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혼의 파괴자(3)
-이 수광 장편추리소설
----- 차 례 -----
제15장에서 계속
제16장 사랑과 슬픔의 광시곡
제17장 나비는 청산에 묻히고
제18장 악마의 숨소리
제19장 살인자를 찾아서
제20장 빗속에 지다
에필로그
제15장에서 계속
3
그날 밤에도 가위처럼 꿈이 계속되었다.
강한섭은 비몽사몽간에 광주에서 시위대에
참여하여 구호를 외치고 있었다.
시위대에는 아내도 있었고,앞집 군인의
부인 이정란과 유미자도 있었다. 그들은
서로 어깨동무를 하고 웃으며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그들뿐이 아니라 거기엔
노동자들도 섞여 있었고
간호원,운전기사,학생들,농민들,그리고
경찰과 검은 베레모를 쓰고 진압봉을 들고
있는 공수부대도 웃으며 춤을 덩실덩실
추듯 시위를 벌이고 있었다.
` 그들은 모두 웃음이 헤펐다. 서로 서로
손을 잡고 웃으며 어디론가 몰려가고
있었다. 누군가 해방이라고 소리를
질렀고 그러자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이
사람들이 참세상이라고 화답을 했다.
날씨는 볕이 쨍쨍했다. 웃역에서는
모내기가 얼추 끝났으나 아랫역 남도에서는
모내기가 제철이었다. 그러고 보면 청천
하늘엔
농사천하지대본()이라는
울긋불긋한 농기()가 펄럭거리고
풍물소리가 드높았다. 꿈도 생각을 따라
가는 것일까. 강한섭은 어느덧 논바닥에서
모를 내고 있었다. 아내가 점심을 여
나르고 논둑에 둘러앉아 점심이
시작되었다. 사람들이 왁자하게 웃고
떠들며 막걸리를 마시고 아내가 수줍은
듯이 웃으며 그에게 눈짓을 하고 있었다.
그는 아내의 손을 잡고 논둑에서 덩실덩실
원무()를 추기 시작했다. 그때 꿈이
바뀌었다.
타타타타탕...
갑자기 총소리가 요란하게 들리자 어둠이
세차게 몸을 떨었다. 강한섭은 벽쪽에 바짝
달라붙어 눈을 질끈 감았다. 전신에 소름이
오싹 끼치면서 다리가 후들거리고 떨렸다.
검은 그림자들은 소리도 없이 도청으로
접근하면서 일제히 사격을 하고 있었다.
도청 어느 방에선지 처절한 비명소리와
신음소리가 들리고 잠자리에서 깨어난
시민들이 바깥의 동정에 귀를 기울이는
기척이 꿈이 아니고 현실인 것처럼
선명하게 느껴졌다.
(이것은... )
강한섭은 입속으로 중얼거렸다. 그러나
더 이상은 아무 말도 생각이 나지 않았다.
갑자기 골목으로 달려오는 군화소리가
들리면서 사람들이 마구 달아나기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사람들의 모습은
보이지 않고 소리만 들리고 있었다.
강한섭도 사람들을 따라 허겁지겁 달아나기
시작했다. 달아나지 않으면 죽는다는
생각에 강한섭은 정신없이 뛰었다.
타타타타탕......
다시 총소리가 요란하게 들렸다.
강한섭은 머리를 바짝 수그렸다. 그러자
탄환 하나가 쉭 하는 날카로운 소리와 함께
귓가를 스치고 지나갔다. 강한섭은
귓바퀴가 화끈해지는 것을 느끼며 앞으로
꼬꾸라졌다.
총소리가 더욱 가까워져 왔다. 강한섭은
-눈을 질끈 감았다. 이제 나도 광주에서
속절없이 죽는구나 하는 생각을 하는데 또
꿈이 바뀌었다. 꿈 속에서 강한섭은
군인이었다. 진압봉을 휘두르며 시위대를
진압하고 있었으나 성난 군중들은 금남로가
빽빽하게 늘어나서 파도처럼 밀려오고
있었다.
(군중들에게 밀리면 죽는다!)
강한섭은 꿈 속에서 그렇게 생각했다.
동료 공수부대원들의 얼굴에도 점점 사색이
짙어오고 있었다. 그들은 성난 군중들이
자신들을 죽일 것 같아 잔뜩 겁을 먹고
있었다.
(우리가 죽지 않으려면 저들을 죽여야
돼... )
강한섭은 어금니를 꽉 깨물고 어깨에
비스듬히 메고 있던 M16을 내려
움켜잡았다. 그리고 성난 군중들을 향해
총구를 겨누었다. 방아쇠에 걸린 손가락이
가늘게 떨렸으나 수많은 군중들이 노래를
부르며 한 걸음 한 걸음씩 가까이 오고
있었다. 강한섭은 방아쇠에 걸린 손가락을
힘껏 잡아 당겼다.
타타타타탕......
그러자 요란한 총소리와 함께 사람들이
피를 뿌리며 나뒹굴었다. 강한섭은 계속
방아쇠를 잡아 당겼다. 사람들이 비명을
지르며 벌떼처럼 흩어져 달아나고 있었으나
강한섭은 그들을 쫑아가며 M16을 난사했다.
이내 금남로가 거짓말처럼 썰렁하게
비었다. 강한섭에게 총을 맞은 부상자들만
여기저기 뒹굴며 괴로운 신음소리를
내뱉거나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강한섭은 핏발 선 눈으로 사방을
휘둘러보았다. 저만치 골목에서 한 떼의
사람들이 모여서 강한섭을 손가락질하며
웅성거리고 있었다.
"돌격!"
강한섭은 목이 터져라 외치며 적을 향해
골목으로 달려갔다. 적들은 어둠 속에서
수상스러운 음모를 꾸미며 웅성대고
있었다. 강한섭은 M16을 난사하며 골목으로
달려갔다. 그러자 어둠 속에서 웅성거리고
있던 사람들이 홀연히 사라져 버렸다.
(이것들이... !)
강한섭은 골목 끝에 있는 판자 대문을
박차고 뛰어 들어가 M16을 난사했다.
그러자 집안에서 여자의 날카로운
비명소리가 들렸다. 강한섭이 방안으로
뛰어 들어가자 젊은 여자가 아랫배를
움켜쥐고 죽어 있었다. 임신을 했는지
홈드레스를 입은 여자의 아랫배가
둥그스름했다.
강한섭은 골목으로 다시 나왔다. 그러자
대문 옆에서 하얀 물체가 서 있다가 후다닥
달아나기 시작했다.
강한섭은 재빨리 달려가 하얀 물체를
나꿔챘다. 그러자 하얀 물체가 그 충격으로
골목에 나뒹굴었다. 여자였다. 여자는 흰
부라우스와 검은 스커트 차림이었다. 어둠
속이기는 했지만 하얀 부라우스가 감싼
젖무덤이 묵직해 보였고 걷어 올려진
스커트 자락 사이로 흰 종아리가 보였다.
강한섭은 M16에 꽂힌 대검으로 여자의
가슴을 겨누었다. 여자가 공포에 질린
눈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그 눈에 무수한
애원과 절박함이 담겨 있었다. 그러나
강한섭의 눈은 여자의 탐스러운 가슴에
.꽂혀 있었다. 그의 눈은 짐승처럼
이글거렸고 추호의 망설임도후회도 없었다.
강한섭은 애원하는 여자의 눈빛을 외면하고
대검을 여자를 향해 힘껏 찔렀다.
"악!"
여자의 젖무덤에서 붉은 선혈이 쏟아지며
여자가 처절한 비명을 질렀다. 강한섭은
멈칫했다. 하얀 부라우스를 입은 여자는
시위 군중이 아니라 아내였다.
"당신 미쳤어요?"
가슴에서 붉은 피를 흘리며 아내가 벌떡
일어났다. 아내는 젖무덤이 하나 없는데도
불구하고 하얗게 눈을 흘기며 강한섭을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으으... "
강한섭은 몸부림을 치다가 꿈에서
깨어났다. 눈을 뜨자 사방이 칠흑처럼
캄캄했다. 아직도 한밤중인 모양이었다.
그러나 강한섭은 꿈에서 깨어났는데도 꿈
속에서의 일이 너무나 생생했다. 해괴한
꿈이었다. 비슷한 꿈을 매일 같이
되풀이하여 꾸고 있는 것도 그렇고 아무리
꿈이라고는 하지만 자신이 공수부대가 되어
시민들에게 총을 쏘는 것도 기이하기만
했다.
(꿈이 너무 선명해... )
강한섭은 손등으로 이마를 문질렀다.
이마에 굵은 땀방울이 맺혀 있었다.
등줄기는 식은 땀으로 축축했다. 어둠
속에서 옆으로 손을 뻗자 아내의 둔부가
만져졌다. 강한섭은 어둠 속을 더듬어
아내의 손을 잡았다. 그러자 아내의 따뜻한
체온이 느껴지면서 무섬증이 조금
진정되었다.
강한섭은 가쁜 호흡을 고르기 시작했다.
시간이 얼마나 되었을까.
침실이 칠흑처럼 캄캄해 아무 것도
분간할 수 없었다. 강한섭은 격렬하게 뛰던
호흡이 진정되자 침대에서 일어나 주섬주섬
옷을 걸치고 거실로 나왔다. 매일 같이
되풀이되는 꿈인데도 강한섭은 꿈 때문에
제대로 잠을 이룰 수 없었다.
거실에서 2층 서재로 올라가자 달빛이
환하게 스며들고 있었다. 침실은 커텐을
두껍게 쳐서 달빛이 스며들지 않고 있었다.
강한섭은 창으로 가까이 갔다. 달은
주택가의 지붕 위 중천에 높이 솟아
있었다. 새벽이 가까워 오고 있는 하늘은
푸르디 푸른 남빛이었고 희뿌연 광망이
신비스럽게 흐르고 있었다.
강한섭은 서재의 창가에서 하염없이
달바라기를 했다. 선녀라도 하강을 하는
것일까. 어디선가 처량한 피리소리가
들려오는 기분이었다. 어쩌면 뜰에서 우는
풀벌레 울음소리인지도 알 수 없었다. 벌써
더위와 장마로 지리한 여름이 가고 가을이
시작되고 있었다. 하늘이 이토록 맑은 것만
보아도 가을이 어디쯤 오고 있는지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밤은 영혼들의 세상인가?)
강한섭은 달빛이 교교한 하늘을 쳐다보며
깊은 생각에 잠겼다. 광주에서 돌아온 이후
부쩍 죽음에 대한 생각이 많아진
강한섭이었다. 광주에서 목격한 숱한
죽음과 피... 그리고 죽어 가는 사람들의
눈동자... 강한섭은 그 눈동자들이 무엇을
의미하는 지 알 수 없었다.
사람들은 광주에서 돌아온 강한섭에게
것 관심이 많았다. 사람들이 가장 관심을 갖고
있는 것은 광주에서 사람들이 얼마나 많이
죽었느냐는 것과 광주사태가 누구의
잘못이냐는 점이었다. 그러나 그 어느
질문에도 강한섭은 확실한 대답을 할 수
없었다. 사람들이 가장 많이 죽은 것은
5월26일 새벽의 도청이라고 할 수 있었으나
그 곳에서 얼마나 죽었는지 아무도 통계를
내지 않았던 것이다.
사람들이 또 하나 관심을 가지고 있는
것은 과연 공수부대가 젊은 여자의 가슴을
도려냈느냐 하는 것이었다. 강한섭은
그러한 질문을 받을 때마다 고개를
설래설래 흔들었다. 계엄사도 그러한
유언비어가 나돌고 있다는 담화문을 발표한
일이 있었으나 어디서도 그러한 일을
보았다는 목격자나 가슴을 난자 당한
희생자는 나타나지 않고 있었다.
소문은 그러한 것 외에도 무수하게
나돌았다. 경상도 군인들이 전라도
사람들의 씨를 말리려 한다는 소문 같은
것은 일반적인 것이었고 공수부대가
시민들과 학생들을 진압할 때 잔인하게
진압하게 하기 위해 병사들에게 술을
먹였다는 소문도 파다하게 나돌았다.
세상이 어수선하자 소문이 더욱 무성했다.
강한섭은 낮게 한숨을 내쉬었다.
광주사태는 이 나라의 앞날에 언제까지나
어두운 그늘로 자리잡고 있을 것이
분명했다.
경찰은 계속해서 시국사범들을 쫑고
있었다. 특히 광주에서 시위를 하다가
탈출한 시민과 학생들은 경찰의 수배를
피해 공장으로 숨어들기도 했고 친지를
찾아다니며 고달픈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서울의 대학생들은 간헐적으로 광주에서
일어난 일을 국민들에게 알리기 위해
유인물을 만들어 살포하기도 하고 책자를
만들어 배포하기도 했다. 그런 일을 하다가
경찰에 발각되면 체포되어 모진 고문을
받아야 하는 사실을 잘 알고 있으면서도
그들은 죽음을 각오하고 광주의 진실을
밝히려고 했다.
그러나 정권의 탄압은 극렬했다.
그들은 유인물을 살포하는 학생들을
가차없이 연행하여 무자비하게 고문하고
재판에 회부했다.
학생들은 도망 다니기에 급급했다.
시위를 하거나 유인물을 뿌리지 않았어도
과거의 학생운동을 한 경력이 있는
학생들은 무조건 연행을 당했다. 지식인과
노동자들,그리고 문인들도 과거의
경력만으로 수배를 당했다.
그들은 먼 섬으로 도피하거나 친지들의
집으로 숨었다. 강한섭의 집에도
수배자들이 찾아 왔다.
강한섭이 수배자들을 집에다 며칠씩
은신시키게 된 것은 어느 날 대학교 후배가
느닷없이 신문사로 전화를 걸어오면서
시작된 일이었다. 그는 강한섭이 다니던
대학교의 단과대 회장을 맡고 있었으나
비밀 서클을 하다가 수배되어 있었다.
그리고 그는 점 조직으로 전국의
학생조직과 연결되어 있었다.
강한섭은 그의 부탁을 받고 수배자들을
숨겨 주게 되었다. 연락은 명동 성당의 박
마르타 수녀가 맡았다.
"교회는 정의와 진실을 수호하기 위해
?존재하는 것입니다. "
강한섭이 수녀가 수배자 일에 참여하고
있는 것을 의아해 하자 박 마르타 수녀는
단호하게 대답했다. 70년대 후반부터
카톨릭은 정의구현사제단이 결성되어
박정희 대통령을 반대하는 반독재 투쟁을
벌이고 있었고 신자들도 진보적인 성향이
강했다.
"이제는 산자들이 죽은 자의 뒤를 따를
때입니다. "
박 마르타 수녀의 말에 강한섭은 고개만
주억거리고 있을 수 밖에 없었다. 그녀의
말은 종교인의 말이기에 앞서 인간의
양심을 울리는 말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강한섭은 아내에게만은
수배자들을 숨기고 있다는 말을 하지
않았다. 만약의 경우 수배자를 숨기고 있는
퓽경찰에게 발각된다고 하더라도
아내는 말려들게 하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설혹 아내가 눈치 챈다고 하더라도
막연하게 알고 있을 뿐이어서 경찰에게
혹독한 고문을 받지 않으리라고 생각했다.
강한섭은 담배를 피워 물었다. 아무래도
오늘은 더 이상 잠을 이룰 수 없을 것
같았다. 이렇게 담배를 피우다가 날이
밝으면 회사로 출근을 하리라고 생각했다.
신문사의 분위기도 점점 가파라지고
있었다. 신문사 경영진이 새로운 체재에
비판적인 기자들을 대대적으로 해직할
것이라는 소문이 흉흉하게 나돌고 있었다.
새로운 체재가 등장하면서 언론을 통폐합할
것이라는 소문이 무성해지자 새로운 체재의
눈에 벗어나지 않기 위해 경영진들이
알아서 길 것이라는 소문이 그것이었다.
만약에 그 소문이 사실이라면 강한섭도
해직될 것은 불을 보듯 뻔한 일이었다.
신문사 경영층과 불편한 관계에 있는 것은
아니었으나 기사 문제로 신문사에 상주하는
기관원들과 몇 번이나 마찰을 일으켰던
것이다. 마찰이랄 것도 없는 사소한
충돌이었으나 일부 기자들이 기관원들에게
비굴할 정도로 달라붙는데 비해 강한섭은
언제나 그들과 일정한 거리를 두고 있었다.
강한섭은 담배연기를 폐부 깊숙이
빨아들였다가 내뱉았다. 해직이 된다고
해도 두렵지는 않았다. 저축해 놓은 것은
없었으나 아내와 두 식구뿐이었으므로
시장에서 노점상을 해도 충분히 먹고 살 수
있을 것이라는 자신감이 있었다.
강한섭은 스탠드를 켜고 책상에 앉았다.
남미에서 민주화투쟁을 벌이고 있는
신부들이 주장하고 있는 해방신학에 관한
책을 번역하여 학생들에게 나누어주기로
했던 것이다.
(이 책이 그들의 손에 넘어가면 나를
공산당이라고 매도하겠지... )
남미에서는 일부 젊은 신부들이 총을
들고 군사 독재정권과 직접 싸우고 있었다.
이제는 종교가 저 높은 곳을 지향할 것이
아니라 저 낮은 곳을 향하여야 한다는 것이
그들의 지론이었다.
강한섭은 불안했다. 그러나 그들과
싸우지 않으면 안되었다. 그들은 머지않아
강한섭을 해직시키고 체재를 부정하는
불순세력으로 체포할 것이다.
새벽이 가까워지고 있는지 달빛이 점점
사위어 가고 있었다.
4
강한섭이 신문사로부터 해직을 당한 것은
그날부터 열흘이 지났을 때였다.
강한섭은 해직 통고를 받자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르는 것을 느꼈다. 사주의
조카인 임 부장이 회의실로 불러 해직
통고를 했을 때 강한섭은 마침내 올 것이
왔다는 생각과 함께 비열한 인간들이라는
말이 목구멍까지 올라오는 것을 억지로
참았다.
"강 기자가 알다시피 우리 형편이 영
좋지 않소. "
임 부장은 침통한 표정을 꾸미고 있었다.
"아직 물밑에서 작업이 이루어지고
있지만 우리 회사는 라디오를 뺏길 것이
분명하오. "
"...... "
"여차하면 신문까지 뺏길 가능성이
있는데 그렇게 되면 최악의 상태가 되는
거요. "
"...... "
"회장님께서는 신문이라도 지키려고
심로()가 이만저만이 아니오. "
강한섭은 임 부장의 설득에 대꾸하지
않고 담배를 피워 물었다. 그러나 성냥을
켜대는 손이 부르르 떨리고 있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임 부장이 강한섭의 떨리는
손을 무심히 응시면서 다시 입을 열었다.
"임시로 쉬고 있는 거라고 해도 좋소. "
"......
"시국만 풀리면 다시 같이 일할 수 있을
테니까. "
강한섭은 임 부장을 향해 담배 연기를
길게 내뿜었다. 임 부장이 얼굴을
찡그렸다가 고개를 외로 꼬았다.
"퇴직금과 해직 수당은 바로 지급이 될
거요. 그럼... "
임 부장이 서둘러 회의실을 나갔다.
회의실이라고 해야 편집국 한쪽 구석에
칸막이를 치고 책상과 의자 몇 개를 갖다가
놓은 것뿐이었다. 밖에서 임 부장의
쿨럭대는 기침소리가 들렸다. 강한섭은
피우던 담배를 재떨이에 비벼 끄고
회의실을 나왔다. 편집국 사람들이 모두
자신을 돌아다보는 것 같아 강한섭은
얼굴이 화끈거렸다.
강한섭은 사회부 책상에 앉아 있기가
껄끄러워 일단 회사를 나왔다. 어디선가
잠시 생각을 해보아야 할 것 같았다.
강한섭은 회사 뒤의 다방을 찾아가
맑앉았다.
갑자기 아내 얼굴이 생각났다.
강한섭은 다방의 공중전화로 아내에게
전화를 걸었다.
"여보세요. "
수화기에서 흘러나오는 아내의 목소리는
여전히 윤기가 흐르고 밝았다.
"나야. "
강한섭은 혼잣말을 하듯이 낮게
중얼거렸다.
"네?"
아내의 목소리가 한 옥타아브 높아졌다.
"당신 남편... "
강한섭은 속삭이듯이 중얼거렸다.
"아!"
"당신 남편 목소리도 구분 못해?"
"애걔... 착 가라앉았으니 어떻게
9알아요?"
"뭐해?"
"책 보고 있어요. "
"팔자 늘어졌군... "
"네?"
"아냐. "
"왜 전화했어요?"
"당신 목소리 듣고 싶어서... "
"거짓말!"
"사랑해. "
"무슨 일 있어요?"
아내의 목소리가 어두워졌다.
"아냐. "
"그럼?"
"당신 목소리가 듣고 싶었던 것뿐이야. "
"...... "
"정말이야. "
"당신을 사랑해요. "
아내가 노래를 부르듯이 중얼거렸다.
아내의 낮게 가라앉아 있는 목소리에
강한섭은 갑자기 목이 꽉 메였다. 아내는
무엇인가 수상한 낌새를 눈치 챈 것이
분명했다. 그러나 남편이 말을 하고 있지
않으므로 용기를 복돋워주기 위해 그런
말을 하고 있는 것이었다. 강한섭은 아내의
마음 씀씀이가 고마웠다.
커피를 마시고 다방을 나오자 해가
중천에 떠 있었다. 강한섭은 길가에
우두커니 서서 오가는 행인들을
쳐다보았다. 행인들의 걸음과 옷차림에
쓸쓸한 가을이 묻어 있었다.
강한섭은 다시 담배를 피워 물었다.
회사에 돌아가서 소지품을 챙겨 와야 했다.
소지품이라고 해야 책 몇 권과 취재수첩
정도였으나 가방이 필요했다. 그는 가방을
하나 사야겠다고 생각하면서 남대문 시장
쪽으로 천천히 걸었다. 사무실의
동료들과도 인사를 해야 했으나 쫑겨나는
것이나 마찬가지이므로 굳이 인사를 나누고
싶지는 않았다.
남대문 시장은 시국이 어수선해도 활기가
넘치고 있었다. 강한섭은 시장을
두리번거리며 돌아다니다가 검은 색 가방을
하나 샀다. 시장은 점점 사람들이 많아지고
있었다. 강한섭은 시장의 노점에서 국수를
하나 말아먹고 소주를 한 병 비웠다.
시간이 이미 정오가 지나 있었다.
(할 것이 없으면 시장에서 장사나
하지... )
강한섭은 시장 상인들의 분주한 모습에서
삶의 활기를 느꼈다. 전에는 느낄 수
없었던 활기였다.
강한섭은 살 것도 없으면서 시장을 한
바뀌 돌았다. 이제부터 시간이 한없이 남아
있다는 생각에 느릿느릿 시장 구경을 할 수
있었다. 앞으로는 시간을 보내는 일도
수월하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 때문에 조금
우울했으나 무엇인가 대책이 세워질
것이라고 생각했다.
(저 것이나 살까?)
강한섭은 여자들 속옷 가게 앞에서
걸음을 멈췄다. 결혼을 한 이후 아내에게
옷가지나 화장품 따위를 선물한 일도 없을
뿐 아니라 쑈윈도우에 진열된 내의들이
제법 고급스러워 보였다. 어쩌면 그것들이
선정적으로 보였기 때문인지도 모를
일이었다.
강한섭은 내의 가게에 들어가 내의를 한
벌 샀다. 진달래빛 핑크색의 브래지어와
팬티 세트였다.
시장에서 나오자 토오쿄 호텔 앞
횡단보도였다. 길을 잘못 든 모양이었다.
(한때 이 곳은 사창가로 유명했지... )
강한섭은 횡단보도 앞에서 토오쿄 호텔을
우울한 눈빛으로 쳐다보며 빙긋 웃었다.
군대에 가기 전에 땡기풀이를 한다고
친구들과 함께 몰려와 동정을 바친 창녀의
얼굴이 희미하게 떠올라왔다. 동정을
바쳤기 때문인지 강한섭은 이따금 그
창녀의 얼굴이 아련히 떠오르곤 했었다.
강한섭은 신호등에 파란 불이 들어오자
횡단보도를 건넜다. 그 곳엔 여전히 붉은
벽돌집이 몇 채 남아 있었다. 강한섭은
층계를 내려가 붉은 벽돌집들이 있는
골목으로 걸어갔다. 붉은 벽돌집들은
남산으로 올라가는 길보다 지대가 낮았기
때문에 길에서 층계를 내려가야 했다.
아직도 창녀들이 있는 지는 알 수
없었다. 골목엔 인적이 거의 없었다.
강한섭은 골목으로 들어가기 전에 다시
담배를 한 대 피워 물었다. 그리고 바바리
코트의 깃을 바짝 올렸다. 누군가 보고
있을까봐 두려워서가 아니라 공연히 자신을
드러내고 싶지 않았다.
"놀다 가요!"
골목을 몇 걸음 걸어 들어가지 않았을 때
청스커트를 입고 있는 아가씨가 수작을
붙여 왔다. 강한섭은 빙긋이 미소를
지었다. 아직도 창녀들이 있다는 사실이
강한섭에게 이상한 안도감이 들게 하고
있었다.
아가씨가 강한섭에게 가까이 다가왔다.
"낮거리도 하나?"
그러나 강한섭은 아가씨의 수작을 가볍게
퉁겼다.
"낮거리 하믄 어디가 덧나나요?"
아가씨가 피식 웃었다. 웃을 때 붉은
입술 사이로 하얀 덧니가 살짝 드러나고
있었다.
"마수걸이 했어?"
머리는 허리까지 내려오는 긴
생머리였다.
"안했으면 아저씨가 해줄래요?"
"그럴까?"
"서비스 잘 해드릴께요. "
"정말이야?"
"네에. "
아가씨가 재빨리 강한섭에게 다가와
팔짱을 끼며 달라붙었다. 강한섭은
못이기는 체하고 아가씨가 이끄는대로 붉은
벽돌집 계단을 올라가기 시작했다. 붉은
벽돌집은 한낮이라 그런지 물 속처럼
조용했다. 강한섭은 아가씨를 따라 3층으로
올라갔다. 아가씨의 방은 복도 끝에 있었고
겨우 두 세 사람이 누우면 알맞을 정도로
방이 좁았다.
강한섭은 방으로 들어가자 공연한 짓을
했어,하는 후회를 했다. 아가씨는 화대부터
받아서 밖으로 나갔다. 강한섭은 아가씨가
돌아올 때까지 우두커니 기다리며 창밖의
남산을 쳐다보았다. 남산도 벌써 추색이
들기 시작해 누르스름한 빛을 띠고 있었다.
(벌써 가을이 오다니... )
강한섭은 무겁게 한숨을 내쉬었다.
회사에서 해직 당하고 찾아온 곳이
사창가라는 사실에 어이가 없었다. 그러나
;아가씨의 방에 배어 있는 무수한 사내들의
들쩍지근한 정액 냄새,어쩐지 시궁창 썩는
냄새처럼 고약하기까지한 냄새가
정겹기까지 했다.
그것은 마치 어린 시절 숨바꼭질을
하다가 캄캄한 다락이나 광 속으로 숨었을
때 느닷없이 코를 찌르던 퀴퀴한 백곰팡이
냄새처럼 편안했다.
아가씨가 돌아왔다.
아가씨는 빠르게 요를 펴고는 옷을 훌훌
벗고 누웠다. 강한섭은 다리를 쩍 벌리고
누운 아가씨의 삼각분기점을 물끄러미
응시했다. 가뭄에 말라비틀어진
나무가지처럼 영양이 충분하지 않은
아가씨의 메마른 허벅지가 눈에 시렸다.
"빨리 하세요. "
아가씨가 강한섭의 시선을 무심하게
4털어내며 재촉했다. 강한섭은 그제서야
옷을 벗고 아가씨의 메마른 육신을 향해
엎드렸다.
밖으로 나오자 날씨가 잔뜩 흐려져
있었다. 강한섭은 회사를 향해 터벅터벅
걸음을 옮겼다.
미경은 최종열의 소설에서 시선을
떼었다. 소설은 마침내 강한섭이
신문사에서 해직 당하는 부분까지 전개되어
있었다. 80년 봄,서울의 봄이 끝나자 5.
18이 일어났고 5. 18이 신군부의 의도대로
진압되자 무서운 검거선풍이 불기 시작한
것도 충분히 예상하고 있던 일이었다.
이제는 무수한 피를 흘리고 대통령
만들기에 성공했으므로 그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사회 각층에 대한 대대적인 숙정이
0시작될 것이다.
제16장 사랑과 슬픔의 광시곡
1
미경은 커피를 한 잔 끓여 마신 뒤에
다시 소설 읽기를 계속했다. 최종열의
소설을 빨리 읽어야만 모든 의문이 풀릴 것
같았다. 어딘지 모르게 남편과
최종열,그리고 강한섭이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는 기분이었다. 이제는 그 비밀의 고리를
밝혀야 할 시간이 점점 가까워지고 있었다.
가을이었다. 바람이 소슬했다. 하늘은
높고 청명했다. 샛노란 은행잎은 바람이 불
때마다 하늘거리며 떨어져 보도 위에
뒹굴었다. 한경호는 시청의 창으로
덕수궁쪽 담장을 물끄러미 조망했다.
어느새 가을이 이토록 깊은 것일까. 시든
가을 햇살이 수선거리는 인도 위에서
사람들은 종종걸음을 치듯이 빠르게 걷고
있었다. 바쁜 일이 없는데도 사람들은
언제나 이맘 때면 걸음을 서둘렀다. 이제
곧 겨울이 닥치기 때문인가.
사람들의 분주한 걸음엔 다가올 겨울에
대한 혹독한 두려움이 짙게 드리워져
있었다.
정국은 꽁꽁 얼어붙어 있었다. 5월17일
비상계엄을 전국으로 확대 실시한 신군부가
김종필,이후락,김대중 등 26명을 권력형
축재와 학생선동혐의로 구속하고 곧 이어
광주사태가 발발하자 대규모의 공수부대를
투입하여 진압하는 바람에 무수한 희생자가
발생하고 정국이 한겨울처럼 얼어붙게
S되었던 것이다.
5월24일엔 대법원이 김재규에게 사형을
선고했고 5월31일엔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가 설치되어 전두환
계엄사령관이 상임위원장이 되었다.
6월5일 계엄사는 광주사태로 인해 민간인
사망자가 148명이라고 발표했다. 그러나
시중엔 희생자가 수천 명이나 된다는
소문이 파다하게 나돌았다.
6월9일엔 악성유언비어 유포 혐의로
언론인 8명을 전격적으로 구속했다.
6월17일엔 오치성,이용희 등 국회의원을
비롯한 정치인과 교수,목사,언론인 학생 등
329명을 체포했고 6월18일엔 권력형
부정축재자들로부터 853억원을
환수조치했다. 7월10일엔 2급 이상 공무원
232명을 숙정했고 7월15일엔 3급 이하
공무원 4760명을 무더기로 숙정했다.
8월4일 계엄사는 사회악사범 일소에
들어가 불량배 및 폭력배 일제 검거를
시작했다.
8월5일엔 전두환 계엄사령관이 대장으로
승진했다.
8월13일 김영삼 신민당 총재가 보안사의
강압에 의해 정계 은퇴를 선언했다.
8월16일 최규하 대통령이 하야를
발표하고 박충훈 총리서리가 대통령
권한대행이 되었다.
8월22일 전두환 육군대장이 화려한
전역식을 갖고 군 생활을 마감했다. 이날
각 신문은 이 사실을 일제히 톱기사로
보도했다.
8월27일 전두환 국보위 상임위원장이
통대 선거에서 제 11대 대통령에
당선되었고 9월1일 대통령에 취임하여
청와대에 입성했다. 9월9일 계엄사는
사회악사범 3만 7천 214명을 검거했다고
발표했다. 정국이 꽁꽁 얼어붙을 수밖에
없었다.
(이 친구는 대체 어떻게 된 거야?)
한경호는 강한섭을 생각하자 짜증이
났다. 세상이 가 파라져 있으면 몸조심을
해야하는데도 강한섭은 그렇지가 않았다.
원래부터 빈골 기질이 있기 때문인지는 알
수 없었으나 광주에 다녀온 뒤로 사람이
달라졌다는 것이 아내의 말이었다.
광주에서 공수부대가 시민들을 죽이는 것을
직접 본 후로 군인들만 보면 자신을 죽일
것 같은 생각에 불안해한다는 것이 아내의
말이었다.
공연한 피해의식이었다.
군인들이 멀쩡한 신문기자를 무엇 때문에
죽이겠는가. 광주에서 공수부대가
시민들에게 총을 쏜 것도 시민들이 대항을
했기 때문일 터였다. 시민들이 잠자코
계엄사의 포고령을 지키고 있었다면 그와
같이 엄청난 광주의 비극은 결코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었다.
한경호는 그렇게 생각했다. 모든 결과는
원인 제공자에게 있다. 강한섭이 광주에서
돌아온 이후 잘난 체하며 민주주의를
찾아도 공허한 염불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오히려 세상이 이토록 어지러울 때는 처신
잘하여 벼랑에서 굴러 떨어지지 않는 것이
현명한 처사일 거였다.
한경호는 담배를 피워 물었다. 이웃의
정리를 생각해서라면 당연히 강한섭을
구출해 주어야 했다. 그러나 강한섭이
s이쪽에 공연한 적대감을 갖고 있는 한
구출해 주는 것이 바람직한 것이라고는
생각되지 않았다.
(벌써 내 꼴도 우습게 되었어...... )
강한섭은 9월초에 해직이 되었었다.
아내에게서 그 말을 들은 한경호는
강한섭에 대한 것을 다시 조사하라고
부하들에게 지시했었다. 그 무렵 한경호는
이미 언론대책반을 만들어 서울 시청에
사무실을 하나 비우게 하고 각 신문사와
방송을 통괄하고 있었다. 전체적인 틀은
비서실장과 정보처장이 짰으나 실제로 그
일을 추진하는 것은 한경호였다.
한경호는 언론에 직접적으로 종사한 일이
한 번도 없었다. 그러나 보안사에 근무를
하면서 언론을 담당한 일이 있었다. 물론
대부분의 보안사 근무는 대공수사였고
언론을 통제하고 감시하는 일은 대구에
파견되어 있을 때 2년뿐이었다. 그러나 그
2년이 한경호에게는 수사관 시절보다 더욱
값진 것이었다.
한경호는 언론대책반의 책임을 맡자
신군부에 비판적인 기자들의 성분을
조사하는 한편 기사 제목까지 일일이
체크하고 간섭했다.
강한섭에 대한 것도 낱낱이 조사했다.
강한섭에 대한 조사는 신문기자들의 성분을
조사한 서류에 들어 있었으나 그 서류를
검토할 때 한경호의 눈에 띄어 재조사를
지시했던 것이다.
강한섭이 쓴 기사는 모조리 스크랩되어
그에게 보고되었고 강한섭의 동료들과
취재원까지 낱낱이 보고되었다.
강한섭은 비교적 평범한 기자였다.
유신시대의 기사가 다 그렇지만 기사를
가지고 강한섭의 꼬투리를 잡을 만한 것은
전혀 없었다. 그러나 기사가 온전하다고
해도 그를 제거하는 것은 얼마던지
가능했다. 한경호는 자신의 손에 강한섭의
목숨이 달려 있다고 생각하자 기묘하고
야릇한 쾌감이 느껴졌다. 그러나 강한섭을
해직하라거나 그를 구속하라는 명령은
내리지 않았다.
강한섭이 신문사로부터 해직을 당한 것은
한경호로서도 뜻밖이었다. 한경호가
책임자로 있는 언론대책반에서 통고한
해직기자 명단에는 분명히 강한섭이 들어
있지 않았었다. 그러나 신문사로부터 온
해직기자 명단에는 강한섭의 이름이
선명하게 찍혀 있었다.
(이게 어떻게 된 거야...... ?)
? 한경호는 그 서류를 한참동안이나
들여다보았다. 그러나 신문사 자체에서 한
일을 꼬투리잡고 싶지는 않았다. 강한섭이
신문사에서 필요 없는 사람이라면 그것으로
그만이었다. 게다가 한경호가 강한섭의
이웃에 살고 있기는 해도 흉금을 털어놓을
정도로 친한 사이도 아니었다.
"앞 집 신랑이 신문사에서 쫑겨났대요. "
그날 저녁 집에 퇴근하자 아내가 무슨
비밀이라도 말하듯이 그의 귓가에 입술을
갖다대고 속삭였다.
"왜?"
한경호는 건성으로 의아해 하는 체했다.
"부인은 보안사 탓이래요. "
"뭐?"
"보안사 사령관이 정권을 잡느라고
애꿎은 사람들을 마구 때려잡고 있대요. "
아내의 말은 어쩐지 가시가 돋혀 있는
기분이었다.
"미쳤군. "
한경호는 어처구니가 없었다. 강한섭의
젊은 부인이 맹랑하기 짝이 없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신문사 자체에서
강한섭을 해직했다고 말할 수는 없었다.
"신문사 기자들이 대량으로 쫑겨
났다면서요?"
"그치들은 다 사이비야...... "
"사이비요?"
"남의 등이나 치고 엉터리 기사나
보도하고...... 그래서 새로운 시대를 맞아
과감하게 일소하는 거야. "
"그럼 앞 집 남자도 사이비예요?"
"그거야 내가 알 수 있나. "
한경호는 재빨리 발뺌을 했다. 얘기가
엉뚱한 방향으로 흐르고 있었다.
"당신도 보안사에 근무하잖아요?"
"보안사에 근무한다고 다 아는 것은
아니야. "
"당신이 좀 도와주면 안돼요?"
"내가?"
한경호는 아내의 말에 깜짝 놀랐다.
아내로부터 그런 말을 들으리라고는
생각조차 못했었다.
"앞 집 부인이 임신했어요. "
"임신?결혼한 지는 꽤 되었을 텐데 왜
이제 임신을 했지?"
"운동을 심하게 해서 임신을 못하는지
알았대요. "
"운동을 심하게 하면 임신을 못하나?"
"누가 그러더래요. "
"별일이군...... "
한경호는 나직하게 뇌까렸다.
"임신까지 했는데 신문사를 쫑겨났으니
어떻게 먹고 살아요?"
아내가 안타까운 표정으로 말했다.
한경호는 아내의 잔뜩 부른 배를
응시하다가 신문기자의 부인은 과연
신문기자의 아이를 임신했을까 하는 의문에
잠겼다. 신문기자의 부인이라고 해서 다른
사내를 만나지 말라는 법이 없으므로 다른
사내의 씨를 잉태하지 말라는 법도 없는
것이다.
"명색이 대학교를 나왔는데 어떻게든
먹고 살겠지...... "
한경호는 딴청을 부렸다. 신문사에서
해직되었다고 해서 다른 직장을 갖지
말라는 지시를 내린 일은 없는 것이다.
한경호가 책임자로 있는 언론대책반에서 각
신문사나 방송국에 보낸 지시에는 반체재
기자,체재비판적인 기자,검열거부
기자,제작거부 기자와 부정부패 등 비위
언론인,사회적 지탄을 받은 언론인을
해직하라는 지시만 있었지 다른 직장에의
취업은 일절 언급이 없었던 것이다.
"그래도 신문사만 하겠어요?"
"남의 일에 간섭하지 마. "
한경호는 아내가 자꾸 강한섭의 복직을
요구하는 것을 단호하게 거절했던 것이다.
그리고는 한동안 잠잠했다. 한경호도
강한섭의 일은 까맣게 잊고 언론기본법
제정에만 몰두했다. 언론기본법은 허문도
비서실장이 적극적으로 추진하여
이루어지고 있었고 한경호는 보안사 언론
대책을 총괄하고 있었다. 물론 모든 기본
틀은 허문도 비서실장을 비롯한 보안사의
참모들이 만들고 있었다.
그런데 신문사에서 해직 당한 강한섭이
새로운 직장을 찾아다니는 것이 아니라
시국수배자들과 어울려 체재를 비판하고
다닌다는 소문이 파다하게 나돌고 있었다.
수배자들이 그의 집에서 며칠씩 숨어
있기도 하고 외신기자들에게 광주사태의
사진을 제공했다는 정보도 들어왔다. 특히
군부와 보안사의 언론정책을 신랄하게
비난한다는 정보가 계속해서 들어왔다.
(이 자식이 아직도 정신을 못
차렸어...... )
한경호는 그 정보를 받자 피가 역류하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보안사의 언론대책에
골간이 되는 것의 하나가 투철한
국가관이었다. 그런데 명색이 신문기자
출신이라는 강한섭이 외국 기자들에게
국가의 위신을 실추시키는 짓을 했다는
사실에 분개하지 않을 수 없었다. 게다가
보안사의 언론정책 비난은 한경호 자신을
비난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그 정보를 받았는데도 불구하고
한경호는 곧 바로 손을 쓰지 않았다.
강한섭이 바로 앞 집에 살고 있다는 사실과
그의 부인의 얼굴이 떠올라 선뜻 구속
명령을 내릴 수 없었던 것이다.
"강 기자는 알고 봤더니 바로 한 실장님
앞 집에 살더군요. "
강한섭이 시국수배자를 숨기고 있다는
정보를 제공한 사람은
경성신문()의 편집국장
조장환()이었다. 전두환
보안사령관이 집권 의지를 처음으로
공개적으로 시사했을 때 제일 먼저
)떠오르는 영도자 운운하는 사설()을
내서 세간을 놀라게 하고 신군부로부터
대대적인 환영을 받았던 사람이었다.
"그렇습니까?"
한경호는 모르는 체 시침을 뗐다.
"전혀 모르셨습니까?"
조장환이 오히려 놀란 표정을 지었다.
"몰랐습니다. 전 서울로 이사를 온지
얼마 되지도 않고 하는 일이 국가 기밀이라
사람을 사귀지 않습니다. "
"그러셨군요. "
조장환이 고개를 끄덕거리는 체했다.
"그럼 조치를 취하셔야겠군요. 단순한
체재비판자도 아니고 시국사범을 은닉까지
하고 있으니 우리 사회의 암적 존재입니다.
"
조장환은 집요하게 한경호를 물고
늘어졌다. 그는 신군부의 실세인 양
행동하고 있었다. 내가 이만큼 정보를
제공했으니 빨리 부하들에게 명령하여
강한섭을 체포하라는 암시였다.
"밑에서 조처하겠지요. "
한경호는 일단 조장환을 돌려보냈다.
그리고 조장환이 돌아간 뒤에 골똘히
생각에 잠겼다. 전두환 보안사령관이
군부의 실세라는 인식이 널리 알려지면서
사회 각계에서 전두환 보안사령관에게 선을
대려는 사람들이 줄을 잇고 있었다. 그것은
언론계도 예외는 아니어서 5월 이후
국보위를 적극적으로 홍보하는가 하면
신군부의 대변지 노릇을 하는 신문까지
있을 정도였다. 언론사의 중견 간부들은
틈틈이 한경호의 언론대책반을 찾아와
신문사 내의 체재 비판이 강한 기자들의
못박명단을 슬그머니 흘리는가 하면 노골적으로
국가관이 없는 기자들이라고 제거해야
한다며 입에 거품을 물기까지 하였다.
한경호는 그런 기자들에게 환멸을
느꼈다. 신군부는 자신들이 하는 일을
국가적 사명으로 생각했고 신군부에
대항하려는 각계각층의 사람들은 국가관이
없는 사람들이라고 매도했다.
"앞 집 남자 요지음 뭘해?"
그날 밤 퇴근하자 한경호는 아내에게
넌지시 물었다. 밤 11시 경이었다.
한경호는 거실에서 아내가 끓여온 커피를
천천히 마셨다.
"모르겠어요. "
"부인 안 만나?"
"네. "
"찾아오는 사람들이 많은가?"
"아뇨. 어쩌다 친척들이 찾아오곤 할뿐
조용해요. "
"그 친구 조심해야 할거야. "
"왜요?"
"경찰이 곧 체포할 모양이더군...... "
"네?"
아내가 깜짝 놀란 눈으로 한경호를
쳐다보았다. 한경호는 잔뜩 부른 배를
받치느라고 허리에 손을 얹고 서 있는
아내를 힐끗 쳐다보았다.
"무슨 일 있어요?"
"자세히는 모르겠어. "
한경호는 아내의 얼굴을 외면했다.
바람이 이는지 뜰의 나무가지들이 우수수
몸을 떠는 소리가 스산하게 들려왔다.
"나쁜 짓 했어요?"
"몰라. "
한경호는 골목을 쓸고 지나가는
바람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11월이었다.
전두환 보안사령관이 대통령에 취임한 지
2개월이 되었고 대학교의 휴교령도
해제되어 있었다. 그러나 대학생들은 꽁꽁
얼어붙어서 시위를 하지 못했다.
광주사태의 엄청난 충격에서 헤어나지 못한
탓도 있었으나 시위를 주도할만한 지도부는
모조리 체포되거나 수배 중에 있었다.
게다가 사회정화의 무서운 바람이 태풍처럼
휘몰아치고 있었다.
"나쁜 짓 할 사람이 아닌 것
같은데...... "
아내가 한경호의 옆에 와 앉으며 말 끝을
흐렸다. 아내의 몸에서 벌써 젖냄새가
희미하게 풍기고 있었다.
"수배자들이 그 집을 드나들고 있대. "
"수배자들이요?"
"수배자를 숨기면 공산당이나
마찬가지야...... "
"설마...... "
"그러니까 그 집을 가까이하지 마. "
한경호의 말에 아내가 입을 다물었다.
한경호는 옆에 앉은 아내의 둥그스름한
배에 손을 얹었다. 아내는 무슨 생각을
하는지 허공을 우두커니 쳐다보고 있었다.
"이봐. "
"네?"
아내가 깜짝 놀라서 한경호를
쳐다보았다.
"앞 집에 그런 소리는 하지 마. "
"네. "
아내가 근심스러운 표정으로 대답했다.
"그리고 앞 집 여자와 가까이 지내지도
뺑..... "
"왜요?"
"괜히 쓸데없는 오해를 받아. "
"알았어요. "
아내가 길게 하품을 했다. 만삭이
가까워지면서 조금만 움직여도 피로한
모양이었다.
"먼저 자...... "
"네. "
아내가 고개를 끄덕거리고 소파에서
일어나 1층으로 걸어 내려갔다. 한경호는
허리를 받치고 힘겹게 계단을 내려가는
아내의 뒷모습을 응시하다가 커피 잔을
들고 창가로 걸어갔다.
달이 둥글게 떠오른 것이 언제쯤일까.
한경호는 커피를 마시며 신비스러운
광망을 뿌리고 있는 둥근 달을 쳐다보았다.
정치판은 정신없이 바쁘게 돌아가고
있었다. 벌써 지난 5월에 설치되어 전두환
보안사령관을 대통령으로 만든 국보위가
해체되고 입법회의()가 설치되어
제5공화국 헌법을 만들고 있었다. 전두환
대통령은 통일주체 대의원 선거로 대통령이
되었으나 제5공화국 헌법이 만들어지면
다시 대통령에 출마할 예정이었다.
이제는 군인으로서 국가를 통치하는 것이
아니라 정치인으로 국가를 통치하게 되는
것이다.
권정달 정보처장은 그를 위해 정당을
만들 준비를 하고 있었다. 새로운 정당을
조직하는 것은 권정달 정보처장에게
일임되어 있었으나 민간인들도 다수 참여할
예정이었다.
언론대책반에서 하는 일만 마무리되면
한경호도 새로운 정당에 참여해야 했다.
비서실장과 정보처장의 신임이 두터울 뿐
아니라 대통령도 한경호를 신뢰하고 있어서
정당에 참여하는 것은 그다지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그러나 언론대책반의 일이
마무리되지 않으면 한경호는 새로 탄생하는
정당에 참여할 수 없게 되는 것이다.
한경호는 달빛이 사금파리 조각처럼
하얗게 깔려 있는 주택가 골목을
내려다보았다. 신군부가 주도하는 정당이
창당되기 전에 언론기본법을 매듭지어야
했다. 아니 언론기본법 뿐이 아니었다.
언론통폐합도 하루빨리 매듭을 지어야
했다.
(저 놈이 이제 오는군...... )
한경호는 골목을 내려다보다가 얼굴을
찡그렸다. 강한섭이 낯선 사내와 함께 술에
비틀거리며 골목으로 들어와 자기
집의 벨을 누르고 있었다. 같이 온 사내는
보나마나 시국사건 수배자일 것이었다.
아내의 말을 들어보면 강한섭이나 그의
아내는 왕래하는 친척이 거의 없다고
하였다. 그렇다고 보면 신문기자 놈과 같이
온 놈은 시국사건 수배자라고 보아야 하는
것이다.
이내 철문이 덜컹하고 열리고 강한섭의
아내 채은숙이 잠옷 바람으로 나오다가
화들짝 놀라서 다시 안으로 들어가는 것이
보였다.
2
한밤중이었다. 바람은 윙윙거리며
음산하게 불고 있었다. 강한섭은 꿈자리가
뒤숭숭하여 선잠을 잤다. 눈을 감으면
밤새도록 저벅거리는 군화소리와
애국가,군중들의 목쉰 함성소리가 귓전을
이명처럼 울리고 등줄기를 식은땀으로
축축하게 했다.
"왜 그래요?"
강한섭이 침대에서 엎치락뒤치락하자
아내가 눈을 뜨고 졸리운 목소리로 물었다.
"잠이 오지 않아... "
"하루 이틀도 아니고 왜 맨날 잠을 안
자요?"
아내가 잠에 취한 목소리로 짜증을
부렸다.
"잠이 오지 않는 것을 어떻게 해?"
강한섭은 볼멘 목소리로 말했다.
신문사에서 해직을 당한 후에 잠이 더욱
없어진 것은 아무래도 낮잠을 자게 된 탓일
탓눼 매일 아침 허둥지둥 출근을 하다가
갑자기 출근을 하지 않게 되자 아침
늦게까지 잠을 잤고 낮에도 하는 일이 없어
빈둥거리며 책이나 뒤적거리다 보면 저절로
눈이 감겨 또 다시 잠을 자게 되는 것이다.
그러다 보니 거꾸로 밤에는 잠을 자지 않게
되는 것이다. 처음엔 신문사에 출근을 하지
않는다는 사실이 믿어지지 않기도 했고
도무지 실감이 되지 않았으나 막상 출근
시간에 맞춰 눈이 떠지자 난감했다.
강한섭은 매일 아침 겸 점심을
늦으막하게 먹고 어슬렁어슬렁 집을 나와
공원을 돌아다니기도 했고 낡은 영화 2편을
동시 상영하는 3류 영화관에서 시간을
보내기도 했다. 그러나 그것도 한계가
있었다. 강한섭은 매일 같이 집에서
빈둥거리며 시간을 보냈다. 책을 읽어도
눈에 들어오지 않고 밤이면 옛 친구들을
찾아다니며 술을 마셨으나 그것도 여의치
않았다.
일 자리를 알아보기도 했으나 강한섭이
다닐 만한 직장도 마땅치 않았다.
"걱정하지 말아요. "
아내는 강한섭이 불안해하자 미소를
머금고 위로를 했다.
"아무려면 우리 두 식구 먹고 살지
못하겠어요?"
"그렇기야 하겠지... 허지만 내가 빨리
취직이 되어야 해. 저축한 것이 있는 것도
아니니까... "
"당신이 안되면 내가 직장에 나갈께요. "
"당신이?"
한경호는 어이가 없었다.
"요지음엔 여자들도 공장에 많이 나가요.
"
"그럴 필요까지는 없어... "
강한섭은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강한섭의 말대로 저축한 돈이 있는 실정도
아니었다. 퇴직금을 받은 것이 약간
있었으나 그것도 몇 달만 지나면 바닥이 날
것은 불을 보듯 뻔한 일이었다. 그러나
아내에게 돈을 벌어 오라고 하기는 싫었다.
"같이 채소장사를 하던지... "
아내가 쿡쿡거리고 웃었다.
"겨울이나 지내고... 그러니 겨울이나
마음 편하게 쉬어요. "
아내는 강한섭이 신문사를 그만 두자
더욱 자상해 졌다. 술 때문에 몸이 많이
상했으니 보약을 먹어야 한다며 친정인
충주에 내려가 한약까지 지어다가 먹였다.
"긴긴 겨울을 무얼 하고 지내나?"
강한섭은 웃음이 비어져 나왔다.
"사랑이나 하고 지내지요. "
"흐흥!"
"내 일이나 거들며... "
"당신 일이 뭐가 있다고... ?"
"빨래도 하고 그러죠. "
강한섭은 실소를 했다. 아내의 말마따나
빨래를 거들어 준다고 해도 두 식구뿐이라
빨래거리도 거의 없었다.
강한섭은 수배자들이나 해직 당한 동료
기자들을 찾아다니기 시작했다. 처음엔
단순하게 위로 받고 위로하기 위해 그들을
만났으나 차츰차츰 그들을 만나서
시국토론도 하고 변혁 운동도 하게 되었다.
변혁 운동이라고 해야 광주사태의 실상을
알리는 유인물을 만들어 배포한다던가
수배자들을 도피시키는 일이 고작이었다.
그들을 만날 때 외에는 집에서
두문불출했다. 변혁 운동을 하는 사람들도
검거선풍이 휘몰아치자 잔뜩 움츠러들어
있었다.
강한섭도 달팽이처럼 잔뜩 몸을
움츠렸다. 그것이 강한섭이 신문사에서
해직을 당한 후 되풀이되는 일과였다.
강한섭은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어디 가요?"
아내가 몸을 반쯤 일으키며 물었다.
"서재나 가 볼래. "
"난 그냥 잘께요. "
아내가 길게 하품을 하며 시트를
뒤집어썼다.
"그래"
강한섭은 나이트 가운을 걸치고 침실을
나왔다.
` 거실은 약간 썰렁했다. 기름을 아끼기
위해 스팀이 침실과 주방,그리고 2층의
서재에만 들어가게 했기 때문이었다.
강한섭은 서재의 책상에 앉아 스탠드를
켰다. 시간이 얼마나 되었을까. 골목에
휘몰아치는 바람소리 외에는 사방이
적요했다. 강한섭은 책 한 권을 꺼냈다.
전환시대의 윤리라는 책이었다. 그러나
책이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강한섭은 창으로 골목을 응시했다.
골목엔 어둠이 서리서리 깔린 채
휴지조각이 바람에 쓸려 다니고 있었다.
그때 찻소리가 희미하게 들려왔다.
찻소리는 점점 가까워지더니 강한섭의 집
앞에 멎었다. 검은 승용차였다.
(앞 집 사내인가?)
강한섭은 책상에서 일어나 창으로 바짝
0다가갔다. 승용차에서 두 사내가 내리고
있었다. 한 사내는 잠바를 입고 있었고 또
한 사내는 파커를 입고 있었다. 그러나
어둠 때문에 무슨 색의 옷인지는 알 수
없었다.
(어?)
강한섭은 깜짝 놀랐다. 사내들이 앞 집을
향하는 것이 아니라 강한섭의 집으로 와
벨을 누르고 있었다. 대문에 달아놓은
차임벨이 2층 서재까지 딩동댕하고 울렸다.
강한섭은 그 소리에 공연히 가슴이 뛰었다.
(누구지... ?)
강한섭은 대문을 향해 서둘러 뛰어
내려갔다. 벨이 계속해서 울리고 있었다.
"누구요?"
강한섭은 대문 앞에서 소리를 질렀다.
차가운 밤 기온이 옷깃을 파고들어 몸이
부르르 떨렸다.
"문 좀 열어요. "
사내의 목소리는 위압적이었다.
"누군지 알아야 문을 열 것이 아니오. "
"서()에서 나왔으니 빨리 열어!"
"서요?"
"경찰서 말이야!"
사내가 신경질적으로 소리를 질렀다.
강한섭은 그 소리에 가슴이 철렁하고
내려앉는 것을 느꼈다. 강한섭은 떨리는
손으로 대문을 열었다. 그러자 몸집이
커다란 사내가 불쑥 들어왔다.
"강한섭씨 맞소?"
백곰처럼 덩치가 큰 사내가 손전등으로
강한섭의 얼굴을 비쳤다. 강한섭은 재빨리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강렬한 불빛 때문에
눈이 부셨다.
"예. "
"손 내밀어!"
"예?"
"손 내밀라구!"
강한섭은 얼떨결에 사내를 향해 오른
손을 내밀었다. 그러자 사내가 강한섭의 왼
손을 잡아 당겨 오른 손과 나란히 한 뒤
철커덕 수갑을 채웠다.
강철의 수갑은 차디찼다. 강한섭은
수갑의 차가운 기운이 뼛속까지 스며드는
기분이었다.
"아니 이게 무슨 일입니까?"
강한섭은 손목을 압박하는 강철의
차가움에 깜짝 놀랐다.
"무슨 일로 저를 체포하는 것입니까?"
"알 필요 없어. "
"예?"
"야!수색해!"
강한섭의 손목에 수갑을 채운 거구의
사내가 뒤를 돌아보고 소리를 질렀다.
"예!"
거구의 사내 뒤에 서 있던 젊은 사내들이
일제히 대답했다. 어느 사이에 몰려왔는지
우락부락한 사내들은 5,6명이나 되었다.
"빨리 해!"
"예!"
사내들이 강한섭을 밀치고 현관으로 뛰어
들어갔다. 강한섭은 망연자실했다. 거구의
사내는 오만한 표정으로 강한섭을
흘겨보고는 담배를 꺼내 물었다. 그리고는
성냥을 켜서 불을 붙인 뒤에 담배 연기를
강한섭을 향해 내뿜었다.
강한섭은 고개를 흔들었다.
거구의 사내가 피식 웃으며 강한섭을
거실로 떠밀었다. 강한섭은 그에게 등을
떠밀려 거실로 들어갔다.
"왜,왜들 이러세요?"
강한섭이 현관으로 들어가자 아내가
나이트가운만 겨우 걸치고 오들오들 떨고
있었고 사내들은 구두를 신은 채 방마다
마구 돌아다니며 샅샅이 뒤지고 있었다.
강한섭은 비로소 사내들이 시국사범 전문
수사관들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거실엔
이미 불이 환하게 켜져 있었다.
"여보!"
아내가 강한섭을 보고 눈물을
글썽거렸다.
"괜찮아. 별일 없을 거야... "
강한섭은 억지로 미소를 지었다.
"당신이 무슨 죄를 지었기에... "
아내의 얼굴로 눈물이 주르르
흘러내렸다.
"괜찮다니까... "
강한섭은 어금니를 꽉 깨물었다.
시국사범으로 체포되면 어떤 고초를
당하리라는 것은 강한섭도 자세히 알고
있었다. 그러나 아내에게 나약한 모습을
보이고 싶지는 않았다.
"옷이나 가져와!"
강한섭은 아내에게 낮게 말하였다.
아내가 사내들의 눈치를 보다가 재빨리
옷을 가져왔다. 강한섭은 아내의 도움을
받으며 옷을 입었다. 그러나 상의를 걸칠
때는 수갑을 잠깐 동안이나마 풀어야 했다.
거구의 사내가 아무 말없이 수갑을 풀어
주었다가 다시 채웠다. 사내들은 그 동안
흙 묻은 구둣발로 집안을 마구 돌아다니며
수색을 했다.
(너희들이 아무리 수색해도 영혼마차는
찾지 못할 거야... )
강한섭은 사내들이 수색을 마칠 때까지
잠자코 기다렸다. 영혼마차는 광주사태
사진과 함께 뒤 안의 장독대 빈 항아리에
들어 있었다. 아내는 내일 아침이면
그것들을 모두 앞 마당의 벗나무 밑에
구덩이를 파고 숨길 것이었다.
강한섭이 자신에게 무슨 일이 생기면 뒤
안에 있는 항아리의 물건들을 벗나무 밑에
파묻으라고 시켰던 것이다.
"이따위 책들이나 보고... 이 새끼
빨갱이네. "
서재에서 책을 한 박스 담아 가지고
내려온 사내 하나가 강한섭에게 눈을
흘겼다. 강한섭은 그 사내의 눈빛이 싫어
외면했다. 그 사내는 체격이 작고
염입고 있었다.
"왜 듣기 싫어?"
"...... "
"아니 이 새끼가 말이 말 같지 않나?"
사내가 박스를 내려놓고 팔꿈치로
강한섭의 옆구리를 쳤다. 강한섭은 얼굴을
찌푸렸다. 옆구리가 시큰했으나 아내
앞이라 내색하지 않았다.
"그 책은 왜 가져가요?"
그때 아내가 가죽잠바의 사내에게
날카롭게 소리를 질렀다.
"이거?"
사내가 아내를 째려보았다.
"그래요!"
"왜 가져가는 지 알 필요 없어!빨갱이
주제에... !"
"누가 빨갱이예요?"
"아니 이게 어디서 악을 쓰고 지랄이야?"
"당신들 뭐예요?당신들 형사예요?"
"그런 건 알아서 뭘해?"
"당신들이 형사들이라면 성실하게
대답하세요. 한밤중에 죄없는 시민의 집을
침입해서 소란을 피우고... 남편을
이유없이 체포하고... 그렇다고 정체를
밝히지도 않았잖아요!"
"그래서?"
"당신들이 형사라면 신분증을 보여
주세요!"
"신분증?"
"형사들이 이런 짓을 할 수 있어요?"
"우리는 빨갱이 잡는 경찰이야!"
"신분증 보여 줘요!"
"이 년이!"
그때 가죽잠바를 입은 사내가 아내의
느세차게 후려쳤다. 그러자 아내가
외마디 비명을 지르며 얼굴을 감싸쥐었다.
"이것 봐요!"
강한섭은 가죽잠바를 향해 소리를 버럭
질렀다.
"뭐야?"
"왜 여자를 때리는 거요?"
"아쭈!이것들이 작당을 해서 덤벼드네!"
"부창부수()지... "
가죽잠바를 입은 사내의 말에 다른
사내들이 일제히 웃었다.
"더구나 남편이 있는 부인이란 말이오!"
"시끄러워!"
"이 새끼가 지금 제 정신인가?"
"이거 뜨끔한 맛을 좀 보여줘야겠군. "
"그래 맛뵈기로 좀 보여줘!"
그 말이 끝나기가 바쁘게 사내들이
강한섭에게 우르르 달려들어 마구 발길질을
하고 주먹질을 하기 시작했다. 강한섭은
수갑에 묶인 채 사내들에게 흠씬 두들겨
맞았다. 그러나 미처 고통을 느낄 겨를이
없었다. 사내들이 강한섭에게 주먹질과
발길질을 해대자 그의 아내가 울음을
터뜨렸고 강한섭은 아내에게 나약한 모습을
보이지 않기 위해 입술을 깨물며 신음을
안으로 삼켰던 것이다.
강한섭이 집에서 끌려 나온 것은 새벽
3시가 지났을 때였다. 강한섭은 검은
승용차에 태워져 어디론가 끌려갔다.
그러나 한밤중이라 어디로 끌려가는지 전혀
알 수가 없었다. 사내들에게 얻어맞은
입술에서는 피가 흘렀고 온 몸이 욱씬욱씬
쑤셨다.
그러나 온 몸이 쑤시는 통증보다 앞 날에
대한 근심이 강한섭을 더욱 두렵게 했다.
승용차는 전속력으로 달리고 있었다.
사내들은 차 안에서 한가하게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이따금 저희들끼리 술집
여자 얘기를 하며 낄낄대고 웃기도 했고
거물을 하나 잡아야 할텐데 하면서 마땅한
놈이 없느냐고 강한섭의 옆구리를 찌르기도
했다.
승용차는 15분 정도 달려서 어느 허름한
골목에 이르렀다. 붉은 벽돌집이었다.
왜정시대에 창고로 지은 건물인 듯 높게
매달린 창문이 손바닥만 했고 담장이 제법
높았다.
승용차가 크락숀을 두 번 울리자 그게
신호라도 되는 듯이 육중한 철문이 열렸다.
"자네들 둘은 이 자식을 지하실에
처넣어. "
강한섭이 차에서 내리자 우두머리로
보이는 거구의 사내가 다른 사내들에게
내뱉았다.
"예. "
강한섭에게 팔짱을 낀 사내와 또 한
사내가 허리를 굽신하며 대답했다.
"그리고 짤짤이네로 와. 모처럼 한 잔
걸직하게 푸자구... "
"예. "
두 사내가 다시 대답을 하자 다른
사내들은 정문을 나가는 우두머리로 보이는
거구의 사내 뒤를 따라 걸었다. 강한섭은
두 사내에게 끌려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건물 출입문 안에는 사복을 입은
우락부락한 사내가 경비실에 앉아 있었다.
건물 출입문도 육중한 철문이었다.
"뭐야?"
우락부락한 사내가 사내들에게 물었다.
"손님이야. "
강한섭의 팔짱을 낀 사내가 대수롭지
않다는 듯이 대꾸했다.
출입문 안으로 들어서자 곧바로 길게
복도가 이어져 있었고 복도는 덩그라니
비어 있었다. 강한섭은 사내들에게 이끌려
복도를 걷기 시작했다. 복도가 길어서
구두발자국 소리가 공기를 진동했다.
"아직도 열었을라나?"
"안 열었으면 깨우지. "
"그런데 짤짤이가 뭐야?"
"몰라. 공주옥 주인 여자 별명이
짤짤이래... "
"공주옥은 어디야?"
"역전 뒤야. 아직 한 번도 안 가봤어?"
"난 여기 온 지 며칠밖에 안되었어.
"서울역이나 청량리는 가봤지만 여긴
처음이야. "
"여기는 휴가병열차가 있어. "
"휴가병열차?"
"휴가를 나온 장병들이 대개가 모두
여기서 열차를 타고 부대로 돌아가. "
"그건 청량리도 있는 모양이던데... "
"그래서 거기도 사창가가 발달했어. "
"하긴... "
한 사내가 낮게 웃었다. 강한섭은
사내들의 얘기를 들으며 자신이 끌려온
장소를 짐작해 보았다. 그러나 막연히
청량리가 아니라는 것만 짐작될 뿐
어디인지 알 수가 없었다.
"여기 사람들이 단골인가?"
강한섭의 팔짱을 낀 사내가 다시 물었다.
"응. 주인 여자가 백곰의 작은 마누라야.
"
"어떻게 술집 여자를 작은 마누라로
데리고 살지?"
