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 간 을 찾 아 서 제 2 권
이수광
차 례
작가소개
제 21 장 검은 고양이
제 22 장 타임머신
제 23 장 밤의 암살자
제 24 장 슬픈 사랑
제 25 장 은하 시대
제 26 장 우주를 향하여
제 27 장 망각의 강
제 28 장 피그미족
제 29 장 제국탈출
제 30 장 외계생명체
제 31 장 보이지 않는 눈
제 32 장 외계인을 찾아서
제 33 장 반인반수
제 34 장 여신 누네즈
제 35 장 반제동맹
제 36 장 여신탄생
제 37 장 신비제국
제 38 장 신화의 날
제 21 장 검은 고양이
장애란은 이리노 퍼그스의 가방을 들고 현관까지 배
웅했다. 이리노중위가 손을 가볍게 흔든뒤 자전거를
타고 달리기 시작했다.
밖에는 아직도 비가 오고 있었다. 그러나 빗발이 굵
지는 않았다.
장애란은 이리노중위가 자전거를 타고 멀어지는 것
을 보다가 가슴이 싸하게 저려왔다. 문득 이리노중위
가 남편이고 자신이 그의 아내가 되어 아침마다 출근
길에 사랑의 키스를 나누고 배웅하는 모습을 머릿속에
아련히 떠올렸던 것이다.
(내가 왜 이런 생각을 하지...?)
장애란은 고개를 살래살래 흔들었다. 지난 밤에는
감기를 심하게 앓는 척했었다. 그녀는 초저녁부터 끙
끙 앓는 척하다가 소파에서 잠이 들었다. 그러자 이리
노중위가 침실에서 나와 그녀를 안아다가 방에 눕히고
약을 먹여 주었다.
장애란은 그 약을 먹고 감기가 낳았다. 새벽에 눈을
뜨자 이리노중위가 자신을 친절하게 보살펴 준 일이
생각났다. 그를 유혹하기 위한 위장이었지만 그녀는
아직까지 그러한 친절을 받아본 일이 없었다.
그녀는 벌판에서 태어나고 벌판에서 자랐다. 거의
짐승 같은 생활이었다.
어느 날 바르시크대령이라는 이름으로 알려져 있던
하데스의 한 지도자가 그녀를 발견했다. 그후 그녀는
하데스의 바르시크대령에 의해 양육되다가 사관학교에
보내졌다. 그리고 사관학교를 졸업하고 소위로 임관된
뒤 얼마 지나지않아 죽음의 벌판이라는 지옥훈련에 투
입되었다. 그녀는 아무도 통과하지 못한 그 훈련을 무
사히 통과하여 블랙버드 애브너소령 대신 유러너스 제
국에서 첩보전을 수행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녀에게는 가족이 하나도 없었으나 바르시크대령
은 위장 가족을 만들어 주었고 블랙버드 애브너소령
도 가족의 구성원이 되었다. 그러나 가족의 따뜻함이
나 소중함을 느낄 수는 없었다. 그녀에게 그러한 감정
을 느끼게 해준 사람은 이리노중위뿐이었다. 이리노중
위는 그녀가 하인에 지나지 않았으나 여동생처럼 대해
주고 있었다.
(그는 어제 나를 가질 수 있었는데도 가지지 않았어
)
장애란은 그 사실이 기쁘면서도 허전했다. 이리노중
위가 다른 사람들처럼 그녀를 한낱 노리개로 여기고
가지려 하지 않았다는 것은 그가 성실한 사람이라는
증거도 되었으나 그녀에게 매력을 느끼지 못했다는 증
거도 되는 것이다. 그녀는 이리노중위가 자신을 여자
로 보고 있지 않은 것이 쓸쓸했다.
(나는 그를 사랑하면 안돼!)
장애란은 거기까지 생각을 하다가 세차게 고개를 흔
들었다. 그녀는 사피언스 그라운드가 블랙버드 애브너
소령 대신 파견한 스파이였다. 사랑에 빠져서는 안되
는 것이다. 그런데 그의 눈을 보고 있으면 가슴이 두
근거리고 얼굴이 화끈거리는 것은 무엇때문일까.
사피언스 그라운드는 유러너스 제국을 붕괴시킬 모
종의 거대한 프로젝트를 세워놓고 있었다. 그 계획의
일부로 애브너소령과 하데스의 행동대원들까지 희생시
킨 것이었다.
장애란은 이리노중위의 모습이 보이지 않자 행주치
마를 두르고 청소를 하기 시작했다. 일단 이리노중위
의 하인으로서 충실해야 했다.
다음에 장애란은 이리노중위의 지문(指紋)을 조심스
럽게 떴다.
유러너스 제국의 거의 모든 컴퓨터는 오른 손 엄지 손
가락을 모니터에 터치하는 것으로 작동이 되게 되어
있었다. 그런 까닭에 다른 사람은 컴퓨터를 사용할 수
가 없었다.
장애란은 이리노중위의 지문을 실리콘으로 뜬 뒤에
자신의 오른 손 엄지 손가락에 씌웠다. 그리고 이리노
중위의 모니터에 터치했다. 그러자 컴퓨터에 녹색 화
면이 뜨고 여러 가지 파일이 차례로 떠올랐다.
바르시크대령으로부터 연락이 온 것은 이리노 퍼그
스중위가 출근을 한 뒤 한 시간이 지나서였다. 장애란
이 이리노중위의 컴퓨터에서 비밀경찰국으로 접속을
시도하려고 했을 때였다.
장애란은 시장 바구니와 우산을 들고 집을 나섰다.
바르시크대령과의 첫 번째 접선이었다. 그녀는 바르시
크대령이 유러너스 제국에서 어떻게 활약하는지 자세
히 알지 못했다. 지난 번에 블랙버드인 애브너소령의
장례식에 바르시크대령이 나타난 것은 알고 있었으나
변장을 하는 바람에 알아볼 수 없었다.
장애란은 주택가를 빠져 나오자 번화가로 천천히 걸
었다. 길에는 벚꽃이 자욱하게 떨어져 있었다.
닷새째 계속 되는 비였다. 봉선화 혜성의 침입으로
지구의 환경이 변화되었다고는 하지만 사피언스 그라
운드에는 비가 오지 않고 유러너스 제국에만 비가 오
고 있다는 사실이 장애란은 기분이 좋지 않았다.
"이리노중위의 컴퓨터를 검색해 봤어?"
바르시크대령은 카페 베아트리체에 앉아 있었다.
"네. 특별한 것은 없었어요."
"이리노중위는 어디까지 접속할 수 있어?"
"2급 비밀파일까지요"
"그럼 코스모스 과학센터를 접속해. 특히 타임스터
디의 타임플랜에 대해서 알아봐."
"네."
"빠른 시일 내에 해야 돼. 우리에게는 시간이 별로
없어. 그리고 시간이 있으면 유러너스 제국의 주민들
에 대해서도 알아봐. 유러너스 제국의 주민들 20만명
이 지난 몇 년 동안에 행방불명이 되었어. 그들의 행
방을 찾아봐."
"네."
바르시크대령으로부터의 지시는 그것뿐이었다.
장애란은 바르시크대령과의 접선을 마치고 무인 슈
퍼마켓에 들려 식료품을 몇 가지 샀다. 그러나 집에
돌아오면서 선글라스에 부착된 반사경으로 뒤를 살피
자 젊은 남자가 뒤를 따라오고 있었다.
(미행자야!)
장애란은 가슴이 철렁했다. 미행자는 계속 그녀의
뒤를 따라오고 있었다. 장애란은 미행자가 눈치 채지
못하게 한적한 곳으로 걷기 시작했다. 어떻게 하던지
미행자를 따돌려야 했다.
그러나 미행자는 일정한 보폭을 유지하면서 장애란
을 계속 따라오고 있었다.
장애란은 전신이 팽팽하게 긴장되는 것을 느꼈다.
장애란은 지하철로 걸어 내려갔다. 지하철에는 사람
이 별로 없었다. 그녀는 열차가 플랫트홈으로 들어오
자 지하철을 탔다. 고속 지하철이었다. 선글라스에 부
착된 반사경으로 뒤를 살피자 미행자도 지하철에 올라
타고 있었다.
장애란은 두 번째 정거장에서 내렸다. 반사경으로
뒤를 살피자 미행자도 따라 내리고 있었다.
장애란은 천천히 지상으로 걸어 올라갔다. 그 곳은
아라크네시 시청 앞이었다. 번화가라 사람들이 어깨를
부딪치며 물결처럼 흐르고 있었다. 장애란은 선글라스
를 벗었다. 길에는 그녀처럼 젊은 여자는 거의 없었
다.
아라크네시의 젊은 여자들은 모두 학교에 있거나 공
장, 그렇지 않으면 직장에 있을 터였다. 아라크네시에
는 실업자가 없었다.
장애란은 문화가 쪽으로 걸었다. 시청에서 오른 편
에는 문화의 거리가 형성되어 있어서 극장, 서점, 갤
러리가 즐비했다. 장애란은 갤러리 앞에서 서성거리는
체하다가 서점에 들어가서 책 한 권을 사서 시장 바구
니에 넣었다. 서점의 윈도우로 밖을 살피자 미행자는
극장 모퉁이에서 이쪽을 살피고 있었다.
장애란은 서점을 나오자 선글라스를 쓰고 계속 걸었
다
(끈질기게 따라 오는군 )
미행자는 여전히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면서 따라오
고 있었다.
장애란은 쓰레기통 앞에서 멈춰 섰다. 그리고 주위를
살피는 체하며 서점에서 산 책과 허리띠에서 뽑은 핑
거(Finger)폭탄을 쓰레기통에 집어넣었다. 핑거폭탄은
손가락 크기의 폭탄으로 허리띠에 붙어있는 리모트콘
트롤로 폭발시키게 되어 있었다.
장애란은 선글라스의 반사경으로 미행자를 살폈다.
미행자는 그녀의 행동을 주의 깊게 살피고 있었다.
(흥!)
장애란은 미행자를 살피며 계속 걸었다. 그리고 미
행자가 쓰레기통에 가까이 와서 손을 집어넣을 때 허
리띠에 붙어있는 리모트콘트롤을 눌렀다. 그 순간 쓰
레기통에서 요란한 폭음이 일어나며 불기둥이 하늘 높
이 치솟았다. 미행자는 불기둥과 함께 하늘로 퉁겨져
올랐다가 떨어졌다.
"깨끗하군."
장애란은 그때서야 이리노중위의 집을 향해 걸음을
천천히 떼어놓기 시작했다.
집에 돌아오자 날씨가 서서히 개고 있었다. 장애란
은 이리노중위의 컴퓨터에서 아라크네시 시청으로 접
속했다. 그는 시청의 시민 명단에서 건축가를 뽑았다.
아라크네시에서 건축에 종사하는 사람은 잡다한 사람
들까지 약 3천명이나 되었다.
"명단을 복사해."
장애란은 그 중에서 중요한 인물들만 2백명을 추렸
다. 그리고 자신의 팜탑 컴퓨터(손바닥위에 올려놓고
쓰는 초소형 컴퓨터)에 그들의 명단을 복사하라는 지
시를 내렸다. 팜탑은 음성인식으로 되어 있어서 그녀
의 명령이 떨어지자 즉시 명단을 복사했다.
(우선 이자부터 찾아봐야겠어 )
장애란은 아라크네시의 건축기사 기다 가와류(喜多
川龍)를 클릭했다. 기다 가와류는 일본계로 1급 건축
기사 자격증을 갖고 있었다.
성명 : 기다 가와류
인식번호 : 3412131024134
출신 : 유러너스 제국 세라스시(市)
주소 : 아라크네시(市) 엔지니어하우스 307호
직업 : 1급 건축기사
기타 : 기다 가와류는 1급 건축기사로 돔식 건
물 건 축에 탁월한 능력을 갖고 있음. 현재 1급 비밀
인 국가 건설업무에 종사하고 있음. 자세한 내용은 유
러너스 제국 경찰국 로즈로 접속할 것.
경찰국 로즈는 비밀경찰국의 슈퍼 컴퓨터를 말하는
것이었다. 장애란은 유러너스 경찰국의 로즈에 접속했
다. 그러자 비밀경찰국의 슈퍼 컴퓨터는 그녀의 접속
을 거부했다.
비밀경찰국 슈퍼컴퓨터는 장애란이 접근할 수 없게
보안시스템이 가동되어 있었다.
귀하는 경찰국 슈퍼컴퓨터 로즈에 접근할 수 없습
니다. 로즈는 일반행정을 취급하지 않고 있습니다. 귀
하가 계속 접속을 시도하면 국가기밀접근죄로 처벌받
게 됩니다
장애란은 비밀경찰국의 컴퓨터에 재접속을 중단했
다. 더 이상 접속을 하려고 했다가는 비밀경찰국으로
부터 역추적을 당할 우려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 대
신 장애란은 행방불명이 된 유러너스 제국 시민들을
무작위로 추출하여 접속해 보았다. 그러나 그들의 인
적사항란에는 기이할 정도로 국가기밀업무 종사 또는
행방불명이라는 단어만 입력되어 있었다.
(20만명이나 아크라네시에서 사라지다니 )
장애란은 다른 시민들도 검색을 해보았으나 한결같
이 1급 기밀인 국가건설 업무에 종사하고 있다거나 행
방불명이라고만 입력되어 있었다. 장애란은 컴퓨터를
껐다.
국가기밀업무 종사 또는 행방불명이 된 사람들은 유
러너스 비밀경찰국에 의해 살해되었을 지도 몰랐다.
그러나 그들이 20만 명이라는 대규모의 시민들을 살해
한다는 것도 어쩐지 타당성이 없는 것으로 여겨졌다.
다만 20만명이 유러너스 제국에서 사라진 배경에는 무
엇인가 거대한 음모가 도사리고 있을 것으로 추정되었
다.
오후에 장애란은 이리노중위의 에어카를 타고 아라
크네시의 엔지니어 하우스로 향했다. 일본계 건축기사
기다 가와류가 그곳에 살고 있었다.
307호는 문이 잠겨 있었다. 장애란이 팜탑을 이용해
암호를 해독한 뒤에 문을 열고 들어가자 기다 가와류
의 아파트는 오랫동안 비워둔 듯 먼지가 수북히 쌓여
있었다.
장애란은 기다 가와류의 아파트를 샅샅이 수색했다.
그러나 기다 가와류의 아파트에서는 아무 것도 발견할
수 없었다.
장애란은 이리노중위의 집으로 돌아와 저녁을 준비
하기 시작했다. 저녁은 이리노중위 혼자 먹는 것이라
그다지 오랜 시간이 걸리지는 않았다. 그러나 장애란
은 정성껏 저녁을 준비했다.
"어서 오십시오. 주인님."
이리노중위가 직장에서 돌아온 것은 저녁 6시가 되
어서였다. 장애란은 재빨리 이리노중위의 가방을 받고
옷을 벗는 것을 도와주었다. 그리고 목욕물을 준비했
다. 그때 초인종이 울렸다.
"이리노중위는 퇴근했나?"
장애란이 현관문을 열고 밖을 내다보자 경찰제복을
입은 여자가 서 있었다. 장애란은 가슴이 철렁했다.
혹시라도 자신의 스파이 행각이 발각된 것이 아닌가하
여 겁이 덜컥 났던 것이다. 여자경찰은 비수처럼 차가
운 눈으로 장애란을 쏘아보고 있었다.
"네. 누구라고 여쭐까요?"
장애란은 조심스럽게 여자경찰을 응시했다.
"로즈. 이리노중위는 내가 누군지 모를 것이다."
"주인님께 말씀 올리겠습니다."
여자경찰은 장애란이 들어오라는 말을 하지 않았는
데도 집안으로 성큼성큼 들어왔다.
"주인님. 로즈라는 경찰이 찾아 왔습니다."
장애란은 욕실에서 샤워를 하는 이리노중위에게 방
문자가 있다는 것을 알렸다. 그러나 이리노중위는 고
개부터 흔들었다.
"누군지 모르는 사람인데 잠시 기다리시라고 해."
"예. 주인님."
장애란은 이리노중위가 고개를 흔들었으나 분명히
여자경찰 로즈와 모종의 관계가 있다고 추측했다.
장애란은 거실로 돌아왔다. 로즈 국장은 코트를 벗
어들고 거실을 둘러보고 있었다.
"주인님께서 잠시 기다리시랍니다. 주인님께서는 지
금 샤워중이십니다."
"그래? 알았어."
로즈 국장이 코트를 장애란에게 주었다. 장애란은
그것을 거실에 있는 옷걸이에 걸었다.
이리노중위가 욕실에서 나온 것은 5분쯤 지나서였
다.
"지나가는 길에 들렸네. 내 이름은 로즈야. 자네 아
버지를 잘 아 는 사람이지. 유러너스 제국 비밀경찰
국장일세."
장애란은 로즈 국장의 말을 듣고 또 다시 가슴이 철
렁했다. 비밀경찰국 총책임자 로즈 국장. 사피언스 그
라운드에는 그녀의 이름이 악마의 대명사로 알려져 있
었다.
"아, 예 "
이리노중위가 재빨리 거수경례를 했다.
"쉬어. 개인적인 방문이니까. 아버지는 안녕하신
가?"
"예."
로즈 국장이 이리노중위의 얼굴을 뚫어질 듯이 살폈
다. 이리노중위는 당황한 표정으로 장애란을 쳐다보고
다시 로즈 국장을 쳐다보았다. 자신도 로즈 국장의
방문을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
"아직도 어릴 때의 모습이 그대로 남아 있군. 그만
가보겠네."
로즈 국장은 복잡미묘한 눈빛으로 이리노중위를 살
피고 있었다.
"저녁이라도 드시고 "
이리노중위의 말에 로즈 국장의 얼굴이 밝게 빛났
다. 그녀는 마치 그 말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같은 표
정이었다. 그러나 그 표정이 금세 차갑게 바뀌었다.
"아니야. 다음에 정식으로 초대해 주게."
"예."
"코트."
로즈 국장이 장애란을 향해 손을 내밀었다. 장애란
은 재빨리 옷걸이에 걸려있는 코트를 벗겨 그녀에게
주었다. 이리노중위가 로즈 국장을 차가 있는 곳까지
배웅했다.
(이상한 일이군. 유러너스 제국의 비밀경찰 총책임
자가 이리노중위를 찾아오다니 )
장애란은 커튼 사이로 밖을 내다보며 고개를 갸우뚱
했다.
이튿날 장애란은 바르시크대령을 다시 접선했다.
"그건 이미 알고 있던 일이야."
바르시크대령은 아라크네시의 시민 20만명이 국가기
밀업무 종사 또는 행방불명이라고 보고하자 차갑게 말
했다. 장애란은 로즈 국장이 이리노중위를 찾아왔던
일을 얘기했다.
"그건 뜻밖의 소득이군."
"어떻게 하죠?"
"로즈 국장의 코트에 도청기를 달아."
"도청기를요?"
"우리는 카메라칩과 사운드마스터까지 내장된 도청
기를 개발했어. 옷 안쪽에 이 도청기를 부착하면 상대
방의 옷을 뚫고 그 앞에 있는 사물이 우리 모니터로
전송되지."
장애란은 고개를 끄덕거렸다. 적국에서의 스파이 활
동은 언제나 첨단장비가 필요했다.
"내일 도청기를 보내 줄께. 그리고 이리노중위를 가
능한 빨리 네 남자로 만들어."
"그는 아직 저를 여자로 생각하지 않아요."
"장애란소위는 암호명이 검은 고양이야. 검은 고양
이라면 그런 일쯤은 척척 해치워야지 "
바르시크대령의 질책에 장애란은 입술을 지그시 깨
물었다.
이리노중위를 그녀의 남자로 만드는 것은 그다지 어
려운 일이 아니었다. 그러나 한 번의 섹스를 했다고
해서 이리노중위가 그녀의 남자가 된다는 것은 얼마나
단순한 생각인가. 바르시크대령은 첩보사령관이면서도
남녀관계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
"장애란소위는 열 여섯 살의 어린 소녀로 위장을 했
어. 키도 작고 얼굴이 앳되기 때문에 얼마든지 가능
해. 남자들에게는 어린 소녀를 좋아하는 야수적인 본
능이 있으니까 한번만 섹스를 하면 이리노중위는 장애
란소위의 남자가 될거야."
"알겠습니다."
"이번 임무만 성공하면 우리는 장애란소위를 2계급
특진시킬 거야."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장애란은 바르시크대령에게 깍듯이 대답했다. 2계급
특진이면 대위가 되는 것이다. 바르시크대령이 창설한
사피언스 그라운드의 특수부대에서는 전례가 없는 일
이었다.
그날 저녁 장애란은 이리노중위가 마시는 술에 강력
한 최음제 성분이 섞인 수면제를 탔다. 술에 최음제
성분이 섞인 수면제를 타는 것은 가장 원시적인 방법
이기는 하지만 가장 수월한 방법이기도 했다. 게다가
유러너스 제국은 러브타임 때문에 시민들이 언제나 하
시시술을 마시고 있었다. 그들이 뛰어난 과학문명을
지니고 있지만 맑은 정신을 갖고 있지 않은 것도 하시
시술의 여파였다.
이리노중위가 수면제로 인해 잠이 든 것은 10시가
조금 지나서였다. 이리노중위는 그녀가 흔들어 깨워도
세상모르고 자고 있었다. 장애란은 이리노중위를 안고
침실로 가서 침대에 눕혔다.
(이리노! 넌 이제 나의 포로가 되어야 돼!)
장애란은 침대에 눕혀져 있는 이리노중위의 옷을 하
나하나 벗기기 시작했다. 이내 젊고 건강한 남자의 나
신이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장애란은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아름다워 )
장애란은 흥건한 미소를 지으며 자신의 옷을 벗기
시작했다. 부라우스의 단추를 따고 스커트의 호크를
풀렀다. 그러자 스커트가 저절로 발밑으로 흘러내려
갔다. 그녀는 부라우스를 벗어 던졌다.
이내 매끄럽고 아름다운 그녀의 나신이 드러났다.
투명하게 아름다운 여체였다.
장애란은 옷을 모두 벗자 침대로 올라가서 이리노중
위의 몸위에 바짝 엎드렸다. 이런 일은 군대에서도 훈
련을 받지 않아도 얼마든지 할 수 있는 일이었다. 그
러나 그녀가 속한 첩보부대에서는 이런 일까지 철저하
게 훈련을 시켰다.
이리노중위가 보드랍고 매끄러운 감촉과 하체에서
뻐근한 기운이 전신으로 번지는 듯한 기분을 느끼고
눈을 떴을 때 그는 자신의 복부에 앉아 있는 알몸의
여자를 발견했다.
아
여자의 살결은 우유빛으로 투명했고 가냘펐다. 장애
란이었다. 그녀의 눈이, 기이한 광채를 띄고 있었다.
그는 스르르 눈을 감고 장애란에게 자신의 몸을 맡
겼다.
한밤중이었다. 사방은 캄캄했다. 그러나 창밖에는
바람이 이는지 나뭇잎을 스치는 바람소리가 스산하게
들리고 있었다.
이리노중위는 눈을 감은 채 장애란의 입술과 혀의
감촉을 음미했다. 장애란이 몸을 돌렸다.
"애란 "
이리노중위는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장애란을
향해 간신히 을 열었다. 장애란으로부터 혀와 입술을
이용한 애무를 받는 것은 온 몸이 떨릴 정도로 좋았으
나 문득 그녀가 열 여섯 살이라고 말한 기억이 떠올랐
던 것이다.
장애란은 하인과 같은 존재였다. 장애란이 원하지
않더라도 이리노중위는 강제로 그녀와 섹스를 할 수도
있었다. 유러너스 제국의 시민들 대부분이 하인들과
섹스를 하고 있었다. 사피언스 그라운드 출신의 하인
을 선발할 때 미모와 풍만한 몸매가 기준이 되는 것도
그 까닭이었다. 그러나 이리노중위는 어린 소녀와 섹
스를 하는 것이 옳지 않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주인님."
장애란의 눈에서 고양이의 눈 같은 강렬한 요기(妖
氣)가 뿜어졌다.
"이러면 안돼."
"주인님."
"애란은 나이가 어려."
"주인님에게 저를 바치고 싶어요. 주인님. 저를 버
리지 마세요."
장애란이 안타깝게 호소하는 시늉을 했다.
"애란 "
그러나 이리노중위는 더 이상 말을 할 수가 없었
다. 장애란이 허리를 가볍게 움직이자 그의 몸이 어느
사이에 장애란의 몸속에 깊숙이 들어가 있었던 것이
다.
(아!)
이리노중위는 눈을 감았다. 어쩐지 장애란의 얼굴을
똑바로 쳐다볼 수가 없었다.
"저는 주인님 것이에요."
그러자 장애란이 그의 가슴위로 바짝 엎드렸다. 이
제 그의 몸은 그의 것이 아니었다. 그의 몸은 애욕으
로 뭉쳐져 있는 장애란의 동굴속을 자신의 의지와 상
관없이 가득 채우고 있었다.
이리노중위는 몸을 떨었다. 탐험이 시작되고 있었
다. 미지의 동굴에 대한 탐험, 단순한 듯하면서도 무
한한 신비가 숨겨져 있는 동굴 그 깊고 깊은 동굴을
탐험했다.
여자의 동굴이란 얼마나 신비스러운 곳인가.
이리노중위와 장애란의 격렬한 정사가 끝난 것은 한
시간이 훨씬 지나서였다. 장애란은 만족했다. 이리노
중위와의 섹스는 달콤하고 새큼했다. 비록 그를 유혹
하기 위한 섹스였으나 그는 파트너로서 만족스러운 몸
을 갖고 있었다.
"이리노중위! 자네는 이제 나의 포로야."
장애란은 잠이 든 이리노중위의 몸을 따뜻한 수건으
로 닦아주며 낮게 속삭였다. 그는 섹스 뒤의 기분좋은
피로와 최음제 성분이 섞인 수면제로 인해 혼곤하게
잠들어 있었다.
밤이 깊어져 갔다.
장애란은 샤워를 한 뒤에 이리노중위의 옆에 누웠
다. 이제는 그의 하인이 아니라 그의 여자였다.
"애란 "
이리노중위가 잠결이면서도 그녀의 품속을 파고들었
다. 장애란은 아기를 안 듯이 이리노중위의 머리를 안
아서 그녀의 가슴으로 끌어당겼다. 이리노중위의 얼굴
이 그녀의 가슴에 닿았다.
밤은 더욱 깊어갔고 바람소리도 점점 거칠어져 가고
있었다. 그러나 이리노중위를 가슴에 안은 장애란은
서서히 포근하고 달콤한 잠에 빠져 들어갔다.
제 22 장 타임머신
타임머신 아르고 24호의 승선 명령을 받았을 때 이
리노중위는 감격에 넘치기에 앞서 장숙희의 동생 장애
란에 대한 걱정이 앞섰다. 그는 자신이 제4차원의 세
계인 시간탐사를 하는동안 장애란이 혼자서 집에 있는
것이 걱정스러웠다.
장애란이 그의 집에 온지 벌써 2개월째였다. 장애란
은 이제 그의 하인이 아니라 연인이었고 사랑이었다.
그는 자신이 장애란에게 정신없이 몰입하는 것을
이해할 수 없었다. 이런 일은 처음이었다. 장숙희가
그의 정부였을 때도 이리노중위는 그토록 몰입하지는
않았었다. 장숙희가 사랑스럽고 아름다운 여자인 것은
분명했으나 장애란처럼 그의 마음을 사로잡지는 못했
었다. 장애란은 여리디 여린 소녀였다. 그러나 잠자리
에서는 누구보다도 깊고 풍부했다. 그것은 참으로 이
해할 수 없는 현상이었다.
(장애란을 어머니에게 부탁하는 수 밖에 없어!)
이리노중위는 장애란을 로즈 국장에게 부탁하기로
했다. 이리노중위가 로즈 국장이 어머니라는 사실을
안 것은 그녀가 두 번째로 이리노중위의 집을 방문했
을 때였다. 그날도 봄날씨답지 않게 제법 굵은 빗줄기
가 쏟아지고 있었다. 로즈 국장은 우산도 쓰지 않은
채 포도주 한 병을 들고 그를 찾아왔던 것이다.
"내가 너무 늦게 방문했나?"
로즈 국장은 현관에 넋이 나간 표정으로 서 있었다.
그녀의 코트에서 흘러내리는 빗물이 현관 바닥을 흥건
히 적시고 있었다.
"괜찮습니다."
"초대를 하지 않기에 혼자서 왔네."
"잘하셨습니다."
이리노중위는 로즈 국장의 모자와 코트를 받아서 장
애란에게 주었다.
"건조기에 말리겠습니다."
장애란이 그것을 재빨리 받아서 욕실로 가져갔다.
로즈 국장은 장애란에게는 관심조차 없었다.
이리노중위는 로즈 국장을 거실로 안내했다.
"이리노중위!"
로즈 국장은 거실에 앉자 아무 말도 없이 포도주만
거푸 세 잔을 마신뒤에 입을 열었다.
"예."
"내가 왜 자네를 방문하는지 알고 있나?"
"잘 모르겠습니다."
"내가 자네의 어머니일세."
로즈 국장은 비가 퍼붓는 창밖을 내다보며 전쟁중에
로버트 퍼그스를 만난 일과 이리노중위를 낳은 뒤에
다시 전선으로 떠난 사실을 자세히 얘기했다. 이리노
중위는 처음에 반신반의했으나 로즈 국장이 눈물까지
흘리는 것을 보고는 사실이라고 믿게 되었다. 그러나
로즈 국장에게 어머니라는 말은 선뜻 나오지 않았다.
"내가 자네를 찾아온 것은 어머니라는 것을 알리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냥 보고 싶어서일세. 무슨 일 때문
인지 모르겠지만 자네의 얼굴이 자꾸 눈앞에 어른거려
아무 일도 할 수가 없었네."
" "
"나는 자네에게 아무 것도 바라지 않네."
" "
"내가 자네를 방문하고 싶을 때 방문을 할 수 있게
허락만 해주면 고맙겠네."
"그렇게 하시죠."
이리노중위는 착잡한 기분으로 대답했다. 아직 어머
니라고 부르고 싶지는 않았으나 방문을 막고 싶지도
않았다. 그녀가 어머니라면 로마노즈에 있는 어머니는
그를 키운 양모(養母)에 지나지 않고 여동생도 동생이
아닌 것이다.
"고맙네."
로즈 국장의 눈에 갑자기 물기가 괴었다.
이리노중위도 공연히 가슴이 찡해 왔다.
"내가 도와 줄 일은 없겠나?"
"없습니다."
"그렇겠지. 허지만 아무 때나 내가 도울 일이 있으
면 말해 주게. 내가 기꺼이 도와주겠네."
"그렇게 하겠습니다."
"자네를 위해서 내 컴퓨터 접속번호를 가르쳐 주겠
네. 언제든지 들어와서 메시지를 남기게."
로즈 국장은 연필로 자신의 컴퓨터 접속번호를 써주
었다. 유러너스 제국의 모든 컴퓨터는 접속번호만 있
으면 전국 어디서나 컴퓨터를 켜고 사용할 수 있도록
온라인화 되어 있었다.
"예."
이리노중위는 로즈 국장의 컴퓨터 점속번호를 주머
니 속에 갈무리했다.
"잘 간수하게. 내 컴퓨터에는 유러너스 제국의 국
가기밀이 저장되어 있으니까 그것이 사피언스 그라운
드로 넘어가면 우린 끝장이야."
"알겠습니다."
"그만 가겠네."
로즈 국장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러자 장애란이
재빨리 건조기에서 말린 코트와 모자를 가지고 나왔
다. 로즈 국장은 천천히 코트를 입고 모자를 쓴 뒤 장
애란을 빤히 쳐다보았다. 장애란은 조용히 고개를 숙
였다.
"한 번 안아 보고 싶은데 "
로즈 국장이 간절한 눈빛으로 이리노중위를 쳐다보
았다.
이리노중위는 잠자코 로즈 국장에게 다가갔다. 그러
자 로즈 국장이 힘껏 이리노중위를 껴안았다. 장애란
은 슬그머니 자리를 비켜주었다.
이리노중위는 시간여행선 아르고호를 타는 동안 장
애란을 돌봐줄 것을 로즈 국장에게 부탁했다. 로즈 국
장이라면 장애란을 충분히 도와 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네가 부탁을 하는데 내가 어떻게 도와주지 않겠니?
조금도 염려하지 말고 다녀오도록 해라."
그러나 그 문제는 걱정하지 않아도 되었다. 로즈 국
장은 이리노중위에게 기쁨에 넘쳐서 약속을 했던 것이
다. 이리노중위는 비로소 안심을 하고 애드먼터 우주
기지로 떠나기로 했다.
시간여행선 아르고 24호의 인솔장교는 코드웰중령이
었고 선장은 레이먼드 제독이었다. 그는 이미 수십 차
례나 시간항해를 했기 때문에 유러너스 제국에서는 저
명인사가 되어 있었다. 그가 가는 곳에는 항상 여자와
기자들이 따라다녔고 유러너스 제국의 차기 해군성 장
관으로 물망에 오르고 있었다.
이리노중위는 아르고 24호가 발사되는 우주기지 애
드먼터로 떠나기 전날 밤 베란다에서 밤하늘을 쳐다보
았다. 장애란은 슈퍼마켓에 식료품을 사러 가서 아직
도 돌아오지 않고 있었다. 집에는 이리노중위 혼자뿐
이었다.
날씨는 따뜻했다. 사방은 캄캄한 어둠에 덮여 있었
으나 골목에서 훈훈한 바람이 불어왔다. 비가 오려고
하는지 바람에는 축축한 습기까지 묻어 있었다.
6월이었다. 장숙희가 죽은지 벌써 5개월이 지난 것
이다.
거리엔 왕래하는 사람도 별로 없었다.
이리노중위는 백색 커피를 마시기 시작했다. 커피는
거의 3천년 전부터 인간들이 기호식품으로 마시고 있
었으나 아직도 사라지지 않고 있었다. 생명체는 수많
은 시간이 흐르면 스스로 진화도 하고 퇴보도 한다.
원시지구 이후 지구엔 무수한 생명체가 있었으나 문명
이 시작되기 전에 사라진 것도 있고 전혀 다르게 변모
한 것도 있었다.
시간여행이란 얼마나 황홀한 것인가. 이리노중위는
베란다에 서서 시간여행에 대해서 생각하고 있었다.
이리노중위는 시간여행이 처음이었으나 낯설게 여겨
지지는 않았다. 시간여행은 20세기의 소설 '타임머신'
이라는 소설에서 절묘하게 묘사된 일이 있었다. 과학
은 상상력의 소산이다라는 말이 있듯이 H. G 웰즈가
묘사한 타임머신은 수많은 실패를 거듭한 끝에 마침내
성공하기에 이른 것이다.
H. G 웰즈의 타임머신은 과학자들로부터 실현 불가
능한 상상력이라는 매서운 비판을 받았으나 광속(光
速)을 능가하는 속도를 개발한다면 시간여행이 가능하
다는 20세기의 물리학자 아인슈타인의 지지를 받기도
했다.
"이리노중위님!"
이리노중위가 베란다에서 시간여행에 대한 생각에
잠겼을 때 거리에서 맑고 경쾌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리노중위가 깜짝 놀라 거리를 내려다보자 검은 색의
에어카에서 중국계의 한 여자가 이리노중위를 쳐다보
고 있었다.
"누구십니까? 나를 알고 계십니까?"
이리노중위는 베란다에 서서 중국계 여자를 내려다
보며 물었다.
"아라크네 통신의 호리리 기자입니다."
"아 호리리양이군요. 우리가 인터뷰를 한 적이 있었
습니까?"
"아니요. 인터뷰한 일은 없었어요."
"그런데 무슨 일입니까?"
"내일 애드먼터 우주기지로 떠나시죠?"
"보도된 것과 똑같습니다. 인터뷰는 할 수 없습니
다. 기자와 만나는 것이 금지되어 있다는 것은 잘 아
시겠죠? 발각되면 당신은 처형을 받게 될 것입니다."
"그렇겠죠? 호호 "
에어카에서 호리리라는 여자가 갑자기 커다랗게 웃
었다.
"이리노중위님. 걱정을 해주셔서 대단히 감사합니
다. 개인 자격입니다. 기자로서의 근무시간은 끝났습
니다."
"무엇이 궁금한 것입니까?"
이리노중위는 얼굴을 찌푸렸다.
"현재 기분이 어떠세요?"
"좋습니다. 시간여행은 매력적인 것입니다."
"시간여행이 정말 가능한 것입니까?"
"무슨 소리입니까?"
"제국의 시민들 중에 정말 시간여행이 가능한 것인
지 의문을 품는 사람들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아르고호는 벌써 23번째나 시간여행을 했습니다.
아르고호의 승무원들이 시간여행에서 얻은 성과와 업
적에 의문을 품는 것입니까?"
"의문을 품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죠. 모든 과학은
상상과 의문에서 시작되는 것이니까요."
"댁이 정말 아라크네 통신의 기자입니까?"
"아니라는 것은 벌써 알고 계실텐데요. 그렇지 않습
니까? 이리노중위님?"
"도대체 목적이 무엇입니까? 보안요원을 부르겠습니
다."
"그럴 필요는 없습니다. 금방 떠날 테니까요. 이리
노중위님이 시간여행에서 돌아오시면 다시 찾아오겠습
니다. 시간여행에 대해서 한 번 깊은 의문을 가져보세
요."
호리리라고 자신을 밝힌 여자는 그 말을 마치자 에
어카를 몰고 어두운 하늘로 사라져버렸다.
이리노중위는 뒤통수를 한 대 얻어맞은 기분이었다.
호리리라는 여자가 말한 시간여행에 대한 의문은 얼토
당토않은 것이었으나 그 여자의 말에는 묘한 울림이
있었다.
이 일은 보고를 해야돼
이리노중위는 호리리라는 여자의 출현을 경찰국에
신고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다음 순간 이리노중위는 신고를 그만두기로
했다. 갑자기 그 여자가 이리노중위에게 아무 악의가
없다는 생각이 났던 것이다. 이리노중위는 악의가 없
는 여자를 신고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
이리노중위는 베란다에서 별을 바라보는 것을 포기
하고 침대로 돌아왔다. 어찌된 일인지 장애란이 꽤 오
랜 시간이 지났는데도 돌아오지 않고 있었다. 그러나
이리노중위는 쉽사리 잠이 오지 않았다. 그 여자가 던
지고 간 의문이 자꾸 머릿속에 떠오르고 있었다.
시간여행에 의문을 가져보라고 했지
그러나 시간여행에는 의문이 있을 수가 없었다.
이제 얼마 있지 않으면 네미시스, 봉선화 혜성이 두
번째로 지구를 침략을 해올 것이고 지구인으로서는
이에 대한 대비책을 세우지 않을 수없는 것이다. 봉선
화 혜성에 대한 가장 강력한 방어책은 시간여행을 하
는 것이었다. 봉선화 혜성을 파괴할 수없는 한 지구의
모든 인간들을 가장 살기좋은 과거의 시간대로 보내
면 봉선화 혜성의 침략을 걱정하지 않아도 되는 것이
다.
봉선화 혜성의 침략에 대한 방어책으로 처음에 고려
된 것은 우주에 있는 다른 천체로의 이동이었다. 코스
모스 과학센터의 과학자들은 이미 아공간(亞空間: 블
랙홀)통과 항법(航法), 광속(光速)을 능가하는 우주
항법 기술을 개발했던 것이다. 아직 염속(念速: 생각
의 속도)에 이르지는 못했지만 수세기 안에 그 기술도
개발할 것으로 예측되었다. 염속은 인간이 6천년 전의
생각을 하면 그 자리에 육체도 따라가는 것이었다. 아
직은 이론상에서만 가능한 속도였다.
20세기에는 거론하는 것조차 비웃음의 대상이 되었
던 이론이었다.
"우주로 갑시다!"
"우주는 무한대로 넓습니다."
"우리가 발견한 은하계 저 밖에 또 다른 은하계가
있습니다!"
지구인들은 20세기에 이미 150억 광년(光年)의 거리
에 있는 은하계까지 측정했었다. 그 당시의 기술로는
그것이 한계였다. 그것은 성인지구식민지설(星人地球
植民地說: 지구는 다른 우주에 있는 외계인들의 식민
지라는 가설)과 함께 20세기의 과학소설을 풍미했었
다. 20세기의 지구에 이러한 가설이 풍미했던 것은 그
당시 빈번하게 목격되었던 UFO(미확인 비행물체)로 인
한 것이었다. 지구인들은 UFO협회까지 만들어가며 외
계인의 존재 여부에 관심을 가졌으나 아직도 결론을
내리지 못하고 있는 사항중의 하나였다.
"우주에는 지구인들이 살만한 천체가 없다!"
수많은 우주선들이 희망에 들떠서 태양계를 비롯한
은하계의 모든 행성들을 탐험했으나 인간들이 살만한
적합한 환경을 갖고 있는 천체가 없었다.
인간들은 자포자기에 빠졌고 수많은 세월이 흐른 뒤
에 시간여행을 하기로 결정을 내린 것이다. 예를 들어
1천만년 전의 과거로 돌아간다면 인간들은 적어도 1천
만년은 네미시스의 침략을 우려하지도 않고 살 수 있
는 것이다. 그 동안 인류는 더욱 놀라운 과학문명을
발전시켜 천체를 인간들이 살기에 적합하게 개조할 수
있는 것이다.
시간여행을 하는 타임플랜은 그렇게 해서 결정이 된
것이었다.
장애란이 돌아온 것은 이리노중위가 침대에 누워 한
시간 동안이나 엎치락뒤치락 하고 있을 때였다. 장애
란은 뜻밖에 하시시술까지 한 병 들고 있었다.
"파티를 해요. 주인님께서 내일은 애드먼터 우주기
지로 떠나시니까요."
장애란은 크리스탈 유리잔을 두 개 가지고 와서 요
염하게 눈웃음을 치며 하시시술을 따랐다. 장애란은
하늘빛 슈미즈를 입고 있었다.
비록 어둠속에서 보는 몸이었지만 그럴 때마다 이리
노중위는 장애란의 몸이 어른스럽다고 느껴졌다. 어쩐
지 16세 소녀의 몸같지가 않았다. 이리노중위는 지나
치게 취하면 안될 것같아 술을 세 잔만 마셨다. 그러
나 그것으로도 충분하게 최음제 효과가 있었다.
제 23 장 밤의 암살자
밖에서 차가 지나가는 소리가 들릴 정도로 깊고 푸
른 밤이었다. 장애란은 이리노중위의 옆에 누워 주위
의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이리노중위는 두 번의 격렬
한 섹스를 마친 뒤 깊은 수면 속에 떨어져 있었다.
하시시술에 탄 수면제 탓일 거였다.
인간은 얼마나 어리석은가.
이리노중위는 내일 아침에 깨어나면 하시시술을 마
시고 격렬한 섹스를 한 뒤에 잠이 들었기 때문에 세상
모르고 잔 것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귀여운 사내 )
장애란은 이리노중위의 가슴에 얼굴을 대고 귀를 기
울여 보았다. 그의 심장이 뛰는 소리가 규칙적으로 들
리고 있었다. 장애란은 그 소리가 흡족했다.
이리노중위와의 섹스는 그녀도 만족스러운 것이었
다. 비록 그녀의 정체를 감추기 위해 이리노중위와 섹
스를 하는 것이었지만 그녀에게는 첫 번째 남자였다.
그가 적이 아니라면 섹스 파트너로 더할 나위없는 사
내였다.
장애란은 이리노중위의 몸에서 천천히 일어났다. 이
리노중위의 체내에 들어간 수면제 성분이 모두 해소될
새벽 4시까지만 돌아온다면 이리노중위는 아무 것도
모를 것이다.
그녀는 씻지도 않고 나신에 슈미즈를 걸쳐 입었다.
그녀의 몸속에는 그의 정액이 들어있을 것이고 그녀의
피부에는 그의 타액이 묻어 있을 것이다. 장애란은 그
것을 씻기가 싫었다.
장애란은 슈미즈 차림으로 서재로 가서 이리노중위
의 컴퓨터 앞에 앉았다. 컴퓨터를 부팅시키고 이리노
중위의 지문으로 만든 실리콘 지문으로 모니터를 터치
하자 컴퓨터에 파일명이 일제히 떠올랐다.
"아라크네시 시티홀!"
장애란은 음성인식 시스템으로 전환을 한 뒤에 아라
크네 시청을 불렀다. 식료품을 사러 슈퍼마켓에 갔다
가 돌아오는 길에 호리리라는 여자와 이리노중위가 얘
기를 주고받는 것을 우연히 목격한 뒤에 장애란은 그
녀를 미행하여 그녀가 과학자들의 주택인 루나하우스
에 살고 있다는 것을 확인했던 것이다. 그녀가 어떤
여자인지 시티홀에서 인적사항을 살필 생각이었다.
이내 아라크네시 시청이 컴퓨터에 접속되었다.
"루나하우스 3번가 27호에 누가 살고있지?"
장애란은 음성으로 물었다.
"루나하우스 3번가 27호에는 식물학자 유강렬박사
가 살고 있습니다."
컴퓨터가 중성(中性)의 목소리로 대답했다.
"동거하는 사람은 없나?"
"동거하는 여자가 있습니다."
"시에서 허락을 받았나?"
"허락을 받았습니다."
"그 여자는 어떤 여자지?"
"우희 위버라는 식물학자입니다."
"우희 위버?"
"네. 그렇습니다."
"호리리가 아니고?"
"아닙니다."
"아라크네 시민 중에 호리리라는 여자가 있나?"
"없습니다."
"우희 위버의 사진을 볼 수가 있나?"
"네."
컴퓨터에서 대답이 끝나자마자 식물학자인 우희 위
버가 컴퓨터 모니터에 떠올랐다. 우희 위버는 뜻밖에
아름다운 여자였다.
그러나 컴퓨터를 통해 여러 가지를 알아보려고 했으
나 컴퓨터에는 자세한 자료가 입력되어 있지 않았다.
"유강렬박사를 보여줘!"
"네. 알았습니다."
이내 컴퓨터에 식물학자 유강렬박사의 얼굴이 떠올
랐다. 유강렬박사는 약간 나이가 들었으나 전형적인
학자 타입이었다.
장애란은 컴퓨터를 껐다. 아무래도 루나하우스로 직
접 달려가서 확인해야 할 것 같았다. 장애란은 옷을
모두 주워 입고 조심스럽게 밖으로 나와 에어카에 올
라탔다.
밖은 인적이 완전히 끊어져 있었다. 대부분의 유러
너스 제국 시민들이 깊은 수면 속에 떨어져 있을 시간
이었다.
장애란은 에어카의 시동을 걸고 식물학자들이 집단
으로 모여 살고 있는 루나 하우스로 날아갔다. 루나하
우스는 이리노중위의 집에서 7km나 떨어져 있었다.
유강렬박사의 집은 2층 7호였다.
장애란은 이리노중위의 에어카를 루나하우스에서 멀
리 떨어진 곳에 착륙시키고 고양이처럼 소리없이 루나
하우스로 다가갔다. 아라크네시의 어디나 그렇지만 경
비는 없었다. 그녀는 2층 7호까지 올라가서 현관문에
설치되어 있는 바코드 번호를 해독하여 문을 열었다.
우희 위버와 유강렬박사는 침대에서 나란히 잠들어
있었다.
(세상 모르고 자고 있군 )
장애란은 그들이 잠들어 있는 모습을 한참동안이나
내려다보았다. 이윽고 장애란은 잠들어 있는 유강렬박
사를 주먹으로 후려쳐 기절시켰다. 그 서슬에 우희 위
버가 깜짝 놀라 눈을 떴다.
"누, 누구야?"
"조용히 해!"
장애란은 벌떡 일어나려는 우희 위버를 목을 움켜쥐
고 다시 눕혔다. 장애란의 주먹은 바위를 깨트리는 파
괴력을 갖고 있었다. 손의 악력(握力)에 의해 우희 위
버가 켁켁거렸다.
"네가 호리리지?"
우희 위버가 공포에 질린 눈빛으로 수긍하는 시늉을
했다.
"사실대로 말하면 해치지는 않겠어!"
"유강렬 박사님은 어떻게 했어요?"
"잠시 기절했을 뿐이야!"
"내가 호리리예요."
"이리노중위에게 왜 거짓말을 했지?"
장애란은 우희 위버를 다그쳤다.
"내 정체를 밝힐 수 없으니까요."
우희 위버가 체념한 듯한 표정으로 말했다.
"이리노중위를 왜 만났어?"
"중요한 일은 아니예요."
"거짓말하지 마! 거짓말하면 죽여버리겠어!"
"당신은 누구예요?"
"검은 고양이!"
"검은 고양이?"
우희 위버가 의혹이 가득한 눈빛으로 장애란을 쳐다보았
다. 그때 유강렬박사가 꿈틀했다. 장애란이 유강렬박사를
돌아보자 유강렬박사가 몸을 일으킬 듯하다가 다시 쓰러졌
다.
"너희들이 두려워하는 비밀경찰은 아니야!"
"사실은 시간탐사계획에 대해서 알려고 했어요."
"시간탐사계획을 왜?"
"시간탐사계획에 의혹이 있어서요. 그래서 이리노중위에
게 시간탐사계획에 대해 의문을 가져보라고 했어요."
장애란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우희 위버가 거짓말을 하
고 있는 것같지는 않았다.
우희 위버가 다시 입을 열었다.
"유러너스 제국은 몇 년전에 생명체가 살고 있는 토성의
위성을 발견했어요!"
"정말이야?"
장애란은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그것은 믿을 수없는 사
실이었다. 사피언스 그라운드는 그 사실도 모르고 유러너스
제국이 시간여행에 성공한 것을 부러워했었다. 장애란은 의
외의 곳에서 중대한 정보를 얻게 되어 뛸 듯이 기뻤다.
"네."
"어떻게 그것을 알았지?"
"X파일을 통해서 알았어요. X파일은 아르고호의 승무원인
에바소령이 남긴 거예요."
에바소령의 이름은 장애란도 몇 번 들은 일이 있었다.
"토성의 위성 이름이 뭐야?"
"살로메요. X파일에 모두 기록되어 있어요."
"좋아. 그런데 왜 이리노중위에게 접선을 한 거야?"
"이리노중위가 진실을 밝혀 주었으면 해서요. 이리노중위
는 이번에 시간탐사선 아르고 24호를 타니까요."
"X파일은 어디 있어?"
"컴퓨터에요."
"유러너스 제국시민 20만명이 실종되었어. 그들이 어디로
갔는지 알고 있나?"
"몰라요."
"정말 몰라?"
"네."
장애란은 우희 위버에게 거짓말 탐지기로 검사를 해보았
다. 그러나 우희 위버는 거짓말을 하고 있지는 않았다.
"좋아. 내일 아침까지 푹 자고 있으라구."
장애란은 주머니에서 립스틱 모양의 소형 마취총을 꺼내
우희 위버에게 쏘았다. 유강렬박사처럼 주먹으로 후려쳐서
기절시킬 수도 있었으나 우희 위버를 난폭하게 다루고 싶지
않았다. 장애란은 유강렬박사에게도 마취총을 쏜 뒤에 주위
를 다시 한 번 점검했다.
'카메라칩을 설치하는 것이 좋겠어 '
장애란은 그들이 깨어나기 전에 카메라칩을 여러 곳에 설
치했다. 바르시크대령으로부터 받은 것이었다. 다음에 그녀
는 유강렬박사의 집을 샅샅이 수색했다. 그리고 컴퓨터를
부팅시켜 파일을 모조리 조사했다. 유강렬박사의 컴퓨터는
보안시스템이 설치되어 있었으나 장애란은 간단히 암호를
해독했다.
'여기 있군 '
장애란은 'X'라는 파일이 떠오르자 그것을 팜탑(손바닥에
놓고 쓰는 초소형 컴퓨터)에 복사했다. 그리고 유강렬박사
의 집을 나와서 에어카를 타고 이리노중위의 집으로 향했
다.
그러나 장애란은 유러너스 제국의 비밀경찰이 자신을 미
행하고 있는 사실은 전혀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다. 그녀는
이리노중위의 집으로 돌아오자 서둘러 옷을 갈아입고 이리
노중위를 살폈다. 이리노중위는 여전히 깊은 잠에 떨어져
있었다.
장애란은 이리노중위에게 가까이 다가가서 가볍게 키스를
했다. 그 바람에 이리노중위가 몸을 뒤챘으나 잠을 깨지는
않았다. 장애란은 침실을 나와서 2층으로 올라가 이리노중
위의 컴퓨터를 켰다. 이어서 팜탑에 복사한 X파일을 이리노
중위의 컴퓨터에 다시 복사한 뒤에 실행시켰다. 이내 X파일
이 모니터에 떠오르기 시작했다.
장애란은 모니터에 떠오르는 X파일을 읽으면서 가슴이 격
렬하게 뛰는 것을 느꼈다. 그것은 시간탐사계획이 아니라
우주탐사 계획이었고 유러너스 제국의 실질적인 지도자가
마더 살로메라는 정체불명의 여인이라는 사실까지 낱낱이
밝히고 있었다.
장애란은 혼란을 느꼈다.
(어떻게 이런 일이 존재하고 있는 것일까?)
그러나 이 엄청난 사실을 혼자서 분석하기에는 너무나 벅
차서 즉시 바르시크대령에게 전송시켰다. 나머지는 바르시
크대령이 해결할 것이었다.
장애란은 이리노중위의 컴퓨터를 끄기 전에 유강렬박사의
집에 부착되어 있는 카메라칩으로 연결을 했다. 카메라칩은
그녀가 예상했던대로 유강렬박사의 집을 컴퓨터 모니터로
보여 주었다.
유강렬박사와 우희 위버는 침실에서 혼곤히 잠들어 있었
다.
장애란은 로즈 국장의 부팅암호로 비밀경찰국에도 침투할
까 하다가 그만두었다. 시간이 너무 오래 흘러가 있었다.
벌써 창밖이 부옇게 밝아오고 있었다.
장애란은 1층의 침실로 걸어 내려갔다. 이리노중위가 눈
을 뜰 때가 된 것이다.
그러나 이리노중위는 그때까지도 깊이 잠들어 있었다. 장
애란은 슈미즈까지 벗고 이리노중위 옆에 누웠다. 그리고
이리노중위를 끌어당겨 팔에 껴안았다. 이제는 잠이 들면
안되었다. 이리노중위는 한 시간만 있으면 깨어날 것이고
그가 깨어나면 시중을 들어주어야 하는 것이다.
장애란은 길게 하품을 했다.
이리노중위가 깨어난 것은 7시30분이 되었을 때였다. 장
애란은 이리노중위보다 조금 일찍 일어나서 아침 준비를 했
다.
이리노중위가 애드먼터 우주기지로 떠난 것은 8시40분이
었다. 장애란은 애드먼터 우주기지에서 온 에어버스가 이리
노중위를 태우고 집앞을 떠나가자 잠시 잠을 잤다. 지난 밤
에 한숨도 자지 못했기 때문에 그녀는 잠이 쏟아지고 눈이
충혈되어 있었다.
장애란이 깨어난 것은 저녁때가 가까워졌을 때였다.
그녀는 점심도 먹지 않고 커피 한 잔을 끓여 마신 뒤 2층
으로 올라가 이리노중위의 컴퓨터를 부팅시키고 유강렬박사
의 집에 있는 카메라칩을 연결했다. 그들이 무엇을 하고 있
는지 살피기 위해서였다.
유강렬박사의 집은 텅 비어 있었다. 유강렬박사와 우희
위버는 아직 퇴근하지 않은 모양이었다. 장애란은 카메라칩
과의 연결을 차단하려다가 잠시 기다렸다.
유강렬박사의 집 현관문이 소리없이 열리고 있었다.
'우희 위버는 아닌데 '
장애란은 고개를 갸우뚱했다.
문을 열고 들어온 사람은 뜻밖에 키가 늘씬한 금발의 여
자였다. 그녀는 오피스걸처럼 머리가 단정했다. 아래는 검
은 스커트 차림이었고 위에는 반소매의 흰 와이셔츠를 입고
있었다
여자는 잔뜩 긴장하여 주위를 세밀하게 살피고 있었다
"도착했어요."
여자가 낮게 속삭였다.
"유강렬박사가 있나 확인해봐!"
그러자 낮고 음침한 목소리가 카메라칩을 통해 모니터에
서 들려왔다. 장애란은 그때서야 금발의 여자가 누군가에게
보고를 하고 지시를 받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녀의 귓
속에 자그마한 무선 이어폰이 박혀 있었다.
"없어요."
금발의 여자가 건성으로 주위를 둘러보고 낮게 말했다.
"그럼 기다려!"
어디선가 사내의 목소리가 금발의 여자에게 일일이 행동
을 지시하고 있었다.
"네."
금발의 여자가 거실의 소파에 털썩 앉았다. 그러자 여자
의 스커트 안이 카메라칩에 의해 훤히 들여다보였다.
그 순간 장애란은 소스라쳐 놀랐다. 여자의 스커트 안이
아무것도 없이 마네킹처럼 민숭민숭했다.
'로봇이야!'
장애란은 하마터면 소리를 지를 뻔했다. 지구인들은 안드
로이드와 1백년 동안이나 처절한 전쟁을 치른 경험이 있었
기 때문에 안드로이드를 제작하는 것을 철저하게 금기로 여
기고 있었다. 유러너스 제국과 사피언스 그라운드가 협정을
맺지는 않았으나 안드로이드를 제작하는 것은 묵시적인 인
류의 공적이었다. 그런데 누군가 비밀리에 안드로이드를 제
작한 것이다.
"다리를 포개고 앉아!"
사내가 날카롭게 소리를 질렀다. 그러자 금발의 안드로이
드 여자가 다리를 포개고 앉아 스커트 안을 가렸다.
컴퓨터 모니터를 응시하는 장애란의 눈빛이 심하게 흔들
렸다. 금발의 안드로이드 여자는 소파에 미동도 하지 않고
있었다. 그때 현관문이 열리는 소리가 미세하게 들렸다.
"누가 왔어요."
금발의 안드로이드 여자가 낮게 속삭였다. 그녀의 눈이
먹이를 발견한 맹수처럼 날카롭게 번뜩였다.
"준비해!"
사내의 목소리는 다시 음침하고 냉막한 목소리로 돌아와
있었다.
"네!"
금발의 안드로이드 여자가 소파에서 거실의 벽에 몸을 바
짝 붙였다. 그때 현관문이 열리고 유강렬박사가 들어왔다.
그러자 금발의 안드로이드 여자가 번개처럼 유강렬박사에게
달려들어 목덜미를 낚아채서 거실 바닥에 팽개쳤다.
"윽."
유강렬박사가 짧은 비명소리를 지르며 거실에 나뒹굴었
다.
"누, 누구요?"
유강렬박사가 놀란 표정으로 금발의 안드로이드 여자를
쳐다보았다. 안드로이드 여자는 목에 가래가 그르렁거리는
소리로 음산하게 웃고 있었다.
"유강렬박사! 너를 기다리고 있었어."
안드로이드 여자가 유강렬박사의 복부를 구둣발로 밟았
다. 유강렬박사가 고통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안드로이드 여
자의 발목을 잡아서 번쩍 쳐들었다. 그러자 안드로이드 여
자가 뒤로 벌렁 나자빠졌다. 유강렬박사의 반격이었다.
"계속 공격해!"
그러자 안드로이드 여자의 귓전에서 날카로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네!"
안드로이드 여자가 큰 소리로 대답했다. 유강렬박사가 비
틀거리는 몸으로 일어서고 있었다. 그러나 목소리의 지시를
받은 안드로이드 여자가 재빨리 유강렬박사에게 달려들자
유강렬박사는 뒤로 밀려나 벽에 쿵 하고 부딪쳤다.
안드로이드 여자가 주먹으로 유강렬박사의 복부를 강타했
다.
"윽!"
유강렬박사가 다시 짧은 비명을 토해냈다.
"계속 공격해! 죽여 버려!"
목소리가 다시 흥분해서 소리를 질렀다.
