의자를 흔들
었다. 모든 것이 만족스러웠다. 해가 기울면서 후덥지근한 열대성 기후도 식고 바다에서 시
원한 바람이 불어오고 있었다. 아름다운 저녁이었다. 정기택은 다시 눈을 뜨고 멀리 야자수
나무 밑에서 서 있는 왜건으로 시선을 던졌다. 그 속에 사람이 있었다. 몇 시간째 차안에서
움직이지 않고 있었다. 이런 여름 날씨에 무엇을 하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 그는 베이지색
왜건에서 시선을 거두고 다시 눈을 감았다. "하니!" 그때 탄력있는 목소리가 해안도로에서
들려왔다. 매기 한의 목소리였다. 눈을 뜨자 매기 한이 도로의 하얀 철책을 넘어 잔디밭으로
달려오고 있었다. 아디다스 제품의 백색 러닝셔츠 안에서 두 개의 커다란 가슴이 묵직하게
출렁거렸다. "얼마나 뛰었지?" 정기택은 의자에서 일어나 달려오는 매기 한을 가슴에 안았
다. 매기 한의 몸은 땀으로 흥건했다. "4킬로미터요." "4킬로미터라면 많이 뛰었군." "살을
좀 빼야겠어요." 매기 한은 깔깔대고 웃으며 그의 목을 끌어안고 입술을 비볐다. 그는 백색
의 핫팬츠가 터질 것처럼 팽팽한 매기 한의 둔부를 가볍게 두드렸다. 매기 한은 아름다운
여자였다. 피부가 백색이고 눈이 파랬다. 조부가 하와이 이민 1세였으며 부친인 2세는 영국
계 미국인이었다. 그녀의 백색 피부와 푸른 눈은 그 미국인으로부터 이어받은 것이었다. 피
부와 눈뿐만 아니라 그녀의 자유분방한 생각까지 이어받고 있었다. "살찌지 않았어. 지금도
괜찮어." 그는 웃었다. 매기 한의 몸은 팽팽했다. "샤워를 해야겠어요?" "바다에 들어가지 않
을래?" 그는 베이지색 왜건이 서 있는 쪽을 힐끗 쳐다보며 매기 한에게 말했다. 기분이 유
쾌하지 않았다. "샤워하고 마이애미에 가야 해요. M캡슐을 인수해 오기로 했어요." "접선했
나?" 정기택이 놀라서 물었다. 이무영 소령이 매기 한이 조깅을 할 때 접선을 해 오리라는
것은 상상도 못했던 일이었다. 그는 이무영 소령에게 배신감을 느꼈다. "네." "이무영 소령
이 직접 나왔어?" "아녜요." "그럼?" "어떤 여자였어요. 제 뒤를 따라 뛰어오다가 얘기해 주
었어요." "한국인이야?" "아뇨." "뭐라고 했어?" "오늘밤 10시에 마이애미 다운타운에 있는
존슨홀에서 M캡슐을 인계해 준대요. 2층 여자 화장실 변기 밑에 넣어주겠데요." "당신이 존
슨홀로 오페라를 보러 가는 걸 알고 있더군." 정기택이 신음하듯이 말했다. "그래요. 이무영
소령은 우리 주위 어딘가에 있는 것 같아요." "그래, 어쩐지 그런 기분이 들어." 정기택도
수긍했다. 기분이 그다지 좋지 않았다. "혼자가도 괜찮을까요?" "괜찮아. 하트 부인은 언제
오지?" "8시 반이오." "아직 한 시간이나 남았군. 그럼 샤워를 같이 해도 되겠는걸." 그는 트
랜지스터를 끄고 매기 한의 허리에 팔을 감았다. 하트 부인은 부동산업자 캔 하트의 부인으
로 시카고에서 변호사로 활동하고 있었다. 마이애미에 온 것은 휴가를 즐기기 위해서였다.
사교성이 좋아 아침에 친구로 사귀었다. 그들은 천천히 걸어서 별장으로 들어갔다. "하니.
한국에 꼭 돌아가야 돼요?" "나는 조직에 몸을 담고 있어. 조직에서 돌아오라고 하면 언제
든지 돌아가야 되는 거야." 정기택은 이번 임무만 끝나면 서울로 돌아가야 했다. "난 어떻게
하구요?" "이 기회에 매기 한도 한국에 귀화해." 매기 한은 정기택에 의해 KCIA 미국 요원
으로 활약하고 있을 뿐 대개의 교포 3세들이 그렇듯이 한국인이라는 긍지나. 자부심 같은
것이 전혀 없었다. "한국은 너무 가난해요." 매기 한은 별장의 거실에 앉아 스파이크 끈을
풀기 시작했다. 정기택은 매기 한의 옆에 앉아서 스파이크의 끈을 대신 풀어주기 시작했다.
"이젠 많이 발전했어." "그러나 독재자가 있어요." 매기 한은 박정희 대통령을 언제나 독재
자라고 부르고 있었다. "우린 독재자와 같이 사는게 아니야. 우린 우리의 일을 하고 함께 사
는 거야." "그래도 독재자를 위해 일하잖아요?" 매기 한이 땀에 젖은 러닝셔츠를 벗으며 말
했다. 그는 브래지어를 하지 않은 매기 한의 가슴에 가볍게 키스했다. 살 냄새가 향긋했다.
"아니야. 독재자를 위해 일하는 것이 아니야. 우린 평화를 위해 일하는 거야." "평화라구요?"
그는 매기 한의 스파이크를 벗긴 뒤 양말까지 벗겨 주었다. 매기 한은 발톱에도 매니큐어를
칠하고 있었다. "우리가 하는 일은 전쟁억제를 위한 거야. 한반도에서 힘의 균형을 이루려는
거야." 그것은 이무영 소령이 그에게 들려준 말이기도 했다. "샤워나 하겠어요." 매기 한이
화난 표정으로 핫팬츠를 벗어 던졌다. 정기택은 매기 한은 재빨리 안았다. 매기 한은 불안을
느끼고 있었다. 필라델피아에서 일어난 일련의 사건들은 그녀가 처음 경험하는 것들이었다.
한국의 중앙정보부에서 훈련을 받을 때 그런 위험한 상황에 처하게 될지도 모른다는 교육을
받기는 했지만 수년간 그녀가 미국에서 맡은 임무는 평화롭고 단순하기만 했다. 그런데도
KCIA의 보수는 그녀가 상류생활을 즐길 수 있을 정도로 풍족한 것이었다. 그녀는 그 까닭
으로 KCIA 미국 요원의 신분에 만족하고 있었다. 그러나 필라델피아에서 일어난 사건은 첩
보원의 생활이 얼마나 위험한 것인가를 그녀에게 일깨워 주고 있었다.
"아이. 싫어요!" 매기 한이 허리를 비틀었다. 정기택의 입술이 빠르게 매기 한의 입술을
덮쳤다. 매기 한은 정기택을 거부할 듯하다가 정기택의 입술을 그대로 받아들였다. 동양인인
정기택의 육체는 그녀가 지금까지 경험한 백인들과 달리 깊고 부드러웠다. 감미로운 기운과
달콤한 전율이 빠르게 그녀의 하체로 번지고 있었다. "하니!" 매기 한은 정기택의 목에 두
팔을 감았다. 그를 위해 입술을 열고 몸을 열기 시작했다. 정기택의 손은 매기 한의 히프에
걸쳐져 있는 속옷 위를 둥글게 애무하다가 그것을 밑으로 끌어내렸다. 매기 한의 입에서 얕
은 신음소리가 흘러나왔다. 그녀의 손이 빠르게 정기택의 하체로 내려가서 바지를 벗기고
그것을 움켜쥐었다. "아." 정기택이 몸을 부르르 떨었다. 매기 한의 손놀림에 의해 그것은
급속하게 부풀고 있었다. "좋아요?" 매기 한이 미소 띤 얼굴로 속삭였다. "음. 좋아." 정기택
의 대답이었다. 어디선가 텔레비전의 소음이 희미하게 들리고 있었다. 한국의 인권, 독재자,
카터 한국 정계 지도자들과 회담 예정이라는 말들이 간단없이 들려왔다. 그들은 끌어안은
채 침대로 갔다. 열려 있는 창문들과 해가 기울고 있었다. 플로리다 남동부의 마이애미 비치
도 저녁 빛이 남빛으로 조용히 물들고 있었다. 매기 한은 절규했다. 파도처럼 들이치는 정기
택에 의해 그녀의 절규와 신음은 오랫동안 계속되었다. 그들이 침대에서 일어난 것은 8시가
되어서였다. 매기 한은 서둘러 샤워를 하고 화장을 하기 시작했다. 하트 부인이 데리러 올
시간인 것이다. 정기택은 샤워를 하고 담배를 피워 물었다.
매기 한은 탄력있는 육체의 소유자였다. 그 육체의 탄력은 그가 한국에 돌아간 뒤에도 결
코 잊혀지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한국은 도대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 것일까. 이무영 소령
은 무엇 때문에 내 주위를 맴돌면서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것일까. 대통령은 국방정보국의
이무영 소령에게 전권을 주어 M캡슐을 한국으로 운반하게 하고 있다. 그런데 해외 7국이
대통령의 특명까지 위반하면서 이무영 소령의 행적을 낱낱이 보고하라는 지시를 계속 보내
오고 있는 것이다. KCIA가 절대자인 대통령의 지시를 위반하는 것은 중대한 이적행위인 것
이다. 혹시 KCIA의 해외 7국장이 제 5열 아닐까. 이무영 소령은 이미 그 사실을 눈치채고
나를 경원하는 건지도 몰라. 그렇다면 나는 어떻게 되는 거지. 내가 서울에서 일어나는 모종
의 음모에 나도 모르게 가담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정치란 추악한 것이다. 대개의 첩보원들
은 조국을 위해 첩보활동을 하지만 뜻하지 않게 정치적 책략에 이용당하기도 한다. 첩보원
들이 가장 비참한 처지에 몰리는 때인 것이다. 그때는 조국을 의해 목숨을 바친다는 대의명
분까지 잃게 되는 것이다. 생각이 거기까지 미치자 정기택은 몸서리를 쳤다. "하니!" 맥 L한
이 화장을 마친 뒤 백색 드레스를 입고 검은 숄을 어깨에 걸친 차림으로 침실에서 나와KT
다. 화려한 파티복 차림이었다. "예쁘군." "고마워요." 매기 한이 웃으며 말했다. 그는 매기
한의 입술에 가볍게 입술을 포갰다. "루즈가 지워지겠어요." 매기 한이 눈을 깜박거리며 말
했다. 그때 밖에서 클랙슨 소리가 들려왔다. "하트 부인이예요." 창밖을 내다본 매기 한이
손을 흔들며 외쳤다. "사랑해." 그는 다시 매기 한을 끌어안고 입술을 부볐다. "루즈가 지워
진다니까요." "돌아오면 다시 사랑해 줄게." "좋아요. 이번엔 내가 당신을 그냥 두지 않겠어
요." 매기 한이 허리를 비틀어 그의 몸에서 떨어지며 간드러지게 웃어댔다. 그 생각만 해도
몸이 달아오른다는 표시였다. 정기택은 매기 한이 하트 부인의 빨간색 무스탕을 타고 사라
지는 것을 창으로 바라보았다. 플로리다 해변에도 이제 서서히 어둠이 내리고 있었다.
플로리다주 마이애미 존슨홀. 샤론 데닝스는 푸치니의 오페라 '토스카'가 공연되고 있는
마이애미 존슨홀의 입구를 차안에서 응시하고 있었다. 8시 40분. 이미 대부분의 관람객들이
입장을 마친 존슨홀 입구의 대리석 계단은 푸른 달빛 아래 조용했다. 아직 매기 한은 나타
나지 않았다. 그러나 이제 곧 도착할 것이다. 그녀는 차안에서 담배 한 대를 꺼내 입에 물었
다. 그때 빨간색 무스탕이 미끄러지듯이 존슨홀 입구에 와서 멎었다. 하트 부인 옆에 백색
드레스에 검은 숄을 걸친 매기 한이 앉아 있었다. 샤론 데닝스는 피우던 담배를 차창 밖으
로 던졌다. 매기 한의 뒤를 따라가야 했다. (미행이 없나?) 샤론 데닝스는 차에서 내리기 전
에 습관적으로 백미러를 살폈다. 그녀의 감각은 거의 본능적인 것이었다. (역시!) 샤론 데닝
스는 속으로 웃었다. 왜건 한 대가 빨간색 무스탕 뒤로 느릿느릿 접근해 오고 있었다. CIA
요원들이 주로 사용하는 차였다. 하트 부인과 매기 한이 승용차에서 내려 존슨홀 계단을 올
라가는 것이 보였다. 왜건에서는 여자 한 사람과 남자가 내리고 있었다. 얼굴이나 체격으로
보아서 고도의 훈련을 받은 자들로 보였다. 샤론 데닝스는 핸드백에서 권총을 꺼내 소음장
치를 부착했다. 그리고 스커트를 들춘 다음 권총을 가터(스타킹 고리)의 권총집에 넣었다.
샤론 데닝스는 차에서 내려 계단을 향해 걸어가기 시작했다. 왜건에서 내린 백인 남자와 백
인 여자는 몇 걸음 앞서서 계단을 올라가고 있었다. 그들만 놓치지 않으면 매기 한을 놓칠
염려는 없었다.
현관 로비에는 사람들이 많았다. 샤론 데닝스가 매기 한을 찾아보았다. 매기 한은 하트 부
인과 함께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인사를 나누고 있었다. 매기 한을 그림자처럼 따르고 있는
턱시도 차림의 이무영 소령도 보였다. 왜건에서 내린 백인 남자와 여자는 이무영 소령까지
감시를 하고 있었다. (총명한 사람이야.) 샤론 데닝스는 이무영 소령을 넋을 잃은 듯이 쳐다
보았다. 이상한 일이었다. 이무영 소령의 얼굴을 쳐다보고 있으면 소녀처럼 가슴이 뛰었다.
동양인에게 그런 기분을 느낀 것은 이무영 소령이 처음이었다. 8시 55분에 사람들은 입장을
완료했다. 샤론 데닝스는 2층으로 올라갔다. 푸치니의 가극이라 그런지 객석은 입추의 여지
없이 관객들이 가득 차 있었다. 샤론 데닝스는 핸드백에서 소형 망원경을 꺼냈다. 밤에도 사
물을 볼 수 있는 기능과 적외선 투시 기능까지 갖춘 특수 망원경이었다. 매기 한은 2층 A
열에 앉아 있었다. 왜건에서 내린 백인 남자와 여자는 D열 맨 뒤에서 매기 한을 감시하고
있었다. 이무영 소령은 매기 한의 오른쪽에 앉아서 무엇인가 낮게 소곤거리고 있었다. 왼쪽
에는 하트 부인이 앉아 있었다. 막이 올랐다. 샤론 데닝스는 무대로 시선을 옮겼다. 토스카
는 프랑스 극작가 '샤르돈'의 희곡으로 정치범의 탈옥사건을 배경으로 한 가희 토스카의 비
극적인 사랑을 그린 오페라였다. 구성이 극적으로 통일되고 푸치니의 음악이 뛰어난 것으로
평가된 작품이었다.
1막이 끝났다. 매기 한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매기 한을 감시하던 백인 여자도 움직이고
있었다. 이무영 소령은 그대로 앉아 있었다. 백인 남자도 계속 앉아 있었다. 매기 한이 복도
로 나갔다. 샤론 데닝스는 스커트 속에 있는 권총을 꺼내 허리춤에 꽂았다. 복도로 나오자
매기 한이 복도 끝에 있는 화장실로 들어가는 것이 보였다. 백인 여자가 총총 걸음으로 그
뒤를 따라 들어가고 있었다. 매기 한은 두 번째 칸에 들어가 있었다. 백인 여자는 샤론 데닝
스가 들어오자 당황하여 첫 번째 칸으로 들어갔다. 샤론 데닝스는 세면대 앞에서 화장을 고
치는 척했다. 이내 매기 한이 화장실에서 나왔다. 백인 여자도 뒤따라 화장실에서 나왔다.
샤론 데닝스는 재빨리 백인 여자를 가로막았다. "미안하지만 루즈 좀 빌려주겠어요?" 백인
여자가 눈을 부릅떴다. 샤론 데닝스가 미행을 방해하는 것으로 눈치 챈 모양이었다. "노오!"
여자가 짤막하게 외쳤다. 샤론 데닝스는 어깨를 으쓱했다. "헬프 미!" "노오." 여자가 그녀를
뿌리치고 화장실을 나갔다. 샤론 데닝스는 세수를 하고 손으로 물기를 닦았다. 그때 여자가
화장실로 다시 들어왔다. 샤론 데닝스는 백치처럼 웃었다. "제기랄! 스타킹이 나가다니!" 그
녀는 일부러 상소리를 뱉었다. 백인 여자가 멍청한 표정으로 그녀를 쳐다보았다. "혹시 스타
킹 여벌 있어요?" 그녀는 여자가 보는 앞에서 스커트를 들추고 스타킹을 말아 쥐었다. 여자
의 시선이 빠르게 그녀의 스커트 속을 더듬었다. 그녀는 노팬티였다. 이럴 때를 대비하여 일
부러 노팬티를 한 것이다. "창녀 같은 년!" 여자가 화를 내며 그녀를 쏘아보았다. "뭐라고?"
그녀도 화를 내는 척했다. 그러자 그 여자는 그녀를 강하게 떠밀었다. "어서 꺼져!" 샤론 데
닝스는 뒤로 발랑 나자빠져 그녀를 공포에 질린 눈으로 쳐다보았다. 완력이 대단한 여자였
다. "그 더러운 곳을 개처럼 내놓지 말고 꺼지란 말이야!" 샤론 데닝스는 재빨리 스커트로
앞을 가리는 척했다. 여자가 샤론 데닝스 따위는 상관할 필요도 없다는 듯이 두 번째 칸으
로 들어갔다. 샤론 데닝스는 화장실을 나왔다. 객석으로 돌아오자 매기 한이 다시 이무영 소
령 옆에 앉아 있는 것이 보였다. 백인 남자는 그대로 자리에 앉아 이무영 소령을 감시하고
있었다. 이내 백인 여자가 백인 남자 옆으로 돌아왔다. 그때 매기 한이 자리에서 일어나는
것이 보였다, 백인 여자도 뒤따라 일어나고 있었다. 매기 한이 밖으로 나갔다. 백인 여자도
뒤따라 나갔다. 이제 배기 한은 택시를 타고 마이애미 비치로 돌아갈 것이고 백인 여자는
매기 한을 미행할 것이다. (매기 한도 이제는 죽음의 순간이 왔군.) 샤론 데닝스는 입 속으
로 가만히 중얼거렸다.
1시간 후. 샤론 데닝스는 정기택의 별장 앞 오른쪽 해안에서 차를 주차시킨 뒤 핸들 위에
바짝 엎드렸다. CIA가 얼마나 일을 잘 처리하는지 그녀의 눈으로 확인해야 했다. 어둠 속에
서 헤드라이트 하나가 나타났다. 매기 한이 탄 노란 색의 택시였다. 택시는 미끄러지듯이 별
장 앞에 와서 멎고 매기 한을 내려놓은 뒤 다시 어둠 속으로 사라져 갔다. 그러자 헤드라이
트도 밝히지 않은 왜건이 어둠 속에서 소리 없이 나타났다. (어떻게 된 거지? 이무영 소령
을 미행하지 않았나?) 왜건에서 백인 남자와 여자가 그대로 타고 있었다. 샤론 데닝스는 재
빨리 고성능 무전기를 꺼내 이무영 소령에게 송신을 보냈다. "울림포스. 여기는 아테네." 이
내 이무영 소령이 무전기에 나왔다. "울림포스다." "그들이 당신을 미행하지 않은 것 같아
요. 그들은 모두 마이애미 비치의 별장으로 왔어요." "예상하고 있었던 일 아니오?" 이무영
소령은 퉁명스럽게 대꾸했다. "그래요. 예상하고 있었던 일이죠." "그런데 거기는 왜 갔소?
우리는 거기서 철수하기로 되어 있지 않소?" "우리 작전이 성공하는지 지켜봐야지요." 샤론
데닝스는 냉랭했다. "어서 거기서 철수하시오." "그들은 아직 나의 존재를 몰라요." "철수하
시오." "알았어요." 샤론 데닝스는 무전기를 끄고 별장 쪽으로 쏘아보았다. 매기 한이 별장
으로 들어가는 것이 보였다. 왜건에서 내린 백인 남자와 여자도 빠르게 별장으로 향해 가고
있었다. 샤론 데닝스는 소리내지 않고 차에서 내린 뒤 권총을 뽑아들고 아스팔트 위에 바짝
엎뜨렸다. 그리고 빠르게 잔디밭으로 기어갔다. 매기 한이 다시 별장 밖으로 나왔다. "하니!"
매기 한이 정기택을 찾고 있었다. "하니!" 매기 한의 목소리가 어둠 속에서 공허하게 울렸
다. 매기 한은 두 남녀가 자신을 주시하고 있는 것도 모른 채 정기택을 찾고 있었다. (정기
택을 제거한 모양이군!) 샤론 데닝스는 안타깝게 정기택을 찾고 있는 매기 한을 바라보면서
그렇게 생각했다. 그녀는 CIA가 KCIA의 하부 조직 제거작업에 착수했다는 정보를 입수하
고 있었다.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하부 조직은 때때로 자신들이 어떤 전략에 의해 희생되
었는지도 모르고 비참하게 죽음을 당하곤 했다. "후 아 유?" 그때 매기 한의 놀라는 목소리
가 들렸다. 백인 여자가 매기 한의 앞에 불쑥 나타난 것이다. 백인 남자는 소리 없이 매기
한의 뒤로 접근하고 있었다. "왓?" 백인 여자가 뭐라고 했는지 매기 한이 뒷걸음질치기 시
작했다. 그러자 매기 한의 뒤에 있던 백인 남자가 재빨리 매기 한의 입을 틀어막고 별장 안
으로 잡아끌었다. 인적은 없었다. 그러나 매기 한은 격렬하게 저항을 하고 있었다. 그러자
백인 여자가 주먹으로 매기 한의 복부를 힘껏 때렸다. 매기 한은 헉 하는 소리와 함께 길게
늘어졌다. (완력이 굉장한 여자군!) 샤론 데닝스는 감탄을 했다. 두 남녀는 매기 한을 별장
안으로 끌고 들어갔다. 샤론 데닝스는 재빨리 잔디 위를 포복으로 기어서 별장 앞에 이르렀
다. 포복에는 자신이 있었다. 이스라엘 여군에 갓 입대했을 때 포복만 일주일을 했었다. 별
장 안에서는 백인 남자와 여자가 매기 한의 몸을 수색하고 있었다. 그들은 매기 한의 핸드
백을 뒤진 뒤 매기 한의 옷을 함부로 뒤졌다. 매기 한이 눈을 뜨고 비명을 질러댔다. 여자가
매기 한의 뺨을 후려쳤다. (M캡슐을 아직도 찾지 못했나? 샤론 데닝스는 얼굴을 찡그렸다.
매기 한이 의외로 M캡슐을 깊숙한 곳에 감춘 모양이었다. 그때 전조등 하나가 해안도로를
따라오고 있는 것이 보였다. 차소리가 조용한 것으로 보아 고급 세단인 것 같았다. 샤론 데
닝스는 엎드린 채 다섯 바퀴를 굴러 풀속에 몸을 숨겼다. 예상대로 벤츠 메르세데츠 한 대
가 조용히 별장 앞에 와서 멎고 두 사내가 내렸다. 키가 껑충한 사내가 담배를 빼어 물고는
그녀의 소형 승용차를 응시하고 있었다. (제기랄!) 샤론 데닝스는 직감으로 일이 심상치 않
게 돌아간다는 것을 깨달았다. 두 사내가 별장 안으로 들어갔다. 샤론 데닝스는 스커트 주머
니에서 리모트 컨트롤을 꺼냈다. 차안에 장치해 놓은 플라스틱 폭약 콤포지션-4를 자동으로
백인 남자와 여자가 별장에서 나왔다. 그들은 빠르게 그녀의 승용차 쪽으로 걸어가고 있었
다. 샤론 데닝스는 창을 통해 별채를 들여다보았다. 키가 껑충하게 큰 사내가 매기 한의 드
레스 앞자락을 함부로 찢고 있었다. 매기 한의 우윳빛 가슴이 오렌지 불빛에 환하게 드러났
다. 탐스러운 가슴이었다. 키가 껑충하게 큰 사내가 매기 한의 가슴에 피우던 담배를 갖다댔
다. 매기 한이 몸부림을 치면서 비명을 질러댔다. (저. 저자는 솔리스트 폴!) 샤론 데닝스는
키 큰 사내의 얼굴을 확인한 순간 가슴이 뛰는 것을 느꼈다.
도요타의 차 유리창이 깨지는 소리가 들렸다. 고개를 돌리자 백인 사내가 권총으로 도요
타의 옆 유리창을 깨트리고 있었다. 차를 조사하려는 것이 분명했다. 그녀는 리모트 컨트롤
을 그녀의 차를 향해 겨누었다. 이제는 차를 날려버리는 수밖에 없었다. 마침내 그녀는 리모
트 컨트롤의 버튼을 눌렀다. 그 순간 요란한 폭음이 터지면서 불길이 치솟았다. 백인 사내와
여자가 공중으로 퉁겨져 오르고 차가 불길에 휩싸였다. 파편이 별장까지 날아오고 있었다.
솔리스트 폴이 창가에 모습을 나타냈다. 키작은 사내는 현관 밖까지 뛰어나와 화염에 싸인
승용차를 멍청하게 쳐다보고 있었다. 샤론 데닝스는 솔리스트 폴을 향해 소음 권총을 겨누
었다. 그 순간 솔리스트 폴이 별장 안으로 모습을 감추고 있었다. (교활한 놈!) 그녀는 풀숲
에서 몸을 일으켰다. 이제는 마이애미 다운타운까지 뛰어서 달려가야 했다. 더 이상 머뭇거
리고 있으면 자동차의 폭발로 충돌할 FBI와 마이애미 경찰에게 발견될 것이다. 솔리스트 폴
을 제거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지만 늦어버린 것이다. 어차피 CIA도 아직은 솔리스트 폴
을 제거할 계획이 없었다. 당분간 그의 목숨은 연장해 주어야 했다.
매기 한에 대한 것은 이튿날 아침 일제히 TV뉴스에 보도되었다. 매기 한은 마이애미 비
치 북쪽의 망그로우브숲에서 발견되었는데 놀랍게도 사지가 잘려 나간 시체로 발견되어 사
람들을 경악시켰다. 시체를 처음 발견한 사람은 아만다 마이켈이라는 50대의 뚱뚱한 흑인
여자였다. 그녀는 아침마다 애완견 멜라니를 데리고 망그로우브숲을 산책하는 것이 일과였
는데 그녀가 처음에 발견한 것은 매기 한의 오른쪽 다리 부분이었다. 그녀의 신고로 마이애
미 경찰을 즉각 투입되었으며 시체의 나머지 부분도 마침내 망그로우브 숲속에서 발견되었
다. 그러나 살인범에 대한 단서는 흔적조차 찾을 수 없었다. 이 사건은 즉각 서울과 워싱턴
에 보고되었다. 워싱턴에서는 CIA부국장 파커가 서울을 방문중인 카터 대통령의 전화를 초
조하게 기다리고 있었다. 서울은 저녁시간이고 대통령은 만찬에 참여하고 있었다. 대통령으
로부터 전화가 걸려온 것은 워싱턴 시간으로 아침 9시경이었다. "대통령이오." "부국장입니
다." "KCIA요원을 제거했다는 보고를 방금 받았소. 포스트 박도 보고를 받았는지 안색이 좋
지 않은 것 같소." "핵무기 개발은 계속할 것 같습니까?" "계속할 모양이오. 나는 그렇게 완
고한 인물은 처음 봤소." "좀 강력하게 말씀해 보시지요." "했소. 외교적으로 큰 실례가 되는
줄 알면서도 포스트 박이 정권을 잃을지도 모른다고 까지 했는데 묵묵부답이었소." "그렇다
면 어쩔 수가 없겠군요." "그렇고. 이젠 장미공작을 실행에 옮길 수밖에 없소." 대통령의 목
소리는 지쳐 있었다. 장미공작은 포스트 박 제거 공작을 말하는 것이었다. CIA에서는 이미
오래 전부터 포스트 박 제거공작을 추진해 왔고 로마시대부터 비밀의 상징인 장미를 이름
에 붙여 장미공작이라고 불러왔던 것이다. 절대적으로 비밀에 요한다는 뜻이었다. "파커 부
국장." "예. 각하." "장미공작을 알고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됩니까?" "CIA에서는 저밖에 없습
니다." "그럼 모사드는?" "샤론 데닝스라는 여자가 알고 있습니다." "샤론 데닝스?" "이무영
소령과 함께 공작을 하고 있는 여자입니다." "아니 그럼 이무영 소령에게 털어놓을 수도 있
지 않소?" "그렇지 않습니다. 대통령 각하. 곧 조치하겠습니다." "좋아요. 파커 부국장. 대신
장미공작에 대한 것은 아무 것도 기록에 남기지 마시오. 나는 부도덕한 대통령으로 역사에
남고 싶지 않소." "명심하겠습니다. 각하." "이무영 소령은 어떻게 되었소?" "솔리스트 폴이
추적하고 있습니다." "이무영 소령이 솔리스트 폴에게 제거되면 모든 일이 수포로 돌아가지
않소?" "이무영 소령은 호락호락한 인물이 아닙니다." "조심해야 할거요. 그리고 지나친 살
인은 삼가시오." "매기 한을 살해하리라는 것은 예상하지 못했습니다. 안나 리프니코바의 복
수를 한 것 같습니다." "안나 리프니코바?" "KGB의 이중 스파이입니다. 닥터 리무스가 제거
했습니다." "정기택은 어떻게 되었소?" "내일쯤 마이애미 사탕수수 농장에서 발견될 것입니
다." "잔인한 시체로 발견되지 않기를 바라겠소. 이제는 미국 시민을 더 이상 놀라게 하지
마시오." "이미 늦었습니다. 각하." "늦었다고?" "예. 내일 아침이면 시체로 발견될 것입니
다." "부국장. 아직 시체가 사람들의 눈에 띄지 않았다면 다시 처리하시오. 사람들의 눈에
띄지 않는 곳에 묻거나 화장을 하시오." "알겠습니다. 각하." 찰칵 전화가 끊겼다. 리차드 파
커 CIA부국장은 수화기를 내려놓고 두 손으로 얼굴을 문질렀다. 대통령의 지시에 따라
KCIA요원인 정기택의 시체를 화장하여 뿌려야겠다고 생각했다. 흔적을 남기지 않는 것이
좋을 것이다.
12
백사장에는 벌써 사람들이 들끓고 있었다. 플로리다의 남동부. 인구 약 5만 명의 휴양도시
마이애미와 3개의 다리와 연결되어 있는 작은 섬 마이애미 비치. 해안도로에는 야자수 가로
수가 열병을 하듯 줄지어 늘어서 있고 섬 안쪽으로는 하얀 별장지대와 망그로우브 나무숲이
우거져 있었다. 기후는 열대성으로 7월은 우기가 시작되지만 사시사철 바다를 좋아하는 사
람들이 몰려들고 있었다. 이무영 소령은 마이애미 비치의 서쪽 바닷가를 느릿느릿 걸었다.
지난 밤 매기 한이 미참하게 살해된 별장과는 정반대의 곳이었다.
마이애미 경찰은 매기 한의 살인범을 찾기 위해 결사적이었다. 사건이 엽기적인 탓에 플
로리다 주 경찰과 FBI까지 관여하게 되었다. 공항이 폐쇄되고 고속도로가 봉쇄되었다. 경찰
은 곳곳에서 검문검색을 실시하고 있었다. 사람들의 관심은 대단했다. 매스컴은 플로리다의
휴양도시 마이애미 비치에서 발생한 살인사건을 대대적으로 보도하고 있었다. 그러나 도요
타와 함께 날아간 백인 남자와 여자에 대한 것은 전혀 언급이 없었다. CIA의 시체처리반이
손을 쓴 것이 분명했다. 다만 매기 한의 시체를 토막내어 사람들의 눈에 띄게 한 것은 일종
의 경고라고 볼 수 있었다. (우리 KCIA에 제5열이 있어...) 이무영 소령은 그것을 절실히 느
꼈다. 그러나 이무영 소령이 플로리다 마이애미 비치까지 M캡슐을 가지고 온 것은 제 5열
을 경계하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그것은 표면적인 이유였다. M캡슐 못지 않게 서울의 박대
통령은 미국의 조종에 의한 한국 군부의 쿠데타 음모를 걱정하고 있었다. 이무영 소령의 극
비임무는 미국이 과연 한국 군부의 쿠데타 음모에 가담하고 있는가 하는 것을 파악하는 일
이었다. M캡슐 못지 않게 서울의 박대통령은 미국의 조종에 의한 한국 군부의 쿠데타 음모
를 걱정하고 있었다. M캡슐 공작에 제5열이 끼여들 것이라고는 이미 각오하고 있었다. 문제
는 한국 군부에서 쿠데타를 일으킨다면 어떤 부대가 동원되며, 어떤 인물들이 주도적인 역
활을 할 것인가 하는 점이었다. 그것을 미국에서 알아내야 했다. 몰론 M캡슐 공작도 국가의
안보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는 공작이었다. 결코 소홀히 할 수는 없었다.
그가 매기 한에게 넘긴 마이크로 필름은 복사된 사본이었다. 그것은 이미 CIA의 손에 넘
어가 있었다. 그러나 조만간 CIA가 복사된 필름이라는 사실을 눈치챌 것이 분명했다. 가능
한 한 빨리 CIA의 추적망에서 벗어나야 했다. 그러나 그는 시간을 끌어야 했다. 적어도 오
늘밤 자정까지는 플로리다에 머물러야 했다. 이무영 소령은 백사장을 느릿느릿 걸었다. 엽기
적인 살인사건이 일어났는데도 바다엔 사람들이 많았다. 색색의 인종들이 아슬아슬한 비키
니 수영복을 입고 태양과 비키니 수영복을 입고 태양과 바다를 즐기고 있었다. 지극히 평화
로운 풍경이었다. 그리고 원시적인 인간의 욕망이 꿈틀대는 바다이기도 했다. 어떤 남자는
허리를 바싹 끌어안고 키스를 하고 있기도 했고, 여자의 가슴을 수영복 위로 애무하는 사람
도 있었다. 인종이 각양각색이듯이 하고 있는 짓들도 천태만상이었다. 바다는 짙은 남빛이었
다. 하늘엔 흰 구름이 엷게 흩어져 있었고 공기는 건조했다. 태양은 점점 뜨거워지고 있었
다. 그와 함께 탄력있는 몸뚱이들이 바다로 뛰어드는 횟수가 잦아졌다. 그는 바다에 들어가
지 않고 10시쯤 호텔로 돌아왔다. 호텔로 돌아오면서 주의 깊게 뒤를 살폈으나 예상했던 미
행자는 눈에 띄지 않았다. 그는 샤워를 한 뒤 잠을 잤다. 그가 잠에서 깨어난 것은 오후 2시
쯤이었다. 그는 호텔의 레스토랑에서 식사를 한 뒤 마이애미 시내 구경을 나갔다. 시내는 조
용했다. 곳곳에서 경찰이 검문검색을 하고 있었으며 시민들의 협조는 적극적이었다. 시민들
은 엽기적인 살인 사건을 저지른 범인을 변태성욕자로 보고 있었다. TV뉴스나 신문도 그쪽
으로 여론을 유도하고 있었다. 매기 한의 가슴에서 발견된 담뱃불로 지진 자국때문에 살인
범을 변태 성욕자나 성도착증 환자로 보고 있었다. 그는 다시 바닷가를 향해 걸었다. 날씨는
숨이 막히도록 더웠다. 작렬하는 태양은 머리 위에서 이글거리고 거리와 집들이 햇빛 때문
에 하얗게 빛났다. 이무영 소령은 오후 내내 수영복을 입은 인파에 섞여 바닷가를 걷고, 수
영을 한 뒤 일광욕을 즐겼다. 그가 미행자를 눈치챈 것은 해가 거의 기울 무렵이었다. 그가
쓰고 있는 검은 선글라스에는 미행자를 감시할 수 있는 특수 반사경이 부착되어 있었는데,
그 반사경에 나타난 미행자는 금발의 젊은 여자와 은발의 백인 남자였다. 그들은 교대로 이
무영 소령을 미행하고 있었다. (드디어 미행을 시작했군.) 이무영 소령은 굳이 미행을 떠돌
리려고 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들이 미행을 하기 쉽도록 느릿느릿 호텔로 돌아왔다. 그는 호
텔에서 식사를 한 뒤 서울로 국제통화를 했다. 그는 호텔에서 식사를 한 뒤 서울로 국제통
화를 했다. 그의 아내 경옥에게 하는 전화였다. 전화가 도청되고 있으리라는 사실은 알고 있
었기 때문에 아내와 딸의 안부를 묻는 말과 플로리다에서 임무를 수행중이라는 말밖에 할
수 없었다. 물론 그가 아내 경옥에게 국제전화를 한 것도 작전의 하나였다. 그의 아내는 그
것도 모르고 울음 섞인 목소리로 반색을 하고 있었다. 서울엔 장마가 계속되고 있다고 했다.