"술집 여자가 어때서?나도 그런 여자나
하나 있음 좋겠다. 철따라 양복 사주고
용돈 주지... 여자들 새로 오면 제일 먼저
상납하지... 백곰은 이 짓 그만 두면 그
여자와 계집 장사나 한댔어. 경기가 좋거나
나쁘거나 변함없이 잘되는 게 계집
장사라는 거야... "
강한섭은 습기찬 복도의 끝에서 지하실로
끌려 내려갔다. 지하실도 방이 여러 개
있었다. 강한섭은 그 중의 가운데 방으로
끌려 들어갔다. 한 평 남짓되는 작은
방이었다. 그래도 한쪽 구석에는 들마루가
하나 놓여 있었다. 침대 대용으로 쓰이는
마루인 모양이었다. 마루의 벽쪽에 퀴퀴한
백곰팡이 냄새가 풍기는 이불도 있었다.
"쉬어. "
팔짱을 끼었던 사내가 강한섭을
들마루쪽으로 떠밀었다. 사내는 이미
강한섭 따위는 안중에도 없는 모양이었다.
강한섭은 들마루에 걸터앉았다. 지하실의
천정엔 희끄므레한 알전구가 하나 달려
있어 실내를 창백하게 했다.
사내들이 철문을 쾅 닫고 밖으로 나갔다.
강한섭은 사내들이 좁은 방을 나가자
비로소 깊은 숨을 내쉬었다. 마침내 경찰에
체포되었다는 생각이 덮쳐 오면서 가슴이
묵직해 왔다. 집에서 울고 있던 아내의
얼굴이 눈 앞에 어른거리고 앞으로 언제
나갈지 알 수 없다는 절망감이 엄습해
왔다.
(이것은 고통이 아니야... )
강한섭은 주먹을 움켜쥐었다. 이것을
고통이라고 할 수는 없다. 이왕 이렇게 된
것 비겁자는 되지 말아야 한다. 광주에서
돌아온 이후 그의 집에 숨겨 주었던
수배자들,경찰의 가혹한 고문이 계속되면
그들의 이름을 털어놓게 될지도 모른다.
그러나 내가 죽는 일이 있어도 그들의
이름을 자백해서는 안된다. 이제는 투사가
되어야 한다. 강철처럼 단단해 져야
한다...
강한섭은 마음 속에 굳게 결심을 했다.
강한섭은 사방을 휘둘러보았다. 갑자기
담배가 피우고 싶어졌다. 그러나 경황없이
끌려 왔기 때문에 담배를 챙기지 못했었다.
강한섭은 담배를 챙기지 못한 것을
후회하며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었다.
그때 주머니에 담배와 라이터가
만져졌다. 아내가 옷을 입혀 주며 어느
사이에 챙겨 넣은 모양이었다.
(아내가 생각이 깊군... )
강한섭은 아내의 얼굴을 생각하자
눈시울이 시큰해 왔다. 경찰에
체포되리라는 예상은 전혀 하지 못했었다.
변혁 운동을 한다고 운동가들과 어울리고
수배자들을 숨겨 주기는 했으나 경찰에
체포될 정도로 뚜렷한 활동을 한 일이
없었다. 그러므로 막연하기는 하지만
자신은 안전하리라 생각했던 것이다.
강한섭은 천천히 담배를 피우기
시작했다. 경찰이 돌아오면 담배를
뺏길지도 모르므로 담배와 라이터를 들마루
밑에 숨겼다.
(이제 어떻게 되는 것일까... ?)
조사를 받고 취조를 당하는 것은 당연한
수순()일 것이었다. 그러나 취조가
어떤 형태일지는 알 수 없는 노릇이었다.
강한섭은 담배를 다 피우고 들마루 위에
누웠다. 붉은 벽돌에서 풍기는 이상한 냄새
때문에 좀처럼 잠을 이룰 수 없었다. 아니
자신의 앞날과 울고 있는 아내의 얼굴이
자꾸 떠올라 한숨만 나왔다. 강한섭을 끌고
온 사내들은 지금쯤 공주옥이라는 술집에서
여자들을 끌어안고 술을 마시고 있을
터였다.
강한섭은 문득 신문사에서 해직되었던
날이 생각났다. 강한섭은 그날 가방을 사러
남대문 시장에 갔다가 그 근처에 있는
사창가를 찾아 갔었다.
여자가 그리웠기 때문이 아니었다.
무엇인가 알 수 없는 힘이 강한섭을
사창가로 이끌었었다. 사창가에서 풍기는
시궁창 썩는 냄새와 허공에 떠돌고 있는
뭇사내들이 배설한 들큼한 정액 냄새
탓인지 알 수 없었다.
아니 그 곳에는 기묘한 편안함이 있었다.
여자는 함부로 다리를 벌린 채 국부를
드러내놓고 있었다. 땟물이 꼬질꼬질 묻어
있는 커텐 사이로 틈입한 햇살 한 자락이
이상한 무늬를 그리고 있는 그 국부
주위에는,갈라진 시멘트 바닥에서 돋아난
풀처럼 생기없는 방초가 듬성듬성 돋아
있었다.
척박한 땅이었다.
강한섭은 빈혈에 걸린 듯 척박한 땅에서
자란 그 풀들을 보고 가슴이 떨리는 듯한
감동을 느꼈었다.
강한섭이 그날 왜 그런 감동을
느꼈는지는 전혀 알 수 없었다. 그러나
5나중에 그녀의 국부에 듬성듬성 돋아 있는
방초를 생각하자 그녀의 풀기 없는 삶이
손에 잡힐 듯이 느껴졌고 빈혈에 걸린 듯한
삶이나마 지탱해 나가려는 안간힘 같은
것이 느껴져 가슴이 아팠다.
지금 왜 갑자기 그런 생각이 들었는지 알
수 없었다.
(우리 삶이 모두 빈혈에 걸렸는지도
몰라... )
강한섭은 엉뚱한 생각을 하였다.
그러다가 강한섭은 깜박 잠이 들었다.
언제 잠이 들었는지 알 수 없었다.
뱃속에서 시장기가 느껴지고 한기가 점차
엄습해 오는 것을 느끼며 이불을 자꾸 머리
끝까지 뒤집어쓰다가 깜박 잠이 든
모양이었다.
강한섭은 옆방에서 들리는 비명소리에
번쩍 떴다. 비명소리는 소름이 끼칠
정도로 처절했다. 이따금 쇠파이프가
허공을 가르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기도
했고 살려 달라고 애원을 하는 청년의
목소리도 들렸다.
강한섭은 가슴이 철렁했다.
(고문을 하고 있어... )
강한섭은 등줄기가 서늘했다. 자신에게도
저런 일이 닥칠지 모른다고 생각하자 온
몸이 부르르 떨렸다.
날은 이미 환하게 밝아 있었다. 천정에
가까이 있는 조그만 환기통으로 눈부신
햇살이 쏟아져 들어와 방안을 밝히고
있었다.
3
은숙은 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사복을
입은 기관원들이 마구 뒤지고 간 장농은
무엇하나 가지런히 놓아진 것이 없었다.
옷가지들은 여기저기 흩어져 있었고 서랍은
장농에서 빠져 나와 볼상 사납게 나뒹굴고
있었다. 마치 태풍이 휩쓸고 간 것처럼 방
안이 난장판이었다.
은숙은 망연히 서 있었다. 방바닥엔 흙
묻은 구두 발자국도 어지럽게 찍혀 있었다.
(개새끼들... )
은숙은 속으로 낮게 외치고 방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남편이 경찰의 수배를
받아 쫑기기 시작한 이래 걸핏하면 낯선
사내들이 찾아와 방안을 발칵 뒤집어놓기
일쑤였다. 처음엔 사내들에게 정체를
밝히라고 악을 쓰기도 했고 수색영장을
가져오라고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기도
했으나 모두 소용없는 짓이었다.
"이거 미친 년 아니야?"
그들은 은숙이 저항을 하자 차가운
눈빛으로 비아냥대며 은숙의 아래 위를
훑어보았다. 여차하면 은숙을 잡아갈 것
같은 기세였다. 은숙은 그들의 차가운
시선에 재빨리 고개를 외로 꼬았다.
"지 남편이 영웅이라도 되는 줄 아나?"
"...... "
"우린 이런 짓이 좋아서 하는 줄 알아?"
"...... "
"이런 꼴 당하기 싫으면 그 사진이 어디
있는지 말하면 될거 아니야?"
"...... "
"젊은 년이 못하는 소리가 없어!"
은숙은 어이없게도 사내들에게 훈계조의
욕설을 싫컷 얻어 먹어야 했다. 사내들은
은숙의 말에 심기가 상했다는 듯이 피우던
담배를 방바닥에 버리고 구둣발로
뭉개버리는가 하면 남편이 숨긴 사진을
찾는답시고 이불을 가위로 싹뚝싹뚝 잘라
버리기까지 했다.
(나무 밑에 숨겨 놓기를 잘했지... )
은숙은 남편이 숨기라고 한 사진들과
원고를 땅속에 묻은 것을 잘했다고
생각했다. 사내들이 장독대까지 모조리
뒤졌기 때문에 하마터면 들킬뻔 했던
것이다.
은숙은 무겁게 한숨을 내쉬고 방안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겉옷은 다시 옷걸이에
걸고 사내들의 손이 닿은 속옷은 불결하게
느껴져 욕실의 빨래통에 넣었다. 사내들의
흙 묻은 구두발자국은 빗자루로 쓸고
닦았다. 그렇게 하자 어느덧 한낮이 지나
9있었다.
은숙은 혼자 라면을 끓여 찬밥을
말아먹었다. 12월의 마지막 일요일이었다.
공장이 쉬었으나 오후에는 성당에 나가야
했다.
남편이 사내들에게 연행된 후 은숙은
무엇을 해야 할지 막막했었다. 남편이
어디로 끌려갔는지 알 수도 없었고 언제
풀려 나올지도 알 수 없었다.
은숙은 이틀 동안을 경찰서를 찾아
헤맸다. 그러나 서울 시내의 경찰서를
모조리 찾아 헤매었으나 남편은 어디로
끌려갔는지 알 수 없었다.
대부분의 경찰서들은 은숙을 냉대했다.
그리고 경찰에 연행되었으면 집에 돌아가
있으라고 하거나 무슨 일로 연행되었느냐고
묻고는 은숙이 모른다고 하면 그것도
캡오히려 짜증을 냈다.
은숙은 명동 성당을 찾아갔다.
12초순이었다. 날씨는 눈발이 뿌릴 것처럼
우중충했다.
은숙이 성당의 한 수녀를 붙잡고 박
마르타 수녀를 만나게 해달라고 하자 5분쯤
지나서 박 마르타 수녀가 교육관 앞으로
나왔다.
"오랜만이네요. 자매님. "
박 마르타 수녀는 은숙을 밝은 미소로
맞았다.
"그간 안녕하셨어요?"
은숙은 고개를 푹 숙이고 인사를 건넸다.
박 마르타 수녀를 만나자 갑자기 코 끝이
찡 하면서 눈물이 핑 돌았다.
"네. "
박 수녀가 은숙을 조심스럽게 살폈다.
은숙은 손수건을 꺼내어 눈 주위를
문질렀다. 거리의 어느 전파사에서인지
크리스마스 캐럴송이 들려오고 있었다.
"우리 성당 뒤로 갈까요?"
박 수녀가 은숙의 손을 꼬옥 쥐었다.
"네. "
은숙은 박 수녀를 따라 붉은 벽돌로
지어진 성당 뒤로 갔다. 명동 성당엔
평일인데도 찾아 오는 사람들이 많아
조용하게 얘기를 할 수가 없었다.
"여기 괜찮겠지요?"
성당 뒤에는 넓은 공지가 있었고 공지
한쪽으로 성모무염시태상이 서 있었다.
전국의 성당 어느 곳에나 있는
성모상이었다.
"네. "
은숙은 박 수녀와 함께 밴취에 나란히
횡
"무슨 일이 있으세요?"
"실은 남편이... "
"해직되셨다는 얘기는 듣고 있었어요. "
"남편이 잡혀 갔어요. "
"오 성모님!"
박 수녀가 짧게 부르짖었다. 그리고
성모무염시태상을 향해 성호를 그었다.
은숙은 입술을 깨물었다. 또 다시 눈물이
핑 돌았다.
"언제 체포되셨어요?"
"며칠 되었어요. "
"어디로 끌려 갔죠?"
"어딘지는 모르겠어요. 사복을 입은
사람들이 새벽에 쳐들어 와서 끌고
갔으니까요. "
은숙은 다시 입술을 깨물었다. 자꾸
눈물이 흘러내리려고 하고 있었다.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
박 수녀가 은숙의 어깨를 부드럽게 감싸
안았다.
"밤이 있으면 새벽도 있어요. "
"어떻게 해야 할지 전혀 모르겠어요.
어디에 잡혀가 있는지도 모르겠고...
옥바라지라도 해야 할 텐데... 있는 곳을
전혀 알 수 없으니... "
"무슨 방법이 있을 거예요. 자매님과
비슷한 처지에 있는 사람들도 있으니
그들과 만나면 도움이 될 거예요. "
"어떤 사람들인데요?"
"모두 이 정권 아래서 구속된 사람들의
가족들이예요. 김대중씨 부인도 있고
고() 전태일()씨의 어머니
이소선() 여사도 있어요. "
은숙은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러나
전태일의 어머니 이소선 여사는 누구인지
알 수 없었다.
은숙은 박 수녀의 권고로 구속자 가족
모임에 참여하게 되었다. 그 모임은 매주
일요일 오후에 열리고 있었는데 항상
2,30명이 되었다. 참석자들은 주로
여자들이 많았다. 시위를 하다가 구속된
대학생들의 어머니로 보이는 중년부인도
있었고 앳된 소녀들도 있었다. 그 소녀들
중에 한 소녀는 영등포에서 공장에 다니고
있었다. 대학교에 다니는 오빠가 법대를
졸업하여 판검사가 되는 것을 유일한
희망으로 알고 잔업과 철야작업을 하여 번
돈으로 오빠의 학비를 돕고 있었다. 그러나
판검사가 되리라던 오빠가 시위를 하다가
구속되자 그녀는 실망하여 자살을
했다.
그녀는 삶의 희망을 잃었던 것이다.
그녀는 오빠가 미워졌고 오빠를 증오하게
되었다. 그러나 감옥에서 날아온 오빠의
편지는 그녀의 가슴을 송두리째 흔들어
놓았다. 오빠의 편지는 그녀가 지금까지
믿고 있던 세상을 다시 보게 하였고 진실이
무엇인지 깨닫게 하였던 것이다.
그녀가 구속자 가족들 앞에서 읽은
편지는 다음과 같은 것이었다.
사랑하는 아우에게
아우야.
내가 이 곳에 온지 벌써 2개월이
되었구나. 그간 네가 어떻게 지내는지
궁금하기도 하고 보고 싶기도 하구나. 내가
이 곳에 들어오자 나는 어떻게 하느냐며
울부짖던 네 모습이 눈에 선하여 오늘도
잠을 이룰 수 없단다. 오로지 이 못난
오래비가 판검사 되는 것만을 유일한
희망으로 알고 있는 너에게 이런 편지를
써야 하는 내 자신이 너무나 저주스럽구나.
내가 무어라고 변명을 해야 네 마음이
풀릴지...
민주주의가 어떻게 되든,이 나라를 누가
통치하든 가난한 우리에게 무슨 상관이냐는
네 말이 구구절절 옳을지도 모르겠구나.
아우야. 너는 알고 있니?
그 옛날 러시아에서 노동자들이 일으킨
붉은 혁명을... 그 혁명을 일으키기 위해
얼마나 많은 선진 노동자들이 피를 흘리고
얼마나 많은 노동자들이 죽었는지...
그러나 그들의 피와 죽음으로 마침내
4러시아가 붕괴되고 노동자의 천국이라는
소비에트가 건설되었지.
허지만 그 소비에트가 과연 우리의
희망이냐 하는 물음에는 고개가 흔들어
지는구나. 그러나 이 나라에 제정 러시아
못지 않은 부르조아 계급이 형성되어
노동자들을 착취하는 상황에서 침묵만
지키고 있을 수가 없구나.
우리의 함성이,우리의 깃발이,우리의
투쟁이 진정 공산주의 하자는 것이
아닌데도 저들은 우리를 공산주의로 몰고
있구나. 허나 그때나 지금이나 우리가 좀
더 자유롭게 살고,좀 더 풍요로운 삶을
누리기 위해서는 이 고통을 감내하지 않을
수 없단다.
아우야.
이 못난 오래비를 위해서 지금도
공장에서 일을 하고 있을 너에게 이 무슨
객쩍은 소리인지 모르겠구나.
그러나 잘못된 것은 바로 잡아야지.
가난을 사랑하고,노동이 신성한 것이라는
저들의 감언이설이 이빨을 감춘 이리의
궤변이라는 것을 외쳐야지.
너를 볼 때마다 나는 생각했다. 젊어서
고생은 사서하라는 말이나 노동은 신성한
것이라는 말이 얼마나 위선에 가득찬
위정자들의 말이라는 것을...
아침 8시에 콩나물 시루 같은 시내버스를
타고 출근하여 정신없이 재봉틀을
돌리다보면 어느 새 정오가 되고 납품
기한에 맞춰야 한다는 사장님,공장장님의
성화같은 재촉에 점심 시간은 고작
40분,5분 동안에 찬밥을 후딱 먹고 산더미
같은 원단 옆에 웅크리고 새우잠을 청하면
어느 사이에 오후의 작업시간이 되지.
뽀얀 재봉틀 먼지를 뒤집어쓰고 다시
일을 하다보면 배에선 꼬르륵 소리가
들리고 그때쯤 시간은 오후 4시에서 5시가
되겠지... 일주일에 사흘은 골프장에서
살고 있는 사장님 기분이 좋으면 새참으로
빵이라도 하나 얻어 먹지만 그렇지 않으면
저녁 8시 퇴근할 때까지 주린 배를 움켜
쥐고 재봉틀을 돌려야 했지. 허나 너희들의
고통이 어디 그것뿐이었니?걸핏하면 잔업을
해야했고 선적기한 때문에 철야를 해야
했어.
아우야.
분배가 공평하게 이루어지지 않는
상황에서 내가 너의 피와 땀을 흘린 댓가로
판사가 되면 무얼 하고 검사가 되면 무얼
하겠니?내가 너의 희망의 나무라는 것은
알고 있지만 내게는 오히려 그 희망이
절망이었단다.
우리가 세상을 산다는 것은 이런 절망을
뛰어 넘자는 것이지 신분 상승을 위하자는
것이 아니란다.
아우야.
나는 이 절망을 뛰어 넘기 위해 너의
희망을 팽개치고 이 곳 고척동 유배의
성전을 찾은 것이란다.
물론 대다수의 많은 사람들은,특히
가난한 빈민들이나 공장 노동자들은 오늘
하루를 사는 것이 중요할 뿐 내일을
기약하지는 않는다. 마치 하루살이에게
내일이 없듯이 우리 노동자들에게는 희망이
없었어.
우리가 깃발을 든 것은,우리가 강철같은
의지로 투쟁을 하는 것은 이들에게 진정한
(희망의 나무를 심어 주기 위해서란다.
아우야.
정말 미안하구나. 그러나 나는 너도
우리의 싸움에 혼쾌히 동참하리라고
믿는다. 네가 나의 사랑하는 동생이기에...
그 소녀가 울면서 편지를 읽었을 때 많은
구속자 가족들이 따라 울었다. 은숙도
뜨거운 눈물이 볼 위로 펑펑 흘러내렸다.
그녀의 오빠는 광주사태가 일어나기 전만
해도 평범한 대학생이었다. 교내에서
시국을 성토하는 집회가 있어도 그는 한
눈을 팔지 않고 도서관에만 파묻혀
살았었다.
그 소녀의 이름은 김광순(),오빠의
이름은 김광민()이었다.
그러나 광주사태는 평범한 법대생
김광민의 인생 목표를 뒤바꿔 놓고 말았다.
광주사태가 일어났을 때 그는 주말을
이용해 지원동 주남 마을에 있는 집에
내려갔었다. 집에서 하숙비도 타와야 했고
위장병으로 고생을 하는 아버지도 뵙고
싶었다. 지원동은 광주에서 화순 방면으로
가는 길목에 있는 광주 남쪽의 변두리였다.
5월17일 광주로 내려온 김광민은 시내가
뒤숭숭했으나 곧 바로 완행버스를 타고
주남 마을로 향했다. 집에서 하룻밤을 자고
내일 아침 일찍 상경할 예정이었다.
그러나 이튿날 아침 라디오 뉴스를
듣고는 집에서 며칠 더 쉬기로 했다.
방송에서 계엄이 전국으로 확대되고
대학교에 휴교령이 내렸다는 뉴스가 나왔기
때문이었다.
"시상이 어떻게 될라고 요로큼 뒤숭숭한
다. 주위에
있던 모든 사람들이 저도 모르게 눈을 감았다.
지 모르것다. "
뉴스를 듣던 아버지는 배를 움켜 쥐고
한숨을 내쉬었다. 김대중이 구속되고
다수의 정치인들이 부정부패 혐의로
계엄사에 체포되었다는 뉴스도 흘러
나왔다.
"핵교도 휴교를 했다닝께 며칠 쉬었다가
올라 가그라이. "
"예. "
아버지의 말이 아니더라도 어쩔 수 없는
상황이었다. 김광민은 서울에 올라가는
것을 포기했다. 서울에 올라가야
도서관조차 들어갈 수 없으므로 집에서
마음 편히 쉬기로 했다.
5월18일은 날씨가 좋았다. 김광민은
광주에 가서 친구들을 만나볼까 했으나
집에서 어머니가 닭을 잡아 삼계탕을
끓인다는 바람에 집에 있기로 하였다.
그러나 오후가 되자 광주 시내의 긴박한
사태가 주남마을까지 들려왔다. 주남마을도
뒤숭숭해지기 시작했다. 5월19일 아침엔
공수부대가 시민들과 학생들을 마구
폭행하여 시민들이 일제히 들고 일어났다는
소문이 들렸다. 그는 좀이 쑤셔 마을에
남아 있을 수가 없었다. 그러나 병든
아버지가 그를 한사코 붙잡았다.
"야가 시방 우쩨 이런디야. 시상이
어수선할 때는 나댕겨싸서는 안된다고
안혀?공연히 싸돌아 다니면 개죽음 당하기
십상이여... "
김광민은 아버지의 권고대로 집에만
있었다. 그러나 광주에서 들려오는 소문은
점점 흉흉해 졌다. 공수부대가 시민들을
총으로 쏘아 죽였다는 소문에서부터
공수부대가 광주 사람들 씨를 말리려고
한다는 출처불명의 소문이 무수하게
나돌았다.
김광민은 마침내 광주 시내에
들어가보기로 하였다. 병든 아버지에게는
잠시 저수지에 올라가 바람을 쏘이겠다고
하고는 곧 바로 광주 시내로 들어갔다.
광주는 그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참혹했다. 학생들과 시민들은 시내
곳곳에서 시위를 벌이고 있었고 공수부대는
진압봉과 대검을 사용하여 시위대를
진압하고 있었다. 오후 3시경이었다.
장동의 MBC 앞에는 3천여 명의 시위대가
집결하여 시위를 벌이고 있었다.
그러나 공수부대의 강력한 타격으로
시위대는 뿔뿔이 흩어져 달아났다. 그
와중에 다수의 시민과 학생들이 공수부대의
진압봉에 부상을 당한 채 끌려갔다.
김광민은 시민들과 학생들이 시위를 하는
것을 방관자처럼 쳐다보다가 공수부대가
강력한 진압작전을 펼치자 일단 그 자리를
피하기로 마음 먹었다. 공연히
공수부대에게 걸려들어 얻어 맞으면 자신만
손해라는 생각이 뇌리를 엄습하고 있었다.
김광민은 공수부대를 피하여 금남로와
계림동 사이인 대인시장쪽으로 허겁지겁
달려갔다. 그러나 그가 대인시장쪽으로
달려갔을 때 공중에서 군 헬기가 느닷없이
총격을 가하였고 APC 장갑차의 돌진으로
대인시장 앞 일대가 아수라장으로 변해
있었다. 게다가 공수부대가 최루탄까지
발사하여 최루탄 연기가 안개처럼 자욱하게
깔려 있어 시민들이 눈을 부비며
우왕좌왕하고 있었다.
5 김광민도 눈을 부비며 마구 뛰었다. 그때
방독면을 뒤집어 쓴 공수부대가 느닷없이
김광민의 등을 진압봉으로 후려쳤다.
김광민은 외마디 비명을 지르며 쓰러졌다.
그러자 이번엔 공수부대가 군화발로 짓밟고
개머리판으로 후려쳤다.
김광민은 입으로 피를 토했다.
그러나 공수부대는 거기서 그치지 않고
대검으로 김광민의 다리를 두 번이나
찌르고 앞으로 달려갔다.
김광민은 비명조차 지를 수 없었다.
공수부대가 대검으로 다리를 찌른 것은
도망을 가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인 것
같았다. 그때 방독면을 뒤집어 쓴
공수부대가 한 무리 그를 향해 달려오는
것이 보였다.
(아!)
김광민은 소름이 오싹 끼쳤다. 김광민은
이대로 쓰러져 있다가는 공수부대에게 맞아
죽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 재빨리
하천으로 몸을 굴렸다.
광주천()이었다.
그때 M16 총성이 요란하게 들려왔다.
김광민은 이제 죽었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
눈을 질끈 감았다. 그러나 M16의 총성은
공포였는지 총알이 날아 오지는 않았다.
공수부대원들은 하천으로 달려 내려와
김광민을 워커발로 짓밟고 진압봉으로
구타했다 김광민은 거의 제 정신이
아니었다. 처음엔 공수부대원들에게 살려
달라고 빌기도 했으나 나중엔 신음소리만
겨우 내뱉았다. 입에서는 계속 피가 흘러
나왔다.
김광민은 다시 도로 위로 기어 올라왔다
9무슨 정신으로 도로 위로 기어
올라왔는지는 알 수 없었다. 어렴풋한 정신
속에서 공수부대의 구타를 피하다가 보니
저절로 도로 위로 기어 올라 오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도로변에서도 김광민은 무수히
구타를 당했다. 김광민이 마침내 정신을
잃자 공수부대는 구타를 멈추었다.
김광민이 눈을 뜬 것은 불과 몇 분도
지나지 않아서였다. 김광민은 도로변의
인조시멘트 화단 위에 꺼꾸로 처박혀
있었다.
(이제 나는 죽는 거야... )
김광민은 비참했다. 자신도 모르게
뜨거운 눈물이 흘러내리면서 가족들의
얼굴이 주마등처럼 망막을 스쳐왔다.
(내가 이렇게 개죽음을 하다니... )
김광민은 억울하다고 생각했다. 그는
시위를 하지도 않았고 나라에 불만을 갖고
있지도 않았다. 그런데 이렇게 허무하게
죽어야 하는 것이다.
입에서 또 피가 뭉클거리고 쏟아져
나왔다. 김광민은 입안에 가득 괴어 있는
피를 토해 냈다. 그러자 저벅거리는
군화소리와 함께 공수부대가 다가와서
돼지처럼 묶었다. 속칭 돼지묶음이라는
포승 방법으로 포승줄을 입에 건 후 양손과
양발을 뒤로 당겨서 묶는 것이었다. 주로
간첩을 묶을 때 사용하는 포승법이었다.
김광민은 돼지묶음을 당한 뒤 군인추럭
위에 던져져 조선대학교 유도장으로
끌려갔다. 그 곳엔 이미 수많은 학생들과
시민들이 끌려와 있었다. 그러나 그 후의
일은 김광민은 기억하지 못했다. 김광민이
조선대학교 체육관인 유도장에 끌려온 직후
정신이 혼미해져 의식을 잃었기
때문이었다. 김광민은 출혈량이 너무 많아
숨이 끊어지기 직전에 있었다. 그러나
체육관에 끌려 들어왔을 때 수많은
학생들이 피투성이로 끌려 들어와 신음하고
있었던 것은 어렴풋이 기억했다.
김광민은 그 후의 일을 전혀 알 수가
없었다. 그러나 나중에 병원에서 들은
얘기에 의하면 그를 구출한 것은 한국전력
운전기사였다.
그는 전기공사 때문에 조선대학교에
갔다가 공수대원이 차를 세우는 바람에
브레이크를 밟았다. 그러자 공수대원이 한
청년을 끌고 나와 광주 국군통합병원
영안실에 실어다 주라고 말했다.
그 청년은 차마 눈뜨고 볼 수 없을
정도로 참혹하게 짓이겨져 있었다. 옷은
갈기갈기 찢어져 있었고 온 몸은
피투성이었다. 그는 너무나 두려운 나머지
운전대를 조선대학교 부속병원으로 돌렸다.
김광민은 응급실에 도착했을 때 눈이
뒤집혀 있었고 숨이 거의 멈춰 있었다.
피도 너무 많이 흘려 실혈사()에
의한 죽음 일보직전에 있었다.
조선대학교 부속병원은 김광민에게
황급히 산소호흡을 시키며 수혈을 했다.
김광민은 조선대학교 부속병원의 노력으로
36시간만에 간신히 깨어났다.
그러나 그 무렵부터 병원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실려 들어오기 시작했다. 대검에
찔린 사람에서부터 진압봉에 맞아 머리가
터진 사람,여기저기 총상을 당한
부상자들이 밀려 들어왔다.
5 시위는 더욱 격해 지고 진압도 강력해
지고 있었다.
병원엔 부상자들에게 수혈할 피가
모자랐다. 그러자 시민들이 몰려와
자발적으로 헌혈을 했다. 헌혈자들 중에는
여자들도 있었고 고등학생과 공장
노동자들까지 있었다.
김광민은 극심한 고통 속에서도 헌혈하는
시민들의 의연한 모습을 보고 큰 감동을
받았다. 특히 공장에 다닌다는 한 여공이
수혈하는 모습을 보았을 때는 가슴이
뻐근하기까지 했다.
김광민은 조선대학교 부속병원에서
사흘만에 퇴원했다. 병든 아버지가 병원을
찾아와 계엄군이 광주 시내로 진주해
온다는 소문이 퍼져 있다고 억지로 퇴원을
시켰던 것이다.
그러나 주남 마을도 안전한 곳은
아니었다. 공수부대는 5월22일 오전 6시
광주에서 화순으로 가는 도로와 너릿재를
장악하였는데 이들이 장악하고 있던 기간에
수많은 시민들이 사살되었다.
5월23일 오전 9시 승객 11명을 태운
미니버스가 화순쪽으로 달려가다가 지원동
녹동 마을 입구에서 매복하고 있던
공수부대의 일제사격을 받아 11명 전원이
사살되었다.
홍금자라는 여학생은 당시 고등학교
1학년이었다. 그녀는 5월23일 아침 오빠를
찾으로 광주 시내로 나갔다가 화순
방면으로 가는 버스를 얻어 타게 되었다.
3시 30분 경이었다.
버스 안에는 광주에서 시위를 하던
사람들이 여럿이 타고 있었다. 그 중에는
총을 들고 있는 사람들까지 있었다.
버스가 화순쪽을 향해 달리는데 갑자기
계엄군이 나타나서 버스를 세우라는 신호를
보냈다. 그러자 운전기사가 차를 세우면
계엄군들이 죽일지도 모른다며 계속
달렸다.
그때 계엄군들이 버스를 향해 일제히
사격을 개시했다. 타이어가 펑 하고
터지면서 버스가 기우뚱하다가 섰다. 버스
안에서 총을 들고 있던 사람들이 계엄군을
향해 일제히 총을 쏘았다. 그러자 산
속에서도 버스를 향해 집중사격이
가해졌다. 홍금자는 총소리가 들리기
시작하자 두 손으로 귀를 막고 버스 바닥에
바짝 엎드렸다. 여기저기서 사람들의
신음소리와 비명소리가 들렸다. 사람들은
그때서야 손수건을 흔들며 총을 쏘지
말라고 소리쳤다. 그러나 총소리 때문에
들리지 않는지 사격이 계속되었다.
계엄군의 사격이 멈춘 것은 한참이
지나서였다. 버스 안은 피비린내가 가득한
가운데 조용했다.
홍금자는 총성이 그치자 고개를 들었다.
산에서 매복하고 있던 계엄군이 버스를
향해 우르르 달려오는 것이 보였다.
홍금자는 다시 버스 바닥에 납짝 엎드려
죽은 척했다.
계엄군들이 버스 안으로 들어와 사살한
시체의 숫자를 세기 시작했다. 홍금자가
바짝 엎드려 귀를 기울이자 계엄군들이
발로 툭툭 차며 시체를 확인하고 있었다.
"부상자가 있나?"
"예. 둘이 있습니다. "
"끌고 나와라!"
"예. "
"생존자가 또 있는지 잘 확인해라!"
"예. "
지휘관이 버스 밖에서 명령을 하자
계엄군들이 다가와 홍금자의 옆구리를 발로
찼다. 홍금자는 옆구리가 아파서 비명을
질렀다. 그러자 군인이 다시 홍금자를 발로
찼다. 홍금자는 얼굴을 찡그리며 소리를
질렀다.
"어?"
군인이 깜짝 놀라서 소리를 질렀다.
"살아 있어!"
"뭐야?"
"여학생입니다. "
"끌고 나와!"
홍금자가 밖으로 끌려 나오자 남자 2명이
부상을 당한 채 산으로 끌려가는 것이
6보였다.
"사살자는 몇 명인가?"
"열 다섯 명입니다. "
"끌고 올라가라!"
지휘관이 계엄군에게 지시했다. 홍금자는
계엄군에 의해 경운기로 산으로 끌려
올라갔다. 홍금자가 경운기에서 계속 살려
달라고 울자 군인 한 명이 대검을 들이대며
너도 유방 하나 짤리고 싶냐고 위협을
했다. 홍금자는 입을 다물었다.
계엄군 지휘소에 올라가자 검은 안경을
쓴 지휘관이 귀찮게 왜 데리고 왔느냐며
사살하라고 지시했다. 먼저 끌려와 있던
남자 부상자 두 명이 살려 달라고 빌었으나
군인들은 그를 산 밑으로 끌고 내려갔다.
홍금자는 그 곳에서 헬리콥터로
통합병원으로 후송되었다.
- 김광민은 집에 돌아와 있었으나 그
얘기를 바로 주남 마을과 녹동 마을에서
일어난 일이었기 때문에 자세히 들을 수
있었다.
광주사태가 진정된 것은 5월이 지났을
때였다. 광주에서 공수부대가 철수하고
시민들의 생활이 옛날처럼 돌아가자 다시
병원에 입원했다.
김광민이 퇴원을 한 것은 7월
장마철이었다. 그러나 학교가 휴교
중이었고 방학까지 시작되었기 때문에
광주에 그대로 남아 있다가 찬바람이 불기
시작하는 9월에야 서울로 상경했다.
서울은 변한 것이 전혀 없었다. 그가
광주에서 보낸 몇 달이 지옥에서 보낸
것처럼 비참했으나 서울은 평화롭기조차
했다.
그러나 그는 서울 생활에 적응할 수가
없었다. 그는 도서관에 가서도 공부를 할
수 없었고 강의실에서도 교수들의 강의가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는 광주사태의 실상을 알리는 유인물을
만들어 대학가에 뿌리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그는 학원 사찰을 맡고 있는 경찰
대공반에 체포되었다.
김광순이 구속자 가족협의회에 참여하게
된 동기였다.
구속자 가족들과의 만남은 은숙에게는
커다란 기쁨이었다. 남편이 어디에 갇혀
있는지는 알 수 없었으나 그들을
만남으로서 용기를 얻게 되었다.
은숙은 박 수녀의 주선으로 공장에도
취직을 했다. 남편이 없는 상황에서 은숙
스스로 생활을 해나가야 했다. 남편이
재판을 받게 되어 교도소에서 생활을 하게
되면 옥바라지도 해야 하는 것이다. 물론
옥바라지가 결코 수월하지 않으리라는 것은
은숙도 알고 있었다.
그러나 겨울이 아무리 길어도 봄이 오는
것은 자연의 순리였다.
4
날씨가 몹시 추웠다. 강한섭은 몸을 바짝
웅크렸다. 턱이 덜덜거리고 떨리고 한기가
엄습해 왔다. 며칠째 계속되고 있는
강추위였다. 한동안 겨울답지 않은 포근한
날씨가 계속되더니 기온이 곤두박질을 치고
살을 에일 듯한 추위가 몰아치고 있었다.
하늘은 윤기없이 매끄러웠다. 그러나
한낮에도 언 하늘이 갈라지는 소리가
쩡쩡거리고 들렸다.
며칠이나 된 것일까.
내가 여기 끌려온 지 얼마나 된 것일까.
강한섭은 이불을 뒤집어 쓴 채 골똘히
생각에 잠겼다. 이 곳에 끌려 온 지 얼마나
되었는지 기억이 아슴했다. 그러나 아직도
겨울이 계속되고 있는 것을 보면 두 달이
채 되지 않았을 것 같았다.
강한섭은 눈을 감았다. 다시 졸음이
쏟아져 왔다. 이상한 일이었다. 사내들의
취조와 고문이 멈추면 고통보다도 졸음이
먼저 쏟아져 오곤 했다.
사내들의 취조는 전혀 엉뚱하게
시작되었다. 그들은 처음에 강한섭에게
자서전을 쓰라고 지시했다.
"자서전이요?"
강한섭은 영문을 알 수 없어서 취조하는
뻗멀뚱히 쳐다보았다. 강한섭은 혹시
자신이 잘못 들은 것이 아닌가 생각했던
것이다.
"신문기자까지 지낸 놈이 자서전도
몰라?"
사내의 말은 얼음처럼 차가웠다.
강한섭을 연행했던 거구의 사내였다. 이
곳에서는 그를 백곰이라고 부르고 있었다.
"뜻은 알지만... "
"그럼 자서전을 쓰란 말이야!"
"제가 무슨 자서전을 쓸 게 있어야지요.
"
"쓰라면 쓰는 거지 무슨 말이 많아 이
새끼야!"
백곰이 느닷없이 강한섭의 뺨을 세차게
후려쳤다. 강한섭은 억 하는 소리와 함께
얼굴을 감싸쥐었다. 갑자기 눈물이 핑
돌았다. 강한섭은 어금니를 꽉 깨물었다.
"하나도 빠트리지 말고 상세하게
써!알겠어?"
백곰이 강한섭을 윽박질렀다.
"예. "
강한섭은 재빨리 대답했다. 백곰이
강한섭을 위 아래로 훑어보고 방을 나갔다.
저벅거리는 구둣소리가 복도 저쪽으로
멀어지자 강한섭은 비로소 책상 위에 놓여
있는 볼펜을 잡았다. 책상 위에는
편지지까지 한 묶음 놓여 있었다.
(자서전을 쓰라니 도대체 무슨
영문이지... ?)
강한섭은 백곰의 의도를 이해할 수가
없었다. 자서전은 일반적으로 큰 업적을
남긴 저명 인사들이 자신의 인생을
회고하기 위해 쓰는 것이었다. 강한섭은
아직 업적을 남긴 일도 없고 자서전을
남길만한 나이도 되지 않은 것이다.
자서전을 쓴다는 것은 황당하기 짝이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백곰이 지시했으므로 쓰지 않을
수 없다고 생각했다. 어떤 내용이던지
자서전이라는 것을 써야 하는 것이다.
강한섭은 우두커니 허공을 쳐다보았다.
자서전을 쓰기 위해 자신의 일생을
돌아보려는 것이었다.
아직 서른도 되지 않은 자신의 나이였다.
강한섭은 서른도 되지 않은 나이에
자서전을 쓰기 위해 길지도 짧지도 않은
일생을 돌아보려니 기묘한 느낌이 들었다.
강한섭은 경기도 포천군 내동면 가채리
속칭 매천() 마을에서 태어났다.
구한말 유림의 거두로 알려진
최익현()이 태어난 곳이라 그가 남긴
저서 매천야록()에서 딴 마을
이름이었다.
그러나 강한섭은 매천 마을에 대한
기억이 거의 없었다. 그의 가족은 강한섭이
9살이었을 때 국민학교 교사인 아버지를
따라 서울로 이사를 했고 그때부터 서울
안암동에서 살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강한섭은 외아들이었다. 외아들이었기
때문에 아버지의 봉급이 많지 않았으나
또래의 다른 아이들처럼 궁핍한 생활은
하지 않았다.
어머니는 늘 강한섭을 애지중지하며
키웠고 아버지는 동네에서
무골호인()이라고 부를 정도로
평범하다 못해 순박한 사람이었다.
강한섭에게도 거의 야단을 치지 않았고
어머니와 부부 싸움을 하지도 않았다.
동네에서는 누군가 아버지와 시비를 하면
무조건 상대방이 잘못이라고 할 정도로
아버지를 경우 바른 사람이라고 칭송했다.
그러나 그러한 아버지도 나쁜 버릇이
하나 있었는데 그것은 술 버릇이었다.
강한섭의 아버지는 술이라면 도무지 사족을
못쓸 정도로 좋아했다. 매일 같이 술에
절어 살다시피 했고 술이 얼큰하면 번지
없는 주막이라던가,비내리는 고모령이라는
철지난 유행가를 흥얼거리며 집으로
돌아오기 일쑤였다.
강한섭의 아버지는 결국 강한섭이
고등학교를 졸업하던 해에 술 때문에 죽고
말았다.
그런 까닭으로 강한섭은 아버지에 대한
특별한 기억이 없었다. 강한섭이 기억하는
것이라고는 술 때문에 코가 딸기처럼
벌겋게 된 아버지의 얼굴과 아버지가
흥얼거리던 유행가 가락뿐이었다.
어머니도 별다른 특징이 없었다.
어머니는 아버지가 죽기 전까지는 지극히
평범한 가정주부였고 무엇이던지-특히
맛있는 음식이 생기면 강한섭에게 주고
싶어 안달을 하는 여인에 지나지 않았다.
아버지가 죽은 후에 어머니는 보문동 큰
길에 점포를 하나 얻어 분식집을 차렸다.
아버지가 없는 상태에서 어머니가 생활을
이끌어 가야 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어머니는 강한섭이 결혼을 한지
두 달만에 죽었다. 병명은 위암이었다.
강한섭은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고려대학교에 입학했다. 어머니가 극성으로
과외공부를 시켰기 때문에 어렵지 않게
합격할 수 있었다.
강한섭의 대학시절은 그의 아버지나
어머니의 삶처럼 평범했다. 정치판은
긴급조치로 어수선했으나 학원사찰이
극심했기 때문에 학생들의 시위도 많지
않았다.
강한섭은 꽁꽁 얼어붙어 있는 분위기가
싫어서 군대에 자원입대했다. 어머니가
면제받을 수도 있는 군대를 무엇 때문에
자원해서 가느냐고 만류했으나 강한섭은
어머니의 만류를 뿌리치고 입대했다.
강한섭은 군대생활도 평범했다. 훈련을
마치자 서부전선의 전방에 배치되었으나
전방 생활이라고 특별한 것은 없었다. 틀에
박힌 조직적이고 규칙적인 생활,명령에만
움직이는 생활,억압되어 있는 청춘... 그런
것들만 존재하고 있는 것이 군대였다.
물론 사람을 죽이는 무기가 언제나 곁에
있다는 것이 사회와 달랐다. 그러나 그
무기는 훈련할 때 외에는 한 번도 사용되지
않았다.
군대에서 특별한 기억이라고는 불침번을
서는 것뿐이었다. 불침번은 내무반에서 설
때도 있었고 고지에서 설 때도 있었다.
강한섭이 불침번을 서던 고지는 6. 25때
북한 공산군과 피아간에 치열한 격전을
치른 곳으로 유명한 피의 고지였다.
그러나 옛날의 치열했던 격전의 모습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고 수목만 무성했다.
강한섭이 제대를 하여 다시 복학했을
때도 여전히 긴급조치가 맹위를 떨치고
있었다. 그러나 대학생들은 유신독재
타도를 부르짖는 시위를 하기 시작했고
지식인들과 종교인들,노동자들도 유신
7정권에 항의하는 집회를 열기 시작하고
있었다.
그러한 와중에 긴급조치 9호가
선포되었다. 긴급조치 9호는 긴급조치에
대한 언급과 보도조차 허용하지 않아
영장없이 체포되고 구금되는 학생들과
지식인들,그리고 노동자들이 무수히
많았다.
강한섭도 대학에 복학하자 시위에
참여하게 되었다. 서슬 퍼런 긴급조치가
선포되어 있던 시절이라 시위에 몇 번
참여만 해도 운동권으로 불리던 시기였다.
강한섭도 복학생으로는 드물게
운동권으로 분류되었다. 강한섭이 학생들이
시위를 할 때마다 시국을 성토하는
유인물을 작성하여 배포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강한섭은 한 번도 경찰에
체포되거나 수배를 받지 않고 대학을
졸업한 뒤에 신문사에 취직을 하였다.
강한섭은 신문사 생활도 평범했다.
수습기자 시절을 거쳐 사회부 기자가 되어
경찰 출입을 하거나 사건 현장을
취재했으나 모나게 행동한 일은 한 번도
없었다. 그는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인
그런 기자였다. 그의 유일한 특징은 그의
아버지처럼 술을 잘 마신다는 것뿐이었다.
그러나 광주사태는 그를 전혀 새로운
인물로 만들었다. 그는 광주에서 돌아온
이후 신군부를 노골적으로 비판했다.
광주에서 공수부대가 저지른 만행을
동료들에게 자주 얘기했고 신문사에
상주하는 기관원들과 기사 문제로 자주
마찰을 일으켰다. 그러나 그것은
마찰이라기 보다는 기관원들의 지적이었다.
그는 기관원들이 싫어하는 기사를 자주
썼고 기관원들이 지적하면 기사를 그
자리에서 찢어버리곤 했다.
신문사에서 그를 해직한 것은 기관원들과
껄끄러운 관계에 있는 그를 추방하여
신군부의 미움을 받지 않기 위해서였다.
강한섭은 가정생활도 지극히 평범했다.
그는 한때 국가 대표 테니스 선수를 지낸
아내를 만나 결혼을 했고 그녀와 함께
평범한 가정을 꾸리고 살고 있었다. 아직
아이가 없었으나 아내가 임신 중이었기
때문에 머지 않아 아버지가 될 예정이었다.
서른이 채 못된 그의 삶은 그가
생각하기에도 지극히 평범하기 짝이 없었던
것이다.
강한섭은 자신의 인생을 되돌아보고
천천히 자서전을 쓰기 시작했다. 사내가
쓰라고 했으므로 평범한
일생이나마 자서전을 써야 했다.
"이 새끼가... 이것도 자서전이라고
썼어?"
백곰은 강한섭이 쓴 자서전을 대충 읽어
보더니 강한섭을 향해 내던졌다.
"제가 워낙 평범한 인생을 살아서 별로
특별한 내용이 없습니다. "
강한섭은 고개를 숙인 채 대답했다.
"너 신문기자 맞아?"
"지금은 아닙니다. "
"신문기사 쓸 때도 이따위로 썼어?"
"신문기사는 사실을 취재하여 쓰는
것입니다. "
"그럼 자서전은 꾸며서 쓰는 거야?"
"...... "
"왜 대답이 없어 이 새끼야?"
백곰이 주먹으로 강한섭의 머리를
후려쳤다.
"다시 써!"
"...... "
"오늘 밤 안으로 다시 써!알았어?"
"예. "
강한섭은 백곰의 지시대로 자서전을 고쳐
썼다. 한밤중이었다. 창 밖에서는 칼날처럼
매서운 바람이 불고 있었고 기온은 점점
곤두박질을 치고 있었다. 강한섭은 살을
파고드는 추위 때문에 손을 호호 불면서
자서전을 썼다.
"이 새끼가 누굴 희롱하나?"
그러나 백곰은 강한섭의 자서전을 대충
훑어 보고는 다짜고짜 주먹으로 때리고
발로 찼다.
"너 뜨거운 맛 좀 볼래?"
"죄,죄송합니다. "
"이걸 자서전이라고 썼어?"
"죄송합니다!"
"이 새끼 끌어내!"
백곰은 밖을 향해 소리를 질렀다. 그러자
사내들이 술 냄새를 풍기며 들어와
강한섭을 옆 방으로 끌고 갔다. 강한섭은
옆 방에 도착하자 가슴이 철렁했다. 옆
방은 죄수들을 고문하는 곳인 모양으로 한
눈에도 고문 도구들로 보이는 몽둥이며
수갑,채찍,밧줄 같은 것들이 어지럽게
흩어져 있었다.
"우선 여기 들어온 인사나 받아 보라구.
"
사내들이 강한섭을 의자에 앉히고 손을
뒤로 묶었다. 강한섭은 눈을 질끈 감았다.
두 사내가 몽둥이를 들고 강한섭에게
3가까이 오고 있었다.
(하느님,저를 살려 주소서!)
강한섭은 입 속으로 빌었다.
그때 왼쪽 어깨죽지가 화끈했다. 사내
하나가 몽둥이로 강한섭의 어깨를 후려친
것이었다. 강한섭은 어금니를 깨물며
얼굴을 찡그렸다. 그러자 이 번엔 오른쪽
허벅지에 몽둥이가 떨어졌다.
"윽!"
강한섭은 자신도 모르게 입이 벌어지면서
신음소리가 새어 나왔다. 그러나 사내들의
몽둥이질은 3분 남짓이나 계속되었다.
강한섭은 비명을 지르며 살려 달라고
소리를 질렀다. 그러나 사내들은
저승사자처럼 몽둥이질을 계속했다.
"이 새끼 이거 왜 이래 약골이야?"
"약골이 아니라 엄살이야. "
1 "이제 시작인데 벌써부터 엄살을 떨면
어떻게 해?"
"백곰한테 걸려야 정신이 번쩍 들지... "
사내들이 낄낄대고 웃었다. 강한섭은 온
몸을 떨면서 울었다. 그러자 사내들이 사내
새끼가 눈물을 찔찔 짠다고 다시 매질을
하였다.
(그래,난 겨우 몽둥이로 몇 대 맞았을
뿐이야!)
강한섭은 방으로 돌아와 혼자 남겨 지자
눈을 부릅떴다. 광주에서 공수부대에게
진압봉으로 몰매를 맞은 일도 있는데
이까짓 몽둥이 몇 대에 나약해져선
안된다고 생각했다. 상처를 살피자
여기저기 피멍이 맺혀 있었다.
강한섭은 그날부터 계속 고문을
당하였다. 자서전을 제대로 쓰지 않았다는
이유 하나 만으로 무수한 고문을 당하였다.
고문도 참으로 다양했다. 그는 고문
방법이 그토록 다양한 지 미처 알지
못했었다. 콧구멍에 고추가루를 넣는
고문이며,손톱 밑을 바늘로 찌르는
고문,전기구이 통닭처럼 알몸으로 꽁꽁
묶어서 몽둥이로 때리는 고문...
특히 백곰이라는 사내의 고문은 생각만
해도 몸서리가 쳐질 정도로 처참했다. 그는
자유자재로 고문 당하는 사람의 팔을
부러뜨리기도 했고 어깨에서 팔을 뽑았다가
맞추기도 하였다.
(이들은 나에게 시국사범 수배자들의
명단을 알려고 하는 거야... )
강한섭은 그때서야 고문자들이 원하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알 수 있었다. 그들은
강한섭이 숨겨 주었던 수배자들과 그들의
연락망을 알아 내려고 하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그것만은 절대로 밝힐 수 없어... !)
강한섭은 입술을 깨물며 굳게 결심을
했다. 그러나 그들의 고문은 계속되었다.
강한섭은 온 몸이 만신창이가 되었다.
고문을 당하고 방으로 돌아오면 다리가
휘청거려 서 있을 수도 없었고 피멍이 든
상처는 추위로 얼어서 쓰라렸다.
그렇게 한 달이 되자 강한섭은 거의 제
정신이 아니었다. 강한섭은 몇 번이나
수배자들의 명단과 연락처를 밝히고 싶은
유혹을 가까스로 참았다. 어느 때는 자신도
모르게 그들의 이름이 목구멍까지 치밀고
올라와 소스라쳐 놀라기도 하였다.
강한섭은 끙끙 앓기 시작했다.
강한섭이 앓은 것이 며칠이나 되었는지
기억할 수도 없었다. 어느 날 강한섭이
눈을 뜨자 환기통으로 환한 볕이 쏟아져
들어오고 있었다.
(봄이 왔나?)
강한섭은 얼핏 그렇게 생각했다. 그러나
봄이 온 것이 안이었다. 아직도 날씨는
살을 에일 듯이 추웠다.
(그러나 언젠가는 봄이 오겠지... )
강한섭은 들마루 위에 누워서 그렇게
생각했다. 문득 언젠가 읽은 민중시인의 시
한 귀절이 생각났다. 그 시인은 긴급조치
위반으로 감옥에 수감되어 있으면서도 시를
썼었다. 연필심 하나를 구해서는 빨래감에
시를 써서 밖으로 내보내기도 했고 회벽에
못으로 굵어서 시를 쓰기도 했었다.
민주주의라는 나무는 피를 마시고 자라고
희망의 나무는 절망을 먹고 자란다
강한섭은 벽에다 희망 그리고
절망이라는 단어를 손톱으로 긁어서
써보았다. 그 글자를 가만히 들여다보자
까닭 없는 슬픔이 복받쳐 목이 메어 왔다.
강한섭은 글자 밑에 1980년 겨울 강한섭이
쓰다라고 써넣었다.
고문이 다시 시작되었다.
강한섭은 그때부터 몸을 떨기 시작했다.
이상한 일이었다. 강한섭은 자기도 모르게
고개를 흔들고 몸을 떨었다.
고문을 받으면서도 몸을 떨었고 마루에
누워서도 몸을 덜덜 떨었다. 잠을 자다가도
사내들이 다가오는 구두소리가 들리면 벌떡
일어나서 살려 달라고 빌었다.
"이 새끼 이거 미친 거 아니야?"
"미치긴 왜 미처?엄살 떠는 거지... "
강한섭은 헛소리까지 하였다. 어둠
속에서 벌떡 일어나 아버지를 찾고
어머니를 불렀다. 이상하게 정신이
아물거려지면 아버지와 어머니의 얼굴이
떠올라 왔다.
아내가 생각이 나는 것은 정신이 맑았을
때였다. 그는 아내를 생각하자 가슴이
찢어지는 것 같았다. 아내가 어떻게
지내는지 궁금하기도 했고 보고 싶기도
했다. 사내들은 강한섭이 헛소리를 하자
한동안 고문을 하지 않고 버려 두었다.
따뜻한 먹을 것을 가져다 주기도 했고
담배를 주기도 했다. 그러면서 다 알고
있는데 왜 숨길려고 하여 이 고생을
자초하느냐고 강한섭을 회유하였다.
"나도 자네 같은 동생이 있어. "
강한섭은 사내들의 말을 듣자 뜨거운
눈물이 쏟아졌다.
"괜한 고생하지 말고 협조하라구. "
"...... "
"우린 이런 짓이 좋아서 하고 있는 줄
알아?"
"...... "
"자네도 나라를 위해서 하는 일이라고
생각하고 있겠지만 우리도 나라를 위해서
이런 짓하고 있는 거야. "
"...... "
"국가에 대한 투철한 사명감 없으면 이
짓 못해. 국민들도 자네들이 혼란만
조성한다고 믿고 있어. 사회정화가
시작되자 국민들이 열렬히 환영하고 있어.
그 이유를 알겠어?"
그때 강한섭은 웃음이 비어져 나왔다.
국가를 위해서라니,국가를 위해서 이런
고문을 한다는 것이 얼마나 우스꽝스러운
짓이라는 걸 모른다는 말인가. 그렇다면 네
놈이야말로 순진한 광대이다. 권력이
광대를 필요로 하듯 국민들도 광대를
필요로 한단 말인가.
"자네가 숨겨준 수배자들 연락처 다
불어... 그렇지 않으면 여기서 살아 나가지
못해. "
강한섭이 대답을 하지 않자 백곰이
날카로운 목소리로 윽박질렀다. 강한섭은
고개를 푹 떨구었다. 갑자기 정신이
몽롱해져 왔다. 마치 천길 벼랑으로
떨어지고 있는 듯한 아득한 추락감과 함께
눈 앞에 캄캄한 어둠이 펼쳐졌다.
"이 새끼!뽄때 좀 보여줘!"
그때 백곰의 신경질적인 목소리가
강한섭의 귓전을 울렸다. 강한섭은
어렴풋이 그 소리를 들으며 눈을 감았다.
사내 하나가 강한섭의 목덜미를 잡아
일으켰다.
"아니 이 새끼가 또 엄살을 부려?"
사내가 강한섭의 아랫배를 주먹으로
내질렀다. 그러나 강한섭은 아무런 통증도
느끼지 못한 채 몸이 늘어지고 있었다.
강한섭은 비틀거리며 사내에게 이끌려
욕조에 처박혔다. 욕조엔 차가운 물이
가득차 있었다. 그러나 강한섭은 아무 것도
기억하지 못하였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강한섭이 눈을
뜬 것은 꽤 오랜 시간이 지났을 때였다.
그러나 얼마나 오랜 시간이
흘렀는지,자신이 왜 여기로 끌려 왔는지
강한섭은 전혀 이해하지 못하였다. 아주
동안 아내의 얼굴이 망막을 스치기는
했으나 금세 안개처럼 희미하게 사라져
버렸다.
강한섭은 다시 들마루 위에 눕혀져
있었다. 그들이 강한섭을 끌어다가
들마루에 눕힌 모양이었다.
강한섭은 편안했다. 이상하게 고통이
느껴지지 않았고 몸도 떨리지 않았다.
다만 어디선가 흰 눈이 사락사락 내리고
있었다. 사방은 칠흑처럼 캄캄했다. 그러나
여인이 옷을 벗듯이 흰 눈이 사락사락
내리며 어둠을 밝히고 있었다.
강한섭은 웃으며 새벽이 오는 것을 보고
있었다.
제17장 나비는 청산에 묻히고
1
또 삭풍이 불고 있었다.
은숙은 앙상한 나무가지를 흔들며 삭풍이
부는 소리에 얼핏 잠이 깼다.
한밤중이었다. 사방은 칠흑처럼 캄캄했다.
그러나 눈을 뜨고 귀를 기울이자
바람소리는 들리지 않고 사방이 물속처럼
적막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꿈이었나?)
은숙은 침대에 누운 채 허공을 물끄러미
응시했다. 머리맡이 선뜻하고 어수선했다.
눈이 오고 있는 것일까. 은숙은 창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그러나 커텐이 두껍게 쳐져
있어 밖이 내다보이지 않았다.
은숙은 다시 눈을 감았다. 어디선가
주전자의 물이 끓는 듯한 소리와 큰길
쪽에서 차가 지나가는 엔진음이 희미하게
들려왔다.
은숙은 잠이 오지 않았다. 신경이
날카로워져 있었다. 신원을 알 수 없는
사내들에게 남편이 잡혀간 뒤부터 밤을
지새우는 날이 많아졌던 것이다.
남편은 지금쯤 어디에 있는 것일까.
남편도 지금 잠을 이루지 못하고 있을까.
은숙은 남편이 어떤 고통을 당하고
있을지 전혀 상상이 되지 않았다. 남편이
잡혀간 지 벌써 두 달이 가까워지고
있으므로 이제는 조사도 모두 끝나 재판에
넘겨져야 했다. 그러나 남편이 재판에
넘겨졌다는 소식은 커녕 남편이 어느 곳에
잡혀 있는지 조차 알 수 없었다.
은숙은 침대에서 일어났다. 나이트
까운을 걸치고 창가로 걸어갔다.
(아!)
은숙은 커텐을 젖히고 자신도 모르게
짧은 탄성을 내뱉았다. 창 밖에는 함박눈이
펑펑 쏟아지고 있었다. 한겨울이었다. 이
며칠 날씨가 따뜻하여 봄날씨처럼
포근하더니 그예 눈발이 날리고 있는
모양이었다. 자욱하게 내리는 눈발 때문에
하늘이 잿빛으로 잔뜩 흐려 있었고 안암동
주택가가 하얀 눈으로 덮여 있었다.
(어떻게 하면 남편을 찾을 수 있을까?)
은숙은 그 의문을 떨쳐 버릴 수가
없었다. 일단은 남편이 어느 곳에 있는지
먼저 찾아야 했다. 그러나 남편을 찾을 수
있는 방법이 전혀 생각이 나지 않았다.
명동 성당에서 만나는 구속자 가족협의회도
남편이 어디 있는지 모르는 상황에서는
전혀 손을 쓸 수 없다고 하였다. 설사
남편이 어디 있는지 안다고 해도 시국이
좋지 않아 손을 쓰기 어려운 형편이라고
하였다.
(허지만 어떻게 하던지 찾을 거야!)
은숙은 주먹을 꽉 움켜 쥐었다. 그녀에게
남편이 없는 삶은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뱃속에는 남편의 아이가 무럭무럭 자라고
있었다. 이제 그 아이가 태어나면 남편은
아이 아빠가 되는 것이다. 그러나
어디인지도 모르는 감옥에 있는 남편은
아이가 태어났는지도 모를 것이다.
이것은 슬픔이 아니라 서러움이다.
남편이 없는 생활,그것은 이제 겨우 불과
두 달밖에 안되었지만 은숙은 삶이 즐거운
것이 아니라 서러움이라는 것을 절실하게
깨달았다. 도대체 살아간다는 것은
무엇일까. 무엇이 우리를 삶에 지치게 하고
가슴에 멍이 들게 하는 것일까. 무엇이
우리를 흰 눈이 꽃잎처럼 하얗게 내리는 이
밤중에 잠을 이루지 못하고 깨어나 있게
하는 것일까...
은숙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남편의 얼굴이 다시 머릿속에 떠올라
오며 가슴이 묵직해 왔다. 남편과의
만남,남편과의 사랑,남편과의 쎈스...
그 모든 것들이 주마등처럼 스쳐 오고
스쳐 갔다.
눈은 이튿날에도 계속 내렸다. 밤새 내린
눈으로 발목이 파묻히고 차들이 서행을
했으나 눈은 온 세상을 하얗게 덮어 버릴
듯이 계속 내렸다.
8 은숙은 눈을 맞으며 공장에 출근했다.
청계천에 있는 피복 공장이었다. 은숙은
명동 성당의 박 마르타 수녀가 소개한
피복공장에 시다로 취직을 했던 것이다.
남편이 잡혀간 뒤에 생활비도 벌어야
했으나 무엇보다도 그녀에게 생활이
필요했다.
은숙은 청계천 피복공장의 작은 창으로
눈이 내리는 것을 내다보았다.
앞 집 여자는 조그맣고 예쁜 딸을
낳았다. 은숙이 딸을 낳은지 3일이 지나서
찾아가자 앞 집 여자는 근심스러운
표정으로 딸에게 젖을 먹이고 있었다.
노산()이라 아이를 어렵게 낳았고 그런
까닭인지 얼굴이 수척했다.
"힘드나 봐요. "
은숙은 정란을 위로했다.
"괜찮아요. "
정란이 엷게 웃으며 대답했다.
"죽은 딸이 살아온 것 같아요. 어쩌면 그
애를 그렇게 닮았는지... "
"그 딸은 어떻게 죽었어요?"
"물에 빠져 죽었어요. "
"어쩜!"
은숙은 가슴이 싸 하게 저려 오는 것을
느끼며 혀를 찼다. 앞 집 여자는 여러 가지
비밀을 갖고 있었다. 그녀는 남편 몰래
외간 남자를 만나고 있었고 자식이 둘이
있었으나 하나는 죽고 하나는 정신병원에
있었다. 그러나 은숙은 정란의 아이들에
대해서 자세히 묻지는 않았다. 행여나
정란의 아픈 곳을 건드릴까봐 걱정이
되었던 것이다.
"신랑은 소식이 있어요?"
정란이 은숙을 쳐다보며 물었다.
"아뇨. "
"우리 애기 아빠에게도 좀 알아 보라고
했는데 아무 소식이 없네요. "
"어떻게든 알아 지겠죠. "
은숙은 우울하게 대답했다. 문득
이정란의 남편 한경호라면 남편이 어디
잡혀가 있는지 알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이정란의 남편에게
직접 남편에 대한 소식을 묻고 싶지는
않았다. 한때 저녁식사까지 같이한 적이
있었으나 어쩐지 한경호와의 사이에는
커다란 벽이 가로막혀 있는 기분이었다.
은숙은 그후 이정란을 만나지 않았다.
오후가 되자 눈발이 그쳤다. 잿빛
구름장들이 걷히고 눈이 시리게 밝은
햇살이 쏟아졌다. 날씨도 포근하여 도심의
콘코리트를 덮고 있던 눈이 녹기 시작했다.
은숙은 8시에 퇴근했다. 청계천
피복공장은 대개가 아침 8시30분에 작업을
시작하여 밤 8시에야 작업이 끝났다.
은숙은 시내버스를 타고 안암동에서
내렸다. 버스정류장에서 집에까지 오는
주택가 골목도 눈이 녹아 질척거리고
있었다.
은숙이 집 앞에 이르자 가죽잠바를 입은
사내와 국방색 파커를 입은 사내가
기다리고 있었다.
"여기 사십니까?"
가죽잠바를 입은 사내가 은숙에게 다가와
말을 건넸다. 은숙은 공연히 가슴이
철렁했다. 그러나 사내의 말투가 공손하여
조금 안심이 되었다.
"네. "
은숙은 사내들을 천천히 살폈다. 어둠
속이라 자세히 보이지 않았으나 가죽잠바를
입은 사내는 서른 안팎으로 보였고 국방색
파커를 입은 사내는 초로()의
나이였다.
"우린 서()에서 나왔습니다. "
"서요?"
은숙은 어리둥절했다. 서라는 말을 처음
들어보았기 때문에 얼핏 무슨 말인지 알아
듣지 못했던 것이다.
"경기도 이천 경찰서 수사계에서
나왔습니다. "
"이천 경찰서요?"
은숙은 이천 경찰서가 어디에 있는지
알지 못하였다. 게다가 이천 경찰서에서
무엇 때문에 자신을 찾아 왔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얼핏 남편을 잡아간 경찰서가 이천
하는 생각이 들었으나 고개를
흔들었다. 사내들은 남편을 잡아간
사내들처럼 사나워 보이지 않았다.