안드로이드 여자는 목소리의 지시가 떨어지자 유강렬박사
를 피투성이가 될 때까지 공격했다. 그러나 유강렬박사도
끈질기게 저항을 하고 있었다. 안드로이드 여자의 허리를
잡아서 넘어트리는가 하면 여자의 스커트 자락을 잡고 발길
질을 했다. 그 서슬에 안드로이드 여자의 스커트가 흘러내
려 여자의 하체가 그대로 드러났다.
장애란은 어이가 없었다. 그것은 마치 마네킹과 인간이
싸우는 것처럼 비현실적이었다.
유강렬박사의 거실은 그들의 싸움으로 아수라장이 되어가
고 있었다.
'저 로봇은 1백년 전보다 훨씬 못해 '
안드로이드 전쟁이 일어났을 때의 로봇은 고도의 지능을
갖고 있었다. 오히려 어떤 면에서는 인간보다 더 우수한 부
분도 있었다. 그러나 유강렬박사와 싸우는 안드로이드는 철
저하게 명령에 의해서만 움직이고 있었다.
장애란은 안드로이드 여자를 주시했다. 안드로이드 여자
가 두 손으로 유강렬박사의 목을 움켜잡고 있었다.
"헉!"
유강렬박사가 짧게 신음을 토했다. 안드로이드 여자의 두
손에 푸른 힘줄이 솟으면서 유강렬박사의 목을 조이기 시작
했던 것이다. 가장 원시적인 살인, 경부를 압박하여 살해하
는 액살(扼殺)이었다.
"사, 살려줘 "
유강렬박사는 얼굴이 붉어지기 시작했고 몸을 바둥거렸
다. 장애란은 마치 자신의 목이 조여지는 듯이 답답해졌다.
'저 여자의 힘은 굉장해!'
장애란은 초능력을 갖고 있었다. 그러나 유강렬박사의 목
을 조르고 있는 안드로이드 여자도 무시무시한 파워를 갖고
있었다.
안드로이드 여자의 두 손과 팔에서 근육이 튀어나오기 시
작했다. 엄청난 힘이 안드로이드 여자의 손에서 작용하고
있었다.
"으으 "
유강렬박사가 기도가 막혀 고통스러워하기 시작했다. 장
애란은 얼굴을 찌푸렸다. 사람이 죽어가는 것을 보고있는
것이 괴로웠다.
이내 유강렬박사가 축 늘어져 버렸다. 그러나 안드로이드
여자는 유강렬박사의 목을 조르는 손에 더욱 힘을 가했고
그러자 으드득 하고 유강렬박사의 목뼈가 부러지는 소리가
모니터를 통해 들려왔다.
처참한 모습이었다.
장애란은 눈을 감았다. 살인을 하는 것을 스포츠를 중계
하듯이 보았다는 사실과 인간이 그렇게 간단하게 죽는다는
사실에 충격을 받았다. 장애란이 다시 눈을 뜨자 모니터의
화면에 비친 유강렬박사는 눈을 부릅뜨고 죽어 있었다. 공
포와 고통스러운 표정이 죽은 얼굴에도 가득했다.
"끝났어요!"
안드로이드 여자가 유강렬박사를 바닥에 팽개치고 말했
다.
"소생시킬 수 있나 확인해봐!"
목소리의 지시는 여전히 냉막했다. 목소리의 지시는 의료
기술이 발달하여 죽은 지 24시간이 되지 않는 사람을 다시
살리는 일이 많았기 때문에 그 가능성을 찾아보라는 것이었
다.
"네!"
안드로이드 여자가 차갑게 대답하고 유강렬박사의 아랫배
에 올라앉았다. 마치 여성상위의 섹스를 하려는 자세 같았
다. 안드로이드 여자는 천천히 유강렬박사의 목과 가슴에
손을 댔다.
"심장은 정지했지만 복구가 가능해요!"
안드로이드 여자가 중성의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렇다면 죽지 않은 거야."
안드로이드 여자에게 지시를 내리는 목소리는 얼음처럼
차가웠다.
"심장을 소생불능 상태로 만들겠어요."
"좋아! 실시하라!"
유강렬박사의 가슴에 얹혀져 있는 안드로이드 여자의 손
이 갑자기 강렬한 적색을 띄었다. 그리고 안드로이드 여자
의 손에서 적색의 빛이 유강렬박사의 가슴으로 빠르게 틈입
해 들어갔다. 불과 10초도 걸리지 않는 짧은 시간의 일이었
다.
"심장 부패 진행!"
안드로이드 여자가 중얼거렸다.
유강렬박사의 얼굴이 서서히 흙빛으로 변하기 시작했다.
"심장 부패 완료!"
"피부조직세포도 부패시켜!"
피부조직을 부패시키는 것은 증거를 남기지 않으려는 수
작이었다.
"네!"
안드로이드 여자의 손에서 청록색의 빛이 뿜어지기 시작
했다. 그러자 유강렬박사의 피부가 급속하게 부패하기 시작
했다.
장애란은 눈을 감았다. 유강렬박사의 시체가 빠르게 썩어
가고 있었다. 피부가 쭈글쭈글해지고 진물이 흘러내렸다.
이제 몇 분만 있으면 유강렬박사의 시체는 무수한 세균이
번식할 것이고 그 세균들에 의해 유강렬박사는 흔적조차 남
지 않고 사라질 것이다. 시체를 부패시키는 세균은 시체를
녹여서 시체의 형체를 남기지 않는다.
"끝났어요."
안드로이드 여자가 말했다. 그녀는 유강렬박사의 몸에서
일어나 있었다.
"좋아. 이제 스커트를 입어!"
냉막한 목소리가 음산하게 지시했다.
"네."
목소리의 지시에 안드로이드 여자가 바닥에 떨어져 있던
스커트를 찾아 두 다리에 꿰어 입었다. 안드로이드 여자는
그때서야 인간처럼 보였다.
장애란은 소름이 끼쳤다.
"유강렬박사는 반제국주의자였어. 감히 X파일을 입수하고
도 비밀경찰에 신고를 하지 않다니 "
안드로이드 여자에게 지시를 내리던 목소리가 낮게 웃었
다.
"우희 위버는 어떻게 할까요?"
"오늘밤에는 우희 위버를 처형한다. 유강렬박사로 위장을
해야하니까 즉시 돌아와라!"
"네."
안드로이드 여자가 스커트를 다 입고 유강렬박사의 집을
나가자 집안은 기묘한 정적만이 감돌았다. 장애란은 무겁게
한숨을 내쉬었다. 장애란은 컴퓨터로 원격조정을 하여 카메
라칩을 파괴하려다가 깜짝 놀랐다.
어디선가 여자의 가느다란 울음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누가 집에 있었어 '
장애란은 카메라칩을 조정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침실의
침대 밑에서 중국풍의 옷차림을 한 여자가 조심스럽게 기어
나오고 있는 것이 모니터에 잡혔다.
'아!'
우희 위버였다. 장애란은 가슴이 격렬하게 뛰었다. 우희
위버의 얼굴은 이미 눈물로 걸레처럼 젖어 있었다.
우희 위버는 거실로 나오자 먼저 공포와 두려움에 싸인
눈으로 커텐을 젖히고 밖을 내다보았다. 살인 안드로이드가
떠난 것을 확인하려는 모양이었다.
"박사님!"
이어서 우희 위버는 세균에 의해 형체가 사라져가는 유강
렬박사의 시체 앞에서 오랫동안 오열을 했다. 우희 위버의
애절한 울음소리가 모니터를 통해 들려오자 장애란은 가슴
이 뻐근했다.
"우희 위버! 도망을 치는 것이 좋아! 유러너스 제국의 비
밀경찰이 너를 노리고 있으니까 일단 그 곳에서 피해 "
장애란은 모니터를 통해 우희 위버에게 지시했다. 우희
위버가 깜짝 놀란 표정으로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난 검은 고양이야."
장애란은 그 말만 하고 카메라칩을 파괴해 버렸다. 우희
위버에게 더 이상 도움을 줄 수가 없었다.
제 24 장 슬픈 사랑
비가 내리고 있기 때문이었을까. 아라크네시에서 니트론
으로 향하는 에어카의 후론트그라스도 축축한 물기에 젖어
있었고 한기가 느껴질 정도로 날씨가 쌀쌀했다. 유강렬박사
의 집을 나온 우희 위버는 에어카의 운전을 자동운전 버튼
에 넣고 클릭했다. 그리고 시트에 편안하게 등을 기댔다.
이제 니트론에 도착할 때까지 그녀가 TV를 시청하거나 잠
을 자거나 아랑곳하지 않고 에어카는 공중 하이웨이를 안전
하게 달려서 3시간 후면 니트론까지 무사히 데려다 줄 것이
다.
니트론은 유러너스 제국에서 가장 변두리에 있는 도시였
다.
유강렬박사를 죽인 안드로이드 여자가 거기까지 추적해
오지는 않을 것이다.
죽음의 공포에서 해방되자 우희 위버는 약간 나른한 기분
이 들었다. 새삼스럽게 기계가 정말 편한 것이라는 생각을
했다. 차에 부착된 레이더 감지기가 공중 하이웨이 상황을
스스로 분석하고 속도까지 조절하면서 운전을 하기 때문에
그녀는 아무 것도 할일이 없었다. 밖에서 내리는 비는 한기
가 느껴지지만 차안은 자동 온도 조절이 되어 있어서 따뜻
했다. 습도도 알맞은 편이었다.
우희 위버는 슬펐다. 유강렬박사의 죽음은 전혀 뜻밖이었
다. 아니 어쩌면 막연하기는 했지만 예상하고 있던 일이기
도 했다. 유러너스 제국의 비밀을 탐지하고 살아 있기를 바
란다는 것 자체가 어리석은 생각이었기 때문이었다.
'비밀경찰이 죽였어 '
우희 위버는 평소보다 일찍 유강렬박사의 집에 도착해 있
었다. 유강렬박사는 아직 퇴근하지 않았고 그녀는 유강렬박
사가 좋아하는 저녁준비를 해놓은 뒤에 베란다에서 거리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우희 위버는 그때 여러 가지 생각에 잠겨 있었다. 마더
살로메라는 거인이 통치하는 유러너스 제국, 인간의 삶과
사랑, 섹스와 진화 그런 것들을 생각하면서 진정한 인간의
행복이 무엇인가 생각하고 있었다. 과학은 인간을 행복하게
하고 있는가 하는 생각도 했다. 그 의문에 그녀는 고개를
흔들었다. 과학은 인간을 편리하게는 했지만 오히려 불행하
게 하고 있었다. 다시 원시시대로 돌아갈 수 있다면 자연처
럼 살아갈 것이다.
섹스를 하고 종족을 보존시키고
그녀가 그런 생각을 하는데 루나하우스 광장에 에어카가
날아와 착륙하고 한 여자가 내렸다. 그녀는 곧장 유강렬박
사의 집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우희 위버는 그 여자가 처음
에 유강렬박사의 새로운 러브타임 파트너인줄로 생각했다.
그녀는 베란다에서 나와 침대밑으로 숨었다.
여자는 침실과 거실을 살핀 뒤에 거실의 소파에 털썩 주
저앉았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않아 유강렬박사가 돌아와 그
녀에게 죽음을 당했던 것이다.
우희 위버는 무섭고 끔찍했다. 사랑하는 사람이 눈앞에서
로봇에게 죽음을 당하는 것을 목격하고 소리를 죽여 흐느껴
울었다.
우희 위버는 유강렬박사의 죽음이 몹시 슬펐다. 슬픔이라
던가 눈물을 잊어버린 것은 이미 오래 전의 일이었다. 그런
데도 유강렬박사가 우희 위버의 눈앞에서 죽자 자신도 모르
게 눈물이 마구 쏟아졌다. 유강렬박사는 그녀가 사이버섹스
프로그램이나 멀티 마네킹을 사용하지 않고 최초로 육체적
관계를 가진 인간이었다.
유강렬박사는 엄밀히 따지면 러브타임을 위한 섹스 파트
너였다. 그러나 그가 단순한 섹스 파트너라고만은 여겨지지
않았다. 유강렬박사와 그녀에게는 어느 사이에 20세기적 감
정이라는 사랑이 존재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이 문제가 아니었다. 유강렬박사가 죽었으므
로 그녀에게도 위험이 닥칠 것은 분명했다. 로봇으로 제작
된 여자는 아라크네시를 샅샅이 뒤져서라도 그녀를 죽여 없
애려고 할것이다.
그녀는 그 위험을 피해 니트론으로 달아나고 있는 중이었
다.
(검은 고양이는 누굴까?)
우희 위버는 시트에 등을 기댄 채 잠시 생각에 잠겼다.
암호명 검은 고양이. 그녀가 적인지 아군인지 알 수가 없었
다. 그러나 유강렬박사의 집을 감시하고 있었던 것은 분명
했다.
유강렬박사가 살해되고 그녀가 썩어가는 유강렬박사의 시
체 앞에서 오열을 하자 검은 고양이가 도망을 치라고 지시
했던 것이다.
'죽음이 두렵지는 않아 '
우희 위버는 차창밖의 어둠을 응시하고 어금니를 꽉 깨물
었다.
에어카의 후론트그라스에는 캄캄한 어둠과 어둠속을 헤집
으며 날아와 부서지는 빗줄기만 보이고 있었다. 적막한 하
늘이었다. 에어카는 지상에서 8백m 상공을 소리없이 날고
있었다.
우희 위버는 30분 후에 도착할 니트론의 모습을 상상하기
도 하고 니트론의 폐허에 살고 있는 20세기적 남자들을 생
각하기도 했다. 그러다가 우희 위버는 입언저리에 미소를
매달았다.
그들이 20세기적 남자라니
유러너스 제국 시민들이 모두 쓰레기라고 부르는 원시인
들, 20세기에는 그런 사람들을 히피나 집시라고 불렀다는
것을 기록에서 본 일이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모두들 유러
너스 제국의 쓰레기들이라고 부르고 있었다. 그들은 아직도
질병에서 신음을 하거나 사소한 일로도 살인을 하고는 했
다.
유강렬박사는 니트론을 좋아했다. 도시의 쓰레기들이 모
여 산다는 니트론을 그가 좋아하는 것은 이해할 수없는 일
이었다. 우희 위버에게 니트론을 가르쳐 준 것도 유강렬박
사였다.
"사람들은 때때로 황폐한 곳에서도 살아야 돼."
유강렬박사는 이따금 그런 말을 했다. 우희 위버로서는
요령부득의 말이었다. 그러나 우희 위버는 그와 같이 있는
시간이 더할 수 없이 편안했다.
'유강렬박사도 20세기적 남자였어 '
우희 위버는 유강렬박사를 생각하자 기분좋은 전율을 느
꼈다. 이상한 일이었다. 죽은 사람을 두고 섹스를 생각하다
니 그 전율은 갑자기 그녀의 아랫도리에서 일어나 물결처
럼 전신으로 번지고 있었다. 그러나 아주 짧은 순간의 일이
었다.
우희 위버는 다시 우울해졌다. 그녀가 유강렬박사의 죽음
을 보고도 섹스를 생각하게 된 것은 모르긴 해도 러브타임
때문일 터였다. 러브타임이라는 기이한 제도는 제국시민들
을 섹스중독자로 만들어 버렸고 제국시민들은 그 여파로 틈
만 나면 섹스를 생각하게 된 것이었다.
우희 위버는 또 다시 아랫도리에서 기분좋은 전율이 번져
오는 것을 느꼈다.
'죽은 사람은 죽은 사람이지 '
우희 위버는 손을 뻗어 리모콘으로 모니터를 켜고 사이버
섹스 프로그램을 클릭했다. 그러자 모니터에 남자들의 사진
과 함께 프로필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우희 위버는 20세기적 남자 심플 터너를 클릭했다. 그 남
자가 나오는 프로그램의 제목 '위험한 여자'의 충격적인 정
사씬이 기억났던 것이다. 우희 위버는 그 프로그램을 성인
클럽을 통해 공급받았었다.
모니터에 우희 위버가 떠올랐다. 모니터의 우희 위버는
사진을 입력한 것이었으나 프로그램이 자체 기능으로 3차원
영상으로 입체화시킨 것이다. 우희 위버는 시트에 등을 기
대고 무릎을 약간 벌린 자세로 모니터를 응시하기 시작했
다. 그리고 우희 위버는 모니터와 연결된 안경을 썼다. 그
렇게 되면 모니터와 그녀가 연결되어 모니터의 우희 위버가
느끼는 감정이라던가 흥분이 그대로 현실의 우희 위버에게
전달되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이미 구시대의 프로그램이었다. 우희 위버
가 아직도 그런 프로그램을 사용하는 것은 구시대에 대한
향수에 지나지 않았다. 파트너가 마땅치 않을 때 아라크네
시민들은 정교한 멀티 마네킹을 사용하여 섹스를 즐겼다.
모니터의 우희 위버는 부라우스와 스커트를 입고 주방에
서 20세기 식으로 요리를 하고 있고 심플 터너는 배관공으
로 등장하고 있다. 모니터의 우희 위버는 요리를 하면서 욕
실에서 샤워기를 고치는 심플 터너에게 힐끔힐끔 눈길을 던
진다.
욕실의 샤워기에서 물이 쏟아지는 소리가 들린다. 심플
터너가 샤워기를 다 고친 모양이다. 우희 위버는 요리를 하
다가 말고 욕실로 간다. 욕실의 샤워기에서는 뿌연 수증기
와 함께 더운 물이 쏟아지고 있다.
"다 고쳤어요?"
우희 위버가 게슴츠레한 눈길로 묻는다. 그녀의 눈은 심
플 터너의 건장한 몸을 보고 몽롱하게 풀어진다. 두 다리에
힘이 없어지고 입술이 바삭바삭 마른다, 심플 터너는 어깨
를 으쓱하고 샤워기를 끈다. 3류영화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표정이다.
모니터의 우희 위버는 욕실로 들어가서 샤워기를 틀어본
다. 그러자 쏴아 하는 소리와 함께 더운 물이 쏟아지기 시
작한다. 이상이 없이 잘 고쳐진 것 같다.
"수고했어요."
우희 위버는 만족스러워 한다. 심플 터너의 흉내를 내어
어깨를 으쓱하고 고개를 돌리는데 심플 터너가 뒤에 바짝
다가와 있다. 우희 위버는 숨이 탁 막히는 기분이다. 심플
터너의 눈이 짐승처럼 이글거리고 있다. 그의 뜨거운 시선
이 우희 위버의 얼굴에서 가슴께로 하강한다.
'아...!'
우희 위버는 온 몸이 저려온다. 그의 시선은 우희
위버의 부라우스 앞섶에 정지해 있다. 그 곳에 우희
위버의 뽀얗게 흰 젖무덤이 도발적으로 삐져 나와 있
다.
그의 손이 우희 위버의 가슴을 덥석 움켜쥔다. 우희
위버는 흠칫하고 놀란다. 우악스러운 그의 손 때문에
가슴이 아프지만 그의 손을 뿌리치지 않는다. 그의 얼
굴이 우희 위버를 향해 내려온다. 우희 위버는 그의
얼굴을 피하기 위해 뒷걸음질을 친다. 그러자 욕실의
하얀 타일벽이 등에 닿는다.
아아
우희 위버는 몇 번이나 신음을 삼킨다. 피할 곳이
없다. 심플 터너의 거친 손이 그녀의 가슴을 둥글게
애무하고 입술이 그녀의 입술에 포개진다. 우희 위버
는 하체가 뻐근해 온다.
우희 위버는 호흡이 가뻐졌다. 모니터의 우희 위버
와 현실의 우희 위버가 혼동을 일으키기 시작했다. 현
실의 우희 위버는 어느 사이에 사라지고 모니터 안의
우희 위버만 존재하고 있었다.
우희 위버는 심플 터너가 자신의 몸속 깊숙이 들어
왔으면 하고 생각한다.
우희 위버는 그의 허리를 안고 눈을 감는다.
그의 투박한 손이 우희 위버의 둔부로 온다. 그는
살덩어리를 움켜쥐듯이 우희 위버의 둔부를 움켜쥐었
다가 놓고 스커트를 걷어 올린다. 그의 손이 우희 위
버의 스커트 속 둔부에서 유영을 하다가 앞쪽으로 옮
겨왔다.
"계속해 "
우희 위버는 신음처럼 중얼거렸다.
그의 손이 우희 위버의 속옷을 쓰다듬을 때 우희 위
버는 짜릿한 전율에 몸을 떨었다. 우희 위버는 그에게
협조하기 위해 다리를 들어 그의 허리에 감았다. 그는
빠르게 버클을 풀렀다. 그러나 그의 지퍼는 우희 위버
가 내렸다. 그는 청바지 안에 아무 것도 입지 않고 있
었다.
우희 위버의 동공에 그의 남성이 확대되어 왔다. 살
아서 불끈거리는 그의 거대한 남성이 우희 위버의 숨
을 막히게 했다. 우희 위버는 다시 몸을 부르르 떨면
서 그의 남성을 자신의 여성에게로 인도했다.
다음은 빛의 축제였다. 어두운 밤하늘에 폭죽을 쏘
아 올리기라도 하듯이 우희 위버의 감은 눈 위에서 무
수한 불꽃이 피어나고 색색의 꽃송이들이 쏟아져 내려
왔다.
우희 위버는 거칠게 신음을 토했다.
차안이라 거칠 것이 없었다. 우희 위버는 비명소리
에 가까운 신음소리를 지르고 소리를 내어 울었다. 가
상의 공간에서 이루어지는 섹스였으나 모니터와 그녀
가 연결되어 있어서 실제의 상황과 똑같은 흥분과 절
정을 만끽할 수 있었다.
사이버섹스 프로그램이 모두 끝난 것은 30분이 지났
을 때였다. 모니터는 프로그램이 끝나자 음악이 흐르
고 차창으로는 황량한 빗발이 뿌리는 적막한 공간이
소리없이 지나가고 있었다.
우희 위버는 호흡이 가라앉자 비로소 눈을 떴다. 아
직도 그녀의 전신에는 격렬한 섹스 뒤의 흥분이 감미
롭게 남아 있었다.
차는 벌써 니트론의 상공을 날고 있었다. 우희 위버
는 현실에서 섹스 뒤의 뒷처리를 하듯이 모니터를 껐
다. 그리고 걷어 올려진 스커트를 내리려다가 멈칫했
다. .
우희 위버는 에어카의 자동운전을 수동으로 바꾸고
니트론의 상공위로 낮게 비행했다. 그녀는 후론트그라
스로 내다보이는 니트론의 황량한 풍경에 약간 몸을
떨었다. 니트론은 여전히 황폐했다. 부서진 건물의 잔
해가 고대 페르시아의 신전처럼 여기저기 널려 있는
평원에는 키 작은 관목들이 볼상 사납게 흩어져 있었
다.
그 곳은 한때 전세계에서 가장 크고 화려했던 도시
뉴욕이었다.
우희 위버는 퀸즈보로다리 쪽으로 에어카를 운전했
다. 퀸즈보로다리를 지나야 맨해턴으로 들어서고 허드
슨강쪽으로 갈 수 있었다.
맨해턴이 폐허가 된지는 이미 오래였다. 전세계에서
가장 크고 화려했던 도시가 지금은 사막이나 다름없었
다.
우희 위버는 허드슨강에 가까이 이르자 에어카를 착
륙시켰다. 그리고 에어카에서 내려 걷기 시작했다. 건
물의 잔해가 여기저기 흩어져 있어서 차가 더 이상 들
어갈 수가 없었다. 게다가 허드슨강을 건너면 늪과 숲
이었다.
빗발이 머리와 목덜미를 푸슷하게 적셨다. 우희 위
버는 트렌치코트의 앞섶을 바짝 여몄다. 문득 이 황폐
한 지역을 공연히 찾아왔다는 후회가 우희 위버의 머
리를 엄습하고 있었다. 우희 위버는 그 생각에 반발을
하듯 걸음을 좀 더 빨리했다. 유러너스 제국의 비밀경
찰이 언제 습격을 해올지 알 수 없어서 불안했다.
우희 위버는 이내 허드슨강 뚝에 이르렀다. 허드슨
강은 황야로 변해 있었다. 강은 메말라버렸다. 강이
흐르던 곳에는 바닥이 드러나 있었고 키 작은 관목들
과 잡초들이 무성했으나 제국에서 방치하여 폐허가 되
어 있었다.
아라크네 시민들이 폐허가 된 니트론을 깨끗한 공원
으로 만들자고 제국정부에 줄기차게 요구하는 것도 결
코 무리는 아니었다.
그러나 제국정부는 시민들의 요구를 거부하고 있었
다. 제국정부가 국민들에게 약속했던 낙원건설은 유보
되어 있었다. 제국정부는 인류 최대의 프로젝트인 타
임플랜 사업에 골몰해 있었다. 그들은 국민들을 위해
낙원을 건설할 여유가 없었다. 온 유러너스 제국이 프
로젝트 타임플랜에 매달려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
다. 그리고 그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었다.
타임플랜은 네미시스의 제2차 지구침입에 대항하기
위한 국민창생 사업이었다.
우희 위버는 강으로 걸어 내려갔다. 도시의 쓰레기
들은 강 건너에 살고 있었다. 사시사철 푸른 물이 흐
르던 강바닥에는 여기저기 웅덩이가 패어 빗물이 괴어
있었다. 그러나 강을 건너는데는 아무런 지장이 없었
다.
우희 위버는 강을 건너자 숲으로 들어섰다.
찬비는 숲에도 뿌리고 있었다. 우희 위버는 종종 걸
음으로 도시의 쓰레기들이 살고있는 마을에 이르렀다.
마을에는 비가 오고 있는데도 문명의 혜택을 받지 못
하고 있는 남루한 아이들이 여기저기서 뛰어 놀고 있
었다.
우희 위버는 마을을 지나 30분쯤 걸어서 유강렬박사
의 오두막 집앞에 이르렀다. 유강렬박사가 아라크네시
로 진출하기 전에 살던 집은 호수끝에 있었다. 호수는
봉선화 혜성으로 인해 생긴 것이었다. 허드슨강이 말
라버린 뒤에 생긴 호수였으나 니트론에서 그 곳만이
유일하게 물이 남아 있었다.
(누가 살고있는 것일까?)
우희 위버는 집앞에서 걸음을 멈췄다. 유강렬박사의
집에서는 푸른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날씨가 황
량하기 때문일까. 누군가 그 집에 들어와 벽난로에 불
을 피우고 있는 것이다. 우희 위버는 도시의 쓰레기들
중 한 사람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어떻게 할까?)
우희 위버는 망설였다. 낮선 사람, 특히 과학문명에
버림받은 도시의 쓰레기들을 만나야 한다는 생각을 하
자 두려움이 일어났다. 그러나 그들에 대한 두려움이
유러너스 제국의 비밀경찰에 대한 두려움을 앞지르지
는 못했다. 유러너스 제국의 비밀경찰을 만나느니 도
시의 쓰레기들을 만나는 것이 더 나을 것같았다.
우희 위버는 문을 두드렸다.
유강렬박사는 죽었다. 유강렬박사가 죽었으므로 이
집에 대한 권리는 나에게 있다. 난폭하지 않은 사람이
라면 권리를 주장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한편
으로는 나에게 과연 그런 권리가 있는가 하는 생각과
유강렬박사의 집에 들어가서 무엇을 하지 하는 생각이
뒤통수를 엄습해왔다. 루나하우스에서 이 곳으로 오려
고 생각한 것은 유러너스 제국의 비밀경찰을 피해 도
망을 치기 위해서였다.
그때 현관문이 덜컥 열리고 늙수그레한 초로의 노인
이 얼굴을 내밀었다.
"누구요?."
노인이 우희 위버를 보고는 이마에 주름을 잡았다.
"이 집은 유강렬박사님 소유가 아닌가요?"
우희 위버는 당황하여 노인에게 반문했다. 유강렬박
사의 집에 노인이 살고 있어서 의아했다.
"댁은 누구요?"
"우희 위버라고 해요. 아라크네시에서 왔어요."
"박사에게 들은 일이 있소."
"유강렬박사님은 돌아가셨어요."
"그 분이 돌아가시다니 좋은 분인데 안되었소."
노인의 얼굴에 어두운 그림자가 스쳐 지나갔다.
"노인께서는 오래 전부터 여기서 살았나요?"
"아니오. 나는 그저 빈집을 지키고 있을 뿐이오."
"유강렬박사님에게 허락을 받았나요?"
"내가 사는 집은 마을에 있소. 여기가 조용하고 창
으로 호수가 보여서 옮겨와서 살게 되었소. 집을 비어
드리겠소."
"유강렬박사님을 잘 아시나요?"
"모르오. 그 양반이 이 곳에 가끔 왔기 때문에 인사
정도만 나누었을 뿐이오."
노인은 어쩐지 우희 위버를 경계하고 있는 것같았
다.
"제가 이 집을 쓸려고 하는데 괜찮겠어요?"
"물론이오. 이제 이 집은 당신 집이오."
노인이 문을 활짝 열고 밖으로 나왔다. 우희 위버는
노인을 비켜서 유강렬박사의 집으로 들어갔다. 거실의
창으로 밖을 내다보자 노인은 느릿느릿 걸어서 마을로
가고 있었다.
우희 위버는 트렌치코트를 벗어서 소파에 던졌다.
거실은 벽난로를 피워 후끈후끈했다. 벽난로에는 장
작이 활활 타고 있었다. 우희 위버는 거실과 방을 한
바꿔 돌아본 뒤에 소파에 털썩 앉았다. 유강렬박사가
있을 때보다 달라진 것은 없었다. 특이한 것은 폐허가
된 도시에 어울리지 않게 대용량의 컴퓨터가 한 대 설
치되어 있는 것뿐이었다.
우희 위버는 눈을 감고 잠을 청했다.
에어카 안에서 사이버섹스 프로그램으로 격렬한 섹
스를 하고 에어카에서 내려 오두막까지 빗속을 걸어온
뒤라 그런지 나른한 피로감과 함께 졸음이 쏟아지고
있었다.
우희 위버가 눈을 뜬 것은 창밖에서 일렁거리는 불
빛이 보였기 때문이었다.
(무슨 불빛이지?)
우희 위버는 소파에서 일어나 밖을 내다보았다. 사
방은 이미 캄캄하게 어두워져 있었다. 그러나 황량하
게 내리던 비는 그쳐 있었다.
밖에서는 누군가 모닥불을 피우고 있었다. 우희 위
버는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밖에서 불을 피우고
있는 것은 아까의 그 노인이었다. 우희 위버는 어깨를
움츠리고 노인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비가 내린 탓인
지 밤공기가 쌀쌀했다.
"무엇을 하고 있어요?"
"식사를 준비하고 있소."
"식사요?"
"여기는 마땅한 식사거리가 없소. 그래서 야생의 닭
을 잡아서 굽고 있소. 소금을 뿌려서 먹으면 맛이 썩
괜찮지 "
노인이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우희 위버는 노인의
미소에 가슴이 따뜻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유강렬박사
도 야생의 닭을 잡아서 우희 위버에게 구워 준 적이
있었다.
"그거 먹어 봤어요. 유강렬박사님이 구워 주셨어
요."
우희 위버는 노인의 옆에 쭈그리고 앉았다. 닭을 굽
는 장작불이 타닥타닥 소리를 내며 타고 뜨거운 열기
가 얼굴로 끼쳐왔다. 장작불이 타는 소리 외에는 사방
이 물속처럼 조용했다.
"유강렬박사님과는 잘 아시나요?"
우희 위버는 두 손으로 불을 쬐며 노인에게 물었다.
노인의 정체가 무엇인지 궁금했다.
"아까도 말했지. 그 양반이 여기 가끔 왔기 때문에
얼굴을 아는 처지라고 "
"그 분이 저에 대해서 얘기 했나요?"
"했소. 좋은 아가씨라고 "
노인의 대답은 간략했다.
"아가씨를 사랑한다고 했지 "
노인이 먼 허공을 쳐다보며 덧붙여 말했다. 노인의
말에 우희 위버는 고개를 떨어트렸다. 사랑하는 사람
은 비참하게 죽고 그녀는 이제 유러너스 비밀경찰의
눈을 피해 정처없이 도망을 다녀야 한다고 생각하자
가슴이 아팠다. 문득 유강렬박사가 죽기 전에 루나하
우스에 침입했던 검은 고양이라는 여자가 생각났다.
그녀가 수상하기도 했으나 유러너스 비밀경찰 같지는
않았다.
"자 맛을 보도록 하시오."
노인이 꼬챙이에 구운 닭을 우희 위버에게 넘겨주었
다. 우희 위버는 노인에게 닭을 받아서 손으로 찢어
먹기 시작했다.
"맛이 아주 좋아요."
"유강렬박사가 좋아하던 요리였소."
노인의 말에 우희 위버는 갑자기 유강렬박사의 죽음
이 현실로 받아들여지면서 뜨거운 눈물 한줄기가 볼을
타고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어둠 때문에 눈물이 노인
에게 보이지 않는 것이 다행이었다.
(아아 나는 반드시 박사님의 복수를 할거야!)
우희 위버는 어둠속에서 눈을 부릅뜨고 맹세를 했
다.
시간탐사선(우주탐사선) 아르고 24호가 발사되는 애
드먼터 우주기지는 아라크네시에서 남쪽으로 350km나
떨어져 있었다. 로즈 국장은 비밀경찰국 경호차량의
경호를 받으며 애드먼터 우주기지로 향했다. 날씨는
좋았다. 숲의 나뭇가지 사이로 저녁 햇살이 금빛으로
살랑거리고 새들이 숲위를 날며 지저귀고 있었다.
평화로우면서도 목가적인 풍경이었다. 아라크네시
상공을 벗어나 교외의 에어하이웨이(공중고속도로)로
에어카 페가서스가 들어서자 서서히 어둠이 내리기 시
작했다. 로즈 국장은 차안에서 우유와 토스트로 저녁
을 때우고 눈을 감았다. 시간탐사선 아르고 24호를 발
사시키는 우주기지 애드먼터에 도착할 때까지는 두 시
간 정도의 여유가 있었다. 그 동안 눈을 붙여 두리라
고 생각했다.
물론 애드먼터에서 발사되는 아르고 24호는 시간탐
사선이 아니라 토성의 위성 살로메를 왕복하는 우주선
이었다.
"받들어총!"
우주기지의 정문에 착륙하자 경찰들이 깜짝 놀라 우
르르 뛰어나와 일렬로 정렬을 했다. 로즈 국장은 그
소리에 잠에서 깨어났다.
"국장님께 경례!"
애드먼터 우주기지는 비밀경찰에 의해 삼엄하게 경
비되고 있었다. 애드먼터 우주기지에 로즈 국장이 비
밀경찰을 파견한 것은 혹시라도 있을지 모를 적의 스
파이의 잠입을 방지하고 내통자들을 차단하기 위해서
였다.
"수고한다!"
로즈 국장은 고개를 끄덕거렸다.
애드먼터기지 안으로 들어가자 제국군인들도 보였
다. 아르고 24호에는 5백명의 제국군인들이 탑승할 예
정이었다.
"어서 오십시오. 국장님."
우주기지 애드먼터의 소장은 해군제독 마린스키였
다. 그는 아르고호의 선장이었으나 살로메 위성을 발
견한 공로로 애드먼터기지의 소장으로 승진하면서 에
바소령과 함께 45인의 원로로 임명된 사람이었다. 그
러나 에바소령은 마더 살로메를 배신하여 비참한 죽음
을 당했던 것이다. 서열은 로즈 국장이 마린스키 제독
보다 위였다.
"소장. 차질없이 진행되고 있소?"
"예. 국장님."
"지금 살로메 위성엔 기술자들이 얼마나 올라가 있
소?"
"모두 20만명쯤 됩니다."
"건설은 얼마나 진행되었소?"
"조만간 훌륭한 도시가 탄생될 예정입니다."
"놀라운 일이군. 저 먼 우주에 도시를 건설하다니
"
로즈 국장은 새삼스럽게 하늘을 쳐다보았다. 토성이
어디쯤 있는지 어림짐작도 할 수 없었으나 광속에 가
까운 첨단을 자랑하는 우주선 아르고 24호로도 32일이
나 걸리는 먼 거리였다.
"우리가 살로메 위성에 건설하는 우주도시는 우주탄
생 이후 가장 놀라운 사건일 것입니다."
마린스키 제독이 자랑스러운 얼굴로 대답했다.
"이번 우주선에는 어떤 분야의 기술자들이 승선할
예정이오?"
"이번엔 건설 기술자들입니다. 식물학자와 동물학
자, 그리고 천문학자도 갑니다."
"군대는 얼마나 있소?"
"지금 2만명의 군대가 주둔하고 있습니다. 아시다시
피 그 곳엔 적이 없습니다. 경찰이 약간 필요한데 국
장님께서 선발해 주십시오."
"그렇다면 우리 비밀경찰을 보내야 하겠군. 몇 명이
나 필요하오?"
"2백명이면 충분할 것입니다."
"좋소. 정예경찰을 선발하겠소."
로즈 국장은 마린스키 제독과 얘기가 끝나자 아르고
24호를 직접 시찰했다. 아르고 24호는 항공모함처럼
거대했다.
살로메 위성에 도시를 건설하는 각종 장비와 기술자
를 실어 나르기 위해 우주선이 거대해질 수밖에 없었
던 것이다.
로즈 국장이 애드먼터 우주기지에서 돌아오자 모리
오 부국장이 기다리고 있었다.
"부국장. 무슨 일인가?"
로즈 국장은 모자를 벗고 안락의자에 몸을 던졌다.
시간이 벌써 자정이 가까워지고 있었다.
"유러너스 제국에서 활동하는 사피언스 그라운드의
최고 책임자가 우리 첩보망에 걸려들었습니다."
"누구야?"
"바르시크대령입니다."
"바르시크대령이라면 하데스의 지도자 아닌가?"
로즈 국장은 얼굴을 찌푸렸다. 바르시크대령은 블랙
버드 애브너소령과 함께 하데스의 양대산맥으로 일컬
어지던 사내였다. 사피언스 그라운드의 첩보사령관이
기도 했다.
"그렇습니다. 지금은 첩보사령관입니다."
"하시시 한 잔 주게."
로즈 국장은 깊은 생각에 잠기며 말했다. 애드먼터
우주기지에 갔다가 오느라고 러브타임에 참여하지 못
했던 것이다. 물론 돌아오는 길에 차안에서 사이버섹
스 프로그램으로 러브타임에 참여할 수 있었으나 로즈
국장은 그렇게하고 싶지 않았다. 그녀는 갑자기 인간
의 체취가 그리워졌다.
"예."
모리오 부국장이 하시시술을 크리스탈 잔에 따라 가
지고 왔다. 로즈 국장은 하시시술을 천천히 음미하듯
이 한 모금 마셨다.
"그럼 첩보사령관이 직접 유러너스 제국에 잠입하여
활동하고 있다는 말인가?"
"예."
"어떻게 바르시크대령을 낚았지?"
"이리노 퍼그스중위의 집에 있는 계집을 통해서입니
다."
"장애란?"
"예."
모리오 부국장이 공손히 대답했다. 로즈 국장은 얼
굴을 찌푸렸다. 장애란은 이리노중위가 보호해 달라고
요청한 계집애인 것이다.
"국장님께서 가르쳐 주신 접속암호로 그 계집이 국
장님 컴퓨터로 침입해 왔습니다. 우리는 그 계집이 바
르시크대령에게 보고를 하기 위해 팜탑으로 접선을 할
때 역추적하여 바르시크의 팜탑 컴퓨터 접속암호를 찾
아내서 위치를 확인한 것입니다. 그리고 바르시크대령
이 자리를 비운 사이에 그의 옷에 카메라칩을 설치했
습니다."
"그렇다면 바르시크가 어디서 무엇을 하던지 우리에
게 보이겠군."
"그렇습니다."
"좋아. 모니터를 보자구."
"예."
모리오 부국장이 로즈 국장의 집무실에 설치되어 있
는 슈퍼컴퓨터를 부팅시켰다. 그러자 모니터에 회의를
하고 있는 사피언스 그라운드 평의회의 모습이 보이고
있었다.
제 25 장 은하 시대
제3군사령부에서 열린 사피언스 그라운드의 평의회
회의는 납덩이처럼 무거운 침묵 속에 빠져들고 있었
다. 암호명 검은 고양이가 팜탑으로 보낸 X파일은 놀
랍기 짝이 없는 것이었다. 그들은 유러너스 제국이 토
성의 위성에서 생명체가 살 수 있는 위성을 찾아내고
그것을 타임플랜이라는 시간탐사계획으로 위장한 배경
에는 반드시 무시무시한 음모가 도사리고 있다고 생각
했던 것이다. 그러나 X파일의 모든 비밀은 암호를 해
독하지 못해 풀 수 없었다.
"X파일에 대해서 논의합시다!"
평의회 의장 예멘이 평의원들을 돌아보며 무겁게 입
을 열었다.
바르시크대령은 잠시 입을 다물고 기다렸다. 누군가
무슨 말을 해주기를 바랐으나 모두들 눈을 내리깐 채
침묵만 지키고 있었다.
"암호명 블랙 캐츠의 보고에 의하면 행방불명이 된
유러너스 제국의 시민들 20만명이 살로메 위성에 있을
거라는 거요."
"그렇다면 살로메 위성에 제2의 유러너스 제국이 건
설되고 있는 것이 아닙니까?"
몰루카장군이 불안한 얼굴로 질문을 던졌다. 평의회
의원들의 얼굴엔 가벼운 탄성과 경악의 표정이 스쳐
지나갔다.
"그렇습니다."
"문제는 이들이 왜 이러한 사실을 비밀에 붙인 채
추진하느냐는 것입니다."
"혹시 우리를 공격하기 위한 것이 아닐까요?"
"우리를 공격한다구요?"
"유러너스 제국은 우리와 공존하기를 원치 않고 있
습니다. 어떻게 하던지 우리를 지구상에서 사라지게
하려고 혈안이 되어 있습니다. 유러너스 제국이 시민
들을 살로메 위성으로 모두 이주시킨 뒤 지구를 파괴
해 버린다면 우리는 단 한 사람도 살아남지 못할 것입
니다. 우리가 그 전에 유러너스 제국을 공격해야 합니
다."
"압둘라장군의 생각은 어떻소?"
예멘 의장이 압둘라장군을 지적하여 질문을 던졌다.
압둘라장군은 별이 번쩍이는 견장을 단 군복을 입고
있었다.
"의장 각하! 사피언스 그라운드에 비상계엄을 선포
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사피언스 그라운드 주민들에게까지요?"
"그렇습니다. 의장 각하! 우리는 아직 적의 음모를
파악하지 못했습니다. 방심하고 있다가 언제 공격을
당할지 모릅니다."
"허지만 무슨 근거로 비상계엄을 선포한다는 말이
오?"
"그건 안됩니다."
그러자 몰루카장군이 단호하게 반대했다.
"안되다니요?"
"비상계엄을 선포하면 큰 혼란이 일어납니다. 의장
각하! 큰 혼란이 일어나면 걷잡을 수 없이 시민들이
동요합니다. 그러잖아도 전쟁만 일어나면 유러너스 제
국군이 사피언스 그라운드를 잿더미로 만들어 버린다
는 소문이 퍼져 있어서 주민들이 전전긍긍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몰루카장군!"
그때 가오슝장군이 벌떡 일어났다. 바르시크대령은
눈쌀을 찌푸리며 가오슝장군을 쳐다보았다.
"예. 가오슝장군!"
"놈들이 우리를 공격하면 우리는 구경만 하고 있는
답니까? 사피언스 그라운드군도 이제는 옛날의 오합지
졸이 아닙니다. 적이 우리를 공격하면 우리도 적을 공
격할 것입니다. 우리는 2천만명이 넘는 군대가 있습니
다!"
"그렇게 감정적으로 결정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닙니
다."
"이게 어디 감정에 의한 것입니까?"
바르시크대령은 더 이상 참고 있을 수가 없었다.
"가오슝장군님! 비상계엄은 위기상황에서 선포하는
것입니다."
바르시크대령은 그때서야 조용히 말했다. 평의회에
서 사태를 정확히 파악하고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
다. 유러너스 제국과의 전쟁은 승산도 없을 뿐아니라
사피언스 그라운드가 추진하는 니리드에 우주도시를
건설한 다음에야 가능한 것이었다. 사피언스 그라운드
와 유러너스 제국이 전쟁을 하게 되면 지구는 완전히
파괴될 것이었다. 게다가 봉선화 혜성의 제2차 침입도
목전에 닥쳐와 있었다.
"지금이 위기상황이 아니라는 것입니까?"
가오슝장군이 눈을 부릅뜨고 바르시크대령을 쏘아보
았다.
바르시크대령은 어처구니가 없었다.
"위기상황입니다."
"그런데 왜 비상계엄을 선포하면 안된다는 것입니
까?"
"아직 우리는 전쟁에서 승리한다는 보장이 없습니
다. 승리한다는 보장도 없이 전쟁을 유발할 비상계엄
을 선포하면 유러너스 제국만 자극합니다."
"우리가 이기지 못하면 유러너스 제국도 이기지 못
합니다."
"우리는 펄서폭탄을 개발했습니다."
"펄서폭탄은 지구를 파괴하는 폭탄입니다. 그것을
사용하면 유러너스 제국은 살아남지 못할 것입니다!"
"그것을 그렇게 간단하게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그럼 바르시크대령은 어떻게 하는 것이 좋겠소?"
"첩보가 더 필요합니다."
"첩보라구요?"
"유러너스 제국이 무엇때문에 우주탐사 계획을 시간
탐사로 위장하고 있는지 밝혀내야 합니다."
"두 분 조용히 하시오."
그때 평의회 예멘 의장이 두 사람을 진정시켰다. 두
사람은 비로소 언쟁을 멈추고 평의회 의장을 쳐다보았
다.
"비상계엄은 유보하겠소."
가오슝장군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바르시크대령의
얼굴엔 만족한 미소가 떠올랐다.
"그 대신 전군에 비상전투태세를 갖추도록 하시오!"
"전군에요?"
"그렇소! 사피언스 그라운드의 모든 군대에 실탄을
지급하고 영외 외출을 금지시키시오! 각급 지휘관들은
항상 최고사령관의 컴퓨터에 접속을 해놓고 대기하도
록 하시오!"
"알겠습니다."
평의회 의원들이 비장한 어조로 대답했다. 사피언스
그라운드의 평의회 회의는 그것으로 끝이 났다. 평의
회 의장을 선두로 의원들이 차례로 회의장을 떠나자
바르시크대령만이 남았다.
"사피언스 그라운드가 전투태세로 들어갔군요."
모리오 부국장이 의미심장한 어조로 내뱉았다. 사피
언스 그라운드가 그들의 음모대로 말려 들어오고 있다
는 말이었다.
"잘된 일이야."
로즈 국장은 테이블 위에 두 다리를 올려놓았다. 모
리오 부국장의 시선이 그녀의 다리 사이에서 불꽃을
일으키는 것을 의식하며 로즈 국장은 감미로운 기분을
느꼈다. 상황이 유러너스 제국에 유리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비밀경찰국 최대의 현안이었던 사피언스 그라
운드 첩보사령부 사령관 바르시크대령을 찾아낸 것도
기분좋은 일이었고 그를 통해 사피언스 그라운드 평의
회를 손바닥 들여다보듯이 감시하고 있는 이상 전쟁은
유러너스 제국의 승리가 될것이다.
"모리오 부국장. 그만 퇴근하게."
로즈 국장은 전신이 나른하여 모리오 부국장에게 지
시했다.
"예."
"나가는 길에 닥터 킬러를 보내게."
"예!"
모리오 부국장이 절도있게 거수경례를 하고 집무실
에서 나갔다. 로즈 국장은 지그시 눈을 감았다. 벌써
러브타임에 참여할 시간이 지나 있었다.
이내 닥터 킬러가 집무실로 들어왔다. 닥터 킬러는
로즈 국장의 러브타임 파트너였다.
"시작하게."
로즈 국장은 눈을 감은 채 명령을 내렸다.
닥터 킬러가 집무실의 조명을 은은하게 조절한 뒤에
그녀의 부츠를 벗기기 시작했다. 로즈 국장은 안락의
자에 몸을 깊숙이 기대고 앉아서 닥터 킬러의 시중을
즐길 자세를 취했다.
부츠는 먼저 지퍼를 열고 벗겨야 한다.
닥터 킬러는 그녀의 부츠에 달려있는 지퍼를 내리고
부츠의 앞 뒤끝을 잡고 끌어당겼다. 그러자 오른쪽 부
츠가 스르르 벗겨져 나갔다. 로즈 국장은 발이 시원한
느낌이 들었다. 부츠는 공기가 잘 통하지 않기 때문에
언제나 발에 냄새가 배고 땀이 났다.
닥터 킬러가 이번엔 로즈 국장의 왼쪽 부츠의 지퍼
를 내리고 그것을 벗겼다. 로즈 국장은 안락의자를 조
절하여 침대를 만들어 누웠다. 이제는 닥터 킬러가 스
타킹을 벗길 차례다.
로즈 국장은 눈을 감고 닥터 킬러가 스타킹을 벗길
때의 차가운 손을 생각했다. 놈에게서는 언제나 죽음
처럼 싸늘한 분위기가 풍긴다. 닥터 킬러는 그녀의 옆
에 와서 무릎을 꿇고 앉아 스커트 안으로 손을 넣는
다. 로즈 국장은 가볍게 몸을 떤다. 살갗을 스치는 손
의 부드러움에 습관처럼 전율한다.
닥터 킬러가 그녀의 허벅지를 쓰다듬다가 오른 쪽
스타킹의 밴드를 잡는다. 그는 스타킹의 밴드를 잡아
서 돌돌 말 듯이 벗긴다.
로즈 국장은 눈을 뜨고 벽에 설치되어 있는 슈퍼컴
퓨터 모니터를 응시한다. 바르시크대령은 회의실에서
나와 복도를 걸어가고 있다.
로즈 국장은 다시 눈을 감는다.
닥터 킬러는 그녀의 제복 상의의 단추를 푸르고 있
다. 그의 손은 단추를 푸를 듯하다가 둥글게 부풀어
오른 가슴을 지그시 누른다. 그러다가 다시 단추를 열
고 상의의 앞섶을 열어 젖힌다.
'상의까지 벗기지 않아도 괜찮은데 '
로즈 국장은 얼핏 그런 생각을 한다. 그러나 내색을
하지는 않는다. 닥터 킬러가 마사지를 하듯이 손으로
그녀의 가슴위에서 둥글게 원을 그린다. 그는 잔인한
킬러답지 않게 러브타임에 참여할 때 정성을 다한다.
그러나 지나치게 느린 탓에 그녀는 이따금 안달을 한
다.
닥터 킬러는 이제 부라우스의 단추를 푸른다. 그녀
는 문득 자신이 닥터 킬러에게 죽음을 당하는 여자들
과 같다는 생각을 한다. 도대체 이놈은 얼마나 많은
여자들을 폭행하고 살해한 것일까.
닥터 킬러가 옷을 벗는 동안 로즈 국장은 다시 모니
터로 시선을 보낸다.
바르시크대령은 어떤 방으로 들어가고 있다. 그도
잠을 자려는 것일까. 바르시크대령이 들어간 방에는
침대가 하나 있다. 하긴 사피언스 그라운드도 밤이 깊
었을 테니 바르시크대령도 자야 한다. 바르시크대령이
상의의 단추를 푸르다가 벽의 전등 스위치를 누른다.
그러자 한순간 모니터가 캄캄해진다.
카메라칩은 어둠만을 감지하고 있다.
카메라칩이 자동으로 적외선을 발사하여 사물을 인
식하는데는 30초쯤 걸린다.
로즈 국장은 닥터 킬러를 쳐다본다. 닥터 킬러는 단
단한 체격을 갖고 있다. 문득 그의 나이가 얼마나 되
었을까 생각해 본다. 그러나 그의 나이를 알 수가 없
다.
닥터 킬러가 안락의자 위로 올라와 그녀의 위에 엎
드린다.
로즈 국장은 닥터 킬러의 어깨 너머로 컴퓨터 모니
터를 살핀다. 적외선 감지기가 스스로 작동을 하여 바
르시크대령을 모니터 위에 띄운다. 바르시크대령은 옷
을 벗고 침대에 눕는 중이다.
바르시크대령은 부속실을 나오자 총총히 의장실로
향했다. 그의 옷에 붙어있는 카메라칩을 찾아낸 것은
첩보사령부의 행동과학과였다. 유러너스 제국이나 사
피언스 그라운드나 치열한 첩보전에서 승리하기 위해
온갖 신무기를 만들어낼 뿐아니라 적의 신무기를 찾아
내는 데도 심혈을 기울인다.
첩보사령부의 행동과학과는 그런 일을 하고 있었다.
그가 사피언스 그라운드로 돌아오자 행동과학과는
그의 옷을 샅샅이 조사하여 카메라칩을 찾아내는데 성
공했다. 그리하여 거짓으로 평의회 회의를 열고 그가
부속실에서 잠을 자기 위해 불을 끌 때 미리 대기시켜
놓은 가짜 바르시크대령과 바꿔치기를 한 것이다.
카메라칩은 투명광선을 이용하여 사물을 인식한다.
그러나 광선이 없는 캄캄한 밤에는 적외선 감지기가
스스로 작동을 하여 사물을 감지한다. 그러나 광선으
로 인식하다가 적외선으로 교체될 때는 30초쯤의 간격
이 있다. 사피언스 그라운드 첩보사령부의 행동과학과
는 그 시간을 이용한 것이다.
유러너스 제국은 이제 엉뚱한 사내를 바르시크대령
인줄 알고 감시하게 될것이다.
"어서 오시오."
의장실에는 예멘 평의회 의장과 몰루카장군이 기다
리고 있었다. 바르시크대령은 그들에게 가볍게 목례를
했다.
"그들은 어떻게하고 있습니까?"
바르시크대령은 예멘 평의회 의장을 쳐다보았다.
"러브타임 중이오."
예멘 의장이 빙긋이 웃었다. 몰루카장군은 언제나처
럼 심각한 표정이었다. 예멘 의장이 보고있는 컴퓨터
화면에는 유러너스 제국의 비밀경찰 로즈 국장과 닥터
킬러가 러브타임에 참여하여 섹스에 몰두하고 있었다.
"국장과 닥터 킬러라 "
예멘 의장이 이해할 수 없다는 듯이 고개를 흔들었
다.
"바르시크 사령관."
"예. 각하!"
"저들의 러브타임이 과연 주민들을 통제하는 수단으
로 효과가 있는 것 같소?"
"의장 각하! 인간의 욕망은 크게 식욕과 성욕으로
나뉘어진다고 합니다. 인간의 이 두 가지 욕망을 해결
하면 욕구불만이 없어지고 결국은 지배층에 대한 불만
도 사라진다는 것입니다."
"결국 성욕을 해결하여 욕구불만 하나를 없앤다는
말이군."
"식욕이나 성욕이나 인간의 존재에 절대적으로 필요
한 것입니다."
"존재?"
"인간은 존재하기 위해 욕망을 갖는 것입니다."
컴퓨터 화면에는 로즈 국장과 닥터 킬러가 벌거벗은
채 정신없이 헐떡거리며 뒹굴고 있었다.
"나에게는 어려운 말이야."
예멘 의장이 고개를 흔들었다. 바르시크대령도 더
이상 설명을 하고 싶지 않았다. 그는 몰루카장군을 따
라가 오늘밤에 발사 될 우주선에 타고 니리드 위성으
로 갈 예정이었다.
"의장 각하! 시간이 얼마 없으니 가시죠."
"그럽시다!"
몰루카장군의 말에 예멘 의장이 앞장을 섰다. 그 뒤
를 몰루카장군이 따르고 바르시크대령이 마지막으로
따랐다.
평의회 청사 앞에는 의장 전용차와 경호차들이 대기
하고 있었다.
예멘 의장은 의장 전용차에 타고 몰루카장군과 바르
시크대령은 의장 부속실차에 탔다. 그러자 경호차들이
앞뒤에서 호위를 하기 시작했다.
시간은 벌써 새벽이 가까워지고 있었다.
바르시크대령은 차창으로 벌판위의 하늘에서 빛을
발하고 있는 별들을 쳐다보았다. 이제 전쟁은 우주로
이어질 지 모른다. 유러너스 제국이 토성의 위성 살로
메에 지구인들을 보내고 사피언스 그라운드마저 니리
드 위성에 주민들을 이주시키기 시작하면 결국 그 곳
에서도 위성을 차지하기 위한 전쟁이 불가피할 것이
다.
"장군님!"
바르시크대령은 깊은 생각에 잠겨 있는 몰루카장군
을 불렀다.
"예?"
몰루카장군이 깜짝 놀라서 바르시크대령을 쳐다보았
다.
"무슨 생각을 하고 계십니까?"
"니리드 위성과 살로메 위성을 생각하고 있습니다."
"위성이요?"
"니리드 위성과 살로메 위성은 갑자기 나타난 천체
입니다."
"갑자기 나타난 천체라니요?"
"니리드 위성과 살로메 위성이 발견된 것은 불과 몇
년 전의 일입니다. 인류는 그 동안 수많은 우주선을
은하계로 쏘아 올려 천체들을 탐사했습니다. 지금까지
인류가 쏘아 올린 우주선만 하더라도 수 만 개는 될것
입니다."
"그렇겠지요."
바르시크대령은 고개를 끄덕거렸다. 20세기에 소련
이라는 나라가 처음으로 우주선을 쏘아 올린 후 벌써
2천5백년이란 세월이 흘렀으니 아무리 적게 잡아도 수
만개가 되는 것이다.
"그런데 니리드와 살로메 위성을 발견했다는 기록은
없습니다."
"인류가 발견하지 못했을 수도 있지 않습니까?"
"그럴 리는 없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새로 생긴 천체라던가 "
"대령! 그렇지 않습니다. 우주에 존재하고 있는 모
든 천체는 생명체가 살 수 있으려면 적어도 20억년은
지나야 합니다."
"어떻게 그런 계산이 나오지요?"
"지구의 과거를 추적해 보면 알 수 있는 사실입니
다. 지구에 생명체가 살게 된 것은 원시지구가 탄생된
지 약 20억년이 지난 26억년 경의 일입니다."
" "
"그것도 단세포 생명체 같은 원시 생명체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현재와 같은 생명체가 살게 된 것은 35억
년에서 40억년이 지났을 때의 일입니다."
"그럼 니리드와 살로메 위성이 가짜입니까?"
"니리드와 살로메 위성엔 여러 가지 의문이 있습니
다. 그 의문을 알 수 없지만 우리가 반드시 풀어야 합
니다. 우리가 대령을 보내는 것도 까닭이 거기에 있습
니다."
"그렇다면 나보고 니리드 위성의 정체를 밝히라는
것입니까?"
"그렇습니다."
"그건 과학자들이 해야할 일이 아닙니까?"
"과학자들은 위험에 대처할 능력이 거의 없습니다.
군인만이 그 일을 해낼 수 있습니다."
"그렇군요."
바르시크대령은 무겁게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 일이
자신이 해야 할일이라면 기꺼이 맡으리라고 생각했다.
그들이 우주선이 발사되는 기지에 도착한 것은 새벽
이었다. 기지 사령관 파이널 잭슨장군의 아침식사를
대접받고 커피를 한 잔 마시자 우주선이 발사될 시간
이었다. 바르시크대령은 몰루카장군과 예멘 의장과 헤
어져 우주선 오딧세이 17호에 탑승했다. 그것이 예멘
의장이 마지막으로 본 바르시크대령의 모습이었다.
예멘 의장은 몰루카장군과 함께 전망대로 올라갔다.
전망대에서는 발사선이 한 눈에 보였다. 사피언스 그
라운드의 우주선 오디세이 17호는 새벽 여명속에 발사
를 기다리며 우뚝 솟아 있었다. 추진력을 얻기 위한
로켓기관은 대기권을 뚫고 나가면 분리되고 모선(母
船)이 단독으로 머나먼 우주를 항해한다. 토성의 궤도
에 진입하면 모선은 계속 궤도를 따라 돌고 착륙선이
모선에서 나와 니리드에 착륙하게 되는 것이다.