그가 서울을 떠나오던 밤에도 비가 많이 내리고 있었다. 아내와의 통화가 끝나자 그는 다시
호텔을 나왔다. 미행자들도 그를 따라오고 있었다. 그는 마이애미 유흥가에 있는 '플레이보
이 클럽'으로 들어갔다. 스트립쇼를 하는 성인 전용 술집이었다. 그는 미니 스커트를 입고
엉덩이를 요란하게 흔드는 웨이트리스에게 브랜디 한 병을 주문했다. 무대에서는 벌써 젖가
슴을 완전히 노출시킨 여자들이 나와 선정적인 춤을 추고 있었다. 그는 병째로 브랜디를 마
시며 무대를 응시했다. 미행자들도 술집에 들어와 있었다. 무대에서 춤을 추는 여자들은 매
춘부들이었다. 손님이 무대에서 춤을 추는 여자들을 지정하고 뚜쟁이에게 돈을 지불하면, 여
자가 좌석에 찾아와 술을 함께 마시기도 하고 호텔로 따라가서 몸을 팔기도 하는 모양이었
다. "하이!" 그때 자그마한 몸집의 사내가 그의 탁자에 와서 앉았다. 피부가 커피색인 것을
보면 남미계의 혼혈 같았다. "하이." 그는 건성으로 대꾸했다. "나는 여기 아가씨들의 흥행
사요. 리틀 잭이라고 부릅니다." "아가씨들이라면 누구를 말하는 거요?" 그는 웃었다. "무대
위에 아가씨들 말이오. 마음에 드는 아가씨가 있소?" 리틀 잭이라는 사내는 매춘 알선을 하
는 뚜재이었다. 사내의 몸에서 고약한 냄새가 풍겼다. "글쎄." 이무영 소령은 코웃음을 쳤다.
"맘에 드는 아가씨가 있으면 얘기하시오. 우리 아가씨들은 가격도 저렴한 편이오." "그래,
얼마면 마음대로 고를 수 있소?" "3백달러." "이봐 그건 일본 관광객들에게 받는 금액이잖
아? 일본놈들은 섹스 관광을 하러 다니니까 3백 달러를 받아도 되지만 나 같은 맥시코인에
게는 2백 달러로도 충분해." "멕시코인이오?" 리틀 잭이 놀란 표정으로 물었다. "플로리다의
올랜도시에 살고 있어. 태어나긴 맥시코에서 태어났고." "좋소, 그럼 당신에게는 2백 달러만
받겠소. 알선료 20달러요." 그는 품속에서 10달러 짜리 지폐 두 장을 꺼내어 리틀 잭에게 주
었다. "어떤 여자를 고르겠소?" 리틀 잭이 물었다. "저기 왼쪽 끝에 있는 여자." "5분만 기다
리시오." 리틀 잭이 건들대는 걸음으로 무대 뒤로 돌아갔다. 이소령은 담배를 꺼내 물고 그
가 선택한 여자를 물끄러미 응시했다. 가슴이 큰 여자였다. 머리는 검은색이고 피부는 백색
이었다. 손바닥 크기의 노란 헝겊조각 하나로 여자의 삼각 분기점을 아슬아슬하게 가린 채
허리를 흔들어대고 있었다. 그는 가슴이 타는 기분을 느꼈다. 술병을 들어 브랜디를 다시 한
모금 마셨다. 미행자들은 브랜디 한 잔씩을 시켜놓고 그를 계속해서 주시하고 있었다. "하
이." 여자는 그가 브랜디를 반 병쯤 비웠을 때 얇은 원피스 차림으로 나타났다. 원피스 안에
는 아무 것도 걸치지 않았는지 뽀얗게 흰 젖무덤이 고스란히 내비치고 있었다. "하이." 그는
선글라스를 벗고 여자를 향해 미소를 날려보냈다. "마리예요." 여자가 생긋 웃으며 그의 옆
에 와서 앉았다. 여자의 몸에서 톡쏘는 화장품냄새가 풍겼다. "산 호세요." 그는 여자의 어
깨 위에 손을 얹었다. "한잔하겠소?" "어디에 머물고 계셔요?" "마이애미 톰슨호텔이오." "
좋은 호텔이군요. 그 호텔에서도 마실 수 있겠죠? 이곳은 쾌적하지 못해요." "물론이오. 내
호텔 냉장고엔 술이 가득 차 있소." 그는 여자의 허리를 안고 술집을 나왔다. 여자의 몸값까
지 계산하면 220만달러나 되었다. 미행자들도 계속 따라오고 있었다. "샤워를 해도 좋겠어
요?" 호텔 방에 돌아오자 여자가 원피스를 벗으며 물었다. "물론이오." 그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여자가 삼각 분기점을 가린 헝겊조각까지 벗어 던지고 욕실로 들어가자 그는
인터폰을 눌러 룸서비스를 불렀다. 이제는 호텔을 탈출해야 했다. 룸서비스가 노크를 하고
들어온 것은 2분도 걸리지 않아서였다. "부르셨습니까?" 룸서비스는 멕시코계의 젊은 사내
였다. 그는 룸서비스가 정중하게 허리를 굽히는 순간 재빨리 그의 복부를 주먹으로 내질렀
다. 룸서비스가 헉 하고 입을 벌렸다. 다음에 그는 짧고 강하게 룸서비스의 명치끝을 올려쳤
다. 룸서비스는 가슴을 움켜쥐고 비명소리도 없이 고꾸라졌다. (잠시 쉬고 있어.) 그는 룸서
비스가 기절한 것을 확인하고 냉장고에서 과도를 꺼냈다. 이번엔 매춘부 마리의 차례였다.
그는 욕실의 도어를 노크했다. "샤워 같이 하실래요?" 마리가 욕실 도어를 열고 환하게 웃
었다. 그는 물방울들이 미끄럼을 타고 있는 마리의 젖무덤을 응시했다. 탐스러운 가슴이었
다. 그의 시선이 젖무덤에서 복부로, 복부에서 하체로 자연스럽게 미끄러져 내려갔다. 그는
하체에서 뻐근한 기운이 밀려오는 것을 느꼈다. 그러나 서둘러야 했다. "미안하오. 아가씨."
그는 진심으로 말했다. "지금부터 소리를 지르면 안되오." "무슨 얘기예요?" "소리를 지르게
되면 죽음을 당해!" 그는 마리를 항해 비로소 과도를 들이댔다. 마리가 화들짝 놀라며 비명
을 질렀다. 그는 재빨리 마리의 입을 틀어막았다. "내 말 알아들었소? 소리만 지르지 않으면
아가씨 몸엔 손끝 하나 건드리지 않겠어." 마리가 재빨리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는 마리를
욕실에서 끌어내 원피스를 찢어 손발을 묶고 입을 틀어막았다. 다음엔 룸서비스의 옷을 벗
기고 침대 시트를 찢어 손발을 묶고 입을 틀어막았다. 그는 그 일을 순간적으로 해치웠다.
마리가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고 있어서 몸을 만질 때마다 짜릿한 흥분이 전신으로 번졌
으나 육체적인 쾌락을 즐기고 있을 시간이 없었다. 그가 룸서비스의 옷을 바꿔 입고 복도로
나오자 복도 끝에서 두 사내가 서성거리고 있었다. 그는 그들을 똑바로 쳐다보지 않고 직원
용 엘리베이터로 걸어갔다. 직원용 엘리베이터에는 아무도 타고 있지 않았다. 그를 엘리베이
터 안에 룸서비스의 옷을 벗어놓고 6층에서 내렸다. 6층 복도에는 감시자가 없었다. 그는 6
층에서 엘리베이터를 바꿔 탔다. 지하 주차장에서 엘리베이터를 내리자 주차장 경비원이 있
었다. 그는 경비원이 자신을 훔쳐보는지 살피면서 이스라엘 비밀첩보부에서 준비해 놓은 승
용차로 걸어갔다. 프랑스제 승용차 푸조였다. 그는 차에 올라타자 주머니에서 수염을 거내
턱에 붙이고 안경을 바꿔 썼다. 주차장 입구에 CIA요원이 지키고 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는 것이다. 주차장 경비원은 다행히 그를 주시하지 않았다. 그는 푸조의 시동을 걸고 천천
히 주차장으로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그의 예상대로였다. 주차장 입구엔 두 명의 사내가 서
성거리며 들어오고 나가는 차를 감시하고 있었다. 그는 '마이애미 톰슨호텔'을 무사히 빠져
나오자 북쪽을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시내엔 경찰과 순찰차들이 요소요소에 깔려 있었다.
그러나 그의 차를 검문하지는 않았다. 밤의 날씨는 서늘했다. 그는 마이애미 시내에서 10킬
로미터 떨어진 지점에 있는 주유소에 차를 세웠다. 샤론 데닝스에게 전화를 걸기 위해서였
다.
솔리스트 폴이 이무영 소령의 잠적을 알게 된 것은 한 시간이 지나서의 일이었다. 이무영
소령의 잠적은 먼저 호텔측에 의해 밝혀졌다. 호텔에서는 이무영 소령이 투숙하고 있던 705
호실 담당 룸서비스가 호출을 받고 올라간 지 30분이 되어도 돌아오지 않자 의아하게 생각
하기 시작했고 50분이 되어도 돌아오지 않자 전화를 했다. 그러나 705호실은 계속 전화를
받지 않았다. 직원 한 사람이 705호실로 달려 올라갔다. 그러나 705호실은 굳게 잠겨 있었
다. 그는 다시 마스터키를 가지고 올라왔다. 이번엔 호텔 지배인과 직원들도 따라 올라갔다.
그리고 그들은 705호실에서 진기한 광경을 목격하게 되었다. 그것은 알몸으로 묶여 있는 매
춘부와 하얀색의 직원 유니폼이 벗겨진 채 침대 시트로 묶여 있는 호텔 룸서비스의 당황해
하는 모습이었다. 그때서야 7층 복도에 있던 CIA요원들도 705호실로 달려와 어처구니없는
광경을 목격했다. 그들은 즉각 이 사실을 솔리스트 폴에게 보고했다. 솔리스트 폴은 그 시간
에 마이애미 CIA사무실에서 서울로 전화를 걸고 있었다. 그는 CIA서울 책임자인 도널드 램
버트에게 이무영 소령과 함께 행동을 한 여자 첩보원에 대한 신원을 밝혀내라고 다그치고
있었다. 도널드 램버트는 CIA의 주류로 정보분석엔 탁월한 능력을 가지고 있었으나 요인을
암살하고 적의 스파이를 제거하는 특수 첩보원으로서는 부적합한 인물이었다. 그러나 그는
서울의 정계와 관계. 그리고 군부에게까지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다. 그의 신분이라
면 이무영 소령과 동행한 여자가 누군인지 밝혀낼 수 있으리라는 것이 그의 생각이었다. 그
러나 서울의 도널드 램버트는 전혀 생각이 달랐다. "이무영 소령은 프랑스에서 노스웨스트
항공편으로 워싱턴으로 갔습니다. 그 여자는 서울에서 파견한 여자가 아니고 미국에 파견되
어 있는 KCIA요원도 아닙니다. 그 여자는 프랑스에서 합류한 제 3의 첩보원입니다." 도널
드 램버트는 이무영 소령과 동행한 여자 첩보원의 신분을 제 3의 세력으로 보고 있었다.
"KCIA가 서울에서 그 여자에게 지시를 내리고 있을 게 아니오?" 그는 전화기에 대고 짜증
스럽게 물었다. 도청을 방지하기 위해 전파교란기를 작동하고 있어서 전화기에서 이상한 금
속성이 들려오고 있었다. "KCIA는 이무영 소령이나 여자 스파이에게 지시를 내리지 못합니
다. 이무영 소령은 독자적으로 M캡슐 공작을 수행하면서 필요에 따라 KCIA의 지원을 받고
있다고 합니다. 미국에 있는 KCIA요원들은 이무영 소령의 요청을 받으면 즉각 지원하라는
포스트 박의 특별 명령을 받았다고 합니다." "그럼 그 여자 첩보원에 대해서는 끝내 알 수
없다는 말이오?" "KCIA도 그 여자 첩보원의 정체를 알아내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습니다."
"매기 한의 죽음에 대한 서울측의 반응은 어떻소?" "서울의 매스컴에는 보도되지 않았습니
다." "아니 내 말은 KCIA의 반응을 말하는 거요." "KCIA는 죽음보다 시체의 토막처리에 충
격을 받은 것 같습니다. CIA에서, 한국의 우방인 미국에서 과연 그런 짓을 지질렀을까하고
의문을 표시하고 있습니다." "그것을 미국의 경고라는 걸 눈치챘소?" "KCIA는 이번 공작에
서 완전히 배제되었기 때문에 그런 것을 느낄 수가 없습니다." "그럼 청와대는?" "포스트 박
의 반응이 있었습니다. 미국은 이제 우리의 우방이 아니라고 했답니다." "좋소. 이무영 소령
의 가족들에게 우리 요원을 붙이시오." "가족에게요?" "머지 않아 이무영 소령의 가족이 우
리에게 필요할지 모르오." "알겠습니다." 찰칵 전화가 끊겼다. 솔리스트 폴은 담배 한 대를
꺼내 물고 CIA마이애미 사무실의 창으로 밤하늘을 쳐다보았다. 이무영 소령은 CIA요원들이
감시를 하고 있으므로 큰 문제가 없었으나 여자 첩보원에 대한 것은 베일에 싸여 있었다.
여자 첩보원을 찾는 것이 시급했다. 파리의 CIA요원들에게서도 여자 첩보원에 대한 정보를
추적하라고 지시를 했으나 아직까지 아무 소득이 없었다. 이무영 소령의 행적은 프랑스 파
리의 패션거리에 있는 한 카페에서 끊어져 있었고, 다음날 노스웨스트 항공편에 산 호세라
는 이름으로 탑승했다는 것이 드러났다. 그러나 파리에서 하룻밤 행적은 완벽하게 끊어져
있었다. 여자첩보원이 프랑스에 나타난 흔적은 전혀 없었다. 그들은 프랑스 파리에서 미국으
로 입국하는 2, 30대 젊은 여자들의 리스트를 뽑아 컴퓨터 조회를 했으나 수상한 여자는 한
사람도 찾을 수 없었다. (대단한 첩보망이야.) 그는 담배에 불을 붙이는 것도 잊어버린 채
어두운 하늘을 응시했다. 남국의 하늘에 별들이 무수히 떠서 반짝거리고 있었다. 그때 마이
애미 톰슨호텔에서 나가 있는 요원들로부터 다급한 전화가 걸려왔다. 이무영 소령이 호텔을
탈출했다는 내용이었다. (이런 병신 같은 새끼들!) 그는 화가 잔뜩 났다. 이무영 소령의 행
적을 찾아낸 지 불과 하루도 못되었지 않은가. 놈이 눈치를 챈 것이다. (놈을 잡아서 족쳐야
하는 것인제 잘못했어.) 이무영 소령이 산 호세라는 이름으로 톰슨호텔에 투숙한 것을 알아
낸 것은 마이애미 경찰이었다. 그는 즉각 그 사실을 리차드 파커 CIA부국장에게 보고했다.
"여자와 함께 있나?" 리차드 파커 부국장이 물었다. 수화기를 통해 들려오는 목소리였으나
의외로 반색하는 기색이 아니었다. "아닙니다." "그럼 놈을 미행해서 여자와 함께 잡아." '여
자와 함께요?" "우리는 여자의 정체도 모르지 않나? 그러니 놈을 미행하면 여자가 꼬리를
드러낼 거야." "알겠습니다." 솔리스트 폴은 맥이 빠진 목소리로 대답하고 수화기를 내려놓
았다. 리차드 파커 부국장의 지시는 옳은 것이었다. 그러나 이무영 소령이 톰슨호텔을 탈출
했다는 보고를 받자 석연치 않은 기분이 들었다. 그는 서둘러 다운타운의 톰슨호텔로 달려
갔다.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이야?" 그는 7층 복도에서 이무영 소령을 감시하던 요원들에게
물었다. "놈이 매춘부를 데리고 호텔로 돌아왔습니다. 우린 복도에서 감시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5분쯤 후에 룸서비스가 들어갔고 다시 나왔습니다. 우리가 룸서비스의 얼굴을 확인
하지 않은 것이 실수였습니다. 놈은 매춘부와 룸서비스를 묶어 놓고 룸서비스의 옷을 갈아
입은 뒤 달아났습니다." "현관에도 우리 요원들이 배치되어 있지 않았나?" "놈은 지하 주차
장으로 달아났습니다." "주차장 입구에도 우리 요원들이 배치되어 있었잖아?" "놈이 변장을
했답니다." "잘했군. 그래 CAI요원이 여섯이나 지키고 있으면서도 한 놈을 놓쳐? 놈을 어떻
게 추적할 거야?" "놈은 6층에서 엘리베이터를 바꿔 탄 뒤 지하 주차장에서내려 프랑스제
푸조 승용차를 타고 달아난 것으로 밝혀졌습니다. 주차장 경비원이 목격했습니다. 푸조를 수
배했습니다." "푸조를 수배하면 놈을 찾을 수 있을 것이라고 보나?'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좋아. 일단 플로리다주 일대에 비상을 치라고. 놈이 마이애미를 벗어났을지는 몰라도 아직
풀로리다주는 벗어나지 못했을 거야." 그는 낮게 한숨을 내쉬고 말했다. 무엇인가 일이 잘못
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마이애미 북쪽 20킬로미터 지점에서 푸조를 발견했다는
보고가 들어온 것은 불과 10분 뒤의 일이었다. 푸조를 발견한 것은 플로리다주 경찰이었다.
"어떻게 할까요? 푸조를 세우고 체포할까요?" 그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선뜻 결정을 내릴
수가 없었다. "차번호를 퐉인할 수 있나?" "플로리다 번호 PM-4136 검은색 4도어." "운전수
를 확인해!" "운전수는 보이지 않습니다. 모자를 눌러 쓰고 있습니다." "좋아. 계속 추적하
게. 몇 킬로로 가고 있나?" "시속 60킬로미터입니다." 시속 60킬로미터라면 드라이브 속도에
지나지 않는다. 그는 으아했으나 마이애미 경찰의 헬리콥터를 부르고 마이애미 경찰에 푸조
의 차적을 조사하도록 지시했다. 시간은 벌써 밤 12시가 가까워지고 있었다. 그는 헬리콥타
거 오자 재빨리 헬리콥터에 올라탔다. 헬리콥터로 추적을 하면 30분이면 푸조를 따라잡을
수 있을 것이다. "교통과의 보고입니다." 헬리콥터가 마이애미 상공을 날아오르자 조종사가
그에게 무전마이크를 넘겨주었다. "폴이다." "검은 색 푸조 플로리다주 등록번호 PM-4136.
소유자는 마이애미 슈퍼마켓 연쇄점 주인. 6시간 전에 도난당한 차량입니다." "알았소." 그
는 실소를 터뜨렸다. 그는 무전으로 푸조를 추적하고 있는 플로리다 주 경찰을 불렀다. "현
재 위치는 어디인가?" "마이애미 북쪽 20킬로미터 지점, 놈이 되돌아오고 있다." "뭐라구?"
그는 놀라서 물었다. 이해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푸조가 방향을 돌려 마이애미로 돌아오고
있다. "그럴 수가!" 그는 뒤토수를 한 대 맞은 기분이었다. 무엇인가 일이 심상치 않게 꼬이
고 있었다. "저기 주유소가 보이는군. 주유소에서 내리겠네." 조종사가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는 품속에서 권총을 꺼내서 실탄을 장전했다. 헬리콥터는 주유소 광장에 착륙했다. 그는
헬리콥터에서 뛰어내렸다. 헬리콥터가 요란한 엔진 소리를 내면서 다시 날아올라 어두운 하
늘로 사라져 갔다. 푸조가 나타난 것은 15분쯤 뒤였다. 푸조는 바리케이드를 치지도 않았는
데 도로를 벗어나 주유소 광장으로 미끄러져 들어왔다. 그 뒤를 플로리다주 경찰 세단이 조
리 없이 따라오고 있었다. 그는 푸조를 향해 걸어갔다. 푸조에서는 뜻밖에 주유소 점원이 내
리고 있었다. "이봐, 이 차의 주인은 어디 있어?" 그는 주유소 점원의 멱살을 잡고 물었다.
"떠났어요." "떠나다니?" "저에게 이 차를 주고 2백 달러를 빌렸어요. 사흘 안에 갚지 않으
면 이 차를 가져도 좋다고 했어요." "이 차는 도난차야!" 주유소 점원은 17, 8세밖에 안되어
보이는 애송이였다. "놈은 어디로 갔어?" "북쪽으로요." "무슨 차를 타고?" "가다가 지나가
는 차를 얻어 타겠다고 했어요. 내가 아는 것은 그게 전부예요." 애송이는 벌벌 떨고 있었
다. 얼굴이 창백했다.
하늘색 택시 한 대가 마이애미 경찰서로 미끄러져 들어왔다. 택시에서 한 여자가 내리는
것을 살인과의 테리 윌슨은 사무실의 유리창으로 언뜻 보았다. 여자는 키가 늘씬했다. 그러
나 더운 날씨에도 불구하고 검은색 원피스를 입고 있었다. (누가 상을 당한 모양이군.) 테리
윌슨은 그렇게 생각했다. 날씨는 아침부터 푹푹 찌고 있었다. 여자의 옷차림이 몹시 더워 보
였다. "이봐. 전화 받아." 그때 동료 해리가 그에게 수화기를 넘겨주었다. "누구야?" 그는 수
화기를 받으며 권총 벨트를 허리에 차는 해리에게 물었다. 여자는 살인과 쪽으로 걸어오고
있었다. "공항 경찰이야." 해리가 스미스 웨슨 9경을 벨트에 차며 대꾸했다. "테리 윌슨입니
다." "맥도널드요." "무슨 일입니까?" "한국인 셋이 탑승 수속을 밟고 있습니다. 억류할까
요?" 공항 경찰엔 한국인 탑승자를 철저하게 조사하라는 특별 명령이 떨어져 있었다. "어떤
사람들이요?" "한 사람은 건축기사이고 두 사람은 핵물리학자요." "건축기사부터 말해 보시
오." "이름 김충길. 서울 출생. 나이 38세. 현재 한국의 은성종합건설 요르단 펜더곤(국방성)
건축소장. 플로리다는 휴가 여행으로 일 주일 전 미국 입국..." "다음 핵물리학자에 대해서
얘기하시오." 그는 전화를 받으면서 검은 원피스의 여자가 살인과 사무실로 들어오는 것을
보았다. 젊은 여자였다. "핵물리학자의 이름은 안국현. 서울 출생. 나이 46세. 캘리포니아 주
립공대 졸업. MIT공대 박사. 현재 한국 농업개발연구소 근무." "또 한 사람은?" "이름 최영
길. 부산 출생. 나이 42세. 예일대 핵물리학부 졸업. 영국 케임부리지대학에서 박사과정 이
수. 현재 한국 원자력발전소 근무." "모두 과학자들이군." 이무영이라는 인물은 아니었다. 검
은 옷을 입은 여자는 살인과 출입문 앞에 앉아 있는 여순경 미넬리와 몇 마디 얘기를 하더
니 그를 향해 또박또박 걸어왔다. 파란 눈이 신비스럽게 반짝이고 있었다. 아름다운 여자였
다. 호리호리한 몸은 갖고 있는데도 가슴이 풍만했다. (노브라로군.) 그는 자신도 모르게 여
자의 가슴에 시선이 쏠렸다. 원피스의 얇은 천에 유두 두 개가 선명하게 내비치고 있었다.
"한 사람은 기술자입니다." 그는 통화를 빨리 끝내고 싶었다. "좋아. 탑승시켜요." "알았습니
다." 수화기를 내려놓자 여자가 그를 향해 생끗 웃었다. 그는 눈이 부신 듯한 기분이 들었
다. "스잔 한이에요." 여자가 그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그는 여자의 손을 잡았다. "어제 전
화했었죠? 매기 한이 제 언니예요." "아. 빨리 왔군요." 그는 놀라서 여자의 얼굴을 빤히 쳐
다보았다. 매기 한은 마이애미 비치의 별장에서 사지가 절단되어 죽은 여자였다. 시체가 다
른 곳에서 발견되기는 했지만 그 끔찍한 시체를 보고 하루종일 아무것도 먹을 수가 없었다.
"언니의 시체를 확인하러 왔어요. 괜찮겠죠? 이제 그만 손을 놔주세요." "물론입니다." 그는
당황하여 여자의 손을 재빨리 놓았다. "시체는 어디 있어요?" "마이애미 대학병원에 있습니
다. 안내를 해드릴까요?" "아뇨. 저 혼자서도 갈 수 있어요." "그럼 전화를 해놓겠습니다."
"고마워요." 여자가 그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손은 작고 예뻤다. "천만에요." 그는 고개를
흔들었다. "몇 가지 궁금한 것이 있어서 물어보려고 하는데 대답해 주시겠어요?" 여자가 그
의 손을 잡은 채 물었다. "물론입니다. 무엇이든지 물어 보십시오." "언니는 어떻게 죽었죠?
정말 사지가 절단되었나요?" "그런 셈입니다. 사지가 절단되고 목이...미안합니다. 시체가 여
러 곳에 흩어져 있었습니다." "왜 그렇게 끔찍하게 죽었죠?" "우리고 아직 모르고 있습니다.
지금 수사를 계속하고 있습니다." "우리 언니가 KCIA요원이라고 하던데 정말 그런가요?"
"KCIA요?" "한국 중앙정보부 말입니다. 언니는 어떤 극비임무를 수행하고 있었다는데 사실
인가요?" "우린 모르는 일입니다." 그는 고개를 흔들었다. 매기 한의 살인사건에는 CIA가
개입해 있었다. 매기 한의 살인범을 추적하는 것도 마이애미 경찰서의 살인과가 아니라 실
제로는 CIA였다. 마이애미 시내에는 전에 없이 CIA요원들이 잔뜩 몰려와 득실대고 있었다.
"그럼 가보겠어요." 여자가 그를 향해 다시 미소를 보냈다. "살인범을 반드시 잡겠습니다."
그는 여자의 등에 대고 말했다. 그러나 여자는 뒤를 돌아보지도 않고 살인과 사무실로 또박
또박 걸어 나갔다. 그는 비로소 자신의 손을 들어 코로 가져가 냄새를 맡았다. 손에서 이름
을 알 수 없는 향수 냄새가 희미하게 풍기고 있었다. 샤론 데닝스는 마이애미 경찰서 살인
과를 나오자 곧바로 마이애미 대학병원으로 택시를 타고 갔다. 매기 한의 시체는 대학병원
냉동실에 보관되어 있었다.
시체는 부검과 봉합이 끝나 깨끗한 편이었다. 하얀 천이 덮여 있어 시체의 몸통 부분을
볼 수 없었으나 얼굴은 화장까지 되어 있었다. 매장을 하지 위해 시체화장사가 화장을 해놓
은 모양이었다. (불쌍하게 희생되었군.) 그녀는 매기 한의 시체를 내려다보며 낮게 한숨을
내쉬었다. 자신도 모르게 눈물 한 방울이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 "유류품은 없나요?" 그녀는
핸드백에서 손수건을 꺼내 눈물을 찍어낸 뒤 젊은 직원을 보고 물었다. "있습니다." 젊은 직
원이 뒤를 돌아다보며 대꾸했다. 냉동실 한쪽 구석에 흰가운을 입을 50대의 사내가 그림자
처럼 서 있었다. 머리가 은백색이었다. (저자는 솔리스트 폴!) 샤론 데닝스는 눈빛이 자신도
모르게 흔들렸다. 그러나 그녀는 재빨리 냉정을 회복했다. 여차하면 스커트 속에 감추어져
있는 권총으로 솔리스트 폴을 사살해야 했다. "좀 보여 주시겠어요?"' "잘 보관하고 있습니
다. 경찰에서 조사를 마치고 여기로 보냈죠. 연고자가 나타나지 않으면 시체와 함께 가매장
을 하려고 했습니다. "좀 봐도 될까요?" "물론입니다." 젊은 직원이 어깨를 으쓱하고 가방을
열었다. 그녀는 가방 속에 들어있는 것들을 천천히 살폈다. 가방 속에는 매기 한의 옷만 가
득 들어 있었다. "이 옷들은 제가 가져도 되나요?" "예, 이젠 당신이 주인입니다." "언니 옷
은 모두 고급이에요." "그런 것 같군요. 참 보석과 현금도 약간 있는 것 같더군요. 갖다가
드릴게요." 젊은 직원이 친절하게 말했다. 그녀는 미소를 지어 주었다. "가지고 오겠습니다 .
보석은 따로 보관되어 있으니까요." 젊은 직원이 냉동실 밖으로 나갔다. 그녀는 매기 한의
가방에서 옷들을 꺼내 몸을 대어보기 시작했다. 솔리스트 폴은 담배를 피우는 체하며 여자
의 동정을 살폈다. 여자가 이 옷 저 옷 몸에 대어보고 걸쳐보고 하더니 그를 힐끗 살피고
검은 원피스를 벗었다. 등을 돌린 채였다. 가슴은 노브라였고 희고 뽀얀 엉덩이엔 손바닥 같
은 푸른 색 헝겊 조각이 한 장 걸쳐져 있었다. (창녀 같은 년!) 그는 재빨리 등을 돌렸다.
여자가 옷을 갈아입는 것을 보는 것은 신사답지 못한 행동이다. "지퍼 좀 올려주시겠어요?"
그때 이름을 알 수 없는 향수 냄새가 코끝에 풍기며 여자가 그를 향해 다가왔다. 그는 얼굴
을 찡그리며 여자가 몸에 걸친 하얀 원피스의 지퍼를 올려주었다. "전 혼자서 지퍼를 올릴
수가 없어요." "어디 출신이요?" "뉴욕이요. 브루클린 아세요?" "몰라." 그는 고개를 흔들었
다. 브루클린은 뉴욕의 사창가였다. 냉동실 직원이 돌아왔다. 그는 조그마한 귀중품 상자를
샤론 데닝스에게 주었다. 샤론 데닝스는 솔리스트 폴이 눈치채지 않을 정도로 호들갑을 떨
며 귀중품을 핸드백에 챙겼고 유류품 인수증과 시체 화장동의서에 사인을 했다. "미안하지
만 부탁 한 가지 해도 될까요?" 그녀는 젊은 냉동실 직원을 향해 말했다. "무슨 일인데요?"
"언니의 유류품을 이 주소로 좀 부쳐 주시겠어요? 항공편으로요. 사례는 할게요. 요금은 수
취인 부담으로 해주시고요." 그녀는 명함 한 장을 냉동실 직원에게 주었다. "그렇게 하지
요." "냉동실 직원이 선선히 대꾸했다. "고마워요. 언제 기회가 오면 브루클린에 들리세요.
좋은 아저씨를 소개해 드릴게요." 그녀는 냉동실 직원을 가볍게 포옹하고 양 볼에 키스를
했다. "더러운 창녀야!" 그녀가 냉동실을 나가자 솔리스트 폴이 침을 칵 뱉었다. 냉동실 직
원은 어깨를 으쓱하고 가방을 다시 챙기기 시작했다. 그녀가 창녀라고 해도 그는 좋은 느낌
을 받았던 것이다. "어디 좀 보자고. 다시 조사를 해야겠어." 솔리스트 폴이 가까이 와서 가
방 안을 샅샅이 조사하기 시작했다. 그녀가 수상한 물건을 가방 안에 넣어 두었을지도 모르
기 때문이었다. "몇 번씩 조사를 했지 않습니까?" "조사하는 것은 아무리 철저하게 해도 빈
틈이 있게 마련이야." 그러나 두 개의 가방에는 수상한 물건이 아무 것도 들어 있지 않았다.
솔리스트 폴은 멍청한 표정으로 매기 한의 시체를 내려다보았다. 그가 잔인하게 살해한 매
기 한이 창백하게 누워 있었다. "집어넣어. 보기 싫으니까." 그는 냉동실을 빠르게 걸어갔다.
"건방진 자식! CIA놈들은 언제나 저따위인가?" 냉동실 직원은 솔리스트 폴이 보이지 않자
거칠게 욕설을 뱉으며 시체를 보관함으로 밀어 넣고 매기 한의 옷가지들을 가방에 쑤셔 담
았다. 공연히 유류품을 항공화물로 부쳐주겠다는 약속을 한 것이 후회되었다. (이건 어쩌
지?) 그는 바닥에 떨어져 있는 검은 원피스를 주워 들고 생각에 잠겼다. 원피스에서 여자의
몸 냄새가 희미하게 느껴졌다. 그는 그것을 냉동실 밖에 있는 쓰레기통 속으로 버릴까 하다
가 가방 속에 쳐넣었다. 어차피 그 여자의 물건인 것이다.
샤론 데닝스는 밖으로 나오자 남쪽 하늘을 쳐다보았다. 이무영 소령이 지금쯤 소형선박을
이용해 멕시코로 떠났으리라는 생각을 하자 속이 부글부글 끓었다. (여우같은 놈.) 이무영
소령을 이용하는 공작이 점점 어려워지고 있었다. 이무영 소령이 CIA의 공작을 어렴풋이
눈치채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샤론 데닝스는 이무영 소령에 의해 뉴욕에서 꼼짝없이 M캡
슐을 지키고 있어야 한다는 생각을 하자 분통이 터졌다. 그 시간이 얼마나 걸릴지조차 알
수 없었다. 그러나 주사위는 던져진 것이다. 어떻게 하든지 M캡슐을 서울까지 운반한 뒤 이
스라엘로 빼돌려야 했다. KGB의 이목을 속이는 일만 아니라면 그것은 간단한 일이었다. 그
러나 KGB를 상대하는 것은 살얼음 위를 걷듯이 조심할 수밖에 없었다. (이번이 마지막 임
무니까...) 그녀는 입술을 깨물었다. 일단 CIA의 리차드 파커 부국장과 다시 협의를 해야겠
다는 생각이 들었다.
13
솔리스트 폴은 마이애미 국제공항 컴퓨터로 멕시코 주재 한국대사 최영한이 멕시코 항공
606편으로 오후 2시에 마이애미에 도착하는 것을 확인했다. 수행원은 없고 부인과 딸이
동행을 하고 있었다. 솔리스트 폴은 오후 1시 30분에 마이애미 국제공항에 도착했다. 최영한
대사가 예약한 월러드 가든호텔은 닥터 리무스가 감시를 하고 있었다.
(이번엔 결판을 내야 해.)
그는 공항 로비에서 마이애미를 찾아오는 휴양객들을 물끄러미 응시하며 생각에 잠겼다.
마이애미는 7, 8월이 오히려 비시즌이었다. 호텔이나 항공편도 7, 8월이면 오히려 할인
혜택을 주는 것이 마이애미였다. 로비를 통해 입국하는 사람들이 많지 않았다.
날씨는 후덥지근했다. 바다 쪽에서 해풍이 불어오긴 했으나 공기가 건조했다. 태양은
불볕처럼 뜨겁게 내리쬐고 있었다. 공항청사 밖에 있는 야자수 잎사귀들도 축 늘어진 채
하늘거리고 있었다.
그는 품속에서 이무영 소령의 사진을 꺼냈다. 서울에 잇는 미국 대사관에서 CIA본부로
전송한 사진을 CIA에서 다시 마이애미로 전송한 것이다. 이무영 소령과 같이 행동한 여자
첩보원에 대해서는 서울의 미국대사관에서도 확인할 수 없었다. 그녀는 아직까지는
그림자에 불과했다.
(내가 이런 애송이에게 당하다니.)
