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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영화,리뷰,

에덴에 그를 보낸다

by Casey,Riley 2023. 6.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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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에덴에 그를 보낸다 >>                 이순원
                                                              
 소 제 목 : 그날 그는 여러번의 망설임 끝에
     그날 그는 여러번의 망설임 끝에 소설가 이득지에게 전화를 
    걸었다. 일부러 나온 전철역  앞 공중전화 부스에서였다. 집
    보다는,그리고 집 앞  골목이거나 부근의 공중전화보다는 그
    래도 사람들의 통행이 많은  전철역의 공중전화가 나을 것이
    라고 생각했다. 

     그는 아직  사진으로말고는 이득지의 얼굴을 본  적이 없었
    다. 그의 소설 <<압구정동>>을 읽은 것도 그것이 나온 지 이
    태나 지난 다음인,불과 며칠  전의 일이었다. 그런데도 그는 
    첫 통신부터 만약의 일을  생각하고 있었다. 그에게 거는 전
    화 한  통이 앞으로 어떤 일들을  불러일으킬지 그것은 아직 
    아무도 모르는 일이었다. 때로는  절대로 일어날 수 없는 일 
    같은 만약의 일이 더  끔찍한 현실이 될 수도 있었다.여러번 
    전화를 망설인 것도 바로 그런 이유에서였다.

     그밖에 그에 대해  알고 있는 것도 책  날개에 사진과 함께 
    나오는 몇 줄짜리 약력을  읽은 것이 전부였다. 그가 어디에 
    살며,또 <<압구정동>> 이후엔 어떤 작품을 썼는지,그것은 그
    에게 중요한  일이 아니었다.  지금 그에게 중요한  건 오직 
    <<압구정동>>을 쓴 소설가  이득지와의 통화였다. 전화 번호
    도 뒤늦게,책을 낸 출판사를 통해 알았다. 수첩에 적은 일곱 
    자리의 전화 번호도 하나하나 긴장 속에 눌렀다.

     그러나 그날,그가  들을 수 있었던 건  일시에 그의 긴장을 
    풀게 하는 다음과 같은 내용의 자동 응답 메모리뿐이었다.

     남자:안녕하십니까? 여기는 이득지,

     여자:(곧바로 상냥한 목소리로)정은주

     남자:의 집입니다. 저희는 지금 여행중이어서 전화를 받을 
    수 없습니다. 전화를 거신 분 중 특히 시사문화의 김이형 부
    장님께 전합니다. 전에 말씀하시던  소설 연재 건에 대해 결
    정을 못 내리고 짐부터 꾸리게 되었습니다. 여행중에라도 꼭 
    연락을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또 소설가  박형우,구인서 씨 
    등 <전망없는 시대의 전망> 동인에게 전합니다. 사전 연락없
    이 갑자기  여행을 떠나게 되어 이번  금요일 모임에 참석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재미있고 유익한 시간되길 바랍니다.
     여자:그리고 내 동생 혜주에게  전합니다. (앞의 말은 방송 
    원고를 읽듯  여기서부터는 마주 앉아 이야기를  하듯) 얘기 
    못하고 가서  미안하다. 훈이는 방학이라 강릉  할머니 댁에 
    가 있어. 집에는 갔다와서 한  번 찾아 갈께. 엄마한테도 그
    렇게 얘기해 줘.

     남자:저희들의 여행 기간은 15일부터 18일까지입니다. 용건
    이 있으신 분은 잠시후 삐이  소리가 나면 메시지를 남겨 주
    시기 바랍니다. 돌아오는 대로 연락을 드리겠습니다.

     남자와 여자가 함께:감사합니다. 안녕히 계십시오.   


     그리고 나서 삐이,하고 메시지를 입력하라는 기계음이 들렸
    다. 그는 아무 메시지도 남기지 않은 채 손으로 훅 스위치를 
    눌렀다. 자동 응답 장치가  아주 낯선 것은 아니었지만 조금
    은  멍해지는 기분이었다.그런  가운데,이것도 <<압구정동>> 
    작가의 한 모습인가 하는 한편 오히려 그의 부재가 다행스럽
    다는 생각도 들었다. 만약  그가 전화를 받았다 해도 그대로 
    훅 스위치를 눌렀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아직 마음 속에 더 
  
뮌 준비와 그에 대한 연구가 필요했다.

     처음 <<압구정동>>을 읽고 났을  때만 해도 그는 그에게 전
    화를 걸게 되리라곤   생각하지 않았다. 아니,그런 예감이거
    나 비슷한 생각  같은 것도 없었다. 아직  그는 그런 식으로 
    자기가 읽은  책에 대하여 어느 작가에게도  전화를 건 적이 
    없었다.더러 그렇게 전화를 거는 독자들도 있겠지만 그건 그
    의 방식도,또 그가 이해할 수 있는 방식인 것도 아니었다.

     그러다 가슴 밑바닥에서  끓어오르는 어떤 적의거나 분노와
    도 같은 결심으로 그에게  전화를 걸어야겠다고 마음먹은 건 
    어제 오후,막 배달되어온 석간  신문  보고 나서였다. 신문
    에 실린 한 박스 기사를 읽으며 그는 자기도 모르게 '이것들 
    정말 다 죽여버리고 말아?'  하는 생각이 들었고,그 연상 작
    용으로 금방 뒷장을 덮은  그의 소설 <<압구정동>>을 생각해
    냈던 것이었다. 절대 소설이  먼저 그를 끓어오르게 했던 게 
    아니었다. 소설은  단지 그에게 하나의 어떤  암시만 주었을 
    뿐이었다.

     테러. 그것도 얼굴 없는 테러리스트의......

     그러면 압구정동은 다시  소설 속의 '압구정동'처럼 끓어오
    를 것이며,사회적 반향 역시 소설 속의 그것 낮 부풀어오를 
    것이다.  

     그는 그에게 직접 그것을 묻고 싶었다. 

     나는 그들을 죽이고 싶다. 당신은 어떻게 생각하는가.

     16일 오후 네 시의 일이었다.

     이득지는 서울에 없었다.

     18일 오후 늦게나 통화가 가능할 것 같았다.

     17,18일.그에 대한 연구.그의 소설에 대한 연구.
     <이틀간 아침부터 저녁까지 도서관에 나가 챙긴 자료들>

     이득지(得志,得智?) 그러나 어느 지면에나 한글로만 씀. 흔
    히 쓰는 이름자들이 아닌 것으로 보아 아마 필명인 듯.

     1957년 강릉에서 출생.(어떤  곳엔 1958년으로 나오기도 하
    고,또 어떤 곳엔 출생지가  명주로 나오기도 하나 이 부분에 
    대해 본인이 따로 밝힌  것은 없음. '1957년 강릉'으로 쓰는 
    경우가 거의 절대적이나 우연히 본, 그 지방의 지방신문사가 
    발행하는 월간 향토지엔 '1957년 명주'로 나옴.)

 
      K대 경영학과 졸업(어느 문예지에  대담 형식으로 밝힌 자
    전적 연보에 의하면 고등학교를  졸업한 후 대학을 졸업하기
    까지 군복무 기간을 포함하여  꼭 10년이 걸림. 처음부터 전
    공 쪽의 공부보다는 소설 쪽에 뜻을 둔 듯 '1학년 때부터 매
    학기마다 출석도 많이 미달되었을 테고,또 내일 당장 시험이
    라고 해도 써지지도 않는  원고지를 잡고 낑낑거리느라고 학
    교 공부는 자연히 소홀해지고'하는  부분이 보임. 아마 결혼
    도 재학중에 한 듯 '동기들은  뭐 벌써 졸업을 했고,이제 후
    배들도 다 졸업하는데 졸업도 안 되고 하니까 그럼 결혼이라
    도 하자,뭐 그런 생각으로...... 그러니까 아내도 그땐 학교
    를 다녔는데,이런 남자 내가  구제 안 해주면 누가 구제하나 
    싶었는지,아니면 그래,나도 공부하기 싫은데 같이 망하고 말
    자 하는 생각이었는지 잘 다니던 학교도 그만두고......')

     연보에 의하면  1988년 '신춘문예 연 10년패  후 조금은 꽉 
    찬 나이'로 등단.(중간에 한  번 '그해 J일보 신춘문예의 한 
    심사위원으로부터 다른 문예지에 작품 발표를 통한 <구제 등
    단>의 제의가  있었으나 사람 구제라면 몰라도  그렇게 되면 
    작품까지 구제받는다는 기분이 싫어' 응하지 않았다고 함.)
     이후 <그  여름의 꽃게>,<다시는 빵을 핥지  않기 위하여>,
    <아버지의 수레>,<낙타는 무릎이 약하다>,<그대 양진을 아는
    가>,<얼굴>,<혜산 가는길> 등  중.단편과 장편소설 <<우리들
    의 석기시대>>를 잇달아  발표하면서 '90년대의 가장 폭넓은 
    잠재적 가능성을 가진 작가'로 주목을 받던 중 이제까지와는 
    전혀 다른 형식의 장편소설 <<압구정동>> 발표.

     '압구정동'의 불행한  이웃,혹은 불행한 벗들에게......

     이 작품 속에서 나는 '압구정동'을 서울 어느 한 동네의 공
    간적 지명을 넘어 이 땅  자본 계급의 상징적 대명사로 쓰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그것은 실제 행정 구역으로서 서울 강남
    의 압구정동일 수도 있고,8학군으로  상징되는 그 인근의 다
    른 여러 동네를 포함할 수도 있고,넓게는 강북의 신문로이거
    나 평창동,한남동,더 멀리는 부산의 달맞이고개일 수도 있습
    니다.

     그곳이 어디거나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이 소설 속의 '압구
    정동'은 당신들이 누 맙“ 대해서나 기를 쓰고 인정받길 강
    변하는 '이 땅 자본 계급의  귀족적 상징'이 아닌 '이 땅 졸
    부들의 끝 없는 욕망과 타락의 전시장,아니 똥통같이 왜곡된 
    한국 자본주의가 미덕처럼  내세우는 환락의 별칭적 대명사'
    라는 점입니다. 동시에 그것은 당신들의 욕망과 타락의 가장 
    민감한 '성감대'이기도 합니다.

      물론 '압구정동'의,그런 욕망을  매개로 한 부패와 타락을 
    더없는 집단적 긍지로 가꾸어  나가는 당신들은 전혀 그것을 
    인정하고 싶지 않겠지만 이 소설을 또 하나의 정신적 자식으
    로 내놓는 나의 진단과 해석은 그렇습니다.

                   -<<압구정동>>에 실린 작가의 말 중에서-

    

   ......그리고 우리가 주목할 젊은 작가로 이득지가 있다.  그의 작
  품에서 우리는 그의  잠재적 역량,즉 어떤 소재를 다루거나  감칠맛
  나고 때깔나게 가공해내는 소설화 솜씨를 목도하게 되고  이 작가의 
  문학적 역량이 참으로 크구나 하는 인상을 받게 되는  것이다. 이는 
  그가 소설 양식  자체에 익숙해 있는 작가임을 뜻하거니와,만약  적
  절한 시기에 자신의 작가적 역량을 폭발적으로 개화시켜  내지 못한
  다면 오히려  한때 그저 솜씨있는  작가로만 기억되고 말  위험성을 
  동시에 안고 있는 대로......최근 그는  <<압구정동>>을 발표하면서 
  또한번 우리의 주목을 끌고 있는 것이다.

   무엇보다 그의 주제적  관심은 분단 문제에서 광주  문제까지,민족 
  문제에서 지역 문제까지,노조 문제에서 군대  문제까지,그리고 최근 
  자신이  태어나고 성장한  큰령(대관령)의 농경사회로부터  '압구정
  동'으로 상징되는  한국 천민자본주의의 구조적 모순에  이르기까지 
  폭넓게 걸쳐 있다.

    -평론가 한인기의 <90년대 작가들의 사회적 대응> 중에서-  

   -요즘 광고를 봐도 X세대니 무슨 세대니 하는 신세대  이야기가 많
  이 나오고,대중음악 쪽도 그렇고 문학에서도 90년대  일군의 작가를 
  '신세대 작가'라고 말하는데 여기에 대해 작가 본인의  생각은 어떤
  지요.

   이득지:직접적으로 말하자면  이득지 당신도  신세대 작가가  아니
  냐,하는 얘긴데 80년대  후반에 등단해 90년대에 들어 조금은  주목
  을 받으며  활동을 한다는 점에서  흔히 말하는 '90년대  작가'라는 
  말은 충분히 이해해요.  저 스스로도 어느 정도는 그렇게  생각하고 
  있고 말이죠. 그렇지만  신세대 작가라는 말에 대해서는 생각이  좀

  달라요. 우선 그 말의 개념도 모호하고......어느  세대,어느 연대에
  서나 문단에 새롭게 진입한 세대의 작가들을 그렇게  불러왔다면 이
  해하겠는데 단순히 그런  의미인 것 같지도 않고...... 웬지 그  말 
  속에 90년대  문학에서 나타나고 있거나  현재 논란의 대상이  되고 
  있는 어떤 부정적인  시대 징후의 혐의 같은 것을 씌우려는  의도가 
  보인다 이거죠.  제가 제 작품의 주제적  관심을 여러 분야에  두고 
  있고 그 주제에 따라 소설 형식도 다양하게 가져가다 보니  같은 90
  년대 작가들 사이에서도  '전방위 작가'니 '올라운드'니 하는  말도 
  나오는데, 그런 점은 제가 지금까지 작업한 대로  인정하겠어요. 또 
  그런 요소가  신세대 작가적  요소다,하면 할말은  없겠지만,밥그릇 
  수가 모든 걸 말하는 건 아니지만 나이로 본다 해도  이젠 기성세대
  의 중간 자리에 해당되고,또 제 작품의 일부 요소와  주제적 관심의 
  다양성만 가지고 그렇게 말한다면 받아들이기가 좀  곤란합니다. 그
  건 신세대 작가의 공통된 성향이 아니라 제 개인의 성향이고  제 작
  품의 성향이니까......
       
             -<문학세계> 최근호에 실린 대담 중 -

   그외 지난  몇 년 간의 문예지들을  뒤져 <<압구정동>>과 그가  쓴 
  작품들에 대한 여러 자료들을 수집.




 소 제 목 : 여전히 저희들의 여행기간은

     18일 오후 일곱 시,두번째 통화 시도.

     16일 첫 통화 때 들었던 것과 같은 내용의 메모리.

     19일 오후 다섯 시,세번째 통화 시도.
          오후 여덟 시,네번째 통화 시도. 

     여전히, 저희들의  여행 기간은  15일부터 18일까지입니다. 
    감사합니다. 안녕히 계십시오. 

     20일 오후 네 시,다섯번째 통화 시도. 
          오후 일곱 시,여섯번째 통화 시도.

     같은 내용의  메모리. 한  주일이 지나도  금요일은 언제나 
    <이번 금요일>이고,저희들의 여행 기간은 15일부터 18일까지
    입니다. 아직도 그는 먼 어제로의 여행중. 
      
     21일 오후 일곱 시,일곱번째 통화 시도.

     처음으로 통화중 신호 울림.

     순간적으로 그는 이제야 그가 돌아왔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오 분  후 다시 마음 속의  말들을 정리해 여덟번째 
    통화를 시도했을 때,그는 집으로  돌아온 것이 아니었다. 조
    금 전 떨어졌던 통화중 신호는  그 시간 누군가 먼저 그에게 
    전화를 걸고 있었던 때문인 듯 다시 네 번의 발신음 끝에,여
    행에서 돌아온 이득지가 아닌 '안녕하십니까 여기는 이득지,
    정은주......'가 나오고,메시지를 입력하라는 기계음이 들렸
    다.

     그는 그대로 수화기를 잡은  채 조금은 화난 듯한 목소리로 
    마음 속으로 준비했던 말과는  다른 말들을 빠르게 입력하기 
    시작했다.

     "안녕하십니까? 이것은 이득지  선생님에게 보내는 나의 첫 
    메시지입니다. 누군지 궁금하시겠지만  당분간 내 이름을 티
    이(T)라고 하겠습니다.나는 선생님과  통화하기 위하여 16일
    부터 21일까지 여덟 번  전화를 걸었습니다. 당신은 지금 어
    디에 있습니까? 나는 선생님에게  꼭 해야 할 말과 물어봐야 
    할 말이 있습니다. 가능한  빨리 돌아오시길 바랍니다. 자세
    한 이야기는 다시 하도록 하겠습니다." 

     메시지의 입력을  마친 다음 서둘러 그는  부스의 유리문을 
    열고 바깥으로 나왔다.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전화를 끊었을 
    때보다는 그래도 조금은  후련해지는 기분이었다. 뒤에 차례
    를 기다리고 섰던 여자가 부스 안으로 들어가다 말고 물끄러
    미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그도 몇 발짝  걸음을 옮기다 
    부스 쪽을 뒤돌아보았다. 그는  자신이 지금 많이 흥분해 있
    다고 생각했다. 

     대답하라.

     나는 그들을 죽이고 싶다.

     이득지,당신은 어떻게 생각하는가.



 소 제 목 : 언제나 그랫듯이

     그가 자신의 그런 첫  메시지를 입력하던 시간 이득지는 아
    내와 함께 '설국(雪國)'의 어느 산장에 있었다.

     언제나 그랬듯  그는 움직이는 여행보다 일단  움직이고 난 
    다음엔 한 군데 숨어지내듯 격리되어 있는 여행을 좋아했다. 
     어린 시절  숨박꼭질을 해도 그는 장롱  속이라든가 아무도 
    찾을 수 없는 헛간 같은 곳 한구석에 꼭꼭 숨어 놀이조차 잊
    은 채 그대로 잠이 들어버리곤 했다. 그러다 눈을 뜨고 밖으
    로 나오면 숨박꼭질은 이미 끝나 있기 십상이고,때로는 어슴
    어슴 땅거미가 내리기도 했다.

     아마 다른 사람들은 모를  것이다.그때의 그 쓸쓸하고 허전
    한 풍경을. 아이들이 모두  돌아간 동네 어귀 가득 노을이라
    도 밀려들면 왠지 혼자 와락  울고 싶어지고 말던 그때의 심
    정을. 그래서 눈물에 물들던 그 노을의 빛깔을. 

     너무 깊이 숨으면 안 돼.

     숨박꼭질을 할 때마다 아이들이 말했다.

     깊이 안 숨어. 

     아니,깊이 숨어도 좋아. 그렇지만 술래가 못 찾겠다고 나오
    라고 하면 금방 나올 수 있는 데 숨어.

     그러나 그런 덴 깊이 숨을  데가 없었다. 그는 다시 숨박꼭
    질을 할  때마다 더 깊이깊이 숨곤했다.  어둑어둑 땅거미가 
    내리거나 두 눈 가득  노을이 밀려들 때까지.그래서 일찍 내
    린 저녁 이슬 같은 눈물이 그 노을에 물들 때까지. 

     어른이 되어 하는 여행도 그랬다. 떠나면 처음 도착한 그곳 
    한 군데에만 있었고,두고온 모든 일과 사람들을 잊었다. 

     어쩌면 여행도 그에겐 혼자의 어깨에 땅거미를 얹고 노을을 
    바라보던 어린 시절의 숨박꼭질 같은 것인지 몰랐다.

     떠나기 전 자동 응답 장치의 메모리를 녹음할 때,거기에 담
    아야 할 얘기들을 다 담으면서 유독 행선지만은 밝히지 않고 
    떠난 것도 그래서였는지 모른다.

     다들 한 번 나를 찾아봐라. 어디 숨었는지도 모르게 깊이깊
    이 숨은 나를.

     어쩌다 한 번쯤은  서울 일이 궁금할 것  같은데 그런 것도 
    없었다. 떠나기  전엔 이것저것 걱정을 하지만  떠나고 나선 
    금방 모든  것을 잊었다. <시사문화> 김이형  주간과의 전화 
    약속도 그랬다. 

     평소 성격도 그랬지만,한계령 산  허리를 터널처럼 깎아 돌
    아내려가는 긴 고갯길을 넘어서자 거기에 바로 설국(雪國)이 
    있어 더욱 세상 바깥의 일들을 잊고 있던 것인지 모른다.

     그곳 설악산에 도착해 제일  처음 그가 떠올린 세상 바깥의 
    일도 가와바다 야스야리의 소설 <<설국>>의 첫머리였다.

     '터널을 지나자 거기에 설국이 있었다.'    



 소 제 목 : 눈속에서 사랑을 하고
     그가 가 있는 일 주일 내내 설국엔 눈이 내렸다. 
     거기에 30년을 살고 있다는  설국의 산장 주인도 근래에 드
    문 폭설이라고 했다
     
    예정보다 여행이 길어졌던 것도 한  번 떠나면 금방 떠난 곳
    의 모든 걸 잊고 마는  그의 성격도 성격이지만 그곳 설국의 
    폭설 때문이었다.
     
    처음 나흘 동안은 어디에로도 나가는 길조차 뚫리지 않았고,
    나머지 사흘 동안은 끊임없는 제설 작업으로 겨우 길은 뚫렸
    지만 산처럼 쌓인 눈이 그의 발길을 놓아주지 않았다.

     외부와의 유일한 끈인  전화도 닷새간이나 불통되었다.그러
    나 전화를 걸 수 있었다고 해도 그는 걸지 않았을 것이다.

     일 주일을 눈 속에서 눈사람처럼 눈에 묻혀 눈을 바라보며,
    눈 속에서  잠이 깨고,눈 속에서 숨을  숨을 쉬고,눈 속에서 
    밥을 먹고,눈  속에서 차를 마시고,눈 속에서  길을 걷고,눈 
    속에서 말을 하고,눈 속에서 불을 밝히고......

     눈 속에서  옷을 벗고,눈 속에서 사랑을  나누고,눈 속에서 
    잠이 들고,그러다 눈같이 깊은 꿈을 꾸곤 했다.

     "폭설이라는 말만 들었지 정말 굉장해요."

     서울에서 태어나 서울에서만 자란 아내는 그곳에 있는 내내 
    입버릇처럼 굉장하다는 말만 반복했다.

     "우린 눈이  발목까지만 내려도 세상이  새하얗게 덮혔다고 
    말했어요."

     "그런데 여기 와 보니까 어때?"

     "상상을 초월해요.  굉장하다는 것말고는.  정말 굉장해요. 
    우리가 오던 다음날 내린 눈은 정말......"

     "그래. 닥터 지바고에 나오는  눈도 그렇지는 않았을 거야. 
    콧수염을 기르고 바깥에 서 있었다면 그보다 더 꽁꽁 얼어붙
    었을 거라구."

     "그리고 그건 영화지만 이건 바로 우리 눈 앞의 현실이잖아
    요. 꼭 하나를 집어낸다면  누가 쓴 시인지는 기억나지 않지
    만 <꿈에 본  폭설>이라는 시 정도에요. 이런  게 바로 꿈에 
    보는 폭설이 아닐까 싶기도 하고.  내가 꿈 속에 여기 와 있
    는 게 아니면 꿈을 꾸다 여기에 와 있는 것처럼 말이에요"

     "둘 다일 수도 있지.이러다  서울에 돌아가면 지금 우리 눈 
    앞의 현실이 꿈이 되는 거고."   

     "그런 생각하면 나도 정말 돌아가고 싶지 않아요."

    
 돌아가면 그 꿈에서 깨어나고 싶지 않을 테고 말이
    지."

     "당신은 여기 와서 뭘 생각했는데요?"

     "설국말고는 아무 것도. 터널을 지나자 거기에 설국이 있었
    다는......"

     "가와바다 야스나리요?"

     "그래."

     "그럼 여기 와서도 소설 생각을 한 거에요?"

     "소설 생각이 아니라 우리가 나온 세상 바깥이 바로 설국이
    니까."


 소 제 목 : 그러니까 더돌아가고 싶지않네
     "그러니까 더 돌아가고 싶지 않네요. 눈도 눈이지만 돌아가
    면 당신은 또  책상에만 앉아 있을 테고 난  또 그런 당신의 
    등만 바라보고 사는 여자가  될 테고 말이죠. 그렇지만 내일
    은 돌아가요. 그동안 당신 일도 많이 밀렸잖아요."
     
    그것 역시 여행을 떠났을 때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바깥 세
    상 일을 먼저 걱정했던  것도 아내였다.눈 속에서 아내는 처
    음으로 눈 이야기가 아닌 다른 이야기를 했다.

     "그것봐.나보고 소설 얘기를 한다 해놓고 진짜 소설 얘기는 
    당신이 하잖아."

     "그거야 내가 안 하면 당신은  끝까지 안 할 사람이니까 그
    렇죠. 그런데 이러다 우리 서울에 가면 제일 먼저 하는 일이 
    뭘까요?"

     "가방 푸는 거."

     "그거말고요."

     "그럼 전화를 거는 일이던가."

     "그거야 여기서도 할 수 있잖아요."

     "그래도 아마 전화부터 먼저 걸게 되겠지. 김이형 부장한테
    도 걸어야 하고,또 나 없는  동안 무슨 일이 있었나 하고 박
    형우한테도 걸어볼 테고."

     "참,그 연재는 어떻게 할 생각인데요?"

     "서울 가면서 생각하지 뭐. 할  것 같으면 하고 못할 것 같
    으면 못하는 거고."

     "그러지 말고 지금 걸어봐요. 어제부터 개통됐다니까. 우리 
    전화기엔 또 무슨 메시지가 담겼는지도 알아보고요."

     "이 시간에?"

     "그럼 우리 전화기만이라도요."

     그는 눈 속에 다이얼을  돌렸다.지금으로선 그것이 설국 세
    상 바깥과의 유일한 통로였다.  그는 서울의 지역 번호를 포
    함해 연달아 아홉 자리 전화 번호를 눌렀다.

     처음 여행을  떠나기 전 녹음해 두었던  대로 '여기는 이득
    지,정은주......'가 나왔다.  '저희들은 지금 여행중'이라고 
    했지만 그 소리가 마치 자신들말고  또 한 쌍의 이득지와 정
    은주가 서울에 남아 이쪽의  이득지와 정은주의 연락을 기다
    리고 있는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키게 했다.

     그러다 '저희들의  여행 기간은  15일부터 18일까지입니다' 
    하는 것을 듣고 나서야 그는  자신이 설국에 너무 오래 꼭꼭 
    숨어 있었다는  것을 알았다.아마 그동안 집으로  전화를 건 
    술래들은 모두 지쳐버리고 말았을 것이다.

     너무 깊이 숨으면 안 돼. 

     숨박꼭질을 할 때마다 아이들이 말했다.

     깊이 안 숨어. 

     아니,깊이 숨어도 좋아. 그렇지만 술래가 못 찾겠다고 나오
    라고 하면 금방 나올 수 있는 데 숨어.

     메시지 음이 들린 다음 그는 #버튼을 누르고 자신의 비밀번
    호 '일사천리(1472)'를 눌렀다.그리고 다시 2번 버튼을 누르
    자 잠시 후 거기에 입력된 술래들의 메시지들이 흘러나왔다.



 소 제 목 : 나야, 언니.혜주
     --나야,언니. 혜주. 대체 어디로  간 거야? 여행을 가면 간
    다고 얘기나 하고 가든가 하지,누가 따라갈까봐 그렇게 얘기
    도 않고  가는 거야? 어디로 가는지도  안 밝혀놓고. 아무튼 
    잘 다녀와. 형부하고 좋은 시간 많이 갖고......

     --득지 선생? 나 시사문화 김이형입니다. 전화 주신다니 좋
    은 소식 기다리겠습니다.  그리고 즐겁게 여행하시고 건강하
    게 다녀오십시오. 그렇지만 득지 선생이 여기 녹음 되어있는 
    내 목소리를 듣기 전에 내가  먼저 득지 선생의 반가운 소리
    를 듣게 될 것 같은데 돌아오면 소주나 한잔합시다.

     --삐이,하고 침묵.

     --어,나 형우다. 그래,잘 갔다 와라. 어디 가는지는 모르지
    만 잘 놀고 오고. 돌아올 때쯤해서 또 전화 하마.

     --삐이,하고 침묵.

     --두 번 더 연속적으로 삐이,하고 침묵.

     --우윤젭니다. 득지형,누구는 말이야 애들 입학시험 때문에 
    방학에도 학교에  나가고, 누구는 세월 좋게  여행하고 말이
    지. 오면 전화 좀 해 줘요. 18일이면 채점 때문에 아마 늦게
    까지도 학교에 있을 거에요. 여행 잘 다녀오고요.

     --응,나  인서. 지금   연속극  하냐?  출연  이득지,정은
    주...... 돌아오면 우리 집에 전화 좀 해라.

     --두 번 연속적으로 삐이,하고 침묵.

     --할머니,지금 말하면  돼요?  알았어요.  그런데,아빠. 왜 
    아까부터 엄마하고 똑 같은  말만 해요? 할머니,아빠가 말을 
    안 해요. 내가 왜 똑  같은 말만 하느냐고 묻는데도요. 이상
    하다. 할머니,아빠 엄마 지금  집에 없는 거에요? 그럼 어디 
    갔어요? 

     --세 번 연속적 삐이 하고 침묵.    

     --안녕하세요.사모님하고  이름이 같은  <문학세계> 정은주 
    기잡니다.여행 가셔도 우리 원고는 잘 되고 있는 거죠? 돌아
    오시면 19일이나 20일쯤 다시 전화를 드릴 께요.너무 신나겠
    다,겨울 여행.....

     --삐이,하고 침묵.

     --어,나 재룡이.우윤제 전화 번호 좀 물어볼려고 그랬는데,
    넌 꼭 그럴 때마다  '이득지,정은주'냐? 돌아오면 내 사무실
    로 전화하라우.

     그럼 나머지 메시지는 다음회에 <콜렉트 콜>



 소 제 목 : 저도 정은주에요
     (어제의 메시지에 이어)

     --야,아직도 안 왔냐? 형우다.

     --연속 적으로 두 번 삐이,하고 침묵.
     
     --우윤젭니다. 특별히 남길  메시지가 없다는 메시지말고는 
    남길 메시지가 없어서 그냥 끊을께요.

     --연속적으로 세 번 삐이,하고 침묵.

     --득지 선생,나 시사문화 김이형이오. 연락 준다고 하곤 아
    직 안 돌아오면 우리 다음 달 책 못 만들어요. 일단 득지 선
    생 원고 들어가는 걸로 잡아놨는데 돌아오는대로 전화 좀 부
    탁합니다.

     --연속적으로 두 번 삐이, 하고 침묵.

     --나야. 언니,혜주. 오면 전화  좀 해 줘. 엄마 걱정하시잖
    아. 그리고  훈이한테서 전화가 왔어. 엄마  아빠 어디 갔냐
    구. 꼭 전화해.

     --어,나 인서. 다른 게 아니고,22일,그러니까 내일 모레 민
    문사에서 망년회를 한다고 다 오란다. 그럼 거기서 보자구. 

     --삐이,하고 침묵.

     --저도 정은주에요.어제도 전화를 했더니 안 오셨더라구요. 
    우리는 원고만 오면  되는데요,선생님 전화도 같이 기다릴께
    요.  

     --야! 15일부터 18일? 임마,오늘이 21일이다. 21일.

     그리고,그의 메시지가 나왔다.

     --안녕하십니까? 이것은 이득지 선생님에게 보내는 나의 첫 
    메시지입니다. 누군지 궁금하시겠지만  당분간 내 이름을 티
    이(T)라고 하겠습니다. 나는 선생님과 통화하기 위하여 16일
    부터 21일까지 여덟 번  전화를 걸었습니다. 당신은 지금 어
    디에 있습니까?  가능한 빨리 돌아오시길  바랍니다. 자세한 
    이야기는 다시 하도록 하겠습니다.

     조금은 화난 듯한 목소리였다.

     이어서 후배 평론가 우윤제와  처제 혜주의 목소리가 한 번 
    더 담겨 있긴 했지만 무어라고 말했는지조차  제대로 듣지 못
    했다. 그의 온 신경이 그의 목소리에만 집중되어 있었다. 



 소 제 목 : 서울에서 무슨일 있어요?
     "서울에 무슨 일 있어요?"

     전화를 걸다 누구에게  호되게 당하기라도 한 듯  그가 수화기를 든 
    채 잠시 멍한 표정을 짓자 옆에 섰던 아내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물었
    다.

     "아냐,아무 것도."

     "그런데 왜 그래요? 갑자기......"

     "무서운 술래가 나타났어."

     그는 수화기를  내려놓았다. 아까 <저희들의 여행  기간은 15일부터 
    18일까지입니다> 하는 소리를 들을 땐 그것을 지우고 새 메시지를 입
    력해야겠다는 생각을 했었다. 저희들의 여행 기간은 15일부터 23일까
    지입니다. 그는 최소한 이틀은 더 있어야겠다고 생각했다. 설국의 눈
    이 그를 붙잡고 있었다. 조금 전까지는 그랬다. 그러나 지금은 더 있
    을 마음도 새 메시지를 입력시킬 마음도 없었다. 

     "술래요?"

     "그래,술래. 우리집 전화에."

     "시사문화에서 뭐라고 그래요?"

     "아니,다른 사람."

     아내는 그가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다는 얼굴로 방금 그가 내려놓
    은 전화기를 들어올렸다.

     "나둬. 독자 전화니까."

     "독자가 왜요?"

     "그냥,나를 찾는다고."

     그래도 아내는 서울 집 전화번호를  꼭꼭 눌러 거기에 입력된 <일사
    천리> 안의 메시지를 호출했다.

     "당신이 들어서 좋을 내용이 아니야."

     "그러니까 더 들어봐야지요."

     첫 메시지는 언제 들어도  공처럼 튀어오르는 처제의 목소리였다.그
    러다 거의 끝부분 그의 메시지에  이르러선 아내의 얼굴도 순간 긴장
    되는 것 같았다.

     그는 이제 짐을 꾸려야겠다고 생각했다.

     이것은 이득지 선생님께 보내는 나의 첫 메시지입니다. 당신은 지금 
    어디에 있습니까? 

     단번에 그토록 강력한 여운을 남기는 메시지라면  십중팔구 <<압구정
    동>>에 대한 이야기일 거라고 생각했다.

     그는 어떤 사람인가.

     여덟 번이나 내게 전화를 걸었다는 익명의 티이(T)는......



 소 제 목 : 압구정동의 쓰레기들
     전에도 그 작품에 대한 많은 항의 전화가 있었다. 그때에도 
    아내는 항의 전화 때문에  자기가 노이로제에 걸리겠다고 말
    했었다. 이태 전의 일이었다.

     그는 작품 속에서 회사  전무의 성적 노리개로 전락하던 끝
    에 압구정동으로  나온 한 여자 아이를  중심으로 미국 딸네 
    집에 갔다가 우연한 기회에 포르노 필름을 본 다음 성도착증
    에 걸린  노파,남자로 태어나 여자로 살아가는  강남 환락가 
    게이 출신의 무희,남자와의 동침을 예사로 아는 양재동 호화 
    빌라의 방탕한 여대생,부동산 투기로 떼돈을 번 다음 호스트
    바를 무시로 드나드는  까만 가죽치마의 여인,도박과 마약과 
    섹스를 인생의 유일한 낙으로 알고 살아가는 재벌 2세 등 거
    듭되는 시점 이동을 통해 매주 금요일마다 얼굴 없는 테러리
    스트로 하여금 그들을 연속 살해케 함으로써 <압구정동>으로 
    상징되는 우리 시대 천민  자본주의의 향락적 부패와 타락을 
    <테러>로써 경고했다.

     책을 냈을 때 첫 반응을  보인 건 동료 소설가들과 평론가,
    각 신문사 문학 담당기자들이었다. 그들은 작품이 안고 있는 
    흠결에 대한 지적 릿 <압구정동식> 욕망에 대한 사회과학적 
    분석과 그  경고 장치로서의 테러에 여러  의미를 부여했다. 
    그리고 한동안 그런 호의적 단평과 기사들이 각 신문의 문화
    면을 도배했다.

     그리고 이어 터진 것이 주요 인물들의 성적 일탈 행위에 대
    한 일부 독자들의 천박한  호기심과 <압구정동> 사람들의 무
    차별한 항의 전화였다.

     전화를 받는 사람이 그든 그의 아내든 가리지 않고 대뜸 욕
    부터 하는  사람이 있었고,또 그에게 이것저것  따져 묻다가 
    결국엔 욕설로  전화를 끝내는 사람들도 있었다.  작품을 잘 
    읽었다는 내용의 전화도 있었지만 그건 그렇게 많지 않았다.

     좋은 내용이든 싫은 내용이든  대체로 그들의 전화는 세 가
    지였다.

     강 이쪽 사람들의 전화는 작품에 대한 무조건 지지였다. 아
    마 그들은 작품을 읽는 동안 얼굴 없는 테러리스트를 자신의 
    분신처럼 생각했을지도 몰랐다. 그런 놈들은 더 죽여합니다. 
    전화에 대고 직접 그렇게  말하던 독자도 있었다. 그때 그는 
    강 이쪽과 저쪽이 얼마나 먼가를 느꼈다.

     두번째 전화는  나도 여기 압구정동에 살지만  이곳  정말 
    그렇다,그러나 나는 아니다,하는  사람들로 그러면서 은근히 
    그들은 <나는 아니다>보다 <나도  여기에 산다>을 더 내세우
    고 싶어 했다. 직접 만나 이야기를 하는 사람들 중에서도 그
    런 사람이 많았다.

     그리고 나머지 하나는 왜  남의 동네를 욕하느냐,여기 살아
    봤느냐,살아보지도 못했으면서 뭘  안다고 떠드느냐,하고 다
    짜고짜 욕설을 퍼붓는 사람들의 전화였다.

     그러나 아무리 지독한  전화도 이번처럼 여행중이거나 부재
    중에까지 메시지를 남기는 경우는 없었다.

     당분  내 이름을 티이(T)라고 하겠습니다.

     그것도 여덟 번씩이나 전화를 걸어......



 소 제 목 : 달빛아래 서서
     "너무 신경쓰지 말아요."

     전화기를 내려놓고 나서 아내가 말했다.

     "신경 안 써."

     그는 창문 너머로 달빛 아래의 눈을 바라보았다.저 눈을 보
    고 감동했고,저 눈을 보고  사흘이나 귀가를 늦추고 있었다. 
    그리고 그 사이 그가 그런 메시지를 입력했다.

     "전에도 그런 전화 많았잖아요."

     신경 쓰지 말라면서 오히려 그  일에 더 신경을 쓰는 건 아
    내였다.단지 서로 내색하지 않을 뿐이었다.
     "많은 정도가 아니었지,그땐......"

     "그래서 우리 생활의 여유도 있어졌고요."

     "나가서 맥주라도 한잔할까?"

     그는 팔을 돌려 아내의 어깨를 잡았다.

     "아뇨.그냥 여기서 눈을 바라보는 게 더 좋아요. 그런데 우
    리 언제 돌아가죠?"

     "아무 때나 돌아가고 싶을 때."

     그는 의도적으로 목소리를 밝게 하면서 아내의 어깨를 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그럼,내일 돌아가요."

     아내는 창밖을 바라보며 말했다.

     "이 눈을 두고?"

     그는 자기라도 여유 있는  모습을 보여야 한다고 생각했다.
    돌아갈 때 돌아가더라도 그 일 때문에 돌아가는 게 아니라  
    걸 아내에게 보여주고 싶었다.

     "갑자기 여기 와 있는 게 불안한 마음이 들어서 그래요."

     결국 이야기는 다시 원점으로 돌아와 버리고 말았다. 

     "왠지 우리가 안 돌아가면 그 사람이 이리로 올 것 같은 생
    각도 들고요. 아니,지금쯤 오고 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밖에 나가는 것도 그렇고요."

     아까 그도 그의 메시지를  들으며 그런 생각을 했었다.여기
    에 더 있을 마음과 새  메시지를 입력시킬 마음이 사라진 것
    도 바로 그래서였다.

     "당신 말대로 그런 전화는 전에도 많았잖아."

     "그때도 참 불안했어요.이러다 누군가 오히려 소설 속의 일
    처럼 당신을 테러하는 게 아닌가 하고......"

     "독자가 아닐 수도 있잖아.항의 전화가 아닐 수도 있고."

     "그러니까 더 불안하죠.항의 전화가 아니면 무슨 전활까 하
    고."

      다음날 그들은 설국을 나왔다.

     <<설국>> 식의 표현대로라면,설국의  눈 터널을 빠져나오자 
    거기에 세상이 있었다.

     언제 또 우리가 그런 눈을 볼 수가 있을까.

     갑자기 나 없는 동안에  생긴 세상의 모든 일들이 궁금해지
    기 시작했다.  



 소 제 목 : 정말 크리스마스가 다가오네
     그가 서울로 돌아온 건 22일 오후 네 시의 일이었다.

     집으로 돌아와 그가  제일 먼저 한 일은  가방을 푸는 일도 
    전화를 거는 일도 아니었다.  그는 그간 우편함에 쌓인 우편
    물과 현관 앞에 어지럽게 널러져 있는 신문들을 챙겼다.

     왜 그런 생각을 했을까.

     아파트 출입구를 들어서다 다른 땐 무심히 지나치던 우편함
    을 바라보았고,거기에 가득 쌓여있는 우편물을 보는 순간 그 
    속에 그의 편지도 들어있을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양
    손에 짐을 들었으므로 일단 그것을  옮기고 난 다음 다시 아
    래로 내려와 그것들을 챙겨  올라갔던 것이었다. 옆에 한 손
    이 빈 아내가 있었지만  그는 그것을 직접 챙기고 싶었다.전
    화 번호를 아는 사람이 주소라고 모를 리 없었다.

     그러나 다행히 그가 보낸 편지 같은 것은 없었다.

     설국을 떠나 서울로 돌아오는 동안에도 내내 자동차 안에서 
    그는 그 메시지의 주인공을 생각했다.

     "운전하면서 다른 생각하지 말아요."

     아내의 말도 운전을 잘 하라는 얘기가 아니라 그 사람에 대
    한 생각을 하지 말라는 뜻이었다. 그러나 그 말은 아내 역시
    도 그에 대해 신경을 쓰고 있다는 얘기가 아니겠는가.

     양평에 도착해 늦은 점심을 먹으면서 전화로 오토폰을 연결
    해 보일러를 가동시켜놓은 때문이지 방은 일 주일 넘게 집을 
    비운 것 같지 않게 따듯했다. 그들이 돌아오기 전 눈군가 그
    곳에 일 주일 간 머물다 그들이 오는 시간에 맞추어 다시 집
    을 내 준 것 같았다.

     "나한테 온 편지는 없어요?"

     아내의 그런 말도 그에겐  그 사람에게서 온 편지는 없느냐
    는 말로 들렸다.

     "없어."

     그러면서 그는 아내에게 온  몇 장의 크리스마스 카드와 백
    화점 청구서를 건네주었다.

     "그러고 보니 정말 크리스마스가 다가오네."

     설국에 가  있는 동안 그것조차 잊고  있었다. 신문도 보지 
    않았고 라디오도  듣지 않았고 텔레비전도 보지  않았다. 본 
    것은 오직 꿈 속 같은 설국의 눈뿐이었다.

     그는 소파 쪽으로 다가가  조심스럽게 자동 응답 장치에 메
    모리된 나머지 메시지를 들었다. 

     설국에서 들었던  것에 이어 다시 처제의  목소리가 나오고 
    친구 박형우의 목소리가 나왔다.  더 이상 입력된 그의 메시
    지는 없었다.

     그러나 그는 첫 메시지를 들었던 지난밤 설국에서부터 지금 
    이곳까지 보이지 않는 얼굴로 그들의 옆에 있었다.

     이득지 선생,이제 내 전화를 받으러 오셨습니까? 



 소 제 목 : 어둠속에 벨을 울리는 그대는?
     그러나 그의 전화는 하루가 지나고 다음날 저녁에 왔다.
     오던 날부터  모든 전화는 이득지가  받았다.아내는 전화기 
    옆에 있다가도 벨이 울리면 그에게 빨리 와 전화를 받으라고 
    손짓했다.

     그날 오후,집에 도착해 그는 자기에게 전화를 할 만한 사람
    들에게 모두 먼저 전화를  걸었다. 긴 여행도 여행이지만 그
    에 대해서도 차라리 그게  편했다. 벨이 울리면 수화기를 들
    어올리기 전까지는 모든 전화가  그의 전화처럼 생각될 것이
    었다.

     그는 우선 아이가 내려가 있는 강릉 본가에 전화를 걸어 어
    머니와 아이와  통화를 한 다음 순서대로  처갓집과 <시사문
    화> 김이형  부장,소설가 박형우,구인서,유재룡,윤호녕,평론
    가 우윤제,<문학세계> 정은주 기자에게 그간 설국에 가서 본 
    눈 이야기와 원고 이야기를 했다.

     구인서는 시내에 일이 있어 나갔다고 했다.그러나 누구에게
    도 <어떤 이상한 사람>이  남긴 메시지에 대해서는 이야기하
    지 않았다. 그리고 저녁을  해결하기 위해 아파트 단지 안의 
    중국집에 전화를 걸었다.

     또 오던 날부터 지금까지  밖에서 걸려온 전화는 그들이 돌
    아왔다는 소식을 전해 들은 처제와 아이,아파트 경비실,구인
    서,비디오 가게,우윤제의 전화였다.

     벨이 울릴 때마다 아내도  긴장하고 그도 긴장했다. 아내는 
    평소엔 그렇게 철저하게 하지  않던 문단속을 낮에도 현관문
    의 보조 자물쇠까지  잠그었다.뒤늦게 전화를 건 처제한테도 
    중간에 전화를 바꾸어 넌 왜  하필 이때 전화를 걸어 사람을 
    놀라게 하느냐고 신경질을 냈다.

     그러다 저녁을 먹기  위해 막 식탁에 앉으려  할 때 그들의 
    동작에 맞추듯 거실 쪽에 놓아둔 전화벨이 길  울렸다.아내
    는 다시 겁 먹은 얼굴로 그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이건 또 누구야. 남 밥 먹을 때......"

     그는 아내에게 단순히 그것이 귀찮아서라는 듯 조금은 과장
    된 몸짓을 해보이고  전화기 쪽으로 다가갔다.두 대를 한 선
    으로 연결한 거실 벽면의 전화기와 소파 앞 탁자의 전화기가 
    교대로 쉴틈없이 번갈아가며 울렸다.

     "여보세요."

     그는 가능한 나직하면서도 묵직한 소리로 말했다.

     "......"

     "여보세요. 이득집니다."

     "......"

     "여보세요.여보세요......"

     "......"

     "여보세요. 미스터 티이(T) ?......"

     "......그렇습니다."  
                             


 소 제 목 : 제가 바로 소리치는 자입니다
     "안녕하십니까? 제가 바로 이득집니다."

     "예. 잘 알고 있습니다."

     "미스터 티이(T)가 남긴 메시지는  잘 들었습니다. 없는 동
    안 여러 번 전화를 하셨더군요."

     "그렇습니다. 선생님의 <<압구정동>>을 읽고 전화를 했습니
    다. 제 메시지를 듣고 놀라지는 않으셨는지요?"

     같은 사람의 목소리라도 화났을  때와 화나지 않았을 땐 또 
    전혀 딴판이었다.  목소리로만 짐작한다면  그때는 숨가쁘게 
    표적물을 쫓는 헌터의 모습이었고,지금은 그렇게 쫓은 그 표
    적물을 주의깊게 탐색하고 있는 듯한 모습이었다.

     그러나 그런 그를  탐색하고 있는 또 한  사람이 있다는 걸 
    그는 모를 것이다. 옆에  다가온 아내가 가만히 손가락을 내
    밀어 녹음 버튼을 눌렀다. 그는 그에게 가능한 많은 말을 시
    켜야겠다고 생각했다.

     "어제 오후 늦게  돌아와 전화를 기다렸습니다.메시지를 들
    은 건 그저께였고요."

     "어제는  다른 일이  있었습니다. 여행은  잘 다녀오셨습니
    까?"

     "예. 염려 덕분에......"

     "어딜 다녀오셨는지 물어봐도 되겠습니까?

     "예.설국에 가 있었습니다. 설악산이오."

     "그래서 돌아오지 못하셨군요. 그곳에 눈이 많이 왔다는 얘
    기를 들었습니다. 저는  그런지도 모르고......덕분에 그 기
    간 동안 선생님에 대해 많은 연구를 했습니다."

     "눈 때문은 아니었습니다. 여행을 해도 나는 그렇게 숨어지
    내듯 한 자리에 있는 걸 좋아합니다.특별한 이유는 없지만."

     "그건 저하고 비슷하군요. 저도 중고등학교 때 수학여행 말
    고는 한 번 떠나 여러 군데를 돌아다니는 여행은 잘 하지 않
    습니다."

     "그런데 무슨 일로 전화를 하셨는지요? "

     "전에도 이런 전화 많이 받으셨습니까?"

     "예. 항의 전화는 많이......"

     "왠지 그런  느낌이 들었습니다. 책을 읽고  나서가 아니라 
    지금 전화를 걸면서.여유 있고 차분하시고......"

     "누구에게나 그렇지요. 특히 미스터 티이에게는......"

     "이제 본론을 얘기해야겠군요.  16일에 첫 전화를 걸었습니
    다. <<압구정동>>을 읽은 건 13일이었고요. 선생님은 여행중
    에도 신문을 보시는지요?"

     "신문이오?"

     "예.신문 말입니다."

     거기서 그는 일단 말을 끊었다.


 소 제 목 : 프라이드가 감히 끼어들기를 해?
     "나는 그런 걸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여행을 떠납니다."

     대답을 하면서도 그는 이야기의 진행이 뭔가 이상하게 돌아
    간다고 생각했다.고작 그걸 묻기  위해 여덟 번 전화를 걸고 
    그런 메시지를 남긴 건 아닐 것이었다. 

     "그럼 돌아오신 다음에도 여행 기간 중의 신문은 안 읽으십
    니까?"

     "챙겨 읽죠. 떠날 땐  그런 것들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떠나
    지만 그러다  막상 돌아오면 또 가장  궁금해지는 것이 내가 
    없는 동안 생긴 세상 일이니까."     

     "그럼 여행을 떠나던 날인 15일자 신문은 읽으셨는지요?"

     "조간은 아마 읽고 갔을 겁니다."

     "조간엔 나지 않았고 석간 대한일보는요?"

     "거기에 나에  대한 무슨 기사라도 났습니까?  아니면 책에 
    대한 기사라든가."

     "아닙니다."

     "아니라면......"

     "<압구정동> 기사이긴  한데 책이 아니라  책에서 선생님이 
    말한 그곳 한국 천민자본주의의  현주소에 대한 기사가 났습
    니다. 15일자 대한일보 사회면의  박스 기사에 말입니다. 그
    걸 보고 화가 나서 전화를 했습니다."

     "무슨 얘긴지 모르겠군요.기사  뼁逾 모르겠고......"

     "여행을 다녀오신 다음에도 여행 기간중의 신문을 읽으신다
    니 혹 다른  신문에서도 보셨는지 모르겠습니다.단발 기사가 
    아니라 계속 뒷얘기가 이어지던 기사였으니까......"

     "얘기를 해 보세요.무슨 내용의 기사인지."

     "선생님은 무슨 자동차를 타고 다니십니까?"

     "그것도 이야기를 해야 합니까?"

     "아니,그렇지는 않습니다.그 기사 속의 사건이 자동차 때문
    에 생긴 일이라서 그냥 물어봤습니다."

     "캐피탈 92년 형입니다. 색깔은 자주색이고,운전 솜씨가 워
    낙 뛰어나다 보니 남 안 쓰는 오토매틱을 쓰고 있고,안전 팩
    도 따로 부착하고......"

     "운전에 대한 얘기는  문예중앙 93년 봄호에서 읽었습니다. 
    일곱 번 떨어지고 여덟 번만에 면허를 땄다고......"

     "이왕 얘기하는 김에 자동차 번호도 마저 얘기할까요?"

     "아닙니다.저는 제가 본 신문  기사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겁
    니다. 그날  신문에 프라이드가 감히 버릇없이  자기들이 탄 
    그랜저 앞에 끼어든다고 그  프라이드의 운전자를 집단 폭행
    한 해외  유학파 오렌지족 얘기가 났습니다.혹시  그런 기사 
    못 보셨습니까?"



 소 제 목 : 그 오렌지족은 유학파?
     "봤습니다. 어제 돌아와서. 누구집  아들이다 하면 알 만한 
    집 아들들이던데,껌장사로 돈 번 어느 대기업 부회장 아들도 
    있고,전 중앙정보부장 손자도 있고. 방학이 되자 부모한테는 
    귀국한다는 얘기도 않고 들어와 여자 친구 집에 머물면서 그
    랬다던데......"

     "그래서 선생님께 전화를  했는데,하도 안 받으시길래 무례
    한 줄 알면서도 메시지를 남겼습니다."

     그쯤에서 그는 조금 전 아내가 걸어 놓았던 녹음 장치를 풀
    었다. 아직 자신의 이름을 익명의 티이(T)라고 하는 것이 마
    음  걸리기는  했지만 생각했던 것보다  작가한테는 무례한 
    내용의 전화도 겁낼 내용의 전화도 아니었다.

     왜 그래요? 하고 입모양으로  묻는 아내에게 그는 손바닥으
    로 송화기의 캡을 막고  아무 일도 아니라고 말했다. 그러자 
    아내는 그럼  왜 자동차 얘기를 해요?  하고 빠르게 물었다. 
    캐피탈,자주색,92년 형,오토매틱,안전  팩,자동차 번호도 마
    저 얘기할까요? 아내는 그 얘기를 이쪽에서 말하는 신상명세
    의 일부로 들은 모양이었다.

     "아니라니까 그러네."

     그래도 아내는 믿을 수 없 募 얼굴을 했다.

     그는 송화기의 캡을 막았던 손바닥을 떼었다.

     "미안합니다.밖에 누가 왔나 해서......"

     "손님이 오셨으면 제가 나중에 다시 걸겠습니다."

     "아닙니다. 사람이 온 게. 마저 이야기를 하죠."

     "제가 선생님의 <<압구정동>>을 읽은 건 그 기사가 나기 이
    틀 전이었습니다.책을 읽을 땐  마음 속으로 어느 정도 통쾌
    했었는데,다음다음날 신문을 보고  나선 전혀 그게 아니었습
    니다. 정말 우리가 사는 세상이 그런 세상인가 하고."

     "그런 셈이죠.극과 극이  공존하는...... 아니,공존이 아니
    라 어느 한쪽이 다른  한쪽을 정신적으로나 물질적으로 끊임
    없이 억압하고 지배하는 거죠."

     "저는 그 사람들한테도 화가  났지만 선생님한테도 많이 화
    가 났습니다."

     "그래요?"

     "선생님의 소설을 보고 나서 얼마  안 돼 그런 기사를 봐서
    이기도 하겠지만,그 기사를 보고 나서 선생님의 소설에 대해 
    많은 생각을 했습니다."

     "어떤 생각들을 했는데요?"

     "압구정동에 대한  테러 얘기 때문이겠지만  작품 자체로만 
    읽으면 재미있고  또 통쾌하기도 한데 신문에  난 그런 일과 
    연관지어 생각하면 읽고 나서도 괜히 화가 나고 개운하지 못
    합니다. 소설은 현실과는 전혀 상관없는 그냥 이야기에 불과
    한 것인가 하는 생각도 들고, 또 선생님한테 사기를 당한 느
    낌도 들고 그랬습니다."

     "지금 사기라고 했습니까?"

     "그렇습니다."

     그는 짧고 분명한 어조로 말했다.


 소 제 목 : 그들은 길에서 우리를 테러했네
     "선생님은 소설로 그들을 테러했지만 그들은 아무런 상처도 
    입지 않습니다. 아니,조금 전  선생님이 하신 말씀대로 오히
    려 정신적으로나 물질적으로  우리를 테러하고 있는 거지요. 
    이제는 많은 사람들이 보는 길바닥에서까지 말입니다."

     "그래서 제 소설이 사기라는 겁니까?"

     "현실과는  정  반대라는   얘깁니다.  지나치게  허구적이
    고.....정작 테러는 그들이 하는데 소설 속에서는 이쪽이 하
    고요."

     "그렇지 않습니다. 소설은  허구의 이야기이지만 현실의 한 
    부분이고 현실의 한 반영입니다. 신문이 사실로 진실을 말한
    다면 소설은 허구로 진실을  말하는 것이지요. 소설 속에 나
    오는 오렌지족 여대생과 재벌  2세가 실제 인물인 것은 아니
    지만 신문에서 보듯 실제 그런  인물과 또 같은 수준의 해외 
    유학파 오렌지족이 소설에 나오는  것과 똑같은 행동을 하고 
    있는 것 아닙니까? 소설은  우리 사회의 그런 실상을 이야기
    하고 또 우리 사회의 그런 오염도를 재는 리트머스 시험지인 
    것이지요.테러는 단지 그런 그들의 부패와 타락에 대한 비판
    과 경고의 의미인 거구요."

     "선생님의 말씀은 그래서 선생님의 소설도 나름대로 사회적 
    기능을 다하고 있다는 말씀인가요?"

     선생님의 소설도라니?

     아무리 독자라지만 그 말에  그는 불끈 불쾌한 감정이 솟아
    올랐다.

     "분명하게 말씀드리자면  그건 내 소설도가  아니라 제대로 
    된 작가가 쓴 제대로 된 소설 모두가 그렇습니다. 이제 아시
    겠습니까?"

     그는 <내  소설도>와 반복하여 말한 <제대로>에  힘을 주어 
    말했다.

     "물론 선생님이야  그렇게 말씀하시겠지요.  그렇지만 이번 
    신문에 난  사건에서 보듯 그런 소설이  무슨 사회적 기능을 
    발휘하겠느냐는 것입니다. 선생님의  말씀대로 제대로 된 소
    설가인 선생님은 제대로 된  소설 속의 테러를 통해 <압구정
    동>으로 상징되는 이땅  천민자본주의의 총체적 부패와 타락
    을 경고했지만,그 소설을  쓰기 전이나 이후나 <압구정동>의 
    무엇이 달라졌느냐는 얘깁니다.정작 제대로 된 건 아무 것도 
    없지 않습니까?"

     "그럼 지금 미스터 T의  얘기는 그것까지도 작가인 내가 책
    임져야  한다는 얘기입니까?  그들의 그런  잘못된 인성까지
    도?"

     "아닙니다. 처음 선생님의 작품을  읽을 땐 그런 생각이 들
    지 않았는데 나중에 그런 기사를  보고 나니까 그 소설에 대
    해서도 다시 생각하게 되더라는 얘기를 하는 것입니다. 선생
    님은 그들의 실상을 수면 위로 올리고,비록 소설 속에서일망
    정 극단적인 방법으로 그들을 비판하고 경고했지만,결과적으
    로 달라진 건 아무 것도 없다는 겁니다. 아니,오히려 그들의 
    그릇된 명성만 올려준 것이 아니냐는 거지요."




 소 제 목 : 우리는 매일 30cm씩 압구정동으로 간다
     "내가 말입니까?"

     "전적으로 그랬다는 건 아니지만  결과적으로 일조를 한 건 
    틀림없는 일 아니겠습니까?  선생님이 아무리 부인한다 하더
    라도 그 소설로  사람들은 압구정동의 모르는 부분까지,그리
    고 그 모르는 곳의 힘이 뭐라는 것까지 알게 되었고요. 그렇
    다고 테러말고는  다른 대안이  나와 있는  것도 아니잖습니
    까?"   

     "소설은 대안을 제시하는 일이 아닙니다. 그건 정치와 정책
    이 할 일이지."

     "그럼 소설이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입니까?

     "굳이 찾자면 그런 우리 사회의 실상에 대한 문제의 제기겠
    지요. 소설은  소설이 할 수 있는  방법과 한계가 있습니다. 
    독자로 하여금 작품을 읽고 그 문제에 대하여 함께 생각하고 
    느끼게 하는 것 그 이상 무슨 방법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그럼 선생님은 <<압구정동>>을 쓰며  그 몫을 충분히 했다
    고 생각하십니까?"

     "적어도 나는 그
 생각하고 있습니다."

     "제가 선생님의 소설이 <압구정동>의 명성에 일조했다는 것
    은......  

     "아까부터 명성, 명성하는데 대체 내가 무얼 어떻게 그들의 
    명성  일조를 했다는 것입니까? 그들의 실상을 파헤치고 테
    러를 하는 것으로 말입니까?"

     그는 자신도 모르게 목소리를 높이기 시작했다. 걱정스러운 
    얼굴로 옆에 섰던 아내가 다시 녹음 버튼을 눌렀다.

     "물론 자발적인  일조는 아니었겠지요.  선생님이 선생님의 
    소설에서 표현한 대로 그  똥통처럼 거대하고 추악한 압구정
    동의 블랙홀이 선생님의 비판과  경고 역시 압구정동 식으로 
    흡수해버린 것이니까. 그래서  애초의 비판과 경고는 설자리
    를 잃고 단지 상업적으로  성공한 껍데기로만 남은 선생님의 
    작품 역시 우리 같은 사람들로선 쉽게 다가갈 수 없는 그 욕
    망의 찌꺼기에 대한 천박한 호기심만 자극하는 거고 말입니
    다."    

     "마치 여러 날 준비하고 연습한 말 같군요."

     "그렇습니다.선생님이 서울에 안  계시는 동안...... 또 소
    설에 쓴 것처럼 우리로 하여금 그것이 잘못되고 헛된 꿈이라
    는 걸 알면서도 매일 30cm씩 압구정동으로 다가가는 꿈을 
    꾸게 하고 말입니다."

     "미스터 T의 얘기는 나보고 소설을 쓸 게 아니라 실제 그곳
    에 가  왜 진짜 테러를  하지 않았느 캅 항의하는  것 같군
    요." 

     "그럴지도 모르죠."

     그는 다시 분명한 어조로 대답했다.

     이득지는 잠시 말문이 막혔다.

    그렇다고 이쪽에서  먼저 전화를 끊을 수도  없는 일이었다. 
    그러면 그는 다시 더 거친 말로 전화를 걸어올 것이었다.


 소 제 목 : <비상구>엔 비상구가 없다
     "이것 봐요.  미스터 T. 아무리 전화로  주고받는 말이라도 
    할 말이 따로 있는 것 아닙니까?"

     "선생님이 어떤 생각을 하고 어떤  말을 하든 저는 지금 신
    문의 그 일로 무척 화가 나 있는 상태입니다."

     "나도 지금 미스터  T와 이야기를 하는 동안  무척 화가 나 
    있는 상태에요. 단지 상업적으로 성공한 껍데기라니......."

     "선생님의 <<압구정동>> 말입니다."

     "정말 그렇게 말해도 되는 겁니까?"

     "예. 상업적으로는. 그걸 발표하시던 해 선생님께선 자동차
    도 새로 사신 것  같고,이제 여행도 마음놓고 다니실 여유를 
    가지게 되셨고...... 아닌가요?"

     그건 정말 뜻밖의 공격이었다.

     그는 조금 전 자동차 이야기를 한 걸 후회했다.

     "더 이야기를 해볼까요?"

     "해보세요. 어디 마음놓고......"

     "지난 16일  처음 전화를 걸고 나서  제 나름대로 선생님과 
    선생님 소설에 대해서 많은 연구를 했습니다. 도서관에 나가 
    선생님이 작품을 발표하던 무렵  신문과 잡지들도 챙겨 보고
    요. 선생님이 <<압구정동>>을 발표하신 후 그 전에는 일상생
    활에서 잘 쓰지 않던 <비상구>라는 말이 유행을 타기 시작했
    습니다. 그 전에 <블룩크린으로 가는 마지막 비상구>라는 영
    화가 국내에 들어와 상영되긴 했지만 제가 보기에 그 영화는 
    <비상구>라는 말을 일상생활에서까지  유행어로 만들지 못했
    습니다. 비상구란  고작 건물 출입문이거나  복도,계단 같은 
    데나 써 붙이는 말인  것으로 생각했던 거지요. 문학적 표현
    으로서도 거의 쓰이지 않았고요."

     "그런데요?"

