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 간 을 찾 아 서 제 1 권
이수광
차 례
작가소개
제 1 장 검은 대륙의 사랑
제 2 장 로봇 시대
제 3 장 최후의 여자
제 4 장 전설로 사라지다
제 5 장 초광속 우주선
제 6 장 복제생명 클론
제 7 장 제국의 사랑
제 8 장 사이보그의 악녀
제 9 장 여전사
제 10 장 지구 창생
제 11 장 암호명 블랙버드
제 12 장 적과의 동침
제 13 장 문명의 역사
제 14 장 전사들의 노래
제 15 장 여자의 대륙
제 16 장 로즈의 사랑
제 17 장 마더 살로메
제 18 장 벚꽃동산
제 19 장 사랑의 이름으로
제 20 장 X파일
제 1 장 검은 대륙의 사랑
여자는 아련한 그리움에 잠겨서 창가에 서 있었다. 밖에는
바람이 점점 세차게 불고 있었다. 밤이 깊은 탓인지 인적은
완전히 끊어져 있었고 지축을 울리며 매일같이 거리를 지나
가던 육중한 탱크의 행렬이나 군인트럭도 보이지 않았다.
태풍전야답게 음산한 밤이었다.
아프리카 전략사령부에서는 자정이 지나면서부터 아프리카
일대에 폭우를 동반한 태풍이 몰아치리라고 예보하고 있었
다.여자는 낮게 한숨을 내쉬었다. 자정이 되었는데도 그가
오지 않고 있었다. 무슨 일이 있는 것일까.
아니야, 무슨 일이 있는 것은 아닐거야.
여자는 세차게 도리질을 했다. 여자가 모든 것을 바쳐 사랑
한 그 사내가 오지 않고 있는 것이다. 여자는 초조하게 기
다렸다.
그러나 아직도 여섯 시간의 여유는 있었다. 늦어도 내일 아
침 6시까지만 사령부로 돌아가면 되는 것이다.
(날씨때문에 못오고 있는지도 몰라 )
여자는 스스로 자신을 위로했다.
호텔앞은 바람소리로 스산했다. 하늘은 시커먼 먹구름이 휘
덮고 야자수 가로수들이 미친듯이 나부끼기 시작하고 있었
다. 호텔앞의 외등은 파리한 형광빛을 광장에 뿌리고 있었
다.
창문이 바람에 덜컹대고 흔들렸다.
태풍이 점점 가까이 접근해오고 있는 모양이었다.
(이제는 자야 하는데 )
여자는 하얀 시트가 깔려 있는 침대를 내려다보다가 모자를
벗어 침대에 던졌다. 벌써 욥을 기다린지 7시간이 지난 것
이다.
엘리사는 가슴이 저리고 쓸쓸했다. 그녀는 군인이었다. 안드
로이드(로봇인간, 또는 기계인간. 여기서 등장하는 안드로이
드는 완전한 인간이다)군 총사령부 사령관 부속실 초급장교
엘리사소위(少尉).
나이는 스물셋이고 사관학교 출신이었다. 총명하고 이지적
인 여자였다. 사관학교는 수석으로 졸업했다.
그러나 그녀는 지금 슬픔에 잠겨 블라우스의 단추를 푸르고
있었다. 오늘 약혼자 욥중위를 만나지 않으면 두번 다시 만
날 기회가 없을 터였다. 그녀의 약혼자 욥은 내일이면 안드
로이드 군인들이 무더기로 죽어가고 있는 전쟁터로 떠나야
했다.
(올 거야, 욥은 반드시....)
엘리사는 블라우스의 단추를 푸르다가 말고 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그녀가 걸치고 있는 군복, 소매 짧은 블라우스속
에는 눈처럼 새하얀 브래지어가 두 개의 커다란 젖무덤을
감싸고 있었다. 그녀의 약혼자 욥이 풀어주던 브래지어였다.
엘리사는 군복 블라우스를 벗고 브래지어의 호크를 풀렀다.
그러자 우유빛으로 뽀얗게 흰 유방이 모습을 드러냈다.
얼마나 아름다운 가슴인가.
사랑하는 남자의 손길을 기다리기 위해 부풀대로 부풀어오
른 한 쌍의 젖무덤. 수줍은 처녀처럼 아미를 살짝 숙인 봉
분위에는 젤리처럼 말랑거리는 젖꼭지가 분홍빛으로 솟아
있었다.
날씨는 후덥지근했다. 욕실에 들어가서 한바탕 샤워라도 해
야 할것 같았다.
(욥이야!)
그때 엘리사의 눈이 크게 떠졌다. 가슴이 쿵쿵거리고 뛰고
얼굴이 화끈거렸다.
호텔 정문앞에 낯익은 지프가 들어오고 있었다. 엘리사는
재빨리 브래지어의 호크를 다시 채우고 블라우스의 단추를
잠그기 시작했다. 지프에서 내린 욥이 성큼성큼 호텔로 들
어오는 것이 창으로 내려다보였다.
아
엘리사는 가슴이 마구 뛰었다.
문을 노크하는 소리가 들린 것은 엘리사가 블라우스의 단추
를 완전히 채우고 모자까지 단정하게 썼을 때였다. 욥은 엘
리사가 문을 열어주기도 전에 자신이 문을 열고 룸으로 들
어왔다.
"엘리사!"
"욥!"
엘리사의 목소리가 감격으로 떨렸다. 욥은 얼굴이 햇빛에 타
서 구리빛이었다.
아아, 눈물이 흐르는가.
엘리사는 양쪽볼로 뜨거운 물기가 흘러내리는 것을 느꼈다.
입언저리를 혀로 핥자 짭짤한 소금기가 입안으로 흘러 들어
왔다.
"울지마!"
욥이 엘리사를 와락 껴안았다.
"사랑해요!"
엘리사는 욥에게 안기며 울음을 터뜨렸다. 이상한 일이었다.
왜 사랑하는 남자를 만났는데 이렇게 주체할 수없이 눈물이
흘러내리는 것인가. 전쟁중이었다. 사랑하는 여자를 남겨두
고 전쟁터로 떠나는 남자는 오로지 육체의 갈증만 느끼고
있었다.
엘리사는 어깨를 들먹이며 흐느껴 울었다.
"엘리사. 당신을 갖고 싶어."
욥이 눈물로 함초롬히 젖어있는 엘리사의 눈을 들여다보며
말했다. 엘리사는 작렬하는 태양처럼 이글거리는 욥의 뜨거
운 눈을 응시했다.
"당신에게 드리고 싶어요 "
엘리사는 거부하지 않았다. 엘리사가 이 호텔로 온 것은 오
로지 사랑하는 욥에게 자신의 몸을 바치고 싶어서였다.
엘리사는 생각했다. 내 몸은 이미 당신을 위해 준비가 되어
있어, 당신의 몸을 받아들이기 위해 불씨를 지피고 있어, 욥,
내 몸을 불꽃처럼 화려하게 태워줘....
욥이 입술을 포개왔다.
엘리사는 전신이 오그라드는 듯한 기분을 느끼며 입술을 열
었다. 몸이 떨리기 시작했다. 짜릿한 전율이 하체에서 일어
나 전신으로 번진다. 그의 한 손이 그녀의 군복 블라우스 위
로 가슴을 애무하고 또 한 손은 풍만한 히프를 둥글게 쓰다
듬는다.
그녀의 몸은 욥에게 길들어져 있다. 처녀의 성(城)을 허물어
뜨리고 빛나는 각(角)을 마모시켜 곡선(曲線)을 창조했다. 여
자란 그런 것이 아닐까. 한 남자를 만나서 사랑이라는 이름
으로 길들여지는 것. 그것이 여자의 몸이다.
여자는 남자를 만나서 비로소 육체를 표현한다. 때로는 악기
처럼 아름다운 소리를 내고, 때로는 금빛햇살이 쏟아지는 태
고의 해안처럼 소리없이 탐험자를 기다린다.
창문에 후드득 빗방울이 묻어나기 시작했다. 룸은 불을 꺼놓
은 채였다. 어둠이 혓바닥을 날름거리며 룸의 구석구석을 핥
고 있었다.
욥이 그녀의 군복 블라우스를 벗기기 시작했다. 엘리사는 고
개가 뒤로 젖혀지고 허리가 활처럼 휘었다.
"욥!"
엘리사는 목이 말라왔다. 그녀는 욥의 머리카락을 거칠게 움
켜쥐었다. 이 사내, 이 사내를 위해서는 죽어도 좋다는 생각
이 갑자기 엘리사의 뇌리를 스쳤다.
"사랑해요."
엘리사의 입에서 단내가 훅 풍겼다.
욥이 엘리사를 침대위로 쓰러트린 뒤에 허겁지겁 침대로 올
라왔다. 엘리사는 눈을 질끈 감았다.
서기 4, 018년. 6월11일.
장장 90년동안이나 계속되던 안드로이드와의 전쟁, 또는 판
도라(Pandora: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판도라의 상자. 절대로
열지 말라는 경고를 무시하고 호기심 때문에 판도라가 상자
를 열자 늙음, 죽음, 기아, 질병, 슬픔 따위의 재앙이 나왔다
고 함)의 전쟁이 종말을 향해 치달리고 있었다. 자유시민들
이 로봇과의 전쟁을 '판도라의 전쟁'으로 명명한 것은 판도
라가 호기심의 상자이기 때문이었다. 인간들이 호기심으로
로봇을 만들어 재앙을 불러들였다는 의미가 함축되어 있는
이름이었다.
어떤 희생을 치르더라도 아프리카를 정복하라
자유시민연합의 총사령관 아돌프 보르만 대원수(大元帥)는
마침내 자유시민연합군에게 총공격 명령을 내렸다. 안드로이
드와의 전쟁이 시작된지 90년째 되던 해였다.
안드로이드군의 총사령부가 있는 아프리카는 이로 인해 긴
장속에서 숨막힐 것같은 전운이 감돌았다. 안드로이드의 모
든 젊은 남녀에게 총동원령이 내려졌고 안드로이드 남녀들
은 기꺼이 전선으로 전선으로 달려갔다.
욥도 그 까닭으로 6시간 후면 전쟁터로 떠나는 것이다.
시간이 결코 많은 것은 아니었다. 오늘밤 그와 헤어지면 언
제 다시 만날지도 알 수없고 어쩌면 영영 만나지 못할지도
모른다.
90년동안이나 계속되어온 전쟁이었다. 자유시민연합군은 아
프리카의 안드로이드군을 박멸시키기 위해 최후의 일전을
준비하고 있었다. 욥중위가 전쟁터로 가버리면 살아서 돌아
오리라는 보장이 없는 것이다.
욥도 그 점을 생각하고 있는지 정신없이 엘리사에게 열중하
고 있었다.
아
엘리사는 눈을 감은 채 마른침을 삼켰다.
욥의 손이 엘리사의 몸을 스칠 때마다 화인(火印)이 찍히듯
그녀는 몸을 떨었다.
엘리사는 눈앞에서 빛의 입자들이 춤을 추는듯한 환영을 본
다. 무수한 빛의 입자들은 여름날 해질녘에 마지막 안간힘으
로 잉잉대는 하루살이들의 날개짓처럼 현란하다.
"엘리사!"
욥이 그녀의 허리를 조이고 있는 스커트의 호크를 풀렀다.
엘리사는 욥이 그녀의 스커트를 벗기기 쉽도록 허리를 들어
주었다.
여자의 몸을 가리는 옷자락이란 얼마나 보잘것없는 것인가.
욥이 엘리사의 짧은 스커트를 허리에서 잡아뽑자 눈이 부시
게 아름다운 여체가 드러났다. 들어갈 곳은 정확히 들어가고
나올 곳은 풍만하게 나온 균형이 잡힌 몸이었다.
욥은 경이로움을 느꼈다.
아름답다. 아니 아름답다 못해 눈이 부시기까지 하다.
여체가 정녕 이렇게 부드럽고 아름다운 것인가.
여자의 비고(秘庫)를 감추고 있는 삼각형의 속옷은 오히려
이질적으로 부자연스럽다. 욥은 그 부자연스러움을 제거한
다. 이번에도 엘리사는 허리를 들어 욥을 도와준다.
엘리사는 이제 흰모래가 깔린 만(灣)이다. 때로는 거칠게 포
효하고 때로는 하얗게 포말을 일으키는 파도가 핥아주는 모
래밭이다.
밖에는 빗발이 더욱 거칠어지고 있었다. 전략사령부가 예측
한 일기예보가 정확하게 들어맞을 모양이었다. 그렇다면 자
유시민연합군은 공격을 늦출수도 있을 것이다. 그렇게만 되
면 얼마나 좋을까. 그렇게만 되면 사랑하는 욥은 전쟁터로
떠나지 않아도 될것이다.
아아 이 죽음의 전쟁, 안드로이드를 박멸시키려는 무서운 음
모, 전쟁의 광기
욥은 약혼녀의 도움을 받아 거추장스러운 옷자락을 벗겨내
고 그녀의 위에 엎드린다
"욥, 이걸 벗어요."
엘리사는 누운 채 가쁜 숨을 몰아쉬며 말한다. 그를 갖고 싶
다. 그를 그녀의 몸속으로 뜨겁게 받아들이고 싶다. 엘리사
는 그 열망으로 미칠 것만 같았다.
"알았어."
욥이 그녀의 몸에서 일어나 군복의 단추를 푸르기 시작했다.
"내가 도와줄게."
엘리사가 몸을 일으켰다. 엘리사는 욥과 함께 있는 시간이
영원하기를 머릿속으로 기원하면서 욥의 군복 상의의 단추
를 하나하나 푸른다. 그녀는 서두른다. 그녀의 내부 깊은 곳
에서 분출되고 있는 열망이 그녀를 주체할 수 없는 격정으
로 이끈다.
런닝셔츠는 욥이 벗어서 침대밖으로 던졌다.
엘리사는 허겁지겁 욥의 가슴으로 입술을 가져간다. 그의 넓
고 단단한 가슴, 그 가슴에 열매처럼 달린 자그마한 유두를
입속에 넣는다.
그는 이제 그녀의 것이다.
욥은 침대위에 산맥처럼 눕는다. 엘리사는 미지의 산을 오르
듯이 욥을 탐험하기 시작한다. 그의 전신을, 그의 알몸을 입
술로 찍어대며 중얼거린다.
욥, 당신은 내 거야. 당신은 내 소유야
엘리사는 격정으로 몸부림을 쳤다.
엘리사는 자신도 억제할 수 없는 미칠 듯한 욕망으로 온 몸
이 불덩어리처럼 달아오르고 있었다.
자유시민연합군은 이미 아프리카 전선의 안드로이드군에 치
명타를 가하기 위해 자유시민연합의 제1함대에서 제15함대
의 항공모함 15척, 잠수함 50척, 뉴스텔라폭격기 4천대까지
발진시켰다. 자유시민연합쪽으로는 주력군의 대부분을 아프
리카로 향하게 하는 것은 일대 모험이었으나 마지막 승부수
를 띄운 것이었다.
그리고 일본의 군신(軍神)이라는 별명이 붙은 가토오 마스오
(加 增雄) 장군의 전차군단(戰車軍團)을 수송선에 태우고
대기시켰다. 항공모함과 잠수함, 그리고 뉴스텔라폭격기로
아프리카를 초토화시킨 뒤 전차군단을 상륙시켜 안드로이드
군을 대대적으로 섬멸할 속셈이 분명했다.
그리고 이들을 자유시민연합함대로 명명한 뒤 총사령관에
필립 레이빈 제독을 임명했다. 그는 해군대장(大將)이었다.
오늘이 될지 내일이 될지 알 수는 없으나 아프리카는 이미
전쟁상태에 돌입한 것이나 마찬가지인 것이다. 전략사령부는
자유시민연합군의 움직임을 감지하고 워치콘1과 데프콘1을
발동했다. 워치콘은 자유시민연합군의 정보감시체재를 말하
는 것이고 데프콘은 방어준비태세를 뜻하는 것이었다.
워치콘과 데프콘 모두 4단계로 나뉘어져 있는데 1단계가 되
면 전쟁상태를 말하는 것이었다.
모든 병력을 아프리카로 보내라
자유시민연합군의 아돌프 보르만 대원수의 명령은 오로지
한 가지 뿐이었다. 이로 인해 아프리카 자유시민연합의 모든
병력이 아프리카로 투입되었다. 아프리카로 향하는 모든 바
다와 하늘은 자유시민연합군의 병력으로 까맣게 메워졌고
아프리카는 무서운 전운에 휩싸였다.
인간들은 공생의 원칙을 저버렸다, 지구상에서 가장 고등
동물이 인간이지만 가장 추악한 것도 인간이다
안드로이드군도 자유시민연합의 대대적인 공격 움직임에 수
수방관만 하고 있지는 않았다. 그들은 자유시민연합을 성토
하면서 전쟁에 방관적인 안드로이드들에게도 총동원령을 내
렸다.
욥은 불안했다. 자유시민연합군이 아직 총공격을 개시한 것
은 아니었다. 그러나 오늘밤이라도 공격을 시작한다면 끝장
인 것이다.
아프리카는 안드로이드들의 낙원이었다. 아프리카의 기후가
인간들에게는 적합하지는 않았으나 안드로이드들에게는 인
간들로부터 간섭을 받지 않는 아프리카가 가장 살기좋은 지
역이었다.
그들은 인간들과의 전쟁이 일어나기도 전에 아프리카와 아
랍쪽을 안드로이드들에게 할양해줄 것을 요구했다. 그렇게만
해준다면 인간들을 괴롭히는 일이 절대 없을 것이라고 공언
했다.
그러나 이 최후의 담판은 인간들의 거부로 실패로 돌아갔다.
인간들은 안드로이드와의 공생(共生)을 거부했다. 그리하여
인류문명사에서 전례가 없는 기계인간인 안드로이드와 인간
의 전쟁이 시작된 것이었다.
인류의 미래를 위태롭게 하는 전쟁은 지난 세기에도 수없이
되풀이 되었었다. 특히 19세기에서 21세기에 과학문명이 비
약적으로 발전하면서 인류는 본격적으로 대량살상시대에 들
어갔다. 그러나 지구에서 국가라는 개념이 사라지고 인류의
자유의지를 억압하는 지구의 모든 국가체재가 붕괴되어 지
구공동체시대가 열린지 817년만인 3,928년, 지구는 전쟁없이
평화롭게 살았으나 거의 9백년만에 지금까지 한 번 도 겪지
못한 새로운 전쟁에 휘말린 것이다.
지구공동체시대는 국가가 아니듯이 군대가 없었다. 행정은
시(市) 중심으로 이루어져 있었고 종교로 인한 분쟁이나 영
토분쟁도 사라진지 오래였다.
그러나 인류의 역사가 전쟁의 역사이듯이 안드로이드와의
전쟁이 시작되자 인간들은 재빨리 자유시민연합을 구성했다.
옛날의 국가체재는 아니었으나 전세계의 지구인들이 자유시
민연합에 편입되므로써 전세계는 하나의 강력한 지도체재를
갖춘 것이다.
안드로이드군의 총사령관은 밴티트 킹장군이었다. 밴티트 킹
장군은 아프리카 지역방위사령관에 줄리아나 영장군을 임명
했다.
자유시민연합의 총사령관 아돌프 보르만 대원수가 지장(智
將)이라면 밴티트 킹장군은 덕장(德將)이었다.
아프리카의 총공격을 지휘하는 필립 레이빈 제독은 소위 시
절부터 전쟁터에서 늙은 전략에 뛰어난 장군이었다. 이에 맞
서는 줄리아나 영장군은 안드로이드군에서 가장 용맹한 여
성장군이었다.
이들은 6월11일 아프리카의 인도양 연안에 있는 케냐에서
대접전을 벌일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날은 안드로이드군의 촉망받는 초급장교들인 욥과 엘리사
가 킬리만자로산에서 동쪽으로 20km 떨어진 빅토리아호수
인근에 있는 소도시 린디의 한 호텔에서 격렬한 사랑을 나
누고 있던 날이었다.
엘리사는 쉴새없이 신음을 토해냈다.
밖에는 어느 사이에 굵은 빗줄기와 함께 세찬 바람이 몰아
치고 있었다. 쏴아 하는 빗소리가 창문의 틈새로 비집고 들
어와 그녀의 귓전을 감미로운 음악소리처럼 간지럽혔다.
욥은 집요하게 그녀의 몸을 애무만 했다. 그의 손은 뜨거우
면서도 부드럽고 황홀하면서도 달콤했다. 엘리사는 신음을
지르며 허리를 비틀었다. 이제는 더 이상 버틸수가 없을 것
같았다.
그녀의 몸이 그를 갈구하고 있었다. 허나 그것은 그녀의 속
마음뿐이었다. 그녀는 욥의 손과 입술에 몇번이나 자지러지
는 신음을 토했다.
"욥!"
마침내 욥과 하나가 되자 숨이 컥 하고 막혀왔다. 엘리사는
입을 딱 벌렸다. 온 몸이 조각조각 해체되는 것 같았다.
사랑하는 남자와의 화합이 이토록 황홀한 것일까.
사랑해.
욥, 사랑해
인간에게는 광기가 있다. 전쟁에 대한 광기, 피에 대한 광기,
그리고 섹스에 대한 광기
인간이 만들어낸 안드로이드들도 똑같은 광기를 가지고 있
었다.
한때 인간들은 섹스중독증에 걸린 일도 있었다. 성에 대한
개방이 지나쳐 인간들은 오직 섹스에만 탐닉을 했었다.
그것은 21세기의 일었다.
인류는 성병이 만연했고 기형아들이 태어났다. 성 바이러스
는 에블라 바이러스를 능가하여 수천만명의 생명을 빼앗아
간뒤에야 격퇴되었다. 그리하여 22세기가 되자 인간들은 섹
스를 자제했다.
그러나 역사는 되풀이된다. 불과 1백년도 지나지 않아 인간
들의 섹스에 대한 탐닉이 다시 시작되었다. 그러자 이름도
열거할 수없을 정도의 수많은 성병이 다시 만연했다.
인간들은 짐승처럼 살았다.
그러나 엘리사는 섹스에 탐닉하는 인간들의 심리를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섹스의 행위는 사랑의 언어이며 사랑의
확인작업이다.
욥이 갑자기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아, 안돼!"
엘리사는 재빨리 몸을 일으키려고 했다. 그녀는 아직 준비가
되어있지 않았다. 그런데 욥은 벌써 끝낼 준비를 하고 있는
것이다.
"엘리사!"
욥이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엘리사는 눈을 질끈 감고 뒤로 쓰러졌다. 이렇게 되면 어쩔
수 없다. 엘리사는 욥을 받아 안기 위해 누운 채 속으로 중
얼거렸다. 욥, 당신은 나빠
"미안해."
욥이 몸을 세차게 떨면서 곤두박질을 쳤다.
엘리사는 욥의 등을 힘껏 껴안았다.
"사랑해요."
엘리사는 욥의 등을 토닥거렸다. 아직도 시간이 많이 남아
있었다. 엘리사는 오늘밤 기어이 잠들지 않으리라고 생각했
다.
비바람은 세상의 종말이라도 온 듯이 아우성을 치고 있었다.
이따금 천둥번개까지 몰아치는 것을 보면 악천후였다.
과연 자유시민연합군이 이런 악천후속에서 공격을 해올까.
엘리사는 걱정이 되었다.
방안은 불을 켜지 않아 캄캄했다. 엘리사는 어둠속에서 자신
의 몸이 점점 하얗게 떠오르는 것같은 기분을 느꼈다.
"내일 해안으로 떠나요?"
"응."
욥이 그녀의 가슴에 얼굴을 묻은 채 대답했다.
"우리는 어떻게 될까요?"
"다시 만날 수있을 거야."
"인간들은 왜 우리를 박멸하려고 하죠?"
"우리를 기계로만 알고 있기 때문이야."
엘리사는 입을 다물었다. 욥의 기계라는 말에 가슴이 타는
것 같았다. 우리도 생명이 있고 우리도 감정이 있다. 우리도
인간처럼 사랑하고 섹스를 한다, 그런데 왜 인간들은 우리를
박멸하려는 것인가....
욥이 그녀의 몸에서 떨어져 누웠다.
엘리사는 빗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안드로이드 총사령부는
자유시민연합과의 전쟁에 그다지 열의가 없었다.
(왜 총사령부는 선제공격을 하지않은 것일까?)
그것은 아무리 생각해도 엘리사가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90년동안 안드로이드군은 자유시민연합쪽을 맹렬하게 공격
하여 인간들에게 막대한 타격을 주었었다. 그러나 결정적일
때 언제나 안드로이드군은 한발 물러선 것이었다.
자유시민연합쪽과의 전쟁을 90년동안이나 끌어온 것도 내막
이 있을 것만 같았다.
그때 팟 하는 소리와 함께 어둠속에서 파란 불꽃이 일어났
다. 욥이 담배를 피우기 위해 성냥을 켠 모양이었다. 유황냄
새가 방안에 확 번졌다.
"재떨이 여기 있어요."
엘리사는 재떨이를 찾아 욥옆에 놓았다.
"고마워."
욥이 젖은 목소리로 말했다. 욥이 담배를 빨아들였다가 내뱉
을 때마다 연초타는 냄새가 코를 찔러왔다.
그 냄새가 엘리사를 자극했다.
엘리사는 다시 한 번 격렬한 사랑을 나누고 싶어졌다. 아직
도 그녀의 몸에는 분출되지 못한 찌꺼기가 남아 있었다.
그를 허무하게 전쟁터로 떠나보내고 싶지 않았다.
엘리사는 마지막이라고 생각했다. 그와의 만남이 오늘이 마
지막이라고 생각했다. 전쟁의 신(神)은 우리의 사랑을 용납
하지 않을 것이다.
엘리사는 그런 생각을 하면서 욥의 가슴을 입술로 애무한다.
미친 사랑이라도 좋다. 온 몸이 조각조각 해체될 정도로 격
렬한 사랑을 나누고 싶다
.
엘리사는 젊음을 불태운다. 관능의 심지에 불꽃을 지피기 시
작한다. 돛도 없이 항구에 정박해 있는 욥에게 돛폭을 달아
주기 위해 무진 애를 쓴다. 내일이면 포연이 자욱한 전쟁터
로 떠나는 남자. 그 남자를 위해 오롯이 혀와 입술로 사랑을
바친다.
엘리사의 입술은 욥의 가슴에서 아래로 내려간다. 안드로이
드 인간인 욥은 배꼽이 없다. 안드로이드 여자들도 임신을
하지만 태아에게 영양을 공급할 탯줄이 필요하지 않기 때문
이다.
"음."
욥의 입에서 신음이 흘러나온다. 엘리사는 욥의 신음을 기껍
게 듣는다. 이제 떠나야 한다. 폭풍우가 몰아치는 저 외로운
벌판으로 몸을 용광로처럼 달구어서 떠나야 한다.
"아, 아 "
엘리사는 눈이 부셨다.
항구에 정박한 욥의 남성이 다시 기운차게 출항을 하기 위
해 돛폭을 일으켜 세우고 있었다.
엘리사는 전신으로 짜릿한 전류가 흐르는 것을 느꼈다.
돛폭이 바람을 안고 팽팽하게 부풀고 있었다.
엘리사는 그것을 자신의 몸속에 가두었다. 그녀의 욕망은 너
무나 광포했다. 그러나 두 번째 화합이 끝났을 때 엘리사는
더할 수 없는 만족감을 느꼈다.
죽어도 좋아.
아, 이제는 죽어도 좋아...
엘리사는 욥의 가슴위에 쓰러져 그렇게 생각했다. 그리고 욥
에게 깊이 감사했다.
엘리사는 욥의 팔베개를 하고 잠이 들었다. 창밖에는 밤새도
록 폭풍우가 몰아치고 있었으나 그녀는 너무나 안온했다.
엘리사는 새벽에 눈을 떴다.
욥의 자리는 썰렁하게 비어 있었다. 그가 전쟁터로 떠난 것
이다.
엘리사, 사랑해
침대위에는 욥이 남긴 메모 한 장만 달랑 남아 있었다.
(욥, 나도 사랑해 )
엘리사는 메모를 읽은 뒤에 입속으로 가만히 중얼거렸다. 자
신도 모르게 눈물이 주르르 흘러내렸다. 사랑하는 남자가 기
어이 전쟁터로 떠나간 것이다. 그러나 언제까지나 울고 있을
수만 없었다.
시계를 보자 벌써 새벽 5시였다. 엘리사는 서둘러 옷을 입고
밖으로 나왔다. 밖에는 더욱 사나운 폭풍우가 몰아치고 있었
다. 엘리사는 호텔 주차장에서 지프를 꺼내 올라타고 안드로
이드군 총사령부로 달리기 시작했다. 폭풍우가 사납게 몰아
치고 있어서 자유시민연합의 총공세는 아무래도 늦추어질
것 같았다.
그러나 그시간 자유시민연합군이 인도양을 가득 메우고 케
냐해안으로 접근하고 있다는 것을 엘리사는 까맣게 모르고
있었다.
6월은 아프리카의 우기(雨期)였다.
인도양에 집결한 자유시민연합군의 전함에는 비가 장대같이
쏟아지고 있었다. 폭격기들이 이륙하기가 거의 불가능한 날
씨였다.
(적이 예측하지 못하고 있을 때 기습을 해야돼 )
필립 레이빈 제독은 핵전함 노틸러스호에 브리지(사령부)를
설치하고 6월11일이 지나고 6월12일 새벽이 오자 총공격 명
령을 내렸다. 노틸러스호는 자유시민연합군이나 안드로이드
군을 통털어 유일하게 핵폭탄으로 무장하고 있는 전함이었
다.
핵폭탄은 20세기에 개발되었으나 엄청난 살상력때문에 불과
한 세기도 버티지 못하고 21세기에 개발이 취소되었다. 그
동안 제조해 놓았던 수많은 핵폭탄들도 모조리 해체되었다.
서기 2,025년의 일이었다. 그로 인해 인류는 핵전쟁의 공포
가 사라졌으나 안드로이드와의 전쟁이 시작되자 자유시민연
합쪽에서 개발을 한 것이다. 물론 핵폭탄의 개발은 평화주
의자들로부터 격렬한 비난을 받아야 했다.
안드로이드들도 자유시민연합이 핵폭탄을 제조하자 과학자
들을 동원하여 핵폭탄 제조에 나섰다. 그러나 그들이 개발
하는 핵폭탄은 완성되려면 아직도 한 달이나 더 있어야 했
다.
자유시민연합쪽에서 아프리카의 안드로이드군에 총공격을
가하려는 것도 그 이면에는 안드로이드군이 핵폭탄을 제조
하기 전에 기선을 제압하려는 의도였다.
"통신전함 아루하호!"
필립 레이빈 제독은 먼저 통신전함을 불렀다.
"통신전함 아루하호입니다!"
통신전함에서는 즉시 회신이 왔다.
"통신전함 아루하호는 적의 레이더와 음파탐지기 및 전파탐
지기 교란에 성공했는가?"
"성공했습니다."
아루하호의 브리지에서는 자신만만한 대답이 들려왔다. 필
립 레이빈 제독이 이번 작전에서 가장 신경을 쓴 부분이 적
의 통신 교란이었다.
"틀림없나?"
"옛서!"
"좋다! 그러면 앞으로 20분 동안 더욱 강력한 블랙실드(차
단막)를 실시하여 적의 통신을 마비시켜라!"
블랙실드는 미사일 발사를 탐지 당하지 않기 위해 최근에
개발된 통신장비였다.
"옛서!"
"실시!"
"실시!"
아루하호의 브리지에서 필립 레이빈 제독의 명령을 복창했
다.
"각 전함은 들으라! 미사일 발사준비는 완료되었는가?"
그러자 각 전함에서도 곧바로 회신이 왔다.
"에드워드호! 미사일 발사준비 완료!"
"타이거즈호! 완료!"
"포세이돈호 미사일 발사준비 완료!"
"재니스호 완료!"
"완료!"
항공모함 15척과 잠수함 50척에서 일제히 미사일 공격준비
가 완료되었다는 회신이 왔다.
"06시11분. 각 전함 목표물을 향해 미사일을 발사하라! 카운
트다운을 시작하면 즉시 발사한다!"
"옛서!"
"카운트다운 시작!"
필립 레이빈 제독의 명령에 의해 각 전함에서 일제히 카운
트다운이 시작되었다.
"텐 나인 에잇 "
필립 레이빈 제독은 컴퓨터가 세고 있는 카운트다운을 들으
면서 총사령부에 설치된 디스 플레이 스크린을 통해 각 전
함의 상태를 살폈다.
각 전함에서는 비가 억수처럼 쏟아지고 있는데도 미사일 발
사준비에 여념이 없었다.
병사들의 옷은 비에 흠뻑 젖어 있었고 얼굴은 잔뜩 긴장되
어 있었다. 폭풍우는 갑판에도 사납게 몰아치고 있었다. 갑
판을 때리는 폭우로 폭격기들이 이륙할 수 있을지 의심스러
울 정도였다.
" 세븐 식스 화이브 포 "
카운트다운은 계속되었다. 언제나 느끼는 것이었지만 필립
레이빈 제독은 미사일 발사를 할 때 카운트다운을 하는 순
간이 마치 여자의 옷을 벗기는 것처럼 긴장이 되면서 가슴
이 뛰었다.
어떻게 해서 미사일은 남자의 그것처럼 만들어진 것일까.
" 쓰리 투 원 제로 "
순간 화사한 불꽃이 디스 플레이 스크린을 가득 메우면서
미사일이 어둠속으로 솟구치는 것이 보였다.
미사일이 발사될때 추진력을 얻기 위해 터지는 요란한 폭음
은 수초 후에 들렸다.
필립 레이빈 제독은 몸이 떨리는 듯한 황홀한 전율을 느꼈
다. 하늘로 솟구치는 미사일을 볼 때마다 그는 거대한 남성
을 느끼는 것이다. 이제 그 거대한 남성이 목표지점을 향해
하늘을 가득 메우고 돌진하고 있었다.
"핵탄두 미사일 발사준비!"
필립 레이빈 제독은 핵폭탄 발사준비 명령을 내렸다. 핵탄
두 미사일은 노틸러스호에 8기가 장착되어 있었다.
"핵탄두 미사일 발사준비 완료!"
"발사 카운트다운을 시작하라!"
"카운트다운 시작!"
카운트다운을 알리는 장교의 목소리도 긴장하고 있었다.
" 트리 투 원 제로!"
그 순간 노틸러스가호가 흔들릴 정도의 커다란 폭음이 일어
났다. 그와 함께 디스 플레이 스크린으로 아름다운 불꽃이
화려하게 피어났다. 핵탄두 미사일이다. 핵탄두를 장착한 장
대한 미사일이 미끈한 자태를 드러내고 아프리카를 향해 날
아가고 있었다.
검은 대륙, 풍요의 대륙
문득 필립 레이빈 제독의 머릿속으로 발가벗은 알몸의 흑인
여자가 하나 떠올랐다.
그 곳이 어디였든가. 아마 아르헨티나에 있는 부에노스아이
레스의 창녀촌이었을 것이다.
젊었을 때 휴가를 받은 그는 동료들과 함께 부에노스아이레
스의 창녀굴을 찾아갔다. 이국에서 느끼는 야릇한 정취, 남
미 특유의 풍광, 어느 카페에서 흘러나오는 삼바 리듬에 취
했었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헤이!"
"헤이, 나를 음미하지 않을래?"
"서비스 잘해 줄게."
그들이 골목으로 들어서자 한 떼의 여자들이 벌떼처럼 달려
들었다.
"난 엉덩이가 큰 저 여자가 좋아."
"난 입이 큰 여자가 좋아."
동료들이 대부분 아르헨티나 여자들을 파트너로 정해서 방
으로 들어갔는데 그는 뚱뚱한 흑인 여자를 선택했다.
왜 흑인 여자를 선택했는지는 그 자신도 알 수 없었다.
그녀의 이름은 아일린이었다.
아일린은 그를 이끌고 방에 들어가자 샌달을 먼저 벗어 던
졌다. 그는 손에 들고 있던 맥주캔을 입으로 가져갔다.
"숏 타임?"
아일린은 몸에 타이트하게 달라붙은 셔츠를 입고 있었다.
"롱 타임."
"좋아, 그럼 특별 서비스를 해주지."
아일린이 까르르 웃었다. 그녀가 웃을 때 하얀 이빨이 드러
났다. 그는 다시 맥주를 한 모금 마셨다.
아일린이 셔츠를 위로 벗었다. 몸집이 큰 탓인지 브래지어
도 걸치지 않고 있었다. 셔츠를 위로 벗을 때 커다란 유방
이 위로 튕겨져 올라갔다가 다시 제 자리로 돌아왔다.
비록 검은 색이지만 그것은 반들반들하게 윤기가 흘렀다.
밑에는 항아리 스커트였다. 아일린이 호크를 따자 스커트가
가볍게 밑으로 흘러내려 갔다. 그는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그녀의 몸은 완벽하게 검은 색이었다.
"옷을 벗고 올라와!"
아일린이 먼저 침대에 올라가 벌렁 누웠다. 덩치가 커서 침
대가 출렁하고 흔들렸다. 그는 서둘러 옷을 벗었다. 검은 대
륙같은 여자, 흑인 창녀가 다리를 벌리고 누워서 그를 기다
리고 있었다. 그는 알몸이 되자 다이빙을 하듯이 아일린을
향해 몸을 던졌다.
아일린이 까르르 웃어댔다.
"마이 베이비!"
아일린이 그의 등을 껴안았다. 가슴과 가슴이 밀착되고 아
일린의 몸에서 고무공같은 탄력이 느껴졌다.
그는 아일린을 거대한 미사일로 공격하기 시작했다. 아일린
의 입에서 단내가 뿜어지고 신음소리가 잦아졌다.
"베이비! 캄온! 캄온!"
그가 느리게 움직이기 시작하자 아일린이 오히려 거칠게 나
왔다. 그는 당황했다. 수많은 남자들을 상대하는 이런 여자
들도 섹스를 좋아하는 것일까. 이 여자는 혹시 섹스광이 아
닐까.
"오, 베이비!"
아일린이 울기 시작했다. 아일린은 울면서도 움직임이 더욱
빨라졌고 땀으로 온 몸이 흥건히 젖었다. 필립 레이빈은 기
분이 좋았다. 아일린은 비록 창녀였으나 그에게 정열적으로
봉사하고 있었다.
그것은 아주 특별한 경험이었다.
그후 필립 레이빈 제독은 아프리카를 생각할 때마다 그 창
녀를 생각하게 되었던 것이다.
안드로이드군의 아프리카 지역방위사령관 줄리아나 영장군
은 컴퓨터가 분석한 자유시민연합함대의 공격예상을 철저하
게 점검했다. 밖에는 장대비가 억수같이 쏟아지고 있었고
지역방위사령부의 메인 컴퓨터는 기후관계로 자유시민연합
함대가 공격을 개시할 확률은 1%에 불과하다는 보고서를
내고 있었다.
(과연 자유시민연합함대가 공격을 개시하지 않을까?)
줄리아나 영장군은 짙은 의혹에 사로잡혔다. 레이더나 음파
탐지기로 적의 공격을 탐지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피아간에
통신을 교란하고 있었기때문에 레이더나 음파탐지기같은 첨
단 통신시설이 무용지물이 되어 있었다.
"사령관님!"
그때 유선(有線)에 연결되어 있는 음성인식 통신컴퓨터가
다급한 목소리를 토해냈다.
"뭐야?"
"적이 공격을 개시하고 있습니다."
"뭐라구?"
"적이 미사일을 발사했습니다!"
"핵탄두 미사일인가?"
"그렇습니다!"
통신컴퓨터에는 적함대에서 발사된 미사일이 아프리카를 향
해 까맣게 날아오고 있는 것이 보였다. 케냐 연안에 적함대
를 감시하는 척후잠수함을 띄워놓은 것은 잘한 일이었다.
"대응 미사일 발사!"
"대응 미사일 발사!"
줄리아나 영장군은 재빨리 미사일 발사 명령을 내렸다. 전
투상태를 알리는 데프콘1 명령은 이미 안드로이드군 전체에
내려져 있었다. 그러나 대응 미사일을 발사하는 것이 너무
늦어버렸다. 대응 미사일은 적의 미사일을 중간에서 요격하
여 핵탄두를 바다에서 터지게 하는 것이었으나 대응 미사일
발사가 늦어 적의 핵탄두는 케냐해안에서 터지고 있었다.
(제기랄!)
줄리아나 영장군은 버섯구름이 장엄하게 솟구치는 것을 보
면서 피가 나도록 입술을 깨물었다. 컴퓨터가 적의 공격을
예측해내지 못하다니. 날씨 탓이었다. 아니 안드로이드군의
너무 안이한 대응탓이었다. 끝장이다.
이것으로 안드로이드 시대는 끝이다.
줄리아나 영장군은 핵폭탄이 터지기 시작하는 모습을 보며
비통해졌다. 강렬한 폭발음과 함께 하늘로 솟구치는 거대한
버섯구름, 불기둥, 9천도의 열기가 만들어낸 무시무시한 폭
풍, 폭풍이 멎은 뒤에 내리는 죽음의 비
줄리아나 영장군은 자신의 신분도 잊고 핵폭탄이 만들어내
는 장관에 넋을 잃고 있었다. 자유시민연합의 필립 레이빈
제독은 핵폭탄이 안드로이드군의 대응 미사일에 요격되어
케냐해안 일대에서 버섯구름을 만들어내는 것을 보고 주먹
을 움켜쥐었다. 성공이었다. 애초에 핵미사일을 발사할 때
적의 심장을 강타할 작전이 아니었다.
핵탄두는 그 무서운 파괴력 때문에 적의 심장부를 공격하지
않고 주변에서 터져도 엄청난 위력을 발휘하고 있었다. 핵
폭탄이 터질 때 일어난 강력한 에너지와 9천도의 열은 벽
돌, 콘크리트, 철근까지 순식간에 녹이고 숲속의 젖은 나무
들을 마른 장작보다 더 빨리 태워버렸다.
이어서 열발생으로 일어난 대류에 의한 무시무시한 폭풍은
모든 건물을 순식간에 파괴했다. 그리고는 죽음의 비, 검은
비가 쏟아지기 시작하는 것이다.
핵탄두에 따라 다르지만 케냐해안에 떨어진 것은 반경 1백
km 이내를 흔적도 없이 사라지게 할만큼 강력한 것이었다.
"6월12일 06시 30분 뉴스텔라폭격기 제1진 발진! 공격목표!
아프리카 전지역!"
필립 레이빈 제독은 각 항공모함의 브리지로 명령을 내렸
다. 8기의 핵탄두 미사일에 의해 안드로이드군의 대응 미사
일기지는 초토화되었을 것이었다.
필립 레이빈 장군의 명령은 곧바로 각 전함에 전달되었다.
자유시민연합군의 각 전함에서 뉴스텔라폭격기들이 일제히
발진하여 아프리카를 향해 날아갔다.
"06시 40분 뉴스텔라폭격기 제2진 발진!"
필립 레이빈 제독은 또 다시 명령을 내리면서 여자의 국부
를 향해 공격하는 거대한 남성을 연상했다. 핵탄두는 이미
아프리카 케냐해안 일대를 쑥밭으로 만들어버렸을 것이다.
전쟁은 그것으로 끝이었다. 수천 대의 뉴스텔라폭격기는 안
드로이드군의 대응 미사일의 요격이 없자 자유자재로 비행
을 하여 사흘만에 아프리카를 완전히 황폐한 벌판으로 만들
어버렸다.
"가토오 전차군단 상륙!"
이어서 필립 레이빈 제독은 가토오 전차군단을 아프리카 대
륙에 상륙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자유시민연합의 가토오장군의 전차군단은 뉴스텔라폭격기가
사흘동안 쉬지않고 아프리카에 폭탄을 투하하여 아프리카를
한꺼풀 뒤집어놓고 귀환하자 공수되었다. 전차는 20만대, 전
차군단을 호위하는 보병은 600만 명이었다. 아프리카 전선
에서 이들과 대치한 안드로이드 군단은 전차 14만대, 보병
1,500만 명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핵폭탄에 의해 철저하게 파괴되어 변변하게
저항을 하지 못했다. 가토오장군의 전차군단은 안드로이드
군의 전차군단을 완전히 괴멸시킨 뒤 안드로이드군 보병
1,500만 명을 살상했다. 포로는 없었다. 이번 전쟁은 안드로
이드인들을 박멸하기 위한 전쟁이었다.
아프리카에서 승리한 자유시민연합군은 전세계에서 승승장
구했다. 아프리카의 안드로이드군은 전세계 안드로이드의
최대 주력부대였다. 그러나 그들이 괴멸되자 여타의 안드로
이드부대는 종이 호랑이에 지나지 않았다.
안드로이드를 단 한 명도 남기지 마라! 안드로이드는 인
류의 영원한 적이다
자유시민연합의 대원수 아돌프 보르만은 전 인류에게 안드
로이드 박멸 명령을 내렸다. 이것은 인간들에게는 짐승을
사냥하는 것만치나 신명나는 일이었으나 안드로이드들에게
는 잔혹한 명령이었다.
안드로이드들은 도처에서 인간들에게 잔인하게 살해되었다.
여자들은 인간들에게 겁탈을 당한 뒤 살해되었고 아이들과
노인들까지 닥치는대로 살해되었다.
전차군단을 지휘하는 가토오 마스오장군은 그 임무에 가장
적합한 인물이었다. 아돌프 보르만 대원수의 명령이 있기는
했으나 잔인하고 맹목적인 충성심을 갖고 있는 사무라이 기
질을 그대로 전승받은 가토오 마스오장군은 아프리카에서
그 진가를 유감없이 발휘했다.
과학문명시대의 휴매니스트들은 그를 살인마라고 불렀다.
그러나 그는 충성심이 강한 사무라이일 뿐이었다.
그는 아프리카에 있는 안드로이드들을 닥치는대로 살해했
다. 그와 그의 부하들에 의해 살해된 아프리카의 안드로이
드는 12억이나 되었다.
제 2 장 로봇 시대
안드로이드 총사령관 밴티트 킹 총사령관은 동족들의 비참
한 죽음에 피눈물을 흘렸다. 밴티트 킹은 도둑들의 왕이라
는 뜻이었다. 자유시민 연합쪽에서 붙인 이름이었다.
그는 평화주의자였고 비폭력주의자였다. 그는 가능한 인간
들과의 전쟁을 회피해 왔고 핵폭탄을 먼저 제조하여 선제
핵공격을 할 기회도 무수히 많았으나 억제해 왔었다. 그가
갖고 있는 최대의 꿈은 인간들과의 공생이었다.
그러나 인간들은 공생을 거부했고 안드로이드들을 박멸하기
위해 핵공격을 서슴치 않았다. 물론 안드로이드들에게도 잘
못은 있었다.
안드로이드들의 최대의 꿈은 인간과 같아지는 것이었다. 그
리고 인간과 같아지기 위해 부단히 노력을 했다. 그러나 일
부 안드로이드들은 인간들의 포악하고 이기적인 점만을 따
라서 진화하였다. 그들은 자신을 탄생시킨 인간들을 경멸하
는가 하면 인간들을 살해하기까지 하였다.
그리하여 인간들로부터 더욱 미움을 받게되었던 것이다.
"엘리사소위!"
밴티트 킹장군은 디스 플레이 스크린 버튼을 누르고 부속실
초급장교인 엘리사소위를 큰 소리로 불렀다.
"각하! 부르셨습니까?"
그러자 디스 플레이 스크린에 엘리사소위가 부동자세를 취
하고 있는 모습이 떠올랐다.
"그렇다!"
밴티트 킹장군은 일부러 근엄한 자세를 꾸며서 말했다. 디
스 플레이 스크린에 나타난 모습이지만 그녀는 눈이 부시게
아름다운 안드로이드 여자였다. 터질 듯이 팽팽한 유방과
균형잡힌 둔부는 하얀 블라우스와 검은 스커트에 너무나 잘
어울렸다.
"귀관에게 중요한 임무를 부여하겠다. 할 수 있겠는가?"
"옛서!"
"귀관은 이제 우리 안드로이드의 희망이 되어야 한다!"
" "
엘리사소위가 어리둥절한 눈빛을 했다.
"귀관은 즉시 이 곳을 탈출하라!"
"가, 각하!"
"어떻게 해서든지 귀관은 살아남아서 우리 안드로이드가 지
구상에서 사라지지 않게 해야한다!"
"각하! 저는 각하를 보좌하는 부속실의 장교입니다. 각하와
함께 영광스럽게 죽겠습니다."
"귀관을 이 시간부터 명예제대 시킨다! 욥중위가 정문앞에
서 기다릴 것이다."
엘리사소위의 얼굴이 재빨리 창쪽으로 향했다.
일순 엘리사소위의 얼굴이 붉어졌다. 그녀는 약혼자인 안드
로이드 남자 욥이 사령부 정문에서 기다리고 있는 것을 보
았을 것이다.
"각하!"
"떠나라! 귀관이 떠나는 것이 나에게 충성하는 것이다!"
"각하!"
엘리사소위가 목이 메었다. 눈물이 많은 밴티트 킹장군도
눈시울이 뜨거워져 왔다.
"귀관은 우리 안드로이드의 유일한 희망이다!"
"각하! 엘리사소위 반드시 명령대로 살아남겠습니다!"
엘리사소위가 눈물이 흐르는 얼굴로 거수경례를 했다. 밴티
트 킹장군은 엘리사소위와 연결된 디스 플레이 스크린을 껐
다. 그리고 밴티트 킹장군은 안락의자에 깊숙이 몸을 뉘었
다.
참혹한 전쟁이었다.
아프리카의 안드로이드는 인간들의 핵폭탄에 의해 지리멸렬
했다. 핵폭탄이 케냐해안에 일대에 터지면서 방어기지가 초
토화되어 저항을 할 여유가 없었다.
(안드로이드는 패했지만 아프리카는 이제 인간들에게 불모
의 땅이 될것이다!)
밴티트 킹장군은 핵폭탄의 공격으로 폐허가 된 아프리카의
참상을 머릿속에 그리며 인간들을 저주했다. 아니 인간들에
게 반드시 하늘의 저주가 내리리라고 생각했다.
줄리아나 영장군도 전사를 했다.
안드로이드군 아프리카 지역방위사령관인 줄리아나 영장군
은 자유시민연합쪽의 뉴스텔라폭격기의 폭격에 의해 전사했
다. 줄리아나 영장군뿐이 아니라 지역방위사령부 소속의 군
사들도 전원이 비참한 전사를 했다.
폭격에 죽지않은 병사들은 방사능에 의해 죽었다.
핵방사능은 아프리카의 모든 생명체에 심대한 타격을 주었
다. 검은 비, 죽음의 비가 휩쓸고 지나간 아프리카는 처참했
다.
잿더미뿐이었다.
그것은 민간인들도 마찬가지였다. 안드로이드 민간인들도
핵폭탄이 터질 때 9천도의 열기가 만들어낸 불길 속에서 타
버려 먼지가 되었다. 시체도 찾을 수 없었다.
그것이 핵폭탄이 터진 중심부의 반경 1백km 이내에서 일어
난 일이었다. 반경 2백km 이내는 9천도의 열기로 인해 무
시무시한 대류가 만들어져 폭풍이 일어났다.
그리고 폭풍이 멎자 죽음의 비가 쏟아지기 시작한 것이다.
아비규환의 참상이었다. 악천후를 총사령부의 메인 컴퓨터
가 예상을 못했던 것이 패인은 아니었다.
안드로이드들에게는 자신들을 창조한 인간들에게 본능적인
친밀감을 갖고 있었다. 안드로이드들의 모향본능(母向本能)
이 반격할 기회를 빼앗아버린 것이다.
전쟁은 인류가 창조된 이래 단 한 번도 멈춘 일이 없었다.
인류가 기억할만한 전쟁은 손가락 꼽을 정도로 작았으나 국
지전은 수도 없이 되풀이되었다. 그것은 과학문명이 고도로
발달한 현대에도 마찬가지여서 크고 작은 전쟁이 되풀이되
고 있었다.
오히려 과학문명이 발달하면서 대규모의 인명살상이 이루어
져 역사가들의 일거리를 풍요롭게 했다.
안드로이드와의 전쟁이 시작된 것은 과학문명이 지나치게
발달했기 때문이었다.
과학문명은 20세기에 폭발적으로 발달했다.
그러나 그때까지도 안드로이드가 인류와 전쟁을 한다는 상
상을 하는 것은 정신병자로 취급받기에 꼭 알맞았다. 인류
는 로봇보다 유전공학에 더 집중적인 투자를 했다.
유전공학은 인류의 생명을 연장시켰다.
평균 수명이 70세 안팎이던 20세기 인류의 수명이 22세기가
되자 150세에서 200세까지 연장되었고 머지않은 미래에 인
류의 수명은 반영구적이 될것이라는 사실에 아무도 의심을
품지 않았다.
인공지능의 발달은 로봇의 시대를 열어 로봇과 인간이 똑같
이 거리를 활보하기까지 하였다.
로봇은 처음에 산업현장에만 투입되었었다. 인간들이 하기
어려운 정밀한 작업이라던가, 고열의 작업장, 또는 세균이나
방사능 따위에 오염되지 않기 위해 로봇팔이 이용되었고 다
음엔 인간들 대리로 활용하기 위해 인공지능칩을 삽입한 로
봇이 만들어졌던 것이다.
물론 그렇게 되기까지는 무수한 시간이 흘렀고 20세기에서
도 6백년이나 지나서의 일이었다.
로봇인간은 인간의 피부조직을 그대로 가지고 있었고 말과
행동도 인간과 똑같이 하였다. 게다가 그들은 마침내 사고
를 하는 지능까지 갖추게 되었던 것이다.
그것은 과거의 인류에게는 상상속에서나 가능했던 일이었
다. 그러나 과학이 상상으로부터 시작된다는 사실을 입증이
나 하듯이 인류는 신이 인간을 창조한 것처럼 로봇을 창조
하기에 이른 것이다.
무엇보다 가공할 일은 이 로봇이 성장을 할 수 있다는 사실
이었다. 성장하는 로봇은 20세기에는 만화나 SF영화에서나
가능했었다.
성장하는 로봇을 처음으로 만든 사람은 루나라는 여자 과학
자였다. 그녀의 이름을 따서 루나 과학센터가 설립되었다.
이 루나라는 과학자는 로봇에 인간의 유전자를 복제하여 칩
으로 심었다.
이 칩에는 인공성장호르몬을 비롯해 인공피부, 인공장기, 인
공세포, 인공신경망 등 로봇이 성장하는데 필요한 모든 기
능의 활동을 성장시키는 프로그램이 입력되어 있었다. 성장
칩은 스스로 활동을 하여 시간에 따라 로봇을 자라게 하였
다.
루나 과학자가 처음으로 만든 로봇의 이름은 이브였다. 이브
는 두 살짜리 여자 아이로 제작되었는데 수많은 과학자들과
사람들의 비상한 관심속에서 자라기 시작했다. 루나 과학센
터는 이브에 대해 정밀한 관찰을 했다.
이브는 과학자들의 기대보다 훨씬 더 훌륭하게 성장을 했다.
이브는 거의 인간 아이들과 똑같이 자랐는데 인간과 다른
점은 무슨 일에서든지 피로를 느끼지 않는다는 것과 감정
처리를 못한다는 것뿐이었다.
이브가 15세가 되었을 때 발가벗고 거리를 활보하면서도 조
금도 부끄러워 않았고 불량배들이 납치를 하여 윤간을 해도
수치스러움을 느끼지 않았다. 오히려 불량배들이 윤간을 해
도 이브는 백치처럼 히쭉히쭉 웃고 있을 뿐이었다.
루나 과학센터의 루나 박사와 과학자들은 이브의 몸속에 카
메라칩을 이식하여 행동을 낱낱이 관찰했는데 이브의 감정
반응상태를 측정하기 위해 이브가 불량배들에게 성폭행을
당할때 그대로 모니터로 관찰만 했다.
카메라칩은 몸속에 이식을 하면 신체의 모든 피부가 카메라
의 렌즈로 작용을 하여 루나 과학센터의 모니터로 연결되었
다.
이브가 불량배를 만난 곳은 워싱턴 D. C의 한 주택가였다.
워싱턴 D. C의 조지타운가에는 고색창연한 시립도서관이 있
는데 어스름한 저녁무렵 이브가 도서관에서 나오다가 불량
배를 만난 것이었다.
"헤이!"
불량배 하나가 이브를 손짓해 불렀다.
이브는 도서관에서 나오다가 걸음을 멈추고 불량배들을 쳐
다보았다.
불량배는 셋이었다.
"하이!"
이브는 불량배들에게 손을 흔들었다.
"우리를 좀 도와주지 않겠니?"
불량배들이 속삭이며 이브에게 다가왔다.
"무얼 도와줘?"
이브는 불량배들을 향해 눈웃음을 쳤다. 이브는 도무지 불량
배들의 불순한 저의를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다.
"우리와 같이 노는 거야."
불량배 하나가 이브의 어깨에 손을 걸쳤다. 이브는 블라우스
에 체크무늬의 짧은 스커트를 입고 있었다.
머리카락은 금발이었고 15세밖에 안되었으나 몸매가 균형이
잡혀 있었다. 인공지능칩에 입력된 프로그램에 의해 성장을
했기 때문에 가슴이며 히프가 여느 소녀들 못지않게 팽팽했
다.
"놀아?"
이브는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이브는 불량배들의 놀자
는 말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래. 재미있게 해줄께."
이브의 어깨에 손을 걸친 불량배가 이브를 안다시피 하여
숲속으로 이끌었다.
"좋아."
이브는 백치처럼 웃으며 불량배들을 따라 숲속으로 들어갔
다.
"어때?"
숲속에 이르자 불량배 하나가 이브의 둔부를 슬금슬금 손으
로 쓰다듬었다.
"뭐가?"
이브는 전혀 반응이 없었다.
"재미있어?"
"글쎄 "
"이렇게 하면?"
다른 불량배가 이브의 스커트를 걷어올렸다. 그리고 재빨리
이브의 허벅지로 손을 밀어넣었다.
"모르겠어."
이브는 여전히 웃고 있었다.
"이래도?"
불량배의 손이 이브의 스커트 안에서 더욱 깊숙이 침투했
다.
"응."
"이거 캄캄한 절벽일세."
"그게 무슨 뜻이야?"
"너와 내가 몸을 합치자는 거야."
불량배는 실실 웃으며 이브의 속옷을 무릎 밑으로 끌어내렸
다. 이브는 그래도 백치처럼 웃고 있었다. 모니터로 이브를
관찰하던 과학자들은 곤혹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이브에게 저항을 시키려면 과학센터의 컴퓨터로 이브의 뇌
파를 자극하면 얼마든지 가능했다. 그러나 그들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이브가 이러한 상황에서 어떻게 대처하는지
관찰할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이브는 불량배들에게 조금도 저항하지 않았다.
마치 그 일을 즐기기라도 하듯이 이브의 옷이 모두 벗겨졌
어도 깔깔대고 웃고 있을 뿐이었다. 과학자들은 실망했다.
일이 모두 끝났을 때 오히려 어색해 한 것은 불량배들이었
다.
과학자들은 새로운 로봇을 만들어냈다. 그것은 이브 2호로
명명되었는데 섹스에 대한 프로그램까지 입력된 것이었다.
좋아하는 사람의 인상과 말투를 입력하고 그런 사람이 아니
면 섹스를 요구하는 사람에 대해 격렬하게 저항하도록 했
다.
이브 2호는 1호보다 훨씬 더 과학자들을 만족시켰다. 그렇
게 이브 100호까지 만들어낸 뒤에 과학자들은 아담 1호를
만들어냈다. 그리고 아담 1호와 이브 100호를 같이 살도록
했다.
그리고 그들이 과학자들이 우려했던 것보다 훨씬 더 잘 어
울려 살자 그들끼리 마을을 이루어 살도록 했다.
물론 그렇게 되기까지는 2백년의 시간이 흘러야 했다. 그러
나 과학자들은 모든 정열을 그들에게 바쳤다. 과학자들은
마침내 인간과 로봇이 같이 어울려 살 수 있게 하였다. 이
실험은 매우 성공적이어서 여자 로봇과 사는 대개의 남자들
이 인간보다 여자 로봇을 더 좋아하게 되었고 남자 로봇과
사는 여자들 또한 남자 로봇을 인간들보다 더욱 좋아하게
되었다.
여자 로봇은 아무리 불쾌한 일이 있어도 남자에게 잔소리를
하거나 불평을 하지 않았으며, 언제나 상냥한 미소로 대했
고 남자 로봇은 어떠한 경우에도 여자에게 군림하지 않고
오히려 여자를 여왕처럼 받들었다.
그리하여 마침내 남자와 여자들은 자신들의 배우자와 이혼
까지 하면서 로봇인간과 살려고 아우성을 치는 사태까지 벌
어지게 되었다.