그는 이무영 소령의 사진을 뚫어질 듯이 들여다보았다. 평범한 사내의 얼굴이었다. 언뜻
보아서는 예리한 관찰력이나 강인함이 전혀 보이지 않았다. 그런데 이무영 소령은
마이애미와 마이애미 비치에서 그를 간단하게 농락하고 잠적을 해 버린 것이다.
미국이 광대한 나라라고는 하지만 그렇게 감쪽같이 사라진다는 것은 불가능했다. 미국
내의 어떤 특수기관이 지원을 하지 않으면 이무영 소령이 CIA의 방대한 조직이 거미줄처럼
처놓은 비상망 속을 종횡무진 누비고 다닐 수 없는 것이다.
그는 이무영 소령의 사진을 구겨서 쓰레기통에 버렸다. 이제는 사진을 들여다보지 않아도
이무영 소령의 얼굴을 기억할 수 있을 것 같았다.
(M캡슐 공작엔 무엇인가 덫이 있어. 누군가가 덫을 판 것이 분명해!.)
그는 주먹을 움켜쥐었다. 불길한 예감이 며칠째 계속해서 그의 뒤통수를 엄습하고 있었다.
자신의 정체가 CIA에 노출되고, CIA가 자신을 감시하고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는 로비를 천천히 둘러보았다. 로비 여기저기에 CIA요원들이 휴양객처럼 위장을 하고
서성대고 있었다. 최영한 대사와 이무영 소령이 접선하는 것을 포착하기 위해서였다.
그는 시간을 확인한 뒤 공중전화 부스로 들어갔다. 뉴욕 시경찰에 전화를 걸기
위해서였다. 그는 매기 한의 유류품을 스잔 한에게 넘겨 준 뒤-시체보관실 직원이
항공화물로 부친 것이지만-곧바로 CIA를 통해 스잔 한의 신원을 조회한 일이 있었다. 그가
뉴욕의 브루클린까지 찾아가서 스잔 한의 신원을 확인할 수 없었던 탓이었다.
CIA를 통한 스잔 한의 신원은 아무 이상이 없었다. 그러나 CIA의 신원조회 통보가 그는
의심스러웠다.
뉴욕 시 경찰국에는 그와 친분이 있는 형사가 한 사람 있었다. 리차드 커니라는 이름의
사내였다. 그라면 진실을 말해 줄 수 있을 것 같았다.
"나 솔리스트 폴일세."
그는 리차드가 CIA와 연결되지 않기를 간절히 빌었다.
"아, 폴인가? 이거 정말 오랜만일세."
리차드가 쾌할한 음성으로 대꾸했다.
"부탁이 있네."
"무슨 일인가?"
"이건 우리 CIA에 숨어 있는 제5열이 누구인지를 찾는 극비작업일세. 절대로 비밀을
지키겠다고 약속해 주게."
"약속하네."
"뉴욕에 사는 한 창녀를 찾아 주게. 이름은 스잔 한. 브루클린에서 창녀 짓을 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네."
"스잔 한이라고 했나?"
리차드가 갑자기 긴장하는 목소리가 되었다.
"스잔 한을 알고 있나?"
"알고 있고 말고. 내 사건의 피해자인데 내가 왜 모르겠나?"
"스잔 한이 어제 마이애미를 방문했는지 조사해 주게."
"조사할 필요도 없네."
"무슨 소리야?"
"스잔 한은 어제 마이애미를 방문하지 않았고 앞으로도 방문할 수가 없네. 스잔 한은
살아 있는 사람이 아니야."
그는 가슴이 덜컥 내려 않는 것을 느꼈다. 예상했던 대로 스잔 한은 가짜였다.
"언제 죽었나?"
"6개월 전에 죽었네. 내가 살인범을 검거했어."
"어떻게 죽었나?"
"자네도 알다시피 브루클린에는 창녀들이 많네. 마약거래도 활발하고... 스잔 한은 자기
조직의 마약을 빼돌리려다가 조직에게 발각되어 목이 졸려 죽었네."
"스잔 한이 살고 있는 곳은 누구의 소유로 되어 있나?"
"조그만 아파트가 하나 있는데 그녀의 언니 매기 한의 소유로 되어 있네. 지금은 아무도
살지 않아. 매기 한은 동양인 사내와 함께 와서 동생의 장례를 치른 뒤 3개월쯤 살다가
워싱턴으로 갔네. 참, 매기 한이 혹시 마이애미에서 살해된 그 여자 아닌가? 뉴스에서
봤는데 그 여자 이름이 매기 한이였지? 사지가 절단되어 살해된 여자 말이야."
"미안하지만 리차드, 그 아파트에 가서 마이애미에서 발송한 항공화물이 도착했는지
알아봐 주겠나?"
"지금 말인가?"
"시급을 요하는 일이야. 급히 알아봐 주게."
"알겠네."
리차드 커니와 통화를 끝내고 시계를 보자 1시 45분이었다. 아직도 최영한 대사 일행이
도착하려면 15분을 더 기다려야 했다. 그는 담배를 꺼내 물고 생각에 잠겼다.
매기 한의 동생 스잔 한으로 위장을 하고 매기 한의 유류품을 확인하던 여자가 이무영
소령과 한패인지, CIA의 끄나플인지 짐작을 할 수가 없었다. 어쨌든 이제 CIA와 그는
한편이 아니라는 사실이 드러나고 말았다. CIA는 이미 그가 이중첩자라는 사실을 알고
있으면서도 M캡슐 공작을 맡긴 것이다.
무서운 일이었다. 비로소 그는 M캡슐 공작에 자신이 알지 못하는 흑막이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그는 철저하게 이용을 당하고 있었다. 따라서 이용을 당한 뒤에는 제거될 것이
분명했다.
세계 최대의 정보기관인 CIA가 M캡슐을 회수하지 못한 이유도 거기에 있을 것이다. CIA
는 M캡슐을 회수하지 못한 것이 아니라 일부러 회수하지 않고 잇는 것이다. 물론 그
이유는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이렇게 된 이상 도망을 쳐야 해. 언제 제거될지 모르니까...)
그는 거기까지 생가하지 등줄기로 식은땀이 흐르는 것을 느꼈다. 지금까지 그의 정체가
발각되지 않으리라고 생각했던 것은 오산이었다. 생각해 보면 지난 20년 동안 용케 버티어
온 것이다.
아니 그는 세계 최대의 정보기관인 CIA의 중심부에서 자신의 진정한 정체를 감추고
조국을 위해 눈부신 활동을 했던 것이고 그것은 누구도 의심할 수 없는 일이었다.
마침내 조국으로 돌아갈 때가 온 것이다. 그의 조국은 추운 나라였지만 그는 조국을
사랑했다. 조국을 위해서 CIA에 침투해 헌신적으로 활동을 한 자신이 자랑스러웠다.
그런데 정체가 어디서 드러난 것일까?
그는 자신의 정체가 드러났다는 사실이 믿어지지 않았다. 그의 진정한 신분을 알고 있는
사람들은 극소수에 지나지 않았다.
(일단 이곳을 벗어나야 돼.)
이무영 소령을 추적하는 것은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정체가 드러난 이상 CIA 가 그를
감시하고 있을 것이 분명한데 감시자의 눈에 뛰지 않게 마이애미를 탈출해 워싱텅으로
들어가야 할 일이 쉽지 않을 것이다.
신분 위장방법은 워싱턴으로 돌아가서 따로 생각해야 했다. 아니 워싱턴에 도착하기 전에
신분을 바꾸어야 할지도 모른다.
그는 무겁게 한숨을 내쉬었다.
(내 정체가 드러난 것은 매기 한 때문일까?)
매기 한을 잔인하게 살해한 것은 KCIA에 대한 경고의 의미가 담겨 있었다. CIA의
북구장도 양해한 사항이었다. 그러나 그 내막에는 닥터 리무스에 대한 복수심이 자리잡고
있었다.
리무스는 그가 사랑한 여인 제니 파커-안나 리프니코바-를 엽기적으로 살해한 자였다.
리무스의 애인 나기를 처형한 동독 비밀 경찰과는 하등의 상관도 없는 일이었다. 그가 매기
한을 잔인하게 살해한 것은 리무스가 차선책으로 KGB 요원인 리프니코바를 살해했듯이
그도 서방측 첩보원인 매기 한을 살해한 것뿐이었다.
멕시코 항공 606편은 2시 정각에 활주로에 착륙했다. 탑승객들이 입국 수속과
세관검사대를 통과하여 로비로 쏟아져 나오기 시작하자 CIA 요원들이 분주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들은 최영한 대사 일행이 혹시라도 감시망을 빠져나갈까 봐 전전긍긍하고
있었다.
"저 사람들입니다."
최영한 대사 일행은 2시 15분에야 로비를 나왔다. 최영한 대사는 50대 초반의 사내였고
부인은 40대 후반, 그리고 딸은 15, 6세의 소녀였다.
"미행해."
그들이 택시를 타고 공항을 떠나자 솔리스트 폴은 요원들에게 지시를 했다. 그들이
눈치채지 않게 마이애미를 떠나기 위해서는 당분간 CIA간부 흉내를 내야 했다.
최영한 대사 일행이 윌러드 가든호텔에 투숙하자 솔리스트 폴은 철저하게 감시를 하라고
지시하고 그 옆에 있는 한스호텔로 들어갔다. 한스호텔은 워싱턴에서 날아온 CIA요원들이
숙소로 이용하는 호텔이었다. 그는 이무영 소령이 자신을 따돌리고 잠적하던 방법을
이용하기로 했다. 지금은 CIA의 누가 자신을 감시하고 있는지 전혀 알 수 없었다.
그는 호텔에서 샤워를 하고 호텔의 직원 중 체격이 그와 비슷한 지배인을 그의 객실로
불렀다. 그리고 그는 냉장고에서 캔맥주를 꺼내 왼손으로 들고 천천히 마셨다.
이내 노크소리가 들렸다. 도어를 열자 붉은 유니폼을 입은 지배인이 서 있었다.
"부르셨습니까?"
지배인이 허리를 굽히고 물을 때 솔리스트 폴은 복도를 살폈으나 복도엔 이미 아무도
없었다.
"들어오시오."
그는 문 옆으로 비켜섰다. 지배인이 그를 조심스럽게 살피며 안으로 들어왔다. 그는
오른손 주먹을 꽉 쥐었다.
"고개를 들어보시오."
지배인이 의아한 표정으로 고개를 들었다. 그 순간 그는 오른손 주먹으로 지배인의 턱을
강하게 올려쳤다. 지배인은 어이쿠 소리를 지르며 뻗어버렸다.
그는 재빨리 지배인의 유니폼을 벗겨 갈아입었다. 지배인은 침대 위에 눕혀 놓았다.
복도로 나오자 아무도 없었다. 그는 직원용 엘리베이터를 타고 옥상으로 올라갔다. 옥상에
세탁실이 있었다. 그는 어리둥절해 하는 세탁부가 벗어 놓은 외출복을 3백 달러를 주고 사
입은 뒤 다시 직원용 엘리베이터를 타고 1층으로 내려왔다.
1층 로비엔 그가 예상했던 대로 CIA 요원 두 명이 서성대고 있었다. 그는 그들과 눈을
마주치지 않기 위해 얼굴을 푹 숙이고 로비를 걸어 나갔다. 밖에는 다행히 CIA요원이
지키고 있지 않았다.
그는 호텔을 벗어나자 쇼핑센터로 들어가 먼저 가방을 사고 염색약, 선글라스, 타이 셔츠
그리고 양복을 한벌 샀다. 변장에 필요한 모든 것이 갖추어지자 그는 한스호텔 옆에 있는
북경호텔로 들어갔다.
그는 거기서 머리에 염색을 하고 선글라스를 쓴 뒤 렌트카 회사에 전화를 걸어 차를
예약했다. 그가 호텔을 나온 것은 한 시간도 걸리지 않아서였다. 그는 택시를 타고 렌트카
회사에 가서 요금을 지불하고 차를 빌렸다.
우선 올랜도로 갈 계획이었다. 올랜도에서 비행기를 타고 워싱턴으로 가면 되었다.
어떻게 된 일인지 그가 마이애미를 완전히 벗어날 때까지 CIA가 미행을 하는 기색은
전혀 없었다.
리챠드 파커 부국장은 사무실에 않아 여송연을 피우고 있었다. 그는 여송연 연기에 취한
듯 몽롱한 표정을 지으며 앞에 서 있는 맥슨 비서를 응시했다. 비서는 넥타이를 단정히
매고 있었다. 코넬리 대학 출신의 햇병아리였다.
"리무스가 뒤를 따라가고 있나?"
"예, 올랜도에서 워싱턴행 비행기를 탔다는 보고가 들어왔습니다."
"몇 시 비행기?"
"5시 비행기입니다."
"그럼 내일 새벽엔 리무스가 죽겠군."
"예?"
"솔리스트 폴은 뛰어난 첩보원이야. 리무스가 미행을 하고 있다는 것을 눈치채면
솔리스트 폴이 그냥 두겠나?"
"그럼 리무스에게 알려 비행기 안에서 솔리스트 폴을 제거하라고 할까요?"
"그냥 둬."
"예?"
"어차피 리무스도 제거 대상자였어."
"리무스는 KGB의 이중첩자가 아니지 않습니까?"
"그는 이성을 잃었어. 나기라는 동독 여자 때문에 조직의 명령까지 거부한 자야."
비서가 입을 다물었다. 그는 여송연을 피우고 있는 부국장이 소름이 끼치도록 잔인한
사내라는 사실을 비로소 깨달았다.
"그럼 솔리스트 폴은 누가 제거합니까?"
"이무영 소령이 제거하겠지."
"이무영 소령은 지금 멕시코로 가고 있습니다. 멕시코에서 서울로 갈 모양입니다."
"이무영 소령이 다시 돌아오면 솔리스트 폴을 제거할 거야."
"그는 왜 M캡슐도 안 가지고 서울로 가는 겁니까?"
"우리 공작에 냄새를 맡은 거겠지."
"샤론 데닝스는 왜 M캡슐을 복사해서 텔아비브로 가져가지 않습니까? 그러면 간단한 일
아닙니까?"
"그렇게 되면 서울에서 가만히 있겠나? 서울에서 즉각 KGB에 알릴 게 뻔해. 그럼
KGB는 우리가 이스라엘 핵무기 제조기술을 이전하는 것으로 알고 시리아에 핵무장을
시킨다고."
맥슨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는 국제정세가 흑막에 싸인 채 급변하고 있다는 것을
비로소 실감할 수 있었다.
"샤론 데닝스는 M캡슐이 들어있는 항공화물을 찾아갔나?"
"예, 케네디 공항에서 찾아갔습니다."
"솔리스트 폴이 샤론 데닝스의 검은 원피스에 부착되어 있는 M캡슐을 찾지 못했다니
우습군. 솔리스트 폴도 이제는 늙었다는 증거 아닌가? 서울에서는 아무 연락이 없나?"
"장미공작은 8월에 실행에 옮겨진다고 합니다."
장미공작은 포스트 박 제거공작을 말하는 것이다.
"맥슨?"
"예?"
"장미공작은 어떠한 일이 있어도 누설되면 안 되는 국가기밀이야. 기록으로 남겨 놓는
대신 철저하게 보관해. 알았나?"
"예."
맥슨이 고개를 꾸뻑했다.
그는 만족한 표정으로 여송연을 빨기 시작했다. 대통령은 기록을 남기지 말라고 했으나
그는 기록을 남길 생각이었다. 만에 하나 장미공작이 잘못되어 의회에서 청문회가 열리면
고스란히 자신만 당하는 것이다.
커터는 재선이 불투명했다. 미국은 그가 슬로건으로 내건 도덕주의에서 보수주의로
회귀하고 있었다. 카터는 이미 시대에 뒤떨어진 인물이었다.
닥터 리무스는 솔리스트 폴을 제거하라는 부국장의 긴급지시를 받고 어리둥절했다.
솔리스트 폴은 냉혹한 인물이기는 하지만 CIA에서는 필요악과도 같은 존재였다. 게다가
솔리스트 폴은 미국을 위해 수많은 첩보 공작을 수행해 온 인물이었다. 그런 인물을 명령
하나로 제거해야 한다는 것은 서글픈 일이었다. 부국장의 명령은 언제나 그렇듯이 이유나
설명이 없었다. 이번에도 솔리스트 폴을 제거하라는 명령뿐이었다.
그는 마이애미에서 올랜도로, 올랜도에서 워싱턴까지 솔리스트 폴을 미행하며 착잡한
생각에 빠졌다. 솔리스트 폴은 아직까지 그의 미행을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다. 마이애미
국제공항에서 어디론가 전화를 건 뒤부터 허둥대기 시작한 솔리스트 폴은 CIA요원들을
따돌리고 올랜도 국제공항으로, 올랜도에서 워싱턴으로 날아온 것이다. 자신을 제거하려는
부국장의 음모를 솔리스트 폴도 알고 있는 모양이었다.
처음부터 이상하게 전개되고 있는 M캡슐 공작이었다. CIA가 M캡슐 공작을 감지한 것은
필라델피아 CIA요원인 샘 오스턴에 의해서였다. 샘 오스틴이 이라크 국방정보국의 압둘라
소령과 브라운 연구소의 제이콥스 박사가 짜고 핵연료 재처리공장 설계도와 시공사양서를
빼내려는 것을 도청한 뒤, 그것을 탈취하여 한국에 팔려고 워싱턴 한국대사관 무관실에
전화를 했을 때 CIA는 이미 그 사실을 도청하고 있었다.
그들이 도청당할 것을 우려해 전파교란기를 작동시켰으나 CIA는 전파교란기의 방해에도
불구하고 전화를 도청할 수 있는 시스템을 개발해 놓고 있었다.
리무스가 이해할 수 없는 것은 CIA가 그 모든 사실을 다 알고 있으면서도 1급비밀에
속하는 M캡슐이 돌아나니게 놔두고 CIA가 M캡슐을 추적하고 있는 흉내를 내고 있는
점이었다.
또 한 가지 의문점은 CIA가 모든 정보를 솔리스트 폴에게 거짓으로 전달하고 있다는
점이었다.
(솔리스트 폴은 이용당하고 있어.)
CIA의 정보가 요원들에게 바르게 전달되지 않는 것은 그 요원이 이중첩자일 때뿐이었다.
솔리스트 폴이 KGB의 스파이라는 증거였다.
리무스는 워싱턴에 도착하자 CIA본부의 소련 담당과장에게 전화를 걸었다.
소련 담당과장 윌리엄 테프트는 그의 오랜 동료였다. 솔리스트 폴은 공항 터미널 앞에서
택시를 기다리고 있었다. 사람들이 줄을 지어 서 있으므로 10분은 기다려야 할 것 같았다.
"닥터 리무스일세."
그는 전화에 윌리엄이 나오자 낮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아, 치과의사 아닌가? 무슨 바람이 불어 전화를 했지?"
"궁금한게 있어 전화를 했네 솔직하게 대답해 주게."
"누군가에게 쫓기고 있나?"
"쫓기고 있는 것이 아니라 쫓고 있네."
그는 한껏 목소리를 낮추어 수화기에 대고 속삭였다. 누군가 엿든고 있을 것 같아 걱정이
되었다. 그의 조심성은 동베를린에서 스파이 활동을 하고 있을 때부터 생겨난 것이었다.
그곳에서는 한순간의 방심이나 실수가 곧바로 죽음으로 연결되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이
수화기에 대고 속삭이는 말을 CIA첨단 도청장비인 만년필 도청기로 낱낱이 도청하고 있는
사람이 있다는 것을 꿈에도 모르고 있었다.
도청자는 솔리스트 폴이었다.
택시정류장에서 택시를 기다리고 있는 그의 오른손에 만년필 한 자루가 들려 있었다.
"누군데?"
전화를 받고 있는 상대방의 목소리는 솔리스트 폴의 귀에 들리지 않았다. 그러나
리무스의 말은 이어피스를 통해 똑똑히 들렸다.
"솔리스트 폴이야."
"부국장이 자네에게 그것을 시켰군."
"그것이라니? 그렇다면 자네는 알고 있었나?"
"CIA에서 내가 모르는 일이 어디 있나. CIA의 모든 공작은 소련을 최우선으로 삼고
있네."
"솔리스트 폴이 KGB 요원인가?"
"그래."
"그런데 왜 나에게는 그런 사실을 얘기하지 않았지?"
"KGB의 이중첩자를 모두 자네에게 얘기해 줄 수는 없어. 그런 초보적인 상식들은 자네도
알고 있겠지?"
"좋아. 그런데 M캡슐 공작은 도대체 어떻게 되고 있는 건가?"
"그건 한국으로 보낼 거야."
"한국으로 보낸다고? CIA는 무엇 때문에 M캡슐을 한국으로 보내지? 처음부터 M캡슐을
보내려고 계획을 세우고 있었나?"
"물론이지. M캡슐 공작은 이스라엘 비밀첩보부가 계획을 세운거야."
"모사드?"
그가 경악하며 소리를 질렀다.
"그래."
"모사드의 누군가? 혹시 이무영 소령과 같이 있던 여자인가?"
"그래. 미국 이름 샤론 데닝스. 이스라엘 이름 샤샤 구리온. '지중해의 붉은 장미'라는
이름으로 더 많이 알려져 있네. 전설적인 여자 스파이 마타하리에 비교해도 손색이 없는
여자지. 지금 마흔 살 쯤 되었을 걸."
"샤론 데닝스라면 나도 이름을 들어 본 적이 있네. 그 여자와 파커 부국장이 손을
잡았나?"
"미국과 이스라엘은 세계 어느 나라보다도 가까운 사이지. 미국의 중동정책은 이스라엘
없이는 불가능해."
"알겠네."
닥터 리무스가 전화를 끊고 이쪽을 힐끗 쳐다보았다. 솔리스트 폴은 재빨리 만년필을
감추고 담배를 꺼내 무는 척했다.
워싱턴의 하늘은 잿빛으로 낮게 가라않아 있었다. 비가 오려는 것인지도 모른다.
솔리스트 폴은 라이터로 불을 붙여 담배연기를 길게 내뿜었다. 리무스가 자신을 살해하기
위해 미행하고 있다는 사실에 소름이 끼쳤다.
그는 코트 주머니 속으로 손을 찔러 넣었다. 딱딱하고 차가운 쇠붙이가 만져졌다. 매그넘
45구경이었다.
이내 택시가 왔다. 그는 택시에 올라타고 백미러로 뒤를 살폈다. 리무스가 줄을 서 있던
사람들에게 패스포트를 꺼내 보이고 양해를 구한 다음 택시에 올라타는 것이 보였다. 그를
미행하려는 것이 분명했다.
그는 한 시간 후에 조지타운의 레스토랑 앞에서 택시를 내렸다. 프랑스 요리 전문
레스토랑이었다.
그가 출입문을 열고 들어가자 홀에는 손님이 가득 차 있었다. 그는 빈자리를 가까스로
찾아서 않은 뒤 웨이터에게 샴페인과 새우요리를 주문했다.
리무스는 보이지 않았다. 그는 사람들 눈에 뛰지 띄지 않게 매그넘 45구경을 코트
주머니에서 꺼낸 뒤 소음장치를 부착했다. 그리고 그것을 다시 주머니에 찔러 넣었다.
닥터 리무스는 한 시간 후에야 솔리스트 폴이 레스토랑에서 나오는 것을 발견했다. 그
레스토랑은 다른 출입구가 없었다. 그는 그것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레스토랑 안으로
솔리스트 폴을 따라 들어갈 필요가 없었다.
솔리스트 폴이 다시 택시를 탔다. 리무스는 뒤따라오는 빈 택시를 잡아타고 솔리스트
폴을 미행하기 시작했다. 솔리스트 폴이 호텔이나 숙소에 들어갔을 때 제거해 버릴
작정이었다. 가능한 한 인적이 없는 것에서 제거해야 했다.
솔리스트 폴이 택시에서 내린 곳은 워싱턴의 오래된 시가지인 알렉산드라였다. 미국의
초대 대통령 조지 워싱턴, 남북전쟁 당시 남군의 명장 리 장군이 살았던 곳으로 워싱턴
남쪽 10킬로미터 지점에 위치해 있었다.
조지타운 구와 함께 식민지 풍의 건물이 많아 관광객들이 항상 들끊고 있었다.
솔리스트 폴이 왜 알렉산드라에서 택시를 내렸는지는 알 수 없었다. 그가 미행을
눈치채고 있다고는 생각되지 않았다. 리무스는 솔리스트 폴에게 발각되지 않기 위해 상당히
조심스럽게 미행을 했던 것이다.
솔리스트 폴은 수제품 가구를 파는 상점 앞거리를 느릿느릿 걷고 있었다.
그곳엔 사람들이 어깨를 부딪힐 정도로 많았다. 리무스는 사람들의 어깨에 부딪히면서
솔리스트 폴을 놓치지 않으려고 바짝 신경을 썼다. 솔리스트 폴은 인파에 섞여 모습을
감추었다가는 나타나고 나타났다가는 사라지곤 하였다.
"제기랄. 내가 미행을 하고 있는 것을 놈이 눈치챘나?"
리무스는 짜증이 났다. 사람들이 많은 곳에서는 미행이 용이치가 않다. 그는 CIA에 지원
요청을 할 걸 그랬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그는 이내 고개를 흔들었다. 솔리스트 폴은 제거 대상자였다. CIA내부에서는
이름도 상당히 알려져 있었다. 그런 자를 제거하는 것은 비밀리에 해야 했다. 인원 지원을
요구하는 것은 어림없는 짓이다.
"내 손으로 제거해야 돼!"
리무스가 주먹을 불끈 쥐었다. 솔리스트 폴은 KGB의 이중첩자였다. 나기를 잔인하게
살해한 동독 비밀경찰과 같은 종류의 인간이었다. 그는 그런 인간들에게 증오심을 갖고
있었다.
그때 솔리스트 폴이 갑자기 몸을 돌려 이쪽으로 걸어오기 시작했다. 그는 소스라쳐
놀랐다. 딴 생각을 하느라고 너무 가까이 접근했던 것이다.
솔리스트 폴은 점점 그를 향해 가까이 걸어오고 있었다. 얼굴이 무표정했다. 솔리스트
폴이 자신을 발견했는지 어쨌는지도 알 수 없었다.
그는 반사적으로 몸을 감추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미행이 발각당한 것이다. 그러나 몸을
숨기기에도 늦었다.
그는 웃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어차피 발각당한 것이다. 우연히 마주친 것이라고 하면
솔리스트 폴도 어쩔 수 없을 것이다.
그런데 웃음이 잘 나오지 않았다. 솔리스트 폴은 점점 가까이 오고 있었다.
사정 거리.
그는 언뜻 그런 생각을 했다. 햇병아리 때 훈련받으면서 교관으로부터 귀가 따갑도록
듣던 소리가 왜 갑자기 생각이 났는지 알 수 없었다.
그는 걸음을 멈추면서 솔리스트 폴의 얼굴을 똑바로 응시했다. 그의 시선이 천천히
밑으로 내려갔다. 솔리스트 폴의 트렌치 코트 오른쪽 주머니 앞이 볼록하게 솟아 나와
있었다.
다음 순간 그는 솔리스트 폴의 트렌치 코트자락에 조그만 구멍이 뚫리는 것을 발견했다.
그리고 거의 동시에 자신의 가슴에 탄환이 날아와 박히는 것을 느꼈다.
소리는 없었다. 소음장치가 부착된 총이 분명했다.
그는 믿을 수 없었다. 대로상에서 그것도 사람들이 어깨를 부딪혀야 할 정도로 들끊는
거리 한복판에서 놈이 저격을 해 오리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던 일이었다.
그때 또 한 방의 탄환이 그의 이마에 날아와 박혔다. 피가 사방으로 튀고 그는
길바닥으로 내동댕이쳤다.
사람들이 물결처럼 갈라지고 있었다. 그는 여자들의 날카로운 비명소리를 들었다. 그리고
그것으로 끝이었다. 그 이상은 아무 것도 기억할 수 없었다. 아니 우왕좌왕하는 사람들의
틈바구니에서 솔리스트 폴이 희미하게 웃고 있는 것을 얼핏 본 기억이 났다.
솔리스트 폴이 군중들 속에서 사라져 가고 있었다. 그러나 아무도 솔리스트 폴을
제지하지 않고 있었다. 아니 그가 총을 쏜 사실조차 모르고 있는 것 같았다.
리무스는 눈을 감았다. 비로소 자신이 죽어가고 있다는 느낌이 확실하게 들었다.
14
7월 12일 밤 9시 30분. 이무영 소령은 일본 하네다 공항에서 JAL기를 타고 서울로
돌아오고 있었다. 플로리다에서 멕시코로, 멕시코에서 프랑스로, 프랑스에서 다시 일본을
거쳐 서울로 돌아오고 있는 것이다. CIA의 추적을 따돌리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CIA의 추적을 완전히 따돌렸다고는 확신할 수 없는 일이었다. 첩보전에서 방심은
곧장 죽음과 연결되고 공작의 실패를 의미했다. CIA가 언제 어떻게 자신을 감시하고
있는지 그는 항상 경계심을 늦추지 않았다.
이무영 소령은 시트 등받이에 머리를 기댔다. 샤론 데닝스의 표독한 눈빛이 머리 속에
떠올라왔다. 이무영 소령이 서울에 잠입했다가 돌아오겠다고 했을 때 샤론 데닝스의 눈빛이
그렇게 독기를 품었었다. 아주 짧은 시간이었지만 이무영 소령은 그것을 놓치지 않았던
것이다.
(이것으로 샤론 데닝스의 정체를 시험할 수 있게 된 거야.)
샤론 데닝스가 모사드의 일급 요원이라는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었다. 그러나 샤론
데닝스의 행동에는 수상한 점이 많았다.
도쿄에서 G7회담이 열린 뒤부터-아니 카터 미대통령이 서울을 방문한 뒤 샤론 데닝스의
태도가 돌변해 있었다. 그녀가 내색하지 않았으나 이무영 소령은 직관으로 그것을 감지할
수 있었다.
그가 서울로 돌아오고 있는 것은 그런 이유 때문이었다. 물론 서울로 돌아오는 길이기
때문에 M캡슐을 가지고 돌아올 수도 있었다. 그러나 그렇게 되면 샤론 데닝스를 뉴욕에
묶어 둘 수가 없었다.
샤론 데닝스가 뉴욕에 있는 한 그녀의 뒤에 있는 세력들은 정체를 드러낼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는 눈을 감았다. 서울엔 비가 오고 있다고 했다. 떠날 때도 비가 왔었는데 돌아올 때도
비가 오고 있었다. 그는 잠시 용두동에서 잠을 자고 있을 아내와 딸을 생각했다.
그들에게 귀국을 알릴 수 없었다. 그의 귀국은 극비였다.
같은 시간, 중앙정보부 해외7국의 오기철 국장은 이문동 청사에서 정보부장과 독대를
하고 있었다. 정보부장은 궁정동 안가에서 대통령과 술을 마신 듯 얼굴이 불콰했다.
"이무영이가 귀국한단 말이야?"
정보부장이 눈을 부릅뜨고 물었다.
"예."
오기철은 조용히 대꾸했다.
"M캡슐을 가지고 온대?"
정보부에서 이무영 소령이 M캡슐 공작 때문에 미국에 파견된 사실을 안 것은 최근의
일이었다. 그것도 CIA의 도날드 램버트를 통해서였다. 대통령이 정보부장을 신임하지 않고
있다는 뚜렷한 증거였다.
"아닙니다. M캡슐은 뉴욕의 여자 첩보원이 가지고 있는 듯하다고 합니다."
"도대체 그 여자 첩보원이 누구야?"
"CIA도 그 여자 정체를 알아내기 위해 초비상 상태에 있답니다."
정보부장이 얼굴을 찡그렸다. 이해가 안 된다는 표정이었다.
"내가 램버트를 한번 만나봐야겠어."
"청와대의 분위기는 어떻습니까?"
"매일 그렇지 머. 그 인간이 있는 한 이 나라 정치는 뒷걸음 칠 수밖에 없어."
"미국은 유사기에 우리편이 될까요?"
"우리편이 되도록 만들어야지. 재빨리 계엄령을 선포하고 정권을 장악해 나가면 돼."
"육군이 가만히 있겠습니까?"
"가만히 있지 않으면 어떻게 하겠어? 미국이 우리편이라는데 감히 대항을 하겠어?"
"미국에서는 정말 대통령이 축출되기를 바라고 있습니까?"
"바라지. 미국도 대통령이 얼마 버티지 못할 거라는 사실을 알고 있어. 대통령이 유고가
되면 누가 정권을 인수받을 지 재고 있더라구. 우린 참모총장만 확보하면 돼."
"정장군 말입니까?"
"음"
정보부장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오기철은 입을 다물었다. 정권을 무력으로 인수받으려면
참모총장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실질적인 힘을 갖고 있는 예하부대의 장군들과
영관장교들을 끌어 모아야 했다. 그러나 정보부장은 그 일에 무관심했다.
(부장이 대통령을 축출하려는 것이 일시적인 기분인 모양이군.)
오기철은 실망이 되었다. 그러면서도 정부부장은 사람들을 만날 때마다 대통령의 정책을
비판하고 정적인 경호실장을 노골적으로 비난하고 있었다. 어리석은 짓이었다.
(이 사람을 따르다가는 큰일도 못하고 억울하게 죽겠어.)
그러나 내색할 수 없는 일이었다.
"이무영인 어떻게 할 거야?"
"CIA에서 감시해 주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완전히 자기네 편인 줄 알고 있군."
"김포공항에 요원들을 보내긴 했습니다."
"일단 감시나 하게 해."
"예."
오기철은 고개를 숙여 인사하고 부장실을 물러 나왔다. 가슴이 답답했다. 그는 자기 방에
돌아와 담배를 한 대 피운 뒤 청사를 나왔다. 모처럼 술이 마시고 싶어졌다. 비는 좀처럼
그칠 기색이 아니었다.
"서초동으로 간다."
그가 자신의 승용차 뒷자리에 앉아 운전기사에게 행선지를 지시했을 때 카폰의 벨이
울렸다.
"나야."
전화를 걸어온 것은 공항에 파견한 정태수였다.
"이무영 소령이 한 시간 후에 김포공항에 도착합니다. 입국자 명단에 있습니다."
"어디서 오는 거야."
"일본입니다. 9시 30분에 하네다 공항을 이륙한 JAL기에 타고 있습니다."
"놓치지 마."
"그럼 체포합니까?"
"아니야. 감시만 해."
"알겠습니다."
찰칵 전화가 끊겼다. 그는 카폰을 놓고 눈을 지그시 감았다. 이무영이가 돌아오고 있다.
그런데 그것이 무슨 문제가 되는 것일까. 이무영 소령은 한낱 정보장교에 불과한 것이다.
현재로서는 M캡슐도 문제의 본질에서 벗어나 있었다. 미국이 M캡슐 때문에 이무영
소령을 제거하려고 했다면 벌써 이무영 소령은 죽었을 것이다. 이무영 소령이 살아있는
것은 미국 쪽에 이용가치가 있기 때문인 것이다.
오기철은 정보부에서 잔뼈가 굵은 사람이었다. 위험이 닥쳐오는 것은 누구보다도 빨리
감지할 수 있었다.
"됐어."
차가 아파트단지로 들어서자 그는 운전기사에게 차를 세우라고 지시했다. 언제나 그랬다.
그는 정보부의 누구에게도 자신의 집이나 거처를 가르쳐준 적이 없었다. 만약의 경우
적들의 공격에 대비하기 위해서였다.
그는 박쥐우산을 쓰고 차에서 내렸다. 빗발이 장대질을 하듯이 퍼붓고 있었다.
차가 아파트단지를 돌아서 오던 길로 다시 달려갔다. 그는 자신의 차가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진 뒤에야 아파트를 향해 걸음을 떼어놓았다.
아파트는 성북동에 있는 요정 장춘각에서 데려다 놓은 기생 춘미에게 사준 것이었다.
그러나 그가 9층에 있는 춘미의 아파트에 도착했을 때 춘미는 아파트에 없었다.
(또 어디를 싸돌아다니는 거지?)
그는 화가 났다. 최근에 춘미는 아파트에 들어앉아 있는 일이 거의 없었다. 그 사실을
뻔히 알고 왔으면서도 그는 부아가 치밀었다.
그는 아파트의 거실에 바지를 벗어 팽개쳤다. 바짓가랑이가 흠뻑 젖어 있었다.
춘미가 들어온 것은 거의 통행시간이 다 되어서였다. 술이 얼큰하게 취해 혀가 꼬부라져
있었다.
"죄, 죄송해요. 아빠."