     "선생님의 소설 <<압구정동>>이 그 <비상구>라는 말을 새로
    운 사회 유행어로 만들어 냈던 것입니다. 제가 보고 들은 것
    만도 몇 가지가 됩니다. 그 지역 국회의원 한 사람은 지역구 
    주민들을 상대로 <압구정동엔 비상구가 있다>는 강연을 하고 
    또 그런 제목으로 어느 여성지에 글을 실었습니다. 또 그 무
    렵 외국 유명 잡지와 라이센스를 맺어 국내에서 같은 제목으
    로 한국판을 창간한 어느 패션 잡지도 패션에 관한 한 <압구
    정동엔 비상구가 있다>는 특집  기사를 실었습니다. 또 어느 
    여자대학에서 가진  여성문제 심포지엄의  제목도 <성폭행엔 
    비상구가 없다>였습니다. 그런 식으로 신문에서도 <청와대엔 
    비상구가 없다>거나 <지하철엔  비상구가 없다> 하는 식으로 
    그 말을  유행어처럼 쓰고,하다못해 <쥐구멍엔  비상구가 없
    다>는 제목의 코메디까지 나왔습니다.그리고 최근엔 어느 신
    문사가 발행하는  시사 주간지에 연재되는  소설 제목까지도 
    선생님 소설의 제목을 따 <평양의 비상구>는 어쩌구 하고 있
    습니다."

     "그래서 그게 어쨌다는 겁니까?"



 소 제 목 : 영화에도 테러리스트가 나옵니다
     "어쨌다는 것이 아니라 한 작가의  작품이 만들어 낼 수 있
    는 최고의 유행어를 그  책이 만들어 냈다는 것입니다. 문학
    판에서까지 <문학의 비상구>니 <소설의 비상구>니 하는 말이 
    나올 정도라면 말입니다. 그러나  그 정도에서 그친 것이 아
    닙니다. 압구정동에 가면  <여기는 압구정동 비상구>라는 술
    집이 생겼고,또 선생님의 작품이 영화로 만들어지던 무렵 같
    은 시기에 비슷한 영화  다섯 개가 만들어졌습니다. <압구정
    동 러브  호텔 비상구>니 뭐니 하면서  어떤 영화는 <압구정
    동>이란 말이 들어간 다른  제목을 쓰고 포스터에 그 제목보
    다 큰 글씨로 <비상구>라고 써넣었습니다. 또 선생님은 선생
    님 나름대로 영화 제작사와 계약을 하며 당시로선 국내 최고
    의 원작료를 받았던 걸로 알고 있습니다."

     "그것도 잘못이라는 얘기입니까?  그건 내 지적 재산권입니
    다. 그리고 지금 미스터 T가 말하는 것 중엔 내가 알고 있는 
    것도 있지만 모르고 있던 부분도 많아요."

     그는 다소 짜증섞인 말로 대답했다.

     "그것까지 선생님  잘못이라고는 말하지  않았습니다. 뭐가 
    한번 어떻다 하면 그쪽으로  우루루 몰리는 사람들의 생리가 
    문제인 거지.  다시 말해 선생님의 소설은  압구정동의 그런 
    거품 위를 떠다니며  또다른 거품을 만들어냈다는 것이지요. 
    압구정동의 거짓 명성에  일조하는 거품들을 말입니다. 선생
    님이 말한 대로 비압구정동 사람들 누구나 매일 자기가 자고 
    일어난 자리에서  하루 30cm씩 압구정동으로  다가가는 꿈을 
    꾸고 있으니까. "

     "아니,뭔가 오해를 하는 모양인데 나는 작품을 통해 압구정
    동의 실체를  해부하고자 했던 거지 거품을  타자고 했던 게 
    아닙니다."

     "압니다, 그것도. 선생님의 의도와 관계없이 결과가 그렇게 
    되었다는 거지.  그런데 한 가지 궁금한  게 있습니다. 다른 
    압구정동 영화들은 다 개봉했는데  선생님 작품은 왜 개봉되
    지 않았는지요?  소문 듣기로는 꽤 유명한  배우들이 출연하
    고,또 막판엔 그 배우들이 자기 돈을 내어 제작비에 보탠 걸
    로 알고 있는데요."

     "영화를 다 만들어놓고 시사회를  하던 중 제작사가 부도가 
    났습니다."

     "그럼 어떻게 되는 겁니까?"

     "당신 말대로 그 거품은 햇빛을 못  릿 거죠. 사장은 도피
    하듯 해외로 나가고 필름은 창고에 들어갔으니까."

     "그 영화에도 테러리스트가 나옵니까?"

     "예. 시사회 때 본 걸로는."

     "소설에는 테러리스트의 얼굴이  안 나오고,영화는 또 보여
    주는 걸로  말하는 거니까 테러리스트의 얼굴이  안 나올 수 
    없겠군요......"

     "그런 셈이죠."

     "마지막으로 두 가지만  묻겠습니다. 만약 선생님이 소설에
    서 쓴  것과 똑 같은 테러가  실제 압구정동에서 연속적으로 
    발생한다면 그때는 어떻게 될 것 같습니까?"
     
     

 소 제 목 : 저쪽은 그가 이쪽은 그에게
     이 자식이 대체 무슨 말을 하는 거지?

     그는 전화기 캡 안에 그가 숨어 있기라도 하듯 입과 귀에서 
    그것을 떼어 캡의 작은 구멍들을 바라보았다.

     "여보세요."

     그러느라고 잠시 대답을 않고 서 있자 저쪽의 그가 다시 이
    쪽의 그를 불렀다.

     "말씀하세요." 

     "만약 소설 속에서와 똑 같은 테러가 실제 압구정동에서 일
    어난다면 그때는 어떻게 될 것 같냐고 물었습니다."

     "글쎄요."

     "한 번도 그런 생각은 해보지 않으셨습니까?"

     "소설 자체가 그런 가정 아래에서 쓰여진 것이니까......"

     "그런 가정이라면 어떤 가정인지요?"

     "기억하시는지 모르겠습니다만,몇 년전 화성에서 그 비슷한 
    연쇄 살인 사건이 일어났을 때 만약 압구정동에서 그런 사건
    이 일어난다면 그때는 어떻게 될까  하는 생각을 하다 쓴 작
    품이란 얘깁니다. 알고 있습니니까?  화성 부녀자 연쇄 살인 
    사건?"

     "예.자세히는 모르지만......"

     "그 화성 부녀자 연쇄 살인  사건은 드러난 범행 과정 하나
    하나가 누가 보든 성 변태적인 정신병자에 의해 저질러진 사
    건이 아니더냐는 거지요?  그런데 압구정동에선 누군가 분명
    한 사회적 목적을 가지고,또   그런 목적이 전달되도록 나름
    대로 어떤 원칙을 가지고 사건을 저지른다 이거지요."

     "그러니까 선생님도 그런 생각을 하긴 하셨군요."

     "머릿속의 생각이지요.  작가로서의 상상력이랄  수도 있겠
    고......"

     "제 말은 단순히 그런  작가적 상상력으로서의 생각이 아니
    라 화성에서 있었던 사건이든 소설 속의 사건이든 정말 그런 
    사건이 압구정동에서 일어난다면 어떻게  될 것 같냐는 거지
    요."

     "정말 그런다면 소설 속의  반응보다 더하면 더하지 덜하지
    는 않겠지요.  압구정동의 반응도 그렇고 또  사회 전체적인 
    반응도 그렇고......"

     "선생님이 화성 사건을 보고 <<압구정동>> 소설을 생각하셨
    듯 누군가 선생님 소설을 읽고 진
瀏 방법으로 압구정동
    으로 들어가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글쎄요,거기까진 생각해보지 않았어요. 작품으로만 생각했
    지."

     "그랜저와 프라이드 사건에서 보듯 지금 압구정동에 필요한 
    건 그들의 그릇된 명성이나  핥아주는 선생님의 소설이 아니
    라 그 소설 속에 나오는 진짜 테러라는 얘깁니다. 말로 하는 
    비판과 경고가 아니라...... 정말  그런 생각 안 해보셨습니
    까?"

     "이것봐요. 듣자 듣자 하니까...... 당신 대체 누구야?"
     무엇을 핥는다는 말에 그는  자제력을 잃고 버럭 소리를 질
    렀다.


 
 소 제 목 : 누군가 압구정동에서 테러를 저지른다면
     옆에 있던 아내도 놀라고 아마 저쪽 상대도 놀랐을 것이다.
     그러나 잠시 후 저쪽에서 들려온 목소리는 의외로 차분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미스터 T입니다. 처음 선생님께서 부르신 대로......"

     "그래도 이름이 있을 거 아니오?"

     "있지만  당분간 T라고  불러주십시오.  처음 그러신  것처
    럼....."

     "그거야 어떻게 부르든 상관없는 일이지만 이야기를 하자면 
    최소한 나도  그쪽이 뭐하는 사람인지는 알아야  할 것 아니
    오?"

     "그냥 독자라고 생각해  주십시오. 뒤늦게 선생님의 <<압구
    정동>>을 읽은...... 아마 미리  읽었다면 이런 전화는 하지 
    않았을 겁니다. 또 느낌도 달랐을 테고 전화를 했다 해도 이
    런 말씀은 드리지 않았을 거고 말입니다."

      그래도 그는 쉽게 흥분이 가라앉지 않았다.

     "아까 미스터 T가 말한  것처럼 나도 내가 형편없는 작가라
    는 건  알지만,대체 나한테 하고 싶은  얘기가 뭐요? 그래서 
    듣고 싶은 얘기는 또 뭐고."

     "선생님을 형편없는  작가라고는 말하지  않았습니다. 며칠 
    전에 있은 오렌지족들의 프라이드 폭행 사건으로 화가 나 그
    런 말을 했던 거지,사실 저도  그 소설을 잘 읽었습니다. 메
    시지가 뭐라는 것도 충분히 알고요. 그래서 <<압구정동>> 소
    설을 쓰신 선생님께 꼭 묻고 싶었던 것이 있었습니다."

     "나도 저녁을 먹다 말고 당신과  이런 얘기하는 거 정말 피
    곤해요. 솔직히 말해 설악산에서  처음 당신 메시지 들을 때
    부터. 얘기 얼른 끝내도록 합시다.  피차 좋은 얘기 하고 있
    는 것도 아닌데."

     "한 가지는  먼저 물었습니다. 만약 선생님이  소설에서 쓴 
    것과 똑 같은 테러가  실제 압구정동에서 연속적으로 발생한
    다면 그때는 어떻게 될 것 같냐고. 선생님은 소설 속의 반응
    보다 더하면 더하지 덜 하지 않을 거라고 말씀하셨고요."

     "그리고 또 뭐요?"

     "만약 누군가 선생님의 소설을  읽고 실제 압구정동으로 들
    어가 소설에 나오는 것과 똑 같은 목적으로 비슷한 대상들에 
    대해 그런  테러를 저지른다면 선생님은  어떻게 하시겠습니
    까? 또 거기에 대해  작가로서 선생님의 사회적 책임 범위는 
    어떻게 되는 건지 알고 싶습니다."

     그는 말 같잖은 질문이라고  생각했다. 또 이미 상업 봉甄 
    핥느니 하는 말로 기분이 상할 대로 상해 있었다.

     "그런 말로 날 협박하고 싶은 겁니까?"

     "협박하는 게 아닙니다. 협박할 일도 아니고. 책을 읽고 난 
    다음 신문에서 그 기사를 보다가  문득 그런 생각이 나 선생
    님의 생각을 알고 싶었던 겁니다."

     "꼭 알고 싶오?"

     그는 앞 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내 물었다.

     그렇습니다.


 소 제 목 : 이것봐요,미스터 T
     "이것 봐요,미스터 T. 누군가가  아니라 미스터 T가 압구정
    동으로 가 그런 사건을 일으킨다  해도 그게 나와 무슨 상관
    이겠오. 설사 그래서  그것이 사회적으로 문제를 불러일으키
    고 또 논란의  대상이 된다 해도 미스터  T의 말대로 소설의 
    제 기능조차 갖추지 못한 내가  책임질 게 뭐가 있겠냐는 얘
    깁니다. 아니,막말로 압구정동에 그런  연쇄 살인 사건이 일
    어난다면 나는 상업적으로 더욱  성공하게 될 게 아니겠냐는 
    얘기오. 요즘엔 잘 팔리지도  않는 책 다시 불티나게 팔리게 
    될 것이 ."

     "정말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그렇소." 

     그는 내킨 김이라고 생각했다.

     그러자 다시 미스터 T가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선생님은 어떻게 생각하실지 모르지만 저는 두 질문 다 진
    지하게 하는 겁니다."

     "당신한테는 진지하게 들리지 않을지  모르지만 나도 내 진
    심을 말하는 거요. "

     그는 상대방도 자신처럼 이쪽에서  하는 말로 열을 받게 만
    들고 싶었다. 전에도 많은  항의 전화를 받았지만 이렇게 끈
    질긴 독자는 없었다.

     "다시 묻겠습니다. 정말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아니라면 그
    것이 아닌 선생님의 생각을 말씀해 주십시오."

     "아니오. 내 진심이오. 제발 덕분에 누군가에 의해 그런 사
    건들이 일어나 보다 많은 책이 팔려 보다 많은 돈을 벌게 될 
    수 있기를 바라오.  그래서 압구정동에 60평짜리 아파트라도 
    하나 사게 되면 더 바랄  게 없겠오. 당신 말대로 내 소설은 
    상업적으로 성공한 껍데기로만 남아 압구정동의 명성이나 핥
    는 정도에 불과하니까. 그래서  프라이드가 감히 자기 차 앞
    에 끼어든다고 그 차  운전자를 폭행한 유학파 오렌지족들처
    럼 그랜저도 한 대  뽑고 말이오. 거기가 어딘지는 모르지만 
    미스터 T가 이 전화를  끊고 바로 압구정동으로 들어가 준다
    면  그보다 더  고마운 일도  없겠고......이제 아시겠소,내 
    말?"

     "제가 선생님을 화나게 만든 것 같군요."

     "아니오. 그 프라이드 운전자라는 사람,나라도 힘이 있다면 
    폭행했을지 몰라요. 나도 매일 독립문 앞에서 겪는 일이지만 
    다른 사람들은 다 자기 차선으로 천천히 와 신호를 기다리는
    데 좌회전 차선으로 달려와  신호등 바로 앞에서 새치기하듯 
    끼어들면 누군들 기분이  좋겠오? 신문엔 <프라이드가 감히>
    라고 했지만 단순히 소형차가  중형차 앞에 끼어들어 기분나
    빴던 건 아닐 거라는  겁니다. 폭행한 사람이 그랜저를 타고 
    폭행당한 사람이  프라이드를 탔으니까 더 문제가  된 거지. 
    내 얘기는 충분히 그럴 수도 있다는 거에요."

     "정말 대단한 압구정동 작가군요. 이젠 아주 압구정동의 명
    성이 아니라 압구정동의 밑구멍을  핥는...... 전화 이만 끊
    겠습니다."

     "아니,끊지 마시오. 나도 당신한테  물어봐야 할 말이 있어
    요."

     그는 조금은 다급한 목소리로 말했다.



 소 제 목 : 내가 알면 당신도 알게 되겠지
     "저는 오늘 선생님에게 더 할 말이 없습니다."

     끝까지 미스터 T는 처분하게 말했다.

     "내가 있어요, 당신한테."

     "저도 중간에 말은 그렇게 했어도 전화를 걸기 전 작으나마 
    선생님에게 기대를 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실망뿐입니다. 
    선생님 같은 사람에게 왜 전화를 걸었는지도 모르겠고요."

     "그건 나도 마찬가지오. 처음  당신 메시지를 들었을 때 단
    순한 항의  전화는 아닐 거라고 생각했어요.  그러나 지금은 
    어느 쪽이든 상관이 없오. 내가 물어보고 싶은 말은......"

     " 뻬맨絿駕첼."

     "당신은 나에 대해 많은 것을  알고 있지만 나는 당신에 대
    하여 당신 이름이 미스터 T라는 것 밖에 모른다는 거요. T가 
    당신 이름의 이니셜입니까?"

     말을 하며 그는 <탁>이라든가, <탄>, <태> 등 T자 이니셜을 
    쓰는 몇 개의 희성을  떠올렸다. 고등학교 때에도 태씨 성을 
    가진 친구가 있었고, 이름과  얼굴은 잊었지만 군에 있을 때
    에도 런닝이라든가 팬티 등  자신의 보급품마다에 작은 비표
    처럼 T자를 쓰거나 새겨넣던 같은 성씨의 졸병이 있었다. 

     "아닙니다."

     사내는 간단하게 그의 생각을 뒤집었다.

     "그럼 무슨 뜻입니까?  T라는 게......"

     "지금은 말씀드릴 수 없습니다. 그렇지만 선생님은 곧 아시
    게 될  겁니다. 오늘 선생님께선 많이  흥분하셨고...... 또 
    연락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아니,하지 마시오!"

     그는 상대가 훅  스위치를 누르기 전 그  말을 작은 틈새에 
    끼어넣듯 버럭 소리를 질렀다. 

     "그건 선생님의  뜻이 아니라 제 뜻입니다.  그럼 이만....
    .." 

     저쪽의 사내는 전화를 끊었다.

     뚜우-- 하는 소리를  湧만庸? 그는 오래도록 수화기를 잡
    고 있었다. 왠지  여지없이 당했다는 느낌 속에  꼭 해야 할 
    말보다 하지  말았어야 할 말만 골라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정말 알 수 없는 상대였다. 

     그렇지만 선생님은 곧 아시게 될 겁니다......

     "누군데 그래요?"

     아까부터 걱정스러운 얼굴로 옆에 섰던 아내가 물었다.

     "미스터 T......


     "그 미스터 T라는 게 누구냐구요?"

     "곧 알게 되겠지. 내가 알면 당신도....."

     "그러게 자동차 얘기는 왜 하고 그래요? 누군지도 모른다면
    서."

     "자동차가 문제가 아니야. 다른 게 문제지."

     "가서 식사나 마저해요. 다 식었겠어요."

     그러나 그는 다시 수저를 들고 싶은 생각이 없었다. 생각할
    수록 기분나쁜 상대에  기분나쁜 통화였다.아니,지독한 상대
    에 지독한 통화였다.

     그럼 또 연락드리도록 하겠습니다,이득지 선생......




 소 제 목 : 바깥에 정은주,안에 정은주
     미스터 T.

     그에게서 다시 전화가 온 건 강릉에 가 있던 아이까지 올라
    온 크리스마스 다음다음날 저녁의 일이었다.

     원고가 밀렸음에도 그 기간  동안 그는 집필실로 나가지 못
    했다. 한  해를 보내며 이곳저곳 출판사에서  마련한 망년회 
    자리에도 그는 참석하지  않았다. <문학세계> 정은주 기자는 
    원고는 이제 내년(그래봐야 며칠  후)에 와도 좋으니 사람만
    이라도 꼭 나와 달라고  했지만,어디에도 그는 나갈 수가 없
    었다.

     "바깥에 정은주를 보고 싶어도  안에 정은주가 나가지  뻑
    는데 어떻게 합니까?"

     아내와 같은 이름을 가진  문예지 기자에게 농담처럼 한 말
    이었지만,실제로 아내가 미스터 T의 전화에 신경을 집중하고 
    있었다.  

     설국에서 서울 집 전화기의  자동 응답 장치에 메모리된 그
    의 첫 메시지를 비밀 번호로  호출해 들을 때처럼 아내는 스
    스로 눌러 녹음한 남편과 그와의 통화 내용을 들은 다음부터 
    더욱 전화기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었다.

     벨이 울리면 언제나 그가 받았고,  그가 미처 받을 수 없을 
    땐 수화기를 들어올리는 대신 자동 응답 버튼을 눌렀다.

     새로 입력한 메시지의 내용도 전에처럼 즐거운 우리집 연속
    극을 하듯 번갈아가며 <여기는 이득지,정은주의 집> 하는 게 
    아니라 단 두 마디로 간단하게 <지금은 외출중입니다.메시지
    를 남겨 주십시오.>로 바꾸었다.

     남편과 함께 아파트 상가  수퍼에 가는 짧은 시간 동안에도 
    아내는 꼭 그것을 눌렀고,돌아오면 거기에 새롭게 입력된 그
    의 메모리가 있는가 없는가를 확인했다.

     그러다 그날 저녁,벨이 울리자  무심코 아이가 그것을 받았
    고, 아빠 전화,하고 무선  전화기를 그의 서재로 들고 왔다. 
    아직 결혼하지 않은 아이의  삼촌에게 부탁해 강릉으로 내려
    가 아이를 데리고 올라오게  한 것도 이득지의 아내였다. 그
    러잖으면 아이는 해가 바뀐  후에까지도 오랫동안 강릉에 있
    을 것이었다.

     훈이 혼자 두면 내가 불안해요.

     그의 녹음을 들은 다음 아내는 전에 한동안 불안해 하던,남
    편에 대한 역 테러보다  더 끔찍한 일까지 생각하고 있었다. 
    감기 걸린다는 핑계로 아이를 바깥에 나가지도 못하게 했고,
    문 단속도 여전히 이중 삼중으로 했다. 

     " 틤,아빠 전화라니까요."

     컴퓨터를 치고 있는 그에게 아이가 토끼 귀를 잡듯 무선 전
    화기의 안테나를 잡은 팔을 내밀었다.

     "누군데?"

     "몰라요. 이득지 선생님 바꿔  달래요. 그런데 아빠 이름이 
    왜 이득지예요? 이수호 씨가 아니고. 어떤 전화는 이득지 선
    생님 바꿔 달라고 그러고,어떤  전화는 이수호 씨 바꿔 달라
    고 그러고. 그러니까 헷갈리잖아요."

     "아빠는 하는 일이 많으니까."

     그는 아이가 건네주는 전화기를 받았다.


 
 소 제 목 : 안녕하십니까? 미스터 T입니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뒤따라 서재로 들어온 아내가 아이에게 
    말했다.

     "훈아,너 전화받지 말랬잖아,엄마가."

     "그럼 찌르릉,찌르릉 하는데 어떻게  안 받아? 엄마는 세탁
    기실에 있고,아빠는 방에서 공부를 하는데."  
     이름의 이니셜도 아닌,그러면서도  자칭 T라는 것과 녹음된 
    목소리말고는 얼굴조차 본 적 없는  그는 전화를 걸 때나 걸
    지 않을 때나 보이지 않는 곳에서 집안 구석구석을 지배하고 
    관섭하고 있었다.

     이건 어린 시절의 숨박꼭질이 아니었다.

     "여보세요. 전화 바꿨습니다."

     "안녕하십니까? 선생님. 미스터 T입니다."

     "무슨 일이오,또?"

     말을 하며 그는 아내와  아이에게 나가 있으라고 손짓을 했
    다.

     아내가 왼쪽  손바닥에 오른쪽 인지를 찍어  보이는 것으로 
    저쪽 전화기에 가 통화 내용을 녹음하겠다는 사인을 보냈다.

     좋을 대로.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전에 훈이라고 했습니까? 아이가 올라온 모양이군요."
     아이에 대한 물음이어서인지  상대는 가능한 친근한 목소리
    로 물었지만,그에겐 왠지 그 소리가 섬뜩하게 들 홱. 

     "......그렇소."

     대답을 하며 그는 아내가  아이 때문에 불안해 하던 얼굴을 
    떠올렸다.

     훈이 혼자 두면 내가 불안해요.

     아내도 그래서 아이에게 전화를  받지 못하게 하는 것일 것
    이었다.

     "늦었습니다만,크리스마스는 잘 보내셨는지요?"

     "피차 그런 얘기를  할 사이는 아니잖소? 그런  걸 물을 줄 
    아는 사람이 받기 싫은 전화를  거는 것도 예의가 아닐 테고 
    말이오."

     그는 시작부터 가능한 무뚝뚝하게 전화를 받았다.

     아내가 문밖에서  녹음을 걸었다는 사인을  보내왔다. 그는 
    알았다는 뜻으로 가볍게 손을  들어 보이고 나서 습관적으로 
    담배를 집어 물었다. 

     그 사이 다시 저쪽의 사내가 아직도 그때의 화가 풀리지 않
    으신 거냐고 물었고,그는 당신이  무슨 말을 하든 그럴 것도 
    없는 일이라고 퉁명스레 대꾸했다.

     "그럼 다시 묻겠습니다. 만약 누군가 선생님의 소설을 읽고 
    실제 압구정동으로 들어가 소설에 나오는 것과 똑 같은 목적
    으로 그들을 하나하나 테러해  나간다면 선생님은 어떻게 하
    시겠습니까?"

     "이봐요,미스  T.  나도 이제 지쳤어요. 제발  이제 그 말 
    같잖은 소리 좀 그만합시다."

     "말 같잖은  소리가 아닙니다. 선생님의 책을  읽으며 저는 
    충분히 그럴 수도 있는 일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테러 방법과 
    대상이야 달라질 수 있겠지만......"

     사내의 집요함과는 다르게 목소리의 억양은 대체 무얼 원하
    는지조차 모르게 높낮이 없이 차분했다. 


 소 제 목 : 그래,네멋대로 해라
     "안 그렇습니까?"

     그가 대답을 않자 다시  저쪽의 사내가 동의를 구하듯 물었
    다.

     "그렇게 생각하든 안 하든 그건 미스터 T의 자유고,설사 그
    런 일이 생긴다 해도 내  대답은 전과 다를 게 없어요. 제발 
    덕분에 그런 일이 일어나 내 책이 다시 한 번 불티나게 팔리
    길 바란다는 것 말고는. 이제 됐오?"

     "지금 하신 말씀 책임질 수 있습니까?"

     전에보다 더 낮게 깔려 쇳소리가 나는 목소리였다.

     "내가 알지도 못하는 당신한테 책임지고 말고 할 일이 어디 
    있어요? 작가가  未 작품에 대해서만 책임지면 되는 거지."

     "만약 그런 일이 발생한다면 작품에 대해 책임을 지듯 그런 
    일에 대해서도 작가로서 같은 책임을 져야 하지 않느냐고 묻
    는 겁니다."    

     "좋아요. 여러 소리할  것 없이 어떤 책임이든  내가 다 질 
    테니,미스터 T 당신은 이 전화를 끊는 즉시 압구정동으로 테
    러를 나가시오. 책에 나오는  대로 전철을 타고 가든 아니면 
    헤엄쳐 강을  건너가든 그건 당신 마음대로  하고.난 더이상 
    할 얘기가 없으니까."

     그는 전화기의 <대기,통화> 버튼을 누르고 주머니에서 라이
    터를 찾아 켰다. 거꾸로 문 담배의 휠터가 기름 묻힌 솜처럼 
    한순간 동그랗게 불꽃을 피웠다.

     "괜찮겠어요? 그래도....."

     "괜찮지 않으면?"

     지켜보던 아내의 말에 그는 저쪽 상대에게 다 내지 못한 짜
    증을 냈다. 

     "그러다 정말 그러면 어떻게 하려고 그래요?"

     "어떻게 하긴 뭘 어떻게 해?"

     "당신 말에 진짜 화가 나서라도 그러면......"

     "괜찮아. 그런 놈이면 애초부터  전화를 하고 말고 할 것도 
    없는 거니까."

     "그래도......"

     "그래도는 뭐가 그래도야? 자꾸......"

     그는 휠터가 탄 담배를 
묽 통에 처박고 새 담배를 꺼내 
    물었다.

     "그리고 이제 애 너무 안에 가둬두지 마. 나도 내일부터 저
    쪽 사무실에 가 글을 쓸 테니까 그렇게 알고. 이건 난데없는 
    미친놈 하나 때문에 온 집안이 말이지....."

     "그래도 해가 바뀔 때까지는  집에서 일해요. 매일 등만 보
    고 살더라도."

     "알았으니까 이거나 갖다 놔."

     그는 아내에게 전화기를 내밀었다.그리고 그게 미처 아내의 
    손에 닿기 전에 다시 거실의 전화벨이 울렸다.

     순간 굳어진  얼굴로 그들 부부는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았
    다. 

     다시 T의 전화일 것이었다.



 소 제 목 : 폭력이 은혜로운 시대에 우리는
     "나가서 메모리를 누를까요?"

     아내가 내밀었던 손을 빼며 빠르게 물었다.

     "나둬. 그러면 자기가 무서워서 그러는 줄 알 거 아니야."

     그는 다시 아까 껐던  <대기,통화> 버튼을 누르고 목소리에 
    힘을 넣었다.아니,자연히 목에 힘이 들어갔다.

     "여보세요."

     "미스터 T입니다."

     "내 얘기는 끝났다고 했지 않소? 당신이 미스터 T든 X든."

     "정말 선생님의 진심을 알고 싶습니다."

     "진심? 지금 진심이라고 했오?"

     그 말을 되묻는 동안 빛처럼  빠르게 그의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가는 생각 하나가 떠올랐다. 그는 상대에게 그 이야기를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렇습니다."

     "좋아요. 그러면 내 진심을 말하기 전 나도 전에 당신이 물
    어보던 것  하나 물어봅시다.미스터 T,당신 오늘  아침 신문 
    봤오?"

     "봤습니다."

     "그러면 거기에  지난번 당신이 말하던  프라이드 운전자에 
    대해서 기사가 난 것 봤오?"

     "......봤습니다."

     "그러면 더 할 얘기도 없는 것 아니오?"

     "......"  

     "그날 처음 폭행을 당했을 땐  집에 돈이 많아 그랜저를 타
    고다니면 돈이 없어 프라이드를 타고다니는 사람한테 그렇게 
    막해도 되는 거냐고 따지고 하소연하던 사람이 며칠 새 다시 
    기자가 찾아갔을 땐 난 아무렇지 않다고,몸도 그렇게 다치거
    나 아픈 게 아니라고,그러니  기자들도 제발 날 좀 괴롭히지 
    말고 조용히 살게 내버려두라고  그러고...... 그게 바로 누
    구도 거역할 수 없는  자본의 힘이고 압구정동의 힘이오. 내 
    소설 <<압구정동>>이 아니라 그  무엇으로도 바로 잡거나 통
    제할 수 없는. 아시겠소,이제? 돈만 오가면 폭행이 은 活막 
    바뀌고 억울함이 은혜로  바뀌는 시대에 그들이 있고,우리가 
    있는 거요. 많이 가진 사람이나 많이 갖지 못한 사람이나 단
    지 그걸 실현하고 실현하지  못하는 차이일뿐 저마다 꿈꾸는 
    욕망의 무게는 같기 마련인 거고." 

     "사실은 그 기사를 보고 화가 나 전화를 했습니다. 지난 번 
    선생님의 말씀이 진심이 아니라는 걸 알면서도."

     "이제 끊읍시다,전화. 내 진심을  말하지 않는다 해도 그게 
    뭐라는 걸 이제 미스터 T도 알았을 테고." 

     "아니,하나만 더 묻겠습니다,선생님.  그리고 이젠 더 전화
    를 드리지도 않겠습니다." 

     "뭡니까? 묻고 싶은 게."



 소 제 목 : <피셔킹) 속에 그의 메시지가 ...

   "선생님은 <피셔킹>이란 영화를 보셨는지요?"
   "아니,보지 않았오."

   그는 처음 가졌던  긴장을 풀지 않은 채  목소리만 누그려뜨려 대답했
  다.

   "그러면 그 영화를 한 번 보시기 바랍니다."
   "그러지요. 시간이 나면."
   "아니,지금 보셔야 합니다. 가능한 빨리......"
   "그랬으면 좋겠는데 난  지금 그렇게 한가하지 못해요.  해야 할 일도 
  많고 또 써야 할 원고도 밀렸고."
   "그래도 지금 꼭 보셔야 합니다. 그  영화 속에 제가 선생님에게 드리
  는 마지막 메시지가 담겨 있습니다."
   "메시지요?"
   "그렇습니다. 그걸 보시면 제가 드리고자 하는 메시지는 물론 전에 선
  생님이 물으셨던 제 이름 T가 무슨 뜻인지도 아시게 될 겁니다."
   "그러면 보지요. 가능한 빨리....."
   "오늘 폭력과 은혜에 대한 말씀,혼란스럽지만 감사합니다.그러나 그런 
  경우의 은혜라면  다시 폭력으로 되갚아져야 하겠지요. 그럼 안녕히 계
  십시오."

   사내는 곱게 전화를 끊었다. 그리곤 이제 다시 그런 전화를 걸지 않을 
  거라고 말했다. 그런데도 전화의 뒤끝은 개운하지가 못했다. 단순히 영
  화 이야기와 그 속에 담겼다는 메시지 이야기 뿐만이 아니었다. 말은 
  이제 다시 전화를 걸지 않을 거라고  했지만,며칠만 지나면 그는 또 전
  화를 걸어 영화를 본 이야기를 묻고  다시 소설에 대하여 끝 없는 시비
  를 걸어올 것이었다. 일찍이 이토록 사람을 불안하게 하고 지치게 하는 
  독자는 없었다.

   "당신 <피셔킹>이란 영화 봤어?"

   그는 앉았던 의자를 돌려 전화기를 건네 주며 아내에 물었다.

   "갑자기 영화는 왜요?"
   "그가 보라는군. 미스터 T가. 거기에 자기의 마지막 메시지가 들어 있
  다고."
   "이젠 소설이 아니라 영화에요?"

   아내도  걋 생각인  모양이었다. 적잖이 짜증스럽고,적잖이 신경쓰이
  는 상대가 아니었다. 그대로  따르자니 불쾌한 기분이 앞섰고,무시하자
  니 메시지 운운하던 그의 말이 의식에 걸린 낚시의 미늘처럼 신경을 건
  드려 왔다.

   전에 <<압구정동>>을 발표했을 때에도  소설과 내용이 비슷하다며 <택
  시 드라이버>라는 영화를 본 적이 있느냐고 묻던 독자가 있었고,작품으
  로 영화를 찍을 때 감독도 같은 말을 했었다. 그는 독자의 전화를 받고 
  그 영화를 봤었다. 그렇지만 그때는 아무런 부담없이 영화를 봤었다.  

   그러다 늦  밤,그는 그가 던진 낚시의 미늘에 끌리듯 아내와 함께 비
  디오 가게로 나갔다. 시간이  늦어서인지 테이프는 주위의 다른 테이프
  들과 함께 <대여중>  표찰이 붙은 채  <신작 코너>  제일 윗 자리에 빈 
  케이스로 꽂혀 있었다. 물었을 때 가게  주인도 삼일 전에 나간 테이픈
  데 아직 안 들어왔다고 했다.

   "아마 내일은 들어올 겁니다. 신작은 빨리빨리 보고 돌려줘야 하는데,
  어딜 갔는지 전화를 해도 안 받고..... 다른 걸 골라보시죠."
   "아뇨 꼭 그걸 좀 봤으면 싶어서 나왔는데......"

   그는 그냥 돌아설까 하다 무슨 영환데  그러나 하는 마음으로 빈 케이
  스를 뽑아들었다. 보는  것은 다음에 하더라도 우선  거기에 적힌 영화 
  소개라도 읽어보고 싶었다.


 소 제 목 : 그런 여자는 확 쓸어버리지 뭘 고민해!

   마술과 환상,그리고 인간성 회복으로 다가온...
   피.셔.킹.
   주연/ <죽은 시인의 사회> <후크>의 로빈 윌리암스
         <나딘> <스타맨>의 제프 브리지스
   감독/ 테리 길리엄

   그리고 그 위에 91년 토론토 영화제 최우수상 수상에서부터 92년 아카
  데미 여우조연상 수상까지 다섯 개의 수상 경력이 느낌표 두 개씩을 달
  고 적혀 있었다.

   가게로 나올 때  가졌던 애초의 긴장과는 달리  <마술과 환상> 그리고 
  <인간성 회복>이라는 말이 주는 편안함과 그 아래 초록색 띠에 적혀 있
  는 <고등학생 이상 관람가>가 그의  마음을 조금은 누그려뜨려 주는 것 
  같았다. 내일 다시 와 테이프를  빌려 본다고 해도 별다른(그러니까 그
  렇게 긴장하거나 겁을 먹어야 할) 내용이 없을 것 같기도 했다.

   빈 케이스를 뽑아들기 전만 해도 그는 <미져리> 계통의 공포 영화이거
  나 전에 독자의  전화로 본 <택시 드라이버>와 같은  무슨 폭력 영화일 
  거라고 생각했었다. 지금까지 T와의 통화  내용으로 봐 달리 다른 메시
  지가 있을 게 없었다. 그만큼 그는 T에 대해 과민했다. 그러나 막상 뽑
  아든 테이프는 또 그게 아닌 듯싶었다.마술과 환상,인간성 회복......

   그는 조금은 편해진  마음으로 무심히 빈 케이스를  뒤로 넘겨 거기에 
  적혀 있는 영화의 줄거리를 읽기 시작했다.

   누가 미치광이인가!
   주인공 잭은 뉴욕  방송국의 명성높은 디스크 자키.  철
 여피족인 
  그는 타인들에게  냉소적인 인물이다. 어느날 방송국에서  일하고 있는 
  그에게 문제의 전화가 걸려 온다. 잭에게 미처 있는 열성팬이라고 자신
  을 밝힌 그 남자는 자신의 애인이 속물 근성뿐인 여자라며 어떻게 해야 
  하느냐는 고민을 털어놓는다. 늘상  받는 전화에 지치고 귀찮아진 잭  
  농담처럼 한마디 던진다.

   "그런 여자라면 총으로 쓸어버리고 말지 뭘 고민해!"

   하루 일과를 마친 잭이 집으로  돌아간다. 호화롭게 꾸며진 안락한 공
  간이다. 무심코 TV를 켠 잭의 시선은 뉴스의 살인 사건에 고정된다. 이
  럴 수가......낮에 전화했던 광신적인 팬이 애인을 총살해버린 것이다. 
  더구나 애인이 일하는 식당에 찾아가  기관총을 쏘아대 다섯 명이나 살
  해했다는 사실에 잭은 경악하게 되는데......

   하마트면 그는 케이스를 떨어뜨릴 뻔했다.
   이 자가 정말......
   영화를 보기도 전  비로  그간 그가 걸었던  전화의 의미가 무엇인지 
  확연하게 알아지는 부분이 있었다.

   미스터 T......
   아니,미스터 Terrorist......
   나는 그에게 압구정동을 쓸어버리라고 말했는가.
   아니,그는 내 말을 그렇게 받아들였는가. 
   다시 전화하라,너......
   다시......


 소 제 목 : 첫번째 사건을 기다리며.

   <피셔킹> 영화를 보기 전엔,아니 그날 비디오를 빌리러 갔다가 테이프
  는 빌리지 못하고 대여중인 테이프  케이스에 적혀 있는 영화 줄거리를 
  읽기 전만 해도 그는 그가 며칠  내로 다시 전화를 걸어올 거라고 생각
  했다.

   위협적이지는 않았지만 전에도 그렇게  끈질긴 독자가 없었던 것은 아
  니었다. <<압구정동>> 속에 나오는  방탕한 오렌지족 여대생 강은지 이
  야기를 할 때,그녀가 살고 있는 빌라를 이야기 하며 <영양사> 이야기를 
  했던 게 문제가 되었다.


   [그녀는 자신의 8백만원짜리 이태리산 침대에서 잠을 깼다. 침대 맞은
  편 벽에 걸려 있는 영국산 수제품  뻐꾸기 시계가 9시 30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그녀는 침대 아래에 놓인 이태리산 털실내화를 신고 엄마가 있
  는 안방으로 갔다. 침실과  아빠 엄마의 의상실이 따로 분리돼 있는 방
  이었다. 아빠는  1억5천만원짜리 벤츠 560SEL을 타고 이미 출근한 다음
  이었고, 엄마 혼자 2천2백만원짜리 서독산 침대에 누워 프랑스산 오리털
  이불 바깥으로 한쪽 다리를 걸치듯 내놓고 있었다. 외출을 할 때면 금박
  을 장식한 12만원짜리  칼빈 클라인 스타킹을 신는 다리였다. 

   아빠는 미국에서도 몇 손가락 안에 들어갈  만큼 규모 큰 패스트 푸드
  사의 한국 지사장이었다. 아빠는  미국 본사의 경영자들도 한국을 새로
  운 마케팅 전략지로 인정하고 있다고 늘 자랑처럼 말했다.

   엄마 방에서 나온 그녀는 네 면의 벽과 바닥을 평당 50만원이 넘는 이
  태리산 대리석으로 꾸민 욕실에 들어가  가볍게 세수를 하고 나와 지방
  시 상표가 수놓아진  수건으로 얼굴의 물기를 걷어내고  프랑스산 드봉 
  스킨로션과 밀크로션을 얼굴에 발랐다.

   그러는 동안 정액급으로 월급 60만원을 받는 영양사 아줌마는 5천만원
  짜리 독일산 포겐폴 부엌가구로 치장된 주방에서 그녀의 가벼운 아침식
  사를 준비하고 있었다. 그 아줌마의 봉급이 다른 집 가정부 아줌마들보
  다 적은 것은 엄마 차를 운전하는  가정 기사 아저씨와 함께 사장 자택
  에 파견 근무를 하는  아빠 회사의 직원이기 때문이었다.그래서 직책도 
  형식적으로는 영양사 보조였다. 대신 그아줌마에겐 매달 회사에서 지급
  하는 20만원의 시간외 수당이 더 붙었다. 아줌마는 영양사 자격이 없어
  도 음식을 잘 만들었다. 시장도 그 아줌마가 직접 봐왔다. 엄마는 시장
  볼 때 떨어지는 돈만으로도 그  아줌마의 봉급은 그런 사람들 수준으로
  선 결코 적은 것이 아니라고 했다.  회사 식당에 근무하는 영양사 보조 
  아줌마들도 서로 파견근무를 나오려고 했다.

   식사를 마치고 그녀는 응접실로 나가 2천만원짜리 이태리산 통가죽 소
  파에 앉아 몸체  값만도 기백만원이 나가는 캔우드  오디오로 라이처드 
  브라더스가 부르는 <사랑과 영혼>의 주제가를 들으며 영국 왕실에서 쓴
  다는 표찰이 붙은  8백만원짜리 탁자 위에 영양사  아줌마가 원산지 본 
  차이나 커피잔에 타다  준 폴거스 마운틴 그로운  커피를 마셨다. 그럴 
  때면 별로 모양없이 생긴 영양사의  아줌마 모습까지도 영국 왕실의 예
  절바른 하녀처럼 보이는  것이었다. 언젠가 그런 말을  했을 때 영양사 
  아줌마도 무척 좋아하는 것 같았다. 왕실의  하녀 같다는 말은 차마 하
  지 못하고 왕실에 근무하는 영양사 같다는 말로 그녀는 스스로 그 왕실
  의 공주가 되었다.]


   다소 인용이 길어진 그 부분이 문제가  되었다. 책이 나온 지 두 달쯤 
  지나 영양사 협회에서 전화가 걸려오고  또 영양사들의 집단 항의가 쏟
  아졌다. 거의 열흘 넘게 많을  때는 하루에 일고여덟 번이었고,적을 때
  에도 서너번이 넘었다.

   우리 영양사를 뭘로 아는 거냐? 우리가 고작 그런 정도로밖에 안 보이
  느냐,글을 쓸려면 뭘  제대로 알고 써라,이건 전국의  모든 영양사들에 
  대한 명백한  명예훼손이다,법적으로 문제 삼겠다,곧  영화를 찍는다는 
  얘기를 들었는데 영화에도 그렇게  나오는 거냐,그러면 정말 가만 있지 
  않겠다 등등...... 

   아마 협회에서 회원들에게 알려 아예 당번을 정해놓고 전화를 거는 듯
  했다. 보통 한 통화가 이삼십 분이었고,그러면 하루 종일 그 전화를 받
  느라고 아무 일도 할 수가 없었다. 거기다 같은 말을 반복해 듣고,같은 
  설명을 반복해 말해야 한다는 것도 여간 고역이 아니었다.

   처음엔 마음대로 해라,나도 어느 한 줄 고칠 수 없다, 그쪽이 법적으로 
  대응하면 나도 기꺼이 법적으로  대응하겠다고 말하다가 끝내는 그들이 
  아니라 스스로에게 타협하듯 그들의 요구대로  다음 번 판을 찍을 때부
  터 <영양사>라는 말을 모두 빼고 그 자리에 <가정부>를 넣었다.

   그러나 이 경우는 그것도 아니었다.  차라리 그때처럼 작품의 어느 한 
  부분을 문제삼아 작가에 대해 끈질지게 물어지는 항의 전화라면, 아니 그
  정도를 넘어 역  테러의 위협이라고 해도 이렇게까지 불안하지는 않을 것
  이었다.

 소 제 목 : 아담, 너는 지금 어디에 있는가.

   거기다 영화를 본 다음 더해진 불안의 무게도 그를 견딜 수 없게 만들
  었다.

   그 사건으로 영화 속의 잭은  방송국에서 해고 되고,반 폐인이 되다시
  피해 거리로 나섰다.

   그것이 정말 그의 마지막 메시지라면 소설  속에 나오는 것과 똑 같은 
  사건이 압구정동에서 벌어질 테고,그러면 그도 영화 속의 잭처럼 반 폐
  인이 되어 거리로 나서게 되고 말 것이었다. 소설가를 해고시킬 사람은 
  없겠지만,아마 스스로 소설로부터 손을 놓게 되고 말 것이었다.

   그러나 그게 두려운 게 아니었다.  그깥 소설이야 안 쓰  그만이지만 
  평생 그것 때문에 가슴 속에 안고  살아가야 할 마음 속의 부담은 그것
  을 생각하고 상상하는 일만으로도 여간 끔찍한 노릇이 아니었다. 

   아니,무엇보다 그게 어디 말이나 될 법한 소리인가. 어느 극렬 독자가 
  책을 읽고,책에 나온 것과 똑 같은 방법으로 소설 속의 무대가 된 동네
  를 찾아가 소설 속에 나오는 것과  똑 같은 방법으로 소설 속에 나오는 
  것과 똑 같은 부류의 사람을 죽이겠다는  것이. 소설 속에선 소설 때문
  에 사람을 죽이고 소설 때문에 사람이 죽을 수 있다 해도 그 소설을 읽
  고 난 독자가  실제로 소설 때문에 사람을 죽이고  소설 때문에 사람이 
  죽는다는 것이.

   말로는 그런  놈들은 더 에스컬레이트해 죽여야  한다거나(2편은 언제 
  쓸 거냐고 묻던 동료 작가 박형우),아니면  다 죽여야 한다고 할 수 있
  어도(책을 읽고 전화한 이문동의 어느 독자) 그건 그 말의 무게가 갖는 
  액면 만큼의 적의거나 적개심 때문이 아니라 아무리 그런 말을 해도 실
  제로 그들에게 가해질 위해도,또 위해를 가할 방법도 없기 때문이 아니
  겠는가. 아니,우리가 그만큼  그들의 그릇된 탐욕과 부패의  그물 안에 
  갇혀 결과적으로 빼앗기고 핍박받는 삶을 살고 있기 때문이 아닌가. 그
  러면서도 달리 대항하거나 그 판을 뒤엎을 방법이 없기 때문이 아닌가.  

   소설을 쓰며 아무런 죄의식 없이,아니  오히려 정신적인 고양 속에 얼
  굴없는 테러리스트를 등장시켜 <압구정동의 쓰레기>들을 하나하나 처치
  해 나갈 때 그가 가졌던 정직한 감정은 스스로 이야기를 진행하고 있는 
  그 소설적 살인에 매우 신들려 있었다는 것이었다. 달리 우리가 그들을 
  어떻게 할 방법이 없었으므로. 그리고 달리 그들에게 우리의 의사를 전
  달할 방법 없었으 퓐.

   하여 그는 그들의 실상과 생각들이 얼마나 썩고 부패해 있는가를 몇몇 
  주요 등장 인물을 통해 때로는 더러는 과장되게,때로는 있는 현실 그대
  로 그들이 세상사는 방식과 생각들을  이야기로 옮기고 그 끝에 얼굴없
  는 테러리스트로 하여금 몰래 그들의 뒤로 다가가 목을 죄게 했던 것이
  었다.

   또 소설을 쓰며 끝까지 신경썼던 것도 결과적으로 살인자에 불과한 테
  러리스트가 작품 전편에 흐르는 윤리적 헤게모니를 장악하게 하는 일이
  었다. 이해 관계가  없는 어느 독자가 읽든 그의  테러가(바로 그 살인
  이) 사회적으로 바른 메시지로  받아들여지고 정의의 한 실천처럼 받아
  들여지도록,그래서 그 윤리적 헤게모니를  놓치지 않게 하기 위하여 끝
  까지 테러리스트의 얼굴을 감추게  했던 것이었다. 그건 그 테러리스트
  가 소설로 그려진 세계에서만,그리고 우리 마음 속 깊은 곳에 자리잡고 
  있는 <윤리>라는 이름의 추상적 존재로만 가능하기 때문이었다.

   작품 말미에 붙인 <작가의 말>을 통해서도  그는 그 부분을 분명히 했
  었다.


   [이어 나는 기회 닿는 대로  당신들의 <비상구 없는 압구정동>의 두번
  째 얘기를   것입니다. 그리고 나의 이런 노력과 상관없이 이 작품 속
  의 얼굴없는 테러리스트 역시 나름대로  당신들에 대한 접근을 계속 시
  도하고 있을 것입니다. 당신들의  그릇된 탐욕과 욕망의 바다가 아무리 
  깊다 해도 우리  가슴 속 그 바다보다 깊은  자리에 <윤리>라는 이름의 
  테러리스트가 아직 잠들지 않고 깨어 있는 한은 말입니다.]


   그런데 그가,그 미스터 T가 소설 속의 테러리스트를 자처하고 나선 것
  이었다. 작품에 자극받았든,아니면 전화로 나눈 작가의 말에 자극을 받


 소 제 목 : 그의 전화는 오지 않았다
     그러나 며칠이 지나도록 그의  전화는 걸려오지 않았다. 해
    가 바뀌어도 해가 바뀐 느낌 또한 들지 않았다.

     그전 같으면 바로 얼마  전 여행을 다녀왔어도 새해 연휴엔 
    다시 새 마음 새 뜻으로 한 해 농사를 설계하듯 여행을 떠났
    을 것이다. 언제나 그랫듯이 무얼 찾아다니듯 돌아다니는 여
    행이 아니라 숨박꼭질을 하듯 어느  한 자리에 꼭꼭 몸을 숨
    기는 여행을.

     지난해엔 한 해가 저무는  그믐날에 떠나 2박3일을 가평 남
    이섬 안 호텔에  가 있었다. 그곳에서 섬을  둘러싼 강 가득 
    피어오르는 보랏빛 새벽 안개를 바라보며 새해에 써야 할 원
    고들을 생각하고,또  개인적으로 해야 할  일들을 생각했다. 
    남들은 멀지도 않은 곳에 가 그렇게 숨어지내듯 틀어박혀 있
    으면 집에 틀어박혀 면벽을 하는  것과 무어 다를 게 있느냐
    고 말했지만  그건 그런 여행의 의미를  몰라서 하는 소리였
    다. 숨쉬는  곳의 공기가 다르면 머릿속에  떠오르는 생각도 
    달랐다. 마치 한 해를  위한 목욕과도 같은 여행이라고나 할
    까.

     돌아보면 물론 한 해의  모든 일이 그 설계대로 이루어지고 
    계획한 대로 이루어지는 건 아니었다. 계획대로 이루어진 일
    보다 계획대로 이루지 못한 일이 더 많았다. 그럼에도 그 새
    해 벽두의 숨은 여행은 마치 일 년 농사의 볍씨를 담그는 일
    처럼 그에겐 소중하고  의미있는 시간들이었다. 얼만큼 계획
    대로 이루었는가도 중요하겠지만,비록 이루지 못한 것일망정 
    어떤 계획들을 세웠는가 반성하듯  돌아보고 또 새로운 계획
    을 세우는 것도 글을 쓰는 그에겐 매우 의미 있는 일이었다.

     "그냥 집에만 있네요,올해는......"

     아내는 쓸쓸한  얼굴로 그렇게 말했지만 그냥  집에만 있는 
    것도 아니었다. 전화벨만 울리면  그는 버릇처럼 T의 목소리
    를 생각했다. 지난번 설악산에서 호출해 들었던 첫 메시지와 
    나중에 걸려온 두 번의 전화에서 아내가 버튼을 눌러 녹음한 
    그의 목소리를 그는 신정 연휴 내내 듣고 또 듣곤 했다.

     "당신도 내가 그에게 나가라고 했다고 생각해?"

     "당신이 아니라면 아니겠지만......"

     "말해봐. 무슨 얘기든."

     "그렇게 듣지 않으려고 해도 녹음한 걸 들으면 자꾸만 그렇
    게 들려요."

     "그건 <피셔킹>에 나오는 미치광이 수준의 얘긴 거고,이 놈
    은 달라. 그런다고 나갈 놈도 아니고."

     "그럼 왜 <피셔킹>을 보라고 했겠어요? 자기가 나가니까 보
    라고......"

     "그래,내 생각에도 그 놈이  나가는 건 틀림없어. 틀림없다
    구. 그러기 위해 전화를  했던 것도 틀림없고. <피셔킹>이니 
    뭐니 떠들었지만  그건 자기가 그쪽으로  나가겠다는 의사를 
    확실하게 전달하기 위해 한  말이지 영화 속의 미치광이처럼 
    내 말을 듣고 나가는 건 아니란 얘기야. 그놈이 약을 올리며 
    그런  쪽으로 내  말을  유도했던 거지.  그 개자식이  말이
    지......"


 소 제 목 : 왜 욕을 하고 그러세요?
     "왜 욕을 하고 그러세요? 누가 있다고......"
     
    "당신 같으면 욕이 안 나와?  누굴 망치자는 것도 아니고 말
    이지."

     그는 극도로  신경이 예민해져 있었다. 그냥  있다가도 T만 
    생각하면 아내에게도 아이에게도 격앙되어 벌컥벌컥 화를 내
    곤 했다.  

     "가만히 보니까 그  개자식이 말이지,우리가 설악산에 있을 
    때 전화를 했던 것도 나한테  나가야 할지 말아야 할지 물어
    보자고 전화를 한 게 아니라 처음부터 그쪽으로 나갈 분명한 
    의사를 가지고 했던 거라구. 그러다 내가 그런 말을 하자 그
    래,너도 잘 걸렸다 하는 마음이었을 거고......"

     "정말 그 사람이 그쪽으로 나갈까요?"

     "나가겠지. 그러자고 두 번 세  번 전화를 한 놈이니까. 나
    중에라도 자기가 그쪽으로 나가는 것에 대한 명분도 세우고,
    문제가 됐을  때 책임도 이쪽으로 나누고  하자고 전화를 건 
    거라구. 그 자식이 보라던 <피셔킹>처럼 내가 나가라고 해서 
    나갔다고 말이지."

     "정말 나갈까요?"

     묻는 아내만 불안한 게 아니었다.  몇 번이고 같은 말을 묻
    는 아내의  얼굴은 그러지 않을 수도  있다는 대답을 바라는 
    눈치였지만,그가 아니라고 해서 아닐 일이 아니었다.

     정말 어쩌다 그런 놈에게 걸려들었는지 모를 심정이었다.앉
    으나 서나 전화기만 바라보였고,그걸 보면 다시 전화로 들었
    던 T의 목소리가 귓가에 맴돌곤 했다.

     그러면 그 영화를 한 번 보시기 바랍니다. 그 영화 속에 제 
    마지막 메시지가 담겨 있습니다......

     "안 그럴 수도  있잖아요. 두 번 다  프라이드 일로 기분이 
    나빠 전화를 했는데 당신이  그렇게 말하니까 분풀이하듯 겁
    만 주자고......"

     " 瀏,그럴 수도  
는 일이겠지.  당신 말대로  겁만 주자
    고......"

     "그렇게 생각해요,우리."

     "우리가 그렇게 생각한다고 그렇게 되는 일도 아니잖아?"

     "그럼 어떻게 해요?"

     아내는 금방이라도 울 듯한 얼굴이었다.

     그러나 알면서도 그는 다시 버럭 소리를 질렀다.

     "어떻게 하긴 뭘  어떻게 해? 그러면 그러고  말면 마는 거
    지. 그 미친 녀석이 그러든 말든 그게 우리하고 무슨 상관이
    냐고? 내 작품하고는 또 무슨 상관이고?"

     "그것 봐요.당신이  늘 그런 식으로 말하니까  그 사람한테
    도......"

     "그러면 말 잘하는 당신이 전화를 받지 왜 나보고 받으라고 
    그랬어? 전화도 당신이 받고  소설도 말 잘하는 당신이 쓰고 
    했으면 됐을 거 아니야?"

     "소리지르지 말아요. 그러잖아도 그 생각만 하면 무서워 죽
    겠는데 당신까지 자꾸 그러면 나는 어떻게 해요?"

     "그러면 소리를 안 지르게 해야지. 써야 할 원고도 바빠 죽
    겠는데  이건  어디서 미친  놈  하나  나타나 가지고  말이
    지......"

     "짜증내지 말아요. 짜증낸다고 해결될 일도 아니잖아요."

     "그러니까 짜증이  나는 거지.  그러니까...... 짜증낸다고 
    해결될 일이 아니니까." 



 소 제 목 : 너로 하여금 괴로운 사람이 있다

     그러면서 그는 다시 서재로 들어가 문을 닫은 채 문제가 된 
    녹음 부분을 들었다.

     "만약 누군가 선생님의 소설을  읽고 실제 압구정동으로 들
    어가 소설에 나오는 것과 똑 같은 목적으로 비슷한 대상들에 
    대해 그런  테러를 저지른다면 선생님은  어떻게 하시겠습니
    까? 또 거기에 대해 작가로서 사회적 책임 범위는 어떻게 되
    는 건지 알고 싶습니다."

     "그런 말로 날 협박하고 싶은 겁니까?"

     "협박하는 게 아닙니다. 협박할 일도 아니고. 책을 읽고 난 
    다음 신문에서 그 기사를 보다   문득 그런 생각이 나 선생
    님의 생각을 알고 싶었던 것입니다."

     "꼭 알고 싶소?"

     "그렇습니다."

     "이것 봐요,미스터 T. 누군가가  아니라 미스터 T가 압구정
    동으로 가 그런 사건을 일으킨다  해도 그게 나와 무슨 상관
    이겠오. 설사 그래서  그것이 사회적으로 문제를 불러일으키
    고 또 논란의  대상이 된다 해도 미스터  T의 말대로 소설의 
    제 기능조차 갖추지 못한 내가  책임질 게 뭐가 있겠냐는 얘
    깁니다. 아니, 막말로 압구정동에 그런 연쇄 살인 사건이 일
    어난다면 나는 상 汰岵막 더욱  성공하게 될 게 아니겠냐는 
    얘기오. 요즘엔 잘 팔리지도  않는 책 다시 불티나게 팔리게 
    될 것이고."

     "정말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그렇소."

     "다시 묻겠습니다. 정말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아니라면 그
    것이 아닌 선생님의 생각을 말씀해 주십시오?"

     "아니오. 내 진심이오. 제발 덕분에 누군가에 의해 그런 사
    건이 일어나 보다  많은 책이 팔려 보다 많은  돈을 벌게 될  
    수 있기를 바라오.(중략) 거기가  어딘지 모르지만 미스터 T
    가 이 전화를 끊고 바로 압구정동으로 들어가 준다면 그보다 
    더 고마운 일이 없겠고......이제 아시겠오,내 말?"

     하는 부분과,

     며칠 후 다시 걸려온 전화에 대고

     "좋아요.여러 소리할 것 없이 어떤 책임이든 내가 다 질 테
    니,미스터 T 당신은 이 전화를 끊는 즉시 압구정동으로 테러
    를 나가시오. 책에 나오는 대로 전철을 타고 가든 헤엄쳐 강
    을 건너가든 그거 당신 마음대로  하고. 난 더 이상 할 얘기
    가 없으니까."
     했던 부분이었다.

     액면대로는 그랬다.

     그때의 상황과 기분을 전혀 감안하지 않고 녹음된 목소리로
    만 들으면 T는 기분나쁠  정도로 침착한 목소리였고,그의 목
    소리는 그런 그의 말에 화가 나서라기보다는 자기가 먼저 흥
    분하여 상대방을 충동질하는  듯한 목소리였다. 그래서 누가 
    듣든 T의  목소리는 간절하게 반대쪽 대답을  원하는 것처럼 
    들렸고,그런데도 그가 무조건  테러를 나가라는 식으로 강요
    하는 것처럼 들렸다.녹음된 것을  들으면 아마 열이면 열 다 
    그렇게 들을 것이었다.

     그러나 그게 어디 내 마음 속의 진정한 뜻인가.

     당시의 상황을 모르고 녹음된  것만 들으면 그렇게 들을 수
    가 있겠지만 그는 절대 그렇게 듣지 않았을 것이다.

     다시 전화가 온다면 그에게 꼭 해 줄 말이 있었다.

     나는 당신의 목소리를 녹음했다고.

     당신이 정말 <피셔킹>의 미치광이처럼 압구정동으로 나간다
    면 나로서는 그것을 공개할 수밖에 없다고.



 소 제 목 : 범인 피살자 입에 T자 메모 남겨
      그리고 그때 내가 당신에게  했던 말은 나의 진심이 아니었다고. 당
    신이  내 작품을 상업적으로만 성공한  껍데기라느니,압구정동의 폐수 
    위를 떠 다니는 거품이라느니,그들의 명성과 밑구멍을  핥는다느니 하
    는 말에 자  극받아 나 스스로도 모르게  나왔던 말일 뿐이라고. 그런 
    내 말에 자극받 고,내 소설에 자극받아 압구정동으로 직접  테러를 나
    간다는 게 어디 말 이나 될 법한 소리냐고.

      그건 정말 말도 되지 않는 소리였다.
      어느 평론가가 말했듯  소설  속의 테러는 <압구정동  사람>들의 불
    특정  다수에 대한 테러가  아니라 아주 정밀하게 대상을 선정하여 실
    행한 테러 였다. 소설 속의 테러리스트는 각 장마다 나오는 주요 등장 
    인물들의 살 해 현장에말고는  단 한 번,양재동 빌라의 방탕한 여대생
    과 그의 남자 친 구가 만나  부패한 대화를 하는 곳에만  얼핏 자신의 
    그림자와도 같은 모습을 보일 뿐이었다.

      그럼에도 어떻게 그는  자신이 테러한 네 사람과  또 앞으로 자신이 
    테러 할 또 한  사람에 대해 마치 곁에서 바라본 것처럼  그들의 행적
    에 대한  정확한 정보를  입수하고 그들이 테러의 대상이 될 사람들인
    가 아닌가 정  확한 판단을 내릴 수  있었는가. 그건 소설이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고, 그  테러리스트가 T와 같은 현실적   존재가 아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 다.

      그래서 그 테러리스트는  소설 속의  인물들에  대한 테러를 가하는 
    동시 에 소설 밖으로  나와서는 소설을 읽는 독자에게 테러를 가하고, 
    또 독자 는 스스로 반성하듯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깊이 감염되고 만 
    자신의 <압구정동>식 욕망에 테러를 가하도록 했던 것이었다. 

      하여,  테러리스트는  자신을 세상으로   내보낸 작가,나 이득지의 
    분신 일 수는 있어도  소설을 읽은 독자 어느 누구도 소설에  나온 것
    과 같은  행동으로 그  테러리스트를 자기와  동일시할 인물은 아니라
    는 얘기였다.  처음부터 그는 소설 속의  현실에만 존재하는 <윤리>라
    는 이름의 허구적  인물이므로.

      그는 T가 자신에게 말은 그렇게 했어도 바로 그 점을 알아 주었으면 
    했 다. 이건  <피셔킹>  식으로 나갈 일도,소설  속의  인물을 그대로 
    모방할   일도 아니며,더더구나 당신이   분개하고 있는 <압구정동>식 
    욕망과,부패와 타락이 그 소설에  나오는 것과 같은 모방 범죄로 해결
    될 단순한 문제가 아니라는 것을.

      그러면서 그는 언제부턴가 신문이  오면 불안한 마음으로 우선 사회
    면을 펼쳐 거기에 나온 일단 기사부터 살피는 버릇이 생겼다. 아침 신
    문이 올 때에도 그랬고,저녁 신문이  올 때에도  그랬다. 전화에서 말
    한 대로 T가 정말 그런 마음으로 압구정동으로 나간다면 아마 첫 사건
    은 그렇게 시작 할 것이었다.