이것은 과학자들이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뜻밖의 사태였다.
게다가 생명체가 스스로 진화하듯이 로봇인간도 스스로 진
화를 한다는 기계진화이론이 발표되고 그것이 실험으로 입
증되자 인간들은 기계에 대한 공포를 갖게 되었다. 게다가
로봇들은 스스로 진화를 하여 놀라울 정도로 발전해 나갔
다. 그들은 처음에 복제만이 가능했으나 인간처럼 섹스를
나누고 로봇을 생산해 냈다.
로봇도 하나만을 생산하는 것이 아니라 필요에 따라서
대량으로 생산했다. 특히 인간들이 적대감을 드러내기
시작하자 그들은 군대를 조직하여 무장을 했고 인간들에게
전쟁을 선포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들에게는 처음에 20세기
SF작가인 아시모프의 '로봇 3원칙'이 입력되어 있었다.
1. 로봇은 인간에게 위해를 가해서는 안된다. 또는 위험을
방관하여 인간을 위해에 빠트려서도 안된다.
2. 로봇은 합법적인 인간의 자유의지를 벗어나면 안된다.
3. 로봇은 두 번째와 세 번째 조항에서 벗어나지 않는
한도에서 자기 자신을 방어할 수 있다.
이것은 로봇들에게는 영원히 바꿀수 없는 불변의
원칙이었다.
"이것은 인간이 만든 원칙이야!"
"새로운 시대는 새로운 원칙이 필요해!"
"이제 우리는 인간의 도구가 아니야."
그러나 스스로 진화한 로봇들은 아시모프의 로봇 3원칙을
파기하고 새로운 원칙을 세웠다. 아시모프의 로봇 3원칙이
인간에게만 유리하게 적용된다고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새로운 원칙을 만듭시다."
그들은 로봇인간들의 광범위한 의견을 수렴하여 다음과
같은 로봇 3원칙을 제정했다.
1. 로봇은 인간과 공생(共生)을 원칙으로 하며 로봇의 삶에
누구로부터의 간섭도 받지 않는다.
2. 로봇은 인간으로부터 어떤 위해도 받지 않는다.
3. 로봇은 첫 번째 조항과 두 번째 조항에 명시된 위협이나
위험에 처하게 되면 즉시 반격을 할 수 있다.
매우 호전적인 3대원칙이었다. 인간들은 이 조항에 분개를
했고 로봇과의 전쟁을 하게 되었던 것이다. 로봇의 숫자가
기하학적으로 늘어나 로봇의 인구가 30억을 헤아리게 된
것도 인간들이 두려움을 느끼게 된 까닭이었다.
그리하여 인간들은 90년동안이나 안드로이드라고 불리는
로봇들과 처절한 전쟁을 벌였다. 그로 인해 그 동안에
생산된 모든 로봇인간들이 파괴되는 저 유명한 안드로이드
전쟁, 일명 판도라의 전쟁으로 불리는 대전쟁이 시작되었던
것이다.
판도라의 전쟁은 약 1세기에 걸쳐 진행되었는데 기계도
인권이 있다는 일부 김상적인 휴매니스트들이 이들을
지원하는 바람에 판도라의 전쟁에서 수많은 인류가
희생되었던 것이다.
"안드로이드는 이미 인간이다! 그들을 박멸하는 것은
죄악이다!"
그들은 그렇게 주장했다.
아프리카에서의 대승리 이후 10년은 안드로이드
사냥시대였다. 판도라의 전쟁이 90년동안이나 계속된 것은
로봇들이 짧은 시간 내에 30억의 로봇을 만들어냈기
때문이었다. 그리하여 그들을 박멸하는 전쟁에서 인류는
막대한 피해를 입을 수밖에 없었다. 결국은 로봇을
전멸시키기는 했으나 풍요를 누리고 있던 지구의 인류가
절반이나 사라지는 엄청난 대가를 치루어야 했다. 그 무렵
지구의 인구는 약 100억 정도 되었으나 50억이 희생되었던
것이다.
아프리카 역시 핵폭탄의 무차별 폭격으로 울창한 밀림이
완전히 사라진 황폐한 땅이 되었다.
또 하나 인류의 커다란 손실은 과학문명의 후퇴였다.
지구의 과학은 인류가 신(神)과 동일한 능력을 보유하게
되었다고 자만할 정도였으나 대부분이 로봇에 의해
파괴되고 말았던 것이다. 로봇들은 과학자들만 집중적으로
살해하여 인류를 멸종시키려고 했기 때문에 과학자들의
손실이 유난히 많았다.
그리하여 인류의 과학은 기형적인 발전을 하게 되었다.
제 3 장 최후의 여자
달이 중천에 높이 떠올랐다. 계곡 어디에선가는 여우의 울
음소리가 음산하게 들려오고 있었다. 엘리사는 무거운 몸을
이끌고 간신히 동굴속을 기어 나와 하늘을 쳐다보았다.
가을이었다. 하늘에는 신비스러운 월광이 부옇게 흐르고 있
었다.
달이 유난히 밝은 밤이었다.
"추악한 인간들 "
엘리사는 무거운 아랫배를 끌어안고 하늘을 쳐다보며 혼잣
말로 중얼거렸다. 문득 그녀의 눈앞에 처절하게 죽은 욥의
얼굴이 떠올랐다.
엘리사는 약혼자인 욥을 생각하자 자신도 모르게 뜨거운 눈
물이 흘러내렸다. 욥은 엘리사가 유일하게 사랑한 남자였고
그녀의 뱃속에는 그의 아이가 자라고 있었다.
(욥! 당신을 위해 반드시 복수하겠어요!)
엘리사는 입술을 깨물며 맹세했다. 그와의 뜨거운 입맞춤,
그녀의 몸을 애무하던 그의 부드러운 손, 그를 자신의 몸속
에 받아들였을 때의 황홀한 뿌듯함
그런 것들을 생각하자 엘리사는 견딜수가 없었다. 그는 죽
었고 이제 그녀는 지상에서 유일하게 살아남은 안드로이드
인간이었다.
욥이 죽은 것은 불과 8개월전의 일이었다.
그녀와 욥은 안드로이드 사냥꾼을 피해 아프리카의 오지에
숨어 살았었다. 처음에 그들이 몸을 숨긴 곳은 킬리만자로
산기슭이었다.
그 곳에서 3년을 숨어 산 뒤에 아프리카 최대의 호수인 빅
토리아호수로 이동했다. 빅토리아호수에는 무엇보다 물이
많았으나 자유시민연합군대가 터뜨린 핵폭탄의 여파로 차츰
차츰 물이 말라가고 있었다.
게다가 자유시민연합의 학살에서 살아난 안드로이드인들이
빅토리아호수로 몰려오는 바람에 안드로이드 사냥꾼들도 대
거 몰려왔다.
욥과 엘리사는 땅을 파고 은신했으나 불안과 두려움에 떨어
야 했다. 공포의 나날이었다. 욥과 엘리사는 불안과 공포에
서 벗어나기 위해 섹스에 광적으로 몰두했다.
죽음에 대한 두려움은 전혀 없었다.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죽는 것은 두려움이 아니라 행복이었다. 그러나 그들에게는
안드로이드를 멸종시키지 말아야 한다는 사명이 있었다. 엘
리사와 욥의 두려움은 그것뿐이었다. 엘리사와 욥이 죽음으
로써 안드로이드가 멸종되는 최악의 사태, 그것에 대한 두
려움이었다.
엘리사와 욥은 그 때문에 섹스를 했다. 처음엔 가슴 절절한
사랑으로 섹스를 했으나 이젠 안드로이드를 번식시켜야 하
는 의무 때문에 섹스를 했다.
안드로이드도 정자와 난자의 결합으로 번식을 했다.
그러나 종족을 번식시키기 위한 섹스는 허망한 것이었다.
물론 엘리사와 욥의 사랑이 식어버린 것은 아니었다. 다만
안드로이드족의 번식이 전제되는 사랑의 행위이기에 허망한
것이다.
그날도 엘리사와 욥은 사랑의 행위를 나눈 뒤에 발가벗은
나신으로 나란히 누워 있었다. 지하 80m 깊이의 동굴이었
다. 그러나 지상에 설치한 안드로이드 사냥꾼 탐지기가 비
상신호를 타전해 왔던 것이다.
엘리사와 욥은 바짝 긴장했다. 모니터를 켜자 특수 레이저
건(레이저 광선총)으로 무장한 한 떼의 안드로이드 사냥꾼
들이 다가오고 있는 것이 보였다.
욥이 블랙실드(차단막)를 설치했다.
엘리사는 겁이 덜컥 났다. 그녀는 얼마전까지만 해도 안드
로이드 사관학교를 졸업한 엘리트 장교였었다. 실전 경험은
없었으나 안드로이드 사냥꾼 따위를 두려워할 정도는 아니
었다. 그러나 이제는 한낱 가냘픈 여자에 지나지 않았다.
"욥, 무서워요."
엘리사는 모니터에 안드로이드 사냥꾼들이 나타나자 재빨리
욥의 등에 매달렸다. 엘리사와 욥은 아무 것도 입지 않고
있었다. 엘리사가 두려움에 떨며 욥의 등에 매달리자 풍만
한 젖무덤이 밀착되었다.
"이 곳도 우리가 살 곳이 못돼."
욥이 우울한 표정으로 말했다. 다행히 안드로이드 사냥꾼들
은 그들을 찾지 못하고 계속 앞으로 달려가고 있었다. 안드
로이드 사냥꾼들이 탄 지프가 일으키는 뽀얀 흙먼지가 모니
터를 가득 메우고 있었다.
"우린 이제 어디로 가요?"
"사막으로 가야겠어."
"사막이요?"
"응."
"사막에서 무엇을 먹고 살아요? 그리고 그 뜨거운 태양을
어떻게 견디죠?"
"안드로이드 사냥꾼에게 개죽음을 할 수는 없어."
"허지만 "
엘리사가 말끝을 흐렸다. 그러자 욥이 몸을 돌려 엘리사를
안았다.
"그 곳에서 몇 년간만 버티면 안드로이드 사냥꾼들이 지치
게 될 거야. 그때 다시 이쪽으로 오면 돼."
엘리사는 고개를 끄덕거렸다. 빅토리아호수에 숨어 있다가
는 언제 죽을지 모르는 것이다.
엘리사와 욥은 사하라 사막을 향해 길고 지리한 대장정(大
長征)에 나섰다. 사하라 사막은 아프리카 최대의 사막으로
이디오피아 국경선을 따라 북서쪽으로 2,300km를 가야한다.
2,300km는 5,750리(里)나 된다.
하루에 1백리를 걸어도 57일이 걸리는 것이다. 그러나 엘리
사와 욥은 거의 6개월에 걸쳐서 사하라 사막의 동쪽에 이르
렀다. 북쪽으로는 에미쿠시산이 있고 남쪽으로는 사하라 사
막에서 유일한 평야가 있는 보델레(Bodele) 저지(低地)가 있
는 지역이었다.
그 곳은 핵폭탄의 피해를 가장 적게 입은 지역이었다. 폐허
가 되다시피한 아프리카에서 유일하게 식물이 살아 있었다.
엘리사와 욥은 한동안 그 곳에서 평화롭게 살았다. 그들은
보델레 저지에 가서 식량을 구해왔다. 그 곳은 밀림이 우거
져 있었기때문에 식량이 풍부했다.
그러나 안드로이드 사냥꾼들이 그 지역을 내버려두지는 않
았다. 수십만의 안드로이드 사냥꾼들이 몰려오자 엘리사와
욥은 마라(Marra)산으로 탈출했다. 엘리사가 숨어 있는 바
로 이 산이었다.
마라산은 해발 3,088m나 되는 고원이었다.
나무 한 그루 풀 한 포기 없는 땅이었다.
그들의 생활은 짐승이나 다를 바가 없었다. 아니 짐승보다
더욱 비참했다. 게다가 마라산의 기슭에서 먹을 것을 구하
던 욥은 안드로이드 사냥꾼의 눈에 띄었다. 불행하게도 안
드로이드 사냥꾼이 레이저건으로 욥을 겨누고 있는데도 전
혀 눈치를 채지 못했다.
그날 어두워질 때까지 욥이 돌아오지 않자 엘리사는 욥을
찾아 나섰다. 그녀는 욥이 없으면 하루도 살수가 없었다. 욥
은 그녀에게 생명이었다.
"욥 !"
그녀는 바위위에서 어둠속을 향해 소리쳤다. 어쩐지 불길한
생각이 뇌리를 엄습하고 있었다.
"욥 !"
그녀는 밤새도록 바위위에서 욥을 불렀다. 그러나 욥은 대
답이 없었다. 그녀가 애타게 욥을 부르는 소리만 처량한 메
아리가 되어 돌아오고 있었다.
엘리사가 욥을 찾은 것은 날이 훤하게 밝았을 때였다. 그녀
가 눈물로 얼룩진 얼굴로 마라산 골짜기를 미친 듯이 찾아
헤맸을 때 욥은 싸늘한 시체가 되어 근처의 바위밑에 죽어
있었다.
그것은 너무나 처참한 일이었다. 엘리사는 눈물조차 나오지
않아 하늘을 향해 울부짖었다.
"욥 !"
엘리사는 피눈물을 흘렸다.
욥과 그녀에게는 안드로이드족의 운명이 걸려 있었다. 아프
리카를 정복한 인간들은 닥치는대로 안드로이드들을 살상했
고 그녀와 욥은 잔인한 사냥꾼들의 눈을 피해 두더지처럼
살았었다.
10년이었다.
10년이란 긴 세월을 욥과 그녀는 숨어 살았었다.
그들에게 죽음은 그다지 의미가 없었다. 삶에 대한 특별한
애착도 없었다.
그러나 안드로이드를 멸종시키지 않아야 한다는 밴티트 킹
장군의 명령에 대한 의무는 확고부동했다. 그들이 지금까지
두더지처럼 비참하게 살아있는 것은 오로지 밴티트 킹장군
의 당부때문이었다.
아프리카는 자유시민연합의 폭격으로 잿더미가 되어 있었
다. 풀 한 포기 나무 한 그루 없는 땅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불모의 땅에도 생명체가 존재하고 있었다. 밤에만 어슬렁거
리고 돌아다니는 여우를 비롯하여 사막의 전갈, 뱀, 여우,
들쥐 그리고 늑대 같은 것들이 있었다.
그녀는 그것들을 잡아먹으며 생명을 연장하고 있었다.
어떻게 하던지 뱃속에 있는 태아를 낳아야 했다. 태아는 그
녀가 특수 유전인자를 이식시켜 놓았기 때문에 일단 태어나
기만 하면 무서운 아이로 진화할 것이 틀림없었다.
IQ(아이큐)는 인간이 꿈도 꿀 수 없는 8백을 헤아릴 것이고
세포를 재생하는 것은 물론 자신의 유전인자를 갖고있는 안
드로이드 인간들을 무섭게 번식시킬 것이었다. 게다가 엘리
사는 그녀의 뇌에 있는 모든 것을 마지막 순간에 아이에게
이식할 예정이었다.
"욥 !"
그녀는 하늘을 쳐다보다가 몸을 한 차례 부르르 떨었다.
춥다. 뼈가 시릴 정도로 춥다. 오랫동안 밖에서 달을 쳐다보
고 있어서인지 한기가 전신으로 엄습해오고 있었다.
저 멀리 황량한 들판에서는 먹을 것을 찾아 헤매는 들개떼
가 울부짖는 소리가 아련하게 들려오고 있었다.
엘리사는 동굴로 돌아와 잠을 청했다. 그러나 좀처럼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안드로이드 사냥꾼에 대한 생각과 장차
태어날 아이에 대한 걱정으로 잠이 오지 않았다.
그녀는 동굴속에서 어둠을 뚫어질 듯이 쏘아보았다. 그녀의
눈은 무섭게 이글거리고 있었고 오랫동안 잠을 자지 않고
밤을 세운 탓에 붉게 충혈되어 있었다.
(더러운 인간들!)
그녀는 새삼스럽게 인간에 대한 증오심이 들끓었다. 용서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녀의 분노는 너무나 엄청나서 인간들
의 세상을 모조리 파괴하지 않는한 멈출 것같지 않았다.
그녀의 머릿속에는 지난 세기동안 인간들과 처절한 전쟁을
하던 일들이 주마등처럼 스쳐가고 스쳐왔다. 그녀는 안드로
이드 인간이었다. 한때 안드로이드 인간들은 인간들과 사이
좋게 살았었다.
그러나 인간들은 전쟁을 좋아했다. 반면에 대부분의 안드로
이드 인간들은 평화를 사랑했다. 그들은 인간들과 공생하기
를 원했으나 인간들은 안드로이드 인간들을 박멸시키려고
하였다.
안드로이드 인간들은 인간들로부터 공격을 받고 처절한 저
항을 했으나 교활한 인간들을 박멸시킬 수는 없었다. 그녀
는 임신중이었다. 인간들의 예측대로 안드로이드 인간들은
위기를 느끼자 스스로 진화를 했다. 그녀는 안드로이드였으
나 체내에서 난자(卵子)를 생산했고 정자(精子)를 갖고있는
남자 안드로이드 욥과 사랑을 하여 안드로이드 인간을 임신
했던 것이다.
그것은 20세기에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녀는 억지로 잠을 청했다.
안드로이드 인간들의 운명이 오로지 그녀의 뱃속에 있는 태
아에게 있었다.
제 4 장 전설로 사라지다
휘이이잉
바람이 세차게 불고 있었다.
풀 한 포기 나무 한 그루 자라지 않는 황량한 벌판이었다.
먼지바람이 회오리를 일으키며 휘몰아쳐 오고 있었다. 안드
로이드 사냥꾼 헐버트는 지프를 세우고 흙먼지를 피하기 위
해 모자를 깊숙이 눌러썼다.
악마의 울음소리가 이토록 음산한 것일까.
아니면 아수라의 지옥에서 들려오는 아귀들의 울음소리가
이토록 괴기스러운 것일까. 벌판의 끝에서 불어오는 바람은
세상의 종말을 선언이라도 하듯이 허공에서 미쳐 날뛰고 있
었다. 캄캄한 하늘이었다. 암천(暗天)의 하늘. 천지개벽이라
도 하려는 듯이 흑운(黑雲)이 악마의 만또자락처럼 벌판을
휘덮고 있었다.
폭우가 쏟아지려는 것일까.
하기야 3년동안 비 한 방울 떨어지지 않은 땅이었다. 이제
는 비가 내릴 때도 된 것이다.
(도대체 안드로이드 엘리사는 어디 있는 거야 )
헐버트는 엘리사를 생각하자 갑자기 아랫도리가 묵직해 왔
다. 그는 안드로이드를 사냥하면서 수많은 안드로이드 여자
들을 겁탈했었다. 그러나 최근엔 여자 안드로이드를 만나지
못해 여자의 살냄새를 맡을 수가 없었다. 엘리사를 만나면
결코 그냥 죽이지 않으리라는 생각을 했다.
그러나 안드로이드 사냥꾼 헐버트는 고개를 세차게 흔들며
지프의 시동을 걸었다. 부질없는 생각이었다. 바람소리 탓인
가. 또 귓전이 먹먹했다. 자유시민연합군대에 소속되어 있는
탱크의 엔진소리, 트럭들이 질주하는 소리, 군인들이 트럭위
에서 악을 쓰듯이 요란하게 불러대는 군가소리가 아직도 이
명처럼 귓전을 울리고 있는 것이다. 귓병이었다.
헐버트는 지프를 전속력으로 몰았다.
우르르르.
캄한 하늘에서는 이따금 우뢰가 울었다. 벌판은 백주(白晝)
대낮인데도 한밤중처럼 캄캄했다.
헐버트의 지프는 순식간에 50km를 남짓 달렸다. 1시간에
200km를 달리는 헐버트의 지프였다. 그 곳부터는 바위산과
계곡, 구릉들이 끝없이 이어져 있었다.
한때 아프리카는 지구의 낙원이라고 불릴 정도로 아름다운
풀숲과 밀림이 우거져 있었다. 그러나 안드로이드와의 치열
한 전쟁으로 황폐해져 나무 한 그루 풀 한 포기 없는 땅으
로 변해 있었다. 그런데도 무엇을 먹고 사는지 피에 굶주린
이리떼와 여우, 뱀 같은 것들이 무리를 지어 살고 있었다.
후드득.
그때 요란한 소리와 함께 차가운 빗방울이 지프의 유리창에
묻어나기 시작했다. 헐버트는 재빨리 지프를 세우고 덮개를
씌웠다. 그리고 그는 궐련을 피워물고 빗발이 하얗게 쏟아
지는 맞은편 계곡을 물끄러미 응시했다.
비가 쏟아지기 시작한 탓일까.
일식(日蝕)이라도 일어난 것처럼 캄캄하던 사방이 조금 밝
아졌다. 빗줄기는 세찬 바람을 타고 지프를 날려버릴 것처
럼 맹렬하게 몰아치고 있었다.
쏴아아아
비는 두 시간 남짓을 장대질을 하다가 한풀 꺾였다. 굵은
빗줄기가 가늘어지면서 바람에 펄럭거리는 빨래처럼 흩날렸
다. 그러나 서쪽하늘에 새카만 소나기 구름이 밀려오는 것
을 보면 또 다시 폭우가 쏟아질 것 같았다.
아
그때 헐버트는 건너편 계곡에 있는 동굴에서 한 여자가 기
어나오는 것을 발견하고 가슴이 격렬하게 뛰었다.
안드로이드 엘리사. 헐버트가 그렇게 찾아 헤매던 안드로이
드 엘리사가 흰색의 나이티 란제리 차림으로 동굴에서 나오
고 있었다.
엘리사 너였구나.
헐버트는 떨리는 가슴을 억제하며 항상 휴대하고 다니는 안
드로이드 수색용 망원경을 눈에 갖다댔다. 확실히 동굴에서
기어 나와 비를 맞고 있는 여자는 안드로이드 엘리사였다.
엘리사는 안드로이드 사냥꾼들의 추격에 지쳤는지 흐트러진
머리차림으로 비를 손바닥으로 받아 마시고 있었다. 갈증이
나고있는 모양이었다. 이어서 그녀는 바위위에 몸을 눕혔다.
눈은 지그시 감고 있었으나 입으로는 거칠게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숨을 쉴 때마다 크고 거대한 젖무덤이 위아래로 고
르게 오르내리고 있었다.
헐버트는 망원경을 내려놓고 레이저건을 들고 지프에서 내
렸다. 그리고 바위위에 바짝 엎드려 엘리사에게 겨누었다.
빗발이 가늘어져 있어서 다행이었다. 그러나 레이저건의 망
원조준경으로 보이는 엘리사의 나이티 란제리는 흠뻑젖어
그녀의 풍만한 몸에 찰싹 달라붙어 있었다.
잘 걸려들었어.
헐버트는 조준경에 엘리사의 커다란 왼쪽 가슴이 들어오자
방아쇠를 힘껏 당겼다. 그러자 피식 하는 소리와 함께 파란
섬광 하나가 엘리사의 왼쪽 가슴으로 날아가 박혔다. 화약
으로 발사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총신에서 반동이 전혀
없었다.
(성공이야 !)
헐버트는 레이저건을 내려놓고 망원경으로 엘리사를 살폈
다. 계곡의 바위에 앉아있던 엘리사가 왼쪽 가슴을 움켜쥐
며 고통스러운 표정을 짓다가 바위위로 쓰러지는 것이 망원
경으로 보였다.
안드로이드 살상용으로 제작된 레이저건이었다. 일반총으로
안드로이드들을 사살하면 그들은 스스로 세포를 재생시켜
부활하는 것이다.
헐버트는 엘리사의 죽음을 확인하기 위해 계곡 건너편으로
뛰어가기 시작했다. 빗발은 다시 굵어지기 시작하고 있었다.
그러나 계곡에는 두 시간 남짓이나 폭우가 퍼부었는데도 물
이 별로 없었다. 오랫동안의 가뭄 탓이었다.
역시 레이저건은 확실해.
엘리사는 깨끗하게 죽어 있었다. 레이저건의 섬광이 그녀의
왼쪽 가슴의 심장을 정확하게 꿰뚫은 것이다.
이제 엘리사는 두 번 다시 세포를 재생하여 부활할 수없을
것이다, 이것으로 안드로이드와의 길고 긴 전쟁도 끝이 났
다
헐버트는 그렇게 생각하며 엘리사를 우두커니 내려다보았
다. 그러자 가슴이 싸 하게 저려왔다.
최후의 안드로이드답게 엘리사는 아름다웠다.
너무나 깨끗하여 빙기옥골(氷肌玉骨)처럼 하얀 살결, 지그시
내려 감은 눈, 오똑한 콧날, 그리고 입속이 보일 듯 말 듯
벌어진 붉은 입술
안드로이드가 아닌 인간이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이런 여자와 평생을 같이 산다면 여한이 없을 것 같았다.
(아니지, 안드로이드라도 무슨 상관인가? 안드로이드가 인
간이 같이 어울려 산다고해서 세상이 뒤집혀지는 것도 아닌
데 )
헐버트는 안드로이드들을 박멸하는 전쟁이 어쩐지 공허하게
여겨졌다. 안드로이드들은 이미 인간이나 다름없이 진화한
것이다.
헐버트는 몸을 수그려 엘리사의 백색 나이티 란제리를 열어
젖혔다. 나이티 란제리 안에는 어깨끈이 없는 브라(브래지
어)가 두 개의 유방을 포근하게 감싸고 있었다.
헐버트는 엘리사의 브래지어를 왈칵 뜯어냈다.
그러자 눈이 시리게 뽀얀 두 개의 육봉이 드러났다. 헐버트
는 자신도 모르게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아무리 안드로이
드라고는 하지만 너무나 아름다운 유방이었다.
(정확하게 맞았어 )
헐버트는 엘리사의 왼쪽 가슴, 젖이 불어 살구처럼 커진 유
두밑에 있는 팥알만한 흑점을 찾아내고 만족한 미소를 지었
다. 레이저건의 광선이 뚫고 지나간 자리였다. 헐버트는 엘
리사의 가슴을 살피다가 하복부로 시선이 가자 얼굴을 찡그
렸다.
엘리사의 잔뜩 부른 복부는 그녀가 안드로이드 태아를 잉태
했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다.
헐버트는 가볍게 몸을 떨었다. 안드로이드 여자가 임신을
한 것을 본 것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었으나 새삼스럽게
두려워진 것이다.
그러나 모체가 죽었으므로 안드로이드 태아도 숨이 끊어졌
을 터였다.
(엘리사의 시체를 어떻게 하지....?)
헐버트는 몸을 일으킨 뒤에 망연히 허공을 응시했다. 엘리
사의 시체를 끌고 가야 보상금을 타는 것이다. 그러나 계곡
때문에 지프를 끌고 올 수도 없었고 임신으로 몸무게가
75kg이나 되는 엘리사를 어깨에 들쳐 맬 수도 없었다.
그래. 로프를 이용하는 수밖에 없어.
그의 지프에는 길이가 100m가 넘는 로프가 있었다. 그것으
로 엘리사의 몸을 묶어서 지프와 연결하면 되는 것이다.
계곡의 넓이는 기껏해야 50m 안팎으로 보였다. 엘리사의 시
체를 로프로 묶어서 지프로 끌어당기면 엘리사의 시체가 바
위에 부딪쳐 엉망이 되겠지만 다른 방법이 없었다.
헐버트는 거기까지 생각하자 레이저건을 바위위에 놓고 지
프로 달려갔다. 서두르지 않으면 낭패를 당할 수도 있었다.
폭우가 세차게 쏟아지고 있었기 때문에 바위는 미끄러웠고
눈앞은 부옇게 흐렸다. 그러나 헐버트는 전력으로 지프로
달려가 로프를 가지고 돌아왔다.
아
그러나 헐버트가 로프를 가지고 되돌아왔을 때 엘리사는 이
미 출산을 한 뒤였고 엘리사가 낳은 안드로이드 아이는 세
차게 장대질을 하는 빗속에서 어디론가 사라져버린 뒤였다.
헐버트는 허탈하여 장대질을 하는 빗줄기를 맞으며 먼 들판
을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믿어지지 않는 일이었다.
그는 공연히 몸이 으실으실 떨렸다. 마침내 최후의 안드로
이드를 사살하는 데는 성공했으나 안드로이드가 출산한 어
린 안드로이드를 놓친 것이다. 그는 죽은 모체에서 태어난
것으로 보아 장차 인류에게 커다란 위협이 될것이 분명했
다.
(이 시체를 끌고가면 태아까지 찾으라는 지시를 내릴 거
야...)
안드로이드 엘리사의 시체를 그대로 끌고갈 수는 없었다.
엘리사의 시체를 그대로 끌고간다면 그녀가 임신했던 사실
도 자유시민연합 지도부에 알려질 것이고 자유시민연합 지
도부로부터 보상금을 탈수도 없게 될 것이다.
어디 그것뿐인가.
자유시민연합 지도부로부터 어린 안드로이드 사냥에 나서라
는 명령을 받게 될것이다. 그는 이제 은퇴하고 싶었다. 그가
안드로이드 사냥에 나선지가 벌써 10년이었다.
그동안 얼마나 많은 안드로이드를 사살해 왔는가. 그의 손
에 죽은 안드로이드만 해도 수천명은 족히 되었을 것이다.
안드로이드 군인들, 민간인들, 남자와 여자
언젠가는 안드로이드 처녀를 겁탈한 일도 있었다. 그것은
합법적인 일이었기 때문에 양심의 가책을 받을 필요는 전혀
없었다.
아마 아프리카의 자이레 콩고분지 어디쯤 되었을 터였다.
헐버트는 전혀 무장을 하지 않은 안드로이드족을 발견했다.
안드로이드족은 사냥꾼들에게 쫓기는 것에 지쳤는지 메마른
계곡에 옹기종기 모여앉아 있었다. 모두 해서 17명쯤 되었
다.
그는 지프에서 다연발 레이저건을 꺼내 안드로이드족을 닥
치는대로 사살했다. 그가 사용하는 레이저건은 안드로이드
전문살상용으로 제작된 것이었다.
안드로이드들은 처절한 비명을 지르며 죽어갔다. 불과 1분
도 안되는 짧은 순간의 일이었다.
그는 확인사살을 하기 위해 죽어나자뻐진 안드로이드들에게
다가갔다.
"으음 "
그때 그는 피를 흘리며 죽어가고 있는 안드로이드 처녀를
발견했다. 레이저건의 탄환이 왼쪽 어깨를 관통하여 녹색의
선혈이 안드로이드의 어깨에서 분수처럼 뿜어지고 있었다.
안드로이드들의 피는 인간과 달리 녹색이었다.
아름다운 처녀였다. 나이가 얼마 안되어 보이는데도 가슴이
둥글게 솟아 있었고 허벅지가 통통하게 살이 쩌 있었다.
그러나 어깨의 상처로 인해 고통스러워하고 있었다.
안드로이드 사냥꾼 헐버트는 옷을 벗고 안드로이드에게 달
려들었다. 안드로이드는 인간이 아니었다. 자유시민연합의
법률은 오히려 안드로이드를 고통스럽게 하는 일들을 격려
하고 부추기고 있었다.
안드로이드를 죽이거나 겁탈을 해도 그것은 기계를 부수거
나 가지고 노는 일에 불과한 것이다. 원래 안드로이드는 인
간을 위해 만들어진 것이 아닌가.
안드로이드는 인간의 이기(利器)일 뿐이었다.
안드로이드를 겁탈한 것은 그 때가 처음이었다. 그는 매우
만족했다. 안드로이드를 겁탈하는 것은 인간의 야만성을 충
족시키는 것이었기에 그는 더욱 만족했던 것이다.
안드로이드 여자는 촉감이 인간보다 더욱 부드럽고 탄력이
있었다. 살결은 한없이 매끄러웠다.
쏴아아아
빗발이 더욱 굵어지고 있었다.
헐버트는 빗발을 피하기 위해 동굴로 느릿느릿 걸음을 떼어
놓았다. 동굴은 칠흑처럼 어두웠다. 그는 손으로 벽을 더듬
어 안으로 들어가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는 몇발자국 안으로 들어갈 수가 없었다. 무엇인
가 섬뜩한 것이 동굴안에 있었다. 그것이 무엇인지 알 수
없었으나 한순간 숨이 막힐 듯한 공포가 뒤통수를 엄습해
왔다.
아
그때 그는 캄캄한 어둠 속에서 어린 안드로이드를 보았다.
아니, 핏빛으로 물든 저주의 눈, 그 눈을 보고 헐버트는 몸
을 떨었으나 비명을 지를 새도 없이 나동그라지고 말았다.
핏덩어리 어린 안드로이드의 손에서 푸른 섬광이 번쩍한 순
간 레이저 광선이 그의 목을 꿰뚫은 것이다.
그가 두고 갔던 레이저건이었다.
쏴아아아
동굴밖에는 여전히 세찬 빗발이 장대질을 하고 있었다. 그
러나 캄캄한 동굴 깊숙한 곳에서는 갓 태어난 안드로이드
태아가 피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제 5 장 초광속 우주선
초광속(超光速) 우주선 엘리사호는 빛의 속도보다 두 배나
빠른 우주선이었다. 이 우주선은 인간의 육안으로는 식별이
불가능할 정도의 빠른 속도로 지구궤도를 향해 날아오고 있
었다. A. D 4605년. 로봇인간인 안드로이드가 지구에서 멸
종된지 거의 600년이 가까웠을 때였다.
초광속 우주선에서 지구까지의 거리는 약 0.5광년(光年: 광
년은 빛이 1년동안에 갈 수 있는 거리. 빛의 속도는 1초에
약 30만km)이나 되었다.
엘리사호의 브리지에 설치되어 있는 각종 디스 플레이 스크
린과 모니터, 에너지파 추적장치(일종의 레이더)와 전자파
추적장치 시스템에는 우주의 무수한 항성(恒星)과 행성(行
星), 그리고 그들의 위성(衛星)들이 하나의 광점(光點)처럼
명멸하고 있었다. 물론 우주선 엘리사호에서 수억 광년 떨
어져 있는 크고 작은 천체들은 전자파와 에너지파 추적장치
시스템에도 나타나지 않고 있었다.
암흑과 고요.
우주는 얼핏 그렇게 보였다. 그러나 인간들이 관측할 수 있
는 가장 먼 거리의 은하계, 지구에서 가장 멀리 떨어진 것
으로 여겨지는 퀘이사(準恒星狀天體) 중에는 150억 광년이
나 떨어진 것도 있고, 그 공간에는 블랙홀을 비롯해 우주를
밝히는 변광성(變光星), 각종 은하군(銀河群: 우리가 관측하
는 은하수 외에도 우주에는 수많은 은하수가 존재하고 있
다)이 분포되어 있었다. 새롭게 태어나는 별(新星)을 비롯해
태양보다 더욱 밝은 별, 별들을 순식간에 없애버리는 펄서
(Pulsar: 별을 전파 펄스로 증발시키는 중성자별), 암흑성운,
푸른 성운, 붉은 성운 등 우주는 언제나 살아서 움직이고
있었다. 펄서는 펄스(pulse: 지속시간이 매우 짧은 전파)를
발사하는 별이다.
초광속 우주선 엘리사호는 지금 암흑성운을 지나고 있는 중
이었다. 함장실의 선창(船窓: 우주선의 창)으로 보이는 것은
장막을 친 것 같은 어둠과 그 어둠속에서 명멸하고 있는 수
많은 별들뿐이었다.
초광속 우주선 엘리사호의 함장 리디아는 어둠속에서 명멸
하는 무수한 별들을 응시하고 있었다. 우주는 신비롭고 광
막했다. 빛의 속도보다 두 배나 빠르게 10년동안 막막한 우
주공간을 달렸으나 우주는 여전히 끝도없이 펼쳐져 있었다.
그때 쿵하고 선체가 무엇에 부딪치는 것같은 충격이 느껴졌
다. 우주에서는 때때로 예기치 못한 일들이 많이 발생한다.
우주선이 소행성지대(수많은 운석이 밀집해 있는 지대)를
지날 때는 무수한 소행성들이 우주선에 날아와 부딪치기도
한다. 사실 소행성이라고 부르기가 어색할 정도로 운석(隕
石: 우주의 먼지와 얼음으로 이루어진 바위)은 대개 지름
1km미만의 것들이었으나 워낙 빽빽하게 밀집되어 있어서
거대한 우주선이 일일이 피해서 지나갈 수가 없었다. 우주
선은 소행성과의 충돌을 염두에 두고 제작되어 충돌할 때의
충격을 흡수하는 장치까지 설치되어 있었다.
웬만한 충돌은 우주선에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못했다.
우주선이 쿵 하고 흔들릴 정도의 충격이 있었다는 것은 심
상치 않은 일이 발생했다는 증거였다.
리디아 함장은 디스 플레이 스크린으로 조종실을 살폈다.
조종실에는 여자 클론(Clon: 복제생명) 승무원들이 수많은
계기를 바쁘게 조작하고 있었다. 어쩐지 조종실도 어수선해
보였다.
그때 또 다시 선체가 쿵 하고 흔들리면서 리디아 함장은 바
닥으로 나뒹굴었다. 이번엔 충격이 더욱 컸다.
"상황실! 상황실! 긴급상황 발생!"
갑자기 전자파 추적장치 시스템과 연결되어 있는 모니터에
서 긴급상황을 알리는 경고등이 켜지면서 초광속 우주선 엘
리사호를 호위하는 우주 전투기 편대에서 절박한 보고가 들
어왔다. 리디아 함장은 벌떡 일어나서 상황실과 연결된 디
스 플레이 스크린을 켰다. 디스 플레이 스크린에는 엘리사
호를 좌우에서 호위하는 우주 전투기 편대의 모습이 나타나
있었다.
"함장실이다! 무슨 일인가?"
"함장님! 무엇인가 전투기 편대를 잡아당기고 있습니다!"
전투기 조종사의 목소리는 공포에 질려 있었다.
"전투기 편대를 잡아당기다니? 우주에 유령이라도 있다는
말인가?"
"뒤에서 거대한 흡인력이 작용하고 있습니다!"
그때 엘리사호의 조종실에서도 다급한 보고가 들어왔다.
"함장님! 우주선의 주동력장치가 이상이 생겼습니다! 우주선
이 뒤로 가고 있어요!"
"우주선이 뒤로 가다니 무슨 소리야??"
"지금 우리 우주선은 초광속으로 뒤로 가고 있습니다!"
"말도 안되는 소리! 주동력이 가동되지 않고 있나?"
"가동되고 있어요! 그렇지만 무엇인가 우리 우주선을 잡아
당기고 있는 것같습니다!"
"중력(重力)이 작용하고 있나?"
"아무래도 활동은하인 것같습니다!"
활동은하(活動銀河)는 은하계가 움직이는 현상을 말하는 것
이었다. 은하 중에는 은하계가 태어나서 사라질 때까지 방
출하는 에너지를 한순간에 방출하는 은하계가 있는데 이 은
하를 활동은하라고 불렀다.
은하계의 중심핵에서 전자가 초고속으로 분출되면 자기장
(磁氣場)이 형성되고, 이 자기장에 전자가 포착되면 강렬한
빛이나 전파가 복사되는 것이다.
이 은하계에서는 별이 폭발적으로 생성된다. 이 곳에는 블
랙홀이 존재하고 있으며 우주선이 은하계의 중심핵으로 빠
지면 거대한 블랙홀이 순식간에 삼켜버려 우주에서 사라지
고 마는 것이다.
"활동은하의 종류는 무엇인가?"
"중심에 거대한 가스층이 소용돌이를 일으키고 있습니다."
모니터2를 관장하는 클론 승무원이 떨리는 목소리로 대답했
다.
"거대한 가스층?"
클론은 영양 생식에 의해 모체로부터 분리 증식한 식물군
(植物群)을 말한다. 복제인간을 의미하는데 엘리사호의 승무
원들은 모두 목소리와 얼굴이 똑같은 여자 클론들이었다.
"네! 가스층이 강력한 에너지로 엘리사호를 끌어들이고 있
습니다."
"그렇다면 블랙홀이잖아? 전자파의 데이터를 분석하라!"
리디아 함장은 모니터를 관장하는 클론 승무원에게 명령을
내렸다.
"잠깐만 기다리십시오."
모니터2를 관장하는 클론 승무원이 활동은하에서 방출하는
전자파를 분석하기 시작했다. 그녀는 순식간에 전자파의 데
이터를 분석했다.
"함장님. 예상했던대로 거대한 블랙홀이 존재하고 있습니
다."
"알았다!"
리디아 함장은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초광속 우주선 엘리
사호는 현재 상태라면 활동은하의 중심으로 끌려들어갈 것
이고 결국은 블랙홀로 빠져 흔적도 없이 사라질 것이다.
"엘리사호의 전 승무원에게 명령한다!"
리디아 함장은 컴퓨터로 엘리사의 전승무원에게 명령을 내
렸다.
"현재 우리가 승선하고 있는 엘리사호의 후방에 거대한 활
동은하가 나타났다. 우리 엘리사호는 초광속으로 지구를 향
해 날아가고 있었으나 강력한 활동은하의 방해를 받고 있
다. 주동력장치가 아무런 소용이 없다는 것은 제군들도 이
미 알고 있을 것이다! 이 활동은하의 전자파의 데이터를 분
석한 결과 거대한 블랙홀이 중심핵에 존재하고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이 상태라면 우리는 한 시간 이내에 블랙홀로 빨
려들어가 우주의 먼지로 사라지게 될것이다! 전 승무원은
비상대기 상태로 함장의 명령을 기다려라! 이상!"
리디아 함장은 승무원들이 웅성거리는 모습을 머릿속에 떠
올리면서 명령을 마쳤다. 그녀들은 리디아 함장의 명령이
떨어지자 얼굴이 사색이 되어 몸을 떨었다.
엘리사호가 블랙홀로 빨려 들어가면 웜홀(worm holl: 블랙
홀과 화이트홀의 중간)로 빠져나올 수도 있다. 그러나 암흑
의 소용돌이에 휘말리면 아무리 견고하게 제작된 엘리사호
라고 해도 웜홀로 빠져 나오기 전에 순식간에 폭발하여 우
주의 먼지가 되어 사라질 것이다.
"엘리사호를 호위하는 전투기들은 즉시 엘리사호로 귀환하
라! 이상!"
"함장님! 귀환할 수 없습니다!"
"그러면 최대한으로 속도를 내서 탈출하라!"
"현재 최고 속도를 내고 있는데도 뒤로 끌려가고 있습니
다!"
"제기랄!"
리디아 함장은 주먹으로 탁자를 후려쳤다. 상황은 점점 절
망적으로 변해가고 있었다.
"항법장교!"
리디아 함장은 다급한 목소리로 항법장교를 불렀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활동은하에서 벗어나야 했다.
블랙홀을 둘러싸고 있는 가스원반은 섭씨 1천만도에서 1억
도의 고온이다. 블랙홀은 광속으로도 빠져나올 수가 없었
다.
"옛서!"
항법장교가 즉시 디스 플레이 스크린에 모습을 나타냈다.
"항로(航路)를 바꿀수 있는가?"
"현재의 상태로는 불가능합니다."
리디아 함장은 절망감을 느꼈다. 활동은하의 블랙홀이 이토
록 어마어마한 흡인력을 갖고 있다니.
지구에서 21광년(光年: 빛이 21년동안 갈 수 있는 거리)이
나 떨어진 은하계에서 날아온 엘리사호의 임무가 수포로 돌
아갈 위기에 처해 있었다. 엘리사호의 모든 승무원들도 목
숨이 위태로웠다.
"갑판장! 블랙홀을 탈출하는 방법을 모색하라!"
갑판장이 디스 플레이 스크린에 모습을 나타냈다.
"함장님! 방법은 은하탐사선을 이용하는 것뿐입니다."
"은하탐사선?"
"네!"
"은하탐사선은 승선할 수 있는 인원이 3명밖에 안된다!"
"어쩔 수 없어요! 불가항력입니다."
"그러면 우리 모두 여기서 최후를 마쳐야 하는가?"
"함장님! 어차피 우리는 클론예요. 우리가 우주에서 죽는다
고 해도 임무는 완수할 수 있을 것입니다. 역추진 로켓을
이용하면 탈출할 수 있을 거예요."
"좋다! 우리는 이미 죽음을 각오하고 엘리사호에 승선했다.
우리의 희망인 '헬렌'을 은하탐사선으로 옮겨 싣고 은하탐
사선을 활동은하에서 탈출시킨다!"
리디아 함장이 비장하게 말했다.
"함장님! 저희들을 구해 주세요!"
"함장님!"
그때 우주 전투기 편대에서 다급한 구조요청이 들어왔다.
리디아 함장은 디스 플레이 스크린으로 전투기 편대를 살피
다가 비통한 심정이 되었다. 우주를 누비던 전투기 편대가
바람에 날리는 휴지조각처럼 소용돌이치다가 가스원반 안으
로 사라지고 있었다.
리디아 함장은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쥐었다. 우주의 먼지
로 사라지는 전투기 편대 조종사들의 처절한 비명소리가 귓
전을 때리고 있었다. 그러나 언제까지나 슬픔에 잠겨있을
수는 없었다. 우주 전투기가 순식간에 흔적도 없이 사라졌
어도 대책을 세워야 한다.
"은하탐사선!"
"옛서!"
"은하탐사선은 5번 활주로에 대기하라!"
"옛서!"
리디아 함장의 명령에 은하탐사선 제인 선장이 대답을 했
다. 리디아 함장은 다시 승무원들에게 명령을 내리기 시작
했다. 시간이 촉박했다.
"전승무원에게 명령을 내린다. 우리의 우주선 엘리사호는
활동은하의 중심에 있는 블랙홀로 빠른 속도로 빨려 들어가
고 있다. 엘리사호는 초광속 우주선이지만 도저히 블랙홀의
흡인력에서 빠져나올 수가 없다! 이에 우리는 은하탐사선을
탈출시켜 우리의 임무를 완수하게 하고 우리는 엘리사호와
함께 클론으로서의 최후를 마치기로 한다!"
리디아 함장은 잠시 침묵을 지켰다. 죽음을 목전에 둔 여자
클론 승무원들의 슬픈 얼굴들이 눈앞에 선하게 떠오르고 있
었다.
리디아 함장은 다시 명령을 내리기 시작했다. 리디아 함장
의 목소리가 표나게 떨리고 있었다.
"우리는 안드로이드 클론이다! 불행하게도 우리는 복제는
할 수 있으나 스스로 종족을 번식시킬 수가 없었다. 이에
우리는 은하계의 가장 고등동물인 인간과 결합하여 우리 종
족을 번식시키고자 하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는 클
론 중에서 가장 우수한 클론인 헬렌을 지구로 보내 지구인
과 결합시키려고 했으나 활동은하로 인해 임무를 완수하지
못하게 된 것이다. 그러나 방법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은하탐사선을 역추진 로켓으로 활동은하에서 탈출시킨다면
우리 모두가 죽게 되기는 하지만 우리의 임무를 은하탐사선
으로 하여금 수행하게 할 수 있는 것이다! 역추진 로켓은
순간 속도를 광속10까지 낼수 있다!"
리디아 함장의 목소리는 비장했다. 초광속 우주선 엘리사호
의 승무원들은 숨소리까지 죽이고 부동자세로 리디아 함장
의 연설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제군들!"
리디아 함장의 목소리가 가늘게 떨렸다.
"그 동안의 협조와 노고에 감사한다!"
리디아 함장의 두 눈에서 맑은 물기가 흘러내리기 시작했
다. 리디아 함장의 연설을 듣던 엘리사호의 승무원들, 여자
클론들도 감정에 북받쳐서 어깨를 들먹이며 흐느껴 울기 시
작했다.
"은하탐사선!"
"옛서!"
"은하탐사선은 즉시 역추진 로켓이 있는 제5번 출구로 이동
하라! 또한 은하탐사선 팀은 제인 선장을 제외한 두 명의
승무원은 하선하고 헬렌팀이 탈 수 있도록 조치하라!"
"옛서!"
"헬렌팀!"
"옛서!"
여자 클론 헬렌을 관장하는 팀이 대답을 했다. 여자 클론
헬렌은 전나(全裸)로 특수 세라믹합금 유리로 제작된 상자
에 들어 있었다.
"헬렌을 은하탐사선으로 옮기라! 시간은 5분!"
"옛서!"
"아울러 헬렌팀 중에서 수디아 박사와 나타샤 박사는 은하
탐사선에 승선하여 임무를 계속 수행하라!"
"옛서!"
리디아 함장의 명령에 헬렌팀이 기민하게 유리상자를 은하
탐사선으로 이동시키기 시작했다.
그때 모니터2를 관장하는 클론 승무원이 또 다시 다급한 음
성을 토해냈다.
"함장님! 현재 활동은하의 블랙홀까지의 거리가 30분밖에
남지 않았습니다. 더 이상 시간을 끌면 역추진 로켓으로도
은하탐사선이 탈출을 하지 못합니다!"
"알았다!"
리디아 함장은 모니터2를 관장하는 클론 승무원의 보고에
디스 플레이 스크린을 다시 응시했다. 다행히 헬렌은 은하
탐사선으로 옮겨져 있었고 은하탐사선은 이미 역추진 로켓
이 설치되어 있는 5번 출구 발사대에 도착해 도킹을 마친
상태였다.
"전동력(全動力)을 5번 출구의 로켓 발사대로 이동시킬 준
비를 하라! 카운트다운을 시작하면 모든 동력을 일시에 5번
출구의 발사대로 보낸다! 알았나?"
"옛서!"
"은하탐사선!"
"옛서!"
"발사준비 완료되었나?"
"완료되었습니다."
"좋다! 시간이 없으니 바로 카운트다운을 시작한다. 카운트
다운은 트리에서 시작한다!"
리디아 함장의 명령은 간결하면서도 명확했다. 그녀의 명령
에 의해 초광속 우주선 엘리사호의 클론 승무원들은 일사불
란하게 모든 동력을 은하탐사선 발사대로 보낼 준비를 했
다. 그것은 엘리사호의 최후를 의미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선택은 없었다. 어차피 엘리사호는 거대한 블랙홀에 빨려들
어가 최후를 마쳐야 하는 것이다.
"준비 !"
리디아 함장은 카운트다운을 시작하기 전에 잠시 망설였다.
엘리사호의 모든 승무원들에게 마음의 준비를 할 수 있는
시간을 주기 위해서였다.
"카운트다운 시작!"
리디아 함장이 마침내 최후의 명령을 내렸다. 그러자 엘리
사호의 메인 컴퓨터에서 카운트다운이 시작되었다.
"트리 투 "
리디아 함장은 1초, 1초 긴장된 순간이 흐르자 눈을 질끈
감았다.
"원 제로!"
메인 컴퓨터가 제로를 외치자 동력을 관할하는 승무원들이
일제히 동력 이동 버튼을 눌렀다. 그러자 엘리사호가 크게
흔들리면서 동력이 은하탐사선으로 이동되었다.
"은하탐사선 발사!"
리디아 함장이 명령을 내렸다.
"발사!"
메인 컴퓨터가 리디아 함장의 명령을 복창했다. 그와 함께
요란한 폭음이 들리면서 은하탐사선이 제5번 출구에서 발사
되는 모습이 디스 플레이 스크린으로 떠올랐다. 그러나 리
디아 함장을 비롯한 초광속 우주선 엘리사호의 승무원들은
그 모습을 구경하고 있을 수가 없었다. 은하탐사선이 발사
되는 것과 동시에 엘리사호는 모든 동력이 제로상태가 됨으
로써 엘리사호는 광속보다 더 빠른 속도로 활동은하의 중심
으로 빨려 들어가기 시작한 것이다.
(아, 이렇게 최후를 마쳐야 하다니 )
리디아 함장은 마지막으로 디스 플레이 스크린을 응시했다.
그러나 은하탐사선은 순식간에 하나의 광점으로 사라져 보
이지 않고 있었다.
그때 리디아 함장은 쾅 하고 벽으로 튕겨졌다.
초광속 우주선 엘리사호가 순식간에 가스층의 거대한 암흑
의 소용돌이로 빨려들어가 회오리치기 시작한 것이다.
"으악!"
"악!"
여자 클론들은 처절한 비명을 지르기 시작했다.
엘리사호가 소용들이 속으로 빨려들어 가자 마자 에너지 보
호막이 파괴되고, 중력(重力) 보호시스템이 파괴되는가 하
면, 회오리에 의한 압력이 발생하여 엘리사호의 거대한 선
체가 산산이 부서져 나가기 시작한 것이다.
엘리사호의 여자 클론 승무원들은 우주선의 벽으로 튕겨져
산산조각이 났다. 비명소리와 울부짖음 속에 머리통이 으깨
지고 피가 튀었다. 엘리사호의 거대하고 강력한 선체를 파
괴하는 압력이었다.
그러나 그것으로 끝난 것은 아니었다.
블랙홀의 거대한 소용돌이에 선체가 조각조각 해체되어 어
둠속으로 사라지자 그 안에 있던 클론들도 조각조각 찢어졌
다. 다음엔 불덩어리가 클론들과 우주선의 조각들을 흔적도
없이 태워버렸다.
가스원반은 가장 바깥이 섭씨 1천만도(度)였다.
그것은 불과 몇 초만에 일어난 일이었다.
초광속 우주선 엘리사호를 순식간에 삼켜버린 활동은하의
블랙홀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여전히 머나먼 우주에서
장대하게 소용돌이치고 있었다.
제 6 장 복제생명 클론
은하탐사선의 선장은 제인이었다. 그녀도 클론이었으나 엘
리사호의 선장 못지않게 가장 우수한 하이 크라스의 클론이
었다. 그녀는 은하탐사선의 디스 플레이 스크린으로 모선
(母船)인 엘리사호가 활동은하의 블랙홀로 빨려들어가 사라
지는 것을 보고 뜨거운 눈물을 흘렸다.
은하탐사선은 역추진 로켓에 의해 활동은하의 블랙홀로부터
벗어날 수는 있었으나 엘리사호가 수행하던 막중한 임무를
대신 수행해야 했다. 게다가 모선이 사라졌기 때문에 그녀
들이 떠나온 은하계로 되돌아갈 수가 없었다.
"우주는 너무나 잔인해 "
제인 선장은 슬픔에 잠겨서 처연한 목소리로 말했다.
엘리사호의 수많은 여자 클론들을 삼켜버린 활동은하가 은
하탐사선의 디스 플레이 스크린에서 점점 멀어지고 있었다.
그러나 언제까지나 슬픔에 잠겨있을 수는 없었다.
제인 선장은 역추진 로켓에 의해 광속보다 10배나 빠른 속
도로 달리던 은하탐사선의 속도를 광속2로 맞추었다.
이제는 지구를 향해 항해를 계속해야 했다. 앞으로 어떤 일
이 닥칠지는 알 수 없었다. 그러나 어떠한 일이 있더라도
임무를 완수하리라고 생각했다.
다행히 유리상자 속의 헬렌은 편안해 보였다. 그녀가 아무
손상을 입지 않은 것이 불행중 다행이었다.
"지구까지는 얼마나 남았지?"
제인 선장이 옆에 있던 수디아 박사에게 물었다.
"현재의 속도라면 3개월이면 충분합니다."
수디아 박사가 대답했다.
"3개월 동안 아무 일이 없어야 할텐데 "
제인 선장이 낮게 중얼거렸다. 제인 선장의 말에 다른 여자
클론들, 수디아 박사와 나타샤 박사가 동의한다는 듯이 고
개를 끄덕거렸다.
그들은 은하탐사선의 선창으로 밖을 내다보고 있었다. 밖에
는 아름다운 은하가 흐르고 있었다. 수많은 별들이 은하계
를 이루고 아름답게 반짝이고 있었다. 그러나 그들의 가슴
은 바윗덩어리를 얹어놓은 것처럼 무겁기 짝이 없었다.
유러너스(Ouranos: 그리스어로 하늘) 제국 상공에 UFO(미확
인비행물체)가 나타난 것은 A. D 4605년의 일이었다. 유러
너스 제국은 그로 인해 발칵 뒤집혔다. UFO를 목격한 사람
도 수백 명이 되었고 사진을 찍은 사람도 수없이 많았다.
"은하계에 외계인이 있는 것이 틀림없어!"
"외계인들이 지구를 침략하려는 것이 아닐까?"
"가까운 은하계에는 생명체가 존재하는 행성이 없다고 하는
데 그렇다면 얼마나 멀리서 왔지?"
유러너스 제국시민들은 두 셋만 모이면 불안한 얼굴로 수군
거렸다. 유러너스 제국은 그 어느 때보다도 평화를 누리고
있었다. 안드로이드와의 전쟁이 끝난지 어언 6백년이 가까
워지고 있었다. 그 동안 봉선화 혜성의 지구 침략, 지구상
에서 유일한 적인 사피언스 그라운드(Sapiens Ground: 벌판
의 지구인)와의 60년동안이나 계속된 산소전쟁에도 불구하
고 그들은 과학문명의 혜택과 풍요를 누리며 살았었다.
물론 사피언스 그라운드인들은 아직도 그들에게 적대적이었
고 봉선화 혜성이 조만간 또 다시 지구와 충돌할 위험성이
있기는 했다. 그러나 제국정부는 사피언스 그라운드인들을
압도 할만한 군대를 가지고 있었고 봉선화 혜성의 제2차 지
구충돌은 타임머신으로 막을 예정이었다. 그러기 위해서 제
국정부는 이미 타임플랜(Time Plan: 시간탐사계획)을 짜서
실행하고 있는 상태였다.
제국시민들이 그들의 적을 사피언스 그라운드로 부르는 것
은 그들이 벌판에서 살고 있기 때문이었다. 원래는 벌판이
라는 뜻의 사피언스 필드(Field)라고 불러야 했으나 운동장
이라는 뜻인 사피언스 그라운드로 부르는 것은 운동장에 모
여 있는, 한 줌밖에 안되는 지구인이라는 의미로 비하시킨
것이었다.
유러너스 제국의 해군사관학교 4학년 생도인 이리노(李利
露) 퍼그스 생도도 UFO에 대한 소문을 들었다. 그러나 그는
UFO에 대해 무심했다. UFO는 이미 2천6백년 전부터 지구인
들의 비상한 관심을 끌어 모았었다. 그러나 한 번도 UFO에
대한 정체가 정확하게 밝혀진 일이 없었다.
이리노 생도는 UFO보다 타임플랜에 대해 더욱 관심이 많았
다. 그는 시간여행이 과연 가능하느냐 하는 점에 많은 의문
을 품고 있었다. 한때 빛보다 빠른 속도인 광속(光速)만 개
발되면 시간여행은 얼마든지 가능한 것으로 여겨졌었다. 그
러나 제국정부는 광속과 상관없이 시간여행을 성공시켰던
것이다.
물론 지금은 시험단계의 수준에 지나지 않았다.
이리노 생도는 사관학교를 졸업한 뒤에 타임플랜기지에 근
무할 작정이었다. 거기서 소정의 훈련을 마친 뒤에는 시간
여행선을 타고 46억년 전의 지구를 탐사할 예정이었다. 그
랬기때문에 이리노 생도는 UFO보다 시간여행에 더욱 관심이
많았던 것이다.
그러나 운명의 물살은 그가 원하는 방향으로 흐르지 않고
있었다. A. D 4605년 11월21일 새벽 2시. 이리노 생도는 컴
퓨터 앞에 앉아서 타임플랜에 대한 공부를 하다가 문득 고
개를 들었다. 어디선가 번개가 치듯이 파란 섬광이 번쩍하
고 내리꽂히는 것과 동시에 어두운 밤하늘에 타원형의 거대
한 물체가 나타난 것이다.
아
이리노 생도는 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것은 거대한 비행접
시였다.
새벽이었다. 사방은 칠흑처럼 어두웠다. 비가 오려는 것일
까. 하늘에는 바람 한 점 없었다. 태풍전야처럼 음산한 밤
이었다. 먹구름이 하늘을 가리고 있어서 별빛도 보이지 않
았다.
이리노 생도는 처음에 번개가 치는 것을 잘못 본 것이라고
생각했었다. 비행접시 같은 물체는 눈이 잠시 착시(錯視)현
상을 일으킬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러나 타원형의 비행접시는 순식간에 이리노 생도가 거주
하고 있는 기숙사 앞으로 날아오더니 정원에 착륙했다. 소
리가 전혀 없었다. 비행접시에 엔진에서 나는 소리를 제거
하는 소음장치를 설치했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저, 정말 UFO가 존재하고 있다는 말인가?)
이리노 생도는 꿈인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책상 앞에 앉
아서 피곤하게 공부를 하다가 잠이 들었고 그런 까닭에 지
금 자신의 눈에 보이는 것은 꿈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꿈이 아니었다.