춘미는 울상을 짓고 있었다. 그가 화가 났을 때 얼마나 난폭한지 그녀는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몸이 사시나무 떨리듯 부들부들 떨렸다.
"이리 와!."
오기철이 낮게 지시했다. 오기철은 달랑 팬티 하나만을 걸친 채 소파에 앉아 있었다.
춘미가 덜덜 떨면서 무릎걸음으로 가까이 왔다.
"어디 갔다가 왔어?"
"디, 디스코텍에..."
"미친년!"
춘미는 이제 겨우 스물세 살이었다. 디스코텍에 출입하는 것을 좋아하는 나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그는 주먹으로 춘미의 얼굴을 후려쳤다.
춘미가 악 하는 비명소리와 함께 거실 바닥으로 나뒹굴었다. 그 바람에 스커트가 걷어
올려지며 살찐 허벅지가 드러났다. 하늘색 삼각 팬티가 감싼 하체의 도톰한 부분이 유난히
선정적으로 보였다.
그것을 좋아할 타입이었다.
"아빠, 용서해 주세요."
춘미는 두 손을 모아 빌고 있었다. 그는 소파에서 일어나 다시 춘미의 빰을 매섭게
후려쳤다. 요정에서 술을 마실 때는 기생들이 아빠라고 부르는 소리가 감미롭기 짝이
없었으나 이제는 싫증이 났다.
그는 30분쯤 춘미를 때리고 발로 찼다. 언제나 비슷하게 되풀이 되는 일이었다. 춘미가
외출을 하지 않고 아파트에서 그를 기다리고 있었어도 그는 무슨 꼬투리라도 잡아서 춘미를
때렸을 것이다. 그리고 이어지는 것은 짐승처럼 격렬한 정사...
오늘도 그랬다. 오기철은 고통으로 신음하는 춘미의 알몸을 껴안고 맹수처럼 날뛰었다.
번개가 치고, 천둥이 울고 그들의 정사는 세상의 종말처럼 격렬하였다.
그리고는 들풀처럼 쓰러져 눕는 그들이었다. 그들은 나란히 누워서 담배를 나누어 피우며
바깥의 빗소리를 들었다. 베란다를 적시고, 아파트의 잿빛 벽에 아우성을 치며 들이치는
빗소리, 그 빗소리를 들으며 잠을 잤다.
비는 이튿날도 계속 왔다.
오기철이 아침 일찍 정보부로 출근하자 정태수 수사관이 기다리고 있었다.
"이무영이는 도착했나?"
"예. 도착하자 곧바로 청와대로 들어갔습니다."
"청와대에?"
그는 믿을 수 없었다.
"그래서 이무영 소령의 집과 이무영 소령이 근무하는 국방부 정보국 직원들에게 모조리
감시요원을 붙이도록 조치했습니다."
"잘 했어."
그때 부장실에서 인터폰이 걸려왔다. 그는 정태수에게 나가도 된다는 손짓을 하고
인터폰을 들었다.
"이무영 소령의 집에 감시요원을 붙였나?"
정보부장이었다.
"예. 방금 보고를 받았습니다."
"요원들을 철수시켜."
"예?"
"아니 그럼 각하께서 우리가 이무영 소령을 감시한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까?"
"그런 것 같지는 않아. 이무영 소령집 근처에 정보부 요원들은 얼씬도 하지 말라고 했을
뿐이야."
"부장님께서는 뭐라고 대답하셨습니까?"
"알았습니다 학 대답했어. 왜?"
"아닙니다."
"이무영 소령 집 근처에 배치한 요원들 철수시켜. 알았나?"
"예."
그는 대답을 하고 천천히 인터폰 수화기를 내렸다. 그러나 이무영 소령의 집 근처에
배치한 요원들을 철수시킬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그는 M캡슐 공작 뒤에 있는 진짜 공작을 알고 싶었다. 그것은 이무영 소령만이 알고
있었다. 어떻게 하든지 잠적해 버린 이무영 소령을 찾아서 다시 감시를 해야 했다.
그러나 이무영 소령은 청와대에서부터 행적이 완전히 끊어져 있었다. 놀라운 일이었다.
오기철은 이무영 소령을 수배하는 작전에 우국의 눈이라는 암호를 붙였다. 우국이란 나라를
근심하고 염려한다는 뜻이고 눈에는 중인 또는 목격자라는 뜻이 숨어있다.
이무영 소령이 그런 존재였다.
오기철은 이무영 소령에게 강한 투지를 느꼈다. 그의 행적을 찾아내는 것에 오기철은
전율에 가까운 긴장감을 느끼고 있었다.
그러나 이무영 소령의 행적은 계속 오리무중이었다. 사흘이 지나고 일주일이 지났다. 이제
오기철은 춘미의 일조차 팽개치고 이무영 소령의 행적을 찾는 일에 나섰다. 그러는 동안
지루한 장마가 끝나고 불볕더위가 시작되었다. 이무영 소령이 돌아온 지 벌써 보름째가
되고 있었다.
그러고도 이틀 후에야 이무영 소령의 행적이 비로소 희미하게 잡혔다. 이무영 소령이
비밀리에 사관학교 출신 장교들의 모임인 근화회를 조사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근화회는 최근에 결성의도를 수상하게 여긴 대통령의 지시에 의해 해병대 사령관
박창길소장이 철저하게 조사를 했었다. 그 까닭으로 제1대 회장 유근일 교통공사사장이
부정축재 혐의로 구속되고, 몇몇 장군들이 예편되는 등 된서리를 맞아 현재는 명맥만 겨우
유지하고 있었다.
이무영 소령이 근화회를 조사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라면 근화회에 불순한 의도가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정국이 소용돌이치고 있다는 증거였다.
그러나 이무영 소령에 대한 행적은 다시 끊어지고 말았다. 이무영 소령을 감시하던
정태수 수사관과 그의 부하들이 이무영 소령과 격투를 하여 이무영 소령이 부상을 당했다는
보고만 겨우 들어와 있을 뿐이었다.
정보부 요원들도 턱이 부서지고 팔이 부러지는 등 모두 부상을 당한 상태였다. 그것이
이무영 소령이 한남동에 있는 요정 도화장에서 첩보사령관 이택석 소장을 만나고 나왔을
때였다.
정보부 요원들은 평소처럼 이무영 소령을 멀찍이 떨어져 미행하고 있었다고 했다.
이무영 소령은 술에 취해 비틀거리는 걸음으로 요정 앞 골목을 걸어가기 시작했다.
정보부 요원들은 천천히 그의 뒤를 따라 걸었다. 이무영 소령의 행적을 추적하기 시작한 지
18일, 가까스로 이무영 소령의 행적을 찾는데 성공했던 것이다.
이무영 소령은 큰길로 나오자 택시를 탔다. 정보부 요원들은 뒤에 따라오던 정보부
승용차를 타고 이무영 소령을 미행했다.
이무영 소령은 신촌에서 택시를 내린 뒤 어느 까페로 들어갔다. 그는 그곳에서 어디론가
전화를 걸더니 검은 선글라스를 꺼내 쓰고 다시 나왔다. 그러나 곧 옆에 있는 스텐드바에
들어갔다.
정보부 요원들로 스탠드바로 들어갔다. 이무영 소령은 무대 바로 앞자리에 앉아 맥주를
주문했다. 정보부 요원들도 이무영 소령과 떨어져 앉아 맥주를 주문했다.
무대에서는 스트립쇼가 한창이었다. 아슬아슬한 비키니를 입는 스트립걸이 선정적으로
둔부를 흔들어대고 있었다. 커다란 젖가슴이며 풍만한 둔부를 바라보는 요원들의
목구멍으로 마른침이 저절로 넘어갔다.
그때 이무영 소령이 화장실을 향해 걸어갔다. 요원 한 사람이 뒤따라갔다.
이무영 소령이 나온 것은 3분쯤 뒤의 일이었다. 혼자였다.
(당했군!)
정태수 수사관은 바짝 긴장이 되었다. 이무영 소령이 계산을 마치고 출입구로 걸어나가고
있었다.
그들은 재빨리 일어나 이무영 소령의 뒤를 따르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들이 출입구를
향해 계단을 뛰어 올라갔을 때 이무영 소령과 5대 1의 격투를 했다. 처절한 격투였다.
이무영 소령은 모두 무술 유단자들인 정보부 요원들을 눈 깜짝할 사이에 해치웠다.
정태수 수사관이 옆에 있던 쇠파이프를 들어 뒤에서 이무영 소령의 어깨를 후려치지
않았다면 이무영 소령은 부상을 당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쇠파이프에 어깨를
얻어맞아 이무영 소령은 계단 위에 나뒹굴고 말았다.
그때 헌병 지프카가 달려오더니 헌병들이 들이닥쳤다. 정태수 수사관은 재빨리 요원들을
이끌고 자리를 피했다. 헌병들을 인솔하고 있는 사람은 뜻밖에도 여군 중위였다.
정태수 수사관은 골목 뒤에 숨어서 헌병들이 이무영 소령을 부축해 지프차에 태운 뒤
어디론가 사라지는 것을 바라보고 있을 수 밖에 없었다. 더 이상 이무영 소령의 뒤를
미행했다가는 어떤 화를 당할지 알 수 없었다.
오기철은 정태수 수사관의 생각에 동의했다. 대통령의 지시를 어기면서까지 이무영
소령을 감시하는 것은 한계가 있는 일이었다. 게다가 헌병들을 인솔하고 있는 여군 중위는
국방부 정보국 소속으로 여겨졌다.
국방부와 대립을 하는 것은 무모한 짓이었다.
이무영 소령이 김포공항을 통해 프랑스로 떠난 것은 서울에 돌아온 지 달포만인 9월 3일의
일이었다. 신변 안전 때문인지 김포공항엔 육군 참모총장을 역임한 서종원 대통령 안보담당
특별보좌관이 나와서 이무영 소령이 탄 비행기가 이륙할 때까지 지켜보고 있었다. 철저한
사내였다.
(나도 이젠 은퇴를 해야겠어.)
오기철은 이무영 소령이 김포공항을 떠나자 맥이 탁 풀렸다. 이무영 소령에 대해선 끝내
아무 것도 알아낼 수 가 없었다.
비참한 일이었다.
이틀 후 오기철은 정보부에 사표를 냈다. 그는 우직한 정보부장이 사표를 수리하지 않을
것에 대비하여 종합병원의 진단서까지 첨부했다. 진단서엔 그에게서 식도암 초기 증세가
나타나고 있다고 적혀 있었다. 물론 그것은 가짜였다.
15
정미경 중위는 국방부 정보국 사무실의 창으로 청사 건너편에 있는 미8군 기지의 울창한
숲을 조용히 응시했다. 그곳에 가을이 성큼성큼 다가오고 있었다. 여름 내내 시원한 녹향을
뿜어대고 매미가 줄기차게 울던 숲이었다. 그 숲도 이제는 연두색 옷을 갈아입고 있었다.
(벌써 가을이 오고 있으니...)
정미경 중위는 쓸쓸한 기분이 들었다. 가슴속으로 자신도 알 수 없는 슬픔이 가을비가
되어 내리고 있었다. 이무영, 처자가 있는 남자... 그를 사랑했다. 도덕적이니 윤리적이니
하는 그런 것들보다 그를 독점할 수 없다는 안타까움만이 그녀의 머리 속을 지배하고
있었다.
그는 지금 뉴욕에 있었다. 정미경 중위는 오늘밤 그를 만나기 위해 뉴욕행 비행기를 타야
했다. 그러나 그를 만나는 것이 기쁘면서도 독점할 수 없다는 사실이 그녀를 쓸쓸하게 하고
있었다.
이무영 소령은 신촌의 어느 스탠드바에서 정체불명의 사내들과 격투를 하여 부상을 당한
뒤 그녀의 아파트에 머물러 있었다. 그녀는 신촌의 카페로 가보라는 청와대 쪽 지시를 받을
때까지도 이무영 소령이 서울에 돌아온 사실을 까마득히 몰랐었다. 이무영 소령이
그녀에게도 알리지 않고 서울에서 활동을 했던 것이다.
이무영 소령이 그녀의 아파트에 머물렀던 일주일은 그녀에게 꿈처럼 행복했던
시간들이었다.
(후회없는 사랑을 딱 한 달만 하고 싶어. 일주일은 너무 짧아.)
그녀는 입술을 깨물며 생각했다.
정국은 소용돌이치고 있었다. 5월 30일 선명야당 바람을 일으키며 신민당 총재에 당선된
김영삼 의원은 윤보선 전 대통령과 김대중 전 대통령후보를 상임고문으로 추대하고
맹렬하게 정부 여당을 공격하고 있었다. 그런데도 정부는 계속해서 비판자들을 긴급조치9호
위반으로 구속했다.
7월엔 임시국회가 열렸고 김영삼 총재가 대표연설을 했다. 정부는 강경한 톤으로 체재를
비판한 야당 총재를 긴급조치 위반으로 입건하고 대표연설문을 작성한 것으로 알려진
김덕룡 비서를 구속했다.
8월 9일에는 YH무역의 여공들 80여 명이 마포구 합정동에 있는 신민당 당사를 찾아와
농성하는 사태가 일어났다. 그들은 폐업반대를 요구하며 격렬한 농성을 시작했다.
노동자들이 정당의 당사를 찾아와 농성을 한 것은 처음 있는 일이었다. 이 사건은 여론의
비상한 관심을 불러 일으켰다.
경찰은 즉각 신민당 당사를 에워쌌다. 그러나 노동자들은 구호를 외치며 계속 폐업반대를
요구했다. 9일이 지나고 10일이 되었다. 경찰은 해산을 종용했으나 노동자들은 반정부
구호까지 외쳐댔다. 여공들의 투쟁은 전에 없이 강경해지고 있었다.
공화당은 YH 여공들의 신민당사 농성에 불순세력이 개입하고 있다고 비난하는 성명을
발표했다. 사람들은 공화당이 지칭하는 불순세력의 의미를 호시탐탐 남침 기회를 노리고
있는 북한이거나 정권을 뒤집으려는 일부 재야인사와 신민당 정치인들로 생각했다. 모두들
그렇게 믿고 있었다.
이에 대해 신민당은 "우리 당은 YH 여공들의 농성에 어떠한 목적으로도 배후 조정한
일이 없으며, 여공들이 우리 당사를 찾아온 것은 그들의 어려운 처지를 호소하기 위한
순수한 동기 때문이다."라고 성명을 발표했다.
정부는 8월 11일 새벽 2시, 수백 명의 기동경찰을 투입해 농성 중인 여공들을 강제로
끌어내기 시작했다. 이때 여공 김경숙양이 4층에서 떨어져 죽는 사태가 발생하였다.
투신자살이었다.
경찰은 신민당 국회의원들과 보도진 20여 명에게도 닥치는 대로 주먹질을 하고 발길질을
했다. 어리석은 짓이었다.
그 당시 신민당 김영삼 총재와 20여 명의 보도진, 그리고 국회의원들은 총재실에서
시경국장이 걸어온 전화를 받고 있었다. 시경국장은 그들에게 새벽 2시까지 여공들을
해산시키라고 일방적으로 통고했다. 그러나 여공들은 해산하지 않았다. 그들은 막바지에
몰려 있었다. 신민당 당사 밖에는 기동경찰이 당사를 겹겹이 에워싸고 있었다.
그리고 기동경찰 뒤에는 대학생들과 노동자들이 몰려와 함성을 지르며 YH여공들을
격려하고 있었다.
전례가 없는 일이었다.
YH 여공들은 신민당에서 제공한 빵과 우유로 허기를 때우며 농성을 계속했다.
새벽 2시 방패를 앞세운 기동경찰이 들이닥쳤다. 기동경찰은 비서실 복도를 향한
칸막이를 부수고 몽둥이와 벽돌을 들고 뛰어들었다.
"돌격."
"방해하면 죽여."
"다 까부셔."
그들은 폭력배들처럼 소리를 질러대고 있었다. 김영삼 총재와 국회의원들이 재빨리 뒤로
물러나자 사복조가 기동경찰의 뒤를 따라 들어와 국회의원들과 보도진의 멱살을 잡고
복도로 끌고 나갔다. 기자들은 취재수첩을 뺏기고 카메라를 탈취당했다. 아비규환이었다.
4층에 있던 여공들의 경우는 더욱 비참했다. 최루탄 연기가 자욱하게 복도를 메운 가운데
들이닥친 기동경찰은 울부짖는 여공들의 머리채를 잡아끌고, 발길질을 하면서 끌어내기
시작한 것이다. 이 와중에서 갓 스무 살의 김경숙양이 경찰의 강제해산에 항의하여
투신자살한 것이다.
이 사건은 살얼음판을 걷고 있던 정국에 커다란 회오리를 불러일으켰다.
여론은 힘없는 노동자를 죽음으로까지 몰고 간 정부 여당의 처사에 조직적인 항의를 하기
시작했다. 방학중이지만 대학가가 들끓기 시작했고 서슬 퍼런 긴급조치 9호가 선포되어
있었는데도 신문들이 일제히 정부 여당을 비난하기 시작한 것이다.
"나라가 너무 어지러워."
정미경 중위는 소용돌이치는 정국을 생각하자 가슴이 미어지는 것 같았다.
국가의 지도자들이 바른 정치를 하지 않으면 충성심이 일어나지 않는 것이다. 썩은 국가,
부패한 지도자들을 위해 생명을 바칠 수는 없다. 정미경 중위는 그러한 생각 때문에 가슴이
아픈 것이다. 지금 이 시간에도 이무영 소령은 생명을 걸고 첩보공작을 수행하고 있지
않은가.
그녀가 국방부 청사를 나온 것은 오후 6시경이었다. 일상적인 퇴근시간이었다. 그녀는
집으로 돌아오자 즉시 사복으로 갈아입고 여행 준비를 서둘렀다. 뉴욕행 비행기는 밤 9시에
김포공항에서 이륙하게 되어 있었다.
그녀는 여행 준비가 모두 끝나자 택시를 타고 명동으로 갔다. 미행자가 있는지 살피기
위해서였다. 다행히 명동 일대를 30분 남짓 돌아다니며 미행자를 살폈으나 미행자는 눈에
띄지 않았다. 그녀는 퇴계로에서 택시를 타고 김포공항으로 향했다.
탑승 수속은 간단했다. 그녀는 팬암항공사의 B-747기 802편의 지정석에 않은 뒤에야
안도의 한숨을 가만히 내쉬었다. 뉴욕까지 몇 시간이 걸리는지도 그녀는 알지 못했다.
그녀는 미국이 초행이었다. 다만 뉴욕의 케네디 국제공항에 도착하면 이무영 소령이 마중을
나오게 되어 있으므로 크게 불안하지는 않았다.
그녀가 불안한 것은 국내의 정정이었다. 젊은 장교들은 벌써 두셋만 모이면 정부의
정책을 비판하고 있었다. M캡슐을 가지고 온다고 해도 그것이 한국의 안보에 요긴하게
쓰이게 될지 장담할 수는 없는 것이다.
몇 번의 아나운스먼트가 들리자 스튜디어스들이 분주히 통로를 오가며 탑승객들의
안전띠를 점검한 뒤 비행기가 이륙하기 시작했다. 정미경 중위는 창문으로 점점 멀어져
가는 김포공항의 불빛을 응시했다.
기분이 착잡했다.
비행기가 김포공항을 이륙한 지 5분쯤 되어서 기장의 아나운스먼트가 시작되었다. 언제나
팬암항공을 이용해 주셔서 고맙다는 것과 여러분이 탑승한 팬암항공의 보잉747
점보제트기는 9시 정각에 김포공항을 이륙해 현재 한국 영공을 날고 있으며 앵커리지를
경유해 뉴욕의 케네디 공항까지 안전하고 친절하게 모실 것이라는 내용이었다.
정미경 중위는 스튜어디스의 도움을 받아 시트를 뒤로 눕힌 뒤 잠을 청했다. 비행기
안에서라도 잠을 자야 했다. 어젯밤에도 그녀는 이무영 소령의 암호전화를 받느라고 꼬박
밤을 새웠던 것이다. 뉴욕에 도착하면 어떤 일이 일어날지 알 수 없는 일이었다.
그녀의 옆에는 콧수염을 기른 남자가 앉아 있었다. 얼핏 필리핀인이거나 아랍인으로
보였다.
스튜어디스가 다시 그녀에게 와서 우아한 동작으로 머리 위에 있는 전등을 껴 주고
돌아갔다. 그녀는 눈을 감았다. 나른한 피로감과 함께 졸음이 몰려왔다. 그 동안 잠을 전혀
잘 수 없었다. 옆에 앉은 남자가 스튜어디스에게 위스키를 부탁하는 소리를 들으면서
그녀는 눈을 감고 있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녀는 잠이 들었고 잠이 들자 꿈을 꾸었다. 악몽이었다. 대학생들이
스크럼을 짜고 그녀를 향해 달려오는 꿈도 꾸었고, 군인들이 탱크를 앞세우고 쿠데타를
일으키는 꿈도 꾸었다. 대통령은 군인들이 쏜 총을 맞고 피투성이가 되어 있었다. 그러한
꿈은 두서없이 몇 번이나 반복되었다. 그녀는 식은땀을 흘렸다.
꿈이 바뀌었다. 키가 크고 청바지를 입은 외국인이 그녀를 향해 징그럽게 웃고 있었다.
그가 땅콩을 좋아하느냐고 물었다. 그녀는 좋아하지 않는다고 대답했다. 그의 얼굴을
텔레비젼에서 본 것 같은 기억이 희미하게 났다. 흑백 텔레비젼, 미국 남부 조지아주, 땅콩
장수, 워터게이트, 텔리비젼이 마력처럼 쏟아내는 무수한 말들, 그 말들이 그녀의 귓전을
우렁우렁 후벼파고 있었다.
꿈은 다시 바뀌었다. 그녀는 벗은 채 침대에 누워 있었다. 그녀는 무엇인가 매끄럽지 않은
것이 그녀의 몸을 더듬는 것을 느꼈다. 그녀는 그것에 저항하려고 했으나 온몸이 결박을
당한 듯이 무기력한 기운에 휩싸여 있었다.
그런데 그녀의 몸을 더듬는 것은 야릇한 성적 쾌감을 수반하고 있었다. 그것은 그녀의
허벅지와 그 사이로 리드미컬한 움직임을 보이고 있었다.
그녀는 공포와 희열이 엇갈린 이상한 기분으로 무릎을 열었다. 그녀는 하체가 촉촉하게
젖어오는 것을 느꼈다.
그때 잠과 꿈이 함께 깼다. 다음 순간 그녀는 옆에 앉아 있는 콧수염 사내의 두툼한 손이
자신의 하체 깊숙이 들어와 있는 것을 깨달았다. 그녀가 화들짝 놀란 표정을 짓자 콧수염
사내가 슬그머니 손을 뺐다.
"개새끼!"
그녀는 오물을 뒤집어쓴 것 같은 모멸감이 들었다. 재빨리 주위를 살폈다. 기내는
조용했다. 탑승객들은 대부분 잠이 들었거나 책을 보고 있었다. 그녀는 안도의 한숨을
가만히 내쉬었다. 비행기에조차 치한이 있으리라고는 상상도 못했던 일이었다.
"촉감이 좋더군."
콧수염의 사내가 징그럽게 웃으며 야비한 말을 던졌다. 그녀는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
"난 동양인을 좋아해. 동양인은 깊고 부드러운 것이 특징이지... 흐흐흐..."
그가 징그럽게 웃었다.
"한마디만 더하면 네놈의 숨통을 끊어버리겠어!"
그녀는 이를 갈았다.
"호오! 제법 가시를 키우고 있었군. 이봐 우리 거래를 할까? 한번 응해 주면 천 달러를
주지. 비행기 안에서 하는 것도 색다를 맛이 있다고."
"닥쳐! 자꾸 치근덕거리면 스튜어디스를 부르겠어!"
"불러보시지. 불러 봤자 너만 망신을 당할 테니까."
그녀는 기가 질려 버렸다. 콧수염의 사내는 안하무인이었다.
"이봐. 천 달러를 주겠다니까. 천 달러가 작아?"
"..."
"그럼 천2백 달러를 주지. 여기 스튜어디스들도 천 달러면 너도나도 스커트를 벗고
달려든다구."
"도대체 비행기 어디에서 한다는 거죠?"
그녀는 구역질이 올라왔으나 꾹 참고 호기심을 보이는 체했다.
"화장실. 이 시간에는 모두 자고 있으니까 화장실을 이용하는 사람도 없어."
"좋아요."
"그럼 따라와."
사내가 먼저 자리에서 일어나 통로로 걸어나갔다. 그녀도 자리에서 일어나 사내의 뒤를
따라갔다. 뒷자리에 앉아 있던 스튜어디스가 의아한 표정으로 그들을 쳐다보았으나 그녀는
스튜어디스에게 일별도 던지지 않았다.
"먼저 돈을 주세요."
화장실은 사내의 말대로 조용하게 비어 있었다. 사내가 양복 주머니에서 패스포트를 꺼내
빳빳한 100달러 짜리 지폐 12장을 꺼내 흔들다가 그녀에게 건네주었다.
"자, 이제 스커트를 걷어올리라고."
콧수염의 사내가 명령을 하듯이 말했다. 그녀는 웃음이 비어져나왔다.
"먼저 바지를 벗으시지. 물건이 얼마나 큰지 보게."
"그럴까?"
"어디 출신이지요?"
"아랍에미리트."
사내가 바지의 혁대를 풀려는 순간 그녀의 주먹이 사내의 명치 끝을 내질렀다. 사내가 헉
하고 명치끝을 움켜쥐며 몸을 숙이자 이번엔 그녀의 무릎이 사내의 턱을 힘껏 올려 찼다.
사내가 숨이 넘어가는 듯한 비명을 지르고 턱을 감싸쥔 뒤 화장실 바닥에 나뒹굴었다.
그녀는 사내에게서 받은 지폐를 사내의 얼굴에 뿌렸다.
"한번만 더 더러운 짓을 하면 숨통을 끊어버리겠어!"
그녀는 고통으로 일어나지 못하고 쭈그리고 있는 사내의 등을 향해 단호하게 내쏘고 나서
좌석으로 돌아와 시치미를 떼고 앉았다. 콧수염의 사내는 10분쯤 뒤에야 잔뜩 부어오를
턱을 만지며 좌석으로 돌아왔다.
그는 비행기가 앵커러지를 경유해 뉴욕 케네디 공항에 도착할 때까지 두 번 다시
추근대지 않았다.
리차드 파커 CIA 부국장은 워싱턴 포스트 제1면을 뚫어져라 들여다보고 있었다. 1면
톱으로, 이란 인질 구출작전 실패, 모래 바람에 헬기 1대 추락하여 긴급구조에 나서... 라는
내용의 기사들이 대서특필되어 있었다. 이스라엘이 엔테베공항에서 항공기 납치범들을
눈깜짝할 사이에 사살하고 자국 인질을 무사히 구출한 것과는 대조적이었다.
이란에서는 벌써 호메이니를 따르는 사람들이 카터를 비난하여 축제 분위기에 휩싸여
있었다.
1주일 전의 신문이었다. 그러나 그는 며칠째 그 신문만 보고 있었다. 이란 인질 구출작전
실패는 미국인들에게는 커다란 충격인 것이다. 잘못하면 그 불똥이 CIA로 날아올 수 도
있었다.
"M캡슐은 어디 있나?"
그는 맥슨을 힐끗 쳐다보고 물었다.
"뉴욕에 있습니다."
"언제 그것을 서울로 가져간데?"
지금 서울에서 요원이 오고 있답니다."
"누가?"
"정보국의 여군 중위라고 합니다."
"이무영 소령은 서울에서 첩보사령관을 만났나?"
"예, 근화회의 활동을 중지하라고 했답니다."
"소령이 장군에게 말이지?"
리차드 파커 부국장이 웃었다. 이무영 소령의 움직임을 훤히 알고 있는 듯한 웃음이었다.
"샤론 데닝스는 무엇을 하고 있나?"
"이스라엘 대사를 만나고 있습니다. 모사드 A 국 요원들이 뉴욕과 워싱턴으로 몰려들고
있습니다."
"이젠 모사드가 움직이는군."
"..."
"이무영 소령이 접선하는 사람들도 체크하고 있겠지?"
"예."
"솔리스트 폴은 무얼 하고 있어?"
"탈출 준비를 하고 있습니다."
"솔리스트 폴을 빨리 제거해야겠어. 샤론 데닝스에게 접선 신호를 보내."
"예."
"서울은 어떤가?"
"장미공작 1단계 작전이 성공했습니다."
"YH 여공들 신민당사 농성 말이군."
"예. 우리가 예상했던 대로 한국 경찰의 강제해산은 미숙하게 진행되었습니다. 기동경찰이
여공들을 해산하는 과정에서 국회의원들과 보도진들에게까지 폭력을 휘두르고 여공 한 명이
4층 옥상에서 투신자살하는 바람에 한국 국민들의 여론이 악화되고 있습니다.
"2단계 작전이 성공하면 폭발하겠군."
"2단계 공작은 김영삼 신민당 총재 직무정지 가처분 신청입니다. 법원에서 이 신청이
받아들여지면 야당은 더욱 강경한 투쟁을 전개할 것으로 보입니다. 벌써 김영삼 신민당
총재를 정점으로 하는 주류측은 박정권 타도를 주장하고 있습니다. 주류 쪽도 지금까지는
선명 야당을 내세우며 투쟁을 했지만 박정권 타도까지는 주장하지 않았었습니다. 한국의
정치 상황은 이미 극한 상황으로 달리고 있습니다."
"그럼 글라이스턴 대사를 시켜 불을 질러야겠군."
"불이요?"
"글라이스턴 대사에게 한국 정부를 자극하는 성명서를 발표하게 하는거야. 한국 정부에게
야당 탄압을 중지하고 구속자를 석방하라고 하면 야당이나 대학생들이 신이 나서 반정부
투쟁을 강화하게 되지. 그렇게 되면 한국 정부는 더욱 강경하게 탄압을 하게 될 거야."
결국 한국은 파국을 맞이하게 된다는 얘기였다. 비서 맥슨은 부국장의 어깨 너머로
어둠이 내리기 시작하는 서편 하늘을 쳐다보았다. 그의 가슴속에도 까닭을 알지 못하는
어둠이 내리고 있었다.
"포스트 박은 제거되어야 해."
부국장이 여송연 연기를 길게 내뿜으며 혼잣말처럼 말했다. 그것은 사형을 선고하는
법관의 목소리처럼 맥슨에게 들렸다.
빌딩들은 서로 어깨를 겨루듯이 하늘 높이 치솟아 있었다. 마천루의 도시 뉴욕. 어둠이
맨하탄의 빌딩가에 있는 월드워즈호텔에도 짙은 남빛으로 내리 덮이고 있었다. 이무영
소령은 월드워즈호텔의 창으로 맨하탄의 시가를 우두커니 내려다보았다.
뉴욕은 밤이 더욱 아름답다. 스카이라인 위로 저녁이 어둑하게 찾아오면 노을진 하늘을
뚫고 우뚝 솟아 있는 엠파이어스테이트 빌딩, 킴벧즈백화점, 매디슨스퀘어 가든 빌딩 등 그
분주한 도시는 성장한 여인처럼 화려한 옷으로 갈아입는 것이다.
그는 팔목을 들어 시계를 보았다. 샤론 데닝스가 워싱턴에서 돌아올 시간이었다. 샤론
데닝스는 자국의 대사관과 M캡슐 문제를 협의하기 위해 어제 아침 워싱턴으로 갔던
것이다.
M캡슐을 마이애미에서 샤론 데닝스가 검은 원피스에 부착시키고, 그것을 샤론 데닝스가
매기 한의 유류품과 함께 항공화물을 이용해 브루클린으로 발송한 것은 절묘한 공작이었다.
이제 그것을 뉴욕에 와 있는 정미경 중위이게 전달하면 된다. 정미경 중위는 M캡슐을
전달받는 즉시 서울로 돌아갈 것이고, 그것으로 M캡슐 공작도 끝이 나는 것이다.
뉴욕의 빌딩 숲 위로 어둠이 하늘을 검게 물들이자 빌딩들이 일제히 불을 밝히기
시작했다. 화려하고 아름다운 야경이었다.
그는 마침내 조바심이 나기 시작했다. 정미경 중위가 센추럴 파크에서 초조하게 기다리고
있을 생각을 하자 견딜 수가 없었다. 뉴욕은 정미경 중위에게 생소한 도시였다. 더욱이
어두운 공원에서 여자가 혼자 있다는 것은 상당히 위험한 일이었다.
그는 천천히 위스키를 한 모금 마셨다.
그때 도어를 노크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는 글라스를 탁자에 내려놓고 도어로 달려갔다.
"늦어서 미안해요."
샤론 데닝스였다. 그는 샤론 데닝스를 안으로 끌어들인 뒤 도어를 잠궜다.
"어떻게 된 거요?"
"러시아워에요. 뉴욕의 러시아워는 정말 지독해요."
"M캡슐은?"
"가져왔어요."
샤론 데닝스가 말했다.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솔리스트 폴을 아세요?"
샤론 데닝스가 핸드백에서 M캡슐을 꺼내어 그를 힐끗 쳐다보았다. 그는 M캡슐을 받아서
양복 상의 안주머니에 넣었다.
"매기 한을 죽인 놈 말이오?"
"네, CIA 본부에서 두 블록 떨어진, 이태리 피자집에 있는 웨이트리스와 접선을 하고
있다는군요. 그는 KGB의 이중첩자래요."
"KGB?"
이무영 소령이 놀라서 물었다.
"네, CIA에서 오늘에야 알았대요. 지금 솔리스트 폴을 추적하느라고 CIA가 발칵
뒤집혔대요."
"정말 놀라운 일이군. 어떻게 그 정보를 입수했소?"
"KGB에 우리 모사드 요원이 잠입해 있어요. 모스크바에서 프랑스에 있는 우리 요원에게
암호 전문이 왔는데 그 요원이 미국에 있는 우리 요원들에게 긴급 전통을 때린 거예요.
솔리스트 폴을 주의하라고..."
"모사드는 확실히 놀라운 정보망을 갖고 있군요."
이무영 소령은 감탄을 했다. 철의 장막 안에서 활동을 하면서도 입수한 정보를 순식간에
전세계의 요원들에게 보내 대비케 하는 모사드의 기동성에 놀라움을 금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CIA도 이태리피자집의 웨이트리스의 정체를 알고 있나요?"
"모르고 있을 거예요."
"샤론, 웨이트리스의 이름을 알고 있어요?"
"그건 왜 묻죠?"
"그냥 알고 싶을 뿐입니다."
설마 매기 한의 복수를 하려는 건 아니겠죠? 그런 생각을 하고 있다면 그만 두세요.
솔리스트 폴이 CIA에 체포되면 웨이트리스의 정체는 저절로 드러날 거예요."
"웨이트리스의 이름을 알려 주십시오."
이무영 소령은 정중하게 부탁했다.
"매기 한을 죽게 한 것에 책임을 느끼세요?"
이무영 소령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거렸다. CIA에서 매기한을 그토록 잔인하게
살해하리라고는 상상도 못했던 일이었다. 그는 매기 한과 정기택이 CIA에 발각되면
체포되어 취조를 받으리라고 단순하게 생각했었다. 그런데 어이없게도 매기 한은 사지가
분시되는 비참한 죽음을 당했던 것이다.
"웨이트리스의 이름은 트로시 칼슨이에요. 23세의 매력적인 아가씨죠."
"고맙소."
그는 샤론 데닝스를 포옹하고 가볍게 키스를 했다. 작별의 인사였다.
"이제 우린 다시 만날 수 없겠군요."
샤론 데닝스가 엷게 웃으며 말했다.
"그 동안 많은 도움을 받았소. 한국에 돌아가서도 잊지 못할 거요."
"M캡슐은 우리 이스라엘의 안보에도 큰 도움이 돼요."
"그럼 다시 만납시다."
그는 샤론 데닝스를 떼어 놓았다. 정미경 중위를 더 이상 기다리게 할 수 없었다. 샤론
데닝스는 언젠가 다시 만나게 될 것이다.
"잘 가요."
샤론 데닝스가 말했다.
"잘 있어요."
그도 샤론 데닝스에게 말했다.
호텔을 나오자 그는 즉시 택시를 타고 5번가에 있는 센추럴 파크 입구로 달려갔다.
정미경 중위가 5번가의 센추럴 파크 입구 안에 있는 의자에 앉아서 기다리기로 했던
것이다. 이무영이 나타나자 그녀는 그에게 달려들어 입술부터 마구 비벼댔다.