예멘 의장은 오딧세이 17호를 내다보며 깊은 생각에
잠겼다.
"차단벽 장치는 안전하오?"
이윽고 예멘 의장이 몰루카장군을 향해 물었다. 차
단벽 장치란 유러너스 제국에서 탐지하지 못하게 우주
선 오딧세이 17호 주위에 거대한 둠 모양의 전파벽을
설치하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이 차단벽은 오딧세이
17호를 따라 움직이기 때문에 유러너스 제국에서는 끝
내 탐지하지 못하게 되는 것이다.
유러너스 제국에서 우주탐사선을 시간탐사선이라고
위장을 하고 살로메 위성에 우주선을 계속 쏘아 올린
것을 사피언스 그라운드에서 몰랐던 것도 그들이 설치
한 차단벽 때문이었다. 유러너스 제국이나 사피언스
그라운드나 모두 우주선을 띄울 때는 차단벽을 설치했
다.
"안전합니다. 적외선, 전파 및 음파, 그리고 어떤
광선도 뚫지 못합니다."
몰루카장군이 대답했다.
"이번엔 우리 주민들이 얼마나 니리드 위성으로 가
지요?"
"2만명입니다."
"그러면 현재까지 니리드 위성에 가 있는 우리 주민
들은 60만명이 넘는군요."
"그런 셈입니다."
몰루카장군이 웃었다.
"왜 웃습니까?"
"혹시 의장 각하께서는 바르시크대령을 니리드 위성
으로 보낸 것은 그 곳에서도 전쟁을 하기 위한 것이
아닙니까?"
이번엔 예멘 의장이 희미하게 웃었다. 몰루카장군의
추측은 전혀 엉뚱한 것이 아니었다. 유러너스 제국이
나 사피언스 그라운드나 우주로 계속 인간들을 보내게
되면 필연적으로 전쟁을 하게 될것이다. 이젠 지구에
서의 전쟁만이 아니라 우주에서 전쟁을 할 시기가 도
래한 것이다.
"장군은 역시 대단한 안목을 가지고 있소!"
예멘 의장이 통쾌한 목소리로 웃었다.
"오딧세이 17호 발사준비 완료했습니다."
그때 조정실에서 발사준비가 끝났다는 사실을 알려
왔다.
"오딧세이 17호! 이상 없는가?"
파이널 잭슨장군이 오딧세이 7호의 선장인 매킨리
제독에게 물었다.
"이상 없습니다. 이륙 준비 완료되었습니다!"
"좋다. 행운을 빈다."
"감사합니다."
"조정실. 5분 후에 카운트다운 시작한다."
"알았습니다. 정확하게 5시 1분전에 카운트다운을
시작하겠습니다."
"좋다."
예멘 의장은 그들이 발사준비를 점검하는 동안 오딧
세이 17호의 동체를 우두커니 쳐다보았다. 오딧세이
17호에는 승무원과 군인들, 그리고 과학자들과 기술자
들이 타고 있었다. 승무원은 불과 150명밖에 안되지만
군인과 과학자들, 그리고 기술자들은 1천명이나 되었
다. 나머지는 모두 일반인들이었다.
그 곳엔 벌써 3만 여명의 군인들과 주민들이 57만명
이 상주하고 있었다. 바르시크대령을 보내는 것은 그
들을 효과적으로 통제하고 정보를 찾아내기 위해서였
다. 전쟁에서의 승리는 결국 첩보전인 것이다.
"조정실 카운트다운 시작하겠습니다."
그때 조정실에서 다시 보고가 올라왔다.
"시작하라!"
몰루카장군이 지시했다.
"카운트다운!"
예멘 의장은 긴장하기 시작했다. 언제나 그렇지만
우주선은 발사할 때가 가장 중요한 것이다. 몰루카장
군의 얼굴도 긴장한 표정이 역력했다.
제 26 장 우주를 향하여
레이먼드 제독의 명령에 따라 이리노중위는 우주복
과 우주모(宇宙帽)가 제대로 안전하게 연결이 되었는
지 확인했다. 그리고 안전벨트까지 잘 매어져 있는지
거듭 확인한 뒤에 심호흡을 했다. 마침내 아르고 24호
가 발사될 순간에 이른 것이다. 이리노중위는 긴장과
흥분 때문에 자신도 모르게 가슴이 뛰고 호흡이 가빠
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나는 이제 무한의 우주를 향해 날아가는 거야. 이
것은 분명히 선택된 행운이야 )
이리노중위는 전면의 디스 플레이 스크린을 응시하
며 속으로 다짐했다.
(허지만 이것은 시간여행이 아니지 않는가?)
이리노중위는 기분이 착잡했다. 마치 배신을 당한
기분이었다. 그가 아르고 24호가 시간여행을 하는 시
간탐사선이 아니라 태양계의 행성 토성의 위성인 살로
메라는 위성을 왕복하는 우주선이라는 것을 안 것은
불과 하루 전의 일이었다. 레이먼드 제독은 아르고 24
호에 승선하는 승무원을 비롯해 모든 기술자들을 애드
먼터 우주기지 강당에 모아놓고 그렇게 말했던 것이
다. 믿어지지 않는 일이었다. 게다가 마더 살로메까지
실존하고 있었다.
승무원들을 비롯해 기술자들이 일제히 웅성거리자
레이먼드 제독이 위압적인 눈빛으로 노려보았다.
"제군들! 조용히 하라!"
레이먼드 제독의 명령에 승무원들과 기술자들이 찬
물을 끼얹은 듯이 조용해졌다.
"제국정부에서 우주탐사를 시간탐사로 위장한 것은
우리 제국 정부안에 사피언스 그라운드의 첩보원들이
활동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에 총통께서는 고육지
책으로 우주탐사를 시간탐사로 위장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 "
"제군들은 토성이라는 행성을 잘 알고 있을 것이다.
이 행성에는 수많은 위성들이 있는데 우리가 가게 된
위성은 최근에 발견된 위성으로 마더 살로메의 이름을
따서 살로메 위성이라고 부른다! 이 위성에는 제군들
이 깜짝 놀랄 정도로 아름다운 산과 들이 있고 나무와
풀, 꽃들이 자라고 있다. 물론 산소도 충분히 있다!"
" "
"제군들은 유토피아라는 말을 들어본 일이 있는가?
들어본 일이 있다면 살로메 위성이 바로 유토피아라는
사실을 알게 될것이다. 우리는 사피언스 그라운드 몰
래 살로메 위성에 도시를 건설하고 그 곳에서 살게 될
것이다."
이리노중위는 그 다음부터 레이먼드 제독의 말이 귀
에 들어오지 않았다. 레이먼드 제독이 한 시간 남짓
입에 거품을 물고 연설을 했으나 그가 머릿속에 뚜렷
이 기억할 수 있었던 것은 시간탐사와 우주탐사, 그리
고 살로메 위성뿐이었다. 그러나 명령에 절대적으로
복종해야 했다. 제국정부에서 하는 일에는 의문을 가
져서도 안되고 반대를 해서도 안되는 것이다.
"제군들! 이제 제군들의 진정한 지도자가 누구인지
알아야 할 시기가 되었다. 제군들은 유러너스 제국의
진정한 지도자가 누구라고 생각하는가?"
" "
레이먼드 제독의 질문에 아무도 대답하지 않았다.
그것은 물어볼 것도 없이 파나카이아 총통이었다.
"제군들! 제군들에게 제국의 진정한 지도자가 누구
인지 보여 주겠다. 그 분은 우리 모두가 어머니라고
부르는 마더 살로메다!"
레이먼드 제독의 말에 아르고 24호의 승무원들과 기
술자들이 일제히 술렁거렸다. 그것은 청천벽력과 같은
선언이었다. 이리노중위는 쇠망치로 뒤통수를 얻어맞
은 것 같았다.
그것은 엄청난 충격이었다.
"마더 살로메를 경배하라!"
레이먼드 제독이 주먹을 들고 발을 구르며 연단을
향해 소리를 질러댔다. 그러자 연단에 있는 영관 장교
들이 일제히 주먹을 흔들고 발을 굴렀다. 연단은 그들
의 주먹질과 발을 구르는 열기로 가득해졌다.
"마더 살로메를 경배하라!"
연단의 함성과 열기는 강당으로 연결되었다. 강당에
운집한 군인들과 기술자들은 마더 타임시간에 하던 것
처럼 광적인 열기에 휩싸여 주먹을 흔들며 발을 굴렀
다. 집단 히스테리에 참여하지 않으면 제국의 반역자
가 되는 것이다.
"마더 살로메를 경배하라!"
이리노중위는 억지로 주먹을 흔들며 소리를 질렀다.
"마더 살로메를 경배하라!"
강당의 군인들과 기술자들이 5분 동안이나 주먹을
흔들고 발을 구르며 함성을 지르자 연단위에 오색(五
色)의 안개가 뿜어졌다. 연단위에서는 웅장하고 신비
스러운 음악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이리노중위는 감전이라도 된듯이 연단을 쳐다보았
다.
이제 마더 살로메가 등장할 차례였다.
강당은 쥐죽은 듯이 조용해졌다.
웅장한 음악이 천상(天上)의 음악처럼 신비스럽게
바뀌자 연단 전면의 벽이 갈라지며 월계관을 쓰고 흰
옷을 입은 마더 살로메가 안개 속에서 홀연히 모습을
드러냈다.
아
이리노중위는 그 순간 가슴이 컥 하고 막히는 것같
았다. 마더 살로메는 거대한 괴인이었다. 강당에 모인
사람들을 압도할 정도로 그녀는 몸집이 컸다. 그녀가
걸을 때마다 연단이 쿵쿵 울렸다.
마더 살로메는 이리노중위가 보고있는 사이에 점점
연단으로 가까이 걸어왔다.
"마더 살로메에게 경배를 드려라!"
레이먼드 제독이 손을 높이 들며 환호를 유도하자
연단의 영관급 장교들이 주먹을 흔들고 발을 구르며
소리를 질렀다. 강당의 군인들도 일제히 함성을 지르
고 발을 굴렀다. 강당은 또 다시 순식간에 광기와 열
기로 가득찼다.
"나의 아들과 딸들아 "
마더 살로메가 손을 들어 환호를 제지시켰다. 강당
이 일시에 물을 끼얹은 것처럼 조용해졌다.
"나는 너희들의 어머니 마더 살로메다."
마더 살로메의 목소리는 강당 안을 웅웅거리고 울렸
다.
"이제 너희들을 저 머나먼 우주의 유토피아로 보낸
다. 그 곳은 내가 너희들을 위하여 만들어 놓은 천상
의 낙원이다. 너희들은 그 곳에 가서 새로운 도시를
만들고 즐겁게 살도록 해라. 모든 것이 너희들의 것이
다 "
이리노중위는 마더 살로메의 기이한 목소리가 뇌리
를 파고드는 것같았다.
"그 별은 살로메 위성이라고 한다. 살로메 위성엔
우리 유러너스 제국의 시민들 20만명이 진출해 있다.
너희들은 그동안 아라크네시에서 행방불명이 되었거나
오랫동안 만나지 못했던 사람들을 만나게 될것이다."
" "
"그 곳은 아주 먼 곳이다. 그 곳까지 가려면 오랜
시간이 걸리니 내가 너희들에게 불멸의 혼을 불어넣어
주겠다. 이것을 받으면 너희들은 늙지도 않고 죽지도
않는다."
마더 살로메가 말을 마치고 두 팔을 벌리고 입김을
불었다. 그러자 그녀의 입에서 짙은 청무(靑霧: 푸른
안개)가 뿜어져 나왔다. 그 안개는 순식간에 강당을
가득 메꾸었다.
이리노중위는 숨을 죽이고 그 광경을 지켜보았다.
청무는 강당 안의 군인들과 과학자들, 그리고 기술
자들을 순식간에 에워쌌다. 이리노중위는 자욱한 청무
를 흡입하고 정신이 몽롱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
까. 문득 청무가 희미해지고 몽롱한 의식을 후벼파듯
웅후한 목소리가 귓전을 울렸다.
"이리 오너라."
이리노중위가 꿈에서 깨어난 듯 목소리가 들리는 연
단을 바라보자 희미한 청무사이로 마더 살로메가 연단
위에 비스듬히 누워 흰옷 속에서 거대한 가슴을 꺼내
는 것이 보였다.
"나의 아들과 딸들아. 너희들이 살로메 위성에 가서
도시를 건설하면 언제까지나 불멸의 혼을 갖도록 해주
겠다 "
자욱한 청무가 걷히자 마더 살로메는 연단에 정좌해
있었고 사람들의 눈빛은 무엇에 홀린 듯이 몽롱하게
풀어져 있었다.
이리노중위는 그날 밤을 어떻게 보냈는지 알 수 없
었다. 그것은 신비스러운 체험이었다. 마더 살로메의
입에서 뿜어진 자욱한 청무, 마더 살로메로부터 뿜어
져 나오는 기이한 체취, 마더 살로메를 위해서는 무엇
이던지 할 수 있을 것같은 기분 그리고 마더 살로메
의 품에 안겨서 유액을 마시고 싶은 욕망을 끝도 없이
느끼고 있었다. 비몽사몽이었다. 그러나 비몽사몽 중
에도 마더 살로메가 나타나서 이리노중위를 끝없이 설
득하고 있었다.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다, 너는 내
말을 들어야 한다
마더 살로메의 말이 그의 귀에 이명처럼 웅웅거리고
맴돌았다.
"아르고 24호 발사준비 완료되었는가?"
그때 우주기지 관제탑에서 스피커로 명령이 날아왔
다.
"아르고 24호 발사준비 완료되었다!"
아르고 24호의 선장인 레이먼드 제독이 사령실에서
대답하는 소리가 스피커에서 들려왔다.
"아르고 24호 최종 점검실시!"
"실시!"
레이먼드 제독이 복창을 했다.
"아르고 24호 전 승무원에게 선장으로서 명령한다!
각자 발사준비 점검하고 보고하라!"
레이먼드 제독이 이어서 아르고 24호 승무원들에게
명령했다.
"관성제어기 점검 완료!"
아르고 24호 승무원들이 차례로 점검 완료 보고를
했다. 이리노중위는 우주복과 우주모, 그리고 안전벨
트를 다시 한 번 점검했다.
"아르고 24호 카운트다운 실시한다!"
관제탑에서 다시 명령이 내려왔다. 디스 플레이 스
크린에 나타난 시계가 새벽 6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카운트다운 실시!"
이리노중위는 약간 긴장을 했다. 카운트다운이 끝나
면 망망한 우주를 항해해야 하는 것이다.
이리노중위는 깊이 숨을 내쉬었다.
"카운트다운 텐 "
여러 가지 생각이 머릿속을 스쳤으나 이리노중위는
카운트다운을 하는 소리에 긴장이 되어 전면을 응시했
다.
"나인 에잇 세븐 "
카운트다운 소리에 섞여 발사 7초 전, 긴장을 푸시
고 심호흡을 하십시오 하는 아나운스먼트가 들려왔
다.
이리노중위는 이것이 누구의 목소리인가 하는 생각
을 얼핏 했다. 그리고 장애란을 생각하고 로즈 국장을
생각했다. 장숙희도 생각이 났다. 마더 살로메의 달고
향기로운 유액도 생각이 났다.
"식스 화이브 포 "
카운트다운은 계속되고 있었다.
이리노중위는 눈을 감았다.
"쓰리 투 원 제로 "
그 순간 무엇인가 폭발하는 듯한 요란한 폭음이 귓
전을 때렸다. 우주선이 충격을 받은 듯 흔들리고 이리
노중위는 갑자기 땅 속으로 아득하게 추락하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마침내 아르고 24호가 발사된 것이다.
추진력이 1만 톤이 넘는 거대한 로켓의 발사대로 인해
우주선은 불길속에서 순식간에 하늘로 떠올랐다.
발사의 성공이었다.
"아르고 24호 발사 성공!"
관제탑에서 스피커로 발사 성공을 알리면서 디스 플
레이 스크린에 지구의 모습이 보였다. 지구는 청색이
었다.
"로켓 부스트 분리 준비!"
관제탑에서 명령이 떨어졌다. 아르고 24호의 선장
레이먼드 제독이 버튼 하나를 누르면 아르고 24호를
우주로 쏘아 올리기 위해 추진력을 얻은 로켓 부스트
가 분리되는 것이다.
"로켓 부스트 분리 준비 완료!"
레이먼드 제독이 대답을 했다.
"로켓 부스트 분리!"
"로켓 부스트 분리!"
"실시!"
"실시!"
레이먼드 제독이 로켓 부스트 분리 버튼을 눌렀다.
그러자 아르고 24호의 모선 엔진이 가동을 시작했다.
이제 로켓 부스트는 역추진력을 얻어 지구로 돌아가고
아르고 24호 모선은 본격적으로 토성의 궤도를 향해
날아갈 것이다.
윙 하는 소리와 함께 모선에서 분리되는 로켓 부스
트의 꼬리 부분이 디스 플레이 스크린으로 보였다. 로
켓 부스트는 눈 깜짝 할 사이에 모선에서 멀어지고 있
었다.
"아르고 24호 로켓 부스트 분리 완료! 안전항해 시
작!"
레이먼드 제독이 관제탑에 보고를 했다.
"수고했다!"
관제탑의 대답은 간단했다.
"전 승무원에게 알린다! 현재 시간 6시 5분 아르고
24호는 무사히 지구를 이륙하여 토성을 향해 항해를
하고 있다. 제군들은 우주복과 우주모를 벗고 각자의
임무를 수행한다! 밖에는 무중력 상태이지만 이 우주
선에는 제군들이 지구에서와 똑같이 활동할 수 있도록
중력을 작용시키고 있다. 그러므로 제군들은 지구에서
와 같이 활동을 하면 된다."
" "
"제군들이 임무에 들어가기 전에 5분간의 휴식시간
을 준다. 커피 한 잔씩을 마시면서 긴장을 풀기 바란
다. 이상!"
레이먼드 제독의 명령이 떨어지자 이리노중위는 우
주모와 우주복을 벗고 안전벨트를 푸르고 일어섰다.
레이먼드 선장의 말대로 우주선에는 중력이 유지되
고 있었다. 20세기만 해도 우주선 안에조차 무중력상
태가 계속되어 우주인들은 유영(遊泳)을 하듯이 움직
여야 했다. 이제는 그런 거추장스러운 일도 없고 산소
때문에 고통을 당하지 않아도 되었다. 아르고 24호는
우주에 퍼져있는 미량의 산소를 끌어모아 우주인들이
충분히 호흡할 수 있도록 산소를 생산해 냈다.
이리노중위는 두 번째 휴식시간에 디스 플레이 스크
린을 스쳐 지나가는 우주의 망망한 풍경을 내다보고
있었다. 우주는 어둠뿐이었다. 우주가 태어날 때도 이
토록 깊은 어둠뿐이었다고 했었다. 그러나 빅뱅으로
우주가 탄생한 것은 대략 150억년전의 일이다. 우주의
끝에까지 가려면 150억 광년(光年)이 걸린다. 150억
광년
이리노중위는 자신도 모르게 어떤 외로움이 밀물처
럼 전신으로 엄습해오는 것을 느꼈다. 우주는 광대무
변하다. 그리고 깊은 적막의 바다만 끝없이 펼쳐져 있
다.
디스 플레이 스크린에 갑자기 적색 광선이 길게 뻗
쳐왔다. 이리노중위는 태양의 광선이 순식간에 적색에
서 황금빛으로 바뀌고 황금빛에서 다시 대낮의 광선처
럼 하얗게 바뀌는 것을 보았다.
"제군들! 전면을 주시하기 바란다! 현재 아르고 24
호의 전면으로 달이 가까워지고 있다. 아르고 24호는
달의 궤도를 지나 토성으로 간다. 제군들은 달의 모습
이 어떤지 육안으로 관측할 수 있을 것이다."
이리노중위는 레이먼드 제독의 말에 아르고 24호의
창을 응시했다. 아르고 24호의 넓은 창으로 달이 거대
한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아르고 24호가 빠르기 때
문에 우주의 낮과 밤이 순식간에 교차하고 있는 것이
다.
아르고 24호에서 보는 달의 모습은 장관이었다.
달은 지구의 유일한 위성이었다. 지구에서 38만
4400km 떨어진 거리에 있는 달은 지구와 비슷한 시기
에 탄생한 것으로 밝혀졌다. 달의 탄생에 대해서는 논
쟁이 분분했으나 가장 주목을 받고있는 것은 '자이언
트 임펙트설'이다. 원시지구가 탄생할 때인 46억년전
화성만한 크기의 행성이 지구와 충돌, 여기서 부서진
행성이 산산조각이 나고 그 충돌로 지구의 일부가 떨
어져 우주공간으로 날아갔는데 그 물질이 이합집산을
거쳐 달이 되었다는 학설이었다.
"정말 아름다운 모습이군요."
이리노중위가 점점 가까이 다가오고 있는 달의 모습
에 정신을 팔고 있을 때 맑고 또렷한 목소리가 귓전을
울렸다. 이리노중위가 뒤를 돌아다보자 젊은 여자였
다. 눈이 서글서글했다. 양쪽볼엔 웃을 때마다 보조개
가 패었다.
"안녕하세요?"
"안녕하세요."
군복을 입지 않은 것을 보면 과학자이거나 기술자인
모양이었다.
"과학자이신가요?"
"지질학자예요. 우위코라고 그래요."
"동양계로군요."
"맞아요. 일본족 계열이죠."
우위코(有爲子)가 생긋 웃었다. 앞니가 귀엽게 뻐드
러져 있었다.
"이리노 퍼그스중위입니다."
이리노중위는 우위코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그러자
우위코가 이리노중위의 손을 잡고 흔들었다. 따뜻하고
부드러운 손이었다.
"러브타임 시간에 함께 참여하시겠어요?"
지질학자인 우위코가 눈웃음을 쳤다.
"그러죠."
이리노 퍼그스중위는 우위코의 육감적인 몸을 곁눈
질하며 혼쾌히 승낙했다. 우위코에게서는 색정적인 매
력이 물씬 풍기고 있었다. 나이가 몇 살인지는 짐작이
되지 않았다. 그러나 가슴과 허리가 균형이 잡혀 있었
고 눈매에 색기가 철철 넘치고 있었다.
멀티 마네킹 외에는 일본족의 여자와 섹스를 나누는
것도 처음이었다. 어차피 러브타임 시간이 되면 무엇
으로던지 간에 섹스를 하지 않으면 안되는 것이다.
"달의 바다가 보이고 있어요!"
우위코가 소리를 지르며 디스 플레이 스크린으로 상
체를 바짝 기울였다. 그 바람에 우위코의 풍성한 머리
숱이 이리노중위에게 쏟아졌다.
이리노중위는 우위코의 탄성에 디스 플레이 스크린
으로 시선을 보냈다. 우위코의 말대로 디스 플레이 스
크린에는 달의 거대한 바다가 보이고 있었다.
달에 바다가 형성된 것은 탄생 직후였다. 그러니까
46억년전인 셈이다. 지구에서 떨어져 나온 파편과 미
행성이 충돌하여 달이 탄생했을 때 지표에서 지하
400km까지 완전히 녹아서 마그마의 바다가 되었다.
이 용암의 바다는 서서히 식어서 가벼운 것은 떠올
라 지표가 되고 무거운 것은 가라앉아 맨틀이 되었다.
그러나 수소와 산소가 적은 바다였기 때문에 이 용암
의 바다는 건조되었어도 수증기가 되지 못했다. 또 한
가지는 화산재가 하늘로 떠올라 태양광선을 차단하지
못하여 소량이나마 존재하던 수소와 산소가 모두 우주
로 증발해 버린 탓도 있었다.
지구에서처럼 고온의 열수가 존재하지 않았던 것도
물이 남아 있지 못한 원인이 되었다.
"물이 없는 바다 수십억년을 태고의 정적속에 잠겨
있는 고요의 바다예요."
우위코가 속삭이는 목소리로 말했다. 이리노중위는
우위코의 입김에 귓전이 간지러웠다.
"달에는 대기도 없지요."
이리노중위는 우위코에게 맞장구를 쳤다.
"처음부터 대기가 될만한 물질이 포함되지 않았어
요."
"자기장도 없구요."
"암석에서 미량의 자기장이 발견되기는 했지만 자기
장이 어떻게 해서 존재하게 되었는지는 밝혀지지 않았
어요."
" "
이리노중위는 웃음이 나왔다. 우위코가 어쩐지 어린
아이처럼 여겨졌기 때문이었다.
"태양계의 먼지에서 저런 달이 탄생되었다니 너무
신비스럽군요."
우위코의 말에 이리노중위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달이 어떻게 탄생했는지 아세요?"
"대충이요."
"전 지질학자이기 때문에 너무나 잘 알아요."
"그래요? 그럼 설명 좀 해주시겠어요?"
"좋아요."
우위코가 생긋 웃었다. 그러나 선뜻 입을 열지는 않
았다. 벌써 휴식시간이 끝나가고 있었다.
"이따가 만나요. 그때 설명을 해드리지요."
우위코가 가볍게 손을 흔들어 보이고 과학자들이 있
는 선실로 걸어갔다. 우위코는 일본족 고유의상인 기
모노 차림이었다. 이리노중위는 우위코가 선실쪽으로
걸어가는 뒷모습을 물끄러미 쳐다보다가 디스 플레이
스크린으로 시선을 옮겼다. 아르고 24호는 달의 궤도
를 따라 측면을 빠르게 지나고 있었다.
"달을 육안으로 충분히 관측했을 것으로 믿는다. 이
제 각자 임무에 충실하도록!"
아르고 24호의 브리지에서 다시 레이먼드 제독의 명
령이 떨어졌다. 이리노중위는 각종 계기의 이상유무를
살핀 뒤에 디스 플레이 스크린을 응시했다. 아르고 24
호가 달을 지나자 다시 캄캄한 암흑이 디스 플레이 스
크린에 비쳐지고 있었다.
토성까지 아르고 24호는 32일이 걸린다.
그동안 싫던 좋던 망망한 우주 대해에서 생활해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우주선 안이라고 할일이 없는 것
은 아니었다. 수십만 개의 기계와 계기들이 이상이 있
는지 여부도 수시로 살펴야 하고 그가 거느리고 있는
소대의 병사들에게 살로메 위성에서 할일도 가르쳐야
했다.
점심 시간이 가까워지자 지휘관 소집이 있었다.
이리노중위는 우주선 아르고 24호의 브리지까지 가
서 레이먼드 제독의 훈시를 들었다.
레이먼드 제독의 훈시는 간단했다. 우주선에서의 명
령불복종은 선상반란 행위에 해당되므로 병사들에게
이를 철저하게 주지시키라는 것이었다.
점심은 장교식당에서 먹었다.
오후엔 특별히 할일이 없었다. 이리노중위의 소대는
밤이 되면 교대근무를 하게 되어 있었다. 그 동안은
병사들이나 이리노중위나 아무 할일이 없었기 때문에
배정된 숙소에서 잠을 잤다.
밤이 되었다.
그러나 우주에서의 밤은 특별한 의미가 없었다. 우
주에서의 밤이라는 것은 지구에서의 밤을 말하는 것일
뿐 실제로 우주에서는 밤이나 낮이나 캄캄했다. 물론
이따금 어떤 행성이나 항성의 옆을 지날 때면 태양처
럼 빛을 발하는 천체 때문에 갑자기 눈이 부시게 밝아
지기도 했으나 대부분은 칠흑처럼 어두운 암흑뿐이었
다.
이리노중위는 소대원들과 함께 우주선을 경비했다.
우주선에서의 반란은 상상도 할 수없는 일이었으나 군
인은 언제나 만약의 일에 대비해야 하는 것이다.
이리노중위는 아르고 24호의 브리지로 갔다. 브리지
에서 당직을 하는 장교는 버트 코드웰중령이었다.
"중령님! 인사드립니다."
이리노중위는 브리지로 들어서자 코드웰중령에게 거
수경례를 붙였다. 그는 이리노중위의 사관학교 선배였
다.
"어서 오게. 이리노중위."
코드웰중령이 반갑게 이리노중위를 맞이했다. 이리
노중위가 사관학교 생도였을 때 코드웰중령은 한때 교
관을 맡기까지 했었다. 코드웰중령의 옆에는 유러너스
경찰국의 여자경찰이 서 있었다. 비밀경찰이었다. 코
드웰중령의 감시 임무를 맡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뵌지가 오래되었는데 그 동안 별일 없으셨습니까?"
"군인에게 무슨 일이 있겠나?"
코드웰중령이 싱긋 웃었다. 그는 약간 피곤해 보였
다. 비밀경찰을 경계하고 있는 것같기도 했다.
"마더타임 시간이군."
코드웰중령이 시계를 들여다보았다. 마더타임은 우
주선에서도 절대적으로 지켜야 하는 수칙이었다. 물론
러브타임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근무자들은 근무
가 끝난 뒤에 마더타임과 러브타임에 참여하게 되어
있었다. 코드웰중령이나 이리노중위나 근무시간이므로
마더타임과 러브타임에 참여하지 않아도 되는 것이다.
"그렇군요."
이리노중위는 우주선 아르고 24호에 탑승하기 전에
본 마더 살로메의 얼굴을 떠올리며 느리게 대꾸했다.
마더타임을 지켜야 한다는 압박감이 무겁게 어깨를 짓
누르고 있었다.
'마더 살로메 같은 거인이 존재하고 있다니 '
브리지의 디스 플레이 스크린에는 은하계의 수많은
천체들이 보이고 있었다. 수천, 수억 개의 행성과 항
성, 그리고 혜성들이 신비스럽게 명멸하고 있는 것이
우주에서 더욱 뚜렷이 보였다.
"자네는 어떻게 지내고 있나?"
코드웰중령이 디스 플레이 스크린에서 움직이고 있
는 무수한 광점(光點)을 살피는 이리노중위에게 담배
한 대를 권하며 물었다.
이리노중위는 또 다시 무한한 고독감을 느꼈다.
"잘 지내고 있습니다."
이리노중위가 대답했다.
"사관학교 친구들도 만나나?"
"거의 만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럴테지."
대화는 겉돌고 있었다. 이리노중위도 마찬가지였지
만 코드웰중령 도 여자 비밀경찰 때문에 할말을 못하
고 있었다.
"근무가 끝나면 놀러 오게."
"예."
"내 옛날 얘기를 들어본 것도 오래 되었을테니 "
코드웰중령이 빙긋이 웃었다. 코드웰중령은 지구의
전설이나 상고사 시대의 인물들에 대해서 잘 알고 있
었다. 사관학교 교관일 때도 곧잘 그 시대의 얘기를
하여 생도들을 즐겁게 했었다.
"그러잖아도 그런 얘기가 듣고 싶어 찾아 왔습니
다."
"기다리겠네."
"그럼 수고하십시오."
이리노중위는 코드웰중령에게 인사를 한 뒤에 여자
경찰에게는 목례를 했다. 여자경찰도 목례로 그의 인
사를 받았다.
그는 경비를 서고 있는 소대원들을 순시했다.
우주선에서의 경비이지만 특별한 이상은 없었다. 우
주선은 정확한 항로를 따라 순항중이었고 민간인들인
과학자나 기술자들도 말썽을 부리는 사람은 없었다.
모두들 마더타임에 참여하고 있었다.
우주선 아르고 24호에서의 마더타임은 집단으로 실
시되고 있었다. 레이먼드 제독의 주도로 마더 살로메
에 대한 경배가 3시간 동안 계속되었다.
그들을 감시하고 있는 것은 여자경찰들이었다. 이들
은 모두 가죽부츠를 신고 팔에 붉은 완장을 두르고 있
었다.
마더타임이 끝나자 러브타임이 시작되었다.
이리노중위는 러브타임에 늦게 참여했다. 그의 소대
가 러브타임이 시작되고도 한 시간이 지나서 교대를
했기 때문이었다.
우위코는 그의 방에 와서 기다리고 있었다.
"어서 오세요."
우위코가 기모노 사이로 흰 유방을 꺼내 놓은 채 눈
웃음을 쳤다.
이리노중위는 옷을 훌훌 벗어던지고 침대로 기어 올
라갔다. 우위코는 생각했던 것보다 침대에서 훨씬 더
적극적이었다.
"이렇게 해봐요."
우위코는 이리노중위에게 여러 가지 체위를 요구했
다. 이따금 인도의 카마수투라 경전에서 배웠다는 방
법으로 이리노중위를 놀라게 하기도 했다. 러브타임이
끝난 것은 한 시간쯤 지나서의 일이었다.
"좋았어요?"
우위코가 나신으로 침대에 누워서 물었다. 이리노중
위는 담배를 두 가치 꺼내서 불을 붙인 다음 한 가치
를 우위코에게 건네주었다.
"좋았어요."
이리노중위는 담배연기를 길게 내뿜고 대답했다. 러
브타임을 위한 우위코와의 섹스 일본족 여자 특유의
착착 감기는 감촉이 색다른 감흥을 안겨주었다.
우위코가 돌아가자 이리노중위는 잠을 청했다. 망망
한 우주에서 섹스를 한 것이 처음이었기 때문에 야릇
한 흥분이 아직까지 남아 있었다. 게다가 일본여자 특
유의 감겨오는 듯한 몸짓과 비음이 귓전에 감미롭게
남아 있었다. 이리노중위는 잠이 쉽게 오지 않았다.
어찌어찌하여 잠이 들었다가 깨어나자 아침이었다. 그
러나 아침이나 밤이나 우주선의 창으로 보이는 것은
다를 것이 없었다. 일정한 항로를 유지하는 바람에 우
주선은 언제나 똑같이 토성을 향해 날아가고 있었고
우주 어디에서고 다른 우주선의 항적(航跡)은 찾을 수
가 없었다.
그것은 매일매일이 같았다.
우주선은 계속 망망한 우주공간을 항해했다.
이따금 혜성이 광속에 가까운 속도로 행성으로 날아
가 충돌하는 모습을 볼 수 있기도 했다. 우주에서는
신비스럽고 이해할 수없는 일이 자주 벌어지기도 했지
만 혜성과 행성이 충돌하는 모습은 장관이었다. 먼저
혜성이 광속(光速)에 가까운 속도로 행성으로 날아간
다. 그 속도로 인해 성간(星間)에 있는 우주의 먼지나
가스층이 타면서 긴 꼬리를 남긴다.
그 꼬리는 거리가 워낙 멀어서 하나의 별빛에 지나
지 않는다.
혜성을 별똥이라고 부르는 것은 그 까닭이었다.
그러나 혜성이 행성이나 항성에 충돌하면 엄청난 폭
발이 일어나고 행성이나 항성은 장려한 불꽃과 함께
수많은 빛의 무리를 우주에 뿌린다. 그리고 혜성이나
행성은 우주에서 사라진다.
이것을 명멸(明滅)이라고 한다.
봉선화 혜성이 지구궤도에 침입하여 대부분의 지구
가 파괴된 것도 결코 우연이 아니었다.
우주선 아르고 24호는 망망한 대해를 항해하는 꼴이
었다. 앞에는 수백 만, 수천만 개의 별들이 있었다.
그 중에는 학자들이 궤도를 추적하지 못하는 혜성들도
수십만 개나 되었다.
그러나 성간 거리가 작게는 10만km에서 수백만km나
되었기 때문에 별들끼리 충돌하는 일은 흔치 않았다.
각자의 별들은 또 일정한 궤도가 있었다.
우위코는 틈만 나면 이리노중위를 찾아왔다. 우주선
에서의 여행이 무료한 탓이었다.
"나를 음미하지 않으실래요?"
우위코는 걸핏하면 이리노중위에게 섹스를 요구했
다. 이리노중위는 그때서야 우위코가 섹스중독증 환자
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의무적으로 참여하는 러브타임
으로 인해 유러너스 제국의 대다수의 시민들은 섹스에
중독되어 있었다.
"아직 러브타임 시간이 되지 않았어."
"당신을 즐겁게 해줄께요."
"러브타임 시간외에는 싫어."
"정말 싫어요?"
"싫어."
이리노중위는 단호하게 말했다. 우위코는 샐쭉하여
돌아갔다. 그러나 러브타임 시간이 되면 어김없이 이
리노중위를 찾아왔다. 이리노중위는 점점 우위코가 싫
어지기 시작했다. 매력적이라고 생각했던 우위코의 보
조개라던가 입술을 벌릴 때마다 살짝 드러나는 덧니,
기모노를 입고 종종걸음을 치는 것도 눈에 거슬렸다.
그러나 새로운 파트너를 만들고 싶지는 않았다.
이리노중위는 러브타임 시간이 되면 어쩔 수없이 우
위코와 함께 뒹굴었다.
화성(火星)이 나타난 것은 지구를 떠난 지 12일째
되는 날이었다.
우주선 아르고 24호의 디스플레이 스크린으로 보이
는 화성은 우주선에서 2천km나 떨어져 있는데도 불덩
어리 같은 장려한 모습을 드러냈다. 이리노중위는 화
성이 가까워질수록 한때 화성에 외계인이 살았으리라
는 추측을 했다.
그러나 화성표면에 액체인 물이 존재했던 것은 35억
년전으로 추정되어 외계인이 살았다고 해도 아득한 옛
날이었을 것이었다. 화성에는 태양계 최대의 화산이라
는 올림포스산이 있고 화산은 2억년 전까지도 활동하
고 있었다고 학자들은 주장했다.
화성의 대기는 이산화탄소가 주성분을 이루고 있었
다.
대기의 주성분이 이산화탄소인 것은 화성과 금성뿐
이었다. 지구만이 유일하게 질소와 산소가 대기의 주
성분을 이루고 있었다.
목성, 토성, 수성, 천왕성(天王星), 해왕성(海王星)
의 대기는 수소와 헬륨이 대기의 주성분을 이루고 있
었다.
금성은 아예 대기가 존재하지 않았다. 명왕성(冥王
星)은 희박한 메탄대기가 존재하고 있었다.
화성의 표면은 화성암이 존재하고 있었다. 그러나
바위와 표면의 흙들이 산화(酸化) 작용을 일으킨 흔적
이 역력하여 한때 산소가 존재했을 것으로 학자들이
추정했고 산소로 인해 생명체가 존재했을 것으로 여기
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아직도 생명체가 살았다는 흔적은 발견되지
않았다.
이리노중위가 육안으로 토성의 위성인 살로메 위성
을 관측할 수 있게 된 것은 우주선 아르고 24호가 지
구를 떠난 지 32일째 되던 날이었다.
'드디어 살로메 위성에 도착했어!'
이리노중위는 전신이 팽팽하게 긴장이 되는 것을 느
꼈다. 32일간의 기나긴 우주여행 끝에 드디어 살로메
위성에 도착하게 된 것이다. 꿈만 같은 일이었다.
아르고 24호의 브리지는 분주했다. 레이먼드 제독은
아르고 24호에서 착륙선을 분리하여 과학자들과 기술
자들을 먼저 살로메 위성에 착륙하게 했다.
이리노중위는 소대원들을 이끌고 과학자들과 기술자
들을 안전하게 착륙시켰다. 모두들 흥분하고 있었다.
제 27 장 망각의 강
바르시크대령은 꿈결인 듯이 먼 벌판을 우두커니 쳐
다보았다. 너무나 아름다운 위성이었다. 벌판에는 기
화이초가 만발해 있었고 먼 산에는 열대 우림이 울창
하게 우거져 있었다. 마치 시간여행을 하여 지구의 태
고시대에 와 있는 느낌이었다.
'생명체가 살고있는 별이 있었다니 '
바르시크대령은 망연히 벌판만 바라보았다.
쾌청한 날씨였다.
태양은 중천에 솟아 따사로운 햇볕을 평원으로 쏟아
붓고 푸른 하늘엔 흰 구름이 두둥실 떠 있었다. 바람
결은 잔잔했다.
"대령!"
그때 오래 전에 니리드 위성에 도착하여 주민들을
보호하고 있던 윌리엄장군이 바르시크대령을 불렀다.
그의 얼굴은 여전히 어두웠다. 바르시크대령은 니리드
위성에 도착한 뒤로 좀처럼 그가 웃는 것을 볼 수 없
었다.
"예."
"순찰을 나가보겠소?"
"좋습니다."
"타시오!"
윌리엄장군이 뒤에 있는 말을 가리켰다. 니리드 위
성에 있는 말이었다. 니리드 위성은 기이하게 금속이
존재하지 못했다. 니리드 위성에서는 모든 금속이 착
륙선이 있는 평원만 벗어나면 공기속으로 사라져버리
는 것이다. 기묘한 일이었다. 과학자들이 그 부분에
대해서 무수히 연구를 했으나 아직도 그 원인을 찾아
내지 못하고 있었다.
금속이 존재할 수 없다는 것은 결국 과학이 존재하
지 못한다는 의미다. 모든 과학문명이 금속으로 이루
어져 있지 않은가.
'이 별은 신비의 별이야.'
바르시크대령은 어두운 표정으로 생각했다. 사피언
스 그라운드의 몰루카장군은 그 사실을 알아내기 위해
바르시크대령을 파견한 것이다. 바르시크대령의 별명
이 사냥개였다.
"갑시다."
바르시크대령이 말에 올라타자 윌리엄장군이 재촉을
했다. 바르시크대령은 말의 옆구리께를 가볍게 찼다.
그것은 마치 지구의 원시시대에 온 기분이었다.
말은 갈색이었다. 사피언스 그라운드인들이 훈련을
시키지 않았는데도 말은 인간들의 탈것이 되어주고 있
었다.
신비하기 짝이 없었다.
두두두
말들은 지축을 요란하게 울리며 초원을 달렸다. 먼
지는 전혀 없었다. 초원이 싱싱하기도 했지만 아침에
비가 20분 남짓 온 탓이었다. 니리드 위성의 습도를
맞추기라도 하듯이 공기가 건조해지자 한바탕 소나기
가 뿌렸었다. 마치 지구의 열대지방에서 뿌리는 스콜
(Squall: 소나기 또는 돌풍) 같았다.
"아니 해가 떴는데도 비가 오고 있지 않습니까?"
바르시크대령은 놀라서 윌리엄장군에게 물었다.
"그렇소. 여기서는 해가 떠도 비가 오고 있소."
윌리엄장군은 새삼스러운 일이 아니라는 듯이 모처
럼 웃었다. 하늘엔 새털구름만 뭉게뭉게 흩어져 있었
다. 빗줄기는 지구와 똑같이 시원하고 푸슷했다.
바르시크대령은 한 시간쯤 말을 달렸다. 아직도 광
활한 초원이 계속되고 있었다.
바르시크대령은 윌리엄장군과 함께 초원에서 잠시
쉬었다. 그들 앞에 물줄기가 도도하게 흐르고 있었다.
강이라고 하기에는 작고 개천이라고 하기에는 큰 대하
(大河)였다. 물은 산소량이 풍부하여 푸른빛이 감돌고
바닥이 들여다보일 정도로 맑았다.
"얼마나 이 지역을 정찰하셨습니까?"
바르시크대령이 질문을 했다.
"220km쯤 정찰했을 거요."
"외계인들은 없었습니까?"
"없었소."
윌리엄장군이 고개를 흔들었다. 220km라면 5백50리
쯤 된다. 5백리를 넘게 정찰을 했는데도 외계인을 볼
수 없었다면 니리드 위성은 외계인이 없는 천체일 가
능성이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 있었소."
윌리엄장군이 문득 어두운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이상한 일이요?"
"우리는 220km쯤 정찰을 했소. 그런데 그 이상은 도
저히 정찰을 할 수 없었소."
"강이라도 있었나요?"
바르시크대령이 눈앞에서 흘러가고 있는 대하를 내
려다보며 말했다. 높은 산이 없는데도 이러한 물줄기
가 흘러가고 있는 것이 바르시크대령은 신기했다.
"아니오."
윌리엄장군이 고개를 흔들었다. 그는 잠시동안 어두
운 표정으로 먼 벌판을 응시하고 있었다. 바르시크대
령은 화제를 바꾸었다. 윌리엄장군은 좀처럼 진실을
말하려고 하지 않고 있었다.
"물이 깨끗하군요."
"그렇소. 깊지 않아서 수영을 할 수도 있소."
"그럼 말을 타고 건널 수도 있겠군요."
"물론이오. 우리는 이 강을 늘 건너다니고 있소. 우
리가 레테의 강이라고 이름을 붙였소만 "
"레테의 강이오?"
레테는 망각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바르시
크대령은 의아하여 물었다. 유러너스 제국의 휴양도시
로마노즈에도 레테의 강이라는 별명을 갖고 있는 위노
강이 있었다.
"여기는 황폐한 지구와는 너무나 다르지요. 그래서
지구를 잊어버려도 좋다는 의미에서 망각의 강이라고
이름을 붙인 것이오."
바르시크대령은 고개를 끄덕거렸다. 윌리엄장군의
말이 십분 이해가 되었다.
"일단 건너기로 하지요."
바르시크대령이 먼저 말 옆구리를 발로 걷어찼다.
그러자 말이 가볍게 물속으로 들어가 물을 차며 레
테의 강을 건너기 시작했다. 강을 건너자 다시 초원이
시작되었다. 그들이 레테의 강을 건너서 30분쯤 달렸
을 때 일단의 군인들이 말을 타고 달려오는 것이 보였
다. 모두들 칼, 활 그리고 긴 목창(木創)으로 무장을
하고 있었다. 목창에는 깃발까지 매달려 펄럭거리고
있었다.
"병사들이 달려오는군요."
"아군이오. 정찰을 나갔던 폴리소령의 부대지요."
윌리엄장군이 무표정하게 대꾸했다.
"장군님!"
이내 폴리소령이 말을 타고 달려와 윌리엄장군에게
경례를 했다. 군복은 현대적인데 무기는 원시시대의
것이어서 바르시크대령은 자신도 모르게 쓴웃음이 나
왔다.
"소령, 정찰중 이상은 없었나?"
"없었습니다."
"마의 숲까지 갔었나?"
"예."
"여전히 길을 찾을 수 없었나?"
"없었습니다."
폴리소령의 대답은 간결했다.
"좋다. 소령은 그만 돌아가서 쉬도록 하라!"
"장군님. 경호를 하겠습니다."
"그럴 필요 없네. 매일 아침 산책도 이만치는 하니
까."
"그럼 돌아가겠습니다."
"소령!"
"옛서!"
"바르시크대령을 소개하겠다. 바르시크대령은 사피
언스 그라운드의 첩보사령관이다."
"아, 그 유명한 바르시크대령님이셨군요. 뵙게 되어
반갑습니다. 폴리소령입니다."
폴리소령이 바르시크대령에게 경례를 했다. 바르시
크대령은 어쩐지 중세시대의 기사(騎士)를 보는 것같
아 마음이 무거웠다.
"반갑네. 소령."
바르시크대령은 고개를 끄덕거렸다.
"부대에서 다시 뵙겠습니다."
폴리소령이 말을 돌려 레테의 강을 건너기 시작했
다. 병사들도 폴리소령을 따라 첨벙대며 강을 건넜다.
이윽고 그들이 요란한 말발굽소리를 울리며 초원으로
사라졌다.
"갑시다."
윌리엄장군이 먼저 말을 달리기 시작했다. 바르시크
대령도 말을 달리기 시작했다. 두 사람이 말을 타고
한 시간쯤 달렸을 때 초원이 끝나고 울창한 밀림이 전
개되기 시작했다.
"어떻소? 더 들어가 보겠소?"
윌리엄장군이 바르시크대령에게 물었다.
"아니오. 됐습니다."
바르시크대령은 고개를 흔들었다. 이것으로 아침 정
찰은 충분하다. 아직 아침식사 전이 아닌가. 밀림으로
들어가면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모르는 것이다.
바르시크대령은 윌리엄장군과 함께 사피언스 그라운
드가 건설한 도시로 돌아왔다. 아침이 된 탓인지 시가
지는 사람들이 몰려나와 활기에 넘쳐 있었다. 윌리엄
장군의 취사병이 아침식사를 준비해 왔다.
"사슴고기와 스프, 그리고 라이스입니다."
라이스는 쌀밥이었다.
"사피언스 그라운드에서 가지고 온 건가?"
바르시크대령은 취사병에게 물었다. 지구에서 머나
먼 니리드 위성으로 식량을 공급하는 것은 여간 어려
운 일이 아닐 것이다.
취사병이 빙그레 웃었다.
"아닙니다. 이 곳에서 생산되고 있습니다."
"사슴과 벼가 이 곳에도 있나?"
"사슴은 밀림에서 잡은 것이고 벼는 초원에서 야생
하고 있습니다."
"이 곳은 그야말로 낙원이로군."
취사병의 말에 바르시크대령은 감탄을 했다.
"우선 식사나 합시다."
윌리엄장군이 사슴고기를 손으로 찢으며 바르시크대
령에게 말했다.
"예."
사슴고기는 불에 통째로 익힌 것이었다. 바르시크대
령도 불에 익힌 사슴고기를 손으로 찢어서 먹기 시작
했다. 소금과 후춧가루를 적당히 뿌려서 맛이 좋았다.
"사슴고기가 연하군요."
"여기는 의식주 걱정은 없소."
"그럼 무엇이 문제입니까?"
"전쟁이 일어나면 전혀 대비할 수가 없소."
"전쟁이요?"
"우리는 이 위성에 외계인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
각을 하고 있소. 우리는 그 징후를 많이 보았소."
바르시크대령은 놀라서 사슴고기를 떨어트릴 뻔했
다.
"외계인이 존재한다는 말씀입니까?"
"그렇소. 외계인이 존재할 가능성이 아주 많소. 언
젠가 그들이 나타나면 전쟁을 해야하는데 우리는 무기
가 전혀 없소. 무기라고는 기껏해야 돌도끼나 나무로
만든 창이 고작이오. 최근에 병사들이 활을 만들어내
기는 했지만 과학문명이 최고로 발달한 47세기에 원시
시대의 무기라니 황당하지 않소?"
바르시크대령은 윌리엄장군의 얼굴에서 떠나지 않고
있던 어두운 표정을 비로소 이해할 수 있었다. 적이
첨단무기로 공격을 하는데 원시시대의 돌도끼나 돌칼,
목창, 활 따위로 싸워야 할 생각을 하자 암담할 수밖
에 없을 터였다.
"외계인이 존재할 가능성이 얼마나 있습니까?"
"앞으로 이 위성을 정찰해 보면 알겠지만 인공적이
라는 느낌이 강하오. 인간에게 도무지 해로운 것이 없
소."
"그렇다고 외계인이 "
"금속이 존재하지 않는 것도 신비스럽고 물론 지구
에서 수십억km나 떨어진 천체이니까 금속이 없을 수
있다고 해도 존재하는 금속마저 사라지는 것은 이해할
수없는 현상이오."
"금속이 어떻게 하여 사라집니까?"
"공기가 흩어지듯이 순식간에 사라져 버리오."
"그런데 우주선의 모선에서 나온 우리 착륙선은 왜
사라지지 않는 겁니까? 착륙선도 금속으로 이루어져
있지 않습니까?"
"우리 과학자들도 그 점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소.
그래서 고도의 문명을 갖고있는 외계인이 존재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는 거요."
윌리엄장군의 말에 바르시크대령은 자신도 알지 못
하는 공포가 엄습해오는 것을 느꼈다. 지구에서 수십
억km나 떨어진 이 곳에서 외계인을 만난다면 어떻게
해야할 것인가. 외계인들이 존재한다면 어떤 모습으로
존재하고 있을 것인가. 그들의 생김은, 그들의 문명은
어느 수준일까 바르시크대령의 머릿속에는 수많은 생
각들이 순식간에 떠올랐다가 사라졌다.
식사를 마치자 바르시크대령은 도시를 살펴보았다.
사피언스 그라운드의 기술자들이 건설한 도시였다. 그
러나 도시 역시 금속을 사용할 수 없었기 때문에 건물
들이 즐비했으나 대개 나무와 돌, 그리고 흙으로 구운
벽돌을 이용해서 지은 것들이었다.
그러나 현대적인 도시 감각에 맞춰서 도로를 닦고
집들을 지었기 때문에 겉보기에는 화려하고 웅장한 도
시의 형태를 띄고 있었다.
도시의 외곽에는 혹시라도 있을지도 모를 외적의 침
입을 방지하기 위해 성까지 쌓아두고 있었다.
오후엔 병사들이 훈련을 하는 것을 보았다. 지구에
서 가지고 온 첨단무기들이 모두 사라져버렸기 때문에
병사들은 어이없게도 활쏘기, 말타기, 창던지기 같은
훈련을 하고 있었다.
"우리는 완벽하게 중세시대로 돌아왔군요."
바르시크대령은 어이가 없어서 그렇게 말했다.
"아니, 중세시대만도 못하오. 중세시대라면 최소한
철기는 사용했지 않소?"
그렇다. 서기(西紀)가 시작되기 전에 이미 인류는
석기시대를 지나 청동기시대, 그리고 철기시대의 도래
를 맞이했던 것이다. 니리드 위성은 인류의 석기시대
에 해당되는 것이다.
오후에 바르시크대령은 말을 타고 레테의 강으로 달
려갔다. 날씨는 따뜻했다. 온도가 섭씨 25도를 약간
지나고 있어서 일을 하거나 운동을 하면 덥고 가만히
있으면 따뜻했다. 아열대(亞熱帶)의 온도였다.
바르시크대령은 강가에 말을 매어 놓고 옷을 벗은
뒤 레테의 강으로 뛰어 들어갔다. 사피언스 그라운드
에는 레테의 강처럼 맑은 물이 없었다.
어디 물뿐인가.
사피언스 그라운드는 산소의 부족으로 주민들이 고
통을 받고 있었다. 이렇게 맑은 물과 맑은 공기가 있
는 것은 분명히 축복이었다.
바르시크대령은 레테의 강에서 한시간 남짓 수영을
했다. 수영을 배운 일이 없어서 헤엄을 치지는 못했으
나 물속에서 팔다리를 흔들자 몸이 자연스럽게 물위에
떴다.
레테의 강에서 나오자 몸이 가뿐했다. 바르시크대령은 발
가벗은 몸으로 강가에서 일광욕을 했다. 인적이 전혀 없는
강이었다. 발가벗고 뒹굴어도 볼 사람이 없다는 사실이 바
르시크대령은 흡족했다.
햇볕은 여전히 따뜻했다.
바르시크대령은 풀 위에 눕자 아른아른 잠이 쏟아져 왔
다. 바르시크대령은 눈을 감고 잠을 잤다. 얼마나 잠을 잤
는지 알 수 없었다. 바르시크대령이 누군가 자신을 훔쳐보
고 있는 듯한 기분에 눈을 뜨자 사방이 기괴할 정도로 조용
했다.
'누군가 훔쳐보는 것 같았는데 '
바르시크대령은 주위를 휘둘러보고 아무도 없자 고개를
갸우뚱했다. 어쩐지 기분이 개운하지 않았다.
해는 어느 사이에 서쪽으로 기울고 있었다. 니리드 위성
은 하루가 24시간이 아니라 18시간이었다. 위성의 자전이
지구와 다르기 때문이었다. 기묘한 것은 낮과 밤이 정확하
게 9시간씩 교차한다는 점이었다.
해가 지고 땅거미가 지는 시간은 불과 10분이었다. 그것
은 해가 뜰 때도 마찬가지였다. 캄캄한 밤중이 계속되다가
불과 10분만에 해가 떠오르는 것이다.
기술자들이 건설하고 있는 도시로 돌아오자 이미 캄캄한
밤중이었다. 예멘 의장은 그 도시의 이름을 애브너시로 명
명했다. 하데스의 지도자 애브너소령을 기념하기 위해 붙인
이름이었다.
병사들이 군데군데 횃불을 밝히고 있어서 도시로 돌아오
는 것이 그다지 어둡지 않았다. 니리드 위성의 근처에 있는
별들도 별빛을 희미하게 뿌리고 있었다.
바르시크대령은 저녁을 먹고 나무침대 위에 누웠다. 창으
로 광대무변한 하늘이 보이고 있었다. 수십억개의 행성과
위성으로 이루어져 있는 은하계, 은하계의 중심에서 보는
은하는 지구에서 보는 것보다 훨씬 밝고 또렷했다.
바르시크대령은 언제 잠이 들었는지 알 수 없었다. 창으
로 무수히 반짝이는 별들을 바라보다가 깜박 잠이 든 모양
이었다. 그러나 잠결인지 꿈결인지 분명하지 않았으나 그는
또 다시 누군가에게 세세히 관찰되고 있는 기분이었다.
이해할 수없는 일이었다.
상대방은 전혀 보이지 않았다. 상대방의 말을 들은 일도
없었다. 그러나 상대방의 눈이 그의 전신을 샅샅이 훑어보
고 있는 기분은 너무나 뚜렷했다.
'내가 꿈을 꾸고 있는 거야 '
바르시크대령은 그렇게 생각했다. 그러나 상대방은 그의
몸을 샅샅이 훑어보는 것으로 끝내지 않았다.
상대방은 손으로 그의 몸을 더듬고 있었다. 그것은 양서
류나 파충류처럼 차가운 손이었다. 그런데 왜 그것을 손이
라고 생각한 것일까. 그것이 혹시 촉수(觸手)는 아니었을
까.
모른다.
바르시크대령은 이해할 수 없었다. 잠결인지 꿈결인지 분
명하지 않았으나 그 손의 피가 차가운 냉혈(冷血)일 것이라
는 생각을 했다. 그리고 냉혈은 양서류나 파충류만이 갖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냉혈수(冷血手)는 집요하게 그의 하체를 자극하고
있었다. 그의 반응을 살피기 위해서인 것같았다.
바르시크대령은 아직까지 어떤 여자로부터도 자극을 받은
일이 없었다. 그는 여자에 대한 경험이 전혀 없었다. 그의
나이는 어느덧 43세였다. 그러나 하데스에 투신하고 첩보사
령부를 창설하느라고 여자에게 관심을 쏟을 여가가 없었다.
몇 번 사랑을 느낀 여자도 있었다. 그러나 그는 사랑보다
일에 더 열중했다.
일
사피언스 그라운드
그것이 그의 이성이었고 여자였던 것이다.
그런데 어느 여자도 자극하지 않았던 그의 몸을 양서류인
지 파충류인지 알 수없는 냉혈수가 자극하고 있었다.
'이럴 수가 '
바르시크대령은 소름이 오싹 끼치는 것같았다. 그런데도
냉혈수는 그의 몸을 집요하게 자극했고 놀랍게도 그의 몸은
서서히 달아오르고 있었다. 냉혈수는 군복을 입고 있는 그
의 전신을 구석구석 애무하고 있었다.
바르시크대령은 몸을 떨었다. 추위와 공포 때문이 아니었
다. 냉혈수의 자극이 그의 몸을 뜨겁게 달아오르게 하고 흥
분으로 황홀하게 했던 것이다.
"으음 "
바르시크대령은 자신도 모르게 신음이 흘러나왔다.
냉혈수가 그의 군복을 벗기기 시작했다. 바르시크대령은
자신의 외계인들의 포로가 된 것이 아닌가하고 얼핏 생각했
다. 그러나 외계인들이라면 왜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가. 외
계인들이 지구인의 옷을 벗겨서 무엇을 어쩌자는 것인가.
그런 생각을 하자 외계인이 아니라 꿈을 꾸고 있는 것에 지
나지 않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군복이 모두 벗겨졌다. 여자와 관계는 맺은 일은 없으나
평생을 군인으로 살아온 그의 육체는 단단한 근육질로 이루
어져 있었다.
문득 어둠속에서 여자의 봉긋하고 뽀얀 젖무덤이 시야에
들어왔다. 남자의 손길이 한 번도 닿지 않은 가슴이었다.
착각인가. 그런데 냉혈수가 알몸이 된 그의 하체를 마구 애
무하고 있었다.
'꿈이야, 이건 꿈이야 '
바르시크대령은 반복해서 입속으로 부르짖었다.
냉혈수는 집요하게 그의 하체를 유린하고 있었다. 그것은
거의 밤새도록 계속되었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 갑자기 냉
혈수가 바르시크대령을 자신의 깊은 동굴속에 가두어버렸
다.