"강한섭씨가 여기 살고 계시지요?"
"네. "
"강한섭씨와 어떻게 되십니까?"
"부인 되는데요. "
가죽잠바를 입은 사내와 국방색 파커를
입은 사내가 서로 얼굴을 마주보았다.
"강한섭씨 집에 안계시지요?"
"네. "
"언제 집을 나갔습니까?"
"왜 그러시는데요?"
"확인할 일이 있어서 그렇습니다. "
"한 두 달되었어요. "
"두 달이요?"
"네. "
"왜 집을 나갔습니까?"
"경찰에서 체포해 갔어요. "
"예?"
가죽잠바를 입은 사내가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얼굴을 찌푸렸다.
"무슨 일로 체포해 갔습니까?"
"몰라요. "
"체포당한 이유도 모른다는 말입니까?"
"그 사람들이 아무 말도 안했어요. "
"어느 경찰서 사람들인데요. "
"그것도 몰라요. "
"예?"
가죽 잠바를 입은 사내가 다시 얼굴을
찡그렸다. 그러자 국방색 파커를 입은
사내가 믿어지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은숙에게 다가왔다.
"남편에 대한 조사를 하는 겁니다.
사실대로 말씀하셔야 합니다. "
"사실대로 말하고 있는 거예요. "
은숙은 신경질적으로 말했다. 경찰이
잡아가고 또 다시 찾아 와서 남편에 대해
조사를 하고 있는 것이 짜증스러웠다.
"일단 들어가서 얘기 할까요?"
"좋아요. "
은숙은 이천에서 온 형사들을 데리고
거실로 들어왔다. 형사들에게 짜증이
났으나 남편을 잡아간 사내들처럼 무례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집이 좋군요. "
형사들이 거실을 살피며 말했다.
"네. "
은숙은 짧게 끊어서 대꾸했다.
"강한섭씨는 무엇을 하고 계셨습니까?"
"무엇을 하다니요?"
"직업 말입니다. "
"전직 신문기자였어요. "
"어느 신문사요?"
"중원일보요. "
"좋은 신문사군요. 참 전직이라고 했는데
그만 두었다는 말씀입니까?"
"지난 9월 달에 해직되었어요. "
두 형사가 입을 다물었다. 은숙은 문득
형사들이 무슨 말인지 하려고 하면서도
망설이고 있는 기색을 발견하고 불안해
졌다.
"경찰에서 연행해 간 뒤 돌아오지
않았습니까?"
"네. "
"이해가 안되는 일이군... 경찰에서
연행해 간 사람이 그렇게 발견되다니... "
"먼저 확인을 시켜 드려야지. "
국방색 파커를 입은 형사가 가죽잠바에게
눈짓을 했다. 이제는 더 이상 질질 끌지
말라는 눈빛 같았다.
"무슨 일예요?"
"어차피 아실 일이니까 말씀
드리겠습니다. 오늘 낮에 우리 관내의
양지면() 지서()에 변사체 발견
신고가 들어 왔습니다. 그래서 지서
순경들이 출동하여 가보니까 목을 매어
자살한 시체가 있었습니다. "
"...... "
"젊은 남자였습니다. 밧줄로 목을
매었는데 주민등록증이 있었습니다. "
가죽잠바를 입은 형사가 난처한 표정으로
계속 말을 했다. 늙은 형사는 고개를
돌리고 딴전만 쳐다보고 있었다.
"...... "
은숙은 형사들을 우두커니 쳐다보았다.
형사들이 무엇 때문에 그런 얘기를
자신에게 하고 있는지 납득이 되지 않았다.
"그 주민등록증이 강한섭씨의
것이었습니다. "
"네?"
"그래서 아까 낮에부터 찾아와 부인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입니다. "
"우리 남편은 경찰에서 체포해
갔어요!남편일 리가 없어요!"
은숙은 날카롭게 소리를 질렀다. 마치
둔탁한 흉기로 뒤통수를 세차게 얻어맞은
기분이었다.
"일단 확인을 하도록 하십시오.
국방색 파커를 입은 형사가 위로하듯이
낮게 말했다. 그러나 은숙은 그 말이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우리도 그 시체가 강한섭씨의 것이라고
확신하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주민등록증이 나왔으니 일단 확인을 하자는
거죠. "
"좋아요. 가서 확인을 해요. "
은숙은 경기도 이천에서 죽은 사내가
남편일 까닭이 없다고 생각하면서도 가슴이
격렬하게 뛰었다. 남편이 목을 매어 자살할
이유도 없거니와 남편은 경찰서에서
나왔다는 사내들이 잡아간 것이다. 남편이
그 사람들에게서 풀려났다고 해도 집에
돌아오지 않고 경기도 이천까지 가서 죽을
까닭이 없는 것이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불길한 생각이 뇌리를 엄습해 왔다.
(그럴 리가 없어!)
은숙은 불길한 생각을 떨쳐 버리기라도
하듯이 세차게 고개를 흔들었다. 남편의
죽음은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가족은 또 없습니까?"
"없어요. "
"그럼 준비하시죠. "
"준비할 것도 없어요. 이대로 가면 돼요.
"
은숙은 몸이 후들후들 떨렸으나 형사들을
따라 집을 나섰다. 형사들은 말없이 은숙을
안내하여 검은 승용차에 태웠다.
겉보기에는 깨끗했으나 이미 수명이 다한
낡은 승용차였다. 시동도 오래 걸렸고
승용차가 주택가 골목을 빠져나가기
시작했을 때도 차가 털털거렸다.
형사들은 차가 서울시 경계를 벗어날
때까지 입을 꾹 다물고 있었다.
은숙도 입을 열지 않고 차창으로
흘러가는 어두운 밤풍경만을 내다보고
무수한 생각이 머릿속을 스쳐 오고
또 스쳐 가고 있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경찰에서 연행해
갔다는 것이 이해가 되지 않는군요. "
형사들이 입을 연 것은 30분쯤 지났을
때였다.
"분명히 경찰에서 나왔다고 그랬어요. "
"사복을 입고 있었나요?"
"네. "
"몇 사람이나 되었지요?"
"다섯 명인가 여섯 명인가 그랬어요. "
"경찰에 알아보기는 했습니까?"
"서울 시내 모든 경찰서에 다 알아
봤는데 남편을 연행한 일이 없대요. "
"그럼 기관인가?"
"기관이라니요?"
"대공 담당을 하고 있는 군부대
수사기관이나 정보기관을 말하는 것입니다.
"
"그들은 경찰이라고 했는데요?"
"그거야 아무렇게나 둘러댈 수 있지요. "
은숙은 고개를 끄덕거렸다. 형사들의
말을 듣고 보니 남편을 연행해 간 사람들이
기관원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빠르게
뇌리를 스쳤다.
"부군이 시국 사건으로 수배를 당한 일은
있었습니까?"
가죽 잠바의 사내가 다시 물었다.
"수배를 당한 일은 없었어요. "
"그럼 그쪽에 관계한 일은 있었나요?"
"네. "
"그럼 기관에서 연행해 간 것이 분명한
모양인데... "
가죽 잠바의 형사가 백미러로 뒤를
본퓔중얼거렸다.
"공연히 단정하지 마!"
가죽 잠바 옆에 앉은 국방색 파커의
형사가 꾸중을 하듯이 낮게 말했다.
"부군이 신분증을 잃어버린 일이
있나요?"
"어떤 신분증이요?"
"주민등록증이요. "
"주민등록증은 항상 집에 두고 다녔어요.
"
"지금도 집에 있습니까?"
"네. "
"...... "
"있을 거예요. "
은숙은 확실치 않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남편의 주민등록증은 언제나 남편의 서재
오른쪽 서랖에 들어 있었다. 그것은 남편이
정체불명의 사내들에게 연행 당해 간 날도
서랖에서 빠져 나와 방바닥에 나뒹굴고
있는 것을 은숙이 다시 주워 서랖에 넣어
두었었다. 그런 까닭으로 주민등록증은
아직도 남편의 서재에 있는 서랖 속에 있을
터였다.
"어떻게 아시죠?"
"남편이 연행 당했을 때 그 사람들이
집을 수색했어요. 그때 남편의 서랖 속에
있는 주민등록증이 방바닥에 나뒹굴었어요.
그 사람들이 남편을 연행해 간 뒤에 제가
그걸 주워서 서랖 속에 다시 넣어 두었기
때문에 기억해요. "
"그것 참... "
가죽 잠바를 입은 사내가 고개를
갸우뚱했다.
"왜요?"
"이천에서 발견된 시체의 주머니에
주민등록이 있었거든요. "
"어떻게 그런 일이 있어요?"
"확실합니까?"
"네. 확실해요. "
"우리가 주민등록증을 확인할 걸
그랬나?"
가죽 잠바를 입은 형사가 도무지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국방색 파커의 형사를
쳐다보았다. 그 형사는 아까부터 후론트
그라스로 차창으로 스쳐 가는 밤풍경만
내다보고 있었다. 승용차가 서울
시계()를 벗어나면서 차창을 스치는
풍경은 눈 쌓인 야산과 들판으로 바뀌어
있었다.
차는 길이 빙판길로 변해 있어서
느릿느릿 달리고 있었다.
은숙은 차창을 스치는 어두운 밤풍경을
내다보면서 오늘 일어난 일을 생각하기
시작했다. 남편이 죽었다는 사실을 믿을
수가 없었다.
그런데 어떻게 하여 남편의 주민등록증이
경기도 이천에 있는 양지면의 야산에 있는
것일까. 혹시 주민등록증은
동명이인()의 것이 아닐까.
그래,동명이인이 분명할 거야. 경찰에
잡혀간 남편이 거기까지 가서 목을 매어
죽을 이유가 없어.
허지만 만약에 그 시체가 정말로
남편이라면 나는 어떻게 하지?내 뱃속에는
그 이의 아기가 있는데... 아니야. 그럴
리가 없어. 죽은 사람은 분명히 남편이
아닐 거야...
그러나 은숙의 머릿속에서 불안감은 더욱
커지고 있었다.
승용차가 이천에 도착한 것은 거의
자정이 가까운 시각이었다. 형사들은
승용차가 이천에 도착하자 곧 바로
읍내에서 한참 떨어진 변두리에 있는
병원으로 승용차를 몰았다. 양지면 지서에
있는 순경들이 시체를 이천병원의 영안실로
옮겨 놓았다는 것이었다.
"너무 긴장하지 마세요. "
가죽 잠바의 형사가 은숙을 병원
영안실로 안내하며 위로했다. 은숙은 몸을
가늘게 떨고 있었다.
"좀 춥지요?차가 워낙 고물이라... "
"괜찮아요. "
은숙은 엷은 미소를 지었다.
병원 영안실은 지하에 있었다. 희미하고
창백한 불빛이 밝혀져 있는 병원 복도를
지나가자 병원 지하실로 내려가는 층계가
나왔다. 지하실은 어둠컴컴했다. 그러나
생각보다 넓은 영안실에는 이미 빈소가
하나 차려져 있어 사람들이 여기저기 모여
두런거리며 얘기를 나누고 있었다.
그러나 아무도 슬퍼하지 않고 있었다.
은숙은 사람들이 슬퍼하지 않는 것이
이상했다.
"교통사고 환자인 모양예요. "
가죽 잠바의 형사가 다시 말했다.
병원의 시체들은 영안실 바로 옆에 있는
시체안치실에 있는 스테인레스 서랖
관()에 안치되어 있었다. 가죽 잠바의
형사가 영안실 관리인에게 무어라고 낮게
말하자 관리인이 은숙을 힐끗 쳐다보고는
냉동실 서랖을 열었다.
시체안치실은 시체를 염()하기도
쩝냉동박스 반대편 벽으로
수의()로 쓰는 베옷들이 여기저기 걸려
있었다.
관리인이 냉동관을 끌어내었다. 은숙은
냉동관 가까이 다가갔다. 가슴이 뛰고
다리가 후들거렸다.
"확인하세요. "
관리인이 뒤로 한 걸음 물러섰다. 은숙은
냉동관으로 바짝 다가섰다.
아...
은숙은 입을 반쯤 벌리며 짧게
부르짖었다.
갑자기 목이 꽉 메이고 가슴이 터질
것처럼 답답했다. 은숙은 마른 침을 꿀꺽
삼켰다.
냉동관에는 하얀 천에 덮인 강한섭이
반듯하게 누워 있었다. 눈은 감고 있었으나
얼굴은 창백하다 못해 푸르스름한 빛을
띠고 있었다.
(이건 꿈이야... )
은숙은 손바닥으로 입을 틀어막으며
강한섭의 시체를 몇 번이나 들여다보았다.
이것은 꿈이다,꿈이 아니면 강한섭이 죽은
것이 아니라 죽은 것처럼 잠들어 있는 것에
불과할 것이다...
은숙은 속으로 그런 생각을 무수히 했다.
그러나 냉동관에 들어 있는 시체는 아무리
살펴도 남편 강한섭이 분명했다.
은숙은 갑자기 눈시울이 시큰해지면서
뜨거운 것이 얼굴을 타고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은숙은 그때서야 관을 붙들고
몸부림을 치며 오열하기 시작했다.
2
-
밤이 점점 깊어 가고 있었다.
아직도 새벽이 오려면 먼 것인가.
은숙은 병원의 복도에 있는 밴취에
앉아서 캄캄한 어둠이 만또자락처럼
펄럭이고 있는 바깥을 응시했다.
남편이 죽었다.
남편이 목을 매어 자살했다.
도대체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는
것일까. 남편이 자살을 했다면 누가 믿을
것인가. 자살이 아니라 살해되었다고 해도
서른도 안되는 삶은 너무나 짧지 않은가.
그에게는 사랑하는 아내가 있고 머지 않아
태어날 아기가 있다. 그런데 무엇 때문에
죽는다는 말인가.
불빛이 희끄무레한 복도를 걸어오는
구두발자국 소리가 들렸다. 가죽 잠바의
형사가 자판기에서 커피를 뽑아 가지고
가까이 왔다.
"이제 좀 진정이 되십니까?"
"네. "
"사인은 경부압박질식사입니다. "
"그게 무슨 뜻예요?"
"목을 매어 자살했다는 뜻입니다. "
"그이는 자살할 까닭이 없어요. "
"진정하세요. "
형사가 다시 차분하게 말했다.
"진정했어요. "
은숙은 낮게 고개를 숙였다. 남편의
죽음을 확인했을 때 처음엔 눈물만
흘렸으나 다음엔 관을 붙들고 소리를 내어
울부짖는 바람에 관리인이 달려오고 형사가
쫑아 왔었다. 그러나 그들은 은숙이 싫컷
울도록 자리를 비켜 주었었다. 관리인과
형사가 와서 은숙을 복도로 끌어낸 것은
은숙이 울다가 지쳐서 시체안치실 바닥에
주저앉아 있을 때였다.
"가족들에게 연락을 하셔야지요. "
"누구에게요?"
은숙은 소매 깃으로 눈물을 닦으며
입술을 깨물었다. 남편의 친척들에게
연락을 해야 한다고 생각했으나 가까운
친척들이 머리에 떠오르지 않았다.
"강한섭씨의 친척들이 있을 거
아닙니까?"
"시댁 부모님들이 돌아가셔서 가까운
친척들이 없어요. "
형사가 어깨짓을 으쓱했다. 그럼 어떻게
할 거냐는 뜻이었다. 은숙은 아무 대꾸도
하지 않고 발 끝만 내려다보았다.
"장례를 치루셔야지요. "
"네. "
"혼자서 장례를 치르시렵니까?"
"...... "
은숙은 대답을 하지 않았다. 남편의
장례를 어떻게 혼자 치른다는 말인가.
그러나 누구에게 도움을 청해야 할지
막막했다.
"혼자서 장례를 치르시겠다면 저희가
도와 드리지요. "
가죽 잠바를 입은 형사가 은숙을
위로했다.
"...... "
"부인도 충격이 크실 테니 빨리 장례를
치르고 쉬시는 게 좋을 겁니다. "
"...... "
"그렇게 하시겠습니까?"
"네. "
8 은숙은 고개를 끄덕거렸다. 가죽 잠바를
입은 형사의 말이 옳은 것 같았다. 이제
와서 장례를 요란하게 치를 필요는 없다.
게다가 장례를 어떻게 치러야 할지
막막하기만 하지 않은가.
"그럼 여기에 서명을 하시지요. "
형사가 은숙에게 서류 한 장을 내밀었다.
"이게 뭐예요?"
"장례를 저희에게 일임한다는
위임장입니다. 거기 서명란이 있으니
이름만 쓰십시오. 도장은 저희들이 하나
새겨서 찍을 테니까요. "
"네. "
은숙은 형사가 내민 서류에 이름을 썼다.
"그럼 조금 있다가 뵙겠습니다. "
형사가 고개를 꾸벅하고 복도 끝으로
사라졌다. 은숙은 형사가 놓고 간 커피
잔을 집어들었다. 커피는 이미 싸늘하게
식어 있었다. 그러나 은숙은 차가운 커피를
음미하듯이 천천히 마셨다.
(내가 정말 꿈을 꾸고 있는 것이
아닐까?)
은숙은 아직도 남편의 죽음이 믿어지지
않았다. 이상한 일이었다. 남편이
금방이라도 복도 저쪽에서 환하게 웃으며
다가올 것 같기도 했고 남편이 바로 옆에
앉아 있는 것 같기도 했다.
은숙은 밴취에서 일어나 영안실로
향했다. 교통사고로 죽었다는 사람의
빈소가 차려진 영안실은 새벽이 되면서
더욱 쓸쓸해지고 있었다. 그러나 가족들인
듯 베옷을 입은 남자들은 술상을 놓고 앉아
술을 마시고 있었고 소복을 입은 여자들은
둘러앉아서 한담을 나누고 있었다. 죽음에
슬픔이나 긴장이 사라졌기 때문인지
여자들은 가볍게 소리를 내어 웃기까지
하고 있었다.
"저... 수의가 좀 있을까요?"
은숙은 관리인에게 찾아가 물었다.
어쩐지 남편을 위해 소복이라도 입어야 할
것 같았다.
"예. "
관리인이 졸리운 표정으로 대답했다.
"이리 오세요. "
관리인이 은숙을 시체안치실로 안내했다.
그리고는 서랖에서 깨끗한 소복을 한 벌
꺼냈다.
"제일 좋은 겁니다. "
"...... "
"정() 형사님이 제일 좋은 수의로
드리라고 했습니다. "
"정 형사가 누구예요?"
"같이 오신 형사님이요. "
은숙은 고개를 끄덕거렸다. 가줌 잠바를
입은 형사의 성이 정인 모양이었다.
"날이 밝으면 장례를 치른다고 하더군요.
조금 후에 염을 하려고 합니다. "
관리인이 밖으로 나갔다. 은숙은 소복을
갈아 입으려다가 멈칫했다. 남편의 시체에
염을 하면 다시는 볼 수 없다. 남편을 다시
한 번 보려면 지금이 가장 적절한 때가
아닌가. 마침 시체안치실에는 아무도
없었다. 설령 누가 있다고 하더라도 남편의
시체를 본다는데 누가 뭐라고 하겠는가
하는 생각을 하자 다소 안심이 되었다.
은숙은 냉동실 서랖을 잡아 당겼다.
서랖은 의외로 쉽게 열렸다.
남편은 마치 잠든 듯이 죽어 있었다.
y얼굴이 희고 창백한 것 외에는 죽었다는
것이 믿어지지 않을 정도였다. 은숙은
남편의 얼굴에 손을 가져가 보았다. 남편의
얼굴은 약간 차가울 뿐 싸늘하지는 않았다.
(죽은 것 같지가 않아... )
은숙은 남편이 죽은 체 하고 있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남편의 전신을 덮고 있는
흰 천을 조금 벗겼다. 남편은 나신이었다.
마치 쎈스를 하고 나서 기분좋은 피로감에
젖어 잠이 든 듯 남편은 평화로운 표정으로
죽어 있었다.
심장은 전혀 뛰지 않았고 손목에도 맥이
없었다. 남편은 죽은 것이 분명했다.
그러나 남편의 몸 여기저기에 상처가
있었다. 은숙은 얼굴을 찡그렸다. 남편의
나신에 뱀이 기어가듯 흉칙하게 달라붙어
있는 상처가 기분이 좋지 않았다.
(왜 이런 상처가 있는 거지?)
은숙은 의아했다. 그러나 상처에
대해서는 더 이상 생각하지 않았다. 이제
날이 밝으면 남편을 산에 묻으면 남편을
다시 볼 수 없다는 생각에 또 다시 눈물이
주르르 흘러내렸다.
은숙은 남편의 시체에 다시 흰 천을
덮었다. 그리고 오랫동안 죽은 남편의
얼굴을 내려다보았다.
"여보... "
은숙은 살아 있는 사람에게 말을 하듯이
낮게 중얼거렸다. 그러나 남편은 대답이
없었다. 어차피 대답을 기대하고 부른 것도
아니었다. 그러나 은숙은 대답도 없는
남편이 야속해 다시 울음이 터져 나왔다.
은숙은 10분쯤 지나서 시체안치실을 나와
현관으로 향했다. 남편을 생각하면
하숙집을 떠나
런던에서 규칙적으로 왕래했생각할수록 자꾸 눈물이 비어져 나왔다.
은숙은 현관 앞에서 잠시 망설였다. 어디로
가야할 지 무엇을 해야할 지 선뜻 판단이
서지 않았다. 병원 현관은 조용했다.
이따금 당직 간호원들이 주사기가 담겨
있는 작은 쟁반을 들고 왔다갔다 했으나
환자들은 잠을 자고 있는지 현관 주위에
얼씬도 하지 않았다.
문득 현관 옆에 공중전화가 보였다.
은숙은 그때서야 친정 식구들에게 전화를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주머니를 뒤지자
동전이 나왔다.
수화기를 들고 동전을 넣었다. 이내 뚜
하는 신호음이 울렸다. 은숙은 다이얼을
돌렸다. 이 시간이라면 어머니가 일어났을
것이다. 병원 현관 벽에 걸린 벽시계가
벌써 5시30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그러나
한겨울이라 사방은 아직도 캄캄했다.
"여보세요. "
철컥하고 수화기를 드는 소리가 들린
뒤에 어머니의 낮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엄마... !"
은숙은 어머니의 목소리가 들리자 자신도
모르게 울음이 터져 나왔다.
"무슨 일이야?"
어머니가 깜짝 놀라서 소리를 질렀다.
"엄마!"
"그래,진정하고 차분하게 말하여라. 너희
아버지 바꿔 줄까?"
"그이가 죽었어요!"
"강 서방이 죽어?무슨 영문인지
모르겠구나... 알아듣게 말하려무나. "
어머니의 목소리가 떨리기 시작했다.
"그이가 목을 매어 자살했단 말예요!"
은숙은 전화를 걸다 말고 소리를 내어
울었다. 그러자 어머니가 얘가 왜 이래?얘
제발 정신 좀 차려... 하는 어머니의
목소리에 이어 아버지 바꿀께... 하더니
아버지가 전화를 바꾸었고 거기
어디냐,하는 아버지의 다급한 외침이
들려왔다. 은숙은 울부짖듯이 이천
병원이라고 말하였다. 그러나 그 다음은
무슨 말을 했는지 기억할 수가 없었다.
아버지가 우리가 곧 가마,하는 소리를 한
뒤에 어머니를 바꾸어서 은숙은 전화기에
대고 또 울음을 터뜨렸던 것이다.
은숙이 한참이 지나서 수화기에 귀를
기울이자 전화가 이미 끊겨 있었다.
은숙은 주먹으로 눈물을 씻고 밖으로
향했다.
현관문을 열고 밖으로 나오자 차가운
8냉기가 얼굴로 엄습해 왔다.
은숙은 병원 정원을 걸었다. 시골
병원이라 그런지 병원이 꽤 널찍했다.
그러나 정원수들은 앙상하게 헐벗고 있었고
정원엔 흰 눈이 하얗게 쌓여 있었다.
날씨는 포근한 편이었다. 밤인데도 눈이
녹고 있는지 낙수 소리가 들렸다.
병원을 나섰다.
한기가 은숙의 몸으로 차갑게 엄습해
왔다.
은숙은 계속 걸었다. 딱히 어디로 갈
의향은 아니었으나 죽음이 있는 곳에서
멀리 떨어지고 싶었다.
병원 정문을 나서자 금세 들판이
펼쳐지고 있었다. 역시 하얗게 눈이 쌓인
들판이었다. 이천병원은 신축 병원이라
읍내에서 멀리 떨어진 야산 기슭에 있었다.
(여보!)
은숙은 벌판을 향해 입 속으로 중얼거려
보았다. 어디선가 남편의 목소리가
암암하게 들릴 것만 같았다.
3
한경호는 입맛을 다시며 허공을 우두커니
쳐다보았다. 허 실장이 의도한대로
언론통폐합이 이루어지고 언론기본법까지
제정되어 언론대책은 완전히 마무리된
셈이었다. 그러나 뜻밖에 강한섭 의문사
사건이 터져 정초의 정국을 어수선하게
하고 있었다.
이제는 1981년이었다.
언론통폐합이 이루어지고 언론기본법이
마무리되면서 한경호도 근무처를
보안사에서 청와대 사정비서관으로 옮겼다.
정치에 투신하려면 무엇보다 경력이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1980년은 전두환 국보위 상임위원장이
제11대 대통령에 취임하고
입법회의()가 제5공화국 헌법을
제정 공포하므로써 저물었다. 그러나
1980년의 대미를 장식한 것은 아무래도
언론통폐합이라고 할 수 있었다.
입법회의는 10월27일 국보위가 국회를
대신할 입법기관으로 설치했었다. 전두환
대통령은 10월28일 입법의원 81명을
임명했는데 의장엔 이호(),부의장에
정래혁(),채문식()을
선출하였다.
입법회의는 입법기관으로 설치되었으나
국보위 위원들이 대거 임명되어 새로운
권력의 통치를 공고하게 하는 입법을
거수기처럼 양산했다.
특히 입법회의는 사회정화위원회를
국무총리 직속으로 발족시키고 정치풍토
쇄신을 위한 특별조치법과. 언론기본법을
통과시키므로써 많은 정치인들과
언론인들에게 한숨과 눈물을 자아내게
하였다. 11월12일 정치쇄신위원회는
정치규제자 811명의 명단을 발표했고
언론통폐합에 들어갔다.
언론통폐합은 보안사령부가 그 실행을
맡았다. 11월12일 정부가 정치규제자
명단을 발표하여 신문이 그 기사로 전면을
할애하고 있을 때였다.
각 언론사의 사주()들은 오후
5시에서 6시 사이 보안사 수사관들의
방문을 받았다. 중앙일보 홍진기()
;회장은 5시가 조금 넘었을 때 수사관들의
방문을 받았다.
"보안사령관님께서 잠시 모셔 오랍니다.
"
수사관들은 홍 회장에게 깍듯이 경례를
했다. 홍 회장은 수사관들의 경례를 받고
회장실 창으로 거리를 내려다보았다.
거리는 이미 어둑어둑하게 저물고 있었다.
11월이라 해가 짧았다. 중앙일보가 있는
서소문의 빌딩 숲도 해가 기울면서 먹물
같은 어둠이 밀려오고 있었다.
"무슨 일이오?"
홍 회장은 등을 돌린 채 수사관들에게
물었다. 어쩐지 기분이 좋지 않았다.
"저희는 모르는 일입니다. "
홍 회장은 입맛을 다셨다. 보안사령관이
언론사 회장을 오라 가라 하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으나 그들의 비위에 거슬리면
어떤 수모를 당할지 알 수 없었다.
"무슨 일인지도 모르고 언론사 회장을
부른다는 말이오?"
"아마 간담회가 있을 모양입니다. "
보안사 수사관이 퉁명스럽게 대꾸했다.
그들의 위압적인 말투에 홍 회장은 얼굴을
찌푸렸다. 수사관은 간담회가 있을
모양이라고 했으나 간담회 같지는 않았다.
"알았소. "
홍 회장은 보안사 수사관들을 따라
나섰다. 굵직굵직한 정치인들이 보안사에
끌려가 수모를 당하는 시절이라 내심
불안했으나 다행히 자신의 승용차를 타고
가게 해주었다.
홍 회장은 10분도 안되어 보안사령부에
도착했다. 헌병들이 보초를 서는 정문을
(지나 사령부 건물에 도착하자 경비가
삼엄한 것을 볼 수 있었다.
사령부 복도는 어둠침침했다. 홍 회장은
공연히 뒷골이 서늘해지는 것을 느끼며
안내하는 수사관들을 따라 2층으로 올라가
작은 방으로 들어갔다. 그 방에는 정복을
한 대령이 기다리고 있었다.
"어서 오십시오. "
대령이 경례를 했다. 홍 회장은 고개를
끄덕해 인사를 받았다.
"모시게 되어 영광입니다. 이 대령이라고
불러 주십시오. "
"반갑소. "
홍 회장은 대령과 악수를 했다.
"우선 좀 앉으십시오. "
대령이 책상 앞에 있는 의자를 가리켰다.
홍 회장은 대령이 가리키는 의자에 앉았다.
홍 회장의 맞은 편에 앉았다.
"사령관의 면담이 있다고 해서 왔는데...
"
"사령관님은 바쁜 일이 있어서 오시지
못합니다. "
"그래요?"
"제가 사령관님을 대신하여 일을
처리하겠습니다. 양해해 주십시오. "
"일이오?"
홍 회장은 의혹이 가득한 눈빛으로
대령을 쳐다보았다.
"이미 알고 계시겠지만 대통령
각하께서는 언론 통폐합에 관심이
많으십니다. 우리 나라에는 방송이 너무
많기 때문에 방송 공영화 정책을 추진하고
계시지요. 단도입적으로 말씀드리면 TBC를
KBS에 통합시켜 공영 방송을 만들려는
"
"...... "
"회장님께서는 대통령 각하의 정책을 잘
알고 계시니 포기 각서에 혼쾌히
서명하시리라 믿습니다. "
"TBC를 포기하라는 말씀이오?"
홍 회장은 가슴이 철렁하여 대령을
쏘아보았다. 얼마 전부터 언론통폐합에
관한 소문이 떠돌고 있었으나 그것이
방송국을 포기하라는 것이리라고는 상상도
할 수 없었다.
"아시다시피 개혁기입니다. "
"...... "
"이런 시기엔 처신을 잘 하셔야 합니다.
"
대령의 얼굴은 냉랭했다. 처신을
잘하라는 것은 완전히 위협이었다.
"서명하십시오. "
대령이 볼펜과 포기 각서를 홍 회장
앞으로 내밀었다.
"이것 봐요. "
"말씀하십시오. "
"우리 동양방송은 TV와 라디오 모두
국민들에게 상업방송으로 각인되어 있소.
그런데 하루 아침에 인수하여 공영
방송으로 만든다는 말이오?"
"서둘러 서명하십시오. 우리는 업무가
바쁩니다. "
대령이 꼿꼿이 고개를 들고 재촉을 했다.
"왜 하필이면 우리 TBC요?"
"상업방송은 모두 폐지됩니다. "
"그럼 동아방송도 폐지되는 거요?"
"그렇습니다. "
"나는 서명할 수 없소. "
"무슨 말씀입니까?"
대령의 눈빛이 날카로워 졌다. 그는
딱딱하게 굳어진 얼굴로 홍 회장을
노려보고 있었다.
"나는 사주가 아니오. "
"...... "
"그리고 우리 TBC는 개인의 것이 아니라
주식회사이기 때문에 주주총회를 열어서
결정해야 합니다. "
"우린 그건 것 모릅니다. 개혁기이기
때문에 한다면 하는 겁니다. 빨리
서명하십시오. 서명하지 않으면 수모를
당하게 되고 여기서 나가지 못하십니다. "
"내가 서명을 해도 소용이 없소. 우리
TBC의 실질적인 사주는 이병철()
회장이기 때문에 나는 아무 권한이 없소. "
"뭐요?"
대령이 책상을 쾅 하고 쳤다. 그리고는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해져 홍 회장을
쏘아보다가 밖에서 대기하고 있던
수사관들을 불렀다.
"야!삼성그룹 이병철 회장 데리고 와!"
홍 회장은 눈을 질끈 감았다. 이병철
회장은 기업가로 한국에서는 독보적인
존재였다. 일개 대령이 아무 예우도 하지도
않고 함부로 데리고 오라고 소리를 지르는
것을 감당할 수가 없었다.
이병철 회장이 보안사령부로 들어온 것은
20분쯤 지났을 때였다. 이병철 회장은
대령과 홍 회장의 얘기를 듣고는 얼굴이
흙빛으로 변했다. TBC는 이 회장이
삼성그룹 산하의 어떤 기업체보다 남다른
애정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포기 각서를
써야 하는 것이 애석했다. 그러나
중앙일보는 통폐합에서 제외된다는 다짐이
있자 서명을 하게 되었다.
동아일보는 김상만() 회장과
이동욱() 사장이 보안사령부로
불려가 3시간의 실랑이 끝에 서명을 하고
말았다.
한국일보는 장강재() 회장이
불려가 경제지 가운데 가장 인기를 끌고
있던 서울경제신문의 포기 각서를 썼다.
서울경제신문은 한국일보의 자매지였다.
이날 밤 보안사는 서울 지역 13개
언론사의 발행인들과 경영주 17명으로부터
포기 각서를 받아 냈다.
언론사 발행인들과 경영주들은 각자의
언론사로 돌아가 울분을 토로했다. 이들은
보안사에서 오늘 밤 있었던 일을 외부에
발설하지 않는다는 각서를 썼으나 도저히
분노와 울분을 참을 수가 없어서
임원들에게 그 사실을 알렸고 임원들은
기자들에게 알렸다. 임원들과 기자들은
세간에 떠돌던 언론통폐합설이 사실로
확인되자 비통함을 감추지 못했다.
그들은 각 언론사들이 자주 가는
술집으로 몰려가 신군부의 폭압적인
언론정책을 개탄했다. 그러나 아무 소용이
없는 일이었다.
언론통폐합은 신군부의 통제아래
강압적으로 이루어져 11월 24일엔 지방지인
경남일보()가 종간()되고
11월25일엔
신아일보(),서울경제신문,내외경제
,영남일보,시사통신,경제통신,산업통신,무
역통신 등이 차례로 문을 닫았다.
그러나 서울경제신문은 11월25일
종간호를 내면서도 굽히지 않는 언론의
기능을 강조하여 눈길을 끌었다.
... 시대는 변한다. 그러나 진리는
변하지 않는다...
서울경제신문은 '한국 경제의 과제와
선택'이라는 연재기사를 통해 아무리
군부가 언론을 탄압해도 굽히지 않을
것임을 간접적으로 선언하여 언론인들의
눈시울을 붉혔다.
언론인들은 신군부의 감시가 칼날
같은데도 나름대로 저항을 하고 있었다.
방송은 11월30일 종방()을 하게
되었다. 기독교방송인 CBS는 보도 기능이
중지되어 11월25일 정오에 마지막 뉴스를
방송했는데 아나운서가 슬픔이 복받쳐
울음을 터뜨리게 되었다. 이에 보안사는
보도지침을 내려 종방에 대한 검열을 더욱
철저하게 하였다.
그러나 방송의 검열은 그들의 뜻대로만
이루어지지 않았다. 동양방송인 TBC는
11월30일 아침 9시30분부터 2시간 동안
고별방송을 했는데 가수 이은하()가
방송중에 울음을 터뜨리는 사건도
발생했다. 그로 인해 이은하는 3개월 동안
방송 출연정지를 당했고 그 후엔 이은하가
노래를 부를 때 취하는 제스처가 간첩과의
접선 신호라는 고약한 루머에까지 시달리게
되었다.
동아방송은 11월25일 정오에 마지막
뉴스를 내보냈다. 우제근()
아나운서와 현옥() 아나운서는
처음부터 울먹이는 목소리로 고별 뉴스를
나갔다.
... 1980년 11월30일 동아방송 정오
뉴스입니다...
그들은 전례 없이 뉴스 시작에 앞서
연도와 날짜까지 서두에 넣어서 이 날의
뉴스에 역사성을 부여했다. 동아방송의
마지막 뉴스를 애청자들에게 영원히 각인
시키기 위한 그들의 염원이었다.
... 오늘 정오 뉴스는 저희 동아방송이
청취자 여러분에게 전해 드리는 마지막
뉴스입니다. 저희 동아 방송은 오늘 정오
뉴스를 끝으로 그 동안 여러분의 사랑을
받아온 보도방송을 모두 마치며 오늘 밤
12시를 기해 동아방송 18년의 역사를
끝내고 여러분 곁을 떠납니다...
동아방송의 마지막 뉴스는 우제근
아나운서 차장의 침통한 목소리와 현옥
아나운서의 울먹임으로 비통한 분위기
속에서 계속되었다.
... 저희 동아방송은 이제 18년의 역사를
매듭 짓고 문을 닫습니다. 우리의 내외
환경과 여건,그리고 저희들의 역부족으로
애청자 여러분의 기대와 여망에 충분히
부응하지 못한 점도 없지 않았으며...
검은 상복()을 입은 현옥 아나운서의
맑은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마지막 뉴스를 지켜보는 동아방송의 보도국
전 직원들의 눈자위도 차츰차츰 붉어졌다.
그들은 약속이나 한 듯이 검은 양복을 입고
출근해 있었다.
... 이 점에 대해 송구스러움을 간직한
채 청취자 여러분께 아쉬운 작별을
고합니다. 그러나 그 동안 동아방송은 우리
나라 언론사에 뚜렷한 발자취를 남겼다고
믿으며,정의와 자유,그리고 언제나 민중의
편에 섰던 동아의 소리는 청취자 여러분의
가슴 깊이 영원하게 살아남을 것으로
확신합니다. 만나면 언젠가는 헤어지게
마련이며...
우제근 아나운서의 눈에서도 뜨거운
눈물이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현옥
아나운서는 입술을 깨물었다. 자꾸 울음이
터지려고 하여 입술을 깨물지 않으면
"뉴스를 진행할 수 없었다. 방송실의
유리창으로 마지막 뉴스를 방송하는 것을
지켜보던 동아방송 직원들도 입술을 깨물며
울음을 참고 있었다.
... 헤어질 땐 다시 만날 것을 기약하고
싶은 것이 인간의 솔직한 심정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오늘의 이 헤어짐이 국가의
발전과 민족의 번영에 기여하는 하나의
계기가 되기를 마음 깊이 기원하고 싶을
따름입니다. 그 동안 동아방송을 아껴 주신
여러분의 가정에 영광과 행복이 함께
하시기를 기원합니다. 청취자
여러분,감사합니다...
마지막 뉴스를 울음 섞인 목소리로 마친
현옥 아나운서가 책상에 엎드려 울음을
터뜨렸다. 우찬제 아나운서는 손수건을
꺼내어 눈물을 훔쳤다.
윤형중(형) 보도국장은 침통한
표정으로 줄담배를 피우다가 직원들에게
고별인사를 했다. 일요일이었다. 동아방송
전 직원들은 12월1일자로 KBS로 옮겨 가게
되어 있었다. 날씨는 가을비라도
뿌리려는지 잔뜩 흐려 있었다.
동아방송에서 내다보이는 태평로와 종로1가
일대가 잿빛으로 우중충했다.
고별인사를 하는 윤형중 보도국장의
목소리는 목이 메어 몇 번이나 중단되었다.
그러나 윤 국장은 끝까지 인사를 마친 뒤에
만세 삼창을 제안했다.
"동아방송 만세!"
윤 국장이 선창을 하자 직원들이
울먹이며 만세를 불렀다. 세 번째 만세를
6부를 때는 직원들도 모두들 울음을
터뜨렸다. 세 번째의 만세는 절규처럼
처절했다.
마침내 언론통폐합이 신군부의 의도대로
마무리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강한섭 의문사 사건이 신군부를
난처하게 하고 있었다. 강한섭의 부인
채은숙이 명동성당과 외신기자들에게
남편의 죽음을 규명해 달라는 요구를
하면서 언론대책반의 실질적인 책임자였던
한경호도 난처하게 되었던 것이다.
강한섭의 의문사 사건은 한경호가
언론대책반에 있을 때 터진 사건이었다.
강한섭은 시국사건 수배자들을 숨기고
있었을 뿐 아니라 광주사태 사진을
외신기자들에게 제공하여 국위를
실추시키고 있었다.
당국에서 강한섭을 체포하여 조사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러나 남영동
대공분실의 수사관들은 강한섭을 가혹하게
취조하여 결국은 강한섭을 죽음으로 이끌고
말았던 것이다.
(정말 강한섭이 자살한 것일까... ?)
한경호는 그 점이 의아했다. 강한섭
사건이 처음 터졌을 때 각 언론사에
보도지침을 내려 강한섭 사건을 보도하지
말라고 지시를 했었다. 그러나 방송사들은
보도지침에 따랐으나 신문사들은 지침을
따르지 않고 보도를 해버렸던 것이다.
보안사의 언론 통제에 신문사들이 강하게
반발하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그러나 강한섭의 의문사를 신문사들이
속시원하게 밝힐 수 없는 일이었다. 신문은
강한섭의 의문사라고만 규정했을 뿐이었다.
( 의문사는 대한민국이 건국된 이래 줄곧
있어온 일이었다. 해방 직후엔 암살사건이
꼬리를 물고 일어났고 제1공화국과
제2공화국 때는 의문사가 사회적으로
이슈화되지는 않았으나 제3공화국 때의
대표적인 의문사 사건인
사상계()편집자인 장준하()
의문사 사건은 재야의 반발과 집요한
추적으로 세인들의 비상한 관심을
끌었었다.
강한섭의 의문사는 새삼스럽다고 할 수
없었다. 그러나 강한섭의 의문사에는
한경호도 관련이 되어 있어서 여간 난처한
일이 아니었다.
한경호가 강한섭의 일에 개입을 하게 된
것은 청와대 보좌관의 전화를
받고서부터였다.
7 "한 실장,내가 들으니 한 실장이 시국
사건 수배자를 숨기고 있던 해직기자
사건에 미온적이라고 하던데 사실이오?"
보좌관은 다짜고짜 한경호를 질책했다.
"누구를 말씀하시는 것입니까?"
"그 작자가 대통령 각하께도 보고를
했소!"
"예?"
"해직기자 강한섭이 사건 말이오!"
"그건 조사를 하고 있습니다. "
"그 작자 말이 한 실장이 뒤를 봐주고
있기 때문에 수사관들이 취조하는 시늉만
하고 있다는 거요. "
한경호는 보좌관으로부터 그 말을 듣는
순간 얼굴이 창백해 졌다. 보좌관이 말하는
그 작자란 신문사 편집국장을 하면서
권력층에 줄을 대기 위해 비굴할 정도로
틤하고 있다는 평판이 자자한
경성신문 편집국장 조장환이었다.
언론계에서도 양심을 팔아먹는 유다로
불리고 있었다.
"모함입니다. "
"나도 모함이라는 것은 알고 있소.
그러나 그런 말이 나가지 않도록 한 실장이
조심을 해야지... "
"조치하겠습니다. "
"강한섭이라는 자는 한 실장 앞집에
산다며?"
"예. "
"알아서 잘 처리하시오. 한 실장 앞 날이
걸린 문제니... "
보좌관의 전화는 그것으로 끝이었다.
한경호는 보좌관과의 통화가 끝나자
대공분실로 전화를 걸어 강한섭을 족치라고
-호통을 쳤다.
"야!이 새끼들아!그 따위 빨갱이 새끼
하나 다루지 못하고 뭘 어물쩡거리고 있는
거야?오늘 중으로 자백 받아!알았어?"
"놈이 자백을 하지 않습니다. "
"자백을 안 한다고 그냥 그러고 있을
거야?"
"...... "
"무슨 수단을 써도 좋으니 자백 받아!"
한경호는 전화통에 대고 악을 썼다.
그러나 대공분실은 사흘이 지나도록
강한섭의 자백을 받지 못하고 끝내
죽음으로 끌고 갔을 뿐이었다.
대공분실의 보고에 의하면 강한섭은
수사관들의 고문이 계속되자 자신과 연결된
시국사건 수배자들의 명단과 연락처를
자백하게 될 것을 두려워 한 나머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는 것이었다. 수사관들이
어느 날 아침 강한섭을 묶어 놓은 방으로
들어가자 강한섭이 밧줄을 풀고 그 밧줄로
올가미를 만든 뒤에 자신의 목에 쓰고 죽어
있었다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그 사실을 공개하지 무엇
때문에 남한강까지 끌고 가서 자살한
것처럼 위장을 했어?"
"국민들이 강한섭이 조사를 받다가
자살했다는 것을 믿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
"고문을 얼마나 했어?"
"일반적인 고문을 했습니다. "
"이것봐!일반적인 고문을 견디지 못해
자살했다는 말이 설득력이 있어?지금 무슨
소리를 하고 있는 거야?"
"저희도 나라를 위해 일하는
사람들입니다. 자백을 받기 위해 고문을
해도 사람을 죽이지는 않습니다. "
천달수의 목소리에도 짜증이 묻어났다.
이 사태에 당신들은 전혀 책임이 없느냐는
뜻으로 한경호에게 들렸다. 한경호는
얼굴이 붉어졌다.
"어쨌거나 이런 꼴이 되지 않았어?책임을
지라구!"
한경호는 신경질적으로 소리쳤다.
강한섭의 의문사 사건이 자신의 앞 날에도
어두운 그림자를 던질지 모른다고 생각하자
불길했다.
"앞으로 어떻게 할 작정이야?"
한경호는 천달수를 다그쳤다.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그걸 나 한테 물어?"
"저도 어떻게 해야 좋을지 모르겠습니다.
"사건이 확대되지 않도록 막아!"
"알겠습니다. 더 이상 사건이 더 이상
확대되지 않도록 막겠습니다. "
한경호는 고개를 끄덕거렸다. 이제는
사건이 확대되지 않도록 막는 수밖에 달리
방법이 없었다.
3
비서관들 근무처인 청와대 별관을 나오자
하늘이 잿빛으로 어둠침침했다. 한경호는
승용차가 있는 곳으로 가다말고 걸음을
멈춘 채 하늘을 우두커니 쳐다보았다.
빗발이라도 뿌리려는 것일까. 잿빛으로
흐린 하늘이 점점 낮게 내려앉고 있었다.
(비가 오면 봄꽃이 더욱 활짝 피겠지...
)
한경호는 무심히 시선을 떨구다가 뜰에
핀 목련에 시선을 멈추었다. 경호원들이
서성거리고 있는 담장 가까이에 목련 한
그루가 소복을 입은 여인처럼 화사하게 서
있었다.
3월이었다. 며칠 전부터 날씨가
포근하더니 어느 새 목련이 핀 모양이었다.
청와대를 나오자 차창으로 빗발이
묻어나기 시작했다. 한경호는 차창으로
거리의 풍경을 물끄러미 응시했다.
세종로를 지나 종로로 빠지자 번화가는
여전히 사람들이 물결처럼 흐르고 있었다.
전일()과 다름없는 풍경이었다.
여자들의 옷차림은 봄답게 화사했다.
남자들은 삼삼오오 함께 퇴근하고
있었다.
. 한경호는 번화가에 흐르는 물결을 유심히
관찰했다.
하루의 일과를 마친 나른함과 알맞은
피로감이 어깨에 얹고 있는 남자들은
종족을 번식시키기 위해 암컷을 찾아
눈빛을 번뜩이고 있었고 거리로 쏟아져
나온 여자들의 살랑대는 둔부에는 빛나는
청춘과 인류의 번식에 이바지하려는 본능이
벌레가 기어가듯 적당히 기분좋게
스멀거리고 있었다.
한경호는 입언저리에 씁쓸한 미소를
떠올렸다.
이 무슨 망발인가.
사람들이 모두 쎈스에 혈안이 되어 있는
것처럼 보여지는 것은 무슨 까닭인가.
아니 종족을 번식시키기 위한 쎈스는
모든 생물의 근원이다. 인간도 종족을
캭쳔갚위해 쎈스를 하고 있을 뿐이다.
한경호는 문득 얼굴을 찌푸렸다. 종족을
번식시키지 않고 오로지 쾌락을 위해
쎈스를 하는 인간들이 얼마나 많은가.
이것은 자연의 법칙에 어긋나는 짓이다.
아내는 아들을 낳았다. 그러나 한경호는
그 아들도 누구의 아들인지 알지 못했다.
막연히 자신의 아들이 아니라고 생각하고
있을 뿐 사실 여부를 확인할 수가 없었다.
아내의 뒤를 밟았으면 아내가 누구를
만나고 있는지 알 수 있었을 것이었다.
그러나 한경호는 그렇게 하지 못했다.
아내가 다른 남자를 만나는 것을 확인한
뒤에 그 뒷일을 감당할 자신이 없었다.
승용차는 종로 4가에서 좌회전을 했다.
성북동에 있는 요정 대원각()으로
가기 위해서였다. 대원각에서
민주정의당() 창당 조직책인
권정달() 의원과 이종찬()
의원 등을 만나기 위해서였다.
권정달 의원은 보안사 정보처장을 지낸
후에 예편하여 민정당을 창당하여
사무총장이 되었고 이종찬 의원은 육사
16기로 안전기획부(전 중앙정보부)에서
총무국장과 기획조정실장을 지낸 후 민정당
정당 창당에 참여했다. 권정달 의원은
안동에서 이종찬 의원은 서울 종로
중구에서 출마하여 당선이 되어 11대
국회의원으로 활동하고 있었다.
권정달 의원은 신군부 핵심 세력이었고
이종찬 의원도 육사 16기에다가 독립투사인
이시영() 부통령의 손자라는 사실이
민정당 창당의 주역을 맡게 되었던 것이다.
민정당이 창당된 것은 81년 1월15일의
일이었다. 80년 11월22일 정당 창당과 정당
기구 운영을 하기 위한 집회가 허용되면서
본격적인 정치의 막이 올랐다.
신군부는 제5공화국 헌법을 만드는 한편
정당 창당에 나섰는데 집권당인 민정당
뿐이 아니라 제1야당인
민주한국당(),제2야당인
한국국민당(),온건 사회당인
민주사회당() 창당까지 일일이
간섭하고 조정하여 정당을 급조하여
1,2,3당이라는 우스개 말까지 나돌았다.
한경호는 민정당에 참여하고 싶었으나
시기상조라고 하여 거절되었다. 게다가 각
정당이 한창 창당 중일 때 한경호는
언론대책반에서 통폐합을 주도하고 있었다.
신군부 주체 세력으로서는 언론 통폐합이
워낙 중대한 사안이었기 때문에 한경호가
언론대책반을 빠져 나와서는 안된다는
것이었다.
"그러면 나는 정치에 참여할 수 없는
것입니까?"
한경호는 볼멘 소리로 물었다. 그는
민주정의당에 참여하고 싶었던 것이다.
"지금은 안돼. "
"그럼 언제나 가능합니까?"
"자네 경력도 문제야. "
"경력이라니요?"
"자네는 정규 육사를 졸업하지도 않았을
뿐 아니라 대학을 졸업하지도 않았어. 자네
능력은 탁월하지만 유권자들에게
내세울만한 경력이 없어... "
한경호는 그 말을 듣자 가슴이 묵직했다.
"자네가 내세울 경력이라고는 보안사
준위에 문관이라는 직책이 아닌가?모두들
"자네를 비웃을 거야. 자네를 비웃는 것은
곧 우리 개혁 주도 세력이 비웃음거리가
되는 것이나 마찬가지고... " "결국 잘난
경력이 문제가 되는군요. "
"또 하나는 언론통폐합이 완전히
마무리되어야 해. 언론 대책이 우리의 통치
기반을 좌우할 테니까... "
한경호는 입을 다물었다. 언론 대책이
중요하다는 것은 한경호가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그 동안 경력을 쌓도록 하게. "
"어떻게 경력을 쌓으라는 말씁입니까?"
"청와대 비서관으로 가 있다가
민정당으로 오게. 조직부장 자리를 줄
테니까. "
"비서관이요?"
"대통령 각하도 모셔 보고... "
, "알겠습니다. "
한경호는 빙긋이 웃었다. 그 정도라면
민정당에 참여하지 않더라도 그다지 억울한
느낌이 들 것 같지 않았던 것이다. 그것이
벌써 4개월 전의 일이었다.
승용차가 대원각에 도착하자 빗발이 제법
굵어졌다. 본관 앞에 이르자 나비 넥타이를
맨 사내들이 달려 나와 박쥐 모양의 우산을
씌워 주었다.
기생들은 화사한 냄새를 풍기며 넓은
대청에 도열해 있었다.
한경호는 기분이 유쾌해 졌다.
"다른 분들은 도착하셨나?"
한경호는 마담에게 눈인사를 보내며
물었다.
"네. 벌써 여러분이 도착해 계십니다. "
한경호는 기생들의 안내를 받아 방으로
8들어갔다. 방 안에는 이미 권정달 민정당
사무총장과 이종찬
사무차장,남재희() 중앙위원,안기부
국장들,그리고 청와대 수석 비서관들인
허화평,허삼수 비서관이 자리하고 있었다.
한경호는 인사를 한 뒤에 말석에 앉았다.
제11대 3. 25 총선을 자축하는 파티였다.
11대 총선은 3월25일 제5공화국 헌법에
의해 투표가 실시되어 민정당이 전국구
포함 151석의 의석을 확보했고 민한당이
81석,국민당이
25석,민권당(),신정당(),민사
당()이 각각
2석,민농당(),안민당()이 각
1석,무소속이 11석을 얻었다.
민정당이 패배한 곳은 제주와
해남뿐이었다.
대원각은 일류 요정이었다. 기생들이
모두 빼어난 미모를 갖추고 있었고 골짜기
곳곳에 기와집이 산재해 있었다. 일찍부터
정치인들과 사업가들이 주로 이용했고
70년대 후반 들어 일본인들의 기생관광으로
명성을 떨치고 있는 곳이었다.
"국회의장은 이재영 의원으로 낙점이
되었습니다. "
"벌써 원 구성이 이루어졌습니까?"
"어른의 뜻이 그렇습니다. "
권정달 사무총장의 말에 모두 고개를
끄덕거렸다. 이재영 의원은 대림그룹의
회장이면서 명망이 있었다. 재사라는
소문도 파다했다.
술 자리는 언제나 비슷했다. 그러나 이
날의 술 자리는 3. 25 총선에서 승리한
여파 탓인지 선거전의 무용담이 주로
=화제가 되었다.
술 자리는 11시가 되어서야 파했다.
기생을 데리고 떠나는 사람도 있었고 2차로
술을 마시러 가는 축도 있었다. 한경호는
함께 가자는 권정달 사무총장의 제안을
사양하고 혼자 승용차를 타고 성북동을
내려왔다.
장충동에 있는 혜진()을 만나기
위해서였다.
혜진은 요정 청계장()의
기생이었었다. 한경호가 언론통폐합을
다루면서 언론인들과 어울려 몇 번 출입을
하자 오빠의 취직을 부탁했고 오빠의
취직을 들어주자 한경호의 정부()
노릇을 기꺼이 하였다. 한경호가 혜진을
원한 것이 아니라 혜진이 한경호를 다른
기생들에게 뺏길까봐 먼저 유혹을 하고
맛위해 살겠다고 제의를 했던
것이다.
한경호는 혜진의 제의를 혼쾌히
들어주었다.
혜진은 이제 스물 세 살이었다. 나이도
젊었지만 일류 요정 기생답게 키도 크고
얼굴도 예뻤다.
혜진을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장충체육관 앞에서 내려 한경호는
신당동쪽 고갯길을 천천히 걸어 올라갔다.
봄비가 추적추적 내리고 있어서 기분이
상쾌했다.
"어서오세요. "
차임벨을 누르자 혜진이 대문까지 뛰어
나왔다. 한경호는 혜진의 둔부를 가볍게
두드렸다.
"아이... "
( 혜진이 간드러진 웃음소리를 내며 몸을
꼬았다. 기생 특유의 교태가 혜진은
웃음에도 묻어 있었다.
"저녁 먹었어?"
한경호는 혜진에게 정답게 물었다.
혜진이 그의 가슴에 어깨를 기대 오자 톡
쏘는 화장품 냄새가 풍겼다.
"네. "
"비도 오는데 우리 산책이나 할까?"
"그래요. 산책해요. "
혜진이 한경호의 팔짱을 끼며 노래하듯이
종알거렸다. 한경호는 혜진과 함께
장충체육관 앞으로 내려와 공원쪽으로
걸었다. 봄비가 내리고 있기 때문인지
공원에는 인적이 끊어져 조용했다.
한경호는 혜진의 팔짱을 끼고 공원을 한
바뀌 돈 뒤에 혜진의 집으로 돌아왔다.
한경호가 사준 집이었다. 한경호는 거실
소파에 앉아 TV를 켰다. TV는 12시 뉴스가
진행되고 있었다.
"술 한잔 드릴까요?"
혜진이 침실에 들어가 나이트 가운으로
갈아 입고 거실로 나왔다.
"아냐. "
한경호는 혜진을 끌어 안아 무릎에
앉혔다. 혜진의 나이트 가운은 속살이
은은하게 내비치고 있어서 한경호를
자극하고 있었다. 거실의 상제리아는
오렌지 빛이었다. 그러나 조도()를
낮추어 거실이 오렌지 빛으로 아슴했다.
조잡스러운 느낌을 주는 붉은 색등과 달리
혜진의 몸을 육감적으로 보이게 하고
있었다.
한경호는 나이트 가운 위로 혜진의
가슴을 두 손으로 움켜 잡았다. 혜진의
가슴이 손바닥에 뭉클하게 느껴졌다.
호리호리한 몸매에 어울리지 않게 풍만한
가슴이었다.
"아이. "
혜진이 허리를 틀었다.
한경호는 하체로 혜진의 둔부를 음미하며
혜진의 허벅지 사이로 손을 가져갔다.
바람이 일고 있는지 창문이 덜컹대고
흔들렸다.
"혜진인 내 여자야. "
한경호는 혜진의 귓가에 입김을 불어
넣었다. 혜진이 둔부를 흔들며 한경호의
하체를 자극하고 있었다. 한경호는 둔부의
부드러운 자극에 하체가 팽팽하게 부풀고
있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날 버리지 않을 거죠?"
"혜진일 왜 버려?"
"날 버리면 안돼요. "
"그럼!"
대화는 겉돌았다. 혜진도 셈에 없는
얘기라는 것을 뻔히 알면서도 한경호에게
속삭이고 있는 것이었다. 한경호는 혜진의
가운 속으로 손을 넣어 도톰한 부분을
손바닥으로 덮었다. 하체에서 일어나는
뜨거운 욕망이 전신으로 퍼지고 있었다.
"이거 벗어요. "
혜진이 한경호의 무릎에서 내려서며
말했다.
"혜진이 벗겨봐. "
"정말?"
"응. "
"엉큼해!"
혜진이 눈을 살짝 흘겼다. 그러나 혜진의
서서히 욕망의 불꽃이 피어나고
있었다.
한경호는 눈을 감았다. 혜진이 무릎을
꿇고 앉아서 그의 허리띠를 푸르고 있었다.
이내 지퍼가 내려지고 혜진의 손이 블록한
부분을 덮었다.
"음... "
한경호는 낮게 신음을 삼켰다.
"좋아요?"
혜진이 한경호의 블록한 부분을 쓰다듬기
시작했다.
"응. "
한경호는 고개를 뒤로 젖혔다. 혜진이
팬티 안에 있는 그의 남성을 꺼내 손으로
애무하기 시작했다. 그의 남성은 이미
팽팽하게 부풀어 혜진의 손바닥 안에서
불끈거리고 있었다.
창문이 다시 덜컹대고 흔들렸다.
한경호는 눈을 뜨고 거실의 창을
응시했다.
캄캄한 어둠이 먹빛으로 달라붙어 있는
유리창에 바람이 일 때마다 빗방울들이
쏴아 하고 몰려와 부딪쳤다가 튕겨져
나가곤 했다. 빗방울들은 창문으로 줄지어
흘러내리기도 했다.
"음... "
문득 한경호는 다시 몸을 움찔 떨었다.
그의 몸이 어느 사이에 혜진의 입 속에
깊이 들어가 있었다.
4
은숙은 창을 물끄러미 응시했다.
낮에부터 오는 봄비가 아직도 계속 내리고
있었다. 자정이 지나면서 음산하게 바람이
일고 창문까지 덜컹대고 흔들렸다. 창으로
내려다보이는 안암동 주택가는 이미 인적이
끊어져 비바람소리만 을씨년스럽게 들리고
있었다. 은숙은 무겁게 한숨을 내쉬었다.
남편이 죽은 지 벌써 4개월이 가까워지고
있었다.
남편이 없기 때문인지 집안이 더욱
썰렁하게 느껴졌다. 그러나 은숙은 남편의
영혼이 허공에서 떠돌고 있는 듯한 기분을
느끼고 있었다. 은숙이 잠에서 깨어난 것도
머리맡이 선뜻한 느낌 때문이었다. 그것은
마치 밤길을 걸을 때 나무 밑을 지나면
뒷덜미가 서늘해지는 것과 같은 것이었다.
그런 것은 아무도 없는 공동묘지에서도
느낄 수 있었다.
영혼은 존재한다.
남편의 영혼도 사라지지 않고 허공에
떠돌고 있다.
은숙은 언제나 그런 생각을 하였다.
남편이 죽은 뒤에서부터 갖게 된
생각이었다.
남편의 육신은 불 속에 던져져 재가 되어
버렸지만 영혼은 남아서 내 주위에 떠돌고
있다. 어쩌면 남편의 영혼이 나 혼자
남겨진 것이 애처로워 저승으로 가지
못하고 이승을 헤매고 있는 것일 것이다.
잠을 자거나 혼자 어둑어둑 땅거미가
내리는 골목을 걸을 때면 문득 남편이 옆에
있는 듯한 느낌이 들어 걸음이 멈춰질 때가
있었다. 그 느낌은 의외로 생생하여 은숙은
사방을 휘둘러보곤 하였다.
물론 남편의 모습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남편은 허공에 먼지처럼
떠돌고 있는 미세한 움직임,공기의 진동을
느낄 수가 있었다.
(남편은 억울하게 죽었어... )
남편을 연행해 간 것은 분명히
기관원들이었다. 그러나 은숙이 명동
성당에서 기자회견을 하고 남편이 경찰에
끌려간 뒤에 죽은 시체로 발견되었다고
하자 경찰은 서울 시내 어느 경찰서에서도
남편을 체포한 일이 없다고 발표했다.
은숙은 경찰이 하루도 안되어 남편의
시체를 화장한 사실을 들어 경찰의 주장을
반박했다. 게다가 남편의 몸에는 고문을
당한 흔적이 여러 곳에 있었다. 처음에는
그 것이 무슨 상처인지 몰랐으나 구속자
가족들에게 얘기를 하자 고문을 당한
상처라고 했던 것이다.
"고문을 당해요?"
"강 기자님은 고문을 당하다가 죽은
거예요. 경찰은 그 사실을 은폐하기 위해
남한강에서 목을 매어 자살한 것처럼
위장했지만 방법이 너무 졸렬했어요. "
"그럼 자살을 한 것이 아닌가요?"
"생각해 보세요?강 기자님이 무엇 때문에
자살하겠어요?"
은숙은 그 말이 옳다고 생각했다. 남편이
남한강 상류까지 찾아가서 자살할 이유가
전혀 없었다. 광주에서 돌아온 뒤에 남편이
달라지긴 했으나 그것은 그들에 대한
적개심과 분노였지 자살하려는 충동은 전혀
없었다. 그것은 신문사에서 해직을 당한
뒤에도 마찬가지였다. 직장에서 쫑겨난 일
때문에 우울해 하긴 했으나 차츰차츰
우울에서 벗어나 변혁운동을 활발하게
하려고 하고 있던 참이었다.
그런데 자살을 한 것이다.
"목을 매었잖아요?"
"그거야 그들이 그렇게 만든 거죠. "
"정말 그럴까요?"
"주민등록증만 해도 그렇잖아요?강
기자님 서랖에 있던 주민등록증이 어떻게
강 기자님 주머니 속에 있겠어요?"
"...... "
"그건 분명히 그들이 갖다가 넣은 게
분명해요. "
은숙은 구속자 가족들의 말에 수긍했다.
남편의 시체를 화장하고 돌아와 남편의
서재에 있는 책상 서랖을 샅샅이 뒤졌으나
주민등록증을 찾을 수가 없었다.
"그런데 주민등록증을 왜 남편의
주머니에 갖다가 넣었을까요?"
"그건 강 기자님을 목을 매어 자살한
6것처럼 위장한 뒤 빨리 시체를 처리하기
위해서예요. "
"시체를 빨리 처리해요?"
"시체가 늦게 발견되고 아무 것도 모르는
지방경찰이 시체의 신원을 밝힌다고 수사를
하게 되면 강 기자님이 살해당한 진짜
이유가 드러나기 때문이죠. "
"...... "
"그들은 그것만큼은 필사적으로 막을
필요가 있었던 거예요. 자칫하면 고문을
하다가 죽인 사실이 들통나니까... "
구속자 가족들의 말을 듣고 보니 은숙은
저절로 고개가 끄덕거려 졌다. 은숙은 집에
돌아와 그 날의 일을 곰곰히 생각해
보았다.
은숙은 그날 청계천 피복공장에서 8시에
퇴근하여 집에 돌아왔었고,집 앞에는 이천
"경찰서에서 올라온 형사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들은 남편이 이천군 양지면의 야산에서
목을 매어 자살했으니 확인하러 가자고
말했다.
은숙은 그들을 따라 나섰다.
남편의 시체는 이천의 병원에 있었다.
형사들은 은숙을 도와주겠다고 하면서
은숙에게 서명을 받아갔다. 도장은
자신들이 새기겠다고 말하였다.
은숙은 경찰이 친절하게 자신을 도와주는
것이라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경찰이
은숙에게 받아간 서명은 나중에 안
일었지만 시체 화장() 동의서였다.
"빈소도 안 차리고 장례를 치르기로 했단
말이냐?"
날이 밝기도 전에 달려온 아버지가
침통한 낯빛으로 물었다. 어머니는 은숙의
손을 잡고 울기에 바뻤다.
"이게 무슨 날벼락이냐?한창 꽃필 나이에
내 딸이 과부가 되다니... 이런 일이 어디
있단 말이냐?"