      매일 같은 자리에  나오는 <아파트에서  2인조  강도 경찰과 대치중 
    인질 살인>이거나 <40대 명동성당  미사에  뛰어들어 "낙태반대" 알몸 
    시위>하는 기사를  읽을 때마다 그는 <오늘도  무사히> 하는 심정이었
    다.

      아내는 사건이 나기 전 우리가  먼저 그 사람의 목소리가 녹음된 테
    이프를 들고가 경찰에 신고할  수도  있는 일 아니냐고 했지만,그것도 
    말처럼 쉽고 단순한 일이 아니었다. 우선 사건이 날지 안 날지도 모르
    는 일이거니와 어떻게 작가가 자신이 쓴 책을  읽고 전화를 해온 독자
    에게 압구정동으로  테러를 나가라고 부추긴(?) 테이프를   들고 나가 
    신고를 할 수가 있겠는가.

      그러자 아내는 다시  테이프는  없애버리고 그냥 그런  전화가 왔었
    다는 신고만이라도 할 수 있는 일  아니냐고 했지만,그러면 경찰은 그 
    신고를 접수하기는커녕 오히려  그를 <피셔킹>에 나오는 미치광이  수
    준으로 볼 것이었다.

      저 사람,글을 쓰다가 살짝 돌아버린 것 아니야.
      전화를 받던 당시의 상황 설명없이 길을 가는 사람을 잡고 물어봐도 
    백이면 백 사람 다 그렇게 말할 것이었다.

    정상적인 사고를 가진   사람들의 생각은 그랬다.  매일  매일 신문 
    일단 기사에 나오는  대로  <변심한 애인 집 찾아가   흉기 휘둘러 살
    해>라든가 <증권사 차장 고객 집에  불질러 2명 사망>은 있을 수 있는 
    일이어도 <20대 청년  소설  모방 압구정동 주민  살해>와 같은  일은 
    정치인이나 정부 관리들이 무슨 사고나 불미스러운 사건 뒤에 늘 입버
    릇처럼 말하는 대로  일어나서도 안 되지만 일어날  수도 없는 일이었
    다.

      그러다 T로부터 그런  전화가 온 날이   보름쯤 지나며 그의 긴장도 
    그의 아내의  긴장도  조금씩조금씩 엷어져갔다.  예전과  마찬가지로 
    아침이면 그는 자신의 집필실로 나갔으며,그의 아내도 늘 아이를 조심
    시키고 문단속을 철저하게 하긴  해도 시간이 지나며 T의 말을 단순한 
    협박으로 받아 들이는 듯했다.

      그러던 어느날 이득지는 자신의  집필실에서 막 배달되어온 석간 신
    문을 펼치다 심장이  멎는 듯한 충격 속에 거기에  난 한 기사에 눈이 
    붙잡히고 말았다.

      <아파트 단지앞 공터에서 노파 피살 
      범인은 피살자 입에 T자 메모 남겨>

 

 소 제 목 : 피살자의 신원은 아직 알 수 없고

  강남 경찰서 강력계 석호근 경감이 그  사건을 접한 건 지난밤 두 시가 
 지나 거의 세 시가 다 될 무렵이었다. 그때 석 경감은 집에서 세상 모르
 게 잠을 자고 있었다. 그러다  느닺없이 울려대는 벨소리에 일어나 아직 
 잠이 덜 깬 상태에서 그날 강력계 당직인 남인욱 형사의 전화를 받았다.

  "죄송합니다,반장님. 주무시는데......"
  "또 무슨 일인데?"

  정말 그 시간만큼 동료거나 부하 직원의 전화가 반갑지 않은 때도 드물
 었다.시간도 시간이지만 그런 시간에  집으로까지 전화를 걸어 보고하는 
 내용이라는 게 으례 골치아픈 일들뿐이기 때문이었다.

  "사건입니다. 압구정동 현대아파트 앞  공터에서 살인 사건이 발생했습
 니다. 두세 시간쯤 전에 발생한 것 같은데,더 조사를 해 봐야겠습니다만 
 70대 여자 피살자의 사체만 있고 범인은 도주한 것 같습니다."
  "공터라면 어디 있는 공터를 얘기하는 거야?"

  그는 다소 짜증스럽게 말했다. 부하 직원의 보고가 시원찮다는 것이 아
 니라 그 시간 그런 전화를 받아야  하는 자신의 처지와 직업이 짜증스러
 운 것이었다.

  "아파트 바로 앞쪽입니다."
  "지금 있는 데는?"
  "현장입니다. "

                                                                                                                                                                                                                                                                                                                                                                                                                                                                                                                              은 이따금씩 
 있어 왔다. 또 그런 살인  사건만 전담하는 강력계 형사들로서는 새삼스
 레 놀라거나 크게 놀랄 일도 아니었다. 차가 많으면 어디에서나 교통 사
 고가 일어나기 마련인  것처럼,사람이 많이 살다 보면  어디서든 사건은 
 일어나기 마련이었다.

  문제는 늘 같은 살인 사건이라도 어떤 사건이 일어났느냐보다 어디에서 
 어떤 사람에게 그런 사건이 일어났느냐 하는 점이었다.

  보고받은 것만 가지고는 피살자 신원이야 아직 알 수 없는 일이고,사건
 이 일어난 곳이 한때는 강남 부촌의 대명사처럼 불리던 압구정동 현대아
 파트 앞 공터라는 게 어떤 직감처럼 마음에 걸렸다.

  아마 남 형사 역시 같은 생각이었을 것이다.그렇잖으면 그보다 이른 시
 간에 발생한 사건이라 하더라도 사건 보고를 한 남형사에게 현장 출동을 
 지시하고 자신은 아침 일찍 출근하는 길이거나 아니면 서에 나갔다가 잠
 시 현장을 둘러보는  정도로 그쳤을지 몰랐다. 아니,그  전에 남 형사가 
 집으로까지 그런 보고를 하지 않았을지 몰랐다. 모르긴 해도 남 형사 역
 시 혼자 현장에 나갔다가 자기만 둘러보는 선에서 끝낼 사건이 아니라고 
 판단해 그 시간 전화를 걸었을 것이었다.  

  석 경감은 곧바로 자리에서 일어나 옷을 갈아입고 현장으로 나갔다.



 소 제 목 : 매니큐어를 칠한 여자의 손이 남자의 ...

  현장엔 전화를 한 남 형사와 감식계 조 형사가 나와 있었다. 그리고 그 
 두 사람으로부터 몇 발짝 떨어져 아파트  관내 파출소 순경과 방범이 감
 식계 형사가 사체를 조사하는 일을 기웃거리고 있었다. 

  "어떻게 된 거야?"
  "보시는 대롭니다. 아직은 말씀드리기가......"

  여전히 짜증스러운 말투로 석 경감이 묻고 한손에 불빛 센 플랫쉬를 들
 고 선 남 형사가 마치 그것이 자기 책임이라도 되는 듯 송구스러운 얼굴
 로 대답했다.

  "어디 보지."

  석 경감은 남 형사로부터 플랫쉬를 받아 사체를 비추어 보았다. 나 甄 
 70세쯤 되어 보이는 노파였고,사체는 뒤에서  목을 졸라 질식케 한 것말
 고는 큰 외상이 없어 보였다. 다시  석 경감은 피살자의 신원을 밝힐 만
 한 신분증이나 물건 같은 게 나왔냐고 물었고,남 형사는 몸에 지닌 패물
 과 그 나이의 노파들이 지니기엔 약간 많다 싶을 만큼의 현금 말고는 별
 다른 소지품이 없다고 대답했다.

  "얼마나 나왔는데 그래?"
  "백만원짜리 수표 두 장하고 현금 47만 3천원입니다."
  "그게 약간 많은 거야? 딱 우리 석 달치 봉급인데도?"
  "......"
  "그래 다른 건 없고? 손가방이라든가 뭐 그  거 말이야."
  "없습니다. 그런데......"
  "그런데 뭐?"
  "피살자 입에서 범인이 남긴 메모가 나왔습니다."
  "뭐야?" 
  "이봐,조 형. 아까 그거 반장님께 좀 보여드리지."

  남 형사가 감식계 형사에게 말하자 감식계 형사는 수건에 싸 수거한 범
 인이 남긴 메모를 석 경감에게 보여 주었다. 피살자의 타액이 묻어 조금
 은 눅눅해 보이는 그 메모지는 일반적으로 사용하는 메모지가 아니라 흔
 히 볼 수 있는 책 한 귀퉁이를 손바닥만하게 찢어낸 종이였다.

  우선 눈에 들어오는 게 인쇄된 활자 위에 파란색 사인펜으로 비교  정
 자로 쓴 알파벳 대문자 T였다. 무슨 뜻인지는 알 수 없지만,한가지 분명
 한 건 우발적 살인이 아니라는  점이었고,범인 스스로 무언가 자신의 존
 재를 알리고  싶어한다는 점이었다.  형사에게든 아니면  다른 사람에게
 든......  

  "아파트 앞도 아파트 앞이지만,주무시는데 전화를 안 드릴까 하다 그게 
 나오는 걸 보고 보통 사건이 아니다 싶어서 전화를 드렸습니다."
  "이거야 정말 사람 죽이는군......"

  석 경감은 다시 플랫쉬를 범인이 남긴 메모지 위에 비추고 그것을 찬찬
 히 뜯어보았다.

  " T라......"

  대체 범인은 이  글자 하나로 자신의 어떤 존재를  알리고 싶다는 것일
 까.

  그러면서 그는 아무렇게나  찢어내 제대로 뜻이 통하지  않는 활자들에 
 시선을 박았다.

  [색 털을 가진 여자의 거기가 비춰지
  히 핥고 있는 그림이 한동안 나오
  의 그것처럼 큰 남자의 물건이
  으로 들어가는 것이었다.아니,그러기 전
  니큐어를 칠한 여자의 손이 남자의 그
  고는 제 입으로 끌어들이는 것이]
  그럼 뒷면 내용은 내일 go novel......


 소 제 목 : 석경감은 범인이 남긴 메모지의 ...

  이어 석 경감은 범인이 남긴 메모지의 뒷면 활자들을 살폈다.

  [었다.살면서 마음 속으로나마 한 번 그
  살을 섞는 법이 있다는 걸 들어보지도
  그 속에 다 어우러지고 있었다.처
  짓 혀를 차기도 했지만 시간이 지
  콘을 꼭 움켜 잡고 조금씩 조금
  앉았다.]

  그러나 찬찬히 보기는  했지만 석 경감은 범인이  남긴 알파벳 T자에만 
 의미를 두었을 뿐 그 메모지가 어떤 책의 한 부분을 찢어낸 것이라는 것
 과 거기에 적힌 글들의 내용에 대해서는 별 의미를 두지 않았다. 그부분
 만 보면 조금 야한 내용의 책을 찢어 쓴 것 같기도 했지만, 누구나 그렇
 게 생각하듯 반듯한 메모지가 없으면 달력을 찢어 쓸 수도 있는 것이고,
 신문이거나 책을 찢어 쓸 수도 있는 일이었다. 단지 거기에 무엇을 남기
 느냐가 문제였고,그것이 그 사건을  해결하는데 미약하나마 하나의 작은 
 힌트와 단서가 될 수 있다는 것뿐이었다.

  "이봐,조형사 이거 잘 보관하고."

  석 경감은 감식계 형사에게 범인이 남긴 메모지를 넘겼다. 아무런 흔적
 이 없는 것보다야  그래도 무엇 하나 흔적을 남긴 것이  있는 게 사건을 
 해결하는데 도움이 되겠지만,오히려 그 단서가    메모를 보고 나자 아
 무래도 이번 사건이  쉽게 해결 될 것 같지 않다는  생각이 드는 것이었
 다.

  범인 스스로 아무런 흔적을 남기지 않고자 노력할 땐 그래도 그 스스로
 도 모르게 남긴 또 다른  흔적과 빈틈이 있가 마련이지만,이번 경우처럼 
 범인 스스로 자기의 존재를 드러내고자 할 땐 그렇게 드러내는 물증이나 
 흔적말고는 다른 걸 찾기가 어려웠다. 지금까지의 경험으로도 그랬고,초
 동 수사를 나와 사건 현장에서 느끼는  어떤 직감 같은 느낌으로도 그랬
 다.

  "사건은 어떻게 접수된 건데?"
  "한 시 반쯤 저  1린 신고를  했습니다. 여기 아파트 내 파출소 직원
 인데 저 친구도 신고를 받고 현장에  나왔다가 바로 우리한테 전화를 했
 답니다."

  파출소 순경 말로는 처음 사건을 신고한 사람은 20대 남자라고 했다.

  "당직을 서고 있는데 전화가 왔습니다.  아파트 앞 공터에 사람이 죽어 
 있는 것 같다고...... 그게 한 시 조금 넘어서였습니다. 그래서 혹시 장
 난 전화가 아닌가 싶어 저희들끼리만 나갔다가 바로 본서로 신고한 겁니
 다."

  순경은 아직 나이가 앳돼 보였다. 사건  신고가 들어왔을 때 무얼 하고 
 있었느냐는 말  나이  어린 순경은 잠시 머뭇거리다가,한  차례 순찰을 
 돌고 와 라면을 끓여 먹고 있었다고 말했다.

  "그렇지만 여기는 열한 시쯤 순찰을  돌았습니다. 바로 요 앞에 순찰함
 이 있고 해서......"
  "이봐. 자네 곤봉 든 지 얼마 됐나?"
  "예?"
  "경찰밥 먹은 지 얼마나 됐냐구?"
  "오는 3월이면 꼭 1년 되는데요."
  "1년 되면 돌아가는 눈치는 알아야지. 지금  한 얘기 조금 있다가 기자
 가 나와 묻고 서장님이 나와 묻거든  그대로 해보지 그래. 라면 끓여 먹
 고 있었다고. 주민들이 나와서 대체 경찰이 뭘 하는 거냐고 물 諍 그대
 로 대답하고."
  "아,예......"

  그제서야 파출소 순경은 석 경감의  말을 눈치챈 모양으로 뒷머리를 긁
 적였다.

  "그 시간 순찰을 돌긴 제대로 돈 거야?"
  "예. 순찰함 사인도 하고요."
  "그땐 별일 없었단 말이지? 뭐 수상한 사람이 있었다거나 그런 낌새 같
 은 것도 없었고?"
  "예. 그때는 아무 일 없었습니다."
  "그럼 파출소로 신고한 사람이 대체 누구란 얘기야?"



 소 제 목 : 석경감은 처음 신고한 사람이 범인이라고
     "지나가는 사람이라면서 전화로 알려왔습니다. 목소리는 20
    대 같은데 누구냐고 물어도  그건 대답할 수 없다면서...... 
    그래서 처음엔 장난 전화가  아닌가 하다가 그래도 미심쩍어 
    저 사람하고 같이 나왔던 겁니다."

     "소장한테는 보고하고?"

     "예. 직원들 다 비상 연락망으로 연락했습니다."

     "신고 전화는 녹음해뒀겠지?"

     "그게 저어......"

     석 경감이 다그치듯 묻자  순경은 머리를 긁적이며 미처 그
    러지 못했다고 말했다.

     "이봐,자네. 그 신고한 사람이  범인이면  渚 거야? 112신
    고도 아니고 파출소 신고라면 최소한 파출소 전화 번호는 알
    고 있는 사람이란 얘기 아니야?"

     "......."

     "그냥 일반 시민이 자기 동네든 아니면 말 그대로 지나가는 
    길이든 가까운  파출소 전화 번호 알고  있는 사람이 몇이나 
    돼? 순경인 자네는 자네가  근무하는 파출소 말고 자네가 사
    는 동네 파출소 전화 번호 알아,몰라? 대답해봐."

     ".......모릅니다."

     "순경인 자네도 자네가 사는 동네 파출소 전화 전화를 모르
    는데 신고한  사람은 피살자가 죽어 있는   痼 보고 어떻게 
    금방 파출소 전화 번호를 알았겠냐는 애기야? 동네 사람이든 
    신고한 대로  지나가던 사람이든. 그러면 그게  장난 전화든 
    아니든 최소한 녹음은 걸었어야지. 파출소에 있는 전화기 녹
    음 장치 없어?"

     "있지만 장난 전환줄 알았고,또 그런 신고는 처음이라 정신
    도 없고 해서......"

     "이런 친구하고  얘길 하자니......  남형사,자네는 어떻게 
    생각해?"

     석 경감은 이번엔 남 형사를 지목해 물었다.

     "파출소로 신고를 했다는 점에선  반장님 말씀대로 일단 범
    인일 가능성도 있지만....."

     "있지만 뭐야?"

     "범인이면 굳이 신고까지  하겠냐는 생각도 드는데요. 만약 
    파출소에서 녹음을 걸 것까지도 생각한다면 말이죠."

     "그래서 아닐 수도 있다?"

     "제 생각엔 어느 쪽으로도 가능성은 있다는 거죠. 신고자를 
    밝히지 않는  거야 그러면 본인이 귀찮고  하니까.그럴 수도 
    있는 거고."

     "그래. 그럴 수도 있겠지.  그렇지만 상식적으로 생각을 해
    봐
만약 자네가 길을 가다  이번 사건을 보았다. 그러면 자
    네는 어디로  신고를 하겠어? 112야,아니면  동네 파출소야? 
    거기다 보통  사람이 동네 파출소 전화  번호를 알고 있기가 
    어디 쉬운 일이야? 길 가다가 했다면 분명 공중전활 테고."

     석 경감은 처음 사건  신고가 파출소로 들어왔다고 했을 때
    부터 그러면 그것은 범인이  건 전화일 거라고 생각했다. 게
    다가 범인이 피살자를 살해한  후 대담하게 피살자의 입에 T
    자 메모를 남긴 것을 보곤  더욱 그런 쪽으로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그것이 형사 생활  20년 동안 쌓아온 경험이었고,이
    번 사건에 대한 그의 직감이었다.


 소 제 목 : 소장님한테 라면얘기는 하지마세요
     "저어,반장님. 우리 소장님 오시면  라면 얘기는 하지 마십
    시오."

     순경은 뒤늦게 그 일이 걱정되는지 석 경감에게 말했다.

     "자넬 난처하게는 안 할 테니  대신 내가 묻는 말에 정직하
    게 대답해봐. 이건 수사  가닥을 잡는데도 아주 아주 중요한 
    거니까. 자네 정말 장난  전화로 들었던 거야,아니면 처음부
    터 제대로 된 사건 신고로 들었던 거야?"

     "사람이 죽었다는 소리를 들을  때부터 정신이 없어서 녹음
    을 걸 생각은......"

     "녹음을 왜 안 했느냐고 묻는  게 아니라 처음 전 ?濱 느
    낌을 묻는 거야. 지금 생각해 보니 신고한 사람이 범인 같더
    냐,아니면 정말 길을 가다가 변사체를 보고 전화를 한 것 같
    더냐 이거야?"

     "제 느낌엔......"

     "그래,자네 느낌엔?"

     "그냥 신고  전화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신고하는 사람도 
    놀라서 어떻게 해야 되는지 무척 허둥대는 느낌이었습니다."

     "뭐라고 신고를 했는데?"

     "그냥 아파트 앞 공터에  사람이 죽어 있다고 했습니다. 여
    자냐 남자냐 물어도 여자 같은데 잘 모르겠다고 그러고요."

     "신고한 사람 인적 사항을 물으니 뭐래?"

     "그건 얘기할 수 없다면서 전화를 끊었습니다. 그래서 전화
    를 받을 땐 장난 전화라고  생각하지 않다가 전화를 끊고 나
    서 장난  전화가 아닌가 생각했던 겁니다.  본서에도 그래서 
    여기 현장을 확인한 다음 바로 전화로 보고를 했습니다."

     "그러니까 자네  생각은 범인이 한 전화  같지는 않다 이거
    지."

     "잘은 모르겠습니만 전화를 받을 때 느낌이......"

     그래도 석 경감은 자신의 경험과 직관 쪽을 믿었다.

     잠시 후 연락을 받고  나온 파출소장과 직원 湧 그 사건의 
    책임이 마치 나이 어린 당직  순경에게 있기나 하듯 그를 다
    긋치듯 힐난하며 이것 저것 물었다.

     시간은 벌써 새벽이 다가오는데 아직 피살자의 신원은 아무 
    것도 밝혀진 것이 없었다. 가족이거나 피살자의 연고를 아는 
    사람이 나타나야  할 텐데 남 형사와  조형사가 현장 수습을 
    마칠 때까지도 나타나는 사람이 없었다.

     "동네 사람이 아닌가,이상한데요.  차림새나 소지품으로 봐
    선 무연고자  같지는 않은데 몇 시간이  지나도 찾는 사람이 
    없으니...... 이 시간에 노인이  나가 들어오지 않으면 불안
    해서라도 찾을 텐데 말입니다."

     "그러게 말이지. 이 동네 노인이 아니라는 얘긴가?"

     현장 수습을 마친 다음 남형사가 말하고 석 경감이 받았다.

     "그러면 일부러 여기까지 끌고와 살해했다는 얘기가 되잖습
    니까?"

     "아니지. 살해한 다음 사체를 유기할 수도 있는 거지."
     그러다 무슨 생각에서인지 석 경감은 다시 파출소장을 불렀
    다. 

     "지금 파출소에 전화 받을 근무자가 있습니까?"

     "있습니다. 직원 하나하고 방범 둘 하고."

     "이봐,남  環. 파출소로 전화를 거는 건 범죄 신고 전화가 
    아니라 바로 이럴 때 거는 거라구. 식구가 나갔는데 아직 안 
    들어온다 했을 때 말이지. 이럴 땐 모르는 전화 번호도 어떻
    게든 알아내서 걸거든."

     그러나 새벽  동이 터오르고,서서히 날이  밝아올 때까지도 
    연고자도,또 파출소로 걸려온 가출 신고 전화도 없었다. 



 소 제 목 : 피살자의 연고자가 나타난건
     피살자의 연고자가 나타난 건  현장 감식이 끝나고,그 마무
    리로 찍어야 할 사진들까지 찍고 난 다음 이제 어느 정도 날
    이 밝아 사체를 병원으로 막 옮기려고 할 때였다.
     아니,연고자가 나타난  것이 아니라 피살자가  어디에 사는 
    누구라는 것만  확인해 줄 사람이 나타난  것이었다. 그것도 
    남 형사가  혹시나 하는 마음에 처음  사건 신고를 받았다는 
    파출소 경찰에게 건너편 아파트  단지에 가 경비들을 불러오
    라고 해서  그 노파가 아파트의 주민인  것을 확인한 것이었
    다.

     "얼굴  보니까 맞는 것  같기도 하네요. 우리 아파트 주민
    이.....아주 낯이 설지 않는 게 몇 번 우리 쪽 초소 앞을 지
    나다니는 걸 본 적이 있는 것 같기도 하고......"

     처음 사건 현장으로 나온 다섯  명의 경비 중 한 명이 말했
    다.

     "몇 동 몇 호에 사는 누구라는 건 모르고요?"

     "뭐 단지 안이 워낙 넓어놓으니 그건 잘...... 7동인가 8동 
    그쪽 같은데 그 쪽 경비가 오면 긴지 아닌지 확실하게 알 텐
    데......"

     "그럼 가서 그쪽 사람  좀 불러오십시오. 단지 안에 시끄럽
    게 소리내지 말고 조용히 말이죠."

     겨우 그런 식으로 해서  피살자의 신원과 가족 사항만 파악
    한 것이었다. 그러나 그  아파트에 혼자 사는 노인은 아니라
    고 했다.

     "함께 사는 아들이 하나  있어요. 스물 일고여덟쯤 됐나,결
    혼은 아직 안 한 것 같고  별다르게 하는 일이 없는지 늘 그
    랜저를 끌고 왔다갔다 하는 걸 봤는데."

     "그럼 지금  집에 없는 모양이군요. 있다면  어머니가 집을 
    나가 안 들어왔는데 그냥 있지는 않을 것 같고......"

     "모르죠,뭐. 요즘 애들이 뭐  부모가 밖에 나갔다가 들 楮
    는지 안 들어왔는지 일일이 그런  데 신경쓰고 사는 것도 아
    니고."

     그러나 다시 아파트로 갔다온  그 동 경비는 경비실에서 아
    무리 연락을 해도 인터폰을 받는 사람이 없더라고 했다.

     "그럼 나중에 아들이 돌아오거든 서(署)로 나오든가 아니면 
    병원으로 나오라고 하시오."

     병원엔 감식계 조형사가 따라가고  석 경감과 남 형사는 일
    단 본서로 들어왔다. 아직  직원들은 아무도 나오지 않았고,
    매일 비슷한 시간에 정해진 구역을  도는 조간 신문 기자 하
    나와 석간 신문 기자  毬ぐ  무슨 별다른 건수가 없는가 나
    와 있었다.

     "사건인 모양이죠? 이 시간에  강력계 두 분이 나란히 출근
    할 일도 없는 것 같고."

     두 사람 중  조금 더 나이가 들어보이는  석간 신문 기자가 
    물었다.

     "뭐 언제는 사건이 안 터졌습니까?"

     석 경감은 대수로운 게 아니라는 투로 받으며 자리에 와 앉
    았다. 잠을 제대로 못 자서 그런지 그의 눈이 조금은 퀭하게 
    보였다. 석 경감은  세수를 할 때처럼 두  손으로 서너 차례 
    마른 얼굴을 비볐다.

     "여기 있는 사람들한테 대충 얘기는 들었습니다. 어떤 사건
    인데 그래요?"

     "별 사건 아닙니다. 아파트  앞 공터에서 노인 하나가 살해
    되었어요."

     "남잡니까?"


 소 제 목 : 아뇨,여자요
     "아뇨,여자요. 쓸 것도 없어요.  금방 해결될 거니까. 써도 
    해결된 다음 써도 되고."

     석 경감은 가능한 기자들의 관심을 따돌리려 했다. 미리 소
    문난 시건치고 제대로 수사가  되는 경우가 많지 않았다. 또 
    맡고 있는 사건이 신문에까지 나 바깥으로 소문이 퍼져 좋을 
    게 없었다. 그것 또한 경찰  생활 20년 동안 갖게 된 기자들
    에 대한 그의  선입견이었고,또 사건에 임하는 반장으로서의 
    생각이었다.

     "피살자의 입에서 메모가 나왔다는 건 뭡니까?"

     이번엔 나이 어린 조간 신문 기자가 물었다.

     "그 얘기는 어디서 들었어요?"

     "여기 와 있으면 안 듣는 얘기가 있습니까?"

     "그건......"

     그러면서 석 경감은 남 형사를 돌아보았다.

     사람,신중하지 못하게......

     석 경감의 눈이 조용히 남 형사를 나무랐다. 그러나 신중하
    지 못한 건 남 형사가 아니라  이 안에 있는 사람 누구일 것
    이다. 아까 현장에서 철수하기 전 남 형사가 본서로 알린 간
    단한 사건 개요를 안에 있는  사람 누군가 기자 앞에서 떠든 
    모양이었다.

     난 아닙니다.

     석 경감의 눈과 마주친 남 형사의 눈이 말했다.

     "그냥 피살자의 입에서 메모 한 장이 나왔어요. 아무 책 중
    간쯤을 손바닥만큼 찢어내 알파벳 T라고만 쓴."

     "무슨 뜻인데요?"

     "지금 그걸 어떻게 압니까? 피살자 신원도 제대로 밝혀지지 
    않았는데."

     "그 메모 좀 구경할 수 있습니까?"

     "아직 감식도 끝나지 않은  걸 뭘 어떻게 보여줘요.내 손에 
    있는 것도 아니고."

     다시 기자 둘이 번갈아가며 메모에 대해 몇 가지 보충 질문
    을 했지만 석 경감은 굳게 입을 다물었다. 그러자 이번엔 기
    자들이 남 형사에게 말머리를 돌렸다.

     "보나 안 보나  마찬가지라니까 그러네. 손바닥만하게 책을 
    찢어내 각이 딱
지게 정자로  T자를 쓴 거라니까. 이제 일 
    좀 하게 비켜줘요. 자꾸 말 시키지 말고."

     "뭘 제대로 얘길 해줘야  비키든 말든 하지요. 이건 은어낚
    시 입질을 하는 것도 아니고 자꾸 감추기만 하니......"

     "얘기한 그대로에요. 감출 것도 없고,감추는 것도 없고. 어
    젯밤 거기에서 사건이 나고,피살자  입에서 그런 게 나오고. 
    뭘 더 얘기할 것도 없는 걸 가지고 자꾸 그래요?"

     "그래도 쓰자면 쓸 거리가 있어야지요."

     "이봐요,기자 양반.  서울에서만도 하룻밤 그런  사건이 몇 
    건이나 일어나는지 잘 알잖소? 그걸 다 쓰자면 신문 한 장으
    로도 부족할 거란 것도 잘  알 테고. 쓸 것도 없다니까 자꾸 
    그러네. 꼭 쓰고  싶으면 내일 모레쯤 사건  종결 짓고 나서 
    쓰던가 하라니까. 아직은 피살자의 신원도 안 밝혀져 그것말
    고는 얘깃거리도  없어요. 범인은  오늘 낼 금방  잡아낼 거
    고."

     "여긴 올 때마다 클레믈린이야. 무슨 비밀이 그렇게 많은지 
      것도 아닌 것까지 다 감추려고만 하니......"

     "그러니까 쓸 거 없다는 거 아니요. 별 것도 아니니까."

     투덜대는 기자들의  등을 돌려세워 내보낸 다음  석 경감은 
    다시 남 형사를 불렀다.

     "자넨,사건 보고가  끝나는 대로 전화국에  나가봐. 어젯밤 
    그 시간  파출소로 신고한 전화가 일반  전환지 공중 전환지 
    말이지. 그리고 메모 얘기는 보고 때 말고는 안에 있는 사람
    들한테도 하지 말고. 사람들이 눈치가 있어야지."

 
 소 제 목 : 이름은 황분이 나이는 67
     석 경감은 그대로 자리에  앉았다가 출근 시간이 되어 윗선
    의 보고보다 먼저 어젯밤 일어났던 노파 살해 사건을 강력계 
 
   형사들에게 설명했다.

     "죽여 주는군,주말 아침부터."

     사건 개요에 대한 반장의  간략한 설명이 끝나기 무섭게 강
    재섭 형사가 입안으로 웅얼거리듯 혼잣소리로 말했다.

     "형사가 토요일이 어딨고 주말이 어딨어,이 사람아. 어젯밤 
    추운데 나가 밤새 덜덜 떨며 사건 치닥거리한 사람도 가만히 
    있는데."

     "모처럼 가족들하고 약속을 했으니 그러지요."

     " 도?愎 소리말고,피곤하겠지만 남  형사는 아까 말한 대
    로 전화국에 나가보고,강 형사는  지금 컴퓨터로 이 주소 한 
    번 조회해봐. 아들놈이 하나 있다는 게 어딜 나가 제 부모가 
    변을 당했는지 어쨌는지도 모르고 있으니 우리라도 보고하기 
    전 피살자 신원이라도 제대로 파악하고 있어야지. 앞으로 뭘 
    알아보재도 그것부터 알고 나서 알아봐야 할 테니까. 그리고 
    김 형사는  지금 바로 아파트로 나가봐.  나가서 기다렸다가 
    아들이 돌아오면 바로 이리로  데리고 오고. 혹 모르니까 그 
    아파트 주변하고 방문자가 있는지도 감시하고."

     "알겠습니다."

     "참,남 형사. 나가는 김에 말이지,전화국에 가서 그쪽 집으
    로 오는  전화 오늘 하루만이라도 이쪽으로  연결되게 할 수 
    없는지도 알아보라구. 또 요 며칠 새 그 집으로 걸려온 전화
    들이 어디서 걸려왔는지 번호들도 알아 오고."

     성명:황분이
     나이:67
     주민등록번호:270322-2123456
     주소:서울시 강남구 압구정동 **아파트 **동 ****호

     잠시 후 강 형사가 컴퓨터로 주소지를 조회해 뽑아 준 피살
    자의 인적 사항은 그렇게  た都.

     "맞는 거 같군. 나이도 그쯤되는 것 같고."

     "주소지 조회로는 그렇게 나옵니다. 김형동이라는 스물여덟
    살 된 아들이 하나 있고요."

     "그럼 뽑는 김에 이름과  주민증록번호를 넣어서 호적 사항
    도 한  번 뽑아봐. 그러면 분가했거나  출가한 자녀들까지도 
    다 나올 테니. 그런데  어머니가 변을 당했는데 그 아들이라
    는 놈은 왜 아직도 안  나타나는 거야? 전화 연락도 없고 말
    이지."

     "오늘 안으로야 오겠죠. 언제 들어와도 들어올 테고......"

     "누가 그걸 몰라서 묻나. 우리 상식으로는 말이 안 되니 하
    는 얘기지. 어머니는 밖에 나가 변을 당하고,아들은 언제 나
    갔는지 밖에 나가 여태 연락도 없고."

     강 형사가 다시 뽑아온  자료에 의하면 피살자의 남편은 23
    년 전 사망했고,자녀는 모두 넷으로 나와 있었다. 주소지 아
    파트에 함께 사는 김형동말고도 위로 출가한 마흔셋된 딸(김
    금순)과 서른아홉된 딸(김정순)이  있고,또 결혼하여 분가한 
    서른셋 된 아들(김형명)이 있었다.  

     그러나 윗선에 간략한 사건  발생 보고를 마친 다음 넷씩이
    나 되는 그 아들    전화보다  먼저 연락이 온 건 전화국으
    로 나간 남 형사의 중간 보고였다.

     어젯밤 사건 신고가 들어오던 무렵 외부에서 파출소로 걸려
    온 전화는 모두  세 통이었고,다행히 세 통  다 공중 전화가 
    아닌 일반 가정집 전화들이라고 했다. 처음 현장에서 가졌던 
    석 경감의 직감대로라면 사건은 금방 해결될 수 있다는 얘기
    였다. 그러나 남 형사가 전화로 그것을 보고했을 때 석 경감
    은 금방 손에 잡힐 것 같던 사건이 갑자기 손 안에서 벗어나
    는 듯한 아득해짐을 느꼈다.



 소 제 목 : 누가봐도 사건은 장기전이었다
     점심 시간이 거의  다 되어 감식계 조  형사가 건네준 감식 
    결과 보고서에 따르면 직접적  사인은 외부에서 물리적 완력
    으로 가한 기도 압박 질식사이지만 피살자의 사체와 유품 어
    디에도 사건 해결의 단서가 될 만한 흔적은 나오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목이 졸린 흔적말고는 아무 것도 없습니다. 피살자가 장갑
    을 끼고 있었다 해도 일단 목이 졸리면 반항하느라 범인에게 
    상처를 내거나 머리카락 하나라도  움켜잡았을 텐데 그런 것
    도 없고요."

     "현실적으로 그게 가능한 얘기야?"
                                                                                                                                                                                                                                                                                                                                                                                                                      
                                                                                                         했지만 그것도 피살자의 것으로 추정되고요."

     "메모지에도 별다른 게 없고?"

     "예. 그렇다고 정자로 쓴 영문자 한 자로 그 사람의 필체를 
    알아낼 수 있는 것도 아니잖습니까?"

     "그래. 우리한테는 그렇겠지. 그렇지만 그런 흔적을 남겼을 
    땐 그 놈에겐 그것이 대단히  중요한 의미겠지. 그 T가 무슨 
    뜻인지는 모르지만...... 애 썼어. 자네는 가 봐. 또 필요하
    면 협조 부탁할 테니까."

     "도움이 못돼 죄송합니다."

     "꼭 범인 같은 소리를 하고 있군."

     "예?" 

     "아니야. 우린 서에 죽치고  앉았더라도 자넨 주말 잘 보내
    라는 얘기였어."

     석 경감은 돌아서려다 말고  다시 고개를 돌려 반문하는 조 
    형사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리며 말했다.

     누가 봐도 사건은 장기전이었다. 전화국에 나갔다가 돌아온 
    남 형사의 얘기도 그랬다.

     "그 시간 파출소로 전화한 세 곳을 알아봤는데 하나는 어제 
    당직을 선 그 친구집  전화 번호였고,하나는 그 친구 고등학
    교 동창 집 전화 번호였습니다. 그 친구 말로도 그렇게 전화
    가 걸려왔었다고 그러고요."

     "나머지  毬ご?"

     "같은 아파트 단지 내의 대학생이었습니다."

     "제대로 알아본 거야? 사람도 만나보고?"

     "예. 방학이고,또  어제 그런 기분 때문에  그냥 집에 있다
    고. 전화국에서 우선 그  학생하고 통화를 하고 나서 서(署)
    로 들어오는 길에 만나보고 왔습니다."

     "만나보니 어때?"

     묻기는 그렇게 했어도 석 경감도 이젠 기대를 하지 않는 얼
    굴이었다. 그렇게 싱겁게 끝날  사건이 아니란 걸 이제는 누
    구보다 그가 더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또 확인하지 않을 
    수 없는 일이었다.


 소 제 목 : 으슥한 곳에 여자친구를 데려가서
     "신고자 인적 사항에라도 필요할  것 같아 주소하고 이름하
    곤 적어 왔는데 아닌 건 분명한 것 같습니다."

     "그럼 전화는  왜 그렇게 한 거야?  112가 아니고 파출소로 
    말이지."

     "사람이 죽어  있는 걸 보고 나서  신고를 하긴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는데 제일 먼저 떠오른  게 매일 그 앞을 지나다
    니며 본 아파트 단지  옆 파출소더랍니다. 그리고 신원을 밝
    히지 않고 전화를 한 건 그 시간 거기에 여자 친구하고 함께 
    갔다가 그걸 봐서 그랬다더군요."

     "여자 친구하고 함께 간 게 왜?"

     "반장님도 참...... 같은 아파트  단지 안의 여자 친구라는
    데 그 시간 거기 으슥한  공터에 여자 친구를 데리고 갔다면 
    왜 데리고 갔겠습니까?  말을 어물어물하길래 하나하나 따져 
    물으니 그래요. 집안 어른들 잔소리하는 거 듣기 싫어서라도 
    집에는 들어가야 할 시간인데 함께  있으니 젊은 몸에 또 욕
    심은 그게 아니었던 모양입니다.그렇다고 어디 여관 같은 데 
    들어갔다가 나오기는 너무 늦고 하니까......"

     "됐어,이 사람아. 나도 자식 키우지만 내 자식이나 남의 자
    식이나 이건 하는 짓들을 보면 꼭 물가에 애 세워둔 것 같은 
    게......"

     "반장님이 모르셔서 그렇지  그래도 그만하면 착한 거에요. 
    어른들 무서워 집에 일찍 들어갈  생각도 하고 사람 죽어 있
    는 것 보고 신고할 생각도  하고...... 요즘 그 나이 애들이 
    어디 그럽니까?  사람이야 죽어 있든 말든  나하고 상관없는 
    일이면 봐도 그냥 지나치지.  놀라서 얼른 밖으로 나와 여자 
    친구를 집앞까지 데려다 주고  저도 집에 들어와 어른들한테 
    얘기하고 전화를 걸었답니다. 파출소  전화 번호도 114에 물
     載≠側諮."

     "틀림없는 얘기야?"

     "그 학생 만나보기 전 그  번호로 전화국에서 확인해 본 사
    항입니다. 통화한 곳과 통화한  시간이 찍혀 나온 걸 보니까 
    114 다음에 곧바로 파출소였던 것도 사실이고요."

     "막막하구만."

     "그런데 한 가지가 더 있습니다."

     "한 가지 더?"

     석 경감의 숱 짙은 눈썹이 살찐 누에처럼 꿈틀 이마 쪽으로 
    올라갔다. 다른  때그랬다면 남 형사도 그런  반장의 모습에 
    입가에 웃음부터 띠었을 것이다.  가끔 석 경감 스스로도 본
    인을 <눈썹 값  못하는 위인>이라고 말할 때가 있는 관운장
    의 봉이 눈썹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그 눈썹을 가지고 웃고 
    말고 할 계제가 아니었다. 

     "예. 그보다  먼저 사망 추정 시간은  어떻게 나왔습니까?"    
     
     "열시부터 열두시 반 사이라는군."

     "파출소 그 친구가 열한시에 순찰을 돌 때까지는 일이 없었
    다고 했잖습니까?"

     "우리야 그걸  알지만 법의학이 그걸 알고  있는 건 아니잖
    아. 그것도 금방 발견된  것이라서 추정 시간을 최대한 좁힌 
    거라는데."

     "그렇지만 의학이 모르  걸 통신 과학은 아는 거지요."



 소 제 목 : 이봐,내가 먼저 묻고 있잖아
     "무슨 얘기야?"

     다시 석 경감의 봉이  눈썹이 이마 한가운데로 모아지며 꿈
    틀거렸다. 대답을 재촉한다는 뜻이었다.  

     "피살자 아들은 나왔습니까?"

     "이봐,내가 먼저 묻고 있잖아."

     "그걸 먼저 알아야 대답할 수 있는 거라서 그럽니다."

     "아직 안 나왔어." 

     "그럼 아직  확실한 건 아니지만 만약  아들이 그 시간까지 
    집에 있다가 밖에 나간 게  아니라면 노인의 사망 추정 시간
    은 적어도 열한시 25분 이후라는 겁니다."

     "자세히 말해봐. 수수께기하는 것처럼 하지  뺐."

     "어젯밤 열 한시 17분에 20분  사이에 누군가 그 집에서 통
    화를 했습니다. 아들이 아니라면 피살된 노인인데,누군가 노
    인을 불러냈다는 거지요.전화를 끊고 13층에서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와 공터까지 뛰어간다고  해도 5분은 걸립니다. 보
    통 걸음으로는 빠르게 걸어도 10분 거리고요. 그러니까 병원 
    쪽에서 내린  사망 추정 시간과 전화국에  찍힌 통화 시간을 
    함께 생각한다면 사건은 열한시  반부터 파출소에 막 신고가 
    들어오던 열두시 반 사이에 일어났다는 얘기가 되는 겁니다. 
    노인이 공터에  도착하자마자 피살되었다고  해도요. 그런데 
    신고한 학생이 공터에서 사체를 본  게 열한 시 45분 쯤이라
    고 했습니다."

     "그럼 그 친구가 사체를 보고 일부러 시계를 봤다는 거야?"

     "그게 아니라 바로 공터 앞에서 여자 친구를 그곳으로 데리
    고 가면서 시계를 봤는데  그게 정확하게 열한시 43분이었다
    는 것입니다."

     "그럼 어떻게 되는 거야? 열한시 30분부터 45사이의 일이라
    는 얘기 아니야."

     "그렇죠. 최대한으로 잡았을 때......"

     거기까지 얘기하고 남 環榮 주머니를 뒤져 담배를 꺼내 물
    었다. 그리고 다시 이쪽  저쪽 주머니를 뒤져 라이터를 찾자 
    그 시간마저 기다릴 수 없다는  듯 석 경감이 자신의 라이터
    로 불을 켜 주었다.

     "그런데 이렇게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길게 첫 모금의 연기를 뱉고 나서 다시 남 형사가 말했다.

     "어떻게?"

     "서로 들어오면서 생각을 했는데  그보다 시간을 더 압축할 
    수도 있다는 거죠."

     "말해봐."

     "반장님은 저보다 경험이 많으시니까 잘 아실 겁니다. 흉기
    를 사용한 것도 아니고  炷 졸라 사람을 죽일 때 최소한 몇 
    분간 목을 졸라야 사람을 죽일 수 있느냐는 거죠. 아무리 피
    살자가 노인이라도 말입니다."

     "3분? 아냐,4분,5분은 더 그래야겠지."

     "그리고 문제의 메모지에 적은 T 자 말입니다."

     "현재로선 그것만 가지고는 단서가  될 게 아무 것도 없어. 
    지문도 나오지 않았고."

     "그걸 범인이 현장에서 준비하지는 않았을 것 아닙니까?"

     "처음부터 준비해 가지고 왔겠지."

     "바로 그 점입니다. 전화  통화를 하고 나왔다는 건 불러냈
    다는 것이 분명하 ,나올 만하니 나왔다는 얘긴데 아주 모르
    는 사람은 아닐 거라는  거죠.그리고 두 사람이 처음부터 공
    터에서 만났든  아니면 공터에서 만나자고  하면 이상하니까 
    아파트 앞에서 만나 그곳으로 데리고 와서 그랬든 서로 어떤 
    이야기를 하다 의견이 안 맞아  살해한 것은 아닐 거라는 겁
    니다. 그런 메모를 준비할 만큼 처음부터 용의주도하게 살해
    할 목적으로 왔던 거니까 시간을 끌고 말고 할 것도 없는 거
    라는 거죠.  그러니까 노인이 공터에 도착한  다음 5분을 못 
    넘겼다는 건데  30분에 도착했 摸  35분이고,늦은 걸음으로 
    35분에 도착했다 해도 40분 사이의 일이고요."

     "그래. 그 시간에 노인을  밖으로 불러낼 수 있는 사람이라
    면 의심없이 공터까지도 데리고 갈 수 있는 사람일 테고. 그
    런데 불러내는 전화는 어디서 한 거야?"

 소 제 목 : 밤 열한시가 넘은 시간에 전화를 해서

   "아파트 앞 공중 전화에서 했습니다. 열한시 17분에요. 그 전
  화가 불러내는 전화가 맞다면......"

   "대담한 놈이군. 아파트 앞에까지 와서 사람을 불러내고."
   남 형사의 대답에 석 경감이 말했다.

   "그러게 말입니다."

   "우선 그  시간대에 그 앞을 지나간  목격자부터 찾아야겠군. 
  제대로 봤을지는 모르지만. 그리고  우리가 내린 살해 추정 시
  간 대에 공터에서도  목격자가 있었는지도 알아봐야겠고. 그런
  데 피살자는 대체 뭘 하는 사람이야?"

   "모르겠습니다.아직 그건."

   "열한시가 넘은 시간에 누군가  전화를 했고, 그 전화를 받고 
  노인이 밖에 나가 살해되고,그런데 노인의 유류퓸 거운데 수표
  를 포함해 현금이 247만 3천원이 들어 있고,그러면 그 돈이 뭐
  냐는 얘기야? 돈이 목적이 아니라는 얘기 아니야? 돈이 목적이
  었다면 수표는 놔두더라도 현금은 가져갔을 거 아니야."

   "그보다는 열한시가 넘은 시간에 밖에 나가면서 그런 큰 돈을 
  왜 가져갔겠느냐는 거죠. 집에서나  밖에서나 늘 그 정도의 돈
  을 지니고  있다는 얘긴지  아니면 일부러  가져나갔다는 얘긴
  지......"

   "모르지 그건. 아들이  누구든 와 봐야 아는 거지. 지금으로
  선 일단  전화로 불러냈다는 것으로 봐선  면식범의 소행 같은
  데,면식범이 T자 사인으로 자기  정체를 밝힌다는 것도 이상하
  고 말이지. 뭔가 아귀가 잘 맞지 않아."

   "제 생각도 그렇습니다. 문제는  그 T자 메시진데 면식범이더
  라도 아주 가까운 사람은  아닐 거라는 생각이 듭니다. 살해된 
  노인 말고는 그가 누구라는 것을 전혀 감을 잡을 수 없는 어떤 
  사람이 과거 어떤 원한을 가지고 있거나 했을 때 뭔가 그 원한
  의 표시를 남기고 싶어 그랬던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고요. 노
  인이 들고 나간 돈도 그래서 들고 나갔던 게 아닌가 싶기도 하
  고....."

   말꼬리를 흐리긴 했지만 남  형사는 거기에 어떤 자신을 가지
  고 있듯  눈을 반짝이며 진지한 표정으로  자신의 추리를 말했
  다.

   "그러니까 남 형사 생각엔 일부러 들고 나간 돈이다,이거지?"

   "예. 원한 때문이라면  그 원한도 돈 때문에  생긴 원한 같고
  요. 예전에 졌던 빚이거나,아니 빚 같지는 않고 일테면 저쪽에
  서 앙심을  품을 만큼 나쁜 방법으로  떼어먹었다거나 해서 눈 
  앞에 나타났을  때 당장 돌려주지 않으면  봉    당할 성질의 
  부채 같은 거  말입니다. 그 시간 전화를  받자마자 돈을 들고 
  내려왔다는 것도  그렇고요. 미처 말씀을 못  드렸는데 어젯밤 
  현장에서 유류품을 정리할 때  그때는 미처 생각하지 못했는데 
  한 가지 이상한 점이 있었습니다."

   "유류품에 뭐 그런 기미라도 있었나?"

   "이게 제 지갑인데요."

   그러면서 남  형사는 바지 뒷주머니에서 검은색  지갑을 뽑아 
  석 경감의 눈 앞에 들어보였다.

   "갑자기 자네 지갑은 왜?"

   "반장님도 한 번 반장님 지갑을 꺼내 보시죠. 누가 돈이 많은
  지  내기도 할 겸......"

   "그건 해서 뭘 하게?"

   석 경감은 이 사람 갑자기  왜 그래,하는 표정으로 남 형사를 
  쳐다보았다. 뚱딴지 같은  제의이긴 했지만 나름대로 그것으로 
  뭔가 사건을 설명하겠다는 뜻일 것이었다. 



 소 제 목 : T자의 행방을 찾아라

   남 형사는 그런 석 경감의  표정을 무시한 채 다시 자기 지갑
  의 뚜껑을 열며 재촉했다.

   "글쎄 한 번 꺼내보시라니까요."

   그러자 석 경감도 무슨 얘기가 있겠지,하는 마음으로 바지 뒷
  주머니에서 지갑을 꺼내들었다.

   "저는 지갑에 10만원권 수표가 한 장 있는데 반장님도 있습니
  까?"
   "그래, 나도 비상금으로 한 장은 넣어가지고 다녀. 그런데 왜 
  그러는 거야?"
   "그럼 저처럼 이렇게 꺼내보십시오."

   남 형사는 지갑 안에서 10만원  권 수표 한장을 꺼내 들었다. 
  그러자 석 경감도 같이 지갑 【 그것을 꺼내들며 말했다.

   "자,이제 꺼냈으니 얘길 해보라구."
   "반장님도 저처럼 수표를 다른 데  넣지 않고 지갑 안에 현금
  과 함께 넣어가지고 다니는가 확인해 보려고 그랬습니다."
   "그걸 확인해서 뭘 하게?"
   "만약 두 장이 있다면 한 장은  지갑에 넣고 한 장은 다른 데 
  넣어가지고 다니는지요. 바지  주머니라든가 아니면 양복 주머
  니 같은데요."
   "얼마나 된다고 다른 데 넣고 말고 할 게 어딨어?"

   남 형사가 뜸을 들인다고  생각하는지 석 경감은 조금은 짜증
  스럽게 말했다. 그런데도 남형사는 다시 엉뚱한 질문을 했다.

   "만약 백만원짜리 수표 두 장이라면요?"
   "백만원짜리 수표 두  장? 그럼 그 노인한테서  수표 두 장이 
  따로 나왔다는 얘기야?"

   석 경감은 빠르게 남 형사의 생각을 짚었다.

   "예. 가지고 있는 백 안에서 백만원짜리 수표 한 장하고 현금 
  47만 3천원이 나오고 입고  있던 겉옷 오른쪽 주머니에서 백만
  원짜리 수표 한 장이 나오고요."
   "그럼 얘기가 어떻게 되는 거야?"
   "그 시간 그렇게 많은 돈을  가지고 밖으로 나왔다는 것도 중
  요하지만 그것을 나누어 넣어가지고 나왔다는 것도 중요하다는 
  얘깁니다. 금방 쓸 잔돈 얼마를 주머니에 넣어가지고 나왔다면 
  몰라도 보통은 액수가 얼마가 되든 반장님이나 저처럼 지갑 안
  에 한군데 넣어가지고  다니는데 말이죠.여자라면 그 노인처럼 
  백 안에 넣어가지고 다니고요."
   "그런데 그 얘긴 왜 이제 하는 거야?"
   "유류품을 정리할 때 생각났던 게 아니라 아까 전화국에 나가 
  사건 나기 바로 전에 전화가 왔었다는 기록을 보고 생각해냈던 
  겁니다. 제 생각엔 주머니에 넣어가지고 나온 수표가 범인에게 
  주려고 따로 준비해 나온  돈이 아닌가 싶습니다. 그리고 범인
  은 노인이 그 돈을 꺼내기도 전에 살해했던 게 틀림 없고요."
   "그러니까 백만원짜리 원한에  의한 살해라는 얘기구만. 그게 
  어느 사람에게 산 원한인지는 알 수가 없는 거고 말이지."
   "그런 셈이죠."
   "얘기는 되는구만.  그렇지만 돈 꼬리가 문제가  아니라 사람 
  꼬리가 문젠 거지. T자의 행방이 말이야."
   "그거야 찾아야죠,이제."



 소 제 목 : 여포같이 생긴 피살자의 아들은

   "그래,찾아야지.자네하고 나하고.  그런데 자네  점심은 먹었
  나?"

   석경감은 지갑을 챙기다 뒤늦게  생각났다는 듯 남 형사를 쳐
  다보았다.

   "아뇨.아직...... 반장님은요?"  
   "나도 아직이야."
   "그러면 아침도  못 드셨을 텐데 반장님  먼저 나갔다가 오시
  죠. 자리 비우고 함께 나갈 수도 없는 일이니까."
   "아니야. 자네도 안 먹었을 텐데  먼저 갔다오게. 난 조금 있
  다가 김 형사 들어오면 피살자 아들도 만나봐야 하니까."
   "그럼 안에서 시켜 먹죠.  저쪽은 당직 근무자말고는 다 퇴근
  했으니  뭉 사람도 없고요.  그런데 강 형사는 어디로 나갔습
  니까?" 
   "병원에 보냈어. 피살자 몸에 뭐 새로운 게 없는가 해서.이거
  야 원,뭐가 뭔지 감을 잡을  수 있어야 수사를 하든 뭐를 하든 
  하지."

   남 형사는 석 경감이  혼자 소리로 투덜거리는 소리를 들으며 
  책상 위의 전화기를 들어올려 서  앞 음식점에 가장 빨리 되는 
  식사 2인분을 가져오라고 했다.

   그리고 그 음식이 배달되어  오기 전 피살자의 아파트로 나갔
  던 김 형사의  전화가 왔다. 지금 둘째  아들이 막 도착했는데 
  함께 병원에 나가 사체를 확인하곤 바로 서(署)로 데리고 들어
  오겠다고 했다. 아침은 먹고  출근했어도 김 형사도 아직 점심 
  전일 것이었다.

   병원에 나갔던 강 형사와  김 형사가 첫눈에 여포처럼 보이는 
  피살자의 둘째 아들을 앞세우고 강력계로 들어온 건 석 경감과 
  남 형사가 점심을  막 끝내고 나서 복도  끝에 나가 150원짜리 
  자판기 커피를 마시고 있을 때였다.

   "저 사람이 정말 아들이 맞는 거야?"

   사무실에 들어와 석 경감이 당사자가 들을 수 없는 거리를 두
  고 김  형사에게 나직이 그렇게 물었던  건 창졸간에 어머니를 
  잃은 사람의 행동 같지  않은 피살자 아들의 태도 때문이었다. 
  복도에서 석 경감이 건넨 위로의 말도 그는 덤덤하게 받아들인 
  채 어머니를 잃은 슬픔보다 낯선  경찰서 내의 풍경에 더 관심
  을 쏟는 듯한 모습이었다.

   "경비실에서 기다렸다가  자동차에서 내리는 걸  붙잡고 얘길 
  했더니 그때도 덤덤하게 남의 애기처럼 듣더군요. 언제 어디서 
  그랬냐고만 묻고......"
   "친어머니가 아닌가?"
   "아니긴요. 반장님이 데리고 얘길 나눠 보세요."
   "그러지."

   차 한 잔 하겠느냐고 묻자  그는 커피를 달라고 했다. 강력계 
  사건 담당 반장으로서,또 어제 현장을 수습했던 책임자로서 당
  연히 따라야 할 의례적인 위로의 말을 하고 나서 석 경감이 물
  었다.

   "아드님 성함은 어떻게 됩니까?"
   "내 이름이요? 김형동입니다."
   "어머니께서 따로  무슨 직업 같은 것을  가지고 계셨는지요. 
  꼭 뭐  직업이 아니더라도 생활의 근거가  될 일정한 수입원을 
  가지고 계셨거나......"

   아무래도 그 나이의 노인이 지니기엔 적지 않다 싶은 돈 이야
  기부터 해야 될 듯 싶었다.

   "직업은 없고,매달 집세를 받아요."
   "집 섬窄 지금 살고  계신 데 말고 또 세를  놓은 집이 있는 
  모양이군요?"
   "가리봉동 오거리 부근에 집이 몇 채 있습니다. 저어,담배 피
  워도 되죠?"
   "그러십시오."

   남 형사에게 했던 것처럼  이번에도 석 경감이 주머니에서 라
  이터를 찾아 꺼내 들었다. 그러나 그런 석 경감의 동작보다 빠
  르게 김형동은 자신의 주머니에서  금장 라이터를 꺼내 자신의 
  담배에 불을 붙혔다. 얼핏본 물건이었지만 그것도 형사들의 한 
  달 봉급은 더할 듯 싶은 물건이었다.

   "집이라면 어떤 집인지요?"
   "거기 그 부근 공장  애들이 사는 벌집이라는 거 있잖습니까? 
  방 하나에 부엌 하나씩 해서 보증금 백오십인가 2백에 월 15만
  원씩 하는 방들 말입니다. 그거 네 채가 있습니다."


 소 제 목 : 내가 모르면 누가 알지?

   일부러 그랬던 건 아니겠지만 김형동은  석 경감의 얼굴 앞에 후,하고 
  담배를 내뿜었다. 석 경감이 가볍게 이맛살을 찌뿌렸다. 그러나 김형동
  은 그런 석 경감의 표정 같은  건 아랑곳하지 않는 표정이었다. 피살자
  의 아들로서 나는  어떤 행동을 해도 거칠  것이 없다,어쩌면 스스로도 
  못 느끼는 사이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인지 몰랐다.

   석 경감은 한편으로는  그렇게 자란 그가 어머니를  잃은 것에 연민을 
  느끼며 또 한편으로는 스스로를 타이르듯 다시 표정을 누그러뜨리며 물
  었다.

   "그런 집이 네  ㅆ窄 방은 모두 몇 개나 되는지 아십니까?"

   "그런 것도 이야기를 해야 합니까?"

   한 쪽 손을 의자 팔걸이로 올리며 상체를 뒤로 젖히고 앉는 뻣뻣한 태
  도로 뻣뻣하게 내뱉는 말투였다.

   "필요합니다. 수사엔 모든 게  다...... 그래야 빨리 어머니를 살해한 
  범인을 잡을 수 있는 거고."

   "어머니가 관리를 해 정확하게는 모르겠는데 아마 방이 140 개는 넘을 
  겁니다.큰 것은 쉰 개가 넘고 적은 건 스무 개가 조금 넘고 하니까."

   "대부분 그 정도 가격대의 보증금에 월세를 받는 방들인가요?"

   "세 채는 2백만원에 15만원이고 한 채는 150만원에 10만원인가 그렇습
  니다."
   
  "가만있자,그럼......"

   삭 경감은 머릿 속으로  빠르게 주판알을 놓았다. 보증금 2백만원짜리 
  방 140개라면 그것만도 2억8천만원이었고, 15만원씩 들어온다는 월세만
  도 10만원짜리 방을 계산한다 해도 월 2천만원 가까이 되는 돈이었다.

   "그 돈을 다 어머니가 관리하셨던 모양이군요?"

   "그렇습니다."

   "형님이 계시는 걸로 알고 있는데 연락은 됐습니까?"

   "지금은 연락을 할 수가 없습니다. 해도 잘 안 될 거 같고요."

   형  얘기 부분에 이르러 김형동은 마치  남의 이야기를 하듯 짧게 대
  답했다. 그리고는 저만치 있는 재털이를 자기 앞으로 끌어당겨 재를 털
  어 털었다.

   "어머니가 돌아가셨는데 연락이 안 되다니 그건 또 무슨 소리입니까?"

   "형은 지금 미국에 나가 삽니다. 그래서 연락이 안 된다는 거에요. 난 
  형 집 미국 전화 번호도 잘 모르고요."

   "그럼 동생이 모르면 누가 압니까?"

   "어머니가 알고 있었어요.  어머니 가지고 있는 장부나  집에 가 전화 
  번호들을 적어놓은 것들을 보면 알 수 있긴 하지만......"

   " 瀏 누님들한테는요?"

   "거긴 전화를 하면 올 겁니다. 누나들은 다 여기 사니까."

   "그럼 지금 전화를 하시죠. 알릴 사람들한테는 빨리 알려야 되지 않겠
  어요. 이봐,김 형사 전화기 이쪽으로 좀 주지."

   석 경감은 김 형사가  밀어주는 전화기를 한손으로는 전화통과 수화기
  를 움켜 잡고 한손으로는 거기에 연결된 줄을 끌어당겨 김형동 앞에 놓
  았다.

   "전화는 조금 있다가 하죠 뭐. 다 끝나고 나서......"

   그 상황에서 나온 대답치고는 정말 의외의 대답이었다.

   "아니 왜요?"

   "모르겠어요. 그냥 . 여기서 말고 집에 가서 하겠습니다."

   보다 못한 남 형사가 물었고,거기에  무슨 이유가 있겠냐는 얼굴로 김
  형동이 남 형사의 얼굴을 쳐다보며 말했다.


 소 제 목 : 그래도 지금 하세요!

   "그래도 지금 하세요. 누님들이 집에 전화를 걸었다가 아무도 안 받으
  면 궁금해 하실 것 아니오?"

   이번에도 석 경감은 입맛을 다시고  돌아섰고, 남 형사가 김형동 앞에 
  의자를 끌어놓고 앉으며 말했다.

   "궁금해 할 것도 없어요,누나들은...... 원래 집에 전화를 잘 안 하는 
  사람들이니까."

   "그래도 하세요."

   "에이,어떤 놈이......"

   어머니를 살해해 자기를 귀찮게  하느냐는 얼굴로 마지 못해 김형동은 
  수화기를 끌어올린 다음 거칠게  번호판을 눌러나갔다. 경찰서로 온 다
  음 처음으로 심각한 표정이었다. 그러나 그 표정도 잠시뿐 이내 처음으
  로 돌아와 수화기를 든 채 석 경감 쪽을 바라보며 말했다.

   "어디 갔는지 전화를 안 받는데요."

   잠시 심각했던 얼굴에서 본래의 얼굴로 돌아온 것도 오히려 그래서 다
  행스럽다는 그의 감출 수 없는 마음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럼 다른 누나한테 걸어보세요."

   수화기를 내려놓으려는 그에게  다시 남 형사가 일렀다.  그러자 그는 
  조금 전보다 더 거칠게 번호판을 두드렸다.

   "연락하기 뭐하면 이리 주세요."

   벨이 울리는 중간 남 형사가 그의  纜【 나꿔채듯 전화기를 건네받았
  다. 석 경감과 김 형사는 저 사람 왜 저래,하는 얼굴로 남 형사를 쳐다
  보았다. 김형동은 어정쩡한 얼굴로  은자에 앉은채 다시 주머니에서 새 
  담배를 꺼내 물었다. 영국산 던힐이었다.

   "지금 전화거는 누님 성함이 어떻게 돼요?"

   빠르게 남 형사가 물었다.

   "금순입니다. 김금순......"

   모두 의아한 얼굴로  남 형사를 바라보았고,그 사이에  전화가 연결된 
  모양이었다.

   "안녕하십니까?  여기 강남경찰선데 김금순 씨 되십니까? 아,예. 다름
  이 아니라 어젯밤 어머니께서 변을 당하셔서 가족분들에게 연락을 드리
  는 겁니다. 죄송합니다. 그러니까 어젯밤  열한시 반쯤 아파트 앞 공터
  에서  누군가에  의해  목이  졸려  살해되셨습니다.  여보세요,여보세
  요...... 예,범인은 아직......  예,죄송합니다. 저희들도 지금 노력하
  고 있습니다. 시신은 병원으로  모셨는데 우선 이쪽으로 나오시면 자세
  한 말씀을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예,예...... 죄송합니다. 저희가 뭐라
  고 말씀을 드려야  할지..... 그리고 참,여기 동생분이  나와 계시는데 
  먼저 통화를 하시겠습니까?"

