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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혼의 파괴자(1)

by Casey,Riley 2023. 6.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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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혼의 파괴자(1)
-이 수광 장편추리소설

----- 차 례 -----

제1장 지옥을 떠나오다
제2장 세상 밖으로
제3장 내 안의 푸른 영혼
제4장 밤으로의 길고 어두운 여로
제5장 떠나가는 영혼들
제6장 임 따라 가는 길
제7장 새벽을 기다리는 사람들
제8장 영혼의 파괴자들
제9장 그 겨울의 장미넝쿨


제1장 지옥을 떠나오다

1

밖에는 주룩주룩 봄비가 내리고 있었다.
안미경()은 차가운 마룻바닥에
옆으로 누워 봄비가 주룩거리는 창밖을
물끄러미 응시했다. 2월인데도 날씨가
포근했다. 어제만 해도 바람이 칼날처럼
매섭더니 벌써 봄이란 말인가. 교도소의
마룻바닥이 여전히 차갑기는 하지만 운동을
하러 밖으로 나가면 양지쪽에 봄풀이
파릇파릇 돋아나는 것을 볼 수 있었다.
또 다시 봄이야.
미경은 습관처럼 중얼거리며 시름에
젖었다. 봄이라는 단어가 촉촉한 봄비처럼
가슴으로 젖어드는 기분이었다.
봄이 오면...
봄이 오면 봄풀이 돋아나듯 겨울 내내
웅크리고 있던 내 마음이 기지개를 켤
것인가. 한숨과 시름도 얼음이 녹듯 따스한
봄볕에 녹아버릴 것인가.
봄이 오면...
봄이 오면 푸른 수의를 입고 있는
나에게도 좋은 일이 생길 것인가.
미경은 시를 읊듯이 중얼거렸다.
"에그 옥살이하는 년 처량하게 왠 놈의
봄비야... "
그때 벽쪽에 누워 있던 여자가 반쯤
일어나 앉으며 한탄조로 중얼거렸다.
간통사건으로 들어왔다는 407호였다. 다른
여자들도 몸을 뒤척이는 것을 보면 잠이
오지 않는 모양이었다. 여기저기서 한숨을
쉬는 소리가 들렸다.
미경도 무겁게 한숨을 토했다. 한숨도
전염이 되는 것인가. 미경은 가슴이 무거운
돌멩이를 얹어 놓은 것처럼 답답했다. 이럴
수가 있는 것인가. 내 삶이 이토록 기구할
수도 있는 것인가. 나는 무엇 때문에 늑대
같은 사내들에게 짓밟히고 지옥 같은
교도소 생활을 해야 하는가. 하늘이
저주하지 않았다면 이렇게 비참한 운명도
흔치 않을 것이 아닌가.
미경은 하루에도 몇 번씩 되살아나는
의문을 머릿속에서 반추하고 있었다.
"잠들 오냐?"
407호가 여자들을 향해 낮게 소리를
질렀다. 그러나 여자들은 아무 대꾸가
없었다.
"이년들이 귀가 처먹었나?빵장이 묻는데
왜 대답이 없어?"
407호가 언성을 높여 굼시렁거렸다.
그러나 입만 걸지 그다지 악의가 있는
욕설은 아니었다.
"그만 자. "
402호가 낮은 목소리로 대꾸했다.
402호는 퇴폐이발소의 여주인이었다.
처음엔 여자 면도사로 시작하여 이발사인
남편을 만나 결혼을 한 뒤 이발소를
개업했었다. 그러나 결혼을 한지 5년만에
남편이 교통사고로 죽자 자신이 손수
이발소를 경영하게 되었다. 그것은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어려운 일이었다.
그녀가 가장 견디기 어려웠던 것은
무엇보다도 머리를 깎는 손님이 없다는
점이었다. 젊은 남자들은 머리를 깎으러
미장원으로 가고 중년 남자들은
퇴폐이발소로 몰렸다.
402호도 어쩔 수 없이 퇴폐이발소로 영업
방침을 바꿨다. 예쁘장한 여자 면도사들을
대거 기용하고 그녀들에게 변태 영업을
시켰다. 이발소에 칸막이를 설치하고
샤워시설도 갖추었다. 그러자 손님들이
몰려오기 시작했다.
402호는 흡족했다. 일제단속이 몇 번
있었으나 미꾸라지가 빠져나가듯이
단속망을 잘 빠졌다. 일제단속이 있으면
상납을 받는 기관에서 미리 연락을 주었고
단속에 걸려도 벌금형을 받거나 영업정지
10일이 고작이었다. 그것도 2,3년에 한번이
고작이었다. 나머지는 단속에 걸려도
돈으로 해결을 했다. 그러나 지난 해에는
기독교단체가 앞장을 서서 단속을 하는
바람에 빠져나갈 방법이 전혀 없었다.
1년 6개월의 징역형을 선고받고
청주 여자교도소에서 복역하게 되었다.
"402호!"
"왜 그래?"
"잠도 오지 않는데 이발소 얘기나 해봐.
"
"맨날 한 얘기를 뭘하러 또해?"
402호가 시큰둥하게 받았다.
"담배 하나 줄께. "
"그까짓 담배는... "
"자..."
그러나 402호도 싫은 기색은 아니었다.
교도소 안에서 담배는 한 가치에 몇
만원씩에 암거래되기 때문이었다. 407호와
402호의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리더니
이내 감방 안에 담배연기 냄새가 구수하게
퍼졌다.
"이발소에서는 어떻게 그 짓을 해?"
"이발하고 면도하고 그래. "
"그 다음엔?"
"면도를 해. "
"그거야 누구나 다 아는 얘기잖아?"
"면도를 한 뒤엔 안마를 해. "
"안마?"
"안마를 할 때는 맨 처음에 손부터 하지.
손가락 하나하나를 부드럽게 마사지하는데
그때 남자의 손이 슬그머니 면도사의
가슴에 닿게 하거나 허벅지를 스치게 하여
남자를 자극하지. 안마를 하면서 남자를
흥분시키는 거야. "
여자들이 402호의 얘기에 귀를 기울이기
시작했다. 미경은 자신도 모르게 402호를
향해 귀를 모았다. 벌써 몇 번씩이나 들은
얘기인데도 402호의 얘기가 싫증이 나지

"그래서?"
"다음엔 남자의 다리를 안마하는 거야.
다리를 안마하면서 슬쩍슬쩍 남자의 그
곳을 애무해. "
"죽여주네!"
누군가 402호의 얘기에 비음을 섞어
말하자 여자들이 일제히 까르르 하는
웃음을 터뜨렸다.
"제기랄,여기서 나가면 여자 면도사나
되어야지. 그럼 남자 거기는 싫컷 만질 거
아니야?"
"만지기만 하나?"
"시끄러워!"
여자들이 왁자하게 떠들자 407호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 여자들이 입을 삐쭉거리며
입을 다물었다.
"계속해 봐. 옷을 입은 채로 만지는
거야?"
"응. 그럼 대부분의 남자들은 가만히
있어. 그때 면도사는 자신의 젖가슴으로
남자의 가슴을 지그시 누르면서 가만히
속삭이는 거야. "
"뭐라구 속삭이는데?"
407호가402호에게 바짝 다가갔다.
"마사지 해드릴까요?"
"그럼 뭐라고 그래?"
"다들 고개를 끄덕거리지. 그때쯤이면
벌써 남자의 거기가 바짝 서 있으니까. "
"그럼 바로 시작하는 거야?"
"아니야. 다음엔 어떻게 해드릴까요?하고
물어. 그러면 남자들은 어떻게 해야
돼?하고 묻지... 그럼 면도사는 세 가지
방법이 있는데 마음대로 고르세요 그래. "
"세 가지?"
"첫째는 손으로 하는 핸드플레이,둘째는
입으로 하는 마우스플레이,셋째는 거기로
하는 스페셜플레이가 있다고 가르쳐 주는
거야. "
미경은 쓴 웃음이 나왔다. 이발소에서
하는 윤락행위도 그렇게 여러 가지 방법이
있었던가 하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그럼 남자들이 뭐라고 그래?"
"대개 입으로 하거나 거기로 해달라고
하지. "
"입으로 하는 것은 어떻게 하는 거야?"
"실제로 입으로 하지는 않아. 손님들의
눈을 수건으로 가렸기 때문에 입으로
해주는 척하지만 실제로는 기구로 하는
거야. "
"그럼 기구로 즐긴다는 말이야?"
"응. 그런데 쓰는 기구가 따로 있어.
그것이 여자의 거기처럼 보드랍기 때문에
남자들은 전혀 몰라. 그저 좋다고 낑낑대고
용을 쓰다가 물총을 딱 하고 쏘는 거야. "
여자들이 또 다시 까르르 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미경은 철창 밖으로 시선을
던졌다. 어둠 속에서 주룩주룩 내리던
빗발이 더욱 굵어지고 있었다. 빗소리
때문에 407호와 402호의 얘기가 잘 들리지
않았으나 미경은 오히려 잘된 일이라고
생각했다. 감옥에서도 퇴폐적인
것,쎈스,음란,욕망... 그런 것들이 화제가
되고 있었다. 어쩌면 그것이 인간의 가장
원시적인 모습인지 알 수 없었으나 미경은
강한 거부감을 느끼고 있었다. 퇴폐적인
것은 단순하게 퇴폐적인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폭력을 수반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폭력은 반드시 탐욕을 바탕으로
하고 있었다.
빗발은 이제 쏴아 소리까지 내면서
장대질을 하고 있었다. 봄비로서는 드물게
내리는 폭우였다. 감옥 안이 벌써 축축한
습기로 가득차 있었다.
(모든 것이 헛된 일이야. )
미경은 철창밖에 하얗게 쏟아지는 빗발을
바라보며 또 다시 한숨을 내쉬었다. 헛되고
헛되도다,세상만사 헛되도다,라는 말은
성경의 전도서에 있는 말이었다. 미경은 그
말이 지금처럼 절실하게 가슴에 와 닿은
적이 없었다.
(허지만 이렇게 당할 수만은 없어... )
미경은 어금니를 꽉 깨물었다. 평범한
가정주부였던 자신이 범죄자가 되어
교도소에 들어온 일을 생각할 때마다 눈을
부릅뜨고 어금니를 깨무는 미경이었다.
(이건 단순한 폭력이 아니라 거대한
조직의 음모야. )
미경은 그 음모만은 무슨 일이 있던지
밝혀야 하겠다고 다짐을 하는 것이었다.
미경이 음모에 말려든 것은 2년 전의
일이었다. 미경은 그때까지도 자신이
거대한 조직의 음모에 휘말리고 있다는
것은 상상조차 하지 못했었다.

그날도 비가 내리고 있었다.
초여름이었다. 아침부터 날씨가
찌푸퉁하더니 오후가 되자 빗발이
후드득대고 있었다. 미경은 늦은 점심을
먹고 베란다에 나가서 비가 오는 것을
구경했다. 오랜 가뭄 끝에 모처럼 내리는
비였다. 아파트의 광장을 하얗게 물들이며
쏟아지는 빗발을 내다보자 가슴에 가득차
있던 응어리가 시원하게 풀어지는 것
같았다.
아파트 광장은 비 때문인지 인적이
완전히 끊어져 있었다. 평소에는 단지를
왕래하는 사람들이 드문드문 있었으나
지금은 고적할 정도였다.
(시원스럽게도 쏟아지네. )
미경은 정신없이 빗줄기를 내다보았다.
하얀 빗줄기는 베란다의 유리창까지
두들겨대고 있어서 빗물이 유리창으로
줄지어 흘러내리고,유리창을 때리는
빗방울들이 산산이 부서져 허공으로
비산()하고 있었다. 미경은 허공으로
흩어져 날리는 비의 입자들을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그때 전화벨이 요란하게 울렸다.
"여보세요. "
미경은 거실로 들어가 전화를 받았다.
"안미경씨 댁이죠?"
"네. "
"경찰입니다. 김석호()씨 교통사고
때문에 조사를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모시러 갈 테니까 댁에서 기다리십시오. "
전화의 목소리는 위압적이고 거칠었다.
"저를요?"
미경은 어리둥절했다.
"아닙니다. 용의자를 한 사람 잡았는데
안미경씨가 아는 사람인지 확인을 해주셔야
합니다. "
"네에. "
미경은 낮게 대답을 했다. 비로소 경찰이
무엇 때문에 전화를 했는지 알게 되었던
것이다.
"10분 정도 지나서 모시러 가겠습니다. "
전화는 미경의 대답도 기다리지 않고
일방적으로 찰칵하고 끊겼다. 미경은
상대방의 전화가 불쾌했으나 경찰이라고
하므로 어쩔 수 없다고 생각했다.
미경은 다시 베란다로 나갔다. 경찰이
말하는 용의자가 무엇을 뜻하는지 언뜻
이해가 되지 않았다. 용의자는 일반적으로
범죄 혐의자를 뜻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경찰이 말하는 용의자에 대해서 미경은
전혀 어림을 할 수 없었다.
미경은 쏟아지는 빗줄기를 넋을 잃고
내다보았다. 여러 가지 생각이 머릿속을
스쳐가고 스쳐왔으나 빗소리가 금방
지워버리곤 했다.
그때 아파트의 광장으로 검은 색 승용차
한 대가 들어오는 것이 보였다. 미경은
승용차를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승용차는
미경의 아파트 바로 앞에까지 와서 멎더니
젊은 남자 둘이 내렸다. 그들은 우산도
쓰지 않고 미경의 아파트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마치 미경의 아파트를 감시하는
기색이었다.
(뭘하는 사람들일까?)
미경은 우두커니 생각에 잠겼다.
사내들이 아파트 안으로 들어갔다.
아파트의 넓은 광장에는 이내 승용차만이
남아서 비를 맞게 되었다.
미경은 베란다의 창을 열었다. 그러자
쏴아 하는 빗소리와 함께 푸슷한
빗방울들이 미경의 얼굴을 때렸다. 미경은
재빨리 창문을 닫았다. 그리고 그때서야
승용차에서 내린 사람들이 형사들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는 재빨리 거실을 거쳐 침실로
들어갔다. 그녀는 아직도 속옷 차림이었다.
미경은 요즈음 거의 외출을 하지 않았고
하루종일 집에서 빈둥거릴 때도 있었다.
남편이 죽은 후 그녀의 일상은 암흑의
수렁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거실엔 '사이먼과 가펑클'의 노래
복서(The boxer)가 감미롭게 흐르고
있었다.

Im jost a boy(나는 아주 불행한
소년입니다. )
Though my storys seldom told(나의
얘기는 잘 알려져 있지 않지만... )

미경은 타올로 얼굴의 빗물을 훔친 뒤
서둘러 옷을 갈아입기 시작했다. 복서는
70년대에 유행했던 노래인데 미국의 가난한
소년이 사회의 밑바닥을 전전하다가
권투선수가 된다는 내용으로 노랫말이
애절하여 전세계적으로 알려져 있었다.
속옷은 아침에 갈아입은 것이었으나
그래도 다시 바꿔 입었다. 브래지어와
팬티가 모두 보라색의 세트였다.
남편에게서 선물 받았던 것으로 착용감이
뛰어난 속옷이었다. 겉옷은 검은 색
반바지에 검은 색 폴로 셔츠를 입었다.
그리고 반바지 속에는 살빛의 밴드
스타킹을 신었다. 비가 오고 있으므로 그
위에 레인코트를 걸치면 되는 것이다.
그때 현관에서 차임벨이 울렸다. 미경은
장농속에서 레인코트를 찾아 걸치고 거실의
전축을 끈 뒤 현관으로 나갔다.
"누구세요?"
"경찰입니다. "
목소리가 무뚝뚝했다. 미경은 공연히
기분이 좋지 않았으나걸쇠를 벗기고
현관문을 열었다. 현관밖에는 승용차에서
내린 두 사내가 서 있었다.
"준비되셨습니까?"
머리가 짧은 사내가 물었다.
경찰이라기보다는 어딘지 모르게 범죄자의
인상을 풍기는 사내였다.
"네. "
미경은 짧게 끊어서 대답하고 사내들을
따라 아파트를 나섰다. 그리고 그것이
미경을 지옥으로 떨어뜨린 첫걸음이었다.

여자들이 낮게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밖에는 여전히 빗발이 쏴아 소리를 내며
쏟아지고 있었다. 407호와 402호는 얘기가
모두 끝났는지 조용했다.
미경은 손등으로 눈물을 훔치며 억지로
잠을 청했다. 이 곳에서는 잠을 자는 것이
유일한 낙이었다. 먹고 자고 일하고 잠을
자야만 각자에게 남겨진 형기()를
손꼽아 보지 않아도 되고 교도소 생활의
시름도 잊게 되는 것이다.

2

미경은 시멘트벽 밑에 몸을 바짝
웅크렸다. 그만해도 양지쪽이기 때문일까.
벽 밑에 샛노란 민들레가 피어 있었다.
미경은 그 꽃을 보자 자신도 모르게 가슴이
싸 하게 저려왔다. 간밤의 비 때문인지
민들레는 노란 빛이 더욱 선연했다. 미경은
그 꽃을 오랫동안 들여다보다가 벽에 등을
기댔다.
여자들은 가벼운 산책을 하거나 2. 3명씩
모여서 얘기를 하고 있었다. 아침
산책시간이었다. 미경은 푸른 죄수복을
걸친 채 먼 산을 시린 눈빛으로 응시했다.
아직 산에는 잔설이 남아 있는 골짜기도
있었고 수목들은 앙상하게 헐벗은 채
아지랑이가 아른대는 하늘을 이고 있었다.
(이젠 봄이 오는 거야.... )
미경은 속으로 생각했다. 산에 있는
나무며 교도소의 담장 앞에 있는 나무들이
점차 연두빛을 띄어 가고 있었다. 그
연두빛이 초록빛으로 바뀌어야 미경은 세상
밖으로 나갈 수 있었다.
(개새끼들.... )
미경은 출소할 날을 머릿속에 꼽아
보다가 이를 갈았다. 또 다시 짧은 머리의
뼁뱀눈의 사내가 전광석화처럼 뇌리를
스쳤던 것이다. 눈에서는 파랗게 불꽃이
일어나고 주먹을 쥔 손이 부르르 떨렸다.
그들은 미경을 천국에서 지옥으로 떨어뜨린
사내들이었다.

사내들이 미경을 승용차에 밀어 넣었다.
미경은 사내의 손이 미경을 승용차에 밀어
넣기 위해 엉덩이를 밀자 재빨리 그 손을
뿌리쳤다. 그러자 그 사내가 미경을 힐끗
쏘아보았다. 눈이 옆으로 가늘게 찢어진
사내였다. 그래서 그런지 눈빛이 뱀처럼
차가웠다.
"가자구. "
뱀눈이 운전석에 앉아 있는 짧은
머리에게 말했다.
"알았어. "
짧은 머리가 미경을 기분 나쁜 눈빛으로
쏘아보고 시동을 걸었다. 미경은 시트에
깊숙이 등을 기댔다. 빗줄기가 승용차의
지붕을 우박을 쏟아 놓듯이 요란하게
두들겨대고 있었다. 미경은 승용차의
앞유리창으로 아파트 광장을 물끄러미
응시했다. 승용차는 옆과 뒤가 모두 짙은
감청색으로 선팅이 되어 있었다.
미경은 기분이 이상했다. 비 때문인지
아파트 광장은 인적이 끊어져 오가는
사람들이 전혀 없었다.
그때 승용차가 부르릉 소리를 내고
아파트 광장을 떠났다.
미경은 눈을 감았다. 옆에 앉은 뱀눈의
사내가 자꾸 자신을 힐끔거리는 것 같아 그
시선을 떼어버리기가 난처했다. 차라리
눈을 감고 있으면 뱀눈의 사내를 의식하지
틉될 것 같아서였다.
"어디로 가지?"
김포읍으로 들어서자 짧은 머리가
뱀눈에게 물었다.
"근처에 야산 있잖아?"
뱀눈이 반문했다. 미경은 눈을 감고 두
사내의 대화에 귀를 기울였다. 두 사내의
대화가 점점 수상스러워지고 있었다.
"천둥산 어때?"
"그래. 거기 아무 데나 승용차를 들이대.
"
"사람들이 왔다갔다 하지 않을까?"
"비가 이렇게 쏟아지는데 무슨
사람들이야?"
승용차가 서울쪽으로 핸들을 꺽었다.
미경은 얼굴을 찡그렸다. 두 사내의 대화가
종잡을 수가 없었다. 경찰이 이런 말을 할
필요가 있을까. 경찰이 무엇 때문에
사람들이 오가는 것을 걱정을 하는 것일까.
어쩐지 이 사람들은 경찰 같지 않아. 경찰
냄새라고는 전혀 풍기지 않잖아...
미경이 이런저런 생각을 하는 동안
승용차가 다시 왼쪽으로 핸들을 꺽었다.
미경이 눈을 뜨자 천둥산 밑의 농로로
승용차가 뒤뚱거리며 들어가고 있었다.
"어디로 가는 거예요?"
미경은 그제서야 사내들에게 물었다.
사내들은 아무 대꾸도 하지 않았다.
"왜 이런 곳으로 가요?"
미경이 재촉하듯이 다시 물었다.
"가보면 알잖아?"
뱀눈이 딱딱하게 잘라 말했다. 미경은
입을 다물었다. 뱀눈의 한 마디에 가슴이
철렁했다.
(경찰이 아니야!)
미경은 갑자기 눈앞이 캄캄해져 왔다.
그때 승용차가 멎었다. 그러나 시동은 끄지
않아 윈도우 브러시가 계속해서 전면
유리창으로 흘러내리는 빗물을 힘겹게
밀어내고 있었다.
"잘들어!"
갑자기 뱀눈이 미경의 머리카락을
움켜쥐었다. 뱀눈의 손에는 어느덧
날카로운 생선회칼이 들려 있었다.
"왜 이래요?"
미경은 온 몸이 부르르 떨렸다.
"우린 경찰이 아니야!"
"...."
"우리는 네 년을 죽여 없애라는 명령을
받았어. 그러나 죽이고 싶지는 않아. 네
년을 죽이고 살인자가 되고 싶지 않단
말이야!그러니 끽 소리 하지 말고 우리가
시키는대로 해!알겠어?"
미경은 엉겁결에 고개를 끄덕거렸다.
가슴이 마구 뛰고 턱이 덜덜 떨렸다.
"대답해!. "
뱀눈이 생선회칼을 미경의 목에 바짝
들이댔다. 미경은 섬칫하여 몸을 뒤로
젖혔다. 금방이라도 생선회칼이 미경의
목을 찔러 버릴 것 같아 겁이 덜컥 났다.
"왜,왜.... "
"이유 같은 것은 묻지 말아. 세상에는
영문도 모르고 죽어서 땅속에 묻히거나
갑자기 사라져서 돌아오지 않는 사람도
무수히 많아. 소위 실종자라는
사람들이지......"
뱀눈이 얼음처럼 차가운 목소리로
내뱉았다.
"허지만 왜 저를..... 제가 무슨 짓을
했기에 이래요?"
미경은 다급하게 물었다. 사내들이 왜
자신을 납치했는지 전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사내들이 무엇인가 잘못 알고
자신을 납치한 것이리라. 착오에 의해서가
아니면 나 같이 평범한 여자를 이들이
납치할 이유가 없을 것이다. 미경은 언뜻
그런 생각을 했다.
"이유 같은 것은 묻지 말라고
그랬잖아?너 같은 계집애 하나 죽여서
산에다 암매장하는 것은 간단한 일이야.
알았어?"
"네. "
미경은 간신히 고개를 끄덕거리며
대답했다. 그러자 뱀눈이 미경의 가슴을
덥썩 잡았다. 미경은 얼굴을 찡그렸다.
뱀눈의 넓은 손바닥에 잡힌 젖가슴이
자지러대는 비명을 질러대고 있었다.
"잠자코 있어!"
뱀눈이 미경을 윽박질렀다.
"네."
미경은 고개를 끄덕거렸다.
"묶고 해!"
운전석에 앉아 있는 사내가 뱀눈에게
수갑을 던졌다. 미경은 하얗게 반짝이는
수갑을 보자 또 다시 가슴이 철렁했다.
이들은 정말 경찰인가. 아무래도 경찰
같지는 않아....
아니야. 경찰이 분명해. 경찰이 아니면
어떻게 경찰 장비인 수갑을 가지고 다닐 수
있어....
허지만 경찰이 이런 짓을 할 리 없어....
미경이 두서없이 그런 생각을 하는데
Q뱀눈이 생선회칼로 위협을 해왔다.
"뒤로 돌아!"
미경은 뱀눈이 시키는대로 뒤로 돌아
앉았다. 그러자 뱀눈이 미경의 두 손을
뒤로 잡아 당겨 손목에 철컥 수갑을
채웠다. 그리고는 미경을 돌려 앉힌 뒤에
입에 테이프를 붙였다. 미경은 뱀눈이 입에
테이프를 붙이지 못하게 세차게 도리질을
했으나 소용이 없었다.
(나쁜 놈들!)
미경은 사내들이 무슨 짓을 저지르려는지
알아차리고 비참한 기분이 되었다.
"빨리 끝낼 테니까 참으라구.... "
뱀눈이 야비하게 웃으며 미경의 바지
벨트를 푸르기 시작했다. 미경은 발버둥을
쳐서라도 저항을 할까 하다가 그만 두었다.
어차피 사내들에게 수갑이 채워져 있는
신세였다. 이런 상태라면 저항을 하는 것도
불가능했고 도망을 칠 수도 없었다.
깨끗하게 놈들에게 당하는 것이 고통이라도
덜 당하리라고 생각했다. 게다가 비가 오고
있기 때문인지 주위엔 인적도 없었다.
뱀눈에 의해 미경의 바지가 벗겨져
나갔다. 뱀눈은 미경이 저항을 하지 않자
빠르게 바지를 벗기고 속옷을 무릎 밑으로
끌어내리기 시작했다.
미경은 그 순간 발버둥을 치기 시작했다.
갑자기 낯선 사내들에게 이렇게 허무하게
당할 수 없다는 생각이 뇌리를 강타하고
있었다. 미경은 사력을 다해 몸을 비틀며
다리를 바둥거렸다.
"용쓰지 마.... "
뱀눈이 낄낄거리고 웃었다. 미경은 그
소리에 소름이 오싹 끼쳤다.
"이런다고 말뚝 못박겠어. "
뱀눈의 더운 입김이 미경의 얼굴 위로
퍼부어졌다.
미경은 눈을 질끈 감았다. 수치스러운
일이기는 하지만 불가항력이었다.
(내가 네 놈들에게 죽지만 않으면 반드시
복수를 할 거야!)
그 대신 미경은 머릿속으로 무서운
결심을 했다. 미경의 두 눈에서 뜨거운
눈물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뱀눈이 미경의 몸 위로 올라왔다. 미경은
얼굴을 잔뜩 찡그렸다. 뱀눈이 미경의
무릎을 억지로 벌리고 있었다.
미경은 남편을 생각했다. 이렇게 위급한
일을 당하고 있을 때 남편이 나타나서
도와주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했으나 죽은
남편이 살아서 돌아올 까닭이 없었다.
남편은 그녀와 결혼을 한지 보름만에
교통사고로 죽었던 것이다.
(미안해요..... )
미경은 속으로 남편을 향해 중얼거렸다.
남편의 슬퍼하는 얼굴이 망막을 스치고
있었다. 비록 남편이 죽었다고 해도
남편에게 죄를 짓는 기분이었다.
(헉!)
그때 미경은 갑자기 목이 꽉 막혀 왔다.
뱀눈이 어느 사이에 그녀의 몸속 깊숙이
들어와 있었다. 미경은 전신을 부르르
떨었다. 사내가 몸을 움직일 때마다 하체가
찢어지는 것처럼 고통스러웠다.
미경이 눈을 뜬 것은 꽤 오랜 시간이
지났을 때였다. 미경은 짧은 머리까지 일을
치르고 그녀의 몸에서 일어나자 비로소
눈을 떴다. 사내들에게 짓밟힌 아랫도리가
얼얼했다. 그러나 아랫도리의 통증보다
미경의 가슴을 더욱 아프게 한 것은 일을
치르고 나자 사내들이 미경의 나신을
카메라의 후레쉬까지 터뜨리며 샅샅이
찍었기 때문이었다. 미경의 나체 사진으로
협박을 하려는 것이 분명했다.
(짐승만도 못한 놈들!)
미경은 그때 피눈물을 흘리며 사내들을
저주했다. 후레쉬가 터질 때마다 자신의
치부가 고스란히 노출된다는 생각을 하자
치가 떨렸다.

미경은 먼 산과 교도소의 높은 담장에서
우울한 시선을 거두었다. 출소할 날이 멀지
않았다는 것을 물이 오르는 초목을
통해서도 여실히 느낄 수 있었다. 초목에
물이 오르면 금세 나뭇잎들이 싹이 틀
신록이 무성한 6월이라야 금방인
것이다. 미경은 교도소에 들어온 날부터
오로지 출소할 날만을 손꼽아 기다리고
있었다.
(복수할 거야. 나를 짓밟은 것처럼 그
놈들도 철저하게 짓밟을 거야!)
미경은 새삼스럽게 주먹을 움켜쥐고 몸을
떨었다. 그날 뱀눈과 짧은 머리에게 당한
일을 생각하자 분노로 이가 갈렸다.

3

하늘은 부옇게 흐려 있었다. 오후의
작업을 끝내자 이른 봄의 저녁해가 서쪽
담장으로 설핏이 기울고 있었다.
세면장에서 작업으로 더러워진 손과 얼굴을
씻고 식당으로 향하다가 문득 미경은
복도의 창으로 설핏이 기울고 있는
저녁해를 보았다. 어둑하게 저물고 있는
봄날의 저녁 풍경이 미경의 가슴을 또 다시
아리게 하고 있었다.
미경은 두 사내에게 윤간을 당한 자신의
처참한 모습을 결코 잊을 수 없었다.
그것은 꿈에서도 겪지 못했던 일이었다.
미경은 그 일을 생각할 때마다 사람에게
당한 것이 아니라 짐승에게 당한 것이라는
생각을 하곤 했다. 무엇보다 두 사내가
그녀의 허벅지에 배설한 미끌미끌한 정액은
생각만 해도 몸서리가 쳐지도록
치욕스러웠다.
그러나 그 뒤에 미경이 겪은 일은 더욱
처참한 것이었다. 미경은 짐승 같은
사내들에 의해 술집으로 팔려 갔는데 그
곳은 지옥이나 다름없을 정도로 비참한
0곳이었다.

두 사내에게 윤간을 당한 미경은
승용차로 어디론가 끌려갔다. 비는
그때까지도 계속 퍼부었고 미경은 손에
수갑이 채이고 입을 테이프로 봉해져
승용차 뒷좌석에 실렸다. 그러나 큰 길이
가까워지자 사내들은 미경에게 레인코트를
뒤집어 씌워 승용차 뒤의 트렁크에
짐짝처럼 구겨 넣었다.
미경은 승용차의 트렁크에서 몇 번이나
정신을 잃었다가 깨어났다. 트렁크 안이
후덥지근하여 숨이 턱턱 막혔다.
미경은 사흘 동안을 트렁크 안에 갇혀
지냈다. 사내들은 무엇 때문인지 알 수
없었으나 미경을 계속 끌고 다니기만 했다.
(이러다가 나는 죽게 될 거야.... )
미경은 비참했다. 트렁크 안에 갇혀서
소리없이 울었으나 사내들은 그녀를 꺼내
주지 않았다. 사내들이 미경을 꺼내는 것은
욕망을 배설할 때뿐이었다. 사내들은
더러운 욕망을 배설하는 도구로 미경을
이용할 속셈인지 걸핏하면 미경을 꺼내
옷을 벗겼다.
미경이 그 곳에 도착한 것은 사내들에게
납치된지 사흘째 되던 날이었다. 그 곳에
닿을 때까지 검문을 두 번 받았으나 경찰은
한번도 승용차 안을 들여다보지 않았다.
오히려 사내들이 신분증을 내보이면
수고하십니다,하고 정중하게 인사를
하기까지 했다.
미경은 사내들의 신분이 의아스러웠다.
사내들은 분명히 경찰이 아니었으나
검문소의 경찰들은 그들에게 깍듯이 인사를
하고 있었다.
미경이 그 곳에 닿은 것은 거의 저녁
시간이었다. 사내들에 의해 미경이
트렁크에서 끌려 나오자 어둠이 서리서리
내리고 있는 뒷골목이었다. 그러나
사내들에게 양쪽 팔이 잡혀 골목으로 끌려
나오자 뜻밖에 번화한 거리였다. 이미
사방은 어둠컴컴해져 있었고 집집마다
네온싸인이 화려하게 켜져 있었다.
(엘로우 하우스야!)
미경은 트렁크에 오랫동안 갇혀 있어
거의 제 정신이 아니었으나 언뜻 그런
생각을 했다. 업소마다 쑈윈도우가
설치되어 있었고 무슨 상품을 진열하듯이
짙은 화장을 한 여자들이 앉아서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눈웃음을 치고 있었다. 언뜻
보면 지극히 화려한 곳이었다.
 그러나 미경은 술집이 아닌 어느
주택으로 끌려 들어갔다. 지하실이었다.
간이 쇠침대가 하나 놓여 있을 뿐 지하실은
썰렁하게 비어 있었다. 미경은 수갑이 채인
채로 그 곳에 갇혔다.
사내들은 미경을 쇠침대에 내던졌다.
미경은 쇠침대에서 비로소 다리를 쭉
뻗었다. 승용차의 트렁크에 갇혀서 지냈기
때문인지 서 있을 수도 없었고 앉아 있을
수도 없었다. 미경은 그 지경을
당했으면서도 잠이 쏟아졌다. 머릿속에서는
어떻게 된 일인지 가늠을 해보려고 했으나
온 몸의 기운이 탈진하여 잠만 계속
쏟아졌다.
미경이 눈을 뜬 것은 이튿날 아침이었다.
지하실 철문이 덜컹 열리고 나이 지긋한
여자가 들어왔다. 몸이 뚱뚱한 여자였다.
뮈몸에서 싸구려 화장품 냄새가 왈칵
풍겼다.
"견딜만 해?"
여자가 퉁명스럽게 물었다.
"네. "
미경은 침대에 일어나 앉았다.
"여기가 어딘지 알아?"
"몰라요. "
"부산 완월동이야. 엘로우 하우스라고
들어봤겠지?"
"네. "
"이제 여기서 일해야 해. "
미경은 여자를 앙칼진 눈빛으로
쏘아보았다. 여자의 말은 미경에게 술을
팔고 몸을 팔라는 뜻이었다.
"왜 내게 그런 일을 시키죠?난 평범한
가정주부예요. 가정이 있는 여자란
말예요!"
"과부라고 그러던데 뭘 그래?남편은
교통사고로 죽고 아이는 없고.... 여기서
일한다고 아무도 뭐라고 그럴 사람이
없잖아?걸리적거릴 것두 없구.... "
"그렇다고 몸을 팔아요?"
"어차피 망가진 몸 아니야?"
여자가 비웃음기를 가득 담은 눈으로
미경을 쏘아보았다. 미경은 어처구니가
없어 여자를 빤히 쳐다보았다. 세상에는
상식으로 통하지 않는 사람이 있다고
그러던데 이 여자가 그런 여자로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나를 보내 주세요. "
"아직 여기 생리를 잘 모르나 본데 한번
들어오면 죽기 전에는 나갈 수 없어!"
"흥!난 어떻게 하던지 나가겠어요!그리고
내가 나가면 당신들을 경찰에
고발하겠어요!"
미경이 단호하게 외쳤다.
"이년이 !"
"함부로 욕하지 말아요!"
"뭐야?"
"난 창녀가 아니예요!당신들처럼 사람을
팔고 사는 더러운 짐승이 아니란 말예요!"
"이게 아직 뜨거운 맛을 못봤군!"
여자가 갑자기 미경의 뺨을 세차게
후려쳤다. 미경은 여자를 독기 서린 눈으로
쏘아보았다. 수갑이 채워져 있어서
여자에게 대항할 수 없는 것이 분통했다.
"아직 뜨거운 맛을 덜본 모양인데 어디
한번 당해봐!"
여자가 찬바람을 일으키며 밖으로
나갔다. 미경은 침대에 벌렁 누웠다.
며칠째 아무 것도 입에 대지 않아 극심한
허기가 느껴졌다. 그러나 먹을 것을 달라고
요구할 수가 없었다.
미경은 침대에 누운 채 무겁게 한숨을
내쉬었다. 지하실인데도 밖에서 빗소리가
들리고 있었다. 밖에는 아직도 비가 내리고
있는 모양이었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지하실문이
다시 덜컹 열렸다. 미경은 지하실 문을
쳐다보았다. 여자가 낯선 사내들을 데리고
들어오고 있었다. 미경은 겁에 질려
사내들을 쏘아보았다. 사내들의 손에는
각목이 들려 있었다.
"손좀 봐!"
여자가 짧게 토막을 치듯이 말했다.
"알았수다. "
사내 하나가 껌을 질겅질겅 씹으며
미경에게 다가왔다. 왼쪽 얼굴에 길다란
흉터가 있는 사내였다. 미경은 침대에 앉은
채 재빨리 뒷걸음질을 쳤다.
"이 몸은 이 바닥에서 도치라고 불리는
어른이야. 말을 듣지 않는 계집들에게 손을
봐주는 걸 업으로 삼고 있어. "
도치라는 사내가 야비하게 웃으며 각목을
허공에 휘둘렀다. 각목이 허공을 가르는
소리가 휘익 하고 들렸다. 미경은 소름이
오싹 끼쳐 왔다.
"내 몸에 손을 대지 마!"
미경은 날카롭게 소리를 질렀다.
"흥!사흘이나 굶겼다더니 쌩쌩하네!"
도치가 미경을 향해 껌을 퉤 뱉았다.
미경은 얼굴을 찡그렸다. 그러자 도치가
미경의 멱살을 잡아 시멘트 바닥으로
팽개쳤다. 미경은 차가운 시멘트 바닥으로
꼬꾸라졌다. 그때 도치가 미경의
어깨죽지를 각목으로 힘껏 내리쳤다.
미경은 어깨가 떨어져 나가는 듯한 통증을
느끼며 악,하는 비명을 질러댔다.
"평생 잊지 못할 기억을 남겨 주지!"
도치가 다시 각목을 휘두르기 시작했다.
미경은 처절한 비명을 지르며 시멘트
바닥을 때굴때굴 굴렀다. 도치라는 사내는
그런데도 미경을 사정없이 각목으로
두들겼다.
"자,잘못했어요!"
미경은 그때서야 도치를 향해 울면서
빌었다.
"다시는 안 그럴께요. 시키는대로
다하겠어요!"
그러나 도치는 미경이 애원을 하는데도
5분 남짓 미경을 사정없이 각목으로
멈추었다. 미경은 지하실
바닥을 엉금엉금 기면서 울었다.
"수갑 풀러!"
도치가 숨을 헐떡거리며 말했다. 낯선
사내가 재빨리 미경의 손목에 채워져 있는
수갑을 풀렀다.
"침대로 올라가!"
도치가 구둣발로 미경의 가슴팍을
내질렀다. 미경은 가슴을 싸안고
나뒹굴었다.
"빨리 올라가!나는 리바이벌이 싫어!"
도치가 이번엔 미경의 아랫배를 구둣발로
밟았다. 미경은 아랫배가 터지는 것 같은
통증을 느끼며 재빨리 침대로 기어
올라갔다. 미경은 이미 제 정신이
아니었다.
"벗어!"
 도치가 짧게 소리를 질렀다. 미경은
도치의 명령이 떨어지자 마자 허겁지겁
바지를 벗었다. 그리고 도치가 시키지도
않았는데도 슬금슬금 도치의 눈치를 살피며
속옷까지 벗었다.

미경은 손등으로 눈가를 씻었다. 그때의
일을 생각할 때마다 눈물을 주체할 수가
없었다.
(여기서 나가면 결코 울지 않을 거야!)
미경은 속으로 굳게 다짐을 했다. 늦은
시간이었다. 여자 수인들은 이제 모두 잠이
들어 있었다. 그러나 미경은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이따금 복도를 오가는 여자
교도관들의 구둣발소리도 이제는 들리지
않았다.
미경은 옆으로 누워 창으로 시선을
보냈다. 감방의 창은 유리로 되어 있었으나
밖에는 쇠파이프가 박혀 있었다.
철창이었다. 그러나 그 철창으로 별들이
빼곡한 하늘이 내다보였다. 어두운 하늘에
총총하게 박혀 있는 별들은 흡사 와르르
쏟아지기라도 할 듯이 가까이 내려와
있었다.
미경은 그 날 도치라는 사내에게 흠씬
두들겨 맞았다. 그것은 그날뿐이 아니었다.
미경은 부산 완월동으로 끌려간 뒤 사흘
동안을 매를 맞아 정신이상 증세까지
일으켰었다. 도치라는 사내와 그 곳의
여자는 미경이 헛소리를 하자 그때서야
매질을 멈추고 닷새를 더 가두어 두었다.
미경이 그 지하실에서 나온 것은
김포에서 납치된지 열 하루가 지났을
때였다. 나중에 알게 된 일이었지만 그
집은 부산 완월동에서도 악명 높은 접대부
알선업소였다. 그러나 말이 알선업소이지
인신매매단으로부터 여자를 사들여 길을
들인 뒤 업소에 되팔아 넘기는 집이었다.
여자는 그 일대에서 '구미호'라는 이름으로
불리고 있었다.
미경은 보름만에 그 곳의 '비너스'라는
집에 팔려가 쑈윈도우에 진열되었다. 이미
그녀의 몸은 무수한 사내들에 의해
망가질대로 망가져 있어 몸을 파는 것을
거부할 엄두가 나지 않았다. 그녀는
생각하는 기능이 폐쇄되어 자신이
누구인지,어디에서 왔는지조차 기억이
아슴했다.
그러나 미경은 언제나 탈출만을
궁리했다. 그리고 마침내 그 방법을 생각해
냈다.
미경이 그 곳을 빠져 나온 것은 3개월쯤
지났을 때였다. 미경은 손님과 동침을
하다가 손님의 지갑을 훔쳐서 감추었다.
그러자 그 손님이 미경을 파출소에
신고했다. 미경은 파출소 순경들에 의해
절도죄로 구속되었다. 판사는 미경이
초범이지만 법정 태도가 나쁘다고 하여
징역 3년을 선고했다. 미경이 재판과정에서
그까짓 돈좀 훔친 것이 무슨 죄가 되느냐고
판사들에게 대들며 패악질을 했기
때문이었다. 물론 그 모든 것은 미경이
치밀하게 세운 계획에 의한 것이었다.
국선 변호인은 아연하여 어찌할 바를
몰랐고 비너스집 주인을 비롯해 그 곳에
빌붙어 살고 있는 기생충 같은 폭력배들도
저 년이 아예 미쳤군,하는 눈치였다.
(내가 부산 완월동까지 끌려온 것은
인신매매단의 짓이 아니야..... )
미경은 자신을 지옥으로 떨어뜨린 것은
폭력배들의 뒤에 어떤 조직이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 조직의
감시에서 벗어 나는 일은 실성한 시늉을
하는 것뿐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미경이 잠이 든 것은 거의 새벽이
가까웠을 때였다. 수인들이 부스럭대는
소리에 눈을 뜨자 벌써 아침이었다. 미경은
모포와 담요를 개어 놓고 식사를 할 준비를
했다. 청주 여자교도소는 시설이 상당히
뛰어난 편이었다. 게다가 초범과
장기수들을 분류하여 수용한 까닭에 미경이
있는 감방은 자유만 유보되어 있을 뿐 크게
불편한 것은 없었다. 하루에 세번씩 하는
식사도 교도관들의 인도를 받아 식당에서
했고 식사가 끝나면 아침 산책시간까지

그리고는 각자의 작업장으로
인도되어 작업을 했다.
3. 1절 특사 소식이 미경에게 전해진
것은 그날 작업을 모두 끝냈을 때였다.
보안과장이 명단을 들고 나타나 가석방자
명단을 발표했는데 미경도 끼어 있었다.
3년의 형기가 지난 8월15일에 광복절
특사로 2년으로 감형되었고,이번에
형집행정지에 의한 가석방자에 포함되었던
것이다.
(하늘이 나를 돕는 거야!)
가석방자 명단이 발표되자 미경은 두
눈으로 뜨거운 눈물이 흘러내렸다. 3.
1절이라고 해야 이제 겨우 사흘이 남은
것이다.

제2장 세상 밖으로

1

덜컹하는 소리와 함께 교도소의 쪽문이
활짝 열렸다. 그러자 철문 안에서 대기하고
있던 여자들이 우르르 쏟아져 나왔다.
모두들 허름한 보따리나 낡은 가방을 들고
있었다. 여자들은 대부분 가족들의 마중을
받았으나 미경처럼 그렇지 못한 여자들도
있었다.
"어 춥다!"
"뭔 놈의 날씨가 요로큼 춥다냐?"
"고생 많았쟈?"
"고생은 무슨 고생이라요?새끼들은 잘
있지라우?"
 "그럼. 새끼들 걱정은 말구 두부나
먹어라. "
교도소 앞의 풍경은 드라마나 영화와
흡사했다. 다른 것이 있다면 드라마나
영화보다 훨씬 더 비인간적이고
을씨년스럽다는 것뿐이었다.
미경은 교도소의 쪽문을 나서자 가슴이
뭉클해 왔다. 불과 1년6개월밖에 있지
않았는데도 10년을 살다가 나온 것 같은
기분이었다. 그녀는 먼저 주위의 풍경을
살핀 뒤 얼굴을 찡그렸다. 교도소 앞의
넓은 길을 찬바람이 흙먼지를 뽀얗게
일으키며 휘몰아쳐 오고 있었다. 2월
하순이지만 날씨가 다시 살을 에일 듯이
추워져 있었다.
미경은 바람이 지나갈 때까지 걸음을
멈추고 기다렸다. 바쁜 것도 없지만
기다리고 있는 사람도 없었다. 그러한
까닭으로 걸음이 활발하지 않았다.
"403호!"
그때 날카로운 목소리가 미경의 귓전을
때렸다. 미경은 흠칫하여 몸을 돌렸다.
그러자 사내처럼 어깨가 떡벌어진 여자가
젊은 여자들에게 둘러싸여 두부를
게걸스럽게 입에 쑤셔 넣으며 그녀를
손짓해 부르고 있었다.
미경은 파리한 입언저리에 희미한 미소를
떠올렸다. 동료 죄수인 411호였다. 미아리
어디에선가 술집을 경영한다는 여자였다.
고향이 마산이라 미아리나 감방에서는
마산댁이라고 부르고 있었다.
"이리와 보래이!"
411호 마산댁이 악을 써댔다. 말투에
항상 경상도 억양이 섞여 있어서 사람을
부르는 것도 시비를 거는 것처럼 요란했다.
미경은 고개를 흔들고 느릿느릿 걷기
시작했다. 시국사범이라도 풀려 나왔는지
한 떼의 젊은 학생들이 교도소 앞에서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미경은 걸음을
멈추고 우두커니 학생들을 쳐다보았다.
학생들은 앳된 여학생을 둘러싸고 경건한
표정으로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죽음이 두려우랴 감옥이 두려우랴
앞서간 학우도 깃발 들고 싸웠노라

미경은 고개를 흔들고 다시 걷기
시작했다. 아직도 사회변혁 운동을 하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는 생각을 했으나
부질없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저 것이 꼭 내 말을 안 들어!"
등 뒤에서 마산댁이 시빗조로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그러나 미경은 개의치 않고
계속해서 걸음을 떼어놓았다.
"야!"
마산댁이 등 뒤까지 달려와서 소리를
버럭 질렀다. 미경은 무표정한 얼굴로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마산댁이 느닷없이
두부를 미경의 입 속에 쑤셔 넣었다.
미경은 고개를 흔들며 두부를 뱉어냈다.
마산댁이 어린 아이처럼 깔깔대고 웃다가
그녀의 등짝을 세차게 후려쳤다.
"왜 이래?"
미경은 쌀쌀한 눈빛으로 마산댁을
흘겨보았다.
"어디로 갈 거야?"
"몰라. "
"나 하고 같이 갈래?"
"..... "
"기왕에 내돌린 몸뚱인데 나하고 같이
벌자구. 내가 섭섭치 않게 대우해 줄께.
아무래도 아는 사람이 있으면 그거 팔아
번돈 뺏기지는 않을 테니까.... "
"나는 매음을 하지 않아. "
미경은 단호하게 말했다. 마산댁이
이상한 년이라는 듯이 눈을 깜박거렸다.
"그렇다면 할 수 없지 뭐.... 그럼 우리
집에서 며칠 쉬었다가 가. 나도 출감하자
마자 바로 그 짓 다시 하지는 못해. 어디
온천에라도 가서 때라도 벗기고 새로
시작해야지.... 마땅하게 갈 곳이 없으면
따라와. 내가 이래뵈두 의리 하나는 끝내
주는 년이니까.... "
마산댁이 미경에게 등을 돌린 채 여자들
있는데로 가기 시작했다. 미경은 교도소
앞의 넓은 길로 걸음을 떼어 놓으려다가
멈칫했다. 저 멀리 아스팔트길의 전봇대
옆에 잠바를 입은 두 사내가 담배를 피우는
것이 눈에 들어왔던 것이다. 미경은 그들을
보자 찬물을 뒤집어 쓴 듯한 기분이
들었다.
"마산댁!"
미경은 갑자기 마산댁의 뒤를 따라 가며
소리쳤다.
"가겠어. "
미경은 마산댁의 어깨를 치며 말했다.
잠바를 입은 사내들이 아직도 자신을 쫑고
있다고 생각하자 소름이 오싹 끼쳤다.
"잘 생각했어...."
마산댁이 미경을 돌아보고 빙그레
웃었다. 마산댁을 찾아온 여자들은
봉고차까지 준비해 놓고 있었다. 미경이
마산댁을 따라 봉고차에 올라타자 여자들은
담배를 나누어 피우며 왁자하게
떠들어댔다. 미경은 그들에게 담배를 얻어
피우며 차창 밖을 물끄러미 내다보았다.
그녀의 뇌리로 지난 일들이 주마등처럼
스쳐오고 있었다.

휘이이잉....
벌판을 달려오는 바람이 아수라의
울부짖음처럼 음산했다. 미경은 책을 읽다
말고 창쪽으로 시선을 던지며 얼굴을
찌푸렸다. 태풍주의보가 내린 탓일까.
아까부터 불길한 예감이 자꾸 뒤통수로
엄습해 오고 있었다.
바람은 점점 거칠어지고 있었다. 벌써
벌판을 달려오는 바람에 유리창이 덜컹대고
흔들리고 허공이 바람소리로 가득했다.
미경은 마음이 심란하여 활자가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비까지 내리면 더욱 음산한 밤이
되겠군.... )
미경은 아랫 입술을 깨물며 근심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미경이 난처한 처지를
당하거나 어려운 일에 부딪치면 곧잘 짓는
표정이었다.
미경은 낮게 한숨을 내쉬었다. 날씨가
음산하여 아까부터 자꾸 신경이 쓰였다.
아파트의 거실도 오늘따라 이상하게
삭막하고 황량한 느낌이 들고 있었다.
그녀는 남편을 기다리는 일이 몹시
지루하고 따분했다. 남편이 귀가할 시간에
맞춰 저녁을 짓고 찌개를 맛있게 끓였으나
소용이 없었다. 남편이 아무 연락도 없이
퇴근이 늦어 그녀는 기다리다가 지쳐 혼자
저녁을 먹었던 것이다.
미경의 나이는 이제 불과 25세였다.
신문기자인 남편과 2주일 전에 결혼식을
올렸으므로 아직도 달콤한 신혼이었다.
그녀의 남편은 그녀보다 다섯살이 위로
신문사 문화부에서 문학담당 기자로 일을
하고 있었다. 대학을 졸업하던 해에 곧
바로 신문사에 취직을 하여 기자로
근무하고 있었다. 대학교에 재학중일 때는
운동권으로 수배를 받은 일이 있을 정도로
사회변혁운동에도 큰 관심을 가지고
있었으나 지금은 취업을 하여 직장생활에만
충실하고 있었다.
미경이 제약회사의 홍보부에서 사보
편집을 하다가 남편을 만나 결혼을 했듯이
그녀의 남편도 지극히 평범한 삶을 살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녀는 불만이 전혀
없었다. 남편은 생활에 충실했고 아파트도
한 채 갖고 있었다. 아파트를 살 때 그녀가
직장에서 받은 퇴직금과 적금을 약간
보태기는 했으나 두 사람만의 공간인
아파트가 있다는 것은 꿈처럼 즐거운
일이었다.
휘이이잉....
또 다시 아수라의 울부짖음 같은
바람소리가 귓전을 때리며 유리창이
덜컹대고 흔들렸다. 미경은 책에서 시선을
떼고 창밖을 물끄러미 응시했다. 바람이
더욱 거칠어지고 있었다.
미경은 심호흡을 하듯이 무겁게 한숨을
내쉬고 다시 책으로 시선을 떨어뜨렸다.
여자의 삶이 남편을 기다리며 사는
것이라는 것은 알고 있었으나 남편이
아직도 귀가하지 않고 있어 우울했다. 밤
11시가 가까운 시간이었다. 신문사에서
동료 기자들과 술을 마시고 귀가한다고
해도 이제는 집에 도착해 있어야할
시간이었다. 남편은 아직 새신랑인 것이다.
신혼여행을 다녀온지 일주일밖에 되지
않았으나 아직까지 이렇게 귀가가 늦어진
일은 없었다.
(정류장까지 우산을 가지고 나갈까?)
미경은 책을 건성으로 읽으며 그렇게
생각했다. 책의 활자들이 눈 앞에서
어른거리기만 할뿐 머릿속에 들어오지
않았다.
(소용없는 짓이었어.... )
미경은 자신의 옷차림을 살피며 얼굴을
찡그렸다. 자신의 옷차림이 새삼스럽게
눈에 거슬렸다. 남편이 귀가할 시간이
가까워지자 그녀는 살결이 은은하게
내비치는 속옷과 나이트 가운으로 갈아
입었던 것이다. 남편에게 예쁘게 보이고
싶어서 속옷을 요염한 것으로 갈아
입었으나 남편이 귀가하지 않아 짜증이
나고 있었다.
(여자는 남편에게 사랑받고 싶어하는
거야. )
미경은 그렇게 생각하며 살래살래 고개를
흔들었다. 남편을 위해 밤에 요염한 속옷을
입는 것이 결코 나쁜 일이 아닌 것이다.
누군가 그러지 않았는가. 남편에게 사랑을
받으려면 속옷을 예쁘게 입으라고....
미경은 다시 창밖을 쳐다보았다. 집에서
버스정류장까지는 2킬로미터 남짓되는
거리였다. 우산을 가져다주지 않으면
고스란히 비를 맞게 될 것이다. 그러나
정류장까지는 길이 너무 어두웠다. 그 길은
낮에도 인적이 드물어 다니기가 꺼려지는
길이었다. 비교적 적은 돈으로 아파트를
마련하다보니 교통이 불편한 서울을 벗어나
김포에 고를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남편은
불평없이 출퇴근을 하였다. 빗발이
뿌리거나 밤늦은 시간이 아니면 공기가
맑고 호젓해서 오히려 별장에 살고 있는
기분이었다.
미경은 책을 덮고 나이트 가운 위에
레인코트를 찾아 걸쳤다. 아무래도 남편을
마중 나가는 것이 좋을 것 같았다. 남편을
기다리고 마중 나가는 것도 집에 있는
아내가 해야할 일이라고 생각했다.
미경이 우산까지 챙겨 들고 아파트를
나서자 사나운 바람이 미경을 향해 세차게
몰아쳐 왔다. 미경은 어깨를 잔뜩
웅크렸다. 바람을 안고 걷게 되어 걸음이
잘 떨어지지 않았다. 그러나 미경은 몸을
잔뜩 숙이고 걸음을 떼어놓았다. 벌판을
달려오는 사나운 바람에는 차가운 빗발까지
한 두 방울씩 섞여 있었다. 그러나 그녀는
우산을 쓰지 않고 정류장을 향해 걸음을
재게 놀렸다. 세찬 바람 때문에 우산을
펴도 소용이 없었다. 그녀는 코트의 깃을
바짝 여미고 걸음을 서둘렀다.
바람이 사납게 불고 있어서인지
버스정류장에도 사람들이 거의 없었다.
이따금 버스가 한 대씩 와서 드문드문
승객들을 내려놓으면 승객들은 어둠 속으로
황황히 사라져 버렸다. 거리는 점점 인적이
끊어져 가고 있었다.
(외박을 하려는 것일까?)
미경은 팔목의 시계를 들여다보았다.
어느덧 11시40분이 지나 있었다. 남편이
타고 오는 버스는 10시40분이 막차였다.
저녁 늦은 시간에는 차가 막히는 일도 없어
언제나 11시40분을 2,3분 전후하여
정류장에 도착하곤 했었다. 그러나 어찌된
일인지 남편은 버스에서 내리지 않고
있었다.
(아까 그 버스가 막차인가?)
미경은 불길한 예감이 뒤통수로 엄습하는
것을 느끼며 아스팔트길에 시선을
못박았다. 바람이 사납게 불고 있는
아스팔트길에는 어느덧 차량마저 끊어져
가고 있었다. 그녀는 버스정류장에서
12시20분까지 남편을 기다렸다. 그러나
남편은 그때까지도 귀가를 하지 않고
있었다.
(외박을 하는 거야!)
미경은 남편이 미워지기 시작했다.
남편이 술에 취해 다른 여자를 껴안는
모습이 자꾸 연상되었다. 그런 생각을 하자
미경은두 다리에 맥이 탁 풀리면서 눈에서
불이 일어나는 것 같았다.
미경은 입술을 깨물며 걸음을 돌렸다.
이제는 버스조차 오지 않아 남편을 더 이상
기다리고 있는 것은 무망한 일이었다.
미경은 바람에 등을 떠밀리며 걸음을
재촉했다.
이내 뚝길이 나타났다. 뚝길 양쪽으로는
벌판이 넓게 펼쳐져 있었다. 가을걷이가
끝난 황량한 들판이었다. 가을걷이가
끝나지 않았을 때만 해도 뚝길 양쪽으로는
황금 들판이 눈이 시리게 펼쳐져 있어서
보기만 해도 가슴이 뿌듯하곤 했었다.
남편도 그녀도 낟알이 탐스럽게 영글어
누렇게 고개 숙인 가을 들판이 마음에 들어
서울에서 한참 떨어진 이 곳에다
보금자리를 마련하는 것을 주저하지
않았었다. 그러나 밤에는 다니기가 무서울
정도로 한적한 것도 사실이었다. 그래서
그녀는 가급적이면 밤외출을 하지 않았다.
뚝길 밑으로는 하천이었다. 농수로로
쓰는 하천을 따라 뚝길이 길게
아파트단지까지 이어져 있었고 그녀와
남편은 그 길을 이용해 버스정류장을
오고갔다.
(빗발이 굵어지네!)
미경은 얼굴을 들고 캄캄한 하늘을
쳐다보았다. 등을 떠밀어대는 세찬 바람에
굵은 빗발이 섞여 있었다. 벌판을 달려오는
바람은 악마가 만또자락을 펄럭이며
돌아다니는 것처럼 귀기스러웠다.
그때 세찬 바람소리에 섞여 끙,하는
신음소리가 그녀의 귓전을 울렸다. 뚝길
밑에서였다. 그녀는 가슴이 철렁하여
걸음을 멈추고 뚝길을 내려다보았다.
그러나 뚝길 밑에는 캄캄한 어둠이 늪처럼
괴어 있었다.
물이 흐르는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하천은 장마가 지거나 농사철이 아니면
언제나 물이 말라 있었다. 농사철이 되어야
한강에서 물을 내려보내는 까닭에 바닥이
드러나 있었고 잡초가 허리까지 올라올
정도로 웃자라 있었다. 가을이 되면서
잡초가 누렇게 마른 뒤에는 새떼와
들쥐떼가 그 곳에 보금자리를 틀었다.
(들쥐일거야.... )
미경은 가슴이 방망이질을 치는 것을
느끼며 걸음을 서두르기 시작했다. 그러자
또 다시 몹시 괴로워하는 듯한 신음소리가
끙,하고 들렸다. 그녀는 머리끝이 곧추
서는 것 같은 공포를 느꼈다. 그러나
뒤돌아보고 싶지는 않았다. 폭풍우가
몰아치는 이런 밤에 하천 바닥에 사람이
쓰러져 있으리라고는 생각조차 할 수
없었다. 세상이 떠나갈 듯한 비바람소리로
인해 잘못 들었거나 짐승이 놀라서 풀숲을
돌아다니는 소리일 터였다.
미경은 뛰듯이 걸음을 빨리 했다. 빗발이
점점 굵어지면서 뚝길이 질퍽거리고
있었다. 빗발은 레인코트를 입었는데도
미경의 얼굴과 머리로 사정없이 들이치고
있었다. 미경은 마구 달음질을 치기
시작했다.
(비가 오기 때문에 돌아오지 못하는지도
몰라. )
미경은 아파트에 도착하자 남편이
귀가하지 않는 이유를 그렇게 생각했다.
그러자 마음이 한결 편안해 졌다. 그녀는
레인코트를 벗어 벽에 걸고 거울을 보며
머리와 얼굴의 빗물을 훔쳤다. 남편과
떨어져 잠을 자야 한다고 생각하자 집안이
텅 빈 것처럼 허전했다.
미경은 샤워를 한 뒤 침실에 들어가
누웠다. 그러나 쉽사리 잠이 오지 않았다.
미경은 엎치락뒤치락하면서 온갖 생각을
했다. 결혼한 뒤의 첫 번째 외박이었다.
물론 신문사에서 당직을 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신문사에서 당직을 한다면
연락이라도 했을 터였다.
남편이 이 늦은 시간에 무엇을 하고
있을지 알 수 없었다. 남자들은 집에
돌아가지 않고 외박을 하게 되면 어디서
잠을 자게 되는 것일까. 남편은 혹시 술집
여자와 함께 잠을 자고 있는 것이 아닐까.
미경은 남편의 얼굴을 머릿속에 떠올리며
가슴이 타는 것 같았다. 남편의 외박이
무엇 때문에 이토록 초조하고 불안한지 알
수 없었다.
(배신하면 죽일 거야!)
미경은 바람에 덜컹대는 유리창 밖의
어둠을 향해 무섭게 눈을 부릅떴다. 남편이
호텔의 침대에서 다른 여자를 껴안고
뒹군다면 결코 용서하지 않으리라고
생각했다.

봉고차가 서울에 도착한 것은 저녁 때가
가까워서였다. 여자들이 고속도로의
휴게소에 도착할 때마다 내려서 커피를
마시느라고 법썩을 떨어댔고 이천에 이르자
온천에 들려 목욕도 하고 점심을 먹었기
때문이었다. 미경도 휴게소에서 내려서
커피를 마셨다. 거의 1년 반만에 마시는
커피였으나 미경은 커피에 대한 감동보다도
자신에게 일어난 악몽 같은 일을
되돌아보기에 여념이 없었다.
모든 것은 남편이 교통사고를 당하던
날부터 시작된 일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우발적인 사고라고 보기에는 미심쩍은
구석이 너무나 많았다.

2

마산댁이 술집을 경영하고 있는 곳은
미아리 텍사스 촌이었다. 엄격히 따지면
길음동에 있었으나 사람들은 기억하기 쉽게
미아리 텍사스라고 부르고 있었다. 미경은
마산댁의 안채에서 출감 첫날밤을 지냈다.
그러나 일찍 잠을 잘 수는 없었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마산댁은 과부였고 남자
동생과 함께 술집을 경영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날 밤은 마산댁의 남자 동생이
마산댁을 환영한다고 장사까지 그만 두고
거나하게 술판을 벌이는 바람에 그 곳의
여자들과 함께 술을 마셨던 것이다.
미경은 이튿날 정오가 되어서야
일어났다. 언제 일어났는지 마산댁이
해장국을 끓여 가지고 미경을 깨웠던
것이다. 미경은 마산댁과 함께 해장국을
먹고 목욕을 갔다. 그리고는 집에 돌아와
요를 깔고 누웠다.
미경은 마산댁의 술집에서 며칠동안
계속해서 먹고 자기만 했다. 먹으면 잠을
잤고 잠에서 깨어나면 먹기만 했다. 잠은
죽음처럼 깊고 어두웠다.
그녀가 자리를 털고 일어난 것은
3월10일이었다. 교도소에서 출감한지
열흘이 더 되는 날이었다.
"나도 홀에 나갈까?"
미경은 마산댁에게 넌지시 물었다.
마산댁이 담배를 피우다가 말고 멀뚱히
미경을 쳐다보았다.
"나 한테 부담을 가질 필요는 없어. 너
하나는 충분히 먹여줄 수 있으니까 필요한
만치 쉬어. "
"놀면 뭘해?"
미경은 마산댁의 흉내를 내어 입언저리에
엷은 미소를 띠었다.
"정말 일 할래?"
"응. "
"이런 일 안하겠다고 했잖아?"
"놀자니 답답해서 그래. "
"집에나 가보지 그래?가족들이 보고
싶지도 않아?"
"이런 꼴이 되어서 가족을 만나면
뭘해?그냥 이렇게 살다가 말겠어. 이
직업이 나쁜 것도 아니구.... 일부러 바람
피우는 여자도 있다는데 싫컷 즐길 수도
있구.... 생각하기 나름 아니겠어?"
"하긴 즐길려고 든다면 괜찮은
직업이지..... "
마산댁이 입을 벌리고 사내들처럼
호탕하게 웃어 젖혔다. 미경은 입가로 알
듯 모를 듯 미소를 지었다.
미경은 그날부터 홀에 나가서 손님을
맞기 시작했다.