그의 내부에서 뻐근하면서도 짜릿한 전율이 파문처럼 일
어나더니 갑자기 전신으로 번졌다. 무엇인가 그의 몸에 밀
착된 느낌, 풍만하고 따뜻한 것, 몽정을 할때처럼 하체가
팽팽하게 부풀었다가 터질 것같은 느낌, 그리고 그것으로
인해 황홀한 전율로 숨이 막혀왔다.
바르시크대령은 몇 번이나 몸을 떨었다.
이튿날 아침, 잠이 깨었을 때 바르시크대령은 넋을 잃은
듯이 천장을 우두커니 쳐다보고 있었다. 지난 밤에 내가 겪
은 일은 꿈인가 생시인가, 꿈이라면 어찌하여 그토록 황홀
했는가.
모든 것이 선명하지 않았다.
옷은 그가 자기 전에 입고 있던 군복 그대로였다. 변한
것은 전혀 없었다. 창문으로는 해가 떠올랐고 해가 떠 있는
데도 20분쯤 비가 내려 대지를 촉촉하게 적시고 있었다.
몸이 나른하면서도 피로했다. 그러나 기분좋은 피로감이
었다.
아침을 먹은 뒤에 바르시크대령은 폴리소령의 정찰부대와
정찰을 떠나기로 했다. 정찰대는 모두 18명으로 구성했다.
아침 10시. 정찰대는 애브너시를 출발했다. 모두들 창과
활로 무장을 했고 야외에서 노숙할 장비까지 갖추었다.
레테의 강을 건너면서 바르시크대령은 지난 밤에 자신이
겪은 일에 대해 곰곰이 생각을 해보았다.
기묘한 일이었다. 몸이 얼어붙을 것같은 차가운 촉수, 그
리고 아직도 몸이 떨릴 정도로 기분이 좋은 전율 그 이율
배반적인 느낌으로 바르시크대령은 꿈결인 듯 정신이 몽롱
했다.
점심때가 되었다. 정찰대가 애브너시에서 30km쯤 멀리 떨
어졌을 때였다. 정찰대는 점심을 먹은 뒤에 초원에서 휴식
을 취했다. 이제 10km만 더 가면 밀림이 시작되는 것이다.
"대령님!"
바르시크대령이 우두커니 생각에 잠겨있을 때 폴리소령이
가까이 다가왔다.
"무슨 일인가?"
"밤에 혹시 이상한 일을 겪지 않았습니까?"
"이상한 일이라니?"
"누군가 우리를 감시하고 있는 듯한 느낌이나 꿈 같은 거
"
폴리소령은 말을 하는 것을 꺼려 하고 있었다.
"그런 일은 없었네."
바르시크대령은 잘라 말했다. 폴리소령에게 지난 밤에 겪
은 일을 말할 수는 없었다. 게다가 지난 밤의 일이 꿈인지
생시인지도 알 수 없었다.
"모두들 이상해 하고 있습니다."
"무슨 소리인가?"
"이 곳에 누군가 있는 것 같다고 합니다. 우리가 모르는
"
"생명체가 존재하는 위성이니 누군가 있겠지."
바르시크대령은 어깨를 으쓱했다. 폴리소령의 말대로라면
병사들이 모두 이상한 일을 겪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출발하세."
"예."
바르시크대령은 폴리소령과 함께 정찰대의 앞에 섰다. 그
들이 8km쯤 전진했을 때 밀림이 서서히 모습을 드러냈다.
니리드 위성의 밀림은 녹색으로 우거져 있었고 하늘은 쪽빛
으로 파랬다.
쿵.
쿵.
그들이 밀림으로 가까이 접근하자 코끼리떼가 이동을 하
는 듯한 소리가 들려왔다. 처음엔 지진이 일어나는 것처럼
희미하게 들렸으나 점점 크게 들려오고 있었다.
"이게 무슨 소리지?"
바르시크대령은 놀라서 말을 세우고 폴리소령에게 물었
다.
코끼리떼가 이동을 하는 듯한 소리가 지축을 울리고 있었
다.
"알로사우러스일 겁니다."
"알로사우러스라니?"
"주라기시대에 살던 공룡입니다."
"그럼 저 밀림에 공룡이 살고 있다는 말인가?"
바르시크대령은 전신이 팽팽하게 긴장되었다.
"예."
폴리소령이 웃으며 대답했다. 폴리소령이 긴장을 하고 있
지 않은 것을 보면 이미 공룡의 존재에 대해서 자세히 알고
있는 모양이었다.
"일단 밀림으로 들어가시지요."
폴리소령이 앞장을 서서 밀림으로 들어갔다. 바르시크대
령은 바짝 긴장하여 목창을 움켜쥐었다. 그러나 밀림으로
들어가도 공룡은 보이지 않고 지축을 울리는 소리만 들려왔
다.
아
공룡은 그들이 5km쯤 더 전진했을 때야 모습을 드러냈다.
밀림 속에 수십마리의 공룡떼가 이동을 하고 있었다. 머리
가 크고 꼬리가 긴 도마뱀 종류였다. 커다란 몸통을 뒷다리
로 버티고 서 있다가 작고 가느다란 앞다리까지 사용하여
이동을 했다. 몸길이가 10m가 더 되어 보였다.
"대단하군."
바르시크대령은 감탄을 했다. '알로사우러스'는 파충류과
의 공룡이었다.
"전에도 본적이 있나?"
"예. 이 곳은 공룡들의 낙원입니다."
그때 푸드득하는 소리와 함께 커다란 새가 밀림에서 하늘
로 날아올랐다.
"저건 뭔가?"
"시조새입니다."
"시조새?"
"우리들이 소르데스라고 이름을 붙였습니다."
'소르데스'를 시조(始祖)새라고 부르는 것은 처음으로 태
어난 새이기 때문일 터였다. 시조새의 몸길이는 50cm나 되
어 커다란 독수리 같았다. 지구에서는 시조새들을 익룡(翼
龍)이라고 불렀었다.
"가까이 가시지요."
"위험하지 않은가?"
"저들은 초식동물입니다."
"초식을 해?"
파충류가 초식을 한다는 것은 처음 들어보는 소리였다.
그러나 폴리소령의 말이 옳을지도 모른다고 바르시크대령은
생각했다.
그들은 말을 타고 밀림으로 들어갔다. '알로사우러스'는
그들이 가까이 접근하는데도 적의를 드러내지 않고 있었다.
마치 자기네 동료를 보듯이 무심하게 밀림의 나뭇잎들을 따
먹고 있었다.
바르시크대령은 두 시간 가까이 밀림으로 들어가자 비로
소 긴장을 풀었다. 지구에서 수십억km나 떨어진 머나먼 우
주까지 와서 공룡들에게 잡아먹힐까봐 등줄기에서 식은땀이
흘렀으나 공룡들은 의외로 온순했다. 그러나 오랫동안 공룡
들을 관찰하고 있을 수는 없었다. 니리드 위성의 하루가 짧
았기 때문에 벌써 해가 기울고 있었다. 폴리소령은 병사들
을 독려하여 군용천막을 치고 보초를 세웠다.
저녁은 간단하게 말린 사슴고기로 때웠다. 우유는 먹을
수가 없었다. 우유를 짜는 젖소를 발견했으나 그 일을 전문
으로 하는 목부들이 없었다.
바르시크대령은 야전침대에 누워 밤하늘을 쳐다보았다.
니리드 위성에서 보는 밤하늘도 지구에서 보는 밤하늘과
별로 다르지 않았다. 다만 니리드 위성이 행성이 아니고 니
리드 위성에 빛을 보내주는 달과 같은 자체의 위성을 거느
리지 않고 있었기 때문에 달빛은 없었다. 그러나 칠흑처럼
캄캄하지는 않았다. 니리드 위성 주위에는 수많은 별들이
있었고 그 별들이 쏘아대는 빛들이 니리드 위성의 밤을 희
미하게나마 밝혀주고 있었다.
바르시크대령은 잠을 자지 않았다. 지난 밤과 같은 일을
당할까 봐 잠을 자는 것이 두려웠다. 그러나 그의 내부 깊
은 곳에서는 그 일을 다시 한 번 당했으면 하는 생각이 은
근하게 일어나고 있었다.
그러나 그날 밤은 아무 일도 없었다.
이튿날은 밀림을 상당히 깊이 정찰했다.
바르시크대령은 해가 질무렵 '메가네우라'라는 잠자리 종
류도 발견했다. 몸길이가 30cm나 되는 대형 잠자리였다.
그날 밤 바르시크대령은 다시 꿈을 꾸었다. 아니, 꿈인지
생시인지 알 수없는 이상한 가수(假睡)상태에서 신비한 경
험을 했다.
그것은 신화(神話) 속에서나 볼 수 있는 기이한 여자들의
꿈이었다. 그녀들은 뱀을 몸에 칭칭 감고 있기도 했고 사자
의 얼굴을 한 괴인과 껴안고 있기도 했다. 어떤 여자들은
속살이 비치는 옷을 입고 있었다. 자세히 보자 그것은 옷이
아니라 매미의 속날개같은 보드랍고 투명한 날개였다.
'이들은 외계인들이야 '
어깨죽지에 날개를 단 여자들은 다짜고짜 그의 옷을 벗겨
서 밀림으로 데리고 가려고 했다. 바르시크대령은 격렬하게
저항했다. 그러나 그들의 힘은 너무나 강했다.
바르시크대령은 발가벗겨진 채 밀림으로 끌려나갔다. 그
는 수치스러움과 모멸감을 동시에 느꼈다. 이 괴상한 여자
들 앞에서 이게 무슨 꼴인가. 이 추잡한 계집년들! 내가 너
희들을 모조리 죽여버릴 거야 ! 그는 그렇게 속으로 그렇
게 부르짖었다.
그때 여자들의 눈빛이 홱 달라졌다. 그리고는 화가 난 표
정으로 날개를 흔들며 밀림으로 사라져버렸다. 아침에 깨어
나자 바르시크대령은 가벼운 두통을 느꼈다. 그러나 정찰은
계속 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들은 일주일 동안을 밀림을 정찰했다. 밀림은 끝도없이
이어지고 있었다. 게다가 밀림에는 수많은 종류의 공룡들이
서식하고 있었다. 지구의 공룡시대에서도 가장 큰 것으로
알려진 '디플로도쿠스'와 흡사한 공룡도 있었고 가장 사나
운 공룡인 '티라노사우러스'도 있었다. 디플로도쿠스는 몸
길이가 50m나 되었고 티라노사우러스는 몸길이가 15m나 되
었다.
'여기는 완전히 공룡의 시대로군 '
바르시크대령은 거대한 공룡들을 살피며 지구의 원시시대
를 탐험하고 있는 기분이었다. 밀림으로 깊이 들어가자 포
유류(哺乳類)의 공룡들이 보였다. 소의 종류인 '인도리코테
리움', '윈터테리움', '아르시노이테리움'도 보였다. 그들
이 마(魔)의 숲에 이른 것은 부대를 떠나서 정찰에 나선지
열흘이 되었을 때였다.
"여긴 마의 숲입니다."
폴리소령이 정찰대를 세우고 바르시크대령에게 말했다.
"마의 숲이라니?"
"길이 없습니다. 아니 우리가 아무리 전진을 해도 제 자
리로 돌아옵니다."
"그게 무슨 소린가?"
바르시크대령은 폴리소령의 말을 이해할 수 없었다.
"대령님께서 한 번 시험해 보십시오."
"어떻게?"
"대령님께서 말을 타고 마의 숲으로 들어가 보십시오."
"그래?"
바르시크대령은 까닭모르게 전신이 긴장되는 것을 느꼈
다.
병사들의 수많은 눈동자들이 그를 살피고 있었다. 병사들
도 장차 어떻게 될것인지 궁금해하는 눈치였다.
"알았네."
바르시크대령은 말의 옆구리를 힘껏 걷어찼다. 그러자 말
이 히히힝 하는 울음소리를 내며 힘차게 달리기 시작했다.
그런데 기묘한 일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그가 탄 말이 앞으
로 힘껏 달리자마자 거대한 소용돌이로 뛰어든 것이었다.
그것은 영화에서 시간여행을 할 때 일어나는 맹렬한 소용돌
이와 비슷했다. 그와 말은 앞을 향해 달리고 있었으나 주위
의 밀림은 빠른 속도로 회전을 하면서 그와 말을 빨아들이
고 있었다.
그는 거의 5분 남짓을 소용돌이 속을 달렸다. 그러나 밀
림의 모든 풍경이 맹렬하게 소용돌이를 쳤기 때문에 무엇을
보았는지 정확하게 알 수 없었다. 언뜻 발가벗은 여자들을
본 것도 같았으나 그것이 그녀의 머릿속에 남아 있던 잔상
(殘像)인지도 알 수 없었다.
다음엔 갑자기 사방이 캄캄해지고 광풍이 몰아치기 시작
했다. 바르시크대령은 당황했다. 사방이 너무나 캄캄하여
지척을 분간할 수가 없었다. 이어서 광풍속에서 아귀의 울
부짖는 소리가 들려왔다.
'아 !'
바르시크대령은 깜짝 놀라서 밖으로 나려고 했으나 입구
를 찾을 수가 없었다.
바르시크대령은 눈을 감았다. 마의 숲은 계속 변하고 있
었다. 캄캄한 암흑속에서 비가 쏟아지는가 하면 천둥 번개
가 몰아치기도 했다. 바르시크대령은 무작정 말을 달렸다.
말의 옆구리를 발로 차고 채찍으로 마구 후려쳤다.
"이랴!"
바르시크대령은 이를 악물고 채찍을 휘둘렀다.
"이랴!"
바르시크대령이 얼마나 암흑속을 미친 듯이 달렸는지 알
수 없었다. 갑자기 소용돌이가 그를 뱉어냈다. 그는 말에
탄 채 소용돌이 속에서 퉁겨져 나왔다. 마치 거대한 블랙홀
에 빨려 들어갔다가 윔홀을 통과해 화이트홀로 나온 기분이
었다. 그의 옷은 그 짧은 순간에 갈가리 찢겨져 있었고 머
리는 빳빳하게 일어서 있었다. 그는 얼떨떨했다.
바르시크대령이 가까스로 정신을 차리자 폴리소령과 병사
들은 천막을 치고 야영준비를 완전히 끝내놓고 있었다. 어
느덧 해가 설핏이 기울고 있었다.
"대령님. 괜찮으십니까?"
폴리소령이 근심스러운 표정으로 가까이 다가왔다.
"괜찮네."
바르시크대령은 말에서 내렸다.
"무엇을 보셨습니까?"
병사들이 궁금한 눈빛으로 바르시크대령 주위로 몰려왔
다.
"별로 "
"본 것이 없으십니까?"
폴리소령의 얼굴에 실망하는 표정이 나타났다.
"밀림이 소용돌이를 일으켰네."
"우리와 똑같군요."
"자네들도 이런 경험을 했나."
"예."
"이해할 수없는 일이군."
바르시크대령은 고개를 갸우뚱했다.
"대령님께서 그 곳에 얼마나 계신지 아십니까?"
"글쎄 내 생각에는 한 5분쯤 된 것같은데 "
"대령님께서는 그 곳에 3일을 계셨습니다."
"뭐라구?"
바르시크대령은 폴리소령의 말에 소스라쳐 놀랐다.
폴리소령의 얼굴은 다시 어두워져 있었다.
"대령님이 마의 숲으로 들어가신지 3일이 되었다는 말씀
입니다."
"정말인가?"
"우리 병사들이 증인입니다."
바르시크대령은 놀라서 입을 다물 수가 없었다. 그렇다면
내가 시간여행을 했다는 말인가. 시간여행은 인류가 그렇게
꿈을 꾸었으면서도 실패한 과학이 아닌가. 폴리소령은 야영
준비를 한 것이 아니라 이미 3일 동안이나 야영을 해온 것
이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나는 거지?"
"아무래도 외계인이 존재하는 것같습니다."
폴리소령이 무겁게 대답했다. 바르시크대령은 자신이 꿈
속에 본 여자들이 외계인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날이 어두워졌기 때문에 바르시크대령은 천막으로 들어갔
다. 그러나 그는 아직도 혼란하기 짝이 없었다. 도대체 어
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는 것일까. 외계인이 존재한다면
블랙홀과 윔홀, 그리고 화이트홀까지 마음대로 설치할 수
있다는 말인가. 그렇다면 그들은 인류보다 훨씬 더 고도로
발달한 과학문명을 소유하고 있다는 말인가. 그러한 외계인
이 존재한다면 니리드 위성은 죽음의 위성이 될것이다.
바르시크대령은 그 생각을 하자 갑자기 공포가 엄습해왔
다.
그날 밤 바르시크대령은 또 다시 외계 여자들을 만났다.
그들은 다짜고짜 바르시크대령을 어디론가 끌고 갔다.
'아아 이것은 도대체 무엇인가?'
바르시크대령은 자신이 어떤 상황에 처해 있는지 전혀 알
수 없었다. 그가 끌려간 곳은 왕궁 같은 곳이었고 한 외계
사내가 왕관을 쓰고 높은 의자에 앉아 있었다. 나머지 외계
여자들은 그 사내의 앞에서 공손한 태도로 시립해 있었다.
왕관을 쓴 외계 사내가 그에게 메시지를 보내기 시작했
다. 텔레파시를 이용한 메시지였다.
당신은 우리 오안네스족에게 선택되었다. 우리는 우주
의 문명인아카에아(제3생명체)이다
외계 사내의 메시지를 텔레파시로 해독한 바르시크대령은
몸을 부르르 떨었다. 지구의 모든 생명체는 제1생명체인 박
테리아, 제2생명체인 식물, 동물, 인간 등 진핵(眞核) 생물
로 이루어져 있었다. 아카에아는 제3의 생명체로 박테리아
처럼 핵막이 없고 진핵 생명체가 살 수없는 곳에서도 생존
하기 때문에 화성 등 다른 천체에 존재할 가능성이 있는 것
이다.
그러나 외계 사내에게 메시지를 보낼 방법이 전혀 없었
다. 바르시크대령이 해독한 외계 사내의 메시지는 외계 사
내가 해독하게 해준 것이었지 바르시크대령이 해독한 것이
아니었다.
'이제 돌아가라!'
외계 사내의 명령에 의해 바르시크대령은 다시 천막으로
돌아왔다. 그러나 바르시크대령은 그것이 꿈으로만 생각되
었다.
3일 후 바르시크대령은 지구로 귀환하는 착륙선에 승선했
다. 착륙선에서 토성의 궤도를 따라 돌고 있는 우주선과 도
킹하여 지구로 돌아갈 예정이었다.
'장애란을 불러 와야겠어 '
착륙선의 창으로 니리드 위성을 내려다보며 바르시크대령
은 그렇게 생각했다. 니리드 위성의 초원에는 지구로 귀환
하는 바르시크대령을 부러운 눈빛으로 응시하고 있는 수많
은 사피언스 그라운드의 병사들이 개미떼처럼 서 있었다.
바르시크대령은 어쩐지 그들이 두 번 다시 지구로 돌아오
지 못할 것같은 불길한 예감을 느꼈다. 그러나 그 자신이
지구로 돌아가지 못할 운명이라는 사실은 까맣게 모르고 있
었다.
제 28 장 피그미족
장애란은 커피를 마시며 우두커니 밤하늘을 쳐다보았다.
이리노중위가 애드먼터 우주기지로 떠난지 사흘. 그녀는 아
직도 X파일을 해독하기 위해 전전긍긍하고 있었다. 그녀가
X파일을 바르시크대령에게 보냈으나 사피언스 그라운드의
일류 과학자들이 X파일의 암호를 풀지 못해 장애란에게 풀
라고 되돌려 보냈던 것이다.
'이리노중위는 지금쯤 어디에 있을까?'
장애란은 베란다에서 커피를 마시며 어두운 하늘을 쳐다
보았다. 창밖에는 찬비가 구죽죽하게 내리고 있었다. 바람
이 이는지 이따금 성긴 빗발이 후드득 창문을 때리고 달아
나곤 했다.
장애란은 이리노중위가 타고 떠난 아르고 24호가 어디쯤
항해를 하고 있는지 궁금했다. 아르고 24호가 애드먼터 우
주기지에서 발사된 것은 사흘 전의 일이므로 아직 살로메
위성에 도착하지는 못했을 것이고 여전히 적막하고 어두운
우주공간을 항해하고 있을 것이다.
장애란은 이리노중위가 보고 싶었다. 그것은 참으로 기이
한 일이었다. 이리노중위는 적국의 장교였고 그녀는 이리노
중위를 거점으로 이용하고 있는 스파이에 지나지 않았다.
그런데도 이리노중위가 가슴이 저리도록 그리웠다.
'어쩐지 나는 운명적으로 그를 사랑하고 있는 것같아 '
장애란은 커피잔을 비우고 다시 컴퓨터 앞으로 돌아왔다.
그녀가 암호를 풀고 있는 X파일은 복잡한 암호로 된 파일이
었다. 얼핏 보면 X파일은 에바소령의 기록에 지나지 않는
것 같았으나 X파일 안에는 또 하나의 파일이 숨어 있었다.
'아 !'
장애란이 X파일을 완전히 해독한 것은 X파일에 매달리기
시작한지 닷새만의 일이었다. X파일을 풀자 반제동맹이라
는 커다란 타이틀이 떠오르면서 해적 마크인 해골과 뼈로
만든 X자가 떠올랐다.
이 파일은 우리 반제동맹이 유러너스 제국의 음모를 전
세계 지구인들에게 알리기 위해서 제작한 것이다. 먼저 X파
일은 두 개의 파일로 만들어졌다는 것을 밝혀두고자 한다.
일명 X파일은 에바소령의 기록이고 Z파일은 X파일 안에 숨
어 있는 마더 살로메의 기괴하고 음흉한 음모를 폭로하기
위해 결성한 반제동맹과 연결하는 파일이다. 암호를 해독
한 그대가 반제동맹에서 가입하려면 그대의 신상명세서를
기록하여 아래에 있는 ID(사용자명)로 전송하라. 반제동맹
에 가입하지 않으려면 Z파일을 즉시 파기하라. 그대가 Z파
일을 두 시간 안에 파괴하지 않으면 죽음을 맞게 될 것이
다. Z파일은 죽음의 파일이다
장애란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Z파일의 서두에 씌어 있는
반제동맹의 말은 상당히 광오한 것이었다. 그러나 Z파일의
지시대로 하지 않으면 Z파일의 내용을 알 수 없을 것이다.
닷새나 걸려서 해독한 Z파일의 암호는 Z파일에 접근하는 암
호였을 뿐 내용을 파악할 수 있는 암호가 아니었다.
'이렇게 되면 반제동맹에 가입할 수밖에 없어 '
장애란은 반제동맹의 ID로 자신의 신상명세서를 입력하여
전송했다. 그러자 5분도 안되어 반제동맹에서 회신이 왔다.
국적 : 사피언스 그라운드
소속 : 첩보사령부 장애란소위.
성별 : 여자
나이 : 미상
가족 : 미상
특기 : IQ 600의 초능력 소유자. 현재 유러너스 제국 아
라크네시에서 이리노중위의 러브타임 파트너 겸 하인으로
암약중.
장애란은 반제동맹의 회신에 깜짝 놀랐다.
반제동맹의 회신은 이미 그녀가 사피언스 그라운드의 첩
보원이라는 사실까지 파악하고 있었다. 장애란은 가슴이 철
렁했으나 컴퓨터 모니터를 뚫어질 듯이 응시했다.
그대의 반제동맹 가입을 허락하며 Z파일을 열람할 권리
를 부여한다
이어서 차르르 하는 소리와 함께 Z파일이 모니터에 떠오
르기 시작했다. 장애란은 재빨리 모니터에 떠오르는 파일을
갈무리하기 시작했다. Z파일을 내용을 파악할 수 있다면 어
떤 위험도 감수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녀가
사피언스 그라운드의 첩보원이라는 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가입을 허락하는 반제동맹을 이해할 수 없었다.
이내 Z파일의 갈무리가 끝났다. 장애란은 해커의 침입을
방지하는 보안시스템을 가동하고 Z파일을 읽기 시작했다.
AD 4138년 지구에는 엄청난 재앙이 휘몰아쳐 왔다. 봉
선화 혜성, 일명 네미시스라는 별명을 갖고있는 혜성이 지
구와 충돌함으로써 지구는 대륙이 바다로 가라앉고 산보다
더 높은 해일이 대륙을 덮치는 사태가 벌어졌다. 지구는 이
혜성의 충돌로 대변동이 일어나 대부분의 대륙이 바다속에
묻혀 버렸다. 아프리카, 아시아, 유럽, 오세아니아 남북아
메리카 등 6대륙이 모두 해저 2km의 심해에 파묻혔던 것이
다. 남은 것이라고는 북아메리카와 남아메리카 일부, 중국
고비사막 일부, 아프리카 최남단이었다. 이들은 각각 몇 개
의 섬처럼 바다 위에 떠있었으나 지층의 변화로 하나의 대
륙, 신대륙으로 합체되었다. 신대륙이 탄생된 것은 유러너
스 제국이 건설되기 직전의 일이었다.
봉선화 혜성의 침입은 이처럼 대재앙을 동반하여 수십억
의 인구가 죽음을 당하는 등 아비규환의 참상이 전개되었던
것이다. 안드로이드와의 1백년 동안이나 계속된 전쟁에도
살아남았던 인류는 봉선화 혜성의 침입에는 속수무책이었
다.
이때부터 지구에는 무질서와 혼란만 일어났다. 강도, 약
탈, 살인 강간 등 길고 긴암흑의 시대가 2백년 동안이나 계
속되었다.
"우리는 저주를 받았어!"
지구인들은 절망속에서 울부짖었다. 대부분의 대륙이 물
속에 잠겨 식량을 구할 수도 없었고 화산의 폭발로 산소도
희박했다. 지구 생태계가 파괴되어 환경이 열악해 졌다. 봉
선화 혜성의 침입에도 살아남은 사람들은 또 다시 굶주림과
질병으로 죽어갔다.
변화된 지구의 환경으로 인간들은 다시 원시시대로 돌아
가 살인과 약탈을 일삼았다.
봉선화 혜성이 지구궤도를 침입하고 2백년이 지났을 때
지구에 한 걸출한 과학자가 등장했다. 그는 데스카미사도스
(셔츠없는 사람들, 빈민과 노동자들)라는 피그미(난쟁이)족
을 이끌고 있었다.
데스카미사도스는 20세기에 아르헨티나의 성녀(聖女)로
추앙받기도 하고 창녀(娼女)로 비난을 받기도 한 에바 폐론
을 지지하던 노동자 계급을 뜻했다. 시골 농부의 딸로 태어
나 영화배우가 되겠다는 신데릴라 신드롬에 젖어 부에노스
아이레스로 상경한 에바 두아르테는 떨어진 스타킹을 신고
굶기를 밥먹듯이 했었다. 그녀는 부에노스 아이레스의 뒷골
목에서 살며 남자들의 품을 전전하다가 탁월한 사교솜씨를
발휘하여 사교계에 진출하는가 하면 라디오 성우가 되고 후
안 폐론을 만나 그의 정치적 동지이자 정부가 된다.
1946년 2월24일 후안 폐론이 대통령이 되자 에바 두아르
테, 에바 페론 에비타는 아르헨티나의 퍼스트레이디가 되었
다. 후안 페론이 아르헨티나의 대통령이 된 이면에는 셔츠
없는 사람들로 대변되는 아르헨티나 빈민들, 에바 페론을
성녀처럼 받들고 있는 노동자들의 지지에 의한 것이었다.
에바 페론은 그들에게는 카리스마를 갖고 있는 성녀였다.
그러나 그녀는 아르헨티나에서 가장 유명한 악녀이기도 했
다.
에바 페론 에비타는 대통령 영부인이 되자 사치와 부패를
일삼았다. 나치 독일의 게쉬타포를 모방하여 창설한 비밀경
찰로 반대자들에 대해 무자비한 고문과 학살행위를 저질렀
다. 후안 페론은 어린 아르헨티나 소녀들을 대통령궁으로
끌어들여 황음한 생활을 했다. 채홍사들이 전국의 여학교를
찾아다니며 얼굴이 예쁜 소녀들을 '중등학생연합'이라는 이
름으로 모집하여 페론과 그의 장교들에게 바쳤다.
아르헨티나는 정치적으로 사회적으로 혼란스러웠다. 에바
페론은 남편에게 영향력을 발휘하여 여자들에게도 참정권을
허락하고 노동자들과 군인들에게 미국이나 유럽보다 더 많
은 봉급을 올려주었으나 경제는 부패로 인해 파탄상태에 빠
져 있었다.
에바 페론 에비타는 영부인이 되자 셔츠없는 사람들을 만
나기 시작했다. 직장을 원하는 사람들에게는 직장을 주었고
굶주리는 사람에게는 식량을, 직장을 원하는 사람은 즉석에
서 직장을 주도록 조치했다.셔츠없는 사람들은 그녀를 면담
하기 위해 매일 같이 대통령궁 앞에서 수백m씩 줄을 섰다.
그러는 동안 에바 페론은 중병에 걸렸다. 에바 페론의 나
이 33세, 그녀는 척수백혈병이라는 병마에 시달렸다. 그녀
의 주치의들은 셔츠없는 사람들의 면담을 중지하고 휴식할
것을 권고했으나 에바 페론은 듣지 않았다.
후안 페론 대통령 정부의 무능과 부패로 아르헨티나 경제
는 공황에 가까울 정도의 파탄상태에 빠져 있었다. 에바 페
론은 병든 몸을 이끌고 매일 같이 카사 로사다 궁전 뜰에
나가 셔츠없는 사람들을 면담하고 그들의 불행을 해결해 주
었다. 무직자와 굶주린 자, 그리고 질병에 걸린 사람들을
돕는 데에는 막대한 돈이 필요했다. 에바 페론은 국고가 바
닥이 나자 국책은행에서 매일 같이 새 돈을 찍게 하여 그들
에게 나누어주었다. 에바 페론의 이러한 행위는 인플레를
부채질하고 그녀의 건강을 더욱 악화시켰다. 1952년 그녀의
척수백혈병은 종양으로 발전하여 온 몸으로 전이되었다.
1952년 7월26일 밤 8시25분 에바 페론 에비타는 33세의
나이로 운명을 했다. 아르헨티나의 모든 라디오 방송은 정
규 방송을 중단하고 그녀의 임종을 국민들에게 알렸다.
아르헨티나 공보실은 우리 국민들의 정신적 지도자인
세뇨라 에바 페론이 영원히 잠들었음을 알리는 슬픈 소식을
전하는 바입니다. 세뇨라 에바 페론은 카사 로사다 궁전에
서 방금 전 8시 25분에 서거하셨습니다. 정부는 즉시 국장
을 선포하였습니다
아르헨티나는 거대한 애도의 물결속에 휩싸였다. 페론주
의자들, 그들이 장악한 언론과 군대, 6백만의 조합원을 가
지고 있는 노동자들이 부에노스 아이레스로 몰려들어 그녀
의 관에 꽃을 보내고 길에서 야영을 하며 애도했다.
하늘도 슬퍼하는 듯 이날 비가 쏟아졌다.
아르헨티나는 6월에서 8월까지가 겨울이었다. 찬비가 내
리고 있었으나 광적인 애도의 물결이 아르헨티나를 휩쓸었
다. 그러나 페론정부의 무능과 부패로 그들에게 반대하는
적들이 생겨났다. 아르헨티나는 정치적으로 거대한 혼란에
빠졌고 쿠데타와 혁명이 반복되었다.
페론은 국외로 망명을 하고 에바 페론 에비타의 시체가
들어있는 관은 20년 동안이나 전세계를 떠도는 신세가 되었
다.
셔츠없는 사람들, 데스카미사도스는 그녀의 추종자들이었
다.
그들은 1973년 9월23일 아르헨티나의 대통령으로 망명중
인 페론을 다시 뽑는 괴력을 발휘했다. 에바 페론의 관도
스페인에서 아르헨티나로 돌아왔다.
이후 2천5백여년이 흐르는 동안 에바 페론 에비타는 불멸
의 여인과 전설의 여인으로 피그미족 데스카미사도스들에게
깊이 인식되었고 그들은 하나의 종교처럼 에바 페론 에비타
를 숭배했다.
에바 폐론을 숭배하는 피그미족 데스카미사도스들은 남아
메리카 최남단 파타고니아 고원의 마아타카 지역에 살고 있
었다.
파타고니아 고원의 마아타카는 지구에서 가장 남쪽지방이
었다. 남극이 가까운 탓에 다윈산맥 일대는 언제나 눈으로
덮여 있고 빙하가 호수로 흘러 들어가고 있다. 사람들이 바
람의 출생지가 아닐까 생각할 정도로 바람이 세차서 그 곳
의 나무들은 언제나 북쪽으로 휘어져 있다.
피그미족 데스카미사도스들은 그 곳에서 살면서 그들 종
족과 하등의 관계가 없는 에바 페론 에비타를 숭배했다.
세월이 흐르는 동안 에바 페론 에비타는 종교적인 성녀로
추앙을 받았고 그녀가 저지른 무수한 악행, 사치와 부패,
무능, 창녀적인 행위는 의도적으로 숨겨졌다. 피그미족인
그들에게는 종족을 단결시키기 위해 카리스마를 갖고있는
절대자가 필요했던 것이다. 그들은 다른 종족들과의 싸움과
척박한 기후와 환경에서 살아남기 위해 처절한 노력을 기울
였다.
피그미족 데스카미사도스들이 특별히 관심을 가지고 연구
를 한 분야는 인체 유전공학 분야와 생명공학이었다. 그들
이 생명공학을 발전시킨 것은 마아타카 지역의 나무 한 그
루 풀 한 포기 자라지 않는 기후와 환경때문이었다. 그러나
피그미족 데스카미사도스들이 가장 관심을 기울인 분야는
인체 유전공학이었다.
그들은 피그미족이 유전적으로 조로현상(早老現狀)이 빨
리 닥쳐와 30세를 넘기지 못하고 단명을 했기 때문에 다른
종족들처럼 좀 더 오래 수명을 누리기 위해 부단히 노력을
했던 것이다. 그들 종족의 사람들은 8세에서 12세만 되면
완전한 성인이 되었고 대개 9세에서 10세에서 결혼을 하여
11세, 12세에 출산을 했다. 조로현상으로 인해 성장도 빨랐
다. 그들은 22세가 넘으면 얼굴이 쭈글쭈글해지고 노화현상
이 일어나 27, 8세만 되면 죽었다.
인류학적으로 그들은 매우 희귀종이었다. 피그미족에서
33세를 살거나 35세를 살면 장수한 사람이 되어 종족의 존
경을 받았다. 그들의 특징은 키가 난쟁이에 속할 정도로 작
다는 것과 조로현상이 유난히 빨리 진행된다는 것뿐이었다.
그들의 그러한 특징 때문에 다른 종족들과 결혼을 할 수
없었다. 아무도 난쟁이족인 그들과 결혼을 하지 않으려고
했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같은 피그미족의 사람들과만 결혼
을 했다. 그리하여 그들의 종족은 유전학적으로도 개량될
수가 없었다.
"우리가 인체 유전공학을 연구하는 것은 조로현상을 방지
하고 거인족들과 똑같은 수명을 누리며 살기 위해서이다."
피그미족의 족장 호세 프랑코는 36세로 세상을 떠나면서
그런 유언을 남겼다. 호세 프랑코가 태어나기 이전에는 피
그미족은 거인족(일반인들이지만 그들에게는 거인이었다)의
조롱을 받으며 살았으나 호세 프랑코의 영향으로 그들은 마
침내 조로현상(早老現狀)을 방지하기 위한 연구에 착수했
다.
그것은 봉선화 혜성이 지구궤도를 침략하기 전의 일이었
다. 호세 프랑코의 가문 사람들은 수백년 동안 오로지 인체
유전공학에만 매달려 다른 종족들을 압도하기 시작했다. 모
름지기 과학이란 한 분야만 발전할 수없는 것이다. 인체 유
전공학을 연구하기 위해 호세 프랑코 가문은 유전공학, 전
자공학, 식품공학, 화학공학 등 관련 학문과 과학을 발전시
켜 나갔다.
그리고 그들은 마침내 조로현상을 방지하고 정상인들과
똑같은 종족을 탄생시킬 수 있는 유전자의 신비를 풀었다.
그 무렵 지구는 안드로이드와의 전쟁이 시작되었다. 안드
로이드는 전세계 지구인들을 멸종시키려고 하였다. 그러나
피그미족이 살고있는 파타고니아 고원은 안드로이드의 주목
을 받지 못했기 때문에 지구 최초의 로봇과 인간의 전쟁에
참여하지 않았다. 그 까닭에 피그미족은 계속 번성을 했다.
피그미족은 지하에 연구소를 건설하고 연구를 계속했다.
그러나 일반 피그미족들은 그 사실을 전혀 몰랐다.
마침내 호세 프랑코의 가문에 유전학적으로 돌연변이인
변종 여자아이가 태어났다. 그녀는 호세 누네즈라는 이름을
갖고 있었는데 피그미족 출신으로는 유일하게 조로현상이
일어나지 않았다. 그녀는 일반인들과 똑같이 조로현상 없이
성장했고 16세가 되자 키도 일반인들과 같은 160cm나 되었
다. 피그미족에게 그녀는 신비로운 존재였고 선망의 대상이
되었다.
"누네즈와 결혼하면 난쟁이를 낳지 않을지도 몰라!"
피그미족 남자들은 누네즈를 자기 여자로 만들기 위해 벌
떼처럼 달려들었다.
누네즈는 아름다웠다. 크고 맑은 눈과 터질 듯이 팽팽한
가슴, 풍만한 둔부는 피그미족 남자들을 사로잡았다. 그들
은 언제나 누네즈의 환심을 사기 위해 모든 지혜를 짜냈다.
그러나 누네즈는 몸가짐이 헤픈 여자였다. 게다가 성욕이
놀라울 정도로 왕성했다. 그녀는 꽃다발 한 묶음에도 남자
들과 숲속으로 들어갔고 스커트 한 벌, 구두 한 켤레, 화장
품 따위로도 손쉽게 속옷을 벗었다. 오히려 그녀쪽에서 더
욱 적극적으로 남자들을 유혹했다.
"누네즈는 창녀야!"
"누네즈가 아이를 낳으면 누구의 아이인지도 모를 거야."
피그미족 사람들은 누네즈를 비난하기 시작했다. 특히 결
혼 적령기에 들어선 피그미족 처녀들은 남자들의 관심이 온
통 누네즈에게 쏠리자 공개적으로 비난하고 나섰다. 피그미
족 장로들은 누네즈로 인하여 부족 전체가 뒤숭숭하자 누네
즈를 피그미족의 한 남자와 강제로 결혼을 하게 했다. 그
남자의 이름은 후안 알바레스였다.
후안 알바레스는 명망있는 의사였다. 그는 임상과 기초의
학에 상당한 업적을 갖고 있었다.
"당신이 나의 아내가 되다니 나는 천사를 얻은 기분이
오."
결혼식을 마치고 초야를 치르던 날 밤 순진한 의사인 알
바레스는 떨리는 목소리로 사랑을 고백했다.
"저는 이제 당신만을 위해 살겠어요."
누네즈도 기쁜 표정으로 대답했다. 알바레스와 같은 명망
있는 의사의 부인이 된다는 것, 그것은 확실히 누네즈의 허
영심을 만족시킬 만한 것이었다.
"당신을 위해서 내 모든 것을 바치겠소."
"말씀만 들어도 고마워요."
"누네즈."
"네?"
"당신을 사랑하오."
"저두요."
"당신에게 키스하고 싶소."
알바레스가 누네즈를 불타는 눈길로 쳐다보며 중얼거렸
다. 누네즈는 붉은 드레스를 입고 있었다. 그것은 파타고니
아 고원의 마아타카에서 생산되는 실크로 만든 것이었다.
그 드레스는 누네즈의 육감적인 여체를 보일 듯 말 듯 내비
치고 있었다.
"좋아요."
누네즈가 허리를 숙였다. 누네즈는 어느덧 키가 165cm나
되었고 알바레스는 호세 프랑코 가문의 평균 키로 123cm밖
에 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알바레스는 누네즈가 허리를 숙이자 그녀의 입술에 자신
의 입술을 얹었다. 알바레스는 황홀했다.
그러나 누네즈는 짜증이 났다. 그녀는 알바레스와 키스를
하기 위해서는 자신이 허리를 잔뜩 숙여야 한다는 사실이
새삼스럽게 머릿속에 떠올랐던 것이다. 그러나 신혼 첫날부
터 짜증을 낼 수가 없었다. 게다가 피그미족 남자들 모두가
알바레스처럼 키가 작았다.
'이 사람의 얼굴은 나의 가슴밖에 닿지 않아 '
누네즈는 그 생각을 하고 우울해졌다. 그때 알바레스가
그녀의 등을 어루만지다가 이브닝 드레스의 지퍼를 내리려
고 했다. 그러나 손이 닿지 않아 알바레스는 발뒤꿈치를 들
고 낑낑대고 있었다.
누네즈는 알바레스가 지퍼를 내리기 쉽도록 등을 돌리고
허리를 숙여주었다. 그러자 알바레스가 드레스의 지퍼를 가
볍게 내렸다. 등 뒤에서 지퍼가 내려가는 소리가 들렸다.
누네즈는 알바레스가 드레스의 지퍼를 내리자 어깨에 걸
쳐져 있는 소매는 스스로 밀어냈다. 드레스는 여체의 부드
러운 곡선을 따라 스르르 흘러내려 둔부에서 멎었다.
그러자 누네즈의 아름다운 여체가 드러났다. 희고 투명한
여체였다. 해발 4천m에서 6천m에 이르는 파타고니아 고원의
맑은 공기를 마시며 자란 누네즈는 설원(雪原)처럼 전신이
하얗게 빛났다.
'인간이 이렇게 아름답다니 '
알바레스는 눈이 부셨다. 그는 매끄럽게 흘러내린 누네즈
의 어깨와 등만을 보고도 감탄했다.
"누네즈."
"네?"
"당신은 너무나 아름답소."
누네즈가 몸을 돌리며 소리내어 웃었다. 그 바람에 누네
즈의 둔부에 걸려있던 드레스가 다시 아래로 흘러 내려갔
다. 이제 누네즈는 알바레스 앞에서 나신이 되어 있었다.
'우물(尤物)이야 '
알바레스는 홀린 듯이 누네즈의 나신을 바라보며 중얼거
렸다.
"안아 주세요."
누네즈가 몽롱한 눈빛으로 알바레스를 응시했다.
알바레스는 자신의 신부인 누네즈를 힘껏 포옹했다. 그의
얼굴이 누네즈의 둥근 가슴에 닿았다. 누네즈의 하얀 젖무
덤에 도화빛의 유두가 솟아 있었다. 알바레스는 누네즈의
가슴에 얼굴을 묻고 한 손으로 누네즈의 풍만한 둔부를 애
무했다.
12월이었다. 날씨는 따뜻했다. 파타고니아 고원은 12월이
한여름이었다. 남쪽으로 내려갈수록 남극의 극점이 가깝기
때문에 추워지고 12월이 가장 더울 때인 것이다.
누네즈와 알바레스가 신혼초야를 보내기 위해 머물고 있
는 호텔은 파타고니아 고원의 마아타카에 있는 카펠리냐 산
에 있었다. 여름이지만 산 정상에는 만년설이 하얗게 쌓여
있고 중턱에는 침엽수들이 빽빽하게 우거져 있었다. 산중턱
이라고 해도 해발 4천m를 상회했다. 호텔은 해발 4천5백m
지점에 있었다. 마아타카 근교 일대에 5백여 개나 산재해
있는 간헐천(間歇川: 온천의 한 종류)에서 수증기가 하얗게
치솟고 있었다. 이 간헐천의 수증기는 2백m까지 상승하고는
했다. 호텔의 이름은 지역의 이름을 따서 마아타카라고 지
었다.
한때 마아타카는 황량한 사막이었다. 마아타카 사막의
'달 계곡'은 마아타카 지역에서도 가장 건조한 곳으로 풀
한 포기 나무 한 그루 자라지 않았었다. 그러나 세월이 흐
르고 기후가 변하여 마아타카 사막에도 풀이 자라고 나무가
우거지기 시작한 것이다. 물론 마아타카 사막을 옥토로 만
든 것은 피그미족 데스카미사도스들의 유전공학과 식물공학
팀이 이룩한 개가였다. 그들은 황량한 마아타카 사막에 인
공강우까지 뿌리면서 사막을 옥토로 만든 것이다.
"침대로 올라와요."
누네즈가 그를 침대위로 이끌었다.
알바레스는 침대위에 비스듬히 누운 누네즈를 응시했다.
푸르스름한 불빛에 드러난 누네즈의 나신은 카펠리냐산의
정기를 받아서인지 여신처럼 요염하면서도 신비스러웠다.
목에서 양쪽 어깨로, 어깨에서 가슴으로 우아하게 흘러내
린 곡선은 비교적 널찍한 가슴팍에 둥글고 봉긋한 한 쌍의
봉오리를 쳐들게 하였고 이 봉오리 사이에는 깊은 계곡이
있었다.
난쟁이족인 피그미 여자들에게서는 결코 찾아볼 수없는
잘 발육된 유방이었다.
"누네즈."
알바레스는 신음처럼 말하며 서둘러 옷을 벗어 던졌다.
그리고 침대로 뛰어올라가 누네즈에게 몸을 포갰다.
누네즈의 몸은 따뜻하고 부드러웠다. 봄이 오면 파르파릇
새싹이 돋아나는 대지처럼 누네즈의 몸은 비옥하고 풍요로
웠다.
신혼초야였다. 알바레스는 모든 것이 자신을 위해 존재하
고 있는 것같은 기쁨속에서 누네즈의 몸을 구석구석 탐험했
다.
밤은 점점 깊어져 갔다.
행위에 익숙해 있는 누네즈는 알바레스를 받아들일 준비
가 되어 있었다. 알바레스가 그녀의 몸을 구석구석 애무하
기 시작하자 그녀의 세포와 혈관이 일제히 깨어나 불을 밝
히기 시작했다.
'이제 나는 그의 여자야 '
누네즈는 눈을 감은 채 생각했다. 피그미족이건 다른 일
반인들이건 결혼의 풍습, 살아가는 사람들의 모습은 크게
다르지 않다. 남자와 여자가 하나의 생명으로 태어나 자라
고 이성을 알 나이, 다시 말해 종족을 번식할 나이가 되면
남자와 여자의 육체는 서로를 받아들일 준비를 하는 것이
다.
"알바레스 "
누네즈는 팔을 뻗어 알바레스를 힘껏 껴안았다. 남자와
결혼을 했다는 것, 한 남자의 여자가 되었다는 사실이 그녀
를 흥분과 감동의 바다에서 소용돌이 치게 했다.
"사랑해."
누네즈의 가슴을 애무하던 알바레스가 고개를 들고 속삭
였다. 누네즈는 알바레스의 말에 아득한 현기가 몰려왔다.
사랑한다는 한 마디, 알바레스가 속삭인 말이 귓전을 간지
럽히며 그녀의 몸을 용광로처럼 달구었다.
'알바레스는 다른 사내들과 달랐으면 좋겠어 '
누네즈는 문득 그런 생각을 했다. 그녀의 얼굴에 어두운
그림자가 덮쳐왔다. 피그미족 데스카미사도스의 남자들, 그
녀가 몸가짐이 단정치 않다는 소문을 들으면서까지 관계를
해온 남자들은 단 한 사람도 그녀를 만족시키지 못했었다.
기이한 일이었다. 피그미족에게 존재하는 조로현상의 영향
인지도 몰랐다.
누네즈는 그 생각만하면 분노가 일어났다. 피그미족 남자
들에 비하면 그녀는 확실히 거인이었다. 그러나 거인이라고
해서 행위를 할 때 만족하지 못한다는 것은 불행이었다. 행
위에 들어간지 불과 5분도 안되어 끝내는 정사(情事), 그것
은 슬프기 짝이 없었다.
'내가 그들을 상대한 것은 오로지 나를 만족시키는 남자
를 찾기 위한 것이었어 '
그러나 그런 남자를 찾을 수가 없었다. 때문에 그녀는 부
나방이 불을 찾아 뛰어들 듯이 수많은 남자들을 전전했고
피그미족 데스카미사도스의 장로들은 그녀로 인해 부족이
뒤숭숭하자 그녀를 서둘러 알바레스와 결혼시켰던 것이다.
그때 알바레스가 거칠게 숨을 내뱉으며 몸을 곧추세웠다.
"아, 안돼 "
누네즈는 당황하여 눈을 뜨고 알바레스를 쳐다보았다. 알
바레스가 벌써 행위를 끝낼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는 가파
른 언덕을 올라가는 열차처럼 헐떡거리고 있었다.
누네즈는 이제 겨우 몸이 달아오르고 있을 뿐이었다.
"알바레스 아직 안돼요!"
"미안해!"
"난 아직 준비가 안되었어요!"
그러나 그녀의 외침은 소용이 없었다. 알바레스는 세차게
몸을 떨더니 그녀를 향해 곤두박질을 치고 있었다. 누네즈
는 얼떨결에 알바레스를 받아 안았다.
'이럴 수는 없어 !'
누네즈는 가쁜 숨을 고르고 있는 알바레스의 등을 안은
채 슬픔에 잠겼다. 평생을 만족하지 못하고 살아야 한다고
생각하자 자신의 불행한 일생이 눈에 선하게 밟히는 것 같
았다.
누네즈는 그날밤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알바레스는 행
위가 끝나자마자 깊은 잠속에 떨어져 버렸으나 누네즈는 자
신의 성을 만족시키지 못하는 알바레스로 인해 밤을 뜬눈으
로 세우고 있었다.
누네즈는 알바레스와의 결혼생활이 흡족하지 못하리라는
것을 깨달았다. 신혼여행중에나 신혼여행에서 돌아왔을 때
나 알바레스와의 행위는 언제나 일방적이었고 누네즈의 욕
구를 채우지 못하는 것이었다. 피그미족은 행위까지도 조로
현상이 나타나고 있었다.
누네즈는 처음에 자신이 불감증이 아닌가 하고도 생각했
으나 차츰차츰 피그미족 남자로는 그녀의 욕구를 채울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것은 그녀가 기구를 이용한 자
위행위로 피그미족에게서는 얻을 수 없는 만족을 얻게 되었
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기구였다.
알바레스는 수시로 그녀를 요구해 왔다. 그러나 누네즈는
알바레스가 덤벼 들어도 흥이 일어나지 않았다. 알바레스는
그녀의 몸을 잔뜩 들뜨게 해놓고는 순식간에 일을 끝내버렸
다.
누네즈는 허망했다.
그러던 어느날 누네즈는 이방인을 만나게 되었다. 그날도
알바레스는 침대에 눕자 슬금슬금 그녀에게 접근을 해왔다.
누네즈는 등을 돌리고 잠을 자는 체했다. 그러자 알바레
스가 등을 슬슬 쓰다듬다가 그녀의 잠옷위로 유방을 만졌
다. 누네즈는 여전히 미동도 하지 않았다. 알바레스의 욕구
를 채워주기가 싫었다. 그는 허겁지겁 자신만 만족하고는
떨어져 잠을 잘 것이 뻔했다.
알바레스의 손이 잠옷 사이로 기어 들어왔다. 누네즈는
마지못해 반듯하게 누워서 알바레스에게 무릎을 열어주었
다. 알바레스는 도무지 혼자 잘 기색이 아니었다.
'이건 비극이야 '
누네즈는 속으로 그렇게 생각했다. 욕정이 들끓는 그녀의
몸을 알바레스가 식혀주지 못하는 현실이 너무나 슬펐다.
누네즈는 눈을 감고 알바레스를 받아들였다. 알바레스는
여전히 5분 정도 맹렬하게 움직이는 듯했으나 금세 무너져
버렸다. 그녀가 예상했던대로였다.
누네즈는 절망적인 기분이 들었다.
'도저히 참을 수가 없어 '
알바레스가 잠이 들자 누네즈는 집을 뛰쳐나왔다. 그녀는
차를 끌고 정신없이 달렸다. 그녀의 몸은 아직도 불덩어리
처럼 뜨거웠다. 온 몸이 달아올라 주체할 수가 없었다.
얼마나 차를 달렸는지 알 수가 없었다.
동녘 하늘이 번하게 밝아오는 것을 보고 누네즈는 차를
세웠다. 수목이 울창한 숲이었다. 그녀는 차에서 내려 숲속
으로 들어갔다. 얼마 걷지 않아 계곡이 나타났다. 맑은 물
이 흘러내리는 계곡이었다.
누네즈는 몸에 걸친 옷가지들을 벗지도 않고 계곡의 물속
으로 뛰어 들어갔다. 그 곳엔 산에서 흘러내리는 물이 작은
소(沼)를 이루고 있었다.
누네즈는 물속에 몸을 담갔다. 간헐천에서 흘러내리는 물
이기 때문에 물은 따뜻했다.
그때 어디선가 남자의 괴성이 들려왔다. 그 소리는 사람
의 말이라기보다 흡사 늑대가 달을 보고 짖는 소리 같았다.
'누굴까?'
누네즈는 목소리가 들리는 방향에 귀를 기울였다. 말을
알아들을 수는 없었으나 누군가를 부르고 있는 것 같았다.
목소리가 들리는 곳은 절벽이 있는 곳이었다. 마아타카 지
역은 숲이 울타리처럼 둘러싸고 숲이 끝나는 곳에 절벽이
있었다.
마아타가는 지층의 변화로 파타고니아 고원에서 떨어져
나온 대륙이었다. 사방 600km나 되는 원형의 대륙이 칼로
자른 듯이 떨어져 나와 바다위에 성채처럼 솟아 있었다. 그
600km를 벗어나면 깍아지른 절벽이 있었다. 마아타카에 살
고있는 사람들이 밖으로 나가지도 못하고 이방인들이 마아
타카로 들어오지 못하는 것도 그 절벽 때문이었다. 절벽위
에 서면 아득히 바다가 내려다보였다. 수천길이나 되는 절
벽이었다.
누네즈는 호기심이 발동하여 절벽쪽으로 조심스럽게 걸어
갔다.
그러나 목소리는 더 이상 들리지 않았다. 그 대신 물흐르
는 소리가 가까이서 들렸다.
그녀가 목욕을 하던 소보다 더 아래 계곡쪽이었다.
누네즈는 계곡쪽으로 조심스럽게 걸어 내려갔다. 그러자
울창한 삼(森)나무 사이로 폭포수 아래서 몸을 씻고 있는
남자의 등이 보였다. 피그미족이 아니었다. 하반신은 계곡
의 물에 담그고 있었으나 상체는 물밖에 내놓고 씻고 있었
다. 상체만으로도 그 남자가 피그미족 남자들보다 훨씬 크
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이방인이야!'
누네즈의 눈이 발정난 고양이의 눈처럼 요기를 띄어갔다.
그때 계곡에 하반신을 담그고 몸을 씻고 있던 사내가 씻
기를 다 마쳤는지 물가로 걸어나오기 시작했다. 누네즈의
시선은 자신도 모르게 이방인의 하체로 화살처럼 날아갔다.
그 순간 누네즈는 세차게 몸을 떨었다. 이방인의 하체에
는 남자의 거대한 양물이 매달려 있었다. 누네즈는 그것을
멀리서 보기만 했는데도 눈이 부시고 몸이 저려왔다.
'어디서 온 남자지?'
누네즈는 이방인이 어디서 왔는지는 알 수 없었다. 그러
나 마아타카에서는 볼 수 없는 사내가 분명했다.
누네즈는 머리에서 흘러내리는 물기를 손으로 씻어냈다.
옷을 입은 채로 계곡에 뛰어들었기 때문에 젖은 옷에서도
물이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이방인 사내는 옷을 입으려고
하고 있었다.
누네즈는 이방인 사내를 향해 걸어갔다. 이방인 사내가
그녀의 인기척을 발견하고 깜짝 놀란 시늉을 했다. 그는 황
급히 옷가지로 자신의 하체를 가리고 멋적은 표정으로 누네
즈를 살폈다.
"당신은 어디서 왔어요?"
누네즈는 그가 옷을 입기를 기다려 먼저 입을 열었다. 사
내가 무어라고 소리를 질렀으나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사
내는 벙어리였다. 다만 사내가 절벽 아래를 손짓하는 것을
보면 바다에서 절벽을 기어 올라온 모양이었다.
'이 사람이 절벽을 기어 올라오다니 '
누네즈는 속으로 감탄했다. 드물기는 하지만 바다에서 마
아타카로 올라오는 사람이 더러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마
아타카에 올라오면 마아타카의 남자들에게 살해를 당하곤
했다.
이방인 사내가 자신의 복부를 손으로 만졌다.
'배가 고프다는 뜻이야.'
누네즈는 이방인 사내의 손짓이 배가 고프다는 시늉이라
는 것을 알아챘다. 누네즈는 이방인 사내에게 가까이 다가
갔다.
이방인 사내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이방인 사내는
피부가 구리빛이었다. 피그미족들의 피부는 백색이었다.
누네즈는 땅에다 그림을 그렸다. 누네즈가 살고 있는 곳
이 이 곳에서 멀리 떨어져 있다는 것, 먹을 것을 가져올 동
안 이 곳에서 움직이지 말고 있으라는 뜻의 여러 가지 그림
을 그렸다. 그리고 마아타카의 다른 사람들 눈에 띄면 죽임
을 당한다는 뜻의 그림을 그리자 사내의 눈빛이 공포에 질
린 표정을 띄었다.
"알아 들었어?"
누네즈의 말에 사내가 고개를 끄덕거렸다. 누네즈는 삼나
무 밑에 둥그런 원을 그렸다. 그리고 사내의 손을 잡아서
그 원 안에 있도록 했다.
이방인 사내는 누네즈가 원을 그리고 그 안에 자신을 있
도록 하자 백치처럼 웃었다.
누네즈는 서둘러 집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알바레스를 위
해 만든 음식과 음료수를 가지고 이방인 사내에게 달려왔
다. 이방인 사내는 그녀가 가져다 준 음식을 맛있게 먹기
시작했다. 그는 며칠 동안을 굶주리기라도 했는지 게걸스럽
게 음식을 먹고 음료수를 벌컥벌컥 마셨다.
'넌 이제 나의 노예야.'
누네즈는 이방인 사내가 허겁지겁 음식을 먹고 음료수를
마시는 것을 보고 속으로 미소를 지었다. 그가 마신 음료수
에는 뇌신경을 마비시키는 약이 들어 있었다. 그것을 마시
면 누구던지 이지를 상실해버려 다시는 회복할 수가 없는
것이다.
음료수를 마신 이방인 사내가 무어라고 중얼거리더니 풀
썩 쓰러졌다. 누네즈는 이방인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이방
인 사내는 눈을 뜨고 있었으나 눈에 이미 초점이 없었다.
누네즈는 잠시 주위를 살펴보았다. 평소에도 인적이 없는
숲이었다. 사방은 기묘할 정도로 조용했고 계곡의 돌틈을
돌아흐르는 물소리만 들리고 있었다. 숲에서는 이따금 새들
이 평화롭게 지저귀고 있었다.
'사람들이 이곳까지 올 리가 없지 '
주위가 조용하자 누네즈는 만족했다. 그녀는 이방인 사내
의 눈빛을 가까이서 들여다보았다. 이방인 사내는 그가 가
까이서 들여다보는데도 백치같은 표정만 짓고 있었다. 그녀
는 서둘러 이방인 사내를 끌고 계곡을 건너 동굴로 들어갔
다.
동굴의 입구는 사람 하나가 간신히 들어갈 정도로 비좁았
으나 안에는 제법 넓었다.
누네즈는 이방인 사내를 동굴로 끌고 들어가서 발에 쇠사
슬을 묶고 그 쇠사슬을 바위에 박힌 징에 묶었다.
다음에 그녀는 집에서 담요를 두 장 가져다가 한 장은 바
닥에 깔고 한 장은 이방인 사내가 덮도록 했다. 밤이 되면
동굴은 몹시 추울 것이었다. 식량도 사내의 옆에 놓아주었
다. 사내는 백치처럼 식량을 손으로 집어먹고 있었다.