   남 형사  전화기를 김형동 앞으로  내밀었다. 담배를 피우고 앉아 있
  던 김형동은 마치 불시의 기습이라도 당한 듯한 얼굴로 전화를 받았다.

   "응,나야, 누나. 몰라.  나도 조금 전에 왔다니까. 가긴  뭘 어딜 가? 
  친구들하고 있었다니니까. 그걸  어떻게 알고 집에만 있냐구.  어제 그 
  시간에 그럴지  언제 그럴지.  참내,누가 그런 걸  생각하고 있냐니까. 
  응,병원에서 가서 봤어. 병원에 갔다가 바로 여기로 온 길이라니까. 그
  래,목을 졸라서. 조금 전에 전화를 하니까  없던데 뭘. 그걸 내가 어떻
  게 알아? 어딜 갔는지. 안 했어.  지금 나한테 전화 번호도 없고. 그럼 
  미국에도 누나가 전화를 하든지 말든지 마음대로 해. 들어와도 형만 들
  어오라고 그러고. 그 여잔 오지  말고. 작은 누나한테도 누나가 연락하
  고...... 알았어. 그럼 여기로 나올 거야? 그건 나도 모른다니까. 궁금
  하면 누나가 나와서 물어보면 되잖아. 알았어."

   그리고 김형동은 던지듯 전화기를 놓았다.  그러는 동안 석 경감은 남 
  형사에게 왜 자네가 먼저 전화를  빼앗아 했느냐고 작은 소리로 책망하
  듯 물었고,남 형사는 형제들간의 느낌이 이상해 혹시,하는 마음으로 그
  랬다고 대답했다.

   누군가 그 시간 노인을 밖으로  불러내 살해했고,그 시간 노인을 불러
  내기 가장 편한 사람 역시 가족일 거라는 생각이 김형동이 전화를 받는 
  태도에서 전광석화처럼 남 형사의 머릿속에 들어왔던 것이었다. 가족이
  라면 수사의 혼선을 주기 위한  연막으로서가 아니라면 굳이 또 하나의 
  증거가 될 T자 메모를 사체의 입안에  넣지 않을 것이라는 기본적인 생
  각조차 잊고......

   그러나 그건 아직 모를 일이잖는가. 성급한 판단 또한......


 소 제 목 : 밤엔 여자하고 뭘 했는데요?

   "자,그럼 다시 저희들이 몇 가지 질문을 하겠습니다."

   부드럽긴 했지만 반장을 대신한 남 형사의 말은 피살자의 아들에 대한 
  태도가 아니라 완전히 한 사람의 용의자에 대한 신문 태도였다. 

   "적다면 적고 많다면 많을 수도  있는데 평소에도 어머님은 수중에 그 
  정도의 돈을 넣어가지고 다니십니까?"

   "모르겠어요,그건 잘......  그렇지만 돈이 많아도 잘  가지고 다니지 
  않는 걸로 알고 있는데요. 아까 얼마라고 그랬어요?"

   이번엔 함께 병원에 다녀온 김 형사에게 물었다.

   "247만 3천입니다. 그중 2백만원은 백만원짜리 수표고요."

   "그러면 많은 돈도 아니네요 뭘."

   "많은 돈도 아니다? 그 정도는....."

   남 형사가 조금은 맥이 빠진 소리로 반문하듯 되물었다. 

   "그렇죠 뭐.그 정도는....." 

   김형동 역시 그렇잖아요,하는 얼굴로 대답했다.

   "그렇지만 어디 맡기러  갈 때라든가 누구한테 빌려주러  갈 때말고는 
  수표는 가방에 잘 안 넣어 다니는데요. 현금은 좀 가지고 다녀도."

   "그럼 가방에 안 넣어 다니는 건 어떻게 아는데요?"

   "......"

   그 질문에 김형동은 저 얼굴에도 저런 표 ㅐ 지을 때가 있나 싶을 만
  큼 조금은 부끄럽고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얘기를 해보세요,뭐든지 다."

   "제가...... 좀 창피한 얘기지만 돈이  없을 때 가끔 어머니의 지갑이
  나 백을 뒤질 때가 있어서 다른 건 몰라도 그건 알아요. 월세를 수표로 
  받는 것도 아니고,또 받아도  10만원짜리로 받지 백만원짜리는 거의 없
  고요."

   "그거 받으러 다녀 봤습니까?"

   "아뇨. 그건 그쪽 공장 애들 월급 다음날 어머니가 직접 나가요. 누구
  한테도 안 맡기고요. 또 어머니가 아니면 받아올 사람도 없고요." 

   "그런데 어머니의  핸드백 안에서 백만원짜리 수표가  나왔어요. 아까 
  보셨죠? 입고 있던 웃옷 주머니에서도 백만원짜리 수표가 나오고."

   "그런 돈은 잘 안 넣어 다니는데. 맡기러 갈 때말고는. 집에서도 백이
  나 지갑  같은 데 안 넣고 여기 저기 감추어두고요."

   "맡긴다는 건 어디에 맡긴다는  얘기에요? 보증금과 월세는 또 어떻게 
  처리하고? 은행입니까,아니면 다르게 또 운영하는 방법이 있었던가요."

   "은행엔 급히 뺄  것말고는 안 넣고,뭐라나 중간에  아는 사람을 놓고 
  알음알음으로  사채를 놓고  했거든요. 장부도  따로 어머니가  보관하
  고......"

   "이런 질문해서 뭣하긴 하지만 아드님이 보시기에 어머니께서 평소 돈 
  때문에 남과 심하게  다투거나 뭐 원한 같은 거 살  일 하신 적 있습니
  까?"

   "모르겠어요,나는 그런 거는 잘...... 있었는지 없었는지도 잘 모르고
  요. 어머니가 하는 일은. 평소에도 나하고 많이 얘기 나누는 것도 아니
  고...... 돈 문제에 대해서는 더 그렇고요.  나도 용돈 달라고 할 때말
  고는 돈 얘기를 안 하고요."

   "최근에 뭐 그런 말씀을 들었다거나 했던 일도 없고 말이죠?"

   "없어요."

   "큰 돈은 아니고 백만원이나 2백만원 쯤 관계된 얘기라든가."

   "없어요."

   "용돈은 잘 주셨어요?"

   "그건...... 안 주면 내가 어머니한테 대들고 그러니까......"

   "용돈은 얼마씩 받아습니까?"

   "일주일에 뭐 백만원 받을 때도 있고,그보다 더 받을 때도 있고...... 
  그런데 왜 나한테 자꾸 그런 것만 물어봐요?"

   날 의심하는 겁니까?

   다시 짜증을 내기 시작하는  김형동의 얼굴에 노골적으로 그런 기색이 
  드러나 보였다. 이럴 때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남 형사도 잠시 난감한 
  얼굴을 했다.

   "그런 게 아니라 우리로선 누구에게나 다 묻는 질문입니다. 그래야 또 
  우리도 수사 방향을 잡을 수 있는 거니까 특별하게 생각하지는 말고 협
  조해 주셔야 해요. 아드님이 협조하지 않으면 누가 합니까?"

   잠시 뒤로 빼고 앉았던 석 경감이  아까처럼 자신의 책상 앞으로 의자
  를 당겨앉으며 달래듯 말했다.

   "어젠 어디로 놀러갔었던 모양이죠?"

   "예,뭐 친구들하고......"

   "이건 우리가 아드님을 의심해서가  아니라 누구에게나 중요한 얘깁니
  다. 어제 저녁부터 아침까지 무얼 했는지 얘기할 수 있어요?"

   "저녁 땐 친구들하고 나이트 가서 놀았고,밤엔......"

   "밤엔요?"

   "나이트에서 만난 어떤 여자하고....."

   거기서 김형동은 거칠게 담배를  비벼 껐다. 화가 난다는 얼굴이었고,
  자기 입으로 이런 얘기까지 해야 하나  하는 얼굴이었다. 그러나 석 경
  감은 일문일답을 하듯 틈을 주지 않고 물었다. 

   "그래 밤엔 여자하고 뭘했습니까?"


 소 제 목 : 양평나가는 길쪽의 러브호텔에..
     그 물음에 김형동은 얼른 대답하지 못했다.

     "그냥 묻는 게 아니라 중요한 겁니다,이건......"

     옆에 섰던 김 형사가 거들었다.

     그제서야 김형동은 어제 나이트에서 만난 여자 아이와 양평 
    나가는 길 쪽의 러브호텔에 갔었다고 말했다.

     "그래,지금 거기서 들어오는 길인 거요?"

     어처구니가 없긴 묻는 남 형사나 옆에서 듣는 석 경감과 김 
    형사,강 형사도 마찬가지였다. 김형동은 그렇다고 작은 소리
    로 대답했다. 어머니가 살해될  때 자신이 집을 비웠다는 죄
    책감보다 여자 친구와 함께 그곳에 간 이야기를 형사들 앞에 
    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  그에겐 더 자존심 상하는 일인지도 
    몰랐다.

     "뭐 어쨌든 그게  사실이라면 사건과는 관계없는 일이니까,
    그거 그 여자 친구가 증명해  줄 수 있어요? 어젯밤 같이 있
    었다는 거."

     다시 거기서 김형동은 말문이 막힌 얼굴이었다.그러다 한참 
    후 그는 어제 함께 그곳으로  간 여자 친구는 나이트에서 금
    방 부킹을 해 만난  여자로 이름도,또 어디에 사는지도 모른
    다고 말했다.

     석 경감은 숫제 귀를 막고 싶은 얼굴이 解,김 형사는 돌아
    서서 혀를 찼다.

     "신문에서고 텔레비전에서고 그렇다는  그렇다는 얘기는 들
    었지만 지금 그게 정말로 가능한 일이에요?"

     "뭐 요즘은 다 그래요. 그런데 와서 촌스럽게 자기 이름 얘
    기하고 전화 번호  얘기하는 애들은 없으니까......그렇지만 
    어제 나이트에 함께 간 내  친구는 다 알아요. 내가 어제 서
    울에 없었다는 거. 그 친구도 자기 파트너 데리고 함께 갔으
    니까."

     남 형사는 김형동이 불러주는  남자 친구의 이름과 전화 번
    호를 받아 적었다.

     " 틉若纛 의심해서 그러는  건 아닙니다. 이것도 절차니까 
    이해하세요. 지금 우리는 어제  김형동 씨가 한 행동이 무엇
    인가를 이야기하고  있는 것은 아니니까. 수사상  그 시간에 
    어디 있었는가를 조사하지 않을 수 없어 물었다는 것도 이해
    하시고. 그렇지만  정말 화가 나지 않을  수 없군요. 얘기를 
    듣다 막상 이런저런 것들을 확인하니까."

     그 말을 듣는 둥 마는 둥 김형동은 지금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은 그것밖에 없다는 식으로 다시 주머니를 뒤졌다. 들어올 
    때만 해도 어머니의 죽음과는  상관없이 무덤덤한 표정을 짓
    던 그는 이제 한풀 꺾인 모습으로 남형사 앞에 앉아 있었다.

     "참 아까  전화로 하는 얘기를 들으니  형제간의 사이가 안 
    좋은 것 같던데 그건 또 왜 그렇습니까?"

     남 형사도 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내 불을 붙였다.

     "형은 어머니 재산을 다 뒤로 빼돌리려고만 합니다. 지금까
    지 빼간  재산도 있는 것 보다  많은데...... 이민도 그래서 
    갔어요. 결혼하고 나서 여자가  중간에서 자꾸 그래서요. 그 
    여자는 어머니를 짐승이나 벌레처럼 대했고요."

     "그럼 형은 공부도 미국에서 했습니까?"

     "말로는 공부를 하러갔지만 정말  거기 가서 공부를 했는지 
    뭘했는지 나는 잘 몰라요. 여자도 거기서 만나고......"

     "미국에선 뭘 합니까?"

     "전엔 큰 수퍼마켓을 하다 노름으로 다 털어먹고 지금은 몰
    라요. 그러니까 어머니가 매달 이 사람 저 사람을 통해 돈을 
    보내는 눈치였고요. 나한테는 얘기를 안 해도 ......"

     "그럼 형말고 다른 가족들은  어머니의 재산에 대해 욕심내
    지 않습니까?  아까보니 전화도 큰누님한테 먼저  걸지 않고 
    작은누님한테 먼저 걸던데....."

                          
 소 제 목 : 큰딸은 어머니의 죽음보다 금고에 더
     남 형사도 처음부터 가족을  의심했던 건 아니었다. 그러나 
    경찰서로 나온 피살자의 아들이 하는 모습을 보자 저절로 그
    런 생각이 들지 않을 수 없었다.

     "큰누나도 그래요. 뭐든지 하나라도 집에서 뭘 가져가지 못
    해 난리고요. 매형도 한두  번 그렇게 어머니한테서 돈을 가
    져갔던 게 아니고요."

     "그럼 대체 어머니 재산이 얼마나 됩니까?"

     "모르겠어요. 그건 잘...... 돈 관리는 어머니가 하니까."

     "그럼 가리봉동 집은 누구 앞으로 되어 있어요?"

     "세 채는 제 앞으로 되어  斂,한 채는 어머니 앞으로 되어 
    있습니다. 형은 있던 거 다 팔아가지고 간 거구요."

     "잘은 모르더라도  어머니가 관리하는 사채가  대충 얼마나 
    되는지도 모릅니까?"

     "전에 큰누나하고 작은누나가 하는 얘기를 들었는데 못돼도 
    10억은 넘을 거라고 하는 소리를 들었는데 집에 가서 장부를 
    보면 정확하게 알 수 있을 겁니다."

     "그럼 아드님은 그 장부를 한 번도 안 봤어요?"

     "어머니가 늘 금고 속에 감춰두고 있으니까 볼 수가 없었어
    요. 또 거기에 장부나  사채 문서말고는 따로 돈  넣어두는 
    것도 아니니 애써 보려고 하지도 않았고요,난......"

     그러면서 김형동은 자신의  가죽옷 소매를 끌어올려 시계를 
    들여다보았다. 작은 누나는 몰라도 전화를 받은 큰누나가 올 
    시간이 되었다는 뜻 같았다.

     "큰 누님이 여기 가까이 삽니까?"

     "예. 집에서 멀지 않아요."

     그리고 그것과 동시에 김형동 앞에 끌어놓았던 전화의 벨이 
    울렸다. 남 형사가 손을 내밀어 전화기를 들어올렸다.

     "강남 경찰서 강력곕니다."

     상대는 아파트로 나간 김 형사가 김형동을 데리고 피살자의 
    사체를 확인하기 위해 병원으로 간 사이 대신 아파트 쪽으로 
    나간 최 형사였다.

     "빨리도 갔네. 최 형산데 반장님 찾는데요. 아까 전화한 가
    족들이 그쪽으로 갔는가 봐요."

     석 경감에게 전화를 넘기며 남 형사가 말했다.

     "응,반장이야. 무슨 일인데 그래?"

     저쪽에서 하는 이야기는 다른 사람들 귀에 들리지 않았다.

     "이리로 나오라고 했는데 왜 그쪽으로들 간 거야? 가족들이 
    집 안으로 들어가겠다고 그런단 말이지?"

     다시 석 경감이 전화에 대고  물었다. 그러자 그 말이 떨어
    지기 무섭게 자리에 앉아  반장을 쳐다보던 김형동이 의자를 
    뒤로 밀고 일어서며 말했다.

     "문  열어주지  말라고  하십시오. 인간  같지도  않은  것
    들......"

     "아니,들어가게 하지 말고  이리로 보내지,우선. 글쎄 키를 
    가졌더래도 들어보내지 말고  이쪽으로 보내라니까. 그래,알
    았어. 자넨 거기 더 있고."

     석경감은 지시할 말만 간단하게 하고 전화를 끊었다.

     "아드님 말 때문에 못 들어가게  한 건 아니지만 왜 누님이 
    집안에 들어가면 안 될 일이라도 있오?"
                                                                                                                                                                                                                                                                                                                                                                                                                                                                                                                              다 해도 자식들 손에 변을 당할 노인이었다
    는 생각이 들어."

     강 형사의 뒤를 어기적거리며 따라가는 아들의 뒷모습을 보
    며 석 경감이 말했다.

     "그러게 말입니다. 여기에 와서  저 꼴을 하는 아들이나 어
    머니가 죽었다는데도 금고 차지하러 그쪽으로 먼저 달려가는 
    딸이나....."

     "그러니 죽은 노인만 불쌍한 거지."

     "아뇨. 천벌 받을 소린지도  모르지만 제 생각엔 꼭 그렇지
    만도 않네요."

     그동안 뒤에 묵묵히 서 있던 김 형사가 말했다.

     "그렇지 않으면?"

     석 경감이 굵은 눈썹을  가운데로 모으며 김 형사에게 물었
    다.

                   
 소 제 목 : 제손으로라도 부모를 죽일 자식들
     "자식 교육 그렇게 시킨 부모 책임도 적지는 않겠다 싶어서
    요. 문제있는 부모 아래  문제있는 자식이 있는 거 아니겠습
    니까? 아까 저 녀석 병원에 가서도 그렇고 여기와서 하는 태
    도를 봐도 그렇고...... 저  녀석도 지금 머릿속엔 금고밖엔 
    생각나는 게 없을 겁니다. 어머니가 죽었는데도 형한테 전화
    를 걸지  않겠다는 것도  그렇고......아까도 그러잖습니까? 
    가족들한테 전화를 걸라니까 조사 끝난 다음 집에 가서 걸겠
    다고."

     그 사이 다시 아파트로 나간 최 형사의 연락이 왔다. 최 형
                                                                                                                                                                                                                                                                                                                                                                                                                                                                                                                              坪 테고......"

     전화를 끊고 나서 조금은  쓸쓰레한 표정으로 석 경감이 말
    했다.

     "이제 아파트 키 가진 사람들도 오고 했으니 거기도 나가봐
    야 되는 거 아닙니까?"

     "그래,그럼 아들이 나오거든 남  형사가 데리고 가서 김 형
    사하고 집안을 샅샅히 훑어봐.  그 시간 밖에서 걸려온 전화
    가 있었다는 것만 알지 범인이 아파트 안까지 들어와 노인을 
    데리고 나가서 살해한 건지 아니면 그냥 밖에서 불러내 살해
    한 건지 그것도 아직 모르니까."

     "알겠습니다."

     "그리고 아까 얘기하던 목격자를 찾을 방법도 연구해보고."
     피살자의 큰딸과 사위가 온 건 남 형사가 아들을 데리고 나
    간지 5분도 채 되지 않았을 때였다.

     "형동인 어디 있어요?"

     큰딸은 의경의 안내를 받아 사무실로 들어서며 첫마디에 그
    렇게 물었다.

     "우선 자리에 앉으십시오.  저희들로선 뭐라고 위로를 해야 
    할지......"

     석 경감은 처음 아들이 왔을 때 그랬던 것처럼 예의를 갖추
    어 말했다.

     "위로나마나 우리 형동인 지금 어디 있냐구요?"

     "조금 전 현장 조사를 할 게 있어서 우리 형사하고 같이 아
    파트로 나갔습니다."

     "예? 아파트로요?"

     "예. 문이 잠겨 있어  저희가 아직 거기는 조사를 못했습니
    다."

     "이봐요,그러면 우린 왜 여기로  오라고 한 거에요? 형동인 
    그리로 보내면서? 우리도 그럼 아파트로 가겠어요. 일어나요 
    여보,우리도 빨리."

     그러면서 여자는 남편의 팔을 끌었다.

     "잠시만 진정하십시오. 아드님이  가도 문만 열어줄 뿐이지 
    현관 안으로는 들어가지 못합니다. 저희 조사가 끝나기 전엔 
    거기에 있는 어떤 것도 손을 댈 수 가 없고 말입니다."

     "그래도 우리도  그쪽으로 가겠어요. 묻고 싶은  거 있으면 
    그쪽으로 가면서 물으면 되잖아요."

     "잠시면 됩니다. 그사이 현장 조사가 끝나지도 않을 거고."

     그래도 여자는  막무가내였다. 선량한 시민의  목숨 하나도 
    제대로 못 지키는 경찰이 뭐가 잘났다고 피살자의 가족이 집
    에 들어가겠다는 것도 막느냐는 식이었다.

     "이것 보세요,아주머니. 이런다고  해결될 일이 아니잖습니
    까? 가족들의 협조가 있어야 수사를  하든 뭘 하든 할 것 아
    니예요? 대체 그 집안에 뭐가 있길래 어머니가 돌아가셨다는
    데도 이러는 겁니까? 지금  어머니를 살해한 범인을 찾는 것
    보다 더 중요한  게 그 집안에 있습니까?  따님이 여기로 안 
    오고 집으로 갔다니까 아들은 따님이 어머니 돈 때문에 그리
    로 갔다고 그러고, 이제 현장 조사 때문에 아들이 집으로 갔
    다니까 따님은 아들이 돈  때문에 거기로 갔다 그러고...... 
    그런 돈  싸움은 경찰이 상관할 일이  아니니 나중에 가족들 
    다 모여서 해도 되잖습니까?  지금은 범인을 잡을 수사 협조
    부터 하고."

     그제서야 여 渼  움찔하고 자리에 앉았다.  그러면서 다시 
    불안한 얼굴로 석 경감을 향해 물었다.

     "형동이가 거기 가도 집안에 못 들어가는 거 확실하지요?"

     석 경감은 대답 대신  잔뜩 인상을 찌푸리고 여자를 쏘아보
    았다. 20년 가까이 형사  생활을 하며 이제까지 피살자의 가
    족이 이토록 경멸스러워 보였더 적이 없었다.  

                        
 소 제 목 : 누나는 동생을 동생은 누나를 의심하고

   그러나 그런 이야기를  하자고 피살자의 딸을 이리로  부른 건 아니었
  다. 석 경감은 자신의  감정을 누그러뜨리고 피살자의 딸에게 피살자의 
  신상에 대해 이것저것 물었다.

   큰딸의 대답 역시 아들의 대답과  비슷했다. 모든 재산과 돈은 어머니
  가 관리했으며,그런 과정에 남과  작은 다툼이야 더러 있었겠지만 크게 
  남의 원한을 살 만한 일 같은 것은 없을 것이라고 했다.

   주머니에서 나온 백만원짜리 수표와 사체 옆에 떨어져 있던 작은 백에
  서 나온 백만원짜리 수표에 대해서도 같은 대답을 했다.

   "현  얼마라면 몰라도 그 시간에 수표 두 장을 주머니와 백에 갈라넣
  어 밖으로 나갈 우리 어머니가 아니에요. 형사님들이 저희 어머니를 잘 
  몰라서 그러는데 거기에 돈이 들었는지  모르고 백을 그냥 들고 나갔다
  면 또 모를까  그전부터 어머니는 작은 돈이든 큰  돈이든 수중에 지닌 
  돈을 그렇게 여기저기 어지럽게 넣어다니지도 않고요."

   "그럼 잘 생각해보세요.  어떤 경우에 어머니가 그  시간 수표를 들고 
  나갈 수 있는지. 그 시간 누가 돈을 빌려달랬다면 어떻게 했겠습니까?"

   "우리 어머니는 그런 작은 돈 거래  안 해요. 아무리 작아도 작은 거 
  한 장 이상이지."

   "작은 거 한 장이라면 얼마를 두고 하는 말씀입니까?"

   "천만원쯤은 돼야 돈을  빌려주고 말고 할 수  있다는 거지요. 아무리 
  이자를 비싸게 준대도 그렇지 백만원 2백만원 하는 식으로 그렇게 자잘
  하게 나누어 관리하다 보면 어지럽기만 하지 부서지는 돈이 더 많아 관
  리도 잘 안 되고요. 그리고 아무리 급전을 빌리러 온 사람이래도 그 시
  간에 돈 거래를 하자고 오는  사람이 어딨겠어요. 저녁 시간도 아니고,
  그냥 확답만 받고 내일 날 밝으면 오지."

   "그럼 대충 어떤 사람들과 돈 거래를



 소 제 목 : 누나는 동생을 동생은 누나를 의심하고

   그러나 그런 이야기를  하자고 피살자의 딸을 이리로  부른 건 아니었
  다. 석 경감은 자신의  감정을 누그러뜨리고 피살자의 딸에게 피살자의 
  신상에 대해 이것저것 물었다.

   큰딸의 대답 역시 아들의 대답과  비슷했다. 모든 재산과 돈은 어머니
  가 관리했으며,그런 과정에 남과  작은 다툼이야 더러 있었겠지만 크게 
  남의 원한을 살 만한 일 같은 것은 없을 것이라고 했다.

   주머니에서 나온 백만원짜리 수표와 사체 옆에 떨어져 있던 작은 백에
  서 나온 백만원짜리 수표에 대해서도 같은 대답을 했다.

   "현  얼마라면 몰라도 그 시간에 수표 두 장을 주머니와 백에 갈라넣
  어 밖으로 나갈 우리 어머니가 아니에요. 형사님들이 저희 어머니를 잘 
  몰라서 그러는데 거기에 돈이 들었는지  모르고 백을 그냥 들고 나갔다
  면 또 모를까  그전부터 어머니는 작은 돈이든 큰  돈이든 수중에 지닌 
  돈을 그렇게 여기저기 어지럽게 넣어다니지도 않고요."

   "그럼 잘 생각해보세요.  어떤 경우에 어머니가 그  시간 수표를 들고 
  나갈 수 있는지. 그 시간 누가 돈을 빌려달랬다면 어떻게 했겠습니까?"

   "우리 어머니는 그런 작은 돈 거래  안 해요. 아무리 작아도 작은 거 
  한 장 이상이지."

   "작은 거 한 장이라면 얼마를 두고 하는 말씀입니
까?"

   "천만원쯤은 돼야 돈을  빌려주고 말고 할 수  있다는 거지요. 아무리 
  이자를 비싸게 준대도 그렇지 백만원 2백만원 하는 식으로 그렇게 자잘
  하게 나누어 관리하다 보면 어지럽기만 하지 부서지는 돈이 더 많아 관
  리도 잘 안 되고요. 그리고 아무리 급전을 빌리러 온 사람이래도 그 시
  간에 돈 거래를 하자고 오는  사람이 어딨겠어요. 저녁 시간도 아니고,
  그냥 확답만 받고 내일 날 밝으면 오지."

   "그럼 대충 어떤 사람들과 돈 거래를 하셨는지도 아십니까? "

   "모르겠어요. 어머니는 돈 얘기는 누구한테도  잘 안 했어요. 저도 그
  렇고 다른 자식한테도 그렇고요."

   "아까 아드님 말씀으로는 큰누님께선  대충 어머니께서 거래하는 사채 
  규모를 알 거라고 하던데......"

   큰딸이 모른다는 소리로만 일관하자 석 경감은 그냥 사채의 규모를 묻
  는 것이 아니라 그녀의 반응을 살피며 일부러 그렇게 질문을 던졌다.

   "형동이 걔가요?"

   "예. 한 10억원쯤 된다던데 어머니께서 놓으신 사채를 전부 합치면 정
  말 그 정도가 됩니까?"

   "어디어디에 놓았는지는 모르지만 아마  그 정도는 될 거에요. 넘으면 
  넘었지."

   "그런데도 돈을 놓으러 갈  때라든가,받아올 때 말고는 수중에 수표를 
  넣어다니는 때는 거의 없다 이거지요?" 

   "예. 그건 내가 시집가기 전에도 그랬어요. 또 돈이 아무리 있어도 아
  무 데나 막 쓰는 사람도 아니고요.  오죽하면 그쪽 바닥에서 구두쇠 할
  머니라고 소문이 났겠어요. 그런데 이  조사 언제 끝나는 거에요? 이런
  다고 어머니를 죽인 놈이 누군지 알 수 있는 건 아니잖아요. 집에 가서 
  무슨 일이 있는지도 봐야 하고 그래야 되는 거 아니에요?"

   큰딸의 말은 노인의 사채 장부와 거래 증명서들이 있는 아파트로 가고 
  싶다는 이야기였다. 그러나 석 경감은 큰  딸의 그 말을 간단하게 일축
  했다.

   "그건 우리가 판단할  문제고,몇 가지만 더 묻겠습니다.  따님 생각엔 
  그 시간 어머니한테 그런 수표를 주머니와 백에 나누어 넣고 밖으로 나
  오게 할 수  있는 사람이 누구일 것 같습니까? 돈을  빌리러 온 사람도 
  아니라면 말입니다. 저희 생각엔 백에 든  돈은 몰라도 주머니에 든 돈
  은 누구에겐가 전해 주려고 가지고 나온 것 같은데......"

   "우리 처남은 어제 그 시간 무얼 했다고 그러던가요?"

   이번엔 옆에 잠자코 있던 큰딸의 남편이 물었다.

   "물어봤어요?"

   큰딸도 뒤늦게 생각났다는 듯 남편의 말을 거들었다.

   "아뇨,안 물어봤습니다."

   석 경감이 대답할 틈도 없이 강  형사가 거짓 대답을 하고 나섰다. 마
  치 큰딸이 자기 남편의 말을 거들고  나서듯. 그러면서 그는 앞에 앉은 
  두 사람의 얼굴 표정을 살폈다.

                            
 소 제 목 : 어릴 때부터 여자를 알았는지 뭘 알았는지

   자네들 정말 왜 그래? 아까부터......

   그런 반장의 눈치를 강 형사라고  모르는 건 아니었다. 아들을 데리고 
  나간 남 형사도  그렇고 강 형사도 반장이 눈썹  하나만 꿈틀해도 그게 
  무슨 뜻인지 알 만큼 콤비를 맞추어온 사이들이었다. 강 형사는 잠시만 
  계십시오,하는 눈빛으로 반장의 눈총을 받아냈다. 물론 허튼 소리를 할 
  강 형사가 아니라는 건 누구보다 석 경감이 잘 알고 있었다.

   그럼 어디 해봐,자네가......

   그런 뜻으로 석 경감은 의자를 조금 뒤로 해 물러나 앉았다. 

   "수사를 하자면 그런 것도 다 물어봐야 하는 거 아닌가요?"

   다시 경찰의 어떤  결정적 헛점에 대해 따끔한  충고라도 하듯 조금은 
  커진 목소리로 큰딸이 말했다.

   "피살자의 가족한테 어떻게 저희가 그런 생각을 할 수 있겠습니까? 더
  구나 다른 사람도 아니고 아드님한테......"

   "그럼 왜 나한테는 이런저런 거 묻는 거에요? 아들이 아니라 딸이라서 
  그러는 건가요? 어머니가 돌아가셨다는데 집에도 못 가 보게 하면서."

   "큰 따님에게도 아드님에게 물었던 것만 묻고 있습니다."

   "다 물어봐요. 딸한테도 묻고 아들한테도  묻고. 나는 어제 집에 있었
  고 걔는 나가 있었어요."

   "알겠습니다. 그런데  저희가 잘못 들어서인지 얼핏  들으면 누님께서 
  오히려 동생을 의심하고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드는데,그런 뜻은 
  아니겠죠,물론. 아까 동생분도 가족분들에게  전화를 걸라니까 왠지 좀 
  망설이는 것 같기는 했습니다만.  그래서 전화도 작은누님께 먼저 걸다
  가 안 받으니까 나중에 큰누님께 걸었던 거구...... "

   강 형사는 석 경감이 물러나앉은  것만큼 의자를 앞으로 당겨 앉았다. 
  그 말이 묘하게 나쁜 쪽으로 큰딸을 자극했던 것인  모른다.

   "나도 확실히 알지 못하면서 이런 얘기까진 안 하려고 했는데,아까 저 
  형사님께서 우리 어머니가 그 시간에  주머니와 백에 그만한 돈을 나누
  어 넣어 가지고 나오게 할 수  있는 사람이 누구냐고 물었는데 제 생각
  에 그럴 수 있는 사람은 한 사람 밖에 없어요."

   "가만....."

   거기서 반장은 다시 강 형사와 바톤 터치를 했다.

   "누굽니까?  그 사람이."

   "혹 아닐지도 모르고 하니 이 얘긴  내 입으로 했다고 말하진 마세요. 
  그럼 얘기를 할 테니."

   "좋습니다. 말씀해보십시오."

   "내가 알기로는 형동이 밖에 없어요. 아까 왔던 동생이오."

   처음 아들의 태도에서도 그랬듯 큰딸에게서도 어느 정도 그 대답이 나
  올 것이라는 것을 예상하고는 있었지만 순간 석 경감은 그 말의 진의를 
  떠나 이들이 과연 한 어머니의 배에서 나온 피를 나눈 형제들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수사는 또 어디까지나 수사였다.

   "그렇게 생각할 만한 특별한 이유라도 있습니까?"

   "내 동생이지만 걘 평소에도 그랬어요. 또 그런 얘고."

   "평소에 어쨌는데요?"

   "걔가 어머니 속 썩인 일을  일일이 얘기하려면 신문이 아니라 텔레비
  전에 나와도 벌써  나왔을 애라는 것만 알고  수사를 하세요. 어머니가 
  걔 때문에 속  썩으면 우리집에 와서도 애기하고,바로  아래 동생 집에 
  가서도 얘기하고  그랬는데,정말 신문에 나지 않고  텔레비전에 나오지 
  않아 그렇지 그런 데 나오는 막돼 먹은 애들보다 더하면 더하지 덜하지
  도 않은 애니까."

   "그렇게 말씀하시지 말고  구체적으로 말씀해주십시오. 그래야 저희들
  도 제데로 수사를 할 수 있습니다."

   "막내라 어머니가  오냐오냐 키워서인지 고등학교  때부터 비뚤어지기 
  시작했어요. 그러니 재수를 해서도 서울에 있는 대학도 못 가고 지방에 
  있는 어느 전문대학 다니다 말았고요. 어릴 때부터 여자를 알았는지 뭘 
  알았는지 돈도 그렇게  흥청망청 써버리고...... 학교 다닐  때에도 걔 
  한 달 용돈이 백만원이 넘었어요. 육칠년 전일 때도. 어머니가 돈을 써 
  육본에서 방위 생활할 때도  그랬고요. 지금도 어디에다 쓰는지 육칠백
  은 족히 써버릴 거에요 아마."

   "어머니가 그런 돈을 주셨습니까? 구두쇠 할머니라고 소문까지 나셨다
  면서."

   "안 주면 어떻게 하겠어요? 얘길  하려니 속이 타서...... 여보,나 담
  배 하나 줘 봐요. 여기서 피워도 되죠?"

   큰딸은 자신의 남편과 석 경감에게 번갈아가며 말했다.
   "그러십시오. 피실 줄 아시면......"

   석 경감은 입이 쓴 얼굴로  말했고,남편은 자기 주머니에서 담배를 꺼
  내 불까지 붙여 아내에게 내밀고 자신도 새 개피를 꺼내 입에 물었다.

                              
 소 제 목 : 여자는 진홍색 루즈가 묻은 담배를
    "안 주면 어떡하다니요?"

    석 경감은 침착하면서도 다그치듯 큰딸에게 물었다.

    "사람을 아주 못 배기게  했어요. 아니,집에 아무리 돈이 많
   아도 그렇지 어느 부모가 제 자식 신세 망치라고 돈을 그렇게 
   펑펑 물쓰듯 쓰라고 주겠어요? 안  주면 못 배기게 하니까 어
   쩔 수 없이 주는 거지...... 걔가 그런 애라구요."

    여자는 진홍색 루지가 묻은  담배를 위태스러운 모습으로 손
   가락 끝에 걸고 길게 연기를 내뱉았다.

    "어떻게 그랬는지 구체적으로 말씀해주시겠습니까?"

    "툭하면 집에  불을 싸지른다질 않나,나가  죽겠다고 그러질 
   않나,집안에 물건을 들어내질 않나,좌우지간 한 번 난리가 나
   면 온 집안을 벌집처럼 뒤집어놓고,어떤 때는 어머니 몸에 손
   을 대지 않나,언제는 돈을 주지 않으니 정말 집안에 석유까지 
   끼얹고,일일이 얘기를 하자면 끝도 없어요."

    "그러니까 따님  말씀으로는 그 시간 동생이  어머니한테 돈 
   백만원이든 2백만원이든  가지고 나오라고 하면  어머니가 그 
   돈을 들고 밖으로 나온다 이거지요?"

    "예. 걔가 어디서 술을 먹든  아니면 다른 지랄을 하든 돈이 
   떨어져서 가지고 나오라고 하면  어머니도 어쩔 수 없이 가지
   고 나왔을  거라는 얘기에요. 그러지 않고는  또 다른 난리가 
   나니까."

    "어머니가 자식들을 어릴 때부터 그렇게 키웠습니까?"

    "나하고 내  바로 아래 동생은 그렇게  크지 않았어요. 남자 
   동생 둘이 그렇게 컸지.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나서 어머니는 
   어떻게든 돈을 모으려고 했고,또 동생들한테는 아버지도 없는 
   자식이 남한테 기죽으면 안  된다고 그렇게 가르친 것도 많고
   요. 그러니 처음엔 큰 게 그러다 결혼한 다음 아예 재산 반을 
     잘라 이민을 가버리고,그게 가고  나니 이번엔 작은 게 이
   어서 그러고......"

    "그 시간 어머니가 돈을 들고  나가기 전 밖에서 전화 한 통
   이 왔습니다. 바로 아파트  앞 공중전화에서 건 전환데,더 조
   사를 해 봐야겠습니다만 만약 동생이 전화를 안 걸고 다른 사
   람이 어머니에 대한 어떤 원한을 가지고 동생 이름을 대고 밖
   으로 나오라고 해도 어머니가 나왔을까요?"

    "모르겠어요,그건......"

    "만약 동생 친구들이 동생이  지금 무슨 일론가 돈이 필요하
   다고 어머니께 말하면요?"

    "그러면 나왔을  거에요. 전에도 그런 일이  몇 번 있었으니
   까."

    "어떤 일인지 얘기할 수 있습니까?"

    "나 참 챙피해서...... 여보,저거 좀."

    여자는 남편에게 재털이를 자기  앞으로 가져다 달라고 말했
   다.

    "얘길 해보세요."

    남편 대신 석 경감이 재털이를 끌어다주며 대답을 재촉했다.

    "나가면 술이고,술을 마시면  싸우고......그러다 남을 때려
   서 그 자리에서  금방 해결을 봐야 한다고  해 어머니가 나가 
   해결한 적도 있고,또 어디서 술을 먹다가 무슨 수가 틀렸는지 
   영업하는 집 기물을 부수고 해 붙잡혀 있다는 연락을 받곤 연
   락한 인편에 돈을 보내기도 하고,그런 일이 한두 번이 아니에
   요."

    "알겠습니다. 그러면 저희들이 그  부분을 더 조사하도록 하
   겠습니다. 그럼 지금  병원으로 가 보시겠습니까,아니면 어머
   니가 계시던 집으로 가 보시겠습니까?"

    "집으로 가 보겠어요. 그리고,혹시 아닐지 모르니 걔한테 지
   금 한 얘기 내 입에서  나왔다고는 절대 말하지 말고요. 그러
   면 또 난리가 나니까."

    여자는 담배를 끄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남편도 따라 일어섰
   다.

                                                                                                                                                                                                                                                                                                                                                                                                                                                                                                                              

 소 제 목 : 정말 그럴 수는 없는 일이었다
     <아파트 앞 공터에서 노파 피살
     범인은 피살자 입에 T자 메모남겨>

     그 기사를  본 소설가 이득지는 갑자기  눈앞이 아득해지며 
    들고 있던 신문을 떨구었다. 정말 그럴 수는 없는 일이었다.
     그것은 겨우 전화로 몇 번 목소리만 들은 한 익명의 독자가 
    압구정동으로 나가  자신이 쓴 소설에 나오는  것과 똑 같은 
    방법으로 이미 테러를 시작했다는 뜻이었다.

     시간이 금요일 밤인 것도  그랬고,첫 희생자가 노파인 점도 
    그랬다.

     소설 속의 노파는 재수를  하는 손주딸이 입시 공부를 하는 
    동안 미국 딸네집에 가 있다가 그곳에서 우연히 포르노 테이
    프를 본  다음 성도착증에 걸린 불쌍한  노인이었다. 그래서 
    귀국한 다음에도 마음  속으로는 이제는 그러지 말아야지,말
    아야지 하면서도 자신도 통제할 수  없는 어떤 힘에 끌려 늘 
    집 앞  비디오 가게에 나가 포르노  테이프를 찾던 노인이었
    다. 몸은 이미  고목등걸처럼 그런 감흥으로부터 말라붙어도 
    그걸 본 다음 갖게 된  한순간의 충격과 쇼크가 뒤늦게 찾아
    온 마귀처럼 노인의 마음과 정신을 지배하고 있었다.

     젊은 시절 남편과 사별한 다음 혼자 몸으로 훌륭히 두 자식
    을 키워내고,그러면서도 마음속에 그런 나쁜 병이 들기 전부
    터 이미 아들과  며느리,손주들에게 거추장스러운 짐처럼 천
    대를 받던 불쌍한 노인이었다.

     그 소설을 쓸 때 이득지 스스로도 가장 마음 아팠던 부분이 
    그 노인에 대한 이야기였다.  가능하면 그는 그 이야기를 쓰
    고 싶지 않았다. 그냥 머릿속으로 생각해낸 이야기도 아니었
    다. 소설을  쓰기 전 누군가 그에게  그 이야기를 해주었다. 
    자신이 엘에이(LA)에 있을 때 어느 이민가에서  泰 본 일이
    라고 했다. 이득지가 한 일은 들은 이야기에 얼마간 살을 붙
    여 압구정동으로 무대를 옮겼던 것뿐이었다.

     그는 그 소설을 통해 자본의 성적 부패와 일탈에 대해 이야
    기하고 싶었다. 노인의 이야기를 썼던 것도 그것의 무자비한 
    부패와 일탈이 가장 숭고하고 깨끗해야 할 한 영혼까지 그런 
    식으로 오염시킬 수 있음을 이야기하기 위해서였다. 소설 속
    의 테러리스트 역시 포르노  테이프를 빌려오는 노인의 몫을 
    조르며 연민에 젖은 목소리로 다음과 같이 말하게 했다.

     "어느 댁 어른인지는 모르지만 그냥 이렇게 가세요,할머니. 
    비록 마음뿐이지만  어느 것 하나  뜨거운 대로......살아도 
    이제 얼마 남지 않은 날 더 욕되게 하지 마시고......"

     그런 자신의 뜻을 T는 조금이라도 헤아리기나 했을까. 헤아
    렸다면 차마 그런 식으로 무모하게  노인의 몸에 손을 댈 수 
    없었을 것이다.

     신문을 본 다음 이득지는 오후  내내 아무 일도 할 수가 없
    었다. 무엇보다 우선 마음이 불안해 견딜 수 없었다. 앞으로
    는 또 어떤 일이 발생할 것이며,또 그런 일들이 자신에겐 어
    떤 올가미로 다가올 것인가.

     처음 설악산에서 T의 메시지를 들은 다음 서울로 돌아와 그
    랬듯 전화벨만 울려도 철렁 가슴이 내려앉는 심정이었다. 그
    러면서도 그는 행여 오게 될지 모를 T의 전화를 기다렸다.

     집필실로 쓰는 사무실의 문단속을 하고 나오기 전까지 바깥
    에서 걸려온 전화는 모두 다섯 통이었다. 두 통은 새롭게 원
    고 청탁을  하는 어느 대기업들의 사보  편집실이었고,또 한 
    통은 내일 원고를 주기로  한 주간잡지의 확인 전화였다. 두 
    통은 청탁을 거절했고,확인 전화는 이미 완성된 원고라 팩시 
    번호를 받아 적었다. 담당자는  그럼 내일까지 그 번호로 원
    고를 보내  달라고 했지만 그는 그  원고에 대해서도 그러고 
    싶은 마음이 없었다. 그러면서도  번호를 받아 적은 것은 그
    렇게 하는 것이 상대로 하여금 가장 빨리 전화를 끊게 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나중에 온 두 통 중  한 통은 지난번 펑크를 낸 <문
    학세계> 정은주 기자의 전화였고,또  한 통은 저녁에 술이나 
    한잔하자는 구인서의 전화였다. 그 두 전화에 대해서도 그는 
    하나는 건성으로,하나는 집에 일이 있다는 핑계로 거절했다.

     "선생님,무슨 일 있으세요?"

     정은주 기자가 그렇게 물었을  때 그는 다만 몸이 불편하다
    고 말했다. 

     정말 그럴 수는 없는 일이었다.

     미스터 T...... 


 소 제 목 : 남자로 태어나 여자로 살아가는
     소설 대로라면 다음 번 범행 대상과 범행 시간도 이미 나와 
    있었다. 소설 속의 두번째  테러 대상은 남자로 태어나 여자
    로 살아가는,압구정동 환락가의  게이 출신의 무희였고 사건
    은 매주 금요일 밤마다 발생했다.  T 역시 첫 범행을 그렇게 
    시작했다면 두번째의 범행도 가능한  그것과 맞추려 할 것이
    었다.

     그는 집으로 돌아가는 자동차  안에서도 내내 그 생각을 했
    었다. 이제 그 일로 나는 어떻게 될 것인가. 그리고 나는 어
    떻게 해야 할 것인가.  생각은 오래했지만 마땅한 방법은 떠
    오르지 않았다.

     그러다 아파트  입구에서 하마트면 길을 건너  상가로 가는 
    아이를 칠  뻔했다. 그는 급브레이크를  밟았고,놀란 아이는 
    자지러지게 울음을 토했다. 그는  아이를 달래고 난 다음 당
    분간 사무실로 나가지 않을  생각으로 자동차를 지하 주차장
    에 세우고  아파트로 올라갔다. 그때까지도 그는  이 사건에 
    대하여 자신이 해야 할 일을 결정하지 못하고 있었다.

     신고를 하는 것도 두려웠고,신고를  하지 않는 것도 두려웠
    다. 영화 <피셔킹>의 주인공 잭이 그 일로 마이크를 놓  방
    송국에서 쫓겨나듯 자신도 이제 영원히 글을 쓰지 못하게 될
    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그의 물  먹은 솜처럼 그의 어깨를 누
    르고 있었다.

     그러나 초인종을 누르며 그는  애써 아무 일 없었던 것처럼 
    얼굴을 바꾸려 노력했다.  아내에게도 당분간 이야기하지 않
    을 생각이었다. 또 이야기를  한다 해도 마땅한 해결 방법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당신이에요?"

     그는 아내가  오토폰의 화면으로 자신을 보고  있을 거라는 
    생각에 응,그래,하는 대답과 함께  일부러 얼굴 가까이 손을 
    들어보였다. 그것은 그가 평소 반가운 사람을 만났을 때라는
    가 기분이  좋다고 할 때 자신도  모르게 나오는 제스츄어였
    다.

     "잠깐만 기다리세요."

     그날도 아내는 보조 잠금 장치까지 걸고 있은 걸고 있은 모
    양이었다. 딸깍,딸깍,하고 아내가  차례로 자물쇠를 풀었다. 
    자신의 불안한 마음이 그렇고,또 그런 마음으로 봐서인지 아
    내의 얼굴도 왠지 수심이 끼어 보였다.

     "훈이는?"

     "방에 있는가 봐요."

     다른 때  같으면 아빠가 들어왔으면 나와서  인사를 해야지 
     嚥 들어앉아  있느냐고 한마디 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럴 
    기분이 아니었다.

     "별일 없었지?"

     아내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는 노트북이 든 가방을 들고 바
    로 서재로 들어갔다. 그러자  아내도 조용히 그의 뒤를 따라 
    들어왔다. 느낌이  이상했다. 그는 확인하듯  아내의 얼굴을 
    돌아보고 싶은데 그럴 용기조차 나지 않는 것이었다. 그러다 
    문득 깨닫듯 집에서도 사무실에서 보는 것과 같은 석간 신문
    을 본다는 것을 떠올렸다. 사무실에서 보는 신문 중 조간 신
    문 하나와 석간 신문 하나를  따로 집으로 신청했던 것은 일
    주일에 한두번쯤 사무실에 나가지  않는 날과 집안에만 있는 
    아내를 위해서였다.

     "당신도 봤지요? 오늘 신문......"

     아내도 봤다는 얘기였다. 전에 T가 자신의 마지막 메시지로 
    <피셔킹>을 보라고 한 다음부터  그가 사무실에서 그랬듯 아
    내도 신문이 오면 하던 일을 멈추고 사회면을 펼쳐 그것부터 
    확인했을 것이었다.

     "당신도?"

     "예......"

     "그럼 전화를 하지 그랬어? 들어오라고."

     "무서워서 그랬어요. 당신한테  전화를 하긴 해야 渼쨉 전
    화기를 드는 것조차 무서워서요."

     아내는 쓰러지듯 그의 품에 안겼다.

     "그 놈이야......"

     그는 팔을 돌려 아내의 어깨를 잡았다.

     "이제 우리는 어떻게 해요?"

     다시 아내가 불안한 얼굴로 말했다.


            
 소 제 목 : 한국영화와 외국영화의 차이점
     "걱정하지마,당신은......"

     말은 그렇게 했지만 어떻게 걱정이  안 되겠는가. 그는 아내의 어깨
    를 잡았던 두 팔을 허리 쪽으로 내려 아내의 몸을 자기 몸 쪽으로 바
    싹 끌어안았다.

     "이러니까 설국에 갔을 때가 생각나지 않아?"

     아내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건 우리하고  상관이 없는 일이야. <피셔킹>처럼  인기인의 농담 
    같은 말을 듣고 그러는  미친놈도 있고,영화를 보고 그러는 미친놈도 
    있고,책을 보고 그러는 미친놈도 있을  수 있는 거야. 언젠가 우리나
    라에도 그런  일  있었잖아. 국민학생이 우편배달부가  나오는 외국 
    영화 테이프를 빌려보고 나서 그것과 똑 같이 동생을 묶어 죽인 다음 
    집에 불을 질렀다고...... 경찰은 아이가 비디오를 보고 그대로 했다
    고 말하고 아이는 자기가 안 그랬다고 그러고....."

     "그렇지만....."

     "그렇지만 뭐?"

     "그렇지만 그건 만약 그 아이가 정말 비디오를 보고 나서 그랬다 해
    도 우리가 문제만 삼을 뿐이지 책임을 물을 수 없는 외국 영화였잖아
    요. 만약 그때 경찰이 그 아이가  우리나라 어느 영화를 보고 그랬다
    면 반응이 어땠을까를 생각해봐요. 그 영화를 만든 사람들한테요."

     "......"

     이득지는 아내를  껴안았던 손에 힘을 풀었다.  그래,정말 그랬다면 
    그 반응이 어땠을까.

     "더구나 영화는 여러 사람이 모여 만드는 거고,그 사람이 테러를 따
    라한 <<압구정동......>>은 당신 혼자 쓴 책이고요."

     신문을 보고 난  다음 아내도 혼자 많은 생각을  했을 것이다. 외국 
    영화를 보고 그랬다면 전에 그 아이의 일에서 보듯 고작 문제를 삼아 
    봐야 폭력 영화에  대한 전반적인 사회 문제 제기  정도로 끝나고 말 
    것이었다. 우리 아이들이 그런  폭력 영화로부터 얼마나 무방비 상태
    에 노출되어 있는가에 대하여.  그런 과정에서 오히려 문제를 삼는다
    면 그런 영화를 만든 외국의  제작자와 감독에 대해서가 아니라 그런 
    비디오를 아이들에게 빌려준 어느어느  비디오 가게 주인에게일 것이
    다. 모든 문제의 원천은 바로 그  비디오 가게 주인의 얄팍한 상혼에 
    있다는 듯.

     그러다 그것이 국내  영화를 보고 그랬다면 문제는  또 달라질 것이
    다. 더구나 이번 경우처럼 그것이 작가  한 사람에게 모든 책임을 씌
    울 수 있는 소설을 보고 그랬다면.  그것도 외국 작가의 소설이 아니
    라 국내 작가의 소설을 보고 그랬다면.....

     "오늘 그 신문을 보고 아무 일도  하지 못했어요. 저녁도 짓지 못하
    고...... 그냥 혼자 앉아  있는 것도 불안하고,그래서 훈이하고 같이 
    있는 것도 불안하고,당신이 돌아올 때만 기다렸어요."

     "전화온 데는 없고?"

     이득지는 T를 생각했다. 전에도 그는 사무실로 전화를 걸지 않고 집
    으로 전화를 걸었다.

     "혜주한테서 온 것말고는 없었어요."

     "뭐라고?"

     "그냥 잘 있냐고요. 그래서 걔라도 부를까  하다 또 오면 걔까지 이 
    일을 알게 될까봐 그냥 잘 있다고 하고선 끊었어요."

     "오전에도 없었고?"

     "어디 사보 편집실이라면서 당신 집필실을  묻는 전화가 와 그것 가
    르쳐주고,은경이가 당신 잡지에 난 것 봤다고 전화를 하곤,그리곤 없
    었어요."

     "그래...... 전에도 <피셔킹>을  보라고 한 후로 전화를  안 했는데 
    이제 일까지 저지른 다음 전화를 걸 리가 없겠지."

     이득지는 이마로 내려오는 머리를  쓸어넘기며 서재 한쪽 벽으로 놓
     틉 소파에 주저앉았다. 그러다 그는 갑자기 생각난 듯 전에 T의 목
    소리를 녹음해 둔 테이프를 떠올렸다.

                            
 소 제 목 : 울고있는 은주(銀珠)
     "아무래도 신고를 해야겠어. 나중이야 어떻게 되든......"
     그는 소파에 앉은 채 방 한가운데 서 있는 아내를 쳐다보며 말했다.

     "경찰서에요?"

     아내도 머리를 쓸어올리며 물었다.

     "그래. 다른 방법이 있는 것도 아니고......"

     "신고를 하면 뭐라고 신고를 할 건데요?"

     "앉아서 얘기를 해. 여기 앉아서."

     그는 소파 한쪽 옆으로 옮겨앉으며 아내에게 손을 내밀었다.

     "됐어요,난. 신고를 하면 어떻게 신고를 할 건지 얘기해봐요."

     "지금으로선 사실대로 얘기를 하는 수밖에 없겠지. 우리가 설악산에 
    갔을 때부터 설악에서 돌아와 마지막 메시지를 받은 것까지 다."

     "신고를 왜 늦게 했느냐고 그러면요?"

     "그것도 사실대로 얘기하고. 전에 협박 전화를 많이 받은 것도 얘기
    하고,그래서 이번에도 그냥 말로만 그러는 건 줄 알았다고."

     "그런다고 믿을 것 같애요? 그 사람들이......"

     "안 믿으면? 누구든 그런 전화를 받았다고  해서 그게 그 사람이 진
    심으로 하는 말일 거라고 생각할 사람이 어디 있겠느냐고. 더구나 나
    는 전에도 그런 비슷한 전화를 여러  번 받 勞解. 그래도 안 믿으면 
    또 얘기를 하는 거지. 만약 내가 그때 그 사람 전화를 받자마자 신고
    를 했다 해도 당신들이 그 신고를 정식으로 접수했겠느냐고. 또 그런 
    신고를 접수하고 나서 사건 나기 전  미리 그 사람을 찾아내 이번 일
    을 예방했겠느냐고."

     "그건 우리 얘기지요. 지금에 와 당신과 내가 할 수 있는......"

     "그렇다고 내  말이 틀린 것도 아니잖아.입장을  바꿔놓고 생각해도 
    그렇고."

     "틀렸다는 게 아니라 그러면 그 사람들은 그럴 거에요. 그래도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르니 신고는 했어야 한다고. 이미 사건이 터진 다음
    이니까 그 사람들은 무슨 말이든 할 수 있는 거구요. 지금 당신이 금
    방 한 얘기만  가지고도 그 사람들은 오히려 그  정도 애기가 오고간 
    거라면 언제 터지든 사건이 터질 거라는 걸 왜 미리 모르겠느냐고 그
    럴 거라구요. 그러면 또 신문에선 충분히  예방할 수 있는 사건을 당
    신이 그때 신고하지 않아 발생했다는 식으로 몰아갈 거구요. 그게 같
    은 신고라도 그때와 지금의 차이에요. 그 사람들 입장에선 이미 사건
    이 터진 다음이니까."

     아내는 그가 생각하지  못하고 있던 부분까지 짚어  말했다. 그만큼 
    신문을 보고 난 다음 아내는 혼자  그 일로 일어날 수 있는 이런저런 
    상황들을 모두 생각해봤다는 뜻이었다.  또 아내의 말은 사건이 발생
    하기 전엔 여러 가정 중 가장 상식적인 가정이 설득력을 갖지만 막상 
    사건이 터지고 난 다음엔 그런 상식도 결과로서 나타난 현실 앞엔 무
    력한 변명이 될 수밖에 없다는 뜻이기도 했다. 어느 경우에나 지나고 
    나면 현실만 필연이니까......    

     "그럼 어떻게 했으면 좋겠어? 당신 생각엔......"

     "나도 모르겠어요. 아무리 생각해도 끝에 가선 모두 최악의 경우 쪽
    으로만 생각되고요. 우리 하루만이라도  더 생각해봐요. 오늘 하루만
    이라도 더....."

     "단순히 그 사건으로 내가 궁지로 몰릴 것 때문에 괴로운 것만은 아
    니야. 누군가 내 소설을 읽고 그 소설에 나오는 것과 똑 같은 방법으
    로 사람을 죽였다는 것도 그렇고,또 그렇게 사람이 죽었다는 것도 그
    렇고...... 대체 이게 있을 수 있는  일이냐구? 내가 그러라고 잠 안 
    자고 그 소설을 썼냐구? 압구정동을?"

      그는 울고 싶은 마음으  소파에서  일어나 두 주먹으로 소파 뒤의 
    벽을 쳤다. 그리고 거기에 자신의 머리를 찧었다.

     "그러지 말아요."

     그러나 정작 울고  있는 건 뒤에서 어깨를 잡은  그의 아내 은주(銀
    珠)였다.

     "대체 이 시대에 소설이 뭐야? 문학은  또 뭐고? 난 그런 일이 생기
    라고,그걸 읽고 압구정동으로  나가 테러를 하라고 그  소설을 쓴 게 
    이 아니란 말이야!"

     "알아요. 아니까 제발......"

     아내는 다시 매달리듯 벽쪽으로 향해 돌아선  그의 두 팔을 뒤로 안
    았다.

                            
 소 제 목 : 안에 은주는 그의 가슴을 안고
     "당신이 알면 뭐해? 이미 그렇게 읽고 나간 놈이 있는데."

     "그건 당신 책임이 아니에요."

     "아니면 누구야? 그럼  그걸 쓸 때 내  등만 바라보고 있은 
    당신 책임이야?"

     "아뇨. 누구 책임도......"

     "그렇지만 이제 세상 사람들은 모두 내 책임이라고 말할 거
    라구. 나 역시 이제 평생을 그렇게 생각하며 살 거고......"

     "세상 사람 모두,그리고 당신까지 그렇게 생각한대도 한 사
    람은 아니에요.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요. 전에 전화한 
    그 사람이  나가지 않고 당신이 나갔다  해도 <안에 은주>는 
    아니에요."

     그는 주먹으로 벽을 짚고 섰고,아내는 그의 등에 얼굴을 대
    고 가만히 어깨 밑으로 손을 넣어 그의 가슴을 안았다.

     "진정해요. 이런다고 해결될 일이 아니잖아요,여보."

     "그러자고,정말 그러자고  그 소설에 테러 이야기를  한 건 
    아니었어. 당신도 알잖아 그건. 소설 속에 나오는 그 노파가 
    한 번 그런 테이프를 본 다음 매일 같이 다른 테이프를 빌려 
    보면서 마른 몸에 자학처럼 그런  행위를 하는 부분을 쓸 때 
    내가 어떻게 했는지. 그런 이야기를  瀟 하는 내 자신이 너
    무 싫어지고,또  그런 부분을 쓰는 내  정신까지 병들어가는 
    것 같아 한  줄 쓰고 훈이 방에 가 훈이  자는 얼굴 보고 오
    고,또 한 줄 쓰고 훈이  방에 가 얼굴 보고 오고...... 그리
    고 거기에 테러리스트를 등장시킬  때에도 세상 모든 노인들
    에게 죄를 짓는 기분이었던  것도 사실이었고. 또 그리고 나
    서도 마음이 풀리지 않아 책을  낼 때에도 후기에 훈이 방에 
    가 훈이 얼굴 보고 온  이야기를 했던 거고. 정말 다른 부분
    을 쓸 땐 그러지  않았어. 테러를 에스컬레이트할  ㎰〉 그
    러지 않았고....."

     "알아요,내가. 내가 봤고요." 

     "그런데 그 놈은 왜 그걸  그렇게 읽었냐는 거야? 왜? 그런
    다고 해결될 압구정동식 욕망도  아닌데. 아니니까 난 또 그 
    놈이 전화했을 때 역으로 그렇게 말했던 거고. 그건 내 소설
    이 아니라 이미 무얼로도  바로잡기 어려운 상태가 되어버린 
    거라고. 난 상대할 말도 안  돼 그렇게 말했는데 그 놈은 내 
    말을 또 반대로 듣고 말이지."

     "더 말하지 말아요. 이제 그 얘기를 하면 무얼 하겠어요. 
    당신 말대로 그 사람은  이미 일을 저질렀는데. 당신이 자꾸 
    그러면 나까지 더 무서워져요.  오늘 낮에 내가 그러니까 훈
    이 얼굴도 따라 그러는 것 같고요."

     아내는 그의 등에서 얼굴을  떼고 가슴을 안았던 손을 풀었
    다.그러자 그는 알 수 없는 어떤 허전함 같은 것을 느꼈다.

     "그냥 이대로 있어."

     "그 얘기는 조금 있다가  해요. 우린 굶더라도 훈이 저녁은 
    먹여야 하잖아요."

     "그냥 이대로 있으라니까."

     그는 몸을 돌려 다시 아내를 껴안았다. 누군가를 그렇게 힘
    껏 껴안지 않고는 왠지 견딜  수 없을 것 같았다. 마주 몸을 
    껴안아 오는 아내 역시 같은 마음일 것이었다. 한 손으로 아
    내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으며 그는 생각했다. 우리는 지금 사
    랑을 안고 있는 것이 아니라  언제 폭발할지 모를 서로의 불
    안을 사랑처럼 안고 있다고.

     그리고 그날밤 그는 불안 속에,마치 그 불안을 그런 식으로 
    떨쳐버리기라도 하듯 밤새도록 아내의 몸을 어루만지고 쓰다
    듬으며 가슴을 찾아 얼굴을 묻었다.

     내일 무얼 해야 할지는 이미 이야기를 끝낸 상태였다. 그는 
    테이프를 들고 사건 관할 경찰서로 가겠다고 말했다. 아내는 
    입술을 깨물며 묵묵히 그 말을 듣기만 했다.

     그러다 새벽이 되어 그가 깜빡  졸 듯 잠이 들었을 때 아내
    는 침대에서 내려와 어젯밤  욕정으로 가장한 그의 건조하고 
    불안한 손길이  벗겨낸 옷들을 챙겨 입고  거실로 나와 그의 
    서재로 들어갔다. 세번째 서랍이었다.

     그녀는 어둠 속을 더듬어 성냥갑만한 녹음 테이프를 찾아냈
    다. 그리고 재봉틀 북에서 실을 빼내듯 플라스틱 케이스에서 
    마그네틱 테이프를 뽑아내기 시작했다.

     "만약 누군가 선생님의 소설을  읽고 실제 압구정동으로 들
    어가 소설에 나오는 것과 똑 같은 목적으로 비슷한 대상들에 
    대해 그런  테러를 저지른다면 선생님은  어떻게 하시겠습니
    까?"

     "이것봐요, 미스터 T.누군가가 아니라 미스터 T가 압구정동
    으로 가 그런 사건을 일으킨다  해도 그게 나와 무슨 상관이
    겠오.설사 그래서 그게  그것이 사회적으로 문제를 일으킨다 
    해도 내가 책임질 게 뭐가 있겠냐는 얘기오."

     "다시 묻겠습니다.아니라면  그것이 아닌  선생님의 생각을 
    말씀해 주십시오."

     "아니오,내 진심이오.거기가  어딘지 모르지만  미스터 T가 
    이 전화를 끊고 바로 압구정동으로 들어가 준다면 그보다 더 
    고마운 일이 없겠고....."

     "지금 하신 그 말 책임질 수 있습니까?"