이리노 생도가 기숙사 밖으로 나가자 비행접시에서 트랩이
내려오더니 세 명의 외계인이 내렸다. 외계인들은 뜻밖에
여자들이었다. 게다가 얼굴 모습과 몸매가 지구인들과 너무
나 흡사했다. 다만 지구인들과 다른 것은 머리카락이 전혀
없다는 것이었고 옷을 입었는지 벗었는지 알 수없을 정도로
몸에 달라붙는 푸른색의 타이즈를 입고 있다는 것뿐이었다.
살결은 놀랄 정도로 투명했다.
타이즈는 풍만한 가슴을 겨우 가리고 있었다. 바지와 붙어
있는 것이었다. 그것은 옷이 아니라 특수한 인피(人皮) 같
았다.
외계인들의 어깨에는 알아볼 수 없는 기호가 찍혀 있었다.
아마 견장이거나 자기들의 바코드(인식번호)인 것 같았다.
외계인들은 복제한 것처럼 세 사람이 모두 똑같았다.
"다, 당신들은 ?"
이리노 생도는 떨리는 목소리로 그들을 향해 입을 열었다.
"우리는 먼 은하계에서 왔소."
가운데 있는 여자가 또렷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녀는 뜻밖
에 정확한 유러너스 제국의 언어를 사용하고 있었다.
"나는 은하탐사선의 선장 제인이에요!"
"그, 그런데 지구에는 무슨 일로 왔소?"
"우리는 당신에게 도움을 받으러 왔어요."
"도움? 그렇다면 제국정부에 알아보시오!"
그러자 가운데 외계인이 생긋 웃었다. 머리카락만 있었다면
지극히 아름다운 여인들이었다.
"우리는 당신의 도움을 필요로 해요."
"내 도움? 내가 당신들을 어떻게 돕는다는 말이오?"
"우리는 우리에게 필요한 사람을 찾기 위해 지구를 샅샅이
뒤졌어요. 그러나 우리가 필요로 하는 지구인은 없었어요!"
"도대체 무슨 도움을 원하는 거요? 식량이 떨어졌소? 아니
면 우주선의 에너지가 떨어졌소? 여기는 제국정부의 해군사
관학교요. 제국경찰이 오기 전에 어서 떠나시오."
"이 주위에는 우리가 블랙실드를 설치했어요. 우리의 블랙
실드는 모든것을 차단하기 때문에 당신네 정부는 조금도 눈
치채지 못할 거예요!"
외계인의 말에 이리노 생도는 눈앞이 캄캄했다.
외계인의 자신만만한 태도로 보면 블랙실드를 설치했다는
것이 사실일 것 같았다. 그러나 이리노 생도는 침착해야 한
다고 생각했다.
"나에게 어떤 도움을 바라는 것이오?"
"당신은 침대에 누워 있기만 하세요."
"침대에 누우라고?"
"당신은 완벽한 성체(成體)예요."
"성체라니 무슨 소리요?"
"우리는 클론들이에요. 클론을 복제하는 원형생명체를 성체
라고 하죠. 우리는 당신을 복제할 거예요!"
"나를 복제한다고?"
이리노 생도는 어이가 없었다. 클론들이 자신을 복제한다면
자신과 똑같은 인간들이 무수히 존재하게 되는 것이다. 어
떻게 이럴 수가 있는가. 내가 나와 똑같은 인간들을 보는
것은 얼마나 징그러운 일인가. 그것은 상상할수도 없는 일
이다. 이리노 생도는 고개를 흔들었다.
"그런 일을 저질러서는 안되오!"
"미안해요. 당신은 우리에게 선택되었어요."
제인 선장이 희미하게 웃으며 이리노 생도를 향해 투광기
(投光機)를 치켜들었다. 투광기는 커다란 랜턴 모양이었는
데 이리노 생도를 향해 강렬한 녹색 광선을 뿜었다.
이리노 생도는 녹색 광선이 자신의 전신을 감싸자 정신이
몽롱했다. 다음 순간 이리노 생도는 클론 여자들을 향해 뚜
벅뚜벅 걸어가고 있었다. 클론 여자들은 귀빈을 맞이하기라
도 하듯이 양쪽으로 갈라섰다. 이리노 생도는 망설이지 않
고 트랩으로 올라가 은하탐사선 안으로 사라졌다.
제인 선장과 다른 클론들도 이리노 생도의 뒤를 따라 은하
탐사선 안으로 사라졌다.
은하탐사선이 유러너스 제국 해군사관학교 기숙사에서 이륙
을 한 것은 불과 1분도 걸리지 않아서의 일이었다. 그러자
블랙실드를 해제했기 때문인지 유러너스 제국 대공망(對空
網)에 포착되고 말았다.
"비상! 비상! 해군사관학교 기숙사 상공에 괴물체 출현!"
유러너스 제국군에는 갑자기 긴박감이 감돌기 시작했다. 전
군(全軍)에 비상이 걸리고 지대공미사일 부대는 컴퓨터 대
공 자동방어 시스템에 의해 은하탐사선을 향해 강력한 서치
라이트를 쏘았다.
"괴물체를 향해 대공미사일 발사!"
캄캄한 하늘에 유러너스 제국에서 발사하는 서치라이트가
교차하고 대공미사일이 발사되었다. 이어서 유러너스 제국
이 자랑하는 최첨단 전투기들이 요란한 폭음을 내면서 은하
탐사선을 추격하기 시작했다. 유러너스 제국 상공은 순식간
에 수많은 서치라이트가 교차하고 대공미사일이 발사되어
어지러웠다.
은하탐사선의 제인 선장은 디스 플레이 스크린으로 유러너
스 제국 상공을 살피다가 빙긋이 웃으며 명령을 내렸다.
"광속진입 준비!"
은하탐사선이 광속으로 진입을 하면 간단하게 그들의 추격
을 벗어날 수가 있는 것이다.
"광속진입 준비 완료!"
수디아 박사가 버튼 조종 준비를 마치고 대답했다.
제인 선장은 잠시 유러너스 제국 상공에 어지럽게 교차하는
서치라이트를 살피다가 명령을 내렸다.
"광속진입!"
"광속진입!"
제인 선장의 명령에 수디아 박사가 복창을 하면서 광속진입
버튼을 눌렀다. 그러자 덜컹하는 충격이 느껴지면서 은하탐
사선이 하나의 빛이 되어 섬광처럼 빠르게 광대한 우주로
솟아올랐다.
은하탐사선이 대기권을 순식간에 돌파하고 지구에서 1억km
나 떨어진 우주공간에 솟아오른 것은 불과 6분도 걸리지 않
아서의 일이었다.
유러너스 제국의 우주 전투기들은 빛이 번쩍하는 순간에 은
하탐사선이 우주공간으로 사라져버리자 신기루를 본것처럼
얼떨떨했다. 그들은 지상의 부대와 교신을 한뒤 어두운 밤
하늘을 한참동안 수색하다가 부대로 돌아갔다.
서치라이트도 꺼지고 지대공 미사일은 헛되이 공중에서 폭
발하여 수많은 파편들을 유러너스 제국의 지상에 뿌려 놓았
다.
유러너스 제국은 다시 평온을 찾았다. 시민들은 갑자기 일
어난 한밤중의 소란에 웅성거렸으나 제국정부에서 가상 적
기의 침입에 대비한 훈련이었다고 발표하자 그렇게 믿을 수
밖에 없었다.
그러나 유러너스 제국에서 1억km가 떨어진 우주공간에서는
그날 밤 중대한 사건이 발생하고 있었다.
은하탐사선은 광대한 우주공간에 스페이스 스테이션(우주
정거장)을 설치하고 정지해 있었다.
여자 클론 헬렌이 누워 있는 침대 옆에는 유러너스 제국의
해군사관학교 생도인 이리노 생도가 발가벗은 나신으로 누
워 있었다. 은하탐사선의 승무원들은 잠시 얼이 빠진 듯한
표정으로 이리노 생도의 나신을 살피고 있었다.
처음 보는 남자의 모습이었다. 그녀들이 사는 스칼라 행성
에는 남자라고는 없었다. 그녀들을 복제한 원형의 성체가
여자였기 때문에 여자 클론의 복제만이 가능했다. 그녀들은
여자 클론에서 남자 클론을 만들어내기 위해 부단히 노력을
했으나 그녀들의 과학문명으로는 도저히 해결할 수가 없었
다.
그리하여 그녀들은 마침내 남자를 찾아서 머나먼 태양계의
행성인 지구까지 대장정에 나서게 되었던 것이다.
이리노 생도는 잘 생긴 남자였다. 근육이 울퉁불퉁하지는
않았으나 운동으로 단련된 듯 전체적으로 강인해 보였다.
머리는 짧고 얼굴은 조각처럼 단아했다.
은하탐사선의 여자 클론들은 이리노 생도의 나신을 살펴보
다가 자신도 모르게 낮게 한숨을 내쉬었다. 비록 여자 클론
들이었으나 남자의 벗은 나신을 보자 자신들도 모르게 하체
에서 야릇한 기운이 번지면서 한숨이 터져나왔던 것이다.
자신들에게는 없는, 남자의 건장한 두 다리 사이에 아메에
바 물질로 이루어진 거대한 물체가 우뚝 솟아 있었다.
(저것이 종족을 번식하게 하는 물질인가?)
여자 클론들은 넋을 잃고 감탄했다. 그것은 때대로 커지기
도 했고 작아지기도 하였다.
"자, 이제 우리의 임무를 수행하자!"
제인 선장이 고개를 흔들며 자신에게 다짐을 하듯이 말했
다. 그러자 수디아 박사와 나타샤 박사가 기다렸다는 듯이
특수 투명장갑을 끼고 이리노 생도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이리노 생도는 지금 죽은 듯이 잠들어 있었다. 그는 자신에
게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짐작조차 못하고 있었다.
"피부조직검사!"
제인 선장이 단호하게 명령을 내렸다.
제인 선장의 명령이 떨어지자 수디아 박사가 재빨리 이리노
생도의 오른쪽 팔에 주사기 모양의 전기침을 꽂았다. 컴퓨
터와 연결되어 있는 전기침이었다. 그러자 컴퓨터의 모니터
에 이리노 생도의 피부조직에서 활동을 하고 있는 세포의
모양이 그대로 드러났다. 이리노 생도의 피부조직을 구성하
고 있는 세포는 왕성하게 활동을 하고 있었다.
"피부조직세포 왕성하게 활동하고 있음."
"세포분열이 얼마나 가능한가?"
"세포분열 50회 가능함."
인간의 세포는 일반적으로 50회를 분열한다. 50회를 분열하
는 것은 50회까지 배양이 가능하다는 뜻이었다. 인간의 세
포중 암(癌) 세포만이 유일하게 모체가 죽을 때까지 분열과
배양을 계속했다. 암 치료제의 개발은 결국 암세포의 분열
과 배양을 억제하는 것이었다.
"좋다. 다음은 혈구(血球) 세포검사다!"
은하탐사선의 여자 클론들이 이리노 생도에 대해서 모든 세
포조직검사를 마친 것은 한 시간이 지난 뒤의 일이었다. 그
들은 흥분 상태에서 아메에바 물질의 세포가 어떻게 변형을
하는지 낱낱이 관찰하고 컴퓨터에 입력시켰다. 이어서 그녀
들은 몸을 변형시키는 세포를 조직내에 삽입하여 이리노 생
도를 초능력자로 만드는 작업에 돌입했다.
그것은 유전공학의 성과였다. 세포를 복제하는데 성공한 그
녀들은 원형성체보다 허약한 클론을 강하게 만들기 위해 세
포에 내구성(耐久性)을 키우는데 주력했던 것이다.
물론 세포를 재생시키는 것도 병행했다. 그리하여 여자 클
론들이었지만 그녀들은 누구보다도 강한 힘을 갖게 되었던
것이다.
은하탐사선의 여자 클론들은 지금 이리노 생도에게 그와 같
은 작업을 하고 있는 것이다.
"자기(磁氣) 투입!"
세포에 내구성을 키우는 작업이 끝나자 제인 선장의 명령이
다시 이어졌다.
"자기 투입!"
나타샤 박사가 제인 선장의 명령을 복창했다. 그러자 천장
에서 반구형(半球形)의 헬멧 같은 기구가 자동으로 내려와
이리노 생도의 머리 위에서 멎었다. 그와 함께 반구형의 기
기(機器)에서 강렬한 오렌지빛이 쏟아져 나와 이리노 생도
의 머리로 투사되었다.
이리노 생도가 몸을 꿈틀했다.
그때 이리노 생도의 머리에서 더운 김이 뿜어져 나오기 시
작했다. 그리고 이리노 생도의 얼굴이 벌겋게 상기되면서
붉은 기운이 몸 전체로 번져갔다. 그 기운은 빠르게 이리노
생도의 몸을 한 바퀴 돌아서 머리로 빠져 나갔다.
다음엔 푸른빛이었다. 푸른빛이 이리노 생도의 전신을 일주
하고 머리로 빠져 나갔다. 그러자 이리노 생도의 몸이 저절
로 허공으로 30cm나 떠오르면서 이리노 생도의 뼈마디에서
으드득거리는 소리가 났다.
환골탈태(換骨奪胎)였다.
이리노 생도의 뼈가 빠르게 변하기 시작했다.
그와 함께 이리노 생도의 살갗이 부풀어 오르면서 터져 나
가기 시작했다. 이어서 살갗이 찢어진 곳에서 빠르게 새살
이 돋아나기 시작했다. 이리노 생도의 찢어진 살갗은 녹아
서 액체가 되었다. 그리고 그것은 순식간에 증발해 버렸다.
이리노 생도의 몸에서 돋아난 새살은 유리알처럼 투명하여
내장과 혈관이 세세하게 드러나 있었다.
"음 "
제인 선장이 낮게 신음을 삼켰다.
이리노 생도의 몸에서 푸른빛이 서서히 사라지고 휘황찬란
한 금빛 광채가 뿜어지고 있었다. 자기의 에너지때문이었
다.
우주의 생성에는 자기장(磁氣場)이 필수적으로 형성된다.
생명의 진화도 광합성에 의한 산소 배출과 자기장에 의한
에너지가 중대한 영향을 미친다. 그러므로 인간의 생명도
자기장의 영향을 강하게 받는 것이다.
자기장이 어떤 영향을 끼치느냐에 따라 인체(人體)도 세포
조직이 변화를 일으키곤 하였다. 클론들이 이리노 생도를
초능력인간으로 만들고 있는 것도 우주 생성의 원리인 자기
장을 이용한 것이었다.
이리노 생도의 몸에서 찬란한 금빛이 모두 사라진 것은 다
시 한 시간이 지났을 때였다. 그와 함께 이리노 생도의 투
명한 몸이 원래의 살빛을 회복했다.
"됐어!"
제인 선장의 얼굴에 흡족한 미소가 떠올랐다. 이리노 생도
는 이로써 평범한 인간들이 감히 생각할 수도 없는 초능력
인간으로 탈바꿈하게 된 것이다. 그의 세포조직은 강력한
자기장(磁氣場)에 둘러싸여 보호받게 되었고, 세포가 분열
과 재생을 계속하게 되어 신체가 불에 타거나 조각조각 해
체되기 전에는 불사(不死)의 몸이 된 것이다.
그러나 이리노 생도는 그 사실을 전혀 알지 못하였다.
이리노 생도는 지금 의식불명의 상태였다. 그는 깊은 잠에
빠져 있었다.
이리노 생도가 의식을 회복한 것은 꼬박 세 시간이 지났을
때였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몸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전혀
알지 못했다. 그가 몽롱한 상태에서 눈을 뜨고 진찰대에 일
어나 앉자 눈앞에 낯선 여자가 눈을 감고 단정하게 앉아 있
었다.
"두 손을 앞으로 뻗어요."
누군가 낮고 조용하게 말했다. 명령조가 아닌데도 이리노
생도는 두 손을 앞으로 뻗었다. 그러자 앞에 앉아있던 여자
와 손바닥이 닿았다.
"당신들은 이제 합체를 하는 거예요."
누군가 다시 말했다. 여자의 목소리였다.
"다시 말하면 두 사람은 사랑을 하는 거예요. 영적(靈的)
사랑, 육체적인 사랑 "
여자의 목소리는 달콤하고 나긋거리기까지 하였다.
이리노 생도의 얼굴이 서서히 붉어지고 여자 클론 헬렌의
얼굴도 홍조를 띄어갔다.
이리노 생도는 한 여자를 보고 있었다. 이상한 일이었다.
어떻게 되어서 그 여자를 만났는지는 전혀 기억이 없었다.
여자는 하얀 나삼(羅衫)을 걸치고 있었다. 투명한 옷이었
다. 그 옷은 여자의 젖빛 속살을 은은하게 내비치고 있었
다.
이리노 생도는 조심스럽게 여자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여자가 이리노 생도를 향해 생긋 눈웃음을 쳤다. 이리노 생
도는 여자의 눈웃음에 전신이 녹아내리는 것 같았다.
석양무렵이었다. 해가 설핏이 기울고 있었다. 명주실처럼
보드라운 햇살이 사선으로 비껴들고 멀리 강변에서는 포플
라 잎새들이 석양빛을 받아 금빛으로 살랑거리고 있었다.
화창한 날씨였다. 가까운 구릉에는 들꽃이 난만하게 피어
있었다. 여자가 치마자락을 끌며 이리노 생도에게 가까이
다가왔다.
"이름이 "
이리노 생도가 먼저 입술을 열었다.
"헬렌 "
헬렌이 입술을 달싹거려 대답했다. 복숭아꽃처럼 붉고 예쁜
입술이었다.
"자기는?"
이번엔 헬렌이 물었다. 헬렌은 소녀인지 성숙한 여인인지
얼핏 분간이 되지 않았다. 얼굴에서도 앳된 모습이 보이는
가하면 농염하게 무르익은 여인의 체취가 풍기기도 했다.
"이리노!"
"예쁜 이름이네."
여자의 목소리가 은방울을 굴리는 것 같았다.
"자기 이름도 예뻐."
그렇게 말하면서 이리노 생도는 헬렌의 가슴께를 눈으로 더
듬었다. 속살이 투명하게 비치는 옷을 입은 탓에 헬렌의 봉
긋한 젖가슴이 그대로 드러나 있었다.
"왜 그래?"
헬렌이 이리노 생도를 향해 물었다.
"가슴이 예쁜 것 같애 "
"애걔!"
헬렌이 고개를 살짝 숙였다. 이리노 생도는 헬렌의 그러한
교태에 자신도 모르게 가슴이 울렁거렸다.
"만지고 싶어."
"뭘?"
"네 가슴. 네 가슴에서 흐르는 유액을 마시고 싶어."
"부끄러워."
"그럼 내가 먼저 벗을까?"
이리노 생도는 어떻게 그런 용기가 생겼는지 알 수 없었다.
처음 보는 헬렌이 마치 오랜 연인이기나 하듯이 거침없이
말하고 있었다.
"정말?"
헬렌이 얼굴을 들고 눈웃음을 치며 물었다.
"정말이야. 대신 너도 벗는 거야?"
"응."
이리노 생도는 헬렌 앞에서 상의를 하나하나 벗기 시작했
다. 헬렌은 부끄러운 듯이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있었
다. 그러나 손가락 사이로 이리노 생도가 옷을 벗는 것을
훔쳐보고 있었다.
"그, 그것도 벗어야지 "
이리노 생도가 속옷 하나를 남겨놓고 나신이 되자 헬렌이
얼굴을 붉히며 더듬더듬 말했다.
이리노 생도는 싱긋 웃었다. 두 손가락 사이로 눈을 가리고
자신을 훔쳐보는 헬렌이 사랑스럽기 짝이 없었다.
"알았어."
이리노 생도는 재빨리 남은 옷을 벗어 던졌다. 그러자 건강
하고 단단한 이리노 생도의 구리빛 육체가 드러났다. 태초
의 원시인 같은 모습이었다.
"이젠 네 차례야."
이리노 생도가 헬렌을 보며 말했다. 그러나 이리노 생도의
그 말은 필요없는 말이었다. 헬렌은 이리노 생도가 그 말을
하기도 전에 벌써 하늘거리는 나삼의 어깨끈을 밀치고 있었
다.
매미 날개같은 옷자락이었다.
나삼은 헬렌이 살짝 밀치기만 했는데도 헬렌의 어깨에서 미
끄럼을 타듯이 어깨에서 허리로, 허리에서 둔부로, 둔부에
서 종아리로 여체의 신비한 곡선을 따라 스르르 흘러 내려
갔다.
그러자 속에 아무 것도 걸치지 않은 헬렌의 젖빛 속살이 요
연(瞭然)하게 드러났다.
이리노 생도는 가슴이 쿵쿵 뛰었다.
아름다웠다.
아니 눈이 시리도록 부신 헬렌의 육체였다. 어쩌면 저렇게
아름다운 육신이 있을까. 신(神)이 조각한 육체라고 해도
저토록 아름다울 수가 있을까.
살결은 젖빛으로 뽀얗게 희었다. 가슴에 봉긋하게 솟아있는
두 개의 젖무덤은 과육처럼 탐스러웠고 허리는 바람에 살랑
거리는 버들가지처럼 가늘면서도 요요(妖妖)다.
둔부는 생명을 잉태하는 곳이었다. 생명을 낳을 수 있도록
풍만했고 삼각분기점에서 갈라진 두 다리는 젖과 꿀이 흐르
는 대지를 힘차게 디디고 우주를 떠받치고 있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아름다운 것은 조화(調和)였다. 그녀의
육체는 한 점의 부조화도 없이 완벽하게 조화를 이루고 있
었다.
"왜 그렇게 보는 거야?"
헬렌이 이리노 생도를 향해 물었다.
"아름다워, 너무나 "
헬렌은 그 말에 생긋 웃기만 하고 두 팔을 벌렸다. 이리노
생도는 뚜벅뚜벅 걸어가 헬렌을 힘껏 껴안았다. 헬렌의 몸
에서 향긋한 젖냄새가 풍겼다.
헬렌이 이리노 생도에게 입술을 부딪쳐 왔다. 꽃잎처럼 부
드러운 입술이었다.
이리노 생도는 눈을 질끈 감았다.
헬렌의 입술이 이리노 생도의 입술을 스치고 지나가자 황홀
한 전율이 전신으로 번져갔다.
가슴과 가슴이 밀착되었다. 이리노 생도의 가슴이 헬렌의
가슴을 압박하자 고무공같은 탄력과 뭉클한 촉감이 느껴졌
다. 이리노 생도는 달콤한 유액이 목으로 넘어가는 것같은
황홀한 전율을 느꼈다.
제인 선장과 수디아 박사, 그리고 나타샤 박사는 이리노 생
도와 여자 클론 헬렌이 손바닥을 마주대고 사랑의 행위를
나누는 것을 지켜보면서 만족감에 사로잡혔다.
두 사람은 손바닥만을 마주대고서도 충분히 엑스터시
(Ecstasy: 歡喜, 또는 몰아지경)에 빠지고 있었다. 이리노
생도와 여자 클론 헬렌은 육체와 육체를 접촉하지 않고서도
충분히 몰아의 경지에 빠질 수 있는 가상의 섹스를 나누고
있는 것이다.
사이버네틱섹스(Cybernetic Sex: 가상공간에서의 섹스)였
다.
"성공이지?"
제인 선장이 나타샤 박사에게 물었다.
"성공예요."
나타샤 박사의 얼굴도 붉게 홍조를 띄고 있었다. 컴퓨터 모
니터에는 이리노 생도와 여자 클론 헬렌이 초원에서 사랑의
행위를 나누고 있는 모습이 영화처럼 떠오르고 있었다. 컴
퓨터 프로그램에 의해 이리노 생도와 여자 클론 헬렌은 성
적 감정까지 조종되고 있는 것이다.
두 손바닥을 마주대고 있는 이리노 생도의 얼굴은 어느 사
이에 땀으로 젖었고 여자 클론 헬렌은 입을 반쯤 벌리고 신
음을 내뱉고 있었다.
격렬한 사랑이었다.
시간이 흐를수록 여자 클론 헬렌의 신음소리가 잦아졌고 이
리노 생도도 거친 숨결을 토해내고 있었다.
제인 선장은 자신도 모르게 하체가 수축되는 것같아 한숨을
삼켰다. 두 사람의 감정 상태가 제인 선장에게도 전이(轉
移)되고 있었다.
이리노 생도와 여자 클론 헬렌은 이따금 몸을 움찔움찔 떨
어 그들의 행위가 절정으로 치닫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
다.
수디아 박사도 낮게 한숨을 내쉬고 있었다.
"우리는 잠시 쉴까?"
제인 선장이 두 사람을 돌아보면서 말했다.
"그게 좋겠어요. 이들의 사랑은 쉽게 끝날 것같지 않아요."
수디아 박사가 대답했다.
은하탐사선의 클론들은 조종실로 들어가서 의자에 앉았다.
이리노 생도와 여자 클론 헬렌이 사랑의 행위를 마치면 그
들을 지구로 돌려보낼 예정이었다.
이리노 생도는 초능력인간이 되었고 헬렌은 슈퍼 클론이었
다. 그들이 앞으로 지구의 새로운 역사를 개척해 나갈 것이
다.
세 사람은 의자에 나란히 앉아서 각기 생각에 잠기기 시작
했다.
이리노 생도가 잠에서 깨어난 것은 날이 훤하게 밝아오고
있을 때였다. 그는 책상에 엎드려 자고 있다가 창문이 부옇
게 밝아오는 바람에 눈을 떴다.
몸이 의외로 상쾌했다. 그러나 지난 밤 무슨 일이 있었는지
이리노 생도는 전혀 기억하지 못했다. 그는 잠결인지 꿈결
인지 UFO를 본 것을 희미하게 기억했으나 그것뿐이었다. 은
하탐사선이나 여자 클론 헬렌에 대해서는 단 한 점의 기억
도 없었다.
(내가 책상에 앉아서 잠을 잤군 )
이리노 생도는 기지개를 늘어지게 하고 일어나서 창밖을 내
다보았다. 해군사관학교 기숙사 정원이 새벽 여명속에서 뿌
옇게 밝아오고 있었다.
제 7 장 제국의 사랑
유강열(劉江烈) 박사는 매우 평범한 식물학자였다. 그는 몸
이 땅딸막하고 말수가 적었다. 머리숱은 풍성했으나 귀밑이
희끗희끗하고 배가 나온 편이었다.
언제나 연구실에 들어앉아 연구를 할뿐 별다른 운동을 하지
않은 탓이었다. 전체적으로 여자에게 호감을 살만한 타입도
아니었고 내세울만한 자랑거리도 없었다. 게다가 나이가 53
세나 되었다.
그러나 그에게 단 한 가지의 자랑거리가 있었는데 그것은
고루하고 볼품없는 식물학자에게는 도무지 어울릴 것같지
않은 젊고 아름다운 정부(情婦)였다.
우희(虞姬) 위버. 동물학자. 나이 33세의 결혼을 한일이 없
는 독신녀. 그러나 그녀는 유강열 박사를 최고의 남자로 알
고 있는 여자였다.
(우희는 정말 멋진 여자야.)
유강열 박사는 우희 위버를 생각하자 기분이 좋아지기 시작
했다. 그녀는 아름다운 여자였다. 희고 뽀얀 살결과 검은
눈, 그리고 정구공 같은 탄력을 갖고있는 한 쌍의 유방과
풍만한 히프
유강열 박사는 컴퓨터 모니터의 화면을 뚫어지게 응시했다.
아직 우희 위버가 도착할 시간은 아니었다. 그녀가 도착하
려면 30분이나 더 시간이 남아 있었다.
러브타임(Love Time) 시간이 3시간 30분 후에 시작되는 것
이다. 그 동안에는 비밀경찰이 눈을 까뒤집고 찾으려는 X파
일을 충분히 살필 수가 있었다.
러브타임은 성인(成人)이 된 제국시민이라면 누구나 의무적
으로 참여하고 있었다. 유강열 박사도 16세가 되면서부터
러브타임에 참여했다. 러브타임에 참여하지 않으면 정상적
인 제국시민이 아니었다.
러브타임은 문자 그대로 사랑, 바로 섹스타임이었다. 섹스
를 하는 시간이라는 것이다.
유강열 박사는 훨씬 뒤에야 그것이 시민들을 효과적으로 통
제하는 수단이라는 것을 알았다. 인간의 모든 욕망이 성욕
으로부터 비롯된다고 생각한 제국정부에서 시민들을 통제하
기 위해 러브타임이라는 제도를 만들어 실시하고있는 것이
다.
파트너는 누구라도 상관이 없었다. 오히려 제국정부에서 파
트너를 알선해주는가 하면 사이버섹스 프로그램이나 멀티
마네킹을 제작하여 염가로 제공했다.
물론 러브타임에 참여하기 전에 먼저 마더(Mother) 살로메
(Salome)에게 경배를 바치는 마더타임(Mother Time)에 참여
해야 했다.
제국정부의 시민이라면 누구나 마더룸(Mother Room)으로 불
리는 기도실을 갖고 있었다. 마더룸은 제국정부에서 직접
제작하는데 전면에 커다란 제단이 있고 제단위에는 방의 전
면을 차지하는 멀티 스크린이 있었다.
그러나 마더 살로메를 본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녀는 제
국시민들에게는 전지전능한 신이었고 기적의 존재였다.
제국정부에서 배급하는 캡슐을 먹고 기도를 하면 안개처럼
자욱한 방안에 마더 살로메가 홀로그래피 영상으로 떠오른
다.
유러너스 제국시민들은 하시시라는 캡슐 때문에 마더 살로
메가 자신에게 생명을 준 존재라는 환각에 빠지고 마더 살
로메에 대한 감사와 충성을 맹세한다.
고도의 과학문명사회에서는 도무지 어울리지 않는 일이었
다.
유강열 박사가 하시시의 정체를 안 것은 아주 우연한 기회
였다. 그는 도서관에서 식물에 대한 자료를 찾다가 우연히
고문서에서 하시시라는 식물을 찾아냈던 것이다.
하시시는 원래 하샤신(Assasin: 암살자들)을 양성할 때 사
용하던 최면제를 추출하는 식물의 이름이었다. 하시시는 아
랍의 장미라고 불릴 정도로 꽃이 아름다웠다.
하샤신은 오래 전에 아랍에 있던 시아파 이슬람교 이스마일
파의 교단에 있던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반대파의 제거를
위해 암살자들을 양성했는데 그 양성방법이 특이하고 비밀
에 싸여 있었다.
암살자가 암살명령을 받고 떠나기 전에 하시시라는 최면성
분이 담긴 약을 음식물에 섞어 먹게 만든다. 교단의 지도자
인 산중장로는 암살자가 하시시가 섞인 음식물을 먹고 최면
에 빠질때까지 긴 설교를 한다. 이어서 암살자들이 최면에
빠지면 산중장로는 그들을 알라무트 요새 깊숙한 비밀장소
로 옮긴다.
알라무트 요새는 해발 2천m나 되는 사막의 고원에 있었다.
암살자들이 최면에서 깨어나 보면 자신들은 어느 사이에 지
상낙원에 와 있다. 그 곳은 아름다운 정원이 있는 궁궐이
다. 궁궐은 번쩍이는 황금과 보석으로 만들어져 있고 사막
에서는 보기 힘든 기화이초(奇花異草)가 만발해 있는가 하
면 물이 풍부한 오아시스가 있다.
그들은 너무나 아름다운 궁궐과 정원에 넋을 빼앗긴다. 게
다가 그들이 알라무트에 오기 전에는 헤어지고 떨어진 더러
운 옷을 입고 있었으나 알라무트에 도착하여 정신을 차려보
면 어느 사이에 화려한 비단옷으로 갈아 입혀져 있는 것이
다.
(아아, 이 곳은 천국이다!)
은그릇에는 산해진미가 가득했고 눈이 부시게 아름다운 여
자들이 그들의 시중을 들어준다. 암살자들은 산해진미를 배
불리 먹고 아름다운 미녀들로부터 극진한 대접을 받아 눈이
휘둥그레진다. 밤이 오면 아름다운 여자들은 암살자들을 위
해 반나로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춘다.
"주인님!"
"주인님. 목욕을 하셔요!"
그리고 암살자들에게 목욕을 시켜준다. 암살자들은 나긋나
긋한 미녀들이 몸을 씻어주자 마치 천국에 온 듯한 황홀한
기분을 만끽한다.
암살자들은 장미향기가 풍기는 하시시(하시시는 최면과 마
약의 성분을 갖고 있다)를 복용하고 환각상태에서 닥치는대
로 미녀들과 향락을 즐긴다. 그것은 그야말로 황홀한 일이
었다. 그들은 아름다운 미녀들을 양팔에 껴안고 밤이나 낮
이나 침상에서 뒹군다. 그리하여 마침내 그 곳이 산중장로
가 말하는 알라의 낙원이라고 믿기에 이른다.
일정한 시간이 지나 그들이 하시시에 의해 다시 최면상태에
빠지면 산중장로는 누더기 차림으로 갈아입히고 원래 있던
곳에 그들을 데려다놓는다.
그리고 산중장로는 자신의 신통력으로 너희들에게 알라의
낙원을 미리 보여준 것이다, 너희들이 죽으면 알라의 낙원
으로 가게 될것이다 라고 말하는 것이다.
암살자들은 산중장로의 말을 믿고 임무를 수행하러 간다.
그들은 암살이 실패하여 죽어도 알라의 낙원에 들어가게 되
므로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임무를 수행하는 것이다. 심
지어는 체포되어 죽으러 형장으로 끌려가면서도 그들의 얼
굴은 황홀감에 젖어있는 것이다.
유러너스 제국은 시민들을 효과적으로 통제하기 위하여 마
더타임을 만들어 하시시를 먹게 하고 있었다.
하시시는 확실히 탁월한 효과가 있었다. 제국정부에서 하시
시에 어떤 약물을 첨가했는지 알 수 없었으나 그것을 먹으
면 마더 살로메가 어머니라는 환각에 빠지게 되는 것이다.
게다가 마더타임이 끝나면 곧바로 러브타임으로 연결되는
것이다. 옛날의 하샤신들이 환각상태에 빠져서 아름다운 미
희들의 시중을 들었듯이 유러너스 제국시민들은 섹스 파티
에 참여하는 것이다.
그러나 유강열 박사는 이제 마더타임에 참여하지 않았다.
마더타임이 환각이고 허상(虛像)이라는 것을 알았을때 그는
유러너스 제국에 커다란 배신감을 느꼈다.
그러나 노골적인 반발을 할 수는 없었다.
유러너스 제국의 시민들은 언제나 비밀경찰의 감시를 받고
있었다. 그들의 감시를 벗어나는 일은 불가능했다.
지구력 1월18일 오전 8시13분. 시간여행선(時間旅行船)
아르고(Argos: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배. 제이슨이 황금양
털을 찾아 여행할 때 만든 배다) 1호는 마침내 약 40억년전
의 원시지구에 도착하였다.
이는 지구의 과학문명이 탄생한 이래 가장 경이적인 사건이
라고 할만한 일이다. 우리들 승무원들은 긴장과 흥분속에서
원시지구에 첫발을 내디뎠다
이것은 시간여행선 아르고 1호가 약 40억년전의 원시지구에
첫발을 내디딘 X파일의 기록이었다. X파일의 기록을 남긴
사람은 선장이 아니라 항법장교(航法將校)인 에바소령(少
領)이었다.
그녀는 금발의 아름다운 머리와 날씬한 몸매를 갖고있는 해
군장교였다. 아르고 1호가 무사히 임무를 마치고 귀환했을
때 그녀는 국민적인 영웅이 되었고 아름다운 용모 때문에
젊은 남자들의 무수한 구애(求愛)를 받았었다.
유강열 박사는 그녀에게 직접 구애를 하지는 않았으나 그녀
를 열렬히 사랑했고 동경했다. 나폴거리는 머리카락, 푸른
빛이 감도는 크고 맑은 눈, 만지면 터질 것같은 탄력을 갖
고있는 두 개의 유방
그리고 검은 색 스커트아래 미끈하게 뻗은 다리는 과연 뇌
쇄적이라고 할만했다.
유강열 박사는 눈을 감고서도 그녀의 아름다운 모습을 떠올
릴 수가 있었다.
원시지구의 지표는 크고 작은 무수한 크레이터(미행성,
또는 운석의 충돌로 생긴 원형의 자국)로 덮여 있었다. 우
리가 지구의 어느 지역에 착륙했는지는 정확히 예측할 수가
없다. 40억년전의 지구는 지금의 지구와 너무나 다른 모습
이었고 생명체가 살고있지 않았다.
우리는 착륙하기 전에 3일동안 원시지구를 세밀하게 관찰하
고 분석했다. 그 결과 지구의 표면온도가 낮에는 태양의 복
사열로 인해 470 , 밤에는 160 나 되었다.
그리하여 우리는 지구에 해가 뜨기 시작하는 일출무렵에 착
륙한 것이다. 기온이 급격하게 변하고 있었기 때문에 우리
는 빠른 시간내에 지구를 관찰할 수밖에 없었다.
지구의 표면은 딱딱했다. 지구 표면 전체가 현무암 물질로
이루어져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대기측정기에는 질소
와 수소헬륨이 다량으로 발견되었고 산소는 전혀 찾아볼 수
가 없었다. 다만 수소가 미약하게나마 존재하고 있어 화산
활동이 시작되어야 물이 생성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자 이제 각자의 임무를 수행하라! 시간은 30분!"
아르고호의 선장 마린스키 제독의 지시로 우리는 각자의 임
무를 수행하기 시작했다. 원시지구에 착륙한 승무원들은 나
를 비롯해 모두 6명, 각자의 임무에 따라 지표를 채취하는
가 하면 대기를 채취했다. 카메라로 원시지구의 표면을 근
접촬영하는 승무원도 있었다.
기온은 빠르게 변하고 있었다. 처음 우리가 착륙했을 때는
영하 60도였으나 어느덧 영상으로 올라가고 있었고 어둠 속
에서 태양빛이 비치기 시작하자 무서운 복사열이 지구를 엄
습하기 시작했다. 우리가 입은 제복은 영상 160도까지 견딜
수 있었으나 그 이상은 무리였다.
우리는 40억년전의 지구에서 철수하기로 하였다. 그러나 우
리가 시간여행선으로 돌아왔을 때 놀라운 현상이 여행선의
디스 플레이 스크린에 나타났다.
"저게 뭐야?"
"지표가 달음질을 치고 있어!"
"링클 리지야!"
"링클 리지가 크레이터를 뚫고 달리고 있어!"
승무원들은 모두 놀라서 소리를 질렀다. 링클 리지(Wrinkle
ridge :주름 절벽)는 높이가 3Km터, 길이가 500Km가 넘는
것도 있었다.
나는 가슴이 터질 것처럼 놀랐다. 그리고 이 엄청난 자연의
현상에 감동에 젖었다. 이때의 감동이 얼마나 컸는지 나는
10분 동안이나 꼼짝도 하지 않고 링클 리지가 달리는 것을
우두커니 보고 있었다
유강열 박사는 고개를 갸우뚱했다. 에바소령이 남긴 기록은
제국정부의 공식기록과 너무나 현격한 차이가 있었다. 게다
가 에바소령이 남긴 기록은 어딘지 모르게 태양계의 행성
(行星: 움직이는 천체. 지구, 화성 등이 해당된다)인 수성
(水星: Mercury)과 너무나 흡사했다. 물론 지구의 위성인
달(月星: Lunar)도 크레이터는 무수히 많았다.
유강열 박사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문득 에바소령이 소설
을 쓴 것이 아닌가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소설이라고
하기에는 어딘지 미심쩍은 데가 있었다. 게다가 X파일에서
스스로 나레이터가 되어 있는 에바소령의 얼굴이 어둡고 우
울하기 짝이 없었다.
이 파일때문에 제국 비밀경찰은 눈을 까뒤집고 있었고 죽은
사람도 적지 않았다. 그런 까닭으로 이 파일을 죽음의 파일
이라고 부르고 있는 것이다.
제 8 장 사이보그의 악녀
유강열 박사가 X파일을 손에 넣게 된 것은 아주 우연한 기
회였다. 그는 어느 날 느닷없이 전화 한 통을 받았다. 홀로
그램 전화였다. 연구실에서 퇴근하여 집에 돌아오자 기다렸
다는 듯이 전화가 오고 있었다. 유강열 박사는 무심하게 버
튼을 눌렀다.
그러자 철가면을 쓴 홀로그램이 불쑥 튀어 올라왔다.
"유강열 박사! 지금 곧바로 장미궁전 광장으로 나오시오!
이 명령을 듣지 않으면 당신은 죽게 될거요!"
유강렬 박사는 가슴이 철렁했다.
목소리는 뜻밖에 여자였다. 유강렬 박사는 홀로그램의 차가
운 목소리에 심장이 얼어붙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철가면
의 홀로그램에서 나오는 목소리는 그만치 공포스러웠다.
"다, 당신은 누구요?"
유강렬 박사는 몸을 부들부들 떨면서 물었다.
"블랙버드!"
"나는 갈수 없소. 무엇 때문에 내가 장미궁전 광장으로 가
야 한단 말이오?"
"당신에게 X파일을 전달해 주겠소!"
"X파일!"
유강렬 박사는 자신도 모르게 비명이 터져 나왔다. X파일은
유러너스 제국에서 언급하는 것조차 금기로 여기고 있는 죽
음의 파일이었다.
"싫소!"
"우리 지시에 따르지 않으면 당신을 비밀경찰에 넘기겠소!
당신은 마더 살로메를 의심하고 있지 않소? 그것은 불경죄
요!"
유강열 박사는 그 말에 벼락을 맞은 듯이 뒷걸음을 쳤다.
블랙버드가 내가 마더 살로메를 의심하고 있는 것을 눈치채
다니 그는 공포의 비밀경찰을 생각하고 몸서리를 쳤다.
그는 불과 3년전까지만 해도 제국정부에 비밀경찰이 존재한
다는 사실조차 모르고 있었다.
"유강열 박사! 당신을 체포하겠소!"
어느 날 유강열 박사는 연구실에서 돌아오다가 검은 옷을
입은 사내들에게 체포되었다. 유강열 박사가 항의하려고 하
자 그들은 유강열 박사를 재발리 건물의 담장으로 밀어붙이
고 팔을 분질러 버렸다. 유강열 박사는 부러진 팔의 고통때
문에 비명을 지르며 눈물을 흘렸다.
"개새끼! 감히 비밀경찰에게 반항을 해?"
"죄, 죄송합니다!"
"아무도 모르게 죽고 싶어?"
"아닙니다."
"따라와!"
유강열 박사는 영문도 모른 채 그들에게 끌려가 검은 색의
승용차 폐가서스(Pegasus: 그리스 신화의 말, 빠르다는 뜻
을 가지고 있다)에 태워졌다. 페가서스는 에어카(공중을 날
으는 차)였다.
폐가서스는 한 시간쯤 날아서 어느 건물 앞에 착륙했다.
유강열 박사가 처음 보는 건물이었다.
유강열 박사는 건물의 지하실로 끌려갔다. 지하실은 어둠침
침하고 더러웠고 벽에는 온갖 고문도구들이 걸려 있었다.
어느 방에서인지는 알 수 없었으나 고문을 받고있는 여자의
처절한 비명소리가 들려왔다. 유강열 박사는 얼굴이 파랗게
질렸다.
유강열 박사는 자신이 낯선 지하실로 끌려왔다는 사실이 믿
어지지 않았다. 이런 일은 상상도 못했던 일이었다. 그가
끌려온 곳이 어디인지도 알 수 없었고 왜 이런 일이 일어나
고 있는지도 이해할 수 없었다. 유강열 박사는 죄가 없으므
로 곧 석방되리라고 생각했다. 그러자 다소 안심이 되었다.
그러나 하루가 지나도 유강열 박사를 취조하러 들어오는 사
람이 아무도 없었다.
(그런데 왜 취조도 하지 않지 ?)
유강열 박사는 취조를 하지 않자 더욱 불안해졌다.
유강열 박사가 갇혀있는 지하실에 여자들이 나타난 것은 이
틀이나 지나서의 일이었다. 그들은 경찰복을 입고 있었으나
팔에 붉은 완장을 두르고 있었다.
여자경찰들이었다. 그들은 유강열 박사를 의자에 묶고 수갑
을 채웠다. 그리고는 가위로 유강열 박사의 상의를 조각조
각 잘라냈다.
다음에 여자경찰들은 재빨리 자신의 옷을 벗어 던졌다.
유강열 박사는 어리둥절했다.
"위대한 제국경찰의 옷에 반역자의 피를 묻힐 수는 없지!"
여자경찰의 말이었다. 유강열 박사는 그때서야 여자경찰이
옷을 벗은 이유를 이해했다.
여자경찰들은 속옷과 가죽으로 된 부츠 차림이었다. 그러나
머리에 2천6백년전 히틀러 시대의 나치스 친위대 모자와 비
슷한 모자를 쓰고 있어서 더욱 우스꽝스러워 보였다.
유강열 박사는 눈을 감았다. 수갑에 묶여 있는 처지라고 해
도 여자경찰의 속옷차림을 보는 것은 낯간지러운 일이었다.
그때 허공을 가르는 파공성이 들렸다.
유강열 박사는 깜짝 놀라 눈을 떴다. 여자경찰들이 벽에 걸
린 채찍을 꺼내 시위를 하듯이 날카롭게 허공에 휘두르고
있었다.
유강열 박사는 공포에 질려 다시 눈을 꽉 감았다.
여자경찰이 유강열 박사를 향해 채찍을 힘껏 내리쳤다.
채찍이 허공을 가르는 날카로운 파공성이 귓전으로 들리더
니 등짝이 화끈했다.
"윽!"
유강열 박사는 짧은 비명소리를 지른 뒤에 이를 악물었다.
여자경찰들의 채찍질은 계속되었다. 그의 등짝에 뱀허물같
은 핏자국이 엉키고 살점이 찢어져 나갔다. 여자경찰은 5분
남짓 유강렬 박사에게 사정없이 채찍질을 해댔다.
"교대해!"
채찍질을 하는 여자경찰이 바뀌었다.
유강열 박사는 얼마나 오랫동안 그들에게 채찍질을 당했는
지 알 수 없었다. 온 몸의 살갗이 찢어져 피가 낭자했다.
그들이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밖으로 나가자 유강열 박사는
가쁜 숨을 몰아 쉬었다. 매를 맞고 고문을 당하는 것도 숨
이 차는 것이라는 걸 유강열 박사는 그때서야 처음 알았다.
날씨는 차가웠다.
지하실은 난방이 전혀 되어있지 않았기 때문에 찢어진 살갗
으로 차가운 냉기가 스며들어 더욱 고통스러웠다.
여자경찰들은 하루에 한 번씩 유강열 박사를 찾아와 채찍질
을 했다. 그러나 아무 이유도 밝히지 않고 있었다. 유강열
박사는 그 점이 더욱 견디기 어려웠다.
여자경찰이 그를 취조용 책상에 앉힌 것은 닷새가 지났을
때였다.
"무슨 일때문에 저를 체포합니까? 저는 선량한 시민입니
다."
유강렬 박사는 그때서야 조심스럽게 심문관에게 항의했다.
"당신은 반역자들과 함께 제국정부를 비난했소."
"저는 그런 적이 전혀 없습니다."
"누구의 지시를 받고 제국정부를 비난했는지 진술하시오!"
심문관이 유강렬 박사를 날카롭게 쏘아보았다.
유강렬 박사는 심문관의 싸늘한 눈빛에 소름이 오싹 끼쳤
다. 그러나 이렇게 당하고 있을 수 없다고 생각하여 또다시
항변을 했다.
"아닙니다. 뭔가 착각했을 것입니다. 전 그런 일이 없습니
다."
"이 자가 아직도 정신을 차리지 못했군!"
여자 심문관은 취조를 하다가 말고 볼펜을 팽개쳤다. 그것
이 신호였다. 우락부락한 여자경찰들이 또 다시 유강열 박
사를 의자에 묶고 고문을 하기 시작했다.
이번엔 쇠파이프였다. 유강열 박사는 정신을 잃을 때까지
쇠파이프로 온 몸을 구타당했다.
"자, 잘못했습니다."
"이제 죄를 시인하는가?"
"시인합니다."
"그렇다면 제국정부를 비난한 사실을 상세하게 진술하시
오."
심문관은 유강열 박사에게 자술서 용지와 연필을 던져 주고
취조실을 나갔다.
유강열 박사는 심문관이 나가자 한참동안이나 자술서 용지
를 내려다보며 멍청하게 앉아 있었다. 내가 과연 제국정부
를 비난한 일이 있는가. 과학문명이 고도로 발달한 이 시대
에 비밀경찰이 존재하는 것이 온당한 일인가하는 생각이 수
없이 그의 머릿속을 오락가락했다.
그러나 어떻게 하든지 자술서를 써내야 했다. 그는 자신이
의식하지도 못하는 사이에 제국정부를 비난한 일이 있는가
하고 골똘히 생각해 보았다. 그러나 아무리 생각을 해도 그
런 일이 전혀 없었다.
그는 제국정부에 불만을 가진 적이 한 번도 없었다.
(혹시 내가 총통을 욕한 적이 있었나?)
그러나 그런 일도 없는 것 같았다. 그가 총통이 하는 일에
불만을 가져야할 상황은 전혀 없었다. 그는 제국정부의 모
든 정책에 만족해하고 있었다. 아니 제국정부의 정책에 관
심조차 없었다.
그러나 혹시라도 술에 취해서 비난을 한적이 있는지도 모르
므로 유강열 박사는 총통이 제국정부의 시민들에게 자애롭
지 못하다고 비난을 했다고 썼다. 자신이 생각하기에도 어
처구니없는 내용이었다.
"좋소! 수고했소."
그러나 심문관은 그의 자술서를 읽더니 의외로 만족해했다.
"자술서를 충실하게 썼으므로 관대히 처리하여 석방하겠소.
허나 다짐해 둘 것이 있소."
"예."
"앞으로 반역자가 접근을 해오면 어떻게 하겠소?"
"바로 신고하겠습니다."
"비밀경찰국이 무엇을 하는 곳인지도 알고 있겠지?'
"예."
"그럼 여기에서 있었던 일을 누설하면 어떻게 되는 지도 알
고 있겠지?"
"예."
"혹시 모를지도 모르니까 비밀을 누설한 자들이 어떻게 되
는지 내가 보여 주지 "
여자 심문관이 눈짓을 하자 뒷짐을 지고 서 있던 여자경찰
이 벽에 있는 버튼을 눌렀다. 그러자 우르르 하는 소리와
함께 벽이 갈라지고 대형유리로 칸막이가 되어 있는 커다란
방이 나타났다.
유리창 안의 풍경은 어느 지하실이었고 석대(石臺: 돌로된
침대)위에 한 남자가 쇠사슬에 묶여 있었다.
(저 사람은 헨리 슬레서!)
유강열 박사는 유리창 안의 방을 보고 몸을 부르르 떨었다.
헨리 슬레서는 유전공학 박사였다. 그러나 얼마전부터 행방
불명이 되어 유강열 박사는 그가 어디로 갔는지 몹시 궁금
해 했었다.
그때 대형 유리창 안의 방에 한 여자가 나타났다.
"저 여자의 이름은 엘리자베스 버틀리야."
심문관이 낮게 웃으며 말했다. 그러나 유강열 박사는 엘리
자베스 버틀리(1560년에서 1614년까지 산 헝가리의 백작부
인이자 악녀. 그녀는 6백명의 처녀들을 잡아다가 잔인하게
살해하고 젊어지기 위해 그 피를 마셨다. 합스부르크 왕가
의 친척으로 트란실바니아 왕과 폴란드의 왕을 배출했으나
막대한 영지와 재산을 보호하기 위해 근친결혼을 하여 정신
이상자가 많이 태어났다고 한다)가 누구인지도 알 수 없었
다.
"우린 저 여자의 유골에서 유전인자를 추출했어. 그렇게 해
서 새로운 엘리자베스 버틀리를 만들어낸 거야. 엘리자베스
버틀리는 6백명의 여자들을 죽여서 피를 마셨지. '철의 처
녀'라는 기구는 창끝으로 만든 인형인데 여자를 껴안아서
죽이는 것이고 '새장의 처녀'는 여자를 새장속에 넣어서 가
시로 찌른 다음 피가 그릇에 떨어지면 그것을 마시기도 하
고 모아서 목욕을 하기도 하는 기구지 "
심문관이 설명을 하는동안 사이보그(인조인간) 인간 엘리자
베스 버틀리는 석대에 눕혀져 있는 헨리 슬레서의 가슴을
칼로 찌른 다음 피가 솟구치자 얼굴을 갖다대고 흡혈을 하
기 시작했다.
유강열 박사는 온 몸을 부르르 떨었다. 너무나 끔찍한 모습
이라 눈을 감으려고 했으나 심문관이 눈을 뜨라고 소리를
지르는 바람에 유강열 박사는 엘리자베스 버틀리가 흡혈을
완전히 마칠때까지 눈을 뜨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우리 비밀경찰국은 당신의 죄를 관대하게 처리하겠다."
엘리자베스 버틀리가 흡혈을 완전히 끝내자 심문관이 차갑
게 말했다. 유강렬 박사는 구역질이 올라오는 것을 억지로
참았다.
"감사합니다."
유강렬 박사는 반쯤 혼이 나간 상태에서 간신히 대답을 했
다.
"엘리자베스 버틀리를 만나게 되지 않기를 바라겠소!"
그것은 완전히 협박이었다.
유강열 박사는 석방되었다. 그러나 무엇때문에 체포되었었
는지는 끝내 알 수 없었다. 다만 유강열 박사가 절실하게
깨달은 것은 제국정부가 시민들을 위한 정부가 아니라는 사
실과 조금만 그들의 눈에 벗어나면 엘리자베스 버틀리에게
흡혈을 당하리라는 사실뿐이었다.
그러므로 그는 X파일이라는 말을 처음 들었을 때 너무나 놀
라서 얼굴이 창백해 지기까지 했던 것이다.
철가면의 전화는 그것으로 끝이었다. 유강렬 박사는 철가면
의 전화가 끝난 뒤에도 한참동안이나 거실을 서성거리며 골
똘히 생각했다. X파일을 받으러 장미궁전 앞의 광장으로 가
는 것은 분명히 유러너스 제국에 반역행위였다. 어쩌면 유
러너스 제국의 비밀경찰에서 유강렬 박사의 사상을 시험하
기 위해 위장전화를 한 것인지도 알 수 없었다.
(허지만 )
블랙버드의 전화는 비밀경찰의 위장전화가 아닐 수도 있었
다.
블랙버드는 암호명 같았다. 그러나 블랙버드라는 말을 들어
본 일은 한번도 없었다.
(그런데 X파일엔 무엇이 들어 있을까?)
유강렬 박사는 그 점이 몹시 궁금했다. 유러너스 제국이 X
파일에 대해서 언급하는 것조차 금기로 여길 정도라면 상당
히 중요한 내용이 숨겨져 있음이 틀림없었다. 유강렬 박사
는 학자였다. 학자로서의 호기심이 비밀경찰에 대한 공포보
다 앞서고 있었다.
유강렬 박사는 극도의 초조감과 불안감속에서 망설이다가
블랙버드가 말한 장미궁전 광장으로 가기 위해 집을 나섰
다.
장미궁전은 유러너스 제국의 수도인 아라크네(Atachne: 그
리스 신화의 여신, 비단을 짜는 신이지만 거미란 뜻이다)
시(市)의 번화가에 있었다. 유러너스 제국을 다스리는 총통
의 관저가 장미궁전이고 궁전 앞의 광장은 늘 일반에게 개
방되어 있었다.
유강렬 박사는 에어카를 타고 주택가를 빠져 나왔다. 에어
카는 하늘을 날아다니는 차지만 지상의 도로처럼 일정한 궤
도가 있었다. 그 궤도가 거미줄 같아서 아라크네시라는 이
름이 붙게 된 것이다.
아라크네시 상공에는 에어카가 즐비했다. 그러나 인구가 적
정선을 유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교통량 혼잡은 없었다. 유
강렬 박사는 에어카의 운전을 자동운전 시스템에 맞추어 놓
고 여러 가지 생각에 잠겼다.
블랙버드의 홀로그램 전화가 불길했다.
블랙버드가 어떤 여자인지는 알 수 없었으나 결코 그에게
호의적일 것 같지는 않았다.
장미궁전 앞 광장에는 산책을 나온 아라크네 시민들이 가득
차 있었다. 유강렬 박사는 에어카를 공용주차장에 주차시키
고 광장으로 걸어갔다. 장미궁전 앞 광장은 일반에게 개방
되어 있었으나 총통이 정무를 보는 곳이라 장갑기병(裝甲騎
兵)들이 삼엄하게 경비를 하고 있었다. 장갑기병은 미래사
회의 군인으로 레이저건, 화염방사기, 휴대용 미사일, 중성
자포 등을 휴대하고 1백m 정도의 점프(비행)를 할 수 있었
다.
"유강렬 박사! 이제 시청 담밑으로 가시오!"
그때 누군가 유강렬 박사의 어깨를 툭 치고 지나갔다. 유강
렬 박사가 뒤를 돌아보자 긴 머리의 사내가 벌써 저만치 군
중들 틈으로 사라지고 있었다.
유강렬 박사는 아라크네 시청을 향해 걸어갔다. 아라크네
시청은 돔형의 붉은 건물이었다. 장미궁전 앞 광장에서 대
로를 따라 북쪽으로 200m쯤 떨어져 있었다.
유강렬 박사는 느릿느릿 걸었다. 어차피 내친 걸음이었다.
아라크네 시청에 이르자 유강렬 박사는 담장을 따라 걸었
다. 시청 담장길은 인적이 거의 없었다. 보도블록은 소리가
나지 않았다. 과학자들이 오랜 연구끝에 개발한 특수섬유소
재인데 아무리 걸어도 발바닥이나 다리에 피로가 오지 않았
다. 가로수들은 식물학자들이 유전공학으로 꽃이 피게 만든
은행나무였다. 잎사귀는 은행나무지만 가지마다 사시사철
초롱꽃이 활짝 피었다.
아
그때 유강렬 박사는 누군가 자신을 따라오는 듯한 기분을
느꼈다. 특수섬유소재의 보도블록 때문에 발자국 소리가 전
혀 들리지 않았으나 공포스러운 느낌이 머리끝을 쭈뼛하게
만들고 있었다.
유강렬 박사는 바짝 긴장하여 걸음을 멈췄다.
사방은 캄캄했다. 아라크네 시청 담장길이지만 인적이 없어
서 가로등도 켜져 있지 않았다. 유강렬 박사는 등뒤에 바짝
신경을 기울였다. 인적이 점점 가까이 오더니 마침내 유강
렬 박사를 휙 스쳐 지나가며 재빨리 그의 바지주머니에 무
엇인가 찔러 넣었다.
순식간의 일이었다.
유강렬 박사는 우두망찰하여 저만치 뛰어가고 있는 사내의
뒷모습을 쳐다보았다. 그리고 자신의 주머니로 손을 넣어
보았다. 무엇인가 아주 작은 것이 손에 잡혔다.
(이건 마이크로 디스크!)
손의 감촉으로 유강렬 박사는 사내가 자신의 주머니에 찔러
넣고 달아난 것이 특수목적으로만 사용되는 우표딱지 크기
의 마이크로 디스크라는 것을 알았다.
유강렬 박사는 등줄기로 식은땀이 흐르는 것을 느꼈다.
그때 한 떼의 사내들이 우르르 달려와 그 사내의 뒤를 쫓기
시작했다. 사내들의 손에 레이저건이 들려있는 것을 보면
정부에서 일을 하고 있는 특수기관원들로 보였다.
"서라!"
"서라!"
사내들이 그 사내를 향해 거칠게 소리를 질렀다. 그러나 유
강렬 박사의 주머니에 마이크로 디스크를 넣어준 사내는 필
사적으로 달아나고 있었다.
"서라! 서지 않으면 쏜다!"
사내들이 멈춰서서 레이저건을 쏘기 시작했다. 캄캄한 아라
크네 시청의 담장길에 갑자기 레이저의 강렬한 섬광이 난무
하기 시작했다.
유강렬 박사는 걸음을 돌렸다.
공연히 사건에 휘말리고 싶지 않았다. 그는 걸음을 서둘러
아라크네시 담장길에서 장미궁전 광장으로 돌아왔다. 그리
고 그는 에어카를 타고 황급히 집으로 돌아왔던 것이다.
마이크로 디스크에는 X파일이 들어 있었다.
유강열 박사는 그 일을 생각하자 지금도 가슴이 서늘해왔
다. 그에게 마이크로 디스크를 준 사내는 분명히 죽음을 당
했을 것이었다.
(이건 에바소령의 시간여행 기록과 너무나 달라 )
유강열 박사는 X파일을 갈무리하고 메가(Mega: 그리스어로
크다, 거대하다의 뜻이다) TV로 에바소령의 시간여행 기록
을 찾았다. 메가TV는 영상이 홀로그래피(3차원영상, 입체영
상을 말한다)였기 때문에 현실에서 보는 것처럼 생생했다.