'완전히 바보가 되었어 '
누네즈는 만족했다.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되다니 '
그러나 누네즈가 그런 준비를 하는데 꽤 오랜 시간이 지
체되었다. 누네즈가 그런 일들을 모두 마치자 서쪽 하늘로
해가 뉘엿뉘엿 기울고 있었다. 알바레스가 돌아올 시간이었
다. 누네즈는 이방인 사내의 목에 걸린 개줄과 쇠줄이 단단
히 묶였는지 확인한 뒤에 집으로 돌아왔다.
그날밤 누네즈는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낮에 본 이방인
사내의 거대한 양물, 그 눈부신 모습을 생각하자 자신도 모
르게 하체에서 뜨거운 욕망이 솟구쳐 올라왔다.
제 29 장 제국탈출
장애란은 고개를 갸우뚱했다. 반제동맹에서 전송되어 온
Z파일의 내용은 엉뚱하게 피그미족인 누네즈라는 여자의 욕
망을 소설처럼 장황하게 다루고 있었다.
'파일이 잘못된 것인가?'
장애란은 Z파일이 잘못 전송되어 온 것이 아닌가하고 의
심을 했다. 그러나 반제동맹이라는 비밀결사 단체에서 이런
실수를 한다는 것은 납득이 되지 않았다. 장애란은 Z파일을
다시 검토하려다가 신경을 곧추 세웠다. 어디선가 조심스럽
게 걸음을 떼어놓는 듯한 소리가 희미하게 들리고 있었다.
'침입자야!'
장애란은 거실쪽으로 신경을 집중했다. 그녀의 귀는 2백m
밖에서 떨어지는 나뭇잎 소리까지 들을 수 있었다.
'사피언스 그라운드의 첩보사령부에 스파이가 있어!'
장애란은 컴퓨터 모니터를 응시한 채 비밀이 누설된 까닭
을 생각했다. 그녀가 이리노중위의 집에 잠입한 것을 알고
있는 것은 사피언스 그라운드의 첩보사령부뿐이었다. 발자
국소리는 거실에서 들리고 있었다. 장애란이 귀를 기울이자
그 소리가 계단을 살금살금 올라오고 있었다.
'체중이 20kg 안팎이야!'
장애란은 계단을 올라오는 소리로 침입자의 체중을 분석
했다. 체중이 20kg이라면 6, 7세 가량의 어린 아이 체중이
다. 그러나 이리노중위의 집을 어린 아이가 침입할 리는 없
었다.
'그래 이건 안드로이드야!'
안드로이드는 실리콘과 특수알루미늄 합금으로 제작되기
때문에 체중이 20kg 안팎인 것이다. 그러나 특수알루미늄
소재이기 때문에 가벼우면서도 강했다. 이내 발자국소리가
서재까지 가까이 접근해 왔다. 장애란은 컴퓨터 모니터를
들여다보는 척하면서 등뒤에 온 신경을 집중했다.
"죽여!"
그때 날카로운 쇳소리와 함께 허공을 가르는 바람소리가
들려왔다. 장애란은 등줄기가 오싹해 왔다.
누군가 등뒤에서 그녀를 덮쳐오고 있었다. 장애란은 바람
소리가 가까이 접근해오자 고개를 숙이고 몸을 휙 돌렸다.
그러자 그녀의 머리 위로 쇳덩어리 같은 주먹이 지나갔다.
여자의 주먹이었다. 장애란은 번개처럼 오른 손 주먹으로
여자의 겨드랑이를 내질렀다.
"윽!"
여자의 입에서 헛바람이 빠지는 듯한 소리가 들리면서 주
먹이 얼얼했다. 장애란의 예상대로 그녀를 공격하고 있는
것은 안드로이드 여자였다. 유강렬박사를 죽인 금발의 살인
안드로이드였다.
"그 년의 목을 졸라!"
살인 안드로이드의 귓전에 박힌 무선 이어폰에서 쇳소리
가 들려왔다. 다른 사람들의 귀에는 들리지 않을 정도로 미
세한 소리였으나 장애란은 초능력을 가지고 있었다. 살인
안드로이드의 귀에서 쇳소리가 지시하는 내용을 낱낱이 들
을 수 있었다.
"죽여! 죽여 버리라구!"
살인 안드로이드는 1차공격이 실패로 돌아가자 주춤해 있
었다. 명령을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네!"
살인 안드로이드가 중성의 목소리로 대답했다. 이어서 살
인 안드로이드의 눈에서 핏빛의 살기가 뿜어졌다. 장애란은
재빨리 대응자세를 취했다.
"죽여 버리겠어!"
살인 안드로이드가 음산하게 웃었다. 장애란은 살인 안드
로이드의 웃음소리에 소름이 오싹 끼쳤다. 그 순간 살인 안
드로이드가 허공으로 도약하여 그녀를 향해 날아왔다.
장애란은 살인 안드로이드의 두 발이 자신의 턱을 겨누고
날아오자 재빨리 왼쪽으로 몸을 틀면서 안드로이드의 등을
발로 올려찼다.
'맞았어!'
그녀의 발이 안드로이드의 등에 꽂혔다. 발끝에 출렁하는
촉감이 느껴졌다. 그러자 안드로이드의 등이 활처럼 휘면서
공중으로 솟아올랐다. 장애란은 그 순간을 놓치지 않고 공
중에서 빙그르 회전하여 떨어지는 안드로이드의 턱에 양발
을 꽂았다.
"윽!"
살인 안드로이드가 괴로운 신음소리를 토하면서 휘청했
다.
장애란은 안드로이드가 균형을 잡기 전에 바짝 달라붙으
면서 그녀의 복부를 주먹으로 내질렀다. 장애란의 주먹은
바윗돌을 깨트리는 파괴력을 갖고 있었다. 그녀의 주먹에
안드로이드 여자의 허리가 종잇장처럼 접혔다.
"이, 이년이 !"
살인 안드로이드가 이를 갈았다.
"흥!"
장애란은 콧소리를 내뱉으며 그 자리에서 오른발로 살인
안드로이드의 커다란 가슴을 찍었다. 이번엔 발끝에 실리콘
의 물컹한 감촉이 실리면서 안드로이드가 서재의 벽으로 날
아가 쿵하고 부딪쳤다.
"유강렬박사를 죽인 살인 안드로이드! 오늘 너를 살려두
지 않겠어!"
장애란은 허공을 날아서 벽에 부딪쳐 거실 바닥에 떨어진
안드로이드의 얼굴을 밟았다. 그러자 안드로이드의 얼굴이
일그러지면서 몸에서 지지직거리는 기괴한 소리가 들려왔
다.
"나, 나쁜 년 "
살인 안드로이드의 마네킹 같은 얼굴이 일그러졌다. 인공
신경망을 파괴했는지 안드로이드는 쓰러진 채 일어나지를
못하고 몸을 바들바들 떨고 있었다.
"아, 아파 "
살인 안드로이드가 고통스러운 신음을 내질렀다. 장애란
은 안드로이드의 가슴을 구둣발로 힘껏 밟았다. 그러자 으
드득하는 쇳소리와 함께 살인 안드로이드의 가슴이 파괴되
었다.
"아 파 아 파 "
안드로이드의 목소리가 남자와 여자의 목소리로 번갈아
바뀌었다. 목소리가 이중으로 입력되어 혼선을 일으키고 있
는 것같았다.
"모리오 부국장님. 제가 망가지고 있어요. 저를 빨리 공
장으로 데리고 가서 재생시켜 주세요!"
안드로이드가 갑자기 남자의 목소리로 외쳤다.
"안돼! 너는 재생할 수가 없어!"
안드로이드의 귀에서 조소하는 듯한 소리가 들려왔다.
무선 이어폰으로 명령을 내리고 있던 자는 유러너스 제국
비밀경찰의 모리오 부국장이었던 모양이었다. 안드로이드는
기능이 망가지고 있어서 전신을 경련하고 있었다.
'모리오 부국장은 여자인데 남자의 목소리로 위장을 했어
'
장애란은 살인 안드로이드의 말을 듣고 그렇게 생각했다.
"부국장님!"
"닥쳐!"
"부국장님. 저를 파괴하지 마세요!"
이번엔 여자의 가냘픈 목소리였다. 목소리가 에코우로 울
렸다.
"너는 중대한 임무에 실패했어!"
"그 동안 저는 누구보다도 열심히 일했어요. 그 동안의
공로를 생각해서라도 "
"어리석은 것!"
"부국장님!"
안드로이드가 안타깝게 호소를 했다. 그녀의 눈에서 뜨거
운 눈물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장애란은 살인 안드로이드가 모리오 부국장에게 재생시켜
달라고 애원하는 것을 보고 가슴이 아팠다. 안드로이드는
비록 기계로 만들어진 로봇에 지나지 않았지만 인간처럼 자
신의 죽음을 앞에 두고 슬픔에 잠겨 있었다.
"너는 이제 끝장이야."
"부국장님. 우리도 생명이 있어요!"
"생명이라고? 너는 한낱 기계에 지나지 않아!"
"부국장님. 제발 저를 살려주세요."
"흥!"
"부국장님. 저에게 한 번만 더 기회를 주세요."
장애란은 살인 안드로이드가 살려달라고 애원하는 것을
우두커니 지켜보았다. 기계가 애원을 하는 모습이 비참했
다.
"안돼!"
"당신네 인간들을 정말 비열해요!"
"우리가 비열하다고?"
"당신들은 우리와 같은 로봇을 만들어서 실컷 이용하고
쓸모가 없으니까 폐기 처분하고 있어요. 비인간적이라구
요!"
"가소로운 것! 너는 인간이 아니야! 기계가 비인간적이라
니 말이나 돼? 네가 인간이라는 환상에서 깨어나라구 "
모리오 부국장이 냉랭하게 웃었다.
"아, 안돼!"
안드로이드가 다급하게 비명을 질러댔다. 그 순간 모리오
부국장의 원격조종에 의해 안드로이드가 폭발했다. 안드로
이드의 가슴이 폭발에 의해 날아가고 불길이 치솟았다. 그
래도 안드로이드는 공포와 슬픔으로 얼굴이 흉측하게 일그
러진 채 비명을 지르며 몸을 경련하고 있었다. 그러나 순식
간에 기능이 망가져 알루미늄 덩어리로 변했다. 장애란은
살인 안드로이드가 알루미늄 고철 덩어리로 변해버리는 것
을 보고 고개를 흔들었다.
그때 이리노중위의 집앞에 에어카들이 날아와 착륙하는
소리가 들렸다.
'안드로이드를 이용해 시간을 끌다니 !'
장애란은 다음 순간 빠르게 도망칠 준비를 하기 시작했
다. 모리오 부국장은 기능이 망가져가고 있는 안드로이드를
이용해 비밀경찰이 출동하는 시간을 벌고 있었던 것이다.
교활한 여자였다. 안드로이드가 자신의 죽음을 슬퍼하는
체하며 재생시켜줄 것을 요구했을 때 그 상황을 파악했어야
했었다. 안드로이드는 로봇이기 때문에 죽음 따위를 두려워
하거나 슬퍼한다는 것은 불가능했다. 물론 지구인들과 안드
로이드들이 1백년 동안이나 벌인 전쟁, 일명 판도라의 전쟁
때는 안드로이드들이 감정과 사고하는 능력까지 가지고 있
었다. 그러나 지금은 불가능한 것이다.
'모리오 부국장에게 감쪽같이 속았어 '
장애란은 서둘러 팜탑을 갈무리하고 첨단 스파이 장비가
들어있는 가방을 어깨에 둘러멨다. 그리고 커튼을 살짝 젖
히고 밖을 내다보았다. 이리노중위의 집앞에는 벌써 비밀경
찰이 에어카를 타고 속속 착륙하여 집안으로 뛰어 들어오고
있었다.
"집을 에워싸라! 놓쳐서는 안된다!"
비밀경찰을 지휘하고 있는 것은 여자였다. 유러너스 제국
의 비밀경찰은 모두 여자들로 이루어져 있었다.
'포위되었어!'
장애란은 유러너스 제국의 비밀경찰이 이리노중위의 집을
삼엄하게 에워싸는 것을 응시하며 고개를 저었다. 탈출을
하는 것이 용이하지 않을 것같았다.
'어떻게 하던지 이리노중위의 에어카까지만 가면 탈출할
수있을 거야 '
이리노중위의 에어카는 현관 앞에 세워져 있었다.
그때 우당탕거리는 소리와 함께 비밀경찰들이 현관문을
부수고 거실로 뛰어들었다.
장애란은 거실쪽 계단을 주시했다. 비밀경찰이 떼를 지어
거실로 몰려 들어오고 있었다.
"블랙캐츠 장애란! 너는 우리 비밀경찰에 포위되었다! 순
순히 투항을 하면 목숨은 살려주겠다!"
그와 함께 비밀경찰이 투항 권고 방송을 하기 시작했다.
장애란은 속으로 코웃음을 치며 가방에서 화염총을 꺼내 조
립했다. 그 화염총은 스파이용으로 제작된 것으로 목표물에
날아갈 때는 일반 탄알처럼 날아가지만 목표물을 맞추면 목
표물을 순식간에 태워버리는 것이었다. 명중과 동시에 5천
도의 열에너지가 발생하여 불꽃이 일어나기도 전에 목표물
을 태워 흔적을 없애버리는 것이었다.
그때 다시 우당탕거리는 소리가 들리면서 비밀경찰이 2층
계단으로 뛰어 올라오기 시작했다.
"흥!"
장애란은 화염총의 방아쇠를 당겼다. 화염총은 조준을 할
필요도 없었다. 이미 인간의 체온인 37. 5도를 감지하는 열
감지 시스템이 부착되어 있어 총알은 스스로 날아가면서 인
간의 체온을 감지하여 목표물을 찾아가는 것이다. 그것은
눈깜짝할 사이의 일이었다.
화염총에서 미세하게 쉬익 하는 소리가 들리면서 탄알이
발사되자 비밀경찰 하나가 비명소리를 지를 시간도 없이 타
버렸다. 화염도 없고 소리도 없었다. 쉬익하는 미세한 소리
가 들리면 탄알은 이미 비밀경찰을 태워버린 것이다.
"블랙캐츠 장애란! 저항하지 마라!"
비밀경찰의 마이크가 다시 투항을 권고해 왔다.
"흥! 어림도 없다!"
장애란은 리모컨으로 에어카의 시동을 거는 것과 동시에
가방에서 연막탄을 꺼내 천장을 향해 쏘았다. 그러자 연막
탄이 평 하고 터져 천장을 뚫고 치솟으면서 자욱한 연기와
함께 장애란의 홀로그래피 영상을 하늘에 띄웠다. 장애란이
천장을 뚫고 탈출하는 것처럼 보이게 하는 연막탄이었다.
"장애란이 탈출한다! 레이저건을 쏴라!"
유러너스 제국의 비밀경찰이 다급하게 외치는 소리가 들
렸다. 그 순간 장애란은 이리노중위의 집을 총알처럼 빠져
나와 에어카에 올라탔다.
"앗! 여자가 이쪽으로 온다!"
"지붕위의 여자는 가짜다!"
유러너스 비밀경찰이 우왕좌왕하는 소리가 들렸다.
장애란은 에어카에 올라타자마자 버튼을 누르고 이륙했
다. 이리노중위의 에어카는 그 순간 하늘로 까마득하게 솟
아올랐다.
"제기랄!"
그러나 비밀경찰도 하늘에 바리케드를 치고 있었다. 물샐
틈없는 포위였다.
'어떻게 하지?'
장애란은 한순간 망설였으나 바리케드를 향해 그대로 돌
진했다.
"장애란이 바리케드와 충돌하려고 한다!"
"레이저건을 쏴라!"
장애란이 에어카를 조종하여 바리케드로 돌진하자 유러너
스 제국의 비밀경찰들이 장애란을 향해 일제히 레이저건을
쏘기 시작했다. 레이저 광선이 허공에 무수한 광망을 만들
어내고 있었다.
'이것들이 감히 공중전을 하자는 건가?'
장애란은 피식 웃었다. 유러너스 제국 비밀경찰들의 에어
카에서 레이저건이 불을 뿜고 있었다. 그러나 장애란은 레
이저건을 피하며 이번엔 수직으로 하강했다. 이어서 에어카
의 속도를 최대한으로 끌어올리고 빌딩과 빌딩 사이를 누비
며 달아나기 시작했다.
제 30 장 외계생명체
착륙선의 해치가 열렸다. 이리노중위는 소대원들에 앞서
착륙선의 트랩을 천천히 내려가기 시작했다. 착륙선이 내린
살로메 위성의 넓은 잔디밭에는 이미 먼저 도착한 유러너스
제국의 군대가 그들을 마중하기 위해 말을 타고 도열해 있
었다.
'군대가 말을 타고 있으니 어떻게 된 일일까 '
이리노중위는 고개를 갸우뚱했다. 군인들은 말을 타고 있
을 뿐 아니라 총도 들지 않은 채 창과 도끼, 칼 같은 것으
로 무장하고 있었다. 이리노중위는 트랩을 내려오자 우주모
를 벗었다. 살로메 위성의 공기는 상쾌했다.
"이리노중위! 저게 모두 어떻게 된거야?"
코드웰중령이 이리노중위의 옆으로 가까이 와서 의아하다
는 표정을 지었다.
"글쎄요. 무슨 축제가 열린 게 아닐까요?"
이리노중위는 엉뚱한 생각을 했다. 그들을 마중 나온 군
인들이 어떤 축제를 벌이고 있는지 모른다고 생각했던 것이
다.
"어서 오십시오."
그때 환영 나온 부대를 이끌고 있는 장교가 코드웰중령에
게 가까이 와서 부동자세로 거수경례를 붙였다. 어깨에 붙
어있는 견장이 소령이었다.
"수고하네. 코드웰중령일세."
코드웰중령이 가볍게 경례를 받았다.
"나무스소령입니다."
"이쪽은 이리노 퍼그스중위일세."
이리노중위는 나무스소령에게 부동자세로 거수경례를 했
다.
"안녕하십니까? 소령님."
"어서 오게."
나무스소령이 이리노중위에게 손을 내밀었다. 이리노중위
는 나무스소령의 잡았다. 나무스소령이 이리노중위의 손을
잡고 가볍게 흔들다가 놓았다.
"이쪽은 비밀경찰의 바바라 잭슨양일세."
코드웰중령이 아르고24호의 브리지에 있던 비밀경찰을 나
무스소령에게 소개했다. 나무스소령이 새삼스럽게 비밀경찰
을 쳐다보고 거수경례를 했다. 비밀경찰 바바라는 가볍게
고개만 끄덕거렸다.
"그런데 무슨 축제가 있나?"
코드웰중령이 나무스소령에게 질문을 던졌다.
"중령님. 축제라니요?"
"군대의 무기가 전부 창이나 칼 따위가 아닌가? 그것도
나무나 돌을 이용해서 만든 "
"아 그것 말씀이군요. 이쪽의 얘기를 듣지 못하셨습니
까?"
"아무것도 듣지 못했네."
"가면서 말씀드리죠. 말을 타보신 일이 있습니까?"
"아니 말은 한 번도 타 본일이 없네."
"그럼 걸어야 하겠군요. 우리가 도시를 건설하고 있는 지
역은 여기서 4km쯤 떨어져 있습니다."
"아니 4km를 걷는다는 말인가?"
"말을 타지 못한다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앞으로 자세히
알게 되시겠지만 살로메 위성의 상황도 파악할 겸 걷는 게
좋을 것같습니다."
"그럼 짐들은 어떻게 할건가?"
"부하들을 시켜 수레로 나르도록 하겠습니다."
나무스소령이 빙그레 웃었다.
"수레로?" 여기는 에어카나 에어트럭이 없나? 아라크네시
에서 그런 장비들을 모두 공수해 왔을 게 아닌가?"
"사라졌습니다."
나무스소령이 어두운 얼굴로 대답했다. 그때 비밀경찰 바
바라의 눈이 번쩍하는 빛을 퉁겼다.
그것은 아주 짧은 순간의 일이었으나 바바라의 눈빛은 얼
음처럼 차가웠다. 이리노중위는 때마침 바바라를 쳐다보고
있었다. 비밀경찰 바바라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궁금했기
때문이었다.
'바바라는 보통 비밀경찰이 아닌 것같아 '
이리노중위는 바바라의 눈빛에서 예사롭지 않은 기운을
발견하고 불길한 기분을 느꼈다.
"무슨 소리야?"
"말 그대로 사라졌습니다."
이리노중위는 나무스소령과 코드웰중령의 대화를 들으며
살로메 위성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다는 것을 눈치챘
다. 군인들이 창이나 칼, 도끼 따위의 원시무기로 무장을
하고 있고 에어카나 에어트럭 같은 것들이 사라졌다는 것은
은하계의 한 가운데에 있는 살로메 위성에서 심각한 사태가
벌어지고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사라지다니? 그런 말이 어디 있나?"
코드웰중령이 의혹이 가득한 표정으로 나무스소령을 쳐다
보았다. 나무스소령도 곤혹스러운 표정이었다. 이리노중위
는 비밀경찰 바바라를 힐끗 쳐다보았다. 바바라도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 그러나 두 사람의 대화를 조용히 듣고
있었다.
"이 곳은 금속이 존재하지 않는 곳입니다."
"금속이 존재하지 않아?"
"쇠붙이가 존재하지 않습니다. 쇠붙이라는 쇠붙이는 바람
처럼 사라져버립니다."
"착륙선은 사라지지 않았잖나?"
코드웰중령이 착륙선을 돌아보며 말했다. 수많은 금속으
로 이루어진 착륙선은 사라지지 않는데 쇠붙이가 사라진다
는 것이 무슨 소리냐는 뜻이었다. 이리노중위도 군인들과
과학자들, 그리고 기술자들을 쏟아놓고 있는 착륙선을 돌아
보았다. 코드웰중령의 말대로 착륙선은 멀쩡히 있었다.
"예. 신기하게도 착륙선은 사라지지 않고 있습니다. 이
곳에 도착한 과학자들이 그 사실을 규명하려고 무던히 애를
썼지만 소용이 없었습니다."
"음 "
코드웰중령이 낮게 신음을 삼켰다.
"도무지 납득이 되지 않는 일이군. 그렇다면 도시는 어떻
게 건설하고 있나?"
"목재와 흙을 이용해 건설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과학이 소용없는 땅이 아닌가?"
"그런 셈입니다. "
그때 비밀경찰 바바라가 무슨 말을 할 듯 하다가 그만 두
었다. 나무스소령이 말을 타고 정렬해 있는 군대를 향해 걸
어가고 있었다. 수레는 그들 뒤에 준비되어 있었다.
"제1중대는 착륙선에서 내린 짐을 수레로 나른다. 제2중
대는 코드웰중령님과 착륙선에서 하선한 과학자, 기술자들
을 우리가 건설하고 있는 도시까지 호위한다! 이상 즉시 실
시하라!"
"옛!"
나무스소령의 명령에 군인들이 일제히 대답하고 양쪽으로
갈라섰다. 그들은 즉시 1중대와 2중대로 나뉘어 1중대는 착
륙선으로 다가가고 2중대는 코드웰중령과 나무스소령을 에
워쌌다. 그들을 호위하기 위해서였다.
"일단 출발하시죠."
나무스소령이 코드웰중령의 옆에 서서 길을 재촉했다. 이
리노중위는 비밀경찰 바바라와 나란히 서서 코드웰중령과
나무스소령의 뒤를 따르기 시작했다.
"이리노중위!"
그때 비밀경찰 바바라가 속삭이듯이 낮게 이리노중위를
불렀다.
이리노중위는 걸음을 멈췄다.
"예."
이리노중위는 바바라의 눈을 쳐다보면서 대답했다.
비밀경찰 바바라는 경찰정복을 단정하게 입고 있고 팔에
붉은 완장까지 두르고 있었다. 모자 밑의 머리는 숏커트의
단발머리였다. 그러나 뒤에서 묶어 단정해 보였다. 머리색
은 은발이고 눈은 초록빛이었다. 어쩌면 콘택트렌즈를 끼고
있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은발의 단발머리도 가발일 것이다. 얼굴도 성형수술을 했
을 것이므로 나이가 몇 살인지 짐작도 할 수 없다. 그러나
얼굴은 표준형 미인이고 몸매도 표준형으로 균형이 잡혀 있
었다.
그러나 바바라에게서는 기이한 냄새가 풍기고 있었다. 이
리노중위는 그 냄새가 어쩐지 낯익은 것처럼 느껴졌다.
코드웰중령과 나무스소령은 저만치 앞서 걸어가고 있고
군인들은 양쪽에 도열하여 그들을 호위하고 있었다.
"걸으면서 얘기하세."
바바라가 앞을 주시하며 말했다.
"그러죠."
이리노중위는 바바라와 보폭을 맞추고 천천히 걸었다.
"이 별이 좀 이상하지 않은가?"
"마치 시간여행을 온 것같습니다."
"그렇지. 금속으로 만든 것이 아무 것도 존재할 수 없다
는 것은 석기시대라는 것을 의미하지. 석기시대는 미개한
시대였어 "
"예. 철기시대가 도래한 후에야 인간들은 문명을 이룰 수
가 있었습니다. 물론 문자의 발견이 더 중요한 역할을 했습
니다만 "
"옳은 말이야."
바바라는 그 말을 끝으로 더 이상 입을 열지 않았다. 바
바라는 다시 골똘히 생각에 잠겨 있었다. 그녀의 얼굴은 불
길한 예감에 사로잡혀 있었다.
이리노중위는 천천히 걷기 시작했다.
살로메 위성의 날씨는 좋았다. 하늘은 짙푸른 쪽빛이었고
양털구름이 하얗게 떠 있었다. 그들이 걷는 길은 잔디밭이
었다. 누군가 인공적으로 만든 것이 아닌가 의심이 들 정도
로 잔디는 잡초 하나 없이 깨끗하게 자라 있었다.
그들이 2km쯤 걸었을 때 잔디밭이 끝나고 넓은 초원이 시
작되었다.
"어?"
코드웰중령이 초원으로 들어서면서 당황한 표정을 지었
다.
"중령님. 무슨 일입니까?"
이리노중위는 황급히 코드웰중령에게 달려갔다.
"레일건이 사라졌어!"
레일건은 아르고호에 탑승하는 장교들에게만 지급된 특수
총이었다.
"예?"
그러나 이리노중위가 코드웰중령에게 달려갔을 때 이리노
중위의 레일건도 안개처럼 사라져버렸다. 이리노중위는 망
연자실했다. 그것은 이리노중위뿐이 아니었다. 아르고 24호
의 착륙선에서 내려온 승무원을 비롯해 군인들, 과학자들,
기술자들의 무기와 각종 실험도구, 기구들 심지어 승객들
의 옷가지에 붙어있던 쇠붙이마저 모조리 사라져버린 것이
다. 초원으로 행군해 가던 아르고 24호의 승객들은 한바탕
법석을 피웠다. 그러나 코드웰중령이 조용히 할 것을 지시
하고 나무스소령을 비롯한 장교들이 승객들 틈을 누비며 진
정시키자 모두 조용해 졌다.
"그러니까 착륙선에서 이 벌판까지가 쇠붙이가 존재할 수
있는 공간이군."
코드웰중령이 침통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초원으로 들어선 아르고 24호의 승객들도 얼굴이 어두웠
다.
"누군가 우리를 감시하고 있어."
그때 비밀경찰 바바라가 잔뜩 긴장하여 중얼거렸다.
이리노중위는 바바라를 멀뚱히 쳐다보았다. 바바라는 초
원의 한 꼭지점을 우두커니 응시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리
노중위가 바바라의 시선을 따라 초원을 응시했으나 아무 것
도 보이지 않았다.
"적은 눈에 보이지 않아."
바바라의 얼굴이 흙빛으로 어두워져 있었다. 바바라의 눈
이 공포에 질려 있었다.
"바바라양은 적이 보입니까?"
이리노중위는 의아하여 바바라를 쳐다보았다.
"느낌이야."
"느낌이라고요?"
"적의 냄새가 느껴져. 우리 유러너스 제국은 상상도 못할
정도의 무서운 적이야."
바바라는 무슨 신통력이라도 부리듯이 중얼거리고 있었
다.
(바바라는 이상한 여자야.)
이리노중위는 바바라를 이해할 수가 없었다.
대열은 다시 정돈되었고 나무스소령의 인도로 행군
을 계속했다. 그러나 쇠붙이가 사라지는 기이한 현상
을 경험한 승객들은 미지의 적에 대한 두려움으로 납
덩이같은 무거운 침묵에 둘러싸여 있었다.
초원이 끝나자 숲이 시작되었다. 숲에는 열대 우림
의 수목들이 우거져 있었다. 나무마다 과일이 풍성했
고 숲에는 사슴을 비롯해 지구에 있는 동물들과 유사
한 동물들이 보였다. 그러나 지구의 동물들과는 약간
달랐다. 사슴으로 보이는 동물은 직립을 하고 있었다.
"저게 사슴인가?"
숲속에서 아르고 24호의 승객들을 살피는 동물을 응
시하며 바바라가 놀란 표정으로 이리노중위에게 속삭
였다. 문득 그녀에게서 여자의 살 냄새가 울컥 풍겨왔
다.
"뿔을 보면 사슴같습니다."
이리노중위도 신기하여 오랫동안 그 동물을 쳐다보
았다. 그러나 그 기이한 동물은 사람들에게 적의를 갖
고 있는 것같지 않았다.
"설마 지능을 갖고 있는 것은 아니겠지?"
"손이나 발의 모양을 보면 원시시대의 사슴입니다."
"마치 꿈을 꾸고 있는 것 같군."
그때 대열 중에 누군가 돌멩이를 하나 집어 사슴을
향해 던졌다. 돌멩이는 곧장 사슴에게 날아가 사슴의
뿔이 있는 머리를 정통으로 맞추었다. 사슴이 케켕하
고 비명을 질러댔다. 그러자 숲속에 숨어있던 수많은
사슴 떼가 날카로운 비명소리를 지르며 일제히 달아나
기 시작했다.
"사슴이 직립을 하다니 "
바바라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인간은 처음에
유인원으로 태어났었다. 그 유인원은 나뭇잎이나 열매
를 먹으며 살다가 점점 진화하여 직립을 하게 되었고
결국은 인간으로까지 진화한 것이다. 사슴이 직립을
하는 것은 영장류로 진화하기 전의 단계가 아닌가 싶
어 이리노중위는 서늘한 공포가 엄습해 왔다.
(내가 공연한 생각을 하는 거야.)
이리노중위는 이마에 흐르는 땀을 손등으로 훔쳤다.
날씨가 덥지는 않았으나 긴장을 한 탓인지 이마에 땀
방울이 송글송글 맺혀 있었다.
그때 커다란 선풍기 날개가 돌아가는 것같은 소리가
숲 전방에서 들려왔다.
"이건 또 뭐지?"
바바라가 소리가 나는 방향을 쳐다보며 놀란 표정을
지었다. 이리노중위도 바바라를 따라 소리가 나는 방
향을 응시했다. 나무스소령의 호위를 받으며 숲으로
걸어 들어가던 코드웰중령도 놀라서 걸음을 멈추고 있
었다.
"놀라지 마십시오. 저건 잠자리의 날개짓 소리입니
다."
나무스소령이 웃으며 말했다.
착륙선에서 내린 사람들이 일제히 웅성거리기 시작
했다.
"여기엔 거대한 잠자리가 살고 있습니다."
나무스소령의 말에 바바라가 다시 이리노중위를 돌
아보았다. 그러나 이리노중위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
다. 살로메 위성은 모든 것이 신비스러웠다. 그때 선
풍기의 날개가 돌아가는 이상한 소리와 함께 수많은
잠자리 떼가 숲에서 날아오기 시작했다. 잠자리는 크
기가 얼추 30cm나 되어 보였다.
"세상에!"
바바라가 탄성을 내뱉았다. 이리노중위도 놀라서 넋
을 잃고 잠자리 떼를 쳐다보았다. 거대한 잠자리 떼가
숲에서 하늘을 까맣게 메우고 날아오는 모습은 장관이
었다. 과학자와 기술자를 비롯한 일반인들은 걸음을
멈추고 하늘을 쳐다보고 있었다. 잠자리 떼가 날개짓
을 하는 소리가 귀가 멍멍할 정도로 시끄러웠다.
"잠자리 떼가 사람을 공격하지 않나?"
코드웰중령이 긴장한 표정으로 나무스소령에게 물었
다.
"이 곳에서는 공룡도 사람을 공격하지 않습니다."
"그럼 계속 행군하세."
"예."
대열은 잠자리 떼가 하늘을 까맣게 메우고 지나간
뒤에야 웅성거리며 행군을 계속했다. 그들이 숲을 지
나 유러너스 제국이 건설한 도시에 이른 것은 한 시간
이 훨씬 지났을 때였다. 도시는 광활한 초원에 건설되
어 있었다. 그러나 유러너스 제국에서 20만명이라는
대규모의 사람들이 이주해왔기 때문에 도시는 세 개로
건설되어 있었다. 제일 첫 번째 건설된 도시는 미터스
(Metis: 제우스신의 부인) 시(市)로 이름을 지었는데
그 도시가 가장 큰 도시로 수도(首都)였다. 부채꼴 모
양으로 미터스시의 왼쪽에 헤라(Hera: 제우스의 두 번
째 부인) 시(市), 오른쪽에는 팔라스(Pallas: 미터스
의 딸) 시(市)가 건설되어 있었다.
세 개의 도시에는 거대한 성벽이 축조되어 있었다.
성벽은 얼핏 3m높이로 축조되어 있었고 성루에는 무수
한 깃발이 꽂혀서 펄럭거리고 있었다. 대열은 코드웰
중령과 나무스소령을 따라 천천히 성문을 통해 도시로
들어갔다.
제 31 장 보이지 않는 눈
착륙선이 오딧세이 17호와 가까워지자 바르시크대령은 눈
을 지그시 감았다. 마침내 지구로 돌아간다는 생각을 하자
만감이 교차하고 있었다. 사피언스 그라운드를 떠나서 적막
한 우주공간을 항해하여 니리드 위성에 첫발을 디뎠을 때만
해도 바르시크대령은 벅찬 감동에 젖었었다.
그러나 니리드 위성에서 그가 겪은 것은 상상조차 하지
못했던 일이었다. 겉보기에 니리드 위성은 모든 것이 풍족
하고 아름다운 별이었다. 그러나 니리드 위성에는 보이지
않는 생명체가 존재하고 있었다. 바르시크대령은 그 생각을
하자 머리끝이 쭈뼛하고 가슴이 서늘한 두려움이 엄습해왔
다. 그의 꿈속에서 겪은 기괴한 일도 이해할 수 없었다.
그는 니리드 위성에 도착할 때까지만 해도 여자를 모르고
있었다. 블랙버드 애브너소령을 한때 좋아하기는 했으나 육
체적인 접촉은 한 번도 없었다.
'그들은 외계인이 분명해 !'
바르시크대령은 눈을 감은 채 입속으로 중얼거렸다. 꿈속
에 나타난 미지의 외계인들, 그들은 냉혈동물처럼 차가웠지
만 말할 수없이 부드러운 육체를 가지고 있었다.
'도대체 어떻게 된거지?'
바르시크대령은 그 생각을 하자 아랫도리가 묵직해 왔다.
바르시크대령은 책상에 앉아 컴퓨터를 켰다. 어쩐지 불길
했다. 무엇인지 알 수 없었으나 상상할 수도 없는 무시무시
한 존재가 니리드 위성에 존재하고 있는 기분이었다.
바르시크대령은 모니터가 뜨자 자판을 두드리기 시작했
다. 그는 자신이 니리드 위성에서 겪은 일을 사피언스 그라
운드로 알릴 작정이었다. 예감이 좋지 않았다.
사피언스 그라운드의 첩보사령관인 나 바르시크대령은
니리드 위성에서 겪은 일이 심상치않은 기분이 들어 이 기
록을 남긴다. 나에게 혹시 무슨 일이 생기면 이 기록을 참
고하여 대처하라
바르시크대령은 거기까지 컴퓨터 자판을 두드리고 고개를
흔들었다. 도대체 나의 예감이라는 것은 무엇인가. 왜 내가
꿈에서 겪은 일을 기록으로 남겨야 하는가. 아니 내가 이상
한 여자들을 만난 것은 꿈이라고 해도 '마의 숲'은 결코 꿈
이 아니다. 그것은 누군가 인위적으로 설치한 것이다.
바르시크대령은 다시 컴퓨터 자판을 두드리기 시작했다.
그는 자신이 겪은 꿈에서부터 마의 숲까지 수상한 점을 낱
낱이 기록한 뒤에 장애란을 불러서 이 비밀을 파헤치라고
썼다.
"대령님. 우리 착륙선은 앞으로 세 시간 후에 오딧세이
17호의 제3도크에 착륙할 예정입니다."
그가 컴퓨터 자판을 두드리고 있을 때 침실문을 노크하는
소리와 함께 선장의 목소리가 들렸다. 착륙선의 선장은 아
이락소령이었다. 그는 몽골계의 인물이었다. 키가 작고 땅
딸막했다. 유러너스 제국과 전투를 할 때 얼굴에 상처를 입
어 보기 흉한 흉터가 남아 있었다.
"알겠네."
바르시크대령은 조용히 대답했다.
"주무십니까?"
"쉬고 있네."
"그럼 3시간 후에 뵙겠습니다."
"음."
바르시크대령은 컴퓨터 자판에서 시선을 떼지 않고 대답
했다. 그리고 기록한 내용을 오딧세이 17호의 통신망을 통
해 사피언스 그라운드의 평의회 예멘 의장 앞으로 전송했
다.
'이제 됐어.'
바르시크대령은 전송을 끝내자 비로소 침대에 누웠다. 시
간을 보니 착륙선이 오딧세이 17호와 도킹할 시간이 1시간
밖에 남아있지 않았다. 그는 한 시간만이라도 눈을 붙이고
쉬고 싶었다.
바르시크대령은 옷을 입은 채 침대에 누웠다.
그때 눈앞이 갑자기 환해 졌다. 바르시크대령이 눈을 뜨
자 눈앞에서 번쩍 하고 빛이 터졌다. 그와 함께 외계 여자
들이 바르시크대령의 눈앞에 서 있었다.
바르시크대령은 눈이 부셨다. 자신도 모르게 눈을 부비고
외계 여자들을 살폈다. 외계 여자들은 모두 셋이었다. 그들
은 바르시크대령 앞에 미동도 하지 않고 서 있었다. 바르시
크대령이 꿈에 보았던 기이한 외계 여자들이었다.
'내가 잠이 들었나?'
바르시크대령은 얼핏 그렇게 생각했다. 착륙선에 탑승하
자 곧바로 그의 방으로 들어와 침대에 누웠는지도 모를 일
이었다. 그리고 잠이 들어 눈앞에 있는 외계인들의 꿈을 꾸
고 있는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가 컴퓨터 앞에 앉아서
지구로 보낸 기록도 꿈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꿈이라고 하
기에는 그녀들의 모습이 너무나 또렷했다.
바르시크대령은 침대에서 몸을 반쯤 일으켰다.
"다, 당신들은 누구요?"
바르시크대령은 그녀들에게 자신의 말이 들리지 않으리라
는 사실을 알면서도 신음처럼 물었다.
"우리는 은하인이예요."
여자들 중에 가운데 있는 여자가 입을 열어 대답했다.
여자는 바르시크대령처럼 지구의 언어를 사용하고 있었
다.
"은하인?"
바르시크대령은 깜짝 놀라서 반문했다. 다음 순간 바르시
크대령은 그들이 외계인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럼 당신들이 외계인이란 말이오?"
"그래요!"
바르시크대령은 여자의 말에 눈을 질끈 감았다가 떴다.
니리드 위성에서 느낀 불길한 예감이 눈앞에 현실로 닥쳐와
있었다.
"당신들은 어디에 살고 있소?"
"은하의 모든 곳 우리는 어디나 존재하고 있어요."
"그렇게 말하면 모르오. 은하는 수십억 또는 수백억 광년
이나 떨어진 모든 우주를 통칭해서 부르는 단어가 아니오?"
"우리가 말하는 은하계는 제4차원까지를 포함해요."
"4, 4차원까지?"
"그래요. 당신은 이제 우리를 따라 가야 해요."
"나는 지구로 돌아가야 하오. 무엇때문에 나를 데려가려
고 하는지 몰라도 당신들을 따라갈 수 없소."
바르시크대령은 그들의 말에 완강하게 반대의사를 표시했
다. 그들과 대화를 할 수 있다는 사실이 두려우면서도 신기
했다.
"당신은 우리에게 가서 우리의 모르모트가 되어야 해요."
"모르모트라니? 나를 실험용으로 쓰겠다는 말이오?"
바르시크대령은 그녀의 말에 가슴이 철렁했다.
"그래요."
"무슨 실험인지 모르겠지만 거부하겠소. 나는 당신들의
실험대상이 아니오."
바르시크대령은 단호하게 거부했다. 그러자 가운데 여자
의 얼굴에서 희미하게 웃음기가 번졌다.
"당신은 우리를 따라가게 될거예요."
가운데 여자가 다시 말했다. 그리고 그녀가 양쪽 옆의 여
자에게 눈짓을 하자 두 여자가 바르시크대령에게 다가오기
시작했다. 바르시크대령은 벌떡 일어나서 머리맡에 있는 레
이저건을 잡으려고 했다. 그러나 두 여자는 느리게 움직이
고 있는 것 같았으나 번쩍 하는 순간에 바르시크대령에게
다가와서 그의 겨드랑이에 손을 넣어 팔을 꼼짝 못하게 잡
고 있었다. 바르시크대령이 팔을 빼내려고 했으나 그녀들은
미동도 하지 않았다.
바르시크대령은 등줄기로 식은땀이 흘렀다.
"나를 어디로 데리고 가려는 거요?"
바르시크대령은 안간힘을 쓰듯이 가운데 여자에게 물었
다.
"가보면 알게 되요."
가운데 여자가 몸을 가볍게 흔들었다. 그러자 그녀의 몸
이 안개처럼 희미해지다가 순식간에 침실에서 사라져버렸
다. 마치 한 줄기의 연기가 사라지는 것같았다.
"저, 저것은 순간이동!"
바르시크대령은 망연자실했다. 그러나 그가 정신을 빼앗
기고 있을 시간이 없었다. 바르시크대령의 양쪽 겨드랑이에
손을 넣고 있던 두 여자가 무어라고 외침과 동시에 그의 몸
도 안개처럼 희미해지다가 순식간에 침실에서 캄캄한 암흑
속으로 사라졌던 것이다.
바르시크대령은 몸이 허공에 붕 뜨는 기분을 느끼면서 재
빨리 눈을 감았다. 그의 몸이 침실의 벽을 향해 맹렬한 속
도로 날아가고 있었다.
순간이동은 SF영화에서 주로 사용되고 있었다. 물리학자
들은 인간이 순간이동을 하는 것은 이론적으로 정보를 전송
하듯이 인간도 정보화시켜 전송을 하면 된다고 했다. 다만
인간이 갖고 있는 정보(원자)가 10 (10뒤에 0이 28개)k바
이트나 되는 천문학적인 숫자이고 이것을 데이터로 바꾸어
전송을 하려면 지구에 있는 모든 책을 전송하는 것보다 더
많은 용량이 필요하여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고 했을 뿐이
었다.
그러나 바르시크대령의 몸은 빛처럼 빠르게 침실의 벽을
통과하여 착륙선 밖으로 날아가고 있었다.
바르시크대령은 눈을 떴다.
'아!'
바르시크대령이 눈을 뜨자 캄캄한 어둠이 펼쳐져 있었다.
오딧세이 17호 착륙선 밖의 우주였다. 그녀는 마치 공중부
양(空中浮揚)을 하듯이 우주공간에 떠 있었다. 그러나 바르
시크대령이 알지 못하는 것이 있었다. 그는 착륙선에서 나
와 광속으로 날고 있었다. 그러나 우주의 광대한 공간에서
순간이동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자신이 마치 우주에 떠있는
것처럼 여겨졌던 것이다.
한순간 바르시크대령의 몸이 크게 흔들렸다. 그와 함께
바르시크대령은 몸이 다시 붕 떠오르는 듯한 기분을 느꼈
다. 그러나 그것은 바르시크대령의 발에 땅이 닿는 충격이
었다.
문득 시야가 엷은 초록빛으로 가득해 졌다. 바르시크대령
은 시야를 가득 메운 초록빛에 적응하기 위해 눈을 깜박거
렸다.
"아 당신의 망막신경은 무색을 초록색으로 구별하는군
요."
그때 오른쪽 여자가 달콤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목소리만
으로는 그에게 적의가 없는 것같았다.
"이 곳의 공기가 초록색이 아니란 말이오?"
바르시크대령은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말했다. 공기가 엷
은 초록빛이었다. 그 까닭에 마치 물속에 있는 것처럼 바르
시크대령의 시야가 뿌옇게 흐렸다.
"당신에게는 초록색이지만 우리에게는 아니죠."
여자가 맑은 목소리로 웃었다.
"내가 도와주죠."
왼쪽에 있던 여자가 말했다. 그리고 바르시크대령의 대답
을 기다리지도 않고 그의 눈을 향해 손바닥을 펼쳤다. 그러
자 바르시크대령은 눈알이 땅기듯이 아파 왔다. 마치 눈알
이 여자의 손바닥을 향해 빠져나가는 것같은 기분이었다.
"이제 괜찮을 거예요."
여자가 다시 말했다. 바르시크대령은 여자의 말에 눈을
부비고 주위를 다시 둘러보았다. 그러자 거짓말처럼 그의
시야가 투명해 졌다.
"당신은 나에게 무슨 짓을 한 거요?"
바르시크대령은 더듬거리며 물었다. 여자가 그에게 어떤
짓을 저질렀는지 알 수없어 불안했다.
"당신의 눈에서 초록색을 구별하는 신경망을 제거했어요.
"그럼 나는 이제 초록색을 구별할 수 없다는 말이오."
여자가 소리를 내어 웃었다.
"이 곳에는 초록색이 존재하지 않아요."
"존재하지 않는다고?"
"그래요. 당신의 신경망이 이 곳의 공기색을 초록색으로
인식하고 있을 뿐예요"
여자의 말에 바르시크대령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여자의 말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때 한 떼의 남자들이 바르시크대령에게 가까이 왔다.
그들은 여자들과 무엇인가 자신들의 언어로 한참동안 얘기
를 하더니 어디론가 갑자기 사라져버렸다. 순간이동을 하여
다른 곳으로 가버린 모양이었다.
"가요."
여자들이 다시 바르시크대령의 팔짱을 끼었다. 여자들의
몸에서 문득 향긋한 체취가 풍겼다. 그 순간 바르시크대령
의 몸이 다시 허공으로 떠올랐다.
바르시크대령은 자신의 몸이 허공으로 솟자 잠시 눈을 감
았다가 떴다. 허공으로 그의 몸이 떠오르고 허공에서 다시
앞으로 빛처럼 날기 시작하자 눈을 뜰 수가 없었다.
바르시크대령이 여자들에 의해 도착한 곳은 어떤 나무 밑
이었다. 나무 밑에는 무수한 남자들과 여자들이 모여 있었
다. 그 앞에는 머리가 길고 흰 수염이 신비스러운 사내가
조용히 앉아 있었다.
여자들이 바르시크대령을 그 사내 앞에 내려놓았다.
사내가 여자에게 무엇인가 그들의 언어로 중얼거리자 여
자들이 공손한 태도로 대답했다. 바르시크대령은 그들이 대
화를 나누는 것을 우두커니 지켜보았다. 그들의 얼굴빛은
온화하면서도 부드러워 지극히 평화스러워 보였다.
사내가 바르시크대령을 쳐다보았다.
바르시크대령은 사내의 눈빛이 자신의 안구를 찌르는 것
처럼 강렬하여 섬칫했다.
"지구인이로군."
사내가 낮게 중얼거렸다.
"뭐라구요?"
바르시크대령은 큰소리로 물었다.
"지구인을 데리고 가서 철저하게 연구하시오."
사내가 여자들에게 지시했다. 그러자 여자들이 공손히 대
답하고 바르시크대령의 팔짱을 끼었다. 그 순간 바르시크대
령은 여자들에 의해 다시 순간이동을 하였다.
'이것들은 걸핏하면 순간이동을 하는군 '
바르시크대령은 화가 났다. 사내의 말투가 어쩐지 우호적
이지 않은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 순간 이미 바
르시크대령은 순간이동에 의해 수많은 실험도구가 장치되어
있는 어떤 방에 도착해 있었다.
"여기는 어딘가?"
바르시크대령은 여자들에게 반말로 물었다.
"우리의 실험실이다."
여자들도 반말로 대답했다.
"무엇을 실험하는가?"
"지구인들을 실험한다."
여자가 짧게 대답했다. 바르시크대령은 주위를 살펴보았
다. 실험실은 외계인들과 각종 실험도구로 어수선했다. 여
자들은 실험실에 있는 외계인들과 무엇인가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바르시크대령은 벽쪽을 살피다가 온 몸을 전율했
다.
벽에는 지구인들이 투명하고 커다란 박스에 갇혀 있었다.
'악독한 것들 '
바르시크대령은 주먹을 움켜쥐었다. 외계인들이 잡아다가
박스에 가둔 지구인들은 수십명이나 되었다. 어떤 지구인은
발가벗긴 채 갇혀 있었고 어떤 지구인은 남자와 여자가 꼭
끌어안은 채 움직이지 않고 있었다. 성행위를 하다가 그대
로 굳어버린 모습이었다. 뱃속에 태아를 갖고 있는 여자도
있었다.
'유러너스 제국 비밀경찰도 있는데 어떻게 된거지 '
바르시크대령은 고개를 갸우뚱했다. 비밀경찰은 상의가
모두 벗겨진 채 투명한 박스 안에 갇혀 있었다.
그때 외계 여자들이 바르시크대령에게 가까이 다가왔다.
그녀들은 바르시크대령의 팔을 잡고 머리에 손을 얹었다.
그러자 무엇인가 뜨거운 기운이 외계 여자의 손바닥에서 느
껴졌다. 다음 순간 바르시크대령의 몸이 휘청하고 흔들렸
다. 그러자 외계 여자들이 그를 안아서 진찰대 비슷한 곳에
눕혔다.
"당신은 마취되었어. 당신의 정신과 성기능을 하는 통제
하는 신경망만 남겨놓고 나머지 기능은 우리가 모두 마취시
켰어!"
한 여자가 그를 향해 말했다.
"당신은 저 여자와 섹스를 해야돼."
바르시크대령은 고개를 돌려 외계 여자들이 말하는 유러
너스 제국의 비밀경찰을 쳐다보았다.
박스 안에 갇혀 있던 유러너스 제국의 비밀경찰이 박스에
서 나와 바르시크대령에게 다가오고 있었다.
"무슨 짓을 하는 거야?"
바르시크대령은 눈을 부릅뜨고 물었다.
"당신들은 섹스를 한다."
"뭐라구?"
"우리는 지구인들의 섹스가 유전자 어던 영향을 주는지
연구하려고 하는 것이다."
"미쳤군!"
"섹스는 원래 진화의 행위였다. 그런데 언젠가부터 당신
들은 진화의 목적없이 섹스를 했다. 단순한 욕망을 위해서,
그리고 지배하기 위해서 그것은 지구인들에게 추악한 범죄
만을 일으키고 있을 뿐이다."
"그것은 너희들이 상관할 일이 아니야."
"너희들은 우리의 후손이다."
"뭐라구?"
"이제 더 이상의 대화는 필요없다."
외계 여자가 대화를 하지 않겠다는 듯이 고개를 흔들었
다. 바르시크대령은 몸을 움직여 보았다. 그러나 그의 몸은
마치 결박이라도 당한 듯이 꼼짝을 할 수가 없었다.
유러너스 비밀경찰은 벌써 바르시크대령이 눕혀져 있는
진찰대까지 가까이 다가와 있었다.
'이 여자도 외계인들에게 제압 당했어!'
유러너스 비밀경찰의 눈은 초점이 없었다.
바르시크대령은 절망감을 느꼈다. 유러너스 비밀경찰이
그의 옷을 하나하나 벗기고 있었으나 그는 조금도 움직일
수가 없었다. 외계인들은 벌써 그들이 강제로 섹스를 하려
는 진찰대 옆으로 잔뜩 몰려와 있었다. 그들은 지구인들이
섹스를 하는 것을 흥미로운 대상으로 관찰하려는 것 같았
다.
제 32 장 외계인을 찾아서
이리노중위는 저녁을 마치자 성루에 올라서서 먼 하늘을
쳐다보았다. 잠시후면 나무스소령과 함께 순찰을 돌아야 했
다. 나무스소령의 말에 의하면 살로메 위성에는 적이 없었
다.
착륙선에서 내려 도시로 들어올 때 본 공룡이나 익룡,
거대한 잠자리 따위의 생명체도 인간을 해치지 않는다고 했
다. 그러므로 순찰이라고 해야 목창을 들고 거리를 한 바퀴
도는 일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이리노중위는 그런 생각을
하며 담배 한 가치를 빼어 물었다.
살로메 위성에 도착해서의 두 번째 밤이었다. 멀고 먼 우
주에는 별들이 빼곡하게 들어차 있었다. 지구에서 보는 별
과 그다지 다르지 않은 별이었다.
'애란이 무엇을 하고 있을지 궁금하군 '
이리노중위는 하늘에서 반짝이는 무수한 별들을 쳐다보며
장애란에 대해 생각했다. 이상한 일이었다. 이리노중위는
장애란이 보고 싶었다. 장애란의 해맑은 눈빛과 촉촉하게
젖은 입술, 둥글고 탐스러운 가슴, 밤이면 작은 새처럼 그
의 품을 파고드는 따뜻하고 보드라운 살결이 그리웠다.
어쩌면 지구를 떠나 적막한 우주공간에 있다는 사실이 이
리노중위를 더욱 쓸쓸한 고독감에 사로잡히게 하고 있는지
도 모를 일이었다.
'마더 살로메의 정체는 무엇일까?'
이리노중위는 마더 살로메를 생각하자 가슴이 답답해왔
다. 마더 살로메는 유러너스 제국의 지도자였다. 그러나 그
녀가 어떻게 유러너스 제국의 지도자인가. 유러너스 제국에
는 45인의 원로들이 있고 그들이 제국을 통치하고 있었다.
파나카이아 총통은 원로원의 의장이었다.
'마더 살로메는 수상한 여자야 '
이리노중위는 처음으로 마더 살로메를 의심했다.
그는 마더룸을 생각해 보았다. 그는 로마노즈에서 아라크
네시로 진출한 뒤에 마더타임에 참여했었다. 마더타임은 유
러너스 제국시민이라면 누구나 참여해야 했으나 아버지 로
버트 퍼그스는 이리노중위와 동생 메리언 퍼그스에게 마더
타임에 참여하지 않게 했었다.
"마더 살로메에 대해 경배를 하는 것은 제국정부의 지시
다. 그러나 제국정부의 지시가 모두 옳은 것은 아니다."
그 말을 하는 로버트 퍼그스의 얼굴은 어딘지 모르게 음
산해 보였다.
"그럼 우리에게 반역자가 되라는 거예요?"
메리언 퍼그스가 로버트 퍼그스에게 반박했다.
"제국정부의 지시를 따르지 않는다고 해서 반역자는 아니
다."
"비밀경찰에 체포되면 우리는 처벌을 받아요."
"그러면 체포되지 않도록 해야지."
"아버지. 이런 비밀이 언제까지나 유지될 수 있을 것같아
요? 언젠가는 우리 가족이 마더타임을 지키지 않는다는 것
을 비밀경찰도 알게 될거예요."
"우리가 마더 살로메가 누군지도 알게 되겠지."
"마더 살로메는 우리의 어머니예요."
"너의 어머니는 조안나 퍼그스다. 너를 낳고 키웠지 "
"나를 낳고 키운 것은 어머니지만 마더 살로메가 없었으
면 불가능해요. 우리 유러너스 제국의 모든 과학이 그 분으
로부터 나왔고, 우리가 먹는 식량, 호흡하는 산소, 지구의
무질서와 혼란 속에서 인류를 구원한 분도 그 분예요."
"너는 철저하게 세뇌되었구나."
"제국의 시민들은 90%가 국립제국병원에서 출생을 하죠.
여자들에게 출산의 고통을 없앴어요. 어디 그 뿐인가요? 우
리에게 러브타임이라는 제도를 만들어 언제나 섹스를 하면
서 즐겁게 살수가 있게 했잖아요? 남자나 여자나 결혼, 출
산 따위의 부담스러운 일에서 벗어나 마음대로 섹스를 할
수 있게 되었으니 얼마나 좋아요."
메리언 퍼그스의 말에 아버지는 빙긋이 웃기만 했었다.
굳이 대답할 필요가 없다는 뜻인 것같았다.
"너는 어떻게 생각하니?"
로버트 퍼그스가 이리노중위에게 물었다.
"모르겠어요."
이리노중위는 고개를 흔들었다. 이따금 로버트 퍼그스가
전혀 낯선 사람처럼 느껴질 때가 있었다. 그것은 조안나 퍼
그스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의 눈빛이 아주 잠간 동안이지만
사악한 빛을 뿜을 때가 있었다.
"그래 지금은 모르지. 그러나 마더 살로메가 누군지 의심
을 해야할 필요가 있다."
"그건 왜 그렇죠?"
"그는 절대자로서의 권력을 누리고 있다."
"그만한 능력이 있기 때문에 누리는 것 아닌가요?"
"그럴지도 모르지. 허나 유러너스 제국시민들이 진정으로
평화를 누리며 살고 있는가 하고 생각을 해보면 그의 절대
권력이 악(惡)이라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우리가 악을
경배하고 숭배한다면 얼마나 우스꽝스러운 일이겠니? 더욱
이 과학문명이 신(神)에 가까울 정도로 발전한 47세기에 절
대자가 존재한다는 것은 비극이다. 그녀는 분명히 자신의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우리 유러너스 제국의 주민들을 통제
하는 수단으로 마더타임과 러브타임이라는 제도를 만들어
시행하고 있는 것이다."
이리노중위는 어릴 때의 일이라 아버지 로버트 퍼그스의
말에 동의하지 않았다. 오히려 아버지가 엉뚱한 논리를 펴
고 있다고 생각했었다. 아라크네시에 진출한 뒤에는 아버지
의 생각에 관심조차 기울일 수가 없었다. 그는 곧장 사관학
교에 입학했고 사관학교에서는 철저하게 마더타임과 러브타
임을 지켜야 했었다.
그때 말발굽소리가 들려왔다. 이리노중위가 성안 쪽을 내
려다보자 횃불을 든 한 떼의 군인들이 도시에서 달려나오고
있었다.
"누구냐?"
이리노중위는 성 아래를 내려다보며 수하를 했다.
군인들은 얼추 2, 30명쯤 되어 보였다.
"나무스소령이다!"
군인들의 무리에서 나무스소령의 절도있는 목소리가 들려
왔다.
"무슨 일이십니까?"
"야간정찰을 나간다고 하지 않았나? 빨리 내려 와라!"
"예!"
이리노중위가 성루를 내려가자 군인들은 활과 창으로 무
장을 하고 있었다. 나무스소령 옆에는 비밀경찰 바바라도
있었다. 그녀도 말을 타고 창을 들고 있었다.
"어디로 가십니까?"
이리노중위는 나무스소령에게 물었다. 바바라가 이리노중
위를 날카로운 눈빛으로 쏘아보고 있었으나 일부러 외면했
다.
"가보면 알게 된다. 훈련이 잘된 말이니 타라."
나무스소령이 사병이 끌고 온 말을 가리켰다.
"자네의 임무는 바바라양을 보호하는 것이니 옆에 바짝
붙어서 경호하라."
"알겠습니다."
이리노중위는 말에 올라탔다. 말을 타보는 것은 처음이었
으나 의외로 손쉬웠다. 말에는 안장까지 얹혀져 있었다.
"가자!"
나무스소령이 먼저 말을 달리기 시작했다. 그러자 사병들
도 일제히 말 옆구리를 발로 차고 성문으로 달려나가기 시
작했다. 이리노중위도 말 옆구리를 힘껏 찼다. 그러자 말이
히히힝 하는 울음소리와 함께 앞발을 높이 쳐들었다.