"오래 기다렸소?"
그는 정미경 중위를 가만히 떼어 놓았다.
"네, 한 시간 반이요."
"샤론 데닝스가 러시아워 때문에 늦게 도착했소. 미안하오."
"아녜요."
정미경 중위가 웃으며 고개를 흔들었다.
"이게 M캡슐이오. 핸드백 속에 깊게 넣어서 비행기를 타시오."
그는 양복 안주머니에서 M캡슐 6개를 꺼내 정미경 중위의 손바닥 위에 올려놓았다.
주위의 인적은 전혀 없었다.
"굉장히 작군요."
"이거 하나에 필름 20커트가 들어 있다면 상상이 되겠소?"
"설마?"
정미경 중위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설계도와 시공사양서 120장이 들어 있소. 현대 과학이 첩보 분야에도 절묘하게 이용되고
있소. 게다가 이 캡슐은 특수 플라스틱으로 제조되어 있어 공항 검색기에도 나타나지 않소."
"정말 놀라운 일이군요."
이무영 소령은 정미경 중위가 M캡슐 6개를 핸드백 속에 안전하게 감추는 동안 주위를
세밀하게 관찰했다. 그러나 수상한 점은 전혀 발견할 수 없었다.
"자, 이제 케네디 공항으로 갑시다."
"지금이요?"
"새벽 2시 30분 직행편이 있소. 유나이티드 항공 1027편인데 앵커리지를 경유하지
않으니까 14시간이면 서울에 도착하오."
"그럼 아직도 다섯 시간이나 남았잖아요."
정미경 중위가 간절한 눈빛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이대로 헤어지는 것은 싫어. 당신을
갖고 싶어. 당신을 사랑해요..."
그 눈빛이 그렇게 외치고 있었다.
이무영 소령은 말없이 그녀를 안았다. 그래, 나도 너를 갖고 싶어, 하지만 이래서는 안돼.
그러나 생각과는 달리 그의 손이 벌써 그녀의 허리를 끌어안고 있었다. 입술이 부딪치자
그녀는 격렬하게 빨아 당겼다.
이무영 소령은 침대에 누워서 우두커니 허공을 쳐다보았다. 욕실에서는 그녀가 샤워를
하는 소리가 들리고 있었다. 그것이 흡사 뱃소리처럼 그의 귓전을 울렸다.
언젠가 비가 쏟아지는 원두막에서 허겁지겁 그녀를 취한 일이 있었다. 캄캄한 하늘에서
낙뢰가 떨어질 때마다 그녀의 알몸은 어둠 속에서 파랗게 빛났었고, 그녀는 흡사 물 속에서
튀어나온 인어처럼 그의 등에 팔다리를 감고 몸부림을 쳤었다.
그후 그녀와의 관계를 청산해야 한다고 수없이 다짐을 하면서도 그녀를 만나곤 했었다.
욕실에서 샤워 물 쏟아지는 소리가 그쳤다. 그는 욕실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녀가 목욕
타월을 두르고 욕실에서 걸어 나오고 있었다.
"조금이라도 주무세요."
그녀가 소곤거리듯 낮은 목소리로 말하며 침대에 걸터앉았다.
"이제 떠날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어."
그는 여자의 타월을 풀어헤치고 여자를 자신의 가슴 위로 안아올렸다. 여자의 몸이
매끄러웠다.
"차갑죠?"
"찬물로 샤워를 했어?"
"아직 찬물로 할만해요."
그녀가 웃으며 남자의 머리카락을 만지기 시작했다. 그는 얼굴 가까이 다가와 있는
여자의 탐스러운 과욕 한 덩어리를 입으로 베어 물었다. 그곳에서 풋풋한 살냄새가 났다.
"서울은 어때?"
"뒤숭숭해요. YH 여공사건, 신민당 김영삼 총재 가처분사건 등으로..."
그는 여자의 둔부를 어루만졌다. 여자의 몸이 점점 더워지고 있었다.
"왜 귀국하지 않으세요?"
여자가 그의 유두를 입술로 애무하며 물었다.
"이곳에서 할 일이 있어."
"무슨 일이요?"
"CIA가 군부 쿠데타를 조종하고 있다는 증거를 찾아야 돼."
"서울에서는 못 찾았어요?"
"못 찾았어."
"그럼 뉴욕에서 어떻게 찾죠?"
"KGB 요원을 잡아서 족칠 생각이야. CIA의 이중첩자야."
여자의 입술이 남자의 하복부로 옮겨져 갔다. 여자는 섬세하게 입술과 혀를 이용해
잠들어버린 그의 관능을 깨우고 있었다. 여자의 혀가 스치고 지나가는 곳마다 그의 관능이
일어나 불을 밝혔다. 그는 눈앞에 다가와 있는 두 개의 언덕 사이로 검은 젖꼭지가 달린 두
개의 유방을 보았다. 그것은 햇볕을 보지 않아 우유빛을 하고 있었다.
위치가 바뀌었다. 그는 어릴 때 본 비행기를 생각했다. 비행기는 두 대씩, 혹은 세 대씩
편대를 지어 아득한 하늘 저쪽으로 사라지곤 했었다. 그 어린 시절의 기억이 꿈결인 듯
토막토막 머리 속에서 되살아오고 다시 사라져갔다.
문득 첩보사령부 이택석 장군의 말이 벼락치듯 귓전을 때렸다.
"근화회는 나라를 근심하는 장교들의 모임이야. 어떻게 영관 장교가 감히 장군들을
조사하나?"
한남동에 있는 요정 도화장에서 이장군을 만났을 때였다.
"나는 군인이야. 군인으로서 의무만 다 한다!"
이무영 소령은 그때 근화회를 의심한 것을 후회했다. 근화회에는 장군들을 비롯하여
기라성 같은 엘리트 영관 장교들이 포진하고 있었다. 그들이 쿠데타를 주도한다면 아무도
막아내지 못하겠지만 이택석 장군의 말대로 순수하게 나라를 근심하는 장교들의 모임이라면
든든하기 짝이 없는 일이었다.
그때 여자가 헉 하고 신음을 삼켰다. 그는 여자의 몸 속에 들어가 있었다.
16
대통령은 감회 어린 표정으로 책상 위에 놓인 M캡슐을 지그시 응시했다. 모두 6개의
M캡슐 안에 핵연료 재처리공장의 개념설계, 기본설계, 상세설계의 설계도와 시공사양서가
완벽하게 들어있다는 것이 놀랍기만 했다.
일반공장의 설계도와는 전혀 달랐다. 일반공장은 기본설계와 상세설계로 끝나지만 핵연료
재처리공장의 설계는 개념설계가 추가되는 것이다. 개념설계를 통해 재처리 공장의 기본
데이터가 나오고, 기본설계 단계에서는 이 데이터를 이용해 개략적인 공장도를 얻는다.
마지막 상세설계에서는 각 부분의 세세한 장치와 설비 디자인이 완성되는 것이다.
그런 까닭으로 시공사양서는 더 없이 중요한 것이다.
"정말 믿어지지 않는군."
대통령은 감탄을 하고 있었다.
M캡슐, 아니 핵연료 재처리 공장은 그가 온갖 수모를 당하면서도 갖고 싶어하던
것이었다. 이제 이 설계도와 시공사양서만 있으면 2년 안에 핵연료 재처리공장을 건설하여
가동할 수 있을 것이고, 3년 안으로 핵폭발 실험까지 할 수 있는 것이다.
"수고들 했소."
그는 집무실 한쪽에 부동자세로 시립해 있는 서특보와 정미경 중위를 응시했다. 정미경
중위를 단정하게 군복을 입고 있었다.
"정말 수고들 많았어."
대통령은 연신 흡족한 표정으로 웃고 있었다.
"위스키 한잔 줄까?"
"괜잖습니다."
"아니야. 이리 와서들 앉아. 난 기분이 너무 좋아. 신민당 총재 때문에 골머리가 아팠는데
M캡슐이 깨끗하게 치료를 해주는군. 정말 과학이란 신기해."
대통령은 웃으며 여직원을 불러 위스키 세 잔을 가져오라고 지시했다.
신민당 총재 때문에 골치가 아프다는 것은 가처분 신청사건을 두고 하는 말이었다. 5월
30일 신민당 전당대회에서 김영삼 의원이 이철승 의원을 근소한 표차로 누르고 총재에
당선되면서 비롯된 사건이었다. 김영삼 의원은 그 당시 3백77표, 이철승 의원은 3백68표를
얻었는데 8월 3일 신민당 원외 지구당 위원장인 조일환, 유기주, 윤완중 등 세 사람이
김영삼 총재단의 직무정지 가처분 신청을 낸 것이다.
이들은 중앙선거관리위원회가 6월 29일 조윤형, 김한수 등 22명의 신민당 전당대회
대의원들에 대해 자격이 없다고 유권해석을 내린 것을 바탕으로 가처분 신청을 냈고
법원-서울민사지법 16부 조언 부장판사, 김중곤, 김동건 판사는 9월 8일 본안 소송 확정
판결시까지 "김영삼 신민당 총재는 직무 집행을, 이민우, 박영록, 이기택, 조윤형은 부총재의
권한을 행사해서는 안되며 이 기간 중 전당대회 의장 정운갑을 총재 직무 대행자로
선임한다"는 결정을 내렸다.
어처구니 없는 일이었다. 이 사건은 박정희 대통령의 통치 행위에 커다란 흠집을 남겼다.
국민들은 법원의 판결에 분노했고 일부 여당 국회의원들까지 정치가 어디로 가고 있는지
모르겠다며 개탄을 했다.
확실히 대통령은 판단력을 상실해 가고 있었다. 그는 일부 정상배들의 말에만 귀를
기울일 뿐 여론을 살피는 것은 게을리 했다.
신민당 총재 직무정지 가처분 신청을 낸 3인의 뒤에 정보기관이 개입하고 있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 실제로 법원으로부터 총재 권한대행에 선임한 정운갑 권한대행의
집에서 정보기관 요원들이 기자들에게 발각되었는가 하면 가지들의 집요한 추궁에 견디다
못한 정운갑 대행이 "내가 이러고 싶어서 이러는 줄 아느냐?"하고 짜증을 내 기자들로부터
비웃음을 사기도 했다.
자신이 꼭두각시라는 사실을 엉겹결에 실토한 셈이 되었던 것이다.
이 사건에 대한 국민들의 여론은 정부를 완전히 불신했다. 사법부가 권력의 시녀로
전략했다는 말이 떠돌기 시작한 것도 이 무렵이었다.
법원은 직무정지 가처분 신청을 받아들이면서 "당원 자격이 없는 22표를 김영삼의
3백77표, 이철승의 3백67표에서 각각 빼면 김영삼은 3백55표, 이철승은 3백45표로 어느
누구도 신민당 당헌에 규정된 과반수를 획득하지 못하였으므로 김영삼 총재를 선출한
전당대회의 결의는 중대한 위법이 되고 따라서 그 결의는 무효이다."라고 판결한 것이다.
얼핏 무자격 대의원들의 22표를 무기명 비밀투표라 누구에게 투표를 했는지 알 수
없으므로 김영삼, 이철승 양인의 득표수에서 빼는 것은 공정하고 정확한 판결로 보였다.
그러나 그것은 재판부의 납득할 수 없는 판결이었다. 22명의 투표가 무기명 비밀투표인
탓에 그 표가 모두 이철승에게 갔을 수도 있었다. 그렇게 본다면 김영삼 총재가 당선에
영향을 끼치지 않을 수 도 있는 것이다. 그 표가 누구에게 얼마만큼 갔느냐 하는 것은
재판부가 결정할 수 도 없고 확인할 수도 없는 것이다. 그런데도 그 표를 두 사람의
득표수에서 공동으로 빼고 과반수가 안 된다는 것은 있을 수가 없는 일이었다.
그것은 마치 자유당 정권 때의 사사오입 파동과 다름없는 판결이었다.
그것은 투표의 결과가 22표로 인하여 '달라졌을지도 모른다'는 가능성에 근거한 것일 뿐
'달라졌을 것이다'라는 개연성이나 '달라졌음이 틀림없다.'라는 확실성에는 이르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또 가처분이란 본안 소송과 달라 '소송상의 분쟁을 확정판결 때까지 기다리게 되면
소송인이 현저히 손해를 보거나 소송의 목적을 달성하기 어려운 때 잠정적으로 취하는
조치'라는 것이 대부분의 법조인들의 주장이었다. 그러므로 가처분 신청 자체가 대상이
안된다는 것이었다.
"자, 이리 와서 앉으라니까."
대통령이 먼저 집무실 소파에 앉았다. 서특보와 정미경 중위는 조심스럽게 대통령 앞에
앉았다.
"이무영 소령은 귀국하지 않았다구?"
"네, 각하."
"무슨 일이 있나?"
"한 가지 할 일이 남아 있어서 며칠 후에 귀국하겠다고 했습니다. 자세한 것은 돌아와서
보고 드린다고 했습니다."
대통령이 흡족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거렸다. 아무래도 상관이 없다는 뜻이었다.
"이젠 마이크로 필름을 복사해서 이스라엘에게 넘겨주어야겠어. 이스라엘도 우리 못지
않게 M캡슐을 원하고 있어. 벌써 이스라엘 대사관에서 연락이 와 있어."
"각하."
"응?"
"이스라엘에 마이크로 필름을 복사해서 넘겨주는 것은 이무영 소령이 귀국할 때까지
보류해 주십시오. 이무영 소령이 당부하였습니다."
"그건 왜 그렇지? 우린 이스라엘 수상과 밀약을 했어. 그 밀약을 우리가 깨트리면
안되잖아?"
"이무영 소령님은 M캡슐 공작에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이 있다고 했습니다. 그것을
밝혀내기 전에는 M캡슐을 이스라엘에게 넘겨주지 말라고 당부했습니다."
"이해할 수 없는 부분?"
대통령은 얼굴을 잔뜩 찡그렸다.
"구체적으로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이란 무엇을 말하나?"
"그건 아직 저도?"
"서특보는 알고 있소?"
"죄송합니다. 저도 그 부분에 대해서는 보고 받은 일이 없습니다."
"이스라엘 수상과의 약속이야. 이무영 소령이 무엇 때문에 그러는지 몰라도 이스라엘
수상과의 약속을 내가 깨트릴 수는 없어. 약속대로 빠른 시간 내에 마이크로 필름을
복사해서 이스라엘에 전달해야 돼."
대통령이 근엄한 표정으로 말하자 서특보와 정미경 중위는 더 이상 뭐라고 할 말이
없었다. 그때 여직원이 위스키 세 잔을 쟁반에 받쳐 가지고 들어왔고 대통령의 제안에 따라
그들은 축배를 들었다.
"우리가 핵무기 개발계획을 세운 것은 73년부터였어. 그런데 74년 하반기부터 미국이
우리에게 본격적인 압력을 가해 오기 시작했지. 그들은 우리에게 리프로세스(재처리)의
리자도 입에 답지 말라고 하더군."
대통령이 위스키로 입술을 축인 뒤 회상하듯 얘기를 꺼내기 시작했다.
"73년에 우리는 프랑스의 상고방사에 재처리 설계 용역을 맡겼고, 75년 프랑스의
세르카사와는 핵연료성형가공 연구시설 공급계약을 체결했어. 그런데 갑자기 이 회사들이
계약을 취소하자는 거야. 알고 봤더니 미국이 압력을 가했더군."
"..."
"미국은 프랑스에만 압력을 가한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도 직접 압력을 가했어.
원자력연구소를 자기들 마음대로 드나들며 감시를 하는가 하면 이때부터 플루토늄이나
재처리 같은 용어는 정부관계자나 학자들에게까지 금기가 되있어."
대통령의 말투에는 비장한 느낌까지 풍기고 있었다.
"생각하기도 싫은 일이지만 75년 8월에는 내가 핵무기 포기각서까지 써야 했으니까."
대통령의 얼굴이 침통해졌다. 그때의 수모를 생각하는 것이 분명했다.
"포드 대통령 시절에 제임스 슬레진저라는 자가 국방장관에 있었어. 그자는 미국 원자력
위원회 위원장과 CIA국장을 역임하고 40대에 국방장관이 되었어. 그 당시 제 8차
한미안보연례협의회가 서울에서 열렸는데 이례적으로 서울에 온 슬레진저는 나를 찾아와서
한국은 자체적으로 핵무기를 개발하지 않는다, 하는 포기각서를 받아갔어. 물론 슬레진저는
북한이 남침을 해 올 경우 선제 핵무기 사용, 한국 수도권 방위 9일 속결전 등 방위각서를
우리에게 제공했어. 그러나 그건 치욕적인 일이었어. 미국 대통령이 바뀔때마다 정책도
바뀌어 케네디와 존슨 때는 월남에 군대를 보내고 공산주의와 싸운다면서 확전을 했어.
그러나 닉슨 대통령이 되자 평화를 찾는답시고 휴전회담을 열더니, 급기야 미군이 월남에서
모조리 철수하고 말았지. 월남은 미국이 철수하자마자 공산화가 되었어."
"..."
"우리도 마찬가지야. 카터가 대통령이 되자 미 지상군 철수를 들고 나왔어. 미 지상군
철수의 의미가 뭐야? 바로 한국에 있는 핵무기의 철수 아닌가? 포드 대통령 때 슬레진저가
약속한 북한 남침시 선제 핵무기 사용, 한국 수도권 방위 9일 속결전에 대한 협정을 모두
파기하는 거지. 그렇게 되면 우린 어떻게 되겠나? 우리도 미군이 철수하자마자 월남 꼴이
될 거야. 게다가 일본은 75년도에 플루토늄을 생산하기 시작했어. 일본이 핵무기를 만드는
것은 이제 3개월이면 충분해. 아직 원폭 실험을 했다는 정보는 없지만, 내가 보는
견지에서는 그들은 원폭 실험을 하지 않고서도 실전에 사용할 수 있을 거야. 앞으로 우리는
일본과도 전쟁을 하게 될 거야. 80년대엔 일본과 경제전쟁이 일어나고, 90년대 후반기엔
군사적인 충돌이 일어난다고 주장하는 학자들도 적지 않아. 우린 그 때문에 반드시
핵무기를 개발해야 돼."
대통령의 말에는 비장함까지 서려 있었다. 정미경 중위는 조심스럽게 위스키 잔을 입으로
가져가 한 모금을 마셨다. 대통령이 이무영 소령의 당부대로 M캡슐을 당분간 이스라엘에
넘겨주지 말았으면 싶었으나 대통령의 결심은 확고한 것 같았다.
"국내 정치가 혼란한 것은 나도 알고 있어. 이제 곧 내각과 여당에 대폭적인 개편을
단행해 민심을 수습하겠어."
대통령도 위스키를 한 모금 마셨다.
"정보부는 일을 너무 미숙하게 처리하고 있어. 5월 30일 신민당 전당대회만 해도 그래.
어떻게 그렇게 많은 돈을 뿌리고도 김영삼을 당선시켜?"
"김영삼 의원이 선명 깃발을 내세웠기 때문입니다."
서특보가 조심스럽게 대꾸했다.
"선명 깃발?"
"김대중씨가 5월 29일 밤에 김영삼 의원측에 대의원들이 모여있는 아서원에서 김영삼지지
연설을 한 것도 중요한 원인이구요."
"그러니까 정보부가 일을 잘못한다는 거야. 연금중인 김대중이 어떻게 해서 아서원에
나타나? 정보부장도 김영삼이와 한팬가?"
"정보부장은 신민당 당권파를 믿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러니 정보부장 자격이 없다는 거야. 그리고 야당 총재 선출하는데 학생들은 왜
나타나서 떠들어?"
대통령의 얼굴 근육이 푸르르 떨렸다. 정미경 중위는 입술을 깨물었다.
5.30 전당대회에 학생들이 나타나서 떠들었다는 대통령의 말은 제1차 투표에서 2백
67표를 얻은 김영삼 총재가 2백 92표를 얻은 이철승 후보에게 뒤졌으나 과반수 득표를
요구한 신민당 당헌에 따라 제2차 투표에 들어가기 전 신민당 각 계파의 막후교섭이 진행된
순간을 말하는 것이었다.
이때 이철승 후보측은 고흥문, 이충환, 유치송 등과 협상을 벌이고 있었고 김영삼
후보측은 조윤형, 박영록, 김재광 계보의 대의원들을 확보한 가운데 이기택과 막후협상을
벌이게 되었다. 이기택은 신민당에서 총재 후보로 나서 제1차 투표 때 92표를 얻어
김영삼에 이어 3위를 했고 막강한 캐스팅 보트를 쥐고 있었다.
김영삼은 2차 투표에 들어가기 전 이기택과 창가에서 최종 협상을 벌이고 있었는데 이때
창밖에는 수많은 청년들이 모여들어 "김영삼! 김영삼!", "이기택! 이기택!"을 연호했던
것이다.
그것은 이기택에게 김영삼을 지지하라는 압력이었다. 4.19때 학생혁명을 주도했던
이기택으로서는 외면할 수 없는 압력이었다. 그 청년의 대부분이 대학생들이었던 것이다.
만약에 그때 학생들이 김영삼과 이기택의 이름을 외치지 않았다면 김영삼의 신민당 총재
당선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때 학생들이 무엇 때문에 신민당 당사에 몰려와
함성을 질렀는지 그들을 신민당 당사로 끌어들인 세력이 누구인지는 결코 알 수 없는
일이었다.
"불순세력이 있어."
박태통령은 그때 일을 생각만 해도 불쾌한 모양이었다.
"M캡슐을 이스라엘에 보내지 않으면 나는 신의 없는 지도자가 되는 거야."
"아주 안 보내는 것이 아니라 잠시 보류하는 것입니다."
정미경 중위는 마침내 입을 열었다.
"보류?"
"예, 이무영 소령을 믿어 주십시오, 각하."
"보류하면 얼마나 시간이 걸릴까?"
"이무영 소령은 조만간 귀국합니다."
"그래? 그럼 일단 보류하기로 하지."
대통령이 마침내 고개를 끄덕거렸다. 정미경 중위는 비로소 마음이 놓였다.
솔리스트 폴은 리무스를 처치한 뒤 새로운 비트를 마련하고 두 달 동안 두문불출했다.
섣불리 밖으로 나다닐 수가 없었다. CIA가 그를 제거하기 위해 리무스를 파견했다면
리무스가 그에게 살해된 사실도 알고 있을 것이다. 이제는 새로운 저격자들 물색하여
그에게 보낼 것이다.
그는 사우스 웨스트 프리웨이의 고급 아파트에서 여러 가지 생각에 잠겼다. 리무스가
전화를 거는 것을 도청한 것은 그에게 행운이었다. 그는 비로소 M캡슐 공작에 관련된
CIA와 이스라엘 비밀첩보부의 음모를 어렴풋이 깨달을 수 있었다. CIA는 이무영 소령과
샤론 데닝스가 M캡슐을 탈취해 한국으로 가는 것을 막은 것이 아니라 비밀리에 도운
것이다. 그는 그 사실을 KGB에 알려야 하겠다고 생각했다.
소련과 미국 그리고 서유럽의 선진국들은 핵확산금지조약이라는 것을 만들어 핵무기
제조기술이 후진국으로 이전되는 것을 엄격히 통제하고 있었다. 소련이나 서유럽
선진국들의 비난을 받지 않고 핵무기 제조기술을 한국과 이스라엘에 이전하려면 CIA가
필사적으로 이무영과 샤론 데닝스를 추적하고 있는 것처럼 꾸며야 했다.
특히 소련의 의심을 받지 않기 위해서 KGB의 이중첩자인 그에게 추적 임무를 맡긴
것이다. 무서운 음모였다.
그는 그러한 음모도 무른 채 이무영 소령에 대한 추적 결과를 KGB에 보고해 왔던
것이다. 이런 상태로 모스크바로 돌아간다면 틀림없이 추궁을 받을 것이 뻔했다.
그러나 CIA의 음모를 낱낱이 밝혀서 보고한다면 그 동안의 실수는 상쇄될 것이
분명했다.
그는 아침 10시에 아파트를 떠났다. 위싱턴은 비가 내리고 있었다. 9월이었다. 목덜미를
때리는 빗줄기에 냉기가 느껴졌다.
그는 코트 주머니에 매그넘 45구경을 숨기고 검은 우산을 썼다. 변장은 완벽했다. 트로시
칼슨도 그의 얼굴을 알아보지는 못할 것이다.
그는 미행자가 있는지 살피기 위해 지하철을 탔다. 워싱턴의 지하철은 모스크바에 비해
청결하고 쾌적했다. 노선은 레드, 블루, 오렌지, 옐로우로 구분된다. 그는 몇 번이나 주위를
살피며 지하철을 바꿔 탄 뒤에 이태리피자점에 도착했다.
미행자는 없었다. 출입문을 열자 출입문에 매달려 있는 풍경이 그윽한 소리를 내며
흔들렸다.
그는 천천히 홀을 살핀 뒤에 구석자리에 앉았다. 비가 오고 있기 때문인지
점심시간인데도 손님이 거의 없었다. 그는 트로시 칼슨이 가까이 오자 피자파이를 주문하고
낮게 자신의 이름을 댔다.
트로시 칼슨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놀란 표정을 짓자 그는 자신의 변장이 성공했다는
것을 느꼈다.
그는 트로시 칼슨에게 눈짓을 하고 화장실로 걸어갔다. 트로시 칼슨이 뒤따라 화장실로
왔다.
"모스크바로 돌아가야겠어."
그는 트로시 칼슨이 화장실로 들어오자 재빨리 뒤에서 그녀를 안았다.
"위조여권과 W의 허가가 필요해."
"무슨 일이에요?"
트로시 칼슨은 저항할 생각도 하지 않고 솔리스트 폴의 공격을 뒤로 받았다. 솔리스트
폴이 허둥대고 있는 것은 상당히 긴장하고 있다는 증거였다.
"CIA에서 내 정체를 알고 있어."
"어떻게요?"
"모르겠어. 나를 제거하려고 하는 리무스를 처치했어."
"그게 당신 짓이었어요?"
트로시 칼슨이 얼굴을 찡그리고 물었다. 뒤에서 공격하는 솔리스트 폴 때문에 하체로
통증이 느껴졌다. 구역질 나는 일이었다.
"아파요!"
"허리를 들어. 제기랄!"
"왜 이제 그걸 보고하는 거에요? 벌써 두 달이 가까워졌잖아요?"
"여기가 CIA에 노출되었는지 감시하고 있어."
솔리스트 폴이 가쁜 숨을 몰아쉬며 헐떡거리기 시작했다. 그의 하체가 그녀의 몸 안에서
피스톤처럼 반복운동을 계속하고 있었다.
"어디로 연락하죠?"
"사우스 웨스트 프리웨이에 있는 랭크 아파트 28층 5호야. 전화는 267-4593."
트로시 칼슨이 입 속으로 전화번호를 외우기 시작했다. 그때 솔리스트 폴이 몸을 세차게
떨다가 피스톤 반복운동을 중단했다. 배설이 끝난 것이다.
(더러운 자식!)
트로시 칼슨은 입술을 깨물었다.
솔리스트 폴은 화장실을 나와 손을 씻고 홀로 돌아왔다. 트로시 칼슨은 조금 후에 돌아와
태연한 표정으로 그에게 치즈파이를 배달했다.
"미안해."
그는 트로시 칼슨에게 낮게 소곤거렸다. 왜 그런 일이 일어나는지 자신도 이해할 수
없었다.
"상관없어요."
트로시 칼슨이 쌀쌀하게 내뱉고 카운터로 돌아갔다. 카운터에는 늙은 사내가 혼자 앉아
성경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성경 외에는 관심이 없는 사내였다.
그는 12시 30분에 이태리 피자집을 나왔다. 그는 근처의 슈퍼마켓에서 변장을 하기 위해
머리 염색약을 사서 랭크 아파트로 돌아왔다. 그는 반백의 머리를 금발로 염색하고
유태인처럼 코를 약간 높였다. 코를 지나치게 높이면 가장을 한 것을 금새 알 수 있는
것이다.
모든 준비가 끝나자 그는 아파트 관리인의 눈에 띄지 않게 뒷문으로 아파트를
빠져나갔다. 그는 이번엔 셔틀버스를 타고 허시혼 미술관 옆에 있는 렌트카회사로 갔다.
그는 거기서 일산 도요타를 대여한 뒤 손수 운전을 하여 CIA워싱턴 본부 앞으로 갔다.
오후 4시쯤이었다.
CIA본부 주차장 입구는 경비원들이 지키고 있었다. CIA지하 주차장으로 잠입할 수는
없었다.
그는 주차장 입구가 잘 보이는 건물 모퉁이에 차를 세우고 기다렸다. 비는 계속해서
내리고 있었다. 그러나 맥슨은 그날 지하 주차장을 통해 퇴근하지 않았다. 그는 밤 8시까지
지하 주차장 근처에서 기다리다가 랭크 아파트로 돌아왔다.
이튿날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계속 지하 주차장 입구에서 잠복했다. 맥슨을 잡으려면
끈질겨야 했다. 맥슨은 햇병아리이기는 했지만 부국장의 비서였다. M캡슐 공작을 훤히 알고
있을 것이었다.
부국장을 납치하면 내막을 더 잘 알 수 있겠지만 부국장은 항상 경호원을 데리고 다녔다.
저격할 수는 있어도 납치는 불가능했다.
그가 맥슨이 CIA 본부의 지하 주차장을 나오는 것을 발견한 것은 잠복을 시작한 지
사흘째 되던 날 오후 7시였다.
맥슨은 검은 승용차를 타고 있었다. 그는 렌트카회사에서 빌린 왜건을 타고 맥슨을
미행하기 시작했다.
맥슨은 사법성 모퉁이를 돌아 상무성 쪽을 향해 달리고 있었다. 솔리스트 폴은 일정한
간격을 유지하며 맥슨을 미행했다.
맥슨은 상무성을 지나 국무성 앞에서 내렸다. 국무성에 볼일이 있는 모양이었다.
그는 모퉁이에서 기다렸다. 맥슨이 국무성에서 나온 것은 10분쯤 지나서였다. 금발의 젊은
여자와 함께였다.
"맥슨의 애인인 모양이군."
솔리스트 폴은 속으로 웃었다. 또 다시 리무스에게 잔인하게 살해된 리프니코바의 얼굴이
희미하게 떠올라 왔다. 가슴이 쓰렸다.
맥슨과 금발여자는 국무성에서 링컨기념관 쪽으로 차를 몰았다. 링컨기념관을 지나면
서포토맥 공원이 있고 공원 남쪽에 레스토랑이 즐비했다. 맥슨과 금발여자는 그곳에서
식사를 하려는 모양이었다.
그는 맥슨에게 들키지 않기 위해 안전거리를 유지하고 미행했다. 사방이 어두워져 있어
뒤에서 미행하는 것을 맥슨이 눈치 챌 염려는 없었다.
맥슨은 서포토맥 강변에 위치한 킹 그리즈리 레스토랑에서 차를 내렸다. 솔리스트 폴은
맥슨이 금발여자와 팔짱을 끼고 불빛이 환한 레스토랑으로 들어가는 것을 확인한 뒤에
강변에 차를 세웠다. 식사를 하려면 적어도 한 시간에서 두 시간 이상이 소요될 것이다.
그는 차에서 내려 강변의 가드레일을 향해 걸어갔다. 그 아래 포토맥강이 건물과
가로등의 불빛을 반사하며 흘러가고 있었다. 그는 담배를 꺼내 물고 불을 붙여 연기를
빨아댔다. 사람을 기다리는 것은 초조하고 지루한 일이었다.
그는 여러 가지 생각에 잠겼다.
트로시 칼슨에게 위조여권과 W의 허가를 요청해 놓았으므로 조만간 미국을 탈출할 수
있을 것이다. 이제는 모스크바로 돌아가는 일만이 남은 셈이었다. 그러나 맨손으로 돌아갈
수는 없었다.
CIA는 무엇인지 모르지만 특수공작을 꾸미고 있었다. 그 음모를 알아내야 했다. 그것만이
그가 모스크바로 돌아가도 환영을 받을 수 있는 길이었다.
그는 이미 녹음기까지 준비해 두고 있었다. 문제는 금발여자를 어떻게 처리하느냐 하는
점이었다. 시간을 자꾸 끌 필요는 없었다. 워싱턴에 오래 머물러 있을수록 CIA에게 덜미를
잡힐 가능성도 많았다. 가능한 한 빨리 모스크바로 돌아가야 했다.
그는 담배연기를 길게 내뿜었다. 모스크바는 추운 곳이었다. 그러나 그는 모스크바가
좋았다. 그는 모스크바에서 태어나고 모스크바에서 자랐다. 그 땅이 춥거나 가난한 것은
아무 문제가 아니었다. 그는 항상 자신이 그 땅의 일부라고 생각해 왔던 것이다.
그는 피우던 담배를 포토맥강에 버렸다.
맥슨과 금발여자는 10시가 조금 지나서야 레스토랑에서 나왔다. 솔리스트 폴은 다시
맥슨을 미행하기 시작했다.
맥슨은 백미러로 뒤를 돌아보았다. 아까부터 브라운색 왜건이 따라오고 있었다.
미행자였다. 그는 자신에게 미행자가 따라붙었다는 사실이 믿어지지 않았다. 자신은 CIA의
거물도 중요한 공작을 수행하고 있는 첩보원도 아니었다.
(누굴까?)
FBI가 그를 범죄 용의자로 잘못 알고 미행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얼핏
들었다. 그는 아직도 자신이 평범한 법무성 하급관리자라는 생각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한 자신에게 미행자가 따라붙었다는 것은 도무지 납득이 되지 않는 일이었다.
(혹시 리무스를 살해한 솔리스트 폴이 아닐까?)
맥슨은 자신이 CIA부국장실에서 근무하는 것을 CIA 요원들조차 제대로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CIA의 모든 업무는, 특히 공작은 팀별로 이뤄지기 때문에 요원들의 부국장실을
드나들 필요가 없었다. 그의 얼굴이 CIA 본부 내에서 알려지지 않은 것도 그런 이유
때문이었다.
(리무스는 솔리스트 폴을 살해하게 되어 있었으나 오히려 솔리스트 폴에게 살해되었어.
그건 솔리스트 폴이 CIA가 자신을 제거하려 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는 증거야.)
CIA가 자신을 제거하려 한다는 사실을 안다면 솔리스트 폴도 무엇인가 대책을 세우고
있을 것이다. 맥슨은 미행자를 따돌려야 하는지, 미행자를 잡아야 할 것인지에 대해 잠깐
동안 생각에 잠겼다. 그리고 미행자를 따돌릴 필요가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 미행자를
따돌리면 언젠가는 다시 미행을 할 것이고 잘못하면 미행자의 손에 죽음을 당하게 될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그는 조수석에 앉아 있는 국무성 직원 마샤 파이퍼를 힐끗 살폈다. 마샤는 흡족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는 마샤에게 미행자가 있다는 사실을 알리지 않기로 했다.
마샤는 그의 애인이었다. 이번 M캡슐 공작 때문에 국무성에 출입하다가 알게 된
여자였다.
"뉴욕 타임즈 기자가 의도하는 대로 그가 답변을 할까요?"
마샤가 의혹이 담긴 표정으로 맥슨에게 물었다. CIA는 서울에서 반정부 투쟁을 부추기는
공작을 진행하고 있었다. 벌써 서울에서는 YH 여공 농성사건에 이어 김영삼 신민당 총재
가처분신청이 받아들여져 김영삼 총재가 직무정지를 당한 상태에 있었다.
서울의 여론은 그로 인해 물끓듯했다. 이제 뉴욕 타임지의 기자가 김영삼 총재와의
인터뷰에 성공하고, CIA의 의도대로 인터뷰에 답변을 하면 기사가 나갈 것이고 서울은
커다란 정치적 소용돌이에 휘말릴 것이다. 신민당 총재 직무정지 가처분 신청, 그리고 뉴욕
타임지 회견... 일련의 이 사건들도 CIA가 포스트 박 제거 공작의 일환으로 추진해 온
것이다.
서울의 정치권은 놀랍게도 CIA의 의도대로 충실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뉴욕 타임지의 기자가 어떻게 유도하느냐에 달려 있겠지. 정치인들은 단순해."
그는 웃으며 백미러를 살폈다. 왜건이 일정한 간격을 유지하면서 따라오고 있었다.
"그 기자도 CIA 요원인가요?"
"요원은 아니야. 그러나 포스트 박을 싫어하는 사람이지."
"그렇다고 그 기자가 CIA의 각본에 따라 질문을 하겠어요?"