어머니는 은숙의 가슴을 두드리며 통곡을
했다. 남편이 죽었을 때 은숙보다 더
슬퍼한 사람이 어머니였다.
"장례가 너무 빠른 게 아니야?"
아버지가 은숙에게 다시 물었다.
"그럼 어떻게 해요?"
"빈소라도 차려야지... 아무리 비명에
죽었기로 하룻밤도 밤샘을 안한단 말이냐?"
"전 모르겠어요. "
"고인에 대한 예의가 아니다. "
"...... "
"내가 병원에 얘기하여 빈소를 차리도록
(하겠다. "
그러나 병원 관리자와 얘기를 하러
들어간 아버지는 이내 풀이 잔뜩 죽어
나왔다.
"병원에서 죽은 사람이 아니라고 하여
영안실을 사용할 수 없다는구나. 시체도
빨리 치워 달라고 한다. "
"할 수 없지요. 뭐... "
은숙은 주먹으로 눈물을 씻으며
대답했다. 병원에서 시체를 치워 달라고
하면 오늘 중으로 장례를 치르면 그만인
것이다. 빈소를 차리고 향을 피운다고 해서
남편이 살아서 돌아올 것이 아니지 않는가.
"매장은 어디에 하기로 했니?"
"아직 정하지 않았어요. "
"그럼 충주에 묻자. 너도 서울 살림
정리하고 충주로 내려오고... 큰 일을
=당했으니 충격이 컸을 게다. 당분간 집에서
쉬도록 해라. "
그러나 남편의 시체를 충주에 매장할
수는 없었다. 경찰이 은숙이 화장 동의서에
서명했으므로 화장을 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때서야 오빠가 병원에
도착하여 화장을 할 수 없다고 따졌으나
경찰은 막무가내였다. 경찰은 아침 9시가
되자 영구차를 가지고 와서는 남편의 관을
내어 싣고 은숙의 가족들만 타도록 했다.
그리고는 화장터로 달려가 버렸다.
남편의 시체는 그렇게 해서 화장이
되었던 것이다.
남편의 죽음이 의문스러웠듯이 장례
절차도 없이 서둘러 화장을 끝내 버린
것이었다.
(그래,남편은 고문을 당하다가 죽은
거야... )
은숙은 그렇게 결론을 내렸다.
그리고 은숙은 그때부터 남편의 의문사를
밝혀줄 것을 집요하게 요구하기 시작했다.
청와대에 진정서를 내는가 하면 피켓을
들고 시위도 했다.
"이것 봐요!그런다고 당신 남편이 살아서
돌아와요?"
은숙은 그럴 때마다 위협과 협박을
당하였다. 누구인지는 알 수 없었으나 자꾸
그런 짓을 하면 네 년을 쥐도 새도 모르게
죽여버리겠다는 전화도 걸려왔다.
"내 남편의 죽음이 진실대로 밝혀질
때까지 나는 계속할 거야!"
은숙은 그런 전화를 받을 때면 소름이
오싹 끼쳤으나 눈을 부릅뜨고 소리를
질렀다.
. "당신 남편은 자살했어!"
"말도 안돼요!경찰에 끌려간 남편이
이천에서 시체로 발견된다는 게 말이나
돼요?게다가 자살할 이유가 없어요!"
"경찰은 당신 남편을 잡아가지 않았어!"
"그럼 누가 잡아갔지요?"
"그걸 내가 어떻게 알아?"
"그럼 왜 이런 전화를 하는 거죠?"
그러자 상대방은 입을 다물어 버렸다.
"당신은 누구죠?"
상대방이 마른 침을 삼키는 소리가
수화기를 통해 들려왔다. 상대방은 큰
소리를 치고 있었으나 긴장하고 있는 것이
역력했다. 마치 도둑질을 하다가 들킨
사람처럼 깜짝 놀란 듯한 기색이었다.
"정체를 밝히세요!"
"알 필요 없어!"
"당신이 우리 남편을 죽인 사람인가요?"
"내가?나는 당신 남편을 알지도 못해!"
"그럼 왜 이런 전화를 하는 거예요?"
"당신이 떠들고 다니는 것이 역겨워서
그래!당신이 떠들고 다니니까 나라가
어수선하잖아?"
"뭐라고요?"
"계속 떠들고 다니면 구국청년단의
이름으로 당신을 처단하겠어!알았어?"
전화가 찰칵 끊겼다. 은숙은 어처구니가
없었다.
그러나 그들은 협박 전화로만 그치지
않았다. 어느 날인가는 은숙의 집에
돌멩이를 던져 유리창을 깨트리기도 했고
은숙이 밤늦게 버스정류장에서 내려 주택가
골목을 걸어 들어오면 느닷없이 나타나서
은숙을 쓰러뜨리고 마구 발길질을 하고
가버리고는 했다.
(그래,아무리 그래 봐라!)
은숙은 그럴 때마다 주먹을 움켜쥐고
피눈물을 삼켰다.
한번은 구속자 가족협의회 사무실에서
기자회견을 한일이 있었다. 보도지침
때문에 은숙의 기자회견은 한 줄도
언급되지 않았으나 기자들은 은숙에게
동정적이었다. 그러나 그 기자회견은
끝까지 진행될 수가 없었다. 갑자기 사복을
입은 사내들이 들이닥쳐 발길질을 하여
기자들을 내쫑고 은숙을 강제로 연행하려고
하였다. 구속자 가족들이 울부짖으며
항의했으나 사내들의 사나운 주먹질과
발길질에 속수무책이었다.
은숙은 필사적으로 저항했다. 끌려가는
것이 두려워서가 아니라 그들에게
고분고분하기가 싫었다. 순종은 그들의
폭력적인 행위를 인정하는 것이라는 생각을
했던 것이다.
"야!이 나쁜 놈들아!"
"끌고 가려거든 우리 모두 같이 끌고
가라!"
"전두환이 졸개들아!차라리 우리도
죽여라!"
구속자 가족들은 악을 쓰며 저항을 했다.
그러나 사내들의 사나운 발길질이 구속자
가족들을 내몰았고 은숙은 사내들에게
양팔과 양발이 잡힌 채 건장한 체격의 사내
어깨에 둘러매져 닭장차로 끌려갔다.
"나 이런 악질 처음 보았네!"
사내가 닭장차 안에 은숙을 팽개치고
씨근덕거렸다. 은숙은 허리가 시큰했으나
이를 악물고 참았다.
은숙은 남영동으로 끌려갔다. 그러나
사내들은 은숙을 취조하지 않았다. 이따금
저희들 끼리 모여 무엇인가 수군거렸으나
은숙에게 아무런 질문도 하지 않았다.
은숙은 그날 밤을 남영동에서 보냈다.
남편처럼 고문을 당하다가 죽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으나 두렵지는 않았다.
오히려 그렇게 죽는다면 남편이 기뻐할
것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이튿날도 사내들은 아무 기척이 없었다.
은숙은 감옥 안을 천천히 살폈다. 감옥
안은 특별한 장식도 가구도 없었다. 벽쪽에
쇠침대가 하나 놓여 있었고 천정에 붉은
알전구가 하나 매달려 대롱거리고 있을
뿐이었다.
은숙은 벽을 천천히 살폈다. 감옥 안에
수인들이 고문을 당한 흔적인 듯 군데군데
훌뭇말라붙어 있었다. 그리고
손톱으로 긁어서 쓴 것인 듯 낙서도
보였다. 낙서 중에는 시도 한 편 있었고
'피를 먹고 자라는 민주주의'라는 말도
보였다. 은숙은 그런 낙서를 볼 때마다
가슴이 타는 것 같았다.
희망,그리고 절망...
들마루 바로 위에 씌어 있는 낙서였다.
은숙은 그 낙서를 읽다가 바로 밑에
깨알처럼 작은 서명을 발견했다.
1880년 겨울 강한섭이 쓰다
은숙은 그 낙서를 읽다가 가슴이 컥 하고
막혀 오는 것을 느끼고 주먹으로 가슴을
남편이 남긴 낙서였다.
(아... !)
은숙은 가슴을 주먹으로 두드리다가
들마루 위에 쓰러져 혼절했다. 남편의
낙서를 발견한 순간 눈 앞이 캄캄해지면서
아득한 벼랑에서 추락하는 듯한 느낌이
들었었다. 그리고는 아무 것도 기억하지
못했다. 눈을 뜨자 사내들이 들어와 은숙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혼절했소?"
"...... "
"남편이 죽은 사정은 딱하지만 좀
자중했으면 좋겠소?그런다고 남편이 살아서
돌아오겠소?"
"...... "
"부인은 아직도 젊으니 재혼을 할 수
있을 것이 아니오?"
은숙은 두 눈으로 뜨거운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사내들의 말은 하나도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오늘 내보내 드리겠소. 부탁이니 제발
우리를 귀찮게 하지 마시오. "
은숙은 대꾸하지 않았다. 남편이 이
방에서 죽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자
눈물이 걷잡을 수 없이 쏟아지고 있었다.
"우리도 곤란한 지경에 처해 있소. "
은숙은 밤중에야 사내들에 의해 집으로
돌아왔다. 사내들이 검은 승용차로 데려다
주었던 것이다. 자정이 넘은 시간이었다.
은숙은 침대에 쓰러져 누웠다. 경찰의 말이
모두 거짓이라는 것이 감옥 안에서 발견된
낙서로 입증이 된 것이다.
은숙은 이튿날 구속자 가족협의회
사무실로 다시 나갔다. 구속자 가족들은
모두 은숙을 끌어안으며 반겨 주었다.
은숙은 남영동에서 발견한 낙서 얘기를
털어놓았다. 사람들은 모두 눈물을
글썽거리며 강한섭의 원혼이 진실을 밝히는
것이라고 말했다.
은숙은 다시 기자회견을 했다.
그러나 그날의 회견도 보도지침 때문에
신문에 한 줄도 보도되지 않았다.
"중원일보의 최종열 기자입니다. "
남편 강한섭이 다니던 신문사의 한
기자가 전화를 걸어온 것은 그날 밤의
일이었다.
"개인적으로 강한섭 선배는 잘 알지
못합니다. 전 작년 12월에 입사를
했습니다. "
"...... "
은숙은 최종열의 말에 아무 대꾸도 하지
최종열이 중원일보 기자이기
때문에 반갑기는 했으나 무엇 때문에
전화를 했는지 알 수 없었다. 낮에 구속자
가족협의회 사무실에서 처음으로 얼핏
보았기 때문에 얼굴도 뚜렷하게 기억할 수
없었다.
"허지만 강한섭 선배가 당한 일에는
분노를 느끼고 있습니다. 아시다시피
보도지침 때문에 저희가 취재를 해도
보도가 되지 않습니다. "
"그건 알고 있어요. "
"한 번 뵙고 싶은데 시간을 내실 수
있겠습니까?"
"무슨 일인데요?"
"자세한 것은 만나서 말씀 드리겠습니다.
"
"좋아요. "
은숙은 최종열의 제안에 선선히
승낙했다.
"언제쯤 시간이 있으십니까?"
"전 밤이면 언제나 시간이 있어요.
낮에는 공장에 나가야 하니까 어렵구요. "
"몇 시에 작업이 끝납니까?"
"8시요. "
"공장 위치가 어디죠?"
"청계천 7가예요. "
"그럼 내일 8시30분에 제가 저녁을
대접하겠습니다. 청계천 7가에
버스정류장이 있는데 거기서 기다리지요.
괜찮으시겠습니까?"
"네. 괜찮아요. "
"그럼... "
최종열이 깍듯하게 인사를 하고 전화를
끊었다. 이튿날 은숙은 작업이 끝나자
"청계천 7가 버스정류장으로 갔다. 최종열은
회색 바바리 코트 차림으로 버스정류장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눈빛이 맑고 키가 큰
사내였다. 머리는 신문사에 갓 입사한
병아리 기자이기 때문인지 단정했다.
"오래 기다리셨어요?"
"아닙니다. "
최종열이 피우던 담배를 버리고 구둣발로
밟으며 말했다.
"어디 가서 저녁이나 하면서 말씀을
나눌까요?"
"네. 마침 저도 시장하던 참예요. "
"그럼 중앙시장으로 가시죠. 해물도 많고
파전을 맛있게 하는 집이 있으니까요. "
"네. "
은숙은 최종열 기자를 따라 중앙시장을
향해 걸었다. 청계천 7가는 고서점이
즐비했고 밤이 되면 인도 위에
노점상들까지 쏟아져 나와 인파로 붐비고
있었다. 청계천에서 사람들이 가장 많이
모이는 곳이었다. 게다가 중앙시장 쪽으로
만물시장이 형성되어 있어 밤에도 불야성을
이루고 있었다.
"이 집 파전이 아주 좋습니다. "
중앙시장 입구의 언덕에 있는 허름한
목로집 앞에서 최종열이 히쭉 웃었다.
은숙은 최종열을 따라 목로집으로
들어갔다. 출입문에는
왕대포,파전,낙지라는 페인트 글씨가
조잡하게 씌어져 있었다. 그러나 목로는
사람들이 가득하여 왁자했다.
"내실로 드세요. 홀에는 자리가
없으니... "
"괜찮겠지요?"
"네. "
최종열이 묻자 은숙은 고개를 끄덕거리며
대답했다. 시장기가 돌아 방이건 홀이건
우선 저녁을 먹고 싶었다. 내실이라고 해야
한 평 남짓 되는 조그만 방이었다.
웃목으로 낡은 서랖장이 하나 놓여 있었고
벽에는 옷가지들이 함부로 걸려 있었다.
"술 한 잔 하시겠습니까?"
파전과 술이 들어오자 최종열이 소주병을
들고 은숙에게 물었다.
"네. "
은숙은 사양하지 않았다. 강한섭이 술을
잘 마셨기 때문에 은숙도 몇 번 같이
대작을 한 적이 있었다. 그러나 금세
얼굴이 빨개지고 취기가 올랐다.
"전에 국가대표 선수를 하신 일이
있지요?"
"네. 아주 옛날이죠. "
"신문에서 몇 번 뵈었는데 이렇게 직접
뵙게 될 줄은 몰랐습니다. "
"저를 만나자고 한 건 무슨 일
때문예요?"
은숙은 소주 한 잔을 마신 뒤 파전을
젓가락으로 찢어 입에 넣었다. 빈 속에
소주를 마셨기 때문인지 뱃속이 찌르르
했다.
"전 신문사에 입사한 지 얼마 안되었지만
강 선배님의 얘기를 많이 들었습니다.
광주에서 취재를 하신 것도 알고 있고 광주
사진과 취재수첩도 갖고 계시다고
들었습니다. 그런 것들을 모두 모아서 책을
펴낼 작정입니다. "
"신문에도 보도하지 못하는 것을 책으로
출판할 수 있나요?"
"지하 출판을 생각 중에 있습니다. 이
정권은 결코 오래 가지 못합니다. "
은숙은 잠시 망설였다. 남편의 유품은
여러 가지가 있었다. 취재수첩도 3권이나
있었고 광주 사태의 생생한 사진을 비롯해
70년대 말과 80년대 초를 다룬 소설까지
쓰고 있었다.
"지하 출판으로 몇 권이나
유통시키겠어요?"
은숙은 고개를 흔들었다. 강한섭의
취재수첩과 광주사태 얘기를 책으로 묶어서
출판한다는 것은 좋은 생각이었으나 책이
나오기 전에 경찰에 발각될 가능성이 더
많았다.
"지하 출판이 어려우면 외국에서
출판하겠습니다. "
"외국에서요?"
"솔제니친의 수용소군도만 해도
소련에서는 출판을 못하고 프랑스에서
출판을 하지 않았습니까?그렇게 해서
수용소군도의 참상이 전세계에 알려지게 된
것입니다. "
"책은 누가 쓸건가요?"
"제가 쓰겠습니다. 자료만 빌려
주십시오. "
은숙은 비로소 고개를 끄덕거렸다.
어떻게 하던지 남편의 억울한 죽음을
알려야 하겠다고 생각했다.
"자료는 제게도 소중한 것이니까 바로
돌려주셔야 해요. "
"물론입니다. "
최종열이 만족스러운 듯이 빙긋 웃었다.
은숙은 다음날 최종열에게 강한섭의
취재수첩이며 광주사태 사진들,남편이 쓰던
'영혼마차'라는 소설 원고를 빌려주었다.
일주일 전의 일이었다.
최종열은 은숙이 빌려준 자료를
신문사에서 모두 복사하겠다고 하였다.
사진 자료들은 일일이 다시 사진을 찍고
소설 '영혼마차'도 복사한다는 것이었다.
필사를 하는 것은 시간이 너무 걸리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은숙은 무겁게 한숨을 내쉬었다 봄비가
썰렁하기는 했지만 촉촉하게 가슴 속으로
스며드는 기분이었다. 주택가는 이제
완전히 불빛이 꺼져 있었다.
시간은 자정을 지나 새벽으로 가고
있었다. 그러나 잠을 자고 싶지 않았다.
사람들이 모두 잠들어 있을 시간에 그녀는
깨어 있고 싶었다.
빗발은 여전히 음산하게 흩날리고
있었다.
은숙은 한 시간 동안이나 창가에
우두커니 서서 비가 내리는 것을 내다보고
있다가 침실로 돌아왔다. 이제는 잠을 자지
않으면 안되었다. 날이 밝으면 공장에
출근해야 했다. 은숙은 남편의 일로 공장을
자주 빠져 주인으로부터 눈총을 받고
있었다.
은숙은 옷을 벗고 침대에 누웠다.
그때 희미한 엔진소리가 먼 찻길에서
들려왔다. 은숙은 엔진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통행금지가 훨씬 지난
시간이기는 해도 이따금 찻길을 지나가는
엔진 소리가 들리곤 했었다.
(이 시간에 어디로 가는 찻소리일까?)
은숙은 그럴 때마다 차들이 어디로
가는지 궁금했다. 그러나 새벽을 달리는
차들이 어디로 가는지 알 수는 없었다.
이내 승용차가 안암동 주택가로 들어오는
소리가 들렸다. 은숙은 골목으로
가까워지는 찻소리에 바짝 귀를 기울였다.
승용차는 음산하게 흩날리는 빗속을 달려와
은숙의 집 앞에 멎고 있었다.
(누굴까?)
은숙은 의아했다. 이내 승용차의 문이
열리는 소리가 희미하게 들렸다. 사방이
죽은 듯이 조용해 골목에서 승용차의 문이
열리는 소리까지 들리는 모양이었다.
은숙은 눈을 감았다. 차에서 내린 사람이
누구인지는 알 수 없었다. 어쩌면 앞집
남자인지도 알 수 없었다.
은숙은 아른아른 눈꺼풀이 감겨왔다.
비로소 잠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은숙은 꿈을 꾸었다.
꿈 속에서도 빗발이 뿌리고 음산한
삭풍이 불고 있었다. 어디인지 알 수 없는
황량한 골짜기였다. 은숙은 골짜기를
헤매고 있었다. 바람소리와 짐승들의
울부짖는 소리가 흡사 무저갱의 아귀()
울음처럼 음산했다.
은숙은 달음질을 치기 시작했다.
어디선가 늑대의 울음소리가 아련히
들려왔다. 은숙은 머리 끝이 곧추 서며
소름이 오싹 끼쳤다.
그때 가슴이 답답해 왔다. 은숙이 깜짝
놀라 눈을 검은 그림자가 은숙을 짓누르고
있었다. 은숙은 가슴이 철렁했다. 검은
그림자가 눈을 파랗게 번뜩이며 은숙의
속옷을 벗기려고 씨근덕거리고 있었다.
"누,누구야?"
은숙은 재빨리 소리를 질렀다.
= "알거 없어!"
검은 그림자가 싸늘하게 내뱉으며 은숙의
속옷을 밑으로 끌어내리려고 했다. 은숙은
재빨리 속옷을 움켜쥐었다. 그러자 다른
사내가 은숙의 팔을 두 손으로 찍어
눌렀다. 방에는 여러 사내들이 들어와
있었다. 어둠 속에서 검은 그림자들이 춤을
추듯이 움직이고 있었다.
은숙은 온 몸을 비틀었다. 팔은 움직이지
못했으나 발버둥을 치며 사내들을
떼어내려고 했다.
그러나 소용없는 짓이었다. 춤을 추듯이
움직이던 검은 그림자들이 은숙의 발을
꼼짝 못하게 움켜 쥐었다.
(한 놈이 아니야!)
은숙은 속으로 부르짖었다. 은숙의 위에
있던 사내가 그때서야 비로소 은숙의
아랫배를 짓누르고 가슴을 잡았다. 손이
얼음처럼 섬칫했다. 어둠 때문에 얼굴은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사내의 두 눈은
어둠 속에서 흡사 짐승의 그것처럼 파랗게
번뜩이고 있었다.
"비켜!"
은숙은 사내를 떼어내려고 몸부림을
쳤다.
"이 년이!"
사내가 은숙의 뺨을 세차게 후려쳤다.
은숙은 뺨이 얼얼했다. 재빨리 두 손을
뺨으로 가져가자 사내가 그 틈에 은숙의
속옷을 무릎 밑으로 끌어내렸다.
"왜 이래?당신 누구야?"
은숙은 다시 발버둥을 치기 시작했다.
"시끄러워!"
"난 남편이 있는 여자야!이런 짓을 하면
홴"
은숙은 울면서 애원을 했다.
"입을 틀어 막아!"
누군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 그러자
은숙을 깔고 앉아 있던 사내가 은숙의
아랫배를 주먹으로 힘껏 내질렀다.
"헉!"
은숙은 아랫배가 터지는 것 같은 통증
때문에 입을 크게 벌렸다. 그러자 사내가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이 은숙의 입 속에
헝겊 조각을 쑤셔 넣었다. 은숙은 세차게
도리질을 했다. 그러나 사내는 은숙의 입
속에 더욱 깊숙히 헝겊 조각을 밀어
넣었다.
(아... !)
은숙은 절망을 했다. 입 속에 쑤셔 박힌
헝겊 조각 때문에 숨이 막히고 눈물이
은나왔다.
5
골목은 소나기가 하얗게 장대질을 하고
있었다.
사내는 시트에 등을 기댄 채 빗줄기
사이로 길 건너 골목을 뚫어질 듯이
응시했다. 불경기의 여파일까. 골목이
빽빽하게 늘어서 있는 텍사스 골목은
여전히 불야성을 이루고 있었으나 향락을
찾는 취객들은 그다지 보이지 않았다.
지리한 장마였다. 다른 해보다 조금 일찍
시작된 장마비가 며칠째 장대질을 하고
있었다.
(뭘하려는 짓이야?)
사내는 골목에 있는 한 텍사스 하우스의
추녀 밑에서 웅크리고 앉아 있는 여자가
무엇을 할지 궁금했다. 여자는 박쥐 모양의
우산을 쓰고 있었으나 전신이 물에 빠진
생쥐처럼 젖어 있었다.
빗발은 좀처럼 그칠 기색이 아니었다.
자동차의 유리창에 떨어지는 빗물을
밀어내고 있는 윈도우 브러시가 몹시
버거워 보였다.
(차라리 깨끗하게 처리해 버리라고
하지... )
사내는 담배를 물며 얼굴을 찡그렸다.
두목의 지시가 마뜩치 않았다. 여자는 이미
온전한 정신을 갖고 있지 않았다. 저런
여자 하나쯤 교통사고로 위장해 죽여
버리는 것은 손가락 하나 까딱하는 것처럼
손쉬운 일이었다.
이미 그런 일을 위해서 연습도 수 없이
했던 것이다.
주머니를 뒤져 라이터를 찾았으나 성냥이
손에 잡혔다. 사내는 성냥을 켜서 담배에
불을 붙여 폐부 깊숙히 담배 연기를 빨아
들였다. 그러자 입 속으로 유황 냄새가
가득히 번졌다.
텍사스 골목의 윈도우 안에는 밤의
여자들이 꽃처럼 화려하게 피어 있었다.
사내는 유리창 안에 상품처럼 진열되어
있는 여자들을 살피면서 무겁게 한숨을
내쉬었다. 어쩐지 기분이 꺼림칙했다.
문득 사내의 머릿속으로
광주사태,불경기,신군부,서울의
봄,계엄령,공수부대... 그런 단어들이
두서없이 스쳐 가면서 아랫도리로 뻐근한
기운이 밀려오는 것을 느꼈다.
(제기랄!)
사내는 입맛을 다셨다. 아랫도리에서
일어나는 욕망이 텍사스의 여자들로 인해
비롯된 것인지 추녀 밑에 웅크리고 앉아
있는 여자로 인한 것인지 짐작을 할 수
없었다.
여자의 몸은 그날 밤 동료들과 함께
가졌었다. 그는 두 번째로 여자를 가졌으나
별다른 감흥은 느낄 수 없었다. 그날 밤의
일은 오로지 여자에게 충격을 주기 위해
저지른 짓이었을 뿐이었다.
여자의 얼굴은 눈물로 범벅이 되어
있었다. 저항은 할 수도 없었고 이미 그의
동료가 일을 저지르고 난 뒤라 저항을 할
생각도 없는 것 같았다. 여자는 그저
다리를 벌린 채 울고 있었다.
여자가 추녀 밑에서 일어났다.
사내는 시트에서 몸을 바로 하고 여자를
획응시했다. 여자가 우산을 쓴 채
휘청거리는 걸음으로 텍사스 골목을
걸어가고 있었다.
사내는 차의 시동을 걸었다. 여자의 뒤를
미행해야 했다.
"차라리 죽여 버리면 간단할 텐데... "
일을 끝내고 난 뒤 그의 동료들은 담배를
피우며 술을 마셨다. 여자는 침대에 묶고
입을 틀어 막아 꼼짝을 할 수 없었다.
"이 여자가 죽으면 문제가 커지는
모양이야. "
"왜?"
"이 여자는 전에 국가대표 테니스
선수였대. "
"그럼 이런 여자를 무엇 때문에 우리에게
맡긴 거야?"
"여자가 대가 세서 도무지 말을 듣지
쨈짹 "
"말을 듣지 않아?"
"달라는데 한사코 주지 않은 모양이야. "
"설마?"
사내는 동료들의 말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런 일로 한 여자를 이렇게
비참하게 짓밟는다는 것이 믿어지지
않았다. 여자를 이렇게 만든 것은 좀 더
다른 이유가 있을 것이었다.
"그렇다면 그런 줄 알고 있어. "
"그럼 이제 어떻게 하지?"
"뽕을 줄 거야. "
"뽕?"
"히로뽕 말이야. "
"그걸 어디서 구해?"
"어디서 구하긴 어디서 구해?그 사람이
다 구해 주는 거지... 우린 그저
0하라는대로 하면 되는 거야... "
그러나 여자에게 히로뽕은 투여되지
않았다. 그들의 두목이 히로뽕을
가져오기도 전에 여자가 이지를 상실했기
때문이었다.
"이거 미친 거 아니야?"
그것은 이튿날 낮의 일이었다. 사내들은
히로뽕이 올 때를 기다리며 술을 마시고
있었다. 안암동 주택가는 조용했다. 어느
집에선가 피아노 소리가 끊어졌다 이어졌다
하며 들리고 있었고 이따금 채소장수가
골목을 지나가며 달랑무나 하루나를 사라며
소리를 지르고 있을 뿐이었다.
"미치다니?"
사내의 동료가 술에 취해 여자를 다시
겁탈하려고 하자 여자가 갑자기 히물히물
웃고 있었다.
"이거 웃는 것 좀봐!"
여자는 벽에 등을 기댄 채 다리를 벌리고
앉아 있었다. 그러나 다리를 벌린 자세가
사창가의 여자 같았다. 사내는 소름이 오싹
끼치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야!"
사내가 여자의 다리를 발로 찼다. 여자가
고개를 들고 사내를 쳐다보았다. 여자의
얼굴엔 여전히 히물거리는 미소가 사라지지
않고 있었다. 그러나 동공이 확대되어
있어서 여자가 이지를 상실했다는 것을
분명하게 알 수 있었다.
"어디?"
동료 하나가 여자를 잡아 일으켜 침대로
끌고 갔다.
"뭘하려는 거야?"
"제 정신인지 아닌지 살펴 보려는 거야.
"웃기고 있네. "
그러나 사내의 동료는 허리가 늘어진
여자를 침대로 끌고 가서 한참 있다가
나왔다.
"어땠어?"
"굉장했어. "
"굉장해?"
"계집이 허리질을 했어. "
사내는 공연히 얼굴이 벌개졌다. 그러나
사내도 그날 밤 여자를 침대로 끌고 갔다.
동료의 말대로 여자는 허리질을 했고
낑낑거리며 신음소리까지 토했다. 처음 그
짓을 당할 때 울부짖고 발버둥을 치던
것과는 전혀 달랐다.
"내 말이 맞지?"
동료가 그를 쳐다보며 의미심장하게
웃었다.
"그래,완전히 미친 모양이야... "
사내는 침을 칵 뱉았다.
사내와 동료들이 사흘을 그 집에
머물면서 지켜보았으나 여자가 이지를
상실하여 아무 것도 알아 보지 못하고
있었다. 원래의 계획은 히로뽕을 잔뜩
투여하여 정신병원으로 보낼 예정이었으나
그럴 필요가 전혀 없었던 것이다.
사내는 동료들과 함께 여자를 차에 태워
경춘가도에 버렸다 밤중이었다. 그리고는
멀찌기 떨어져서 여자를 감시했다.
여자는 경춘가도에서 한참동안이나
우두커니 서 있다가 춘천쪽으로 무작정
걷기 시작했다. 사내는 동료들과 함께
여자를 미행했다.
여자가 춘천 방향으로 30분쯤 걸었을 때
화물추럭 한 대가 와서 멎었다. 화물추럭
운전기사가 여자에게 무어라고 수작을
붙이더니 여자를 안아서 추럭에 태웠다.
"뭘하는 놈이지?"
"추럭기사지 뭐야?"
"누가 추럭기사인지 몰라?뭘하려고
여자를 태운 것이냐는 말이지... "
"그걸 내가 어떻게 알아?"
여자를 태운 화물추럭이 경춘가도를
달려가기 시작했다. 사내도 동료들과 함께
추럭 뒤를 따르기 시작했다.
"추럭이 멎는데... "
화물추럭은 가평 못미쳐 야산 기슭에서
멎었다.
"왜 가다가 섰지?"
사내는 추럭이 선 이유를 알 수가
없었다. 추럭이 있는 곳까지 가까이
덜란드식 지붕 밑 다락방과 세가
헐한 방을 5접근해서 차를 세우고 귀를 기울였으나
추럭의 동정을 알 수가 없었다. 추럭은 8톤
화물추럭이었기 때문에 운전석이 보통
추럭들보다 훨씬 높았다.
"운전기사 놈이 여자를 따먹는 거
아니야?"
사내는 동료가 중얼거리는 말에 아무
대꾸도 하지 않았다. 화물 추럭 운전기사가
여자를 태운 것은 욕심을 채우기 위해서인
것 같았다. 그러나 여자는 금세 추럭에서
떠밀리다시피 내렸다. 화물 추럭은 여자가
내리자 춘천쪽으로 요란하게 달려가 버렸고
여자는 아스팔트 바닥에 죽은 듯이 엎드려
있었다.
"어떻게 된 거야?"
"가까이 가 보자구. "
차의 시동을 걸고 가까이 가자 여자는
무릎을 꿇고 엎드려 있었다.
"피를 흘리고 있잖아?"
동료가 놀라서 소리를 질렀다. 사내는
여자를 향해 헤트라이트를 비추었다.
그러자 여자의 하체로 피가 흥건하게
흘러내리고 있는 것이 보였다.
"어떻게 된 거지?"
"달거리 하는 거 아니야?"
"그래두 여자라고 골고루 다하네. "
사내의 동료들이 담배를 피우며
빈정거렸다. 그러나 여자는 달거리를 한
것이 아니라 유산을 한 것이었다. 사내는
나중에야 그 사실을 알고 무겁게 한숨을
내쉬었다.
여자는 그 날 지나가는 용달차
운전기사에게 발견되어 병원으로 실려가
용케 목숨을 건졌다. 그러나 정신은 회복될
수 없었다. 그녀는 정신이상만 일으킨 것이
아니라 실어증()까지 걸려 말을
하지도 못했다. 입원비를 내지 못하고
병원에 며칠 동안이나 누워 있다가 거리로
나와 떠돌아 다니게 되었던 것이다.
사내는 창유리를 내리고 피우던 담배
꽁초를 길바닥에 버렸다. 비는 점점 세차게
쏟아지고 있었다.
여자는 큰 길로 걸어 나갔다. 두 달 남짓
거리를 돌아 다녔는데도 옷은 헤어지고
더러워 지나는 사람들은 여자를 보면 행여
부딪치기라도 할까봐 몸을 피하기에
급급했다. 누가 보아도 실성한 여자라는
것을 한 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제18장 악마의 숨소리
1
미경은 최종열의 소설 원고에서 시선을
떼었다. 눈이 몹시 피로했다. 회사에서
퇴근을 한 뒤에 줄곧 최종열의 소설을 읽어
눈이 충혈되기까지 했으나 소설을 읽는
것을 멈출 수는 없었다. 최종열의 소설은
이제 대단원을 향해 가고 있었다.
(강한섭과 최종열이 이렇게
연결되다니... )
미경은 최종열의 소설에 감탄을 금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최종열의 소설이
단순하게 구성상의 이유로 연결된 것이
아니라 사실에 바탕을 둔 것이라고 여겨져
더욱 가슴이 무거웠다.
강한섭 기자의 부인 채은숙의 비참한
삶도 소설을 읽는 미경의 가슴을 아프게
했다.
미경은 소설을 읽다가 말고 몇 번이나
눈을 들어 허공을 쳐다보곤 했었다.
채은숙의 비참한 삶은 미경의 삶과도
흡사한 데가 있었다.
(누군가 폭력배들을 동원했어... )
미경은 채은숙을 윤간하고 경춘가도에
버린 사내들이 경찰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채은숙은 그 일로 충격을 받아
실성을 하게 되었고,결국은 경기도 이천의
야산에서 목을 매어 죽게 한 것이다. 물론
그 죽음도 채은숙이 원한 것이라고는 할 수
없었다. 채은숙은 강한섭이 남긴
취재수첩과 소설 원고,그리고 광주사태를
찍은 사진을 갖고 돌아다니다가 죽은
것이다.
기묘한 일이었다.
미경은 다시 최종열의 소설로 시선을
떨어트렸다. 날이 새기 전에 최종열의
소설을 모두 읽어야 했다.
나뭇잎이 우수수 바람에 떨어져 날렸다.
가을이었다. 보도에 떨어진 나뭇잎들은
바람이 불 때마다 담벼락으로 쓸려 다녔다.
햇살은 품석()이 가지런히 배열되어
있는 인정전() 앞에도 고지넣했다.
고궁의 가을도 어느 사이에 추색이 완연해
있었다.
한경호는 도심 한가운데 있는 고궁을
거닐며 가슴이 무거운 것을 느꼈다.
창경궁()은 참으로 오래간만에
들어와 본 곳이었다. 그러나 가을이라
그런지 창경궁엔 시들어 가는 가을 햇살만
수선거리고 있을 뿐 조용하다 못해
적막하기까지 했다.
"그 놈은 김학규라는 작자였습니다. "
문득 백곰의 말이 귓전을 이명처럼
울려왔다. 한경호는 머리끝이 곧추 서는
듯한 기분을 느꼈다. 그러나 백곰에게는
아무 내색도 하지 않았다.
"뭘하는 놈이야?"
"부동산업자입니다. "
"복덕방 하는 놈?"
한경호는 얼굴을 찡그렸다. 아내가 한낱
복덕방 업자와 놀아났다는 사실이 어이가
없었다.
"복덕방은 복덕방이지만 꽤 규모가 큰
복덕방입니다. "
3 백곰이 빙긋 웃었다.
"놈은 갖고 있는 땅이 좀 있어서 거기에
집을 지어 팔기도 하더군요. 팔자가 좋아서
낚시나 다니는 놈입니다. "
"언제부터 만났대?"
"몇 년 된 것 같습니다. 이천에 살고
계실 때 부터라더군요. "
백곰을 만난 것은 한 달 전의 일이었다.
백곰은 경찰관 신분으로 공주옥이라는
술집을 경영하고 인신매매단으로부터
미성년자들을 사들여 윤락행위를 시킨 것이
발각되어 파면되었었다. 백곰의 범법은
구속 사유에 해당되었으나 경찰 상부가
옹호하는 바람에 구속은 간신히 면할 수
있었다.
최종열 기자 때문이었다.
최종열 기자는 강한섭 의문사 사건을
집요하게 파고들더니 어떻게 알았는지
대공분실의 백곰을 물고 늘어진 것이었다.
최종열 기자에게는 몇 번이나 신문사에
출입하는 기관원들을 통해 경고를 하기도
했고 최종열 기자가 쓴 기사를
보도지침으로 통제하기도 했었다. 그러나
최종열 기자는 완강했다. 마치 죽음을
무릅쓰고 강한섭 기자의 의문사 사건에
매달리고 있는 듯한 느낌이었다.
최종열 기자는 백곰이 경영하는
공주옥이라는 술집을 비밀리에 취재한 뒤
신문에 낱낱이 공개했었다.
최종열 기자의 기사는 대통령 취임
특집기사로 시리즈로 된 것이었는데 1회는
상(),중(),하()로 나누어 정치의
개혁,2회는 공무원 사회의 개혁을 다루고
있었다. 1회에서 제5공화국의 개혁정치를
마르도록 칭찬한 까닭에 2회의 공무원
사회의 개혁도 당연히 제5공화국에 대한
찬양으로 이루어질 것으로 생각했으나
공무원 사회가 위에서와 달리 하부
조직에서 부정부패를 척결하려는 의지가
요원하다고 신랄하게 일갈하고 있었다.
특히 경찰 조직의 부정과 권력 남용,축재를
상,중,하로 나누어 공격했다.
얼핏 보아서는 단순한 기사로 보였다.
경찰의 하부 조직의 문제이므로 통치권에서
별 악영향이 없을 것 같아 기사를 검열하는
보도지침을 내리지 않았다.
최종열 기자는 공무원 사회의 부정을
다룬 2회의 중 편에서 경찰이 공주옥이라는
술집을 경영하고,그 술집에서는 미성년자를
고용하여 윤락행위를 하고 있으며,경찰은
미성년자들이 윤락행위로 번 돈을 갈취하고
있다고 공개했던 것이다.
치안본부에서는 그 기사가 보도되자 관련
경찰관을 즉각 파면조치 하라고 지시했다.
관련 경찰관이 대공분실의 백곰이라는
것을 알게 된 것은 다른 신문들이 기회가
왔다는 듯이 백곰에 대한 기사를 써댔기
때문이었다. 경찰은 그때서야 최종열
기자의 덫에 걸린 사실을 알았으나 전
신문의 집중포화를 견딜 수가 없었다.
백곰은 결국 파면조치 되었던 것이다.
"어떻게 할까요?"
"글쎄... "
"처단하는 것은 간단한 일입니다. "
"놈을 죽이겠다는 말이야?명색이
경찰관을 했던 사람이... ?"
"저야 모든 악명을 혼자 쓰고 있는 놈
아닙니까?그리고 어디 저를 위해서 놈을
낫것입니까?"
백곰이 한경호를 옆눈질로 살피며 빙긋
웃었다.
"죽일 필요는 없어... "
"손이나 볼까요?"
"그냥 놔둬. "
"그냥이요?"
백곰이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한경호를
쏘아보았다. 마치 뭐 이따위 자식이
있어?하는 기분 나쁜 표정이었다.
"헤어지면 그만이지... "
한경호는 무심하게 뇌까렸다.
"아이들은 어떻게 합니까?"
"내 아이들이 아니니까... "
한경호는 얼굴을 딱딱하게 굳히며
내뱉았다.
"예?"
"그렇게 알고 있어. "
"무슨 말씀인지?"
"혈액형이 달라. 아이들이 모두 내 피가
섞이지 않았어. "
한경호는 자조하듯이 씁쓸하게 미소를
지었다.
"설마?"
백곰이 비로소 놀란 표정을 지었다.
"이제 됐어. 그런 얘기는 그만 하자구...
"
한경호는 대화가 더 이상 그쪽으로
흐르는 것을 차단했다.
"사무실을 하나 냈습니다. "
"사무실을?"
"예. "
"자네 국회의원 출마하나?"
"제가 무슨 국회의원에 출마를
하겠습니까?아이들 몇 데리고 있을
뿐입니다. 조직부장을 맡으셨으니 앞으로
저희 애들이 필요하실 때가 있을 겁니다.
아무 때나 부르기만 하십시오. "
한경호는 비서관직에서 조직부장으로
바뀌어 있었다. 제12대 국회의원 선거에
출마할 예정이었다.
"알았네. "
"사무실 내느라고 돈이 좀 들었는데 자금
좀 도와 주십시오. "
"내일 다시 와!"
"예. "
한경호는 쌀쌀하게 내뱉았다. 어쩐지
백곰과 마주 앉아 있는 것조차 소름이
돋아나도록 싫었다. 강한섭을 죽게 만든
것도 백곰이었고 강한섭의 처 채은숙에게
정신이상을 일으키도록 한 것도
6백곰이었다.
백곰은 경찰관의 자질이 없는
인물이었다. 그가 어떻게 경찰관이
되었는지는 알 수 없었으나 파출소에
근무할 때도 늘 말썽을 일으킨 일들이
비일비재했다. 관내 유흥음식점을
돌아다니며 돈을 갈취하는 것은 예사로운
일이었고 그의 관내에서 술집에 근무하는
아가씨들은 거의 모두 돈을 뜯기고 몸을
빼앗겼다.
그의 관내에서 백곰은 야마모또
천달수()라고 불렸다. 언제부터
나돌기 시작한 소문인지 알 수 없었으나
그가 근무하는 파출소에 왜정 때 악바리로
유명한 일본 순사 야마모또가 있었기
때문에 그렇게 불렸다는 것이었다.
백곰은 나중에 붙은 별호였다.
야마모또 천달수는 철면피였다. 사람들
중에는 자신이 저지른 악행을 수치스러워
할 줄 모르는 사람이 있는데 천달수가 바로
그런 자였다.
그런 천달수에게 어느 날 대공분실로
발령이 떨어졌다. 천달수는 대공분실이
무엇하는 곳인지도 몰랐으나 무엇보다
정복을 입지 않고 사복을 입고 근무한다는
사실이 흡족했다. 그들은 대공수사라는 한
마디만 하면 막강한 권세를 휘두를 수
있었다. 파출소 순경으로 근무하며 관내의
유흥음식점을 갈취하는 것은 아무 것도
아니었다.
대공분실은 그 무렵 시국사범 수사를
전문으로 하고 있었다. 대공분실 본연의
업무는 북한과 대치하고 있는 상황에서
공산주의자들에 대한 수사였으나 어느
때부터인가 대학생을 비롯한 시국사범
수사가 가장 중요한 임무가 되었던 것이다.
정부는 반체재,또는 반정부 활동을 하는
사람들을 대공 차원에서 다루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것은 독재정치에 이탈해 가는
민심을 가장 손쉽게 탄압하는 방법이었다.
정치판은 해를 거듭할수록 어수선해
갔다. 독재정치,유신헌법을 반대하는
국민들의 불만은 더욱 높아져 갔고
지식인과 학생들,종교인들,노동자들의
저항도 점점 드세어져 가고 있었다.
대공분실도 바빠져 갔다. 남영동의
대공분실은 언제나 수인들로 넘쳐났다.
가난한 노동자들,여공들,그리고 문인들과
학생들... 야마모또 천달수는 그 곳에서
단연 두각을 나타냈다.
그의 고문은 체재에 저항하는
사람들에게는 악마의 저주로 불리었다.
그는 무지막했다. 잠을 재우지 않거나
쇠파이프로 구타하는 것은 고문도
아니었다. 그런 것은 대공분실의 누구나 할
수 있었다. 그러나 천달수는 전기구이
통닭,손톱 밑을 바늘로 찌르기,팔을
뽑았다가 다시 맞추기,물수건을 얼굴에
얹어 놓고 주전자로 물뿌리기 등을
예사로이 했다.
사람들은 천달수가 마음만 먹으면 손가락
하나로도 시국 사범들을 살해할 수 도 있을
것이라고 하였다.
정권은 천달수를 이용했다. 천달수가
하는 짓이 애국적인 일이라고 추켜세우면서
반대자들을 탄압하도록 했다.
천달수는 차츰차츰 자신이 애국자라는
환상에 빠져 들어갔다. 그는 마치
독립투사인 듯이 행동했다. 정권을 잡고
있는 세력들은 그가 없으면 이 나라가 큰
혼란을 일으킬 것이라고 했고 어리석게도
천달수는 그 말을 믿었다.
그 말을 입증하듯이 그에게 여러 개의
훈장이 수여되었다. 정권을 잡고 있는
세력은 그에게 훈장까지 수여하면서 그의
행동을 부추켰던 것이다.
그러나 이제는 한낱 민간인에 지나지
않았다. 모두가 최종열이라는 풋내기
신문기자 때문이었다.
한경호는 인정전에서 나와 종묘()
쪽으로 느릿느릿 걸음을 떼어놓았다.
혜진이 종묘의 밴취에 나오기로 되어
있었다. 시간이 조금 이르기는 했으나
한적한 종묘를 미리 보는 것도 괜찮을 것
같았다.
창경궁과 종묘는 조그만 육교가 놓아져
있었다. 조선시대에는 정문으로 돌아서
다녀야 했으나 원남동 로타리에서 비원
쪽으로 가는 길 위에 육교를 놓아
관람객들이 손쉽게 오가고 교통도 원활하게
하고 있었다.
한경호는 육교를 건너 종묘로 들어갔다.
종묘의 뒷쪽 숲은 상수리나무가 우거져
있었다.
한경호는 상수리 나무숲을 지나 종묘
앞으로 갔다. 혜진은 종묘 앞 돌계단에
오도카니 앉아 있었다. 머리엔 검은
베레모를 썼고 갈색의 트렌치 코트를 입고
있었다.
"아저씨!"
한경호가 가까이 오는 기척을 느낀
혜진이 벌떡 일어나 한경호에게 달려왔다.
한경호는 달려오는 혜진을 가볍게 가슴에
안았다.
"일찍 나왔군. "
한경호는 혜진의 어깨 너머로 해가
기울고 있는 것을 보았다.
"조금 전에 도착했어요. "
혜진이 그의 팔짱을 끼며 대답했다.
"여기 괜찮지?"
"네. 서울 시내 한복판에 이렇게 조용한
곳이 있는지 몰랐어요. "
"고궁 중엔 여기가 제일 조용할 거야. "
한경호는 혜진의 어깨를 안고 종묘
뒷쪽으로 천천히 걸음을 떼어놓았다.
종묘에서 혜진을 만나기로 한 것은 혜진이
교외로 단풍 구경을 가자고 졸라서 멀리 갈
수 없으니 가까운 종묘나 가자며 약속을
했기 때문이었다.
"정말 그러네요. "
혜진은 만족한 표정이었다.
종묘 뒤의 숲은 단풍이 타는 듯이 붉게
물들어 있었다. 바람은 차고 하늘이
맑았다. 숲으로 들어서자 공기도 청정했다.
"종묘가 뭐하는 곳이예요?"
"조선시대 임금들의 위패를 모신 곳이야.
"
"위패요?"
"때에 맞춰 제사를 지내기도 했고... "
"그럼 제사를 지내는 궁전인가요?"
"그런 셈이지... "
"재미있네요. 제사를 지내는 궁전이 다
있으니... "
혜진의 말에 한경호는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러고 보면 조선시대는
제사를 유난히 중요하게 여긴 모양이었다.
잠시 대화가 끊겼다.
혜진은 허리를 구부려 나뭇잎을 주웠고
한경호는 담장 밖에서 들리는 도시의
소음에 귀를 기울였다.
"도토리도 있어요. "
혜진이 나뭇잎을 줍다가 상수리를 주워서
기쁜 표정을 지었다.
"그건 도토리가 아니고 상수리야. "
"상수리요?"
"우리가 참나무라고 부르는 나무의
열매지. "
"아!"
혜진이 봉긋한 입술을 벌리고 가볍게
놀라는 시늉을 했다. 한경호는 문득 혜진의
붉은 입술에 키스를 하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그러나 혜진이 몸을 돌리는 바람에
그만 두었다. 혜진은 계속 상수리 열매를
0줍고 있었다. 한경호는 혜진의 뒤를 따르며
숲에 야생하고 있는 산국()을 꺽었다.
"그럼 도토리묵은 어떤 걸로 만들어요?"
혜진이 상수리 열매를 한 주먹 주워서
한경호에게 가까이 왔다.
"도토리묵은 이걸로 만들어. "
"그럼 도토리묵이 아니라
상수리묵이겠네요?"
"그렇지!"
한경호는 보라색 산국 한 송이를 혜진의
머리에 꼽아 주었다. 흰 색과 보라색
두상화()가 9,10월이면 전국의 산과
들에 피었다. 어쩌다가 산국이 종묘의 숲에
피었는지 알 수 없었다. 군락()을
이루지도 않고 여기저기 산개해 피어
있는데도 모습이 조야()하면서도
청신했다.
"참 조용하고 좋아요. "
혜진이 수줍은 듯이 낮게 웃었다.
한경호는 혜진의 어깨를 안았다. 혜진의
머리에서도 청량한 가을 냄새가 풍겼다.
한경호는 혜진을 바짝 당겨 안아서 입술을
포갰다. 가을 향기가 묻어 나는 산국처럼
혜진의 입술에서 향기가 풍겼다.
"혜진이 백곡 내려가기로 한 것 생각해
봤어?"
입술을 떼고 한경호가 혜진에게 물었다.
"네. "
혜진이 고개를 숙이며 대답했다. 마음에
썩 내키는 기색은 아니었으나 어쩔 수
없어서 대답을 하는 기분이었다.
"정말?"
"네. "
혜진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고마워. "
한경호는 혜진을 다시 덥썩 안았다. 충북
진천군 백곡은 한경호의 고향이었다.
그러나 한경호는 백곡에서 태어나기만 했을
뿐 자란 곳은 부산이었다. 부산이 한경호의
고향이라고 해야 타당했으나 출생지는
언제나 충북 진천이 되어 한경호의
이력서에 붙어 다녔다.
한경호가 혜진을 백곡으로 내려가라고 한
것은 국회의원에 출마하기 위해서였다.
이미 한경호는 백곡면에 논도 사놓았고
백곡 저수지 옆에는 2층집도 하나
신축했다.
선거구민 관리는 지구당에서 하겠지만
선거철이 닥치면 한경호도 자주 진천을
오르내려야 했다. 진천에 내려갈 때마다
혜진을 데리고 내려가느니 아예 혜진을
상주시키려는 속셈이었다. 혜진이
마음 내켜 하지 않는 것이 자신이 한경호의
첩이라는 생각을 했기 때문일 터였다.
"차를 하나 사 줄께. "
"차요?"
"빨간 색이나 흰 색으로... "
"네. "
혜진이 비로소 고개를 들고 웃으며
한경호를 쳐다보았다. 한경호는 다시
혜진을 안아서 입술을 부볐다. 내년
2월이면 국회의원 선거가 있을 것이고
한경호는 공천을 받아서 국회의원에 출마할
작정이었다.
국회의원 신분으로 마음에 드는 계집
하나를 첩으로 거느리는 것은 당연한
권리라고 생각했다.
2
달이 높이 떠올랐다. 처녀의 살찐
가슴팍처럼 희고 뽀얀 달이었다. 정란은
창가에 서서 신비스러운 광망을 뿌리고
있는 하늘을 쳐다본다.
김학규가 죽다니...
김학규가 어떻게 그렇게 허무하게
죽는다는 말인가.
정란은 창으로 달을 쳐다보며 김학규의
얼굴을 머릿속에 떠올린다. 가을이다.
달빛이 희다 못해 푸르스름하고 바람이 일
때마다 나뭇잎들이 우수수 골목으로 쓸려
다닌다. 뜰에서는 밤이 깊지 않은데도
풀벌레가 애잔하게 울고 있다.
김학규가 죽은 것은 오늘 새벽의
일이었다. 어젯밤 김학규는 서울에 올라
3와서 그녀와 함께 밤을 지내고 이천으로
내려가다가 가로수를 들이받고 죽은
것이다.
정란은 김학규의 죽음이 믿어지지
않았다. 아직도 그녀의 몸에는 김학규의
체취가 남아 있는 것만 같았다. 지난 밤에
김학규의 뜨거운 손길이 스치던 그녀의 몸
구석구석,김학규의 축축한 입술이
화인()을 새기던 그녀의 가슴과
둔부...
(김학규는 정말 죽은 것일까?)
정란은 김학규의 죽음이 믿어지지
않았다. 암만해도 죽음이 그렇게 쉽사리 올
것 같지 않았다.
창에 턱을 괴었다. 안암동 주택가는 푸른
달빛으로 가득차 있고 앞집은 불이 꺼진 채
조용했다. 마치 괴괴할 정도로 앞집은
조용했다. 그러고 보면 죽음이 항상 멀리
있는 것만은 아니었다. 앞집 남자 강한섭도
거짓말처럼 죽은 것이다.
정란은 무겁게 한숨을 내쉬었다.
강한섭이 죽은지 벌써 4년이나 되고
있었다. 그후 강한섭의 부인 채은숙도
실성을 하였고 집은 아직까지 비어 있었다.
이따금 채은숙의 친정 식구들이 다녀가기는
하였으나 집은 비어 있을 때가 더 많았다.
"우리 애가 돌아오면 알려 주세요. "
채은숙의 친정 어머니는 정란을 붙잡고
신신당부를 하였다. 시골 여자였으나 딸에
대한 사랑은 남다른 것 같았다.
"네. "
은숙은 쓸쓸하게 대답했다. 채은숙의
실성이 가슴 아펐다. 게다가 채은숙이
어디로 갔는지도 알 수 없었다.
"중원일보의 최종열 기자입니다. "
신문사 기자들도 채은숙을 찾아온 일이
있었다. 그들은 모두 정란이 앞집에 산다는
이유로 채은숙에 대해 이것저것 물어보곤
하였다.
"네. "
"앞집에 살던 채은숙씨에 대해
여쭤볼려고 합니다. "
"무슨... ?"
"채은숙씨가 어디로 갔는지 알 수
있습니까?"
"몰라요. "
"채은숙씨가 실성을 했다는데
사실입니까?"
"네. "
"무엇 때문에 실성을 했습니까?"
"모르겠어요. "
"채은숙씨가 실성을 하기 전에 무슨 일을
당했는지 모르십니까?"
"전 자세히 모르겠어요. "
"누가 아는 사람이 있을까요?"
"몰라요. 거의 없을 거예요. 남편이 죽은
뒤 혼자 살았으니... "
정란은 고개를 흔들었다. 채은숙이 무엇
때문에 실성을 했는지는 정란도 궁금하게
여기는 일이었다.
"채은숙씨가 정신병원에 입원했던 일은
알고 있습니까?"
"정신병원에요?"
"정신병원이라고 하기보다는
정신병자수용소지만 2개월 동안 갇혀
있었죠. "
"왜요?"
"춘천 가는 국도에서 유산()을 하고
가는 것을 용달차 운전기사가
발견하여 병원에 보냈는데 병원에서 유산에
대한 치료만 하고 수용소로 보냈답니다. "
"어쩜... !"
정란은 가슴이 터질 것 같았다.
"병원의 얘기로는 윤간을 당한 충격으로
실성을 하면서 유산을 한 것이라고 합니다.
"
"네에. "
"혹시 채은숙씨가 돌아오면 제게 연락을
해주십시요. "
최종열 기자는 정란에게 명함을 한 장
주고 돌아갔다. 그러나 채은숙은 끝내
돌아오지 않고 있었다. 어쩌면 지금쯤 이미
죽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내일은 앞 집이나 한 번 살펴봐야지...
)
정란은 앞집을 바라보며 속으로
생각했다. 채은숙이 행방불명이 된 후 그
집에서 이따금 김학규와 밀회를 했었다.
아무도 없는 빈 집이고 채은숙의 어머니가
열쇠까지 맡겼기 때문에 마음대로 사용할
수 있었다.
(나는 이제 어떻게 살아야 하지?)
정란은 김학규의 죽음보다 그를 다시는
만날 수 없다는 사실이 슬펐다. 김학규는
그녀에게 삶의 희망이었고 의지였었다.
그러나 그가 죽은 이상 이제는 새로운
의지처를 찾아야 했다.
최종열 기자로부터 다시 전화가 걸려온
것은 이튿날 아침의 일이었다. 정란이
채은숙의 집에 들어가 이 곳 저 곳을
살피고 돌아오자 일하는 아줌마가
최종열이라는 사람한테 전화가 왔었다고
주었다.
"최종열이라고 했어요?"
정란은 고개를 갸우뚱했다. 최종열이
누구인지 얼핏 생각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네. "
일하는 아줌마가 대답했다.
"뭐라고 그래요?"
"조금 후에 다시 한다고 그랬어요. "
"그럼 전화가 오면 내가 받을 테니 그냥
두세요. "
"네. "
일하는 아줌마가 고개를 숙여 보이고
주방으로 들어갔다. 아이를 낳고부터 주방
일도 하고 청소며 빨래 같은 허드레 일을
시키기 위해 들인 아줌마였다. 고향이
전주라 전주댁이라고 불렀다. 운전기사는
'마당에서 나뭇잎을 쓸어서 태우고 있었다.
담장 쪽에 있는 라일락이며 은행나무에서
적지 않은 나뭇잎이 떨어지고 있었다. 매일
같이 나뭇잎을 쓸어 모아 태우는데도 자고
일어나면 나뭇잎이 수북히 떨어져 있곤
하였다.
남편 한경호는 선거 때문에 자주 이천에
내려가 있었다. 서울에 있을 때도 낮에는
중앙당에서 조직부의 일을 하고 밤이면
진천에 내려가 있었다. 집에 돌아오지
않는지 벌써 사흘째였다.
그때 전화벨이 요란하게 울렸다.
"저... 최종열이라고 합니다.
기억하시겠습니까?"
수화기 저 쪽의 목소리는 아침인데도
술에 취한 느낌이 들었다.
"네. "
"기억력이 좋으시군요. "
최종열의 목소리는 어쩐지 비아냥대고
있는 것 같았다.
"무슨 일예요?"
정란은 경계를 하듯이 긴장해서 물었다.
"채은숙씨 소식을 알고 계시나 해서요. "
"몰라요. "
정란은 쌀쌀맞게 대답했다.
"저는 알고 있습니다. "
"그래요?지금 무얼 하고 있어요?"
"수용소에 있습니다. 걸핏하면 수용소를
도망 나와 돌아다니다가 다시 수용소에
끌려가곤 하더군요. "
최종열의 말에 정란은 가슴을 저미는
듯한 안타까운 생각이들었다. 총명하고
아름답던 채은숙이 실성하여
정신병자수용소를 들락거리고 있다니
오아팠다.
"그 부모님은 알고 계시나요?"
"모를 겁니다. "
"그럼 부모님에게 알려 드려야겠네요?"
"알려 드려야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부모님들 마음만 아프지... "
"...... "
정란은 얼굴을 찌푸렸다. 최종열이 무슨
의도로 전화를 걸고 있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참 저는 신문사에서 해고되었습니다. "
"왜요?"
"보도지침 때문이죠. "
"보도지침이요?"
"보도지침이 무엇인지 모르십니까?"
"네. "
"그렇군요. 모르고 계셨으니... 하긴 알
없죠. 김학규씨가 죽었더군요.
교통사고로... "
정란은 최종열의 말에 가슴이 철렁했다.
최종열이라는 사람이 김학규와 나와의
관계를 알고 있었구나,하는 생각에 가슴이
마구 뛰었다. 이 사람이 혹시 김학규와의
일을 남편에게 알리는 것이 아닐까하여
겁이 덜컥 났다.
"지금은 무얼 하세요?"
정란은 재빨리 화제를 바꾸었다.
최종열이 계속 김학규에 대해 얘기하는
것이 싫었다.
"예?"
"신문사 그만 두셨다고 했잖아요. "
"아!"
최종열이 의외의 질문이라는 듯이 피식
웃었다.
"글을 쓰고 있어요. "
"글이요?"
"소설이요. 밥벌이는 안되지만 무언가
쓰지 않을 수 없어요. "
"네에. "
정란은 최종열의 말을 이해할 수 없었다.
최종열이 왜 이런 말을 하는지 알 수
없었던 것이다.
"혹시 천달수라는 사람을 아십니까?"
"몰라요. "
"정말 모르십니까?"
최종열이 다짐을 하듯이 정란에게
물었다.
"네. 왜 그러시는데요?"
"천달수가 채은숙씨를 그렇게
만들었습니다. "
"...... "
"천달수는 아주 악질적인 인간예요. "
"전 그런 사람 몰라요. "
"다음에 또 전화를 드리지요. "
최종열의 전화가 끊겼다. 최종열은
정란에게 무엇인가 할말이 있는 듯했으나
망설이다가 그만 둔 것 같았다. 정란은
최종열의 전화가 끝나자 우두커니 마당을
내다보았다. 운전기사가 낙엽을 쓸어 모아
태우는 푸른 연기가 매캐하게 퍼지고
있었다.
3
한경호는 저수지를 물끄러미 응시했다.
김학규라는 자가 죽었으나 마음은 그다지
유쾌하지 않았다. 가을이 깊어 가고 있기
때문일까. 마음 한 구석에 무거운
돌덩어리를 얹어 놓은 듯이 답답했다. 10월
하순이었다. 산과 들이 온통 황금빛
일색이었다. 멀고 가까운 산들은 추색이
붉었고 들에는 낟알이 탐스럽게 영글어
금빛으로 출렁거리고 있었다.
빠른 곳에서는 벌써 벼베기를 하는 곳도
있었다.
(김학규를 죽인 것은 백곰이겠지... )
한경호는 김학규를 죽인 것이 백곰
천달수라고 단정을 했다. 한경호는
천달수가 김학규를 죽이는 것을 바라고
있었다. 그러나 입 밖으로 김학규를 죽여
달라고 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천달수의
성격상 김학규를 죽여 놓고 그것을 미끼로
무엇인가 협박을 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천달수는 지저분한 인간이었다.
강한섭을 죽게 만든 것도 천달수였고
강한섭의 부인 채은숙을 윤간하고
경춘가도에 버린 것도 천달수였다. 한
집안을 완전히 파괴한 인간인 것이다.
물론 강한섭을 죽게 한 것은 정치적인
성격도 강했다. 천달수 같은 인간을
대공분실에서 시국사범을 수사하게 한 것이
정치인들인 것이다. 정치인들은 천달수
같은 자를 이용하고 있었다.
한경호도 지구당을 개편할 때 천달수의
도움을 받았었다. 한경호가 인수받아야 할
지구당 위원장이 한사코 위원장 자리를
내놓으려고 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개편대회를 치르던 날은 청년 당원들을
동원하여 한경호에게 위협을 가했던
것이다.
천달수는 밑에 있는 폭력배들을 동원하여
지구당 전 위원장 측의 청년 당원들을
깨끗하게 소탕해 버렸다. 각목이
난무하고,회칼까지 등장했으나 신문에는
보도되지 않았다.
한경호가 손을 써서 보도하지 못하도록
지침을 내렸던 것이다. 그가 모시고 있던
사람은 총과 탱크로 권력을 쟁취했으나
그는 각목과 회칼로 지구당 위원장 자리를
빼앗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제는 아내와의 관계를 정리할
때가 왔다고 생각했다. 다만 선거철이
목전에 닥쳤기 때문에 일단 선거철은
무사히 넘겨야 했다. 김학규의 죽음은 목에
걸린 가시를 빼어낸 것처럼 후련한
일이었다. 아내가 김학규처럼 그렇게 죽어
준다면 더 바랄 것이 없을 것 같았다.
아내와 이혼을 하는 것은 정치계에
탭졍그에게는 그다지 바람직하지
못했다. 이혼을 하는 것과 사별을 하는
것은 천지 차이인 것이다. 아내가 병에
걸려 죽어 주거나 교통사고로 죽어
주었으면 싶었다.
문득 바람이 불어 왔다. 포플라의 샛노란
잎사귀들이 우수수 떨어지고
코스모스군()이 스산하게 나부꼈다.
한경호는 몸을 가볍게 떨었다. 해가
설핏이 기울면서 기온이 차가워지고
있었다.
한경호는 혜진의 무릎을 베고 누웠다.
해는 저수지 위에 붉은 노을을 그리며
자맥질을 하고 있었다.
"추워요?"
혜진이 물었다.
"아니. "
한경호는 고개를 흔들었다. 나뭇잎이
떨어지기 시작했으므로 이제 곧 겨울이
닥칠 것이다. 얼어붙은 하늘,빙판길,물기에
젖은 기차의 목쉰 기적소리... 그런 것들을
생각하자 한경호는 몸이 떨려 오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술 한 잔 더 드려요?"
혜진이 맑은 눈빛으로 한경호를
내려다보며 물었다.
"응. "
한경호는 옆에 놓은 크리스탈 잔을
잡았다. 별장에서 5백보 쯤 떨어진 저수지
뚝방이었다. 저수지 건너편에는 충주
방면으로 가는 국도가 이어지고 있었고
국도 옆에는 잎사귀가 노랗게 물든
포플라가 열병을 하듯이 길게 늘어서
있었다.
뚝방에는 코스모스가 군락을 이루고
피어서 하늘거리고 있었다. 노을이 점점
짙어져 가는 하늘은 윤기 하나 없이
푸르기만 했다.
"드세요. "
혜진이 한경호의 잔에 시바스 리갈을
따랐다. 박정희 대통령이 궁정동에서
시해될 때 마신 술이라고 하여 세간에
분분하게 화제가 되었던 술이었다.
"저녁이 되니까 쌀쌀해 지는 것 같아요.
"
"해도 짧아지고... "
한경호는 시바스 리갈 한 잔을 입에 털어
넣었다. 서울에서는 폭탄주가 한창
유행하고 있었으나 한경호는 그런 만용을
부리지 않았다.
"마실래?"
한경호는 술을 혀로 입에서 굴리다가
목으로 넘긴 뒤 혜진에게 물었다.
"저녁 해야죠. "
혜진이 방긋 웃었다. 한경호는 다시
혜진의 무릎을 베고 누웠다. 바람이 일고
있기 때문인지 저수지에서도 물결이 일고
있었다.