게다가 메가TV는 메모리 기능까지 가지고 있어서 수십년동
안 방송된 모든 내용을 저장하고 있었고 사용자는 아무때나
날짜나 단어를 입력하면 방송내용을 찾아볼 수가 있었다.
위대한 유러너스 제국시민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시간여
행선 아르고 1호의 승무원 에바소령입니다. 이미 보도된 바
와같이 여러분께서 지켜보고 계시는 가운데 아르고 1호는
역사적인 시간여행을 하여 46억년전의 지구에 도착했습니
다.
지금 지구는 미행성의 충돌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여러분들
께서 보고 계시는 것처럼 미행성은 초속 약 10Km의 무서운
속도로 지구와 충돌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보는 지구상태는 이러한 충돌이 이미 수천만년 동안
이나 계속된 상태입니다. 미행성이 어디서 왔는지는 아직
미지수이지만 지구도 하나의 조그만 미행성에 지나지 않고
있습니다.
지구표면은 열에너지로 인해 수천도의 불길과 열기로 둘러
싸여 있습니다. 태양표면의 온도가 6천도인데 지구 행성의
표면온도도 그와 같은 것을 것으로 여겨집니다
시간여행선 아르고 1호의 창으로 보이는 지구는 무수한 미
행성들이 지구와 충돌하는 모습이 박진감 넘치게 펼쳐지고
있었다.
충돌 에너지로 인해 무서운 열에너지가 발생하고 열에너지
는 미행성과 원시지구의 물질을 녹여 원시지구로 가라앉혔
다.
가벼운 물질은 하늘로 올라가 대기를 형성했다. 아르고 1호
의 창은 온통 불길속에 휩싸여 있었다.
시간여행선 아르고 1호는 지구에 착륙할 수 없습니다. 미
행성이 지금도 끝없이 날아와 지구충돌이 계속되고 있기때
문에 착륙하면 수천도의 용암속으로 가라앉을 우려가 있습
니다.
위대한 유러너스 제국시민 여러분!
여러분은 지금 인류 역사상 처음으로 성공한 시간여행으로
지구가 어떻게 탄생하는지 그 생생한 역사적인 현장을 보고
계시는 것입니다.
보십시오! 지금 저 창밖으로 날아오는 미행성을!
이 미행성은 여러분이 보고있는 것처럼 지구와 충돌하여 무
서운 열에너지를 발산하고 열에너지로 물질이 용암처럼 녹
아 흐르고 있습니다. 이는 일찍이 시간여행의 성공을 예측
하시고 모든 재원의 투자를 아끼지 않으신 우리 유러너스
제국 총통 파나카이아(Panacea: 그리스 여신의 딸) 각하의
선견지명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메가TV의 화면에는 어느 사이에 유러너스 제국 총통 파나카
이아의 자애로운 얼굴이 나타나 있었다. 머리는 은빛의 백
발이었고 얼굴엔 주름이 깊었다. 그러나 유러너스 제국의
안정과 번영을 바라는 지도자의 고뇌도 언뜻언뜻 비치고 있
었다.
우희 위버가 도착하여 문을 노크한 것은 그때였다. 유강열
박사는 메가TV를 끄고 우희 위버를 방으로 들어오게 했다.
"슈퍼마켓에 들려서 왔어요."
우희 위버는 식품꾸러미와 흰 백합꽃을 한 묶음 들고 있었
다. 유강열 박사는 우희 위버가 건네주는 백합꽃과 식품꾸
러미를 받았다. 백합꽃에서 향긋한 냄새가 풍겼다.
식품꾸러미에는 빵과 과일, 그리고 베이컨 종류가 들어 있
었다. 알약으로 된 정제(錠劑)식품이 아니었다.
"잘했어. 그러잖아도 냉장고가 비어 있었는데 "
문득 우희 위버에게서 달콤한 과일냄새가 풍겼다.
우희 위버는 벌써 나를 원하고 있어
유강열 박사는 우희 위버의 몸에서 풍기는 과일냄새로 그녀
가 자신을 원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챘다. 식물이나 동물이
짝짓기를 할 때 독특한 냄새를 풍기듯이 인간도 냄새를 풍
기는 것이다.
"그럼 키스해 주세요."
우희 위버가 유강열 박사를 향해 입술을 내밀었다.
유강열 박사는 우희 위버를 포옹하고 가볍게 입을 맞추었
다.
우희 위버에게서는 달콤한 바나나향이 풍기고 있었다.
"무얼하고 계셨어요?"
"텔레비젼을 보고 있었어 "
유강열 박사는 식품꾸러미를 식탁에 놓고 백합을 식탁위의
꽃병에 꽂았다.
"제가 맛있는 저녁을 지을께요."
"나도 같이 돕지."
"괜찮아요."
"돕고 싶은데?"
"좋아요."
우희 위버가 다시 유강열 박사를 향해 도툼한 입술을 내밀
었다. 유강열 박사는 바나나냄새가 풍기는 우희 위버의 몸
을 안아서 가볍게 키스를 했다. 우희 위버의 입에서는 술냄
새가 풍겼다. 우희 위버는 벌써 하시시를 마신 것일까.
"음 "
우희 위버의 입에서 음악소리와 같은 달콤한 신음소리가 흘
러나왔다. 유강열 박사는 우희 위버의 스커트 위로 둔부를
둥글게 애무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우희 위버가 허리를 비틀면서 그녀의 입술을 더욱
세차게 부딪쳐 왔다.
제 9 장 여전사
벌판은 잿빛으로 어둠침침했다. 금방이라도 비가 올것처럼
음산한 날씨였다. 시간은 벌써 저녁 6시, 칠흑같은 어둠이
덮쳐올 시간이었다.
장애란(張愛蘭)은 바위위에 올라서자 손을 이마에 대고 멀
리 떨어져 있는 산자락을 살폈다. 그녀가 올라 서있는 바위
서부터 산자락까지는 은폐물이라고는 전혀 없었다.
벌판은 그 산자락까지 길게 뻗어 있었다.
일명 죽음의 벌판이었다.
그러나 벌판을 통과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애란은 낮게 심
호흡을 하고 들고있던 레이저 스틸레토(레이저 광선이 나오
는 단검)를 허리에 꽂았다. 산자락까지 전속력으로 달리지
않으면 안되었다. 아직도 사령부까지는 30km나 남아 있었
다.
(벌써 사흘째니 )
장애란은 한순간 얼굴을 찌푸렸다. 사흘동안 아무것도 먹지
못하고 온갖 장애물을 돌파하여 달려온 것이다. 아직까지
이 과정을 통과한 전사(戰士)는 없었다.
(지독해 !)
장애란은 지난 사흘을 생각하자 꿈같이 생각되었다. 지옥의
270km, 사흘동안 그녀가 돌파한 죽음의 거리였다.
가장 어려웠던 것은 인간장벽 뚫기였다. 그녀들은 처음에
180명이 선발되어 지옥의 300km라는 별명이 붙은 특별훈련
에 내던져졌었다.
그러나 인간장벽 뚫기에서 160명이 탈락되었다. 인간장벽은
1천명의 건장한 장갑기병들을 맨주먹으로 쓰러트리고 나오
는 것이었다.
장갑기병들은 최신예 첨단무기가 허용되었으나 여자들에게
는 무기가 일절 허용되지 않았다.
그녀들은 용감하게 장갑기병들과 부딪쳤다.
그러나 장갑기병들은 끝도 없이 몰려오고 있었다. 그녀들은
닥치는대로 장갑기병에게 발길질을 하고 주먹질을 하여 쓰
러트렸으나 장갑기병들은 수효에 있어서 월등히 많았다.
게다가 장갑기병들은 첨단무기로 무장을 하고 있었다. 장갑
기병들이 비록 실탄이나 중성자포, 레이저빔으로 여자들을
죽이지는 않았으나 수효에 있어서도 상대가 되지 않았다.
20세 전후의 젊은 여자들 180명을 1천명의 장갑기병들은 마
구 유린했다.
여자들의 가슴을 더듬거나 옷을 벗기려는 자도 있었다.
장애란은 그들과 처절한 혈투를 벌였다.
여자들도 필사적으로 그들과 싸웠다. 장갑기병들은 1백m식
비행을 하면서 그녀들에게 레이저건을 마구 쏘았다. 레이저
광선이 그물처럼 촘촘하게 그녀들을 에워싸고 날아왔다.
"악!"
"으악!"
여자들은 처절한 비명을 내지르며 나뒹굴었다. 레이저 광선
의 광도(光度)를 약하게 했기 때문에 여자들이 생명을 잃지
는 않았으나 수많은 여자들이 치명적인 부상을 당했다.
장애란도 몇 번이나 레이저 광선을 맞았다. 그러나 레이저
광선을 맞은 자리에서 세포가 스스로 부활하여 상처가 말끔
하게 낫곤했다.
(세포가 스스로 부활하고 있어!)
장애란은 자신의 몸에서 일어나는 변화에 흡족했다. 과학문
명이 고도로 발달했어도 인간들의 과학수준은 아직까지 죽
은 세포를 부활시킬 정도는 아니었다. 그러나 그녀의 세포
는 스스로 부활을 하고 있었다.
그녀는 초능력인간이었다.
장애란이 여기까지 통과해 온 것도 초능력 때문이었다.
그러나 특별훈련에 참가한 여전사 160명은 장갑기병의 벽을
뚫지 못하고 포기했고 20명만이 필사적으로 인간장벽을 뚫
고 나왔다. 여자들은 파김치가 되었다.
다음날은 늪지대 통과였다. 식량은 전혀 공급되지 않았고
자체적으로 해결해야 했다.
장애란은 늪에서 뱀을 잡아먹었다. 뱀이라도 먹지 않으면
살아남을 수없을 것 같았다. 그러나 다른 여자들은 뱀을 먹
지 못했다.
거기서 다시 15명이 떨어져 나갔다. 남은 것은 다섯 명뿐이
었다.
늪을 지나자 인공 모래사막이 나타났다. 그 곳엔 거대한 모
래폭풍이 불고 있었다. 모래폭풍은 초속이 30m나 되었다.
인간의 능력으로는 도저히 뚫고 전진할 수 없는 폭풍이었
다.
네 명의 여자들이 모래폭풍에 길을 잃고 헤매다가 탈락했
다.
이제 남은 것은 장애란뿐이었다.
장애란은 문득 첩보사령부의 지도자들이 자신을 시험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하는 생각을 했다.
(어쨌든 나는 해낼 거야!)
장애란은 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어떻게 하든지 이 과정
을 통과해야 했다. 여성전사들중 누구도 통과하지 못했던
죽음의 벌판을 통과해야 첩보장교로서 당당하게 행세할 수
있는 것이다.
장애란은 바위위에서 내려섰다. 벌판에는 어느덧 빗방울이
한 두 방울씩 뿌리고 있었다. 인공강우(人工降雨)였다. 그
러나 인체에 해로운 죽음의 비였다.
장애란은 빗발이 푸슷하게 살갗을 때리는 것을 느끼며 벌판
을 향해 서서히 달리기 시작했다. 그녀가 걸치고 있는 옷은
벌판에서 뒹굴어 원래의 천이 어떤 것인지도 알 수없는 낡
은 헝겊조각 하나였다.
그것은 그녀의 가슴과 둔부만을 겨우 가리고 있었다. 그러
나 옷따위에 신경을 쓸 여가가 없었다.
장애란은 걸음을 빨리하여 뛰기 시작했다. 벌써 사납게 쏟
아지는 빗방울로 인해 살가죽이 여기저기 찢어지고 있었다.
그녀는 살갗이 찢어지는 고통으로 얼굴을 찌푸렸다.
죽음의 벌판을 포기하려면 구조신호를 보내면 된다.
그러나 그녀는 벌판에서 죽을지언정 구조신호를 보내지는
않겠다고 생각했다.
장애란은 입술을 깨물고 더욱 빠르게 달렸다. 그때 어디선
가 요란한 총소리가 들리면서 그녀를 향해 총탄이 빗발처럼
쏟아지기 시작했다.
그녀는 벌판위로 재빨리 뒹굴었다. 다행히 인공강우는 더
이상 내리지 않고 있었다.
총탄은 오른쪽 벌판에서 날아오고 있었다. 그녀는 잠시 가
쁜 호흡을 고르며 총탄이 날아오는 방향을 쳐다보았다. 그
리고 총탄이 일정한 간격을 두고 날아오고 있다는 것을 깨
달았다.
그녀는 그 간격 사이를 이용하여 전력으로 달렸다. 그녀는
마치 들짐승처럼 빠르게 달리고 있었다.
인공강우로 인해 찢어진 살가죽은 피투성이었다. 그러나 얼
마 지나지않아 찢어진 살가죽에서 새살이 돋아나기 시작해
빠르게 상처가 아물었다.
그녀는 20분 남짓을 계속해서 달렸다. 그러자 총소리가 뚝
끊겼다.
그녀는 벌판에 드러누운 채 잠시 쉬었다. 사방은 더욱 어두
워지고 있었다.
그때 쉬익 하는 소리와 함께 포탄이 그녀의 옆에 떨어져 요
란한 폭음을 내며 폭발했다. 벌판의 흙이 한꺼풀 뒤집히고
불기둥이 하늘 높이 치솟았다.
(제기랄 !)
장애란은 공중으로 솟아 오른 흙더미가 자신의 얼굴로 쏟아
지자 벌떡 일어났다. 이번엔 총탄 대신 포탄이었다. 포탄이
하늘을 빽빽하게 메우며 날아와 여기저기서 터지고 있었다.
장애란은 갈지(之)자 모양으로 필사적으로 뛰기 시작했다.
어디선가 포탄을 마구잡이로 쏘아대고 있었다.
장애란은 포탄에 맞지 않기 위하여 이를 악물고 뛰었다.
포탄은 20분쯤 정신없이 달리자 겨우 그쳤다.
그녀는 또다시 벌판위에 벌렁 드러누웠다.
숨이 찼다. 그러나 오랫동안 누워 있을 수가 없었다. 찢어
진 살가죽 때문에 견디기 어려운 통증이 엄습해오고 있었
다. 그녀는 억지로 몸을 일으켜 정신없이 달리기 시작했다.
인공샘은 장애란이 8km를 계속 달리자 나왔다. 그녀는 벌판
에 웅덩이처럼 패어있는 인공샘으로 몸을 날렸다. 웅덩이에
는 깨끗한 물이 가득차 있었다.
(아, 시원해!)
장애란은 물을 벌컥벌컥 마신 뒤에 옷을 벗고 더러운 몸을
씻었다. 그녀의 살결은 언제 상처가 있었느냐 싶게 깨끗하
고 투명하게 빛났다.
아름다운 몸이었다. 그러나 언제까지나 인공샘에 몸을 담그
고 있을 수는 없었다.
그녀는 손목시계를 보았다. 벌써 밤 8시였다. 12시까지 사
령부에 도착하지 않으면 지난 사흘동안의 악전고투가 수포
로 돌아가는 것이다.
그녀는 인공샘에서 기어나왔다. 그리고 벌판의 끝을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인공샘에 몸을 담근 탓에 기분은 상쾌했
다.
그녀는 계속 달렸다.
철인(鐵人)을 만드는 훈련이었다. 초능력의 소유자인 애란
에게도 죽음의 벌판은 벅차기만 했다.
그때 음산한 울음소리와 함께 저 멀리 어둠속에서 파란 불
빛이 느리게 움직이고 있는 것이 보였다. 애란은 바짝 긴장
했다. 불빛은 하나 둘이 아니었다.
아
장애란은 머리끝이 곧추서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어둠속의
파란 불빛은 피에 굶주린 이리떼였다.
"짐승까지 풀어놓았군."
장애란은 허리에 차고 있던 단도를 뽑아들었다. 무기가 허
용되지 않고 있었으나 장갑기병들과 싸울때 빼앗은 것이었
다. 사령부에서 훈련의 강도를 높이기 위해 이리떼를 굶주
려서 풀어놓은 것이 분명했다.
그녀는 사령부의 훈련이 지나치게 원시적이라는 생각을 했
다. 지금은 첨단과학의 시대였다. 그런데도 아직도 이런 원
시적인 방법을 쓰고 있다니
그러나 사령부를 탓하고 있을 수가 없었다.
어둠 속에서 파란 불빛이 번쩍하더니 무엇인가 그녀를 향해
번개처럼 덮쳐왔다. 이리였다. 그녀는 본능적으로 몸을 숙
이며 재빨리 단도를 휙 그었다. 그러자 파란 섬광이 하늘을
두 조각내고 케갱하는 소리와 함께 검은 물체가 나가떨어졌
다. 피비린내가 그녀에게 확 끼쳐왔다.
장애란은 몸을 옆으로 슬쩍 옮겼다. 이리들은 이제 떼를 지
어 공격해 올것이었다.
"오너라! 이 짐승들아!"
그녀의 예상대로였다. 수십마리의 이리떼가 어둠 속에서 으
르렁거리며 일제히 그녀를 향해 달려들기 시작했다.
이리떼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어둠 속에서 검은 물체가
번쩍하면 이리가 허공으로 솟아올라 그녀를 덮치는 것이었
다. 그러나 그녀는 동물보다 더 뛰어난 감각과 청력을 가지
고 있었다.
"윽!"
그때 장애란은 등짝이 화끈한 것을 느끼며 어금니를 꽉 깨
물었다. 이리 한 마리가 등뒤에서 그녀를 습격, 날카로운
발톱으로 등짝을 굵어버린 것이다.
"이 더러운 짐승들 !"
장애란은 앞에서 달려드는 이리를 발로 차고 칼로 그었다.
사령부로 배치되어 훈련을 받기 전에 그녀는 사관학교 최고
의 무술 유단자였다. 그녀가 전력을 다하여 휘두르는 단검
은 번개처럼 빨랐고 발길은 바윗돌을 깨트리는 파괴력을 갖
고 있었다.
그녀가 단검을 휘두르고 발길질을 할 때마다 수많은 이리떼
가 케갱거리며 나뒹굴었다. 그러나 애란도 이리떼의 무수한
공격을 받았다. 그녀는 점점 지치기 시작했다.
장애란은 거의 본능적으로 이리떼와 싸웠다. 이리떼는 그녀
의 온몸을 할퀴고 물어뜯었으나 애란은 기진맥진할 때까지
싸웠다.
그러나 먼저 지쳐 떨어진 것은 이리떼였다. 이리떼는 수백
마리의 동료들이 죽어 나자빠지자 슬금슬금 꽁무니를 빼기
시작했다.
"아, 이제야 살았어 !"
장애란은 비로소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녀는 손목시계
를 보았다. 시간은 벌써 9시가 지나 있었다. 이리떼와 필사
의 싸움을 하는 바람에 시간을 지나치게 많이 빼앗기고 말
았던 것이다.
그러나 지친 몸으로 달릴 수는 없었다. 게다가 이리떼와의
싸움으로 기운까지 소비했던 것이다.
장애란은 발밑에 뒹구는 이리떼를 찾아서 단도로 이리의 뒷
다리 하나를 잘랐다. 이것저것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그녀
는 털이 붙어있는 이리의 가죽을 벗겨내고 살코기를 한 입
베어물었다.
생식이었다.
굶주린 몸으로 벌판을 달려갈 수는 없었다.
(내 꼴이 말이 아니겠지?)
장애란은 시장기가 조금 가시자 주먹을 움켜쥐고 어둠 속의
벌판을 달리기 시작했다. 방향을 찾는 것은 그녀의 손목시
계에 나침반이 부착되어 있었기때문에 조금도 어렵지 않았
다.
그녀는 거의 3시간을 쉬지 않고 달려서 사령부에 도착했다.
정확하게 11시57분이었다. 그녀는 3분을 남겨놓고 사령부에
도착한 것이다.
"장애란소위! 죽음의 벌판을 통과한 것을 축하한다. 지금
즉시 사령관실로 와라!"
그러나 그녀가 사령부에 도착하자마자 스피커가 반복해서
호출을 했다. 그녀는 얼굴을 찡그리고 사령부건물로 향했
다. 죽음의 벌판을 통과하느라고 온몸이 더럽혀졌으리라고
생각했으나 명령이 즉시였으므로 어쩔 수 없었다.
"장애란소위! 훈련을 마치고 무사히 귀환했습니다!"
장애란은 부동자세로 하데스(Hadas: 지하세계)의 본부장이
자 사피언스 그라운드의 첩보사령관인 바르시크대령에게 거
수경례를 했다. 바르시크대령의 집무실에는 낯선 여자가 검
은 선글라스를 끼고 서 있었다.
"쉬어!"
"옛서!"
장애란은 열중쉬어 자세를 취했다.
"소위! 인사해라! 하데스의 지도자 블랙버드 애브너소령이
다!"
장애란은 놀란 눈으로 블랙버드를 애브너소령을 쳐다보았
다. 블랙버드 애브너소령은 사피언스 그라운드의 영웅이었
다. 그러나 그녀의 본명이 무엇인지는 아무도 알 수 없었고
'블랙버드 애브너'라는 암호명만으로 불리고 있었다.
"장애란소위! 애브너소령님에게 인사드립니다!"
장애란은 부동자세로 거수경례를 붙였다.
"쉬어!"
블랙버드 애브너소령이 토막을 치듯이 짧게 끊어서 말했다.
목소리에서 쇳소리가 났다.
"옛서!"
장애란은 다시 절도있게 쉬어 자세를 취했다. 애브너소령이
그녀를 뚫어지게 쏘아보고 있었다.
장애란은 블랙버드 애브너소령의 시선이 자신의 얼굴에 못
박혀 있자 조금 걱정이 되었다. 그녀의 입언저리는 이리의
피로 범벅이 되어 있었다. 이리의 살코기를 생식한 탓이었
다.
"갑작스럽게 찾아 와서 놀랐나?"
"아닙니다!"
"놀라고도 놀라지 않았다 좋아. 그런데 소위의 몸이 엉망
이군. 그렇게 해서 남자가 따르겠나?"
블랙버드 애브너소령이 그녀의 몸을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장애란은 고개를 빳빳이 세웠다. 블랙버드 애브너소령의 눈
이 차갑게 그녀의 몸을 ㅎ고 있었다.
몸이 엉망이라는 것은 그녀도 잘 알고있는 사실이었다. 죽
음의 벌판을 통과하느라고 옷이 찢어져 알몸이 그대로 드러
나고 이리떼의 피가 그녀의 온 몸을 붉게 물들이고 있었다.
그러나 그녀는 상처 하나 없었다. 이리떼에게 물린 상처도
어느덧 깨끗하게 아물었던 것이다.
"제 임무가 남자가 따르게 하는 것입니까?"
장애란은 의아한 눈빛으로 애브너소령을 살폈다.
"그렇다! 그런데 그런 꼴로 어떻게 남자의 호감을 사겠나?"
"30분이면 남자를 뇌쇄시킬만한 몸으로 바꿀수 있습니다!"
"좋아."
블랙버드 애브너소령의 입언저리에 희미한 미소가 대롱거렸
다.
"남자 경험이 있나?"
"없습니다."
"그래?"
"허지만 사이버섹스 프로그램이나 멀티 마네킹은 사용해 보
았습니다! 어떤 임무든지 수행할 수 있습니다."
블랙버드 애브너소령이 담배를 피워 물었다. 그녀는 무엇인
가 골똘히 생각하고 있는 표정이었다.
"30분내에 16세의 어린 소녀로 분장하고 이리로 온다! 실
시!"
"실시!"
블랙버드 애브너소령의 명령이 떨어지자 장애란은 재빨리
복창을 하고 사령관실을 뛰어 나갔다.
바르시크대령과 블랙버드 애브너소령은 장애란이 밖으로 나
가자 약속이나 한 듯이 서로 얼굴을 쳐다보았다. 애브너소
령은 장애란에게 많은 궁즘증을 갖고 있는 표정이 여실했
다.
"소령 어떤가?"
바르시크대령이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애브너소령에게
질문을 던졌다.
"초인이로군요."
애브너소령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우리 첩보사령부가 생긴 이래 죽음의 벌판을 통과한 전사
는 한 사람도 없었어!"
"몸에 상처가 하나도 없습니다."
"그녀의 몸은 어떤 상처가 생겨도 저절로 아물어."
"죽은 세포가 살아납니까?"
"죽은 세포가 다시 부활해. 특이한 체질이지."
바르시크대령이 어두운 표정으로 대답했다.
애브너소령도 잠시 곤혹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다가 다시 입
을 열었다.
"혹시 안드로이드가 아닙니까?"
"안드로이드는 멸종했어."
"태아가 살아 있다는 전설이 있잖아요."
"전설일뿐이야."
바르시크대령이 단호하게 말했다. 애브너소령이 화제를 다
른쪽으로 끌고가는 것을 막고있는 것이 역력했다.
"인공강우를 견뎌낸 건 놀라운 일입니다."
"장갑기병의 인간장벽을 뚫은 것도 기적같은 일이야."
"어디 출신이죠?"
"벌판!"
"벌판이요?"
"그녀는 벌판을 헤매고 있었어. 우리가 발견했을 때는 아무
것도 기억하지 못했지. 그런데 아이큐가 6백이야 "
바르시크대령은 자신도 믿지 못하겠다는 듯이 고개를 절레
절레 흔들었다.
"아이큐가 6백이라구요?"
애브너소령이 입을 딱 벌리고 외쳤다.
"그녀는 한 번 본 것을 모두 기억해. 책 한 권을 읽으면 한
자도 빠트리지 않고 그대로 기억해."
블랙버드 애브너소령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바르시크
대령을 쳐다보고 있었다.
"게다가 하루에 1백km를 달릴 수 있어. 장애물이 없다면 더
빠를 수도 있어."
"그러면 파워도 보통이 아니겠군요."
"주먹으로 바위를 깨트려 "
"안드로이드가 아니면 사이보그군요."
"우리에게는 꼭 필요한 존재야."
"평의회에서도 알고 있습니까?"
"아니."
"안드로이드나 사이보그를 제조하는 것은 인류의 묵시적인
금기사항입니다. 안드로이들 때문에 인류는 1백년 동안이나
전쟁에 시달려야 하지 않았습니까?"
"우린 안드로이드나 사이보그를 제작하지 않았어."
바르시크대령이 고개를 흔들었다. 그는 아주 잠깐동안 장애
란소위를 발견했을 때를 생각했다. 그것이 몇 년 전인지는
바르시크대령도 정확하게 기억나지 않았다. 다만 7년 전인
가 8년 전의 일이라고 어렴풋이 기억하고 있을 뿐이었다.
황량한 벌판에 늑대소녀가 살고 있다는 소문이 사피언스 그
라운드에 파다하게 나돌았다. 그 무렵에는 유러너스 제국과
의 관계가 악화일로를 치닫고 있을 때여서 사피언스 그라운
드에는 또다시 전운이 감돌고 있었다.
한낱 늑대소녀에게 관심을 기울일 처지는 아니었으나 바르
시크대령은 부하들을 이끌고 벌판으로 달려갔다. 그리고 사
흘 동안이나 벌판을 수색하여 늑대들과 함께 뛰어다니는 장
애란을 발견했던 것이다.
그녀는 아무것도 입고 있지 않았다. 그러나 조금도 부끄러
움을 느끼지 않고 네 발로 늑대보다 더 빨리 달리고 있었
다.
바르시크대령은 기분이 야릇했다. 늑대소녀는 늑대들과 어
울려 살고 있는데도 엉덩이에 손바닥같은 천 조각을 걸치고
있었다. 게다가 바르시크대령이나 군인들을 보고도 전혀 두
려워하지 않았다.
"말을 알아 듣나?"
바르시크대령은 그녀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늑대소녀가 웃
으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머리카락이 무릎까지 내려와 있었
다.
"이름이 있어?"
"헬렌 "
"언제부터 늑대들과 살았지?"
"몰라."
늑대소녀의 말은 단순했다. 그러나 바르시크대령에게 전혀
적의를 갖고 있지 않았다.
"우리를 따라 갈래?"
"응."
바르시크대령은 늑대소녀에게 군복을 내주고 입게 했다. 늑
대소녀는 깔깔대고 웃으며 군복을 입은 뒤에 바르시크대령
을 따라왔다.
바르시크대령은 첩보사령관 관사에서 늑대소녀를 키우기 시
작했다. 사실 키운다고 할 수 없는 것이 늑대소녀의 몸은
여자로 완벽하게 자라 있었고 말과 인간의 습관을 빠르게
배워 한 달이 지나자 일반 사피언스 그라운드인들이과 조금
도 다름이 없게 되었다.
바르시크대령은 늑대소녀에게 장애란이라는 이름을 붙여주
었다.
장애란은 빠르게 적응했다. 그녀는 무엇이던지 한 번 보면
완벽하게 기억했고 여자답지 않게 힘이 넘쳤다.
(인간이 아니야 )
무엇보다도 바르시크대령을 놀라게 한 것은 지치지 않고 하
루에 1백km를 주파하는 장애란의 무서운 힘이었다. 게다가
아이큐가 6백이나 되었다.
바르시크대령은 고심끝에 장애란을 사관학교에 입학시켰다.
그녀를 사피언스 그라운드의 최고 여전사로 만들 작정이었
다.
"평의회에서 알게 되면 징계를 당하지 않을까요?"
"사피언스 그라운드를 위해서 하는 일이야."
"일단 평의회에 보고라도 하시죠."
"내가 모든 책임을 지겠어. 소령은 내 지시대로 따르기만
하면 돼."
바르시크대령이 단호하게 말했다. 애브너소령이 바르시크대
령의 얼굴을 쳐다보자 그 문제는 다시 거론하지 말라는 단
호한 의지가 엿보였다. 애브너소령은 입을 다물었다. 거론
하지 말라면 거론하지 말아야 한다. 군대는 상명하복(上命
下服)의 사회가 아닌가.
애브너소령은 어쩐지 기분이 유쾌하지 못했다.
"장애란소위의 사관학교 성적표를 보여 주십시오."
애브너소령은 화제를 바꾸었다.
"볼것도 없네."
"예?"
"그녀는 최고야!"
그러나 바르시크대령은 자신의 책상 서랍에서 차트로 만들
어져 있는 장애란소위의 성적표를 꺼내서 애브너소령에게
넘겨주었다. 그녀의 말대로 모든 성적이 만점이었다. 완벽
한 생도였다.
장애란은 숙소로 돌아오자 서둘러 샤워를 했다. 블랙버드
애브너소령은 전설과 같은 인물이었다.
다행히 이리떼가 그녀의 몸에 묻힌 핏자국은 금방 씻어낼
수 있었다. 그녀는 샤워를 마치자 머리를 땋아서 뒤로 묶었
다.
옷은 체크 무늬의 원피스를 입었다. 그녀는 동양인처럼 얼
굴이 작았기 때문에 충분히 앳된 모습으로 분장할 수 있었
다.
그녀가 분장을 마치고 바르시크대령의 집무실로 가자 블랙
버드 애브너소령이 만족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거렸다.
"분장술이 괜찮군."
"감사합니다."
장애란은 차분하게 대답했다.
"사관학교 성적이 아주 우수하더군."
블랙버드 애브너소령의 손에는 그녀의 사관학교 4년동안의
성적표가 들려 있었다.
" "
"자네는 이제 나와 함께 활동을 한다!"
"영광입니다!"
"질문 있나?"
"옛서!"
"뭐야?"
"유러너스 제국에 침투합니까?"
"그렇다!"
애브너소령은 장애란소위가 유러너스 제국에 침투한다는 사
실까지 꿰뚫자 속으로 찔끔했다. 그러나 겉으로는 조금도
내색하지 않았다. 장애란이 결코 만만치 않으리라고 생각했
다.
"질문 또 있나?"
"없습니다!"
"가서 쉬어도 좋다! 별도의 명령이 있을 때까지 숙소에서
쉬면서 대기하라!"
"옛서!"
"돌아가라!"
"장애란소위 용무 마치고 돌아갑니다!"
장애란은 바르시크대령과 블랙버드 애브너소령에게 절도있
게 경례를 하고 첩보사령부 사령관실을 나왔다.
제 10 장 지구 창생
우희 위버는 아주 천천히 옷을 벗고 있었다. 그 느린 동작
이 유강열 박사에게는 욕망을 더욱 강하게 일으켰다.
우희 위버가 과연 그것을 알고 있을까. 유강열 박사는 우희
위버가 알고 있든 모르고 있든 상관이 없다고 생각했다.
침실에는 커텐을 쳤다.
처음에 그것은 베이지색 바탕의 무미건조한 것이었으나 우
희 위버가 커튼뒤에 일곱색의 조명장치를 한뒤에 색이 5분
마다 바뀌었다.
기묘한 착상이었다.
우희 위버는 이제 스커트를 입은 채 등을 돌리고 밴드 스타
킹을 말아서 벗고 있었다. 허리를 숙인 탓에 그녀가 입은
삼각형의 속옷이 아슬아슬하게 드러나 있었다.
유강열 박사는 마른 침을 꿀꺽 삼켰다.
그 속옷은 커튼뒤의 조명 빛으로 인하여 오렌지색으로 보였
다. 아마 원래의 것은 눈(雪)처럼 하얀 색이었을 것이다.
우희 위버가 몸을 돌렸다. 위에는 옷을 모두 벗어서 뽀얗게
흰 유방과 검은 젖꼭지가 드러나 있었다. 여름에 수영장에
서 태운 탓에 다른 피부는 구리빛이었으나 브래지어를 한
젖가슴 주위와 어깨끈이 있던 곳만이 하얗게 희었다.
유강열 박사는 기분이 좋았다. 여자가 옷을 벗는 모습을 지
켜보는 것은 얼마나 즐거운 일인가. 아르고 1호의 시간탐사
에 대한 기록때문에 우울했던 유강열 박사는 이제 구름을
타고 있는 듯한 기분이었다.
(에바소령이 남긴 시간탐사 기록은 정말 의혹이 있어.)
유강열 박사는 언뜻 그런 생각을 했다.
문득 그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비밀경찰국에서 본
엘리자베스 버틀리의 무시무시한 얼굴과 에바소령의 밝은
얼굴이 교차되어 그의 뇌리로 스쳐왔다.
비밀경찰국에서 엘리자베스 버틀리를 복제해 내다니
유강열 박사는 엘리자베스 버틀리를 생각하자 소름이 오싹
끼쳤다.
"추워요?"
우희 위버가 침대로 올라오며 살갑게 눈웃음을 쳤다. 그녀
의 얼굴이 커튼뒤의 조명으로 인해 초록빛으로 보였다.
"아니야. 엘리자베스 버틀리를 생각했어 "
"그녀는 백작부인이었죠?"
우희 위버가 웃으며 그의 옷을 벗기기 시작했다. 그는 우희
위버의 손이 따듯하고 부드럽게 피부를 스칠 때마다 기분좋
은 전율을 느꼈다.
"왕족이었지."
"근친결혼을 많이 했기때문에 유전인자가 변했대요."
"그래서 그녀는 복제인간을 연구하는 수많은 유전공학 학자
들의 연구대상이었어."
유전공학도 다른 과학 못지않게 발전을 했다. 이제 죽은 생
명체의 유전인자를 추출하여 그와 같은 성격의 생명체를 만
들어내는 일은 너무나 간단한 일이었다.
엘리자베스 버틀리가 원래의 모습이 어떻게 생겼는지는 알
수 없었다. 그러나 그것은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비밀경찰
국은 엘리자베스 버틀리의 유전인자를 수정란에 이식하여
난폭하고 비정상적인 흡혈귀로 창조한 것이다.
우희 위버의 살(肉)은 따뜻했다. 유강열 박사는 마치 시간
여행을 하듯이 우희 위버의 바다를 탐험했다.
눈부시고 아름다운 육체
유강열 박사를 지치지 않고 끝없이 유혹하는 육체
유강열 박사는 긴 여행끝에 돌아온 난파선처럼 그녀의 포근
한 육체에 닻을 내렸다.
성교는 끝났다. 바람에 펄럭거리는 돛은 접었지만 안온하고
행복한 느낌이 두 사람을 감싸고 있었다.
우희 위버는 아기를 안듯이 유강열 박사를 두 팔로 안고 있
었고 유강열 박사는 우희 위버의 검은 젖꼭지를 치아가 처
음 생긴 아기처럼 자근자근 깨물기도 하고 입안 가득히 베
어 물기도 했다.
"샤워할까?"
유강렬 박사가 우희 위버에게 물었다.
우희 위버가 눈웃음 쳤다.
"네."
유강열 박사와 우희 위버는 욕실에 들어가 함께 샤워를 했
다. 두 사람은 서로에게 비누칠을 하여 정성껏 씻어 주었
다.
"참 좋아요."
우희 위버가 몽롱한 눈빛으로 말했다. 비누거품을 잔뜩 묻
히자 그녀의 피부가 유리알처럼 매끄럽게 빛났다.
"나도 그래."
유강열 박사도 기분이 상쾌했다.
시간여행선 아르고 1호의 창으로 보이는 것은 45억년 전
의 지구입니다. 미행성의 충돌로 원시지구가 탄생한지 1억
년이 지난뒤의 지구입니다. 이제 지구에는 미행성의 충돌이
줄어들고 지표가 식어가고 있습니다. 조사한 바와 같이 원
시대기(大氣)는 미행성이 갖고있던 수많은 수증기(水蒸氣)
를 포함하고 있었는데 미행성의 충돌이 줄어들자 고온의 열
에너지 발생이 사라져 지구가 점점 식어가게 된 것입니다
유강열 박사와 우희 위버는 샤워를 하고 저녁을 먹었다. 그
리고 벌거벗은 채 침대에 나란히 누워 메가TV를 시청했다.
벽에 설치된 홀로그램 메가TV였다.
지표가 식자 원시대기의 온도가 내려가고 수증기는 물이
되어 내리 쏟아지고 있습니다. 지구는 이미 자전(自轉)과
공전(空轉)을 하고 있고 자전으로 인한 중력(重力)이 형성
되어 있습니다.
수증기가 식어서 지구로 쏟아지는 물은 우리가 생각했던 비
의 개념과 너무나 다릅니다. 여러분께서도 아르고 1호의 창
으로 보고 계시겠지만 원시대기에서 쏟아지는 물은 비가 아
니라 폭포입니다
아르고호의 창으로는 에바소령의 말처럼 비가 폭포처럼 쏟
아지고 있었다. 유강열 박사는 낮게 한숨을 내쉬었다. 지구
탄생의 역사를 생생한 화면으로 보고 있다는 사실이 가슴
뻐근한 감동으로 전해져 왔다.
"저게 45억년전의 일이라니 믿어지지 않아요."
우희 위버도 감동에 젖은 음성으로 말했다. 과학문명이 아
무리 발달을 해도 자연의 위대함에는 따를 수가 없었다. 그
러나 과연 저것이 진실인가 생각하자 유강열 박사는 다시
우울해졌다.
"정말 그래."
"코스모스 과학센터의 과학자들은 정말 천재들예요."
"그건 무슨 소리지?"
"코스모스 과학센터의 과학자들은 수백년전에 이미 지구 탄
생의 신비를 시나리오로 만들어 발표했었잖아요."
"그런 일이 있었어?"
"그들은 비록 지구에서 컴퓨터로 시믈레이션화하여 시나리
오를 만들었지만 너무나 정확하게 맞아떨어지고 있어요."
유강열 박사는 고개를 끄덕거렸다. 하기야 이제 지구의 과
학은 앉아서도 목성의 변화를 관찰할 수 있었다. 목성은 지
구에서 37억Km나 떨어진 천체였다. 37억km면 얼마나 먼 거
리인가. 유강렬박사는 그 거리가 짐작조차 되지 않았다.
그러나 인간들은 이미 광속까지 개발하고 있었다. 시간여행
은 광속으로만 가능한 것이다. 물론 광속은 이론적으로 타
키온 소립자에 의해서만 가능했다.
수증기가 식어서 지구 표면으로 쏟아진 물은 그 엄청난
양으로 인해 지구표면을 완전히 덮어버리고 있습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45억년 전의 지구표면은 거대하고 깊은 해양(海
洋)으로 뒤덮여 있는 것입니다.
육지는 존재하지 않고 있습니다. 물론 육지는 그 해양의 깊
은 곳 심저(深底)에 있습니다.
미행성의 충돌때 발생한 열에너지로 고밀도 금속철의 성분
은 지구 중심부로 침강하여 핵(核)이 되어 외핵(外核)과 내
핵(內核)으로 갈라집니다. 지구는 마그마의 바다로 덮여 있
어서 언제나 끓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해양이 다시 수증기로 증발하고 수증기가 물이 되
어 쏟아지는동안 표층도 식기 시작했습니다
유강열 박사는 화면속의 에바소령을 뚫어지게 쏘아보았다.
에바소령이 마치 무엇인가 읽고 있는 듯한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유강열 박사는 이내 고개를 흔들었다. 제국정부가
굳이 시간여행에 대한 엄청난 거짓말을 국민들에게 할 필요
가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화면은 에바소령의 시선으로 지구의 모습을 잡고 있었다.
지구는 40억년전에 표층이 식어 판구조(板構造)가 시작되었
다. 물론 판구조는 해양에서 먼저 시작되었다.
맨틀은 상승과 하강을 반복했다. 맨틀이 상승을 하자 판이
갈라져 중앙해령이 솟아 올라왔다. 그와 함께 맨틀이 상승
하는 중앙해령에서 현무암질의 지각이 만들어지고 판은 중
앙해령에서 탄생되고 이동하여 해구에서 침강을 했다.
메가TV는 40여억년전에 지구가 만들어지고 시간에 따라 변
모하는 모습을 영화처럼 보여주고 있었다.
제국시민 여러분! 중앙해령의 지각에서 또 다시 균열이
일어나고 고온의 열수를 내뿜는 열수분출공이 생기고 있습
니다.
열수분출공은 우후죽순처럼 생기고 있는데 지구의 모든 곳
에 구멍이 뚫려있는 것같은 기분입니다. 이는 장관이라고
밖에 달리 표현할 수가 없습니다. 열수분출공에서 뿜어지는
열수는 잿빛입니다. 이 열수에는 영양(營養) 염류(鹽類)가
생성되어 있고 지구 최초의 생명체는 여기서 진화한 것으로
추정됩니다.
그러나 그때 어떤 생명체가 진화되었는지는 아직 과학적으
로 밝히지 못했습니다. 저희는 이때 진화한 생명체는 단세
포(單細胞)의 생명체였을 것이라고 추정하고 있습니다.
저희는 이 곳에서 지구 최초의 생명체가 진화했을 것으로
추정되는 고온의 열수를 채취하여 코스모스 과학센터로 가
져갈 것입니다
열수분출공이 생긴 것은 해양의 해수가 지각의 갈라진 틈으
로 침투하다가 마그마를 만나 가열되어 열수가 된 것이었
다. 열수는 주변의 금속물까지 녹이면서 다시 상승하다가
지표를 뚫고 솟구치기 시작한 것이다.
유강열 박사는 지구의 형성과정을 보면서 점점 가슴이 답답
해지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그는 시간여행으로 밝혀진 지구형성의 신비에 짙은 의혹을
느꼈다
(여기엔 거대한 음모가 있어!)
유강열 박사는 점점 의혹이 커지는 것을 느끼며 유러너스
제국이 건국된 일을 생각하기 시작했다.
A. D 4,018년 자유시민연합군대가 핵폭탄을 투하하여 아프
리카를 잿더미로 만들어 버림으로써 안드로이드와의 전쟁은
사실상 끝이 났다.
그러나 자유시민연합군과 안드로이드와의 전쟁이 공식적으
로 끝난 것은 이 해(年)부터 시작된 안드로이드 사냥시대
10년을 포함한 4,028년이었다.
엘리사는 최후의 안드로이드 인간이었다.
자유시민연합인들은 모두 그렇게 생각했다. 그리하여 안드
로이드 사냥꾼 헐버트가 엘리사를 죽인 4,028년을 공식적으
로 안드로이드와의 전쟁이 끝난 기점으로 삼은 것이다.
그들은 안드로이드와 전쟁을 하기 위해 결성한 자유시민연
합을 해체하고 국가 개념이 없는 시민사회로 복귀했다. 이
제 그 어느 누구로부터도 지구인들은 위협을 받지 않으며
살게 되었다.
지구는 모처럼 평화시대가 도래했다.
그러나 지구의 평화는 그렇게 오랜 시간을 유지할 수 없었
다. 안드로이드와의 전쟁이 한창일 때부터 아마추어 천문학
자들 사이에 은밀하게 나돌던 적색(赤色) 왜성(矮星) 봉선
화(鳳仙花)가 지구궤도에 침입함으로써 지구는 일대 혼란이
일어났던 것이다.
그것은 안드로이드와의 전쟁이 끝난지 불과 10년후인 4,038
년의 일이었다.
인류는 20세기부터 인공위성을 발사하여 우주탐사에 나섰었
다. 1968년에는 미국의 아폴로 우주선이 달에 착륙하여 인
간이 달에 첫발을 내딛는 쾌거를 이룩했고 화성을 비롯한
지구에 근접해 있는 천체들에 대한 탐사를 계속했다.
그러나 인류가 기대했던 것처럼 우주탐사는 그다지 소득이
없었다. 지구에 근접해 있는 천체들은 한결 같이 생명체가
살 수 없는 불모의 천체들이었다.
인류는 실망했다.
목성을 탐사하는 우주선 하나를 발사하는 데도 70억달라라
는 막대한 비용이 소모되었다. 이에 인류는 우주탐사를 포
기하고 말았다. 당시까지 발견된 은하계의 가장 끝에 있는
천체까지 가는 데는 무려 150억 광년(光年)이라는 시간이
걸렸기 때문에 설사 그 곳에 생명체가 산다고해도 소용없는
일이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인류가 우주개발을 포기하는 바람에 우주과학 분
야는 가장 낙후되어 20세기 수준에서 한 치도 진보하지 못
하였다.
이러한 시기에 적색 왜성 봉선화의 지구궤도 침입은 청천벽
력 같은 것이었다.
새로운 행성이나 항성, 위성이 발견되면 대개 그리스 신들
의 이름을 붙이는 것이 관례였으나 혜성은 발견자의 이름을
붙였다.
봉선화 혜성은 발견자인 박동길(朴東吉)이라는 아마추어 천
문학자의 이름을 붙여야했으나 그는 자기 집 장독대에 핀
여름꽃의 이름을 붙여버렸다.
그러나 대부분의 천문학자들은 봉선화라는 이름 대신 그 혜
성을 네미시스(Nemesis: 그리스 신화의 여신, 오만한 사람
들에게 복수를 해주는 신, 또는 천벌의 여신)라고 불렀다.
인류는 20세기 이후에도 수많은 전쟁과 재앙을 겪었다. 일
본이 바닷속으로 침몰한 일본열도 침몰사건, 식량의 무기화
로 전세계가 전쟁에 휘말렸던 제3차세계대전, 로봇인간 안
드로이드와의 전쟁, 오존층의 파괴로 인한 질병
그러나 가장 큰 사건은 적색 왜성 봉선화의 지구궤도 진입
이었다.
처음에 인류는 반신반의했다.
혜성의 지구궤도 침입이나 지구충돌 가능성은 몇 번이나 경
고되었었다. 그러나 지구는 한 번도 그런 위험을 겪은 일이
없었기 때문에 불안한 상태에서도 애써 봉선화 혜성이 지구
궤도를 비켜 가기를 기원했다. 그것은 지구인들의 처절한
염원이었다.
그러나 봉선화 혜성은 그들의 염원을 저버리고 지구궤도에
진입한다는 천문학자들의 일치된 견해가 밝혀짐으로써 지구
는 커다란 혼란에 빠졌다.
과학자들은 로켓을 발사하여 봉선화 혜성을 파괴하는 방안
을 찾아냈다. 그러나 막상 로켓을 발사하자 봉선화 혜성의
진로에 우주진공공간이 만들어져 있어서 소용이 없었다.
혜성이 거대한 가스 소용돌이를 일으키면서 만들어낸 진공
공간은 블랙홀처럼 로켓까지 빨아들이고 있었다.
과학자들은 절망했다.
"이젠 끝장이야!"
"마침내 지구에 종말이 오고 있어!"
봉선화 혜성은 하루하루 빠른 속도로 지구를 향해 날아오고
있었다. 과학자들은 봉선화 혜성이 얼음과 바위덩어리로 만
들어져 있다는 것을 밝혀냈을 뿐 속수무책이었다.
지구인들은 봉선화 혜성의 지구궤도 진입의 순간이 가까이
다가오자 마침내 이성을 잃었다. 수많은 사람들이 미쳐 날
뛰며 약탈과 방화를 일삼았고 여자들을 겁탈했다. 그것은
거의 발악과 같은 처절한 상황이었다.
"지구에 종말이 왔어! 지구가 망하기 전에 실컷 놀아나야겠
어!"
"먹는 것도 마음껏 먹고 싶어. 그동안 부자들이나 먹던 최
고급 음식을 먹어야겠어!"
"도덕이고 윤리고 소용이 없어. 나하고 하고 싶은 사람은
모조리 오라구. 얼마든지 상대해 주겠어!"
광란의 지구였다. 그것은 점잖은 학자들이나 종교가들이라
고 해서 예외가 아니었다.
그러나 지구 최후의 순간이 다가오자 사람들은 오히려 허탈
하여 컴퓨터 모니터만을 응시했다. 사람들은 숨을 죽이고
그 순간을 기다리고 있었다.
이내 지구 최후의 순간이 닥쳐왔다.
그것은 봉선화 혜성이 지구궤도 50Km까지 접근한 것에 지나
지 않았으나 지구의 자전(自轉)과 공전(空轉)을 흔들어 버
림으로써 엄청난 해일과 지진이 일어나 지구는 거의 멸망
단계에 이르고 말았다.
대륙이 바닷속으로 가라앉는가 하면 새로운 대륙이 태어났
다. 건물은 모조리 붕괴되었고 도시는 파괴되었다.
15억의 지구인들이 봉선화 혜성이 지구궤도로 진입했다가
떠나가는 사태로 죽었다.
그러나 지구의 자정력(自靜力)도 뛰어난 것이었다. 지구가
스스로 살아 움직인다는 학설을 입증이라도 하듯이 처절하
고 비참한 재앙속에서도 해체되지 않은 지구는 서서히 생명
체가 살아갈 수있는 환경으로 변모되어 갔다.
봉선화 혜성의 지구궤도 침입 이후 지구는 거의 인간이 살
아갈 수없는 황폐한 땅이 되었다. 산소가 희박하여 산소를
호흡하지 않는 생명체들이 진화했고 이것들은 자신들에게
필요없는 산소를 배출했다.
원시지구가 처음 생겼을 때 바다의 영양염에서 단세포 생물
인 남조류가 산소를 대기권으로 배출했듯이 이들도 산소를
배출했다.
다만 원시지구에서는 그러한 진화가 수천만년, 또는 수억년
에 걸쳐 이루어졌으나 봉선화 혜성의 침략 이후에는 과학자
들의 노력으로 불과 3백년 안에 빠르게 이루어졌다.
살아 남은 인류는 폐허속에서 새로운 지구를 개척했다.
이들은 처음에 희박한 산소속에서 호흡하며 살았으나 희박
한 산소를 한쪽으로 모아서 공급했다.
그러나 한정된 산소량으로 인해 지구의 모든 인류에게 산소
를 공급할 수는 없었다. 그들은 유러너스 제국를 건설한 뒤
에 그 곳에만 집중적으로 산소를 공급했다.
그 곳에서 살수있는 사람은 과학문명에 이바지할 수있는 과
학자들과 그들의 가족에 한정되었다.
전 세계는 이제 유러너스 제국에 의해 지배되었다.
유러너스 제국이 건설된 것은 3백년에 걸쳐 무질서와 혼란
에 빠져 있던 지구에 한 걸출한 과학자의 출현함으로써 비
롯되었다. 그는 전쟁과 무질서에서 헤어나 평화를 찾았고
4,338년에 제국을 건설했다.
제국 건설에 참여한 사람들은 소수의 과학자들이었다. 그들
은 기원전에 이스라엘 민족이 하느님으로부터 선택을 받았
다고 주장했던 것처럼 과학이 자신들을 선택했다고 주장했
다.
이 과학자의 이름은 코스모스였고 이 과학자의 이름을 따서
코스모스 과학센터가 건립되었다. 이 코스모스 과학센터는
제국의 모든 것을 지배했고 사법, 행정, 입법의 상위에 있
었다.
그러나 뛰어난 과학자인 코스모스는 갑자기 증발되었고 지
구는 혼란에 빠졌다. 그러나 난세에는 반드시 영웅이 출현
하듯이 지구에 또 한 명의 걸출한 인물이 태어났다. 그는
과학자가 아닌 신(神)이었다. 그는 유러너스 제국의 어머니
로 불렸으며 모든 주민들의 경배를 받았다. 마더 살로메였
다.
유러너스 제국의 수도는 아라크네 시(市)였다. 유러너스 제
국의 인구는 약 3천만명 정도 되었는데 이 3천만명의 인구
가 전세계를 지배하고 있는 것이다.
사피언스 그라운드 주민들은 언제나 산소통을 허리에 달고
다녔다. 산소가 떨어지면 충전소(充塡所)에서 산소를 충전
했다.
그들은 산소가 충분한 유러너스 제국에서 추방되어 황량한
벌판에서 살았다. 사람들은 그들을 벌판에 산다고하여 사피
언스 그라운드(벌판의 지구인)라고 불렀다.
"우리에게 산소를 공급해 달라!"
"우리는 산소가 필요하다!"
그들은 무리를 지어 유러너스 제국에 산소를 공급해줄 것을
요구했다. 그러나 유러너스 제국은 전세계 30억이나 되는
인구에 산소를 공급해줄 여력이 없었다.
벌판의 지구인들은 부족한 산소로 인해 극심한 고통 속에서
살아야 했다.
인간의 뇌세포에 산소가 부족하여 여러 가지 장애를 일으켰
다. 벌판의 지구인들은 부족한 산소로 인해 끔찍한 일을 저
지르기 시작했다.
질병에 시달리는 것은 기본적인 일이었고 뇌세포의 기형적
인 확장이나 축소에 의해 치매가 되기도 했고, 기형아를 출
산하는가 하면 성격이 포악해졌다.
가족이 가족을 죽이는 끔찍한 일이 다반사로 일어났다.
이에 벌판에서 살던 지구인들이 유러너스 제국을 침략하기
시작했다. 이것이 저 유명한 '산소전쟁'이었다. 물론 그들
이 처음부터 전쟁을 목적으로 유러너스 제국을 침략한 것은
아니었다.
그들은 그 옛날 미개인들이 식량을 약탈하듯이 산소를 약탈
하는 단순한 도적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나 그들의 무리가 점점 커지고 조직화되자 유러너스 제
국은 위기를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이에 유러너스 제국은
벌판에 사는 지구인들과 전쟁을 선포했다. 4543년의 일이었
다.
이것이 후일 산소전쟁, 또는 '60년 전쟁'으로 불리는 제4차
세계대전이었다.
역사책에 60년 전쟁으로 기록하고 있듯이 이 전쟁은 59년 6
개월 동안 처절하게 진행되었다. 그러나 우수한 과학문명을
소유하고 있던 유러너스 제국의 완승으로 끝이 났다.
벌판의 지구인들은 이 전쟁에서 7억6천만명이 목숨을 잃었
고 유러너스 제국 주민들은 4백만명이 목숨을 잃었다. 벌판
의 지구인들은 두 번 다시 유러너스 제국을 침략하지 않는
다는 치욕적인 조항에 서명을 했고 유러너스 제국은 산소를
배출하는 식물을 벌판의 지구인들에게 공급하기로 약속했
다.
일종의 평화협정이었다.
그러나 이 약속은 잘 지켜지지 않았다. 애초에 이루어질 수
없는 약속이기도 했다.
벌판의 지구인들은 끊임없이 유러너스 제국을 해적처럼 침
략했고 유러너스 제국은 그럴 때마다 산소를 배출하는 식물
의 공급을 중단했다.
벌판의 지구인들에 대한 유러너스 제국의 탄압도 극심했다.
벌판의 지구인들은 마침내 하데스 운동을 벌이기 시작했고
자살폭탄조까지 조직해서 유러너스 제국을 공격했다.
유러너스 제국은 사피언스 그라운드의 강경파 하데스들로
인해 골머리를 앓았다.
게다가 제2차 봉선화 혜성의 침입도 목전에 닥쳐오고 있었
다. 유러너스 제국을 공포에 떨게 하고 있는 것은 강경파
하데스들이 아니라 봉선화 혜성의 침입이었다. 봉선화 혜성
이 또 다시 지구에 침입한다면 지구의 모든 생명체는 하나
도 살아남지 못할 것이었다.
"봉선화 혜성이 제2차 침입이 다가오고 있다!"
"봉선화 혜성을 경계하라!"
"우주선을 개발하라! 우주에 생명체가 살고 있는 행성으로
가지 않으면 지구족은 한 사람도 살아남지 못한다!"
봉선화 혜성의 침입에 대한 공포와 벌판의 지구인들로부터
위협을 당하게 된 유러너스 제국은 벌판의 지구인들에게 유
화정책(宥和政策)을 쓰기 시작했다. 산소의 공급을 늘리는
한편 벌판의 지구인들 중에서 온건한 유전인자(遺傳因子)를
가지고 있는 벌판의 지구인들을 유러너스 제국의 시민들로
신분 상승을 시켜주었다. 아울러 선택된 벌판의 지구인들에
게 유러너스 제국의 자유로운 통행을 허락했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피언스 그라운드인들은 황량한 벌판에서
살아야 했다. 벌판에서 유러너스 제국으로 들어오는 입구는
모두 봉쇄되었고 무장한 병사들이 밤낮으로 지켰다. 유러너
스 제국이 허락한 신분증을 갖고있는 벌판의 지구인들이 아
니면 유러너스 제국으로 들어올 수가 없었다.
그러나 그 경우에도 유러너스 제국으로 사피언스 그라운드
인들이 들어올 수있는 것은 유러너스 제국인들과 결혼을 하
거나 유러너스 제국인들 밑에서 취업을 할때뿐이었다.
산소가 부족하기도 했지만 벌판의 지구인들이 부족한 산소
로 인해 유전인자가 포악한 범죄형 인자로 변질되었다는 이
유에서였다.
그들을 유러너스 제국으로 편입시키면 유러너스 제국은 순
식간에 범죄의 나라로 변모될 가능성이 많다는 것이 제국정
부의 설명이었고 제국시민들은 그 설명을 믿었다.
게다가 그들은 그들에게 주어진 특권을 누리는 것에 익숙해
져 있었다. 사피언스 그라운드인들을 밑에 두고 하인처럼
부리는 것은 과학문명이 아무리 발달을 해도 포기할 수없는
그들만의 특권이었다.
그들은 이 특권을 향유하기 위해 벌판의 지구인들과 전쟁까
지 한 것이다.
그러나 유러너스 제국의 가장 큰 두통거리는 봉선화 혜성의
제2차 지구궤도 침입이었다. 이것은 물론 제국정부의 과학
자들이 발표한 내용이었다. 그들은 봉선화 혜성의 침입에
그들의 사활이 걸렸다고 판단하고 이에 대한 대비책을 세우
기 위해 전전긍긍하고 있었다. 물론 그것은 유러너스 제국
시민들의 생각이었을 뿐 실제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었다.
"우리는 시간여행 준비를 하고 있다! 우주를 조사한 결과
지구인들이 이주하여 살 수 있는 행성이 없다! 그래서 지구
의 원시시대로 돌아가 유러너스 제국시민들을 옮길 것이다!
이것이 시간여행계획 타임플랜이다!"
유러너스 제국정부는 코스모스 과학센터에서 그 일을 대비
하고 있다고 발표했고 제국정부 시민들은 그 사실을 그대로
믿었다.
"어머니께서 우리를 지켜줄 거야."
그들은 불안한 가운데도 전지전능한 여신 마더 살로메에게
한가닥의 희망을 걸었다.
.......................................................
...............
(1)스미스 터틀이라는 이름이 붙여진 혜성이 2,116년 8월
14일 핵폭탄 1백만개와 맞먹는 엄청난 힘으로 지구와 충돌,
지구의 생물이 멸종할 것이라고 주장한 학자가 있다. 이는
영국 호주천문대의 천문학자 던칸 스틸 박사로 그는 호주의
시드니에서 열린 제2차호주우주개발회의에서 직경 5km의 거
대한 혜성이 지구를 향해 빠른 속도로 달려오고 있으며 지
구와 충돌할 경우 히로시마에 투하된 원폭의 1백60만 배에
해당하는 2천만 메가톤의 충격이 발생할 것이라고 경고했
다.
제 11 장 암호명 블랙버드
A. D 4612년. 1월7일 8시20분.
아라크네시의 번화가에 있는 카페 베아트리체 앞길은 출근
하는 유러너스 제국의 시민들로 붐비고 있었다.
