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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혼의 파괴자(2)

by Casey,Riley 2023. 6.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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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혼의 파괴자(2)

-이 수광 장편추리소설
 ----- 차 례 -----

제10장 별들의 전쟁
제11장 서울에는 봄이 없다.
제12장 영혼이 없다
제13장 길고 어두운 밤의 시작
제14장 울 밑에 선 봉선화야
제15장 산 자는 따르라

제10장 별들의 전쟁

1

미경은 컴퓨터 모니터에서 시선을 떼고
무겁게 한숨을 내쉬었다. 최종열의
소설에는 12. 12사태가 일어난 절박했던
순간들이 적나라하게 묘사되고 있었다.
미경은 계엄사령관을 사이에 두고 숨가쁘게
전개되었던 일들이 한국의 현대사를
얼룩지게 했다는 사실에 가슴이 뻐근했다.
12. 12사태는 그 사태에 관련된 사람들뿐
아니라 민초들의 삶에도 중대한 영향을
끼쳤던 것이다.
시간은 벌써 자정이 지나 있었다. 사방은
째깍거리는 벽시계의 초침소리가 들릴
정도로 밤이 깊어 있었다. 이제는
강변도로를 달리는 차량들의 엔진음도
조용해져 있었고 강건너 아파트단지도
차츰차츰 불빛이 꺼져 가고 있었다.
미경은 다시 컴퓨터 모니터로 시선을
떨어뜨렸다. 커서가 모니터의 한가운데서
수상스러운 몸짓으로 깜박거리고 있었다.
박태호가 보낸 파일이었다.

아내는 깊이 잠들어 있었다. 한경호는
피가 역류하는 듯한 기분을 느끼며 아내의
목으로 두 손을 가져 가다가 흠칫했다.
아내가 갑자기 몸을 뒤척이며 또 다시
잠꼬대를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한경호는
등줄기로 식은 땀이 흘러내리는 듯한
기분에 가슴이 철렁했다.
"우리는 죄를 받을 거야... "
오천사백육십 일().
총소요경비 황금 오백만 냥() 
아내가 얼굴을 잔뜩 찌푸리고
중얼거렸다. 한경호는 슬그머니 손을
거두어 들였다. 아내를 죽여야 한다고
생각했으나 겁이 덜컥 났다. 아내를
죽이려면 좀 더 치밀한 계획을 세워야
했다. 홧김에 준비없이 아내를 죽이게 되면
살인범으로 체포되는 것이다.
(아내를 살해하려면 완전범죄가 되어야
하는 거야. 홧김에 아내를 죽였다가는 내
신세만 망치게 되지. 이제 와서 부정한
아내를 죽이고 쇠고랑 찰 필요는 없어... )
한경호는 어금니를 깨물며 그렇게
생각했다. 아내를 살해하는 것이 어렵다면
저절로 죽어 주기를 바랄 수밖에 없는
것이다. 어차피 사랑을 하지 않는
아내니까. 이제는 돈도 생기고 권력도 잡게
되었으니 여자야 지천으로 널려 있다.
욕망이 일어날 때면 거리에 널려 있는
여자를 찾으면 될 것이다.
한경호는 침대에서 일어나 거실로
나왔다. 그는 갑자기 새벽이 오는 것을
보고 싶었다.
밖은 조용했다.
골목에서는 이따금 신문을 돌리는
소년들과 우유를 배달하는 청년들이 오가는
발자국소리가 들리고 있었다.

미경은 소설을 읽다가 말고 고개를
설래설래 흔들었다. 최종열의 소설에는
한경호와 이정란이 서로를 증오하고 있는
것을 그리고 있을 뿐 그 이유는 설명이
없었다. 그러나 부부 사이가 증오로 가득차
있어서 보기에 안타까웠다.
미경은 담배를 피워 물고 다시 소설을
읽기 시작했다.

정란은 전축을 크게 틀어놓고 청소를
하기 시작했다. 언제나 그랬듯이 주택가의
아침은 한가롭고 조용했다. 정란은 대충
청소를 마친 다음 커피를 끓여 마시며
음악을 들을 작정이었다. 그래도 심심하면
신문기자 부인을 불러 얘기도 하고
테니스를 치면 하루가 지나가는 것이다.
(내일이면 여주에서 김학규가
올라오니까... )
김학규를 생각하자 정란은 눈 앞에 빛의
입자들이 무수히 반짝이고 아랫도리에
나른한 감각이 사르르 밀려오는 것을
느꼈다.
신문기자의 부인과 테니스를 쳐서 그런지
몸이 한결 가쁜해진 기분이었다. 여자의
은 눈동자는
생명이 없는 잿빛몸이 피어 나는 것은 
남자가 먼저 안다는
말이 있듯이 김학규는 그녀를 안으면서
탄력이 더욱 좋아졌다고 말했었다.
(좋은 사람... )
정란은 입꼬리에 흐뭇한 미소를
매달았다. 김학규의 말을 듣고부터
테니스에 더욱 열중하게 된 것은 그의
사랑을 듬뿍 받고 싶어서일 것이다.
(어제도 또 글을 썼네... )
정란은 남편 한경호의 서재를 치우다가
책상 위에 수북히 쌓여 있는 타이프 용지를
보고 고개를 갸우뚱했다. 남편은 지난
겨울부터 밤을 새워가며 글을 쓰고 있었다.
그러나 무엇 때문에 글을 쓰는지 전혀
이해할 수 없었다. 남편은 언제나 찬바람이
불듯 냉랭하여 이런 얘기를 그녀에게
들려주지 않았다. 남편과의 사이는 이미
틈이 벌어질대로 벌어져 있어서 도저히
회복할 수가 없었다. 이제는 갈라서는
것만이 유일한 해결책이라는 것을 그녀도
남편도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남편도 그녀도 먼저 갈라서자는 말을
꺼내지는 않았다. 갈라서야 한다는 것을 잘
알면서도 막상 그 결심을 하면 두려운
것이다.
(우리는 그저 형식적인 부부야... )
정란은 남편이 무엇 때문에 그녀를
멀리하는지 전혀 알 수 없었다. 처음엔
남편에게 여자가 생겨서 그렇거니 했으나
자세히 관찰하자 그것도 아니었다. 남편은
아무 까닭도 이유도 없이 그녀를 싫어하고
있을 뿐이었다.
(내가 바람을 피우는 것을 눈치 챘기
때문이 아니야... )
정란은 자신도 모르게 입술을 깨물었다.
그녀가 바람을 피우게 된 것은 남편이
자신을 싫어 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고
나서의 일이었다. 그러므로 그녀가 바람을
피우는 것과 남편이 그녀를 증오하는
것과는 하등의 상관이 없는 것이다.
정란은 무겁게 한숨을 내쉬었다. 남편을
생각하자 가슴이 답답해 왔다. 그녀는
이따금 어디서부터 일이 잘못되었는지
생각해 볼 때가 있었다. 남편과 아내란
살을 맞대고 사는 부부였다. 그러나
언제부터인가 두 사람은 서로를 증오하는
일에만 몰두해 있었다. 물론 기이할 정도로
두 사람 다 그 사실을 겉으로 내색하지
않고 있을 뿐이었다. 아니 내색하지 않을
뿐 아니라 겉으로는 오히려 다정한
부부처럼 위장까지 하고 있었다.
가증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정란은 남편을 생각하다가 다시 김학규를
머릿속에 떠올렸다. 서울로 이사를
오고서부터는 일주일에 겨우 한 번밖에
만나지 못했으나 그를 만나는 즐거움은
언제나 변함이 없었다.
정란이 그를 처음 만난 것은 남편이
여주로 전출을 했을 때였다. 남편은
군인이라 자주 전출을 다녔고 그럴 때마다
정란도 남편을 따라 이사를 가야 했다.
정란이 남편을 따라 여주로 이사를 갔을 때
그는 정란에게 집을 소개해 주었었다. 그
무렵 정란과 남편은 이미 틈이 벌어질대로
벌어져 있었다. 남편은 무엇 때문인지 알
수 없었으나 매일 같이 술에 취해서
돌아왔고 그녀에게 이틀이 멀다하고
손찌검을 하였다.
 정란의 나날은 지옥 같았다.
어느 날 정란은 술에 취해서 손찌검을
하는 남편을 피해 집을 나왔었다. 어디로
가려고 정하지도 않고 집을 나오자 마땅히
갈 곳이 없었다.
그녀는 무작정 군청 뒤의 강가로
걸어갔다. 한겨울이었으나 강바람이라도
씌어야 답답한 속이 풀릴 것 같았다.
그녀는 여주 군청 뒤의 강가에 이르자 어둠
속에서 무릎을 쪼그리고 앉았다.
어둠 속에서도 강물은 무심하게 흘러가고
있었다.
그녀는 강물을 하염없이 응시했다.
남편에게 매를 맞고 살아야 하는 자신의
서러운 처지를 생각하자 눈물이 쏟아졌고
눈물이 주체할 수 없이 쏟아지면
치마자락으로 찍어내면서 강물을 응시했다.
 날씨는 차가웠다. 강건너 벌판에서는
바람이 윙윙거리며 몰아쳐 왔다. 그녀는
몸을 떨면서 울었고 울면서 강물에 뛰어
들어 자살을 할까 하고 생각했다. 강물이
그녀를 들어오라고 손짓하고 있는 것
같았다.
밤이라 강가엔 사람이 없었다. 그녀는
사람들의 눈치를 살피지 않고 가슴이
시원하도록 울었다. 그러자 마음이 한결
개운해 졌다.
그리고 그때부터 정란은 틈만 나면
강둑에 나가서 바람을 쐬었다. 남편에 대한
원망과 증오가 강바람을 쐬고 나면
말끔하게 가시는 기분이었다.
김학규를 만난 것은 그 강둑에서였다.
봄이었다. 햇살이 따스한 오전에 정란은
설거지를 마치고 무엇에 홀린 듯이
강둑으로 나왔다. 아이들을 학교에 보낸
탓에 집에 들어앉아 있어야 무료하기만
했고 봄이 되자 애정도 없는 남편을 떠나
어디론가 정처없이 여행을 하고 싶었다.
정란은 강둑을 따라 계속 걸었다. 날씨가
좋았다. 하늘엔 흰 구름이 두둥실 떠 있고
바람은 나무가지 끝에서 살랑거리고
있었다.
정란은 한참을 걸었다. 이런저런 생각에
잠겨서 정신없이 걷다가 사방을 둘러보자
여주 읍내에서 꽤 많이 벗어났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정란은 걸음을 돌리려다가 우쭐렁거리며
흐르는 강물에 시선을 던졌다.
그녀는 강가로 걸어 내려갔다. 강가에서
걸음을 돌려 읍내로 돌아오는데 낚시를
하는 사람이 눈에 띄었다. 정란은 낚시하는
첼"
명령을 받고,사람이 낯이 익다고 생각하면서 무심히
지나치려 했다. 그때 낚시를 하던 사내가
인기척을 느끼고 그녀를 돌아보다가 서둘러
일어나 아는 체를 하며 고개를 꾸벅했다.
"아니 여긴 왠일이세요?"
정란은 당황했다.
"그냥... "
그러나 인사를 받지 않을 수 없어서
정란은 입가에 어색한 미소를 그리며
고개를 숙여 보였다. 그가 누구인지 전혀
생각이 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저 아시겠어요?"
사내가 싱그러운 미소를 얼굴에 담뿍
그리며 물었다. 강가에서 보아서 그런지
그는 풀잎 냄새를 풍기는 것 같았다.
"글쎄요... "
정란은 난처하여 고개만 숙였다. 공연히
셈붉어지고 있었다.
"제가 집을 소개해 드렸죠. "
"아"
정란은 그때서야 짧은 탄성을 내뱉았다.
그는 뜻밖에 정란에게 집을 소개해 준
부동산업자였다. 그러나 부동산업자답지
않게 눈매가 부드럽고 따뜻했다. 이따금
바람에 나부끼는 포플라 잎사귀를 쳐다볼
때는 깊은 사색에 잠긴 듯한 인상을
풍기기도 해서 정란의 가슴을 저리게
하기도 했다.
"바람 쐬러 나오셨나요?"
"네. "
"참 아름다우시네요. "
그때 김학규가 눈부신 표정을 지었다.
"네?"
정란은 어리둥절했다. 여자로 태어나서
틘말을 들어본 것은 그때가
처음이었다.
"부인이 정말 아름다워요. "
"어머... "
정란은 얼굴이 확 달아올랐다. 그것은
칭찬이 분명한데도 정란은 얼굴이
화끈거리고 다리가 후들거려서 재빨리
고개를 숙였다.
"산책 나오셨나요?"
"네. "
"참 좋은 날씨죠?"
"네. 고기 많이 잡으셨어요?"
정란은 용기를 내어 김학규에게 말을
건넸다. 가슴이 방망이질을 하듯이
콩당거리고 뛰었다.
"어디 눈 먼 고기가 있어야죠. "
김학규가 머리를 긁적거렸다.
 "집은 살기 괜찮죠?"
"네. "
정란은 수줍게 대답했다. 낯선 남자와
얘기를 하는 것은 처음이었다. 물론 집을
살 때도 몇 마디 주고 받기는 했으나
그것은 사무적인 것일 뿐이었다. 그러나
김학규와의 의외의 만남은 정란의 가슴에
잔잔한 파문을 던지고 있었다.
그날은 그것으로 헤어졌다. 짧은
만남이었다. 그러나 정란의 가슴엔 자신도
알지 못하는 사이에 화사한 꽃물이 들고
있었다.
이튿날 정란은 다시 강둑으로 나갔다.
그러나 김학규가 낚시를 하고 있는
곳까지는 가지 않고 중간에서 되돌아왔다.
그녀의 마음 속 깊은 곳에서는 김학규가
있는 곳까지 가보자고 채근하고 있었으나
그녀는 그것이 부정한 일을 저지르는
일이라도 되는 듯이 억제했다.
그것은 다음날도 마찬가지였다.
그녀는 계속 강둑을 걸으면서도 일부러
김학규가 있는 곳까지 가까이 가지 않았다.
그러나 몸만 그 곳까지 가지 않았을 뿐
그녀의 마음은 늘 김학규에게 가까이 가
있었다.
그것은 참으로 이상한 일이었다.
그녀는 집에 있을 때도 김학규만
생각했다. 집에서 설거지를 하거나 빨래를
하면서 김학규의 얼굴을 떠올리고 흥건한
미소를 지었다. 김학규만 생각하면 그녀는
가슴이 쿵쿵거리고 뛰었다.
김학규를 다시 만난 것은 거의 일주일쯤
되었을 때였다. 그날은 안개 같은 비가
내리고 있었다. 먼 산에는 진달래꽃이
피고 들에는 봄풀이 파랗게
돋아나고 있었다.
그녀는 비가 오니까 김학규가 낚시를
오지 않았겠지 하는 생각으로 강둑을
걸었다. 그러나 김학규는 세우()가
안개처럼 내리는데도 남색 파카를 입고
낚시를 하고 있었다.
"나오셨군요?"
그녀를 발견한 김학규가 먼저 반색을
했다.
"네. "
정란은 살포시 미소를 짓고 가볍게
고개를 숙여 보였다. 김학규를 만나기
전까지는 그를 만나는 것이 불안했으나
막상 만나자 안도감이 들고 있었다.
"오늘도 나오셨네요?"
이번엔 정란이 주저하며 말을 건넸다.
"네... 실은 매일 같이 나왔습니다. "
"낚시를 아주 좋아하시나 봐요?"
"글쎄요... "
김학규가 하얀 이를 드러내놓고 싱그럽게
웃었다. 그의 머리에는 세우가 안개꽃처럼
묻어 있었다. 건강하고 아름다운
모습이었다. 정란은 그때 처음 남자도
아름다울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매일 같이 나오셨으면 일은 언제
하세요?"
"이사철이 벌써 지났어요. 그리고 집보러
다니는 분들은 대개 오후에 다니거든요. "
"네. "
정란은 우쭐렁대며 흐르는 강물로 시선을
던졌다. 김학규의 시선을 계속 받고 있기가
부끄러웠다.
"많이 잡으셨어요?"
"아뇨. 그냥 낚시를 드리우고 있을
뿐이었어요. "
"고기는 안 잡고요?"
"낚시가 어디 고기만 낚는 것인가요?"
"그럼은요?"
"세월도 낚고... "
그때 김학규의 눈이 빠르게 정란의 몸을
더듬었다. 정란은 김학규의 시선을
의식하고 몸이 나른하게 풀리는 기분을
느꼈다.
"낚시 걷고 점심이나 같이 하실래요?"
"아녜요. "
정란은 재빨리 고개를 흔들었다. 외간
남자와 얘기를 하는 것도 신경이 쓰이는데
점심을 같이 먹을 수는 없었다.
"읍내에 짜장면 잘하는 집이 있는데... "
김학규가 아쉬운 표정으로 말했다.
ㅆ갑자기 짜장면이 먹고 싶어졌다.
"다음에요. "
그러나 정란은 예의바르게 사양했다.
그날은 김학규와 한 시간이나 얘기를
하다가 돌아왔다. 그리고 집에 돌아오자
정란은 온 몸에 맥이 풀려 그대로 침대에
쓰러져 잠을 잤다. 김학규와의 만남이
이상하게 전신을 노곤하게 하고 기분 좋은
피로감에 젖게 하고 있었다. 게다가 정란은
잠을 자면서도 김학규의 꿈을 꾸었다.
그것은 참으로 달콤한 꿈이었다.
정란은 꿈 속에서 김학규의 품에 안겨
있었다. 김학규는 정란의 옷을 한 겹 한 겹
벗긴 뒤 정성스럽게 애무를 했고 정란은 그
애무를 기꺼워하며 몸부림을 쳤었다.
꿈에서 깨어나자 정란의 하체는 흥건히
젖어 있었다. 정란은 팬티를 갈아 입으며
그 꿈이 너무 생생하고 선명한데 다시 한번
놀랐다. 그리고 그 꿈에서 깨어난 것이
아쉬웠다.
그날 밤 정란은 남편에게 또 매를
맞았다. 남편은 반찬이 간이 맞지 않는다고
투덜거리기 시작하더니 그예 상을
뒤집어엎었다. 정란은 대꾸하지 않고 상을
치우기 시작했다. 그러자 남편이 대꾸도
하지 않는다며 정란의 머리채를 휘어잡고
휘두르다가 주먹질을 하였다.
정란은 입술을 깨물었다.
아이들은 저희들 방에 들어가 소리 죽여
울고 있었다. 남편은 아이들에게는
손찌검을 하지는 않았으나 아이들까지
미워하였다. 아이들도 남편이 미워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는지 한경호를
가까이 하지 않았다.
 남편이 그녀에게 발길질까지 하고 방으로
들어가자 그녀는 주방에 쪼그리고 앉아
소리없이 울었다. 그리고 시간이 오래 되자
벽에 기대어 잠을 잤다. 남편이 있는 방에
들어가 자고 싶은 마음이 추호도 없었다.
"엄마. "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작은 아이
소영()이 방에서 나와 울먹거렸다.
정란은 소영을 우두커니 쳐다보았다.
소영은 이제 국민학교 1학년이었다. 큰
아이 영철()은 국민학교 3학년으로 두
살 터울이었다.
"들어가서 자야지... "
정란은 서러운 눈빛으로 소영에게
말했다. 아이들에게 자신의 초라한 몰골을
보이는 것이 가슴 아펐다.
"엄마는... ?"
 "난 조금 있다가 들어가 잘께. "
"아빠가 무서워. "
"괜찮아. 너희들을 때리지는 않잖아?"
정란은 입술을 깨물며 소영을 달랬다.
소영은 정란이 몇 번이나 다독이며 달래자
마지못해 방으로 들어갔다.
정란은 다시 눈물이 주르르 흘러내렸다.
영철은 명색이 제 엄마가 매를 맞았는데도
나와 보지 않고 있었다. 아버지가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된 이후
영철의 성격이 이상하게 변해 있었다.
정란은 다시 잠을 청했다.
그녀가 눈을 뜬 것은 침실문이 열리는
소리 때문이었다.
"들어와. "
정란이 부시시 눈을 뜨자 남편이 침실문
앞에 서 있었다. 정란은 가슴이 철렁했다.
 정란은 엉거주춤 몸을 일으켰다. 남편의
말에 따르지 않았다가는 또 매를 맞게 되는
것이다.
정란이 침실로 들어서자 남편이 그녀를
휙 침대로 밀어붙였다. 그녀는 침대 위로
벌렁 쓰러졌다. 그러자 남편이 허겁지겁
달려들어 마치 겁탈을 하듯이 그녀를
덮쳤다.
(짐승 같은 인간)
정란은 속으로 치를 떨었다.
그러나 손찌검을 일삼는 남편에게 저항할
수는 없었다.
남편은 난폭하게 그녀의 치마를 걷어
올리고 속옷을 벗겼다. 그리고는 함부로
그녀를 짓이기기 시작했다. 그녀는
모멸감을 느꼈으나 고개를 외로 돌리고
저항하지 않았다. 오히려 남편의 난폭한
행동을 기꺼워하는 표정으로 입을 벌리고
신음소리를 내뱉았다. 그러나 그녀의 머리
속에는 오로지 김학규만 어른거리고
있었다.
이튿날 정란은 다시 김학규를 찾아 갔다.
그리고 김학규의 제안에 따라 여주 읍내의
허름한 중국집에서 점심을 같이 먹었다.
그것은 다음 날도 마찬가지였다. 정란은
또 다시 남편에 대한 반발로 김학규를
찾아가 점심을 같이 먹었다. 망설임이나
후회 같은 것은 전혀 없었다. 오히려
그날은 김학규와 다방에 가서 커피까지
마셨다.
그렇게 닷새째 되던 날 정란은 김학규와
여관을 찾아가 살을 섞었다. 점심 때
중국요리를 먹으면서 술을 마신 탓도
있었으나 그녀의 마음 속 깊은 곳에서는
이미 김학규가 자신의 남자이기를 간절하게
바라고 있었던 것이다.
그것은 마음이 허락한 뜨거운
결합이었다. 남편에게서 짐승 같은 모욕을
받으면서 결합을 했던 것과는 전혀 달랐다.
남편과 결합을 할 때는 초조하고 수치심만
느꼈으나 마음이 허락한 김학규와의 관계는
황홀하기만 했다.
어쩌면 그것은 눈부심이었다. 정란은
참으로 오래간만에 불꽃처럼 타올랐다.
김학규와의 관계가 그녀를 여자로서
새롭게 태어나게 하고 있었다. 그녀는
김학규와 관계를 할 때마다 뜨거운
몸짓으로 새처럼 비상했다.
그것이 벌써 5년 전의 일이었다. 그녀는
아직도 김학규를 계속 만나고 있었다. 이제
김학규와의 만남은 단순한 불륜이 아니라
정란에게는 생의 의미가 되고 있었다.
정란은 다시 남편의 타이프 라이터
용지에 시선을 멈추었다.
(한번 읽어 봐야지... )
정란은 타이프 용지를 집어들었다.
얼음처럼 차갑고 냉랭한 남편이 무엇
때문에 이런 것을 쓰고 있는지 살펴보고
싶었던 것이다.
정란은 책상에 앉아 남편이 쓴 글을 읽기
시작했다.

전두환 보안사령관은 대통령 재가가
실패로 돌아가자 계획대로 병력을 동원하기
시작했다. 그는 참모총장 연행을 하면서
총격전이 벌어져 육본이 비상상태에
돌입했다는 것을 허화평 비서실장으로부터
보고를 받고 초조했다. 최규하 대통령은
한사코 참모총장 연행에 대한 재가는
국방부 장관의 보고를 들어야만
허락하겠다고 버티고 있었다.
총리 공관을 경비중인 경호대는 이미
비상상태에 돌입해 있었다. 청와대
경호실은 차지철의 죽음으로 제 기능을
발휘하지 못하고 있었고 군통수권자인
최규하 대통령의 경호는 기존 병력 외에
육본에서 파견한 헌병 20명이 맡고 있었다.
경호대의 대장은 1사단 헌병대장인
구정길() 중령이 임명되어 있었다.
"총장님이 납치되었다는데 알고 있나?"
구 중령은 7시40분 경에 육본 김진기
헌병감의 전화를 받았다.
"예. 방금 전통을 받고 비상을
걸었습니다. "
"합수부장이 거기에 있나?"
합수부장은 합동수사본부장을 말하는
것이었다. 전두환 보안사령관이 겸직을
하고 있었다.
"예. 한 시간 전에 들어왔는데 대통령
각하에게 보고중입니다. "
"무슨 보고야?"
"무슨 내용인지는 모르겠습니다. "
"아무튼 근무 철저히 해사태가 심상치
않아"
"예. "
김진기 헌병감은 10분 후에 다시 전화를
걸어왔다.
"전 장군이 아직도 거기 있나?"
"예. "
"구 중령총장님을 납치한 것이 보안사의
짓이 분명한 것 같다. 이 일을 최광수
비서실장에게 알려서 대통령 각하에게
린하라"
"알겠습니다. "
구 중령은 김진기 헌병감의 전화를 받자
즉시 최광수 실장에게 보고했다. 그러나
최광수 비서실장이 최규하 대통령에게
보고했는지는 알 수 없었다. 구 중령은
최광수 비서실장에게 참모총장이
보안사측에 연행된 것 같다는 보고를 한 뒤
경호대 막사로 급히 돌아왔다. 그러자
김진기 헌병감으로부터 세 번째 전화가
걸려왔다.
"구 중령인가?"
"예. "
"총장님이 납치되었다고 대통령 각하에게
알렸나?"
"최광수 비서실장에게 알렸습니다. "
"좋다. 그럼 내가 지시하는대로 할 수
있겠나?"
"예. "
"보안사령관을 검거할 수 있겠나?"
"예. 할 수 있습니다. "
"좋아. 그럼 다시 연락할 때까지 체포할
준비를 하고 기다리라. "
"알겠습니다. "
구 중령은 보안사령관 체포 준비를 하고
김진기 헌병감의 전화가 오기를 기다렸다.
그러나 김진기 헌병감의 전화는 두 번 다시
걸려오지 않았다.
전두환 사령관은 최규하 대통령으로부터
재가를 받기 어렵게 되자 총리공관을
서둘러 빠져 나왔다. 총리공관은 이미
고명승() 대령에 의해 외곽이
삼엄하게 포위되어 있었다. 고명승 대령은
30단 단장인 장세동 대령으로부터 전두환
장군이 총리 공관으로 들어갔으니 보호를
해야 한다는 연락을 받고 총리 공관으로
달려왔었다. 그러나 총리 공관은 이미
경비가 철통같았다.
고명승 대령은 장세동 대령과 연락을 한
뒤 청와대 경호 병력의 지원을 받아 총리
공관을 포위했다. 구 중령이 전두환
사령관을 체포했으면 총리 공관 경비병과
청와대 경비병들 사이에 총격전이 벌어질
수 있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김진기
헌병감으로부터 아무 연락이 없는 바람에
전두환 사령관은 총리 공관을 빠져나가
경복궁에 도착했다.
경복궁에 모여 있던 장군들은 전두환
장군이 도착하자 어떻게 되었느냐고
다급하게 물었다. 모두들 초조한 기색이
역력했다.
 "각하께서 재가를 보류하고 계십니다. "
전두환 사령관의 얼굴은 창백하게 굳어
있었다.
"재가를 보류하다니?"
"국방부 장관의 건의가 있어야만
재가하겠다고 하십니다. "
"그럼 장관을 불러야겠군. "
"장관이 행방불명입니다. "
전두환 장군의 말에 모두들 침통한
표정이 되었다. 상황은 합수부측에
불리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육본에서는
이미 비상령을 내린 상태였고 수경사의
장태원 사령관은 경복궁에 모인 장군들을
탱크로 밀어버리겠다고 위협을 하고 있는
처지였다. 우물쭈물하다가는 돌이킬 수
없는 위험한 상황에 처하게 되는 것이다.
"우리 쪽에서도 서둘러 대책을 세워야
할텐데 장관이 없으니 큰일이군... "
"각께서는 총장의 연행을 저 혼자의
의견으로 생각하고 있는 듯합니다. "
전두환 장군은 볼멘 표정으로 장군들을
쳐다보았다. 좋은 의견들이 있으면 말해
달라는 표정이었다.
"그렇다면 우리 모두가 총리공관에 가서
재가를 요청하기로 합시다. "
황영시 중장이 비장한 어조로 제의했다.
장군들이 대통령에게 집단으로 건의하자는
뜻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표면적으로는
건의였으나 사실상 군통수권자인 대통령을
위협하자는 의미를 함축하고 있었다.
"좋습니다. 모두 함께 가시지요. "
전두환 장군은 노태우 소장과 박준병
소장을 경복궁에 남게 하고 5명의 장군들과
함께 삼청동 총리 공관으로 향했다.
총리공관은 이미 고명승 대령이 외곽을
삼엄하게 통제하고 있었다. 그뿐 아니라
청와대 경호실장 직무대리 정동호()
준장도 총리 공관으로 급히 달려와 있었다.
정동호 준장은 이미 합수부쪽에 가담해
있었다.
"여기 경호대장이 누군가?"
정동호 준장은 구 중령을 불렀다.
"접니다. "
"나는 대통령 경호실의 정동호 준장이다.
보안사령관이 파견해서 왔다. "
"수고 많으십니다. "
구 중령은 정동호 준장에게 거수경례를
했다.
"보안사령관의 지시로 지금부터
대통령각하의 경호 임무를 우리가 맡는다.
귀관은 경비 업무를 우리에게 인계하고
즉시 철수하라. "
"저희는 계엄사령관의 지시를 받고
있습니다. 계엄사령부에서 임무 교체
명령이 떨어지면 그대로 이행하겠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명령이 떨어지지 않아 그
임무를 포기할 수 없습니다. "
구 중령은 단호하게 거부했다. 이미
전두환 보안사령관의 체포 명령이 떨어져
있는 상황에서 그들의 지시를 이행할 수가
없었다.
"대통령 경호실에서 대통령을
경호하겠다는데 무엇이 잘못인가?"
고명승 대령이 구 중령에게 위협적인
말투로 내뱉았다.
"안됩니다. "
"비상령이 내려져 있는데 대통령 숙소에
경호실 병력이 배치되는 것은 당연한
일이야. 여러 소리 말고 이행하라"
"절대로 그렇게 할 수 없습니다"
"뭐야?이 친구 말로 해서 안되겠군...
야체포해"
정동호 준장이 뒤를 돌아다보고 외치자
청와대 경호 병력이 재빨리 권총을
뽑아들고 구 중령에게 달려들어 무장을
해제하고 경비숙소에 가두었다. 초소에
있던 헌병 2명과 경찰 2명도 순식간에
무장해제를 당하여 숙소에 갇혔다. 이렇게
하여 대통령 숙소인 총리 공관이 불과
5분도 안되어 반란군에게 장악되었다.
전두환 장군이 나타난 것은 이들이 총리
공관을 완전히 장악한 뒤였다.
"어떻게 되었어?"
"장악했습니다. "
"잘했어. "
"공관엔 국무총리도 들어와 있습니다. "
"안내해. "
"예. "
전두환 장군과 5명의 장군들은 전투복
차림에 권총을 허리에 찬 채 정동호 준장의
안내로 접견실로 들어갔다. 공관 접견실은
6명의 장군들이 들어서자 숨막히는
분위기로 돌변했다. 전두환 사령관은
최규하 대통령에게 장군들을 일일이
소개했다. 모두들 수도권의 중요 직책을
맡고 있는 장군들이었다.
"대통령 각하께 경례"
"충성"
장군들은 일제히 거수경례를 했다.
최규하 대통령은 의연한 모습으로 집무실
상석에 앉아 있었다.
"각하. 재가를 꼭 해주셔야 합니다.
시간이 지연되면 걷잡을 수 없는 사태가
발생합니다. "
"...... "
"정승화 총장이 박정희 대통령 시해에
관련된 것은 틀림없습니다"
"정 총장을 조사하지 않으면 군의
지휘체계가 우스운 꼴이 됩니다. 병사들의
동요를 막을 수 없을 것입니다"
장군들은 다투어 최규하 대통령에게 사후
결제를 요구했다. 그러나 최규하 대통령은
단호하게 거부했다.
"나는 조금 전에 육본으로부터 총장이
연행되었다는 보고를 받았소. 보안사의
사령관이 비록 합동수사본부장을 겸직하고
있다고 하지만 이것은 명백한 월권행위요.
게다가 사후결제 요구는 정상적인 경로를
밟지 않고 올라온 것이니만큼 결제를 할 수
없소. "
최규하 대통령은 장군들의 위압적인
태도에도 굽히지 않았다.
"각하. 정 총장을 조사해야 한다는 것은
수도권의 장성들이 모두 동의하고 있는
사실입니다. 지금 각하께서 재가해 주시지
않으면 이 나라는 큰 혼란이 일어납니다.
각하께서는 아군끼리 피를 흘리는 싸움이
일어난다는 사실을 아셔야 할 것입니다.
육본에서는 지금 우리를 체포하기 위해
병력을 동원하고 있고 우리도 그에
대항하기 위해 병력을 동원할 것입니다.
아군끼리 충돌이 일어나서 서울이 불바다가
되면 각하께서도 책임을 모면할 수 없을
것입니다"
장군들의 말을 듣고 있던 대통령의
얼굴에 은은한 노기가 서렸다.
 "당신들 말만 듣고 총장 연행을 재가할
수 없소이 사태의 책임자 얘기를 듣고
결재할 테니 장관을 불러오시오"
대통령은 언성을 높였다. 대통령의 손이
노기로 부르르 떨리고 있었다.
"각하. 참고로 말씀드립니다만은 공관
주위에 경호 병력을 늘렸습니다. 육본에서
파견한 구 중령을 무장해제하고 청와대
경호실 병력으로 대체했습니다"
"누가 그런 지시를 했소?나를 연금하는
거요?"
"모두 대통령 각하의 안전을
위해서입니다. "
"돌아들 가시오장관이 오기 전에는
절대로 결재하지 않겠소"
대통령은 장군들을 돌려보냈다. 전두환
장군을 비롯해 합수부에 가담한 장군들은
도리없이 총리공관을 물러나올 수밖에
없었다.
전두환 사령관은 서둘러 보안사령부로
귀대했다. 최규하 대통령의 태도로 보아
총장 연행에 대한 재가를 받기는 틀린
일이라고 생각했다.
보안사령부는 전군의 움직임을
손바닥처럼 파악할 수 있는 통신시설을
갖추고 있었다. 정탁영()
보안1처장은 보안처장실을 통신시설을
바탕으로 상황실로 바꾸어 운영하고
있었다. 보안사의 통신실은 군 내부의 보안
유지와 쿠데타 음모를 방지하기 위해 군의
움직임을 소상히 파악할 수 있는 시스템을
갖고 있었다. 보안사는 군 부대의 통신을
도청까지 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전두환 사령관이 보안사로 돌아오자
육본의 움직임이 즉시 보고되었다. 육본은
이미 9공수 여단에 출동 명령을 내린
상태였으며 26사단과 수도 기계화사단까지
출동 준비를 하고 있는 것이 감지되었다.
상황은 긴박했다.
밤 10시가 되자 경복궁으로 탱크의
요란한 캐터필러소리가 들려왔다.
33경비단의 전차부대가 필동의
수경사령부로 이동하는 소리였다. 경복궁에
모여 있던 장군들은 아연실색했다.
"이게 무슨 소리야?"
"전차소리입니다"
"이 근처에 전차부대가 있나?"
"33경비단에 전차 1개 중대가 있습니다.
그들이 출동한 것 같습니다. "
장세동 대령의 말에 장군들은 얼굴이
핼슥해졌다.
"놈들이 우리를 진압하기 위해 출동한
것이 아닌가?"
"확인해 보겠습니다. "
장세동 대령과 김진영 대령이 급히
전화로 부대 이동 상황을 파악하기
시작했다. 이내 보안사의 예하부대로부터
보고가 올라왔다.
"필동으로 가는 전차부대랍니다. "
"필동이면 수경사 아니야?"
"그렇습니다. "
"수경사에 전차부대가 배치되면
안돼누가 나가서 전차부대를 돌려보내"
"제가 나가겠습니다"
노태우 장군의 말에 김진영 대령이
찢차를 몰고 광화문으로 나갔다. 광화문은
전차 12대가 지축을 울리며 필동을 향해
가고 있었다. 전차부대의 지휘관은
차기준() 중령이었다.
"어디로 가는 건가?"
김진영 대령은 찢차로 전차부대를
가로막았다.
"수경사로 갑니다. "
"보안사령관의 지시다. 즉시 회군하라"
"회군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수경사의
예하부대입니다. "
"오늘 사태는 총장을 연행하는 과정에서
일어난 오해다. 대통령께서 결재하셨으므로
공연히 병력을 이동하는 것은 큰 실수를
하는 것이다. 수경사는 상황을 잘못
파악하여 아군끼리 싸우려고 한다자네는
우리 국군을 전차로 깔아뭉갤 작정인가?"
"일단 수경사로 들어가려는 것입니다. "
"빨리 돌아가라"
"총장 연행은 합법적인 것입니까?"
 "그걸 말이라고 하나?수경사로 가려면
나를 밀어버리고 가라"
김진영 대령의 단호한 태도에 차기준
중령은 마음이 움직여 전차부대를
회군시켰다. 12. 12사태가 또 한번 큰
파도를 일으키며 굽이친 순간이었다.
보안사 보안처장실에는 육본의 출동
명령이 계속해서 통신망을 통해
입수되었다. 육본은 수도권의 주요부대에
계속해서 출동 명령을 내렸으나 보안사는
그 명령이 끝나고 나면 출동을 준비하는
부대에 출동을 하지 말라는 저지 명령을
내렸다. 보안사는 각 부대에도 보안부대가
있었고 각 부대의 보안부대장들은
일사분란하게 출동을 저지시켰다.
정영탁 보안처장과 허화평 비서실장은
전화통에 매달리다시피 하며 하나회 조직과
육사 선후배를 동원해 출동하려는
부대장들을 설득했다. 전두환 보안사령관도
후배 장교들을 직접 설득했다. 장군들은
대부분 합수부쪽에 가담해 있었고 부대의
각 부대를 지휘하는 영관급 핵심 장교들은
대부분 하나회에 가담해 있는 실정이었다.
전두환 보안사령관은 일단 육본쪽의 병력
출동을 저지하게 되자 육본과 국방부를
점령하라는 지시를 1공수 여단에 내렸다.
1공수 여단은 정병주 특전사령관의
예하부대였으나 박희도 여단장이 이미
합수부쪽에 가담해 있었다.
"1공수를 출동시켜라목표는 육본과
국방부"
보안사령관의 지시는 즉시 1공수 여단에
하달되었다. 특전사는 4개 공수 여단이
서울 일원에 주둔하고 있었으나 1.
,5공수여단은 합수부에 넘어가 있었다.
"알겠습니다"
박희도 여단장은 보안사령관의 지시를
부여단장 이기룡() 대령에게
하달했다.
"대대장들 집합"
이기룡 대령은 여단장의 명령이 떨어지자
즉시 대대장들을 집합시켰다. 1공수 여단엔
금세 팽팽한 긴장감이 감돌았다.
"지금부터 전 여단이 육본을 향하여
출동한다. 육본을 점령하는 것이 우리의
임무다각 대대장들은 특전사의 명령을
듣지 말고 내 명령에만 따라라. 알겠나?"
"옛"
대대장들이 일제히 상기된 얼굴로
대답했다.
"좋다즉시 출동하라"
이기룡 대령은 대대장들에게 출동 명령을
내렸다. 1공수 여단은 이기룡 부여단장의
명령이 떨어지자 즉시 출동 준비에 나섰다.
병사들에게 비상 출동 명령이 내리고
차량이 속속 동원되었다. 병사들에게는
실탄이 지급되었다.
"1공수가 출동 준비를 하고 있다. 목표는
육본이다"
1공수 여단이 출동 준비에 들어갔다는
다급한 상황이 육본에 보고된 것은
12월12일 밤 9시 45분이었다. 육본
지휘부는 당황했다. 육본 지휘부는
9시쯤부터 비상령을 하달하여 전군
지휘관들에게 부대 장악을 철저히 하라고
지시했었다. 그러나 1공수 여단이 출동
준비에 들어갔다는 보고가 들어오자
대경실색하여 대책 마련에 부심했다.
1공수 여단은 출동 준비 명령이 떨어진지
15분만에 1개 대대를 선두로 여단 정문을
나섰다.
"1공수즉시 철수하라"
육본은 1공수 여단의 출동을 중지할 것을
강력히 지시했다. 특전사령부도 예하부대인
1공수 여단의 부대복귀를 계속해서
명령했다.
"1공수의 출동은 명백한
반란이다너희들은 반란군이 되려고
하는가?"
육본의 작전차장 이병구() 준장도
필사적으로 1공수 여단을 설득했다.
"우리는 여단장의 지시를 받고 있습니다.
"
"여단장과 연락이 되었다. "
이병구 준장은 1공수 여단의 여단
꼍퓐전통을 때렸다.
"정말입니까?"
"즉시 1공수를 복귀시켜라"
"알겠습니다"
1공수 여단 상황실은 이기룡
부여단장에게 부대 복귀를 지시했다.
이기룡 부여단장은 상황실에서 명령이
떨어지자 신월동까지 진출했다가 부대로
되돌아갔다.
육본은 그 틈에 지휘부를
수도경비사령부로 옮겼다. 육본에는 얼마
안되는 경비병들뿐이어서 육본을 방어할
병력이 없었다. 합수부쪽에서 대규모의
병력을 동원하면 대항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윤성민 참모차장은 3군 예하의 26사단과
수도기계화사단에 출동 준비 명령을
내렸다. 수도권에는 4개 충정사단이
있었다. 특히 20사단은 육본의 계엄 중앙
기동예비부대로 남한산성과 태릉에
주둔하고 있었으나 사단장 박준병 소장이
합수부쪽에 가담하여 동원할 수 없었다.
장태원 사령관과 정병주 사령관은 1공수
여단을 저지할 병력으로 특전사의 9공수
여단을 지목했다. 수경사 휘하의 30단과
33단 병력이 합수부에 넘어가 있는
상황이라 동원할 수 있는 병력이 9공수
여단뿐이었다.
육본에서도 이병구 준장이 9공수의
출동을 요청했다.
"9공수9공수는 육본으로 출동하라"
"무슨 일인가?"
"총장님이 납치되었다. 불순한 병력이
육본을 점령하려고 하니까 속히 출동하여
자는 좋고 저 남자는 싫다고 가릴 게
뭐람 하는 생컥갰뼈방어하라"
"그런 출동 명령은 받을 수 없다. 정식
지휘 계통의 명령을 받아야 출동한다"
"지금 그따위 문제를 따질 겨를이 어디
있는가?"
"차량도 지원해 주어야 한다"
"무슨 소리야?"
"우리 부대에는 1개 대대를 수송할
차량밖에 없다"
"좋다"
이병구 준장의 전화에 이어 특전사
정병주 사령관의 전화가 걸려왔다.
"여단장 바꿔!"
"접니다!사령관님!"
윤흥정() 준장은 부동자세로
대답했다. 정병주 사령관은 직속
상관이었다.
"1. 3. 5 여단장 놈들이 배신을
했다!병사들에게 실탄을 지급하고 즉시
출동시켜라!"
"알겠습니다!"
윤 여단장은 전화를 끊고 비상 출동
준비를 시켰다. 대대장들을 집합시키고
차량을 동원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9공수
여단을 수송할만한 차량이 없었다.
"여단장!아직까지 출동하지 않고 뭘하고
있어?"
정병주 사령관은 9공수 여단의 출동이
늦어지자 전화로 불호령을 내렸다.
"지원 차량이 도착하지 않았습니다!"
"야!지금 제 정신이야?"
"예?"
"지금 우리 상황이 어떻게 되었는지
알아?차량이 준비된 병력부터 빨리
출동시켜!"
"알겠습니다!"
윤흥정 준장은 정병주 사령관의 명령이
떨어지자 9공수 여단의 1개 대대 병력을
먼저 출동시켰다. 자신은 여단에 상황실을
설치한 뒤 직접 부대를 이끌었다. 9공수의
출동 루트는 경인고속도로를 지나 영등포와
노량진을 거쳐 한강대로를 지난다음 곧
바로 육본으로 진입하게 되어 있었다. 심야
시간대이므로 40분이면 육본에 도착할 수
있었다.
합수부는 9공수가 육본을 향해
출동했다는 보고를 접수하자 바짝
긴장했다. 육본쪽에 전화를 걸어 피아간에
병력을 출동시키지 않는다는 약속을 하고
병력을 철수시킬 것을 요구했다.
육본에서는 윤성민 참모차장이 이들과
통화하여 병력을 동원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했다.
9공수 상황실에는 병력을 복귀시키라는
전화가 빗발치기 시작했다. 그들은 대부분
합수부쪽 장교들이었다. 전두환 사령관은
9공수가 출동했다는 보고를 받자 얼굴이
창백하게 변했다. 9공수가 출동을 하면
대규모의 군사 충돌이 일어날 것은 불을
보듯 뻔한 일이었다.
9공수 여단 상황실은 전화가 쇄도하여
정신이 없을 정도였다. 그러나 대부분
신분을 밝히지 않고 병력을 철수시키라는
전화였다. 어떤 장군은 상황실장인 9공수
참모장 신수호() 중령에게 마구 욕을
하면서 협박을 하기까지 했다.
9공수의 5대대가 윤흥정 부여단장과
대대장 주원탁() 중령의 지휘로
정문을 나선지 10분쯤 되었을 때 성판을 단
찢차가 맹렬한 속도로 달려왔다.
신수호 중령은 재빨리 정문으로
달려나갔다. 성판이 선명한 찢차를 타고 온
사람은 윤흥정 준장이었다.
"야!무엇 때문에 돌아오라고 무전을
쳤어?"
윤흥정 준장은 신수호 중령에게 벌컥
화를 냈다.
"아닙니다. 그런 지시를 내린 적이
없습니다!"
"뭐야?무전을 치지 않았다는 말이야?"
"예!"
"어떤 놈이 장난을 쳤군!야!상황실
장교한테 정신 똑바로 차리라고
말해!도대체 어느 놈 지시를 받는 거야?"
"알겠습니다. 부대로 돌아가시면 저도 곧
바로 뒤따라 가겠습니다!"
신수호 중령은 윤흥정 준장을 부대로
돌려보냈다. 그러나 상황실로 무전이
빗발치고 있었다. 그 중에는 육본의 윤성민
참모차장의 무전도 있었다. 윤성민
참모차장은 아군끼리의 대규모 충돌이
일어나면 서울이 불바다가 된다고 병력
복귀를 지시하고 있었다.
신수호 중령은 병력의 복귀를 지시했다.
윤흥정 준장도 참모차장의 복귀 지시가
내려오자 경인고속도로까지 진출했다가
부대를 철수시키고 말았다. 특전사의
정병주 사령관과는 연락이 두절되어
있었다.
그러나 그 시간 합수부쪽 병력은 육본과
병력을 동원하지 않기로 약속을 하고서도
서울을 장악하기 위해 출동하고 있었다.
박희도 준장의 1공수 여단은 행주대교를
건너고 있었고 최세창 준장의 3공수 여단은
직속 상관인 정병주 사령관을 체포하기
위하여 특전사 사령부로 물밀 듯이
쳐들어가고 있었다.
3공수 여단이 특전사를 점령한 것은 마치
특공작전을 연상할 정도로 전광석화 같은
것이었다. 12월12일 밤 11시 50분
경이었다.
장지동에 있는 특전사 사령부에 소형
군용트럭이 맹렬하게 질주해와 우측문 앞에
멎었다. 3공수의 제15대대 병력으로
대대장은 박종규() 중령이었다.
그들은 특전사 앞에 도착하자 M16으로
무장한 선발대 10명을 먼저 뛰어내리게
했다.
선발대는 번개처럼 달려가 우측문에서
보초를 서고 있던 하사에게 달려가 주먹을
내질렀다.
"끽 소리 말고 있어!"
"안에 연락하면 죽을 줄 알아!"
하사는 공수부대의 사나운 주먹에 턱을
얻어맞고 통신대 교환실로 피해 갔다.
15대대 병력은 저항을 받지 않고 특전사
사령부 안으로 쇄도해 들어갔다. 그들은
특공작전을 벌이듯이 1층 건물 안으로
달려들어가 사령관실이 있는 2층을 향해
뛰어 올라가며 일제히 사격을 해댔다.
수경사령부가 있는 필동은 도심중의
도심이었다. 한밤중에 콩을 볶듯 요란한
총소리가 나자 시민들은 잠자리에
들려다가말고 우왕좌왕했다. 파출소로 무슨
일이냐는 전화가 빗발쳤고 불안한 눈빛으로
수군거렸다.
 15대대 병사들은 2층까지 거침없이 밀고
올라갔다. 그러나 사령관실은 문이 굳게
잠겨 있었다. 박 중령은 문에다 사격을
하라고 지시했다. 병사들이 일제히 문을
향해 M16을 발사했다. 총성이 요란하게
울려 퍼졌다. 안에서도 누군가 권총으로
응사했다. 15대대 병사들이 그 권총에 의해
부상을 당했다.
공수부대원들은 눈에 핏발이 섰다.
그들은 문을 향해 또 다시 M16을 집중
발사했다.
이내 문이 부서져 나갔다. 권총소리도
그쳐 있었다.
병사들이 문을 걷어차고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그 곳은 집무실의 내실로 통하는
좁은 복도였다. 통로에 김오랑()
소령이 쓰러져 있었다.
 "들어가!"
"빨리빨리 들어가!"
공수부대의 장교가 내실로 통하는 문을
열어 보았다. 그러나 그 문도 잠겨 있었다.
장교들이 그 문을 향해 권총을 발사했다.
안에서도 누군가 권총으로 응사해 왔다.
그러나 이내 조용해 졌다. 박 중령이 내실
문을 발로 차고 들어갔다. 정병주 사령관은
총상을 입고 쓰러져 있었다.
"이 놈들!"
정병주 사령관은 눈을 부릅떴다. 그러나
곧 총상에 의한 출혈이 심해 혼절했다.
박 중령은 신음하는 정병주 사령관을
끌고 나와 지프에 태워 서빙고 분실로 끌고
갔다.
정병주 특전 사령관이 부하들에게
연행되고 있을 때 필동의 수경사
사령부에는 긴박감이 감돌고 있었다.
장태원 사령관은 합수부를 진압하기 위해
방패사단인 26사단과 수도화기계사단의
출동을 요구하려고 했으나 부대의 이동을
승인권자인 노재현 국방장관의 행방을 알
수 없어 부대를 출동시킬 수 없었다.
장태원 사령관은 사령부 내의 장교들을
기밀실로 비상 소집했다. 그때까지도
사령부에는 장교들이 60 여 명이나 남아
있었다.
"모두 모였나?"
"예. "
"좋아. 그럼 내 말을 명심해 듣기
바란다. "
장태원 사령관은 비장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여러분!여러분은 나와 생명을 같이할
동지들이오!여러분이 우리
수도경비사령부의 충성스러운 간부들이라는
것은 여러분이 여기 이 자리에 있다는 그
사실 하나로 증명되고 있소. 우리
사령부에는 약 450명의 장교들이 있었으나
많은 장교들이 경복궁에서 국가반란을
모의하는 무리들에 가담하여 이제 우리를
향해 총부리를 겨누고 있소. 참으로
통탄하기 짝이 없는 일이오!이 모든 것은
사령관인 나의 책임이겠으나 부임한지 24일
밖에 되지 않아 우리 부대의 더러운 암적
존재들을 제거할 여유가 없었기 때문이오.
천지신명께 맹세하지만 이들과 생사를
같이할 수 없소. 이제 최후의 명령을
하달할 것이니 동지들은 국가를 위해
최선을 다해 주기 바라오!"
장태원 사령관은 비장한 어조로 열변을
토한 다음 최후의 전투 명령을 내렸다.
"첫째,제30경비단장,33경비단장
헌병단장은 보는 즉시 사살하거나
체포하라!"
30경비단장은 장세동 대령이었고
33경비단장은 김진영 대령,헌병단장은 조홍
대령이었다.
"둘째. 지금 제30경비단에는 전두환
보안사령관을 비롯하여
차주헌,유학성,황영시 중장과
노태우,박준병 소장,그리고 백운택 준장이
반란을 꾀하고 있다. 이들은 반란군이니
보는 즉시 사살하거나 체포하라!"
장태원 사령관의 명령은 서릿발 같았다.
수경사 사령부의 장교들은 침조차 삼키지
않고 사령관의 명령을 들었다.
"알았나?"
. "옛!"
장태원 사령관은 사령부 안에 있는 전차
1개 소대를 동원하고 행정병까지 전 병력에
실탄을 지급한 다음 출동 준비를 하라고
지시했다.
"자 신속히 출동준비를 하라!"
장태원 사령관은 출동준비 명령을 내리고
장교들을 해산시켰다. 그는 이미 죽음을
각오하고 있었다.
육본은 그때 수경사에 이동해 있었다.
장태원 사령관은 그의 집무실로 올라가
윤성민 참모차장에게 다시 한번 병력
지원을 요청했다. 그러나 윤성민
참모차장을 비롯한 육본 지휘부는 병력
출동을 자제해야 한다는 의견을 제시했다.
장태원 사령관은 역정을 버럭 내고
김기택 참모장을 불렀다.
 "지금 즉시 전차부대를 선두로 전 병력을
전투조로 편성하라!목표는 보안사령부와
경복궁,공격개시선은 아스토리아 호텔
앞이다. 출발은 내가 선도하겠다. 중앙청
부근에 진지를 구축하고 전차포. 토우
미사일,106 무반동총,3. 5로켓포로 2개
목표지점을 폭격한 다음 일제히 돌격하여
반란군들을 진압한다!알겠나?"
"옛!"
김기택 참모장이 부동자세로 대답하고
1층으로 달려 내려갔다. 그러자 윤성민
참모차장이 다시 만류했다. 육본 지휘부도
동원할 병력이 없다는 이유로 대부분 부대
출동에 반대하고 있었다. 다만
군수참모부장인 안종훈() 소장만이
결연하게 부대 출동에 찬성했다.
"이번 쿠데타가 아무리 오래 전부터
계획되었고 진압이 어렵다고 해도 국민의
군대요,군인의 사명에 따라야 하는 우리
고급 장성들이 쿠데타 세력에 항복을
하자는 말입니까?우리는 이 나라 육군의
심장인 육군본부의 지휘관들이오!생사를
걸고 쿠데타군을 진압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장군들은 묵묵부답이었다.
장태원 사령관은 육군 수뇌부가 쿠데타
진압을 포기하려는 의도를 보이기 시작할
때 1층으로 내려와 전투용 찢차에
올라탔다.
"전투 준비 완료되었나?"
장태원 사령관은 대열 후미에 위치한
병사들에게 전투 상황을 점검하면서 앞으로
나갔다. 그때 장태원 사령관의 비서실장인
김수택() 중령이 황급히 달려왔다.
"사령관님. 큰일 났습니다. "
"무슨 일이야?"
"제가 전차소대쪽에 갔더니
전차대대본부로부터 사령관님을 사살하라는
무전이 계속 들어오고 있습니다!"
"뭐야?"
"전차소대는 전차대대본부의 지휘를 받고
있는 부대입니다. 사령관님의 지시를
따르기보다 대대본부의 명령을 따를 것
같습니다!"
"개새끼들!"
"전차소대를 지휘하시면 사령관님이
위험합니다!"
장태원 사령관은 얼굴에 핏기가 싹 가신
얼굴로 전차소대의 무전에 귀를 기울였다.
전차부대의 무전은 요란한 엔진소리에도
들릴 수 있도록 스피커 장치가 되어 있어
30미터 밖에까지 들렸다. 장태원
사령관이 귀를 기울이자 계속해서 장태원
사령관을 사살하라는 무전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틀렸군!)
장태원 사령관은 어금니를 꽉 깨물었다.
비참한 기분이었다.
장태원 사령관은 출동 중지 명령을
내리고 사령관 집무실로 올라갔다. 그때
집무실로 노재현 국방 장관의 전화가
걸려왔다.
"야!장태원!너는 왜 자꾸 싸우려고 하는
거야?"
"장관님,제가 무슨 병력이 있어야
싸우지요. 야전군을 동원할 수 있게
해주십시요!"
"야,아군끼리 싸우면 어떻게 해?말로 해
말로!"
"장관님,저쪽에서 병력을 동원하는데
말로 됩니까?이게 어디 말로 할
상황입니까?총든 놈들한테 어떻게 말로
합니까?"
"우리끼리는 절대로 피를 흘려서는
안돼!"
"피흘리나마 다 끝났습니다. 저쪽으로 다
넘어가고 우리에게는 전투 병력이
없습니다. 장관님이 지시를 내려 주시면
하라는대로 하겠습니다!"
장태원 사령관은 울먹이며 말했다.
"병력을 철수시키고 상황을 끝내!"
"알겠습니다. 장관님 지시니까 그대로
하겠습니다. 장관님 제가 복명
복창하겠습니다. 상황 끝!"
장태원 사령관은 눈물이 핑 돌았다.
 장태원 사령관은 즉시 참모들을
소집했다.
"장관 지시로 상황을 끝내겠다. 상오
3시를 기해 합수부쪽에 대한 일체의 전투
행위와 사격을 중지하라!"
장태원 사령관은 침통한 어조로 말을
이어갔다.
"합수부쪽과 대치한 상황에서 일어난
모든 책임은 내가 지겠다. 너희들은 무조건
사령관이 명령에 불복종하면 총살하겠다고
하여 어쩔 수 없이 명령에 따랐다고만
하라. 그렇게 되면 너희들에게는 아무
책임도 묻지 않을 것이다. "
장태원 사령관은 육본 수뇌부가 있는
사령관 집무실로 가서 윤성민 참모차장에게
상황을 종료시켰다고 보고했다. 윤성민
참모차장은 합수부쪽에 전화를 걸어 상황이
끝났다는 사실을 통보했다. 사실상 항복
통고나 다름없었다.
수경사의 헌병단 부단장 신윤희()
중령은 전두환 보안사령관으로부터 장태원
수경사 사령관을 체포하고 육본 지휘부의
무장을 해제하라는 명령을 받고 기회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장태원 사령관의
명령으로 한남동으로 출동했다가 돌아와
수경사에 합류해 있었다.
그는 헌병단 소속의 중대장들을
소집했다.
"지금부터 사령부를 장악한다!이는
전두환 사령관님의 지시다!"
"예!"
헌병 중대장들이 일제히 대답했다. 신
중령은 M16으로 무장한 헌병 40명을
차출하여 사령부 정문 안팎에 배치하고
사병들을 이끌고 2층으로 달려
올라갔다. 2층엔 각 장성들의 수행부관들이
웅성거리고 있었다.
"손들엇!"
그는 수행부관들을 권총으로 위협했다.
수행부관들이 재빨리 손을 높이 들었다.
"무장해제 해!"
"예!"
헌병들이 일제히 수행부관들의 무장을
해제했다.
"모두 조용히 밖으로 나가 있어!허튼
수작하면 쏜다!"
신윤희 중령은 낮은 목소리로
수행부관들을 위협했다. 수행 부관들이
웅성거리며 하나 둘 1층으로 내려갔다.
사령관 집무실에는 육본 수뇌부들이
망연하게 앉아 있었다. 기독교 신자인
천주원() 소장은 눈을
감고 기도를 하고 있었다. 상황이 완전히
종료된 상태라 육군의 심장부가 아무 것도
못하고 있었다.
그때 문을 발로 걷어차고 헌병들이
뛰어들었다.
"손들엇!"
헌병들은 육군 수뇌부의 장군들을 향해
일제히 M16을 겨누었다. 장군들은 엉거주춤
손을 들었다. 이때 육본 작전참모부장
하소곤() 소장이 접견실에서
들어오다가 허리에 찬 권총에 손을 댔다.
그 순간 M16이 요란한 굉음을 울리면서
불을 뿜었다.
"윽!"
하소곤 소장이 가슴을 움켜쥐고
비틀거렸다.
"저 놈들이 나를 쏘았어!"
하소곤 소장은 고통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사령관 집무실 바닥에 나뒹굴었다. 붉은
선혈이 하소곤 소장의 가슴에서 왈칵
뿜어졌다.
"뭣하는 짓들이야?"
하소곤 소장이 피를 흘리며 쓰러지자
정승화 참모총장 수석 부관 황원탁()
대령이 권총을 뽑아 헌병들에게 겨누었다.
그러자 합참본부장 문홍구() 중장이
재빨리 황원탁 대령의 팔을 잡아 권총을
빼앗었다.
"야!우리는 비무장이야!총을 치워 이
자식들아!"
장태원 사령관이 총소리를 듣고 집무실로
달려왔다.
"야,이놈들아!차라리 나를 죽이지 이게
무슨 짓이야?"
"사령관님,죄송합니다. "
신윤희 중령이 머리를 숙였다.
"야,너는 수경사 소속인데 배신을
해?명령 불복종이면 군법회의감이야!"
"죄송합니다!"
"누구 지시야?"
"전두환 보안사령관님
지시입니다!죄송합니다. 사령관님을 제가
모시겠습니다. "
"좋다. 전두환이에게 가자!"
장태원 사령관은 부하인 신윤희 중령에
의해 서빙고로 연행되었다.
3군사령관 이건영() 중장은 장태원
사령관이 병력 지원을 요청했을 때 장관의
지시가 없다며 머뭇거리고 있다가 이튿날
12. 12가 완전히 매듭이 지어졌을 때
보안사 요원들에게 체포되었다. 3군에는
4개 사단이 있었고 그 중에 26사단과
수도기계화사단은 쿠데타와 내란을
진압하는 방패부대였다. 그러나 그는
머뭇거리다가 끝내 수경사령관에게 병력
지원을 해주지 못했고 서빙고로
연행되었다가 예편되는 불운을 맞이하게
되고 말았다.
노재현 국방 장관도 군 최고
지휘자로서의 역할을 제대로 하지 못했다.
그는 12. 12사태가 발생하자 쿠데타군을
효과적으로 진압하지 못하고 군사충돌만
우려하다가 연행되다시피 끌려가 정승화
참모총장의 연행을 재가하는데 손을
들어주고 말게 되는 것이다. 12. 12사태가
성공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이와 같이 몇몇
군 수뇌부의 우유부단도 한 요인으로
작용했다.

정란은 남편의 원고에서 시선을 떼며
무겁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나 남편의
원고를 정신없이 읽어 숨이 가뻤기 때문이
아니었다. 남편의 원고는 정란이 TV나
신문에서만 보던 최규하 대통령과 전두환
보안사령관까지 등장하고 있었다. 단순한
소설이 아니었다.
(왜 이런 을 쓰고 있는 것일까?)
정란은 고개를 갸우뚱했다. 남편의
원고는 거기서 그쳐 있었으나 지난 해
겨울의 이야기를 다룬 것이 분명했다.
남편의 원고에 등장하는 사람들도 정란에게
낯익은 사람들이 상당히 있었다. 남편은
보안사의 문관에 지나지 않았으나 영관급
장교들과도 두터운 친분을 갖고 있었다.

소설에 등장하는 보안사의 장교들이 그녀의
집에까지 몰려와 밤늦게까지 술을 마신
일도 있을 정도였다.
(청소나 해야지... )
정란은 남편의 책상을 대충 정리하고
빗자루로 방을 쓸기 시작했다. 남편이 쓰고
있는 소설에 아무런 감동을 느낄 수
없었다.

제11장 서울에는 봄이 없다.