"혜진이 스물 셋인가?"
"네. "
"시집을 가야겠군... "
한경호는 혜진을 떠보기 위해 슬며시
수작을 붙였다. 혜진이 눈을 살짝 흘기더니
한경호의 팔을 꼬집었다.
"시집은 왜 가요?"
"젊은 여자가 그럼 혼자 살아?"
"제가 어디 혼자 살아요?"
"그럼 나만을 바라보고 살 거야?"
"네. "
"괜히 그러지... "
"정말예요. 젊은 애들한테 시집가서 애나
키우며 살기는 싫어요. "
"나하고 이렇게 사는 것은 첩으로 사는
거나 마찬가지야. "
"요즈음은 첩이라고 안 그래요. "
"그럼?"
"내연의 처()라고 그래요. "
"내연의 처?"
한경호는 혜진의 말이 어이가 없어서
피식 웃었다. 내연의 처라는 말은 비교적
어떤 사건이 일어났을 때 기자들이 자주
쓰는 말이었다. 경찰 조서에도 내연이란
말이 자주 쓰였다.
"네. "
혜진이 웃음을 깨물었다. 혜진의 말은
그저 우스개 말인 모양이었다. 한경호는
몸을 일으키며 혜진을 안아 풀 숲 위에
눕혔다. 혜진의 몸에서 비릿한 풀냄새가
풍겨 왔다.
한경호는 혜진의 얼굴을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혜진이 한경호의 시선을 감당하기
어려운지 눈을 지그시 감았다.
한경호는 자신의 입술을 혜진의 입술에
얹었다. 그러자 혜진이 입술을 열어
주었다. 한경호는 혜진의 입술이 열리자
혀를 밀어 넣었다. 손으로는 둔부를
쓰다듬다가 스커트를 걷어 올렸다. 혜진이
가볍게 저항하는 시늉을 했다.
"음... "
혜진이 그의 혀를 밀어내며 신음을
흘렸다.
한경호는 손으로 혜진의 삼각분기점에
있는 언덕을 찾아갔다. 혜진의 몸에서는
막연하지만 들큼한 탁주 냄새가 풍기기
시작하고 있었다.
혜진은 경기도 문산()이 고향이었다.
그녀는 거기서 양조장을 하는 아버지
김성일()과 어머니 유옥주()
사이에서 둘째 딸로 태어났다. 그녀의
형제는 오빠를 비롯하여 4남매나 되었으나
양조장을 하는 아버지가 중풍에 걸려 앓아
눕는 바람에 어머니가 양조장을 경영하게
되었다. 오빠는 그 무렵 서울에서 대학교에
다니고 있었다. 그러나 공부는 하지 않고
집에서 돈을 가져다가 영화 제작자들에게
바치기에 바빴다.
혜진의 오빠는 사내답지 않게 얼굴이
곱상하게 생겨 친구들이 영화배우로
P나가라는 말을 자주 했고 혜진의 오빠
자신도 영화배우를 하고 싶어했다.
그러나 영화배우가 되는 일은 요원했다.
혜진의 오빠는 10년 남짓을 충무로
일대에서 허비했다. 한때 충무로에서
혜진의 오빠를 모르면 영화 제작자가
아니라는 말까지 나돌 정도로 혜진의
오빠는 충무로에 이름이 널리 알려져
있었다. 영화 출연도 몇 번했으나 대개가
대사 몇 마디뿐인 엑스트라급 조연이었고
가장 길게 출연한 것도 10분을 넘지
않았다.
혜진의 오빠는 마침내 영화배우가 되는
길을 포기하고 문산으로 돌아왔다. 그러나
혜진의 오빠가 집으로 돌아 왔을 때는
문산에서 알부자로 알려진 양조장이
빚더미에 쌓여 있었다.
혜진은 근근히 고등학교를 졸업하였다.
오빠가 집안의 돈을 모조리 탕진하고
오히려 빚까지 지게 했기 때문에 수업료도
제대로 낼 수 있는 형편이 아니었다.
혜진은 학창생활이 우울했다.
마침내 양조장이 빛에 넘어가고 어머니가
노점을 하여 살아가게 되었다. 오빠는
문산에 돌아왔으나 여전히 빈둥거리기만
했고 취직 시험을 보면 번번이 떨어졌다.
그러나 형편이 어려운데도 불구하고
그녀는 공부를 열심히 하여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학교까지 입학하게 되었다.
물론 야간 대학이었다. 낮에는 조그만
회사의 경리로 취직하여 열심히 일을 했다.
그 무렵 혜진의 사무실에 출입하는
사람들이 혜진의 미모를 칭찬하기
시작했다. 고등학교에 다닐 때도
남학생들이 편지를 보내 오거나 집에까지
쫑아 오는 일이 많았으나 영화배우가
되라고 권고하는 사람은 없었다.
혜진의 집에서는 오빠 때문에
영화배우라는 말에 넌덜머리를 내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서울에서는 달랐다. 혜진은
서울에서 꽃처럼 화사하게 피었다. 혜진은
스무 살이 되어서야 미모가 더욱 빛났다.
혜진도 영화배우에 대한 미련이 생기기
시작했다. 혜진은 연기학원에 등록했다.
회사와 학교를 다니며 연기학원에 다닐
수가 없어서 학교는 휴학을 했다.
그러나 혜진은 영화배우가 되는 대신
탈렌트가 되었다. 그 무렵 영화에 못지
않게 텔레비전의 드라마 배우들이 인기를
끌고 있기도 했지만 방송국에서 마침
탈렌트 공개 모집을 했기 때문이었다.
혜진은 탈렌트 시험에 당당하게 합격을
했다.
혜진은 그때부터 방송국으로 출근을 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혜진에게도 운명의 신은
잔인했다. 혜진이 탈렌트 시험에 합격한 지
불과 두 달도 못되어 방송국이 KBS로
통합되고 말았던 것이다.
KBS에서는 탈렌트들이 넘쳐나고 있어서
혜진이 발을 디밀 틈이 없었다. 탈렌트들도
모두 KBS로 옮겼으나 찬밥 신세였다.
모두들 겉돌다가 하나 둘 KBS를 떠났다.
혜진도 KBS를 떠났다. 그러나 갈 곳이
없었다. 혜진은 3개월을 자취방에서 잠만
잤다.
그때 한 요정에서 혜진에게 손을 뻗쳐
왔다. 혜진은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요정으로 나갔다.
혜진이 요정의 기생이 된 사연이었다.
혜진의 말이 어디까지 진실인지 알 수
없었으나 한경호는 그 말을 믿었다. 혜진은
지금이라도 드라마의 주인공으로
출연하라고 해도 손색이 없을 정도로
뛰어난 미모를 갖고 있었다.
혜진의 몸에서 들큼한 탁주 냄새가
풍기는 듯한 기분은 혜진의 집이 양주장을
했기 때문일 터였다.
한경호의 손이 혜진의 스커트를 허리
위로 걷어 올렸다. 혜진은 스커트 안에
삼각형의 앙징 맞은 속옷을 입고 있었다.
한경호는 혜진의 속옷을 벗기기 시작했다.
쌀쌀한 저녁 바람 때문일까. 혜진의 몸이
풀잎처럼 떨렸다.
"추워?"
"조금이요. "
혜진이 나직하게 속삭이며 한경호의 목에
팔을 감았다. 한경호는 혜진의 몸에 자신의
몸을 실으며 하체가 뻐근해져 오는 것을
느꼈다.
사방은 이미 어둑어둑 땅거미가 내리기
시작했고 저수지의 물결소리가 높아져
갔다.
한경호가 혜진과 함께 별장으로 돌아왔을
때는 사방이 캄캄해져 있었다. 한경호는
혜진이 지어 주는 저녁을 먹고 다시 술을
마셨다.
천달수에게서 전화가 온 것은 한경호가
혜진과 함께 양주 한 병을 비우고 침대에
누웠을 때였다.
"무슨 일이야?"
"사모님이 카바레에서 나와 호텔에
윱 "
"뭐?"
한경호는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김학규가 죽은지 얼마 되지도 않는데
아내가 카바레에 출입을 하고 다른 남자를
만나고 있다는 사실이 믿을 수 없었다.
"남자 놈은 조대현이라는 놈입니다. "
"조대현?"
"예. "
"뭐하는 놈이야?"
"제비죠. "
"알았어. 내가 올라 갈께. 거기 어디야?"
"강남에 있는 플라밍고 호텔입니다. "
"알았어. "
한경호는 전화를 찰칵 끊었다. 아내가
여전히 바람을 피우고 있다는 사실에 머리
끝이 곤두섰다.
한경호는 혜진에게 별장에 있으라고 하고
차를 끌고 나왔다. 한밤중이었다. 안개가
자욱했다. 한경호는 손수 운전을 하여
국도로 나섰다. 저녁을 먹은 뒤에도 계속
술을 마셔 취기가 돌았다. 그러나 아내의
불륜 현장을 이번에는 잡아서
조치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이제는 더 이상
방치해 두고 싶지 않았다.
안개는 국도에도 자욱했다.
저수지에서 피어 오른 안개가 바람을
따라 낮게 깔려 쓸려 다니고 있었다.
한경호는 국도로 나서자 액셀레이터를
힘껏 밟았다. 마음이 초조하고 조급했다.
안개가 자욱하기는 했으나 밤중이라 국도에
차량이 없었다.
차는 국도를 바람처럼 질주했다. 술
때문인지 전혀 속도감이 느껴지지 않았다.
낮쓸려 다니는 안개 사이로 아내가
낯선 놈팡이를 끌어안고 뒹굴고 있는
모습만 자구 어른거렸다.
(더러운 년!)
한경호는 이를 갈았다. 전에 없이 아내에
대한 증오가 가슴 깊은 곳에서 끓어올랐다.
아내가 조대현이라는 놈팡이와 헐떡거리고
있을 생각을 하자 머리 끝이 곤두섰다.
차가 광혜원을 지났을 때였다. 한경호는
갑자기 강렬한 헤트라이트 불빛이 쏘아져
오는 바람에 깜짝 놀랐다. 한경호의 앞으로
불빛 하나가 맹렬하게 돌진해 오고 있었다.
헤트라이트 불빛에 눈이 부셔서 눈을
뜨기조차 어려웠으나 한경호는 반사적으로
그것이 승용차라고 생각했다. 버스나 추럭
같은 대형차가 아니라는 것을 느낌으로 알
수 있었다. 한경호는 섬광이 번쩍 하는
0찰나에 급브레이크를 밟으며 핸들을
꺾었다.
그 순간 커다란 가로수가 한경호를 향해
돌진해 왔다 한경호는 핸들을 놓고 재빨리
두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그러자 차가
무엇엔가 쾅 하고 충돌하는 충격이
느껴지면서 갈비뼈가 뻐근했다.
그리고 한경호는 아무 것도 기억하지
못하게 되었다.
한경호가 눈을 뜬 것은 병원의
침대에서였다. 갈비뼈로 극심한 통증이
느껴졌고 얼굴이 피범벅이 되어 있었다.
(교통사고야... !)
한경호는 가슴이 철렁했다.
재빨리 팔과 다리를 움직여 보았으나
팔과 발은 움직일 수 있었다 중상은 아닌
모양이었다. 그러나 정신이 가물가물하여
몇 번이나 눈을 감았다가 뜨곤 눈을
감았다가 뜨곤 하였다. 눈을 떴을 때도
머릿속이 멍하여 아무 것도 생각할 수
없었다. 이따금 가슴이 부서지는 것 같은
통증에 눈을 뜨면 사방이 흰 벽으로 되어
있는 병실이었고 역시 흰 옷을 입은
간호사와 의사가 소리없이 들어왔다가
소리없이 나가곤 하였다.
아내가 병실에 들어온 것은 한경호가
눈을 뜨고 사람들을 알아보기 시작했을
때였다. 그러나 한경호와 말을 할 수 있게
된 것은 그러고도 이틀이 지나서였다.
한경호가 잠에서 깨어나자 아내가 침대
앞에 앉아 있었다. 한경호는 아내의 얼굴을
보자 얼굴부터 찌푸렸다. 아내의 불륜
현장을 잡겠다고 취중에 운전을 하여
달려가다가 교통사고를 당했다는 생각을
기분이 이상했다. 부정한 아내에 대한
분통이 치밀었으나 한경호는 밖으로
내색하지 않았다.
"수혈을 했어요. "
아내가 앞에 앉아서 무표정한 기색으로
말하였다.
"수혈?"
한경호는 아내의 비대한 몸뚱이를 보고
얼굴을 찌푸렸다. 몇 년 사이에 아내의
몸은 점점 뚱뚱해져 이제는 걷는 것도
뒤뚱거리며 걸어야 했다.
"피를 너무 많이 흘렸대요. "
아내는 남의 얘기하듯 덤덤하게 말하고
있었다.
"어떻게 된 거지?"
"당신은 프라다너스 나무를
들이받았어요. 프라다너스 나무는 뽑히고
차는 앞 부분이 완전히 부서졌어요. "
아내가 몸을 부르르 떠는 시늉을 했다.
한경호는 그제서야 눈 앞으로 돌진해 오던
헤트라이트가 생각났다.
"어떤 차가 갑자기 내 앞으로
달려들었어. 그걸 피하다가 가로수를
들이받은 모양이야. "
"당신이 운전을 지그재그로 했대요. "
"누가 그래?"
"당신이 사고 날 때 지나가던 택시
기사가 그랬어요. 그 택시 기사도 당신
때문에 논두럭에 처박혔대요. "
"무슨 소리야?"
"당신이 지그재그로 달려오는 바람에
당신을 피하다가 논두럭에 처박혔다는
거예요. "
"지 놈이 중앙선을 침범하고... "
"당신은 음주 운전이래요. "
그 말은 사실이었다. 한경호는 그날 술에
몹시 취한 상태로 운전을 했던 것이다.
"갈비뼈 두 개가 부러지고 얼굴을 열 네
바늘 꿰맸어요. "
"몇 주나 입원해야 한대. "
"8주요. "
"제길... "
한경호는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8주
동안이나 병원에 있어야 한다는 사실이
짜증스러웠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죽지
않은 것만 해도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술을
먹고 운전을 했으므로 죽을 수도 있었다.
그렇게 되었으면 아내는 다른 놈팡이들과
마음껏 놀아날 것이 분명했다.
"최종열이라는 사람이 전화를 했었어요.
"
아내가 먼 허공을 바라보고 있다가 불쑥
내뱉았다.
"최종열?"
"전에 중원일보 기자였었대요. "
한경호는 공연히 가슴이 뜨끔했다.
"지금은 기자가 아니고?"
"네. "
"지금은 무얼한대?"
"글을 쓴대요. "
"글?"
"네. "
아내의 대답은 냉랭했다. 아내도 그에게
애정이 없는 것이 분명했다.
"그런데 왜 전화를 했대?"
"천달수라는 사람을 아느냐고 했어요. "
"그래서?"
"모른다고 했어요. "
"잘했어. "
"천달수라는 사람을 알아요?"
"몰라. "
"우리 앞 집에 사는 신문기자의 부인을
실성하게 만든 장본인이라고 그러대요. "
아내가 한경호의 얼굴을 가만히 살폈다.
한경호는 아내의 시선과 마주치자 뜨끔하여
고개를 외로 꼬았다. 아내의 시선은 마치
너는 알고 있지 않느냐는 듯이 차가웠다.
"천달수가 왜 신문기자 부인을 실성하게
만들어?"
한경호는 다시 가슴이 철렁했다.
최종열이라는 자가 천달수가 저지른 일을
모두 알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
불안했다.
"신문기자 부인을 윤간했대요. "
"설마... "
"가볼께요. 젊은 아가씨가 면회를 와
있어요. 진천 지구당 사무실에서 왔다는데
예쁜 아가씨더군요. "
아내가 의자에서 몸을 일으켜 병실을
나갔다. 어쩐지 찬 바람이 일고 있는 듯한
냉랭한 뒷모습이었다.
(천달수 그 놈이 모든 화근의
원인이야... )
한경호는 상처의 고통도 잊고 천달수를
증오했다.
이내 혜진이 희고 노란 국화꽃 한 묶음을
들고 들어왔다.
"사모님 뵈었어요. "
혜진이 웃으며 국화꽃을 한경호의 얼굴에
들이댔다. 한경호는 얼굴을 간지르는
국화꽃의 향기를 맡았다. 방금 꺽어온
꽃인지 청신한 향기가 풍겼다.
"사모님은 무슨... "
혜진이 둔부를 침대 위에 걸쳤다. 병실은
특실로 독방이었다. 아내가 그렇게 배려한
모양이었다.
"아저씨 잘 모시라고 그러대요. "
"별 소리를 다하는군. "
"우리 관계를 알고 있는 기색이었어요. "
"알아도 상관없어. "
한경호는 혜진의 둔부를 가볍게
두드렸다. 혜진은 갈색의 스커트를 입고
있었다.
"아프지 않으세요?"
혜진이 화제를 바꾸었다.
"조금... "
"이틀이나 정신을 잃고 있었어요. "
"그렇게나?"
"가끔 깨어나긴 했지만 마취도 하고
했으니까요. 피가 없어서 병원에서
피를 구하느라고 애를 썼대요. "
"피가 없어?"
"아저씨 혈액형은 B형예요. 그런데
서울의 큰 병원들에 그 피가 떨어져
구하느라고 애를 먹었대요.. "
한경호는 얼굴을 찌푸렸다. 한경호의
혈액형은 A형이었다. 그런데 혜진이
B형이라고 말한 것은 혜진이 잘못 알고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내 피는 A형이야... "
그러자 혜진이 입을 가리고 웃음을
터뜨렸다.
"왜 그래?"
"자신의 혈액형도 모르는 사람이 어디
있어요?"
"내가 왜 내 혈액형을 몰라?"
"그럼 왜 자꾸 A형이라고
그러세요?여기서 몇 번이나 조사했는지
아세요?수혈은 잘못하면 큰일 나니까
병원에서 정확하게 검사를 했어요. "
"군대에서 검사했을 때 A형이었어. "
한경호는 볼멘 소리로 대답했다.
한경호가 하사관으로 자원 입대했을 때
혈액형 검사를 했었다. 벌써 20년 전의
일이었다. 그러나 연병장에서 혈액형
검사를 하던 여군의 예쁘장한 얼굴과
한경호의 혈액형을 큰 소리로 가르쳐 주던
조교의 얼굴은 아직도 기억이 선명했다.
한경호는 그때 조교의 말을 제대로
알아듣지 못했었다. 하사관 훈련을 하는
연병장 옆에는 유격 훈련장이 있었는데
신병들이 사격 훈련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I "조교가 내 혈액형이 뭐라고 그랬지?"
한경호는 옆에 앉아 있는 동료에게
물었다.
"A형!"
동료가 귀찮아하는 표정으로 말했다.
날씨가 몹시 더웠기 때문에 훈련을 받는
하사관 후보생들이 모두 짜증스러워 하고
있었다. 그러나 한경호는 그때부터 자신의
혈액형이 A형이라고 굳게 믿고 있었다.
그런데 병원에서 혈액형 검사를 하여
B형이라고 했다면 군대에서의 검사를 잘못
알고 있다고 보아야 했다. 한경호는 생각이
거기까지 미치자 갑자기 가슴이 컥 하고
막히는 기분이 들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혜진이 잘못 알고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혜진이 잘못 알고 있기를
간절히 빌었다.
혜진은 정오가 지나서야 돌아갔다.
"누가 국화꽃을 갖다가 놓았을까?"
간호사가 들어온 것은 혜진이 돌아가고
한 시간이 지나서였다. 간호사는 한경호의
얼굴에 소독약을 바르고 링겔병을 갈아주며
웃었다. 한경호는 간호사가 일을 마칠
때까지 내내 얼굴을 찡그렸다. 상처가
고통스럽기도 했지만 혈액형 때문에 가슴이
아팠다.
"애인이 갖고 왔어요?"
간호사가 다시 미소를 머금고 물었다.
"수혈을 했다면서요?"
한경호는 정색을 하고 물었다. 간호사가
몸을 돌리려다가 말고 한경호에게 귀를
기울였다.
"네. "
"피를 구하지 못해 고생을 했다고 하는데
피가 그렇게 특이합니까?"
"아녜요. 선생님 피는 B형인데 준비된
혈액이 없어서 그랬어요. "
"B형 혈액이 준비된 게 없습니까?"
"B형뿐이 아니라 A형 O형 모두 모잘라요.
요즈음은 사람들이 헌혈을 잘하지
않으니까요. 멀지 않아 혈액까지 수입해
와야 할 거예요. "
"제 피가 B형이 확실합니까?"
한경호는 간호사에게 다짐을 하듯이
물었다.
"그럼요. 수혈을 하기 위해 얼마나
철저하게 조사했는데요. 혈액이 맞지
않으면 수혈 못해요. "
"...... "
한경호는 입을 다물었다.
"왜 그러세요?"
간호사가 의아한 표정으로 한경호를
살폈다.
"아무 것도 아닙니다. "
한경호는 고개를 흔들었다.
"얼굴이 창백해요. "
"조금 피로해서 그럽니다. "
"어디가 특별히 아픈 것은 아니죠?"
"예. "
"참 이 국화꽃이요. "
"예. "
"국화꽃은 조화()로 쓰는
꽃이거든요. "
"조화요?"
"사람이 죽었을 때 상가나 빈소에서 많이
쓰잖아요. 허지만 가을 꽃이니 상관
없겠죠. "
간호사가 다시 웃으며 병실을 나갔다.
한경호는 천천히 눈을 감았다 마치 천길
벼랑으로 굴러 떨어지고 있는 듯한 암담한
기분이었다.
4
한경호가 퇴원을 한 것은 이듬해 2월의
일이었다. 한경호는 교통사고로 국회의원에
출마할 수 없었고 그 자리는 한경호에게
지구당 위원장 자리를 빼앗겨 격렬하게
저항하던 전 지구당 위원장에게 돌아갔다.
그는 김영삼과 김대중이 이끄는
신한민주당()의 돌풍에도
불구하고 텃밭인 진천에서 수월하게
당선하였다.
한경호는 2월14일 진천의 백곡으로
내려왔다. 퇴원을 한 것은 2월8일이었으나
횡집에서 엿새를 지냈다. 서울은 온통
선거 바람으로 들떠 있었다. TV와
라디오,신문은 국회의원 총선거에 대하여
떠들썩하게 보도하고 있었고 사람들도
신한당()의 돌풍으로 화제를 삼았다.
신한당은 김영삼 전 신민당 총재가
제5공화국에 저항하는 단식을 끝낸 후에
결성했던 민주화추진협의회가 모체가 되어
창당되었었다. 민한당이 제5공화국의
들러리 야당이며,민정당이 1중대,민한당이
2중대,국민당이 제3중대라는 비아냥을 받고
있었기 때문에 신한당의 창당은 돌풍을
일으키기에 충분했다.
신한당은 전통 야당의 맥을 이었고
제5공화국 치하에서 온갖 탄압을 받던 야당
인사들이 주축을 이루고 있었다. 내란
혐의로 사형을 선고받았던 전 대통령후보
김대중은 세계의 여론이 빗발치자
정부로부터 무기형으로 감형을 받은 뒤
다시 가석방되어 미국에 나가 있었다. 전
신민당 총재 김영삼은 신군부에 의해
정치활동이 금지되어 있었으나 한국의
민주화를 요구한다는 성명을 발표하고 단식
투쟁에 들어갔다.
국내 언론에는 보도지침으로 한 줄도
보도되지 않았으나 외국언론은 김영삼 전
총재의 단식을 대대적으로 보도했다.
정부는 김영삼 총재의 상도동 자택을
철저하게 차단하여 단식 투쟁 사실이 새어
나가지 않도록 하려고 했으나 외국 신문이
국내에 역수입되어 대학가와
야당인사,지식인들에게 알려지게 되었다.
민한당은 국회에서 현안()이라는
우회적 표현으로 김영삼 전 총재의 단식에
대책을 세우라고 촉구했다. 그러는 동안
김영삼 전 총재의 단식은 점점 길어져
갔다. 김영삼 전 총재가 단식을 한지
20여일이 되자 탈진하는 상태가 빚어졌고
마침내 서울대 병원에 입원까지 하게
되었다.
정부는 긴장했다.
김영삼 전 총재가 단식 끝에 절명을
한다면 제5공화국 정권에도 치명적인
영향을 미칠 것이 분명했다. 김영삼 전
총재는 무모할 정도로 강하게 밀어붙이는
스타일이었다. 일부에서는 그에게 감각
정치를 한다고 말하기도 했다. 5월30일
신민당 전당대회만 해도 중앙정보부의
공작으로 당선될 가능성이 희박했으나 그는
밀어붙여서 성공했고 서슬 퍼런 긴급조치가
선포되어 있는데도 개헌투쟁을 밀어붙여
부마사태와 김영삼 총재 제명사건,그리고
10. 26으로 이어져 박정희 독재의 종말을
고하게 했던 것이다.
정부는 민주화를 약속하지 않을 수
없었다.
김영삼 전 총재는 단식을 끝내고
민주화추진협의회를 결성했다. 그리고 그
민주화추진협의회가 모체가 되어 신한당이
창당되었던 것이다.
선거는 치열했다.
2월12일이 투표일이었기 때문에 선거전은
한겨울에 벌어졌다. 그러나 전국의
유세장은 청중들로 메워졌다. 신한당은
김영삼 총재가 정치규제법에 묶여 있었기
때문에 이민우() 전 신민당 수석
부총재를 총재에 선출하고 선거전에
나섰다.
신한당은 민주화 바람을 선거전에 불어
넣었다. 선거 표어도 '불어라
민주바람'이었다. 김영삼 총재는 성북구에
민청학련() 사건의 이철()을
공천했다.
그는 박정희 시대에 민청학련 사건으로
유인태() 등과 함께 사형을
선고받았던 학생이었다. 그는 서울에서
'사형수 돌아오다'라는 선거구호로 바람을
일으켰다. 그의 유세장마다 대학생들이
구름처럼 몰려들었다.
이민우 총재는 종로 중구에서 바람을
일으켰다. 그는 특유의 단문 형태의 연설로
군사문화와 군사독재 청산,대통령 직선제
관철로 바람을 일으켰다.
신당 바람은 김대중 전 대통령후보의
귀국으로 절정에 달했다. 김대중은 미국에
있었으나 신한당에 힘을 불어 넣어 주기
위해 투표일 전에 귀국을 결심했다.
주위에서는 귀국하면 필리핀의 아키노
상원의원처럼 공항에서 저격되어
살해될지도 모른다고 귀국을 만류했으나
그의 결심은 확고했다.
2월9일 그는 마침내 귀국 비행기에
올랐다. 그의 안전을 염려한 미국의
상원의원과 하원의원들이 다수 동행했다.
미국은 그가 귀국할 때 한국 정부는 안전을
책임지라고 통고했다. 신한당은 공항으로
김대중을 환영하러 나갔다. 그러나
김대중은 공항에 도착하자마자 전경들에게
에워싸여 강제로 동교동에 연금되었다.
신한당은 정부를 강력히 비난했다.
마침내 투표가 시작되었고 제1야당인
민한당은 신한당에 참패하고 말았다.
한경호는 병원에서 신문을 통해 신한당
돌풍을 보았다. 그러나 그의 가슴 속은
공허했다. 국회의원 후보로 출마하여
낙선을 했다고 해도 이토록 가슴이
아프지는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말 수가 없어졌다. 병원에 오래
있었기 때문에 눈빛이 깊어 졌고 얼굴이
희고 창백했으나 불과 몇 달 사이에 바짝
늙었다.
집에 돌아와서도 전혀 말을 하지 않았다.
그의 집에는 어린 딸이 있었다. 그 아이는
이제 다섯 살이었다. 그 아이가 누구의
딸인지 알 수 없었으나 그는 미워하지도
않고 증오하지도 않았다.
아이가 재롱을 부릴 때면 그저 희미하게
웃을 뿐이었다.
백곡엔 아직도 혜진이 별장을 지키고
있었다. 그는 혜진에게 진심으로 미안함과
고마움을 느꼈다. 혜진이 젊은 나이에 나이
많은 사람의 첩 노릇을 하고 있다는 사실이
처음으로 안쓰럽게 생각되었다.
그날 한경호는 혜진과 마주 앉아 술을
마셨다.
"고생 많이 하셨어요. "
혜진이 먼저 그에게 술을 따르며 말했다.
혜진은 검은 야회복을 입고 있었다.
빼치카에는 장작을 지폈다. 이따금 뒷곁을
스쳐 지나가는 삭막한 바람소리에 섞여
장작이 타는 소리가 타닥거리고 들렸다.
"고생은 무슨... "
한경호는 나직하게 말했다. 밖에서는 찬
바람이 아우성을 치고 있었으나 안은
따뜻했다. 한경호는 삭풍에 몸을 떠는
나무가지에 귀를 기울였다.
! (우리 인생도 저렇게 어둡고
을씨년스러운 것이겠지... )
한경호는 어두운 창밖에 시선을
못박았다. 문득 창 밖에서 아이들이 웃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뭘 생각하세요?"
혜진이 한경호의 얼굴을 살피며 물었다.
혜진은 소파 대신 바닥에 다리를 길게 뻗고
앉아 있었다.
"별로... "
한경호는 말 끝을 흐렸다.
혜진은 한경호의 얼굴에 시선을 못박고
있다가 고개를 떨구었다. 한경호가 전과
달라져 있었다. 전에도 우울한 눈빛으로 먼
허공을 바라볼 때가 있었으나 병원에서
퇴원한 뒤로 사색이 더욱 깊어진
느낌이었다. 사람은 큰 병을 앓고 나면
뗌든다고 하는데 한경호도 그런 것일까.
혜진은 천천히 술 잔을 입으로 가져갔다.
한경호는 넋을 잃은 듯이 창 밖만
응시하고 있었다.
"저... "
혜진은 술을 한 모금 마시고 한경호를
쳐다보았다.
"응?"
한경호가 술잔을 입으로 가져가다가 말고
혜진에게 시선을 돌렸다.
"저를 어떻게 생각하세요?"
"혜진일?"
"네. "
혜진은 수줍은 시늉을 하며 고개를
숙였다.
"혜진인 좋은 여자야. "
"저를 좋아 하세요?"
' "좋아 하고 말고... "
한경호의 얼굴에 쓸쓸한 미소가
떠올랐다.
"그럼 제 부탁 하나 들어 주실래요?"
"무슨 일인데?"
"전 아직도 탈렌트가 되고 싶어요. "
한경호의 얼굴이 갑자기 딱딱하게
굳어졌다. 혜진은 한경호가 고개를 돌려 창
밖을 보자 공연히 말을 꺼냈구나,하는
생각이 들었다.
(아직 이 사람은 나에게 흠뻑 빠지지
않은 거야. 그러나 이왕 말을 꺼냈으니
도리 없어. 이 사람은 내가 탈렌트 되는
것보다 자신의 첩이 되길 바라는 거야... )
혜진은 그렇게 생각했다. 그러나 그의
첩으로 만족하고 살 수는 없는 일이었다.
"어떻게 하면 되지?"
창 밖을 내다보고 있던 한경호가 불쑥
물었다.
"네?"
혜진은 귀가 번쩍 뜨여 재빨리 반문했다.
"어떻게 하면 탈렌트로 성공할 수 있어?"
"방송국에 드라마 제작부가 있어요. "
"그런데?"
"제작국장에게 연속 드라마의 주인공
자리 하나 맡기라고 얘기하실 수 있어요?"
"있지. "
한경호가 의외로 수월하게 대답했다.
혜진은 가슴이 쿵쿵 뛰는 것을 느꼈다.
방송국의 제작국장에게 전화를 걸어 주인공
자리를 하나 따는 것은 물론 비열한
짓이었다. 그러나 세상 사람들이 모두
돈으로 신분을 사거나 권력으로 빼앗고
있었다.
"정말이요?"
혜진은 자신도 모르게 환성이 튀어
나왔다.
"드라마 제작국장이
장익종()이라는 사람이지?"
"네. 그 분을 아세요?"
"알아. "
한경호는 장익종의 기름끼 번들거리는
얼굴을 눈 앞에 떠올리며 대답했다.
언론통폐합에 이어 언론계 숙정이 한창일
때 장익종이 술자리를 주최한 일이 여러 번
있었다. 그때 장익종은 신인 탈렌트들을
데리고 나와서 술 시중을 들게 했었던
것이다.
장익종은 방송국내에서 평판이 나빠 숙정
대상에 포함되어 있었으나 그 일로
구제되었다는 말이 파다했다. 한경호를 몇
번이나 찾아와 구제를 호소한 일도 있었다.
그러나 한경호가 별로 반응을 보이지 않자
다른 고위층에게 달라붙어 자신의 자리를
보전했던 것이다.
한경호가 혜진을 추천하면 권력을
해바라기처럼 쫑는 그로서는 결코 거절하지
못할 것이었다.
"내일 전화할께. "
"고마워요. "
혜진이 술잔을 놓고 한경호에게 다가와
덥썩 안겼다. 한경호는 혜진의 등을 가만히
쓰다듬었다.
"제가 오늘 밤 기쁘게 해드릴께요. "
혜진이 한경호의 입술에 자신의 입술을
부벼 왔다. 혜진의 한 손은 한경호의
사타구니를 더듬고 있었다.
한경호는 혜진의 등을 안은 채 다시 창
밖의 어둠을 응시했다.
이튿날 한경호는 장익종에게 전화를
했다. 장익종은 한경호의 전화를 깍듯이
받으며 혜진을 당장 방송국으로 보내라고
했다. 한경호는 어르신네의 뜻이니 혜진을
잘 보살피라고 장익종에게 거짓말을 했다.
어르신네의 뜻이라고 하면 방송국의 누구도
그녀를 터치하지 못할 것이었다.
"염려 마십시오. "
장익종은 몇 번이나 염려하지 말라는
말을 했다.
"이제 올라가 봐. "
한경호는 정오가 되자 혜진을 서울로
올려 보냈다.
"고마워요. 아저씨. "
혜진이 눈물이 글썽하여 한경호에게
안겼다. 한경호는 혜진의 등을 가만히
두드려주었다.
혜진이 탄 차가 국도에서 완전히
사라지자 한경호도 백곡의 별장을 나섰다.
진천에서 이천까지는 잠깐이었다. 그는
택시를 대절하여 이천의 마장면에 있는
정신병원에 도착했다. 아들 영철을 보기
위해서였다.
2월15일이었다. 바람이 아직도 찼다.
해가 설핏이 기울면서 기온이 더욱
차가워지고 있었다.
"면회시간은 지났는데요. "
간호사가 난처한 기색으로 한경호를
쳐다보았다.
"내일 외국으로 떠나기 때문에 오늘이
아니면 만날 수가 없습니다. "
한경호는 거짓말을 했다.
"영철군과 어떻게 되세요?"
"아버지 되는 사람이요. "
간호사가 눈을 깜박거리며 한경호를
쳐다보았다. 한경호의 말을 믿으려 하는
눈치가 아니었다.
"왜 그 동안 한 번도 오지 않으셨어요?"
"집 사람이 오지 않았소?"
간호사가 어디론가 전화를 걸더니 면회를
허락해 주었다. 그러나 면회랄 것도 없는
면회였다. 영철은 아직도 이지를 상실하여
방구석에 쪼그리고 앉아 있을 뿐이었다.
그러나 몸은 부쩍 자라 있었다.
(미안하구나... )
한경호는 마음 속으로 사죄했다. 자신도
모르게 콧날이 시큰해지면서 눈시울이
뜨거워져 왔다.
병원을 나오자 사방이 캄캄해져 있었다
한경호는 대기하고 있던 택시를 타고
백곡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전화를 걸어
천달수를 내려오라고 지시했다.
천달수는 자정이 가까운 시간에야
백곡으로 내려왔다. 한경호는 천달수와
함께 술을 마셨다. 천달수는 술이 얼큰하게
오르자 최종열이 자꾸 뒤를 캐고 다녀
최종열을 제거해야겠다고 주절댔다.
한경호는 최종열의 일에서 손을 떼라고
천달수에게 지시했다. 천달수는 불만스러운
표정이었으나 아무 대꾸도 하지 않았다.
한경호는 천달수에게 최종열의 주소를 물어
메모했다.
이튿날 한경호는 천달수와 함께 서울로
올라가서 원고를 정리하여 백곡으로
돌아왔다. 아내는 외출 중이었다.
한경호는 그날부터 다시 원고를 쓰기
시작했다. 한경호가 서울로 처음 올라왔을
때부터 쓰던 원고였다. 그 원고에는 서울
공작과 k공작이 모두 포함되어 있었다.
원고가 모두 완성된 것은 4월이었다.
한경호는 원고가 완성되자 최종열에게
부쳤다. 그리고 제5공화국이 무너지기
전에는 발표하지 말아달라는 부탁을 했다.
아내한테도 길고 긴 편지를 썼다.
아내에게 사죄하는 글이었지만 아내가
사죄를 받아줄 지 어쩔 지는 알 수 없었다.
이튿날 한경호는 신인 탈렌트 오혜진이
드라마의 주연으로 발탁되었다는
스퍼츠신문의 연예면 톱 기사를 보았다.
신문에 나온 혜진의 사진은 여전히
깜찍하고 예뻤다.
혜진이 출연한 드라마가 첫 방송이 된
날은 5월2일이었다. 한경호는 그 드라마를
보고 슬그머니 입가에 미소를 떠올렸다.
혜진이 드라마에서 혜진이 대사를 할 때
하는 입모양이 마치 아저씨
고마워요,아저씨 고마워요... 하는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었다.
한경호는 그날 밤 병원에서 퇴원한 이후
처음으로 편안한 잠을 잤다.
이튿날 한경호는 택시를 대절하여 여주로
갔다. 그리고 여주 우체국에 들어가 일주일
후에 편지가 도착하게 해달라고 부탁했다.
우체국의 여직원은 아무 이유도 묻지 않고
그렇게 하겠다고 대답했다. 한경호는
여주읍에서 소주 두 병과 오징어 한 마리를
사 들고 걸어서 남한강 상류로 거슬러
올라갔다. 그 옛날 영철이와 소영이를
데리고 낚시를 왔던 곳이었다.
날씨는 따뜻했다. 하늘은 구름 한 점
없이 맑았고 따뜻한 바람이 남쪽에서 불어
오고 있었다. 강변의 포플라숲은 화창한
햇살을 받아 무성한 잎사귀들이 금빛으로
살랑거리고 있었다.
한경호는 강가에 앉아서 술병을 땄다.
소영이의 얼굴이 희미하게 떠올라 왔다.
지금쯤 살았으면 몇 살이나 되었을까
생각했으나 나이가 얼핏 생각이 나지
않았다. 다만 물에 빠져 허우적거리던
소영이의 애처로운 모습만 눈에 어른거리고
있었다.
(내가 어리석었어... )
한경호는 술병을 들어 입으로 가져가
병째 한 모금 마셨다. 자신의 어리석음이
한없이 증오스러웠다. 한경호는 다시 술을
한 모금 마셨다. 술이 목구멍으로
넘어가면서 뱃속이 찌르르 했다.
한경호는 오징어를 찢어 입에 넣고
우물우물 씹기 시작했다.
불가()에서는 무지()도 죄라고
했다. 자신이 혈액형을 잘못 알고 영철이와
소영이를 남의 자식이라고 증오한 일이
후회스럽기만 했다.
아내를 미워하고 구박한 것도 모두
자신에게 잘못이 있었다. 혈액형 때문에
아내가 부정한 짓을 저지르고 있다고
생각을 한 것이 화근이었다. 모든 불행의
씨를 자신이 만든 것이다. 영철이가
혈액형을 말했을 때 자신의 혈액형을 다시
한 번 조사했더라면 이런 불행은 없었을
터였다.
아내도 처음부터 부정한 짓을 저지른
것은 아니었다. 그가 아내를 의심하고
증오하여 구타를 하기 시작하자 남편인
자신을 미워하게 되었고 그러다가
자와 바람을 피우게 되었던 것이다.
한경호는 다시 술을 마셨다. 이번엔 술이
물이 넘어 가듯 벌컥벌컥 넘어 갔다.
한경호는 강을 응시했다. 강은 여전히
우쭐렁대며 흘러가고 있었다.
(내 친 딸을 죽였으니 속죄해야 해... )
한경호는 푸르디 푸르게 흘러가는 강물을
보며 속으로 중얼거렸다. 한경호는 다시
술을 마셨다. 그리고 강변에 벌렁 누웠다.
날씨가 따뜻하여 아른아른 잠이 쏟아져
왔다.
한경호는 눈을 감았다.
강파도소리가 귓전에 자장가처럼 들렸다.
5
러 오라, 곡식이며
가축을 혜진은 잠시 거울을 응시했다. 기초
화장을 끝낸 상태의 창백한 얼굴이 거울
안에서 무표정하게 이쪽을 응시하고
있었다. 머리는 가볍게 묶어서 틀어 올린
복고풍이었다.
밖에는 빗발이 추적대고 있었다. 지리한
장마가 끝나고 가을이 오는가 싶었는데 또
빗발이 구죽죽하게 뿌리고 있었다. 혜진은
차가운 빗발이 몸 속으로 젖어 드는 것
같은 기분을 느꼈다. 가을은 어쩐지 죽음의
냄새를 물씬 풍기는 것 같아 싫었다.
(비가 오면 나면 가을이 성큼
다가오겠지... )
혜진은 낮게 한숨을 내쉬었다. 창에도
스산하게 빗발이 뿌리고 있었다. 혜진은
빗발이 뿌리는 창이 싫어 일어나 커텐을
여몄다.
침실은 따뜻했다. 40평형의 빌라에
침실과 방이 2개고 커다란 거실이 하나
있었다. 베란다에서는 한강이 한 눈에
내려다 보였다.
혜진은 다시 거울 앞에 화장을 하기
시작했다. 기초화장으로 얼굴을 깨끗하게
닦았으므로 이제는 메이크업 베이스를
얼굴이 축축하도록 부드럽게 펴발라야
했다. 한경호의 본처인 이정란을 만나는
것이므로 화장에 반듯이 신경을 쓸 필요는
없었다. 그러나 어디서던지 팬을 만날 수가
있으므로 인기 스타로써 얼굴에 신경을
쓰지 않을 수 없었다.
혜진은 메이크업 베이스를 손바닥에
묻혀서 얼굴에 골고루 발랐다. 얼굴이 조금
땡기는 듯했으나 이마에서 턱까지 부드럽게
펴서 발랐다.
` 한경호가 죽은 지 벌써 1년이 넘어
있었다. 그러나 혜진은 아직도 한경호가
죽은 원인을 모르고 있었다. 다만 한경호가
죽기 전에 주변을 정리한 듯한 느낌을
받았고 한경호로부터 커다란 은혜를
입었다는 사실만 기억하고 있었다.
혜진은 스펀지에 화운데이션을 묻혀
얼굴에 바르기 시작했다. 비가 오고
있으므로 화장이 조금 짙어도 상관이 없을
것이었다. 게다가 절기도 가을로 성큼성큼
다가서고 있었다.
(백곡 별장은 정말 마음에 들어... )
혜진은 화운데이션을 얼굴에 바르다가
말고 다시 한숨을 내쉬었다. 가을을
생각하자 백곡 별장이 떠올랐고 백곡
별장이 떠오르자 한경호와 백곡에서 보낸
날들이 떠올랐던 것이다.
y 백곡은 주변 경치가 참 좋았다. 특히
저수지 주변의 코스모스라던가 포플라숲은
가을이면 눈이 시리도록 아름다웠다.
혜진은 화운데이션을 다 바르자 브러시로
다시 화운데이션을 털어 냈다.
화운데이션이 얼굴에 덕지덕지 묻어 있으면
여간 흉한 것이 아니었다.
눈썹은 전체를 회색으로 그려 준 뒤
눈꼬리부터 연보라색으로 덧그렸다. 쌍겹
부위는 팬지 보라빛으로,눈썹뼈 부분은
하이라이트로 설정하여 흰 색으로 표현했다
입술은 먼저 라인을 그린 뒤 봉선화 빛의
레드로 그렸다. 볼에도 창백해 보이지
않도록 붉은 기가 돌게 했다.
아파트를 나오자 운전기사가 대기하고
있었다. 혜진이 승용차 가까이 가자
운전기사가 재빨리 도어를 열어 주었다.
"방송국으로 모실까요?"
운전기사가 시동을 걸며 물었다.
"아녜요. 안암동예요. "
"안암동 어디입니까?"
"고대 가는 쪽이에요. 대광고등학교를
지나... 아니 신설동에서 돈암동으로
가다가 세무서 앞에서 우회전하면 돼요. "
"예. "
운전기사가 고개를 끄덕거리고
액셀레이터를 밟았다. 차가 미끄러지듯이
부드럽게 아파트 광장을 벗어나기
시작했다. 혜진은 자동차의 백밀러에
비치고 있는 자신의 얼굴을 살폈다. 얼굴
화장이 만족스러웠다. 그러나 정란을
만나야 한다는 사실이 조금 긴장이 되고
있었다.
혜진은 핸드백에서 담배를 꺼내 입에
물었다. 라이터로 불을 붙여 담배 연기를
길게 내뿜자 조금 안정이 되는 것 같았다.
거리는 비 때문인지 어둑어둑했다.
창을 조금 열었다. 담배 연기가 차 안에
가득했다. 빗발이 창으로 날아와 얼굴을
푸슷하게 때렸다.
차는 혜진이 담배를 다 피우고 한참이
지나서야 안암동에 도착했다.
정란은 2층 베란다에서 흔들의자에 앉아
있었다. 일하는 아줌마의 안내를 받아
2층으로 올라가자 정란이 검은 선글라스를
쓰고 주택가 골목으로 얼굴을 향하고
있었다.
빗소리를 듣고 있는 것일까. 혜진이
가까이 걸어가도 정란은 기척이 없었다.
"안녕하세요?"
혜진은 정란에게 인사를 했다.
"어서 와요. "
정란이 가라앉은 음성으로 대꾸했다.
혜진은 잠시 정란의 옷차림을 우두커니
살폈다. 정란은 몸이 비대했다. 나이트
가운을 걸치고 있었으나 비대한 몸집
때문에 고급스러운 살구 빛의 나이트
가운이 오히려 퇴폐적인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 정란은 한경호가 죽었을 때보다도
더욱 살이 쩌 있었다.
"앉아요. "
정란이 혜진에게 옆에 있는 의자를 턱짓
했다.
"네. "
혜진은 작은 탁자를 사이에 두고 정란의
옆에 조심스럽게 앉았다. 탁자에는 담배와
재떨이,그리고 라이터가 놓여 있었다.
정란이 피우는 담배인 모양이었다.
"비가 오는 소리를 듣고 있었어요. "
정란이 다시 골목으로 얼굴을 향하며
말했다.
"... "
혜진은 정란을 따라 안암동의 주택가
골목으로 시선을 보냈다.
"냄새가 좋군요. "
문득 정란이 낮게 중얼거렸다.
"자스민인가요?"
"네. "
혜진은 그제서야 정란이 향수를 말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아파트를 나올 때
겨드랑이에 향수를 뿌렸던 것이다.
"전엔 나도 자스민을 뿌렸었죠. "
"... "
"앞 집 보이죠?"
"네. "
"그 집에 신문기자 부인이 살고
있었어요. 그 부인과 함께 쇼핑도 다니고
테니스도 치고 그랬지요. "
"...... "
"그런데 운명이란 참 이상해요. 그
여자는 정신이상이 되어 거리를 헤매고
다니고 나는 실명()을 했으니... "
"...... "
"그 동안 잘 지냈어요?"
정란이 그제서야 혜진의 안부를 물었다.
혜진은 잠시 정란을 조심스럽게 살폈다.
정란의 눈이 보이지 않았으나 함부로 대할
수가 없었다. 공연한 느낌인지 알 수
없었으나 정란의 몸에서도 죽음의 냄새가
끈적끈적 풍기고 있는 것 같았다.
"네. "
혜진은 천천히 대답했다.
"눈이 보이지 않아서 혜진씨가 출연한
드라마도 못보고 있어요. "
"죄송해요. "
"혜진씨가 나에게 죄송할 일이 뭐가
있어요. 다 내 팔자 소관인 것을... "
정란이 씁쓸하게 웃었다. 혜진은 정란의
그 말에 가슴이 찌르르 울리는 것을
느꼈다.
"오늘 찾아 뵌 것은 백곡에 있는 별장
때문예요. "
"그건 혜진씨 걸로 알고 있는데요. "
"전 이제 탈렌트로 성공했어요. 그래서
돌려 드릴려고요. "
"혜진씨. "
"네?"
"그건 혜진씨 몫이예요. "
"전 돈을 많이 벌었어요. 사모님께서는
,사업을 하시다가 실패하여 자금 압박을
받고 있으니 그거라도 팔아서... "
정란의 눈썹이 꿈틀했다. 혜진이
사업이라고 한 말이 귀에 거슬린
모양이었다. 정란은 사업을 하느라고
한경호가 남긴 재산을 낭비한 것이 아니라
남자들과 방탕한 생활을 하느라고 재산을
낭비했던 것이다. 그러나 혜진이 정란이
불쾌하지 않도록 그렇게 말했던 것이다.
"그래요?"
정란의 얼굴로 엷은 미소가 번졌다.
혜진은 아무 대꾸도 하지 않았다.
"그럼 성의로 알고 받지요. "
"여기 서류를 모두 가지고 왔어요. 제
도장은 미리 찍었으니까 사모님 도장만
찍으면 돼요. "
"알았어요. "
혜진은 핸드백에서 백곡 별장을 양도하는
매매서류를 모두 꺼내 탁자 위에 놓았다.
"여기 탁자 위에 서류를 놓았습니다. "
"알았어요. "
"그럼 전 바뻐서... "
혜진은 소파에서 엉덩이를 들고
일어났다. 나이트 가운의 앞 자락 사이로
정란의 풍만한 가슴이 허옇게 드러나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정상적인 여자의
가슴이 아니었다.
"잘 가요. "
"안녕히 계세요. "
혜진이 고개를 꾸벅하고 베란다를 나가기
시작했다.
정란은 귀를 쫑긋하게 세우고 혜진이
베란다를 나가는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그러나 혜진이 베란다를 나가는 것은
기척뿐이었다. 혜진이 소파에서 일어날 때
공기의 움직임,공기의 미세한 흔들림이
눈꺼풀 위에 감지되는 것이었다.
정란은 탁자를 더듬어 혜진이 놓고 간
서류를 만져보았다. 그것이 진정 백곡
별장의 매매서류인지 어떤지 알 수 없었다.
그러나 확인할 방법이 없었다.
정란은 서류를 탁자 위에 놓고 다시
탁자를 더듬었다. 탁자에 있는 담배를 찾아
입에 물고 라이터로 불을 붙였다. 베란다
밖에는 여전히 비가 내리고 있었다.
귓전으로 바람에 날리는 빗소리와 먼
신작로의 소음이 들리고 있었다.
정란은 담배 연기를 가슴 속 깊이
들이마셨다가 내뱉았다.
이내 대문이 열리고 닫히는 소리와
찻소리가 들렸다. 혜진이 대문을 나가 차에
)올라타는 소리였다.
혜진은 입언저리로 엷은 미소를
떠올렸다. 문득 혜진이 차에 타기 전 손을
흔든 것 같은 기분이 들었던 것이다.
이내 차의 시동이 걸리는 소리와 차가
골목을 떠나는 소리가 들렸다. 혜진은 그
찻소리가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귀를
기울였다.
떠났다.
혜진이 골목에서 완전히 사라졌다.
그런데 사라진다는 것은 무슨 의미가
있는 것일까. 혜진은 귓전에 찻소리가
쟁쟁하게 남아 있는 기분이었다. 이상한
일이었다. 눈이 보이지 않게 되자 귀가
예민해 졌고 예민한 귀는 사물의 소리가
완전히 멀어진 뒤에도 여운처럼 그 소리를
기억하고 있었다.
정란은 다시 뒤 쪽으로 귀를 기울였다.
일하는 아줌마가 실내화를 끌고 올라오고
있었다. 정란은 치마 끌리는 소리로 일하는
아줌마를 분간했다.
"전화가 왔어요. "
"누구 한테서요?"
"조 사장님에게서요. "
조 사장은 조대현을 말하는 것이었다.
카바레에서 만난 제비족이었으나 사장으로
행세하고 있었다.
"뭐라고 그러지요?"
"저녁을 대접한다고 저녁 드시지 말고
기다리시래요. 6시까지 오신대요. "
"알았어요. "
"저녁 어떻게 할까요?"
"나가서 먹을께요. "
"그럼 커피 한 잔 드릴까요?"
"그래요. "
정란은 웃으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일하는 아줌마가 자신의 마음을 잘
파악하고 있어서 흡족했다. 날씨가
스산하여 따뜻한 커피를 마시면 좋을 것
같았다.
조대현이 온 것은 6시 10분 전이었다.
정란은 일하는 아줌마의 도움을 받아
갈색의 울 원피스를 입었다. 몸이 비대해
진 뒤로 투피스로 정장을 할 수 없었다.
조대현은 정란의 팔짱을 끼고 집을
나서서 그라나다 승용차에 태워 주었다.
정란이 사 준 차였다.
"어디로 가는 거야?"
정란은 조대현이 차의 시동을 걸고
골목을 벗어나자 낮게 물었다.
"태릉. "
"태릉?"
"태릉에 유명한 돼지 갈비집이 있어.
옛날에 배밭이 있던 곳인데 갈비집이
들어섰어... "
조대현은 껌을 질겅질겅 씹고 있었다.
처음 만났을 때 경박해 보여 탐탁치
않았으나 어차피 쾌락만을 위해 만나는
것이라 상관하지 않았었다. 그런데 의외로
그와의 관계가 길어진 것이다.
태릉에 도착한 것은 얼추 7시가 되었을
때였다.
조대현의 말대로 태릉의 갈비는 맛이
부드러웠다. 정란은 조대현과 소주까지 한
병씩 비운 뒤에 다시 냉면 한 그릇도
해치웠다.
"이 여사가 식사는 참 잘한단 말이야. "
조대현은 냉면을 반쯤 먹고 남겼다.
"너무 먹어서 싫어?"
"아니야. "
"이 체격을 유지할려면 먹지 않고는
안돼. "
"그럼 더 시킬까?"
"아냐. "
정란은 고개를 설래설래 흔들었다. 돼지
갈비도 정란 혼자서 4인분은 거뜬히 먹어
치웠을 터였다.
밖으로 나오자 빗발이 더욱 거칠어져
있었다. 정란은 조대현이 계산을 하는 동안
우두커니 빗발이 쏟아지는 하늘을
응시했다. 차가 어디에 있는지 알 수도
없으려니와 차가운 빗발이 얼굴을 때리고
있어서 시원했다.
취기 때문일 것이었다. 저녁을 먹기
전까지만 해도 날씨가 스산했던 것 같은데
술을 먹고 나오자 몸이 더웠다.
"왜 비를 맞아?"
조대현이 뛰어 나오며 소리를 질렀다.
정란은 비틀거리며 몸을 돌려 조대현쪽으로
향했다. 조대현이 빗물을 튀기며 달려와
정란의 허리를 안았다.
"비가 시원해!"
정란은 어린 소녀처럼 소리를 질렀다.
자신도 모르게 몸이 비틀거려졌다.
"감기 걸려!"
조대현이 정란의 허리를 안고 차로
데리고 갔다.
"괜찮아... "
혀꼬부라진 목소리로 정란이 말했다.
정란은 조대현에게 안기다시피 하여 차에
탔다.
"조 사장!"
"왜?"
"포마드 발랐어?"
"응. "
"냄새가 좋아. "
정란은 낄낄대고 웃었다. 술을 마셨기
때문인지 웃음이 헤펐다.
"어디 가까운 여관에라도 가서
쉬어야겠어. "
"운전 괜찮겠어?"
"가까운 곳에 여관이 있겠지. 여관까지는
끌고 갈 수 있어. "
조대현이 시동을 걸고 차를 출발시켰다.
정란은 푹신한 시트에 등을 기댔다.
조대현이 차를 모텔 앞에 들이댄 것은 불과
10분도 되지 않아서였다.
"어디야?"
"모텔이야. "
= "모텔?"
"여관이나 마찬가지야. 여관보다는 조금
고급스럽지... "
조대현이 차를 주차시키고 정란을 차에서
내리게 했다. 정란은 차에서 내려 모텔
현관으로 들어갔다. 조대현이 뒤따라
들어와 정란의 팔을 잡고 종업원과 함께
3층으로 올라갔다. 층계와 복도는 카페트가
깔린 모양으로 푹신했다.
정란은 종업원이 숙박부를 적고 내려가자
옷을 벗어 놓고 욕실로 들어갔다. 정란이
욕조에 물을 받기 시작할 때 조대현이
인터폰으로 맥주를 주문하는 소리가
들렸다. 정란은 욕조에 들어가 몸을
눕혔다.
정란이 욕실에서 나오자 조대현이 욕실로
들어갔다. 정란은 담배를 피워 물고 창으로
가까이 갔다. 커텐을 젖히고 창문을 열자
비바람이 쏴아 하고 몰아쳐 왔다. 정란은
담배연기를 후 하고 내뿜었다.
비바람에는 차가운 기운이 섞여 있었다.
밤.
밤이었다.
정란은 오히려 밤이 편안했다.
정란에게는 낮이나 밤이나 어둠 밖에
보이지 않았다. 잠에서 깨어나도 언제나
칠흑의 어둠뿐이었다. 눈에 보이던 모든
것들이 보이지 않자 그녀의 인생도
암흑뿐이었다.
조대현이 욕실에서 나왔다. 욕실문이
여닫히고 어 시원하다, 하는 소리가 귓전을
울려왔다.
정란은 다시 담배 연기를 가슴 속 깊이
들이마셨다가 길게 내뿜었다. 조대현이
오는지 오렌지향의 비누 냄새가 코
끝에 풍겼다.
"비가 줄기차게 오지?"
조대현이 등 뒤로 다가와서 입김을
뿌렸다.
"응. "
정란은 낮게 대꾸했다. 조대현이 나신을
뒤로 밀착시켜 왔다.
"여기가 3층인가?"
"응. "
조대현의 두 손이 뒤에서 정란의 가슴을
움켜쥐었다.
"여기서 뛰어 내려도 죽을까?"
"무슨 소리야?"
조대현이 약간 놀란 기색으로 되물었다.
정란은 피우던 담배를 창 밖으로 버리고
몸을 돌렸다.
"자살하고 싶어?"
"아니. "
정란은 입가에 미소를 담았다. 눈에 쓴
안경을 벗어드는데 조대현이 오른 손으로
정란의 오른 쪽 가슴을 애무하면서 허리를
숙여 정란의 왼쪽 가슴을 입에 물었다.
정란은 창틀에 등을 기댔다. 조대현이 한
입 가득 베어 물고 있는 가슴의 살
덩어리가 자지러지는 비명을 질러대고
있었다.
"공연히 그런 생각할 필요 없어. "
조대현이 입 안 가득히 넣었던 살
덩어리를 뱉으며 말하였다. 정란은 그 말에
아무 대꾸도 하지 않았다.
"왜 그런 생각을 했어?"
"그냥. "
정란은 손을 뻗어 조대현의 어깨에 두
손을 얹었다. 그리고 조대현의 어깨를
지그시 눌러 무릎을 꿇게 했다. 등 뒤에서
다시 비바람 소리가 쏴아 하고 들려왔다.
조대현이 정란의 의도를 알아차리고 무릎을
꿇은 채 정란의 하체로 얼굴을 가져왔다.
정란은 무릎을 벌리고 팔을 뻗어 커텐을 양
손으로 움켜잡았다.
정란이 남편 한경호의 편지를 받은 것은
한경호의 장례가 끝난 다음 날이었다.
한경호는 교통사고를 당한 뒤 그 충격으로
말 수가 없어졌고 퇴원을 하여 집에
돌아와서도 전혀 얘기를 하지 않았다.
정란은 한경호의 그런 모습을 볼 때마다
한경호가 여전히 자신을 증오하고 있는
것이라고 생각했었다.
한경호는 집에 돌아온 지 엿새만에
백곡으로 내려갔다. 그는 모든 공직에서
사퇴했고 죽음의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러나 정란은 그때까지도 한경호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 전혀 알지 못하였다.
김학규가 죽은 뒤 그녀는 카바레에
출입하고 있었다. 남편이 오혜진이라는
탈렌트 출신의 기생에게 빠져 있었기
때문에 그녀는 카바레를 돌면서 방탕한
생활을 하고 있었다. 김학규의 죽음은
정란을 더욱 깊은 나락의 구렁텅이로
빠트리고 있었다.
그녀는 그 나락에서 빠져 나오지
못하였다.
이따금 남편을 생각하기는 했었다.
카바레에서 만난 남자들과 여관이나 호텔의
침대에 뒹굴거나 남자들의 품에 안겨 춤을
추면서도 남편도 지금 쯤 오혜진이라는
계집애와 뒹굴고 있겠지,그들도 우리처럼
4관능의 늪에 빠져 허우적거리고 있겠지...
하는 생각들이었다.
정란은 그런 생각을 할 때마다 피가
나도록 입술을 깨물었다. 그리고 남편에게
반발하듯이 남자들의 품을 찾아 헤맸던
것이다.
남편은 딸이 죽은 곳에서 자살을 했다.
그의 시체는 딸 소영이처럼 강 하류에서
발견되었다. 시체가 죽은 지 이틀이나
지나서 발견되었기 때문에 살이 물에
불어서 끔찍하기 짝이 없었다.
"음... "
정란은 신음을 안으로 삼켰다.
이상하게 남자들과 관계를 할 때마다
남편의 얼굴이 떠오르곤 했다. 그것은
남편이 살아 있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정란은 김학규와 관계를 하면서도 남편의
,차가운 얼굴을 생각했었다.
(난 더러운 여자야... )
정란은 남편의 얼굴이 머릿속에 떠오르면
그렇게 생각했다.
창녀나 매춘녀는 아니라도 음탕한
여자임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무엇일까.
무엇이 나를 이렇게 음탕하게 만드는
것일까.
정란은 남자들과 관계가 끝나고 나면
그런 생각을 했다. 관계가 끝나기 전에는
추악한 욕망에 휩싸여 자신의 몸뚱이를
마구 내던졌다. 그러나 그녀의 욕망은
채워도 채워도 채워지지 않고 있었다.
그녀가 점점 몸이 뚱뚱해지고 있는 것도 그
욕망 탓일 거였다. 그녀는 채워지지 않는
욕망에 대한 스트레스 때문에 비만이 된
것인지도 몰랐다.
조대현이 몸을 일으켰다.
정란은 조대현의 어깨를 다시 짓눌렀다.
그러나 이번엔 조대현이 정란의 어깨를
눌렀다.
정란은 무릎을 꿇고 앉았다.
조대현이 하체를 정란의 얼굴로
가져왔다. 정란의 입은 이제 거대한 욕망의
도구가 되었다.
비바람이 쏴아 하고 들이쳤다. 차가운
빗방울들이 정란의 발가벗은 등줄기를
때렸다.
정란은 남편의 편지를 받고 허망했다.
남편의 편지엔 남편이 정란을 미워하게 된
사연이 줄줄이 적혀 있었다.
정란은 울면서 그 편지를 읽었다.
남편의 그 편지는 아들 영철이 학교에서
돌아와 자신의 혈액형이 B형이라고 말했을
때부터 남편이 정란을 의심했다고 고백하고
있었다. 남편 자신의 혈액형이 A형이라고
알고 있어서 O형인 정란과의 사이에 B형인
아들이 태어날 수 없고 그런 까닭으로
아들이 정란이 불륜을 저질러 태어난
아이라고 생각했다는 것이다.
정란은 어이가 없었다.
한경호는 그때 믿었던 아들이 자신의
아들이 아니라고 생각되어 가슴이 조각조각
찢어지는 것 같았다는 것이다.
한경호는 그때부터 정란을 증오하기
시작하였다. 한경호가 부대로 출근한 뒤에
정란이 다른 남자를 만나 껴안고 뒹군다는
생각을 하면 눈에서 불이 일어나는 것
같았다.
그것뿐이 아니었다.
R 그는 아들과 딸도 증오하였다. 아들과
딸이 자신의 자식이 아니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그들이 가까이 오면 소름이
끼치도록 싫었다.
한경호가 아이들을 증오한 것은 자신의
자식이 아니라는 사실보다도 부정한 아내의
자식이라는 사실 때문이었다. 그 사실이
한경호를 더욱 괴롭혔다.
한경호는 그때부터 폭음을 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정란을 폭행하고
구타하기 시작했다.
정란은 그때까지 한경호가 자신을 무엇
때문에 폭행하는지 알 수 없었다. 한경호가
매일 같이 술에 취해 들어오고 자신을 보는
것을 징그러운 벌레를 보듯이 멀리했으나
그 까닭을 알 수가 없었다.
정란은 막연히 한경호가 인격파탄자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한경호를 슬금슬금
피했다.
김학규를 만난 것은 여주에서였다.
한경호가 정란을 매일 같이 폭행하고
구타하여 정란으로서도 한경호를 남편으로
생각하고 있지 않을 때였다.
정란은 김학규를 사랑했다.
한경호가 그녀에게서 멀어진 이상 그녀가
마음을 의지할 곳은 김학규뿐이었다.
소영이 죽은 것은 여주에서였다. 정란은
그때 포항의 동생 결혼식에 갔었다. 그러나
바로 여주로 돌아오지 않고 김학규와 함께
경주 구경을 했었다. 김학규와 경주에서
만나 불국사와 석굴암을 관광했었다.
그리고 그날 밤을 경주의 호텔에서
신혼여행을 보내듯 즐겁게 보내고 돌아왔던
것이다.
그러나 정란이 집으로 돌아오자 소영이
죽어 있었다. 정란은 자신이 김학규와
놀아났기 때문에 소영이 죽은 것이라고
생각하고 슬프게 울었다.
한경호는 편지에서 그때의 일도
고백했다.
한경호는 소영이에게 물조심을 하라고
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소영이 물에 빠져
허우적거리고 있을 때도 잠이 든 체했을
뿐이었다. 한경호는 자신의 딸이 물에 빠져
허우적거리고 있는데도 외면을 했던
것이다.