     "좋아요.여러 소리할 것 없이 어떤 책임이든 내가 다 질 테
    니,미스터 T 당신은 이 전화를 끊는 즉시 압구정동으로 테러
    를 나가시오. 난 더 이상 할 얘기가 없으니까."

     이제 영원히 사라지고 떠나라,이 거친 말들......

     뽑아낸 테이프는 그녀의 몸을  거미줄처럼 감고 있었다. 그
    러나 그냥 두면 그 말들은  남편의 몸을 거미줄처럼 감고 말 
    것이었다. 

                 
 소 제 목 : 불안하여 격렬했던 정사의 뒤끝이
     얕은 잠결  속에 이득지는 꿈을 꾸었다.  누군가 그의 몸을 
    가는 밧줄  같은 것으로 꽁꽁 묶어  결박지으려는 꿈이었다. 
    처음엔 꼼짝할 수가 없었다. 그는 그 결박으로부터 벗어나듯 
    간신히 몸을 틀어 침대 옆 자리를 더듬었다. 걸리는 것 하나 
    없는 허전한 느낌이 손끝에서 가슴으로 전달되어 왔다.
     그는 다시  손을 내밀어 아내의 몸을  찾았다. 그러다 그는 
    어젯밤,불안하여 더욱  맹목적으로 치룬  아내와의 잠자리를 
    떠올리며 잠에서 깨어났다. 입안이 꺼칠한 게 자갈이라도 한 
    입 문 것 같았다. 겨울 낙엽처럼 마르게 치러낸 정사의 뒤끝
    이 잠시  의식의 어떤 마비와 같은  잠을 실어왔고,깨어나자 
    다시 지난밤의 불안이 벗어나지  못할 공포처럼 그를 엄습해 
    왔다.

     아내는 방에 없었다.

     "여보."

     그는 작은 소리로 조심스럽게 아내를 불었다. 

     "여보......"

     그는 침대에서  내려와 거실로 나갔다.  성에처럼 희부윰한 
    빛깔의 겨울 새벽이  조금씩조금씩 창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그러나 거실 소파에도,아이의 방에도 아내는 보이지 않았다.

     "여보....."

     "......"

     그는 마지막 남은 서재의 문을  열였다. 아내는 조금 전 꿈
    결에서 본 자신의 모습처럼  플라스틱 케이스에서 뽑아낸 마
    그네틱 테이프를 온 몸에 감고 있었다. 아니,감은 것이 아니
    라 김긴 것처럼 그것이  잠옷을 입은 아내의 어깨와 가슴,허
    리와 무릎에 어지럽게 달라붙어 있었다.

     "뭐 하는 거야?"

     그는 낮지만 놀란 소리로 물었다.

     그제서야 아내가 그를 쳐다보았다.

     "뭐하는 거냐구?"

     "이 테이프 어디에도 가져가지 말아요."

     아내는 울고 있었다. 얼굴도  목소리에도 눈물이 흐르고 있
    었다.

     그는 말없이 아내 앞에 섰다.

     "어제 신문 보고 나서 당신이  들어오기 전 이걸 다시 들어
    봤어요. 그리고 없애버릴까 하다  당신이 어떻게 할 건지 얘
    기를 들은 다음 없애버리려고 그냥 두었어요."

     "그렇지만 여보,이건 아니야....."

     그는 아내의 손에서 테이프를  모두 뽑아낸 빈 케이스를 빼
    앗았다. 그러자 아내의 무릎  쪽에 붙어있던 몇 가닥의 테이
    프가 케이스 끝으로 매달려 올라왔다. 그렇게 뽑아내도 부분
    적으로 목소리의 재생은 가능할 것이었다. 그는 빠르게 아내
    의 몸에 붙어있는 테이프를 걷어내기 시작했다.

     "잠깐만요!"

     아내가 그의 행동을 제지했다. 그도 손을 멈추고 아내를 바
    라보았다.

     "무얼 하시려구요?"

     "......"

     그는 대답 대신 다시 천천히 아내의 몸에 붙은 테이프를 걷
    어들이기 시작했다.

     "안 돼요!"

     아내는 거의 비명에 가까운 소리를 질렀다.

                
 소 제 목 : 나에게 소중한 오직 한사람 그대..
     그는 움찔하고 뒤로 물러났다.

     "당신이 이러면 나 이걸 그대로 감고 아래로 떨어져 죽을지 
    몰라요. 그런 다음 그걸  걷어가 신고를 하든 말든 마음대로 
    해요."

     정말 그럴 결심이라도 선 듯 아내의 얼굴은 아까보다 더 굳
    어 있었다.

     "손에 있는 것도 그대로 놓고요."

     "......"

     "어서요!"

     "어제 우리 그러기로 했잖아."

     그는 그대로 빈 케이스와  테이프를 든 채 달래듯 아내에게 
    말했다.

     "이젠 안 돼요."

     그러면서 아내는 단호한 얼굴로 그의 손에서 성냥갑만한 케
    이스와 갈색 테이프를 걷어갔다. 

     "그 놈은 사람을 죽였어."

     "알아요."

     아내는 빠른 동작으로 자기  몸에 붙어 있는 나머지 테이프
    를 두 손 안으로 구기듯 모아쥐었다.

     "알면서 왜?"

     "그러니까 그러는 거에요. 모르지  않고 아니까. 그리고 그 
    사람이 이 전화를 하고 나서 사람을 죽였으니까."

     "테이프만 신고를 하면 금방  잡을 수 있어. 누군지도 금방 
    알고."

     "그 사람을 위해서 그러는 게 아니에요. 나한테는 누구보다 
    당신 한  사람이 소중해요. 이 세상  모든 사람들보다 더요. 
    당신은 당신이 이걸 경찰에 신고하면  그 다음 어떤 일이 생
    길지 생각해봤어요?"

     "......"

     "신고하자마자 당신과 그 사람이  통화한 내용이 그대로 텔
    레비전과 라디오로 나오고  신문에도 나고,그러면 그걸 듣고 
    읽은 사람들이 당신을 어떻게 생각할 것 같냐구요?"

     어제,아이의 저녁을 먹인 다음  아내와 이야기를 하며 경찰
    에 신고하자는 결론을 내리면서도  마지막 순간까지 그가 가
    장 고민했던 부분 이  바로 그것이었다. 그러면서도  榴 어
    떤 죄책감처럼 자신이 쓴 소설과,격한 감정으로 내뱉은 신중
    하지 못한 말 몇  마디가 사람을 죽였다는 생각을 했고,무엇
    보다 다음  사건이 발생하기 전 범인을  잡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그 일로 겪게 될  세상 사람들의 비난과,자의로든 타의로든 
    이제 더 이상 소설을 쓸  수 없게 될 절필(絶筆)의 불안까지
    도 누르고 내린 결론이었다.  오죽하면 마음 속의 욕정 때문
    이 아니라 잠이 오지 않아 눈을 뜨고 있는 동안 머릿속 가득 
    밀려드는 그 불안을 떨쳐버리기  위해 제대로 직립되지 않는 
    자신의 성기를 학대하며 밤새도록 아내의 몸을 더듬고 또 탐
    하고 했겠는가. 

     "목소리가 방송에 나오면 범인이 누구라는 건 금방 알게 되
    겠지요. 그렇게 되면 당신 말대로 범인도 금방 잡을 수 있을 
    테고. 그래요. 그렇게 해서 당신이 신고한 이 테이프 때문에 
    범인을 잡았다고 해요. 그렇다고  해서 세상 사람들이 이 속
    에 든 당신 말을 문제삼지  않을 것 같아요? 당신 신고로 범
    인을 잡았다고 해서?"

     "바라지 않아, 그건....."

     "나도 거기까진 바라지 않아요. 그렇지만 범인을 잡는 걸로 
    모든 문제가  다 끝나는 게 아니잖아요.  테이프를 공개하게 
    되면 이건 단순히 소설을 읽고 그걸 따라 압구정동으로 테러
    를 나간 게 아니라 작가인  당신이 그 사람한테 명령하듯 나
    가라고 해서 나간 게 되잖아요."

     "난 그때 그런 뜻으로 한 말이 아니야!"

     그는 자신의 결백을 주장하듯  목소리에 힘을 실어 말했다. 
    그런데도 왠지 기운이 빠지는 것 같았다.

      
 소 제 목 : 맹목적인 사랑으로 부터 느끼는
     "알아요,난. 그렇지만 그걸 나말고  믿을 사람이 어디 있느
    냐구요? 그때 어떤 상황이었는지도  모른 채 당신하고 그 사
    람하고 전화한 목소리만 듣고 나서....."

     "......"

     "전화에 대고 당신은 그곳에 테러가 아니라 그보다 더한 일
    이 발생해도 나하곤  상관없다는 식이었고,그러니까 그 사람
    이 오히려 그게 진심이냐,아니면 그것이 아닌 당신의 진심을 
    말해달라고 그러고요. 그런데도 당신은 모든 책임은 내가 질 
    테니 지금 즉시 압구정동으로  나가라는 식으로 그의 전화를 
    끊고....."

     "그건 내가 설명할 수 있어.  말은 그렇게 했지만 그게  내 
    진심이 아니었다는 걸......"

     "아뇨. 이젠 누구도 설명하지  못해요. 오직 신(神)하고 나
    하고만 알지. 이미 사건은 터졌고,그런 다음 당신이 이걸 신
    고해 여기  녹음된 걸 듣는다면 사람들은  이미 그런 사건이 
    터진 정황 속에서 모든  걸 생각하고 판단하니까. 녹음 내용
    도 사건 정황과 일치하고요.  그렇게 되면 어떤 진실도 끼어
    들 틈이 없어요.  아마 우리도 이게 우리  일이 아니라 다른 
    작가의 일이라면 여기에 녹음  내용을 듣고 나선 그렇게 생
    각할 거구요."

     그는 아내의 머릿속에  그렇게 일목요연한 생각들이 정리되
    어 있을 줄 몰랐다.  그렇다면 어젯밤 자기가 테이프를 들고 
    나가 신고를 하겠다고 했을 때  아내가 입술만 깨물 뿐 아무 
    말을 하지 않은 것도 우선은  그렇게 하는 것이 자기 손으로 
    테이프를 파손시킬 수 있는  유일한 길이라고 생각했던 것인
    지 모른다. 그  자리에서 반대를 하면 그가  그걸 다른 데에 
    보관할지도 모르므로.

     "지금 나한테는  오직 한  사람만 소중해요. 오직  한 사람
    만....."

     아내는 다시 작은 소리로 흐느껴 울면서 플라스틱 케이스와 
    마그네틱 테이프의 연결 부분을 끊었다. 테이프가 가는 실처
    럼 늘어나며 끊겼다.

     그런 아내의 모습에서  이득지는 순간적이나마 어젯밤 아내
    의 몸을 더듬고 탐할 때  가졌던 불안과는 다른 어떤 안도감
    을 느꼈다. 어쩌면 그건  자신에 대한 아내의 맹목적인 사랑
    으로부터 느끼는 안도감이 아니라 파손된 테이프로부터 느끼
    는 안도감인지도 몰랐다. 아니,그순간 이득지의 가장 인간적
    이고 정직한 감정은 뒤의 것이었다. 신고를 해야겠다고 생각
    하면서도 그렇게 되지 않을 쪽으로의 진행을 더 바라고 있었
    던 것인지 모른다. 아니,바라고 있었다.

     "이제 어떻게 할 건데?"

     이득지는 두 손 안으로  꼭꼭 테이프를 모아쥐는 아내를 바
    라보며 물었다.

     두번째 사건이 나기 전 당장 오늘이라도 범인을 잡을 수 있
    는 유일한 증거이자,자신을 깊은 수렁과도 같은 나락으로 밀
    어뜨릴 절벽 끝의 총구와도 같은 물건이었다.

     없애버리면 범인은 쉽게 잡히지 않는다. 그렇다고 언제까지 
    안 잡힐 건 아니겠지만,사건  또한 계속해서 일어날 것이다. 
    소설 속의  <얼굴없는 테러리스트>의 몫을  현실로 자처하고 
    나선 그가 앞으로 그 역할(역할? 그렇게도 마땅한 단어가 없
    는가,역할이라니?)을 어떻게 해나갈지 저것만 없애버리면 이
    제 그건 전적으로 그의  몫이 되어버린다. 통제할 사람도 통
    제할 방법도  없다. 그가 소설 속의  테러리스트처럼 현장에 
    또다른 결정적 물증만 남기지 않았다면 아무도 그를 쉽게 잡
    을 수  없을 것이다.  아내가 저 테이프를  없애버기만 한다
    면.....

     "태워버릴 거에요. 이 안에 든 당신이 한 말 모두......"

     "그러면 그를 끝내 잡을 수 없게 될지 몰라."

     "알아요,나도."

     "그러면 계속해서 사람이 죽고."

     "그것도 알아요. 알지만 나한테는 지금 당신밖에 보이지 않
    아요.  어제  신문을  보고난   다음부터는  이  세상  어떤 
    것......"


                      
 소 제 목 : 그 새벽 그녀는
     처음 그 자의 목소리를 녹음할 때만 해도 오히려 그것을 신
    고하자는 쪽은 아내였다. 그때는  그가 반대를 했었다. 아내 
    말대로라면 그때는 아직  사건이 일어나기 전이었으므로. 그
    러므로 그때는 그런 전화를  했다고 해서 그(T)가 정말 테러
    를 나가리라는  것보다는 나가지 않으리라는  게 현실적으로 
    더 설득력 있는 상식이었으므로. 그리고 누구나 그런 상식에 
    기초하여 생각하고 판단하므로.

     "전에 당신이 그랬죠? 그가 정말 압구정동으로 나갈 사람이
    라면 그때 당신이 어떤 대답을 하든 상관없이 이미 그쪽으로 
    나갈 생각을 하고 전화를  걸었을 거라구. 이제 내가 당신에
    게 그 말을  할께요. 그는 그때 당신이  한 말과는 상관없이 
    그쪽으로 나간 거에요. 그러니 당신도 이제 그렇게 생각하세
    요."

     "그런다고 내가 그것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을까?"

     "그럼 이걸 신고한다고 당신이 자유로울 수 있나요?"

     "......"

     "그 사람은 이미 사건을  저질렀고,이제 신고를 하든 안 하
    든 어느 경우에나 자유로운 건 아무 것도 없어요. 단지 신고
    했을 때와 신고하지 않았을 때  당신이 받을 비난과 우리 가
    족이 받을 고통의 차이뿐이지."

     아내는 저  사람에게도 저렇게 차고 냉정한  구석이 있었나 
    싶을 만큼 굳은 얼굴로  정면으로 그를 바라보며 말했다. 처
    음 그것을 녹음할 때와 어젯밤에  보였던 불안 같은 것은 아
    내의 얼굴 어디에도 없었다.  아니,아내는 어떤 의지에 굳어 
    있었다. 그것은 이제 자신이라도 그를 지키겠다는 의지였고,
    단순히 한 사람이거나 한 여자로서가 아니라 한 남자의 아내
    로서 스스로에게 다지는 의지일 것이었다. 그는 자신도 모르
    게 그런 아내의 의지에 자신의  모든 것을 맡기고 싶은 어떤 
    도피감 같은 느꼈다.  정말 그렇게 하여 그  일로 생긴 모든 
    불안들을 내 마음 속에서 훌훌 털어낼 수만 있다면......

     아마 그래서였을 것이다.

     "신고를 하면 사람은 더 다치지 않아."

     말은 그렇게 했지만 그는 그 말에 이어질 아내의 보다 강한 
    의지를 보고 싶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아까도 얘기했지만 내 눈엔 오직 당신밖에 보이지 않아요. 
    내가 잘 알지도 못하는 쓰레기  같은 몇 사람의 목숨을 위해 
    나는 당신을 세상 사람들의 비난 한가운데 둘 수가 없어요."

     "쓰레기 같은 목숨이라니?"

     "그는 책에 나온 대로  테러를 하러 나간 사람이에요. 책에 
    나온 대로라면 다음번 희생자가 어떤 사람일 거라는 걸 우리
    는 짐작하고 있고요."

     "그렇지만 그건 소설이고 이건 현실이야. 그가 진짜로 사람
    을 죽인 일이라구."

     "알아요. 아니까 이러는 거구요."

     아내는 찬바람이 나도록 그의 옆을 비켜 거실로 나갔다. 그
    가 뒤따라 나갔을 때 아내는 주방 쪽으로 가 한 손으로는 흐
    트러진 테이프를 들고,다른 한 손으로 사스레인지의 점화 스
    위치를 비틀었다. 철컥,하는 소리와  함께 파란 불꽃이 등을 
    보이고 선 아내의 허리 옆에서 일었다. 아내는 그 위에 다른 
    손에 든 마그네틱 테이프를  얹었다. 한순간 붉은 불길이 아
    내의 어깨 위로 올랐다.

     그러는 동안 그가 본 것은 돌아서 있는 아내의 등뿐이었다.

     나는 당신의 등만 바라보고 사는 여자에요.

     언젠가 아내가 말했다.

     그때 그말을 할 때 아내의 기분은 어떤 것이었을까.

     "여보....."

     "아무 말도  하지 말아요,아직은. 이  당신이  한 말은 이 
    세상 어디에도  남아있지 않아요. 불안해  하지도 말고요...
    .."

     아내는 여전히 등을 보이고 선 채 말했다.

     나는 당신의 등만 바라보고 사는 여자에요.....

     그는 그런 아내의 등 뒤에 숨어있는 자신의 작고 초라한 모
    습을 보았다. 그 새벽.....

     대체 이 험난한 세상에 내  소설이 할 수 있는,그리고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인가......

     이득지는 쓰러지듯 방바닥에 주저앉았다.

    잠시 후 그의 어깨 위에 조용히 아내의 손길이 와 닿았다.

     "내 ,내가...... 당신 곁에 있을 거에요." 



 소 제 목 : 오래도록 서로 몸을 안고
     두 사람은 오래도록 그렇게 서로의 몸을 안고 있었다. 창밖
    엔 조금씩 아침이 다가서고 있었다.

     "T가 다시 전화를 걸어올까?"

     낮은 소리로 그가 물었다.

     "당신 생각엔요?"

     "모르겠어."

     그는 무겁게 고개를 흔들었다.

     "당신은 그가 다시 전화를 해주길 바라는군요."

     아내가 자리에서 일어서며 말했다.

     "그래,그런 건지도 모르지. 왠지  그에게 나는 내 이야기를 
    다하지 못했다는  생각이 들어. 그렇게 끝날  말이 아니었는
    데......"

     "알아요,내가."

     정말 그렇게 끝날 수는 없는 일이었다. 다시 그에게 전화가 
    온다면 무슨 말을 하게 될지는 모르지만 정말 그렇게 끝나서
    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가 과연 다시 전화를 걸어올 수 있을까.

     이득지는 스스로에게 묻고 스스로에게 아니라고 말했다. 단
    지 하나 그의 마음 속에 어떤 후회처럼 남는 미련은 그때 마
    지막 전화에서 당신의 목소리를  녹음했다는 말을 하지 못했
    다는 점이었다. 다른 말보다 그 말을 했어야 했다. 그가 <피
    셔킹>을 보라고 했을 때, 그  전에 그 영화를 봤다면 틀림없
    이 녹음 이야기를 했을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만 했다면 그는 나가고 싶어도 나가지 못했을 
    것이다. 아니,나갔어도 다른  방법으로 나갔을 것이다. 최소
    한 나의 소설 식은 아니었을 것이다.

     T는 이제 그에게 전화를 하고  싶어도 하지 하지 못할 것이
    다. 내가 이렇게 기다리고 있어도. 이제 그의 목소리에 다시 
    녹음을 걸지 않는다 해도.

     그는 누구인가

     아니,당신은 누구인가.

     내게 이렇게 큰 짐을 지워놓고 압구정동으로 나간 미스터 T 
    당신은......

     "당신,오늘은 무얼 할 거에요?"

     다시 가스레인지 쪽으로 가 거기의 뒷설거지를 하던 아내가 
    물었다. 뒤돌아선  채로 묻는 말이지만 어딘지  모르게 힘이 
    들어가 있는 목소리였다. 여자가  어머니일 때만 강한 게 아
    니었다. 한 남자의 여자일 때 <안에 은주> 역시 어둠을 밀어
    내고 진군하는 새벽처럼 강해지고 있었다.

     "모르겠어. 어떻게 해야 될지....."

     "사무실은요?"

     "나가고 싶지 않아......"

     "쓰던 원고들은 다 넘겼어요?"

     "아니. 그럴 정신도 아니었으니까." 

     "이젠 그러지 말아요. 집안  걱정은 하지 말고 사무실로 나
    가 청탁도 받고 원고도 쓰고요. 여기는 내가 있으니까. 그리
    고 밀린 원고들 끝내놓고 우리 지난번처럼 함께 어디로 갔다
    와요. 훈이도 데리고."

     아내는 가스렌인지 위에 얹은 철망을 빼어 싱크대의 개수대
    에 담그었다.

     "이제 우린 그 사람으로부터 아무런 전화도 받지 않았어요. 
    그러니 당신도 어디 가서 아무 말을 하지 말구요."

     그렇게 해서라도 집안에 남아 있는  T의 흔적을 지울 수 있
    다면 그도 기꺼이 아내와 함께 그 흔적을 지울 것이다. 그러
    나 지우면 지울수록 이제 그의  존재는 이 집안에 더욱 뚜렷
    하게 남을 것이다. 아내는  몰라도 그는 알고 있었다. 아니,
    어쩌면 아내도 알면서 한 남자의 아내로서 노력하고 있는 것
    인지 몰랐다.

     "그러다 언젠가 그가 내 책을  읽고 테러를 나갔다는 걸 알
    게 되면 되면......"

     "그래도 지금보다는 나아요."

     아내의 목소리는 분명했다. 그는 작은 어깨를 가진,그러나 
    결코 약하지 않은 한 여자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그래도 전화하라,미스터 T. 다시   번......

                
 소 제 목 : 압구정동으로 나가기까지 미스터 T는..
     그 시간 미스터 T 역시 밤새  잠을 이루지 못한 채 여명 속
    에 새벽을 맞이하고 있었다. 그는 자신이 그저께 밤 무슨 일
    을 했는지 알고  있었다. 알면서 그는 한  노파의 목을 졸랐
    다.

     소설 속의 테러리스트는,그 얼굴 없는 테러리스트는 차갑고
    도 따뜻한 면을 동시에 가지고 있었다. 소설 속의 그는 성도
    착증에 걸린 노인의 목을 조르며 그래도 따뜻한 말 한마디하
    는 걸 잊지 않았다.

     "어느 댁 노인인지는 모르지만 그냥 이렇게 가세요,할머니. 
    살아도  이제  얼마 남지  않은  날  더 욕되게  하지  마시
    고......"

     그러나 그는 그런 말 한마디 하지 못했다.

     압구정동에 나갔다가 들어온 날부터 이틀 째 그는 꼼짝없이 
    방에만 틀어박혀 있었다. 첫  범행 대상을 노인으로 잡은 것
    도,날짜를 금요일로 한 것도  가능한 소설 속의 테러를 그대
    로 옮기겠다는 생각에서였다.  메시지는 이미 소설로 이득지
    가 전달했고,그는 그 메시지가 다시 한 번 가장 크게 울리게 
    할 방법으로 소설 속의 테러를 생각했던 것이었다. T자 메시
    지 역시 그래서 준비했다.  

     그때 이득 熾痼 통화를 끝내고도 그에 대해서 나쁜 감정을 
    가지고 있지 않은 것도  그래서였다. 전화를 걸었을 때 정말 
    이득지의 반응은 뜻밖이었다.  그러나 그가 진정으로 자신을 
    그곳으로 나가라고  말했던 게 아니라는 걸  그는 알고 있었
    다. 그는 단지 이득지의 생각을 알고 싶었던 것뿐이었다.

     처음 책을  읽고,그 <프라이드와 그랜저>의  기사를 읽었을 
    때 순간 머릿속에 떠오른 생각이 그것이었다. 그곳엔 비상구
    가 없다. 이득지가 그 소설을 썼을 때보다 더 나빠졌으면 나
    빠졌지 나아진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그는 그것이 화가 났
    고 그 소설에서 어떤 힌트처럼 테러를 떠올렸던 것이었다.

     어쩌면 세번에  걸쳐 한 이득지와의 통화는  자신의 결의를 
    더욱 그쪽으로 다져나가기  위해서였던 것인지도 모른다. 처
    음 그가 예상했던 이득지의 대답은 그래서는 안 된다는 쪽이
    었다. 그러면 자신은 더욱 강경하게 그쪽으로 나가겠다고 말
    할 참이었다. 그런 식으로 자신의 결의를 다질 생각이었다.

     그런데 이득지는 그런 자신이 마음을 알기라도 하듯 시작부
    터 예상과는  어긋나는 대답을 했었다. 자신을  화나게 하는 
    대답이긴 했지만  한편으로는 기운빠지게  하는 대답이었다. 
    그것도 진심으로 그렇게 대답한 것이 아니라 거친 말투로 그
    런 세상에 대해 <<압구정동...>>을 쓴 소설가로서 자신이 할 
    수 있는  비판의 한계를 이미 절감하고  있다는 의미가 강한 
    대답이었다.

     "내 소설이 아니라 그 무엇으로도  바로 잡고 통제할 수 없
    는......"

     "돈만 오가면 폭행이 은전으로  바뀌고 억울함이 은혜로 바
    뀌는 시대에 우리는 살고 있는 것....."

     "그것이 바로 자본의 힘이고 압구정동이 힘이오....."

     그래서 자신도 그를 화나게 했던 것인지 모른다. 세상이 우
    리를 화나게 하므로 피차  우리는 시작부터 상대방을 화나게 
    했던 것인지 모른다.

     그에게 <피셔킹>을  보라고 한 것도 마지막  통보가 아니라 
    스스로 다지는 마지막 결의처럼 했던 말이었다. 그러나 그는 
    끝까지 나가서는 안 된다는 말을 하지 않았다.

     지금도 그는 그때 자신이  만약 그런 일이 발생한다면 작품
    에 대해 책임을 지듯 그런  일에 대해서도 작가로서 같은 책
    임을 져야 하는 게  아니냐고 했을 때,거칠게 맞받아치던 이
    득지의 목소리를 방금 전의 일처럼 기억하고 있다.

     "좋아요. 여러 소리할  것 없이 어떤 책임이든  내가 다 질 
    테니,미스터 T 당신은 이 전화를 끊는 즉시 압구정동으로 테
    러를 나가시오."

     어제 석간에 난 기사를  보았다면 이득지 역시 자신처럼 잠
    을 이루지 못할 것이었다. 그러나 이미 자신은 강을 건넜고,
    사건의 주사위 역시 그렇게  던져지고 말았다. 먼저 쓴 소설
    에서 이득지가 한 표현대로라면 이 땅의 사람들이 가장 건너
    기 힘들고 먼  강을. 아무  빨리 다가가도  하루 30cm 이상 
    다가갈 수 없는 그 욕망의 강 저편 엘도라도를......

                   
 소 제 목 : 압구정동으로 가서 미스터 T는
     이득지와 통화를 하고 20일이나  시간을 기다린 건 첫 테러
    의 준비도 준비지만 이득지의 전화가 자동 응답 장치가 부착
    된 전화기였던 때문이었다.

     그가 설악산에 가 있는 동안  여덟 번의 통화 시도 끝에 거
    기에 자신의 목소리를 입력했다는  점이 오래도록 마음에 걸
    렸다. 그가  그것을 지울 충분한 시간이  필요하다고 생각했
    다. 자신의 목소리 위에 또다른 사람의 목소리가 여러 번 얹
    어질 시간적인 여유가.

     그밖에 그때  자신이 목소리를 입력했던 것  말고는 통화중 
    이득지가  蹊 녹음을 걸었을 거라곤 생각하지 않았다. 녹음
    을 걸 사람이면 그런  식으로는 전화를 받지 않을 것이었다. 
    나가라고 말하는  사람은 녹음을 걸지 않는다.  그가 녹음을 
    걸었다면 그것은 자신이 무슨 말을 하든 나가지 말라고 했을 
    때일 것이었다.  처음부터 이득지는 거칠게  전화를 받았다. 
    아니,그것이 진심이 아닌 줄은 알지만 이득지는 오히려 지금
    이라도 당장  나가라고 말했다. 어떤 경우에나  녹음을 걸면 
    말부터 조심스러워질 것이었다.

     또 만약 그가 행여 모를 뒤의 일을 생각해 녹음을 걸었다면 
    세 번의 직접 통화 중 언젠가  한 번은 안전 장치처럼 그 말
    을 했을 것이다.  설사 녹음을 걸지 않았다  해도 한 번쯤은 
    그렇게 말할 수도 있는  것이었다. 나는 당신의 목소리를 녹
    음해 두었다. 어디 한 번 나갈 테면 나가 봐라,하는 식으로. 
    처음부터 그는  이쪽의 전화를 평소보다 더  거친 항의 전화 
    정도로 여겼다는 얘기였다. 그의 입으로 전에도 그런 전화를 
    많이 받았다고 했다.

     그리고 자신이 첫 테러 대상으로  그 노인을 선택한 건 <소
    설에 나오는 것과 같이>를  떠올렸을 때 처음 떠오른 대상이 
    그 노인이었기 때문이었다. 꼭 이번 테러가 아니더라도 전에
    도 언젠가 한 번 그 노인에 대해 알고 싶었던 적이 있었다.

     한 달에 한 번씩 가리봉동  벌집으로 오던 노인. 그곳 벌집
    에서 자취를 할 때 사람들은 그 노인을 <집주인>이라고 부르
    지 않고 <달거리 할머니>라고  불렀다. 매달 그렇게 한 번씩 
    얼굴을 잊을 만하면 와서 집세를 챙겨갔으므로.

     남편이 없다는 얘기도 전에 들었으며,그렇게 받은 보증금과 
    월세로 고리의 사채를 놓고  있다는 얘기도 전에 들 駭. 아
    들 하나가 미국으로 건너갔다는 얘기도 전에 들었고,남은 아
    들 하나가 망나니라는 얘기도  전에 들어 익히 알던 터였다. 
    단지 그는 며칠 사이 소문만 확인하였을 뿐이었다.

     전에도 그 달거리 노인이 그를 화나게 했던 것은 그 노인이 
    그렇게 매달 악착같이 빠지지 않고 받아가는 돈을 그 아들은 
    물쓰듯 쓰며,노인 또한 물쓰듯 쓰게 준다는 것이었다. 내 돈 
    내가 쓰는데 누가 뭐래,하면 할  말이 없을 것 같지만 또 그
    렇지도 않았다.

     자신은 부근 공단에 다니지 않지만,받은 집세라 하여 그 돈
    은 그렇게 막 써서는 안  될 돈이었다. 그 돈은 거기 벌집에 
    세들어 사는  공단 아이들이 노동을 팔고  받은 돈의 일부였
    다. 그 돈을 벌기  위해 프레스에 엄지손가락이 잘리는,보다 
    나이 어린 남자 시다 아이가 있고, 재봉틀 바늘에 찔려 손톱
    이 문드러진 여자 시다 아이가 있다.

     그런 손을 감추기 위해  여름에도 길에선 주머니에 손을 넣
    고 다니는 아이가 있고, 그런 손톱을 감추기 위해 다른 화장
    은 안 하면서도 유독 손톱에만 짙은 매니큐어를 바르는 아이
    가 있다. 그런 아이들을  사람들은 배운 것 없이 껄렁댄다고 
    하고,노동에 찌든  손을 감추기 위해 바른  매니큐어를 보고 
    너는 그런 애,하는 식으로  천박하다고 말한다. 거대한 공룡
    들의 배를 채워주기 위해 그들은 저임에도 꿈쩍없이 일하고,
    또 다른 공룡의 유흥비를 마련해 주기 위해 매달 <달거리>로 
    집세를 낸다.

     정말 함부로 써서는 안 될  돈을 고름 짜듯 받아 그들은 그
    렇게 썼다. 그러면서 내 돈 내가 쓰고,내 돈 내 아들에게 주
    는데 누가 뭐랄 거냐고 말한다.아니,보다 큰소리로 주장하듯 
    말한다. 내가 도둑질을 해서  내 아들에게 주며,내 어머니가 
    도둑질을 해서 내게 주는 거냐고. 그들은 자신들이 저지르는 
    그런 죄악을 너무도  당연한 권리로,누구에게나 인정받고 누
    구나 인정해 줘야 할 자신들의 특권으로 여겨왔다.

     노동하지 않을 특권,남을  생각하지 않을 특권,남의 노동을 
    비웃을 특권,스스로의 노동을 비참하게 여기게 할 특권,그것
    을 자식에게 당연한 권리로서 가르치고 세습시킬 특권,이 세
    상에 그보다 더 큰 죄악이 또 어디 있겠는가.

     그는 첫 범행 대상을 잘못 선정하지 않 年鳴 생각했다.

     그래서 소설 속의  테러리스트처럼 노인의 목을 조르면서도 
    끝내 연민의 말 한마디하지 못했던 것인지도 모른다.


 소 제 목 : 터무니없으면서도 절실한 성욕이
     압구정동으로 나갈 때 그는 자신의 머리를 짧께 깎았다. 행
    여 머리카락 하나 노인의 손 안에 남겨서는 알 될 일이었다. 

    그 위에 털실 모자를  눌러썼고,마스크를 하고 테 굵은 안경
    을 썼다. 상의 역시 앞뒤로 뒤집어 입을 수 있는 가죽점버를 
    입고,목까지 지퍼를  올리고 깃을 세웠다.  손에는 오래도록 
    내 살처럼 익은 양피장갑을 꼈다. 아래 바지 역시 노인이 반
    항할 때 쉽게 잡을 수 없는 조금은 끼는 청바지를 입었다.

     전화는 이득지에게 걸 때처럼  아파트 입구 바로 옆 공중전
    화에서 했다.

     "안녕하세요.형동이 어머니시죠? 밤늦게  전화를 해서 죄송
    합니다. 형동이가 지금 술집에서  사고를 쳐 붙잡혀 있어 전
    화를 했습니다. 다른 자리  사람과 싸우다 기물을 부수고 해 
    지금 그곳에 붙잡혀 있습니다.열두 시에 문을 닫는데 그때까
    지 물건 값으로 백만원을 안 가져오면 경찰에 넘긴다고 해서 
    제가 지금 아파트 앞에 와 전화를 거는 겁니다. 형동이가 빨
    리 어머니한테 가서 돈을 달래 오라고 해서요."

     그러자 노인은 금방 밖으로 나왔다. 그곳에서 돈을 받지 않
    고,공터까지 끌고 나온 건  멀지 않은 곳 술집인데 보호자의 
    보증이 있어야 한다는 거짓말을 해서였다.

     일을 치룬 후 그는 두  정거장 거리를 뛰어 자리를 옮긴 다
    음 택시를 탔다. 빈 택시의 앞좌석에 앉은 것도 기사가 룸밀
    러로 살피는 뒷좌석보다 그곳이 편하기 때문이었다. 혹시 누
    군가 봤을지 모를 모자와 장갑,마스크를 벗어 점버 주머니에 
    넣고 점버 역시 검은색  쪽에서 귤색 쪽으로 뒤집어 입었다. 
    그리고 잔뜩 깃을 세운 채 고개를 창밖 쪽으로 틀었다. 조금
    은 술이 취한 척 가장을 하며. 

     그때 택시에서 내린 다음 그는 엄습하는 불안 속에 한 가지 
    자신의 마음 속에 이는 이상한 갈등이거나 묘한 감정의 변화 
    같은 것을 경험했다. 아니,이해했다는 표현이 옳을 것이다.

     집 근처에 와 택시에서 내린 다음 왠지 집으로는 걸음이 떨
    어지지 않는 것이었다. 들어가면 그곳에 누군가 자기보다 먼
    저 와 기다리고 있는 사람이  있을 것 같은 불안감도 그랬지
    만,많은 범죄자들이 범행을 저지른 후 안전한 장소라고 숨어
    드는 곳이 왜 공통적으로 정부(情婦)의 집이거나 사창가인가 
    하는 점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몸이 요구하지 않는 또  다른 형태의 성욕이 끈질지게 그를 
    지배해 왔다. 억지로라도 그 성욕을 키우고 해결하지 않고는 
    마음 속에 밀려드는 불안들이 다스려질 것 같지가 않았다.

     그건 이제까지 느껴보지  못한 터무니없으면서도 절실한 감
    정으로서의 성욕이었다. 왠지 그 성욕만이 조금 전에 저지른 
    자신의 범행에  대한 공포와도 같은 불안들을  다스려 줄 것 
    같은 생각으로 그는 오래도록 거리를 배회했다.

     치루어도 쾌감없는 섹스가 될 게 뻔한,그러면서도 스스로가 
    스스로에 대한 집요하고도 절실한  요구처럼 밀려드는 이 불
    안하고도 건조한 욕망은 신체의  안전보다 마음의 안전에 기
    울어져 있었다. 많은 범죄자들이  범죄 후 그곳이 결코 안전
    한 곳이 아니라는 것을 알면서도 우선은 불안한 마음을 달래
    기 위해  앞뒤 가림없이 사창가를 찾고  또 그곳에서 여자를 
    사는 것이.

     그는 불안  속에서도 그런 자신의 마음이  여간 당혹스럽고 
    혐오스러운 게 아니었다.  그러자고 오래도록 계획한 일처럼 
    압구정동으로 나갔던 게 아니잖는가. 아무리  勞훌巒,또 설
    사 그것으로 마음 깊숙이  터진 샘물처럼 솟아오르는 불안감
    을 달랠 수 있다 해도 자신은 그래서는 안 될 것이었다.

     거리를 배회하며 그는 또  자신이 그곳에 나가 일을 저지른 
    것이 전적으로 이득지에게 책임이 있기라도 한 듯 그에게 전
    화를 걸어 모든 것을 이야기하고  싶은 충동 같은 것을 느꼈
    다. 그러나 그런 감정 또한 자신이 저지른 일에 대한 책임의 
    전가나 반분의 요구가 아니라 그만큼  그 자신이 그 일로 불
    안해하고 있다는 뜻이기도 했다.

     그가 집으로 들어온  것은 새벽 두 시가  조금 넘은 시간었
    고,그때부터 그는 이틀 동안 방안에만 꼼짝없이 틀어박혀 있
    었다.

     이득지 선생,이제 우리는 시작입니다......


 
 소 제 목 : 3월이 되어도 범인의 행방은 여전히
     지난 1월 21일 밤에 발생한  아파트 앞 노인 살해 사건은 2
    월이 지나고 3월이 되어도 무엇 하나 드러난 것이 없었다.

     현장에서 발견된 물증은 어느  곳에도 지문 하나 묻어 있지 
    않은 T자 메모지뿐이었다. 단지 그걸 입에 물고 있던 노인의 
    타액만 검출되었을 뿐이었다.

     아주 쉽게 해결 될  일은 아니라고 여겼지만,그래도 경찰은 
    그렇게 오래 끌 사건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가족들의 면담
    을 끝낸 다음 경찰은 노인의  주변 인물로 일단 수사 대상을 
    좁혔다.

     그리고 그 중 가장 혐의를  두었던 게 노인의 작은 아들 김
    형동이었다. 다시 만난 피살자의 딸들로부터 경찰은 그간 김
    형동이 무언가 자기 사업을 하고 싶다며 어머니에게 여러 번 
    행패까지 부렸다는 얘기를 들었다. 그전부터 그는 인도어 골
    프장을 하고 싶다고 했다는 것이었다. 스스로 그것을 차려서 
    하기보다는 이미 시설되어 있는  것을 임대하여 하겠다는 것
    이 그의 뜻이었다.

     거기에 대해 노인도 아들을 신뢰하지 않았고,누이들도 같은 
    뜻으로 말렸다고 했다. 그 과정에서 김형동은 어머니의 편을 
    든 매형을  찾아와 집안 기물을 부수며  폭행까지 했다고 했
    다. 그런다고 그  돈이 한 푼이라도 당신에게  갈 줄 아느냐
    고.


     그러나 김형동의 알리바이는 완벽했고,몇몇 그의 주변을 조
    사했지만 그것 역시 별  소득이 없었다. 그리고 그건 딸들의 
    주변도 마찬가지였다. 경찰은  노인의 장부를 바탕으로 그간 
    노인과 돈  거래를 했던 사람들의 뒤를  추적하기 시작했다. 
    범인이 나 여기 있소,하고  올 것도 아니고 현재로서는 그것
    말고 다른 대안이 없었다.  또 그렇게 애를 써 수소문했음에
    도 목 鳧憫뗏 나타나지 않는 것도 그랬다.

     "이거야말로 맥빠지는 숨박꼭질이군. 찾을 사람이 누군지도 
    모르고 찾는......"

     석경감의 말은 모든 수사를  원점에서 다시 해야 한다는 뜻
    이었다. 그간 가족들을 면담하며 알아낸 일만 가지고는 도대
    체 사건 핵심으로 접근이  안 되는 것이었다. 누이들의 말을 
    듣고 김형동의 뒤를 캐면 뭔가 가닥이 잡힐 듯싶다가도 아니
    었고,김형동의 말을 듣고 큰 누이와 그 남편의 뒤를 캐면 이
    것 역시 마지막에 가선 아무  것도 아닌 것에 부딪치고 말았
    다.

     그리고 그 동안 수사를 하며  들은 건 노인의 장례 후 미국
    에서까지 온 아들과 합쳐 네  자식이 노인의 유산을 놓고 서
    로의 몫을 다툰다는 이야기였다. 그 중 큰 딸은 변호사를 선
    임해 소송 준비를 한다는 말까지 들렸다. 

     그러다 나중엔 노인의 네 자식 모두 경찰에 대해 범인을 못 
    잡아도 좋으니 제발 자기들을 더  이상 귀찮게 하지 말아 달
    라는 식으로 나왔다.

     "하기야 범인을 잡는다고 해서  이제와 자신들의 몫의 유산
    이 늘어날 것도 아니니까. 지금 그 사람들에게 중요한 건 바
    로 돈이고 말이지."

     "이래저래 맥빠지는 거죠. 사건 발생한 지 40일이 넘는데도 
    아직 단서조차 잡히지 않는 것도 그렇고,가족들한테 그런 얘
    기를 듣는 것도 그렇고......"

     "문제는 피살자 입에서 나온 T자 메몬데, 그게 무슨 뜻인지 
    감을 잡을 수 없으니......남 형사는  뭐 감이 잡히는 거 없
    어?"

     "저도 그게 무슨 뜻인지는 감이 잡히지 않는데......범인이 
    피살자의 주변 사람이 아니라 전혀 엉뚱한 사람이 아닐까 하
    는 생각이 들 때는 있습니다."

     "엉뚱한 사람이라니?"                                                                                                                                                                                                                                                                                                                                                                                                                                                                                                     
    하는 점과 또 왜 그것을 입에  넣었느냐 하는 점이 신경쓰여서 하는 
    얘깁니다."

     "그럼 입에 안 넣으면  어디에 넣어? 피살자 주머니에 넣으
    면 그게 범인이 남긴 건지 피살자가 가지고 있던 건지 알 수 
    없잖아. 범인은 단순히 피살자를 죽이는 것으로만 끝나는 것
    이 아니라 누구에겐가 그걸 보여 주고 싶어한다는 뜻이고."

     "그렇긴 하죠. 그런데 개인적으로 어떤 원한 때문에 그랬다
    면 굳이 그런 메모를 남길  필요도 없이 살해만 하면 끝나는
    다는 거죠. 그런데 제  말씀은 범인이 그런  貧彫嗤 피살자 
    입에 남기는 것이 어떤 경우인가 하는 겁니다."

     "어떤 경우라니?"

     석경감의 누에 눈썹이 다시 이마 위로 꿈틀거렸다. 

 

 소 제 목 : 어이없이 두번째의 사건이 터지고
     "이건 실제 있었던 사건이 아니라 소설과 영화에서 본 건데 
    전에 <양들의 침묵> 이라는 영화 속에 범인이 피살자의 입에 
    어떤 나방의 번데기를 넣는 걸 봤습니다."
     "이봐,남 형사. 이건 소설과 영화가 아니라 현실이야. 바로 
    당신하고 내가 해결해야 할 사건이라고."

     "알죠,그거야......"

     "그럼 아는 사람이 그런 소리를 해?"

     뭔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얼굴을 할 때 석 경감의 눈썹은 
    잠이 든 누에처럼 이마 한가운데 일직선을 그었다.
     "그리고 화성 연쇄 살인 사건 때는 범인이 피살자의 국소에 
    복숭아 살점을 넣었습니다. 그건 범인이 변태니까 그렇다 하
    더라도 피살자의 몸에 어떤 흔적을 남긴다는 건 단순히 살인 
    이상의 의미가 있는 게 아닌가 싶어서요. 그 살인을 통해 자
    신의 무엇을 드러내고 싶어하는......"

     "그래,그게 뭐냐구?"

     "모르죠,아직...... 그러니까 이러고 있는 거구요."

     "쓸데없는 소리말고 지금까지 그  노인하고 돈 거래를 했던 
    사람들 명단 다시 한  번 뽑아봐. 노인은 범인한테서 전화를 
    받고 지갑과 주머니에 돈을  나누어 넣고 나갔어. 그럼 문제
    는 이게 돈과 관계된  사건이다 이거야. 아직 의미가 뭔지도 
    모르는 T자 메모보다 죽은 노인을 그런 식으로 불러낼 낼 사
    람이 누군지 하나하나 줄여나가  보라구. 그 아들 주변도 계
    속 살펴보고....."

     그러나,석경감은 단언하듯 그렇게 말했지만,그날 밤 압구정
    동에선 문제의 T자 메모지와 관련한 두번째의 사건이 발생했
    다.

     첫 사건 때와 마찬가지로  이번에도 석 경감은 집에서 사건 
    보고를 받았다. 연락한  사람 역시 첫 사건  때 당직을 섰던 
    남 형사였다. 그는 새벽 두  시에 먼저 연락을 받고 나간 현
    장에서 무선 전화로 반장에게 사건 발생 보고를 했다.

     남 형삽니다,하는 소리에 석  경감은 직감적으로 또 사건이
    구나,하는 것을 떠올렸다.  첫마디에 무슨 일이야,하고 묻지 
    않고 어디야, 하고 물은 것도 그래서였다.

     "죄송합니다. 도산공원 뒤쪽입니다."

     짧은 두 마디를 하는데도  남 형사의 목소리는 많이 떨리고 
    있었다. 사건이라고 해서 평소 그렇게 긴장하거나 흥분할 친
    구가 아니었다.

     "T자야?"

     "예."

     "노인인가?"

     "아닙니다. 젊은 여잡니다."

     "젊은 여자?"

     "예."

     "이번에도 목을 조르고?"

     "예."

     대답과 함께 자기도 모르게  입술을 무는 남 형사의 '예'엔 
    자기도 모르게 가벼운 비읍 받침이 따랐다.

     "죽이는군."

     석경감은 끙,하는 신음을 전화기에 뱉았다.

     "죄송합니다. 댁으로 차를 보낼까요?"

     "아니야. 그럴 시간이면 내가 나가지. 기다려."

     그리고 나서 전화를 끊으려다 석 경감은 다시 남 형사를 불
    렀다.

     "예,반장님."

     "강력계 다른 형사들한테도 연락했는가?"

     "아직......"

     "그럼 연락하지. 다 나오라고."

     옷을 갈아입고 석 경감은 자동차에 올랐다. 시동을 거는 손
    에 파르르 힘이 들어가고 있음을 스스로도 느낄 수 있었다.

     천호동에서 심야의 텅 틴 올림픽대로로 나와 그는 속도계의 
    숫자를 140까지  올렸다. 그러면서 그는  현장에 도착하기도 
    전 머릿속으로 이 사건의 가닥을 어디서 어떻게 잡아야 할지
    를 생각했다. 어쩌면 바로 낮에 남 형사가 얘기한 그런 갈래
    의 사건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연쇄 살인에서 피살
    자의 입에 나방의 번데기를  물리는 것이나 T자 메모를 물리
    는 것이나......  


 소 제 목 : 진한화장에 몸매가 미끈한
     "어떻게 된 거야?"

     현장에 도착해 차에서 내린 석 경감은 남 형사를 잡고 물었
    다.

     "서(署)로 바로 신고가 들어왔습니다."

     "그 얘기 말고......"

     "그리곤 보고 드린 대롭니다.  신고는 한 시에 들어오고 피
    살자 몸에 T자 메모가 남겨져 있고......"

     "입 안에?"

     "아뇨,이번엔 입 안이 아니라 바로 여기에 이렇게 들어 있
    었습니다."

     그러면서 남 형사는 얇은  면장갑을 낀 손으로 피살자의 목
    덜미에서 가슴으로 흐르는  옷깃을 들어보였다. 가슴도,그렇
    다  목도 아닌 부분이었다.

     3월이라지만 아직 날씨가 찬  때문인지 피살자는 헐렁한 무
    스탕을 걸치고 그 아래에  검정색 짧은 치마를 입고 있었다. 
    언뜻 오른쪽 다리에 실이  터진 스타킹이 눈에 들어왔다. 진
    한 화장을 했고,얼굴은 윤곽이 반듯했다. 스물대여섯쯤 되어 
    보이는 여자였다.    

     석 경감은 찬찬히 피살자의  얼굴을 살펴보았다. 뒤에서 달
    려들어 목을 조름과 동시에  뒷머리를 앞으로 밀었는지 졸린 
    목과 턱 밑에 푸른 멍이  들어 있었다. 그리고 목이 졸린 상
    태에서 반항하느라 고개를 이리저리  흔든 흔적처럼 입술 화
    장이 입 언저리께로 번져  있었다. 그밖에 얼굴과 몸에 다른 
    큰 상처는 보이지 않았다.

     "아니,어떻게 당하면 이렇게 당할 수 있는 거야?"
     아무리 공원 뒤쪽이라고는 하지만 피살된 장소에서 불과 70
    미터 정도 떨어진  거리에 대로가 있었고,흉기를 사용했다면 
    모를까 목을 졸라  살해한다 할 때 그게 이삼  분 안에 끝날 
    일이 아니어서  범행 장소로도 마땅한 곳은  아니었다. 워낙 
    공원 뒤쪽이 으슥해 사람의 발길이 잘 닿지 않는다 하더러도 
    그래도 사람들의 통행이 아주 없는 곳이 아니었다.

     "신원은 밝혀지고?"

     "아뇨,아직....."

     "백 안에도 주민등록증이나 은행 카드 같은 거 없어?"

     "없습니다. 화장품 몇 가지하고,피임약,그리고 뭔지 모르는 
    알약이 한 병 나오고 지갑 안에 현금이 조금 나왔습니다. 14
    만 7천원인가 8천원인가...... 그리고  명함 몇 장이 나왔습
    니다."

     "그럼 뭘 하는  여잔지도 모를 거 아니야?   어디 사는지도 
    모를 거고."

     "예,아직은......"

     "엎친데 덮치는군. 죽어라 죽어라  하고..... 그런데 강 형
    사하고 김 형사는 왜 아직 안 나오는 거야?"

     그러면서 석 경감은 죽은  채로 하늘을 보고 반듯하게 누워 
    있는 젊은 여자의 사체를 다시 훑어보듯 내려다보았다.

     여자 키치고는 큰 편이었다. 누워  있어 더 크게 보이는 건
    지는 모르겠지만 어림 짐작에도  170cm 가까이 될 듯싶었다. 
    그리고 짧은 치마 아래로 드러난 다리가 무슨 운동이나 체조
    로 다졌는지 무척이나 미끈해 보였다.

     "신발은 일부러 벗겨낸 거야?"

     석 경감은  아무리 사체이긴 하지만 아직  겨울과  摸㎨愎 
    날씨에 맨발로 누워 있는 여자의 발을 조금은 안쓰러운 눈으
    로 바라보았다.

     "아닙니다. 반항하느라 그랬는지  발견 당시 벗겨져 있었습
    니다."

     "유류품 잘 챙기고,가죽 옷이니 살해하기 전 붙잡느라고 혹
    시 지문 같은 것 남겼을지 모르니 위에 옷도 벗겨내 따로 보
    관하고."

     "알겠습니다."

     가죽옷 속엔 몸에 착 달라붙는  검은 색의 얇은 T셔츠 하나
    만 걸치고 있었다. 그리고 그 안에 따로 브래지어를 하지 않
    았는지 양쪽 가슴 부위의 봉긋한 정점에 유두의 위치가 옷에 
    눌린 가운데서도 조금은 위로  더 솟아오르듯 뚜렷하게 도드
    라져 보였다.

     "참,하체는 살펴봤나?"

     그러나 죽은 여자의 윤곽  뚜렷한 가슴을 바라보다 하체 검
    사를 떠올린 건 아니었다. 바로  낮에 남 형사가 한 말 때문
    이었다. 여러 해 전 화성 사건에서 보듯 부녀자를 상대로 한 
    연쇄 살인의 경우 범인이  피살자의 국소를 난행하거나 아니
    면 거기에 돌이라는가 복숭아 살점과 같은 이물질을 넣는 경
    우가 종종 있었기 때문이었다.

     "아직...... 속옷 안은 확인 안하고 치마  들어 속옷 위만 
    얼핏 살펴봤습니다."

     "이 사람아 그럼  마저 확인을 해야지. 뭐  별다른 거 없었
    어?"

     "예. 흰색인데  목이 졸리며 소변을 흘려서인지  젖어 있는 
    것말고는 속옷도 깨끗하고,또 벗겼다  입힌 것 같지 않게 착
    용 상태도 반듯하고 해서......"



 소 제 목 : 여자의 속옷확인을 끝낸다음
     석 경감은  당연한 순서처럼 물었지만 대답하는  남 형사는 
    그것이 의당 해야 할 일인 줄 알면서도 아직 속옷 안 까지는 
    살피지 않고 있었다. 아무리 직업이 형사이고 피살자의 사체
    를 조사하는 일이라고는 하지만 아직 결혼 전의 총각이 익숙
    하게 나서서 처리할 일은 아니었다.

     "그럼 나머지는 조금 있다가 김  형사나 강 형사 오거든 같
    이 하지. 우선 주변 정황부터 조사하고......"

     돌아서서 석  경감은 손바닥으로 바람을 막은  채 담뱃불을 
    붙였다.

     "아 참,메모 나왔다는 거 줘 보지."

     남 형사는 따로 수거해 놓았던 메모지를 석 경감 앞으로 가
    져갔다. 첫 눈에 지난번 것과 같은 메모지였다. 푸른색의 가
    는 매직 펜으로 쓴 T자도  그랬고,그것을 쓴 종이도 어떤 책 
    한 귀퉁이를 찢어낸 것이었다.

     그동안 지난번 메모지를 늘 들여다봐서인지 거기에 씌여 있
    는 활자들도 그 책의 것과 같은 것임을 알 수 있었다. 석 경
    감은 거기 적힌 메모지의 글자들을 하나하나 읽어나갔다.

    을 파고들고 가슴으로 들어왔다.정신을 차렸을
    입김이 목덜미에 퍼부어지고 있었다.그 石 꼼
    의 가슴에 얼굴을 묻었다.울지 마,울지 말라
    두손이 가슴 앞으로 와 유니폼 가운의 단추를
    지 못했다.오히려 일을 치르고 나서도 화를 내

     이어 석 경감은 메모지의 뒤쪽을 펼쳤다.

    고 그것으로 침대를 어지럽혔다는 것이 왠지 부
    모든 것이 끝나버린 다음엔 차라이 홀가분한 기
    일이 꼬여 계약이 안 됐을 때보다 한결 나은 일
    알게 모르게 언제가는 이런 일이 있을 거라고
    왔던 일이 아니던가.

     "자네도 여기 안에 적혀 있는 글 봤어?"

     석 경감은 남 형사에게 물었다.

     "아뇨,아직 내용까지는...... 뭐 이상한 게 있습니까?"
     반장이 부르자 다시 피살자의 몸을 멀찍이 돌아 석 경감 앞
    으로 온 남 형사가 대답했다.

     "이걸 잘 봐. 여기 글씨들 말이야. 지난 번 것과 같은 책을 
    오려냈다는 생각 들지 않아?"

     "그러고 보니 정말 그런데요."

     "지난 번 것도 그렇고,이번  것도 그렇고 뭔지 모르지만 좀 
    야한 내용 같단 말이지.  연쇄 살인이라는 것도 그렇고 메모
    지 내용도 그렇고 이거 변태 소행인 것 아니야?"

     "이따가 김 형사나 강 형사가 나오면 다시 자세히 살펴봐야
    겠습니다만 그냥 속옷 상태를 확인한 것만 가지고 봐선 아직 
    그런 징후를 보이는 것 같지는 않았습니다. 반장님 나오시기 
    전 저도 부녀자를 상대로한 연쇄  살인이라는 게  마음에 걸
    려 오자마자 그것부터 들쳐봤는데......"

     "내일부터 신문에 또 난리가 나겠구만. 지난번엔 노인이고,
    이번엔 젊은 여자고 말이지."

     김 형사와 강 형사가 나온  건 피살자가 살해될 때 흘린 소
    변으로 젖은 치마가  뻐덕뻐덕하게 얼었을 때였다.두 사람은 
    익숙한 손길로 얼음이 언 치마를 위로 걷어올리고 속옷을 끌
    어내려 여자의 국소를 확인한 다음 다시 속옷을 원래대로 올
    려놓았다. 여자의 몸  내부 깊숙이까지는 확인하지 않았지만 
    겉으로 봐선 이물질 같은 것은 없는 듯했다.

     그러고 나서 석 경감까지 포함해 네 사람은 사체를 일단 병
    원으로 보낸 다음,날이 밝을  때까지 그 주변을 이잡듯 샅샅
    히 뒤졌다. 피살자가 입은 가죽옷과 핸드백에서 지문이 나올
    지는 떠 봐야 알겠지만 현장 주변엔 지난번 때와 마찬가지로 
    이렇다 할 흔적이 나오지 않았다.

     고작 수거한 것은 피살자가 쓰러져 있는  바로 그 자리에서 
    주워
은 몇 개의 머리카락과  이 사건과 관계가 있을지 없
    을지도 모르는 담배 꽁초  두 개,길바닥에 떨어져 있던 백원
    짜리 동전 하나가 고작이었다.

     또 사체를 병원으로 보내기 전 석 경감이 직접 확인한 피살
    자의 손톱도 목이 졸리는 동안 반항한 여자의 그것답지 않게 
    깨끗했다. 거기 어디엔가 범인의 몸에 상처를 낸 흔 적 같은 
    게 있다면 더 바랄 것이 없을 것이었다.

     게임은 이제부터였다.

     석 경감은 현장에 강형사만  남기고 일단 철수  治첩 내렸
    다.  


          
 소 제 목 : 서울보통시 강남특별구 압구정동...

   서(署)로 돌아와 석  경감은 서장이 출근하는 대로  일단 사건 보고를 
  했다.그러자 서장도 첫 마디에 "시끄럽겠군.이제...."라고 말했다.

   같은 살인 사건이라도 우발적이거나  단발적으로 일어나는 열 개의 사
  건보다 연쇄적으로 발생하는 두 개의 사건이 더 더 크게 보도되고,사회
  적으로도 더 많은 문제와 관심의 대상이 되기 마련이었다.

   몇년 전 겨울에 있은 주택가 방화  사건에서 보듯 어느 공장에서 수백
  억원 대의 재산 피해를 낸 대형  화재도 뉴스가 되지만,매일 저녁 누군
  가에 의해 발생하는 피해액 십만원 미만 대의 주택가 연쇄 방화 사건도 
  그것 못지 않은  뉴스가 되는 것과 마찬가지  이치였다. 아니,사람들은 
  피해액 수백억원 대의 공장 화재보다 누구에 의해 저질러지는지도 모르
  는 주택가의 연쇄 방화를 언제 닥칠지 모를 내 일처럼 더 두려워했다.

   오래 전에 있은 이종대 문도석의 <개머리판  없는 칼빈 사건> 때도 그
  랬고,불과 몇년 전 화성에서 있은 부녀자  연쇄 살인 사건 때에도 그랬
  다. 더구나 이곳은 서울 하고도 강남의 심장과도 같은 상징인 압구정동
  이 아니던가.

   "기자들은 왔다 갔어?"

   두번째 질문에서도 서장은 범인을  쉽게 찾아낼 무슨 증거가 있더냐는 
  말보다 그 사건이 사회적 문제로 부각될 때의 일을 더 먼저 걱정했다.

   "예."

   석 경감은 짧게 대답했다.

   "석간부터 때려 조지겠구만. 경찰이 뭐하는 거냐구."

   "지금도 강력계에 기자들이 몰려와 있습니다."

   "얘기 안  해도 잘 알겠지만  그놈들한테 행여 쓸데없는  소리하지 말
  어."

   "예.알겠습니다."

   "밑에 형사들한테도 단단히 주의  주고...... 기자란 놈들은 원래부터 
  엉덩이를 봤다면 뭘 봤다고 써대는 놈들이니까."
                                                                                                                                                                                                                                                                                                                                                                                                                                                                                                                              "죄송합니다."

   그런 말에 그런 대답을 할 수밖에 없는 게 서글픈 일이기 하지만 그것 
  또한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그래,사건은 쉽게 해결될 것 같고?"

   "모르겠습니다,아직은. 자세한 건 감식 결과가 나와봐야......"
   그러자 서장은 조금은 짜증난다는 얼굴로 석 경감의 말을 잘랐다.

   "이봐,현장에 갔다온 자네가 모르면 누가 아나?"

   "그렇긴 합니다만 상당히 지능적인 놈이 저지른 사건 같아서......"

   "증거는 있고?"

   "몇 가지 있긴 합니다만,일단 감식반에 의뢰를 보내 놨습니다."

   "좌우지간 삼일 안으로  잡아. 서 전체 직원들을  동원해서라도. 알겠
  나?"

   "예. 알겠습니다."

   석 경감은 서장의 책상 앞에 선 채 부동자세로 대답했다.

   "자네도 여기가 어떤 동넨 줄 알지?"

   "예. 알고 있습니다."

   "나도 여기 살지만, 우리나라 장관 절반이 여기 강남 사람이야."

   그 와중에도 서장은 '나도 여기  살지만'하는 말을 잊지 않았다. 장관
  의 절반이 아니라 어느 누구도  어떤 경우에서나 '나도 여기 살지만'을 
  더없는 긍지로  여기는 곳,흔히 말하는 대로  <서울보통시 강남특별구> 
  하고도 압구정동이었다.

   그 특별구 압구정동에 부녀자를 상대로 한 두번째의 연쇄 살인 사건이 
  발생한 것이었다. 그것도 대담하게  대로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장소
  에서 살해 소요 시간이 5분 이상 걸리는 방법으로 목을 졸라서. 그리고 
  더욱 대담무쌍하게 피살자의  몸에 자신의 범행 흔적으로  T 자 메모를 
  남기고......

                        
 소 제 목 : 범인이 남긴 T자의 숨은뜻은
     "어떤 동넨 줄 알면 범인을 잡는 것도 잡는 거지만,크게 소
    문 안  나는 방향으로 사건 마무리지을  수 있도록 하고....
    .."

     "알겠겠습니다."

     "그럼 나가서 일 봐. 필요한 지원 있으면 직접 나한테 얘기
    하고. 또 수시로 보고 하고 말이지."

     "예."

     석 경감은 인사를 하고 서장의 책상 앞에서 물러났다.

     "알아서 해. 다음번 내 인사......"

     돌아서는 석 경감의 등에  대고 서장은 어떤 경고거나 마지
    막 확인처럼 말했다.

     "예?"

     문고리를 잡으려다 말고 석  경감은 다시 서장을 향해 돌아
    섰다.

     "물 먹고 안 먹고는 이제 석 경감 당신 손에 달린 거니까."

     "열심히 하겠습니다."

     그리고 석 경감은 서장실을  나왔다. 강력계로 돌아오자 그
    의 책상 주변에 몰려 있던  기자들이 수첩을 빼 들고 그에게 
    벌떼처럼 달려들었다.

     "피살자 신원은 어떻게 됩니까?"

     "피살자 몸에서 나왔다는 메모는 지금 어디 있습니까?"

     "T자 말고 뭐 다른 말을 쓴 것 없었습니까?"

     "먼저 발생한 노인의 죽음과는 어떤 연관이 있습니까?"