1

박태호로부터 온 컴퓨터 파일은 거기서
그쳐 있었다. 미경은 밤이 늦어 박태호가
컴퓨터 워드 작업을 중단한 것이라고
생각했다. 시간은 이미 밤 12시를 지나
2시가 가까워지고 있었다. 박태호도 잠이
들 시간이었다.
미경은 박태호에게서 온 파일을
갈무리했다. 컴퓨터의 파일을 갈무리를
하면 언제던지 꺼내보고 싶을 때 꺼내볼 수
있었다.
미경은 갈무리가 끝나자 컴퓨터를 끄고
창밖을 물끄러미 응시했다. 동작대교와 그
건너 아파트단지가 대부분 불이 꺼져
있었다. 미경은 늘어지게 하품을 했다.
컴퓨터 모니터를 오랫동안 들여다본 탓인지
눈이 피로했다.
이제는 잠을 자야 하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쉽사리 잠이 올 것 같지는 않았다.
미경은 최종열의 소설로 인해 12. 12사태가
일어난 배경과 원인을 상세하게 파악할 수
있었다. 일반에서는 그 사태를 별들의
전쟁이라고 했으나 엄격히 따지면
쿠데타군과 진압군의 대결이었다.
미경은 진압군이 그토록 손쉽게
쿠데타군에게 백기를 든 사실이 납득이
되지 않았다. 특히 장군들이 단순히
대규모의 군사충돌을 우려해 쿠데타군에게
속수무책으로 당했다는 사실에 비애까지
느꼈다.
 (우리 나라 군인들에게 사명감이 없어...
)
보안사의 대령들과 그 주위의 일부
대령들이 자신들이 모시고 있던 상관들과
이 나라 국군의 심장인 육군 수뇌부에게
거침없이 총부리를 들이댔던 사실도 분노를
느꼈다. 군인들은 명예를 생명처럼 여기는
집단이다. 더욱이 정규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한 장교들이라면 누구나 인정하는
엘리트 집단인 것이다. 그들이 생명처럼
여기는 국가관과 명예를 팽개치고 권력을
쟁취하기 위해 육군 심장부인 육군 본부에
총부리를 겨누었다는 사실에 분노와
배신감을 느꼈던 것이다.
미경은 담배 한 대를 피우고 침실로
들어가 양윤석의 옆에 누웠다. 양윤석은
곤하게 자고 있었다. 은행이 정기감사
중이어서 늦게까지 야근을 했던 것이다.
미경은 엎치락뒤치락했다. 눈이 충혈되어
피로했으나 머릿속이 복잡했다.
(미행자들을 잡아야 해...)
미경은 눈을 감은 채 결심했다. 자세히
알 수는 없었으나 어둠의 세력이 그녀를
향해 서서히 목을 조여 오고 있는 듯한
기분이었다. 아직 그들이 누구인지는 알 수
없었다. 그러나 미경은 그들이 남편의
죽음과 자신의 납치와 관계가 있을
것이라는 예감이 들었다.
미경에게는 남편의 죽음에 대한 단
하나의 증거가 있었다. 그것은 남편이
교통사고로 죽은 현장에 떨어져 있던
라이터였다. 그 라이터는 미경의 패물함
속에 보관되어 있었다. 미경은 그것이
남편의 죽음에 유일한 증거가 되리라고
생각하고 소중히 간직하고 있었다.
이튿날 미경은 컴퓨터에서 최종열의
소설을 디스켓에 뽑아 가지고 회사에
출근했다. 잡지사의 일과는 언제나
그랬지만 마감을 앞두고 있어서 아침부터
정신없이 바뻤다. 미경은 출근하자마자
디스켓을 곧 바로 자료실에 보관시켰다.
퇴근은 오후 8시가 지나서야 했다.
박태호로부터는 다시 컴퓨터 파일이 오지
않고 있었다. 미경이 전화를 걸었지만
아무도 받는 사람이 없었다. 컴퓨터도
접속이 되지 않았다.
양윤석이 그때까지 퇴근을 하지 않아
미경은 혼자서 저녁을 지어 먹었다.
양윤석은 감사가 아니더라도 은행의
대부계에 근무하고 있기 때문에 종종
퇴근이 늦었다. 직장의 동료들과 술자리도
있었고 대출을 받으려는 사람들로부터
종종 향응을 제공받았다.
양윤석이 돌아온 것은 자정이 가까워졌을
때였다. 미경이 컴퓨터로 미로찾기 게임을
하고 있을 때 현관의 비디오폰이 울렸다.
양윤석이었다.
"늦었네. "
미경은 양윤석에게 눈웃음을 쳤다.
"응. "
양윤석이 우울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술을 마셨는지 눈언저리가 붉게 물들어
있었다. 손에는 비닐봉다리가 대롱거리고
있었다. 비닐봉다리는 근처 슈퍼에서
샀는지 매듭이 허름했다.
"그게 뭐야?"
"아이스크림. "
"그건?"
"순대. "
"애걔... "
미경이 양윤석에게서 비닐봉다리를
받으며 웃음을 깨물었다.
"아이스크림은 우리 아이들 꺼구 순대는
마누라 꺼야... "
양윤석이 양복 상의를 벗으며 침울하게
내뱉았다. 미경은 그때서야 흠칫하는
표정이 되었다. 양윤석의 부인과 아이들이
죽은 날이 오늘이었던 것이다. 그새 몇
년이라는 세월이 흘렀다고는 하지만
양윤석으로서는 무심할 수 없었던
모양이었다.
"어머!"
미경은 양윤석의 양복 상의를 받으며
깜짝 놀라는 시늉을 했다. 양윤석이 미경을
힐끗 쏘아보았다.
"왜 그래 놀라?"
"몰랐어. 미안해... "
"미경이 미안할 필요는 없어. "
양윤석이 침실로 들어가 침대 위에 벌렁
누웠다.
"꿀물 타 줄까?"
"아니야. "
"그럼 답답하지 않게 옷이라도 벗겨
줄까?"
"불이나 꺼줘. "
"그래. "
미경은 말 잘 듣는 아이처럼 재빨리
침실의 불을 껐다. 양윤석은 혼자 있고
싶은 모양이었다.
미경은 침실문을 닫고 거실로 나왔다.
양윤석의 침울한 얼굴과 죽은 남편의
얼굴이 오버랩되며 가슴이 저려왔다.
 (죽은 사람들은 모두 어디에 있는
것일까?)
미경은 거실의 소파 앞에 우두커니 서서
생각에 잠겼다. 죽은 남편,양윤석의 부인과
아이들... 영혼이 존재한다면 그들이 어둠
속을 헤매고 있을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미경은 고개를 설래설래 흔들었다.
양윤석의 부인과 아이들은 사진만 겨우
한번 보았을 뿐이었다. 경주 불국사에서
부인과 아이들이 함께 찍은 사진이었다.
양윤석은 사진을 찍어주고 있었는지
사진에는 등장하지 않고 있었다.
미경은 기분이 이상했다. 양윤석이
측은해 보여 견딜 수가 없었다.
미경은 침실문을 살며시 열었다.
양윤석은 침대에 옆으로 누워 웅크리고
있었다. 소리없이 울고 있는지 어깨가
가늘게 들먹거려지고 있었다.
(가엾은 사람... )
미경은 눈시울이 시큰해 왔다.
"윤석씨!"
미경은 침대로 쓰러지며 양윤석을
부둥켜안았다. 양윤석이 얼굴을 그녀의
가슴에 묻어 왔다. 미경은 양윤석의 머리를
안고 자신의 가슴에 부볐다.
격정이었다.
어쩌면 몸부림 같은 것이기도 했다.
소리 죽여 울던 양윤석이 그녀의 가슴을
풀어 헤쳤다. 그녀는 어린 아이에게 젖을
물리듯이 양윤석에게 가슴을 내주었다.
양윤석이 그녀의 물컹한 가슴을 굶주린
아이처럼 허겁지겁 베어 물었다.
전율이 왔다.
그녀는 진저리를 치듯이 전신을 부르르

"엄마!"
양윤석이 그녀를 보챘다.
"그래,아가야... "
그녀는 젖을 보채는 아이의 보숭보숭한
머리를 쓰다듬었다.
양윤석이 그녀를 눕혔다.
그녀는 눈을 감았다.
양윤석이 성급히 그녀의 옷을 벗기기
시작했다. 부라우스,스커트,그리고
브래지어와 팬티......
그녀는 옷이 모두 벗겨질 때까지
기다렸다. 남자가 옷을 벗겨줄 때의 미묘한
희열이 혈관을 누비고 있는 기분이었다.
그녀의 감은 눈두덩 위로 희디 흰 달빛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명주실 같은
달빛이었다. 하늘엔 푸른 광망이
신비스럽게 번지고 있었다.
아......
그녀는 신음을 안으로 삼켰다.
달빛이,그녀의 몸속으로 신비스럽게
젖어들던 달빛이 팽팽하게 부풀면서 그녀를
유린하고 있었다.
"누워. "
그녀는 양윤석을 침대 위에 눕혔다.
이제는 양윤석의 옷을 그녀가 한겹 한겹
벗겨줄 차례였다.
양윤석이 침대 위에 누웠다. 그러자
침대가 출렁하고 흔들렸다. 그녀는
양윤석의 아랫배 위에 둔부를 내려놓고
넥타이를 푸른 다음 와이셔스의 단추를
풀렀다. 남자가 옷을 벗겨주는 것도 짜릿한
희열을 느낄 수 있지만 남자의 옷을 벗기는
것도 몸이 저리도록 좋았다. 그녀는
2차례차례 양윤석의 옷을 벗겨 나갔다. 결코
서두를 필요는 없었다.
허리띠,바지,양말... 그리고 남자의
상징이 숨어 있는 속옷을 천천히 벗겼다.
양윤석이 몸을 일으키며 그녀를 안았다.
그녀는 양윤석의 어깨에 팔을 얹었다.
그녀는 바다였다. 달빛을 받아들여
검푸르게 출렁대는 바다였다.
바다,바다,금빛 육체의 바다......
금빛 육체의 바다가 아우성을 치며
물보라를 일으켰다.
그녀는 울기 시작했다.
달빛은 기둥이었다. 그녀는 그 기둥을
쓸어안고 요동을 치고 몸부림을 쳤다.
환희와 격정의 몸부림이었다. 기둥이
폭발하는 순간까지 바다는 으르렁거리며
포효했다.
살과 살이 부딪치고 피가 튀었다.
"사랑해. "
기둥이 거친 숨을 내뱉으며 쓰러졌다.
바다는 파도를 거느리고 거대한 산이 되어
몸을 일으켰다. 풀어 헤친
머리카락이,바다의 흰 파도가 기둥을
덮쳤다. 기둥이 진저리를 치며 몸을
떨었다.
바다는 열차가 되었다. 파도를 거느리고
아래로 아래로 달려갔다.
기둥은 생선이 되어 퍼득거렸다. 생선의
비늘이 아침 햇살에 금빛으로 빛났다.
"힘들지 않아?"
남자가 물었다.
"아니. "
여자가 대답했다.
여자의 풍성한 머리숱이 남자의 무릎을
 남자는 눈을 뜨고 여자의 종아리에
입술을 갖다댔다. 여자의 다리가 파르르
떨렸다.
아......
여자가 다시 몸을 떨었다. 여자의
몸에서도 무수한 비늘이 눈송이처럼
흩날렸다.
여자가 몸을 일으켰다. 남자는 여자의
몸이 흡사 물고기 같다고 생각했다.
물고기의 하얀 아랫배가 그의 얼굴을 향해
다가왔다.
남자는 눈을 감았다.
물고기의 아랫배가 그의 얼굴을 누지르고
있었다.
"윽. "
이번엔 남자의 입에서 짧은 신음이 토해
졌다. 하지로 가벼운 경련이 일어났다.
 이것은...
남자는 생각했다.
이것은 불이야.
생명을 가진 불이야.
나의 전신은 불꽃에 의해 선명한
화인()이 찍히고 있어......
그랬다. 여자는 남자의 전신 구석구석에
선명한 화인을 찍고 있었다. 사람들은
누구나 슬픔이나 설움을 가슴 속에 한
무더기씩 묻어 놓고 살고 있었다. 양윤석도
그런 사내였다. 아내와 아이들의 죽음
때문에 꺼내도 꺼내도 끝이 없는 슬픔을
가슴 속에 묻어 놓고 있었다. 그 슬픔의
덩어리를 용해시키는 것이 자신의 몫이라고
미경은 생각했다.
슬픔의 덩어리를 가슴 속에 간직하고
사는 것이 어디 양윤석뿐이랴. 그녀 자신도
렘탯보름만에 남편을 잃은 것이다. 사랑을
잃은 사람끼리 갖는 결합,슬픔과 슬픔의
만남...
여자는 그것을 사랑의 행위라고
생각했다.
사랑...
육체와 육체의 결합...
그 뜨거운 결합이야말로 잠시나마 슬픔을
덜어주는 도구일 것이었다.

2

박태호가 컴퓨터 파일을 다시 보내온
것은 이튿날 새벽이었다. 박태호가
미경에게 전화를 걸은 것은 그날 자정의
일이었다. 미경은 양윤석의 팔베개를 하고
곤하게 잠들어 있었다. 최종열의 소설을
한시바삐 보고 싶은 생각도 있었으나
사랑의 행위 뒤에 느껴지는 나른한 졸음과
포만감에서 벗어나기가 싫었다. 미경은
새벽에야 일어나서 박태호가 보낸 압축
파일을 해제하여 읽기 시작했다.

안녕하세요?늦었습니다. 친구가 찾아와
외출을 했다가 이제야 돌아왔습니다. 밤에
계속 전화를 했는데 안
받으시더군요?외출하셨었나 보죠?파일을
보냈으니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미경은 모니터에서 깜박거리고 있는
커서를 지그시 응시했다. 박태호로부터
다시 파일을 받았다는 생각을 하자 서서히
긴장이 되고 있었다.
최종열의 소설 뒷부분이 궁금했다.

정란은 흔들의자에 앉아서 나른한 볕을
쬐고 있었다. 4월이었다. 한낮의 따사로운
햇살이 정원에서 깃발처럼 나부끼고
있었다. 정란은 남편이 쓰고 있는 원고가
다시 머릿속에서 되살아났다. 그것을
소설이라고 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소설은
아니지만 소설처럼 자신이 몸담고 있는
부대와 사람들의 얘기를 쓰고 있었다.
그러나 남편이 왜 그러한 것을 밤을 세워
가며 쓰고 있는지 납득이 되지 않았다.
그녀는 정치나 군대에 대해서는 잘
몰랐다. 그녀가 알고 있는 것은 사관학교를
나온 장교들처럼 남편이 쑥쑥 진급을 할 수
없다는 것과 장교가 될 수 없었다는 사실에
커다란 불만과 우울해 있었다는
사실뿐이었다. 남편은 흐르는 물이 아니라
언제까지나 제자리에 고여 있는
물이었었다.
그러나 지금은 달랐다. 지금은 비록 문관
신분에 지나지 않았으나 남편은 대령들
못지 않은 권력을 갖고 있었다. 만나는
사람들도 대령과 권력의 심장부에 있는
사람들이고 주머니엔 전에는 감히 상상도
할 수 없는 돈들이 쏟아져 들어오고
있었다. 정란은 그 사실만은 만족했다.
남편은 그 원고뿐 아니라
서울공작이라는 이상한 작전계획서까지
작성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극비에
해당하는지 남편이 가지고 다니거나 서랖
속에 넣고 잠그고 다녔다.
정란은 낮게 한숨을 내쉬었다. 남편이
군사작전을 방블케하는 이상한
작전계획서를 만들고 있었으나 관여할 바가
아니라고 생각했다.
어디선가 쏴아 하고 훈풍이 불어왔다.
그러자 안암동 주택가에 피어 있는
라일락의 독한 꽃향기가 담너머로
날아왔다. 문득 남편의 목소리가 귓전을
울려왔다.
"부대에서는 더 이상 출세를 할 수 없어.
몇 달 후에 부대를 그만 두게 될 거야. "
"그만 둬요?"
"지금하고 있는 공작이 완성되면 세상이
바뀌어. "
"무슨 소리예요?"
"당신은 그렇게만 알고 있어. 당신도
국회의원 사모님이 될 테니까... "
남편은 전에 없이 기분이 좋아져 있었다.
하긴 서울에 올라와 보안사에
출근하면서부터 그녀가 놀랄 정도로 달라진
남편이었다.
"국회의원이요?"
정란은 남편의 말을 믿을 수가 없었다.
"됐어!더 이상은 국가 기밀이니까 말할
수 없어. "
남편 한경호가 며칠 전에 그녀에게 한
말이었다. 정란은 더 이상 물어보지
못했으나 남편이 무엇인가 일을 꾸미고
있다는 생각을 지워버릴 수가 없었다.
확실히 남편은 서울에 이사온 후로
달라져 있었다. 그의 직책에 어울리지 않게
영관 장교들을 만나고 사령관도 자주
만나는 눈치였다. 어느 날은 대령 계급을
달고 있는 장교들까지 한 패가 몰려와
늦게까지 술을 마시고 간 일도 있었다.
생활비도 전과 달리 듬뿍듬뿍 내놓았다.
정란은 남편이 월급을 타 오면 꼬박꼬박
가계부를 적곤 했었다. 그러나 남편은 돈을
꺼내 놓으면서 가계부를 적지 못하게 했다.
그것은 위에 있는 사람이 그냥 쓰라고 준
돈이므로 써야 한다는 것이었다. 정란은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때 초인종이 딩동댕 하고 울렸다.
정란은 흔들의자에서 일어나 대문으로
갔다.
"어서 와요. "
대문 앞에는 그녀가 생각했던대로
신문기자의 부인 채은숙이 서 있었다.
"한가해요?"
채은숙은 테니스 유니폼 차림이었다.
위에는 하얀 셔츠 위에 검은 색의 스웨터를
걸치고 손에는 라켓 가방을 들고 있었다.
상큼한 차림이었다. 나이 차이가 있기는
했으나 얄미울 정도로 싱싱해 보였다.
"네. "
정란은 환하게 웃었다.
"테니스 치실래요?"
"난 잘 치지도 못하는데... "
"운동신경이 발달해 있어서 금방
배우던데요 뭐. "
"준비할께 들어오세요. "
정란은 채은숙을 안방으로 데리고
들어왔다. 정란도 이미 테니스복과 라켓을
준비했을 뿐아니라 오전에는 강사에게
교육을 받고 있었다. 신문기자의 부인에게
뒤지기 싫어서였다. 그러나 결혼하기 전
테니스 선수를 한 채은숙을 이길 수는
없었다.
"어제는 신랑이 술에 몹시 취했었나
봐요?"
정란이 옷을 갈아 입기 위해 장농문을
열며 채은숙을 살폈다. 어젯밤 남편의
귀가가 늦어 2층에서 골목을 내려다보고
있다가 채은숙의 신랑이 잔뜩 취해서
돌아오는 것을 보았던 것이다.
"요즈음 매일 술에 절어서 살아요. "
은숙이 얼굴을 붉히며 대답했다.
"왜요?"
정란은 집에서 입는 홈드레스와 스웨터를
벗어 걸며 물었다.
"신문사 분위기가 좋지 않은가 봐요. "
"무슨 일이 있나요?"
"정치적인 일이죠. 뭐... "
"정치적인 일이요?"
"지난 1월에 사회부에서 정치부로
바뀌었어요. 사회부에 있을 때도 맨날 술에
절어 살았는데 정치부로 옮기고부터는
술독에 빠져 살아요. "
은숙의 시선이 옷을 갈아 입기 위해 속옷
차림이 된 이정란의 몸매를 훑었다. 정란은
벌써 살이 붙기 시작하고 있었다. 몸매가
상당히 풍만해 보였다. 은숙의 몸도
사람들에게 풍만하다는 얘기를 듣고
있었으나 정란의 몸은 차라리 요염해
보인다는 편이 옳을 것이었다.
"보기 흉하죠?"
은숙의 시선을 눈치 챈 정란이 수줍은
표정을 지었다.
"아뇨. 알맞게 살이 붙어 탐스러워요.
가슴도 크고 둔부도 풍만하잖아요?"
"요즈음은 살이 찌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아요. "
"설마?"
은숙이 입을 가리고 웃었다. 정란은
팬티와 브래지어 위에 테니스웨어를
걸쳤다. 문득 지난 밤 자신의 몸을 더듬던
남편 한경호의 손길이 머릿속에 떠올라
얼굴이 찡그려졌다. 남편과의 관계는
오래간만에 갖는 것이었으나 여전히
살갑지가 않았다.
골목으로 나오자 주택가의 담장 위에
라일락이 흐드러지게 피어 있었다. 정란과
은숙은 산업은행 테니스 코트를 향해
보폭을 맞추며 나란히 걸었다.
화창한 날씨였다. 주택가 골목은 인적이
끊어져 조용했고 어느 집에선가 피아노를
치는지 피아노의 선율이 끊어졌다 이어졌다
하며 들려오고 있었다.
테니스 코트가 있는 골목으로 나설 때
목공소에 있는 기계대패소리가 윙하고
들렸다. 정란은 주택가에 왜 저런 목공소가
들어와 있는 것일까 하는 생각을 했다.
목공소는 언제나 대패밥이 날려서 골목이
어지러져 있고는 했다. 목공소에서 일하는
소년이 매일 아침 저녁으로 쓸어도
대패밥은 항상 골목이 지저분하게 어지러져
있고는 했다.
"소리가 아주 시끄럽죠?"
정란이 은숙을 보고 물었다. 기계대패
소리의 진동 때문에 골목의 아스팔트
바닥이 흔들리고 있었다.
"네. "
"이런 고급 주택가에 왜 저런 목공소가
들어와 있는지 모르겠어요. "
"먹고 살려니 어쩔 수 없죠. "
은숙이 엷게 웃었다. 어쩐지 넉넉해
보이는 웃음이었다.
"이 근처 식모들이 짜증을 부린대요. "
안암동 주택가는 부자들이 많이 살고
있었다. 정란이 살고 있는 집 주위만 해도
은행장과 국세청장,상공부 차관,회사 사장
등의 집이 있었다. 그들은 모두 집에
가정부를 두고 있었다. 그 근처에서
가정부를 두고 있지 않은 집은 신문기자의
집과 자신의 집뿐이었다.
"식모들이요?"
"골목이 더러워진다고 목공소 청년에게
짜증을 내곤 해요. 골목이 더러워지면
식모들이 쓸어야 하니까요. "
"어머 딱해라. "
은숙이 가볍게 놀라는 시늉을 했다.
"딱해요?"
"무작정 상경한 청년이래요. 일자리를
찾아 이틀간 굶주리며 헤매다가 들어온
목공소라는 것 같았어요. "
"어떻게 아세요?"
 "지난 일요일에 집에 문()을 고칠 것이
있어서 불렀었어요. 남편과 점심을
먹으면서 얘기하는 걸 들었어요. "
정란은 고개를 끄덕거렸다. 문득 집의
목욕탕문과 마루문이 잘 열리지 않는데
청년에게 수리를 해 달래야 하겠다고
생각했다.
이내 목공소 앞에 이르렀다. 정란이
목공소를 지나치면서 안을 힐끗 살피자
청년은 기계대패로 재단을 한 문재()를
깎고 있었다. 더부룩한 머리는 뽀얀
나무먼지가 자욱하게 덮여 있었고
런닝샤쓰는 누렇게 때에 절어 있었다.
테니스 코트엔 사람이 별로 없었다.
정란은 은숙과 함께 한시간 남짓 테니스를
쳤다. 땀에 젖은 얼굴을 수건으로 닦으며
코를 나서자 골목으로 땅거미가 어둑하게
있었다. 목공소의 기계대패소리는
그때까지도 계속 들려오고 있었다. 정란은
윙 하고 돌아가는 기계대패소리에 이상하게
가슴이 뛰었다.

3

은숙은 현관에 불을 환하게 켰다. 오늘도
남편 강한섭은 술에 취해서 돌아오려는지
퇴근시간이 지났는데도 귀가하지 않고
있었다.
은숙은 보던 책에서 시선을 거두고 낮게
한숨을 내쉬었다. 은숙이 요지음 보고 있는
책은 대학가에서 화제가 되고 있는
난장이가 쏘아 올린 작은 공이었다.
난장이를 아버지로 둔 3남매가 서울의
공장과 판자촌에서 겪는 가난한 삶의
얘기였다. 문학서적에 대해서 잘 알지는
못했으나 은숙은 작품이 노동자들의 삶을
절절하게 묘사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물론
은숙은 전혀 알지 못하는 세계의 얘기였다.
은숙은 매우 평범한 삶을 살아왔다.
아버지가 철도공무원인데다 식구도
어머니와 오빠뿐이었다. 아버지의 봉급으로
풍족하게 살지는 못했으나 그 또래의 다른
아이들처럼 가난하게 살지는 않았다.
은숙이 태어난 곳은 충청북도 중원군
산척이라는 곳이었다. 조치원에서 제천을
오가는 충북선()의 간이역으로
면소재지였다. 은숙은 그 곳에서
국민학교를 마치기도 전에 자주 근무처를
옮기는 아버지를 따라
음성으로,괴산으로,제천으로,충주로
2,3년에 한번씩 이사를 다니다가 충주에
정착을 했다. 어머니가 아이들이 더 크기
전에 정착을 해야 공부를 잘할 수 있다고
주장했기 때문이었다.
아버지는 그때부터 열차를 타고 출퇴근을
했다. 철도공무원이라 열차만 타면 어느
곳이든 갈 수 있었으나 자라는 아이들의
학교 공부를 위해서 아버지가 힘든 길을
선택하기로 했던 것이다. 어머니는
아버지를 돕기 위해 충주 시내에 조그만
양품점을 차렸다.
은숙도 오빠도 그때부터 과외공부를
했다. 어머니는 비교적 아이들의 공부에
열성이었다.
그러나 은숙은 공부를 썩 잘하지 못했다.
오빠는 어머니의 열성 때문인지 2류
대학교나마 합격을 했으나 은숙은 충주에
여자고등학교까지도 합격하지를 못했다.
물론 충주 여고가 충청북도에서는 청주
여고 다음으로 공부 잘하는 아이들이
들어가는 학교인 탓도 있었으나 은숙은
공부에 그다지 열성이지 않았다.
은숙은 그 대신 중학교 때부터 테니스를
쳤다. 은숙은 그 무렵 충주에 있는 성당에
다녔는데 그 성당에는 외국인 신부가
있었다. 그 외국인 신부는 은숙을 유난히
귀여워하여 기타와 테니스를 가르쳐
주었다. 은숙은 기타보다 테니스를 더
열심히 배웠다.
어쩐 일인지 기타를 치는 것보다 라켓을
힘껏 휘두르는 것이 은숙의 적성에 더
맞았다. 은숙은 방과 후면 언제나 충주
교현동성당의 운동장을 찾아가 테니스를
쳤다.
중학교 1학년이 되었을 때 은숙은 학교
대표 테니스 선수가와 시() 대표 테니스
선수가 되었다. 그 때만 해도 지방학교에는
테니스가 전혀 보급되어 있지 않았다.
은숙은 출전이나 시켜보자는 학교측에 의해
도() 대회에 나가게 되었고 거기서
우승을 하게 되어 서울에 있는 고등학교에
스카웃되었다.
어머니는 계집애가 테니스 선수로 뽑혀
다니는 것을 못내 찜찜해 했다. 그러나
굳이 막지는 않았다. 그 무렵 대학에
다니는 은숙의 오빠가 서울에서 자취를
하고 있었기 때문에 오빠 밥이나 해주고
빨래나 해주라며 은숙을 올려 보냈던
것이다.
어머니는 테니스 선수에 대한 관심이
그다지 높지 않았다. 속옷이 훤히
들여다보이는 테니스 유니폼을 입고
`계집애가 팔짝거리며 뛰어다니는 것보다
주산이라도 잘 배워서 은행에 취직했으면
하는 것이 어머니의 바람이었다.
은숙도 은행원이 되는 것이 꿈이었다.
그러나 은숙이 다니는 여자고등학교에서는
은숙에게 주산을 가르치지 않았다. 은숙은
체육교사의 지도로 테니스만 열심히 할
수밖에 없었다.
은숙은 주니어 테니스 선수권대회라던가
청소년 테니스 선수권대회에서 좋은
성적으로 입상을 하게 되었다. 은숙의
이름이 드물기는 하지만 스포츠신문에
실리기까지 하였다.
은숙은 고등학교 3학년이 되었을 때
아시아 테니스 선수권대회 대표선수가
되었다 국가대표선수였으나 대만에 가서
그다지 좋은 성적을 올리지는 못하였다.
 은숙이 고등학교를 졸업하자 은행에서
은숙을 스카웃했다. 은행원이 된 것은
아니었으나 은숙은 은행의 테니스 선수가
된 것으로 만족해야 했다. 어머니도 은숙이
유명한 테니스 선수가 되었다고 하여
은행원이 되지 못한 것을 아쉬워하지
않았다.
은숙이 강한섭을 만난 것은 고등학교를
졸업한지 1년이 조금 지났을 때였다.
강한섭은 그때 대학 4학년이었다. 은숙이
은행의 테니스 코트를 향하여 아침마다
집을 나설 때면 강한섭도 집을 나서서
학교로 갔다.
안암동에는 안암천을 따라 꽃길이
조성되어 있었다. 안암천은 돈암동쪽에서
신설동쪽으로 흘러가는 개울이었다. 개울을
따라 차도가 길게 뻗어 있고 차도 옆에는
프라다너스만 듬성듬성 서 있었으나 성북
구청에서 꽃길을 조성했던 것이다.
여름이면 젊은 아베크족들이 찾아와
다정하게 사랑의 밀어를 나누는가 하면
키타를 치며 노래를 부르기도 하였다.
강한섭의 집은 그쪽 천변에 있었다.
은숙이 오빠와 자취를 하던 집에서 다섯
채쯤 떨어져 있었다.
은숙은 강한섭이 점점 낯이 익어 갔다.
강한섭은 잘 생긴 대학생이었다. 옷은
허름하게 입었으나 눈은 크고 맑았다.
은숙은 강한섭을 볼 때마다 가슴이
쿵쿵거리고 뛰었다.
강한섭이 은숙에게 말을 건네 온 것은
처음 마주친지 3개월쯤 되었을 때였다.
"테니스 하는 채은숙 선수죠?"
여름이었다. 소나기가 장대처럼 퍼붓고
있었다. 은숙이 버스정류장 앞의 담배가게
처마 밑에서 비를 피하고 있는데 누군가
머리 위에 우산을 불쑥 씌워 주었다. 깜짝
놀라 고개를 돌리자 낯선 청년이었다.
"네. "
은숙은 고개를 떨구며 대답했다. 은숙은
장충동 테니스 코트에서 연습을 한 뒤에
돌아오던 참이었다. 버스에서 내린 은숙은
비가 쏟아지자 정류장 앞의 담배가게 처마
밑에서 우두커니 거리를 쳐다보고 있었다.
"길에서 자주 뵙긴 했지요. 기억나세요?"
나중에 안 일이었지만 그는
대학생이었다. 그리고 집이 근처인지 몇 번
마주친 적이 있는 청년이었다.
"네. "
은숙은 기어 들어가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이상한 일이었다. 은숙은 자신이
왜소해 지는 기분이었다.
"시간 있으세요?"
"시간이요?"
"괜찮으시다면 제가 따뜻한 커피를
대접할께요. "
"네. "
은숙은 살포시 미소를 지었다.
"이 근처에 좋은 음악다방이 있습니다. "
강한섭이 은숙의 어깨에 팔을 감았다.
은숙은 갑자기 얼굴이 화끈거리고 가슴이
쿵쿵 뛰었다.
음악다방은 가까운 곳에 있었다.
나하나라는 이름의 다방이었다. 그 곳은
오후인데도 젊은이들이 구석구석 몰려
앉아서 음악을 듣고 있었다. 음악을
신청하여 듣는 다방이었다.
강한섭은 사운드 오브 사이렌서와
스카브로 훼어라는 노래를 신청했다. 두
곡 모두 졸업이라는 영화에 삽입된
노래라는 것이었다. 사운드 오브
사이렌서는 침묵의 소리라는 뜻이고
스카브로 훼어는 스카브로의 추억이라는
뜻이라고 강한섭이 해석을 해주었다.
은숙은 스피크 오브 소프트라는 노래를
신청했다. 영화 대부의 주제가로 앤디
윌리암스가 부른 노래였다. 부드러운
목소리,또는 감미로운 목소리라는 뜻을
갖고 있었다. 은숙은 클래식이나 가곡은
그다지 잘 알지 못하였다. 은숙이 기껏
알고 있는 클래식이라고는 라벨의
볼레르와 베오토오벤의
운명정도였다.
다방에서 나오자 사방이 어두워져
있었다. 비는 그때까지도 줄기차게 내리고
0있었다.
그날 밤 은숙은 잠을 이루지 못했다.
눈을 감으면 자꾸 환하게 웃는 강한섭의
얼굴이 떠올라 왔다. 어떻게 남자가 그렇게
아름답게 웃을 수 있을까. 은숙은 강한섭의
미소만 떠올리면 온 몸이 나른해 졌다.
(사랑해요... )
은숙은 눈을 감은 채 강한섭의 얼굴을
떠올리며 몇 번이나 중얼거렸다.
이튿날 은숙은 다시 강한섭을 만났다.
강한섭이 버스 정류장에서 은숙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날부터 은숙은 길고 긴 사랑의 열병을
앓았다. 강한섭을 만나지 못하는 날은
가슴이 아프고 강한섭을 만났다가 헤어지면
가슴이 저렸다.
강한섭을 만난지 5개월쯤 되었을 때
은숙은 첫 키스를 했다. 그리고 1년이
되었을 때는 강한섭에게 순결을 바쳤다.
강한섭이 만날 때마다 그녀를 요구해 왔고
그녀도 강한섭이 원하는 것을 기꺼이 주고
싶었다.
강한섭이 키스를 하거나 그녀의 몸을
패팅할 때면 그녀는 온 몸이 뜨겁게
달았다. 그리고 강한섭을 자신의 몸속
깊숙이 받아들이고 싶은 욕망을 주체할
수가 없어 몸부림을 쳤다. 그런 날들이
계속되자 오히려 그녀 쪽에서 견딜 수 없게
되었다.
은숙은 강한섭에게 자신을 오롯이
바치기로 했다. 그를 사랑했기 때문에 더
이상 버티고 싶지 않았다. 게다가 그녀도
강한섭을 갖고 싶었다.
그 무렵 강한섭이 해수욕장을 함께
요구해 왔다. 은숙은 혼쾌히
강한섭을 따라 나섰다.
바닷가 백사장에 텐트를 쳤다. 낮에는
알몸뚱이로 뒹구는 사람들과 함께 해수욕을
하고 밤이 오자 맥주를 마셨다. 그리고
둘이 텐트에 누웠다.
별빛이 맑은 밤이었다. 텐트의 구멍이 난
곳으로 밤하늘이 내다보였다.
"은숙아. "
"응?"
"너를 갖고 싶어. "
강한섭이 은숙의 손을 쥐며 중얼거렸다.
(그래. 나를 가져... )
은숙은 속으로 중얼거렸다. 얼굴이
화끈거렸다. 발가락을 자신도 모르게
꼼지락거렸다.
"괜찮지?"
강한섭의 손이 미경의 가슴 위로
올라왔다.
"키스해 줘. "
은숙이 들뜬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벌써
숨이 가뻐 오고 있었다.
강한섭이 은숙의 입술에 축축한 입술을
얹었다. 은숙은 강한섭의 등에 팔을 감고
격렬하게 입술을 부볐다. 강한섭의 한 손이
어느덧 은숙의 하체를 애무하고 있었다.
은숙은 몸을 떨며 강한섭의 목에 매달렸다.
어디선가 젊은이들이 키타를 치며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아!)
은숙은 눈을 감았다.
하체가 뻐근하면서 가벼운 통증이 번져
왔다. 은숙은 입을 벌리고 고통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아퍼?"
강한섭이 물었다.
"아니. "
은숙은 도리질을 했다.
"사랑해. "
강한섭이 깊숙이 밀고 들어왔다.
"아... "
은숙은 짧게 신음을 토했다. 자신도
모르게 강한섭의 등을 힘껏 껴안았다.
그것의 강한섭과의 첫경험이었다.
은숙은 그날부터 강한섭에게 언제나 문을
열어 주었다. 그를 진정으로 사랑했고
사랑하는 사람이기 때문에 무엇이던지 할
수 있었던 것이다.
주택가 골목은 여전히 조용했다.
은숙은 창가에서 물끄러미 골목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강한섭과의 첫만남과
결합이 어제의 일인 듯이 생생하게
떠오르고 있었다.

4

정란은 신문에서 시선을 떼었다. 벌써
정오가 가까워지고 있었다. 정란은
늘어지게 하품을 했다. 어젯밤 남편이
귀가하지 않아 뜬눈으로 밤을 새웠기
때문이었다. 새벽에 잠시 눈을 붙이기는
했으나 혹시나 남편이 돌아올까 하여
선잠을 잤던 것이다. 아직도 눈꺼풀이
무거웠다.
정란은 문득 유리창이 흔들리는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어디선가 미세한 진동음이
들리고 있었다. 그 소리에 유리창이 떨고
공기가 진동을 하고 있었다.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공기의 미세한 파장이 손에 잡힐
듯이 느껴졌다.
(목공소에서 나는 소리군. )
정란은 입꼬리에 씁쓸한 미소를
매달았다. 어쩌자고 주택가에 저런
목공소가 들어와 있는지 알 수 없었다.
(이젠 외박을 밥 먹듯이 하고 있어... )
정란은 눈섭을 치켜올리며 입술을
비틀었다. 남편의 귀가가 늦어지고
외박까지 하는 것은 세상이 어수선한
탓이었다. 박정희 대통령이 죽고 최규하
대통령이 지난 연말에 취임을 했으나
세상은 여전히 두터운 얼음장처럼 꽁꽁
얼어붙어 있었다. 신문에서 연내 개헌이니
민주화니 하고 떠들고 있었지만 사람들의
얼굴엔 유류파동이 휘몰아쳤을 때처럼
어두운 그림자가 덮여 있었다.
 남편은 점점 바뻐지고 있었다. 전화를 걸
때 옆에서 지켜보고 있으면 남편은 빠르게
큰 인물이 되어가고 있는 기분이었다.
기묘한 일이었다. 남편은 보안사의 문관이
하는 일이 아닌 큰 일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정란은 우울했다. 남편이 일
때문에 정신없이 바뻐지게 되었기 때문이
아니었다. 서울로 이사를 온 후 김학규를
마나는 날이 일주일에 한 번 밖에 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차라리 이혼을 할까... ?)
정란은 어금니를 사려 물었다. 남편이 일
때문에 바뻐지기도 했으나 외박을 하는
것은 여자들을 만나기 때문이었다. 남편이
여자들을 만나는 이상 자신도 혼자서
독수공방을 할 필요가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흔한 것이 여자라고는 하지만
남자도 그만큼 널려 있었다. 여자도 바람을
피우려고 마음을 먹으면 얼마던지 바람을
피울 수 있는 것이다. 세상은 이제 변해
있었다. 카바레만 가도 하룻밤을 같이 보낼
남자들은 얼마던지 있었다.
정란은 문득 고개를 세차게 흔들었다. 이
생각 저 생각을 하다보니 창녀와 같은
생각을 하고 말았던 것이다.
(나에게 더러운 피가 흐르기 때문이야...
)
정란은 창녀처럼 음탕한 생각을 한 것을
피 때문이라고 여겼다. 그녀가 바람을
피우는 것을 어머니에게서 물려받은
탓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정란은 친정 식구가 하나 뿐이었다.
정란의 아버지는 정란이 어릴 때 죽었고
어머니는 아버지가 죽자 다른 사내와 눈이
맞아 집을 나가서 돌아오지 않았던 것이다.
정란에게는 남동생이 하나 있었으나 그
동생은 해병대에 지원하여 군인이 되었고
포항에서 직업군인으로 근무하고 있었다.
이따금 전화가 오기는 했으나 찾아 오는
일은 거의 드물었다.
정란이 태어난 곳은 경상남도 남쪽
끝으로 학림()이라는 곳이었다. 집에서
조금만 나서도 푸른 바다가 보였다.
정란의 아버지는 뱃꾼이었다. 아버지가
배를 타고 나갔다가 돌아오면 아버지의
몸에서는 언제나 짭쪼름한 소금냄새와 함께
생선 비린내가 물씬 풍겼다. 그래도
어머니는 동구밖 고갯마루에서 생선
비린내를 묻혀서 돌아오는 아버지를
기다리고 또 기다렸다.
어머니의 세월은 기다림의 세월이었다.
정란은 어머니의 치마 끝에 매달려
아버지를 기다렸다. 그러나 정란이
국민학교에 다니고서부터는 아버지를
기다리지 않게 되었다. 아버지를 기다리는
것은 어머니의 몫이었다. 그 대신 정란은
학교에서 돌아올 때면 동구밖 고갯길에서
아버지를 하염없이 기다리는 어머니를 자주
볼 수 있었다.
아버지가 돌아올 때면 어머니의 얼굴엔
언제나 도화꽃이 곱게 피었다.
그러나 아버지가 뭍에 있는 날은 얼마
되지 않았다. 아버지는 며칠 집에서 쉬고
나면 다시 배를 탔고 어머니가 동구밖
고갯마루에서 아버지를 기다리는 일은 다시
시작되었다.
어머니가 아버지를 기다리지 않게 된
것은 정란이 중학교 2학년 때였다.
가을이었다. 해마다 9월이 오면 여지없이
불어오는 계절풍이 그 해에도 어김없이
불어닥쳤다. 집채만한 파도가 해안가
마을을 덮치고 바람이 허공에서 미쳐
날뛰었다.
어머니는 비바람이 몰아치는데도 동구밖
고갯마루로 달려 올라갔다. 아버지가 배를
타고 나가서 돌아오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비바람은 이틀이나 계속 사납게 불어댔고
어머니도 꼬박 이틀을 동구밖 고갯마루에서
아버지를 기다렸다.
그러나 끝내 아버지는 돌아오지 않았다.
태풍이 그치고 바다가 가라앉았으나
아버지는 그예 돌아오지 않고 대신
아버지가 타고 나간 고깃배가 좌초되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어머니는 사흘을 누워서 울기만 했다.
그리고는 다시 동구밖 고갯마루에 올라가서
아버지를 기다리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어머니가 실성했다고
수군거렸다.
정란도 어머니가 실성한 것이라고
생각했다. 어머니는 집안 일에는 도무지
관심이 없었다.
어머니가 일을 나가기 시작한 것은
집안에 때거리가 끊어졌을 때였다.
아버지가 실종된지 5개월이 지났을 때였다.
어머니는 그제서야 마을에서 10리나 떨어진
읍내 식당에 나가서 일을 했다.
정란은 다시 학교에 다니기 시작했다.
어머니는 점점 집에 돌아오는 시간이
늦어졌다. 동생이 왜 이렇게 늦게 오느냐고
짜증을 부리면 어머니는 식당에 손님이
많아서 그렇다고 얼굴을 붉히며 대답했다.
그런 날에는 어머니의 입에서 시금텁텁한
탁주 냄새가 풍겼다.
정란은 어머니가 싫어지기 시작했다.
사춘기인 정란은 어머니가 사내 냄새를
묻혀서 돌아온다는 것을 눈치챘던 것이다.
그러나 어머니는 그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마냥 늦게 돌아 올뿐 아니라 어느 때는
집에 돌아오지 않을 때도 있었다.
이번에는 정란이 어머니를 기다리기
시작했다. 칭얼대는 동생을 재우고 나면
사방이 갑자기 죽은 듯이 조용해져 정란은
겁이 나고 무섬증이 치밀어 견딜 수가
없었다.
정란은 혼자서 동구밖 고갯마루로 올라가
어머니를 기다렸다. 기다리다가 지치면
읍내까지 느릿느릿 걸어갔다. 그러나
어머니는 읍내 식당에 없었다. 어머니가
일하는 곳은 식당이 아니라 술집이었다.
어머니는 처음에만 식당에서 일을 하다가
소위 니나노집이라는 술집으로 자리를
옮겼던 것이다.
정란은 니나노집 앞에까지 가보았다.
밤이 이슥해 거리는 사람들이 왕래하지
않았으나 그 술집은 불이 환하게 켜져
있었고 사내들이 술에 취해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정란이 술집 앞에까지 가자 유리창으로
안이 환히 들여다보였다.
(더러워... )
정란은 안을 들여다보다가 얼굴이
화끈하게 달아오르는 것을 느꼈다. 자신도
모르게 목구멍에서 뜨거운 것이 치밀고
올라오고 있었다. 어머니는 어떤 사내의
무릎에 올라 앉아 온갖 아양을 떨며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어머니를 무릎에 앉힌 사내는 흡족한
듯이 어머니의 무릎을 쓰다듬기도 하고
가슴을 만지기도 하였다. 어머니는 그럴
때마다 앙탈을 하는 시늉을 했으나 부러
그러는 것이 분명했다.
정란은 울면서 집으로 돌아왔다.
어머니는 그후 두 달쯤 지나서 아예 집을
나가서 돌아오지 않았다. 정란은 차라리
잘된 일인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런
어머니를 생각하는 것조차 정란은
역겨웠다.
정란은 학교를 그만 두었다. 어머니가
집을 나가자 정란이 손수 끼니거리를
마련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정란은 마을 여자들을 따라 바다로
나갔다. 바다에서 하루종일 자맥질을 하며
미역을 따고 소라를 땄다.
그러자 정란의 남동생이 동구밖
고갯마루에서 정란을 기다리기 시작했다.
바닷가에 사는 사람들에게 기다림이란 숙명
같은 것이었다.
정란은 남동생의 그런 모습이 싫어서
부산으로 이사를 했다. 그리고 부산의
신발공장에 취직을 하여 야간 중학을
마치고 야간 고등학교에 입학했다.
남편 한경호를 만난 것은 정란이
신발공장에 취직을 한지 5년쯤 되었을
때였다. 한경호는 그때 이미 군인이었고
정란의 옆방에서 자취를 하고 있었다.
정란은 이따금 한경호의 빨래도 해주고
밑반찬을 만들어 주었다. 한경호는 그
답례로 정란에게 짜장면도 사 주고
화장품을 사주었다.
 그러다가 한경호가 오산으로 전출을 가게
되었다. 정란의 동생은 그 무렵 고등학교에
다니고 있었다.
한경호가 오산으로 떠나 버리자 정란은
갑자기 모든 것을 잃어버린 듯이 허전했다.
이상한 일이었다. 한경호가 가까이 있을
때는 그런 감정을 전혀 느끼지 못했으나
한경호가 떠나자 갑자기 보고 싶어졌다.
정란은 한경호를 생각하며 가슴앓이를
했다. 한경호가 사무치게 그리워지고
있었다.
정란은 열차를 타고 한경호를 찾아
나섰다. 한경호가 떠난지 3개월만의
일이었다.
봄이었다. 날씨가 화창했다. 들에는
아지랑이가 지신대고 노랑나비가 날았다.
나무들은 연두빛으로 물이 오르고 봄볕은
산에 깃발이 되어 나부끼고 있었다.
정란은 차창으로 두엇두엇 흘러가는 농촌
풍경을 보면서 어쩐지 좋은 일이 생길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이게 누구야?"
오산에 도착하여 부대로 면회를 가자
한경호가 눈이 부신 표정으로 정란을
반겼다.
"안녕하셨어요?"
정란은 활기차게 인사를 했다.
"그래. "
한경호가 환하게 웃었다.
정란은 한경호의 구김살 없는 웃음에
가슴이 찌르르 울리는 것 같았다. 전에
느끼지 못하던 감정이었다.
"어쩐 일이니?"
"아저씨가 보고 싶어 왔어요. "
"정말?"
"비싼 차비 내고 왔는데 설마 거짓말
하겠어요?"
정란이 눈을 흘겼다. 한경호가
장난스럽게 고개를 갸우뚱했다. 정란은
재빨리 한경호의 팔에 팔짱을 끼었다.
부산에서 아침에 열차를 탔는데 오산에
도착하자 이미 어두워져 가고 있었다.
사람들에게 팔짱을 낀 모습이 보이지 않아
다행이었다.
"고마워서 어쩌지?"
"저녁 사 주세요. "
"저녁 가지고 될까?"
"그럼 평생 먹여 주세요. "
"평생?"
"내가 아저씨한테 시집가면 되잖아요. "
정란은 응석을 부리듯이 말했다. 어떻게
그렇게 대범한 마리 정란의 입에서
거침없이 술술 나왔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날 밤 정란은 허름한 여관방에서
한경호의 여자가 되었다. 그러나 특별한
감동은 없었다. 생전 처음 사내를 자신의
몸속에 받아 들였다는 야릇한 느낌과
이제야말로 확실하게 한경호의 여자가
되었다는 이상한 안도감뿐이었다. 먼
훗날에야 정란은 그것이 자신의 내부에서
끝없이 갈구하고 있던 보호받고 싶어하는
본능이라는 것을 알았으나 그 때는
막연하게 한경호의 여자가 되었다는 것으로
만족하고 있었다.
정란은 일주일을 오산에서 보냈다. 낮에
한경호가 부대로 출근을 하면 빨래와 방
청소를 하고 밤이면 한경호의 품에 안겼다.
이상하게 정란은 그런 일들이 전혀 싫지
않았다. 마치 오랫동안 해온 일처럼 그런
일들이 정란에게 익숙했다.
한달 후에 정란은 부산 살림을 정리하고
오산으로 올라왔다. 동생은 부산에서
하숙을 시켰다. 완연한 봄이었다. 정란이
한경호를 만나러 오산으로 갈 때만 해도
이른 봄이었으나 차창으로 지나가는
들녘에는 벗꽃이 흐드러지게 피어 바람이
일 때마다 하얗게 꽃물결을 이루며
출렁거렸다.
정란은 차창으로 지나가는 꽃물결을
보면서 자신의 미래가 행복하리라는 것을
의심하지 않았다.
그해 여름에 정란은 한경호와 결혼식을
올렸다. 정란의 예상대로 그것은 행복의
문으로 들어가는 길이었다. 한경호가
정란보다 나이가 몇 살 더 많았으나 정란은
한경호에게서 아버지와 같은 따뜻한 정을
느끼고 있었다.
정란은 다시 늘어지게 하품을 했다.
너무나 편한 생활이었다. 한가지 아쉬운
것은 한경호가 어느 날부터 갑자기 그녀를
증오하기 시작했다는 사실이었다. 만약에
그런 일만 생기지 않았다면 정란은 남편의
그늘에서 평범하게 살았을 것이고 김학규를
만나 불륜을 저지르는 일도 없었을 터였다.
정란은 욕실로 들어가 온수를 틀었다.
목욕을 하기 위해서였다. 신문기자의 부인
채은숙과 백화점으로 쑈핑을 하러 가기로
약속을 했던 것이다.
정란이 욕조에 따뜻한 물을 받고 있을 때
초인종이 딩동댕 하고 울렸다. 정란이
대문을 열자 연장 가방을 들고 있는 목공소
청년이었다.
"문 고치러 왔습니다. "
청년이 머리를 꾸벅하고 인사를 했다.
머리가 더부룩했다.
"들어 와요. "
정란은 청년을 데리고 거실로 들어왔다.
청년을 부른 것은 욕실문과 거실 앞문인
분합문()이 잘 여닫히지 않기
때문이었다. 분합문은 열을 때마다
찌익거리는 소리가 났고 욕실문은 틈새가
맞지 않아 문을 닫을 수가 없었다.
"이 문예요?"
청년이 욕실문 앞에서 정란을
쳐다보았다.
"네. "
청년이 욕실문을 닫고 틈새를 살폈다.
정란은 그 동안 주방에 가서 커피를
끓였다. 정란이 찻쟁반에 커피잔을
캔나오자 청년은 벌써 드라이버로
욕실문을 떼어 대패로 깎고 있었다.
"커피 드세요. "
정란은 응접 탁자 위에 커피 쟁반을
내려놓았다.
"예. "
청년이 욕실문을 한쪽에 세우고 소파에
앉아서 커피를 마시기 시작했다. 청년은
청바지와 반소매의 티셔츠를 입고 있었다.
그러나 티셔츠에도 나무먼지가 뽀얗게 앉아
있었다. 얼굴은 스무살을 갓 넘어 보였다.
"기술이 좋은가 봐요. "
정란이 청년의 얼굴을 살피며 말을
붙였다.
"좋기는요... "
청년이 면구스러운 표정으로 대꾸를
했다.
"언제 이런 기술을 배웠어요?"
"기술 배운지 몇 년 되었어요. "
청년이 무심한 표정으로 대꾸했다.
청년의 말투에 경상도 악센트가 섞여
있었다.
"몇 살인데요?"
"국민학교를 졸업하고 곧 바로 서울로
올라왔죠. 처음엔 중국집에서 배달을
했었어요. "
"고향이 시골인 모양이죠. "
"경남 삼천포예요. "
"어머!난 학림인데...... "
학림은 삼천포에서 100리쯤 떨어진
곳이었다.
"고향 분이시군요. "
청년이 반가운 체를 했다. 정란은 활짝
미소를 지었다. 서울에서 고향 사람을 만난
반가웠다.
청년은 커피를 다 마시자 다시 욕실문을
고치기 시작했다. 정란은 청년이 욕실문을
고치고 이어서 분합문을 고칠 때 목욕을
했다. 신문기자의 부인 채은숙과 약속
시간이 가까워지고 있었다.
정란이 목욕을 마치고 머리의 물기를
닦으며 거실로 나오자 청년이 기다리고
있었다.
"다 끝났어요?"
정란이 청년에게 물었다.
"예. "
"얼마죠?"
"알아서 주십시요. "
정란은 지갑에서 2만원을 꺼내 청년에게
내밀었다. 청년이 약간 놀란 표정을 짓더니
돈을 청바지 주머니에 찔러 넣고 연장
가방을 들었다.
"고맙습니다. "
청년이 꾸벅 인사를 했다.
"잘가요. "
정란은 나긋한 목소리로 인사를 받았다.
2만원은 문짝을 고치는 수고비로는
지나치게 많은 것이었다. 그러나
정란에게는 많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청년이 일을 잘해서가 아니라 정란의
핸드백엔 요즈음 만원권이 가득 들어
있었다. 남편이 가져오는 돈을 은행에
넣기도 했으나 정란이 쓰기도 하는 것이다.
불황이 무엇인지 정란은 알지 못했다.
불황이라는 말을 신문에서도 보고
TV뉴스에서도 보았으나 돌아서면
잊어버렸다. 그리고 그런 말들은 정란과
관계없는 말이기도 했다.
정란은 침실로 들어가 홈드레스를
벗었다. 속에는 아무것도 걸치지 않은
나신이었다.
정란은 자신의 나신을 거울에
비쳐보았다. 자꾸 살이 찌고 있는 것 같아
신경이 쓰였다.
"집에 앉아서 살만 찌는군... "
문득 그녀가 살이 찌자 비아냥대던 남편
한경호의 말이 머릿속에서 떠올라왔다.
정란은 남편을 생각하자 닭살부터 돋았다.
남편은 그녀가 무엇을 하던지 탐탁해 하지
않았다.
그러나 김학규는 전혀 달랐다. 김학규는
그녀가 무엇을 하던지 흡족해 하고 있었다.
"살이 쩌서 싫어요?"
정란은 어느 날 김학규에게 조심스럽게
물은 적이 있었다.
"아니. 살이 찌기 시작하니까 여자다워.
나이 지긋한 여자의 요염함 같은 것이
느껴진다고 할까... "
"요염한 게 좋아요?"
"좋지. "
정란이 결혼하기 전에는 말라깽이처럼
가날펐었다.
정란은 고개를 갸우뚱하고 장농 서랖을
열었다. 그 서랖에는 팬티와 브래지어만
가득 들어 있었다. 모두 서울에 올라와서
산 것이었다. 정란은 삼각형의 속옷을 꺼내
다리에 꿰었다. 천이 실크라 착용감이
부드럽고 매낀매낀했다.
그때 정란은 등 뒤에 인기척을 느꼈다.
정란이 재빨리 고개를 돌리자 거실에 서
있던 목공소 청년이 깜짝 놀라 고개를
돌리고 있었다.
"어머!"
정란의 입에서 뾰족한 외침이
터져나왔다. 정란은 재빨리 홈드레스를
주워 나신을 가렸다. 얼굴이 화끈거리고
가슴이 뛰었다. 청년에게 자신의 나신을
보이고 말았다는 수치심이 얼굴을 새빨갛게
물들였다.
"무슨 일예요?"
"죄송합니다. 드라이버를 빠트렸어요. "
청년이 마루문 앞에서 드라이버를 주워
들었다. 연장을 빠트린 모양이었다.
그렇다면 고의적으로 침입한 것이
아니었다. 정란은 다소 안심이 되었다.
대문을 잠그지 않은 것이 실수였을
뿐이었다.
"죄송합니다. "
청년이 거듭 머리를 숙이고 현관을
1나갔다. 청년도 당황하고 있었다.
정란은 홈드레스를 걸치고 마당으로 나가
대문을 잠갔다. 청년에게 자신의 나신을
보여 주었다는 생각에 기분이 불쾌했다.

5

강한섭은 피우던 담배를 아스팔트 바닥에
버리고 구둣발로 뭉갰다. 김영삼 총재가
담배를 피우지 않기 때문에 상도동 자택에
들어설 때면 언제나 담배를 삼가고 있었다.
대문은 열려 있었다. 신민당 청년 당원들이
대문 앞에서 서너 명 서성거리고 있었으나
강한섭을 제지하지는 않았다. 동교동
김대중 민추협 고문의 자택이나 상도동에는
기자들이 무상으로 출입하고 있었다.
강한섭도 상도동과 동교동을 매일 같이
출입하고 있었다.
상도동 정원에는 이른 아침인데도
상도동계 국회의원들이 몰려와 삼삼오오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정치부 초년생인
강한섭에게는 낯선 사람들도 많았으나
대부분 오랫동안 김영삼 총재와 동거동락을
함께 해온 동지들이었다. 그들은 거실이
비좁아 정원에 나와 있는 모양이었다.
"강 기자 아니신가?"
국회의원들에게 둘러싸여 뭔가 얘기를
주고받고 있던 김동영 의원이 강한섭에게
아는 체를 했다. 김영삼 총재 진영에서
좌동영() 우형우()라고
부를만큼 김영삼 총재의 수족 같은
사람이었다.
"오늘은 어떻습니까?일찍부터
나오셨군요. "
"정치의 계절 아닙니까?사람들이 서울의
봄이라고 하지만 우리네에게는 춥게만
느껴지는군요. "
김동영 의원이 큰 몸집을 흔들며 너털
웃음을 터뜨렸다. 강한섭은 김동영 의원도
군부의 존재를 알고 있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
"어떤 움직임이라도 있습니까?"
"누구 말이요?"
"김 의원님께서도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우리야 감이지만 강 기자는 사실을 알고
있을 것이 아니요?그들이 어느 정도까지
계획을 세우고 있소?"
김동영 의원이 오히려 강한섭에게 반문을
했다.
"그들이 그런 기밀을 누설하겠습니까?"
 "그래도 신문사에 있으니까 정보가 빠를
거 아니오?"
"우리도 감만 잡고 있을 뿐입니다.
총재께서는 일어나셨습니까?"
강한섭은 김동영 의원의 말을 차단하기
위해 화제를 바꾸었다. 김동영 의원은
노련한 정치가답게 오히려 강한섭에게서
정보를 얻으려고 하고 있었다.
"거실에 계십니다. 들어가 봐요.
동아일보의 박 기자와 조선일보의 문
기자도 와 있소. "
"저 보다 한발 빠르군요. "
강한섭은 웃으며 현관에 구두를 벗어
놓고 거실로 들어갔다. 김영삼 총재는 마포
당사로 출근하기 위해서인지 양복을 입고
소파에 앉아 있었다. 머리가 희끗희끗
했으나 얼굴은 여전히 동안()이었다.
 "왔노?"
강한섭이 인사를 꾸벅하자 김영삼 총재가
특유의 부드러운 미소를 얼굴에 담고
인사를 받았다. 말투는 여전히 경상도
악센트가 강했다.
"저 쪽에서는 완전히 결별을 할것 같은
데 총재께서는 어찌할 생각이십니까?"
조선일보의 문 기자가 김영삼 총재를
살피며 물었다. 박정희 대통령이 죽고
국민적 지지기반이 약한 최규하 대통령이
한시적인 집권을 하게 되자 김영삼 총재와
동교동의 김대중 민추협 고문은 대권을
쟁탈하기 위한 고지를 선점하기 위해
치열한 각축을 벌이고 있었다.
최규하 대통령은 빠른 시일 내에
유신헌법을 철폐하고 민주헌법으로 개헌을
하겠다고 약속을 했고 그것은 누구도
의심하지 않는 사실이었다. 18년
장기독재는 끝났고 박정희 정권 밑에서
온갖 탄압을 받으며 민주주의를 위해
투쟁을 한 양김씨와 민주공화당의 김종필
총재가 국민의 공정한 선택을 받기 위해
총력을 기울이고 있었다.
그러나 군부가 걸림돌이 되고 있었다.
지난 12월12일의 일이 세간에 파다하게
퍼져 있었다.
김종필 총재는 사실상 민주공화당의
대통령 후보나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신민당은 김영삼과 김대중이라는 걸출한
반독재 투사를 배출했기 때문에 당내에서의
경쟁이 더욱 치열했다.
상도동계는 김대중 민추협 고문에게
신민당에 들어와서 전당대회를 열어
대통령후보를 선출하자고 했고 동교동계는
민추협 고문이 정치규제에 묶여
있는 동안 신민당 당권을 장악한
상도동계가 재야인사까지 받아들여야만
입당하겠다고 말했다. 그러자 상도동계는
재야인사를 심사하겠다고 주장했다.
재야인사를 받아들이기는 하되 괄목할만한
활동을 한 인사들만 받아들이겠다는
것이었으나 동교동은 이를 거부했다.
동교동은 감옥을 오가면서 투쟁을 해온
인사들을 상도동이 무슨 권리로
심사하느냐고 주장했고 동교동이 추천하는
재야인사 전원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입당하지 않겠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상도동계는 김대중 민추협 고문이 재야
인사들을 신민당에 입당시키려는 것은 자파
세력을 확장하려는 의도에 지나지 않는다고
보고 있었다. 김대중 민추협 고문의 신민당
문제는 사실상 양 계파의 세력
싸움이었다.
그러한 까닭으로 김대중 민추협 고문의
신민당 입당 여부는 신민당뿐 아니라
국민들의 지대한 관심을 끌어 모으고
있었다.
"동교동 말이가?"
"총재님께서 잘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어디 내만 알고 있나?문 기자도 모르는
일이 아니제?"
"결별을 하리라고 보십니까?"
"동교동에 물어 보그라. 내는 당사에
나갈란다. "
김영삼 총재가 당사에서 일어섰다.
기자들도 웃다가 엉거주춤 따라 일어섰다.
"학생들 동태가 심상치 않은데
총재께서는 알고 계십니까?"
강한섭은 돌아서는 김영삼 총재에게
질문을 던졌다. 김영삼 총재가 흠칫하는
표정으로 강한섭을 돌아보았다.
"뭐라꼬?"
"학생들이 움직이고 있지
않습니까?산발적이기는 합니다만 서울에
봄이 왔다고 하는데 데모를 할 필요가
있겠습니까?"
"글쎄... "
김영삼 총재가 장난스러운 표정을 얼굴에
그렸다.
"마 그 문제라면 학생들에게 물어봐야
하지 않겠나?"
김영삼 총재가 어깨를 으쓱했다. 오랜
국회의원 생활을 했기 때문에 기자들의
질문을 피하는 말솜씨가 절묘했다.
"학생들이 파쑈 정권이라는 구호를
사용하는데 누구를 지목하는 것 같습니까?"
"강 기자,아침인데 그만 하재이... "
김영삼 총재가 손사래짓을 하며 현관을
향해 나가다가 주방을 향해 돌아섰다.
"나 나간데이. "
주방에 있는 손명순 여사에게 하는
말이었다. 그러자 주방에서 한복을 입은 손
여사가 재빨리 나왔다. 강한섭은 손
여사에게 묵례를 했다.
"오셨군요. "
손 여사가 인사를 받고 김영삼 총재를
배웅하러 현관으로 나갔다. 상도동의
가신()이라고 할 수 있는 국회의원들과
비서들도 김영삼 총재의 뒤를 따랐다.
최형우,김덕룡,최기선을 비롯해
황락주,서석재 의원 등도 보였다. 그들은
주방에서 아침을 먹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이 사람들도 군부의 존재를 알고
있어... )
강한섭은 김영삼 총재의 상도동 자택을
나오며 머리를 흔들었다. 상도동에서도
보안사를 중심으로한 군부 세력이 도사리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다만 군부
세력이 어떤 음모나 계획하에 움직이고
있는지 구체적인 내막을 모를 뿐이었다.
권력의 공백상태에서 군부가 실세로
등장하고 있다는 것은 이제 공공연한
비밀인 것이다.
강한섭은 신문사로 돌아와 상도동 동정을
몇줄 썼다. 동교동을 담당한
손영규() 기자도 동교동 동정을
기사로 뽑고 있었다. 동교동 동정은 김대중
민추협 고문이 조만간 광주를 방문할
예정이라는 것이었다. 그것이 사실이라면
기사의 비중은 정치면 톱이 될 것이
분명했다.
기사 마감시간이 지나자 강한섭은 학생들
동정을 살피기 위해 고려대로 향했다.
신문사에서 배정 받은 차로 종로를 지나
대광고등학교쪽으로 꺽었다. 날씨는
화창했다. 서울의 거리는 봄볕이 나부끼고
여자들의 옷차림이 화사해 지고 있었다.
어디서나 봄은 생명이 약동하는
계절이었다.
안암로로 꺽어 들자 프라타너스에
연두빛으로 물이 오르고 있는 것이 보였다.
주택가의 담장 안에는 라일락이며 벗꽃이
흐드러지게 피고 일찍 핀 벗꽃들은 담장
밑으로 사금파리 조각처럼 하얗게 떨어져
있었다.
고려대는 뜻밖에 조용했다. 강한섭이
고려대 출신이라 학생회장단과 교수들까지
만나 보았으나 학생들은 기묘할 정도로
별다른 움직임을 보이지 않고 있었다.
(태풍전야의 정적인가?)
강한섭은 고개를 갸우뚱했다 하기야
아직까지 계엄이 선포되어 있기는 했다.
학생들이 마음 놓고 시위를 할 형편이
아니었다. 그렇다고는 해도 너무나 조용한
것이 강한섭은 불길했다. 무엇인가 커다란
일이 벌어질 것 같은데 정체를 드러내고
있지 않은 기분이었다.
강한섭은 고려대를 나와 안암동으로
향했다 신문사로 바로 들어갈까 하다가
집이 근처라는 생각이 들어 잠깐
들려보기로 했다.
그러나 아내 은숙은 앞집 여자와 함께
테니스 코트에 가 있었다. 집이 비어 있어

주택가 골목을 돌아 나오는데 테니스
코트가 눈에 띠어 차를 세우고 들여다보자
아내가 앞집 여자와 함께 테니스를 치고
있었다.
(팔자들이 좋군... )
강한섭은 여자들을 보면서 속으로
빈정거렸다.
아내가 앞집 여자와 함께 테니스를
친다는 것은 아내에게서 몇 번이나
들었었다.
(봄이라 여자들도 물이 오르는
것인가...... )
강한섭은 속으로 엉뚱한 생각을 했다.
세상이 어수선하기만 한데 테니스를 치고
있는 여편네들이 한심하면서도 유니폼을
입고 코트를 이리 뛰고 저리 뛰고 있는
여자들의 모습이 싱싱해 보이기도 하였다.
 강한섭은 코트의 철망에 손을 기댔다.
아내가 그가 온 것을 알아채고 가까이
오려고 했으나 그는 손을 저어 계속하라는
싸인을 보냈다. 앞집 여자는 이웃 남자에게
테니스를 치는 모습을 보이는 것이
쑥스러운지 입을 가리고 웃고 있었다.
(살이 더욱 붙었군... )
강한섭은 짧은 스커트 아래 드러난 앞집
여자의 팽팽한 허벅지에 눈총을 주며
아랫도리가 뻐근해 왔다. 확실히 여자의
몸은 건드리면 툭 터질 것처럼 팽팽했다.
들어갈 곳은 들어가고 나올 곳은 나온
수준이 아니라 몸뚱이 전체가 살이 쩌
염기()로 둘러싸인 기분이었다.
특히 가슴과 둔부가 풍만했다. 운동을
계속한 아내의 몸도 다른 여자들에게
뒤지지 않게 풍만한 편이었으나 앞집
a여자의 풍만은 타고 난 느낌이었다.
"왠일예요?"
아내와 앞집 여자가 테니스를 끝낸 것은
그가 보기 시작한지 10분도 되지
않아서였다. 아무래도 그가 보고 있는 것이
여자들에게는 신경이 쓰이는 모양이었다.
"고대에 들렸다가 들어가는 길이야. "
여자들은 테니스 유니폼 위에 장미
꽃무늬의 긴 치마를 입고 있었다. 색상만
다를 뿐 똑같은 무늬의 옷이었다. 아내의
치마가 하늘 색이고 앞집 여자의 치마가
남색이었다. 아내의 치마는 앞집 여자와
백화점에 갔다가 앞집 여자가 자기 것을
사며 아내도 하나 사주었다는 것이다.
"고대는 왜요?"
"학생들이 무얼 하나 보러 간 거야. "
"신문기자가 학생들이 무얼 하는지도
틴해요?"
"시국이 어수선하니까... 난 신문사로
들어갈 테니까 집으로 들어 가... "
"오늘도 늦어요?"
"글쎄... "
"늦지 않으면 앞집과 같이 식사를 해요.
"
"앞집과?"
"앞집 신랑이 언제 저녁이라도
같이하자고 그러더래요. "
아내 은숙의 말에 앞집 여자가 입을
가리고 웃었다. 나이가 많은 앞집의 남편을
신랑이라고 부르는 것이 우스운
모양이었다. 강한섭은 앞집 남자가 무슨
의도로 그런 말을 했는지 그 진의를
파악하려고 잠시 망설였다.
"무슨 날인가?"
"날은 무슨 날이예요. 이웃끼리 저녁
같이 하는 건데... "
"그럼 그러지. "
강한섭은 선선히 승락했다. 저녁을 같이
하자는데 굳이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우린 목욕하고 저녁 준비할께 꼭 일찍
들어와요. 알았어요?"
아내가 그에게 다짐을 했다.
"그래. "
강한섭은 고개를 끄덕거리며 대답했다.
이 기회에 앞집 사내가 무엇을 하는지
알아보자는 생각과 함께 앞집 사내와 알고
지내는 것도 나쁠 것이 없겠다고 생각했다.