영철이는 한경호가 소영을 구해 주지
않은 것을 알고 한경호를 두려워하기
시작했다.
영철의 두려움은 공포로 바뀌었고
마침내는 정신이상까지 일으키게 되었던
것이다.
한경호는 부대에서 제대했다. 그러나
2년만에 다시 부대로 들어갔다. 이번엔
하사관으로서가 아니라 문관으로서였다.
그후 한경호는 강원도로 전출을 하게
되었고 거기서 근무하다가 10. 26이 터져
서울로 올라오게 되었던 것이다.
서울에서 한경호가 활동한 일은
정란에게는 그다지 관련이 없는 일이었다.
한경호도 그것을 알고 있는지 그 부분은
편지를 간략하게 썼다.
한경호는 편지 말미에서 정란에게 사죄를
하고 있었다. 다른 말은 없었다. 자신의
어리석음 때문에 딸 소영이를 죽게 한
사실과 아들 영철이에게 정신병을 유발시킨
사실을 뼈저리게 후회하고 그 죄를
죽음으로 사죄한다고 말하고 있었다.
8 어처구니없는 일이었다.
혈액형 하나 잘못 알아서 이 모든 비극이
시작되었다고 생각하자 정란은 울음조차
나오지 않았다.
조대현이 몸을 가볍게 떠는 시늉을 했다.
그의 하체로 흐르는 팽팽한 긴장이 정란의
전신을 짜릿하게 흥분시켰다.
조대현이 정란의 머리카락을 움켜쥐었다.
정란이 몸을 일으키자 조대현이 허겁지겁
정란을 침대쪽으로 밀었다. 정란은
조대현을 안은 채 침대로 밀려갔다. 그러나
계속 밀리지만은 않았다. 정란은 산맥처럼
버티고 서서 조대현의 전신을 입술로
터치했다.
산맥은 울음을 울고 있었다.
가슴 속 깊이 묻어 둔 설움을 토해 내며
울고 있었다.
어둠이 서럽고,창문을 두드리는 바람이
서러워 목이 메어 울고 있었다.
정란이 완전히 실명을 한 것은 한경호가
죽은 지 5개월쯤 되었을 때였다. 정란은
한경호로부터 편지를 받고 나서 식음을
전폐했다. 한경호와 자신,그리고 아이들의
삶이 기구해서 침대에 쓰러져 일어나지를
않았다.
정란은 3개월을 침대에 쓰러져 지냈다.
처음 일주일은 침대에 쓰러져 식사도 하지
않았으나 차츰차츰 식사는 하면서 침대에
쓰러져 잠만 잤다. 삶의 의욕이 전혀
없었다. 그러자 몸이 더욱 비대해 졌다.
욕실에 들어가 변기에 앉아서 거울을 보면
살이 찌는 것을 눈으로 확인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봄이 왔다.
개구리가 긴 동면에서 깨어나듯이 정란은
길고 긴 잠에서 일어났다. 그러나 정란은
눈이 침침해져 있었다. 처음엔 단순하게
눈이 좀 나빠진 것이려니 여겼으나 시력은
급속도로 악화되고 있었다. 정란은 다시
방구석에 쓰러져 누웠다. 실명의 원인이
무엇인지는 알 수 없었다.
(내가 천벌을 받은 거야... )
정란은 아무 것도 보이지 않게 되자 자조
섞인 웃음이 입술새로 흘러 나왔다.
어둠이란 무엇인가.
왜 어둠은 존재하는가.
정란은 그런 사색에 빠질 때가 있었다.
그러나 사색의 해답은 알 수 없었다.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 캄캄한 어둠의 세계
저쪽에서 이따금 자신을 비웃고 있는 듯한
암암한 웃음소리를 들을 뿐이었다.
정란은 그 환청이 들릴 때마다 죽음을
생각했다.
죽음이란 무엇인가.
죽음은 왜 인간들에게 찾아오는가.
왜 꽃은 피어나자 마자 시들어 가는가.
정란은 캄캄한 어둠 속에서 암암한
웃음소리를 들으며 그런 생각을 하는
것이었다.
정란은 하나의 만()처럼 침대에 쓰러져
누웠다.
불덩어리 하나가 그녀의 몸속을 뜨겁게
유린하고 있었다.
미경은 최종열의 소설 원고를 덮었다.
최종열의 소설은 거기서 끝이 나 있었다.
그러나 소설의 내용으로는 완성이 되었다고
볼 수는 없었다.
(왜 소설을 완성하지 않았을까?)
미경은 최종열이 소설을 완성시키지 않은
것을 의아하게 생각했다. 이제 최종열의
소설 원고는 더 찾을 수가 없었다.
지금까지의 내용으로도 약간만 손질을 하면
작품으로서는 손색이 없을 것 같았다.
(어쩌면 최종열이 일부러 소설을
완성하지 않은 것이 안닐까?)
미경은 그런 생각을 했다. 최종열의
소설은 대부분이 실화였다. 실화를
바탕으로 한 것이기에 매듭은 살아 있는
사람들이 지어야 하는 것이다. 미경은
최종열이 그러한 짐을 자신에게 넘긴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것은 무엇보다도
강한섭,최종열... 그리고 그녀의 남편
김석호의 의문사를 추적하는 일일 것이다.
(두 가족의 삶이 참으로 비극적이야... )
미경은 창 밖의 어둠을 내다보며 그렇게
생각했다. 강한섭 기자의 부인 채은숙이
천달수 패거리들에게 윤간을 당한 뒤
길거리에 버려진 일이나 한경호의 부인
이정란이 실명을 한 장면은 가슴이
뻐근하도록 감동적이었다.
미경은 길게 하품을 했다. 이미 새벽이
가까이 오고 있었으나 쉽사리 잠이 올 것
같지 않았다.
제19장 살인자를 찾아서
1
하늘엔 별이 총총히 박혀 있었다. 그러나
별빛이 하나 둘 사위어 가고 있는
새벽이었다. 미경은 커피 한 잔을 끓여
마시며 최종열의 소설을 정리했다.
최종열의 소설에 의해 모든 의문이 풀리고
있는 기분이었다. 그러나 아직도 남편을
살해한 범인이 누구인지,자신을 윤간하고
윤락가에 팔아버린 사내들이 누구인지 알
수 없었다.
그러나 미경은 남편 김석호도 이들과
연결되어 있으리라는 사실을 의심하지
않았다. 강한섭,최종열,그리고 남편
김석호가 모두 중원일보의 기자인 것이다.
중원일보는 전통 민족지였다.
일제시대에 창간되어 숱한 우여곡절을
겪으면서 나름대로 민족지의 역할을 다해
왔다. 일제시대에는 민족지사들과
독립투사들을 옹호했고 해방 이후에는
반공산당,반독재 투쟁을 했다.
물론 민족지로서 오점도 남기고 있었다.
강제적인 일이긴 했으나 창씨개명을
찬성했다던가. 신사참배를 조선인들에게
권고한 것은 민족지로서 가장 부끄럽게
여겨야 할 오점이었다.
해방 후에도 오점은 많았다.
70년대의 암울했던 정치상황 아래서
정권에 협조한 일이 적지 않았다. 80년대도
언론의 자유와 민주화를 요구하던 젊은
기자들을 대대적으로 해고했었다.
그러나 기자들은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면면히 불의와 투쟁을 했던 것이다. 강한섭
기자가 의문의 죽음을 당하고 최종열이
변사 시체로 발견된 것이나 남편 김석호가
의문의 교통사고를 당한 것도 같은
맥락으로 보아야 했다.
미경은 창가로 가까이 걸어갔다.
날이 서서히 밝아 오고 있었다. 멀리
동작대교가 희끄므레한 새벽빛 사이로
떠오르고 있었다.
(모든 것이 강한섭과 천달수로부터
시작된 거야... )
미경은 새벽의 한강을 내려다보며 생각에
잠겼다. 이제는 천달수를 추적해야 했다.
다만 천달수가 실명인지 아닌지 그것을
알 수 없었다. 그러나 최종열의 소설에
나오는 사람들이 거의 모두 실명으로
(등장하고 있으므로 일단 천달수도
실명이라고 보아야 했다.
(일단 소설을 잡지에 연재해야 해... )
소설이 잡지로 나가면 어디선가 반응이
있을 것이 분명했다. 그 반응에 따라
대응을 하면 되리라고 생각했다.
날이 밝자 미경은 토스트와 계란
후라이,그리고 커피 한 잔으로 아침을
때우고 회사에 출근했다. 회사에는 출장을
갔던 백 주간이 돌아와 있었다.
"최종열이 소설을 찾았어?"
백 주간은 미경이 최종열의 소설 원고를
찾았다는 사실에 반색을 했다.
"네. "
"어떤 내용이야?"
"강한섭이 고문으로 죽고 채은숙이
실성하여 돌아다니다가 비참하게 죽는
횬나와요. "
"음. "
"한경호는 자살을 하고... "
"어때?모두가 실화인가?"
"실화예요. "
"좋아. 그럼 내가 먼저 읽고서 다시
얘기를 하지... "
"네. "
백 주 간은 최종열의 소설 원고를 가지고
회의실로 들어갔다. 미경은 백 주간이
최종열의 소설을 읽는 동안 신문사
자료실에 내려가서 천달수라는 인물에 대해
조사했다.
(역시!)
천달수에 대한 기록은 최종열 기자의
기명() 기사에 자세하게 나와 있었다.
최종열의 소설에 나와 있는 것처럼
천달수가 용산의 '공주옥'이라는 술집에서
미성년자를 고용하여 윤락행위를 시킨 것과
그 사건이 터지자 경찰에서 파면을
당했다는 기사가 실려 있었다.
미경은 신문기사에 언급되어 있는 주소로
공주옥을 찾아갔다. 공주옥의 주소는
용산역 뒤편이었다. 그러나 한때 서울역과
청량리와 함께 사창가로 이름을 날린 그
곳은 이미 자취도 없이 사라져 있었다.
미경이 파출소까지 찾아가 옛날에 공주옥이
있던 주소를 물었으나 그 곳은 전자상가로
변해 있었다.
미경은 할 수 없이 용산역 일대를
서성거리다가 돌아올 수 밖에 없었다.
백 주간이 최종열의 소설을 모두 읽은
것은 미경이 용산역에서 돌아와 점심을
마친 뒤의 일이었다.
"소설의 내용으로 봐서 우리 잡지에
연재만 하는 것은 좋지 안겠어. 이 내용이
발표되면 회오리바람이 일어날 거야. "
"네?"
"우리 잡지에 발표하기는 너무 버거워. "
"그럼 어떻게 하시겠어요?"
백 주간의 얼굴은 곤혹스러웠다. 미경은
백 주간의 얼굴을 뚫어질 듯이 응시했다.
"먼저 신문에 때리는 것이 좋겠어. "
이윽고 백 주간이 심각한 얼굴로 말했다.
"신문에요?"
"이 내용은 신문기사로 다룰 가치가
있어. 강한섭 최종열 두 기자의 억울한
죽음도 재수사를 촉구할 겸... "
"그들이 수사를 하겠어요?"
"신문사에서 어떻게 다루느냐가 문제야.
일단 나한테 맡기라구... "
e "그러죠. "
미경은 백 주간의 제안에 고개를
끄덕거렸다. 최종열의 소설이 신문에
특집으로 다루어지면 소설의 내용이
아무래도 힘을 얻게 될 것이 분명했다.
백 주간은 최종열의 소설을 복사해서
미경이 근무하는 잡지사의 모계 신문사인
중원일보 편집국장에게 넘겼다. 편집국장은
최종열의 소설을 몇 번이나 되풀이해서
읽었다. 그리고 편집회의를 열어 최종열의
소설 내용을 특집으로 다루기로 결정했다.
신문사 내부에서 반대 의견도 만만치
않았으나 소설의 내용이 반드시 기사가
되어야 한다는 주장이 더 많았다.
무엇보다도 강한섭과 최종열이 중원일보
전직 기자라는 사실이 그들의 마음을
어둡게 했다. 강한섭과 최종열은
중원일보에서 해직된 기자였기 때문에
그들을 기사로 다루는 것은 중원일보의
치부를 드러내는 일도 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중원일보의 간부들은 한때
자신들이 양심 있는 기자들을 해직한
사실을 부끄럽게 여겨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 부끄러움을 씻어내기 위하여
최종열의 소설을 기사화하기로 결정한
것이다.
중원일보는 마침내 5월24일 최종열의
소설을 3,4면에 특집으로 대대적으로
보도했다. 기사의 제목은 '영혼의 파괴자는
누구인가'로 강한섭과 최종열의 죽음을
추적하는 내용으로 되어 있었다. 군데군데
최종열의 소설에 의하면... 이라는 인용
기사로 소설의 내용이 사실이라는 점을
강조했다.
- 중원일보가 배포되자 전국은 발칵
뒤집혔다.
방송은 다투어 중원일보 기사 내용을
보도했고 사실 여부를 확인하려는 각계의
전화가 빗발쳤다.
중원일보는 미경의 인터뷰까지 싣고
최종열의 소설이 발표되는 것을 두려워하고
있는 세력이 있다고 지적했다. 미경은
매스컴의 표적이 되었다.
검찰은 파문이 걷잡을 수 없이 커지자
천달수라는 인물에 대한 수사를 하겠다고
발표했고 경찰은 천달수라는 사람이 한때
대공분실에 근무하고 있었던 것은 사실이나
이미 오래 전에 비위 사실이 발각되어 파면
당한 사람이므르 경찰과 관계가 없다고
주장했다.
시민들은 분노했다.
매스컴은 연일 검찰과 경찰의 동정을
보도했다.
검찰은 다시 강한섭 기자의 의문사를
수사하겠다고 발표했다. 경찰도 강한섭
기자의 의문사를 수사하겠다고 말했다.
미경은 검찰에 증인으로 소환되었다.
검찰은 미경에게 최종열의 소설을 입수하게
된 동기를 진술 받았다.
미경은 만 하루 동안 검찰에서 조사를
받았다. 미경은 최종열의 소설을 입수하게
된 동기에서부터 정체불명의 사내들로부터
미행과 감시를 받고 있다는 사실까지
낱낱이 진술했다.
검찰은 강한섭 기자의 의문사 사건을
다시 수사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강한섭
기자의 시신이 화장이 되어 강에 뿌려졌고
당시 대공분실에 근무하던 사람들이 줄줄이
검찰에 소환되어 조사를 받았으나 그들은
한 결 같이 강한섭 기자를 연행한 일이
없다고 부인했다.
매스컴은 대공분실을 현장 검증하라고
촉구했다. 재야와 종교계,그리고
대학생들도 맹렬한 비난을 퍼부었다.
검찰은 마지못해 대공분실에 대한 현장
수사를 실시했다. 최종열의 소설에 나오는
'희망 그리고 절망'이라는 글자와 '1980년
강한섭이 쓰다'라는 글자가 있는지
대공분실의 조사실 벽을 조사했다.
그러나 대공분실은 이미 깨끗하게
정리되어 있었다. 제5공화국이 무너지고
문민정부가 들어선 이후 경찰도 많은
변화를 겪고 있었다. 제5공화국이나
제4공화국의 유신시대에 활약하던 고문
경찰들은 모두 도태되어 있었고 도태되지
않았더라도 과거의 고문 사실을 숨기고
조용히 엎드려 있었다.
정가()도 최종열의 소설에 비상한
관심을 쏟았다. 선거법 개정문제로
소집되어 있던 국회에서 야당 의원들은
강한섭 기자와 최종열 기자의 의문사
사건을 밝히라고 추궁했다.
제3공화국에서부터 지금까지 의문사로
죽은 사람들이 수 백명이 넘는다는 자료를
제시한 국회의원도 있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자 세인들의 관심은
최종열의 소설에서 멀어져 갔다.
중원일보는 다시 한 번 '고문 경관 안
잡는가,못 잡는가'라는 특집기사를 냈다.
검찰은 중원일보 기사에 '우리가 잡기
싫어 안 잡는가,우리의 손발이 되어 주어야
할 경찰이 움직여야 잡지... '하고 볼멘
I소리로 항변했다. 그러자 신문기자가 그
사실을 다시 신문에 보도하여 검찰과
경찰을 웃음거리로 만들었다.
"그 놈이 그 놈이지. "
"검찰이 지시하는데 경찰이 안 잡아?"
"엽전들은 할 수가 없다니까... "
시민들은 검찰과 경찰을 냉소적으로
보았다. 그들이 힘없는 사람들에겐 강하고
힘있는 사람들에게는 약하다는 것을
시민들은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시중엔 유언비어가 무수하게 나돌았다.
천달수가 이미 해외로
도피했다던가,경찰의 보호 아래 안전한
곳에 숨어 있다는 등 갖가지 소문이 꼬리를
물고 돌아다녔다.
천달수가 잡히는 것을 경찰이나
야당,그리고 재야인사들도 싫어한다는
소문도 은밀히 나돌았다. 천달수가 잡히면
천달수에게 시국사범을 고문하라고 지시한
경찰 간부들 중 일부가 정가에 진출해 있고
천달수에게 고문을 당하다 견디지 못해
동지를 배신한 재야 인사들이 아직도
상당수 활약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들이
천달수가 체포되는 것을 두려워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라는 것이었다.
구속자 가족협의회에서는 천달수에게
현상금을 걸었다. 그래도 천달수는 잡히지
않았다.
경찰은 최종열에 대한 수사를 재개했다.
그러나 최종열에 대한 수사도 아무런
성과가 없었다.
미경은 쓸쓸했다. 최종열의 소설이 이
정도의 반향밖에 불러 일으키지 못하는가
하는 생각을 하자 가슴이 아팠다.
"그래도 이만하면 큰 성과야. "
백 주간은 미경을 위로했다. 잡지는 이미
인쇄에 들어가 있었다. 독자들의 전화가
빗발치고 있었기 때문에 잡지의 판매
부수가 놀랄만치 신장되리라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는 사실이었다. 벌써 시중에
나오지 않은 잡지의 주문이 쏟아져
들어오고 있었다.
"이젠 푹 쉬라구. "
"네. "
미경은 백 주간의 말에 어쩔 수 없이
동의했다.
그날부터 미경은 착잡한 기분으로 회사와
아파트를 오갔다.
날은 점점 따뜻해지고 있었다. 거리의
가로수들에는 잎사귀들이 무성해 지고
여자들의 스커트 길이가 짧아 졌다.
양윤석이 미경을 찾아 온 것은 5월의
마지막 주말이었다. 미경이 잡지사에서
퇴근하여 동료들과 점심을 먹고 영화까지
한 편 감상을 하고 돌아왔을 때도 아파트의
복도에는 아무도 없었다. 그러나 미경이
아파트를 대충 청소하고 슈퍼에 쇼핑을
하러 가기 위해 아파트를 나서자 양윤석이
복도에 서 있었다.
"어머!"
미경은 깜짝 놀라는 시늉을 했다.
"놀랐어?"
양윤석이 히쭉 웃었다.
"들어와. "
"괜찮아?"
"그럼 괜찮지. "
"여전하네. "
양윤석이 아파트 거실에 들어와 사방을
맘 미경은 벽에 등을 기대고
서서 양윤석을 미소로 지켜봤다. 양윤석도
지난 몇 달 동안 아무 변화가 없는 것
같았다.
"왠일이야?"
"그냥. "
"그 아가씨는 잘 있어?"
"응. "
"결혼한다더니 안해?"
"해야지. "
"어째 대답이 시원치 않네. "
양윤석이 소파에 걸터앉으며 피식
웃었다.
"왜?"
"결혼이 어디 쉬운 것인가?"
"그럼 안할 거야?"
"아가씨는 적극적인데 나는 내키지 않아.
어쩐지 결혼이 두려워지고 있어. "
"아가씨가 싫어졌어?"
"싫어졌다기 보다 내가 두려워지고 있는
것뿐이야. "
미경은 고개를 갸우뚱했다. 양윤석이
무엇 때문에 갈등을 겪고 있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양윤석이 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내 입에
물었다. 미경은 양윤석의 앞에 와서
라이터로 불을 붙여 주었다.
"남자 와이셔쓰네. "
양윤석이 담배 연기를 길게 내뿜고
미경의 옷차림을 살폈다. 미경은 짧은
주황색 스커트에 남편의 와이셔쓰를 입고
있었다. 하의는 이것 저것 입었지만 집에서
있을 때는 상의는 반드시 남편의
와이셔쓰를 입고 지냈다.
"남편 꺼야. "
"아직도 남편을 사랑하나 보지?"
"모르겠어. "
미경은 고개를 흔들었다. 남편을 아직도
자신이 사랑하고 있는 것일까 하고
생각했으나 알 수 없었다.
"요지음 최종열씨 소설이 화제가 되고
있대. "
"그런 모양이야. "
미경은 덤덤하게 대꾸했다.
"소설은 계속 연재되나?"
"응. 내일 모레 잡지가 또 나와. "
"잡지가 잘 팔리겠어... "
미경은 고개를 끄덕거렸다. 대화가
겉돌고 있었다. 양윤석의 얼굴이 어쩐지
쓸쓸해 보였다.
"술 한 잔 줘?"
"응. "
미경은 주방에서 양주 한 병과 마른
안주를 가지고 나왔다. 양윤석은 미경이
술을 따르자 홀짝 홀짝 입속에 양주를 털어
넣었다.
미경도 양주를 두 잔 마셨다.
"미경아. "
"응. "
"이리 와라. 내외하는 사이도 아닌데
천리나 격해 떨어져 있으니 되겠냐?"
양윤석은 금세 술에 취해 혀가
꼬부라졌다. 미경은 어이가 없어 피식
웃었다. 그러나 양윤석의 옆에 가서 털썩
앉았다. 그러자 양윤석이 미경의 팔에
어깨를 감아 왔다.
"냄새가 좋아. "
양윤석이 미경의 얼굴에 볼을 비비며
뽀 미경은 양윤석의 볼에 가볍게 입을
맞추었다. 그러자 양윤석이 갑자기 미경을
소파 위에 쓰러트리고 가슴을 헤치기
시작했다.
"왜 이래?"
미경은 가볍게 양윤석을 떼밀었다.
"왜 그러긴... "
양윤석이 계속 그녀의 가슴을 풀어
헤쳤다. 미경은 그의 입술이 가슴을 덮쳐
오자 등을 주먹으로 두드렸다.
"싫어?"
양윤석이 그녀의 눈을 쏘아보며 물었다.
양윤석의 눈이 불처럼 뜨겁게 이글거리고
있었다.
"싫은 것이 아니고... "
미경은 도리질을 했다. 양윤석이 싫은
것은 아니었다. 다만 양윤석이 전에 없이
탠그녀를 덮치고 있는 것이 기묘했을
뿐이었다.
"그럼?"
"이상해서 그래. "
"뭐가?"
"왜 이렇게 서둘러?전에는 이러지
않았잖아?"
미경은 얼굴을 붉게 물들이며 양윤석의
귓전에 낮게 속삭였다. 양윤석이 무엇에
홀린 듯이 허겁지겁 그녀를 탐하고 있는
것이 싫지 않았다.
"그럼 잠자코 있어... "
양윤석이 다시 그녀의 가슴을 풀어헤치고
손을 스커트로 가져왔다. 미경의 와이셔쓰
단추가 풀어지고 스커트가 밑으로 흘러
내려갔다. 미경은 숨이 가뻐 왔다.
양윤석은 숨을 쉴 여유도 주지 않고 그녀를
밀어붙이고 있었다.
(아... )
미경은 눈을 감았다.
그때 아파트 출입문이 열리는 소리가
미경의 귓전으로 희미하게 들렸다. 미경은
출입문 쪽으로 바짝 귀를 기울였다.
양윤석이 들어올 때 분명히 현관문을
잠그었기 때문에 잘못 들은 것이려니
여겼던 것이다. 그러나 잘못 들은 것이
아니었다. 양윤석이 그녀의 속옷을 무릎
밑으로 끌어내릴 때 인기척이 확실하게
느껴졌다. 미경은 눈을 번쩍 떴다.
"야!이년아!"
인기척이 누구인지 알아채기도 전에
앙칼진 여자의 목소리가 미경의 귓전을
때렸다.
"어?"
( 깜짝 놀란 양윤석이 허둥지둥 미경에게서
떨어져 일어나자 여자가 기다렸다는 듯이
미경의 뺨을 세차게 후려쳤다. 언젠가
양윤석의 부천 빌라에서 만났던 그
여자였다.
(젠장!이 여자는 어떻게 이럴 때만
나타나는 거야?)
미경은 속으로 짜증이 났다.
"이 년이 지난 번에도 꼬리를 치더니 또
꼬리를 쳐?"
"이런 년은 단단히 혼구멍을 내야 해!"
그러나 그 여자는 혼자서 온 것이
아니었다. 미경이 소파에서 채 일어나기도
전에 여자들이 와르르 달려들어 미경의
옷을 찢고,얼굴을 할퀴고,미경에게 마구
발길질을 했다.
미경은 비명소리도 제대로 지르지 못하고
짹시작했다. 여자들이 어떻게나
세차게 미경을 때리는지 미경은 미처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패 죽여!"
"남의 남자에게 꼬리치는 년은 개망신을
줘야 해!"
"발가벗겨서 밖으로 끌고 나가!"
"이 아파트 사람들한테 발가벗겨서
보여줘!"
여자들은 미경을 복도까지 끌고 나가려고
했다.
"왜 이래?"
미경은 여자들에게 끌려나가지 않으려고
발버둥을 쳤다. 이런 꼴로 아파트 복도로
끌려나가면 망신스럽기 짝이 없는
일이었다.
"어 이 년이 사람을 치네!"
"이 년이 어디라고 덤벼들어?"
그러나 미경이 여자들에게 필사적으로
저항을 했으나 소용이 없었다. 양윤석은
여자들의 기세에 놀랐는지 거실 구석에서
꼼짝도 하지 않고 있었다. 워낙 샌님 같은
양윤석이기는 했으나 미경은 야속했다.
여자들은 셋이 합세를 하여 미경을 아파트
복도로 끌어냈다. 그러자 사람들이 금세
웅성거리며 몰려들었다.
미경은 입술을 깨물었다.
어처구니없는 봉변이었다.
"이 년이 남의 약혼자를 유혹한
년이에요!"
"이 년은 더러운 년이에요!"
여자들은 아파트 사람들에게 미경의 온갖
험담을 늘어놓았다. 미경은 여자들을
뿌리치고 아파트로 들어오려고 했다.
여자들은 미경의 머리채를 휘어잡고
휘두르는가 하면 미경에게 마구 손찌검과
발길질을 하다가는 아파트의 경비가
올라오자 미경에게 침까지 퉤퉤 뱉고
사라졌다.
미경은 엉금엉금 기어서 거실로
들어왔다. 끔찍한 일이었다. 미경은 벌렁
누워서 소리없이 울었다.
"미안해. "
그때 양윤석이 미경에게 다가와 낮게
말했다.
"병신!"
미경은 양윤석에게 화풀이를 했다.
"...... "
"너 같은 새끼는 꼴도 보기도 싫으니까
꺼져!"
미경은 양윤석에게 소리를 꽥 질렀다.
r양윤석은 얼굴이 핼쓱해져 미경을
쳐다보다가 어깨를 늘어트리고 거실을
나갔다. 미경은 표독한 눈으로 그 뒷모습을
쏘아보다가 울음을 터뜨렸다. 그리고는
이제는 양윤석과 다시는 만나지 말아야
하겠다고 생각했다.
미경은 한참을 울다가 욕실로 들어가
거울을 보았다. 그리고는 자신도 모르게
피식 웃고 말았다. 거울 속에는 머리를
산발하고 옷이 갈기갈기 찢겨진 여자가
볼상 사납게 서 있었다. 오른 쪽
젖가슴에는 손톱 자국도 흉하게 나 있었다.
미경은 비틀대는 걸음으로 거실로
나왔다. 목욕을 하고 싶지도 않았고 옷을
갈아 입고 싶지도 않았다. 미경은 양윤석이
마시다가 남긴 양주병을 들고 베란다로
나갔다. 베란다에서는 아파트 광장이
뻔졍맙눼
광장은 조용했다. 토요일 오후였다.
프로야구 중계를 하고 있는지 아파트 어느
집에선가 아나운서의 흥분한 목소리가
희미하게 들리고 있었다.
2
홍연숙()은 담배 연기를 길게
내뿜었다. 차영희()와
김유란()도 술이 거나하게 취한
모양이었다. 몸들이 흩어지고 혀가
꼬부라져 있었다.
"우리 그만 가자. "
연숙은 영희와 유란을 살피며 먼저
일어섰다.
"그래. "
영희가 연숙을 따라서 엉거주춤
일어나려고 했다. 유란은 아까부터
이쪽으로 눈짓을 보내고 있는 건너편
테이블의 사내들이 마음에 드는지
머뭇거리고 있었다. 양윤석의 옛날 여자가
살고 있는 아파트에 몰려가서 한바탕
소란을 피우고 돌아와 마음껏 마신
술이었다. 취기가 오른 탓도 있었으나
남자들을 유난히 바치는 유란이 추근덕대는
남자들을 그냥 두고 일어서기가 싫은
모양이었다.
"왜 벌써 가?"
유란이 깜짝 놀란 표정으로 연숙을
쳐다보았다.
"난 좀 취했어. "
"누군 안 취했니?"
"그래. 좀 더 놀다가 가자. "
. 영희가 연숙의 눈치를 살피며 다시
주저앉았다.
"저 치들이 자꾸 싸인을 보내잖아?"
유란이 건너편 테이블의 사내들을 향해
눈을 꿈벅거렸다. 어느 회사에 다니는
샐러리맨들인지 9시가 조금 넘어
나이트클럽에 들어 와서는 연숙 일행에게
계속 추파를 던지고 있었다.
"난 저 사람들 관심 없어. "
연숙은 어쩐지 빨리 일어나고 싶었다. 그
사내와 약속한 시간은 아직 남아 있었으나
아까부터 자꾸 뒤통수가 근질거리는
기분이었다. 누군가 자신을 살피고 있는
듯한 기분에 연숙은 불안하고 초조했다.
"너야 애인 있잖니?"
유란이 아니꼽다는 듯이 야멸차게
내뱉았다.
, "애인은 뭐... "
연숙은 우울한 기분으로 대꾸했다.
양윤석을 애인이라고 단정할 자신이
없었다. 양윤석을 만난 것도 연숙이
근무하는 룸싸롱에서였고 양윤석은 여자가
있었다. 그 여자에게는 양윤석이 자신의
약혼자라고 당당하게 말했지만 어쩐지
양윤석이 자신의 남자라는 남자라는 확신이
서지 않았다.
그것은 무엇보다도 양윤석의 마음을 알
수 없다는 점이었다. 양윤석이 술김에 몇
번 결혼을 하자고 제의했지만 그것이
진심인지 아닌지 알 길이 없었다.
"조금만 더 놀다 가자. "
"그래 너 때문에 오늘 일도 안
나갔잖아?"
유란이 연숙의 스커트를 잡아 당겨서
쨔의자에 주저앉혔다.
"미안해. 기분이 내키지 않아. "
연숙은 진심으로 말했다.
"왜?"
"몰라. 누가 자꾸 나를 살피고 있는 것
같아. "
"무슨 소리야?"
영희와 유란이 재빨리 사방을
휘둘러보았다.
"아무도 없는데 뭐... "
"괜히 기분이 그래. "
연숙은 자신의 기분을 영희와 유란에게
설명할 자신이 없었다.
"서울에서 돌아올 때부터 기분이
이상했어. "
연숙은 담배를 꺼내 입에 물었다. 그러자
저만치 떨어져 있던 웨이터가 재빨리
다가와서 라이터로 불을 붙여 주었다.
연숙은 담배 연기를 후 하고 내뿜었다.
"그 여자 때문에?"
영희와 유란이 깔깔대고 웃음을
터뜨렸다. 연숙이 자리에서 일어나려는
것은 누군가 자신을 살피고 있는 듯한 기분
때문이 아니라 약속이 있기 때문이었다.
연숙은 11시30분에 부천에서 만나기로
약속한 사내가 있었다. 시간은 많이 남아
있었지만 이상하게 기분이 초조하고
불안했다.
"그 여자가 복수하러 오지 않을까?"
그러나 연숙은 엉뚱한 소리를 했다.
"얘봐!"
"왜?"
"너 추리소설 쓰니?이런 일에 누가
복수를 해?"
"그럼?"
"기껏 억울하면 경찰에 고발하지 복수를
해?"
"하긴... "
미경은 고개를 끄덕거리는 체했다.
양윤석의 옛날 여자를 찾아가 행패를
부렸다고 복수를 하러 올 까닭이 없는
것이다. 그때 건너편 테이블의 사내들이
엉거주춤 일어나서 가까이 왔다.
"춤 한 번 추시겠습니까?"
키가 멀쑥하게 큰 사내가 연숙에게 손을
내밀었다. 연숙은 유란을 쳐다보았다.
유란이 생글거리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연숙은 내키지 않았으나 사내의 손을 잡고
플로어로 나갔다. 스테이지에서는 30대의
여자가 '베사메무쵸'를 신명나게 부르고
있었다.
연숙은 탱고를 잘 추지 못했다. 그러나
사내는 탱고 스텝이 능숙하여 연숙을
부드럽게 리드하고 있었다. 연숙은 탱고
리듬이 마음에 들었다. 남미() 특유의
경쾌하고 정열적인 탱고 리듬은 언제나
연숙을 황홀하게 사로잡고 있었다. 원래는
중앙 아프리카 토인의 춤이었다는데 20세기
초에 아르헨티나로부터 유럽을 거쳐
전세계에 퍼졌다는 것이었다. 스펜인 탱고.
아르헨티나 탱고,그리고 프렌지 탱고가
있는데 사교댄스로 쓰이는 탱고는 모두
프렌지 탱고라고 하였다.
연숙이 룸싸롱에 처음 나갔을 때
지배인으로부터 배운 것이었다.
베사메무쵸가 끝나자 30대의 무명 여자
가수는 다시 앵콜송으로 '서울야곡'을
불렀다. 현인이라는 가수도 불렀고
전영이라는 가수도 리바이벌하여 히트한
노래였다.
"한 곡만 더 부탁 드리겠습니다. "
탱고 두 곡이 다 끝나 테이블로
돌아오려고 하자 사내가 연숙의 손을
지그시 잡고 놓지 않았다. 연숙은 테이블
쪽을 힐끗 돌아보았다. 영희는 다른 사내와
함께 플로어에 나와 있었고 유란이 혼자
테이블에 앉아서 연숙에게 눈을 흘기며
맥주를 홀짝거리고 있었다.
"상대를 잘못 잡으셨어요. "
"예?"
"전 약속이 있어서 곧 가야 돼요. "
"그럼 딱 한 곡만 더 부탁드리겠습니다.
"
"좋아요. "
연숙은 사내의 청을 수락했다. 사내는
;무대 매너도 좋고 인상도 깨끗했다. 유란이
사내를 놓치고 싶어하지 않는 까닭을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춤을 잘 추시는군요. "
사내가 연숙의 오른 쪽 허리에 손을 감고
왼손을 잡았다. 플로어에는 부르스의
리듬이 장쾌하게 흐르고 있었다.
스테이지에서 30대의 여자 가수가 물러가고
20대의 여자 가수가 하늘색의 롱드레스를
입고 나와 '대전부르스'를 열창하고
있었다.
"잘 추지 못해요. "
룸싸롱에 일을 나가기 위해서는 춤을
모두 마스터해야 했다. 탱고나 부르스는
기본이고 폐르시아 뱀춤에 배꼽춤까지
다양한 춤을 추어야 하는 것이다.
대전부르스는 안정애라는 여자 가수가
2불러서 너무나 유명한 노래였다. 특히
새벽은 잠이 들어 고요한 이밤,나만이
소리치며 울 줄이야,아아 붙잡아도
뿌리치는 목포행 완행열차... 하는 부분이
사람들의 심금을 사로잡고 있었다.
연숙은 대전부르스가 끝나자 테이블로
돌아왔다. 사내들이 합석을 요구하자
유란이 선뜻 응했다. 연숙은 그 틈을 타서
자리에서 일어섰다.
"나 이제 갈께. "
연숙은 영희와 유란에게 말했다.
"저쪽도 둘이니까 나는 가도 괜찮잖아?"
"그럼 여기 계산이나 하고 가. "
유란이 차갑게 말했다.
"그래. 계산은 걱정하지 말고 잘 놀다가
와. "
연숙은 핸드백을 들고 일어섰다. 그러자
9웨이터가 재빨리 다가와 연숙을 카운터로
안내했다. 연숙은 술값을 치르고 나이트
클럽을 나왔다.
사방은 이미 캄캄하게 어두워져 있었다.
8시가 조금 못되어 나이트 클럽에
도착했는데 이미 10시30분이 지나 있었다.
무궁화가 네 개인 특급 나이트 클럽이기
때문에 새벽 2시까지도 영업을 할 수
있었다. 그러나 약속을 지키려면 이제는
부천으로 가야 했다.
연숙은 택시를 잡기 위해 큰 길로
나갔다. 밤이기 때문에 부천까지 40분이면
충분히 갈 수 있는데도 마음이 조급했다.
다행히 연숙이 큰 길로 나가자 빈 택시가
한 대 오고 있었다.
"택시!"
연숙은 손을 흔들어 택시를 잡았다.
"부천이요. "
연숙은 택시에 올라타자 택시 기사에게
다급하게 말했다.
"부천이요?"
"네. "
"대절요금을 주셔야 하는데요. "
"드릴께요. 가요. "
"3만원 주시겠습니까?"
"네. "
연숙은 조금 비싸다는 생각이 들었으나
어쩔 수 없다고 생각했다. 택시 기사가
백미러로 연숙을 힐끗 살피고 액셀레이터를
밟았다.
"88도로로 가요. "
"네. "
택시 기사가 핸들을 남산쪽으로 꺾었다.
동대문에서 남산 터널을 빠져나가 강변로로
달릴 모양이었다. 양윤석의 옛날 여자에게
행패를 부리고 연숙 일행이 몰려간 곳은
종로5가 뒷골목에 있는 일식집이었었다.
연숙 일행은 거기서 저녁을 먹고 동대문
나이트 클럽으로 몰려갔던 것이다.
이왕이면 가장 좋은 나이트 클럽에서
한바탕 놀아보자는 것이 그들의
생각이었다.
이내 택시가 남산 터널을 빠져 나와
한남동을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연숙은 창문을 조금 열고 담배를 피우기
시작했다.
"비가 오네요. "
강변 도로로 빠지자 택시 기사가 연숙을
돌아보며 말했다.
"네. "
연숙은 심드렁하게 대꾸했다. 차창으로
엷은 빗방울이 묻어 나고 헤트라이트에
바람에 날리는 빗방울들이 보이고 있었다.
빗방울은 칠흑 같은 어둠 속을 헤집고
날아와 차창에 묻어나고 있었다.
(양윤석은 빌라에 돌아와 있을까?)
연숙은 차창을 스쳐 가는 어둠을
내다보며 잠시 생각에 잠겼다.
양윤석에게는 미안했다. 양윤석의 옛날
여자에게 찾아가 행패를 부릴 생각은
처음부터 없었다. 게다가 양윤석을 지극히
사랑하고 있는 것도 아니었다. 양윤석이
술김에 결혼을 하자고 했을 때 선뜻 응한
것도 단골손님을 놓치지 않으려는
생각에서였다.
그러나 양윤석은 계속 연숙을 찾아 왔다.
연숙도 계속 양윤석을 만났다. 그러는 동안
연숙은 양윤석의 빌라까지 드나들게 되었고
거기서 양윤석의 옛날 여자를 만나게
되었던 것이다.
그 무렵 연숙은 양윤석과 결혼을 해도
좋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했었다. 그러나
양윤석이 옛날 여자를 만나는 것을 보고
화가 치밀어 행패를 부리게 되었던 것이다.
그후 한동안 양윤석을 만나지 않았었다.
양윤석이 옛날 여자를 다시 만나는 것을
알게 되자 양윤석이 연숙과 결혼을 하자는
얘기가 진실이라고 아니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러자 양윤석이 연숙을 찾아 왔다.
연숙은 양윤석을 손님으로만 대했다.
양윤석도 손님 이상으로 연숙을 생각하지
않는 눈치였다.
그 사내가 연숙을 찾아온 것은 일주일
전의 일이었다. 신문과 방송은 온통
최종열이라는 사람의 소설로 화제가 되고
있었다. 그 사내는 자신이 양윤석이 만나는
옛날 여자와 결혼을 할 사이라고 말했다.
그런데 양윤석이 자신과 결혼할 여자를
자꾸 만나고 있어서 일이 꼬이고 있다고
말했다. 생각 같아서는 양윤석을 죽여
버리고 싶지만 그럴 수는 없고 양윤석과
여자에게 망신이나 주고 싶다고 말했다.
연숙은 어떻게 했으면 좋겠느냐고
사내에게 물었다.
사내는 얼추 50세가 넘어 보였다. 몸은
작달막했지만 체구가 당당했고 눈빛이
매서웠다. 사내는 자신의 아내와 사별을 한
뒤에 혼자 살고 있었는데 중매장이의
소개로 양윤석의 옛날 여자를 만나게
되었다는 것이다.
중매장이의 말로는 여자도 사귀는 남자가
립헤어진 상태라 결혼을 하는데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고 하기에 그 말을
믿었다고 했다. 그러나 여자는 옛날 남자를
계속 만나고 있었다. 어떻게 하던지 그
남자를 떼어버리고 싶은 것이 사내의
솔직한 심정이었다.
"그러니까 저보고 어떻게 하라는
말씀예요?"
연숙은 나이 지긋한 사내를 우롱하는
양윤석의 옛날 여자가 나쁜 여자라고
생각했다.
"그 여자 아파트에 찾아가서 버릇을 고쳐
줘. "
"버릇이요?"
"다시는 그 놈을 만나지 않도록 망신을
주라구... "
"어떻게요?"
"친구들을 데리고 가서 여자를
아파트에서 끌어내어 아파트 사람들이 모두
보는데서 옷을 찢고 얼굴을 할퀴라구. 그
여자가 다시는 얼굴을 들고 그 놈을 만나지
못하도록... "
연숙은 그 말에 고개를 끄덕거렸다.
양윤석의 옛날 여자에게 한번 쯤 본때를
보여 주는 것도 나이 지긋한 사내나 자신을
위해서도 좋겠다고 생각했다. 게다가
사내는 연숙에게 술이나 마시라며 돈까지
2백만원을 주었다. 그리고 그 일이 끝나면
다시 5백만원을 주겠다고 하였던 것이다.
연숙은 혼쾌히 그 일을 승낙했다.
양윤석의 옛날 여자가 무슨 일을 하는지는
알 수 없었으나 양윤석을 계속 만나는
것보다는 그 사내와 결혼을 해서 오순도순
사는 것이 그 여자를 위해서도 좋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사내는 돈이 많아 보였다. 양윤석의 옛날
여자가 돈 많은 남자와 같이 살게 만드는
것은 결코 나쁜 일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 여자의 아파트에 양윤석이
있으리라고는 생각도 못했었다.
택시가 부천에 도착한 것은
11시10분이었다.
연숙은 택시에서 내리자 슈퍼마켓에서
우산을 하나 샀다. 비가 장대질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니었으나 장미원()이
있는 아아동까지 가려면 우산을 써야 했다.
부천 시청에서 도원동 장미원까지는 불과
10분 거리였다. 술도 깰겸 천천히 걸어도
늦지 않으리라고 생각했다.
연숙은 도원동쪽으로 느릿느릿 걸음을
떼어놓았다. 시간이 오래 되어서인지
거리는 점점 인적이 끊어져 가고 있었다.
게다가 비까지 을씨년스럽게 내리고
있었다. 연숙은 기분이 착잡했다.
장미원으로 가는 골목은 인적 없이 길게
뻗어 있었다. 연숙은 골목 끝을 향해
걸음을 서두르기 시작했다. 빨리 사내에게
돈을 받고 자취방에 돌아가 푹 쉬고
싶었다.
이내 장미원의 무성한 울타리가 보였다.
연숙은 장미원 울타리가 보이자 기분이
상쾌해 지기 시작했다. 6월의 장미원은
색색의 장미가 만발하여 가슴 속에서조차
색색의 장미꽃이 만개한 듯한 기분이 드는
것이다.
장미원은 원래 부천 시유지였다. 인근의
시유지를 모두 불하하고 짜투리가 남은
것을 어느 독지가가 시의 허락을 받고 10년
E전부터 장미를 키우기 시작해 지금은
장미원 또는 장미공원이라고 불러도 좋을
정도로 장미 넝쿨이 울창하게 자라 있었다.
겨울에는 보잘 것이 없지만 장미가
만발하는 5월부터 8월까지는 부천의 명소가
되어 있었다.
연숙은 장미원으로 들어갔다. 자정이
가까운 시간이라 그런지 장미원에는 산책
나온 사람들도 없었다. 장미숲에 떨어지는
빗소리만 쏴아 하고 들리고 있었다.
그 사내는 아직 나오지 않은 모양이었다.
연숙은 장미원의 안쪽에 있는 밴취로
걸어가 핸드백에서 손수건을 꺼내 물기를
닦은 뒤 밴취에 앉았다.
사방이 고즈넉했다.
여기저기 장미꽃 잎잎에서 풍기는 향기가
상쾌했다.
연숙은 핸드백에서 담배를 꺼내 물었다.
그때 장미숲 어디선가 여자의 야릇한
신음소리가 들렸다.
"안돼. "
"가만 있어!"
이어서 앳된 남자와 여자가 낮게
옥신각신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연숙은
얼굴을 찡그렸다. 목소리로 보면 10대
소년소녀들인 것 같았다.
"누가 온 것 같았어. "
"오긴 누가 와?"
연숙은 얕게 헛기침을 했다. 그들이
장미숲에서 떠나 다른 곳으로 가주었으면
싶었다. 그러자 남자와 여자의
옥신각신하는 소리가 뚝 끊겼다.
(어린 것들이 집에 안 들어가고 무슨
짓들이야... )
연숙은 속으로 혀를 찼다.
그때 찻소리가 들리고 검은 승용차 한
대가 장미원 앞에 와 멎었다. 차의 소리로
들어보아도 고급 승용차가 분명했다.
연숙은 밴취에서 일어났다. 검은
승용차에서 내린 사내가 주위를 조심스럽게
살핀 뒤에 장미숲으로 뚜벅뚜벅 걸어
들어왔다. 연숙과 만나기로 한 그
사내였다. 어둠 속이기는 하지만 사내의
작달막한 체구 때문에 한 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시간이 정확하시네요. "
연숙은 시계를 들여다보며 말했다.
"오래 기다렸소?"
사내가 다시 주위를 살피며 물었다.
"약간이요. "
"혼자요?"
"네. "
"여기 다른 사람은 없소?"
"네. "
연숙은 얼핏 사내의 질문이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장미숲 어딘가에 어린
소년소녀들이 있다는 사실은 사내에게
말하고 싶지 않았다. 사내에게서 약속한
돈을 받아서 떠나면 그 뿐인 것이다.
"앉읍시다. "
사내가 먼저 밴취에 앉았다. 연숙도 사내
옆에 앉았다. 사내는 또 다시 주위를
두리번거리고 귀를 기울이더니 연숙의
어깨에 손을 감아 왔다. 연숙은 아미를
찡그리며 고개를 돌렸다. 속으로는 내가
술집에 나간다고 이 자식이 나를 우습게
보나... 하고 생각했으나 겉으로
내색하지는 않았다.
y "약속한 돈을 줘야지... "
사내가 자신의 양복 주머니로 손을
가져갔다. 연숙은 고개를 떨구었다. 그때
연숙의 어깨를 감싸고 있던 사내의 두툼한
손이 갑자기 연숙의 입을 틀어막았다.
연숙은 깜짝 놀라 사내의 손을 떼내려고
했으나 아랫배가 화끈하여 멈칫했다.
사내가 어느 사이에 양복 주머니에서 칼을
꺼내 연숙의 아랫배를 힘껏 찔렀던 것이다.
순식간의 일이었다.
연숙은 눈 앞이 캄캄해 왔다. 자신도
모르게 아,하고 입을 벌리려고 했으나 입이
틀어 막혀 있어 신음이나 비명이 되어
나오지 않았다. 그 사이에 사내는 몇
번이나 연숙의 아랫배를 찌르고 있었다.
연숙은 온 몸을 부르르 떨었다. 고통을
느낄 시간조차 없었다. 연숙은 아랫배에서
무엇인가 콸콸대고 흘러내리는 것 같은
기분을 느끼며 눈을 감았다.
그러자 이번엔 왼쪽 가슴이 뜨끔했다.
사내가 그때서야 연숙의 입을 틀어막고
있던 손을 떼고 벌떡 일어나서 승용차로
총총히 걸어갔다. 연숙은 밴취에서
미끄러져 바닥으로 꼬꾸라졌다.
눈 앞이 점점 희미해져 왔다. 그러나
의식은 아직 또렷했다. 연숙은 장미숲에
진동하는 장미향을 맡을 수 있었으며 내가
이게 무슨 꼴인가,내가 지금 꿈을 꾸고
있는 것인가 하는 생각을 했다.
그때 아랫배로 극심한 통증이 밀려 왔다.
연숙은 아랫배를 움켜쥐고 소리를 지르기
시작했다.
3
민 형사 일행이 사건 현장에 도착했을 때
여자는 이미 숨이 완전히 끊어져 있었다.
민 형사는 여자의 시체를 내려다보며
막막한 느낌이 들었다. 언제나 그렇지만
살인사건 현장에 도착하면 그를 먼저
맞이하는 것은 역겨운 피 냄새였다. 그
동안 수많은 사건을 수사하면서 시체도
볼만큼 보았고 피 냄새도 맡을만치
맡았으나 민 형사는 피 냄새만큼은 여전히
익숙할 수가 없었다.
"감식반 출동했나?"
민 형사는 시체를 살피고 있는 김()
형사를 보고 물었다. 김 형사는 당직이라
서()에서 바로 출동을 했고 민 형사는
집에서 출동을 했기 때문에 자세한
제반사항을 알 수가 없었던 것이다. 김
형사는 부천 토박이었으나 민 형사는
여주에서 부천으로 전보되었기 대문에 김
형사로부터 많은 도움을 받고 있었다. 김
형사의 이름은 김제만()이었다. 키는
작았으나 몸집이 다부졌다.
"곧 도착할 겁니다. "
김 형사가 고개도 돌리지 않고 대답했다.
"흉기는 나왔나?"
"예. 여자의 가슴에 꽂혀 있었습니다. "
김 형사가 밴취를 턱짓으로 가리켰다.
밴취 위에 비닐에 싸인 비수가 놓여
있었다.
"지문 채취를 해야겠군... "
"암만해도 쉽지 않을 것 같습니다. "
"왜?"
"전문가 솜씨 같습니다. "
"전문가?"
"여자가 별로 반항한 흔적이 없습니다. "
"그럼 면식범의 소행이겠지... "
민 형사는 전문가라는 김 형사의 말을
탐탁하게 여기지 않았다. 이 나라에 살인
전문가가 있다는 것은 가당치 않은
주장이라고 생각했다.
현장엔 밤이 오래 되고 비가 오고
있는데도 구경꾼들이 꽤 많이 몰려와
있었다. 관할 파출소의 차석과
순경,강력계에서 데리고 나온 전경까지
합하면 족히 3,40명은 되어 보였다.
"구경꾼들을 보낼까요?"
차석이 민 형사에게 다가와 귓속말로
물었다. 구경꾼들이 수사에 방해가 되지
않겠느냐는 물음이었다.
"그냥 두세요. 혹시 구경꾼들 중에
목격자가 있을지도 모르니까... "
민 형사는 구경꾼들을 보내지 말라고
지시했다. 구경꾼들을 보내면 중요한
목격자를 놓칠 수도 있는 것이다.
구경꾼들이 수사에 방해만 되지 않는다면
굳이 쫑아 보낼 필요가 없었다.
"하필이면 이런 곳에서 죽었으니... "
김 형사가 혀를 찼다. 시체는 젊은
여자의 것이었다. 기껏해야 25,6세 정도
밖에 안되어 보였으나 어쩐지 몸매가
흐트러져 보이고 화장이 짙은 것으로 보아
여염집 여자는 아닐 것 같았다.
"꽤나 낭만적인 살인사건이군... "
언제 나타났는지 지역신문인
경기민보()의 사회부
윤태영() 기자가 카메라를 들이대며
중얼거렸다. 부천주재 기자였으나 전과자
출신이었다. 지방신문의 기자라는 신분을
산업쓰레기를 무단 방출하는
기업체를 공갈 협박하여 돈을 뜯어내다가
구속될 위기에 처한 일이 몇 번 있었다.
"윤 기자,시체에 가까이 접근하지
마시오!"
김 형사가 재빨리 윤 기자를 가로막았다.
"걱정마시오. "
"시체를 건드리면 감식하는데 지장
있다는 말이오. "
"걱정 말라니까... "
윤 기자는 김 형사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시체 사진을 몇 커트 찍은 뒤에야
물러섰다.
"좋은 데서 죽었어... "
윤 기자는 여자가 장미숲에서 죽은 것이
기묘한 모양이었다.
"좋기는... "
3 민 형사는 코웃음을 쳤다.
"마지막 순간에 장미 향기를 맡고 죽었을
테니 얼마나 좋아?"
"쓸데없는 소리 그만해. "
감식반이 도착한 것은 30분이 채
못되었을 때였다 감식반이 도착하자 비로소
수사는 활기를 띠었다. 감식반은 여자의
시체를 세밀하게 사진으로 찍으며 먼저
검안()을 했다. 육안으로 여자가
어떻게 살해되었는지 세세히 살피는 것이
검안이었다. 검안에는 경찰 공의()도
참여하고 있었다.
다음엔 유류품 검사였다.
피해자는 마침 핸드백을 가지고 있었고
핸드백에는
주민등록증,보건증,명함,성냥,라이터 담배
같은 것들과 자질구레한 화장품 샘플이
들어 있었다.
감식반은 지문 채취를 한 뒤 유류품을 민
형사에게 넘겨주었다.
"이름은 홍연숙,나이는 24세로군... "
여자가 주민등록증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신원은 금방 확인이 될 것 같았다.
보건증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보아
유흥업소에 종사하는 여자인 모양이었다.
"집으로 먼저 확인을 할까요?"
김 형사가 보건증을 살피며 민 형사에게
물었다.
"그래. 전경을 보내. "
여자의 주소는 서울 동대문구 제기동으로
되어 있었다.
"여기 술집 이름이 적힌 라이터의
룸싸롱과 동대문 나이트 클럽에도 아는
사람이 있는지 확인하고... "
여자는 단서가 될만한 증거를 여러 가지
가지고 있었다. 특히 여자의 핸드백에
40만원 남짓한 돈이 그냥 들어 있었기
때문에 주변 우범자들의 우발적인
소행이라고 볼 수는 없었다. 살인한 장소가
장미원 안에 있는 밴취라는 사실만 미루어
보더라도 여자가 누군가와 약속이 되어
있었던 것이 분명했다.
(홍연숙,24세,술집 종업원,비오는
장미숲에서 살해... )
민 형사는 여자의 죽음을 머릿속에서
정리해 보았다. 전에도 비오는 날 여자의
시체가 발견되어 수사를 한 일이 있었다.
그때는 민 형사가 여주 경찰서에 있을
때였다. 아리랑파크라는 모텔에서 여자가
투신했으나 자살인지 타살인지 단정을 내릴
수가 없었다. 결국 미제 사건으로 끝나고
말았지만 민 형사의 가슴 속은 아직도
찜찜했다.
민 형사가 담당했던 사건들중 유일하게
해결하지 못한 사건이었다. 민 형사는 그후
화성연쇄살인사건 수사본부에 잠깐
차출되었다가 다시 여주 경찰서로 돌아가게
되었고 그가 모시고 있던 수사과장이
총경으로 승진하여 부천경찰서 서장이 되는
바람에 부천경찰서 강력계장으로 발탁이
되었던 것이다.
부천은 신흥공업도시였다. 유동인구도
많고 서울에서 유입된 인구가 많아 각종
강력사건이 꼬리를 물고 일어나고 있었다.
그러나 민 형사는 대부분의 강력사건을
무리없이 잘 처리하여 서장의 두터운
신임을 받았다. 이번 사건도 해결의 전망이
밝아 여 민 형사는 기분이 흡족했다.
- "사인은 뭡니까?"
민 형사는 담배를 물고 감식반들에게
가까이 갔다. 감식반은 여자의 옷을 벗기며
일일이 사진을 찍고 돋보기가지 동원하여
시체의 손상된 부위를 살피고 있었다.
다행히 빗발이 세우()처럼 가늘게
내리고 있어서 감식을 하기에는 큰 불편이
없어 보였다.
"실혈사예요. "
감식반 반장인 최() 경사가 뒤를
돌아다보지도 않고 대답했다. 홍연숙의
사인은 민 형사가 예측한대로
실혈사()였다. 칼에 찔린 아랫배와
가슴에서 다량의 피가 쏟아져 밴취 밑이
흥건했다.
"피가 아직도 굳지 않은 것을 보면 사망
시간은 두 시간도 안된 것 같고... "
최 경사가 여자의 가슴을 가린
브래지어를 벗기며 말했다. 자상()은
여자의 왼쪽 가슴에도 있었다. 살인자가
심장을 찌르기 위해 여자의 왼쪽 젖가슴을
찌른 모양이었다. 왼쪽 젖가슴에서도 피가
흥건하게 흘러나와 있었다.
"반항한 흔적은 있습니까?"
"손톱 사이에 혈혼이 있어요. 분석을
해봐야 알겠지만... "
"정사한 흔적은 있습니까?"
"질() 검사를 했는데 가까운 시간엔
없어요. 입에서 아직까지 술 냄새를 풍기는
것을 보면 술은 꽤 많이 마신 것 같고요. "
감식반은 홍연숙의 시체를 완전히
발가벗겨서 샅샅이 조사를 했다. 그러나
살인의 증거가 될만한 증거품은 나오지
않고 있었다. 민 형사는 감식이 모두
시체를 부천종합병원의 영안실로
옮기게 하고 현장엔 나이롱줄을 쳐서
전경들에게 지키도록 했다. 내일 아침 날이
밝으면 다시 한 번 샅샅이 조사를 할
작정이었다.
"신고는 누가 했어요?"
민 형사는 파출소 차석에게 물었다.
"어떤 남자입니다. "
파출소 차석이 담배를 피우다가 말고
황급히 대답했다. 차석은 40대 후반의
깡마른 남자였다.
"신고자가 신원을 밝혔습니까?"
"아닙니다. 신고하는 것을 굉장히
두려워하는 것 같고... 목소리가
앳되었습니다. "
"목소리가 앳되다면?"
"스무살 안팎입니다. "
"전화번호를 추적해 보세요. 전화국에
연락하면 어디서 전화했는지 알 수 있을
테니까요. "
"예. "
파출소 차석이 공손히 대답을 하고
물러갔다. 민 형사는 이어서 구경꾼들에게
일일이 장미원 주위를 배회하는 사람을 본
일이 있는가 하고 물었으나 모두들 겁먹은
표정으로 고개를 흔들었다. 민 형사는 날이
밝으면 탐문수사를 하기로 결정했다.
수사진도 보강해야 하고 살인동기도 찾아야
했다.
수사본부는 가까운 파출소에 임시로
마련했다.
이튿날은 날이 화창하게 밝았다.
민 형사는 날이 밝자 마자 김 형사와
함께 사건 현장으로 달려갔다. 그러나 사건
현장에서 특별히 살인사건의 유력한 증거가
될만한 유류품은 나오지 않고 있었다.
민 형사는 실망하여 아파트로 돌아왔다.
수사진이 대거 보강된 것은 아침
9시였다. 그리고 그 무렵 서울에서
홍연숙의 부모가 달려와 딸의 시체를
부둥켜안고 울음을 터뜨렸고 홍연숙이
다니던 룸싸롱의 지배인
표영호()라는 사내와 홍연숙의
동료들인 차영희와 김유란이라는 여자가
수사본부에 임의동행 형식으로 연행되었다.
표영호에게는 간단한 취조를 했다.
홍연숙이 다니는 룸싸롱은 여자들만 30명이
넘는 대규모의 룸싸롱이라 표영호가
홍연숙을 자세히 알지 못한다고 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차영희와 김유란은 조사가
길었다. 그녀들이 모두 홍연숙과 같은
아파트를 전세 얻어서 살고 있는 데다가
사건 당일도 홍연숙과 행동을 같이했다고
스스로 증언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니까 어제 셋이 모두 양윤석이라는
남자의 옛날 여자들에게 행패를 부리러
갔다는 말이지?"
민 형사는 위압적인 시선으로 여자들을
쏘아보며 질문을 했다.
"네. "
김유란이 스스럼없이 대답했다. 김유란은
허벅지가 허옇게 노출된 미니 스커트를
입고 있어서 민 형사의 눈은 자신도 모르게
자꾸 그쪽으로 쏠렸다.
"양윤석은 뭐하는 남자야?"
"한성은행 대리예요. "
"그런데 왜 양윤석의 옛날 여자에게
튼행패를 부렸지?"
"죽은 연숙이와 양윤석은 결혼할
사이였어요. "
"결혼?"
"그러니까 연숙이가 자기 애인이 옛날
여자를 자꾸 만나니까 찾아가서 혼구멍을
내주자고 했어요. "
"그래서 어떻게 했어?"
"연숙이 따라 가서 혼구멍을 내줬어요. "
"어떻게?"
김유란과 차영희가 잠시 얼굴을
마주보았다. 그러나 둘은 별로 망설이는
기색도 없이 양윤석의 옛날 여자를 찾아가
행패를 부린 얘기를 낱낱이 털어놓았다.
"그리고?"
"동대문 나이트 클럽에서 술을 마시고
연숙이가 먼저 일어났어요. "
"그럼 홍연숙이 혼자 나갔어?"
"네. "
"확실해?"
"네. "
여자들의 대답은 민 형사가 아무리
다그쳐도 한결 같았다. 민 형사는 잠시
취조를 멈추고 두 여자를 날카로운
눈빛으로 쏘아보았다. 여자들이 거짓말을
하고 있는지 살피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여자들은 동료가 죽었는데도 태연했고
세상이 다 그런 거 아니냐는 식으로 한가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두 사람은 동대문 나이트 클럽에서 몇
시에 나왔어?"
"저희들은 새벽 1시에 나왔어요. "
"증인 있어?"
"네. "
! "누구야?"
"어젯밤 나이트 클럽에서 만난
남자들이요. 그 사람들과 여관에 같이
갔어요. "
"여관 이름 대봐. "
그러나 두 여자에 대한 혐의점은 아무리
찾아도 소용이 없었다. 여자들은
알리바이도 완벽했고 증인들도 많았다.
애초에 여자들을 연행한 것은 범인으로서
혐의가 있어서가 아니라 피해자 주변을
알기 위해서였으므로 김 형사에게 넘겨
간단한 신상명세를 적게 한 뒤에
돌려보냈다.
여자들로부터 소득을 얻은 것은 죽은
피해자가 양윤석의 옛날 여자가 행패부린
일에 대한 앙갚음을 하러 올까봐 겁을 먹고
있었다는 사실이었다. 그러나 막연하게
=겁을 집어먹고 있다거나 누군가 자꾸
자신을 살피는 것 같아 초조해 있다는
이유로 양윤석의 옛날 여자를 살인범으로
단정 지을 수는 없었다. 무엇보다 피해자의
상처가 망설임도 없이 깊숙히 찔러 넣었던
점으로 보아 살인자는 남자일 가능성이
유력했던 것이다.
"양윤석을 연행해 와. "
민 형사는 김 형사에게 한성은행
부천지점 대출과장인 양윤석을 연행해
오라고 지시했다. 양윤석도 범인 혐의를
벗어날 수가 없었다.
양윤석이 수사본부에 도착한 것은 오전
11시가 조금 지났을 때였다. 양윤석은
어쩐지 잔뜩 풀이 죽어 있었다.
"어젯밤 어디 있었소?"
민 형사는 다짜고짜 양윤석의
추궁했다.
"당직했습니다. "
"당직이요?"
민 형사는 눈쌀을 찌푸렸다. 양윤석이
당직을 했다면 살인을 저질렀다고 볼 수
없는 것이다.
"확인했습니다. "
김 형사가 옆에서 거들었다. 양윤석의
알리바이는 의심할 수 없다는 뜻이었다.
"어제 몇 시부터 당직했소?"
"밤 9시부터입니다. "
"당직이 9시부터야?"
"아닙니다. 당직은 아니지만 9시에
은행에 들어가서 당직하는 사람들과 같이
잤습니다. "
"왜 은행에 들어가서 잠을 잤소?"
"낮에 죽은 연숙이가 행패를 부린 일도
.. 기분이 울적해서 집으로 들어가지
않았습니다. "
"혼자 산다면서요?"
"예. 몇 년 전에 아내와 아이들이
교통사고로 죽어서... "
"안미숙이라는 여자와 동거도 했소?"
"예. "
"왜 동거를 하면서도 결혼을 하지
않았소?"
"그 여자는 독신주의자였습니다. "
민 형사는 잠시 입을 다물었다. 사건이
단순해 보이는데도 종잡을 수가 없었다.
"안미숙은 뭐하는 여자요?"
"잡지사 기자입니다. "
"기자?"
"요지음 화제가 되고 있는 최종열이라는
사람의 소설을 찾아내서 폭로한
여자입니다. "
민 형사는 양윤석의 말에 고개를
갸우뚱했다. 최종열의 소설에 대한 기사는
민 형사도 주의 깊게 읽고 있었다. 그
소설은 놀랍게도 몇 년 전에 자신이 이천
경찰서 강력계에 있을 때 터진 한경호의
부인 이정란 투신사건까지 상세하게
기록하고 있었다. 민 형사는 이 사람이
언제 이렇게 취재를 하여 소설을 쓴 것일까
하고 혀를 내둘렀었다.
또 하나 그가 최종열의 소설을 주의 깊게
읽은 것은 전직이지만 대공분실의 천달수
때문이었다. 아직 천달수에 대한 부분은
소설이 잡지에 연재되지 않고 있어서
상세한 내막을 알 길이 없었으나
중원일보에 보도된 내용으로 보면 천달수는
파렴치한 인물이 분명했다.