"어, 어 "
이리노중위는 당황했다. 앞발을 높이 치켜든 말이 땅을
박차더니 갑자기 번개처럼 달려나갔다. 그 바람에 이리노중
위는 말에서 떨어져 나뒹굴었다. 엉덩이가 부서질 듯이 아
팠다.
'제기랄!'
이리노중위는 엉덩이를 만지며 속으로 중얼거렸다. 그때
앞에 달려가던 바바라가 되돌아왔다.
"뭐하는 거야?"
바바라가 날카롭게 힐문했다.
"말에서 떨어졌습니다. 죄송합니다."
"이런 풋내기!"
바바라가 혀를 찼다. 이리노중위는 난감했다. 말은 이미
저만치 달아나고 있었다.
"잡아!"
바바라가 손을 내밀었다.
"예?"
"내 손을 잡으라고!"
"예."
이리노중위는 바바라의 손을 잡았다. 그러자 바바라가 이
리노중위의 손을 힘껏 잡아챘다. 이리노중위는 재빨리 말안
장의 발판을 밟고 바바라의 등뒤에 올라탔다.
"이리노중위!
"예!"
"또 놓치지 말고 내 등을 꽉 잡아라!"
"예!"
이리노중위는 바바라의 허리에 팔을 감고 등에 얼굴을 기
댔다.
"이랴!"
그러자 바바라가 말 옆구리를 발로 찬 뒤에 말고삐를 휘
둘렀다. 바바라가 탄 말이 히히힝 하는 울음소리를 내면서
앞발을 높이 치켜들었다. 이리노중위는 떨어지지 않기 위해
바바라의 허리를 꽉 잡았다.
말이 땅을 박찼다.
이어서 말이 어둠을 가르고 쏜살같이 달리기 시작했다.
이리노중위는 눈을 꽉 감았다. 말이 힘껏 달리자 바람이 얼
굴을 세차게 후려쳤다. 바바라의 머리카락도 말갈기처럼 휘
날렸다.
"이랴!"
"이랴!"
바바라가 더욱 세차게 말고삐를 휘둘렀다. 앞서 간 나무
스소령을 따라잡기 위해서였다.
"이랴!"
이내 밀림이 나타났다. 바바라는 밀림을 내쳐 달렸다. 아
직도 나무스소령 일행이 보이지 않고 있었다.
"이랴!"
그들이 나무스소령 일행을 따라잡은 것은 밀림 한가운데
서였다. 나무스소령 일행은 그 곳에서 바바라와 이리노중위
를 기다리고 있었다.
"중위 호강하는군."
바바라의 등뒤에 매달린 이리노중위를 보고 나무스소령이
웃었다. 사병들도 킬킬대고 웃고 있었다. 이리노중위는 말
에서 뛰어 내렸다.
"여기서부터는 마의 숲이다."
"마의 숲이란 어떤 것을 말합니까?"
"마의 숲은 일종의 블랙홀이다."
"블랙홀이라구요?"
이리노중위는 놀라서 나무스소령을 쳐다보았다. 바바라는
말 위에 앉아서 나무스소령의 말을 주의 깊게 듣고 있었다.
"누군가 밀림에 인위적으로 블랙홀을 설치한 것이다. 허
나 이것은 눈속임 블랙홀이다."
이리노중위는 나무스소령의 말을 이해할 수 없었다.
"지구의 고대사를 살펴보면 진법(陣法)이라는 것이 있다.
병사들이 전쟁을 할 때 진을 만들어 싸우는 것을 말하는데
이것이 발전하여 토목과 기관을 이용하게 되었다. 중국의
제갈공명 같은 군사(軍師)는 진법의 대가인데 돌멩이 몇 개
로도 비가 오고 천둥이 치는 것같은 조화를 부렸다. 진법의
대가는 대개 하늘을 쳐다보고 별들의 움직임을 보고 진법을
만들었다. 우주의 변화를 병법에 이용한 것이다."
"그럼 진법을 깨트리는 방법을 찾았다는 말입니까?"
"그렇다. 우리 과학자들 중에 중국계의 과학자가 한 사람
있었는데 그가 파훼하는 방법을 알아낸 것이다."
이리노중위는 얼핏 납득이 되지 않았다. 바바라도 납득이
가지 않는 표정이었다. 병사들도 웅성거리고 있었다.
"모두들 이해하기 어려울 줄 안다. 나도 처음엔 이러한
진법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믿지 않았다."
병사들이 웅성거리자 나무스소령이 설명을 하기 시작했
다.
"중국에서는 이러한 진법을 기문진법이라고 불렀다. 돌멩
이 몇 개로 진을 만들어 수만명의 병사들을 꼼짝 못하게 가
두기도 하고 미로에서 헤매게 하기도 한다. 고대의 전쟁에
서는 이러한 진법이 많이 사용되었으나 현재는 실전되었다.
그런데 여기에 이런 진법이 펼쳐져 있는 것이다. 원래 이
진법은 고대 부여족에서 만들어졌다고도 하는데 그 내력은
자세히 알 수가 없다."
" "
"여기에 설치된 진법은 음양오행설(陰陽五行說)을 바탕으
로 한 음양오행진(陰陽五行陣)이다. 생문(生門)과 사문(死
門)이 있는데 생문에 발을 들여놓으면 살고 사문에 발을 들
여놓으면 죽는다."
나무스소령의 말에 병사들이 일제히 긴장했다.
"말은 이 근처에 묶어 놓는다."
나무스소령이 병사들을 돌아보며 말했다.
"실시!"
나무스소령의 지시에 사병들이 웅성거리며 말에서 내렸
다. 그들은 빠르게 말을 나무에 묶어 놓고 죽음의 진 앞에
집합했다.
바바라도 말을 묶어 놓고 돌아와 이리노중위 옆에 섰다.
"모두들 내 발자국만 따라서 걸어야 하므로 손을 잡는다.
절대로 아무 곳에나 발을 디디지 마라. 알겠나?"
"옛!"
병사들이 일제히 대답했다.
"그럼 내가 먼저 들어간다. 모두들 횃불을 꺼라!"
나무스소령이 병사 한 명의 손을 잡고 마의 숲으로 걸음
을 떼어놓기 시작했다. 병사들도 긴장한 표정으로 횃불을
끄고 나무스소령을 따라 마의 숲으로 걸음을 떼어놓기 시작
했다.
"이리노중위 내 손을 잡아!"
바바라가 이리노중위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예."
이리노중위는 바바라의 손을 잡았다. 바바라의 손은 따뜻
하고 부드러웠다. 이리노중위는 조심스럽게 바바라의 발자
국을 밟고 마의 숲에 발을 들여놓았다.
그때 갑자기 사방이 캄캄해지면서 세찬 바람이 불기 시작
했다. 이리노중위는 어리둥절했다. 바람은 더욱 거칠어지고
어디선가 지옥의 악귀들이 울부짖는 것같은 울음소리까지
들려오고 있었다. 그 소리는 소름이 끼치도록 공포스러웠다
"무슨 소리가 들리고 눈앞에 지옥이 펼쳐진다고 해도 동
요하지 마라. 너희들이 내 발자국만 조심스럽게 따라 걸으
면 결코 아무 일도 없을 것이다."
이리노중위의 손에서 끈적거리는 땀이 배어났다. 마의 숲
에 펼쳐진 진은 앞으로 나갈수록 신비했다. 처음엔 사방이
캄캄해지고 바람이 미친 듯이 불어대더니 다음엔 악귀의 울
음소리가 들리고, 그 다음엔 발가벗은 여자들이 춤을 추며
병사들을 유혹했다. 그러나 그 여자들은 가까이 접근했다가
는 안개처럼 사라지고는 했다.
그들이 음양오행진이라는 기괴한 진을 모두 통과한 것은
한 시간이 지났을 때였다. 모두들 기진맥진하여 숲에 주저
앉았다.
"5분간 휴식한다."
나무스소령도 긴장을 했는지 손등으로 이마의 땀을 훔치
며 말했다.
"바바라양, 괜찮습니까?"
이리노중위는 바바라의 옆에 앉아 물로 목을 축이고 담배
를 피워 물었다.
"괜찮아."
바바라가 숲에 앉아 먼 벌판을 바라보며 대답했다. 그녀
도 이마에 땀방울이 송글송글 맺혀 있었다.
"대오를 정리한다."
5분이 지나자 나무스소령이 병사들을 집합시켰다. 병사들
은 창과 칼을 들고 집합했다.
"전진!"
"전진!"
병사들이 나무스소령의 명령을 복창하고 행군을 하기 시
작했다.
숲은 잠이 든 듯 조용했다. 그러나 숲을 벗어나자 벌판이
시작되었다. 벌판도 어둠 속에서 조용했다. 살로메 위성의
모든 것이 잠이 든 듯한 기분이었다.
"여기는 달이 없어 "
바바라가 병사들의 뒤를 따라 걸으며 말했다.
"보름이 지나 하현이나 상현에 가까운 것이 아닐까요?"
이리노중위가 별들이 빽빽한 하늘을 쳐다보며 대꾸했다.
지구에서도 그믐이나 초승이면 달이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살로메 위성에 달이 뜨지는 않았으나 별빛 때문에 벌판이
희끄무레하게 윤곽을 드러내고 있었다.
"저기 불빛이 있다!"
그때 대열의 앞에 있던 병사가 소리를 질렀다.
병사의 말에 이리노중위는 재빨리 전방을 살폈다. 병사들
도 일제히 웅성거리며 벌판의 한 지점을 살피고 있었다. 벌
판 저만치 불빛이 희미하게 깜박거리고 있었다.
"소령님!"
"어디냐?"
"저기입니다."
"음. 정말 불빛이군."
나무스소령이 낮게 신음을 살폈다. 이리노중위는 바바라
를 쳐다보았다. 바바라도 자세를 낮게 웅크리고 불빛을 살
피고 있었다.
"모두들 조용히 하라!"
나무스소령의 명령에 병사들이 일제히 입을 다물었다.
"일단 불빛 가까이 접근한다! 전진!"
"전진!"
"앞으로는 복창하지 마라!"
"옛!"
나무스소령이 병사들의 앞장을 섰다. 이리노중위는 바바
라와 함께 벌판을 향해 걸음을 떼어놓기 시작했다.
"정지!"
병사들이 불빛 가까이 이른 것은 한시간이나 행군을 했을
때였다. 나무스소령이 손을 들어 병사들의 행군을 중지시켰
다. 불빛은 마을에서 흘러나오고 있었다. 그러나 유러너스
제국처럼 도시를 방어하기 위한 성벽은 없었다.
"일단 정찰대를 조직하여 마을에 잠입한다."
나무스소령이 병사들에게 말했다.
"보안데상사!"
"옛서!"
나무스소령의 지시에 보안데상사가 앞으로 나섰다. 그는
아프리카 출신으로 흑인이었다. 사피언스 그라운드에는 흑
인이 많았지만 유러너스 제국에는 흑인이 소수 인종이었다.
"상사가 병사 2명을 차출하여 마을을 정찰하라!"
"옛서!"
"나머지는 그 자리에 앉아서 쉰다!"
보안데상사가 병사 2명과 함께 마을로 출발했다. 이리노
중위는 바바라와 나란히 앉아서 마을을 응시했다. 마을을
보고 있자니 여러 가지 생각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살로메
위성에 마을이 있다는 것은 외계인이 존재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런데 외계인이 있다면 얼마나 발전한
문명을 갖고 있을까. 그들의 문명이 유러너스 제국의 과학
문명을 압도하고 있지는 않을까
이리노중위가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무엇인가 부드러
운 것이 어깨에 기대왔다. 비밀경찰 바바라의 머리였다. 마
의 숲을 지나 여기까지 행군하느라고 지친 모양이었다.
'비밀경찰이라도 여자는 여자군 '
이리노중위는 바바라의 머리를 가만히 쓰다듬었다. 바바
라의 풍성한 머리칼에서 기분좋은 냄새가 풍기고 있었다.
한 시간이 지나갔다. 보안데상사는 아직도 돌아오지 않고
있었다.
이리노중위는 바바라의 어깨를 감싸안았다. 그러자 바바
라가 가늘게 코를 고는 소리가 들려왔다.
'내일은 바바라와 러브타임에 참여해야겠군.'
바바라는 균형이 잡힌 몸매를 갖고 있으므로 살결이 아름
다울 것이다. 오늘은 정찰을 나왔으므로 러브타임에 참여할
수가 없었다.
보안데상사가 돌아온 것은 다시 30분이 지났을 때였다.
"소령님. 마을엔 외계인이 살고 있습니다."
"외계인?"
"별다른 무기는 없습니다. 키도 작구요. 공격을 해도 좋
겠습니다."
보안데상사가 창을 움켜쥐고 말했다.
이리노중위는 보안데상사를 쳐다보았다. 보안데상사의 눈
이 굶주린 맹수처럼 번쩍이고 있었다.
"외계인이 얼마나 되나?"
나무스소령이 긴장한 표정으로 물었다.
"20명쯤 됩니다."
"어떻게 생겼지?"
"날개가 있습니다. 마치 요정 같습니다."
"날개가 있다고?"
보안데상사의 말에 병사들이 슬렁거렸다. 외계인에게 날
개가 있다는 보안데상사의 말이 공포심을 불러일으키고 있
었다.
"예. 분명히 날개가 있습니다!"
"무엇을 하고 있나?"
"불가에 둘러앉아 과일을 먹고 있습니다."
"무기는?"
"무기를 보지 못했습니다."
"민간인들인가?"
"모르겠습니다. 민간인으로 위장을 했는지도 모르겠습니
다."
나무스소령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이리노중위도 날개가
달린 외계인에 대해서 깊이 생각했다.
"좋다! 보안데상사가 발견한 것은 곤충이 진화한 외계인
이라고 생각된다! 이제 우리는 곤충족을 공격한다! 총독께
서 이미 명령을 내리셨지만 우리의 임무는 살로메 위성을
정복하는 것이다! 모두들 적을 공격할 준비를 하라!"
살로메 위성에는 총독이 있었다. 파나카이아 총통은 살로
메 위성에 총독을 파견하여 다스리게 했다. 총독에는 해군
제독 커밍스 장군이 임명되어 있었다.
이리노중위는 바바라를 깨웠다.
"무슨 일이야?"
이리노중위가 어깨를 흔들자 바바라가 눈을 떴다.
"외계인을 공격합니다."
"외계인?"
"보안데상사가 정찰을 하고 왔습니다."
이리노중위는 목창을 움켜쥐고 말했다. 바바라는 그때서
야 엉덩이를 털고 일어섰다.
"전진한다!"
나무스소령이 병사들에게 명령을 내렸다.
"보안데상사가 앞장을 서라!"
"옛"
보안데상사가 재빨리 병사들의 앞으로 나섰다. 이리노중
위는 바바라를 뒤에 서게 하고 조심스럽게 병사들의 뒤를
따라갔다. 외계인들의 마을은 그들이 있던 곳에서 30분 거
리나 떨어져 있었다. 마을 가까이에 이르자 알아들을 수없
는 언어로 얘기를 하고 있는 소리가 들려왔다. 외계인들은
모닥불을 피우고 그 앞에 둘러앉아 무엇인가 왁자하게 떠들
고 있었다.
'외계인들에게 정말 날개가 있군. 곤충족에서 진화한 것
이 분명해.'
이리노중위는 일렁거리는 불빛에 드러난 외계인들의 날개
를 보고 기분이 미묘했다. 외계인들의 날개는 매미 속날개
처럼 투명했다.
'저건 여자 외계인인 모양인데 '
외계인들 중에는 가슴이 유난히 큰 외계인들도 있었다.
외계인의 가슴이 크다는 것은 아이에게 젖을 먹이고 있다는
증거였다. 젖을 먹이는 일이 없었다면 외계인의 가슴은 퇴
화되어 버렸을 것이다.
"내가 공격명령을 내리면 일제히 달려가 창으로 적을 찌
른다. 알겠나?"
"예!"
병사들이 일제히 대답했다.
이리노중위는 외계인을 공격하기 위해 창을 움켜쥐었다.
우주에서의 첫 번째 전투였다. 전신이 팽팽하게 긴장되고
있었다.
"바바라양은 경찰이니까 이 곳에서 대기하시오."
나무스소령이 바바라의 옆으로 와서 말했다.
"알았어요."
바바라가 고개를 끄덕거렸다. 바바라가 비밀경찰이 아니
라고 하더라도 여자이므로 전투에 직접 참여할 필요는 없었
다. 게다가 외계인들은 무방비 상태였다. 바바라까지 전투
에 참여하지 않아도 외계인들을 충분히 공격할 수 있을 것
이었다.
"이리노중위!"
"예. 소령님."
"귀관은 전투에 참가하지 말고 바바라양을 보호하라!"
이리노중위는 바바라를 힐끗 쳐다보았다. 병사들이 모두
전투에 나가면 바바라는 혼자 남게 되는 것이다. 이리노중
위는 바바라를 보호해야 하겠다고 생각했다. 전투에 참여하
지 않게 되어 긴장이 풀렸으나 소령의 명령이었다.
"명령에 따르겠습니다."
이리노중위는 부동자세로 대답했다.
"주목!"
나무스소령이 병사들에게 자신을 향해 집중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지금부터 외계인들을 향해 전진한다! 누구든지 외계인들
이 있는 곳까지 바짝 접근할 때까지는 일체의 소리를 내지
마라! 소리를 내어 적에게 들키는 날이면 군법으로 즉결처
분하겠다! 알겠나?"
"옛"
"전진!"
"전진!"
"복창하지 마라! 내가 공격명령을 내릴 때까지는 수신호
만 사용한다!"
"옛"
나무스소령이 손짓으로 전진하라는 신호를 했다. 그러자
보안데상사를 선두로 병사들이 소리없이 외계인들을 향해
전진하기 시작했다. "외계인들이 정말 무장을 하지 않았
을까?"
바바라가 이리노중위의 옆에 바짝 다가와 낮게 속삭였다.
"글쎄요."
"외계인들은 우리보다 더 뛰어난 과학문명을 갖고 있는
것같아 "
"소령님이 외계인들을 공격하러 갔으니까 조만간 알게 되
겠죠."
이리노중위는 외계인들에게 조심스럽게 접근하는 나무스
소령 일행을 주시했다. 그들은 점점 외계인들에게 가까이
다가가고 있었다.
"공격!"
나무스소령이 공격명령을 내린 것은 불과 1분도 되지 않
아서였다.
"와!"
병사들은 명령이 떨어지자 바짝 엎드려 있던 자세에서 벌
떡 일어나 외계인들에게 창을 겨누고 달려갔다.
"공격하라!"
나무스소령이 앞장을 서서 공격을 했다.
"공격하라!"
그 뒤를 보안데상사가 따르고 병사들이 따랐다. 이리노중
위는 숨을 죽이고 전투 모습을 주시했다. 나무스소령과 보
안데상사가 고함을 지르고 달려가고 병사들이 총공격을 하
자 외계인들은 우왕좌왕하고 있었다. 그들은 날개가 있는데
도 당황하여 어쩔 줄을 모르고 있었다.
"캭!"
"캬아악!"
외계인들이 처절한 비명을 지르기 시작했다. 나무스소령
의 창과 보안데상사의 창이 외계인들을 공격하기 시작한 것
이다. 그들은 흡사 사냥을 하듯이 외계인들을 닥치는대로
찔러 죽이고 있었다.
기이할 정도로 외계인들은 저항을 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들은 공포에 질려서 유러너스 제국 군인들의 공격에 죽어
갔다. 그것은 마치 군인들이 어린아이들을 학살하고 있는
것처럼 일방적인 전투였다. 외계인들은 이리저리 쫓기며 살
육을 당했다.
"하나도 살려 두지 마라!"
"모조리 죽여라!"
나무스소령과 보안데상사는 병사들을 독려하며 외계인들
을 죽이고 있었다.
"잘하는군. 역시 제국군인들이야."
바바라가 몸을 엎드린 채 살기를 번뜩이며 말했다. 이리
노중위는 얼굴을 찡그렸다. 바바라의 냉혹한 음성에 소름이
끼쳤다.
"캬아악!"
그때 한 외계인이 원숭이처럼 비명을 지르며 꼬꾸라졌다.
그러자 보안데상사가 외계인의 등을 밟고 창을 찔렀다. 그
순간 뒤에 있던 여자 외계인이 보안데상사의 등짝에 올라타
면서 울부짖었다. 마치 외계인을 죽였다고 항의를 하는 것
같았다.
보안데상사가 여자 외계인을 뿌리쳤다. 여자 외계인은 그
서슬에 뒤로 벌렁 나자빠졌고 보안데상사는 나자빠진 여자
외계인의 가슴에 목창을 깊이 찔러 넣었다.
이리노중위는 눈을 질끈 감았다.
"왜 그래?"
바바라가 이리노중위를 돌아보며 물었다.
"이건 전투가 아니라 살육입니다."
"이리노중위! 이제 살로메 위성은 우리의 별이야! 우리는
이 곳에 있는 외계인들을 하나도 남겨놓지 않고 죽인 뒤 이
별을 정복해야 돼! 유러너스 제국의 앞에는 정복뿐이라는
것을 모르나!"
바바라가 벌떡 일어서며 버럭 소리를 질렀다. 이리노중위
는 바바라의 말에 대꾸하지 않았다. 바바라는 역시 냉혹한
비밀경찰이었구나, 하는 생각이 뇌리를 스쳤다.
외계인들은 여기저기서 비명을 지르며 죽어가고 있었다.
그 소란은 10여분 동안이나 계속되었다.
제 33 장 반인반수
외계인들이 죽은 현장은 피냄새가 진동을 하고 있었다.
나무스소령은 외계인의 마을을 완전히 초토화시킨 뒤 이리
노중위와 바바라를 불렀다. 이리노중위는 현장에 도착해 외
계인 시체의 끔찍한 모습을 살피며 몸서리를 쳤다.
'외계인들을 무조건 죽이다니 '
이리노중위는 나무스소령의 행위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적은 섬멸했다. 우리는 외계인들의 말과 식량을 노획했
다!"
나무스소령이 병사들을 집합시켜 놓고 짧은 연설을 했다.
그러자 병사들이 일제히 창을 흔들며 환호성을 질러댔다.
"일단 외계인들의 식량으로 식사를 한다. 식사를 한 뒤에
다시 정찰을 나간다! 우리는 살로메 위성의 외계인을 최초
로 섬멸한 지구인들이다. 우리가 가는 곳에 있는 외계인들
은 무조건 정복한다! 알겠나"
"옛!"
"식사 실시!"
"실시!"
나무스소령이 명령에 병사들이 흩어져 외계인들에게서 노
획한 과일을 먹기 시작했다. 이리노중위도 바바라와 함께
과일을 먹었다. 병사들은 식사가 끝나자 외계인들의 기이한
모습, 인간의 형상을 하고 있으면서도 날개를 달고 있는 외
계인들을 새삼스럽게 살피며 고개를 갸우뚱했다. 외계인들
은 요정처럼 아름다웠다. 마치 곤충에서 진화한 것같았다.
대열이 외계인의 마을을 출발한 것은 한 시간쯤 지난 뒤
의 일이었다. 벌써 동녘이 훤하게 밝아오고 있었다.
이내 밀림이 나타났다. 그들은 밀림으로 행군해 들어갔
다.
병사들이 외계인의 거대한 도시를 발견한 것은 스콜(열대
지방의 소나기)이 한바탕 쏟아지기 시작했을 때였다.
병사들은 밀림에 은신했다. 비가 쏟아지고 있기 때문인지
외계인의 도시는 조용했다.
"저들도 성을 쌓고 있군요."
이리노중위는 말에서 내려 바바라에게 속삭였다. 외계인
들의 도시는 거대한 성벽으로 둘러싸여 있었고 성루에는 깃
발이 꽂혀 나부끼고 있었다.
"이리노중위!"
"예."
"저 성안에 외계인들이 상당히 많은 것같지 않나?"
바바라가 이리노중위를 돌아보며 물었다. 바바라는 비 때
문에 옷이 흠뻑 젖어 있었다. 비에 젖은 옷이 바바라의 풍
만한 몸을 도발적으로 보이게 했다.
"저렇게 큰 성을 쌓을 정도면 몇 만명은 있으리라고 추측
됩니다."
"그래. 문제는 그들이 성을 쌓은 이유야. 또 다른 적이
있어."
"그렇습니다. 아마 가공할 정도의 무서운 적이 있을지도
모릅니다."
이리노중위는 얼굴로 흘러내리는 빗물을 손등으로 훔치며
공감했다. 성은 적을 방어하기 위해 쌓는 것이므로 외계인
들이 적을 두려워하고 있다는 증거가 되는 것이다.
"보안데상사!"
나무스소령이 보안데상사를 불렀다.
"예. 소령님."
"상사가 다시 적을 정찰한다. 정찰대 2명을 선발하여 성
에 들어가라!"
"옛!"
보안데상사가 나무스소령에게 경례를 하고 부하 둘을 선
발하여 성으로 달려갔다. 그들은 빗속을 누비고 성 가까이
접근했다. 비가 오고 있기 때문인지 성루에는 파수병이 세
워져 있지 않았다. 이리노중위는 빗속에서 보안데상사와 정
찰병이 성벽을 기어올라 성안으로 잠입하는 것을 지켜보았
다.
비는 서서히 그쳐 가고 있었다. 바바라는 밀림으로 들어
가 비에 젖은 옷을 짜서 입고 이리노중위는 담배를 피워 물
었다.
보안데상사가 돌아온 것은 두 시간이 훨씬 지났을 때였
다. 비는 완전히 그쳐서 햇살이 밀림의 나뭇가지 사이로 비
치고 새들이 평화스럽게 지저귀고 있었다.
"성안에는 수만명의 외계인들이 살고 있습니다."
보안데상사가 나무스소령에게 정찰 보고를 했다.
"군인들도 있나?"
"예. 모두들 무장을 하고 있습니다."
"무기는 무엇인가?"
"무기는 우리와 똑같습니다. 창과 칼 같은 것들입니다.
전쟁을 하려는지 훈련을 하고 있었습니다."
"파수병은 없었나?"
"없었습니다."
나무스소령이 잠시 생각에 잠겼다.
"이리노중위!"
"예."
이리노중위는 나무스소령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나와 같이 정찰하겠나?"
"예."
"보안데상사! 상사가 여기 병사들을 지휘하여 대기하고
있어라!"
"예."
보안데상사가 거수경례를 바쳤다.
그때 비밀경찰 바바라가 앞으로 불쑥 나섰다.
"나도 같이 가겠어요."
"워험하지 않겠소? 정찰에는 참여하지 않는 게 좋을 거
요."
나무스소령이 마땅치 않은 표정으로 말했다.
"정찰은 내 임무예요. 그리고 내가 위험에 빠지면 이리노
중위가 보호해 주겠죠."
바바라가 이리노중위를 쳐다보고 생긋 웃었다.
이리노중위는 어깨를 으쓱했다. 그녀를 보호하는 것은 이
리노중위의 책임이 아니었다. 그런데도 그녀는 의도적으로
그에게 접근해 오고 있었다.
"좋소. 당신은 비밀경찰이니까 적을 관찰할 필요가 있겠
지 "
나무스소령이 비아냥대는 말투로 내뱉았다.
"출발!"
나무스소령이 손짓으로 앞으로 전진하라는 신호를 보내면
서 앞장을 섰다. 이리노중위는 보안데상사에게서 밧줄을 받
아 어깨에 걸고 나무스소령의 뒤를 따랐다. 밀림은 조용했
다. 이따금 공룡 떼가 지나가는지 지축이 쿵쿵 울리고 있었
다.
성벽에 이르자 나무스소령이 밧줄을 던져 성루에 걸었다.
그리고 이리노중위에게 올라가라는 신호를 했다. 이리노중
위는 밧줄을 잡고 성벽을 기어오르기 시작했다. 성벽은 얼
추 5m나 되어 보였다. 그러나 이리노중위는 가볍게 성벽을
기어올라가 성루에 올라섰다.
이어서 바바라가 성벽을 기어 올라왔다. 이리노중위는 바
바라의 손을 잡아주었다.
"고마워."
바바라가 하얗게 웃었다. 위에서 내려다보자 바바라의 옷
깃 사이로 탐스러운 젖무덤이 내려다보였다. 이리노중위는
재빨리 외면했다.
"왜 그래?"
바바라가 성루로 올라서며 물었다.
"아무것도 아닙니다."
"뭘 보고 있었어?"
"예?"
"내 가슴을 보지 않았어?"
"얼핏 보았습니다."
"솔직해서 좋아. 러브타임 때 보자구."
바바라가 다시 싱긋 웃었다. 이리노중위는 그 말에 우위
코가 생각났다. 아르고 24호에 승선한 뒤에 그의 러브타임
파트너는 우위코였었다. 바바라는 군대를 감시하는 비밀경
찰이므로 이리노중위의 상관이었다. 그녀가 원하면 그녀의
러브타임 파트너가 되어야 했다. 그것은 그가 원하던 일이
기도 했다.
"내려가세."
나무스소령이 성루로 올라오자 이리노중위는 밧줄을 걷어
서 성안으로 내렸다. 이번에는 나무스소령이 먼저 내려가고
이리노중위가 성벽을 타고 성안으로 내려갔다. 바바라는 마
지막으로 내려왔다. 밧줄을 잡아 주느라고 성벽을 올려다보
자 이번엔 바바라의 스커트 사이로 흰 속옷자락이 보였다.
'내가 보고 싶어서 보는 게 아니야.'
이리노중위는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그러나 바바라는 이
번에는 아무 탓도 하지 않았다.
외계인들이 훈련을 하고 있는 초원은 성벽에서 8백m쯤 떨
어져 있었다. 나뭇가지 사이로 숨어서 가까이 접근하자 외
계인들이 벌판에 빽빽하게 모여 있었다. 그들은 창으로 찌
르기라던가 칼로 베는 연습을 하고 있었으나 엉성하기 짝이
없었다.
"외계인들이 군사훈련을 하고 있군. 병정놀이를 하고 있
어."
나무스소령이 어이없다는 듯이 웃으며 말했다. 이리노중
위가 보기에도 그들은 허약하기 짝이 없었다. 그러나 그들
은 날개를 가지고 있어서 공중을 날면서 적을 공격할 수 있
었다.
외계인들의 날개는 매미 날개처럼 연약했다.
"저들은 곤충족이야. 나비에서 진화한 것같아."
나무스소령이 다시 말했다. 이리노중위도 같은 생각이었
다. 그들은 나비 아목(亞目)과의 나방종류에서 진화했을 것
이다.
"내 생각엔 님프인이라고 부르는 게 더 좋을 것 같아요."
바바라가 낮게 말했다. 이리노중위는 님프라는 말이 참으
로 적절하다고 생각했다. 그들은 요정처럼 아름다웠다.
"저들을 공격하려면 더 많은 군대가 필요하겠어."
나무스소령이 무겁게 신음을 삼켰다.
"이제 그만 돌아가세."
그들은 두 시간쯤 외계인들이 봉술과 검술훈련을 하는 것
을 지켜보다가 성벽을 넘어 나무스소령의 부하들이 기다리
고 있는 숲으로 돌아왔다. 그러는 동안 사방이 어두워지기
시작했다. 나무스소령은 밀림을 헤치고 마의 숲을 찾아가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판단하고 밀림에 야영을 하라고 지시했
다. 부대에서 준비한 건량으로 저녁을 먹고나자 밤이 깊어
졌다.
하늘에는 무수히 별이 반짝이고 있었다. 바람은 나뭇잎을
흔들며 부드럽게 살랑거렸다.
이리노중위는 숲에 누웠다. 얼마나 잠을 잤을까. 이리노
중위가 무엇인가 매끄러운 것이 몸에 닿는 것을 느끼고 눈
을 뜨자 바바라가 그를 짓누르고 있었다.
이리노중위는 눈을 감았다. 바바라가 욕정을 이기지 못해
그에게 달려들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사방은 조용했다. 병
사들은 모두 잠들어 있었다. 불침번을 서고 있는 병사들조
차 창을 세워두고 모로 쓰러져 자고 있었다.
피곤했던 모양이었다. 지난 밤 유러너스 제국이 건설한
미터스시에서 빠져나와 마의 숲을 통과했고 외계인 마을에
대한 습격, 말을 타고 전진하여 외계인들의 도시를 찾아 나
서느라고 눈을 붙일 시간이 없었던 것이다.
"이리노중위!"
바바라의 말에 이리노중위는 눈을 떴다.
"예."
"너의 러브타임 파트너는 누구야?"
"우위코입니다."
"일본족 지질학자이군."
"예."
"이제부터는 내가 너의 러브타임 파트너야. 알겠어?"
"예."
이리노중위는 바바라를 외면했다. 바바라가 그의 러브타
임 파트너라는 생각을 하자 기분이 미묘했다. 그녀의 눈은
벌써 색기로 번들거리고 있었다. 바바라는 하시시 캡슐을
복용한 모양이었다.
"이리노!"
바바라가 들뜬 음성으로 중얼거리며 이리노중위에게 접근
해 왔다.이리노중위는 눈을 감고 그녀에게 자신의 몸을 맡
겼다.
이리노중위는 바바라가 흡족해 하며 그에게서 떨어져 눕
자 눈을 뜨고 밀림의 나뭇가지 사이로 하늘을 쳐다보았다.
하늘에는 별들이 더욱 빽빽하게 들어차 희끄무레한 별빛을
뿌리고 있었다.
아름다운 하늘이었다. 살로메 위성에서는 은하계가 더욱
뚜렷이 보였다. 이리노중위는 별을 바라보다가 잠이 들었
다.
이리노중위가 눈을 뜬것은 갑자기 비명소리가 들리기 시
작했기 때문이었다. 아직도 한밤중이었다. 사방은 여전히
캄캄했다. 그러나 어둠 속에서 무엇인가 검은 물체가 휙휙
움직이고 있었고 여기저기서 병사들의 날카로운 비명소리가
들려왔다.
'기습이야!'
이리노중위는 가슴이 철렁했다.
이리노중위는 벌떡 일어나려고 했다. 그러나 그 순간 커
다란 그물이 이리노중위를 향해 덮쳐왔다. 이리노중위는 그
물을 피하려고 했으나 어둠 때문에 미처 피하지 못하고 그
물에 갇히고 말았다. 손을 휘저어 그물에서 벗어나려고 시
도했으나 그럴수록 그물은 더욱 그의 몸에 엉켜들었다.
'성안에 있던 외계인들이 아니야!'
어둠 속에서 움직이고 있는 외계인들은 성안에 있던 외계
인들보다 체격이 훨씬 컸다. 그리고 그들은 먹이를 사냥하
듯 병사들을 창으로 마구 찌르거나 그물 속에 잡아넣고 있
었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는지 알 수 없었다. 사방이 갑자기 조
용해 졌다. 이리노중위가 그물 사이로 밖을 살피자 어둠 속
에서 움직이고 있는 것은 괴물같은 외계인들뿐이었다. 그들
은 짐승처럼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우우!"
그들 중에 우두머리인 듯한 자가 창을 높이 들고 소리를
지르자 다른 무리들도 일제히 소리를 질러댔다.
'아!'
그때 이리노중위는 그들의 창에 걸려있는 물체를 보고 소
스라쳐 놀랐다. 그것은 나무스소령의 머리였다. 그것뿐이
아니었다. 그들은 나무스소령의 머리를 창에 꿰어서 흔들며
환호한 뒤에 허겁지겁 병사들의 시체에 달려들어 뜯어먹기
시작했다. 어둠 속에서 움직이는 기괴한 모습의 괴물들, 사
튀로스족은 식인족이었다.
'이, 이럴 수가 !'
이리노중위는 몸서리를 쳤다. 이리노중위는 자신의 눈앞
에서 전개된 처참한 모습에 고개를 돌려버렸다. 너무나 끔
찍하여 그들의 포악한 만행을 보고 있을 수가 없었다.
서서히 날이 밝기 시작했다. 날이 희부움하게 밝아오기
시작하자 이리노중위는 사튀로스족의 모습을 좀 더 똑똑히
볼 수 있었다. 그들은 반인반수(半人半獸)의 형상을 하고
있었다. 몸체는 인간형태를 하고 있었으나 머리는 괴물이었
다.
몸 전체가 갑질(鉀質)로 덮여 있었다.
손과 발에는 갈퀴가 있었다.
'이들은 아직 진화되지 않았어!'
이리노중위는 사튀로스족이 진화되지 않은 외계동물이라
고 생각했다. 인간은 유인원인 영장류에서 진화했다. 그러
나 영장류만 인간으로 진화하라는 법은 없는 것이다. 곤충
류나 파충류 따위도 얼마든지 인간으로 진화할 수 있었다.
사튀로스족은 괴물이 인간으로 진화해 가는 과정에 있는 것
같았다.
그들은 아직 언어를 사용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나 귀
가 유난히 크고 입은 옆으로 길게 찢어져 있었다. 눈은 핏
빛으로 섬칫했다. 피부조차 갑질로 덮여 있어서 신화 속의
괴수(怪獸) 같았다.
이리노중위는 그물을 뚫으려고 몇 번이나 시도해 보았으
나 소용이 없었다. 그물을 뚫고 도망치지 않으면 언젠가는
그들의 먹이가 될것이 분명했다.
사튀로스족은 저주스러운 식사가 끝나자 포로들을 긴 장
대에 매달아서 어깨에 메고 끌고가기 시작했다. 자세히 살
피자 바바라와 보안데상사도 포로가 되어 있었다. 그들도
그물에 갇혀 장대에 매달려 끌려가고 있었다. 바바라는 거
의 알몸이었다. 사튀로스족이 바바라가 입고 있는 옷을 신
기하게 여겨서 마구 찢어버린 것이다.
그것은 이리노중위도 마찬가지였다. 이리노중위의 옷도
그들이 찢어댔기 때문에 나신이나 다름없었다
제 34 장 여신 누네즈
장애란은 에어카를 지상에 닿을 정도로 낮게 비행했다.
유러너스 제국의 비밀경찰도 에어카를 몰고 끈질기게 추격
을 해오고 있었다. 그들이 쏘아대는 레이저건과 양자포(陽
子砲: 원자핵을 구성하는 소립자를 이용하여 만든 포)로 건
물이 무너지고 아라크네 시민들이 비명을 지르며 죽어갔으
나 그녀는 마하(音速)의 속도로 에어카를 몰았다.
그리하여 간신히 유러너스 제국 비밀경찰을 따돌리고 아
라크네시 교외의 공원에 에어카를 파킹했다. 언젠가 이리노
중위와 함께 자전거를 타고 하이킹을 왔던 벚꽃동산이었다.
'간신히 따돌렸네 '
장애란은 주위를 살핀 뒤에 팜탑을 틀었다. 반제동맹에서
보낸 Z파일을 보기 위해서였다. 휴일인 탓인지 주라기 공원
에는 인적이 전혀 없었다.
이방인을 동굴에 가둔 누네즈는 매일같이 알바레스의
눈을 피해 이방인을 찾아갔다. 이방인은 이지를 완전히 상
실했으나 성적인 능력은 그대로 가지고 있었다.
'이 사람이 이토록 장대한 물건을 가지고 있다니 '
누네즈는 뽀얀 물안개가 몸을 휘감아 오는 듯한 기분이었
다. 눈앞이 부옇게 흐렸다. 누네즈는 그의 남성을 보는 것
만으로도 몸이 달아올랐다
장애란은 팜탑의 모니터에 떠오르는 글자들을 보면서 고
개를 흔들었다. 반제동맹에서 보낸 파일이 아직도 누네즈라
는 정체불명의 여자만 언급되고 있어서 이해가 되지 않았
다.
'컴퓨터에 해커가 침입했나?'
유러너스 제국의 비밀경찰이라면 충분히 그런 짓을 할 수
도 있을 터였다. 그러나 반제동맹에서 그만한 대비를 하지
않았을리도 없었다.
장애란은 다시 팜탑의 모니터로 시선을 떨어트렸다.
누네즈는 이방인을 이용해 욕망을 해소했다. 이방인은
피그미족과 달랐다. 그는 이지를 상실했는데도 누네즈를 충
분히 만족시켰다. 누네즈는 짐승처럼 날뛰었다. 마치 폭풍
이 몰아치는 것처럼 욕망이 회오리를 쳤다. 그녀의 내부에
서 꽃들이 무수히 피어나는가 하면 뇌성벽력이 울었다.
이방인은 거대했다. 누네즈는 비명을 지르다가 울었다.
격렬한 희열이 그녀의 내부에서 폭발하고 있었다.
그녀는 때때로 모래사막이었다. 이방인은 사구(砂丘)를
오르는 모래바람이었다. 그녀는 또 거대한 만(灣)이었다.
이방인은 하얀 포말을 일으키는 파도였고 깃폭이 펄럭거리
는 돛단배였다. 멀고 먼 바다를 항해하여 정박할 곳을 찾는
난파선이었다
장애란은 이리노중위를 생각했다. 누네즈의 이야기를 읽
다보니까 갑자기 이리노중위가 가슴속에 아련히 떠오르면서
몸이 떨렸다.
'그가 여기서 내 머리에 꽃을 꽃아 주었어 '
장애란은 이리노중위가 보고 싶었다. 이리노중위의 환하
게 웃는 얼굴, 그의 얼굴을 생각하자 가슴이 찌르르 울렸
다.
'이리노중위! 당신을 사랑해요.'
장애란은 바람에 물결처럼 나부끼는 벚꽃동산을 바라보면
서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누네즈는 3년 동안 정신없이 이방인을 찾아갔다. 누네
즈가 이방인을 찾아다니던 3년이 누네즈에게는 가장 행복했
던 시간이었다. 그러나 그런 행복이 무한정으로 지속될 수
는 없었다.
알바레스가 누네즈의 수상스러운 행각을 눈치챘다. 그는
어느날 밤 누네즈의 뒤를 밟았고 누네즈가 이방인을 눕혀
놓고 짐승같은 짓을 저지르고 있는 것을 발견했던 것이다.
알바레스는 눈에서 불이 일어나는 것같았다. 그와 결혼할
때 누네즈가 소문이 자자할 정도로 방탕했던 것은 알바레스
도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처녀 때의 일이었다. 일단
결혼을 했으면 순결을 지켜야 한다. 피그미족은 처녀 때는
남자들과 자유롭게 교제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일단 결혼을
하면 남편 외의 외간 남자들과의 교제는 일체 금지되어 있
었다. 그것은 여자의 정절이라는 관점에서가 아니라 남자의
권위를 위해서였다. 피그미족에게는 여자가 외도를 하면 남
자의 권위를 짓밟는 행위가 되었다.
'더러운 년!'
알바레스는 이를 갈았다.
누네즈는 알바레스가 숨어서 보고있는 것도 모르고 이방
인 사내와 달라붙어 있었다.
알바레스는 누네즈가 일을 마치기 전에 집으로 돌아왔다.
그의 눈은 증오로 붉게 충혈되어 있었다.
누네즈가 돌아온 것은 2시간이나 지나서의 일이었다. 알
바레스는 잠이 든 체했다. 누네즈는 샤워를 한 뒤에 옷을
벗고 침대로 기어 들어왔다.
얼마의 시간이 지났을까. 누네즈가 알바레스에게 접근해
왔다. 마음속에서는 알바레스 따위는 관심조차 없었으나 바
람을 피우고 난 뒤의 미안함 때문인지 알바레스에게 치근덕
거리고 있었다.
알바레스는 차마 누네즈를 거부할 수가 없었다. 속에서는
더러운 년이라는 욕설이 금방이라도 튀어나올 것 같았으나
그는 이를 악물고 참았다.
누네즈의 손에 의해 그의 몸이 더워지기 시작했다. 알바
레스는 처참한 기분이었다. 그는 가능하면 누네즈의 음탕한
손에 의해 자극되지 않았으면 하고 바랐다. 그러나 그의 의
사와 상관없이 그의 몸이 기재개를 켜고 있었다.
"자지 않는 것 다 알아요."
누네즈가 속삭였다.
알바레스는 누네즈에게 자신의 몸을 맡기고 말았다.
이윽고 누네즈가 잠에 떨어졌다.
알바레스는 누네즈가 잠에 떨어지자 침대에서 일어나 주
섬주섬 옷을 챙겨 입었다. 그는 밖으로 나가기 전에 다시
한 번 누네즈가 잠든 모습을 살펴보았다.
누네즈는 입을 약간 벌리고 있었다. 벌어진 입술 사이로
어둠 속에서 하얀 치아가 도드라져 보였다. 시트는 허벅지
위로 함부로 걷어 올라가 있었다.
두 팔은 네 활개를 펴듯 벌린 채였다. 알바레스를 자신의
몸속에 받아들인 누네즈가 잔뜩 포만감에 젖어 잠이 들어
있었다.
그는 누네즈의 목을 눌러버리려다가 그만 두었다. 누네즈
를 죽이고 자신도 죽는다는 것은 미욱한 짓 같았다.
그는 거실로 나오자 오랫동안 사용하지 않던 엽총을 꺼내
총알을 장전했다.
밖으로 나왔다. 아직도 한밤중이었다. 그는 조용히 차를
끌고 이방인과 누네즈가 그 짓을 하던 동굴이 있는 숲으로
달려갔다. 그의 눈에는 이방인과 누네즈가 그 짓을 하던 모
습 외에는 아무 것도 떠오르지 않았다. 이방인을 끌어안고
미친 듯이 울부짖던 누네즈를 생각하자 그는 새삼스럽게 분
노가 솟구쳤다.
동굴은 캄캄했다.
그는 랜턴을 비추며 동굴 안으로 들어갔다. 이방인은 쇠
사슬에 묶여 있었다.
'이방인을 사육하고 있었어 '
알바레스는 어처구니가 없었다. 누네즈가 이방인과 그 짓
을 하는 것은 알았으나 사육을 하고 있었다는 것은 상상도
못했던 일이었다. 그러나 이제는 끝장을 내야 했다.
알바레스는 이방인을 향해 엽총을 겨누었다.
이방인이 그에게 죄를 지은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누네
즈가 이방인과 더러운 짓을 했으므로 죽어야 하는 것이다.
이방인이 어디서 왔는지는 알 수 없었으나 피그미족 누구의
눈에 띄더라도 죽어야할 운명이었다.
'나를 원망하지는 말아 '
알바레스는 방아쇠로 손가락을 가져갔다. 격발장치는 이
미 풀어놓은 상태였다. 이방인은 동굴벽에 바짝 달라붙어
웅크리고 자고 있었다. 그의 등을 향해 엽총을 조준했다.
엽총은 산탄용이었다. 탄환을 맞으면 등짝이 벌집으로 변할
것이다.
살인은 처음이었다. 그는 죽어가는 사람을 살리는 의사였
다. 그러나 그의 아내인 누네즈와 사통한 놈을 살려둘 수는
없었다.
알바레스는 호흡을 깊게 했다.
막상 방아쇠를 당기려니까 긴장이 되고 있었다. 그때 등
뒤에서 나뭇잎이 바스락거리는 것같은 소리가 들려왔다. 그
는 재빨리 뒤를 돌아다보았다. 그러나 뒤에는 캄캄한 어둠
뿐이었다.
'짐승일 꺼야.'
지나치게 긴장을 한 탓일 거였다. 산속이므로 짐승들이
얼마든지 돌아다닐 수 있을 터였다. 사람이 이 곳까지 올리
는 없었다.
알바레스는 다시 이방인을 향해 총을 겨누었다.
"아, 알바레스 "
그때 분명한 사람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누네즈의 목소리
였다.
"안돼요! 그를 죽이지 마세요!"
누네즈였다. 누네즈가 하얀 잠옷 차림으로 동굴 입구에
서 있었다. 그가 밖으로 나올 때 뒤를 밟은 모양이었다.
"더러운 년!"
알바레스는 눈에서 파랗게 불꽃이 일어나는 것같았다. 누
네즈가 이방인을 변호하자 더욱 증오심이 솟구쳤다.
"그는 죄가 없어요!"
누네즈가 무릎을 끓었다. 누네즈의 얼굴에서 눈물이 주르
르 흘러내리고 있었다.
"차라리 저를 죽이세요! 전 그 사람 없으면 하루도 살수
가 없어요!"
"이놈은 이방인이야!"
알바레스는 분노로 몸을 부르르 떨었다.
누네즈를 도저히 용서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누네즈를
죽일 수는 없었다. 그 대신 이방인을 죽일 작정이었다. 이
방인을 죽이는 것은 누네즈에게 가슴을 도려내는 것같은 고
통일 것이다.
"그가 무엇이던 저는 그 사람 없으면 못살아요. 그러니
차라리 저를 먼저 죽이세요!"
"어림없어!"
알바레스는 이방인을 향해 다시 총을 겨누었다.
"알바레스! 만약에 그를 죽이면 당신과 헤어지겠어요!"
그때 누네즈가 날카롭게 말했다.
"더러운 년! 이방인과 놀아난 주제에 헤어져?"
알바레스는 방아쇠를 힘껏 당겼다. 탕 하는 총소리와 함
께 화약냄새가 코끝에 강하게 풍겼다. 이방인의 등에서 피
가 분수처럼 솟구쳤다. 이방인은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등
짝이 벌집이 된 것이다. 이방인의 등에서 흘러내리는 피가
금세 동굴바닥을 흥건하게 적셨다.
"다, 당신!"
누네즈가 분개한 목소리로 소리를 질렀다.
"이 살인자! 내가 그렇게 빌었는데 죽이다니 !"
누네즈가 표독한 눈빛으로 알바레스를 쏘아보고는 동굴
밖으로 달려나갔다.
"누네즈!"
알바레스는 누네즈를 향해 뛰어가기 시작했다. 누네즈를
죽이고 싶지 않았다. 누네즈가 용서를 빌면 용서하리라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누네즈는 그를 오히려 비난하고 있었
다. 이방인과의 정사가 그토록 황홀하게 누네즈를 사로잡았
던 것일까.
동굴 밖으로 나오자 저만치 숲속을 미친 듯이 달려가고
있는 누네즈의 흰 나이트 가운이 보였다. 알바레스는 누네
즈를 향해 정신없이 달려가기 시작했다.
"으악!"
그때 절 벽쪽에서 누네즈의 처절한 비명소리가 들려왔다.
알바레스는 절벽 쪽으로 황급히 달려갔다. 누네즈가 절벽
에서 발을 헛디뎌 떨어진 모양이었다.
'맙소사!'
절벽에 이른 알바레스는 누네즈가 나뭇가지 끝에 매달려
대롱거리는 것을 발견하고 아찔했다. 까마득한 절벽이었다.
누네즈는 절벽의 중간쯤에 매달려 바둥거리고 있었다.
"알바레스 살려줘요!"
누네즈가 절벽 위에 있는 알바레스를 발견하고 소리를 질
렀다. 알바레스는 망설였다. 나뭇가지 끝에 매달려 있는 누
네즈를 구출해 줄 수도 있었다. 그러나 그가 이방인을 죽였
을 때 누네즈의 눈은 증오로 표독하게 빛났었다. 그것은 이
미 사랑이 떠난 여자의 눈빛이었다. 누네즈를 절벽에서 구
출해 주면 반드시 복수를 하려고 할 것이었다.
'넌 죽어야 돼!'
알바레스는 누네즈를 향해 총을 겨누었다.
누네즈를 용서하고 싶은 마음도 있었으나 그녀의 마음이
이미 그를 떠났다는 생각을 하자 다시 분노가 솟구쳤다.
"알바레스!"
누네즈가 처절하게 알바레스를 불렀다.
"누네즈! 너는 남자의 권위를 무시했어!"
알바레스는 누네즈가 사육하던 이방인을 죽였듯이 누네즈
를 죽이리라고 생각했다.
"아, 안돼요!"
"죽음의 고통이 어떤지 똑똑히 기억해 두라고!"
"알바레스 제발 저를 구해 주세요! 이제 두 번 다시 나쁜
짓을 하지 않을께요!"
누네즈가 눈물로 애원을 했다.
알바레스는 입술을 실룩거렸다.
"흥! 이방인과 그 짓을 할 때 좋아서 미친 듯이 울부짖지
않았던가? 다시 한 번 그렇게 울부짖어 보시지 "
알바레스가 차갑게 비웃었다.
"당신을 저주할 거예요!"
누네즈의 눈에서 고통과 증오로 피눈물이 흘러내렸다. 팔
에서 점점 기운이 빠져가고 있었다.
"나도 그러길 바래. 지옥에 가서 나를 마음껏 저주하라
구!"
알바레스가 입술을 비틀며 방아쇠를 당겼다. 그러자 요란
한 총성과 함께 누네즈의 귓전으로 총탄이 스쳐 지나갔다.
누네즈는 귓전이 화끈하여 나무가지를 놓쳤다.
"으악!"
누네즈는 또 다시 처절한 비명을 지르며 절벽으로 추락하
기 시작했다. 알바레스가 절벽 위에서 내려다보자 마치 한
마리 새가 하늘에서 곤두박질을 치듯이 하얀 나이트 가운을
입은 누네즈의 몸뚱이가 추락하고 있었다.
제 35 장 반제동맹
벽난로의 불이 여전히 타닥 탁 소리를 내며 타고 있었다.
우희 위버는 고개를 무릎에 묻고 불을 쬐었다. 유강렬박사
의 오두막집에서 만난 노인, 그 노인은 유러너스 제국의 비
밀을 너무나 상세하게 알고 있었다.
"그후 누네즈라는 여자는 어떻게 되었어요?"
우희 위버는 고개를 들고 노인을 응시했다. 벽난로 때문
에 거실이 후끈후끈했다.
"그 여자는 여신이 되었어."
노인이 우울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여신이요?"
"물론 절벽에서 떨어진 뒤에 바로 여신이 된 것은 아니었
어. 누네즈는 알바레스가 총을 쏘자 나무가지를 놓쳤는데
팔을 허우적거리며 떨어지다가 무의식중에 또 다시 나무가
지를 잡게 되었던 거야 "
"그럼 누구에게 구원을 받았겠군요."
"그 나무가지는 어떤 동굴과 연결이 되어 있었어. 사람이
란 절박한 상태에 몰리면 기적과 같은 힘을 발휘할 때가 있
는데 누네즈가 그랬어. 그녀는 나무가지를 잡고 사방을 두
리번거리다가 동굴을 발견한 거야."
노인의 얘기는 새벽까지 계속되었다.
누네즈는 나무가지에 매달려 사방을 휘둘러보다가 나무가
지가 절벽의 동굴에서 뻗어 나온 것을 발견했다. 그녀는 필
사적으로 동굴을 향해 나무가지를 탔다. 손바닥이 찢어져
피가 흐르고 팔이 떨어져 나갈 듯이 아팠으나 이를 악물고
버티었다.
'어떻게 하던지 살아야 돼!'
그녀는 필사적으로 동굴을 향해 나무가지를 탔다. 그녀가
붙잡은 나무가지는 아이들 팔뚝만했으나 다행히 그녀의 몸
을 잘 지탱해 주었다. 그녀는 온 몸이 피투성이가 된 채 전
신에 땀을 흘리며 동굴로 기어갔다.
"살았어! 나는 이제 살았어!"
그녀는 동굴에 이르자 기진맥진하여 나무토막처럼 풀썩
쓰러졌다. 아무 것도 생각할 수가 없었다. 마침내 천길 벼
랑에서 구사일생으로 살아났다는 안도감이 들면서 팽팽한
긴장감이 풀어졌고 그녀는 그대로 정신을 잃었던 것이다.
얼마나 기절 상태에 있었는지는 알지 못했다. 의식이 돌
아오자 사방이 여전히 캄캄했다. 그녀는 몸을 일으켜 동굴
벽에 등을 기대고 앉았다. 이방인 사내와의 만남, 알바레스
에 의한 도망, 절벽의 나무가지 끝에 매달려 죽음의 고비를
넘긴 일을 생각하자 슬픔이 복받쳤다.
그녀는 소리를 내어 울었다.
이내 날이 서서히 밝아오기 시작했다.
누네즈는 동굴 입구로 가까이 걸어나와 절벽을 내려다보
았다. 절벽은 거기서도 까마득하게 계속되고 있었다. 절벽
을 내려가는 것은 도저히 엄두를 낼 수가 없었다. 그렇다고
위로 올라가는 것도 절벽이 깎아지른 것처럼 험준해서 불가
능했다.
'여긴 그야말로 천길 벼랑이야 '
누네즈는 절망했다. 밖으로 나갈 수 없으므로 동굴로 들
어가야 했다. 그녀는 조심스럽게 동굴을 살피기 시작했다.
동굴은 의외로 깊고 넓었다. 처음엔 짐승이라도 살지 않을
까 하여 걱정이 되었으나 안으로 들어갈수록 안심이 되었
다.
'아!'
누네즈는 어두운 동굴속을 더듬어 들어가다가 기쁨에 넘
쳤다. 동굴 저 깊은 곳에서 희미한 불빛이 흘러나오고 있었
다. 그녀는 불빛을 따라 계속 걸어 들어갔다.
'전깃불이야!'
누네즈는 긴장이 되었다. 동굴안으로 깊이 들어갈수록 불
빛이 점점 밝아지고 있었다. 누군가 동굴속에 전등을 가설
한 것이다. 이내 동굴 천장에 오렌지빛의 전등이 나타났다.
동굴은 종류석으로 되어 있었다. 태고적부터 만들어진 동
굴이었다. 그러나 전등이 설치되어 있으므로 사람이 있을
것이 분명했다. 그녀는 계속 걸었다. 종류석에서 떨어지는
물방울소리가 에코우로 크게 울렸다. 그녀는 몸을 잔뜩 움
츠리고 걸었다. 동굴은 안으로 들어갈수록 서늘했다. 나이
트 가운이 찢어지는 바람에 그녀는 거의 속옷 차림이었다.
동굴의 냉기에 턱이 덜덜 떨렸다.
누네즈가 2km쯤 안으로 들어가자 육중한 철문이 보였다.
철문은 비스듬하게 열려 있었다.
'여기는 연구소였어 '
누네즈는 놀라서 걸음을 멈추었다. 철문을 열고 들어가자
콘크리트로 만들어진 복도와 연구실들이 미로처럼 배치되어
있었다. 그러나 사람은 보이지 않았다. 누네즈는 조심스럽
게 연구실들을 살피기 시작했다. 이 정도의 연구실이라면
경비를 하는 사람들이 있을 것이고 그들에게 들킨다면 죽임
을 당할지도 모르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조심스럽게 걸음을 떼어놓았다.
"앗 !"
누네즈는 한 연구실을 조심스럽게 들여다보다가 소스라쳐
놀랐다. 연구실 의자에 흰 가운을 입은 해골이 앉아 있었
다.
누네즈는 가슴이 철렁했다. 등줄기를 엄습하는 공포로 머
리끝이 뻣뻣하게 일어서는 것같았다. 누네즈는 눈을 부릅뜨
고 해골을 쏘아보았다. 얼핏 내가 사람을 잘못 본 것이 아
닐까. 내가 꿈을 꾼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뇌리를 스쳤
으나 엄연한 현실이었다.
'연구실이니까 누군가 장난을 하느라고 해골에 가운을 입
혀 놨는지도 몰라 '
누네즈는 가까스로 벌렁거리는 가슴을 진정시켰다. 그러
나 다음 순간 누네즈는 또 다시 소스라쳐 놀랐다. 연구실에
있는 책상마다 한결같이 하얀 가운을 입은 해골들이 앉아
있었다.
"모, 모두들 죽은 거야 "
누네즈는 간신히 입을 벌리고 중얼거렸다. 연구실에 있는
수많은 사람들이 의자에 앉아서 연구를 하다가 그 자리에서
죽은 것이 분명했다. 그것은 다른 연구실도 마찬가지였다.
누네즈가 부들부들 떨면서 연구실마다 모조리 살펴보았으나
한 사람도 살아있는 사람이 없었다.
연구소 사람들이 몰살을 당한 모양이었다.
'어떻게 이런 일이 벌어졌지?'
연구소는 규모가 거대했다. 연구실마다 시체가 가득차 있
었고 행정직원으로 보이는 해골들도 수두룩했다.