"CIA의 각본은 너무나 완벽해."
"뉴욕 타임지의 회견 기사가 나오면 한국은 어떻게 되는 거예요?"
"정부 여당엔 커다란 충격이 될 거야. 특히 포스트 박에게 과잉 충성을 하는 정치인들과
정부의 관리들은 신민당 총재의 회견이 사대주의적 발상이라고 몰아 세우겠지. 신민당
총재는 현재 총재자리에서 축출되었어. YH 여공 농성사건으로 노동자들을 정치적으로
이용한다는 비난을 받고 있지. 궁지에 몰려 있는 그에게 한국의 저항 세력이 동조하기
시작했어. 얼핏 보면 대수롭지 않은 사건에 지나지 않을 수도 있지만 화약고나 마찬가지야.
도화선에 불을 붙이면 순식간에 폭발한다구."
"뉴욕 타임지 회견이 어떻게 도화선이 되죠?"
"한국의 정부 여당은 신민당 총재를 법원을 통해 축출한 사람들이야. 이제 그에게 남아
있는 것은 국회의원 자리뿐이야. 정부와 여당은 국회의원 신분까지 박탈할 거야."
"이해가 잘 안돼요."
"그렇게 되면 학생과 국민들이 봉기를 해. YH 때도 참고, 신민당 총재 직무정지 가처분
신청 때도 한국 국민들도 분노를 인내하며 참았지. 그러나 신민당 총재가 제명을 당하면
국민들은 폭발할 거야."
"그러면 포스트 박이 계엄령을 선포하지 않겠어요?"
"계엄령은 국민들과 학생들의 분노를 억누를 수는 있겠지만 젊은 장교들의 불만을 사게
될 거야. 젊은 장교들의 불만이 고조되면 어떻게 되겠어?"
"쿠데타를 유발하겠죠. 그럼 CIA는 한국에서 쿠데타가 일어나기를 기대하나요?"
"천만에. 쿠데타는 한국과 미국의 장래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 알 수가 없어. 우린 그런
불확실한 쿠데타 정부보단 미국에 우호적인 정권을 원하고 있는 거야."
"그럼 도대체 누가 미국에 우호적인 정권을 창출할 수가 있죠?"
"곧 알게 될 거야."
맥슨은 그것까지는 마샤에게 말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지금까지도 충분히 CIA의
극비정보를 마샤에게 알려준 것이다.
맥슨은 이스트 사이드의 그의 셋집 앞에 차를 세웠다. 멀리서 왜건이 전조등을 끄고 있는
것이 보였다. 그는 마샤를 데리고 현관으로 들어가 현관문을 잠궜다. 뒷문은 언제나 잠겨
있었다. 그러나 다시 한번 문이 잠긴 것을 확인한 뒤 2층 침실로 올라갔다. 마샤가 옷을
벗고 샤워를 하는 동안 그는 창으로 밖을 내다보았다.
왜건은 굴뚝 모퉁이에 세워져 있었다. 미행자는 어디 숨어 있는지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10분쯤 골목을 살피자 벽에 바짝 붙어서 있는 검은 물체가 보였다.
"불이 꺼지기를 기다리고 있군."
그는 커튼을 내렸다. 욕실에서는 마샤가 알몸으로 샤워를 하고 있었다. 그는 천천히 옷을
벗기 시작했다. 마샤와 함께 샤워를 할 시간은 충분했다.
현관문은 굳게 잠겨 있었다. 솔리스트 폴은 창으로 들어갔다. 그는 코트를 벗어 유리창에
대고 주먹으로 쳤다. 쟁그랑 소리와 함께 유리창이 깨졌다. 예상했던 것보다는 소리가 훨씬
컸다.
그는 매그넘 45구경을 뽑아서 손에 쥐었다. 거실은 조용했다. 유리창이 깨지는 소리를
듣고 맥슨이 2층에서 내려오는 소리는 없었다. 그는 창문을 넘어 안으로 들어갔다.
가슴이 격렬하게 뛰었다. 긴장 때문에 손바닥에서 땀이 났다. 심호흡을 길게 했다.
솔리스트 폴은 어둠 속을 더듬어 올라가기 시작했다. 걸음을 천천히 떼어 놓았다.
손바닥에서 땀이 흘러나와 총신이 미끄러웠다.
2층에 도달한 그는 한동안 주위를 살피다가 침실 쪽으로 다가갔다. 침실은 조용했다. 그는
침실 도어의 시린다에 손을 가져갔다. 시린다는 잠겨 있지 않았다.
그는 소리나지 않게 시린다를 돌렸다. 도어가 소리없이 열렸다.
침실은 캄캄했다. 그는 그림자처럼 소리없이 침실로 들어섰다.
그때 매그넘 45구경을 움켜쥔 손목 위로 바람소리를 가르며 강한 충격이 가해져 왔다.
그는 매그넘을 떨어뜨렸다. 팔뚝이 부서지는 것 같은 통증이 밀려왔다.
그의 복부에 다시 강한 충격이 느껴졌다. 맥슨이었다. 맥슨이 그의 침입을 눈치채고
역습을 해온 것이다.
그는 복부와 얼굴을 연달아 주먹으로 가격 당했다. 매서운 주먹이었다. 그러나 급소를
얻어맞지는 않았다.
그는 맥슨이 전화선으로 그의 목을 감으려는 것을 눈치재고 재빨리 침실 바닥으로
뒹굴었다. 맥슨이 그의 등을 힘껏 밟아댔다. 그는 등뼈가 부서지는 것 같은 충격을 느꼈다.
그러나 침실 바닥에 떨어트린 매그넘을 잡은 것이 다행이었다. 그는 매그넘을 잡자마자
몸을 돌려 맥슨을 향해 방아쇠를 당겼다.
첫 번째 탄환은 빗나갔다. 그러나 매그넘에서 발사된 슉 하는 소리에 맥슨이 주춤했다.
그는 맥슨을 향해 다시 매그넘을 겨누었다.
"쏘, 쏘지 마!"
맥슨이 다급하게 외쳤다.
"맥슨, 죽고 싶지 않으면 불을 켜!"
그는 어둠 속에서 몸을 일으켰다. 맥슨이 어둠 속을 더듬어 전등 스위치를 올렸다. 불이
환하게 켜졌다.
"움직이지 말아요."
그때 여자의 긴장된 목소리가 그의 뒷전을 때렸다. 마샤 파이커였다. 마샤 파이커가 침대
위에서 두 손으로 모젤을 잡고 그를 노려보고 있었다.
"움직이면 그대로 방아쇠를 당길 거예요.!"
마샤 파이커는 떨고 있었다.
"총을 내려놔요!"
그는 맥슨을 향해 겨누고 있던 매그넘 45구경을 몸을 돌리는 것과 동시에 침대 위의
여자에게 겨누었다. 여자의 눈이 커졌다. 그는 방아쇠를 당겼다. 슉하는 소리가 들리면서
여자가 뒤로 나자빠졌다.
여자의 가슴에서 피가 흥건하게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명중이었다.
그는 두 번째 방아쇠를 당겼다. 그것은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여자의 복부에 구멍을
뻥 뚫었다.
"쏘, 쏘지 마!"
재빨리 돌아선 맥슨을 향해 다시 매그넘을 조준하자 맥슨은 두 손을 번쩍 들었다.
"허튼 수작하면 총알이 날아간다."
"아, 알았어요."
17
트로시 칼슨은 출입문 위에 매달려 있는 풍경이 울리는 소리를 들었다. 아직 영업이
시작될 시간이 아니었다. 영업은 상오 11시부터 시작된다. 지금은 홀과 화장실을 청소하고
탁자를 정리하는 그런 시간이었다.
출입문을 열고 들어온 사람은 이목구비가 뚜렷한 동양인이었다. 잿빛 트렌치 코트를 입고
있었으나 우산을 쓰지 않았다. 얼굴이 침울해 보였다.
날씨 탓일까? FBI 수사관이나 CIA 요원 같지는 않았다. 그렇다면 지방경찰? 그러나
지방경찰은 결코 혼자서 행동을 하는 일이 없다.
어쩌면 이 지역 신디케이트일지도 모르지. 그러나 신디케이트가 나에게 무슨 볼일이
있을까. 신디케이트가 아니야.
트로시 칼슨은 빠르게 그런 생각을 했다. 솔리스트 폴이 CIA에게 정체가 발각되었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 그녀는 자신에게도 위험이 닥치리라는 사실을 예상하고 있었다. 다만
그것이 CIA인지 KGB인지 예측할 수 없었을 뿐이었다.
CIA가 그녀를 체포하러 온다면 솔리스트 폴이 CIA에 체포되었을 때이고 KGB에서
암살자를 파견한다면 CIA에 노출된 조직을 그녀의 선에서 차단하기 위해서일 것이다.
그녀는 CIA와 KGB 모두에게 생명의 위협을 당하고 있는 셈이다. 그러나 탈출구는
없었다. 그녀가 KGB에 요구한 탈출 허가는 KGB에 의해 증거를 확보할 때까지 솔리스트
폴의 접선책으로 남아 있어야 했던 탓이었다.
그렇다고 CIA에 보호 요청할 수도 없었다. 그녀가 CIA에 보호 요청을 하면 KGB는
모스크바에 있는 그녀의 가족을 수용소로 보낼 것이 분명했다.
"영업은 11시부터예요."
그녀는 동양인 사내를 향해 억지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사내가 그녀의 적이
아니었으면 싶었다.
"트로시 칼슨양인가요?"
사내가 정중하게 물었다.
"네."
"나는 이무영이라는 사람이오. 내 이름을 들어본 적이 있소?"
그녀는 고개를 흔들었다. 이무영이라는 이름을 솔리스트 폴에게 얼핏 들은 기억이 났다.
한국 국방부 정보국 소령, M캡슐 공작의 실질적인 책임자. 그를 직접 만나게 되리라고는
상상조차 해본 일이 없었다.
그녀는 KGB의 접선책에 지나지 않았다. 솔리스트 폴에게 명령을 내리는 것은 워싱턴에
있는 소련 대사관 직원이었다. W라는 코드네임을 갖고 있었다.
"솔리스트 폴을 알고 있겠지?"
사내의 눈빛이 날카롭게 안구를 찔러왔다.
"모, 몰라요."
그녀는 침착해지려고 애를 쓰며 대답했다. 다리가 후들거리고 떨렸다.
"트로시 칼슨, 당신이 KGB 요원이라는 것도 알고 있어. 솔리스트 폴의 접선책."
사내가 그녀에게 가까이 다가왔다. 그녀는 반사적으로 뒤로 물러섰다. 몇 걸음 뒤
카운터에는 강도방지용 리버럴 38구경 모젤이 서랍에 들어 있었다. 사내가 코트 주머니
속에 총을 숨기고 있지 않다면 도망을 쳐서 총을 꺼내야 했다.
"아녜요. 전 아녜요."
그녀는 기회를 살피면서 사내의 말을 부정했다.
"거짓말을 해도 소용이 없어."
사내가 빙긋이 웃었다. 선량해 보이는 미소였다. 그녀는 이때라고 생각하며 재빨리
카운터를 향해 달렷다.
이무영 소령은 트로시 칼슨이 카운터로 향해 달리자 청소를 하기 위해 탁자 위에
올려놓은 의자를 집어던졌다. 트로시 칼슨이 의자를 얻어맞고 비명을 지르며 홀에
꼬꾸라졌다.
그는 트로시 칼슨에게 달려가 그녀의 옆구리를 발로 찼다. 우선 기선을 제압해야 했다.
트로시 칼슨은 배를 움켜쥐며 고통스러운 비명을 계속 질러댔다.
"솔리스트 폴을 모른다고 했지?"
그는 트로시 칼슨의 턱을 치켜들고 물었다.
"모, 몰라요."
트로시 칼슨이 고래를 흔들었다. 그는 오른손 주먹으로 트로시 칼슨의 복부를 힘껏
내질렀다.
"읔!"
트로시 칼슨이 도리질을 했다. 그는 모젤의 안전장치를 풀었다.
"사, 살려주세요!"
트로시 칼슨의 얼굴이 하얗게 질렷다. 그의 총에는 소음기까지 부착되어 있었다.
"솔리스트 폴을 모르나?"
이무영 소령이 다시 물었다. 트로시 칼슨은 망설였다. 대답을 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 알
수 없었다.
"한 번만 더 묻겠어. 솔리스트 폴을 모르나?"
"아, 알아요."
"솔리스트 폴은 어디 있지?"
"사우스 웨스트 프리웨이의 랭크 아파트에 있어요."
"몇 호?"
"28층 5호요."
"살고 싶은가?"
"네, 제발 살려 주세요. 전 접선책에 지나지 않아요."
"그럼 내가 시키는 대로 해. 넌 지금부터 랭크 아파트까지 나를 안내해야 해. 조금이라도
허튼 수작을 하면 그 순간 네 몸뚱아리는 벌집이 되는 거야. 알겠어?"
"네."
트로시 칼슨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내 팔에 팔짱을 끼고 나를 따라와. 애인처럼... 자 팔짱을 끼어. 왼쪽이 아니고 오른쪽..."
트로시 칼슨은 억지로 이무영 소령의 오른쪽 팔에 팔짱을 끼었다. 이무영 소령은 트렌치
코트 오른쪽 주머니에 스미스 웨슨 9구경 모젤을 쥔 손을 집어넣었다.
트로시 칼슨이 수상한 짓을 하면 그대로 쏘아 버리겠다는 신호였다. 실제로 걸음을 떼어
놓을 때마다 모젤의 총구가 그녀의 옆구리를 찌르곤 했다.
그들이 사우스 웨스트 프리웨이에 있는 랭크 아파트에 도착한 것은 11시 10분경이었다.
랭크 아파트는 35층짜리 고층 아파트였다.
"어디로 가는 거요?"
그들은 아파트의 현관에서 흑인 경비원의 제지를 받았다. 아파트의 입구에는
폐쇄회로까지 설치되어 있었다.
"셀던 수레이거씨를 만나러 왔어요."
트로시 칼슨이 대답했다. 목소리가 떨리고 있었다. 셀던 수레이거는 솔리스트 폴의 새
이름이었다.
"누구라고 전할까요?"
"트로시 칼슨이오."
"잠깐만 기다려요."
경비원이 다이얼을 돌리는 동안 트로시 칼슨은 이무영 소령을 힐끗 쳐다보았다. 이무영
소령은 놀랄 정도로 침착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올라오시랍니다."
경비원이 수화기를 든 채 대답했다. 이무영 소령은 경비원이 들고 있는 수화기를 힐끗
쳐다보고 엘리베이터를 향해 걸음을 떼어 놓았다.
"동양인도 한 명 있습니다."
경비원은 엘리베이터 안으로 사라지는 두 남녀를 노려보며 수화기에 대고 말했다.
"동양인이 같이 왔다구?"
솔리스트 폴은 경비원에게서 걸려온 전화를 받고 얼굴을 잔뜩 찌푸렸다. 트로시 칼슨이
아파트까지 찾아오는 일은 전례가 없는 일이었다. 게다가 동양인 사내를 동반하고 있다니...
CIA의 수법은 아니었다. 어쨋거나 대비를 해야 했다. 트로시 칼슨이 같이 왔다고 해도
경계를 늦추면 안되었다. 그는 침대 밑에 감추어 둔 매그넘 45구경을 꺼내 실탄을 장전하고
소음장치를 부착햇다.
대낮이었다. 부유층 아파트라 출입자들도 많지 않은 시간이었다.
그는 맥슨을 위협해 M캡슐 공작의 내막을 캐내는데 성공했었다. 그 내용을 보고서에
추가해 트로시 칼슨에게 전달하려던 참이었다. 그런데 트로시 칼슨이 스스로 찾아온 것이다.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동양인이 혹시 이무영 소령이 아닐까?"
CIA에도 동양인 요원들이 있기는 했다. 그러나 그를 제거하는데 동양인 요원을 선발해
보내지는 않을 것이다.
그는 도어를 향해 매그넘 45구경 모젤을 겨누었다. 엘리베이터가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모젤의 격발장치를 풀었다. 그는 긴장이 되었다. 복도를 걸어오는 발자국소리가 들리고
있었다. 솔리스트 폴은 숨을 죽이고 기다렸다.
이내 도어를 노크하는 소리가 들렸다.
"누구요?"
그는 문 앞에 바짝 붙어서서 낮게 소리를 질렀다.
"트로시예요."
트로시 칼슨이었다. 목소리가 떨리고 있는 것이 긴장을 하고 있는 것 같았다. 트로시
칼슨이 위협을 받고 있다는 증거였다.
"무슨 일이야?"
"KCIA의 이무영 소령과 함께 있어요. 이무영 소령이 협상을 요구하고 있어요."
"협상?"
그는 트로시 칼슨의 말에 어이가 없었다.
"협상에 응하지 않으면 저를 죽이겠대요."
트로시 칼슨이 울먹이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는 깊이 숨을 몰아쉬었다.
"이무영 소령을 문 옆으로 오라고 해."
그는 트로시 칼슨에게 말하고 모젤을 쥔 손에 힘을 주었다.
"이무영이오."
이내 엑센트가 없는 사내의 음산한 목소리가 문틈을 통해 들려왔다.
"나에게 원하는 것이 무엇인가?"
"M캡슐 공작에 대한 진상이오."
"M캡슐은 한국에서 가져가지 않았나? CIA의 보호를 받으며... 모사드도 한몫 했고..."
이무영 소령이 퉁명스럽게 말했다.
"나는 내 총을 트로시 칼슨에게 맡기겠소. 들여보내 주겠소?"
"내가 자네를 살해할 수도 있을 텐데?"
"솔리스트 폴! 당신이 나를 살해해서 얻을 이익이 뭐요? 당신은 나를 살해함으로써 기껏
마련한 이 거점까지 포기할 생각이오?"
대범한 자였다. 솔리스트 폴은 손바닥으로 진땀이 배어 나오는 것을 느꼈다.
"나 역시 당신을 살해해서 얻을 이익은 아무 것도 없소."
"매기 한의 복수를 할 생각도 없나?"
그는 조소하듯이 말했다.
"매기 한의 복수를 할 생각이었다면 트로시 칼슨을 끌고 여기까지 오지는 않았을 거요.
트로시 칼슨을 죽이고 당신을 기습하는 것이 나로서는 훨씬 쉬운 일이니까."
"들어와라. 문은 열려 있다."
"문열 열어 줄 생각은 없소?"
이무영 소령이 문밖에서 웃는 소리가 들렸다. 그를 비웃고 있는 것 같았다.
그는 왼손으로 도어 손잡이를 돌려 도어를 재빨리 열어 젖히고 모젤을 겨누었다. 문 앞에
서 있을 것이 틀림없을 이무영 소령을 향해 방아쇠를 당겨 버릴 작정이었다.
그러나 문이 열린 순간 커다란 물체가 그를 향해 빠르게 돌진해 왔다. 그는 엉겹결에 그
물체를 향해 연달아 방아쇠를 당겼다.
트로시 칼슨이 피투성이가 되어 그에게 안겨 왔다. 그는 트로시 칼슨의 몸뚱이를 힘껏
떼밀었다. 트로시 칼슨의 뭄뚱이는 벽으로 내동댕이쳐졌다.
트로시 칼슨은 벽에다 흥건한 핏자국을 그리며 그대로 주저앉았다.
그는 이무영 소령을 향해 다시 모젤을 겨누려고 했다. 그러나 어느 틈에 달려 들어온
이무영 소령이 모젤을 쥔 그의 손을 후려친 것과 동시에 구둣발이 둘려차기로 그의 턱을
걷어찼다. 그는 모젤을 떨어트리고 턱을 감싸쥐며 나뒹굴었다.
순식간의 일이었다. 그가 몸을 일으키려 했을 때 벌써 이무영 소령의 모젤이 그의 이마를
찍어누르고 있었다. 스미스 웨슨 9경에 소음장치가 부착되어 있었다.
그는 눈을 감았다.
"일어나!"
그가 눈을 뜨자 이무영 소령은 그의 매그넘 45구경까지 왼손에 들고 있었다.
"몇 가지만 물어 보겠어. 솔직하게 대답해 주겠나?"
이무영 소령은 도어를 닫고 매그넘 45구경 모젤의 실탄을 빼서 거실바닥에 던졌다.
"무언가?"
"본명을 말해."
"알렉세이 볼라소프. 모스크바 쿠즈네스키 출신이지."
"M캡슐 공작을 얼마만큼 알고 있나?"
"거의 모두..."
"M캡슐 공작에 대해서 모두 얘기해 주게."
"나를 어떻게 할 것인가?"
솔리스트 폴이 이소령을 똑바로 쏘아보며 물었다. 그는 피식 웃었다. 매기 한의 비참한
죽음이 또 다시 머리 속에 떠올라 왔다. 그러나 매기 한의 죽음에 대한 복수를 할 생각은
전혀 없었다.
"어떻게 해 주기를 바라나?"
"죽여주게."
"뭐라구?"
이무영 소령의 얼굴에 핏기가 싹 가셨다. 그는 자신이 들은 말을 믿을 수가 없었다.
"가능하면 고통 없이 죽여주게."
"무엇 때문에 죽기를 원하나?"
"이유는 묻지 말게."
솔리스트 폴이 착잡한 표정으로 대꾸했다. 그는 솔리스트 폴에게 연민을 느꼈다.
"모스크바에 돌아가면 처형을 당하나?"
솔리스트 폴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CIA에 망명을 할 수도 있지 않은가?"
"CIA는 이미 나의 제거 명령을 내렸네. 게다가 나는 이미 CIA의 리무스와 파커 부국장의
비서인 맥슨을 죽였어. 맥슨의 애인인 국무성 직원 마샤 파이커도 살해했구."
"모스크바로 돌아가면 무엇 때문에 처형을 당하나?"
"트로시 칼슨이 죽었기 때문이야. 트로시 칼슨은 KGB의 내 접선책이었어. 모스크바의
KGB는 그 책임을 나에게 물을 걸세."
"자네가 모스크바의 KGB에 보고할 만한 것은 없나?"
"이미 늦었네. M캡슐은 한국에 가 있구 그것은 곧 이스라엘로 갈 테니까. 모스크바의
KGB는 내가 M캡슐이 한국에 넘어갈 때까지 손을 쓰지 못했다는 것을 보고 받았을 걸세."
"자네가 보고를 했나?"
"그렇지 않네."
"그렇다면 보고되지 않았을 가능성도 있지 않은가?"
"CIA에 KGB의 이중첩자가 나 혼자만은 아니라고 생각하네."
옳은 말이었다. 이무영 소령은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러나 언제까지나 솔리스트 폴에게
연민을 느끼고 있을 수만은 없었다.
"샤론 데닝스를 알고 있나?"
"알고 있지. 그녀가 장미공작을 입안했으니까."
"장미공작이라니?"
"아직도 모르고 있나? 장미공작이란 포스트 박 제거 공작을 말하는 거야. 이스라엘은
장미공작에서 M캡슐을 차지하고 CIA는 포스트 박을 제거하기로 되어 있었던 거야. 자네나
나는 그것도 모르고 M캡슐만 중요하게 생각한 거야."
"포스트 박을 CIA가 왜 제거하려고 하지?"
이무영 소령은 소름 끼치는 전율을 느끼며 그렇게 물었다.
"첫째는 포스트 박이 핵무기를 개발하려고 하고 있기 때문이야. 둘째는 포스트 박이 장기
집권을 하는 바람에 서울에 포스트 박 타도 움직임이 커지고 있기 때문이지. 이란처럼
미국이 독재자를 계속 지지하다가 혁명이 일어나면 미국은 한국에서 쫓겨날까봐 걱정을
하고 있는 거야. 그런 전철을 밟지 않기 위해서 미국은 포스트 박이 학생들이나 민족주의를
내세우는 군인들의 쿠데타로 실각하기 전에 포스트 박을 제거하고 친미정권을 세우려는
거야. 이제 알겠나?"
"놀랍군!"
"CIA는 장미공작을 이미 실천에 옮기고 있어."
"어떻게?"
"5월 30일 신민당 전당대회, YH 여공 신민당사 농성사건, 신민당 총재 직무정지 가처분
사건은 알고 있겠지?"
"알고 있어."
"CIA는 포스트 박을 암살하려고 해."
"암살?"
"이미 재일교포를 일본에서 선발해 훈련시켰네. 지금은 미국에 있지만 곧 서울로 떠날
거야."
"이름도 알고 있나?"
"이름은 몰라."
"어떻게 장미공작에 대해서 그렇게 자세히 알지?"
"CIA 부국장 리차드 파커의 비서 맥슨을 잡았네. 그의 말을 녹음까지 해 두었어."
"음."
이무영 소령은 신음을 토했다.
"샤론 데닝스는 자신의 얼굴을 알고 있는 사람은 반드시 제거하는 걸로 유명하지."
"독거미였군. 믿을 수가 없을 정도야."
이무영 소령이 소태를 씹은 얼굴로 중얼거렸다. 그런 여자와 M캡술 공작을 함께 했다는
사실이 씁쓸했다.
그때 등뒤에서 인기척이 났다. 이무영 소령이 재빨리 몸을 돌리려 하자 자동소총의
안전장치를 뽑는 철컥 소리가 났다.
이무영 소령은 가슴이 철렁하는 것을 느끼며 그대로 정지했다. 그는 자신이 조금만
움직여도 자동소총에 의해 뒤통수가 날아갈 거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총을 내려놓는 것이 어때? 천천히... 아주 천천히..."
샤론 데닝스였다. 그는 손에 들고 있던 스미스 웨슨9경을 거실 바닥에 떨어뜨렸다.
"말을 아주 잘 듣는군. 이무영 소령."
샤론 데닝스가 깔깔대고 웃었다. 그는 찬물을 뒤집어 쓴 듯한 모욕감을 느끼며 천천히
몸을 돌렷다. 총을 들고 있지 않은 이상 샤론 데닝스가 자동소총의 방아쇠를 당기지는 않을
것이다.
"여기는 웬일이오?"
그는 샤론 데닝스의 얼굴을 차갑게 응시했다.
"내 정체를 아는 자를 제거하러 왔지."
"나를 제거하러?"
그가 반문하며 웃었다.
"아니."
샤론 데닝스가 고개를 흔들었다. 그녀의 자동소총 총구가 천천히 솔리스트 폴에게로
돌려졌다.
"무, 무슨 짓이야?"
솔리스트 폴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이소령에게 고통없이 죽여달라고 하던 때와는
딴판이었다.
(나의 동정심을 끌어내어 어떻게 하든지 도망칠 기회를 노릴 셈이었군.)
이무영 소령은 솔리스트 폴의 교활함에 새삼스럽게 놀랐다.
"아, 안돼!"
솔리스트 폴이 손을 내저으며 절박하게 외쳤다. 그러나 샤론 데닝스의 자동소총은
솔리스트 폴의 절규를 아랑곳하지 않고 요란한 굉음과 함께 불을 뿜어댔다. 솔리스트 폴이
몸을 일으키려다가 그대로 퉁겨졌다.
그의 몸뚱이에 벌집 같은 구멍들이 뚫렸다. 얼굴은 알아볼 수도 없을 정도로 피범벅이
되었다.
"뒤처리를 해요."
복도에서 경찰관복을 입은 사내가 들어오자 샤론 데닝스가 자동소총을 넘겨 주고 이무영
소령의 스미스 웨슨9경 모젤을 집어들었다.
"해리!"
샤론 데닝스가 복도를 향해 외쳤다. 그러나 복도에서 또 한 사람의 사내가 들어왔다. 그도
경찰관 정복을 입고 있었다.
"이자에게 수갑을 채워요."
샤론 데닝스가 말했다. 해리라는 사내가 말없이 수갑을 그의 손목에 채웠다.
"갑시다!"
샤론 데닝스가 이무영 소령의 둥을 떠밀었다. 이무영 소령은 천천히 복도로 걸어나갔다.
총소리를 듣고 나왔는지 아파트의 주민들이 복도에 몰려나와 웅성대고 있었다.
"FBI예요. 마약 사범을 체포했으니 비켜 주세요."
샤론 데닝스가 주미들에게 FBI 신분증을 꺼내 보이자 주민들이 양쪽으로 갈라서며 길을
비켜 주었다. 이무영 소령은 어처구니가 없었으나 주민들에게 도움을 요청할 수는 없었다.
모사드는 이미 FBI 수사관으로까지 위장하고 있었다.
"모사드는 정말 대단하군!"
이무영 소령은 진심으로 감탄했다. 아파트 앞 광장에는 경광등이 번쩍거리는
경찰세단까지 대기하고 있었다. 놀라운 기동력이었다.
"모사드는 언제나 완벽을 추구해요."
샤론 데닝스가 자랑스럽다는 듯이 말하고 어깨를 으쓱했다.
그는 경찰세단에 올라탔다. 샤론 데닝스가 그의 옆자리에 앉았다. 사내가 뒤따라 운전석에
올라타고 자동소총을 든 정복 경찰관이 황급히 조수석에 올라탔다.
"가요."
샤론 데닝스가 짧게 외쳤다. 경찰세단이 사이렌을 울리며 사우스 웨스트 프리웨이를
질주하기 시작했다.
"사이렌을 꺼요."
샤론 데닝스가 말했다. 이무영 소령은 입을 다물고 앞만 바라보았다. 샤론 데닝스가
자신을 어떻게 할지는 알 수 없었다. 그러나 샤론 데닝스가 쉽사리 자신을 살해하지는
못하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를 어디로 데리고 가는 거요?"
그는 침착하게 샤론 데닝스에게 물었다. 샤론 데닝스는 천의 얼굴을 갖고 있는 여자였다.
"M캡슐만 이스라엘에 넘겨주면 서울까지 무사히 보내 주겠어."
샤론 데닝스가 냉랭하게 말했다.
"장미공작이 뭔지 얘기해 보시지."
이무영 소령이 비웃는 투로 말했다.
"내가 당신을 너무 얕봤어. 당신은 당신이 서울로 돌아갈 때까지 M캡슐 복사본을
이스라엘에 넘겨주지 말라고 했더군. 우리 계획대로 모든 것이 순조롭게 진행되는가
싶었는데 브레이크가 걸렸어."
"그럼 지중해의 붉은 장미가 곤경에 빠졌겠군."
"그러나 우린 M캡슐을 손에 넣을 수 있어."
샤론 데닝스가 자신감에 차서 말했다.
"어떻게?"
"당신이 내 수중에 있으니까 방법을 천천히 생각할 거야."
샤론 데닝스가 애인에게 하듯이 눈을 흘기며 웃었다. 이무영 소령은 그 웃음에 소름이
오싹 끼치는 기분이 들었다.
18
그는 고통스러워하며 스타카토로 짧게 끊어지는 신음소리를 내뱉고 있었다. 높다란
천장에 매달린 알전구가 활처럼 웅크리고 있는 그의 등에 오렌지빛 광선을 쏟아 놓고
있었다. 등에는 가죽 채찍에 맞은 핏자국이 뱀처럼 살아서 꿈틀거렸다.
샤론 데닝스는 잠시 채찍질을 멈추고 가쁜 호흡을 진정시켰다. 이런 원시적인 고문에는
상당한 운동량이 필요했다.
그녀는 책상 위에서 담배를 꺼내 입에 물고 라이터로 불을 붙여 담배연기를 폐부 깊숙이
빨아들였다가 내뱉었다. 푸르스름한 담배연기가 그녀의 눈앞에서 안개처럼 흩어졌다.
지하실은 눅눅한 습기가 가득 차 있었다. 포토맥강이 가까운 탓일까.
놈이 또 신음소리를 삼키고 있었다. 의외로 인내력이 강한 놈이다. 벌써 5일째 계속되는
고문이었다. 처음 1주일은 놈을 회유하고 협박하는데 소모했다. 협박도 놈에겐 소용이
없었다.
"이무영."
샤론 데닝스는 천천히 이무영 소령에게 가까이 갔다. 이무영 소령은 고개를 숙인 채
미동도 하지 않고 있었다.
"내 말이 안들려?"
샤론 데닝스의 구둣발이 이무영 소령의 얼굴을 올려찼다. 이무영 소령이 짐승처럼 괴로운
신음소리를 내뱉으며 콘크리트 바닥에 나뒹굴었다.
"내 말이 안 들리나?"
샤론 데닝스가 잔인하게 웃으며 구둣발을 소령의 가슴팍에 올려놓았다.
"말해라!"
"M캡슐을 넘겨주지 않으면 네 가족이 죽는다."
"먼저 포스트 박 제거공작을 중지해라."
이무영 소령이 힘겨워 하며 대꾸했다.
"포스트 박은 독재자야. 너희 국민들이 모두 미워하고 있어."
"그래도 CIA와 모사드의 공작에 의해 제거되게 놔둘 수는 없어."
"포스트 박에게 충성을 하는군."
"그는 우리의 대통령이야."
"그리고 국민들을 탄압하는 독재자지. 독재자를 위해 일을 하는 것은 의로운 일이
아니야."
"그렇다고 외국의 정보기관에 제거되게 놔둘 수는 없어. 그건 우리의 민족적 수치야."
"쇠귀에 경읽기군."
"샤론 데닝스. 그 동안의 정을 생각해서 나에게 이럴 수 있나? 마이애미에서 황홀했던
정사가 기억나지 않아?"
"흥!"
샤론 데닝스가 코웃음을 쳤다.
"우린 뉴욕에서도 함께 지냈잖아?"
"그래, 나는 너를 싫증이 나도록 즐겼지."
샤론 데닝스가 구둣발로 다시 그의 옆구리를 찼다.
"너에게 살려달라고 말하지는 않겠어. 하지만 진실만은 알고 싶어."
"진실?"
"암살자들이 내 가족만을 죽이러 간 것은 아니지? 그들은 우리 대통령을 암살하러
간거야. 그렇지?"
"맞았어. 당신 머리는 너무 좋군."
"그들은 재일 한국인이지?"
"그래."
"CIA는 육영수 여사 저격사건에서 힌트를 얻어 재일 한국인을 내세워 대통령을 저격할
음모를 꾸민 거야. 내 말이 틀리나?"
"틀리지 않아."
샤론 데닝스가 어깨를 들썩이며 웃었다. 조롱기가 가득한 웃음이었다.
"그들의 이름이 뭐지?"
"알 필요 없어. 너는 지금부터 네 가족이 죽었다는 소식이나 기다리라구."
"차라리 날 먼저 죽여다오."
"그래?"
샤론 데닝스는 차갑게 웃고는 벽에 세워져 있는 쇠파이프 토막을 집어들었다. 그는 오싹
소름이 끼쳐왔다.
"뭘, 뭘 하려는 거야?"
그는 공포에 질려 소리를 질렀다.
"널 죽여주려고."
"잔인한 년!"
이무영 소령은 이를 갈았다.
"M캡슐을 이스라엘에 넘겨 주라는 편지만 쓰면 간단해!"
샤론 데닝스의 눈빛이 표독스러웠다.
"닥쳐!"
"고문을 하는 것은 잔인한 일이야. 그러나 매력 있는 일이기도해!"
샤론 데닝스가 깔깔대고 웃으며 쇠파이프 끝으로 그의 가슴을 내리찍었다. 그는 가슴이
터지는 것 같은 통증을 느끼며 신음소리를 내뱉었다. 통증은 눈이 튀어나올 것처럼
격렬했다.
"아픈가?"
샤론 데닝스가 독사처럼 웃었다. 그는 대답을 하지 않았다. 그러자 샤론 데닝스가
쇠파이프로 그의 몸을 마구 후려쳤다. 그는 비명을 지르며 데굴데굴 굴렀다.
그러나 손발이 묶여 있어 구르는 것도 용이하지 않았다. 그는 비명을 지르며 울었다. 샤론
데닝스가 휘두르는 쇠파이프에 살점이 뜯겨져 나가고 피가 튀고 있었다. 의지력이 강한
그도 고통은 견딜 수가 없었다.
"잘 생각해 봐. 네 가족을 죽이러 암살자가 이미 워싱턴 내셔날공항을 떠났어."
샤론 데닝스가 가쁜 숨을 고르며 구둣발로 그의 가슴을 눌렀다.
"서울에 도착하기 전에 제지하지 않으면 네 가족은 암살자의 면도칼에 목이 잘려."
샤론 데닝스가 구둣발에 힘을 주었다.
"정미경 중위에게 편지를 써. 국제전화를 하든지."
샤론 데닝스가 악마처럼 속삭였다.
"못한다!"
그는 고개를 흔들었다.
"그럼 암살자의 손에 네 마누라와 아이를 죽게 놔둘 거야?"