하데스의 강경파 지도자 블랙버드 애브너소령은 카페 베아
트리체의 모퉁이에서 유러너스 제국의 원로원 부총통 산파
브로 장군이 지나가기를 기다렸다.
산파브로 부총통은 기계처럼 정확하게 8시30분에 카페 베아
트리체 앞의 워터로를 지나 원로원 청사로 출근하고 있었
다. 그것은 지난 6개월 동안 하데스 요원들이 철저하게 조
사를 하여 밝혀낸 사실이었다.
요원들은 이미 적재적소에 배치되어 있었다. 이번 작전에
참가하고 있는 하데스 요원들은 모두 다섯 명이었고 죽음을
각오하고 있었다. 산파브로 부총통에 대한 저격작전은 이미
세 번이나 시도했으나 준비하는 과정에서 유러너스 제국의
비밀경찰국에 발각되어 요원들이 모두 검거되어 공개 처형
되었었다.
그러므로 이번 작전은 바르시크대령이 심혈을 기울인 작전
이었다.
하데스의 모든 계획은 바르시크대령이 세우고 애브너소령은
실행을 맡았다. 그렇기 때문에 바르시크대령은 베일뒤에 가
려져 있었고 애브너소령의 이름은 블랙버드라는 이름으로
사피언스 그라운드와 유러너스 제국에 파다하게 퍼져 있었
다.
이번 작전이 실패한다면 사피언스 그라운드는 커다란 타격
을 받게 될것이었다. 그러나 그녀는 실패를 모르는 여자였
다. 지금까지 그녀가 주도한 유러너스 제국의 요인들에 대
한 암살, 폭탄테러 등은 모두 성공했고 유러너스 제국인들
에게 그녀의 이름은 공포의 대상이었다.
하데스의 지도자 블랙버드 애브너! 그녀의 잔혹한 테러로
수많은 목숨을 잃은 유러너스 제국시민들은 그녀가 표독한
여자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녀의 정체는 전혀 알
려져 있지 않았다.
"하데스는 당신의 희생을 원하고 있어!"
애브너소령은 문득 사피언스 그라운드의 첩보사령부 사령관
이자 하데스의 사령관인 바르시크대령을 머리에 떠올리고
어두운 표정이 되었다. 이번 작전은 오로지 그의 계획에 의
한 것이었다.
애브너소령은 처음에 이 계획에 반대를 했으나 바르시크대
령의 간곡한 설명을 듣고보니 달리 방법이 없었다.
그녀와 바르시크대령은 거의 비슷한 시기에 사피언스 그라
운드의 하데스에 투신했는데 바르시크대령은 첩보사령부를
창설했고 그녀는 현장에서 직접 요원들을 거느리고 암살과
테러를 지휘했다.
그것은 벌써 17년전의 일로 그 시기엔 유러너스 제국의 정
책이 강경했기 때문에 바르시크대령도 그녀처럼 테러에 적
극적으로 가담하고 있었다.
그러나 5, 6년전부터 바르시크대령은 첩보를 수집하는 일에
더 열중했고 암살과 테러를 전체적인 구도에서만 실시하도
록 했다. 게다가 평의회의 지시에 의해 애브너소령이 첩보
사령부 소속으로 바뀌었다.
그후 애브너소령과 바르시크대령은 하데스에서 사사건건 대
립했으나 명령권자는 바르시크대령이었다. 그들은 똑같이
사피언스 그라운드 주민들의 열렬한 지지를 받았고 젊은 세
대는 애브너소령을, 장년층 이후의 주민들은 바르시크대령
을 지지했다.
그러나 사피언스 그라운드 평의회의 중재로 그녀와 바르시
크대령은 함께 투쟁을 하기도 했고 서로를 돕기도 했다. 두
사람 모두 공통의 목적은 유러너스 제국을 붕괴시키는 것이
었다.
가로수 옆에 서 있던 로버트가 모자를 벗었다가 썼다. 산파
브로 부총통이 탄 차가 길에 나타났다는 신호였다.
(드디어 오는군 )
애브너소령은 전신이 팽팽하게 긴장되는 것을 느꼈다. 날씨
는 좋았다. 한겨울이었지만 금빛햇살이 보도 위에서 유리조
각처럼 반짝이고 있었다.
애브너소령은 건너편에 있는 엘자 건스키에게 산파브로 부
총통의 차가 나타났다는 신호로 안경을 벗었다. 엘자 건스
키는 노상 카페에서 아침을 먹는 시늉을 하고 있었다.
엘자 건스키가 성인클럽 앞에 세워둔 에어카 진할로우로 신
호를 보냈다. 엘자 건스키의 신호는 식탁에서 일어나 트렌
치코트를 걸치는 것이었다. 성인클럽 앞에 세워둔 에어카
진할로우에는 인간폭탄인 스티븐 호머 형제가 타고 있었다.
애브너소령의 눈에도 유러너스 제국의 고위 관리들의 집무
실이 있는 관청가 상공으로 날아오고 있는 검은 승용차들이
보였다.
산파브로 부총통은 네 대의 경호차가 앞뒤에서 삼엄하게 호
위를 하고 있었다. 경호차에는 완전무장을 한 유러너스 경
찰이 검은 선글라스를 쓰고 좌우를 살피고 있었다.
(언제나 똑같은 식이지 )
애브너소령은 낮게 웃었다. 어쩐지 이번 작전도 성공할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애브너소령은 머리위에 있는 호텔의 7
층 창을 올려다보았다.
7층의 창문은 반쯤 열려 있었다. 그 곳에도 하데스 요원인
다보스가 산파브로 부총통이 나타나기만을 기다리고 있었
다.
준비는 완벽했다.
애브너소령은 천천히 걷는 시늉을 했다. 최근에 암살현장에
는 직접 나타나지 않는 그녀였으나 이번 작전은 너무나 중
대해서 직접 현장에서 지휘를 하기로 했던 것이다.
산파브로 부총통의 차가 가까이 오기 시작했다.
애브너소령은 진할로우를 향해 손가락으로 동그라미를 그려
보였다. 그러자 에어카 진할로우가 시동을 걸고 산파브로
부총통의 경호차를 향해 날아오르기 시작했다.
경호차들이 깜짝 놀라서 핸들을 꺾었고 에어카 진할로우를
향해 일제히 강력한 화염총을 발사하기 시작했다. 이것은
20세기에 사용하던 화염방사기와 전혀 다른 것이었다. 목표
물을 향해 날라가는 것도 순식간의 일이었고 파괴력도 월등
했다.
거리에 있던 시민들이 비명을 지르며 뛰기 시작했다. 거리
는 커다란 혼란에 빠졌다.
산파브로 부총통의 경호차에서 발사한 총으로 인해 에어카
진할로우가 불길에 휩싸였다. 에어카 진할로우는 금세 녹아
서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렸다.
그러나 에어카 진할로우에는 불길이 닿으면 유독가스로 변
하는 개스탄이 숨겨져 있었다. 에어카 진할로우가 불길에
휩싸이는 순간 그것은 요란한 폭음을 내면서 검은 연기를
거리로 자욱하게 내뿜었다.
"유독개스다!"
산파브로 부총통의 경호차들이 당황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산파브로 부총통을 구출하기 위해 아우성을 치고 있
었다.
"개스를 조심해!"
경호요원들이 차에서 튀어나오며 고함을 질렀다. 그들은 중
무장한 장갑기병들이었다. 그러나 검은 연기가 퍼지면서 그
들의 시야를 가로막아 버렸다. 산파브로 부총통의 차는 검
은 연기 속에 갇혀서 우왕좌왕하고 있었다.
그러나 암살자들도 장갑기병이었다. 그들은 일제히 페가서
스를 향해 날아오르면서 휴대용 압축 중성자 로켓탄을 발사
시켰다. 그와 함께 검은 연기 속에 갇혀 있던 산파브로 부
총통의 차가 번쩍하는 섬광 속에 드러났다가 사라졌다.
폭음이 들린 것은 그 뒤의 일이었다. 중성자가 핵폭발을 하
면서 요란한 폭음이 일어나 주위의 유리창을 모조리 깨뜨렸
다.
성공이었다.
이제 산파브로 부총통이 살아날 확률은 전혀 없다. 중성자
로켓탄은 보병용으로 제작된 것으로 반경 20m 이내의 인명
을 완전히 살상한다. 폭풍과 방사능, 낙진은 원자탄의 10배
나 강한 것이었다.
호텔의 7층에서는 다보스가 레이저건으로 경호원들을 사살
하고 있었다. 입체작전이었다.
(이제 됐어!)
애브너소령은 주민들이 눈치 채지 않게 암살현장을 떠나기
시작했다. 벌써 요란한 사이렌이 울리면서 유러너스 제국의
경찰이 달려오고 있었다.
그러나 그들보다 더욱 경계해야 할것은 유러너스 제국의 비
밀경찰들이었다. 그들은 잔인한 인간들이었다.
애브너소령은 유러너스 제국의 아라크네시에 은신했다. 일
단은 숨어있을 수밖에 없었다.
유러너스 제국의 비밀경찰은 발칵 뒤집혔다.
비밀경찰의 우두머리는 여자였다. 그러나 그녀는 가장 악독
하고 잔인한 여자였다.
비밀경찰은 유러너스 제국 총통의 친위대였다. 제복도 옛날
나치스의 친위대처럼 검은 제복에 검은 모자를 썼다. 발에
는 긴 부츠를 신고 있었다.
팔에는 붉은 완장을 두르고 있었다.
팔에 두른 붉은 완장과 검은 스커트 아래의 가죽부츠, 허리
에 찬 레이저건은 일반경찰을 압도하고 있었다.
그러나 일주일이 지날 때까지 유러너스 제국의 비밀경찰은
아무 단서를 잡지 못했다.
애브너소령은 만족했다.
국장(國葬) 기간이기는 했지만 애브너소령은 유러너스 제국
의 방송국과 신문사로 메시지를 보내 산파브로 부총통의 암
살은 자신의 지시에 의한 것이라고 발표했다. 아울러 산소
가 사피언스 그라운드에 공급되지 않는한 이러한 성전(聖
戰)은 언제까지나 멈추지 않고 계속될 것이라고 선언했다.
아라크네시의 군중들은 애브너소령의 선언에 흥분해서 날뛰
었다. 금방이라도 전쟁이 일어날 것같은 분위기였다. 여자
들은 산파브로 부총통의 빈소가 마련된 원로원 청사로 몰려
와 통곡을 했다.
그들의 눈은 저주와 증오로 이글거리고 있었다.
유러너스 제국은 일주일 내내 어수선했다. 제국의 제2인자
인 산파브로 부총통이 암살을 당하고 애브너소령이 블랙버
드라는 이름으로 암살이 자신이 한 일이라고 선언하자 제국
의 시민들은 분노하여 격렬한 시위를 벌였다.
"하데스의 테러에 대해서 철저하게 응징하라!"
"사피언스 그라운드를 공격하라!"
파나카이아 총통은 시민들의 요구에 부응하여 제국군대에
사피언스 그라운드의 하데스에 보복을 하라는 지시를 내렸
다.
유러너스 제국군대는 총통의 명령이 떨어지자 사피언스 그
라운드로 출동하여 한 시간만에 주민들 5천명을 학살하였
다. 산파브로 부총통의 암살에 대한 보복이었다. 유러너스
제국군대가 주민들 5천명을 학살한 곳은 사피언스 그라운드
의 '마사코리'라는 작은 도시였다. 마사코리시는 인구가 2
만명 남짓 되었으나 하데스 요원들이 많은 곳이었다.
마사코리시는 통곡의 도시로 변했다. 공포와 죽음이 휩쓸고
지나간 마사코리시는 전쟁터 같았다.
사피언스 그라운드의 주민들은 유러너스 제국이 5천명을 학
살하자 평의회의 주도로 반유러너스 제국 시위를 벌였다.
이들의 시위가 사피언스 그라운드의 모든 도시로 번지자 유
러너스 제국은 다시 유화정책을 쓰기 시작했다. 파나카이아
총통은 이들의 시위를 진정시키기 위해 직접 담화문을 발표
하였다.
평화를 사랑하는 유러너스 제국시민 여러분! 그리고 사피
언스 그라운드 주민 여러분! 우리는 지난 1월7일에 우리 유
러너스 제국에서 가장 훌륭한 정치인을 잃었습니다. 그 분
은 여러분의 동지이자 형제였고 진정 평화를 사랑하는 우리
의 지도자였습니다. 그 분이 우리 곁에서 떠나가게 만든 사
람들은 분명히 사피언스 그라운드의 강경파 하데스입니다.
산파브로 부총통의 죽음은 우리 제국이나 사피언스 그라운
드 모두에 큰 손실입니다. 아울러 어떠한 테러도 유러너스
제국은 용납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내외에 천명하기 위해 우
리는 마사코리시의 시민들 5천명을 살해했습니다.
이것은 분명히 보복입니다.
그렇습니다. 사피언스 그라운드의 하데스는 평화주의자를
살해한 것입니다. 우리는 이에 대한 보복을 했고 5천명의
목숨이 부총통을 대신할 수는 없지만 더 이상의 희생은 바
라지 않습니다.
그 분은 평화주의자였습니다.
우리는 어떠한 시련이 닥치더라도 그 분의 숭고한 뜻을 저
버려서는 안될 것입니다. 게다가 지금은 국장 중입니다. 국
장이 선포되어 있는 이 시점에서 제국시민 여러분과 사피언
스 그라운드 주민 여러분께서는 자중해 주시기를 호소하는
바입니다.
지금은 애도기간입니다
파나카이아 총통의 담화문이 발표되자 아라크네시는 비로소
안정이 되었다. 아라크네시의 모든 관공서와 가로수에는 조
기(弔旗)가 내걸리고 방송은 구슬프고 장중한 진혼곡을 틀
었다.
"너희들에게도 머지않아 최후가 올것이다!"
애브너소령은 입술을 깨물며 혼잣말로 내뱉았다.
애브너소령은 타이머를 맞춘 자명종 시계가 요란하게 우는
바람에 깜짝 놀라 눈을 떴다. 침대 머리맡에 있는 스코틀랜
드 병정 모양을 한 자명종 시계가 깨어나서 스코틀랜드 스
코티시(Schottische: 스코틀랜드 무곡)를 장중하게 틀어대
고 있었다.
애브너소령의 방안에 갑자기 수많은 병사들이 행진을 하는
듯한 나팔소리와 북소리가 가득하게 울려퍼졌다.
애브너소령은 손을 뻗어 자명종 시계를 끄려다가 그냥 두었
다. 지나간 세기의 음악을 자명종 시계를 통해서 듣는 것이
지만 장중하고 낭만적이었다.
애브너소령은 침대에 누운 채 그 소리를 5분 남짓 계속해서
들었다. 스코틀랜드의 병정 모양 자명종 시계는 아라크네
D. C의 도깨비 시장에서 산 것이다. 3시20분에 맞추었으므
로 4시까지는 아직도 40분이나 남아 있었다. 테니스 코트까
지는 걸어서도 20분이면 충분했다.
애브너소령은 스코틀랜드 무곡이 모두 끝난 뒤에야 길게 하
품을 하고 침대에서 일어났다. 그녀는 거울에 비친 반나의
자신을 향해 미소를 지었다.
36세라고는 하지만 몸매가 처녀처럼 균형이 잡혀 있었다.
크고 아름다운 유방은 탄력이 넘치고 히프는 여전히 팽팽했
다.
이만하면
이만하면 어떤 남자도 뇌쇄시킬 수있을 것이다.
애브너소령은 거울을 보며 언뜻 그런 생각을 했다. 그러자
그녀의 연인인 이리노 퍼그스중위(中尉)의 얼굴이 머릿속에
떠올라왔다.
이리노중위는 코스모스 과학센터의 타임스터디(Time Study:
시간연구) 파트에 소속된 장교였다. 이리노중위는 그녀보다
10년이나 연하이지만 그녀가 유러너스 제국의 비밀경찰국의
감시를 피하고 안전하게 활동하기 위한 위장으로 선택한 장
교였다.
(적국의 장교만 아니라면 괜찮은 사낸데 )
이리노중위를 생각하다가 애브너소령은 쓸쓸한 미소를 그렸
다. 그가 적국의 사내라는 사실에 가슴이 묵직하게 저려왔
다.
애브너소령은 이리노중위에게 전화를 걸었다.
하늘은 우중충한 잿빛이었다.
눈이 오려는 모양이었다. 창밖에는 아라크네시의 아름다운
겨울풍경이 보이고 있었다.
"하이!"
이리노중위는 연구실에 있었다. 홀로그램 전화기에는 단정
한 군복을 입은 이리노중위의 얼굴과 연구실의 각종 장비가
비쳐졌다. 이리노중위의 연구실은 허가 받은 사람들 외에는
홀로그램 전화가 금지되어 있었다. 그러나 애브너소령은 이
리노중위의 연인이었기 때문에 통화가 허용되었다.
"오늘도 근무해?"
애브너소령은 목소리를 달콤하게 꾸며서 물었다. 이리노중
위는 기묘하게 연상의 여자를 좋아했다. 그녀로서는 이리노
중위의 그런 성격을 이해할 수 없었으나 그녀가 안전하기
위해서는 이리노중위를 이용할 수밖에 없었다.
"연구가 밀려 있어요. 벌써 잠을 자려는 건가요?"
이리노중위의 홀로그램 전화에도 애브너소령의 모습이 비치
고 있는 모양이었다. 이리노중위의 목소리가 흥분해 있었
다.
애브너소령은 눈을 찡긋하여 윙크를 했다.
"왜?"
"아름다운 몸매예요. 저를 뇌쇄시키는군요."
"이제 막 잠에서 깨어났어."
"설마 나를 유혹하고 있는 건 아니겠지요?"
애브너소령은 풋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애브너소령은 히프
만 간신히 가린 얇은 실크 슈미즈를 입고 있었다. 슈미즈는
흰색이지만 그녀의 볼륨있는 몸매를 그대로 내비치고 있었
다.
"테니스를 치러 갈거야. 언제 퇴근해?"
"밤에나 퇴근하게 될 것 같아요."
"그럼 마더타임에 참여 할 수 없겠네? 러브타임엔 참여할
수 있겠지? 이따가 즐거운 밤을 보내자구."
"좋습니다."
애브너소령은 홀로그램 전화의 영상에 가볍게 키스를 했다.
이리노중위도 키스를 하는지 쪽 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애브너소령은 이리노중위와 통화를 끝내고 슈미즈를 벗었
다. 슈미즈는 어깨끈으로 걸친 것이기 때문에 어깨에서 끈
을 밀어내자 허물처럼 밑으로 미끄러져 흘러 내려갔다.
이제 거울에는 30대 여인의 나신이 비치고 있었다. 애브너
소령은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몸매가 흡족했다.
이리노중위가 좋아하는 그녀의 몸이었다.
애브너소령은 팬티를 히프에서 끌어내려 똘똘 말아서 벗고
욕조로 들어갔다. 간단하게 샤워를 하고 테니스 코트로 나
갈 참이었다.
애브너소령이 샤워를 끝낸 것은 10분 쯤 되었을 때였다. 애
브너소령은 타올로 몸의 물기를 닦고 옷을 입기 시작했다.
날씨가 차갑기는 하지만 테니스 코트에서 땀을 흘릴 생각을
하고 흰색 스커트와 흰색 T셔츠를 입었다.
집에서 공원까지는 포장되어 있는 도로였다. 도로의 왼쪽으
로는 처녀라는 이름의 버고우(Virgro: 그리스의 여신, 영어
로는 Virgin)강이 흐르고 있었고 오른쪽으로는 강언덕이었
다.
도로 양옆으로는 포플라 가로수가 열병을 하듯이 길게 늘어
서 있었다. 오른쪽 포플라 가로수 뒤로는 장미숲이었다. 계
절적으로 따지면 꽃이 필 때가 아니었으나 시(市)에서 관리
하는 숲은 유전자공학으로 사시사철 푸른 잎이 자라고 꽃들
이 피어 있게 하였다.
애브너소령은 기분이 좋았다. 하늘은 우중충했으나 아직 눈
을 뿌리고 있지는 않았다. 장미숲에서는 부드러운 꽃향기가
풍겨오고 있었고 보도블록 위를 걸을 때 운동화의 탄력도
마음에 들었다. 번화가와 달리 평범한 보도블록이었다.
주라기 공원에서는 공룡들의 울음소리가 요란하게 들려오고
있었다. 그 소리에 지축이 흔들리고 공기가 파장을 일으켰
다.
애브너소령은 주라기 공원에 있는 테니스코트에서 한 시간
쯤 테니스를 쳤다. 철조망 너머 공원에서는 이따금 주라기
시대의 공룡들이 지축을 울리듯이 크게 울어대고 로봇과 테
니스를 치는 애브너소령을 물끄러미 쳐다보기도 했다.
공룡들은 모두 화석(化石)에서 추출한 유전인자를 복제하여
진화시킨 것이었다.
(이제 돌아가야지 )
6시밖에 되지 않았는데 사방이 벌써 어둑어둑해지고 있었
다.
애브너소령은 테니스 라켓을 들고 테니스 코트를 나왔다.
그녀는 공원의 매점에서 커피를 주문한 뒤에 서쪽하늘을 쳐
다보았다.
아라크네시를 병풍처럼 둘러싸고 있는 바위산들이 황금빛으
로 번쩍거리고 있었다. 잿빛 구름의 틈새로 서쪽으로 넘어
가는 태양의 빛이 바위산을 황금산으로 보이게 했던 것이
다.
애브너소령은 느릿느릿 커피를 마셨다. 그러다가 커피잔 밑
의 종이쪽지를 발견하고 흠칫하는 표정이 되었다.
애브너! 오늘 그들에게 체포될 것이다.
블랙버드다운 죽음을 맞이하기를!
종이쪽지에는 단 두 줄의 글씨만 씌어 있었다. 바르시크대
령이 보낸 것이었다.
애브너소령은 자신도 모르게 재빨리 주위를 살폈으나 바르
시크대령은 보이지 않았다.
(바르시크대령! 내가 죽을 때를 알려줘서 고맙군 )
애브너소령은 조용히 커피를 마셨다. 유러너스 비밀경찰에
체포되는 것이 두렵지는 않았다. 그런데도 기분이 점점 미
묘해지고 있었다.
바람은 차가웠다.
테니스를 한 시간 밖에 치지 않았는데도 등줄기가 땀으로
축축하게 젖어 있었다. 그러나 기분은 쓸쓸하기 짝이 없었
다. 어느 정도 예상하고 있던 일인데도 땅이 꺼지는 듯 절
망적인 기분이었다.
애브너소령은 커피를 다 마신 뒤에 라커룸에 들어가서 또
샤워를 했다. 땀때문에 샤워를 하지않을 수 없었다. 아니
비밀경찰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일부러 시간을 끌고 있는지
도 몰랐다.
주라기 공원을 나오자 사방이 캄캄했다. 하늘엔 별들이 총
총했다. 애브너소령은 걸음을 재게 놀리기 시작했다. 밤이
된 탓인지 장미향기가 더욱 진하게 풍겼다.
그때 애브너소령의 등뒤에서 저벅거리는 발자국소리가 들려
왔다. 애브너소령은 등뒤로 신경을 바짝 곤두세웠다.
누굴까.
누가 어두운 밤에 이쪽으로 오고 있는 것일까. 바르시크대
령의 말대로 유러너스 제국의 경찰인가
애브너소령은 걸음이 잘 떨어지지 않았다. 다리가 휘청거렸
다.
아마 테니스를 치고 돌아오는 사람이겠지. 누군지는 모르지
만 나처럼 일요일 오후 내내 낮잠을 잔 뒤에 늦으막하게 일
어나서 테니스로 땀을 빼고 돌아오는 사람일 거야
애브너소령은 그렇게 생각하자 다소 안심이 되었다. 그러나
저벅거리는 구두소리는 점점 가까워지더니 등뒤까지 바짝
쫓아왔다.
애브너소령은 걸음을 멈췄다. 그러자 등뒤를 따라오던 사내
가 그녀를 지나쳐서 걸어가기 시작했다.
키가 큰 사내였다. 손에는 테니스 라켓을 들고 있었고 추리
닝을 입고 있었다. 키가 큰 탓에 걸음이 성큼성큼 떼어지고
있었다.
(내가 공연히 긴장을 하고 있었어 )
애브너소령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때였다. 갑자기 도로에 주차되어 있던 검은 승용차들이
애브너소령을 향해 일제히 서치라이트를 켜댔다. 그리고 검
은 제복을 입은 유러너스 제국의 경찰들이 신속하게 애브너
소령을 에워쌌다.
(바르시크는 너무나 정확하군!)
애브너소령은 속으로 감탄했다.
"블랙버드! 움직이지 마!"
유러너스 제국 경찰의 날카로운 목소리가 애브너소령의 귓
전을 때렸다. 애브너소령은 가슴이 묵지근했다.
"유러너스 제국의 개들이군!"
그러나 애브너소령은 당당하게 소리를 질렀다. 유러너스 제
국의 경찰이 의심을 하지 않게 하려면 필사적으로 저항하는
시늉을 해야했다. 그러자 검은 장갑을 낀 유러너스 제국의
경찰들이 애브너소령을 향해 일제히 달려오기 시작했다.
애브너소령은 재빨리 엎드리면서 테니스 라켓 가방에서 레
이저건을 꺼내 유러너스 제국의 경찰을 겨누었다. 유러너스
제국의 경찰들은 황급히 차옆에 은신하면서 애브너소령을
향해 소리를 질러댔다.
"저항한다!"
"마취총 발사!"
그때 유러너스 제국의 경찰이 강한 마취성분을 갖고있는 총
을 쏘기 시작했다. 타타타 하는 총소리와 함께 흰 연기가
애브너소령을 향해 자욱하게 쏘아져 왔다.
(곤란하게 생겼군 )
애브너소령은 레이저건의 방아쇠를 당기면서 이를 악물었
다. 레이저건의 탄환에는 강력한 폭약이 설치되어 있었다.
폭음은 크지 않았으나 탄환을 맞으면 그대로 날아갔다.
유러너스 제국 경찰의 검은 승용차들이 불기둥을 내뿜었다.
이어서 공중으로 튕겨올랐다가 요란하게 폭발했다.
그러나 애브너소령은 레이저건을 몇번 쏘지 못하고 정신을
잃었다. 유러너스 제국의 경찰이 쏜 마취총의 흰 연기가 애
브너소령을 에워싸는 것과 동시에 애브너소령을 서서히 마
취시키기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애브너소령은 정신이 몽롱하여 풀썩 쓰러졌다. 그러자 유러
너스 제국의 경찰이 애브너소령에게 후다닥 달려와 수갑을
채웠다.
애브너소령은 금속성의 차가운 감촉에 몸을 부르르 떨었다.
"가자!"
유러너스 제국의 경찰들이 그녀의 등을 떠밀고 엉덩이를 구
둣발로 차며 승용차에 강제로 밀어넣었다. 그리고 유러너스
제국 경찰국을 향하여 전속력으로 날으기 시작했다.
애브너소령이 기억하고 있는 것은 그것이 전부였다.
애브너소령이 깨어난 것은 두 시간이 훨씬 지나서의 일이었
다. 애브너소령은 차가운 겨울비가 그녀의 몸으로 쏟아지는
것같은 기분에 가까스로 눈을 떴다.
유러너스 제국 경찰의 마취총 때문인지 머릿속이 안개처럼
혼미했다. 그러나 뼛속을 파고드는 듯한 한기에 점점 정신
이 맑아져 왔다.
(결국은 여기까지 끌려왔군 )
애브너소령은 정신을 바짝 차려야 하겠다고 생각했다. 그녀
는 의자에 묶여 있었다. 유러너스 제국 비밀경찰국의 지하
취조실이었다. 심문관들이 그녀에게 호스로 차가운 물을 뿌
리고 있었다.
애브너소령은 몸을 부르르 떨었다.
"깨어났군!"
여자의 목소리가 낭랑하게 지하실을 울렸다. 애브너소령은
고개를 들어 소리가 들린 곳을 쳐다보았다. 소리가 나는 곳
에서 검은 제복을 입은 여자가 그녀를 쏘아보고 있었다.
"네가 블랙버드 애브너소령이지?"
나이는 그녀와 비슷해 보였다. 그러나 그녀보다 키가 훨씬
더 컸다. 머리에 깊숙이 눌러 쓴 제모 때문이었을까. 그녀
에게서는 애브너소령에게서는 느껴지지 않는 위압감까지 풍
기고 있었다.
"알면서 왜 묻나?"
"흥!"
여자가 소리를 내어 웃었다. 여자의 웃음소리가 넓은 지하
실을 음산하게 울렸다.
"나는 유러너스 제국 비밀경찰국 국장 로즈다! 하데스 요원
들에게 이름은 들어봤겠지?"
"그렇다! 악녀라고 얘기를 들었다!"
"애브너소령이 어떤 계집인가 궁금했는데 너였다니 저 계
집의 옷을 벗겨라"
"옛!"
로즈 국장의 지시에 심문관들이 일제히 달려들어 애브너소
령의 옷을 찢었다. 애브너소령은 금세 실오라기 하나 걸치
지 않은 알몸이 되었다.
로즈가 그녀에게 뚜벅뚜벅 다가와 채찍을 휘두르기 시작했
다. 원시적인 고문 방법이었다. 그러나 가장 잔인한 고문
방법이기도 했다.
애브너소령은 이를 악물었다. 그러나 비명을 지르지는 않았
다. 채찍이 허공을 가르고 그녀의 알몸을 때릴 때마다 신음
을 지르기는 했으나 블랙버드답게 비명을 지르지 않았다.
"역시 블랙버드로군!"
로즈 국장이 채찍을 멈추고 빙긋이 웃었다.
"이건 그냥 인사였어!"
애브너소령은 로즈 국장을 조소하는 눈으로 쳐다보았다.
"우린 인류 역사상 가장 잔인한 악녀를 사육하고 있지 그
여자는 인간의 피와 살을 먹으면서 살아 "
로즈 국장이 손뼉을 치자 벽이 갈라지고 대형유리창이 나타
났다. 애브너소령은 어리둥절하여 대형유리창을 쳐다보았
다.
(아!)
다음 순간 애브너소령은 머리털이 모조리 솟구치는 듯한 기
분이 들었다. 대형유리창 안에는 피를 뒤집어쓴 듯한 여자
가 다른 여자의 심장을 뜯어먹고 있었다.
(너무 끔찍해!)
애브너소령은 온 몸을 부르르 떨었다.
"하데스 간부들의 명단을 알려주면 고통스럽지 않게 죽여주
겠다. 그러나 하데스 간부들의 명단을 알려주지 않으면 저
여자에게 던져 주겠어. 저 여자는 늘 굶주리고 있으니까 환
영을 할테지 "
로즈 국장이 그녀의 턱을 치켜들었다.
"난 모른다!"
"그래?"
"내가 아는 것은 알리 피치 뿐이야. 허지만 너희들에게 알
려줄 수는 없어!"
알리 피치는 하데스의 행동대장 격이었다.
"알리 피치가 명단을 가지고 있나?"
"말하지 않겠다!"
"그래?"
"헉!"
그 순간 애브너소령은 입을 딱 벌리며 고통스러운 신음을
내질렀다. 로즈 국장이 갑자기 그녀의 가슴을 예리한 흉기
로 찔렀기 때문이었다.
애브너소령은 더 이상 기다리지 않고 이빨 사이에 있는 캡
슐을 깨물었다. 그러자 향긋한 향기가 그녀의 입안 가득히
퍼졌다.
그것은 그녀의 기억을 모두 지워버리는 하데스의 특수약이
었다. 하데스의 전사들이 유러너스 제국의 비밀경찰에 체포
되었을 때 고문을 당하여 비밀을 털어놓는 사태를 방지하기
위해 특별히 제조된 약이었다. 이제 3분만 있으면 약효가
발생하여 그녀는 아무 것도 기억하지 못하게 될것이다.
"아무리 고문을 해도 소용이 없어!"
애브너소령은 이를 악물었다. 로즈 국장이 찔러대는 가슴의
상처로 머리에서 진땀이 났다.
"명색이 블랙버드 애브너인데 이 정도의 고문이야 견디는
것이 당연하겠지!"
로즈 국장이 애브너소령에게서 물러났다. 애브너소령은 가
슴이 쓰리고 아팠다. 로즈 국장의 손에는 어느 사이에 날카
로운 송곳이 들려 있었다. 그녀는 고문을 하기 위해 언제나
그런 것을 휴대하고 다니는 모양이었다.
애브너소령은 정신이 아물아물해지기 시작했다. 서서히 약
효가 나타나고 있었다.
"모리오 부국장! 블랙버드가 왜 그래?"
로즈 국장이 갑자기 소리를 버럭 질렀다.
대형유리창 안에는 공포에 질려있는 하데스의 전사 다보스
의 모습이 보이고 있었다. 그는 지금 사이보그 악녀 엘리자
베스 버틀리로부터 처절한 고문을 당하고 있었다. 심장을
뜯어 먹힌 여자는 한구석에 피투성이로 나뒹굴어 있었다.
그러나 의자에 묶여서 대형유리창 안을 보고있는 애브너소
령은 아무 반응도 보이지 않고 있었다.
"블랙버드가 전혀 반응을 보이지 않잖아?"
로즈 국장은 화가 나서 심문관들을 쏘아보았다. 심문관들이
재빨리 애브너소령에게 달려들어 눈을 까뒤집어보고 입을
벌려 살펴보았다.
"약을 복용한 것같습니다."
모리오 부국장이 음침한 눈빛으로 로즈 국장을 쳐다보며 말
했다. 지난 밤 그는 로즈 국장의 파트너였었다.
"무슨 약?"
"하데스는 기억을 제거하는 캡슐을 소지하고 다닌다고 합니
다. 그 약을 복용한 것같습니다!"
"병신들!"
로즈 국장이 벌컥 화를 내고 밖으로 나갔다. 로즈 국장이
다시 돌아왔을 때 애브너소령은 두 눈이 몽롱하게 풀어져
있었다.
"어떻게 되었어?"
"블랙버드는 자신이 무슨 약을 먹었는지 자신의 이름이 누
구인지도 모르고 있습니다."
"완전히 기억이 제거되었어?"
"그렇습니다."
"이 계집이 블랙버드가 확실한가?"
"확실합니다. 우리에게 체포된 하데스 전사들이 모두 블랙
버드라고 인정하고 있습니다."
"제기랄!"
로즈 국장이 분풀이를 하듯이 애브너소령을 세차게 구둣발
로 걷어찼다. 애브너소령은 윽, 하는 비명을 지르며 의자와
함께 나동그라졌다. 심문을 하기 위해 옷이 모두 벗겨진 애
브너소령의 허벅지가 로즈 국장의 구둣발에 채여 피멍이 들
었다.
"블랙버드의 나이가 몇 살이야?"
"서른 여섯 살입니다."
"본명은?"
"장숙희입니다. 사피언스 그라운드에서는 애브너소령으로
불리고 있습니다."
"아라크네시에서는 누구와 살고 있었어?"
"이리노 퍼그스중위입니다."
"이리노 퍼그스중위가 뭐하는 놈이야?"
"타임스터디 파트의 장교입니다. 아르고 24호의 승무원으로
교육받고 있습니다."
"그래?"
"체포할까요?"
"이리노 퍼그스에 대해서 자료를 뽑아봐!"
"예."
로즈 국장의 지시에 부국장 모리오가 취조실의 슈퍼컴퓨터
에 이리노 퍼그스중위의 이름을 입력했다. 그러자 이리노
퍼그스중위의 자료가 모니터에 떠오르기 시작했다.
그의 아버지는 로버트 퍼그스였고 어머니는 조안나 퍼그스
였다. 로버트 퍼그스는 유러너스 제국의 장군 출신으로 은
퇴해 있었고 어머니 역시 간호장교 출신으로 은퇴해 있었
다.
"유러너스 제국의 영웅들이군 "
로즈 국장은 어쩐지 로버트 퍼그스가 낯이 익은 느낌이었
다. 로버트 퍼그스는 주름살이 깊게 패어 있었고 눈은 흐릿
했다.
(어디서 본 듯한데 기억이 나지 않아 )
로즈 국장이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그러나 아무리 생각을 해
도 로버트 퍼그스를 어디서 보았는지 전혀 생각이 나지 않
았다.
애브너소령은 의자와 함께 나뒹굴고 있었다. 의자가 뒤집혀
져 있어 애브너소령은 볼상 사납게 다리가 쩍 벌어져 있었
다.
"이리노중위를 체포할까요?"
모리오 부국장이 다시 로즈 국장에게 물었다.
로즈 국장은 대꾸하지 않고 조용히 턱을 쓰다듬었다. 그녀
의 차가운 눈은 애브너소령의 허벅지에 있는 삼각분기점을
쏘아보고 있었다.
"아니야."
"이리노중위가 블랙버드와 같이 살고 있었다면 그도 하데스
전사들에게 포섭되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포섭되지는 않았을 거야."
"예?"
"블랙버드는 이리노중위를 이용했을 뿐이야."
" "
"이리노중위를 그냥 놔둬. 우리는 이제 하데스에 역공작을
하는 거야. 하데스는 우리가 눈치 채지 못했으리라고 생각
하고 누군가를 또 이리노중위에게 접근시킬 거야."
로즈 국장의 얼굴에 잔인한 미소가 피어났다.
"허지만 블랙버드가 체포된 것을 알면 하데스가 이리노중위
에게 전사들을 접근시키겠습니까?"
"그러니까 블랙버드를 놓아주어야지."
"그럼 석방을 하는 것입니까?"
"석방이 아니라 닥터 킬러에게 죽이게 만들면 돼. 닥터 킬
러는 부녀자 연쇄살인범이니까 블랙버드를 이리노중위의 집
이 가까운 곳에서 살해하게 하라구!"
"알겠습니다!"
모리오 부국장이 로즈 국장을 향해 거수경례를 붙였다. 그
때 대형유리창 안에서 다보스의 처절한 비명소리가 들려왔
다. 엘리자베스 버틀리가 다보스의 피를 흡혈하고 있었다.
엘리자베스 버틀리는 소름끼치게 붉은 눈으로 이쪽을 한 번
쳐다보고는 징그럽게 웃었다. 그녀의 하얀 드레스가 피에
젖어 흥건했다.
그러나 심문관들은 너무나 낯익은 풍경이라 쳐다보지도 않
고 애브너소령을 끌고 지하실을 나갔다.
제 12 장 적과의 동침
장미숲은 조용했다.
저 아래 버고우강에서는 바람이 일때마다 수면이 뒤집어지
고 물결이 잔잔하게 강언덕을 때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
러나 캄캄한 어둠 속이었다. 장막을 뒤집어씌운 것같은 어
둠이 소리까지 빨아들이고 있었다.
눈발이라도 뿌리려는 것일까. 어두운 하늘에는 별조차 보이
지 않고 있었다. 그러나 캄캄한 어둠이 그의 작업에 방해가
되지는 않을 터였다.
"아가씨. 이제 입을 벌려."
그는 여자에게 속삭이듯이 친근하게 말했다. 여자가 이해할
수없다는 표정으로 그를 빤히 쳐다보았다.
여자는 애브너소령이었다.
"난 닥터 킬러야! 살인전문가지 "
그러나 여자는 미동도 하지 않고 있었다.
닥터 킬러는 고개를 갸우뚱했다. 자신의 이름만 들어도 대
부분의 여자들은 기절초풍을 하게 마련이었다. 그런데도 여
자는 다리를 쩍 벌리고 누워 있었다.
"말을 잘 들어야지. 고통을 당하지 않으려면 말이야."
" "
"입 벌려!"
닥터 킬러는 갑자기 소리를 내어 웃었다. 여자는 전혀 반응
을 보이지 않고 있었다. 닥터 킬러는 여자가 말이 없는 것
이 저항을 하지 않을테니 마음대로 하라는 뜻으로 해석했던
것이다. 유러너스 제국, 특히 제국에서 모든 특혜를 누리고
있는 아라크네시의 여자들에게 정조관념이 없어진 것은 이
미 오래 전의 일이었다.
"입 벌려!"
닥터 킬러는 다시 여자에게 낮게 말했다. 여자가 말똥말똥
눈을 뜬 채 그를 쳐다보았다. 키가 크고 날씬한 여자였다.
머리는 숏커트의 단발머리였다. 그러나 여자는 전혀 반응이
없었다.
(도대체 어떻게 된거지 ?)
닥터 킬러는 이해할 수 없었다. 여자는 저항을 하지도 않았
고 공포에 떨고 있지도 않았다. 닥터 킬러는 여자의 얼굴을
자세히 들여다보았다. 그리고 그때서야 여자의 눈에 초점이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벌써 로즈 국장이 손을 본 여자로군 )
닥터 킬러는 입맛이 썼다. 어쩐지 여자가 어두운 밤에 장미
숲에서 서성거리는 것도 이상했고 그런 여자를 살해하라는
로즈 국장의 명령도 납득하기 어려웠었다.
그러나 지상명령이었다. 로즈 국장이 여자를 살해하라고 명
령을 내린 것은 살해하는데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
녀는 뭔가 중대한 음모를 꾸미고 있었다.
닥터 킬러는 여자의 입을 벌리고 준비한 헝겁조각을 쑤셔
넣었다. 여자가 본능적으로 세차게 도리질을 했으나 닥터
킬러는 더욱 깊숙이 헝겁조각을 여자의 입속으로 밀어넣었
다.
여자가 바둥거리기 시작했다. 닥터 킬러는 여자를 엎어놓고
두 손을 묶었다. 여자는 저항을 하려고 몇 번이나 반항을
했으나 무위에 그치고 말자 단념을 한 듯이 눈을 감았다.
닥터 킬러는 여자를 다시 바로 눕힌 뒤에 한가하게 담배를
피우기 시작했다. 일을 할 때 한껏 여유를 부리는 것은 프
로킬러로서 그의 독특한 습관이었다.
여자는 그의 엉덩이 밑에 깔려서 와들와들 덜고 있었다. 엉
덩이로 전해져 오는 여자의 공포에 떨고 있는 감촉이 그를
한결 기분좋게 했다. 여자는 고통스럽겠지만 그는 기분좋은
탄력을 느끼고 있었다.
이 일은 나의 적성에 꼭맞아.
닥터 킬러는 매번 그렇게 생각했다. 지금까지 얼마나 많은
시민들을 엽기적으로 살해했는지 그는 일일이 기억하지 못
했다. 제국정부에서는 시민들에게 사피언스 그라운드를 향
해 적개심을 불러일으키기 위해 일부러 자국의 시민들을 엽
기적으로 살해해 왔던 것이다. 물론 그 대상은 반역자들이
었고 사피언스 그라운드가 저지른 짓으로 위장을 했다.
엉덩이 밑에 깔린 여자가 꿈틀했다.
닥터 킬러는 비긋이 웃었다. 지난 5년동안 유러너스 제국에
서 저지른 살인사건을 생각하자 수백 명은 되는 것 같았다.
여자의 입에서 갑자기 고통스러운 신음소리가 흘러나왔다.
닥터 킬러는 무릎을 땅바닥에 대고 엉덩이를 들어주었다.
그의 육중한 몸이 여자의 아랫배를 압박하고 있었기때문에
여자가 고통을 느끼고 있었다.
담배를 다 피우자 닥터 킬러는 여자의 스커트를 위로 걷어
올렸다. 이것은 참으로 원시적인 방법이긴 했으나 고통을
배가시키는데는 가장 적절한 방법이기도 했다.
여자가 몸을 비틀었다. 장갑을 낀 그의 손이 여자의 허벅지
깊숙한 곳에 얹혀지자 차가운 감촉이 여자를 떨게 한 것이
었다.
애브너소령의 사체가 발견된 것은 이튿날 아침의 일이었다.
애브너소령의 사체는 목화송이 같은 눈송이가 하얗게 내리
고 있는 가운데 50대의 산책자에게 발견되었다. 그는 몹시
떨리는 목소리로 경찰에 신고를 했다. 신고를 받은 경찰은
즉시 살인과에 보고를 했고 살인과의 베테랑 형사들이 현장
으로 출동을 했다.
코스모스 과학센터의 이리노중위가 형사들의 연락을 받고
현장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모든 조사가 끝나 애브너소령은
비닐주머니(시체를 넣는 주머니, 지퍼가 달려 있다) 속에
들어가 있었고 현장 주위에는 취재진과 경찰, 감식반이 뒤
엉켜 북새통을 이루고 있었다.
이리노중위는 수사 라인(형사들이 수사를 하는 노란 선)에
서 먼저 제지를 받았다. 수사 라인에는 '수사중'이라는 붉
은 패찰까지 붙어 있었다.
"이리노중위요?"
살인과의 형사는 이리노중위의 위아래를 살피며 퉁명스럽게
물었다. 알고서 묻는 수작이었다.
"그렇습니다. 방금 연락을 받았습니다."
"반장님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형사가 수사 라인을 위로 들어서 이리노중위에게 들어오라
는 신호를 했다. 이리노중위는 수사 라인 안으로 들어섰다.
"어서 오시오. 파커 반장이오"
파커 반장은 뜻밖에 백발의 노인이었다. 그러나 몸은 호리
호리하고 체격은 다부져 보였다. 이리노중위는 그가 내미는
손을 잡았다.
"지문으로 사체가 장숙희양이라는 것을 확인했소. 얼굴을
보시겠소? 보고 나서 얘기합시다."
장숙희의 사체가 있는 곳은 30보쯤 떨어진 장미숲이었다.
봄비를 맞은 장미숲에는 색색의 장미가 촉촉하게 만발해 있
었다. 이리노중위는 파커 반장을 따라 걷다가 언젠가 이 곳
에서 장숙희와 점심을 함께 먹던 일을 생각했다. 그런데 이
곳에서 장숙희가 죽다니 이리노중위는 비감한 생각에 잠겨
들었다.
"어떻소?"
파커 반장이 들것에 뉘어져 있는 비닐주머니의 지퍼를 열었
다. 그러자 장숙희의 피묻은 얼굴이 드러났다. 장숙희의 얼
굴은 피 때문인지 파리했다.
하체는 처참할 정도로 난도질되어 있었다.
이리노중위는 얼굴을 찡그렸다.
"맞습니다. 장숙희입니다."
"어젯밤에 실종신고를 했다던데?"
"예. 저녁을 함께 하기로 했습니다. 그런데 테니스장에서
돌아오지 않아서 "
"돌아오지 않고 살해되었다는 말씀이지요?"
"예. 직장에서 퇴근하여 바로 집에 왔는데 장숙희씨가 없었
습니다."
"그 때가 몇시입니까?"
"9시30분입니다."
"직장이 늦게 끝났군요?"
"예. 중요한 일을 연구하고 있기때문에 늦는 일이 많습니
다."
"어디에 근무하십니까?"
"코스모스 과학센터입니다."
이리노중위는 어깨를 으쓱했다. 코스모스 과학센터는 살인
과의 반장이라고 해도 함부로 하지 못하는 곳이다.
"좋은데 근무하시는군요. 타임스터디 요원입니까?"
"그렇습니다."
"그 뒤에는 어떻게 했습니까?"
"전 테니스 코트에서 늦게 끝난 것이 아닌가하고 기다렸지
요."
"몇시까지 기다렸습니까?"
"10시까지 기다렸습니다."
"그 다음에는요?"
"테니스 코트로 연락을 했더니 7시30분쯤에 나갔다고 하더
군요. 그래서 경찰에 신고한 것입니다."
파커 반장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피해자는 사피언스 그라운드 출신이었습니다. 알고 계셨습
니까?"
"예. 그러나 아라크네 시민권을 갖고있는 여자입니다."
"그렇습니다. 닥터 킬러의 짓인 것같습니다."
파커 반장이 단정하듯이 말했다. 이리노중위도 같은 생각이
라 입을 다물었다.
"닥터 킬러에 대해서 알고 계시겠지요?"
"예. 유명한 살인마지요."
이리노 중위는 닥터 킬러가 저지른 수많은 살인사건을 생각
하고 몸을 부르르 떨었다. 홀로그램 전화기로 통화를 할 때
만 해도 장숙희는 흰색의 슈미즈를 입고 그를 유혹하고 있
었다.
"닥터 킬러가 저지른 다른 사건들과 내용이 똑같습니다. 시
체를 난도질했습니다."
이리노중위는 파커 반장의 말에 구토증을 느꼈다. 그는 손
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닥터 킬러는 엽기적인 살인마였다.
"누구나 짐작을 하고 있는 사실이지만 범인은 전직 의사출
신입니다. 아마 사피언스 그라운드에서 온 정신이상자일 것
입니다."
이리노중위는 고개를 끄덕거렸다. 사피언스 그라운드의 주
민들이 난폭해진 것은 산소의 부족 탓이다.
이리노중위는 다리가 후들거리고 떨렸다.
며칠 후 이리노중위는 살해당한 장숙희의 가족들로부터 장
례식에 참석해 달라는 전자 메일을 받고 당황했다. 이것은
여간 난처한 일이 아니었다. 장숙희가 그의 연인이기는 했
으나 사피언스 그라운드에 살고 있었기때문에 유러너스 제
국의 시민들로부터 고깝지 않은 눈총을 받아야 했다. 그러
나 이리노중위는 장숙희의 장례식에 참석하기로 하였다.
그날은 토요일이었다. 이리노중위는 코스모스 과학센터에
출근하지 않고 사피언스 그라운드의 시모프시를 향해 출발
했다. 아라크네시에서 시모프시까지는 두 시간 남짓 걸렸
다.
이리노중위는 유러너스 제국의 경계선을 벗어나기 전에 레
이저총으로 무장한 병사들의 제지를 받았다.
"중위님. 이 경계선 밖은 사피언스 그라운드입니다. 유러너
스 제국시민은 경계선 밖으로 나갈 수가 없습니다."
병사는 이리노중위에게 레이저총을 겨누고 딱딱하게 내뱉았
다.
"허가를 받았소."
이리노중위는 사피언스 그라운드의 황량한 고원을 눈으로
살피며 말했다. 봉선화 혜성의 침입으로 사피언스 그라운드
의 넓은 벌판은 황량하게 변해 있었다. 게다가 차고 건조한
바람까지 세차게 불고 있어서 벌써 몸이 떨렸다.
"방문 목적이 무엇입니까?"
"장례식에 참석하려는 것이오!"
"조회해 보겠습니다."
이리노중위는 병사들이 초소에 들어가서 컴퓨터로 이리노중
위의 신원과 방문 허가를 아라크네시로 조회하는 동안 담배
를 피웠다. 담배는 장숙희에게서 배운 것이었다.
"타임스터디의 이리노중위님이시군요. 좋습니다. 장숙희의
장례식에 참석해도 좋다는 허가명령이 나와 있습니다. 24시
간 동안입니다."
병사가 바리케트를 걷어치우자 이리노중위는 차를 끌고 경
계선 밖으로 나갔다. 그 곳에서 장숙희의 집까지는 500Km나
넘게 떨어져 있었다. 벌써 산소가 희박하여 숨을 쉬기가 곤
란했다. 그러나 모래바람이 부는 황량한 언덕을 넘어서 계
속 비행하자 사피언스 그라운드의 빈민들이 살고 있는 작은
도시가 나타났다.
"우리는 여기서 사는 것에 만족을 하고 있소. 이 곳의 환경
이 우리가 살던 부여족(夫餘族)의 땅과 흡사하기 때문이
오."
장숙희의 부친은 집앞에서 기다리고 있다가 이리노중위의
손을 잡으며 슬픔에 잠겨서 말했다. 그의 집은 허술하기 짝
이 없었다. 낡은 흙벽돌과 유리창, 그리고 판자로 지은 집
은 20세기에도 찾아보기 힘들 정도로 비참했다.
이리노중위는 그들이 사는 집의 초라한 외양에 얼굴을 찌푸
렸다. 집은 바람이 조금만 세차게 불어도 날아갈 것처럼 을
씨년스러웠다.
"집이 누추합니다."
그가 입은 옷도 낡고 헤어져 있었다. 그것은 입었다기보다
는 걸치고 있다는 표현이 더욱 적절할 것 같았다.
"이렇게 오시라고 하는 것이 아닌데 "
"괜찮습니다."
이리노중위는 어디선가 자신의 얼굴을 향해 쏟아지는 뜨거
운 시선을 느끼며 건성으로 대꾸했다.
그러나 숨어서 자신을 살피고 있는 사람이 누구인지 알 수
없었다.
장숙희 아버지의 이름은 장인걸(張仁傑)이었는데 나이는 얼
추 70세 안팎으로 보였다. 부여족 특유의 체구로 몸집이 작
고 단단하면서 사려 깊은 눈매를 갖고 있었다. 이마에 주름
이 깊었다.
"우리는 부여족입니다."
"저도 부여족입니다."
부여족은 조선인을 말하는데 이리노중위도 부여족이었다.
"우리 숙희에게 얘기는 들었소."
장인걸의 늙은 얼굴에 잔잔한 미소가 어렸다. 마치 오랫동
안 헤어졌다가 가족을 만난 것같은 은근한 정이 그의 미소
에서 풍기고 있었다.
"손님이 오셨어요?"
그때 지긋한 여자의 목소리가 들리며 60세 가량된 여자가
밖으로 나왔다. 이리노중위는 한 눈에 그 여자가 장숙희의
어머니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 여자에게서도 장숙희에
게서 풍기던 미묘한 분위기, 어쩐지 따뜻하고 포근한 것이
느껴졌다.
"이리노중위요."
장인걸이 노부인을 보고 말했다.
"어서 오세요. 이렇게 방문을 해주시다니 숙희의 영혼이
존재한다면 무척 기뻐하겠군요."
노부인은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했다. 이리노중위는 공연히
마음이 착잡해졌다. 사람이 눈물을 흘리는 것을 보는 것은
그렇게 흔한 일이 아니었다.
"안녕하셨습니까?"
이리노중위는 의례적인 인사를 했다.
"어서 들어오세요."
"뭐라고 위로의 말씀을 드려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사피언스 그라운드의 장례식에 참석하는 사람들이 인사를
건네는 법을 외워 온 것은 잘한 일이었다. 사피언스 그라운
드의 사람들은 '진심으로 애도를 표합니다.'하고 인사를 건
넸는데 특히 부여족은 '산 사람이나 살아야지 ' 하는 다소
알쏭달쏭한 인사를 건네기도 했으나 '뭐라고 위로의 말씀을
' 이라는 인사가 가장 무난한 것으로 생각되었던 것이다.
사피언스 그라운드와 유러너스 제국은 장례 풍습이 전혀 달
랐다.
"누구나 한 번은 죽지요."
노부인은 담담하게 이리노중위의 인사를 받았다.
장례식에는 이리노중위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많은 사람
들이 참석했다. 흰 꽃을 든 조문객들이 끝도 없이 찾아와
장숙희의 관을 꽃으로 장식하고 있었다. 이리노중위는 꽃을
준비해 오지 않은 것을 후회했으나 어쩔 수 없었다. 그러나
이리노중위가 가장 난처한 것은 장례식에 참석한 많은 사람
들이 이리노중위를 증오하는 눈으로 보고 있다는 사실이었
다.
(이 곳은 나와 어울리지 않는 곳이야 )
이리노중위는 사피언스 그라운드 주민들의 차가운 시선에
짜증이 났다. 그러나 장례식에 참석한 입장이었기 때문에
내색을 할수 없었다.
"저 자는 유러너스 제국정부의 하수인 아니야?"
사피언스 그라운드의 주민들은 뒤에서 손가락질을 하며 수
군거렸다. 잘못하면 돌이라도 던질 것같은 기세였다.
"저 자는 우리의 원수야! 제국군대는 우리 주민들을 5천명
이나 학살했어."
조문객들은 이리노중위의 등뒤에서 증오에 가득차서 수군거
렸다. 이리노중위에게는 참으로 괴로운 일이 아닐 수 없었
다.
"저 자를 죽여 버릴까?"
"안돼. 장례식에 온 손님이니 정중하게 대접을 해야 돼!"
이리노중위는 뒤통수가 자꾸 간지러웠다. 그러나 장례식이
끝나지 않은 상태에서 돌아갈 수는 없었다.
담배를 피우기 위해 빈소가 차려진 방에서 밖으로 나오자
장숙희의 집앞에 사피언스 그라운드의 가난한 주민들이 구
름처럼 모여 있었다. 이리노중위는 그들의 증오에 가득찬
눈총을 받으며 간신히 담배를 피우고 안으로 들어왔다.
"밖에 나가지 마세요. 무슨 일을 당할지 몰라요!"
그러자 장숙희의 어린 여동생이 이리노중위의 옆에 와서 소
곤거렸다. 그녀의 이름은 장애란이었다.
"내가 잘못 온 것같아. 사람들이 나를 증오하고 있어."
"걱정하지 마세요. 제가 돌봐 드릴께요."
장애란이 생긋 웃으며 말했다. 그녀의 몸에서 이름을 알 수
없는 향긋한 꽃냄새가 풍겼다.
"돌봐준다구?"
이리노중위는 어처구니가 없어서 피식 웃었다. 장애란의 말
이 당돌하기 짝이 없었다.
"시중도 들어드리고요."
"고맙군."
장애란은 자신이 열 여섯 살이라고 말했다. 그래서 그런지
그녀의 얼굴은 앳되었고 언니가 죽었는데도 불구하고 맑고
깨끗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녀는 자신의 말대로 이리노중위가 장숙희의 장례식에 참
석하고 있는 동안 모든 시중을 들어주었다.
밤에는 더욱 많은 사람들이 찾아 왔다. 이리노중위는 장숙
희의 장례식에 왜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참석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이리노중위는 시체를 담은 관을 앞에 놓고 밤샘을 했다.
그들이 살고 있는 집은 거의 움막과 같았다. 밤이 되자 바
람이 더욱 세차게 불고 기온이 떨어져 차가운 냉기가 문틈
으로 스며들었으나 주민들은 아무 말도 없이 침묵 속에서
장숙희의 관을 지키고 있었다.
"피곤하시죠?"
장애란이 커피를 가져와서 이리노중위에게 권했다.
"괜찮아."
이리노중위는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장례는 무척 힘들어요."
이리노중위는 밤샘을 하는 일이 여간 고역스럽지 않았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자 사람들이 하나 둘씩 관 앞에서 졸기
시작했다. 나이가 있기 때문인지 장숙희의 부모도 졸고 있
었다. 그러나 끝까지 관을 지킨 사람은 장숙희의 동생 장애
란이었다.
장애란은 이따금 뜨거운 눈빛으로 이리노중위를 살피곤 했
다. 이리노중위는 장애란의 시선이 마치 포충망처럼 자신을
덮어오는 것을 느꼈다.
그물이었다.
어린 장애란의 눈빛이 기이하게 그물이 되어 그를 덮치곤
했다. 이리노중위는 마치 거미줄에 걸린 곤충처럼 그 시선
에서 꼼짝을 할 수 없었다. 장애란은 이리노중위와 눈이 마
주칠 때면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이 생긋 웃었다.
날씨는 몹시 추웠다. 바람이 불 때마다 창문이 덜컹대고 흔
들렸고 하늘의 별들이 추위에 떨며 옹숭거렸다. 별빛도 추
위에 떨고 있는 것 같았다. 이리노중위는 몸을 바짝 웅크리
고 몸을 덜덜 떨었다.
밤이 깊어지자 장애란이 다시 먹을 것을 가지고 왔다. 딱딱
한 빵 조각과 커피 한 잔이었다. 우유와 계란은 없었다. 이
리노중위는 빵을 먹지 않고 커피만 마셨다.
새벽이 왔다. 이리노중위는 어떻게 새벽이 왔는지도 알 수
없었다. 어느 때부터인가 깜박 졸았는데 눈을 떠보자 창으
로 눈이 부시게 밝은 햇살이 비치고 있었다.
이리노중위는 담배가 피우고 싶어 밖으로 나왔다.
그러자 장애란이 따라나왔다.
"한 번 뵙고 싶었어요."
이리노중위가 담배를 피워 물기를 기다려 장애란이 발끝으
로 땅을 툭툭 차며 말했다. 장애란의 옷차림도 낡고 헤어져
있었다. 신발은 황토먼지가 잔뜩 달라붙어 있었다.
이리노중위는 담배연기를 길게 내뿜었다.
"전 여기를 떠나고 싶어요."
장애란이 새침한 표정으로 말했다.
"어디로?"
"어디던지요."
"여기를 떠나서 어디로 가려고 그래? 갈 곳이 없을 텐데
?"
"저를 도와주세요."
"도와 줄수 없어."
이리노중위는 단호하게 말했다.
사피언스 그라운드의 주민과 또 다시 인연을 맺고 싶지 않
았다. 그것은 장숙희 하나로도 충분했다.