식당에는 요리사들의 시체까지 있었다. 동굴의 반대편 문
을 열고 나가자 거대한 식물원이 나타났다. 식물원에는 식
량이 될만한 채소와 과일들이 풍부했다. 다행히 그것들은
죽지 않고 무성하게 자라 있었다.
식물원 옆의 동물원에는 수많은 동물들이 죽어 나자빠져
있었다. 그 동물들은 실험용과 연구소의 식량으로 사육되었
던 것같았으나 사료를 주는 사람이 없었기 때문에 죽은 것
같았다. 죽은지 오래되어 그것들도 뼛조각만 남아 있었다.
누네즈는 식물원에서 양배추를 조금 뜯어 먹어보았다. 혹
시라도 독이 있는지 걱정이 되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아
무 이상이 없었다.
'양배추는 이상이 없어 '
누네즈는 다시 토마토를 하나 따먹어 보았다. 역시 이상
이 없었다. 다음에 누네즈는 바나나를 따먹어 보았다. 바나
나도 이상이 없었다. 누네즈는 과일이 아무 독성이 없자 바
나나를 배불리 따먹었다. 그리고 그녀는 연구소를 천천히
살피기 시작했다. 연구실마다 시체가 가득차 있었으나 익숙
해지자 공포와 두려움이 서서히 사라지고 있었다.
연구소는 인체공학연구실과 유전공학연구실로 양분되어
있었다. 시체들은 모두 피그미족 과학자들이어서 인체공학
연구와 유전공학연구에만 몰두하고 있었던 것같았다.
그녀는 컴퓨터를 켜보았다. 컴퓨터는 작동이 되고 있었
다.
누네즈는 다시 출입구를 찾기 시작했다. 연구소에서 시체
들과 어울려 살 수는 없었다. 그러나 누네즈가 몇 시간 동
안 연구소 안을 헤매고 다녔으나 끝내 출입구를 찾을 수가
없었다.
'도대체 출입구는 어디에 있는 것일까?'
누네즈는 실망했다.
누네즈는 피로하여 연구소 안에 있는 숙소로 들어갔다.
연구소의 사람들이 몰살을 한 것이 근무시간이었는지 숙소
는 텅텅 비어 있었다. 그는 남자들의 숙소로 먼저 들어가
보았다. 남자들의 숙소에는 수많은 방과 침대 그리고 샤워
실 따위가 있었다.
그녀는 여자들 숙소도 들어가 보았다. 여자들 숙소도 남
자들 숙소와 별반 다르지 않았다. 다만 남자들 숙소보다 침
대가 좀 더 잘 정돈되어 있었고 여자들의 옷도 많았다. 그
러나 연구원들이 모두 피그미족이었기 때문에 그녀에게 맞
는 옷이 없었다. 꽃무늬 원피스를 하나 걸치자 겨우 엉덩이
를 가리고 있었다.
'이거라도 어쩔 수없지 '
누네즈는 원피스를 엉덩이에 걸치고 침대에 벌렁 누웠다.
다음날도 누네즈는 오로지 출입구를 찾는 일에만 몰두했
다. 그것은 누네즈에게 생사가 걸린 일이었다. 그러나 누네
즈가 며칠동안이나 출입구를 찾아 헤맸으나 끝내 출입구를
찾을 수가 없었다.
"좋아. 출입구를 찾을 수 없다면 여기서 살지. 그 동안
누군가 찾으러 오겠지. 연구소가 이 꼴이 되었는데 그대로
방치한다는 것은 말이 안돼."
누네즈는 연구소를 정리하기 시작했다. 그녀는 먼저 각
연구실에 있는 볼상 사나운 해골들을 모조리 끌어내어 동물
원에 갖다가 버렸다. 그리고 연구소의 컴퓨터를 살피다가
깜짝 놀랐다. 그들이 연구하던 것은 피그미족 최대의 숙원
인 조로현상(早老現狀) 방지에 대한 것이었다.
'이들이 여기서 이런 연구를 하고 있었다니 '
누네즈는 눈앞이 환해지는 기분이었다. 놀랍게도 그들의
연구는 성공단계에 들어가 있었다.
우리가 가장 큰 관심을 가지고 연구한 것은 조로현상
방지를 위한 유전공학과 우리의 몸을 일반인들과 똑같이 만
드는 인체공학이었다. 우리는 마침내 이 연구의 완성을 눈
앞에 두고 있다. 그런데 왜 이렇게 불안한 것일까
그것은 한 연구원이 노트에 휘갈겨 써넣은 기록이었다.
이것은 신의 영역에 도전하는 일이다. 우리의 연구는
너무나 놀라운 성과를 발휘한 나머지 조로현상을 방지한 것
은 물론이고 우리의 수명을 2백세 이후까지 연장시킬 수 있
게 되었다. 어디 그것뿐인가. 조금만 더 연구를 하면 세포
를 재생하여 영구적으로 죽지 않고 살 수도 있게 될것이다.
인체공학분야도 눈부신 성과를 얻어 120cm 내외밖에 되지
않는 우리의 키를 170cm 내외까지 자라게 하는데 성공했다.
오! 하느님! 도대체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한 것입니까?
이 연구는 우리의 조로현상을 방지하기 위한 목적으로 시
작되었는데 이제는 감히 신에게 도전장을 던진 것이다. 인
간의 과학이란 이토록 경이적인 것이다.
유전자 조작의 신비라니
누네즈는 전율하는 듯한 긴장감을 느꼈다. 연구원이 남긴
기록은 술에 취해서 쓴 듯 문맥이 어지럽고 감상적이었다.
우리는 아메바 세포의 유전자를 집중적으로 연구했다.
인간의 몸에서 유일하게 수축을 할 수 있는 부분, 비록 성
적인 흥분상태에서지만 그것은 평소의 2배 이상으로 확대되
기도 하고 축소되기도 하는 것이다.
우리는 20년전에 한 여자를 실험대상으로 삼았다. 그 여
자는 호세 프랑코 가문의 여자로 우리는 그 여자에게 조작
한 유전자를 가지고 있는 정자를 인공수정했다. 그리하여
마침내 그 여자에게서 딸이 태어났는데 그 아이는 우리가
기대했던 것처럼 조로현상이 전혀 없었을 뿐아니라 키도 일
반인들과 똑같이 크게 자랐다. 다만 우리가 그 아이가 성인
이 되어 임신을 빨리 할 수 있도록 성욕을 자극하는 염색체
를 확대시켜 놓았기 때문에 그 아이는 피그미족의 무수한
남자들과 성관계를 갖게 되었다.
우리는 그녀가 임신해 주기를 바랐다. 그러나 그녀는 피
그미족 남자의 정자로는 결코 임신을 할 수 없었다. 유전인
자의 배열이 달랐기 때문이었다.
우리는 유전인자를 조작해 그녀의 유전인자와 비슷한 남
자를 만들어내 그녀에게 보냈다. 그녀는 그 남자를 발견하
자 동굴로 끌고가서 번식을 시키기 위한 행위에 몰두했다.
그녀의 이름은 누네즈다
누네즈는 기록을 읽다가 말고 눈앞이 캄캄했다.
자신이 피그미족 연구소의 연구에 의해 태어난 인간이라
는 생각을 하자 비참했다. 자신이 피그미족과 다르게 성장
한 것이나 남보다 성욕이 왕성했던 것, 이방인을 만나서 욕
정을 불태운 것이 장구한 연구와 음모에 의한 것이라는 사
실은 그녀에게 깊은 절망감을 안겨주었다.
'이제 나는 어떻게 해야 하지?'
누네즈는 연구원의 기록을 읽다가 말고 망연히 허공을 쳐
다보았다. 그녀는 연구원들이 그녀에게 보낸 이방인과 정신
없이 욕정을 불태운 생각을 하자 그 짓을 하다가 다른 사람
들에게 들킨 것처럼 수치스러웠다. 그녀의 삶이 연구원들에
의해 낱낱이 관찰되었다는 사실이 견딜 수없이 불쾌했다.
'허지만 이들이 나에게 보내준 이방인, 아니 실험인간은
알바레스에게 죽었어 '
누네즈는 실험인간을 생각하자 다시 슬픔이 밀려왔다. 실
험인간이 죽지 않았다면 이 곳에서 그와 함께 영원히 살고
싶었다.
그러나 그것은 헛된 망상이었다. 이방인 사내는 죽었고
그녀는 이제 두 번 다시 그런 남자를 만날 수 없었다.
누네즈는 다시 기록을 읽기 시작했다.
그러나 연구원의 기록은 거기서부터 엉뚱하게 연구소내의
모든 연구업적이 중앙관리센타의 슈퍼컴퓨터에 입력되어 있
으며 그것을 한 사람이 소유한다면 가공할 결과를 초래할지
도 모른다고 경고하고 있었다.
누네즈는 고개를 갸우뚱했다. 연구원의 기록이 무엇을 의
미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슈퍼컴퓨터의 X파일은 우리가 연구한 업적, 우리 인간
이 수백년을 살 수 있는 유전자 조작에 대한 연구결과와 인
간의 몸을 거인으로 만드는 세포확장과 수축에 대한 연구결
과가 포함되어 있다. 이것은 누네즈라는 여자 아이를 탄생
시킨 유전자 조작보다 더욱 무서운 연구성과로 이 기록을
소유하면 자신의 몸을 거인으로 만들 수도 있고 현재의 피
그미족보다 더욱 작은 인간으로 만들 수도 있다. 그것뿐인
가.
조로현상을 방지하기 위한 연구를 하다가 인간의 수명을
수백년이나 연장시킨 연구성과를 얻었기 때문에 이 파일을
소유한 자는 장차 세계를 지배하게 될것이다. 이는 피그미
족의 운명이 걸린 일이 아니라 전 세계의 운명이 걸린 중대
한 일이다. 그리하여 연구소의 간부들이 인류에 재앙을 가
져올지도 모르는 이 사태를 방지하기 위해 연구결과를 파괴
할지도 모른다는 소문이 나돌기 시작했고 각고의 노력 끝에
전대미문의 연구성과를 얻은 과학자들은 연구소의 간부들이
연구결과를 파괴하려는 계획을 저지시키기 위해 모종의 음
모를 꾸미기 시작했다.
과학자들과 연구소의 간부들이 대립을 하고 있는 것이다.
아 장차 우리 연구소의 운명이 어떻게 될지 생각만해도 무
섭다
연구원의 기록은 거기서 끝이었다. 누네즈는 연구원의 기
록을 다 읽자 슬그머니 미소를 지었다. 연구원의 기록중에
X파일을 소유하면 전세계를 지배한다는 부분이 마음에 들었
다
누네즈는 중앙통제센타를 향해 힘차게 걸어가기 시작했
다. 연구소의 사람들이 모조리 죽은 것은 연구소의 간부들
과 과학자들의 대립 때문인 것같았다.
제 36 장 여신탄생
우희 위버가 잠이 들었다.
로버트 퍼그스는 평화롭게 잠이 든 우희 위버의 얼굴을
물끄러미 응시하게 웃었다. 아름다운 여인이었다. 나이가
몇 살인지는 알 수 없었다. 그러나 사랑하는 남자를 로봇인
간 안드로이드에게 잃고 실의와 좌절에 빠져 있었다.
로버트 퍼그스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우희 위버가 몸을 뒤채자 뽀얀 허벅지가 시야에 들어왔
다.
눈이 부시게 하얀 허벅지였다. 그는 우희 위버의 희고 매
끄러운 허벅지에 자신의 하체가 묵직해져 오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나는 반제동맹을 이끌고 있는 사람이야 '
로버트 퍼그스는 고개를 흔들었다. 지금은 우희 위버의
허벅지를 보고 욕망에 사로잡혀서는 안된다고 생각했다. 우
희 위버를 취하는 것은 앞으로도 얼마든지 시간이 있을 것
이다.
반제동맹은 그가 결성한 단체였다.
반제동맹의 원대한 계획을 실현시키기 위해 사사로운 욕
망은 억제해야 했다.
로버트 퍼그스는 창가로 걸어갔다. 그는 어두운 호수 쪽
을 우두커니 바라보았다.
문득 피그미족의 누네즈가 떠올랐다. 그녀도 지극히 아름
다운 여자였다. 그러나 피그미족의 연구원들에 의해 유전자
가 조작되어 태어나 기이한 인생을 살게 된 여자였다. 아니
그녀는 이제 인간이 아니라 신이었다. 고대 그리스나 로마
의 여신들처럼 완벽한 신이었다. 과학이 만들어낸 신이었
다.
'그녀가 마더 살로메가 되다니 '
로버트 퍼그스는 누네즈가 마더 살로메가 된 비밀을 낱낱
이 알고 있었다.
유러너스 제국에서 로버트 퍼그스처럼 마더 살로메, 아니
누네즈의 비밀을 자세히 알고있는 사람은 얼마되지 않았다.
누네즈는 연구원의 기록을 읽고 중앙통제실로 들어갔
다. 중앙통제실에는 연구원의 기록대로 그 연구소가 심혈을
기울여 연구한 결과가 그대로 보존되어 있었다. 누네즈는
그때부터 침식을 잊다시피 하며 하며 기록을 읽는데 몰두했
다. 그러나 과학자가 아닌 그녀로서는 연구원들이 연구한
기록을 이해하는데도 무수한 시간이 필요했다. 그녀는 처음
으로 과학공부를 하기 시작했다.
5년의 세월이 흘렀다. 그녀는 그때서야 겨우 과학자들이
슈퍼컴퓨터에 기록된 X파일의 내용을 조금이나마 이해할 수
있었다.
다시 5년이 지나갔다. 그녀는 이제 과학자들이 연구한 기
록을 토대로 조금씩 실험을 할 수 있게 되었다. 그녀가 무
엇보다 중요하게 여긴 것은 자신의 수명을 늘리는 일이었
다. 인체의 무수한 세포의 재생은 겨우 50번 정도가 한계였
으나 연구원들은 거의 무한대로 세포 재생이 가능하게 하였
다.
그것은 결국 노화를 방지하여 인간의 수명을 늘려주는 것
이다. 물론 인간의 수명을 늘리는 것은 복잡하기 짝이 없는
일이었다.
다시 10년이 지나갔다. 그녀는 어느덧 40대의 나이가 되
었다. 동굴속의 연구소에서 20년이라는 기나긴 시간을 보낸
것이다. 그러나 그 20년은 누네즈를 인체공학이나, 유전공
학, 그리고 생명공학 등에서 뛰어난 과학자가 되게 하였다.
그녀는 잠자는 시간외에 오로지 실험에만 매달렸다.
"아아 나는 마침내 성공했어!"
누네즈는 자신의 수명을 영구적으로 늘리는데 성공하자
벅찬 감동으로 뜨거운 눈물이 흘러내렸다.
그것은 사실상 연구라고는 할 수 없었다. 그녀는 연구소
에서 목숨을 잃은 수많은 연구원들이 연구해 낸 결과를 토
대로 자신이 직접 실험을 한 것뿐이었다. 그러나 그 실험이
라고 해서 깊은 과학적 지식을 갖고 있지 않으면 불가능했
다.
'나의 세포는 이제 무한정 재생이 가능해 '
인간의 생명은 세포의 재생 여부에 달려있는 것이다.
누네즈는 수명을 늘리는데 성공하자 자신의 몸을 확장시
키고 수축시키는 연구에 골몰했다. 이미 그 연구도 연구원
들이 완성해 놓은 상태였다. 그녀가 하는 일이라고는 연구
원들이 연구한 결과를 바탕으로 자신의 몸에 실험을 하는
것뿐이었다. 몸을 수축시키거나 확대시키는 것은 정제로 만
들었다.
어느날 그녀는 알약을 복용하고 침대위에 누워 눈을 감았
다. 그녀는 긴장이 되어 견딜수가 없었다. 그것은 인간이
신(神)과 같이 되는 일이었다.
약을 복용한지 5분이 지나자 서서히 약효가 나타나기 시
작했다. 처음엔 몸이 근질근질했다. 인간의 몸을 구성하고
있는 10의 28배나 되는 원자가 일제히 확대되고 있었기 때
문이었다. 그것은 억(億)의 1억 배인 1경(京)에 다시 동그
라미가 12개가 있어야 하는 천문학적 숫자였다.
원자가 커지므로서 세포도 확대되기 시작했다.
누네즈는 자신의 몸이 빠르게 확대되는 것을 느꼈다. 손
과 발이 길어지면서 굵어졌고 신체의 모든 부분이 일제히
확대되었다.
누네즈는 신체가 확대되기 시작하자 눈을 뜨고 자신의 신
체가 변하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먼저 그녀의 몸에 걸친 옷이 후드득 뜯어져 나갔다. 그녀
의 몸에 걸친 짧은 원피스가 순식간에 찢어져 나갔고 브래
지어와 삼각형 속옷까지 한순간에 뜯어져 나갔다.
'아!'
누네즈는 자신의 몸이 커지는 것을 보고 입을 벌려 탄성
을 내뱉았다.
그때 그녀의 체중을 지탱하지 못한 침대가 부서졌다. 그
녀는 바닥으로 쿵 하고 굴러 떨어졌다.
그러나 그녀의 몸은 계속 커지고 있었다. 그녀가 누워 있
는 방은 두 평 남짓 되는 방이었다. 그녀의 키가 커지자 방
이 작아졌다. 그녀는 손으로 허리 옆의 벽을 밀었다. 그러
자 허리 옆의 벽이 와르르 무너졌다. 이어서 발로 벽을 찼
다. 발치에 있던 벽도 그녀의 가벼운 발길질에 힘없이 무너
져 내렸다.
그녀는 발을 길게 뻗었다.
발이 벽을 뚫고 나갔다. 그녀는 손을 들어 자신의 눈앞으
로 가져와 살펴보았다. 손이 솥뚜껑만 하게 커져 있었다.
손이 커지는데 따른 부작용은 전혀 없었다.
마침내 그녀의 몸이 확대되는 것이 멈춰졌다.
그녀는 몸을 반쯤 일으켜 앉았다. 천장이 무너질까봐 일
어설 수가 없었다. 그녀는 자신의 나신을 세심하게 살펴보
았다. 허벅지가 한 아름이나 되었고 유방은 거대했다. 그녀
가 무의식중에 젖무덤을 누르자 유액이 폭포처럼 쏟아졌다.
'내 몸이 다섯 배나 커졌어!'
누네즈는 환희로 온 몸을 전율했다.
'물이 차면 나는 죽을 거야. 이렇게 죽을 수는 없어 '
누네즈는 벌덕 일어났다. 그러나 맹렬하게 솟구치기 시작
한 물줄기는 금세 누네즈가 있는 곳까지 올라와 누네즈를
삼켜버렸다. 누네즈는 물속에 빠져 허우적거리기 시작했다.
바닷물이었다.
누네즈는 짠 바닷물을 마시며 손을 마구 휘저었다. 그러
자 물이 그녀를 띄웠다.
'오, 올라가고 있어!'
누네즈는 환희에 넘쳤다. 물이 차오를수록 그녀는 수면위
로 떠올랐다. 그러나 바닷물은 어느 정도 차오르자 갑자기
소용돌이를 일으켰다. 그녀는 팔과 다리를 허우적거리다가
물속으로 가라앉기 시작했다. 호흡이 괴로워지기 시작하고
물이 코와 입속으로 쏟아져 들어왔다.
누네즈가 기억하는 것은 그것이 전부였다. 누네즈는 물속
에서 의식을 잃었다.
누네즈가 의식을 회복한 것은 무엇인가 종아리를 간지르
는 듯한 기분 때문이었다. 눈을 뜨자 하얀 빛이 먼저 안구
를 찔러왔다. 누네즈는 눈이 부셔 눈을 감았다. 그러자 파
도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누네즈는 다시 눈을 떴다. 이번
엔 견딜만했다.
아
누네즈는 자신도 모르게 입을 벌렸다. 그리고 자신이 바
닷가의 모래사장에 쓰러져 있다는 것을 알았다.
파도가 누네즈를 바닷가 모래사장으로 밀어낸 모양이었
다. 종아리를 간지르고 있는 것은 파도였다.
'아아 나는 마침내 세상으로 나왔어!'
누네즈는 벌떡 일어나서 사방을 휘둘러보았다. 그녀가 서
있는 모래사장에는 희고 부드러운 모래가 한없이 깔려 있었
다.
누네즈는 깊은 동굴속 연구소에서 20년이 넘게 살다가 밖
으로 나오자 감개가 무량했다. 옷은 헤어져 원래의 것이 어
떤 것인지 알 수 없었고 머리는 한 번도 깎지를 않아 긴 머
리가 발까지 치렁치렁 내려와 있었다.
"나는 세상으로 나왔다!"
누네즈는 목이 메어 소리를 질렀다.
그녀가 나온 해안에는 아무도 없었다. 태풍이 휩쓸고 간
듯 부러진 나무가지만 여기저기 뒹굴고 있었다.
"나는 자유다!"
사람이 아무도 없었기 때문에 더욱 큰소리를 지를 수 있
었는지 몰랐다. 그녀는 두 손을 입에 모아 마음껏 소리를
질렀다. 자신도 모르게 눈물이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그녀는 알바레스가 살고있는 곳으로 찾아가려고 했다. 한
때 알바레스가 죽이고 싶도록 미웠으나 20년이라는 장구한
세월이 흐르자 미움이나 증오 따위의 감정이 사라져버렸던
것이다.
게다가 그녀는 인간을 확대시키는 방법도 알고 있었고 수
명을 영구적으로 늘릴 수도 있었다. 그 방법을 이용해 피그
미인 알바레스를 그녀와 같은 거인족으로 만들면 다시 함께
살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러나 피그미족이 살고있는 마아타카 지역은 쑥밭이 되
어 있었다. 다행히 마아타카 지역에도 해일이 덮치고 지진
이 일어났으나 일부는 바닷속으로 가라앉지 않았다. 수많은
피그미족이 해일에 목숨을 잃고 지진으로 생매장을 당했으
나 마아타카의 일부는 기적처럼 바다 위의 섬이 되어 있었
다. 알바레스는 죽었는지 살았는지조차 알 수 없었다.
누네즈는 알바레스를 찾는 것을 포기했다. 마아타카는 옛
날의 모습을 전혀 찾을 수가 없었다. 여기저기 건물이 부서
지고 죽은 사람들의 뼛조각도 무수히 많았다.
'성경에도 물로 심판을 하는 구절이 있는데 마치 지구가
심판을 받은 것같아 '
창세기에 보면 노아의 방주라는 것이 있었다. 세상의 종
말이 오자 노아는 커다란 배를 만들어 공중의 새를 비롯해
날짐승, 길짐승, 들짐승 등 모든 동물을 암수 한 쌍씩 배에
태웠던 것이다.
그리고 홍수가 시작되었다. 홍수는 40일을 밤낮으로 비가
계속 내려 시작되었다. 지구의 더러운 것을 씻어버리려는
하느님의 뜻에 의해서였다. 봉선화 혜성의 침입도 지구가
너무 더러워져 정화시키려는 하느님의 의도인지도 몰랐다.
누네즈는 알바레스를 찾는 것을 포기하고 그렇게 생각했다.
그녀는 마아타카 일대를 샅샅이 뒤졌다. 마아타카는 생명
체가 살지 않는 황폐한 땅이 되어 있었다. 그러나 기적은
있게 마련이었다. 누네즈가 마아타카를 샅샅이 누비고 다니
자 바위 틈이나 동굴속에서 살고있던 피그미족들이 하나 둘
씩 기어 나오기 시작했다.
누네즈는 자신의 몸을 확대시켜 피그미족들에게 공포와
경외감을 불러 일으켜 자신을 경배하도록 했다.
그러나 황폐한 마아타카에는 식량이 없었다. 대재앙이 휩
쓸고 간 마아타카는 풀 한 포기 나무 한 그루 남아있지 않
았다.
'이들에게 식량을 공급해야 돼 '
누네즈는 고심에 빠졌다. 살아남은 피그미족은 얼추 수천
명이나 되었다. 그들은 굶주림으로 하나 둘 죽어가고 있었
다. 뱃가죽이 등에 달라붙고 팔다리가 젓가락처럼 말라 비
틀어져 죽어가고 있었다. 그리하여 마침내는 먹을 것이 없
자 인육을 먹는 사건까지 벌어졌다.
그러나 마땅한 해결책이 없었다.
비참한 일이었다.
누네즈는 바다로 나가보았다. 그러나 바다는 수많은 어류
와 해초류가 살던 옛날의 바다가 아니었다. 바다는 죽음의
바다가 되어 있었다. 어류와 해초류가 살 수 있는 생태계가
파괴되어 물고기며 해초가 살 수 없는 바다가 되어 있었다.
'아아 이 일을 어떻게 하지 '
누네즈는 수많은 사람들을 거느리는 일이 쉬운 일이 아니
라는 것을 절실히 깨달았다. 그녀는 고뇌에 빠졌다. 불사신
이나 다름없는 몸을 갖고 있는 그녀로서도 대자연의 재앙
앞에서는 속수무책이었다.
어느 날 밤이었다.
누네즈는 피그미족 무리들과 따로 떨어져 잠을 자고 있었
다. 산소가 희박해 잠을 자는 것도 고통스러웠다.
누네즈는 잠결에 가슴이 간지러운 것을 느꼈다. 누군가
유두를 빨고 있는 듯한 기분이었다. 그녀가 눈을 뜨자 피그
미족 어린 아이가 그녀의 젖을 물고 있었다.
누네즈는 어린 아이를 떼어내려다가 그대로 두었다. 여자
로서의 본성, 어머니로서의 모성이 누네즈에게서 일어나고
있었다.
'그래 이 젖을 먹고서라도 죽지 말아라 '
누네즈는 어린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그녀의
젖은 풍부했다. 그녀가 처음으로 자신의 몸을 확대시킨 후
그것은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흘러 넘치고 있었다. 마치
출산 직후의 산모처럼 시도 때도 없이 유액이 흘러내려 옷
을 흠뻑 적시기까지 했다.
'내 몸에서 유액을 만드는 호르몬에 이상이 생긴 거야 '
누네즈는 막연히 그렇게 생각했다. 여성 호르몬이 많이
분비되면 남자의 몸이 여자처럼 변하고 남성 호르몬이 많아
지면 여자에게서도 수염이 나는 것이다.
염색체의 변화도 중요한 몫을 했다.
그러나 누네즈는 그러한 것을 자세히 알지 못했다. 그녀
가 20년이 넘게 동굴속의 연구소에 갇혀서 각종 실험을 했
으나 그것은 수많은 연구원들이 수백년에 걸친 연구결과가
있었기 때문이었지 그녀가 연구를 한 것은 아니었다.
피그미족의 어린 아이가 그녀의 젖을 먹고 잠이 들었다.
아이는 이미 배가 잔뜩 불러 있었다. 그녀는 자신의 젖을
눌러보았다. 젖은 아직도 풍부했다.
'다른 아이들에게도 먹여야겠어 '
누네즈는 피그미족의 다른 아이들에게도 차례로 젖을 먹
였다. 아이들은 그녀에 의해 굶주리지 않게 되었고 그녀의
젖은 기이하게 멈추지 않고 계속 흘러내렸다. 아이들은 그
녀를 어머니처럼 따르기 시작했다.
피그미족 어른들은 아이들을 부러운 눈빛으로 쳐다보고
있었다. 피그미족 어른들은 자신들도 누네즈의 젖을 먹고
굶주림에서 벗어났으면 하고 바라는 눈이었다.
'인간의 욕망 중에 식욕이 가장 무서운 욕망이야 '
그것은 가장 원시적인 욕망이기도 했다.
누네즈는 피그미족 성인들에게도 자신의 유액을 마시게
했다.
누네즈는 피그미족 모두에게 자신의 유액을 마시게 했다.
그것은 참으로 기이한 일이었다. 봉선화 혜성의 지구궤도
침입에 살아남은 피그미족 사람들은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
고 누네즈의 유액을 마시고 혹독한 기아에서 살아 남았다.
'내 몸은 내가 생각하기에도 신기하게 변했어 '
누네즈는 흡족했다. 피그미족의 모든 사람들이 그녀를 어
머니처럼 따르고 있었다. 그녀는 어느 사이에 피그미족의
절대자가 되어 있었고 여신이 되어 있었다. 그녀는 자신의
몸에서 어떻게 하여 유액이 샘솟는지 도무지 이해할 수 없
었다.
그러나 누네즈가 모르는 것이 있었다. 그녀의 몸은 피그
미족의 연구원들이 거인족의 유전인자를 이식시킬 때 욕망
을 자극하는 유전인자와 유액을 생산하는 여성 호르몬을 관
장하는 대뇌의 신경망을 열어 놓았기 때문에 유액이 항상
넘치고 있었다. 그들은 누네즈의 과다한 욕망으로 출산이
시작될 것을 대비하여 유액을 충분히 공급하도록 신경망을
조작했던 것이다.
그러나 누네즈의 유액을 관장하는 뇌의 신경망이 몸을 확
대시키는 유전인자로 인해 돌연변이로 바뀌어 유액이 멈추
지 않고 흘러내리고 있었다.
그것은 누네즈가 전혀 모르는 사실이었다.
그녀는 고대 그리스의 여신들처럼 머리에 월계관을 쓰고
피그미족을 이끌고 인간이 살 수 있는 땅을 찾아 이동을 하
기 시작했다. 그 뒤를 수많은 피그미족 무리들이 따라서 이
동을 했다.
로버트 퍼그스는 창에서 몸을 돌려 우희 위버를 살폈다.
우희 위버는 아직도 곤하게 자고 있었다. 처음엔 벽에 기대
어 자면서 스커트를 단속했기 때문에 단정했으나 잠이 깊어
지면서 스커트가 말려 올라가허벅지가 함부로 드러나 있었
다.
'침대에 눕혀 주어야 하겠어 .'
로버트 퍼그스는 벽에 기대어 자고 있는 우희 위버에게
가까이 갔다. 우희 위버는 입술을 약간 벌린 채 자고 있었
다.
로버트 퍼그스는 우희 위버의 허리와 장딴지 밑으로 손을
넣어 우희 위버를 안았다. 우희 위버는 의외로 묵직했다.
'젊은 여자가 꽤나 무겁군.'
로버트 퍼그스는 음산하게 웃었다.
로버트 퍼그스는 우희 위버를 안고 침대로 걸어갔다. 우
희 위버는 그가 안는 것을 느꼈는지 잠결에 두 팔을 뻗어
그의 목에 감았다.
'유강렬박사가 좋아할 만한 여자야.'
로버트 퍼그스는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우희 위버는
살결도 따뜻하고 부드러웠다. 유강렬박사가 아니더라
도 누구나 목숨을 바쳐 사랑할만한 타입이었다.
로버트 퍼그스는 우희 위버를 침대에 눕혔다. 그때
우희 위버가 다시 팔을 뻗어 로버트 퍼그스를 와락 끌
어안았다. 그 바람에 로버트 퍼그스는 우희 위버의 몸
위로 그대로 쓰러졌다.
그의 가슴에 닿은 우희 위버의 젖무덤이 물컹했다.
로버트 퍼그스는 가슴이 울렁거리는 듯한 기분을 느
끼면서 조심스럽게 우희 위버의 팔을 떼어냈다. 우희
위버는 잠결이라 그를 죽은 유강렬박사로 착각한 것이
분명했다. 로버트 퍼그스는 우희 위버의 도발적인 행
동에 하체가 묵직해오자 재빨리 고개를 저었다. 우희
위버가 사랑스럽고 아름다운 여자이기는 해도 유러너
스 제국을 붕괴시키는데 이용가치가 있는 여자였다.
그러나 사랑스러운 여인이었다. 로버트 퍼그스는 우
희 위버의 잠자는 모습을 홀린 듯이 넋을 잃고 지켜보
았다.
유강렬박사의 집 지하실에는 반제동맹의 비밀 아지
트가 건설되어 있었다. 그것은 유강렬박사도 모르고
우희 위버도 모르고 있었다. 때가 되면 두 사람을 반
제동맹에 가입시켜 요원으로 활동하게 하려고 했으나
유강렬박사가 살해되어 기회를 놓치고 말았던 것이다.
아쉬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우희 위버라도 우리 요원으로 만들어야 해 '
로버트 퍼그스는 우희 위버만은 어떻게 하던지 요원
으로 만들 생각이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희 위버의
몸이 아무리 도발적이라고 해도 참아야 했다.
로버트 퍼그스는 떨리는 손으로 우희 위버에게 시트
를 덮어 주었다. 그리고 그는 책상 앞으로 가서 컴퓨
터를 부팅시켰다.
유러너스 제국과 사피언스 그라운드는 경쟁적으로
광활한 우주로 우주선을 띄워보내고 있었다. 그들은
지구에서의 전쟁도 모자라 이제는 우주로까지 전쟁을
확대시키고 있었다.
유러너스 제국이 살로메라는 이름을 붙인 토성의 위
성, 사피언스 그라운드가 니리드라는 이름을 붙인 토
성의 위성은 같은 위성이었다.
반제동맹의 비밀결사 조직원들은 유러너스 제국의
아르고 24호와 사피언스 그라운드의 오디세이 17호에
도 탐승하여 정보를 반제동맹으로 보내오고 있었다.
그는 그들에게서 오는 정보를 취합한 뒤에 새로운 명
령을 내려야 했다.
날이 밝은 것은 4시간이 지나서의 일이었다. 로버트
퍼그스가 토성의 위성에서 반제동맹 조직원들이 보내
온 정보를 모두 취합하여 분석하고 새로운 명령을 내
리고 나자 날이 밝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는 벽난로에 장작을 더 집어넣은 뒤에 소파에 누
워 눈을 감았다. 몹시 피로했다.
유러너스 비밀경찰이 들이닥칠 위험은 별로 없었다.
니트론은 유러너스 제국의 쓰레기들이 살고 있었다.
그들은 20세기 사람들처럼 각종 질병을 앓고 있었다.
그러나 유러너스 제국 시민들은 잘 발달된 의료기술에
의해 질병이 모두 퇴치되었기 때문에 면역이 약해져
질병을 가장 무서워했다.
유러너스 제국의 비밀경찰이 우희 위버를 미행했다
면 로봇인간 안드로이드를 보내올 것이다. 그러나 니
트론의 입구에는 로봇의 출입을 감시할 수있는 감시망
이 설치되어 있었다.
로버트 퍼그스는 이내 잠이 들었다.
로버트 퍼그스가 잠이 깬 것은 어디선가 덜그럭대는
소리 때문이었다. 누군가 주방에서 그릇을 씻고 음식
을 조리하고 있었다. 벽난로에는 여전히 장작이 타고
있었고 그의 몸에는 시트가 덮여 있었다.
로버트 퍼그스는 편안했다. 로마노즈에 있는 아내
조안나 퍼그스가 옆에 있는 것처럼 가정의 평화와 안
락함이 느껴지고 있었다.
로버트 퍼그스는 시트를 걷고 일어났다. 주방에서
그릇을 씻으며 음식을 조리하고 있는 사람은 우희 위
버였다.
"벌써 일어나셨어요?"
우희 위버가 상냥하게 웃으며 말했다.
"내가 너무 오랫동안 잔 것 같군요."
로버트 퍼그스는 길게 하품을 했다.
"아녜요. 제가 주책없이 말씀을 듣다 말고 잠이 들
었어요."
우희 위버가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숙였다.
"어제는 피로했을 거요. 그처럼 엄청난 일을 겪었으
니 "
"아침 드시겠어요?"
"아침을 주겠다면 기꺼이 먹겠소. 재료도 별로 없었
을 텐데 무엇을 만들었소?"
"카레 라이스예요."
우희 위버가 살포시 웃었다.
"마침 카레 가루도 있고 감자도 있더군요."
"그거 참 맛있겠군. 내가 좋아하는 요리인데."
"어서 상으로 오세요. 저도 몹시 시장해요"
우희 위버가 로버트 퍼그스의 팔짱을 끼고 식탁으로
이끌었다. 로버트 퍼그스는 흡족했다.
날씨는 좋았다.
황량한 니트론의 호수에도 싱그러운 아침햇살이 부
채살처럼 퍼지고 있었다. 어제 비가 내린 탓인지 모든
것이 깨끗했고 산뜻했다.
아침식사가 끝나자 로버트 퍼그스와 우희 위버는 흔
들의자에 나란히 앉아서 누네즈에 대한 얘기를 계속했
다.
"누네즈는 그후 어떻게 되었어요?"
우희 위버가 의자를 흔들며 로버트 퍼그스에게 물었
다.
로버트 퍼그스는 우희 위버의 말에 또 다시 길고 긴
얘기를 하기 시작했다.
"누네즈는 피그미족을 이끌고 계속 이동을 했어. 지
구는 황폐했고 식물이나 동물이 거의 살아남지 못했
어. 성경의 예수가 이스라엘 민족을 이끌고 광야를 헤
맸듯이 누네즈는 피그미족과 함께 그렇게 광야를 헤맸
지 "
"얼마 동안이나요?"
"40년."
"세상에! 그럼 누네즈의 나이가 80이 넘었겠네요?"
"80이 훨씬 넘었지. 그러나 그녀는 불사의 몸을 갖
고 있는 여자야. 자신의 몸을 마음대로 키우기도 하고
줄이기도 하지 "
"맞았어요. 제가 그걸 깜박했어요. 장군님. 그런데
정말 인간이 자신의 몸을 마음대로 크게도 하고 작게
도 할 수 있을까요?"
우희 위버가 고개를 갸우뚱하며 의문을 표시했다.
그녀는 로버트 퍼그스를 장군으로 부르고 있었다. 그
가 유러너스 제국에서 장군으로 퇴역했다는 사실을 털
어놓았기 때문이었다.
"유전공학으로 슈퍼 감자를 만들고 슈퍼 생쥐를 만들어낸
것은 20세기말에도 했었어. 그런데 지금은 47세기야. 인간
이 유전공학에 관심을 갖기 시작하고도 2600년이 흘렀는데
오히려 과학의 발전이 더디었다고 볼 수 있는 거야."
"그렇겠네요."
우희 위버가 심각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거렸다. 몇 차
례에 걸친 전쟁, 봉선화 혜성의 침입으로 인한 재앙이 아니
라면 인류는 이미 완벽하게 불사신이 되었을 것이다.
"누네즈는 결국 황량한 지구에서 낙원을 찾는다는 것이
무의미하다는 사실을 깨달았어. 그리고 피그미족이 살고 있
던 땅으로 되돌아와서 식물과 동물이 살아갈 수 있도록 환
경을 바꾸기 시작했지. 그것은 인간의 능력으로는 거의 불
가능한 일이었어. 그러나 누네즈는 지구에 살아남은 모든
과학자들을 피그미족이 살고있는 땅에 모아서 코스모스 과
학센터를 설립한 거야."
"잠깐만요. 그럼 코스모스는 누구죠?"
"코스모스는 알바레스야."
"알바레스요?"
우희 위버는 눈이 휘둥그레졌다. 알바레스는 누네즈의 남
편이었다. 누네즈는 봉선화 혜성의 침입으로 지구가 파괴되
었을 때 알바레스를 찾기 위해 부단히 노력을 했었다. 그러
나 그녀는 끝내 알바레스를 찾지 못했던 것이다.
"알바레스를 어떻게 찾았는지 궁금한가?"
우희 위버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놀란 표정을 짓자 로버
트 퍼그스가 빙그레 웃었다.
"네."
"사람의 인연이란 것은 참으로 기구한 거야. 누네즈가 황
량한 지구를 40년 동안이나 헤매고 피그미족이 살던 마아타
카로 돌아오자 놀랍게도 알바레스가 마아타카에 있는 거야.
게다가 알바레스는 산소를 생산하는 플로라 나무를 연구했
어."
"플로라 나무요?"
"남조류(藍藻類)라고 들어봤나?"
"어렴풋이요. 전 동물학자라 식물에 대해서는 잘 몰라
요."
로버트 퍼그스가 우희 위버의 허벅지에 눈길을 던지며 고
개를 끄덕거렸다. 우희 위버는 속옷을 입지 않고 있었다.
유강렬박사가 살고있는 오두막집에는 여자 옷이 없었다. 속
옷을 입을래도 입을 옷이 없는 것이다.
"남조류는 거의 최초의 원시생명체야. 지구가 처음 탄생
했을 때 영양염(營養鹽)에서 진화했는데 단세포나 여럿의
세포가 실 모양으로 이루어져 있어. 하등 식물인데 세포내
에 엽록소(葉綠素)를 가지고 있어서 태양의 광합섬에 의해
산소를 생산하지 "
우희 위버가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녀는 비로소 로버트
퍼그스의 말을 이해할 수 있었다.
"누네즈는 알바레스를 보자 반가웠어. 어디 그것뿐인가?
알바레스가 산소를 생산하는 플로라 나무까지 개발했으니
금상첨화였지. 누네즈는 알바레스를 곁에 두고 이용하기 시
작했어. 플로라 나무의 개발을 서두르게 하는 한편 밤에는
알바레스를 자신과 같은 초인을 만들어 욕망을 해소하기 시
작했어. 그런데 문제가 하나 생겼어. 알바레스가 자신과 똑
같은 초인이 된다면 자신이 알바레스에게 제압될지도 모른
다는 걱정이 생긴 거야. 그래서 그녀는 알바레스를 초인과
같은 거인으로 만들면서도 자신의 말에 절대적으로 복종하
게 하는 약을 만들었어. 그것이 하시시야. 누네즈는 하시시
에 여러 가지 약을 첨가해서 그 약을 먹으면 최면상태에 빠
지게 했어. 그리고 최면상태에 빠지면 자신이 너의 어머니
다, 어머니다, 라는 인식을 깊이 심어 주었어 "
로버트 퍼그스의 말에 우희 위버는 이맛살을 찌푸렸다.
로버트 퍼그스의 말을 들어도 여러 가지 의문점이 계속 남
아 있었다.
"그 하시시는 우리가 먹는 것과 똑같은가요?"
"하시시는 여러 가지로 개발되었어."
"어떻게요?"
"마더타임용 캡슐은 최면 효과가 강력하지."
"그러면 러브타임용은요?"
"그것은 흥분제야."
로버트 퍼그스가 단호하게 말했다. 우희 위버는 흥분제라
는 말에 공연히 얼굴이 붉어졌다.
"45인의 원로를 알지?"
"네."
"그들은 마더 살로메의 젖을 직접 먹어. 그런데도 기묘하
게 그들은 마더 살로메에게 제압을 당해 있지. 정신이며 모
든 것이 그들은 마더 살로메의 명령을 지상최대의 명령으
로 알고 있어. 마더 살로메에게 복종을 하지 않으면 죽게
되고 "
"어떻게 그럴 수가 있죠? 그들은 하시시를 먹는 것도 아
니잖아요?"
"그것은 눈속임이야."
"눈속임?"
우희 위버는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들이 먹는 마더 살로메의 젖은 가짜야. 마더 살로메도
가짜지만 그들이 젖을 먹는 마더 살로메는 정교하게 만들
어진 안드로이드야."
"그럼 로봇이란 말씀예요?"
"로봇이지. 그러니까 원로들이 마더 살로메의 젖인줄 알
고 먹는 것은 중독성이 강한 독약이야. 유러너스 제국의 원
로들에게 그토록 독성이 강한 젖을 먹이고도 마더 살로메가
어떻게 살아 있겠어? 자신이 먼저 독약에 의해 죽지."
로버트 퍼그스가 공허하게 소리를 내어 웃었다.
"유러너스 제국의 원로들은 한 달에 한 번씩 마더 살로
메, 아니 로봇의 가슴에서 나오는 독약을 먹지 않으면 죽게
되어 있어. 그래서 철저하게 복종하는 거야."
"알바레스는 그후 어떻게 되었어요?"
"알바레스는 누네즈의 제물이 되었어."
"제물이요?"
"애욕의 제물 "
로버트 퍼그스의 얘기는 계속되었다.
누네즈는 알바레스를 초인으로 만든 뒤 자신이 제조한 하
시시를 먹이고 관계를 했다. 그들은 일반인들의 다섯 배나
될 정도로 몸집이 커졌기 때문에 알몸으로 뒤엉켜 살을 섞
을 때는 마치 지진이 일어나는 것처럼 땅이 흔들리고 광풍
이 휘몰아쳤다.
피그미족은 그들이 관계를 할때는 잠을 이룰 수 없었다.
그들의 신음소리는 천둥소리 같았고 그들의 호흡은 광풍
이 몰아치는 것처럼 거칠었다. 땅이 흔들리고 집이 울렸다.
산에서는 사태가 나서 흙더미가 쏟아지고 바윗덩어리가 굴
러 떨어졌다.
누네즈는 알바레스를 제2인자로 만들었다. 그리하여 그에
게 코스모스 과학센터를 설립하게 했다. 알바레스는 지구의
모든 과학자들을 코스모스 과학센터로 불러 모아 새로운 지
구를 건설하기 시작했다.
모든 것은 그녀의 계획대로 이루어져 갔다. 봉선화 혜성
의 침입이후 지구는 무질서와 혼란뿐이었다. 그러나 코스모
스 과학센터의 과학자들은 누네즈에게 사육되다시피 하며
새로운 지구건설에 박차를 가했다.
누네즈는 결코 앞에 나서지 않았다.
그녀는 알바레스를 전면에 내세워 신시(神市) 아라크네시
건설에 골몰했다. 그녀가 가장 중점을 둔 것은 그들을 어떻
게 통제하느냐 하는 것이었다.
그러는 동안 시간은 거침없이 흘러갔다.
그녀의 나이는 어느덧 120세가 되었다. 그러나 불로불사
의 몸을 갖고 있는 그녀는 늙지도 죽지도 않았다. 그녀는
오히려 더욱 건강해졌으며 몸매도 살결도 더욱 아름다워졌
다.
다시 1백여년의 시간이 흘러갔다. 누네즈는 250세가 되었
다. 그 무렵부터 코스모스 과학센터의 기틀이 잡히기 시작
했다. 봉선화 혜성의 침입이 4138년의 일이었으므로 얼추 2
백여년이 흘러간 것이다.
지구는 코스모스 과학센터가 건설한 신시 아라크네시와
아라크네시 바깥의 사피언스 그라운드로 재편성되었다. 누
네즈는 자신이 통제할 수 있는 숫자인 3천만명 정도를 아라
크네시 시민으로 편성시킨 뒤 유러너스 제국을 건설했다.
그 무렵 알바레스가 반란을 획책하기 시작했다. 알바레스
는 십년동안이나 기회를 노리다가 마침내 하시시의 비밀을
알아냈다. 그리고 자신을 비롯하여 코스모스 과학센터의 모
든 과학자들이 누네즈에게 통제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전
율했다. 그는 누네즈를 제거하기로 결심했다. 그러나 그는
누네즈가 불로불사의 몸이라는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알바레스는 누네즈가 잠든 사이에 누네즈의 침대로 접근
해서 암살을 시도했다. 그는 강철을 자르는 칼을 누네즈의
심장에 꽂았다. 누네즈의 심장에서는 피가 분수처럼 솟구쳤
고 누네즈는 고통으로 격렬하게 몸부림을 쳤다.
"아, 알바레스 !"
누네즈가 믿어지지 않는다는 눈빛으로 알바레스를 쏘아보
았다.
"당신은 나를 사육했어!"
알바레스는 누네즈의 심장에서 칼을 뽑아 다시 그녀의 가
슴을 찔렀다. 그러자 누네즈가 짐승처럼 컥 하는 비명을 지
르며 맨손으로 칼을 움켜쥐었다. 누네즈의 손에서 피가 주
르르 흘러내렸다.
"그래도 당신을 "
누네즈의 눈빛은 공허했다. 마치 사랑하는 사람에게 배신
을 당해 슬픔에 잠긴 듯한 눈빛이었다. 알바레스는 강하게
고개를 흔들었다. 누네즈의 눈빛에 흔들려서는 안된다고 생
각했다.
"넌 악마야!"
알바레스는 소리를 버럭 지르며 누네즈의 가슴을 칼로 정
신없이 찔러댔다. 그러자 그녀의 하얀 침대가 순식간에 피
로 물들고 누네즈의 팔다리가 경련을 일으키기 시작했다.
마치 살아있는 청개구리를 바늘로 찌르면 다리가 경련을
하듯이 누네즈는 무섭게 경련을 일으키고 있었다. 그리고
알바레스를 증오의 눈으로 쏘아보다가 눈을 감았다.
"네가 아무리 그런 눈으로 나를 쏘아보아도 소용이 없어
!"
알바레스는 식은땀을 흘렸다. 핏빛으로 이글거리던 누네
즈의 눈빛을 생각하자 손발이 덜덜 떨렸다.
알바레스는 누네즈의 침실을 뛰어나왔다. 한때 누네즈는
그의 아내였었다. 아내였던 여자의 심장을 찔러 죽였다고
생각하자 비감했다. 그의 나이도 어느덧 250세를 훌쩍 넘기
고 있었다. 참으로 오랜 세월을 살아온 것이다. 그가 지금
까지 살아온 것은 모두 아내 누네즈의 덕분인지도 몰랐다.
그러나 알바레스는 사육되면서 살고 싶지는 않았다. 그것은
짐승이나 다를 바 없는 일이었다.
거미라는 이름의 아라크네 신시의 건설, 유러너스 제국의
건국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
유러너스 제국의 경계선밖에는 수십억의 지구인들이 산소
부족과 기아, 그리고 질병으로 죽어가고 있었다. 그들을 내
버려둔 채 다만 3천만명만 선택하여 제국시민으로서의 권리
를 누리게 하는 것은 비인간적이었다.
물론 엄밀하게 말하면 그들도 사육되고 있었다. 누네즈는
스스로 여신인 척하고 있었다.
"알바레스!"
그때 등뒤에서 누네즈의 얼음처럼 차가운 음성이 들려왔
다. 알바레스는 가슴이 철렁했다.
"당신은 나를 두 번씩이나 죽이려 했어!"
표독한 말이었다. 알바레스가 재빨리 몸을 돌리자 온 몸
에 피를 뒤집어쓴 듯한 누네즈가 알바레스를 노려보고 있었
다.
"누, 누네즈 "
알바레스는 온 몸이 사시나무처럼 떨렸다. 누네즈는 그가
심장을 수십 번씩이나 찔렀는데도 살아 있었다.
"이제는 더 이상 용서하지 않겠어!"
"누네즈!"
"당신을 영원히 죽지도 못하는 고통 속에서 살게 하겠
어!"
누네즈가 여자 경호원들에게 눈짓을 했다. 그녀는 코스모
스 과학센터를 설립하면서 살인 안드로이드를 제작하여 경
호원으로 쓰고 있었다. 그들은 로봇이었기 때문에 누네즈의
명령에만 철저하게 복종하고 있었다.
"저 놈을 체포해라!"
누네즈가 표독하게 소리를 질렀다. 칼에 찔린 누네즈의
가슴은 벌써 깨끗하게 상처가 아물어 있었다. 피부조직세포
가 스스로 재생을 하여 상처를 아물게 하고 혈액 세포가 그
녀의 몸에서 필요로 하는 혈액을 스스로 생산하여 보충한
것이다.
'누네즈는 인간이 아니야!'
알바레스는 절망했다.
살인 안드로이드들이 알바레스를 붙잡았다. 알바레스는
저항을 포기했다. 살인 안드로이드들은 남자들보다 완력이
더 강했다.
"지하실에 처넣어!"
누네즈가 다시 명령을 내렸다.
알바레스, 유러너스 제국 시민들이 코스모스로 알고 있는
알바레스는 그후 두 번 다시 공식석상에 모습을 나타내지
않았다. 그러나 알바레스가 누네즈에 의해 바로 죽은 것은
아니었다.
알바레스는 지하실에 갇혀서 장장 2백년 동안이나 누네즈
의 성의 노예 노릇을 하다가 죽었다.
제 37 장 신비제국
장애란은 반제동맹에서 전송되어 온 파일을 모두 읽고 무
겁게 한숨을 내쉬었다. 유러너스 제국의 신비가 완전히 벗
겨진 순간이었다. 사방은 벌써 캄캄해져 있었다. 벚꽃동산
에도 칠흑의 어둠이 삼단같은 머리를 풀어헤치고 밀려왔다.
밤이 되었기 때문인지 벚꽃동산은 인적이 끊어지고 나뭇잎
을 스치는 바람소리만 서걱거렸다.
장애란을 추적하는 유러너스 제국의 비밀경찰도 보이지
않았다.
'수많은 과학자들이 마더 살로메, 아니 누네즈의 손바닥
에서 놀아나다니 '
그것은 엄청난 비극이었다. 장애란은 과학자들이 누네즈
의 치마폭에서 놀아난 사실이 믿어지지 않았다. 인간들은
의외로 단순한 동물이었다. 누네즈가 자신을 마더 살로메로
위장을 했으나 1세기가 넘도록 내가 너의 어머니다, 라는
인식을 유러너스 제국 시민들에게 주입시켰으므로 철저하게
세뇌가 된 것이다.
마더 살로메가 어머니라는 사실을 의심하는 시민들은 반
역자로 몰아서 처형을 했다. 하시시에 의한 약물 최면과 세
뇌, 그리고 반역자에 대한 공포 분위기는 충분히 시민들을
통제할 수 있었을 것이다.
게다가 마더타임이라는 제도는 또 얼마나 우스꽝스러운
제도인가. 그것뿐이 아니다. 러브타임 제도까지 시행하여
유러너스 제국의 시민들을 온통 섹스중독증에 걸리게 한 것
이다.
유러너스 제국 시민들은 자신이 어떤 직업, 어떤 일을 하
더라도 낮에는 마더 살로메를 위해 일을 하고 밤에는 마더
타임 시간에 참여하여 마더 살로메에게 경배를 바치고 있었
다. 마더타임용 하시시 캡슐은 시민들의 뇌에 작용을 하여
최면상태에 빠지게 하고 그 시간이 지나면 흥분제로 바뀐
다.
러브타임을 위한 것이다.
'누네즈는 악마일 뿐이 아니라 음탕한 여자야 '
장애란은 그렇게 생각했다.
러브타임이라는 제도를 만들어 유러너스 제국 시민들은
온통 섹스에 몰두하게 하는 것은 그녀의 음탕한 본성 탓일
것이었다.
'그런데 나도 이리노중위만 생각하면 같이 자고 싶은데
나도 음탕한 여자인가 ?'
장애란은 마더 살로메를 생각하다가 얼굴을 붉혔다. 이리
노중위의 얼굴이 눈앞에 아련히 떠오르면서 그와의 뜨거운
정사가 생각났다. 왜 이리노중위를 생각하면 정사부터 떠오
르는 것일까. 나도 누네즈처럼 음탕한 여자인가 갖고 싶
다. 이리노중위를 갖고 싶다. 미치도록 그를 몸속에 받아들
이고 싶다.
아아 그러나 그는 머나먼 우주에 있지 않은가.
장애란은 이리노중위와의 황홀한 정사를 생각하다가 고개
를 흔들었다. 지금은 그를 생각하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X파일의 비밀을 모두 풀었으니 이제는 이 사실을 사피언
스 그라운드로 전송해야 하는 것이다. 그들은 장애란이 X파
일의 암호를 해독할 때만 눈이 빠지게 기다리고 있었다.
장애란은 서둘러 X파일을 해독한 내용을 간추려 사피언스
그라운드로 전송했다. 그리고 마더 살로메에 대해서 다시
곰곰 생각해 보았다. 생각할수록 마더 살로메는 기이한 여
자였다.
인간이 그토록 장구한 세월을 살 수 있다는 것도 신기했
다. 누네즈가 피그미족 연구소에 나올 때가 40세가 넘었고
봉선화 혜성이 그 무렵에 지구궤도를 침입했으니 얼추 따져
도 500세는 넘었을 것이다.
그때 장애란의 컴퓨터에 사피언스 그라운드 첩보사령부로
부터 연락이 왔다. 자막이 붉은 글씨로 뜨고 있는 것을 보
면 긴급사항이었다.
암호명 검은 고양이 즉시 귀대하라!
암호를 해독하자 귀대명령이 떨어져 있었다.
장애란은 컴퓨터 모니터 위에서 깜박거리는 커서를 들여
다보고 미간을 찌푸렸다. 귀대명령은 갑작스러운 것이었다.
무슨 일인가?
장애란은 자판을 두드려 귀대명령이 왜 떨어졌는지 질문
했다.
첩보사령관이 행방불명이 되었다.
바르시크대령이 행방불명이라니 무슨 소리인가?
바르시크대령은 오디세이 17호를 타고 니리드 위성에 갔
었다. 돌아오는 길에 착륙선에서 사라졌다.
어떻게 그런 일이 발생할 수 있는가?
모른다. 일단 귀대하면 새로운 임무가 부여될 것이다.
알았다. 어느 쪽으로 귀대하는가?
우리 첩보원들이 그대를 귀대시키기 위해 22시09분에 국
경과 여러 도시에서 소란을 피울 것이다. 22시에 시모프시
쪽의 국경에 대기하고 있다가 탈출하라! 우리는 그대가 니
트론 방향으로 탈출하는 것처럼 소란을 피울 것이다. 에어
카의 모니터를 작동시켜 놓으면 유러너스 제국의 C. C TV와
연결되어 상황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알겠다.
장애란은 사피언스 그라운드 첩보사령부와의 연결을 차단
하고 에어카의 모니터를 켰다. 유러너스 제국의 C. C TV는
도로상황을 감시하는 TV였다. 공중도로나 지상도로에서 사
고가 생겨 교통상황이 좋지 않을 때를 대비하여 유러너스
제국은 모든 에어카에 C. C TV를 연결해 두고 있었다.
장애란은 에어카의 시동을 걸고 벚꽃동산을 이륙했다.
바르시크대령이 우주선에 탑승하고 지구로 귀환하는 착륙
선에서 행방불명이 되었다는 사실이 믿어지지 않았다.
시계를 보자 벌써 밤 9시10분이었다.
사피언스 그라운드 첩보원들이 활동을 시작한 것은 5분도
지나지 않아서의 일이었다.
에어카의 모니터에 주라기 파크에서 불길이 치솟는 것이
화면에 잡히더니 에어카 한 대가 공중으로 날아오르고 유러
너스 제국 비밀경찰의 에어카가 추적을 하는 것이 보였다.
'우리 첩보원들이 유러너스 제국의 비밀경찰을 따돌리고
있어!'
비밀경찰은 장애란을 체포하기 위해 곳곳에 매복해 있었
던 모양이었다. 모니터로 유러너스 제국의 비밀경찰이 첩보
원을 향해 레이저건을 쏘고 화염총을 발사하는 것이 오락기
의 게임처럼 보였다.
장애란은 에어카를 8백m 상공으로 비행하게 했다. 아라크
네시의 상공은 캄캄하게 어두웠으나 에어카는 항로를 따라
비행하기 때문에 전혀 문제될 것이 없었다.
장애란은 비밀경찰의 추적을 피하여 22시 08분에 시모프
시 쪽의 국경선에 이르렀다. 국경선에는 유러너스 제국군대
가 삼엄하게 바리케드를 치고 감시하고 있었다. 공중에 서
치라이트가 푸른 광망을 만들고 레이더 날개가 회전을 하고
있었다.
초소에는 레이저건을 어깨에 멘 유러너스 제국 초병들도
보였다.
'시작할 때가 됐는데 '
장애란은 시계를 보았다. 첩보원과의 약속한 시간인 22시
09분이 다가오고 있었다. 장애란은 에어카를 8백m 상공에
정지시켜 놓고 일거에 바리케드를 돌파할 준비를 했다.
"하나, 둘, 셋 "
장애란은 22시 08분 55초가 되자 입으로 숫자를 세기 시
작했다.
"넷, 다섯 "
그때 어두운 하늘에서 푸른 섬광이 번쩍하고 빛을 뿌렸
다. 광자포(光子砲)였다. 사피언스 그라운드의 첩보사령부
는 그녀를 탈출시키기 위해 광자포까지 사용하고 있었다.
"간다!"
장애란은 에어카를 최고의 속도로 끌어올렸다.
푸른 섬광이 공중 바리케드를 몇 번씩이나 가르고 빛의
입자를 뿌렸다. 빛의 입자에 맞은 초병들이 찰나지간에 까
맣게 타죽고 바리케드가 무너져 내렸다. 유러너스 제국의
군대가 친 바리케드는 순식간에 구멍이 뚫렸다.