6

한경호는 아내의 전화를 받고 잠시
생각에 잠겼다. 아내는 신문기자 가족과
함께 저녁을 같이 하기로 했으니 어떤 일이
있어도 일찍 들어오라고 당부를 했던
것이다. 신문기자는 먼 발치에서 한번
보았으나 인사를 하고 지내는 사이는
아니었다. 다만 신문기자의 부인과 그의
아내 정란이 이웃이고 나이 차이가 꽤 많은
데도 자주 어울리는 것을 알고 있을
뿐이었다. 그의 아내는 신문기자의
부인에게 테니스까지 배우고 있는
눈치였다.
(흥!테니스를 배운다더니 이젠 상류층
행세를 할 모양이군... )
한경호는 아내의 얼굴이 눈앞에 떠오르자
눈살을 찌푸렸다. 기분이 좋지 않았다.
그는 아내를 철저하게 증오하고 있었다.
아내는 부정한 여자였다. 부정한 여자일 뿐
아니라 다른 사내의 아이를 낳아서 그의
아이인 척 위장하기까지 했다.
그는 아내가 낳은 아이가 자신의 아이가
아니라는 것을 알았을 때 머리 끝이 곧추
서는 듯한 분노와 함께 가슴을 예리한
흉기로 찌르는 듯한 슬픔을 느겼었다.
그것은 너무나 엄청난 충격이었기 때문에
분노와 함께 슬픔까지 복받쳤던 것이다.
그가 아내의 부정,아니 그의 아이들이
자신의 아이들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된
것은 딸 아이가 국민학교에
들어가고서였다. 그때까지만 해도 그는
아내와 아이들을 사랑했고 집안은 어느
집보다 화목했었다. 그러나 학교에서
돌아온 아이가 앙징맞은 입으로 그에게
아빠,오늘 학교에서 혈액형 검사했는데 내
피가 B형이래. 하고 종알거렸을 때 그는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뭐라구?"
"내 혈액형이 B형이라니까!"
"잘못 알았다. "
한경호는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웃었다. 그의 혈액형은 A형이었고 아내의
혈액형이 O형이었기 때문에 B형이 출생할
수 없는 것이다. 아이의 혈액형은 A형이나
O형이어야 하는 것이다.
"내가 왜 잘못 알아?"
아이가 항의를 했다.
"내일 다시 선생님에게 물어 봐. "
아이는 다음날 학교에 가서 혈액형을
물어 왔다. 그가 의심을 했기 때문인지
아이는 이번엔 종이 쪽지에 적어 오기까지
했다. 글씨가 어른의 필적인 것으로 보아
선생님이 써 준 모양이었다.
"넌 혈액형이 뭐냐?"
그는 아들에게 혈액형을 물어보았다.
"B형예요. "
"확실해?"
"네. "
한경호는 아들의 대답에 가슴이 타는 것
같았다. 아들은 그가 두 번씩이나 다짐을
하자 수상스럽다는 표정까지 지었다.
"당신 혈액형이 뭐라고 그랬지?"
밤에 그는 아내에게도 은근히 혈액형을
물어보았다.
"O형이라고 그랬잖아요. "
아내가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확실해?"
"이이가!"
아내가 눈을 흘겼다.
"잘못 알고 있는 거 아니지?"
 "영철이 임신했을 때 병원에서 검사한
거예요. "
아내의 말에 한경호는 가슴이 철렁했다.
어느 정도 예상하고 있던 일이었으나
그것을 확인한 순간 가슴이 터질 것
같았다. 아내가 자신의 혈액형이 O형이
맞는다고 대꾸한 순간 그것은 자신이
부정을 저질렀다고 자백한 것이나
마찬가지였기 때문이었다.
한경호는 그날밤 잠을 이루지 못했다.
아내의 부정에 속에서 부아가 끓고
배신감에 치가 떨렸다.
그러나 그를 더욱 괴롭힌 것은 아이들이
둘 다 자신의 아이가 아니라는 사실이었다.
그는 아내와 부정한 짓을 저지른 사내의
아이들을 자신의 아이처럼 정을 쏟고
살아온 사실이 모멸스럽기까지 하였다.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는가?어떻게 아내는 다른 사내와 부정을
저지르고도 모자라 그 사내의 아이를 내
아이처럼 감쪽 같이 위장을 할 수 있는가.
그는 자신이 아내의 부정을 모르고
지금까지 속아 살아온 것이 후회스러웠다.
여자가 그토록 교활한 존재라는 것도
그때서야 깨달았다.
그는 아내와 헤어져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막상 아내와 헤어질 생각을 하자 눈
앞이 캄캄했다. 그것은 아내를 사랑했기
때문이 아니라 아내의 부정을 모르고
지금까지 살아온 데 대한 사람들의 비난이
두려웠기 때문이었다.
(아내는 나를 철저하게 속였어... )
그는 아내를 증오하기 시작했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것 같던 아이들도 다른
사내의 아이들이라는 생각이 들자 소름이
돋을 것처럼 미워졌다.
한경호는 그 날부터 입이 무거워졌다.
아내를 거들떠보지도 않고 아이들에게도
걸핏하면 짜증을 부렸다.
아이들은 슬금슬금 그를 피하기
시작했다. 아내는 갑자기 달라진 그의
태도에 불안해 하고 초조해 하다가 짜증을
부리기 시작했다.
그는 아내에게 손찌검을 하기 시작했다.
아내는 악다구니를 퍼부우며 달려들었다.
아내도 그의 이유없는 폭행에 진저리를
내고 있었다.
그는 아내의 가슴팍을 발길로 내지르고
머리채를 잡고 휘둘렀다. 아내는 소리를
지르며 울었다. 그리고 아내에게 한 번
손찌검을 하기 시작하자 그것이 종내는
습관이 되었다. 그는 아내와 헤어지는 대신
폭행으로 그는 아내에 대한 증오심을
달랬다. 아내를 폭행하는 데서 야릇한
쾌감까지 느끼게 되었던 것이다.
한경호는 퇴근 준비를 서두르기
시작했다. 벌써 퇴근시간이 훨씬 지나
있었다. 그러나 사령관이 아직도 퇴근하지
않고 있었다.
사령관은 최근 거처를 자주 옮겨 다니고
있었다. 믿을만한 정보인지는 알 수
없었으나 해병대가 사령관 암살을 계획하고
있다는 정보가 들어와 있었다. 그러잖아도
사령관에게 군부의 불만이 팽배해 있는
실정이었다. 사령관을 지원하는 장교들은
정규 육사 출신들과 하나회의 영관 장교
그룹이었다. 그들 외에는 상당수의
장성들과 영관급 장교들이 불만을 갖고
있다고 보아야 했다.
한경호는 사령관이 퇴근하지 않고
있는데도 비서실장에게 집안 일로 일찍
퇴근하겠다고 말하고 사무실을 나왔다.
찢차는 사령부 건물 한쪽에 대기하고
있었다. 부대에 배정된 찢차는 군용 외에는
단위부대 지휘관들만 사용하게 되어
있었으나 보안사는 군무원들도 직급에 따라
찢차를 사용하게 했다.
날은 벌써 어둑어둑해지고 있었다. 저녁
7시였다. 보안사령부를 나와 번화가로
들어서자 네온싸인이 불야성을 이룬 거리에
인파가 물결처럼 흐르고 있었다.
( 거리는 여전히 화려하군...... )
한경호는 물결처럼 흐르는 인파를 찢차를
통해 보면서 생각했다. 세상은 변한 것
같은데도 전혀 변하지 않고 있었다. 10.
26에서 12. 12를 거치면서 서울이 불바다가
될뻔한 위급한 상황에 빠졌던 것을
사람들은 기억조차 하고 있지 않은 것
같았다.
어쩌면 사람들이 그러한 사실을 알고
있지 못한 탓인지도 몰랐다. 12. 12사태
직후 발표한 정부와 국방부의 발표는
박정희 대통령 시해사건에 관련된 정승화
육군 참모총장을 합수부가 연행 조사하는
과정에서 총장 경비병들과 우발적인
총격전이 있었을 뿐이라고 발표했던
것이다. 정부와 국방부의 발표대로라면
문제될 것이 전혀 없는 것이다.
찢차가 안암동 주택가에 이르자 날이
완전히 어두워지고 말았다. 한경호는
찢차를 돌려보내고 초인종을 눌렀다. 어느
집에선가 라일락의 독한 꽃향기가
풍겨왔다.
"당신예요?"
아내 정란이 대문으로 쪼르르 달려왔다.
"나야. "
한경호는 대문을 향해 냉랭하게 말했다.
그러자 철컹 소리와 함께 대문이 열렸다.
그는 작은 손가방을 아내에게 내밀었다.
"늦지는 않았네요. "
아내가 그 가방을 받으며 활짝 미소를
지었다. 서울로 이사를 온 뒤부터 아내에
대한 폭행이 사라져 아내는 차츰차츰
우울증에서 벗어나고 있었다.
그러나 그가 아내를 증오하지 않게 된
것은 아니었다. 아내에 대한 증오가 그가
참여하고 있는 공작의 일로 중단되고 있을
뿐이었다.
(이 시점에서 가정문제로 내 앞 일을
그르칠 수는 없어... )
한경호는 억지로라도 가정이 평화스러운
것처럼 위장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가정문제가 복잡한 사람이 큰 일을 할 수
없는 것이다.
그는 큰 꿈을 갖고 있었다. 어릴 때부터
갖고 있던 꿈,가슴 속 깊은 곳에 묻어
두었던 활화산 같은 야망을 불태울 기회가
왔는데 가정문제로 포기할 수 없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 야망은 직업군인의 길로
들어섰을 때 좌절되었으나 이제는
탄탄대로가 열려 있다고 할 수 있었다.
그의 사령관이 영도자가 되면 주변에
있는 모든 사람이 권력의 정점에 서게 되는
것이다.
"손님들 오셨어?"
그는 아내의 둔부를 손바닥으로 가볍게
-두드렸다. 아내의 몸에서 화장품 냄새가
독하게 풍겼다. 그가 최근에 요정에
출입하면서 자주 맡고 있는 냄새였다.
"부인만 왔어요. "
아내가 허리를 비틀며 까르르 웃었다.
그가 현관으로 들어가자 신문기자의 부인이
주방에서 얼굴을 내밀며 인사를 했다. 그는
황급히 인사를 받고 침실로 가서 옷을 갈아
입었다. 그가 다시 거실로 나오자 초인종이
울렸다.
"내가 나갈게. "
그는 주방에 있는 아내에게 말하고
대문으로 나갔다. 대문엔 신문기자가
퇴근하는 길인 듯 서류봉투와 신문을 들고
서 있었다.
"안녕하십니까?늦었습니다. "
신문기자는 깍듯이 인사를 했다.
"아닙니다. 저도 지금 들어왔습니다. "
어둠 속이기는 했으나 신문기자는
한경호보다 예닐곱살 쯤 아래로 보였다.
그러나 키가 훌쭉하고 눈이 서글서글했다.
"진작 찾아 뵙고 인사를 드려야
하는데... 강한섭이라고 합니다. "
신문기자가 먼저 악수를 청했다.
"아닙니다. 우리가 이사를 왔으니
떡이라도 돌려야 하는데 겨를이
없었습니다. 한경호입니다. "
한경호는 웃으며 신문기자의 손을 잡고
흔들었다.
"집이 참 좋습니다. "
강한섭이 집을 휘둘러보며 인사치례를
했다.
"강형집도 상당히 좋더군요. "
"그건 제집이 아닙니다. 마누라가
은행에서 받은 퇴직금과 선수로 있을 때
받은 돈으로 산 집이니까요. 그렇지 않으면
신문기자가 어떻게 그런 집을 살 수
있겠습니까?"
강한섭은 약간 취기가 있는 듯했다.
"농담을 잘하시는군요. "
"정말입니다. 내가 보탠 돈은 아마
장농값 밖에 안될 것입니다. "
"들어가시죠. "
"예. "
강한섭이 엉뚱한 소리를 하는 것 같아
한경호는 강한섭을 거실로 이끌었다.
그러자 아내와 강한섭의 부인 채은숙이
거실로 나와 인사를 했다.
"어서 오세요. "
"초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
아내와 강한섭은 낯간지러울 정도로
정중하게 인사를 주고받았다.
"늦었네요. "
채은숙은 강한섭에게 눈웃음을 쳤다.
저녁은 8시쯤에 시작되었다. 두집
가족이라고 해야 부부뿐이었기 때문에
분위기는 조용했다. 그래도 화제는
신문기자인 강한섭이 이끌었다. 그는
상도동의 김영삼 총재 자택과 신민당 마포
당사를 출입하는 정치부 기자였다. 자연히
신민당 정치인들에 대한 얘기가 화제의
중심이 되었다.
"김영삼 총재는 어떤 인물입니까?"
한경호는 김영삼 총재에 대해 지대한
관심을 기울였다.
"야당의 거목이죠. 보스 기질이 있는
사람입니다. 밑에 있는 사람들은 한번 그의
사람이 되면 떠나려고 하지를 않습니다. "
 "인화력이 있는 사람이군요. "
"정치를 감각으로 하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그 감각이 아주 뛰어납니다. "
"가신 그룹도 뛰어난 사람이
많다면서요?"
"드러난 인물로는 김동영과 최형우
의원이죠. 그들을 좌동영 우형우라고 부를
정도니까요. "
"재미 있는 일화도 있습니까?"
"누구라고 말하기 어렵습니다만 웃기는
사람도 있습니다. 한번은 여성지의 청탁을
받은 여류소설가가 어떤 국회의원을
취재하게 되었답니다. 여성지니까 정치적인
쟁점을 취재하는 것은 아니고 가정에 대한
것을 단독으로 취재하게 되었지요. 약속한
시간이 되어 여류 소설가가 국회의원의
사무실로 가니까 국회의원이 기다리고
있다가 종이에 깨알 같이 적은 자화자찬을
늘어놓더랍니다. 그래서 이 여류 소설가가
의원님,제가 취재하고자 하는 것은 이런
것이 아니고 의원님의 가정에 대한
것입니다. 의원님이 부인을 어떻게 만나고
어떻게 하여 결혼을 하게 되었는지 그런
자질구레한 것 말입니다. 그러니까
국회의원이 입을 쩝쩝 다시고 있다가
질문을 하라고 그러더랍니다. "
강한섭의 얘기에 채은숙과 아내도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한경호도 강한섭의
얘기에 귀를 기울였다. 얘기는 그다지
재미가 없었으나 이 기회에 신문기자들이
인터뷰나 취재를 어떻게 하는지 알고
싶어졌다.
"그럭저럭 취재를 마치고 여류 소설가가
국회의원 사무실을 나오려고 인사를 하니까
국회의원이 쭈빗쭈빗 하더니 팁을 얼마나
주어야 하지?하고 묻더라는 것입니다. "
"팁이요?"
한경호는 어리둥절했다. 아내와 채은숙도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강한섭을
쳐다보고 있었다.
"여류 소설가도 깜짝 놀라
팁이라니요?하고 물었답니다. 그러자
국회의원이 거 왜 인터뷰 끝나면 주는 거
있잖아?그러더랍니다. 여류 소설가가
가만히 생각하니까 정치인들을 인터뷰하면
정치인들이 기자들에게 촌지()라는
봉투를 주는데 그 국회의원이 촌지라는
말을 잊어버려서 술집 접대부에게 팁을
주는 것처럼 기자에게도 팁을 주는 걸로
알고 있는 눈치더랍니다. 그래도 호스티스
취급받은 것이 괘씸하여 의원님,저는
의원님에게 팁을 받을만치 서비스를 해드린
것이 없습니다,하고 의원 사무실을 나오고
말았답니다. "
한경호는 빙그레 웃었다. 웃음이 많은
아내는 무슨 내용인지도 잘 이해하지를
못했으면서도 까르르 웃음을 터뜨렸다.
여자들이 설거지를 하는 동안 한경호는
강한섭을 데리고 마당으로 나왔다. 마당에
비치 파라솔을 세우고 그 밑에 식탁을 하나
놓았던 것이다. 아내가 강한섭의 집에서
보고 와 들여놓은 것이었다. 처음엔 그런
것들을 무엇 때문에 들여놓는가 싶었으나
담장쪽으로 벗꽃이 피자 제법 운치가
살아났다.
"보안사에 근무하신다고요?"
강한섭이 정색을 하고 물은 것은 비치
파라솔 밑에 술상을 보고 양주를 석잔씩
컴컸하늘 아래
벌떼때였다.
"예. "
한경호는 자세를 바로 했다.
"요즈음 보안사가 군부의 실세라는 말이
있더군요. "
"예. "
한경호는 마른 침을 꿀꺽 삼켰다. 그것은
이미 공공연한 비밀이라 부정할래야 부정할
수가 없었다.
"전두환 사령관이 중장으로 진급하고
중앙정보부장을 겸임했으니 무소불위의
권력을 장악하게 된 셈이죠. 원래
중앙정보부장은 겸직을 할 수 없게 되어
있는데 말입니다. "
전두환 사령관이 중앙정보부장 서리에
임명된 것은 지난 3월의 일이었다.
"그래서 서리에 임명된 것입니다. "
 "편법이지요. "
"어쩔 수 없는 선택입니다. "
한경호는 단호하게 못을 박았다.
"신문기자들 사이엔 보안사 대령 그룹을
신군부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그들이 어떤
생각을 갖고 있느냐에 따라 이 나라가
커다란 소용돌이에 휘말리게 되지요. 혹시
그들이 어떤 생각을 갖고 있는지 알고
계십니까?"
"나는 보안사의 대령 그룹이 아닙니다. "
"그들이 혹시 혁명을 하려는 것이
아닙니까?"
"우리는 이 나라 정치를 개혁하려는
의도밖에 없습니다. "
한경호는 자신도 모르게 우리라는 말을
내뱉고 아차 하고 후회를 했다.
"우리라고 하셨는데 전두환 장군을
추종하고 계십니까?"
"추종이라니 좀 이상한 느낌이 드는군요.
아무튼 군인은 상명하복이 생명입니다. "
"상명하복이요?"
강한섭이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한경호는 대화가 껄끄러워지고 있는 것을
느꼈으나 자신의 생각을 모두 털어놓을
수는 없었다.
"보안사도 이 나라에 민주화를 할 계획을
갖고 있습니까?"
"당연하지요. "
"그런데 어찌하여 아직도 언론을
검열하고 있습니까?"
"조만간 검열이 풀리겠지요. "
"계엄은 언제 해제될 것 같습니까?"
"강 기자님은 나를 보안사의 대단한
존재로 보시는 모양인데 실은 미미한
존재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리고
계엄령이야 대통령의 고유 권한이
아닙니까?대통령께서 해제할만 하다고
생각되시면 해제하실 것입니다. 계엄령이
선포되어 있어도 국민들 생활엔 아무런
불편이 없지 않습니까?"
"별들이 우수수 떨어졌더군요. "
"대통령 시해사건과 관련이 있는
사람들입니다. 총장 연행을 방해한 장군도
있구요. "
"정승화 총장이 10. 26을 방조했습니까?"
"그렇습니다. 그 점은 정승화 총장도
인정했습니다. "
"정승화 장군이 고문을 받았다는 소문이
있습니다. "
한경호는 얼굴이 창백해졌다. 정승화
총장이 고문을 받은 것은 사실이었다.
 정승화 총장은 12월12일 밤 보안사의
서빙고 분실로 끌려갔다. 서빙고 분실은
보안사의 비밀 조사부였다. 정승화 총장이
도착하자 2명의 수사관이 정승화 총장을
조사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30대의 건장한
사나이로 사복을 입고 있었다. 그들은
정중한 태도로 10월26일 김재규가 박정희
대통령을 시해하던 날의 정승화 총장의
행적을 자세하게 조사하기 시작했다.
정승화 총장은 대통령의 재가를 받고
보안사 수사관들이 자신을 조사하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비교적 솔직하게
수사관들의 질문에 대답했다.
그러나 13일 새벽이 되자 상황이
달라졌다. 13일 새벽 4시가 되자 사복을
입은 수사관 2명이 더 조사실로 들어왔다.
그들은 잠자코 정승화 총장의 조사받는
모습을 지켜보다가 갑자기 버럭 역정을
냈다.
"이거 조사 받는 태도가 개판이구먼!누가
그따위 복장으로 조사 받게 했어?당장 그
옷 벗지 못하겠어?"
정승화 총장은 어이가 없어 수사관들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수사관들의 태도가
너무나 오만해 대꾸할 수가 없었다.
"그 옷 벗지 못해?"
수사관들이 다시 정승화 총장을 향해
눈을 부릅떴다.
"이게 무슨 짓들이야?"
정승화 총장은 그때서야 분노로 몸을
떨며 수사관들을 질책했다. 4성의 육군
참모총장에 계엄사령관인 자신을 보안사의
일개 수사관들이 모욕을 주고 있는 것을
참을 수가 없었다.
"뭐야?아직도 여기가 어딘 줄
모르는구만. "
수사관들이 정승화 총장의 옷을 잡고
강제로 일으켰다. 정승화 총장은 얼굴이
시뻘겋게 되었다.
"야!너희들 뭐하는 짓들이야?너희들이
군인이야?"
"뭐야?지금 누구한테 소리를 지르고
있어?지금도 참모총장니지 알아?죄를
지었으면 공손히 조사나 받을 일이지 무슨
말이 많아?"
"화끈한 맛을 봐야 정신을 차릴
모양이구만. "
그들은 정승화 총장을 비웃으며 헌
전투복으로 갈아 입으라고 했다. 정승화
총장은 참담했다. 그러나 육군 대장의
몸으로 일개 수사관들인 사내들과 계속
옥신각신할 수 없었다. 정승화 총장은
울분을 씹으며 헌 전투복으로 갈아입은 뒤
그들의 조사에 응했다.
이내 아침이 왔다. 13일 아침이었다.
수사관들은 정승화 총장을 서빙고 분실의
창고처럼 허름한 2층 건물로 옮겼다. 방
가운데 특수 철제의자가 놓여 있었고
밧줄과 곡괭이,각목을 비롯해 여러 가지
고문 도구들이 널려 있었다.
방안에는 얼굴이 험상맞게 생긴
사나이들이 대기하고 있었다. 정승화
총장은 그들이 자신을 고문하려는 것이라는
사실을 알아챘다. 기분이 착잡했다.
"너희들이 나를 고문하려는 모양인데
육군 대장의 몸으로 너희들에게 고문 당할
수는 없다. 예편원을 쓰고 고문을 당할
테니 종이와 연필을 가져 와라. "
 정승화 총장은 의연한 자세로
수사관들에게 말했다.
"뭘 몰라도 한참 모르고 있군. 그런 것
안 써도 예편되었으니 걱정하지 마. 아직도
참모총장인 줄 알고 있나?"
수사관들이 아니꼽다는 듯이 낄낄대며
빈정거렸다. 정승화 총장은 그 말에 참담한
기분을 느꼈다.
정승화 총장은 눈을 질끈 감았다.
수사관들은 정승화 총장을 철제 의자에
앉히고 양팔과 두 다리를 의자에 묶었다.
"자,험한 꼴 당하기 전에 김재규와
공모한 사실을 인정해. "
정승화 총장은 대꾸하지 않았다. 그들의
말은 일고의 가치도 없었다.
"정말 뜨거운 맛을 볼 텐가?"
"...... "
 "좋아!야,맛 좀 보여줘!"
"예. "
수사관 둘이 정승화 총장의 오금 사이에
각목을 끼워 넣고 곡괭이 자루로 허벅지를
때렸다. 정승화 총장은 입술을 깨물며
고통을 참았다. 어떤 수사관은 정승화
총장의 무릎 위에 올라가 밟기도 했다.
"어때?"
수사관들의 상급자인 듯한 자가 정승화
총장에게 물었다. 정승화 총장은 여전히
대꾸하지 않았다. 속에서는 뜨거운 눈물이
흘러내렸으나 겉으로는 조금도 내색하지
않았다. 명색이 육군 참모총장에 4성
장군인 육군 대장이었다. 고문이
고통스럽기는 했으나 비명을 지를 수는
없었다. 혀를 깨물고 죽는 한이 있더라도
참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 자식이 아직도 정신을 못차렸군!"
수사관들의 상급자가 수사관들에게
눈짓을 하자 기다렸다는 듯이 수사관들이
정승화 총장을 각목으로 마구 후려쳤다.
그들은 신명이라도 지핀 듯이 정승화
총장을 각목으로 사정없이 후려치고
있었다.
"자!바른대로 말해!김재규와
공모했지?너도 김재규와 한패지?"
"...... "
"이 자식아,버티어 봐야 소용없어!다
알고 있는데 죽으려고 버텨?"
보안사 수사관들은 정승화 총장에게 악명
높은 물고문까지 가했다. 물고문은 머리를
뒤로 젖히고 젖은 물수건을 얼굴에 덮어
씌운 다음 주전자로 물을 들이붓는
것이었다. 이 고문은 숨을 쉴 때마다
물방울이 폐까지 들어가 폐가 찢어지는
듯한 엄청난 고통을 주는 것이었다.
물고문을 당한 사람 중에는 기절하지 않은
사람이 없을 정도로 잔인하고 무서운
고문이었다.
정승화 총장도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희미하게 꺼져가는 의식 속에서 내가 이제
고문으로 죽는구나,4성 장군인 내가 무슨
수모인가,차라리 6. 25때 죽었으면 이런
수모를 당하지는 않았을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했다. 무엇보다 억울한 것은
더러운 누명을 쓰고 죽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이었다.
정승화 총장은 김재규와의 공모 여부를
3일 동안이나 추궁 받았다. 그러나 아무리
취조를 해도 김재규와 공모했다는 자백을
받을 수 없자 조사 방향을 바꾸었다.
보안사 수사관들은 이번엔 김재규의 거사를
방조했다는 자백을 하라고 정승화 총장에게
다그치기 시작했다.
"알았나?당신은 김재규가 범인인 줄
알고도 김재규를 체포하지 않았어!그러니
방조한 것이 아니고 뭐야?"
정승화 총장은 김재규가 범인이라는 것을
몰랐다고 말했다. 수사관들은 정승화
총장이 완강하게 내란방조 혐의까지
부인하자 태도를 바꾸었다.
"저희들로서는 총장님이 내란방조 혐의를
인정하지 않으면 결코 끝낼 수 없습니다.
총장님께서는 하루라도 빨리
내란방조혐의를 인정하고 여기서 나가는
것이 좋습니다. 상부의 지시가 워낙
완강해서 인정하지 않으면 살아서 나가실
수 없습니다. "
 보안사 수사관들은 내란방조혐의조서를
작성하여 정승화 총장에게 서명하라고
요구했다.
정승화 총장은 마침내 그들이 요구하는
내란방조혐의조서에 서명을 했다. 그는
어떻게 해서던지 살아서 나가 진실을
밝혀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정승화 총장은 내란방조혐의로 국방부
계엄군법회의에 회부되어 10년형을
선고받고 관할관 확인 과정에서 7년형이
확정되었다. 변호사들이 대법원에
상고하자고 요구했으나 정승화 총장은
거부했다. 시국이 보안사령관 전두환
장군의 손아귀에 들어가 있는 이상 무죄
판결이 불가능하리라고 판단했던 것이다.
"나도 그런 얘기는 들었습니다. "
한경호는 딱딱한 표정으로 강한섭의 말을
인정했다. 한경호는 보안사에 근무하고
있었기 때문에 보안사 서빙고 분실에서
일어나는 일을 소상히 알 수 있었다.
한경호가 비서실장이나 정보부장 등 보안사
대령급들의 지시를 서빙고 분실의 백
소령에게 직접 전달하기까지 했었다.
서빙고 분실의 백 소령은 고문
책임자였다. 물론 백 소령은 고문 받는
사람들을 속이기 위한 가짜 계급에 가짜
성씨였다. 백 소령의 진짜 신분은 한경호도
모르고 있었다.
"저희들도 함께 해요. "
설거지를 마친 여자들이 비치 파라솔로
몰려 나오는 바람에 딱딱한 대화가
끊어졌다. 여자들은 분위기에 취했는지
웃음이 헤프고 남자들이 따라주는 술을
홀짝거리며 계속 마셨다.
신문기자의 가족이 돌아간 것은 밤
11시가 지나서였다. 한경호는 아내가 비치
파라솔의 술자리를 치우는 동안 욕실에서
따뜻한 물로 샤워를 했다.
기분 좋은 취기가 몸을 노곤하게 하고
있었다.

7

호텔은 무궁화가 3개인 중급 호텔이었다.
건물은 7층밖에 되지 않았으나 내부는
호화스러웠다. 바닥과 벽은 이태리제
대리석이었고 복도엔 붉은 카피트가 깔려
상당히 세련된 외양을 하고 있었다.
"우선 목욕부터 하시죠. "
"목욕이요?"
한경호는 의아한 표정으로 홍 상무를
쳐다보았다.
"목욕을 하고 저녁을 드시면 피로도
풀리고 개운하지요. 서비스가 아주 좋은
곳입니다. "
홍() 상무가 빙긋이 웃으며 터키탕으로
올라가는 엘리베이터의 버튼을 눌렀다.
한경호는 홍 상무의 안내를 받아
엘리베이터 박스로 들어서면서 조금
긴장되는 것을 느꼈다. 터키탕은
처음이었다. 어렴풋이 목욕을 하는 곳으로
알고 있었으나 들어가 본 일은 한 번도
없었다. 사우나탕은 몇 번 들어가 보았으나
일반 대중 목욕탕보다 조금 고급스러울 뿐
별다른 것은 없었다. 마음 속으로 터키탕도
그와 비슷한 것이겠지 생각하는데
엘리베이터가 7층에 도착했다.
7층이 터키탕이었다. 한경호가
ㅈ내리자 홍 상무가 터키탕의
출입문을 공손히 열었다. 그는 조금 머슥한
기분을 느꼈다.
출입문이 열리자 마자 미니 스커트를
입은 미모의 아가씨들이 일제히 허리를
굽혀 인사를 했다.
"어서오세요. "
한경호는 홍 상무를 돌아다보았다.
목욕탕에 젊은 여자들이 있다는 것이
뜻밖이었다.
"잘 모셔. "
홍 상무가 여자들에게 말했다.
"네에. "
여자들이 앵무새처럼 대답했다.
"이리 오세요. "
여자들 중에 한 여자가 한경호에게
눈짓을 하며 앞서 복도를 걷기 시작했다.
"목욕하고 나오십시요. "
홍 상무가 그에게 인사를 했다.
"같이 안하십니까?"
한경호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홍
상무에게 물었다.
"저도 하겠습니다. 먼저 들어가시죠. "
홍 상무가 다시 정중하게 허리를 숙였다.
"예에. "
한경호는 여자의 뒤를 따라 붉은
카피트가 깔린 복도를 걸으며 좌우를
살폈다. 좌우의 방들에 매실이니
연실이니 하는 이상한 팻말이 붙어
있었다.
한경호는 복도의 모퉁이를 돌아 왼쪽에
있는 홍실이라는 방으로 안내되었다.
흡사 여관 같은 구조를 갖고 있는
방이었다. 다만 침대가 있는 방 옆에
욕실이 있었고 욕실에 있는 욕조가
여관보다 큰 것뿐이었다. 그리고 여관에는
없는 욕조 옆에 때를 밀 때 쓰는 목침대가
하나 벽쪽에 붙어 있었다.
"전 미스김이에요. "
여자가 생글생글 웃으며 말했다.
"옷은 여기 있는 장농에 거세요. "
여자가 욕조에 따뜻한 물을 받기
시작했다. 한경호는 상의를 벗어 장농에
걸었다. 그러자 여자가 밖으로 나갔고
욕조에 물 쏟아지는 소리만 방안에 가득해
졌다.
(여관 같은데 무슨 터키탕이지... ?)
한경호는 의아했다.
여자가 돌아온 것은 한경호가 옷을 모두
벗고 욕조에 들어가 몸을 담그고 있을
때였다. 여자는 어느 사이에 검은 색의
브래지어와 팬티 차림을 하고 있었다.
(몸을 씻어 주는 여자인가?)
한경호는 속으로 의아해 하면서도 짜릿한
흥분이 전신으로 퍼져 가는 것을 느꼈다.
여자가 몸을 씻어 주는 목욕은 한번도
경험한 일이 없었다. 세상이 요지경
속이라고 하더니 정말 그런 모양이었다.
그러나 싫지는 않았다. 아니 싫은 것이
아니라 젊은 여자의 나긋나긋한 손이
전신을 애무해 주는 상상을 하자 하체가
묵직해지는 기분이었다..
여자가 방의 불을 끄고 욕실로 들어왔다.
욕실의 창은 밀폐되어 있고 분홍 커텐이
드리워져 있어서 욕실이 어둠스레하면서도
자극적인 분위기를 풍겼다. 한경호는
여자를 번쩍 안아서 욕조로 끌고 들어오고
싶은 것을 참았다.
"양치하세요. "
여자가 칫솔에 치약을 묻혀 한경호에게
건네주었다.
"응. "
한경호는 여자에게서 칫솔을 받아
양치질을 하였다. 여자가 컵에 물을 받아
한경호에게 건네주었다. 한경호는 컵을
받아 입을 헹구어 욕조 바깥에 뱉았다.
"나오세요. "
여자가 말했다. 한경호는 여자가
시키는대로 욕조에서 나왔다. 그러자
여자가 목침대 위에 누우라고 하였다.
한경호는 목침대 위에 올라가 누웠다.
"이런데 처음이세요?"
여자가 이태리 타올에 비누칠을 하며
상냥하게 물었다.
"응. "
 한경호는 눈을 감고 대답했다.
여자가 비누를 묻힌 이태리 타올로
한경호의 전신을 문지르기 시작했다.
한경호는 편안하고 안온한 기분이 들었다.
그러면서 터키탕이라는 곳이 이런
곳이로구나,하는 생각을 했다. 그러면서
슬그머니 웃음이 비어져 나오는 것을
참았다. 여자는 이따금 나긋나긋한 손으로
그의 전신을 마사지 하기도 했다.
한경호는 기분이 좋아졌다. 터키탕에 온
것은 뜻밖의 행운이었다. 아내의 얼굴이
아주 잠깐 동안 머릿 속에 떠오르기도
했으나 부정한 아내이므로 죄의식은 들지
않았다.
여자는 정성스럽게 그의 몸을 닦았다.
한경호는 나른하게 몸이 풀렸다.
여자가 목침대 위에 올라와 그의 몸에
자신의 몸을 실었다. 그리고 이번에는
몸으로 그를 애무했다. 그의 몸에 비누칠을
잔뜩 해놓았기 때문에 여자가 그의 몸에
엎드리자 물컹하면서도 매낀매낀한 촉감이
느껴졌다. 여자는 어느 사이에 몸에 걸치고
있던 브래지어와 팬티까지 벗고 알몸이
되어 있었다.
한경호가 터키탕을 나온 것은 두 시간쯤
지났을 때였다. 여자는 그의 몸을 씻은
뒤에 당연한 순서인 듯이 관계까지 했고
관계가 끝나자 샤워를 하게 하였다. 물론
여자와 함께 하는 샤워였다.
샤워가 끝나자 여자가 그의 몸에 묻은
물기를 깨끗한 수건으로 닦고 침대로
이끌었다. 그리고는 수건 한 장을 덮은 뒤
안마를 하기 시작했다.
한경호는 그때서야 터키탕이 일본의
;유곽과 비슷한 것이라는 걸 알았다 일본의
유곽에서는 유녀()들이 남자를
정성스럽게 목욕을 시킨 뒤 몸을 판다는
것을 어느 책에서 읽은 기억이 났던
것이다.
"목욕을 했으니 저녁이나 하시죠. "
"예. "
한경호는 홍 상무 차를 타고 성북동의 한
일식집으로 갔다. 아직 한경호는 연우실업
홍 상무에게서 아무 얘기도 듣지 못했던
것이다. 윤() 사장은 연우실업 홍 상무가
우리를 도와 줄 사람이니 만나서 얘기를
들어보라고 했었다.
윤 사장은 서울공작의 총책임자였다.
보안사의 몇몇 대령들과 전두환
보안사령관을 영도자로 떠받들려는
민간인들이 조직한 비밀결사였다. 그들은
전두환 보안사령관의 영도자 만들기를 위해
모든 비밀 계획을 세우고 실천하고 있었다.
대외적으로는 비밀에 싸여 있었으나 그것은
보안사령관의 대통령 만들기였고 K공작의
전 단계였다.
윤 사장은 한경호에게 홍 상무를 만나서
얘기를 들어보라고 했을 뿐 무엇 때문에
만나야 하는지는 말하지는 않았다. 다만
가서 만나면 알게 될 것이라고 하였다.
얼핏 납득이 가지 않는 말이었다. 그러나
홍 상무를 만나면 어찌된 연유인지 알 수
있을 것 같아 질문도 하지 않았었다.
저녁은 장어 정식으로 시켰다. 그
집에서도 여자들이 옆에 단정하게 무릎을
꿇고 앉아 식사 시중을 들어주었다.
한경호는 만족했다.
"저녁을 했으니 술이나 하실까요?"
 홍 상무가 불콰한 얼굴로 말했다. 장어
정식으로 저녁을 먹으면서 반주로 정종을
마셨는데 홍 상무는 벌써 술이 얼쿤해
있었다.
"그러죠. "
한경호는 가벼운 마음으로 대꾸했다.
아직 홍 상무로부터 용무를 듣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홍 상무는 저녁을 먹으면서도
용무에 대해서는 전혀 언급조차 하지 않고
정치 얘기만 늘어놓았었다.
"제가 잘 아는 술집이 있습니다. "
일식집을 나오자 홍 상무가 자신의
승용차문을 열어 주었다. 한경호는 외제
승용차의 뒷좌석에 편하게 기대 앉았다.
밖은 이제서야 어둠이 스멀스멀 내리고
있었다.
홍 상무가 한경호를 안내한 곳은
옜있는 고급 주택이었다. 한경호는
차에서 내릴 때 홍 상무의 집인가,하는
생각을 했으나 뜻밖에 술집이었다.
한경호와 홍 상무가 들어서자 30대의
여자가 현관에 나와서 맞이했다. 얼굴도
미모였으나 어쩐지 낯이 익은 여자였다.
"마담 알아보시겠습니까?"
방으로 안내되자 홍 상무가 귓속말로
속삭였다.
"모르겠는데요. "
한경호는 고개를 흔들었다.
"영화배우예요. "
"아... "
"주연은 아니지만 조연으로는 꽤 알려진
배우였습니다. "
"예. "
한경호는 고개를 끄덕거렸다. 영화배우나
탈렌트들이 비밀요정을 차렸다는 주간지
기사를 읽은 기억이 그때서야 머릿속에
떠올랐다. 방은 호텔 못지 않게
호화스러웠다.
이내 술상이 나오고 여자들이 들어왔다.
여자들은 속이 아른아른 비치는 드레스를
입고 있었다. 한결 같이 20대 초반의
여자들로 눈이 부신 미모를 갖고 있었다.
한경호는 여자들의 극진한 대접을 받으며
술을 마셨다.
"장군께서 큰 일을 하신다고 들었습니다.
"
여자들이 잠시 자리를 비운 틈을 타서 홍
상무가 정색을 하고 입을 열었다. 한경호는
자세를 바로 했다.
"아,예... "
"자금도 많이 필요하신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
"그렇습니다. "
한경호는 홍 상무의 말에 고개를
주억거렸다. 전두환 보안사령관을
대통령으로 만들기 위해 공작을 추진하고
있는 그들에게는 막대한 자금이 필요했다.
특히 민간인들을 끌어들이는데는 자금이 큰
몫을 차지하고 있었다. 언론사의
간부들에게도 뭉텅이 돈을 뿌려야 했고
학자며 교수들도 포섭하려면 적지 않은
자금이 소요되고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자금을 조달하기가 여의치 않았다. 아직
재벌 기업들에게서 공공연히 정치자금을
걷어들일 형편이 아니었다. 눈치 빠른 기업
몇 군데서 정치자금 제공 의사를 타진해
오긴 했으나 정중하게 거절하고 있었다.
정권이 영도자에게 넘어오게 되면 사회
일각에 대한 대대적인 부정 척결을 실시할
예정이었다. 그러한 형편에 있으므로
정치자금을 걷기가 난처한 것이다.
연우실업이 선택된 것은 일반에 알려진
기업도 아닐 뿐 아니라 보안사령관을
모시고 있는 대령 중의 한 명과 연우실업
회장이 고교 동창이라는 사실 때문이었다.
"저희 회장님께서는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습니다. "
"감사합니다. "
"그러나 워낙 기업이 작아서 도와
드리기가 쉽지 않습니다. "
"그러시겠죠. "
"게다가 현금을 동원하는 일은 더욱
어려운 형편입니다. "
"그러시면 굳이 도우려고 하지 않아도
됩니다. "
"아닙니다. 제 말씀은 그런 뜻이
아닙니다. "
홍 상무가 황급히 손을 내저었다.
한경호는 홍 상무의 진의를 알 수 없어
우두커니 홍 상무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연우실업쪽에 구걸을 하듯 자금을 얻어 쓸
필요까지는 없었다.
"제 말씀은 저희가 현금을 마련할 수
있도록 조금만 도와 주십사 하는 것입니다.
"
"우리가요?"
"예. "
"글쎄요 우리가 사업하는 분들을 도울 수
있는 일이 어떤 것인지 모르겠군요... "
한경호는 고개를 갸우뚱했다.
"어려운 일도 아닙니다. "
"그렇다면 당연히 도와 드려야지요. "
 "감사합니다. "
홍 상무가 머리를 깊숙이 숙여 보였다.
"우리가 도와 드릴 일이 구체적으로 어떤
것입니까?"
"저희 회사에서는 이번에 레저산업에
진출하기 위해 양평에 콘도를 세우려고
합니다. 한 선생님께도 콘도를 하나 드릴
예정입니다만 우리 나라에서는 처음으로
시도하는 사업이죠. "
"콘도요?"
"휴양시설입니다. 한 선생님께서 윗분에
말씀 드려 사업 허가를 받게 해주시고
부지를 매입할 수 있도록 은행 융자를
알선해 주셨으면 합니다. "
"그렇게 말씀 드리죠. "
한경호는 술잔을 기울이며 대답했다.
콘도라는 이름은 처음 들어보았으나 굳이
알고 싶지도 않았다. 연우실업 홍 상무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그것만 알아서
상부에 보고하면 되는 것이다.
"저희야 그 일이 성사되면 좋겠지만
성사되지 않더라도 최대한으로 장군님을
도울 생각입니다. "
"뭐 성사되지 않을 까닭은 없으리라고
생각합니다. 다 나라를 위해서 하는 일이
아닙니까?"
한경호는 빙긋 웃으며 홍 상무를
안심시켰다. 콘도사업 승인이 어느
부처에서 하는 일인지 알 수 없었으나 전화
한 통화면 해결될 것이고 은행 융자도
간단한 일이었다. 벌써 권력이 한쪽으로
쏠리고 있는 낌새를 눈치 챈 금융계
사람들이 슬금슬금 접근을 해오고 있었다.
"감사합니다. "
"술이나 마십시다. "
"그러지요. "
홍 상무가 깍듯이 머리를 숙이고 손뼉을
쳤다. 그러자 여자들이 화장품 냄새를
풍기며 또 다시 몰려 들어왔다.
"자 이제 놀자구나. 모두들 옷을 벗어라.
"
홍 상무의 말에 여자들이 교성을 지르며
환호했고 싫어하는 기색없이 훌훌 옷을
벗었다. 한경호는 여자들이 일제히 나신이
되자 넥타이를 느슨하게 풀렀다. 화장품
냄새와 육향()이 물씬 풍기는 나녀들의
파티였다.
한경호가 집에 돌아온 것은 새벽 2시가
되었을 때였다.
"대접 잘 받았습니다. "
한경호는 집 앞에까지 차를 태워 준 홍
5상무에게 정중히 인사를 했다.
"이건 용돈으로 쓰십시요. "
홍 상무가 흰 봉투 하나를 한경호의
윗주머니에 찔러 넣어 주었다.
"아닙니다. 오늘 대접도 과분합니다. "
한경호는 사양하는 체했다.
"저희 성의입니다. "
"너무 과분해서... "
"얼마 안됩니다. 나중에 다시 인사
올리겠습니다. "
그러나 홍 상무가 돌아간 뒤에 봉투를
꺼내 보자 3백만원이나 들어있었다.
십만원권 자기앞 수표 30장이었다.
한경호는 자신이 잘못 본 것이 아닌가 하고
몇 번이나 다시 액면가를 확인하고 수표 장
수를 세어 보았으나 3백만원이 틀림없었다.
한경호는 숨이 막히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아내는 자고 있었다. 한경호는 돈을
서재의 서랖 속에 넣고 침대에 돌아와
누웠다.
밖에는 비가 오고 있었다. 한경호는
침대에 누워 빗소리를 들었다. 아내는 잠이
들었는지 조용했다. 그는 잠이 오지
않았다. 처음으로 들어가 본 터키탕,장어
정식,장충동 주택가의 비밀 술집,문자
그대로 주지육림이라는 말이 어울릴 그
비밀 술집의 여자들... 그 여자들의
나긋나긋한 체취와 육향이 새삼스럽게
가슴을 뻐근하게 했다. 하루 동안에 두
여자와 관계를 한 사실이 한경호는 꿈만
같았다. 두 여자가 모두 매음을 하는
여자들에 지나지 않았으나 여자들은 모두
20대 초반이었고 몸매가 날씬한
여자들이었다.
권력이란 이런 것인가.
한경호는 자신 같은 일개 문관이 술과
여자를 마음껏 즐긴 사실이 신기했다.
그리고 돈과 권력만 있다면 여자들은
얼마던지 즐길 수 있다는 사실이 흡족했다.
홍 상무가 용돈이나 하라며 준 3백만원도
한경호로서는 좀처럼 만질 수 없는
돈이었다. 그러나 그는 용돈이나 하라며 준
것이다. 콘도사업이 무엇인지는 모르지만
사업승인 허가가 떨어지고 은행융자를 받게
되면 인사를 따로 하겠다고까지 했었다.
한경호는 그 사실을 머릿속에 떠올리자
다시 기분이 좋아졌다. 권력이란 달콤한
꿀과 같은 것이다. 권력을 갖고 있으면
저절로 돈과 여자가 생기지 않는가...
여자들은 벌거벗고서도 기꺼이 춤을
추었고 그는 홍 상무를 따라 벌거벗은
여자를 안고 춤을 추었다.
(하기야 영웅은 여자를 많이 거느리는
법이지...... )
그는 여자들을 안고 춤을 춘 것이 결코
후회되지 않았다. 의자왕은 3천 궁녀를
거느렸고 연산군은 궁녀들을 발가벗기고
짐승처럼 기어다니게 했다지 않는가.
여자와 돈이란 많으면 많을수록 좋은
법이다. 세상에 어느 놈이 돈 싫어하고
여자 싫어하겠는가. 한경호는 자신의
방탕을 합리화시키느라고 궁리가 바뻤다.
그는 억지로 잠을 청했다. 아내는 임신을
하고 있었다. 겉으로는 그다지 배가 부르지
않았으나 옷을 벗으면 아랫배가 블록한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는 이마에 손을 얹었다. 아내의 임신을
잠이 오지 않았다. 이번에 아내의
뱃속에 들어 있는 아이가 누구의 아이인지
알 수 없을 뿐 아니라 설사 그의 아이라
하더라도 따뜻한 부정을 느낄 수 없을 것
같았다.
"비가 오나 봐요. "
잠이 든 줄 알았던 그의 아내가 잠에
취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응. "
한경호는 심드렁하게 대꾸했다.
"내일이 토요일이죠?"
"응. "
"내일은 병원에 가야겠어요. "
"가봐. "
한경호는 차갑게 대꾸했다. 아내가
병원에 가겠다는 것은 아들이 입원해 있는
정신병원에 가겠다는 것이었다.
 "당신은 못가겠죠?"
"바뻐. "
한경호는 아내의 말을 칼로 자르듯이
차단했다. 그도 영철이 입원한 병원에 몇
번 가보기는 했으나 아버지로서의 의무감
때문이었지 애정이 있어서는 아니었다.
"알았어요. "
아내가 낮게 대답했다.
이튿날 한경호는 새벽에 눈을 떴다.
아내가 새벽처럼 일어나 아들 영철이 먹을
김밥을 싼다고 부시럭대기도 했지만 술
때문에 갈증이 났다. 아내는 그가 일어나자
꿀물을 타주었다.
그는 꿀물을 마신 뒤 침대에서 일어나
커텐을 걷었다. 밖에는 아직도 빗발이
뿌리고 있었다. 그러나 새벽 하늘이 번하게
밝아 오기 시작하고 있었다.

8

정란은 차창으로 잿빛 하늘을 묵연히
응시했다. 어제부터 내리기 시작한 비가
아직도 그치지 않아 사방이 온통 질펀하게
젖어 있는 느낌이었다. 그녀는 차창으로 물
흐르듯이 흘러가는 시골 풍경을 내다보며
아들의 얼굴을 생각했고 김학규의 얼굴을
생각했다. 아들의 얼굴을 생각할 때는
가슴이 묵직하게 아팠고 김학규의 얼굴을
생각할 때는 가슴이 설레었다. 그러나
남편이 얼굴을 생각하면 가슴 속으로 찬
바람이 부는 것 같았다.
버스는 비때문에 느릿느릿 달리고
있었다.
차창으로 흐르는 풍경은 이미 봄이
완연했다. 길가의 이태리 포플라는
잎사귀들이 연두빛으로 돋아나 있었고 들과
산에는 살구꽃과 복사꽃,그리고 오야꽃이
하얗게 피어 빗발에 꽃잎을 떨구고 있었다.
버스가 이천 터미날에 도착한 것은
11시가 가까운 시간이었다.
정란은 버스에서 내리자 택시를 바꿔
타고 마장면으로 향했다. 그 곳에 조그맣고
아담한 정신병원이 하나 있었다. 이천
읍내에서 15분 남짓 걸리는 거리였다.
정란은 병원 현관 안의 로비에서 담당
의사를 만났다.
"아,오셨군요. "
담당의사는 마침 회진을 마치고 병실에서
내려오는 길이었다.
"안녕하세요?"
정란은 머리를 숙여 인사를 했다. 아들을
"담당한 의사는 30대의 여의사로 눈빛이
맑았다.
"예. 아직도 비가 오네요. "
의사는 정란의 머리에 묻은 빗방울을
보고 현관 밖으로 시선을 던졌다. 택시에서
내리며 우산을 썼으나 그래도 빗방울이
머리에 묻은 것이다.
"우리 아이는 차도가 있나요?"
정란이 근심스러운 빛으로 여의사에게
물었다.
"늘 같죠. 뭐... "
여의사가 난처한 얼굴로 대답했다.
여의사는 그녀의 아들이 평생 정신병원
신세를 져야 한다고 병원장이 처방을 내린
뒤였으므로 차도가 있느냐는 물음에
희망적인 말을 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정란은 병원에 찾아올 때마다 같은 질문을
피했다.
"볼 수 있을까요?"
"그냥 밖에서는요... "
밖에서라는 것은 폐쇄병동의 복도를
말하는 것이었다. 아들을 찾아올 때마다
폐쇄병동에서 들여다보고 가는 것도 이제는
만성이 되어 있었다.
"그럼 가 볼께요. "
"전화를 해 놓을께요. "
"네. "
여의사와 헤어져 폐쇄병동으로 가자 굳게
닫힌 철문이 정란을 가로막았다. 정란은
잠시 호흡을 가다듬은 뒤 철문 옆에 있는
벨을 눌렀다.
"어떻게 오셨어요?"
그러자 안에서 간호사의 사무적인
목소리가 들려왔다.
"영철이 엄마예요. "
정란은 벨 밑에 있는 스피커를 통해
대답했다.
"잠깐만 기다리세요. "
"네. "
정란은 철문이 열릴 때까지 병동의
차가운 벽에 등을 기댔다. 병원에 갇혀
있는 영철을 생각하자 가슴이 답답해 왔다.
영철은 벌써 열 네 살이 되어 있었다.
그러나 영철의 정신은 무엇 때문인지
마모되어 짐승의 흉내를 내며 방안을
서성거리고 있을 뿐이었다.
이내 철문이 열렸다. 정란은 철문 안으로
몸을 들여놓았다.
"어서오세요. "
간호사가 철문을 열어 주었다. 정란은
가볍게 목례를 하고 안으로 들어갔다.
복도를 걷기 시작하자 어느 병실에서인지
여자의 사나운 비명 소리가 들렸다. 또
다른 병실에서는 제법 그윽한 목소리로
찬송가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복도 끝에 있는 병실 출입문에 있는
유리를 통해 안을 들여보자 아들은 병실
한쪽 구석에 쪼그리고 앉아 있었다.
(불쌍한 녀석... )
정란은 유리창을 가만히 두드려보았다.
그러나 아들은 아무 반응 없이 허공의
일점을 쏘아보고 있었다. 정란은 주먹으로
가슴을 두드렸다. 병실에 쪼그리고 앉아
있는 아들을 보자 가슴이 막히면서 눈물이
주르르 흘러내렸다.
(그 인간은 천벌을 받을 거야... )
정란은 입술을 깨물었다. 아들이 이렇게
된 것이 어쩐지 모두 남편의 탓인 것만

정란이 병원을 나온 것은 12시가 조금
지났을 때였다. 병원에 싸가지고 온 김밥을
간호사에게 아들에게 먹여 달라고 전해
주고 밖으로 나오자 12시 10분이 되어
있었다. 12시가 되자 간호사가 그만 가
주었으면 하고 바라는 눈치였기
때문이었다.
김학규는 여주 옛날 그 강가에서
박쥐우산을 쓰고 기다리고 있었다. 정란은
뛰듯이 빠르게 걸어가 김학규의 품에
안겼다.
"병원에 들렸어?"
김학규가 정란의 등을 쓰다듬으며
따뜻하게 말했다.
"네. "
정란은 정감 어린 목소리로 대답했다.
"비가 오는데 어디 찻집이라도 갈까?"
"그냥 걸어요. "
정란은 김학규의 팔짱을 끼었다.
"비를 좋아 하는군... "
김학규가 빙긋이 웃었다.
"비보다 당신이 더 좋아요. "
"정말인가?"
"그럼요. "
정란은 웃음을 깨물었다. 그러면서
속으로 왜 나는 이 남자를 보면 웃음이
헤픈 것일까,우리는 왜 좀 더 일찍 만나지
못했을 까 하는 생각을 했다.
먼 산과 들은 빗발로 부옇게 흐려
있었다.
정란은 김학규와 보폭을 맞추며 천천히
걸었다.
"오늘 돌아가야지?"
"네. "
"나도 서울로 이사를 갈까?"
"이사요?"
"그럼 더욱 자주 만날 수 있잖아?"
"그렇지만 어떻게 서울로 이사를 와요?"
"그냥 가면 되지 뭐 이사가 별건가?"
"직장은요?"
"장사나 하지... "
"무슨 장사요?"
"무슨 장사던지... "
정란은 김학규를 쳐다보았다. 김학규의
얼굴에 언뜻 쓸쓸한 그림자가 스쳐
지나가고 있었다. 정란은 김학규와 부인의
사이가 더욱 나빠진 탓이라고 생각했다.
"부인도 서울로 이사하는 것을
찬성해요?"
"이혼을 하자고 그러고 있어... "
6 "이혼이요?"
"뭔가 눈치를 챈 것 같아. "
"그럼 어떻게 해요?"
"그냥 앙탈하는 거지 별일 있겠어?"
김학규가 고개를 들고 먼 허공에 시선을
주었다. 정란도 김학규를 따라 잿빛 하늘로
시선을 던졌다. 김학규의 부인이 이혼을
원하고 있다는 생각이 가슴을 무겁게 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김학규가 부인과 이혼을
하면 얼마나 좋을까,그리고 나도 남편과
이혼을 하면 그와 함께 살 수 있을 거야...
하는 생각을 했다.
문득 김학규의 손이 어깨를 감아 왔다.
정란은 김학규의 어깨에 다소곳이 얼굴을
기댔다. 김학규의 손이 어깨에서 미끄러져
가슴으로 내려왔다.
"아이... "
정란은 몸을 뒤트는 시늉을 했다.
"가슴이 커진 것 같애. "
김학규가 계면쩍은 표정으로 소근거렸다.
"아이 때문일 거예요. "
"그렇군. "
김학규가 묘한 표정을 지었다.
"아이 싫어요?"
"아니야. 배도 나왔나?"
"네. "
"몇 달이야?"
김학규의 부인은 아이를 낳지 못하고
있었다. 그래서 그런지 그는 정란의 임신에
부쩍 관심이 많았다.
"옷을 벗어야 겨우 알 수 있어요. "
"그래. 지금 이렇게 봐서는 알 수가
없어. 임신한 여자의 배는 어떻게
생겼을까?"
"보고 싶어요?"
"응. "
"그럼 보여 드릴께요. "
"여기서?"
"애걔... !"
정란은 곱게 눈을 흘겼다.
"가요. "
"어딜?"
"여관에요!"
"그러지. "
김학규가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여관은 늘 다니는 매화장이었다. 정란은
여관에 들어가기 전 근처 슈퍼에서 맥주 두
병을 샀다. 점심 시간이 지나 있었으나
아들의 김밥을 쌀 때 김학규와 함께 먹을
김밥까지 쌌던 것이다. 어쩌면 병원에 있는
아들보다 김학규를 위해 새벽부터
부스럭대며 김밥을 싼 것인지도 알 수
없었다.
방에 들어서자 정란은 김밥을 풀렀다.
그러나 김학규는 김밥을 거들떠보지도 않고
정란을 와락 끌어안았다.
"보고 싶었어... "
김학규의 말에 정란은 이상하게 눈물이
핑그르 돌았다.
"저두 보고 싶었어요. "
정란은 스스럼없이 그의 가슴에 안겼다.
"우리는 언제나 같이 살 수 있을까?"
"어쩌면 평생 같이 살 수 없을 거예요. "
"그래 그럴지도 몰라. "
김학규가 입술을 부딪쳐 왔다. 정란은
아련한 기분에 젖어 김학규의 입술을
받았다.
우리는 서로 같이 살 수가 없다.
 서로 사랑하는데 같이 살 수가 없다.
정란은 김학규의 입술을 받으면서 그런
생각을 했다.
김학규가 서둘러 정란의 옷을 벗기기
시작했다. 시간이 그렇게 많은 것은
아니었다. 언제나 그렇지만 관계를 맺으면
서둘러 서울로 올라가야 하지 않는가.
정란이 그런 생각을 하는 동안 김학규가
정란을 침대에 눕혔다. 정란은 김학규의
애무를 받으면서 마음이 기꺼워 졌다.
이것은 불륜이다.
남편 몰래 저지르는 위험한 불장난이다.
정란은 입속으로 중얼거리며 김학규를
자신의 몸속 깊이 받아들였다.
감미로웠다. 남편에게서는 느낄 수 없는
이 기쁨과 환희,몸이 떨리는 희열...
정란은 몸이 더워져 왔다.
3 김학규를 가슴에 품어 안으며 더운
입김을 내뿜었다. 김학규가 그녀의 전신을
애무할 때마다 몸을 떨고 신음을 내질렀다.
황홀한 전율이,가슴을 저미는 쾌락이
그녀의 전신 구석구석을 누비고 있었다.
정란은 두 시간쯤 지나서 김학규와
헤어져 서울로 올라가는 버스에 올라탔다.
그녀는 차창으로 흐르는 이천 시가지의
풍경을 내다보며 충만한 사랑을 느꼈다.
그녀의 코 끝에는 아직도 김학규에게서
풍기던 밤꽃 냄새가 희미하게 남아 있었다.
화합의 결정체인 애액이 풍기는 들큼한
밤꽃 냄새... 그것은 그녀가 서울에 도착한
뒤에도 내내 그녀의 코 끝에 맴돌고
있었다.