" "이 자식이 경찰 망신 다 시키는 거
아니야?"
"에이그 이런 인간이 있으니 우리가 죽을
고생을 하고도 시민들에게 욕을 먹는 거야.
"
"어쩌다 이런 놈이 경찰 노릇을 했을까?"
"오늘 아침엔 마누라와 자식 보기가
민망하더라니까... "
경찰들은 두 세명만 모이면 천달수의
일로 화제를 삼았다. 모두들 천달수가
경찰의 위신을 추락시켰다고 분개하고
있었다. 민 형사도 천달수의 기사 때문에
경찰에서 보낸 청춘이 후회스럽기까지
하였다.
그러나 인간이 사는 곳에는 어디나
악인이 있게 마련이다,천달수는 우연히
경찰이라는 조직에서 발생한 기생충 같은
존재에 지나지 않는다...
민 형사는 그런 생각으로 자위를 했다.
그런데 홍연숙 살인사건의 용의자가 그
사건을 폭로하고 있는 여성지 기자라는
것은 아이러니컬한 일이라고 밖에 할 수
없었다.
민 형사는 양윤석을 돌려보내고
감식반으로 전화를 걸었다. 감식반은
피해자의 손톱에서 채취한 혈혼을
국립과학수사연구소에 보냈다는 것과
시체를 다시 정밀 검안한 결과 시체의
얼굴에서 손톱 자국이 나왔으며,칼에서는
지문이 채취되지 않았다고 말했다. 아울러
손톱의 혈혼과 대조하게 유력한 용의자들의
혈액을 채취해 보내라고 했다.
민 형사는 수사진에게 용의자로 떠오른
사람들의 혈액을 채취해 오라고 지시했다.
'수사진은 양윤석과 홍연숙이 다니던
룸싸롱의 지배인과 홍연숙과 가까운
웨이터,그리고 손님들의 명단을 찾아내서
모두 10여 명의 혈액을 채취해 왔다.
민 형사는 형사들이 채취한 혈액을 모두
국립과학수사연구소에 보냈다. 그러나
피해자의 손톱에서 나온 혈혼과 형사들이
채취한 혈액은 동일한 것이 하나도 없었다.
민 형사는 께림칙한 기분을 떨쳐버리지
못한 채 안미숙을 연행해 오도록 지시했다.
4
미경은 유치장 마루바닥에 몸을 눕혔다.
벌써 자정이 지나 있었다. 유치장 안은
여전히 시끌벅적했다. 풍속사범 일제단속
기간이라 그런지 자정이 지났는데도
계속해서 사람들이 연행되어 오고 있었다.
횡단보도 위반자에서부터,고성방가 혐의로
연행된 사람,미성년자 윤락행위방지법 위반
혐의로 연행된 사람들,각종
절도범,폭행범,주차위반에 항의하다가
공무집행 방해 혐의로 연행된 사람...
경찰서 유치장은 흡사 악마구리가 들끓는
소굴 같았다.
여자들은 모두 다섯 명이었다.
둘은 이제 15,6세로 보이는 어린
소녀들이었고 둘은 중년 여자들이었다.
소녀들은 가출한 문제 소녀들로 여인숙에서
장기 투숙하며 술집에 나가 접대부 노릇을
하다가 연행되었고 한 여자는 간통
혐의로,한 여자는 절도 혐의로 연행된
여자였다.
절도 혐의로 연행된 여자는 33세
훈팀막몸도 호리호리하고 얼굴도 예쁜
편이어서 절도를 하리라고는 믿어지지
않았다. 38세 안팎으로 되어 보이는 여자는
몸도 뚱뚱하고 얼굴도 광대뼈가 튀어나온
못생긴 얼굴이어서 간통을 했다는 사실이
우습기까지 하였다.
얼굴에 푸른 멍이 들어 있는 것은 간통을
하다가 적발되었을 때 남편에게 얻어맞은
상처였다. 옷도 여기저기 찢어지고
머리까지 흐트러져 마치 며칠 전 미경이
죽은 홍연숙에게 당했던 꼴과 흡사했다.
소녀들은 둘다 되바라져 보였다. 하나는
15,6세의 소녀로 보이지 않을 정도로 몸이
숙성했고 다른 하나는 키도 작고 몸도 마른
편이었다. 둘 다 몸에 타이트하게 달라붙는
흰 티 셔츠와 초미니 차림이었다. 손님들을
호객하기 위해 일부러 초미니를 입고 있는
모양이었다. 그러나 몸가짐이 단정치 않아
그녀들이 몸을 뒤척거릴 때마다 언뜻언뜻
속옷 자락이 드러나곤 했다. 머리는
숏커트의 파마머리였다. 얼굴에 화장품을
덕지덕지 바르고 루즈를 새빨갛게 칠해
보기에 흉했다.
미경은 낮게 한숨을 내쉬었다. 유치장이
처음은 아니었다. 남편 김석호가 의문의
교통사고를 당하고 미경이 정체불명의
사내들에게 납치되어 부산의 엘로우
하우스에서 몸을 팔고 있을 때 손님의 돈을
훔쳐 유치장에 들어간 일이 있었다. 물론
그것은 미경이 엘로우 하우스를 탈출하기
위한 고육지책으로 꾸민 계략이었으나 내심
참담하기만 했었다.
무엇보다 견딜 수 없었던 것은 파출소에
연행되었을 때였다. 파출소의 순경들과
들락거릴 때마다 미경을 보고 얜
뭐야?이거 절도범 아니야... ? 하고
머리통을 쥐어박거나 함부로 욕질을 했다.
미경은 파출소에 연행될 때 격렬한
저항을 했고 때마침 무슨 살인사건이 있어
파출소에 수사본부를 설치하고 있던
형사들마저 패악질을 하는 미경에게 함부로
욕질과 손찌검을 했던 것이다.
결국 미경은 악바리로 낙인이 찍혀
검찰에 넘겨졌고 검찰에서도 격렬하게
패악질을 하여 검사가 설래설래 고개를
흔들기까지 하였다. 그리고 그것은 재판
때까지 계속되어 미경은 초범이면서도
중형을 선고받게 되었던 것이다.
그런 까닭으로 미경은 유치장이 낯설지는
않았다. 다만 살인 용의자로 연행되었다는
사실에 마음이 어두웠다. 어쩐지 음모에
빠지고 있는 듯한 기분이었다.
(내가 그 여자를 죽인 것은 아니니까...
)
미경은 속으로 그렇게 위로를 했다.
살인범이 따로 있으므로 반드시 진실이
밝혀지리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누가 그 여자를 죽인 것일까?)
미경은 살인자가 누구인지 의아했다.
살인자가 한낱 룸싸롱 호스테스를 살해한
것도 이상했고 살인의 장소도 거의 공개된
장소나 마찬가지인 장미원을 택한 것도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호스테스가
살해되었다면 치정에 얽힌 살인으로 보아야
하는데 오히려 그쪽에는 뚜렷한 용의자도
없었다. 만약에 살인사건이 삼각관계에서
비롯되었다면 자신과 양윤석이 가장 유력한
용의자가 될 것이었다.
미경은 거기까지 생각하다가 고개를
살래살래 흔들었다. 양윤석도 자신도 그
여자를 살해할 만한 절박한 이유가 없었다.
만약에 살인범이 있다면 그 여자의 다른
남자,제3의 인물이 베일 뒤에 숨어 있을
것으로 추정되었다.
그러나 경찰은 그 점을 인정하지 않고
있었다.
게다가 형사들이 미경을 연행할 때
가택수색을 실시하여 미경이 청계천에서
사들인 가스총을 비롯해 손전등,등산용
칼과 종로5가에서 산 동물용 마취제까지
압수했던 것이다. 경찰로서 보면 미경이
유력한 용의자가 될 수밖에 없었다. 그
뿐이 아니라 미경과 죽은 여자는 양윤석
하나를 쟁취하기 위해 싸운 꼴로
지방신문인 경기민보가 기사를 끌고 가고
있었다.
미경은 무겁게 한숨을 내쉬었다. 경찰이
연행해 놓고 아무 취조도 하지 않는 것이
마음에 어두운 그림자를 던지고 있었다.
경찰은 도대체 무슨 끙끙이 속으로
연행만 해놓고 조사도 하지 않는 것일까.
연행은 임의동행 형식이었다. 임의동행은
법적으로 거절할 권리가 있다는 것은
미경도 잘 알고 있었으나 굳이 거절을 하여
의심을 사고 싶지 않았다.
어차피 48시간 안에 구속영장이 떨어지지
않으면 경찰로서는 불법 감금이 되니까
석방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었다. 또
중원일보사의 여성잡지 기자라는 확실한
신분이 있기 때문에 경찰이 함부로 하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몇 시간이
지났는데도 간단한 신분 확인과 지문만
6찍어 가고는 아무 조사도 하지 않는 것이
불안하기 짝이 없었다.
(용의자만 되면 꼭 지문을 찍어 가야
하나?)
미경은 경찰이 지문을 떠갈 때 불쾌하기
짝이 없었다. 지문을 떠갈 때 어쩐지
범죄자가 된 기분인 것이다.
중원일보와 잡지사는 발칵 뒤집혀
있었다. 안미경이 살인사건 용의자라는
사실은 중원일보와 잡지사에 도덕적인
상처를 입힐 우려가 있었다.
"이런 것들은 모두 범행도구들인데 무얼
하러 샀습니까?"
민 형사는 미경을 연행한 뒤 6시간이
지난 뒤인 새벽 4시에야 미경을 취조실로
불러냈다. 취조실엔 책상이 하나 있었고
책상 위에는 고물 타이프 라이터가 하나
달랑 놓여 있었다. 민 형사 옆에는 김
형사가 앉았고 미경은 민 형사를 마주 보고
앉았다. 다른 형사들은 김 형사의 뒤에 죽
둘러서서 미경의 취조를 지켜보고 있었다.
"전 생명의 위협을 느끼고 있었어요. "
미경은 차분하게 대답했다.
김 형사는 민 형사의 질문과 미경의
대답을 타이프 라이터로 찍고 있었다.
"생명의 위협을 느끼다니요?"
"최종열씨의 소설이 우리 잡지에
연재되면서 전 신분을 알 수 없는 사람들의
미행을 받았어요. 한 번은 그 사람들에게
몰매를 맞아서 죽을 뻔하기도 했고... "
"그 사람들이 누구입니까?"
"몰라요. 베일 속의 인물들이니까요. "
"왜 그 사람들이 안미숙씨를 미행하고
있었지요?"
; "최종열씨의 소설에 자신들에 대한
내용이 들어 있을까봐 겁을 낸
사람들이겠죠. "
"그럼 그 사람들이 안미숙씨를 살해하면
간단한 일 아닙니까?굳이 미행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하는데... "
"그들은 최종열씨의 소설이 어디에
있는지 몰랐어요. 저도 최근에야 그 소설
원고를 찾았으니까요. "
미경은 민 형사를 똑바로 응시했다. 민
형사가 진실해 보이기는 해도 그에게 모든
사실을 다 밝힐 수는 없었다. 아직도
천달수라는 인물은 체포되지 않았고
강한섭,김석호,최종열에 대한 의문사는
하나도 밝혀지지 않고 있었다.
"좋아요. 그러면 양윤석씨와의 관계에
대해서 얘기해 보시오. "
"한때 동거하던 사이예요. "
"어떤 동거입니까?"
"무슨 뜻이죠?"
"결혼을 전제로 한 동거냐는 뜻입니다. "
"아녜요. 결혼은 두 사람 다 처음부터
생각하지 않았어요. "
"일반적으로 남자와 여자가 동거를 하게
되면 결혼을 생각할 텐데 왜 결혼을
생각하지 않았죠?"
"그 사람도 상처를 가지고 있었고 저도
상처를 갖고 있었어요. 평범하게 결혼을
해서 살아갈 수 없다고 생각했어요. "
"안미경씨는 어떤 상처를 갖고
있습니까?"
"남편이 교통사고로 죽었어요. "
"얼마나 되었죠?"
"7,8년 되었어요. "
"그럼 재혼을 고려해 볼만한 시간도 되지
않았습니까?"
"아뇨. 시간의 문제가 아니예요. "
미경은 짧게 끊어서 단호하게 말했다.
남편이 죽은 지 몇 년이 되었다고 해서
재혼을 고려한다는 것은 지나치게
단세포적인 생각이다.
민 형사가 볼펜으로 책상을 가만히
두드렸다. 미경의 얘기가 납득이 되지
않는다는 뜻이었다.
"저 쪽에서는 안미숙씨를 양윤석씨의
옛날 여자라고 그러던데 지금은 완전히
헤어진 상태입니까?"
"글쎄요... "
미경은 잠시 망설였다. 양윤석과 과연
완전히 헤어진 상태인가 하고 반문해
보았으나 그런 것 같지는 않았다.
"계속 만나는 사이입니까?"
"만나지 말자는 얘기는 한 번도 하지
않았어요. "
"결별을 선언하지 않았다는 말씀입니까?"
"네. "
"계속 만나기 위해서요?"
"꼭 그런 건 아니었어요. "
양윤석과 헤어진 것은 양윤석이 부천으로
발령을 받았기 때문이었다. 양윤석이
부천으로 떠났기 때문에 이제 그만 만날
때가 된 것이라고 생각했을 뿐이었다.
"그럼 가끔 만날 생각이었습니까?"
"아뇨. "
"결별을 선언하지 않았다면서요?"
"자연스럽게 만나게 되지 않으리라고
생각했어요. "
"양윤석씨가 부천으로 떠난 뒤에도 자주
만났습니까?"
"자주 만나지는 않았어요. "
미경은 고개를 흔들었다. 민 형사가
양윤석과 미경의 관계를 집요하게 묻고
있는 것은 양윤석에 대한 애정이 얼마나
깊은지 확인하려는 모양이었다. 민 형사는
홍연숙 살인사건을 삼각관계에 의한
살인으로 보고 있는 것 같았다. 미경은
그런 느낌을 강하게 받았다.
"피해자의 얼굴에 긁힌 상처가 하나
있었어요. 우린 안미숙씨의 손톱에 긁힌
것이라고 생각하는데 맞습니까?"
"그럴 가능성이 많지요. "
미경은 선선하게 인정했다. 죽은
홍연숙의 얼굴에 손톱에 긁힌 상처가
있었다면 그것은 그 여자들이 아파트에
떼거리로 몰려와 행패를 부릴 때 미경이
저항을 하다가 생긴 것일 터였다.
"또 하나는 피해자의 손톱 사이에 혈혼이
하나 발견되었는데 감식반은 피해자가
살인자에게 저항을 할 때 몸 어딘가를
굵었기 때문이라고 보고 있습니다. "
"그럴 수도 있겠죠. "
"담담하십니까?"
"이치에 맞으니까요. "
"그 손톱의 혈혼이 안미숙씨의 혈액과
동일하다는 감정이 나오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미경은 그때서야 얼굴이 창백해 졌다. 민
형사가 미경을 살인자로 몰아 가고 있는
것으로 여겨졌다.
"제 혈액과 동일할 수도 있어요. "
"어째서 그렇지요?"
"여자들이 제게 몰려와 행패를 부릴 때
제 몸은 성한 곳이 없었어요. 지금도
얼굴에 손톱에 긁힌 생채기가 남아 있지만
가슴에도 할퀸 자국이 많아요. "
미경은 입술을 지그시 깨물고 있다가
말했다. 올가미가 점점 자신의 목을 조여
오고 있는 듯이 가슴이 서늘해 왔다.
"여자가 그 날 밤 살해되었으니 당연히
손톱에 제 혈액이 응고되어 있을 수도
있죠. "
민 형사가 고개를 끄덕거렸다. 다른
형사들은 미경과 민 형사를 번갈아 살피며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실내에 담배 연기가
자욱하게 퍼져 있었다.
"그런데 알리바이가 전혀 성립이 되지
않는군요. "
"성립이 안되는 것이 아니라 증명이
안되는 거예요. "
미경은 민 형사의 말을 정정했다. 미경은
그날 여자들이 행패를 부리고 돌아간
다음에 바깥에 외출을 하지 않고 아파트에
틀어박혀 있었다. 여자들에게 행패를 당한
것이 어이없기도 했지만 이 기회에
양윤석과의 관계를 완전히 끝내야겠다고
결심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녀의
알리바이를 증명해 줄만한 사람이 없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럼 알리바이를 증명해야 하지
않을까요?"
"그건 경찰의 일이죠. "
미경은 차갑게 대꾸했다. 민 형사와의
불필요한 대화를 빨리 끝내고 싶었다.
그때 여순경이 취조실로 들어와 민
형사에게 서류 한 장을 보여 주며 무엇인가
귓속말로 소근거렸다. 미경은 얼굴을
찌푸렸다. 민 형사의 얼굴이 점점
심각해지는 것으로 보아 여순경은 상당히
중요한 내용을 알린 모양이었다. 민 형사는
여순경이 준 서류와 미경을 몇 번이나
되풀이해 살폈고 어깨 너머로 서류를
들여다보던 형사들도 서로 얼굴을 마주
보며 웅성거리고 있었다.
(무슨 일이지... ?)
미경은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안미숙씨!"
이윽고 민 형사가 날카로운 눈빛으로
미경을 쏘아보았다. 미경은 가슴이
철렁했다.
"네?"
"당신은 안미숙이 아니고 안미경이지?"
민 형사가 책상을 주먹으로 쾅 쳤다.
미경은 깜짝 놀라서 민 형사를 쳐다보았다.
형사의 눈이 마치 용광로처럼
이글거리고 있었다.
미경은 민 형사의 눈을 본 순간 마치
천길 벼랑으로 떨어지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제20장 빗속에 지다
1
민 형사는 강력계 창으로 빗줄기가
하얗게 쏟아지는 경찰서 뒤뜰을 우두커니
내다보았다. 예년에 비해 며칠 일찍 시작한
장마비였다. 어제만 해도 후덥지근한
날씨에 숨이 턱턱 막힐 것 같더니 언제
그런 날이 있었느냐는 듯이 시원스럽게
빗줄기가 쏟아지고 있었다.
(사건이 정치적으로 비화되고 있어... )
민 형사는 빗줄기를 내다보며 골똘히
생각에 잠겼다. 홍연숙이라는 룸싸롱
호스티스 살인사건이 걷잡을 수 없이
확대되고 있었다. 처음엔 단순한 치정에
얽힌 살인사건으로 추정했었으나 사건이
파고 들어가면 갈수록 실타래처럼 복잡하게
엉키면서 전국민적인 관심을 불러 일으키고
있었다.
신문과 방송은 매일 같이 이 사건을
대대적으로 보도하고 있었고 안미경이 어떤
여자인가 하는 점에 관심의 촛점이
모아지고 있었다. 특히 중원일보사와 경쟁
관계에 있는 조일신문()이
안미경의 과거를 낱낱이 폭로하면서 사건은
새로운 국면에 접어들고 있었다.
우리시대의 여성 잡지사 기자 안미숙은
위장취업자!
조일신문이 사회면 톱으로 때린 기사의
제목이었다. 조일신문은 그 기사에서
안미경이 사창가를 전전한 정체불명의
여자이며,자신의 사창가 생활을 감추기
위해 성형수술까지 한 뒤에 여동생
안미숙의 이름으로 중원일보의 자매지인
우리시대의 여성에 취업했으며 그녀가
발굴했다는 최종열의 소설은 의문점이 많아
그를 토대로 특집기사를 낸 중원일보의
양식이 의심스럽다는 투로 논조를 이끌어
가고 있었다.
중원일보에 대한 노골적인 비난이었다.
검찰과 경찰 간부들은 기다렸다는 듯이
강한섭,최종열 의문사 사건은 중원일보
기사가 객관성을 잃고 있으므로 수사를
중단한다고 발표했다. 아울러 정확한
사실에 근거하지 않은 기사를 보도하여
사회적 혼란을 야기한 중원일보에 대한
수사를 고려하고 있다는 말도 넌지시
1흘렸다.
중원일보에 대한 압력이었다.
이제 홍연숙의 살인범인 누구냐는
사실보다 안미경이 무엇 때문에
성형수술까지 하고 그녀의 여동생 안미숙
행세를 했느냐는 사실이 더 비상한 관심을
모으고 있었다.
그러나 안미경은 여전히 홍연숙의 가장
유력한 살인범이었다. 경찰 상부에서는
사건을 빨리 자백 받으라고 성화가
빗발치고 있었다. 경찰 간부들은 아예
안미경을 살인자로 단정하고 있었다.
그러나 민 형사는 안미경을 살인자로
검찰에 송치할 수는 없었다.
홍연숙의 살인범은 따로 있는 것이
분명했다. 살인범이 누구인지는 알 수
없었으나 그 살인범을 잡는데 전력을
다하지 않으면 사건은 엉뚱한 방향으로
끌려가게 되는 것이다.
그는 사건이 최종열의 소설로 화제가
되고 있는 안미경을 연행할 때부터 심상치
않게 돌아가리라는 것을 막연하게나마
짐작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때부터 자신도
알 수 없는 불안감에 싸이기 시작한
것이다.
(그런데 안미경은 어쩌다가 그 지경까지
당하게 되었을까... )
민 형사는 안미경의 처지를 생각하자
가슴이 묵직해 왔다. 안미경은 자신의 말로
사창가 생활을 했고 그 사창가 생활을
감추기 위해 성형수술을 한 뒤에 여동생
안미숙의 이름으로 중원일보사의 자매지인
여성지에 기자로 위장취업을 한 것이라는
사실은 부정하지 않고 자백하고 있었다.
그러나 무엇 때문에 사창가 생활을 했는지
그 내막은 밝히지 않고 있었다.
민 형사는 며칠 밤을 세우다시피 하며 그
내막을 추궁했었다. "천달수가 체포되기
전에는 말할 수 없어요. "
그러나 안미경은 단호하게 잘라서 자백을
거절했다.
"자백하지 않으면 살인범으로 몰릴 수도
있어요. "
"내가 살인범이 아니라는 것은 형사님도
알고 있을 거예요. "
"또 교도소 생활을 하고 싶어요?"
안미경은 사창가 생활을 할 때 절도죄로
체포되어 복역한 일이 있었다. 그때의 재판
기록과 수사 기록을 모두 검토한 민 형사는
고개를 갸우뚱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때의
수사 기록과 재판 기록에 나타난 안미경의
모습은 악랄하다는 말이 어울릴 정도로
사나운 여자였었다. 그러나 안미경을
자세히 관찰한 결과 절도죄는 도무지
어울리지 않았다.
"나를 살인범으로 단정하는 거예요?"
"최종열이 썼다는 소설도 모두 당신의
창작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아요. "
"내가 어떻게 그런 소설을 쓰겠어요?"
안미경은 어처구니없다는 표정만 짓고
있었다. 민 형사는 도리없이 안미경에 대한
기사가 보도된 신문 뭉치를 안미경에게
던져 주었다.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죠?"
신문을 보던 안미경의 얼굴이 창백해지며
민 형사를 쏘아보았다.
안미경의 자백은 민 형사와 김 형사가
있는 데서 이루어졌었다. 그런데도
5중원일보와 경쟁사인 조일신문이 안미경의
과거에 대해 낱낱이 까발긴 것이다.
"우리한테서 정보가 새어 나간 것은
아니오. "
"무슨 소리예요?그럼 이 사람들이 어떻게
이런 기사를 쓰겠어요?"
"신문사에 알아보니까 익명의 제보자가
있다고 했소. "
"제보자요?"
"그렇소. 당신이 사창가 생활을 한 것을
아는 사람들이 또 있을 것이오. "
안미경은 민 형사의 말에 아무 대꾸도
하지 않았다. 민 형사의 말이 옳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비로소 조일신문에 기사를 제공한 익명의
제공자가 누구인지 짐작할 수 있었다. 그는
홍연숙을 살해하여 미경을 살인범으로 몰고
가려고 했고 그것이 실패하자 조일신문에
미경의 과거를 제공하여 미경을 사창가
생활을 한 위장취업자로 전락시킨 것이다.
"신고자 수사는 어떻게 되어 가고 있어?"
민 형사는 김 형사가 사무실로 들어오자
짜증을 부렸다. 홍연숙 살인사건을 신고한
남자만 찾아도 사건이 훨씬 수월하게
풀릴텐데 신고자 수사가 영
오리무중이었다.
"근처 불량 학생들을 모조리 쑤시고
있습니다. "
김 형사가 얼굴의 빗물을 손으로 훔치며
대답했다. 차에서 내려 사무실로 들어 올
때 비를 맞은 모양이었다.
"신문과 방송에서 이만큼 떠들어댔으면
반응이 있을 만한데 이상하네... "
"정체를 밝힐 수 없는 사정이 있는
9모양이지요. "
"장미원에 잠복하고 있겠지?"
"예. 유() 형사와 한() 형사가
잠복하고 있습니다. "
장미원 주변에 유 형사와 한 형사를
배치한 것은 신고자가 한 번쯤은 살인사건
현장에 기웃거리지 않을까 하는 생각
때문이었다. 물론 범인은 범죄 현장에
반드시 한 번은 찾아온다고 하지만 민
형사는 그런 가설()은 믿지 않았다.
그러나 신고자라면 그 후의 일이 궁금하여
들릴 것이라고 본 것이다.
"안미경을 석방해야 하지 않을까요?"
김 형사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김 형사도
안미경이 살인자가 아니라는 생각을 갖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무슨 명분으로 석방을 해?"
안미경이는 이미 구속영장이 떨어져 있는
상태였다. 안미경이를 석방하려면
구속사유가 해제되어야 하는데 그럴 만한
증거가 나오지 않은 것이다.
"중원일보가 난리입니다. "
"참 중원일보 기자를 안미경과 만나게
해줄까?"
"기자를요?"
"중원일보에서 안미경이를 만나기 위해
안달이잖아?조일신문에 크게 당했으니
어떻게 하던지 진실을 밝히려 할 거야. "
"그런 셈이죠. "
김 형사가 썩 내키지 않는다는 듯이
맥없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중원일보에서
매일 같이 안미경을 만나게 해달라고
재촉을 했으나 수사중이라는 이유로 거부해
왔던 것이다.
"중원일보에 연락해. "
"예. "
김 형사가 고개를 끄덕거리고 밖으로
나갔다. 민 형사는 계장실 책상에 돌아와
의자에 몸을 던지듯이 털썩 주저앉았다.
빗소리가 점점 커지고 있는 것을 보면
빗발은 좀처럼 수그러들 기색이 아니었다.
민 형사는 담배 한 대를 피우고 취조실로
내려갔다.
"중원일보 기자들을 오라고 했는데
만나겠어요?"
민 형사는 안미경을 취조실로 불러서
의향을 물었다.
"왜요?"
"중원일보가 발칵 뒤집힌 모양입니다. "
"...... "
"안미경씨가 제공한 최종열의 소설에
9대해 중원일보가 대대적으로 보도했는데
안미경씨가 위장취업 기자라는 사실이
밝혀져 중원일보의 도덕성까지 의심받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
민 형사의 목소리는 차분했다. 어쩐지
미경을 달래고 있는 듯한 목소리였다.
"...... "
"우리에게 자백하지 않은 것을 그
사람들에게 말해도 좋아요. "
안미경은 한참 동안이나 생각에 잠겼다.
민 형사는 그녀가 생각을 할 수 있도록
담배를 주었다. 안미경은 민 형사가
건네주는 담배를 받아서 입에 물고는
한동안 생각에 잠겨 있다가 입을 열었다.
"만나지 않겠어요. "
"중원일보에서 아우성입니다. "
"이제 와서 그들을 만나서 무얼
?하겠어요?"
안미경은 완고했다. 민 형사가 몇 번이나
설득을 했으나 안미경은 중원일보
기자들과의 면담을 거절했다. 민 형사는
다시 안미경을 유치장으로 내려보냈다.
중원일보 기자들이 김 형사의 연락을
받고 들이닥친 것은 한 시간이 채 못되었을
때였다. 그러나 안미경이 면담을
거절한다는 얘기를 듣고는 실망하여
투덜거리며 돌아갔다.
장미원 주변에서 잠복하고 유 형사와 한
형사가 수상한 남녀라고 10대 소년소녀들을
연행해 온 것은 그날 밤의 일이었다.
"얘들은 뭐야?"
민 형사는 한 형사를 보고 물었다. 한
형사는 강력계에 배치된 유일한
여형사였다. 유 형사와 짝을 이루어
6장미원에 잠복시키고 있었다. 한 형사는
경찰 시험에 합격한 후 여자로서는 드물게
강력계를 지원하여 화제가 되었었다.
얼굴이 동그스름하고 눈매가 서늘했다.
"장미원 주변에서 연행해 온
아이들입니다. "
유 형사가 대답을 했다. 유 형사는
눈매가 날카로워 '살모사'라는 별명을 갖고
있었다. 강력계의 베테랑 형사였다.
"왜?"
"이 애들이 살인사건에 대해서 얘기하고
있었어요. "
한 형사의 얘기에 의하면 장미원에
잠복하고 있는데 두 소년 소녀과 나타나
옥신각신하더라는 것이었다. 한 형사와 유
형사가 가만히 귀를 기울이자 남자는
장미원에 들어가자고 여자를 재촉하고
있었고 여자는 살인사건이 일어난 곳이라
무섭다며 들어가지 않으려 하고 있었다.
특히 여자의 말 중에 지난 번 살인을
목격한 뒤로 꿈에도 자꾸 그 일이 나타나
무서워 죽겠다는 말이 한 형사의 귀를 번쩍
뜨이게 했다. 한 형사와 유 형사는 즉각
그들을 체포했다. 그들은 근처에 있는
독서실에 등록한 고등학생들로 독서실에서
나오면 언제나 인적이 없는 장미원에
들어와 데이트를 즐기는 사이였다는
것이다.
민 형사는 10대 소년과 소녀를 매섭게
쏘아보았다. 고등학생답게 소녀는
단발머리였고 소년은 상고머리였다. 둘 다
등에다 가방을 매고 있었다.
"학생들이야?"
민 형사가 소년과 소녀를 다그쳤다.
"예. "
소년이 쭈빗거리며 대답했다. 소녀는
고개를 푹 수그리고 있었다.
"이름?"
"박석진()이요. "
"넌?"
"조현경()... "
소녀가 기어 들어가는 목소리로
대꾸했다.
"데리고 가서 취조해!"
민 형사는 박석진과 조현경을 유 형사와
한 형사에게 넘겼다. 그러나 유 형사와 한
형사는 박석진과 조현경을 취조실로 데리고
간지 30분도 못되어 취조를 끝내고
돌아왔다.
"어떻게 됐어?"
"신고자들입니다. "
한 형사가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확실해?"
"네. 신고도 했고 목격도 했답니다.
"그래?"
민 형사는 고개를 갸우뚱했다. 목격자가
아직까지 신고를 하지 않았다는 것이
기이했던 것이다.
"그 아이들은 고등학생들이지만 성관계를
갖고 있는 사이입니다. 학생 신분이라
여관을 이용하지는 못하고 은밀한 곳을
찾아다니며 데이트를 즐긴 모양입니다. "
한 형사가 방글방긋 웃으며 설명을 했다.
"뭐라고?"
"성관계를 갖고 있는 사이라구요?"
"정말이야?"
"네. "
"나 이거야 정말... "
"요지음 아이들은 빨라요. 가방을
뒤져보니까 피임약도 갖고 있더라구요. "
한 형사의 말에 민 형사는 입이
다물어지지 않았다.
"그러니까 자기네 데이트가 들통날까봐
전화신고만 하고 나타나지 않은 거군... "
"네. "
"살인자를 봤대. "
"네. "
"몽타지 만들 수 있나?"
"어둠 속이라 그 정도는 보지 못했고
50대의 남자라고 했어요. 차를 타고 와서
장미원 앞에 내린 뒤 장미원에 들어와
여자를 죽였답니다. 남자와 여자는 서로
아는 사이인 듯 밴취에 나란히 앉았는데
남자가 갑자기 여자의 입을 틀어 막고 칼을
꺼내 마구 찔렀답니다. 그 뒤에 남자는
냈걸어가 차를 타고 사라졌답니다. "
"남자가 분명하대?"
"예. 차량번호를 3개 외우고 있었습니다.
끝 자리가 567이라고 했습니다. "
"차종은?"
"검은 색 그랜저라고 합니다. "
"그럼 검은 색 그랜저의 끝 자리가 567인
차량을 수배해!"
"네. "
민 형사는 이어서 목격자 진술조사를
받아 두라고 지시하고 안미경을 석방하라고
지시했다. 홍연숙의 살인사건의 목격자들이
나타났으므로 안미경을 구속하고 있을
필요가 없었다.
2
미경은 희디 흰 햇살이 난무하는 아파트
광장을 뚫어질 듯이 내려다보았다. 햇살이
하얗게 표백시킨 아파트 광장은 지열이
후끈거리고 바람 한 점 불지 않고 있었다.
장마가 일찍 시작되면 폭염이 온다더니
장마도 더위도 예년보다 훨씬 빨랐다.
(이젠 서서히 놈들을 추적해야 해... )
미경은 입술을 비틀며 무섭게 결심을
했다.
부천 경찰서에서 석방된 뒤 미경은
일주일을 침대에 누워서 지냈다. 아무 것도
생각하고 싶지 않았고 아무도 만나고 싶지
않았다. 신문과 방송이 대대적으로 보도한
탓에 그녀의 부모와 가족들이 시골에서
올라와 만나기를 간청했으나 미경은 문을
걸어 잠근 채 만나 주지 않았다.
그것은 중원일보 기자들도 마찬가지였다.
중원일보는 미경으로 인해서 실추된
이미지를 회복해야 하겠다고 미경의
인터뷰를 집요하게 요구했으나 미경은
단호하게 거절했다. 아직은 때가 아니었다.
경찰은 천달수를 체포하지 못하고 있었다.
조일신문의 정보원() 확보의 난점
때문이기는 하겠지만 진실보도를 외면하고
있었다. 아니 조일신문은 정보원에게
이용을 당하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조일신문 같은 전국지라면
정보원()에 대한 철저한 취재와
확인이 필요한데도 어찌된 일인지 미경의
사창가 생활,위장취업 부분만 확대하여
보도하고 있을 뿐이었다.
미경은 조일신문에 의해 철저하게
매춘녀로 보도되었을 뿐이었다.
(함정이야... )
미경은 입속으로 몇 번이나 그 말을
되뇌었다. 미행자들은 미경을 지금까지도
계속 미행하고 있었고 양윤석과
홍연숙,그리고 미경의 관계까지 상세하게
파악하고 있었다. 미지의 인물이 홍연숙을
살해한 것은 홍연숙의 살인범으로 미경을
옭아 넣으려는 것이었고 그것이 실패할
경우에도 미경의 사창가 생활과 위장취업
부분을 중원일보와 경쟁관계에 있는
조일신문에 제보함으로써 미경의 부도덕을
부각시켜 최종열의 소설의 신빙성을
떨어트리려는 의도인 것이다.
그러나 사건은 목격자가 나타나므로써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들고 있었다. 경찰은
검은 색 그랜저 승용차를 타고 나타나서
살인을 하고 사라진 안개 속의 인물을 쫑고
있었다.
신문도 안미경이 유력한 용의자라는 식의
추측성 기사에서 탈피하여 50대 용의자가
새로 등장했다고 쓰고 있었다.
날씨는 미경이 부천 경찰서에서 석방된
이후 줄곧 찌는 듯이 더웠다. 저 아래 남쪽
지방이 섭씨 34도라던가 아이들이 물놀이를
하다가 물에 빠져 죽었다는 기사가
심심찮게 신문에 오르내렸다. 미경은 죽은
듯이 침대에 쓰러져 있으면서도 바깥의
동정을 예의주시했다.
그녀의 아파트 주위에는 언제나 수상쩍은
사람들이 진을 치고 있었다. 중원일보
기자에서부터 그녀와 같이 일을 하던
잡지사 동료들,경찰... 그리고 백 주간도
몇 번이나 문 앞을 서성거리다가 돌아갔다.
미경은 아파트 광장을 뚫어질 듯이
쏘아보다가 외출 준비를 하기 시작했다.
팎컷탈출해야 했다. 그러나 아파트
주위에서 감시하고 있는 사람들의 눈을
피하기가 쉽지 않을 것 같았다. 그러나
어떻게 하던지 탈출을 시도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일단 백 주간을 만나는 것이 좋겠지...
)
미경은 백 주간을 이용하기로 했다. 백
주간에게도 여러 가지 미안한 점이 적지
않았다. 그 점도 사과를 하고 양해도
구해야 했다. 미경은 백 주간에게 전화를
걸기로 했다.
"저... 안미경예요. "
잡지사로 전화를 걸자 백 주간은 마침
자리에 있었다.
"아!"
백 주간은 의외라는 듯이 짧은 탄성을
뻘
"한 번 뵙고 싶은데요. "
"그래요. 만납시다. "
백 주간이 반색을 했다.
"전 며칠 동안 잠만 계속 잤거든요.
그래서 고기를 좀 먹으려고 그래요. 같이
하시겠어요?"
"물론이요. "
"제가 성북동 대원각에 예약을 하겠어요.
1시까지 오세요. "
"그래요. 꼭 가겠소. "
"그럼... "
미경은 전화를 끊었다. 이어서 미경은
성북동 대원각에 전화를 걸어 자리를
예약했다. 그리고 아파트를 떠날 준비를
꼼꼼하게 하기 시작했다.
(옷도 좀 준비해야지... )
미경은 전화가 끝나자 작은 숄더백에
간단한 옷 한 벌을 챙겼다. 그리고 그
가방을 다시 007 가방에 넣고 아파트를
나섰다. 경비실 앞에서 사방을 휘둘러보자
미경이 예상했던대로 수상스러운 사람들이
여러 군데서 서성거리고 있었다.
(저들을 떼어 버려야지... )
아직 시간은 많이 남아 있었다. 그녀는
먼저 아파트단지 내의 미장원에서 머리를
숏 커트로 짜르고 가발을 하나 샀다.
가발을 사면서 밖을 살폈으나 미장원까지
살피는 사람은 없었다.
미경은 아파트 단지를 나오자 택시를
잡아 성북동 대원각으로 향했다. 택시
안에서 백미러로 뒤를 살피자 미행하는
차가 두 대나 있었다. 한 대는 중원일보
취재차였고 또 한 대는 경찰차 인 듯했다.
대원각에는 백 주간이 중원일보 사회부
차장과 함께 도착해 있었다. 미경도 안면이
있는 사람이었다.
"어떻게 된 거요?"
백 주간은 식사가 들어오기 전부터
미경에게 자초지종을 캐물으려고 하였다.
"죄송해요. "
미경은 푸른 숲에 둘러싸인 대원각의
바깥 마당을 살피며 대답했다. 한때
요정으로 이름을 날리던 대원각이 이제는
갈비집으로 바뀌어 있었다.
"우선 인사나 나눠요. 이쪽은 중원일보
사회부 차장이요. "
백 주간이 사회부 차장을 미경에게
소개했다.
"신항섭()입니다. "
신 차장이 미경에게 명함 한 장을
내밀었다.
"뵈은 적은 있어요. "
미경은 머리를 숙여 인사를 했다.
"고 김석호 기자와는 입사 동기입니다. "
신 차장의 말에 미경은 가슴이 찌르르
울리는 것을 느꼈다. 갑자기 눈시울이
뜨거워져 오고 있었다.
"안미경씨가 김석호 기자의 부인이라는
것이 사실이오?"
"네. "
"김석호 기자는 총명한 기자였는데
부인되는 사람이 어떻게 하다가 그런
생활까지 하였소?"
"피치 못할 사정이 있었어요. "
미경은 고개를 떨구고 대답했다.
그때 웨이터가 다가와서 음식을 주문해
갔다. 미경은 잠시 밖을 내다보다가 담배를
물었다. 백 주간이 멀뚱히 쳐다보다가
라이터로 불을 붙여 주었다.
"우리 입장이 여간 난처한 것이 아니오.
"
"이건 함정예요. "
"우리도 그렇게 생각은 하고 있소.
그래서 최종열의 소설은 계속 연재하기로
했소. "
"...... "
"허나 어떻게 되었던지 안미경씨의 일은
밝혀야 할 입장이오. 독자들의 전화가
빗발치고 있소. "
백 주간이 딱딱한 얼굴로 말했다.
"몇 가지 약속을 해주시면 밝히겠어요. "
"무슨 약속이요?"
"첫째는 제가 허락할 때까지 제 얘기를
보도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해주세요. 지금
링돋하면 중요한 단서를 잡을 수가 없는
일이 있어서 그래요. "
"중요한 단서라니?"
"전 제 손으로 저를 사창가에 떨어뜨린
자를 잡을 거예요. 제가 그 자를 잡을
때까지만 오프 더 레코드(보도하지 않는)로
해주세요. 그 자는 분명히
강한섭,최종열,그리고 제 남편의 의문사
사건과 밀접한 관련이 있을 거예요. "
"그럼 김석호 기자도 의문의 죽음을
당했다는 말이오?"
"네. "
"그 일을 왜 손수 하려는 거요?"
"경찰은 할 수 없어요!"
미경은 단호하게 말했다.
"두 번째는 뭐요?"
"저를 탈출시켜 주세요. "
"탈출?"
"지금도 저를 감시하는 사람들이 있어요.
"
백 주간과 신 차장이 재빨리 주위를
살피는 시늉을 했다. 미경은 입꼬리에 엷은
미소를 매달았다. 미행자들이 그 정도로
허술하게 감시하지 않으리라는
생각에서였다.
"좋아요. "
백 주간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신 차장님도 약속할 수 있어요?"
"예. 약속합니다. "
신 차장도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럼 점심을 먹고 얘기를 해요. 얘기가
기니까요... "
미경이 음식 쟁반을 가지고 들어오는
여종업원을 보며 말했다. 백 주간과 신
다시 고개를 끄덕거렸고 미경은
청하도 두 병 주문했다. 대원각은 한때
요정으로 명성을 날린 집답게 갈비는
정갈하고 맛이 좋았다. 세 사람은 청하를
곁들여 갈비와 냉면을 먹은 뒤 골짜기로
걸어 올라갔다. 대원각은 골짜기 하나가
모두 갈비집이어서 시원한 그늘이 있는
바위도 있었고 정자도 있었다.
미경은 정자에 앉아서 백 주간과 신
차장에게 자신이 겪은 얘기를 차분하게
털어놓기 시작했다. 그녀는 남편 김석호가
집에 돌아오지 않던 밤부터 얘기했다.
처음엔 남편의 죽음이 단순한 교통사고로
생각했다가 뺑소니 기사를 찾기 시작하자
협박 전화가 오기 시작했고 중원일보의
도움으로 뺑소니 기사에 대한 특집기사가
나간지 얼마 안되어 경찰을 가장한
정체불명의 사내들에게 납치 당하여 윤간을
당하고 부산 완월동으로 팔려간 일을
입술을 깨물며 얘기했다.
미경이 얘기하는 동안 백 주간은 몇
번이나 신음을 삼켰고 신 차장은 계속해서
취재수첩에 기록했다.
"여기까지 일단 정리를 하지요. "
신 차장이 침통한 얼굴로 미경을
쳐다보았다. 미경은 손수건으로 눈물을
닦으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러니까 안미경씨의 얘기는 자신을
납치한 사람들이 인신매매단이 아니라
정체불명의 사나이들이라는 말씀이
아닙니까?"
"네. "
"그럴 만한 증거가 있습니까?"
"증거는 없어요. "
"그럼 어떻게 인신매매단이 아니라고
확신을 할 수 있지요?"
"그들은 나를 사창가에 팔아 버린 뒤에도
계속 감시를 했어요. "
"감시했다는 증거는 있습니까?"
"제 증언 뿐예요. "
미경은 눈을 지그시 감았다. 신 차장은
잠시 난감한 표정을 짓고 있다가 백 주간을
쳐다보았다.
"그래서 증거를 찾기 위해 오프 더
레코드로 해달라는 거예요. "
미경이 눈을 뜨고 말했다.
"좋습니다. 계속하시죠. "
미경은 다시 사창가 생활에서부터
성형수술을 하기까지의 얘기를 모두 했다.
그리고 최종열의 소설을 입수하게 된
경위와 그 소설을 입수하면서 정체불명의
미행자가 다시 따라붙기 시작했다는 얘기도
했다.
"그럼 안미경씨를 미행하는 자들이
최종열씨의 소설이 발표되는 것을
두려워했다는 말씀이군요?"
"네. "
미경이 신 차장에게 자신이 겪은 얘기를
모두 끝냈을 때는 이미 길고 긴 여름 해도
서쪽으로 뉘엿뉘엿 기울고 있었다.
"이 정도면 조일신문 기사를 반박할 만한
증거는 충분합니다. 아무튼 안미경씨와
약속을 했으니 한 달 정도 기다리겠습니다.
그 동안 중요한 증거를 찾아내시기
바랍니다. "
신 차장이 취재수첩을 덮으며 말했다.
"그럼 이제 안미경씨의 탈출이 남았군...
"
백 주간이 일부러 명랑한 표정을 꾸미며
말했다. 미경도 쾌활하게 웃었다.
"방법을 생각해 놓은 것이 있소?"
"네. "
"어떤 방법이오?"
"일단 대학로에 가서 연극 관람을 해요.
"
"연극이요?"
"전 연극을 보는 척하면서 옷을 갈아
입고 나오겠어요. 연극이 끝날 때 두 분은
맨 끝에 나오세요. 전 젊은이들 틈에 끼어
먼저 나갈께요. "
"그건 그다지 어려운 일이 아닌데... "
"감시자들이 그렇게 호락호락할까요?"
"한 번 해보는 거죠 뭐... "
미경은 야무지게 대답했다. 그들은 곧장
신문사 차를 타고 대학로 갔다. 연극이
대부분 7시30분에 시작되기 때문에 시간이
많지 않았던 것이다. 다행히 대학로에는
젊은이들에게 한창 인기를 끌고 있는
'파리의 정사'라는 프랑스 연극이 공연되고
있었다.
미경은 표를 끊어 백 주간과 신 차장과
함께 나란히 소극장 안으로 젊은이들을
따라 들어갔다. 그리고 극장에 들어가자
마자 화장실로 들어가 007 가방에서
솔터백을 꺼내 옷을 갈아 입고 가발을
뒤집어썼다. 옷은 허벅지가 드러난 검은 색
반바지와 탱크톱이라는 검은 색
배꼽티,그리고 허리까지 내려오는 베이지
색의 자켓이었다. 가발 위에는 요즈음
젊은이들처럼 챙이 달린 흰 모자를 쓰고
등에는 솔터백을 맸다.
세대로의 완벽한 변장이었다.
미경은 화장실에서 나오면서 주위를
세밀하게 살폈다. 다행히 감시자들은 극장
안에까지는 따라 들어오지 않은
모양이었다.
미경은 안심하고 극장에 들어가 연극을
관람했다.
연극이 끝난 것은 8시40분이었다.
미경은 연극이 끝나자 마자 출구로
우르르 쏟아져 나가는 젊은이들 뒤에 바짝
붙어 섰다. 고개는 약간 떨구고 재잘대며
나가는 여자들 패에 섞였다. 그때 한
여자가 의아한 듯이 미경을 쳐다보았다.
미경은 도리없이 그들에게서 떨어졌다.
그들이 미경을 자꾸 힐끔거리면 감시자들이
미경을 의심할 것이 분명했다.
그때 미경의 눈에 혼자 나오는 스물 두
세살 되어 보이는 청년이 보였다. 미경은
그에게 다가가서 팔짱을 끼었다.
"미안해요. "
미경은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 청년이
깜짝 놀라서 미경의 팔을 뿌리치려고 했다.
"좀 도와 줘요. "
미경은 청년의 팔을 놓치 않았다.
"왜 이래요?"
청년이 항의를 했다.
"가면서 설명할께요. "
"무슨 일예요?"
"대학로를 빠져 나갈 때까지만 애인인 척
해주세요. "
"왜요?"
"급하니까 사정은 묻지 말고... 가면서
얘기해요. "
미경은 청년의 팔짱을 끼고 계단을
오르기 시작했다. 청년은 마지못한 듯
미경에게 팔을 맡긴 채 엉거주춤 따라
나오고 있었다. 미경은 극장 앞으로 나오자
청년에게 더욱 바짝 달라붙었다.
"어디로 가요?"
청년이 얼굴을 찡그리며 물었다.
"먹자 골목으로 가요. "
미경은 청년을 명륜동쪽으로 끌었다.
청년이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거기서 약속이 있는데... "
"애인?"
"친구 놈들이요. "
"난 또 애인인 줄 알았지. "
미경이 소리를 내어 웃었다. 청년도
웃었다.
날은 이미 캄캄해져 있었으나 대학로에는
젊은이들이 잔뜩 몰려 나와 서로 어깨를
부딪치며 지나가야 했다. 미경에게는
오히려 다행인 셈이었다.
미경은 결코 뒤를 돌아보지 않고 계속
걸었다. 청년과 셈에 없는 얘기를 주고
받기는 했으나 주위의 동정을 세밀하게
살폈고 지하철 혜화역 앞에서 먹자
골목으로 건너 간 뒤에야 청년과 헤어져
젊은이들의 물결 속에 휩쓸렸다.
미행자들은 그림자도 보이지 않고
있었다.
3
민 형사는 젊은이들이 썰물처럼 빠져
나간 극장 앞에서 고개를 설래설래
흔들었다. 연극을 보러 극장에 들어간
안미경이 감쪽 같이 사라진 것이다. 어느
정도 예상하고 있던 일이었으나 민 형사는
=낭패감이 들기보다는 제법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어떻게 하지요?"
김 형사가 민 형사 앞으로 다가오며
물었다. 민 형사는 담배를 꺼내 물며
대학로에 물결처럼 흐르는 청소년들을
물끄러미 응시했다. 서울의 청소년들이
모두 대학로로 쏟아져 나온 것이 아닌가
싶을 정도로 대학로는 생기발랄한
청소년들이 쌍쌍이 오가고 있었다.
"저 놈이나 놓치지 말아. "
민 형사는 극장 앞에서 주위를
두리번거리고 있는 30대 초반의 사내를
쏘아보며 말했다. 그는 안미경이 석방되어
아파트로 돌아왔을 때 줄곧 안미경을
감시하고 있던 사내였다. 오늘 아침
안미경이 마침내 외출을 하자 미장원으로
해서 성북동 대원각까지 쫑아가며 미행하던
사내였다. 위에는 검은 색 티샤쓰를 입고
밑에는 검은 색 바지를 입고 있었다.
머리가 짧고 근육이 단단해 보이는 것으로
미루어 조직 폭력배의 행동대원 같기도
했다.
"저 놈도 당황한 기색인데요. "
"저 놈이라고 별 수 있겠어?"
"도대체 뭘하는 놈일까요?"
"모르지... "
"극장이 문 닫기 전에 들어가 볼까요?"
"그래 저 놈에게 눈치 채이지 않도록
조심해서 들어가 봐. "
"예. "
김 형사가 고개를 꾸벅하고 극장으로
들어갔다. 민 형사는 김 형사가 극장으로
들어가는 것을 확인한 뒤에 미행자에게
눈길을 주었다. 미행자는 무엇인가 결정을
내리지 못하여 망설이다가 공중전화 박스로
들어갔다.
"극장엔 없지?"
그때 김 형사가 극장에서 나왔다.
"예. 극장엔 단원들밖에 없습니다.
화장실에 안미경이 입고 있던 옷과 가방이
있었습니다. "
김 형사가 가방을 흔들어 보였다.
"저 치 눈에 띄지 않게 차에 넣어. "
"예. "
김 형사가 차로 걸어갈 때 백 주간과 신
차장을 미행했던 한 형사가 돌아왔다.
"어떻게 되었어?"
"두 사람 모두 집으로 들어갔어요. "
"집이 가까운 모양이지?"
"두 사람 다 돈암동에 있는 장미
아파트에 살고 있대요. "
"유 형사가 잠복하고 있나?"
"네. 돈암동 파출소에서 한 사람 지원
받는댔어요. "
"잘했군. "
민 형사는 고개를 끄덕거렸다. 민 형사가
안미경을 미행하고 있는 것은 안미경에게
살인 혐의가 있어서가 아니라 안미경의
뒤를 추적하다보면 베일에 싸인 살인자가
모습을 드러낼 것이라는 확신 때문이었다.
"박() 형사로부터는 연락이 없었어?"
박 형사는 수원에서 박태호를 감시하고
있었다. 안미경의 아파트를 수색했을 때
박태호의 수첩과 나체 사진이 한 무더기
나왔는데 민 형사는 그것을 압수하지 않고
그대로 두었었다. 마치 그것들을 발견하지
못한 것처럼 하여 안미경이 안심하고
쪘접선할 수 있도록 했던 것이다.
"예. "
"안미경이 어디로 갔을까?"
"제3의 인물을 찾아갔겠지요. "
"안미경은 과연 제3의 인물을 알고
있을까?"
"뭔가 단서는 갖고 있겠지요. "
그때 검은 옷을 입은 사내가 공중전화
박스에서 나와 차로 걸어가는 것이 보였다.
"차로 가는데요. "
"우리도 타지. 한 형사는 그만
돌아가고... "
한 형사는 어머니의 생신이라고 일찍
퇴근하겠다고 했었다.
"내일 뵙겠습니다. "
한 형사가 머리를 꾸벅했다.
"우린 타자구. "
"예. "
민 형사와 김 형사는 재빨리 대학로
노변에 세워 둔 회색 엑셀에 올라탔다.
검은 옷을 입은 사내의 차는 검은 색
엘란트라였다. 새 차는 아니었으나
깨끗했다.
"어디로 가는 거죠?"
김 형사가 핸들을 잡고 엘란트라를
응시했다. 시동을 건 엘란트라가 혜화동
로타리를 향해 가고 있었다.
"차량 넘버를 확인해 봐야겠어. "
민 형사는 차내 무선기로 서울 시경
상황실로 전통을 때렸다.
"상황실. 여기는 부천 경찰서 강력계
팀이오. 차량 넘버 하나 확인해 주시오. "
"차량번호가 어떻게 됩니까?"
시경 상황실에서는 맑고 깨끗한 목소리의
,여경이 응답을 해왔다.
"서울 사 1에 36번이요. "
"잠깐만 기다리십시오. "
민 형사는 엘란트라가 혜화동 로타리에서
돈암동쪽으로 꺾는 것을 보았다. 김 형사도
재빨리 엘란트라 뒤를 쫑아 핸들을 꺾었다.
그때 상황실에서 응답이 왔다.
"차량번호 사 1에 57번 소유주
김종근()입니다. 본적 전라남도
구례. 나이 45세... "
"혹시 수배된 차 아니요?"
민 형사는 차량 소유주와 운전자의
나이가 다른 것을 보고 도난 차량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퍼뜻 뇌리를 스쳤다.
"아닙니다. 렌트카 회사 소유입니다. "
"그럼 소유주는 렌트카 회사요?"
"네. "
"렌트카 회사의 주소는 어디요?"
"한남동 143번지 서일 렌트카입니다. "
"서일?"
"네. "
"알겠소. 고맙소. "
"수고하세요. "
엘란트라는 어느덧 삼선교에서 우회전을
하여 아리랑 고개로 넘어가고 있었다. 김
형사는 엘란트라와 멀찌기 떨어져
따라갔다. 길가의 프라다너스가 무성하여
아리랑 고개는 마치 숲길을 달리고 있는
듯이 시원했다.
"서일 렌트카랍니까?"
"응. "
"서일 렌트카에 확인을 해야겠군요. "
"그래야지. "
민 형사는 담배를 꺼내 물었다. 시장기가
,돌고 있었다. 시간은 이미 밤 9시가 지나
있었다. 엘란트라는 보문동 길을 달리다가
다시 우회전을 하여 골목으로 들어갔다.
"집으로 가는 건가?"
그러나 엘란트라가 멎은 곳은 중국집
앞이었다.
"저녁을 먹는 모양이군. "
"우리도 저녁을 해야 하지 않습니까?"
"빵으로 때우지. "
민 형사는 차에서 내려 빵과 우유를
사가지고 돌아왔다. 엘란트라의 사내는
30분쯤 중국집에 들어가 있다가 나와서
장안동으로 차를 끌고 갔다.
"술집으로 들어가네. "
김 형사가 어이없는 듯이 낭패한 표정을
지었다. 엘란트라의 사내가 술집에
들어갔다면 언제 나올지 알 수 없기
?때문이었다. 용의자를 미행할 때 가장
난처한 것이 용의자들이 술집에 들어갈
때와 여관에 투숙할 때였다. 용의자가
술집에 들어가면 미행하는 경찰은 꼼짝없이
기다려야 했고 여관에 투숙하면 여관
앞에서 꼬박 날을 세워야 하는 것이다.
"일을 끝냈으니 술을 퍼 마시겠지. "
민 형사는 무표정하게 대꾸했다. 어차피
각오하고 있던 일이었다.
"여자들이 있는 술집 같지요?"
김 형사가 술집 앞에 바짝 차를 세우고
말했다.
"응. "
민 형사는 차창으로 술집을 살피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술집은 네온싸인이
화려했고 나비 넥타이를 맨 젊은 사내가
현관 앞에서 손님들을 호객하고 있었다.
민 형사는 눈을 감았다.
엘란트라의 사내가 술을 마시고 나오려면
적지 않은 시간이 필요할 것이었다.
(안미경의 말대로 제3의 인물이 있는
것이 틀림없어... )
민 형사는 속으로 그렇게 생각했다.
홍연숙을 살해한 것은 단순하게 치정에
얽힌 살인사건이 아니었다.
경찰 상부에서는 사건을 빨리
매듭지으라고 성화를 부리고 있었다.
천달수가 대공분실에 있을 때 저지른
일들이 현 정부와는 아무런 관계가
없었으나 의문사를 밝히지 못하는 무능한
정부라는 비판이 일고 있었다.
5공 정권하에서 권세를 누리던 세력들이
경찰을 보는 눈도 곱지 않았다. 그들은
경찰이 의도적으로 5공 세력들을
도태시키려 한다고 불만을 갖고 있었다.
최종열의 소설에 대한 군부나 경찰의
반발도 만만치 않았다. 군부는 최종열의
소설이 지나치게 군부를 매도하고 있으며
그의 소설로 군부의 위신이 땅에
떨어졌다고 항의하고 있었다.
정치에 참여한 군인은 소수이고 권력의
하수인이 된 군인도 일부인데 군 전체를
매도하면 군이 어떻게 목숨을 걸고 나라를
지키느냐고 불만을 토로하고 있었다.
옳은 말이었다.
5공이 무너지고 6공이 탄생하면서 평생을
군에서 보내려고 군문()에 몸을 담은
직업군인들은 자신들의 위치에 대한 깊은
회의에 빠져 있었다. 특히 문민정부가
들어서 군의 개혁이 이루어지고 정치색을
띤 고위 장성들과 부패 혐의를 받고 있는
볕대거 예편되거나 구속되자 군부의
불만은 절정에 이르렀던 것이다.
경찰도 마찬가지였다.
경찰은 과거 독재정권 밑에서 권력의
하수인 노릇을 했었다. 그러나 그것은
최근에 와서의 평가이지 그때는 그것이
애국이었고 나라를 위한 유일한 길이었다.
민주화 시위를 하는 대학생들을 쇠파이프로
두들겨 패고,인간답게 살겠다고 주장하는
어린 여공들에게 최루탄을 쏘고 그들을
닥치는대로 두들겨 패서 구속한 것은 모두
나라를 위해서 한 일이었다.
그들은 그렇게 알았고 그렇게 확신했다.
경찰이 한 일도 모두 그런 일이었다.
경찰은 체재에 도전하는 세력들을 뿌리뽑기
위해 자신들에게 주어진 임무에 충실했다.
그 무렵 경찰의 최대 임무는 체재에
도전하는 세력을 뿌리뽑는 것이었고 일선
경찰서의 대공 담당자들은 정보부와 함께
그 전위 역할을 했다.
경찰은 악명을 얻게 되었다.
체재에 도전하는 세력이 아니더라도
경찰에 끌려가면 인간 이하의 취급을
당했다. 특히 대공분실은 본연의 임무보다
오히려 시국사범을 퇴치하는데 전력을
기울였다. 시국사범을 많이 구속해야
진급도 할 수 있는 세월이었다.
그것은 제3공화국이 무너지고
제5공화국이 들어섰을 때도 변하지 않았다.
오히려 제3공화국 때보다 제5공화국 때가
대공분실이 전성기를 이루었다.
그러나 시대가 달라지자 그들은 하루
아침에 고문 경관으로 전락하고 말았던
것이다. 경찰의 권위는 땅에 떨어졌고 민주
경찰이라는 말이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기
시작했다.
이제 경찰은 새로 태어나기 위해
몸부림을 치고 있었다. 과거에 시민들 위에
군림하던 경찰의 모습을 국민의 뇌리
속에서 지우고 새로운 시대에 걸맞는
경찰상을 확립하려고 절치부심하고 있었다.
그러한 와중에 터진 최종열의 소설
사건이 경찰로서도 달가울 리 없는 것이다.
가능하면 빨리 매듭이 지어져 국민들의
뇌리 속에서 사라지게 해야 했다.
"자식 이제 나오네. "
엘란트라의 사내가 술집에서 나온 것은
두 시간쯤 지났을 때였다. 김 형사가 길게
하품을 하며 차의 시동을 걸었다. 민
형사는 그때서야 눈을 뜨고 술집 앞을
살폈다. 엘란트라의 사내가 젊은 여자의
어깨를 안고 엘란트라로 걸어오고 있었다.
"저건 뭐야?"
민 형사는 여자를 눈짓으로 가리키며
얼굴을 찡그렸다. 거리엔 술에 취해
비틀거리는 사람들이 많아져 있었다.
"술집 여자죠 뭐... "
김 형사가 혀를 찼다.
"애인인가?"
"그런 모양입니다. "
사내가 여자를 엘란트라에 태웠다.
여자는 20대 초반이었다. 흰 색 원피스에
키가 늘씬하게 큰 여자였다.
엘란트라가 시동을 걸고 출발하기
시작했다. 김 형사도 엑셀 승용차를
출발시켰다.
엘란트라는 배봉로타리에서 우회전을
하여 면목동쪽으로 꺾었다. 신호등에 빨간
불이 들어와 있었으나 그대로 달려서
건너고 있었다.
"저런 개새끼... "
욕설을 내뱉으며 김 형사도 신호를
무시하고 우회전을 했다. 차들이
빵빵거리고 크락쑤을 눌러댔으나 엘란트라
뒤로 바짝 붙었다.
엘란트라는 우회전을 하자 3분도 가지
않고 멎었다. 2급 호텔 앞이었다. 간판을
쳐다보자 '임페리얼'호텔이었다.
"겨우 여기까지 오려고 신호등을
무시하나?나쁜 새끼... !"
김 형사가 브레이크를 밟으며
투덜거렸다. 민 형사는 엘란트라에서 내려
임페리얼 호텔로 나란히 들어가는 남자와
여자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응시했다.
4
날씨는 잿빛으로 잔뜩 흐려 있었다.
그러나 후덥지근하기 짝이 없는 날씨였다.
아침부터 숨이 턱턱 막히는 날씨가
계속되어 가만히 있어도 겨드랑이로 땀이
주르르 흘러 내렸다. 습도가 높아
불쾌지수가 80이 넘는데도 바람 한 점 불지
않고 있었다. 하늘은 낮게 내려앉아
있었다.
(비나 한바탕 오지... )
미경은 이마에 송글송글 맺혀 있는
땀방울을 손등으로 훔치고 대영공업사를
물끄러미 응시했다. 대영공업사는 사람들이
바쁘게 일하고 있었다. 여름이라 문들을
활짝 열어 놓은 채 남자들이 재단대에서
원단을 자르고 있었다.
미경은 대영공업사 앞으로 걸어갔다.
주인인 듯한 젊은 사내는 문 앞에서 원단을
정리하고 있었다. 미경은 그 사내 앞으로
가까이 갔다.
"또 오셨군요?"
인기척을 느낀 사내가 고개를 들고
미경을 쳐다보았다. 사내의 얼굴에
노골적으로 불쾌해 하는 표정이 드러나
있었다. 미경은 벌써 며칠째 대영공업사를
찾아 왔었으나 사내가 냉랭하게 거절했던
것이다.
"잠시 시간을 좀 내주세요. "
미경은 조용히 대꾸했다.
"제가 누군지 아시잖아요?"
"전 그런 사람들 모른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정 그렇게 나오면 신문기자들에게
.알리겠어요. "
미경은 차갑게 내뱉았다. 최종열이 한때
이 집과 연관을 맺고 있었다면 경찰도
조사를 할 것이고 신문기자들도 벌떼처럼
몰려올 것이었다.
"거 참... "
사내가 입맛을 다셨다. 일하는 사람들이
이상한 일이라는 듯이 미경을 힐끔거리며
살피고 있었다. 사내는 동료들의 시선을
부담스러워하고 있었다. 미경은 빠르게 그
사실을 눈치 채고 차갑게 내쏘았다.
"이 앞에 있는 다방에서 기다리겠어요.
나오던지 말던지 알아서 하세요"
"좋소. "
사내가 고개를 끄덕거렸다. 미경은
사내보다 먼저 대영공업사를 나와 다방으로
걸어갔다. 사내는 20분쯤 지나서야
나타났다. 그러나 사내는 어떤 여자와
동행이었고 여자에게 미경을 가르쳐 준 뒤
바로 돌아가 버렸다. 미경이 의아해 하고
있을 때 여자가 나직하게 입을 열었다.
"최종열씨에 대해서는 제가 잘 알아요. "
여자는 34,5세로 보였다. 얼굴이
조그맣고 기미가 있었다. 지극히 평범한
가정주부의 얼굴이었다.
"최종열씨와 어떻게 되는 사이인데요?"
"그보다 비밀을 지킨다고 약속해 주세요.
"
여자는 최종열에 대한 얘기를 하는 것을
몹시 난처해하고 있었다.
"약속하죠. "
"전 최종열씨의 여자였어요. 이름은
이은순()이고요. "
"...... "
( "아까 그 분이 저희 오빠인데 어느 날
최종열씨가 재단사 보조로 들어왔어요.