     "첫번  사건 때 이런 일이 계속 일어날 거라고 생각했는지
    요?"

     "이번이 두번짼데 그러면 앞으로도  계속 사건이 일어날 것 
    같습니까?" 

     서장은 가능한 사건을  조용히 마무리짓는 쪽으로 해결하라
    고 했지만  미처 자리에 앉기도 전  쏟아지는 질문들만 봐도 
    앞으로 이  사건이 사회적으로 얼마나 큰  문제가 될 것이며 
    또 관심의 대상이 될 것인지 충분히 짐작이 가는 일이었다.

     석 경감은 굳게 입을  다문 채 달려드는 기자들을 밀어내고 
    자리에 앉았다. 기자들이 다시 호기심을 번뜩이며  戮 책상 
    주변으로 몰려들었다. 그냥 입을 다물고 있거나 억지로 쫓아
    낸다고 해서 그냥 넘어갈 문제도,또 해결될 일도 아니었다.
     그들 중의  몇은 나와바리(담당 구역)를 돌던  새벽부터 와 
    있었고, 나머지 기자들도 뒤늦게 얘기를 듣긴 했지만 서(署)
    의 다른 직원들보다 먼저  나와 있던 사람들이었다. 또 현장
    에서 철수 할 무렵 그곳까지 쫓아왔던 사람들도 있었다. 

     "아까 잠깐 이야기한 대롭니다. 지난  1월 22일 밤 우리 서 
    관내 압구정동 아파트 단지  앞 공터에서 첫 사건이 있었고,
    어젯밤,아직은 어젯밤인지  자정이 지나서인지는  확실히 알 
    수 없지만,어젯밤이라고  한다면 3월 4일 밤  도산공원 뒤쪽 
    후미진 곳에서 두번째의 사건이 발생한 것입니다. 이제 됐습
    니까?"

     석 경감은 두  손을 가지런히 책상 위에  올려놓은 채 표정 
    없는 얼굴로 단어와 단어 사이를 딱딱 끊어 말하듯 기자들에
    게 말했다.

     "그건 우리도 아는 거고 뭐 좀 새로운 걸 얘기해 주세요."
     첫 사건 때에도 왔던 얼굴이 익은 조간 신문 기자였다.

     "아직은 저도  이것 이상은 이야기할 수가  없 윱求. 사건 
    현장에서 수거한  유류품 몇 가지가 있긴  하지만 지금 감식 
    중이라 증거가 될지 안  될지도 모르는 상탭니다. 오후 늦게
    나 돼야 결과가 나오지....."

     "범인이 남겼다는 메모지에 T자  말고 다른 메시지 같은 건 
    없었습니까?"

     "없었습니다."

     석 경감은 노련한 얼굴로 짧게 대답했다.

     "T자가 무슨 뜻인지는 알고 계십니까?"

     "아직은 모릅니다. 그것만 알아도 사건 해결이 한결 쉽겠지
    만,그건 범인이 붙잡혀야 알 수 있는 일 아니겠습니까?"

     "그럼 어떤 추측이라든가,아니면  무엇 같다 하는 정도로라
    도 짐작하고 계시는 게 있는지요."

     "지금은 없습니다."

     "그렇게 감추려고만 하지 말고 말씀 좀 해 주십시오."

     "감추는 게 아닙니다. 수사는 지금 기자분들이 물으신 대로 
    어떤 추측이나 짐작 가지고  하는 게 아닙니다. 드러난 증거
    를 바탕으로 과학적 분석을 해 나가는 것이지."

     "그래도 경찰 입장에서 무슨  뜻 같다,하는 건 있지 않겠습
    니까?"

     "없습니다,아직은. 사체 감식과 유류품 감식도 아직 끝나지 
    않은 상태고 해서 사실 더 말씀드릴 것도 없구요."  

     "잠깐만요."

     지난번 노파 살인 사건 때 사회면 1단으로라도 처음 그것을 
    신문에 보도한 석간 신문  기자였다. 석 경감과 눈이 마주치
    자 그 키작은 기자는 볼편을  든 손으로 자신의 안경을 밀어
    올리며 눈빛을 반짝였다.



 소 제 목 : 성폭행 흔적은요?
     "제가 보기엔 지금 반장님이 하신  말에 문제가 좀 있는 것 
    같습니다."

     "문제라니요?"

     석 경감은 침착한 얼굴로 그 기자를 눌러보았다.

     "첫 사건이 1월 22일에 발생했고,그때에도 문제의 메모지가 
    나왔는데 아직도 모르신다면  사건도 사건이지만 경찰한테도 
    문제가 있는 것 아닙니까?"

     그러자 다른 기자들도 금방 그래,맞아,하는 얼굴들을 했다. 
    석 경감은 그런 기자들의 표정을 놓지지 않았다. 

     그건 중요한  문제였다. 어떻게 대답하느냐에  따라 경찰이 
    문제 있는  痼막 비쳐질  수도 있고,반대로 전혀 그렇지 않
    을 수도 있었다. 이미  기자들은 한 동료 기자의 질문만으로
    도 충분히  경찰에게 문제가 있다는 얼굴들을  하고 있었다. 
    그건 짧은 시간 동안 안에도  어떤 말들이 오고 가느냐에 따
    라 수시로 바뀔 수 있는 분위기의 문제였다. 그리고 그런 분
    위기라는 게 한 번 잘못 대답하면 그 다음엔 어떤 설득력 있
    는 말을 해도 쉽게 납득이  안 되는 쪽으로 굳어지기 마련이
    었다. 

     석 경감은 짧은 시간 동안 빠르게 머리 속을 회전시켰다.

     이럴 때,그건 사건 당사자인 범인만 알뿐 세계적인 천재 경
    찰이라 해도 그렇지 스물여섯 자나  되는 알파벳 한 자를 놓
    고 그 뜻을  알 방법이 어디 있겠냐는 식으로  말해선 안 될 
    것이었다. 실제 그렇다 하더라도 그런 말을 하면 받아들이는 
    쪽에선 우선 그걸 변명으로 듣고,경찰의 무능함으로 들을 게 
    뻔한 일이었다.

     "문제의 메모지에 적힌 T자가  아직 무슨 뜻인지 모르는 게 
    경찰의 무능함 때문이라는  얘긴데,그럼 기자들 생각엔 거기
    에 T자가 아니라 A자가 적혀 있었다면 그건 무슨 뜻이겠습니
    까? 또 B자가 적혀 있었다면?"

     "......."

     "그리고 지금 상태에서 다른  알파벳 글자가 적혀 있었다고 
    해서 그 글자에 따라 범행 성격과 해석이 달라진다고 생각합
    니까?"

     "범행 의도는 다를 수 있지 않겠습니까?"

     "그렇지요. 그게 범인의 뜻일 수 있는 거니까. 그렇지만 의
    도가 다르다고 해서 이미  저질러진 범행의 성격까지 달라지
    는 건  아니지요. 범죄  자체의 해석이 달라지는  것도 아니
    고."

     기자들은 계속해 석 경감의  입에서 무슨 말이 나오나,하는 
    얼굴로 그  바라보았다.

     "내 얘기는 현재로선 그런  메모지가 나왔다는 것이 중요하
    지 수사하는  경찰 입장에선 그것이 A든  B든 C든,물론 알면 
    좋지만 알파벳 글자 한자의 의미가 무엇이냐 하는 게 중요한 
    게 아니라는 것입니다. 단지 그 글자 안에 현재로선 그걸 남
    긴 범인만 알고 있는 어떤  뜻이 함축되어 있을 거라고 추측
    만 하는 거지 그게 A라고  해서 수사 방향이 달라지고 B라고 
    해서 수사 방향이 달라지고  하는 게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
    리고 그런 범행 의도는 경찰의 추측에 의해서가 아니라  活
    이 잡힌  다음에야 비로소 밝혀지는 것  아니겠습니까? 미리 
    그걸 알고 수사한다는 건 범인을 잡아놓고 수사를 한다는 거
    나 마찬가지 얘긴 거구."

     그제서야 기자들은 대체로 석 경감의 설명에 수긍하는 얼굴
    들이었다.

     그러나 말은 그렇게 했지만  석 경감도 이번 수사에서 무엇
    보다 중요한 게 그 T자  메모지라는 걸 누구보다 잘 알고 있
    었다. 범행 수법의 유사성도 유사성이지만 먼저 발생한 노인 
    살해 사건과 이번 사건이 동일인에 의해 저질러진 연쇄 살인 
    사건이라고 단정지을 수 있었던 연결고리도 그 T자 메모지에 
    있었고,앞으로 사건 수사의  가닥을 잡는데서도 그것은 대단
    히 중요한 단서가 될 수 있었다. 

     "그 메모가 이번에도 입에서 나왔습니까?"

     "아닙니다. 가슴과 목 사이의 옷깃에서 나왔습니다."

     "피살된 사람 하나는 노인이고  하나는 젊은 미인이덴데 그
    건 어떻게 설명되는 겁니까?"

     "풀어야죠,이제......"

     "아까 더  살펴봐야 한다고 그랬는데 성폭행  흔적 같은 건
    요?"

     "지금으로선 없습니다.  자세한 건 감식 결과가  나와 봐야 
    알겠지만......"

     그리고 나서도 기자들은 몇  가지 더 질문을 했지만 석경감
    은 아직 말할 단계가 아니라거나  감식 결과가 나와 봐야 한
    다는 말로 기자들의 말머리를  막았다. 그러다 그는 어느 정
    도 시간이 지나 호기심으로  번뜩이던 기자들의 얼굴에서 어
    떤 실망스런 빛을 읽은 다음 자리에서 일어섰다.그게 미묘한 
    사건에 대해 꼬치꼬치 캐묻는 기자들을 다루는 석 경감 나름
    대로의 방식이었다.

     "이제 그만 자리를 피해  주시죠. 그래야 저희들도 일을 할 
    수 있으니까."

     그래도 기자들은 그의 책상  곁을 떠나지 않고 마지막 피치
    를 올리듯 이런저런 질문을 해댔다.

     "이봐,이러다간 끝날  것 같지도 않고 우리가  회의실로 가
    지."

     석경감은 기자들에게 자리를 빼앗겨 저만치 물러나 있는 형
    사들에게 말하고 먼저 회의실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소 제 목 : 피살자는 나이트클럽의 무용수로
      피살자의 신원이  밝혀진 건 점심 때가  거의 다 되어서였
    다. 다행히 여자의 핸드백 안엔 몇 개의 나이트 클럽 지배인
    들의 명함이 있었고,남  형사가 그 중 연락이  되는 두 명을 
    불러 병원으로 데려가 직접 사체를 확인케 한 것이었다.
     불려온 <아파치>의 지배인은 첫 눈에 그녀가 자신의 나이트 
    클럽 무희임을 알려 주었다.  지난밤 현장에서 보았을 때 어
    쩐지 여자의  몸매가 보통 여자들과는 다르다  싶었다. 화장 
    역시 보통 여자들보다는 진하다 생각했었다.

     이름: 최현희.
     나이: 23.

     본적은 전남 보성이었고,주소지는  구로구 가리봉동으로 되
    어 있었다.

     "우리 일을 한 지는 얼마  돼요. 한 석 달 되었나...... 업
    소에서는 유라라는 이름을  쓰고요. 이바닥에서 순진하게 본
    명을 쓰는 애가 없으니까."

     "그 업소 전속 무흽니까?"

     "예."

     "그럼 어제도 일을 했습니까?"

     "그럼요. 아마  일을 하고  나가다가 변을 당한  것 같은데
    요."

     "일은 몇 시에 끝났습니까?"

     "보통 얘들은 열한 시  사십 분까지 일합니다. 문닫을 시간
    까지요. 요즘은 심야 영업을 못하게 하니까......"

     그러면서 지배인은 보통 그런 업소의 무용수들은 전속과 프
    리,두 부류가 있는데,전속  무용수들은 대부분 신출내기들로 
    저녁 일곱 시 반시부터 영업  시간이 끝날 때까지 홀에 마련
    된 스테이지를 돌아가며  춤을 추는 디스코 걸들이고,프리는 
    이 업소 저 업소 시간 맞추어 돌아가며 메인 스테이지에서 
    본격 성인쇼를 하는 여자들이라고 했다.

     "어제 뭐 별다른 일은 없었습니까?"

     "없었으니까 그  시간 일을 끝내고 밖에  나가서 변을 당한 
     키憫熾. 업소에서  무슨 일이 있었다면 밖에  나가서 그런 
    일 당할 것도 없는 거고......"

     "동료 무용수들을  만날 수 있습니까? 혹시  그들에게 무슨 
    말을 했다거나."

     "낮에는 연락들이  힘들고 저녁 때  오면 볼 수  있을 겁니
    다."

     남 형사는 일단 지배인을 돌려보냈다. 그에겐 더 이상 알아
    볼 것도 없었다. 그가 총책을  맡고 있는 나이트 클럽 <아파
    치>에만도 그런 쇼걸이 전속으로  여섯 명이라고 했다. 그리
    고 암만 지배인이라고 해도  그렇지 무희들의 사생활에 대해
    서까지 자세하게 알고 있는  것은 아니었다. 단지 그가 아는 
    것은 그녀들의 몸매와 춤 솜씨뿐이었다.

     뒤이어 감식반에서 온  연락도 핸드백이라든가 그밖에 그녀
    의 유류품 어디에도 피살자의 것 말고는 지문이 나오지 않았
    다고 했다. 현장에서 수거한 머리카락도 여자의 것은 그녀의 
    것이고,남자의 것으로 보이는 것은  그 자리에 떨어진 지 이
    미 열흘이 지난 것이며 담배꽁초도  그렇게 신빙할 게 못 된
    다고 했다.

     사실 담배꽁초는 그 자리에  있으니 주워왔던 것일 뿐 강력
    계 형사들도 큰  穗釉  걸지 않았던 것이었다. 사람을 살해
    하고 나 그 자리에서  담배를 피웠다는 것도 말이 되지 않을 
    뿐더러 그녀가 그곳으로 오기를  기다리는 동안 피웠다는 것
    도 말이 되지 않는 소리였다.

     그리고 그녀의 손톱에도 가죽옷을  긁은 흔적만 나올 뿐 피
    살자의 몸에  상채기를 낸 흔적 같은  것은 나오지 않았다고 
    했다. 또 그런 경우 흔히  있을 수 있는 식으로 여자를 폭행
    하거나 어떻게 하려는 흔적 같은 것도 마찬가지라고 했다.

           
 소 제 목 : 같은책을 찢어낸 메모지를 단서로
     "이봐들,이게 말이 되는 소리야?"

     석 경감은 형사들을 둘러보았다.

     "지난 번 노인 때라면 몰라. 젊은 여자가 그렇게 변변히 반
    항도 못해보고 나 죽여 주십시오,하고 변을 당할 수 있는 거
    냐구?"

     "그렇다면 2인조나 3인조인  것은 아닐까요? 아니,3인조요. 
    그 T자가 트리오라든가 뭐 그런 식으로......"

     강형사였다.

     "그런 식으로 따지면 2인조라고 안  될 것도 없는 거지. 트
    윈스,하는 식으로."

     김 형사가 강 형사의 말을 받았다.

     "피살자 몸의 상처라든가 정황을  봐선 단독 범행이 분명한
    데...... 만약 둘이고 셋이라면 협조한 흔적이 있어야 할 것 
    아니야? 함께
목을 졸랐든가,아니면 피살자의  목에 나타난 
    대로 혼자 목을 조르는 동안  반항 못하도록 양쪽 손목을 잡
    고 있었다거나 말이지. 그러면 손목에라도 멍이 있거나 상처
    가 있어야 할 거고."

     "이건 뭐 한 가지 증거라도 있어야 어떻게 그걸 파고들던가 
    말든가 하지,여러 날 묵은  것도 아니고 금방 발견된 사체에 
    아무런 흔적도 없으니......"

     "아니,저는 증거가  아주 없는 것도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단지 우리가 그것을 알아내지  못하고 있을 뿐이지. 아까 이
    거 말입니다."

     그러면서 남 형사는 자신의 서랍에서 미리 복사해둔 문제의 
    T자 메모지 두 장을 책상 위에 꺼내 놓았다.

     "아까 반장님은  기자들에게 이 T자의 의미를  밝혀내는 게 
    범인을 잡고 나서 수사를 하자는 거나 마찬가지 말이라고 하
    셨지만, 그건 신문이 우리  경찰을 두드리는 걸 막자는 뜻에
    서 하신  말씀이었던 거지 사실 저는  이것부터 밝혀내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남 형사의 말에 석 경감과 동료 형사들은 다시 범인이 남긴 
    메모지에 시선을 집중시켰다.

     "A든 B든 뭔가 뜻이 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또 A라든가 B
    라고 쓰지 않고 T라고 썼을 땐 그렇게 쓴 뜻이 있을 테고 말
    이죠."

     "그렇다고 거기에 무슨 지문이 나온 것도 아니잖아? 그러니
    까 범인이 남긴 메모지가 있어도 실제 수사엔 아무런 도움이 
    안 되는 거구."

     강 형사였다.

     "선배님은 언제 범인이 우리  입맛대로 범죄를 저지르는 것 
    봤습니까? 나름대로는 완전 범죄를 저지른다고 하는 걸 우리
    가 찾아내고 밝혀냈던 거지요."

     "그래,말해봐. 나도 아까  기자들한테 말은 그렇게 했지만,
    다른 증거가 나오지  않는다면 천상 여기서부터 사건을 풀어
    나가야 하는 게 아닌가 생각을 했으니까. 남 형사도 아무 생
    각없이 꺼낸 말인 건 아닐 테고......"

     석 경감은  특유의 표정으로 눈썹을 꿈틀거리며  남 형사를 
    바라보았다.

     "어젯밤 사건 현장에선 정신이 없어 일단 수거만 했는데,그
    때 반장님께서  하시는 말씀 듣고 바로  여기에 뭔가 비밀이 
    들어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생 ♣ 했습니다. 그래서 감식반
    에 부탁해 지문이 나오더라도 그걸 손상하지 않게 복사를 떠 
    달라고 했던 거구요."

     "현장에서 내가 자네한테 무슨 말을 했는데?"

     "지난번 메모지와 이번 메모지가 같은 책에서 찢어낸 것 같
    다고 했습니다."

     "맞지? 그런 게?"

     "예. 종이 질도 그렇고,활자도 그렇고요."

     "그런데?"

     석 경감은 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내 물었다. 남 형사의 대답
    을 조금은 초조하게 기다린다는 뜻이었다. 그러자 김 형사가 
    석 경감의 얼굴 앞에 라이터를 켜주며 자신도 담배불을 붙였
    다.

 소 제 목 : <양들의 침묵>에서처럼 범인은 ....

   "어제 제가  반장님께 <양들의 침묵>이라는 영화  얘기를 드렸는데,그 
  영화를 보면 경찰이 피살자 입 속에  든 나방 번데기 하나로 범인이 어
  느 지역에 있는 놈일 거라는 걸 먼저 밝혀내지 않습니까? 그 종류의 나
  방이 어느 지역에서 서식하는가를 알아내 가지고 말입니다."

   "그건 영화 애기고 이건 실제 사건이고  또 책을 찢어낸 종이잖아. 그
  리고 책은 전국 어디서나 돈만 주면 똑 같은 것을 얼마든지 살 수 있는 
  거고."

   다시 강 형사가 말했다.

   "바로 그 점입니다. 우리가 너무 쉽게 놓칠 뻔했던 게 ."

   "쉽게 놓칠 뻔하다니?"

   "우리는 지금까지 범인이 그 위에 쓴 T자만 생각했는데,메모지 자체도 
  그 T자의 의미만큼 중요한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메모지 자체라면  책을 찢어낸 이 종이가 말이지?"

   이번엔 김 형사가  물었다. 석 경감은 묵묵히 남  형사의 말을 듣기만 
  했다.

   "단일 사건에서  나온 메모지라면 그게 중요하지  않을지도 모릅니다. 
  또 중요하다 해도  우리가 그 중요성을 쉽게 찾아낼  방법도 없는 거구
  요. 단지 거기에 직접적 증거가 될 지문이 있느냐 없느냐 하는 것  중
  요하지..... 그런데 어젯밤  똑 같은 메모지에 똑  같은 범인의 사인이 
  두 번째 나왔다는 겁니다."

   "그래,그게 무슨 뜻이라는 얘기야? 그 T자가......"

   석 경감도 이젠 주변 얘기보다 본론을 재촉했다.

   "아직 그거야 알 벙법이 없는 거고,어제  반장님이 그 말씀을 하실 때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단 한 번  저지르고 말 사건에서라면 그 메모지
  를 진짜 메모지로 쓰든 아니면 어떤  책을 찢어내 쓰든 또 그게 아니라
  면 사전을 찢어서 쓰든 우리 눈엔 단지 T자 메시지를 남기기 위한 종이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라는 겁니다. 그런데  그걸 쓴 메모지가 먼저 번 
  것과 똑 같다면 우리도 거기에 대해  생각을 달리 해야 하지 않나 하는 
  거지요."

   "그래. 나도 어제 자네한테  그 말을 할 때 그 생각을  아주 안 한 건 
  아니니까. 그렇다고 메모지 자체도  T자 메시지만큼 중요하다고 생각했
  던 건 아니지만....."

   "제 생각은 그렇습니다."

   그러면서 남 형사는 책상 위에 놓아둔 범인의 메시지 두 장을 한 손에 
  하나씩 들어올렸다.

   "이게 먼저번 것이고 이게 나중 것인데요,하루 이틀 사이에 저지른 사
  건에 똑 같은 메모지를 남겼다면 모를까,이건 메모지도 아니고 책을 찢
  어낸 종이인데 한 달 보름 사이의  사건에 똑 같은 책을 찢어내 메모지
  로 이용했다는 건 어쩌다 그렇게 된 일이라고 볼 수 없다는 거죠. 단지 
  이걸 메모지로 사용하기 위해 찢어낸  것이라면 우선은 다른 종이를 메
  모지로 사용할 가능성이  높겠고,또 그런 종이가 없어  책을 찢어 쓴다 
  해도 손에 집히는  대로라면 서로 다른 책을 찢어낼  가능성이 더 많지 
  않겠냐는 겁니다.  달력 종이라면 또 이해하겠지만......  그런데 이건 
  뭔가 한 가지 책을 고집하고 있다는 인상을 준다 이거죠."

   "그러니까 남 형사 생각엔 범인이 의도적으로 똑 같은 책을 찢어 메모
  지로 쓴 것 같다,이거지?"

   "속단할 수는 없지만 아주 그럴 가능성도 없지도 않다는 것입니다. 어
  느 집이나 T자 한 자 쓸 메모지가  없어 책을 찢어냈다는 것도 말이 안 
  되고,또 한 달 보름 후에 같은 책을 찢어냈다는 것도 그렇고요."

   "그래,그럴지도 모르지."

   석 경감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간 다시  이마에 붙은 검은 누에들의 잠
  을 깨우듯 눈썹을 꿈틀거리며 부하 형사들을 둘러보았다.

   "아니,남 형사 말에도 일리가 있어.  자네들 한 번 이렇게 생각해보라
  구. 이번 사건에서  범인이 피살자의 목을 조르지  않고 칼이라든가 뭐 
  다른 흉기를 사용했다고 말이지."

   형사들은 반장이 무슨 말을 하는가 싶은  얼굴로 석 경감의 얼굴을 쳐
  다보았다.

   "그래,칼이라구 하자구. 아주 잘 드는 칼로 난자해서 사람을 죽였다고 
  말이지. 그리고 그 옆에 그 살인에  대한 자신의 어떤 메시지로 T자 메
  모를 남기고...... 그러면 그 범인이  범행 전에 가장 신경써서 준비했
  던 물건이 뭐야?"

   "그거야 흉기겠죠."



 소 제 목 : 여자는 신경안정제를 복용하고
     그제서야 동료  형사들이  새로운 물증이라도 발견한  듯 우루루 
    남  형사의 책상 주변으로 몰려들었다.

     "남 형사. 그럼 이게 무슨 책에서 찢어냈다는 거야?"
     아까부터 아무  말없이 듣기만 하던 최  형사가 복사를 뜬  메모
    지를 들여다보며 물었다.

     "그거야 아직  모르죠.  지질과  활자를 봐서  같은 책을 찢어서   
    쓴 것만은 분명하다는 거지......"

     "그렇다면 이게  어떤  책에서 찢어낸 건지  무슨 수로 찾아내겠
    다는  거야? 사건 놔두고 모두 서점에 나가 수십만 권이  넘는 책
    을 일일이 이거하고 대조하며 책장을 넘길 수도 없는 일이고."

     "아니야. 그렇게만 생각할 것도."
     석 경감이 최 형사의 말을 받았다.

     "똑 같은 책을 찢어낸  거라면 찾는데까지는  찾아봐야지. 남 형
    사 말대로 의도적으로 이 책을   찢어 쓴 건지 아니면  그냥 우연
    히 같은 책을 찢어  쓴 건지...... 

    내 생각에도 우리가  최소한 그건 알고 나서 수사에 들어가야  할 
    것 같은데,그게 무슨  책인지 금방 알아낼 수  있는 방법 같은 거 
    없어?"

     "이렇게 하면 어떨까요?"

     처음 그 문제를  지적한  남 형사가 미리 대답을 준비해두고  있
    기라도 하듯 앞으로 나섰다. 

     "어떻게?"

     "최 형사님  말씀대로  우리가 나서서 찾는다는  건 아무래도 한
    계가 있을  것 같고,제 생각엔  이 메모지를 기자들에게 공개하는  
    게 제일  빠르지  않을까 싶은데요.  두  개  다 앞뒤면이 신문에   
    나오도록 말이죠.  아니,앞뒤로까진   힘들다 해도  범인이 T자를   
    쓴 쪽만 사진으로 나오게   해도 금방 제보자가  나타나지 않겠습
    니까? 그게 무슨  책 어디를 찢은 거다 하고...... 그런  것만 전
    문적으로 알아내기 좋아하는 사람들도 있으니까"

     "그거 말곤?"

     석 경감은 일언지하에 남  형사의 생각을  옆으로 제겨놓고 다른 
    형사들을 쳐다보았다.

     "제 생각에도 그게 제일  빠를 것  같은데요 왜...... 지금 공개
    하면 내일 조간엔 다 날 테고......"

     강 형사였다. 그러자 김 형사와 최 형사도  첫마디에 그거 말고?

    하는 반장의  쐐기에 말을 않아 그렇지  심정적으로는 남  형사의 
    생각이 제일 낫다는 얼굴로 마주 반장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석 경감이라고 그게 제일 빠른 방법이라는  걸 모르는 건 아니었
    다. 그러나  아침에 보고차 서장실에   들어갔을 때 서장으로부터 
    다짐받듯  들은 이야기가 있었다. 
    서장은 이 사건이 크게 취급되는 걸 꺼려했다.  사진 한 장이라도
    신문에 더 나면 그것 한 장 안  난 것보다는 난 것만큼 더 시끄러
    울 것이었다.  거기다 그게 무슨 책에서 찢어낸 것이다,하는 소리
    까지 공개적으로  나와버리면 사건은 자연 확대될 수밖에 없었다.

     "서장님 방침이야. 가능한  한 사건을 축소하며 수사하라는  게. 
    아니,가능한 한이 아니라 그렇게 하라는 게."

     "그럼 우리가 찾아야 한다는 얘기 아닙니까?"

     "그러니 방법들을 묻고   있는 거잖아. 신문에 공개하는 거 말고  
    뭐 좋은 생각이 없냐고. 최 형사는 뭐 생각나는 거 없어?"

     "아까 얼핏보니까 전문서적이나   딱딱한 이론서 같지는 않고,내
    용을  봐선 뭐 빨간  딱지 소설 같던데...... 책 많이  읽는 사람
    들한테 은밀하게 자문을 구하는 건 어떻겠습니까? 저마다 그런 사
    람들이 한둘씩은 주변에 있으니까."

     "그것도 괜찮긴 한데,그러면서 또  뭐 다르게 해볼 방법 같은 게 
    없냐는 거지."

     "기자들한테 공개하는  게  어렵다면 출판사들로  은밀하게 공문 
    같은  걸 보내면  어떻겠습니까? 이런 부분이 나오는 책을 찾는다
    고......"

     다시 남 형사가 말했다.

     "경찰서에서 사람도 아니고 책을 찾는다?"

     "뭐 꼭 경찰서에서 보내는 공문이 아니더라도  말이죠. 개인적으
    로도 그럴 수 있는 거고."

     "그것도 한  방법이겠지. 수사는 수사대로   진행하고,그건 그것 
    대로 알아보고 그러자고.  서장님은 서의 전직원 지원을 받아서라
    도  삼 일 안 막 해결하라고 하시지만 지금 나타난  증거만 가지
    고는 금방 해결될 일  같지도  않고 말이지. 그런데 참,어젯밤 현
    장에서 보니까  피살자 핸드백에서  뭐 약 같은 게  나오는 것 같
    던데 그건 뭐라고 그래?"

     "신경 안정제 종류랍니다."

     감식반에서 감식 결과를 받아왔던 김 형사가 대답했다.

     "신경안정제?"
     다시 검은 누에 두 마리가  머리가 쳐들고  조금은 주름진 석 경
    감의 이마 가운데로 모아졌다.

     "예."

           
 소 제 목 : 불특정 다수의 부녀자를 대상으로

   "그럼 피살되기 전 그걸 복용했다는 얘기야?"

   "확실한 건 부검을 해봐야 알겠지만,병원에서도 부작용이 일어날 만큼 
  과다 복용한 것 같지는 않다고 했습니다. 또 제가 전에 듣기로 그런 쪽
  에서 일하는 여자들 중에 많은 숫자가  무대에 오르기 전 그런 약을 복
  용한다고 들었고요."

   "부검은 언제 하는데?"

   "아무래도 보호자 입회 아래에서 해야 되지 않겠습니까?"

   "피살자 고향으로 연락은 하고?"

   "예. 일단은 서울에 도착하는 대로 이곳으로 나오라고 했습니다. 피살
  자 신원도 그래야 더 확실하  밝혀질 거구요."

   "그럼 말이지,피살자의 보호자가  올라오거든 먼저번 노인하고는 어떤 
  관계가 있는 건지도 알아봐.  관계가 없으면 어떤 연관성이라도 있다든
  가 말이지. 연쇄 살인이면 전혀 그런 게 없지도 않을 테고......"

   남 형사가 복사한 범인의 메모지를 다시 복사해 강력계 형사들의 비표
  처럼 나누어 지닌  다음,석 경감은 형사들에게 오후에  해야 할 일들을 
  지시했다.

   김 형사에겐 병원으로 나가 피살자 사체에 더 다른 물증 같은 게 없는
  가 확인하게 하고,강형사에겐 피살자의  현주소로 되어 있는 구로구 가
  리봉동을 나가보게 했다. 또 최 형사에겐 사건 발생 시간 그 주변에 있
  었던 용의자거나 목격자 탐문 수사를 지시했다.

   남 형사에겐 특별히 해야 할 일을 지시하지 않은 건 그에게 이미 오후 
  일정이 잡혀 있기 때문이었다. 남 형사는 나이트 클럽 <아파치>로 나가 
  그곳 동료 무희들을 탐문 수사해야 했다.  또 그러기 전에 어제 피살된 
  여자가 먼저 피살된 노인의 아들  김형동과는 아무 관련이 없는지도 알
  아봐야 했다.

   부녀자 연쇄 살인 사건치고는 정말 이상한 사건이었다.

   노인과 젊은 여 ,일단 겉으로  나타난 것으로는 피살자끼리의 신원도 
  잘 연결되지 않을 뿐더러 두 번  다 목을 졸라 살해했다는 것도 믿어지
  지 않을 대담성이었다. 사람들은 범행 방법의 끔찍함만으로,또 그런 범
  행 뒤에 자신의 메시지와도 같은  메모지를 남긴 것만으로 범인의 대담
  성을 이야기하지만 경찰이 보는 입장은 또 달랐다. 아무리 깊은 밤이고 
  인적이 드문 곳에서라고는 하지만 언제  그 주변에 사람이 나타날지 모
  르는 곳에서 순전히 자신의 완력으로  사람의 목을 졸라 살해한다는 것
  은 누가 보든 쉽지 않은 일이었다. 또 그것은 어떤 잔인한 방법과도 비
  교가 안 될 만큼 범인이 대담하다는 뜻이기도 했다.

   범행 전 아무리 사전에 치밀한 준비를  한다 해도 언제 그곳을 지날지 
  모를 행인들의 눈에 띄지 않을  방법까지 사전에 준비하고 방비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그것은 아무 누구도  예측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런데
  도 범인은 가장 시간이 많이 걸리는 방법으로 피살자의 목을 졸라 노인
  과 젊은  무희를 살해했다. 졸린 목  외에는 별다른 상처를  남기지 않
  고.....

   메모지까지 남긴 걸로 봐 두 사람의  살해로 뭔가 얻고자 하는 목적이 
  있었을 것 같은 데 아직 그것조차 오리무중이었다. 두 피살자의 손가방
  과 수중에 든 돈들도 그대로 있었다.  물론 그것말고 다른 돈들을 가져
  갔을 수도 있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일부러 그 돈의 일부를 남겨놓고 가
  져갈 리도 없는 일이었다.

   젊은 무희의 경우는  일반적인 부녀자 연쇄 피살  사건에서 보는 폭행 
  흔적이라든가 그것을 시도한 흔적조차 없었다. 정말 이럴 땐 경찰 입장
  에선 제발 폭행이라도 하고 살해했으면 하는 마음까지 드는 것이다.

   대체 그는 누구인가.

   경찰 입장에서 보자면 가장 대담한 방법으로 도시 한가운데에서 두 피
  살자의 목을 조르고,그 현장에 자신의  어떤 메시지처럼 T자 메모를 남
  긴 그놈은......

   간단히 시켜먹은 점심을 끝내고 형사들은 형사들은 서를 나갔다. 소득
  이 있든 없든 일단 피살자의 주변과 범행 현장 주변부터 뒤져볼 필요가 
  있었다. 그러다 보면 사건은 애초에 기대하지 않았던 전혀 뜻밖의 곳에
  서 가닥이 잡힐 수도 있었다.

   일차적으로 범행의 성격을 규명하는데는  두 피살자 사이에 어떤 연결
  고리가 있느냐 없느냐 하는 것이었다. 있다면 사건을 수사하  경찰 입
  장에선 의외로 사건을 축소된 범위에서 수사를 진행할 수 있을 터이고,
  아무 연관성도 없다면 그건 범행  상대의 나이까지 구분하지 않고 저질
  러지는 불특정 다수의 부녀자를 대상으로 한 범행이라는 소리였다.

        
 소 제 목 : 여자의 몸이 목적이 아니라 ...
    "골치 아프군. 감이 안 잡혀."

    "그럴수록 하나하나 시작해야죠.  첫 사건부터 새로 수사한다는 기분
   으로요. 그렇게 말고는 달리 방법이 있는 것도 아니잖습니까? 두 사건
   을 유기적으로 생각하면서 말이죠."

    "그래. 연쇄 사건인 줄도  모르고 먼저번 노인 가족 주변만 맴돌았으
   니......어쩌면 범인은 전혀 엉뚱한 데 있을지도 모르는데 말이지. 그
   래도 김형동과 나중에 피살된  여자가 어떤 관계가 있는지는 알아봐야
   겠지?"

    "조금 전 김형동이한테  전화를 해두었습니다. 제가 그쪽으로 나가겠
   고."

    "성급한 판단일지는  모르지만,범행 방법만 다르다 뿐이지  몇 년 전 
   화성 연쇄 살인 사건 같은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자꾸 들어."

    "설마 그렇기까지야 할려구요."

    "아니야. 설마가 늘 사람 잡는 거라구. 자꾸 그런 생각이 들어. 서울
   판 화성 사건이 아닌가 하는......"

    다른 형사들이 나간 다음 석 경감과 남 형사는 나름대로 느끼고 있는 
   이번 사건의 성격에 대해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그 사건은 처음부터 끝까지 지저분했잖습니까? 살해 전엔 폭행하고,
   또 살해  커 여자 국소를 난행하거나 이물질을 넣고 하는 식으로."

    "어쨌거나 현재 드러난 걸로는 부녀자를 대상으로 하고 있잖아."

    "그렇긴 하지만 또 하나 다른 건 화성 사건 경우엔 자신의 범행이 발
   각될까봐 사체를 감추어  발견되더라도 오래 있다가 발견됐는데,이 경
   우는 누가 보란 듯이  대로변에서 일을 저지르고요. 거기다 아직 뭔지
   는 모르지만 범인 스스로 자신의  범행을 통해 뭔가 이야기를 하려 한
   다 이겁니다. 범행 그  자체를 통해서든 아니면 T자를 통해서든. 그러
   잖으면 그걸 남길 이유도  없는 거구요. 단순히 수사의 혼선을 위해서
   가 아니라...... 아니,수사의 혼선을 위해서라면 오히려 그런 거 하나
   라도 남기지 않았겠지요."

    "그래. 무얼 남긴다는 건 그게  증거가 되든 안 되든 아무 것도 남기
   는 않는 것보다는 위험한 일이니까."

    "단순히 그 사람들을 살해한 것만이 범인의 목적이 아닐 거라는 생각
   이 듭니다.살해하는 것만 목적이라면 그것보다 더 쉽게 살해할 방법도 
   있고, 굳이 그런 메모를 남길 이유도 없는 거구요. 비약일지는 모르지
   만 또 하나 있습니다. 이 사건과 화성 사건이 다른 게......"

    "뭔지 얘기해봐."

    "제가 보기엔 화성  사건의 경우,범인이 처음부터 죽이자고 피살자에
   게 접근했던 게  아니라 일단 폭행을 목적으로  접근했다가 일을 치룬 
   다음 나중에 그것이 발각될까봐  사람을 살해하기 시작했던 게 아닌가 
   싶습니다. 그런데  이 사건은 돈이라든가 여자의  몸이 목적이 아니라 
   처음부터 살해를 목적으로 접근했던 거 같구요. 그리고 그렇게 살해한 
   다음 T자를 통해 뭔가 이야기를  하려 한다 이겁니다. 두 피살자 사이
   에 어떤 연관성이 없다면 말이죠."

    "게임이구만. 우리하고 그 놈하고."

    "그럴지도 모르죠. 지능은 높고 도덕적으로는 어느 일면이 결여돼 있
   는 정신이상자가 내가 이렇게  사람을 죽였다,그러니 이 T자를 가지고 
   너희들 나를 한번 찾아봐라
럴  수도 있는 거구요. 흉기를 사용하지 
   않고,피살자의 반항이라든가 다른  사람 눈에 노출될 위험성을 무릅쓰
   고 목을 졸라  살해했다는 것도 어떻게 생각하면  그런 식의 살해에서 
   스릴을 즐겼다는 얘기가 될 수 있는 거고......"

                 
 소 제 목 : 나이트클럽 무희와 빨간 옷의 선정성
    "그래서 골치가 아프다는 거야, 그래서. 이런 말이 성립할지 안 할지
   는 모르지만 사건 뒤처리를  한 걸 보면 뭔가 지능적인데 그런 지능과
   는 또 다르게 범행의 상식을 완전히 뒤집고 있으니."

    석 경감은 담배를 뽑아문  다음 이마 쪽으로 흩어져 내려오는 자신의 
   머리카락을 쓸어넘겼다. 남 형사도  점버 주머니에서 몇 개피 남지 않
   은 담배갑을 꺼냈다.

    "자네하고 얘기를 하면 말이지, 뭔가 사건에 대해 정리가 되는 것 같
   다가도, 그래서 그 정리된 가닥을 잡으려들면 그땐 또 단순할 수도 있
   는 사건을 놓고 우리가  필요 이상으로 확대하고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고."

    "죄송합니다."

    "그런 얘기를 듣자는 게 아니라...... 자넨 범인이 남긴 메모지가 같
   다는 것에 뭔가 비중을  두는 것 같은데, 그게 그렇게 중요한 일일까? 
   이번 사건에서."

    "그건 아직 아무도 모르지요. 우연일 수도 있고, 아까 제가 말씀드린 
   것처럼 그런 의도일 수도 있는 거구요."

    "의도적이라면 그 의도적인 것의 뜻이 뭐냐 이거야?"

    "제 생각은 그렇고 반장님 생각은 어떤데요?"

    "나도 그게 우연 같지는 않아.  메모지 두 개가 같은 책을 찢어 썼다
   는 것도 그렇고 피살자의 입에 무얼 넣는다는 것도 그렇고. 전에 자네
   가 얘기한  그 영화  말이야. 피살자  입에 나방  번데기를 넣고 하는 
   거."

    "양들의 침묵이오?"

    "그래. 양들의 침묵."

    "갑자기 그건 왜요?"

    "나도 그거 책으로 봤는데, 이것도 전에 자네가 말한 것처럼 그런 식
   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고. 피살자의 입에  똑 같은 번데기를 넣듯 
   이것도 의도적으로  같은 책 종이에 같은  T자를 쓰고 말이지. 범인도 
   우리처럼 그 책  읽었거나 영화를 보고 따라하는 것 같기도 하고. 그 
   영화야 워낙 유명했으니까. 책도 그때 많이 팔렸던 거 같고."

    "범행 동기 말씀입니까?"

    "그거야 알 수 없는 거지만 그런 식으로 똑같은 메모를 남기는 건 말
   이지. 첫 사건 때 그게 피살자 입 속에서 나왔다는 것도 그렇고."

    "제 생각엔 이 메모지를  기자들한테 공개하는 것도 크게 나쁠 게 없
   을 것 같은데요."

    석 경감보다 먼저 담배를 비벼 끄며 남 형사는 조심스럽게 반장의 얼
   굴을 살폈다. 아까는 반장의 태도가 너무 완강해 거기에 대해  摸 이
   유를 달지 않았다.

    "자넨 내가 서장님 지시 때문에만 그런다고 생각하나?"

    석 경감도 반쯤 타들어온 담배를 비벼 끄고 남 형사를 바라보았다.

    "그런 것도 있겠지만 오히려  반장님 생각이 더 그런 것이 아닌가 싶
   어서요."

    "그래. 어쩌면 서장님보다 내 생각이 더 그런지도 모르지. 그걸 공개
   한다는 게......"

    "무슨 다른 뜻이 있습니까?"

    "자네 화성 사건 때 그런 루머가 돈 거 아나?"

    "무슨 루머 말씀인지......"  

    "한때 그런 얘기가 있었잖아. 범인이 빨간 옷을 입은 여자만 골라 그
   런다고 해서 그 지역 여자들이 붉은 옷을 안 입고 했던 거 말이야."

    "그거하고 이거하고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더구나 빨간 옷하고."

    "직접적 상관은 없지만  피살자가 나이트클럽 무용수라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선정적으로 흐를 수가 있어."

                         
 소 제 목 : 사건이 선정적으로 부풀려지는 건
    석경감은 잠시 남 형사를 쳐다보고 나서 다시 말을 이었다.

    "그런데다 범인이 남긴 메모지까지 공개해봐. 그래서 그게 무슨 책을 
   찢어서 쓴 거다 하는  게 공개적으로 알려지고 하면 어떤 일이 벌어질
   지."

    "뭐 별일이야 있겠습니까? 우리는 우리대로 정보를 얻고, 그 대신 그
   게 공개 안 됐을 때보다는 조금 더 시끄러운 정도밖엔......"

    "이 사람아, 조금 시끄러운 정도로 끝날 일이 아니야. 사건을 이상한 
   쪽으로 몰고가는 건 범행 내용도 내용이지만 바로 그 범행의 수수께끼 
   같은 부분들이라고.  나중엔 사건 자체보다 그런  부분들이 더 부풀려 
   보도되고, 그러다보면 또 사건 자체도 따라 부풀려지는 거고. 그냥 살
   해한 것보다 거기에 T자  메모를 남긴 게 사람들한테 호기심을 자극하
   기 마련이고, 또 그냥  T자 메모가 있었다는 것보다는 그 메모지가 무
   슨 책을 어디를 찢어서  쓴 것이다 하는 게 더 호기심을 불러일으키는 
   거고. 더구나 메모지에 쓰여있는  내용이 보통 야한 내용인 것도 아니
   고 말이지."

    "그렇긴 하지만......"

    "뭐가 그렇긴 하지만이야? 내 얘기는  그때 빨간 옷 얘기 같은 게 화
   성 사건을 더 귀기스럽게 만들었듯 이것도 공개되면 정보 쪽으로 기능
   하기보다는 이런저런 말을 만들어내는 쪽으로 더 발전한다는 거야. 그
   래서 수사에 도움되는 쪽보다 안 되는 쪽으로 선정적으로 사건만 부풀
   려지는 거고."

    "아, 예. 전 거기까지는 생각을 못했습니다."

    "그게 밥그릇 수라는 거야. 척 하면 삼척인 거고."

    두 사람이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고 있을 때 서의 아르바이트 학생
   이 팔뚝에 한 묶음의  수건을 걸치듯 신문을 걸치고 각 팀마다 그것을 
   나누어 주기 위해 사무실  들어왔다.

    "여기 있습니다."

    학생은 경감의 책상 위에 던지듯 신문을 놓았다. 

    "어이, 학생."

    강력계 몫의 신문을 받아든 석 경감이 돌아서는 학생을 불렀다.

    "우리는 오늘 한 부 더 주지 그래."

    "여유가 있을지 모르겠는데요."

    "그래도 줘 봐. 사건 기사 보려는 거니까."

    학생은 무슨 인심이라도  쓰는 듯한 얼굴로 다시  팔뚝에 건 신문 한 
   장을 더 뽑아 석 경감에게 내밀었다.

    얼핏 본 1면 머릿기사는 북한 핵에 관한 기사였다. 그러나 모르긴 해
   도 사회면엔 이 사건에  대한 기사가 결코 적지 않은 분량을 차지하고 
   있을 것이었다. 경찰이 작게  취급해 주길 바란다고 해서 그대로 따라 
   줄 기자들이 아니었다.  그러면 그럴수록 그들은 사건을 키웠다. 때로
   는 공개 수사가 범인을  잡는데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걸 기자들 
   스스로 더 잘 알고 있는 사건에 대해서조차도 그랬다.

    "그리고, 학생."

    석 경감은 다시 출입문 쪽으로 걸어나가는 학생을 불렀다.

    "예?"

    "자네 무슨 과 다닌다고 했나?"

    "독문관데요. 그건 왜요?"

    "아니, 학생은 소설 읽  거 좋아하나 해서?"

    "좋아는 하지만 많이 읽지는 못하는데요."

    "그럼 이리  와 봐. 혹시  이런 부분이 나오는 소설  읽은 적이 있는
   지."

    석 경감은 학생 눈 앞에 범인의 메모지를 꺼내 밀었다.

    "이거 오늘  신문에 난 그  메모지 아니에요? 여기  T라고 쓰여 있는 
   게."

    "신문에? 이 메모지 사진이 말이지?"

    놀란 건 석  경감만이 아니었다. 옆에 있던  남 형사 역시 그럴 리가 
   없는데 하는 얼굴로 아르바이트 학생을 쳐다보았다.


 소 제 목 : 이거 되게 야한 내용인데요
    "아뇨 사진은 안 나오고 그냥 그런 메모지가 나왔다는 것만요. T자라
   고 쓴......"

    "자, 남 형사는 뭐라고 났는지  보고, 자넨 이거 한 번 읽어봐. 어디
   서 본 적이 있는지. 이게 먼저니까 이것부터 말이지."

    남 형사는 학생이 먼저 던진 신문을 들어 한면 통광고가 실린 뒷장부
   터 그것을 펼쳐 들었고, 학생은 석 경감이 내민 범인의 메모지에 씌여 
   있는 활자들을 읽어내려 갔다.
    
    <T자 사인이 있는 첫번째 메모지 복사 앞면>
    [색 털을 가진 여자의 거기가 비춰지
     히 핥고 있는 그림이 한 옛 나오
     의 그것처럼 큰 남자의 물건이
     으로 들어가는 것이었다.아니,그러기 전
     니큐어를 칠한 여자의 손이 남자의
     고는 제 입으로 끌어들이는 것이]

    <첫번째 메모지 복사 뒷면>
    [었다.살면서 마음속으로나마 한 번 그
     살을 섞는 법이 있다는 걸 들어보지도
     그 속에 다 어우러지고 있었다.지
     콘을 꼭 움켜잡고 조금씩 조금
     않았다]
    
    <T자 사인이 있는 두번째 메모지 복사 앞면>
    [을 파고들고 가슴으로 들어왔다.정신을 차렸을
     입김이 목덜미에 퍼부어지고 있었다.그녀는 꼼
     의 가슴에 얼굴을 묻었다.울지마,울지 말라
     두손이 가슴 앞으로 와 유니폼 가운의 단추를
     지 못했다.오히려 일을 그르치고 나서도 화를 내]

    <두번쩨 메모지 복사 뒷면>
    [고 그것으로 침대를 어지럽혔다는 것이 왠지 부
     모든 것이 끝나버린 다음엔 차라리 홀가분한 기
     일이 꼬여 계약이 안 됐을 때보다 한 결 나은 일
     알게 모르게 언젠가는 이런 일이 있을 거라고
     왔던 일이 아니던가.]
    
    "잘 모르겠는데요. 이것만 읽어가지고는."

    학생이 메모지에서 눈을 떼며 말했다.

    "어디서 본 것 같은 느낌도 없고?"

    "예. 되게 야한 책 같다는 느낌은 드는데......."

    "가 봐. 그리고 말이지 어디  가서 여기서 그런 것 봤다고 말하지 말
   고. 기자라든가 누가 물어도 말이지."

    "저는 말 안해요."

    "아르바이트로 나오는  것이긴 하지만 우리 서로  얼굴 오래 보자고. 
   보는 동안 좋은 얼굴로 보고 말이지. 무슨 말인지 알지?"

    "알아요."

    학생을 보내고 나서 석 경감은 복사한 메모
 챙긴 다음 남은 신문
   을 집어들어 먼저 남 형사처럼 그것을 뒷장부터 열어 ┚틈.

    <한밤중 부녀자 연쇄 피살
    범인 현장에 T자 메모 남겨>

    사회면 톱  기사는 사진과 함께 실린  조계종 분규에 대한 것이었고, 
   그것은 그 아래 5백원짜리 동전보다 조금 더 큰 피살자의 사진과 함께 
   3단으로 처리되어 있었다. 일단 아침에 기자들을 상대로 선방은 한 셈
   이었다. 그는 아무리 작게  나더라도 그보다는 크게 나올 거라고 생각
   했다. 문제는 내일 조간 신문들이었다. 당일 석간은 크게 싣고 싶어도 
   아무래도 마감시간까진 자료가 부족하기 마련이었다.

    기사를 쓴 기자는 범인이 두 번 다 T자 메모지를 남겼다는 것에 비중
   을 두고 있었다. 먼저는  피살자의 입에, 어제는 목과 가슴 사이의 옷
   깃에......만약 그 T자 메모지를 공개했다면 어쩌면 그 기사는 조계종
   을 누르거나 누르진  못한다 하더러도 그것과 대등한 지면으로 처리되
   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신문의 선정성은 여자의 몸과 속옷, 스캔들
   에만 있는 게 아니었다.

                              
 소 제 목 : 그 여자 게이 아니에요?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던 끝에  석 경감은 조금은 큰 목소리로 갑자기 
   남형사를 불렀다.

    "이봐. 남 형사."

    "예."
    조금 전 아르바이트 학생이  왔을 때 보여주었던 메모지에서 뭔가 전
   광석화처럼 떠오른 생각 하나가 있었다.

    "그 메모지 진짜는 어디 있어?"

    "캐비넷에 따로 보관하고 있는데요."

    "그거 꺼내 와 봐."

    남 형사가 왜 그러시지,  하는 얼굴로 석 경감의 책상을 돌아 캐비넷
   을 열고 그것을 꺼내와 석 경감 앞에 놓았다. 석 경감은 두 겹의 비닐 
   속에서 조심스럽게  陋痼 꺼내 이리저리 살피다 어떤 회심의 미소 같
   은 것을 지었다.

    "뭐가 있습니까?"

    옆에 섰던 남형사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있어. 자네 말이야, 이 신문 이렇게 한 번 찢어봐?"

    그러면서 석 경감은 시범을 보이듯 신문 1면을 범인이 남긴 메모지처
   럼 찢어 보였다. 남 형사는 그런 반장을 멀거니 바라보기만 했다.

    "해보라니까. 자네도 이 메모지처럼."

    그러자 남 형사도 석 경감이 찢어낸 옆 부분을 그렇게 찢었다.

    "왜 그러시는데요?"

    "바로 이거라구.  지금 우리가 찢어낸 거  말이야. 이걸 봐도 범인이 
   이 메모지를 그냥 마땅한  종이가 없어 쓴 게 아니라 얼마나 신경써서 
   준비했는지 알 수 있는 거라구."

    "그건 저도 그렇게 생각하지만 이거 하고는 무슨 상관인지 잘......"

    "나무에 결이 있듯 어떤 종이에도 결이 있는 거라구. 신문은 세로 결
   이고,범인이 찢은 이 책은  가로 결이고. 그래서 지금 우리가 찢은 건 
   둘 다  세로로는 똑 바로 찢어졌는데  가로로는 똑바로 찢어지지 않고 
   한 쪽이 뾰족하지 않냐  이 얘기야. 그런데,범인이 찢은 이 책은 가로 
   결도 똑바로 찢어지고 세로  결도 어느 정도 똑바로 찢어졌다는 거지. 
   무슨 얘긴지 잘 모르겠어?"

    "예, 잘......"

    "그냥 찢으면 우리처럼 찢어지고 정성들여 신경써서 찢으면 범인처럼 
   찢어낼 수 있다는 거야. 아까 학생이 왔을 때 복사한 메모지를 보여주
   느라고 나도 다시 봤는데 칼을 대지 않고도 뭔가 반듯하게 찢어낸  것 
   같은 생각이 들더라구. 그런데  이제 그 이유를 알았어. 이게 다른 메
   모지가 없어 여기에  쓴 게 아니라는 걸  말이지. 그리고 그것도 아주 
   신경써서 준비한 것이라는 걸."

    그러면서 석 경감은 메모지를 들어 남 형사 눈 앞으로 가져갔다.

    "여길 잘 봐. 여기 찢어진 부분 쪽으로 자세히 보면 못이라든가 송곳 
   같은 것으로 그리듯 긁은 자국 같은 게 보이지?"

    "예."

    "범인이 이 책을 그냥 찢은 것이 아니라 찢어야 할 부분을 미리 송곳 
   끝으로 긁어 표시를 한 다음 그 자리를 따라 찢어냈다는 거야. 그러니
   까 송곳으로 긁은 자리가 여기에 남을 수도 있고, 아니면 그것을 찢어
   낸 책 이 페이지에 남을 수도 있는 거고 말이지. 안 그래?"

    "예. 정말 그런데요?"

    "맞았어, 아까  자  얘기가. T자만큼 이  메모지 자체도 중요하다는 
   거 말이야. 그냥 T자만  중요하다면 굳이 이럴 필요까지는 없거든. 송
   곳으로 미리 찢어낼 자리를 긁어 표시할 필요도 없는 거고 말이지. 이
   게 어느 책에서 찢어낸 것인 것만 안다면 최소한 범행 의도와 범행 성
   격은 알 것 같은데....."

    그때 남 형사의 자리에  길게 전화벨이 울렸다. 남 형사가 다시 자기 
   자리로 돌아가 전화를 받았다.

    "예. 강남 경찰섭니다. 예,강력계 맞습니다. 말씀하십시오. 예? 무슨 
   얘긴지 저는...... 아, 그거요. 아닙니다. 무희는 맞는데 그런 여자가 
   아니라 그냥 여잡니다."

    그리고 나서 남 형사는 전화기를 내려놓았다.

    "재수가 없으려니 별 전화가 다 걸려와 와 가지고......"

    "무슨 전환데 그래?"

    석경감이 이맛살을 찌푸리며  물었다. 그럴 땐 이마의 누에 눈썹들도 
   어딘지 모르게 불안해 보였다.

    "어느 미친 놈이 어제 죽은 여자가 게이가 아니냥니다."

    "게이?"

    다시 누에 두 마리가 누운 자리에서 떨어질 듯 꿈틀거렸다.

    "왜 그런 여자들 있잖습니까? 아니, 여자도 아니지요. 태어나긴 남자
     태어나  여자처럼 살아가는  애들이오. 성전환수술인가  뭔가도 하
   고......"

    "이 사람아 경찰서에 그런 거 물으러 전화하는 사람치고 제대로 정신
   이 박힌  사람이 있어? 얼른 나가봐.  여포(먼저 피살된 노인의 아들) 
   기다리게 하지 말고."
    
 


 소 제 목 : 미스터 T 네가 나를 망치는 구나,네가
     T가 저지른  두번째 사건이 실린 석간  신문을 본 이득지는 
    그대로 자리에 주저앉고 싶은 심정이었다. 아니,그는 그대로 
    자리에 주저앉았다.

     정말 이럴 수는 없는 일이었다.

     미스터 T......

     이태전 겨울,어느 계간 문예지의 청탁을 받아 전작 전재 장
    편으로 처음 <<압구정동>>을 쓸  때에도 행여 발생할지 모를 
    모방 범죄에 대하여 전혀  생각하지 않은 건 아니었다. 작품
    을 거의 완결해나갈 무렵 지금까지 쓴 부분을 교정하며 다시 
    읽어나가는데 그런 요소가 많이 눈에 띄던 것이었다.

     누군가 이 작품을 보고 압구정동으로 나간다면......

     문득 떠오른 생각이 그것이었다.

     얼굴 없는 테러리스트가 성도착증에 걸린 노파와,남자로 태
    어나 호모와 변태의  그릇된 정액받이로 살아가는 게이,남자
    와의 동침을 예사로 알며 자신의 지나친 씀씀이에 대해 충고
    하는 룸메이트들에 대해 너희들  부자를 미워하지 말라는 말
    을 서슴없이 해대는 양재동 빌라의 방탕한 여대생,부동산 투
    기로 번 돈으로 룸살롱을  경영하며 스스로는 호스트바를 무
    시로 드나드는  까만가죽치마의 여인,섹스와  마약과 도박을 
    인생의 유일한 낙으로 알고  살아가는 재벌 2세를 차례로 목
    을 졸라  살해해 가는 과정을 통해  그가 이야기하고자 했던 
    것은 <테러의 대상은 자본이  아니라 자본의 부패와 타락>이
    며,그 <부패와 타락이 생산해낸 쓰레기들로부터 그런 쓰레기
    를 생산해내는 자본의 실질적 주체>로 테러 대상을 에스컬레
    트 하는 것으로 한국 천민자본주의의 부패와 타락에 대해 경
    고하자는 것이었다.

     그런 소설 속의 테러의  과정이 이땅의 절대 다수인 비압구
    정동 사람들에게 대리 테러의  욕구를 충족시킬 것이라는 것
    을 이득지는  알고 있었다. 그러면서 또  한편으로는 누군가 
    이 작품을 보고 압구정동으로 나간다면,하는 생각을 했던 것
    이었다. 그때 작품을 쓰면서도  그는 다소 과장된 면이 없지 
    않다 하더라도 소설을 쓴다는  생각보다 1990년대의 한국 천
    민자본주의의 현실을 현실보다 더 리얼한 느낌으로 다가오도
    록 그리겠다는 생각을 했었다. 때로는 절망으로,때로는 분노
    로.....

     그러다 작품 끝 부분에 이르러 그는 이제까지 쓴 것을 읽으
    며,정말 눈군가 이걸 읽고  모방 범행이거나 동조 범행을 저
    지르러 압구정동으로 나간다면, 하는 어떤 걱정을 했었고 그
    것이 기우라는 것을 알면서도(당시엔)  작품 말미에 그 부분
    에 대한 자신의 우려를 한 인물의 입을 빌어 말했다.

     얼굴없는 테러리스트를 쫓는 경찰과 이미 네 건이나 발생한 
    연쇄 터러의 의미를 추적하는 잡지사 기자가 만나 서로 느끼
    는 사건의 성격에 대해 이야기하는 부분이었다.

     먼저 경찰이 말하게 했다.

     "그럼 그가 잡히지 않는 한 사건은 계속 일어나겠군요."

     "어느 누구도 그런 범죄가 발생할 수밖에 없는 사회적 문제
    에 대해서는  지적하지 않고 있어요. 오히려  범행을 자극할 
    뿐이지......"

     "저도 그런 생각을  했습니다.경찰로서 범인을 잡지 못하고 
    있는 것에 대한 책임 회피를  하기 위해서 하는 얘기가 아니
    라......"

     "핵심을 빙빙 돌기만 하는 거죠. 알면서도 지금까지 저질러 
    온 자신들의 부패와 타락을 인정하고 싶지 않은 겁니다."

     "이러다 동조 범죄까지 발생한다면 정말 큰일인데......"

     "그런 일이야 없겠죠. 아니,  없어야 하겠죠. 어느 정도 심
    리적으로는 동조한다 해도......"

     그게 그때 그가 <<압구정동>>을 쓰며 가졌던 솔직한 마음이
    었다.

     그것이 이태나 지난 다음  이득지 앞에 현실로 나타난 것이
    었다.  그는 사무실  한켠에 놓인  책꽂이에서  자신의 소설 
    <<압구정동>>을 꺼내 그 부분을 읽고 또 읽고 했다. 정말 그
    럴 수는 없는 일이었다.

     대체 그는  무슨 뜻으로 테러를 나간  것인가. 소설 속에선 
    그것이 가능해도 현실에서도 그것이 가능하다고 생각했던 것
    일까?  사건은 벌써 두번째 일어나고 있었다. 처음은 소설에
    서처럼 나이든 노파였고,  두번째는 강남 나이트클럽의 무희
    이긴 하지만 소설에 나오는  게이가 아닌 보통 여자였다. 아
    직 확실하게  밝혀지지는  않았지만 신문에  난 대로는 그랬
    다.

     소설에선 그런 테러가 작품의 뚜렷한 주제를 가지고 얼마든
    지 가능해도 현실에서 그것은  어떤 명분으로도 일어나선 안 
    될 범죄며 폭력이었다. 처음  전화를 한 대로 그랜저의 프라
    이드 폭행 사건 때문이었든,아니면 다른 일 때문이었든 소설 
    속의 테러는 비판과 경고로  읽히지만 현실에 ? 그것은 일
    단 무모한 살인으로밖에 받아들여지지  않는다는 걸 왜 모르
    는가.

     그리고 무엇보다 이제 그  일로 자신에게 다가올 엄청난 일
    들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지난  겨울,T는 마지막으로 
    자신에게 <피셔킹>의 메시지를 남기고 그곳으로 나가고,어제 
    두번째 사건을 일으켰다.

     그가 잡히든 잡히지 않든,시간이  지나면 어떤 식으로든 사
    람들은 그것이 자신의 소설에 대한 모방 범죄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고,그렇게 되면 그  다음 자신과 자신의 작품에 대해 
    무차별하게 쏟아질 비난과 협박들......   

     미스터 T, 네가 나를 망치는구나.

     네가......


 소 제 목 : 연재 소설 필자의 사정으로 ...

   그러나 처음 사건 때보다는 차라리 담담한 기분이었다.

   지난 1월, 첫  사건이 실린 신문을 보았을  때는 하늘이 무너져내리는 
  기분이었다. 두번째 사건은 언제 터지든 그때 이미 예상하고 있던 일이
  었다. 그것 한  번으로 끝날 사건이 아니라는 건 이득지가  더 잘 알고 
  있었다.

   소설 속에서 그것은  매주 금요일 밤마다 발생했다.  그리고 T가 강남 
  아파트 앞 공터에서 노파를 살해한 사건  역시 1월 셋쨋주 금요일 밤이
  었다. 첫 사건이 터진 다음 한 주일 동안 그는 제대로 잠을 잘 수가 없
  었다. 그건 이득지의 아내 <안에  은주>도 마찬가지였다. 단지 서로 그 
  부분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지 않을 뿐이었다. 다시 그 이야기를 꺼내면 
  집안 구석구석이 공포와도 같은 분위기에 휩싸일 것이므로.

   다음달로 약속했던 원고들  또한 첫 사건이 실린  신문을 보던 날부터 
  한 줄도 나가지 못한 채 그대로  있었다. 그러면서도 그는 매일 사무실
  에 나와 있곤 했다.