9

동해()은행 은행장은 이미
파라다이스 호텔 커피숍에 나와 있었다.
한경호는 홍 상무와 함께 은행장
전갑수()와 악수를 나누었다. 전갑수
은행장은 김해성() 이사와
동행이었다.
"정국이 혼란한데 얼마나 바쁘십니까?"
전갑수가 한경호에게 의례적인 인사를
건넸다.
"할일을 하고 있을 뿐입니다. "
한경호는 담담하게 대꾸했다. 이제는
사회 저명인사들과 인사를 나누는 것도
숙달이 되어 있었다.
"장군께서는 공사다망하시겠죠?"
"예. 워낙 일 밖에 모르는 분이니까요. "
"그러시겠죠. 언제 한 번 장군님을
수 있는 영광을 만들어 주십시요. "
한경호는 전갑수가 알현이라는 말을
사용하자 기묘한 기분이 들었다. 일개
장성에 지나지 않는 장군에게 그런 말을
하는 것이 적당한 것인가,권력을 손에
잡으면 사람들이 이토록 비굴해 지는
것인가. 그런 생각을 하는데 전갑수가 다시
입을 열었다.
"사례는 반드시 하겠습니다. "
"제가 무슨 힘이 있어야죠. "
한경호는 손을 내저었다.
"윗분들에게는 따로 사례를 하겠습니다.
"
"글쎄요. "
"꼭 부탁 드립니다. "
"정 그러시다면 조만간 자리를 마련해
보겠습니다. "
한경호는 주위의 눈이 있어서 낮게
대답했다.
"업무에 관한 것은 두 분에게 일임하고
우리는 점심이나 함께 하시죠. "
"그러죠. 뭐... "
전갑수 동해 은행장과 점심을 먹고
헤어진 것은 거의 2시가 되었을 때였다.
전갑수 은행장은 헤어질 때 용돈이나
하시라며 흰 봉투 하나를 한경호에게
건네주었다. 한경호가 화장실에서 봉투의
내용물을 꺼내 보자 백만원권 수표 다섯
장이 들어 있었다.
(사람을 만나기만 해도 돈이
들어오는군... )
한경호는 입가로 미소를 흘렸다.
사무실로 돌아오자 홍 상무로부터 전화가
걸려 왔다. 홍 상무는 기쁜 말투로
동해은행과 대출 협의가 잘되었으며 이
모든 것이 한경호의 덕분이라고 추켜
세웠다. 그리고 장군을 뵙고 정치자금을
드릴 터이니 오늘 중으로 자리를 마련해
달라고 말하였다.
한경호는 기다리라고 통고했다. 장군의
스케줄이 어떻게 될지 알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장군은 저녁 시간에 특별한
스케줄이 없었다. 한경호는 비서실과
상의하여 저녁 7시에 만나기로 시간을
정했다.
(개혁에도 돈이 필요하군... )
한경호는 담배를 꺼내 물고 우두커니 창
밖을 내다보았다. 어제부터 내리던 빗발이
아직도 추적추적 내리고 있었다. 거리와 먼
아파트단지가 빗발 때문에 부옇게 흐려
보였다.
저녁 7시가 되자 대령들이 장군을
수행했다. 한경호는 그들을 인사시키기
위해 동행했다. 장군의 행차에는 한경호가
수행한 일은 한 번도 없었으나 한경호는
기회만 주어지면 언제던지 수행할
계획이었다. 모든 권력과 돈이 장군 주위로
몰리고 있었다.
장군과 연우실업 회장이 만난 것은
종로2가 낙원시장 뒤에 있는 고급
요정에서였다. 처음엔 인사 소개를 위하여
대령들과 한경호까지 가세하여 참석하고
연우실업 쪽에서는 회장,사장,그리고
전무와 홍 상무가 참석하였다.
그러나 곧 바로 장군과 연우실업 회장이
일대 일로 면담을 하고 다른 사람들은 방을
옮겼다.
 요정에서의 파티가 파한 것은 11시가
조금 지나서였다. 뜻밖에 장군과 연우실업
회장의 면담은 30분 만에 끝나고 곧 바로
술자리가 시작되었다. 떡벌어진 요리상이
들어오고 기생들이 들어와 시중을 들었다.
한경호는 술자리가 파하자 장충동에 있는
파라다이스 호텔로 다시 갔다. 낮에 홍
상무를 만났던 커피숍이 있는 곳이었다. 홍
상무는 그 곳에 방을 예약해 두고 한경호를
불렀던 것이다. 그러나 홍 상무는 호텔에
와 있지 않았다.
"홍 상무님께서 오시면 전달해 드리라고
이것을 맡겼습니다. "
호텔 지배인이 한경호를 직접 찾아와
전달한 것은 흰 봉투였다.
(또 돈인가?)
한경호는 지배인에게서 흰 봉투를
받았다.
"아가씨가 곧 오실겁니다. "
지배인이 정중하게 인사를 하고
물러갔다. 한경호는 흰 봉투를
들여다보았다. 흰 봉투에는 한경호가
상상하지도 못했던 큰 돈이 들어 있었다.
(이건 액면가 1천만원짜리 수표잖아?)
한경호는 숨이 막히는 듯한 기분이었다.
흰 봉투에는 1천만원짜리 수표가 3장이나
들어 있었다. 한경호는 신기한 표정으로 그
수표를 몇 번씩이나 들여다보다가 상의
안주머니에 갈무리했다.
지배인이 말한 아가씨가 온 것은
한경호가 담배를 꺼내 물고 창으로
불야성을 이룬 시가지를 조망하고 있을
때였다. 19층에 있는 스위트 룸이었다.
멀리 중앙청과 청와대 건물이 창으로
어렴풋이 내다보였다. 이 나라 권력의
심장인 그 곳은 지금 빗속에서 조용하게
잠들어 있었다.
"왔군... "
한경호는 인사를 건네고 레인코트를 벗는
아가씨에게 미소를 날렸다. 요정에서 그의
시중을 들어주던 기생이었다. 요정에서는
한복을 입고 있었으나 지금은 양장
차림이었다. 1류 요정의 기생답게 키가
늘씬한 미인인데다 학벌도 좋았다.
한경호는 기분이 흡족하여 아가씨를 가볍게
포옹하고 입술을 부볐다.
"샤워 같이 하실래요?"
아가씨가 방긋 웃으며 한경호를
쳐다보았다.
"그럴까?"
한경호는 아가씨의 제안에 선선하게
응했다.
한경호는 새벽에 호텔에서 나와 집으로
돌아왔다. 비는 그때까지도 안개처럼
흩날리고 있었다. 바람이 이는지 이따금
비바람이 얼굴을 때렸다. 거리의 간판이
비바람에 요란한 소리를 내고 거리의 휴지
조각이 골목으로 쓸려다녔다.
아내는 자고 있었다. 시계를 보자 새벽
4시였다. 한경호는 옷을 벗고 침대에
올라가 누웠다. 그 바람에 침대가 출렁하고
흔들렸고 아내가 잠에서 깨어났다.
"몇 시예요?"
아내가 졸리운 목소리로 한경호에게
물었다.
"깨어났어?4시야. "
한경호는 팔을 베고 허공을 응시하며
대꾸했다. 집에 돌아오기는 했으나 쉽사리
잠이 오지 않았다. 병원에 있는 아들의
얼굴이 머릿속에 떠오르며 가슴이 묵직해
왔다. 그 아이는 언제까지 정신병원에
있어야 하는 걸까. 내가 비록 친 아버지가
아니라고 하더라도 그 아이에게 따뜻한
사랑을 베풀어 주어야 하는 것이 아닐까...
한경호는 그런 생각을 했다. 늘 그의
머릿속을 떠나지 않는 생각이었다. 그러나
아내에게서 속아 다른 사내의 아이를
자신의 아이처럼 사랑을 듬뿍 쏟았던 일을
생각하자 가슴이 싸 하게 저리면서 다시
증오심이 일어났다.
한경호는 빗발이 뿌리는 창을 응시했다.
바람이 불 때마다 어둠 속에서 희끗희끗
날리는 빗방울이 유리창 밖에서 아우성을
치고 있었다.
"아이는 좀 어때?"
한경호는 낮은 목소리로 아내에게
물었다.
"여전해요. "
"아직도 몰라 봐?"
"네. "
아내가 그의 옆으로 돌아누웠다.
한경호는 무겁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가
새삼스럽게 병원에 있는 아이에게 관심을
갖는 것은 호텔에서 기생과 살을 섞고
돌아온 미안함 때문이었다. 누군가
그랬었다. 바람을 피운 날은 남자나 여자나
서로의 상대방에게 더욱 친절해 진다고.
"요즈음 당신 너무 피곤하겠어요. "
아내가 나긋나긋한 목소리로 말했다.
"피곤하긴 뭐... "
"건강이 제일예요. "
"아직은 견딜만 해. "
한경호는 유난스럽게 부드러워진 아내의
말투에 더욱 미안한 느낌이 들었다.
"술 드셨어요?"
"조금. "
"꿀물 타 드릴까요?"
아내가 그의 사타구니로 부드럽게 손을
넣었다. 전에 없던 일이었다.
"하고 싶어?"
한경호는 아내의 얼굴을 보지 않고
말했다. 마음 속에서는 그냥 누워 있고
싶었으나 바람을 피웠다는 자책감이 아내를
거부하지 못하게 하고 있었다.
"아니요. "
아내가 부드러운 목소리로 대답했다.
"당신은?"
아내의 질문에 한경호는 가슴이 뜨끔해
왔다. 솔직한 심정으로는 하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어떻게 하고 싶지 않다는
말을 할 수 있는가. 아내와 살을 섞은지
벌써 일주일이 넘은 것이다. 관계를 한지
오래 되었는데도 하고 싶지 않다면 아내는
여자의 직감으로 의심을 하게 될 것이다.
"하고 싶어. "
한경호는 마음과 다른 대꾸를 했다.
"그럼. 손으로 해줄께요. "
"응. "
아내가 한경호의 속옷을 무릎 밑으로
끌어내리고 손으로 그의 남성을 애무하기
시작했다. 한경호는 지그시 눈을 감았다.
그의 감은 눈 위로 호텔에서 관계를 한
젊은 기생의 하얀 몸뚱이가 떠올라 왔다.
아내와는 비교할 수 없는 아름다운
몸이었다. 1년 전만 해도 그런 여자를 품에
안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었다.
 그러나 지금은 달랐다. 이제 그런
여자들은 지천에 널려 있었다.
아내가 몸을 일으켰다.
아내의 얼굴이 그의 하체로 내려왔다.
"음... "
한경호는 입을 벌리고 신음을 토했다.
하체가 아내의 입술에 의해 팽팽하게
부풀고 전신의 세포들이 기지개를 켠다.
그러나 한경호는 어떤 서러움 같은 것을
느끼고 있었다. 아내의 축축한 입술이 그의
나신에다 불꽃을 피울 때마다 몸을
경련하면서 증오를 했다.
아내는 그녀의 다른 남자에게도 이런
짓을 했을 것이다.
아내의 입술은 그 남자의 나신에도
선명한 입술 자국을 찍었을 것이다.
한경호가 그런 생각을 하는 동안 아내의
입은 커다란 구멍이 된다. 오로지 욕망과
탐욕밖에 모르는 커다란 구멍,썩은
물고기의 하얀 뱃가죽,들큼한 시궁창
냄새를 풍기는 입...
한경호는 다시 병원에 있는 아들을
생각했다.
여주 강가에서 물에 빠져 죽은 딸과
정신병이 생긴 아들... 그의 아들이지만
그의 아들이 아닌 아들,아내의 아들,그러나
아내가 다른 사내와 살을 섞어서 낳은
아들......
한경호는 숨이 가뻐 왔다.
아내의 입이 끈끈한 애액을 그의 전신에
묻히고 있었다. 썩은 생선의 비린내가
아내의 입에서 풍겼다. 어쩌면 이것은
착각이고 그가 맡고 있는 것은 비릿한 비
냄새인지도 몰랐다. 이 놈의 비가 며칠
동안이나 내리려는 것인가. 한경호는
두서없는 생각을 계속했다.
(이건 결코 사랑의 행위가 아니야... )
정란도 입술로 남편의 전신을 찍으면서
자신의 행위를 합리화하고 있었다.
남편이지만 사랑을 하지 않는 것은 엄연한
현실이었다. 한때 남자와 여자가 살을 섞는
것은 사랑을 해야만 가능한 것이라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지금은 달랐다. 남자와
여자는 사랑을 하지 않으면서도 관계를
한다.
때로는 의무적으로,때로는 바람을 피운
것을 들키지 않기 위해 내키지 않는 애교를
떨면서 남편의 욕망을 채워주는 것이다.
어쩌면 바람을 피운 날 남편에게 더욱
교태를 부리게 되는 것은 한 가닥의 양심
때문일 터였다.
 지금의 나만 비교해 보아도 알 수 있지
않은가. 낮에 김학규와 얼마나 뜨겁게
사랑을 나누었는데 또 남편과 이러고
있는가.
남편을 저주한다.
남편이 나에게 휘두른 폭력을 저주한다.
그러나 폭력을 휘두르는 남편에게
영합하는 나는 무엇인가. 나는 왜 남편의
폭력에 저항하지 않는가. 내가 어느 사이에
폭력에 길들여져 있는 것은 아닌가...
그러나 복잡한 것은 모른다. 나는 지금
남편을 위해 시궁창 썩는 냄새를 풍기고
있을 뿐이다.
갑자기 아내가 하얀 엉덩이를 그의
하체에 내려놓는다.
그는 아내와 하나가 된다.
폭력과 탐욕이 어우러져 질펀하게
뒹군다.

제12장 영혼이 없다

미경은 허공을 우두커니 쳐다보았다.
박태호로부터 온 컴퓨터 파일은 그것으로
끝이었다. 최종열이 누이 동생 최종미에게
맡긴 소설이 모두 끝난 셈이었다. 그러나
최종열의 소설이 완전히 끝난 것은
아니었다. 최종열의 소설은 작품 구성상
이제 불과 절반에 지나지 않는 것으로
추정되었다. 소설이 완성되었다면 어딘가에
있을 것이고 그 절반의 원고를 찾아야
했다.
미경은 이튿날 출근하자 잡지의 편집
책임을 맡고 있는 백인화() 주간에게
지금까지의 상황을 상세하게 보고했다.
그리고 최종미로부터 입수한 최종열의 소설
제출했다. 백 주간은 오전 내내 그
원고를 읽고는 오후에 미경을 데스크로
불렀다. 미경은 자판기에서 커피를 두 잔을
뽑아 가지고 백 주간의 책상 앞에 가서
앉았다.
백 주간이 원고를 미경 앞으로 밀면서
커피잔을 잡았다. 미경도 커피잔을 잡아서
한 모금을 마셨다.
"이게 전부인가?"
"네. "
"소설은 상당히 좋은데 끝이 없잖아?아직
완성된 것이 아닌가?"
"확실히는 알 수 없어요. 그래도 일단
연재를 하는 것이 좋을 것 같아요. "
"일단 연재를 하자구?"
백 주간이 이맛살을 잔뜩 찌푸렸다.
"네. "
 "소설이 탈고되지 않았는데 어떻게
연재를 해?연재를 하다가 중단할 수는 없는
노릇 아니야?그렇다고 작가가 살아 있어서
소설을 계속 집필할 수 있는 것도
아니구... "
백 주간은 책임 때문인지 망설이는
기색이었다. 몸집이 땅딸막하고 비대했으나
매사를 신중하게 생각한 뒤에 결정하는
버릇이 백 주간에게는 있었다.
"소설은 어느 정도 마무리 된 것으로
보입니다. "
"어떻게 알 수 있어?"
"최종열씨는 소설 원고를 아는
사람들에게 골고루 분배하여 보관하게
했습니다. 다만 우리가 누구에게
보관시켰는지 찾을 수 없을 뿐입니다. "
"그러니까 문제란 말이야. 우리가 그
원고를 찾아내면 모르지만 그렇지 않으면
독자들의 항의를 받게 될 거야. "
"소설을 연재하면서 사고()를
내야죠. 의문의 죽음 을 당한 최종열의
소설을 연재하겠다,최종열은 우리 잡지에
연재하기 위하여 소설을 쓰다가 의문의
죽음을 당했는데 그는 죽기 전에 원고를
지인()들에게 맡겼다. 최종열의 소설
원고를 보관하고 있는 사람은 연락해
달라,뭐 그런 사고도 내고 또 광고를 내는
것입니다. 잡지 광고는 어차피 하는
것이니까요. "
백 주간이 담배를 꺼내 입에 물었다.
미경은 백 주간에게 불을 붙여 주고 자신도
담배를 피워 물었다.
"좋은 생각이군. 그런데 소설을 연재하는
것은 좋은데 아무 문제가 없을까?"
 "문제요?어떤 문제요?"
"세상이 좋아지기는 했지만 아직도 12.
12나 군부의 일을 소설로 다루는 것은
금기시 하고 있잖아?"
"금기는 자꾸 깨트려야 해요. "
"이 소설에 보니까 5,6공에서 실세로
활약하던 사람들이 모두 실명으로 등장하고
있어. 그들이 우리 잡지를 명예훼손으로
제소하면 곤란할 거야. "
"실명으로 등장한 사람들은 모두
공인()들예요. 일단 공인이 되면 작품
속에서 비평을 받는 것은 당연하지
않아요?사법부에서도 그 점은 인정하게 될
거예요. "
"공인에겐 명예훼손이 적용되지 않는다?"
"예를 들어 이완용을 매국노라고
비판했다고 해서 그 후손들이 명예훼손으로
고발할 수 있겠어요?그런 문제를
명예훼손이니 어쩌니 하는 것도 따지고
보면 헌법에 보장된 표현의 자유를
침해하는 거예요. "
"듣고 보니 그렇군... "
백 주간이 빙그레 웃었다. 최근에 들어
문화계에 명예훼손 시비가 잇따르고
있었다. 작품 속에서 조상들이 나쁘게
그려졌다고 하여 그 후손들이 사자()의
초상권이니,사자의 명예훼손이니 하고
제소를 하는데 그로 인해 작가들이
위축되어 표현의 자유가 침해되고 있는
것이다.
"그럼 연재하는 거죠?"
"좋아,안 기자가 추진해 봐. "
"네. "
"연재는 다음 달부터 하기로 하고 우선
교정을 시작해... 제목은 어떻게 뽑지?"
"최종열씨의 소설에 제목이 없었으니
우리가 임의대로 뽑을 수밖에 없어요. "
"좋은 제목이라도 있어?"
"영혼마차가 어떨까요?"
"영혼마차?무슨 뜻이야?"
"최종열씨의 소설에 그런 제목이 나오고
있어요. 이 소설은 강한섭과 한경호라는
인물들이 80년대를 기록하기 위해 소설을
쓰는 것으로 얼개가 짜여 있는데 강한섭의
소설에는 제목을 영혼마차라고 붙였어요. "
"그래. 소설 속에 그런 대목이 있지...
그런데 영혼마차가 무슨 뜻인지 잘 이해할
수 없더라구... "
"영원의 상징예요. 영혼은 불멸을
상징하고 마차는 권위를 상징하죠. 영원히
살고 싶은 인간의 욕망과 권력을 상징하는
걸 꺼예요. "
"제목이 약하지 않아?"
"영혼마차는 원래 진시황의 능에서
발견된 유물예요. "
"유물이라구?"
"진시황은 불로초를 구하기 위해 우리
나라에 동남동녀 3천명을 보냈다는 기록이
있을 정도로 영원히 살고 싶어 했어요.
그래서 죽은 뒤에 타고 다니기 위해
영혼마차를 만들어 자신의 무덤 속에 함께
묻게 했다는 거예요. 그런데 그 영혼마차가
진시황이 죽은지 2300년 만인 1970년 경에
발견되었대요. 생각해 보세요. 진시황은
그토록 엄청난 권력을 누렸으면서도 영원히
살고 싶어 했으니... "
"그런데 최종열은 무엇 때문에
영혼마차를 소설 속에 대입시킨 거야?"
"영혼마차를 권력의 허구성이나 뭐 그런
것에 비유하기 위해서가 아닐까요?저도
자세히는 모르겠어요. "
미경은 어깨를 으쓱했다. 백 주간에게
연재를 하기로 허락을 받았으므로
영혼마차가 무엇을 뜻하던지 아무 상관이
없었다. 미경은 큰 짐을 벗어버린 듯이
홀가분했다.

2

미경은 백 주간으로부터 교정을
시작하라는 지시를 받은 다음 날부터
회사에서 최종열의 소설을 교정하기
시작했다. 특별히 문장을 고칠 곳이 있는
것은 아니었으나 맞춤법이 틀렸다던가
띄어쓰기가 틀린 곳을 정정해야 했다. 특히
띄어쓰기는 단행본과 잡지사가 각각 다르게
하고 있으므로 실정에 맞춰 고쳐야 했다.
날씨는 점점 쌀쌀해지기 시작했다. 벌써
12월이었다. 미경은 언제나 어둑어둑해서야
퇴근했다. 6시만 되면 벌써 사방이
어두워져 아파트에 도착하면 캄캄한
밤이었다.
퇴근해서는 그다지 할 일이 없었다.
미경은 저녁을 지어먹고 나면 양윤석과
소파에 앉아 TV를 시청하거나 비디오를
빌려서 봤다. 평화로운 나날이었다. 미경은
이따금 남편의 죽음이나 자신을 납치하여
윤락가에 팔아 넘긴 사람들의 일을 모두
잊고 이렇게 평범하게 살까 하는 생각을
하기까지 했다. 어떻게 생각하면 그들의
정체를 밝히는 일이 무망한 것처럼
생각되기도 했다.
 (우리네 삶은 버러지 같은 것이야... )
미경은 불을 끄고 침대에 누우면 그런
생각을 했다 양윤석과 격렬한 쎈스를 하고
나도 가슴 속이 허전했다. 무엇인가
가슴속에 채워져 있어야 할 것이 없는 듯
가슴이 텅텅 비어 있는 느낌이었다.
양윤석이 지방으로 발령을 받은 것은
12월 초순의 어느 날이었다. 양윤석은 그
은행 연말 정기인사에서 과장으로 승진을
하면서 부천으로 발령을 받았던 것이다.
"아무튼 축하해. "
미경은 양윤석과 헤어져야 한다는 생각이
들어 쓸쓸했으나 덤덤한 표정을 꾸며 축하
인사를 건넸다.
"부천으로 간다고 해도 멀지는 않아.
전철은 40분 남짓 걸리니까... "
양윤석이 멋적은 표정으로 웃었다.
"이왕 지방으로 가는 거니까 이제
재혼해. "
"재혼?"
"이제 재혼할 때도 되었잖아?"
"이제 와서 무슨 재혼을 하겠어... "
"부천에서도 나 같은 사람을 만날 수는
없을 거 아니야?성인 남자가 혼자서 살기도
그렇구... "
"하긴... "
잠시 대화가 끊겼다. 미경은 양윤석의
얼굴을 조용히 쳐다보았다. 양윤석의
얼굴엔 아직도 어두운 그늘이 덮여 있었다.
한가족을 잃은 슬픔이 그의 얼굴에 언제나
어두운 그늘을 드리우고 있는 모양이었다.
"언제 떠나?"
"다음 주 월요일부터 부천에서 근무하게
돼. "
"술이나 한 잔 할까?"
"그러지. "
미경은 양윤석과 함께 슈퍼마켓에 가서
양주와 간단한 안주거리를 샀다.
"눈 오네!"
슈퍼마켓에서 나오자 눈발이 어지럽게
뿌리기 시작하고 있었다. 미경은 자신도
모르게 하늘을 쳐다보고 환성을 질렀다.
"진눈깨비야. "
양윤석도 하늘을 쳐다보았다. 미경은
양윤석의 팔짱을 꼈다. 양윤석의 말대로
하늘에서 뿌려지는 흰 눈송이들에는
빗방울도 섞여 있었다. 눈송이들이
길바닥에 떨어지며 질척거렸다.
"좀 걸을까?"
양윤석이 미경에게 물었다.
"응. "
미경은 양윤석을 따라 아파트 광장을
천천히 걸었다. 눈이 내리기 때문인지
아파트 광장에는 밤인데도 아이들이
몰려나와 놀고 있었다.
"실은 말하고 싶은 것이 있었어. "
"뭔데?"
"미경씨가 좀전에 얘기 했듯이 내 재혼
문제... "
양윤석의 말에 미경은 가슴이 찌르르
울렸다. 양윤석이 겉으로 내색하지는
않았으나 재혼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아가씨 있어?"
"응. "
"재혼 약속했어?"
"아직 그런 단계는 아니구 만나기 시작한
것에 지나지 않아. "
"여행원이야?"
"아냐. 술집에 나가는 아가씨야. "
"왜 하필 그런 아가씨를?"
미경은 양윤석을 이해할 수 없었다.
"나도 그렇게 떳떳한 결혼 대상자는
아니야. 나이도 들었구 결혼해서
아이들까지 있었어. 마음 편한 상대를 고른
거야. 아무때나 헤어질 수도 있을 테구...
"
"헤어지기 위해 만나는 거야?"
"사람들은 누구나 헤어지는 연습을 해야
한다고 생각해. 이별이란 불시에 찾아오는
것이니까. "
양윤석의 말은 마치 미경에게 다짐을
하는 말 같기도 했다.
(그래. 떠날 사람은 떠나는 거야. )
미경은 속으로 그렇게 생각했다. 떠날
사람은 떠나는 것이다. 내가 무엇을 아쉬워
하겠는가. 양윤석과의 동거는 단순한
동거일 뿐이었다. 서로가 필요해서이고
서로가 싫지 않아서 같이 살아온
것뿐이었다.
양윤석은 이제 그러한 관계를 정리할
때가 왔다고 선언하고 있는 것이었다.
눈발이 더욱 자욱하게 뿌리기 시작했다.
미경은 고개를 뒤로 젖히고 하늘을
쳐다보았다. 문득 시 한 귀절이 머릿속에
떠올라 왔다.

꽃이 지네 꽃이지네
우리들 마음에 핀 꽃이
그 여름 새벽에 장독대에 핀 꽃은
시집 간 내누이의 얼굴
분꽃,채송화,백일홍을 닮은 누이의 얼굴

눈이 오네 눈이 오네
쓸쓸한 이 거리에 눈이 오네
이 겨울 적요한 밤에 내리는 눈은
떠나가는 여인의 마음
눈을 닮아 하얗게 변해 버린 여인의 속옷

누구의 시인지는 얼핏 기억이 나지
않았다. 그러나 싯귀의 끝에 하얗게 변해
버린 여자의 속옷이라는 표현이 절묘하여
기억하고 있었다.
양윤석이 떠난 것은 토요일 오후의
일이었다. 이삿짐이라야 옷가지와 책 몇
권뿐인 단촐한 것이어서 양윤석의 승용차로
날라도 충분했다. 나머지 가구는 양윤석이
따로 구입한다고 했다. TV라던가 오디오
셋트는 양윤석이 죽은 아내와 함께 살던
아파트에 그대로 보관되어 있었다.
양윤석은 직장을 따라 전전하면서 살고
있던 아파트를 세를 주고 방 하나에 세간
일체를 넣어 두고 있었다.
미경은 부천 양윤석의 셋집까지
동행했다. 양윤석의 셋집은 부천시
원미동의 작은 빌라였다. 방 2개와 주방 겸
거실,그리고 욕조가 하나 있었다.
"아담하네. "
미경은 빌라를 돌아보고 말했다. 빌라는
지은지 얼마 되지 않아서 벽에서 도배지의
풀 냄새가 풍겼다.
"그럭저럭 혼자 살 수는 있을 거야. "
"둘이 살지 않고?"
"그건 두고 봐야지. "
"아무래도 가정을 꾸며 안정을 하는 게
좋을 거야. "
 "미경이나 가정을 꾸며야지. "
"난 할 일이 있어... "
미경은 단호하게 말했다.
저녁은 시내에 나가서 먹었다. 토요일
밤이라 내일 출근할 걱정은 없었다. 미경은
양윤석과 함께 부천에서 제일 큰
나이트클럽에서 술을 마시고 춤까지
추었다.
"마치 이별 의식을 치르는 것 같군... "
습관처럼 쎈스를 마치고 침대에 눕자
양윤석이 피식 웃었다. 쎈스는 전보다 더욱
격렬했으나 욕구가 완전히 채워지지
않았다. 낯선 도시,헤어짐,그러나 사랑을
하지 않고 단순하게 욕구를 채우는 쎈스는
공허하기만 했다.
양윤석은 이내 코를 골며 잠이 들었다.
그러나 미경은 잠이 오지 않았다.
 미경은 침대 위에서 엎치락뒤치락하며
밤을 새웠다. 이따금 유리창을 흔들며
열차가 지나가고 어디선가 주전자에서 물이
끓는 듯한 소리가 들리고 있었다.
미경은 새벽에 눈을 떴다.
주섬주섬 옷을 챙겨 입고 양윤석의
빌라를 나오자 동녘이 훤하게 밝아 오고
있었다.
미경은 부천역을 향해 느릿느릿 걸음을
떼어놓았다. 그것이 양윤석과의
마지막이라고 생각했다.
양윤석이 떠나고 나자 아파트가 갑자기
썰렁한 것처럼 느껴졌다.
미경은 회사에서 퇴근하면 컴퓨터에
매달렸다. 무엇인가 일을 하지 않으면 가슴
하나 가득 비어 있는 공허함을 달랠 수가
없었다. 미경은 하이텔이나 천리안에
접속하여 소위 빼앗긴 봄,또는 서울의
봄이라는 80년 3,4월의 기사를 뽑아 읽기
시작했다.
1980년 신군부가 권력을 장악하기 위해
맹렬한 물밑 작업을 하고 있을 때 정치권은
갈팡질팡하고 있었다. 김대중 민추협
고문이나 신민당 김영삼 총재,민주공화당
김종필 총재는 신군부의 움직임을 감지하고
있으면서도 그들을 저지할 힘이 없었다.
보안사 사령관 전두환 장군의 집무실에는
그가 수면 위로 떠오르기 전인데도 새로운
권력자를 찾아서 사람들이 구름처럼
몰려들고 있었다.
80년 4월은 오히려 춥디 추운 봄이었다.

3

 세밑이 되면서 날이 더욱 추워지기
시작했다. 12월 하순이었다. 최종열의
소설은 1회분이 교정과 편집을 마치고
인쇄부로 넘어갔다. 신년호부터 연재될
예정이었다. 미경은 잡지의 기사 마감이
끝나자 잡지가 나오기만을 초조하게
기다렸다. 잡지가 시중에 배포되었을 때
일어날 파문을 생각하자 좀이 쑤셔 견딜
수가 없었다.
연말은 전과 다름없이 어수선했다.
경찰은 예년처럼 연말연시 갑호 비상을
내리고 경계에 들어갔고 번화가는
크리스마스 트리가 세워지면서 캐럴송이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미경은 최종열의
소설 나머지 부분을 교정하면서 시간을
보냈다. 양윤석이 부천으로 떠났기 때문에
집안이 물 속처럼 조용했다.
 잡지가 나온 것은 12월30일이었다.
잡지가 시중에 배포되고 반응이 오는 것은
새해나 되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잡지가
배포되자마자 신문사 기자들과
방송국으로부터 먼저 전화가 왔다. 그들은
최종열의 죽음에 지대한 관심을 갖고
있었다.
미경은 신문사 기자들과의 인터뷰를 뒤로
미루고 방송국 기자들을 먼저 만났다.
그들은 미경에게 방송에 출연할 것을
제의해 왔다. 미경은 그 제안에 선뜻
응했다.
"늘푸른 여성에 연재되는 최종열씨의
소설이 완간된 것입니까?"
미경은 방송국 9시 뉴스에 직접 출연하여
뉴스를 진행하는 앵커와 대담을 했다.
방송국에서도 전례가 없는 일이었다.
= "네. "
"영혼마차를 연재하면서... 라고 쓴
기사에서 밝힌 것을 보면 이 소설은 여러
사람이 나누어 보관하고 있었다고 했는데
왜 그랬습니까?"
"최종열씨는 이 소설을 쓰면서 신변의
위험을 느낀 것 같습니다. 최종열씨는
자신의 신변에 이상이 생기더라도 소설이
안전하게 발표되기를 바라서 원고를
분산하여 숨긴 것 같습니다. 솔제니친의
수용소군도를 연상하면 됩니다. "
"수용소군도요?"
"솔제니친은 수용소군도를 쓰면서 소련
비밀경찰에 체포될 것을 몹시
두려워했습니다. 그것은 자신의 신변에
닥칠 위험보다 귀중한 원고가 사장될 것을
우려한 것입니다. 그래서 자신의 절친한
틀림없이 이웃사람들이 들르기도
하겠지요. 그런 때에 음식 동료들에게 
맡겼는데 한 여자는 자신이
비밀경찰에 체포될 위험에 놓이자 목을
매어 자살하여 원고를 빼앗기지 않았지요.
"
"그럼 최종열씨의 소설에 그만큼 중대한
내용이 있다는 말씀이 아닙니까?"
"네. 최종열씨의 소설은 상당히 중요한
내용이 담겨 있습니다. "
"구체적으로 어떤 내용입니까?"
"아직 원고를 모두 입수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지금까지 입수한 원고의
내용만으로도 10. 26에서 5. 18까지의
얘기가 충격적으로 그려지고 있습니다. "
"최종열씨의 죽음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의문사입니다. "
"의문사란 어떤 뜻이죠?"
"문자 그대로 의문의 죽음을 당했다는
뜻입니다. "
"정치적인 의문사입니까?"
"전 그렇게 생각합니다. "
"경찰이 적극적으로 수사를 해야겠군요.
"
"전 경찰은 끝내 진실을 밝히지 못할
거라고 생각합니다. "
미경은 단호하게 말했다. 앵커가
카메라의 앵글을 피해 얼굴을 찌푸렸다가
폈다.
"경찰을 의심합니까?"
"경찰은 이근안 경감을 체포하지 못하고
있으니까요. 어쩌면 안하고 있는 것이지도
모르지만... "
"고문 기술자 이근안 경감 말입니까?"
"네. "
 "그렇군요. 이근안 경감을 체포하지
못하는 것은 우리 경찰의 한계라고 할 수
있겠죠. 끝으로 시청자에게 바라고 싶은
것이 있다면 무엇입니까?"
"최종열씨의 소설 원고를 가지고 있는
분은 우리 잡지사나 저에게 연락을
해주셨으면 합니다. 꼭 사례를 하겠습니다.
"
"감사합니다. "
인터뷰는 그것으로 끝이었다. 5분밖에
되지 않았으나 방송국에서 그 필림을 12시
마감 뉴스에 재방송을 하는 바람에
국민들의 비상한 관심을 불러 일으켰다.
미경은 방송국에서 인터뷰가 끝나자 곧
바로 가방 하나를 들고 여행을 떠났다.
신정 연휴가 끼어 있기도 했지만 불필요한
전화에 시달리고 싶지 않았다.
 미경은 먼저 열차로 천안 근처의 한
도시에 도착했다. 12월30일 늦은
시간이었다. 역 부근의 허름한 여관을 잡자
자정이 가까워져 있었다. 미경은 여관에
가방을 놓고 밖으로 나왔다. 시장기가
돌았다. 비로소 방송국에서 나오고 아무
것도 입에 대지 않았다는 생각이 떠올랐던
것이다.
다행히 역광장 부근에 포장마차들이
칸데라 불빛을 밝히고 나와 있었다. 미경은
허름한 포장마차에 들어가 국수를 하나
말아 달라고 부탁했다. 포장마차에는
30대의 두 사내가 곱창을 구워 놓고 술을
마시고 있었다. 이미 전주가 있는지 두
사내는 상당히 취해 있었다. 미경은 국수를
말을 때까지 그들의 얘기에 귀를 기울였다.
"내가 뭐라구 그랬어?그래서 여편네들은
사흘에 한번씩 두들겨패야 한다니까... "
"두들겨팬다고 해결이 될 문제야?"
"그래 이제 어떻게 할 참이야?"
"헤어져야지. 다른 사내를 껴안고 뒹군
계집을 어떻게 데리고 살아?"
"애들은?"
"내가 데리고 있을 거야. "
"하기야 새끼들이 무슨 죄가 있겠어.
여자들이 밤늦게 쏘다니는 게 문제지... "
사내가 미경을 힐끗 쏘아보았다. 미경은
사내의 시선에 아랑곳하지 않고 국수가
나오자 훌훌 저어 먹기 시작했다. 사내들은
얘기를 계속했다.
"여자들은 모두 창녀 기질을 가지고
있어. "
"남자들이라고 다르겠냐?어느 놈이고
계집 스물을 안겨 주면 마다하지 않을
거야. "
"성이 지나치게 개방되어 있는 것 같애.
"
"개방되었다는 것은 익명성이 보장되고
있다는 뜻이야. 여자고 남자고 마음만
먹으면 성을 즐길 수 있으니까... 세상이
혼탁해져 가는 증거지. "
"그래 술이나 마시자. "
두 사내가 미경을 다시 힐끔거리고
술잔을 비우기 시작했다. 미경은 사내들의
대화가 역겨워지기 시작했다.
"난 이따금 이런 생각을 했어. "
"무슨 생각?"
"세상이 다시 원시로 돌아가면 어떨까
하고... 여자고 남자고 아무데서나 만나면
그 짓을 하는... 그렇게 되면 윤리나
도덕에 구애받지 않고 자기 본능대로
충실히 살겠지... 오히려 그런 생활이 죄가
없는 생활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어... "
미경은 한 사내의 말에 속으로 고개를
끄덕거렸다. 사내의 말이 두서없기는 해도
누구나 꿈꾸고 있는 생활일 것 같았다.
성이란 결국 욕구이고 인간이 추구하는
권력이나 폭력이 모두 이런 욕구로 인해
비롯되는 것이다.
국수값을 치르고 포장마차를 나오자
뜻밖에 성긴 빗발이 뿌리고 있었다. 미경이
어두운 하늘을 쳐다보는데 낮고 음침한
목소리가 귓전을 때렸다.
"놀다 가세요. "
"좋은 애 있어요. "
물론 미경에게 하는 소리가 아니었다.
허름한 코트를 입은 여자가 역 대합실에서
쏟아져 나오는 승객들을 붙들고 속삭이는
소리였다.
"어차피 여관에서 묵으실 거면 객고를
풀어야 하지 않겠어요?"
미경은 걸음을 멈추고 역 광장을
조망했다. 한 펨푸가 중년 남자에게 바짝
달라붙어서 속삭이고 있었다. 남자는
솔깃한 태도였다. 어두워서 사내의 얼굴은
보이지 않았으나 망설이고 있는 눈치였다.
"침대방인가?"
미경은 딴전을 보는 체 하며 펨푸와 중년
남자의 얘기에 귀를 기울였다.
"그럼요. 욕조도 있어요. "
"예쁜 여자야?"
"네. 싱싱한 영계들이죠. "
"요즈음은 재미있는 집도 있다고 하는데
여기는 그런 곳 없나?"
"그룹 말씀예요?"
"응. "
사내가 주위를 둘러보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미경은 재빨리 걸음을
떼어놓는 척했다.
"있죠. "
"그룹은 몇이야?"
"둘이면 되지 않겠어요?"
"그럼 화대를 두 사람 분을 주어야
하나?"
"한 사람 분만 주면 되지만 어느 정도
팁은 생각해 주셔야죠. 그래야 애들이 잘
놀아 줄 테니까요. "
미경은 펨푸의 말에 화들짝 놀랐다.
그들이 말하고 있는 것은 그룹쎈스를
말하는 것이었다. 사창가가 예전처럼
활발하지 않자 이제는 그룹쎈스까지 등장한
모양이었다.
 ( 정말 상상도 못할 일들이 우리
사회에서 진행되고 있군. 두 여자가 한
사내에게 동시에 매음을 하는 발상을
어떻게 한 것일까?수치에 대한 개념이
완전히 사라진 것인가?)
미경은 의아했다. 중년남자와 펨푸는
타협이 잘 이루어졌는지 역 부근의 벌집을
향해 가고 있었다. 미경은 문득 그들을
따라가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미경은 일정한 간격을 유지하고 그들을
따라 걸었다. 벌집 골목에 이르자 우산을
받쳐 든 여자들이 옹기종기 모여 호객을
하고 있는 것이 보였다. 그러나 시간이
오래 되었기 때문인지 벌집 골목엔 인적이
거의 없어 여자들만 서성거리고 있었다.
중년 남자와 펨푸는 벌집 골목에서 어느
2층 층계를 향해 올라갔다. 그들이 여자들
7곁을 지날 때 여자들이 낄낄대며 수작을
부리기 시작했다.
"아줌마 또 물었네. "
"우리 아줌마는 기술도 좋다니까. "
"아줌마,내가 반까이 해줄께 그 손님
나한테 넘겨요. "
여자들이 다시 낄낄대고 웃었다. 미경은
벌집 골목을 지나 미경이 투숙한 여관을
향해 걸음을 떼어놓았다. 아무리 중년
남자의 일이 궁금해도 방까지 따라 들어갈
수는 없었다.
미경이 투숙하는 여관 앞에도 몇몇
여자들이 우산을 들고 서성거리고 있었다.
미경은 여관으로 들어가려다가 담배를 피워
물었다. 어쩐지 사창가의 뒷골목 풍경이
낯설어 보이지 않았다.
미경은 여관 벽에 등을 기댔다. 그리고
생각했다. 이렇게 벽에 등을 기대고 서
있으면 누군가 나타나서 화대가 얼마냐고
물어줄지도 모른다고......
빗발이 점점 굵어지고 있었다.

4

이튿날은 비 대신 눈발이 뿌렸다. 겨울
날씨라 일기가 불순했다.
미경은 대전으로 갔다가 계룡산의
동학사로 향했다. 눈발이 뿌리고 있어서
길이 미끄러워 계룡산 정상까지 올라갈
수는 없었으나 동학사는 구경할 수 있었다.
동학사를 구경하고 내려오자 오후가 훨씬
지나 있었다. 미경은 유성에서 점심을 먹고
온천을 했다. 그리고 그날은 유성에서
머무른 뒤 이튿날 열차를 타고 공주와 부여
구경을 했다.
신정이었다. 날씨는 모처럼 화창했다.
미경은 부여 박물관을 구경한 뒤 부소산을
올랐다. 낙화암을 보기 위해서였다.
나당()연합군에 의해 백제가 멸망하게
되자 3천궁녀가 백마강에 뛰어 내렸다는
전설이 깃든 곳이었다.
그러나 낙화암은 여자들이 뛰어 내릴만큼
깎아지른 절벽이 아니었다. 백마강도
수심이 얕아 강이라기 보다는 큰
하천이라는 편이 적절할 것 같았다.
(하기야 천년 세월이 흘렀으니... )
10년이면 강산이 변한다고 했는데 천년이
훨씬 지난 것이다. 미경은 부여에서 1박을
했다. 낯선 곳에서의 숙박이 외롭고
쓸쓸했으나 그래도 견딜만 했다.
이튿날은 열차를 타고 서울로 올라오기
시작했다. 이틀뿐인 신정연휴가 끝나 가고
있었다. 그러나 미경은 영등포에서 열차를
내렸다. 열차가 서울에 가까워지자 불현듯
양윤석이 생각났던 것이다. 어쩌면
양윤석에 대한 생각은 신정 내내 갖고
있었던 것인지 알 수 없었다. 방송국에서
인터뷰를 마치고 무작정 열차를 타고 대전
부근의 한 소도시에 내렸을 때 양윤석에
대한 그리움을 떠올렸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역 부근에서 창녀들의 호객하는 모습에서
미경은 짐승 같은 원시적인 욕구를 느꼈던
것이다. 그러나 그녀는 그 욕구를 억제하기
위해 관광을 하고 다녔던 것이다.
부천에 도착하자 정오가 조금 지나
있었다. 미경은 공연히 부천을 찾아왔다는
후회를 하면서 원미동으로 택시를 타고
갔다. 그러나 양윤석은 빌라에 없었다.
빌라의 현관문 시린다를 돌려 보았으나
문은 굳게 잠겨 있었다.
(연휴라 어디 놀러간 것인가?)
미경은 실망했다. 그러나 빌라 앞에서
언제까지나 기다리고 있을 수는 없었다.
미경은 빌라를 나와 근처 중국집에서
간단하게 짜장면을 사 먹었다. 짜장면은
그다지 맛이 없었으나 시장했던 참이라
접시를 깨끗하게 비웠다.
(어디로 간 거야?)
중국집에서 나와 양윤석의 빌라를 다시
가보았으나 양윤석은 그때까지도 돌아오지
않고 있었다. 미경은 짜증이 났다. 빌라
앞에서 담배를 한대 피우고 있는데 앞집의
문이 열리며 젊은 여자가 수상스러워 하는
기색으로 미경을 살폈다.
(혹시 당직인가?)
미경은 빌라 앞에 있는 슈퍼마켓에서
공중전화를 걸었다. 미경의 예상대로
양윤석은 당직이었다.
"언제 끝나?"
"6시. "
"그럼 그 때까지 기다릴께. "
"열쇠 줄께 이리와. "
"아냐. 어디 근처에서 사우나나 할래. "
"그러던지. "
양윤석이 싱겁게 대꾸했다. 그다지
반가운 기색은 아니었다. 미경은 주위에
사람이 있기 때문이라고 편하게 생각했다.
미경은 다시 빌라를 나와 택시를 탔다.
택시 기사에게 근처에 사우나가 있느냐고
묻자 택시기사는 미경을 부천 시내로
데려다 주었다. 미경은 사우나탕에서
목욕을 하고 마사지를 했다. 사우나에서
마사지까지 했으나 시간은 4시도 되지 않고
있었다. 미경은 사우나탕에서 나와 부천역
부근에 있는 영화관으로 갔다. 시간을
죽이기 위해서는 영화라도 한편 보아야
했다.
영화는 이미 3분의 1쯤 시작되어 있었다.
죽음을 부르는 정사()라는 포르노성
성인영화였다. 그러나 대부분의 관객들은
10대로 보이는 앳된 남녀뿐이었다.
영화는 질퍽했다.
영화배우들이 한결 같이 무명의 배우들인
것으로 비디오용으로 제작된 영화 같았다.
내용도 빈약한 편이었다. 살인사건이 두 번
벌어지고 쎈스 장면이 몇 번 계속되다가
영화는 싱겁게 끝이 났다. 다행인 것은
쎈스 장면이 추하게 그려지지 않았다는
것뿐이었다. 여자의 신음소리가 극장을
가득 메우고 허여멀건 유방이 화면을
압도했으나 어딘지 모르게 사창가의 풍경을
들여다보는 느낌을 주는 영화였다.
영화관을 나오자 5시30분이었다. 미경은
원미동까지 천천히 걸었다. 겨울이라
어느덧 땅거미가 어둑어둑 깔리고
질퍽거리는 땅이 얼기 시작해 발 밑에서
부석거리고 있었다.
"일찍 왔네. "
양윤석은 이미 빌라에 도착해 있었다.
미경이 시계를 보자 6시15분이었다.
"기다리는 사람 생각하고 빨리 왔지. "
양윤석이 빙긋이 웃었다.
미경은 소파에 걸터 앉았다. 양윤석을
보자 갑자기 공연히 왔다는 생각이 들었다.
"기다리는 동안 뭘했어?"
양윤석이 미경의 옆에 바짝 당겨 앉았다.
"목욕하고 영화 봤어. "
"무슨 영화?"
"죽음을 부르는 정사. "
"재미있어?"
"포르노야. "
미경은 양윤석의 턱에 난 파란
면도자국을 보며 웃었다. 그러자 양윤석이
미경을 안아서 입술을 포갰다. 미경은
양윤석의 입을 열고 혀를 밀어 넣었다.
갑자기 아랫도리에서 강한 욕망이 몸부림을
치고 있었다.
"방송에서 봤어. "
"어땠어?"
"글쎄... 내가 아는 사람이 텔레비전에
나오니 이상하더군. 뭐랄까?반가우면서도
전혀 낯선 사람 같이 느껴지더라구...... "
"나도 그랬어. "
미경은 9시 뉴스를 보지는 못했으나 12시
마감 뉴스는 볼 수 있었다. 그러나
TV화면에 비친 자신의 모습은 어설프기만
했다.
"최종열의 소설이 대단한 의미가 있는
모양이지... "
"그런 것 같애. "
양윤석이 미경을 다시 안았다. 미경은
양윤석의 얼굴을 조용히 쳐다보았다.
양윤석의 얼굴은 심로() 때문에 여전히
우울해 보였다.
양윤석이 천천히 입술을 포개 왔다.
미경은 양윤석을 향해 입을 열었다. 그러자
양윤석이 혀를 깊숙이 밀어 넣었다. 미경은
몸이 떨리는 듯한 전율을 느끼며 그것을
세차게 흡입했다.
 미경은 눈을 감았다. 아랫도리로 다시
짜릿한 쾌감이 빠르게 번지고 감은 눈 위로
빛의 입자들이 무수히 퍼득거렸다.
"저녁을 먹어야지. "
양윤석이 축축한 입술을 거두며 말했다.
"응. "
미경은 아쉬운 표정으로 대답했다.
아랫도리의 나른한 기분 좋은 감각이
불꽃이 사그라들듯이 천천히 수그러들고
있었다. 그러나 다시 활활 필 수 있는
불꽃이었다.
"이 근처에 일식집이 하나 있어. 오늘은
성찬으로 저녁을 먹자구... "
양윤석의 말에 미경은 몽롱한 눈빛으로
고개를 끄덕거렸다. 성찬이라니. 참으로
적절한 표현이야. 양윤석의 성찬이라는
표현엔 물론 쎈스도 포함되어 있는 거야...
" 미경은 그런 생각을 했다.
일식집은 양윤석의 차로 15분쯤 걸리는
곳이었다. 부천 시청근처의 번화가
뒷골목에 위치해 있었다.
"이런 곳에서 며칠 저녁을 먹으면 한 달
봉급이 다 날라 가겠는데?"
미경의 말에 양윤석이 아마 그럴 걸,하고
웃었다.
음식은 정갈했다. 밑반찬도 깨끗했고
아가씨가 단정하게 무릎을 꿇고 앉아서
식사 시중을 들어주었다. 미경은 흡족했다.
반주로 정종을 마셨으나 그다지 취기가
오르지 않았다.
"회는 스태미너식이라니까 오늘 기대해
보겠어. "
시중을 드는 아가씨가 잠시 자리를 비운
틈을 타서 미경은 양윤석에게 교태를
부렸다.
"기대가 크면 실망도 크다고 그러대. "
양윤석이 맞장구를 쳤다.
"설마 입으로 하는 것은 아니겠지?"
"직접 맛을 보면 알걸. "
"늘 보던건데 다른 맛이 있을려구.
그릇을 바꾸기라도 했다면 몰라도... "
뼈가 있는 농담이었다. 양윤석이 정색을
했으나 이내 표정을 바꾸었다.
"질투하는 것은 아니야?"
"절대로!"
미경은 단호하게 다짐을 했다.
"나도 그러리라고 생각했어. "
"내 말은 새로운 경험을 했으니 새로운
테크닉을 배웠느냐는 뜻이었어. "
"골이 깊으면 내도 크지... "
미경은 어깨를 으쓱했다. 문득 자신이
이토록 추한 음담을 거침없이 내뱉았다는
사실이 역겨워졌다. 그런 음담들은 대부분
미경이 천호동이나 미아리를 비롯해 부산의
엘로우 하우스에서 배운 것들이었다.
"내가 너무 원초적이었지?"
미경은 스스로 어처구니가 없어 정종잔을
들어 술을 입에 털어 넣었다. 정종은
시원하다 못해 차갑기까지 했다.
"그렇게 말하면 내가 쑥스러워. "
"일어나지. "
미경은 갑자기 우울해졌다. 자신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양윤석의 빌라로 돌아오자 8시가 조금
지나 있었다. 미경은 거실에서 양윤석을
빤히 쳐다보았다.
"그 아가씨 계속 만나?"
"응. "
"정말 결혼할 거야. "
"응. "
"결혼할 거면서 왜 나를 만나?결혼하는
사람들은 순결해야 되는 거 아니야?"
"순결?"
"과거야 어찌되었든 현재부터는 결혼
상대자를 위해 순결을 지켜야 할거야. "
"결혼하면 그렇게 할거야. "
"아가씨도 윤석씨와 나와의 관계를
알아?"
"몰라. 알면 난리가 날거야. "
"아가씨가 윤석씨를 사랑하는 모양이지?"
"그런 모양이야. "
"윤석씨는?"
"나도 사랑하려고 노력하고 있어. "
미경은 고개를 끄덕거렸다. 양윤석이
사귀는 아가씨가 양윤석을 행복하게 해줄
같은 예감이 들었다. 그 예감이
이상하게 미경의 마음을 차분하게
가라앉혔다.
미경은 발뒤꿈치를 들고 양윤석의 입술에
자신의 입술을 포갰다. 양윤석이 미경의
등을 감싸 안더니 두 손으로 둔부를
받쳤다.
"가야겠어. "
"무슨 소리야?"
"집에 가고 싶어. "
"내가 태워다 줄께. "
양윤석이 성급히 미경의 원피스 자락을
들추기 시작했다.
"이러지마. "
미경은 양윤석의 손을 움켜잡았다.
"너를 갖고 싶어. "
"...... "
"이게 잔뜩 부풀었어!"
양윤석이 미경의 손을 끌어다가 자신의
하체에 갖다댔다. 미경은 재빨리 손을
빼냈다. 양윤석의 하체가 이미 팽팽하게
부풀어 그녀의 손바닥에서 불끈거리고
있었다.
미경은 눈을 감았다. 이제 와서 양윤석을
거부하는 것은 무슨 수작이고 집에
가겠다는 것은 또 얼마나 가당찮은 말
장난인가. 위장하지 말자,위장하지
말자,여자의 델리키트한 심리로 포장하여
쾌락에 몸을 내던지고자 하는 진실을
외면하자 말자... 미경은 속으로 그렇게
부르짖었다.
양윤석이 미경을 소파 위에 눕혔다.
(내가 왜 이렇게 멜랑코리해 진 거야...
)
 미경은 자신의 우울을 이해할 수 없었다.
미경의 원피스가 허리 위로 들추어지고
속옷이 무릎 밑으로 흘러 내려갔다. 미경은
양윤석의 목에 두 팔을 감고 협조했다.
그러면서 내가 왜 이렇게 멜랑코리한
상태에 빠진 것일까 하는 생각을 했다.
양윤석도 허겁지겁 바지와 속옷을 벗어
던졌다. 그리고 미경에게 다시 엎드려
하체를 압박해 왔다. 미경은 다리를 벌리고
양윤석의 등을 힘주어 껴안았다.
눈을 감았으나 불빛에 눈이 부셨다.
미경은 불을 껐으면 하고 생각했다.
그때 현관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미경은 눈을 번쩍 떴다. 그러나 양윤석은
현관문이 열리는 소리를 듣지 못했는지
계속 하체를 압박하고 있었다.
"누가 왔어. "
미경이 양윤석의 귓전에 속삭였다.
"응?"
양윤석이 멈칫했다.
"누가 왔어... "
"잘들 논다!"
누군가 갑자기 야비하게 말질을 했다.
양윤석이 깜짝 놀라 후닥닥 미경의 몸에서
떨어져 일어났다. 미경은 소파에 누운 채
멍하니 여자를 쳐다보았다. 화장이 짙은
파마머리의 20대 여자였다. 키가 크고 검은
색의 원피스를 입고 있었다.
"어,어쩐 일이야?"
양윤석이 당황한 표정으로 말하면서
바지를 주워 입기 시작했다. 미경은
그때서야 천천히 몸을 일으켜 속옷을 주워
다리에 꿰기 시작했다. 양윤석이 사귀고
있다는 아가씨인 모양이었다.
 "넌 어느 바닥에서 굴러먹던 계집앤데
남의 남자와 놀아나고 있어?"
그때 여자가 느닷없이 미경의 가슴팍을
힘껏 떠밀었다. 미경은 속옷을 다리에
줏어꿰다 말고 거실 바닥에 나뒹굴었다.
그러자 여자가 미경에게 엎어져 머리채를
잡고 휘두르고 마구 주먹질을 해댔다.
순식간의 일이었다. 미경은 뭐라고 대꾸할
새도 없이 여자에게 정신없이 얻어맞았다.
"왜 이래?"
양윤석이 여자를 미경에게 떼어낸 것은
미경이 이미 싫컷 얻어맞고 난 뒤였다.
"야!이 년아!너 어디서 굴러 먹었어?"
여자는 양윤석에게 붙잡혀 꼼짝을 하지
못하게 된 뒤에도 식식거리며 악다구니를
계속 퍼부었다. 미경은 대꾸하지 않고
속옷을 주워 입었다.
. "임자있는 남자 건드리면 어떻게 되는 줄
알아?"
미경은 어처구니가 없었다.
"미안해요. "
미경은 여자에게 사과했다.
"나올 필요 없어요. "
미경은 양윤석에게도 매몰차게 말하고
현관을 향해 걸어갔다. 등 뒤에서 여자가
다시 악다구니를 퍼부었다.
"한번만 더 남의 남자 탐내면 면상을
그어 버릴 테니까 그런 줄 알아!"
미경은 대꾸하지 않고 현관문을 세차게
닫았다. 서울에 돌아와 거울을 들여다보자
눈언저리에 시퍼렇게 멍이 들어 있었고
얼굴에도 손톱으로 긁힌 자국이 있었다.
그러나 미경은 불쾌하지 않았다. 여자가
양윤석에게 갖고 있는 감정이 미경의
오오히려 따뜻하게 하고 있었다.