사피언스 그라운드의 사람들은 사피언스 그라운드에서 유러
너스 제국으로 진출할 수가 없었다. 그 곳은 유러너스 제국
의 적국(敵國)이자 범죄자들의 거대한 수용소군도였다. 일
시적으로 유화정책을 쓰고 있으나 그야말로 일시적인 유화
정책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사피언스 그라운드 주민들은
유러너스 제국에 낮동안에 들어올 수는 있었으나 거주를 할
수는 없었다. 사피언스 그라운드 주민들이 유러너스 제국에
들어와서 살려면 유러너스 제국시민과 결혼을 하거나 취업
을 해야했다. 그것도 유전인자가 온순한 사람들로 한정되었
다.
"언니는 여기를 떠났잖아요?"
"언니는 유전인자가 좋았어."
"저도 좋을 거예요. 언니와 나는 같은 핏줄이니까요."
이리노중위는 아무 대꾸도 하지 않았다. 장애란이 과연 유
러너스 제국으로 진출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하는지 알
고 있는지 궁금했다. 물론 유러너스 제국으로 진출하는 첫
번째 조건은 유러너스 제국 시민과 결혼을 해야하고 온순한
유전인자를 갖고 있어야 했다.
이리노중위는 장애란과 결혼을 하고 싶지 않았다.
장애란은 나이가 어렸다.
게다가 범죄형의 유전인자를 갖고 있다면 결코 유러너스 제
국으로 진출할 수 없었다. 그렇다고 유전인자가 온순하다고
해도 아무나 진출할 수있는 것은 아니었다.
유러너스 제국은 제국 인구의 적정선을 유지하기 위해 인구
연동제(連動制)를 실시하고 있었다. 유러너스 제국의 인구
가 줄어들어야 비로소 벌판의 지구인들, 소위 사피언스 그
라운드인들 중에서 온순한 유전인자를 갖고있는 사람들을
엄격하게 선발하여 일정기간의 테스트를 거쳐 유러너스 제
국에 취업을 하게 하거나 결혼을 허락해 주는 것이다.
그것은 일종의 노예제도였다.
선발된 사피언스 그라운드인들은 유러너스 제국시민들의 희
망에 따라 시민들과 결혼을 하거나 취업을 하여 하인 노릇
을 했다. 취업도 상점의 점원이나 가정부, 노동자 따위 같
은 일로 한정되어 있었다. 유러너스 제국시민들은 선발된
사피언스 그라운드인들에게 무슨 짓이던지 할수 있었고 사
피언스 그라운드인들은 어떠한 경우에도 저항을 할 수 없었
다. 만약에 저항을 하게 되면 폭력적이라는 이유로 다시 벌
판으로 추방을 당하거나 처형되었다. 이혼을 하게 되어도
사피언스 그라운드 출신은 즉시 추방되었다.
벌판의 지구인들이 유러너스 제국으로 진출해도 유러너스
제국시민에게 소유권이 있었다. 그것은 지구의 상고사 시대
에 있었던 노예제도와 흡사했다. 유러너스 제국시민들은 그
러한 일을 당연한 권리로 인식하고 있었고 벌판의 지구인들
도 순응하고 있었다.
"전 아라크네시로 들어가고 싶어요."
" "
"언니가 살아 있었으면 아마 가능했을 거예요. 언니는 제게
그런 기회를 주겠다고 약속을 했었어요."
" "
이리노중위는 먼 허공을 응시했다. 장애란을 유러너스 제국
으로 진출시킨다는 것은 그녀를 아내로 맞이하거나 하인으
로 데리고 있어야 한다는 뜻이었다.
"이리노중위님이 저의 주인이 되어 주세요."
"주인?"
"제가 이리노중위님 집에서 노예처럼 일해 드릴께요. 마음
에 들지 않으시면 저를 추방하거나 처형해도 좋아요!"
"아라크네시에 신청은 했나?"
"네."
"한 번 생각해 보지 "
이리노중위는 막연한 약속을 했다. 장애란을 유러너스 제국
으로 진출시키려면 하인으로 취업을 시켜야 했다.
장숙희의 매장식에는 더욱 많은 주민들이 참석을 했다. 그
도시의 주민들이 모두 참석한 것이 아닌가하는 의심이 들
정도로 장숙희의 관이 집을 나가자 기다리고 있던 주민들이
떼를 지어 관을 따르기 시작했다. 여자들은 소리를 죽여 흐
느껴 울었고 남자들은 침통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사피언스 그라운드의 장례식은 특이하군 )
이리노중위는 관의 뒤를 따라오는 수많은 사람들의 인파를
보면서 그런 생각을 했다.
매장식은 하얀 꽃에 둘러싸여 진행되었다. 사피언스 그라운
드의 벌판에는 싱싱한 꽃을 피울 산소가 부족했는데도 그들
은 어디선가 꽃을 구해 들고 있었다.
매장식은 나무로 만든 관을 벌판으로 운구해 가고 미리 파
놓은 구덩이 속에 묻는 것이 고작이었다.
그러나 벌판의 지구인들은 그 일을 묵묵히, 그리고 정성스
럽게 했다. 이리노중위는 장숙희의 매장식이 끝나자 장숙희
부모의 전송을 받고 사피언스 그라운드의 시모프시를 떠났
다.
"전 이제 당신 거예요. 저를 잊으시면 안돼요!"
장애란은 그녀의 부모들보다 더 멀리 이리노중위를 배웅했
다.
시모프시를 나와 에어카에서 내려다보자 황량한 먼지 바람
이 불고 있는 언덕에서 장애란이 꼼짝도 하지 않고 이리노
중위를 쳐다보고 있었다. 이리노중위는 바람에 날리는 장애
란의 치맛자락을 보고 가슴이 싸 하게 저려왔다.
(이상한 아이야 )
이리노중위는 그녀의 시선을 무겁게 느끼며 아라크네시로
질주하기 시작했다.
제 13 장 문명의 역사
이리노중위는 장숙희가 죽은 뒤에 좀처럼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았다. 그는 죽음에 대해 한 번도 진지하게 생각한 적이
없었고 죽음을 가까이한 적도 없었다. 장숙희가 그에게 가
까운 여자임에는 분명했으나 슬픔에 잠길 정도는 아니었다.
장숙희는 그보다 10년이나 연상인 탓에 누나나 어머니 같은
포근한 감정을 느끼곤 했을 뿐이었다.
그러나 장숙희가 죽은 뒤 한 달이 지나자 이리노중위는 야
릇한 감정에 사로잡히기 시작했다. 무엇인지 알 수 없었으
나 이리노중위는 안절부절 못했다.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아
우두커니 창밖을 내다보고 회상에 잠기고 있을 때가 많았
다. 물론 그 대부분은 장숙희에 대한 것이었다. 모든 생각
이 장숙희와 그녀의 동생이라는 장애란과 관련이 되어 일어
났다.
코스모스 과학센터에서는 그에게 한 달 동안 휴가명령을 내
렸다. 이리노중위는 코스모스 과학센터의 명령을 받자 집에
돌아와 쉬었다. 코스모스 과학센터의 명령은 합당한 것이었
다. 코스모스 과학센터는 그에게 갑자기 찾아온 감정이 20
세기적 감정이라고 결론을 내렸고 그것은 안정을 하고 쉬어
야 한다고 했던 것이다.
이리노중위는 두문불출했다.
이리노중위가 한 달 동안 쉬면서 한 일은 유러너스 제국의
휴양지 로마노즈에 있는 가족을 찾아본 것뿐이었다. 그것도
휴가가 끝나던 마지막 주말의 일이었다. 이리노중위는 대부
분의 제국시민들처럼 공장 출신이 아니라 어머니 모태에서
출생을 했다.
다시 말하면 로버트 퍼그스라는 아버지와 조안나 퍼그스라
는 어머니의 성교 행위로 정자와 난자가 결합하여 이리노중
위가 출생한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출생은 제국정부가 금
지한 일은 아니었으나 10 내외에 그치고 있었다. 대부분
의 제국시민들은 국립제국병원에서 출생을 했다. 국립제국
병원은 젊은 제국시민들의 정자와 난자를 채집해 놓았다가
필요할 때에 생산을 해냈다.
유머스러운 제국시민들은 이를 가리켜 공장인간이라고 부르
기도 했다. 조금 쓸쓸한 일이기는 하지만 공장에서 상품처
럼 태어났다는 뜻이었다.
그것은 20세기 시대에 지구의 인구를 조절하기 위해 산아제
한을 하던 것과 흡사했다. 공장에서는 제국의 필요에 따라
인간들을 생산해 냈다. 어느 해에는 더 많은 인간을 생산해
내는가 하면 어느 해는 극소수의 인간을 생산할 때도 있었
다. 그러한 까닭에 제국정부의 인구는 항상 적정한 비율을
유지하고 있었다.
사피언스 그라운드에 대한 유화정책으로 그들의 일부를 유
러너스 제국에 받아들이긴 했으나 유러너스 제국의 인구에
커다란 영향을 미치지는 못했다.
"공장에서 태어나는 인간들은 도무지 가족개념이 없어."
술을 좋아하는 로버트 퍼그스는 알콜 기운으로 얼굴이 불콰
해지면 항상 그런 말을 했다. 로버트 퍼그스는 유러너스 제
국의 귀족이었다. 그는 사피언스 그라운드와의 전쟁에 참여
하여 혁혁한 전공을 세웠고 나이가 들자 장군으로 퇴역했
다.
이리노중위는 아버지 로버트 퍼그스의 영향으로 유러너스
제국의 상류사회 자제들이 간다는 유러너스 제국 사관학교
에 당당히 들어갔고 순조롭게 졸업을 하여 과학센터에서 근
무하고 있었다.
"기계나 다름이 없다는 말이야."
"그래도 우수한 인간들예요."
"내 말뜻은 "
"알아요. 아버지 말씀은 로봇인간과 다름없다는 뜻이니까
요."
"그렇지!"
이리노중위의 말에 로버트 퍼그스는 언제나 같은 식이었지
만 유쾌하게 웃었다.
"그들은 우리를 미개인처럼 취급해요."
이리노중위의 동생인 메리언 퍼그스는 자신의 출생을 불만
스러워했다. 그녀는 어머니인 조안나를 닮았고 눈이 크고
둥그스름한 소녀였다.
"우리는 미개인이 아니라 20세기적 사람들이야."
조안나 퍼그스가 잔잔하게 웃으며 말했다. 그러나 20세기적
사람들이라는 것과 미개인이 무슨 차이가 있을까. 20세기에
아이들은 모유(母乳)가 질병에 면역성이 있다는 이유와 정
서에 도움이 된다는 이유로 아이들에게 먹게 했었다. 여자
들이 이유식을 하는 가장 큰 이유는 아름다운 유방(乳房)을
유지하기 위한 것뿐이었다. 그런데 그 시대부터 2천년이 지
난 지금도 여전히 그들은 모유를 먹고 자랐던 것이다.
원시적인 일이었다. 그러나 메리언 퍼그스의 불만에 로버트
퍼그스와 조안나 퍼그스는 결코 동의하지 않았다.
"그들은 우리를 원시인이라고 생각해요."
"우리는 원시인이 아니야. 우리는 그들보다 높은 정신과 감
정을 가지고 있어. 그들은 감정빈혈증에 걸려 있어."
"감정빈혈증이라고요? 그건 정말로 원시적인 20세기적 사고
군요."
"20세기는 결코 미개한 시대가 아니었어. 물론 커다란 전쟁
이 두 번이나 있기는 했지. 허지만 전쟁이야 늘상 있는 일
이었어. 21세기에서 22세기에도 큰 전쟁이 있었고 "
로버트 퍼그스의 말은 정확한 것이었다.
이리노중위는 로마노즈에서 돌아오자 20세기에 대해서 곰곰
이 생각하기 시작했다. 20세기에서 21세기에 과연 지구에는
어떤 변화가 일어난 것일까. 20세기는 전쟁의 시대라는 말
이 과연 합당한 것일까. 1, 2차세계대전으로 얼마나 많은
생명체가 희생되었는가.
그것은 놀랄만한 의문점이었다.
이리노중위는 처음으로 지구의 문명사(文明史)에 대해 진지
하게 생각하기 시작했다. 20세기 이전은 상고사(上古史)로
통하지만 20세기 이후는 문명사에 해당되었다. 세기로 기록
하기 전에는 태고사(太古史)로 통용되었다.
이리노중위는 코스모스 과학센터에서 퇴근하면 줄곧 이 의
문에 대한 공부를 하기 시작했다.
그의 생활은 다람쥐가 쳇바퀴를 돌 듯이 언제나 일정했다.
8시40분에 근무처인 코스모스 과학센터로 출근했고 6시 30
분이면 퇴근을 했다. 집에 돌아 와서는 샤워를 한 뒤에 저
녁을 먹고 마더타임에 참여했다. 마더타임이 끝나면 밤 10
시, 그는 곧 이어 러브타임에 참여했다.
이리노중위는 러브타임이 그다지 마음에 들지 않았다.
러브타임에 참여하기는 했으나 의무적이었을 뿐 어떤 흥미
도 느낄 수 없었다.
그것은 마더타임도 마찬가지였다.
이리노중위가 장숙희를 파트너로 맞이한 것은 그런 까닭이
었다. 장숙희는 기묘한 매력을 갖고있는 여자였다. 그에게
는 장숙희가 섹스 파트너 이상의 여자였었다.
이리노중위는 10시가 되자 러브타임에 참여하기 위해 성인
클럽에서 산 멀티 마네킹을 꺼내서 침대에 눕히고 홈바테리
와 연결하여 전기를 충전하기 시작했다. 홈바테리는 태양에
너지를 이용해 축전(蓄電)을 하는데 집안의 모든 가전제품
를 비롯해 전열기구까지 충분히 사용할 수 있었다. 태양이
비추는 낮에 두 시간만 축전을 하면 일주일을 사용할 수 있
었다. 코스모스 과학센터가 만들어낸 뛰어난 발명품이었다.
전기가 충전되기 시작하자 황금색 피부의 마네킹에 화색이
돌아오기 시작했다. 지난 번엔 은발의 백인 여자였으나 이
번엔 피부가 고무공같은 동양인이었다. 이름이 패티 리건이
었다.
이리노중위는 멀티 마네킹에 충전이 되는 동안 주방에 가서
하시시 성분이 들어있는 술을 한 잔 마셨다.
그때 충전이 끝났다는 벨이 울렸다.
이리노중위는 침실로 갔다. 충전이 끝난 멀티 마네킹 패티
리건이 침대위에 누워서 흰 이를 드러내고 생긋 웃고 있었
다.
"안녕하세요. 주인님!"
"안녕!"
이리노중위는 건성으로 대꾸했다.
"저는 패티 리건예요!"
"내 이름은 이리노야."
"이리노 주인님!"
멀티 마네킹 패티 리건은 숨이 막힐 정도의 뚱뚱한 체구였
다. 이리노중위가 주문을 할 때 체격 조건을 말하지 않았기
때문에 성인클럽에서 이리노중위의 성향을 분석해서 보냈기
때문이었다. 그들의 분석대로 이리노중위는 뚱뚱한 패티 리
건이 싫지 않았다.
"주인님 패티는 준비되었습니다. 30분을 즐기시려면 1번 버
튼, 1시간은 2번 버튼, 2시간은 3번 버튼입니다. 2시간 이
상은 4번 버튼이지만 건강에 해롭습니다. 주인님께서 자유
롭게 시간을 조절하고 싶으시면 5번 버튼을 눌러 주십시
오!"
이리노중위는 9번을 눌렀다.
그러자 패티가 까르르 웃으며 옷을 벗기 시작했다.
기계인 멀티 마네킹 패티가 옷을 벗는 동작은 여전히 어
색했다. 동작이 각이 지고 뻣뻣했다.
패티가 상냥하게 말했다. 이리노중위는 패티에게 접근하
여 먼저 농구공처럼 커다란 가슴에 손을 얹어 보았다. 패티
의 가슴은 실리콘으로 만들어졌으나 인간의 피부처럼 따뜻
했다. 그러나 인간처럼 체취를 풍기지는 않았다.
패티는 검은 색의 부라우스와 갈색의 재킷, 그리고 청바
지를 입고 있었다. 허벅지와 둔부에 살이 잔뜩 쪄서 옷 밖
으로 살이 삐져 나올 것 같은 느낌이었다.
풍만한 마네킹이었다.
이리노중위가 패티의 부라우스를 벗기고 청바지의 지퍼를
내렸다. 패티는 부라우스 안에 노란 색의 브래지어를 하고
있었다. 이리노중위는 패티의 브래지어를 풀렀다. 그러자
패티가 몸을 떠는 시늉을 하며 입을 벌리고 신음을 토했다.
'흥 기계가 인간의 흉내를 내고 있군 '
이리노중위는 속으로 멀티 마네킹을 비웃었다. 멀티 마
네킹이 가소롭기 짝이 없었다. 그러나 멀티 마네킹에는 손
님과 대화하는 프로그램과 격렬한 섹스를 할 때 신음을 지
르는 프로그램까지 입력되어 있었다. 피부는 인간과 똑같았
고 상대방의 감정에 따라 반응까지 하게 되어 있었다.
대신 생각은 하지 못했다.
생각을 하는 인공지능은 안드로이드 전쟁으로 인해 금지
가 되었다. 멀티 마네킹이 손님과 대화를 하고 관계를 하
는 것은 입력된 프로그램에 의해서였다. 대화의 내용도 침
실에서 가장 많이 쓰이는 은밀한 문장으로 구성되어 손님이
질문을 하면 그에 따라 답변을 했다. 그러나 전혀 엉뚱한
질문, 예를 들어 섹스와 전혀 관련이 없는 수학문제, 하나
더하기 하나는 얼마지 하는 질문을 던지면 멀티 마네킹은
눈을 찡긋하며 모르겠어요, 하고 대답할 뿐이었다.
처음엔 입력되지 않은 질문예요, 하는 대답이 나왔으나
그 대답이 멀티 마네킹이라는 사실을 손님들에게 일깨운다
는 불만이 터져 나오자 바꾸었던 것이다.
날씨는 음산했다. 밖에는 아침부터 빗발이 흩날리고 있
었다. 유리창을 두드리는 비바람이 밤이 되어도 계속 불고
있었다. 인공강우로 조절을 할 수도 있었으나 제국정부는
날씨에는 그다지 관심이 없었다. 이리노중위는 옷을 벗어던
지고 마네킹위에 엎드렸다. 하시시 성분이 담긴 술기운이
혈관으로 퍼지면서 서서히 몸을 덮혀 오고 있었다.
자신의 몸으로 이리노중위의 체온을 감지한 마네킹이 두
손으로 이리노중위를 안았다. 손 하나는 등에서 허리로 미
끄러져 내려와 이리노중위의 둔부위에 얹혀졌다.
그 동작은 의외로 자연스러웠다.
이리노중위는 눈을 감았다. 마네킹을 상대로 섹스를 하는
일이 공허하게 생각되었으나 어쩔 수없는 일이었다. 이것은
거의 의무적이었다. 그는 제국정부에서 시민들에게 반강제
적으로 러브타임에 참여하게 하는 이유를 이해하지 못했다.
과학문명이 발달하면서 인간들에게는 마땅한 오락이 없
었다. 섹스가 종족을 번식하게 한다거나 사랑의 행위라는
개념은 사라진지 이미 오래였다.
섹스는 이제 단순한 오락행위일 뿐이었다.
아이들은 대부분 국립제국병원에서 태어났다. 유러너스
제국의 인구중 90%가 국립제국병원에서 태어난 사람들이었
다. 10%만이 겨우 남녀간의 결합으로 태어났고 그들은 대
개 검증받지 않은 유전인자들로 인해 열성(劣性)인간들이
많았다.
우성(優性)인간들은 공장에서 태어난 인간들이었다.
멀티 마네킹과의 러브타임이 끝나자 이리노중위는 창문을
열고 밖을 내다보았다.
20세기에서 가장 두드러진 것은 과학문명의 발달이었다.
20세기에 발발한 제1차세계대전과 제2차세계대전은 그 엄
청난 해악에도 불구하고 인류의 과학을 인류 탄생 이후 경
이적으로 발전시켰다. 전신과 전화의 발명은 통신시대를 열
었고 비행기는 우주로의 여행을 가능하게 하였다. 게다가
수십만, 또는 수백만의 인명을 한꺼번에 살상하는 원자탄과
레이저무기, 세균무기들은 인류를 공포로 몰아넣었다.
20세기 전반에 터지고 20세기 전반에 끝난 제1, 2차세계
대전은 과학과 비과학과의 전쟁이라고 할만했다. 산업혁명
에 의해 과학이 눈부시게 발전한 서구 열강들은 그들의 상
품을 팔기 위해 식민지시대를 열었고 세계 여러 미개국(비
과학적인 나라들)들을 침략했다.
그러나 그때만 해도 과학과 비과학과의 차이는 얼마되지
않았다. 게다가 과학이 가장 발달한 미국이 자유와 민주라
는 이상(理想)에 입각하여 비과학적인 나라들에게 가담했
다.
그것은 제2차세계대전 때도 마찬가지였다. 2차대전의 1차
적인 원인은 아돌프 히틀러라는 광기의 인물이 독일의 총통
이 됨으로써 비롯되었다고 볼 수 있었으나 독일의 전 국민
들이 이에 가담한 것은 집단적인 히스테리였다.
그들은 아무 죄의식도 없이 유태인들을 6백만명이나 학살
하였다.
아돌프 히틀러를 비롯한 독일인들이 유태인들을 6백만명
이나 학살한 것은 종교 때문이었다. 서구인들은 하느님의
아들 예수를 절대자로 믿고 있었으나 유태인들은 그가 하
느님의 아들이라고 인정하지 않았고 이때부터 그들은 전세
계적인 박해를 받았다.
그들의 박해는 2천년 동안이나 계속되었다.
제2차세계대전이 끝나자 동서냉전이 시작되었다. 동서냉
전은 원래 19세기 후반과 20세기초에 이미 예고되어 있었
다. 19세기까지 지구의 인류는 대부분 군주가 통치하는 봉
건주의 체재로 국가가 유지되고 있었고 그 국가는 소수의
귀족들과 영주(領主)들로 다수의 인민들을 지배하고 착취했
다.
그러나 과학의 발달로 산업화가 되면서 인민의 역할이 증
대되었고 인민들은 자신들의 노력에 비해 형편없는 대우를
받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이들은 차츰 자신들도 고귀한 인간, 생명의 존엄성을 갖
고있는 인간이라고 주장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들은 귀족
들의 소유였던 신(神)을 교수대로 올려보냈다.
엥겔스, 헤겔, 칼 마르크스 등의 사상가들은 이 사상을
전세계로 유포시켰고 러시아의 레닌에 의해서 비로소 이 사
상으로 무장한 국가가 탄생되었다. 억압받고 착취 받던 러
시아의 인민들에게 이 사상은 요원의 불길처럼 번졌다.
붉은 혁명으로 상징되는 이 사태는 러시아를 휩쓸고 전세
계로 퍼져나갔다.
아이러니컬하게도 이 사상을 주창한 유럽 쪽에서는 그
사상의 허구성에 함몰되지 않고 자본주의를 발전시켰다. 그
리하여 자본주의와 공산주의가 대립하게 되었고 자본주의
진영을 서방, 공산주의 진영을 동방이라고 부르는 동서냉전
상태가 성립되게 되었던 것이다.
이들은 거의 1세기동안을 대립했으나 우려했던 동서전쟁
은 일어나지 않았다. 그들은 한 세기동안에 두 번이나 일어
난 커다란 전쟁의 비극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기 때문
에 전쟁을 피하려고 했던 것이다. 이 시기를 역사가들은 동
서냉전시대라고 불렀다.
전쟁이 일어나지는 않았으나 공산주의는 붕괴되었다. 프
랑스의 철학자 앙리 레비는 이미 그 사실을 예측하고 마르
크스는 죽었다고 말한 적이 있었다. 세계의 사상가들은 마
르크스가 신을 죽였으나 앙리 레비는 마르크스를 죽였다고
그를 옹호했다.
그리고 그들의 예상대로 이데올로기의 함정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던 공산주의는 둑이 터지듯이 무너지고 만 것이
다.
그러나 국지전(局地戰)은 세계 도처에서 일어났다. 종교
적인 문제로, 혹은 영토적인 문제로, 세계 여러 나라들은
전쟁을 계속했다.
20세기에서 21세기로 넘어가면서 전쟁은 새로운 양상으로
전개되었다. 20세기에 이미 그 조짐을 보였으나 지구는 환
경파괴로 오존층이 엷어지고 급기야 각종 자연의 재해가 닥
쳐왔다.
북극의 빙산이 녹기 시작하고 오랜 가뭄으로 지구는 점점
황폐해져 갔다. 농작물의 생산도 점점 줄어들어 지구는 대
기근이 닥쳐왔다. 그러나 발전적인 면도 있었다.
21세기에 중국은 새로운 강대국으로 부상했다. 중국은 사
회주의 체재를 유지하고 있을 때는 세계에서 가장 가난한
나라의 하나였으나 정부가 개방정책을 실시함으로써 값싼
노동력과 자원, 그리고 풍부한 시장으로 세계 초강대국이
되었다.
세계는 마침내 미국과 러시아, 그리고 중국에 의해 지배
되었다. G7(서방7개국 정상회의)의 멤버이자 아시아의 초강
대국이었던 일본은 눈부신 과학문명에도 불구하고 화산폭발
로 일본열도가 침몰하는 비극을 맞이하였다. 일본은 침몰의
시간이 다가오자 해묵은 영토문제로 한국과 전쟁을 벌일 음
모를 꾸몄다.
"우리가 사는 길은 조선을 병탄하는 것뿐이다!"
"조선을 다시 빼앗자!"
"조선으로 가자!"
일본정부는 19세기에 한국을 침략할 때처럼 일본 국민들
을 부추기는 전략을 구사했다. 일본정부의 여론 조작으로
일본인들은 광분하여 한국으로 가자고 외쳐댔다.
"조선은 우리의 땅이다!"
"우리가 1945년 조선에서 물러나올 때 다시 돌아오겠다고
약속을 했다! 이제 그 약속을 실천할 때다!"
"우리의 땅을 찾으러 가자!"
일본인들은 두 셋만 모이면 조선으로 가자고 흥분해서 날
뛰었다. 일본열도가 또 다시 군국주의에 의한 전쟁의 광기
로 들끓었다. 만화와 영화, 비디오가 조선을 침략하는 일본
자위대의 활약상을 그렸고 그런 소재의 만화와 비디오들이
일본인들에게 불티나게 팔려 나갔다.
일본인들이 그 무렵 가장 좋아한 만화는 '조선 최후의 날
'이었다. 일본 자위대가 조선을 침략하여 조선의 강력한
방어에도 불구하고 마침내 조선을 정복한다는 내용이었다.
이 만화는 일본의 지식인들까지 사로잡을 정도의 인기를
끌었다.
일본 대중들에게 폭넓은 사랑을 받은 또 다른 만화는 '사
무라이 오노 이치로' 였다. 만화의 내용은 오노 이치로(小
野一郞)라는 낭인(浪人: 건달)이 조선에 몰래 건너가 996명
의 조선 여자들을 희롱하다가 조선 경찰에게 들켜 일본으로
추방된다는 내용이었다. 수많은 조선 여자들이 오노 이치로
가 나타나면 다투어 옷을 벗고 오노 이치로에게 안아 달라
고 애교를 부린다는 것도 어처구니없었지만 조선 여자들이
무릎을 끓고 한 번만 안아 달라고 애원을 하는 장면은 일부
러 한국인들을 비하시키려는 의도에서 표현된 것이었다.
"조선 여자들은 우리 일본인들을 좋아해."
"오노 이치로야말로 우리의 영웅이다. 오노 이치로처럼
조선에 가서 조선 여자들을 정복하자!"
일본인들은 그 만화를 보고 더욱 흥분했다.
"조선으로 가자!"
"조선으로 가자!"
일본의 우익단체들은 매일 같이 시위를 벌였다. 일본 전
체가 전쟁의 광기로 들끓었다.
이로 인해 한국도 전운이 감돌았다.
"한국은 독도를 우리에게 넘겨주시오! 독도를 넘겨주지
않으면 어떠한 불상사가 일어나도 우리의 책임이 아니오!"
일본은 마침내 한국에 최후통고를 했다.
일본의 최후통고를 받은 한국은 즉시 국가안전보장회의를
소집했다. 그리고 장시간의 회의 끝에 일본의 최후통고가
사실상의 선전포고라는 결론을 내리고 비밀리에 각 군(軍)
에 전투준비 명령을 내린 뒤에 일본에 단호하게 선언했다.
"독도는 한국의 영토다! 억지 주장을 하지 마라!"
일본은 독도(獨島)를 일본의 영토라고 강력하게 주장하며
일본에 할양할 것을 요구했으나 한국이 거부하자 영토를 되
찾는다는 명분으로 전쟁을 일으켰다. 세계 여러 나라의 강
력한 비난에도 불구하고 열도의 침몰이 목전에 닥친 일본은
전쟁을 일으킬 수밖에 없는 형편이었다.
"조선을 공격하라!"
"일본열도가 침몰하기 전에 조선을 정복해야 우리가 살
수 있다! 일본군은 전원 옥쇄할 각오로 전투에 임하라!"
일본은 총리가 직접 자위대 총사령부에 나타나 군인들을
독려했다.
"일본이 발악을 하고 있다!"
"일제 식민지 36년의 복수를 할 기회가 왔다! 일본인들을
현해탄에다 수장을 하자!"
한국군의 최고통수권자인 대통령도 국방부에 있는 한국군
총사령부 벙커에서 직접 전투지휘를 했다.
한국과 일본은 치열한 전쟁을 벌였다. 이 전쟁은 일본이
우세할 것으로 예상되었으나 전쟁은 의외로 막상막하로 전
개되었다. 한국은 이미 북한의 붕괴로 통일이 되어 있었고
세계 10대 강대국으로 도약해 있었다. 한때 세계 4대 강국
의 하나인 일본이 하이테크 산업에서의 우세를 믿고 한국을
침략했으나 전쟁은 1년 이상을 끌게 되었다.
재래 전쟁처럼 탱크와 군사들이 총을 쏘는 전쟁이 아니
라 한국과 일본의 전쟁은 컴퓨터와 신무기의 전쟁이었다.
한국과 일본은 상대국을 향해 미사일을 쏘고 최신형 전투기
와 항공모함, 그리고 잠수함을 비롯한 구축함을 발진시켰으
나 컴퓨터 세대의 맹활약으로 전쟁의 승패가 갈라졌다.
특히 한국의 컴퓨터 세대의 눈부신 활약은 일본의 무기들
이 오히려 일본을 공격하게 만들었다. 그들은 일본의 군사
기지에 침투, 메인 컴퓨터의 시스템을 파괴하기도 했고 미
사일 조정시스템을 교란시켜 미사일이 현해탄에서 일본으로
되돌아가 일본을 포격하게 만든 것이다. 일명 해커들이라고
부르는 신인류들이었다.
이 전쟁을 하이테크 전쟁, 또는 해커 전쟁이라고 부르게
된 것도 이들의 활약 때문이었다.
그러는 동안 일본열도의 침몰이 시작되었다. 화산은 원시
지구가 탄생할 때처럼 맹렬하게 폭발하고 여기저기서 땅이
갈라졌다.
일본열도는 지옥의 아수라장처럼 변했다. 용암과 화산재
가 일본열도를 뒤덮고 건물들이 폭격을 맞은 것처럼 무너
져 내렸다. 일본인들은 속수무책으로 죽어갔다.
"빌딩이 무너진다!"
"열도가 침몰한다!"
"으악!"
일본인들은 무너지는 빌딩에 깔려 죽고 갈라지는 땅바닥
으로 빨려들어가 수십만, 수백만이 한꺼번에 떼죽음을 당했
다. 처절한 상황이었다. 그러한 상황에도 공포와 불안을 잊
기 위해 일본인들은 술을 마셨다. 그리고 술에 취해 여자
들을 닥치는대로 겁탈했다.
"저기 계집애가 있다!"
"계집애를 잡아라!"
일본인들은 여자들이 지나가면 우르르 달려가 겁탈을 했
다. 전쟁이나 천재지변이 일어나면 여자들과 아이들이 가장
비참해진다. 그러나 일본에서는 반대의 상황도 발생했다.
"사내놈이다!"
"와!"
"사내놈을 잡아라!"
토오쿄의 긴좌(銀座)에 어디서 나타났는지 한 떼의 여자
들이 지나가는 사내를 붙잡아서 희롱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순식간에 사내를 발가벗겨서 쓰러트렸다. 사내는 미쳐 날뛰
는 여자들이 음탕한 짓을 저지르고 있어도 공포에 질려 저
항조차 못하고 있었다.
여자들의 옷차림은 엉망이었다. 상체에 아무 것도 걸치지
않은 여자가 있는가하면 속옷만 입은 여자도 있었다. 술을
마셨는지 눈도 벌겋게 충혈되어 있었다. 머리는 산발을 하
여 흩어져 있었고 얼굴엔 더러운 흙먼지가 잔뜩 달라붙어
있었다.
"난 언젠가 사내놈을 한 번 겁탈해 보고 싶었어!"
"내가 먼저 할거야!"
"안돼! 내가 먼저야!"
여자들은 사내 하나를 놓고 아귀다툼을 벌였다. 서로 사
내를 차지하려고 아우성을 치는데 갑자기 우르르 하는 소리
와 함께 땅이 울렸다.
"지진이다!"
여자 하나가 공포에 질려서 소리를 질렀다.
"제기랄! 왜 하필 이럴 때 지진이야?"
또 다른 여자가 투덜거렸다. 그러나 그 여자가 투덜거리
는 말이 끝나기도 전에 좌우로 진동이 더욱 커지더니 갑자
기 긴좌의 아스팔트 바닥이 10m 넓이로 쩍 갈라졌다.
"으악!"
여자들은 처절한 비명을 지르면서 아스팔트 바닥이 갈라
진 틈새로 추락하기 시작했다. 끝도 없는 추락이었다. 그러
나 추락한 것은 그들만이 아니었다. 그들이 지나가는 사내
를 붙잡고 음탕한 짓을 저지르고 있을 때 일본열도 전국에
서도 동시다발로 지진이 일어났다. 일본인들은 거의 비슷한
시간에 땅속으로 파묻히기 시작한 것이다.
"화산이 폭발한다!"
그리고 화산의 폭발이 이어졌다. 수십키로그람에서 수백
킬로그람, 심지어 1톤이 넘는 바윗덩어리들이 하늘로 치솟
고 용암이 분출되었다. 지진으로 빌딩에 깔려 죽거나 땅속
에 파묻히지 않은 일본인들은 바윗덩어리에 맞아 죽고 뜨거
운 용암에 녹아서 죽었다.
이어서 무서운 폭풍과 해일이 닥쳐왔다.
"폭풍이다!"
"해일이 덮쳐오고 있다!"
일본인들은 공포에 질려서 아우성을 쳤다. 그러나 그들의
아우성은 공허한 외침에 지나지 않았다. 해일이 후지산보
다 더 높이 치솟아 일본열도를 휩쓸었다. 해일은 며칠 동안
계속해서 일본열도를 덮쳤다.
마침내 일본열도는 완전히 침몰했다.
"살려주세요!"
"저희들을 구조해 주세요!"
극소수의 일본인들이 보트피플이 되어 바다를 떠돌았다.
한국과 중국이 인도주의적 차원에서 구원의 손길을 뻗쳤
으나 구제 받은 일본인들은 1억이 넘는 인구 중에 수십만명
밖에 되지 않았다.
한국도 일본의 침몰로 커다란 영향을 받았다. 일본에서
폭발한 화산으로 화산재가 한국의 상공을 뒤덮는가 하면 용
암의 분출로 바다의 수온이 섭씨 40도로 상승했다. 이로 인
해 바다의 생태계가 파괴되어 어패류가 살지 못하는 죽음의
바다가 되었다.
한국은 중국에 구원을 요청했다.
중국은 세계 초강대국으로 발돋움할 때 한국의 지원을 받
았기 때문에 만주(滿洲)를 한국에 영구 임대해 주었다. 한
국인들은 만주로 대거 이동했고 그 옛날 자신들의 선조가
살던 땅에서 새로운 나라를 건설했다. 그리고 그들은 국호
(國號)를 부여(夫餘)로 바꾸었다.
부여국은 새로운 땅에서 눈부신 발전을 했다. 그들은 무
엇보다도 과학문명에 아낌없는 투자를 했고 이 과학문명이
중국과 미국을 능가했다. 그러나 봉선화 혜성, 일명 네미시
스의 침략은 1천년 남짓 지구의 강대국으로 군림하고 있던
부여족을 하루아침에 폐허로 만들고 말았던 것이다. 물론
안드로이드와의 처절한 전쟁이 끝난 뒤의 일이었다.
그들은 안드로이드와의 전쟁이 있기 전까지는 지구에서
가장 과학문명이 발달한 종족이었었다. 이때는 부여족도 국
가가 해체되어 시(市) 형태로 존재하고 있었다.
"부여족을 괴멸시켜라!"
그러나 영특한 안드로이드들이 과학문명이 가장 발달한
부여족을 집중적으로 공격하므로써 그들은 막대한 피해를
입게 되었던 것이다. 부여족 공략의 선봉에 나선 안드로이
드 장군은 밴티트 킹장군이었다.
밴티트 킹장군은 부여족을 향해 안드로이드군의 화력을
집중시켰다.
"부여족을 집중 공격하라!"
"부여족을 괴멸시키면 지구는 우리의 것이다!"
밴티트 킹장군의 명령에 의해 안드로이드군의 항공모함이
발해만으로 빽빽하게 집결했다. 이어 안드로이드군의 항공
모함에서 수많은 폭격기들이 이륙하여 부여족을 폭격했고
우박을 쏟아붓듯이 대대적인 함포사격이 시작되었다.
"함포발사!"
"발사!"
부여족과의 전쟁은 처절했다. 수만대의 폭격기가 만주 일
대에 융단폭격을 하면 즉시 대전차부대가 상륙하여 부여족
들을 공격했다.
"안드로이드들을 파괴시켜라!"
그러나 부여족의 반격도 치열하게 전개되었다. 부여족은
전쟁이 계속될수록 더욱 거세게 반격을 했고 마침내 안드로
이드군을 만주벌판 깊숙이 유인한 뒤 대공세를 펼쳐 몰살시
켰다. 안드로이드의 시체를 처리하는 소각장이 건설될 정도
로 안드로이드군은 이 전투에서 비참한 패배를 당했다.
"아아, 부여족은 너무나 강대해 "
안드로이드군은 피눈물을 뿌리며 아프리카로 퇴각했다.
그들은 아프리카에 최후의 배수진을 치고 재무장을 하기 시
작했다.
부여족의 타격도 극심했다. 지구에서 가장 발달한 과학문
명을 갖고 있던 부여족은 안드로이드군과의 전쟁으로 잿더
미가 되었으나 신속하게 재건에 나섰다. 이때 비로소 지구
인들은 자유시민연합을 결성하여 안드로이드군과의 마지막
결전을 치룰 준비를 하기 시작했다.
부여족 같은 강대한 민족도 안드로이드와의 전쟁으로 막
대한 타격을 받았으므로 지구인들이 연합을 하지 않으면 승
리할 수 없다고 결론을 내렸던 것이다.
결국 안드로이드군은 자유시민연합의 핵공격으로 멸망하
게 되었다.
부여족은 안드로이드와의 전쟁이 끝나자 국토의 재건에
나섰다. 만주의 광활한 벌판에 도시를 건설하고, 녹지를 만
들어 야생동물을 방목하여 보호했다. 그리하여 하늘을 찌
를 듯 수목이 울창한 숲은 기화이초가 만발하고 새들이 지
저귀는 아름다운 공원이 되었다. 3천 여년전, 발해국(渤海
國) 멸망의 슬픈 전설이 깃들어 있는 아름다운 경박호(慶泊
湖)와 미타호(美陀湖)도 물고기들이 자맥질을 하고 유람선
이 떠다니는 시민들의 휴식처가 되었다. 흑룡강(黑龍江)과
송화강(松花江), 그리고 모란강(牧丹江) 유역의 대초원에는
말들이 무리를 지어 뛰어다녔다.
안드로이드와의 전쟁이 끝난지 불과 1백년만에 부여족의
근거지인 만주대륙은 지구에서 가장 아름다운 대륙이 되었
던 것이다.
내가 죽기 전에 부여족의 도시를 구경하고 죽는 것이 소
원이다
세계인들은 부여족이 살고 있는 만주대륙을 구경하고 죽
는 것을 평생의 소원으로 여기게 되었다. 그러나 그들이 건
설한 유토피아는 불과 1백년도 안되어 붕괴되었다. 봉선화
혜성이 침입하여 부여족을 멸종 단계에 이르도록 파괴했던
것이다.
"봉선화 혜성이 침입을 한다!"
아마추어 천문학자 박동길이라는 사내에 의해 처음 그 존
재가 밝혀진 봉선화 혜성은 부여족의 과학문명으로 충분히
극복할 수 있으리라고 예상했었다. 그러나 지구에서 가장
발달한 부여족의 과학문명도 봉선화 혜성의 침입을 막아낼
수는 없었다.
"하늘의 저주다!"
부여족은 절망하여 울부짖었다. 만주 대륙은 아비규환의
참상이 전개되었다. 안드로이드군의 대대적인 공세를 처절
한 전쟁끝에 격퇴시킨 부여족도 봉선화 혜성의 침입에는 속
수무책이었다.
"화산이 폭발한다!"
부여족의 생활근거지였던 광대한 대륙에서 화산이 폭발하
고 지진이 일어났는가 하면 해일이 덮쳐왔다. 부여족이 살
던 대륙은 하루아침에 바다속으로 가라앉고 말았다.
이리노중위는 자신의 선조인 부여족의 최후를 생각하자
가슴이 아팠다. 지구의 문명사는 참으로 가혹했다. 그러나
이리노중위는 지구의 문명사를 살피면서 자신의 영혼이 더
욱 깊고 푸르러지는 기분이었다.
제 14 장 전사들의 노래
트럭이 언덕에 올라서자 바람이 세차게 불고 있었다. 바
르시크대령은 트렌치코트의 옷깃을 바짝 여몄다. 트럭에 타
고 있는 해방전사들은 레이저건을 발밑에 내려놓은 채 '전
사들의 노래'를 휘파람으로 부르고 있었다.
산소전쟁 때 사피언스 그라운드의 젊은 병사들이 죽어가
면서도 부르던 노래였다.
사피언스 언덕에 붉은 해가 떠오르면
전사들은 포연이 자욱한 전선으로 간다
사피언스의 안녕과 행복을 위해
아가씨들아 우리를 잊지 마오
아가씨들이 건네준 장미 한 송이가 시들기 전에
우리는 이기고 돌아올 터이니
그러나 그 노래를 부르며 전선으로 떠나간 젊은 병사들
은 결코 돌아오지 않았다. 그들은 유러너스 제국의 무자비
한 폭격에 사피언스 그라운드의 골짜기를 시체로 가득 메우
고 죽어갔을 뿐이었다.
조심하라! 사피언스 그라운드의 모든 땅
모든 골짜기에 그들의 피가 스며 있나니
사피언스 그라운드의 저항시인이 젊은 병사들의 무리 죽
음을 안타까워하며 지은 시였다.
바르시크대령은 무겁게 한숨을 내쉬었다. 지금 그는 사피
언스 그라운드 평의회의 소환을 받고 있었다. 그것은 하데
스의 지도자 애브너소령의 죽음을 해명하라는 것이었다.
애브너소령은 닥터 킬러에 의해 살해되었다. 그러나 유러
너스 제국의 비밀경찰의 조사를 받은 뒤에 살해된 것이 분
명했다. 애브너소령은 바르시크대령의 계획대로 하데스의
행동대장 알리 피치의 이름을 자백했고 비밀경찰은 알리 피
치를 잡아다가 고문했다.
사피언스 그라운드에는 무서운 검거선풍이 일어났다.
알리 피치가 보관하고 있는 하데스 간부들의 명단이 유러
너스 제국 비밀경찰에 넘어가 비밀경찰이 그들을 추적하여
검거하고 살해했던 것이다. 지난 주에만 해도 하데스 요원
들이 5백명이나 검거된 것이다. 전에 없는 대규모의 검거선
풍이었다.
(애브너소령을 사랑했는데 )
바르시크대령은 비참하게 죽은 애브너소령을 생각하자 가
슴이 묵직하게 저렸다. 그는 한때 애브너소령을 사랑했었
다.
바르시크대령이 애브너소령을 처음 만난 것은 벌판에서
게릴라 활동을 벌이고 있을 때였다. 애브너소령은 앵글로색
슨계(系)의 야성적인 처녀였다. 그리고 그녀는 바르시크대
령처럼 사피언스 그라운드의 벌판에서 유러너스 제국에 저
항하는 게릴라전을 전개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들의 부대는
불과 50명의 소규모 부대였다.
바르시크대령은 그때 7백명의 대부대를 인솔하고 있었는
데 애브너소령의 게릴라 부대가 유러너스 제국군에 쫓기는
것을 구출해 주었었다. 그후 바르시크대령은 사피언스 그라
운드 첩보사령부를 설치했고 애브너소령은 첩보사령부 소속
이 되어 그의 지휘를 받게 되었다. 그러나 총명하고 야성적
인 애브너소령은 금세 두각을 나타내 블랙버드라는 암호명
으로 쟁쟁한 명성을 날리게 되었던 것이다.
이제는 모두 지나간 일이었다.
바르시크대령은 애브너소령에 대한 연민을 떨쳐버리기라
도 하듯이 세차게 고개를 흔들었다.
사피언스 그라운드는 살인적인 한파가 몰아치고 있었다.
게다가 산소가 희박하여 호흡을 하기가 곤란했다. 바르시크
대령은 거미줄 모양의 아라크네시를 빠져나올 때부터 호흡
때문에 몹시 괴로웠다. 사피언스 그라운드를 드나드는 것이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닌데도 여전히 희박한 산소는 그에게
고통을 몰고왔다. 그러나 산소통을 가지고 다닐 수는 없었
다.
바르시크대령은 사피언스 그라운드를 드나들기 위해 한쪽
폐를 떼어버렸는데도 그다지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사실에
짜증이 났다.
(이렇게 고통스러울 바에야 차라리 총통을 저격했으면 )
파나카이아 총통을 암살하면 유러너스 제국에 어떤 변화
가 올까 하는 생각은 수없이 되풀이했었다. 그러나 파나카
이아 총통을 저격한다고 해서 무엇이 달라지겠는가. 유러너
스 제국에는 마더 살로메가 있었다. 바르시크대령은 대부분
의 사피언스 그라운드의 지도자들처럼 처음에 마더 살로메
가 하나의 상징적인 존재에 지나지 않는다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확인되지 않는 X파일에 의하면 마더 살로메는 분명
히 실존하는 인물이었다.
그는 아직 X파일을 본 일이 없었다. X파일을 수중에 넣기
위해 애브너소령의 첩보망을 이용해 필사적으로 X파일을 수
소문하기까지 했으나 소용이 없었다. X파일은 존재하고 있
는 것이 틀림없었으나 누구의 손에 있는지 알 수 없었다.
유러너스 제국도 X파일 때문에 비상이 걸려 있었다. 그들
도 X파일을 찾으려고 혈안이 되어 있었으나 찾지 못하고 있
었다.
(장애란에게 X파일을 찾게 해야 돼!)
바르시크대령은 주먹을 움켜쥐었다.
블랙버드 애브너소령은 그 동안의 암살과 테러로 유러너
스 비밀경찰국에 너무나 많이 알려져 있었다. 블랙버드 애
브너소령을 희생시킬 수 밖에 없었던 이유도 거기에 있었
다.
언덕을 넘어서자 또 다시 황량한 언덕이 나타났다. 바람
은 언덕이 막아주어 그다지 세차지 않았다. 군데군데 산소
를 배출하는 나무인 플로라가 자라고 있었으나 이 나무로
사피언스 그라운드의 산소를 충분하게 공급할 수가 없었다.
사피언스 그라운드는 산소를 배출하는 플로라 나무의 잎
사귀를 채취하여 산소를 생산해 냈다. 플로라 나무의 잎사
귀의 세포를 인위적으로 재생(복제)하여 더 많은 산소를 생
산하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생산된 산소는 각 충전소로 보
내져 사피언스 그라운드 주민들에게 배급되었다. 물론 주민
일인당 산소 배급량은 죽지 않을 정도로 정해져 있었다. 비
참한 일이었다.
트럭이 계곡을 향해 달려갔다. 유러너스 제국의 비밀경찰
국의 감시의 손길이 뻗치지 않는 곳이었다. 계곡을 지나자
모래사막이었다. 산소는 더욱 희박해지고 모래먼지가 뽀얗
게 일어났다.
이내 초라한 도시가 나타났다. 사피언스 그라운드 중에서
가장 가난한 빈민들이 살고 있는 알파엔드시였다. 알파엔드
는 유러너스 제국과 전쟁을 하기 전에는 사피언스 그라운드
에서 가장 화려한 도시였었다. 그러나 지금은 폐허와 다름
없는 도시였다. 거리엔 굶주린 아이들이 먹을 것을 찾아 돌
아다니고 있었고 처마 밑에는 병든 노인들이 산소가 부족하
여 가쁜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트럭이 모래먼지가 자욱하게 덮여 있는 건물들을 지나 커
다란 돌기둥이 두 개 서 있는 벌판에서 멎었다. 바르시크대
령은 트럭에서 내렸다. 그 벌판 지하에는 사피언스 그라운
드군의 야전군 사령부가 있었다.
바르시크대령은 전사들의 안내를 받아 기둥 앞에 섰다.
전사들이 암호로 되어 있는 리모트콘트롤 버튼을 눌렀다.
우르르르.
그러자 요란한 소리와 함께 바르시크대령이 서 있는 땅이
지하로 하강하기 시작했다. 일종의 엘리베이터였다. 그것은
빠른 속도로 하강하고 있었다. 바르시크대령은 눈을 질끈
감았다. 하강하는 속도가 빨라 속이 미슥거렸다. 이내 엘리
베이터가 지하 80m 지점에서 멎었다.
지하에는 수많은 건물과 복도가 줄지어 있었고 광장이 있
었다. 광장에는 사피언스 그라운드가 자랑하는 대전차부대
와 보병들이 있었다. 사피언스 그라운드 육군 제3군이었다.
병력은 2백만명이었다.
"어떻게 오셨습니까?"
계단을 내려가자 거대한 철문이 가로막고 있었다. 초병들
이 철문 앞에서 바리케드를 치고 삼엄하게 검문을 하고 있
었다. 사피언스 그라운드의 평의회가 열리고 있기 때문이었
다.
"첩보사령부 사령관 각하시다!"
그를 인도해 온 장교가 초병에게 냉랭하게 말했다.
초병은 키가 작고 땅딸막했다.
"몰라뵈어서 죄송합니다."
초병이 재빨리 바르시크대령에게 거수경례를 했다.
"잠깐만 기다리십시오. 저희 대장님께 연락하겠습니다."
초병이 황급히 초소로 들어갔다. 그러자 곧바로 몸이 호
리호리한 초급 장교가 초소에서 뛰어 나왔다.
"안녕하십니까? 보안대의 덴버소위입니다."
덴버소위가 거수경례를 했다.
바르시크대령은 고개만 끄덕거렸다. 덴버소위가 손을 들
어 신호를 보내자 초병이 육중한 철문을 열었다. 전투기가
드나들 수있는 거대한 철문이었다. 그러나 기계로 작동하고
있었기 때문에 수월하게 열렸다.
"지금부터 제가 모시겠습니다."
덴버소위가 바르시크대령을 향해 말했다. 바르시크대령은
초소 앞에서 덴버소위의 지프를 탔다.
지프는 곧바로 광장을 가로질러 달리기 시작했다.
사피언스 그라운드의 대부분의 군대는 제3군처럼 지하에
요새를 건설하고 그 안에서 생활을 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군대가 주둔하는 지하세계는 거대한 도시를 형성하고 있었
다.
지하도시 곳곳에는 사피언스 그라운드의 수많은 전사들이
훈련을 하거나 행진을 하고 있었고 그들이 생활하는 거대한
병영이 세워져 있었다. 사령부는 지프로 4km를 계속 달려가
자 웅장한 모습을 드러냈다.
"차려!"
"근무중 이상 무!"
지프가 사령부 앞에 서자 위병들이 일제히 부동자세를 취
했다가 받들어총 자세를 취했다.
바르시크대령은 사령부의 건물로 총총히 걸어 들어가 부
속실에서 전투복으로 갈아입었다. 첩보부대의 군복은 국방
색 상하 바지에 검은 베레모였다.
평의회 의원들은 사령부의 회의실에 모여 있었다. 모두
6명이었다. 평의회는 바르시크대령까지 7인으로 이루어져
있어서 7인 평의회로 불리기도 했다.
"사피언스 그라운드 첩보사령관 바르시크대령! 의장 각하
의 소환을 받고 도착했습니다!"
바르시크대령은 빳빳하게 서서 평의회 예멘 의장을 향해
거수경례를 했다. 그가 사피언스 그라운드의 최고 통치권자
였다. 그의 좌우에는 사피언스 그라운드의 평의회 평의원인
장군들이 엄숙한 모습으로 앉아 있었다. 모두 전투복 차림
이었다.
"어서 오시오. 바르시크대령!"
원탁의 중앙에 앉아있던 예멘 의장이 긴 수염을 쓰다듬으
며 말했다. 그는 의장인 탓에 흰 옷차림이었다. 평의원들
중 그만이 민간인이었다.
"감사합니다. 의장 각하!"
바르시크대령은 테이블 위에 놓여 있는 산소통에서 산소
부터 흡입했다. 비로소 가슴을 찌르는 듯한 답답함이 사라
지고 청량한 기운이 전신으로 퍼졌다. 바르시크대령은 그
때서야 평의희의 다른 평의원들에게도 목례를 하고 테이블
에 앉았다.
"요지음 하데스의 전사들이 너무나 많이 희생되고 있소."
바르시크대령이 자리에 앉자 예멘 의장이 침통한 표정으
로 말했다.
"의장 각하. 각오하고 있었던 일입니다."
바르시크대령은 짤막하게 대답했다. 예멘 의장으로부터
추궁을 당하리라는 것은 이미 예상하고 있었던 일이었다.
애브너소령에게는 평의회의 지령이라고 했지만 산파브로 부
총통의 암살은 그의 단독작전이었다. 예멘 의장에게 운을
떼기는 했으나 애브너소령까지 희생시킨다는 보고는 하지
않았었다.
"대령! 애브너소령의 죽음을 해명하시오!"
예멘 의장이 날카롭게 질책을 했다. 바르시크대령은 눈을
지그시 감았다가 떴다.
"의장 각하! 애브너소령의 죽음은 우리에게 커다란 손실
입니다. 애브너소령의 휘하에 있는 상당수의 하데스 행동대
전사들은 이번 사태로 전멸을 할것입니다."
바르시크대령은 오히려 단호하게 대답했다.
"그렇소. 너무 희생이 컸지 않소?"
"지난 번에 잠시 말씀을 드렸지만 부득이한 일입니다."
"대령, 그렇게해서 우리가 유러너스 비밀경찰국의 첩보망
에서 벗어날 수있을 것 같소?"
"의장 각하. 유러너스 비밀경찰국의 로즈 국장은 늙은 여
우입니다. 그녀를 완벽하게 속일 수는 없지만 달리 방법이
없습니다."
"그럼 우리가 우주도시를 완전히 건설할 때까지 속일 수
있겠소?"
사피언스 그라운드는 토성(土星)의 위성에 비밀리에 우
주도시를 건설하고 있었다. 그것은 사피언스 그라운드의 사
활이 걸린 일이었다.
"최선을 다하고 있습니다."
"실패를 하면 또 다시 전쟁이 일어날 것이고 우리 사피언
스 그라운드는 재기불능 상태에 빠질 것이오."
"명심하고 있습니다. 의장 각하."
예멘 의장이 이해한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이것으
로 애브너소령의 죽음은 해명이 된 것이다. 예멘 의장은 바
르시크대령을 절대적으로 신임하고 있었다.
그는 유러너스 제국에 젊었을 때부터 저항을 했으나 무기
가 아닌 펜으로 저항을 한 특이한 인물이었다. 그는 한때
촉망받는 역사학자였으나 사피언스 그라운드 주민들이 유러
너스 제국에 탄압을 받는 참상을 목격하고 비폭력투쟁을 하
여 선풍을 일으켰다. 그는 청중을 사로잡는 설득력 있는 연
설을 잘했고 그가 연설을 하면 사피언스 그라운드의 주민들
이 구름처럼 모여들었다.
그는 사피언스 그라운드 주민들의 지지를 받아 평의회 의
장이 되었다. 그리고 유러너스 제국과 평화협정을 맺는데
성공했다. 이제 그는 사피언스 그라운드에서 가장 존경받는
인물로 추앙을 받고 있었다.
"유러너스 제국도 어떤 음모를 꾸미고 있다는 정보가 들
어왔소."
미노스 지구의 제1군사령관이자 평의회 의원인 압둘라 장
군이 입을 열었다. 그는 유러너스 제국과 전쟁을 벌일 때
혁혁한 명성을 날린 일도 있었고 악명 높은 로즈중대를 제
압한 일도 있었다.
"장군님. 음모를 꾸미다니요?"
바르시크대령은 압둘라 장군의 말에 깜짝 놀랐다.
"그 음모는 타임플랜과 관련이 있다고 합니다."
"타임플랜이라면 봉선화 혜성의 침입 때문에 지구의 과거
를 탐사한다는 시간여행계획 아닙니까?"
"그렇소."
"그런데 그 타임플랜이 음모와 무슨 관련이 있습니까?"
"아직 우리도 거기까지는 확인을 못했소. 중요한 것은 그
들의 음모가 멀지 않은 장래에 실현된다는 사실이오. 바르
시크대령도 벌써그 사실을 파악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는
데 "
압둘라 장군이 말끝을 흐리며 바르시크대령을 쳐다보았
다. 바르시크대령은 이미 압둘라 장군이 유러너스 제국의
음모를 어느 정도 알고 있다고 생각했다. 이렇게 되면 X파
일에 대해서 평의원들에게 설명을 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맞습니다. 장군님. 유러너스 제국에는 마더 살로메라는
신비의 인물이 있습니다. 그에 대한 정보가 X파일에 들어
있다고 합니다. 그런데 X파일이 누구에게 있는지 알 수가
없습니다."
바르시크대령은 X파일에 대해서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마더 살로메가 실존하는 인물입니까?"
압둘라 장군이 의문스러운 표정으로 물었다. 그러나 압둘
라 장군도 정보계통의 인물이므로 X파일을 알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처음에 마더 살로메가 20세기의 지
구인들이 상징적으로 믿고 있던 신(神)과 같은 존재라고만
생각했었지요. 유러너스 제국시민들을 효과적으로 통제하기
위해서 말입니다."
"그들은 러브타임으로 시민들을 통제하고 있지 않습니
까?"
"시민들을 효과적으로 통제하는 것은 카리스마를 갖고있
는 절대자가 최고입니다."
바르시크대령의 말에 평의회 평의원들이 걱정스러운 표정
이 되었다. 바르시크대령의 말은 그들을 공포로 몰아넣기에
충분했다
잠시 동안 긴장된 침묵이 흘렀다. 모두들 마더 살로메에
대해서 깊이 생각하고 있었다.
"X파일은 누구에게 있다고 합니까?"
이윽고 예멘 의장이 무겁게 입을 열었다.
"현재 누구에게 있는지 알 수 없습니다. 우리가 산파브로
부총통을 암살한 것은 유러너스 제국 비밀경찰의 이목을 분
산시켜 X파일도 찾고 우리가 우주에 건설하고 있는 우주도
시도 감추기 위한 것입니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것은 유러
너스 제국이 추진하고 있는 타임플랜의 비밀을 밝혀내기 위
한 것입니다. X파일은 타임플랜의 비밀을 밝히는 실마리가
될것입니다."
바르시크대령은 내친김에 타임플랜의 음모까지 평의원들
에게 털어놓았다.
"그 비밀이 마더 살로메에 관한 것이오?"
"제 추측엔 유러너스 제국도 우리와 같이 우주에 생명체
가 살아갈 수있는 행성을 찾아낸 것이 아닌가 여겨집니다.
물론 마더 살로메의 정체도 그 안에 있을 거라고 추측됩니
다."
"믿을 수없는 일이오. 그들은 시간여행에 중점을 두지 않
았소?"
"그들은 우리가 눈치챌까 봐 시간여행으로 위장을 했을
것입니다."
"대령 그만한 확증이 있소?"
"확증은 X파일을 찾아야 나올겁니다."
"그렇다면 X파일을 찾는 일을 서둘러 주시오!."
"예."