사내는 옆구리를 잔뜩 움켜쥐었다.
바람이 세차게 불고 있어서 어디가
어디인지 짐작도 할 수 없었다. 그러나
그는 옆구리를 움켜쥐고 필사적으로
엉금엉금 기었다. 이렇게 쓰러져 있으면
죽게 되는 거야,어떻게 하던지 사람들
눈에만 띠게 되면 살 수 있어.... 그는
혼미해져 가는 정신을 수습하며 속으로
절규하듯이 외쳤다. 죽음은 허무한 것이다.
무엇보다 꽃 같은 아내를 두고 죽을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아내와 결혼식을 올린지
이제 불과 보름밖에 안되는 것이다.
그러나....
그는 점점 의식이 꺼져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죽음이 이렇게 허무하게
오다니.... 그는 자신에게 닥친 일이 믿을
수가 없었다.
사내는 몸을 바로 눕혔다. 벌써 몇 번째
의식을 잃었다가 되찾고 의식을 잃었다가
되찾고는 했었다. 그러나 이번에 의식을
잃으면 두 번 다시 의식을 회복하지 못할
것이라는 불길한 예감이 뇌리를 스쳤다.
그는 의식을 잃지 않기 위해 점점
무거워지는 눈꺼풀을 위로 밀어 올렸다.
눈꺼풀이 천근이나 되는 것처럼 무거웠다.
(나는 죽으면 안돼!)
사내는 입속으로 비통하게 부르짖었다.
이상하게 고통은 느껴지지 않았다. 이런
상처라면 소리를 지르며 미쳐 날뛸 정도로
통증이 와야 했으나 기이할 정도로 통증이
느껴지지 않고 있었다. 사내는 문득 자신이
꿈을 꾸고 있는 것이 아닌가하는 생각을
했다. 꿈이 아니라면 이렇게 큰 상처를
당했는데도 고통이 느껴지지 않을 리가
없었다.
그러나 꿈이 아니었다. 사내는 오늘 따라
퇴근을 했다. 낮부터 바람이 음산하게
불어 퇴근을 일찍하려고 했었으나 퇴근이
늦어진 것은 신문에 소설을 연재하고 있는
여류작가 정주연()이 뒤늦게
연재원고를 가지고 나타났기 때문에 그녀를
접대하느라고 시간이 늦어졌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이미 베스트셀러 작가로 화려한
명성을 날리고 있었으나 소설의 내용보다
대학교수라는 이미지로 많은 독자들을
확보하고 있었다. 신문사에서 파격적인
고료를 지급하며 모셔온 작가이기 때문에
대접을 소홀히 할 수 없었다.
정주연은 여류작가로는 드물게 술까지 잘
마셨다. 문화부장과 차장,출판담당 기자와
함께 저녁을 먹으면서 간단하게 반주로
시작한 술이 2차 3차로 이어져 그는 9시가
넘어서야 간신히 술자리에서 빠져 나올 수
있었다.
(흥!베스트셀러 작가라고
의기양양하군..... )
그는 퇴근하는 버스에 오르자 정주연의
얼굴을 떠올리며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그가 먼저 자리에서 일어나겠다고 하자
정주연이 조소하는 듯한 얼굴로 요즈음
젊은 아이들은 버릇이 없어서.... 하고
중얼거렸던 것이다. 그것은 노골적으로
그에게 들으라는 말이었다. 그는 얼굴이
벌개졌으나 신문사 문화부장의 체면을
살리기 위해 못들은 체하고 자리를 빠져
나왔던 것이다.
(쌍년!)
그러나 밖으로 나오자 그는 침부터 칵
뱉았다. 정주연에 대한 불쾌감을 참을 수가
없었다.
거리엔 바람이 사납게 불고 있었다.
휴지조각이 세찬 바람에 날아다니고
여자들이 짧은 치맛자락을 말아 쥐고
종종걸음을 치고 있었다. 그는 몸을 잔뜩
웅크리고 버스정류장을 향해 걸음을 빨리
했다.
버스가 그의 집 근처에 도착한 것은
10시가 조금 지나서였다. 바람이 세차게
불고 있었으므로 그는 걸음을 빨리 했다.
집에는 그의 아내가 눈이 빠지게 기다리고
있을 것이었다. 그는 집에서 기다리는
아내를 생각하자 기분이 좋아졌다.
"김 기자!"
그가 뚝길로 향하는 모퉁이를 돌려고
했을 때 낮고 강한 목소리가 그의 귓전을
울렸다. 그는 자신도 모르게 뒤를
돌아보았다. 그러나 그의 뒤에는 캄캄한

(내가 잘못 들었나?)
그는 바람소리 때문에 자신이 잘못 들은
것이려니 생각하고 몸을 돌려 걸음을
떼어놓기 시작했다. 공연히 뒤통수가
서늘해져 왔다.
"김 기자!"
그때 또 다시 그를 부르는 낮고 음침한
소리가 귓전을 울렸다.
"누구요?"
그는 가슴이 철렁하여 어둠 속을 향해
소리쳤다.
"나요. "
상대방은 어둠 속에 있었다. 그는
우두커니 상대방이 어둠 속에서 걸어
나오기를 기다렸다. 아직 상대방이
누구인지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그러나
김 기자라고 자신을 분명하게 부른 이상
낯선 인물은 아닐 것이라고 생각했다.
"퇴근이 늦었수다. "
상대방이 어둠 속에서 가까이 오기
시작했다. 어둠 때문에 자세히 볼 수
없었으나 상대방은 바지에 잠바차림이었다.
"누구요?"
"나요. 벌써 나를 잊었소?"
그는 얼굴을 잔뜩 찌푸리고 눈을
부릅떴다. 그렇게 해야 상대방이 누구인지
알 수 있을 것 같아서였다.
상대방이 점점 가까이 다가왔다. 그는
상대방을 기다리는 시간이 초조하여 담배를
빼어 물고 성냥을 꺼내 불을 켜기
시작했다. 그러나 세찬 바람 때문에
성냥불이 제대로 켜지지 않았다. 그는 몸을
잔뜩 숙이고 몇 번이나 성냥을 그어댔다.
"이걸로 붙이시오. "
상대방이 1회용 라이터를 그에게 불쑥
내밀었다. 그는 무심결에 라이터를
받아들고 담배에 불을 붙이기 위해 머리를
숙이고 라이터를 켰다.
"억!"
그때 목덜미가 쇠망치에 얻어맞은 듯이
강한 충격이 느껴졌다. 그는 숨이 컥 하고
막히는 기분이었다. 그는 어찌된
영문인지도 알지 못하고 앞으로
꼬꾸라졌다.
"한 방에 끝냈군.... "
누군가 낮게 웃으며 말질을 했다.
"빨리 해치워!"
"예. "
낮은 대답소리와 함께 후닥닥 뛰어가는
소리가 들렸다. 그는 몸을 일으키려고
했다. 누군가 목덜미를 쇠망치 같은 것으로
강하게 내려쳤다는 것을 알았으나 이렇게
맥없이 꼬꾸라졌다는 사실이 믿어지지
않았다.
그때 부릉부릉 하고 시동을 거는
찻소리가 요란하게 들렸다. 그는 고개를
들었다. 멀리서 밝은 헤트라이트 불빛이
이쪽을 향해 쏘아지고 있었다. 그는 고개를
떨구었다. 아직도 숨이 막혀 몸을 움직일
수가 없었다. 그는 호흡을 고르기
시작했다. 심호흡을 하듯이 느리게 호흡을
해야 꽉 막힌 호흡이 뚫리는 것이다.
찻소리가 가까워지기 시작했다. 그는
다시 고개를 들었다. 그러자 전속력으로
이쪽을 향해 돌진해 오고 있는 헤트라이트
불빛이 보였다.
(아!)
그는 눈앞이 아득해 왔다. 자동차가
달려오면 꼼짝없이 죽음을 당해야 했다.
그는 헤트라이트 불빛을 피하기 위해 몸을
움직이려고 해보았으나 몸이 전혀 말을
듣지 않았다. 그는 눈을 질끈 감고 주먹을
움켜쥐었다. 헤트라이트의 불빛이 그의
동공 속에서 확대된 순간 벼락을 치듯 쾅
하는 충격이 뇌리를 강타했다. 순식간의
일이었다. 그는 자신의 몸 위로 육중한
탱크 같은 것이 지나갔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 뒤로는 아무 것도 기억하지
못하게 되고 말았던 것이다.
사내가 의식을 회복한 것은 한참이
지나서의 일이었다. 지옥에서 들려오는
아수라의 울부짖음 같은 음산한 바람소리가
그의 의식을 깨웠던 것이다. 그러나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는 알 수 없었다. 그가
의식을 회복하고 눈을 뜨자 칠흑의 어둠만
눈앞에 펼쳐져 있었다.
(여기가 어디일까?)
사내는 자신이 쓰러져 있는 곳이
어디인지 알 수 없었다. 그러나 차츰차츰
의식이 명료해지자 자신이 차에
치었고,쓰러져 있는 곳이 하천 바닥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리고 자신이
누군가의 치밀한 사전계획에 의해
교통사고로 위장 당해 죽어가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비참한 일이었다. 그는 자신이 죽어야
하는 이유를 전혀 알 수 없었다.
누군가에게 살해를 당할만큼 원한을 산
일도 없었다.
그는 가쁜 호흡을 고르기 시작했다. 차가
어디를 어떻게 치었는지 숨을 쉬기가
힘들었다. 옆구리에서는 무엇인가 쉴새없이
끈적거리는 것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바람이 세차게 불고 있었으나 그의
주위에서는 피비린내까지 풍기고 있었다.
(뚝길을 지나가는 여자한테 소리를
질러야 했어..... )
그는 비감했다. 그가 눈을 떴을 때
누군가 종종걸음을 치면서 뚝길을 지나가고
있었다. 그는 뚝길의 여자에게 소리를
지르려고 했다. 그러나 그것은
마음뿐이었지 입조차 벙긋할 수 없었다.
이상한 일이었다. 고통은 없었으나 전혀
소리를 지를 수가 없었다. 그는 허공을
향하여 몇 번이나 헛되이 손을 흔들었을
뿐이었다.
(나는 죽어 가고 있는 거야. )
그는 눈을 감았다. 아니 눈을
감았다기보다 무거운 눈꺼풀을 감당할 수가
없어 저절로 눈이 감겼다. 그러자 얼굴
위로 차가운 빗발이 느껴졌다.

손바닥만한 창으로 나른한 봄볕이 쏟아져
들어왔다. 미경은 팬티와 브래지어
차림으로 엎드려서 주간지를 뒤적거렸다.
아직 영업이 이른 시간이었다. 어느 방에서
화투를 치는지 여자들이 왁자하게 떠드는
소리가 들렸다. 미경이 텍사스촌의
꽃순이가 된지 어느덧 2개월이 가까워지고
있었다. 그 동안 미경의 신변엔 많은
변화가 일어나 있었다. 머리는 짧게
숏커트를 친 뒤에 파머를 했고 화장은
언제나 횟가루를 바른 듯이 짙게 했다.
텍사스촌의 꽃순이로의 변신이었다.
죽은 남편에게는 미안한 일이었지만 어쩔
없다고 생각했다. 자의던 타의던 그녀는
부산 완월동에서 뭇사내들의 노리개 노릇을
했던 것이다.
(내가 밤거리의 꽃순이가 되다니.... )
물론 아직도 어처구니가 없는 일이라는
생각은 지워버릴 수가 없었다.
밤에 손님을 맞는 것도 다른 여자들과
조금도 다를 바가 없었다. 텍사스촌에 오는
손님들이 모두 그렇듯이 미경은 그들의
요구에 따라 유두주()를 만들기도
했고 계곡주()를 만들어 주기도
했다. 나체로 술시중을 들고 나체로 춤을
추었다. 그리고는 즉석 불고기라는 이름에
걸맞게 어느 정도 주석이 무르익어 파장이
되어 가면 파트너를 데리고 구석방으로
데리고 갔다. 그것이 하루에 두 팀씩 걸릴
때도 있었다. 밤에는 늘 술에 젖어 살았고
홰렛열 두시까지 죽음처럼 깊은 잠을
잤다.
그러나 미경은 때때로 어둠을 향해 눈을
부릅뜨고 이를 갈았다. 누구인지는 알 수
없었으나 아직까지 자신을 미행하고
있었다.

3

미경은 두 달만에 술집을 옮겼다. 뚜렷한
이유가 있었던 것은 아니었으나 미경이 두
번째로 옮긴 곳은 건국대 후문쪽에 있는
텍사스촌이었다. 미경은 그 곳에서도
누군가 자신을 감시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러나 감시의 눈길이 훨씬
느슨해져 가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날 밤은 몹시 길었다. 미경은 밤을
거의 꼬박 밝히고는 새벽녘에야 잠깐 잠이
들었다. 밤새도록 허공을 달려와 유리창을
흔들어대는 비바람소리에 머리맡이
어수선하여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미경은
몇 번이나 잠이 들었다가 깨고 잠이
들었다가 깨고는 했다.
꿈자리도 뒤숭숭한 밤이었다. 미경은
남편이 술집 여자와 벌거벗고 뒹구는 꿈을
꾸었다. 미경이 물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꿈도 꾸었다. 그러다가 새벽녘에야 겨우
잠이 들었던 것이다.
미경은 잠결에 요란하게 울리는
전화벨소리에 깜짝 놀라 눈을 떴다. 그리고
눈을 뜨자마자 재빨리 침대 머리맡의
수화기를 들었다. 피치 못할 사정으로
외박을 한 남편이 아침에라도 전화를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러나 전화를 건 사람은 남편이 아니었다.
"김석호 선배 댁이죠?"
수화기 저쪽의 목소리는 상당히
조심스러운 것이었다.
"네. "
미경은 잠에서 덜깬 목소리로 대답했다.
"여기는 회사입니다. "
회사는 남편이 다니는 신문사를 말하는
것이었다.
"김 선배 안 들어 오셨죠?"
"네. "
"죄송합니다만 부인되십니까?"
"네. "
미경은 불길한 예감이 뒤통수로 엄습해
오는 것을 느끼며 침대에서 일어나 앉았다.
침대 맞은 편에 있는 화장대의 거울에
봄뵉젊은 여자의 얼굴이 비치고
있었다.
"저는 이() 기자입니다. 일전에 결혼
피로연에서 뵈었습니다만.... "
"안녕하세요?"
미경은 그때서야 알은 체를 했다.
"실은 방금 전에 경찰로부터 전화를
받았습니다. 김 선배께서 댁 앞에서
교통사고를 당했다고 합니다. "
"네?"
"교통사고요. 교통사고가 난 자리가 김
선배 아파트 앞이라니까 서둘러
나가보십시요. 저희도 곧 가겠습니다. "
"그이는 어떻게 되었어요?많이
다쳤나요?"
미경은 온 몸을 떨며 자신도 모르게
뾰족한 비명소리를 질렀다.
"저희도 지금 연락을 받아 자세히 알 수
없습니다. 김 선배가 신분증을 기자패스만
가지고 있어서 회사로 연락을 했다고
하더군요. "
"알겠습니다. "
미경은 서둘러 전화를 끊었다. 정신이
얼떨떨했으나 남편이 교통사고를 당한 것은
틀림이 없는 모양이었다. 그러나 무엇을
어떻게 해야 좋을지 알 수 없었다. 미경은
정신없이 침실을 왔다갔다 했다. 그때 다시
전화벨이 요란하게 울렸다. 미경은 재빨리
수화기를 들었다.
"여보세요. "
"김석호씨 댁입니까?"
전화의 목소리는 이번에도 남자의
것이었다.
"네. "
"경찰입니다. 실례지만 김석호씨와
어떻게 되시죠?"
"김석호씨의 부인예요. "
미경은 가슴이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김석호씨가 교통사고를 당했습니다.
아파트단지로 들어가는 진입로
중간쯤입니다. "
"그,그이가 많이 다쳤나요?"
미경은 자신도 모르게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죄송합니다. 돌아가셨습니다. "
"어.... "
미경은 갑자기 가슴이 컥 하고 막히는 것
같아 입을 열 수가 없었다. 그이가
죽다니,아니야,그럴리가 없어. 이건 분명히
무언가 잘못되었거나 꿈일 거야....
수화기를 든 채 미경은 침대 위에
주저앉았다.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는가. 하필이면 왜 내 남편이 교통사고로
죽는가. 결혼식을 올린지 이제 불과 보름
밖에 되지 않았는데....
미경은 소리를 내어 울었다. 자신이 들은
말이 모두 거짓인 것 같았다. 그러다가
미경은 남편의 죽음을 확인해야 한다는
생각이 퍼뜻 뇌리를 스쳤다.
(그래. 어쩌면 착오일 수도 있어!)
미경은 허겁지겁 옷을 입고 아파트를
뛰어나갔다. 날씨는 뜻밖에 쾌청했다. 지난
밤에 그토록 세차게 불던 바람도 자고
비까지 그쳐 투명한 아침 햇살이
아파트단지에 부채살처럼 퍼지고 있었다.
그러나 비바람이 할퀴고 간 자국은
여기저기 어지럽게 남아 있었다. 뚝길에는
군데군데 웅덩이가 패어 있고 부러진
나무가지들이 뒹굴고 있었다.
(하느님. 저를 도와주세요. )
미경은 뚝길을 달리며 간절히 기도를
했다.
아파트단지로 들어오는 뚝길 중간에는
벌써 사람들이 잔뜩 몰려와 웅성거리고
있었다. 미경은 사람들 틈을 비집고 안으로
들어갔다. 교통사고를 당한 사람은
가마니에 덮여 있어서 얼굴을 확인할 수
없었으나 입고 있는 옷은 그녀에게 낯익은
쥐색 양복이었다.
"어떻게 오셨습니까?"
검은 안경을 쓴 경찰이 미경에게
무뚝뚝한 얼굴로 물었다. 미경은 길바닥
곳곳에 뿌려져 있는 핏자국을 보고 얼굴을
찡그렸다.
"전화를 받고 왔어요. "
미경은 숨이 차서 간신히 대답했다.
"그럼 김석호씨 부인되십니까?"
"네. "
"우선 좀 진정하시죠. 숨을 크게
들이쉬세요. "
경찰이 안경을 벗고 말했다. 미경은
경찰이 시키는대로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가
내쉬었다.
"그럼 확인하시죠. "
경찰이 가마니를 들추었다.
"억!"
미경은 다시 가슴이 컥 하고 막혀왔다.
가마니속에 있는 사람은 분명히 그녀의
남편이었다. 그녀는 뜨거운 눈물이 왈칵
쏟아지는 것을 느끼며 가슴을 주먹으로
두드리기 시작했다. 금방이라도 가슴이
터질 것처럼 답답했다.
" "천천히 숨을 쉬세요. "
경찰이 말했다. 미경은 경찰이
시키는대로 천천히 숨을 쉬었다. 그리고
그녀는 자신에게도 침착해야 한다고 속으로
무수히 타일렀다. 그러자 조금 안정이 되는
것 같았다. 그리고 그때서야 남편의 흰
와이셔스가 온통 피에 젖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남편은 눈을 부릅뜬 채 죽어 있었다.
옆구리가 터져 찢어진 와이셔츠 사이로
무엇인가 하얀 것이 쏟아져 나와 있었다.
나중에야 알았지만 그것은 내장이었다.
"남편이 맞습니까?"
경찰이 근심스러운 표정으로 미경을
살폈다.
".... "
미경은 입을 벌린 채 아무 대꾸도 하지
못했다. 그러자 경찰이 미경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았다. 미경은 숨을 쉴 수가 없어
가슴을 주먹으로 다시 두드렸다.
"사고를 당한 분이 남편이세요?"
경찰이 다시 물었다.
"네. "
미경은 간신히 대답했다. 그리고는
발밑이 천길 벼랑으로 꺼지는 듯한 아득한
추락감을 느끼며 정신을 잃었다.

구의동 텍사스촌은 매우 특이한
지역이었다. 미아리 텍사스촌이
직장인들이나 중년 남자들이 즐겨 찾는
곳이라면 구의동은 젊은 세대가 즐겨
찾았다. 미경은 그 곳에서 세 달을 지냈다.
그것은 마치 마네킹처럼 생명이 없는
삶이었다.

4

미경이 세 번째로 옮긴 곳은
천호동이었다. 천호동은 한때 미아리를
능가할 정도로 세간에 알려졌으나 점점 그
명성을 잃어 가고 있었다. 미경은 그
곳에서 세 달을 지낸 뒤 자취를 감추었다.

악몽 같은 나날이었다. 미경은 남편이
죽은 뒤의 며칠을 죽음과 같은 고통 속에서
보냈다. 남편의 장례와 교통사고에 대한
뒷처리는 친척이며 가족들이 몰려와 모두
치루었으나 그녀의 슬픔은 가슴을 저며
내듯 처절하기만 했다. 그러나 그녀는 울
수 있는 시간조차 허락되지 않았다. 그녀는
남편이 죽은 뒤 일주일이 지나서야 비로소
혼자 남겨져 오열을 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때서야 비로소 남편의 사고 경위를
차분하게 유추해 볼 수 있었다.
남편은 그날 신문사에서 작가 정주연을
만나 문화부의 부장,차장,그리고 출판담당
기자와 함께 저녁을 먹고 술을 마신 뒤
9시쯤에 먼저 일어났다고 했다. 바람이
심하게 불고 있어서 서둘러 집으로 돌아올
생각이었던 모양이었다.
남편은 10시쯤 아파트 진입로가 가까운
버스정류장에서 내렸다. 그는 거기서
곧바로 뚝길쪽을 향해 걸음을 재촉했다.
그러나 거기서부터는 막연히 추측을 할
수밖에 없었다. 거기서부터는 목격자도
증인도 없었다.
그러나 남편이 뚝길로 향하는 진입로로
들어서다가 교통사고를 당한 것은
분명했다. 남편이 교통사고를 당한 자리에
핏자국이 낭자했기 때문에 경찰은 그 곳이
교통사고 지점이라고 단정했다. 게다가 그
곳에서 남편의 손목에 채워져 있던 시계가
망가진 채 발견되기까지 했던 것이다.
그것은 그녀가 남편에게 준 결혼
예물시계였다.
그러나 남편의 시체는 거기서
아파트쪽으로 50보쯤 떨어진 뚝길 밑에
버려져 있었다. 경찰은 남편이 사고를 당한
후 아파트를 향해 필사적으로 기어가다가
하천으로 굴러 떨어진 것이라고 추측했다.
그 곳에도 핏자국이 낭자해 남편이 얼마나
많은 피를 흘렸는지 알 수 있었다.
(피를 너무 많이 흘려 비가 왔어도 씻겨
내려가지 않은 거야.... )
미경은 그렇게 생각했다. 간밤의 비가
남편의 핏자국을 모두 씻어가 버리지 않은
것이 신기했다. 한편으로는 남편이 그 많은
피를 흘리며 죽어 가고 있을 때 자신은
전혀 모르고 있었다는 사실을 생각하면
가슴이 찢어지는 것 같았다.
(그때 그 신음소리가 남편의
신음소리였어.... )
그날밤 남편을 마중 갔다가 돌아올 때
하천에서 들리던 신음소리를 생각하자
미경은 꿈 같기만 했다. 마치 악몽을 꾼 것
같았다.
사고를 낸 운전기사가 뺑소니를 쳤기
때문에 사고의 경위도 분명하지 않았고
차종이 무엇인지도 알 수 없었다. 분명한
것은 남편이 교통사고로 죽었다는 엄청난
사실뿐이었다.
미경은 두문불출했다. 문을 완전히 걸어
잠그지는 않았으나 남편의 죽음에 대한
자신의 마음도 정리해야 했고 앞으로의
일도 생각해야 했다.
미경은 자신이 결혼한지 보름만에
남편없는 과부가 되었다는 사실이 도무지
믿어지지가 않았다. 스물 다섯의 젊은
나이에 과부라니. 그녀는 과부라는 말이
그토록 생경할 수가 없었다. 다행이랄지
불행이랄지 그녀에게 딸린 식구는 없었다.
남편은 시댁의 막내라 부모님을 모시지도
않았고 그녀는 아직 임신조차 하지 않았던
것이다. 재혼을 하려면 홀가분하게 할 수
있었다. 그러나 재혼이라는 것은 생각조차
하기 싫었다. 아직 남편과 결혼을 올리던
광경이 눈에 밟힐 듯이 선했다. 어디
그것뿐인가. 남편과 함께 보낸 신혼초야가
어제 일인 듯 선명했다.
그녀가 남자를 자신의 몸속으로 받아들인
것은 남편이 처음이었다. 그녀는 스물
다섯해 동안 곱게 간직해 온 순결을
남편에게 바쳤던 것이다.
그것은 황홀한 경험이었다. 스물
다섯이나 된 그녀의 육체는 이미 남자를
받아들이기 위해 농익은 과일처럼 단내를
풍기고 있었고,남자를 받아들이자 무르익어
터졌던 것이다. 고통은 전혀 없었다.
그녀는 몇 번이나 까무러치는 듯한
절정감을 느끼며 남편의 품에서 흐느껴
울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제는 모든 것이 끝났다고 미경은
생각했다. 남편의 죽음은 그녀의
행복까지도 송두리째 빼앗아 가고 만
것이다. 미경은 그 엄연한 사실을 밤이면
더욱 절실하게 느꼈다.
미경은 아파트에서 두문불출했다. 그녀가
외출을 하는 일은 거의 없었다. 그 대신
그녀는 하루 한번씩 남편이 교통사고를
당한 지점을 꼬박꼬박 찾아갔다. 그 곳에서
무엇을 하겠다는 생각은 없었으나 어쩐
일인지 남편이 자신을 자꾸 부르는 것
같았다.
(이게 왜 여기 떨어져 있을까?)
그러던 어느날 그녀는 그 곳에서 라이터
하나를 발견했다. 그것은 [화인]이라는
술집 이름과 여자의 나체가 입체로
도안되어 있는 1회용 라이터였다. 남편이
사용하던 라이터가 아니었으나 그녀는
그것을 주워서 아파트로 돌아왔다. 그러나
그것으로 어찌해볼 생각은 전혀 없었다.
아니 그것으로 무엇을 해야 좋을지도 알 수

미경이 다시 경찰의 전화를 받은 것은
2개월쯤 뒤의 일이었다.
"무슨 일이예요?"
"뺑소니차를 찾기 위해 두 달 동안이나
수사를 했지만 별 소득이 없습니다. 사고가
있던 날 워낙 바람이 많이 불어서 목격자를
찾을 수가 없습니다. 죄송합니다만 사건을
종결할 수밖에 없습니다. "
"알겠어요. "
미경은 허탈하여 그렇게 하라고
대답했다. 달리 어떻게 해볼 도리가
없었다.
"혹시 손수 뺑소니차를 찾으시려는 것은
아니죠?"
"네?"
"별다른 뜻은 없구 가끔 그런 사람들이
있어서 드리는 말씀입니다. 공연히 시간과
돈을 낭비할 필요는 없다는 얘기죠. "
"네에. "
미경은 전화를 건 경찰의 말에 동의했다.
그런 일은 너무나 많았다. 거리를
돌아다니다 보면 `목격자를 찾습니다!'라는
현수막을 흔하게 볼 수 있었다.
"그럼 수고하십시요. "
"안녕히 계세요. "
미경은 건성으로 인사를 하고 전화를
끊었다. 그러나 기분이 이상했다. 왜
경찰은 이런 전화를 걸어준 것일까. 내가
뺑소니차를 찾던지 찾지 않던지 경찰이
무슨 상관인가. 교통사고를 당한 사람의
가족들이 뺑소니차를 찾으려고 하는 것은
인지상정이 아닌가....
문득 미경은 죽은 남편을 위해 자신이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녀는 고지식할 정도로 경찰의 말만 듣고
있었다. 남편이 교통사고로 죽고
운전기사가 뺑소니를 쳤는데도 뺑소니차를
찾을 생각조차 하지 않았던 것이다.
미경은 남편의 교통사고를 처리한
김포경찰서로 전화를 걸었다. 그리고
담당자를 바꾸어 달라고 말했다. 그러나
남편의 교통사고를 처리한 담당 경찰은
다른 곳으로 전근을 갔다는 대답이었다.
"그럼 조금 전에 우리 집에 전화를 건
분을 바꿔 주세요?"
"전화요?"
"네. "
"글쎄요. 누가 전화를 걸었을까.... ?"
"한번 사무실에 계신 분들께 물어봐
주세요. "
"잠깐 기다리세요. "
경찰이 수화기를 책상에 얹어 놓는
소리가 탁하고 들렸다. 이어서 경찰서의
왁자한 소음이 들렸다. 그러나 무슨
소리인지는 전혀 알 수 없었다. 잠시후에
교통계의 경찰 목소리가 다시 들렸다.
"여보세요. "
"네. "
"우리 교통계에서는 전화를 건 사람이
없다고 합니다. 실례지만 어떻게 되시죠?"
"교통사고를 당한 사람의 부인예요. "
"그럼 김석호 기자의 부인이십니까?"
"네. "
"그 사건 수사계로 넘어갔습니다. "
"수사계요?"
미경은 어리둥절했다.
"뺑소니 사건이라 수사계에서 조사를
수사계로 돌려 드릴까요?"
"네. "
"잠시 기다리십시요. "
수화기에서 다시 왁자한 소음이
들려왔다. 그리고는 두 번의 벨소리에 이어
굵은 목소리가 미경의 귓전을 울렸다.
"예. 수사계 서() 형사입니다. "
"저.... 김석호 기자의 부인되는
사람인데요. 그 사건 담당하고 있는 분 좀
바꿔 주세요. "
"제가 담당하고 있습니다. "
"혹시 조금 전에 저희 집에 전화를
거셨나요?"
"전화요?아니 걸지 않았습니다. "
"그럼 제 남편 사건 수사는 어떻게 하고
계세요?"
"진전은 없지만 계속하고 있습니다. "
"사건을 종결하지 않았나요?"
"종결하지 않았습니다. 무슨 일입니까?"
"조금 전에 어떤 사람이 전화를 걸어서
경찰이라고 말하며 사건이 종결되었다고
했어요. 그리고 손수 뺑소니차를 찾으려는
수고를 할 필요가 없다구 했어요. "
"우린 그런 전화를 드린 일이 없습니다.
그리고 이 사건은 신문사에서도 관심이
많은 사건이라 함부로 종결할 수가
없습니다. 누가 장난 전화를 한 것
같습니다. "
"그래요?"
미경은 어리둥절했다. 누가 이런 사건을
가지고 장난을 한다는 것인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 문제는 우리쪽에서 한번 조사를
해보겠습니다. "
"그렇게 해주세요. "
"그럼 조사를 하고 전화를 드리겠습니다.
"
"네. 수고하세요. "
미경은 전화를 끊었다. 그리고 미경은
침대에 걸터앉아 오랫동안 생각에 잠겼다.
기분이 야릇했다. 내가 어떻게 남편의
죽음에 이토록 무관심했던 것일까. 남편을
죽이고 달아난 뺑소니 기사는 누구일까.
이제부터라도 적극적으로 나서서 뺑소니
운전기사를 잡아 볼까....
미경은 온갖 생각을 했다. 그러나 뺑소니
기사를 잡기 위해 선뜻 행동에 나설 수가
없었다. 뺑소니 기사를 어떻게 잡아야
할지도 알 수 없었지만 뺑소니 기사가
고의적으로 남편을 치었다고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뺑소니 기사도 남편을 죽게 한
것을 후회할 것이고 그에게도 가족이 있을
것이었다. 뺑소니 기사가 잡히면 그
가족들도 슬픔에 잠길 것이 분명했다.
(그래도 남편이 어떻게 죽었는 지는
알아야 해!)
미경은 다부지게 입술을 깨물었다.
이튿날부터 미경은 뺑소니차 운전기사를
찾기 위해 혼신의 힘을 기울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것은 그녀가 상상하지도 못했던
엄청난 음모에 휘말리는 계기가 되었다.

미경이 천호동을 떠난 것은 11월이었다.
날씨가 점점 쌀쌀해 지고 있었다. 미경이
떠난지 두 달쯤 되어 검은 안경을 쓰고
잠바를 입은 두 사내가 천호동 텍사스촌
일대를 기웃거리며 미경의 행방을
수소문하기 시작했다.
"짭새야. "
"그 새침한 계집애가 무슨 일을 저지른
모양이지?"
"남편을 죽인 여자래. "
"남편을 죽여?"
"짭새들이 그러는데 정부와 짜고
남편한테 청산가리를 먹여 죽였대. "
"독한 년이네. "
검은 잠바를 입은 사내들은 미경의
행방을 수소문하는 까닭을 미경이 남편을
죽였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여자들은
혀를 차며 수군거렸으나 미경의 행방을 알
수는 없었다.
"어디로 갔는지 모른다는 말이야?"
"흑산도로 가겠다고 그랬어요. "
"나 한테는 부산으로 간다고
그랬는데..... "
"왜 여기를 떠난다고 그러지?"
"자세히는 모르지만 서울에 아는 사람이
많아 이런 짓 하기가 껄끄럽다고 그랬어요.
아는 사람이 왔다고 당황해 하는 것도 몇번
봤어요. "
여자들의 대답은 약속이나 한 듯이
신통치 않았다.
"계집이 우리가 감시하고 있는 것을 눈치
챈 것이 아닐까?"
"눈치 챘으면 경찰에게 달려갔겠지.... "
"그럼 여기서 계집에 대한 일은 매듭을
지을까?"
"그게 좋겠어. 일은 바쁜데 몸뚱이 파는
계집을 감시하고 있을 새가 어디
있어?차라리 제거해 버리면 모를까.... "
"이젠 무작정 제거하는 것도 좋은 방법이
아니야. 요지 음에는 의문사에 대한 사회적
높아져 처신을 잘해야 돼. "
사내들은 천호동의 텍사스 골목을 빠져
나오며 무겁게 한숨을 내쉬었다.

제3장 내 안의 푸른 영혼

1

청량한 가을 아침이었다. 하늘이 높고
맑았다. 미경은 2층의 창으로 뜨락을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뜨락에 붉은
사루비아가 농염하게 피어 요염한 자태를
한껏 뽐내고 있었다.
어느덧 가을이 깊어 가고 있었다. 바람이
일 때마다 노랗게 물든 은행잎이 진저리를
치며 떨어지고,떨어진 잎사귀들이 비명을
지르며 담벽 밑으로 쓸려다녔다. 아침마다
나뭇잎을 쓸어서 불에 태워도 자고
일어나면 나뭇잎이 수북히 떨어져 쌓이곤
했다.
미경은 바람에 뒹구는 나뭇잎을 보면서
몸을 한차례 부르르 떨었다. 나뭇잎이
저렇게 떨어지고 차가운 빗발이 뿌리면
춥디 추운 겨울이 닥칠 거였다.
미경은 겨울이 오는 것이 싫었다. 겨울은
가난하고 무력한 사람들에게는 잔인한
계절이었다. 얼어붙은 하늘,유리창에 낀
성에,연탄재가 잔뜩 쌓인 더러운
골목,빈민굴의 헐벗은 아이들.... 겨울이면
유리알처럼 매끄러운 하늘조차 쩡쩡 소리를
내며 갈라지곤 했다.
해는 점점 짧아지고 있었다. 아침에
일어나 창가에 시름없이서서 마당을
내다보고 있으면 어느덧 점심 때고
점심때가 지나면 금세 짧은 가을 해가
설핏이 기울었다. 밤에는 달빛이 부옇게
흐르는 하늘에 철새가 떼를 지어 날고
밑에서 풀벌레가 울었다.
미경은 그해 가을 내내 잠을 이루지
못했다. 잠을 이룰려고 하면 악몽을 꾸었고
악몽 때문에 식은 땀을 흥건히 흘리며
깨어났다. 꿈에서 깨어나면 간장을 끊을
듯이 애절한 풀벌레 울음 소리가
베갯머리를 적시게 했다.
(우리가 사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 ?)
미경은 이따금 그런 생각을 했다. 자신의
삶이 너무나 어처구니가 없었다. 어떻게
이토록 기구한 삶이 있는 것일까,무엇으로
인해 불과 몇 년 사이에 한 평범한 젊은
여자가 지옥으로 전락하게 된 것일까,내가
이렇게 된 것은 인간에 의해서가 아니라
거부할 수 없는 어떤 거대한 힘에 의한
것이 아닐까..... 그렇다면 내 과거를
추적하려는 시도는 무망한 일이 될 것이다.
우리가 사는 이 세상에는 때때로 우리가
알지 못하는 어둡고 축축한 바람이
불어온다. 저 깊고 어두운 땅 속에는
우리의 운명을 조종하고 희롱하는 어두운
존재가 도사리고 있다.
까뮈가 이방인에서 갈파한 말이었다.
그렇다면 우리가 주어진 운명에서
벗어나려는 시도는 한낱 부질없는 몸부림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어스름하게 해가 기울
때 하루살이가 아무리 지는 해를
붙잡으려고 해도 소용없는 일이듯이 우리의
몸부림도 공연한 짓거리에 지나지 않을
터였다.
(그러나 나는 이대로 포기할 수가 없어!)
그런 생각이 들 때마다 미경은 반발을
하듯이 입술을 피가 나도록 깨물며 눈을
부릅떴다.
(나는 변할 거야. 나는 이제 옛날의
안미경이 아니야!)
미경은 밤마다 그런 생각을 하면서
몸부림을 쳤다.
미경이 소위 텍사스촌이라는 사창가에서
빠져 나온 것은 교도소에서 출감한지 거의
9개월이 되었을 때였다. 미경은 교도소에서
출감했을 때부터 누군가 자신을 감시하고
있다는 것을 눈치챘다. 그리고 그들의 눈을
따돌리기 위해서 마산댁을 따라가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사내들은 미아리까지 들락거리며
미경을 감시하고 있었다. 미경은 감시의
눈을 느슨하게 하기 위해 자청하여 홀에
나갔다. 어차피 망가진 몸이었다. 남편은
교통사고로 죽었고 텍사스촌에서 몸을
판다고 해도 양심에 거리낄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늙은 아버지와 어머니가 있었으나
그들은 강원도 속초에 살고 있었다. 미경이
텍사스촌에서 무슨 짓을 해도 그들은
알길이 없었다.
예상했던대로 미경이 구의동
텍사스촌으로 옮겼을 때 감시의 눈길이
한결 느슨해 졌다. 미경은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미경은 감시자들이 조만간 미경을
감시 대상자에서 제외시킬 것이라고
생각했다.
감시자들은 미경을 타락한 창녀로 여기고
있었다. 한번 그런 시궁창에 빠지면 다시는
헤쳐 나올 수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미경은 빠져 나왔다.
감시자들에게는 그 세계의 여자들처럼
술집을 전전하고 있다는 인상을 심어준 채.
그 까닭으로 미경은 1년도 되지 않는
기간에 세번이나 술집을 옮긴 것이었다.
미경은 천호동을 나오자 택시를 타고
청량리역으로 가서 무작정 중앙선 열차를
탔다. 그리고 열차가 제천에 도착하자
승객들을 따라 내렸다. 제천은 처음 와
보는 곳이었으나 미경은 복덕방에 부탁해
허름한 집 한 채를 얻어 세를 들었다. 제천
시내에서도 버스로 20분이나 떨어진 거리에
있는 변두리여서 월세는 얼마되지 않았다.
집 주인은 서울 사람이어서 집을 지켜 주는
것도 감지덕지하고 있었다.
미경은 감시자들과 싸우기 위해서는
치밀한 계획을 세워야 한다고 생각했다.
감시자들이 어떤 조직에 소속되어 있는지는
알 수 없었으나 여자 혼자서 싸우려면
그들에게 방심하도록 만들도록 해야 했다.

창밖에는 눈발이 자욱하게 날리고
있었다. 미경은 함박눈이 쏟아지는 거리를
우두커니 내려다보았다. 12월이었다.
크리스마스를 며칠 앞두고 있었으나 날씨가
계속해서 포근하더니 마침내 눈발이 날리고
있었다.
"오래 기다리셨습니까?"
미경이 다방에서 20분 남짓하게 앉아
있었을 때야 서 형사가 나타났다.
"아녜요. "
미경은 재빨리 미소를 지으며 자세를
바로 했다.
"연말연시라 비상이 걸렸습니다.
죄송합니다. "
서 형사가 피곤한 기색으로 미경의 앞에
앉았다. 미경은 약간 긴장이 되는 기분을
느꼈다. 그 동안 서 형사를 몇 번 만났으나
선입관 때문인지 매번 긴장이
되곤 했다. 그러나 애써 서 형사와 약속을
한 것이므로 돌아가는 상황을 파악하지
않을 수 없었다.
"어떻게 되었어요?"
"발신자 조사를 했습니다만 공중전화를
사용해서 추적을 할 수가 없었습니다. "
미경은 얼굴을 찌푸렸다. 경찰인 서
형사가 수사를 했는데도 진척이 없어
저으기 실망이 되었다.
"그럼 어떻게 해야죠?"
"협박을 받지 않으려면 전화를 바꾸는
수밖에 없습니다. "
"전화를요?"
미경은 고개를 흔들었다.
"그렇다고 이사를 갈 수는 없지
않습니까?"
- 서 형사가 오히려 반문을 했다. 미경은
서 형사의 얼굴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서
형사는 키가 크고 몸이 마른 편이었다.
그러나 눈빛이 면도칼처럼 날카로웠다.
"이사를 갈 수는 없어요. "
미경은 단호하게 말했다.
"그럼 계속 범인의 협박에 시달리게
됩니다. 아시다시피 우리 경찰은 개인의
신변 경호를 해드릴 수가 없습니다. 이사를
하지 않으면 무슨 일을 당할지 모르지
않습니까?"
"알았어요. "
그러나 미경은 이사를 하지 않았다.
미경이 이사를 해버리면 이상한 전화는
받지 않을 수도 있었으나 남편의
교통사고에 대한 실마리가 끊어져 버리기
때문이었다.
미경에게 경찰을 사칭한 이상한
사내들에게서 협박 전화가 걸려오기 시작한
것은 미경이 남편의 교통사고 사건을
조사하기 시작했을 때부터였다. 처음엔
경찰이라면서 새삼스럽게 뺑소니 기사를
잡아서 무얼 하느냐고 회유하더니 미경이
응하지 않자 노골적으로 욕설을 뱉고
협박을 해왔다. 미경은 그런 전화를 받을
때마다 머리끝이 곧추 서는 것 같았으나
남편의 교통사고에 대한 의혹이 더욱
짙어졌다.
"그럼 이렇게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사실 회사에서도 의혹을
가지고 있던 참이고 뺑소니에 대한
사회적인 경각심도 높일겸 신문에서 한번
때리겠습니다. 그럼 협박자로부터 어떤
반응이 있을 것입니다. "
미경이 남편이 다니던 신문사를 찾아간
것은 이듬해 늦은 봄의 일이었다. 남편이
다니던 신문사의 문화부 차장은 미경의
얘기에 조용히 귀를 기울이더니 사회부
기자를 소개해 주었다.
사회부 기자는 사려 깊은 눈매를 갖고
있는 사람이었다. 이름이
오승만()이었다. 그는 미경을 신문사
지하 커피숍에서 만나 주었다.
"그 뒤엔 어떻게 하죠?"
"어떻게 한다기 보다 우선 목격자가
나타날 가능성이 많습니다. 목격자만
나타나면 협박자의 신원을 밝힐 수가
있습니다. "
"정말 그럴까요?"
"방송국에 친구가 있습니다. 우리
신문에서 먼저 때린 후 방송에서도
돈하겠습니다. 방송의 효과는
상상외로 높습니다. 다만 부인께서도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
"어떤 일이요?"
"먼저 뺑소니차를 찾기 위해 부인이
최선의 노력을 하고 있다는 인상을 심어
주어야 합니다. "
"어떻게요?"
"교통사고가 난 곳에 다른 사람들처럼
목격자를 찾습니다,라는 현수막을 붙이고
전화기에 녹음 시설을 설치하십시요. "
"녹음시설이요?"
"협박 전화가 걸려 오면 자동으로 녹음이
되게 하십시요. 중요한 증거가 될
테니까요. "
"알겠습니다. "
미경은 사회부 기자와 헤어져 김포로
돌아오자 즉각 간판 만드는 집에 부탁하여
'목격자를 찾습니다'라는 현수막을 남편이
교통사고를 당한 지점에 붙였다. 밑에는
전화번호와 사례금 5백만원이라고
써넣었다.
전화기에는 심부름센타에 부탁하여
녹음장치를 설치했다. 그러나 한동안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뺑소니에 대한 특집기사가 실린 것은
보름쯤 지났을 때였다. 사회부는 5회
특집으로 뺑소니 기사를 내보내면서 미경의
남편 사건도 큼직하게 다루었다. 그러자
금방 협박전화가 왔다.
"야. 이년아!"
상대방은 다짜고짜 전화기에 대고
욕설부터 내뱉았다.
"누구세요?"
상대방이 다짜고짜 욕설부터 뱉았으므로
미경은 눈썹을 치켜올렸다.
"신문에 내면 죽은 니 남편이 살아서
돌아올 줄 알아?"
"뺑소니 기사인가요?댁한테는 아무
감정이 없어요. 다만 저는 왜 그런 일이
일어났는지 알고 싶을 뿐예요. "
"닥쳐!쥐도 새도 모르게 죽고 싶지
않으면 잠자코 있어!"
협박전화는 며칠 동안 계속해서 왔다.
미경은 진저리를 치다가 경찰에 신고하고
신문사에 알렸다. 그러나 경찰은 녹음
테이프까지 갖고 갔으면서도 범인을 잡지
못했다. 신문사에서도 마땅한 대책이
없다고 말했다.
미경은 실망했다.
(이젠 나 혼자 나설 수밖에 없어!)
미경은 그후 혼자서 남편을 죽인
뺑소니차를 찾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것은
막막하기 짝이 없는 일이었다. 기껏해야
신문사 동료 기자들의 협조를 얻어 남편의
최근 행적을 조사하는 것뿐이었다. 그러나
남편의 행적은 특별히 수상한 구석이
없었다. 남편은 시계바늘처럼 신문사와
아파트를 오갔고 신문사에서 하던 일도
'사라진 사람들'이라는 제목으로 실종자들
얘기를 시리즈로 다루고 있었을 뿐이었다.
미경이 뱀눈의 사내와 짧은 머리의
사내에게 납치를 당한 것은 그 무렵의
일이었다. 그들이 단순한 납치범이나
인신매매단이 아니라는 것은 미경의
아파트에서 아무 것도 가지고 나오지
않았다는 사실에서도 알 수 있었다.
밤이 왔다. 깊고 푸른 밤이었다. 미경은
무릎을 세우고 그 위에 턱을 얹어 놓았다.
어찌된 일인지 동생 미숙()에게서
아무런 연락이 없었다.
미경은 창으로 하늘을 쳐다보았다.
미숙을 기다리는 일이 지루하고 조바심이
났다. 바람이 이따금 뒷곁의 나뭇잎을 쓸고
다닐 뿐 밤이 깊어질수록 사위가 깊은 적막
속에 가라앉고 있었다. 하늘은 부옇게
흐르는 달빛의 광망() 때문에 점점
신비스럽게 투명해져 가고 있었다.
미숙이 온 것은 자정이 가까웠을 때였다.
"언니!"
미숙은 미경을 보자 눈물부터
글썽거렸다.
"미숙아!"
미경도 눈물이 주르르 흘러내렸다. 두
자매는 대문 앞에서 부둥켜 안고 한동안
소리 죽여 울었다.
"언니 그 동안 어디에 있었어?"
"나에 대한 것은 아무 것도 묻지마. 그
동안 나는 지옥에 다녀왔어. 인간이 겪을
수 있는 고통은 모두 겪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야. "
"무슨 일인데?"
"그냥 그렇게 알아. "
"대체 무슨 일을 겪었어?"
"난 술집에서 몸을 팔기도 했고
교도소에도 다녀왔어. "
"설마!"
미숙이 반신반의 하는 표정을 지었다.
"내가 거짓말을 하나 내 몸을 봐. "
미경은 동생 미숙을 방으로 데리고
들어와서 실오라기 하나 남기지 않고 옷을
모두 벗었다. 그리고 미숙에게 자세히
,보라고 허벅지를 벌렸다.
"언니. 그 상처는.... ?"
미숙이 입을 벌리고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미경의 오른쪽 허벅지에
검푸른 흉터가 세 개나 보기 흉하게 찍혀
있었다.
"담뱃불로 지진 흉터야!"
미경의 눈에서 파란 살기가 뿜어졌다.
"언니. 도대체 누가 그런 짓을 했어?"
미숙의 눈에 눈물이 글썽해 졌다.
"나도 모르는 놈들이야. 그러나 이
흉터를 남긴 놈이 문제가 아니야. 나는
형부를 죽인 놈과 나를 이렇게 만들라고
지시한 놈을 찾으려는 거야. "
"언니 경찰에 신고해!"
"안돼. 이 일은 아무도 모르게 나 혼자
할 거야. 누군가 배후에 있어. 그 배후를
추적하고 밝힐 거야. 니가 조금만 도와줘.
"
"내가 어떻게 도와?"
"집에서는 내가 어떻게 된줄 알아?"
"아빠가 실종자 신고를 냈어. 언니가
갑자기 실종된 이후 아빠가 얼마나 언니를
찾아 헤맸는지 언니는 모를 거야. 1년
동안을 찾아 헤매다가 결국 포기하고
마셨지만.... "
"내가 교도소에 들어가기 전일 거야. "
미숙이 손등으로 눈물을 씻었다.
"내가 어떻게 언니를 도와야 해?"
"간단해. 주민등록만 빌려 줘. "
"주민등록?"
"내가 니 행세를 할 거야. 그리고 돈이
좀 필요한데 아파트는 어떻게 했니?"
"아파트는 팔아서 내가 오피스텔을 하나
언니 나 결혼했어. 신랑과 그
오피스텔에서 살고 있어. "
"잘했구나. "
미경은 고개를 끄덕거렸다. 미숙이
아파트를 팔아서 오피스텔을 얻은 것은
서운했으나 탓하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금방 오피스텔 빼서 언니에게 돌려
줄께. "
"아니야. 그럴 필요 없어. 그들이 눈치를
챌 거야. "
"그럼 어떻게 해?"
"통장이 있었는데 그건 어떻게 했니?형부
퇴직금이 약간 있었어. "
"투자신탁에 맡겼어. 언니의 패물도 모두
내가 갖고 있어"
"그럼 그거라도 나에게 갖다 줘. "
"응. "
미경은 미숙을 새벽에 떠나 보냈다.
미숙이 미경의 남편이 남긴 퇴직금을
그대로 금융기관에 예치해 놓은 것은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2

미숙이 미경을 다시 찾아온 것은 이틀이
지났을 때였다. 미경은 미숙이 오는 것을
언덕에 숨어서 살폈다. 행여나 미행자가
있나 우려해서였다. 그러나 미숙을
미행하는 자는 아무도 없었다. 미경은
미숙이 집으로 들어간 뒤에도 한 시간
동안이나 주위를 살핀 뒤에야 집으로
들어갔다.
"통장을 모두 가져 왔어. "
미숙은 미경의 이름으로 되어 있는
꺼내 놓았다. 통장엔 모두 천
칠백만원이 들어 있었다.
"집에 누구 찾아 온 사람 없든?"
"형사가 한번 왔었어. "
"형사?"
"응. 언니에게서 아직도 아무 소식이
없느냐고 묻고 갔어. "
미숙의 말에 미경은 눈쌀을 잔뜩
찌푸렸다. 어쩐지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신분증을 봤어?"
"아니. 형사라고 그러는데 어떻게
신분증을 보여 달라고 그래?"
"형사라는 사람이 뭐라고 그래?"
"언니 소식을 물었어. "
"그래서 뭐라고 대답했어?"
"모른다고 그랬어. "
"눈치 채지 않았을까?"
 "눈치 채지는 못했을 거야. "
미숙이 단정적으로 말했다. 미경은 낮게
한숨을 내쉬었다.
"여기 올 때 누가 따라 오는 것 같지는
않든?"
"나도 형사라는 사람이 찾아와 걱정이
되었어. 그래서 그 사람이 가자 마자
언니에게 온 거야. "
"할 수 없지 뭐. "
미경은 미숙을 돌려보낸 뒤 골똘히
생각에 잠겼다. 그 사내들이 미숙을
미행했다면 지금까지 미경이 해온 일이
모두 수포로 돌아가는 것이었다. 그러나
눈치를 채지 못했을 가능성도 있었다.
미경은 이튿날 제천의 한 직업소개소를
찾아갔다. 그리고 다방에 레지로 취직을
했다. 다방에서는 언제나 사람들을
모집하고 있었기 때문에 취업이 쉬웠다.
미경은 제천의 그 다방에서 두 달을
보냈다. 다방에서 차를 배달하면서도
미행자가 있는지 조심스럽게 살폈으나
미행자는 눈에 띄지 않았다.
미경은 두 달 후에 충주로 다방을
옮겼다. 그러나 다방을 옮기기 전에
천호동으로 전화를 걸어 그 곳
아가씨들에게 제천에 놀러 오라고 말했다.
감시자들에게 미경이 아직도 유흥가를
전전하고 있다고 알려주기 위해서였다.
물론 그 것은 미경이 감시자들을 따돌리기
위한 치밀한 계획에 의한 것이었다.
감시자들이 천호동에 나타난 것은 미경의
전화가 온지 이틀이 지났을 때였다. 그들은
천호동 아가씨들에게 미경의 연락이
있었다는 얘기를 듣고 곧 바로 제천으로
달려갔다. 그러나 미경은 이미 제천을 떠난
뒤였다. 그들은 미경과 가까이 지냈던 다방
아가씨와 손님들을 철저하게 조사했다.
그러나 아가씨들이나손님들은 미경의 간
곳을 알 수가 없었다. 그들은 미경이
울산으로 갔을 것이라는 막연한 대답만
들었을 뿐이었다.
"어떻게 하지?"
"돌아가야지.... "
"이 계집이 정말 유흥가를 전전하고 있는
것일까?"
"그렇게 몸을 망쳤는데 온전한 여자로
살아갈 수 있겠어?평생 이런 데나
돌아다니다가 종내는 몹쓸 병에 걸려 죽는
거지.... "
"난 어쩐지 기분이 꺼림칙해. "
"이젠 이 계집은 감시 대상에서 제외
시키자구. 지나치게 감시를 하는 것도 우리
정체를 드러내는데 안성맞춤이야. "
"한번만 더 두고 보자구. 또 연락이 있을
거야. "
그들의 예상대로 미경으로부터 다시
연락이 온 것은 한 달이 지났을 때였다.
그러나 미경은 여자들에게 어디 있는지
위치를 말하지 않아 감시자들을 조바심
나게 했다. 여자들이 위치가 어디냐고
물으면 미경은 듣지 못했는지 엉뚱하게
사귀는 남자 얘기만 주절주절 떠들어대다가
전화를 끊었다.
감시자들은 여자들로부터 그 얘기를 듣고
전화에 녹음장치를 설치했다.
미경의 전화가 다시 걸려온 것은 보름이
지났을 때였다. 감시자들은 미경의
목소리를 녹음기를 통해서나마 직접 들을
수 있었다.
"여보세요. "
"안녕하세요?송화 있어요?"
"누구시죠?"
"도화예요. 홍도화. "
미경은 천호동 텍사스촌에서 홍도화라는
이름을 사용했었다. 그 곳에서는 여자들
이름을 모두 꽃으로 사용했다.
"어머!너로구나. 그래 거기 어디니?"
"채송화 좀 바꿔 주세요. "
"그래. 송화야 전화 받아라!지금
일하는데 어디야?"
"다방이요. 차 배달하고 있어요. "
"차 배달?그런데서 목돈 만질 수 있어?"
"하기 나름이죠. 티켓 다방이니까 나가서
술도 마시고 남자들도 만나고 그래요. "
"심심하면 재미를 본다는 말이지?"
여자들의 웃음소리가 높아졌다. 이어서
전화를 바꾼 듯이 목소리가 달라졌다.
"언니?"
"송화니?"
"응. 송화야. 어디 있어?"
"나 다방에서 일해. 여관에 차 배달
나왔다가 전화를 하는 거야. "
"여관으로 차 배달을 해?"
"그럼. "
"그럼 재미도 보겠네?"
"재미도 보지. 거기처럼 하루에 두
사람을 상대할 때는 없지만 다방도 지낼
만해. 말이 두 사람이지 텍사스가 어디
사람이 있을 곳이니?지금 생각하면
그런데서 어떻게 지냈는지 진저리가 나.
매일 밤 술에 절어 살아야지 내가 원하지
않아도 나체로 술시중을 들어야지.... 또
즉석 불고기를 구워 주어야지.... 난 거기
있을 때 아랫도리가 헐어 버리는 줄
알았어. "
"언니. 거기 한번 놀러 갈까?지금 있는
곳이 어디야?"
"다방이라니까. 얘 전화가 끊어 질려고
그런다. 다음에 내가 또 연락할께. "
찰칵 하고 전화 끊어지는 소리가
녹음기에서 들렸다. 감시자들은 기분이
묘했다. 여자는 결정적인 순간에 답변을
회피하고 있었다.
"어떻게 생각해?"
"여자가 의도적으로 위치를 밝히지 않는
것이 아닐까?"
"여자가 그 정도로 교활할까?"
"그렇지 않으면 교묘할 정도로 답변을
회피할 리가 없잖아?"
"우연히 그렇게 된 것이 아닐까?"
"그럼 한 번만 더 기다려 보자구. "
미경으로부터 다시 전화가 걸려온 것은
열흘 뒤였다. 그들은 전화기의 녹음
테이프를 수거하다가 다시 틀었다.
"잘 있었어?"
"거기 어디야?"
"여기는 의정부야. "
"그럼 서울 위네. "
"그래. "
"그럼 서울 지날 때 들리지 그랬어?"
"직업소개소 차를 타고 가는 바람에 들릴
수가 있어야지... 그래 어떻게 지내니?"
"텍사스 꽃순이 생활이 그렇지 뭐. "
"아직도 거기로 병마개 따니?"
"병마개뿐이야?요즈음은 탁구공을
넣었다가 쏘는 쇼를 해. 손님들이 점점
.자극적인 것을 원하고 있어. "
"그러다가 몸 망칠라. "
"어차피 망가진 걸 뭐.... 집에는
들렸어?"
"내 주제에 어떻게 집에 들리니?이젠
집이랑 완전히 인연을 끊었어. "
"집에 가고 싶지 않아?"
"집은 깨끗하게 잊었어. 이렇게 평생
살다가 때되면 끝내는 거지 뭐. "
"언니를 그렇게 만든 사람들이
원망스럽겠다.... "
"후훗.... 원래 팔자가 그랬던 모양이야.
그들이 아니면 남편이 교통사고로 죽었으니
과부로 살다가 재혼을 했겠지. 하지만
재혼을 했다고 행복해지란 보장은
없잖아?처음에가 좀 고통스러웠지만 지금은
오히려 잘되었다는 생각도 들어. 난 완전히
내가 마음에 드는 남자와 잘
수도 있고 술도 마실 수 있어. 여자로
태어나서 이렇게 즐기며 사는 것도 흔치
않은 일이야. "
"언니는 그럼 그 사람들이 고맙다는
얘기야?"
"얜!그렇다고 그치들이 고마울 게 뭐
있어?그건 그렇고 한번 놀러 와라. "
"거기가 어딘지 가르쳐 주어야지. "
"의정부라니까. 의정부 가능동에
'미추'라는 다방이 있어. "
"그럼 한번 놀러 갈께. "
"꼭 와?"
"응. "
그리고는 잘 있으라는 인사와 함께
전화가 끊겼다. 감시자들은 그 전화를 받고
의정부로 달려갔다. 미경은 전화의
내용대로 의정부 가능동에 있는 다방에서
차를 배달하고 있었다. 감시자들은 멀찌기
떨어져서 그녀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했다.
그녀는 허벅지가 죄드러난 짧은 치마를
입고 껌을 질겅질겅 씹으며 하루종일 차를
배달하고 있었다. 낮에는 중년 남자들과
노인들의 무릎팍에 앉아 웃음을 팔고
밤이면 술집으로 여관으로 출장을 다녔다.
여자는 그들이 의도한대로 사창가의
생활이 몸에 젖어 버린 듯했다.
감시자들은 만족했다. 그들은 서울로
돌아오자 그 여자에 대해서는 이제 더 이상
감시를 할 필요가 없다는 보고서를 올렸다.

3

미경이 의정부를 떠난 것은 이듬해
F초봄의 일이었다. 미경은 의정부에서
떠나자 두 번 다시 사창가를 전전하지
않았다. 그녀는 대신 서울로 돌아와
성형외과의 문을 두드렸다.
"어떻게 오셨어요?"
미경이 찾아간 곳은 영동에 있는
성형외과였다. 미경이 문을 열고 들어가자
간호원이 상냥하게 인사를 건네 왔다.
"수술을 받고 싶어 왔어요. "
"어디를 수술하시게요?"
"의사 선생님을 뵙고 말씀 드릴께요. "
"들어오세요. "
간호원이 미경을 진찰실로 안내했다.
진찰실에는 40대의 중년의사가 앉아
있었다. 미경은 의사에게 다소곳이 인사를
했다. 의사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여 미경의
인사를 받았다. 조금 거만한 인상을 풍기는
퓨눼 그는 고급스러운 금테 안경을
쓰고 있었다.
"수술을 하신다고요?"
의사의 목소리는 의외로 가늘었다.
탤런트들과 스캔들이 파다한 의사였다.
"네. "
"어디를 하시렵니까?제가 보기엔 수술할
곳이 전혀 없으신 것 같은데요. "
"얼굴 전체를 수술했으면 싶어요. "
"얼굴 전체를요?"
의사가 약간 놀란 표정을 지었다.
"네. "
"얼굴 전체를 어떻게 수술하고
싶으십니까?"
"다른 사람이 되고 싶어요. 외국
영화에서 보니까 얼굴을 완전히 뜯어 고쳐
남편까지도 몰라보던데 그 정도 수술이
"
의사가 안락의자 뒤로 몸을 젖히며
피식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이었다.
"왜 웃으세요?"
"그런 수술은 영화에서나 가능한
일입니다. 돈도 많이 들구요. "
"전혀 불가능한가요?"
의사가 미경의 얼굴을 조용히
쏘아보았다. 마치 미경의 진의가 무엇인지
파악하려는 듯한 기색이었다.
"그렇다고 봐야죠. "
"그럼 지금의 제 얼굴과 어느 정도
다르게 할 수 있죠?"
"글쎄요. "
의사가 고개를 설래설래 흔들었다.
"가능한한 다르게만 해주세요. "
"무슨 까닭인지 알려 주십시요. 이런
부탁은 처음이라 까닭을 알기 전에는
대답을 해드릴 수가 없습니다. "
"좋아요. 허지만 제 사연을 다
들으시려면 하루가 걸릴 거예요. 시간을
내실 수 있겠어요?"
"내지요. "
미경은 의사와 퇴근 후에 만나기로
약속을 했다. 장소는 호텔 커피숍이었다.
의사는 약속 시간이 30분이나 지난 저녁
7시에야 커피숍에 도착했다. 미경은 미리
예약한 호텔 객실로 의사를 이끌었다.
의사는 조금 망설이는 듯하다가 미경을
따라 객실로 들어왔다. 미경은 의사 앞에서
옷을 모두 벗고 자신의 알몸을 낱낱이 보여
주었다. 그리고 미경이 지금까지 겪은
얘기를 모두 했다. 의사는 미경의 얘기를
R들으며 몇 번이나 주먹을 쥐고 부르르
떨었다.
"해드리겠습니다. 최선을 다해서 다른
사람으로 만들어 보겠습니다. "
미경이 수술대에 올라간 것은 그로부터
닷새 후였다.
3월이었다. 날씨가 화창했다. 창으로는
봄바람이 불어오고 봄볕이 나른했다.
미경은 두 번에 걸쳐 대수술을 받았다.
의사는 그녀 엉덩이의 살을 잘라 얼굴에
붙이는 등 정성을 다해서 수술에 임했다.
얼굴이 갸름한 편이었으나 복스럽게
바뀌었고 양볼엔 보조개까지 넣었다.
눈에는 쌍꺼풀을 지웠다. 눈매를 약간 찢어
날카로운 인상을 만들고 코도 높였다.
전체적으로는 상당히 부조화를 이루는
얼굴이었으나 전의 얼굴이 완전히 바뀌어져
있었다.
미경은 4월에 퇴원했다. 봄이 완연한
때였다. 주택가의 골목에는 라일락의 독한
꽃향기가 날리고 바람이 불 때마다
라일락의 흰 꽃잎이 분분히 날렸다. 미경은
길바닥에 사금파리 조각처럼 하얗게 깔린
라일락 꽃잎을 밟고 퇴원했다. 그러나
얼굴의 흉터를 제거하는 수술을 다시 한번
해야 했기 때문에 미경이 성형수술을
완전히 끝낸 것은 늦은 5월의 일이었다.
(이젠 됐어!)
미경은 거울을 보고 만족했다. 거울엔
전혀 다른 여자가 차가운 미소를 짓고
있었다.
(나는 이제 내가 아니야..... )
미경은 거울 앞에서 몇 번이나 맹세했다.