5

소설은 2회째 잡지에 연재되었다. 1월도
어느덧 매서운 추위와 함께 하순이
되었으나 최종열의 소설 원고를 가지고
있을 것으로 추측되는 미지의 사람에게서는
아무 연락이 없었다. 미경은 길고 긴
겨울을 초조하게 연락이 오기만을
기다렸으나 신문사와 잡지들의 전화만
빗발치고 있었다.
"이거 우리가 잘못 짚은 것이 아니야?"
1월 하순이 되자 백 주간은 미경을
데스크로 불러서 근심스러운 얼굴로
말했다.
"연재가 3회분이나 남았으니 좀 더
기다려 보는 게 좋겠어요. "
"어쩐지 최종열이 소설을 완성하지
못하고 죽은 것 같은 예감이 들어. "
"최종열은 완성했을 거예요. "
"여자의 육감인가?"
백 주간이 빙긋 웃었다.
"아무튼 이만해도 성공이니 연재는
계속해야겠지... 독자가 20푸로나 늘었어.
"
백 주간이 만족한 표정으로 말했다. 백
주간의 말은 사실이었다. 최종열의 소설에
대한 매스컴의 집중적인 보도가 새삼스럽게
12. 12사태를 부각시키는 바람에 잡지의
판매가 부쩍 늘었던 것이다. 게다가
전직기자인 최종열의 죽음에 대한 관심도
커져 가고 있었다. 화성에서는 최종열의
의문사 사건에 베테랑 형사들을 집중적으로
투입하고 수사를 더욱 적극적으로
펴나가겠다고 공언했다.
그러나 미경이 의도하고 있던 연락은
오지 않고 있었다.
미경은 최종열의 소설에 대한 연락이
오기를 기다리며 남편에 대한 생각을 했다.
이제는 남편의 의문사에 대한 추적을
시작해야 했다.
그러나 어디서부터 시작을 해야 할지
막막하기만 했다. 미경이 가지고 있는
유일한 증거라고는 남편이 죽었던 현장에
떨어져 있던 라이터 하나 뿐이었다. 그
라이터에 화인이라는 술집 이름이 씌어
있었다.
미경은 화인이라는 술집을 찾아 나섰다.
그 술집은 종로2가의 낙원상가 뒤에
있었다.
 그러나 그 술집은 이미 없어진지
오래였고 술집이 있던 자리에는 비디오방이
들어 서 있었다.
(너무 늦었어. 진작 찾아 나섰어야
하는데... )
미경은 실망하여 아파트로 돌아왔다.
그러나 그대로 물러설 수는 없었다. 미경은
남편의 죽음을 처음부터 다시 검토하기로
했다. 남편이 의문사를 당한 것은 거의
움직일 수 없는 사실이었고 의문사를 당한
것이라면 반드시 그에 합당한 이유가
있으리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남편이 남긴 유품들은 김포에 있는
아파트에 있었으나 미숙이 오피스텔에 옮겨
놓고 있었다.
미경은 미숙에게 남편의 유품을 모두
가지고 오라고 하여 꼼꼼히 살피기
시작했다. 남편의 유품은 옷 박스가 두
개였고 기호품이나 기념품을 넣어 둔
박스가 하나였다. 그리고 남편이 즐겨 치던
키타도 하나 있었다. 남편의 기호품과
기념품을 담은 박스엔
담배,라이터,손수건,소형 트랜지스터를
비롯해 수 십가지나 되었다. 그 중에서도
미경의 관심을 끈 것은 키타와
취재수첩이었다.
(이것들이 남편의 흔적이로군... )
키타는 남편이 이따끔 미경을 위하여
연주를 해주었었다. 남편은 전문연주가는
아니었으나 아마추어로서는 상당한 경지에
이르러 있었다.
미경은 키타를 보고 남편이 자신을 위해
연주를 해주던 생각을 하며 쓸쓸한 회상에
잠겼다가 깨어났다.
 취재수첩엔 취재해야 할 명단과 취재
내용이 깨알처럼 적혀 있었다. 대부분
문화계 인사들의 전화번호와 약속 날짜와
시간 취재할 요점이 간략하게 메모되어
있었다. 취재 내용도 더러 적혀 있었으나
그것도 전부 문학에 관한 것이었다.
(이걸로는 전혀 도움이 안되겠네... )
미경은 난감했다.
미경은 커피를 끓여 마시며 천천히
동작대교 쪽을 응시했다. 한겨울인데도
하늘이 윤기 하나 없이 매끄러웠다.
미경은 커피를 마시자 남편의 옷가지들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이제는 죽은
남편이었고 죽은 남편의 옷을 언제까지나
간직하고 있을 수는 없는 일이었다.
미경은 남편의 옷가지들 중에서 와이셔쓰
세 벌과 남방 두 벌,그리고 깨끗한
런닝샤쓰를 따로 챙기고 나머지는 박스에
챙겨 아파트밖에 내놓았다. 재활용
옷이라고 싸인펜으로 썼으므로 누군가
가져다 입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것들은 봐서 내가 입어야지... )
미경은 남편의 와이셔쓰와 런닝셔쓰를
살피며 생각했다. 갑자기 남편의 옷을 입고
남편을 느끼고 싶어졌다. 남편의
얼굴이,남편의 체온이 벌써 희미해져 가고
있었다.
미경은 겉옷을 벗고 브래지어까지
벗었다. 그리고 남편의 런닝셔쓰를 걸쳤다.
그러자 남편에게 안겨 있는 듯한 야릇한
기분이 아랫도리에서 전신으로 번졌다.
미경은 누가 몸을 간지르고 있기라도
하듯이 몸을 꼬았다.
(그래 이 런닝셔쓰로 남편을 느끼며 사는
거야!)
미경은 입언저리에 미소를 매달았다.
런닝셔쓰의 부드러운 촉감이 그녀를 나른한
감각에 휩싸이게 하고 있었다.
미경은 남편의 런닝셔쓰 위에 와이셔쓰를
걸치고 다시 취재수첩을 살피기 시작했다.
(아니,이럴 수가... !)
미경은 취재수첩을 살피다가 말고 깜짝
놀랐다. 취재수첩엔 뜻밖에 최종열의
주소와 전화번호가 적혀 있었고 이름 밑에
간단한 메모까지 씌어 있었다.
(남편이 최종열을 알고 있었어!)
미경은 남편의 취재수첩을 보고 뒤통수를
흉기로 한 대 얻어맞은 기분이었다. 남편이
최종열을 알고 있었다는 것은 남편이
최종열을 취재하기 위한 것이라고
여겨졌으나 그래도 기묘한 인연에 정신이
탑낭냘

최종열 서울 행당동 전화 295-476
전 신문기자 해직되어 작가로 활동하고
있음.
현재 12. 12 사건 때의 비화를 다룬
소설을 쓰기 위해 자료를 수집중

메모는 간단했다. 그러나 최종열의
주소가 전남 목포가 아니라 서울이라는
것은 여간 놀라운 일이 아니었다.
미경은 남편의 취재수첩에 적혀 있는
전화번호로 전화를 걸어보았다. 가슴이
쿵쿵거리고 뛰었다. 상대방에서는 벨소리가
여러 번 울린 뒤에야 겨우 수화기를
들었다.
"여보세요. "
미경은 긴장하여 수화기에 바짝 귀를
갖다댔다.
"네. 대영공업사입니다. "
수화기에서는 굵은 남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대영공업사요?"
"예. 그렇습니다. "
"혹시 거기 최종열이라는 분 계시나요?"
"...... "
수화기 저쪽에서 침을 삼키고 있는 듯한
소리가 들렸다. 상대방도 긴장하고 있는
기색이었다.
"여기는 그런 사람이 없습니다. "
"그러지 마세요. 다 알고 있어요. "
미경은 강하게 밀고 나갔다. 상대방은
무엇인가 감추려고 하고 있었다.
"무얼 다 안다는 말씀입니까?"
"최종열씨가 거기 있었다는 거요. "
"이 전화번호는 어떻게 아셨습니까?"
"혹시 김석호 기자라고 아세요?"
"김석호요?"
"몇 년 전에 교통사고로 죽은
신문기자죠. "
"댁은 그 분과 어떻게 되십니까?"
"부인예요. "
"...... "
상대방이 다시 침묵을 지켰다. 미경도
입을 다물고 상대방의 반응을 초조하게
기다렸다.
"그런 분 모릅니다. "
이내 상대방이 무뚝뚝하게 내뱉았다.
"여보세요!"
"전화 끊습니다. "
상대방이 찰칵 하고 수화기를 놓는
소리가 들렸다. 미경은 다시 전화를
걸려다가 그만 두었다. 전화를 다시
걸어봤자 소용이 없을 것 같아서였다. 그럴
바에야 직접 행당동으로 찾아가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미경은 전화를 끊자 담배부터 한 대 피워
물었다. 대영공업사라는 곳에서는 분명히
최종열과 그녀의 남편을 알고 있는 것
같았다. 그러나 무엇 때문인지 최종열이나
남편을 모른다고 시치미를 떼고 있었다.
(그래 그 쪽에서 그렇게 나오면 나도
생각이 있어... )
미경은 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이튿날 미경은 청계천에 나가서 개스총을
구입하고 종로5가 농약상에서는 여러 가지
약품을 구입했다. 물론 그것은 가축들을
상대로 하는 약품이었으나 최음제와
마취제는 사람들에게까지 사용할 수
있었다. 그리고 청계천 7가로 거슬러
올라가 만물상회 골목을 돌아다니며
나이프와 등산화,손전등,검은 색의
바바리코트까지 구입했다. 그리고 열쇠를
수리하는 수리공에게 마스타키도 하나
만들었다. 물론 그것들이 지금 당장 필요할
지는 알 수 없었으나 미리 준비해 두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가발 상회에서는 몇 가지 모양의 가발을
샀고 선글라스도 몇 개 구입했다. 그리고
그것들이 모두 갖추어지자 아파트로 돌아와
변장을 해보았다.
미경의 변장은 어딘지 서툴러 보였다.
그러나 가발을 쓰고 선글라스까지 쓰자
전혀 달라 보였다.
(이만하면 됐어... )
미경은 거울을 보고 만족한 미소를
지었다.
오후에 미경은 행당동으로 대영공업사를
찾아갔다. 미경의 수중에는 달랑 전화번호
하나 밖에 없었으나 파출소에 들려
대영공업사를 찾자 순경이 친절하게 가르쳐
주었다.
대영공업사는 무학여고 옆에 있었다.
뜻밖에 그 곳은 청바지를 만드는 가내
봉제공장이었다.
미경은 고개를 갸우뚱했다. 가내
봉제공장과 최종열의 연결고리를 전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주인이 최종열의 친척인가?)
미경은 대영공업사 앞에서 해가 질
때까지 살펴보았다. 대영공업사는
한겨울이라 문을 닫고 일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따금 여자들이 들락거리기도 했고
원단을 실은 차가 와서 짐을 부리기도
했다.
전화를 받은 사람은 키가 땅딸막한
사내로 보였다. 그는 팔에 실밥이 더덕더덕
붙어 있는 토시를 차고 있었다.
(오늘은 일단 돌아가야겠어... )
미경은 몸을 떨며 대답했다. 해가
기울면서 날씨가 더욱 추워지고 있었다.
미경은 그날부터 틈틈이 행당동으로
찾아가 대영공업사를 은밀하게 살폈다.
그러는 동안 1월도 가고 2월이 왔다.
2월엔 민족의 대명절인 구정이 들어
있었다.
미경은 구정에 틈을 내어 수원에 사는
박태호를 만났다. 박태호에게 술을 사주마
하고 약속을 했던 것이다.
 "잘 지냈어?"
전화를 하고 수원시외버스 터미날에
도착하자 박태호가 마중을 나와 있었다.
박태호와는 잡지에 최종열의 소설이
연재되기 시작하면서 몇 번 전화 통화를
했으나 만나는 것은 열차에서 헤어진 이후
처음이었다. 미경은 박태호를 데리고 인근
다방으로 들어갔다. 어디선가 버스 정류장
특유의 가솔린 냄새가 풍겨와 속이
미슥거렸다.
"예. "
박태호가 선선하게 웃었다. 다방의
오렌지빛 조명 아래서 보자 박태호는 제법
준수한 얼굴이었다.
"최종열씨 소설은 읽었겠지?"
"예. 처음엔 무심하게 읽었는데 이번에
연재되는 바람에 상세하게 읽었습니다. "
 "소감이 어때?"
"12. 12사건이 잘 묘사되고 있더군요.
신문에서 논픽션으로 다룬 것은 많이
보았지만 소설로 다룬 것은 처음
읽었습니다. 신문에서 다룬 것은
논픽션이라 사실감은 있지만 잘 정리를
하지 않았는데 최종열씨 소설은 이해하기
쉽도록 전개가 되고 있더군요. 아쉬운
부분도 더러 있지만... "
"신군부를 강하게 비판하기를 바래?"
"소설이 어딘지 모르게 음울합니다. 아직
전체적인 내용을 파악할 수 없지만 작가의
의도는 따로 있는 것 같습니다. "
"그럴지도 모르지. "
미경은 고개를 끄덕거렸다. 소설을 읽는
박태호의 안목이 제법 높다고 생각했다.
"소설을 연재하는데 외압은 없습니까?"
 "없어. "
"왜 그들이 잠잠한지 이해할 수 없군요.
"
박태호가 고개를 갸우뚱했다.
"공식적으로는 누구도 12. 12가
정당했다고 말할 수 없어. 그리고 소설에
압력을 가하는 것은 표현의 자유를
침해하는 것이 될 뿐 아니라 그들로서도
공연한 논쟁에 휘말리게 되는 거야. 논쟁이
일어나면 일어날수록 12. 12의 핵심
세력들은 불리해 지거든... "
이번엔 박태호가 고개를 끄덕거렸다.
다방을 나오자 해가 설핏이 기울고
있었다. 좀 이르기는 하지만 터미날 근처의
중국요리집의 방에 들어가 요리와 술을
시켰다. 박태호에게 무엇을 먹겠느냐고
하자 박태호가 한참동안이나 생각하다가
중국 음식을 먹겠다고 했던 것이다.
"누님을 미행하는 자들은 어떻게
되었습니까?아직도 누님을 미행하고
있습니까?"
고추 잡채와 고량주가 나오자 박태호가
미경의 잔에 술을 따르며 물었다. 미경도
박태호의 잔에 술을 따라 주었다.
"잡지에 최종열의 소설이 연재되면서
사라졌어. "
미행자들은 매스컴이 최종열의 소설에
집중적인 보도를 하면서 갑자기 꼬리를
감추고 있었다.
"경찰에 신고를 하시죠. "
"경찰은 믿을 수 없어. "
"경찰도 관련되어 있다고 보시나요?"
"관련되어 있다기보다 경찰에도 그들
조직이 있는 것 같아. "
 미경은 고량주 잔을 들어 한 모금
마셨다. 고량주가 목구멍으로 넘어갈 목이
따끔했다.
"앞으로 어떻게 하실 예정예요?"
박태호는 고량주를 단숨에 비웠다.
"아직 뚜렷한 계획을 세운 것은 없어. "
미경은 안주를 집어먹고 박태호의 잔에
다시 술을 따랐다. 뚜렷한 계획을 세우지
않았다는 것은 거짓말이었다. 남편의
죽음,그녀의 납치,최종열의 죽음이 결코
무관하지 않다는 것을 미경은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남편을 의문의 교통사고로
죽게 한 일이나 자신을 납치하여 사창가에
팔아 넘겨 지옥 같은 경험을 하게 한
사내들에 대한 추적을 미루고 있는 것은
최종열과 연관되어 있는 고리를 찾기
위해서였다. 미경은 그 일을 위하여
기다리고 있었다. 서두르면 모든
것이 수포로 돌아갈 것은 너무나 자명한
일이었다.
"제가 도울 일이 있을까요?"
"글쎄... "
박태호의 말에 미경은 밝게 웃었다.
박태호가 어떤 일을 도울 수 있을지 짐작이
되지 않았다.
"제가 필요하면 언제던지 불러 주십시요.
"
"별로 없을 거야. "
"누님은 여자니까 의외로 위험한 일에
부딪칠 일이 많을 겁니다. "
"오히려 여자기 때문에 위험한 상황에서
손쉽게 벗어날 수도 있어. 남자들은 여자를
대수롭지 않게 보고 있으니까. "
"그럴 수도 있죠. "
박태호가 흰 이를 드러내고 웃었다.
저녁이 끝나자 미경은 박태호를 데리고
나이트클럽으로 갔다. 박태호에게
그럴듯하게 술을 사겠다는 약속을 지키기
위해서라기 보다 미경 자신의 울적한
마음을 달래기 위해서였다.
"춤을 잘 추네?"
박태호는 대학생답지 않게 소위 사교춤을
다양하게 추었다.
"요즈음은 기본입니다. "
"그러다가 제비족 되겠어. "
"강남에 가면 사모님을 키울만한 실력은
되죠. "
"사모님들이 제비를 키운다던데 이젠
제비가 사모님을 키우나?"
"사모님들에게 잘 배워야 마누라를
곁눈질하지 않게 단속할 수 있답니다. "
"그래서 춤을 배웠어?"
미경은 웃음을 깨물었다. 박태호는
얘기를 하면 할수록 재미있는 사내였다.
"아르바이트로 심부름센타에서 일한 일이
있습니다. "
"심부름센타?"
"심부름센타라는 곳이 아주 재미있는
곳예요. "
"왜?"
"심부름센타에서 하는 일의 상당수가
바람난 남자나 여자들 뒤를 밟는 일예요. "
"그런 얘기는 나도 들은 일이 있어. "
미경은 박태호의 허리에 한쪽 팔을 감고
스텝을 밟았다. 젊은 여자 가수가 무대에
올라와 명동부루스를 부르고 있었다.
미경은 박태호의 스텝이 능숙하여
유쾌했다.
 "그리고 그런 사람들이 가는 곳이 대부분
나이트클럽이나 카바레죠. "
"그래서 그들 뒤를 밟다가 대학생이
춤도사가 되었다는 얘기야?"
"처음엔 디스코만 추었어요. 그런데 점점
춤이 좋아지더라구요. "
"그럼 진짜 제비가 되었어?"
"두 세번 제비 노릇을 한 적은 있지만
직업적으로 한 일은 한번도 없습니다.
게다가 전부 누나나 어머니 같은
여자들인데 어떻게 그런 사람들 등을
치겠습니까?죽자살자 매달리는 아줌마를
떼어놓느라고 혼난 적도 있습니다. "
미경은 쓴 웃음이 나왔다. 아들 같은
앳된 대학생을 잡고 정염을 불태우려는
여자를 생각하자 씁쓸했다.
부루스가 끝났다. 춤을 추는 사람들이
일제히 스테이지를 향해 돌아서서 박수를
쳐댔다. 미경은 박태호와 함께 테이블로
돌아와 앉았다. 스테이지의 여자 가수는
다시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한번은 이런 일도 있었습니다. "
박태호가 다시 얘기를 시작했다. 미경은
맥주를 마시며 즐겁게 얘기를 하는
박태호의 얼굴을 웃으며 쳐다보았다.
박태호는 미경이 재미있어 하는 표정을
짓자 더욱 신이 나서 얘기를 하고 있었다.
"어느 여름이었을 거예요. 심부름센타에
앉아 있는데 중년 남자가 쭈빗쭈빗 들어와
자기 부인을 미행해 달라는 것입니다. 왜
그러느냐고 하니까 부인이 바람을 피운다는
것입니다. "
"...... "
"그래서 증거가 있느냐고 물으니까
여자 속옷을 꺼내는 것입니다.
"
"여자 속옷?"
"그 남자의 부인은 밖에 나갔다가
들어오면 반드시 속옷을 벗어 던지고
샤워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속옷을
부인 몰래 가져왔다는 것입니다. "
"웃기는 사람이군. "
"그 사람 얘기가 더 걸작입니다. 부인의
속옷에 노란 얼룩이 묻어 있는데 그게 다른
남자의 정액이라는 거죠. "
"그래서 어떻게 했어?"
"남자가 의처증 환자였습니다. "
"뒤를 밟았어?"
"예. "
나이트클럽을 나온 것은 거의 10시가
되었을 때였다. 미경은 뭔가 아쉬운 표정을
짓고 있는 박태호와 헤어져 택시를 타고
부천으로 갔다. 양윤석을 만나기
위해서였다. 미경은 부천역 근처에 여관을
잡고 양윤석에게 전화를 걸었다. 양윤석은
다행히 집에 혼자 있었다. 미경은 양윤석이
집으로 오라는 것을 근처 여관으로
불러냈다. 신정 때처럼 술집에 나간다는
아가씨에게 느닷없이 수모를 당하지 않기
위해서였다.
"전에 미안했어. "
양윤석이 여관에 도착한 것은 20분이
지났을 때였다. 미경이 샤워를 마치고
나오자 양윤석이 도어를 열고 들어섰다.
"괜찮아. "
"성격이 난폭한 여자가 아닌데 그날은 좀
이상했어. "
"내 꼴만 사납게 된 거지 뭐. "
미경은 웃었다. 술집 아가씨에게 당한
일을 양윤석에게 화풀이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샤워나 해. "
"금방 할께. "
양윤석이 옷을 훌훌 벗어 놓고 욕실로
들어갔다. 미경은 야윤 석의 옷을 한쪽에
치우고 출입문을 잠갔다. 아가씨가
여관까지 뒤쫑아 오지는 않겠지만 일단
조심을 하는 것이 좋을 것 같았다.
미경은 커텐을 여미고 TV를 켰다. 전등은
꺼버렸다. 그러자 방안이 어둑해 지면서
안온한 느낌이 들었다. 미경은 침대에 눈을
감고 누웠다.
"언제 왔어?"
양윤석이 욕실에서 타월을 감고 나와
침대에 걸터 앉았다. 그 바람에 침대와
미경의 몸이 출렁하고 흔들렸다.
"오후에. "
미경은 양윤석의 등을 가만히
쓰다듬었다. 양윤석의 등은 차고 단단했다.
"그럼 그 동안 뭘했어?"
양윤석이 담배를 피워 물며 물었다.
"제비 하나 키웠어. "
"제비?"
"그런 일이 있어. "
"이젠 강남 사모님이 되려는 모양이지?"
양윤석이 빙긋이 웃었다.
"때때로 외로울 때가 있어. 사무치게...
"
미경은 몸을 반쯤 곧추 세우고 양윤석의
등에 입술을 찍어 갔다. 미경의 말은
사실이었다. 수원으로 박태호를 찾아간
것은 술을 사주기 위한 것도 있었지만
남자가 그리웠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차마
박태호에게 그런 내색을 할 수는 없었다.
양윤석이 담배를 들지 않은 손으로
미경의 등을 가만히 쓰다듬었다. 양윤석의
손길은 마치 그래 누구나 외로움을 탈 때가
있지,하고 말하는 것 같았다. 미경은
양윤석의 허리를 지나 허벅지로 입술을
가져갔다. 그러자 양윤석이 미경을 허벅지
위에 눕혔다.
미경은 담배를 피우는 양윤석을
올려다보았다.
양윤석이 손을 뻗어 미경의 가슴을
어루만졌다. 미경은 눈을 감았다. 양윤석의
손이 가슴에서 아랫배로,아랫배에서
가슴으로 느리게 왕래를 했다.
미경은 편안했다. 이상하게 눈꺼풀이
무거워지면서 잠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7

2월이 갔다. 그리고 겨울도 갔다. 2월과
겨울이 가자 양지쪽으로 푸릇푸릇 봄풀이
돋아나고 햇살이 따뜻해졌다. 소설은
3회분이 잡지에 실렸으나 최종열의 소설
원고를 가지고 있는 사람에게서는 아무
연락이 없었다.
미경은 초조해지기 시작했다. 미행자들도
보이지 않았다. 소설은 이제 3월과 4월
두번만 더 연재되면 끝이었다. 백 주간도
어떻게 된 일이냐고 미경을 채근했다.
매스컴의 관심도 점점 줄어들고 있었다.
그러나 미경은 속수무책이었다.
미경은 부천과 수원만 부지런히 오갔다.
마음이 초조하자 더욱 쎈스에 골몰하게
되었던 것이다.
(어차피 나는 깨끗한 인간이
못되니까...... )
미경은 박태호와도 관계를 했다.
박태호가 손을 벌리자 미경은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이 끌려갔다.
(사창가에서 몸을 파는 것으로 생각하면
그만이야. )
미경은 스스로 자위했다. 연하인
박태호와 관계를 하는 자신의 추한 모습을
떠올릴 때마다 버릇처럼 그런 생각을 했다.
박태호도 그다지 순수한 학생은 아니었다.
심부름센타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박태호는 사회의 밑바닥을 너무나 깊이
체험했고 이제는 그것을 즐기기까지 하고
있었다.
최종열의 소설 마지막 부분을 박태호가
가지고 있다는 것을 미경이 알게 된 것은
3월이 지나고 4월 초순의 일이었다. 토요일
오후 직원들이 모두 퇴근한 사무실로
박태호의 전화가 걸려와서 알게 된
일이었다. 미경은 그날 박태호에게 이제
그만 만나자고 말했었다. 연하의 남자인
박태호와의 관계를 이제는 끊어야겠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와 관계를 하고 나면
이상하게 회의와 모멸감에서 벗어날 수가
없었다.
"왜요?"
그러자 박태호가 항변하는 투로 말했다.
어딘가 응석끼가 있으면서도 따지는 듯한
말투였다.
"학생이니까 공부를 해야지... "
"공부요?"
박태호가 갑자기 요란하게 소리를 내어
미경은 박태호의 돌연한
웃음소리에 기분이 상했다. 박태호는 이제
미경을 안중에도 없는 듯한 말투로 변해
있었다.
"잘 나가다가 왜 이러실까?"
"무슨 소리야?"
미경은 눈을 치떴다. 박태호가 앞에
있었으면 따귀라도 한 대 갈기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 동안 잘 지냈지 않습니까?"
"그래서?"
"계속 잘 지내자는 얘기입니다. 누이
좋고 매부 좋은 거 아닙니까?"
"전화 끊어. 상대하고 싶지 않아!"
미경은 재빨리 수화기를 내려놓았다.
그러자 박태호가 금방 다시 전화를
걸어왔다.
"전화 끊으라고 했잖아?"
"누가 누구에게 명령을 하십니까?영계를
잘 데리고 놀았으면 그만한 보상이 있어야
하는 거 아닙니까?"
"뭐야?"
"좋아요. 나도 즐거웠으니 보상은 받지
않죠. 대신 누님이 필요한 것을
드리겠습니다. "
"필요한 거?"
"아시지 않습니까?최종열의 소설 원고...
"
"그럼 그걸 가지고 있다는 말이야?"
"예. "
미경은 책상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러나
금방 다시 주저앉았다. 박태호의 말을 믿을
수가 없었다.
"그런데 왜 숨겼어?"
 "그게 우리들 생리 아닙니까?적절한
시기에 공개해야 소득이 생긴다는 것은
우리 세계의 철칙입니다. "
미경은 어이가 없었다. 박태호에게
깨끗이 당했다는 생각을 하자 치가 떨렸다.
(이런 나쁜 자식!)
미경은 피가 역류하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지난 몇 달 동안 그토록
노심초사했는데도 박태호가 숨기고 있다는
생각을 하자 침이라도 뱉어주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박태호에게 보기 좋게 당한
것이다. 박태호는 역시 제비족에 지나지
않았다. 학생이라는 것도 믿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최종열의 소설 원고를
찾기 위해서는 이를 악물고 참아야 했다.
"그래?"
미경은 건성으로 대꾸하는 체했다.
매달리면 박태호에게 질질 끌려
다니는 것이다.
"필요하지 않으십니까?"
박태호의 목소리는 징그러울 정도로
능글맞았다. 미경은 박태호의 정체를
파악하지 못한 사실이 뼈저리게
후회되었다.
"필요하긴 하지. "
"그럼 오세요. 돌려 드릴께. "
"니가 와. 난 수원까지 가기 싫어. "
"원고가 필요하지 않으십니까?"
"필요하지만 수원까지 가기 싫을 뿐이야.
"
"그래요?"
"그 원고는 네가 갖고 있어야 아무
필요가 없는 거야. "
"나에겐 필요가 없지만 누님에게는
필요하지 않습니까?오늘 저녁 8시까지 수원
터미날 옆에 있는 귀빈 다방으로 오십시요.
지난 번에 우리가 만난 다방이니까 누님도
기억하고 계실 것입니다. "
찰칵 하고 전화가 일방적으로 끊겼다.
(이런 개새끼!)
미경은 수화기를 든 채 이를 갈았다.
그러나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박태호는
최종열의 소설 원고를 가지고 돈을 요구할
것이 분명했다.
미경은 사무실을 나왔다. 박태호의
문제를 곰곰이 생각해 보기 위해서였다.
날씨는 화창했다. 따스한 햇살이 거리에
깃털처럼 내려앉고 옷차림이 가벼워진
여자들이 경쾌한 걸음으로 몰려다니고
있었다. 미경은 백화점으로 향했다.
박태호의 문제를 곰곰이 생각했으나 아무리
생각해도 좋은 방법이 떠오르지 않았다.
박태호의 양심에 호소할 수밖에 없는
일이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박태호를
몸으로라도 사로잡을 수밖에 없었다. 이미
박태호에게 자신의 육체를 사창가 여자처럼
주어버렸기 때문에 새삼스럽게 주저할
필요는 없었다.
백화점에는 사람들이 들끓고 있었다.
봄철 세일기간인 모양이었다. 미경은 여성
의류 매장을 찾아갔다.
"어서 오세요. "
젊은 여직원이 미경을 공손하게 맞았다.
미경은 검은 색의 미니 스커트와 분홍색의
면티를 사서 매장의 탈의실에서 갈아
입었다. 속옷도 한 벌을 셋트로 사서 갈아
입었다. 겉에는 둔부까지 내려오는
스웨터를 사서 걸쳤다.
 백화점을 나오자 햇살이 한결 부드러워져
있었다.
미경은 자주 다니는 미장원에 들려
머리를 단장하고 백화점에서 싸가지고 온
옷가방을 맡겼다.
(그래. 박태호를 그 놈들로 생각하고
요리해 보는 거야... )
미경은 자신이 청계천 일대에서 사놓은
개스총과 마취제 따위를 생각하자 기분이
좋아졌다. 박태호가 제비족이라면 본때를
보일 필요가 있었다.
서울역에 도착하자 해가 기울기 시작하고
있었다. 미경은 봄날은 간다라는 노래를
흥얼거리며 표를 끊어 플랫트홈으로
들어갔다.
이상하게 기분이 좋아지고 있었다.
미경은 열차의 차창가에 앉았다. 긴 여행은
횡틈립차창으로 흘러가는 봄날의
풍경을 보고 싶었다.
이내 열차가 출발했다. 토요일 오후라
그런지 열차엔 승객들이 드문드문 앉아
있었다. 미경은 또 노래를 흥얼거리기
시작했다.

로빈슨 부인 여기예요
주님은 당신을 사랑하고 있어요
신의 축복이 가득하기를
로빈슨 부인
천국에는 기도하는 사람들을,
그들을 위한 자리가 있습니다.

영화 졸업에 나오는 로빈슨
부인이라는 노래였다. 한 대학생이 여자
친구의 어머니와 불륜에 빠지고 성의
환락과 청순한 사랑 사이에서 갈등을
빚다가 사랑을 찾아간다는 줄거리였다. 그
영화에 나오는 사운드 오브 사이렌스나
스카브로 훼어도 국내에 크게
히트했었다. 모두 죽은 남편 김석호가
좋아하는 노래였다.
차창으로는 봄 풍경이 운치있게 흘러가고
있었다. 철로변에 심어진 버드나무엔 푸른
잎사귀들이 돋아나고 열차가 지나는 농촌
마을엔 살구꽃이며 복사꽃,벗꽃이
흐드러지게 피어 하얀 꽃숲을 이루고
있었다. 개나리꽃은 이미 꽃이 져서 파란
잎사귀들이 무성했다.
봄이었다.
논에는 써래질을 하기 위해 물이 가득
실려 있었고 기울어 가는 봄햇살이 수면
위에 사선으로 비껴들며 반짝거리고
있었다.
수원에 도착하자 어둑어둑 땅거미가
내리고 있었다. 미경은 수원 역사를 빠져
나와 터니날쪽을 향해 천천히 걸었다. 수원
시외버스 터미날까지는 걸어서 한참
걸렸으나 그래도 걷고 싶었다. 시간도
넉넉한 편이었다.
미경은 번화가의 쑈윈도우를 살피며
걸었다. 봄은 쑈윈도우와 여자들의 옷에서
먼저 오는 것일까. 쇼윈도우에 내걸린
여자들의 옷이며 번화가를 오가는 여자들의
옷차림도 봄이 나폴거리고 있었다.
수원 터미날에 도착했는데도 8시가 채
되지 않았다. 미경은 혼자 식당에 들어가
천천히 식사를 했다.
"늦었군요. "
여관에 들어서자 박태호가 먼저 도착해서
있었다. 미경은 핸드백을 침대에
던졌다.
"별로 오고 싶지 않았으니까. "
미경은 야멸차게 말했다. 서릿발이
서리는 목소리였다.
"원고가 필요하지 않습니까?"
"필요하다고 그냥 넘겨주겠어?"
"협상을 아시는군요. "
"원고를 가지고 있는 것은 확실해?"
"그럼요. "
"내가 그것을 어떻게 믿어?"
미경은 어깨를 으쓱했다. 박태호가
최종열의 원고를 가지고 있는지 확신할
수가 없었다.
"어떻게 하면 믿을 수 있겠습니까?"
"그걸 나한테 물어?"
"그럼 누구에게 묻겠습니까?"
"알아서 믿게끔 해봐. 협상은 그 뒤에
하는 것이 좋겠지. "
"좋아요. 내일 컴퓨터 통신으로 파일을
보내드리죠. "
"전부를 다?"
"일부요. "
"좋아. "
"잡지를 보니까 매회 100매 정도가
연재되고 있더군요. 내일 중으로 100매를
띄우겠습니다. "
"그 다음엔?"
"통장에 제 용돈을 입금시키시는 것이
순서겠죠. "
"용돈이 얼마나 되는데?"
"알아서 주십시요. 문자 그대로
용돈이니까... "
박태호가 미경에게 다가왔다. 미경은
그대로 서서 박태호를 응시했다. 박태호와
그 짓을 하고 싶지 않았으나 원고 때문에
참았다. 원고를 일주일 이내에 입수하지
않으면 잡지가 나갈 수가 없었다. 어떻게
하던지 일주일 이내에 원고를 입수해야
했다.
"원고가 어느 정도 분량이나 되지?"
박태호가 미경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원고지 500매 정도 분량이 되더군요. "
박태호의 손이 어깨에서 미경의 둔부로
내려왔다. 미경은 스스로 박태호에게
하체를 밀착시켰다. 박태호가 미경을
끌어안고 축축한 입술을 미경의 목덜미에
찍어 눌렀다.
"읽어 봤어?"
"예. "
"무슨 내용이야?"
"광주사태,그리고 강한섭과 한경호의
이야기더군요. "
"그들은 어떻게 되지?"
"비참해요. "
박태호가 미경의 옷을 벗기기 시작했다.
미경은 박태호가 하는대로 다소곳이
응했다.
"이 정도면 정보는 충분하지요?"
미경은 이내 나신이 되었다.
"괜찮은 것 같애. "
미경이 냉랭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그럼 정보 가치가 꽤 나간다는 뜻으로
받아 들여도 되겠군요. "
"아냐. 니 몸이 쓸만 하다는 뜻이야. "
미경의 말에 박태호가 옷을 벗다 말고
히쭉 웃었다.
"쓸만은 하죠. 사모님들을 모실려면 몸이
"실해야 하니까요. "
"몸만 실하다고 사모님들이 좋아하지는
않아. 문제는 테크닉과 에치켓이야. "
미경은 박태호에게 다가가서 박태호가
걸친 속옷을 밑으로 끌어내렸다. 그러자
박태호가 그것에서 두 다리를 뽑고 미경을
쳐다보았다.
"테크닉이라고 하셨습니까?"
미경은 박태호의 그것을 쏘아보았다.
박태호의 그것은 이미 불끈 일어서 있었다.
"그래. "
"테크닉이 어떤 것인지 가르쳐 드리죠. "
박태호가 빙긋 웃고 미경을 안아서
침대에 눕혔다.
"기대하겠어. "
미경은 눈을 감았다. 박태호에게서 얻은
정보는 그가 아직도 최종열의 소설을 500매
정도나 가지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박태호가 어느 정도 돈을 요구할지 알 수
없었다. 처음엔 신용을 지키는 체하면서
원고를 넘겨주겠지만 마지막에 이르면
막대한 돈을 요구할 것이 분명했다. 물론
잡지사에서도 최종열의 원고를 찾아 주는
사람에게는 소정의 사례금을 지급하겠다는
광고를 내기는 했지만 내부적으로
200만원으로 정해 놓고 있었다. 그 이상은
미경이 직접 지급해야 했다.
"솔직히 말해 봐. 얼마가 필요한 거야?"
미경은 박태호의 등에 팔을 감은 채
물었다. 박태호는 이미 미경의 몸속 깊숙이
들어와 있었다.
"얼마나 주실 수 있습니까?"
"태호가 알다시피 그 소설이 나 하고
직접 관련이 있는 것은 아니야. 그러니
씀뮌돈을 줄 수는 없어. "
"나는 많은 돈이 필요해요. "
"내가 그 소설을 위해 많은 돈을 줄
꺼라고 생각해?"
미경은 어처구니가 없었다.
"그 소설이 필요한 것은 내가
아니니까요. "
"그래 얼마가 필요한데?"
"이 순간에 꼭 흥정을 해야 합니까?"
"이런 방법은 네가 잘 써먹는 방법이
아니야?"
박태호는 미경의 위에서 땀을 흘리면서도
녹녹하게 흥정에 응하려 하지 않았다.
"좋아요. "
"얼마면 되겠어?"
"2천만원이요. "
"2천만원?"
미경은 깜짝 놀랐다.
"왜 그렇게 놀라세요?"
"내가 강남의 사모님인지 알아?"
"사모님들 같으면 그렇게 많이 달라고
하지도 않습니다. 지나치게 많이 달라고
하면 오히려 쇠고랑을 차게 되니까요. "
"그래?"
미경은 소름이 돋아나는 기분이었다.
"그리고 내일 밤에 3백만원을
가져오세요. 그래야 이번 호에 연재할
원고를 드리겠습니다. "
"얘기가 다르잖아?"
"생각이 달라졌어요. 귀찮게 컴퓨터
통신으로 띄우느니 직접 거래를
하겠습니다. "
"좋아. "
미경은 박태호가 눈치 채지 않게 입술을
갼 박태호가 그렇게 나간다면
비상한 방법을 동원해야 하겠다고
생각했다.
"그럼 흥정이 끝난 거죠?"
"끝난 거야. "
"자 그럼 인간 박태호의 테크닉이 어떤지
음미해 보십시요. "
"그래. "
미경은 암암하게 웃었다.
어디선가 기차가 달리는 소리가
덜컹거리고 들려왔다. 어쩌면 환청인지도
알 수 없었다. 그러나 미경은 눈을 감은 채
그 소리를 듣고 있었다. 박태호가 땀을
뻘뻘 흘리며 열심히 반복운동을 했으나
미경은 파도에 흔들리는 나뭇잎처럼
출렁거릴 뿐이었다.
미경이 여관을 빠져 나온 것은 10시가
조금 지나서였다. 샤워도 하지 않은
채였다. 몸에서 박태호의 정액냄새가
풍기는 기분이었으나 미경은 골목에 몸을
숨기고 박태호가 나오기를 기다렸다.
박태호를 미행할 속셈이었다.
샤워를 마친 박태호가 여관에서 나온
것은 30분쯤 지났을 때였다. 박태호는
손으로 머리를 털기까지 하며 터미날
뒷골목을 향해 휘적휘적 걸음을
떼어놓았다.
미경은 느릿느릿 뒤따라 걸었다.
박태호는 수원 시외버스터미날 뒷골목을
지나 큰길로 나섰다. 미경은 담배를 한대
꺼내 물었다. 박태호가 담배를 꺼내 피우고
있었다. 미경이 담배 연기를 두어 모금
빨았을 때 박태호가 큰길을 건넜다. 미경도
큰길을 건넜다. 박태호가 버스정유장
앞에서 걸음을 멈췄다. 미경도 걸음을
멈췄다.
박태호가 버스를 탔다. 미경은 택시를
잡아탔다. 버스 정류장 근처에 빈 택시들이
늘어서 있어서 택시를 잡기가 쉬웠다.
버스는 북문 쪽으로 달려갔다. 미경은
택시의 유리창으로 거리를 세심히 살폈다.
박태호가 버스에서 내렸다. 미경도
택시에서 내렸다. 정자동이라는 동네였다.
어둠컴컴한 거리에 우뚝 솟아 있는 건물을
살피자 수원상공회의소라는 간판이
보였다.
박태호가 건물 모퉁이를 돌았다.
거기서부터는 주택가 골목이었다.
(집이 저기인 모양이군... )
그러나 박태호는 주택가를 벗어나 여관이
즐비한 골목을 향해 갔다.
 (집도 없는 자식인가?)
미경은 의아했다. 박태호가 걸음을 멈춘
곳은 허름한 여관 앞이었다. 미경은 멀찌기
떨어져서 박태호의 뒷모습을 쏘아보았다.
이상하게 마음이 차분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박태호가 여관 안으로 들어갔다.
미경은 여관을 따라 들어갈 수 없어
여관을 우두커니 쳐다보았다. 여관은 몇
개의 방이 불이 켜져 있었으나 나머지는
모두 꺼져 있었다.
미경은 다시 담배를 피워 물었다. 이내
여관의 2층 방에 불이 환하게 켜졌다.
미경은 불빛이 쏟아지는 창을 통해 방이
어디쯤인지 가늠했다. 박태호가 단
하룻밤의 투숙객인지 장기 투숙객인지
확인할 필요가 있었다.
이튿날 미경은 회사에 출근하여 최종열의
원고를 입수하기 위해 지방출장을
다녀오겠다고 백 주간에게 보고했다. 백
주간은 한시바삐 최종열의 소설을 입수해
오라면서 출장을 허락해 주었다.
아파트에 돌아오자 미경은 오후까지 잠을
잤다. 그리고 오후 늦게서야 잠자리에서
일어나 늦은 점심 겸 이른 저녁을 들었다.
미경이 수원에 도착한 것은 해가 완전히
기울었을 때였다. 미경은 박태호와 약속한
여관으로 가지 않고 박태호가 투숙하고
있는 정자동 여관으로 갔다. 박태호가
투숙한 여관방은 불이 꺼져 있었다. 미경을
만나기 위해 수원 시외버스 터미날 부근에
있는 여관으로 간 것이 분명했다.
미경은 여관 앞에서 기다렸다. 기다리고
있으면 박태호는 화가 잔뜩 나서 돌아올
것이다. 여관에 들어가 박태호에 대한 것을
물어볼 수도 있었으나 여관에서 낯선
여자에게 호락호락 박태호에 대해서 가르쳐
주지 않을 것 같아 그만 두었다.
미경은 코트의 깃을 바짝 세웠다.
날씨가 따뜻했으나 밤이 되면서 기온이
차가워지고 있었다. 그러나 견딜만했다.
미경이 견디기 어려운 것은 날씨가 아니라
지루한 시간이었다.
박태호는 거의 11시가 되어서야
나타났다. 미경을 기다리다가 술을
마셨는지 몸이 비틀거리고 있었다.
(술까지 마셨으니 금방 골아
떨어지겠군... )
미경은 흡족했다. 여관의 2층을 쳐다보자
불이 환하게 켜졌다가 이내 꺼졌다.
박태호가 샤워도 하지 않고 침대에 쓰러진

미경은 박태호가 여관에 들어간지 20분이
지났을 때 여관으로 들어가는 중년남자의
뒤를 몇 걸음 사이에 두고 따라 들어갔다.
현관에 붙어 있는 내실엔 젊은 여자가 앉아
있었다.
"혼자예요?"
여관의 여자가 내실의 창을 열고 미경을
살폈다.
"일행예요. "
미경은 층계를 올라가는 중년 남자를
턱짓으로 가리켰다. 여관 여자가 탁 하고
창을 닫았다.
미경은 천천히 층계를 올라가기
시작했다. 중년 남자와 사이를 두기
위해서였다.
층계와 복도에는 붉은 카피트가 깔려
있었다.
미경은 카피트를 밟고 박태호의 방 앞에
이르렀다. 약간 긴장이 되었으나 두렵거나
무섭지는 않았다.
박태호의 방은 잠겨 있었다. 그러나
마스터키로 열자 간단하게 열렸다. 미경은
방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섰다. 안이 깜깜해
미경은 어둠이 눈에 익을 때까지
한참동안이나 그 자리에 못박힌 듯
움직이지 않고 기다렸다.
(이 방이 틀림없을 거야... )
미경은 낮게 심호흡을 했다.
핸드백에서 손전등을 꺼내 방을 살피자
그녀가 예상했던대로 박태호의 방이었다.
박태호는 옷도 벗지 않은 채 침대 위에 네
활개를 펴고 자고 있었다.
미경은 핸드백에서 마취제병과 손수건을
꺼냈다. 입에 마스크를 쓰고 마취제병
뚜껑을 열어 손수건에 묻혔다. 마취성이
강하지만 깨어나는 것도 금방이고 독성은
없었다. 물론 다량을 흡입하게 되면
생명까지 위험한 것이었다.
마취제는 종로5가 농약상회에서 산
것이었다. 마스터키는 청계천에서 구입한
것이었다.
손수건에 마취제가 묻어나자 미경은
마취제병을 핸드백에 챙기고 손수건을
가지고 침대에서 자고 있는 박태호에게
조심스럽게 다가갔다. 그리고 박태호의
코에 마취제가 묻은 손수건을 덮었다.
(너무 간단하군... )
박태호는 손수건을 코에 덮자 1분도
안되어 마취가 되어 잠들어 버렸다. 어깨를
흔들고 살을 꼬집어보았으나 죽은 듯이
잠들어 있었다. 미경은 핸드백을 열고
마취제가 묻은 손수건을 집어 넣었다.
박태호는 30분이 지나야 깨어날 것이었다.
30분이면 박태호의 방에서 원고를 충분히
찾을 수 있었다.
미경은 여관문을 안에서 잠그고 불을
켰다. 박태호는 여관에 살림이라도
차렸는지 방이 빽빽하도록 가구가 들어차
있었다.
미경은 문갑부터 뒤졌다. 문갑은 잠겨
있었으나 박태호의 주머니를 뒤지자 열쇠
꾸러미가 나왔다.
(이건 나체 사진 아니야?)
미경은 박태호의 문갑에서 남녀의 나체
사진들을 발견하고 어이가 없었다. 사진은
대개 여자들과 박태호가 나체로 껴안고
자고 있는 사진이었다. 박태호가 남녀의
나체 사진을 찍은 것을 보면 박태호는
대학생이 아니라 제비족인 모양이었다.
(이 사진이 어떻게 된 거지... ?)
미경은 사진들을 살피다가 고개를
갸우뚱했다. 사진에 박태호가 직접
등장하고 있는 것을 보면 누군가 사진을
찍어준 것이 분명했다. 누군가 박태호와
공모를 하고 있다고 보아야 하는 것이다.
게다가 박태호의 방에는 컴퓨터도 없었다.
박태호는 철저하게 미경을 속인 것이
분명했다. 열차에서 만났을 때 미경을
유혹하려는 계획을 세웠던 것이고 미경이
잡지사 기자라는 바람에 망설이고 있었던
것으로 보였다.
그러나 미경이 남자를 그리워하다 스스로
손을 내밀자 재빨리 올가미를 친 것이라고
볼 수밖에 없었다.
 (이 여자가 자주 등장하고 있는 것이
수상하군... )
미경은 사진들 속에 유난히 자주
등장하고 있는 여자를 세심히 살폈다.
사진들중에는 뜻밖에 박태호가 빠지고 낯선
남자들과 미모의 젊은 여자가 껴안고
뒹굴고 있는 것도 여러 장 있었다. 여자는
한 여자였고 남자들은 계속 바뀌고 있었다.
(이제 봤더니 이 여자는 꽃뱀이로군... )
미경은 입가에 쓴 미소를 떠올렸다.
여자와 박태호는 꽃뱀과 제비족으로 여자가
남자들을 유혹하면 박태호가 사진을 찍고
박태호가 여자들을 유혹하면 여자가 사진을
찍은 모양이었다. 다만 유혹을 당한
여자들이나 남자들이 한결 같이 잠이 든
표정인 것을 보면 쎈스를 하고 나서
수면제를 먹이고 사진을 찍은 것으로
추정되었다. 사진에 찍힌 여자와 남자들의
사진은 40여 명이 넘었고 사진은
서류봉투로 가득차 있었다.
(이 것들이 내 사진까지 찍었네... !)
미경은 기가 막혔다. 박태호의 사진
뭉텅이 속에는 미경이 다리를 벌리고 자고
있는 나체 사진까지 다섯 장이나 있었다.
미경은 입을 헤 벌린 채 잠이 들어 있었고
박태호는 미경과 관계를 하는 듯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맥주에 수면제를 탔어!)
사진에 찍힌 여관의 침대로 보아 2월에
찍은 것이었다. 침대 디자인이 낯익은
것이었다. 그러나 필림은 보이지 않았다.
필림은 따로 보관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최종열의 소설 원고는 옷장 깊숙이
숨겨져 있었다. 미경이 최종열의 소설을
검토하는데 박태호가 끙 하고 몸을 뒤챘다.
마취제 성분이 떨어져 가고 있는
기색이었다.
미경은 재빨리 핸드백에서 마취제병을
꺼내 손수건에 묻혀 박태호의 코에 덮었다.
그리고 박태호가 마취되자 손과 발을
넥타이와 허리띠로 묶어버렸다.
박태호는 팔다리를 꽁꽁 묶는데도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었다.
미경은 박태호의 방을 샅샅이 뒤졌다.
그러나 나체 사진을 현상한 필림은 나오지
않고 여자들의 전화번호가 가득 적혀 있는
수첩만 나왔다. 미경은 수첩도 핸드백 속에
챙겼다.
박태호가 마취에서 깨어난 것은 30분이
지나서였다. 미경이 몇 번이나 어깨를
흔들어도 꿈쩍도 하지 않고 있다가 뺨을
셋갈기자 그때서야 무거운 눈꺼풀을
밀어 올리며 미경을 쳐다보았다. 그러나
눈을 감고 다시 자려고 했다.
"눈 떠!"
미경은 다시 뺨을 후려쳤다. 박태호의
뺨에 손자국이 빨갛게 묻어 났다.
"왜 그래요?"
박태호가 짜증스러운 기색으로 미경을
쳐다보았다.
"내가 누군지 알아?"
"졸려요. "
"정신 차려,이 자식아!이거 보여?"
미경은 박태호의 눈 앞에 재크 나이프를
바짝 들이댔다.
"왜,왜 그러세요?"
박태호는 그때서야 파랗게 질린 얼굴로
미경을 쳐다보았다. 그리고 자신의 손과
호화스런 놀이묶인 것을 알고는 눈이 휘둥그레졌다.
"왜 그러긴 왜 그래?심심해서 그러지...
"
"누,누님... !"
"누님 좋아하네!"
"... "
"보비트 사건 알아?"
"보비트 사건이요?"
"그래!"
"몰라요. "
"거시기를 싹뚝 잘라 버린 사건
말이야!신문도 안 봤어?"
"봐,봤습니다!"
박태호가 턱을 덜덜 떨었다. 미경이 재크
나이프의 끝을 얼굴에다 살짝 찔렀기
때문이었다.
"늘 궁금했어. 여자들이 어떻게 남자의
탐챰짤라 버리나 하고... 그래서
언젠가는 직접 한번 해볼 생각이었어. "
미경은 차갑게 웃었다.
"누님,왜 이러십니까?"
"왜 이러는지 몰라?"
미경은 재크 나이프로 박태호의
옷가지들을 잘라냈다. 그러자 박태호가
몸을 뒤틀며 발버둥을 쳤다.
"잠자코 있어!"
미경이 날카롭게 소리쳤다.
"움직이면 칼에 찔려!"
"누님,워,원하는 게 무업니까?"
"몰라서 물어?"
"원고 때문이라면 옷장에 있습니다.
가져가시면 되지 않습니까?"
"원고는 찾았어!"
"그럼 나를 괴롭힐 일이 없지 않습니까?"
"야,너 내 사진까지 찍었더구나... !"
"필림이 필요하십니까?"
"이제서야 말귀를 알아 듣는군. "
"그건 침대 밑에 있는 박스에 있습니다.
"
"그래?"
미경은 재크 나이프를 거두고 침대 밑을
살펴보았다. 박태호의 말대로 라면 박스
속에 들어 있었다. 그 라면 박스 속에는
필림 뿐 아니라 여자들의 속옷까지 들어
있었다. 박태호는 지저분하게 여자들의
속옷까지 수집한 모양이었다.
"여기 이 여자는 누구야?"
미경은 꽃뱀으로 보이는 여자의 사진을
박태호의 눈 앞에 들이댔다.
"대학생입니다. "
"꽃뱀 같아 보이는데?"
"꽃뱀이지만 대학생입니다. "
"대학생이 할 일이 없어서 이딴 짓을
해?"
"재미도 있고 돈도 벌어서 좋다고
합니다. "
"어떻게 만났어?"
"디스코텍에서 만났습니다. "
"넌 대학생 아니지?"
"1년 다니다가 제적당했습니다. "
"왜?"
"여자 문제를 일으켜서... "
"나한테 보낸 컴퓨터 통신은 어떻게
보냈어?"
"여자가 보냈습니다. "
"이름이 뭐야?"
"오유란()입니다. "
"어디 있어?"
"수원 세류동에 살고 있습니다. "
"전화번호!"
미경은 오유란의 전화번호를 수첩에
적었다. 오유란이나 박태호가 앞으로
쓸모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원고와 필림은 내가 가지고 가겠어!이
필림이 앞으로 쓸모가 있겠지... 이 필림이
경찰의 손에 넘어가지 않게 하려면 잠자코
있어! 알았어?"
"예. "
"내가 어떤 일을 할 때 도와주면
필요한만치 용돈을 주겠어. 어쩌면 니가
나한테 바란 것보다 더 많은 돈을 줄지도
몰라. "
"알겠습니다. "
박태호가 공손하게 대답했다.
"너를 묶은 것은 내가 나간 뒤에 여관
주인한테 전화해서 풀어 주라고 하겠어.
그러니 묶여 있는 것은 걱정하지 마. "
"알겠습니다. "
미경은 박태호의 여관방에서 최종열의
소설 원고와 필림을 가지고 거리로 나왔다.
거리는 이미 인적이 완전히 끊어져 있었다.
미경은 정자동까지 서둘러 걸어가서 택시를
잡았다. 그리고 서울에 도착해서 박태호가
묶여 있는 여관에 전화를 걸어 박태호를
풀어 주라고 부탁했다.

제13장 길고 어두운 밤의 시작

1

미경은 아파트의 현관문을 단단히
잠그었다. 박태호가 미경의 뒤를 쫑아올
염려는 없었으나 어둠 속에서 활동하는
미행자들이 습격할 위험이 있었다. 그들은
최종열의 소설이 잡지에 연재되면서부터
미경의 아파트 근처에서 사라졌으나 언제
다시 나타날지 알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미경은 아파트의 문을 단단히 잠근 뒤에
컴퓨터를 켜고 스캐너를 이용해 최종열의
소설을 모두 복사하여 컴퓨터에
입력시켰다. 일단 컴퓨터에 입력시켜
회사로 전송할 생각이었다. 그래야만
미행자들이 습격을 해도 원고가 안전한
것이다.
미경이 스캐너로 최종열의 소설을 모두
복사한 것은 새벽 5시가 되었을 때였다.
원고가 디스켓으로 되어 있었으면 간단하게
카피할 수 있었으나 원고가 타이핑된
것이라 일일이 스캐너로 복사를 해야 했던
것이다. 워드 작업으로 입력시킬 수도
있었으나 미경의 워드 실력으로는 너무
오랜 시간이 걸릴 것 같아서였다.
미경은 복사가 끝나자 컴퓨터 통신을
이용해 일단 회사로 원고를 전송했다.
그리고는 샤워를 하고 커피를 끓여 마셨다.
잠을 자지 못해 눈이 충혈되었으나 이제는
잠을 자기에 시간이 늦어 있었다. 회사에
출근하기 전에 최종열의 원고나 읽어 두는
것이 좋을 것 같았다.
 미경은 커피를 마시자 다시 컴퓨터 앞에
앉았다. 최종열의 소설은 마침내 5월로
접어들고 있었다.

강한섭은 데모대의 행렬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대학생들은 스크럼을 짜고
점점 시내로 진출해 가고 있었다. 날씨는
찌푸퉁했다. 아침부터 하늘은 잿빛이었고
바람이 살매 들린 것처럼 가로수의 나무
끝에서 살랑거리고 있었다.
(비가 올 모양이군... )
강한섭은 대학생들의 데모 행진에서
시선을 거두어 검푸르게 살랑대는
마로니에를 쳐다보았다. 문득 영화
닥터지바고의 한 장면이 생각났다. 유리
지바고가 어린 시절 아버지의 장례식이
진행될 때도 바람이 포플라 잎사귀에서
살랑대고 있었다. 닥터 지바고를
감독한 데이빗드 린 감독은 검푸르게
살랑대는 포플라 잎사귀에서 러시아의
어두운 시대를 상징적으로 표현했던
것이다. 지금 대학로에서 보이는
마로니에의 검푸른 잎사귀도 한국의 어두운
시대를 상징하고 있는 것처럼 강한섭은
느껴졌다.
"파쑈!"
"파쑈!"
학생들이 손을 들고 구호를 외치기
시작했다. 이 며칠 학생들의 데모는 거의
절정에 이르고 있는 느낌이었다.
강한섭은 다시 학생들의 시위로 시선을
옮겼다.
"군부 파쑈 물러가라!"
"군부 파쑈 물러가라!"
 5월14일이었다. 민주공화당은 5.
16군사혁명 기념일을 며칠 앞두고 있었으나
행사를 간소하게 치르기로 하고 시국을
살피고 있었다. 군부가 이제는 노골적으로
정치 전면에 등장하고 있었다. 5. 16혁명의
주체들은 군부의 등장을 잔뜩 경계했으나
그들을 저지할 힘이 없었다.
그것은 야당도 마찬가지였다. 모처럼
찾아온 봄에 온갖 탄압을 받으면서 민주화
투쟁을 해온 야당의 두 거목 김대중 민추협
고문과 김영삼 신민당 총재는 3월달에
결별하여 야당은 극심한 분열 현상을 빚고
있었다.
국민들도 김대중 민추협 고문과 김영삼
신민당 총재의 지지로 분열되어 있었다.
보수 세력들은 김종필 민주공화당 총재를
지지하여 정국은 한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현상이었다.
그러나 4,5월이 되면서 군부의 존재가
무섭게 떠오르기 시작하자 그들도 긴장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학생들은 군부를 규탄했다.
그들도 이미 전두환 보안사령관의 존재를
알고 있었다. 한때 신현확 국무총리가
이원집정제를 구상하고 있다는 소문이
파다하게 나돌았으나 그것은 유언비어였다.
12. 12사태를 거치면서 시중엔 수많은
유언비어가 나돌고 있었다.
"전두환 파쑈는 물러가라!"
"전두환 파쇼는 물러가라!"
학생들은 종로쪽으로 몰려가고 있었다.
강한섭은 학생들의 데모 행렬을 따라
천천히 걸음을 떼어놓기 시작했다.
행인들은 학생들의 데모 행렬을 물끄러미
쳐다보고 있을 뿐이었다. 얼핏 학생들이
무엇 때문에 데모를 하는지 이해할 수
없다는 얼굴이었다.
데모대가 종로 5가 로타리에서
태평로쪽으로 방향을 꺽었다. 강한섭은
담배를 피워 물었다. 찌푸퉁한 하늘에서
마침내 성긴 빗방울이 한 두 방울씩 뿌리기
시작하고 있었다.
경찰은 데모대의 행렬을 저지하지 않고
있었다. 데모가 시작되기가 바쁘게
원천봉쇄 하기 일쑤인 경찰로서는 의아하기
짝이 없는 일이었다.
"이 친구 여기서 뭘해?"
그때 종로경찰서에서 학생 담당을 하고
있는 서만수() 형사가 강한섭의
어깨를 툭 쳤다. 사회부에 있으면서 경찰
출입을 할 때 사귀어 놓은 형사였다.
까다롭지 않아서 술자리도 같이
했었고 가끔 중요한 정보도 얻었었다.
"서형이군요. "
강한섭은 반색을 했다.
"사람이 넋을 놓고 있는 것이 마치 얼이
빠져 있는 것 같습디다. "
"글쎄말입니다. "
"취재 나왔습니까?"
"글쎄요... "
"왜 그렇게 사람이 싱겁습니까?"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알 수가
없어서요. "
강한섭은 멋적게 웃었다.
"어떻게... 근무중입니까?"
"예. "
서 형사가 고개를 설래설래 흔들었다. 서
형사도 어딘지 모르게 씁쓸한 기색이었다.
"학생들이 종로까지 진출하는데 진압
안합니까?"
"진압하지 말라는 지시가 내려왔습니다.
"
"예?"
강한섭은 어리둥절했다. 경찰이 학생
데모대를 진압하지 않는다는 것은 기묘한
일이었다.
"우리야 큰 판은 잘 모르지요. "
서 형사가 주위를 경계하며 대답했다 큰
판이라는 것은 군부와 정치판을 뜻하는
말이었다.
"음모가 있는 것은 아닙니까?"
"있어도 우리는 모르지요. 우리야
조무라기 아닙니까?"
"데모대를 따라 갈겁니까?"
"지켜는 봐야지요. "
 "위의 지시인가요?"
서 형사가 먼저 데모대의 뒤를 향해
걸음을 떼어놓았다. 강한섭도 천천히
데모대의 뒤를 따르기 시작했다.
"시민들은 냉담한 것 같습니다. "
서 형사가 강한섭을 옆눈질로 살피며
말했다. 시민들이 데모하는 학생들에게
무관심한 것을 일컫는 말이었다.
"긴급조치가 워낙 사나웠었기 때문에
데모대를 지지하는 것에 습관적인 두려움을
느끼고 있습니다. 긴급조치가 해제되었어도
여전히 두려운 것입니다. 게다가 판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전혀 모르고 있기
때문이지요. "
서 형사가 고개를 끄덕거렸다.
"강 기자는 알고 있습니까?"
"막연할 뿐이지요. 그들이 어디까지 밀고
나갈지는 그들만 아는 일이지요. "
"학생들은 다 알고 있는 것 같습니다. "
"학생들이야 우리의 정치를 선도하고
있으니까요. "
강한섭은 씁쓸하게 웃으며 서 형사와
보폭을 맞추었다.
"강 기자!"
"예. "
"이건 우리끼리 얘긴데 앞으로는 몸을
사려야 할 일이 많을 겁니다. "
"몸을 사려요?"
"체재가 바뀔 땐 대개 강압정치를
합니다. 5. 16을 잘 살펴보면 앞으로 어떤
일이 일어날지 짐작이 갈겁니다. "
강한섭은 서 형사의 말을 곰씹어 보았다.
5. 16을 연상하자 국가재건최고위원회의
구성과 정치인들에 대한 숙정,폭력배들에
대한 소탕이 요란하게 진행되었던 일이
생각났다. 물론 그것은 정권 교체기에서
반발 세력을 제압하기 위해 새로운
권력자들이 사용하는 고전화 된
수법이었다.
"D데이가 잡혔어요. "
"D데이요?"
"3,4일 이내가 정치인들에게는 위험한
밤이 될겁니다. "
"그렇군요!"
강한섭은 등줄기가 서늘해져 오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D데이란 말 속에는
군부가 어떤 계획을 세우고 추진한다는
뜻이 숨어 있는 것이다.
강한섭은 서 형사를 따라 계속
태평로쪽으로 걸었다. 거리에는 벌써
우산을 들고 다니는 사람들이 눈에 띄었다.
빗발은 아직도 가늘게 뿌리고 있었다.
모처럼 오는 비라 강한섭은 그대로 비를
맞고 걸었다. 서 형사도 비를 맞으며
학생들의 뒤를 따르고 있었다.
강한섭은 D데이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곰곰이 생각했다. 서 형사에게 물어보고
싶은 생각도 들었으나 서 형사도 그 자세한
내막을 알고 있을 것 같지는 않았다.
"연락이 온 모양인데... "
서 형사가 잠바 주머니 속에서 경찰
무전기를 꺼냈다. 무전기의 볼륨을 잔뜩
줄여 놓았기 때문인지 무전기에서 겨우
찍찍거리는 소리만 들리고 있었다.
"서에 들어가 봐야겠어. "
서 형사가 무전기에 귀를 기울이고
있다가 강한섭에게 말했다.
"비상입니까?"
 "예. "
"그럼 학생들 진압이겠군요. "
"그럴겁니다. 또 봅시다. "
서 형사가 무전기를 주머니 속에 찔러
놓고 종로경찰서를 향해 휘적휘적 걸음을
떼어놓았다. 강한섭은 서 형사의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다시 학생들 뒤를 따르기
시작했다.
학생 데모대는 점점 눈덩이처럼 불어나고
있었다. 교통은 서서히 마비되기 시작해
차들이 데모대를 피해 우회를 하고 있었다.
강한섭이 데모대를 따라 태평로에 이르자
각 대학에서 먼저 도착한 학생들이 앉아서
연좌데모를 하고 있었다. 경찰은 태평로
앞에 바리케트를 치고 최루 개스총으로
무장을 하고 도열해 있었다. 명령만
떨어지면 곧 바로 학생들을 진압할
태세였다.
강한섭은 다시 담배를 피워 물었다.
빗발이 굵어지는지 옷이 후줄근하게 젖고
있었다. 그러나 학생들은 점점 많이
불어나고 있었다.
(서울 시내의 모든 대학생들이 데모를
하기로 결정한 모양이군... )
강한섭은 무엇인가 가슴을 뻐근하게 하는
것을 느꼈다. 유신시대엔 학생들이 거리로
진출하기는 커녕 학교 안에서 데모를 하는
것조차 쉽지 않았었다. 그런데 이제는
대학생들이 태평로까지 진출하여 데모를
하고 있는 것이다. 그것도 계엄령이
선포되어 있는 상황이었다. 전국 계엄을
조종하고 있는 사람은 12. 12사태를 일으켜
모든 권력을 손아귀에 넣고 있었다. 그러나
대학생들은 그를 물러가라고 데모를 하고
있었다.
그때 학생들이 일제히 박수를 치기
시작했다. 한 떼의 대학생들이 깃발을
앞세우고 퇴계로쪽에서 태평로로 들어오고
있었다.
(동국대학교 학생들이군... )
학생들이 들고 있는 깃발은 동국대학교
교기였다. 동국대학교 학생들도 교기를
앞세우고 경찰 바리케트 앞에서 연좌
데모를 하기 시작했다.
태평로 일대는 데모 학생들과 경찰
바리케트로 완전히 마비되어 있었다.
강한섭은 데모대가 더욱 불어나자
신문사로 걸음을 옮겼다. 데모대의 모습을
취재도 하지 않으면서 구경하고 있을 수는
없었다. 이미 태평로 일대엔 각 신문사의
기자들과 방송국 기자들이 전쟁터를 헤매고
다니듯 분주히 뛰어다니며 취재를 하고
있었다.
신문사도 도떼기 시장처럼 분주했다.
특히 정치부와 사회부는 정신없이 바쁘게
움직이고 있었다. 정치부의 각 부처
출입기자들에게서는 정신없이 부처 동정이
쏟아져 들어오고 있었고 국방부와 계엄사
출입기자들에게서는 군부의 주요 지휘관들
움직임이 수상스럽다는 보고가 계속해
들어오고 있었다. 사회부는 서울 시내 각
대학교 학생회장들이 숙명여대에 모여
회의를 하고 있다는 소식을 보내오고
있었으나 회의의 내용은 알려지지 않고
있었다.
"상도동은 어때?"
데스크가 강한섭에게 물었다.
"조용합니다. "
"상도동에서 성명서라도 내야할 것 같지
않아?"
"성명서요?"
"동교동에서 학생들에게 자제하라는
성명서를 냈어. "
"그래요?"
강한섭은 깜짝 놀랐다 동교동에서 그러한
성명서를 냈다면 동교동에서 신군부가
모종의 조치를 취할 것이라는 사실을
파악하고 있다는 증거였다.
"상도동에 가지 않았어?"
"갔었습니다. "
"그런데 상도동에서 아무런 움직임도
없다는 말이야?"
"신군부의 움직임을 제어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기 때문이겠죠. "
강한섭은 막막한 기분으로 데스크의
질문에 대꾸했다. 상도동에서 학생들의
동정에 왜 아무 동정도 없는 것일까.
그들은 군부의 동정에 위기감을 느끼지
않는 것일까. 강한섭은 그러 생각을 하며
데스크를 멀뚱히 쳐다보았다.
"그럴 리가 없어. 다시 가봐. "
데스크가 잘라 말했다.
"예. "
강한섭은 데스크의 지시를 받자 다시
신문사를 나왔다. 그러나 차를 타고
상도동이나 마포 신민당 당사까지 갈 수는
없었다. 교통은 데모 학생들로 인해 완전히
막혀 있었다.
강한섭은 근처 다방으로 들어가 상도동에
전화를 걸었다. 그러나 상도동엔 김영삼
총재가 당사에서 돌아오지 않고 있었다.
김영삼 총재도 교통이 막혀 귀가하지
못하고 있거나 당사에서 학생들의 데모
상황에 대한 대책을 세우고 있는 것으로
보였다. 강한섭은 마포 당사까지
걸어가려다가 태평로로 걸음을 옮겼다.
벌써 날이 어둑어둑해지고 있었다.
서소문에서 태평로로 걸어가자 학생들의
함성이 빌딩숲을 흔들고 있었다.
데모에 참여한 학생들은 10만 명이 훨씬
넘어 보였다. 신림동에 있는 서울대학교
학생들은 두 편으로 나뉘어 한쪽은
영등포와 여의도를 거쳐 진입중이었고 또
한쪽은 상도동과 노량진을 거쳐 서울역쪽을
향해 진입하고 있었다. 이화여자대학교와
연세대학교,홍익대학교는
서소문쪽으로,서강대학교는
만리동쪽으로,숙명여자대학교는
서부역쪽으로,고려대학교는 신설동을 지나
동대문으로 진입하고 있었다. 그리고
성균관대학교는 원남동을 지나 안국동으로
해서 광화문쪽으로 진입하고 있었다.
"어이 강 기자!"
태평로에 이르자 사회부의 최병준 기자가
강한섭을 손짓해 불렀다.
"최 기자는 여기에 있었나?"
강한섭은 최병준 기자에게 번쩍 손을
들어 아는 체를 했다. 최병준은
바바리코트가 흠뻑 젖은 채 연신 카메라의
셔터를 눌러대고 있었다.
"이화여대에서 뒤따라 왔어... "
"상황이 어때?"
"모르겠어. 데모 행렬이 엄청나다는
것뿐이야. 이 정도면 4. 19때와 맞먹겠지?"
"숫자로는 더 많을 걸. 6. 3사태 때도
이만하지는 않았을 거야. "
최병준 기자가 피우던 담배를 버리며
말했다. 최병준 기자의 얼굴은 흥분
때문인지 상기되어 있었다.
"신문사에 가보니까 학생 대표들이
숙명여대에 모였다던군. "
"정치권에서 학생들에게 자제하라는
성명서를 내고 있어. 사회 지도층 인사들도
학생들에게 자제하라고 당부하고 있고...
정치권이나 지도층 인사들이 군부의
움직임을 어느 정도 파악하고 있는
모양이야. "
"군부의 목표는 뭐야?"
"계엄 확대 아니겠어?"
최병준이 반문했다.
"계엄 확대?"
"국가보위 비상대책위원회가 생긴다는
소문이 파다해. "
"어디서 들었어?"
"검찰에서. 현직 검사가 보안사에
차출되어 법안을 검토했다는 얘기를
들었어. "
강한섭은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렇다면
신군부가 계엄을 전국으로 확대하고
국가보위 비상대책위원회를 만들어
혁명평의회 역할을 할 것이 분명했다.
강한섭은 갑자기 가슴이 서늘해 왔다.
"보도했나?"
"계엄사에서 검열을 하는데 어떻게
보도해?"
"데스크는 알고 있나?"
"얘기 안했어. "
"왜?"
"해봐야 아무 소용이 없으니까... "
그때 펑 하는 소리와 함께 최루탄 가스가
자욱하게 공중으로 퍼졌다. 강한섭은 깜짝
놀라 학생들이 연좌 데모를 하는 거리를
쳐다보았다. 전투 경찰이 다연발 최루탄을
잇달아 쏘아대고 있었고 학생들이 와 하는
함성을 지르면서 흩어지기 시작하고
있었다.
"최루탄이야!"
"다연발 최루탄을 쏘고 있어!"
기자들이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이
벌떼처럼 흩어져 달아나는 학생들을 향해
카메라의 셔터를 눌러댔다.
"어?진압 명령이 내렸나본데?"
최병준 기자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데모대를 향해 뛰어갔다. 골목과 골목에서
갑자기 수많은 사복 경찰이 쏟아져
나오면서 최루탄 가스를 피해 달아나는
학생들을 닥치는대로 두들겨 패며 연행을
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태평로는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되었다. 학생들은 연행하는
경찰들을 피해 근처 상점으로 뛰어들기도
했고 골목으로 달아나기도 했다.
진압 경찰은 필사적이었다. 핏발이 선
눈으로 도망치는 학생들을 뒤쫓아가 발로
차고 주먹질을 한 뒤 목덜미를 잡아끌고
연행하여 경찰 버스에 태우고 있었다.
(경찰이 강경해 졌어... )
강한섭은 경찰의 진압 태도에서 불길한
예감을 느꼈다. 그러나 학생들이 데모를
하던 태평로 일대는 최루탄 몇 발에
삽시간에 진압이 되었다.
강한섭은 근처 다방으로 다시 들어가
신민당 마포 당사의 대변인실로 전화를
걸었다. 그러자 마포 당사에서도
학생들에게 자제를 요구하는 성명서를
발표했다고 응답했다. 강한섭은 대변인의
성명을 전화로 받아 적고 신문사로 걸음을
되돌렸다. 그러나 석간 신문은 이미 배달이
된 뒤였다. 강한섭은 데스크의 지시에 의해
퇴근을 하지 않았다.
데모는 밤늦도록 계속되었다. 방송의 9시
뉴스는 서울 시내 일원에서 수 십만의
대학생들이 데모에 참여했다고 보도했다.
카메라는 빗속에서 데모를 하는 학생들
모습을 열심히 비추었으나 데모의 내용은
보도하지 않고 있었다. 학생들이 주장하는
전두환 파쇼라거나 전두환 물러가라는
내용은 일절 없었다. 알맹이 없는
보도였다.
데모대는 경찰이 진압을 하자 시내
곳곳에서 산발적인 데모를 계속했다.
빗발이 점점 심해지고 있어서 학생들도
비를 흠뻑 맞고 있었다.