   그러다 다음 주 금요일,아니 다음 주 토요일과 일요일 신문에 그런 기
  사가 없자 지난 일 주일간 처음으로  어떤 안도의 한숨 같은 것을 내쉬
  었다. 그리고 다  그 다음 주 금요일과 토요일을 기다렸고,또 그 다음 
  주 금요일과 토요일을 기다렸다.  엄습하는 불안 속에 기도하는 마음으
  로 그것을 기다렸다.

   첫 사건이 터지던 1월 하순부터 시작해 2월이 가는 동안 그가 한 일은 
  '다음 달엔'하고 철석같이 약속한  <문학세계>의 단편소설 원고 펑크와 
  이제 막 시작해 겨우 첫달치가 나간  <시사문화>의 연재소설 펑크였다. 
  필자의 사정으로 이득지의 연재소설 <우리들의 자본주의>는 이번 달 쉽
  니다. 그래,필자의 사정으로......

   "다음 달 또 그러면 정말 안 됩니다. 내   달아나요."

   <시사문화>의 김이형 부장이 말했고, 이득지는 다음 달엔 꼭 넣겠다고 
  했다. <문학세계>의 정은주  기자도 선생님 정말 누구  잘리는 것 보고 
  싶어서 그러는 거예요? 했다.

   "그런다고 제가 선생님 원고 안 받을 것 같아요?"

   첫 사건이 나기 전까지만 해도 둘 다 철석같이 약속했던 원고였다. 만
  약 원고를 넘기지 못하면 내 얼굴을  복사기에 박아 '이 사람이 원고를 
  펑크낸 사람'이라고 실어도 좋다고......

   그리고 첫 사건이  터졌고,3주일간 아무 일도 못한  채 집필실로 쓰는 
  사무실에  나와 있다가 2월 하순부터 다시 원고를 잡기 시작했다. T의 
  두번째 사건이 안 터져서가 아니라 왜  원고를 안 쓰냐는 두 군데 잡지
  사의 득달 같은 성화에 못 이겨......

   아니,그것이 아니었다. 억지로라도 원고를 잡은 건 두 달째 계속 그렇
  게 원고를 펑크냈을 때 나중에라도 그  원고 펑크의 원인이 T가 저지른 
  <<압구정동>>의 모방 범죄 때문이었음이  밝혀진 다음의 일이 두려워서
  였다. 

   이것봐. 지난해까지 이득지의 한 달 평균 원고량이 4,5백매였어. 많을 
  땐 6,7백매가 넘을 때도 있었고.  문단의 7대  柰』瑛 중 하나였다구. 
  술을 안 마시는 날보다 마시는 날이  더 많은데 이득지는 언제 그 원고
  를 다 쓰나 하는 게. 거기다  학교 한 군데 출강나가지,말로는 거기 나
  가서도 원고를 쓴다지만 어쨋거나 집필실 말고도 객원 식으로 일주일에 
  한이틀씩 나가봐야 하는 회사 한 군데 있지, 그러면서도 걔 원고 한 번 
  펑크낸 적이 없었어. 너희들 걔  언제 노트북 샀는지 알아? 그전까지는 
  큰 컴퓨터로 쓰다가 지난해 가을 위장이 빵꾸나 병원에 입원해 있을 때 
  거기서도 원고 쓸려고 새로 노트북 샀던 놈이라구.

   그런데 올해 들어오면서부터 이득지가  몇 군데 원고를 펑크내기 시작
  했지? 그리곤 지금까지 어디도 소설 발표한 데가 없지? 그게 왜 그랬겠
  어? 그 원고  귀신이. 이득지는 처음부터 알고  있었다는 얘기 아니야? 
  이미 사건 나기 전부터...... 생각해봐. 첫 사건이 터질 때까지는 누구
  도 그게 이득지의 <<압구정동>>을 보고 저지른 모방 범죄라는 걸 알 길 
  없는 것 아니냐구? 사건이 두 번 세  번 연속 터진 다음부터 원고를 안 
  쓰기 시작했다면 이득지도 뒤늦게 알고 그랬다지만...... 

   그게 싫어서였다. 그게......

   자신을 두고 그렇게 떠돌 말이. 그건  T가 잡히든 잡히지 않든 상관없
  이 그랬다.

   그래서 쓰기 싫은 원고를,나가지 않는 원고를 억지로 잡아 첫 사건 때
  문에 거의 완결 단계에서 손을  놓았던 <문학세계>의 단편 원고를 넘기
  고,지난 달 펑크를 낸 <시사문화>의 두번째 원고를 넘겼다.

   그러나 이젠 그것도 소용없는 일이 되고 말았다. 더 이상 자신을 속일 
  수도,또 누구를 속일 수도 없는 일이......

   이득지는 쓰던 원고와  신문을 그대로 두고 사무실을  나와 문을 걸었
  다. 그리고 차고  쪽으로 걸어가다 자동  키를  그대로 주머니에 넣고 
  거리 쪽으로 나왔다. 텔레비전에선 매일 같이 봄 소식을 전하지만 아직 
  서울 거리는 찬 바람이 불고 있었다.

   아내는 오늘 신문을 보았을까.

   아니,아직 그곳엔 신문에 배달되지  않았을지 모른다. 석간 신문은 배
  달 다니는 아이가 학교에서 돌아온 다음 늘 해 떨어진 다음에나 들어왔
  으니까.

   그런데. 이제 나는 어디로 가지......

   이제 나는......
   

 소 제 목 : 압구정동과 비압구정동의 이분법
     오래도록 이득지는 거리에 서 있었다.

     한강 건너로  달려가는 차량과 한강 건너에서  달려오는 차
    량......언제부터 서울은,우리의 서울은 그런 이분법을 가졌
    을까. 어쩌면  T는 내 소설이 아니라  서울의 그런 이분법을 
    따라 그곳으로 갔던 것인지도 모른다.

     그랜저와  프라이드의  이분법,강남과 강북의  이분법,아니 
    '압구정동'과 '비압구정동'의 이분법을 따라...... 

     그러나 사람들은 절대 그렇게 말하지 않을 것이다. 나 역시
    도 사람들 앞에 그렇게 말할 수가 없다. 그런 식으로 따지자
    면 이 세상에 T의 범행에 책임지지 않을 현상이 어디 있으며 
    공범이 아닌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또 스스로 그렇게 말하
    는 것처럼 자신의 작품과 자신의 말에 대한 무책임한 변명이 
    어디 있겠는가.

     그간의 과정에서  그가 무엇 때문에 화가  나 압구정동으로 
    나갈 생각을 했든,그게  그랜저의 프라이드 폭행 때문이었든 
    아니든 어쨌거나 그는 내 작품의  읽고 내 작품에 나오는 방
    식대로 그곳에 나가 사람을  살해했다. 거기에 내가 무슨 이
    유와 변명을 달 수 있겠는가.  그런 뜻으로 쓴 작품도,또 그
    런 뜻으로 해석될 작품도 아니라는 말을...... 

     그건 아무 사건도 일어나지 않았을 때,아니,자신이 처음 그 
    작품을 발표했을 때,신문사의  문화부 기자들이나 문예지 기
    자들이 인터뷰를 하는 과정에서  기사의 흥미를 더하기 위해 
    혹여 그렇게  물었을 때나 제발 그런  일이 생기기라도 하면 
    재밌겠다는 식으로 조금은 느긋한 표정으로 해줄 수 있는 대
    답일 뿐이었다. 정말 아무 사건도 일어나지 않았을 때......

     그러나 T가 그런 말을 했음에도 그가 그곳으로 테러를 나갈 
    결의를 다지고 나서 건 전화라는  걸 몰랐기 때문에 그 반대
    로 대답했던 것만은 아니었다.  어느 경우에나 그런 일이 발
    생하리라곤,더구나 전화까지 걸면서 그러리라곤 상상조차 하
    지 못했기 때문에 저쪽에서 자신의 작품에 대해 그가 찌르는 
    대로 충실하게 반응했던 것뿐이었다.

     처음엔, 자신이 그의 말에 그렇게 반응하고 그런 말을 했던 
    것을 후회했지만 사실은 그것이 중요한 게 아니었다. 처음부
    터 나가는 쪽으로 결심하고 한 전화라면 이쪽에서 어떤 말을 
    해도 그는 나가고 말았을  것이 . 자신이 아무리 나가지 말
    라고 해도 그는 나갔을 것이다.

     이미 사건은 한 달 반  사이를 두고 두 건이나 연이어 발생
    했고,이제 와  후회스러운 것은 T의 그런  의도를 왜 진작에 
    몰랐던가 하는 것이었다. 알았다면 나가지 말라는 말보다 더 
    확실하게 그의 발목을 잡을 말이 있었다. 

     최소한,그가 <피셔  킹>을 보았느냐고 물었을 때,  그 전에 
    그것을 보기만 했었더라도 일은 이렇게까지 발전하지 않았을 
    것이었다.

     그러면 그가  그것이 자신의 마지막 메시지라고  말하기 전 
     兼却【 먼저 어떤 식으로든  끼워넣어 쐐기를 박듯 이제까
    지 당신이 한  말을 녹음해두었노라고,그러니 나가려면 어디 
    마음대로 나가보라는 식으로 대차게 말하기만 했더라도 그는 
    감히 그곳으로 나가지 못했을 것이다. 정말 다른 건 다 그만
    두고 마지막 확인처럼 그 말만 했어도.

     뚜렷한 목적지 없이 걸음을 떼면서도 사무실에서 보고 나온 
    기사 제목이 어떤 혼란처럼 이득지의 머릿속을 흔들었다.

     <한밤중 부녀자 연쇄 피살
     범인 현장에 T자 메모 남겨>

     기사대로라면 두번째 피살자   같은 무희이긴 하지만 게이
    가 아닌 보통 여자였다.  그가 쓴 <<압구정동>> 속에서도 게
    이의 피살을  처음 알린 석간  신문 기자는 그  게이를 그냥 
    '무희'라고 기사를 썼다.  어쩌면 이번에도 대한일보 사회부 
    기자는 자신의 눈으로 확인한  대로 게이를 '강남 나이트 클
    럽 아파치의 전속 무희'라고 쓴 것인지도 모를 일이었다. 사
    체 감식반에  의해 그가 성전환 수술까지  받은 여장 남자인 
    것이 밝혀지기보다 먼저 석간  신문의 마감 시간이 다가왔으
    므로.

     신문은 그냥 무희라고 썼지  이득지는 틀림없이 게이일 거
    라고 생각했다. 노파를 살해한 첫 사건에서도 그랬고 이번에
    도 T는 가능한 범행 대상을 소설에 나오는 인물 쪽으로 맞추
    었을 것이었다. 첫 사건과  두번째 사건의 기간이 소설 속의 
    일 주일보다 많이 길어진 것도 그는 그렇게 해석했다.

     공중 전화 앞을  지나면서 구인서,유재룡,박형우,윤호녕 등 
    몇몇 친구의 얼굴이 떠올랐지만  어느 누구에게도 선뜻 전화
    를 걸 마음이 나지 않았다.

     이것 봐. 이득지는 내가 잘  알아. 지난해까지 걔 한 달 평
    균 
疵? 4,5백 매였어. 그러면서도 걔 어디 한군데 원고 
    펑크 낸 적이 없었어.  그런데 올해 들어오면서부터 몇 군데 
    원고를 펑크내기 시작했지?   <시사문화> 연재를 시작하면서
    부터 펑크를 내고. 그게 왜 그랬겠냐구......

     이 친구들도 나중에 다른 사람들 앞에 그런 소리를 하게 될
    까. 아마 나라면 그런 소리를 할 것이다.

     이것 봐. 구인서는 내가 잘 알아.

     그렇다면 그 친구들도 그런 소리를 할 것이다. 비난이나 폄
    하와는 또 따른 문단의 한 까십거리로. 아무리 해도 해도 물
    리지 않는. 

                                                            
 소 제 목 : 한때는 긍지였던 소설가라는 직업이
     그는 이제 자신이 무엇을 해야  하며,무엇을 할 수 있을 것
    이가를 생각했다.  한 달이나 두 달,혹은  먼 앞날의 일로서 
    걱정이 아니라 오늘 당장의 일로서 그랬다.

     누군가 내 소설을 읽고 두번째의 테러를 실행했다는 어이없
    는 충격 속에 사무실을 나오긴 했지만 지금으로선 어디로 걸
    음을 떼야 할지도 잘 생각나지  않는 오늘 당장의 일에 대하
    여. 숨을래야 숨을 곳도  없는,차라리 자신이 어디론가 멀리 
    사라지고 싶은 그 사건의 뒷감당에 대하여......

     사람들은 그런 지금의 내 심정을 모를 것이다. 모든 것으로
    부터,발을 딛고  선 이 땅으로부터마저도 영원히  돌아올 수 
    없는 곳으로 도피하고 싶은,그러나 그럴 수 없기에 더 큰 공
    포로 다가오는 이 불안감을. 어쩌면 이 세상에서 가장 큰 저
    울로도 달 수 없는 게 바로 지금 자신이 느끼는 전율과도 같
    은 두려움인지도 모른다.

     거리 한가운데서  이득지는 울고 싶은  심정이었다. 목놓아 
    우는 것으로 해결할 수 있는 일이라면 그는 자신의 체면조차 
    내팽개치고 싶었다.

     등단 이후 자신에겐 늘 긍지의 또다른 표현이었던  寗낡《
    는 직업이  결국은 자신의 정신적 자식인  소설을 통해 그런 
    사건을 몰고 온 것까지 모든 게 처음부터 예정되었던 운명과
    도 같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그러면서도 차라리 자포자기의 심정이라면 이렇게까지 불안
    하지는 않을  것이다.내 소설을 읽고 누군가  테러를 나갔으
    며,내 소설로 무고한 사람이 죽었다는 것으로부터 출발한 그 
    불안과 두려움은 이제 영원히 헤어날 수 없는 깊은 수렁처럼 
    그의 몸과 마음을 끌어들였다. 

     사람들은 말할 것이다. 지금이라도  신고를 하는 게  玲굼 
    방법일 것이라고. 그것이 지금이라도 그 죄를 줄이고 무고한 
    희생자를 줄일 수 있는 방법이라고......

     그의 마음 한구석도 자신에게 타이르듯 그렇게 말하고 있었
    다. 그러나 그 마음 속의 또다른 자신은 이렇게 말하고 있었
    다. 너는 이미 신고할 시기를 놓치고 말았다고......

     사건의 결과를 놓고 보면  꼭 신고를 했어야 할 일이었다면 
    그 신고는 처음 T가 그런  전화를 걸어왔을 때 했어야 했다. 
    그가 자신의 마지막 메시지라면서  <피셔 킹>을 보라고 했을 
    때,아니 그의 마지막 메시지로 <피셔 킹>을 보고 난 다음 바
    로......

     그러나 그건 결과가 이렇게  된 다음의 일이지 당시로는 그
    것이 아니었다. 지금은 그것이 가장 뼈아픈 후회처럼 느껴지
    지만 당시로선  그것처럼 쓸데없는 걱정이며  웃음거리가 될 
    일이 없었다. 어떤 일에나 과정보다 결과가 중요하게 느껴지
    므로 이미 두번째의 사건까지 발생하고 난 다음 뒤늦은 후회
    처럼 그렇게 말할 수는 있다  해도 당시에 내려할 판단은 당
    시의 상황에 따르지 않을 수 없었다.

     그것은 첫 사건이 발생했을  때에도 마 弼≠熾눼. 이미 두
    번째 사건이 발생한 다음에  생각하기엔 그때에 신고를 하는 
    것도 늦지  않았다고 말할 수 있겠지만,그땐  그때대로 이미 
    한 번 그런 기회를 놓친 다음이었고,또 아내 역시 완강한 태
    도로 그의 목소리가 담긴 테이프를 없애버리지 않았던가. 아
    내에겐 무엇보다 그 일이 중요했으므로. 그리고 그도 자신이 
    T에게 지금 당장 압구정동으로 테러를 나가라는 식으로 말한 
    증거를 아울러 공개하는 것이 두려웠으므로......

     지나온 과정 하나하나는 '그때  이렇게 했더라면 사건을 막


 소 제 목 : 그냥 무용수가 아니라 게이가 아니냐고
     거리 한가운데  그는 걸음을 옮기거나 모든  사람이 자기를 
    쳐다보는 것  같았다. 저 사람이 <<압구정>>동을  쓴 소설가 
    이득지다. 저 사람이. 저 사람이 바로 자기 독자에게 압구정
    동으로 테러를 나가라고 말한 이득지다......

     그래서 고개를 숙이면 또  모든 사람들이 고개를 숙이고 있
    는 한 남자만을 쳐다보는 것  같았다. 찬 바람이 온 몸을 향
    해 불어와도  이미 더 들어찰 자리  없는 불안과 두려움으로 
    그는 숨이 막혔다.

     그러나 도망친다고  도망쳐질 일이 아니었다.  또 정면으로 
    맞서 나설 일 또한  아니었다. 그러면서도 그는 이제 자신이 
    이 사건 한가운데로 뛰어들지 않을 수 없다는 생각으로 조금 
    전 지나쳐왔던 공중전화 부스로 들어갔다. 우선 사건 성격부
    터 알아야 할 필요가 있었다.

     그는 114로 대한일보의 전화를 묻고,다시 그곳에 전화를 걸
    어 그 기사를 쓴 김태형 기자를 찾았다.

     "여보세요,신문 독잡니다. "

     "무슨 일 때문인지요?"

     "오늘 신문에 난 부녀자 연쇄  살해 사건 때문에 전화를 걸
    었습니다."

     "제봅니까? 말씀하세요."

     "그런 건 아니고...... 혹시,그 피살자가 그냥 무용수가 아
    니라 게이가 아닌가 해서요."

     "예?"

     "게이 말입니다. 성전환수술을 받은 남장 여자......"

     "아닙니다. 그냥  여자였어요. 우리가 직접  확인하고 사체 
    사진도 찍었는데......"

     그래도 믿을 수 없었다.  피살자가 게이인지 아닌지는 눈으
    로 확인하고 사진으로 확인할 일이 아니었다.

     그는 다시 114로 강남  경찰서의 전화 번호를 묻고, 번호판
    을 누르는 동안 두 번이나 마음을 진정해가며 가까스로 번호
    판을 누그 ,떨리는 목소리로 그곳 강력계의 젊은 형사와 통
    화를 했다. 누구냐고 물으면  그런 곳에 나가는 가족이 있는 
    사람이라고 대답할 참이었다. 그러나 형사는 그의 전화에 대
    해 별 미친놈이 다 있다는 투로 대꾸했다.

     다른 전화에서 그런 소리를 들었다면 불쾌했을 것이나 그는 
    진심에서 우러나온 마음으로  '감사합니다'하고 전화를 끊었
    다. 자신으로선 모험처럼 건  전화에 대해 형사가 전혀 신경
    쓰지 않는 태도도 그랬고,피살자가 작품에 나오는 게이가 아
    니라는 말도  그랬다. 전화를 거는 동안  온몸이 후들거리는 
    불안과 두려움  속에서도 그것만으로도 왠지  다행이다 싶은 
    마음이 들었다.

     단순히 두번째 피살자가 소설  속에 나오는 것과 같은 게이
    였을 때와 아닐 때 그 사건이 자신과 자신의 작품에 미칠 영
    향의 차이 때문만은 아니었다. 단지 보다 일찍 알게 되고 늦
    게 알게 되는 차이일 뿐  어느 경우에나 그것이 자신의 소설 
    <<압구정동>>을 읽고 그것을 모방하여 범행을 저지른 것이란 
    것이 밝혀지는 건 시간 문제였다. 

     그가 느낀  다행함은 또다른 데에  있었다. <<압구 ㅅ>>을 
    쓰는 동안 그가 작품 속에 등장시키며 진심으로 가슴 아파했
    던 인물이 성도착증에 걸린 노파와 남자로 태어나 여자로 살
    아가는 게이 강혜리의 슬픈 삶이었다.



 소 제 목 : 아담스미스와 섹스시장
     정말 그가 소설로 그 이야기를  쓰지 않고 T처럼 직접 테러
    를 나갔다 해도 그 두  인물만은 테러 대상에서 제외했을 것
    이었다. 

     그럼에도 그가  작품 속에 게이를  등장시켰던 것은,그리고 
    얼굴 없는 테러리스트로 하여금 그 게이의 목을 조르게 했던 
    것은 <자본>이 인간의 성에  대해서도 얼마나 집요하게 그것
    을 상품화해 나가는가 하는 것을 하나의 극단적인 예로 보여
    주기 위해서였다.

     아는가 미스터 T,너는......

     그 작품에서 내가 왜 게이를 등장시켰는지......

     [현재 국내의 성전환증환자(일명 게이)의 수는 대략 2천 명 
    정도로 그 가운데 5백  명 정도가 정상적인 수술이나 '야매'
    수술을 받은 것으로 추정되는데,80년대 이후 고도산업사회로
    의 진행 이후 발병자와 수술자  모 급격히 늘어나고 있는 추
    세로 이른바 <게이 바>의 출현  등 점차 사회 문제화하고 있
    다.

     아마 그것은 오늘날 우리가  현대 자본주의 한 특징을 이루
    고 있는 고도 산업산회로의 이행 과정에서 개인의 다양한 욕
    구 추구와 서구 성문화의 무분별한 수입으로 기존의 성 기치
    관이나 성 도덕관,성 의식구조의 급격한 변화를 초래하고 있
    기 때문이 아닌가 보여진다.

     여성이 가지고 있는 인간 고유의 아름다움까지 상품화될 수 
    있는 자본주의  구조 속에 성의  상품화만큼 원초적이면서도 
    끝간 데 없는 것이 없을 것이며,다양한 형태의 성 욕구와 성
    의 상품화 수요 속에 게이 역시 기이한 성적 특성 자체로 일
    부의 수요에 대해서는  슬프고도 매력적인(?) 구매력을 갖는
    다는 점에서  그 생존 입지는 이미  튼튼하게 확보되어 있는 
    것이다.

     일찍이 성의 영혼이 도치된  강혜리의 삶은 어느 한구석 슬
    프지 않고 안타깝지 않은  구석이 없다. 그러나 강혜리의 그 
    안타까움 역시  영화 '브룩크린으로 가는  마지막 비상구'에 
    나오는 게이의 기형적인 삶의  터전처럼 부패한 자본주의 체
    제가 불량품처럼 생산해놓은 어느  한 무리들에겐 더없는 희
    소 가치의 상품이다. 여자가  갖는 본래적 미와 성적 수단이 
    자본의 향락적 부패와 타락  앞에 간단없이 상품화되는 그의 
    기이한 성적 수단 또한 나이트 클럽 무희로 상품화되고 말았
    다.

     일찍이 미국에 세이라는 경제학자가 있어 공급은 스스로 수
    요를 창조한다고 했다.  그의 그릇된(그리고 부정된) 이론을 
    적용하면 게이가 호모를 만들고 변태를 만든다. 그러나 아니
    다. 공급은 스스로 수요를  창조하지 않는다. 자본주의의 향
    락적 부패와 타락이 성의 다양한 욕구를 부추기고 모두 성적 
    수단의 상품화  과정에서 일부 대책없는  불량품으로 호모와 
    변태를 생산하다. 그리고 강한 흡입력으로 그 불량품들의 욕
    구 수요에 필요한 왜곡된 성(게이)의 상품화를 부추긴다. 아
    담 스미스의 '보이지 않는  손'은 섹스 사장에 ? 존재하기 
    마련이다. 적어도 이땅의 이태원과 압구정동의 일부 섹스 시
    장은 그러하다. 아니,성 윤리에 관해 이땅의 천민자본주의가 
    가리키는 서울의 현재 시간은 그러하다.]

     바로 그 이야기를 하기  위해 강혜리라는 이름의 게이를 등
    장시켰고,적의보다는 어떤  안타까움으로 그의  목을 조르게 
    했던 것이었다.

     만약 T가  소설 속에서처럼 끝까지 어느  한 게이를 찾아내 
    그의 목을 졸랐다면 자신은  두 번 그들을 죽이는 셈이었다. 
    번호판을 누르는 손과 온몸이  떨리는 불안과 두려  속에서
    도 호랑이 굴에 손을  밀어넣듯 강남서(江南署)로 전화를 걸
    었던 것도 그것 때문이었는지 모른다.

     그러면서 또 한편으로는 이제 필연적으로 세번째 사건이 발
    생하게 될 수밖에 없으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두번째 사건의 
    피살자가  게이라면,사람들은 이내  T의 범행에서  <<압구정
    동>> 모방을 읽어낼 수 있겠지만 지금 사건으로는 아직 그럴 
    단계가  아니었다.  그가  남긴  단순한  T자  메모  하나로
    는......

     아직 이득지로선 그  메모지가 자신의 소설 <<압구정동>>의 
      부분을 찢어
 것이라는 것을 알 길이 없었다. 



 소 제 목 : 저는 은평구 신사동에 삽니다

   신문사와 경찰서,두 군데 전화를 걸고  나서 이득지는 다시 아내의 얼
  굴을 떠올렸다. 아직 아내는 모를 것이다. 지금 자신에게 어떤 일이 벌
  어졌는지. 지금 자신이 어떤 절망과도 같은 두려움과 불안에 떨고 있는
  지......

   그러나 그는 알고 있었다. 그런  아내에게 이 두번째의 사건이 얼마나 
  큰 두려움과 불안이 될지. 사무실에서도, 그리고 밖에 나와서도 그래서 
  전화를 하지 못하고 있었다.

   정말 아내가 끝까지 이 일을 모를 수 있다면......

   이미 큰 일을 당한 다음의 어떤 절박감 속에 느끼는 희망  때로는 그
  렇게 작고 터무니 없는 것이었다.  T가 압구정동으로 나갔던 게 꿈이었
  으면이 아니라 아내가 이 일을 끝까지  모를 수 있다면 하는 것이 보다 
  절실해지는.....

   그가 감춘다고 감춰질 일이 아니었다.  그가 아무리 말을 하지 않는다
  고 해도 저녁이면  아내는 신문을 볼 것이고,또  텔레비전을 볼 것이었
  다. 그가 집필실로 쓰는 사무실에 나와  그랬듯 아내도 불안과 초조 속
  에 지금쯤 석간 신문을 기다라고 있을 것이었다.

   또 그랬을 때 아내가 어떤 충격을 받으리라는 것도 그는 알고 있었다. 
  차라리 남편의 입을 통해 듣는 게 낫다는 것도,또 그렇게 하는 것이 스
  스로에게도 적지 않은  위로가 될 것이라는 것도  알고 있었다. 전에도 
  아내는 새벽에 일어나 이득지 스스로 없애지 못한 테이프를 태워버리지 
  않았던가. 그는 아내가 이 세상의 모든 아내들처럼 때로 자기보다 강하
  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는 버스 정류장 가판대에서 다시 신문을 샀다. 그리고 그 앞에서 바
  로 택시를 타고 흔들리는 자동차  안에서 아까 보았던 신문을 펼쳐들었
  다.

   이 범행으로 그가 전하고자 하는 의미는 무엇인가.

   그는 <압구정동>에 대하여 어떤 형태의 분노와 적의를 가지고 있는 것
  일까.

   그리고 자신의 전화를 그렇게 받은 나에 대해서는......

   단지 <그랜저>의 <프라이드>에 대한  폭행과 자신의 전화를 그런 식으
  로 받은 한 작가에 대한 분풀이 식의 테러라면 그것처럼 위험하고 무모
  한 일이 어디 있겠는가. 어떤 식으로든 <피셔 킹>은 해피앤딩으로 끝났
  지만 이건 그렇게 끝날 일이 아니었다.  영화란 늘 의도하고자 하는 줄
  거리만 남을 뿐 한 인물을 둘러싼 사회와 주위의 정작 핵심적인 변수와 
  상황들은 화면 밖으로 흐르기 마련이었다.   

   "뭐 재미있는 거라도 났오?"

   서대문 로터리에 이르러 좌회전 신호를 기다리는 동안 운전 기사가 물
  었다. 룸밀러에 비친 기사의 얼굴은 마흔 다섯쯤 되는 것처럼 보였다.

   "뭐 별로 없습니다."

   이득지는 짧게 대답했다.

   그러다 그는 그  사건에 대한 운전 기사의 반응을  알고 싶었다. 다른 
  사람들은 그 사건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압구정동에서 부녀자 연쇄 살인 사건이 발생했다는 것 말고는....."

   "그건 아까  뉴스에서도 잠깐 나왔는데,지난번엔 일흔  가까운 노인을 
                                                                                                                                                                                                                                                                                                                                                                                                                                                                                                                              藪. 손님도 신문
  을 봤으니 알 테고,그거 어떻게 생각하슈?"


 소 제 목 : 죽여야 할 놈이 쌔고 쌘 데가 거긴데

   "어떻게 생각하다니요?"

   그는 이야기가 된다 싶었다.

   "그 사건 말이오."

   "저야 뭐 압니까,거기 사는 것도 아니고......"

   "이게 손님한테 할 얘긴지는 모르겠지만  난 아까 라디오로 그거 들으
  면서 이런 생각을 했수. 막말로 닥치는  대로 사람을 죽이러 나섰든 아
  니면 여자만 골라 죽이러 나섰든  이왕 그럴 작정으로 강남으로 갔다면 
  왜 고작 그런 사람들만 죽였느냐 이  애기오. 그런 사람들 아니고도 죽
  여야 할 인간들이 쌔고 쌘 데가 바로 거긴데 말이지......"

   그러면서 운전 기사는 손에  岵  주어 1단 기어를 밀어넣었다간 이내 
  뒤로 뽑았다.

   "......"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안 그렇소?"

   기사가 다시 흘끔 룸밀러를 바라보고 물었다. 부분적 표정이긴 하지만 
  무언가 동의를 구한다는 얼굴이었다. 아니,내가 보기에 당신도 그리 잘 
  사는 것 같지 않은데 왜 동의하지 않느냐는 얼굴이었는지도 모른다.

   "죽이러 강남으로 간 건지 아니면  거기 사는 사람이 그랬는지도 모르
  잖습니까? 아직은......"

   "거기 사는 놈이 그랬든 아니면 다른  데 사는 놈이 거기로 가서 그랬
  든 이왕 그럴 바에는 말이지요."

   "예, 뭐 좀 그렇지요. 불쌍한 사람들만......"

   "우린 직업이 이래놔 별의별 사람을  다 만나지만 정말 오늘 아침에는 
  되게 열받데요. 내 오늘 아침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애기할 테니 들어
  보겠소?"

   "예. 말씀하세요."

   "내 먼저 하나 물어봅시다. 손님은 차 없지요?"

   "예?"

   "차요,자가용 말이오."

   "아,예,있긴 있습니다. 잘 안 끌고 다녀서 그렇지......"

   "아이구,미안하게 됐소. 나는 집에 간다는 양반이 택시를 타길래 차가 
  없는 줄 알고 그랬더니......"

   "미안할 것까지 뭐가 있겠습니까.차가 있고 없고를 물을 걸 가지고."

   "그럼 하나만 더 물어봅시다. 손님 가지고 있는 차종이 뭐요?"

   "캐피탈입니다."

   "내가 이걸 왜 묻는가 하니,오늘 아침에 말이오. 여의도에서 압구정동 
  가는 손님을 태워서 거기 갔다가,거기서 다시 시내로 들어오는 길에 나
  이 한 마흔일고여덟쯤 되는 여편네 하나를 태워 시청 쪽으로 오는데,이 
  여편네가 차를 타자마자 뒤에서 자꾸 말을 시키면서 묻는 거요. 그러면
  서 지 딸이 올해 대학엘 들어갔느니 어쨌느니 자랑을 해쌌길래,그래 니
  는 뒤에서 지껄여라 나는 앞만 보고 운전하겠다 하고 오는데,이 여편네
  가 뭐라는지 아슈?"

   "뭐라는데요?"

   "들어보슈. 내 더러워서......나보고 운전을  몇 년 했느냐고 묻는 거
  요. 그래서 군대 갔다온 다음부터 운전을 했으니 한 20년 되는 것 같다
  고 했더니,그럼 차에 대해서 잘  알겠다고 하길래 그렇다고 했지요. 그
  랬더니 이 년이 하는 말이 올해  대학에 들어간 자기 딸이 학교가 멀어
  서 다니기 힘들어 하는데 차를 한 대 사 줘야겠다는 거요. 운전 면허는 
  학교 시험 끝나고 나서 땄다고 그러고.   瀏  庸 나보고 어떤 차를 사 
  줬으면 좋겠냐는 거요."

   "그래서요?"

   "내가 택시 영업을 하긴 하지만 학교가  멀고 하면 학생 애들이 차 끌
  고다니는 거 가지고 뭐라지는 않아요. 걔들 차 끌고다니지 않아도 서울 
  길 어느 곳이나  늘 막히는 거고,그럴 수도 있다고  보는 거지. 그런데 
  뒤에 앉은 여자 하는 폼이 티코는  사 주라고 했다간 사람을 어떻게 보
  느냐고 할 것 같고,그래서 학교 다니는 애들이면 프라이드나 엑셀이 괜
  찮다고 얘기를 하려다가 그것도 이 여자  하는 폼이 아닌 것 같아서 내 
  딴엔 한 단계 더 높혀 세피아나 엘란트라가 무난할 것 같다고 했수. 여
  자 아이고 아직 운전이 서투르고 할  테니 오토로 하든 뭐로 하든..... 
  그랬더니 이 년이 말이요,내 기가 막혀서......"

   그러면서 기사는 운전석 쪽 창문을  내리고 칵,하고 거리에 침을 뱉았
  다.

              
 소 제 목 : 이거 또 어떤 형태의 적개심일까

   "뭐라고 그러는데요?"

   "내 더러워서 말이 다 잘 안  나오네 정말...... 이 년이 말이요,암만 
  애들이 타고 다니는 거라도 그렇지 그것도 차냐는 거요,그것도. 엘란트
  라나 세피아가 말이오. 그래서 내 그 년 말하는 거 더러워도 참고 물어
  봤우. 그럼 뭘로 사 줄 생각이냐고. 그랬더니 최소한 소나타는 돼야 차 
  소리 들을 수 있는 거 아니냐는  거라,이 년이. 그 소리를 들으니 속에
  서 성질이 욱하고  올라오는데 내 거기서 조금만 더  욱했으면 오던 길 
  도로 돌아 그대로 그 년하고 한강에 뛰어들었을 거요."

   목소리로는 흥분했지만 부분적으로 보이는  얼굴로는 그 흥분이 잘 나
  타나지 않았다. 그는  기사와 눈이 마주치자 슬몃  창문 밖으로 눈길을 
  주었다.

   "그런데 내가 더 기분나쁜 건 이  년이 내가 운전을 하니 나한테 어떤 
  차가 좋은지 물으려 했던 게 아니라 그걸 자랑하고 싶어 떠들었다 이거
  요. 그런 년이 우리 같은 택시 기사 말 듣고 차 사 줄 리도 없는 거고,
  없이 사는 사람 앞에서 한 번 그렇게 폼을 재 보겠다는 건데......"

   "그냥 말로 한 번  그래 봤던 거겠지요. 사 줄 땐  다른 걸 사 주더라
  도."

                                                                                                                                                                                                                                                                                                                                                                                                                                                                                                                              했수. 이왕 
  죽일 거면 그런 사람들 죽일 게  아니라 아까 그런 년들 하루에 댓년씩 
  365일 죽여도 잘 죽였다는 소리를 들을 거라구 말이오."

   이건 또 어떤 형태의 적의와 적개심일까?

   또 미스터 T의  적의와 적개심은 이것과 또 무엇이  같고 무엇이 다를 
  것인가.

   "내 말이 틀렸소?"

   그가 아무 말을 않자 다시 녹번역  앞에서 죄회전 신호를 받으며 기사
  가 물었다.

   "아뇨,더러 그런 생각이 들 때도 있겠지요. 더러는......"

   "이봐요,젊은  양반.  댁이  잘 몰라서  그렇지  더러가  아니오,더러
                                                                                                                                                                                                                                                                                                                                                                                                                                                                                                                              생각이 들 때도 한 두번이 아니고...... 그런데 뭘 하슈?"

   "예?"

   자기 말에 반응이 시원찮다는 뜻일까,거울에 비친 사내의 눈꼬리가 조
  금은 위로 올라갔다 싶었다.

   "댁에 직업 말이오?"

   "아,예......"

   그는 선뜻 대답할 직업이 떠오르지 않았다.

   입고 있는 차림  때문에 회사원이라고 말할 수도  없고,그렇다고 글을 
  쓰는 사람이라고는 더 말하고 싶지 않았다.

   "그냥 작은 가게 하나 가지고 장사하고 있습니다."

   "무슨 장사를 하는지도 모르고,또 얼마나 잘 되는 장사를 하는지도 모
  르 嗤 젊은 사람이 세상 돌아가는 꼴은  알고 살아야지 안 그렇수? 암
  만 장사가 밸을 빼던지고 하는  거라지만 더러운 것보고는 더럽다고 그
  럴 줄도 알고......"

   어쩌면 그가 몸이 왜소한데다 뒷좌석 한구석에 신문을 들고 어딘지 모
  르게 불안한 얼굴로  앉아 있었기 때문에 더 그런  소리를 했는지 모른
  다.

   다른 때 같으면 아파트 단지 안으로  들어가자고 했을 것이나 그는 아
  파트로 올라가는 언덕  아래에서 차를 세웠다. 설사  이 세상 사람들이 
  모두 그렇게 생각한다 해도 현재로선  자기에게 어떤 위로도 되지 않을 
  소리였다.

   만약 T가 자신의 소설 대로가 아니라 처음부터 저 기사의 말처럼 범행
  을 저질러 나갔다면 그때는 어떻게 되었을까? 

   자신이 나서든 안 나서든 그동안  붙잡히지만 않는다면 T는 세번째 범
  행에 나설 것이었다. 그렇게  되면 범행 대상의 에스컬레이트가 이루어
  질 것이고,그때에 저 기사는 다른 손님을  상대로 박수를 치며 그 사건
  을 이야기할 것인가.
    
                                   
 소 제 목 : <안에 은주>는 그의 얼굴을 보고

   언덕길을 올라 집으로 들어오자 현관  문이 걸려 있었다. 초인종을 두
  번 눌러도 안에서 대꾸가 없었다.

   어디로 갔지?

   그는 주머니에서 자동차  키와 함께 달고 다니는  아파트 현관 열쇠로 
  문을 따고 안으로 들어갔다.

   그러자 잠시 후 밖에 나갔던 아내가  돌아와 그가 들어올 때 열어놓은 
  문의 열쇠 구멍에 열쇠를 맞추는 소리가 들렸다.

   "열렸어."

   조금은 큰 소리로 그가 현관 쪽에 대고 말했다.

   "언제 들어왔어요?"

   아내가 한손엔 물건이 든 수퍼마켓 비닐 봉지를 들고 다른 한 손엔 그
  대로 열쇠꾸러미를 든 채 아이를 앞세우고 들어오며 물었다.

   "조금 전에....."

   "오늘 원고 쓸 거 많아서 늦을 거라고 그랬잖아요."

   "응,그냥 들어왔어."

   "무슨 일 있었어요?"

   아내의 얼굴이 금방 훅,하고 먹구름이 덮친 자리같이 그늘이 졌다.

   "......"

   그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러고 보니 아내보다 먼저 들어와서
  도 그대로 손에 신문을 들고 있었다.

   "훈아,넌 슬비 집에  가서 슬비하고 놀고 있어. 밖에  나가 놀지 말고 
  그냥 슬비  집에서. 이따가 엄마가 부르러  갈 테니까 밖에  나가면 안 
  돼."

   "알았어요."

   아이가 왠 일로 엄마가 나를 나가 놀라고 다 하지,하는 얼굴로 밖으로 
  나가자 아내는 문을 걸고 거실로 들어왔다.

   "그 사람이 또 일을 저질렀어요?"

   "......그래."

   "게이인가요?"

   "아니."

   짧은 순간이긴 하지만 일말의 다행스러움 같은 것이 언뜻 아내의 얼굴
  에 비쳤다. 그러나 사무실에서 처음  신문을 보고 나서,또 신문사와 경
  찰서에 전화를 걸고 나서 그가  느꼈던 다행스러움과는 또 다른 형태의 
  다행스러움임을 그는 알고 있었다. 

   "누구에요?"

   "그냥 무용수야. 게이는 아니고."

   그는 아내에게 들고 있던 신문을  내밀었다. 아내가 그것을 받아 펼쳤
  다.

   "제일 뒤에."

   그는 서재로 들어왔다. 이제 우리는  어떻게 한다...... 그는 서가 한
  구운데 꽂혀 있는 자신이 쓴 책들을 꺼내 하나 하나 손바닥으로 그것을 
  쓰다듬어보았다. 너희들을 세상에 내보낼 때는 내게도 큰 기쁨었지. 그
  러나 이제 그 중 한 권은 세상에 내놓지 말아야 할 책을 세상에 내놓았
  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신이 어떤 의도로 그것을 썼든 그 책은 한 극렬 
  독자의 테러 지침서가 되고 말았다.

   미스터 T,당신은 꼭 그렇게 했어야만 했는가?

   나 역시 참을  수 없는 분노로 이 작품을  썼지만,당신마저 그 분노를 
  꼭 그런 식으로 표현했어야 했는가......

   그런 식의 분노라면 이 세상에 살아남을 사람이 얼마나 되겠는가.

   그리고 그것이 현실에서도 최선의 해결 방법이라고 생각했는가.

   오며 나는 당신과 같은 생각의 운전 기사를 만났다. 하지만 어디 그런 
  생각을 하는 사람이 그 운전 기사  한 사람뿐이겠는가. 세상 사람들 절
  반 이상은 그런 생각을 한다.  아니,절반  아니라 일부를 제외한 나머
  지 모두 그런 생각을 한다. 나 역시도 그런 생각으로 이 소설을 썼다.

   그러나 현실 속에 그것을 실행할  일이 있고,실행하지 않을 일이 일이 
  있는 것 아닌가.  소설로 쓸 일이 있고, 또 소설로  써야 할 내용이 있
  고,그리고 소설에서 느껴야 할 내용이 따로 있는 것 아닌가.

                                    
 소 제 목 : 포르노 비디오를 보는 남편에게 은주는

   "게이일지도 모르잖아요."

   그가 손에 든 <<압구정동>> 책을 망연히 내려보고 있을 때 등 뒤로 아
  내가 다가와 말했다.

   "아니야,확인해봤어."

   그는 돌아선 채 책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확인이라니요?"

   "신문사와 경찰서에 전화를 걸었어."

   "경찰서요?"

   "그래.  책  얘기는  하지  않고,피살된  무용수가  게이가  아니냐고
  만......"

   "사무실에서요?"

   "아니,밖에 나와 공중전화로......"

   "돌아서서 날 봐요."

   침착한 목소리로 아내가  말했다. 그는 발밑에 떨어뜨리듯  책을 놓고 
  아내 쪽을 향해 돌아섰다. 아내가 다가와  그가 떨어뜨린 책을 집어 가
  슴에 안았다.

   "그렇게 막 놓지 말아요. 내겐 당신이  쓴 책 어느 것도 소중해요. 그
  리고 이제 이 책은 내 몸처럼  소중하고요. 아니요,내 몸보다 더요. 당
  신 몸처럼......"

   전에 아내는 그렇게 말하지 않았다.

   현실적으로 그 책이 가계에 많은  도움을 주고,또 어딜 가서도 제목만 
  대면 알 만큼 남편의 출세작처럼 불리던 작품이긴 하지만,아내는 그 책
  을 어느 누구에게도 자기 손으로 건넨 적이 없었다.

   처음 그  徘걋 어느 계간 문예지를  통해 전작으로 발표되었을 때 아
  내는 그에게 조금은 실망한 듯한 얼굴로 이렇게 말했다.

   "난 당신이 왜  이런 작품을 썼는지 모르겠어요.  지금까지 당신이 쓴 
  작품과도 전혀 다르고......"

   "그 작품이 어때서?"

   그도 얼마간 기분이 나빠진 얼굴로 되물었다.

   "모르겠어요,나도. 난 당신이 이런 작품은  쓰지 않는 작가인 줄 알았
  어요."

   무슨 뜻으로 하는 말인지 모르지  않았다. 첫 피살자인 노파와 두번째 
  피살자인 게이에 대한  이야기를 쓰며 그는 그 안에  포르노 테이프 한 
  부분을 그대로 따 실었다. 또 작품이  발표될 때까지 전혀 그것을 모르
  고 있던 아내도 아니었다.

   그 부분을 쓸 때 그는 청계천에  나가 웃돈을 주고 치치올리나가 주연
  한 포르노 테이프 원판을 사왔었다. 그리고  그 부분을 쓰던 중 거실에 
  있는 텔레비전과 비디오 세트를 서재에 들여놓고 테이프를 비디오 테크
  에 꽂은 다음 저만치 물러나 앉아  그 부분의 성애를 화면에 비치는 대
  로 취재 수첩에 옮겨 적었다.

   그 무렵 그는 거의 매일 서너 시가 되어야 잠들었고,때로는 그런 남편
  을 아내가 일부러 건너와 이제 그만  자라고 말하던 날도 많았다. 취재 
  수첩에 비디오 테이프를 따던 날도 그랬다.

   방문을 열었을 때,남편이 그 시간까지 퀭한 눈으로 잠도 자지 않고 포
  르노 테이프를 보며 그것을 노트에 옮겨  적는 모습을 보았을 때 이 세
  상의 다른 여자들은 그런 남편에게  무슨 말을 했을까. 아니,그런 남편
  을 어떻게 생각했을까.

   정면으로 보이는 화면 안에서는  전나의 여자와 남자가 괴상한 신음을 
  지르며 있는대로 몸을 노출시키며  그런 짓을 하고 있고,그 화면으로부
  터 저만치 물러난 곳에 남편이란   泳汰 너무도 진지한 얼굴로 그것을 
  그대로 받아적는 모습을 보았을 때......

   "피곤한데 그만 일하고 주무세요."

   그때 아내는,<안에 은주>는 그렇게 말했다.

   그러던 아내가 막상 작품이 나왔을 때,성도착증에 걸린 노파와 게이의 
  헝클어진 삶과 그 과정을 설명하기 위해  쓴 그 부분을 읽곤 저으기 실
  망한 얼굴로 당신 작품에 왜  이런 부분까지 나와야 하는지 모르겠다고 
  말하던 것이었다.

   "잘못된 부분도 없고,잘못 읽힐 부분도 없어."

   "알아요. 알지만 당신 작품이기 때문에 그 부분이 싫은 거에요."

   이후,한동안 각 신문의 문화면마다 한  번씩 돌아가며 그 작품을 다루
  고 뒤어어 실린 문예지들의 작품 평들도 아내의 생각과는 거리가 먼 것
  이었지만(한 평론가는 그것이 계몽주의적  소설이라고 말할 만큼) 아내
  의 생각은 애초의 생각에서 조금도 벗어나지 않았다.

   "나는 내 남편이 작품 속에 그런 애기를 썼다는 게 싫어요."

   이제까지 그 작품에 대하여 가장 집요하게 악평을 하고 싫어했던 사람
  이 바로 아내일지도 몰랐다. 세상 사람들이  다 그 작품을 좋다고 해도 
  나만은 결코 좋아할 수도 없고,좋아 痴層 않는다는 태도로.

   그래서 그녀는 자신이 남편의 작품을 전해야  할 일이 있으면 꼭 다른 
  책으로 전하곤 했다. 그리고 친구라든가 아는 사람들이 집을 방문할 때
  에도 행여 그  책을 달랄까봐 서가 가운데 자리에 꽂혀  있는 한 권(이 
  책을 내가 나에게 바친다,고 남편이  자필 사인한 것)말고는 모두 제일 
  아랫칸 구석자리에 책 등이 뒤로 가게 꽂아 두었다.

   그런 아내가 남편이 떨어뜨린 책을  집어 처음으로 그렇게 제 몸처럼,
  아니 아내의 말대로 '당신 몸처럼' 가슴에 안은 것이었다.
       
             
 소 제 목 : 안아줘요. 나좀..
     "안아 줘요. 나 좀......"

     아내는 그의 손을 잡아 자기  가슴 앞으로 끌었다. 그는 선 
    채로 조금은 어정쩡 한 자세로  책을 들고 있는 아내를 안았
    다. 그의 몸과 아내의 몸 사이에 책이 있었다. 책을 잡은 손
    을 놓고 아내도 그의 몸을 마주 안았다.

     "미안해. 처음부터 당신 말을 들었어야 했는데. 처음 그 놈
    이 그런 메시지를 남길 때부터."

     "그건 나도 그랬잖아요. 첫 사건나고 나서 당신이 신고하겠
    다는 걸 내가 테이프까지 다 없애 버리고......"

     "이젠 나도 어떻게 해야 할  모르겠어. 그를 내 손으로 찾
    아내고 싶어도 어떻게 할 방법이 있는 것도 아니고."

     "나도 그런 생각을 해요. 그 사람이 처음 그런 전화를 했을 
    때 내가 신고를 하자고 했지만 그땐 그때대로 당신이 옳았어
    요. 그리고 첫 사건이 터졌을 때 나로서도 그렇게밖에 할 수
    가 없었구요.  나한테는 이 세상에서 당신이  제일 중요하니
    까. 그리고 그건 지금도 마찬가지고요."

     아내가 먼저 그의  몸에서 손을 풀고 가슴  앞의 책을 잡았
    다. 그도 조심스럽게 아내의 몸을 안았던 손을 풀었다.

     "우리 잠시만 앉아서 생각해봐요."

     아내는 서가에  책을 꽂고 먼저 거실  쪽으로 나갔다. 그도 
    아내의 뒤를 따라 거실로 나갔다.

     "먼저 당신 생각을 얘기해봐요. 그래도 당신이 나보다 오래
    도록 생각했을 테니까."

     "이제 당분간 글을 쓰지  않을 거야. 아니,당분간이 아니라 
    이제 영원히 쓰는 일은 하지  않을 거야. 또 내가 쓰고 싶다 
    해도 써질 일도 아니고......"

     "그래요. 그건 쉬어요. 당분간이든 아니면 더 오래든. 진짜
    로 당신이 다시 쓰고 싶은  마음이 들 때까지. 그리고 이 일
    은요?"

     "내 손으로 그를 잡고 싶어. 잡지 못한다 하더라도 왜 그렇
    게 하지 않으면 안  되었는지 진짜 이유만이라도 알고 싶어. 
    그때 했던  말은 나도 진심이 아니었고,그도  진심이 아니었
    어. 우리는 서로 다른 말을 했었다구. 그가 그곳으로 테러를 
    나가겠다고 한 말 말고는  서로 저쪽이 어떤 말을 하는가,그 
    말로  자신을  어떻게 화나게  하는가  하는  것만 신경  썼
    고......"

     "그래서 당신이 경찰서로 나갈 건가요?"

     "모르겠어,그것도. 그렇게 하는 게 옳다는 건 알지만,그게  
    내 일이었을 때 옳은 대로 행동하기가 쉬운 것도 아니고."

     "나가면 무얼 얘기할 건데요?"

     "사건이 더 커지기 전에 그가  내 책을 읽고 나간 것이라고 
    애기를 해야겠지."

     "그 얘기를 하면 경찰이 그 사람을  금방 잡을 수 있나요?"

     "모르지 그건......"

     "다시 지난번처럼 제 솔직한 심정을 이야기해 볼까요?"

     "해봐,무슨 얘기든지."

     "신고하지 말아요. 당신 발로 걸어가선......"

     아내는 다시 조금씩 강해지고 있었다. 그는 그런 아내의 얼
    굴을 바라보았다.  渚섯 그는 지난번처럼 다시 아내의 그런 
    대답을 기대하고 있었던 건지도 모를 일이었다. 자신은 이제 
    어떤 판단도 내릴 수 없는 사람처럼......


 소 제 목 : 이제 내마음속에 제일 앞자리에
     "당신이 당신 발로 걸어가서 신고한다고 그 사람을 금방 잡
    을 수 있나요?"

     다시 아내가 일문일답을 하듯 그에게 말했다.

     "......"

     "우린 이미 그를 잡을 수 있는 모든 증거를 없애 버렸어요. 
    우리가 아니라  당신의 아내인 내가요. 당신이  나가 신고를 
    한다 해도 현실적으로 도움을 줄 일이 아무 것도 없어요. 생
    각해봐요. 당신이 그 사람에  대해서 알고 있는 정보가 하나
    라도 있는지."

     그는 잠자코 아내의 말을 듣기만 했다.

     "당신이 신고를 하러 나간다면 그건 그  泳汰 잡는데 어떤 
    도움을 주기 위해서가 아니에요. 지금 말로는 당신이 신고한
    다고 했지만,그건 신고가 아니라 오히려 자수와도 같은 심정
    이겠지요. 당신  작품 때문에 그런 일이  생겼다는 불안감과 
    자책감 때문에......  경찰서로 나간다 해도  당신은 신고를 
    하는 게 아니라 자수를 하는 마음일 거라구요."

     "그래,그럴지도 모르지. 내 마음 속의 불안감도 그렇고."

     "불안하긴 당신이나 나나  마찬가지예요. 그렇지만 난 이제 
    당신 같은 자책감은 갖지 않아요. 아니,갖지 않기로 했어요. 
    대체 당신이 이  세상에 대해 무얼 잘못했어요?  그 책을 쓴 
    게 그렇게 못 견딜 만큼 큰 잘못인가요?"

     "어쨌거나 그는 내 책을 보고 나갔어. 그래서 이미 두 사람
    이나 죽었고."

     "알아요,그건. 그리고 나도  그것 때문에 불안하고요. 그렇
    지만 그런 일이 생겨 당신한테 그 일이 어떤 영향을 미칠 거
    라고 생각해서 불안한 거지 당신이  어떤 잘못을 한 것에 대
    해 불안한 것은 아니에요."

     "전에 당신도 그 책이 마음에 안 든다고 했잖아."

     "그거하고 이거  하곤 달라요. 그때 내가   瀏린 생각했던 
    것은 당신이 보다 아름다운  글을 쓰기 바랐던 거지,그게 잘
    못되어서 그랬던  건 아니에요. 당신 아내로서  나는 당신이 
    늘 좋은 역만 맡기를 바랐던 거라구요. 그런 것 아니어도 얼
    마든지 당신은 향기 나는 작품을  쓸 수가 있는데 왜 하필이
    면 내 남편이 그런 악취나는  부분을 건들었는가 하는 게 싫
    었던 것뿐이에요.  그 작품이 잘못됐다고 생각했던  적은 한 
    번도 없었어요. 그리고 이젠 당신 작품 중에서 내 마음 속에 
    제일 앞자리에 둘 거구요."

     "정말 내가 이 사건  대해 기여할 수 있는 게 없을까?"

     "이젠 없어요.  당신이 기여하려고 해도 모든  게 당신에게 
    불리한 쪽으로만 돌아가게 될 거예요."

     "언제 알아도 사람들은 알아.  그 T자의 의미가 테러리스라
    는 걸. 어쨌거나 다음 번엔 범행 대상이 에스컬레이트 될 것
    도 뻔하고."

     "그걸 안다고 그의 범행을 막을 수 있는 건 아니잖아요. 오
    히려 당신만 더 진흙밭 속으로 들어가게 되는 거지. 제 생각
    은 그래요. 그게 당신 작품을 보고 그랬다는 걸 알게 되더라
    도 그 사람들  스스로 알게 놔둬요. 당신은  당신 마음 속의 
    자책감 때문에  경찰서로 간다 해도 우선  당신 스스로 그걸 
    자수로 생각하고 있고,그 사람들도 당신이 범인을 잡는데 협
    력하기 위해 왔다고 생각하지  않고 당신의 잘못을 자수하기 
    위해 왔다고 생각하 게  뻔해요.아니,그런 정도가 아니라 어
    쩌면 그 사람들은 당신과  그를 공범처럼 볼지도 몰라요. 아
    무런 끈을 가지고 있지 않다고 해도 이 사건의 잘못 절반 이
    상을 당신에게 몰고 갈 거라구요."

     "그건 나중에 알게 돼도 마찬가지야."

     "아뇨. 달라요. 신고라는 형식으로  당신이 스스로 그걸 인
    정하는 것과 그들이 그렇다고 말하는 것은."
      
     "솔직이 말해봐요. 당신은 그가 얼만큼 밉나요?"

                  
 소 제 목 :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을 읽고 권총자살을
     짧은 시간 안에  아내는 그가 몇 시간  동안 생각한 것보다 
    더 많은 생각을 그에게  이야기했다. 가면 갈수록 점점 강해
    지고 있는 그니의 생각을.

     "어떻게 다른 건지는 당신이 더 잘 알거구요."

     "말해봐."

     "오늘이든 내일이든  당신이 경찰서로 나가  신고를 했다고 
    생각해봐요. 범인은 누군지도  모르고,그러면 사람들은 우선 
    당신에게 이 사건의  모든 책임을 씌우려들거라구요. 전적으
    로 당신이 그런 소설을 썼기 때문에 이런 사건이 일어났다는 
    식으로. 그 사람들에겐 누군가  그 일에 대해 비난하고 책임
    을 덮어씌울 사람만 필요하지 다른 건 필요가 없으니까."

     "나중에 알게 된다 해서  그러지 않는 것도 아니잖아. 이제 
    세번째 사건만 일어나면 이 사건이 어디에 끈이 닿아 있는지 
    자연히 알게 될 일이고."

     "그럼 내가 물어볼께요. 당신은  지금 당신이 그 작품을 썼
    던 걸 후회하나요?"

     "......."

     "대답해봐요."

     "후회하지는 않아. 그냥 불안해서  그럴 뿐이지. 그리고 후
    회를 한다 해도 그건 미연에  이 일을 막을 기회가 있었는데 
    그러지 못했다는 것이 대한 것이지, 오히려......"

     "그건 나도 그래요. 그런  사건이 터졌다고 해서 당신 작품
    이 잘못되었다고는 생각하지 않아요. 당신 아내가 아니라 당
    신 독자로 생각한다 해도......"

     "지금 중요한 건 그게 아니야. 작품이 중요한 게 아니라 그 
    작품을 읽고 누군가 그쪽으로 나가 사람을 죽이고 있다는 게 
    중요한 거라구. 지금 내가 견딜  수 없는 것도 그 작품이 잘
    못되었다는 게 아니라 그 작품 때문에 잘못된 일들이 발생하
    고 있다는 거고. 내가,내가 말이지."

     "전에 당신 그 작품을 처음  발표하고 났을 때를 생각해 봐
    요. 그때도 하루 몇 통씩  그런 전화가 걸려 왔어요. 소설쓰
    는 당신 친구들도 다음편을 빨리 쓰라고,그런 사람들만 죽일 
    게 아니라 테러를 압구정동의 상류층으로 상당 부분 더 에스
    컬레이트해야 그 작품이  완결될 거라고 말하구요. 압구정동
    에서 걸려온 항의 전화말고는  다른 독자들의 전화도 그랬어
    요. 그때  내가 당신한테 물었어요. 이러다  정말 그런 일이 
    생기면 생기면 그땐 당신 어떻게 할 거냐구. 그때 당신이 뭐
    랬는지 생각나요?"

     "내가 뭐랬는데?"

     "괜찮다고 그랬어요. 설사 그런 사건이 일어난다고 해도 나
    하고는 상관없는 일이라고.  그리고 괴에테의 <<젊은 베르테
    르의 슬픔>>에 대해 이야기했어요."

     그래,그런 말을 했던 적이 있었다. 괴에테가 <<젊은 베르테
    르의 슬픔>>을 쓰고 나자 실연한 프랑스의 젊은 남자들이 작
    품 속의 베르테르처럼 노란 쪼끼를 입고 권총자살을 하는 게 
    유행이었다고. 그래도 아무도  그 작품에 대해 잘못되었다고 
    말하지 않았다고. 또 그게  그 자품 때문이었다고 말하지 않
    았고.
                                                                                                                                                                                                                                                                                                                                                                                                                                                                                                                               딱 한가지예요. 세상 사람들 다 그
    게 당신이 잘못해 시작된  일이라고 말할지라도 내가 그렇게 
    생각하지 않듯 당신도 그렇게  생각해 달라는 거요. 지금 우
    리에게 필요한 건 그것밖에  없어요. 이미 사건은 일어나고,
    우리가 나선다고 어떻게 해결될  일도 아니라면 당신이 모든 
    죄는 나한테 있다는 식으로 자청해 나설 필요는 없다는 거예
    요."

     "당신은 불안하지도 않나?"

     "이제 난  불안하지 않아요. 당신이 불안해  하니까 나라도 
    그래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 들어서 그래요.  우리는 불안해 
    할 일을 했던 게 아니라구요. 당신은요."

     이 소리를 듣고 싶었던가.

     부엌에서 일을 하다가 바퀴벌레 한 마리라도 지나가면 어쩔 
    줄 몰라 그 자리에 얼어붙던 아내였다. 그래서 그런 걸 처리
    하는 건 늘 그였고,그가 없으면 훈이가 휴지를 집어 대신 그 
    일을 했다.

     그런 아내가 다른 사람도  아닌 한 테러리스트의 출현에 대
    해 저토록  강하게 나올 것이라곤 그도,아내인  그녀 자신도 
    짐작하지 못했던 일었다.


           
 소 제 목 : 그에게 당신 행동을 보세요
     "또 이런 생각을 해요."

     아내가 그의 옆으로 한걸음 더 다가와 앉았다.

     "무슨 생각을?"

     "당신은 그를 지금 얼마나 미워하고 있는가 말이에요."

     "미워하고 말고 할 것도 없어. 어떻게 그런 일이 일어날 수 
    있는 건지 황당스러울 뿐이고,또  그 자식 때문에 치루게 될 
    앞으로의 일이 불안한 거지."

     "그럼 이런 생각은 안 해 봤나요?"

     "어떤 생각?"

     "그가 우리 주위를 지켜보고 있을 거라는 생각이요."

     "우리 주위를?"

     "안 그러겠어요? 당신 같으면....."

                                                                                                                                                                                                                                                                                                                                                                                                                                                                                                                              이다. 언제나 옆에서 
    붙어서서 바라보듯 지켜볼 수는  없겠지만 이따금 그렇게 그
    의 주위를 맴돌고 그의 집 주위를 맴돌지 모를 일이었다. 또 
    그런 식으로 현장 주위도 맴돌고 경찰서 주위도 맴돌고 그럴 
    것이었다.

     지금 너는 어디에 있는가. 지금 너는.....

     아마 T는 그런 식으로 집필실로 쓰는 사무실 주변도 이따끔
    씩 순찰을 돌듯 둘러보고  갔을 것이다. 자신의 범해에 대해 
    그 소설을  쓴 작가는 어떻게 반응하는가,그에게  그보다 더 
    궁금한 일이 어디 있겠는가.

     "어딜 좀 떠나고 싶어."

     그는 아내를 돌아보며 말했다.
     "어딜요?"

     아내가 그를 쳐다보고 있었다.  그는 아내와 마주쳤던 눈을 
    아래로 깔았다. 어항 속의  고기들이 눈에 들어왔다. 저들의 
    세계에는 그런 일이 없겠지. 최소한 같은 종류의 고기들끼리
    는. 아니,그런 종류의 고기들이  있다 해도 서로간의 적개심
    으로 그러지는 않겠지.

     "설악산이든 아니면 다른 데 어디든 한 며칠......"

     "혼자서요?"

     "훈이 학교가 아니라면 같이 갔으면 좋겠지만......"

     "떠나지 말아요. 당신  〈  게 싫어서가 아니라 그냥 당신
    이 서울에 있는 게 더 낫겠다는 생각이 들어요."

     "그래. 피하다고 해결될 일도 아니겠지. 그런데, 그 자식이 
    우리에게도 적개심을 가지고 있을까?"

     "당신 생각은 어떤데요?"

     "그렇지 않을 거라는 생각이 들어. 그 때 말은 그렇게 했지
    만......"

     "처음엔 나도 그가 우리를 어떻게 하는 게 아닌가 걱정하고 
    불안해 했어요. 지금도 불안한  게 사실이구요. 그렇지만 그
    가 우리를 어떻게 하거나 하는 불안은 이제 들지 않아요. 다
    른 불안이 그걸 지워주었는지 아니면 그가 나름대로 어떤 명
    분을 가지고 그곳으로 나갔다는  생각이 들어서 그런 건지는 
    모르지만."