제4장 밤으로의 길고 어두운 여로

1

부우우웅.
부우우웅.
멀리서 공기를 진동하며 뱃고동 소리가
은은하게 들렸다. 미경은 우울한 눈빛으로
뱃고동 소리가 들리는 먼 바다를 물끄러미
응시했다. 빗발이라도 뿌리려는 것일까.
하늘이 잿빛으로 잔뜩 흐려 있었다. 미경은
잿빛의 우중충한 하늘과 망망한 바다를
응시하며 무겁게 한숨을 토해 냈다.
(목포에 올 때마다 날씨가 잿빛이군. )
미경은 바람에 날리는 긴 머리카락을
뒤로 쓸어 넘겼다. 목포경찰서 수사계
만나기로 약속한 시간은 아직도 한
시간이 더 남아 있었다. 그러나 형사를
기다리면서 시간을 보낼 곳이 마땅치
않았다. 목포는 초행이 아니었다. 1년 전쯤
소설가 최종열()을 만나러 온 것이
처음이었고 이번이 두 번째였다. 그런
까닭으로 미경은 목포 지리를 거의 알지
못했다.
미경은 여객선 터미널쪽을 향해 걸으면서
담배를 꺼내 입에 물었다. 젊은 여자가
길거리에서 담배를 피우는 것이 망설여지긴
했으나 목포는 낯선 곳이었다. 직장의
동료들을 만날 일도 없고 아는 사람을 만날
우려도 없었다. 이렇게 낯선 곳이라면 젊은
여자가 거리에서 담배를 피우는 자유쯤은
누려도 괜찮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미경은 핸드백에서 조그만 라이터를 꺼내
담배에 불을 붙였다. 기다리는 시간이
초조하고 불안했다. 미경은 담배 연기를
가슴 속 깊이 빨아들였다가 내뱉고 문득
옆을 힐끗 쏘아보았다. 지나가던 30대의
남자가 미경을 아니꼬운 눈빛으로
힐끔거리고 있었다. 그러나 미경은 자신을
기분 나쁘게 힐끔거리는 남자의 시선을
쌀쌀한 눈빛으로 퉁겨 버렸다. 한국에서는
여자가 담배를 피우는 것을 대부분의
남자들이 못마땅해하고 있었다. 미경은
남자들의 그런 시각이 싫었다.
미경은 잿빛 하늘에 아득하게 솟아 있는
유달산을 쳐다보았다.
미경이 변신을 한지 어느덧 1년이
가까워지고 있었다. 잡지사 여기자로서의
변신이었다. 성형수술을 한 미경은 곧 바로
남편이 다니던 신문사를 찾아갔었다.
사회부 기자 오승만을 만나기 위해서였다.
"마침 회사에서 여성지를 창간하게 되어
경력기자를 뽑으려던 참입니다. 제가 힘은
없지만 밀어드리겠습니다. "
오승만은 미경이 잡지사에 취직을
하겠다고 하자 기꺼이 도와주었다. 물론
미경이 겪은 일을 모두 털어놓은 뒤의
일이었다.
오승만의 말대로 그 신문사는 얼마 후에
여성지를 창간했고,미경에게 이력서를
가지고 오라고 하더니 여성지 기자로
발령을 냈다. 1년 반 전의 일이었다.
미경의 동생 미숙이 결혼하기 전에
여성잡지에 근무한 경력이 큰 보탬이
되었다. 미숙은 대학을 졸업하자
신혼부부를 대상으로 하는 '마이홈'이라는
여성지에 기자로 근무했었다. 미경은
미숙의 이름으로 취직을 했던 것이고
미경도 결혼 전에 사보 편집을 했기 때문에
기자 생활이 그다지 어렵지 않았다.
미경이 목포경찰서 수사계
박윤수() 형사의 전화를 받은 것은
오늘 아침 8시경의 일이었다.
"거기 안미숙씨 댁이죠?"
미경이 침실 문갑에서 울리는 요란한
전화벨 소리에 깜짝 놀라 수화기를 들자
호남 악센트가 강한 사내의 목소리가
귓전을 때렸다.
"그런데요?"
미경은 얼굴을 찌푸리면서 반문했다.
아직도 안미숙이라는 이름이 귀에 설었다.
미경이 성형수술을 한 뒤에 동생의
이름으로 잡지사에 기자로 취직을 한지
1년이 넘었는데도 여전히 안미숙이라는
귓전을 때릴 때마다 깜짝깜짝
놀라기 일쑤였던 것이다.
"여기는 목포경찰서입니다. 수사계
박윤수 형사입니다. "
"경찰서요?"
미경은 경찰서라는 말에 가슴이
철렁했다.
"이지애()씨 알지요?"
"이지애요?"
미경은 고개를 갸우뚱했다. 기억에 없는
이름이었다.
"그럼 소설가 최종열씨는 아십니까?"
"네. "
미경은 기어 들어가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이른 새벽부터 경찰에서 전화를
해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언젠가
경찰이라는 사람의 전화를 받고 납치되었던
뼈생각하자 소름이 돋는 기분이었다.
"이지애는 최종열의 정부입니다. "
"정부?"
"내연의 여자말입니다. 목포에서 카페를
경영하고 있었죠. "
"아!"
미경은 그때서야 자신도 모르게 짧은
탄성을 내뱉았다.
"이제야 기억이 납니까?"
형사는 약간 비웃는 듯한 말투가 되었다.
"네. "
"어떤 사이입니까?"
박윤수 형사는 다짜고짜 미경에게
취조하듯이 묻고 있었다.
"누구 하고요?"
"이지애. "
"잘 모르는 사이예요. 1년 전에 한번
립돛뿐예요. "
"최종열과는 어떤 사이죠?"
"우리 잡지에 소설을 쓰기로 한
작가입니다. "
"그것뿐입니까?"
"네. "
"최근에 만난 것이 언제죠?"
미경은 옆에서 자고 있는
양윤석()을 힐끗 쳐다보았다.
양윤석은 새벽의 전화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고단한 모습으로 자고 있었다. 미경은
양윤석이 지난 밤에 새벽까지 술을 마신
것이 다행이지 싶었다. 최종열을 가장
최근에 만난 것은 3개월 전의 일이었다.
"3개월쯤 되었을 거예요. 그런데 무슨
일이죠?"
미경은 조금 쌀쌀맞게 내쏘았다.
"미안합니다. 실은 이지애씨가
죽었습니다. "
"죽어요?"
"예. "
"왜요?"
"아직 그 사실을 밝혀 내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안미숙씨의 도움을 받고자 합니다.
"
"어떻게 죽었죠?"
"자세한 것은 목포에 와서 말씀을 나누는
것이 어떻겠습까?"
"저를 소환하는 건가요?"
미경은 바짝 긴장했다.
"아닙니다. 신분도 확실하고,또 기자
신분이니 참고인 진술을 받으려는
것뿐입니다. "
"..... "
 "오늘 내려오실 수 있겠죠?"
"네. "
"좋습니다. 그럼 목포에 와서 전화
주십시오. 전화번호는 목포경찰서 수사계로
하면 됩니다. "
"알겠습니다. "
미경은 맥없이 수화기를 놓았다. 날은
이미 훤하게 밝아 있었다. 아침 햇살이
은은한 핑크빛 커텐사이로 틈입해 들어오고
아파트 광장에서는 사람들이 아침 운동을
하는 소리가 들리고 있었다. 미경은
브래지어와 팬티 차림으로 침실에 딸린
욕실로 들어갔다. 소설가 최종열의 정부
이지애가 죽다니 이 무슨 날벼락 같은
일인가. 미경은 브래지어와 팬티를 벗어
세탁기에 넣고 샤워기로 온수를 틀었다.
이지애가 죽었다는 사실이 믿어지지
않았다.
(그런데 최종열은 왜 행방불명이 된
것일까?)
미경은 문득 최종열의 행방불명에
의구심이 일어났다. 최종열은 2개월 전부터
갑자기 소식이 끊겨 있었다.
(혹시 우리 잡지에 연재하기로 한 소설
때문에 죽은 것이 아닐까?)
최종열은 미경이 근무하는 여성잡지에
10. 26에서 12. 12사태와 5. 18광주항쟁을
거치며 한국의 민주주의가 거대하게
파도치던 80년대 이야기를 연재하기 위해
소설을 쓰고 있었다. 이미 자료 수집이
모두 끝나 작품이 완성 단계에 들어갔다는
말이 들리고 있었다. 최종열이 그 소설을
쓰게 된 것은 12. 12사태 때 신군부에
반대하다가 합수부에 연행되었던 전 수경사
정병주() 소장()이 89년
3월 서울 근교의 야산에서 의문의 자살체로
발견되고,신군부가 그를 연행할 때 그의
비서실장이었던 김오랑()
소령()이 권총으로 신군부측에 저항을
하다가 총격전에 의해 사망했는데 91년
6월,김오랑 소령의 부인이 그 충격으로
실명을 하고 신경안정제를 과다복용한 채
건물 옥상에서 뛰어내려 자살한 사건이
터졌기 때문이었다. 세간에는 그 사건으로
유언비어가 분분하게 나돌았고 김오랑
소령의 부인의 죽음에 흑막이 있다는
소문이 파다하게 나돌았다. 모두들 그
불행한 여인을 동정하고 있었다. 미경이
다니는 잡지사에서도 김오랑 소령 부인의
자살사건이 터지자 곧 바로 취재를 하여
특집으로 다루었다. 그러자 좀 더 자세한
사실을 알고 싶어하는 독자들의 전화가
빗발쳤다. 잡지사에서는 독자들의 요구를
충족시키기 위해 그 사건을 소설로
연재하기로 했는데 그떠 선정된 작가가
80년대에 정치부 기자로 활동을 하다가
해직되어 작가활동을 하고 있는
최종열이었다. 문체가 다이나믹한 것이
특징이었다.
(이제 와서 그들이 작가를 살해할 리가
없는데.... )
미경은 고개를 갸우뚱했다. 그러나
이지애의 죽음은 의문스럽기 짝이 없었고
최종열의 행방불명은 미경의 머릿속을
혼란하게 하고 있었다. 미경이 최종열과
불륜의 관계를 갖게 된 것은,갖게 되었다기
보다 일방적으로 당한 것이지만 1년 전
유달산에서였다.
미경은 최종열이 요구하는 소설의 자료를
잡지사 자료실에서 뽑아 가지고 바람이나
쐬려고 목포로 최종열을 찾아 갔었다.
잡지사에서 최종열을 담당하고 있는 사람은
편집부 차장이었으나 미경이 자청했던
것이다.
최종열은 목포에서 혼자 살고 있었다.
무슨 연유인지 최종열은 결혼도 하지 않고
목포에서도 변두리에 속하는 여객선 터미널
근처의 브록크 기와집에 방 한 칸을 월세로
얻어 집필생활을 하고 있었다.
미경이 목포에 도착하여 최종열에게
자료를 건네주자 최종열은 이왕 목포에
왔으니 유달산이나 구경하라며 미경을
이끌었다. 그러나 최종열이 미경을 이끌고
간 곳은 유달산이 아니라 시내의 한
카페였다. 미경은 최종열에게 자료를 전해
주는 것보다 바람을 쐬기 위해 목포까지
내려온 것이므로 혼쾌히 최종열을
따라갔다. 최종열의 자료는 우편을 이용해
보내 주어도 상관이 없는 것이었다.
"내 애인이요. "
카페로 들어가자 최종열은 나이 지긋한
여자를 불러 미경에게 소개했다.
"안녕하세요?"
이지애가 미경에게 다소곳이 인사를
했다.
"처음 뵙겠습니다. "
미경은 황급히 허리를 숙여 답례를 했다.
이지애가 미경보다 훨씬 나이가 더 들어
보였기 때문이었다. 이지애는 그 카페의
주인이었다. 머리가 길고 숱이 풍성해
호감이 가는 얼굴이었다. 그러나 어딘지
모르게 세파에 찌든 듯한 인상도 함께
풍기고 있었다.
"나는 이 여자가 있기 때문에 살아
있다는 기분을 느끼죠. "
최종열이 어두운 얼굴로 말했다. 미경은
어쩐지 최종열의 말이 가슴을 공허하게
울리는 기분이었다. 최종열의 말은 땅속
깊은 곳에서 들리는 말처럼 이상한 울림을
가지고 있었다.
"이 여자는 나의 정부()와 같은
여자입니다. "
미경은 곤혹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최 선생님이 필요할 때만 정부죠. "
이지애가 눈을 샐쭉하게 흘기며 말했다.
그러나 그다지 고까워하는 눈빛이 아닌
것으로 보아 그들 사이에는 이미 그런
대화가 예사롭게 오가는 눈치였다.
"내가 필요할 때는 최 선생님이 반대가
섧풉맙 "
이지애가 입을 가리고 웃었다. 미경은
어리둥절했다.
"네?"
"정부의 의미가 무엇인지 알아요?"
최종열이 미경에게 의미심장한 얼굴로
물었다. 최종열은 대낮인데도 얼굴이
불콰해 있었다.
"글쎄요.... "
미경은 당황하여 말 끝을 흐렸다.
"정부란 추악한 욕망을 배설하는 도구요.
"
"..... "
"인간은 온갖 욕망을 갖고 살지요,권력에
대한 욕심,식욕,성욕.... 이 여자는 그
많은 욕망 중에 내 성욕을 받아 주는
여자란 뜻이요. "
미경은 얼굴이 붉어졌다. 최종열은
지독한 독설을 술기운을 빌어 마구
뱉어내고 있었다.
"어디 최 선생님만 성욕을 가지고 있는
줄 아세요?여자도 그런 욕망을 갖고
있어요. "
이지애가 지지 않고 최종열의 말을 받아
넘겼다.
"안 기자님 그렇지 않아요?"
"그렇죠. "
미경은 억지 웃음을 얼굴에 띄우며
대꾸했다. 대화가 껄끄럽기 짝이 없었다.
"그런가?"
최종열이 호탕하게 웃어 젖혔다.
이지애와의 대화는 그것으로 끝이었다.
갑자기 카페로 젊은 손님들이 우르르 몰려
들어와 이지애가 그 쪽으로 가버리자
2최종열이 미경을 끌고 카페를 나왔던
것이다.
"지금 서울로 올라갈 예정이 아니면
유달산이나 올라갑시다. "
최종열이 옆눈질로 미경을 보며 우울하게
내뱉았다.
미경은 잠시 망설였다. 유달산은 바로 눈
앞에 있었으나 산에 오르려면 한참이 걸릴
것 같았다. 그러나 잡지사의 일이 크게
바쁜 것도 없고 지금 당장 서울로 올라가고
싶지도 않았다. 미경은 이 기회에
예향() 목포의 명산 유달산을 보아
두자고 생각했다. 나중에 깨달은 것이지만
끈적대는 죽음의 냄새가 풍기는 것 같은
최종열의 이상한 분위기도 미경을 잡아끌고
있었다.
날씨는 우중충했다. 유달산 봉우리
먹구름이 밀려들고 있었으나
미경은 최종열을 따라 유달산을 오르기
시작했다.
"여기서 쉬었다가 갈까요?"
유달산을 중턱쯤 올랐을 때 최종열이
미경을 돌아보며 말했다. 미경은 웃으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모처럼 산에 오르기
때문인지 숨이 찼다.
"남녘 풍광이 괜찮지요?"
최종열이 낮고 조용한 목소리로 물었다.
그 곳에서는 목포 시가지가 한 눈에
내려다보였다.
"네. "
"술 한잔 할래요?"
유달산 중턱의 오솔길에는 허름한
옷차림의 시골 아주머니가 동동주와 간단한
안주를 팔고 있었다.
"네. "
미경은 웃으며 대답했다. 시장기가
돌았다.
플래스틱 용기에 담은 동동주와
도토리묵을 시켜놓고 술을 함께 마신 뒤
미경은 최종열을 따라 다시 유달산을
오르기 시작했다. 생각보다 유달산은
오르막길이 가파랐다. 쉬엄쉬엄 산을 올라
정상에 이르자 먹구름이 몰려들어 잿빛
하늘에서 성긴 빗발이 날리기 시작하고
있었다.
"비가 오는데요?"
최종열이 하늘을 쳐다보며 중얼거렸다.
"네. "
미경은 망망한 바다를 내려다보며
대답했다. 가을비야 맞으면 그만이다.
그러나 유달산 정상에 올라 금세 내려가고
q싶지 않았다. 먹구름 때문에 하늘과 바다가
온통 잿빛으로 보이고 임진왜란의 전설이
깃든 노적봉조차 희미하게 윤곽을 드러내고
있었다. 그러나 기분은 상쾌했다. 중턱에서
조그만 사발로 두 잔이나 마신 동동주
때문인지 얼굴을 때리는 빗방울도 시원하게
느껴지고 있었다. 관광객이 많다는
유달산은 날씨 탓에 인적이 끊어져
고즈넉했다. 이따금 마른 나뭇잎을 때리는
빗소리만 스산하게 귓전을 울리고 있었다.
"그만 내려갈까요?"
최종열이 담배를 피우며 미경에게
물었다. 미경도 담배를 피우고 싶었으나
최종열이 옆에 있어 참았다.
"조금만 더 쉬었다가 가요. "
미경은 최종열에게 눈웃음을 쳤다.
빗발이 점점 잦아지고 있었다. 부지런히
산을 내려간다고 해도 이제는 산을 다
내려가기도 전에 비를 흠뻑 맞게 될 것이
분명했다. 어차피 비를 맞을 바에야
쉬엄쉬엄 내려가는 것이 편하리라고
생각했다.
"그러죠. "
최종열이 선선히 대답했다. 미경은
최종열을 피해 숲으로 들어가 담배 한대를
피워 물었다. 빗발이 점점 굵어져 옷을
후줄근하게 적시고 있었다. 미경은
그때서야 비로소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멀리서 천둥이 우는 소리까지 우르르
우르르 들리는 것으로 보아 예사로운
가을비 같지 않았다.
"아무래도 비를 좀 긋고 산을 내려가야
할 것 같군요. "
미경이 담배를 피우고 숲에서 나오자
최종열이 미경을 향해 나직하게 말했다.
미경은 고개를 끄덕거렸다. 빗발이
푸슷하게 얼굴을 때리고 오솔길을 축축하게
적셨다. 하늘과 바다는 온통 우중충한
잿빛이었다.
"여기서라도 쉬어 가야 하겠습니다. "
최종열이 눈짓으로 커다란 바위를
가리키며 젖은 음성으로 말했다. 유달산의
정상 주위에 커다란 바위가 몇 개 뒹굴고
있었고,그 바위들 중에 틈서리가 벌어진
곳이 있어서 한 사람이 간신히 들어갈 수
있을 것 같았다.
"네. "
미경은 최종열이 가리키는 바위 틈서리로
들어갔다. 최종열도 미경의 옆에 와 섰다.
그러나 그 바위는 두 사람이 함께 비를
피할만한 곳은 못되었다. 미경과 최종열이
부딪칠 듯이 비비고 들어섰으나
빗발은 사정없이 두 사람에게 들이치고
있었다.
미경은 고개를 들고 어둠컴컴한 하늘을
쳐다보았다. 빗발이 쉬이 그칠 기색이
아니었다.
"피우겠어요?"
최종열이 담배를 꺼내 미경에게
내밀었다.
"네. "
미경은 사양하지 않고 최종열의 담배를
받아 입에 물었다. 아까 솔숲에서 미경이
담배를 피우는 것을 최종열이 본
모양이었다. 그렇다면 굳이 담배를 피우지
않는 시늉을 할 필요가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비 때문인지 몸이 으실으실 떨렸다.
최종열이 라이터를 켰다. 미경은 머리를
숙여 담배에 불을 붙였다.
우르르.
멀리서 다시 천둥이 울었다. 미경은 담배
연기를 길게 내뿜었다. 미경은 그때 갑자기
최종열의 눈빛이 자신의 몸을 더듬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미경은 기분이
야릇해 졌다. 징그럽다거나 불유쾌한 것이
아니라 이 사람도 한낱 사내였던가,이
사람은 명색이 지식인이라는 소설가인데도
여자의 몸을 음흉한 눈빛으로 더듬고
있는가,하는 생각이 빠르게 뇌리를 스쳤던
것이다. 그러나 미경은 최종열의 뜨거운
눈빛을 튕겨 버리지 않고 오히려 받아
들였다.
남자가 여자의 몸을 눈으로 더듬는 것은
본능적인 행위이다. 마찬가지로 여자가
남자의 눈길을 의식하는 것도 결코 나쁜
것만은 아니지 않는가. 미경은 다소 엉뚱한
생각을 했다.
비는 점점 세차게 쏟아지고 있었다.
미경의 옷은 이미 흠뻑 젖어서 몸에 찰싹
달라붙어 있었다. 몸의 굴곡이 그대로
드러나 최종열을 자극할 것 같아 미경은
은근히 걱정이 되었다.
"안 기자. "
그때 최종열이 미경을 불렀다.
"네?"
미경은 몸을 떨며 대답했다. 옷이 비에
젖어 몸까지 축축하게 젖고 있었다.
"어때요?비오는 유달산에서 바다를
내려다보니까 기분이 묘하지 않아요?"
최종열이 의미심장한 미소를 입가에
떠올리며 말했다.
"네. "
미경은 우울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문득
자신이 경솔한 짓을 저질렀다는 생각이
뇌리를 스쳤다.
"바다는 여자요. "
"..... "
"나는 이따금 바다에 안기듯 여자에게
안기지요. "
최종열이 불이라도 내뿜을 듯 강렬한
눈빛으로 미경을 응시했다. 미경은
최종열의 시선이 부담스러워 슬그머니
외면했다. 그러자 최종열이 갑자기 미경을
와락 끌어안았다. 미경은 깜짝 놀라
최종열을 쳐다보았다. 그러자 최종열이
재빨리 미경의 입술에 자신의 입술을
부딪쳐 왔다.
미경은 그때서야 황급히 최종열을
떼어내려고 했다. 그러나 최종열은 미경의
반발을 예상하고 있기라도 했듯이 비에
젖은 미경의 원피스 자락을 가볍게 들추고
안으로 손을 밀어 넣었다.
(아!)
미경은 짜릿한 전율이 전신으로 퍼지며
온 몸이 나른하게 풀어지는 기분이었다.
최종열은 미경이 미처 저항할 틈도 주지
않고 한 손으로는 치마 속을 유린하고 한
손으로는 미경의 앞가슴을 움켜쥐고 바위로
밀어붙이고 있었다.
"최 선생님!"
미경은 바둥거리면서 간신히 부르짖었다.
그러자 또 다시 최종열의 두툼한 입술이
미경의 입술을 덮어버리고 말았다. 미경은
황당했다. 최종열의 손이 자신의 치마
속에서 빠르게 은밀한 곳을 향해 올라오고
있었다. 미경은 온 몸에 기운이 빠지면서
눈 앞이 아득해 왔다.
그것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일이었다.
미경은 두 다리가 후들거리고 떨렸다.
그러나 그녀의 내부에서는 상반된 두 개의
반응이 나타나고 있었다. 그 하나는 쾌락을
거부하려는 반응이었고 다른 하나는
최종열의 손이 좀 더 깊숙하고 은밀한 곳을
애무해 주었으면 하는 반응이었다.
(이게 무슨 짓인가?)
미경은 고개를 흔들며 저항의 몸짓을
했다. 그러나 최종열의 손길이 자신의 몸을
마구 유린하는 것을 방어하지 못하고
있었다. 오히려 최종열의 손이 그녀의
깊숙한 곳으로 접근하자 미경은 고통인지
희열인지 알 수 없는 신음을 토해 내기까지
했다.
 그때 최종열이 미경을 안아서 바위 위에
눕혔다. 미경은 다시 한번 저항하기 위해
몸을 바둥거렸다. 그러나 그것은 소용없는
몸짓이었다. 바위 위에 쓰러진 미경을
최종열이 덮치듯이 누르면서 미경의 원피스
자락을 성급히 위로 들추었다.
(이,이럴 수가.... )
미경은 저항을 포기하고 눈을 감았다.
그리고 그때서야 차가운 빗발이 뿌리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삼각형의 얇은
천조각 하나 밖에 남지 않은 그녀의 몸으로
세찬 빗줄기가 장대질을 하듯이 퍼붓고
있었다.
미경은 어금니를 꽉 깨물었다.
그녀의 몸 깊은 곳에서 뜨거운 불꽃이
피어나고 있었다. 그리고 그 불꽃은 빠르게
전신으로 번졌다.
 최종열은 미경이 저항을 포기하자 비로소
자유로운 상태가 되어 미경을 유린하기
시작했다.
1년 전의 일이었다. 산 속에서,그것도
차가운 가을비가 쏟아지는 산상의 바위에서
지식인이라는 소설가에게 겁탈을 당한
미경은 한동안 그 충격에서 벗어날 수가
없었다. 무엇보다 최종열에게 폭행을 당한
것도 아니면서 저항을 하지 않은 자신이
역겹기까지 했다.
(사창가 생활을 했던 것이 내 정조관념을
무너뜨렸어. 처음 본 남자에게까지 함부로
옷을 벗기게 했으니..... )
미경은 그렇게 생각했다. 사창가를
전전하며 몸을 팔던 일을 생각하자 소름이
닭살처럼 돋아나는 기분이었다.
(허지만 어차피 버린 몸이야. )
 미경은 쓸쓸하게 웃으며 고개를
흔들었다. 미경은 사창가를 빠져
나오고서도 사내들과 빈번하게 관계를
가졌다. 처음엔 죽은 남편에게 죄의식을
느끼기까지 했으나 시간이 흐를수록
죄의식은 사라지고 욕망만이 거품처럼
남았다.
최종열에 대한 것도 시간이 흐르자
오히려 그날 산상에서의 쎈스가 그리워지고
있었다. 이왕 그렇게 되었을 바에야 좀 더
적극적으로 최종열에게 호응할 걸 그랬다는
생각에서부터 발가벗은 나신 위에 차갑게
쏟아지던 소나기까지 그리워지고 있었다.
그것은 거의 변하지 않고 무미건조하게
되풀이되는 자신의 생활에 있어서는
충격적이고 신선하기까지 한 것이었다.
최종열이 서울에 올라온 것은 그후
5개월이 지났을 때였다. 최종열은
자료조사차 서울에 올라 왔다고 했으나
미경을 만나기 위해서 서울에 올라 온 것이
분명했다.
미경은 그날 서울 교외의 허름한
여관에서 최종열과 격렬하게 살을 섞었다.
최종열을 사랑한 것은 아니었으나 미경은
거리낌없이 옷을 벗었다. 그것은 최종열을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을 위한 것이었다.
최종열은 미경이 오히려 격렬한 행위를
요구하자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그러나
미경은 최종열을 아랑곳하지 않고 자신의
욕구를 마음껏 분출했다.
그러나 물거품 같은 욕망을 배설하고
나면 허망하고 쓸쓸하기만 했다.
(최종열이 행방불명인데 이지애까지
죽다니 믿을 수 없어. )
미경은 골똘히 생각에 잠겼다. 최종열의
행방불명이 더욱 의심스러워지고 있었다.
부우우웅.
다시 뱃고동이 구슬프게 울었다. 미경이
뱃고동 소리에 놀라 고개를 들자 어느
사이에 빗방울이 한 두 방울씩 뿌리고
있었다. 미경은 얼굴에 떨어지는 차가운
빗방울을 느끼며 유달산을 우두커니
쳐다보았다. 1년 전,저 유달산의 산정상에
있는 바위 위에서 세찬 빗줄기를 맞으며
최종열을 자신의 몸속 깊이 받아들이던
생각이 났다. 그러자 아랫배를 격렬하게
압박하던 최종열의 어두운 얼굴이 떠올라
왔다.
미경은 다리 사이에서 나른한 감각을
느끼며 몸을 세차게 떨었다.

2

미경이 목포경찰서 수사계의 박윤수
형사를 만난 것은 오후 4시가 훨씬 지났을
때였다. 박윤수 형사는 약속 시간보다
20분이나 늦게 터미날 다방에 나타났다.
미경의 생각과 달리 박윤수 형사는 말끔한
신사복 차림이었고 형사답지 않게 인상이
깔끔했다.
"멀리까지 내려오시게 해서 죄송합니다.
목포가 초행은 아니죠?"
박윤수 형사는 30대 후반으로 보였다.
키는 중키고 몸이 호리호리했다.
"네. "
미경은 긴장하면서 대답했다. 형사와의
대화를 어찌해야 좋을지 알 수 없었다.
"최종열씨가 여성지 <늘푸른 여성>에
소설을 연재할 예정이었습니까?"
"네. "
미경은 짤막하게 끊어서 대답했다.
"긴장하지 마십시요. "
박윤수 형사가 미소를 지었다. 미경은
담배를 꺼내 입에 물었다. 그러자 박윤수
형사가 약간 놀란 표정을 짓고 있다가
재빨리 자신의 표정을 수습하고 라이터를
꺼내 미경에게 불을 붙여 주었다. 미경은
담배 연기를 길게 내뿜었다.
"죄송합니다. "
"괜찮습니다. "
"죽은 사람은 이지애씨인데 왜 최종열
선생님에 대해서 묻죠?"
미경은 최종열에게 깍듯이 선생님이라는
존칭을 쓰기로 했다. 박윤수 형사에게
최종열과의 관계를 눈치 채이고 싶지
형사가 그 사실을 알게 되면 여러
가지 불미스러운 일에 말려들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언뜻 뇌리를 스쳤던 것이다.
"최종열씨는 행방불명입니다. "
"네. "
"알고 있었습니까?"
"얼마 전부터 연락이 끊겨서 우리
잡지사도 찾고 있는 중이었어요.
이지애씨는 어떻게 죽었어요?"
"자살했습니다. "
"자살이요?"
"바위에서 굴러 떨어진 채 산에서
발견되었습니다. "
"세상에!"
"저기 보이는 유달산 뒤 쪽에
사체()가 버려져 있었습니다. "
박윤수 형사가 턱짓으로 창 밖의
유달산을 가리켰다. 미경은 그 순간 가슴이
찌르르 울리는 듯한 기분을 느꼈다.
이지애는 왜 하필 유달산에서 죽은 것일까.
이지애도 최종열과 유달산에서 관계를
맺었다는 말인가. 미경은 자신도 모르게
유달산쪽을 쳐다보며 씁쓸해 졌다.
"벌써 한 달이 되었습니다. 그래도 목포
지역에선 알려진 사람이라 우리 나름대로
수사를 열심히 했습니다만 특별히
살해되었다는 증거를 찾을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사건을 종결하려고 합니다. "
"다른 상처는 없었나요?"
미경은 어리둥절했다.
"위에서는 실족사라고 보는 시각도
있습니다. "
"실족사요?"
미경은 얼굴을 찌푸렸다.
 "바위에서 굴른 흔적이 있습니다. 몸
여기 저기에 바위에 부딪친 상처와
나무가지에 긁힌 상처가 있었지요. "
"그렇다고 실족이라고 볼 수 있나요?"
"그래서 자살이라고 결정을 내린
것입니다. 특별히 살해당할 만한 동기도
없고 젊은 여자가 바위에서 실족한다는
것도 별로 타당하지 않으니까요. "
"그래도 어떻게 자살이라고 보죠?"
"물론 그만한 이유가 있습니다.
이지애씨는 우울증을 앓고 있었습니다. "
"우울증이요?"
"우울증이 심해지면 자살을 하게 된다고
합니다. "
"그럼 이지애씨가 그토록 심한 우울증에
빠져 있었다는 말인가요?믿어지지 않는
일이네요. "
 "최종열씨와 가까운 사이인가요?"
"왜요?"
"이지애씨의 가장 가까운 사람은
최종열씨인데 행방불명이 되었으니 혹시
알고 있나 해서 물어보는 겁니다. "
"글쎄요.... "
미경은 박윤수 형사를 우두커니
쳐다보았다. 박윤수 형사의'가까운
사이'라는 말이 마치 육체관계를 의미하는
것처럼 미경에게 들렸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최종열과 서너 번의 육체관계를
가졌다고 해서 진정 가까운 사이라고 할
수는 없었다. 최종열에게 처음 겁탈을
당하듯이 관계를 했을 때부터 지금까지
관계를 하기 전이나 관계를 한 뒤에나
한번도 마음을 터놓고 대화를 한 일이
없었다. 최종열은 술을 마실 때 외에는
거의 말이 없는 사내였고 미경도 허기진
것처럼 허겁지겁 욕망을 채우고 나면
서둘러 헤어지곤 했던 것이다.
"이지애씨는 신경정신과 치료를 받고
있었습니다. "
"그래요?"
"전혀 모르고 있었습니까?"
"네. "
"정신과 의사들과 얘기를 해보니까
우울증이 심해지면 자살을 한다고 합니다.
"
미경은 입을 다물었다. 경찰에서
이지애의 죽음을 자살로 단정했다면 그렇게
믿을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이지애가
어찌하여 우울증을 앓게 된 것이고
자살까지 하게 된 것일까. 그리고 그녀의
죽음은 최종열의 행방불명과 어떤 관련이
냅것일까.
미경은 머릿속이 어수선했다.
"그런데 왜 저를 목포까지 부르셨어요?"
"이지애씨 사건을 종결하게 되었으니까
의혹을 남기지 말아야지요. 혹시라도
타살되었으면 다시 수사를 해야 하니까요.
"
"그렇지만.... "
"이지애씨와 친하지 않았습니까?"
"전혀요. "
"정말입니까?"
"네. "
"거짓 진술하면 의심을 받는다는 거
알지요?"
박윤수 형사가 날카로운 눈빛으로 미경을
쏘아보았다.
"내가 왜 거짓말을 하겠어요?"
미경은 강하게 고개를 흔든 뒤에
이지애를 만난 일을 박윤수 형사에게
설명했다. 그러나 박윤수 형사는 미경의
말을 믿지 않는 눈치였다.
"이지애씨와 친한 사람이 누군지는 알고
있습니까?"
"몰라요. "
미경은 쌀쌀맞게 내뱉았다.
"잘 생각해 봐요. "
"이지애씨를 만난 일이 그때 한 번뿐이기
때문에 이지애씨가 어떤 사람인지도
몰라요. "
"그런데 왜 이지애씨의 수첩에 안미숙씨
이름이 있었죠?"
"모르겠어요. "
미경은 고개를 흔들었다. 이지애의
수첩에 자신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는 것은
금시초문이었다.
"이거 알아 보겠어요?"
박윤수 형사가 두툼한 서류 봉투를
미경을 향해 내밀었다. 미경이 서류봉투의
내용물을 꺼내자 뜻밖에 최종열의 육필
원고가 들어 있었다.
"이건 최 선생님의 원고 같은데요?"
"이걸 이지애씨가 갖고 있었습니다. "
"이걸 왜 이지애씨가 갖고 있죠?"
"모르지요. 최종열씨가 맡겼겠죠. "
"이게 전부인가요?"
"전부는 아닌 것 같아요. "
"그럼 나머지는 어디 있어요?"
"모릅니다. "
"내용을 읽어 보셨나요?"
"아니요. 소설인 것 같아서 조금 읽다가
그만 두었어요. 사건과 직접 관련도 없는
같구..... 최종열씨는 이 소설을 완성한
뒤에 행방불명이 되었다더군요. 그런데
행방불명이 되기 전에 누구한테 소설
원고를 맡겼다는 거예요. "
"누구에게요?"
"모르지요. 우린 안미숙씨가 알고
있으리라 생각했습니다. "
"전 아직까지 최 선생님 원고를 구경조차
못했어요. "
"그래요?그럼 누구에게 맡겼을까.... ?"
"목포의 친구에게 맡겼겠죠. "
"그런 얘기 전혀 못들었습니까?"
"네. "
"최종열씨가 원고를 맡길만한 사람이
목포에 있을까요?"
"모르겠어요. 실은 최종열씨가 누구와
친한지도 몰라요. "
박윤수 형사의 얼굴에 언뜻 실망하는
표정이 스치고 지나갔다. 미경은 원고를
천천히 살피다가 박윤수 형사를
쳐다보았다.
"이 원고 제가 가져도 될까요?"
미경은 최종열의 원고 일부나마 찾게
되었다는 사실이 기뻤다. 잡지사에서는
자료비 명목으로 최종열에게 적지 않은
고료까지 지급한 처지라 최종열의
행방불명에 담당자들이 전전긍긍하고
있었다. 원고를 가지고 돌아가면 잡지사의
담당자들은 물론 간부들까지 반색을 할
것이 분명했다.
"그러시죠. "
박윤수 형사가 선선히 승락했다.
"이건 우리 잡지에 연재할 소설이니까요.
"
" 원고는 미경이 예상했던대로 70년대 말의
우울한 정치상황이 첫장부터 전개되고
있었다.
"요지음은 이런 소설을 써도 당국의
조사를 받지 않는 모양이지요?"
박윤수 형사가 미경을 살피며 넌지시
물었다.
"세상이 달라졌잖아요. "
미경은 대수롭지 않은 일이라는 듯이
가볍게 대꾸했다. 이제는 신문사들이 앞을
다투어 5공시대의 정치비화를 다루고
있었다. 5공이 6공으로 바뀌고,6공이
문민정부로 바뀌자 정치판도는 완전히
뒤집히고 말았던 것이다.
"그렇긴 하지요. "
박윤수 형사가 실망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거렸다. 미경은 박윤수 형사가 왜 그런
짓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러나
굳이 그 문제에 집착하고 싶지는 않았다.

3

날이 서서히 어두워지고 있었다. 미경은
착잡한 기분으로 항구의 분위기가 물씬
풍기는 창 밖의 거리를 우두커니
내려다보았다. 거리는 어둠이 내리면서
빗발이 더욱 굵어지고 바람이 거칠어지고
있었다. 이따금 찬바람에 유리창이
덜컹대고 빗발이 날아와 창에 달라붙고
있었다.
미경은 무겁게 한숨을 내쉬었다.
이지애의 죽음과 최종열의 행방불명이
아직도 무겁게 가슴을 짓누르고 있었다.
미경은 최근에 이르러 실종자와 의문사를
당한 사람들이 유난히 많다는 사실을
생각했다. 남편의 죽음 또한 뺑소니차에
의한 단순한 교통사고일 수도 있지만
의문사에 가까웠다. 그것은 남편의
교통사고 이후 자신에게 닥친 일을
생각해도 충분히 짐작할 수 있는 일이었다.
이제 미경은 최종열의 행방불명과 이지애의
의문사에 의혹을 갖지 않을 수 없었다.
박윤수 형사와 헤어지고 나서 미경은
의문사와 실종에 대한압박감을 처리할 수
없어서 부두가를 방황하다가 최종열의
원고를 읽어 볼 셈으로 목포에 주저앉아
낯선 여관을 찾아 들었던 것이다. 그러나
원고는 눈에 들어오지 않고 머릿속만
심란했다.
부우우웅.
부우우웅.
 그때 창문을 흔들며 뱃고동소리가 연거푸
들려왔다. 한겨울에 문풍지가 우는 것 같은
삭막한 소리였다.
미경은 최종열의 원고로 시선을
떨어뜨렸다. 최종열은 행동이 기괴하기는
해도 문체가 다이나믹하고 생동감이 넘치고
있었다. 무엇보다 최종열 소설의 특징인
비극적인 장중미가 이 소설에서도 가슴
뻐근한 감동을 자아내고 있었다.
제목은 '영혼마차'였다. 10. 26이나 12.
12,5. 18광주항쟁을 다룬 소설로는 어딘지
모르게 연애소설적인 냄새가 느껴지는
제목이었다. 미경은 담배를 피워 물고
최종열의 소설을 읽기 시작했다.

여자는 흔들의자에 앉아 있었다.
가을볕이 나른한 오후였다.
 주택가 어느 집에선가 피아노 소리가
끊어졌다 이어졌다 하면서 들려오고
있었다. 여자는 피아노소리에 귀를
기울이는지 미동도 하지 않고 있었다.
어쩌면 잠이라도 든 것이 아닐까. 정()
여인은 보라색의 드레스를 입고 흔들의자에
앉아 있는 젊은 여자를 보면서 고개를
끄덕거렸다.
풍만하고 육감적인 모습이었다. 여자의
남편은 어느 정보기관의 기관원으로
근무하고 있었다. 그러나 여자의 남편이
어떤 기관에 근무하는지는 알 수 없었다.
여자의 남편은 항상 검은 찢차를 타고
출퇴근을 하고 이웃 사람들과는 가까이
지내지 않았다. 이따금 길에서 여자의
남편을 만나기는 했으나 얼음처럼 차갑고
날카로운 인상 때문에 정 여인은 한번도
말을 건넨 일이 없었다. 그러나 여자는
붙임성이 좋고 나긋나긋했다.
여자의 이름은 이정란(),32세였다.
그녀의 남편은 한경호(),38세로 그
나머지에 대해서는 아무 것도 알려져 있지
않았다. 동네에서는 여자의 남편이
기관원이라는 사실 때문에 가까이 접근하는
것을 꺼렸다. 여자의 남편 쪽에서도 동네
사람들과 어울리는 것을 달가워하지 않는지
동네의 크고 작은 행사나 잔치에 참석하지
않을 뿐더러 반상회조차 나오지 않고
있었다.
동네에서는 여자의 남편이 과묵한 탓에
여자가 재취거나 첩이 아닐까 생각하기도
했다. 게다가 두 사람에게는 정신병을 앓고
있는 아이가 하나 있었다. 처음부터 아이가
정신 질환자는 아니었으나 그 아이로 인해
사이가 원만하지 못하다는 소문까지
나돌았다. 그러나 그것은 소문일 뿐
사람들은 아직까지 그 아이를 본 일도
없었다.
여자가 앉아 있는 잔디밭 앞에는 붉은
깨꽃이 한 무더기 농염하게 피어 바람에
하늘거리고 있었다. 오수()를 즐길
만큼 청명한 날씨였다.
"주무시나?"
정 여인은 얕은 기침을 하면서
이정란에게 가까이 갔다.
"아녜요. "
정란이 재빨리 흔들의자에서 일어나며
얼굴을 찌푸렸다.
"내가 공연히 낮잠을 방해한 것이 아닌지
몰라. "
정 여인이 주위를 살피며 말했다.
 "할일이 없어서 앉아 있는걸요. 뭐.... "
정란이 말 끝을 흐렸다. 여느 때와
다름없이 그녀의 얼굴에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는 것을 정 여인은 발견할 수
있었다.
"이사 준비는 다 하구?"
정란의 남편 한경호는 서울로 전출
지시를 받고 있었다. 한경호의 상관인
기관의 책임자가 서울로 영전되어 부하
직원인 한경호도 따라가게 되었던 것이다.
"이삿짐이 뭐 있어야죠. "
"점심은 어떻게 했어?"
"생각이 없어서 아직 안 먹었어요. "
"그럼 점심이나 같이 할까?"
"글쎄요. 혼자서 먹는 점심이라 라면이나
끓여 먹을까 하던 참예요. "
정란이 미소를 지었다. 눈가에 그늘이
지고 있는 음울한 미소였다.
"어쩐 일이세요?"
정란이 정 여인을 조심스럽게 살폈다. 정
여인은 동네에서 평판이 나쁜 여자였다.
군인 남편들의 잦은 전출로 우울증에 빠져
있는 군인 부인들을 유혹해 계()를
한다던가 비싼 외제 물건을 팔기도
했고,춤을 가르치기도 하여 여러 가지
문제를 일으키곤 했었다.
군인 부인들이 전방으로 전출된 남편을
따라 이사를 오게 되면 한동안 낯선 환경에
적응을 하지 못해 우울해 하는데,그럴 때면
정 여인이 어김없이 나타나 부인들을
유혹했다. 처음엔 낯선 곳에 이사를 와서
얼마나 적적하느냐,여기 사정을 잘 모를
테니 내가 안내를 해주마 하고 친절하게
접근을 했다. 그리고는 시장도 같이 가주고
하여 부인들의 마음을 사로잡은 뒤 외제
물건을 사라느니,계를 들라느니,이렇게 살
바에야 좋은 곳에 가서 춤이나 한번 추자고
유혹하는 것이었다.
정란도 처음 이 곳에 왔을 때 정 여인의
유혹에 말려들어 춤바람이 날뻔 했었다.
지금 생각하면 우습기까지 한 일이었으나
당시엔 낯선 남자의 품에 안겨
지루박이니,부르스니 하는 춤을 추느라고
정신이 없었다.
"저 아래 마을에 잔치가 있는데 국수나
먹으러 가자구. "
정 여인이 추근거리기 시작했다.
잔치집에서 국수를 먹은 뒤에 이왕
나왔으니 스텝이나 밟자고 유혹할 것이
뻔했다.
"전 집에 있을래요. "
 정란은 정 여인의 유혹을 거절했다.
정란은 이 곳에 오기 전부터 남편 몰래
사귀는 남자가 있었다. 그 남자
하나만으로도 정란은 남편의 눈을 속이기에
벅찼다. 정란이 한때나마 춤바람에 빠졌던
것은 사귀는 남자가 갑자기 연락을
끊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는 2년만에
다시 나타났고 정란은 그와 다시 밀회를
갖게 되었던 것이다.
"그래?"
정 여인이 유들유들한 미소를 지었다.
"참,윤 선생이 한번 만나고 싶어하는
눈치던데?"
정 여인이 지나가는 말투로 한 마디
던지고 정란의 눈치를 살폈다. 정란은
아미를 살짝 찡그렸다. 윤() 선생이란
정란에게 춤을 가르치던 춤 선생이었다.
 "전 이제 춤 같은 것은 추지 않아요. "
정란은 정색을 하고 말했다.
"하긴 스텝 밟아 본지 오래 되었을 거야.
"
정란은 대꾸하지 않았다. 비로소 정
여인이 찾아온 음흉한 속셈을 짐작할 수
있었다.
"점심이나 같이 하자구 그러더라구.
서울로 이사를 가면 다시 만날 수 없을
테니.... 윤 선생 말이 사모님처럼 앉은
자리가 깔끔한 여자는 처음 보았다는 거야.
미모며 몸매도 자기가 만난 여자들 중에
캡이라고 그러대. "
정란은 얼굴이 붉어졌다. 윤 선생이라는
제비족에게 자신의 미모나 몸매에 대한
찬사를 듣는 것이 역겨우면서도 가슴이
떨렸다. 정란의 머릿속으로 문득 딱 한번만
그를 만날까 하는 생각이 빠르게 스쳤다.
서울로 이사를 가면 그만이니까 춤 한번
춘다고 어떻게 되는 일은 없을 것이
아닌가.
"생각 없어요. "
그러나 정란은 쌀쌀맞게 잘라서
거절했다.
"잘 생각해 봐. 서울로 이사를 가면 두벌
다시 만날 일이 있겠어?"
정 여인이 여러 가지 의미가 담긴 말을
남기고 몸을 돌렸다.
정란은 정 여인에게 뚜쟁이 같은 짓은
작작하라며 되알지게 내쏘고 싶었으나
참았다. 정 여인이 무슨 짓을 하던 자신이
바른 행실을 보이면 그만인 것이다.
정 여인은 목적을 달성하지 못했기
때문인지 입술을 삐쭉 내밀고 마당을
있었다. 정란은 정 여인의 펑퍼짐한
엉덩이가 유난스럽게 실룩거리는 것을
보면서 쓴 웃음이 나왔다.
(저런 사람이 없어야 할텐데.... )
정란은 낮게 한숨을 내쉬었다. 정 여인
외에도 군인들을 상대로 소소한 사기
행각을 벌이는 사람들이 적지 않았다.
전쟁이 끝난 직후부터 군인부대 주변에는
군수물자를 사고 파는 장사꾼들이 적지
않았고,그 전통이 아직까지 끈끈하게
이어져 부대에서 세금이 없는 전자제품들을
사서 장사꾼들에게 넘겨주는 사람이
있었고,반대로 시중의 물건을 감언이설로
속여 순진한 군인들이나 군인 가족들에게
파는 사람들도 있었다. 다행히 최근 들어
그러한 사람들이 점점 없어지고 있었다.
정란은 정 여인이 대문 밖으로 사라지자
주방으로 들어갔다. 어느덧 시장기가 돌고
있었다. 라면을 끓이기 위해 냄비에 물을
붓고 가스를 켠 뒤 식탁에 앉자 남편이
보던 신문이 눈에 들어왔다. 정란은 물이
끓는 동안 신문을 보기 시작했다.

정부 여당 김영삼 총재
제명방침!정국 초긴장!

신문의 큰 활자는 신민당 총재인 김영삼
총재의 의원자격을 제명한다는 기사를 전면
톱으로 보도하고 있었다. 정란도 신문과 TV
뉴스를 통해 어느 정도 알고 있는
기사였으나 여당과 야당의 대치는 이미
돌이킬 수 없는 강을 건너고 있는 듯한
느낌이었다. 1979년 10월13일의
신문기사였다.

미경은 최종열의 원고에서 시선을
거두었다. 한경호와 이정란이 등장하는
장면은 거기서 그치고 소설은 갑자기
엉뚱한 장면으로 바뀌고 있었다. 미경은
최종열의 소설에 등장하는 한경호와
이정란이 누구인지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미경은 창 밖으로 우울한 시선을 던졌다.
밖은 이미 캄캄하게 어두워져 있었다.
어둠이 만또자락처럼 펄럭거리는
시가지에는 차가운 빗방울만이 희끗희끗
날리고 있었다. 남녘 항구의 밤은 점점
조용하게 깊어 가고 있었다.
미경은 어두운 시가지를 내려다보며 깊은
생각에 잠겼다. 최종열이 쓴 소설의
도입부가 아직도 감이 잡히지 않았다.

4

아스팔트는 빗물에 번들거리고 있었다.
미경은 1년 전 최종열과 함께 들렸던 카페
앞에서 잠시 걸음을 멈췄다. 카페 골목을
오가는 행인들이 그녀의 행색을 수상스러운
듯이 살피고 있었다. 미경의 모습이 우산을
쓰지 않아 얼굴과 머리가 비에 흠뻑 젖어
볼상 사나운 모양이었다.
미경은 망설였다. 이런 행색으로 카페에
들어가는 것이 괜찮은 일인지 언뜻 판단이
서지 않았다. 그러나 미경은 고개를 세차게
젓고 카페의 문을 열고 들어갔다. 목포에
내려오기로 결정했을 때 이런 결과를
예상하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으나 이제는
상황이 다른 만큼 직접 부딪쳐 보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더욱이 박윤수 형사를
만나고 난 뒤에 곧 바로 서울로 올라가지
않은 것도 그 이면에는 이러한 행위를
하리라는 결심이 자신의 마음 속에 서려
있다고 보아야 했다.
카페 안은 어둠스레했다.
"어머!비를 맞으셨네요. "
미경이 비에 흠뻑 젖은 차림으로
들어서자 카운터에 앉아 있던 젊은 여자가
화들짝 놀라는 시늉을 하며 수건을
건네주었다. 미경은 젊은 여자가 건네주는
수건으로 얼굴과 머리의 빗물을 대충
훔쳤다.
"이쪽으로 앉으세요. "
여자가 빈 자리로 미경을 안내했다.
미경은 자리에 앉자 저녁으로 카페정식을
주문했다. 생각 같아서는 위스키를 몇 잔
마시고 싶었으나 여자 혼자서 위스키를
타것이 꼴볼견일 것 같아 참았다.
카페 안에는 손님들이 드문드문 앉아
있었다.
"주인이세요?"
미경은 저녁을 마친 뒤 위스키를
주문하고 카운터의 젊은 여자를 불렀다.
"네. "
여자가 의아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술 한잔 마실래요?"
"일행 없으세요?"
여자가 반문했다. 여자의 나이는 얼추
서른이 채 못되어 보였다. 그러나 어딘지
모르게 여자의 얼굴이 이지애를 닮은 것
같았다.
"없으니까 혼자서 저녁을 먹죠. "
미경은 눈웃음을 쳤다. 여자가 생긋
웃으며 미경의 앞자리에 앉았다.
"타지에서 오셨죠?"
미경이 위스키를 따르자 여자가 잔을
들어 한 모금 마신 뒤 탁자 위에 놓았다.
"네. "
"취직하러 오셨어요?"
"취직이요?"
"가끔 취직하러 오는 여자분들이 있어요.
목포가 항구도시라 큰 돈이 잘 돌거든요. "
"아녜요. "
미경은 쓴 웃음이 나왔다. 여자는 미경이
술집에 취직을 하러 온 접대부로 생각하고
있는 듯했다.
"그럼?"
"잡지사 기자예요. 최종열 선생님을
만나러 왔는데 행방불명이라는군요. "
미경은 거짓말을 했다.
"어머!"
여자가 가볍게 놀란 표정을 했다.
"오해를 해서 죄송해요. "
"괜찮아요. "
"최종열 선생님은 여기 잘 들리셨죠?"
"네. 우리 언니와 친했어요. "
"이지애씨가 언니예요?"
"네. 우리 언니를 아세요?"
"언니를 1년 전에 여기서 한번 만난 일이
있어요. "
"언니는 죽었어요. "
여자가 갑자기 쓸쓸한 표정을 꾸미며
말했다.
"왜요?"
미경도 눈을 동그랗게 뜨고 놀란 시늉을
했다.
"경찰은 자살이라고 하지만..... 살해된
것 같아요. "
여자가 주위를 조심스럽게 살핀 뒤
미경에게 소근거렸다.
"살해?"
"우리 언니는 자살할 이유가 없어요. "
"그럼 살해당할 만한 이유는 있나요?"
미경은 젊은 여자 앞으로 바짝
다가앉았다.
"아무래도 최 선생님 원고 때문인 것
같아요. 최 선생님은 협박을 당하고
있었대요. "
"그렇다고 이지애씨가 살해당할 이유는
없잖아요?"
"우리 언니가 최 선생님 원고를 가지고
있었대요. "
"그럼 이지애씨가 최 선생님 원고 때문에
살해당했다는 뜻인가요?"
"네,그 원고가 공개되면 정치적으로
매장을 당할 위험에 처한 사람들 짓이라는
거죠. 최 선생님 행방불명도 단순한
행방불명이 아닐 가능성이 많아요. "
"행방불명이 아니라면..... ?"
"실종이죠. "
미경은 카페 주인의 얼굴을 멀뚱히
쳐다보았다. 카페 주인의 말이 얼마나
사실에 근접한 것인지 내막을 짐작할 수
없었다.
"이지애씨가 가지고 있던 원고를 내가
가지고 있어요. 그런데 그 원고는 최
선생님 원고의 일부에 지나지 않아요. "
"최 선생님은 원고를 완성하기 직전에
행방불명이 되셨어요. "
"그럼 그 나머지 원고는 어디 있죠?"
"모르겠어요. 경찰도 그 원고를 찾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는것 같아요. "
"원고를 찾을 방법이 전혀 없나요?"
"현재로는 없어요. 하지만 최 선생님은
그 원고를 친한 분들에게 골고루 분배해서
숨겨 놓았다는 말이 있어요. 그러니까 최
선생님과 친한 분들만 찾으면 원고를 찾을
수 있을 거예요. "
미경은 천천히 술잔을 입으로 가져가
기울였다. 최종열의 소설은 뜻밖에 수많은
의혹을 가지고 있었다. 미경은 박윤수
형사와 헤어진 뒤 곧 바로 서울로 올라가지
않은 것이 잘한 일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박윤수 형사와 헤어져 바로
서울로 올라갔다면 이러한 내막은 짐작조차
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카페의
여주인에게서는 더 이상 최종열의 소설과
실종에 관해서 알아낼 수가 없었다.
(이지애의 죽음이 의문사란 말인가?)
미경은 카페를 나와 여관을 향해
느릿느릿 걸음을 떼어놓았다. 비는 아직도
계속 내리고 있었다. 그러나 카페 주인과
마신 술 때문에 추위가 느껴지지 않았다.
항구도시 목포는 인적이 끊어져
조용했다. 미경은 빗물에 번들거리는
아스팔트를 또박또박 걸으며 최종열의
생각에 골몰했다. 최종열이 행방불명이
되었는지 실종되었는지는 알 수 없었으나
최종열이 쓴 소설의 내용이 더욱 궁금해
졌다. 소설의 내용이 얼마나 충격적인
내용을 담고 있어서 이지애가 살해되고
최종열이 행방불명이 되었을까 하는 생각을
하자 갑자기 등줄기가 서늘해져 왔다.
미경은 여관으로 걸음을 서둘렀다.
최종열이 만약에 실종되었다면 살해되었을
가능성이 농후했다. 그렇게 되면 최종열도
퓜당한 것이었다.

5

샤워를 하고 침실로 나온 미경은
담배부터 한대 피워 물었다. 시간은 벌써
12시가 가까워지고 있었다. 미경은 창가에
서서 골목을 내려다보았다. 여관이 즐비한
골목에 전봇대가 하나 서 있고 그 전봇대
밑에 가죽잠바를 입은 사내가 서성거리고
있었다.
미경은 고개를 갸우뚱했다. 잠바를 입은
사내들에게서 수 없이 감시와 미행을 당한
미경으로서는 신경이 곤두서지 않을 수
없었다.
(뭘 하는 사내일까?)
미경은 사내를 오랫동안 내려다보았다.
사내는 그 곳을 떠나지 않고 계속
서성거리고 있었다. 담배를 피우는지
이따금 어둠 속에서 빨갛게 불빛이
반짝거리곤 했다.
(바람난 여편네를 미행이라도 하는
것일까?)
미경은 쓴 웃음이 나왔다.
미경은 담배를 다 피우자 침대에 엎드려
최종열의 소설을 읽기 시작했다. 최종열의
소설은 70년대에서 90년대로 건너 뛰어
전개되고 있었다. 그러나 첫 장면에 나온
이정란은 간 곳이 없고 엉뚱한 여자가
등장하고 있었다.

바람은 그날 밤 밤새도록 세차게 불었다.
허공을 달리는 음산한 바람소리가
귀곡성처럼 아우성을 치고 벌판 끝에서
목을 매듯 비명을 질러댔다. 경기도 이천군
마장면 황사리(). 누런 모래
마을이라는 어엿한 이름이 있는데도 마을
사람들이 스스로 황사리(),속칭
뱀골이라고 부르는 마을의 주민들은
밤새도록 불어대는 바람 소리때문에 모두
선잠을 잤다. 나중에 주고받은 얘기이기는
하지만 꿈자리가 뒤숭숭하여 잠을 이루지
못한 것이 기이할 정도로 한결 같았다.
뱀골의 가장 후미진 곳에 사는
박봉호() 노인도 꿈자리가 사나워
제대로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밤새도록
불어대는 바람소리,먼 골짜기에서 피에
굶주려 울고 있는 듯한 개짓는
소리,무엇인지 알 수 없었지만 머리맡을
서늘하게 하는 공포....
박 노인은 그런 것들 때문에 잠이
들었다가는 깨고 잠이 들었다가는 깨곤
하였다.
기묘한 일이었다. 박 노인은 눈을 뜨자
우두커니 천정부터 쳐다보았다. 날은
이제서야 겨우 동녘이 희끄므레하게 밝아
오고 있었다. 그러나 바람은 아직도
누그러지지 않고 세차게 불고 있었다.
뒷곁의 나뭇잎들이 우수수 찬 바람에
쓸려다니고 문풍지가 펄럭거렸다.
박 노인은 등짝으로 차가운 냉기를
느꼈다. 간밤에 군불을 지폈으나 방바닥이
싸늘하게 식어 있었다. 박 노인은 몸이
으실으실 떨리는 것을 느끼며 손을 뻗어
옆자리를 더듬었다. 옆에서 자고 있을
설희()의 풍만한 여체에 몸을
가까이하여 따뜻하게 하고 싶었다. 그러나
박 노인의 옆자리는 이미 썰렁하게 비어
있었다.
(역시!)
박 노인은 옆자리가 비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자 가슴 속이 허전해 왔다.
설희가 없는 것이다. 설희가 밤외출을
하는 것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었다.
설희가 박 노인의 집에 온 것은 불과 두 달
전인 지난 겨울의 일이었으나 그 동안
한번도 밤외출을 거른 적이 없었다.
(아무리 출신을 알 수 없는 계집이라고는
하지만.... )
박 노인은 입맛을 쩝 하고 다셨다. 매일
같이 되풀이되는 설희의 밤외출에 박
노인은 부아가 치밀었다. 물론 설희가 박
노인의 아낙도 아니고 첩도 아니었다.
그렇다고 시쳇말로 정부는 더더욱
아니었다. 설희는 그야말로 박 노인이 주워
온 여자인 것이다.
나이도 알지 못하고 이름도 알지 못했다.
설희라는 이름조차 박 노인이 눈 속에서
주웠다고 하여 붙인 이름이었다.
어느날 박 노인은 땔감으로 쓸 삭정이를
주우러 산에 올라갔다가 눈 속에 쓰러져
있는 여자를 발견했다.
여자는 눈 속에 쓰러져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었다. 박 노인이 아무리 어깨를
흔들어도 요지부동이었다. 박 노인은
여자가 혹시 죽은 것이 아닐까하여 여자의
코에 얼굴을 바짝 갖다댔다. 그러자 여자의
숨결이 희미하게 느껴졌다. 박 노인은
이번엔 여자의 손을 만져보았다. 눈 속에
쓰러져 있어서 그런지 여자의 손은
얼음장처럼 차가웠다.
(허,이런 낭패가 있나?)
박 노인은 몹시 난처했다. 여자는 옷이
너덜너덜 헤어져 있었고 얼굴은 흙먼지가
묻어 더럽기 짝이 없었다. 그러나 자세히
얼굴을 살피자 상당한 미인이었다. 나이는
알 수 없었으나 묵직해 보일 정도로 커다란
가슴과 풍만한 둔부가 알맞게 균형이 잡혀
있었다.
박 노인은 여자를 들쳐 엎고 집으로
돌아오기 시작했다. 그날도 하늘에서는
눈발이 하얗게 날리고 있었다. 멀고 가까운
산들이 자욱하게 날리는 하얀 눈발로 잿빛
천지가 되고 길바닥에 쌓인 눈으로 발목이
푹푹 파묻혔으나 박 노인은 개의치 않았다.
박 노인은 소년처럼 가슴이 두근거렸다.
다행히 눈이 자욱하게 내리고 있어서인지
길에는 행인이 없었다. 박 노인은 여자를
안방에 눕혔다. 새벽에 군불을 지폈기
때문에 방바닥에는 아직도 따뜻한 온기가
남아 있었다.
박 노인은 여자를 눕힌 뒤 부엌으로 나가
또 군불을 지폈다. 여자가 눈 속에 쓰러져
있었기 때문에 몸이 잔뜩 얼어 있었다.
여자를 소생시키려면 몸을 따뜻하게
해주어야 했다. 물론 얼어 죽어 가는
여자의 몸을 따뜻하게 해주는 것은 남자와
동침을 하는 것이 좋은 방법이기는 했다.
그런 것은 어릴 적에 동네 어른들한테서도
수 없이 들었고,독짓는 늙은인가 뭔가 하는
영화도 그렇게 해서 여자를 살리고 여자와
함께 살림을 차렸던 것이다.
박 노인은 아직도 그 영화가 잊혀지지
않았다. 늙수그레한 황혼에 찾아온 젊은
여인,그 여인과의 애욕,젊은
남자,보리밭,철부지 아들..... 영화의 끝
부분은 기억나지 않았으나 젊은 여인이
떠나간 뒤 노인이 혼자 남아 독을 짓는
모습은 박 노인에게도 눈물을 글썽거리게
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박 노인은 여자의 몸에 손을 댈
생각이 추호도 없었다. 여자가 누구인지도
알 수 없었을 뿐 아니라 우선 여자를 먼저
살려야 했던 것이다.
박 노인이 아궁이에 불을 잔뜩 지피고
방으로 들어오자 여자는 그때까지도
깨어나지 않고 있었다. 박 노인은 여자
옆에 책상다리를 하고 앉아서 여자의
얼굴을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여자의
얼굴은 아직도 창백했다.
박 노인은 입가에 슬그머니 흥건한
미소를 지었다. 갑자기 여자와 살을 섞는
생각을 하자 늙은 그의 아랫도리가
묵직해지기 시작했던 것이다.
(이거 내가 공연한 짓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박 노인은 갑자기 두려운 생각이 들었다.
여자가 깨어나면 무슨 봉변을 당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뇌리를 엄습해 왔다.
물에 빠진 사람을 구해 주면 보따리를
내놓으란다는 속담이 있듯이 여자도 무슨
요구를 할 지 알 수 없는 것이다.
박 노인은 낮게 한숨을 내쉬었다. 엉뚱한
짓을 했다는 생각이 다시 뇌리를 엄습해
왔다. 여자를 집으로 데리고 오는 것보다
병원으로 데리고 갔어야 했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러나 여자의 행색을 자세히
살피자 그런 걱정은 하지 않아도 좋을 것
같았다. 여자는 행색이 남루하기 짝이
없어서 무슨 사연이 있어서 집을 나왔다기
보다는 거렁뱅이 짓을 하며 돌아다니는
여자가 분명해 보였던 것이다.
여자는 박 노인이 집으로 데리고 온지
거의 하루가 다 되어서야 깨어났다. 그러나
과거를 기억하지 못했고 자신이 어디서
왔는지,무엇을 하는 사람인지,가족들이
있는지 없는지 전혀 알지 못했다. 마치
기억상실증에 걸린 사람처럼 자신의 과거를
전혀 모르고 있었다. 그래도 다행인 것은
여자가 스스로 옷을 갈아입는다던가 밥을
먹는 일 따위를 한다는 것이었다. 그것 뿐
아니라 여자는 손수 밥까지 짓고 빨래도
하였다.
박 노인은 여자가 과거를 기억하지
못하는 것이 오히려 흐뭇했다. 여자의
과거를 알지 못해 한가닥의 불안이
머릿속에 자리잡고 있었으나 젊은 여자의
희고 매끄러운 몸이 그것을 잊게 했다.
옷을 갈아 입히자 여자는 선녀처럼
아름다웠다. 중국 동양화의 미인도처럼
갸름한 얼굴이며 뽀얗게 흰 살결,반달 같은
눈섶과 검은 머리,우뚝선 콧날,그리고
앵두처럼 붉은 입술.... 박 노인은 여자를
볼 때마다 숨이 막히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내가 꿈을 꾸고 있는 게야. )
박 노인은 그런 생각을 했다. 여자는 박
노인과의 잠자리도 거부하지 않았다. 마치
그렇게 하는 것이 당연한 의무이기나
하듯이 다소곳이 박 노인을 자신의
몸속으로 받아들였다. 박 노인에게서
노추()가 느껴질만도 한데 도무지 그런
내색을 하지 않았다.
게다가 여자는 요즈음의 젊은 여자답지
않게 머리를 곱게 빗어 가르마를 탄 다음
비녀를 꼽아 신비스러운 분위기까지 풍기고
있었다. 옷도 언제나 눈()처럼 흰
저고리와 소복() 같은 치마만 입었다.
박 노인이 여자의 밤외출을 알게 된 것은
여자가 박 노인의 집에 온지 보름쯤 지났을
때였다. 박 노인이 새벽에 소피를 보기
위해 눈을 뜨자 옆자리가 덩그러니 비어
있었다. 박 노인은 여자가 뒷간이라도
갔으려니 했으나 한참을 기다려도 여자는
돌아오지 않았다.
박 노인은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여자가
늙은이와 살기가 싫어서 야반도주를 한
것인지도 모른다고 생각하자 가슴이
미어지는 것 같았다. 박 노인은 반 시간이
지나도록 여자가 돌아오지 않자 마당으로
나섰다.
한겨울이었다. 기온은 영하로 떨어져
날씨가 살을 에일 듯이 추웠다. 박 노인은
어깨를 잔득 움츠리고 집안을 살핀 뒤 바깥
마당을 휘휘 둘러보았다. 그러나 여자의
모습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박 노인은 허전했다. 박 노인은 밖으로
나가 마을의 고샅과 벌판,농수로까지
살폈다. 그러나 마을 어디에서도 여자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이것이 샛서방질을 하나?)
박 노인은 언뜻 그런 의심이 들었다.
여자가 돌아온 것은 얼추 날이 훤하게
밝아 오고 있을 때였다. 박 노인은 자리에
누워 엎치락뒤치락하다가 문 밖에서
인기척이 나자 재빨리 잠을 자는 체했다.
여자가 어디에 갔다가 왔는지 물어 보기가
겁이 났다. 여자를 다그치다보면 샛서방질
일까지 알게 될 것이고,그것이 빌미가
되어 여자가 떠날까봐 겁이 났던 것이다.
여자가 방으로 들어오자 찬바람이 휘익
불어 들어왔다. 박 노인은 눈을 질끈
감았다. 방에는 불이 꺼져 있어서 여자는
박 노인이 잠이 깬 것을 알아채지 못하고
있었다. 여자는 익숙한 몸짓으로 옷을 훌훌
벗고 자리에 누웠다.
박 노인은 끙,하고 한숨을 내쉬었다.
옷을 벗은 여자가 이불 속으로 들어오자
살이 닿았고,살이 닿자 여자의 몸이 꽁꽁
얼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여자는
몸이 꽁꽁 얼도록 어딘가 다녀왔던 것이다.
여자는 그 날 이후에도 거의 매일 같이
밤외출을 했다. 박 노인은 여자가 밤외출을
할 때마다 가슴을 졸였다. 여자가 자신을
배신하고 달아날 것 같아 견딜 수가
없었다.
박 노인은 마침내 여자를 미행하기
시작했다. 여자의 밤외출을 알고 나서 얼마
되지 않았을 때였다.
(야행증인가?)
박 노인은 여자를 미행하다가 말고
고개를 갸우뚱했다. 여자는 밤외출을 하여
누군가를 만나는 것이 아니라 마을과
뒷산을 미친 듯이 쏘다니다가 집으로
돌아오는 것이 고작이었던 것이다. 박
노인은 여자가 샛서방질을 하지 않는 것이
다행스러웠으나 궁금증이 일어났다. 여자가
야행증이나 몽유병이 아니라면 밤중에
자다말고 일어나서 돌아 다닐 리가 없는
것이다.
박 노인은 그 후부터 설희를 미행하지
않았다. 설희가 샛서방질을 하기 위해
하는 것이 아닌 이상 굳이 뒤를
밟을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밤에 혹시 꿈을 꾸나?"
언젠가 박 노인이 설희에게 넌지시
물어본 일이 있었다.
"네. "
설희가 몽롱한 눈빛으로 대답했다.
설희의 눈빛은 꿈을 꾸듯 먼 허공을 더듬고
있었다.
"무슨 꿈?"
"영혼마차. "
설희가 기운 없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마을과 야산을 헤매고 다녀 지친
기색이었다.
"영혼마차?"
박 노인은 어리둥절했다.
"네. "
"영혼마차가 뭔데?"
"영혼을 싣고 다니는 마차예요. "
"영혼을 싣고 다니는 마차?그런 마차가
어디 있어?"
"난 가지고 있었어요!그건 제 남편
거예요. "
뜻밖에 설희가 단호한 목소리로 외쳤다.
박 노인은 설희의 얼굴을 쳐다보고는 입을
다물고 말았다. 설희의 얼굴이 전에 없이
차갑게 굳어 있었다. 게다가 영혼마차라는
말도 생소하기 짝이 없어서 그런 이상한
대화를 나누고 싶지 않았다.
박 노인은 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나왔다. 바깥은 아직도 미명의 새벽이었다.
이제서야 겨우 동쪽 하늘이 희미하게 밝아
오고 있을 뿐 벌판과 마을엔 어둠이 짙게
깔려 있었다.
(바람이 차군. )
박 노인은 눈살을 찌푸렸다. 바람이 불면
자꾸 눈물이 비어져 나와서 여간
주접스러운 것이 아니었다. 그러나 설희가
어디로 갔는지 보이지 않아 걱정이 되었다.
박 노인은 마을을 한 바퀴 돌았다. 아침이
이른 집은 소 여물을 쑤는지 푸른 연기가
모락모락 피어 오르고 있었다. 그러나
대부분의 집들은 불이 꺼진 채 조용했다.
(이 애가 산에 올라갔나?)
마을을 한 바퀴 돌아도 설희가 보이지
않자 박 노인은 뒷곁의 야산을 휘적휘적
오르기 시작했다. 설희를 처음 발견한
산이었다. 집 바로 뒤의 산은 낮으막했으나
그 뒤로는 험준한 산들이 첩첩으로 이어져
있었다. 태백산맥에서 갈라져 나온
소백산맥의 지맥이었다.
설희는 집 바로 뒤의 산골짜기에 쓰러져
있었다.
(저것이 뭘까?)
박 노인이 산중턱에 이르자 저만치 앞에
있는 나무가지에 희끗희끗한 옷가지가
매달려 대롱거리고 있는 것이 보였다.
낯익은 여자의 옷이었다. 박 노인은 눈이
커지면서 가슴이 터질 듯이 방망이질을
치는 것을 느꼈다. 그 옷은 설희의 옷이
분명했다. 박 노인은 달음질을 치듯이
허겁지겁 산을 올라갔다.
아 .....
박 노인은 나무가지에 대롱거리고 있는
옷가지가 시야에 뚜렷이 들어오자 가슴이
철렁했다. 설희가 나뭇잎이 모두 떨어진
상수리나무 가지에 매달려 대롱거리고
있었다. 설희가 목을 맨 것이었다.
박 노인은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흔들었다. 마치 꿈을 꾸고 있는 것처럼
정신이 몽롱했다. 그러나 박 노인은
비틀거리는 걸음으로 설희에게 다가갔다.
설희는 이미 숨이 끊어진지 오래된
모양으로 사지가 축 늘어져 있었다.
(이럴 수가 없어.... )
박 노인은 비통했다. 지난 밤에도 설희는
박 노인의 옆에 누워 아기처럼 편안하게
잠을 잤었다. 그런데 그 설희가 죽은
것이다. 박 노인은 설희의 죽음이 믿어지지
않았다. 자신도 모르게 휘청대는 걸음으로
설희에게 다가가서 발목을 잡아 보았다.
그러나 설희의 발목은 이미 싸늘하게 식어
있었다.