2

한경호는 TV 화면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방송의 뉴스 진행자는 흥분된 어조로
데모하는 학생들이 밤이 되었는데도 서울
시내 일원에서 시위를 계속하고 있다고
보도하고 있었다. 그러나 학생들에게
데모를 자제하라는 요구는 하지 않고
있었다.
(비싼 등록금 내고 대학교에 보내면
쓸데없이 데모질이나 하구... )
한경호는 화면에 비치는 대학생들의 데모
행렬을 보면서 속으로 빈정거렸다. 그는
학생들의 데모가 탐탁하지 않았다. 그러나
학생들의 데모는 그들이 의도하는대로
흘러가고 있었다. 학생들의 데모가
계속되어 사회가 혼란스러워야 국민들에게
계엄을 확대하는 구실이 되는 것이다.
(내일부터는 더욱 바뻐지겠지... )
한경호는 담배를 피워 물었다.
"어떻게 돼 가는 거예요?"
아내 정란이 커피를 끓여 내오며
한경호에게 물었다. 한경호는 TV에서
시선을 떼고 정란을 힐끗 쳐다보았다.
정란이 의아한 눈길로 TV와 한경호를
번갈아 살피고 있었다.
"뭐가?"
"데모요. "
정란이 한경호의 옆에 와 앉았다. 정란의
몸에서 자스민 냄새가 왈칵 풍겼다.
"어두워졌으니까 끝나겠지... "
"아까 길에서 들으니까 전두환 파쇼라고
무슨 소리예요?"
"시내 나갔었어?"
한경호는 얼굴을 찌푸리며 물었다.
"네. "
"시내에 나가지 말고 집에 있으라고
그랬잖아?"
"나 병원에 갔었어요. "
정란이 혀로 입술을 핥으며 멋적은
표정을 지었다.
"병원에?"
한경호는 정란의 얼굴을 멀뚱히
쳐다보았다. 정란이 갑자기 병원에 갔다는
말을 꺼내 어리둥절했다. 병원이라는 말에
이천의 정신병원이 생각났던 것이다.
"네. "
정란이 살갑게 눈웃음을 쳤다. 정란의
얼굴엔 까닭을 알 수 없는 야릇한 미소가
있었다.
"어디 아퍼?"
"아뇨. "
정란이 고개를 살래살래 흔들었다.
고개를 흔드는 그녀의 몸짓에 알 수 없는
교태가 묻어났다.
"그럼?"
"맞춰 보세요. "
정란이 애교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좋은 일인가?"
"그럼요. "
"무슨 일인지 난 전혀 모르겠어. "
"당신이 바라는 일예요. "
"내가?내가 병원에서 무얼 바래?"
"바보!"
정란이 아이들처럼 입술을 삐쭉
내밀었다.
"가르쳐 줘. "
"싫어요. "
"그럼 힌트라도 줘. "
"싫어요. "
"그럼 할 수 없지... "
"뭐가요?"
"왜 병원에 갔는지 몰라도 할 수 없다는
거야. "
"아이 매력없어. "
한경호는 어깨를 으쓱했다. 정란은
신문기자 부인과 자주 어울리고서부터
말투가 서울 깍쟁이들을 닮아 가고 있었다.
"정말 모르겠어요?"
정란이 한경호를 향해 바짝 다가 앉았다.
그러자 또 다시 정란의 몸에서 자스민
냄새가 왈칵 풍겼다. 한경호는 얼굴을
찡그렸다. 한경호는 자스민 냄새가 어쩐지
횡 정란이 자스민 향수를 지나치게
많이 뿌린 탓인지 알 수 없었다.
"모르겠어. "
한경호는 고개를 흔들었다.
"아유 속터져!"
정란이 한경호의 손을 잡아 당겨 자신의
배로 가져갔다.
"뭐 느껴지는 거 없어요?"
"따뜻해. "
"정말 당신은 벽창호야!"
"왜 그래?"
"이 속에 뭐가 들었는지 모르겠어요?"
"몰라. "
한경호는 고개를 흔들려다가 깜짝
놀랐다. 정란은 뱃속에 아기를 가진
것이다.
"아기야?"
( 한경호는 가슴이 철렁했다.
"그래요!"
정란이 뽀루퉁한 표정으로 대꾸했다.
한경호는 정란을 날카로운 눈빛으로
쏘아보았다. 정란은 부정한 여자였다. 이
부정한 여자가 아이를 갖고 있다면 대체
누구의 아이란 말인가. 내 아이인가,나
몰래 만나는 그 놈팽이의 아이인가...
한경호는 명치 끝이 묵직해 왔다.
"병원에서 3개월 되었대요. "
정란이 주춤한 기색으로 말했다.
"미안해. 전혀 몰랐어... "
한경호는 명치 끝을 지그시 누르며
말했다. 아내의 임신이 그의 신경을
날카롭게 하고 있었다.
"정말 실망했어요!"
아내가 천연덕스럽게 말했다. 한경호는
아내의 얼굴에 침이라도 뱉어 주고 싶은
심정이었다.
"귀띔이라도 해줘야 알지. "
그러나 겉으로는 내색하지 않고 기꺼운
표정을 지었다.
"당신은 언제나 무심하기만 했어... !"
아내의 말에 가시가 돋쳤다. 한경호는
말문이 탁 막혔다. 서울로 이사온 뒤에
아내에 대한 폭행을 삼가해 온 탓인지
아내는 어느 때보다도 기가 살아 있었다.
"그랬나... ?"
한경호는 공허하게 웃으며 아내를 와락
끌어안는 시늉을 했다. 아내가 임신을 무슨
벼슬이나 한 것처럼 자랑하고 있었으나
한경호는 결코 공감할 수 없었다. 그는
아내의 임신했다는 말에 병원에 있는
아들이 먼저 머릿속에 떠올랐던 것이다.
그러나 그런 사실을 전혀 의식하지
못하는지 기꺼운 표정으로 한경호의 가슴에
안겨 왔다.
"당신 아이란 말예요. "
정란이 그의 품속에 새처럼 안겨서
종알거렸다.
"이번엔 소영이처럼 예쁜 딸을 낳을
거예요. "
"미안해. "
한경호는 얼굴을 딱딱하게 만들며
말했다. 갑자기 죽은 딸 소영의 얼굴이
머릿속에 떠올라왔다.
소영이 죽은 것은 여주에서였다.
여주에는 군청 뒤로 남한강 상류가 서울
쪽으로 흐르고 있었다. 물론 남한강의 여러
줄기에 지나지 않았으나 여주 읍민들에게는
한여름이면 시원한 강바람을 쐬게 해줄
뿐아니라 물것들을 잡을 수 있게 해주었다.
강변에는 언제나 낚시를 하는 사람들이
한 둘씩 눈에 띄었다. 강에 그물을 던져
물고기를 잡아 매운탕을 끓여 술추렴을
하는 사람도 있었고 수영을 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한경호는 그해 일요일에 아이들을 데리고
강가로 갔다. 딸 소영이 언제부터인지
낚시를 하러 가자고 졸랐었고 그도 집안에
들어앉아 있기가 싫어졌기 때문이었다.
아내는 동생의 결혼식에 가서 돌아오지
않고 있었다. 아내의 동생은 포항에서
직업군인으로 있으면서 그 곳에서
결혼식까지 올리게 되었는데 결혼식 날짜가
토요일로 잡히는 바람에 한경호는 빠지고
말았던 것이다. 한경호가 근무하는
부대에서 탈영병이 생기는 바람에 비상이
걸린 탓도 있었으나 한경호는 아내 동생의
결혼식에 굳이 참석하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아내에 대한 증오가 그 동생에게까지
미치고 있었다.
날씨는 후덥지근했다. 한여름이었다.
한경호는 버스를 타고 상류로 거슬러
올라갔다. 읍내와 가까운 강에는 사람들도
많을 뿐아니라 인적이 드문 곳이면 수영도
할 수 있겠거니 생각했던 것이다.
강가에 이르자 온 몸이 땀으로 후줄근히
젖었다. 여주에서 충주쪽으로 20리쯤
떨어진 곳이었다. 한경호는 억새풀이
우거진 강가를 걸어 아카시아 그늘 밑에
자리를 잡았다. 아이들은 강가에 이르자
마자 옷을 벗고 강으로 뛰어들었다.
한경호는 얼굴과 손을 씻고 낚시 가방을
풀렀다.
그늘이 있어서 다행이었다. 인적도 없는
한적한 곳이었다. 아카시아 숲 뒤로는 낮은
야산이 있어서 싱그러운 녹향이 바람결에
날리고 있었다.
한경호는 낚시를 강에 드리웠다. 바람이
없어서 찌를 관찰하기가 쉬웠다.
정오가 되었다. 한경호는 물고기를 몇
마리 잡아 매운탕을 끓였다. 야산에서
이따금 뻐꾸기가 울어댔다. 뻐꾸기의
울음소리는 강파도소리 밖에 들리지 않는
조용한 강가를 찌렁찌렁 울리고 있었다.
매운탕이 끓자 아이들은 매운탕에 가지고
온 밥을 먹게 하고 한경호는 술을 마셨다.
오후엔 아카시아 그늘 밑에서 잠을 잤다.
아이들은 낚시대를 만지기도 하고 강가를
뛰며 놀았다. 더우면 강에 들어가 물장구를
치고 놀았다.
그는 아이들에게 물조심하라고 당부하지
않았다. 이상하게 그런 말이 마음 속에서
우러 나오지 않았다.
아내에 대한 증오가 다시 속에서 끓어
올랐다. 강가에서 놀고 있는 아이들도
벌레처럼 미워졌다. 내 아이들이
아니다,라는 생각과 지금까지 자신의
아이들인줄 믿고 사랑을 쏟아온 사실에
대한 배신감에 또 다시 치가 떨렸다.
그는 실눈을 뜨고 강가를 내려다보았다.
아이들은 강에 들어가 물장난을 하며 놀고
있었다. 영철이 소영에게 물을 끼얹고
있었고 소영은 물세례를 피하기 위해
깔깔대고 웃으며 깊은 강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위험해!)
 한경호는 눈을 번쩍 떴다. 소영은 물살이
빠른 곳으로 달려가고 있었다.
그러나 한경호는 다시 눈을 감았다.
갑자기 한경호의 머릿속으로 소영이 그대로
물에 빠져 죽었으면 하는 생각이 번개처럼
스쳤던 것이다. 소영이 뿐이 아니었다.
영철이도 소영이를 구한답시고 따라
들어가면 둘이 함께 죽을 것이 아닌가...
한경호의 머릿속에는 무서운 생각이
꿈틀대고 있었다.
한경호는 실눈을 떴다.
그러나 소영이는 강의 더 깊은 곳으로
들어가지 않고 있었다.
(영악한 계집애... )
한경호는 눈을 감았다. 술이 오르고
있는지 졸음이 나른하게 쏟아지고 있었다.
태양은 중천에서 화산이 폭발을 하듯이
작렬하고 있었다. 가만히 누워 있는데도
숨이 턱턱 막혔다. 어디선가 보릿단을
태우는 것 같은 매캐한 연기 냄새가 풍기고
있었다.
한경호는 아내를 생각했다. 아내가
아직까지 돌아오지 않는 것은 동생의
결혼식에 참석하고 있기 때문이 아니라
그새 외간 남자를 만나고 있기 때문일
것이라고 여겨졌다. 아내는 금요일날
갔으므로 토요일의 결혼식에 참석했으면
밤에라도 돌아와야 했을 터였다. 신랑
신부가 신혼여행을 떠나버리면 일가친척도
변변히 없는 아내가 어디서 잠을 자겠는가.
지금쯤 어둠컴컴한 여관 구석방에서 어느
놈팽이를 껴안고 가쁜 숨을 몰아 쉬고 있을
터였다.
한경호는 아내의 하얀 몸뚱이를
생각했다.
아내의 하얀 몸뚱이를 더듬고 있는 낯선
사내의 투박한 손을 생각했다.
아내는 그 손이 자신의 몸을 애무할
때마다 입을 벌리고 더운 입김을 토해내고
있을 것이다. 그리고 두 연놈의 등짝은
땀으로 흥건히 젖어 있을 것이다.
아내는 오늘 밤에 놈의 정액을
사타구니에 묻히고 돌아와 밤꽃 냄새를
풍기며 애교를 떨 것이다. 그러면 그는
못이기는 체 하며 바람을 피운 아내를
껴안고 짐승처럼 교미를 하게 될 것이다.
바람을 피운 화냥년들은 자신이 바람을
피운 사실을 숨기기 위해서 그런 날은 더욱
남편에게 교태를 부린다고 하지 않는가.
더러운 화냥년들...
한경호는 주먹을 움켜쥐었다. 태양과
짜증스럽다. 주먹으로 이마의 땀을
훔쳤다.
소영아...
소영아...
영철이 소영을 부르는 소리가 희미하게
들렸다. 한경호는 문득 눈을 뜨고 강을
본다. 소영이 보이지 않는다.
소영아...
영철은 허리까지 찬 강 속에서 소영을
부르고 있다. 영철이 소영을 부르는 소리가
아득하게 귓전을 후빈다.
(꿈인가?)
한경호는 몸을 반쯤 일으켜본다. 영철이
문득 이쪽을 돌아본다. 한경호는 그 순간
영철이와 눈이 마주쳤다고 생각한다.
"아빠!"
영철이 한경호를 부르는 소리가 귓전을
생생하게 울렸다. 다음 순간 한경호는
소영이 강물 속에서 허우적거리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 착각인가?아니다. 소영은
분명히 강물 한가운데 빠져 허우적거리고
있었다. 영철이 한경호를 부르는 것은
소영이 물에 빠졌기 때문인 모양이었다.
(빠졌어!)
한경호는 자신도 모르게 입속으로
부르짖었다. 그리고 소영을 구하러 가는
대신 재빨리 누워버렸다.
"아빠!"
"아빠!"
영철이 다급하게 한경호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그러나 한경호는 눈을 질끈 감고
대꾸하지 않았다.
"아빠!소영이가 물에 빠졌어!"
"아빠!소영이를 살려줘!"
한경호는 영철의 다급한 부름에도
대꾸하지 않았다. 가슴이 격렬하게 뛰고
손에서 진땀이 나고 있었으나 못들은
체하고 있을 뿐이었다. 그리고 영철이
소영을 따라 들어가 물에 빠져 죽기를
간절히 바랐다.
"아빠!"
그러나 영철은 아카시아 그늘 밑으로
달려나와 한경호의 어깨를 마구 흔들고
있었다. 한경호는 그때서야 눈을 부스스
뜨는 체했다.
"아빠!"
"왜?"
"소영이가 물에 빠졌어요!"
영철이의 목소리는 울음이 섞여 있었다.
"뭐?"
"소영이가 물에 빠졌는데 왜 모르는
체하는 거예요?"
"뭐?"
한경호는 가슴이 철렁했다. 영철이에게
잠을 자는 체하던 것이 들켰다고 생각되어
자신도 모르게 같은 질문이 터져 나왔다.
"소영이가 물에 빠졌단 말예요!"
영철이 한경호의 가슴팍을 주먹으로
두드렸다. 한경호는 영철을 밀어버리고
벌떡 일어났다. 그러나 소영은 강물 어느
곳에서도 보이지 않았다.
"어디?"
한경호는 강물을 휘휘 둘러보았다 조금
전까지 강에 빠져 허우적거리던 소영이
보이지 않고 있었다.
(벌써 가라앉았나?)
한경호는 등줄기로 식은 땀이 쫙 하고
흘러내리는 것을 느꼈다. 그는 비로소
엄청난 사태가 발생했다는 사실을 깨달았던
것이다.
한경호는 눈 앞이 아득해 왔다. 강을
아무리 휘둘러보아도 어린 소영의 모습은
거짓말처럼 그림자도 보이지 않고 있었다.
한경호는 죽은 소영이의 얼굴을 생각하자
가슴 속으로 찬 비가 뿌리는 기분이었다.
소영은 그가 원하던대로 죽었으나 그의
가슴은 죄의식으로 언제나 가슴이 뻐개질
것 같았다.
소영의 시체는 그날 해질 무렵에야
발견되었다. 한경호가 경찰에 신고하고
마을 사람들과 강변을 샅샅이 수색했으나
한경호가 낚시를 하던 곳에서는 발견되지
않고 그 곳에서 1킬로미타나 떨어진 강가에
떠올라 천렵꾼들에게 발견되었던 것이다.
영철은 그 이후 한경호와 마주치는 것을
두려워했다. 이상한 일이었다. 한경호가
소영이 죽어주는 것을 바랬던 것을 알고
있기나 하듯이 한경호를 무서워하고
있었다.
한경호도 영철이 두려워졌다. 영철은
그의 비밀을 알고 있었다. 소영이 물에
빠져 허우적거릴 때 눈을 뜨고 봤으면서도
잠이 든 체하고 구출해 주지 않은 것을
영철은 알고 있었다. 영철이 그를 멀리하는
것은 그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영철은 그 사실을 아내에게는
말하지 않았다. 한경호도 입을 다물었다.
그러나 아이를 돌보지 않았다는 책임은
모면할 수 없었다. 아내는 그에게
살인자라고 말했고 동네 사람들은 그가
지나가면 손가락질을 하며 수군거렸다.
영철은 점점 말이 없어졌다. 그리고
소영이 죽은 지 불과 6개월도 못되어
정신이상을 일으켜 병원에 입원해야 했던
것이다.
소영의 죽음으로 충격을 받은 것이
분명했다.
그러나 충격을 받은 것은 한경호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소영이 비록 자신의
자식이 아니라고 해도 죽음을 방치한 것은
죄악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
죄의식에서 벗어나기 위해 매일 술을
마셨다. 아내는 그러한 그를 짐승을 보듯이
멀리했다. 악몽 같은 날들이었다.
"한번 만져 봐요. "
아내가 다시 한경호의 손을 잡아 당겨
복부에 올려놓았다.
한경호는 무겁게 한숨을 내쉬었다. 이
무슨 운명의 저주란 말인가. 아내가 부정한
짓을 저질러 낳은 아이가 물에 빠져 죽고
그 아이로 인해 또 다른 아이는 정신병자가
되고 자기는 죄의식에 빠져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참으로 더러운 운명이
아닌가,그런데 아내가 또 임신을 했으니 이
기구한 운명이 나를 조롱하고 있는
것인가...
한경호는 손바닥에 느껴지는 아내의
따뜻한 아랫배를 만지며 그런 생각을 했다.
그러나 아내의 아랫배에서는 아직 생명이
움직이는 기분은 전혀 느낄 수 없었다.
"어때요?"
"따뜻해. "
"아기가 느껴져요?"
"아직... "
"그래요. 나도 아직 아기를 느낄 수
없어요. 그래도 자꾸 기분이 좋아져요. "
아내가 한경호의 목을 끌어안고 그의
입술에 자신의 입술을 포갰다. 한경호는
아내의 어깨너머로 비가 내리는 창밖을
내다보며 내가 또 다시 누구의 아이인지도
모르는 아기 아빠가 되는 것인가 하는
생각을 했다. 어쩐지 아버지가 된다는
사실이 불안하면서도 기막힌 운명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그런 기분을 아내에게 내색할
수는 없었다.
"당신은 어때요?"
"나도 물론 좋아. "
"정말예요?"
"정말이잖구?"
이번엔 한경호가 아내의 등을 끌어안고
입술을 포갰다. 그러자 아내가 불쑥 그의
입술을 열고 혀를 밀어 넣었다. 한경호는
틂뻗안아서 무릎 위에 앉혔다. 아내가
가쁜 숨을 몰아 쉬며 그를 소파 등받이로
쓰러트렸다.
"참 좋다. "
아내가 입술을 떼고 말했다. 아내의 손이
벌써 바지춤에 가 있었다.
"나 사랑해?"
아내가 들뜬 음성으로 물었다.
"그럼. "
"아이 좋아. "
아내가 다시 그의 입술에 자신의 입술을
얹었다. 그러면서 아내의 손은 능숙하게
그의 바지 지퍼를 내리고 있었다. 한경호는
정란의 손을 가만히 잡았다. TV에서 심야
뉴스가 끝나 쏴아 하는 소리가 들리고
있었다. TV의 모든 프로그램이 끝난
모양이었다.
"왜 그래요?"
아내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텔레비전을 꺼야겠어. "
한경호는 억지로 내키지 않는 미소를
지었다.
"내가 끌께. "
아내가 그의 무릎에서 일어나 거실의
전등과 TV를 껐다 그러자 방안이
캄캄해지면서 빗소리가 거실을 가득
메웠다.
한경호는 거실 탁자를 더듬어 담배를
찾아 입에 물었다. 라이터는 아내가 찾아
불을 붙여 주었다.
"당신은 가만히 있어. 내가 서비스
해줄께... "
아내가 낮게 속삭이고 돌아서서 옷을
벗기 시작했다. 한경호가 담배를 깊숙이
빨아들이자 빨간 담뱃불에 옷을 벗는
아내의 모습이 뚜렷이 드러났다가
스러졌다. 아내의 몸은 더욱 요염해지고
매끈해 진 것 같았다.
"아기 때문에 괜찮을까?"
"하고 싶어. "
아내가 그에게 다가와 응석을 부리며
말했다.
"조심해야 할거야. "
한경호는 내키지 않는 기색으로 응했다.
한경호는 문득 아내가 이천의 병원에
다녀온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다.
아내는 이천에 다녀올 때마다 행위에 대한
욕구가 점점 강해지고 있었다.
"조심할께. "
아내가 무릎을 끓고 앉아 그의 옷을
벗기며 낮게 소근거렸다. 벌써 아내의
입에서는 뜨거운 입김이 뿜어지고 있었다.
한경호는 얼굴을 찡그리고 눈을 감았다.
이제는 아내의 요구를 그대로 받아들이는
수밖에 달리 방법이 없었다. 물론 한경호가
아내와의 관계를 싫어해서가 아니었다.
그는 아내를 증오하면서도 이상할 정도로
아내의 육체는 계속해서 탐닉해 왔던
것이다.
한경호는 그 사실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아내를 증오하면서도 아내의 육체를
탐하는... 그 이율배반적인 자신의 행위도
한경호는 싫었다.
아내는 분명히 변해 있었다. 아내가 무엇
때문에 달라진 것인지는 알 수 없었으나
한경호는 아내의 변화가 막연히 두려워지고
있었다.
한경호는 TV 뉴스를 잠깐 생각했다.
정국이 가파른 내리막길로 굴러가고
있었다. 5월17일 이 나라 정치사에 큰 획을
긋는 미증유의 사태가 발생하리라고
생각하자 편안하게 행위에 몰두할 수
없었다.
"나를 봐요!"
아내가 한경호에게 자신의 나신을 덮어
오며 허리를 흔들었다. 한경호는
습관적으로 아내의 등을 끌어안으며 눈을
떴다. 아내의 어둠 속에서 하얗게 웃으며
한경호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한경호는 그
순간 아내의 눈이 탐욕으로 번들거리고
요기를 띠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들어 가만히
몸을 떨었다.
창밖에는 빗발이 더욱 거칠어지고
있었다. 유리창이 덜컹대고 흔들리고
빗소리가 귓전을 때려왔다. 그리고
바람소리와 빗소리에 섞여 아내의
신음소리가 잦아지기 시작했다.

3

강한섭이 목포에 도착한 것은 5월15일
오후2시였다. 신문사의 예상대로 광주도
학생들 시위로 어수선했다. 신문사에 5.
17전국 계엄 확대와 김대중 민추협 고문
구속 제보가 들어온 것은 5. 14일 자정이
가까운 시간이었다. 제보는 김대중 민추협
고문 뿐 아니라 김종필 민주공화당 총재를
비롯해 정치인 수십 명을 구속할
예정이라고 했었다. 그러나 김영삼 신민당
총재는 구속 대상이 아니라고 했다.
"김영삼 총재가 구속 대상이 아니라구?"
"아니 무엇 때문에 김영삼 총재는 구속
대상이 아니라는 거야?"
"혹시 군부에서 김영삼 총재를
대통령으로 옹립하려는 게 아니야?"
신문사에서는 정치인 대량 구속
예정이라는 제보가 들어오자 비상상태에
돌입했다. 특히 김영삼 총재가 구속 대상이
아니라는 바람에 신군부에서 그를
대통령으로 옹립하려는 의도가 아닌가 하고
촉각을 곤두세웠다.
"신군부는 3김씨를 모두 비토하고
있습니다. "
"그럼 왜 구속을 안해?"
"제2의 부마사태를 두려워해서 연금으로
끝낼 것 같다고 합니다. "
"연금?연금이면 한계가 있을 텐데?"
"정치규제법이 만들어지겠지요. "
"그렇다면 강제로 정계 은퇴를
"시키겠군... "
"그럴 가능성이 제일 높습니다. "
정치부 데스크는 계엄이 전국으로
확대되고 정치인들이 대거 구속 사태가
잇따를 것이라는 제보를 받자 앞으로의
일을 예측하기에 바뻤다. 그때 광주에서
대학생 데모를 취재하고 있던 사회부에서
지원 요청이 들어왔다. 광주는 김대중
민추협 고문이 구속될 위기에 처해 있다는
소문이 파다하게 퍼져 있어 공기가 심상치
않다는 것이었다.
광주에서는 김대중 민추협 고문에 대한
지지가 폭발적인 상태에 있었다. 71년
제9대 대통령 선거에서 김대중 돌풍을
일으키며 박정희 대통령에게 도전했다가
패배했으나 호남지역에서의 지지는
김대중을 정치계의 거목으로 끌어 올렸던
그러나 유신헌법이 선포되기 직전
일본으로 떠났다가 10월 유신을 맞이한
김대중은 일본에 그대로 주저앉아 박정희
대통령에 대한 맹렬한 비판을 가했다. 이에
한국 정부는 골머리를 앓고 있다가 그를
납치하는 잘못을 저지르게 되는 것이다.
소문은 정보부가 김대중을 동경에서
살해하려다가 실패했으며,바다에 던져
넣으려다가 미국 CIA가 이를 눈치 채고
전투기로 추적을 해오는 바람에 한국까지
끌고 와 집앞 골목에 팽개친 것이라는
내용으로 시중에 파다하게 나돌았었다.
정부에서는 구국청년단이 애국적인
행동으로 일본에서 반국가적인 행동을
일삼고 있는 김대중을 납치한 것이며
구국청년단을 체포하기 위해 정부가 최선을
다하고 있다고 발표했었다.
 그러나 국민들은 그 말을 믿지 않았다.
정부는 김대중 납치사건으로 외교적
곤경에 처하게 되었다. 외국 언론들은
다투어 김대중을 납치한 자들이 한국의
중앙정보부이며 반체재 인사들에 대한
납치는 가장 추악한 권력욕에서 비롯된
것이라며 유신헌법까지 맹렬하게 비판했다.
일본은 한국 정부가 중앙정보부
수사관들을 일본에 파견하여 김대중을
납치한 것은 명백한 주권 침해며 원상복귀
시키지 않으면 이를 좌시하지 않을
것이라고 선언했다.
일본 언론들도 다투어 한국 정부를
공격했다.
한국 정부는 김대중 납치로 오히려
곤욕을 치러야 했다.
반체재 인사들과 시민들,그리고 학생들은
김대중 납치의 진상을 밝히라고 촉구했다.
대학생들은 진상을 밝힐 것을 요구하며
연일 데모를 벌였다.
호남지역에서는 데모를 하지는 않았으나
김대중의 납치로 또 하나의 큰 상처를
가슴에 묻어야 했다. 71년 대통령
선거에서의 좌절,영남 지역이나 대구 경북
지역에 비해 상대적으로 낙후된 농촌
실정이 박정희 대통령과 그 지역
권력자들의 호남 차별정책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호남 지역 주민들은 김대중의 납치가
자신들에 대한 탄압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김대중은 그후 상당히 오랫동안
연금상태에 묶여 있었다. 호남 지역
주민들은 김대중의 연금도 자신들이 연금
당한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들의 가슴에는
어느 사이에 칼날 같은 한()이 푸른
빛으로 자라고 있었다. 그리고 그 한은
녹슬지 않고 더욱 크게 자라고 있었다.
세월은 더욱 암담해져 갔다. 긴급조치가
선포되고 반체재 인사들이 속속
구속되었다. 호남에서는 일자리를 찾아
어린 소녀들이 서울로 서울로 상경을 했다.
그리고 그들은 대부분 가난한 공장
노동자가 되었다.
우울하고 암담한 시대였다.
남루한 의복,떨어진 신발,병든 시골집
부모들,재봉틀 먼지가 자욱한 봉제공장이
70년대의 대표적인 사회적 풍경이었듯이
호남 지역 주민들은 70년대에서 철저하게
소외되고 있었다. 누구의 입에서 나온
말인지 알 수 없었으나 호남 사람들을
하와이이라고 부르기도 했고 전라도
깽깽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호남 주민들에
대한 노골적인 비하였다. 사람들은 그것을
압제자들이 만들어 낸 교묘한 지역
차별정책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10. 26이 터지고 김대중은 사면과
복권이 되어 정치 일선에 복귀했다.
압제자는 부하의 총에 죽고 탄압 받던
김대중은 국민의 영웅으로 돌아오게
되었다.
호남지역 주민들은 김대중의 금의환향을
학수고대했다. 그리고 그의 얼굴을 보기
위해 관광차를 동원해 서울로 서울로
상경했다. 그들은 김대중의 얼굴을 보는
것만으로도 눈물을 흘리며 감격했다.
그리고 그들은 김대중의 귀향을 바랬다.
김대중은 마침내 광주 방문에 동의했다.
그러나 시간을 확정짓지는 않았다.
김대중의 광주 방문이 지역 이기주의를
조장할지 모른다는 우려 때문이었다.
그러한 시기에 신군부가 김대중을
구속하고 혁명을 일으키려 한다는 소문이
나돌아 호남 지역 국민들을 분노케하고
있는 것이다.
강한섭이 광주에 도착했을 때 그 여파
때문인지 알 수 없었으나 학생들 시위가
서울 못지 않게 격렬했다. 시위를 주도하고
있는 것은 전남대학교 학생들이었으나
5월15일엔 조선대학교와 광주교육대학교의
학생들까지 참여하여 도청 분수대 앞으로
약 1만6천 여 명의 대학생들이 진출하여
시위를 벌였다.
"비상계엄 해제하라!"
"유신잔당 물러가라!"
"정치일정 단축하라!"
 "노동3권 보장하라!"
전남대 학생회는 시국성토선언문을
발표했고 조선대와 광주교대는
민주화투쟁위원회의 이름으로 선언문을
낭독한 뒤 구호를 외쳤다. 시위는
질서정연했고 경찰은 물리적인 제재를
가하지 않고 질서만 지켜줄 것을 요구했다.
학생들의 시위에는 다수의 교수들과
시민들까지 참여하여 학생들을 격려했다.
시위대는 집회를 마친 후 질서정연하게
각 대학으로 돌아갔다.
(공연히 소문만 무성했군... )
강한섭은 광주의 대학생들 시위를
취재하며 학생들이 경찰과 격렬한 충돌을
벌일 것이라는 예상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알고 안심이 되었다.
서울에서는 데모가 더욱 격렬하게
진행되었다. 5월15일 서울역 일대에는 약
10만 명의 대학생들이 집결하여 군부의
음모를 성토했다. 그러나 오후 3시 무렵이
되자 각 대학교의 학생회로 계엄군 병력이
이동하고 있다는 시민들의 제보가 잇따라
들어왔다. 학생회 간부들은 바짝 긴장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학생회 간부들은 군
병력과 장갑차가 서울로 이동하고 있다는
사실을 서울역 일대에서 데모하는
학생들에게 통보했다.
"군인들은 모두 우리의
가족입니다!우리의 형님일 수도 있고
동료일 수도 있습니다!그들이 무엇 때문에
우리에게 총부리를 겨누고 우리를 장갑차로
깔아 뭉개겠습니까?"
서울역 광장에 스쿨버스로 임시 연단을
설치한 시위 학생들은 학생회의 통보에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오히려 학생들이
연설을 할 때마다 우뢰 같은 박수가 쏟아져
분위기를 돋구었다.
"군인들은 우리의
오라버니들입니다!군인들이 장갑차를 끌고
오면 달아날 필요가 없습니다!물론
군인들과 싸울 필요도 없습니다. 오히려
그들이 오면 맨 가슴으로 뜨겁게
맞이합시다!그리고 총부리를 유신 잔당에게
돌리도록 호소합시다!"
여학생들의 연설에도 아낌없는 박수가
쏟아졌다.
그날의 시위도 밤늦게까지 계속되었다.
정치권은 부산하게 움직였다. 신민당은
국회에 비상계엄 해제 촉구결의안을 국회에
냈고 김종필 총재는 신현확 국무총리를
방문하여 학생들을 물리적으로 진압하지 말
것을 요구했다.
신현확 국무총리는 오후 7시50분
학생들의 시위를 자제할 것을 촉구하는
담화문을 발표했다. 담화문의 내용은
연말까지 개헌을 하여 내년 상반기에
정권을 이양하겠다는 것이었다. 기존의
입장을 재확인하는 것이었을 뿐 아무런
설득력이 없는 것이었다. 그 시간 학생들의
시위는 절정에 달해 있었다.
그러나 각 대학 학생회 대표들은 병력이
이동하고 있다는 시민들의 제보를 받고
고려대학교로 급히 모였다. 그들은
가두시위 계속 여부와 향후 투쟁 방향을
놓고 격렬한 논쟁을 벌였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사회단체와의 연합
투쟁이었으나 정치권이 학생들의 시위를
자제할 것을 요구하고 있었다.
 학생들의 토론은 장시간 동안
계속되었으나 날이 어두워지고 비가 내리고
있으므로 일단 학교로 복귀한다는 방침이
정해졌다. 이것이 저 유명한 서울역
회군이었다.
강한섭은 광주에서도 서울의 동정에만
귀를 기울였다.
5월16일엔 전국적으로 비가 내렸다.
5월16일 오후 전남 도청 앞 분수대가 있는
광장에는 광주 일대의 대학생 3백 여 명이
집결했다. 전남대학교 복학생
정동년()은 여기서 제2시국선언문을
낭독했다.
학생들은 시국선언문 낭독이 끝나자
대규모의 가두행진을 벌였다. 이때도
경찰과 학생들의 물리적인 충돌은 없었다.
밤 8시 학생들은 도청 앞에 다시
집결하여 횃불 시위에 들어갔다.
조선대학교 학생들을 선두로 제1대는
금남로를 따라 행진을 하고 제2대는
전남대학교 학생들을 선두로
광주체신청-산장입구-산수동5거리-동명파출
소-노동청을 거치며 행진을 하여 도청
앞으로 되돌아 왔다. 광주 시내는 수
백개의 횃불로 대낮처럼 환하게 밝았다.
학생들은 5. 16 19주기를 맞아 5. 16
화형식을 치른 뒤 비로소 해산했다.
강한섭은 시위 현장을 빠짐없이 취재하여
서울로 타전했다. 계엄사의 보도 검열
때문에 기사가 실릴 지 어떨 지는 알 수
없었으나 취재한 내용은 서울로 송고해야
했다. 그러나 이튿날 아침에 신문을 받아
보자 광주에서 횃불 시위가 일어났다는
기사가 사회면에 제법 크게 보도되어
있었다. 강한섭은 만족하여 다시 취재에
나섰다.
5월17일은 광주가 조용했다. 서울에서
학생들이 대규모 시위를 일시적으로
중단하기로 했다는 연락을 받은 광주 지역
학생들도 서울과 보조를 맞추기로 했던
것이다.
광주에서 대대적인 검거 선풍이 불어닥친
것은 5월17일 밤11시가 되었을 때였다.
이보다 앞서 광주 시내는 아침부터 불길한
일들이 하나 둘씩 일어나고 있었다.
호남고속도로를 질주하는 군용추럭의
행렬이 시민들에게 자주 목격되기도 했고
전남대학교에서 어학 강의를 하는
미국인들이 일제히 출근하지 않아 학생들을
의아하게 했다. 전남대학교 뒷산에서
완전무장을 한 군인들이 학생들을 정찰하는
윳간간이 눈에 띄었다.
오후 7시가 되었을 때 서울에서
전남대학교 총학생회로 다급한 전화가
걸려왔다.
"모두들 피하세요!이화여대에서 회의를
하던 학생들이 모두 계엄사로
연행되었어요!"
"군이 투입되었습니까?"
"자세한 것은 모르겠어요. 빨리 피하셔야
해요!"
"계엄령이 확대되었습니까?"
"몰라요!"
여학생의 목소리는 다급했으나 자세한
내막을 알 수가 없었다. 학생 대표들은
서울로 전화를 걸어 각 학교에 군이
투입되었는지 확인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서울에서는 이미 일제히 검거선풍이
불어닥쳐 연락이 쉽지 않았다. 게다가
8시쯤이 되자 학생들은 서울에 검거선풍이
불고 있다는 것을 여러 곳에서 확인할 수
있었다.
학생들은 곧 비상회의에 들어갔다.
"계엄령이 확대되지도 않은 상태에서
검거선풍이 불고 있는 모양입니다.
아무래도 사태가 심상치 않은 것 같습니다.
"
학생들은 서울의 사태에 깊은 우려를
표시했다.
"군이 투입되어도 시위는 계속해야 할 것
같습니다. "
"안됩니다. 서울과 보조를 맞추어야
합니다. "
"우리가 도피하면 학생들에게 내일 아침
10시 학교로 모여 도청 앞에 집결하라는
지침은 어떻게 되겠습니까?우리가 피하면
아무 것도 모르는 학생들만 희생됩니다. "
"시위 지도부가 없으니까 학생들은
해산할 겁니다. 또 군에 연행된다고 해도
지도부가 아니니까 훈방될 겁니다. "
학생들은 회의를 계속했으나 뚜렷한
결론이 나오지 않아 일단 9시쯤 대지호텔로
피했다가 상황이 점점 불길한 방향으로
전개될 움직임을 보이자 곧 바로 호텔을
떠나 은신했다.
강한섭은 대지호텔에 숙소를 정해 놓고
있었다. 저녁을 먹고 서울로 전화를 걸자
서울도 공기가 좋지 않다고 말했다. 그는
집으로 전화를 걸어 바깥 외출을
자제하라고 아내에게 당부했다. 그리고
강한섭은 상도동으로 전화를 걸었다.
상도동에는 이미 국회의원들이 모두
돌아가고 비서 몇 사람만 남아 있었다.
강한섭이 평소부터 잘 알고 있는 비서에게
김영삼 총재의 동향이 어떠냐고 묻자
총재는 침통한 표정으로 2층에 올라가
있다고 말했다.
"바깥은 어떻습니까?"
"좋지 않아요. 이미 군인들이 짝
깔렸어요. "
"총재께서 연행될 것 같습니까?"
"모르겠어요. 동교동은 연행이 될
모양입니다. 그쪽 비서실에서 난리예요. "
강한섭은 가슴이 철렁했다. 군부에서
김대중 민추협 고문을 연행한다면 앞으로의
정국이 혁명 정국으로 돌입하게 되는
것이다. 어느 정도 예상하고 있던
일이었으나 막상 일이 닥치자 강한섭은 등
뒤에서 차가운 바람이 부는 듯이

강한섭은 마른 침을 꿀꺽 삼켰다.
"김대중 민추협 고문이 연행된다는
말씀입니까?"
"예. "
"몇 시에요?"
"11시 전후라고 합니다. 자세히는 알 수
없지만 거의 정확한 소식통인 모양입니다.
"
"잘 알겠습니다. "
"이봐요. 강 기자!"
강한섭이 전화를 끊으려고 저쪽에서
다급하게 강한섭을 불렀다.
"예. "
"이 상황이 보도될 수 없는 상황이오?"
"예. 아시다시피 보도는 철저하게
통제되고 있습니다. 계엄사에서 보도하게
그냥 두겠습니까?"
"하긴 그렇지요. 그럼 다음에 봅시다.
아무래도 이번 봄은 혹독하게 무서운 봄이
될 것 같소. 수고하시오. "
상도동 비서가 맥없이 전화를 끊었다.
강한섭은 수화기를 놓고 우두커니 창밖을
내다보다가 신문사로 전화를 걸었다.
신문사도 이미 비상이 걸려 있었다. 기자들
대부분이 퇴근도 하지 못하고 신문사를
지키거나 계엄군의 이동을 따라 이리저리
뛰고 있었다.
"계엄군이 얼마나 보강되었어?"
강한섭은 사회부의 최병준 기자와 통화를
했다.
"말도 마. 지금 여기는 살벌하다구. "
"탱크가 투입되었었어?"
"응. 각 언론사에 탱크가 투입되구 군
낳뉠쩜대대적으로 보강되었어. "
"동교동이 연행된다며?"
"동교동 뿐이 아니야. 재야의 주요
인사들과 학생들은 벌써부터 연행되고
있어. "
"그래?"
강한섭은 가슴이 뜨끔했다.
"유신 때와 똑 같아. "
"혁명이군... "
"광주는 어때?"
"광주도 검거 선풍이 분다는 소문이
퍼지고 있어. "
"조심하게. 광주에 공수부대가
이동했다는 소문이 돌고 있어. "
"공수부대가?"
"그들은 충정훈련을 받은 부대래. "
"충정훈련이 뭐야?"
"쿠데타 진압 훈련이야. "
"알았네. "
강한섭은 서둘러 전화를 끊었다. 벌써 밤
11시가 가까워지고 있었다. 계엄군이
진입하는 것은 광주도 예외는 아닐
것이었다. 그러나 쿠데타 진압군을 광주에
투입한다는 것은 어떤 의미가 있는 것일까
하는 생각을 하자 몸서리가 쳐졌다.

4

서교동 분실의 창으로 보이는 버드나무가
점점 초록빛으로 짙어갔다. 한경호는
사무실의 창으로 우두커니 신록을 응시하고
있었다. 5월17일 마침내 서울공작의 힘찬
진군이 시작된 것이다.
5월17일 아침 주영복 국방부 장관은
보안사의 권정달() 대령으로부터 한
통의 서찰을 받았다. 그것은 비상계엄
확대조치와 비상기구 설치,그리고 국회
해산에 관한 내용이었다.
주영복 국방 장관은 이미 그러한 조치가
있으리라는 것은 사전에 충분히 알고
있었고 그에 대한 대책까지 세우고 있었다.
국방부에서 전군 주요 지휘관회의를 열기로
한 것도 그러한 조치를 뒷밤침하기
위해서였다.
"어떻게 생각하시오?"
주영복 국방부 장관은 유병현
합참의장에게 물었다.
"문제가 있습니다. "
"문제가 있다니요?"
"장관님. 아무리 비상계엄이 선포되어
있다고 해도 국회 해산은 군에서 논의할
수가 없습니다. 이는 헌법에 위반됩니다. "
"그렇군요. "
주영복 국방부 장관은 고개를
끄덕거렸다. 각 군 참모총장들도 유병현
합참의장의 말에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주영복 장관은 이 사실을 권정달 대령에게
통보했다. 그러자 권정달 대령도
국회해산에 대한 문제는 거론하지 않아도
좋다고 응답해 왔다.
5월17일 상오 10시 국방부 제1회의실에서
드디어 전군 주요 지휘관회의가 열렸다. 이
회의는 이미 시나리오에 마련된대로
신군부의 권력 장악을 위한 포석을
형식적으로 추인하는 것에 지나지 않았다.
합참 정보국장 최성택() 소장이
회의에 북한의 동향과 국내 정세를
보고했고 주영복() 국방 장관이
회의를 주재했다.
"우리는 지금 국가적인 위기에 처해
있습니다. 안으로는 권력의 공백 상태를
틈타 소위 민주화 데모라는 학생들의
데모가 여느 때보다 격렬하고 밖으로는
북한이 적화남침의 기회만을 호시탐탐
노리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사태를
방관할 수 없어 우국충정하는 마음으로
계엄의 전국확대 실시와 비상기구가
필요하다는데 의견을 같이 하고 이를
국무회의에 건의하기 위해 모였습니다. "
주영복 국방 장관은 계엄의 전국 확대
실시와 비상기구 설치를 역설했다. 계엄의
전국 확대와 비상기구는 혁명을 의미하는
것이었기 때문에 어느 정도 예측하고
있었던 일인데도 장군들의 얼굴은 바짝
긴장이 되었다.
 "여기에 대해서 각 지휘관들의 합의가
필요하오. "
주영복 장관의 발언이 끝났으나 아무도
발언을 하지 않았다. 그러자 장관은 일일이
장군들을 호명하여 찬성 발언을 이끌어
냈다.
"정치풍토를 쇄신하지 않으면 이 나라는
월남처럼 부패하여 패망할 것이오. "
장관은 노골적으로 정치풍토쇄신법까지
거론하며 구정치인들을 일소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군이 직접 개입해서는 안됩니다. 군은
정치에 초연해야 합니다. "
그러자 군수기지 사령관 안종훈()
중장이 손을 들고 군의 정치개입을
반대하는 발언을 했다. 그는 12. 12사태
때도 육본 지휘관들이 대부분 합수부에
저항을 포기하는 발언을 했을 때도 혼자서
합수부를 진압해야 한다고 주장했던 용기
있는 군인이었다.
"국회가 개원되면 국가의 명운을
위태롭게 가능성이 많습니다. 부패한
정치인들이 대부분인 국회가 현재의 지역
계엄을 해제하고 군을 무력하게 만들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비상계엄을 지지하고
있습니다!"
특전사령관 정호용() 소장은
안종훈 장군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언성을
높여 안종훈 장군의 말을 비판했다.
"비상 계엄 확대안은 이미 결정된
것이오. 따라서 이 회의는 단순하게 의견을
듣는 자리일 뿐이오. "
계엄사령관 이희성() 육군
참모총장도 안종훈 장군의 발언을
일언지하에 잘라버렸다.
안종훈 장군은 더 이상 반대 의견을 말할
수 없었다. 주요 지휘관회의는 반대 발언을
할 수 없도록 분위기가 살벌했다.
(이것은 통고지 회의가 아니야... )
안종훈 중장은 침통한 표정으로 침묵을
지켰다. 그렇게 하여 전군 주요
지휘관회의는 비상 계엄 전국확대와
비상기구 설치 결의문에 전원이 서명하게
되었다. 그러나 결의문에 아무 내용이 없는
백지 결의문이었다. 백지 결의문의 내용은
물론 신군부가 작성한 것이었다.
이 결의문은 곧 바로 신현확 국무총리와
최규하 대통령에게 전달되었다.
신현확 총리는 주영복 국방부 장관과
이희성 계엄사령관으로부터 계엄확대와
비상기구 설치를 전군 지휘관들이
요구했다는 결의문을 전달받자 계엄확대는
반대하지 않았으나 비상기구 설치는
반대했다.
전두환 보안사령관은 같은 시간에
청와대로 최규하 대통령을 방문했다. 그는
권총을 찬 채 집무실에 들어가 비상계엄
확대와 대통령 긴급조치로 국회 해산과
국가보위를 위한 비상대책위원회를
설치해야 한다고 요구했다.
최규하 대통령은 눈을 지그시 감고
전두환 사령관의 요구를 들었다. 그의
얼굴은 몹시 침울해 보였다.
"계엄확대는 동의하겠소. "
이윽고 최규하 대통령이 무겁게 입을
열었다.
"각하. 국회 해산과 국가보위
비상대책위원회를 설치해야 합니다!"
"안됩니다. 국회는 해산할 수 없어요. "
최규하 대통령은 단호했다.
"각하!시국을 바로 보셔야 합니다. "
"6. 25때도 국회는 해산하지 않았소. "
"각하!"
"전 장군이 요구하는 것은 혁명적
조치요!"
"각하!이것은 제가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전군 주요 지휘관회의에서 결의한
것입니다. "
전두환 장군은 얼굴이 벌겋게
상기되었다. 그는 최규하 대통령을 전군
주요 지휘관회의를 내세워 밀어붙이고
있었다. 그러나 최규하 대통령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군은 국회 해산이나 비상조치를 건의할
권한이 없소!"
 최규하 대통령의 목소리는 낮았으나
위엄이 있었다.
"전군 지휘관들은 순수한 애국심으로
이러한 결의를 한 것입니다. "
"임시 국무회의를 소집하도록
지시하겠소. 그러나 회의의 안건은
비상계엄 확대뿐이오. "
"알겠습니다. "
전두환 장군은 도리없이 청와대를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계엄군은 이미
정치적인 활동에 들어가 있었다. 신군부는
강원도에 주둔하고 있던 특전사 11여단과
13여단을 서울로 이동하게 하여 거여동
특전사령부와 김포 여단에 배치했고 서울에
주둔하고 있는 각 여단도 점령 목표로
이동했다.
전북에 주둔하고 7공수 여단은 광주로
이동했다.
양평에 주둔하고 있던 20사단의 사단
직할 61연대와 62연대도 서울로 이동했고
60연대는 태릉의 육군사관학교로 이동해
있었다.
5월17일 밤 9시42분 중앙청에서 제42회
임시 국무회의가 열렸다. 회의 안건은
최규하 대통령의 요구대로 비상계엄의 전국
확대뿐이었다. 그러나 전국 계엄은 지역
계엄과 그 권한의 폭에서 판이하게 달랐다.
지역 계엄은 국방부 장관을 통해 내각의
통제를 받게 되어 있었으나 전국 계엄은
대통령의 통제를 받게 되어 있었다.
전국의 치안을 장악하고 있는
계엄사령관은 대통령의 통제만 받을 뿐
내각의 통제를 받지 않게 되는 것이다.
계엄사령관이 무소불위의 권력을 사용할 수
있는 법적조치였다.
그 조치를 의결하기 위해 국무회의가
열린 것이다.
중앙청 일대는 9시가 되기 전부터
무장군인들에 의해 삼엄하게 에워싸여
있었다. 비상 소집 연락을 받은 각 부처의
장관들은 중앙청 앞에 도착하자마자
무장군인들에 의해 옆문을 통해 회의실로
모셔졌다.
중앙청 복도에도 군인들은 완전무장을
하고 지키고 있었다. 중앙청에서 야근을
하던 공무원들은 군인들에 의해 별관으로
쫓겨나 있었다. 전화는 두절되었고
분위기는 살벌했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임시 국무회의는 제안 설명이나 찬반토론도
없이 비상계엄 전국확대를 의결했다.
이규현() 문화공보부 장관은 밤
에 시달리며, 굶주리고 병든
자기 자식을 평생 생각하11시40분 서울 시청에서 비상계엄 지역을
제주도를 제외한 전국 일원에서 전국으로
변경한다고 발표했다.
이에 앞서 보안사 요원들은 이미 학생
체포에 들어가 있었다. 그것은
이화여대에서 전국 학생 대표자회의가
열리고 있던 오후 6시경의 일이었다. 밤
10시 무렵부터는 정치인들과 재야인사들에
대한 대대적인 검거에 들어갔다.
문익환,예춘호,김동길,인명진,고은,이영희
등 재야 인사들에 대한 검거는 소요 배후
조종 혐의가 적용되었고 김대중은 내란
혐의,김종필,이후락,김치열,김진만,이세호
등은 부정축재 혐의로 체포되었다. 김영삼
등 야당 정치인들은 이유도 없이 자택에
연금되었다.
김대중이 체포된 것은 밤 11시20분
경이었다.
동교동은 이날 낮부터 바짝 긴장해
있었다. 오후 5시경 비상 국무회의가
소집되었다는 라디오 뉴스에 이어
이화여대에 계엄군이 투입되어 학생들을
연행해 갔다는 소식이 들려오자 동교동의
분위기는 올 것이 왔다는 생각으로 침통해
있었다. 밤 10시경이 되자 문익환. 고은 등
재야인사들이 계엄군에 연행되었다는
연락이 전화선을 타고 빗발쳤다.
동교동에는 11시20분이 되었을 때야
군인들이 들이닥쳤다. 동교동의 비서진과
경호원들은 밖에서 군인들의 구령소리와
군화소리가 들리자 우왕좌왕했다. 사람들은
얼굴이 핼쓱하게 질려 어쩔 줄을 몰라했다.
그때 경호원들 중의 한 사람이 밖으로 뛰어
나가 계엄군을 저지하다가 피투성이가 되어
나뒹굴었다.
계엄군들은 M16을 겨눈 채 경호원들을
물리치고 집안으로 들어가 김대중을
연행하여 남산 중앙정보부에 수감했다.
계엄 포고령이 발표되기도 전의
일이었다.
(그는 이제 남산에 가면 한동안 나오지도
못하겠지... )
한경호는 푸르게 살랑거리는 버드나무
가지를 내다보면서 속으로 중얼거렸다.
내란 혐의가 그에게 씌워진 것은 단순하게
그를 제거하려는 것만이 아니었다.
김대중에 대한 체포와 구속은 정국을
얼어붙게 만드는 부수적인 효과도 있었다.
윤 사장에게서 전화가 걸려온 것은
한경호가 밖의 버드나무 가지를 내다보며
묵연히 생각에 잠겨 있을 때였다.
"한 부장인가?"
"예?"
"나 윤일세. "
전화 속의 목소리는 신분을 위장하기
위해 사용하는 윤 사장이었다.
"아,사장님... "
한 부장은 한경호의 위장 이름이었다.
"자네 오늘부터 남산을 왔다갔다
해야겠어. "
"남산을요?"
"자네가 남산쪽 놈들의 취조를
맡아야겠어. 이 일은 시간을 끌면 안되니까
서둘러야 해... "
"예에. "
"어느 쪽 방향으로 취조를 해야 하는지는
자네가 잘 알고 있을 테니 이럴 때 능력을
발휘하게. 서울공작 팀의 아이디어 뱅크는
자네가 아닌가?"
윤 사장은 다짜고짜 한경호에게 남산에
구속되는 있는 시국사범들의 취조 명령을
내렸다. 한경호는 전화가 끝나자 잠시
골똘히 생각에 잠겼다. 서울 공작팀이라는
것은 5. 17 전국 계엄확대와 비상기구
설치를 계획하기 위해 만든 기구였다. 윤
사장이니 한 부장이니 하는 것은 각 자의
신분이 드러나지 않도록 하기 위해 각 자의
계급을 떼어버리고 부장과 과장 따위의
호칭을 하는 것에 지나지 않았다.
서울공작은 곧 K공작으로 바꾸어 전두환
사령관을 대통령 만들기에 총력을 기울일
작정이었다.
한경호는 곧 남산으로 떠날 준비를 했다.
시국사범을 취조한 일은 한번도 없었으나
어려우리라고 생각되지는 않았다. 게다가
전두환 보안사령관이 중앙정보부장을
겸직하고 있었기 때문에 전출이라고 볼
수도 없는 것이었다. 한경호는 보안사
대령들의 업무를 돕기 위해 지난 4월부터
남산에 출입하여 낯이 설지도 않았다.
"남산?"
보안사의 서교동 분실장은 한경호의
보고를 받자 얼굴을 잔뜩 찌푸렸다. 그런
중대한 일을 자신에게 맡기지 않고
한경호에게 맡긴데 대한 불만이 가득한
표정이었다.
"정보부 말이로군. 자네가 취조를
담당한다니 잘 되었네. 이 왕 남산으로
가는 거라면 철저하게 취조를 하도록 하게.
취조를 잘해야 국민들이 우리의 애국충정을
납득하네. 그렇게 알고 곧 바로 출발해...
"
 "알겠습니다. "
한경호는 혼쾌하게 대답했다. 이미
자신은 보안사의 일에 깊숙이 개입되어
있었다. 단순히 보안사의 업무를 돕는
문관이 아니라 그들과 함께 계획을
수행하는 전략가로 활동하고 있었다.
이제는 벗어날래야 벗어날 수도 없으려니와
문관으로서는 상상할 수도 없는 권력이
그의 수중에 들어와 있었다.
(정치권은 모조리 도태되고 새로운
인물들이 권력의 핵심에 서게 될 거야... )
그는 앞으로 2,3년 후의 일을 머릿속에서
짐작하며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그는
전두환 보안사령관이 예편하는 것과 동시에
보안사를 나올 생각이었다. 보안사 대령
그룹은 권력을 인수하는대로 새로운 정당을
창당하기 위해 준비에 착수할 것이었다.
지금은 권력을 인수하는 작업에 정신이
없지만 집권하게 되면 권력 기반을
튼튼하게 받쳐줄 정당이 필요하게 될
것이고 구 정치인을 몰아낸 탓에 인물난을
겪게 될 것이었다. 물론 다수의 구정치인이
구제되고 신군부와 관료들이 어느 정도
참여하겠지만 보안사쪽으로서는 충성심이
변함없는 요원들을 다수 정당에 참여시킬
것이 분명했다.
그것은 5. 16이 일어났을 때도 겪은
일이었다.
그는 보안사의 문관으로 평생을 보내고
싶지는 않았다. 문관이라는 것은 남자의
직업으로서는 그다지 바람직한 것이
아니었다. 직업군인으로서 평생을
보내겠다는 생각을 했기 때문에 10년 남짓
하사관 생활을 했고,본의 아니게 불미한
퓽막명예제대를 한 뒤에 문관이
되었을 뿐이었다.
한경호는 천천히 사무실에서 나와 찢차에
올라탔다. 거리는 이미 봄이 완연했다.