"..."
"암살자들은 네 가족을 먼저 죽이고 대통령을 저격할 거야."
"..."
"그들은 전문 킬러야."
"못해!"
그는 세차게 고개를 흔들었다. 이제 와서 포기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잘 생각해 보라구."
샤론 데닝스가 차갑게 내뱉고 지하실을 나갔다. 철문이 닫히는 소리가 쾅 하고 고막을
때렸다.
그는 입술을 깨물며 몸을 일으켜 콘크리트벽에 등을 기댔다. 온몸이 쑤시고 아팠다.
그는 자신도 모르게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자신의 처지가 비참하기만 했다. 샤론
데닝스가 말한, 아내와 딸을 죽이러 암살자가 서울로 떠났다는 말이 이명처럼 귓전을
후벼파고 있었다.
아내와 딸은 아무 힘이 없다. 그들이 암살자의 잔인한 마수에서 벗어난다는 것은 전혀
불가능한 일이었다.
여러 가지 생각이 계속 떠올랐다. 국방부 정보국에서 근무하다가 느닷없이 대통령의
호출을 받고 청와대에 불려갔던 일. 그로부터 M캡슐 특별공작 임무를 부여받고 부랴부랴
집으로 돌아와 떠날 준비를 하던 일, 아내와의 이별, 프랑스에서 샤론 데닝스를 처음
접촉했던 일. 필라델피아에서의 M캡슐 회수 공작, 그리고 플로리다 마이애미에서의 샤론
데닝스와의 정사...
그러나 모든 것이 샤론 데닝스과 CIA의 음모임을 알았을 때 이무영 소령은 분노를 넘어
비감한 기분까지 느껴야 했다.
M캡슐 공작의 발단은 필라델피아 CIA의 샘 오스틴에 의해 이루어진 것이었다. 샘
오스틴은 일반적인 CIA 정보활동의 일환으로 이라크 국방정보국의 압둘라 소령과 브라운
연구소 제이콥스 박사의 전화를 우연히 도청했는데 그것은 M캡슐에 관한 것이었다.
이라크는 중동의 패자가 될 계획으로 핵무기 생산계획을 세웠던 것이다. 그들은 첫 단계
공작으로 브라운연구소의 제이콥스 박사를 포섭해 막대한 자금과 첩보장비까지 지원하면서
M캡슐을 빼내려고 했으나 필라델피아의 CIA 요원 샘 오스틴에게 탐지되고 말았던 것이다.
그러나 샘 오스틴은 그 사실을 CIA에게 보고하지 않고 한국 대사관과 접촉해 M캡슐을
탈취하여 한국에 팔려고 워싱턴의 한국 대사관에 전화를 한 것이다.
이때 CIA는 샘 오스틴의 음모를 탐지하고 있었다. 그들은 즉각 이스라엘의 비밀첩보부
모사드와 연락을 취했다.
이스라엘은 그 무렵 아랍연맹에 대항하기 위해 핵무기를 생산해야 하는 절박한 처지에
놓여 있었다. 재래식 무기로 아랍연맹과 대항한다는 것은 한계가 있었다. 미국도 그 사실을
안정하고 어떻게 하든지 이스라엘이 핵무장을 할 수 있도록 도우려는 참이었다.
그러나 공개적으로 이스라엘에게 핵무기 제조기술을 이전할 경우 소련의 격렬한 비난을
받을 우려가 있어 머뭇거리고 있었다.
이때 한국으로부터 M캡슐을 서울로 운반하는데 협조해 달라는 요청이 이스라엘에
들어왔다. 이스라엘은 그 요청을 쾌히 받아들였다.
CIA는 처음 M캡슐이 한국에 넘어가기 전 회수하려고 했다. 그러나 그것을 CIA가 회수해
버리면 이스라엘도 핵무기를 생산해내지 못한다는 사실에 봉착했다.
중동에서 소련의 팽창주의를 견제하고 아랍연맹의 아랍 민족주의에 맞서려면 이스라엘에
핵무장을 시켜 미국의 대리전을 치르게 해야 했다. 그러나 이스라엘에 M캡슐을 넘기면
소련의 항의를 감당할 수 없게 되는 것이다.
CIA는 이 문제에 대해 이스라엘과 깊숙이 논의 했다. 그리고 한가지 결론을 내렸다.
그것은 북한의 위협에 대응하기 위해 핵무기를 갖기를 원하는 한국을 이용하는 것이었다.
한국은 마침 이스라엘에 M캡슐 공작에 협조해 달라는 요청을 해놓고 있었다. 한국의
계획대로 M캡슐을 한국과 이스라엘이 협력하여 M캡슐을 서울로 가져가게 방치한 뒤 그
책임을 물어 포스트 박을 제거하고 M캡슐을 서울에서 이스라엘로 가져가게 하는 것이었다.
물론 거기에는 많은 난관이 가로놓여 있었다.
첫째는 한국이 이스라엘 비밀첩보부와 M캡슐 공작을 공동으로 한다는 정보가 KGB에
들어가지 않게 하는 것이었다. CIA는 그 정보의 누출을 막고 소련의 의심을 사지 않도록
하기 위해 KGB의 이중첩자인 솔리스트 폴에게 M캡슐 회수 공작의 총책임을 맡겼다.
CIA가 필사적으로 M캡슐을 회수하려고 하는 것처럼 KGB에 보이기 위해서였다.
결과적으로 그 음모는 깨끗하게 성공했다. KGB는 소련 외무성을 통해 극비문서로
M캡슐을 회수하지 못한 CIA를 맹렬하게 비난했다. 아울러 한국이 핵무기 생산을 포기하지
않으면 북한으로 하여금 남침을 하게 하겠다고 통고해 왔다.
그러나 이스라엘에 대해서는 일언반구의 비난도 없었다. M캡슐 공작의 뒤에는
이스라엘이 도사리고 있다는 사실을 그들은 상상조차 못하고 있었다.
미국은 모든 외교적 노력을 기울여 한국으로보터 M캡슐을 회수해 오려는 노력을 하는
척했다. 소련을 무마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한국이 M캡슐을 되돌려 줄 리가 없었다.
미국이 예상했던 일이었다.
소련은 극비문서로 미국이 모든 책임을 지라고 통고해 왔다. 미국은 M캡슐을 누출시킨
책임을 지고 포스트 박을 제거하겠다고 소련에 통보했다.
소련은 포스트 박 제거에 동의했다. 한국군의 약화를 노린 전술이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M캡슐을 손에 넣을 수 없었다. 한국이 이미 M캡슐을 확보했으면서도
이스라엘에 넘겨주지 않는 것은 CIA와 모사드의 음모를 어렴풋이 눈치 챈 이무영 소령이
자신의 허락이 있을 때까지 M캡슐을 이스라엘에 넘겨주지 말라고 정미경 중위에게 단단히
당부를 한 탓이었다. 샤론 데닝스가 이무영 소령을 고문하는 것은 M캡슐 복사본을
이스라엘에게 념겨주라는 내용의 편지를 쓰라는 그녀의 말을 이무영 소령이 거부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럴 줄 알았으면 플로리다에서 복사하는 건데...)
샤론 데닝스는 입술을 깨물며 후회했으나 소용없는 일이었다.
한국의 박정희 대통령이 국가 대 국가의 약속을 깨트리라고는 예상도 하지 못했던
일이었다. 물론 그 이면에는 이스라엘 비밀첩보부와 CIA의 음모를 눈치 챈 이무영 소령의
제동이 있었다.
(이젠 그의 가족을 미끼로 M캡슐 복사본을 요구해야 돼.)
한국의 박정희 대통령은 이무영 소령을 누구보다도 신뢰하고 있었다. 이무영 소령이
친필로 편지를 쓴다면 자세한 내막을 알리 없는 한국의 박정희 대통령이 이스라엘에 M캡슐
복사본을 양도해 줄 것은 틀림없는 일이었다.
날씨는 쾌청했다. 벌써 10월도 중순으로 넘어가고 있었다. 서울은 신민당 김영삼 총재와
뉴욕타임지 회견기사로 혼미를 거듭하고 있었다.
여당은 국회에서 날치기 통과로 김영삼 총재의 의원직을 제명했고 김영삼 총재는 "닭의
모가지를 비틀어도 새벽은 온다."하고 정부 여당에 굴복하지 않을 것임을 당당하게
선언했다. 모든 일이 CIA가 의도한 대로 진행되고 있었다.
그녀는 조지타운 구의 거리를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양광이 따뜻했다. 바람은 없었으나
단풍이 들기 시작하는 가로수의 노란 잎사귀들이 하늘하늘 떨어지고 있었다.
서울에서 파견한 암살자들로부터는 내일 아침에나 국제전화가 올 것이다. 부인의 목소리와
어린 딸의 울음소리를 듣는다면 아무리 충성심이 강한 이무영 소령이라고 해도 굴복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이무영 소령이 그녀가 원하는 대로 편지를 쓰면 이무영 소령은 그 즉시 제거될 것이다.
이무영 소령은 너무 많은 비밀을 알고 있었다. 물론 서울에 있는 이무영 소령의 부인과
어린 딸도 제거될 것이 분명했다. 화근의 싹은 미리 잘라 없애야 했다.
(아까운 인물이지만 어쩔 수 없어.)
그녀는 혼잣말로 낮게 중얼거렸다. 문득 플로리다 마이애미 비치에서 이무영 소령과
알몸으로 밤바다를 헤엄치던 생각이 떠올랐다. 그리고 모래사장 위에서의 격렬하고
뜨거웠떤 정사...
그것은 많은 남자와 관계를 가진 그녀에게도 독특한 경험이었다. 그녀는 남자와의 관계를
단순한 욕망의 해소와 쾌락을 위한 행위로만 규정했었다.
그러나 이무영 소령과의 정사는 그녀의 그런 생각을 송두리째 흔들어놓았다. 그녀는
소령과의 정사에서 새롭게 눈을 뜬 것이다.
그러나 그녀는 비밀첩보원이었다. 남자와 사랑에 빠지면 첩보원의 생명은 함정에 빠질
가능성이 높았다. 그녀는 이무영 소령에게 기우는 마음을 야멸차게 차단했다.
그녀에게 있어서 남자는 한낱 쾌락의 대상에 지나지 않았다. 그것은 지금까지 그녀가
엄격하게 통제해 온 규칙이었다. 그녀는 그 규칙을 스스로 깨뜨리는 어리석음을 범하지
않을 생각이었다.
그녀는 해가 기울 때까지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창가에 앉아 있었다. 그녀가 이스라엘
여군 중위로 복무하다가 이스라엘 비밀첩보부에 들어간 것은 PLO의 폭탄테러로 가족을
모두 잃은 뒤였다. 그녀는 PLO 과격분자들에게 복수를 하기 위해 비밀첩보부의 지옥같은
훈련을 우수한 성적으로 수료했다.
그러나 그녀가 처음 파견된 곳은 아랍이 아니라 미국이었다. 그녀는 미국에서 철저하게
임무를 수행했다. 그녀는 임무를 완수하기 위해서는 자신의 육체를 제공하는 미인계도
서슴지 않고 사용했다.
차츰 비밀첩보부에서 그녀의 명성이 높아져 갔다. 그녀의 이름과 얼굴이 미국에서
활동하는 첩보원들에게 널리 알려지게 되자 그녀는 텔아비브로 소환되었고 얼마 후에
레바논으로 파견되었다.
그녀는 레바논에서도 많은 활약을 해 독거미라는 별명까지 얻었다. 지중해의 붉은 장미는
그녀가 레바논에서 활약할 때 사용하던 코드 네임이었다.
그녀는 그후 유럽과 미국에서 활동을 했다. 그 사이 그녀가 이스라엘 비밀첩보부에 발을
들여놓은 지 17년이란 긴 세월이 흘렀고 그녀는 어느덧 40의 중년여인이 되었던 것이다.
그녀가 아직도 20대의 얼굴과 피부를 갖고 있는 것은 성형수술때문이었다. 이스라엘
비밀첩보부는 그녀의 임무가 끝날 때마다 얼굴을 바꾸게 했다. 그녀의 얼굴이 세계
첩보조직에 알려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서였다.
(이번 임무가 끝나면 또 성형수술을 해야겠지.)
그녀는 자신의 얼굴을 또 다시 뜯어 고쳐야 한다는 사실이 싫었다. 게다가 나이도
40세였다. 여자 나이 40세면 결코 적은 나이가 아니었다. 은퇴할 나이가 된 것이다.
그녀는 창가에서 일어섰다. 조지타운 구의 거리에도 어둠이 서서히 내리고 있었다.
그녀는 지하실로 걸어 내려갔다. 이무영 소령이 어떻게 하고 있는지 살펴보아야 했다.
이무영 소령은 콘크리트 바닥에 모로 쓰러져 움직이지 않고 있었다. 그녀는 지하실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이무영 소령은 신음소리조차 내지 않고 있었다. 그녀는 이무영
소령의 옆구리를 발로 차 보았다.
그래도 이무영 소령은 움직이지 않고 있었다. 정신을 읽은 것일까? 그녀는 의아하여
이무영 소령의 호흡을 살피기 위해 무릎을 꿇고 얼굴을 이무영 소령의 얼굴 가까이
가져갔다.
그때 이무영 소령이 눈을 번쩍 뜨고 무릎으로 그녀의 사타구니를 힘껏 내질렀다. 그녀는
눈알이 튀어나올 것 같은 통증을 느끼며 콘크리트 바닥에 나뒹굴었다. 숨을 쉴 수가 없었다.
이무영 소령은 샤론 데닝스가 콘크리트 바닥에 나뒹굴자 재빨리 몸을 돌려 샤론
데닝스에게 다가갔다. 두 손이 묶여 있어 샤론 데닝스의 목을 조르는 것은 용이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이 순간을 위해 수많은 시간을 준비해 왔던 것이다.
열 십자로 묶여 있는 손목의 나일론 줄을 풀 수는 없었으나 며칠 째 손목이 끊어지는 것
같은 고통을 인내하며 느슨하게 만들어 어느 정도 자유롭게 움직일 수는 있었다.
그는 자신의 몸으로 고통스러워하는 샤론 데닝스의 몸을 덮어 누른 뒤 샤론 데닝스의
목을 움켜쥐었다.
샤론 데닝스가 비로소 눈을 뜨고 그를 쳐다보았다. 그는 두 손에 잔뜩 힘을 주었다.
죽이지 않으면 죽임을 당하는 것이다.
샤론 데닝스가 격렬하게 저항을 하기 시작했다. 두 손으로 그의 손을 떼어 내려고
안간힘을 쓰며 발악을 했다. 그는 필사적으로 샤론 데닝스의 목을 눌렀다. 샤론 데닝스의
목을 놓치면 그에게 돌아오는 것은 죽음뿐이었다.
샤론 데닝스의 얼굴이 고통으로 붉게 변해 갔다. 입에서는 캑캑대는 괴로운 신음소리가
새어나왔다. 샤론 데닝스의 푸른 눈은 금방이라도 튀어나올 것 같았다.
그는 샤론 데닝스의 목을 누른 손에 더욱 힘을 주었다.
19
경옥은 밤새 악몽을 꾸었다. 잠이 들면 꿈을 꾸었고 꿈을 꾸면 영락없이 악몽이었다.
무섭고 기묘한 것이 꿈으로 변해 계속해서 그녀를 괴롭혔다.
밖에는 비비람이 불고 있었다.
바람이 일 때마다 유리창이 흔들리고 추녀 끝의 함석 챙이 음산하게 펄럭거렸다.
어쩌면 그것조차 꿈의 계속인지 알 수 없었다. 남편이 특수 임무를 띠고 떠난 뒤부터
그녀는 줄곧 악몽에 시달려 왔다. 절기는 벌써 가을이었다. 아침저녁으로는 바람이 차고
밤이면 골목을 쓸고 다니는 바람소리가 가슴을 춥게 했다.
정치권은 극도의 혼란 속에 빠져 있었다. 국회에서 뉴욕 타임지 회견기사를 문제 삼아
여당이 신민당 김영삼 총재의 국회의원직을 제명했고, 이에 맞서 신민당은 무기한 등원
거부에 들어갔다. 그리고 일주일 뒤인 10월 13일 신민당 국회의원 66명 전원과 통일당
국회의원 3명이 국회의원직 사퇴서를 제출했다.
의정사상 처음 있는 일이었다.
김영삼 신민당 총재의 제명에 항의하여 신민당 국회의원 전원이 사퇴서를 내자
박대통령은 비로소 후회를 했다. 그는 10월 14일 최광수 의전 수석비서관을 불러 야당측과
접촉해 보라는 지시를 했다.
이에 최광수 의전 수석비서관은 서울대학교 동기동창이자 신민당 정책위 의장인 이택돈
의원을 만났다. 이택돈 의원은 현 상황을 수습하는 전제조건으로 박정희 대통령에게 민주화
선언을 촉구했다.
그러나 야당의 의견은 정부 여당에 의해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오히려 정부 여당은
신민당 국회의원들이 낸 사퇴서를 선별수리 하겠다는 발표를 하여 여론을 들끓게 만들었다.
그것은 화약고에 불을 지르는 것 같은 위험한 발상이었다. 그러나 정부 여당은 국민들의
저변에 흐르는 민주화에 대한 열망을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다.
마침내 10월 15일 김영삼 총재의 의원직 제명과 선별수리를 항의하여 부산에서 5천명의
학생과 시민들이 데모를 벌였다. 데모는 전에 없이 격렬했다. 데모대는 파출소를 습격하고
세무서와 방송국에 불을 질렀다.
이에 놀란 정부는 즉각 부산에 계엄령을 선포했다. 4.19이후 처음 있는 격렬한 데모였다.
탱크가 부산 시내에 진입을 하고 군병력이 공공건물을 에워싸고 있는 가운데서도 부산의
시민과 학생들은 다음 날도 계엄령 반대를 외치며 격렬한 데모를 벌였다. 그리고 이 데모는
마산까지 가세하여 마산에서도 2천여 명의 시민과 학생들이 데모에 가담했다.
소위 부마사태가 일어난 것이다. 부산 일원에 계엄령이 선포된 가운데 마산엔 급이야
위수령이 발동되었다. 전국의 각 대학엔 휴교령이 내려졌다.
부산에서는 시민과 학생 1,058명이 계엄사령부에 연행되고 마산에서는 505명이 체포되어
군사재판에 회부되었다.
그 자세한 내막을 알 수 없으나 일개 아녀자인 경옥에게도 김영삼 총재의 제명 파동으로
야기된 부마사태는 불안하기 짝이 없었다.
소문도 흉흉했다. 군사혁명이 일어날 것이라는 소문이 나도는가하면 김일성이 남침을 할
것이라는 소문까지 나돌았다.
게다가 부마사태가 일어나기 전날 밤 데모를 부추기는 다량의 유인물이 서울에서
부산으로 내려갔다거나, 서울에서마저 부산과 같은 격렬한 데모가 일어나면 광화문 일대가
피바다가 될 것이라는 출처불명의 흉흉한 소문까지 나돌았다.
경옥은 한국의 정치 상황이 남편이 대통령으로부터 부여받은 모종의 임무와 관련이 있을
것이라는 불길한 예감을 느끼고 있었다. 그것은 여자 특유의 육감이었다. 그런 까닭으로
그녀는 10월로 접어들면서 제대로 잠을 이루지 못하고 있었다.
오늘밤도 그랬다. 그녀는 계속 악몽에 시달렸다. 얼굴도 모르는 사내가 그녀의 옷을
벗기고 겁탈하려는 꿈도 꾸었고 검둥이 사내가 도끼를 들고 쫓아오는 꿈도 꾸었다.
그녀가 꿈에서 깨어나자 등줄기가 식은땀으로 축축했다. 밖에는 가을비가 음산하게
추적대고 있었다. 그녀는 어둠 속에서 천장을 우두커니 쳐다보았다.
(왜 이렇게 무서운 꿈만 꾸고 있는 것일까?)
그녀는 잠들기가 겁이 났다. 잠만 들면 영락없이 악몽을 꾸어야 하는 일에 몸서리가
처졌다. 집에 남편이 없기 때문인지 몰랐다. 그녀는 새삼스럽게 남편의 빈자리가 크게
느껴졌다.
(지금쯤 어디에 있을까?)
그녀는 남편이 어느 나라 어느 곳에서 임무를 수행하고 있는지도 알지 못했다. 이따금
국방부 정보국에 근무하는 정미경 중위로부터 안부 전화가 걸려오는 것이 고작이었다.
그녀는 다시 잠을 청했다.
밤을 새울 수는 없는 일이었다. 밖에서는 빗소리와 바람소리가 그치지 않고 들리고
있었다. 을씨년스러운 밤이었다.
그녀가 설핏 잠이 들었다가 깬 것은 아이가 칭얼대며 우는 소리때문이었다. 그녀는
반사적으로 아이를 끌어당겨 젖꼭지를 물리려다가 화들짝 놀랐다. 아이의 이마가
불덩이처럼 뜨거웠다.
"명지야!"
그녀는 놀라서 아이를 안고 허겁지겁 전등을 켰다. 아이가 자지러지게 울고 있었다.
그녀는 시계를 보았다. 새벽 1시 통금시간이었다.
(어떻게 하지?)
그녀는 발을 동동 굴렀다. 아이를 데리고 병원에 가야 했으나 통금시간이었다. 왕래하는
사람도 없을뿐더러 교통편도 없을 것이다.
그러나 몸이 불덩이처럼 뜨거운 아이를 안고 새벽이 올 때까지 기다릴 수는 없었다
그녀는 서둘러 옷을 입고 아이를 들쳐없었다. 교통편이 없으면 뛰어서라도 병원에 가야
한다.
그녀는 뒤통수를 엄습해 오는 불길한 예감을 떨쳐 버릴 수가 없었다. 자신도 모르게
입술이 바삭바삭 탔다.
그녀는 대문을 나서자 큰길을 향해 달음질을 쳤다. 우산을 들고 나오지 않아 차가운
빗발이 얼굴을 때렸으나 그녀는 아이가 비를 맞지 않도록 포대기를 덮어씌운 채 달렸다.
큰길도 차량과 인적이 완전히 끊겨 있었다. 그녀는 발을 구르다가 제기동 쪽을 향해
달렸다. 그곳에 산부인과 병원이 하나 있었다.
우선 산부인과 의사에게라도 응급조치를 받아야 할 것 같았다. 그러나 산부인과 병원은
문이 닫혀 있었다.
"여보세요. 여보세요!"
그녀는 세차게 병원 문을 두드렸다.
"여보세요! 아무도 안 계세요? 문 좀 열어 주세요!"
그녀는 울면서 소리쳤다. 자신도 모르게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그러나 산부인과 병원은
불이 꺼진 채 아무 응답이 없었다. 그녀는 병원 문을 발로 차면서 울부짖었다.
"문 좀 열어 주세요. 우리 아기가 죽어 가요!"
병원 문이 열린 것은 그녀가 병원 문을 사납게 두드리기 시작한지 10분쯤 되어서의
일이었다. 병원 복도에 불이 켜지며 40대의 여자가 부스스한 얼굴로 나왔다. 잠옷
차림이었다.
"무슨 일이에요?"
여자의 얼굴은 단잠을 방해받았기 때문인지 짜증스러운 기색이 역력했다.
"문 좀 열어 주세요. 우리 아기가 몹시 아파요!"
그녀는 구세주를 만난 것처럼 기뻤다. 그러나 여자의 대답은 야멸스러웠다.
"여기는 소아과가 아니라 산부인과예요. 소아과와 산부이과도 구별 못해요?"
"우리 아기가 몹시 아파서 그래요. 제발 우리 아기 진찰 좀 해주세요."
그녀는 울면서 사정했다.
"우리 선생님은 주무실 때는 환자를 보지 않아요. 다른 병원으로 가세요."
"여보세요."
"귀잖게 자꾸 그러지 말고 다른 병원으로 가세요. 왕십리에 대학병원도 있고 경찰병원도
있잖아요?"
여자가 화를 내며 복도의 불을 끄고 안으로 들어갔다. 그녀는 어처구니가 없어 멍청히 서
있다가 큰길로 달려나왔다. 여자에게 욕을 퍼붓고 있을 시간조차 그녀에게는 아까웠다.
그 때 신설동 쪽에서 헤드라이트 하나가 달려오고 있는 것이 보였다. 그녀는 재빨리
찻길로 뛰어나가 두 손을 높이 쳐들었다. 경찰세단이었다.
"무슨 일이오?"
경찰관이 차를 세우고 눈을 부릅떴다.
"미안해요 아저씨, 우리 아기가 아파서 그러는데 대학병원까지 좀 태워다 주세요!"
그녀는 흐느끼며 말했다.
"타요."
경찰관이 그녀의 위아래를 살피고 나서 고개를 끄덕거렸다.
"고맙습니다."
그녀는 등에 업은 아이를 내려 안고 차에 탔다. 또 다시 눈물이 왈칵 쏟아지고 있었다.
"아기가 많이 아픈 모양이지요?"
경찰관이 차를 출발시키며 근심스러운 표정으로 물었다.
"네."
"어디가 아픈데요?"
"자다가 아기가 울어서 깨어 보니까 몸이 불덩어리 같아요."
"그럼 열이 있는 셈이군요."
"네."
그녀는 아직도 칭얼대는 아이를 내려다보며 대답했다. 아이에게 젖을 물렸으나 아이는
계속 도리질만 하고 있었다.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아이들은 감기만 들어도 열이 나고 체하기만 해도 열이 나니까요.
열이 아이들의 건강 바로미터죠. 첫아기지요?"
"예."
"보통 첫아기들이 아플 때 엄마들이 걱정을 많이 합니다."
경찰관이 친절하게 그녀를 위로했다. 그녀는 비로소 안도감이 들었다. 경찰세단은 인적
없는 새벽 비바람 속으로 빠르게 달려가고 있었다.
그 시간 국방부 정보국의 정미경 중위는 지프를 손수 운전하여 용두동 이무영 소령의
집을 향해 달리고 있었다. 그녀의 뒤에는 국방부 경비병력에서 차출한 일개 소대 병력이 두
대의 트럭에 분승하여 따라오고 있었다.
그들은 M-16으로 완전무장하고 있었다.
(제발 아무 일도 없어야 할텐데...)
그녀는 초조했다. 미국에 있는 이무영 소령으로부터 가족을 보호해 달라는 전화가 걸려온
것은 불과 한 시간 전의 일이었다. 이무영 소령과 길게 통화를 할 수는 없었다. 이미 이무영
소령의 가족들을 살해한 암살자들이 서울에 도착했을 것이라는 이무영 소령의 말에 그녀는
우선 병력을 동원해야 했던 것이다.
수도권에서는 불과 1개 소대의 병력이라도 이동을 하려면 수도경비사령부의 승인이
있어야 했다. 그것은 대통령 경호와 직결되는 문제이기 때문에 병력이동이 엄격하게
통제되고 있었다.
그녀는 이무영 소령과 통화를 끝내자마자 서특보에게 다급하게 보고를 했고 서특보가
수도경비사 사령관에게 병력 이동 승인을 받아 국방부 경비병력을 차출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무영 소령의 가족사항까지 그들이 알고 있으니...)
그것은 한국에 그들과 접촉하고 있는 제5열이 있다는 것을 의미했다. 그녀는 그 사실에
분노를 느꼈다. 한국의 정치상황은 이제 파국을 향해 치달리고 있었다. 정보국에서 근무하는
그녀는 그것을 누구보다 먼저 감지하고 있었다.
한국의 정치는 어쩐지 잘 짜여진 시나리오에 의해 벼랑에서 굴러 떨어지고 있는
느낌이었다.
그녀는 초조했다. 그것은 폭풍전야의 정적처럼 불길한 예감으로 엄습하고 있었다.
신설동 로터리를 지나자 그녀는 작은 골목으로 핸들을 꺾었다. 비는 그때까지 계속
추적추적 내리고 있었다.
(어떻게 된 거지?)
이무영 소령의 한옥집은 대문이 활짝 열려있었다. 정미경 중위는 권총을 뽑아들고 대문
안으로 달려들어갔다. 집에는 아무도 없었다. 마루에 여기저기 구두 발자국이 찍혀 있는
것을 보면 암살자들이 다녀간 모양이었다. 그녀는 절망감을 느꼈다.
"벌써 놈들이 다녀간 것 아닙니까?"
병력을 골목과 집 주위에 배치한 국방부 경비대 김문원 중위가 구두 발자국이 어지럽게
찍혀 있는 마루를 살피며 말했다.
"그런 것 같아요."
"살해된 것 같지는 않고 납치된 것 같군요."
"어떻게 하지요?"
"우선 경찰에 신고를 하는 것이 어떨까요? 납치범을 찾는 것은 아무래도 경찰이 빠를
테니까요."
"그들이 정말 이무영 소령님의 가족을 납치했을까요?"
"예, 내 생각엔 납치된 것 같습니다. 그들이 이무영 소령님의 가족을 살해했다면 시체가
있어야 할 텐데 없지 않습니까?"
"그렇군요."
정미경 중위가 고개를 끄덕거렸다. 이무영 소령의 가족이 납치된 것 같은 흔적은
여기저기 남아 있었다. 안방엔 이무영 소령의 부인과 아기가 자고 있었던 이부자리가
그대로 남아 있었고 잠옷까지 벗겨져 있었다. 그리고 사내들의 구두 발자국이 방바닥에까지
어지럽게 찍혀 있었다.
"이무영 소령님은 어떻게 되었습니까?"
김문원 중위가 물었다.
"이스라엘 첩보부에게 잡혀 있다가 탈출해서 워싱턴 한국 대사관에 있대요. 지금
대사관에서 발행한 대사관 직원 신분증을 가지고 곧 서울로 돌아올 거예요."
"대사관 신분증이요?"
"외교관에게 면책특권이 있잖아요? 추방을 할 수는 있어도 체포할 수는 없죠."
"다행이군요."
"아무래도 경찰에 의뢰를 하는 게 좋겠어요. 경찰에 비상을 걸어 호텔이나 여관을
불심검문을 해야지요."
"그럼 제가 연락하겠습니다."
김문원 중위가 말했다.
그러나 그때 경옥이 아이를 안고 용두동 집으로 돌아왔다. 경옥은 새벽비가 내리는
가운데 순찰용의 경찰세단까지 타고 돌아와 정미경 중위와 김문원 중위를 어리둥절하게
만들었다.
그러나 어리둥절한 것은 그들뿐이 아니었다. 친절한 경찰관을 만나 대학병원에서 아이를
치료하고 돌아오던 경옥은 골목과 집 주위에 무장한 군인들이 서성대고 있자 아, 서울에도
마침내 계엄령이 선포되었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 어쩐 일인지 가슴속으로 찬바람이 부는
기분이었다.
그러나 정미경 중위와 김문원 중위를 만나자 경옥은 자신의 생각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들은 그녀를 보호하기 위해 온 사람이었다.
"그러니까 아이가 아파서 병원에 다녀오시는 길이란 말씀이죠?"
정미경 중위는 경옥에게서 자초지종을 듣고 어이없는 표정을 지었다. 다행히 아기는 위에
가벼운 염증 기운이 있을 뿐이었다.
"네."
"정말 기묘한 일이네요. 아기가 아파 암살자의 마수를 피했으니, 우린 그것도 모르고
납치되신 줄 알았어요."
"걱정을 끼쳐드려 미안해요."
경옥이 정미경 중위와 김문원 중위에게 머리를 숙여 사과했다. 마루와 방바닥엔
그때까지도 발자국이 그대로 남아 있었다.
"아기를 눕히세요."
정미경 중위가 방바닥을 걸레로 대충 훔치고 경옥에게 말했다. 아기는 쌔근쌔근 자고
있었다.
"네."
경옥은 이부자리를 다시 편 다음 아이를 눕혔다.
"아기는 정말 괜잖은가요?"
"네, 괜잖아요. 위에 가벼운 염증 증세가 있어서 열이 높았대요. 이유식을 하려고
초저녁에 이유밀을 먹였는데 그것이 맞지 않았나 봐요. 어린아이들에게 흔히 있는
일이래요."
"정말 다행스러운 일이군요."
"그런데 무슨 일이죠? 제가 납치된 줄로 생각했다는 건?"
경옥은 비로소 가슴속에 품고 있던 의문을 정미경 중위에게 털어놓았다. 진작부터 품고
있던 의문이었다. 마루와 방바닥에 어지럽게 찍혀 있는 구두 발자국, 빗속에서도 완전무장을
하고 있는 군인들의 모습에서 그녀는 어느 정도 사태를 잠작하기는 했었다.
"실은 새벽에 이무영 소령님으로부터 갑자기 전화가 왔어요. 암살자들이 사모님과 아기를
해치려고 서울로 갔으니까 급히 보호해달라는..."
"세상에!"
경옥이 반신반의하는 표정을 지으며 몸을 부르르 떨었다.
"암살자는 이미 왔다가 간 것 같습니다. 여기 구두 발자국이 그 증거입니다."
김문원 중위가 말했다.
"그럼 우리가 병원에 갔을 때?"
"그렇습니다. 하늘이 도와서 아기가 아픈 바람에 암살자들의 마수를 피하게 된 것입니다."
"믿어지지 않아요."
"아무튼 날이 밝은 때까지 우리가 지켜 드리겠습니다. 사모님께서 아기를 데리고 병원에
가는 바람에 허탕을 친 암살자들이 언제 다시 돌아올지 모르니까요. 날이 밝으면 안전한
곳으로 옮겨 드리겠습니다."
김문원 중위가 말했다.
"명지 아빠는 어디 있죠?"
경옥은 그때서야 이무영 소령에 대한 안부를 물었다.
"이무영 소령님은 워싱턴의 한국 대사관에 계십니다. 오늘밤이나 내일 새벽이면 서울에
도착할 겁니다."
정미경 중위가 대답했다.
"샤론 데닝스는 어떻게 되었나?"
수화기를 통해 들려오는 대통령의 목소리는 전에 없이 냉정했다. 대통령 선거의 명암이
확실하게 드러나자 대통령은 계속해서 히스테릭한 반응을 보이고 있었다.
"살아났습니다. 조금만 늦게 발견했어요. 죽을 뻔했는데..."
"다행이군."
"예, 정말 다행입니다. 장미공작을 위해서 샤론 데닝스는 꼭 필요한 존재입니다."
"서울에 간 암살자들은 어떻게 되었나?"
"실패했습니다. 그들이 처음 이무영 소령의 집에 갔을 땐 집이 비어 있었고 두 번째 갔을
땐 군인들이 지키고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M캡슐이 아직도 이스라엘에 넘어가지 못했나?"
"죄송합니다."
리차드 파커 CIA 부국장은 건성으로 대꾸했다. 대통령의 임기는 이제 3개월밖에 남지
않은 것이다.
"이스라엘 수상으로부터 방금 또 연락을 받았네. M캡슐을 빨리 입수하게 해 달라는
거야."
"최선을 다하고 있습니다."
"한국은 현재 어떤가?"
"부마사태 이후 겉보기엔 평온합니다. 마치 폭풍전야의 고요 같다고나 할까요. 현재 그런
상태입니다."
"언제까지면 결판이 나겠나?"
"10월 안으로 결판이 날 것 같습니다."
"포스트 박이 불쌍하군. 부인도 저격을 당했는데."
대통령이 포스트 박을 걱정하는 투로 말했다. 그는 미지상군 철수문제와 한국의
인권문제로 박정희 대통령에게 돌이킬 수 없는 반감을 가지고 있었다. 재선에 실패한
이유의 하나가 한국의 박정희 대통령에게 있다고 믿고 있었다.
그는 이제 은퇴할 준비를 해야 했다.
"포스트 박에 제거되면 한국은 야당이 집권하나?"
"야당이 집권하면 4.19때와 같은 큰 혼란이 옵니다."
"군부가 비호한다는 말인가?"
"예."
"그럼 군부가 다시 집권을 하겠군."
"예, 각하."
"포스트 박은 어떻게 제거하나?"
"브루터스가 제거할 것입니다. 포스트 박은 이승만 대통령이 헌병사령부와 특무대에게
권력을 나누어 준 뒤 서로 경쟁하게 만들었듯이 중앙정보부와 대통령 경호실에 막강한
권력을 주었습니다. 국내의 모든 정보가 이들을 통해 대통령에게 들어간다는 말이
있습니다."
"경호실도 정치를 하나?"
"독재국가에선 흔히 있는 일입니다."
"좋아. 언제쯤 포스트 박이 제거되겠나?"
"금명간 제거됩니다."
"미국이 개입하고 있다는 사실이 알려지진 않겠지?"