미경은 최종열의 원고에서 시선을
센 최종열이 무엇 때문에 박 노인과
설희라는 여자를 소설 속에 등장시켰는지
전혀 이해할 수가 없었다.

6

미경은 우두커니 허공을 쳐다보았다.
시간은 이제 새벽 1시가 지나 있었다.
그러나 창 밖에는 줄기차게 비가 내리고
있었다.
(이 소설은 아직 10. 26이나 12. 12는
언급도 하지 않고 있는데 왜 그런 것일까?)
미경은 최종열의 작품 의도를 파악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설희라는 여자의
죽음이 기묘한 느낌으로 가슴에 젖어드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미경은 침대에서 일어나 앉아서 다시
최종열의 소설을 읽기 시작했다. 오랫동안
침대에 엎드려 원고를 읽은 탓에 팔이
아팠다. 그러나 원고는 계속 읽어야 했다.

박 노인은 멀뚱멀뚱 형사를 쳐다보았다.
형사는 박 노인의 대답이 마땅치 않은지
짜증을 부리며 입맛을 다시고 있었다.
"할아버지. 알만한 분이 왜
이러세요?할아버지가 죽은 여자 신원을
모른다는 것이 말이 됩니까?"
"나도 딱합니다. 모르는 것을 모른다고
하지 어떻게 하겠소?"
"그럼 처음부터 다시 시작합시다. 죽은
여자를 어떻게 만났어요?"
"눈 속에 쓰러져 있는 것을 데려 왔소. "
"눈 속에요?"
"그렇소. "
"죽은 여자는 무엇 때문에 눈 속에
쓰러져 있었습니까?"
박 노인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그것은
박 노인도 몹시 궁금해 하던 일이었다.
"모르오. "
"여자의 이름은 어떻게 됩니까?"
"모르오. "
"여자가 말하지 않던가요?"
"전혀 말하지 않았소. 여자는 무엇을
하는 여자인지,어디에 사는 여자인지 한
번도 말하지 않았소. 심지어 여자는 자신의
이름조차 말하지 않았소. 여자가 기껏 말한
것은 영혼마차라는 말뿐이었소. "
"영혼마차가 무엇입니까?"
"영혼이 타고 다닌다는 마차요. "
박 노인은 씁쓸하게 웃었다. 박 노인도
영혼마차가 무엇인지 궁금하기만 했다.
형사는 박 노인을 의뭉스러운
눈으로 살피며 윽박지르고 있었다.
"그 밖에 다른 말은 하지 않았습니까?"
"안했소. 내 생각엔 기억상실증에 걸린
여자 같았소. "
"처음 그 여자를 보았을 때의
옷차림,그러니까 눈 속에 쓰러져 있었을
때의 행색은 어땠습니까?"
"거지 꼴이었소. 그래서 집으로 업고 와
방에 눕히고 불을 때서 몸을 따뜻하게
해주었소. "
"그 뒤에 같이 살았습니까?"
"그렇소. "
"여자가 눈 속에 쓰러져 있었던 것은
언제입니까?"
"지난 12월이요. "
"작년이요?"
"그렇소. "
박 노인은 주머니를 뒤져 담배를 찾아
물었다. 그러자 형사가 라이터를 꺼내 불을
붙여 주었다.
"사건이 나던 날 밤 여자와 같이
주무셨습니까?"
"같이 잤소. "
"그런데 새벽에 나갔다는 말씀이죠?"
"새벽인지 밤인지는 모르겠소. 나는 잠을
자고 있었으니까.... 새벽에 깨어나 보니
여자가 없었소. "
"그래서 찾아 나섰다는 말씀이죠?"
"그렇소. "
박 노인은 무겁게 한숨을 내쉬었다. 박
노인은 아직도 설희의 죽음이 실감되지
않고 있었다.
"동침도 하셨습니까?"
형사가 박 노인을 우두커니 째려보다가
퉁명스럽게 말질을 했다.
"그렇소. "
"아무튼 좋습니다. 여자의 신원이야 지문
조회를 하면 금방 알 수 있으니까요.
그런데 죽은 여자가 그 높은 상수리나무
가지에 올라가서 목을 맬 수 있을까요?"
"모르겠소. 내 생각엔 그 나무에는
올라가지 못할 거 같소. "
"그렇다면 살해되었다는 얘기 아닙니까?"
"나도 살해되었다고 생각하오. 이래뵈두
나도 경찰에서 늙은 몸이오. 자신의
과거조차 기억하지 못하는 여자가 어떻게
자살할 생각을 하겠소?게다가 목을 맨
나이롱줄은 우리 집에 없는 거요. "
"그럼 그 나이롱줄을 마을에서 본 일이
있습니까?"
"없소. "
박 노인은 잘라 말했다.
"그렇다면 외부에서 살인자가 왔다는
얘기 아닙니까?"
"모르겠소. "
"아무튼 좋습니다. 여자가 살해된 것은
분명하고 현재는 목격자도 없고 뚜렷한
용의자도 없습니다. 물론 수사는 우리가
하겠지만 영감님도 집에 조용히 계십시요.
영감님이 경찰에서 청춘을 보낸 분이라
일단 댁으로 보내 드리는 겁니다. "
"알겠소. "
박 노인은 젊은 형사의 훈계조 얘기를
듣고서야 수사계를 나왔다. 젊은 형사의
말은 모두 사실이었다. 박 노인이
경찰관으로 근무하다가 정년퇴직을 하지
않았더라면 젊은 형사는 구속부터 하고
조사를 했을 것이 분명했다.
경찰서를 나오자 벌써 땅거미가 어둑어둑
내리고 있었다. 박 노인은 경찰서 골목을
느릿느릿 걷다가 순대국집에 들어가 국말이
한 그릇을 시켜 놓고 소주 한 병을 비운
뒤에야 집으로 돌아왔다.
집은 썰렁한 냉기가 돌고 있었다. 박
노인은 군불도 지피지 않고 이불을 깔고
누웠다. 술기운이 돌기도 했으나 몹시
피로했다. 오늘 하루의 일이 모두 거짓말
같고 여전히 꿈을 꾼 기분이었다.
박 노인은 그날 밤 선잠을 잤다. 바람도
불지 않는데 머리맡이 어수선하고 잠자리가
뒤숭숭했다. 눈을 감으면 설희의 얼굴이
어둠 속에서 하얗게 떠오르고 눈을 뜨면
사라지곤 했다.
이튿날 박 노인은 새벽에 눈을 떴다. 온
몸이 으실으실 떨리고 있었다. 불을 때지
않은 방바닥이 새벽이 되자 얼음장처럼
냉골로 변해 있었다.
박 노인은 부엌에 나가 군불부터 지폈다.
연탄을 피우는 방이 있었으나 연탄을
갈기가 싫어서 항상 군불을 지피고
살았었다. 마른 장작에 불이 붙자 박
노인은 아궁이 앞에 쭈그리고 앉았다.
비로소 몸이 따뜻해지면서 한껏 늘어지는
기분이었다.
(도대체 어느 놈이 설희를 죽였을까?)
박 노인은 설희의 하얀 얼굴을 생각하며
두 눈을 훔쳤다. 설희의 죽음 때문에 두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 괴고 있었다.
(설희가 죽다니.... )
박 노인은 허망했다. 설희가 무엇을 하던
여자인지,어디에 살던 여자인지 알 수
없었으나 박 노인은 설희로 인해 잠깐 동안
이나마 쓸쓸한 노후를 행복하게 살 수
있었다. 어쩌면 그것은 분에 넘치는
행복이었는지도 알 수 없었다. 그러나
설희가 죽었다고 생각하자 앞으로의 여생이
적막하게만 생각되었다.
날이 밝자 박 노인은 읍내로 나가서
해장국 한 그릇을 먹고 돌아왔다.
읍내 경찰서에서 형사가 전화를 걸어온
것은 겨울해가 설핏이 기울고 있을 때였다.
형사는 설희의 신원이 밝혀졌는데 이름은
채은숙()이고,나이는 36세이며,전
중원일보() 정치부 기자
강한섭()의 부인이라고 말했다.
아울러 설희의 죽음을 수사하기 위해
수사본부가 설치될 것이며 서울에서
기자들이 몰려와 취재 경쟁을 벌일
것이라고 말했다.
박 노인은 형사의 전화를 받고 난감했다.
가슴이 답답하여 견딜 수가 없었다. 설희의
죽음조차 황망하기 짝이 없는데 수사본부가
설치되고 기자들이 몰려올 것이라고
생각하자 가슴이 터질 것 같았다. 그러나
설희의 죽음은 반드시 밝혀져야 한다고
생각했다.
형사의 말대로 마장면 지서에 수사본부가
설치된 것은 이튿날 아침이었다. 그러나
수사본부가 설치되기에 앞서 서울에서
기자들이 몰려와 열띤 취재 경쟁을 벌였다.
형사들은 어찌된 일인지 건성건성 수사를
하고 있었다. 경찰 생활을 오랫동안 한 박
노인은 경찰이 수사에 열의가 없다는 것을
담박에 알아 차렸다. 기자들도 설희의
죽음을 사회면에 일제히 보도했으나 열띤
취재경쟁을 벌이던 것과는 달리 한
귀퉁이에 조그맣게 보도하고 말았다.
(하기야 여자 한 사람 죽었다고 신문에서
대대적으로 보도할 리가 없지. )
박 노인은 신문이 설희의 죽음을
대서특필하지 않은 것을 이해했다. 설희의
죽음은 비록 살해되었을 가능성이 많다고
해도 단순하게 목을 매어 죽은 것이다.
엽기적인 살인이 아닌 만큼 세간의 화제를
불러 일으키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수사본부는 사흘 동안 형식적인 수사를
한 뒤에 사건을 자살로 매듭짓고 말았다.
신문도 경찰의 발표를 그대로 보도했다.
(설희는 자살한 것이 아니야!)
박 노인은 경찰의 발표와 신문의 보도에
강한 불만을 느꼈다. 신문은 경찰의 발표를
짤막하게 인용하여 보도하고 있을
뿐이었다. 게다가 설희의 남편인 전
중원일보 기자 강한섭이 남한강 상류의
야산에서 목을 매어 죽은 시체로 발견된 뒤
설희가 그 충격으로 정신이상을 일으켰다는
토막 기사 하나는 박 노인에게 더욱 커다란
의혹을 불러 일으켰다. 공교롭게도 남편과
부인이 모두 목을 매어 죽은 것이다.
그러나 박 노인이 사건을 수사할 수는
없었다. 다만 남편의 어처구니없는 죽음에
비통해 하는 설희,그리고 그 충격을
극복하지 못하고 정신이상을 일으켜 거리를
방황하는 설희의 애처로운 모습을 생각하자
가슴이 찢어지는 것 같았다.

미경이 잠자리에 든 것은 새벽 3시가
5분이나 지났을 때였다. 최종열의 소설에
등장하는 채은숙과 강한섭이 누구인지
미경은 비로소 알 수 있었다. 그리고
그들이 그렇게 비통하게 죽었다는 사실에
가슴이 아팠다. 강한섭은 민족지
중원일보의 정치부 기자로 70년대 말과
80년대 초에 쟁쟁한 이름을 날렸었다.
(최종열은 실명으로 소설을 이끌어 가고
있어!)
미경은 눈을 감은 채 최종열이 소설
속에서 주장하려고 한 것이 무엇인지 알아
내려고 골똘히 생각에 잠겼다. 그러나
최종열의 작품 의도가 무엇인지 아직도
파악할 수가 없었다.
미경은 그날 잠을 이루지 못했다.
최종열과 이지애,그리고 최종열의 소설
속에 나오는 인물들이 자꾸 미경의 꿈 속에
나타나고 있었다.
미경은 아침 8시에 일어났다. 서울발
새마을호 열차가 8시40분에 출발하기
때문이었다.
날씨는 쾌청했다. 새벽까지 내리던 비는
언제 그쳤는지 하늘이 유리알처럼 맑게
개어 있었다. 전형적인 가을 날씨였다.
새마을호 열차가 지나는 들은 황금빛으로
출렁거리고 있었고 먼 산은 붉게 단풍이
들어 추색()이 짙었다.
미경은 열차가 서울에 도착할 때까지
내내 차창에 기대어 가고 오는 들판을
내다보았다. 차창을 스치는 가을 풍경은
풍요롭다 못해 쓸쓸해 보이기까지 했다.
미경이 아파트에 도착한 것은 오후 2시가
지났을 때였다. 미경은 샤워도 하지 않고
침대에 누웠다. 잠을 설쳤기 때문에 금방
잠이 오리라고 생각했으나 기이할 정도로
잠이 오지 않았다. 미경이 침대에
누웠는데도 그때까지도 덜컹대는 열차의
굉음이 귓전에 이명처럼 쟁쟁하게 남아
있었다.
미경은 잠이 오지 않자 침실에서 나와
거실의 소파에 앉았다. 최종열의 소설을
다시 읽을 생각이었다.
(소설의 구성을 절묘하게 짜고 있어. )
미경은 거실의 소파에 앉아서 동작대교
쪽을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집에
돌아오자 안온한 기분과 함께 허전한
느낌이 들고 있었다. 안온한 느낌은 낯선
곳에서 무사히 돌아왔다는 안도감과
편안함이었고,허전한 것은 최종열의 실종과
이지애의 죽음을 확인했으면서도 아무 것도
하지 못했다는 무력감이었다. 미경은
입언저리에 씁쓸한 미소를 떠올렸다. 낯선
곳,모르는 남자,뱃고동소리가 은은한
부두,그리고 처량하게 내리는 가을비....
한 작가의 실종과 그의 정부인 여자의
의문사.... 미경은 가슴 속으로 여러 가지
의문이 뭉게뭉게 일어나는 것을 느끼며
최종열의 원고로 시선을 떨어뜨렸다.
최종열이 중원일보의 정치부 기자를 동원한
것은 소설에 리얼리티를 부여하려는 의도로
보였다. 한경호와 이정란이라는 인물이
무엇 때문에 등장하고 있는지는 알 수
없었으나 강한섭 기자의 부인이 등장하는
것은 7,80년대의 정치상황이 암울했다는
것을 상징하는 장치로 생각되었다.

박 노인은 명치 끝을 손으로 지그시
눌렀다. 며칠째 가슴이 꽉 막혀 있는
기분이었다. 설희가 죽은 뒤의 일주일이 박
노인에게는 세상이 무너진 듯 참담하기만
했다. 경찰의 조사나 기자들의 취재는
형식적인 것이어서 그다지 불편하지
않았으나 설희의 죽음은 박 노인의 가슴을
도려내는 것 같았다. 10년 전 늙은 아내가
병으로 죽었을 때도 박 노인은 이처럼
커다란 슬픔을 느끼지는 않았었다. 아내가
위장암으로 거의 6년이라는 긴 세월을
시름시름 앓다가 죽은 탓도 있겠으나 박
노인은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았었다.
그러나 설희의 죽음은 견딜 수 없도록
비통하고 쓸쓸했다. 설희가 채은숙이라는
어엿한 이름이 있고,강한섭이라는 남편까지
있었으나 박 노인은 그런 것들이 모두 거짓
같았다. 설희는 오로지 박 노인 자신만을
위해 존재하다가 죽은 여인으로만 여겨지고
있었다.
(그렇게 죽으려면 무엇하러 이 곳까지
왔을까?)
박 노인은 설희가 원망스럽기까지
하였다.
그러나 박 노인은 매일 같이 설희의
환영을 그리며 살았다. 설희가 죽었는데도
불구하고 밤이면 옆에서 자고 있는 듯했고
낮에는 금방이라도 문을 열고 설희가
하얗게 웃으며 들어올 것만 같았다.
(참한 여자였어. )
박 노인은 설희를 생각하면서 산을 향해
비칠비칠 걸음을 옮겼다. 석양 무렵이었다.
짧은 겨울해가 서산으로 기울면서 찬바람이
일고 있었다. 날씨는 차가웠다. 어제
밤부터 기온이 곤두박질을 치기 시작해
영하의 날씨가 계속되고 있었다. 하늘은
얼음조각처럼 투명했다. 그러나 이따금
쩡쩡거리며 언하늘이 갈라지는 소리가
들렸다. 산을 오르는 황토 길바닥도 잔뜩
얼어붙어 있었다.
박 노인은 몸을 바짝 웅크리고 걸었다.
어쩌자고 산을 오르는지는 자신도 알 수
없었다. 그러나 설희를 처음 발견한
곳,그리고 설희가 죽음을 당한
상수리나무를 귀신 들린 듯이 올라갔다가
내려오는 것이 박 노인의 요즈음 일과였다.
박 노인은 설희를 처음 발견한 곳부터
찾아갔다. 그 곳은 산의 중턱쯤 되는
골짜기였다. 장마철에는 물이 흐르기도
했으나 평소에는 칡넝쿨만 잔뜩 우거진
쓸모없는 골짜기였다. 그래도 골짜기가
깊어서 가을과 겨울에는 마른 나뭇잎이
수북히 쌓이곤 했다.
설희가 그 곳을 찾아와 쓰러진 것은
골짜기가 바람막이가 되어 주고 나뭇잎이
수북히 쌓여 있었기 때문일 것이었다.
설희는 나뭇잎을 쓸어 모아 깔고 밤을
지새려 했을 것이다. 그러나 설희는
굶주림과 추위에 지쳐 잠이 들었고 설희가
잠이 든 뒤에 눈이 내려 얼어 죽을 뻔했던
것이다.
(어쩌다가 이런 곳까지 찾아와 얼어 죽을
뻔했을까?)
박 노인은 골짜기에 도착하자 가슴이
저려왔다. 설희가 인가를 찾지 않고 산을
찾은 것은 그럴만한 사정이 있을 것으로
생각되었다.
박 노인은 눈을 부비고 담배를 피워
물었다. 또 눈물이 그렁그렁 괴고 있었다.
(말년에 내가 분에 넘치는 복을 누린
거야.... )
박 노인은 죽은 설희에게 미안한 생각이
들었다. 설희가 기억상실증에 걸리지
않았다면 이런 산골까지 찾아 오지도
않았을 것이고 자신처럼 늙은 노인에게
몸을 유린 당하지도 않았을 것이었다.
설희는 가족이 있는 여자였다. 남편은
죽었으나 자녀들도 있을 것이고 시집
식구들이나 친정 식구들도 있을 것이다.
그들이 늙은이가 설희의 몸을 유린한 것을
알면 얼마나 가슴 아파할 것인가. 설희
역시 싸늘한 시체가 되기는 했지만 영혼이
있다면 저승에서라도 자신을 증오할
것이다.
박 노인은 그 생각을 하자 가슴이
저렸다.
박 노인은 설희가 쓰러져 있던
골짜기에서 한참동안이나 서 있다가 죽은
장소로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벌써 해가
떨어져 가고 있어서 산은 땅그림자가 길게
깔리고 있었다. 이제 곧 칠흑 같은 어둠이
사방을 덮을 것이고,그렇게 되면 어느
골짜기에서 늑대의 울음소리 같은 음산한
여우 울음 소리가 들릴 터였다.
박 노인은 몸을 부르르 떨었다. 날씨가
차갑기도 했지만 산의 분위기가
으스스했다. 박 노인은 걸음을 조금 빨리
했다. 발 밑에서 나뭇잎이 밟히는
바스락소리도 기분이 좋지 않았다. 바람은
앙상한 나무가지를 을씨년스럽게 흔들고
있었다.
이내 박 노인은 설희가 죽은 상수리나무
밑에 이르렀다. 가슴이 뻐근해 왔다. 한때
살을 섞고 살던 여자였다. 그 여자가
있었기에 박 노인은 겨울을 따뜻하게 지낼
수 있었다.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을까. 박 노인은 설희가 눈 속에 쓰러져
있고,자신과 함께 두 달 남짓 살을 섞으며
함께 살고,갑자기 죽은 시체로 발견된 일이
믿어지지 않았다. 게다가 설희의 죽음을
조사하는 경찰의 수사도 싱겁기 짝이
없었다. 경찰은 의도적으로 자살로 매듭을
지은 것이 분명했다.
(내가 정녕 꿈을 꾸고 있는 것인가?)
그러나 꿈이 아닐 터였다. 집에는 설희가
입던 옷가지와 소지품들이 그대로 있었다.
옷가지는 모두 박 노인이 설희에게 사 준
것들이었다. 설희는 눈 속에 쓰러져 있었을
때 한겨울인데도 불구하고 얇은 여름옷
차림이었다.
박 노인은 낮게 한숨을 내쉬었다. 문득
설희를 목욕시켜 주고 옷을 갈아 입히던
일이 생각났다.
 (살결이 무척 고운 여자였는데.... )
박 노인은 그 생각을 하자 쓸쓸해 졌다.
설희의 희고 매끄러운 몸뚱이,농익은
과일처럼 단내가 풍기던 몸뚱이를 생각하자
가슴이 묵직하게 저렸다. 지난 두 달 동안
설희의 육체는 완벽하게 그의 소유였었다.
따뜻하고 부드러운,그러면서도 처녀의
살결처럼 뽀얗게 윤기가 흐르던 나신....
박 노인은 그 신비스러운 여체를
서러워하며 깊이 탐험했었다.
박 노인은 정년 퇴직을 한 후 남자로서의
기능이 상실되었었다. 특별히 남자로서의
기능을 발휘할 대상도 없었고 굳이 거리의
여자를 찾아가 관계를 맺고 싶지도 않았다.
그러다보니 자연스럽게 그 기능이
상실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설희는 그에게 남자의 기능을
회복시켰을 뿐 아니라 삶의 의미까지 찾아
주었던 것이다.
(참,소지품 중에 서류봉투가 있었지?)
박 노인은 문득 설희의 소지품 생각이
났다. 설희의 소지품은 박 노인이 장농속
깊이 넣어 두었었다.
(그래. 그것이 무엇인지 알아봐야겠어. )
박 노인은 몸을 돌려 집으로 빠르게 걷기
시작했다. 설희에게는 그 봉투를 박 노인이
가지고 있다고 말하지 않았었다. 혹시라도
설희가 그 봉투를 찾게 되면 박 노인을
떠날까봐 걱정이 되었던 것이다.
마을로 내려오자 사방이 캄캄하게
어두워져 있었다. 박 노인은 서둘러 집으로
들어가 장농속을 뒤졌다. 다행히 설희의
서류봉투는 그대로 있었다. 박 노인은 불을
켜고 서류봉투를 꺼냈다.
서류봉투엔 두툼한 노트가 들어 있었다.
박 노인은 노트의 첫장을 펼쳤다.

영혼마차

노트의 첫장엔 뜻밖에도 '영혼 마차'라는
글자가 큼직하게 씌어 있었다.
(설희가 찾던 것이 이 노트였던가?)
박 노인은 커다란 흉기로 뒤통수를
얻어맞은 듯이 정신이 번쩍 났다. 박
노인은 자신도 모르게 영혼마차라는 제목이
붙어 있는 설희의 노트를 읽기 시작했다.

제5장 떠나가는 영혼들

1

미경은 고개를 갸우뚱했다. 최종열의
소설은 액자소설 얼개로 전개되고 있었다.
설희와 박 노인이 등장하는 부분은 거기서
끝이 나고 소설은 다시 이정란이라는
여자로 시작되고 있었다. 소설은 두 여자의
삶을 번갈아 교차시키며 전개되는 것
같았다. 그러나 소설의 도입부가 모두
의문의 죽음으로 시작되고 있는 것이
이채로웠다.
미경은 차창 밖을 우두커니 내다보았다.
박 노인이 설희와 육체 관계를 맺은 생각을
하자 기분이 이상했다.
 미경은 고개를 설래설래 흔들었다.
최종열이 무엇 때문에 민족지 중원일보의
기자인 강한섭의 부인 채은숙을 박 노인의
정부로 격하시켰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소설이 끝을 맺은 것은 아니었으나 그것은
죽은 강한섭 기자나 그 부인을 욕되게 하는
일이 분명했다.
(혹시 이것은 실화가 아닐까?)
미경은 거기까지 생각하자 가슴이 뻐근해
왔다. 중원일보의 기자 강한섭의 죽음은
아직도 수수께끼로 남아 있었다. 경찰이
자살로 단정을 내렸으나 세간에서는
타살이었을 것이라는 추측이 무성했다.
미경은 다시 최종열의 소설을 읽기
시작했다. 최종열의 소설이 어느덧 미경을
사로잡고 있었다.

 날씨는 가을답지 않게 후덥지근했다.
거리는 어둠이 칠흑처럼 덮여 있었으나
군데군데 들어차 있는 숙박업소의 불빛으로
인해 빛과 어둠의 경계가 뚜렷했다. 비가
오려는 것일까. 이따금 축축한 물기가 묻어
있는 바람이 보도에 서 있는 가로수들의
무성한 잎사귀를 검푸르게 흔들고
지나갔다.
경기도 여주군 여주읍. 남한강()의
지류를 따라 강변도로가 동서로 길게 뻗어
있고,경관이 수려한 강변으로 여관과
모텔이 즐비하게 늘어 서 있는
숙박업소지대에 <아리랑파크>는 서 있었다.
읍내 번화가에서는 불과 5분,10분밖에
걸리지 않는 거리였다. 그러나
별장지대처럼 이 곳은 언제나 조용했다.
이따금 강파도소리만 바람소리에 섞여
0한가롭게 들려오는 것이 고작이었다.
1989년 10월9일. 여주 군민의 날인 이날
아리랑파크의 주인 강인숙()은
전날과 다름없이 내실에 앉아서 운수떼기
화투를 치고 있었다.
모텔은 조용했다. 룸은 아직도 비어 있는
곳이 많았으나 언제나 그렇듯이 12시가
되기 전에 모두 찰 것이고,그 무렵이면
손님들의 시중도 오()군 혼자서 충분히
감당할 것이다.
강인숙은 어깨를 부르르 떨었다. 감기
기운이 있는 것일까. 날씨가
후덥지근한데도 아까부터 전신에 오한이
일어나고 있었다.
(쌍화탕이라도 하나 마시던가
해야지..... )
강인숙은 화투장을 쓸어서 화투곽에 담고
늘어지게 하품을 했다. 멀리서 불꽃놀이를
하는 듯 함성소리가 요란하게 들려왔다.
강인숙은 손목을 들어 시계를 보았다. 밤
10시가 조금 지나있었다. 강변도로는
여전히 조용했다. 이따금 아베크족들과
술에 취한 젊은이들이 오가는 소리가
조용조용 들리고 있을 뿐이었다.
그때 인터폰의 벨이 삐리리 울렸다.
강인숙은 인터폰의 송수화기를 들었다.
508호에서 울리는 인터폰이었다. 508호엔
뚱뚱한 여자와 키가 멀쑥하게 큰 사내가
들어 있었다. 둘다 30대 후반으로 보였으나
여자는 장님이었다. 그러나 특별히 수상한
구석은 없는 사람들이었다.
"508호입니다. 술 좀 갖다가 주실래요?"
송수화기의 목소리는 기분 나쁘게 음침한
사내의 것이었다.
"무슨 술이요?"
"맥주요. 맥주 세병 하고 마른 안주 좀
갖다 줘요. "
"알았어요. "
강인숙이 대답을 하자 찰칵,하고
인터폰이 끊겼다. 강인숙은 송수화기를
내려놓고 밖을 내다보았다.
"오군아!"
"..... "
"오군아!"
강인숙은 복도를 내다보며 버럭 소리를
질렀다. 그러나 오군은 어디로 갔는지
대답이 없었다.
"얜 또 어디를 갔어?"
강인숙은 짜증을 부리며 냉장고에서
맥주를 꺼내고 비닐랴으로 포장을 한 마른
안주를 꺼내 컵과 함께 쟁반에 담았다.
오군이 보이지 않으므로 508호까지 손수
가져가야 했다. 그것은 어쩐지 꺼림칙하고
기분 나쁜 일이었다.
그러나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강인숙은
내키지 않았으나 쟁반과 맥주병을 들고
계단을 오르기 시작했다. 그런데 이상하게
걸음이 무거웠다. 그것은 계단을 오르면
오를수록 더욱 심해져 4층에 이를 땐
다리가 후들거리고 떨리기까지 했다.
(몸살이야. )
강인숙은 머릿속의 불길한 생각을
떨쳐버리기라도 하듯이 고개를 흔들었다.
강인숙이 508호의 문을 두드리자 사내가
문을 열어 주었다.
그때 강인숙은 방 안에서 찬바람이
휘익하고 불어오는 기분을 느꼈다.
강인숙은 등줄기가 서늘해지는 것을 느끼며
탯맥주와 안주쟁반을 사내에게 넘겨
주었다.
"고마워요. "
사내가 맥주와 쟁반을 받으며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강인숙은 사내의 미소가
자신의 몸을 벌레처럼 징그럽게 더듬고
있는 것 같아 얼굴을 찡그렸다.
"얼마지요?"
사내가 맥주와 쟁반을 들여놓고
강인숙에게 물었다.
"6천원예요. "
강인숙은 사내의 어깨 너머로 힐끗 방
안을 살폈다. 갑자기 여자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 궁금했다. 그러나 방 내부의 문이
반쯤 닫혀 있어서 안이 들여다보이지
않았다.
"잠깐만 기다려요. "
 사내가 안으로 들어갔다. 문은 열어놓은
채였다. 강인숙은 그때서야 벽에 등을
기대고 침대에 앉아 있는 여자를 흘깃
쳐다보았다. 여자는 눈()처럼 하얀 속옷
차림이었고,그래서 거대해 보이기까지 하는
여자의 젖무덤이 유(U)자로 깊숙이 파인
속옷 밖으로 풍만하게 드러나 있었다.
(몸이 뚱뚱하니 가슴까지도 저렇게 크군.
)
강인숙은 야릇한 질투심을 느끼며 낮게
한숨을 내쉬었다. 여자의 희고 뽀얀 가슴에
숨이 막히는 듯한 기분이었다.
여자는 밤인데도 검은 색의 선글라스를
쓴 채 미동도 하지 않고 있었다.
"여기 있어요. "
사내가 만원권 한 장을 강인숙에게
내밀었다.

"거스름돈을 안 가져 왔어요. 곧 갖다가
드릴께요. "
강인숙은 재빨리 여자에게서 시선을
거두고 사내를 쳐다보았다. 사내는
희미하게 웃고 있었다. 강인숙은 사내의
미소가 어쩐지 차갑게 느껴졌다.
"됐어요. "
"예?"
"나머지는 아주머니 심부름 값입니다. "
사내가 필요없다는 뜻으로 손사래짓을
했다.
"고맙습니다. "
강인숙은 약간 떨떠름한 기분을 느끼며
사내에게서 돈을 받았다. 자신이 모텔의
주인이 분명한데도 이따금 손님들로부터
종업원 취급을 받을 때가 있었다. 심지어는
돈을 주면서 동침을 요구하는 손님까지
있었다.
508호의 문이 딸칵하고 닫혔다. 강인숙은
그 자리에서 움직이지 않고 잠시 서
있었다. 붉은 카피트가 깔린 복도 저
켠에서 축축하고 어두운 바람이 불어오고
어디선가 개짖는 소리가 희미하게 들렸다.
아니 개짖는 소리가 아니라 저 먼
골짜기에서 피에 굶주린 늑대가 울고 있는
듯한 소리였다.
(내가 왜 이런 생각을 하지?)
강인숙은 고개를 살래살래 흔들었다.
공연한 생각이었다.
강인숙은 황급히 계단을 내려가기
시작했다. 1층 현관에 도착하자 오군이
담배를 꼬나물고 있었다.
"어디 갔었니?"
강인숙은 내실로 들어가며 오군에게 눈을
오군이 담배를 피우는 태도에
불량끼가 느껴졌다.
"밖에서 불꽃놀이 하는 걸 봤어요. "
오군이 머리를 긁적거렸다.
"그까짓 불꽃놀이를 뭘 볼 게
있다구..... "
"군민의 날이잖아요?공설운동장에서는
노래자랑도 한대요. "
"그런거 백날하면 뭘해?약방에 가서
쌍화탕이나 하나 사와. "
강인숙은 오군에게 천원짜리 한 장을
건네주었다.
"쌍화탕이요?"
"그래!"
"어느 손님이 감기 걸렸어요?"
"손님이 아니라 내가 걸렸어. "
강인숙이 짜증스럽게 내뱉았다.
"알았어요. "
오군이 천원짜리를 받아들고 밖으로
나갔다. 강인숙은 내실에 우두커니 서
있다가 복도로 나왔다. 기분이 이상했다.
그들이 508호에 들어온 것은 이틀 전의
일이었다. 날이 어둑어둑 저물고 있을
때였다. 두 사람은 택시에서 내리자 강이
내려다보이는 방을 요구했고,그 방에
투숙한 뒤로는 식사를 하러 밖으로 나갈 때
외에는 거의 바깥 출입을 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특별히 소란을 피우는 일도
없었다.
지극히 평범한 손님이었다. 다만 사내가
이상하리만치 기분 나쁜 인상이었고 그가
옆을 지날 때면 찬바람이 이는 것 같은
서늘한 느낌이 들곤 했다. 여자도 어딘지
모르게 음울한 인상을 풍겼다. 물론 여자는
장님이었고 그래서 그런지 언제나 말이
없었다.
그러나 여자는 사내에 비해 부유해
보였다. 몸이 뚱뚱하긴 했으나 살결은 희고
매끄러웠고 옷은 고급스러웠다. 그러나
검은 안경은 그녀의 얼굴을 전체적으로
어두워 보이게 했다. 마치 죽음의 그림자를
끌고 다니는 듯한 기묘한 느낌이었다.
강인숙은 내실을 나와 모텔 앞 큰 길로
나섰다. 어둠이 삼단 같은 머리를 치렁치렁
늘어뜨리고 있는 강변도로로 물기 묻은
축축한 바람이 불어오고 있었다.
강인숙은 하늘을 우두커니 쳐다보았다.
멀리서 군민의 날을 축하하는 폭죽이
터지고 불꽃이 어두운 하늘을 화려하게
수놓았다. 그리고 탄성이 쏟아졌다.
사람들이 불꽃을 바라보며 환성을 지르고

강인숙은 그 환성을 꿈결인 듯 들었다.
몸이 좋지 않아서인지 환성이 날벌레들의
날개짓 같았다.
(비야!)
강인숙은 얼굴을 들고 낮게 중얼거렸다.
얼굴로 푸슷한 빗방울이 떨어지고 있었다.
바람도 일고 있는지 숙박업소들 앞에
조경용으로 심어 놓은 관상수의 잎사귀들이
검푸른 빛으로 나부끼고 있었다.

2

김순영()은 차() 보따리를 들고
천천히 다방을 나섰다. 또 여관
배달이었다. 늦은 시간이라 썩 마음이
내키지 않았으나 김순영은 걸음을
서둘렀다. 선택의 여지가 전혀 없었다.
그나마 티켓을 끊지 않은 것만 해도
다행이었다.
여주 일대는 티켓다방이 성업중이었다.
물론 모든 다방이 티켓을 위주로 영업을
하고 있지는 않았으나 적지 않은 다방들이
티켓을 위주로 영업을 하고 있었다.
김순영이 있는 다방도 티켓 다방이었다.
아가씨들이 다방 규모에 어울리지 않게
아홉이나 되는 것도 티켓 때문이었다.
티켓을 끊지 않아도 여관이나 술집으로
배달이 많았다.
김순영은 군청 건물쪽으로 걸음을
서둘렀다. 청사 뒤편이 오대산 어딘가에
원천이 있다는 남한강의 지류였고,그 강의
뚝을 따라 강변도로가 길게 뻗어 있었다.
그리고 강변도로와 인접하여 숙박업소들이
즐비했다.
(비가 오나?)
김순영은 군청의 담모퉁이를 돌다 말고
컴컴한 하늘을 쳐다보았다. 어두운
하늘에서 성긴 빗방울이 한 두 방울씩
뿌리고 있었다.
(이 가을에 무슨 비람!)
김순영은 얼굴을 찡그렸다. 바람까지
일고 있는지 빗방울이 차갑게 얼굴을
때리고 있었다.
김순영은 종종걸음을 치기 시작했다.
차를 배달시킨 것은 <녹원장> 여관이었다.
이름은 장급 여관이었으나 내부는
여인숙처럼 보잘 것 없었다. 녹원장은
신축건물인 아리랑파크 바로 옆에 있었다.
김순영은 종종걸음으로 골목길로
꺽어들었다. 담배가게 바로 옆으로
Q강변도로로 나갈 수 있는 좁은 골목이 하나
있었고,그 골목을 지나서 50미터쯤 가면
아리랑파크가 있었다.
골목은 조용했다. 군민의 날이기 때문에
곳곳에서 여러 가지 행사가 있었으나
이제는 모두 집으로 돌아갔는지 거리엔
인적이 끊기고 차량도 드물었다.
골목을 나서자 강변도로가 나타났다.
강변도로도 이미 썰렁하게 비어 있었다.
도로 밑의 강물은 소리없이 서쪽으로
흐르고 도로엔 지나는 차량이 없었다.
숙박업소들이 줄지어 서 있는 도로의
인도엔 오늘따라 아베크족도 보이지
않았다.
김순영은 인도를 따라 또박또박 걷기
시작했다. 발 밑에서 보도블록을 때리는
하이힐의 굽소리가 경쾌하게 들렸다.
돛흡족했다. 비록 차 배달을 하고
있었으나 새로 산 하이힐이 마음에 들었다.
스커트는 짧았다. 스커트 자락이
무릎에서 20센티나 올라가 겨우 둔부를
가리고 있을 정도였다. 위에는 타이즈처럼
몸에 착 달라붙는 검은 색의 울 셔츠였다.
머리는 얼굴이 앳되어 보이면서도 요염해
보이게 뒤로 묶어 틀어 올려 빗을 꼽았다.
다방에서 아가씨들과 노닥거리며 차를
마시는 손님들은 아가씨가 어리면서도
퇴폐적인 냄새를 풍기는 것을 좋아했다.
특히 티켓을 위주로 영업을 하는 다방은
아가씨들의 옷차림이 허벅지가 죄
드러나도록 짧은 미니 스커트나 반바지를
입어야 했다. 그런 차림을 해야만 손님들이
잘 찾았고 그와 비례해서 아가씨들의
수입이 늘어나는 것이다.
 김순영은 이미 티켓 다방의 그런 생리를
철저하게 파악하고 있었다. 그리고 이왕에
티켓다방에서 일을 할 바에야 체면 차리지
말고 돈을 벌자는 생각을 단단히 하고
있었다.
김순영은 문득 걸음을 멈추었다. 갑자기
찬바람이 휘익하고 불어오면서 가슴이
철렁하고 등줄기가 서늘했다. 아리랑파크
모텔 앞이었다. 김순영은 까닭을 알 수
없는 공포로 가슴이 격렬하게 뛰는 것을
느꼈다.
(왜 이러지?)
김순영은 가슴을 주먹으로 두드렸다.
어떤 공포로 인해 머리 끝이 곧추 서고
있는 기분이었다. 기묘한 일이었다.
김순영은 아리랑 파크의 붉은 건물을
올려다보았다. 착각이었을까. 그때 갑자기
아리랑파크의 어느 방에서 여자의 처절한
비명소리가 들렸다.
(무슨 일일까?)
김순영은 얼굴을 찡그렸다. 언뜻
아리랑파크의 어느 방에서 불량배가 여자를
겁탈하고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기 분 나쁜 일이었다. 김순영도 다방에서
차를 나르기 전 불량배들에게 끌려가
겁탈을 당한 일이 있었다.
그러나 여자의 비명소리는 두 번 다시
들려오지 않았다. 김순영은 고개를
갸우뚱했다. 아리랑파크의 방들은 드문드문
불이 켜져 있었으나 조용했다.
김순영은 녹원장을 향해 걸음을 재게
놀렸다.
녹원장에서 차를 시킨 사람은 뜻밖에
40대의 남자 혼자였다.
김순영은 침대에 걸터앉아 있는 사내에게
고개를 살짝 숙이고 차 보따리를 풀렀다.
"밤인데 커피를 드세요?"
김순영은 프림과 설탕을 타면서 셈에
없는 얘기를 건넸다.
"잠이 오지 않아서.... "
사내가 담배를 물면서 말 끝을
얼버무렸다. 사내는 파자마 차림이었다.
머리가 단정한 것으로 보아 출장을 나온
회사원 같았다.
김순영은 스커트 주머니에서 라이터를
꺼내 사내에게 불을 붙여 주었다.
"그럼 술을 드시죠. "
김순영은 애교스럽게 눈웃음을 쳤다.
"혼자서 무슨 기분으로 술을 마셔?"
"여기 혼자 오셨어요?"
"응. "
"그럼 밖에 나가서 술도 마시고
그러세요. "
"아가씨하고 같이 마시면 모를까 무슨
재미로 혼자 술을 마셔?"
"저두 사 주실래요?"
"마실래?"
"사 주시면 마시죠. "
김순영이 살갑게 눈웃음을 쳤다. 어차피
사내가 여관으로 차를 주문한 것은 꿍꿍이
속이 있었기 때문일 거였다.
"티켓을 끊어야 하나?"
사내도 티켓 다방에 대해서는 들은
풍월이 있는 모양이었다. 하긴 요새 남자들
중에 티켓 다방을 모른다면 숙맥일 것이다.
"네. 두 시간만 끊으세요. "
김순영은 기분이 좋아졌다. 아리랑파크
앞에서 느끼던 이상한 공포는 점점
사라지고 있었다.
"그러지. "
사내가 빙그레 웃었다. 김순영은 다방에
전화를 걸어 티켓 두 시간이라고 통고했다.
사내는 인터폰으로 여관 카운터에 맥주를
주문했다.
김순영이 녹원장 여관을 나온 것은 얼추
한 시간 반이 지났을 때였다. 약속 시간은
두 시간이었으나 사내가 목적한 바를
이루었기 때문에 더 이상 머물 필요가
없었다. 사내는 맥주 두잔을 마시자
김순영에게 노골적으로 추파를 던졌고
김순영은 사내의 요구에 순순히 응했던
것이다. 티켓 요금은 다방의 수입이었으나
손님에게서 받는 화대는 김순영의
수입이었다.
현관으로 내려오자 비바람이 쏴아 하고
몰아쳐 왔다. 김순영은 얼굴을 잔뜩
찡그렸다. 빗방울은 어느덧 아스팔트
바닥을 적실 정도로 굵어져 있었다.
(재수없게 왠 비가 이렇게 쏟아져?)
김순영은 차 보따리를 들고 망연히
하늘을 쳐다보았다. 비가 오고 있어서인지
바람이 차가웠다.
김순영은 여관 출입문을 열고 밖으로
나섰다. 그러자 차가운 빗줄기가 김순영의
몸을 때리기 시작했다.
김순영은 뛰듯이 빠르게 걸었다.
허벅지가 드러날 정도의 짧은 미니
스커트와 하이힐 때문에 달음질을 치기가
여의치 않았다.
도로는 이미 인적이 완전히 끊어져
있었다. 밤이 깊은 탓인지 차량도 보이지
않았다.
그때 김순영은 머리 위에서 창문이
드르륵하고 열리는 소리를 들었다.
아리랑파크 모텔 앞이었다. 김순영은
반사적으로 고개를 들었다.
(뭘하려는 거야?)
김순영은 걸음을 멈추고 눈쌀을
찌푸렸다. 아리랑파크 모텔의 창에 한
여자가 상체를 반쯤 내밀고 있었다.
불빛이 희미하여 자세히 볼 수는
없었으나 여자는 거꾸로 떨어지려는
순간이었다.
(어?)
김순영은 자신도 모르게 손으로 입을
틀어막고 눈을 감았다. 그러나 다음 순간
자신이 잘못 본 것인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고 재빨리 눈을 떴다.
아......
 그러나 잘못 본 것이 아니었다. 김순영이
눈을 뜨자 여자는 마치 텔레비젼의 슬로우
모션 화면처럼 느리게 창을 빠져 나와
추락하고 있었다. 순간적이긴 했으나
여자가 입고 있는 하얀 내의 때문에
김순영은 커다란 빨래가 펄럭거리며
떨어지는 듯한 기분을 느꼈다.
김순영은 눈을 꽉 감았다.
이내 퍽,하는 소리가 김순영의 바로
앞에서 들렸다. 김순영은 눈을 번쩍 떴다.
빨래가 펄럭거리는 것 같은 하얀 물체,그
여자가 김순영의 바로 앞에 쓰러져 있었다.
비명소리조차 없었다.
김순영은 자신의 눈이 믿어지지 않았다.
그것은 순식간의 일이었다. 김순영은
자신이 꿈을 꾸고 있는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것은 꿈이 아니라
엄연한 현실이었다.
김순영은 다리가 후들후들 떨렸다.
가까스로 정신을 수습하여 하얀 물체를
살피자 몸집이 유난히 큰 여자였다. 으깨진
여자의 몸에서 피가 분수처럼 쏟아지고
사지가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 경련이었다.
김순영은 갑자기 속이 메스꺼워졌다.
쓰러진 여자에게서 벌써 피비린내가 역하게
풍기고 있었다.

3

빗발은 더욱 굵어져 있었다. 여주경찰서
민() 형사 일행이 현장에 도착했을 때
여자는 이미 숨이 완전히 끊어져 있었다.
민 형사는 난감한 표정으로 여자의 사체를
둘러싸고 있는 사람들을 훑어보았다. 비가
내리고 있는데도 어디서 나타났는지
사람들이 잔뜩 몰려와 웅성거리고 있었다.
"어떻게 하지요?"
김() 형사가 박쥐우산을 뒤로 젖히며
근심스러운 표정으로 민 형사에게 물었다.
민 형사는 여자의 사체로 천천히 시선을
떨어뜨렸다. 여자는 얇은 네글리제 속옷
차림이었으나 흩날리는 빗발에 옷자락이
젖어 몸에 착 달라붙어 있었다.
(꽤 선정적이군.... )
민 형사는 죽은 여인의 우람한 몸집을
내려다보며 마른 침을 꿀꺽 삼켰다.
"현장을 보존해야겠지요?"
김 형사가 다시 물었다.
"살인이래?"
민 형사는 그때서야 죽은 여자의
사체에서 시선을 거두었다.
"자살이랍니다. 허지만 조사가 끝날
때까지는 보존을 해야하지 않겠습니까?"
"어떻게 보존을 해?"
"비라도 맞지 않게 비닐이라도 씌워야죠.
"
"그래. 사체에 뭘 갖다가 덮고 그 위에
비닐을 덮어. "
민 형사는 다시 사체를 내려다보며
나지막하게 말했다. 여자의 시체는
참혹했다. 머리와 어깨는 으깨져 피가
흥건하게 흘러내리고 있었다.
(자살을 해도 하필이면 왜 이런 방법으로
자살을 했을까?)
민 형사는 기분이 착잡했다. 여자가
속옷인 얇은 네글리제 차림으로 자살을 한
것도 이상한 일이었다. 비록 죽은 사체라고
해도 살결이 내비치는 속옷으로 인해
몸은 도발적이었다.
"김 형사. 가까운데서 공의를 불러. "
"예?"
김 형사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검안()이라도 해야지.... "
민 형사가 심드렁하게 대꾸했다. 검안은
육안으로 사인()을 찾는 것이었다.
"예. "
김 형사가 고개를 끄덕거렸다. 민 형사는
파출소의 순경들에게 현장보존 지시를
했다. 이제는 사건조사에 착수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신고를 한 사람이 누굽니까?"
민 형사는 사체를 둘러싸고 웅성거리는
구경꾼들을 향해 물었다.
"전데요. "
그러자 스물 안팎의 앳되어 보이는
청년이 쭈빗거리는 몸짓으로 민 형사의
앞으로 나섰다. 키가 작고 광대뼈가 툭
불거진 청년이었다.
"자네가 제일 먼저 발견했나?"
민 형사는 청년을 아래 위로 훑어
보았다. 오랜 형사 생활에 몸에 밴
습관이었다.
"아녜요. 제가 아니고 저기 있는
아가씨예요. "
청년이 재빨리 고개를 흔들고 턱짓으로
구경꾼들 틈에 섞여 있는 다방 아가씨를
가리켰다. 민 형사는 다방 아가씨를 멀뚱히
쳐다보았다. 아가씨는 비를 흠뻑 맞은 채
오들오들 떨고 있었다.
"이리와 봐요. "
민 형사는 가늘게 찢어진 눈으로
아가씨의 옷차림을 살피며 말했다.
아가씨는 차 보따리까지 들고 있었다.
아가씨가 엉거주춤 민 형사에게 다가왔다.
"아가씨가 맨 처음 발견했나?"
"네. "
아가씨가 턱을 달달 떨며 대답했다.
허벅지가 죄 드러난 아가씨의 미니
스커트가 을씨년스러워 보였다.
"어떻게 해서 발견했어?"
"차 배달을 하고 나오는데 저기서
떨어졌어요. "
아가씨가 아리랑파크의 모텔을
올려다보며 대답했다. 민 형사는 자신도
모르게 모텔의 방을 올려다보았다. 모텔의
4층 어느 방에서 커텐이 비바람에 음산하게
나부끼고 있었다. 민 형사는 공연히 몸이
떨리는 듯한 으스스한 기분을 느꼈다.
"떨어져?"
"네. "
"뛰어 내린 것이 아니고?"
"모르겠어요. 그냥 그렇게 생각이
들었어요. "
"떨어지는 것을 봤어?"
"네. "
민 형사는 다시 한번 모텔의 창을
올려다보았다. 기분이 이상했다.
"어느 다방에 있지?"
"은성이요. "
"은성?"
"네. "
"이름은?"
"김순영예요. "
"나이는?"
"스물 한살예요. "
김순영이 망설이는 듯하다가 대답했다.
"비가 오니까 일단 안에 들어가 있어. "
민 형사는 김순영을 모텔 현관으로
들여보냈다. 그 동안 김 형사는 파출소의
순경들과 함께 여자의 사체에 담요를 덮고
비닐을 갖다가 씌우느라고 분주했다.
"어떻게 해서 신고를 하게 되었어?"
민 형사는 청년을 보고 물었다.
"다방 아가씨가 사람이 떨어졌다고 알려
주었어요. "
"그래서?"
"밖에 나와 봤더니 이 분이 쓰러져
있었어요. "
"병원엔 연락했어?"
"그땐 이미 죽어 있었어요. "
"자넨 이름이 뭐야?"
"오지호입니다. "
"이 여관의 종업원인가?"
"예. "
"이 여자는 여기 손님이야?"
"예. "
"언제 투숙했어?"
"이틀 전에요. "
"혼자?"
"아닙니다. 남자 분하고 같이
투숙했어요. "
"그 남자는 어디 있어?"
"저기요. "
오지호가 턱짓으로 키가 멀쑥하게 큰
사내를 가리켰다. 민 형사는 검은 양복을
입고 있는 사내에게 가까이 갔다. 사내는
창백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이 여자와 일행이라는데 맞습니까?"
"예. "
"부인되십니까?"
"아닙니다. "
"그럼 어떤 사이입니까?"
"그냥 아는 사이입니다. "
사내가 더듬거리며 대답했다. 민 형사는
사내를 아래 위로 째려보았다. 죽은 여자가
부인이 아니라면 불륜 관계일 것이고,죽은
여자와 불륜 관계라면 사내가 제비족일
것이라는 생각이 빠르게 뇌리를 스쳤다.
"그냥 어떻게?"
"그냥 아는 사이입니다. "
사내가 난처한 듯이 대꾸했다.
"당신 이름이 뭐야?"
"조대현()입니다. "
"직업은?"
"없습니다. "
"없어?그럼 어떻게 먹고 살아?"
"..... "
사내가 입을 다물고 고개를 외로 꼬았다.
대답하기 싫어하는 기색이었다.
"여자의 이름은 뭐야?"
민 형사는 질문을 바꾸었다.
"이정란입니다. "
"남편이 있어?"
"죽었습니다. "
"왜?"
"모르겠습니다. 물에 빠진 시체로
발견되었으니까요. "
"언제?"
"몇 년 되었습니다. "
민 형사는 입을 다물었다. 조대현의
대답은 두리뭉실해서 종잡을 수가 없었다.
그러나 비가 쏟아지는 길바닥에서 조대현을
마냥 다그치고 있을 수는 없는 일이었다.
"어떻게 된 일이야?"
"여자가 뛰어 내렸습니다. "
"여자가 뛰어내리는 걸 봤어?"
"못봤습니다. 전 초저녁에 술을 마시고
잠이 들었었습니다. 여관에서 일하는
청년이 문을 두드려서야 겨우 알았습니다.
"
"뒤에서 민 거 아니야?"
"제가 왜 이 여자를 뒤에서
밀겠습니까?전 이 여자와 결혼할
생각이었습니다. "
"그럼 이 여자가 왜 창에서 뛰어 내려?"
"모릅니다. 변덕이 심한 여자였으니까요.
"
"방이 어디야?"
"508호입니다. "
"가 보자구. "
민 형사는 김 형사에게 여자의 사체를
비를 맞지 않도록 여관 복도로 옮기라고
지시한 뒤 조대현을 따라 아리랑파크로
들어갔다. 여관 복도엔 투숙하고 있는
손님들이 모두 나와서 웅성거리고 있었다.
508호는 4층이었다. 바깥문은 열려
있었으나 침실은 가지런히 정리되어
있었다. 싸운 흔적도 없고 수상한 점도
찾아볼 수 없었다. 민 형사는 침실과
욕실까지 샅샅이 살펴 보았다. 침대 앞에
있는 문갑에 빈 맥주병과 맥주잔이 놓여
있는 쟁반이 있었으나 그것도 어지러져
있지 않았다. 창만이 활짝 열려 있어
빗발이 사납게 들이치고 커텐이 음산하게
나부끼고 있었다. 그것만 아니면 지극히
평범한 여관방이었다.
"저 창으로 뛰어 내렸나?"
민 형사는 창 가까이 가서 아래를
뻔졍맘 사람들이 아직도 시체
주위에 몰려 웅성거리고 있었다. 그러나 김
형사가 파출소의 순경들과 함께 여자의
시체를 옮기려 하자 재빨리 길을 터주었다.
"예. "
"창이 그다지 크지도 않은데?"
"..... "
"유서 같은 것은 없어?"
"없는 것 같습니다. "
"방에 한 번 찾아 봐. "
"예. "
그러나 민 형사가 조대현과 함께 방을
샅샅이 뒤져도 유서 같은 것은 찾을 수가
없었다. 민 형사는 실망하여 여관 1층으로
내려왔다. 여관의 1층엔 이미 김 형사가
이정란의 사체를 옮겨 놓고 사진 촬영을
하고 있었다.
"어때?"
"다른 외상은 없는 것 같습니다. "
김 형사가 카메라의 셔터를 누르다가
말고 민 형사를 쳐다보았다.
"외상?"
"제가 보기엔 뛰어내릴 때 생긴 상처로
인해 사망한 것 같습니다. 어깨와 머리가
아스팔트와 부딪쳤습니다. "
"으깨졌나?"
"예. "
김 형사가 얼굴을 찡그렸다. 사체는
참혹했다. 머리와 어깨에서 아직도 검붉은
피가 꾸역꾸역 흘러내리고 있었다. 민
형사는 한쪽 무릎을 구부리고 앉아
이정란의 사체를 천천히 살폈다. 이정란은
상당히 덩치가 큰 여자였다. 이미 숨이
끊어진 상태인데도 커다란 가슴과 허벅지는
탉막힐 것처럼 풍만했다. 게다가 살빛도
투명했다.
민 형사는 또 다시 마른 침을 꿀꺽
삼켰다. 김 형사의 말대로 별다른 상처는
없었다. 사체는 머리와 어깨 외에는
깨끗했다.

제6장 임 따라 가는 길

1

그날 밤 꿈에 강한섭은 또 목쉰
노래소리와 함성을 들었다. 깊은
겨울,한밤중이었다. 밖에는 차가운 삭풍이
불고 있었다. 골목을 달려오는 바람에 루핑
조각이 펄럭거리고 전선줄이 잉잉대는
비명을 질러대고 있었다.
강한섭은 선잠을 잤다. 바람이 세차게
불어 머리맡이 어수선했다. 그래서 그런지
꿈인지 생시인지 분명하지 않게 목쉰
여공들의 노래소리,함성,울음소리....
그리고 미싱이 돌아가는 소리가 드르륵
드르륵 들리곤 했다.
아저씨,우리는 싸울 거예요.
어떤 소녀가 울음 섞인 소리로 말했다.
우리의 투쟁이 신문에 한 줄도 보도되지
않는다는 거 다 알고 있어요. 그래도 우린
싸워요!
소녀가 어깨를 들먹이며 흐느껴 울기
시작했다. 강한섭은 갑자기 목이 메이고
눈시울이 뜨거워져 왔다.
회사가 깡패들을 동원했어요.
그것은 유미자()의 앳된
목소리였다. 경찰이 조합원들을 마구 잡아
가고 있었다.
"유미자는 죽었어요. "
갑자기 아내의 퉁명스러운 소리가
강한섭의 귓전을 날카롭게 후벼 팠다.
강한섭은 그때서야 정신이 번쩍 들었다.
눈을 뜨자 창문이 겨우 희미하게 밝아 오고
있었다.
강한섭은 머리맡을 더듬어 담배를 찾아
입에 물었다. 꿈인지 생시인지 분명치 않은
잠결에 유미자를 만나는 것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었다. 그러나 유미자는 죽은 지
오래였고 남해방직 사태도 이미 매듭이
지어져 있었다. 관련된 여공들은 모조리
구속되거나 해고되었다. 남해방직은 다시
정상적인 조업을 하고 있었다.
"아침부터 너구리를 잡는 거예요?"
강한섭이 입에 문 담배에 불을 붙여
연기를 두어 모금 빨았을 때 그의 아내가
주방에서 들어오며 종알거렸다. 강한섭은
침대에 누운 채 아내의 얼굴을 멀뚱히
쳐다보았다.
"몸에 해롭다는 식전 담배 그만 피우고
일찍 일어났으면 운동할 준비나 좀 하세요.