5

강한섭은 호텔을 나오자 전남대학교
쪽으로 느릿느릿 걸었다. 5월18일
아침이었다. 전국으로 비상계엄이
확대되었으나 광주는 조용했다. 지난 밤에
광주 지역의 재야 인사들과 학생들이
대부분 검거되거나 도피한 탓인지 아침
10시 학교 앞 집결이라는 행동지침이
무색하게 거리가 한산했다.
신문은 아침부터 비상계엄 전국확대와
정치인들 대량 구속,계엄 포고령에 의한 각
대학의 휴교령을 대서특필하고 있었다.
방송과 신문이 연이어 뉴스 속보를 터뜨린
탓인지 시민들은 어리둥절한 표정이었다.
강한섭은 집에 전화를 걸어 아내와
통화를 했다. 아내는 아침에 일어나
고려대학교까지 조깅을 했는데도 거리가
비교적 한산한 편이라고 강한섭에게
말했다. 다만 고려대 앞에 육중한 탱크가
서 있고 무장을 한 군인들이 버티고 있어서
기분이 좋지 않았다고 말했다.
(시민들은 조용하군... )
강한섭은 아내와 전화를 끊은 뒤
신문사와 통화를 했다. 신문사에 광주는
조용하니 올라가도 좋으냐고 물었으나
별도의 지시가 있을 때까지 계속 광주에
남아 있으라고 하였다.
(이거 완전히 광주에서 세월을 보내게
6생겼군... )
강한섭은 별다른 일이 없자 전남지사에
들렸다가 무등산 구경을 하기로 했다.
어차피 광주는 한적하고 조용하기만 했던
것이다. 그러나 지사에 들리자 상황이
돌변해 있었다. 지사에 근무하는 지방
기자들은 얼굴이 벌겋게 상기되어
이광일() 지사장과 취재 문제를
협의하고 있었다. 지난 밤에 광주에
공수여단이 투입되어 학생들을 마구
폭행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지사장님,어떻게 된 일입니까?"
지사장은 50대의 뚱뚱한 사내였다. 광주
토박이로 양조장을 하면서 지사까지
운영하고 있었다. 그러나 양조장보다는
신문사 지사 일에 더 큰 매력을 느끼고
있었다.
 "공수여단이 투입되었습니다. "
"언제요?"
"어젯밤이요. 전남대에서 공부하는
대학생들을 마구 폭행했답니다. "
이광일 지사장의 말에 의하면 광주에는
5월17일 자정을 전후하여 7공수여단
33대대가 투입되었다고 하였다. 그들은
2군사령부로부터 전남대와 광주교대를
점령하라는 작전 지시를 받을 때 교내에
기숙사에 있는 학생은 귀가 조치하고 시위
주모자는 전원 체포하라는 명령을 받았으나
이 명령을 완전히 무시했다. 그들은 교내에
진주하자 마자 도서관에서 공부하는
학생들까지 모조리 체포하고 군화발로
짓밟으며 진압봉을 휘둘러 초주검을
만들었다.
학생들은 피투성이가 되어 나뒹굴었으나
공수부대원들은 학생들에게 팬티만 남기고
옷을 모두 벗게 한 후 복도에 밤새도록
꿇어앉아 있게 했다.
비참한 밤이었다. 그러나 광주의 비극은
이제 시작에 지나지 않았다.
계엄 포고령에 의해 각 대학교는
휴교령이 내렸으나 도서관에 들어가려는
학생들이 아침 7시부터 하나 둘 나타났다.
그러나 이들은 정문에 도착하자 정문에서
입초를 서고 있던 공수부대원들에게 붙잡혀
이유도 없이 구타를 당했다. 일부는
가까스로 공수부대의 발길질을 피해
달아나기도 했다. 그것이 어젯밤부터
아침까지 전남대에서 일어난 사건이었다.
"학생들이 많이 다쳤나요?"
"초주검이 되도록 맞았다니까 심각한 것
같습니다. "
"그럼 취재를 해야겠군요. "
"10시에 학생들이 전남대 앞으로
모이니까 전남대로 가죠. "
이광일 지사장의 제안에 의해 강한섭은
지방 기자들을 따라 전남대로 달려갔다.
전남대 앞에는 벌써 학교 앞으로
집결하라는 학생 지도부의 행동지침을
따르는 학생들이 속속 모여들고 있었다.
"부대장을 만나고 싶소. "
강한섭은 전남대 정문으로 가서 입초를
서고 있는 병사들에게 말했다.
"무슨 일입니까?"
완전무장을 한 병사가 날카로운 눈빛으로
강한섭을 훑었다.
"신문사에서 나왔소. "
강한섭은 당당하게 말했다.
"잠시 기다리십시오. "
병사가 머뭇거리다가 정문 경비실에
들어가서 전화를 걸었다.
"나오신답니다. "
이내 병사가 정문 경비실에서 나와서
강한섭에게 말했다. 강한섭은 고개를
끄덕거렸다.
정문 앞에는 학생들이 점점 불어나고
있었다. 그들은 어느덧 2백여 명이나 되고
있었다. 그리고 그들은 누가 지시하지도
않았는데 데모 대오를 갖추고 구호를
외치기 시작했다.
"비상계엄 해제하라!"
"전두환은 물러가라!"
"공수부대 물러가라!"
33공수 대대장 권승만() 중령이
찢차를 타고 나온 것은 그 때였다.
"무슨 일입니까?"
권 중령은 검은 색의 선글라스를 쓰고
있었다.
"서울에서 내려온 특별취재반입니다. "
"신문사요?"
"그렇습니다. "
"지금은 계엄하이니 취재에 응할 수
없소. "
"어제 도서관에서 공부하는 학생들이
구속되고 구타를 당했다고 들었습니다.
사실입니까?"
"그런 일없소!"
권 중령이 강한섭을 아래 위로 훑어보며
내뱉았다.
"기자 양반,그만 돌아가시오!앞으로 어떤
일이 일어나더라도 취재를 할 수 없을 뿐
아니라 불의의 사고가 생겨도 그것은 당신
책임이라는 것을 명심하시오. "
" 권 중령의 말은 단호했다.
강한섭은 온전히 취재를 할 수 없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어 그 자리를 물러섰다.
학생들의 구호는 더욱 커지고 있었다.
33공수 대대장 권 중령은 정문 병력을
증강한 후 진압 대형을 갖추게 했다.
학생들은 공수부대가 진압대형을 취하자
돌멩이를 집어던지며 더욱 크게 구호를
외쳤다.
"비상계엄 해제하라!"
그러나 공수부대는 구경만 하고 있지
않았다.
"돌격하라!"
33공수 대대장 권승만 중령이 공격
명령을 내리자 공수부대 병력은 요란한
함성을 지르며 학생들을 향해 달려갔다.
학생들은 일제히 달아났으나 걸음이 빠르지
못한 학생들은 공수부대 병사들에게 붙잡혀
군화발로 짓밟히고 진압봉으로 얻어맞아
피투성이가 되어 뒹굴었다.
"아니 저럴 수가... !"
지방 기자들은 공수부대가 의외로 잔인한
방법으로 학생들을 진압하자 어이가 없는
표정이었다. 그러나 공수부대의 위세에
전남대 앞의 시위는 간단하게 진압이
되었다. 공수부대가 전남대 정문 앞에
나뒹구는 학생들을 잡아끌고 학교 안으로
들어가자 전남대 앞에는 적막감만 감돌고
있었다.
그러나 공수부대의 잔인한 진압은
학생들의 분노를 촉발시켰다. 학생들은
도청 앞으로 집결하여 시위를 계속했다.
다행히 공수부대는 도청까지 진출하지는
않았으나 경찰이 최루탄까지 쏘면서
학생들을 해산시켰다. 학생들은 최루탄
가스를 피하여 시내 곳곳에서 산발적인
시위를 벌였다.
강한섭은 도청 앞에서 취재를 계속했다.
처음에 전남대 앞에서 취재를 하다가
공수부대원들이 학생들을 진압봉으로 마구
후려치는 것을 보고 군인들 가까이 접근할
수가 없었다.
학생들도 살벌하게 진압을 하는 군인들을
피해 도청 앞으로 몰려들고 있었다.
"전두환 물러가라!"
"비상계엄 해제하라!"
"김대중을 석방하라!"
학생들의 구호엔 김대중을 석방하라는
구호가 하나 더 추가되었다. 점심 때
신문사에 기사 내용을 타전하고 서울
소식을 물었으나 서울은 오히려 조용하다고
말했다. 오후에도 학생들의 산발적인
시위는 계속되었다. 그러나 경찰이
강력하게 대응함으로써 학생들의 시위는
위축되었다. 학생들의 시위 지도부는
대부분 검거되고 시위 학생들은 도주하기에
바뻤다.
학생들이 가장 많이 모여 시위를 한 곳은
광주 한일은행 앞이었다. 12시30분경
학생들 950여 명이 한일은행 앞에 모여
계엄군 물러가라는 구호를 외치며 시위를
벌였으나 경찰이 최루탄을 쏘며 진압을
하자 분산하여 학생회관,카톨릭센타 앞으로
이동하면서 시위를 계속했다. 그러나
주력이 와해되어 2백 명,3백 명 단위로
시위를 계속하다가 흩어지게 되었다.
학생들은 12시45분 경 산수동 파출소에
돌을 던져 유리창 20여 장을 깨고 달아난
뒤 2시15분 경 자진 해산했다. 일부는
10,20 명 단위로 시내를 배회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 이후엔 시위가 더 이상
일어나지는 않았다. 5월18일은
토요일이었고 시민들이나 학생들은 5.
17비상계엄 전국 확대 이후 사태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관망할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공수부대의 움직임은 심상치
않았다. 강한섭은 취재를 이유로 거리를
배회하는 것이 위험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으나 현장에서 직접 취재를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저럴 수가!)
강한섭이 공수부대의 잔인한 진압을 또
다시 목격한 것은 오후 4시
금남로에서였다. 강한섭이 광남로와
금남로가 교차되는 금남로 5가에 이르렀을
때 갑자기 공수부대 병력이 나타나 도열해
섰다. 그들은 시민들에게 빨리 집으로
돌아가라는 경고 방송을 하고 1분도 못되어
강력한 진압을 하기 시작했다.
"돌격!"
지휘관의 명령이 떨어지자
공수부대원들은 M16에 대검을 꽂고
시민들을 향해 돌진했다. 학생들은 몸이
빨라 공수부대가 돌진하자 재빨리
달아났으나 시민들은 구경을 하다가
공수부대의 무차별 습격을 받았다.
공수부대는 시민들을 마구 구타하고
짓밟은 뒤 개 끌듯이 끌고 가서 군용추럭에
실었다.
"공수부대다!"
"피해라!"
강한섭은 공수부대가 돌진하자 학생들을
따라 동아일보 광주지사로 후닥닥 뛰어
들어갔다. 그러나 7공수는 동아일보
지사까지 뛰어들어와 학생들을 무자비하게
구타하고 끌고 갔다.
"아니 이거 왜 이래요?"
"여기는 신문사요!신문사에까지 들어와서
이러는 법이 어디 있소?당신 상관에게
항의하겠소!"
"뭐야?"
"뭐 이따위 새끼가 있어?신문사면 다야?"
갑자기 뛰어든 공수부대원들에게 몇몇
신문사 직원들이 항의를 했으나 오히려
구타를 당한 뒤 모조리 끌려갔다. 강한섭은
카메라를 숨긴 채 공수부대원들과 눈을
마주치지 않았다. 공수부대원들의 눈에
조금만 건방지게 보여도 구타를 당하고
끌려가는 상황이었다.
 "아니 저게 우리 나라 군인야?"
"우리가 빨갱이야 뭐야?"
"저 새끼들 미친 거 아니야?어떻게
시민들을 이렇게 무자비하게 폭행할 수
있어?"
"본사에 연락해!광주 사태를 1면 톱으로
보도하라고 해!"
동아일보 기자들은 공수부대원들이
물러가자 책상을 치며 울분을 터뜨렸다.
강한섭은 슬그머니 동아일보 지사를
나왔다. 동아일보사가 타 신문사이기도
했지만 광주에서의 일을 취재수첩에
기록해야 했다. 서울의 본사로 기사를
타전해도 계엄사의 검열 때문에 제대로 된
기사가 보도되지 않고 있었으나 훗날을
위해서라도 일단 기록해 두어야 했다.
"저 놈들이 추럭 위에서도 구타를 해요.

강한섭이 신문사를 나오자 한 중년
여자가 발을 동동 구르고있었다. 강한섭이
중년여자가 손으로 가르키는 곳을 쳐다보자
서석병원 앞에 정차해 있는 추럭 위에서
공수부대원들이 부상 당한 시민들을 마구
구타하고 있었다.
"여자를 희롱해요!"
강한섭은 입술을 깨물었다 추럭 위에서
젊은 여자가 옷이 찢긴 채 희롱을 당하고
있었다.
강한섭은 카메라를 꺼내 그 장면을
찍었다. 그리고 자신이 목격하는 장면을
세세하게 기록하기 시작했다.
광주는 5월18일부터 처참한 상황으로
돌변해 있었다.

5월18일 토요일
동아일보 광주지사 계엄군에게 습격 당함
광주일고 옆 금남로에서 무릎을 꿇고
비는 학생을 군화발로 짓밟고 진압봉으로
구타.
광주일고 담밑에서 지나가는 젊은 여자를
잡아 머리채를 휘둘러 곤두박질을 치게
하고 군화발로 짓밟음. 여자는 옷이 찢기는
수모를 당함.
칠성당구장으로 피신하는 대학생들을
추격하여 기물을 부수고 항의하는 시민들을
구타.
중앙국민학교 후문 땀 쪽에서 여학생 수
명을 7공수가 상의를 벗기고 구타함.
노인이 말리자 노인까지 구타함.

공수부대원들은 이성을 상실한 듯
첫단순하게 진압하는 것이 아니라
타격을 하고 있었다. 5월18일 밤까지
강한섭이 계엄군을 피해 가며 취재수첩에
기록한 내용은 5월18일부터 공수부대원들이
노골적으로 시민들을 타격했다는 사실을
여실히 입증하고 있었다.
그러나 강한섭이 목격한 것은 빙산의
일각에 지나지 않았다. 32세의 목공
김영철은 저녁 8시 버스가 다니지 않아
도보로 귀가중 MBC 앞에 이르러
공수부대원들에게 무차별 구타를 당했고
통일당 상무위원인 39세의 김태랑은 금남로
5가에서 시위 도중 계엄군에게 무차별
구타당하고 연행되었다가 통일당 당원증이
발견되어 잔혹한 고문을 당하게 되었다.
그러나 그 후유증으로 얼마 후에 사망했다.
강한섭도 숙소인 대지호텔로 돌아오다가
몰매를 맞았다.
"뭐야?"
"왜 도망가?"
대지호텔 모퉁이를 돌 때 갑자가 나타난
공수부대는 다짜고짜 강한섭에게
진압봉부터 휘둘렀다.
"억!"
공수부대의 진압봉에 어깨를 맞은
강한섭은 어깨를 움켜쥐며 비틀거렸다.
"너두 돌멩이 던지고 시위했지?"
"이 새끼 맛좀 보여주어야 돼!"
"통행금지인데 왜 돌아다녀?"
"불순분자야!"
공수부대는 진압봉을 계속 휘둘러댔다.
강한섭은 어구구 하는 비명을 지르며
보도블록 위에 뒹굴었다. 그러자
공수부대가 군화발로 강한섭을 마구

"옷 벗겨서 끌고 가!"
지휘관이 공수부대 병사들에게 소리를
질렀다.
"야 이 새끼야 벗어!"
"벗어!"
공수부대가 대검이 꽂힌 M16으로
강한섭을 위협했다.
"나,나는 기자요. "
강한섭은 신음처럼 내뱉았다. 이대로
끌려갔다가는 무슨 봉변을 당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자 소름이 오싹 끼쳤다.
"뭐야?"
"기자랍니다!"
"기자 놈들이 더 악질이야!"
"나는 전우신문 기자란 말이오!"
강한섭은 악을 썼다.

전우신문()은 군인 신문이므로
공수부대도 호감을 갖고 있으리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전우신문이라고?"
"그렇소!"
"전우신문 기자가 왜 여기 와 있어?"
"당신들 활동을 취재하라는 보안사령관의
지시요!"
"이런 데서 얼씬거리지마!전우신문
기자라도 취재를 보장 못해!"
지휘관이 침을 칵 뱉았다. 그러자
공수부대 병사들이 지휘관을 멀뚱히
쳐다보았다. 어떻게 하느냐는 표정이었다.
"앞으로는 조심해!"
지휘관이 강한섭에게 거칠게 내뱉고
병사들에게 눈짓을 하고 금남로 쪽으로
바쁘게 걸어갔다. 그러자 병사들이
,지휘관을 따라 우르르 몰려갔다.
강한섭은 그때서야 가까스로 몸을
추스르고 일어났다. 공수부대 병사들에게
얻어맞은 온 몸뚱이가 쑤시고 아팠다.
(개새끼들!)
강한섭은 이를 갈았다. 갑자기 눈물이 핑
돌았다.
광주 시민과 학생들이 5월19일에 더욱
격렬한 시위를 하게 된 것은 18일의 과잉
진압과 5. 17 비상계엄 전국 확대 이후
김대중 민추협 고문이 계엄사에
구속되었다는 보도 때문이었다. 특히
시민들 면전에서 대학생들을 군화발로
짓밟고 진압봉으로 구타한 행위는 시민들을
공포에 질리게 하기도 했지만 시민들의
가슴 속에 분노의 불길을 지피기에
충분했다.
 광주 시내의 MBC와 KBS,그리고 신문이
광주에서 일어나고 있는 무자비한 진압을
한 줄도 보도하지 않았기 때문에 시민들은
입에서 입으로 소식을 전하며 분노로 몸을
떨었다.
5월19일 오전 10시 금남로에는 2,3천
명의 시민과 학생들이 집결했다. 경찰과
공수부대는 최루탄을 쏘며 해산을
시도했다. 학생과 시민들은 광주은행과
관광 호텔 앞을 거점으로 삼아 격렬하게
투석전을 전개했다.
이때 11공수 여단이 새로 투입되었다.
이들은 7공수 여단의 35대대까지 배속 받아
33대대의 임무를 인계 받아 조선대에서
출동 명령을 기다리고 있었다. 이들은 장교
108명,사병1038명의 강력한 진압부대였다.
61대대는 시내의 주요 시위 거점을
점령하고 있었고 62,63대대는 차량에
탑승하여 시내를 질주하며 공포 분위기를
조성하다가 금남로와 충장로 부근에서
시위대를 포위 압축해 들어갔다. 그들은
M16을 어깨에 비껴 메고 진압봉을 움켜쥐고
일제히 돌격했다.
시위대는 공수부대의 강력한 타격을 당할
수가 없어 재빨리 골목으로 달아나거나
주변의 상가로 뛰어 들어가 셔터를 내렸다.
"학생들에게 알린다. 숨은 사람은 모두
자수하기 바란다. 자수하지 않으면 강력한
타격작전을 전개할 것이다!"
공수부대 장교가 메가폰으로 자수 방송을
실시했다. 그러나 아무도 자수하려고 하지
않았다. 공수부대는 이미 달아나지 못하고
잡힌 시민들과 학생들을 무차별 폭행하고
있었다.
"숨은 사람은 자수하라!"
공수부대 장교의 방송이 끝나자
공수부대원들이 일제히 주위 상가로
달려들어 상가의 셔터를 부수고 난입하여
타격전을 전개했다. 그들의 진압봉은
박달나무로 되어 있어서 한 대만 맞아도
치명적인 부상을 입는 것이었다. 상가의
쑈윈도우와 진열장들이 박살나고 학생들과
시위를 하던 시민들이 무수히 폭행을
당했다.
"아구!"
"으악!"
거리는 학생과 시민들의 비명소리로
아수라장이 되었다.
반항을 하면 더욱 심한 구타를 당했다.
어떤 시민은 대검으로 허벅지를 찔리기도
했다. 연행 도중에 달아나면 가정집까지
추격하여 진압봉을 머리를 후려쳐서
쓰러트린 뒤 연행했다.
그들은 군인 추럭으로 연행되었다.
추럭엔 이미 수많은 시민과 학생들이
연행되어 있었고 공수부대원들이 걸핏하면
휘두르는 진압봉에 맞아 모두 피투성이가
되어 있었다.
광주는 무법지대가 되어 가고 있었다.
미도장이라는 작은 호텔도 공수부대의
잔혹한 타격의 대상이 되었다. 공수부대는
금남로에서 하차하자 그 일대
다방,당구장,여관 등을 수색하게 되었다.
미도장에는 7명의 공수부대가 들어갔다.
그들이 미도장 앞에 이르자 철문이 닫혀
있었다. 공수부대는 철문을 두드렸으나
아무도 문을 열어 주지 않았다. 그들은
담을 넘어 들어가 문을 열었다.
호텔 복도에는 4명의 종업원들이 하얗게
질린 얼굴로 서 있었다. 그들은 모두 검은
바지에 하얀 와이셔츠,그리고 나비
넥타이를 깜끔하게 매고 있었다.
"왜 문을 안 열어?"
"우리 호텔에는 데모하는 사람들이
아무도 없습니다. "
"이런 개새끼들!문을 두드리면 열어야
할거 아니야?"
"악!"
공수부대원들은 문을 안 열었다는 이유로
호텔 종업원들을 마구 구타했다. 4명의
종업원들이 순식간에 피투성이가 되어
나뒹굴었다.
"일어서!"
"아구구!"
"일어서!"
"악!"
공수부대원들은 호텔 종업원들에게
군인들에게 하듯이 기합을 주었다.
"앉아!"
"일어서!"
"앉아!"
"일어서!"
종업원들은 피투성이가 되었으면서도
후닥닥 앉았다가 일어나는 것을
되풀이했다. 그때 지역대장인 소령이
들어왔다.
"이 새끼들은 뭐야?"
"여관 종업원입니다!"
"이런 개새끼들!앉아!"
종업원들은 일제히 무릎을 꿇고 앉았다.
그러자 소령이 종업원들의 얼굴을 하나하나
군화발로 걷어찼다. 종업원들은 얼굴이
피투성이가 되었으나 다시 무릎 꿇는
자세를 취했다.
공수부대원들은 호텔을 샅샅이 수색했다.
여관에는 20여 명의 사람들이 투숙해
있었다. 공수부대는 그중 2,30대의 젊은
사람만 밖으로 끌어냈다.
거기엔 신혼부부도 섞여 있었다. 초야를
치른 신부가 울면서 사정을 했으나 소용이
없었다.
시민들은 일차로 무수히 구타를 당했다.
공수부대원들이 연행자들을 구타하는 것은
도망을 하지 못하게 하는 것도 있지만 기를
죽여 꼼짝을 못하게 하기 위해서였다.
다음엔 팬티만 남기고 옷을 벗기는
것이었다. 그리고는 피해자의 허리띠로
묶은 뒤 묶인 손으로 자신의 옷을 들고
있게 하였다. 때로는 대로에서 팬티
꼭막기합을 주기 일쑤였다.
조금이라도 행동이 굼뜨면 군화발과
진압봉이 머리 위로 쏟아지기 때문에
체포된 시민과 학생들은 얼이 빠진 채
지시대로 해야 했다.
"뒤로 취침!"
"앞으로 취침!"
"좌로 굴러!"
"우로 굴러!"
기합이 끝나면 추럭에 강제로 실려졌다.
그러나 차량 위에서도 진압봉은 시민들의
머리와 어깨를 향하여 쉴새없이 쏟아졌다.
"고개 숙여!"
"고개 숙이란 말이야 이 새끼들아!"
"야 이 새끼야 고개 숙여!"
"악!"
공수부대의 가혹한 타격은 추럭 위에서
뿐 아니라 조선대학교 운동장으로 옮긴
뒤에도 계속되었다. 진압에 참가하지 않고
운동장에 있던 경계 대비병들과
취사병,행정병까지 진압봉을 들고
모여들었다. 마치 학생들이나 시민들을
마구 구타하지 않으면 대열에서
도태되기라도 하듯이 그들은 다투어 구타에
참여했다.
19일의 시위는 오전에 이어 오후에도
치열하게 전개되었다. 진압을 맡은
공수부대는 정오가 조금 지나자 점심
식사를 위해 금남로에서 일시적으로
철수했다. 금남로 일대엔 경찰 병력만 남게
되었다. 그러자 공수부대의 무자비한
진압을 피해 흩어졌던 시민들과 학생들은
일시에 금남로로 쏟아져 나왔다. 그들은
핏자국이 금남로 여기저기에 남아 있는
것을 보고 증오심이 불타올라 경찰에 돌을
던지고 MBC와 KBS에 방화했다.
시민들은 카톨릭센타 차고에서 전일방송
취재차량 2대를 끌어내어 불을 지른 뒤
경찰의 바리케트로 밀어붙였다. 차량은
경찰의 바리케트에 부딪치자 요란한 폭음을
일으키면서 폭발했다. 이어서 근처의
건축공사장에서 기름통을 갖다가 불을 붙인
후 경찰에게 굴려 보냈다. 기름통도 경찰
바리케트에 부딪치자 요란하게 폭발했다.
"와!"
시민들은 환호성을 질렀다.
시민들은 이어서 대형 화분과 공중전화
박스,교통철책을 뜯어다가 바리케트를 쌓고
경찰과 대치했다. 뒤에서는 여자들이
보도블록을 깨서 돌멩이를 만들었다.
지하도 공사를 하던 공사장의 인부들은
각목과 철근,쇠파이프 등을 가지고 나왔다.
시위는 이제 본격적인 항쟁으로 이어지고
있었다.
이때 점심식사를 마친 11공수 여단이
장갑차를 앞세우고 금남로로 짓쳐
들어왔다. 공수부대의 선두는 전쟁터에나
볼 수 있는 장갑차가 맡고 있었다.
"장갑차다!"
"장갑차가 쳐들어온다!"
"저 놈들이 우리를 장갑차로 깔아뭉개려
한다!"
시민들과 학생들은 벌떼처럼 흩어져
달아났다. 그러나 우왕좌왕하던 시민들은
공수부대의 집중적인 타격을 받아 사상자가
발생하기 시작했다. 11여단 61대대,62대대.
63대대는 유동삼 거리에서
도청쪽으로,7여단 35대대는 도청에서
금남로 방면으로 포위하여 시위를
진압했다. 오후 3시40분 경에는 7여단 33대
30분의 250명도 시내로 진출했다. 광주
시내는 이제 무적을 자랑하는 공수부대 5개
대대가 투입된 것이다.
이들은 공비를 토벌하듯이 시위대를
진압하기 시작했다.
시민들은 궁지에 몰렸으나 진압을 피해
다니면서 눈물겨운 시위를 계속했다. 오후
3시27분 경에는 장동 MBC 앞에 3천 명의
시위 군중이 몰렸고 충장로 앞에도 수 천
명의 시위대가 집결했다. 4시40분에는
대인동 공용 터미날 앞으로 시민 학생 1천
여 명이 모여 격렬한 시위를 했다.
"전두환은 물러가라!"
"공수부대 돌아가라!"
시위대의 구호는 절규처럼 처절했다.
61대대는 장갑차를 시위대를 향해
돌진시켰으나 시위대는 가드레일과
공중전화 박스를 뜯어 대항했다.
공수부대는 시위대의 시위가 죽음을
불사할 정도로 격렬했기 때문에 저녁
7시30분 경에야 겨우 이곳의 시위를 진압할
수 있을 정도였다.
공용 터미날 지하도로 달아난 시민들은
공수부대로부터 집중적인 타격을 받았다.
시위대는 어둠컴컴한 지하도 안에서
공수부대원들의 진압봉에 맞아 죽고 대검에
찔려 죽었다.
터미날 사무실에서도 공수부대원들은
닥치는대로 진압봉을 휘두르고 안내양들을
어디론가 끌고 갔다.
서서히 밤이 왔다. 격렬했던 광주도
시민들의 흐느낌 속에서 어둠이 내렸다.
통행금지가 9시로 선포되어 있었기 때문에
거리는 인적이 끊어져 갔고 질주하는
군인추럭 소리와 군화소리,장갑차의
엔진소리가 공포스럽게 들려왔다.

6

강한섭은 그날 밤을 어떻게 보냈는지 알
길이 없었다. 서울로 전화를 했으나 전화는
불통이었고 외곽은 군인들에 의해 장악되어
있었다. 외곽으로 빠져나가 서울로 통화를
하고 싶었으나 군인들에게 걸리면 카메라와
취재수첩을 뺏기는 것은 물론 자신이
어떻게 될지도 알 수 없었다. 게다가
광주의 처절한 상황이 강한섭을 빠져나가지
못하게 했다.
(죽어도 여기서 죽어야 해... )
 광주는 이미 공포의 도시로 변해 있었다.
통행금지가 실시된 9시에 나온 방송
뉴스는 서울 소식을 보도하고 있었다.
그러나 광주사태에 대한 보도는 일절
없었다. 각 방송은 계엄사의 검열 때문에
광주에서 일어난 대규모 시위와 잔인한
진압은 보도하지 못하고 계엄사의 포고령만
계속 방송하고 있었다. 그것은 신문도
마찬가지였다.
(계엄사가 언론을 철저하게 통제하고
있군... )
강한섭은 참담한 기분을 느꼈다.
강한섭은 밤이 되자 호텔에서 떠나지
않았다. 통행금지 시간에는 거리에 나다닐
수가 없었다. 공수부대는 살벌한 모습으로
거리와 골목을 누비며 시위 학생들을
수색하고 있었다.
밤이 되자 빗발이 뿌리기 시작했다. 광주
시민들의 피와 눈물 같은 비였다.
강한섭은 9시가 조금 넘자 호텔 식당에서
저녁을 먹었다. 호텔 식당도 계엄군의
만행에 사람들이 분개하고 있었다. 어떤
사람은 자신이 목격한 일이라며 공수부대가
대검으로 사람들을 찌른 얘기를 했다.
"통행금지가 시작되기 바로 전이었어요.
내가 남광주쪽으로 가는데 갑자기 사람들이
도망가며 장갑차가 쫓아온다고 도망가라고
소리를 지르더군요. 내가 깜짝 놀라 뒤를
돌아다보니 정말 장갑차가 쫓아오고
있었어요. 그래서 골목으로 허겁지겁
달아났는데 거기서 또 공수를 만났어요.
그래서 나는 남의 집 담을 넘어
들어갔어요. 거기서 숨을 죽이고 있는데
사람들의 비명소리가 들려오는 거예요.
담장 위로 머리를 내밀자 공수부대 여섯
명이 어떤 아저씨와 젊은 아가씨를
대검으로 마구 찌르고 있었어요. "
"여자까지 대검으로 찔러요?"
"그 놈들 눈에는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
모양예요. "
호텔 식당에 있는 사람들은 모두 한숨을
토했다. 어떤 여자는 소리를 죽여 흐느껴
울기도 했다.
강한섭은 식사를 마치고 침실로 돌아와
침대에 누웠다. 서울로 전화를 하고
싶었으나 전화는 계속 불통이었다.
계엄군이 광주를 완전히 고립시킨
모양이었다. 다행히 방송보도를 면밀히
분석한 결과 서울에는 시위가 일어나지
않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서울에
시위가 일어나지 않았다면 일단 아내
은숙의 신변은 위험하지 않으리라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강한섭은 빗소리를 들으며 잠이 들었다.
하루종일 시위 현장을 쫓아다니며 취재를
했으나 보람도 없는 취재였다. 기자의
취재는 일단 신문에 보도되어야 그 빛을
발휘하는 것이다. 그러나 보도되지 않는
기사를 취재하는 것은 무망한 일이었다.
강한섭은 신문기자의 한계를 절실하게
느꼈다.
날이 밝았다. 5월20일이었다. 밤부터
내리기 시작한 비는 그때까지도 계속해서
내리고 있었다.
새벽 6시 전남 양조장 옆의 공터에서 한
노동자의 사체가 시민들에게 발견되었다.
그는 얼굴이 온통 짓이겨지고 전신이
피멍이 들어 죽어 있었다. 그의 죽음은
입에서 입을 통해 광주 시민들에게
알려졌다. 광주 시민들은 그 소식을 듣고
분노했다.
오전 10시가 되자 비가 그쳤다. 비가
그치자 그 소식을 들은 수많은 시민들이
대인시장 주변으로 몰려들었다.
시민들은 시민회관 로타리로 진출했다.
그들은 금남로로 진출하려 했으나 장갑차를
앞세운 공수부대의 저지선에 부딪쳐 더
이상 전진할 수가 없게 되었다. 다행스러운
것은 공수부대가 19일처럼 시위대를
필사적으로 추격하면서 진압하지는 않았다.
강한섭은 금남로의 카톨릭센타 앞으로
갔다. 10시20분 경이었다. 그 곳에는
공수부대가 시위대를 1차로 진압하여
체포당한 시민들이 혹독한 기합을 받고
있었다.
"저 놈들이 인간이야?"
"저 놈들은 누이도 없어?"
시민들은 공수부대가 체포한 시위
학생들과 시민들에게 기합을 주는 것을
보고 치를 떨었다. 체포된 시위대는 남녀
모두 30 명 정도 되었는데 팬티만 남기고
옷을 모두 벗기운 채 묶여 있었다.
"앞으로 취침!"
"뒤로 취침!"
"동작들 봐라!동작이 왜 이렇게 굼떠?"
공수부대는 체포된 시위대가 조금이라도
굼뜨게 움직이면 사정없이 군화발로 차고
진압봉으로 두들겨 팼다.
"엎드려 뻗쳐!"
"뻗쳐!"
그것은 여자들이라고 해도 예외가 되지
않았다. 시민들은 여자들이 팬티 차림으로
아스팔트 바닥을 뒹구는 것을 보고
분개하며 돌을 던졌다.
"나 한테 M16만 있었으면 저 놈들을
모조리 쏘았을 텐데... "
카톨릭 신부도 창으로 내려다보며 분노로
몸을 떨었다. 사람들은 처참한 모습에
눈물을 흘렸다.
오전 11시 무렵이 되자 고등학생들도
시내로 몰려 나왔다.
중앙여고,광주일고,대동고등학교 학생들은
휴교조치가 내려져 있는데도 불구하고
거리로 몰려 나왔다. 그들은 형님과 누님이
공수부대에게 매를 맞아 죽어 가는데도
집안에만 틀어박혀 있을 수 없다고 거리로
쏟아져 나와 구호를 외쳤다. 학생들뿐이
아니라 직장인들과 상인들도 거리로 몰려
나왔다. 직장인들은 출근을 하지 않거나
직장에서 일을 하다가 말고 나왔고
상인들은 물건을 팔다가 말고 쏟아져
나왔다. 시간이 흐를수록 시민들의 숫자는
더욱 불어났다. 어느덧 시민들의 숫자가
학생들을 압도하고 있었다.
강한섭은 꾸역꾸역 거리로 몰려나오는
광주 시민들을 보고 가슴이 벅차 왔다.
광주 시민들은 대하처럼 흐르고 있었다.
그것은 마치 거부할 수 없는 역사의 도도한
흐름을 보는 기분이었다.
공수부대는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시민들이 점점 불어나 이제는 공수부대가
시민들에게 포위된 꼴이 되고 말았다.
"공수부대 물러가라!"
"내 자식을 살려내라!"
"전두환은 물러가라!"
"김대중을 석방하라!"
 시민들의 구호와 함성은 노도처럼
거대했다. 그러나 12시30분이 되면서
새벽에 서울에 급파된 3공수 여단 5개
대대가 금남로에 투입되면서 사태는
바뀌었다. 약 3천 여 명의 공수부대는 또
다시 19일과 마찬가지로 강력한 타격으로
시위대를 진압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공수부대는 시민들을 완전히
진압할 수가 없었다. 시민들은 필사적으로
공수부대에게 저항했고 밀려났다가
밀려들어가는 일진일퇴를 거듭했다.
공수부대가 최루탄을 쏘고 장갑차를
앞세우고 돌진하면 시민들이 뿔뿔이
달아났으나 다른 시민들이 공수부대가
점거하고 있던 위치를 확보했다.
오후 4시가 되었을 때 금남로 일대에
집결한 시민들은 3만 여 명에 이르렀다.
시민들은 이제 무장을 하기 시작했다.
공수부대가 진압봉을 휘두르고 대검으로
인명을 살상하는 상황에서 맨 손으로 싸울
수는 없었다. 시민들은
각목,쇠파이프,돌,연탄집게,소주병,부엌칼
등으로 원시적인 무장을 했다.
시위대는 방송과 신문이 제 구실을
못하자 스스로 홍보를 하기 시작했다. 19일
오후에는 몇 가지 유인물이 만들어져
시내에 뿌려졌고 20일 오후에는
전옥주,차명숙 등 여자들이 엠프를 차에
싣고 다니며 광주 시민들의 궐기를
호소했다. 그들은 머리에 흰 띠를 두르고
목이 터져라 외쳤다.
택시운수 노동자들은 오후 3시경에
영업용 택시 50여 대를 끌고 광주 역 앞에
집결했다. 그들은 경적을 울려 동료들을
모으기로 했다. 그들은 차량으로 경적을
울려 시위도 하고 동료들도 불러 모았다.
오후 6시가 되자 약속 장소인
무등경기장에는 운수노동자들이 200여 대가
넘는 각종 차량을 끌고 집결했다.
공수부대는 운수노동자들이 차량시위를
한다는 정보를 입수하자 전일방송 앞에
바리케트를 쳤다. 공수부대가 수세로
돌아서는 순간이었다.
오후 7시가 되었다. 늦은 봄날의 해가
기울고 어둑하게 어둠이 내리기 시작했다.
운수노동자들의 대형버스와 대한통운
추럭을 앞세운 200여 대의 차량은 일제히
헤트라이트를 켜고 경적을 울리면서 도청을
향해 전진했다. 공수부대와 치열한
투석전을 벌이면서 시위를 하던 시민들은
일제히 환호성을 울리면서 차량 시위대를
에워싸고 행진을 하는가하면 차량에
올라타고 박수를 쳤다.
공수부대는 당황했다. 시위대가 차량을
앞세우며 전진해 오자 재빨리 옆으로
흩어져 최루탄을 발사했다. 시위대는
최루탄 때문에 주춤했다. 그러자
공수부대의 돌격조가 차량을 향해 일제히
돌진했다. 그들은 차량 안으로 뛰어들자
미친 듯이 진압봉을 휘두르고 대검으로
찔러댔다. 처절한 살륙전이 벌어지기
시작한 것이다.
시민들도 그대로 있지는 않았다.
시민들은 진압봉에 얻어맞고 대검에 찔려
비명을 지르면서도 공수부대에게 용감하게
저항했다. 그러나 고도의 훈련을 받은
공수부대에게 시민들이 승리할 수는
없었다. 시민들은 여기저기서 피투성이가
되어 나뒹굴며 처절한 비명을 질렀다.
이 충돌은 20분 남짓이나 계속되었다.
공수부대에 의해 시민들의 희생이 점점
늘어나자 시민들은 일단 물러났다. 그러나
시동이 걸린 채 서 있는 수많은 차량들
사이에는 처절한 육박전 뒤의 잔해가
어지럽게 널려 있었다. 어머니를 찾는 나이
어린 여학생,머리가 깨진 운전기사 차림의
30대 남자를 끌어안고 통곡을 하는 안내양
차림의 여자들,피투성이가 되어 실신해
있는 부상자들,앰블런스를 찾는 외침......
시위와 진압은 적을 향한 필사적인
공격처럼 진행되고 있었다.
7시30분이 되자 잠시 물러났던 시민들은
1만여 명의 대군중이 되어 노도처럼
밀어닥쳤다.
"공수부대 물러가라!"
 "연행학생 석방하라!"
"전두환은 물러가라!"
공수부대는 감히 시위대를 해산하지
못했다. 광주 신역에서도 시위대와
공수부대는 격렬하게 충돌했다. 광주에
새로 지은 신역은 공수부대가 병력과
보급품을 수령하는 중요한 요충지였기
때문에 공수부대는 필사적으로 시위대를
저지하려고 했다. 그렇기 때문에 희생자
수가 더욱 많이 늘어났다.
시위대는 차량을 앞세운 공격을
감행했다. 12대대는 최루탄을 쏘면서
저지선을 지킬 뿐 감히 타격하여 진압하는
작전은 펴지 못했다.
밤 11시 시위대의 파상공세가 강화되기
시작했을 때 M16 총성이 요란하게 울려
퍼졌다. 시민들은 흠칫하여 파상공세를

일순 사방이 기묘할 정도로 조용해졌다.
그 요란한 시위 소리와 함성이 정지되어
사람들의 숨소리가 들릴 정도로 조용해
졌던 것이다. 숨막힐 듯한 정적이었다.
강한섭은 등줄기로 찬바람이 흙고
지나가는 기분을 느꼈다.
"공포다!"
"공포니까 물러서지 마라!"
그때 누군가 외쳤다. 시위대는 비로소
정신을 차리고 대오를 정비했다.
"갑시다!"
"앞으로 나갑시다!"
시위대는 구호를 외치며 앞으로 전진하기
시작했다. 누군가 노래를 부르기도 했다.
그러자 시민들이 일제히 따라 불렀다.

동지의 시체를 넘고 넘어
앞으로 앞으로
동지들아 잘 있거라
우리는 전진한다.
총칼이 무서우랴
공수부대야 길 비켜라

그때 어둠 속에서 다시 요란한 총성이
울려 왔다. 강한섭은 가슴이 철렁하면서
소름이 쫙 끼쳤다.
시위대의 맨 앞줄이 분수처럼 선혈을
뿜으며 쓰러졌다. 공수부대가 마침내
군중들을 향해 발포를 한 순간이었다. 광주
신역에서의 발포는 3여단의 11,13
본부대대가 참여함으로써 더욱 확대되었다.
특히 본부대대는 부여단장까지 탑승한
상태에서 실탄 120발씩을 지급 받아 도보로
광주역으로 향하면서 아스팔트와 건물을
향해 마구 사격을 퍼부었다. 추럭 위에서는
M60이 이들을 엄호했다.
"후퇴하지 마라!후퇴하는 자는
사살한다!"
3여단 작전참모인 소령은 권총을 뽑아
들고 공수부대원들에게 소리를 질렀다.
병사들은 공포 분위기 속에서 계속 총을
쏘며 광주역으로 접근했다. 광주역에는
이미 공수부대 병사들이 일렬로 도열해서
시위대를 향해 M16을 난사하고 있었다.
분수대쪽에는 시민들이 탄 버스와 추럭이
돌진해오다 공수부대의 사격으로 분수대에
처박혔고 분수대 주위에는 20명 정도의
시민들이 총에 맞아 나뒹굴고 있었다.
공수부대의 발포는 곳곳에서 이루어졌다.
광주 세무서 앞에서도 공수부대는 발포를
시작하여 수많은 사상자를 냈고 조선대학교
부근에서도 시위대가 몰려오자 공수부대는
수류탄까지 던져서 이들을 저지했다.
그러는동안 5월20일 밤이 가고 5월21일
새벽이 왔다. 한밤중이었으나 광주는 대낮
같았다. 시민들은 밤새도록 시위를
벌이면서 시내의 파출소를 모두 불태웠다.
공수부대는 도청 한 곳만을 남기고
전남대와 조선대 등 시 외곽으로 철수했다.
"공수부대가 학살한 시체가 있다!"
동이 트기 시작하는 새벽 6시 경 광주
신역 앞에서 시체 두 구가 발견되었다.
시민들은 태극기를 덮은 시신을 손수레에
싣고 도청으로 향했다.
"살인마 전두환은 물러가라!"
"두환아,내 자식을 살려내라!"
수만 명의 시민들이 프랭카드를 들고
손수레의 뒤를 따랐다.
아침 8시가 되자 공수부대가 다시
카톨릭센타 앞으로 진출했다. 시위대는
공수부대와 대치하면서 연좌농성을 벌였다.
공수부대와 대결하기 위해서 아세아
자동차공장에서 완성된 장갑차와 버스가
시위대에게 투입되었다.
청년들은 차량을 이용하여 시위 군중들을
태우고 도심으로 향했다. 미처 차를 타지
못한 시민들은 자전거와 오토바이를 이용해
중심가로 달려갔고 걸어서 중심가로 향하는
시민들도 있었다.
청년들은 광주사태를 전남 각 지역에
알리기 위해 죽음을 무릅쓰고 광주를
탈출하기도 했다. 그러는동안 시민들은
금남로를 가득 메웠다.
"반란자 전두환을 죽여라!"
 "광주 시민의 피를 보상하라!"
"우리는 죽음으로 광주를 사수한다!"
오전 10시가 되었을 때는 금남로 일대에
10만 명이 넘는 시민들이 모였다. 시위
군중에는 노인에서부터 어린이까지 보였다.
머리에 흰 띠를 두르고 있는 여자들도 적지
않았다.
그러나 광주는 이미 3개 공수여단 10개
대대와 5월20일 밤에 급파된 20사단을 합쳐
2만 명이나 되는 병력이 있었다.
시민들은 공수부대를 힘으로
밀어붙이기로 결정했다. 공수부대 병력은
장갑차를 앞세우고 도청 앞에 도열해
있었다. 도청 광장에는 헬리콥터가 수 없이
이착륙을 하면서 중요한 서류를 실어
나르고 있었다.
시위대는 차량을 앞 대열로 배치했다.
그때 시위대의 장갑차 한 대가 갑자기
공수부대를 향해 돌진했다.
"가자!"
"공수부대를 몰아내자!"
시위 군중들이 와 하는 함성을 지르면서
뒤를 따랐다.
공수부대는 당황했다. 시위대가 장갑차를
가지고 돌진해 오자 공수부대는 화들짝
놀라 도청쪽으로 도주했다. 공수부대의
장갑차도 황급히 방향을 돌려 후진했다. 그
바람에 병사 2명이 장갑차의 캐터필러에
깔려 사망했다.
공수부대의 저지선이 무너지자 시위대의
차량과 장갑차,그리고 시민들이 함성을
지르며 달려갔다. 성난 파도와 같은
기세였다.
공수부대가 일제히 사격을 시작한 것은
12시 58분 경이었다. 광성여객 소속의
버스가 도청 광장에 접근했을 때 분수대
근처에 있던 병사들이 일제히 사격을
개시했다. 버스는 공수부대의 사격을 받아
운전기사가 즉사하여 전남 수협 도지부
건물에 처박혔다.
그때 애국가가 울리기 시작했다. 수협
건물에 처박힌 버스를 쳐다보던 시민들은
어리둥절했다. 그러나 공수부대는 애국가를
신호로 시민들을 향해 일제히 사격을
실시했다. 공수부대가 마침내 수많은
시민들을 향해 집단 발포를 한 것이다.
금남로는 순식간에 피바다를 이루었다.
공수부대의 일제 사격은 장교가 메가폰으로
사격중지 명령을 내릴 때까지 10분
동안이나 계속되었다.
시민들로 가득 찼던 거리는 죽은
시민들의 피와 부상자들의 신음소리로 가득
찼다. 부상자들을 구출하기 위해 몇몇
시민들이 거리로 달려나갔지만 그들은
저격병의 사격 목표가 되어 피를 뿌리며
죽어갔다.
비참한 모습이었다. 금남로 일대엔
형언할 수없는 적막감이 감돌고 있는
가운데 어디선가 젊은 여자의 애절한
흐느낌 소리가 들렸다. 총소리가 요란하게
들리자 재빨리 골목으로 숨었던 여학생들이
우는 소리였다.
"광주만세!광주시민 만세!"
그때 장갑차 한 대가 적막감이 감돌고
있는 금남로를 질주하며 장갑차 위에서
상의를 벗고 머리에 흰 띠를 두른 한
청년이 목이 터져라 외쳤다. 그는 태극기를
흔들며 도청쪽으로 달리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순식간의 일이었다.
청년을 향해 공수부대의 집중사격이
퍼부어졌고 청년은 힘없이 꼬꾸라졌다.
장갑차는 꺾어진 청년의 몸을 싣고 화순
방면으로 사라졌다.
"광주시민 만세!"
이때 한국은행 광주지점 앞에 5,6명의
청년들이 나타났다. 그들도 태극기를
흔들고 구호를 외치며 금남로를 달렸다.
"살인마 전두환을 죽여라!"
"공수부대 물러가라!"
"김대중을 석방하라!"
"비상계엄 해제하라!"
공수부대는 그들을 향해서도 일제히
사격을 퍼부었다. 그들이 피를 뿌리며 죽어
가자 또 다른 청년들이 피 묻은 태극기를
주워 들고 구호를 외쳤다.
 "광주 시민 다 죽여라!"
공수부대의 발포는 전남대 앞에서도
이루어졌다.
전남대 앞에는 오전 10시부터 수 만 명의
시민들과 공수부대가 공방전을 치르고
있었다. 오후 2시가 되자 전남대 앞에는
차량 시위대까지 집결했다. 정문쪽으로 4만
여 명,후문쪽에 1만여 명 등 시위대는
공수부대를 포위하고 압박했다.
공수부대는 차량 시위대를 향해 일제히
발포했다. 시위대는 공수부대가 발포하자
순식간에 흩어졌다. 그러나 미처 피하지
못한 차량 시위대에게 공수부대는 수류탄을
투척하여 부상자들을 모두 버스에서
끌어냈다.
3공수는 단순하게 발포만 한 것이
아니었다. 시민들이 흩어져 달아나자 인근
주택가까지 마구 침입하여 주민들을
살상했다. 임신 8개월이 된 스물 네살의
가정주부가 공수부대가 정조준하여 쏜 총에
머리를 맞아 죽은 것도 전남대 앞에서였다.
공수부대가 발포를 하자 시민들도 무장을
하기 시작했다. 시민들은 공수부대가 없는
파출소와 예비군 무기고에서 M1과
칼빈,실탄 등을 꺼내다가 무장했다. 광산
노동자들은 다이너마이트를 가져왔다.
광주는 이제 단순한 시위 현장이 아니었다.
무장한 시민들을 사람들은 스스로
시민군이라고 불렀다.
21일 오후 3시 M1 소총과 칼빈으로
무장한 시민군은 충장로 광주우체국에서
도청쪽으로 진격했다. 시민군의 뒤를 시민
2천여 명이 따르며 함성을 질렀다.
도청 앞의 공수부대는 바리케트를 치고
시위대가 접근하지 못하도록 계속 발포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시민들은 공수부대의
발포가 계속되어 광장에서 멀리 떨어져
숨어 있었다. 그러나 시민군이 나타나자
그들은 환호성을 지르며 박수를 쳤다.
시민군이 나타나자 공수부대는 당황했다.
총이 없을 때도 시민들의 필사적인 저항에
부딪쳐 공포에 질려 있던 공수부대는
시민들이 총으로 무장하고 나타나자 이
사실을 즉각 상부에 보고했다.
시민군은 공수부대를 향해 발포하기
시작했다. 재래식 무기가 시민들에게 계속
반입되어 무장한 시민군의 수효도 점점
늘어났다.
오후 4시가 되자 공수부대는 철수 명령을
받았다. 공수부대는 APC 장갑차로 도로를
왕복하며 캐리버50을 무차별 난사하여
시민군들을 후퇴시켰다.
4시 30분이 되자 공수부대 11여단 3개
대대와 7여단 35대대 병력은 도로 양편으로
무차별 사격을 하면서 조선대로 철수했다.
이로서 5월18일부터 광주에 투입되어
악명을 떨친 공수부대의 역할은 일단 막을
내리고 광주 시내는 수많은 희생을 치른
시민군들에게 장악되었다.

제14장 울 밑에 선 봉선화야

1

한경호는 서울대 복학생
김근석()을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5월21일이었다. 저 아래 광주에서는 마침내
김대중을 지지하는 폭도들이 폭력과 파괴를
일삼으며 궐기하여 공수부대까지
투입되었다고 하였다. 보안사로 보고되어
오는 내용을 살피면 군인들이 여럿 죽고
폭도들도 수 백 명이 죽은 모양이었다.
(이것들이 군인 알기를 우습게 아는군...
)
한경호는 무의식 속에서 담배를 피우며
그런 생각을 했다. 학생들의 시위가
`폭도들의 발악에 지나지 않는다고
생각되었다. 엄연히 계엄령이 선포되어
있고 포고령으로 집회와 시위를
금지시켰는데도 그것을 무시하고
폭력시위를 일으키는 김대중 지지자들에게
좀 더 강력한 진압을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학생들은 시국을 너무 안일하게 생각하고
있었다. 학생들이 이런 식으로 시위를
일으키면 호시탐탐 남침기회를 노리는
북한만 유리하게 되는 것이다. 전쟁이
일어나면 꽁무니가 빠져라 고 먼저 달아날
학생놈들이 민주주의니 어쩌니 하고 떠들어
보아야 배부른 소리일 뿐이다. 국민들이
언제 민주주의 찾은 적이 있는가...
한경호는 혼자서 그런 생각을 하였다.
게다가 군대는 상명하복의 집단이었다.
특히 일본식의,명령에 죽고 명령에 사는
군인정신만을 교육시킨 이 나라에서 군의
명령이 합당한지 아닌지 헤아릴 여유가
없었다.
5월21일 언론은 처음으로 광주에서
일어난 사태를 보도했다. 그러나 계엄사의
발표를 그대로 이용하여 발표했기 때문에
내용은 표피적이고 빈약했다.
이희성 계엄사령관은 담화문과 경고를
동시에 발표했다. 이희성 사령관은
담화문에서 광주사태가 발생하게 된 것은
상당수의 타지역 불순분자들이 악성
유언비어를 유포하여 계획적으로
지역감정을 부추기고 방화와 약탈을 일삼게
했다,특히 고정간첩이 광주에 잠입하여
활동하고 있는 바 이에 현혹되어 국가적
파탄을 자초하지 말고 생업에
.전념하라,하고 담화문에서조차 국민들에게
경고했다.
이날 신현확 국무총리가 물러나고
박충훈() 전 부총리가 새로
국무총리에 임명되었다.
"어때?이제 그만 자백하지?"
한경호가 멀뚱히 생각에 잠겨 있는 사이
김유택() 수사관이 김근석을
윽박질렀다. 김근석은 겁먹은 표정으로 김
수사관을 쳐다보았다. 지하실은
어둠침침하면서도 습기에 가득차 있었다.
처음엔 약간 서늘한 느낌까지 들었으나
이젠 면역이 되어 그다지 춥게 느껴지지
않았다.
세 평쯤 되는 방이었다. 벽에는 여러
가지 고문기구들이 걸려 있었고 천정엔
사람들을 비인간적으로 보이게 하는
린하나 매달려 있었다.
김근석은 의자에 묶여 있었고 그를
취조하는 수사관들은 서서 위압적으로
쏘아보고 있었다.
김근석은 취조실로 불려오자 마자
쇠파이프로 얻어 맞아 반쯤 얼이 빠져
있었다. 수사관들이 쇠파이프로 얼굴까지
때렸는지 왼쪽 얼굴에서는 피가 흐르고
있었다.
"저,전 모르는 일입니다. "
"죽고 싶어?"
"정말 모릅니다. 고은태씨를 한번도 만난
일이 없습니다. "
"다른 놈이 너하고 같이 만났다고
자백했어!이 자식이 아직도 정신을
못차렸나?"
한경호는 의자에서 벌떡 일어났다.
김근석이 재빨리 무릎을 꿇고 두
손을 싹싹 빌었다.
"정말입니다. 정말 모르는 일입니다!"
김근석은 울상이 되어 그를 쳐다보고
있었다.
"그럼 누가 고은태를 만났어?"
한경호는 구둣발로 김근석의 턱을
치켜들고 물었다.
"예?"
"니가 안 만났으면 고은태를 만난 놈이
있을 거 아니야?"
"모릅니다. 저는 정말 사실만을
말씀드리고 있습니다. "
"그럼 김대중이를 직접 만났나?"
"예?"
"김대중이를 직접 만나서 시위 자금을
전달받았느냐는 말이야? 대답해 이
"
한경호는 구둣발로 김근석의 턱을
걷어찼다. 김근석이 악,하는 비명을
지르면서 의자를 싸안고 나뒹굴었다.
"그,그런 일 없습니다. "
김근석이 기계처럼 벌떡 일어서며
대답했다.
"그래?"
"정말입니다. 제가 어떻게 그런 분들을
만났겠습니까?"
"알았어. "
한경호는 빙긋이 웃었다. 벌써 해가
서쪽으로 기울기 시작하고 있었다.
"야!"
한경호는 문 밖의 경비병을 불렀다.
"예!"
경비병이 후닥닥 뛰어 왔다.
1 "이 새끼 데리고 나가!"
"예. "
경비병이 김근석을 데리고 나갔다.
한경호는 책상으로 돌아와 천천히 담배를
피우기 시작했다. 시계가 벌써 6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야!지영옥()이 끌고 와!"
한경호는 다시 밖의 경비병에게
지시했다. 지영옥은 이화여대 정치외교학과
학생이었다. 이틀째 잠을 재우지 않고
취조를 했기 때문에 거짓으로라도 자백을
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한경호는 오늘 중으로 반드시 결판을
내리라고 생각했다. 윤 사장이 또 다시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고 학생들을
취조하라고 명령을 내렸던 것이다. 윤
사장의 명령은 학생들을 취조해 김대중이
7시위를 배후 조종했다는 혐의를 밝히고
전두환 파쑈라고 주장한 배후 인물을
캐라는 것이었다.
물론 광주사태로 인해 시일이 촉박했다.
광주사태의 배후조종 혐의도 김대중에게
덮어 씌워야 했다. 따라서 수단방법을
가리지 말라는 것이었다.
정치인들에 대한 취조는 남산에서 하고
있었다. 학생들도 간부급에 속하면
남산으로 연행되었다. 한경호는 처음엔
정치인들만 담당했으나 이틀만에 학생들
담당으로 바뀌었다.
"예!"
경비병들이 대답을 하고 복도로 멀어져
가는 발자국소리가 들렸다. 여학생들은
복도 끝에 감금되어 있었다. 모두 5월17일
계엄 포고령 10호를 발표하기 전에
옜뭔막체포된 학생들이었다.
불법체포였다.
이내 경비병들이 지영옥을 끌고
들어왔다.
"지영옥!"
경비병들이 지영옥을 취조실 중앙에
세웠다.
"네. "
지영옥이 고개를 똑바로 치켜들었다.
동그란 얼굴이었다. 얼굴은 희고 창백했고
눈이 두려움에 떨고 있었다.
"어떻게 할 테야?"
김 수사관이 지영옥의 머리채를 잡아
당겨 흔들다가 벽으로 밀어붙였다.
지영옥이 힘없이 벽에 부딪쳤다.
"의자에 묶어!"
한경호는 지영옥의 앞으로 갔다.
수사관들이 지영옥을 의자에 앉히고 손을
뒤로 묶었다. 한경호는 담뱃불을 바닥에
버리고 구둣발로 밟았다. 환기 구멍을 통해
남산 숲 어디선가 뻐꾸기 우는 소리가
들렸다.
"시작해!"
한경호는 수사관들에게 지시했다. 모두
한경호와 연배가 비슷한 수사관들이었으나
한경호는 이 곳에서 윤 소령으로 불리고
있었다. 정보부 수사관들을 지휘하기 위해
위장한 계급이었다. 정보부에는 한경호
말고도 정치인들을 취조하는 백 소령이라는
인물이 또 하나 있었다. 그는 고문
기술자였기 때문에 특별히 정치인들의
취조를 맡기고 있었다. 그의 정체에
대해서는 한경호도 알지 못했다.
김 수사관이 바닥에서 뒹굴고 있던 고무
별응집어들었다.
"지영옥!"
한경호는 지영옥을 노려보았다.
"할말 없나?"
"없습니다. "
지영옥의 목소리는 또렷했다. 처음엔
다소 앙칼지기까지 했으나 이제는 많이
순해져 있었다.
"전두환 파쑈라는 말을 어디서 들었어?"
"모릅니다. "
"네가 만든 유인물에 전두환 파쑈가
있는데 어디서 들었는지 몰라?"
"모릅니다. "
"대답을 제대로 하지 않으면 여기서 살아
나가지 못해!"
지영옥이 고개를 쳐들었다.
"기억나지 않습니다. "
) "잘 생각해봐!"
"지금까지 계속 생각했습니다만 전혀
생각나지 않습니다. "
"좋아. "
한경호는 피식 웃으며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그리고 장길호()
수사관에게 눈짓을 했다. 장길호 수사관이
지영옥에게 다가가 청자켓을 벗기기
시작했다. 그러자 지영옥이 의자에 묶인 채
발버둥을 치며 저항을 했다.
"잠자코 있어 있어 이 년아!"
장 수사관이 지영옥의 뺨을 후려쳤다.
그러자 지영옥이 독기 서린 눈빛으로 장
수사관을 쏘아보았다. 이내 처녀의 알몸이
하얗게 드러났다.
장 수사관이 지영옥을 브래지어 차림으로
만들자 김 수사관이 고무 곤봉을 들고
지영옥에게 다가가더니 고무 곤봉을
지영옥의 어깨에 힘껏 내리쳤다.
"윽!"
지영옥이 입술을 깨물며 고통스러운
비명을 질렀다. 그러나 김 수사관은
닥치는대로 지영옥에게 고무곤봉을
휘두르고 있었다. 지영옥은 몸을 비틀며
처절하게 비명을 질러댔다. 비명소리가
지하실을 웅웅거리고 울렸다. 그러나
눈물을 흘리지는 않았다.
한경호는 얼굴을 찡그렸다. 불과 며칠
동안 수많은 학생들을 고문하는 것을
보았는데도 아직도 익숙할 수가 없었다.
처음엔 고문을 하는 모습이 너무나 끔찍해
얼굴을 돌리고 있었으나 그나마 이제는
낯이 익어가고 있었다.
(이젠 내가 직접 해야 돼... )
한경호는 아까부터 직접 학생들을
고문하리라고 생각했다. 어차피 그들에게
가담해 역사를 뒤집어가고 있는
실정이었다. 이왕 역사를 뒤집으려면
따라다니며 뒤집을 것이 아니라 앞에서
선도하며 능동적으로 뒤집자고 생각했다.
한경호는 벽에 걸려 있는 채찍을 손에
쥐었다. 지영옥이 그의 얼굴을 말끔한
눈빛으로 쳐다보았다.
"자백해!"
김 수사관이 지영옥을 윽박질렀다.
"몰라요. "
"이런 쌍년!"
김 수사관이 욕설을 뱉으며 지영옥에게
고무 곤봉을 휘둘렀다. 지영옥이 다시
날카로운 비명을 내질렀다.
"고추가루를 써!"
" 장 수사관이 말했다.
김 수사관이 씩씩거리며 주전자의 물에
고추가루를 섞어 지영옥의 코에 들이붓기
시작했다. 지영옥이 고통스러워하며 마구
도리질을 하자 장 수관이 지영옥이
움직이지 못하도록 어깨와 팔을 잡았다.
"기절했어!"
김 수사관이 주전자를 팽개치며
중얼거렸다. 한경호는 얼굴을 찡그렸다.
이렇게 해서는 오늘 밤에도 취조가 끝나지
않을 것 같았다.
"물 뿌려!"
한경호는 수사관들에게 강력하게
지시했다. 어떻게 하던지 오늘 밤 안으로
취조를 끝내야 했다.
장 수사관이 취조실 안에 있는 욕조에서
양동이로 물을 받아다가 지영옥에게
2뿌렸다. 그러자 지영옥이 얼굴을 들고
머리를 세차게 흔들었다. 지영옥의
나신으로 차가운 물방울들이 흘러내렸다.
"계속해!"
한경호는 차갑게 내뱉았다. 김 수사관이
각목을 들고 지영옥의 허벅지를 때리기
시작했다. 지영옥이 다시 고통스러운
신음소리를 내뱉았다.
그때 다른 감방에 있는 학생들이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지영옥이 고문 받고 있는
것을 알고 있는 학생들이 지영옥을
격려하기 위해 노래를 부르고 있는 것이다.
"조용히 해!"
"조용히 하지 못해?"
그러자 경비병들이 철창을 흔들며
학생들을 위협했다. 그러나 학생들의
노랫소리는 더욱 커지고 있었다.