"대통령을 쏜 사람도 자신이 CIA의 조종을 받았다는 사실을 모를 것입니다. 그는 상당히
다혈질적인 인물입니다."
"알겠네. 그동안 수고가 많았네."
"감사합니다, 각하. 각하에게 도움이 되지 못하여 진심으로 죄송하게 생각합니다."
"아니야. 부국장은 최선을 다했네. 11월에 도널드 레이건이 대통령 당선자로 확정되면
그에게도 M캡슐 공작과 포스트 박 제거 작전에 대해서 보고를 해 주게."
"그렇게 하겠습니다, 각하."
"언제 조지아의 농장으로 한번 놀러오게."
"감사합니다, 각하."
그는 대통령이 수화기를 내려놓은 소리를 들은 뒤에야 자신도 수화기를 내려놓고 낮게
한숨을 내쉬었다. 포스트 박 제거작전은 이미 카운트다운을 시작하고 있었다. 제3세계의
지도자를 미국의 국익에 따라 제거하는 것은 부도덕한 일이 분명했다.
그러나 주사위는 이미 던져진 것이다. 게다가 하원의 비밀 군사위원회도 동의하고
예산까지 배정해 준 것이다. 이제 그 사실이 매스컴에 알려져 미국 여론이 들끓어도 의회의
청문회에 소환당할 염려가 없었다.
(이무영 소령을 살려서 보내라고 해야겠어.)
이무영 소령은 워싱턴 한국 대사관에 은신해 있었다. 외교관 신분으로 미국을 탈출하려는
계획이 분명했다. 그러나 이무영 소령을 살해하려면 얼마든지 가능했다. 외교관 여권을
가졌다고 CIA가 저격하지 못할 이유가 없었다.
경우에 따라서는 KAL이 워싱턴 인터내셔널 항공을 이륙해 태평양 상공을 날고 있을 때
폭파시켜도 되고, 이무영 소령이 김포공항에 도착한 뒤 저격을 해도 되는 것이다.
그러나 그는 이무영 소령을 살려보낼 작정이었다. 이무영 소령은 자신도 모르게 포스트
박 제거작전에 들러리를 서게 될 것이다.
20
이무영 소령이 만신창이가 된 몸으로 김포공항에 도착한 것은 10월 22일 아침 10시였다.
공항 청사엔 정미경 중위와 그의 아내 경옥이 어린 딸 명지를 안고 마중을 나와 있었다.
조촐한 마중이었다.
"여보!"
경옥은 국제선 로비에서 이무영 소령이 다리를 절뚝거리며 걸어나오자 체면도 불구하고
이무영 소령에게 달려가 안기며 울음을 터뜨렸다. 자신도 모르게 눈물이 걷잡을 수 없이
흘러내렸다.
이무영 소령은 수척했다. 수염은 덥수룩하고 얼굴은 빈혈환자처럼 창백해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처럼 위태로워 보였다. 경옥은 그런 이무영 소령의 얼굴을 대하자 목이 메였다.
"고생 많이 했소."
이무영 소령도 경옥의 어깨를 가만히 안으며 눈시울이 시큰했다.
"아이는 괜잖소?"
그는 경옥에게 안겨 있는 아이의 얼굴을 들여다보며 착잡한 표정으로 물었다. 어린
생명에게 살인자의 마수가 뻗칠 뻔했다는 생각을 하자 가슴이 타는 것 같았다.
"네."
경옥이 대답했다. 아이는 방실거리고 웃고 있었다.
"청와대로 가야겠소."
그는 아이의 얼굴에서 시선을 떼고 정미경 중위에게 말했다.
정미경 중위의 얼굴을 해하자 착잡했다. 그러나 시간이 없었다. 암살자가 그의 가족을
살해하는데 실패했으므로 이제는 대통령을 저격할 준비를 하고 있을 것이 분명했다.
잘못하면 74년 8월 15일 육영수 여사가 저격당했던 것처럼 불행한 사태가 일어날 수도 있는
것이다.
"청와대요?"
정미경 중위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귀국 보고를 해야 합니다."
"목욕이라도 하셔야지요."
그의 아내가 그를 만류했다. 정미경 중위도 동의하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녀의
눈이 우수에 젖어 있었다.
"암살자들이 대통령을 음해할 준비를 하고 있소."
"암살자요?"
정미경 중위가 놀라서 물었다.
"서둘러야 합니다. 우리가 암살자를 놓치면 국가적 위기에 봉착합니다. 차 준비하시오."
"네."
정미경 중위가 재빨리 대답을 하고 청사 밖으로 나갔다.
이무영 소령은 경옥의 얼굴을 지그시 응시했다. 경옥은 조용히 입술만 깨물고 있었다.
"미안하오. 당신은 집에 돌아가 기다려야하겠소."
경옥은 이무영 소령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다가 서운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거렸다.
대통령이 음해되고 국가적 위기에 봉착할지도 모른다는 남편의 말에 경옥은 더 이상 할
말이 없었다. 그녀도 위태로운 정치 현실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이무영 소령이 청와대에 귀국 보고를 하고 정보국에 돌아온 것은 오후 2시경이었다. 그는
즉각 서울 시내 각 경찰서의 수사과 형사들을 국방부 정보국에 소집하여 M캡슐 공작
내용을 브리핑하고, 대통령을 저격하려는 암살자들을 체포하는 작전을 수립하기 시작했다.
작전의 이름은 독수리작전으로 명명되었다.
수사과 형사들은 자신들도 모르는 사이에 M캡슐 공작이 미국에서 이루어진 일에 경탄을
했으나 CIA가 대통령을 암살하려 한다는 얘기는 반신반의하였다.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
그러나 이무영 소령은 청와대로부터 암살자 체포에 대한 특명을 받고 있었다. 대통령은
미국이 대통령을 저격하기 위해 암살자를 파견했다는 이무영 소령의 보고를 받자 몸을
부르르 떨면서 화를 냈다. 즉각 경호실장이 불려오고 정보부장이 청와대로 들어왔다.
대통령은 정보부장이 들어오자 부마사태와 암살자가 서울에 이미 잡입한 사실을 예로
들어 정보부가 무엇을 하는 것이냐고 호통을 쳤다. 경호실장도 옆에서 정보부가 무능하기
짝이 없다고 비난했다.
정보부장은 고개만 푹 숙인 채 대통령의 호통과 경호실장의 비난을 그대로 듣고만
있었다. 우직한 사람이었다.[
"개새끼 같으니!"
정보부장은 청와대를 나서자 얼굴을 붉히며 욕설을 뱉었다. 경호실장에게 하는 욕이었다.
두 사람 사이가 견원지간이라는 소문은 들었으나 이무영 소령은 처음 목격하는 일이었다.
"그래, 대위로 예편한 놈이 명색이 3성 장군 출신인 나에게 그렇게 해도 되는거야? 제
놈이 대통령 총애를 받았으면 받았지 각하 앞에서 나를 그렇게 몰아 세워두 돼? 그리고
부마사태만 해도 그렇지, 내가 뭐랬어? 일 터지기 전에 긴급조치 9호 해제하고 김영삼 총재
인정해 줘야 한다고 했잖아? 내가 바른 정보를 보고할 때는 뭉개버리구 왜 이제 와서 내
탓을 해? 각하도 그런 놈을 데리고 정치를 하니 나라가 이 꼴이 되는 거야."
정보부장은 이무영 소령에게 들으라구 하는 소린지 마구 욕설을 뱉고는 정보부장
전용차를 타고 가 버렸다. 항간에 정보부장 교체설이 나돌아서 그런지 정보부장은 눈에
핏발이 서 있었다.
"각 경찰서별로 관내의 숙박업소를 철저히 수색하고 불심검문을 강화하십시오. 특히 재일
한국인들에 대한 조사를 철저히 해야 합니다."
"암살자들에 대한 정보는 아무 것도 없습니까?"
"없습니다."
"그럼 어떻게 암살자들을 찾지요?"
"암살자들은 재일교포로 위장하고 있습니다. 재일교포는 한 사람도 빠짐없이 체크해야
합니다."
"그것뿐인가요?"
"미국 대사관과 한국에 있는 CIA요원들을 철저하게 감시해야 합니다. 암살자들과 CIA는
접선을 할 것이 분명합니다."
이무영 소령의 설명이 끝나자 정보국 요원들과 정보과 형사들은 반신반의하면서도
신속하게 임무를 수행하러 나갔다. 이무영 소령은 그들이 나가자 공항경찰과 항만 경찰에
연락해 출입국자를 체크하여 정보국 컴퓨터로 연결해 줄 것을 부탁했다. 출입국자의
동태까지 감시할 계획이었다.
그러나 암살자에 대한 수색은 계속 허탕을 쳤다. 경찰이 서울시내의 호텔과 여관에 대해
일제 수색을 했으나 암살자들은 그림자도 찾을 수 없었다. CIA와 미국 대사관을 감시하고
있는 수사관들에게만 그들이 비상사태를 당한 것처럼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다는 보고만
계속 들어오고 있었다.
(어떻게 된 일이지?)
22일이 지나고 23일이 되어도 아무 소식이 없자 이무영 소령은 짙은 의문을 느꼈다.
수사관들은 재일교포들을 닥치는 대로 연행하여 조사하고 있었다. 그러나 암살자들에 대한
단서는 머리카락 한 올 만한 단서도 찾을 수 없었다.
23일 저녁 특이한 보고가 정보국 상황실에 들어왔다. 미국 대사와 정보부장이 L호텔에서
회동하여 저녁식사를 하고 있다는 내용이었다.
(그들이 무엇 때문에 만나고 있지?)
이무영 소령은 의아했다. 게다가 저녁식사가 끝날 무렵 도널드 램버트 CIA 한국
책임자가 동석했다는 보고가 들어오자 이무영 소령은 좀처럼 의혹을 떨쳐 버릴 수가
없었다.
그러나 그날도 아무 일이 없었다. 이무영 소령은 시간이 흐를수록 초조했으나 암살자를
찾는 작업은 막대한 인원을 투입하고 있는데도 미로를 헤매고 있었다.
24일엔 미국 대사가 정보부장을 만난 것이 보고되었다. CIA와 미국이 긴박하게 움직이고
있다는 증거였다.
그러나 그들이 암살자와 접촉한 흔적은 전혀 발견되지 않고 있었다.
(이상한 일이네...)
25일 날이 밝자 이무영 소령은 암살자들이 잠입했을 10월 20일을 전후한 김포공항
입국자들의 명단을 공항경찰로부터 넘겨받아 조사에 착수했다. 20일 전후에 김포공항에
입국한 재일교포들은 생각보다 많지 않았다. 특히 워싱턴 내셔널 공항을 통해 김포공항으로
들어온 사람은 불과 7명밖에 되지 않았다. 그 중 5명은 10월 21일에서 23일 사이에
일본으로 갔고 2명은 아직 한국에 남아 있었다.
이무영 소령은 요원들을 시켜 2명의 재일교포를 긴급 수배했다. 그들은 40대의 재일교포
부부로 이름이 각각 문영철과 전숙자였다. 미국과 캐나다를 관광 여행하고 일본으로
돌아가는 길에 한국을 방문한 것으로 되어 있었다. 그러나 요원들이 그들의 행적을 추적한
결과 그들은 24일 밤에 이미 부산에서 카페리 편으로 시모노세키로 돌아간 것으로
확인되었다.
(이들도 암살자가 아니군.)
이무영 소령은 착잡했다.
(마치 존재하지 않는 사람을 추적하는 것 같으니...)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암살자들이 서울에 잠입했다는 사실은 그의 집 마루와
방바닥에 찍혀 있는 구두 발자국으로 증명이 되는 것이다. 그런데 암살자들이 아무 일도
하지 않고 떠난 것이다.
25일도 가고 26일이 되었다. 날씨는 아침부터 비가 내릴 것처럼 찌뿌드드했다. 이무영
소령은 청와대 경호실로부터 대통령 일정표를 넘겨받아 경호실의 대통령 경호 업무를
도왔다. 대통령은 오전에 충남 아산의 삽교천에 제방 준공식에 참석하는 것으로 일정이
잡혀있었다.
이무영 소령은 경기도경과 충남도경에 긴급 지시를 내려 대통령이 지나는 길에
재일교포의 접근을 차단하도록 했다. 그리고 그 자신도 대통령 경호팀에 합류하여 대통령을
수행했다.
대통령은 신변의 위협을 느껴 경호실 헬리콥터로 충남 아산의 삽교천 준공식에 참석하고,
거기서 식사를 한 뒤 온산의 농업개발 연구소를 방문하여 핵무기 개발에 몰두하고 있는
과학자들을 격려한 뒤 도고온천으로 갔다.
도고온천에서 머리를 식힐 요량이었다.
그러나 대통령의 헬기가 도고온천에 착륙할 때 도고 온천에서 사육하는 사슴 한 마리가
이리 뛰고 저리 뛰다가 대통령의 헬기에 부딪쳐 죽는 불상사가 일어나고 말았다. 대통령은
기분이 상했는지 목욕도 하지 않고 곧장 상경길에 올랐다.
이무영 소령은 대통령이 청와대로 들어간 것을 확인한 뒤에 국방부 정보국으로 돌아왔다.
대통령이 청와대에 있는 이상 암살자들이 저격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는 정보국 사무실에서 느긋하게 담배를 피우며 컴퓨터를 작동시켰다. 김포공항의
입국자 명단이 입력된 컴퓨터였다.
그가 대통령 경호팀에 합류해 있는 동안 정미경 중위가 컴퓨터 디스크에 오늘 입국자를
모두 입력시켰던 것이다.
(아니 이 여자는?)
이무영 소령은 컴퓨터 모니터를 응시하다가 눈을 크게 떴다. 컴퓨터 모니터에 샤론
데닝스의 얼굴이 찍혀 나왔던 것이다.
(믿을 수가 없어. 어떻게 이 여자가 살아났지?)
그는 자기 눈을 의심했다. 샤론 데닝스는 자신의 손으로 목을 졸라 살해했던 것이다.
워싱턴에서 샤론 데닝스의 목을 완전히 끊어버리지 못했던 모양이었다.
국적 아메리카, 성명 헬렌 B. 스미스
직업 UN 식량구조위원회 위원
나이 41세.
머리를 금발로 바꾸었으나 그녀는 틀림없는 이스라엘 비밀첩보부 A국 요원인 샤론
데닝스, 샤샤 구리온 이었다. 그 여자와 살을 섞은 일이 있기 때문에 이무영 소령은 그
여자의 얼굴을 너무나 뚜렷이 기억할 수 있었다.
이무영 소령은 컴퓨터 모니터에 찍혀 있는 샤론 데닝스의 사진을 뚫어질 듯 노려보며
몸을 떨었다.
"여기는 상황실, 독수리 작전의 모든 요원들에게 지시한다. 지금 당장 서울 시내의 모든
호텔을 뒤져 헬렌 B. 스미스를 체포하라! 반복한다. 헬렌 B. 스미스를 즉각 체포하라!"
그는 독수리 작전에 투입되어 있는 전 요원들에게 긴급지시를 했다.
독수리 작전에 투입된 요원들이 샤론 데닝스를 체포한 것은 불과 1시간도 걸리지
않아서였다. 샤론 데닝스는 한남동의 미네르바호텔 특실에서 샤워를 하다가 요원들에게
체포된 것이다.
이무영 소령은 요원들에게 대기하라고 지시하고 곧바로 호텔로 달려갔다.
"정말 놀라운 여자로군."
이무영 소령은 샤론 데닝스의 얼굴을 직접 대하자 만감이 교차했다. 샤론 데닝스가
서울에 나타나리라고는 상상도 못했던 일이었다.
"난 생명줄이 유난히 굵은 모양이에요."
샤론 데닝스가 웃으며 그에게 손을 내밀었다. 그는 피식 웃고 그녀의 손을 잡았다.
체포되었으면서도 샤론 데닝스는 여유를 부리고 있었다.
"난 그때 당신이 죽은 줄 알았는데 용케 살아 있었군."
"하마터면 죽을 뻔했죠."
"어떻게 살아났지?"
"2층에 우리 요원이 한 사람 있었어요. 앙리 미셀이라고... 2층 창으로 당신이 달아나는
것을 발견하고 곧바로 지하실로 뛰어내려와 나에게 인공호흡을 시켰어요."
"명이 긴 여자로군."
"당신은 사람을 죽일 줄 몰라요. 첩보원의 손 끝에 인정이 남아 있으면 거꾸로 자신이
죽음을 당하게 된다는 사실을 알아야 해요."
"그럼 나를 살해하러 서울에 왔나?"
"천만에요. 당신을 죽여서 이스라엘에 무슨 이익이 있겠어요? 난 M캡슐을 가지러
왔어요."
이무영 소령은 쓴웃음이 나왔다. M캡슐에 대한 이스라엘의 집녑은 무섭기 짝이 없었다.
"암살자들은 어디 있지?"
"이미 철수했어요."
"철수했다고?"
이무영 소령은 어리둥절하여 샤론 데닝스를 노려보았다. 암살자들이 철수했다는 샤론
데닝스의 말이 믿어지지 않았다. 샤론 데닝스는 시종일관 여유 있게 웃고 있었다.
"암살자들은 위장에 지나지 않아요."
"위장이라니? 그건 또 무슨 소리지?"
"당신의 이목을 다른 곳으로 쏠리게 하려는 위장전술이라는 얘기죠. 한국은 아직 진짜
첩보전이 무엇인지 모르고 있어요."
"그래?"
이무영 소령은 어처구니가 없어 샤론 데닝스를 똑바로 쳐다보았다. 샤론 데닝스는
오만방자했다. 이무영 소령은 샤론 데닝스의 빰을 한 대 갈기고 싶은 충동을 참았다.
그때 정미경 중위로부터 전화가 걸려왔다. 정미경 중위는 정보국 상황실을 지키고 있었다.
"큰일났어요. 소령님."
정미경 중위의 목소리는 다급했다. 이무영 소령은 얼굴을 찌푸렸다. 문득 불길한 예감이
뒤통수를 엄습해 왔다.
"무슨 일이야?"
"각하께서 저격 당하신 것 같아요!"
"뭐라고?"
"각하께서 저격 당하신 것 같아요!"
정미경 중위의 목소리에는 울음까지 섞여 있었다. 당황하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이무영
소령은 가슴이 싸 하게 저려오는 것을 느꼈다. 기어이 대통령이 저격되었구나, 하는 생각에
다리가 후들거렸다.
"돌아가셨나?"
"모르겠어요. 비서실장이 수도통합병원으로 옮겼대요."
"어디서 저격 당하셨지?"
"궁정도 안가요."
"궁정동 안가면 정보부가 경호를 했을 거 아니야? 어떻게 저격자가 침입했어?"
"내부 소행인 모양이에요."
"내부? 중앙정보부 말인가?"
"네, 정보부장과 참모총장이 육군 벙커에 도착했어요. 각 부대에 비상이 걸리고 있어요.
상황실이 벌집을 쑤신 것 같아요."
"알았어. 내가 곧 갈게."
"기다릴게요."
이무영 소령은 수화기를 내려놓고 샤론 데닝스를 쏘아보았다.
"우리 대통령이 저격을 당하셨다는군."
"미안해요."
샤론 데닝스가 고개를 푹 숙였다. 이미 알고 있었다는 듯한 태도였다. 이무영 소령은
주먹을 움켜쥐었다.
"개 같은 년!"
다음 순간 샤론 데닝스는 턱이 부서지는 것 같은 충격을 느끼며 호텔 바닥에 나뒹굴었다.
이무영 소령의 주먹이 정통으로 얼굴을 때린 것이다.
코피가 주르르 쏟아졌다.
이무영 소령은 샤론 데닝스가 쓰러지자 워커발로 마구 차고 밟아댔다. 좀처럼 분노가
풀리지 않았다. 이무영 소령은 샤론 데닝스가 비명을 지르며 울부짖다가 눈을 하얗게
까뒤집고 정신을 잃자 비로소 발길질을 멈추었다.
"첩보사령부로 연행해."
그는 요원들에게 지시하고 미네르바호텔을 나왔다. 대통령이 저격을 당한 사실을 아는지
모르는지 거리는 평온해 보였다.
"수도통합병원."
그는 지프차에 올라타자 담배를 꺼내 물고 운전병에게 지시했다. 대통령이 저격된 것이
사실이라면 나라는 어찌 될 것인가. 최규하 국무총리가 권한대행에 취임해도 아무 문제가
없을 것인가.
그는 얼핏 그런 생각을 했다. 대통령의 저격 이후의 문제를 생각하지 않은 것이
잘못이었다. 그러나 설령 대통령이 저격당하리라는 예상을 했더라도 영관 장교에 불과한
그로서는 속수무책이었을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는 차창 밖에 흐르는 어둠처럼 암담한
절망감을 느꼈다.
그가 수도통합병원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병원이 봉쇄되어 있었다. 그가 대통령의 저격을
확인하기 위해 출입을 요청해도 병사들은 첩보사령관의 명령서 없이는 안된다고 잘라
말했다.
그는 허탈감과 무력감에 빠져 국방부 정보국으로 돌아왔으나 육군 벙커에 장관들과 3군
수뇌부들이 속속 모여들고 있다는 보고만 있을 뿐 대통령의 저격에 대해서는 아무 것도
확인할 수 없었다.
(어떻게 이럴 수가 있는 거지?)
이무영 소령은 깊은 절망감을 느끼며 서빙고의 첩보사령부로 달려갔다.
"이무영 소령입니까?"
첩보사령부의 위병소는 전에 없이 삼엄한 경계가 펼쳐져 있었다. 마치 서울에도 계엄령이
선포되어 있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샤론 데닝스라는 여자를 연행해 왔지?"
그는 완전 무장한 부하들을 거느리고 지프차로 다가오는 중위에게 물었다.
"이무영 소령님, 첩보사령관의 명령으로 체포해야겠습니다."
"뭐야?"
"야! 무장해제하고 체포해!"
중위가 지프차를 둘러싼 병사들에게 버럭 소리를 질렀다.
"중위! 무슨 짓을 하고 있는 거야! 나는 정보국의..."
"체포해!"
"중위! 왜 이래?"
"반항하면 사살해도 좋다는 명령을 받았소."
"뭐라고?"
이무영 소령은 어이가 없었다. 무엇인가 잘못된 것이 분명하다는 생각이 들었으나,
반항하면 사살해도 좋다는 명령을 받았다는 중위의 말에 맥이 탁 풀렸다.
그때 병사들이 재빨리 그의 팔을 뒤로 꺾어 수갑을 채우고 지프에서 끌어내렸다.
"영창에 처 넣어!"
중위가 그의 등에 대고 버럭 소리를 질렀다.
그때 이무영 소령은 위병소 안에 첩보사령관 이택석 장군과 샤론 데닝스, 그리고 CIA의
한국 책임자 도널드 램버트가 나란히 서 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었다.
(이럴 수가!)
이무영 소령은 눈앞이 캄캄해져 왔다. 첩보사령부를 믿은 것이 잘못이었다. 이택석 장군이
정권을 담보로 M캡슐을 이스라엘에 넘겨 주고 미국의 지지를 받기로 밀약을 한 것이
분명했다.
"빨리 걸어!"
병사들이 개머리판으로 그의 등을 후려쳤다. 그는 피가 나도록 입술을 깨물며 영창을
향해 걸음을 떼어 놓았다.
21
이무영 소령은 며칠째 계속해서 같은 꿈만 되풀이하여 꾸었다. 아니 그것이 꿈인지
환상인지도 분명하지가 않았다.
이제는 취조가 어지간히 끝난 모양인지 복도를 울리는 심문관들의 구두 발자국 소리가
그를 공포에 떨게 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온몸을 엄습하는 한기와 몽둥이에 얻어맞은
상처가 시도 때도 없이 그를 고통에 시달리게 했다.
그것들은 아직도 아물지 않고 있었다. 그는 그럴 때마다 콘크리트 바닥을 엉금엉금 기고
시멘트벽을 주먹으로 때리며 짐승처럼 울부짖었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 그가 첩보사령부 지하 감옥에 갇힌 것이 언제인지도 알 수
없었다. 그것이 까마득히 오래 전의 일 같기도 했고 바로 엊그제 일어난 일 같기도 했다.
그의 의식이 혼란스러웠다. 그의 머리 속에 있는 것은 무엇이든지 뒤죽박죽이었다.
첩보사령관 위병소 앞에서 중위에게 체포되었던 사실조차 꿈 같기도 하고 환상 같기도
했다.
그러나 의식이 명료하게 맑아질 때도 있었다. 그럴 때면 그는 자신이 첩보사령관 지하
감옥에서 겪은 심문을 생각하고 몸서리를 쳤다.
처음엔 자술서였다. 심문관들은 첩보사령관 지하 감옥에 그가 투옥된 지 사흘만에
나타나서 종이와 펜을 주고 자술서를 쓰라고 요구했다.
그는 그 요구를 거절했다. 자술서는 일반적으로 사상범들에게 쓰게 하고 있었다. 최근엔
학생운동이나 반체제 운동을 하는 인사들에게도 그것을 쓰게 하는 것이 추세였다. 그러나
그는 자술서를 써야 할 이유가 없었다.
"이런 개새끼!"
심문관들이 그를 워커발로 차고 각목으로 후려치기 시작했다. 심무관들 중엔 상사도
있었다. 그는 하사관에게 워커발로 차이고 각목으로 얻어맞으며 피가 나도록 입술을
깨물었다.
이튿날도 같은 일이 되풀이되었다. 심문관들은 이유도 없이 그에게 자술서를 요구했고
그가 거절하자 워커발로 짓밟고 각목으로 그를 마구 때렸다. 심문관들은 그가 정신을 잃은
뒤에야 그를 감옥에 쳐넣곤 하였다.
그런 일은 매일 같이 되풀이되었다. 그는 한밤중에도 끌려나가 심무관들에게 매질을
당했고 새벽에도 끌려나가 매질을 당하고 돌아왔다. 그러나 자술서만은 한사코 거부했다.
"지독한 놈이군."
"그러니 미국에 가서 M캡슐을 가져왔지."
"M캡슐은 이스라엘에서 가져갔다며?"
"샤론 데닝스라는 여자가 가져갔대."
"아깝군. 그게 있으면 우리 나라도 핵무기를 제조할 수 있을 텐데."
어느 날 그는 무의식 상태에서 심문관들이 수군거리는 소리를 들었다.
"M캡슐을 가지고 있으면 미국에서 그냥 안 둬. 미국은 박대통령까지 시해하게
만들었잖아?"
"정말 정보부장이 미국의 사주를 받아서 대통령을 시해한 건가? 신문엔 경호실장하고
다투다가 '각하, 정치 좀 잘하십시오. 이런 놈을 데리고 정치를 하니까 나라꼴이 이 지경이
됐지 않습니까?'하고 각하를 쐈다고 났잖아?"
"정보부장이 육군본부 벙커에서 뭐라고 그랬는지 알아? '내 뒤엔 미국이 있다...'하고
큰소리를 쳤대."
"혁명정부를 만들려고 했나?"
"그런데 아무도 호응을 하지 않았어. 결국 우리 사령관에게 체포되었지만."
"이해할 수 없는 일이 많아. 제주도를 제외한 전국에 계엄령이 선포되고 계엄사령관에
참모총장이 임명되었는데 실질적인 권한은 우리 사령관이 갖고 있는 것 같으니."
"우리 사령관이 합동수사본부장에 임명되었잖아."
이무영 소령이 10월 26일 밤에 일어난 사건들에 대해 좀더 자세히 알게 된 것은 누군가
그의 감옥에 넣어 준 신문에 의해서였다. 신문기사에 의하면 박정희 대통령은 10월 26일 밤
7시 45분 중앙정보부 궁정동 안가에서 술을 마시다가 동석한 정보부장에 의해 권총으로
시해되었고, 앙숙관계였던 경호실장도 그 자리에서 살해되었다고 되어 있었다.
우발적인 범행이라는 논조였다. 물론 그것은 합동수사본부장인 첩보사령관의 발표를
그대로 보고한 것이었다.
(그랬군, 모든 것이...)
이무영 소령은 그때서야 사태가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알 수 있었다. 비감했다.
CIA는 한국의 정치 상황을 혼란하게 만든 뒤 단순하고 우직한 정보부장을 부추겨
대통령을 시해하게 한 것이다. 그러나 대통령의 죽음 이후 실질적인 권한은 첩보사령관이
장악하게 만들어 M캡슐을 이스라엘이 가져가게 한 것이다.
이스라엘과 CIA가 의도한 그대로였다. 그것은 12월 12일 첩보사령관이 일단의 병력을
이끌고 육군참모총장이자 계엄사령관인 정승화 장군을 관저로 침입하여 체포한 사실로
여실히 증명되었다.
허망한 일이었다.
해가 바뀌었다.
이무영 소령은 첩보사령부 지하 감옥에서 새해를 맞았다. 심문관들은 이제 나타나지
않았다. 그가 자술서 쓰기를 끝내 거부하자 심문관들도 포기한 모양이었다.
심문관 대신 군의관이 오기 시작했다. 군의관은 그가 곧 석방된다고 하면서 그의 팔뚝에
주사기를 꽂고는 했다.
이무영 소령은 기분이 괜찮았다. 상처의 통증도 서서히 사라지고 있었다. 옆구리와
허벅지의 상처가 몇 군데 곪아 가고 있었으나 이상할 정도로 통증이 없었다. 그리고 그
무렵부터 이무영 소령은 군의관들이 왔다 갈 때마다 기분이 몽롱해지는 것을 느꼈다.
어느 때는 이유도 없이 알몸의 여자가 생각나서 그녀와 관계를 하는 환상에 빠져들기도
했고, 그 환상에서 벗어나면 공포가 엄습해 오곤 했다. 한창 기분이 좋을 때는 수많은
여자들이 옷을 벗기며 희롱했고 공포가 엄습할 때는 누군가 그를 살해하여 전기톱으로
사지를 자르고, 도끼로 자신의 이마를 내려찍는 흉측하고 무서운 환상을 보곤 했다.
그러한 가운데도 군의관들은 하루도 빠지지 않고 어둠침침한 지하 감옥으로 내려와서
그의 팔뚝에 주사기를 꽂고는 했다.
어느 날 그는 자신의 팔뚝에서 수없이 많은 바늘 자국을 발견했다. 그것은 마약을 투여한
바늘자국이었다. 그는 앙상하게 마른 자신의 팔뚝에 무수히 찍혀 있는 바늘 자국을
들여다보며 하염없이 울었다.
그는 1980년 4월 첩보사령부 지하 감옥에서 용인에 있는 한 정신요양원으로 이송되었다.
그러나 그는 그때 이미 완전히 폐인이 되어 있어서 정신요양원측은 그를 폐쇄병동에
수용하고 보호관찰하기로 했다.
그는 실어증까지 걸려 있어 말을 못할 뿐 아니라 자신이 누구인지도 기억하지 못했다.
그가 할 수 있는 유일한 것이라고는 사람들이 관찰하러 올 때마다 백치처럼 히죽거리며
웃는 것이 고작이었다.
다시 2년 후인 1982년 4월, 그는 정신요양원에서 거리로 내보내졌다.
"회복할 가능성은 없나요?"
"없어."
남루한 의복을 헐렁거리며 멀어져 가는 그의 뒷모습을 응시하면서 두 사내가 낮게
수군거리고 있었다.
"조금 안되었다는 생각이 드는군요. 그냥 두면 행려병자가 되어 죽을 텐데..."
"연민을 느끼나?"
"얼마나 살까?"
"저 상태라면 3개월을 넘기지 못할 거야."
"가족들을 찾아가지 않을까요?"
"가족들은 호주로 이민을 갔어."
"그럼 정말 돌볼 사람이 없겠군요?"
"없어, 아무도."
"계속 미행을 해야 하나요?"
"안돼. 다 죽어 가는 사람을 미행하다가 기자들 눈에 띄면 그 동안의 일이 모두 수포로
돌아가. 죽든지 살든지 이젠 그냥 둬야 해. 어차피 아무 것도 기억하지 못하는 백치가
되었으니까."
"그럼 우리 임무도 끝났군요?"
"끝났어."
두 사내는 약속이나 한 듯이 홀가분한 표정으로 담배를 꺼내 물었다.
봄볕이 나른한 신작로에 아지랑이가 아롱아롱 피어오르고 있었다. 좋은 계절이었다.
1986년 7월 4일. 미국 독립 210주년 기념 축제가 열리고 있던 신시내티 에덴 공원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리차드 파커라는 백인 사내가 피살되는 사건이 발생했다.
목격자들은 리차드 파커라는 백인 사내가 검은 안경을 쓴 동양인 사내에 의해
피살되었으며, 동양인 사내는 리챠드 파커를 쏜 뒤 회색 머큐리 세이블을 타고 유유히
사라졌다고 증언했다.
신시내티 경찰의 조사 결과 살해된 리챠드 파커는 매그넘 45구경으로 두개골에 한 발,
복부에 다섯 발을 관통 당해 현장에서 즉사 한 것으로 밝혀졌다. 그러나 리차드 파커를 쏜
동양인 사내의 신원은 끝내 밝히지 못했고, 리차드 파커가 전직 CIA부국장이라는 사실만
밝혀졌을 뿐이었다.
그로부터 다시 일주일 후. 이번엔 이스라엘의 수도 텔아비브의 한 아파트에서 전라의
여자 시체가 발견되어 이스라엘 경찰을 긴장시켰다. 피살자의 신원은 샤샤 구리온. 사인은
왼쪽 가슴에 깊숙히 박혀 있는 과도에 의한 다량의 출혈사였다.
과도는 심장에서 단 한 푼도 빗나가지 않아 샤샤 구리온은 고통을 느낄 시간도 없이
사망한 것으로 추정되었다.
그러나 범인에 대해서는 멕시코인이 아파트에서 나오는 것을 보았다는 목격자만 겨우
확보했을 뿐, 역시 단서 하나 없었다. 피살자 샤샤 구리온이 이스라엘 비밀첩보부 A급
요원이었다는 사실만 밝혀졌을 뿐이다.
1986년 9월 6일. 시장바구니를 들고 아이를 등에 업은 한 여인이 아파트 앞에서 만난
집배원으로부터 편지 한 통을 건네 받고 흐뭇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국방부 정보국
요원으로 활동하다가 1979년 12.12사태 직후 전역한 정미경이었다. 편지는 호주에 있는
이무영 소령으로부터 온 편지였다.
정중위 친전
정중위, 그동안 소식 전하지 못해 미안합니다.
정중위가 12.12사태 직후 전역하여 한 남자와 결혼, 단란한 가정을 이루었다는 소식을
이곳 시드니에서 인편을 통해 이제야 들었습니다. 왜 내가 정신을 차렸을 때 말해 주지
않았습니까? 늦게나마 결혼을 축하드립니다.
나는 지난 7월에 미국 신시내티와 이스라엘 텔아비브를 다녀왔습니다.
내가 왜 그것엘 다녀 왔는지, 내가 그곳에서 무엇을 했는지는 새삼스럽게 설명하지
않겠습니다. 내가 정중위에게 분명하게 말할 수 있는 것은 대한민국 정보장교의 자존심을
확인하고 돌아왔다는 사실뿐입니다.
정중위.
그동안 정중위가 우리 가족을 호주로 이주하게 도와주고, 가정을 가진 몸으로 폐인이나
다름없는 나를 병원에 입원시켜 살려준 일에 대해서는 두고두고 잊지 못할 것입니다.
혹시 해외여행을 떠날 기회가 있으면 부디 시드니에 한 번 들러주시기 바랍니다. 아내와
딸도 당신을 진심으로 환영할 것입니다.
남편과 함께 행복하시기를 빕니다.
시드니에서 이무영
추신 : 이 편지는 보고 나서 태워 버리기 바랍니다.
정미경은 이무영 소령의 편지를 몇 번이나 되풀이해서 읽은 뒤 그것을 아파트의 베란다로
가지고 나가 라이터로 불을 붙여 태웠다.
이무영 소령이 미국 신시내티를 다녀왔다는 것은 CIA를 은퇴하여 향리에서 은둔중인
리차드 파커 부국장을 저격하기 위한 것이었고, 이스라엘 수도 텔아비브를 다녀왔다는 것은
샤론 데닝스를 살해하기 위한 것이 분명했다. 그리고 그는 그 목적을 달성한 것이다.
(이젠 정말 끝났어...)
정미경은 초가을의 햇살이 고즈넉한 아파트의 광장을 내려다보며 낮게 중얼거렸다.
그녀의 눈에서 자신도 모르게 눈물 한 방울이 굴러 떨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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