"담배나 마저 피우구.... "
강한섭은 아내의 잔소리가 또 시작된다
싶어서 고개를 돌렸다. 결혼을 하기 전에는
몰랐으나 결혼을 한 뒤에는 아내의
목소리가 꽤나 앙칼지다는 것을 절실히
느낄 수 있었다.
"술도 그만 마시고요. "
"아침부터 왠 바가지야?"
"당신 요즈음 술에 절어서 산다는 걸
알고 있어요?"
"당신이 술 사줬어?"
"이이가!"
그의 아내가 하얗게 눈을 흘기며 시트
밑으로 손을 밀어 넣었다. 강한섭은 담배를
재떨이에 비벼 껐다.
"당신 몸에서 항상 술 냄새가 나요. 그
옐얼마나 역겨운지 알고 있기나
해요?"
"알았으니까 그만해. "
강한섭은 침대에서 일어나 추리닝을
주섬주섬 걸쳐 입기 시작했다. 아내의
잔소리를 듣고 있느니 서둘러 옷 입고
운동이나 하러 가는 것이 낫겠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속 괜찮아요?"
"괜찮아. "
"그렇게 술 마시다가 탈날 거야. "
그의 아내가 입술을 삐쭉 내밀었다.
"왜 그래?"
"멀쩡한 처녀 데려 왔으면 호강을
시키지는 못하고 맨날 술에 절어 사니 무슨
재미가 있어야죠. "
"그래도 아침 운동은 늘 함께 하잖아?"
 강한섭은 아내의 얼굴을 보면서 피식
웃었다. 아내와 함께 아침 운동을 하는
것은 즐거운 일이었다. 아내와 결혼한지
벌써 6개월이 되었으나 아침 운동은 항상
즐겁게 하는 편이었다.
추리닝으로 갈아 입은 아내와 함께
골목으로 나오자 동쪽 하늘이 붉으스레하게
물들어 있었다. 겨울해가 떠오르고 있는
모양이었다. 강한섭은 추리닝의 깃을 바짝
올려 세웠다. 날씨가 제법 차가웠다.
입에서는 하얀 입김이 뿜어지고 손이
시렸다.
"고대 정문까지 뛸까?"
강한섭은 하얀 추리닝을 입은 아내의
얼굴을 보며 말했다.
"좋아요. "
아내가 생긋 웃으며 대답했다. 그의
틂뺨고등학교 때 테니스 선수로 활동을
했었다. 국가대표에 선발되지는 못했으나
고등학교를 졸업하자 곧 바로 은행에
취업이 되었고,은행에서 선수로 활동을
하다가 강한섭을 만났다. 그래서 그런지
그의 아내는 몸매가 균형이 잡혀 있고
테니스공처럼 팽팽한 탄력을 갖고 있었다.
안암동 주택가를 빠져 나와 안암로로
나서자 차량이 드문드문 보였다.
새벽인데도 노선버스는 학생들과 일터로
나가는 노동자들로 가득차 있었다.
강한섭은 아내와 보폭을 맞추며 고려대
쪽을 향해 뛰기 시작했다. 미국 대통령에
카터가 당선된 이후 한국에도 조깅 붐이
선풍처럼 일어나고 있었다. 그러나
강한섭이 조깅을 하는 것은 그의 아내의
닥달 때문이었다. 그의 아내는 운동을
옙횡강한섭에게 조깅만은 한사코
시켰는데 그것이 습관이 되자 강한섭도
아침이면 으레 조깅을 하는 것으로 여기게
되었던 것이다.
"영혼마차가 뭐예요?"
강한섭이 안암 로타리에 이르렀을 때
아내가 불쑥 물었다.
"영혼마차?"
"어젯밤 취해서 시황()이 어쩌니
영혼마차가 어쩌니 하고 횡설수설
하던데요?"
"횡설수설?"
강한섭은 어처구니가 없어서 피식하고
헛웃음을 웃었다.
"왜요?"
"하늘 같은 남편에게 무슨 말투가 그래?"
"피!"
그의 아내가 콧방귀를 뀌었다.
"남편 알기를 개밥의 도토리처럼 알다간
혼나!"
"맨날 술에 절어 사는 남편이 어디
남편예요?"
"어허!술에 절어 살다니!"
강한섭은 짐짓 화난 표정으로 눈을
부라렸다. 그러나 그의 아내는 생글생글
웃고만 있었다.
"영혼마차가 무슨 뜻인지 가르쳐 주기나
하세요. "
"영혼마차는 시황의 영혼이 타고
다닌다는 마차야. "
"시황이 누군데요?"
"중국 최초의 황제지. "
"진()의 시황?"
"응. "
그러자 그의 아내가 입을 가리며 까르르
웃었다.
"왜 웃어?"
"당신이 어젯밤 뭐라고 했는지 알아요?"
"뭐라고 했는데?"
"시황이 영혼마차를 타고 서울에 왔대요.
"
"그랬나?"
강한섭은 공허하게 웃었다. 강한섭이
요즈음에 중국 진나라의 시황에 푹 빠져
있는 것은 사실이었다.
"왜 웃어요?"
"실은 요즈음 영혼마차라는 제목으로
소설을 써 보려고 그래. "
"소설이요?"
"응. "
"왜 갑자기 소설예요?"
"신문은 사실을 보도하는데 한계가 있어.
"
강한섭은 우울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신문이 보도하지 못하는 걸 소설은
어떻게 표현해요?"
"일단 써 놓으면 지금이 아니더라도
언젠가는 발표할 수 있을 거야. "
"아직도 계엄사가 검열을
하나요?대통령이 민주화를 하겠다고
약속하고 구속된 학생들과 지식인들이 모두
석방되었잖아요?"
"12. 12사태가 심상치 않아. "
"참모총장 연행사건이요?"
"응. "
"참모총장도 대통령 시해사건에
연루되었다고 하잖아요. 대통령 재가도
받았구..... "
"실은 그게 대통령이 재가하기 전에
연행되었다는 거야. "
"그럼 어떻게 되는 거죠?"
"군()의 반란이야. "
"반란?"
"엄격하게 따지면 정권 탈취를 위한
내란이지. "
"그럼 우린 어떻게 되는 거예요?"
"침묵을 강요 당할 거야. "
강한섭의 목소리는 우울했다. 정국은
한치 앞을 내다볼 수 없을 정도로
시계()가 불량했다. 그러나 정치권은
절대 권력자가 쓰러진 절호의 기회를
이용해 대권을 쟁취하기 위해 바쁘게
움직이고 있었다. 그러나 그 어느 누구도
막후에서 활발한 공작을 벌이고 있는
군부의 움직임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다.
고려대 정문 앞에 도착하자 마자 붉은
해가 본관 건물 위로 솟아 올랐다.
강한섭은 아내와 함께 정문으로 들어가
간단한 체조를 했다. 강한섭이 아내
채은숙과 결혼한 뒤 매일 되풀이하는 아침
운동이었다. 그의 아내는 대학을 다니지
않았으나 강한섭이 고려대를 졸업한 탓에
고려대를 찾아와 아침 운동을 하는 것은
즐거운 일상이었다. 부마()사태가 터져
고려대에 위수령이 발동되고,그것이 10.
26으로 이어져 계엄이 선포되는 바람에
육중한 탱크와 군대가 캠퍼스에 주둔했을
때 외에는 거의 하루도 거르지 않고 찾아와
운동을 했었다.
교정은 조용했다. 강한섭은 아내와 함께
캠퍼스를 한 바퀴 돌고 안암로로 나왔다.
안암로도 이제는 차량으로 메꾸어져
있었다. 노선버스들이 자욱하게 매연을
내뿜으며 달리고 정류장마다학생들이
빽빽했다.
강한섭은 천천히 뛰었다. 사람들이
한가하게 아침 운동을 하는 그들 부부를
아니꼽다는 듯이 힐끔거리고 있었다.
강한섭은 공연히 뒷덜미가 근질거리는 듯한
기분을 느꼈다.
우리는 처음부터 노동자로 태어났던 것이
아녜요.
다시 유미자의 목소리가 이명처럼 귓전을
후벼 팠다. 유미자의 목소리는 여전히
울음이 섞여 있었다.
강한섭이 유미자를 처음 만난 것은
인천에 있는 남해방직이 격렬한 노동쟁의에
휘말려 있을 때였다. 그 때도 긴급조치가
선포되어 있어서 정치인과 학생들은 물론
기자들까지 숨을 죽이고 있을 무렵이었다.
유신체재를 부정하거나 민주화를 외치는
사람들은 영장도 없이 체포되거나
구속되었다. 신문은 매일 같이 구속자
명단을 보도하는 것이 고작이었다. 그러나
그것도 긴급조치에 위반된다는 보도지침이
내리자 중지되고 말았다. 국민들은
누가,어떻게 얼마나 구속되고 있는지 전혀
알길이 없었다.
유미자는 남해방직의 여공이었다. 그녀는
시골에서 중학교를 간신히 마치고 서울에
올라와 봉제공장을 전전하다가 인천의
방직공장에 취직을 했는데 그 곳이
남해방직이었다. 남해방직은 여공들만 해도
2천명이 넘는 공장이었다.
일찍부터 노동조합이 설립되어 있었으나
조합 간부들은 노동자들의 권익을
등한시하고 있었다. 노동자들의 기본권이
통치권차원에서 법률적으로 유보되어 있는
상태였으나 노동자들은 그러한 실정을
용인하지 않았다. 남해방직의 여공들은
조합원들의 권익을 등한시하는 노동조합
집행부에 반기를 들었다.
조합 집행부와 회사 쪽에서 그 사실을
알고 여공들을 회유하고 설득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들은 마침내 대의원
총회에서 조합 집행부를 불신임하고 새로운
조합 집행부를 구성했다.
새로운 집행부는 전투적인 집행부였다.
그들은 회사가 집행부를 인정하기도 전에
임금 인상을 요구했다. 회사는 새 집행부의
요구를 거절했다.
새 집행부는 즉각 단체행동[]에
나섰다. 그러나 단체행동권은 법으로
금지되어 있었다.
새 집행부는 단체행동권 금지 조항을
철폐하라는 요구를 내 세웠다. 그것은 법률
개정을 요구하는 것으로 정부에서는
노동자들의 정치행위로 간주하여 강력한
대응을 하기로 했다. 게다가 긴급조치
9호가 선포되어 있었다. 긴급조치 9호는
시위와 집회까지 금지하고 있었다.
경찰이 남해방직에 투입되었다. 경찰은
대부분이 나이 어린 여공들인 남해방직
여공들을 경찰봉으로 두들겨 패서
해산시켰다. 여공들은 돌멩이를 집어던지며
저항했으나 소용없었다. 오히려 화가 난
경찰은 여공들의 머리채를 더욱 난폭하게
잡아끌고 발길질을 해댔다.
여공들은 경찰이 접근하지 못하도록
오물을 퍼부었다. 그러나 경찰은 벌떼 같이
달려들었다. 여공들은 연행 당하지 않기
위하여 상의를 모두 벗고 공장 마당에 인간
사슬을 만들고 드러누웠다. 경찰이 일순
주춤했다. 여공들은 상체에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채 누워서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그러자 기자들이 경찰의 저지선을 뚫고
달려가 카메라의 셔터를 누르기 시작했다.
여공들은 비장한 각오로 투쟁을 하는
것이었으나 기자들에게는 취재대상일
뿐이었다. 물론 신문에는 한 줄의 기사로도
보도되지 못할 것이 뻔했다. 그러나
보도하고 보도하지 않는 것은 데스크의
문제지 취재기자의 문제는 아니었다.
강한섭도 경찰의 저지선을 뚫고 달려가
카메라의 셔터를 정신없이 눌렀다.
여공들은 울면서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강한섭은 그때서야 여공들이 노래를
부르고 있는 것이 아니라 피를 토하듯이
절규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강한섭은
갑자기 목이 메이면서 눈시울이 뜨거워져
왔다.
"이 새끼들 뭐하는 거야?"
"카메라 뺏어!"
그때 성난 고함소리와 함께 경찰이
우르르 달려오며 사정없이 경찰봉을
휘둘렀다. 강한섭은 카메라를 빼앗기지
않기 위해 재빨리 카메라를 가슴 속에 품고
뛰기 시작했다. 그러자 경찰의 몽둥이가
어깨죽지를 내리쳤다.
"억!"
강한섭은 외마디 비명을 내지르며
여공들이 오물을 뿌린 공장 바닥으로
뒹굴었다. 어깨죽지가 떨어져 나가는 것
같았다. 그러나 어깨의 통증이 채 가시기도
전에 누군가 구둣발로 엉덩이를 걷어찼다.
강한섭은 재빨리 일어나서 공장 바깥으로
튀었다. 공장은 아수라장이었다. 사복을
입은 경찰은 상의를 벗은 여공들의 팔을
하나씩 붙잡고 강제로 끌어내어 닭장차에
싣고 있었다. 울부짖고 몸부림치는
여공들을 경찰은 마구 발길질을 하고
있었다.
"개새끼들!"
강한섭은 경찰에게서 멀리 떨어지자 침을
칵 뱉았다. 옷에서 오물 냄새가 코를
찌르고 있었다.
"잡아라!"
"저 년이 튄다!"
그때 경찰의 왁자한 소리가 들렸다.
렝고개를 돌리자 상의를 입지 않은
여공 하나가 그가 있는 쪽으로 총알처럼
달려오고 있었다. 그러자 구경꾼들이
재빨리 길을 터주었다.
"잡아!"
경찰 하나가 계속 악을 써댔다.
"놔둬!"
"왜 잡아?"
"너는 누이 동생도 없냐?"
경찰들이 여공을 잡기 위해 우르르
몰려오자 구경꾼들과 기자들이 일제히
소리를 질러댔다. 그러자 경찰들이
주춤했다. 강한섭은 그 틈에 재빨리 잠바를
벗어 여공에게 뒤집어 씌워 주었다. 여공이
상의를 아무 것도 걸치지 않아 보기에
민망했다.
"어서 달아나!"
"고마워요. "
여공이 생긋 웃었다. 티 하나 없는
순진무구한 웃음이었다.
"어서 뛰어!"
강한섭이 다시 재촉을 하자 여공이
재빨리 골목으로 달려갔다. 구경꾼들과
기자들은 경찰의 앞을 가로막고 노동자들이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나 태어나 이 강산에 노동자되어
꽃피고 눈내리기 어언 삼십년
무엇을 하였느냐 무엇을 바라느냐
나 죽어 이 강산에 묻히면 그만이지
아 다시 못올 흘러간 내 청춘
푸른 옷에 실려간 꽃다운 내 청춘

강한섭도 기자의 신분이라는 것도
잊어버리고 노래를 불렀다. 자신도 모르게
두 눈에서 뜨거운 눈물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여공이 강한섭을 찾아온 것은 그로부터
열흘이 지난 뒤였다.
그 여공의 이름이 유미자였다. 강한섭은
어수선한 정국 때문에 남해방직의
노동쟁의는 까맣게 잊고 있었다. 아니
일부러 외면하고 있었다. 다만 인천에서
어린 여공들이 시위를 하는 모습을
사진까지 찍었으면서도 보도를 하지 못해
늘 가슴이 묵직한 상태로 지내고 있었다.
"몇 번 전화를 드렸는데 안 계시대요. "
유미자는 신문사의 편집국까지 찾아
왔다.
"어?어떻게 왔어?"
"잠바를 돌려 드리려고 왔어요. "
"그래?"
강한섭은 쓴 웃음이 나왔다. 갑자기
유미자의 아무 것도 걸치지 않은 상반신이
생각났기 때문이었다.
"왜 웃어요?"
유미자가 기분 나쁜 표정으로 물었다.
"나갈까?"
강한섭은 유미자의 물음에 대꾸하지 않고
유미자를 데리고 신문사를 나왔다. 아직
퇴근할 시간은 되지 않았으나 기사 마감
시간은 이미 지났고 당직도 걸리지 않은
날이었다.
"시간이 좀 이르지만 저녁 먹을래?"
"맛 있는 거 사주실래요?"
"맛 있는 게 뭔데?"
"탕수육 같은 거요. "
"왜 그렇게 비싼 것을 먹으려고 그러지?"
강한섭은 유미자가 귀여웠다. 일부러
농담을 했다.
"아저씨가 내 가슴을 봤잖아요?"
"뭐?"
강한섭은 어이가 없었다.
"공짜로 보셨으니 그 값을 내셔야죠. "
유미자가 얼굴을 붉히며 말했다.
강한섭은 유미자의 풋사과처럼 작은 가슴을
생각하며 얼굴을 찡그렸다. 유미자는
확실히 대찬 데가 있는 아가씨였다.
"그럼 내야지. "
강한섭은 졸래졸래 따라오는 유미자를
근처의 중국집으로 인도했다.
"실은 탕수육 처음 먹어요. "
"응?"
"가난해서 탕수육을 처음 먹는다고요. "
유미자가 얼굴을 새침하게 꾸미며
뽀 불빛 아래서 자세히 보자 유미자는
스무살이 겨우 넘어 보였으나 가난한 삶에
찌든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럼 많이 먹어. "
"동정하는 거 아니죠?"
"아냐. "
강한섭은 도리질을 했다. 유미자의 말에
가슴이 찡하게 울렸다.
"그날 고생하지 않았어?"
"아저씨 덕분에 고생은 안했어요. "
유미자가 천천히 젓가락으로 탕수육을
집어 먹기 시작했다.
강한섭은 고량주를 시켜서 자작으로 두
잔을 따라 마셨다.
"그날 저 흉했죠?"
"뭐가?"
"멀쩡한 처녀가 옷을 벗고 가슴을
드러냈잖아요?"
"글쎄.... "
강한섭은 난처하여 고개를 외로 꼬았다.
"솔직히 말씀해 보세요. "
"솔직히 말하라고 하면 할께. 그날
아가씨들은 모두 예뻤어. 특히 미자는....
"
유미자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강한섭을
쳐다보았다. 그러나 그것은 사실이었다.
여공들이 일시에 상의를 모두 벗은 것은
충격적인 일이었으나 때묻지 않은 가슴들은
햇과일처럼 풋풋해 보였었다.
유미자는 그 뒤로도 틈틈이 강한섭을
찾아 오곤 했었다. 강한섭은 유미자로부터
70년대 노동현장의 열악한 현실을 상세히
알게 되었다. 그러나 그것은 커다란
부담이었다. 강한섭이 노동현장을 알게
되면 될수록 그러한 실정을 속속들이
보도하지 못하는 기자로서의 양심이 그를
괴롭히고 있었다.

2

회사에 출근하자 사()의 분위기도
어수선했다. 강한섭은 무겁게 가라앉아
있는 사의 분위기가 꺼림칙했으나 담배부터
피워 물었다. 데스크에서 별다른 지시가
없는 것을 보면 간밤에는 특별한 사건이
없는 모양이었다. 그러나 회사의 분위기는
여전히 무거웠다.
강한섭은 데스크에서 별다른 지시가
없었기 때문에 출근부에 도장을 찍고 지난
밤 야간근무 기자들이 취재한 기사를 대충
살펴보았다. 아침에 특별한 기사거리가
없으면 지난 밤의 야간근무 기자들이
취재한 기사를 취합하여 석간에 내보내는
것이다.
야간근무 기자들이 취재한 기사는 특별히
주의를 끌만한 것이 없었다. 교통사고
1건,살인사건 2건,화재사건 1건이
고작이었다. 강한섭은 기사 원고를
이기석() 차장에게 넘겼다.
"이게 전부야?"
이 차장이 원고를 대충 훑어보며 말했다.
"예. "
"세상이 어수선해도 이런 짓을 저지르는
인간 쓰레기들이 있군. 쯧쯧.... "
이 차장이 혀를 찼다.
강한섭은 대꾸하지 않고 사회면에
연재하는 '79년의 10대사건'이라는
시리즈물의 3회분 원고를 타이핑하기
시작했다. 12월이 얼마 남지 않았기 때문에
신문사들이 연례행사로 다루는 시리즈물의
하나였다.
"데스크가 어두운데?"
옆자리의 최병준() 기자가
강한섭의 귀에 낮게 속삭였다. 최병준은
강한섭과 입사동기였다.
"글쎄 말이야. "
"무슨 일 있는 거 아니야?"
"낸들 어떻게 알겠어?세상이 하도
뒤죽박죽이라 어떻게 돌아가는 지 감을
잡을 수가 있어야지. "
"합수부에서 또 일 저지른 거 아니야?"
"모르겠어. "
강한섭은 고개를 흔들었다. 합수부가
며칠 전인 12월12일 계엄사령관인
정승화() 육군 참모총장을 연행
구속한 이후 세간에는 군부가 쿠데타를
일으키고 있다는 소문이 파다하게 나돌고
있었다.
"합수부 바람이 매서운 모양이야.
장군들이 무더기로 예편되고 있어. "
"대통령이 민주화를 하겠다고 하는데
거짓인가?"
"대통령이야 군부의 내막을 알길이 있나.
"
강한섭은 피우던 담배를 재떨이에 비벼
껐다. 사주()의 조카인 임홍길()
부장이 데스크에서 일어나고 있었다.
"경찰서들이나 한 바퀴 돌아봐. 요즈음
사회 분위기가 심상치 않잖아?"
임 부장이 기운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는 신문사 사회부 부장이라는 직책이
버거워 보였다.
"예. "
강한섭은 건성으로 대답하고 의자에서
일어나 코트를 걸쳤다. 최병준도 따라
일어섰다. 임 부장이 경찰서라도 한 바퀴
돌아보라고 하는 것은 반드시 사건을
취재해 오라는 뜻이 아니었다. 시국이 물
밑에서 소용돌이치고 있었으나 보도를 할
수 없는 신문기자들의 자괴감을 표현한
것뿐이었다.
회사를 나오자 날씨가 우중충했다.
눈발이라도 뿌리려는 것일까. 사회부에
배정된 취재차를 끌고 가까운 곳에 있는
남대문경찰서를 비롯해 종로경찰서,동대문
경찰서,성북경찰서에 이르자 11시가
가까워지고 있었다.
"별일 없는 모양인데?"
최병준 기자가 차창으로 밖을 내다보며
킹홱 경찰서의 강력계와 교통계를
모조리 뒤졌으나 특별히 기사거리가 될만한
것은 없었다.
"꽁꽁 얼어붙었어. "
강한섭이 몸을 떠는 시늉을 했다. 그러자
최병준 기자가 낄낄거리고 웃었다.
"임 부장 기분이 안 좋아 보이던데 무슨
일이 있나?"
"보안사 요원들 때문이겠지. "
"그 작자들은 무엇 때문에 신문사에
상주하고 있는 거야?"
"보도통제를 하기 위해서지 뭐하러
상주하겠어?. "
"제기랄! 박통 때는 긴급조치로 기자들을
꼼짝 못하게 하더니 지금은 보안사가
언론을 통제하는군. "
"..... "
"언론 정책을 보안사의 준위가
주무른다며?"
"준위?"
"준위면 계급이 어떻게 되는 거야?"
"상사 위지. "
"그러면 하사관이 이 나라 언론을
좌지우지한다는 말인가?"
"그래. "
최병준이 빙긋이 웃었다.
"하사관이 어떻게 언론을 알아?"
"낸들 알겠나. "
최병준이 낄낄대고 웃었다.
회사에 도착하자 12시가 지나 있었다.
강한섭은 최병준과 함께 편집국에
올라갔다가 다시 내려와 근처의 식당에
가서 점심을 먹었다. 기분이 우울했다.
신군부는 대학에서는 군대를 철수시켰으나
언론사와 중앙청에는 그대로 병력을 남겨
두고 있었다. 아직도 계엄이 선포되어 있는
상태인 것이다.

3

오후가 되자 눈발이 날리기 시작했다.
강한섭은 회사에서 5시쯤 퇴근했다. 정승화
총장의 연행,수도 경비사령관
장태원() 소장(),특전사 사령관
정병주() 소장,3군사령관
이건영() 중장(),합참본부장
문홍구()중장의 구속과 12월14일의
전면 개각으로 정신없이 바쁘게 돌아가고
있었다. 정치부는 눈코 뜰 새 없이
바뻤으나 사회부는 기묘할 정도로
한가했다. 어느 시인의 말처럼 얼어붙은
70년대를 회고하는 것이 사회부의
일이었다.
긴급조치 9호는 해제되었고 구속되었던
사람들도 석방되었다. 12월17일에
권한대행의 딱지를 떼고 대통령에 취임한
최규하 대통령은 빠른 시일내에 헌법을
개정하여 새로운 대통령을 선출하겠다고
약속하여 국민들로부터 대대적인 환영을
받았다. 그러나 군부의 동태가 심상치
않았다. 사람들은 그 사실을 전혀 모른 채
민주화가 실현된다는 사실만 기뻐하고
있었다.
정치권은 부산하게 움직였다. 야당의
김영삼과 김대중,그리고 여당 아닌 여당인
공화당은 새로운 정치상황 아래서 대권을
차지하기 위한 준비에만 몰두하고 있었다.
모두들 장미빛 꿈에 부풀어 있었다.
그러나 강한섭은 군부의 동태를 살피고
미구에 불길한 일이 닥칠 것 같은 예감을
느꼈다. 그 예감이 어떤 것인지 정확하게
예측할 수는 없었으나 강한섭은 불안하기만
했다.
경제는 불황이었다. 박정희의 죽음이
몰고 온 충격이 유류파동 못지 않은
불경기로 이어지고 있었다. 강한섭은
퇴근하면 거의 매일 술을 마셨다. 앞날에
대한 불확실성이 강한섭을 술집으로
이끌었고,강한섭은 술이 얼큰하게 취해서야
집으로 돌아왔다.
강한섭이 보안사에 근무한다는
한경호라는 사내의 부인을 만난 것은 해가
바뀐 1월초의 일이었다. 그날 강한섭이
술을 마시고 집에 돌아오자 아내 은숙이
낯선 여자와 함께 차를 마시고 있었다.
렝현관에서 눈을 털고 거실로
올라섰다. 낯선 방문자,아내보다 나이가
7,8세 더 많은 여자가 재빨리 소파에서
일어나며 목례를 했다.
강한섭은 얼떨결에 고개를 숙여 답례를
했다.
"옆집에 이사 온 분예요. "
아내가 여자를 강한섭에게 소개했다.
"처음 뵙겠습니다. "
여자가 새삼스럽게 고개를 숙여 인사를
했다. 목덜미가 유난히 뽀얗게 흰
여자였다.
"반갑습니다. "
강한섭도 다시 인사를 했다. 그러자 그의
아내가 입을 가리고 웃었다. 인사를
두벌씩이나 주고받는 것이 우스운
모양이었다.
"저녁은 어떻게 했어요?"
그의 아내가 웃음을 깨물며 물었다.
"했어. "
"그럼 우리들끼리 얘기하고 놀께 들어가
쉬세요. "
"응. "
강한섭은 고개를 끄덕거렸다. 옆집
사람이니 시간이 늦었어도 상관이 없을
터였다.
"어서요!"
그의 아내가 다시 웃으며 재촉을 했다.
"말씀들 나누십시요. "
강한섭은 아내의 웃음은 아랑곳하지 않고
서재로 들어갔다.
문득 며칠 전에 옆집에 세워져 있던
찢차가 생각났고 그렇다면 여자가 그
집으로 이사를 온 모양이군,하는 생각이
들었다. 여자는 전체적인 인상이 기묘할
정도로 육감적이었다. 아래는 미디 계열의
베이지색 주름치마를 입고 있었으나 위에는
털실로 짠 밤색의 스웨터를 입고 있었다.
강한섭은 코트를 벗고 책상에 앉았다.
책상 위에는 며칠 전에 펼쳐 놓은 원고지가
그대로 있었다. 아직 한 줄도 메꾸지 않은
원고지였다.
강한섭은 창 밖을 우두커니 내다보았다.
창밖에는 여전히 눈 발이 자욱하게 날리고
있었다. 강한섭은 볼펜을 잡고 원고지로
시선을 떨어뜨렸다. 이제는 소설을
시작해야 했다. 그러나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지 도무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며칠 동안 원고지 앞에서 끙끙댔으나 전혀
감이 잡히지 않았다.
거실에서는 간간이 여자들의 웃음소리가
들리고 있었다.
강한섭은 원고지에 '영혼마차'라고 썼다.
그가 쓰려는 소설의 제목인 셈이었다.

초막()밖에는 여전히 하얀 빗줄기가
장대질을 하듯이 세차게 퍼붓고 있었다.
사흘째 계속되는 장마였다.
진()나라 제일의 도공()
소진()은 작업을 하다가 말고 우두커니
밖을 내다보았다. 빗발이 골짜기를 하얗게
물들이며 소진의 공방()인 초막까지
달려오고 있었다.
소진은 넋을 잃은 듯이 한참동안이나
빗발이 세차게 뿌리는 바깥 풍경을
물끄러미 응시했다.
(차라리 석달 열흘 동안 비가 쏟아져 이
놈의 더러운 세상이 몽땅 떠내려 가기나
하지.... )
소진은 밖을 내다보며 눈을 부릅떴다.
하얗게 쏟아지는 빗줄기 사이로 병사들의
막사가 드문드문 보였다. 번을 서는
병사들은 비가 쏟아지고 있는데도 창을
들고 막사 앞에서 미동도 하지 않고
있었다.
(짐승 같은 놈들!)
병사들을 노려보는 소진의 눈에서 증오의
불길이 파랗게 뿜어졌다. 여기는 중국
섬서성(). 때는 시황 35년(BC
212년:약2200년 전)의 일이었다.
진의 시황은 중국 역사상 처음으로
중국을 통일하는 위업을 달성했으나
만리장성을 축조하고,아방궁()을
짓고,자신을 비판하는 유생들을 탄압하기
위해 분서갱유()를 일으키는 등
^극악한 통치를 하고 있었다. 그것 뿐
아니라 여산()에 자신의 능()을
만드는 막대한 토목공사를 벌여 백성들의
원성을 샀다. 이미 자신에게 반대하는 유생
460명을 진의 도읍 함양()에서
생매장하여 그 원혼이 저승으로 가지
못하고 구천에서 떠돌고 있다는 소문이
흉흉하게 나돌고 있었다.
소진이 만들고 있는 영혼마차는 시황이
죽은 뒤에 그의 영혼이 타고 다닐
마차였다. 시황은 즉위 28년에 제2차
동방순행을 하면서 서시()라는
방사(:술사)에게
동남동녀()3천명을 인솔하고
불로초를 구해 오도록 지시했으나 서시는
불로초를 구하지 못해 달아나고 시황은
육신은 죽어도 영혼은 불멸한다는 중국의
관습에 의해 자신이 타고 다닐 마차를
만들도록 지시했던 것이다. 물론 그 마차는
청동과 황금으로 만들어지고 있었다.
영혼마차는 시황의 능에 들어갈
예정이었다. 시황의 능은 즉위 원년부터
축조되기 시작해 시황제의 능과
병마용()이 모두 셋이나 되었다.
병마용들은 진시황 능의
부장갱()으로 흙으로 빚었어도
진시황의 능을 지키는 숙위군들이었다.
용갱 하나에 약 8천의 병사가 들어가는데
그 병사들에게 영혼을 불어 넣기 위해 산
사람을 죽여서 그 피를 뿌릴 예정이었다.
권력자를 위해 백성들은 목숨까지 속절없이
바쳐야 했다.
소진은 그러한 시황을 죽이고 싶도록
증오했다. 시황의 영혼이 마차를 타고
다닌다는 것은 터무니없는 망상일
뿐이었다. 영혼이 불멸하는 것이 아니라
권력에 대한 인간의 추악한 탐욕이 불멸할
뿐이었다.
소진은 그 사실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천년,2천년이 지난 뒤에도
인간들은 여전히 권력을 차지하기 위해
수많은 사람들의 피를 흘릴 것이다.

문 열리는 소리가 조용히 들리고 화장품
냄새가 연하게 풍겨 왔다. 강한섭이 고개를
돌리자 그의 아내가 화사한 잠옷 차림으로
등 뒤에 와 서 있었다.
"갔어?"
강한섭은 아내를 향해 조용히 물었다.
창밖에는 여전히 흰 눈이 사락사락 내리고
있었다.
"네. "
그의 아내가 강한섭을 등 뒤에서 안고
가슴으로 눌렀다. 강한섭은 볼펜을 책상
위에 놓았다. 소설은 첫 장면을 무난하게
시작했으나 시간이 꽤 오래된 모양이었다.
사방이 신비스러울 정도로 조용했다.
"몇 시나 되었어?"
"열 한시 조금 넘었어요. "
"벌써?"
강한섭은 아내를 향해 회전의자를
돌렸다.
"네. "
그의 아내가 강한섭의 무릎 위에 앉았다.
강한섭은 두 팔로 아내를 안고 회전의자를
돌려 창 밖을 향했다. 아내의 몸에서
자스민 꽃향기가 풍겼다.
"향수 뿌렸어?"
"네. "
"샀어?"
"옆집 여자가 주었어요. 예쁘죠?"
"뭐가?"
"아까 그 여자요. "
"응. "
강한섭은 솔직하게 대답했다. 처음 보는
여자였으나 살결이 희고 몸매가 풍만했다.
게다가 아내보다 나이가 일고여덟살에서
열살 쯤 위로 보였다. 여인으로서 완숙한
육체가 묘한 매력을 풍기고 있었다.
"나 보다 더 예뻐요?"
"아니. "
강한섭은 그때서야 고개를 흔들었다.
"정말?"
"그럼!"
"아이 좋아!"
그의 아내가 허리를 비틀며 신음소리에
가까운 비음을 냈다. 강한섭은 아내의
둔부를 가볍게 애무했다.
"소설 시작했어요?"
"응. "
"내가 한번 읽어 볼께요. "
그의 아내가 책상 위의 원고를 읽기
시작했다. 강한섭은 아내의 등에 얼굴을
묻었다. 언뜻 깊은 밤 신혼의 아내와 함께
깨어 있는 것은 얼마나 행복한 일인가.
아내를 무릎 위에 앉히고 눈내리는 창 밖을
볼 수 있는 행복한 시간이 언제까지나
계속될 수 있을 것인가,하는 생각이 불현듯
뇌리를 때렸다.
그는 아내의 목덜미에 입술을 갖다댔다.

4

밤은 점점 깊어 가고 있었다. 아니
이제는 새벽이 가까이 오고 있는
시간이었다. 강한섭은 곤하게 잠들어 있는
아내의 얼굴을 물끄러미 들여다보았다.
창밖에는 아직도 눈이 내리고 있는 것일까.
불을 껐는데도 방안에 흰 빛이 가득차
있었다.
그는 아내의 잠든 얼굴이 지극히
평화스럽다고 생각했다. 세상의 풍파를
전혀 겪지 않은 얼굴,스물 여섯 해의 삶을
살았으면서도 불행을 모른다는 것은 얼마나
큰 축복일까. 아내의 삶은 참으로
순탄하기만 하지 않았는가. 그러나
앞으로의 삶이 계속 순탄하리라는 것은
아무도 보장할 수 없을 것이다.
그는 아내가 사랑스러워 견딜 수가
없었다.
그는 아내의 입술에 가만히 입술을
얹었다가 떼었다. 어쩐 일인지 잠이 오지
않았다. 이왕 잠이 오지 않을 바에야
소설이나 계속 쓰리라고 생각했다.
아내의 품 속을 조심스럽게 빠져 나온
강한섭은 잠옷 차림으로 서재로 들어가
스탠드를 켰다. 원고지는 책상 위에 그대로
펼쳐져 있었다. 그는 볼펜을 잡고 소설을
써내려 가기 시작했다.

바람은 아침에도 을씨년스럽게 불어대고
있었다. 길고 무더운 여름이 선들바람과
함께 가버리고 가을이 시작되는가 싶었는데
벌써 춥디 추운 겨울이 닥치고 있었다.
11월이었다. 동트기 전의 새벽 5시.
포크레인 기사 한광표()는 밤새도록
계속되는 바람소리에 선잠을 자다가 억지로
눈을 떴다. 연탄불이 꺼졌는지 방안에
썰렁한 냉기가 돌고 있었다. 한광표는 거의
습관적으로 캐시미론 이불을 머리까지
뒤집어썼다.
바람소리에 창문이 덜컹대고 흔들리고
야산의 잡목숲이 아우성을 치고 있었다.
어찌 들으면 지옥의 악귀들이 황량한
겨울들판을 헤매면서 울부짖고 있는 것
같기도 했다.
참 기이한 일이야.
그는 이불 속에서 낮게 중얼거렸다. 여름
가을 두 계절 동안이나 빨지 않은 이불이
눅눅했다. 게다가 퀴퀴하게 곰팡이 피는
냄새까지 풍기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그의 코에 익숙한 냄새 였기 때문에 그는
그다지 신경을 쓰지 않았다. 그가 지금
c잔뜩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는 것은
아침부터 공사장에 나가서 포크레인을
움직여야 한다는 것과 며칠째 계속되는
이상한 꿈이었다.
(내가 몸이 허약해진 거야. )
그는 간밤의 꿈을 생각하면서 몸을
뒤척거렸다. 방안에 냉기가 돌았다. 이불을
머리까지 뒤집어썼는데도 몸에서 오한이
일어났다. 감기라도 걸린 것일까. 그는
기분이 좋지 않았다. 혼자 사는 몸에
감기,특히 몸살 따위가 찾아들면 여간
괴로운 일이 아니었다.
(혹시 저것 때문에 그런 것이 아닐까?)
한광표는 이불을 가슴으로 끌어내리고
선반 위에 있는 조그만 마차를 뚫어질 듯이
노려보았다. 어둠 때문에 확실히 보이지는
않았으나 네 필의 말이 끌고 있는 이상한
h마차가 꺼림칙했다. 그것은 한광표가 닷새
전 공사장에서 발굴한 것이었다.
발굴했다기 보다는 포크레인의 삽에 퍼올려
진 것이지만 흙을 털어내자 황금빛과
청동빛이 찬란한 사두마차()였다.
(별게 다 나오는군. )
한광표는 그것을 집으로 가지고 와서
선반 위에 올려놓았다. 그런데 그 뒤부터
기분이 영 개운치 않았다. 매일 밤 꿈
자리가 뒤숭숭하고 잠 자리가 어수선했다.
환청인지 착각인지 알 수 없었으나 잠이
들면 늑대의 울음소리 같은 아우성소리와
함께 요란한 말발굽소리가 들렸다.
(재수없는 물건이야!)
한광표는 그것을 버리기로 했다.
한광표가 이불 속에서 이런저런 생각을
하는 동안 날이 서서히 밝아 오기
시작했다. 한광표는 이불 속에서 빠져 나와
석유곤로로 라면을 끓여 먹고 집을 나섰다.
점심은 공사장 함바에서 먹으면 되는
까닭에 아침은 으레 라면으로 때우는
한광표였다.
날씨는 차디찼다.
한광표는 입으로 하얀 입김을 내뿜으며
걸음을 재촉했다. 길바닥은 빙판이었다.
한광표가 공사장 근처에 이르렀을 때
날이 훤히 밝았다. 한광표는 시멘트 봉지에
싼 마차를 농수로 비탈에 버렸다. 그만해도
변두리인 개울뚝은 이른 아침이라 인적이
전혀 없었다. 한광표는 비로소 이상한
안도감을 느끼며 공사장을 향해 걸어가기
시작했다.

강한섭은 원고를 쓰다말고 잠시 밖을
내다보았다. 눈은 그쳤으나 사방이 흰
빛으로 가득하고 사위가 물기에 젖어 있는
느낌이었다.
강한섭은 늘어지게 하품을 했다. 비로소
졸음이 밀려오고 있었다. 그러나 강한섭은
오늘 중으로 도입부를 모두 마쳐야
하겠다고 생각했다.

바람이 휘몰아치는 골목을 여자는 걸음을
재게 놀리며 걷고 있었다. 음산한
날씨였다. 해는 어느덧 서산으로 떨어지고
어둠이 만또자락을 펄럭이듯이 골목 끝에서
서성거리고 있었다. 2월이라고는 해도
바람은 칼날처럼 차가웠다.
여자는 허름한 털 스웨터의 앞섶을 바짝
여몄다. 바람이 옷깃을 파고들어 몸이
으실으실 떨렸다. 여자는 몸을 한 차례
떨며 걸음을 재게 놀렸다.
골목은 썰렁하게 비어 있었다. 마치
악마가 으르렁 거리듯이 을씨년스러운
바람이 골목에 있는 휴지조각을 쓸고 다닐
뿐 골목은 인적이 완전히 끊어져 있었다.
여자는 문득 걸음을 멈추었다. 기분이
이상했다. 마치 저만치 골목 끝에서 누군가
자신을 기다리고 있는 것 같기도 했고
누군가 자신을 따라 오고 있는 것 같기도
했다. 그리고 그것은 자신이 감당할 수
없는 공포스러운 존재일 것만 같았다.
여자는 골목 끝을 우두커니 응시했다.
사방이 기묘할 정도로 조용했다. 이따금
흙먼지를 뽀얗게 날리며 불어오는 바람소리
외에는 골목이 땅속 깊은 곳에 가라앉아
있는 것처럼 비현실적으로 보였다.
여자는 고개를 살래살래 흔들었다.
바람이 유난히 음산한 것이나 골목이
비현실적으로 보이는 것이 모두 자신의
몸이 허약해진 탓이라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몸이 허약해지면 눈에 헛것이
보이고 이상한 생각을 하게 되는 것이다.
그것은 며칠째 계속되어 온 현상이었다.
몸이 더욱 약해진 탓이라고 밖에 볼 수
없었다. 골목 끝에 공포스러운 존재가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야말로 어쭙잖은 생각인
것이다.
여자는 다시 걸음을 떼어놓기 시작했다.
걸음을 떼어놓기가 몹시 힘이 들었다.
걸음을 떼어놓으면 떼어놓을수록 이상한
공포심으로 머리 끝이 곧추 서고 가슴이
뛰었다.
여자는 또 다시 걸음을 멈추었다. 골목은
언제나 오가던 길로 아침이나 지금이나
특별히 달라진 것은 없었다. 골목의
중간쯤에 서 있는 전봇대라던가
쓰레기통,골목에 쌓여 있는 더러운
연탄재,음식 찌꺼기 .... 그런 것들이
변함없이 함부로 버려져 있었다. 이 나라의
어디에서나 볼 수 있는 풍경이었다.
(내가 공연한 생각을 하는 거야. )
여자는 입언저리에 씁쓸한 미소를
떠올렸다. 서둘러 집에 돌아가서 저녁을
지어 먹고 잠자리에 들면 그것으로 끝인
것이다. 월급날이 아직도 사흘이나
남았으므로 반찬은 신 김치쪽 뿐이었다.
그러나 밥을 따뜻하게 지어 먹으면
그것으로 충분했다. 시장이 반찬이라니까
그것도 달디달게 먹을 수 있었다.
여자의 이름은 장순덕(),32세의
이혼녀였다. 5년 전에 결혼을 했으나
남편이 바람을 피워 혼자 살고 있었다.
남편은 건설현장의 철근공이었으나 술만
마시면 주사가 심했다. 결혼한지 불과
3개월도 못되어 손찌검을 하기 시작하더니
1년이 가까워질 무렵부터는 매일 같이
손찌검을 해댔다. 그녀는 허구헌날
남편에게 맞아서 눈이 퉁퉁 부어 살다가
불과 6개월 전에야 이혼을 하고 혼자 살고
있었다.
그러나 남편은 이혼을 한 뒤에도 틈틈이
찾아와 우격다짐으로 그녀와 잠자리를 같이
하거나 손찌검을 했다. 게다가 용돈까지
뺏아 가고는 했다. 그녀는 이미 이혼을 한
남편이 그러한 짓을 되풀이해도 묵묵히
참고 지낼 뿐이었다. 배운 것이 없는 데다
그녀의 남편 말을 빌리면 바보천치인
그녀는 처녀가 아닌 몸으로 남편에게
시집을 갔다는 사실을 가장 큰 죄악으로
생각하고 있었고,그러한 탓에 비록 남편과
이혼을 했어도 남편의 요구를 거절해서는
안된다는 생각만을 편집적으로 하고
있었다.
어리석은 생각이었다.
여자는 골목에 서서 얼굴을 찡그렸다.
이런 일은 처음이었다. 여자는 골목 끝을
향하여 걸음을 떼놓기가 어쩐지 두려웠다.
그 길이 집으로 가는 지름길이라는 사실을
뻔히 알면서도 선뜻 걸음이 떨어지지
않았다.
그러나 여자는 한 걸음을 앞으로
내디뎠다. 그때 골목 끝의 캄캄한 어둠
속에서 지옥의 악귀들이 울부짖고 있는 것
같은 으스스한 느낌이 들었다. 여자는 온
몸을 부르르 떨었다. 골목 끝이
가까워질수록 가슴은 더욱 격렬하게 뛰고
공포가 극심해 졌다. 여자는 가슴이 터질
것 같았다.
여자는 다시 골목 끝을 노려보았다. 골목
끝에서 피에 굶주린 늑대가 우는 것 같은
개짖는 소리가 아련히 들려왔다.
여자는 더 이상 걸음을 떼어놓을 수가
없었다. 여자는 빠르게 몸을 돌렸다.
그러자 무엇인가 자신의 머리를 나꿔채서
골목 끝으로 잡아당기고 있는 것 같은
섬칫한 느낌이 들었다. 여자는 재빨리
자신의 뒷머리로 손을 가져갔다. 그러나
뒷머리엔 아무것도 없었다. 여자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골목을 빠져 나오기
시작했다.
이봐,이봐.
그때 누군가 그녀를 부르고 있는 것 같은
이 늪에 모일 것인지
날짜를 정하고 그날 누구의 일이 끝3소리가 등 뒤에서 들려왔다. 여자는
흠칫하여 뒤를 돌아보았다. 그러나 이미
캄캄하게 어두워진 골목엔 인적은 그림자도
찾을 수가 없었다.
이리 와,먼 길로 돌아가지 말구 지름길로
가.
어둠이 그녀를 유혹하기 시작했다.
여기에 무엇이 있다고 무서워 해?
보라구,여기는 아무 것도 없어.
그 다음엔 낄낄대는 웃음 소리가
들려왔다. 가슴이 얼어버릴 정도로 차가운
웃음소리였다.
여자는 낮게 한숨을 내쉬었다. 골목이
그토록 무서워 보이기는 처음이었다.
한편으로는 공연히 무서워 보이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뇌리를 스치기도 했다.
여자는 다시 골목을 향해 걸음을
떼어놓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무엇인가
그 곳에서 강한 흡인력으로 그녀를
끌어당기고 있었다. 게다가 골목 끝에서
집까지는 불과 1킬로미터,느린 걸음으로도
10분 거리인 것이다.
골목을 지나면 집들이 없는
허허벌판이었다. 벌판을 가로지르고
경운기가 겨우 다닐 정도의 농수로 뚝길이
마을까지 이어져 있을 뿐이었다. 여름 한철
젊은 남녀들이 심심찮게 찾아와 짐승들처럼
엉겨붙기는 했으나 수상스러운 일은 한번도
없었다.
그러나 지금은 그 곳으로 가고 싶지
않았다. 누군가 분명히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것이 무엇인지 확실하지는
않지만 공기중에 떠돌고 있는 미세한
먼지처럼 분명하게 존재하고 있었다.
골목길을 피해 큰 길로 집으로 가면 20여
분이나 더 돌아가게 되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여자는 매사를 이성으로 판단하지
않았다. 학교 교육을 변변히 받지 않은
탓에 언제나 육감으로 매사를 판단했고
그에 따라 행동했다.
여자는 골목을 벗어나기 시작했다.
그러자 저만치 골목 끝에서 또 다시 이상한
소리들이 들려오기 시작했다. 그것은
소름이 오싹 끼칠 정도로 차갑게 그녀의
귓전을 후비고 있었다.
이리 와.
이리 오라니까.
이리 오지 않으면 네 년을 찢어 죽일
거야.
여자는 공포로 머리털이 곤두서는 것
같았다. 여자는 걸음을 서두르기 시작했다.
골목 끝에는 분명하게 무시무시한 존재가
도사리고 있었다. 여자는 그때서야 그
사실을 깨달았다.
여자는 걸음을 재게 놀리기 시작했다. 등
뒤에서는 계속 그녀를 부르는 소리가
음산하게 들려오고 있었다. 여자는 뛰듯이
빠르게 걸었다. 오늘따라 골목이 유난히
길게 느껴졌다. 그러나 골목을 벗어나면
벗어날수록 골목 끝에서 들려오는 음산한
소리가 희미해져 가고 있었다. 그와 함께
가슴이 얼어붙는 것 같은 공포도 사라지고
있었다.
여자는 골목을 완전히 벗어나자 비로소
안도의 깊은 한숨을 토해 냈다. 큰
길이었다. 번화가는 아니었으나 도로변으로
군데군데 상점이 있어서 불빛이 밝았다.
곧게 뻗은 아스팔트에는 간간이
헤트라이트를 밝힌 차들이 빠른 속도로
달리고 있었다.
여자는 가쁜 호흡을 고르며 인도를 따라
천천히 걸었다. 이마에서는 식은 땀까지
흘러내리고 있었다. 그러나 가쁜 호흡이
진정되자 비로소 어처구니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참 이상한 일이야. )
여자는 자신이 겪은 일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지금까지 골목을 무수히 오갔으나
그런 경험은 처음이었다. 아니 골목에서
뿐아니라 어디에서도 그런 일을 겪은 일이
없었다.
(설마 그것 때문에.... ?)
여자는 며칠전 농수로에서 주운 이상한
마차가 생각났다. 그 마차는 시멘트 종이에
싸여 있었으나 청동과 황금빛이 찬란했다.
물론 황금이 진짜이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으나 모양이 특이하고 별다른 장식품을
갖고 있지 않은 여자는 그것을 가져다가
집의 찬장에 올려놓았던 것이다. 그러나
그것으로 인해 이상한 공포심을 느낀다고는
생각할 수 없었다.
(내가 공연히 이러지. )
여자는 자신의 행동을 후회했다. 큰 길로
돌아가면 집이 너무 멀었다. 게다가
차도에서 불어오는 바람이 매섭게 얼굴을
할퀴고 있었다. 여자는 걸음을 멈추었다.
바람이 더욱 세차게 불고 있었다. 바람은
이미 캄캄하게 어두워진 차도 건너편
황량한 벌판에서 미친 듯이 아우성을 치고
있었다.
(무섭기는 이 길도 마찬가지야!)
여자는 그런 생각을 했다. 공연히 길을
돌아갈 필요가 없었다. 뱃속에서는
아까부터 꼬르륵 소리가 나고 있었다.
여자는 골목을 향해 걸음을 돌렸다.
골목은 어둠이 먹빛으로 짙게 깔려 검은
상포()처럼 펄럭거리고 있었다. 여자는
어둠의 장막을 헤치며 걷듯이 한 발 한 발
걸음을 떼어놓았다. 이제는 공포가
극심하지 않았다. 그러나 지옥의
무저갱으로 향하는 듯한 기이한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여자는 골목 끝을 향해 걸음을 서둘렀다.
어디선가 개들이 사납게 짖어대고 있었다.
여자는 개들의 울음소리가 늑대가 울부짖는
것 같다고 생각했다. 개들이 짖는 소리가
음산한 울림을 가지고 골목을 울리고
있었다.
 문득 개들이 짖는 소리가 뚝 끊겼다.
여자는 앞만 보고 내쳐 걸었다. 여자는
이미 골목 끝까지 도착해 있었다. 눈을
들어 벌판을 바라보자 어둠 속에서도
벌판의 윤곽이 희미하게 보였다.
여자는 농수로 뚝길을 향해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발 밑이 캄캄하여 걸음을
떼어놓기가 수월하지 않았으나 그래도 수
없이 오간 길이었다. 짐작으로도 집까지
걸어갈 수 있었다.
여자는 농수로 뚝길의 중간쯤에
이르렀다. 착각이었을까. 그때 농수로의
뚝길에서 무엇인가 납짝 엎드려 있던
물체가 벌떡 일어서고 있었다. 여자는
가슴이 철렁했다. 여자가 그것을
사람이라고 알아차린 순간 여자는 소름이
오싹 끼치면서 머리 끝이 쭈뼛해 왔다.
(아!)
여자는 자신도 모르게 걸음을 멈추었다.
그러나 여자가 위험을 예감했을 때는 이미
늦어 버린 뒤였다. 갑자기 뒤통수로 서늘한
기분이 덮쳐 오면서 누군가 그녀를 뒤에서
안듯이 하고 거친 손바닥으로 입을 틀어
막았다.
(읍!)
여자는 발버둥을 치기 시작했다. 입이
틀어 막혀 소리를 지를 수는 없었으나
필사적으로 저항을 했다. 그것은 거의
본능에 가까운 것이었다.
(이,이러면 안돼!)
여자는 머리를 흔들며 울부짖었다.
"빨리 빨리 해치워!"
그러자 어둠을 찢어버릴 듯한 날카로운
목소리가 귓전에 꽂혔다. 사내들은 하나
둘이 아닌 모양이었다. 여자는 거의 제
정신이 아니었다. 사내들이 자신에게
원하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알아차릴
겨를도 없이 누군가에 의해 입이 틀어
막히고 목이 조여졌다.
여자는 숨이 막혀 왔다. 어둠 속이지만
굵은 팔뚝이 자신의 목을 조이고 있다는
것을 알 수가 있었다. 숨을 쉬기가
답답했다. 무서움이나 공포 따위 보다 숨이
막혀 견딜 수가 없었다.
여자는 자신의 목을 감고 있는 팔뚝을
떼어내려고 필사적으로 발버둥을 쳤다.
그러나 여자의 목을 감고 있는 팔뚝은 더욱
억세게 그녀의 목을 조일 뿐이었다.
여자는 무의식적으로 팔꿈치를 뒤로 힘껏
뻗었다. 그러자 팔꿈치가 시큰하면서
억,하는 소리가 들렸다. 무엇인가 팔꿈치에
강하게 부딪친 느낌이었다. 그와 함께 목에
감겨 있던 팔뚝이 힘없이 풀어졌다.
"어!"
사내들의 어처구니없어 하는 소리가
여자의 귓전을 울렸다. 여자는 그때서야
도망쳐야 한다는 생각이 번개처럼 뇌리를
강타했다. 캄캄한 어둠 속에서 여자를
둘러싸고 있는 사내들의 검은 그림자가
무슨 장승처럼 보였다.
여자는 어둠 속으로 허겁지겁 달리기
시작했다.
"튄다!"
"잡아!"
등 뒤에서 사내들의 다급한 외침이
들려왔다. 여자는 머리 끝이 곧추 서는
듯한 기분을 느끼며 냅다 뛰었다. 등
뒤에서 사내들이 달려오는 소리가 지축을
울리듯이 요란하게 들렸다. 여자는 겁이
덜컥 났다. 숨을 헐떡거리며 달렸으나
걸음이 제대로 떨어지지 않았다.
"윽!"
다음 순간 여자는 외마디 비명을 지르며
농수로로 나뒹굴었다. 누군가 그녀의
머리채를 낚아채서 내동댕이쳤던 것이다.
여자는 둔부와 어깨죽지가 으깨지는 듯한
통증을 느꼈다. 그러나 미처 소리를 지를
틈도 없었다. 사내 하나가 엎어질 듯이
여자의 몸 위로 쓰러지며 뺨을 세차게
후려쳤던 것이다.
"이게 어디서 튀고 있어?"
여자는 뺨이 얼얼했다. 그러나 사내는
순식간에 여자의 입에 헝겊 조각을 쑤셔
넣고 팔을 묶어 버렸다. 그리고는 여자의
아랫배를 구둣발로 힘껏 밟았다.
(헉!)
여자는 아랫배가 터지는 것 같은 극심한
통증을 느꼈다.
"이 자식들아,하마터면 놓칠 뻔했잖아?"
누군가 숨을 헐떡거리며 소리를 질렀다.
"죄송합니다. "
"이런 계집 하나도 못다뤄서 앞으로
어떻게 큰 일을 하겠다는 거야?"
"처음이라 그렇습니다. "
"아무리 처음이라도 그렇지 이따위로
일을 하면 은팔찌밖에 더 차겠어? 병신
같은 새끼들!"
사내가 침을 칵 뱉았다. 여자는 아득한
절망감을 느꼈다. 두 다리에 경련이
일어나면서 몸이 사시나무처럼 떨렸다.
"자 이제 알아서들 해봐. 너희들
스스로를 인간이라고 생각하지 말고 이
처리해!가르쳐준대로 못하는 놈은
죽을 줄 알아!"
두목인 듯한 사내의 음산한 목소리였다.
"예!"
사내들이 깍듯한 목소리로 공손히 대답을
했다. 여자는 문득 자신이 언젠가 3류
영화관에서 본 홍콩 영화의 주인공이 된
듯한 기분이 들었다. 홍콩 영화가 아니면
이런 일이 일어난다는 것은 상상할 수도
없었다.
"연습이라고 생각하면 안돼!"
두목인 듯한 사내가 다시 으르렁거렸다.
"예!"
사내들이 염라대왕을 대하듯이 공손히
대답을 했다.
"시작해!"
"예!"
 두목인 듯한 사내의 명령이 떨어지자
사내 하나가 여자의 치마를 허리로 걷어
올렸다. 여자는 눈을 질끈 감았다. 비로소
사내들이 하려는 짓이 무엇인지 알 수
있었다. 여자는 맹렬하게 저항하기
시작했다. 입이 틀어 막히고 손이 묶여서
비명을 지르고 도망을 칠 수는 없었으나 온
몸을 뒤틀며 몸부림쳤다.

강한섭은 볼펜을 놓고 손으로 눈을
비볐다. 시간이 얼마나 되었는지 알 수
없었으나 눈이 몹시 피로했다. 의외로
소설이 빠르게 진행되고 있었다. 바깥은
새벽이 오고 있는 것이 완연하게 느껴졌다.
그는 책상에서 일어나 주방으로 가서 손수
커피를 끓여 마시고 다시 소설을 쓰기
시작했다. 이제는 밤을 꼬박 세워야 할 것

장군이 퇴근했을 때 거실의 소파에는
부인이 앉아서 무엇인가 열심히 닦고
있었다. 장군은 모자를 벗으며 부인이 닦고
있는 것을 곁눈으로 살폈다.
"그게 뭐야?"
"마차예요. "
부인이 건성으로 대답했다.
"골동품인가?"
장군은 웃으며 부인의 앞에 앉았다.
"그래 보이죠?"
부인도 기분이 나쁘지 않은 듯 화사한
미소를 지었다. 이제는 중년을 넘었으나
처녀 때의 아름다움이 아직도 남아 있는
얼굴엔 주름을 감추려는 듯 화장을 진하게
하고 있었다.
"뭔지도 모르고 샀어?"
장군은 부인이 닦고 있는 마차를 자세히
살폈다. 마차는 청동색과 황금색이었는데
네 마리의 말이 끌고 있었다. 상당히
정교하게 만든 마차인데 마부의 복식은
조선의 것이 아니라 중국의 것이었다.
"고물장사에게 샀어요. "
"고물장사?"
"당신이 그림도 못사게 하고 장식품도
못사게 하니 이런 거나 사서 진열해야죠. "
부인의 말투엔 가벼운 불만이 묻어
있었다. 그는 부인이 다른 장교 부인들처럼
몰려다니는 것을 단호하게 반대해 왔었다.
부인들끼리 몰려다니며 그림을 산다거나
복부인 노릇을 하는 것은 장군의
부인으로서는 품위가 떨어지는 일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런 까닭으로 거실에
장식장에 진열된 양주병도 부인 이
모두 고물상에게서 사다가 진열한 것에
지나지 않았다.
"얼마에?"
"헐값예요. "
"헐값?"
"2만원이요. "
"2만원이 헐값인가?"
"당신도 이제 이만한 장식품은 집에
있어야 해요. 남들은 몇십만원씩 주고
도자기도 사는데..... "
부인이 가볍게 눈을 흘겼다. 장군은 더
이상 대꾸하지 않고 담배를 피워 물었다.
부인의 말마따나 2만원을 주고 샀다면 좀
비싸긴 해도 낭비를 했다고 볼 수는 없는
것이다.
"고물장사는 이게 어디서 났대?"
장군은 화제를 바꾸었다.
"어떤 남자한테 샀대요. "
"상당히 정교해 보이는데?"
"그래요. 이 물건이 진품인지 어떤지는
알 수 없어도 이렇게 정교하게 만들려면 몇
달은 걸렸을 거예요. 좀 불길한 물건이기는
하지만.... "
"불길해?"
"이걸 판 남자의 부인이 강도들에게
집단으로 겁탈을 당하고 살해되었대요.
얼마 전에 엽기적인 살인사건이
일어났잖아요?여자를 강간한 뒤에 죽인
사건이요. 범인들이 살인과 강간을
연습삼아 했다고 해서 큰 화제가 되었었죠.
"그래. 신문에서 본 기억이 나. "
장군은 새삼스럽게 사두마차를 살피며
낯끄덕거렸다. 그러나 그것 때문에
불길하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장군은 담배를 재떨이에 비벼 끈 뒤
안방으로 들어가 군복을 벗고 평상복으로
갈아 입었다. 부인이 장군을 따라 들어와
옷을 갈아 입는 것을 도와주었다.
그날 밤 장군은 수많은 말들이 벌판을
달려오는 꿈을 꾸었다. 그것은 기치창검이
하늘을 가득 메우고 피비린내가 진동을
하는 이상한 광경이었다. 전쟁의 꿈이었다.
그러나 탱크와 포를 앞세운 현대전이
아니라 창과 칼로 싸우는 아득한 고대의
전쟁이었다. 그는 거기서도 수 십만 대군을
거느린 장군이었다.
그의 호령 하나로 수 십만 대군이 뽀얀
흙먼지를 일으키며 전투를 벌이고 있었다.
그는 삼국지()에 나오는 관우()
장군처럼 청룡언월도()를 들고
말 위에서 호령을 하고 있었다.
그는 제왕이 되고 싶었다. 그러나 무엇
때문에 제왕이 되고 싶은지는 알 수
없었다. 다만 자신이 제왕이 되는 일에
방해가 되는 자는 가차없이 죽이라는
명령을 내릴 뿐이었다.
전쟁은 참혹했다. 무수한 사람들의 피가
뿌려지고 비명소리가 귓전을 울렸다. 피는
강을 이루고 시체는 산을 이루었다. 문자
그대로 시산혈해()였다. 그러나
그는 제왕이 되기 위해 닥치는대로 사람을
죽였다.
뽀얀 흙먼지가 불듯이 피바람이 불었다.
그러나 권력의 뿌리는 피를 마시고
성장한다는 어디선가 읽은 책 생각이 났다.
권력을 쟁취하는데 피를 뿌리지 않고
탑뺐가능한 일이겠는가. 전쟁이 끝나자
그는 자신에 대한 반대자들을 가혹하게
제거하기 시작했다.

날이 훤히 밝아 오기 시작했다. 강한섭은
그때서야 쓰기를 멈추었다. 장군과
영혼마차의 상관 관계를 정하는 과제가
남아 있었으나 영혼마차를 인간의 권력욕을
상징하는 장치로 설정할 작정이었다.
그러나 한광표의 죽음과 장순덕의 죽음은
지나치게 과장된 느낌이 들었다. 허지만
작품을 완성한 뒤에 기회를 보아 검토를
하면서 삭제해 버리면 그만이었다.

제7장 새벽을 기다리는 사람들

1

한경호는 창밖을 우두커니
내려다보았다.날씨는 포근했다.간밤에
함박눈이 내렸으나 날씨가 따뜻해 길바닥에
쌓인 눈이 녹고 지붕에서는 처마 끝으로
낙수물이 떨어지고 있었다.햇살도 눈이
부시게 밝았다.
그러나 그의 마음은 무겁기 짝이 없었다.
비서실장을 통해 내려온 사령관의 명령은
전혀 상식 밖의 것이었다.그는 그 명령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그러나 그 명령을
실행하지 않으면 안되었다.이미 사령관은
보안사령관을 거쳐 합동수사본부장으로
임명된 뒤 전격적으로 계엄사령관인
육군참모총장을 연행 구속하여 군부 뿐
아니라 정계까지도 발칵 뒤집어놓고
있었다.
주사위는 던져진 것이다.이제는 명령을
이행하지 않을 수 없었다.군대란
상명하복()의 집단이었다.명령을
이행하지 않으면 그대로 군사재판에
회부되는 것이다.그러나 10.26에 관련된 전
중앙정보부장 김재규()의 부하들은
명령에 복종한 죄로 모조리 사형대의
이슬로 사라져야 했다.한경호는 자신이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하는
사면초가()에 몰렸다는 사실을
절감했다.
한경호는 다시 책상 앞에
앉았다.사령관의 명령은 어렵거나 이행할
수 없는 것이 아니었다.그러나 사령관의
명령엔 깊은 뜻이 숨어 있었다.한경호는
사령관의 명령을 이행하기 위해 낡은
타이프 라이터의 자판을 두드리기
시작했다.