"돌파!"
절호의 기회였다. 장애란은 에어카를 순간 최고속도로 끌
어올리고 바리케드로 돌진했다. 그러나 유러너스 제국의 바
리케드는 강력했다. 에어카가 바리케드를 돌파하는 순간 뜨
거운 불길속에 휩싸였다.
쇳물처럼 뜨거운 불길이 에어카의 창으로 쏟아졌다.
'제기랄!'
장애란은 온 몸으로 열기가 훅 끼쳐왔다. 벌써 에어카가
바리케드에서 쏟아지는 불길에 의해 녹아내리고 있었다. 유
러너스 제국군대가 바리케드에 강력한 화염망을 설치한 모
양이었다.
장애란은 황급히 에어카를 수직으로 강하시킨 뒤 지상
50m 상공에 이르자 수평으로 자동비행을 하게 버튼을 누르
고 에어카에서 뛰어내렸다.
그녀의 몸이 무서운 속도로 지상으로 추락하기 시작했다.
그대로 떨어지면 가루가 되어 버린다.
장애란은 공중에서 몸을 뒤집으며 추락속도를 늦추었다.
그러나 50m나 되는 상공이었기 때문에 지상으로 추락하자
발이 부러지는 듯한 충격이 느껴졌다.
"악랄한 놈들 "
장애란은 이를 악물었다. 그때 에어카가 바리케드와 충돌
하면서 대폭발을 했다. 장애란은 주먹을 움켜쥐고 불길속으
로 뛰어들었다. 벌써 용광로처럼 뜨거운 불길이 그녀의 몸
을 덮치고 있었다. 옷이 불에 타고 살이 타는 냄새가 코를
찔렀다.
장애란은 필사적으로 뛰었다.
"저기다!"
"검은 고양이가 탈출한다!"
유러너스 제국의 군대가 장애란을 향해 일제히 레이저건
을 발사하기 시작했다. 레이저의 섬광이 장애란의 주위에
빗발처럼 꽂혔다.
"아악!"
장애란은 짐승처럼 울부짖으며 정신없이 달렸다. 광자포
가 뚫어버린 바리케드를 통과할 때는 지옥불을 통과하는 것
처럼 뜨거웠다.
얼마나 정신없이 달렸는지 알 수 없었다. 장애란이 미친
듯이 달리다가 주위가 조용한 것을 깨닫고 달리기를 멈추자
황량한 벌판이었다. 유러너스 제국의 바리케드도 보이지 않
았고 지옥처럼 뜨거운 불길도 보이지 않았다.
"통과했어!"
장애란은 자신도 모르게 뜨거운 눈물이 흘러내렸다. 그러
나 어디인지도 알 수 없었고 온 몸의 살이 불길에 타서 흐
늘흐늘 녹고 있었다. 장애란은 그 자리에 꼬꾸라졌다. 전신
이 화상을 입어 고통스러웠다.
"우 !"
그녀는 무릎을 끓은 채 두 손을 입에 모아 처절하게 소리
를 질렀다 상처 입은 짐승이 동료를 부르는 듯한 처절한 소
리였다.
"우 !"
다음에 그녀는 흙 위에 얼굴을 쓰러뜨렸다. 아직도 살이
타고 있었다. 머리는 밤송이가 되어 있었다. 그녀는 전신을
엄습하는 화기에 처절하게 울부짖다가 정신을 잃었다.
장애란이 정신을 차린 것은 한참이 지나서의 일이었다.
그녀는 갑자기 전신이 차가워지는 기분을 느끼고 눈을 떴
다. 그러자 그녀의 몸이 얼음 박스에 갇혀 있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밖에는 흰 수염의 사내와 군복을 입은 눈매가 날카로운
사내, 그리고 피부가 검은 사내가 서 있었다.
"이제 정신이 드나?"
눈빛이 음침한 예멘 의장이 침통한 표정으로 물었다.
장애란은 고개를 끄덕거렸다.
"이게 어떻게 된거죠?"
그들은 장애란이 처음 보는 사람들이었다.
"나는 사피언스 그라운드 평의회의 예멘 의장일세."
흰 수염의 사내가 먼저 자신을 소개했다.
"의장 각하.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장애란은 또렷한 목소리로 인사를 했다.
그들은 사피언스 그라운드를 이끌고 있는 지도자들이었
다.
"먼저 동지들을 소개하겠네. 내 오른 쪽은 평의회 의원인
압둘라장군일세. 정보를 맡고 있네."
"뵙게되어 반갑습니다. 장군님."
"고생이 많았네."
압둘라장군은 검은 선글라스를 쓰고 있었다.
"내 왼쪽은 우주계획을 총괄하는 몰루카장군일세."
"안녕하십니까. 장군님?"
장애란은 몰루카장군에게도 인사를 했다.
"반갑네 소위!"
몰루카장군은 머리가 곱슬머리였다. 그는 흑인이었다.
"제가 살아난 것입니까?"
"자네는 기적적으로 살았네."
몰루카장군이 대답했다.
"왜 저를 여기에 가두었습니까?"
"자네 몸은 아직도 불덩어리일세. 얼음박스로 자네 몸의
화기(火氣)를 다스리는 것일세."
"얼마나 걸리겠습니까?"
"한 시간이면 충분할 걸세. 자네는 세포가 스스로 부활하
고 재생하는 특이체질이라 특별한 치료도 필요 없네."
몰루카장군의 말대로였다. 유러너스 제국의 바리케드를
통과할 때 살이 흐늘흐늘할 정도로 중상을 입은 화상이 벌
써 아물어가고 있었다. 다만 그녀의 옷은 불에 타서 보기에
민망할 정도였고 기묘하게 머리카락도 재생되지 않고 있었
다.
얼굴은 숯검정을 칠한 듯 더러웠다.
'이리노중위가 이런 꼴을 보면 얼마나 비웃을까?'
장애란은 자신의 몸을 살피고 이리노중위의 얼굴을 떠올
렸다.
"자네는 두 시간 후에 우주선 발사기지로 가야하네. 오딧
세이 17호를 타고 니리드 위성에 가서 바르시크대령의 행방
불명을 조사하게."
"두 시간 후에요?"
"그렇네."
"하루만 여유를 주십시오. 피곤하여 잠을 자고 싶습니
다."
"우주선에서 자게."
"알겠습니다."
"자네를 위해 우주선이 두 시간 후에 발사되네."
"네."
장애란은 한 시간이 지나자 얼음박스에서 나와 샤워를 하
고 옷을 갈아입었다. 그리고 우주선이 발사되는 우주기지로
향했다.
제 38 장 신화의 날
날이 완전히 밝았다.
악몽과 같은 밤이 지났는데도 그들은 어디론가 계속 행진
해 가고 있었다. 이리노중위는 그들이 어깨에 매달고 가는
바람에 계속 흔들렸다. 바바라는 그들이 흔들어대서 제정신
이 아니었다. 그녀는 비명을 지르는 것도 잊어버리고 몇 번
이나 구토를 했다.
사튀로스족은 거의 두 시간 동안이나 밀림을 행진했다.
그러자 거대한 동굴이 나타났다. 약탈자 사튀로스족이 동굴
로 들어가자 동굴안에 있던 수많은 사튀로스족이 마중을 나
와 환영을 했다.
'우주에 이런 괴상한 동물들이 살고 있었다니 '
이리노중위는 꿈을 꾸고 있는 것같았다. 그물 속에서 사
튀로스족에게 시달려 몇 번이나 정신을 잃을 뻔했으나 이리
노중위는 입술을 깨물며 혼미해져 가는 정신을 수습했다.
다른 사람들은 이미 혼이 나가 있었다. 지난 밤에 사튀로
스족에 동료들이 산채로 잡아먹히는 것을 목격한 병사들은
눈에 초점이 완전히 풀어져 있었다.
바바라의 경우는 더욱 심했다.
사튀로스족이 걸핏하면 갈퀴가 있는 손으로 바바라에게
다가와서 살을 만지고 날카로운 손톱으로 긁어댔기 때문에
나중에는 침을 질질 흘리고 이상한 헛소리를 했다. 그러다
가 정신이 들면 눈물을 흘리며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이들은 분명히 동물이 진화를 한 거야 '
물론 인간들도 동물에서 진화를 했다. 그러나 인간들은
초식동물에서 진화를 했다. 영장류인 원숭이는 초식과 과일
류만 먹다가 직립을 하고 결국은 지능이 발달하여 인간이
되었던 것이다.
사튀로스족은 육식동물인 맹수류에서 진화한 것으로 보였
다.
이리노중위를 비롯해 유러너스 제국의 군인들은 그물에서
끌려나와 동굴의 벽에 묶였다. 그들은 사튀로스족이 먹을
것을 주지 않았기 때문에 극심한 공포와 허기에 지쳐 있었
다.
이리노중위는 벽에 묶여 있으면서도 탈진하여 잠을 잤다.
이리노중위가 깨어난 것은 어디선가 북소리가 들리기 시
작했기 때문이었다. 이리노중위가 눈을 뜨고 사방을 살피자
사튀로스족이 모닥불을 피워 놓고 그 앞에서 북을 치며 춤
을 추고 있었다.
'무엇을 하는 거지?'
이리노중위는 어리둥절했다.
그러나 차츰차츰 정신이 맑아지자 그들이 종교의식을 거
행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모닥불이 피워져 있는
광장 앞에 제단이 있었고 제단 위에는 거대한 괴물의 신상
(神像)이 세워져 있었다. 신상은 악귀(惡鬼)의 형상을 하고
있었다.
둥둥둥둥
북소리는 빨라지기도 하고 느려지기도 했다. 사튀로스족
은 북소리에 맞춰 격렬한 춤을 추고 있었다.
이리노중위는 머리를 세차게 흔들었다. 북소리에 섞여 사
튀로스족들의 괴성이 소름 끼치게 음산하게 들려왔다.
이내 춤이 그치고 사튀로스족들의 우두머리인 듯한 사내
가 창을 들고 괴성을 질렀다. 그러자 사튀로스족들이 일제
히 괴성을 질러댔다. 이리노중위는 귀를 틀어막고 싶었다.
그들의 괴성이 귀청을 찢어버릴 것처럼 무시무시했다.
둥 둥
북소리가 리드미컬해 졌다. 그리고 포악하게 생긴 사튀로
스족들이 어디선가 곤충족들을 끌고 왔다. 곤충족들은 공포
에 질린 표정으로 캬악, 캬악 하는 괴성을 지르며 끌려오지
않으려고 발버둥을 치고 있었다.
"이리노중위!"
그때 바바라가 이리노중위를 불렀다. 이리노중위가 바바
라를 쳐다보자 바바라는 극도의 공포로 안절부절하고 있었
다.
"난 아무래도 죽을 것같아."
"바바라양, 정신을 잃으면 안됩니다."
"이들은 자신이 믿는 신에게 제물을 바치려고 하고 있
어."
"예?"
"저걸 봐. 곤충족들이 공포에 질려있어. 이 괴물들이 곤
충족을 제물로 바치려는 거야."
바바라가 울부짖으며 말했다.
"제물을 바친 뒤에 우리를 잡아 먹을 거야."
"코드웰중령님이 수색조를 내보냈을 겁니다."
이리노중위는 공포에 떨고있는 바바라를 위로 하려고 했
다.
"저것들이 나를 향해 오고 있어!"
바바라가 깜짝 놀라 비명을 질렀다. 한 무리의 사튀로스
족들이 바바라를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그들은 바바라를
묶은 줄을 푸른 뒤에 바바라를 끌고 가기 시작했다.
"이리노중위!"
바바라가 날카롭게 이리노중위를 불렀다.
바바라는 사튀로스족들에게 끌려가지 않으려고 몸부림을
치고 있었다. 그러나 사튀로스족들은 바바라가 저항을 하자
갈퀴가 달린 손으로 바바라의 등을 마구 때렸다. 바바라의
등에 핏자국이 맺히고 바바라가 짐승처럼 비명을 질러댔다.
"바바라!"
이리노중위는 손목을 묶은 줄을 풀려고 필사적으로 발버
둥을 치면서 바바라를 불렀다. 그러나 이리노중위의 손목을
묶은 줄은 의외로 견고했다. 손목을 움직여 줄을 풀려고 했
으나 오히려 손목에 피만 맺힐 뿐이었다.
"이리노중위 살려줘!"
바바라의 처절한 비명이 이리노중위의 귓전을 때렸다.
"바바라!"
이리노중위는 비통했다. 바바라가 사튀로스족들에게 끌려
가는데도 아무 도움을 주지 못한다는 사실에 가슴이 찢어지
는 것 같았다.
"무서워!"
바바라는 계속 비명을 질러대고 있었다. 이리노중위는 눈
을 감았다가 떴다. 피가 나도록 입술을 깨물고 바바라를 쳐
다보자 사튀로스족들이 바바라를 모닥불 앞에 팽개치고 주
술을 외우고 있었다.
'바바라가 저들의 제물이야!'
사튀로스족들은 바바라를 제물로 삼으려는 것이 분명했
다. 지구의 원시시대에도 샤머니즘적인 종교의식에는 언제
나 새롭고 소중한 것이 제물이 되었었다.
둥둥둥둥
북소리가 다시 요란하게 울리기 시작했다. 사튀로스족들
이 괴성을 지르며 바바라의 주위를 돌면서 춤을 추기 시작
했다. 사튀로스족들은 얼추 수백명이나 되어 보였다. 그들
은 모두 주술에 취한 것처럼 경건하면서도 진지하게 춤을
추고 있었다.
둥 둥
이번엔 북소리의 템포가 느려졌다. 북소리가 느려지자 사
튀로스족들이 일제히 신상을 향해 절을 했다. 이리노중위는
세차게 고개를 흔들었다. 마치 꿈을 꾸고 있는 기분이었다.
지구에서 우주선으로 32일이나 걸려서 날아온 은하계에
지구의 원시시대에나 있었던 괴물들이 존재하고, 그들이 원
시 지구인들처럼 사람을 제물로 바치는 샤머니즘적인 종교
행사를 치루고 있다는 사실이 믿어지지 않았다.
그러나 그것은 엄연한 현실이었다.
사튀로스족들이 바바라를 번쩍 들어서 제단에 올려놓았
다.
둥둥둥둥
그러자 북소리가 다시 요란해지고 신상의 거대한 입에서
흑무(黑霧)가 자욱하게 뿜어져 나왔다. 바바라는 사튀로스
족들이 그녀를 제단 위에 올려놓자 재빨리 몸을 일으켜 도
망치려고 했으나 흑무를 마시자마자 그대로 풀썩 쓰러졌다.
'저것은 독이야!'
이리노중위는 소스라쳐 놀랐다. 신상의 입에서 자욱하게
뿜어져 나온 흑무는 독무(毒霧)였다.
둥 둥
신상의 입에서 독무가 쏟아져 나오자 북소리의 템포가 느
려졌다. 그와 함께 사튀로스족들이 일제히 바닥에 엎드려
괴성을 질렀다. 그들의 얼굴도 공포에 질려 있었다.
'뭘하는 것이지?'
이리노중위는 의아했다.
'아 !'
이리노중위는 다음 순간 자신도 모르게 입을 딱 벌렸다.
자욱한 흑무 사이로 무엇인가 혓바닥을 날름거리며 불쑥 튀
어 나왔던 것이다.
'저것은 뱀이야!'
이리노중위는 찬물을 뒤집어 쓴 것처럼 등줄기가 오싹했
다.
신상의 입에서 나온 뱀은 비단구렁이보다 더욱 컸다. 게
다가 그 뱀은 독무까지 내뿜고 있었다. 사튀로스족들이 뱀
에게 공포감을 느끼고 제물을 바치는 것은 당연한 일인지도
몰랐다. 뱀은 배가 고프면 사튀로스족들을 잡아 먹을 것이
고 사튀로스족들은 뱀에게 잡아먹히지 않기 위해 제물을 바
쳐온 것일 터였다.
'사튀로스족들은 원시 외계인이야, 아니 외계인이 아니라
한낱 동물에 지나지 않아 '
이리노중위는 사튀로스족들이 북을 치고 제단을 향해 절
을 하는 이유를 비로소 이해할 수 있었다.
뱀이 거대한 몸뚱이로 바바라를 휘어 감았다. 바바라는
독무에 의해 정신을 잃었는지 뱀이 그녀의 몸을 휘어감어도
비명을 지르지 않고 있었다. 바바라는 사지가 축 늘어져 있
었다.
둥 둥
사튀로스족들은 제단을 향해 무수히 절을 했다. 그때 뱀
이 입을 크게 벌리고 바바라를 삼키기 시작했다.
이리노중위는 눈을 꽉 감았다.
뱀이 바바라를 뜯어먹는 끔찍한 모습을 차마 눈 뜨고 바
라볼 수가 없었다. 그때 바바라에게서 괴상한 소리가 들려
왔다. 이리노중위는 바바라의 소리에 놀라 눈을 번쩍 떴다.
뱀이 사나운 이빨로 바바라의 몸을 물자 쇠와 쇠가 부딪치
는 듯한 날카로운 금속성이 들려오고 있었다.
'맙소사! 바바라가 로봇이라니!'
이리노중위는 자신의 눈을 의심했다. 비록 며칠 동안이지
만 그녀와 함께 많은 얘기를 하기도 했고 숲속에서 러브타
임을 갖기도 했었다. 그런데 그러한 바바라가 로봇이라는
사실이 끔찍했다.
이리노중위가 놀라고 있는 사이에 뱀은 바바라의 몸을 완
전히 부숴버렸다. 바바라는 특수 알루미늄과 실리콘으로 정
교하게 제작되어 있었다. 뱀은 그때까지도 바바라가 로봇이
라는 것을 전혀 눈치 채지 못하고 있는 것같았다. 마치 맛
있는 식사를 하듯이 로봇인간 바바라를 천천히 입속으로 삼
키고 있었다.
'살로메 위성은 쇠붙이가 존재할 수 없는 땅인데 어떻게
된거지?'
이리노중위는 짙은 의혹에 사로잡혔다.
'혹시 실리콘으로 알루미늄을 감쌌기 때문에 로봇인 바바
라가 사라지지 않은 것인가?'
로봇인간은 알루미늄으로 골격을 만든 뒤에 실리콘으로
덧씌워 겉에는 인간과 똑같았다. 이리노중위가 바바라와 섹
스를 했으면서도 로봇이라는 것을 눈치 채지 못한 이유도
거기에 있었다.
이리노중위는 당혹스러웠다.
바바라가 로봇이라도 인간처런 행동을 했고 인간과 같은
감정을 갖고 있었다. 바바라가 거대한 뱀에게 잡아먹히고
있는 사실에 연민의 감정이 느껴졌다.
그러나 바바라는 완벽한 로봇이 아니었다. 바바라는 감정
과 사고하는 인공지능까지 갖추고 있었으나 번식을 하지는
못했다. 안드로이드와의 1백년에 걸친 전쟁, 일명 판도라의
전쟁때에 지구인들과 처절한 전쟁을 했던 안드로이드들은
인간이 제작을 한 것이 아니라 스스로 복제를 하고 번식을
했었다.
바바라를 완전히 삼켜버린 뱀이 다시 신상의 입으로 들어
갔다.
사튀로스족들이 꿇어 엎드려 있던 바닥에서 일어나 환성
을 질렀다.
둥둥둥둥
북소리가 다시 경쾌하게 울려 퍼지기 시작했고 사튀로스
족들은 크악, 크악 하는 괴성을 지르며 춤을 추었다. 이어
서 그들은 곤충족들을 끌어냈다.
그때 신상의 입에서 다시 흑무가 자욱하게 뿜어졌다. 아
울러 신상이 요동을 치기 시작했다.
이리노중위는 정신을 바짝 집중했다. 신상의 입에서 뱀이
나와 마구 흑무를 뿜어대고 있었다. 로봇을 먹은 뱀이 소화
가 되지 않아 몸부림을 치고 있는 것같았다. 사튀로스족들
은 뱀이 요동을 치자 당황하여 우왕좌왕하고 있었다.
스스스스
뱀은 신상에서 빠져 나와 거대한 몸체로 제단위로 미끄러
져 내려왔다. 사튀로스족들이 황급히 곤충족들을 제단위로
던져 주었으나 뱀은 꼬리로 그것을 쳐버렸다. 곤충족들은
뱀의 꼬리에 맞아 비명을 지르며 벽으로 날아가 부딪쳤다.
뱀의 힘이 너무나 강해서 곤충족들은 벽에 부딪치자 그대로
몸이 터지거나 으깨져버렸다.
처참한 모습이었다.
벽에서 곤충족들의 피가 튀어 바닥에 흥건하게 괴었다.
사튀로스족들은 더욱 당황하여 제단 앞에 꿇어 엎드렸다.
그러나 뱀은 제단에서 내려와 사튀로스족들을 닥치는대로
배로 뭉개어 죽이는가 하면 꼬리로 쳐죽이고, 입으로 물어
서 죽였다. 동굴 안은 사튀로스족들의 비명소리가 처절하게
울려 퍼졌다.
'무시무시한 놈이야 !'
이리노중위는 입안이 바싹바싹 마르는 겉같았다. 그때 사
튀로스족들의 우두머리인 듯한 자가 이리노중위에게 달려와
서 벽에 묶은 밧줄을 푸르고 이리노중위를 끌어다가 뱀에게
던졌다.
"츠으윽!"
뱀이 이리노중위를 향해 혓바닥을 날름거리며 괴성을 질
렀다. 이리노중위는 소름이 오싹 끼쳐왔다. 뱀의 혓바닥에
서는 끈적거리는 액체가 묻어 있었다. 뱀이 사냥감을 그 액
체에 달라붙게 하여 입으로 삼켜버리는 모양이었다.
'이러다가는 뱀에게 잡아먹히겠어.'
이리노중위는 뱀의 혓바닥이 가까이 접근해 오자 데굴데
굴 굴렀다. 사튀로스족들이 손목을 풀지 않아 뱀과 싸울 수
가 없었다. 사튀로스족들은 이미 뱀에게 물리거나 꼬리에
맞아 대부분 죽어 나자빠져 있었다.
그때 뱀이 갑자기 입을 딱 벌리고 크아악 하는 비명을 질
러댔다. 이리노중위가 정신을 차리고 보자 몸길이가 1m나
되는 고슴도치들이 뱀에게 달려들어 거대한 몸통을 깨물어
먹고 있었다. 뱀은 고통스러워하면서 발광을 했으나 고슴도
치를 어찌할 수가 없었다. 고슴도치가 잔뜩 웅크리고 뱀의
커다란 몸통을 으적으적 깨물어 먹는 바람에 꼬리로 치거나
입으로 물 수가 없었다. 고슴도치는 몸이 칼보다 더 날카로
운 가시로 뒤덮여 있었다.
'뱀의 천적이 고슴도치였군 '
이리노중위는 동굴의 벽에 바짝 붙어 서서 숨을 죽였다.
고슴도치나 뱀에게 들키면 살아날 수가 없었다.
고슴도치 떼는 발광을 하는 뱀을 빠르게 먹어 치웠다. 마
침내 동굴에는 뱀의 거대한 뼈만 남았다. 그러나 고슴도치
도 몇 마리가 뱀에게 죽고 말았다. 뱀에 물려 죽은 것이 아
니라 압사를 했거나 발광하는 뱀의 꼬리에 맞아 죽은 것같
았다.
'살로메 위성도 안전한 곳이 아니야.'
고슴도치들은 뼈가 남을 때까지 뱀을 먹어 치운 뒤에야
어슬렁어슬렁 기어서 어디론가 사라졌다. 이리노중위는 그
때서야 동굴의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한바탕 전쟁을 치
룬 동굴 안은 끔직했다. 여기저기 사튀로스족들과 곤충족들
의 시체가 나뒹굴고 피가 낭자했다.
이리노중위는 바닥에 앉아서 10분쯤 쉬다가 죽은 고슴도
치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고슴도치의 가시가 칼날보다 더욱
날카로웠다. 그는 고슴도치의 가시에 손목의 밧줄을 대고
문지르기 시작했다.
이내 밧줄이 고슴도치의 가시에 의해 끊어졌다.
그때 죽은 듯이 꼼짝도 하지 않고 있던 고슴도치 한 마리
가 벌떡 일어나 이리노중위에게 달려들었다.
이리노중위는 화들짝 놀라 몸을 피하려고 했다. 그러나
오랫동안 묶여 있었던 탓에 몸을 자유롭게 움직일 수가 없
었다. 이리노중위는 고슴도치의 공격에 속수무책으로 찔리
고 이빨에 물렸다. 고슴도치의 가시는 칼날보다 더울 날카
로웠다. 이리노중위의 몸에 살짝 스치기만 했는데도 살이
베어지고 선혈이 주르르 흘러내렸다.
'무시무시한 놈이야!'
이리노중위는 겁이 덜컥 났다. 고슴도치의 가시에 가슴이
찔리면 그것으로 끝장이었다. 게다가 고슴도치의 가시는
50cm나 되어서 팔다리가 베이면 그대로 잘라질 것이다.
그러나 이리노중위도 초능력을 가지고 있었다. 가시를 날
카롭게 세우고 달려드는 고슴도치를 사튀로스족들이 불을
피우던 장작을 주워들어 필사적으로 막아냈다.
이리노중위는 피투성이가 되었다.
이리노중위가 고슴도치를 완전히 격퇴한 것은 30분쯤 지
났을 때였다. 고슴도치들은 이리노중위가 맹렬하게 공격을
하자 슬금슬금 꽁무니를 빼고 사라졌다.
'이제야 끝났어!'
이리노중위는 이를 악물고 동굴 바닥에 주저앉았다. 고슴
도치의 가시에 베이고 찔린 상처가 쓰리고 아펐다. 그러나
동굴 안에서는 마땅한 치료방법이 없었다. 가시에 베인 상
처는 살점이 너덜너덜했고 찔린 상처에서는 피가 계속 흘러
내렸다.
이리노중위는 눈을 감고 가쁜 숨을 몰아 쉬었다. 피로와
함께 이빨이 딱딱 부딪치는 통증이 함께 몰려왔다. 그는 동
굴 벽에 기댄 채 눈을 감았다. 여기서 눈을 감아서는 안된
다고 마음속으로 다짐을 했으나 눈까풀이 천근처럼 무겁게
내려감기면서 잠이 쏟아지고 있었다.
이리노중위는 눈을 감았다.
이리노중위는 잠결에 꿈을 꾸었다. 지구의 유러너스 제
국, 휴양도시 로마노즈에 있는 가족들의 꿈이었다. 가족들
은 거실에 모여 앉아 즐겁게 얘기를 나누고 있었다.
꿈이 바뀌었다. 살로메 위성에서 겪은 여러 가지 일들이
마치 주마등처럼 꿈속에 나타났다가 사라졌다.
진화에 대한 꿈도 꾸었다. 사람의 유전인자는 선대들의
전생(前生)이 기록되어 있었다. 생명체가 지구의 영양염에
서 진화를 하고 진화한 남조류떼가 식물과 어패류, 그리고
뭍으로 올라와 식물이 되고 동물이 되는 과정이 낱낱이 기
록되어 있었다.
물론 인간들은 아직도 유전인자에 기록되어 있는 그 사실
을 읽어내지 못한다. 인간의 두뇌가 현실에 더 빨리 적응하
게 되어 있기 때문이었다. 그것은 마치 컴퓨터에 저장되어
있는 파일들을 사용자가 찾지 못하는 것과 흡사하다.
인간은 과거, 유전인자에 기록되어 있는 시간을 기억하지
못하는 것이다.
생명의 신비였다. 그러나 이리노중위는 꿈속에서 잃어버
린 시간을 만나고 있었다.
꿈이 다시 바뀌었다. 이번엔 장애란을 만나는 꿈이었다.
장애란과 이리노중위는 유전인자에 기록되어 있는 시간, 인
간들이 잃어버린 태초의 시간 속에 있었다.
그 곳은 꿈의 동산이었다. 생로병사가 없고 고통이 없었
다. 사람은 오직 장애란과 이리노중위뿐이었고 그들은 나뭇
잎으로 부끄러운 곳을 가린 채 동산을 뛰어다니며 놀고 있
었다. 동산에는 젖과 꿀이 흐르듯이 기화이초가 만발해 있
었다. 계곡엔 맑은 시냇물이 졸졸거리고 흐르고 새들은 잎
사귀가 무성한 나무가지 사이를 누비며 평화롭게 지저귀고
있었다.
이리노중위는 장애란과 손을 잡고 동산을 뛰어다녔다. 그
들은 늙지도 죽지도 않고 고통도 몰랐다.
그때 꿈이 깨었다.
이리노중위가 눈을 뜨자 무엇인가 부드러운 것이 그의 몸
을 핥고 있었다. 그것은 얼음처럼 차가웠다. 마치 파충류의
몸에 닿은 듯이 섬뜩하게 차가웠다.
"뭐, 뭐야?"
이리노중위는 깜짝 놀라 소리를 질렀다. 그러자 파닥거리
는 날개짓소리가 들리면서 무엇인가 그의 몸에서 후다닥 떨
어졌다.
'이것들은 곤충족 같은데 '
이리노중위가 눈을 부비고 어둠 속을 살피자 그것은 곤충
족들이었다. 그들은 무기를 전혀 갖고 있지 않았다. 이리노
중위는 자신의 몸을 핥고 있던 것들이 곤충족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자 기분이 미묘했다. 곤충족들은 그에게 적의가 없
는 것같았다. 이리노중위가 깨어나 화를 내자 그에게서 떨
어져 물끄러미 그를 살피고 있었다.
'이것들을 곤충이라고 해야할지 사람이라고 해야할지 모
르겠네.'
이리노중위의 상처는 깨끗하게 나은 것같았다. 그가 잠이
들어 있는 사이에 세포가 스스로 치료를 해버렸던 것이다.
게다가 곤충족들이 혀로 그의 핏자국을 깨끗이 닦았던 것이
다. 그러나 이리노중위는 그 사실을 전혀 모르고 있었다.
이리노중위는 동굴 바닥에서 일어났다. 어둠 속에서 동굴
을 살폈으나 살아있는 유러너스 제국 군대는 한 사람도 없
었다. 이리노중위는 모닥불을 뒤져 불씨를 찾아 불을 피웠
다. 횃불을 만들어 동굴 안을 비추자 곤충족들이 자세히 보
였다.
아름다웠다.
인간이라고 하기에는 어딘지 엉성해 보였지만 날개를 가
지고 있는 것 외에는 인간의 형상을 그대로 가지고 있었고
특히 눈이 크고 맑았다. 피부도 놀라울 정도로 희고 깨끗했
다.
이리노중위는 횃불을 들고 밖으로 나왔다. 곤충족들이 무
어라고 키익 키익거리며 그의 뒤를 따라 동굴을 나왔다.
밖에는 번하게 동이 터 오고 있었다.
이리노중위는 동굴 앞에서 망설였다. 유러너스 제국이 살
로메 위성에 건설한 미터스시로 돌아가야 했으나 방향을 짐
작할 수가 없었다.
그때 곤충족 중에 하나가 이리노중위 앞에 와서 키익키익
거리며 말을 했다. 그러나 이리노중위는 그의 말을 알아들
을 수가 없었다. 이리노중위도 그들에게 말을 걸어보았으나
그들도 이리노중위의 말을 알아 듣지 못하는지 큰 눈만 꿈
벅거렸다.
'도무지 말이 통해야지 '
이리노중위는 곤충족들과 말이 통하지 않자 답답했다.
동굴 안은 어수선했다. 뱀의 뼈와 죽은 고슴도치들, 그리
고 곤충족들의 시체가 어지럽게 널려 있었다.
곤충족 중의 하나가 자신들과 함께 가지고 손짓으로 말하
기 시작했다. 이리노중위는 그가 몇 번이나 손짓을 한 뒤에
야 겨우 그 뜻을 알아들을 수 있었다.
곤충족들이 이리노중위 옆에 와서 팔을 잡았다. 어떤 곤
충족은 그의 발을 잡기도 했다.
'뭘하려는 거지?'
이리노중위는 의아했다. 그때 곤충족들이 날개짓을 하여
하늘로 날아올랐다. 이리노중위는 깜짝 놀랐다. 그러나 곤
충족들은 이리노중위의 팔과 다리를 잡고 하늘로 날아올라
비행하기 시작했다.
이리노중위는 눈을 감았다. 곤충족들이 날개를 치는 소리
가 꽤나 요란했다. 귓전으로는 바람이 휙휙 스쳐 지나가고
있었다. 눈을 뜨고 밑을 내려다보자 지상의 밀림이 아득하
게 내려다보였다.
사튀로스족은 계곡에 잔뜩 몰려 있었다.
곤충족들은 이리노중위를 데리고 공중을 나는 것이 힘이
드는지 이따금 밀림에 내려앉아 쉬었다가 다시 날고는 했
다.
그들은 한 시간쯤 날아서 어떤 도시에 이르렀다. 거대한
성으로 둘러싸여 있는 도시였다.
날은 이제 완전히 밝아 있었다.
날이 밝자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이 열대성 소나기가 한바
탕 뿌려댔다. 곤충족들은 이리노중위를 그들의 우두머리에
게 데리고 갔다. 거리를 오가던 곤충족들은 이리노중위가
신기해 보였는지 지나가면서 계속 힐끔거렸다. 이리노중위
도 곤충족들의 거리를 주의 깊게 살펴보았다. 곤충족들은
대개 나무에 구멍을 뚫어놓고 그 곳으로 드나들고 있었다.
곤충족들은 이리노중위를 곤충족들의 우두머리가 있는 곳
으로 데리고 갔다. 우두머리의 집도 나무에 있었다. 안으로
들어가자 땅속 지하와 연결되어 의외로 넓었다. 마치 개미
들이 살고 있는 집 같았다.
곤충족의 우두머리는 높은 의자에 앉아 있었다. 수염은
없었으나 얼굴에 주름이 잡혀 있는 것을 보면 나이가 꽤 들
어 보였다. 그 옆에는 우아하고 아름다운 곤충족 여자가 앉
아 있었다.
'마치 왕과 왕비 같군 '
이리노중위는 그들의 모습에서 범접할 수 없는 권위와 위
엄을 볼 수 있었다. 그들은 지극히 온화하고 아름다웠으나
한 종족을 이끌고 있는 기품있는 자태가 풍기고 있었다. 이
리노중위는 그들을 왕과 왕비로 부르기로 했다. 그들의 머
리에는 보라색의 초롱꽃으로 만든 화관이 씌워져 있었다.
왕과 왕비의 앞에는 그들의 자녀들인 듯 여자 곤충족과
남자 곤충족이 앉아 있었다. 그들의 화관에는 깃털이 하나
씩 꽂혀 있었다. 이리노중위는 그들을 왕자와 공주로 부르
기로 했다. 공주는 이리노중위를 넋을 잃은 듯이 쳐다보고
있었다.
곤충족들의 우두머리는 이리노중위에게 자신들의 언어로
한참동안 얘기를 했다. 이리노중위는 우두머리의 말을 알아
들을 수가 없었다. 곤충족의 우두머리도 이리노중위가 자신
의 말을 알아듣지 못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는지 낙담한 표정
으로 가슴을 두드렸다. 답답하다는 뜻인 모양이었다.
'답답하긴 나도 답답해 '
이리노중위는 어이가 없어서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곤충
족의 우두머리가 옆에 있던 곤충족들에게 무어라고 지시했
다. 그러자 곤충족들이 재빨리 밖으로 날아가서 과일을 한
아름 가지고 돌아왔다. 그들은 과일을 이리노중위 앞에 갖
다가 놓으며 먹으라는 시늉을 했다.
이리노중위는 과일을 먹기 시작했다. 과일은 달고 시원했
다. 그러는 동안 소나기가 그치고 하늘이 맑게 개었다.
이리노중위가 과일을 몇 개 먹고 그만 먹겠다는 손짓을
하자 곤충족의 우두머리가 옆에 있던 곤충족에게 무어라고
지시했다. 그러자 곤충족들이 이리노중위를 데리고 다시 날
기 시작했다. 그들은 이리노중위를 강가에 있는 나무 위에
지어놓은 집으로 데리고 갔다. 나무 위의 집은 이리노중위
를 위해 특별히 만든 것같았다.
이리노중위는 나무 위의 집에서 쉬었다. 이리노중위를 데
리고 온 곤충족들은 어디론가 날아가 버려 이리노중위는 혼
자가 되었다. 이리노중위는 그들이 날아가자 바닥에 벌렁
누웠다. 나무위의 집은 요람처럼 편안했다.
이리노중위는 날씨가 따뜻해 잠이 쏟아져 왔다. 몸이 봄
날처럼 나른했다.
눈을 감자 여러 가지 생각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지구에
서 우주선을 타고 머나먼 우주의 살로메 위성까지 온 일이
며 정찰을 나왔다가 사튀로스족을 만난 일, 그리고 고슴도
치와 혈투를 벌이고 쓰러진 뒤에 곤충족들에 의해 그들의
도시까지 온 일이 꿈결인 듯 두서없이 머릿속에 떠올라왔다
이리노중위는 달디단 잠을 잤다.
이리노중위가 깨어난 것은 누군가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
는 듯한 인기척 때문이었다. 이리노중위가 눈을 뜨자 곤충
족의 공주가 살포시 웃고 있었다.
이리노중위는 일어나 앉았다. 그러자 공주가 수줍은 듯이
고개를 떨구었다. 공주의 희고 뽀얀 목덜미가 붉은 홍조를
띄고 있었다. 공주는 인간들이라면 15, 6세 정도 되어 보였
다. 그러나 궁둥이가 제법 풍만하고 가슴이 봉긋하여 성장
한 곤충족이 아닌가 생각되었다.
'공주가 왜 나를 찾아왔지?'
이리노중위는 의아했다.
공주가 이리노중위에게 무엇이라고 말을 했다. 그러나 이
리노중위는 한 마디도 알아들을 수 없었다.
"뭐라고 하는 거야? 난 너의 말을 알아들을 수없어."
이리노중위는 공주에게 알아들을 수 없다고 손짓과 함께
말했다. 공주가 난감하다는 시늉을 했다. 이리노중위는 어
깨를 으쓱했다. 그러자 공주가 자신이 쓰고 있는 화관을 벗
어서 이리노중위에게 씌워 주었다.
"왜 이러지?"
"키키 "
공주가 기쁜 표정을 지었다.
"공주. 왜 이 화관을 내 머리에 씌우는 거야?"
이리노중위는 화관을 벗으려고 했다. 자세히 알 수는 없
었으나 화관은 곤충족들 중에서 신분이 높은 곤충족이 쓰는
것 같았다. 이리노 중위가 화관을 벗으려고 하자 공주가 화
들짝 놀란 표정으로 이리노중위가 화관을 벗는 것을 제지했
다.
이리노중위는 우두커니 공주를 쳐다보았다. 공주가 왜 화
관을 이리노중위에게 씌워 주었는지 전혀 이해할 수가 없었
다.
공주가 나무 밑을 손짓했다. 그리고 공주는 날개를 움직
여 땅으로 날아 내려갔다. 이리노중위는 공주를 내려다보았
다. 공주가 따라오라는 시늉으로 손짓을 했다. 나무 밑에는
공주의 시종들인 듯 곤충족들이 모여 있었다.
이리노중위는 나무를 타고 내려가 공주에게 다가갔다. 공
주가 이리노중위의 손을 잡았다. 공주의 손은 기이하게 축
축했다.
공주가 이리노중위를 잡아끌었다.
이리노중위는 공주의 손에 이끌려 강가로 걸어갔다. 공주
의 시종들인 곤충족들도 그들의 뒤를 따랐다.
강가에는 많은 곤충족들이 앉아서 쉬거나 유희를 하고 있
었다. 그들은 공주와 이리노중위를 보자 반가운 표정을 지
었고 공주에게 경의를 표했다. 공주는 만족한 듯이 그들에
게 일일이 고개를 끄덕여 답례를 했다.
곤충족들 중에는 이리노중위가 신기한 듯이 이리노중위에
게 가까이 다가와서 얼굴을 만져보기도 하고 주위를 빙빙
돌기도 했다. 이리노중위는 쓴웃음이 나왔다.
'이들은 내가 신기한 거야 '
이리노중위는 곤충족들에게 둘러싸인 채 흐뭇한 미소를 지
었다. 곤충족들에게서 적의를 발견할 수 없었다.
공주도 예쁘게 미소를 짓고 있었다. 이리노중위는 공주를
따라서 곤충족들이 사는 모습을 구경하기 시작했다. 곤충족
들이 사는 모습도 인간들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곤충족들
은 가족을 이루어 살고 있었고 일은 하지 않았다. 곤충족들
이 기껏 하는 일이라고는 집을 짓는 일 뿐이었고 곤충족들
의 식량인 과일이 지천으로 널려 있었기 때문에 일을 할 필
요가 없는 것같았다. 그 대신 그들은 틈만 나면 새처럼 아
름다운 목소리로 노래를 불렀다.
이리노중위는 공주를 따라 강가를 산책하다가 풀밭에 누웠
다. 날씨는 따뜻했다. 공기는 쾌적했고 하늘에는 하얀 양털
구름이 무리를 지어 이동을 하고 있었다.
공주가 이리노중위 옆에 누워서 무엇이라고 소곤거렸으나
무슨 말인지 전혀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공주의 말은 사랑
의 밀어처럼 달콤하게 그의 귓전을 파고들고 있었다.
이리노중위는 눈을 감은 채 지구를 생각했고 장애란을 생
각했다. 유러너스 제국의 장교인 자신이 이런 곤충족들의
세계에서 하릴없이 시간을 보내는 것이 옳은 것인가 하는
생각도 했다.
부대로 돌아가야 했다.
부대로 돌아가 정찰대가 사튀로스족에게 몰살 당한 사실을
보고해야 했다. 살로메 위성에는 사튀로스족 뿐이 아니라
곤충족들도 살고 있었다. 그 사실들을 모두 유러너스 제국
에 보고해야 했다. 이리노중위는 그 생각을 하자 우울해 졌
다. 정찰대중 살아남은 사람이라고는 이리노중위 자신뿐이
었다.
게다가 비밀경찰로 알고 있던 바바라가 로봇인간이라는 생
각을 하자 이리노중위는 머릿속이 혼란했다. 유러너스 제국
의 지도자 마더 살로메의 정체도 의문투성이었다. 신비에
싸인 정체불명의 여자에게 수많은 유러너스 제국시민들이나
군인들이 충성을 바쳐야 한다는 사실이 납득이 되지 않았
다.
'마더 살로메는 우리를 지배하고 있는 것에 지나지 않아
'
마더 살로메는 안드로이드들을 이용해 시민들을 철저하게
통제하고 있었다. 마더타임과 러브타임 같은 제도는 오로지
시민들을 통제하기 위한 것에 지나지 않았다.
그런데 왜 나는 그 동안 한 번도 마더타임이나 러브타임에
대해서 의문을 가져보지 않았을까. 수많은 제국시민들은 어
찌하여 그러한 제도에 익숙한 채 저항을 하지 않았을까.
무엇이 그들을 로봇처럼 명령에 움직이도록 세뇌시킨 것일
까. 이리노중위는 여러 가지 의문이 꼬리를 물고 일어났으
나 해답을 찾을 수가 없었다.
날이 저물기 시작했다.
이리노중위는 공주를 따라 집으로 돌아왔다. 그의 집에는
불빛이 환했다. 곤충족들이 불을 밝혀 놓은 모양이었다.
이리노중위는 공주와 함께 과일로 식사를 했다.
공주는 이리노중위와 눈이 마주칠 때마다 얼굴을 붉혔다.
밤이 깊어 갔다. 이리노중위는 바닥에 누웠다. 공주도 날
개를 접고 그의 옆에 누웠다.
이리노중위는 쉽사리 잠이 오지 않았다. 낮에 잠을 잔 탓
인지도 알 수 없었다. 지난 며칠 동안 겪은 일들이 도 다시
주마등처럼 머릿속을 스쳐가고 스쳐왔다. 머나먼 우주에서
만난 외계인들, 사람을 잡아먹는 식인 외계인 사튀로스족,
날개를 가지고 있는 곤충족 그는 마치 동화책에 나오는 환
상의 세계를 여행하고 있는 기분이었다.
이리노중위는 그런 저런 생각을 하다가 잠이 들었다.
얼마나 잠을 잤을까. 이리노중위는 잠결인 듯 꿈결인 듯
누군가 그의 전신을 부드럽게 애무하는 듯한 감미로운 기분
을 느끼기 시작했다.
'누구지?'
이리노중위는 바바라를 생각했고 우위코를 생각했다. 장애
란의 아름다운 얼굴도 머릿속에 떠올라왔다. 그러다가 자신
이 곤충족의 도시에 와 있다는 생각을 하고 화들짝 놀라서
눈을 떴다.
"키키 "
그러자 곤충족의 공주가 그의 가슴 위에서 낮게 속삭였다.
공주의 몸이 깃털처럼 가벼웠다.
"왜 이래?"
이리노중위는 공주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어둠 속이라 뚜
렷이 보이지 않았으나 공주의 얼굴도 당황한 것같았다. 이
리노중위는 공주를 떼어내려고 했다. 무의식적으로 가슴을
밀어내는데 손바닥이 뭉클했다. 공주의 가슴을 만진 것이
다.
"안돼!"
이리노중위는 당황했으나 엄격한 표정으로 말했다. 왜 그
랬는지는 알 수 없었으나 곤충족과 섹스를 할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그러자 공주의 얼굴이 갑자기 차갑게 돌변했다.
공주는 이리노중위의 표정에서 싫어한다는 감정을 읽은 것
같았다. 이리노중위의 가슴에서 벌떡 일어나 무어라고 소리
를 버럭 질렀다.
이리노중위가 뺨을 얻어맞은 것은 다음 순간의 일이었다.
눈에서 불이 번쩍 하더니 뺨이 얼얼했다. 이리노중위는 어
처구니가 없었다. 공주는 이리노중위의 뺨을 때린 뒤에 재
빨리 날개짓을 하여 어둠 속으로 날아가 버렸다.
이리노중위는 우울했다. 공주가 날아간 곳에 하얀 깃털 하
나가 떨어져 있었다. 이리노중위는 깃털을 주워서 밖으로
날렸다. 깃털이 하늘거리고 나무밑으로 떨어졌다.
하늘에는 별들이 빼곡하게 들어차서 스멀거리고 있었다.
이리노중위는 바닥에 벌렁 누웠다. 문득 공주가 원하는대
로 잠자코 있을 걸 그랬다는 생각이 뇌리를 스쳤다. 그러나
공주는 곤충족이 아닌가. 인간이 아닌 곤충족과 섹스를 한
다는 것은 꺼림칙하기 짝이 없었다.
그는 기분이 야릇했다. 사위는 죽은 듯이 조용했다. 곤충
족들도 모두 잠이 들었는지 이따금 바람이 나뭇잎을 스치는
소리만 들리고 있었다. 그는 잠이 오지 않아 나무 위의 집
에서 내려와 산책을 하기 시작했다. 그는 강쪽으로 터벅터
벅 걸었다. 아무래도 내일은 부대를 찾아 돌아가야 할 것같
았다.
그는 지구인이었다. 지구에는 그가 사랑하는 여인 장애란
이 기다리고 있었다. 부대에 돌아가서 지구 근무를 요청하
여 장애란과 함께 평범하게 살아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때 어디선가 흐느껴 우는 듯한 소리가 들려왔다. 이리노
중위는 걸음을 멈췄다.
'공주가 울고 있다니 '
곤충족의 공주가 나무에 기대어 울고 있었다. 이리노중위
는 공주가 울고 있는 모습을 보고 가슴이 싸하게 저려왔다.
기이한 일이었다. 곤충족들에게도 눈물이 있다니
이리노중위는 공주의 뒤에 다가가서 어깨를 감싸 안았다.
그러자 공주가 더욱 크게 흐느껴 울었다.
"미안해."
이리노중위는 진심으로 말했다.
"키키 "
공주가 눈물에 젖은 얼굴을 들고 무어라고 말했다. 그러나
이리노중위는 전혀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그래도 공주는
손짓까지 섞어 열심히 말을 했고 이리노중위는 비로소 공주
가 말하는 뜻을 어렴풋이 이해할 수 있었다.
"아버지가 나를 당신에게 주었어요. 나는 이제 당신의 여
자예요. 우리 곤충족들은 내가 당신의 여자라는 걸 모두 알
고 있어요. 그런데 당신이 나를 거부하면 나는 수치스러워
살수가 없어요. 그것은 죽는 것만 못해요."
이리노중위가 정확하게 해석했는지는 알 수 없었으나 대충
그런 내용이었다.
"알겠어. 공주를 거부하지는 않겠어. 당신은 아름다운 곤
충족 여자이고 나는 당신을 좋아해."
이리노중위의 말을 알아들었는지 공주의 얼굴이 환하게 펴
졌다. 이리노중위는 공주를 번쩍 안고 집으로 향했다. 그러
자 공주가 고개를 흔들며 강쪽을 손짓했다.
"강으로 가고 싶다고?"
의외로 공주는 가벼웠다. 마치 하늘을 날고 있는 새를 안
은 것처럼 가벼웠다.
"키키 "
공주가 고개를 끄덕거렸다.
"알았어."
이리노중위는 강가로 가서 공주를 내려놓았다.
강은 잔잔하게 흐르고 있었다.
이리노중위는 공주와 함께 강둑의 망고나무 밑에 나란히
앉았다. 강둑의 풀숲은 벌써 밤이슬이 촉촉하게 내리고 있
었다. 이리노중위가 풀숲에 내리는 밤이슬 때문에 가볍게
몸을 떠는 시늉을 하자 공주가 부드러운 날개를 펴서 그의
몸을 덮어 주었다.
'이 날개는 여러 가지 용도로 쓰이는군.'
이리노중위는 공주의 날개가 따뜻하여 잠이 오기 시작했
다. 공주의 날개는 한없이 부드러우면서도 포근했다. 공주
의 가슴에서는 밍밍한 젖냄새도 희미하게 풍겼다.
얼마나 잠을 잤을까. 이리노중위는 잠결에 곤충족들의 날
카로운 비명소리를 듣고 벌떡 일어났다.
"키키 "
공주도 잠이 깼는지 이리노중위의 품속을 파고들며 몸을
떨고 있었다. 곤충족들의 비명소리는 그들의 도시 쪽에서
들리고 있었다.
"공주 무슨 일이야?"
이리노중위는 공포에 떨고있는 공주의 어깨를 흔들며 외쳤
다. 그러나 공주는 혼이 나갔는지 마구 비명을 지르며 몸을
떨고 있었다.
"공주! 소리 지르지 말고 잠자코 있어!"
이리노중위는 도시 쪽으로 달려가려고 했다. 그러나 공주
가 발작을 하는 것처럼 비명을 질러대서 꼼짝을 할 수가 없
었다. 이리노중위는 공주를 진정시키기 위해 공주의 뺨을
후려쳤다. 그러자 공주가 비명을 지르는 것을 멈추고 이리
노중위를 빤히 쳐다보았다.
"나를 믿고 따라와!"
이리노중위는 단호한 표정으로 말했다. 공주가 그때서야
눈물에 젖은 눈으로 고개를 끄덕거렸다. 공주는 그의 입모
양을 보고 의사를 알아듣는 것같았다. 이리노중위는 곤충족
들의 도시를 향해 서둘러 달려갔다. 그들의 도시는 이미 아
수라장이었다. 어둠속에서 크고 검은 물체가 휙휙거리고돌
아다니고 곤충족들의 비명소리가 그치지를 안았다.
"저것들은 사튀로스족이야!"
이리노중위는 등줄기가 오싹했다. 사튀로스족이 곤충족 도
시를 습격하고 있었다. 그들은 거대한 덩치에 어울리지 않
게 어둠 속을 휘젓고 돌아다니면서 닥치는대로 곤충족들을
잡아서 그물 속에 처넣고 있었다. 그물에 곤충족들을 넣는
것은 사튀로스족이 나중에 식량으로 사용하기 위해서였다.
곤충족의 저항은 미미했다. 그들도 칼과 창을 가지고 있었
으나 변변하게 싸우지도 못하고 있었다.
'무서운 놈들!'
이리노중위는 바짝 긴장한 채 주먹을 움켜쥐었다. 그때 그
의 옆에 있던 공주가 날카로운 비명을 질러댔다.
'맙소사!'
이리노중위가 깜짝 놀라 돌아보자 공주 앞에서 사튀로스족
이 곤충족을 산채로 잡아먹고 있었다. 이리노중위는 머리카
락이 빳빳하게 일어서는 것같았다. 공주의 비명소리를 들은
사튀로스족이 곤충족을 뜯어먹다가 말고 그들을 향해 달려
오고 있었다. 이리노중위는 가슴이 철렁했다. 사튀로스족의
입가에 피가 잔뜩 묻어 있었다.
"크흐흐흐 "
사튀로스족이 산채로 잡아먹던 곤충족을 내던지고 이리노
중위를 향해 창을 찔러댔다.
이리노중위는 재빨리 창을 피하고 사튀로스족의 얼굴을 주
먹으로 내질렀다. 그러자 사튀로스족이 창을 놓치면서 외마
디 비명을 질러댔다. 놈은 이리노중위의 일격을 맞고 휘청
거리고 있었다. 이리노중위는 사튀로스족이 놓친 창을 잡아
재빨리 놈의 복부를 힘껏 찔렀다. "크아악!"
사튀로스족이 복부를 움켜쥐고 또 다시 비명을 질러댔다.
이리노중위는 재빨리 창을 뽑아 이번엔 사튀로스족의 가슴
을 힘껏 찔렀다.
창이 사튀로스족의 가슴에 깊숙이 박혔다.
"컥!"
사튀로스족이 입에서 피화살을 내뿜으며 나동그라졌다. 이
리노중위의 창이 사튀로스족의 심장을 찌른 모양이었다.
"공주 괜찮아?"
이리노중위는 공포에 떨고있는 공주를 위로했다. 공주가
울고 있다가 재빨리 이리노중위의 가슴으로 달려들었다. 이
리노중위는 공주를 안아서 다독거려 주었다.
"잠시만 기다려! 내가 사튀로스족을 해치울께!"
공주가 불안한 눈빛으로 도리질을 했다. 공주의 눈빛이 공
포에 질려 있었다.
"공주! 우리는 싸워야 해! 언제까지나 사튀로스족의 식량
이 될 수는 없어!"
이리노중위는 엄격한 표정으로 말했다. 공주가 그때서야
풀죽은 모습으로 고개를 끄덕거렸다. 사튀로스족은 아직도
여기저기서 곤충족들을 사냥하고 있었다. 이리노중위는 사
튀로스족에게 빼앗은 창으로 사튀로스족들과 싸우기 시작했
다. 사튀로스족은 사납기만 했지 의외로 날쌔지는 않았다.
이리노중위가 사튀로스족들과 싸우기 시작하자 연약한 공
주도 창을 들고 사튀로스족들과 싸우기 시작했다.
'공주가 나를 사랑하고 있어!'
이리노중위는 공주의 그런 모습을 보고 가슴이 뭉클했다.
이리노중위는 공주를 보호하면서 사튀로스족들과 혈투를
벌였다. 사튀로스족은 어둠 속에서 날뛰고 있었기 때문에
쉽사리 찾아낼 수가 없었다. 그러나 곤충족들의 비명소리가
들리는 곳에는 어김없이 사튀로스족들이 있었다.
이내 날이 번하게 밝아오기 시작했다.
사튀로스족은 그때서야 사로잡은 곤충족들을 끌고 어디론
가 사라져버렸다. 이리노중위는 기진맥진하여 숲에 쓰러졌
다. 사튀로스족들과 싸우느라고 여기저기 상처가 생겼으나
잠을 자지 못해 눈이 저절로 감겼다. 공주는 그가 잠을 자
고 있는 동안에 그의 상처를 깨끗하게 닦아주었다.
이리노중위가 잠을 자고 일어나자 공주가 과일을 가지고
왔다. 이리노중위는 과일로 아침식사를 했다. 이리노중위는
아침식사를 마치자 곤충족의 도시를 살펴보았다.
곤충족들의 피해는 엄청나게 컸다.
수많은 곤충족들이 사튀로스족에게 잡아먹히거나 그물에
사로잡혀 끌려가 버린 것이다. 도시의 바깥 숲에는 사튀로
스족들이 먹어치운 곤충족들의 시체와 뼈가 여기저기 뒹굴
고 있었다.
'사튀로스족은 곤충족을 주식으로 삼고 있어!'
이리노중위는 곤충족들이 쌓아 놓은 성루로 올라갔다. 성
루에서 밖을 내다보자 저 멀리 마의 숲이 보였다. 나무스소
령을 따라 정찰을 하기 위해 통과해 온 마의 숲이었다. 그
러나 나무스소령이 죽었으므로 마의 숲을 통과할 방법이 없
었다.
이리노중위가 마의 숲을 쳐다보자 공주가 슬픈 표정을 지
었다.
'내가 떠날까봐 걱정을 하는군.'
이리노중위는 성루에 앉아서 쉬었다. 공주도 그의 옆에 앉
았다.
공주는 그의 옆에 앉아서 여러 가지 얘기를 했다. 공주의
입에서 나오는 말은 '키키' 라는 두 마디뿐이었으나 손짓으
로 설명을 곁들였기 때문에 그 두 마디에도 무수한 표현이
담겨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공주는 주로 자신들의 종족에 대해서 얘기를 했다. 자신들
은 나비 종류에 진화한 종족이며 날개가 점점 퇴화하고 있
다고 했다. 아울러 자신들을 주식으로 삼고 있는 사튀로스
족으로 인해 공포에 떨고 있다고 말했다.
곤충족은 유전적으로 힘이 약했다. 그들이 나비 종류에서
진화했기 때문이었다.
공주는 그들이 종족끼리 모여 살고 있으며 자신의 아버지
가 곤충족의 왕이라고 말했다. 이리노중위가 짐작했던 대로
였다. 그러나 그녀의 아버지는 곤충족을 잡아먹는 사튀로스
족으로 인해 늘 불안해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내가 이들을 도와주어야 해.'
이리노중위는 지난밤의 일을 직접 보았기 때문에 곤충족이
측은하게 생각되었다.
'당신은 어디에서 왔어요?'
공주가 이리노중위를 쳐다보고 물었다. 손짓으로 물어보는
것이었으나 이리노중위는 충분히 공주의 의사를 알아들을
수 있었다.
'나는 지구에서 왔어. 공주가 살고 있는 이 위성에서 아주
멀리 떨어져 있어.'
이리노중위는 지구에 대해서 공주에게 설명을 해주었다.
지구인들이 원숭이 인간이라는 유인원에서 진화를 했고 5백
만년에 걸쳐 진화를 하여 살로메 위성까지 오게 되었다고
말했다. 공주가 이리노중위의 말을 알아들었는지 어쨌는지
는 알 수 없었다. 공주는 이리노중위가 말을 할 때면 눈을
반짝이며 귀를 기울였다. 이리노중위는 공주의 그런 모습이
참으로 아름답다고 생각했다. 지구에 장애란이 없었다면 이
리노중위는 곤충족의 나라에서 공주와 함께 살고 싶을 정도
였다.
이리노중위는 공주에게 하란이라는 이름을 붙여 주었다.
공주가 고대 중국의 하란 지방에서 서식하는 나비처럼 예뻤
기 때문이었다.
"지구에 여자도 있나요?"
이번엔 하란공주가 여자에 대해서 물었다. 이리노중위는
고개를 끄덕거렸다.
'지구에 당신이 사랑하는 사람이 있어요?'
이리노중위는 고개를 저었다. 그 질문을 하는 하란공주의
표정이 너무나 진지했기 대문에 사실대로 말을 할 수가 없
었다.
'나는 당신을 사랑해요.'
하란공주가 수줍은 표정으로 고백을 했다.
'나도 공주를 좋아해.'
그러자 하란공주가 이리노중위의 가슴에 다소곳이 안겨왔
다. 이리노중위는 하란공주를 가슴에 안고 등을 토닥거려
주었다.
제 2 권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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