오빠는 재단사 보조 일을 할 사람이 아닌
것 같다고 했지만 사람이 딸릴 때여서
최종열씨를 일꾼으로 쓰게 되었어요. 전
그때 오빠 공장에서 미싱사로 일을 하고
있었고... "
미경은 고개를 끄덕거렸다. 최종열이
대영공업사에서 일을 하게 된 것은
신문사에서 해직된 이후 수배를 받고
있었을 때인 것 같았다. 그는 수배를
피하기 위해 대영공업사에서 위장 취업을
했던 것이고 거기서 미싱사인 이은순을
만난 것이다.
"우리는 최종열씨가 해직기자라는 것을
전혀 몰랐어요. "
"...... "
, "일이 끝나면 술도 같이 마시고 쉬는
날은 영화구경도 같이 가고 그랬죠. "
이은순의 얼굴은 어느덧 아득한 회상에
잠겨 들고 있었다. 미경은 이은순의 얼굴을
쳐다보며 이은순이 최종열을
사랑했구나,하는 생각을 했다.
"같이 살았어요?"
"네. 3년쯤... "
"그런데 왜 헤어지게 되었죠?"
"그는 술을 무척 좋아했어요. 술만
마시면 아무 여자하고나 잠을 자고... "
이은순이 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미경은 얼굴을 찡그렸다. 최종열은
강한섭과 한경호 두 가족의 삶을 다룬
소설을 쓰기는 했어도 여자 문제는
복잡하기 짝이 없었다.
"그래서 헤어지게 되었나요?"
"아녜요. "
"그럼?"
"최종열씨가 갑자기 사라졌어요. "
"사라져요?"
미경은 어리둥절했다.
"나중에 알게 되었지만 목포에 내려가
있었어요. "
"그래서요?"
"제가 물어물어 찾아갔더니... 어떤
여자와 같이 살고 있었어요. "
여자가 갑자기 고개를 떨구더니 어깨를
들먹이며 울기 시작했다. 미경은 손수건을
꺼내어 여자에게 건네주었다.
"최종열씨가 배신했군요!"
"저도 그때는 그렇게 생각했어요. 그런데
그게 아니었어요. 그 분은 저를 위해서
저와 헤어지기로 한 거예요... "
"무슨 뜻이죠?"
"그 분이 말했어요. 나하고 같이 살면
은순이 너까지 생명이 위험해 질
것이라고... "
"...... "
"이제는 더 이상 시간을 기다릴 수 없어
소설을 발표해야 하는데 그렇게 되면 나를
아는 사람들이 위험에 처해 진다는
것이었어요. "
"...... "
"전 그 분 말을 믿지 않았어요. 그리고
더러운 배신자라고 욕을 하고 올라와서
홧김에 지금의 남편과 결혼했어요. 그런데
얼마 전에 그 분이 화성에서 죽었다는
신문기사를 보고 그 분이 저를 진심으로
사랑했다는 것을 알았어요. "
이은순이 고개를 들었다. 미경은 그녀의
두 눈에 눈물이 가득 괸 것을 보고 가슴이
묵직하게 저려 왔다.
"김석호라고 중원일보 기자를 아세요?"
"네. "
"어떻게 아시죠?"
"제가 최종열씨와 살고 있을 때 자주
찾아와 최종열씨와 술을 마시곤 했어요.
김석호 기자님은 최종열씨에게 소설을
발표하라고 요구하고 있었고 최종열씨는
때가 아니라고 반대를 하곤 했지요. "
"최종열씨가 목포로 내려간 것이
언제죠?"
"김석호 기자가 죽은 뒤의 일예요. "
"...... "
"그 분은 김석호 기자의 죽음에 상당히
충격을 받았던 것 같아요. 매일 같이 잠을
이루지 못하고 뒤척거리다가 술을 퍼
마시곤 했지요. 나중엔 폐인처럼 되다시피
했지만... 정신은 맑았어요... 술에 절어
살면서도 눈을 부릅뜨고 어떻게 하던지
소설만은 발표하겠다고 했어요. "
이은순이 입술을 깨물었다. 그녀의
어깨가 또다시 들먹거려지고 있었다.
"소설 말고 다른 것은 없었나요?"
"수첩이 있었어요. "
"어떤 수첩이죠?"
"신문사 수첩예요. "
"지금도 가지고 있나요?"
"네. "
이은순이 핸드백에서 조그만 수첩을
꺼냈다.
"오빠가 그런 놈은 다시는 만나지
말라면서 옷가지와 소지품을 모두 불에
태우는 것을 제가 몰래 숨겨 두었었어요. "
이은순의 말이었다. 그것은 중원일보에서
기자들 포켓수첩으로 제작한 것이었다.
미경이 이은순에게 수첩을 받아서 펼치자
깨알 같은 글씨들이 빽빽하게 적혀 있었다.
"이것을 제게 주시겠어요?"
"이걸 뭣에 쓰시게요?"
"이건 중요한 증거가 될거예요. "
"저로서는 필요가 없는 것이기는
하지만... "
이은순이 망설이는 표정을 지었다.
최종열의 손때가 묻은 것을 선뜻 내놓기가
곤란한 모양이었다.
"최종열씨도 제가 갖기를 바랄 꺼예요. "
"할 수 없죠. "
이은순이 마지못한 듯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리고... 이런 이야기 저희 남편이
알면 안돼요. 남편은 성격이 불같아요. "
"염려 마세요. "
미경은 미소를 지었다.
미경이 이은순과 헤어져 밖으로 나오자
사방이 어둠컴컴해져 있었다. 미경은 다방
앞에서 잠시 하늘을 쳐다보았다. 하늘에
먹구름이 새카맣게 몰려오고 길가의
가로수들이 검푸른 빛으로 나부끼고
있었다.
(비가 오려는 거야... )
미경은 하늘을 쳐다보며 낮게
중얼거렸다.
미경은 택시를 타고 장충동에 있는
여관으로 향했다. 일주일 전 대학로에서
연극을 구경하는 체하며 미행자들을
따돌리고 대학로를 빠져 나온 미경은
장충동에 있는 여관에 투숙했었다. 남산의
울창한 숲이 내다보이는 여관이었다.
미경은 여관으로 돌아오자 샤워부터
했다. 날씨가 후덥지근하여 온 몸이 땀으로
후줄근하게 젖어 있었다. 샤워를 마친
미경은 후론트에 전화를 걸어 중국 음식을
시키고 침대에 앉아서 최종열의 수첩을
읽기 시작했다.
(천달수 이 자가 범인이었어... )
미경은 최종열의 수첩을 읽으면서 몇
번이나 입술을 깨물고 주먹을 움켜쥐었다.
최종열의 수첩엔 강한섭의 의문사와 그의
부인 채은숙의 윤간과 실성,그리고 그
사건을 조사하던 남편 김석호의 교통사고를
가장한 살인까지 낱낱이 적혀 있었다.
최종열은 수 년에 걸쳐 죽음의 위험을
무릅쓰고 그 사실을 추적했고 마침내 그
이야기를 소설로 쓰게 되었던 것이다.
(박태호에게 이 자를 추적하게 해야지...
)
미경은 최종열의 수첩을 읽다가 말고
수원의 박태호에게로 전화를 걸었다.
그리고 박태호에게 천달수를 추적하라고
지시했다.
박태호는 마침 여관에 있었다. 그는
미경이 느닷없이 천달수를 추적하라는
미경의 지시에 어리둥절했으나 곧 바로
서울로 상경하여 조사에 착수하겠다고
말했다.
창밖에는 그때서야 쏴아 소리를 내며
비가 내리기 시작하고 있었다.
5
이동일()은 여관의 창가에 서서
빗발이 하얗게 쏟아지고 있는 거리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닷새째 계속되는
장마비였다. 캄캄한 먹구름으로 덮인
하늘이 잠시 멀끔하게 개는가 싶으면 금세
먹구름이 밀려오고 세찬 빗줄기가 장대질을
하곤 하였다. 이제는 여관의 침대까지
눅눅하게 젖어 있는 기분이었다.
(오늘은 기어이 천달수에게 돈을 받아야
해... )
이동일은 빗줄기 때문에 어둠컴컴한
거리를 우두커니 내려다보며 다시 골똘히
생각에 잠겼다. 벌써 몇 번째 천달수를
만나려고 시도를 했으나 천달수가 돈을
마련하지 못했다는 핑계로 회피하고
있었다. 그러나 마냥 천달수의 핑계를
들어주고 있을 수는 없는 일이었다. 이제는
결판을 내야 했다. 경찰이 그의 뒤를
미행하고 있는 것을 보면 무엇인가 냄새를
맡은 것이 분명했다.
(그 날도 경찰에게 꼬리를 잡힐
뻔했어... )
이동일은 며칠 전 안미경을 미행하다가
대학로에서 놓친 뒤 오히려 경찰의 미행을
받았던 일을 생각하고 등줄기가 서늘해져
왔다. 그날 장안동의 여관에 처음 만난
술집 계집애를 하나 끌고 들어가서 자는
체하고 경찰을 따돌리지 않았다면 지금쯤은
꼼짝없이 유치장 신세를 지고 있을 터였다.
이동일은 무겁게 한숨을 내쉬었다.
엎드려서 만화책을 뒤적거리고 있던
조성자()는 어느 새 잠이 들었는지
가늘게 코를 까지 골고 있었다. 조성자는
이동일이 자주 다니는 천호동 술집에서
데리고 나온 여자였다. 천달수를 만나기
위해 여관에서 빈둥거리는 것이 따분하여
조성자를 불러냈던 것이다. 일주일째
여관에서 같이 뒹굴고 있었다.
조성자는 입을 반쯤 벌린 채 자고
있었다. 숨을 쉴 때마다 복부가 위 아래로
고르게 오르내리고 있었다. 얼굴은
커텐빛이 반사되어 붉은 기운이 돌고
있었다. 화장을 하지 않은 얼굴이었다.
몸은 전체적으로 균형이 잡혀 있었고
통통했다. 유흥가를 전전한 지 얼마나
되었는지 알 수 없으나 균형 잡힌 몸에는
아직도 팽팽한 탄력이 넘치고 있었다. 특히
팬지 보라색의 메리야쓰 위로 봉긋하게
솟아 있는 두 개의 젖무덤은 탐스럽기까지
했다.
이동일은 침대에 걸터앉으며 조성자의
메리야쓰 위로 손을 가져갔다. 밍밍하고
뭉클한 살 덩어리가 손바닥 하나 가득
들어왔다.
(그 계집도 이랬어... )
이동일은 문득 안미경을 생각했다. 그
여자의 남편 김석호를 교통사고를 위장해
죽이고 그 여자를 김포에서 납치하여
윤간하고 부산의 사창가에 팔아 넘기던
일이 어제 일처럼 선명하게 떠올라왔다.
(더럽게도 질긴 인연이야... )
이동일은 안미경을 생각하자 얼굴을
찡그렸다. 일은 점점 더럽게 꼬여 가고
있었다. 이제는 어떻게 손을 쓸 수 없을
만치 멋대로 굴러가 천달수도 안절부절하고
있는 기색이었다.
이동일이 천달수를 처음 만난 것은
천달수가 파출소에 근무하고 있을 때였다.
이동일은 그때 천달수 관내의 유흥업소에
활동하는 폭력배 똘마니였다. 그는 폭력배
똘마니를 하면서도 잡혀가지 않기 위해
천달수를 깍듯이 형님으로 모시면서 정보원
노릇까지 했고 천달수는 그런 이동일의
뒤를 봐주었다. 그러다가 천달수가
대공분실로 옮기게 되었고,중원일보 기자
강한섭이 죽었을 때 그 뒷처리를 맡아
달라는 부탁을 받게 되었다.
이동일은 천달수의 부탁을 쾌히
응낙했다. 강한섭의 시체를 대공분실
뒷문에서 인계 받아 자동차 트렁크에 싣고
이천의 한 야산까지 끌고 가서 자살한
것처럼 위장해 놓았다. 그리고
천달수로부터 적지 않은 돈을 받았다.
그것은 너무나 간단한 일이었다.
그러나 강한섭의 부인이 맹렬하게
반발하기 시작했다. 그녀는 자신의 남편이
경찰에 연행되어 갔었으며 경찰의 고문에
의해 죽은 것이 분명하다고 주장했다.
천달수는 강한섭의 부인 때문에 곤란한
처지에 놓이게 되었다. 그리고 이동일을
불러 강한섭의 부인을 처치해 줄 것을
부탁했다.
이동일은 이 번에도 천달수의 지시에
충실히 따랐다. 채은숙의 집에 부하들을
끌고 가서 윤간을 한 뒤에 경기도 가평
쪽의 야산에서 처치해 버리려고 했다.
그러나 채은숙이 윤간의 충격으로 실성을
하자 46번 국도에 팽개치고 말았다. 실성한
여자를 굳이 죽일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
잠결에 조성자가 이동일의 손을
뿌리쳤다.
"가만 있어!"
이 동일은 조성자의 메리야쓰를 위로
2걷어 올렸다. 그러자 희고 뽀얀 두 개의
육봉이 드러났다.
"졸려!"
조성자의 얼굴에 가벼운 짜증이
묻어났다. 이동일은 조성자의 짧은 스커트
속으로 손을 가져갔다. 조성자가 몇 번이나
허리를 비틀면서 저항하는 시늉을 하다가
눈을 떴다. 그리고는 스스로 속옷을 벗어
똘똘 말아 가지고 침대 밑으로 던졌다.
이동일도 재빨리 옷을 벗고 조성자에게
엎드렸다.
강한섭의 죽음,그리고 그 부인의
실성으로 천달수는 한동안 곤경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그러나 최종열 기자가 천달수의
비위 사실을 들춰냈고 천달수는 경찰에서
파면을 당했다.
최종열도 신문사에서 해직되었다.
최종열이 신문사에서 해직된 것은 그가
지나치게 경찰의 치부를 드러냈기
때문이었다.
최종열은 신문사에서 해직되자 맹렬하게
5공 정부를 비난하기 시작했다. 그는 뜻이
맞는 동료들과 함께 유인물을 만들어
살포했고 광주사태를 민주화 항쟁이라고
주장했다.
최종열은 즉각 수배되었다. 그러자
최종열은 어디론가 사라졌고 한동안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천달수는 최종열에게 복수하기 위하여
최종열을 찾아다니기 시작했다. 그리고
마침내 목포에서 최종열을 찾아냈다.
그러나 한경호의 지시로 최종열에 대한
복수는 포기해야 했다. 그 무렵 천달수는
한경호에게 바짝 달라붙어 그의 졸개
노릇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한경호가 돌연히 죽었던 것이다.
한경호의 죽음은 천달수에게는 청천벽력과
같은 것이었다. 그는 한경호가 있으므로서
권력과 밀접한 관계를 유지할 수 있었고
폭력배 생활도 유지해 나갈 수 있었다.
그러나 한경호의 죽음은 한순간에 천달수를
낙담하게 하고 말았다.
천달수는 고향으로 낙향했다. 그의
고향은 충청북도 괴산이었다. 그는
한경호를 흉내 내어 고향에 별장을
지어놓고 세월을 낚았다.
그 무렵 정권이 바뀌었다.
정권이 바뀌자 중원일보의 풋내기 기자
김석호 기자가 '사라진 사람들'이라는
제목으로 강한섭의 죽음을 추적하기
시작했다. 천달수는 고향에서 평화로운
삶을 유지하며 살다가 그 기사를 보고는
불안에 떨기 시작했다. 기사는 점점
천달수의 목을 죄어 오는 기분이었다.
천달수는 손수 김석호를 살해하고
교통사고로 위장을 해버렸다. 김석호가
자신의 뒤를 추적해 오는 것을 견딜 수가
없었던 것이다.
안미경을 납치하여 사창가에 팔아 버린
것은 그녀가 뺑소니 기사를 추적하려고
했기 때문이었다. 안미경을 살해할 수도
있었으나 두 사람을 한꺼번에 죽이면
경찰이 의심을 할 것 같아 그만 두었다.
다만 안미경을 납치하여 윤간하고 사창가에
팔아버리는 일은 이동일이 맡았다.
결국 안미경은 그들이 의도했던대로
사창가를 전전하다가 어디론가 사라졌다.
천달수와 이동일은 안미경이 끝내
사창가에서 헤어나지 못하리라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상황은 그들의 뜻대로만 움직이지
않았다. 안미경은 그들의 감시망을 감쪽
같이 벗어나 성형수술까지 한 뒤에
잡지사에 취직을 했고 최종열을 만나
그들의 이야기를 소설이라는 형식을 빌려
잡지에 연재하게 되었던 것이다.
어처구니없는 일이었다.
천달수는 의문사를 밝히려는 그들의
집념에 몸서리를 쳤다. 천달수와 이동일은
최종열을 추적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목포에서 최종열을 찾아내는데 성공했다.
그러나 그가 쓴 소설은 이미 누군가에게
넘어가 있었다.
천달수는 소설을 찾기 위해 혈안이
되었다.
그러나 최종열의 정부 이지애를
유달산에서 살해하고 최종열을 납치하여
무수히 고문을 했으나 소용이 없었다. 결국
천달수는 최종열까지 죽여서 화성에 있는
야산에 버려야 했다.
(그 계집애를 죽여 버려야 하는 건데...
)
이동일은 안미경을 살려둔 것을
후회했다.
"무슨 생각을 해?"
조성자가 허리를 비트는 시늉을 하다가
갑자기 눈을 흘겼다. 이동일이 다른 생각에
잠겨 있는 것을 눈치 챈 것이다.
"미안해. "
이동일은 그때서야 천달수의 생각에서
벗어나 조성자를 밀어붙이기 시작했다.
"잠자는 사람을 깨워 놓고 왜 딴
)짓이야?"
조성자가 색기가 번들거리는 눈빛으로
이동일에게 짜증스럽게 내뱉았다. 이동일은
재빨리 조성자를 껴안았다. 조성자가
그때서야 천달수의 허리에 다리를 감아
바짝 조이며 호응을 해오기 시작했다.
밖에는 여전히 빗줄기가 장대질을 하고
있었다. 이동일은 빗소리에 박자를
맞추듯이 더욱 빠르게 조성자를 밀어
붙였다. 그러자 조성자가 그의 목에 두
팔을 감고 요란하게 신음을 내지르기
시작했다.
이동일은 땀을 흥건히 흘렸다.
천달수로부터 전화가 온 것은 날이
어둑어둑하게 저물고 있을 때였다.
"돈을 준비했다. "
천달수의 목소리는 여전히 낮고
식
"그럼 제가 가겠습니다. "
"여긴 괴산이다. "
"괴산이요?"
"전에 한 번 온 적이 있었지?"
"예. "
괴산에는 천달수의 별장이 하나 있었다.
천달수는 그 별장을 지을 때 첩의 이름으로
땅을 사서 지었기 때문에 경찰이 수배를
했을 때도 드러나지 않았었다. 마을에서도
한참이나 떨어진 골짜기에 있기 때문에
차가 없이는 들어갈 수도 없었다.
"지금 오면 10시엔 도착할 수 있을
것이다. "
이동일은 시계를 보았다. 시계가 저녁
7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괴산까지
3시간이면 충분하리라고 생각했다.
"알겠습니다. "
천달수가 전화를 찰칵 끊었다. 이동일은
전화를 끊자 서둘러 옷을 입기 시작했다.
"돈을 준대?"
조성자가 물었다.
"응. "
"나도 갈까?"
"기다리고 있어. "
"나 떼어놓고 달아나려는 것은 아니지?"
"걱정마. "
이동일은 조성자의 엉덩이를 가볍게
토닥거렸다. 천달수에게 돈을 받아서
조성자와 함께 경치 좋은 곳에서 조용히
살기로 약속을 했던 것이다.
이동일은 여관 주차장에서 엘란트라를
끌고 나왔다. 조성자가 여관 앞에까지 따라
나와 손을 흔들었다.
이동일은 조성자에게 손을 흔들어 주고
중부고속도로를 향해 질주하기 시작했다.
소나기가 장대질을 하듯이 퍼붓고 있기
때문인지 거리엔 차량이 별로 없었다.
그것은 고속도로도 마찬가지였다.
중부고속도로로 들어서자 쭉 뻗은
고속도로에 빗줄기만 하얗게 쏟아지고
있었다.
이동일은 속도계를 60으로 떨어트렸다.
소나기가 장대질을 하듯이 퍼붓는
고속도로에서 그 이상은 위험할 것 같았다.
이동일이 괴산에 도착한 것은 밤
9시45분이 되었을 때였다. 장대질을 하듯이
퍼붓던 비는 이천에서 인터체인지를 빠져
나올 무렵 완전히 그쳐 있었다. 그러나
하늘이 캄캄한 것을 보면 금세 다시
소나기가 퍼부울 것 같았다.
이동일은 별장 앞에 도착하자 잠시
별장을 살폈다. 별장의 어느 방에선가
불빛이 희미하게 흘러나오고 있었다.
이동일은 운전석의 좌석 밑에서 재크
나이프를 꺼내 뒷주머니에 찔러 넣었다.
천달수의 별장은 어둠 속에서 죽은 듯이
조용하게 웅크리고 있었다.
이동일은 차에서 내려 철문을 향해
조심스럽게 걸어갔다. 저만치 떨어진 마을
어디선가 개짖는 소리가 음산하게
들려왔다. 그 소리는 마치 황량한 계곡에서
늑대가 울부짖는 것처럼 귀기스러웠다.
이동일은 그 소리에 공연히 몸을 움찔했다.
철문은 비스듬하게 열려 있었다.
이동일은 뒷주머니에서 재크 나이프를 다시
한 번 확인하고 별장 안으로 들어갔다.
별장은 단층이었다. 불빛이 흘러나오고
있는 곳은 거실이었다. 이동일은 거실의 창
앞으로 바짝 다가갔다. 천달수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 일단 살펴보는 것이
좋으리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아... )
이동일은 창 앞으로 가까이 가다가 깜짝
놀랐다. 거실 안에는 뜻밖에도 천달수가
의자에 묶여 있었고 한 여자가 의자에 묶여
있는 천달수에게 채찍을 휘두르고 있었다.
천달수는 채찍을 얼마나 맞았는지 옷이
갈기갈기 찢어져 있었고 얼굴에는 채찍
자국이 뱀처럼 엉켜 있었다.
(저 계집애는 안미경이야!)
이동일은 불빛에 드러난 여자의 얼굴을
확인한 순간 자신도 모르게 얼굴을
찡그렸다. 안미경이 천달수까지 찾아온
것을 보면 이미 천달수와 이동일이 저지른
'일을 모두 알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천달수가 어떻게 하다가 당했지?)
이동일은 천달수를 구해야 하겠다고
생각했다. 천달수에게 돈을 받으려면
천달수가 죽어서는 안되는 것이다. 게다가
어차피 안미경은 죽여 없애야 하는
계집이었다. 그 계집이 살아 있으면
천달수나 이동일 자신은 결코 발을 뻗고
잠을 잘 수 없을 것이었다.
이동일은 거실 현관 문으로 조심스럽게
접근했다.
우르르.
또 다시 비가 오려는지 먼 곳에서 갑자기
뇌성이 우는 소리가 들렸다. 이동일은
뒷주머니에서 재크 나이프를 꺼내서 폈다.
찰칵 하고 나이프 펴지는 소리가 귓전을
울렸다.
우르르.
또 다시 뇌성이 울더니 마침내 섬광이
번쩍 하고 어두운 하늘을 갈랐다. 이어서
대낮처럼 밝은 빛이 마을 저 편으로
내리꽂히고 쾅 하는 천둥소리가 고막을
때렸다. 천달수의 별장이 그 소리에 부르르
진동을 했다. 이동일은 잠시 호흡을
가다듬었다. 또 다시 섬광이 어두운 하늘을
가르더니 전기가 퍽 하고 나갔던 것이다.
사방이 칠흑처럼 캄캄해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다.
(차라리 잘 되었어... )
이동일은 속으로 중얼거렸다. 천둥
번개에 이어 쏴아 하는 소리를 내며 다시
소나기가 쏟아지고 있었다.
이동일은 현관 손잡이를 살그머니
돌렸다. 그리고 번개가 번쩍 하고 뇌성이
울 때를 기다려 재빨리 현관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대낮처럼 밝은 섬광 속에서
여자가 화들짝 놀라는 것이 보였다. 그러나
그것은 몇 초에 지나지 않는 순간의
일이었다. 거실을 환하게 밝히던 섬광이
사라지면서 칠흑의 어둠이 거실을
휘덮었다. 이동일은 여자를 향해 돌진하여
재크 나이프를 힘껏 찔렀다.
"헉!"
여자의 짧은 호흡소리와 함께 칼 끝에
묵직한 느낌이 전해져 왔다. 이동일은 재크
나이프를 뽑았다. 어둠 속에서 여자가
비틀거리는 듯한 기척이 느껴졌으나 다시
여자를 향해 재크 나이프를 휘둘렀다.
밖에서는 다시 섬광이 번쩍하고 어둠을
가르고 있었다.
여자가 쿵 하고 거실 바닥에 쓰러졌다.
이동일은 어둠 속에서 가쁜 숨을 몰아
쉬었다. 이마로 굵은 땀방울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이동일은 주먹으로 이마의 땀을
훔쳤다. 거실 바닥에서 피비린내가 왈칵
풍겼다.
"누구야?"
그때 천달수의 쉰 목소리가 이동일의
귓전으로 들렸다.
"접니다. "
"동일이?"
"예. "
"잘 왔어. "
천달수가 그때서야 반색을 했다.
"불을 켤까요?"
"그래. "
이동일은 주머니에서 라이터를 꺼내 불을
켰다. 거실 바닥에 여자가 쓰러져 있었다.
0여자의 아랫배에서 흘러나온 피가 카페트
위에 흥건했다. 피는 아직도 꾸역꾸역
흘러나오고 있었다. 천달수는 의자에 묶인
채 괴로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
"어떻게 된 겁니까?"
이동일은 천달수를 묶은 빨래줄을 풀러
주었다.
"자네를 기다리고 있는데 계집이 쳐들어
왔어. 계집은 우리의 일을 모두 알고
있었어... "
"그렇다고 여자에게 묶입니까?"
"계집이 엽총을 가지고 있었어. "
천달수가 눈짓으로 거실벽을 가리켰다.
거실벽에 엽총 한 자루가 세워져 있었다.
이동일은 비로소 천달수가 계집에게 꼼짝도
못하고 당한 까닭을 알 수 있었다.
"이제 어떻게 하지요?"
이동일이 근심스럽게 천달수를
쳐다보았다. 안미경을 죽였으므로 시체를
처리해야 했다.
"시체를 묻어야지. "
"어디에요?"
"뜰에. "
천달수가 눈짓으로 뜰을 가리켰다. 칠흑
같은 어둠이 덮여 있는 뜰은 소나기만 쏴아
소리를 내며 계속해서 쏟아지고 있었다.
"비가 오니까 아무도 나타나지 않을
거야. "
천달수가 담배를 피워 물었다. 이동일도
담배를 물고 라이터로 불을 붙였다.
담뱃불을 붙이고 안미경의 시체를
내려다보자 안미경이 꿈틀하고 있었다.
"살았나?"
이동일이 놀라서 안미경의 옆구리를 발로
찼다. 안미경은 꿈쩍도 하지 않고 있었다.
"사후 경련일 거야. "
천달수가 담배 연기를 길게 내뿜으며
말했다.
"사후 경련이요?"
"죽은 뒤에도 경련이 일어나는 경우가
더러 있어. "
천달수의 말에 이동일은 고개를
끄덕거렸다. 안미경이 살아 있다고 해도
숨이 끊어지는 것은 시간 문제일 터였다.
"돈은 준비하셨습니까?"
이동일은 천달수를 똑바로 노려보았다.
천달수를 찾아온 것은 돈을 받기
위해서였다.
"준비했어... 돈을 준비하고 자네를
기다리는데 이 년이 나타난 거야... 자네가
죽였으니 자네가 서둘러야 해... "
천달수가 음침하게 웃었다. 기분 나쁜
웃음이었다.
"알았습니다. "
이동일은 담배를 거실 바닥에 버렸다.
천달수가 먼저 거실 밖으로 나갔다.
이동일은 천달수를 따라 밖으로 나왔다.
천달수가 별장 뒤로 돌아가더니 곡괭이와
삽을 가지고 나왔다.
"자... "
천달수가 삽을 이동일에게 건네주었다.
"예. "
천달수는 삽을 받아 쥐었다.
"더럽게도 많이 쏟아지네. "
천달수가 하늘을 쳐다보고 침을 칵
뱉았다. 그리고는 곡괭이를 들고
울타리쪽으로 서둘러 달려갔다. 이동일은
삽을 들고 천달수를 따라 울타리쪽으로
;뛰어갔다.
천달수가 곡괭이질을 하기 시작했다.
천달수도 삽으로 구덩이를 파기 시작했다.
비가 세차게 쏟아지고 있었기 때문에 땅을
파기는 수월했다. 그러나 천달수와
이동일의 옷은 흠뻑 젖어 있었다. 천달수와
이동일은 헐떡거리며 구덩이를 팠다.
이내 커다란 구덩이가 파여졌다. 무덤
같은 구덩이였다.
"들어가서 흙을 퍼내... "
천달수가 이마의 땀을 훔치며 말했다.
이동일도 주먹으로 이마의 땀을 훔쳤다.
정신없이 구덩이만 파고 있었기 때문에
얼굴이 빗물과 땀으로 범벅이 되어 있었다.
"예. "
이동일은 무심하게 대꾸하고 구덩이로
들어갔다. 소나기가 세차게 쏟아지고
0있어서 구덩이로 빗물이 마구 흘러들고
있었다. 이동일은 가쁜 숨을 몰아 쉬며
구덩이의 흙을 퍼냈다.
그때 갑자기 머리 위가 선뜻해 왔다.
이동일이 머리 끝이 쭈뼛한 공포 때문에
머리를 쳐들자 곡괭이 끝이 그의 정수리를
겨누고 내려오고 있었다.
아......
이동일은 눈 앞이 캄캄해 왔다. 이동일은
재빨리 몸을 피하려고 하다가 빗물에
미끄러져 비틀거렸다. 그러자 그의 등으로
곡괭이가 내리꽂혔다.
"헉!"
이동일은 외마디 비명을 지르며 구덩이
속에 처박혔다. 눈 앞이 노랗게 변하면서
등이 부서지는 것 같은 충격이 느껴졌다.
그때 또 다시 곡괭이 끝이 그의 등을
-내리찍었다. 이동일은 처절한 비명을
지르며 구덩이 속으로 꼬꾸라졌다.
"흐흐... "
천달수는 곡괭이 자루를 내던지고
음산하게 웃었다. 이동일은 팔다리가
심하게 경련을 일으키고 있었다. 그러나 몇
번 팔다리를 꿈틀거리다가 그대로
멎어버리고 말았다.
"넌 나의 비밀을 너무 많이 알고 있어...
"
천달수는 구덩이를 내려다보며 낮고
음침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이동일을
처치했으므로 이제는 거실에서 안미경을
끌어내다가 묻어버리면 그만이었다.
천달수는 얼굴의 빗물을 손바닥으로 훔치며
가쁜 호흡을 진정시키기 시작했다. 여전히
비가 세차게 쏟아지고 있었다.
1 우르르.
그때 섬광이 번쩍하고 어둠을 가르고
뇌성이 고막을 때렸다. 귀청이 찢어질 것
같은 요란한 천둥이었다.
(저 계집애가... )
천달수는 안미경의 시체를 끌고 나오려고
거실을 향해 몸을 돌리려다가 흠칫했다.
이동일의 칼에 죽은 줄 알았던 안미경이
엽총을 들고 세차게 쏟아지는 빗줄기 속에
서 있었다.
(제기랄... )
천달수는 어찌해야 좋을지 알 수 없었다.
안미경이 빗속에서 그를 향해 한 걸음 한
걸음 다가오고 있었다. 천달수는 다리가
후들후들 떨려왔다. 갑자기 죽음에 대한
공포가 그의 뇌리를 후려치고 있었다.
안미경은 빗속에서 점점 가까이 오고
그녀의 하얀 드레스는 피와 비에
흥건하게 젖어 있었다.
"사,살려주세요... "
천달수는 안미경을 향해 무릎을 끓었다.
안미경이 걸음을 멈추고 그를
노려보았다.
"제,제발... "
천달수는 애원을 하기 시작했다.
"더러운 놈... "
안미경이 차갑게 비웃었다.
"신이 존재한다면 누구의 신이던지
너에게 복수하는 것을 허락할 것이다... !"
안미경이 차갑게 내뱉으며 엽총을
천달수에게 겨누었다. 천달수는 눈을 질끈
감았다. 죽음에 대한 공포로 온 몸이
사시나무처럼 떨렸다.
탕!
그때 요란한 총성이 울리면서 왼쪽
귓바뀌가 화끈했다. 탄환이 천달수의 왼쪽
귓바뀌를 스친 것이다. 천달수는 그 순간을
놓치지 않고 벌떡 일어나서 안미경을 향해
맹수처럼 돌진했다.
탕!
또 다시 요란한 총성이 천달수의 귓전을
울렸다. 안미경을 향해 맹수처럼 달려가던
천달수는 허공으로 풀쩍 뛰어 올랐다가
나동그라졌다. 천달수가 가슴으로 화끈한
충격을 느낀 것은 몇 초 후의 일이었다.
천달수는 자신의 가슴이 뻥 뚫렸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목구멍으로 비릿한 것이
치밀고 올라오는 것을 느끼며 가쁜 숨을
몰아 쉬기 시작했다.
목에서 그르렁거리는 소리가 났다.
천달수는 하늘을 응시했다. 하늘에서
섬광이 폭죽처럼 터지고 그 섬광이
자신을 향해 내리꽂히고 있었다. 천달수는
그 섬광을 받아 안으려는 듯이 두 팔을
하늘로 들어올리다가 떨어트렸다.
우르르.
멀리서 뇌성이 은은하게 울었다.
에필로그
1
장마는 일주일 동안이나 계속되었다.
길고 지루한 장마였다. 천달수의 별장에서
일어난 사건은 장마가 계속되는 일주일
내내 세간의 화제가 되었다. 신문과 방송은
연일 이 사건을 대대적으로 보도했고
최종열의 소설은 그 대부분이 사실로
검증되었다. 언론들은 다투어 한 시대가
인간의 영혼을 얼마나 깊고 처절하게
파괴했는지 최종열의 소설이 증언한다고
말했다.
이동일은 천달수의 하수인으로 별장에서
곡괭이로 살해되었고 천달수는 안미경을
`죽이려다가 안미경에 의해 오히려 엽총을
맞고 죽은 것으로 보도되었다. 안미경은
정당방위가 인정되어 여론의 동정을
받았다.
그러나 안미경이 이동일의 칼에 찔렸다는
보도는 어디에도 없었고 오히려 경찰이
조금만 늦게 도착했어도 천달수의 칼에
찔린 안미경의 숨이 끊어졌을 것이라는
기사가 보도되고 있었다.
안미경은 경찰에 의해 병원으로 실려
갔고 응급실에서 5시간의 대수술을 받았다.
경찰은 천달수와 이동일의 살인 행각을
낱낱이 밝혀냈다. 최종열의 소설이
천달수의 비행과 살인 행각을 어느 정도
밝히고 있기도 했지만 제5공화국에서
일어난 다수의 의문사 사건에 천달수가
개입을 했고 그 실행은 이동일 일당이
맡았다는 것도 속속 밝혀졌다.
사람들은 천달수와 이동일의 범죄에 치를
떨었다. 그들이 계획하고 실행한 살인만도
6건이 넘었다. 이동일은 수하에
조직폭력배들을 거느리고 있었는데 그
부하들과 함께 살인연습까지 하면서 범죄를
저질러 세인들을 놀라게 했다. 그들은
악마와 같은 자들이었다.
"그래도 우리 손으로 해결하여
다행입니다. "
김 형사가 우쭐렁거리며 흘러가는 강물을
내려다보며 중얼거렸다. 민 형사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거리고 소주잔을 입으로
가져갔다. 김 형사의 말 뜻은 경찰 출신의
천달수가 저지른 사건으로 경찰의 대국민
이미지가 실추되어 있는데 그나마 사건을
해결하게 되어 다행이라는 뜻이었다.
그들은 지금 여주의 남한강 강둑에 앉아
있었다. 사건은 모두 매듭이 지어졌으나 김
형사가 사건이 일어난 현장을 모두
찾아보자고 제안을 하여 이천의 마장면을
거쳐 여기까지 온 것이었다.
이천에서는 마장면에서 강한섭이 목을
매어 자살한 시체로 발견되었고 양지면
야산에서는 강한섭의 부인 채은숙이 목을
매어 자살한 시체로 발견되었던 것이다.
강한섭의 부인 채은숙이 실성한 몸으로
이천군 마장면 야산에서 눈 속에 쓰러져
있었던 것은 이지를 상실했으면서도 남편이
죽은 곳을 찾아 헤매다가 사경을 헤매게 된
것이고 우연히 박 노인에게 발견된
것이라고 볼 수 있었다.
비감한 일이었다.
민 형사는 남편의 죽은 장소를 찾아
헤매는 채은숙의 안타까운 모습이 눈 앞에
선하여 가슴이 아팠다.
"박태호를 미행하지 않았으면 큰일 날
뻔했습니다. "
안미경은 박태호를 미행하여 천달수의
별장을 찾아냈고 박태호를 통해 엽총을
구입했던 것이다. 형사들을 시켜 박태호를
미행하지 않았다면 안미경이나 천달수의
행방을 찾기는 어려웠을 것이었다.
"언제나 진실은 밝혀지게 마련이야. "
민 형사는 우울하게 대꾸했다.
박태호를 미행하여 천달수의 별장을
알아냈었으나 박태호가 다시 서울에 올라와
안미경을 접선하는 것을 지켜보고 있다가
놓치고 말았던 것이다. 박태호와 안미경은
여관에서 잠을 체 하고는 안미경이 그들의
감시를 피해 감쪽 같이 사라져 버렸던
.것이다. 민형사와 김 형사가 안미경이
사라진 것을 알아채고 부랴부랴 괴산으로
달려왔을 때는 이미 모든 상황이 끝난
뒤였다.
"그 여자는 이제 어떻게 할까요?"
"모르지... "
"그 여자의 삶도 참 기구해요. "
김 형사가 자작하여 소주를 따라 한 모금
마셨다.
"기구한 것이 어디 그 여자의 삶뿐인가?"
민 형사는 담배를 꺼내 물었다. 이동일의
칼에 찔린 안미경을 천달수의 칼에 찔린
것으로 바꾸고,안미경이 천달수에게 납치
당하여 죽음의 위험에 처해 있다가
가까스로 엽총을 찾아 천달수를 정당방위
차원에서 살해한 것으로 꾸민 것은 모두 민
형사의 작품이었다.
, 민 형사는 안미경이 천달수에게 복수를
하기 위해 살해한 사실을 위장했던 것이다.
안미경이 복수를 했다고 해도 그것은
엄연히 살인이었고,살인을 했기 때문에
다시 살인범으로 체포되어야 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민 형사는 차마
안미경을 체포할 수가 없었다.
"한경호도 불행한 인간이었습니다. "
김 형사가 다시 말했다. 민 형사는 김
형사의 말에 한경호의 부인 이정란을
머릿속에 떠올렸다. 그리고 여주의
아리랑파크에서 투신하여 목숨을 끊은
이정란의 풍만한 여체를 생각했다.
참으로 기묘한 일이었다.
"이정란의 투신자살 사건을
조사하셨었지요?"
"응. "
"어딥니까?"
"바로 저기야. "
민 형사는 등을 돌려 아리랑파크를
눈짓으로 김 형사에게 가르쳐 주었다.
"예?"
"오늘 밤 저기서 자기로 했잖아?"
"설마 그 방을 예약해 놓으신 것은
아니지요?"
"그 방이야. "
"기가 막히네. "
김 형사가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아리랑파크는 어둠 속에 호젓이 서 있었다.
방에 손님이 들었는지 몇 개는 불이 켜져
있었고 몇 개는 불이 꺼져 있었다.
아리랑파크 앞에 서 있는 가로수들은 어둠
속에서 검은 빛으로 살랑거리고 있었다.
"난 모르겠습니다. 꿈에 귀신이
나타나도... "
김 형사가 고개를 설래설래 흔들었다.
"자살하지는 말게. "
민 형사는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농담 마십시요. "
김 형사도 웃음을 터뜨렸다. 민 형사는
김 형사의 웃음이 어쩐지 공허하게 들렸다.
"영혼이 있을까요?"
김 형사가 자작하여 술을 마셨다. 민
형사도 김 형사를 따라 자작하여 소주를 한
잔 마셨다. 뱃속이 찌르르 했다.
"모르지... "
민 형사는 고개를 흔들었다. 영혼은 과연
존재하는 것일까. 그런 의문은 민 형사도
여러 번 가졌었다. 그러나 그 의문에
해답은 없었다.
"전 어쩐지 영혼이 존재하는 것
1같습니다. "
"왜?"
"아까부터 우리 주위에 영혼이 떠도는 것
같았습니다. 밤이고 강가라 그런지...
무엇인가 미세한 것이... 마치 먼지처럼
보이지 않는 무엇이 공기 중에 섞여서
돌아다니는 것 같습니다... 공기의 떨림이
느껴지는 것 같아요... "
민 형사는 대꾸하지 않았다. 김 형사의
말대로 죽은 사람들의 영혼이 과연 공기
중에 떠돌고 있는 것이 사실일까. 이
어둠,축축한 바람,강파도...
어느 집에선가 창 문이 여닫히는 소리가
희미하게 들렸다. 사방은 강파도 소리
외에는 죽은 듯이 조용했다. 민 형사는
정적 속에서 무엇인가 찾으려는 듯이
조용히 귀를 기울였다.
"그만 일어나지요. "
김 형사가 먼저 엉덩이를 털고 일어섰다.
민 형사도 강언덕에서 일어나
아리랑파크를 향해 휘적휘적 걸어가는 김
형사의 뒤를 따라 천천히 걸음을 떼어놓기
시작했다. 기분이 이상했다. 강물은
조용하게 흐르고 있었고 사위는 신비스러울
정도로 적요했다. 민 형사는 다시 걸음을
떼어놓기 시작했다. 그는 이상한 고독감에
사로잡혀 있었다. 아리랑파크에 가까이
갈수록 가슴을 저미는 듯한 고독감이
휘몰아쳐 오고 있었다. 그는 걸음을
멈추었다.
그는 어둠 속에서 성채처럼 우뚝 솟아
있는 아리랑파크를 멍하니 쳐다보았다.
이 이상한 고독감은 무엇일까?
왜 이 이상한 고독감이 가슴이
쩌쳬돈엄습해 오는 것일까?그는
무엇인지 모를 이상한 소리들이 귓전으로
들려오고 잇는 것을 깨달았다. 어쩌면
처절한 비명소리 같기도 하고 저 깊은 땅
속에서 들려오는 악귀들의 울부짖음 같은
소리... 언뜻 생각하면 여름 날 해질 무렵
장독대 위에서 잉잉대는 하루살이의 날개짓
같은 소리들이 아리랑파크에서 들려오고
있었다.
그는 가슴이 뛰는 것을 느꼈다.
에필로그
2
멀리 신작로 옆으로 흐르는 큰
개울에서는 방학을 맞은 아이들이 멱을
감고 있었다.
폭염이었다. 6월 장마가 끝나자 마자
시작된 무더위가 한 달이 넘게 계속되어
가뭄이 극심했다. 영남에서는 밭작물이
말라 죽고 논바닥이 갈라지더니 마침내
식수현상까지 빚어지고 있었다. 미경은
마른 먼지가 풀풀 날리는 호박밭에서
잡초를 뽑다가 말고 먼 신작로를 시린
눈빛으로 조망했다.
어디로 가는 버스일까. 신작로에는 지금
막 버스 한 대가 황토 먼지를 자욱하게
일으키며 남쪽으로 달려가고 있었다. 짙은
청록색으로 단장을 한 포플라는 뙤약볕에
잎사귀가 축축 늘어지고 신작로까지 펼쳐진
논에는 극심한 가뭄에도 벼들이 푸르게
웃자라 있었다. 그러나 열흘만 더 가뭄이
계속된다면 이 곳의 논바닥도 갈라질
것이라고 농사를 짓는 사람들이 우려를
하고 있었다. 풀잎 하나 까딱하지 않는
더위였다. 태양은 머리 위에서 이글거리고
건조한 공기는 숨이 턱턱 막혔다.
(새참 때가 지났을 텐데... )
미경은 남자들이 관정()을 뚫고 있는
집 뒤의 산머리를 어림하여 눈길을 보냈다.
집에 가려서 관정을 뚫고 있는 논이
보이지는 않았으나 기계소리가 여전히
시끄럽게 지축을 울리고 있었다.
미경은 목에 두른 수건으로 이마에서
흘러내리는 땀을 닦았다. 수건에서도
시지근한 땀냄새가 풍기고 있었다.
(참 조용하기도 하네... )
사방은 죽은 듯이 조용했다. 한동안
시끄럽게 울어대던 매미도 더위에 지쳤는지
사방이 기묘할 정도로 적요했다. 미경은
낯좌우로 돌려 인적이 없는 것을
살피고는 부라우스를 걷어 올리고 젖가슴과
겨드랑이의 땀을 닦았다. 온 몸이 땀으로
후줄근하게 젖어 미끌거렸다.
3백평 남짓한 텃밭에 앉은뱅이 호박을
심은 것은 일손이 가장 적게 가는 작물이
그것뿐이었기 때문이었다. 아직은 농사를
짓는 일이 손에 달라붙지 않고 있었다.
마을 사람들 말로는 청명()
한식()이 지난 뒤에 구덩이를 듬성듬성
파서 돼지 두엄을 뿌리고 호박씨를 묻어
두면 가을에 늙은 호박을 5백 개나 수확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밭에 김을 매거나
비료를 줄 필요도 없고 여름철에 애호박이
열리기 시작하면 그것을 솎아서 빈대떡이나
부쳐먹으면 호박농사는 끝이라는 것이었다.
늙은 호박 한 개에 대도시에서 1만원씩
거래되니 그것만해도 5백만원의 수입을
올릴 수 있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장마철이 시작되자 하나 둘 솟아
나오기 시작한
쇠비름이며,강아지풀,민들레,그리고 이름도
모르는 잡초들이 장마가 끝나자 허리까지
찰 정도로 쑥쑥 자라 호박 넝쿨이 뻗지를
못하였다. 뙤약볕 아래서나마 잡초를
뽑아내야 했다.
미경은 밭머리까지 천천히 걸어갔다.
더위 때문에 얼굴이 화끈거리고 어지럼증이
일어나 밭머리에 있는 느티나무 아래서
쉬기 위해서였다.
"안나씨!"
밭머리에 이르러 땀을 식히는데 관정을
뚫는 논둑에서 영농후계자
최현철()의 부인 황윤정()이
부르고 있었다. 오늘 새참 당번인데
아들 둘에 딸 하나를 둔 30대 초반의
여자였다. 낙태를 반대하는 카톨릭
신자답게 나이가 허락할 때가지 아이를
계속 낳겠다는 여자였다.
"네!"
미경은 황윤정을 향해 쾌활하게
대답했다.
"새참 먹으러 오세요!"
"네!"
이 곳은 마을 전체가 카톨릭
신자들이었다. 150년 전 카톨릭이 대원군에
의해 모진 탄압을 받았을 때 하나 둘
교난()을 피해 이 골짜기까지 들어와
화전()을 일군 신도들의 후예였다.
미경도 이 곳에 정착한 후 양윤석과 함께
카톨릭에 귀의했다.
미경이 논둑길을 걸어 관정을 뚫는 곳에
이르자 남자들이 왁자하게 국수와 막걸리를
먹고 있었다. 여자들까지 논둑에는 여덟
명이나 되었다. 미경도 국수 한 그릇을
받아 양윤석의 옆에 털썩 앉았다. 국수
위에 한 숟가락 듬뿍 떠준 호박 꾸미가
입맛을 돋구었다.
"왠 사람들이 이렇게 많지?"
"글쎄 일할 때는 없어도 먹을 때만 되면
용케 나타나거든... "
"발이 재야 국수 한 그릇이라도 얻어먹는
거야. "
국수를 먹는 사람들 중에는 면사무소에서
나온 새마을 계장 전상필()도
있었다. 자칭 잰 발의 마당발이라면서
우스개 소리를 곧잘 하여 마을
사람들로부터 환영을 받고 있었다.
=지나가다가 새참이나 점심을 먹는 곳이
있으면 열일 마다하고 얻어 먹고 갔다.
"마누라와 팝콘의 공통점 세 가지 아는
사람?"
막걸리를 한 잔 마신 최현철이 좌중을
돌아보며 씨익 웃음을 흘렸다. 얼굴이
넓적하고 구변이 좋은데다 영농후계자가
되어 일본 농업시설을 시찰까지 하고 온
최현철은 입담이 걸었다. 남자들은 국수를
먹다가 말고 무슨 영문이냐는 듯이 서로
얼굴을 마주 보았고 여자들은 최현철의
입에서 또 무슨 재미있는 말이 쏟아져
나올까 하여 잔뜩 기대를 거는 눈빛으로
최현철을 쳐다보고 있었다.
"아는 사람 없어?"
최현철이 좌중을 둘러보며 호기롭게
소리를 질렀다.
"또 양보다 질이라는 소리 할려고
그러지?"
새마을 계장의 말에 사람들이 왁자하게
웃었다. 양보다 질이라는 것은 최현철이
PC통신에서 들었다는 음담패설로 양을
좋아하는 남자가 늙을 때까지 결혼도 하지
않고 양만 키우고 있었는데 어느 날 갑자기
결혼을 하겠다고 선언을 하여 깜짝 놀란
사람들이 그 까닭을 묻자 양보다 질이라고
대답을 했다고 하여 사람들이 배꼽을 잡고
웃었었다. 질이라는 것은 여자의 질()을
말하는 것인 모양이었다.
"그 정도로 퇴폐적이지는 않습니다. "
"우리는 모르니까 보따리 풀러봐.
처녀인가 뜸을 들이게... "
새마을 계장이 국수를 후루룩 먹어 치운
뒤 입가를 씻으며 채근했다. 최현철의
부인이 더 잡으시겠냐니까 손을 설래설래
저어서 사양했다.
"첫째 마누라와 팝콘은 공짜다. "
최현철의 말에 모두들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어느 정도 음담이라는 것은 눈치
챌 수 있었으나 그 뜻을 알 수 없었던
것이다.
"무슨 소리야?"
"호프집에 가봐. 팝콘을 공짜로 주잖아.
마누라도 공짜로 주고... "
최현철의 말에 남자들이 그때서야 일제히
웃음을 터뜨렸다. 국수를 먹던 양윤석도
피식 웃고 있었다. 여자들은 얼굴을 붉히며
미소를 짓고 있었다.
"둘째 달라면 더 준다. "
최현철의 두 번째 말에 미경도 웃음을
터뜨렸다.
"셋째 생각은 없는데 손이 자꾸 간다. "
최현철의 세 번째 말에 남자들이
박장대소를 했다. 여자들도 더 이상 웃음을
참을 수 없다는 듯이 일제히 깔깔대고
웃어댔다.
"생각은 없는데 손이 자꾸 가서 쟤를
낳았나?"
새마을 계장이 돌아앉아 꼬마의 젖을
먹이고 있는 최현철의 황윤정의 등을
쳐다보며 말하자 사람들이 또 다시
왁자하게 웃음을 터뜨렸다.
"아니 마누라가 팝콘으로밖에
안보여?농촌에서 노총각으로 늙어 가는
것을 구제해 줬더니 숫제 팝콘 취급이야?"
황윤정이 등을 돌리며 가볍게 항의를
하자 여자들이 맞아,맞아... 남자들은
사흘에 한 번씩 볶아야 한다니까 하고
웃었다.
점심은 양계장을 하는 송덕수()의
집에서 먹었다. 송덕수의 부인이
노계() 세 마리를 잡아 삼계탕을
끓였던 것이다.
미경은 집으로 돌아와 낮잠을 잤다.
삼계탕을 두 그릇이나 먹었기 때문인지
포만감과 함께 졸음이 쏟아져 왔다.
미경이 잠이 깬 것은 오후 5시쯤이었다.
미경은 다시 텃밭에 나가 잡초를 뽑기
시작했다. 그리고 해가 질 무렵이 되자 집
뒤 샘에서 물을 길어다가 포기마다 물을
뿌렸다.
"날씨도 더운데 쉬엄쉬엄해... "
어느 틈에 왔는지 양윤석이 등 뒤에서
웃고 있었다. 미경은 양윤석을 향해 밝게
웃었다.
"다 끝났어요?"
"물이 쉽게 나오지 않는 걸... "
"그럼 밤에도 해요?"
"밤에도 한대. "
"신부님의 버드나무도 틀린 모양이네요.
"
관정을 뚫는 곳은 신부()가
버드나무로 물이 있는 곳을 가르쳐 준
장소였다.
"워낙 가뭄이 심하잖아. "
양윤석의 시선이 먼 신작로를 더듬었다.
미경도 양윤석의 옆에 서서 저녁 햇살을
받아 금빛으로 살랑거리고 있는 신작로의
포플라 잎사귀를 우두커니 응시했다.
경상북도 봉화군 관장면 용두리().
3개 면()에 산세가 뻗어 있는
만리산()의 깊은 골짜기인 용두리.
용머리 마을로 미경과 양윤석이
찾아온 것은 2년 전 가을이었다. 만리산은
해발 792미터밖에 되지 않았으나 조선의
척추인 태백산맥의 중심이었고 사방 백리
안쪽이 모두 첩첩 산으로 이어져 있었다.
산세도 험준할 뿐 아니라 풍광도 수려했다.
"햇살이 좋은데... "
양윤석도 포플라 잎사귀가 저녁 햇살을
받아 금빛으로 살랑거리고 있는 것을 보고
있었던 것일까.
미경은 양윤석의 말이 이상한 고독감을
가지고 가슴을 공허하게 울리는 것을
느꼈다.
에필로그
3
가을이었다.
날씨가 청명하고 바람결이 서늘했다.
청천 하늘은 눈이 부시도록 맑고 극심한
가뭄 속에서도 용케 말라 죽지 않고 견딘
들판의 벼들은 누렇게 고개를 숙이고
소슬바람이 불 때마다 황금빛으로 물결치고
있었다.
가을은 외진 산간 계곡에서부터 먼저
오기 시작하는 것일까.
얼마 전까지 싱싱한 녹향을 뿜어대던
계곡이 어느 날 안개 속에서 누르스름한
빛을 띠기 시작하더니 어느 사이에 용머리
마을을 병풍처럼 둘러싼 첩첩
연봉()들이 붉은 비단을 펼쳐 놓은
것처럼 울긋불긋해 져 있었다.
눈이 시리다.
아침마다 눈을 뜨고 청정한 공기를
마시며 멀고 가까운 만리산 연봉들을
조망하면 뺨을 간지르는 산바람과 선연한
단풍이 입안까지 빨갛게 물을 들이는
기분이었다.
텃밭의 호박도 누렇게 익어서 벌써 6백
개를 수확했다. 예상보다는 더 많이 수확을
했지만 호박값은 폭락을 하여 개당
2천원에서 3천원을 받은 것이 고작이었다.
그래도 첫 수확이라 미경은 가슴이
뿌듯했다. 여름 내내 잡초를 뽑느라고
고생은 했지만 애호박도 한 추럭이나
팔았으므로 그다지 손해를 본 것은
아니었다.
마당의 장독대 앞에는 새마을 계장
전상필에게서 얻어 심은 붉은 깨꽃이
농염하게 피어 가을바람에 하늘거리고
신작로에서 집으로 들어오는 진입로에는
코스모스가 군락()을 이루고 피어 붉고
하얀 꽃바다를 이루고 있었다.
용머리 마을에 정착한 기념으로 2년 전
마당에 식수()한 두 그루의 은행나무는
바람이 일 때마다 노란 잎사귀를 한 잎 두
잎 떨구고 있다.
오후였다.
햇살은 고즈넉한 마당에서 수선거리고
있었다.
미경은 거실의 창으로 상념에 잠겨 밖을
내다보다가 화음이 맞지 않는 피아노
소리에 얼굴을 찡그렸다. 양계장을 하는
송덕수의 둘째 딸 아란()이가
피아노를 치는 것이 지쳤는지 건반을
함부로 고르고 있었다.
"아란아. "
미경은 아란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요지음 미경은 아이들이 꽃
같다고 생각한다. 잎잎이 부드럽고 연약한
꽃처럼 아이들에게서 싱그러움을 느낀다.
"네?"
아란이 건반을 고르다가 말고 미경을
빤히 쳐다본다. 아란의 맑은 눈동자에
호수처럼 푸른 하늘이 비치고 있다.
"이제 그만하렴. "
"네. "
아란이 선뜻 대답하고 피아노 의자에서
내려온다.
"혜란아. "
"네. "
거실의 홈페트 위에 엎드려 만화책을
보고 있던 혜란()이 선뜻 대답하고
피아노 의자에 앉는다. 둘은 연년생이라
다투곤 한다. 아란이 국민학교
2학년이고 혜란이 국민학교 1학년이다.
미경은 혜란의 뒤에 서서 두 손을 잡고
건반을 고르는 요령을 가르쳐 준다. 혜란과
아란이가 미경에게 피아노를 배우기 시작한
지 1년이 넘었지만 둘은 아직 어린이
바이엘 하권 수준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혜란은 오늘 41쪽의 응용곡 '런던브릿지'를
연습할 차례다. 4분의 4박자이므로 약간
빠른 템포로 건반을 눌러 주어야 한다.
미경은 박자를 맞추는 요령을 가르쳐 준
뒤 연습을 시키고 마당으로 나온다.
마당은 햇살이 따사롭다.
미경은 들마루 위에 삶아서 널어놓은
고춧잎을 뒤집는다. 고추를 수확하고 나서
잎사귀를 흙어서 삶아 말리면 겨울에 좋은
반찬이 된다. 가을이라 그런가. 미경은
가슴으로 잦아드는 고독감에 쓸쓸하다.
아란이와 혜란이와 같은 딸이라도 하나
있으면 가슴이 저리도록 공허한 고독을
잊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아이는
아무리 노력해도 소식이 없다.
미경은 아이들이 돌아가자 손수 커피를
끓여 마신 뒤 피아노의 건반을 고르기
시작한다.
양윤석은 송덕수와 함께 가락동 농수산물
시장으로 새벽 같이 계란을 팔러가서
아직도 돌아오지 않고 있다. 송덕수는 매주
월요일 새벽이면 일주일 동안 양계장에서
낳은 계란을 모아 가락동 시장으로 팔러
가는데 양윤석이 동행을 하는 것이다.
미경은 미친 듯이 피아노의 건반을
고른다. 어린이 피아노 소곡집이지만 한
권에 수록되어 있는 72곡을 모두 쳐본다.
어린이 피아노 소곡집에도 차이코프스키의
백조의 호수를 비롯해 포스터의
스와니강,가곡 오빠생각,민요
달아달아 밝은 달아까지 수록되어 있다.
미경이 정신없이 피아노의 건반을 고르고
있는데 전화벨이 울린다. 수화기를 들자
비닐 하우스에서 오이와 토마토를 재배하는
박완구()의 부인
이경선()이다. 막내 아들 귀빠진
날이라고 신랑과 함께 저녁을 먹으러
오라고 초대한다. 미경은 그러마 하고
대답을 한 뒤에 전화를 끊는다.
미경은 잠시 창 밖을 내다본다. 저 멀리
신작로에서부터 어둑어둑 땅거미가 깔려
오고 있다. 가을이라 볕이 짧다. 미경은
마당으로 나가 고춧잎을 거두어들인다.
양윤석은 사방이 캄캄해져서야 돌아왔다.
5 "늦었어요. "
개짖는 소리에 창 밖을 내다보다가
양윤석이 돌아오는 것을 발견한 미경은
마당으로 달려나가 양윤석의 가슴에 덥썩
안긴다. 양윤석이 남편이기 때문에 반가운
것인지 고적한 집에 사람이 나타나서
반가운 것인지 미경은 알 수 없다.
"에구 누가 보면 어쩔려구... "
양윤석은 기꺼운 표정으로 미경을 가슴에
안는다.
"이 깊은 산중에서 누가 보겠어요?"
미경은 응석을 부린다.
"산신령님이 보지 누가 봐?"
"산신령님 잠시만 눈을 감으세요. "
미경은 발뒤굼치를 들고 양윤석의 입술에
자신의 입술을 부볐다. 양윤석의 몸에서
희미하게 계란 냄새가 풍겼다.
"그건 뭐예요?"
양윤석의 손에는 작고 예쁜 상자가 들려
있었다.
"선물. "
"뭔데?"
"내복. "
"아이 좋아. "
미경은 다시 한번 양윤석의 입술을 찾아
자신의 입술을 부빈다. 양윤석도 두 손으로
미경의 둔부를 받치며 입술을 부빈다.
달이 떠올랐다.
둥근 보름달이었다.
미경은 양윤석의 팔짱을 끼고 초대받은
박완구의 집으로 향한다. 양윤석이 선물로
사온 브래지어와 팬티를 갈아 입은 탓에
착용감이 감미롭기까지 하다.
박완구의 집에는 벌써 마을 사람들이
몰려들어 떠들썩했다. 언제 왔는지
마당발이라는 면사무소의 새마을 계장
전상필도 아랫목에 앉아 웃음 보따리를
풀어놓고 있는 참이었다.
미경은 상 위의 음식부터 살폈다. 시골
음식이지만 상 위에는 갈비찜을 비롯해
닭도리탕,잡채,해파리,부친개,홍어회까지
풍성하게 차려져 있었다. 색색의 생일떡과
미역국도 있었다. 밥은 햅쌀이라 윤기가
자르르 흐르고 있었다. 고사리며
도라지,취나물 같은 산채도 입맛을 돋구고
있었다.
늦게 온 벌주라며 양윤석이 인삼주를 두
잔이나 마시는 동안 미경은 미역국부터 한
숟가락 떴다.
우스개 소리를 늘어놓고 있는 것은
뜻밖에 최현철의 부인 황윤정이었다.
얼굴이 불콰해진 것을 보면 이미 술까지 몇
잔 마신 모양이었다.
"어떤 여자가 과부 아들에게 시집을
갔는데 하루는 자고 일어나보니 시어머니가
대문에 남자의 그것을 그려 놓았더래요.
며느리가 보고 에그 망칙해라... 하고
재빨리 지웠더니 다음날은 시어머니가 조금
더 크게 그것을 그렸대요. 며느리는
망칙하다고 지우고 시어머니는 지우면 점점
더 크게 그리고... 하루는 며느리가 짜증이
나서 어머니 왜 자꾸 그것을 점점 크게
그려요?하고 항의를 했더니 시어머니
왈,얘야 왜 그 물건을 자꾸 지우니?그
물건은 건드리면 커지는 것이란다...
하더래요. "
황윤정의 말에 사람들이 박장대소를 하고
웃었다. 미경도 어처구니가 없어서 입을 헤
벌리고 웃었다. 맞아 그 놈은 건드리면
커지는 놈이지,글쎄 부창부수라니까...
하고 사람들이 웃자 최현철이 오히려
얼굴을 붉혔다.
박완구의 집을 나오자 달이 중천에 떠
있었다.
미경은 술에 취해 비틀거리는 양윤석을
부축하여 논둑길에 하얗게 깔린 달빛을
밟으며 집으로 돌아왔다.
"이 물건은 정말 건드리면 커지나?"
침대에 누웠을 때 미경이 양윤석의
사춤으로 손을 가져가며 웃음을 깨물었다.
미경이 이 곳에 처음 왔을 때 가장 견디기
어려운 것이 고독감이었다. 생일이나 제사
등 집안의 크고 작은 일을 빌미 삼아 서로
초대하지 않으면 하루종일 인적을 구경하지
못할 때도 있었다. 마을이래야 20호 남짓
퓸립여기저기 한 두 채씩 떨어져
있어서 쉬이 마실을 다닐 형편이 아니었던
것이다.
"한 번 건드려 봐. "
양윤석이 싫지 않다는 듯이 벙긋 웃었다.
"정말 커지네. "
양윤석의 사춤을 애무하던 미경이
키들거리고 웃었다.
"요게. "
양윤석이 몸을 일으켜 미경에게
포개왔다.
미경은 양윤석의 어깨 너머로 달빛이
부옇게 흐르고 있는 하늘을 쳐다보았다.
달이 신비스럽게 밝은 밤이었다. 뜰에서는
나뭇잎이 바람에 쓸려 다니는 소리가
스산하게 들리고 어디선가 개짖는 소리가
아련히 들려왔다.
! 양윤석의 호흡이 거칠어지기 시작하자
미경은 양윤석의 등을 꽉 껴안고 눈을
감는다. 미경의 감은 눈 위로 전 남편
김석호의 얼굴이 희미하게 떠오르고...
강한섭,채은숙,그리고 한경호와 이정란의
기구한 삶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진다.
아울러 수많은 사람들의 영혼을 짓밟은
파괴자 천달수와 이동일의 사악한 얼굴도
지나간다.
그들도 이제는 영혼이 되었을 것이다.
영혼.
영혼들.
구만리 멀고 아득한 황천()을 헤매고
있을 영혼들.
"우리도 아이가 하나 있어야겠어. "
양윤석이 문득 그녀의 귓전으로 뜨거운
입김을 불어 넣었다. 양윤석의 입에서
맛집에서 마신 인삼주의 쌉싸름한
냄새가 풍겼다. 미경은 그때서야 퍼뜩 눈을
떴다.
양윤석의 얼굴이 벌써 잔뜩 일그러져
있다.
"아이를 갖고 싶지 않아?"
"갖고 싶어요. "
"그럼 오늘 밤 아이를 하나 만들까?"
"네. "
미경은 다시 눈을 감고 두 다리를
허공으로 들어올린다. 그래 아이를 갖고
싶다. 눈이 큰 사내 아이도 좋고 깜찍하고
앙징맞은 계집아이도 좋으니 내 아이를
갖고 싶다.
가슴을 저미는 이 쓸쓸한 고독감에서
벗어나기 위해.
밤이면 저 어두운 벌판에서 들려오는
뽁껭스산한 바람소리를 듣지 않기
위해 내 아이를 갖고 갖고 싶어...
미경은 맑은 하늘에서 밝게 빛나는
달빛을 받아 안듯이 양윤석을 세차게
끌어안는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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