1979년은 연초부터 정국에 심상치 않은
기류가 감돌고 있었다.1978년 5월18일
제2대 통일주체대의원 선거에서 압승을
거둔 민주공화당() 총재인
박정희()는 7월6일에 실시된
대통령선거에서 단독출마하여 제9대
대통령에 당선되어 유신정권 제2기를
이끌고 있었다.그러나 체육관 선거라는
비아냥거림이 널리 퍼지면서 긴급조치로
강력한 독재정치를 실현하는 박정희에 대해
국민들의 반발은 만만치 않았다.
국민들은 박정희의 체육관 선거에 침묵의
저항을 하게 되었고 그것은 그해
12월12일에 실시된 제10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야당인 신민당()이 여당을
득표율에서 1.1% 앞서는 결과를 낳고
말았다.신민당은 축제 분위기에 휩싸였으나
여당인 공화당은 의석수에서는 앞섰어도
득표율에서 뒤져 침통한 분위기 속에서
79년을 맞이하고 있었다.
공화당은 이러한 분위기를 쇄신하기 위해
이효상() 당의장서리가 낸 사표를
수리하고 박준규() 정책의장을
당의장서리로 임명했다.박준규
당의장서리는 박정희 총재의 재가를 받아
사무총장에 신형식(식),원내총무에
현오봉( ),대변인에 오유방()
의원을 임명하여 국회 개원에 앞서
야당과의 대화에 나섰다.
신민당은 당권파인 이철승()
대표최고위원이 중도통합론()을
내세우며 여당과의 대화를 시도했으나
김영삼()의 상도동계는
선명론()을 내세워 독재정권과싸워야
한다고 당권파를 몰아세웠다.
상도동계의 강경론은 재야로부터 강력한
지원을 받았다.그리고 말없는 다수인
국민들로부터 절대적인 지지를 받고
있었다.
김영삼의 상도동계는 1.1%의 승리를
수권()의 국민적 명령이라고 신년
벽두부터 신민당의 당권파와 공화당을
공격했다.이러한 가운데 공화당이 제10대
국회의장 후보로 유정회() 소속의
백두진() 의원을 내세우자 김영삼
의원을 비롯한 비당권파는 격렬한 반발을
했다.
우여곡절 끝에 백두진 의원이
김영삼,이민우(),정해영()
의원 등 신민당 소속 의원 17명이 퇴장한
가운데 국회의장에 선출되었으나 그것은
79년의 파란을 예고한 전주곡이었을
뿐이었다.
신민당의 양대 계보인 상도동계와
이철승계는 백두진 파동으로 한차례 접전을
벌인 뒤 5월의 전당대회를 앞두고 지구당
개편대회에 들어가 격렬한 당권 싸움을
시작했다.김영삼 의원은 74년에 총재로
선출되어 야당의 개헌서명운동을 이끌어
지식인들과 청장년층에 폭발적인 인기를
얻고 있었으나 각목대회에서 당권을 빼앗겨
절치부심하고 있었다.
 이철승 대표와 김영삼 전 총재는 4월3일
광주() 지구당개편대회에서부터 치열한
접전을 벌였다.이철승 대표는 기자회견과
대표치사를 통해 '중도통합론은 참여하의
개혁이며 국회를 중심으로 실질적인 투쟁을
벌이자는 것이며,투쟁을 위한 투쟁이나
당내 일부 인사들이 백두진 파동 때 퇴장한
것은 해당() 행위'라고 비당권파를
맹렬히 비난했다.
김영삼 전 총재는 기자회견과 축사를
통해 '백두진 파동 때 당지도부가 보인
것은 여당에 끌려가는 행태'라고 반격한 뒤
'야당다운 야당을 만들어 민주회복을
이루어야 한다'고 이철승 대표를 격렬하게
공격했다.
신민당은 5월2일 김재광()
의원,5월9일 신도환() 의원이 당수
출마를 선언함으로써 본격적인 당권 투쟁의
막을 올렸다.이어 비당권파의 7인
전권위원들인
박일(),황락주(),김옥선()
,최형우(),박용만(),이필선(
),유한열() 의원 등은 5월13일
김영삼 전 총재를 만장일치로 신민당 총재
후보로 추대했다.
신민당의 전당대회는 정치인들 뿐 아니라
대학생들과 노동자들까지 비상한 관심을
가지고 지켜보았다.그들은 중도통합론보다
선명론을 절대적으로 지지하고 있었다.
그러한 가운데 신민당은 최고회의와
정무회의을 잇달아 열어 전당대회일을
5월30일과 5월31일 이틀 동안으로 결정하고
단일지도체재로의 당헌개정안까지
마련했다.
 이철승 대표는 5월21일 당수출마를 공식
선언했다.조윤형()은 5월24일,김영삼
전 총재는 5월25일 각각 출마를
선언하였다.
신민당의 정헌주() 전당대회
의장은 5월25일 전당대회 소집공고를 내고
74개 지구당 대의원 370명,정무회의 선출
대의원 100명,중앙상무위원 370명 등 모두
757명의 대의원 명단을 확정 발표했다.
5월26일엔 박영록(),5월29일엔
이기택() 의원도 각각 당수 출마를
선언했다.그러나 전당대회를 앞두고
조윤형,박영록,김재광 의원은 출마를
사퇴하고 김영삼 전 총재를 지지한다고
발표했다.
김영삼 전 총재는 당권 투쟁에서 당권파
뿐 아니라 중앙정보부로부터도 강력한
견제를 받고 있었다.정보부와 공화당은
김영삼 전 총재의 당선을 막기 위해 모든
공작을 동원하고 있었다.
김영삼 전 총재의 상도동계는
김동영(),황락주,박권흠(),문
부식() 의원 등 4인이 중심 역할을
하고 있었다.그러나 그들은 정보부의
치열한 공작으로 도무지 선거운동을 할 수
없었다.
"이거 원 정보부가 국민의 세금으로
정치사찰만 일삼고 있으니 어떻게 하자는
거야?"
"그놈들이 사찰을 한 것이 어디 어제
오늘의 일이야?"
"대의원들에게 돈을 뿌리고 있대!"
"이런 상황에서 총재 출마를 했다가는
망신만 당하겠어!"
 정보부의 공작이 어찌나 치열한지
황락주,박권흠,문부식 의원은 '우리의
상황은 밑바닥까지 쪼개진 상태여서 승산이
전혀 없다'고 김영삼에게 총재 출마를
만류하기까지 했다.
"도저히 안되겠습니다."
"저 놈들이 죽기살기로 방해공작을 하고
있습니다."
"아무래도 대통령의 결재가 떨어진
눈치입니다."
"이번엔 포기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의원들은 다투어 김영삼 전 총재에게
출마를 하지 않는 것이 유리하다고 말했다.
"나의 목표는 박정권을 타도하는
것이다.내가 여기서 포기하면 이 땅의
민주주의는 누가 회복하는가?이 싸움이
진다고 안하고 이긴다고 할 수는
Z없다.다구나 우리가 독재정권을
쓰러뜨린다는 희망을 포기한다면 어떻게 될
것인가?그렇게 될 바에는 차라리 정치를
그만 두고 말겠다."
김영삼 전 총재는 상도동계의 중진
의원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단호하게
말했다.
한국의 정치 상황은 악화일로를 걷고
있었다.전국의 카톨릭 성당에서 천주교
정의구현사제단의 3.1절 기념 구국선언문이
경찰에 의해 압수되고 탈취되는가 하면
경동교회의 크리스찬 아카데미 관계자들이
반정부,반국가 활동을 했다는 이유로
전격적으로 구속되고,서대문 교도소에서는
긴급조치 위반으로 구속된 학생들이
교도관들과 충돌,교도관들로부터 집단으로
구타를 당하는 사건까지 일어나 시국이
살얼음판 같았다.
게다가 카톨릭의 안동교구에서는
카톨릭농민회 청기분회장인
오원춘()이 실종되어 당국과
카톨릭이 정면대결을 벌이는 사태까지
발생했다.기독교협의회와 교수협의회는
카터 미국 대통령에게 보내는 서한을
발표,한국의 인권문제 해결을 요구했다.
신민당의 전당대회는 이러한 국내의
반독재 투쟁 상황과 맞물려 초미의
관심사로 떠올랐다.
이철승 대표는 최고위원인
이충환(),고흥문(),유치송(
) 의원의 지지를 얻어 범당권파를
결성했다.김영삼 전 총재는
조윤형,박영록,김재광 의원의 지지를 받아
비당권파 연합을 결성했다.신민당의 최대
맛이들은 백중세의 세력으로 맞붙어
국민들의 관심을 고조시켰다.이들의 당권
경쟁은 정보부와 청와대 경호실조차 향방을
점칠 수 없을 정도로 뜨겁게 가열되어
갔다.
청와대 경호실장 차지철()은
전당대회 하루 전인 5월29일 전 대통령후보
김대중()이 중국집 아서원에서 열릴
김영삼 후보의 단합대회에 참석할 것이라는
정보를 입수했다.이 정보는 김재규의
공작자금을 받은 신민당의 국회의원으로
부터 입수한 것이었다.김대중은 10월유신이
선포되기 바로 전에 일본에 갔다가
일본에서 납치되어 세계적인 관심을 불러
일으킨 뒤 유신헌법 철폐를 주장하다가
긴급조치 위반으로 구속되었으나 78년 12월
대통령 취임식날 형집행정지로 출감했었다.
 형집행정지 상태에 있었기 때문에 정치
행위는 할 수 없었으나 신민당에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다.조윤형,박영록,김재광 의원이
김영삼 전 총재를 지지하게 된 것도 따지고
보면 김대중의 영향력이 작용한 것이었다.
당국은 그 정보를 입수하자 즉각
대책회의를 열었다.김영삼 전 총재가
신민당의 당권을 장악한다면 박정희
대통령에겐 커다란 부담이 될 수밖에
없었다.
대책회의엔 정보부장 김재규와 경호실장
차지철,경찰까지 참석했다.경찰은
대책회의에서 김대중을 강제로 연금을
해서라도 아서원의 단합대회에 참석하지
못하게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김대중을 또 연금하자는 얘기요?"
중앙정보부의 김재규 부장이 퉁명스럽게
내뱉았다.그는 차지철과 함께 앉아서
대책회의를 여는 것조차 불만스러운
얼굴이었다.
"김영삼이가 신민당 당권을 장악하면
문제가 많습니다."
"우리가 공작을 충분히 했기 때문에
당선은 불가능하오."
"만약의 경우 당선이라도 되면 각하께서
진노하십니다."
"그런 일은 없을 거요.공연히 김대중이를
연금했다가 신민당의 중도파까지 자극할
필요 없소."
그러나 경찰의 상부 조직이나 마찬가지인
중앙정보부의 김재규 부장은 조직과
자금으로 신민당 대의원들을 포섭해
놓았으므로 공연히 연금을 해서 중도파를
자극할 필요가 없다고 주장했다.
"김 부장 말이 맞아.각하께서는 카터의
인권정책으로 골치를 앓고 있어.김대중이를
연금했다가 미국 대사의 항의라도 받으면
곤란해."
차지철 경호실장도 김재규의 의견에
동조했다.경찰 당국자는 장관들조차
굽실대는 경호실장이 연금에 반대하자 입을
다물어 버렸다.그리하여 5월29일 저녁
김대중은 경찰의 방해를 받지 않고
아서원에 도착해 대의원들에게 김영삼
지지를 호소했다.71년 대통령선거에서
특유의 단문형 연설로 수많은 유권자들을
사로잡은 바 있는 김대중은 아서원에
도착하자 김영삼 동지를 지지하는 것은
선명야당을 지지하는 것이고 이철승 대표를
지지하는 것은 여당을 지지하는 것이라며
김영삼 전 총재의 선명론에 불을 질렀다.
5월 30일 마침내 신민당 전당대회는
새로운 전당대회 의장에 정운갑()
의원을 선출하고 곧 바로 총재 선출에
들어갔다.그러나 1차 투표에서는 이철승
대표가 292표,김영삼 전 총재가
267표,이기택 의원이 92표,신도환 의원이
87표,김옥선 의원이 11표,무효 2표로 재석
대의원 751명의 과반수인 376표에 모두
미달하여 2차 투표에 들어갈 수밖에
없었다.
신민당 전당대회장은 팽팽한 긴장감이
감돌았다.전당대회는 내외신 기자들 뿐
아니라 국민들에게도 비상한 관심을 불러
모아 신민당의 마포 당사에는 이른
아침부터 국민들이 꾸역꾸역 모여 들고
있었다.특히 재야와 대학생들,노동자들은
김영삼과 이철승의 대결을 독재와 반독재의
투쟁이라고까지 규정했다.이철승은
중도통합론으로 재야로부터 강한 불신을
받고 있었다.
그러나 74년도에 개헌서명운동을
이끌었던 김영삼 전 총재는
재야인사들로부터 열렬한 환영을 받으며
반독재 투쟁의 중심에 있었다.
2차 투표에 들어 가기에 앞서 신민당의
총재 후보들은 숨가쁜 계파연합을
시도했다.그리하여 신도환 의원은 총재
후보를 사퇴하고 이철승 대표 지지를
선언했고 김영삼 전 총재와 이기택 후보는
2층 창가에서 장시간의 밀담 끝에 이기택
후보가 후보를 사퇴하고 김영삼 지지를
선언하게 되었다.
오후 7시,2차 투표 개표 결과 김영삼 전
총재가 378표,이철승 대표가 367표,이기택
4표,신도환 2표로 김영삼 전 총재가 재석
대의원 과반수에서 불과 2표,이철승
대표보다는 11표를 더 얻어 신민당 총재에
당선됨으로써 79년의 대파란을 예고하게
되었다.
김영삼 후보의 총재 당선은 민주회복에
대한 국민들의 열망이 만들어낸
결과였다.신민당의 당권 경쟁이 막바지로
치달리고 있을 때부터 은근하게 김영삼
총재를 기자들이 지원했고,재야의 카톨릭을
비롯한 종교인,대학교수,문화 예술인들은
보이지 않게 자금과 조직에서 열세인
김영삼 총재를 지원했다.
총재 투표가 실시되던 5월30일 신민당의
마포 당사 앞에는 이른 아침부터
대학생들과 청년들이 몰려 들어
'김영삼!''김영삼!'을 연호하여 유신헌법에
반대하는 국민들의 열의가 얼마나 뜨거운
것인지 증거하였다.이들은 제 1차 투표가
끝난 뒤 2차 투표를 앞두고 숨가쁜
막후협상이 벌어지고 있을 때까지 자리를
떠나지 않고 김영삼 후보쪽에 성원을
보냈다.특히 김영삼 후보가 이기택 후보와
제휴 협상을 하느라고 귓속말을 나누는
모습이 당사의 창가에 비치자 이들은
'김영삼!''김영삼!''이기택!''이기택!'하고
뜨거운 함성을 질렀다.4.19세대인 이기택은
창 밖의 함성이 무엇을 뜻하는지 알 수
있었고 그 함성을 끝내 외면할 수 없어
후보를 사퇴하고 김영삼 후보의 지지를
선언하게 되었던 것이다.
김영삼 총재는 6월1일
이민우,박영록,조윤형,이기택을 부총재로
임명하고 사무총장에
박한상(),원내총무에
황락주,대변인에 박권흠 의원을
임명했다.특히 인권수호위원장에
고재청(),개헌특별위원장에 이충환
의원을 임명하여 초반부터 박정희 정권과
강경한 투쟁을 벌일 것이라는 인상을
국민들에게 강력하게 심어 주었다.아울러
무소속 의원 7명을 영입하여 신민당 의석을
61석에서 68석으로 늘렸다.이들 무소속
의원들은 대부분 대여 강경 투쟁을 원하는
의원들로 김영삼 총재가 당선되자 비로소
신민당에 입당한 것이었다.

한경호는 잠시 손을 멈추고 허공을
우두커니 응시했다.불과 7개월 전의 신민당
5월30일 전당대회가 까마득한 옛날 일처럼
아득하게 생각되었다.김영삼 총재의 당선은
김대중의 아서원 연설 때문도 아니고
이기택 후보의 지지 선언 때문도
아니었다.그것은 오랫동안의 독재정치에
염증을 느낀 국민들의 말없는 침묵의
저항이 만든 결과였다.

2

한경호는 담배 연기를 길게
내뿜었다.79년을 격동의 시대로 이끈 것은
정치적인 사건뿐이 아니었다.사회의 크고
작은 사건들도 자세히 살피면 평범한
일상이 아니라 역사였다.79년은 1월2일
경상남도 남해에서 버스가 바다로
추락,승객 7명이 숨지는 등 신정연휴 동안
사고와 화재로 70 여명이 숨져 벽두부터
우울하게 시작되었다.3월엔 율산()그룹
회장 신선호()가 치안본부에
연행되어 조사를 받았고 4월엔 강원도
정선의 함백()탄광에서 다이너마이트가
터져 광부 26명이 숨지는 등 사건 사고가
꼬리를 물고 일어났다.6월엔 강원도
삼척()에서 버스가 트럭과 정면 충돌
130미터 절벽으로 굴러 안내양과 승객
24명이 숨졌고 부산에서는 20대 여인 알몸
토막시체가 발견되어 경찰이 수사에
나섰는가 하면 울산에서는 어린이 4명이
냉장고에 들어갔다가 문이 잠기는 바람에
질식하여 숨지는 사태가 발생했다.
그러나 7월엔 제헌절을 맞이하여 시인
양성우를 비롯한 긴급조치 위반자 86명이
석방되기도 했다.
79년 8월은 폭우와 태풍으로
D시작되었다.8월2일 서울을 비롯한
중부지방에 집중호우가 내려 7명이 숨지고
가옥 200 여 채가 침수되었다.5일에는
집중호우가 강원,충청,전북지방까지 이어져
71명이 사망하고 300억원의 재산 피해를
냈다.17일에는 태풍 어빙이 영남지방을
강타하여 13명이 사망하고 45억원의
재산피해를 가져왔다.8월24일과 25일엔
태풍 주디가 남부지방을 강타해 135명이
사망하고 300억원에 이르는 막대한 재산
피해를 내고 동해로 물러갔다.
그러나 그해 8월의 가장 큰 태풍은 역시
YH무역 여공들의 신민당사 농성
사건이었다.

태양은 아침부터 머리 위에서 이글거리고
있었다.8월 초의 폭염은 아스팔트 바닥을
{뜨겁게 달구고 더위로 부풀어 오른 공기는
숨이 턱턱 막혔다.
정국은 긴장의 연속이었다.재야 세력의
전폭적인 지원 아래 신민당의 당권을
장악한 김영삼 총재는 7월에 열린 102회
임시국회에서 대정부질문을 통해 박정희
정권을 맹렬하게 비난했다.박정희 대통령은
국회가 열리기 하루 전인 7월19일 정부
여당 연석회의에서 헌정질서를 파괴하는
행위는 용납할 수 없다고 김영삼 총재의
대정부질문을 경계했다.그러나 20일에 열린
신민당의 의원총회는 '김영삼 총재는
어떠한 위협에도 굴하지 않고 민주회복
투쟁을 전개해 나갈 것이며 김영삼 총재
발언을 신민당 모든 의원들은 단결해서
뒷받침할 것'이라는 결의문을
발표했다.이어서 야당 총재의 원내 발언에
위압적 경고와 원칙에 벗어난 간섭을
자행한 정부 여당의 일련의 작태는 의회
민주정치를 부정하는 비민주적 폭거라는
성명을 발표했다.
7월20일 개회식이 끝나자 유정회와
공화당은 김영삼 총재의 발언이 유신체재를
비판할 경우 제명도 불사한다는 방침을
세우고 앞에 앉은 의원들에게 야유를
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7월23일 내외의 관심이 집중된 가운데
김영삼 총재는 대정부질문의 형태를 빌어
대표연설을 시작했다.김영삼 총재는
박정권이라는 강경한 표현대신 박정희
대통령과 1인 체재라는 완곡한 표현을
사용하여 박정희 대통령은 진실로 이 나라
장래를 위해 조속한 시일 안에 정권을
평화적으로 이양할 준비를 갖추라고
요구했다.이어서 국회에
헌법개정특별위원회를 설치하라고
제의했다.김영삼 총재는 또 역사는 분명히
새로운 민주시대로의 전환을 요구하고
있으며 인위적인 총화가 아니라 자발적인
국민적 단합을 위해 역사의 진로를
민주회복으로 바꿀 시점이라고 말했다.
그는 여당 의원들의 야유가 계속되는
가운데 한국의 인권실태를 상세하게
거론하면서 양심범의 즉각적인 석방,언론의
자유,사법권의 독립 보장,공평한
분배,긴급조치 해제를 촉구했다.
백두진 국회의장은 두 번씩이나 김영삼
총재에게 경고를 했으나 그는 아랑곳하지
않았다.그러나 공화당과 유정회도 더 이상
김영삼 총재의 대표연설을 문제 삼지는
않았다.
 여야의 대립은 25일 신민당이
헌법개정특위구성결의안을 국회 사무처에
접수하고 법사위원회에 상정할 것을
요구하여 비롯되었다.여당은 이를 거부했고
야당은 이를 빌미로 신민당의 기관지인
민주전선()을 들고 가두판매에
나섰다.이 민주전선에는 김영삼 총재의
국회 대표 연설이 실려 있었다.
검찰은 신민당이 민주전선의 가두판매에
나서자 전격적으로 문부식 주간을 긴급조치
9호 위반으로 구속하였다.
여야의 중진 의원들은 이때 비로소 정국
기류가 심상치 않게 돌아가고 있다는 것을
감지했다.그것은 막연한 예감이었으나 중진
의원들은 파국을 막기 위해 중진회담을
개최하여 난국을 타개하기로 했다.
그러나 8월9일 YH무역 여공 사건이
터짐으로써 사태는 다시 파국을 향하여
걷잡을 수 없이 치달리게 되었다.
8월9일 아침 상도동 김영삼 총재의
자택에는 재야의 이문영()
교수,문동환() 목사,시인
고은()이 찾아왔다.
"총재께서도 들으셨는지 모르지만
면목동에 YH무역이라는 회사가 있습니다.그
회사가 오늘 아침 마침내 문을 닫고
여공들을 기숙사에서
쫓아냈습니다.여공들은 그 동안 끈질기게
폐업철회를 요구해 왔지만 기업주는
막무가내로 폐업을 했습니다.여공들이
마지막으로 신민당을 찾아와 호소하려고
하니까 호소를 들어보고 당국에 해결책을
촉구해 주셨으면 합니다."
3인의 재야 인사들은 김영삼 총재에게
간곡하게 부탁했다.
"여공들의 처지가 몹시 어렵습니까?"
"그렇습니다."
"그 회사는 무엇을 하는 회사입니까?"
"처음엔 가발을 수출하여 상당한 돈을
벌었다고 합니다.그러나 70년대 후반부터
가발 수요가 떨어지자 마구잡이로 여공들을
감원하고 해고하는 등 여러 가지 인권
침해를 일으키고 있습니다."
"알겠습니다.나이 어린 여공들이 그와
같은 곤경에 처해 있는데 우리가 돕지
않으면 누가 돕겠습니까? 또 우리 집과
당사는 누구에게나 개방되어 있으므로
찾아오면 선처하겠습니다."
김영삼 총재는 그 자리에서 박권흠
대변인에게 당사에 먼저 나가 여공들의
호소를 들은 다음 보고하라고
지시했다.김영삼 총재는 그때까지도
여공들의 당사 방문이 단순한 호소 차원일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김영삼 총재는 10시에 마포 당사에
도착했다.김영삼 총재가 도착했을 때 YH
여공들은 이미 4층 강당에 빽빽하게 모여
있었다.김영삼 총재는 총재단 회의에
이문영 교수 일행의 요구를 간략하게
보고하고 수해 대책을 논의한 뒤 여공 대표
5명을 총재실로 불렀다.
"YH무역의 문제점이 무엇입니까?"
여공들은 김영삼 총재를 대면하자
울음부터 터뜨렸다.김영삼 총재 같은 거물
정치인이 자신들과 같은 하찮은 여공들을
만나 주자 감격했던 것이다.
"우리는 일을 해야 사는데 일을 할 수가
없습니다."
 "왜 일을 할 수 없지요?"
"장용호() 회장이 막대한 돈을
미국으로 빼돌려 공장운영이 어렵게 되자
공장을 폐쇄하고 8월6일 해고수당과
퇴직금을 은행에 예치시킨 후 8월8일
식당과 기숙사 폐쇄령을 내렸어요."
"그럼 임금은 받을 수 있겠군요?"
"총재님.임금이 문제가 아니예요.기업이
안된다고 문을 닫으면 우리 노동자들은
어떻게 살아가요?그리고 이런 일은
전국에서 비일비재하게 일어나고
있어요.전국의 노동자들을 기업이 안된다고
마구잡이로 해고하고 공장을 폐업하게 되면
노동자들의 삶은 어떻게 되겠어요?"
"그럼 갈 곳이 없습니까?"
"네."
여공들이 울먹이며 대답했다.
"그럼 어떻게 해야 좋겠습니까?"
"기업하는 사람들이 공장을 마구 폐쇄할
수 없도록 해주세요.우리는 일을 하고
싶어요."
"기업도 수지타산이 맞아야 할 것
아니오?"
"기업이 잘될 때는
잔업,연장근로,철야까지 마구 시키고
그렇게 해서 번 돈을 외국으로 빼돌린 뒤에
기업이 안된다고 폐업을 하는 것은 옳지
않아요."
"알았소."
"우리는 마지막으로 신민당에 찾아와
호소하기로 결정했는데 아는 사람이 없어서
이 교수님에게 부탁하게 되었어요.저희들을
받아 주셔서 정말 고맙습니다."
김영삼 총재는 여공 대표들의 호소를
들은 뒤 4층 강당으로 올라갔다.그 곳엔
이미 여공들 180 여 명이 모여 앉아 농성을
하고 있었다.김영삼 총재가 들어서자
여공들은 박수로 맞이했다.
"여러분들이 우리 신민당을 찾아와
고맙습니다.우리 신민당은 여러분들이
억울한 일을 당하지 않도록 정부에
강력하게 촉구하겠습니다."
김영삼 총재는 여공들에게 다짐했다.
박한상 사무총장은 홍성철()
보건사회부 장관에게 전화를 걸어 여공들에
대한 대책을 세우라고 촉구했다.홍성철
장관은 노동청장을 보내겠다고 했으나
노동청장은 나타나지 않았다.
YH무역 여공들이 신민당 당사에서
농성하고 있다는 소식은 신민당 출입
기자들을 통해 일제히 각 방송국과
신문사로 타전되었고 방송국과 신문사는
긴급조치가 선포되어 있는 어려운
상황인데도 불구하고 긴급뉴스로
보도했다.여공들이 야당 당사에서 농성을
하고 있는 것은 헌정 사상 초유의
일이었다.
경찰은 즉각 신민당의 마포 당사를
에워쌌다.여공들의 신민당 당사 농성은
정부 여당을 바짝 긴장시켰다.
여공들에게 점심으로 빵과 우유가
지급되었다.여공들은 자신들의 투쟁 방향에
대해 회의에 들어갔고 여당은 YH무역의
사장 박연원()을 내세워 여공들을
설득하려고 했다.그러나 박연원 사장은 두
번에 걸친 설득이 실패로 돌아가자
연락조차 해오지 않았다.
"우리를 나가라면 어디로 나가라는
말이냐?"
"배고파서 못살겠다.먹을 것을 달라!"
여공들은 신민당 당사에 프랭카드를
내걸었다.정부와 여당은 신민당을 향해
여공들을 당사에서 내보내라는 성명을
발표했다.신민당은 8월10일
총재단,당3역,국회 보사위 소속 의원들과
연석회의를 열고 보사위의 즉각 소집과
당내에 사회노동문제대책위원회를
구성했다.
박권흠 대변인은 정부 여당을 강도 높게
비난하는 성명을 발표했다.
"YH무역 여공들이 신민당사에서 하룻밤을
꼬박 새웠는데도 불구하고 정부측에서는
아무런 성의를 보이지 않을 뿐 아니라
보건사회부 장관이나 노동청장이 얼굴조차
보이지 않으니 직무 유기로
규탄한다.근로자들이 정부를 믿지 못하고
야당을 찾아와 스스로의 생존권을 지키려
한 사태는 정부가 마땅히 책임져야 할
일이다.이에 우리 신민당은 장용호 회장을
즉각 소환해서 재산을 도피시킨 배후를
밝힐 것,YH무역의 현 근로자들을 한 사람도
해고시키지 말고 공장을 가동시킬 것,마포
당사 주변에 배치된 경찰병력을 철수시킬
것,YH 노조의 집단행동에 대해 일체 불문에
붙이고 근로자들의 신변 안전을 보장할
것을 요구한다."
여야는 사태가 심각하게 돌아가자
총무회담을 열었다.야당은 보사위 소집을
요구했으나 여당은 이를 거부했다.홍성철
보사부 장관은 여공들에게 퇴직금을
지급하고 근로자 전원에게 취직을
알선하겠다고 야당 총무에게 답변했다.
8월10일 오후 5시.이순구() 서울
시경국장은 박한상 사무총장에게 전화를
걸어 여공들을 무조건 해산시키라고
요구했다.박한상 사무총장은 갈 곳도 없는
여공들을 어디로 내보내느냐고 항의하고
경찰이 개입하지 말 것을 요구했다.
여공들은 저녁무렵부터 사복경찰이
배치되기 시작하자 초조한 모습을 보이기
시작했다.기자들을 통해 경찰이 강제로
여공들을 해산시키려 한다는 불길한 소식이
들어오자 여공들은 당황하기 시작했다.
여공들은 애국가,노농의 노래 등을
부르며 울음을 터뜨렸다.노조 총회와 노조
간부회의가 잇달아 열리고,울음 속에
경찰이 강제로 투입될 경우 4층에서
뛰어내려 집단 자살하겠다는 성명서가
발표되는가 하면 자살조와 투신조를
편성하는 등 여공들은 죽음으로
항쟁하겠다는 결의문이 낭독되었다.
회의가 끝나자 여공들은 위문품으로
들어온 콜라병과 사이다 병을 들고 창가에
매달렸다.이에 당황한 신민당은 김영삼
총재가 강당에 들어가 '경찰이 들어오지
못하도록 할 테니 걱정하지 말라'하고
여공들을 진정시켰다.
사태는 걷잡을 수 없는 양상으로
발전하고 있었다.신민당 당사 앞에는 경찰
외에도 시민과 노동자들,대학생들이 구름
같이 몰려들어 나이 어린 여공들의 처절한
투쟁을 지켜보고 있었다.일부 노동자들은
당사 안에 있는 여공들을 격려하기 위해
노래를 불러 주기도 했으나 경찰의
위압적이 태도에 금방 입을
다물었다.그러나 시민들과 노동자들,그리고
대학생들은 침묵 속에서 여공들에게 성원을
보내고 있었다.
기자들의 취재경쟁도 치열했다.야당과
재야의 민주화 투쟁은 비록 언론의 자유가
제한되어 있었으나 나름대로 최선을 다하여
민주화 세력을 지원했다.특히 신문의
논조는 언제나 야당과민주화 세력을
지원하고 있었다.
황락주 원내총무는 이순구 시경국장에게
전화를 걸어 기동경찰을 철수시킬 것을
요구했다.이순구 시경국장은 경찰을
출동기키지 않겠다고 약속했다.
김영삼 총재는 여공들을 자극하지 말라고
당원들에게 지시하고 당사 앞에 나가
경찰을 철수하라고 말했다.그러나 경찰은
철수하지 않았다.
김영삼 총재는 당사 주변을 서성거리던
}마포경찰서 김준기()
서장,마포경찰서 정보1과 황용하()
과장을 발견하자 더욱 큰 소리로 질책했다.
"너희들이 정말 저 나이 어린 여공들을
창문에서 뛰어내리게 할 참이야?"
김영삼 총재는 두 사람의 뺨을
때렸다.그러자 경찰이 우르르 달려들었고
신민당의 청년 당원들도 총재를 보호하기
위해 경찰과 치고 받는 몸싸움을
벌였다.그러나 김영삼 총재가 야당 총재의
신분이었기 때문에 더 이상의 불상사는
없었다.공화당과 유정회는 야당 총재가
경찰을 폭행했다고 격렬하게 비난했다.
8월11일 새벽 1시58분.이순구 시경국장은
갑자기 여공들을 내보내지 않으면 경찰을
투입하겠다고 박한상 사무총장에게
통고했다.경찰은 이미 여공들의 강제해산
d작전을 수립해 놓고 있었다.작전명은
'101'작전이었다.
그리고 2분 뒤인 새벽 2시 자동차의
크랙숀 소리가 두번 울리자 '101작전'이
개시되었다.조명용 소방차 2대가 대낮처럼
서치라이트를 밝히고 고가사다리차 3대
물탱크차 2대가 동원된 가운데 1천 여
명의 사복()경찰들이 신민당 당사로
일제히 뛰어 들어갔다.
2층 총재실에는 박한상 사무총장이
이순구 시경국장과 통화를 끝낸 후 대책을
숙의하려던 참이었다.갑자기 건장한 체구의
사복들이 벽돌과 쇠파이프로 양쪽문을
부수고 뛰어 들어와 김영삼 총재 등
국회의원 16명과 기자 등 30 여 명을
주먹질과 발길질을 하면서 당사 밖으로
몰아냈다.신민당의 청년 당원들은 사복
경찰이 몰려 들어오자 재떨이를 집어던지며
저항했고 경찰은 벽돌과 쇠파이프로 이들을
진압했다.
신민당 총재실은 순식간에 아비규환으로
변했다.경찰은 닥치는대로 쇠파이프를
휘둘러 총재실을 수라장으로
만들었다.김영삼 총재를 제외한 모든
국회의원들이 주먹질을 당했고
황락주,김형광,박한상 의원 등이
집중적으로 몰매를 맞았다.
신민당 대변인 박권흠 의원은
"저 놈이 박권흠이다!"
"악질이다!"
"저 새끼 죽여!"
하는 소리와 함께 달려든 사복 경찰에게
구둣발로 짓밟혀 얼굴을 알아 볼 수 없을
정도로 피투성이가 되었다.
"기자면 다냐?"
"이 새끼는 악질적인 기자야!"
기자들도 예외없이 집단 구타를
당했다.카메라가 박살이 나고 필림이
짓밟혔다.
4층의 여공들은 갑자기 사복 경찰이
들이닥치자 공포에 휩싸여
울부짖었다.그녀들은 자정이 넘자 경찰이
강제해산을 하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교대로 잠을 자고 있었다.
사복 경찰은 4층에 들어서자 여공들의
투신을 막기 위해 열려 있는 창문을 겹겹이
에워쌌다.
여공들은 그때서야 잠에서 깨어나
사이다병과 콜라병을 깨어들고 울부짖으며
저항했다.그러나 잇달아 기동경찰이 방패와
솨파이프를 들고 뛰어들어와 여공들을
닥치는대로 연행하여 기동경찰 버스에
태웠다.일부 여공들은 울부짖으며 창문으로
달려가 유리창을 깨뜨리고 뛰어내리려
했으나 경찰들의 장벽에 막혀 뜻을 이루지
못했다.이때 일부 여공들이 깨진 유리
조각과 사이다병으로 동맥을 절단하여
자살을 기도했는데 스물 한살의 여공
김경숙()이 왼쪽 팔목의 동맥절단과
원인불명의 타박상을 입은 채 당사 뒤편
지하실 입구에서 발견되어 녹십자 병원으로
옮겼으나 새벽 2시30분쯤 절명했다.
당사 밖으로 끌려 나온 여공들은
기동경찰 버스에 실려
마포,청량리,성북,성동,동대문 경찰서 등에
분산 수용되었다.그러나 여공들은 버스
안에서도 울부짖으며 창문을 부수고
연행되지 않으려고 격렬하게
X저항했다.경찰은 새벽 2시30분 여공들의
해산이 완료되자 인근의 건재상을 동원하여
신민당 당사의 깨진 유리창을 갈아 끼우고
청소부 30명을 백차로 싣고 와 당사를
깨끗이 청소했다.
YH 여공들의 강제해산은 여야 관계를
더욱 냉각시켰다.공화당과 유정회는
노사문제를 정략적으로 유도했다고
신민당을 격렬하게 비난했다.신민당은
무참하게 유린되어 가는 민권을 살리기
위해서는 어떠한 희생도 감수할 것이며
신민당의 현 상태를 초비상상태로 규정하고
농성에 들어갔다.공화당과 유정회는 다시
YH 사건 뒤에는
도시산업선교회()와
불순세력이 있다고 발표했다.신민당은
구자춘() 내무장관과 이순구
시경국장의 구속을 요구했다.
유정회는 정재호() 대변인의
이름으로 7개항의 공개질의서를 신민당에
보냈다.그것은 8.11 YH사태는 단순한
노사분규를 신민당에서 부채질하여
정략적으로 이용한 것이 아닌가,총재가
농성 여공들에게 계급투쟁의식을 불어 넣은
것은 김 총재의 외신회견에서 말한
해방정당의 논리가 아닌가,신민당 당사를
농성장으로 제공하면서 재야의
이모,문모,고모와 사전 논의한 진의를
밝히라는 것 등이었다.그리고 노동쟁의를
부추키는 불순세력이 있으니 정부는 이를
철저하게 조사하여 밝히라고 촉구했다.
신민당은 정부와 여당이
도시산업선교회,크리스찬
아카데미,카톨릭농민회 등을 사회불안을
d조성하는 불순세력으로 지목하자
진상조사에 착수하기로 했다.
김성진() 문화공보부 장관은
8월22일 일부 종교를 빙자한 노동쟁의
주동인사들이 투쟁방식이 불법적이고
비도덕적이며 용공적이라는 산업계
종교계의 시정 요구를 받아들인다는 명분을
내세워 조사에 착수했다.이 조사는 청와대
사정반이 직접 참여하여 재야와 종교계를
긴장시켰다.그러나 한 달간의 조사가
끝나자 이들 단체나 관련인사들이
용공적이라는 증거를 찾을 수는 없었으나
불법적인 활동을 한 것은 분명한 사실이며
정부는 이를 단호하게 처리할 것이므로
차후로 이러한 일이 발생하지 않기를
바란다고 발표했다.
김영삼 총재는 8월27일 8.11사태에 대한
종합보고서 형태의 백서를 발표했다.정부와
경찰은 이 보고서를 압수하기 위해
수색영장까지 발부받았으나 신민당의
거부로 실패했다.
김영삼 총재는 ' '이라는
제목의 백서에서 '8.11사태는 단순한
피습사건이 아니라 민주정치를 파괴하고
근로대중을 학대하고 야당과 언론을 탄압한
폭거'라고 신랄하게 비난했다.
신민당은 8월28일 마포 당사 앞에서
김경숙양 추도식을 올렸다.이에 앞서
신민당은 의원총회를 열고 농성해제를
결정하고 2단계 투쟁을 다짐하는 결의문을
채택했다.
'신민당은 8.11폭거의 책임을 끝까지
추궁할 것이며 그 행위가 민족과 역사 앞에
단죄되는 날까지 투쟁을 멈추지 않을
것이다.'
의원총회를 마친 후 신민당은 김경숙양
추도식에 들어갔다.추도식에는 김영삼
총재를 비롯 소속의원과 당원,그리고
재야인사,여공 등 2백 여 명이
참석했다.추도식이 거행된 신민당 마포
당사 주변에는 경찰 2천 여 명이 출입을
통제했다.추도위원회 고문에 추대된
윤보선(),김대중,김수환()
추기경,김관석() 목사를 비롯한 재야
종교계 인사들은 경찰의 방해로 추도식에
참석하지 못하였다.그러나
천관우(),김철(),안필수()
,김정례() 등은 방해를 무릅쓰고
추도식에 참석하여 80년대 노동운동의 불을
지핀 김경숙양의 영혼을 위로했다.

날이 어두워지기 시작했다.한경호는
팔목을 들어 시계를 보았다.시간이 벌써
5시32분이 되어 있었다.부대의 막사 앞에는
어둠이 서리서리 내리고 있었다.한경호는
타이핑한 원고를 서류봉투에 담고 부대를
나섰다.
거리는 조용했다.연말연시의 들뜬
분위기도 없이 거리는 잿빛과 회색으로
우중충했다.검은 색 찢차의 차창으로
흐르는 서울의 야경을 우두커니 내다보면서
한경호는 마음이 무거워지는 것을 느꼈다..

3

저녁을 마치자 한경호는 아내와 함께
소파에 앉아서 TV를 보았다.12월22일
크리스마스 이브를 이틀 앞두고 있었으나
TV프로도 차분하게 가라앉아 있었다.박정희
대통령의 죽음과 12.12사태로 방송도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이번 크리스마스는 무척 춥겠어요."
그의 아내 정란이 어깨를 기대 오며
나직하게 말했다.아내의 머리숱에서 비누
냄새가 강하게 풍겼다.
"연말이니까...."
한경호는 얼굴을 찌푸리며 말 끝을
흐렸다.아내의 머리숱에서 풍기는 비누
냄새는 어쩐지 싸구려 화장품처럼 역겨움이
느껴졌다.
"목욕했나?"
"네."
정란이 웃으며 대답했다.한경호는 팔을
뻗어 아내의 어깨에 감았다.아내가 그렇게
해주기를 기다리고 있는 눈치였다.
"근처에 목욕탕이 있나?"
"대광고등학교 쪽에도 있고
신설동,보문동에도 있어요."
"벌써 동네 구경을 다한 모양이군."
"심심해서 옆집 여자하고 시장에도
가보고 목욕탕에도 같이 가고 그랬어요."
"뭐하는 여자야?"
"가정주부예요."
"남편은 뭐한데?"
"기자예요."
"기자?"
"중원일보 기자래요.아직 아이들이
없어요.그래도 여자는 얌전해요...."
한경호는 이사를 오던 날 집 앞에서
구경을 하던 젊은 여자가 그 여자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서른이 채 안된 젊은
여자였다.그러나 운동을 했는지 몸이
팽팽하게 탄력이 넘쳤다.어쩌면 아내보다
젊기 때문인지 알 수 없었다.언뜻 보기에도
아내보다 7,8년 연하로 보였다.
"이웃이니까 가깝게 지내도 괜찮겠죠?"
"여자들 끼리야 가깝게 지내야지.그러나
내 직업에 대해서는 말하지마."
"옆 집에도 비밀을 지켜야 해요?"
정란이 불만스러운 표정으로 말했다.
"국가 기밀을 다루니까 어쩔 수 없어."
한경호는 냉랭하게 말했다.옆집 사내의
직업이 신문기자라면 더욱 자신의 근무처를
밝힐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럼 직업이 뭐냐고 물으면 뭐라고
그래요?"
"군인이라고 그래."
"장교?"
"응."
"장교도 아니면서 어떻게 장교라고
그래요?"
정란의 얼굴에 다시 불만이 묻어
났다.한경호는 낮게 헛기침을 했다.정란의
그런 불만은 한경호 자신도 같이 느끼고
있는 것이었다.군대에 지원 입대하여
하사관으로 복무하다가 10년째
퇴직했었다.그러나 2년이 채 못되어
복직했는데 이번엔 군인이 아닌
문관으로서였다.
한경호는 때때로 자신의 처지를
한탄했다.자신보다 젊은 사람들이
사관학교를 졸업하고 곧장 장교로 부임하는
것을 볼 때마다 가슴으로 찬바람이 부는 것
같은 쓸쓸함이 밀려오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럼 선임하사라고 그럴래?"
한경호의 말투가 날카롭게 변했다.
"누가 그런대요?"
정란이 움찔했으나 곧 이어 또 다시
퉁명스럽게 내뱉았다.
한경호는 정란의 말투에 대꾸하지 않고
우두커니 TV 화면을 응시했다.TV 화면은
년말특집으로 70년대의 국내 10대 사건을
다루고 있었다.
그때 현관에서 차임벨 소리가
울렸다.정란이 재빨리 현관으로 뛰어
나가는 것을 응시하며 한경호는 담배를
피워 물었다.이 시간에 누구일까 하는
생각이 들었으나 TV 화면에 대연각 화재
모습이 잡히자 화면으로 시선을 못박았다.
"여보."
정란이 화사하게 웃으며 한경호를
불렀다.정란의 옆에는 신문기자의
옆집 여자가 수줍은 듯이 입을
손으로 가리며 웃고 있었다.
"우리 남편예요."
정란이 한경호를 옆집 여자에게
소개했다.
"안녕하세요?"
옆집 여자가 상냥하게 인사를 건네며
고개를 숙였다.한경호는 황급히 소파에서
일어나 목례를 했다.
"옆집에 사는 채은숙예요."
"한경호라고 합니다."
"공연히 두 분의 시간을 방해한 것이
아닌지 모르겠어요.남편이 신문사에서
돌아오지 않아 차나 한 잔 얻어 마실까
하고 왔어요."
채은숙이 밝게 웃었다.
"예."
한경호는 어색하게 대꾸했다.
"당신은 들어가 쉬세요.우리끼리 얘기나
하게...."
정란이 그의 등을 떠밀었다.
"그럴까?"
한경호는 즐겁게 지내시라고 채은숙에게
인사를 한 뒤 서재로 들어가 책상에
앉았다.채은숙의 방문은 돌연한 것이었으나
싫지 않았다.사람이 사는 곳에는 사람이
찾아 와야 하는 것이다.게다가 채은숙의
인상도 마음에 들었다.채은숙의 맑은
인상이 아내의 욕구불만에 찬 얼굴과
비교되었다.채은숙의 얼굴에 비교하면
아내의 얼굴은 탐욕과 부정이 덕지덕지
묻어 있었다.
한경호는 책상 위에 있는 타이프
라이터의 뚜껑을 열고 낮에 사무실에서
하던 작업을 계속하기 시작했다.

정국은 YH 사건을 기폭제로 파국을
향하여 줄달음을 치고 있었다.8.11사태에
항의하기 위해 신민당 의원들의 농성이
계속되고 있을 때 신민당의 비주류
원외지구당 위원장들인
유기준(),윤완중(),조일환(
)이 총재단 직무정지가처분 신청을
내므로써 정국은 소용돌이가 더욱 거세지게
되었던 것이다.
이들은
조윤형,김한수(),조연하(),김
옥선,황명수(),심봉섭(),김태
룡(),김형중(),신경설()
,김덕룡(),정일형() 등이
긴급조치 위반으로 형을 선고받은 일이
있어 정당원 자격이 없고 따라서 이들이
추천한 대의원 25명은 대의원 자격이 없는
무자격 대의원이므로 김영삼 총재는
과반수에서 2표를 더 얻었기 때문에
무효라고 주장했다.
어처구니없는 일이었다.신민당은 즉각
당기위원회를 열어 이들을
제명했다.신민당의 당권투쟁은 정국과
맞물려 국민들의 비상한 관심을 불러
일으켰다.
조윤형 부총재는 가처분신청의 제출은
배후세력이 개입하여 저지른 야당
탄압이라고 주장하고 명백한 증거도 갖고
있다고 말했다.또한 정권과 결탁하여
가처분신청을 제출하게 한 사꾸라 세력이
신민당에 있다고 비주류를 겨냥하여 포문을
열었다. 이에 대해 비주류의
이철승,신도환,고흥문,이충환,유치송
의원등 전 최고위원들은 동지를 모함하고
있다고 주류측을 맹렬히 비난했다.
김영삼 총재는 8월30일 기자회견을 열어
'가처분신청은 야당을 말살하기 위한
조작극'이라고 주장하고 이러한 음모에
단호하게 항쟁할 것이라고 선언했다.
서울 민사지법 합의 16부(
부장판사. , 판사)는 9월8일
'총재선출 무효확인 등 본안소송
확정판결시까지 김영삼은 신민당 총재
집무집행을,이민우,박영록,조윤형,이기택은
부총재의 권한을 행사해서는 안된다'는
결정을 내렸다.이어서 재판부는 전당대회
의장인 정운갑을 총재직무대행자로
선임했다.
매스컴은 이 사실을 대대적으로 보도했고
신민당은 걷잡을 수 없는 혼란에
빠졌다.재야는 법원이 이러한 결정을 내린
것은 법원이 정권의 시녀로 전락한
것이라고 강력한 비난을 가했다.
신민당은 큰 충격 속에서 확대간부회의를
열어 법원 판결을 전면적으로 거부하고
민주회복 투쟁을 더욱 강화한다는 방침을
세웠다.
정운갑 전당대회 의장은 수습위원회를
구성하자고 주류와 비주류에 제의하고
나섰다.그러나 주류측은 이를
거부했다.중도파 의원들 뿐 아니라 비주류
의원들 일부도 참석하지 않아 수습위
구성은 처음부터 난항에 부딪쳤다.
김성진 문화공보부 장관은 9월19일
성명을 발표하여 '정부는 신민당 소속의
김영삼 의원의 발언을 앞으로는 신민당을
대표하는 것으로 보지 않고 개인의
의견으로 본다'면서 김영삼
의원,김영삼씨로 호칭을 바꾸었다.
신민당 주류는 9월25일 당원 1,500명이
참석한 가운데 '김영삼 총재 수호 전국
당원대회'를 열고'김영삼 총재가 유일한
신민당의 법통이며 관선대행은
반당()의 표본'이라고 선언했다.
이어서 신민당은 김영삼 총재 지지
서명작업에 들어가 9월26일 신민당 의원
42명의 명단과 통일당() 의원 3명의
명단을 발표했다.
비서명 의원은 25명뿐이었다.비주류와
여당은 씁쓸했으나 신민당의 주류는 원내
우위를 확보할 수 있었다.
그러나 김영삼 총재의 뉴욕타임지
회견기사가 보도되면서 여당에 의한 김영삼
O총재 제명론이 일어나 정국은 다시 파국을
향해 가파른 고갯길을 달려 내려가기
시작했다.

정부에 대한 김총재의 거리낌없는
투쟁으로 체포의 위험에 처해 있는 한국
야당의 지도자는 카터 미국 대통령에게
박정희 대통령에 대한 지지를 철회하라고
요구했다.미국은 국민을 탄압하는 정권과
민주주의를 열망하는 대다수 국민들 둘
중에서 하나를 선택해야 할 것이다.지난
8월의 가처분 결정은 김총재로부터 신민당
총재의 권한을 대부분 박탈했으며 한국
정부는 국민들에게 사법부에 대한 비난을
금지하고 노동자 및 농민들을 조직화하려는
반정부 인사들을 경계하라는 명령을
내렸다.한국의 고위 관리들은 김총재
셕심각하게 고려하고 있다고
시사했다.여당인 공화당의 박준규
당의장서리는 김총재 체포 가능성에 대한
질문을 받고 '그는 강압적이고 비민주적인
개입을 유도하고 있지만 우리는 그런 비상
수단을 사용하게 되는 사태를 우려하고
있다.김영삼씨는 자고 일어나면 더욱
강경한 혁명주의자가 되어 가고 있다.'고
말했다.그러나 구속당할 위험에 있어도
김총재는 계속 입을 다물지 않고 있다.그는
지난 6월 카터 대통령의 방한에 언급
'카터는 방한을 하여 박대통령에게 큰
선물을 주었다.카터는 박대통령의 위신을
세워 줌으로써 박대통령이 반대 세력을
말살할 수 있는 용기를 불어 넣어
주었다.우리는 박대통령에게 강력한
탄압정책을 쓰도록 해줄 것이라는 사실
카터에게 방한하지 말 것을
요구했었다.그러나 지금은 우리의 우려가
현실이 되었다.카터의 방한을 생각하면
분노를 금할 수 없다.'고 말했다.한국
정부는 딜레마에 빠져 있다.김총재를
구속하자니 그를 대중의 영웅으로 만들어
주는 결과가 될 것이고 그냥 두자니 정부에
대한 노골적이고 공개적인 비판을 멈추게
할 수 없는 것이다.김총재는 '미국의
대사관은 그들의 시야와 접촉을 확대할
능력이 없는 것 같다.대사관이 방대한
인원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접촉의 범위가
그렇게 한정되어 있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라고 말했다.그는 미국의 주
테헤란 대사관이 국무성에 팔레비 정권의
취약성을 경고하지 못한 것을 지적하면서
'이란은 미국의 가장 중대한 외교적
나는 미국 대사관이 이 곳에서
똑같은 전철을 밟지 말기를 바란다.내가
미국 관리들에게 미국은 박대통령에게
직접적이고 공개적인 압력을 통해서만 그를
제어할 수 있다고 말할 때마다 미국
관리들은 한국의 국내 정치에 간섭할 수
없다고 말했다.억지 이론이다.미국은
한국을 보호하기 위해 3만 명의 지상군을
두고 있지 않은가?그것이 국내 문제에 대한
개입이 아니고 무엇인가?'라고
반문했다.한국의 제일 야당인 신민당은
국회에서 3분의 1 미만인 67석을 차지하고
있는데 78년 12월의 선거에서 여당인
공화당보다 더 많은 득표를 했다.
김총재는 '나는 지금도 북한과 대응하는
가장 적절한 방법은 언론 집회의 자유,자유
선거를 통한 우리의 정부를 선택할
자유라고 확신하고 있다.궁극적으로는 보다
많은 민주주의,보다 개방적인 제도와
더불어서만 한국은 이 지역에서의 미국의
이익에 부합할 수 있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김영삼 총재의 회견 내용은 정가를 발칵
뒤집어 놓았다.여당측은 뉴욕타임즈의 회견
내용이 사대주의적 발상이라고
몰아붙였다.공화당과 유정회는
백두진,박준규,태완선(),김종필,이효
상 등 수뇌부 회담을 열어 김영삼 총재의
뉴욕타임지 회견기사를 문제 삼기로 하고
5개질의서를 보내는 한편 정기국회에서
추궁하기로 하였다.특히 유정회는
국가모독죄로 김영삼 총재를 구속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미 국무성은 9월18일 성명을 내고
한국정부는 김영삼 총재를 구속하지 말
것을 촉구하고 김영삼 총재에게는 충동적인
발언으로 정부를 자극하지 말도록
권고했다.
공화당과 유정회는 김영삼 총재를
구속하는 대신 징계동의안을 국회에
제출했다.징계사유는 '국회의원으로서의
신분을 일탈하여 국헌을 위배하고
국가안보와 국리민복을 저해하는
허위사실을 유포하는 등 반국가적 언동을
함으로써 스스로의 주권을 모독하여 국회의
위신을 실추시키고 국회의원으로서의
품위를 손상시켰으므로 국회법 제157조에
의해 징계를 요구한다'로 되어 있었다.
국회에 징계동의안을 제출한 공화당과
유정회는 9월29일 당무회의에서 징계
다소 멀기는 했지만
아들]종류를 제명()으로 결정했다.
박준규 공화당 의장서리는 회의 도중
신라 호텔에 가서 태완선 유정회
의장,차지철 경호실장 등과 회동,청와대의
제명 결정을 통보 받았다.
신민당은 가처분 결정으로 주류와
비주류의 당권 투쟁이 혼미를 거듭하고
있었으나 10월 2일 긴급 의원총회를 열어
'김 총재 제명저지 비상대책회의'를
구성했다.
공화당과 유정회는 김영삼 총재의 제명을
위해 10인 전략위원회를 발족시켰다.그러나
정치가 화약을 지고 불로 뛰어드는 것 같은
양상으로 치닫자 우려하는 여당의원들도
나타났다.박찬종() 의원은 공화당과
유정회의 합동대책회의에서 야당 총재의
제명은 정치적으로 좋지 않다고
'말했다.그러자 태완선 유정회 의장이 그를
옆방으로 불렀다.
"나도 박 의원과 같은 생각을 하는
사람이오.그러나 청와대 법률 담당보좌관이
국회법 규정에 따라 징계가 가능하다고
각하께 보고했소.각하가 싸인한 보고서가
지금 내 주머니에 있으니 아무 말도
마시오."
박찬종 의원은 그 말에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김영삼 총재는 신민당 의원총회에서
'여당은 나의 정치적 신념을 철회하라는 게
제명의 근본적 이유'라고 말한 뒤 '공화당
정권이 비록 나를 감옥에 보내는데
성공할지는 모르나 민주주의에 대한 나의
확고한 신념은 빼앗지 못할 것'이라고
말했다.
10월4일 이른 아침부터 신민당 의원들은
비상대책회의와 의원총회를 잇달아 열고
실력저지를 다짐하고 국회로 출발했다.오전
9시50분,국회 본회의장의 문이 열리자 마자
신민당 의원들은 본회의장에 들어가 단상을
점거했다.백두진 국회의장은 오전
10시30분,11시,12시 세 차례에 걸쳐
의장석에 접근을 시도하여 여야 의원간에
밀고 밀치는 실랑이가 벌어졌다.
오후 1시20분,백두진 국회의장이 네 번째
회의장에 들어와 단상을 중심으로 여야
의원들은 다시 격돌을 벌였다.그 와중에
국회 경위들에게 둘러싸인 백두진 의장은
구두로 손을 들어 '김영삼 의원의
징계동의안이 발의되어 법사위원회에
회부합니다.'하고 선언했다.
백두진 의장의 변칙 사회로 징계동의안이
법사위에 회부되자 법사위는 야당
위원들에게도 알리지 않고 법사위를 열어
40초만에 전격적으로
통과시켰다.서상린() 법사위원장은
'징계안에 대한 제안설명은 유인물로
대체한다'하고 이의를 물은 다음 재빨리
제명 가결을 선포하고 말았다.
뒤늦게 이 사실을 알고 달려온 신민당
의원들과 여당 의원들 사이에 고성이
오가고 밀고 밀리는 소동이 일어났다.야당
의원들은 징계안이 본회의장에서 통과될
것을 대비 본회의장으로 돌아와 단상을
점거했다.
백 의장은 오후 3시55분,국회법
제141조에 의거하여 경호권()을
발동했다.이에 따라 새벽부터 국회의사당
지하실에서 대기하던 300 여 명의
국회경찰이 여당의원 의총회장으로
이용되는 146호실의 통로를 막고 공화당과
유정회 의원들만 입장시켰다.
백 의장은 여당 의원들이 모두 입장을
마친 오후 4시5분,본회의 속개를 선언하고
국회법 제118조에 따라 비공개 회의를
진행했다.그리고 마침내 오후
4시8분,무기명 비밀투표를 시작해 오후 4시
20분에 개표까지 모두 끝냈다.결과는
여당의원 159명 중 159명 전원이 찬성하여
제명이 가결되었다.
신민당 의원들은 여당이 본회의장까지
이동하여 변칙제명을 한 사실을 뒤늦게
알고 달려갔으나 경찰에 의해 저지되었다.
김영삼 총재는 격앙된 분위기 속에서
열린 신민당 의원총회에서 비통한 목소리로
고별인사를 했다.
"공화당 정권이 총선에서 1.1%를 이긴
야당의 총재를 국회에서 추방한 것은
민주주의를 추방한 것이며 닭의 모가지를
비틀어도 새벽은 기필코 오고야 만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할 것입니다.여러분은
제명 전에 의총에서 나와 운명을 같이
한다고 결의했지만 민주주의의 보루인
의회에 남아서 마지막까지 싸워주십시요."
김영삼 총재는 고별사를 남기고 25년
동안 몸담았던 국회를 떠났다.이날 한국의
모든 신문은 국회를 떠나는 김영삼 총재의
그림자가 길게 깔린 사진을 싣고 정부
여당을 노골적으로 비판했다.

제8장 영혼의 파괴자들

1

최종열의 소설은 거기서 끝이 나 있었다.
미경은 원고를 모두 읽자 최종열이 이러한
소설을 쓴 까닭이 다시 궁금해 졌다.
소설은 두 가정이 등장하고 있었으나 두
가정의 얘기를 통해 80년대 정치상황을
분석해 보려는 것 같았다.
(허지만 이런 정도의 소설 때문에
행방불명이 된 것 같지는 않은데 이상한
일이군. )
미경은 소파에 앉아서 골똘히 생각에
잠겼다. 세상은 이제 7,80년대와 전혀
달라져 있었다. 군사정권이 퇴진하고
{문민정부가 들어선 이후 대통령은 12.
12사태를 쿠데타적 사건이라 규정했고 12.
12사태의 피해자들인 정승화 전
육군참모총장 등이 검찰에 고발했으나
검찰은 12. 12사태가 하극상에 의한
반란이라는 사실을 명백히 한 뒤 기소유예
처분을 했던 것이다. 검찰의 처분은 사법적
판단이라는데 그 중요한 의미가 있는
것이었다. 12. 12사태나 그 후의 일 때문에
민간인들이 기관에 구속되거나 살해당할
위협은 전혀 없었다.
(나머지 원고를 찾아서 읽어 봐야 돼. )
미경은 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다시 목포에 내려가서 최종열의
행방을 찾아야 하는 것이 급선무였다.
그러나 최종열과 불륜의 육체관계를
맺었다는 사실이 미경을 주저하게 했다.
최종열만 생각하면 기이할 정도로 그의
벌거벗은 육체와 그와 관계를 맺던 일이
생각나곤 했다.
물론 최종열이 미경의 정부는 아니었다.
미경은 한번도 그를 정부로 생각한 적이
없었고 최종열도 미경을 정부로 생각하지는
않았었다. 미경의 정부라면 지금 함께 살고
있는 사내 양윤석이었다. 최종열은 미경의
욕망을 해소하는 대상이었을 뿐이었다.
(내가 창녀인가?)
미경은 생각이 거기까지 미치자 씁쓸하게
웃었다. 남자들은 스트레스를 해소하기
위해 직업 여자들을 만나 관계를 하고
있었다. 남자들이 관계를 할 수 있는 곳도
수 없이 많았다. 술집이 아니라도 일부
이발소,사우나탕,안마시술소도 쉽사리
남자들이 여자들에게 욕망을 배설할 수
있는 장소였다. 남자들은 약간의 돈만
있으면 여자들을 얼마던지 살 수 있었다.
죄의식이나 도덕적인 윤리는 사라진지
오래였다.
여자들도 마찬가지였다. 여자들은 오래
전부터 나이트클럽이나 카바레를 통해
남자들을 불나비처럼 찾아다녔다. 최근엔
남자 호스트들을 고용한 여성 전용술집이
생겨 충격을 주더니 그 곳을 이용하는
여자들이 대부분 젊은 여자들이라는 사실이
밝혀져 아연하게 했다. 사람들은 그런 곳을
퇴폐 유흥업소라고 부르고 있었다.
그러나 그런 일부 유흥업소를 통해서만
여자들이 문제를 일으키는 것은 아니었다.
최근의 신세대들은 오렌지족,야타족,나타족
등 신조어까지 만들어 가며 욕망을
배설하고 있었다. 성의 개방풍조는 그것이
{지나쳐 큰 사회문제를 일으키고 있었다.
미경은 저녁을 지어 먹고 TV 앞에
앉았다. 양윤석은 아직도 퇴근하지 않고
있었다. TV는 9시 뉴스를 방송하고 있었다.
미경은 9시 뉴스를 잠시 시청하다가 샤워를
하고 침실에 들어가 누웠다.
양윤석은 그날 밤 돌아오지 않았다.
미경은 이튿날 회사에 출근하여 근무를
했다. 양윤석이 다니는 은행에 전화를 걸어
보고 싶은 생각도 들었으나 그가 외박을
하면서 전화를 걸어주지 않은 이상 자신도
걸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 양윤석은
당직이 걸렸거나 동료들과 어울려 포커를
하러 갔을 것이었다.
미경은 회사에서 늦게 퇴근을 했다.
경기도 강화군의 특산품인 화문석 상가를
취재하고 아파트로 돌아오자 그는 이미
뭬틸있었다.
"늦었군. "
양윤석이 덤덤한 어조로 말했다.
"취재를 갔다가 오느라고 늦었어. "
미경은 집에서 입는 일상복으로 갈아
입었다.
"어디?"
"강화도. "
"저녁은 어떻게 했어?"
"아직 안 먹었어. "
미경은 시계를 보았다. 시간은 벌써
8시30분이 가까워지고 있었다.
"시장하겠네?"
미경이 양윤석을 보고 물었다.
"조금. "
"금방 할께. "
"자기도 안 먹었나?"
"응. "
"그럼 외식을 할까?"
"그냥 집에서 해. "
"그러던지. "
그가 소파에 있는 신문을 펴들었다.
미경은 주방으로 가서 저녁을 차리기
시작했다. 밥은 아침에 지어 놓은 것이
있었고 찌게만 끓이면 되었다. 소소한
밑반찬은 백화점에서 산 것이 그대로
있어서 충분했다.
"된장 찌개 끓일까?"
"그래. "
그가 감정이 없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미경은 냄비에 물을 붓고 된장을 풀었다.
야채로는 호박,고기는 조갯살,그리고
두부를 숭숭 썰어서 넣었다.
"술 한잔 할래?"
소파에서 신문을 보던 그가 기척도 없이
등 뒤로 다가와서 미경을 안았다. 미경은
그를 힐끗 쳐다보았다
"술?"
"저녁을 먹으면서 반주로 하지. "
"느닷없이 왠 술일까?"
미경은 웃으며 대꾸했다. 그가 술을 같이
하자고 한 말이 무엇을 뜻하는지
알아차렸기 때문이었다. 저녁을 준비하고
있는데도 그의 손은 미경의 둔부를
슬금슬금 어루만지고 있었다.
"알면서 그래. "
그가 하체를 미경의 둔부에 바짝
밀착시켰다. 미경은 허리를 틀며 웃음을
깨물었다.
"좋아. "
"그럼 내가 사 올께. "
"응. "
그가 미경의 목덜미에 축축한 입술을
얹었다가 떼고 밖으로 나갔다.
미경은 싱크대 앞에서 잠시 그대로 서
있었다. 가슴에서 무엇인가 둔중하게 울린
기분이었다. 우리는 도대체 무엇을 하고
있는 것인가. 벌써 그와 살을 섞고
동거한지도 1년이 가까워 오고 있지
않은가. 우리가 장난처럼 이렇게 사는 것이
옳은가 하는 회의가 가슴을 울리고 있었다.
(그 놈들만 아니었으면 나도 재혼을
했겠지.... )
미경은 우두커니 생각에 잠겼다. 이제
와서 재혼을 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그녀는 이미 사창가에서 지옥 같은 생활을
했고 어찌되었거나 몸을 팔던 여자였다.
그런 몸으로 다른 남자에게 시집을 간다는
것은 부도덕한 일이었다.
게다가 남편의 죽음에 대한 의문도
풀어야 했다. 남편의 죽음 뿐 아니라
미경을 사창가에 팔아 넘긴 사내들도
추적해야 했다. 미경은 그 사내들만은 결코
용서할 수가 없을 것 같았다. 그 사내들로
인해 미경의 인생은 송두리째 뒤바뀌고
말았던 것이다.
물론 미경은 아직도 죽은 남편을
사랑하고 있었다. 미경이 남편에 대한
사랑은 가슴이 시리도록 절절한 것이었다.
미경이 남편을 처음 만난 것은 대학교
1학년 여름방학 때의 일이었다. 미경은
대학생이 된 뒤의 첫 방학이라 친구들과
어울려 고향과 정 반대쪽에 있는 서해안의
대천 해수욕장으로 놀러갔다. 집에서는
여자들끼리 해수욕장에 가는 것을
반대했으나 미경은 허락을 받지 않고 집을
떠났다. 이틀 동안은 해변에 텐트를 치고
지냈고 사흘째 되던 날부터 소나기가
쏟아지자 가까스로 민박집을 얻어 이틀을
지냈다.
미경의 친구들은 비가 쏟아져 해수욕을
할 수 없게 되자 호텔에 가서 춤을 추기로
했다. 미경도 대천까지 와서 방구석에
처량하게 앉아 있기는 싫었다.
미경과 친구들은 호텔의 나이트클럽에서
춤을 추다가 남자들을 만났다. 그들이
미경의 친구들과 합석을 요구했고 미경과
미경의 친구들은 아무도 반대하지 않았다.
그들은 서울에서 내려온 대학생들이었다.
미경과 미경의 친구들은 그 곳
나이트클럽에서 남자들과 함께 자정이 될
때까지 춤을 추었다. 밖으로 나오자
그때까지도 비가 쏟아지고 있었다.
남자들의 제안에 의해 그녀들은 남자들의
텐트로 몰려갔다. 남자들은 귀한 손님들이
왔다면서 술과 음식을 꺼냈다. 그녀들은
남자들이 권하는 대로 술을 마시고 노래를
불렀다.
미경은 새벽 3시쯤 남자들의 텐트에서
나왔다. 술을 더 이상 마실 수가 없었다.
밖으로 나오자 빗발이 약해져 있었다.
미경은 남자들이 바래다 주겠다는 것을
사양하고 민박집을 향해 걸음을
떼어놓았다. 걸음이 비틀거렸다. 미경은
몸을 가누지 못할 정도로 취해 있었다.
미경의 친구들은 남자들과 계속 술을
마시고 노래를 불렀다.
미경은 비틀대며 걸었다. 공연히 술을
마셨다는 생각이 들었으나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미경은 백사장을 걷다가 잠시 걸음을
멈추었다. 백사장은 군데군데 텐트가 쳐져
있었으나 대개 불이 꺼져 있었다. 미경은
백사장에서 검푸른 바다를 쳐다보았다.
빗발이 시원했다. 파도는 검은 빛으로
달려와 모래톱을 핥고 있었다.
미경은 다시 걸음을 떼어놓았다. 술이
몹시 취해 다리가 비틀거렸다.
"아가씨 취했구만. "
그때 어둠 속에서 낯선 사내들이
미경에게 다가왔다. 미경은 머리를
흔들었다.
"누구세요?"
"누군지는 알아서 뭘해?"
사내 하나가 미경의 어깨에 팔을 감았다.
미경은 깜짝 놀라 사내의 팔을 떼어내려고
했다.
"아쭈!"
사내 하나가 갑자기 넓은 손바닥으로
미경의 입을 틀어막았다. 미경은 사내의
손을 뿌리치려고 사내의 손을 잡았다.
그러자 또 한 사내가 달려들어 미경의 팔을
뒤로 꺽었다.
"빨리해!"
누군가 다급하게 소리를 질렀다. 그러자
사내 하나가 미경의 머리에 옷가지를 덮어
씌웠다. 미경은 발버둥을 쳤다. 그러나
사내들은 빠르게 미경을 어깨에 둘러메고
풀숲으로 달려갔다.
(이 일을 어떻게 해.... ?)
미경은 입속으로 부르짖었다. 그때
사내들이 미경을 풀숲에 내려 놓았다.
사내들이 미경의 옷을 벗기기 시작했다.
T미경은 눈 앞이 캄캄해져 왔다. 그러나
미경은 안간힘을 쓰면서 반항했다.
사내들이 어깨를 찍어 누르고 있었으나
필사적인 저항을 했다.
"이년이!"
"잠자코 있어 이년아!"
사내들이 미경의 뺨을 후려쳤다. 미경은
뺨이 얼얼했다. 사내들은 미경이 저항하지
못하도록 양쪽 어깨를 찍어 누르고 다시
옷을 벗기기 시작했다. 미경은 울면서
몸부림을 쳤다. 그러나 소용없는 짓이었다.
사내들은 미경이 입고 있던 스커트의
지퍼를 내리고 치마자락을 허리로 걷어
올렸다. 미경은 필사적으로 발버둥을 쳤다.
"이년이 칼 맛을 봐야겠어?"
그때 사내 하나가 날이 시퍼런 과도
하나를 미경의 눈 앞에 들이댔다. 미경은
가슴이 철렁했다.
"어때?이걸로 면상을 그어줘?"
미경은 고개를 절래절래 흔들었다.
"그럼 잠자코 있어. 알았어?반항해 봤자
험한 꼴만 될 테니까.... 잠자코 있는 것이
너를 위해서도 좋아!"
미경은 고개를 끄덕거렸다. 사내들이
칼을 들고 있어 겁이 덜컥 났다.
"입을 틀어 막아!"
사내 하나가 짧게 외쳤다. 그러자 다른
사내가 재빨리 미경의 입에 헝겊조각으로
재갈을 물렸다. 그리고 이어서 미경의 손을
나이롱줄로 묶었다.
미경은 두 눈을 감았다. 사방은 캄캄하게
어두웠고 비가 계속 쏟아지고 있었다.
미경은 캄캄한 어둠 속에서 숨을 죽였다.
사내들은 미경의 아랫도리에 걸쳐져 있는
속옷까지 벗기고 미경의 몸위로
올라왔다.
미경은 울기 시작했다. 사내의 하체가
미경의 아랫도리의 은밀한 곳을 압박해
오려는 순간이었다.
(아!)
미경은 비감했다. 그때 어디선가
호루라기소리가 요란하게 들려왔다.
"뭐야?"
"경찰이야!"
"씨팔!"
"튀어!"
미경을 겁탈하려던 사내들이
호루라기소리에 놀라 후닥닥 달아나기
시작했다. 호루라기소리는 한참동안이나
요란하게 들려오다가 그쳤다.
"괜찮아요?"
그때 젊은 사내의 부드러운 목소리가
미경의 귓전을 울렸다. 미경이 눈을 뜨자
어둠 속에 한 사내가 서 있었다.
"불량배들은 달아났습니다. "
사내의 목소리는 낮은 저음이었다.
미경은 으,으,하는 신음소리를 냈다.
"이런.... !입이 막혔군요. "
사내가 그때서야 미경의 입에 물린
재갈을 꺼내고 손을 풀러주었다. 미경은
재빨리 스커트를 주워 입었다. 어둠 속이라
아무것도 걸치지 않은 자신의 아랫도리가
사내에게 자세히 보이지 않은 것만 해도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고맙습니다. "
미경은 사내에게 공손히 인사를 했다.
"별 말씀을요. 이만하기를 다행입니다. "
사내가 미경에게 우산을 씌워 주었다.
그 날밤 그 사내의 보호를 받으며
민박집으로 돌아왔다.
이튿날 그 사내가 기타를 들고 찾아
왔다. 미경은 어젯밤의 일이 부끄러웠으나
사내를 따라 나섰다. 다행히 날씨가 맑게
개어 있었다.
사내는 해수욕장 근처의 바위 언덕으로
미경을 데리고 가서 노래를 불러 주었다.
사내는 서울에서 대학교를 다니다가 방학을
맞아 고향인 대천으로 내려온
대학생이었다.