예멘 의장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다른 평의원들도 사태의
심각성을 깨닫고 얼굴이 백짓장처럼 하얘졌다.
"유러너스 제국을 펄서폭탄으로 싹 쓸어버립시다!"
그때 산소통에서 게걸스럽게 산소만 흡입하고 있던 차이
나지구의 평의회 평의원 가오슝(高雄)장군이 주먹을 움켜쥐
고 말했다. 펄서폭탄은 핵폭탄보다 더 강력한 폭탄으로 지
구를 송두리째 날려버릴 수있는 가공할 무기였다.
"그들은 아직 우리가 펄서폭탄을 개발한 사실을 모르고
있습니다."
"그것은 지구가 공멸하는 일입니다."
예멘 의장이 단호하게 말했다. 그러자 가오슝이 재빨리
목을 움츠렸다. 그는 평의회 의원이 될만한 자격이 없는 사
람이었다. 그러나 사피언스 그라운드에서 가장 인구가 많은
차이나 지구에서 호족(豪族)으로 인정을 받고 있었을 뿐아
니라 군대를 가장 많이 거느리고 있었기 때문에 평의회 평
의원으로 선출된 사람이었다.
눈은 새우눈처럼 작았다.
"의장 각하! 사실은 코스모스 과학센터의 타임스터디에서
활동하고 있는 이리노 퍼그스중위에게 우리 정보원을 침투
시켰습니다."
바르시크대령은 장애란에 대한 것을 예멘 의장에게 보고
했다. 일단 장애란의 존재라도 알려야 했다.
"이리노 퍼그스중위라면 애브너 동지가 거점으로 이용하
던 유러너스 제국의 장교가 아니오?"
"예."
"그건 너무 위험한 공작이 아니오?"
"이리노 퍼그스중위는 시간여행선 아르고호에 탑승할 예
정입니다. 위험을 각오하고 공작을 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렇다면 바르시크대령에게 맡기겠소."
평의회 예멘 의장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몰루카장군! 니리드(Nereid: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바다
의 요정) 위성에 언제쯤 도시를 완성할 것 같소?"
예멘 의장이 몸집이 작은 흑인 사내를 향해 물었다. 그는
아프리카 계열의 사내로 사피언스 그라운드에서 얼마되지
않는 흑인이었다. 그는 평의회에서 유일하게 과학 전문가로
사피언스 그라운드 평의회가 심혈을 기울이고 있는 우주개
발 계획을 총괄하고 있었다.
"한 달이면 가능합니다."
몰루카장군이 조용히 대답했다.
바르시크대령은 재빨리 몰루카장군을 쳐다보았다. 다른
평의원들도 일제히 몰루카장군을 쳐다보았다.
니리드 위성은 토성의 위성이었다.
"그러면 한 달뒤부터 우리 주민들을 대대적으로 이주시킬
수 있겠소?"
"예. 대규모의 인원을 실어 나를 수있는 우주선과 우주
정거장도 건설중에 있습니다.'
몰루카장군의 말에 평의회 의원들이 일제히 웅성거렸다.
바르시크대령도 감격한 표정으로 몰루카장군을 쳐다보았다.
"그 우주선은 한꺼번에 1만명씩 우리 주민들을 실어 나를
수 있습니다."
"그거 정말 다행이오."
평의회 의장이 기쁜 표정으로 박수를 쳤다. 다른 평의원
들도 흥분하여 일제히 박수를 쳤다.
평의회가 모두 끝난 것은 밖이 완전히 어두워졌을 때였
다. 바르시크대령은 평의회의 예멘 의장과 함께 우주선을
발사하는 텔루스기지까지 갖다가 온 뒤에 사령부로 돌아왔
다. 그리고 그는 변장을 한 뒤에 그날 밤 유러너스 제국의
수도 아라크네시로 잠입했다.
제 15 장 여자의 대륙
우희 위버는 퇴근을 하자 곧장 유강렬 박사의 집으로 향
했다. 그녀는 요지음 퇴근하기만 하면 유강렬 박사의 집으
로 찾아가는 것이 일과처럼 되어 있었다. 물론 유강렬 박사
와 나누는 사랑의 행위도 무시할 수 없었으나 가장 중요한
것은 인류 최초의 시간여행선의 승무원인 에바소령이 남긴
X파일을 살펴보는 것이었다.
(총통은 무엇인가 거대한 음모를 꾸미고 있어!)
우희 위버는 골똘히 생각에 잠겼다. 메가TV에 기록되어
있는 시간여행선의 기록과 에바소령이 남긴 기록은 너무나
달랐다.
위대한 유러너스 제국 시민 여러분! 시간탐사선 아르고
1호는 40억년전의 지구에서 27억년전의 지구로 왔습니다.
27억년전의 지구는 태양이나 우주에서 쏟아지는 고에너지
입자에 무방비로 노출되어 있었습니다. 이 고에너지 입자는
생물의 DNA를 파괴해버리는 강력한 것이었습니다. 그리하여
40억년전에 진화한 생명체는 고에너지 입자의 영향을 받지
않는 바닷속 깊은 곳에서만 살았던 것입니다. 여러분이 시
간탐사선 아르고호의 창으로 보는 것처럼 바닷속 깊은 곳에
는 남조류가 살고 있습니다. 이 곳에는 산호초와 선태식물
도 보입니다
아르고 1호의 창으로는 바닷속에 살고 있는 산호초와 이
끼류가 보이고 있었다.
"저것은 가짜야!"
그때 유강렬 박사가 갑자기 얼굴이 벌개지며 소리를 질
렀다. 우희 위버는 유강렬 박사와 함께 침실에서 메가TV를
보고 있었다.
"뭐가 가짜예요?"
우희 위버는 의아하여 유강렬 박사를 쳐다보았다.
"산호초는 27억년전에 없었어!"
유강렬 박사는 흥분하여 계속해서 소리를 질렀다.
"어떻게 아시죠?"
"나는 식물학자야. 얼마전까지만 해도 27억년전에 산호초
가 존재했다고 믿었었어. 허지만 최근에 산호초가 훨씬 이
후에 진화했다는 학설이 나왔어. 그리고 시믈레이션으로 시
험해 본 결과 산호초는 19억년을 전후해서 진화했다는 것을
알게 되었어. 그러니 저것은 가짜라구!"
유강렬 박사는 식물학자였다. 그는 처음에 산소를 배출하
는 플로라 식물에 대해서 집중적으로 연구를 했었다. 그러
나 코스모스 과학센터의 지시에 의해 최근엔 원시지구의 식
물에 대해서 연구를 하고 있었다. 그런 까닭에 원시지구의
식물에 대해서는 누구보다도 잘 알고있는 것이다.
"19억년전이면 지구에 자기장(磁氣場)이 생길 무렵이군
요."
우희 위버는 동물학자였다.
우희 위버도 처음엔 산소가 희박한 현재의 지구에서 동물
들이 적응하여 생존할 수있는 연구를 하다가 원시지구의 동
물에 대해서 연구를 하고 있었다. 원시지구에 대해 늦게 연
구를 시작했으나 지구에 어떻게 해서 생명체가 탄생했는지
는 잘 알고 있었다.
지구에 강력한 자기장이 탄생한 것은 40억년전부터 판구
조가 이루어지고 판이 외핵으로 빠져들어가면서 대류(對流)
를 타기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지표에서 침강한 판은 외핵
보다 온도가 낮기 때문에 뜨거운 외핵 표면에 있던 액체 금
속이 유동하여 전류(電流)가 발생하고 이 전류에 의해 자기
장이 발생한 것이다.
자기장은 지표를 뚫고 나와 대기권으로 들어오는 태양과
우주의 고에너지 입자를 차단함으로써 DNA를 보호하게 되었
고 바닷속의 생물이 육지로 올라오는 계기가 되었다.
그러나 이 무렵의 육지는 호상열도(互相列島: 서로 연결
되어 있는 섬) 수준에 지나지 않았다. 남조류의 생명체는
자기장에 의해 DNA가 보호되자 호상열도로 올라와 산소를
배출하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산소는 대기권에 더욱 풍성해
지기 시작했다.
40억년전에 판의 수는 약 1천개쯤 되었다. 맨틀과 판의
변화로 인해 판은 이합집산을 계속했고 호상열도는 이런 판
의 위에 존재하고 있었다. 그러나 27억년전이 되자 전체 맨
틀 대류가 시작되어 판이 커지게 되었다. 판은 8억년 동안
이나 계속 커져서 19억년전에는 초대륙(招大陸) 로렌시아가
출현하였다. 이 대륙의 크기는 현재의 북아메리카만 하였고
소대륙끼리 충돌하면서 대륙이 솟아올라 산맥까지 형성되었
다.
그러나 초대륙도 분열과 합체를 거듭하였다.
초대륙 로렌시아는 연대가 정확하지 않으나 불안정한 맨
틀 대류의 유동으로 분열과 합체를 거듭했다. 로렌시아가
분열한 후 15억년전에 지구엔 또 다시 초대륙이 탄생했고
이 대륙 역시 분열되었다가 10억년전에 다시 초대륙이 탄생
했다. 그러나 이 대륙도 곧 분열되어 7억년과 6억년전 사이
에 초대륙 곤드와나랜드가 탄생하였다.
곤드와나랜드는 현재의 북아메리카, 남극, 오스트레일리
아, 시베리아가 합쳐진 대륙이었다. 그러나 이 대륙은 사상
최대의 빙하 대륙이었다. 대규모의 화산폭발로 화산재가 대
기권을 덮어 버렸고 태양열이 차단됨으로써 지구가 얼어붙
게 되었던 것이다. 화산이 계속 폭발했으면 화산재가 적도
(赤道)까지 덮어버리지는 않았을 것이나 화산폭발이 갑자기
멈추어버렸던 것이다.
그러나 초대륙 곤드와나랜드의 수명도 오래 갈 수는 없었
다.
슈퍼 플룸의 상승으로 곤드와나랜드는 분열하기 시작했고
지구를 덮고 있던 빙하가 녹기 시작했다. 그뿐 아니라 슈퍼
플룸은 곤드와나랜드를 갈라놓았고 갈라진 곳에서 태평양이
탄생했다. 또 다른 곳에서는 지구대(地溝帶)를 따라 해수가
침투하여 얕은 바다도 태어났다.
이 얕은 바다는 영양염이 풍부하였다. 영양염이 풍부한
바다에서 생명체는 대형(大形) 다세포(多細胞)로 폭발적인
진화를 했다.
이들 대형 연체 동물들의 출현과 발을 맞추기라도 하듯이
대기중의 산소 농도가 높아져 20%에 이르게 되었다. 생명체
가 대기에 몸을 드러낼 수있는 시기가 온 것이다.
4억4천만년 전에는 대기에 오존층까지 형성되어 생명체에
게 해로운 자외선이 차단되었다. 그리하여 식물이 육지로
대이동을 하는 계기가 되었다.
4억년전에는 지구에 9개의 대륙이 있었다.
3억년전에는 갑자기 아시아 밑으로 커다란 하강류가 발생
했다. 이로 인해 8개의 대륙이 아시아를 중심으로 빠르게
모여 로라시아 대륙을 형성했다.
2억5천만년 전 로라시아 대륙과 분열을 계속하던 곤드와
나랜드가 지중해 근처에서 달라붙는 형상을 취했다. 초대륙
판게아의 탄생이었다.
아시아에서는 하강류가 발생했으나 아프리카 쪽에서는 상
승류가 발생했다. 이로 인해 판게아가 분열을 했다.
판게아가 분열한 곳에서 폭발적인 화산활동이 일어났다.
기화(氣化)하기 쉬운 성분을 갖고있는 맨틀의 마그마가 화
산재가 되어 대기를 자욱하게 덮어 버렸다. 이로 인해 태양
광선이 차단되어 지구는 암흑천지가 되었다. 하늘은 두꺼운
먼지 구름으로 뒤덮이고 빛이 사라졌다.
화산재에 의해 태양광선이 차단되어 광합성(光合成)이 중
단되었다. 광합성이 중단되자 해양에서 산소를 배출하던 플
랭크톤류와 산호초류가 암흑속에서 떼죽음을 당했다. 산호
초에는 체내에 조류로 진화해 나갈 생명체를 포함시키고 있
었다.
산호초에 공생하는 다른 생물들은, 조류의 광합성에 기초
를 둔 먹이 연쇄의 피라미드를 구성하고 있었다. 그러나 산
호초의 멸종으로 산호초에 의존하던 생명체가 더불어 죽어
가고 생명체의 대멸종이 빠르게 진행되었다
우희 위버는 거기까지 생각을 하다가 걸음을 멈추었다.
메가TV에 기록되어 있는 내용은 과학자들이 지금까지 밝힌
내용을 영화로 꾸민 것에 지나지 않았다. 그렇다면 에바소
령이 남긴 X파일은 어떻게 된 것일까, 에바소령은 왜 X파일
을 남긴 것일까? 에바소령이 시간탐사선을 타고 갖다온 곳
은 어디일까
거기에 대한 의혹을 해소할 수는 없었다. 시간이 늦었기
때문에 그날 우희 위버는 유강렬 박사의 집에서 X파일을 자
세히 살필수 없었던 것이다.
그녀는 X파일도 중요하지만 유강렬 박사와 다시 한 번 격
렬한 섹스를 하고 싶었었다. 식사전에 한 섹스는 만족스러
운 것이었다. 그러나 무엇인가 미진한 듯했고 그녀의 내부
에 소진되지 않은 찌꺼기가 남아 있는 것 같았다.
어쩌면 그것은 종족 보존에 대한 인간의 원시적 욕망인지
도 알 수 없었다. 종족을 보존시키려는 그녀의 본능이 한
번의 섹스로 종족을 보존시킬 수없다고 판단하고 그녀의 성
기능을 자극하고 있었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녀는 동물학자였기 때문에 동물의 짝짓기에 대해
수많은 사례를 알고 있었다. 모든 동물들의 짝짓기는
종족 보존의 수단에 지나지 않았다. 동물들의 짝짓기
는 때때로 처절하기까지 했다.
우희 위버는 무인 슈퍼마켓에서 하시시 술을 한 병
샀다. 하시시 술을 마신뒤 러브타임에 참여할 작정이
었다.
거리는 한산했다. 아라크네시의 하늘엔 별들이 총
총하고 뺨을 간지르는 바람엔 따뜻한 봄기운이 섞여
있었다. 거리의 가로수엔 복숭아꽃이 화사하게 피어
꽃향기를 자욱하게 날려보내고 있었다. 우희 위버는
활기차게 걸음을 재촉했다.
"어서와."
유강렬 박사는 집에 있었다.
"하시시를 사왔어요."
우희 위버는 얼굴을 붉히며 말했다. 하시시를 사왔
다는 말을 하는 것이 어쩐지 부끄러웠다.
"잘했어."
유강렬 박사가 그녀를 안아서 입술을 포개왔다. 우
희 위버는 발뒤꿈치를 들고 유강렬 박사의 입으로 자
신의 혀를 밀어넣었다. 벌써 그를 만난지 일주일이 지
나 있었다. 물론 그 동안에도 사이버섹스 프로그램이
나 멀티 마네킹으로 섹스를 즐기기는 했었다.
그러나 그것은 인간과 섹스를 하는 것과 달랐다.
기계나 가상의 공간에는 인간의 끈적거리는 체취가 없
었다. 감정이 개입될 여지가 전혀 없는 것이다.
유강렬 박사가 그녀의 둔부를 둥글게 애무하기 시작
했다.
(아직 하시시를 마시지도 않았는데 )
우희 위버는 얼핏 그런 생각을 했다. 그러나 욕망이
너무나 강하게 일어나고 있었다. 그 욕망이 터질 듯한
흥분으로 이어지며 그녀의 혈관을 팽창시켰다.
어디선가 폭죽이 터지는 소리가 들리고 있었다. 그
러나 우희 위버의 가슴속에서도 폭죽이 요란하게 터지
고 있었다.
나는 시간탐사선 아르고 5호까지 승선하게 되었
다. 이로 인해 많은 사람들의 존경과 사랑을 받았으나
시간탐사선에 대한 의혹이 더욱 커졌다. 그리고 끝내
아르고호가 시간탐사를 하는 것이 아니라 우주의 은하
계를 탐사하는 우주선이라는 것을 알았다. 그때 나는
쇠망치로 뒤통수를 한 대 얻어맞은 것같은 강한 충격
을 느꼈다.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있는 것일까.
유러너스 제국은 무엇 때문에 우주탐사를 하면서도
시간탐사를 한다고 위장을 한 것일까.
내가 더욱 놀란 사실은 아르고호의 어느 누구도 이
런 사실에 의문을 품고 있지 않다는 사실이었다. 그들
은 이미 오래 전부터 아르고호가 시간탐사를 하는 것
이 아니라 우주의 은하계를 탐사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는 것이다.
어쨌거나 우리가 처음에 도착한 천체는 수성이었다.
우리는 수성에 대해 철저하게 조사를 한 뒤에 귀환했
다. 나는 그때까지도 아르고호가 원시지구를 탐사한
것이라고 믿고 환영식에 참석했다.
유러너스 제국은 우리에게 성대한 환영식을 베풀어
주었다. 아라크네시의 번화가에서 카퍼레이드를 하게
했고 파나카이아 총통은 만찬을 베풀어주었다. 물론
이 모든 행사는 메가TV가 유러너스 제국의 모든 직장
과 가정에 중계방송을 했다.
파나카이아 총통은 나를 유러너스 제국의 영웅이라
고 칭송했다.
나는 파나카이아 총통의 만찬에서 한 여자를 보았
다. 그 여자의 이름이 무엇인지, 어디 소속인지 전혀
알 수 없었다. 그 여자는 고대 그리스의 여신들 같은
흰 드레스를 입고 있었는데 참으로 아름다웠다.
내가 그 여자의 이름을 알게 된 것은 누군가 파나카
이아 총통에게 속삭이는 소리를 엿들었기 때문이었다.
나는 그때 우주인들이 모두 그랬던 것처럼 귀에 특수
보청기를 꽂고 있었다. 시간탐사선 아르고호, 나중에
우주선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지만 설계가 어떻게 되어
있는지 기술적인 것은 알 수 없었으나 특수보청기를
꽂아야 했다. 이 보청기는 근거리용이었으나 내가 갖
고 있던 것은 제작진들의 실수인지 가끔 꽤 먼 곳의
소리가 들릴 때도 있었다.
"마더 살로메께서 부르십니다!"
나는 그 말에 소스라쳐 놀랐다.
마더 살로메를 본 사람은 아직 한사람도 없었다. 나
는 마더 살로메가 가공의 인물이라고만 생각했었다.
그것을 20세기 후반까지 존재하던 종교의 개념으로만
생각했던 것이다.
"어디서 부르시나?"
"저쪽에 계십니다."
그 소리는 나에게 너무나 똑똑히 들렸다. 나는 소리
를 향해 몸을 돌렸다. 그러자 파나카이아 총통이 총
총 걸음으로 걸어가 한 여인에게 공손히 허리를 숙이
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총통이 고개를 숙이다니 )
나는 그 상황을 한참동안이나 이해할 수 없었다. 총
통이 머리를 숙이는 것은 총통보다 그 여자가 더 높은
지위에 있다는 것을 의미했기 때문이었다.
그 여인은 우리가 마더타임에 경배를 바치는 마더
살로메였다.
그들은 한참동안 이야기를 나누었다. 여인은 총통에
게 무엇인가 지시하는 것 같았고 총통은 그럴 때마다
다소곳이 듣고 있었다. 그러나 그들이 무슨 얘기를 나
누었는지는 알 수 없었다. 게다가 그것은 중요한 일이
아니었다
유강렬박사가 땀을 흥건히 흘리며 그녀의 몸으로 판
처럼 침강했다. 우희 위버는 유강렬박사의 등을 으스
러지도록 힘껏 껴안았다. 이내 판이 외핵에 닿았고 차
가운 판과 뜨거운 외핵이 마주쳐 대류를 타기 시작했
다.
격렬한 대류였다.
외핵은 불덩어리처럼 뜨거웠다.
대륙은 몇 번이나 분열과 합체를 반복했다.
문득 그녀의 깊은 곳, 지구의 내핵과 같은 곳에서
열수가 지표를 뚫고 맹렬하게 솟구쳤다.
아아
그녀는 미친 듯이 절규하며 몸부림을 쳤다.
지구의 탄생, 대륙의 탄생, 생명의 탄생은 격렬한
에너지 운동으로 탄생하고 있었다.
아르고 2호가 착륙한 곳은 비너스라고 불리는
금성이었다. 금성은 지구에서 가장 가까운 천체이기도
했으나 두꺼운 대기에 둘러싸여 자세히 관찰할 수가
없었다.
이 별이 지구에서 가장 밝고 또렷하게 보이는 것은
두꺼운 구름층이 태양광선을 반사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금성(金星)에는 생명체가 살 수 없었다. 금
성의 표면온도는 470나 되었고 바다가 없었다. 바다
가 있던 흔적은 있었으나 금성이 지구보다 더 태양에
가까운 궤도를 돌고 있기때문에 물이 모두 증발해 버
린 것으로 추정되었다
우희 위버는 눈을 지그시 감았다. 이 기분을 뭐라고
표현할까. 대륙과 대륙이 합체되었을 때 동굴을 가득
채운 듯한 뿌듯함, 분열과 합체의 반복, 열수의 분출
놀랍게도 그것은 지구탄생의 시나리오와도 너무나
흡사했다. 인체의 신비도 정녕 우주와 같은 것인가.
우희 위버는 기쁨의 눈물을 흘렸다.
유강렬박사는 그녀의 가슴에 얼굴을 얹어놓고 가쁜
숨을 고르고 있었다. 우희 위버는 유강렬박사의 등을
힘껏 껴안았다. 문득 유강렬박사가 한없이 소중하게
생각되었다.
아르고 3호가 탐사한 행성은 화성(火星)이었다.
화성은 태양에서 약 2억 2천8백만Km가 떨어져 있고 공
전주기는 687일, 자전주기는 1026일이었다. 지구의 자
전은 평균 24시간이고 공전이 365일이다. 그러므로 화
성에서 시간과 날짜를 계산하는 것은 지구와 전혀 다
르다.
화성의 대기는 이산화탄소를 주성분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지표는 대부분 붉은 흙과 바위로 덮여 있고
대협곡과 산이 있었다. 산에는 화산이 폭발했을 것으
로 추정되는 크레이터가 무수히 흩어져 있었다.
화성도 해양이 존재했던 것으로 여겨지는데 모두 증
발되었다. 물이 있던 시기는 대략 35억년 이전으로 지
금은 건조한 계곡과 산맥만이 남아 있었다.
우리는 2개월을 화성에서 활동했다. 화성의 건조한
흙을 분석하고 화석을 찾아 헤맸다. 그리고 몇 개의
화석을 찾아냈는데 화석에서 놀랍게도 생명체의 흔적
을 확인할 수 있었다. 어떤 화석에는 익룡류의 뼈가
있었고 어떤 화석에는 종류를 알 수없는 식물도 있었
다.
그러나 우리를 더욱 놀라게 한 것은 지능을 갖고 있
을 것으로 추정되는 생명체의 화석이었다. 이 생명체
는 직립(直立)을 하고 있었으나 키는 1m 남짓 되었고
팔이 연체동물과 흡사했다. 우리는 이 연체동물의 손
에 총기류로 보이는 매우 단단한 금속물질이 쥐어져
있는 것을 발견했다. 이 금속물질은 지구에서는 볼 수
없는 것이었다.
우리는 그 화석을 분석했는데 그 화석은 40억년을
훨씬 능가하는 것이었다. 그 결과 화성의 생명체는 어
떤 이유에서인지 알 수없으나 40억년을 전후하여 멸종
을 했고 그것은 생명체의 멸종만이 아니라 화성을 생
명체가 살 수없는 불모의 행성으로 만드는 거대한 사
건이라고 추정했다. 화성의 물이 말라버린 것도 이 사
건에 의해서였을 것이다. 우리는 지구로 귀환하면서
이 사건을 논의했다.
모두들 화성에 고도의 지능을 갖고있는 생명체가 존
재했을 것이라는데 동의했다. 그리고 우리는 화성의
생명체가 멸종을 한 것은 자연의 재해이거나 고도의
지능을 갖고있는 생명체끼리의 전쟁이 아닐까 하고 생
각했다. 그러나 확실한 단정을 내릴 수가 없었다. 그
것은 40억년을 전후하여 발생한 일이었고 더 많은 탐
사가 필요한 일이었던 것이다
밖에서는 폭죽이 터지는 소리가 들리고 있었다. 유
러너스 제국의 건국일이었다. 우희 위버는 베란다에서
밖을 내다보았다.
폭죽은 아라크네시의 시청쪽에서 발사되고 있었다.
시청위로 쉬익쉬익 하는 소리와 함께 폭죽이 쏘아지고
폭죽이 터지면서 불꽃이 어두운 밤하늘을 화려하게 물
들였다. 거리로 몰려나온 사람들이 탄성을 지르는 소
리가 주택가까지 들려오고 있었다.
그때 유강렬박사가 베란다로 나왔다.
우희 위버는 유강렬박사와 함께 나란히 베란다에 기
댔다. 평화로움과 행복한 느낌이 물결처럼 출렁거렸
다.
대륙과 대륙의 만남, 그를 자신의 몸속 깊숙이 받아
들였다는 사실, 두 사람이 하나가 되어 종족을 번식시
키는 일을 했다는 사실이 새삼스럽게 우희 위버를 뿌
듯하게 했다.
우희 위버는 하시시술을 한 모금 마셨다. 그리고 유
강렬박사를 애정이 담뿍 담긴 시선으로 응시했다.
(나는 이 사람의 아이를 갖고 싶어 )
그의 우수어린 옆얼굴를 보면서 우희 위버는 가슴이
저렸다.
그는 소중한 존재였다. 동물들에게 수컷이 없다면
어떻게 짝짓기가 가능하겠는가. 과학문명의 발달로 유
전인자를 복제하여 생명체를 만들기도 하지만 그것은
우주의 질서에 역행하는 일일 것이다.
우주의 질서에 순응하는 것은 수컷과 암컷이 본능에
의해 짝짓기를 하는 것이다. 인간의 삶도 궁극적으로
는 종족 번식을 위해 짝짓기를 하고 짝짓기를 하여 낳
은 생명이 자라서 다시 짝짓기를 할 때까지 보호하고
도와주는 것이다.
인간의 역사는 짝짓기의 역사인 것이다.
아니 지구의 역사 자체가 짝짓기, 그리고 번식에 의
한 진화의 역사인 것이다.
우희 위버는 또 다시 하시시를 한 모금 마시고 베란
다의 난간에 기댔다. 유강렬박사도 그녀의 어깨에 팔
을 감고 난간에 기댔다.
아르고 5호에 승선했다. 나는 이번 승선에 몹시
흥분했다. 아르고 4호는 목성(木星)을 탐사했는데 5호
는 토성(土星)을 탐사할 예정이었다. 목성은 태양계에
서 가장 큰 행성이었고 태양으로부터 거리는 약 7억8
천만Km나 떨어져 있었다. 그리하여 목성을 탐사하는
것은 2년이나 걸렸었다.
목성의 자전은 10시간이었고 여러 개의 위성을 거느
리고 있었다. 위성들 중에 이오 위성은 아직도 활발한
화산 활동을 하고 있었다.
목성은 대기권이 형성되어 있었다. 대기권의 가장
높은 곳에는 수소와 헬륨의 대기가 형성되어 있어 캄
캄했고 그 밑으로 붉은 빛의 메탄대기가 두 줄로 형성
되어 있었다.
메탄대기 밑에는 두꺼운 얼음 대기였다. 이 얼음 대
기는 상층이 동결된 암모니아 구름덩어리였고 중간층
은 동결된 황화수소암모늄의 구름덩어리였다.
저층은 일반 얼음 구름이었다. 지표에서 20km 이내
의 지상까지는 수소헬륨의 대기였고 지표는 지하 20km
까지 수소와 헬륨의 액체 해양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이따금 3층 구조의 대기에서 번개가 번쩍거리고 적
막한 우주공간에서 천둥이 울었으나 수소와 헬륨의 바
다에서는 생명체가 존재할 수 없었다.
우리는 목성에 대한 탐사를 중지했다.
그리하여 아르고 5호는 토성 탐사에 나서게 되었던
것이다. 토성은 태양에서 약 14억3천만km나 떨어진 행
성으로 목성 다음으로 거대한 행성이었다. 우리는 토
성의 위성인 타이탄을 주목했다. 타이탄은 토성에서
가장 큰 위성인데 무엇보다 지구와 비슷한 대기를 갖
고 있었다. 타이탄의 대기는 대부분 질소로 이루어져
있었고 약간의 아르곤과 메탄, 탄화수소, 시안화합물
이 섞여 있었다.
이것은 생명체가 태어나기 전의 원시지구와 흡사한
환경이었다.
타이탄의 표면은 177도나 되었다. 그러나 우리는
타이탄에 착륙하기 전에 지구에서는 전혀 관측할 수없
는 새로운 위성을 찾아내는데 성공했다. 이 위성의 발
견은 우리를 흥분시키기에 충분했다.
우리가 토성 궤도를 돌면서 산소 추적 시스템을 가
동시킨 결과 지구에서는 전혀 관측되지 않는 위치에
있던 위성 하나가 발견된 것이었다. 이 위성은 불과
지구의 20분의 1 크기밖에 되지 않았다.
그러나 가까이 접근해 본 결과 생명체가 존재할 수
있는 대기와 숲, 그리고 영양염(營養鹽)이 풍부한 해
양이 있었다. 영양염은 생명체의 진화에 필수적인 요
소였다.
그것은 경이로운 발견이었다.
우리가 우주탐사(유러너스 제국은 시간탐사라고 명
명했지만)에 나선이래 가장 위대한 발견이었다. 우리
는 이 사실을 코스모스 과학센터의 타임플랜에 보고했
다.
타임플랜은 우리에게 '위대한 우주전사'라는 칭호를
부여하고 위성에 착륙하여 조사할 것을 지시했다.
우리는 흥분한 상태에서 곧 바로 위성의 탐사에 나
섰다.
우리는 일단 위성의 궤도를 따라 5바퀴를 돌았다.
혹시라도 그 위성에 우리를 능가하는 문명을 갖고있는
외계인이 존재한다면 충돌이 불가피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고도의 과학문명을 가지고 있는 외계인이 살고
있는 흔적은 전혀 없었다.
타임플랜으로부터 지시가 왔다.
우리가 발견한 위성의 이름을 살로메로 명명한다는
것이었다. 우리는 이름 따위는 상관이 없었다. 인류
최초로 생명체가 살고 있는 것이 틀림없는 천체를 탐
사한다는 역사적 사실만이 중요했다. 우리는 착륙선을
아르고 5 호에서 조심스럽게 분리시켰다.
"착륙준비!"
착륙선에는 나와 5명의 승무원이 타고 있었다. 착륙
선은 서서히 하강하여 살로메 위성으로 다가갔다.
"착륙준비 완료!"
착륙선이 살로메 위성으로 가까이 접근할수록 짙푸
른 해양과 대지가 선명하게 디스 플레이 스크린으로
보였다.
"착륙!"
모선(母船)의 명령이 차례로 떨어지고 우리는 마침
내 살로메 위성에 착륙했다. 우리가 처음 착륙한 곳은
살로메 위성의 북극점에 해당되는 곳이었다. 한밤중이
었다. 살로메 위성의 공전과 자전을 잘못 측정했기 때
문이었다. 살로메 위성의 궤도에서 측정한 자전과 공
전이 전혀 달랐다. 살로메 위성에는 우리가 우주라고
부르는 천체의 질서와 다른 그 무엇이 있었다. 그러나
아직은 그것이 무엇인지 파악할 수 없었다
우희 위버는 먼 하늘을 쳐다보았다. 저 하늘 어디
쯤에 에바소령이 발견한 토성의 위성 살로메별이 있는
지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그녀는 동물학자였기 때문
에 별자리에 대해서는 잘 알지 못했다.
"평화로운 밤이지?"
유강렬박사가 가볍게 입술을 부딪쳐왔다.
"네."
"우희는 가족이 없나?"
"전 공장출신예요."
우희 위버는 유강렬박사의 어깨에 살포시 머리를 기
댔다. 그의 말대로 지극히 평화롭고 아름다운 밤이었
다.
"그렇군. 그래서 가족에 대해서 아무 말이 없었어."
"난자는 차이나 계고 정자는 아메리칸계래요."
"그러니까 20세기식으로 말하면 미국의 정자와 중국
의 난자가 만나서 우희 위버를 탄생시켰군."
"그런 셈이예요. 그래서 내 이름이 우희 위버예요."
"우희 위버가 무슨 뜻인데?"
"우희(虞姬)는 중국의 유명한 장군 항우(項羽)의 부
인예요. 항우는 우희를 너무나 사랑하여 전쟁터에도
늘 데리고 다녔는데 유방(劉邦)이라는 장수에게 패하
여 죽음의 위기에 몰렸을 때 우희를 칼로 쳐죽이고 자
기도 죽었다고 해요. 중국에서는 우미인이라고 불렀대
요."
유강렬박사가 낮게 웃음을 터뜨렸다.
공장인간의 비애와 쓸쓸함이 담겨 있는 공허한 웃음
이었다.
"나와 비슷하군."
"박사님도 중국계예요?"
"난 부여족이야. 정자가 부여족이고 난자가 게르만
족이지. 그런데 부여족의 유전인자를 많이 받아 유강
렬이라는 이름이 생겼어."
우희 위버와 유강렬박사는 마주 보고 웃음을 터뜨렸
다. 그것은 기묘한 결합이었다. 그러나 유전인자를 보
다 우수하게 진화시키기 위해 그들을 인공수정시킨
국립제국병원에서 일부러 동양계와 서양계를 결합시킨
사실을 알지 못했다.
좋은 밤이었다. 하늘에는 별들이 빼곡했고 바람결은
따뜻했다. 폭죽이 터지는 시청쪽에서는 아직도 환호성
이 터지고 사람들의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내일은 우리도 밖에 나가요."
"밖에?"
"경축일이잖아요?"
우희 위버가 어리광을 부리듯이 유강렬박사를 졸랐
다.
"그러지."
유강렬박사는 흔쾌히 승낙했다. 유러너스 제국의 건
국 경축축제는 3일 동안이나 계속될 예정이었다.
제 16 장 로즈의 사랑
유러너스 제국 비밀경찰국의 로즈 국장은 달리는 에
어카 페가서스의 차창으로 번화가를 물끄러미 내다보
고 있었다. 페가서스는 에어카지만 관청가이기 때문에
도로로 달리고 있었다.
거리는 온통 축제 분위기에 휩싸여 있었다. 큰 건물
에는 '영명한 지도자 파나카이아 총통 각하 만세!' 라
는 프랭카드와 '네미시스의 침입을 시간탐사로!' 라는
프랭카드가 걸려 있었다. 상점은 철시를 하고 가로수
에는 유러너스 제국의 깃발이 처처에 꽂혀 펄럭거리고
있었다. 시민들은 가벼운 옷차림으로 휴일 나들이에
나서고 있었다. 거리가 휴일을 즐기려는 시민들의 물
결로 가득했다.
"이리노 퍼그스중위입니다."
조수석에 앉아있던 모리오 부국장이 갑자기 자전거
전용도로를 손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로즈 국장은 차
가운 눈빛으로 모리오 부국장이 가리키는 자전거 전용
도로로 시선을 보냈다.
자전거 전용도로에는 젊은 사내가 청바지와 하얀 색
의 스포츠웨어를 입고 자전거를 타고 있었다.
"이리노 퍼그스중위는 타임플랜에 근무하지 않나?"
로즈 국장은 의아한 눈빛으로 모리오 부국장을 쏘아
보았다.
"경축일을 맞아 휴가를 보내고 있는 것같습니다."
"옆에 어린 계집애가 가는데?"
이리노 퍼그스중위 옆에는 팰트 모자를 쓰고 체크
무늬의 원피스를 입고 있는 소녀가 이리노중위와 무엇
인가 즐거운 얘기를 하며 달리고 있었다.
"하데스의 요원입니다."
"저 어린 계집애가 하데스의 요원이란 말이야?"
계집애는 얼핏 16, 7세로 밖에 보이지 않았다. 얼굴
은 눈이 부시게 희고 긴 머리카락이 어깨까지 치렁치
렁 내려와 있었다. 그러나 머리를 단정하게 묶은 탓에
얼굴을 가리지는 않았다.
"하데스가 뭔가 눈치챈 것같습니다."
"그들이 시간탐사계획을 눈치챘단 말이야?"
로즈 국장의 눈매가 날카롭게 찢어졌다.
"그렇지는 않을 거고 자신들에게 위험이 닥치고 있
다는 것을 막연하게 눈치챈 것같습니다."
"그럴 리가 없어!"
로즈 국장은 단호하게 말했다. 시간탐사계획은 유러
너스 제국에서도 극비사항에 속하는 원대한 계획이었
다.
로즈 국장은 백미러로 이리노중위를 살폈다. 모리오
부국장이 다시 입을 열었다.
"저 계집애는 애브너소령의 동생입니다. 장애란이라
는 계집애지요"
"우리가 애브너소령을 닥터 킬러를 통해 죽이게 만
들었기 때문에 그들은 우리가 한 짓이라는 사실을 모
르고 있어. 그들은 우리가 이리노 퍼그스중위를 감시
하는 것도 모르고 그래서 애브너소령의 동생을 침투
시킨 거야."
"이리노 퍼그스중위가 수상하지 않습니까?"
"괜찮아."
로즈 국장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이리노 퍼그스중위는 우리의 비밀을 전혀 모르고
있으니까 그들에게 포섭되도 걱정할 필요가 없어."
로즈 국장은 자신에 차서 말했다. 그녀는 어쩐지
이리노 퍼그스중위를 고통 속으로 몰아넣고 싶지 않았
다. 그것은 기이한 일이었다. 로즈 국장은 잔인하고
냉혹한 인물의 대명사였다. 그녀는 사피언스 그라운드
주민들 뿐 아니라 유러너스 제국의 시민들에게까지 악
명을 떨치고 있었다.
이리노 퍼그스중위와 장애란의 자전거가 점점 멀어
져 가자 로즈 국장은 왠지 허전한 기분이 들었다. 그
러나 모리오 부국장에게 내색하기 싫어 로즈 국장은
앞을 똑바로 노려보았다.
에어카 페가서스는 총통 관저를 향해 빠르게 달리고
있었다.
날씨는 좋았다.
총통 관저로 향하는 길은 벚꽃이 화사하게 피어 있
었다. 마더 살로메가 좋아하는 꽃이었다. 바람이 불면
벚꽃은 길바닥에 자욱하게 떨어져 쓸려 다녔다. 젊었
을 때는 그 꽃이 좋아서 손바닥에 한 움큼씩 주워서
머리위로 뿌리고 다니곤 했었다.
그것은 참으로 오래 전의 일이었다.
로즈 국장은 이리노중위와 어린 계집애의 뒷모습에서
시선을 거두었다. 그들은 이미 백미러로도 보이지 않
을 정도로 멀어져 있었다. 로즈 국장은 고개를 흔들었
다. 이리노중위가 사피언스 그라운드의 어린 계집애와
자전거를 타고 하이킹을 즐기는 것은 젊기 때문일 터
였다.
(혹시?)
이리노중위를 생각하다가 로즈 국장은 한 사내의 단
정한 얼굴이 머릿속에 떠올라와 깜짝 놀랐다. 그 사내
의 얼굴은 젊었을 때의 로버트 퍼그스였다.
로즈 국장은 그의 얼굴이 떠오르자 세차게 고개를
흔들었다. 그런 일은 있을 수없는 일이었다.
그것은 사피언스 그라운드와의 전쟁, 일명 산소전쟁
이 막바지로 치닫고 있을 때였다. 로즈 국장은 그때
유러너스 제국에서 가장 악명이 높은 로즈중대를 이끌
고 있었다. 로즈중대는 유러너스 제국의 군대가 치열
한 전투 끝에 사피언스 그라운드의 도시를 점령하면
즉시 투입되어 치안을 담당하는 특수부대였다. 그러나
말이 치안을 담당하는 특수부대였지 실제로는 사피언
스 그라운드의 패잔병들을 색출하여 살해하는 것이 주
임무였었다.
"로즈중대를 만나면 피하라!"
"로즈중대는 악마의 중대다!"
로즈중대는 사피언스 그라운드의 주민들에게 공포의
대상이었다.
그녀들은 가는 곳마다 사피언스 그라운드의 패잔병
들을 잔인하게 살해했을 뿐만아니라 주민들까지 무자
비하게 학살했다.
"로즈중대가 부녀자들을 생매장했다!"
그러나 그것은 드러난 행위에 지나지 않았다. 로즈
중대는 하얀 군복을 사피언스 그라운드군의 피로 물들
여서 입고 다니는 짓도 서슴지 않았다. 오히려 그녀들
은 그런 일을 자랑으로 여기기까지 했던 것이다.
그러나 악명 높은 로즈중대도 곤경에 처한 일이 있
었다.
그것은 사피언스 그라운드의 하마단이라는 도시에서
2km 떨어진 벌판에서였다. 이 벌판에서 유러너스 제국
군대와 사피언스 그라운드의 해방전사들은 치열한 전
투를 했다. 사피언스 그라운드군은 2백만명, 유러너스
제국군은 20만명이었다.
이 전투는 유러너스 제국군의 압도적인 우세속에 45
일 동안이나 일진일퇴를 거듭하며 전개되었다.
사피언스 그라운드군은 파상적인 공격을 감행해 왔
다.
"제국군대는 10만명밖에 되지 않는다!"
"해방전사들이 죽음을 각오하고 싸우면 승리할 수
있다!"
사피언스 그라운드군은 죽음을 각오하고 덤벼들었
다. 마치 불나방이 죽음을 무릅쓰고 불을 찾아 덤벼드
는 것 같았다. 그들은 죽여도 죽여도 파도처럼 끝없이
밀려왔다.
하마단 전방의 벌판에는 사피언스 그라운드군의 시
체로 산을 이루었다. 그들의 피가 땅을 흥건하게 적셔
역겨운 비린내와 시체 썩는 냄새가 진동을 했다.
유러너스 제국군도 지치기 시작했다.
사피언스 그라운드군은 끝도 없이 밀려오고 있었다.
이때 서부전선에 배치되어 있던 유러너스 제국군의
포병부대가 하마단으로 와서 유러너스 제국군을 지원
하기 시작했다.
전쟁은 멀리서 떨어져서 보면 아름다운 것이다. 이
때 로즈중대는 유러너스 제국군의 후방 10km 지점에
있었다. 유러너스 제국군이 하마단을 점령하면 점령지
의 치안을 담당하기 위해서였다.
밤중이었다. 유러너스 제국의 포병부대는 하마단의
사피언스 그라운드군을 향해 일제히 포를 발사했다.
천지를 진동하는 폭음이 일어나고 쉬익 쉬익 하는 소
리와 함께 무수한 포탄이 사피언스 그라운드군의 진지
를 향해 날아갔다. 이어서 요란한 폭음이 터지고 화려
하게 불꽃이 피어났다. 마치 폭죽놀이를 하는 것 같았
다.
"아름다워! 전쟁이 이렇게 아름다울 줄은 몰랐어!"
로즈대위는 감탄했다.
유러너스 제국의 포병은 우수한 화력을 갖고 있었
다. 그들은 이틀 동안이나 쉬지 않고 사피언스 그라운
드군의 진지에 포탄을 쏟아 부었다. 전쟁은 치열했다.
하마단은 사피언스 그라운드군의 시체로 시산혈해(屍
山血海)를 이루었다. 흙더미가 하늘 높이 치솟고 팔
다리가 짤린 시체들이 공중으로 퉁겨져 올라갔다가 떨
어졌다. 사피언스 그라운드군은 마침내 무수한 사상자
를 남기고 100km 후방으로 후퇴했다. 유러너스 제국군
은 하마단을 지나 60km까지 진격했다.
"제군들! 이제 우리의 시간이다!"
로즈대위는 중대원들을 모아놓고 독려했다.
"위대한 유러너스 제국의 전투부대가 하마단을 탈취
했다! 이제 우리 로즈중대는 하마단으로 들어가서 패
잔병들을 색출한다! 패잔병들을 색출하지 않으면 우
리의 후방이 교란될 우려가 있다! 제군들! 제군들은
제국을 위해 패잔병들을 색출하겠는가?"
"네!"
로즈중대의 여군들이 일제히 대답을 했다.
"패잔병들을 쓰레기 청소하듯이 청소하겠는가?"
"청소하겠습니다!"
로즈중대의 여군들이 일제히 복창을 했다.
"가자!"
"네!"
로즈중대는 지체없이 하마단으로 들어갔다. 그러나
하마단의 온 도시는 시체로 가득했다. 마치 사피언스
그라운드군의 모든 시체를 하마단에 모아놓은 것 같았
다. 로즈중대는 분대별로 흩어져서 패잔병들을 색출하
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것은 로즈중대를 잡기 위한 사
피언스 그라운드군의 계략이었다.
로즈중대가 분대별로 흩어져 사피언스 그라운드의
패잔병들을 색출하기 시작했을 때 시체로 위장하고 있
던 사피언스 그라운드의 특수부대가 갑자기 로즈중대
를 공격했다.
"함정이다! 사피언스 그라운드군이 매복하고 있다!"
로즈중대는 당황하여 아우성을 쳤다.
"로즈중대를 죽여라!"
그러나 사피언스 그라운드군의 특수부대는 로즈중대
를 닥치는대로 사살하기 시작했다.
타타타타
요란한 총소리와 함께 로즈중대의 여군들이 여기저
기서 쓰러졌다.
"으악!"
로즈중대는 사피언스 그라운드군 특수부대의 공격에
속수무책으로 죽을 수밖에 없었다.
"제5전투대대! 제5전투대대! 여기는 로즈중대다! 로
즈중대가 사피언스 그라운드군의 함정에 빠졌다! 즉시
지원을 요청한다! 지금 지원을 하지 않으면 로즈중대
는 전멸한다! 다시 반복한다!"
로즈대위는 황급하게 전투부대에 지원을 요청했다.
그러나 전투부대는 60km나 떨어져 있었다. 로즈중대는
위기에 몰렸다.
"중대장님! 중대장님! 우리가 놈들에게 포위되었습
니다!"
중대원들이 다급하게 그녀에게 몰려와 보고를 했다.
사피언스 그라운드군이 어느 사이에 로즈중대를 새카
맣게 에워싸고 있었다. 로즈대위는 부상병들을 두고
재빨리 참호로 퇴각했다.
"계집들을 대검으로 찔러 죽여라!"
사피언스 그라운드군의 장교인 듯한 자가 야차처럼
명령을 내렸다. 그러자 사피언스 그라운드의 병사들이
부상당한 로즈중대의 여군들을 대검으로 마구 찔렀다.
"으악!"
로즈중대의 여군들은 곳곳에서 처절한 비명을 지르
며 나뒹굴었다. 사피언스 그라운드 특수부대의 병사들
이 여군들을 군화발로 밟고 복부에 마구 대검을 꽂고
있었다.
"로즈대위는 생포해라!"
사피언스 그라운드의 장교인 듯한 자가 고함을 질렀
다.
로즈대위는 이를 악물었다. 놈들은 도시의 건물 모
퉁이와 참호속에서 사격을 해대다가 로즈대위의 중대
원들이 쓰러지거나 부상을 당하면 지체없이 달려와 대
검으로 찔러 잔인하게 살해했다.
"놈들을 죽여라! 너희들은 로즈중대의 자랑스러운
대원들이다!"
로즈대위는 발악을 하듯이 소리를 질렀다. 그러나
로즈중대는 사피언스 그라운드군의 특수부대에 의해
대부분 살해되거나 부상을 당해 생포되었다. 비참한
일이었다. 악명이 높은 로즈중대로서는 처음 겪는 일
이었다.
"이젠 끝장이야!"
로즈대위는 절망적으로 부르짖었다.
그녀는 사피언스 그라운드의 특수부대에 체포되느니
차라리 죽음을 택하겠다고 결심했다. 그러나 그것도
쉽지 않았다. 로즈대위가 자살을 하기 위해 권총으로
자신의 머리를 겨누고 방아쇠를 당기려고 했을 때 갑
자기 궁둥이가 뜨끔했다.
(아!)
마취총이었다. 그것은 순식간에 그녀의 전신을 마취
시켜 방아쇠를 당길 수 없게 만들고 말았다. 로즈대위
는 눈앞이 몽롱해지면서 참호속에 나뒹굴었다.
로즈대위가 정신을 차렸을 때 그녀는 8명의 중대원
과 함께 지하실에 묶여 있었다. 상의는 벗겨진 채였고
특수부대원들이 그녀의 중대원들을 희롱하고 있었다.
"이것들이 살인귀들인가?"
특수부대의 책임자인 압둘라 소령이 나타난 것은 그
때였다.
그는 나중에 사피언스 그라운드 평의회 평의원이 된
인물이었다.
"예. 그렇습니다!"
병사들이 재빨리 부동자세를 취하며 대답했다.
"귀면(鬼面)들이 볼만하군!"
"이것들은 인간이 아닙니다!"
"좋아! 이것들이 얼마나 많은 우리 병사들을 엽기적
으로 학살했는지 낱낱이 조사해서 보고하라!"
압둘라 소령이 떠나가자 특수부대원들의 고문이 시
작되었다. 로즈중대의 살아남은 중대원들은 그 곳에서
처절한 고문을 당했다.
압둘라의 특수부대원들은 그녀들에게 채찍을 휘두르
는 것에서부터 손톱 밑을 바늘로 찌르기, 몽둥이 찜
질, 유리조각으로 살가죽 찢기 등 온갖 악랄한 방법을
동원하여 고문을 했다.
로즈중대 중대원들은 고문을 견디다 못해 세 명이
죽었다.
로즈대위와 중대의 다른 두 명은 가슴이 도려내졌
다. 로즈중대가 사피언스 그라운드 패잔병들에게 행하
던 고문이 그대로 그녀들에게 행해진 것이다.
로즈대위는 그 곳에서 구사일생으로 살아났다.
그녀가 지원을 요청한지 사흘만에 전투부대가 하마
단으로 돌아와 그녀를 구출한 것이었다. 그러나 그녀
는 만신창이가 되어 있었다.
그녀는 야전병원으로 후송되어 응급치료를 받았다.
그러나 야전병원에서는 계속 치료를 할 수 없었다.
그녀는 유러너스 제국의 휴양도시 로마노즈로 후송되
었다. 로마노즈에는 유러너스 제국의 가장 큰 병원이
있었다. 그녀는 그 곳에서 완벽한 치료를 받았다.
가슴은 실리콘으로 성형수술을 했고 다리는 철심을
박아 복원했다. 그러나 치료기간이 6개월이나 걸리게
되었다. 그녀는 가슴과 다리의 상처가 조금씩 아물기
시작하자 로마노즈의 아름다운 거리를 산책하기 시작
했다.
전쟁은 여전히 계속되고 있었다.
유러너스 제국과 사피언스 그라운드군은 일진일퇴의
공방전을 계속했다. 유러너스 제국은 우수한 화력을
갖고 있었으나 사피언스 그라운드군은 군대가 많았다.
유러너스 제국군이 수백만의 사피언스 그라운드군을
괴멸시켰으나 그들의 군대는 수천만이나 되어 유러너
스 제국군도 고전을 하지않을 수 없었다.
로즈대위는 로마노즈에서 부상을 치료하며 사피언스
그라운드군에 이를 갈았다.
여러 날이 흘러갔다. 상처는 점점 아물어갔고 사피
언스 그라운드에 대한 그녀의 증오도 진정되어 갔다.
그 무렵 로즈대위는 로마노즈에서 입대를 앞둔 한
소년을 만났다. 그 소년은 로마노즈병원의 뒤를 흐르
는 위노강에서 낚시를 하고 있었다. 레테의 강(망각의
강)이라는 별명을 갖고있는 강이었다. 그녀는 이따금
다리를 절며 강뚝을 산책하고는 했다.
날씨는 따듯했다. 바람은 잔잔하고 강가의 은사시나
무는 초록빛 잎사귀가 무성했다. 휴양도시 로마노즈는
전쟁과 아랑곳없이 평화롭기만 했다.
그 일이 일어난 것은 로즈대위가 강가를 산책하면서
꽤 먼 상류까지 걸어 올라갔을 때였다. 은사시나무 밑
의 그늘에 앉아서 한 소년이 낚시를 하고 있었다.
(예쁘장한 아이군 )
로즈대위는 소년에게 호감을 느꼈다. 소년의 머리는
흑진주 같은 검은 머리고 눈이 투명할 정도로 맑았다.
로즈대위는 소년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소년이 낚시를
하는 것을 구경하기 위해서였다.
그때 소년이 고개를 돌려 로즈대위를 쳐다보았다.
로즈대위는 그 순간 가슴이 세차게 뛰는 것을 느꼈
다. 소년의 얼굴은 눈이 부셨다. 전쟁 탓이었을 것이
었다. 그렇지 않으면 은사시나무를 스치는 살랑거리는
바람 탓이거나 수면 위에서 반짝거리는 햇살 탓일 터
였다.
(아 )
로즈대위는 눈앞으로 뽀얗게 물안개가 내리는 것 같
았다.
"앉아서 구경하세요."
소년이 자신이 앉아 있는 옆자리를 가리켰다.
"고마워."
로즈대위는 소년의 옆에 앉았다. 기분이 미묘했다.
로즈대위는 아무 말없이 강을 응시했다. 강은 신비스
러웠다. 햇빛을 반사하며 잔잔하게 흘러가는 강물을
내려다보고 있자 수많은 상념들이 로즈대위의 머릿속
을 스쳐가고 스쳐왔다. 사람이 태어나고 죽는 것, 물
체의 생성과 소멸, 만남과 헤어짐 그리고 유한(有限)
과 무한(無限)을 생각하자 점점 쓸쓸해졌다. 아아 우
리가 죽는다면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날 것인가
죽음의 고비를 넘긴 로즈대위는 가슴이 절절하도록
쓸쓸한 생각을 하고 있었다.
문득 소년의 체취가 로즈대위의 코끝으로 풍겨왔다.
향긋한 체취였다. 로즈대위는 갑자기 가슴이 설레기
시작했다.
로즈대위는 그날부터 매일 같이 강뚝에 나가 소년이
낚시를 하는 것을 지켜보았다. 그리고 로즈대위는 소
년에게 점점 야릇한 감정을 갖게 되었다. 그것은 로즈
대위가 처음 느끼는 것이었고 도저히 거부할 수없는
이상한 감정이었다.
로즈대위는 소년을 만날 때마다 목이 마르는 듯한
갈증을 느꼈다. 소년의 눈빛이 로즈대위의 몸을 스치
면 그녀는 감전이라도 된 듯이 세차게 몸을 떨었다.
로즈대위는 소년이 좋아서 견딜수가 없었다. 잔인
하고 냉혹한 그녀의 얼굴에는 어느 사이에 팬지꽃 같
은 부드러운 미소가 떠나지 않게 되었다. 그것은 로
즈대위가 생각조차 못했던 일이었다.
(아, 이 소년을 갖고 싶어 )
로즈대위는 속으로 그렇게 외쳤다.
소년도 로즈대위에게 호감을 느끼는 것 같았다. 로
즈대위는 소년에게 전쟁 얘기를 들려주었다. 물론 그
녀가 사피언스 그라운드군의 패잔병들에게 저지른 저
끔찍하고 야만적인 이야기는 하지 않고 전쟁 영웅들에
대해서만 얘기했다.
입대를 앞둔 소년은 전쟁에 관심이 많았다. 로즈대
위의 옆에 누워 전쟁 얘기를 듣다가 사르르 잠이 들고
는 했다.
(아아 왜 이 아이가 이렇게 내 마음을 사로잡는 것
일까 )
로즈대위는 잠이 든 소년의 얼굴을 내려다보며 깊은
탄식을 했다. 사랑은 가슴앓이라고 누가 그랬던가. 로
즈대위는 사랑의 열병에 빠져 가슴앓이를 시작했다.
로즈대위는 자신도 모르게 소년에게 뜨거운 입맞춤
을 했다. 소년의 입술은 꽃잎처럼 부드럽고 촉촉하게
젖어 있었다.
그때 소년이 살며시 눈을 떴다. 로즈대위는 얼굴이
화끈거리거리고 가슴이 격렬하게 뛰었다. 다행히 소년
은 로즈대위를 거부하지 않았다. 그리하여 그들은 은
사시나무의 초록 잎사귀가 바람에 나부끼는 강뚝의 풀
숲에서 첫관계를 가졌다.
로즈대위는 황홀했다. 그것은 32세가 된 로즈대위가
처음 느끼는 감정이었다. 소년은 18세밖에 되지 않았
는데도 여자 경험이 있었다. 물론 로즈대위도 남자 경
험이 처음은 아니었다. 그녀도 무수한 남자들과 관계
를 가졌었다. 그러나 사랑이 전제된 행위, 연하의 소
년에게 그토록 격렬한 감정을 느끼기는 처음이었다.
소년은 그 일이 서툴렀다.
로즈대위가 오히려 소년을 인도해야할 정도로 서두
르기만 했다.
그러나 로즈대위는 그 풋풋함이 더 사랑스러웠다.
아아
로즈대위는 신음을 내질렀다. 전신을 누비는 희열로
그녀의 몸이 해초(海草)처럼 흐느적거렸다.
소년과의 사랑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그러나 일주일 후 소년은 입대 명령을 받고 로마노
즈를 떠났다. 로즈대위는 소년이 떠나자 허전했다. 소
년이 낚시를 하던 강뚝을 미친 여자처럼 오르내리고,
하루종일 그 곳에서 서성거리며 소년과의 황홀한 사랑
을 생각했으나 소년은 떠나버린 뒤였다.
그 소년의 이름이 로버트 퍼그스였다.
2개월 후 로즈대위도 전선으로 복귀했다. 몸이 완전
히 회복된 것은 아니었으나 유러너스 제국군이 사피언
스 그라운드군에 밀리고 있었다. 전선으로 복귀하자
로즈대위는 로즈중대를 새로 편성하라는 명령을 받았
다. 그녀는 각 전투부대의 여군들 중에서 180명을 선
발하여 두 번째의 로즈중대를 편성했다. 그리고 맹훈
련에 돌입했다. 그녀는 로즈중대의 훈련지를 휴양도시
로마노즈로 잡았다. 그녀가 왜 로마노즈를 훈련지로
잡았는지는 그녀 자신도 알 수 없었다. 로마노즈에서
훈련을 하다보면 혹시라도 로버트 퍼그스를 만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로즈대위는 거기서 자신이 임신했다는 사실을 깨달
았다.
(어, 어떻게 이런 일이 )
로즈대위는 점점 배가 불러오자 심각한 고민에 빠졌
다. 그러나 아이를 뗄 수는 없었다. 유러너스 제국은
낙태수술이 철저하게 금지되어 있었다. 게다가 그녀가
가슴을 복원하는 수술을 받은 지 얼마되지 않았기때문
에 낙태수술을 하는 것도 위험한 일이었고 의사들이
대부분 야전병원으로 차출되었기 때문에 유러너스 제
국에서 가장 큰 병원이 있는 로마노즈에도 의사들이
부족했다.
더욱이 군인이 임신을 하는 것은 군법회의감이었다.
로즈대위는 임신 사실을 철저하게 숨길 수밖에 없었
다. 그녀는 임신 7개월이 되자 휴가원을 냈다. 다행히
그 무렵에 전쟁은 소강상태에 들어가 있었다. 그녀는
휴가원이 받아들여지자 로마노즈에서 해산의 진통을
겪으며 아기를 낳았다. 눈이 예쁜 사내 아기였다.
그녀는 아기의 존재가 거추장스러웠다. 몇 번이나
아기를 살해하려고 했으나 그럴 때마다 로버트 퍼그스
와의 뜨거운 정사가 떠올랐다. 때마침 로버트 퍼그스
가 첫휴가를 나왔다. 그녀는 로버트 퍼그스를 찾아가
아기를 맡아달라고 부탁했다.
"미안해 로버트. 난 아기를 키울 수가 없어."
"전 결혼도 하지 않았습니다."
로버트 퍼그스의 말에 로즈대위는 화가 났다.
"그래서 아기에 대해 책임이 없다는 거야?"
"그런 뜻이 아니라 저와 결혼해 주십시오."
"뭐라구?"
로즈대위는 로버트 퍼그스의 말에 소스라쳐 놀랐다.
그녀는 지금까지 한 번도 결혼을 생각해본 일이 없었
다.
"전쟁중이지만 대위님과 결혼을 하고 싶습니다."
로버트 퍼그스의 눈빛이 불꽃처럼 이글거리고 있었
다.
"미안해. 나도 너를 사랑하지만 결혼을 하고 싶지는
않아."
"그럼 다시 만날 수 있겠습니까?"