어머니 날 낳으시고 아버지 날 기르시어
대학이라 보내 놓고 일구월심 기도하네
내 아들아 의사가 되어라
내 딸아 판검사가 되어라

대학이라 와서 보니 민주나무 키우는 곳
피를 뿌려 거름 주어야 꽃이 핀다

가자 가자 앞으로 가자
먼저 간 열사들 뒤를 따라
민주나무 꽃 피우려 깃발 들고 가자구나
민주나무 꽃피우면 새 세상이 온단다

지영옥이 입을 조그맣게 열어 노래를
따라 부르기 시작했다. 한경호는 머리 끝이
곧추 서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저런 개새끼들!"
장 수사관과 김 수사관이 화를 벌컥 내며
밖으로 뛰어 나갔다. 한경호는 채찍을 움켜
쥔 손에 바짝 힘을 주었다. 그리고는
지영옥을 묶은 밧줄을 풀렀다. 지영옥이
의아한 눈길로 한경호를 살피다가 학생들의
노래를 따라 부르기 시작했다.
한경호는 허공을 향해 채찍을 휘둘렀다.
허공을 가르는 채찍의 파열음이 쉬익 하고
귓전을 때렸다.

엄마 엄마 나 죽으면
앞산에도 묻지 말고
뒷산에도 묻지 말고
양지쪽에 묻어 주

눈이 오면 쓸어 주고
비가 오면 덮어 주고
내 친구가 찾아오면
먼길 떠났다고 전해 주

클레멘타인이라는 노래에 가사를 바꾸어
대학생들이 데모를 할 때 부르는 소위
데모가였다.
한경호는 지영옥을 향해 성큼성큼
다가갔다. 이상하게 가슴이 뛰고 있었다.
밖에서는 장 수사관과 김 수사관이
학생들을 잡아 패는 소리가 요란하게
들리고 있었다. 여기저기서 퍽퍽거리는
소리가 들리고 학생들의 비명소리가
들렸다.
한경호는 지영옥을 향해 채찍을 힘껏
휘둘렀다. 채찍이 허공을 가르며 지영옥의
등에 달라붙었다. 지영옥이 재빨리 몸을
6구부려 채찍을 피하려 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지영옥의 등은 채찍이 달라붙으면서
붉은 핏자국이 선명하게 새겨겼다.
(성공이야!)
한경호는 희열에 차서 속으로
부르짖었다. 처음 해보는 채찍 고문이었다.
장 수사관과 김 수사관은 오랫동안 해온
일이라 이력이 붙어 있었지만 한경호는
처음이었다. 장 수사관과 김 수사관의
눈빛에서 어딘지 모르게 자신을 멸시하는
듯한 것을 느꼈던 한경호는 비로소
자신감이 생겼다.
"어때?"
한경호는 차갑게 미소를 지었다. 고문은
단순하게 고통만 주는 것이 아니라
공포까지 주어야 한다는 것을 한경호는
짧은 시일 안에 터득하고 있었다.
 "채찍 맛이 괜찮지?"
한경호는 지영옥을 비웃으며 다시 채찍을
들어올렸다가 지영옥을 향해 힘껏
내리쳤다. 지영옥이 다시 처절한 비명을
지르며 의자에서 굴러 떨어졌다. 이번의
채찍은 처음보다 더욱 강하게 지영옥을
후려친 모양이었다.
한경호는 계속 채찍을 휘둘렀다.
지영옥이 취조실 바닥을 때굴때굴 구르며
비명을 질러댔다. 그러나 한경호의
귓전에는 이미 지영옥의 비명소리가 들리지
않고 있었다. 한경호의 귓전에는 기이하게
때려,때려 하는 소리와 더 세게,더 세게
하는 소리만 환청처럼 들리고 있었다.
한경호가 채찍질을 멈춘 것은 장
수사관과 김 수사관이 들어오는 소리
때문이었다.
 채찍질을 멈추고 지영옥을 살피자
지영옥은 이미 걸레처럼 널부러져 있었다.
옷을 벗긴 탓에 살점이 찢기고 터져 피가
낭자하게 흐르고 있었다.
"저녁 먹고 올 테니까 자백 받아!"
한경호는 채찍을 내던지고 밖으로
나왔다. 장 수사관과 김 수사관에게 보란
듯이 시위를 한 것이었다.
밖은 이미 캄캄했다. 한경호는 담배를
피워 물고 층계참에 걸터 앉았다. 남산 숲
어디선가 뻐꾸기가 또 한가롭게 울고
있었다. 그는 담배를 두 대나 피우고서야
식당에 가서 저녁을 먹었다. 담배를 많이
피어서 입안이 깔깔했으나 간신히 된장국에
말아서 한 공기를 비웠다.
취조실로 돌아오자 곰처럼 생긴
우락부락한 사내가 의자에 앉아 있었다.
"이 대령님이 다녀갔습니다. "
한경호가 의아한 눈빛으로 살피자 장
수사관이 입을 열었다.
"이 대령?"
"예. "
"왜?"
"기술자를 모시고 왔습니다. "
"기술자?"
한경호는 어리둥절했다.
"나는 대공분실에 있는 사람입니다.
사람들이 백곰이라고 부르니까 그냥
백곰이라고 부르십시요. "
사내가 의자에서 일어나 두툼한 손을
내밀었다. 한경호는 부지불식간에 그 손을
잡았다.
"죄수들 취조가 전문이지요. 높은 분들이
이런 일을 잘 맡지 않으려고 해서 어느덧

엿보고 있는 얼굴들이 나타났기 때문이다?
전문가로 불려다니는 형편이 되었습니다.
이 바닥에선 악명이 높습니다. 내 이름만
듣고도 슬금슬금 자백하는 놈들도
있으니까요. "
백곰이라는 사내가 빙긋이 웃었다.
어쩐지 얼음처럼 차갑게 느껴지는
웃음이었다.
"이 대령님께서는 여기 일은 이분에게
맡기고 퇴근하라고 하셨습니다. "
장 수사관이 다시 말했다. 한경호는 옷이
입혀진 채 의자에 앉혀져 있는 지영옥을
힐끗 살피고 고개를 끄덕거렸다. 취조실을
벗어나고 싶은 생각은 오래 전부터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명령을 따르지 않으면
그들에게서 도태가 될 것 같아 말도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우리도 이것 애국하자고 하는 짓
틈"
백곰이라는 사내가 다시 빙긋 웃었다.
"그럼요. 애국하기 위해서 하지요. "
한경호는 맞장구를 쳤다. 쓸데없는
소리인줄 알면서 맞장구를 치지 않을 수
없었다.

3

바람이 쏴아 하고 불어올 때마다
아카시아 숲이 물결처럼 출렁거렸다.
한경호는 아내 정란의 손을 잡고 천천히
걸었다. 5월,그리고 초여름을 앞둔 늦은
봄이었다. 코 끝에 아카시아의 독한
꽃향기가 풍겼다. 천지사방이 아카시아의
숲을 이루고 있어서 과향기가 진동을 하고
있었다.

"여기에 이런 시골길이 있을 줄
몰랐어요. "
정란이 흡족한 표정으로 종알거렸다.
모처럼 나온 산책길이라 기분이 상쾌한
모양이었다.
한경호는 블록하게 나온 정란의 배를
살폈다. 정란은 임신중이었다. 4월달에는
거의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배가
평범했으나 이제는 임신복을 입어야 할
정도로 배가 불러 있었다.
"걷기에 힘들지 않아?"
"네. "
정란이 정겹게 웃었다. 정란의 말투에는
새색시 같은 응석이 묻어 있었다.
"하긴 태아를 위해서는 가벼운 운동을
하는 것이 좋다고 그러대. "
한경호는 빙긋이 웃었다. 그러면서
아이를 갖는다는 것은 무엇일까,남자와
여자가 만나 그 짓을 하면 아이가 생긴다.
결혼을 한 사람들에게는 그것이 축복이
되지만 결혼을 하지 않은 사람들은 불행의
씨앗이 된다. 그러나 결혼을 한 부부에게서
태어난 아이라고 해서 반드시 축복을
받았다고 할 수 있을까... 우리처럼 서로가
증오를 하는 사람이라면 그 아이는 축복이
아니라 저주가 된다.
한경호는 아내의 뱃속에 있는 아이가
누구의 아이일까 하는 생각에 잠겼다.
어쩌면 그 아이는 내 아이일 수도 있고
아내가 만나고 있는 부정한 사내의 아이일
수도 있다. 그런데 아내는 어떻게 저렇게
천연스러울 수 있을까...
한경호는 아내의 천연스러움에 화가
치밀었다.
 "뭘 생각해요?"
"그냥 이것저것... "
한경호는 말 끝을 흐렸다.
"광주는 어떻게 되었어요?"
"나도 자세히는 몰라. 신문에 폭도들이
소요를 일으켰다니까 그런 것이지... "
"소요가 뭐예요?"
"소란이지 뭐. "
한경호는 소요라는 말을 생각하고 피식
웃었다. 계엄사에서 광주사태에 대한
소식을 처음 발표했을 때 계엄사와 언론은
팽팽한 대립을 벌이고 있었다.
계엄사에서는 광주사태를 무장폭동이라고
불렀고 언론사들은 무장폭동이 아니라
과격시위라고 부르겠다고 했던 것이다.
그것이 비록 광주사태를 표현하는 한 줄의
문장에 지나지 않았으나 함축된 뜻이
다르기 때문에 계엄사와 언론사들은 용어
사용을 둘러싸고 팽팽한 대립을 보이게
되었던 것이다.
결국 소요()라는 용어가
채택되었는데 이 말은 여러 가지 뜻을
가지고 있었다. 소요를 문자 그대로
해석하면 소란스럽다는 뜻을 가지고 있는데
뭇사람들이 일제히 들고 일어나 한 지방의
공공질서를 문란케 하는 것을 소요라고
부르고 있었다. 여기에 죄()가 추가되어
소요죄()가 되면 내란죄()와는
구별되지만 불해산죄()가 포함되는
것이다.
계엄사에서 소요죄 사용을 허락한 것은
광주사태가 사회불안을 조장하는 공공질서
파괴행위로 간주한 탓이었고 언론사가
소요라는 말을 사용한 것은 오직
소란스러운 행위로만 간주한다는 뜻을 갖고
있었다. 그리고 그것은 무장폭동이라는
계엄사의 주장을 거부한다는 의미도
내포되어 있었다.
집으로 돌아오자 성긴 빗발이 뿌리기
시작했다. 한경호는 소파에 앉아 위스키를
한 잔 마셨다.
"광주가 굉장한 모양예요?"
정란이 TV를 켜며 말했다. TV는 뉴스
시간이 아닌데도 광주 시내의 어지러운
상황을 보도하고 있었다. 총을 들고 시내를
활보하는 시민들,복면을 쓰고 추럭 위에 서
있는 시민들,불타는 버스와 건물들...
광주는 전쟁터처럼 스산했다. 그러나
광주사태가 왜 일어났는지는 전혀 언급이
없었고 불순분자의 배후조종에 현혹되지
말라는 계엄사의 발표만 계속 보도하고

"곧 진정되겠지... "
한경호는 대수롭지 않게 대꾸했다.
광주에 20사단까지 투입되었으므로 광주의
진압은 시간문제였다.
"그런데 광주 사람들이 왜 그렇게 데모를
심하게 했어요?"
"모르지. "
"정말 불순분자들이 배후조종을 한
거예요?"
"응. 경상도 군인들이 광주 사람들 씨를
말린다는 소문이 퍼져 광주 사람들이
흥분했대. "
한경호도 광주사태가 일어난 배경을
속속들이 알 수는 없었다. 다만 보안사에
근무하고 있었기 때문에 광주사태가
예상보다 훨씬 심각하다는 사실만 알고
뿐이었다.
"옆 집이요. "
"누구?"
"신문기자 말예요. "
"응. "
"광주에 내려가 있대요. "
"그래?"
한경호는 정란의 말에 공연히 가슴이
섬칫해 왔다.
"부인이 걱정이 많은 모양예요. "
"신문기자니까 무슨 일이 있을려구... "
"광주엔 전화도 안된대요. "
"...... "
"부인 말로는 광주가 피바다가 되었대요.
신문사에 전화를 했더니 신문사도 난리인
모양예요. "
"신문사가 왜 난리야?"
"광주가 무법천지가 되었으니
오죽하겠어요?공수부대가 여자들의
젖가슴을 대검으로 잘랐대요. "
"누가 그런 소리를 해?"
한경호는 얼굴을 잔뜩 찌푸렸다.
광주사태에 대한 언론을 통제하면서
유언비어가 무섭게 번지고 있었다.
"아까 방송에도 나오던대요. "
"방송에?"
"유언비어에 현혹되지 말고 유언비어를
퍼뜨리는 사람이 있으면 당국에
신고하래요. "
계엄사의 발표를 말하는 모양이었다.
한경호는 기분이 좋지 않아 늦게까지 술을
마신 뒤에야 겨우 잠이 들었다. 한경호가
잠이 깬 것은 요란하게 울리는 전화벨소리
때문이었다.
"한 부장인가?잠자는 시간에 미안하네.
차를 보냈으니까 빨리 나와야겠네. "
윤 사장이었다. 윤 사장은 한경호를
언제나 한 부장으로 부르고 있었다.
"무슨 일입니까?"
"나와서 얘기하세. 서둘러야 할 일이
있어. "
전화는 일방적으로 끊겼다.
"나오래요?"
정란이 잠에 취한 목소리로 물었다.
"응. 그냥 자고 있어. "
한경호는 벽에 걸린 시계를 보았다. 벌써
새벽 5시였다. 창밖에는 아직도 비가
내리고 있었다. 한경호는 서둘러 세수를
하고 옷을 입었다.
윤 사장이 보낸 차가 도착한 것은
5시10분이 되었을 때였다. 사무실에는
윤 사장 혼자 피곤한 기색으로 앉아
있었다.
"이 서류 좀 검토해. "
한경호가 인사를 하자 비서실장이
서류뭉치를 한경호에게 던졌다.
"무슨 서류입니까?"
"오늘 계엄사에서 발표할 내용이야. "
한경호는 서류뭉치를 천천히 살폈다.
그것은 김대중에 대한 중간수사
내용이었다.
"벌써 중간 수사발표를 합니까?"
한경호는 너무 빠른 것이 아닌가하는
생각이 들었다. 학생들을 무수히
고문했으나 김대중이 광주사태와 관련이
되었다는 증거는 하나도 포착되지 않고
있었다.
"광주가 심각해. "
"그럼 광주도 김대중이 선동한 것으로
합니까?"
"우선 불순분자의 선동으로 몰아가야지.
"
"알겠습니다. "
한경호는 책상에 앉아 서류를 검토하기
시작했다.

1. 김대중은 대중을 선동하여 민중봉기를
일어나게 한 다음 정부를 전복하려고
복직교수와 복학생을 중심으로 사조직을
만들었다.

2. 김대중은 각 대학교의 학생회장
입후부자에게 선거자금을 제공하고 학생회
간부들에게 시위자금을 지급했다.

3. 김대중은 5월14일과 15일의 서울시내
학생시위도 배후 조종하였으며 사무실
수색에서 추천서,입회원서,비밀숫자로
표시된 회원명부가 압수되었는데 곧
전체적인 윤곽이 밝혀질 것이다.

4. 김대중은 해방직후 남로당
조직원으로서 목포시 경찰지서 습격,방화에
연루되었고 1972년 유신선포 이후에는
일본과 미국에서 용공세력과 연합한
좌익분자이다.

한경호는 낮게 한숨을 내쉬었다.
전체적인 문맥은 김대중을 좌경분자로 몰아
내란혐의를 씌우려는 것이 분명해 보였으나
혐의가 미약해 보였다.
"어때?"
"좀 약하지 않습니까?"
"중간수사발표니까... "
"기자들은 알맹이가 없다는 것을
알겁니다. "
"그러니까 한 달 내에 자네가 알맹이를
만들어. "
"예. "
"문맥도 잡구. 아무리 중간수사발표라도
너무 거칠어서 되겠어?"
"예. "
한경호가 서류의 문맥을 모두 잡아 윤
사장에게 보고한 것은 7시가 조금 지났을
때였다. 한경호가 보안사 서빙고 분실에
잠깐 들렸다가 남산으로 출근하자
계엄사에서 김대중에 대한 중간 수사발표를
하는 것이 TV화면에 나오고 있었다.
한경호는 착잡한 기분으로 TV화면을
음쳬

4

강한섭은 멍한 눈빛으로 신문을
들여다보았다. 광주사태가 발생한 이후
처음 배달된 신문이었다. 그러나 신문의
머릿기사들이 한결 같이 기대에 어긋난
것들 뿐이었다. 광주데모사태 닷새째...
행정 완전 공백상태... 데모대가 공포 쏘자
시민들은 귀가페허같은 광주시내
6일째,자극적인 소문이 기폭제시위선동
간첩검거,목포잠입 기도도청 점거 학생
1명 독침 맞아!신문의 제목들은 계엄사의
발표를 일방적으로 싣고 있을 뿐
공수부대의 무자비한 진압은 전혀 언급이
없었다.
 (그래. 신문이 모두 검열받고 있으니
진실을 보도할 수 없겠지... )
강한섭은 맥이 탁 풀리는 기분이었다.
그러나 광주는 점점 긴박감이 감돌고
있었다. 5월22일 공수부대가 도청에서
철수한 이후 시민군은 곧 바로 도청을
점거했고 공수부대는 광주 외곽에 주둔해
있었다.
서울에서는 계엄사를 따라 기자들이 대거
내려와 본격적인 취재에 들어가 있었다.
"강 기자. 이거 서울에서 듣던 거와는
딴판이 아니야?"
기자들은 단순하게 광주에서 폭동이
일어난 것으로 알고 내려왔다가 사태가
간단치 않다는 것을 알게 되자 긴장하기
시작했다. 공수부대의 얼굴에는 살기가
번뜩였고 시민군들의 눈은 핏빛으로 붉게
있었다.
"그렇습니다. 광주는 이제 옛날의 광주가
아닙니다. "
"도대체 어떻게 하다가 이 지경이
되었어?"
"사태의 원인은 공수부대의
과잉진압입니다. "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전쟁터 같잖아?"
"전쟁이지요. "
"정말 배후가 있는 거 아니야?"
"배후요?"
"배후가 없으면 어떻게 광주시민 전체가
죽음을 무릅쓰고 항쟁을 해?"
기자들은 곳곳에서 무장을 하고 있는
시민군들의 모습을 살피며 의아해 했다.
시민군들은 때때로 복면을 하고 시내를
질주했으며 불탄 차량이 곳곳에 나뒹굴고
?있었다. 얼핏 보면 시민군들이 모두 폭도로
보일 것 같은 모습이었다.
"어떻게 기사를 써 보내야 할지 엄두가
나지 않는군... "
서울에서 내려온 기자들은 망연자실했다.
그러나 그들은 활발하게 취재활동에
들어갔다.
강한섭은 광주를 떠나기로 했다.
서울에서 특별취재반이 대거 몰려오기도
했지만 더 이상 광주에서 취재를 하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광주를 떠날 수가 없었다. 광주
외곽은 군부대에 의해 철저하게 통제되어
외곽으로 도저히 빠져 나갈 수가 없었다.
5월24일이 되자 광주에 시민수습위원회가
결성되었다. 수습위원회는 계엄사와 수습
방안을 논의했으나 회의는 처음부터
캔퓸
5월25일 최규하 대통령이 광주를
방문했다. 그날은 아침부터 날씨가
우중충하더니 오후가 되자 장대 같은
폭우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비다!"
"소나기다!"
시위 군중들은 시위를 멈추고 인근
상점이나 공공건물로 뛰어 들어가 비를
피했다. 시민군과 군중들로 빽빽하던
거리는 삽시간에 텅 비었다. 5월에 내리는
비치고는 장대질을 하듯이 억세게 퍼붓는
비였다.
최규하 대통령은 이희성 계엄사령관과
최광수 비서실장,윤자중 공군참모총장을
대동하고 전남북 계엄분소인 전교사
사령부를 방문했다.
 최규하 대통령은 빗속에서 침통한
표정으로 담화문을 발표했다.
"오늘의 불행한 사태를 북한 공산집단이
악용하고자 할 것은 불을 보듯 명약관화한
일이므로 일시적인 흥분과 격분에 의해
총을 든 시민 여러분들은 자중자애하여
총기를 반환하고 집으로 돌아가 치안을
회복하는데 협력해 주시기 바랍니다. "
최규하 대통령의 담화문은 즉각 전국에
방송되었다. 라디오와 TV는
9시,10시,10시30분 잇달아 담화문을
보도했다. 그리고 광주가 무장폭도들에
의해 무법천지가 되었다고 다투어
보도했다. 불순분자의 책동,고청간첩
체포,독침... 불순분자들의 선동이라는
단어들이 보도매체들을 화려하게 수놓았다.
그러나 부상을 당했거나 죽음을 당한
시민들의 비참한 모습은 한 줄도 보도되지
않고 있었다.
(대통령의 담화문이 시민들을 위로하는
내용은 전혀 없군... )
강한섭은 TV로 담화문을 발표하는 최규하
대통령을 보고는 저으기 실망했다.
알맹이가 없는 담화문이었다. 그것으로는
가족들을 잃고 흥분한 광주 시민들을
달래기에는 역부족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날 밤에는 피아간에 더 이상의
충돌은 없었다. 최규하 대통령의 방문
때문인지 아니면 억수 같이 쏟아지는
소나기 때문인지 공수부대도 시민들도
거리로 뛰어 나가지 않았다.
강한섭은 호텔에서 비가 내리는 거리
풍경을 물끄러미 응시했다. 그 격렬했던
시위와 진압이 모두 꿈이었던 듯이 거리는
어둠과 빗속에서 칠흑 같은 밤이 점점 깊어
가고 있었다.
5월26일이 왔다. 밤새도록 내리던 비가
그치기 시작한 5시30분경 탱크의 요란한
캐터필러소리가 들렸다. 20사단 병력이
탱크를 앞세우고 각 방면에서 광주시내로
진군해 오기 시작하고 있었다.
도청에는 금세 비상이 걸렸다. 기자들은
군부의 진압이 시작된 것으로 알고 잠자다
말고 뛰쳐 나왔다. 강한섭은 카메라를 들고
도청으로 달려갔다. 도청에는 이미 항쟁
지도부와 수습위원회가 비상회의를 하고
있었다. 강한섭은 도청을 살피다가
기자들을 향해 물었다.
"어떻게 된 거야?"
"군부에서 진압을 시작할 모양이야. "
기자들은 구석에 삼삼오오 모여
수군거리고 있었다. 강한섭은 수습위원들이
모여 있는 방으로 들어갔다. 기자들도
우르르 몰려왔다. 그 곳엔 재야
수습위원들도 함께 있었다.
"이렇게 된 이상 어쩔 수가 없습니다.
저들이 강제로 진압을 하려 한다면 도저히
막을 수 없습니다. 여기 있어도 죽을
것이고 나가도 죽을 것입니다. 우리가 먼저
방패가 됩시다. "
로만 칼라를 한 신부가 침통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누구지?"
"로만 칼라를 한 것을 보니 신부인
모양이야. "
"아 저 양반 김성용 신부야. "
기자들 중에 광주 출신의 지방기자가
로만 카라의 신부의 이름을 낮게 말했다.
"좋습니다. 우리 모두 방패가 됩시다. "
재야 인사들은 김성용 신부의 제안에
모두 찬성하고 비장한 결의문을 채택했다.

1. 1시간 이내에 군은 본래의 위치로
철수하라.
2. 군이 철수하지 않으면 전 시민의
무장화를 호소한다.
3. 게릴라전으로 항쟁한다.
4. 최후의 순간이 오면 TNT를 폭발시켜
전원 자폭한다.

죽음을 각오한 재야인사 17명은 금남로에
일렬행대로 섰다. 그들은 비무장을 한 채
금남로에서 농촌진흥원 앞까지 약
4킬로미터를 천천히 걸었다. 수많은
시민들이 목숨을 걸고 그들 뒤를 따랐다.
A 어느덧 해가 높이 떠올라 있었다. 양쪽
인도에는 착검한 계엄군들이 매서운
눈빛으로 시민들을 경계하고 있었다.
도로에 즐비한 건물의 옥상에도 군인들이
기관총의 총구를 시민들에게 겨눈 채
발포할 태세를 갖추고 있었다. 완장을 찬
외신 기자들은 장갑차 사이를 누비변서
사진을 찍고 있었다. 그러나 공수부대
병사들은 외신기자들에게 아무 제재도
가하지 않았다.
(취재도 외신 기자들에게는 자유롭게
허용하고 있군... )
강한섭은 외신 기자들이 자유롭게
취재하는 것을 보고 분노를 느꼈다.
그때 검은 승용차가 나타났다.
승용차에서 별이 번쩍이는 계급장을 달고
있는 장군이 내렸다.
"수습위원들입니까?"
"그렇소?"
"그럼 계엄 사령부에 가서 얘기하시죠. "
"군이 먼저 어젯밤의 위치로 철수하시오.
"
"좋습니다. "
장군은 전차병에게 후퇴 명령을 내렸다.
그러자 전차들이 요란한 소음을 내면서
사라졌다.
김성용 신부는 학생 대표들과 함께
전교사 사령부로 갔다. 그러나 협상은
결렬되었다. 애초부터 협상이 성립될 수
없는 상황이었다.
5월26일 밤이 왔다. 공수부대가 진압
D데이로 결정한 날이었다.
어둠이 내리자 시민들은 하나 둘 흩어져
집으로 돌아갔다.
 계엄군은 작전이 시작되기 직전에 전남
일원의 전화선을 모두 차단시켰고 곧 이어
시내 전화도 두절시켰다. 그러나
시민군들은 시민들의 제보로 계엄군이
쳐들어 올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바짝
긴장했다.
"시민 여러분!계엄군이 쳐들어 오고
있습니다. 잠시 후면 사랑하는 우리 형제
우리 자매들이 계엄군의 총칼에 숨져갈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광주를 죽음으로
사수할 것입니다. 우리를 잊지
말아주십시요. 우리는 최후까지 싸울
것입니다. "
송원전문 학생 박영순과 목포전문 학생
이경희는 밤새도록 광주시내를 돌아다니며
가두방송을 했다. 이들의 비참한 호소는
죽음 같은 정적이 깔린 광주 시내 전역에
통곡처럼 울려 퍼졌다. 그러나 시민들은
밖으로 나올 수가 없었다. 밖으로 나오는
것은 죽음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어쩐 일인지 공수부대는 이 여학생들의
가두방송을 제지하지 않았다.
새벽 4시가 되면서 시내 여러 곳에서
총성이 울리기 시작했다.

미경은 허공을 우두커니 쳐다보았다.
최종열의 소설은 광주사태를 방관자처럼
묘사하고 있었다. 그러나 비교적 세세하게
묘사하고 있었기 때문에 광주사태의 실상을
소상하게 파악할 수 있었다.
그러나 광주사태는 더 이상 소설 속에
나오지 않고 소설은 다시 강한섭과
한경호의 개인에게 옮겨져 있었다. 미경은
소설 읽기를 일단 중지했다. 이미 꽤 오랜
=시간이 지나 있었다. 이제는 잠을 자야
했다.
미경은 잠시 깊은 생각에 잠겼다.
최종열이 5월26일의 도청 진압 상황을 소설
속에 묘사하지 않은 이유가 궁금했다.
그러나 그 이유를 알 수가 없었다.
(광주는 엄청난 비극을 잉태하고
있었어... )
미경은 무겁게 한숨을 내쉬었다.
광주사태를 지금까지 단순한 민중항쟁
정도로 보았던 일이 후회되었다.
미경은 이튿날 회사에 출근하여
광주사태에 대한 당시 신문기사를 자세히
살펴보았다. 백 주간이 출장 중이어서
자세한 내막을 보고할 수가 없었다. 백
주간은 사흘째 남도지방의 문화유산답사를
떠나 있었다. 그러나 오후에나 밤늦게까지
예정이었으므로 내일까지는 보고할
수 있었다. 그동안 최종열의 소설을
교정하여 연재할 준비를 해놓으면 되는
것이다.
미경은 80년 5월의 신문기사를 읽으면서
가슴이 먹먹한 분노를 느꼈다. 광주사태는
최종열의 소설에서 밝혔듯이 폭동으로
묘사되고 있었다. 그러나 더욱 아쉬운 것은
광주사태가 비극으로 막을 내린 뒤에
전국에 불어닥친 검거선풍이었다. 신군부는
광주사태를 빌미로 전국에 대대적인
검거선풍을 일으켜 재야인사와 학생들을
무자비하게 탄압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제15장 산 자는 따르라

1

백 주간은 퇴근시간까지도 귀사하지
않았다. 미경은 백 주간을 늦게까지
기다리기로 했다. 회사에서 퇴근을 하여
아파트로 돌아가 봤자 기다리고 있는
사람도 없는 데다 최종열의 소설을 마저
읽고 싶었다. 미경은 퇴근시간이 지나자
회사 근처에 있는 식당에서 저녁을 먹고
회사로 돌아왔다. 회사에서 최종열의
나머지 소설을 읽을 요량이었다.
(이 소설 때문에 최종열이 의문의 죽음을
당하지는 않았을 거야...... )
미경은 아직도 최종렬의 죽음이 이해되지
않았다. 최종열의 소설이 현대사의 한
단면을 날카롭게 다루고 있었으나 의문의
죽음을 당할만치 충격적인 내용은 없었던
것이다. 최종열의 소설 나머지 부분에서
그러한 점이 밝혀지지 않는다면 지금까지의
노력이 허사로 돌아갈 것이라고 생각했다.
미경은 책상에 앉아 담배를 피우며
최종열의 소설을 읽기 시작했다. 사방은
이미 캄캄하게 어두워져 있었다.

채은숙은 정원에서 빨래를 걷다 말고
얼굴을 찌푸렸다. 누군가 2층에서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는 느낌이었다. 남편의
대학교 후배라는 사내가 2층 서재의 창으로
내려다보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은숙은
공연히 불쾌한 기분이 들었다.
남편의 후배가 집에 온지 벌써
일주일째였다. 남편이 회사에서 퇴근하여
집에 돌아와 있을 때는 별 문제가 없었으나
남편이 출근하면 커다란 집에 덩그라니
둘만 남게 되어 여간 거북스러운 것이
아니었다.
(이제 그만 가지... )
은숙은 짜증이 났다. 친척이라도 이틀
사흘 머무르게 되면 짜증이 나는데 생판
모르는 사람이 일주일째 버티고 있어서
골치가 아팠다. 그만 가주었으면 싶었으나
그는 도통 그런 생각이 없는 모양이었다.
그가 하는 일이라고는 하루종일 잠을
자거나 책을 읽는 것이 고작이었다. 어떤
때는 몇 시간씩 전화통을 붙잡고 있을 때도
있었다. 게다가 은숙이 뜰에서 무엇을 할
때면 등 뒤로 그의 따가운 시선을 느끼게
되어 더욱 견딜 수 없었다.
 이상한 일이었다. 언제부터인지 모르게
그의 시선이 은숙의 등을 쫑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보다 더 불쾌한 것은 그가 온
뒤부터 생활의 균형이 깨어졌다는
점이었다. 남편은 회사에서 퇴근을 하면
그와 술을 마시거나 밤늦도록 토론을
하고는 했다. 은숙도 처음엔 그들의 토론에
참석하였으나 그들이 어쩐지 은숙을
꺼려하는 듯한 낌새를 보이자 슬그머니
빠지고 말았다. 그들의 토론이라는 것도
해방신학이니,민중이니 하는 따분하기 짝이
없는 것들이었다.
남편은 그와 늦도록 술을 마시고 같이
잠을 잤다. 오히려 그녀와 잠을 자는 날이
그와 잠을 자는 날보다 더 적었다.
은숙은 빨래를 다 걷을 때까지 2층을
올려다보지 않았다. 그러나 빨래를 걷어
현관으로 들어서기 전에 힐끗 2층을
쳐다보자 사내가 그녀를 넋이 나간 듯이
내려다보고 있었다. 은숙은 공연히
꺼림칙한 느낌이 들었다.
은숙은 빨래를 차곡차곡 갠 다음 농속에
넣었다. 그리고 소파에 앉아서 골똘히
생각에 잠겼다. 2층에 있는 사내와
광주에서 돌아온 뒤 변한 남편이 자꾸
신경에 거슬렸다. 남편은 광주에서 돌아온
이후 갑자기 말수가 적어졌고 우두커니
생각에 잠겨 있는 때가 많아졌다.
(광주에서 무엇을 보았을까?)
은숙은 골똘히 생각에 잠겼다. 남편은
광주에서 충격적인 사실을 목격한 것이
분명했다. 잠자다가 말고 가위 눌린 듯이
헛소리를 하는가하면 식은 땀을 흥건히
흘리며 깨어날 때가 자주 있었다.
그리고 어느 날 갑자기 낯선 사내 하나를
집으로 데리고 왔다.
"누구예요?"
은숙이 의아해 하자 남편이 간단하게
대꾸했다.
"후배야. "
"잠시 폐를 끼치게 되었습니다. "
사내는 예의 바르게 인사를 했다. 눈빛이
불을 뿜듯이 형형한 사내였다.
"아녜요. 편하게 쉬세요. "
은숙도 정중하게 인사를 했다. 그는
집에서 아무 것도 하지 않고 이틀을
머물다가 갔다. 남편과 그가 주위를 꺼리는
듯한 표정으로 은밀하게 속삭이는 것으로
보아 어쩐지 나쁜 짓을 저지르고 쫑기는
사람 같았다.
그후 닷새가 지났을 때 남편은 50이 넘어
보이는 중년 사내를 데리고 왔다. 은숙은
처음에 중절모를 깊숙이 눌러 쓴 사내가
남편의 친척이라고 생각했었다.
"누구예요?"
은숙은 먼저번처럼 남편에게 물었다.
"그냥 아는 분이야. "
"친척 아녜요?"
"아니야... "
"왜 오신 거예요?"
"그런 건 묻지 말고 술상이나 차려. 참
그리고 누가 물어보면 친척이 오셨다고
그래. "
남편의 말은 차가웠다. 은숙은 어쩐지
남편이 점점 멀어지고 있는 듯한 느낌을
지워 버릴 수가 없었다. 은숙이 중년
사내가 누군지 알게 된 것은 이틀 후
느닷없이 걸려온 전화 때문이었다.
( "강 기자님 댁이죠?"
전화의 목소리는 젊은 여자의 것이었다.
"네. "
"전 박 마르타 수녀인데요. 송 선생님 좀
바꿔 주시겠어요?"
"송 선생님이요?"
"댁에서 신세를 지고 계시잖아요?마침
피신처가 마련되어서 알려 드릴려구요. "
은숙은 어리둥절했다. 그러나 전화를 건
여자의 목소리가 조금도 적의가 없을 뿐
아니라 동지에게 속삭이듯 사근사근하여
마음에 들었다. 송 선생님이라는 것은 2층
서재에서 머물고 있는 중년 사내를 말하는
것 같았다.
"전 무슨 말씀이신지... "
그러자 박 마르타라는 수녀가 낮고
부드럽게 웃었다. 마치 꽃이 피는 것 같은
부드러운 웃음 소리였다.
"걱정하지 않으셔도 돼요. 우리는 다
같은 편이예요. "
"2층에 계신 분 말씀인가요?"
"네. 그 분이 누구신지 모르셨어요?"
"네. "
"이를 어째?자매님에게도 말씀을 드리지
않다니... 그냥 알고만 계세요. 그 분은
전남대에서 재직하고 계신 분예요. 소설도
몇 편 발표하셨는데... "
"그럼 작가 선생님이네요?"
"네. "
박 마르타 수녀가 다시 부드럽게 웃었다.
"잠시만 기다리세요. "
은숙은 박 마르타 수녀가 말을 계속하기
전에 막고 수화기를 탁자 위에 내려놓았다.
그리고 2층으로 올라가 서재의 문을
두드렸다.
"전화 왔어요. "
송 선생이라는 사내가 문을 빠끔히 열고
내다보다가 엉거주춤 미소를 지었다.
어딘지 모르게 바보스러우면서도 선량해
보이는 미소였다.
"고맙습니다. "
송 선생이라는 사내가 1층 거실로 내려가
전화를 받았다. 은숙은 송 선생이라는
사내가 머물던 서재를 들여다보았다.
그러나 서재는 별달리 수상한 구석이
없었다.
"떠나야겠습니다. "
송 선생이라는 사내가 전화를 받고
은숙의 방문을 두드린 것은 은숙이 시장에
가려고 옷을 갈아 입고 있을 때였다.
사내는 어느덧 낡은 가방까지 챙겨 들고

"그러세요?"
"저... "
송 선생이라는 사내가 계면쩍은 표정으로
머리를 긁적거렸다.
"무슨... ?"
"염치없는 부탁인지 알지만 혹시 돈 가진
거 있으시면 좀 빌릴 수 있을까요?"
"얼마나 필요하신데요?"
"글쎄요. 한 2,3만원... 나중에 꼭
갚겠습니다. "
은숙은 그때 수중에 5천원 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것은 시장에 갈 돈이었다. 그러나
송 선생이라는 사람을 그냥 보낼 수 없어서
앞집에 가서 이정란에게 3만원을 꾸어서
갖다 주었다.
"정말 면목 없습니다. "
송 선생이라는 사내는 몇 번이나 머리를
숙여 보였다.
"아녜요. "
"좋은 세상이 오면 꼭 복 받으실겁니다.
"
송 선생이라는 사내는 어쩐지 휘청거리는
걸음으로 버스정류장을 향해 서둘러
걸어갔다.
"누구야?"
이정란이 대문까지 나와 있다가 은숙에게
물었다.
"친척... "
은숙은 말 끝을 흐렸다.
"점심이나 먹을까?"
"벌써?"
"12시가 지났어... 내가 청요리 시킬께
같이 먹자구... "
 "비싼 청요리를 어떻게?"
"남자들은 요정으로 돌아다니며 먹는데
청요리 시켜 먹는 게 뭐 어때?"
이정란이 걱정하지 말라는 뜻으로 손을
휘휘 내젓고 대문 안으로 들어갔다. 은숙은
피식 웃으며 이정란의 뒤를 따라 그녀의
집으로 들어갔다. 남편에게 부수입이
많은지 이정란은 돈을 물 쓰듯이 쓰고
있었다.
남편은 그 후에도 계속 사람들을 데리고
왔다. 집이 넓어서 사람들이 자고 가는
것은 아무 문제도 없었으나 은숙은 어쩐지
고약한 일에 말려들고 있는 것 같은 불길한
예감 때문에 불안했다.
날씨는 점점 더워지고 있었다.
여름이었다. 광주사태가 끝난지 두 달이
되었으나 거리엔 곳곳에서 사복을 입은
사람들이 거동수상자를 불심검문하고
있었다.
세상은 가파라지고 있었다. 정부에서는
5월27일 국가보위 비상대책위원회라는 것을
설치하더니 상임위원장에 전두환
보안사령관이 임명되고 사회정화위원회라는
것이 만들어졌다. 곧 이어 정부에서는
대대적인 공무원 숙정사업에 들어가 부정한
공무원과 무능한 공무원을 축출하기
시작했다. 사회정화위원회에서는
사회불안을 조장하는 폭력배들에 대한 일제
소탕령을 내려 삼청교육대로 보냈다.
곳곳에서 폭력배들이 경찰에 검거되었다.
팔에 문신을 하거나 당구장이나 다방에서
얼씬거리는 청년들,거리에서 건들대며
돌아다니는 사람들이 일제히 경찰에
잡혀갔다.
 술을 먹고 동네 사람과 싸운 통장,돈을
꾼 뒤에 갚지 않은 사람,역에서 기차를
기다리다가 잠이 든 학교 선생님이 영문도
모르고 경찰에 연행되어 삼청교육대로
끌려가기도 했다.
인심은 흉흉해졌다. 경찰이 할당된
숫자를 채우기 위해 죄없는 사람을 연행해
간다던가 할당된 숫자를 채우지 못한
파출소 소장이 숙정 대상자가 되어
쫑겨났다는 소문이 은밀하게 나돌았다.
전두환 국보위 상임위원장은
빈곤으로부터의 해방과 폭력으로부터의
해방,부정부패로부터의 해방을 외쳤다.
사람들은 그의 말을 열렬히 환영했다.
그는 언론에서 새로운 영도자,떠오르는
영도자로 불려졌다.
그리고 곳곳에서 궐기대회가 열리기
시작했다. 직장과 학교에서 사람들은
머리에 흰 띠를 두르고 새 영도자를
중심으로 새 시대를 열어 나가야 한다고
판에 박힌 말을 외쳤다. 신문과 방송은
매일 같이 새 영도자의 동정과 궐기대회
소식을 보도했다.
궐기대회는 전국으로 요원의 들불처럼
번졌다. 새 영도자를 받들어야 한다는
궐기대회를 하지 않으면 기업은 살아남을
수 없었다.
은숙은 불안했다. 세상은 어쩐지 이상한
광기에 휩싸여 있는 것 같았다. 무엇인지
알 수 없지만 그러한 광기가 자신을 파멸로
이끌 것 같은 기분이었다.
남편 강한섭은 말수도 적어졌지만 눈빛도
날카로워 있었다. 늘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사람을 경계했다.
(변했어... )
은숙은 고개를 흔들었다. 남편이
변했다는 것을 알 수 있었으나 그 원인도
해결책도 알 수 없었다.
은숙은 소파에서 일어나 커피를 끓여
가지고 2층으로 올라갔다. 사내는 2층
서재에 앉아 있었다. 은숙이 커피잔을
가지고 들어서자 황급히 일어나 커피잔을
받았다.
"심심하시겠어요?"
은숙은 내키지 않았으나 미소를 띠고
말을 붙였다.
"아닙니다. "
사내가 황급히 고개를 흔들었다.
"하루종일 아무 것도 하지 않으면... "
"동지들을 생각하면 이만한 것은 오히려
호강입니다. "
9 은숙은 동지라는 말이 낯설고 생경했다.
사내의 독립투사 같은 말투에 화제를
바꾸었다.
"비가 올 것 같아요. "
은숙은 창으로 가까이 가서 밖을
내다보았다. 날씨가 후덥지근했다. 하늘은
아침부터 낮고 찌푸퉁했으나 빗발은 뿌리지
않고 있었다.
"네. 한바탕 뿌릴 것 같습니다. "
사내가 은숙의 말을 받았다.
골목은 조용했다. 오후가 되었는데도
골목은 언제나처럼 인적이 끊어져 있었다.
(저 집은 무얼하고 있을까?)
은숙은 배가 잔뜩 부른 이정란을
생각했다. 이정란은 임신중이었다. 은숙은
문득 그녀를 본 일이 꽤 오래 되었다는
생각을 했다. 그녀가 배가 불러 오면서
테니스도 같이 하지 않게 되어 앞 뒷집에
살면서도 만나는 일이 뜸하게 되었던
것이다.
(앞 집에나 가볼까?)
은숙은 2층에서 내려오자 그런 생각을
했다. 오후가 몹시 무료했다.
"비가 오시네!"
은숙이 앞집을 가기 위해 대문을 나오자
성긴 빗발이 뿌리기 시작하고 있었다.
은숙은 하늘을 쳐다보며 싱그러운 미소를
지었다.
대문은 뜻밖에 비스듬히 열려 있었다.
(왠일이지?)
은숙은 의아했다. 대문에서 벨을 누를까
하다가 그만 두고 열린 문으로 안으로
들어갔다. 집안은 조용했다. 현관문으로
가까이 가자 안에서 갑자기 여자의
웃음소리가 들렸다.
(누가 왔나?)
은숙은 현관문에 귀를 기울였다. 그녀의
남편이 벌써 돌아왔을 리는 없고 손님이 온
모양이었다.
"아이!"
그때 현관문 안에서 다시 몸을 꼬는 듯한
간드러진 목소리가 들렸다. 은숙은 자신도
모르게 얼굴이 붉어졌다. 은숙은 공연히
왔다는 생각을 하며 걸음을 돌리려 했다.
그러나 그때 남자의 탁한 목소리가 은숙의
발목을 잡았다.
"정란이. "
남자의 목소리는 어리광을 부리듯 보채고
있었다.
"안되요!"
은숙은 걸음을 멈추고 귀를 기울였다.
 "정란이... 견딜 수가 없어... "
"정말 안돼요. 난 임신 중이잖아요?"
"그냥 만지기만 하겠어... "
"아이 짖궂어...... "
이내 여자가 남자에게 양보를 하는 듯한
목소리가 들렸다. 여자의 목소리는
집주인인 이정란이 분명했으나 남자의
목소리는 누구인지 알 수 없었다.
(어떻게 된 거지?)
은숙은 얼굴이 화끈거렸다. 이정란이
외간 남자를 집으로 끌어들여 수상한 짓을
한다고 생각하자 얼굴이 화끈거리고 가슴이
방망이질을 치듯이 뛰었다.
은숙은 망설이다가 벽모퉁이를 돌아
창쪽으로 가까이 갔다. 이런 일은
처음이었으나 눈으로 직접 보고 싶은
욕망이 강하게 일어났다. 창쪽으로 바짝
?붙어서면 안을 자세히 들여다 볼 수 있을
것이었다. 다행히 성긴 빗발이 뿌리고
있어서 날은 어둑어둑했다. 은숙은
조심조심 걸어서 창밑으로 가까이 갔다.
"아이!"
이정란의 소리가 다시 들린 것은 은숙이
창밑에 이르렀을 때였다. 여름이라 그런지
거실의 창은 반쯤 열려 있었고 분홍색
커텐이 바람에 한가롭게 나부끼고 있었다.
"정란이... "
남자의 목소리는 숨이 가빴다.
은숙은 커텐 사이로 안을 들여다보았다.
거실은 날씨 때문에 어둠스레했다. 그러나
거실의 소파에 비스듬히 기대 앉아 있는
이정란과 이정란의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아
있는 중년 사내의 넓은 등이 뚜렷이
보였다.

(낯선 남자야... )
은숙은 아랫도리가 짜릿해 왔다.
남자는 이정란의 복부에 얼굴을 기대고
있었고 이정란은 남자의 단정한 머리를
쓰다듬고 있었다.
"정란이!"
남자의 손이 이정란의 가슴을
쓰다듬었다.
"왜요?"
그러자 이정란이 입을 벌리고 고개를
뒤로 젖혔다. 이정란은 남자의 손이 가슴을
애무하는 것을 기꺼워하고 있었다.
남자의 손은 부드럽게 이정란의 가슴을
애무하다가 허리로 내려왔고 허리에서 다시
가슴으로 올라갔다가 허벅지를
어루만지듯이 더듬고 있었다. 이정란은
남자의 손이 위치를 바꿀 때마다 허리를
,한껏 뒤로 젖히고 남자의 머리카락을
움켜쥐고 몸을 떨었다.
은숙은 자신도 모르게 몸을 부르르
떨었다.
남자와 여자가 관계를 하는 것을 보는
것은 처음이었다. 은숙은 부끄러운 생각이
들었으나 그 자리를 떠나고 싶지는 않았다.
그러한 것을 보는 것이 나쁜 일이라는 것은
알고 있었으나 강한 호기심이 그 자리를
떠날 수 없게 만들고 있었다.
(누구일까?)
남자는 등을 이쪽으로 돌리고 있어서
누구인지 알 수 없었다. 분명한 것은 그
남자가 이정란의 남편 한경호가 아니라는
사실뿐이었다.
남자의 손이 이정란의 치마 자락을
들추었다. 이정란이 그 손을 움켜쥐는
4시늉을 했다. 그러나 시늉뿐이었다.
이정란은 갑자기 남자의 머리를 세차게
감싸안더니 입술을 부비기 시작했다.
은숙은 눈을 질끈 감았다. 다리가
후들후들 떨리면서 삼각분기점에서 뜨거운
기운이 솟구치고 있었다.
은숙은 자신도 모르게 벽에 등을 기대고
하체로 손을 가져갔다.
안에서 이정란의 신음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은숙이 다시 조심스럽게 안을
들여다보자 남자는 어느 사이에 옷을 벗고
있었고 있었고 이정란은 서둘러 원피스를
벗고 있는 중이었다. 거실이
어둠스레했으나 이정란의 배는 임신으로
하얗게 불러 있었다.
"조심해요. "
이정란이 낮게 속삭였다.
"걱정하지 말아. "
남자가 이정란의 하얗게 부른 배를
쓰다듬다가 몸을 실었다.
"아,아퍼. "
이정란이 짧게 외쳤다.
"정말?"
"정말이잖구!"
이정란이 눈을 샐쭉거렸다. 그러나
어쩐지 부러 그러는 기색으로 느껴졌다.
"아직 산달은 멀었는데... "
"산달이 멀었다구 아프지 않을까?"
"그럼 어쩌지?"
"어쩌긴 뭘 어째요?"
이정란이 갑자기 까르르 웃어댔다.
"거짓말이었지?"
"그래요!"
"이런!그냥 두지 않겠어!"
"그냥 두지 않으면 어쩔 거예요?"
"죽여 주겠어!"
"어떻게?"
"이걸로 죽여 주겠어!"
"죽이기만 못해 봐!"
이정란이 또 다시 까르르 웃으며 남자를
품에 안았다. 그러자 남자가 재빨리
이정란에게 자신의 몸을 실었다. 이정란이
기꺼운 표정으로 남자의 목에 팔을 감고 두
다리를 허공으로 들어올렸다.
"좋아요?"
"응. "
은숙은 다시 몸을 떨었다 이정란과
남자가 관계를 하는 것을 보는데 자신이
더욱 견딜 수 없을 정도로 흥분이 되어
가고 있었다.
이정란과 남자가 관계를 끝낸 것은 얼추
0분이 지났을 때였다. 은숙은 그때서야
창에서 눈을 떼고 무겁게 한숨을 몰아
쉬었다. 그리고 그녀는 자신의 손으로
자극한 하체가 축축하게 젖어 있는 것을
깨달았다.
은숙은 그들이 눈치 채기 전에 서둘러
집으로 돌아왔다. 남자가 누구인지
확인하지 않은 것이 아쉬웠으나 그들의
관계를 훔쳐본 것이 겁이 났다.

2

집으로 돌아오자 은숙은 소파에 털썩
주저앉았다. 아직도 흥분과 떨림이
진정되지 않고 있었다. 눈 앞이 몽롱하고
주체할 수 없는 흥분이 전율처럼 전신으로
맹렬하게 번지고 있었다. 그녀의 눈 앞에는
립꼭품에 안고 몸부림치는 이정란과
남자의 넓은 등이 계속 어른거리고 있었다.
전화벨이 울리기 시작한 것은 그때였다.
은숙은 소파에서 일어나 수화기를
들었다.
"여보세요?"
"저 강 기자님 댁이죠?"
수화기 저쪽의 목소리는 젊은 여자의
것이었다.
"네. "
"저는 박 마르타 수녀예요. "
"네. "
은숙은 얼굴을 찡그리며 낮게 대답을
했다. 언젠가도 전화를 걸어온 일이 있는
수녀였다.
"댁에 김철구()씨 계시죠?"
"네. "
은숙은 머뭇거리며 대답했다. 2층 서재에
머물고 있는 사내가 김철구라는 이름을
갖고 있다는 것을 얼핏 들은 기억이 났던
것이다.
"김철구씨에게 전해 드릴 물건이 있는데
잠깐 나와 주시겠어요?"
"저요?"
"네. 부인께서 잠시 나와 주셨으면
하는데요. 김철구씨는 밖으로 나오면
아무래도 위험할 것 같아서요. "
"네. 그럴께요. "
은숙은 무슨 영문인지 알 수 없었으나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럼 지금 바로 안암교 옆에 있는
제과점으로 나오세요. "
"안암교 옆에 있는... ?"
"뉴욕제과라고 있죠?"
, "네. "
"댁에서 가까우니까 5분도 걸리지 않을
거예요. "
"금방 나갈께요. "
은숙은 전화를 끊었다. 자신도 모르게
긴장이 되고 있었으나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옷을 갈아 입고 밖으로
나오자 빗발이 굵어져 있었다. 은숙은 검은
우산을 쓰고 안암교를 향해 걸었다.
안암교는 대광고등학교 뒷편을 흐르는
안암천 위에 놓여 있는 다리였다.
뉴욕제과는 다리에서 고려대쪽으로 50보쯤
떨어져 있었다. 은숙이 가끔 가다가 식빵을
샀기 때문에 낯선 곳이 아니었다.
제과점으로 들어서자 회색 제복을 입은
수녀가 기다리고 있었다. 얼굴이 맑고
깨끗한 수녀였다.
"안녕하세요?뵙게 되어 반갑습니다. "
수녀가 먼저 은숙을 알아 보고 인사를
건넸다.
"안녕하셨어요?"
은숙도 엉거주춤 인사를 했다.
"전화만 드리다가 만나 뵙게 되어
기뻐요. "
"저도 기쁨니다. "
"댁에서 신세를 진 분들이 모두
고마워하고 있어요. 강 기자님도 강
기자님이지만 자매님께서 애를 많이
쓰신다고 들었어요. "
"전 그저 시키는대로 했어요. "
"겸손하시네요. "
수녀가 밝게 웃었다. 은숙은 어색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은숙도 중학교에 다닐
때는 성당에 다녔었다. 그 이후에는 성당을
않았으나 언제든지 기회가 오면
다시 다니리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수녀가
낯선 사람이기는 하지만 생경한 느낌은
없었다.
"김철구씨는 잘 계시죠?"
"네. "
"김철구씨에게 부인도 잘 계시다고 전해
주세요. 어제 경찰에서 풀려났는데
건강하다구요. "
"그럼 결혼하신 분인가요?"
"예쁜 딸도 있어요. "
"그럼 부인에게 다녀 가시라고 하시죠.
김철구씨가 댁에 돌아가기 어려운
형편이면... "
그러자 수녀가 곤혹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은숙은 수녀와 그녀 사이에 보이지
않는 벽이 가로막혀 있는 듯한 기분을
느꼈다.
"그렇게 되어야겠지요. 하지만 지금은
안돼요. 참 뭣 좀 드실래요?"
"우유 한 잔 마실께요. "
"그러세요. "
수녀가 종업원을 불러 우유 두 잔을
시켰다.
잠시 대화가 끊겼다. 은숙은 수녀에게서
시선을 거두고 밖에서 내리고 있는
빗줄기를 쳐다보았다. 수녀도 잠자코 밖을
내다보았다. 제과점 안은 조용했고
영화음악 태양은 가득히가 장엄하게
흐르고 있었다.
은숙은 다시 수녀에게 시선을 돌렸다.
수녀는 손가락에 끼고 있는 작은 반지를
계속 굴리고 있었다. 성당에 다니는
사람들이 로사리오 기도를 할 때 쓰는

"세상이 너무 끔찍하죠?"
이내 수녀가 다시 입을 열었다.
"네?"
"부군에게 들으셨겠지만 광주에서 일어난
일 반드시 하느님의 심판을 받을 거예요. "
수녀의 목소리가 단호했다. 은숙은
수녀가 무슨 뜻으로 그런 말을 하는지 알
수 없어서 미소로 얼버무렸다.
"이것 김철구씨에게 전해 주세요. "
수녀가 탁자 밑에 있는 검은 색의
가방에서 서류봉투를 꺼냈다.
"네. "
은숙은 그 서류를 받아 옆 자리에
놓았다.
"종교를 갖고 계세요?"
"중학교 때 충주에서 성당에 다녔어요. "
"그럼 영세는?"
"본명이 로사예요. "
본명은 세례명을 말하는 것이었다.
"어머!그러고보니 우리 자매님이셨군요?"
"지금은 냉담 중예요. "
"이번 주일에 명동 성당 미사에 참석해
보세요. "
"네. "
은숙은 선선하게 대답했다. 성당에 다시
나가겠다는 생각은 전에도 여러번 했었다.
은숙은 수녀와 한참동안이나 더 셈에
없는 얘기를 주고 받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수녀는 밖에까지 나와 은숙을 배웅했다.
집에 돌아오자 남편이 돌아와 있었다.
은숙은 수녀에게서 받은 서류봉투를
남편에게 전해 주었다.
"수녀님을 만났어?"
"네. "
"좋은 분이야... "
남편이 서류봉투를 들고 2층으로
올라갔다. 은숙은 2층으로 올라가는 남편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쳐다보다가 주방으로
가서 저녁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비는 밤에도 계속 내렸다.
은숙은 우울한 얼굴로 창밖에 내리는
빗줄기를 내다보았다. 남편은 또
김철구라는 사내와 서재에 틀어박혀
있었다.
은숙은 남편이 서재에서 내려올 기색이
보이지 않자 혼자서 침대에 누웠다. 빗소리
때문에 잠이 오지 않았다. 그러나
엎치락뒤치락하다가 겨우 잠이 들었다.
남편이 서재에서 내려온 것은
은숙이 침대가 출렁하는
느낌에 눈을 뜨자 남편이 침대에 몸을
눕히고 있었다.
은숙은 늘어지게 하품을 했다. 밖에는
아직도 비가 내리는지 창문이 덜컹대고
흔들리고 빗소리가 요란했다.
"더 자. "
남편이 피로한 기색으로 말했다.
"아직까지 서재에 있었어요?"
"응. "
"무슨 얘기가 그렇게 길어요?"
"얘기는 무슨... "
"난 너무 심심해요. 정말 요즈음은
생과부가 된 기분예요. "
"쓸데없는 소리는... "
"앞집 여자 말이예요. "
은숙은 손을 뻗어 남편의 손을 잡았다.
"누구?"
은숙은 남편의 손을 제 가슴 위에 얹어
놓았다.
"군인 부인이요. "
"그 여자가 뭐?"
남편이 그때서야 은숙의 가슴을 애무하기
시작했다. 은숙은 남편의 옆으로 몸을 바짝
밀착시켰다.
"남자를 집으로 끌어들이고 있어요. "
은숙은 남편을 향해 낮게 속삭였다.
"무슨 소리야?"
남편이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물었다.
"바람을 피운단 말예요. "
"어떻게 알아?"
"내가 봤어요. "
"바람 피우는 걸?"
"아까 심심해서 앞 집 여자와 얘기나
"할려고 갔더니 대문이 열려 있대요. 그래서
안으로 들어가니까 이상한 신음소리가
들리는 거예요. "
은숙은 잠시 얘기를 멈추었다. 앞 집에
들어갔다가 그 여자가 외간남자를 끌어안고
허우적거리는 것을 몰래 훔쳐보았다는
얘기를 차마 남편에게 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그래서 얼른 밖으로 나왔어요. "
"그걸루 어떻게 바람을 피웠다고 단정을
해?"
"나중에 2층에서 보니까 그 집 대문
안에서 둘이 열렬하게 포옹을 하던대요?"
은숙은 입술을 삐쭉 내밀었다. 나도
그렇게 열렬하게 관계를 하고 싶다고
남편에게 쏘아주고 싶었으나 그럴 수가
없었다.
"그래?"
남편이 맨숭맨숭한 표정으로 대꾸했다.
은숙은 또 다시 눈 앞에 이정란의 벌거벗은
나신에 몸을 싣고 있던 남자의 넓은 등을
떠올렸다. 그러자 가슴이 뛰고 숨이 가뻐
왔다.
은숙은 손을 뻗어 남편의 하체로
가져갔다. 남편은 얇은 삼각형 속옷 한
장을 걸치고 있었다. 은숙은 속옷 위로
남편의 그것을 애무했다. 남편의 그것이
서서히 부풀기 시작하고 있었다.
"광주에서 무슨 일 있었어요?"
은숙은 남편의 얼굴을 조심스럽게
살폈다.
"아니..."
남편이 대수롭지 않은 표정으로
대꾸했다.
"당신 꿈자리가 사나운 모양예요."
"왜?"
"잠을 자면서 헛소리를 하고... 식은
땀을 흘려요."
"몸이 약해서 그래."
남편의 눈은 먼 허공을 쫑고 있었다.
"가위가 놀려..."
"어떤 가위인데요?"
"..."
남편이 잠시 입을 다물었다. 은숙은
남편이 입을 열 때까지 잠자코 기다렸다.
골목에서 신문을 배달하는 소년과 우유를
배달하는 사람들의 발자국 소리가 들렸다.
"총..."
"총?"
"어느 골목을 가고 있는데 누군가 나를
따라오는 거야. 그래서 뒤를 돌아보면
누군가 나를 향해 총을 쏘는 거야...
현실처럼 생생해서 견딜 수가 없어."
남편의 목소리가 깊게 가라앉아 있었다.
"누군지 봤어요?"
"못봤어. 너무 무서워서..."
"그냥 꿈이네요."
"대검으로 나를 찌르기도 하고..."
"가위가 원래 그래요."
"어떤 여자의 가슴을 도려내기도
하고..."
남편의 말에 은숙은 얼굴을 잔뜩
찡그렸다. 그것은 광주사태가 절정에
이르고 있을 때 계엄사에서 발표한
담화문에도 들어 있었다. 계엄사의
담화문은 불순분자의 유언비라며 경상도
군인들이 광주 사람들 씨를 말리러
왔다공수부대가 대검으로 여자의 유방을
도려냈다라는 말이 나돌고 있으니 광주
시민들은 현혹되지 말라고 당부했던
것이다. 그 발표를 나오자 유언비어가
아니고 사실일 것이라는 소문이 파다하게
나돌았고 그런 유언비어가 공연히
나돌았겠느냐며 계엄사의 발표를 믿지
않으려는 사람도 많았다.
은숙은 아무리 공수부대가 잔인해도 그런
일을 저지를 리 없다고 믿고 있었다.
"광주에서 그런 일이 진짜 있었어요?"
"있었다고 그래..."
"당신이 직접 목격했어요?"
"아니."
"그럼 목격한 사람을 봤어요?그렇게
가슴이 도려내져 희생 당한 사람이던가...
?"
"아니."
"그럼 왜 그런 것을 생각해요?"
"광주 사람들은 모두 믿고 있어..."
은숙은 입을 다물었다. 남편의 말에 무엇
때문인지 알 수 없었으나 가슴이 답답해
왔다.
"이거 벗어요. "
은숙은 자신의 속옷을 벗으며 남편에게
말했다.
남편이 그때서야 속옷을 벗고 그녀에게
몸을 실어 왔다.
"아!"
은숙은 두 팔을 남편의 목에 감고 무릎을
열었다. 밖에는 벌써 어슴푸레하게 동이 터
오고 있었다.

3권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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