나는 아주 불행한 소년입니다.
나의 얘기는 그다지 잘 알려져 있지는
않지만
불만에 가득차고 고통스러운 어린 시절을
보냈습니다.
약속이나 한 듯이
거짓말과 농담들, 아버지는 여전히 내
얘기를 무시했습니다.
거짓말,거짓말.....

나는 고향을 떠났습니다.
몸을 의지할만한,겨우 잠잘 수 있는 곳을
찾아 도시의 빈민가로 갔습니다.
거짓말,거짓말.....

조그만 일자리라도 얻으려고 했지만
그것도 쉽지 않았습니다.
오직 7번가의 창녀들만이 유혹의 손짓을
보낼 뿐이었습니다.
거짓말,거짓말....

나는 권투선수 겸 청부폭력배가
되었습니다.
도시의 차가운 겨울바람을 견디기 위해
고향으로 가기 위해 복서가 되었습니다.
거짓말,거짓말.....

사내는 그 무렵에 한창 유행하던
사이먼과 가펑클의 '복서'라는 노래를
번역해서 불러 주기도 했다. 사내는 기타를
잘 쳤고 부드러운 목소리를 갖고 있었다.
미경이 복서라는 노래를 좋아하게 된 것도
그 까닭이었다.
사내의 이름은 김석호였다.
미경이 그 사내를 다시 만난 것은 3년
후의 일이었다. 미경이 마지막 여름방학을
해수욕장에 보내기 위해 대천에 갔을 때
김석호도 고향에 돌아와 있었다. 김석호는
대학에 재학중이면서 학생운동을 하여 강제
입영이 되었던 것이다.
미경은 그해 여름부터 김석호와 부쩍
가까워졌다. 해수욕장에서 돌아온 뒤에도
김석호를 계속해서 만났고 김석호를
하루라도 보지 않으면 가슴이 타는 것
같았다. 김석호를 만나면 공연히 가슴이
뛰고 얼굴이 붉어졌다.
(나는 그를 사랑하는 거야.... )
미경은 그렇게 생각했다.
미경과 김석호는 만나기 시작한지
6년만에 결혼식을 올렸다. 연애기간이
길기는 했으나 학생운동을 하던 남편이
졸업하자 곧 바로 신문사에 취직을 하여
정신없이 바쁘게 되었고 혼수비용도
마련해야 했다. 미경도 제약회사 홍보부에
취업을 했다. 자연스럽게 결혼이 늦어진
것이다.
 남편의 의문스러운 죽음과 미경이
정체불명의 사내들에게 납치되어 사창가로
전락하지 않았더라면 지극히 평범한
소시민으로 살아가고 있었을 터였다.
(나는 복수할 거야!)
남편의 얼굴과 자신이 지옥 같은
사창가에서 보낸 일들이 머릿속에서
떠오르자 미경은 얼굴이 차가워졌다.
복수란 단어는 이미 날카로운 비수가 되어
그녀의 가슴 속에서 날을 갈고 있었다.
재혼은 포기했다. 과거를 숨기고 결혼을
할 수도 있었으나 그렇게 재혼을 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녀의 가슴 속에는 오로지
복수에 대한 일념만 가득차 있었다. 다만
미경이 아직까지 정체불명의 사내들에 대한
조사를 하지 않는 것은 그들이 방심하기를
기다리고 있는 것뿐이었다.
양윤석이 돌아온 것은 미경이 저녁을
식탁에 차리기 시작했을 때였다. 미경은
양윤석과 함께 저녁을 먹으면서 술을
마셨다.
"샤워 같이 할까?"
저녁을 마치자 양윤석이 물었다.
"좋지. "
미경은 쾌활하게 대답했다. 술 때문일까.
미경의 내부에서 갑자기 쎈스에 대한
욕망이 강렬하게 솟구치고 있었다.
"쎈스란 뭘까?"
욕실에서 양윤석이 미경을 안아서 무릎
위에 올려놓으며 말했다.
"욕망이겠지. "
"욕망?"
"종족 번식에 대한 욕망,폭력에 대한
욕망.... "
"아니야. 쎈스가 반드시 욕망은 아니야.
"
"그럼 뭐야?"
"사랑이야. "
"웃기네!"
미경이 코웃음을 쳤다.
"그럼 너는 욕망 때문에 쎈스를 하니?"
"그럼 무엇 때문에 쎈스를 해?"
미경이 가볍게 둔부를 흔들었다. 그러자
양윤석이 미경의 가슴을 한 입 베어
물었다.
"아,기분 좋아. "
미경은 허리를 뒤로 젖히고 양윤석의
머리를 감싸 안았다. 양윤석은 두 손으로
미경의 둔부를 받치고 있었다. 미경은
둔부에 양윤석의 손길을 느끼며 가볍게
둔부를 흔들었다. 양윤석의 하체가 그녀의
구깊이 침입해 들어오고 있었다.
"이게 욕망이야?"
양윤석이 미경의 허리를 바짝 조이며
물었다.
"그럼 욕망이 아니고 무어야?"
"이건 사랑이야. "
양윤석이 미경을 타이루 벽으로
밀어붙였다.
미경은 눈을 감고 전신으로 퍼지는
관능적인 쾌락을 음미하기 시작했다.
양윤석과의 쎈스가 욕망이든지 사랑이든지
아무 상관이 없었다. 미경은 양윤석이
자신의 몸 속에 들어와 있는 순간만큼은
철저하게 쾌락에 몰두하고 싶었다.

2

양윤석이 후드득 몸을 떨며 곤두박질을
쳤다. 미경은 재빨리 양윤석의 땀에 젖은
몸뚱이를 받아 안으며 두 다리로 그의
허리를 바짝 조였다. 양윤석은 언제나
그렇듯이 몸을 두,세 차례 부르르 떨고는
미경의 젖무덤에 얼굴을 묻었다.
"어땠어?"
양윤석이 땀에 젖은 얼굴을 미경의
가슴에 비비며 물었다. 미경은 고개를
돌렸다.
"수고했어. "
미경은 가볍게 양윤석의 등을 두드렸다.
"내가 노동을 한 건가?"
양윤석의 말에 미경은 쿡 하고 웃음이
터져 나왔다.
"남자들은 그런다던데.... 부인과 쎈스가
끝나면 아 오늘도 체력봉사를 했구나
거야. "
"그럼 여자들은?"
"계()를 탓다고 그런대. "
"쎈스가?"
"응. "
"어째서?"
"결혼 생활이 어느 정도 되면 남자들은
회사에서 스트레스 받고 술 마시고
이래저래 쎈스를 등한시하게 된다는 거야.
그런데 여자는 오히려 성욕이 더욱
왕성해진대. 그래서 남자들이 피곤하다는
이유로 여자들의 욕구를 거절하는데 모처럼
쎈스를 하게 되면 여자 쪽에선 마치 계를
탄 것 같다는 거지. "
"그럼 그만치 즐겁다는 얘기야?"
"계를 타는 것이 마냥 즐거운 것만은
아니야. 목돈을 타기 위해 계를 부울 때는
희망이 컸는데 막상 곗돈을 타고 보니 여기
저기 찢어발기고 남은 돈이 없게 되지.
쎈스도 그와 마찬가지야. 기다리고
기다리다가 쎈스를 했는데 까무러칠만치
좋은 것도 없구 밍밍하니까 실망이 컸다는
얘기야. "
"신빙성이 있는 얘기인가?"
"그럼 모든 부부가 항상 오르가즘을
느낀다고 생각해?"
"그런건 아니야. "
"무거워. "
미경은 양윤석의 가슴을 가볍게
밀어냈다. 쎈스에 열중해 있을 때는 느낄
수 없었으나 일단 쎈스가 끝나면 기이하게
남자들의 몸이 무겁게 느껴졌다.
"한번 더 할까?"
양윤석이 그녀의 젖무덤을 입술로 가볍게

"자신 있어?"
미경은 양윤석의 둔부를 손바닥으로
두드렸다.
"공연히 곗돈 탔다는 소리를 들을까봐
그래. "
양윤석이 웃음을 깨물었다.
"무리하는 거 아니야?"
"겨우 두 번에?"
"하긴.... "
"첫 번째는 너무 싱거웠어. 우리가 무슨
포르노 배우라구 욕실에 서서 쎈스를 해?"
"그래서 재미 없었어?"
"너무 빨리 끝났어. "
"그럼 두 번째는?"
"달콤했지. "
미경이 입술을 삐쭉 내밀었다.
"세번은 안 될 거야. "
"한번 해보는 거지 뭐. 어때?"
"좋아. "
미경은 살갑게 웃었다. 그러나 미경과
양윤석이 땀을 뻘뻘 흘리며 필사적인
노력을 했는데도 세 번째는 간신히
이루어졌다. 미경과 양윤석은 씻지도 않고
그대로 침대 위에서 축 늘어져 죽음처럼
깊은 잠을 잤다.
이튿날은 날이 청량하게 맑았다. 하늘은
높고 바람결은 시원했다. 미경은 날씨만큼
몸이 가쁜하여 즐거운 마음으로 회사에
출근을 했다. 이따금 최종열의 원고 때문에
신경이 쓰였으나 어찌해 볼 도리가 없었다.
최종열이 행방불명이 되었기 때문에 그
나머지 원고를 찾을 수가 없었다.
그후 여러 날이 지나갔다. 미경이 목포에
다녀온지 그럭저럭 한 달이 지나자 날씨는
겨울로 접어들었다. 미경은 매일 매일을
평범하게 보냈다. 아파트에서
회사로,회사에서 아파트로 오고 가는 일이
다람쥐 쳇바퀴 돌듯이 계속되었다.
양윤석과의 동거도 계속되었다. 양윤석의
성격이 특별히 모난 성격이 아니어서
스스럼없이 친구처럼,애인처럼,그리고
결혼한 부부처럼 편안하게 지낼 수 있었다.
물론 그 이면에는 쎈스라는 매개가 그들을
끈끈하게 엮어주고 있었다.
미경이 양윤석을 처음 만난 것은
의정부에 있을 때였다. 양윤석은 그 무렵
부인과 딸이 교통사고를 당해 혼자 살고
있었다. 미경이 일하는 다방에 저녁이면
매일 같이 찾아와 한참동안을 우두커니
앉아 있다가 가곤 했다. 그러던 어느날
미경에게 명함 한 장을 주고 갔다.

한성은행 의정부지점 대리 양윤석

전화번호와 함께 명함에 새겨진
글자였다. 양윤석은 그 동안 한성은행
의정부 지점에 근무하고 있었으나 서울로
발령을 받았던 것이다. 양윤석은 서울에
오면 꼭 한번 찾아 오라고 미경에게
당부했고 미경은 성형수술을 마치자
양윤석과 만나 동거생활을 시작했던
것이다.
(우리는 짐승처럼 살고 있는 거야.... )
미경은 양윤석과 쎈스를 하다가도 침실에
붙어 있는 커다란 거울을 향하여
중얼거리곤 했다. 그 거울에는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두 남녀가 짐승처럼
교미를 하고 있었다. 남자나 여자나 입까지
벌리고 누가 더 크게 신음소리를 내는
시합이라도 벌이듯이 정신없이 헐떡대고
있었다. 영락없는 두 마리의 짐승이었다.
방안에는 뜨거운 열기가 가득했고 살이
부딪치는 소리가 요란했다.
그들은 뱀처럼 엉켜 있었다. 때때로
체위가 바뀌기도 했고 뒤에서 뒤로
달라붙거나 옆으로 누워서 달라붙어 있을
때도 있었다. 드물기는 하지만 짐승들이
교미를 하는 자세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야릇한 자세,소위 식스 나인 자세로 엉켜
있는 모습이 거울에 비치기도 했다. 미경은
그럴 때마다 허공에서 낯선 사내들의 웃음
소리가 암암하게 들려 오는 듯한 환청에
몸을 떨었다.
미경이 최종열의 소식을 다시 듣게 된
것은 12월 초순의 일이었다. 미경은
연말특집에 실릴 기사를 끝내고 사무실에
앉아서 한가하게 담배를 피워 물고 있었다.
토요일 오후였다. 미경은 양윤석에게
전화를 걸어 대학로에 가서 연극이나 한편
보러 가자고 할 참이었는데 석간신문이
배달되었다.
미경은 무심결에 신문을 펼쳐 정치면부터
대충 훑어보기 시작했다.
"어!"
미경의 시선이 사회면에 이르렀을 때
미경은 자신도 모르게 짧은 신음소리를
토했다. 사회면 하단에 최종열의
변사() 기사가 짧게 실려 있었다.

11일 오전 9시15분쯤 경기도 화성군
태안읍 진안리 야산 소나무 숲에서 작가
최종열씨(37. 전남 목포시)가 손발이
묶이고 입에 재갈이 물린 채 목졸려 숨져
있는 것을 주민 김태수씨(26. 태안읍
황계리)가 발견하여 경찰에 신고했다.
숨진 최씨는 두 손이 나이롱줄에 묶여
있었으며 입에 여자의 속옷으로 재갈이
물리고 복부를 난자 당한 채 부라우스로
목이 졸려 있었다. 현장 주변에는 최씨의
것으로 보이는 가방,외투,지갑 등이 떨어져
있었다.
경찰은 범행 수법이 잔인하고 최씨의
입에 속옷을 집어 넣고 목을 조른 것이
여자의 옷인 점을 미루어 치정에 얽힌
살인으로 보고 수사중이다.

미경은 그 신문기사를 두 번이나
되풀이해서 읽었다. 신문기사를 도무지
믿을 수가 없었다. 행방불명이 된 최종열이
살해당한 것도 믿을 수 없는 일이었으나
살해당한 방법도 도무지 납득이 되지
않았다. 최종열이란 사람이 그렇게
허망하게 죽었다는 것이 도저히 실감이
되지 않았다.
(최종열의 죽음은 치정이 아니야. )
미경은 신문에서 시선을 떼고 무겁게
한숨을 내뱉았다. 그러나 신문기사만으로는
자세한 내막을 파악할 길이 없었다. 가장
좋은 방법은 직접 사건 현장에 가서
최종열이 어떻게 죽었는지 살펴보는
것뿐이었다. 그러나 선뜻 사건 현장으로
달려가고 싶은 생각이 나지 않았다.
미경은 착잡한 생각을 떨쳐버릴 수가
없었다. 최종열의 죽음을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의문 투성이었다.
 미경은 회사에서 퇴근을 한 뒤에 인근
찻집에 들어가 앉았다. 토요일 오후라
그런지 찻집은 덩그러니 비어 있었다.
미경은 커피 한잔을 시켜 놓고 최종열이
살해당한 이유를 골똘히 생각하기
시작했다. 최종열은 아무래도 정치적인
이유로 살해당했으리라고 보는 것이 옳을
것 같았다. 80년대의 무단통치가 끝난 것은
분명했으나 그 시대를 그리워하는 세력이나
그 시대의 잔여 세력들에 의해 살해당했을
것으로 추측되었다.
(그 사람들이 부활한다더니 정말
그런가?)
미경은 최근의 정치판을 머릿속에
떠올리며 우울해 졌다. 문민정부가
들어서며 정치권뿐 아니라 사회 각분야에서
수많은 기득권층이 도태되거나 매장을 당한
뒤 현 사회에 대한 불만이 팽배해 지고
있었다.
개혁이 후퇴하고 있다는 비판이 거세게
일어나는가 하면 개혁이 주춤한 틈을 타서
우익 보수 진영이 들고 일어나고 있었다.
최종열의 죽음은 결코 이러한 사회 현상과
무관할 수 없었다.
(일단 그의 죽음을 확인해야 해. )
미경은 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미경은 커피를 마신 뒤 찻집에서 나와
회사에 들어갔다. 회사에서 카메라를
챙기기 위해서였다. 최종열의 죽음을
취재하려면 기자패스와 카메라가 필요했던
것이다.
회사에는 후배기자인 박순옥()이
혼자 앉아서 전화를 받고 있었다. 미경은
캐비넷에서 카메라를 꺼내 가지고 필림을
확인한 뒤 회사를 나왔다. 미경은 먼저
회사 근처에 있는 분식집에 들어가
칼국수로 간단하게 점심을 때웠다.
경기도 화성은 수원 옆에 있었다. 미경은
화성에 한번도 가 본 일이 없었으나
화성연쇄살인 사건이 잇달아 터지는 바람에
화성의 위치는 막연히 짐작하고 있었다.
미경은 시청역에서 전철을 탔다.
수원까지는 버스를 타야 했으나 국도가
밀리고 차를 갖고 있지 않은 미경은 전철이
가장 빠르리라고 생각했다. 다행히 수원행
전철은 토요일인데도 그다지 혼잡하지
않았다.
서울에서 수원까지는 40분 남짓 걸렸다.
화성군 태안읍은 수원에서 오산으로
택시를 타고 15분쯤 걸렸다. 생각했던
것보다는 가까운 곳이었다.
그러나 태안읍 병점리에서 내리자
막막하기 짝이 없었다. 미경은 사람들에게
물어 태안지서를 먼저 찾아갔다.
태안지서는 아직도 화성연쇄살인사건
수사본부가 설치되어 있었고 최종열
살인사건은 뜻밖에 화성경찰서에 설치되어
있었다.
"사건 현장을 가봐도 되나요?"
미경은 지서를 지키고 있는 차석에게
물었다.
"그럼요. "
차석이 선선하게 대꾸했다. 차석은 눈이
크고 시원시원한 사람이었다.
"현장이 어디쯤 되요?"
"여기서 가까운데..... 큰 길을 건너면
야산이 하나 보일겁니다. 석재공장 바로
뒤에요. 그 산 중턱에 있습니다. "
"높은가요?"
"높지 않습니다. 국민학교 아이들도
올라가서 노니까요. 잠깐 기다리십시요.
우리 의경에게 안내해 드리라고
할테니까.... "
"괜찮아요. 저 혼자서도 갈 수 있어요. "
미경은 차석의 제안을 사양했다. 공연히
의경이 따라붙어 이것 저것 간섭을 하게 될
것 같아 미리 차단해 버리자는 속셈이었다.
그러자 차석이 빙그레 웃었다.
"안됩니다. "
"네?"
"여기는 화성입니다. 여자분 혼자서
야산에 올라가게 할 수 없습니다. "
"무슨 뜻예요?"
"위험하다는 뜻입니다. "
"아직두요?"
"살인마를 검거하지 못했으니 조심하는
게 상책이지요. "
미경은 도리없이 차석이 따라붙인 의경의
안내를 받으며 진안리 야산으로 올라갔다.
그러나 그 야산은 이미 경찰이 샅샅이
수색을 하고 증거물을 모조리 수집해 간
뒤여서 아무 것도 남아 있지 않았다. 기껏
남아 있는 것이라고는 경찰이 '수사중
접근금지'라는 종이를 매달아 놓은 붉은
나이롱줄 뿐이었다.
"수사는 진척이 있나요?"
미경은 을씨년스러운 사건 현장에서
사진을 몇 커트 찍고 의경에게 물었다.
"전 모릅니다. "
"시체를 봤어요?"
"예. "
"시체가 어땠어요?"
" "글쎄요. 죽은지 오래된 시체라는
것밖에는 잘 모르겠습니다. "
"오래 돼요?시체가 부패했었나요?"
"겨울이라 완전히 부패하지는 않았지만
죽은지 오래 된 것은 틀림없습니다. "
"의대생예요?"
"어,어떻게 아시죠?"
의경이 놀란 눈으로 미경을 쳐다보았다.
"시체의 부패 정도를 보고 죽은지
오래되었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전문가라고
봐야죠. "
미경은 피식 웃었다.
"그렇군요. "
의경이 고개를 끄덕거리며 담배를 꺼내
입에 물었다. 미경도 담배를 피워 물었다.
최종열의 시체가 죽은지 오래된 것이라면
행방불명이 되었을 때 이미 살해되었다고
맘틴했다.
"시체는 어떻게 되었어요?"
"부검을 하기 위해 국립과학수사연구소로
보냈습니다. "
"가족들은 왔나요?"
"잘 모르겠습니다. "
"시체가 참혹했나요?"
"예. "
미경은 얼굴을 찡그렸다. 최종열이
참혹하게 죽은 모습을 상상하자 기분이
야릇했다.
미경은 아직도 최종열을 자신의 몸속
깊숙이 받아들이며 쾌락에 몸을 떨던
순간들을 잊지 않고 있었다. 그의 체취는
잊었으나 그 느낌은 잊지 않고 있었다.
그런데 그가 비참하기 짝이 없는 모습으로
죽은 것이다.
(내가 죽은 사람을 두고 쎈스를
생각하다니.... )
미경은 고개를 절래절래 흔들었다.
야산은 소나무만 여기저기 듬성듬성 서
있을 뿐 키 작은 잡목과 나뭇잎만 수북히
쌓여 있었다.
"여기는 살인사건이 여러 번 일어난
곳입니다. "
미경이 입을 다물고 있자 의경이 입을
열었다.
"화성연쇄살인사건이요?"
"예. 바로 이 근처에서 두 번이나
일어났지요. "
"그 사건은 아직도 미궁에 빠져 있나요?"
"두 건은 해결했구 나머지는
오리무중입니다. 이 산 저 너머에서
여중생이 살해되었는데 그 사건은
피퓸저 쪽에서 일어난 사건은 아직
해결되지 않았습니다. "
"어디예요?"
"바로 저기입니다. "
의경이 손으로 가리키는 장소는 최종열의
시체가 발견된 곳에서 30미터 남짓 떨어져
있었다.
"붉은 옷을 입은 여자만
살해한다면서요?"
미경은 여자가 살해된 곳을 쳐다보며
의경에게 물었다.
"그건 헛소문입니다. "
"왜요?"
"여러 사람이 살인마에게 살해되다
보니까 이상한 소문이 많이 떠돌아
다닙니다. "
"저기서 살해된 여자는 어떤 여자예요?"
"스물 아홉살 먹은 여자라고 합니다.
딸이 셋인데 비오는 날 밤에 저쪽 큰
길에서 우산을 두 개 들고 남편을
기다리다가 여기까지 끌려 와서
살해되었다고 합니다. "
"어떤 모습으로 살해되었어요?"
"대개의 화성연쇄살인사건과 비슷합니다.
여자의 옷으로 목을 조르고 솔가지로 덮어
두었었죠. "
미경은 고개를 끄덕거렸다. 최종열이
하필이면 화성연쇄살인 사건이 일어난
현장까지 와서 살해당했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미경은 의경과 헤어져 화성경찰서로
찾아갔다. 화성경찰서는 강력계가 최종열
살인사건을 담당하고 있었다. 그러나
화성경찰서 강력계에서도 뚜렷한 소득은
얻을 수가 없었다. 형사들은 최종열이
연고가 없는 화성에서 시체로 발견된
사실을 조사하기 위해 탐문수사를 벌이고
있었고 최종열은 화성에서 살해된 것이
아니라 살해된 뒤에 화성에 버려진 것으로
추정하고 있었다. 그 증거로 최종열이
사망한 시간이 이미 2주일 이상이나 되어
최종열이 화성에서 살해되었다면 사람의
왕래가 잦은 화성의 야산에서 그때까지
발견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라는
점이었다. 화성은 연쇄살인 사건이 발생한
이유로 형사들이 자주 인근 야산을
수색했다는 것이다.
최종열은 유류품도 없었다. 최종열이
사건 현장에 남긴 유류품이라고는
주민등록증이 들어 있는 지갑 하나
뿐이었다. 미경이 그 지갑을 좀 볼 수
윰캅하자 강력계 주임은 사건을
수사중이라 불가능하다고 말했다.
미경은 강력계 주임과 헤어져
화성경찰서를 나왔다. 벌써 날이
어둑어둑해지고 있었다.

3

열차는 남쪽을 향해 쉬임없이 달리고
있었다. 미경은 차창에 비스듬히 기대 앉아
차창으로 지나가는 농촌 풍경을 물끄러미
응시했다. 월요일 아침이었다. 날은
눈이라도 내리려는지 잿빛으로 잔뜩 흐려
있었다.
최종열의 시체는 국립과학수사연구소에서
부검을 마치고 그의 여동생이 있는 진주로
내려가 있었다. 최종열은 결혼을 하지
않았으나 부모는 없고 진주에 여동생이
살고 있었다. 최종열의 누이 동생은 목포가
고향이었으나 진주로 시집을 갔던 것이다.
(사는 게 뭔지.... )
미경은 차창을 향해 나지막하게 한숨을
토했다. 불과 1년 여 전에 목포 유달산에서
최종열에게 겁탈을 당하듯이 관계를 맺은
일이며 서울에서 애정없이 관계를 맺은
일들이 주마등처럼 머릿속을 스쳐 왔다.
그런데 그 최종열이 죽은 것이다.
미경은 최종열의 죽은 모습을 제대로
그려볼 수가 없었다. 최종열은 목이 졸리고
복부를 칼로 난자당했다고 했으나 어느
쪽이 사인()인지 짐작할 수 없었다.
그것은 경찰도 마찬가지로
국립과학수사연구소의 부검 통보가 와야만
알 수 있다고 하였다.
최종열의 입에 물린 재갈도 미경의
기분을 개운하지 못하게 했다. 최종열의
입에 물린 재갈은 뜻밖에 삼각형의 여자
속옷이었다.
미경이 진주에 내려가기로 한 것은 그의
장례식에 참석하면 어떤 실마리가 잡히지
않을까 해서였다. 미경은 이미 백 주간에게
최종열의 소설 원고 일부를 입수한 경위를
보고했었고 백 주간도 그의 행방불명에
난감해 하고 있던 처지였다.
최종열의 죽음이 신문에 보도되자 백
주간은 미경에게 득달 같이 전화를 걸어
최종열의 죽음을 추적하라고 취재지시를
내렸던 것이다. 그러나 백 주간이 최종열의
죽음이 보도된 신문을 월요일 아침에야
보았기 때문에 그 지시는 월요일에 내릴
수밖에 없었다.
"안 기자!"
열차가 수원에 정차했을 때 '기찻길옆
오막살이'라는 시집을 내서 베스트셀러가
되었던 시인 김영길()이 통로로
들어서며 손을 흔들었다.
"어머!"
미경은 반색을 했다. 김영길을 미경이
인터뷰한 적이 있어서 반가웠다.
"어디 취재라도 가는 거요?"
김영길이 미경의 옆에 털썩 앉으며
물었다. 김영길은 검은 양복 차림이었다.
"네. "
미경은 웃으며 대답했다.
"그런데 김 선생님은 어디 가세요?"
"친구가 죽어서 장례에 갑니다. "
"어딘데요?"
"진주요. "
"어머!"
미경은 깜짝 놀라는 시늉을 했다.
"왜 놀라는 거요?"
"저도 진주에 가요. "
"그래요?진주까지 심심해서 어떻게 가나
걱정을 했는데 동행이 생겨서 잘되었군. "
"친구분과 아주 절친했나 보죠?장례식에
참석하러 진주까지 가시게.... "
"안 기자도 이름은 알걸.... 그 친구가
그래도 명색이 작가니까. "
"누군데요?"
"최종열. 한때 신문사에도 있었어요. "
"어머!"
김영길의 말에 미경은 다시 한번 입을 딱
벌리고 놀랐다.
"왜 놀라요?"
"저도 그 분 장례식에 가요. "
"그럼 안 기자도 최종열을 알고 있었소?"
이번에 놀란 것은 김영길이었다. 그때
열차가 기적을 울리며 철로 위를
미끄러지기 시작했다.
"네. 우리 잡지에 소설을 연재하기로
했는데 행방불명이 되었어요. "
"어떤 소설인데요?"
"10. 26과 12. 12,그리고 5. 18로
이어지는 현대사를 다룰 예정이었어요. "
"그럼 그 소설이었군. "
김영길이 어두운 얼굴로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 소설이라니요?"
"최종열이 굉장한 소설을 쓴다는 소문이
파다하게 나돌고있었소. 대작이라거나
문제작이라는 의미의 굉장한 소설이 아니라
우리 시대의 가장 불행했던 시기에 있었던
어떤 사건을 폭로할 예정이었다는 거요. "
미경은 김영길의 말에 어리둥절했다.
최종열을 만났을 때는 한번도 그런 얘기를
들은 일이 없었던 것이다.
"그럼 최종열 선생님이 죽은 것도 그
때문인가요?"
"그렇다고 봐야지.... "
미경은 비로소 전신이 바짝 긴장되는
것을 느꼈다.
"최종열 선생님이 쓴 소설의 원고를 일부
봤는데 특별히 문제 될 만한 곳이
없던데요?"
"그렇지 않을 거요. 전반부에서는 문제될
곳이 없는지 모르지만 후반부는 대단한
폭로가 있다고 하오. "
"그런데 그 나머지 원고가 어디 있는지
모르겠어요. "
"최종열을 죽인 사람들도 그 원고를 찾고
있는 것 같소. 최종열을 알고 있는
사람들의 집이 수색을 당하고 조사를
받았다고 하오. "
"그럼 현 정부에서 그 일을 하고
있나요?"
"나는 그렇게 생각하고 있소. "
김영길의 말에 미경은 입을 다물었다.
최종열의 죽음에 현 정부가 관련되어
있다면 그의 죽음을 추적하는 일이 쉽지
않으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현 정부가 그런 일에 개입할
까닭이 없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최종열 선생님은 원고를 숨겼다는 말이
있는데 어디에 숨겼을까요?"
"글쎄.... 일단 최종열과 가까운
사람에게 맡기지 않았을까 생각을 하지만
누군지는 알 수가 없는 일이오. "
열차가 진주에 도착한 것은 날이
어둑어둑해 지고 있을 때였다. 최종열의
시신은 진주 시내의 한 병원 영안실에
안치되어 있었다.
미경은 김영길과 함께 영안실에 가서
분향을 했다. 최종열이 의문사를
당해서인지 영안실은 문상객도 없이
쓸쓸했다. 미경은 김영길과 함께 영안실
한쪽 구석에서 저녁을 먹었다. 상가에서
서둘러 준비한 음식이었다.
영안실에서는 최종열의 누이 동생과
그녀의 남편이 손님들을 맞고 있었다.
최종열의 누이 동생은 그 병원의 간호사로
근무하고 있었다. 이름은
최종미()였다. 그녀의 남편은 진주
시청에 근무하는 공무원이었다.
밤이 점점 깊어갔다. 미경은 이따금
최종미가 자신을 살피고 있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미경은 최종미가 자신에게 할말이
있는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최종미는 끝내 미경에게 접근해 오지
않았다.
미경은 자정이 되자 병원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여관에 투숙했다.
영안실에서 밤을 세우고 싶지는 않았다.
이튿날은 아침부터 눈발이 희끗희끗
날렸다. 장례식 날이었다. 미경은
해장국집에서 아침을 먹고 병원 영안실로
갔다. 영안실 앞에는 이미 흰 색의
영구차가 도착해 있었다.
영구차가 간단한 발인식을 마치고 장지로
출발한 것은 아침 10시가 되어서였다.
영구차에는 최종열의 누이가 다니는 성당의
신도들인 듯한 사람들이 기도서와 성가책을
들고 한 무리 앉아 있었다. 나중에 알고
봤더니 최종열도 카톨릭 신도로 영세명이
세례자 요한이었다. 그러나 군데군데
자리가 비어 있었고 김영길은 지난 새벽에
돌아갔는지 문상객들 틈에 없었다.
"안 기자님이죠?"
최종미가 미경의 옆자리에 와서 앉은
것은 영구차가 진주 시내를 벗어났을
때였다. 미경은 차창으로 흩날리는 눈발을
우두커니 내다보고 있었다. 성당의
신도들은 나지막하게 기도를 하고 있었다.
"네. "
미경은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오빠가 갑자기 변을 당해서 상심이
크시겠어요. "
미경은 의례적인 말투로 최종미를

"어쩔 수 없는 일이죠. "
최종미가 엷게 웃으며 대답했다.
최종미는 얼굴이 오종종한 여자였다.
"오빠에게 얘기를 들었어요. "
"제 얘기를요?"
"네. 두 달쯤 전의 일이었어요. 오빠가
갑자기 진주에 왔어요. "
최종미가 주위를 살핀 뒤에 낮게
속삭였다.
"무슨?"
미경은 얼굴이 붉어지며 목소리를
낮추었다. 최종열이 누이 동생에게까지
자신의 얘기를 했으리라고는 상상조차 하지
못했었다.
"오빠가 소설을 쓰고 있었던 것은 알고
계시죠?"
"네. "
"그런데 오빠는 소설을 쓰면서 신변의
위협을 느끼고 있었던 것 같아요. 오빠에게
무슨 일이 생기면 안 기자님에게 주라면서
서류봉투를 하나 맡겼어요. 전 대단치 않은
것인 줄 알고 병원에 그냥 두었었어요.
그런데 오빠가 행방불명이 되고나서
얼마되지 않았을 때 우리 집에 도둑이 들어
집안을 샅샅이 뒤졌어요. "
"도둑이요?"
"네. "
최종미가 낮게 대답했다. 최종미의
얼굴이 점점 어두워지고 있었다.
"무엇을 훔쳐 갔나요?"
"아니요. 아무 것도 훔쳐 가지 않았어요.
"
"그럼?"
미경은 의혹이 담긴 눈길로 최종미를
쳐다보았다.
"도둑은 무엇인가 찾으려고 했던 것
같아요. 전 나중에야 도둑이 오빠가 맡긴
서류봉투를 찾으려고 침입했다는 것을 알게
되었어요. 서류봉투엔 오빠가 쓴 소설
원고가 들어 있었으니까요. "
"그럼 그 원고를 지금도 가지고 계세요?"
"네. 그 원고를 병원에 두기를 잘 했던
것 같아요. 하마터면 그 원고를 도둑 맞을
뻔 했으니까요. "
최종미가 다시 주위를 조심스럽게
살폈다. 미경도 덩달아서 주위를
둘러보았다. 최종미는 무엇인가 두려워
하고 있었다. 미경도 공연히 주위 사람들이
의심스러워졌다.
"지금 제가 원고를 가지고 왔어요.
다행히 버스엔 수상스러운 사람이 없으니까
받아서 감추세요. "
최종미가 가슴 속에서 두툼한 서류봉투를
꺼내어 미경에게 건네 주었다. 미경은
재빨리 서류봉투를 받아 코트 안주머니에
챙겼다. 가슴이 마구 뛰고 있었다. 마침내
최종열의 원고를 찾았다는 생각에 최종열의
장례식에 참석하고 있다는 사실조차 망각할
정도였다.
영구차가 장지에 이른 것은 거의 11시가
다 되어서였다. 눈발은 그때까지 그치지
않고 흩날리고 있었으나 사람들은 이미
파놓은 묘혈로 최종열의 관을 운구해 갔다.
신도들은 관이 안치되고 흙이 덮이기
시작하자 카톨릭 성가를 부르기 시작했다.
장례식 때나 상가에서 부르는
위령성가였다.

오늘 이 세상 떠난 이 영혼 보소서
주님을 믿고 살아온 그 보람 주소서
주님의 품에 받아 위로해 주소서
주님의 품에 받아 위로해 주소서

미경은 우두커니 하늘을 쳐다보았다.
최종열의 하관식은 카톨릭의 예절에 의해
진행되고 있었으나 미경은 어쩐지
비인간적이고 낯설게 느껴졌다.

하느님이 몸소 그들의 눈에서
모든 눈물을 닦아 주시리니
다시는 죽음이 없고 슬픔도 울부짖음도
고통도 없으리라 고통도 없으리라

그것은 이질적이면서도 비감한
풍경이었다. 미경은 카톨릭 신도들이
'고통도 없으리라'라는 제목의 카톨릭 성가
3절을 부를 때야 비로소 눈물 한 방울이
흘러내렸다. 노래는 장례식의 슬픈 풍경을
절절하게 표현하고 있었다.
미경은 최종열의 장례가 끝나자 진주에서
상행선 열차에 올라탔다. 오후 5시가
가까운 시간이었다. 눈은 그쳤으나 날씨는
여전히 흐린 잿빛이었다. 게다가 해가 짧은
겨울이라 열차가 진주역 구내를 빠져 나갈
무렵엔 이미 해가 기울어 사방이
어둑어둑해 지고 있었다.

4

차창으로는 캄캄한 어둠이 칠흑의
바다처럼 펼쳐져 있었다. 미경은 차창에
기대어 눈을 감았다. 심신이 몹시
피로했으나 잠은 오지 않았다. 참으로
기묘하기 짝이 없는 하루였다. 최종열의
장례식에 참석하여 그의 누이 동생으로부터
소설 원고의 일부를 넘겨 받은 것은 잘된
일이었으나 미행자가 있었다는 것은
뜻밖이었다.
미경은 최종열을 둘러싸고 일어난 일들이
심상치 않으리라는 사실에 비로소 몸이
떨렸다.
미경이 미행자가 있다는 것을 알아챈
것은 열차가 마산에 이르렀을 때였다.
미경은 누군가 자신을 자꾸 힐끔거리고
있는 듯한 느낌에 고개를 들고 앞을
쏘아보았다. 미경이 앉아 있는 좌석에서
앞으로 세 번째 좌석에 앉아 있는 사내가
너무나 낯이 익었다.
미경은 그때 고개를 갸우뚱했다. 그
사내는 미경의 아파트 주위에서 자주 보던
사내였다. 그는 하릴없이 미경의 아파트
광장에서 담배를 피우고 있거나
지하철역에서,택시 정류장에서 둘둘 말은
신문을 들고 먼 곳을 쳐다보고 있기
일쑤였다.
미경이 그 사내를 기억하는 것은 눈빛
때문이었다. 그 사내는 우연인 척하면서
무심한 눈빛으로 미경을 살폈으나 미경은
그 사내와 눈빛이 마주쳤을 때 마치
시골길에서 뱀을 만난 듯 가슴이 철렁했던
것이다.
옷차림은 허름했다. 낡은 청바지에 짧은
머리,그리고 가죽잠바를 자주 입었다.
(저 사내는 나를 미행하고 있는 거야....
)
미경은 그 생각을 하자 가슴이 뛰었다.
그러면서 그 사내를 따돌려야 하겠다는
생각을 하기 시작했다.
(뭔가 방법이 있을 거야. )
미경은 범죄영화와 첩보영화를 생각하기
시작했다. 그런 영화에는 스파이를
미행하는 방법이나 추적자를 따돌리는
방법이 숱하게 많았다. 그러나 영화와
현실은 다른 것이고 영화의 주인공들은
초인적인 능력을 갖고 있었다. 미행자를
따돌리는 것이 결코 영화처럼 쉽지는 않을
것이었다.
그러나 미행자에게 계속 미행을 당하고
있을 수는 없었다.
미경은 좌석에서 일어나 통로로 나가
승강대로 걸어갔다. 사내는 힐끗 미경을
살폈으나 승강대로 따라 나오지는 않았다.
미경은 담배를 피워 물었다. 사내는
신문을 보는 시늉을 하고 있었다.
미경은 30분마다 승강대에 나가 담배를
피웠다. 영화에서는 주인공들이 곧잘
승강대에서 뛰어 내리고는 했으나 미경은
도저히 달리는 열차에서 뛰어 내릴 엄두가
나지 않았다. 그러나 어떻게 하던지
열차에서 뛰어 내리지 않으면 안되었다.
미경은 초조하게 담배를 피우면서 열차에서
뛰어 내릴 기회를 노렸다.
미경이 열차에서 뛰어 내린 것은 열차가
삼랑진 못미처의 조그만 간이역에서 서행을
하고 있을 때였다. 열차의 차내 방송이
삼랑진에서 10분간 연착을 하겠다는 방송을
두 번 되풀이 했을 때 미경은 섬광 같은
생각이 뇌리를 스쳤던 것이다.
열차는 면()지역 간이역을 통과하고
있었다. 간이역을 지나고 있기 때문인지
서행을 하고 있었다. 승강대에서 사내를
살피자 이쪽을 향해 등을 돌리고 있었다.
미경은 승강대에서 심호흡을 했다. 이
기회를 놓칠 수 없다는 생각을 하면서
어금니를 꽉 깨물고 힘껏 뛰어 내렸다.
"윽!"
그러자 발바닥에 강한 충격이 느껴지면서
다리가 시큰했다. 미경은 열차에서 뛰어
내리자 마자 충격을 완화하기 위해
데굴데굴 굴렀다. 다행히 다친 곳은 전혀
없었고 엎어지거나 엉덩방아를 찧지도
않았다. 열차는 이미 삼랑진을 향해 어둠
속으로 멀어져 가고 있었다.
미경은 다친 곳이 없자 불빛이 있는 곳을
향해 서둘러 뛰었다. 삼랑진까지는
금방이었다. 사내는 삼랑진에 도착하기
전에 미경이 뛰어내렸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이내 국도가 나왔다. 미경은 지나가는
차를 향해 손을 마구 흔들었다. 다행히
용달차가 지나가다가 미경을 태워주었다.
미경이 삼랑진역에 도착하자 열차는 이미
도착해 있었다. 미경은 대합실 구석에서
주위의 동정을 조심스럽게 살폈다. 사내는
개찰구로 쏟아져 들어오는 승객들의 등을
마구 밀치며 헐레벌떡 개찰구로 나오고
있었다.
벌써 미경이 열차에서 뛰어 내린 것을
알아챈 것이 분명했다. 그는 삼랑진역
대합실을 살펴볼 생각도 없이 허둥지둥
역광장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미경은 사내가 나가자 표를 새로 끊어서
플랫홈으로 들어갔다. 그러나 바로 열차에
올라타지는 않고 개찰이 끝날 때까지
사내가 되돌아오지 않는 것을 확인한
뒤에야 열차에 올라탔다. 비로소 미행자를
따돌린 것이다.
미경은 흡족했다. 차창에 기대어
편안하게 눈을 감았다. 그러나 이것이
시초에 지나지 않는다는 생각을 하자
전신이 바짝 긴장되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미경은 코트에서 서류봉투를 꺼냈다.
봉투는 테이프로 밀봉되어 있었다.

한경호는 비서실장의 얼굴을 조심스럽게
쳐다보았다. 비서실장의 날카로운 눈빛이
마치 한경호의 전신을 꿰뚫어보고 있는
느낌이었다. 한경호는 마른 침을 꿀꺽
삼켰다.
"수고했어. 사령관께서 흡족해 하시더군.
"
비서실장이 책상에서 일어났다. 한경호는
빳빳하게 부동자세를 취했다.
"앉지. "
"괜찮습니다. "
"앉아!"
비서실장이 명령조로 말하고 먼저 응접
소파에 털썩 앉았다. 한경호는 그때서야
비서실장의 맞은 편에 조심스럽게 앉았다.
"사령관께서 자네의 정치적 식견을 높이
사고 있어. 자네 같은 인재가 일개
문관으로 있다는 게 몹시 아쉬운 일이라고
말씀하시더군. "
"..... "
"각하께서 왜 79년의 정치상황을
분석하라고 하신 지 알고 있나?"
"모릅니다. "
"짐작은 하고 있겠지?"
"어렴풋이는 하고 있습니다. "
"좋아. 자네는 우리 각하를 어떻게 보고
있나?"
"무슨 말씀이신지.... ?"
"통치자의 재목으로 어떤가?"
"통치자?"
한경호는 자신도 모르게 머리 끝이 곧추
서는 듯한 기분을 느꼈다. 통치자란
대통령을 의미하는 것이다.
"자네 정도의 정치적 식견이면 구시대의
정치인들이 이 나라를 이끌기에는
함량미달이라는 것을 알고 있을 거야. "
"..... "
"우리 군부는 3김씨 모두를 경원하고
있어. 담배 피우겠나?"
비서실장이 한경호에게 담배갑을 불쑥
내밀었다.
"감사합니다. "
한경호는 비서실장의 담배를 받아서 입에
물었다. 비서실장이 군복 윗주머니에서
라이터를 꺼내 불을 붙여 주었다.
"새로운 시대엔 새로운 영도자가 필요해.
"
"예. "
"떠오르는 영도자란 제목의 신문 사설을
만들게. 초안이면 될 거야. 살을 붙이는
것은 신문사 논설위원들이 할 테니까. 5.
16혁명 이념이나 강령 같은 것을 참조하는
것이 좋겠지. "
"예. "
"앞으로 어떤 상황이 발생하더라도
자네는 우리 편이야. 각하에게 목숨을
뺙충성하기를 바라네. 그렇게만 하면
자네의 앞길도 문관으로 끝나지는 않을
거야. "
"명심하겠습니다."
한경호는 재떨이에 피우던 담배를 비벼
껐다.
"나가 보게. "
"예. "
한경호는 재빨리 소파에서 일어나
거수경례를 붙였다.

미경은 길게 하품을 했다. 소설은
한경호가 신군부의 실세들과 연결되는
부분으로 접근하고 있었다. 미경은 차창을
내다보았다. 열차가 동대구역으로 서서히
진입하고 있었다. 미경은 원고를 봉투에
담아서 코트 안주머니에 넣었다.
대구역에 도착하면 열차에서 내릴
예정이었다. 미경이 다시 열차에 탄 것을
미행자가 눈치챈다면 미행자 역시 어떻게
하던지 다시 열차에 올라탈 것이 분명했다
가능한 미행자의 예상을 앞질러야 했다.
이내 열차가 동대구역의 플랫트홈으로
미끄러져 들어갔다. 미경은 승강대에
매달려서 플랫트홈을 살피기 시작했다.
(역시!)
미경의 예상대로였다. 사내는 벌써
플랫트홈에서 열차가 도착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사내는 혼자가 아닌 듯이 그의
주위에 파커와 잠바를 걸친 사람들이
셋이나 되었다.
미경은 열차가 플랫트홈에 도착하자
반대편으로 내렸다. 반대편 플랫트홈 옆의
선로에는 마침 화물열차가 한대 서 있었다.
미경은 화물열차 뒤에 숨었다.
사내들은 열차에 탄 뒤에 열차를 샅샅이
뒤질 것이다. 미경은 열차가 출발하기를
기다렸다. 밤 날씨가 제법 쌀쌀했다.
그러나 열차는 3분 남짓 정차하고는
기적소리를 길게 울리면서 플랫트홈을
미끄러지기 시작했다.
미경은 재빨리 뛰어가 열차에 올라탔다.
차창을 통해 밖을 내다보자 사내들은
플랫트홈에서 수군대고 있었다.
열차가 서울역에 도착한 것은 새벽
4시였다. 미경은 승객들 틈에 섞여
내리면서 주위를 조심스럽게 살폈다.
다행히 수상스러운 사내들은 보이지
않았다. 미경은 서울역 지하철 통로로
빠르게 걸음을 옮겼다. 대합실을 통해
서울역 광장으로 나가면 사내들에게
발각당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아직은 지하철이 다닐 시간이
아니므로 사내들이 지하철 통로에서
기다리고 있을 염려는 없었다.
미경은 지하철의 문이 열리는
5시40분까지 지하철 입구 앞에서 기다렸다.
피로와 졸음이 쏟아져 왔으나 잠을 잘
수는 없었다. 아파트에 돌아가면 충분히
잠을 잘 수 있을 것이었다.
5시40분이 되자 지하철 입구의 문이
열렸다. 미경은 표를 사가지고 역구내로
들어가 지하철을 기다렸다. 자동판매기에서
커피를 한잔 뽑아 마시자 이내 열차가
왔다.
열차는 새벽이라 썰렁하게 비어 있었다.
미경은 이촌동 지하철역에 내려서는
아파트까지 걸었다. 이촌동 지하철역에서
미경의 아파트까지는 도보로 10분
거리였다.
이내 아파트 광장이 나타났다. 미경은
저만치 경비실의 불빛이 보이자 걸음을
빨리하기 시작했다. 빨리 아파트에
들어가서 쉬고 싶었다. 미경은 경비실을
향하여 걸음을 빠르게 놀렸다.
아파트의 경비는 경비실 책상에 엎드려
자고 있었다. 미경은 엘리베이터를 향해
지친 걸음으로 걸어갔다. 비로소 집에
돌아왔다는 안도감에 서서히 긴장이 풀리고
있었다.
미경은 엘리베이터의 버튼을 눌렀다.
그때 누군가 등 뒤로 소리없이 다가오는
듯한 기척이 느껴졌다. 미경은 등허리로
식은땀이 쫙 하고 흘러내리는 것을 느꼈다.
그 순간 누군가 수도()로 미경의
오른쪽 목을 강하게 내리쳤다. 미경은 목이
부러지는 듯한 충격을 느끼며 몸을 돌려
뒤를 돌아다보았다.
"헉!"
그러나 다음 순간 무쇠 같은 주먹이
미경의 아랫배를 내지르자 미경은 짧은
비명소리와 함께 아랫배를 움켜쥐고
주저앉았다. 창자가 끊어지는 것처럼
고통스러웠다.
"쌍년!"
누군가 미경의 등을 구둣발로 밟으며
거칠게 내뱉았다. 미경은 비명소리조차
지르지 못하고 일어나려고 했다. 그러자
사내가 미경의 가슴팍을 구둣발로
내질렀다. 미경은 젖가슴이 터지는 것 같은
통증과 함께 정신이 아물아물해져 왔다.
그러나 사내들은 미경을 진흙을 밟듯이
마구 짓이겨댔다.
"그만해!"
누군가 날카롭게 소리를 질렀다.
"예!"
사내가 절도 있는 목소리로 공손히
대답했다. 미경은 그 소리를 끝으로 의식을
잃었다.
미경이 의식을 되찾은 것은 누군가
자신의 가슴을 함부로 주무르고 있는 듯한
기분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사내들이
미경의 몸을 수색하고 있는 것이었다.
사내들은 무엇인가 찾아내려고 혈안이 되어
미경의 몸을 젖가슴이며 스커트 속까지
가리지 않고 함부로 손을 집어 넣어 뒤지고
있었다. 미경은 통증보다 수치스러움
때문에 뜨거운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없습니다!"
사내가 누군가를 향해 소리를 질렀다.
"그럼 놔둬!"
현관쪽에서 다른 사내가 지시했다.
그러자 미경의 코트와 몸을 샅샅이 뒤지던
사내가 미경의 엉덩이를 구둣발로 냅다
내지르고는 빠른 걸음으로 사라져 갔다.
(개새끼들!)
미경은 엉금엉금 기면서 이를 갈았다.
사내들이 출입구쪽으로 나가자 부르릉 하는
찻소리가 들렸다. 미경은 출입구쪽을
간신히 쳐다보았다. 낡은 슈퍼살롱 한 대가
출입구 앞을 떠나기 위해 시동을 걸고
있었다.

제9장 그 겨울의 장미넝쿨

1

미경은 아파트 거실에 대()자로
누웠다. 얼굴도 모르는 사내들에게
얻어맞고 짓밟혀 온 몸으로 격렬한 통증이
오고 있었다. 미경은 입술을 깨물며 신음을
참았다. 양윤석이 침실에서 자고 있을지도
몰라 추한 꼴을 보이고 싶지 않았다.
(그 봉투를 다른 사람에게 맡기길
잘했지.... )
미경은 최종열의 소설 원고를 뺏기지
않은 것만 해도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최종열의 소설 원고를 가져간 사람은
대학생이었다. 미경은 동대구역에서
사내들을 따돌리고 골똘히 생각에
잠겼었다. 사내들은 필사적으로 미경을
추적하고 있었다. 그러나 미경을 죽일
생각은 없었고 단지 최종열의 소설 원고를
뺏으려는 것이 분명했다. 사내들이 미경을
죽이려고 했으면 그럴 기회는 얼마던지
있었다. 미경이 최종열의 소설 원고를
가지고 있는 것이 확실하다면 미경을
죽여서라도 그것을 뺏으려고 할 것이나 그
점을 확신할 수 없어 미경을 미행하고 있는
것이 틀림없었다.
미경은 사내들이 필사적으로 자신을
미행하려고 한 사실에 최종열의 소설이
심상치않은 내용을 담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최종열의 소설은 단순하게
70년대말과 80년대의 어두운 정치상황을
다루고 있는 것이 아니었다.
미경은 사내들이 아파트 앞이나
서울역에서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러자 최종열의 소설 원고를
아파트로 가져갈 수 없다고 생각했다.
미경은 최종열의 소설 원고를 감출
방법을 골똘히 궁리했다. 그때 미경의
앞자리에서 컴퓨터 잡지를 읽는 청년이
보였다. 얼굴이 앳되어 보이는 것으로 보아
대학생 같았다.
"학생예요?"
미경은 청년에게 말을 건넸다. 청년이
책을 덮으며 미경을 의아한 눈길로
쳐다보았다.
"예. "
"집에 컴퓨터 있어요?"
"예. "
청년은 느닷없이 묘령의 여인이 말을
건네자 경계하는 눈빛을 하고 있었다.
"어떤 기종?"
"386입니다. "
"컴퓨터 잘 다뤄요?"
미경은 청년을 향해 눈웃음을 뿌렸다.
청년은 금세 얼굴이 붉어져 고개를
끄덕거렸다.
"잘 다룬다기보다 그냥 좀 다룹니다. "
"컴퓨터 통신도 해요?"
"예. "
"내가 부탁이 하나 있는데 들어 줄래요?"
"무슨 부탁인데요?"
"전 중원일보 자매지인 늘푸른여성의
기자예요. 이름은 안미숙이고요. 중요한
소설 원고를 하나 갖고 있는데 정체불명의
사람들이 뺏으려고 해요. 서울에 도착해서
컴퓨터 통신으로 좀 보내줄 수 있겠어요?"
"어떤 소설인데요?"
청년이 불안한 표정으로 미경을 살폈다.
"나도 아직 어떤 소설인지 몰라요. "
"디스크에 담았나요?"
"아녜요. 육필로 쓴 것이니까 워드를
쳐서 보내야 해요. "
"해보죠. "
청년이 선선하게 대답했다. 미경은
청년에게 어느 학교에 다니고,이름이
무엇이고,집이 어디인지 상세하게 물은 뒤
미경의 전화번호를 알려주었다. 청년은
S대학교 전자공학과 3학년에 재학중이어서
컴퓨터를 전문가 못지 않게 잘 다룬다는
것이었다.
미경은 청년과 열차에서 맥주를 마시며
여러 가지 얘기를 나누었다. 청년은 얼굴에
취기가 오르자 비로소 미경에게 누님이라고
불러도 좋으냐고 물었다. 미경은
누님이라고 부르면 근사하게 술을 한잔
사겠다고 대답했다.
청년은 기분이 흡족하여 수원에서
내렸다. 미경도 기분이 상쾌하여 열차가
서울에 도착할 때까지 잠을 잤던 것이다.
미경은 억지로 몸을 일으켰다. 온 몸이
결리고 쑤셔서 움직이기가 힘이 들었으나
침실로 가까이 가서 문을 살그머니 열어
보았다. 양윤석은 돌아와 있지 않았다.
미경은 침실 문을 닫고 거실에 옷을 벗어
던지기 시작했다. 어디 부러진 곳이
없었으므로 샤워를 하고 한숨 잘
생각이었다. 자고 일어나면 사내들에게
얻어맞은 것이나 피로도 어느 정도 풀릴
것이라고 생각했다.
욕실에 들어가 거울에 알몸을 비치자
"여기저기 푸르게 멍이 들어 있었다. 그러나
얼굴은 깨끗했다.
"개새끼들!"
미경은 욕실의 거울을 노려보며 욕설을
뱉았다. 푸른 멍은 왼쪽 젖가슴 유두
밑에도 있었다. 가슴을 호되게 얻어맞은
모양이었다.
미경은 욕조에 온수를 틀고 들어가 몸을
눕혔다. 욕조에 물이 차기 시작하자 나른한
졸음이 쏟아져 왔다.
미경은 욕조에 누워 30분쯤 잠을 잤다.
잠을 잘 생각은 없었으나 갑자기 졸음이
쏟아졌던 것이다. 미경이 잠을 깬 것은
요란하게 울리는 전화벨 소리 때문이었다.
"저 안 기자님 댁이죠?"
"그런데요?"
미경은 전화의 목소리를 식별하기 위해
바짝 집중했다. 새벽부터 누가
전화했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저 박태호()입니다. "
"아. "
미경은 짧게 탄성을 내뱉았다. 열차에서
만난 대학생이었다.
"벌써 제 목소리를 잊으셨습니까?"
"아녜요. 욕조에서 깜박 잠이
들었었어요. "
"욕조에서요?"
박태호의 목소리가 묘한 여운을 풍겼다.
박태호는 미경의 알몸을 상상하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그래요. 그런데 새벽부터 왠일이죠?"
"컴퓨터 켜 보세요. 지금
전송했으니까요. "
"지금이요?"
" "예. "
"좋아요. "
미경은 전화를 끊고 방으로 들어가서
컴퓨터를 틀었다. 잠은 이미 말짱하게
달아나 있었다.

한경호는 책상에 앉아서 담배를 피워
물었다. 날씨가 차가웠다. 그러나 한경호의
책상에서 보이는 하늘은 별빛이 유난히
밝았다. 세상은 빠르게 변하고 있었다.
정치권은 권력의 공백상태에서 대권을
차지하기 위해 발빠른 행보를 하고 있었다.
김영삼 총재는 신민당 총재에 복귀하여
당무를 장악했고 김대중은 연금상태에서
풀려나 활발한 정치활동을 하고 있었다.
공화당의 김종필 총재도 박찬종()
의원 등 소장 의원들에 의해 정풍()
소용돌이에 휘말렸으나 공화당을 장악하여
대권 포석에 나서 있었다.
정치는 바야흐로 3김 시대를 열고
있었다. 그러나 군부의 움직임은 심상치
않았다. 12. 12의 주역들은 반대파 군부의
숙정에 나서 수많은 장군들이 일시에
예편되어 새로운 권력 분포가 이루어지고
있었다.
그러나 국민들은 아무 것도 모르고
있었다.
군부는 한경호의 사령관을 새 시대의
영도자로 떠받들고 있었다. 국민들은 어둠
속에서 움직이는 군부를 전혀 의식하지
못하고 민주화가 이루어지리라고 낙관하고
있었다.
(우리 사령관이 이 나라를 지배하면 나도
중요한 몫을 할 수 있을 거야.... )
한경호는 눈을 부릅뜨고 생각했다.
신군부를 움직이는 것은 사실상 대령급
영관 장교들과 소장()급 몇몇
장성들이었다. 그들은 수도권의 중요한
보직에 있었기 때문에 늘 사령관을 싸고
돌았다.
한경호는 피우던 담배를 재떨이에 비벼
껐다. 자신이 막강한 파워를 가지고 있는
신군부의 중요 인물이 된다고 생각하자
가슴이 설레어지고 있었다.
한경호가 사령관의 비서실장을 만난 것은
문학잡지 장편소설 공모에 준당선된 소설
때문이었다. 한경호는 고등학교에 다닐 때
문학수업에 심취해 있었는데 집안이
가난하여 대학에 진학하지 못하고 군대에
자원입대했었다. 인문계 고등학교를 졸업한
처지로는 마땅히 취직할 직장도 없었는데
그럴 바에야 하사관으로 자원입대하면 직장
문제도 해결될 것이라는 먼 친척의 권유를
받아 들였던 것이다.
한경호는 하사관이 된 뒤에 틈틈이 소설
습작을 했다. 그러나 혼자서 하는 습작은
제대로 문학공부가 되지 않아 한경호는
거의 10년만에 문학잡지에서 지령 100호
기념으로 공모한 장편소설공모에 가까스로
턱걸이하듯 준당선 되었던 것이다. 일종의
가작 입선이었다.
그 소설의 제목은 '격동의 계절'이었다.
대통령이 북한이 내려보낸 공작원에 의해
암살되고 정치권이 혼란에 빠진 틈을 타서
소령을 주축으로 한 영관 장교들이
쿠데타를 일으키려다가 실패한다는
내용이었다.
그러나 그 소설은 정보부의 지시로 겨우
51회가 잡지에 연재되었다가 중단되었다.
한경호는 정보부로,보안사령부로 불려
다니며 혹독한 조사를 받게 되었는데 그때
한경호를 조사한 장교가 비서실장이었다.
한경호는 당시 보안사령부의
조사관이었던 비서실장에 의해 무혐의
처리되고 오히려 보안사령부에서 근무하게
되었던 것이다. 10. 26이 터진 뒤 한경호를
강원도에서 서울로 불러 올린 것도
비서실장이었다.
"그때 그 소설 있지?"
비서실장은 한경호가 보안사령부에
도착하여 인사를 하자 느닷없이 그런
질문부터 했다.
"소설이라니요?"
한경호는 어리둥절하여 반문했다.
비서실장이 무슨 소리를 하는지 이해할 수
것이다.
"그 소설 말이야. "
"어떤?"
"쿠데타 다룬 소설 말이야. "
"쿠데타요?"
"이 친구 왜 이래 답답해?자네가 쓴 그
소설 말이야!"
비서실장이 약간 짜증스럽게 내뱉았다.
한경호는 그때서야 비서실장이 자신의
소설을 말하는 것이라고 깨닫고 가슴이
철렁했다. 그 소설 사건이 아직도 매듭이
지어지지 않은 것인가 하는 생각을 하면서
아내 정란의 얼굴을 머릿속에 떠올렸다.
이제 또 다시 보안사령부의 조사를 받게
되면 아내는 분명히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이 그를 떠나게 될 것이다.
"예. "
한경호는 복잡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그거 발표한 일 있어?"
"없습니다. 곧 발표할 예정입니다. "
"안돼!"
비서실장이 단호하게 소리쳤다.
"출판사와 교섭중에 있습니다. 이사를
와야 하니까 돈이 필요합니다. "
한경호는 아둔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발표하지 마. 돈은 내가 줄 테니까....
원고가 무얼로 되어 있어?육필로 썼나
타이프로 쳤나?"
"타이프로 쳤습니다. "
"좋아. 그거 지금 가지고 오구 다시 한번
말하지만 절대로 발표하지마. 사본도
만들지 말구. 자네는 그런 소설을 쓴 일이
없는 걸로 해야 돼!"
"무슨 일 때문인지 알 수 있습니까?"
"알려고 하지 마. "
비서실장이 차갑게 내뱉았다.
"알겠습니다. "
한경호는 더 이상 묻지 않았다.
비서실장이 자신의 소설이 무엇 때문에
필요한지 알 수 없었으나 나쁜 일은 아닌
것 같았다. 그날 한경호는 비서실장에게
소설을 갖다가 주었고 비서실장은 누런
행정봉투를 하나 한경호에게 주었다.
봉투는 묵직했다. 사무실을 나와 봉투를
들여다보자 그 봉투엔 뜻밖에 한경호가
상상도 하지 못했던 액수의 큰 돈이 들어
있었다.

한경호가 보낸 파일의 내용은 거기서
일단 끝이나 있었다. 그 대신 메모 하나가
모니터에 떠올라 미경의 얼굴에 미소를
짓게 했다.

누님 만족하세요?졸려서 이만 할께
누님도 한숨 주무세요. 오후에 다시 하는
것이 어떨까요?

미경은 박태호가 보낸 소설을 디스크에
복사한 뒤 컴퓨터 통신으로 박태호에게
답장을 보냈다.

수고했어. 혹시 어떤 일이 생길지
모르니까 가능한 소설을 잘 감추어둬.
나중에 근사하게 한잔 살께.

미경은 컴퓨터를 끄고 책상에서
일어났다. 날은 이미 환하게 밝아 있었다.

2

박태호로부터 컴퓨터 파일이 다시 온
것은 그날 밤이었다. 미경은 양윤석과 함께
잠자리에 들었다가 슬그머니 빠져 나왔다.
최종열의 소설에 대한 것은 양윤석에게도
알리고 싶지 않았다. 최종열의 소설을
양윤석이 알게 되면 비밀이 새어 나갈
염려도 있었고 양윤석을 위험한 일에
끌어들이고 싶지도 않았다.
미경은 브래지어와 팬티를 알몸에 걸치고
서재로 나가 컴퓨터를 켰다. 벌써 시간이
12시가 가까워지고 있었다. 그러나
피곤하지는 않았다. 새벽에 미경을
미행하던 사내들에게 맞은 멍자국도 많이
가라앉아 있었고 저녁때까지 내쳐 잤기
때문에 불면으로 인한 피로도 사라지고
C없었다.
(쎈스가 피로를 풀어준 것인가?)
미경은 다소 엉뚱한 생각을 하며
모니터로 시선을 집중했다. 저녁에 돌아온
양윤석과의 쎈스가 미경을 흡족하게 했다.
미경은 쎈스 뒤의 나른한 포만감에 젖어
양윤석의 팔베개를 하고 잠을 자고 싶기도
했으나 최종열의 소설을 빨리 읽어야 했다.
박태호는 컴퓨터의 전문가라서 통신이
손쉽게 이루어지고 있었다.