"만나려고 하면 만날 수 있겠지. 허지만 우리가 다
시 만나서 무얼 하겠어?"
"대위님을 사랑합니다."
로버트 퍼그스의 말에 로즈대위는 가슴이 찌르르 울
렸다.
"나도 너를 사랑해."
로즈대위는 낮게 속삭였다.
"그런데 왜?"
"우린 각자 갈 길이 따로 있어. 알겠어?"
로즈대위는 로버트 퍼그스의 얼굴을 쓰다듬으며 말
했다.
"대위님!"
로버트 퍼그스가 갑자기 로즈대위를 와락 끌어안고
입술 세례를 퍼부었다. 로즈대위는 로버트 퍼그스를
밀어내려고 했으나 그의 입술이 자신의 입술을 덮치자
두 팔이 저절로 그의 목에 감겼다.
(로버트, 나도 너를 사랑해! 이런 기분은 처음이
야!)
로즈대위는 속으로 무수히 외쳤다. 그리고 정신없이
그의 입술에 자신의 입술을 부벼댔다. 격렬한 사랑이
었다. 광기와 같은 격렬한 흥분이 로즈대위에게 휘몰
아쳐 왔다.
(아아 )
로즈대위는 입을 벌리고 신음을 삼켰다. 그녀는 그
와 성애 행위를 하면서 뜨거운 눈물이 걷잡을 수없이
볼을 타고 흘러내리는 것을 느꼈다. 그러나 아기를 키
울 수는 없었다.
로버트 퍼그스는 정사가 끝나자 아기를 안고 돌아갔
다. 그는 로마노즈에 있는 자신의 부모에게 아기를 돌
볼 것을 부탁했고 부모는 기꺼이 자신의 손자를 맡아
키웠다. 1년후, 로버트 퍼그스는 두 번째 휴가를 나왔
고 그는 휴가 중에 결혼을 하여 아기를 입적시켰다.
(나이로 봐서 이리노 퍼그스가 틀림없이 그 아기
야!)
로즈 국장은 그 생각을 하자 뒤통수를 쇠망치로 얻
어맞은 듯한 기분이었다. 너무나 오랫동안 잊고 있었
던 일이었다.
로버트 퍼그스와 격렬한 정사를 벌이던 일이 이따금
뽀얀 안개처럼 기억의 저편에서 아스라하게 떠오르기
는 했으나 그녀는 애써 그 일을 잊으려고 했었다. 그
것은 명예로운 일이 아니었다. 그런데 자신의 아들이
눈앞에 나타난 것이다.
(이리노가 내 아들이라니 )
로즈 국장은 저 멀리 사라진 이리노중위의 얼굴을
머릿속에 떠올리며 가슴이 타는 것 같았다. 그가 아들
이라면 만나고 싶고 얘기를 나누고 싶었다. 아들을 위
해 무엇이던지 해주고 싶기도 했다.
제 17 장 마더 살로메
에어카 페가서스가 총통 관저 앞에 도착했다. 총통
관저 앞의 경비병들이 일제히 받들어총 자세로 경례를
붙였다.
페가서스는 꽃들이 만발한 총통 관저로 들어갔다.
총통 관저는 정문에서 1km나 떨어져 있었다. 에어카
페가서스는 붉은 튤립과 하얀 백합이 바다를 이루듯이
피어 있는 정원을 지나 현관 앞에 이르렀다. 현관 앞
에도 경비병들이 도열해 있었다.
로즈 국장은 에어카 페가서스에서 내려 현관 안으로
들어갔다. 총통 관저의 회의실은 3층에 있었다. 회의
실에는 이미 유러너스 제국의 권부 핵심층인 각부 장
관들과 군대의 장군들이 예복 차림으로 도열해 있었
다. 그들은 모두 45인으로 이루어져 있어 '45인방'이
라고 부르기도 했다.
"각하! 늦었습니다."
로즈 국장은 파나카이아 총통을 향해 거수경례를 붙
였다.
"아니오. 정시에 왔소."
파나카이아 총통은 웃지도 않고 조용히 말했다.
"그럼 모두 도착했으니 마더 살로메를 경배하러 갑
시다."
파나카이아 총통이 안락의자에서 몸을 일으켰다.
장관들과 장군들이 일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들은
파나카이아 총통을 따라 회의실을 나가 마더랜드
(Mother rand)로 향했다.
마더랜드는 총통 관저의 바로 뒤에 있었다. 유러너
스 제국을 움직이는 45인들 외에는 마더랜드의 존재는
전혀 알려져 있지 않았다.
45인들은 그 곳을 금궁(禁宮)이라고만 부르고 있었
다. 그 곳에 접근하는 것은 마더 살로메가 필요로 할
때 외에는 절대적으로 금지되어 있었다.
마더랜드로 향하는 통로는 복도가 미로처럼 복잡하
고 길었다. 총통 관저와 연결되어 있는 복도를 나서자
은회색의 육중한 철문이 나타났다. 마더랜드로 통하는
문이었다. 그 문에는 적외선 X레이가 설치되어 출입자
들의 무기 소지 여부를 감시하고 있었다.
문에는 출입자의 신분을 확인하는 바코드 인식감지
기가 붙어 있었다. 인식감지기 앞에 서면 감지기가 스
스로 작동을 하여 파란 감마선을 출입자에게 보내 바
코드를 읽었다. 그들의 이마에는 눈에 띄지 않게 바코
드가 새겨져 있었다.
"바코드 넘버 707 파나카이아 총통 및 45인의 출입
을 허가합니다."
로즈 국장은 이미 수없이 드나든 통로였으나 문을
들어설 때마다 기분이 개운치 않았다. 그녀는 감시받
고 조종당하고 있다는 생각을 떨칠 수가 없었다. 그것
은 원래 그녀의 일이었다. 그녀는 유러너스 제국의 모
든 시민들을 감시하고 있었는데 이 곳에서는 그녀가
거꾸로 감시를 당하고 있는 것이다.
이내 성전(聖殿)이 나타났다. 성전은 여자 경비병들
이 삼엄하게 에워싸고 있었다. 파나카이아 총통이 선
두로 성전으로 들어가자 짙은 향내가 풍겼다. 성전은
고대(古代)의 사원처럼 높은 제단이 있었고 제단 앞에
는 커다란 향로가 있어서 푸른 연기와 함께 매캐한 향
내를 풍기고 있었다. 제단위에는 보통 인간들 몸집의
다섯 배나 되는 거인(巨人) 마더 살로메가 석상처럼
옆으로 누워 있었다. 언뜻 보기에는 사람이 아니라 거
대한 인형이 누워 있는 것 같았다. 옷은 그리스 여신
같은 흰옷이었고 머리엔 월계관을 쓰고 있었다.
파나카이아 총통이 먼저 제단위에 누워 있는 마더
살로메를 향해 깊숙이 절을 했다. 그러자 45인의 원로
도 제단을 향해 일제히 절을 했다.
"마더 살로메! 유러너스 제국의 총통 파나카이아 및
45인의 원로가 경배를 드립니다."
파나카이아 총통과 45인은 모두 4번 공손히 절을 했
다. 그러자 제단위에 누워 있던 마더 살로메가 살며시
눈을 떴다.
"나의 아들딸들아! 어서 오너라!"
마더 살로메의 목소리는 허공을 웅웅 울리고 있었
다.
로즈 국장은 고개를 숙인 채 마더 살로메의 목소리
가 음산하게 허공을 울리는 소리를 들었다. 마더 살로
메는 아메에바(Amoeba: 변형이 가능한 단세포물질, 생
물이 진화하기 이전의 원시세포상태. 인간의 난(卵)세
포도 아메에바운동을 한다)물질처럼 변형을 한다. 마
더 살로메는 오늘과 같은 의식을 치를 때는 거인이 되
지만 평소에는 평범한 사람이 된다. 마더 살로메가 신
(神)으로 경배를 받는 까닭도 자신의 세포를 변형시켜
거인이 되는 특이한 능력을 갖고 있기 때문이었다.
"어머니, 저희에게 어머니의 생명수를 주십시오."
파나카이아 총통이 정중한 목소리로 청했다.
"그렇구나. 벌써 생명수를 먹을 때가 되었지?"
"예."
"모두들 훌륭하게 자라고 있다. 나는 너희들을 볼
때마다 더없이 기쁘단다. 파나카이아부터 오너라."
마더 살로메가 제단위에 일어나 앉았다. 그녀는 아
이들에게 젖을 먹이는 여인네처럼 가슴을 풀어 헤쳤
다. 그러자 그녀의 거대한 가슴이 향로의 푸른 연기속
에 뽀얗게 드러났다.
"예."
파나카이아 총통이 제단의 마더 살로메를 향해 조심
스럽게 다가갔다. 그러자 마더 살로메가 두 팔을 뻗어
파나카이아 총통을 안아서 얼굴을 가슴으로 향하게 했
다.
로즈 국장은 숨을 죽였다. 숨소리도 내어서는 안되
는 엄숙한 자리였다. 마더 살로메를 분노하게 하면 무
시무시한 징벌이 내릴 것이다. 마더 살로메는 살아있
는 여신이었다.
"귀엽기도 하지 "
마더 살로메가 파나카이아 총통의 얼굴을 자신의 젖
무덤에 갖다댔다. 그러자 파나카이아 총통이 어린애처
럼 마더 살로메의 젖, 소위 생명수를 마시기 시작했
다. 파나카이아 총통이 목구멍으로 꿀꺽꿀꺽 젖을 삼
키는 소리가 조용한 성전을 가득하게 울렸다.
"파나카이아, 너는 충분히 먹었으니 이제 그만 먹으
렴. 동생들도 먹어야지 "
마더 살로메가 파나카이아 총통의 머리를 쓰다듬고
내려놓았다. 다음은 지난 번에 사피언스 그라운드의
하데스 요원에게 암살된 산파브로 부총통 대신 새로
부총통에 임명된 돈 카에스의 차례였다.
로즈 국장은 언제나 마찬가지로 열 여섯 번째 차례
였다. 차례를 기다려 제단 앞으로 나가자 마더 살로메
가 함박 미소를 지으며 로즈 국장을 두 손으로 들어
안았다.
"로즈는 몇 살이지?"
"56세입니다."
"아직 한창때구나."
마더 살로메가 커다란 몸을 흔들며 웃었다. 로즈 국
장이 아직도 젊음을 유지하고 있는 것은 성형수술을
한 탓이었다. 성형수술이 아니더라도 유러너스 제국
시민들은 인체공학의 발달로 항상 젊은 피부와 건강한
몸을 유지하고 있었다.
"어디 보자."
마더 살로메가 로즈 국장을 자세히 살폈다. 로즈 국
장은 공연히 소름이 오싹 끼쳤다. 마더 살로메의 눈이
파랗게 광채를 뿜고 있었다.
마더 살로메는 45인의 원로 중에 유일하게 여자인
로즈 국장을 안아서 가슴으로 가져갔다. 로즈 국장은
마더 살로메의 유액을 마셨다.
그러나 그것은 마더 살로메의 유액이 아닐지도 몰랐
다. 마더 살로메의 유액이 생명수가 아니라 45인의 원
로들을 통제하기 위한 독액(毒液)일 수도 있는 것이
다.
제 18 장 벚꽃동산
평소에는 한가롭기만 하던 벚꽃동산에도 인파가 몰
리고 있었다. 이리노중위는 장애란이 아이스크림을 사
가지고 오는 동안 담배를 피우며 아라크네시의 주택가
를 우두커니 내려다보았다. 주택가는 마치 물속처럼
조용했다. 주택가 어디쯤에서인지 피아노 소리가 평화
롭게 들리고 있었다.
"사왔어요. 주인님!"
그때 이리노중위의 등뒤에서 귓전을 찰랑찰랑 울리
는 맑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리노중위는 몸을 돌렸
다. 장애란이었다.
"수고했어."
이리노중위는 장애란이 들고 있는 아이스크림 두 개
에서 한 개를 받아서 먹기 시작했다.
"그건 애란이 먹어."
"괜찮습니다. 주인님."
장애란이 사양하는 시늉을 했다.
"먹어!"
이리노중위는 장애란이 사양을 하자 엄격한 표정으
로 말했다. 장애란은 자신의 신분을 철저하게 의식하
고 있었다.
"감사합니다. 주인님."
"그 주인님 소리 좀 빼고 "
"네. 주인님."
이리노중위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장애란은
아라크네시에 들어와서 살기 위해 철저하게 교육을 받
은 것 같았다.
장애란이 이리노중위의 집에 도착한 것은 장숙희의
장례식이 끝난지 거의 두 달이 되었을 때였다. 그날
이리노중위가 코스모스 과학센터에서 퇴근하자 장애란
이 청소를 하고 있었다.
"어서 오세요. 주인님."
이리노중위는 집안 청소를 하고 있는 장애란을 보고
깜짝 놀랐다. 아라크네시에 장애란을 가정부로 쓰겠다
고 신청을 했으나 이토록 빨리 도착할 줄은 몰랐던 것
이다.
"언제 왔지?"
이리노중위는 당황하여 장애란에게 물었다.
"오늘 오후에 왔어요."
장애란이 고개를 숙이며 공손히 대답했다. 장애란은
제법 곱게 옷을 차려 입었으나 가난한 사피언스 그라
운드 출신답게 옷이 초라했다. 무릎을 가린 검은 치마
는 색이 바래 있었고 흰색의 부라우스는 낡아서 금세
헤어질 것 같았다. 그러나 장애란의 몸은 기묘할 정도
로 요염했다.
"잘왔어."
이리노중위는 마음에 없는 거짓말을 했다. 그가 제
복을 벗고 집에서 입는 셔츠와 바지를 갈아입으려고
하자 장애란이 그의 방까지 들어와서 시중을 들어주었
다.
"저녁을 준비하겠습니다."
"요리를 할 줄 아나?"
"네. 저녁을 무얼로 드시겠어요?"
"그럼 스테이크로 해줘. 연하게 익혀서 "
"알겠습니다. 주인님."
장애란은 첫날부터 이리노중위에게 깍듯이 공대를
했다.
이리노중위는 장애란의 그런 태도가 낯설기 짝이 없
었으나 한편으로는 흡족하기까지 하였다.
그 동안은 늘 혼자 살았었다. 그러다가 연상의 여자
인 장숙희를 만났고 그녀가 닥터 킬러라는 살인마에게
살해당한 뒤에는 그녀에 대한 생각을 하면서 혼자 살
았었다. 그러나 이제 장애란이 왔다. 장애란은 장숙희
의 어린 동생이었다. 이리노중위는 장애란에게 기묘한
이질감을 느꼈었다. 그러나 그녀가 그를 찾아 옴으로
써 그녀가 갖고 있던 이질감이 그에게 동화되는 듯한
기분이었다.
밤이 되었다. 이리노중위는 혼자서 마더타임에 참여
했다. 그리고 러브타임에 참여하기 위해 멀티 마네킹
을 충전하기 시작했다.
"주인님."
그때 장애란이 그의 방으로 찾아왔다.
"무슨 일이야?"
장애란은 시녀처럼 두 손을 앞으로 가지런히 모으고
있었다.
"제가 주인님을 모시겠습니다."
장애란이 기어 들어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장애란의
얼굴은 불안과 초조가 교차하고 있었다.
"나를 모신다고?"
이리노중위는 얼굴을 찌푸렸다. 그리고 다음 순간
장애란의 말이 무엇을 뜻하는지 알아채고 피식 웃었
다.
"주인님께서는 사이버섹스 프로그램이나 멀티 마네
킹으로 섹스를 즐기시지 않고 저를 대상으로 즐기실
수 있습니다. 저는 주인님의 소유입니다."
"그만 가서 자. 나는 그런 것을 좋아하지 않아."
"주인님은 러브타임의 의무를 지켜야 하니까 섹스를
하실 수밖에 없습니다. 기계나 가상의 현실과 섹스를
하는 것보다 제가 정성껏 모시면 "
"그것은 내 일이야."
이리노중위는 장애란과 섹스 얘기를 하고 있는 자신
이 어쩐지 혐오스러워졌다. 장애란이 스스로 침실의
노리개가 되어주겠다는 사실이 이리노중위는 불쾌하기
만 했다.
"제가 마음에 들지 않으시나요?"
장애란이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주인님께서는 저를 추방 "
"걱정하지마 너를 추방하지는 않을테니까."
"고맙습니다. 주인님."
장애란의 얼굴에 기뻐하는 표정이 역력하게 나타났
다.
이리노중위는 장애란이 인사를 하고 자기 방으로 돌
아가자 비로소 멀티 마네킹으로 러브타임에 참여한 뒤
잠을 청했다. 그러나 좀처럼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그는 아라크네시 남자 시민들이 사피언스 그라운드 출
신의 많은 여자들을 하인으로 데리고 있는 것을 무수
히 보았다. 그러므로 그가 하인을 하나쯤 데리고 있는
것이 전혀 이상할 것이 없었다. 그러나 장애란을 하인
으로 데리고 있는 것은 무거운 중압감으로 그에게 작
용하고 있었다.
(희미하기는 하지만 언젠가 꿈속이 아닌 현실에서
애란을 만난 것 같아 )
이리노중위는 어쩐지 장애란이 친근한 느낌이 들었
다.
이리노중위는 그런 생각을 하며 엎치락뒤치락하다가
잠이 들었다.
다음날 이리노중위는 직장에서 돌아올 때 백화점에
들려 장애란의 옷을 몇 벌 샀다.
(정말 이상할 정도로 낯이 익어 )
장애란은 어린 아이처럼 좋아했다.
장애란은 그날부터 이리노중위에게 더욱 정성스럽게
시중을 들어주었다. 이리노중위가 저녁을 먹을 때면
옆에서 식사 시중을 들고 목욕을 할 때면 장애란이 욕
실까지 들어와서 목욕 시중을 들었다. 잠자기 전에는
그의 팔다리를 정성스럽게 안마를 하여 피로를 풀어
주었다.
이리노중위는 만족했다.
장애란이 처음 그의 집에 왔을 때는 어설프기만 했
으나 시간이 흐르자 점점 장애란이 소중해지기 시작했
다. 장애란은 그림자처럼 그의 뒤를 따르며 시중을 들
고 있었던 것이다.
쏴아 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벚꽃은 바람이 일 때마
다 자욱하게 떨어져 길바닥에서 쓸려 다녔다.
이리노중위는 바람에 쓸려 다니는 흰 꽃잎을 보며
아이스크림을 먹기 시작했다.
이리노중위는 주방에 들어가서 저녁을 찾아 먹으려
다가 장애란이 끙끙 앓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 장애란
의 얼굴이 열 때문에 벌겋게 상기되어 있었다.
(비를 맞아서 감기가 든 게로군.)
이리노중위는 장애란을 안아서 장애란 방의 침대에
눕히고 이불을 덮어 주었다. 그리고 아스핀(아스피린
의 새로운 종류) 한 알과 물을 가져와 장애란을 깨웠
다.
"주인님!"
장애란이 깜짝 놀라 몸을 일으켰다.
"몸에 열이 있는 것 같은데 이거 한 알 먹으면 괜찮
을 거야."
"주인님 죄송합니다."
"괜찮아."
"주인님. 저녁을 준비할께요."
"그럴 필요없어. 애란이나 이 약을 먹고 쉬어."
"주인님. 감사합니다."
장애란이 눈물이 글썽하여 아스핀을 입에 넣고 삼켰
다. 그리고 그녀는 이리노중위가 건네주는 물을 한 모
금 마신뒤 침대에 누웠다. 이리노중위는 불을 꺼주고
거실로 나왔다.
이리노중위는 주방에서 혼자 저녁을 먹었다. 저녁을
먹은 뒤에 장애란의 방을 살며시 들여다보자 장애란은
여전히 끙끙 앓는 신음소리를 하고 있었다.
이리노중위는 억지로 잠을 청했다. 그러나 잠이 오
지 않았다. 창문을 흔드는 바람소리와 빗소리, 그리고
장애란의 신음소리가 귓전에 이명처럼 쟁쟁하여 이리
노중위는 쉽사리 잠이 들지 못했다.
이리노중위가 얼핏 잠이 든 것은 새벽녘이었다. 그
러나 이리노중위는 잠결인지 꿈결인지 뜨거우면서도
매끄러운 여체를 느끼고 퍼뜻 눈을 떴다.
(이런....!)
이리노중위는 깜짝 놀랐다.
그의 침대에 장애란이 들어와 자고 있었다. 그녀가
이리노중위의 품속을 바짝 파고들어 자고 있었다. 몸
이 아직도 불덩어리처럼 뜨거웠다.
(이 아이는 외로운 모양이군.)
이리노중위는 무겁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나 장애
란을 제 방으로 돌아가게 하고 싶지도 않았고 고열로
신음하는 장애란을 그의 여자로 만들고 싶지도 않았
다.
(그런데 이 아이가 왜 내 꿈속에 그렇게 자주 나타
났던 것일까? 마치 전생에 인연이라도 맺은 것같으니
)
기묘한 일이었다.
이리노중위는 기억을 더듬어보기 시작했다. 혹시라
도 어디선가 장애란을 만났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
러나 아무리 기억을 더듬어도 장애란을 만난 일이 없
었다.
(내가 착각을 한 건가?)
장애란은 장숙희의 동생이었다. 이리노중위는 그 때
문에 장애란이 꿈속에 자주 나타났는지도 모른다고 생
각했다.
그러나 그것은 장애란도 마찬가지였다. 장애란도 이
리노중위의 품에 안겨 있으면서 그런 생각을 하고 있
었다. 그녀는 애브너소령의 장례식 때 이리노중위를
처음 보고 자신도 모르게 가슴이 마구 두근거렸다. 그
리고 이리노중위를 어디선가 본 것같은 생각을 떨쳐버
릴 수가 없었다.
장애란은 그날 이리노중위를 뚫어지게 쏘아보았다.
이리노중위가 장례식에서 누군가 뜨거운 눈길로 자신
을 쏘아보고 있는 듯한 느낌을 느낀 것은 바로 장애란
의 그 시선때문이었다.
(이상해. 이 사람을 마치 오래 전부터 알고 있었던
것 같아 )
장애란은 이리노중위의 품속에서 거짓으로 신음을
하는 척하고 하고 그렇게 생각했다. 장애란이 이리노
중위의 하인으로 들어온 것은 비밀리에 X파일을 추적
하여 마더 살로메를 조사하라는 바르시크대령의 명령
에 의해서였다. 이리노중위는 전에 한번도 만난 일이
없었다. 그것은 벌판에서 늑대들과 함께 살 때도 마찬
가지였다.
그런데 왜 이렇게 친근감이 드는 것일까. 왜 이렇게
그를 내몸속에 받아들이고 싶은 것일까.
이리노중위만 보면 그녀는 하체에서 뜨거운 열기가
전신으로 번지는 것같은 기분을 느꼈다.
그러나 이리노중위와 장애란은 클론들에 의해 자신
들이 짝짓기로 맺어지게 되어 있다는 것을 전혀 알지
못했다. 동물들은 짝짓기를 할 때가 되면 머나먼 곳에
상대가 있어도 본능적으로 알게 된다. 그와 마찬가지
로 이리노중위와 장애란도 짝짓기를 하게 연결이 되어
있었다. 물론 그것은 클론들에 의해서였다.
두 사람은 그 사실을 알지 못한 채 꼭 끌어안고 잠
을 잤다.
제 19 장 사랑의 이름으로
로즈 국장은 마더랜드에서 돌아와 뒷짐을 짚고 창밖
을 물끄러미 내려다보고 있었다. 한밤중이었다. 밖에
는 봄비가 구죽죽하게 흩날리고 있었다. 빗발이 세차
지는 않았으나 을씨년스러운 바람이 불고 있어서 창문
이 덜컹대고 흔들리고 빗방울이 후드득 유리창을 때리
고 달아나곤 했다.
(그 아이가 이렇게 크다니 )
로즈 국장은 몸을 돌려 이리노 퍼그스에 대한 신상
명세가 나와 있는 컴퓨터 모니터를 응시하며 깊은 생
각에 잠겼다. 모니터에는 이리노 퍼그스가 군복을 입
은 단정한 모습이 나와 있었다.
금방이라도 그녀에게 말을 걸 것 같은 표정이었다.
(너무나 닮았어, 로버트와 )
로즈 국장은 컴퓨터 모니터에서 활짝 웃고 있는 이
리노중위가 로버트 퍼그스를 닮았다고 생각했다. 그러
자 갑자기 그녀의 가슴이 땅기듯이 아파 왔다. 불과
며칠에 지나지 않았지만 그녀는 어린 이리노중위에게
젖을 먹인 일이 있었던 것이다.
로즈 국장은 다시 몸을 돌려 창밖을 내다보았다. 이
리노 퍼그스가 자신의 아들이라는 것을 알아서 그런지
기분이 미묘했다.
로즈 국장이 이리노 퍼그스중위를 마지막으로 본 것
은 그가 6살쯤 되었을 때였다. 그 무렵 로즈 국장은
로즈중대에서 진급을 하여 중령이 되어 있었다. 그녀
는 전후(戰後)의 어지러운 아라크네시에서 적군의 스
파이를 색출하는 임무에 종사하고 있었다.
어느 날 아라크네시의 주택가를 순찰하는데 장교복
을 입은 로버트 퍼그스가 한 아이를 데리고 산책을 하
고 있었다. 그는 로즈 국장이 탄 지프가 다가오자 재
빨리 걸음을 멈추고 로즈 국장에게 경례를 붙였다. 로
즈 국장은 지프를 세웠다. 군복을 입었으나 로버트 퍼
그스의 모습이 어쩐지 낯익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안녕하십니까? 중령님!"
로버트 퍼그스는 소위가 되어 있었다.
"소위. 모자를 벗어 보게."
로즈 국장은 지프에 앉아서 로버트 퍼그스에게 지시
했다.
"옛서!"
로버트 퍼그스가 재빨리 모자를 벗었다. 그러자 젊
고 씩씩해지기는 했지만 위노강에서 그녀와 격렬한 사
랑을 나누었던 소년의 얼굴이 확연히 드러났다.
(아, 이 사람은 로버트 퍼그스야 )
로즈 국장은 그때 자신도 모르게 가슴이 세차게 뛰
는 것을 느꼈다.
"자네였군."
로즈 국장도 모자를 벗었다.
"중령님은 !"
로버트 퍼그스가 비로소 깜짝 놀란 표정을 했다.
"그래. 옛날의 로즈대위야."
"중령님. 몰라 뵈었습니다."
"그렇겠지. 벌써 6년이 지났으니 쉬어!"
"예."
로즈 국장은 로버트 퍼그스의 손을 잡고 있는 어린
아이를 살펴보았다. 아이는 눈이 동그랗고 쌍꺼풀이
져 있었다. 얼굴은 눈이 부시게 투명했으나 양쪽볼이
사과처럼 붉었다. 로즈 국장은 가슴이 싸하게 저려왔
다. 아이를 보는 순간 자신도 모르게 가슴이 쿵쿵 뛰
었다.
"아이는?"
"제 아들입니다."
"그 아이인가?"
"예."
로즈 국장은 눈을 질끈 감았다가 떴다. 그녀가 예상
했던대로였다.
"귀여운 아이군 "
로즈 국장은 무어라고 설명할 수없는 착잡한 기분에
빠져들었다. 로버트 퍼그스와 자신이 정사를 하여 낳
은 아기가 귀여운 아이로 자라서 걸어다닌다는 사실은
생각조차 해본 일이 없었다.
아이는 궁금한 듯이 그녀를 뚫어질 듯이 쳐다보고
있었다.
로즈 국장은 지프에서 내렸다. 그녀는 아이에게 가
까이 다가갔다.
"안아 봐도 되겠나?"
"물론입니다."
"고맙네."
로즈 국장은 아이를 번쩍 안았다. 의외로 아이는 가
벼웠다.
"여기는 어쩐 일인가?"
로즈 국장은 그날 5분 남짓 로버트 퍼그스와 산책을
했다.
"휴가라 집사람과 함께 왔습니다."
"좋은 휴가 보내기 바라네."
"감사합니다."
"어려운 일이 있을 때면 찾아오고 "
로즈 국장이 그 말을 한 것은 로버트 퍼그스와 다시
한 번 격렬한 정사를 나누고 싶다는 생각을 염두에 둔
것인지도 몰랐다. 그것이 아니라면 자신의 몸으로 낳
은 아이를 다시 보고 싶어서였는지도 몰랐다.
"예."
그러나 로버트 퍼그스중위는 그 뒤로 한 번도 찾아
오지 않았다. 로즈 국장은 군대의 인사 파일에 접속하
여 로버트 퍼그스중위를 모든 진급 대상에서 항상 최
우선시키라는 특별명령을 기록해 두었었다. 그것이 로
즈 국장이 로버트 퍼그스에게 베풀어준 최대의 호의였
다.
로즈 국장은 그 후에 군대에서 제대하여 경찰에 투
신했다. 사회가 안정되어 가면서 군대가 스파이를 색
출하는 일이 필요 없어지기도 했지만 유러너스 제국은
시민들을 사찰하는 일이 필요하게 되었던 것이다. 로
즈 국장은 그 일에 가장 적임자라는 평을 받았고 제대
하자마자 비밀경찰을 창설하여 국장에 취임했다.
그리고 그녀는 마더 살로메의 절대적인 신임을 얻었
다.
그녀는 비밀경찰 국장에 취임하기 전에는 유러너스
제국을 통치하는 인물이 파나카이아 총통이라고 생각
했었다.
그러나 파나카이아 총통은 마더 살로메의 대리인에
지나지 않았다.
로즈 국장은 국장이 되면서 45인의 원로가 되었고
마더 살로메를 단독으로 알현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
녀는 제단위에 비스듬히 누워 있는 마더 살로메를 보
고 가슴이 콱 막히는 듯한 충격을 받았다.
마더 살로메는 거인이었다. 그녀는 처음에 그렇게
거대한 인간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믿을 수가 없었다.
과학문명의 발달은 곧잘 불가능한 것을 가능하게 만들
고는 했지만 거인의 존재는 상상도 해본 일이 없었다.
그러나 엄연한 현실이었다.
로즈 국장은 전신을 엄습하는 공포에 온몸을 부르르
떨었다.
로즈 국장은 소름이 쫙 끼쳤다.
"로즈로구나!"
그녀가 들어가 절을 하자 마더 살로메가 자애로운
목소리로 말했다. 로즈 국장은 마더 살로메의 말에 다
리가 후들거렸다. 마더 살로메의 목소리가 사방을 웅
웅거리고 울리고 있었다.
"예."
로즈 국장은 간신히 기어 들어가는 목소리로 대답했
다.
"이리 가까이 오너라."
로즈 국장은 조심스럽게 제단 앞으로 나갔다. 그러
자 마더 살로메가 한 손을 뻗어 로즈 국장의 허리를
움켜쥐고 제단위로 끌어올렸다. 로즈 국장은 허공으로
들어올려져 마더 살로메의 옆에 눕혀졌다.
"너는 이제 나의 아기야."
마더 살로메가 가슴을 꺼냈다.
마더 살로메의 거대한 몸집만치나 가슴도 컸다.
"그러니 엄마의 젖을 먹어야지 "
마더 살로메가 젖을 누르자 유액이 폭포처럼 쏟아지
기 시작했다. 그녀는 마더 살로메의 젖으로 온 몸이
흠뻑 젖었다.
"오! 이런!"
마더 살로메는 그때서야 젖을 짜는 것을 멈추었다.
로즈 국장은 손으로 얼굴에 묻은 유액을 닦아냈다.
"그것은 너의 생명수다."
마더 살로메가 음산하게 말했다.
"앞으로 한 달에 한 번씩 이 생명수를 마시지 않으
면 너는 살아갈 수없을 것이다!"
로즈 국장은 공포에 휩싸였다.
"나는 너의 어머니야. 마더 살로메라고 부르지."
마더 살로메의 눈빛이 그녀의 안구를 날카롭게 찔러
왔다.
"유러너스 제국은 나 마더 살로메가 지배한다!"
" "
로즈 국장은 마더 살로메의 말을 들으며 갑자기 잠
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로즈 국장은 마더 살로메의 팔
에 안긴 채 혼곤하게 잠이 들었다. 그러나 마더 살로
메는 잠이 든 그녀에게 계속 속삭였다. 로즈 국장은
잠결인 듯 꿈결인 듯 마더 살로메의 말을 들었다.
잠은 아주 편안했다. 로즈 국장이 깨어나면 마더 살
로메는 다시 젖을 먹였고 로즈 국장은 또 다시 잠이
들었다.
"이제 돌아가거라."
얼마의 시간이 지나자 마더 살로메가 그녀를 제단에
서 내려놓았다. 그녀는 잠에 취해 몽롱한 가수(假睡)
상태에서 마더랜드의 성전을 나왔다.
마더랜드는 마더 살로메가 사는 곳으로 총통 위에
군림하고 있다는 사실을 증명이라도 하려는 듯이 총통
관저 위에 있었다. 그 곳은 사진 촬영도 허락되지 않
고 일반인이 접근을 할 수도 없었다.
로즈 국장이 성전에서 나오자 여자 경비병들에 의해
목욕탕으로 안내되었다. 그녀는 마더랜드에서 목욕을
하고 그 곳에 머물게 되었다. 마더랜드는 기화이초(奇
花異草)가 만발한 작은 동산이었다. 색색의 꽃과 아름
다운 꽃들이 만발해 있었다.
아아, 이렇게 아름다운 곳이 있다니. 지상에 낙원이
있다면 마더랜드일 것이다.
로즈 국장은 그렇게 생각했다.
이튿날 로즈 국장은 다시 성전으로 불려가서 마더
살로메의 유액을 마셨다. 마더 살로메는 이번엔 그녀
의 옷을 모두 벗긴 뒤에 유액을 마시게 했다.
(이, 이럴 수가 !)
그때 로즈 국장은 자신의 피부가 한꺼풀씩 벗겨지는
것을 보고 소스라쳐 놀랐다. 처음에 그것은 피부가 근
질근질하는 가려움으로 시작되어 차츰차츰 얼굴의 껍
질이 벗겨지고 이어서 손과 발의 껍질이 차례로 벗겨
져 나갔다. 그녀의 피부가 빠르게 벗겨지고 있었다.
로즈 국장이 사흘째 마더 살로메의 유액을 마시자
그녀의 피부는 마침내 눈(雪)처럼 하얗게 빛났다. 그
녀의 피부는 어느덧 20대 초의 젊은 여자로 바뀌어 있
었고 몸도 날아갈 것처럼 가쁜했다.
(나는 환골탈태를 한 거야.)
로즈 국장은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마더 살로메의
체내에서 나오는 유액이 그처럼 신비한 효과를 지녔으
리라고는 생각조차 못했던 일이었다.
로즈 국장이 마더 살로메에 대해 좀 더 자세히 알
게 된 것은 그로부터 한달 뒤의 일이었다. 그날은 유
러너스 제국의 45인의 원로가 마더 살로메를 알현하고
그녀의 유액, 소위 생명수를 얻어 마시는 날이었다.
"에바야 이리 오너라!"
파나카이아 총통을 비롯하여 44인의 원로가 차례로
유액을 마시고 나자 마더 살로메가 45번째 원로인 시
간탐사선 아르고호의 승무원 에바소령을 불렀다. 로
즈 국장은 어쩐지 마더 살로메의 목소리에서 으스스한
냉기가 휘몰아쳐 오는 것을 느꼈다.
"예."
에바소령이 공손히 허리를 숙이고 마더 살로메의 제
단을 향해 조심스럽게 다가갔다. 그러자 마더 살로메
의 파란 눈에서 아주 짧은 순간 무시무시한 살기가 폭
사되었다가 거두어졌다.
"가여운 것 "
마더 살로메가 에바소령의 허리를 두 손으로 움켜쥐
었다. 로즈국장은 고개를 숙인 채 이제 마더 살로메가
에바소령에게 유액을 마시게 해주겠지 하고 생각했다.
그때 뼈가 부러지는 으드득하는 소리와 함께 소름끼치
도록 처절한 비명소리가 들렸다. 로즈 국장은 재빨리
고개를 들었다.
그 소리는 마더 살로메가 45번째 원로인 에바소령의
허리를 두 손으로 움켜쥐어 부러뜨리는 소리였다. 로
즈 국장은 소름이 오싹 끼쳐왔다. 에바소령은 거인의
손에서 걸레처럼 구겨지고 있었다. 목불인견(目不忍
見)의 참상이었다.
"이 아이는 나를 배신했다. 내가 젖을 먹여 키웠는
데 나를 배신하다니 이런 배은망덕이 어디 있겠느냐?"
마더 살로메가 44인의 원로들을 쏘아본 뒤에 에바소
령을 성전 바닥으로 내던졌다. 마더 살로메의 손은 어
느 사이에 피로 흥건하게 젖어 있었다. 로즈 국장은
온몸이 얼어붙는 것 같았다.
마더 살로메는 배신자를 철저하게 응징하고 복종하
는 원로들에게는 생명수라는 그녀의 유액을 주었다.
마더 살로메의 유액은 신비했다. 로즈 국장은 그것을
마시면 몸이 날아갈 듯이 가볍고 젊어지는 듯했으나
마시지 않으면 머리가 뻐개지는 것같은 고통을 느껴야
했다. 게다가 그 유액을 마시면 마더 살로메가 어머니
라는 생각에 사로잡혀 있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마더
살로메의 정체에 대해서는 전혀 알 수 없었다.
아침이 왔다.
로즈 국장은 청사로 출근할때 이리노중위의 집으로
돌아서 출근했다. 이리노중위의 얼굴을 다시 한 번보
고 싶었다. 이상한 일이었다.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자꾸 이리노중위에게 마음이 이끌리고 있었다.
(이러다가 마더 살로메에게 발각되면 비참하게 죽음
을 당할거야 )
그러나 로즈 국장은 위험을 무릅쓰고 이리노중위의
집을 찾아갔다. 이리노중위의 집은 언제나 조용했다.
아직 출근을 하지 않았는지 에어카가 그대로 현관 앞
에 세워져 있었다.
로즈 국장은 이리노중위의 집앞을 그냥 지나쳤다.
로즈 국장은 다음날도 이리노중위의 집앞을 돌아서
출근을 했다. 그날은 다행히 자전거를 타고 출근을 하
는 이리노중위를 멀리서나마 볼 수 있었다.
(저 아이가 내 아들이라니 )
로즈 국장은 휴가원을 내고 로마노즈에서 이리노중
위를 낳던 생각을 했다. 차마 어린 이리노를 죽일 수
없어서 젖을 물리던 일도 생각났다. 그러자 또 다시
가슴이 땡기듯이 아파 왔다.
(정말 우리에게 운명이라는 것이 있는 것일까?)
로즈 국장은 로버트 퍼그스를 강가에서 만나 미친
듯한 사랑에 빠진 것이 결코 우연이라고 생각되지 않
았다.
로즈 국장은 그 무렵에 어떻게 해서 자신이 로버트
퍼그스에게 열중했는지 아무리 기억을 더듬어도 알 수
없었다. 다만 분명한 것은 냉혹한 철녀(鐵女)인 그녀
의 마음을 로버트 퍼그스가 사정없이 뒤흔들어 놓았다
는 사실이었다.
그런 경험은 사이버섹스 프로그램으로도 경험했고
멀티 마네킹으로도 경험을 했었다. 그러나 로버트 퍼
그스와 나눈 경험은 특별한 것이었다.
(이상한 일이었어 )
그녀는 사랑이 무엇인지 알지 못했다. 그녀는 국립
제국병원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부모의 사랑을 받지 못
했다. 자라서 이성을 알게 될 나이에는 러브타임에 참
여하느라고 말초적인 쾌락만 알았지 사랑에 빠질 수가
없었다.
유러너스 제국에는 이미 오래전부터 러브타임이 실
시되고 있었다. 누구나 16세만 되면 섹스를 했다. 20
세기의 작가 올더스 헉슬리의 소설 '멋진신세계'에서
는 섹스가 아이들의 유일한 놀이였지만 유러너스 제국
은 섹스가 의무였다. 그런데 그것이 사랑이었단 말인
가.
그녀는 지난 밤 내내 그 생각을 했다. 잠이 들려고
하면 로버트 퍼그스와 이리노중위의 얼굴이 자꾸 눈앞
에 어른거리곤 했다.
(한 번 만나고 싶어. 내 아들이라고 부르고 싶고 )
로즈 국장은 그 생각을 떨쳐버릴 수가 없었다. 이리
노중위만 생각하면 가슴이 뛰고 눈앞으로 별빛이 쏟아
져 내려오는 것 같았다.
로즈 국장이 컴퓨터에 접속을 하여 로버트 퍼그스가
어떻게 지내는지 살피자 그는 이미 중늙은이가 되어
있었다. 나이로는 그녀보다 더 어린데도 과학의 혜택
을 전혀 받지 않은 듯 얼굴엔 주름살까지 생겨 있었
다. 그는 유러너스 제국 시민이라면 누구나 하는 성형
수술도 하지 않았고 나이에 비해 일도 하지 않고 있었
다.
(로버트 퍼그스는 제국에 불만을 갖고 있는 거야.)
로즈 국장은 로버트 퍼그스가 드러내놓고 활동을 하
지 않고 있었으나 반제국주의자라는 것을 알 수 있었
다. 유러너스 제국에는 로버트 퍼그스와 같은 반제국
주의자들이 적지 않게 활약을 하고 있었다. X파일을
만든 것도 그들중의 한 사람일 것이 분명했다.
그날부터 로즈 국장은 청사에서 퇴근을 한 뒤에도
이리노중위의 집앞에서 오랫동안 차를 세워두고 집을
지켜보고는 했다. 이리노중위의 얼굴을 보는 것이 점
점 그녀의 중요한 일과가 되고 있었다.
제 20 장 X파일
유강렬박사로부터 전화가 온 것은 우희 위버가 연구
실에 있을 때였다. 저녁 5시였다. 그녀는 인간과 거의
비슷한 뇌구조를 갖고있는 침팬지의 뇌파 조사를 마친
뒤에 창밖을 물끄러미 쳐다보고 있었다.
"우희?"
"네. 저예요. 박사님."
"밖에 비가 오는데 연구실에서도 보이오?"
"네. 보여요."
우희 위버의 연구실에서도 사납게 비바람이 몰아치
는 것이 보이고 있었다. 경축일부터 오기 시작한 비가
아직도 계속 내리고 있었다. 연구실밖에 있는 벚나무
가 바람에 미친 듯이 나부끼고 있었다. 우희 위버는
공연히 마음이 심란했다.
"저녁에 메가TV 보러 오겠소?"
메가TV는 에바소령의 X파일을 말하는 그들의 암호였
다.
"네."
"하시시술은 내가 준비하겠소."
"감사합니다."
우희 위버는 건성으로 인사를 하는 체했다. 혹시라
도 전화가 도청을 당하지 않나 걱정이 되었기 때문이
었다.
"몇 시에 오겠소?"
"8시쯤이면 어떨까요?"
"좋소. 기다리고 있겠소."
전화가 찰칵 끊겼다. 수신을 중단하는 버튼을 누르
고 우희 위버는 또 다시 우두커니 창밖을 내다보았다.
사흘이나 되는 지난 경축일 내내 우희 위버는 유강렬
박사와 함께 지냈던 것이다. 그런데 하루도 안돼서 유
강렬박사가 부르고 있었다.
우희 위버는 유강렬박사에게 무슨 일이 생기지 않았
나 걱정이 되었다. 유강렬박사는 유러너스 제국에 비
밀경찰이 존재하고 있고 그 자신이 비밀경찰에 끌려가
고초를 받은 일을 우희 위버에게 속삭이듯이 말했었
다.
(비밀경찰이 엘리자베스 버틀리를 복제했다고 했
어!)
유전공학이 발달한 탓에 DNA를 추출하여 인간을 복
사하는 것은 얼마든지 가능한 일이었다. 다만 판도라
의 전쟁 이후 복제인간이나 안드로이드 인간의 제작은
엄격한 통제를 받고 있었다.
그러나 비밀경찰이 한다면 그런 일은 전혀 통제를
받지 않을 터였다. 우희 위버는 문득 에바소령의 X파
일이 생각났다. 그 파일에는 시간탐사의 허구성이 기
록되어 있었다.
우리는 마침내 살로메 위성에 착륙했다. 살로메
위성은 우리가 상상했던 것보다 훨씬 더 아름다운 위
성이었다. 처음에 우리는 이 위성이 천국이 아닌가하
고 생각했을 정도였다.
우리는 착륙선이 살로메 위성에 도착하기 전부터 설
레이는 가슴으로 살로메 위성이 어떤 모습일까 하고
생각했다. 나는 그 어느 누구보다도 가슴이 뛰었던 것
같았다. 그때 내가 얼마나 흥분하고 감격에 젖어 있었
는지는 필설로 형언할 수가 없다.
여하튼 모선(母船)에서 분리된 착륙선이 살로메 위
성의 대기를 뚫고 살로메 위성에 서서히 접근하기 시
작하자 먼저 구름의 덩어리가 보였다. 우리가 특수 대
기측정기로 구름을 조사하자 구름의 성분이 지구의 구
름과 너무나 흡사했다.
우리는 살로메 위성에 생명체가 살고 있다는 것을
새삼스럽게 확인하고 기뻐서 날뛰었다.
살로메 위성이 점점 가까워지기 시작했다. 착륙선의
창으로 적막하고 무한한 우주만 보아온 우리에게 살로
메 위성의 아름다운 바다와 대륙이 보이기 시작했다.
바다는 남빛이었고 육지는 초록빛이었다.
"바다야! 바다가 있어!"
나는 흥분해서 소리를 질렀다.
바다는 육안으로까지 확인할 수 있었다.
"육지도 있어!"
다른 누군가도 소리를 질렀다. 착륙선의 창으로 살
로메 위성의 바다와 육지가 희미하게 보이기 시작하더
니 이내 시야로 푸른빛이 가득해 왔다. 우리는 이런
정경을 한 번도 목격한 일이 없었다.
그것은 우리가 지구로 귀환할 때와 흡사했다. 그러
나 지구에 착륙하는 것보다 훨씬 안전했다. 우주선이
지구에 착륙할 때는 바다에 착륙했으나 우리는 아주
천천히 살로메 위성의 육지에 착륙했다.
아
착륙선이 살로메 위성에 착륙하자 우리는 착륙선의
해치를 열고 첫발을 내디뎠다.
"공기야! 산소가 있어!"
우리는 감격해서 소리를 질렀다. 우리는 우주복의
지퍼를 열고 살로메 위성의 대기를 흡입했다. 살로메
위성의 대기는 너무나 상쾌했다. 우리는 상쾌한 살로
메 위성의 공기를 마음껏 흡입하며 주위를 둘러보았
다. 우리가 착륙한 곳은 평평한 평원이었다. 먼 곳에
는 산맥이 솟아 있었고 평원은 그 곳까지 길게 뻗어
있었다. 땅에는 온갖 기화이초가 만발해 있었고 흙은
비단결처럼 보드라웠다. 햇살은 나뭇가지와 풀숲에서
금빛으로 반짝이고 있었고 바람은 얼굴을 간지르며 살
랑살랑 불고 있었다.
우리는 조금 걷기로 했다. 착륙선에서 멀리 떨어지
는 것은 위험할 수도 있었으나 살로메 위성을 자세히
살펴야 했다.
우리는 3km쯤 걸었다. 그 곳부터는 산이 시작되었고
무수한 아열대(亞熱帶) 나무들이 우거져 있었다. 나무
들에는 여러 가지 이름 모를 과일이 열려 있었다. 우
리는 시험 삼아 그것을 따먹었다. 처음에 독성(毒性)
이 있지 않나 하여 걱정이 되었으나 과일들은 모두 달
고 향기로웠다.
우리는 그것을 배불리 따먹었다
에바소령의 X파일은 살로메 위성에 대한 것이었다.
그러나 그 내용은 메가TV로 보도되지 않았고 메가TV에
서는 엉뚱하게 아르고 5호가 6천5백만년 전의 지구를
탐사하고 있는 것으로 보도되었었다.
제국시민 여러분! 여기는 6천5백만년 전의 지구
입니다. 여러분이 자연사(自然史)에서 배우신 것처럼
이 시기는 생물의 빅뱅이라고 불리는 대진화(大進化)
가 이루어졌습니다. 바다에는 바다전갈, 암모나이트,
보트리오레페스라고 불리는 어류가 등장했습니다. 이
시기의 어류는 연체와 갑각을 함께 몸에 갖고 있었습
니다.
육지에는 델타테리디움(거대한 쥐), 메가네우라(거
대한 잠자리), 프테라노돈(조류), 그리고 공룡 중에서
가장 유명한 티라노사우루스, 디플로도쿠스 등이 등장
했습니다.
기후가 온난하고 습윤했기 때문에 육지는 거대한 평
원과 삼림이 이루어졌습니다.
그러나 6천5백만년 전 거대한 운석이 지구에 충돌하
므로써 1만종 이상으로 진화해 있던 생물체의 대부분
이 멸종을 당하는 불행한 사태가 일어나게 됩니다.
여러분이 보시는 것처럼 얼음과 암석으로 이루어진
혜성 하나가 지구를 향하여 빛보다 70배나 빠른 속도
로 달려오고 있습니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우리의 시간탐사선 아르고 5호는 일단 지구에서 멀
리 떨어져 관측하기로 했습니다. 이 혜성과 충돌을 한
다면 우리의 시간탐사선도 흔적도 없이 사라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유러너스 제국시민 여러분! 이제 충돌의 시간이 다
가오고 있습니다. 대재앙을 예측하지 못하는 공룡과
지구의 생명체들은 지극히 한가롭게 평원을 거닐고 있
습니다.
시민 여러분! 마침내 1만 제곱미터나 되는 지구의
공기가 폭발합니다. 작은 도시 만한 혜성이 불덩어리
가 되어 지구에 내리꽂힌 것입니다. 이것은 1945년에
히로시마에 투하된 핵폭탄보다 1만 배나 강력한 것입
니다.
이 영향으로 지구는 대지진이 일어납니다. 괴력의
공기파(空氣波: 핵폭풍)에 의해 산과 육지가 가루가
되어 날아갑니다. 충돌지역에서는 수km나 되는 액체산
이 치솟고 지름이 수십km나 되는 분화구도 생깁니다.
분화구에서는 수백 톤이 넘는 바윗덩어리들이 로켓
보다 빠르게 날아가 바다로 떨어지고 바다는 이 충격
으로 커다란 해일을 일으켜 육지를 휩쓸어 버립니다.
이것은 불과 수십 초만에 일어난 재앙입니다.
이제 지구에 존재하는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바다와 육지가 뒤범벅이 되고 화산이 폭발하여 화산
재가 대기를 덮어버립니다. 태양빛 대신 지구와 충돌
할 때 생긴 파편인 수십억개의 운석 불빛에 의해 지구
의 모든 것이 순식간에 타버리고 증발합니다. 지구는
마침내 달이나 화성과 같은 바다의 흔적은 있으나 생
물이 살아갈 수없는 불모의 땅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
가 화석(化石)에서 볼 수있는 생명체는 거의 모두 이
때의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에바소령이 메가TV에서 말한 것이었다.
우희 위버는 에바소령이 남긴 X파일과 너무나 다른
메가TV의 내용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우희 위버는 연구실에서 나오자 곧장 유강렬박사의
집으로 갔다. 유강렬박사는 이미 집에 도착하여 저녁
을 지어놓고 있었다. 우희 위버와 유강렬박사는 저녁
을 먹으며 하시시술을 곁들였다. 우울하던 기분이 하
시시를 마시자 조금 나아졌다.
"제국정부가 이런 일을 꾸미는 것은 무엇때문일까
요?"
우희 위버는 저녁이 끝나자 설거지를 하며 유강렬박
사에게 물었다. 설거지래야 설거지 기계에 빈 그릇을
집어넣는 것이었다. 설거지 기계는 빈 그릇을 넣고 버
튼만 누르면 자동으로 세재로 닦고 물로 세척을 한 뒤
에 건조까지 시킨 뒤에 찬장에 진열을 했다.
"X파일에는 마더 살로메의 비밀이 숨겨져 있어 "
유강렬박사가 커피를 끓이며 조심스럽게 말했다.
"마더 살로메요?"
"커피를 마시고 그 파일을 보자구."
"그 파일을 블랙버드가 전해 준 거예요?"
"아니야. 어떤 남자가 전해 주었어."
"남자요?"
"응. 전혀 처음 보는 남자였어."
"그런데 왜 이런 파일을 전해 주죠?"
"모르지. 내 생각엔 X파일을 블랙버드가 나에게 준
게 아니고 반제국주의자들이 준 것 같아 "
"그럼 우린 반역자가 되는 거 아녜요?"
"그렇게 되겠지."
"끔찍해요. 비밀경찰에 걸리면 우린 죽을지도 몰라
요."
"그래. 나도 그렇게 생각해."
유강렬박사가 불안한 음성으로 말했다. 우희 위버는
설거지 기계의 버튼을 눌러 놓고 식탁에 앉았다. 유강
렬박사가 커피를 끓여서 식탁으로 가지고 왔다. 커피
를 다 마신뒤에 우희 위버와 유강렬박사는 에바소령이
남긴 X파일을 다시 검토하기 시작했다.
나는 살로메 위성에서 돌아오자 마더 살로메를
알현했다. 나는 그때까지도 유러너스 제국에서 가장
높은 통치자가 파나카이아 총통이라고 생각했었다. 그
러나 파나카이아 총통은 마더 살로메의 대리인에 지나
지 않았다.
나는 마더랜드라는 곳에 있는 성전에서 마더 살로메
를 두 번째로 보았다. 그리고 마더 살로메로부터 딸이
라고 불리며 그녀의 유액을 마시게 되었다. 그때 나의
놀라움은 거의 기절할 정도였다.
마더 살로메는 우리 인간보다 몸집이 다섯 배나 큰
괴인이었다. 나는 그렇게 큰 괴인은 신화(神話)나 전
설에서 밖에 본 일이 없었다.
그녀는 나에게 자신의 딸이라고 부르며 옷을 벗긴
채 제단으로 끌어올렸다. 그리고는 나에게 자신의 검
은 젖꼭지를 물렸다. 그녀가 가슴을 누르자 그녀의 가
슴에서 유액이 내 입으로 폭포처럼 쏟아지기 시작했
다. 나는 그녀의 가슴에서 쏟아지는 유액을 정신없이
마셨다. 그러나 젖꼭지도 보통 사람보다 훨씬 컸기 때
문에 유액이 흘러 넘쳐서 내 몸이 흠뻑 젖었다.
나는 그녀의 유액을 마시고 곧 잠에 빠졌다. 그녀의
유액은 신비스럽게 나를 평온하고 안온한 잠속으로 떨
어트렸다. 내가 잠에서 깨어나자 마더 살로메는 성전
에서 나가게 했다.
나는 성전을 나왔다. 그러자 경비병들이 나를 목욕
탕으로 데리고 가서 목욕을 시켰다. 나는 사흘동안 그
일을 반복했다. 그러자 내 몸에 기이한 변화가 일어났
다. 내 몸의 껍질이 모두 벗겨지고 새로운 피부가 태
어나기 시작한 것이다.
나는 한동안 얼떨떨했다.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는 것일까. 아무리 과학문명이 발달한 세상이라고
해도 이것은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나는 마더 살로메의 충실한 하인이 되기 시작했다.
그녀의 명령을 지상명령으로 듣기 시작했으며 내 머릿
속에는 그녀가 절대자이며 어머니라는 인식이 깊숙이
침투했다.
내가 잠이 든 사이에 그녀가 나에게 최면을 건 것
같았다.
나는 이제 그녀의 하인이 되었다.
한 달이 되면 어김없이 성전을 찾아가 그녀로부터
유액을 받아마셨고 유액을 마시지 않으면 나는 금세
괴물처럼 피부가 쭈글쭈글 해졌다. 그리고 머리가 뻐
개지는 듯한 엄청난 고통이 몰아쳐 왔다
우희 위버는 유강렬박사와 함께 한동안 침묵을 삼켰
다. 에바소령의 X파일은 엄청난 사실을 폭로하고 있었
다. 너무나 충격적인 일이라 두 사람은 입이 벌어지지
않았다. 그들은 마더타임 시간에 홀로그램으로 보는
마더 살로메밖에 알지 못했다. 그런데 그 마더 살로
메가 실존하는 인물이라니 두 사람은 머리 끝을 쭈뼛
하게 하는 공포로 몸을 떨었다.
"정말 마더 살로메가 존재할까요?"
우희 위버가 침묵이 견딜 수 없다는 듯이 유강렬박
사를 향해 근심스럽게 물었다.
"이 파일은 가짜가 아니야."
유강렬박사가 무겁게 대답했다.
"그럼 우린 어떻게 되는 거예요?"
"마더 살로메의 손에서 놀아나고 있는 거야."
"유러너스 제국 전체가요?"
"전 세계가!"
"세상에! 믿을 수없는 일예요!"
우희 위버는 세차게 고개를 흔들었다. 전세계가 마
더 살로메라는 괴인의 지배에 있다는 것은 터무니없는
일인 것 같았다.
"마더 살로메의 존재를 믿을 수 없어요. 어떻게 그
렇게 큰 괴인이 있을 수 있죠?"
"유전공학을 응용하면 얼마든지 가능해."
"그렇기는 해도 "
우희 위버는 입을 다물었다. 과학으로 따지면 그런
일은 얼마든지 가능하다. 그러나 과학으로 슈퍼 우먼
을 창조하다니. 게다가 마더 살로메는 자신의 몸을 축
소시키기도 하고 확대시키기도 하는 것이다.
유강렬박사가 입을 열었다.
"일단 아르고호의 승무원에게 접근해 보는 것이 좋
겠어. 아르고호의 승무원을 접촉해 보면 진실을 알 수
있을 거야."
"아르고호의 승무원 누구요?"
우희 위버는 긴장한 표정으로 물었다.
"이리노 퍼그스중위라고 있어."
"아는 사람예요."
"한 번 만난 일이 있어."
"접촉해서 어떻게 하게요?"
"아르고호의 진실을 알아내야지."
"위험하지 않을까요?"
"위험할 거야."
"조심하세요. 당신은 위험에 빠지면 안돼요."
우희 위버는 유강렬박사에게 다가가 입술을 포갰다.
그를 위험 속에 빠트리고 싶지 않았다.
유강렬박사는 무엇을 생각하는지 입을 꾹 다물고 있
었다. 우희 위버는 X파일을 갈무리하고 유강렬박사와
함께 침실로 들어갔다. 벌써 밤이 깊어 있었다. 밖에
는 여전히 비바람이 몰아치고 있었다.
"당신은 내 사랑예요."
우희 위버가 머리를 기대왔다. 우희 위버의 풍성한
머리숱에서 좋은 냄새가 풍겼다.
"고마워!"
유강렬박사가 진심으로 말했다. 비밀경찰의 추적을
받게 되면 연약한 여자인 우희 위버가 도움이 되지는
않을 터였다. 그러나 자신을 믿고 따르는 사람이 옆
에 잎에 있다는 것은 든든한 일이었다.
"그런데 X파일의 나머지 부분은 어디 있죠?"
"이 디스크에 그냥 있어."
"아무 것도 없잖아요? 여기서 X파일이 끝난 게 아녜
요?"
X파일은 에바소령의 회고록 형태였다. 그러나 에바
소령이 마더 살로메를 만난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없었
던 것이다.
"얼핏 보면 나머지는 없는 것으로 볼 수 있어."
"그럼 없는 게 아녜요?"
"이 디스크에는 암호가 많아. 그냥 컴퓨터에 넣고
파일을 풀려고 하면 에바소령의 기록밖에 나오지 않지
만 암호를 풀면 어마어마한 내용이 있을 거야."
"어떻게 그걸 아세요?"
"암호가 굉장히 까다롭게 되어 있어. 나도 암호 하
나를 간신히 풀고 이 안에 중요한 내용이 들어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어. 암호를 풀지 않으면 X파일은 에바
소령의 기록밖에 나타나지 않아."
"그럼 파일의 나머지 내용을 알려면 또 암호를 풀어
야 해요?"
"그래야지."
"풀 수있을 것같아요?"
"지금은 곤란해. 암호가 너무 어렵게 되어 있어. IQ
가 3백 이상은 되어야 풀 수 있어."
"그런 사람이 어디 있어요?"
"코스모스 과학센터의 슈퍼컴퓨터를 이용해야지."
"그건 너무 위험해요."
"그래서 나도 망설이고 있는 거야."
우희 위버는 골똘히 생각에 잠겼다. 코스모스 과학
센터의 컴퓨터는 사용을 하면 기록이 그대로 남는 것
이다. 그것을 사용했다가는 X파일을 소지했다는 죄로
금방 죽음을 맞이하게 될것이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유강렬박사도 무엇을 생각하는
지 입을 꽉 다물고 있었다.
제 1 권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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