강한섭은 아내 채은숙이 가늘게 코를
골며 잠이 들자 비로소 침실에서 빠져
나왔다. 아내가 잠이 든 틈에 빠져나오는
것이 아내에게 미안했으나 이제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아내는 쎈스 뒤의 만족감에
젖어 입까지 벌리고 잠들어 있었다.

미경은 최종열의 소설을 읽다가 말고
얼굴에 흥건한 미소를 띄웠다. 최종열의
소설에서 묘사되고 있는 쎈스 뒤에 잠이 든
채은숙의 모습이 어쩐지 자신과 흡사하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강한섭은 침실을 나오기에 앞서 아내의
모습을 가만히 살폈다. 아내는 방이 더운
탓인지 캐시미론 이불을 반쯤 걷어차고
잠들어 있었다. 평소에도 추위를 타지 않는
아내는 스팀이 들어오는 집안에서는 언제나
반소매만 입었다. 밤에는 쎈스를 하든지
하지 않든지 발가벗고 잠을 잤다. 아내는
지금도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고 있어서
붉은 스탠드 불빛에 상체가 고스란히
드러나 있었다.
강한섭은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아내는
나신도 아름다웠다. 그런 아내와의 다함
없는 사랑과 쎈스가 결혼이며 삶이라는
생각을 하자 행복함을 느낄 수 있었다.
강한섭은 서재로 들어가 책상에 앉았다.
밖은 살을 에일 듯이 추웠다. 이따금
바람이 창을 흔들어댔으나 방으로
스며들지는 않았다.
강한섭은 타이프 라이터를 두드리기
시작했다. 얼마전 손으로 원고를 쓰기가
힘이 들어 중고 타이프 라이터 하나를 샀던
것이다.

장군은 거실의 장식장에 신주처럼 모셔져
있는 사두마차를 물끄러미 응시했다.
사두마차는 보면 볼수록 신기했다. 도대체
아내는 저토록 신기한 물건을 어디서 구한
것일까. 사두마차를보고 있으면 자신도 알
수 없는 웅지가 솟아 오르곤 했다. 기이한
일이었다.
게다가 이상한 꿈도 꾸게 되었다. 장군은
아내가 사두마차를 집에 들여놓던 날부터
신비한 꿈을 꾸었다. 처음엔 수많은 말이
벌판을 달리고 사람들의 비명소리가 들리는
환청이 시작되었으나 얼마 후부터는 그런
환청이 없어지고 꿈을 꾸게 되었던 것이다.
그 꿈은 자신이 중국의 황제가 되어 있는
것이었다. 처음엔 단순하게 왕의 꿈이라고
생각했으나 곧 그것이 중국을 처음으로
통일한 진나라의 시황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어떻게 생각하면 어처구니없는
꿈이기도 했으나 장군은 점점 그 꿈이
즐거워졌다.
한번은 머리에 쓴 삿갓을 벗는 꿈을
꾸었는데 아내도 똑같은 꿈을 꾸었다.
장군이 아침에 일어나 그 얘기를 하자
아내도 깜짝 놀라 점쟁이를 찾아가봐야
하겠다고 말했다. 장군은 허허 웃고
말았다.
아내는 집안에 크고 작은 일이 있을
때마다 점쟁이를 찾아가곤 했는데 장군은
처음엔 반대했으나 아내의 히스테리가
심해지자 그만 두고 말았다. 아내가 그런
방법으로나마 군인 아내의 불만을 해소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당신이 왕이 되는 꿈이래요. "
저녁에 관사로 퇴근하자 아내가 입이
함지박만하게 벌어져 속삭였다.
"왕?"
장군은 어이가 없어 아내의 얼굴을
틤맘 갑자기 이 놈의 여편네가
어떻게 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당신 성이 뭐예요?"
"성이라니?"
"성도 몰라요?김씨 이씨 하는 성이지
뭐예요?내가 이렇게 꽉맥힌 사람과 평생을
살았으니..... "
아내가 혀를 찼다. 그러나 기분이 나쁜
상태가 아니었기 때문에 장군은 모자를
벗고 소파에 앉았다.
"도대체 왜 그러는 거야?"
"당신 성이 전씨 아녜요?"
"그래서?'
"당신 성에서 삿갓을 벗겨 봐요. "
"삿갓을 벗겨?"
장군은 역정이 났다.
"당신 성이 온전할 전()자 전씨니까
사람 인()자 모양의 삿갓을 벗겨 봐요.
뭐가 되나. "
장군은 그때서야 싱거운 웃음을 지었다.
사람 인자를 떼어버리면 임금 왕()자가
되는 것이다. 점쟁이가 누구인지는 알 수
없었으나 절묘한 꿈풀이라고 생각했다. 그
점쟁이는 만만치 않은 학식도 있는
모양으로 대통령과 저명한 정치인들도
단골이라고 했다. 10. 26이 일어나기 전에
차지철에게 '차사복변()'이라는
점쾌를 내기도 해서 화제가 되었었다.
차사복변이라는 것은 차지철이 죽고 정변이
일어난다는 뜻이었다. 그러나 차지철은
차가 뒤집혀 자신이 죽는다는 뜻으로
해석하여 엉뚱하게 운전기사를 바꾸었다는
것이다.
 10. 26이 일어나기 얼마 전의 일이었다.
아내가 그 유명한 점쟁이에게서 점쾌를
받아 왔으므로 전혀 엉터리라고는 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이 개명한 세상에
왕이란 무슨 뚱딴지 같은 말인가. 게다가
자신은 군인인 것이다. 정치인이라면
선거로 대통령이 된다고 해도 군인은
쿠데타를 일으키기 전에는 정권을 잡을
수가 없다.
장군은 고개를 세차게 흔들었다. 아직도
취기가 오르고 있었다. 보안사령관의
비서실장인 허() 대령으로부터 들은 말이
이명처럼 귓전을 울리고 있었다.
"각하. 이제는 각하께서 나서야 하실
때입니다. "
허 대령이 장군을 삼청동에 있는
요정으로 안내한 것은 날이 저물고 있을
때였다. 세상은 대통령의 시해로
어수선했다. 10월26일 궁정동 안가에서
박정희 대통령이 중앙정보부장 김재규에게
시해된 후 최규하 국무총리가 대통령
권한대행에 취임했으나 정국이 어떻게
전개될지 예측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나서다니?"
장군은 의아한 표정으로 허 대령을
쳐다보았다. 요정에는 보안사령부의 핵심
멤버인 작전국장,인사국장,정보국장 등이
모두 참석해 있었다.
"정치가 혼란에 빠졌습니다. "
"대통령 국장이 끝나면 곧 자리가
잡히겠지.... "
"그렇지 않습니다. 국장이 끝나면 어떤
형태로든지 대통령을 새로 선출해야
합니다. 지금은 권한대행이 계시지만 3개월
이내에는 새로 선출해야 합니다.
통일주체대의원 선거로 대통령을 선출하면
권한대행이 당선되겠지만 국민들은 새로운
헌법을 원하고 있습니다. 만약에 헌법을
개정하게 되면 3김씨가 유력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선동정치의 대가인 야당의
양김씨와 공화당의 김종필 총재에게 이
나라를 맡길 수 없습니다. 그들은 이제
물러나야 합니다. "
"그들은 국민들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고
있는 정치인들이야. "
"각하. 국민들의 지지란 물거품 같은
것입니다. "
장군은 그때 아무 대꾸도 하지 않았다.
"양김씨는 이 나라를 이끌고 가기에는
함량부족입니다. 김종필 총재도 북한의
위협이 상존하고 있는 이 나라를 이끌 수가
없다는 평가가 군부안에 팽배합니다. "
"그렇다면 이 나라를 이끌어 갈 사람이
누구란 말인가?"
"새로운 영도자가 필요합니다. "
"새로운 영도자?"
"각하께서 이 나라를 영도해 주십시요. "
허 대령이 거리낌없이 내뱉았다.
"뭐야?"
장군은 깜짝 놀라서 좌우를 둘러보았다.
동석한 국장들이 모두 자신의 수하였으나
허 대령의 말은 사석에서의 발언이라고
해도 엄청난 파장을 몰고 올 수 있는
발언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국장들은
그들끼리 논의가 있었는지 허 대령의 말에
동의하고 있는 눈빛을 보내고 있었다.
"북한의 위협에 대처하고 어지러운 이
엿이끌기 위해서는 강력한 통치력을
갖고 계시는 영도자가 필요합니다. "
"그렇습니다. "
"각하께서 이끌어 주셔야 합니다. "
국장들이 일제히 허 대령의 말을 받쳐
주었다.
"혁명을 하자는 겐가?"
"저희는 혁명이라기보다 개혁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
"개혁?"
"마침 저희가 좋은 책을 하나
찾았습니다. "
"책이라니?"
"보안사 문관이 쓴 책인데 우리의 지침이
될만한 책입니다. "
"그래?"
"여러 부를 복사까지 했으니 각하께서도
한번 꼼꼼히 읽어 보십시요. 읽으신 뒤엔
반드시 태워 없애야 합니다. "
"알았어. "
장군은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는
부하들에게 강한 지도력을 보이고 애경사를
빠지지 않고 챙겼기 때문에 부하들로부터
신망을 얻고 있었다. 오늘 부하들이 그를
술집으로 초대하여 이러한 제안을 하는
것은 모두 그 신망 때문일 터였다.
"이 소설을 쓴 문관은 정치적 식견이
뛰어납니다. 그래서 우리가
'서울공작'이라는 이름의 시나리오를
만들라고 지시했습니다. "
"서울공작?"
"워(WAR:전쟁) 게임 같은 것입니다. "
"워 게임?"
"개혁의 게임입니다. 우리는 비상한
조치를 취해야 합니다. "
"음. "
장군은 무겁게 신음을 삼켰다.
비서실장의 말은 표현이 완곡하긴 했으나
혁명을 말하고 있는 것이었다.
서울공작이란 두말할 것도 없이 병력을
동원하는 공작이 가장 중요한 포인트가 될
것이 분명했던 것이다.
장군은 안방에 들어가 군복을 벗고
평상복으로 갈아 입었다. 아내는 처가에
가고 집에는 아이들뿐이었다. 그러나
아이들은 모두 2층에서 놀고 있었다.
장군은 2층에 올라가 아이들을 살핀 뒤
다시 내려와 거실에서 허 대령이 준 소설을
읽기 시작했다.

강한섭은 눈을 들어 창 밖을 내다보았다.
건너 앞집 2층에 불이 환하게 켜져
있었다. 강한섭은 저 집에도 아직 자지
않고 있는 사람이 있나 하는 생각을 했다.
그 집은 보안사에 다니는 한경호의
집이었다.
그러나 한경호의 계급이 무엇인지는 전혀
알 수 없었다. 한경호는 한 번도 자신의
계급을 말한 일도 없고 부인도 그 부분에
대해서는 철저하게 함구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강한섭은 한경호 부인을 머릿속에
떠올리며 자신도 모르게 미소를 지었다.
한경호의 부인은 기묘하게 요염했다.

3

한경호는 큰 길을 달리는 자동차의
경적음에 얼굴을 들고 창 밖을 내다보았다.
밤이 깊어서인지 찻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리고 있었다.
날씨는 차가웠다. 그래서인지 찻소리조차
얼어붙어 있는 느낌이었다.
한겨울이었다. 며칠째 살을 에일 듯한
강추위가 계속되고 있었다.
한경호는 몸을 한차례 부르르 떨었다.
방안은 따뜻했으나 바깥의 추위가 방안에
있는 한경호까지 춥게 만들고 있었다.
한경호는 주방으로 가서 손수 커피를
끓여 마신 뒤 다시 타이프를 치기
시작했다. 한경호가 안암동에 2층집을
마련한 것은 비서실장이 준 돈 때문이었다.

겨울이라 해가 짧았다. 1979년 12월12일
오후 6시. 경복궁 바로 옆에 있는
보안사령부는 팽팽한 긴장감이 흐르고
있었다. 양 어깨에 두 개의 별을 달고 있는
전두환() 합동수사본부장은 사령관실
창으로 어두운 바깥 하늘을 내다보고
있었다. 모두들 전투복 차림이었다.
"그럼 떠나겠습니다!"
허삼수() 대령이 팔을 들어 시계를
보고 사령관에게 말했다.
"좋아. 실수 없이 임무를 수행하라!"
전두환 사령관이 긴장된 얼굴로 지시를
내렸다. 허삼수 대령과 우경윤()
대령은 재빨리 거수경례를 하고 사령관실을
나갔다.
전두환 사령관은 비로소 담배를 피워
물었다. 잔뜩 긴장을 하고 있는 탓인지 손
끝이 바르르 떨리고 있었다.
그때 문이 벌컥 열리고 허화평()
들어왔다.
"각하. 준비가 되었습니다!"
허화평 대령은 전두환 사령관의
비서실장이었다.
"30경비단의 상황은 어떤가?"
"차질없이 진행되고 있다는
장세동() 대령의 보고입니다. "
"김진영()이도 같이 있나?"
"예. 김 대령도 같이 있습니다. "
"누구누구 도착했대?"
"차주헌(),유학성(),황영시(
)
중장,노태우(),박준병()
소장,백운택,박희도,최세창(),장기오
() 준장 등입니다. "
"모두 왔군. "
전두환 사령관이 흡족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각하!떠나야할 시간입니다. "
허 대령은 전두환 사령관을 재촉했다.
삼청동 공관에 가서 대통령의 재가를 받는
것은 시급을 다투는 일이었다. 벌써 허삼수
대령과 우경윤 대령이 육군 참모총장을
연행하기 위해 한남동 공관으로 출발한
것이다. 그런데도 전두환 사령관은
망설이고 있었다.
"연희동은 어떤가?"
"각하!"
"연희동 상황이 보고가 없나?"
"아닙니다. 연희동엔 우국일()
참모장이 잘하고 있습니다. 정병주()
특전사령관,장태원( )
수도경비사령관,계엄사 치안감
김진기() 준장이 이미 도착해서
받고 있다고 합니다. "
"좋아. 우리도 간다. 허 대령은 사령부에
남아서 긴급 연락을 맡도록 하라!"
장군이 마침내 결단을 내렸다.
"예. "
허 대령이 안도하는 얼굴로 짧게
대답했다.
"부관!"
"예!"
부관실에서 수행부관 손삼수()
중위가 뛰어 들어왔다. 전두환 사령관은
권총을 허리에 찼다.
"수사국장이 대기하고 있나?"
"예. "
"출발한다!"
"알겠습니다!"
손삼수 중위가 재빨리 앞장을 섰다.
사령부 앞에는 이미 성판()을 단
찢차가 준비되어 있었다. 사령관 수행부관
손삼수 중위가 앞에 타고 전두환 사령관은
뒤에 탔다. 보안사 수사국장
이학봉() 중령은 또 다른 찢차에
탔다.
"삼청동 공관으로!"
허 대령이 운전병에게 지시했다.
"예. "
운전병이 대답했다. 사령관의 찢차가
부르릉 시동을 걸고 사령부 앞을
미끄러지기 시작했다.
"다녀 오십시요. 각하!"
허 대령은 전두환 장군이 탄 찢차를 향해
재빨리 거수경례를 붙였다. 전두환 장군이
탄 찢차의 뒤를 이학봉 중령의 찢차가 바짝
따르고 경호용의 보안사 병력 1개소대는
완전무장을 하고 추럭에 탑승하여 전두환
장군의 차를 따르고 있었다.
손삼수 중위는 입을 굳게 다물었다.
전두환 사령관은 짙은 선글라스를 쓰고
있었다. 손 중위는 자신이 모시고 있는
전두환 장군의 모습을 백미러로 살피면서
착잡한 기분을 느꼈다. 이번의 거사는
오랫동안 연구하고 준비한 것이었다.
그러나 막상 결행의 순간이 닥치자
두려워지고 있었다.
물론 이번의 거사는 자신과 같은 위관급
장교의 손에서 결정된 것이 아니었다.
거사는 보안사 영관 장교들을 중심으로
하나회 장교들이 주축이 되어 모의한
것이었다.
완전한 쿠데타였다. 실패하면 거사를
모의한 장교들 뿐 아니라 가담한 하급
장교들까지 군사재판에 회부될 것이다.
(하기야 실패하면 우리 모두 반역자가
되는 것이니까..... )
손 중위는 장군을 이해했다. 그러나
모질게 마음을 먹지 않으면 안되었다. 말은
이미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너고 있었다.
이내 찢차가 삼청동 공관에 도착했다.
이학봉 중령은 장군을 모시고 안으로
들어갔다. 경비병들은 장군을 제지하지
않았다. 경호실 병력이 있었으나 대통령
경호실도 보안사의 지시를 받고 있었다.
이내 찢차가 총리 공관 현관에 도착했다.
어쩐 일인지 대통령은 권한대행의 딱지를
떼었으면서도 청와대에 입주하지 않고
있었다.
장군이 찢차에서 내려 공관으로
들어갔다. 이 중령과 손 중위는 장군의
뒤에 바짝 따라붙었다. 공관 정문에는
경비병들이 있었으나 장군을 제지하지
않았다. 총리 공관의 경비병들은 이미
보안사의 통제를 받고 있었다.
"어서 오십시요!"
장군은 최광수() 비서실장의
영접을 받았다.
"대통령 각하는 어디에 계십니까?"
"접견실에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
장군은 최 비서실장의 안내로 이 중령과
함께 접견실로 들어갔다. 손 중위는
비서실에 그대로 남았다.
"각하!"
장군은 접견실로 들어가자 부동자세로
대통령에게 경례를 했다. 대통령의 눈빛이
무장을 한 장군과 이 중령의 모습을 힐끗
살피고는 자세를 바로 했다.
"무슨 일이오?"
"각하의 재가를 받을 일이 있어서
왔습니다. "
"사령관이 나에게 직접 재가를 받는다는
말이오?"
"그렇습니다. "
"사령관은 나에게 직접 재가를 받을 수
없소. 무슨 일인지는 모르겠으나
계엄사령관이나 국방부 장관을 거쳐 재가를
받아야 할 것이오. "
최규하 대통령은 냉담하게 거절했다.
"각하!시급을 요하는 일입니다!"
"사령관의 재가 보고를 받을 수 없소. "
"각하. 이는 계엄사령관과 관련된
사항입니다!"
"무슨 소리요?"
"계엄사령관이 대통령 시해사건에
효퓸있습니다. 그래서 우리
합동수사본부는 정승화 장군을 연행하여
조사하려고 합니다. 각하께서 재가해
주셔야 합니다. "
"뭐요?"
대통령이 깜짝 놀란 표정으로 말했다.
"각하!"
"합수부에서 육군 참모총장을 연행한다는
말이오?"
"그렇습니다. "
"장군!그것이 하극상이라는 것을 알고
있소?"
"대통령을 시해한 사건을 조사하는
것입니다. 참모총장이 아니라 그 누구도
조사를 해서 진실을 밝혀야 합니다!"
"장관에게 먼저 보고하시오!"
"각하!"
"나는 장관의 정식 요구가 있기 전에는
재가할 수 없소. "
최 대통령이 고개를 외로 꼬았다.
"각하. 그럼 수사국장인 이 중령의
보고를 들어 보십시요!"
장군의 말에 최 대통령이 이 중령을 힐끗
쳐다보았다. 이 중령은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이 겨드랑이에 끼고 있던 서류를 꺼냈다.
최 대통령은 합수부에서 정승화 육군
참모총장을 연행하려는 이유라도
들어보려는지 이 중령을 제지하지 않고
있었다.
대통령 비서실로 허삼수 대령의 다급한
전화가 걸려온 것은 이 중령이 수사보고를
마치고 비서실로 잠깐 나왔을 때였다.
"각하께서는 어디 계시나?"
허삼수 대령은 잔뜩 긴장해 있었다.
"대통령 각하와 단독대좌를 하고
계십니다. "
"그럼 아직도 재가를 받지 못했나?"
"예. 대통령 각하가 너무 완고하십니다.
그 일은 어찌되었습니까?"
"연행은 했는데 총장 공관에서 총격전이
있었어. "
"총격전이요?"
"자네가 수사분실로 빨리 오게. "
"알겠습니다!"
이 중령은 얼굴이 창백해져 전화를
끊었다. 총장 공관에서 총격전이 있었다면
일이 심상치 않게 돌아가는 것이다. 이
중령은 손 중위에게 급한 일이
생겼다,각하께서 찾으면 수사분실로 갔다고
말씀 드려라,하고는 찢차가 있는 공관
앞으로 달려갔다.
손 중위는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그때
보안사령부에서 비서실장 허화평 대령이
전화를 걸어 왔다.
"각하는 어디에 계시나?"
"대통령 각하를 만나고 계십니다. "
"손 중위!사령관 각하께 서둘러 전화를
받으시라고 해라!"
허 대령의 목소리는 다급했다.
"실장님. 사령관 각하는 대통령 각하를
만나고 계십니다. 보고 중인데 어떻게
전화를 받으시라고 합니까?"
"이봐 손 중위!이건 급한 일이야!쪽지를
들여보내서라도 전화를 받으시도록 해!"
"알겠습니다. "
손 중위는 허 대령의 목소리가 심상치
않자 대통령 비서관에게 전두환 사령관을
불러 달라고 말했다. 그러자 비서관은
냘표정으로 머뭇거리다가 쪽지를 써서
접견실로 들여보냈다.
"무슨 일이야?"
이내 전두환 장군이 화난 표정으로
접견실에서 나왔다.
"실장님 전화입니다. "
전두환 장군이 전화를 받았다. 장군은 허
대령의 전화를 받으면서 점점 얼굴이
흙빛으로 변했다. 그리고는 알았어,곧 갈
테니까 동요하지 말아,하고 지시한 뒤
접견실로 들어갔다.
전두환 장군은 10분쯤 지나서야
접견실에서 나왔다. 그러나 그의 얼굴은
거사가 실패할 것이라는 예감이라도
들었는지 창백하게 일그러져 있었다.

4

이에 앞서 허삼수 대령과 우경윤 대령은
12월12일 6시35분에 한남동 육군 참모총장
공관에 도착했다. 그들은 행정용 봉투에
신문지를 집어 넣고 대통령이 총장 연행을
재가한 서류처럼 위장했다. 전두환
사령관이 대통령의 재가를 받기 위해 총리
공관으로 갔으나 재가는 떨어지지 않은
상태였다.
그들은 보안사 요원들과 함께 2대의
슈퍼살롱에 나누어 타고 공관에 도착했고
합수부에 배속된 33헌병대 1개중대 60명의
병력은 완전무장을 하고 마이크로 버스에
나누어 타고 이들의 뒤를 따랐다. 이들은
헌병 백차에 탄 3명의 장교가 지휘하고
있었다. 육군 헌병감 기획과장
성환옥() 대령,33헌병대장
) 중령,육군본부 헌병대장
이종민() 중령이 었다. 이들은 공관
경비병들을 제압하기 위해 출동했던
것이다. 이종민 중령은 공관 경비병들의
직속 상관이었다.
허삼수 대령은 총장 공관으로 출발하기
바로 전에 총장 수행부관 이재천()
소령에게 전화를 걸었다.
"나 보안사 정보처장이다. 총장 각하
계시나?"
"계십니다. "
"총장 각하께 급하게 보고할 일이 있어서
공관으로 가야겠다. "
"각하께서는 7시에 외출 약속이
있으십니다. "
"급한 일이다!"
"몇 시에 오실 것입니까?"
"7시에 간다. "
"될 수 있으면 7시 전에 오십시요. "
"좋다. 공관 경비 초소에 미리 연락해
놓아!"
"알겠습니다. "
이재천 소령은 전화를 끊고 공관촌 정문
초소를 전화로 불렀다.
"조금 후에 보안사 정보처장이 보고하러
오면 들여 보내라. "
이재천 소령은 공관촌 정문 초소
경비병에게 지시했다. 공관촌에는 국방부
장관,외무부 장관,합참의장,해병대
사령관,해군 참모총장,육군 참모총장의
공관이 몰려 있었다. 공관촌의 외곽 경비와
입구 초소는 해병대가 담당하고 있었다.
초소에는 3명의 병사들이 경비를 서고
있었다. 그들은 이재천 소령으로부터
맘횔정보처장을 들여 보내라는 지시를
받았기 때문에 허삼수 대령 일행이
도착하자 신분을 확인한 뒤 그대로 들여
보냈다.
33헌병대는 근처에 대기하고 있다가
10분쯤 지나서 공관촌 입구에 도착했다.
정문 경비병이 백차를 세우고 가까이
다가왔다. 그는 백차에 탄 사람들이
장교라는 것을 확인하자 재빨리 거수경례를
했다.
"어떻게 오셨습니까?"
경비병이 초소의 지휘관인 헌병
선임하사를 돌아본 뒤에 물었다.
"육군 참모총장 공관 경비 병력이다.
교대하러 왔다. "
"몇 명입니까?"
"58분의 3이야!"
58분의 3이라는 것은 사병 58명과 장교
3명이라는 뜻이었다. 경비병은 다시
초소쪽을 쳐다보았다. 어떠한 경우에도
허락을 받지 않은 병력을 통과시킬 수는
없었으나 헌병 백차를 탄 장교들을 무시할
수가 없었다. 그때 선임하사가 밖으로
나왔다. 그는 장교들을 향하여 거수경례를
한 뒤 경비병과 같은 질문을 했다.
"총장 공관 경비 병력이다. "
"병력이 왜 이렇게 많습니까?"
"계엄상황이다. 총장 공관 경비를
강화하라는 지시를 받았다. "
"저는 그런 통보를 받지 못했습니다.
죄송합니다만 확인할 때까지 잠시 기다려
주십시요. "
선임하사는 전화를 걸기 위해 초소
쪽으로 걸음을 떼어놓았다. 그때 마이크로
버스에서 완전무장한 헌병들이 우르르
쏟아져 나왔다.
"손들어!"
"손들어!"
"움직이면 사살한다!"
헌병들은 번개처럼 마이크로 버스에서
쏟아져 나와 경비병들을 에워싸고 총을
겨누었다. 경비병들은 깜짝 놀라 손을 번쩍
들었다. 선임하사는 경비대 본부에 전화를
걸려고 수화기를 들다가 헌병들에게 무장을
해제 당하고 묶였다. 헌병 지휘관들은
공관촌 정문 초소에 헌병 9명을 배치했다.
허삼수 대령과 우경윤 대령은 참모총장
공관 정문에 도착하여 당번병
김영진() 병장의 영접을 받았다.
김영진 병장은 이들을 응접실로 안내했다.
성환옥 대령과 이종민 헌병대장은 보안사
수사관 2명과 함께 참모총장 공관 정문에서
내려 경비대 초소로 들어갔다. 경비병들은
이 중령이 들어오자 재빨리 부동자세를
취하고 거수경례를 했다.
"움직이지 마!"
"지시에 따라 움직이면 아무 일없을
것이다!"
보안사 수사관 2명은 권총으로
경비병들을 위협하여 M16 소총을 빼앗았다.
경비병들은 눈이 휘둥그레졌으나 직속
상관이 괜찮다는 눈빛을 하자 잠자코
무장해제를 당했다.
"조용히 명령에 움직여!"
"자 이제 내무반으로 들어가!"
보안사 수사관들은 경비병들을 초소에
딸린 내무반으로 강제로 몰아 넣었다.
내무반에는 근무대기조 병사들이 남아
있었으나 보안사 수사관들은 그들까지
내무반에 엎드리도록 지시하고 M16으로
감시했다.
보안사 수사관 2명은 허 대령과 우
대령의 뒤를 따라 공관으로 들어갔다가 그
옆의 부관실로 들어갔다.
보안사 수사관 2명은 슈퍼살롱 뒤
트렁크를 열고 M16 소총을 꺼내어 현관을
향해 엎드린 채 사격자세를 취했다.
저녁 7시5분이었다.
정승화 참모총장은 공관 2층에서
TV뉴스를 보고 있었다. 그때 부관 이재천
소령이 인터폰 연락을 해왔다.
"무슨 일이야?"
"각하. 보안사 정보처장과 육본
범죄수사단장이 급한 보고가 있다고 찾아
왔습니다. "
"밤에 무슨 보고야?내가 지금 내려갈
테니까 기다리라고 해. "
"예. "
정승화 참모총장은 얼굴을 찌푸리고
소파에서 일어났다. 보안사의 정보처장이
왔다는 말에 정 총장은 기분이 나빴다.
보안사 사령관인 전두환 소장이
합동수사본부장을 맡은 이래 월권하는 일이
잦아서 정 총장은 비밀리에 전두환 소장을
동해사령부로 좌천시키려던 참이었던
것이다.
"각하!날씨가 추워졌습니다!"
허 대령과 우 대령은 정 총장이 2층에서
내려오자 부동자세로 경례를 했다.
"그렇군. "
정 총장은 가볍게 대꾸했다.
"어디 외출하십니까?"
"처남이 장군 진급이 확정되었네. 그래서
집 사람과 장모님께 인사 드리러 가는
길일세. "
"총장님. 이번 진급에 저도 포함되는 줄
알았는데 빠졌더군요. 섭섭합니다 총장님.
"
우 대령은 가볍게 농담을 건넸다. 그러나
그의 얼굴은 딱딱하게 굳어 있었고
목소리는 가늘게 떨렸다.
"그랬지. 진급심사가 있을 때마다 모두
진급시키지 못해 나도 늘 미안하게
생각하고 있어. "
정 총장이 불편한 기색으로 말했다. 그의
얼굴엔 미소가 감돌았으나 속마음은 이들의
돌연한 방문이 탐탁치 않았다.
"그래. 무슨 보고야?"
정 총장은 입을 다물고 잔뜩 긴장한
표정으로 앉아 있는 허 대령을 향해
물었다. 허 대령이 비로소 자세를 바로
했다.
"총장님께서 김재규로부터 돈을 많이
받았다는 제보가 들어와 있습니다. 그래서
부득이 총장님의 진술을 받아야 합니다. "
허 대령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뭐야?"
정 총장이 언성을 높였다. 그의 눈빛이
날카롭게 변했다.
"총장님. 증거도 있습니다. "
"누가 그 따위 소리를 해?전두환이야?"
"죄송합니다. "
"김재규가 그렇게 증언했어?"
"저는 자세히 모릅니다. 상부로부터
총장님의 진술을 녹음해 오라는 지시를
받았습니다. 총장님. 협조해 주십시요. "
"이런 나쁜 놈들!좋아!녹음기를 가져
왔나?"
정 총장이 짜증스럽게 소리쳤다.
"아닙니다. 녹음 준비가 되어 있는 우리
분실까지 가셔야 하겠습니다. 육본
범죄수사단장이 함께 온 것은 그
때문입니다. "
"뭐?"
정 총장이 몸을 벌떡 일으켰다. 그는
비로소 허 대령과 우 대령이 자신을
연행하러 온 것이라는 사실을 눈치 채고
화를 벌컥 냈다.
"가시죠?"
"전두환이가 이따위 지시를 내렸지?"
"아닙니다. 대통령 각하입니다!"
허 대령과 우 대령도 소파에서 몸을
일으켰다.
"너희들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내가 계엄사령관인데 나도 모르게
대통령이 그런 지시를 해?"
"총장님. 이러지 마십시요. "
"대통령이 그런 지시를 했다면 나에게
전화라도 했을 거야!내가 직접 확인하기
전에는 이따위 조사에 응하지 않겠어!"
정 총장은 부관 이재천 소령을 소리쳐
불렀다. 이재천 소령이 부관실에서 후닥닥
뛰어 나왔다.
"각하!"
이재천 소령이 놀라서 정 총장을
쳐다보았다.
"총리 공관이나 장관에게 전화 걸어!"
"예!"
이재천 소령이 당황하여 부관실로
뛰어갔다. 이재천 소령은 어쩐지 사태가
않게 돌아간다고 생각했다. 그는
부관실로 들어가자 마자 경비 전화를
잡았다. 그러자 부관실에 들어와 있던
보안사 수사관들이 이재천 소령을
가로막았다. 총장 경호장교 김인선()
대위는 수사관들이 이재천 소령을 가로막자
권총을 뽑았다. 그러나 보안사 수사관들이
더욱 빠르게 권총을 뽑아서 김인선 대위를
쏘았다. 김인선 대위는 얼굴에 수발의 총을
맞고 나뒹굴었다. 이재천 소령은 전화를
걸려다 말고 총을 맞고 쓰러졌다.
그때 공관 현관에 엎드려 있던 보안사
수사관 2명이 일제히 공관을 향해 총을
쏘았다. 공관은 금세 아수라장이 되었다.
"총장님. 이제는 함께 가셔야겠습니다. "
응접실에 있던 허 대령과 우 대령은
부관실 쪽에서 총소리가 나자 마자 정
팔짱을 끼었다.
"이게 무슨 짓들이야?"
"총장님!"
"너희들이 지금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
알아?"
"상부의 지시입니다!"
"총소리가 났잖아?"
"총장님께서 이러고 있으니까 총소리가
난 것입니다. !"
"사격을 중지 시켜!사격중지!"
정 총장이 소리를 버럭 질렀다.
그때 응접실 밖에서 보안사 수사관들이
M16 소총 개머리판으로 유리창을 깨고
응접실로 뛰어 들어왔다.
"갑시다!"
그 사내는 총구를 정 총장의 얼굴에 바짝
겨누었다. 정 총장은 깜짝 놀란 표정으로
그 사내를 쳐다보았다. 그 사내는 마치
청와대 경호실 요원들의 야전 점퍼 같은
감색 잠바를 입고 있었다.
"넌 누구야?"
"알 것 없어!가자고 하면 빨리 따라 나설
것이지 무슨 말이 많아?"
사내가 M16 소총의 총구로 정 총장을
위협했다. 그 바람에 정 총장의 안경이
총구에 밀려 땅바닥으로 떨어졌다. 정
총장은 응접실 바닥에 떨어진 안경을 주워
얼굴에 썼다.
"가자!"
정 총장은 대통령이 연행을 지시했다면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낙심한 얼굴로 사내들을 따라가기로
결심했다.
정 총장은 보안사 수사관들에 의해
읒퓽나갔다. 현관 앞에는 어느 사이에
검은 색의 슈퍼 살롱이 대기하고 있었다.
정 총장은 수사관들에게 떠밀려 뒷좌석에
올라탔다. 그러자 보안사 영관장교 둘이
양쪽으로 올라타서 정 총장의 팔짱을
끼었다. 앞 좌석에는 허삼수 대령이
앉았다.
정 총장은 눈을 지그시 감았다. 공관에는
낯선 병사들만 잔뜩 몰려와 서성거리고
있을 뿐 공관 경비병들은 눈을 씻고 봐도
찾을 수가 없었다.

5

한경호는 거울을 들여다보고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장군과 보안사 영관
장교들이 자신의 소설과 비슷한 방법으로
혁명을 일으키고 있다고 생각하자 가슴이
뿌듯했다. 그것은 어떻게 생각하면
반란이고 쿠데타였다. 그 중심에는 권력의
공백상태에서 막강한 힘을 갖고 있는
보안사와 하나회의 고급 장교들이 있었으나
세부계획이나 다름이 없는 시나리오 역할은
자신의 소설이 하고 있는 것이다. 그는
계속해서 타이프를 치기 시작했다.
아무래도 오늘 밤을 꼬박 새워야 할 것
같았다.

장군은 침통한 표정으로 사령부로
돌아왔다. 참모총장 연행에 대한 대통령의
재가가 끝내 떨어지지 않아 얼굴이
흙빛이었다. 벌써 허삼수 대령은
참모총장을 서빙고 분실로 연행해 놓은
상태였다. 대통령의 재가만 받았으면 아무
염려가 없는 일이었으나 상황은 여의치
않았다. 보안사 수사관들은 참모총장을
연행하면서 총격전까지 벌여 서울 시내
일원이 비상 상태로 돌입해 있었다.
공관촌은 이미 해병대 병력이 출동해
있었다.
해병대 사령관 김정호() 중장은
7시20분에 요란한 총성을 들었다. 그는
총소리가 들리자 가슴이 철렁했다.
총소리는 계엄사령관이자 육군 참모총장의
공관이 있는 쪽에서 들려오고 있었다. 그는
즉각 심상치 않은 사태가 발생했다는 것을
깨닫고 부관에게 해군본부에 기동타격대
출동을 요청하라고 지시했다. 그리고 그는
전투복으로 갈아 입고 무장을 했다.
공관촌의 외곽 경비를 해병대 사령부가
맡고 있기 때문에 불미한 상황이 발생하면
자신이 지휘 책임을 져야 했다.
한남동 공관촌 경비대장 황인주()
소령은 해병대 소 속이었다.
그는 공관촌을 순시하다가 요란한 총성을
들었다. 국방부 장관 공관 앞에 이르렀을
때였다. 총성은 칠흑의 어둠에 묻혀 있는
공관촌을 뒤흔들며 계속되고 있었다.
"이게 무슨 소리야?"
황 소령은 소스라쳐 놀랐다.
"총소리입니다!"
병사들이 당황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M16인가?"
"예. M16입니다!"
"비상이다!기동타격대에 비상을 걸어라!"
황인주 소령은 국방부 장관 위병 초소의
경비 전화로 기동타격대를 소집했다.
기동타격대는 외곽을 경비하는 해병대 병력
비상시에 대비 1개분대로 편성되어
있었다.
그는 즉각 경비대 사령부로 뛰어 갔다.
황 소령은 탄약고에 보관중인 실탄 박스를
뜯고 기동타격대 조장에게 대원들에게
분배하라고 지시했다.
그때 육군 참모총장 공관 관리장교인
반일부() 준위가 헐레벌떡 상황실로
뛰어 들어왔다.
"반 준위 아니오?"
황 소령이 놀라서 반 준위를 쳐다보았다.
"큰 일 났습니다!총장 공관이 습격을
당했습니다!"
"뭐요?"
"괴한들이 총장 공관에 침입했습니다!"
"괴한들이 얼마나 되오?"
"모릅니다!"
황 소령은 가슴이 터질 것 같았다. 그는
즉시 해군본부에 상황을 보고한 뒤
병사들을 지휘하기 위해 반 준위를 데리고
밖을 향해 달려 나가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가 경비대 내무실 막사를 돌아가기도
전에 일단의 헌병대 병사들과 마주쳤다.
"뭐야?"
황 소령이 병사들을 향해 소리를 질렀다.
"너희들 왜 여기로 몰려와?공관이
괴한에게 습격을 당했는데 여기서 꾸물대고
있으면 어떻게 해?"
반 준위는 헌병대가 공관 경비병으로
착각을 하고 소리를 질렀다. 그러나 그의
고함이 채 끝나기도 전에 헌병대 병사들이
우르르 달려들어 황 소령과 반 준위를 M16
개머리판으로 마구 내려찍고 군화발로
사정없이 짓밟았다.
"뭐야?"
"너희들 누구야?"
황 소령과 반 준위는 얼떨결에
개머리판에 얻어 맞고 발길질에 차이며
신음소리처럼 내뱉았다.
"입닥쳐 이 새끼야!"
"이 새끼들 밟아 버려!"
그러자 헌병대 지휘관들이 욕설을 섞어
병사들에게 지시했다. 병사들은 기다렸다는
듯이 공포를 쏘며 무장을 해제한 뒤 무수히
구타를 했다. 황 소령과 반 준위는
정신없이 얻어 맞았다. 황 소령은 그로
인해 뒷머리가 찢어져 피투성이가 되었고
반 준위는 정신을 잃었다. 특히 반 준위는
손톱이 빠질 정도로 얻어 맞고 쓰러졌으나
헌병대 병사들은 계속해서 옆구리에 총를
겨누고 무수히 밟아댔다.
해병대 경비병들 중 교대 대기중이던
병사들은 헌병대 병사들에게 제압 당하여
경비대 대장실로 끌려 들어가 소등을 한
상태에서 무차별 구타를 당했다. 아군이
아군을 구타하고 죽이는 비참한
상황이었다.
김인선 대위는 엉덩이와 눈두덩,대퇴부에
심한 총상을 입고 쓰러졌다. 이재천 소령은
오른 쪽 옆구리에 탄환을 맞았다. 탄환이
간을 스치고 지나가 뱃속에 박혔는데
출혈이 심해 사경을 헤매고 있었다.
해병 경비대 병사들은 그 시간 실탄을
분배받고 있었다. 그때 소속이 분명하지
않은 병사들이 들이닥쳐 황 소령을 끌고
가는 것을 보고 말았다.
"대장님이 잡혔다!"
"수상한 놈들이 대장님을 끌고
"
해병대 경비 병사들은 소리를 지르며
막사 주위로 산개하여 막사를 포위했다.
일부 병사들은 사령관에게 보고하기 위하여
해병대 사령관 공관으로 달려갔다.
"무슨 일이야?"
김정호 중장은 출동 준비를 끝내고
공관을 나서려던 참이었다.
"큰 일 났습니다!육군 헌병 복장을 한
괴한들이 경비대 막사를 점거했습니다!"
병사들이 다급하게 보고했다.
"경비대장은 어디 있나?"
"인질로 잡혀 있습니다!"
"포로가 되었다는 말인가?"
"예!"
"괴한들이 침입한 곳은 경비대
막사뿐인가?"
"육군 참모총장 공관도 침입한 것
같습니다!"
김정호 중장은 낮게 신음을 토했다. 그는
10. 26으로 정정이 불안한 틈을 타서
북한이 무장공비를 침투시킨 것이
아닌가하는 생각을 했다.
"괴한들은 얼마나 되는가?"
"얼마되지 않습니다. "
"무기는 무엇인가?"
"M16입니다!"
"좋다!지금부터 내가 지휘한다!누구든지
보이면 수하를 하고 수하에 응하지 않으면
무조건 사살하라!"
"옛!"
병사들이 일제히 대답을 했다. 그들은
3성 장군인 해병대 사령관이 직접 지휘를
하겠다고 하자 용기가 솟아 났다. 재빨리
H전투 대오를 갖추는 것과 동시에 김 중장을
4명의 병사들이 에워싸고 호위를 했다.
그들은 누가 지시하지도 않았는데도 불의의
기습을 당할 것을 우려해 스스로 사령관을
호위하려고 했던 것이다.
김정호 중장은 정문부터 탈환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는 정문 상황을 파악한 뒤
특공대를 편성해 진격시켰다. 해병
특공대는 김 중장의 명령이 떨어지자
배수구를 따라 낮은 포복으로 정문으로
접근했다. 그들은 정문 10미터 전방까지
접근한 뒤 일제히 사격을 개시하면서
정문으로 달려 들어갔다.
공관촌에 또 다시 날카로운 총성이 울려
퍼졌다. 총성은 어둠을 산산이 찢어버릴
듯이 요란했다.
"손들어!"
"움직이지 마!움직이면 쏜다!"
"모두 엎드려!"
공관촌 정문을 점거한 보안사 헌병들은
해병 경비대의 일제 사격에 변변하게
저항도 하지 못하고 제압 당했다. 보안사
헌병들은 이 총격전에서 장교 1명과 사병
2명이 중상을 당했다. 6명은 해병대의
포로가 되었다.
공관촌 정문을 쉽사리 장악한 해병대는
경비병 3명을 풀어 주고 정문을
바리케이드로 폐쇄했다.
김정호 중장은 중상을 입은 보안사
대위를 심문했다. 그는 뜻밖에
합동수사본부 요원이었다.
"누구의 지시로 이러한 짓을 했는가?"
"33헌병대장 최석립 중령의 지시를
받았습니다. "
" "목적이 무엇인가?"
"육군 참모총장의 연행입니다. "
"계엄 사령관을 합수부에서 연행한단
말인가?"
"예. "
김정호 중장은 어이가 없었다. 계엄이
선포되어 있는 상황에서 사령관을
연행한다는 것은 대통령의 재가가 있어야
했다. 게다가 계엄사령관은 육군
참모총장이었다. 그를 연행한다는 것은
명백한 반란 행위에 해당된다. 이를
신속하게 진압하지 않으면 걷잡을 수 없는
사태가 발생하는 것이다.
"병사들은 계속해서 경비대 막사를
탈환하라!반항하는 자는 사살하라!"
김정호 중장은 해병대 병사들에게 막사
탈환 명령을 내렸다. 전투 명령이었다.
"예!"
병사들이 우렁차게 대답을 하고 막사를
향해 달려갔다. 곧 이어 막사를 향하여
총을 쏘는 소리가 요란하게 들려왔다.
그때 육군본부 헌병 기동타격대와 국방부
50헌병대가 공관촌 정문에 도착했다.
"어떤 부대도 별도의 명령이 있을 때까지
정문으로 들여 보내지 마라!그래도 진입을
시도하는 부대가 있으면 사살하라!"
김정호 중장은 강력한 지시를 내렸다.
적과 동지를 구분할 수 없는 위험한
상황이었다.
해병대 병사들은 헌병 기동타격대와 50
헌병대에 신속하게 위협 사격을 가했다.
기동타격대와 50 헌병대는 해병대의 일제
사격이 개시되자 일단 뒤로 물러났다.
해병대 병사들은 경비대 막사를 포위하고
일제히 총을 쏘았다.
해병대 경비병들을 억류하고 있던
33헌병대는 당황했다. 사태는 급변하고
있었다. 밖에서는 계속해서 총소리가
밤공기를 흔들고 있었다. 완전한 전투
상황이었다.
"대장님. 사격을 중지시켜 주십시요.
우리는 적이 아닌 국군입니다. "
헌병 지휘관인 대위가 황인주 소령에게
비로소 사정을 하기 시작했다.
"뭐야?"
황 소령은 기가 막혔다.
"이렇게 총격전이 계속되면 쌍방이 모두
죽습니다. "
"닥쳐!이 새끼야!"
"부탁합니다. 우리도 명령에 따르고 있는
것입니다. 저하고 함께 나가서 사격을 중지
쳔돕척 "
"너와 함께 나가면 내 부하들에게
총알받이가 돼!나가도 나 혼자 나갈 테니까
넌 여기서 기다려!"
황 소령은 헌병 대위를 날카로운
눈빛으로 쏘아보며 외쳤다. 상황이 완전히
바뀌어져 있었다.
밖으로 나가자 총소리가 귀청을 찢을
듯이 요란했다. 황 소령은 손을 들고 쏘지
말라고 소리를 질렀다.
"누구야?"
어둠 속에서 병사들이 수하를 했다.
"나다!너희들 대장이다!"
"경비 대장님이십니까?"
"그렇다!너희들 있는 데로 갈 테니까
쏘지 마라!"
"알겠습니다. "
황 소령은 총성이 그치자 재빨리 해병대
병사들이 있는 곳으로 달려갔다. 그 곳에는
김정호 중장이 전투복 차림으로 병사들을
지휘하고 있었다.
"각하!"
황 소령은 부동자세로 거수경례를 했다.
그의 목소리가 격정으로 떨렸다.
"어떻게 된 일인가?"
"합수부측 병력입니다!육군 참모총장님을
연행해 갔습니다!"
"병사들을 지휘할 수 있겠는가?"
"예!"
"좋다!경비대 병사들을 귀관이
지휘하라!"
"옛!"
황 소령은 다시 거수경례를 했다.
개머리판에 얻어맞은 뒷머리에서는
C끈적거리는 피가 흘러내리고 있었으나 그는
개의치 않았다. 해병대 사령관이 직접
병사들을 지휘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시간은 벌써 8시가 가까워지고 있었다.
사방은 칠흑처럼 캄캄했다. 황 소령이
병사들의 무장을 확인하고 있을 때
참모총장 공관 쪽에서 미니 버스 한대가
헤트라이트를 켜고 언덕을 미끄러져
내려오는 것이 보였다.
"산개하라!"
황 소령은 재빨리 병사들을 도로
양쪽으로 배치했다. 병사들은 황 소령의
명령을 받자 신속하게 도로 양쪽으로
흩어져 엎드렸다.
"수하에 불응하면 무조건 사살하라!"
국방부 장관 공관 앞은 금세 팽팽한
긴장감이 돌았다. 병사들은 어둠 속에서
버스를 향해 총구를 겨누었다.
"수하하라!"
황 소령의 지시에 병사 둘이 M16을
겨누고 도로로 나갔다.
"정지!"
미니버스가 정지했다.
"너희들은 완전히 포위되었다!수하에
불응하면 무조건 사살하라는 명령이다!"
병사는 긴장하여 버스 안을 향해 소리를
질렀다.
"명령에 따르겠다!"
버스 안에서 응답이 왔다. 그들은 사태가
여의치 않게 돌아가고 있는 것을 깨달은 것
같았다.
"무장을 해제한다!반항하면 사살하겠다!"
황 소령은 해병대 병사들에게 무장을
해제하라고 명령했다. 병사들은 재빨리
.버스로 올라가 무장을 해제했다. 버스에는
보안사 요원 3명과 육군 헌병 24명이 타고
있었다.
시간이 흐르자 전두환 장군은 초조해지기
시작했다. 대통령은 한사코 참모총장의
연행을 재가하지 않고 있었다. 그는 국방부
장관의 요청이 있어야만 재가를 하겠다고
완강하게 버티고 있는 것이다.
"특전사령관은 어떻게 되었어?"
특전사령관은 정병주 소장이었다.
"총장 공관에 일이 터졌다는 보고를 받고
부대로 급히 돌아갔습니다. "
"수경사령관은?"
수경사령관은 장태원 소장이었다.
"사령부로 돌아갔습니다. 지금쯤
수경사와 특전사에 비상이 걸려 있을
것입니다!"
"어떤 놈이 연락을 했어?"
"육군 헌병대에서 헌병감 김진기
준장에게 비상 연락이 왔습니다. "
"그걸 막았어야지!"
장군이 짜증을 냈다. 그는 초조한 듯이
담배를 피워 물었다. 상황은 점점
불리해지고 있었다. 그는 담배를 피우면서
5. 16이 일어났을 때를 잠시 생각했다.
그때도 혁명군의 상황은 지금처럼 불리하기
짝이 없었다. 그러나 혁명군이 강하게
밀어붙였기 때문에 아군끼리의 충돌을
우려하는 장군들의 우유부단함으로 혁명이
성공했던 것이다.
그는 당시 육군 대위였다. 육군사관학교
교관으로 있으면서 혁명군을 지지하는
생도들의 시위를 유도하기까지 했었다.
"특전사에 병력이 동원되겠나?"
"여단장들이나 부대장들이 모두 우리측에
가담해 있습니다. "
"수경사는?"
"수경사도 병력을 동원하기가 어려울
것입니다!"
"좋아. 9사단장에게 예정대로 부대를
서울로 진입시키도록 연락하고 장태원이나
정병주가 우리를 진압하려고 하면
체포하거나 사살하라!"
"알겠습니다. "
"어떠한 일이 있어도 수경사나 특전사가
병력을 동원하지 못하도록 하라!"
"예. "
그때 부관이 상기된 얼굴로 사령관실로
뛰어 들어왔다.
"무슨 일이야?"
"큰 일 났습니다!"
"큰 일이라니?"
"전군에 비상령이 내렸습니다. "
"누가 내렸어?"
"육본입니다!"
"작전명은?"
"진도개 하나입니다. "
"명령 내용은 뭐야?"
"각 부대 지휘관은 즉시 귀대하여 병력을
장악하고 육본으로 지급으로 보고하라는
내용입니다. "
"참모차장의 명령이군!"
장군은 무섭게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각 검문소에도 긴급지시가 내려와
있습니다. "
"무슨 내용이야?"
"육군 참모총장의 행방을 발견하는 즉시
보고하라는 것과 일제 슈퍼살롱의 검문을
뗌하라는 것입니다!"
"알았어!"
장군은 사납게 담배를 재떨이에 비벼
껐다.
육군본부에서 전군에 비상명령이 하달된
것은 윤성민() 참모차장에
의해서였다.
윤 참모차장은 공관에서 정승화 참모총장
부인 신유경()의 다급한 전화를
받았다.
"사모님 무슨 일입니까?"
"차장님 비상사태가 발생했습니다!여기서
총격전이 일어났어요!총장님이 괴한들에게
납치되었어요!"
"납치라구요?"
윤 참모차장은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계엄사령관이자 육군 참모총장을 괴한들이
*납치해 갔다는 것이 도무지 이해되지
않았다.
"네!빨리 손을 써 주셔야겠어요!"
"아니 그게 사실입니까?"
"차장님. 제가 왜 거짓말을
하겠어요?여기는 지금 피바다예요!이재천
소령과 김인선 대위가 죽어 가고 있어요!"
신유경의 목소리는 울음이 섞여 있었다.
윤 참모차장은 그때서야 정신이 번쩍 드는
기분이었다.
"괴한들이 누구인지 알겠습니까?"
"몰라요!빨리 조치를 취해 주세요!"
"알겠습니다!"
윤 참모차장은 전화를 끊자 곧 바로
전투복으로 갈아 입고 권총을 찼다. 그리고
그는 부관을 대동하고 헌병감실로
달려갔다. 공관에서 헌병감실까지는 5분도
걸리지 않는 거리였다. 그러나 책임
지휘관인 헌병감 김진기() 준장이
자리에 없었다. 당직 근무장교가 있었으나
그는 상황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다. 윤 참모차장은 헌병감실을 나와
육본 벙커로 달려갔다. 그는 당직 장교에게
육본 참모들의 비상소집을 지시했다.
전군에는 비상경계령을 내렸다.
이내 육본 벙커로 비상연락을 받은
장군과 영관 장교들이 속속 도착했다.
그러나 상황은 전혀 알 길이 없었다.
계엄사령관이자 육군 참모총장인 정승화
장군이 괴한들에게 납치되었다는 사실만
알려져 참모들을 불안하게 만들었다.
윤 참모차장은 전방부대에 북한군의
동태를 파악하여 보고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혹시나 북한의 무장공비가
침투하여 계엄사령관을 납치한 것이
아닌가하는 우려 때문이었다.
한미연합사령부에도 같은 전통을 때렸다.
그러나 전방부대와 한미연합사는 북한군의
동태에 이상이 없다는 보고를 해왔다.
(그렇다면 내부소행이야!)
윤 참모차장은 목이 마르는 듯한 기분을
느꼈다. 그는 장관 공관에 전화를 걸었으나
장관은 이미 피신해 버린 뒤였다. 윤
참모차장은 이제 자신이 총 책임자가 되어
육군을 지휘해야 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는 어깨에 무거운 중압감을 느끼며
전군에 '진도개 하나' 비상경계령을
내렸다.
"전군비상!각 부대 지휘관은 즉시
귀대하여 병력을 장악하고 육본 상황실로
보고하라!"
이 비상경계령은 신촌의 요정에서
저녁식사를 하고 있던 헌병감 김준기
준장과 수경사령관 장태원 소장,특전사령관
정병주 소장에게도 하달되었다.
장태원 사령관은 부대로 귀대하기 위해
찢차에 타자 즉시 무전으로 사령부
상황실에 비상 대기하고 있는
김기택() 준장을 호출했다.
"총장 공관에 무슨 일이 있나?"
"총격전이 있었습니다!"
"총장님은 어떻게 되셨나?"
"아직 확인이 되지 않고 있습니다. 지금
해병대 병력이 공관촌을 장악하고
있습니다!"
"그럼 그 놈들이 일을 저지른 거야?"
"모르겠습니다. 상황이 파악되는 대로
보고 올리겠습니다. "
"우선 APC(장갑차) 한 대와 기동타격대를
총장 공관으로 출동시켜!무조건 밀고
들어가서 총장님을 구출하도록
하라!알았나?"
"옛!"
"우물쭈물하면 놈들에게 당하니까
장갑차로 먼저 밀고 들어가!"
"옛"
장태원 사령관은 김기택 준장에게 즉시
병력을 출동시키라는 지시를 했다.
장태원 사령관이 필동()의 수경사에
도착한 것은 밤 8시가 약간 지났을 때였다.
상황실엔 김기택 참모장과 김진선
상황실장이 대기하고 있었다.
"어떻게 되었어?"
"기동타격대를 출동시켰습니다. "
"누가 지휘하고 있어?"
"신윤희() 중령입니다!"
신윤희 중령은 헌병단 부단장이었다.
"총장 공관 상황은 파악되었나?"
"파악되지 않고 있습니다. "
"30단장과 33단장은 어디 있어?"
수경사 30단 단장은 장세동()
대령이었고 33단 단장은 김진영()
대령이었다. 그러나 이들은 전두환 보안사
사령관의 휘하에 들어가 있었다.
"무전을 때렸는데도 응답이 없습니다. "
"이 자식들 또 어디 몰려가서 술 퍼먹고
있는 거 아니야?"
장태원 사령관은 장세동 대령과 김진영
대령을 빨리 찾으라고 지시한 뒤 수경사
지하 상황실로 내려갔다. 그러나 상황은
조금도 나아지지 않고 있었다.
장태원 사령관은 헌병 1개소대와 전차
1대,APC 1대,사이카 2대,앰블런스 1대를
총장 공관으로 출동시켰다. 그러나 30분이
지나도 아무런 보고가 없었다.
장태원 사령관은 수경사 전 병력에
실탄을 지급하고 완전무장을 시키라고
지시한 뒤 직접 현장으로 출동했다.
정보참모 박웅() 대령과 전속부관
천연우() 대위가 수행했다.
장충체육관을 지나 한남동 길목인
약수동으로 꺽어들자 거리는 차량과
행인들로 잔뜩 메워져 있었다. 한남동
공관촌에서 잇달아 일어난 총성에
민간인들은 갈피를 잡지 못하고
우왕좌왕하고 있었다.
"장군님 참모차장님이 찾으십니다!"
윤성민 참모차장이 다급하게 무전을 친
것은 장태원 사령관의 차가 약수동
묽넘고 있을 때였다. 장태원
사령관은 천 대위로부터 무전기를 넘겨
받았다.
"차장님. 접니다!"
"장 장군이오?"
"예. 장태원입니다. "
"도대체 지금 어디 있소?총장 공관이
괴한들에게 습격을 받았소!"
"그래서 총장 공관으로 가고 있습니다.
자세한 상황을 몰라 대책을 세울 수가
없습니다. 어떻게 된 것입니까?"
"장세동이와 우경윤이 총장을 납치해
갔소. "
"장세동이도 가담했습니까?"
장태원 사령관은 분노로 얼굴이
벌개졌다. 장세동은 수경사 휘하의
30단장을 맡고 있었기 때문에 자신의 휘하
참모였던 것이다. 그러나 장세동 대령은
이날 정승화 참모총장의 연행에는 참여하지
않았었다. 윤 참모차장이 허삼수 대령을
잘못 알고 그렇게 말한 것이었다.
"그렇소!"
"보안사 짓이 분명합니다!"
"그런 것 같소. 빨리 부대로 돌아가서
부대를 장악하시오. "
그러나 장태원 사령관의 차는 이미
한남동 공관촌 입구에 도착해 있었다.
장태원 사령관은 공관촌 상황을 파악하기
위해 차에서 내렸다. 공관촌 입구 주변은
수도권 일대의 각 부대에서 출동한
병력으로 어수선했다. 이따금 요란하게
M16소총소리가 들려와 긴장감을 높이고
있었다. 위협사격을 하고 있는 병력은
해병대 병력이었고 긴급 출동한 병력은
틈을하기 위해 고가도로 밑에 납짝
엎드려 있었다.
"수경사 병력은 어디 있나?누가
출동했어?"
"제가 나와 있습니다!"
신윤희 중령이 고가도로 밑에서 뛰어
나와 장태원 사령관에게 거수경례를
붙였다.
"야!너 왜 이러고 있어?내가 공격하라고
지시했잖아?"
장태원 사령관은 신윤희 중령을
다그쳤다.
"해병대가 공관촌을 장악하고
있습니다!사격이 심해서 접근할 수가
없습니다!"
"장갑차로 밀어 버려!"
그때 해군 헌병감 박종곤() 중령이
기동타격대 병력을 끌고 달려왔다.
"수고하십니다. "
"당신은 뭐야?"
"해군 헌병감입니다. "
"당신들 저들과 한 패거리야?"
"공관의 해병경비대로부터 급보를 받고
출동했습니다. 저도 어떻게 된 영문인지
모릅니다. "
박종곤 중령이 낭패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누가 적이고 누가 아군인지 알
수 없을 정도로 공관촌 입구는 각 부대의
병력이 몰려들어 혼잡하기 짝이 없었다.
"장군님!"
그때 육본의 본부사령 황근영()
준장이 육군 기동타격대를 이끌고 장태원
사령관을 찾아 왔다.
"황 장군!나는 참모차장의 명령을 받고
들어가야 하오. 이 현장은 당신이
지휘하시오!"
장태원 사령관은 황근영 준장에게 현장
지휘를 맡겼다.
"신 준령!"
"예!"
"나는 부대로 돌아갈 테니 무조건 APC로
밀고 들어가 공관을 장악해!"
신윤희 중령에게는 재차 진압 명령을
내렸다.
"예."
장태원 사령관이 수경사 사령부로
돌아오자 장세동 대령과 김진영 대령은
그때까지도 귀대해 있지 않았다.
"이 자식들 어디 갔어?비상인데도 왜
나타나지 않아?"
"경복궁 30단에 있는 모양입니다. 그
곳에 유학성,황영시,차주헌 장군과
노태우,박준병,백운택 장군,그리고 공수
여단장들이 함께 있다고 합니다. "
김기택 참모장이 긴장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뭐야?"
장태원 사령관은 피가 역류하는 듯한
기분을 느꼈다. 중장급 장군들과 소장급
장군들,그리고 준장들과 영관 장교들이
참모총장을 불법으로 연행한 것은 쿠데타
음모가 분명했다. 특히 자신의 부하들인
장세동 대령과 김진영 대령이 쿠데타에
가담한 것은 그의 분노를 폭발시켰다.
"30단에 전화 걸어!"
장태원 사령관은 얼굴이 벌개져서 소리를
버럭 질렀다. 수도경비사령부 사령관에
임명된 지 불과 며칠 되지 않아 참모들을
장악하지 못한 것이 후회스러웠다.
"장 장군 나 황영시요. "
그러나 황영시 중장이 먼저 전화를
받았다.
"장군님. 이게 무슨 경우입니까?"
"장 장군. 이리 와서 얘기 합시다. "
"선배님. 도대체 왜 이러십니까?선배님도
참모총장을 연행하는데
가담했습니까?선배님께서 정 총장이 1군
사령관이던 시절에 선배님들이 참모총장을
시켜야 한다고 하지 않았습니까?그래 놓고
이제 와서 총부리를 들이댑니까?"
장태원 사령관은 펄펄 뛰었다. 황영시
중장은 장태원 사령관과 친밀한 관계를
갖고 있던 유학성 중장을 바꾸어 주었다.
"나 유학성이오?"
"장군님이 거기는 왠일이십니까?"
"장 장군. 이리로 오시오. 사태는 우리
쪽으로 기울었소. "
"지금 무슨 말씀을 하십니까?참모총장을
불법으로 연행해 놓고 우리 쪽으로
기울었다니 장군님도 반란군에
가담했습니까?"
장태원 사령관은 전화기에 유학성 중장이
나오자 더욱 흥분했다.
"이것 봐요. 이건 반란이 아니라 우리의
충정에서 나온 거요. 대통령을 시해한
역모에 가담한 총장을 체포한 거요. "
"말도 안되는 소리하지 말고 빨리 총장을
원상복귀시키십시오. 어디서 행동을 그렇게
합니까?탱크로 밀고 가서 쑥밭을 만들어
버릴 테니 그런 줄 아시오!"
장태원 사령관이 흥분해서 소리를 지르자
유학성 장군은 다시 황영시 중장을
바꾸었다.
"장 장군. 흥분하지 마시오. "
"내가 지금 흥분하지 않게
되었습니까?당신들 모조리 체포할 테니
그런 줄 아시오!"
황영시 장군은 장태원 사령관이 부대를
출동시켜 체포하겠다고 하자 차주헌 장군을
바꾸었다. 차주헌 장군은 장태원 사령관이
한때 상관으로 모시고 있던 장군이었다.
그에게 함부로 말을 하기가 난처하여
장태원 사령관은 전화를 끊어 버렸다.
상황은 악화일로를 걷고 있었다.
육본에서는 부대장들의 소재 파악을
해나가다가 전두환 보안사령관 겸
합동수사본부장이 배후에 있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육본에서는 참모총장을 연행한
것은 명백한 반란행위로 규정하고 이들을
진압하기 위해 병력을 모으기 시작했다.
육본은 헬리콥터와 장갑차를 동원해서라도
반란군을 진압하기로 결정을 내리고 최규하
대통령에게 재가를 요청하기 위해
삼청동으로 전화를 걸었다. 그러나 최광수
비서실장은 최규하 대통령에게 전화를
연결해 주지 않았다. 최규하 대통령은 이때
전두환 장군을 만나고 있었다. 국방부
장관과 참모총장이 유고인 상태에서
군통수권을 갖고 있는 최규하 대통령과
연결이 되지 않아 육본 수뇌부는 병력을
동원하는데 막대한 지장을 받게 되었다.
육본이 병력을 동원한다는 정보를 입수한
합동수사본부쪽도 병력 동원을 서둘렀다.
서울이 반란군과 진압군의 전투로 피바다가
될 위태로운 상황으로 치달리기 시작한
것이다.

날이 번하게 밝아 오기 시작했다.
한경호는 비로소 타이프 치는 것을 멈추고
창으로 밖을 내다보았다. 주택가의 겨울
아침이 서서히 밝아 오면서 골목에
행인들이 드문드문 오가고 있는 것이
보였다.
한경호는 서재에서 나와 안방으로
들어갔다. 아내는 아직도 깊은 잠이 들어
있었다. 그는 잠깐이라도 눈을 붙이기 위해
옷을 벗고 아내의 옆에 누웠다. 침실은
커텐을 쳤기 때문에 어둠스레했다.
한경호는 눈을 감았다. 혼곤하게 잠을
자고 있던 아내 정란이 잠결에 몸을
뒤척거리며 무어라고 웅얼거렸다. 한경호는
정란을 향해 돌아누우며 귀를 기울였다.
"남편이....눈....치....챌....거야..

보는 바에 의하면 비적 떼와 다름없다.
그 부대장이 .."
한경호는 눈을 뜨고 얼굴을 찡그렸다.
아내의 잠꼬대로도 그녀가 부정한 여자라는
것을 스스로 고백하고 있는 셈이었다.
(죽일 년!)
한경호는 머리 끝이 곧추 서는 듯한
분노를 느끼며 아내의 목으로 손을
가져갔다.

<2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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