     "그렇지만 서울에 있는다 해도 내가  할 일은 아무 것도 없
    어. 당신 말대로 자수를  하듯 경찰서로 걸어나가는 게 아니
    라면."

     "아뇨. 있어요. 할 일이. 경찰서로 나가지 않고도......"

     "어떻게....."

     "오늘은 집에 들어왔으니 그냥  두더라도 내일부터 다시 집
    필실로 나가세요."

     "그럼 지금 나보고 다시  원고를 쓰란 말이야? 이런 상태에
    서?"

     "원고를 쓰라는 얘기가 아니에요."

     "그럼 뭐야?"

     "그는 당신을 보고 있어요. 나도 그게 어떻게 해야 되는 건
    지 모르지만  그에게 당신이 행동으로  무언가를 보여주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어떤 행동을?"

               
 소 제 목 : 숨지만 말고 이 같은 자식아
     이득지는 다시 소파 쪽으로 털썩 주저앉았다.

     "그건 나도 몰라요.그렇지만 당신이 그에게 뭔가 보여줄 행
    동이 있다고 생각해요. 그런  식으로 불안한 마음만 보일 것
    이 아니라...... 어쩌면 그 사람은 오늘 당신의 모습을 지켜
    보았는지 모르잖아요."

     "당신은 내가  그에게 어떤 행동을 보여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해? 그는 내  행동이 아니라 내 책을  보고 그리고 나갔
    어. 그런 그에게 내 책보다  더 강하게 전달할 수 있는 행동
    이 어디 있느냐고? 거리에  나가서 피켓이라도 들고 더 이상 
    테러를 하지 말라고 소리라도 지르란 얘기야."

     "그렇게 큰소리 지르지 말아요.  지금 말은 이렇게 해도 당
    신보다 내가 더 불안해요. 단지 그런 당신 앞에서 함께 울고
    불고 할 수 없어 참고 있는 거에요. 내 얘기는 그가 당신 책
    에 영향을 받고 나갔듯 당신의 행동 하나하나도 지켜보며 거
    기에 영향을  받을 거라는 얘기에요. 피켓을  들고 나가라는 
    얘기가 아니라...... 오늘 그는  당신이 사무실에서 나와 어
    디론가 전화를 거는 모습도 지켜보았을 거라구요. 그리고 그
    게 혹시 신고 전 ? 아닐까 불안해 하기도 할 거구요. 만약 
    지켜보았다면 말이에요."

     "그래 좋아. 그렇다고 해. 그럼  내가 그에게 보여 줄 행동
    이라는 게 어떤 것인지 말해봐. 당신 같으면 불안해 하는 것 
    말고 그렇게 보여줄 어떤 행동이 있겠는지 말해보라니까."

     "그럼,당신이 불안해  하는 모습을 본다고 그가  더 이상의 
    테러를 하지 않는 것도 아니잖아요?"

     "그건 내가 의식적으로 아무렇지 않게 행동을 하는 걸 봐도 
    마찬가지야. 아니,내가 의식적으로  아무렇지 않게 행동하면 
    그 자식이  더   자극받을지 모른다구.차라리  내가 불안해 
    하는 게 낫지."

     "아까는 미처 그런  생각을 못했는데,어쩌면 그것도 당신이 
    경찰로 나가서는 안 되는 또 한가지 이유가 될지 몰라요." 

     "이유는 또 무슨 이유가 그렇게 많다는 거야?"

     "지금 당신이 한  말대로  당신이 아무렇지 않게 행동을 해
    도 그 사람은 자극을  받을 거라고 그랬잖아요. 그런데 당신
    이 직접 그 사람을 신고하겠다고 경찰서로 나가봐요. 그때는 
    또 어떤 자극을 받게 될지.  아마 그렇게 되면 그 사람이 당
    신이나 나나 우리 훈이까지  어떻게 할지도 모르는 일이잖아
    요."

     "미친 자식......"

     "그러니까 우리는 그 사람을  자극하면 안 돼요. 경찰이 스
    스로 알게 놔둬야 한다구요. 당신 말대로 그 사람이 미친 자
    식이라면 더 그래야 하구요."

     "지금 당신한테 중요한 건  바로 그거지. 세상 일이야 어떻
    게 되든 우리만 안전하면 된다는 식으로."

     그런 말까지 아내에게 하게 될 지는 몰랐다. 그만큼 자제력
    을 잃었다는 말일 것이다.  하기야 그런 일을 당하고도 자제
    력을 잃지  않을 사람이 어디 있을 低  그런 말이 아내에게 
    대고 직접 나올지는 몰랐다.  그는 아내의 얼굴을 피해 창밖
    으로 시선을 틀었다. 조금씩  봄이 다가오고 있었다. 겨울에 
    그를 처음 만났고 이제 불안 속에 봄이 오고 있는 것이었다. 
    지난 겨울,설악산에 가 마음 속으로 준비했던 새 봄은,그 봄
    에 하리라 마음 먹었던 일은 이런 것이 아니었다.늘 좋은 일
    만 생길 것이라고  생각했지.꿈에서조차 생각하지 않았던 일
    이었다.

     "우리만 안전하자는 게 아니에요."

     "아니긴 뭐가 아니야?"

     아내는 차분하고도 완강한 어조로 말했지만 그는 다시 소리
    를 지르듯 말했다.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결딘 수 없을 것 
    같은 마음이었다.

     "그래요. 나는 그런  여자에요. 당신하고 훈이밖에 모르는. 
    그러니 당신 마음대로 하세요 이제. 그런 일로 그 사람을 자
    극해 나하고 훈이가 어떻게 되든 말든 마음대로 하라구요."

     그는 아내의 말을 뒤로 하고 서재에 들어가 담배를 꺼내 물
    었다.

     미친 자식.....

     저절로 그런 욕이 나왔다. 이제  나 보고 어떻게 하란 말인
    가. 내가 어떻게 해야 네  마음 속의 분노를 다스릴 수 있다
    는 것인가.

     얘기를 하라. 얘기를......

     숨지만 말고 이 개 같은 자식아.



 소 제 목 : 그날 나는 당신을 지켜보았다
     이득지 선생.

     그날 나는 당신을 지켜보았다.

     처음부터 지켜본 것은 아니지만 어쨌거나 그날 나는 당신의 
    많은 부분을 지켜보았다.

     전날 밤,나는 압구정동으로  나갔다. 당신의 소설 속에서는 
    매주 사건이 발생했다. 가능하다면 나도 그렇게 사건을 일으
    키고 싶었다. 그러나 그건  어느 경우에도 불가능했다. 사건 
    발생의 일주일 단위의 주기성은  그야말로 당신이 쓴 소설에
    서나 가능한 일이었다.

     처음부터 알았지만 그래도 가능한 그렇게 하고 싶었다.불가
    능한 줄 알면서도.  하여 내가 당신의 소설에  맞출 수 있는 
    것은 테러의 대상과 테러의 방법,그리고 그 테러가 발생하는 
    것이 금요일이라는 것 뿐이었다.

     어쩌면 앞으로 그 중에 어느 것 하나가 또 소설과 달라질지
    도 모른다. 나는 당분간 이 테러를 멈추지 않을 것이므로.

     당신의 소설 <<압구정동>>에  나오는 대로 테러를 실행하면
    서 나는 당신 소설에서 이해  못할 부분을 새삼 많이 발견했
    다. 범행 방법이야 어차피  소설이니까 그럴 수 있다고 생각
    했다. 또 현실과  소설이 다른 점이 바로  그런 것일  痼譴
    로.

     소설 속에 나오는 당신의 얼굴 없는 테러리스트는 피살자의 
    목을 졸라 그들을 살해했다. 아마 그것은 작중의 테러리스트
    가 선택한 방법이라기 보다는  작가인 당신이 피살자의 몸에 
    별다른 상처를 남기지 않기  위해 의도적으로 선택한 방법이
    었을 것이다. 테러의 의미를  보다 명확히 한다는 점에서,또 
    최소한 그 얼굴 없는 테러리스트가 잔인함을 즐기기 위해 테
    러를 하는 것이 아님을 보여주기 위해서.

     그러나 그것처럼 가능하지 않은  일은 없다. 그런데도 일단 
    내가 두 번의 테러에서 모든 위험을 무릅쓰고 당신이 의도했
    던 방법을 따랐던 것은 그  테러를 당신의 소설 속의 테러와 
    일치 시키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나는 누구보다 건장하고,또 
    그들은 누구보다 약했으므로 그것이 가능했던 것인지도 모르
    겠다.

     오히려 소설에 나오는 방식대로,또  그런 인물과 유사한 인
    물들을 상대로 테러를 하며 의문을 가졌던 것은 과연 당신이 
    어떤 목적으로 노파와 게이를 제1,제2의 테러 대상으로 설정
    했는가 하는 점이었다.

     물론 소설에선 그것이 친절하게  설명 퓸 있다. 한국 천민 
    자본주의가 생산해낸 쓰레기로부터  그런 쓰레기를 생산해내
    는 주체로  테러의 대상을 에스칼레이트 한다는  것. 당신은 
    그런 뜻으로 그 소설을 썼고,또 그것으로 한국 천민자본주의
    의 상징과도 같은 <압구정동>의  부패와 타락을 비판 경고했
    을 것이다.

     그러나 두 번의 테러를 실행하며 나는 이런 생각을 했다.
     만약 당신의 소설이 이  세상에 나오지 않은 상태에서 내가 
    테러의 대상을 그런 식으로 에스컬레이트 시켰을 때 세상 사
    람들은 과연 그 테러의 의미와 경고를 제대로 받이들일 것인
    가. 아니, 현실에서의 테러는  비판과 경고가 아니라 곧바로 
    응징일 것일진대,세상 사람들이  그런 응징의 의미를 제대로 
    읽어낼 것인가.

     소설은 어차피 당신이 쓰는  것이므로 그 안에 그런 의미를 
    넣을 수 있다. 나도 그렇게 읽고 그 책을 읽은 다른 모든 사
    람들도 그렇게 읽었을 것이다. 처음부터 그것은 당신이 의도
    하는 바대로 읽힐 수밖에 없는 것이므로. 또 그런 의미로 읽
    고 내가  직접 압구정동으로 나서지 않았던가.  당신은 내가 
    당신 소설에서 방법을  맘年鳴  말하지 모르지만 그러나 내
    가 본 것은 방법이 아니라  당신이 소설을 통해 말하고자 한 
    의미였다. 

     만약 당신의 소설과 상관없이  내가 당신 소설 속에 나오는 
    그 테러리스트처럼 압구정동으로 나갔다면 그 테러의 대상은 
    전면적으로 수정되었을 것이다. 앞으로 내가 찾아내야 할 세
    번째의 인물이거나  네번째의 인물을 첫  대상으로 올려놓는 
    식으로. 

     소설 속에서의 그것은 비판과 경고일 수 있지만 현실에서의 
    그것은 비판과 경고의 단위를  넘는다는 것을 나도 이곳으로 
    나오기 전 알고 있었다.

     그래서 많이 망설였던 것도  사실이었다. 처음 당신의 집에 
    전화를 걸기 전부터......

 
 소 제 목 : 그여자는 게이의 대체인물이 아니다
     그 이야기는  언제 다시 할 기회가  있을 것이다. 당신에게 
    직접하든 아니면 내 또다른 독백을 통해서 하든.
     당신은 내 두번째의 테러에  대해 많은 의문을 가지고 있을 
    것이다. 왜  게이가 아니고  그냥 무용수인가,하는  점에 대
    해......

     정말 건너뛰고 싶은 대상이 그녀였다. 

     당신 소설 속에 나오는 게이 강혜리의 삶도 슬프지만 내 손
    에 살해된 그녀의  삶 또한 슬프지 않은  구석이 없다. 또한 
    일부러 고른 대상이 그녀였다는 것도 나로서는 가슴 아픈 일
    이다. 고르고 보니 그런  여자였던 것이 아니라 일부러 그런 
    여자를 고르지 않을 수 없었다는 것이.

     당신은 소설 속에서 강혜리를 등장시키며,그리고 얼굴 없는 
    테러리스트로 하여 그의 목을 조를 때 어떤 생각이었는지 모
    르지만 현실에서 나는 당신의 열 배 스무 배 고민을 했을 것
    이다.

     소설에선 테러조차 하나의 미학으로 그려낼 수 있지만,현실
    에서 그것은 범죄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라는 것을 내가 왜 
    모르겠는가. 

     그녀가 어떤 여자인가에 대해서는  따로 말하지 않겠다. 이
    야기를 해봐야 그 痼 오히려 변명처럼 들리고 말 일이니까. 
    분명한 것은 그녀가 당신 소설  속에 나오는 게이의 대체 인
    물은 아니었다는 점이다. 정말 그것만은 나의 어렵고 어려운 
    선택으로 이루어진 일이다. 

     그녀를 두번째의 테레 대상으로  지목하지 않을 수 없는 상
    황을 이미 당신이 내게  주었고,나는 그 상황에 따르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이건 당신에게 내가 저지르는 테러의 모든 책임을 떠넘기기 
    위해 하는 말이 아니다.  솔직한 얘기로 나는 당신에게 특별
    한 감정이 없다. 당신을 좋아한다거나 혹은 당신을 싫어한다
    거나. 처음부터  우리는 어떤 호오의 감정으로  만났던 것이 
    아니다. 

     처음 당신의 소설을 읽을  때에도 그랬고,그것은 그 소설을 
    읽은 다음 두 번째의 테러를 실행한 지금도 그렇다. 

     그러나 여기서 한 가지  분명하게 당신에게 말하고 싶은 것
    이 있다. 당신은 내가 지난  겨울 전화로 주고 받았던 말 때
    문에 내가 압구정동으로 나갔던  게 아닐까 생각할지 모르지
    만 절대 그것은 아니다.

     마지막 통화에서  내가 <피셔 킹>을  이야기했던 것도,그런 
    당신의 말 때문에 그랬던  것이 아니다. 당신의 소설을 읽을 
    때부터,아니 당신의  소설을 읽고 난  다음다음날 <그랜저의 
    프라이드 폭행 사건>을 보고 났을  때 이미 나는 이 일을 결
    심했었다. 물론 신문에서 그런  기사를 보기 전 당신의 소설 
    <<압구정동>>을 읽지 않았다면 많은  다른 사람들과 같이 그
    냥 그들에게 '죽일놈들'하고 한순간의 어떤 적의를 들어내는 
    것말고는 거기에 대해 더이상  아무 일도,또 아무 생각도 하
    지 않았을 것이다. 

     오래 전에 본  것이 아니라 바로 그때  당신의 소설을 봤기 
    때문에 나는 당신 소설 속에 나오는 방식대로의 테러를 생각
    했던 것이었다. 전화가 내게 무엇을 주었던 것이 아니다. 그 
    전화는 처음부터 내가  의도한 것이었고,그쪽으로 나가기 위
    해 내 스스로 결의를 다지기 위해서였던 것뿐이었다. 당신이 
    나가지 말라고 말렸다 해도 그런  당신의 말 또한 내겐 그쪽
    으로 나를  보내게 하는 결의의 한  장치로 받아들였을 것이
    다.

     나도 알고 있다. 소설은 소설이고 영화는 영화라는 것을.
     당신 소설의 메시지가 무엇이라는  것도 충분히 알고  獵. 
    역설적으로 그것이 무엇인지 알기  때문에 나갔다는 것이 정
    확한 내 대답일 것이다. 사실 이 땅의 현실(특히 천민자본주
    의 구조적 모순과 그들의  그릇된 부패와 타락)에 대해 당신
    의 소설 만큼 강한 메시지를 담고 있는 글도 많지 않을 것이
    다. 그러나 그 강한 메시지 역시 그들은 그들 방식대로 흡수
    해버리고 말았다. 그것은 결코 그런 식으로 흡수되어서도 안 
    되며,또 그들의 그릇된 명성에 일조하여서도 안 됨에 불구하
    고 현실은 그렇지가 않았다.

     아니,현실이 그것을 흡수해  버 홱. 그런 메시지가 소설로
    밖에 전달될 수 없는, 소설 속에 묘사 된 것보다 더 썩은 압
    구정동의 현실이.  또 소설로 말고는 현실적으로  그런 일이 
    발생할 수 없다는 것을 누구보다 그들이 더 알기 때문에.

     나를 부른 건 바로 그들이었다.

     어쩌면 나는  당신의 소설보다는 그들의 부름을  받고 갔던 
    것인지도 모른다.

     당신의 메시지를 전달하기 위해.

     아니,이제는 바로  내 메시지가 된 그  의미를 전달하기 위
    해.


 소 제 목 : 우리는 게임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이득지 선생.

     우리는 지금 <피셔 킹> 영화를  하고 있거나 그 영화를 사이에 둔 게
    임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당신은 나를 <피셔 킹>에 나오는 그 미치광이 사내 수준으로 보고 있
    는가. 아니라는 것을 나는 알고 있다. 그것은 허리우드가 만들어낸 하
    나의 오락 영화일 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인간성 회복이라고?

     혹 그렇게 말하는 사람이  있을지 모르겠다. 그러나 내 눈엔 아니다. 
    그 사내와 내게서 유사점을  찾으려든다면 그것처럼 또 웃기고 오락적
    인 일이 없을 것이다.  그것은 단지 허리우드의 자본이 만들어낸 영화
    일 뿐이다.  서울은 허리우드가 아니다.  서울 하고도 <압구정동>으로 
    상징되는 우리의  이웃이면서도 우리의 일부거나  이웃이 아닌 그들의 
    세계는. 그래,나는 그것을 우리의 한 부분으로 포함하지 않고 <그들의 
    세계>라고 말한다.

     지난 겨울 당신은  그 세계에서 일어난 <그랜저의  프라이드 폭행 사
    건>을 또 다른 시각으로 해석했었다. 당신의 말에도 일리가 있다는 것
    을 나는 인정한다. 아니,인정하는  정도가 아니라 그런 당신의 해석에
      나는 더욱더 내 테러의 결의를 다진 것인지도 모른다.

     그 전화에서 당신은 말했다. 내가  전화를 걸기 바로 전 날의 신문을 
    보았느냐고. 나는 그 신문을  보지 못했다. 당신이 이어 말했다. 그랜
    저의 운전자에게 폭행 당한 사람이  그런 폭행을 처음 당했을 때는 돈
    이 많아 고급 중형차를 타고  다니면 돈이 없어 소형차를 타고 다니는 
    사람을 길 위에서 그렇게 린치를 가해도 되는 거냐고 만나는 기자들에
    게마다 자신의 억울함을 하소연하다가 언제부턴가 기자들에게 이젠 제
    발 날 좀 조용히 내버려  달라고 말했다고. 어디 아픈 데도 없으며 크
    게 다친 데도 없고,이것이  더 이상 사회문제화되는 것도 원하지 않으
    며,그저 조용히 살고  싶다고. 그 이면에 어떤  일이 있었는지는 당신 
    스스로 알아서 짐작하라는 식으로.

     그 이야기를 하며 당신은  내게 내가 얼마나 터무니없는 일에 분개하
    는가를 가르쳐 주기라도 하듯 다시 이렇게 말했다. 그것이 압구정동의 
    힘이고 자본의  힘이라고. 그 이야기를 하며  당신은 그런 압구정동의 
    그릇된 힘은 당신 소설이 아니라  그 무엇으로도 바로 잡기 어려운 지
    경에 이르렀다고 말했다. 그들의 폭력이 선택된 은혜로 바뀌는 시대에 
    우리가 살고 있는 것이라고.

     처음 당신에게 전화를 걸었던 건 처음 보도된 <그랜저의 프라이드 폭
    행> 사건  때문이었지만,압구정동으로 테러를 나갈  결의를 더욱 다진 
    것은 폭력을 선택된 은혜로 바꾸는 자본의 그릇된 영향력과 그런 영향
    력을 기득권처럼 쥐고 있는 압구정동의 힘에 대한 응징을 위해서였다.

     타락한 시대의 타락한 대상에 대하여 가장 타락하고도 섬뜩한 방법으
    로 대응하는 것말고는 방법이 없다고 생각했다. 그것이 그들에겐 가장 
    직접적으로 가슴에 와닿는 경고이자 비판이며 응징일 터이므로.
     그것말고 우리가 우리의 뜻을  가장 확실하게 전달할 벙법이 어디 있
    겠는가. 그런 의미에서 당신의 소설 <<압구정동>>은 내 테러의 지침서
    였다.

     새로운 어떤 메시지의 전달보다  이미 당신이 소설로 말한 그 메시지
    를 전달하는 것이 어느  면으로나 가장 확실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
    리고 그 메시지를 전달하는 방법  또한 당신 소설의 그것을 따르는 것
    이 가장 확실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내가 독자적인 방법으로 테러를 시작했다면 절대 그 대상에 포함시키
    지 않을 노인과 무용수를 그 테러의 앞자리에 놓은 것도 바로 그런 이
    유에서였다.

     물론 그것이 당신을 벼랑 끝으로 몰고갈 것이라는 것을 나도 잘 알고 
    있다. 그리고 나 역시도 벼랑 끝으로 내몰리고 있다는 것도.


             
 소 제 목 : 내가 당신의 일거일동을 훔쳐보고 있는것은]
     그것으로 이득지  선생 당신이 얼마나 불안해  할 것인가도 
    잘 알고 있다. 그리고 아직은 당신이 나를 이해하지 못할 것
    이라는 것도.

     어쩌면 세상은 내가 저지르는 사건보다 당신과 당신의 작품
    에 더 초점을  맞추게 될지도 모른다. 모든  눈과 귀를 어떤 
    식으로 해야 사람들이 흥미를  느낄 것인가에 우선적으로 맞
    추는 것이  그들의 기본적 속성이므로. 게다가  나의 존재를 
    아직 그들이 알 길 없으므로. 먼저 밝혀지는 것은 나의 존재
    가 아니라 바로 이 사건의 성격이 될 것이라는 것도  ご 알
    고 있다.

     그렇게 되었을 때 일단  세상의 모든 눈빛은 나보다 그대에
    게 향할 것이다. 당신이 두려워하고 있는 가장 큰 이유가 어
    쩌면 그것이  아니겠는가. 앞으로 당신이 영원히  글을 쓰지 
    못하게 될지도 모를.

     그날 오후  나는 당신 사무실 앞으로  나갔다. 그리고 그리 
    멀지 않은 곳에서 당신을 살폈다. 나 역시 그날 석간 신문을 
    당신 사무실  부근에서 보았다. 당신 사무실이  있는 건물로 
    신문을 배달하는 학생이  들어가고,그리고 30분쯤 후 당신은 
    사무실에서 나왔다.

     물론 당신에 대한 이런  관찰은 그날이 처음이었던 것은 아
    니었다. 지난 겨울 당신과  마지막 통화를 한 후 이틀이거나 
    사흘 사이로  나는 당신의 동정을 살폈다.  무엇보다 그것이 
    나에겐 궁금한 일이므로. 첫  사건 때에도 나는 다음날 당신 
    사무실 앞으로 나갔었다. 그리곤 일주일간 꼼짝도 않고 갇혀 
    지내듯 내 방에 틀어박혀 있었다.

     그때,첫 사건 후 나가 본  당신의 모습도 많이 당황하는 것 
    같았었다. 아니, 황당하고 불안했을 것이다. 그리고 이번 역
    시 그랬다. 나는 당신이  사무실 바깥으로 나와 전화를 거는 
    것을 먼 곳에서 지켜보았다.  그런 당신의 모습은 나를 많이 
    불안하게 했다. 불안한 얼굴로 공중전화 부스 안으로 들어가
    는 당신을 보는 내 모습 또한 당신만큼이나 불안했다.

     나는 그대가 어디에  전화를 걸었던 건지 전혀  알 길이 없
    다. 그것이 당신 집이든,아니면  내가 걱정하는 대로 경찰서
    로 거는 것이든.

     아마 당신은 그곳에서 두 군데에 전화를 거는 듯했다. 당신
    은 한군데와 통화를 하고  나서 다시 다이얼을 눌렀다. 그때 
    심장이 멎는 듯한 나의 심정을 아마 당신은 모를 것이다. 아
    니,그런 당신을 내가 지켜보고 있다는 것을 당신은 짐작이나 
    했을까. 

     그때 나는  내 스스로에게 이런 말을  했었다. 별일이 없을 
    거라고. 별일이 있는 전화면  당신이 사무실에서 걸지 왜 밖
    으로 나와 공중전화에서  걸겠느냐고. 나는 스스로를 그렇게 
    위로하고 달랬다.

     그러나 또 한편으로 이런 생각이 드는 것이었다. 별일 없는 
    전화라면 안에서 걸지 왜  밖에 나와서 걸겠느냐고. 공중 전
    화에서 전화를 거는 것은 어쩌면 당신이 익명으로 사  신고
    를 하기 위해서 그러는 것이 아닌가 하고. 어느 경우에나 당
    신이 전화를  거는 모습을 보는 것은  나에게 두려운 일이었
    다.

     그 전화를 걸고 나서 당신은  바로 택시를 잡았다. 당신 차
    가 그대로 그 사무실 바깥 주차장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운전
    을 할 수 없을 만큼 당신은 불안에 떨고 있었던 것인지 모른
    다. 그런 당신을  보며 나는 이 사건이  장차 당신 개인에게 
    어떤 영향을  미칠 것인지를 생각해 보았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의 생각이었다. 당장은 전화를  거는 당신을 보고   다
    음 내가 더 불안했으므로.  

     나는 택시를 타고  가는 당신의 뒤를 나는  쫓을 수가 없었
    다. 그곳에 나는 차를  가지고 간 것이 아니므로. 아니,나에
    겐 그곳으로 가져갈 프라이드조차 없으므로.

     아직도 나는 그때 당신이 어떤 곳에 어떤 내용의 통화를 한 
    것인지 알 수 없다. 혹시 신고 전화가 아닐까 걱정을 했었는
    데 그런 것 같지는 않았다. 만약 그것이 신고 전화였다면 그
    날 밤  텔레비전 뉴스라든가 다음날 신문에  그 이야기가 날 
    게 분명하지 않겠는가.



 소 제 목 : 이제 당신에 관해서만 말하겠다
     다음날에도 나는 당신 집필실  앞으로 나갔다. 물론 그날은 
    그곳에 나가기 앞서 내가  두번째의 사건을 일으켰던 도산공
    원 부근에  나갔었다. 나가봐야 손을 쓸  일도 없고,또 그것 
    자체로 만에 하나 일이 잘못되게 될지도 모른다는 것을 알면
    서도 나는 그곳에 나가보지 않을 수 없었다.

     아마 당신도  알 것이다. 그것이 바로  범행 후의 운명과도 
    같은 심리라는 것을. 당신 주변을 살펴보는 것 역시 그런 심
    리의 하나일 것이다. 아니,그  이상의 의미를 나는 당신에게 
    가지고 있다.

     그러나 여기서는 내 다른 행동보다 당신에 관해서만 말하도
    록 하겠다.

     그날 나는  당신이 사무실로 나오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
    다. 그래서 당신 사무실 앞으로 나왔다가 당신 집 부근을 살
    펴볼 생각을  했었다. 그런데 의외로 당신은  사무실로 나와 
    있었다. 내가 그곳에 간  시간이 오전 열 시쯤이었는데 당신
    은 그보다 먼저 그곳에 나와  있었다. 정말 알 수 없는 일이
    었다.

     첫 사건  때 당신은 사흘인가 나흘  후 사무실로 나왔었다. 
    그런데 두번째  사건이 나고 나선 당신은  전혀 그런 사건에 
    대해 모르는  사람처럼 다음날 일찍 사무실로  나와 있었다. 
    놀란 것은 오히려 나였다.

     나는 그런 당신의 모습을 보고서 정말 그저께 밤 나는 압구
    정동으로 나가 그런 사건을 일으켰던가,그게 내 혼자의 착각
    이 아닌가 하는 생각까지도 했었다.

     나타나더라도 일주일 후이거나 그보다 훨씬 더 많은 시간이 
    지난 다음일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당신은  사건이 나던 
    바로 다음날  아침 정말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사무실로 
    나왔다.

     짐을 챙겨가기 위해서 그러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도 했었
    다. 더구나 어제 당신은  그곳에 자동차를 그대로 두고 갔으
    므로.

     나는 점심  시간이 훨씬 지난 다음까지도  그 앞에 있었다. 
    당신은 마치 전날의  신문도,그리고 전날밤의 뉴스도,그리고 
    전날보다 더 크게 그 사건이  보도된 그날 아침 신문조차 보
    지 못한 사람 같았다.

     사무실 안에서 당신이 무엇을  했는지는 나로선 알 길이 없
    다. 당신은 사무실로 들어간 다음 점심을 먹기 위해 잠시 나
    왔던 것말고는 밖에 나온  일이 없었다. 안에서 원고를 썼는
    지 아니면 다른 일을 했었는지. 당신 사무실에도 매일 아침 
    조간 신문 두개가 배달되어 오지 않던가.

     그런 당신의 행동이 정상적인 것인지,아니면 불안의 또다른 
    표현인지조차 나로서는  알 길이 없었지만  정말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곳에 나와 사건과 관계없이  원고를 쓰든 
    아니면 그냥 나와 자리만 지키고 앉아 있는 것이든.

     그런 당신의 태도는 그  다음날도 나의 궁금증을 자극했다. 
    그곳으로 다시 나가보지 않을  수가 없었다. 전날 내가 당신 
    사무실 앞에서 돌아온 다음 그곳의 모든 짐과 자동차를 가지
    고 들어간 것인지도 모를 일이므로. 그래서 그 날은 조금 일
    찍 당신 사무실 앞으로 나갔다. 나가서 시계를 보았을 때 아
    홉시 오분 전이었다.

     그런데 당신은  정확하게 아홉시 오분에  사무실로 나왔다. 
    언젠가 통화 때 당신이 내게 말한 자주색 캐피탈을 운전하고
    서. 당신은 좁은 주차 공간 안에 능숙한 솜씨로 단번에 후진 
    주차를 시키고 나서 늘  들고 다니는 손가방을 들고 내렸다. 
    그 안에 노트북과 다른 원고들이 들어있다는 것을 나는 알고 
    있다.

     정말 이 사람이 이런 정신 속에서도 원고를 쓰고 있는 것인
    가. 당신은 오른손에 가방을  들고 왼손으로 자동차 문을 채
    웠다. 그리고는 건물 입구쪽을 향해 걸어들어갔다. 들어가다
    가 당신은 뒤돌아 내가 서 있는 쪽을 바라보았다. 몸을 숨길 
    마땅한 곳도 없었고 또 그럴  경황도 없었으므로 나는 그 자
    리에 얼어붙은 듯 당신을 마주 바라보았다.

     아마 당신은 그냥 뒤를 돌아본 것뿐인 모양이었다. 다시 당
    신은 안으로 걸어들어갔다. 당신이 건물 입구로 들어가고 나
    서 십분쯤 후 나도 그  건물 안으로 들어가 보았다. 당신 집
    필실이 있는 그 건물의  4층 복도까지 걸어서. 아니, 그전에 
    먼저 확인할 것이 있었다.  현관 입구에 있는 당신의 메일박
    스를. 당신이 정말 그날  아침 신문을 가지고 올라간 것인지 
    아닌지. 여러번 살펴본 바로  그 건물은 조간 신문은 메일박
    스에 넣고,석간  신문은 각 층마다 돌아다니며  사무실 앞에 
    던지듯 밀어넣는다는 것까지 나는 알고 있었다. 

     4층 복도에서 잠깐 당신 사무실쪽을 바라보다 나는 다시 아
    래로 내려왔다. 그리고 처음  섰던 자리로 내려와 당신 사무
    실을 올려다보듯 바라보았다. 

     정말 우리 사이엔 아무 일이 없었는가.

     내가 저지른  사건과 당신은 지금 당신이  보이는 태도처럼 
    아무 상관이 없는 것인가. 아니면  지난 두 달 사이 아무 일
    도 일어나지 않았던 것인가.  나는 정말 두 번이나 압구정동
    으로 나가기나 했던 것일까.

     그러다 한 시간 쯤 지났을  때 나는 당신의 특별한 한 행동
    을 보았다. 내게 보내는 게 분명하지 싶은 당신의 어떤 메시
    지를.....      


 소 제 목 : 바람에 날리는 그 오렌지색

   당신은 당신의 사무실 창문을 열었다. 그 창문은 거리 쪽으로 나 있었
  고,우리가 익히 얼굴을 아는 사이라면,그래서 애써 찾으려 했다면 내가 
  창문을 연 당신을 볼 수 있었듯  당신도 멀리서 당신을 보는 나를 찾을 
  수 있었을 것이다.  만약 당신의 친구나 당신의  가족 누군가가 그렇게 
  마주 바라보고 있었다면. 우리는 그렇게 멀리 떨어져 있었던 게 아니므
  로.

   한참 후 당신은  창문을 닫았다. 단순히 환기를 위하여  창문을 연 것 
  같지는 않았다. 당신은  무언가를 찾기 위해 혹은  누군가를 찾기 위해 
  두 ?彭타? 것 같았다. 누군가가 아니라 바로 나를 찾기 위해. 아니,
  창밖에 내가 서  있다면 내가 당신을 보아달라는  뜻으로. 나는 그렇게 
  해석했다.

   물론 나의 턱없는 상상이며 지나친 의미 부여일 수도 있다. 그러나 당
  신과 나 사이는 이제 어떤 턱없음과 어떤 지나침도 엉뚱한 것이 아니라
  는 것을 나는 알고 있다. 그리고 당신 역시 그것을 알고 있다.

   오분 후 당신은 다시 창문을  열었다. 그때에도 나는 당신의 사무실이 
  바라보이는 길 건너편에 서 있었다. 그러나 처음 당신이 창문을 열었을 
  때처럼 오래 있을 수 없었다.

   내가 서 있는 자리가 바로 버스 정류장이고,또 그곳에 늘 여러 사람이 
  사람이 서 있기는 해도 그렇게 당신의 눈에 내가 오래도록 보인다는 것
  을 아직 나는 조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것은 당신이 내 존재를 알고 
  모르고에 상관없이 그랬다.

   어쩌면 당신은 창문을 열기 전에도 오래도록 그렇게 창가에 서서 이쪽
  을 바라보고 있었는지 모른다. 그러다 당신은  그렇게 두 번 창을 열었
  다. 나는 그 자리를 떠났고, 당신은 하루 종일 그것을 반복했는지 모른
  다.

   다음날 오후 나는 다시 당신 사무실 근처로 나갔다. 그날도 당신은 아
  무 일 없었다는 듯이 사무실로 나와 있었다.

   이미 바깥에선 조금씩 내가 저지른 사건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었다.

   서울 강남에 두 건의 연쇄 살인 사건이 발생했다는 것. 피살자는 예순
  다섯된 노인과 20대의 환락가의 무희이며,범인이 두 경우 다 목을 졸라 
  살해했다는 것,그리고 그 현장에 자신의  존재를 알리듯 T자 메모를 남
  겼다는 것,그런데도 경찰은 아직 사건의 어떤 단서조차 잡지 못하고 있
  다는 것......

   당신 사무실이 있는 곳으로 나오며 버스  안에서 잠깐 들은 라디오 뉴
  스도 그 사건 보도에 이르러선 이렇게  말했다. 강남 부녀자 연쇄 살인 
  사건을 수사하고 있는 경찰은......  그러면서 아나운서는 경찰은 시민
  들의 제보를 기다린다고 말했다. 제보를 기다린다고. 당신도 그런 뉴스
  를 들었을 것이다.

   오후에 나왔을 때,아니 그곳에  도착해서도 나는 버스에서 내리자마자 
  한쪽 옆에 비켜서서 당신  사무실을 오래도록 쳐다보았다. 당신은 내가 
  도착했을 때 창문을  열어 놓은 상태로 있었으며 잠시  후 그것을 닫았
  다.

   그날 나는 한 시간 가까이 그곳에서  사무실 안에 있는 당신의 일거일
  동을 살폈다. 당신은 오분이거나 십분 사이로 창문을 열고 닫았다.

   나는 그것을 당신이 무언가 이야기하고 싶다는 뜻으로 받아들였다. 아
  니면 사무실에 나오기는 했지만 진정할  수 없도록 불안한 당신의 마음
  이 당신 스스로도 느끼지 못하는 사이에 그렇게 나타나고 있거나.

   한참 후 당신은 당신이 늘 열고  닫는 창문의 유리창 한구석에 주황색 
  색종이 하나를 붙였다. 무슨 뜻일까, 그것은.

   왜 그 자리에  당신은 그것을 붙인 것일까. 바람에  날리는 그 오렌지 
  색을.

                      
 소 제 목 : 나는 숨어서 그것을 바라보았네
   나는 오래도록 숨어서 그것을 바라보았다.

   오렌지 색이라.....
   그것으로 당신은 내게 무엇인가  이야기를 하고 싶었는지 모르지만 나
  는 거기에서 아무 것도 읽어낼 수가 없었다. 내가 읽어낸 것은 단지 당
  신이 내게 무언가  이야기를 하고 싶어 한다는  것뿐이었다. 내가 남긴 
  두 번의 메시지  T자조차 아직 경찰이 그것을  읽어내지 못하고 있는데 
  그런 것도 없이 그냥 색종이 하나로 내가 알아낼 수 있는 것이 무엇 있
  겠는가.

   오렌지 색의 상징과 압구정동,뭔가 의미가  있을 것 같기는 했지만 그
  것은 섣불리 판단할 문제가 아니잖는가. 또 당신의 어떤 메시지를 내게 
  보낸다고 하여 그것이 앞으로의 내 행동에  어떤 영향을 줄 수 있는 것
  도 아니잖는가. 이제 내가 당신에게 궁금한 것은 당신의 반응일 뿐.

   첫날 당신이 당신 사무실을 나와 어디론가  두군데 전화를 거는 걸 보
  았던 게 아직도 내겐 일말의 불안처럼  남아 있다. 물론 그동안 당신은 
  그 전화 말고도 여러 군데 전화를 걸곤 했을 것이다. 가족에게도 걸고,
  때로는 바깥 사람들에게도 걸고. 그러나 그것은 내가 보지 않은 일이므
  로 큰 걱정이 되지 않는다. 이상하게  당신이 바깥에 나와 공중 전화부
  스에서 걸던 그  전화가 자다가도 문득문득 나를  불안하게 한다. 마치 
  나의 보이지 않는 존재가 당신을 불안하게 하듯.

   이득지 선생.

   압구정동으로 나오며 처음엔 그런 생각을 생각을 했었다. 우리는 서로 
  다른 방법으로 압구정동으로 접근하고  있는 것이라고. 당신은 소설로,
  나는 현실로. 당신의  방법이 비판과 경고였다면 나는  그 비판과 경고 
  위에 응징을 더하는  것이라고. 서로 다른 방법으로  같은 곳으로 가는 
  두 사람......

   당신은 소설이란 이름으로 화제를 모으고 스포트라이트를 받으며,나는 
  이제 끝없는 추적과 저주를 받으며......

   그러나 이제 당신에 대한 갈채와 나에 대한 저주의 또한 어느 한 지점
  에선 같은 몫으로 합치게 될지 모른다.  언젠가 그들이 내 메시지를 정
  확하게 읽어내기만 한다면. 아니  그들은 오래잖아 그것을 읽어낼 것이
  다. 나는 그들이  하루라도 빠른 시간 안에  그것을 읽어주도록 당신의 
  책을 찢어 사용했다. 못 읽을 그들이 아니잖는가.

   전정 당신이 한국 천민자본의 부패와 타락을 경고하기 위해 그 소설을 
  쓴 것이라면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이 나를 비난한다 하더라도 이득지 선
  생,당신까지 그 편에 있어서는 안  될 것이다. 그러나 아직은 당신에게 
  그걸 요구할 때가 아니라는 것도 알고 있다.

   당신이 내게 보내는 메시지의 진짜 뜻이 무엇인지 모르지만 어쩌면 우
  리는 서로가 서로에게 보내는 그 메시지를 통해 같은 길을 나아갈 것이
  라는 섣부른 희망을 나는 하고 있다.

   지금쯤 경찰이 내가 남긴 T자 메모의 메시지를 읽기에 바쁘듯 나도 당
  신의 주홍색 메시지를 읽도록  노력하겠다. 그것이 정말 당신이 나에게 
  하는 말이라면. 그러나  어느 경우에도 나는 그들을  향한 나의 테러를 
  멈추지는 않을 것이다.

   현재로서 나는 아무 것도 아는 것이 없다. 당신이 어떤 뜻으로 경찰에 
  나가지 않고 있는지조차. 그것이 단순히 앞으로 당신과 당신 작품에 닥
  칠 어떤 비난의  말들과 앞으로의 일들에 대한  감당을 두려워해서인지 
  아니면 또다른 뜻으로 그러는 것인지. 

   앞으로도 나는 계속 당신을 지켜볼  것이다. 그리고 당신의 그 메시지
  가 무엇이라는 것을  내 스스로 읽는 날 내가  당신에게 같은 방법으로 
  메시지를 전달하겠다.

   하려고  勇 방법이야 왜 없겠는가. 당신이 유리창에 오렌지색 색종이
  를 붙이듯 나도 그 메시지의 뜻을 읽는 날 당신의 메일 박스에 같은 색
  의 색종이를 넣어두겠다. 만약 당신이 그런 내 메시지를 읽는다면 또다
  른 메시지로 화답하게 될 것이나 별 의미없이,혹은 나에 대한 메시지가 
  아니라 다른 필요에 의해 그것을 붙인 것이라면 메일 박스에 든 색종이 
  역시 아무 의미 없이 그곳에 넣어져  있는 휴지 정도로 여기고 말 것이
  다.

   그런 방법 외에 이제 우리는 전화를  주고받을 수 있는 사이도 아니잖
  는가. 물론 전화를  斂 받는다고 해서 안 될 것은 없겠지만 그 전화라
  는 것도 당신의 분명한 거처를 아는  내가 먼저 시작해야 할 것인데 현
  재로서는 내가 그런 위험 부담을 안을 수 있는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

   이득지 선생.

   그럼 내일 또 나는 당신을 보러 나오겠다.
   세상은 서두르지 않고 내가 그들에게 던지 당신의 메시지를 읽을 것이
  며.
   거듭 말하지만 지금 우리는 게임을 하는 것이 아니다.


 소 제 목 : 남 형사가 꺼낸 책은 ...

   "뭐라구?"

   전화를 받는 석 경감의 얼굴이 예사롭지가 않았다. 연신 두 마리의 누
  에가 그의 이마에서 꿈틀댔다.

   "알았어. 알았으니까 일단 들어와서 얘기를 해."

   석 경감은 쿵,하고 전화기를 내려놓았다. 서에 남아 있던 다른 형사들 
  모두 석 경감의 눈치를 살피고 있었다.

   그날 아침에도 석 경감은 서장에게 불려가 한바탕 찜부럭을 당하고 나
  왔다. 첫 서건 때는 그렇다 치고 동일  범행에 의한 두 번째 사건이 발
  생한 지 한 달이 다 돼 가는데도 아직 사건의 윤곽조차 못 잡고 있다는 
  게 어디 말 犬 되는 소리냐고 서장이 호통쳤다. 증거라고는 범인이 남
  긴 T자 메모  밖에 없는데 아직 아무도 그 뜻을  읽어내지 못하고 있는 
  것이었다.

   "다들 모여봐."

   석 경감이 형사들을 둘러보고 말했다.

   "그냥 선 채로 들어."

   형사들은 석 경감은 얼굴보다는 석 경감의 얼굴의 누에를 살피고 있었
  다.

   "이제 사건의 가닥이 잡히는 것 같애."

   그 말을 하면서도 석 경감은 아무런 표정이 없었다.

   "조금 있다가 남  형사가 들어와 다시 설명하겠지만  T자 메모지 말이
  야. 그게 뭐라는 건 이제 알았 .  자세한 설명은 남 형사 들어오면 듣
  기로 하고 그때까지 그냥 대기들 하고 있어. 어디로 나가지 말고."

   "무슨 뜻입니까? T가......"

   "자세한 얘기는 들어와 하라고 그랬어. 그 메모지를 어떤 책에서 찢어
  낸 것인지만 밝힌 거지 사건의 어떤 단서까지 알아낸 건 아니니까."

   "무슨 책인데요?"

   "무슨 소설 책이라는군. 남 형사가 곧 듣어온다니까 무슨 얘기가 있겠
  지."

   형사들은 자리에 앉은 채 대기했고,전화를 건 남 형사는 30분쯤 후 두
  툼한 사각 봉투 하나를 옆구리에 끼고 들어왔다.

   "다녀왔습니다."

   "애썼어.어떻게 된 건지 얘기를 해봐."

   석 경감이 세워둔 채로 남 형사에게 말했다.

   "아무래도 출판사 쪽이 빠르겠다 싶어 전에 몇몇 출판사들 돌아다니며 
  알아봐 달라고 부탁을 했던니 한군데서  연락이 와서 나갔다 오는 길입
  니다."

   "이 사람아,그럼 거길 나간다고 보고를 하고 나가지. 난 또 어딜 그렇
  게 나가나 했더니만."

   "며칠 전에도 한 번 그런 일이  있어서 제 눈으로 확인하고 나서 말씀
  드리려고 그랬습니다."

   "그래,그럼 다들 있는데서 얘기를 해봐.  우리만 알아야 할  舅見 회
  의실로 들어가서 이야기를 하던가."

   "괜 찮습니다. 여기도."

   그러면서 남 형사는 들어온 사각 봉투 안에서 책 한 권을 꺼냈다.

   <<압구정동>>

   "바로 이 책입니다."

                   
 소 제 목 : 뭐 테러리스트?

   "이 책 어디?"

   "바로 여깁니다."

   남 형사는 미리 그 페이지를 접어온  듯 책을 펼쳤다. 그리고 전에 복
  사해 가지고 있던 범인의 메모지를 꺼내 그 옆에 놓았다. 펼친 곳은 그 
  책의 51페이지였고,찢어낸  부분은 그 페이지의  오른쪽 윗부분이었다. 
  남형사는 미리 준비한 듯 범인이 그 책을 찢어낸 부분을 붉은 볼펜으로 
  선을 그어 놓았다.

   "이게 첫 번째 사건 때 남긴 메모집니다."

   "정말 그렇네."

   "그래,맞아."

   동료 형사들이 가벼운 감탄을 했다.

   "그럼 두 번째 메모지는?"

   아까처럼 석 경감이 다시 표정 없는 얼굴로 물었다.

   "그건 여깁니다."

   남 형사는 먼저  펼친 곳에 메모지를 끼워둔 채 그  책의 앞부분을 을 
  넘겼다. 29페이지에도 남 형사는  뒤에 것과 마찬가지로 붉은색 볼펜으
  로 범인이 메모지로  찢어낸 부분을 표시해 두었다.  그리고 그 위에도 
  두번째 사건 때 범인이 남긴 메모지를 올려 놓았다.

   "이건 앞이네. 사건은 뒤에 났는데."

   "그러게 말이야." 

   "그건 아직 잘 모르겠습니다. 왜 그랬는지."

   "그럼 T자의 뜻이 뭐야?"

   이번에도 석 경감이 물었 .

   "출판사 사람 말로는 그 사건에 이 책을 찢어 남긴 메모지에 T자를 쓴 
  거라면 테러리스트의 이니셜로 쓴 게 틀림없을 거라고 했습니다."

   "자넨 아직 이 책 안 읽었어."

   "예. 제목은 전에도 여러번 듣고 봤는데  책은 오늘 나가서 처음 봤습
  니다."

   "출판사 그 친구는 어떻게 알았대?"

   "거기도 작가들이 자주 드나드는데  들어오는 사람들한테 가끔씩 물어
  봤답니다.이게 이 어느 책에서 찢어낸 것 같으냐고요."

   "또 소문 다 내는 거 아니야."

   "아마 그렇지는 않을 겁니다.  이 사건과 관계없이 부탁했던 일이니까
  요."

   "T 자도 물어봤다면서?"

   "그건 오늘 처음 물어본 것입니다. 전에는  얘기를 하지 않고 오늘 처
  음 이게 이 사건에 범인이 남긴 메모지라고 얘기를 했습니다. 그렇지만 
  그 사람 다른 데 가서는 그런 얘기를 하지 않을 것입니다. 단단히 주의
  도 줬고요. 만약  언론에라도 우리보다 먼저 공개를  하면 곤란한 일이 
  있을 거라고 겁도 주고요."

   "그런데 그 놈이 왜 이 책을 찢어 썼다는 거야."

   "그 사람 말로는 이 책 내용이 압구정동의 부패와 타락에 대해 얼굴없
  는 테러리스트가 나서서 테러를  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읽으
  면 금방 무슨 뜻인지 알 거라고 했고요."

   "때 아니게 수사 접어두고 책 읽게 생겼구만."

   박 형사였다. 석 경감은 그런 박  형사를 잠시 곁눈으로 보곤 다시 남 
  형사에게 말했다.

   "그럼 이 사람아,사 가지고 올 거면  여러 권 사 가지고 와야지. 혼자 
  읽고 말거야? 형사가 몇인데."

   "그 생각은 미처 하지 못했습니다."

   "어느 세월에 책 한 권 가지고 돌려가면서 읽을 수도 없는 거고. 책은 
  어디서 구했는데."

   "서점에 갔던 것도 아니고 그 친구가 가지고 있는 책을 달래서 가져왔
  습니다. 얼른 들어오라고 해서 서점에 나가 볼 시간도 없었고요."

   "알았어. 그거야 아르바이트생한테  시키면 되는 거니까. 나도  이 책 
  제목은 들어왔어. 읽어보지는 않았지만."

   "저희들도 제목은 들어봤습니다. 한 때 광고도  꽤 많이 나왔던 것 같
  구요."

   "그런데 어떤 사람이 쓴 책이야? 이리 줘봐."

   남 형사가 메모지를 끼워놓은 채 책을 들어 석경감에게 건넸다.

   "이득지 장편소설?"


 소 제 목 : 욕망의 해방구를 배경으로
 책 겉장을 보고 석 경감이 말했다. 그때 특유의 누에 눈썹이 꿈틀거렸
다. 이어 석 경감은 책 겉장을 펼쳐 그곳 날개에 이득지의 사진과 함께 
적혀 있는 작가의 약력을 살폈다.

 "이 사람이야?"
 "예. 그렇습니다."
 "가만 있어봐."

 석 경감은 작가의 약력 소개 아래  남 형사가 밑줄을 그어놓은 [이 소
설,<<압구정동>>은 이른바 욕망의  해방구로 불리는 <압구정동>을 배경
으로 자본의 부패와 타락을 연쇄 테러의 플롯에 담아 비판,경고한 작품
으로 현대 산업사회의 구조적  모순을 실감나게 그려냄으로써] 하는 부
분을 자세히 살폈다.

 남형사는 그 가운데 [압구정동을 배경으로]와 [연쇄 테러의 플롯에 담
아]를 강조하듯 두 줄로 그어놓았다.

 "그럼 소설을 보고 저지르는 모방 범죄라는 얘기야?"

 "아직 읽어보지 않아  단언할 수는 없는데 일단은  그런 것 같습니다. 
오늘 나갔던 출판사 친구도 그런 것 같다고 말하고요."

 "이 사람은 어떤 사람이래?"

 "오늘 그 친구 말로는 요즘 잘  나가는 젊은 작가라고 했습니다. 90년
대 작가라든가 뭐라든가 하면서."

 "골치 아프군. 요즘 소설이고  영화고 비디오고 맨 폭력물에다가 섹스
물뿐이니까 그런 걸 보고 애들이 뭘 배우겠어. 그러니 책 읽은 거 보고 
그대로 사건 저지르고,영화 보고 나서 그대로 그 짓하고 그러는 거지."

 "일단 책부터 읽고 나면 범행 의도 같은 것도 드러날 것 같은데요."

 "그래, 아르바이트생 좀 오라고 그래. 아니,그러지 말고 남 형사가 나
가서 몇 권 사 가지고 들어오지. 괜히  한 놈 두 놈 더 알게 하는 것보
다는. 여유있게 아주 몇 권 더 사 가지고 오라고. 괜히 나중에 더 필요
해서 또 사러 나가지 말고."

 "알겠습니다."
 남 형사가 자리에서 일어서서 밖으로 나갔다.

 "그리고 박형사,자네는  이사람,이 이득지라는 사람  연락처하고 주소 
좀 알아보고. 우리가  연락하거나 협조 받아야 할  일이 있을지 모르니
까."

 "그럼 책 좀 주십시오."
 "책은 왜?"
 "책을 낸 데다가 알아보는 게 제일 빠르지 않겠습니다."
 "그렇군. 그런데 이게 뭐야? 이거 신문사에서 나온 책 아니야? 대한일
보 말이야."
 "어,정말 그런데요? 신문사에서도 책을 내나......"

 박 형사의 그 말은 신문사에서 신문만  내지 무슨 책까지도 다 내느냐
는 소리였다. 다른 형사들에게도 왠지 그건 뜻밖의 일처럼 보였다. 

 그냥 알아볼까요?"
 "신문사로 알아본다면 어딜 알아보는데?"
 "그냥 전화를 걸어서 묻죠 뭐. 대한일보에서 그런 책이 나왔는데 어느 
부서 누구한테 알아보면 되느냐고."
 "그러지 말고 다른  데로 알아봐. 괜히 신문사에  전화를 걸어 광고를 
할 일도 없는 거고."
 "그럼 어디로 알아볼까요."
 "그걸 나한테 물으면 어떻게 해? 내가  그 사람 전화번호를 가지고 있
는 것도 아니고...... 아니,나둬. 남  형사 들어오면 출판사 쪽으로 알
아보라면 될 테니까."
 "그런데 서장님한테 보고를 안 해도 될까요?"

 아까부터 별 말 없이 뒤에 물러나 있던 최 형사가 말했다.
 "보고?"
 "예."

 그러고 보니 석  경감도 미처 그 생각을 하지  못하고 있었다. 아침에 
호통을 칠 때 서장은 수사상에 무슨 일이 있으면 자기에게 지체없이 보
고하라고 했던 것이었다.

 "내일 아침에 하지. 우선 우리가  이 소설의 내용부터 파악하고 나서. 
그게 낫지 않겠어? 서장님이 뭘 물어도 말이지. 대신 우리 형사들도 내
일 아침까지는 이걸 다 읽고 나오도록 하고."

            
 소 제 목 : 구로공단에서 일하던 그 여자는...
   다음날부터 수사는 활기를 띠기 시작했다.

   아침 일찍 석 경감은 전에 남  형사가 복사한 범인의 메모지와 이득지
  의 압구정동을 들고 서장실로 들어가 그것을 보고했다.

   "정말 사건이 터지는군."
   석 경감의 보고를 듣고 나 서장이 말했다. 

   석 경감은 서장이 무슨 뜻으로 그 말을 하는지 감을 잡았다. 잠잠해졌
  던 사건이 그것으로 다시  시끄러워진다는 얘기였다. 어쩌면 그것은 앞
  서 두 번의 사건 발생 때보다  사회적으로 더 시끄러워질 수도 있는 일
  이었다.

   "바깥에 사람들도 다 알고 있는 일이야?"
   "현재로선 저희 강력계 형사들만 알고 있습니다."

   석 경감은 남 형사에게 그것을 가르쳐  준 출판사 기자 이야기는 하지 
  않았다.
   "그럼 아직은 비공개로 수사를 해. 언제  공개를 해야 할지는 내가 따
  로 지시를 할 테니까,가능한 그 전에 범인을 잡아내고."

   "알겠습니다."
   "책은 거기 두고 나가. 누가 묻더라도 나도 감을 잡아야 하니까."
   석 경감은 서장실을 나와 강력계로 돌아왔다. 형사들이 반장을 기다리
  고 있었다. 석경감은 형사들에게  서장의 지시를 간략하게 설명하고 모
  두 사무실 옆 회의실로 모이라고 했다.

   "다들 책은 보고 나왔을 테니까 이야기를 해보지. 대충 가닥들을 잡았
  을 테니까."

   회의실 가운데 자리에 앉아 석  경감이 형사들을 둘러보며 말했다. 처
  음엔 아무도 입을 열려고 하지 않았다.

   "김형사부터 애기를 해봐."
   "어제 집에 가 처음부터 끝까지  읽어봤는데 모방 범죄가 틀림없는 것 
  같습니다. 
  이 책에서 메모지를 찢어냈다는 것도 그렇고. 형사라는 직업을 떠나 책
  을 읽으니까 어딘지 모르게 화나게 하는 구석들도 많았구요."

   "화나게 하는 구석이라니."
   "책 내용이요. 읽은 사람 다는 아니겠지만 개중엔 범인처럼 자신이 소
  설 속의 테러리스트처럼 행동하고 싶은 충동을 느끼게도 하고......"

   "또 얘기들 해보지. 사건하고 관련해서......"
   "책 내용으로 봤을 때 지금으로선 세번째 곧 발생하지 않을까 하는 생
  각이 들었습니다. 그렇게 된다면 대충 어떤 사람이 희생될 거라는 생각
  도 들고."

   최 형사였다.
   "책에 나오는 대로 말이지."
   "예. 처음 피살자도 그렇고 두번째 피살자도 그렇고요."
   "처음에 노인이 피살된 건 같아도 두번째 피살자는 달랐잖아. 책에 나
  오는 대로라면 게이여야 하는데 그냥 여자였고. 내 생각엔 오히려 게이
  라기보다 이 책에 나오는 주인공 여자 같은 느낌이 들었는데."

   "그런 건 있지만 무용수라는 것도 그렇고 이미지는 비슷하잖습니까?"
   "저도 그 부분에 몇가지 의문을 가졌더랬습니다."
   남 형사였다.

   "일단 이번 사건이 이 소설에 대한  모방 범죄라고 볼 때 소설의 흐름
  도 그렇고 또 두번째 피살자가 무용수라는 걸로 봐선 게이 쪽이 가까운
  데 T자 메모지는 서장님 말씀대로 앞부분 여자 주인공에 대한 얘기에서 
  찢어냈고요. 이번 사건하고  관련해서 본다면 제 생각엔  그 둘을 합친 
  게 아닌가 싶습니다.  죄송한 말씀입니다만 우리가 그  놈을 잡기 전에 
  다음 번 사건이 일어난다 해도 게이는  아닐 거라는 거죠. 두번째 피살
  자가 강남 환락가의  무희였으니까. 그래서 제 생각엔  다음 번 사건이 
  발생한다면 소설에 나오는 대로 복부인 같은 게 아닐까 싶습니다."

   "내 생각도 그렇긴  한데,이봐 김 형사. 지난 번  두번째 피살자 말이
  야."
   "예."
   "그 피살자 신원이 어떻게 되지?"
   "인적 사항 말씀입니까?"
   "아니,인적사항이야 아는 거고 그  여자  소설에 나오는 여자처럼 처
  음엔 구로 공단에서 알하던 아이라고 그랬잖아."
   "예. 그런데 전력이 좀 화려합니다.  처음엔 구로공단 어디 있는 봉제 
  공장에서 일했고,거기서 미싱 자수를 하는 쪽으로 옮겼고,다시 전자 부
  품 공장,또 미싱 자수,잠깐만요, 워낙 여기 저기 옮겨서......"
   "김 형사는 주머니에서 수첩을 꺼냈다.
   "그런 다음 구로 공단에서 나와 현인릉 부근 어디 야외 갈비집에도 가 
  있었고,천호동 유흥업소에도 가 있었고,그러다 동대문 어디 나이트클럽 
  무용수로 있다가  강남으로 옮긴  거라고 했습 求. 전체  여덟 군데를
  요."
   "그럼 어디 정리를 해 보자구. 우리는  범인을 잡자는 거지 이번 사건
  하고 소설하고 얼마나 비슷한지를 따지는 게 아니니까."

                   
 소 제 목 : 그가 받은 이상한 전화
   석 경감은 다시 형사들을 둘러보았다. 뭐 느끼는 게 있거나 감이 잡히
  는 게 없느냐는 얼굴이었다.

   "나도 어제 이걸 읽고 곰곰히 생각해 봤는데,우리가 이번 사건의 범행 
  성격이랄까 범인의 의도가 뭔지는 알겠는데 그런다고 그게 수사에 어떤 
  도움을 주는 건 아니란 얘기야. 지금 우리가 알아낸 건 사실 다른 사건
  에선 기본적으로 알  수 있는 걸 두 번째 사건이  나고도 한 달이나 더 
  걸려 알아냈던 거구. 그러면서도 크게 도움이 되는 건 없다는 얘기야."

   "아뇨.그렇지는 않습니다."
   박 형사였다. 그는 이 ┗沮 잠자코  다른 사람들의 말을 듣기만 했었
  다.

   "아니면?"
   석 경감의 눈썹이 위로 꿈틀거렸다.  뭔가 기대할 만한 뽕잎이라도 있
  느냐는 표정이었다.

   "이번 사건하고 소설하곤 뗄래야 뗄 수가 없는 연관성이 있거든요. 그
  게 지금 우리가 밝혀낸 대로 모방 범죄든 뭐든......"

   "그래서?"
   "저도 어제 이걸  읽고 이런저런 생각을 해봤습니다.  이 소설이 뭐를 
  얘기하기 위해 쓴 거다 하는 건  사실 우리한테는 필요가 없는 얘기고,
  필요한 게 있다면 소설에 나오는  피살자들의 신원과 이번 사건의 피 
  자 신원의 관계라는 거죠. 그래서 종이에 한 번 정리를 해봤습니다. 소
  설 속의 피살자는 사건 순서대로라면  제일 처음 성도착증에 걸린 노파
  고 두번째가 게이입니다."

   "그거야 얘기하지 않아도 다 아는 얘건 거고."
   "그렇죠. 다 아는 얘기죠. 한 사람은 압구정동 부촌 아파트에 사는 사
  람이고 한 사람은  밤무대에서 스트립 쇼를 하는  여자고요. 아뇨,진짜 
  여자는 아니지만 여자라고 하고요. 그리고 이번 사건의 피살자 역시 첫
  번째 노인은 성도착증에 걸린 것은 아니지만 고리대금업을 하는 노인이
  고,두번째는 조금 전 김 형사가 얘기한  대로 단지 무용수다 뿐이지 소
  설 속의 게이하고는 전혀  상관이 없거든요. 오히려 비슷하다면 소설에 
  나오는 여자 주인공 쪽이지. 그런데 소설과의 연관성을 떠나 첫번째 두
  번째 사건이 두 사건 사이에도 어떤 연관성이 있다는 거죠."

   "연관성이라니?"
   "예. 소설 속의 테러리스트는 얼굴이 없지만 이번 사건의 범인은 우리
  가 아직 그 놈을 잡아내지 못해서 그렇지 얼굴 없는 테러리스트가 아니
  라는 거죠. 다시 말해 소설 속의 테러리스트는 그 소설을 쓴 작가가 먼
  저 죽여야 할   菅갠湧 소개하고 나서 언제라도 그  사람들을 죽일 수 
  있는 위치에서 홍길동처럼 동에 번쩍 서에 번쩍할 수 있도록 만들어 놓
  은 허상의 테러리스트지만  현실에선 범인이 평소 피살자들을  잘 알지 
  못하고서는 그게 불가능하다는 얘깁니다."

   "계속해 봐."
   "문제는 이번 사건의 피살자  사이의 공통점입니다. 거기에 더해서 범
  인까지 세 사람이 어떤 한 가지의 끈을 가지고 있다는 거죠."
   "끈?"
   "예. 첫번째 피살자인 노인부터 말씀드리겠습니다. 그 노인이 사는 건 
  압구정동 아파트지만 공단 부근에 벌집  여러 채를 가지고 있었지 않았
  습니까? 그리고 두  번째의 피살자인 무용수도 공단  출신 아이인 거구
  요. 제 생각엔 범인도 어쩌면 그 부근에 살고 있거나 살았던 사람이 아
  닌가 싶습니다. 그때 이 두 피살자들에 대해 잘 알고 있었던 게 아니냐
  는 거죠. 그러다 이  책하고 똑같은 사건을 저질러야겠다고 마음먹었을 
  때 자연스럽게 이 사람들을  떠올렸다는 겁니다. 아뇨,처음부터 떠올리
  지 않더라도 대상을  찾다보니 이 사람들이 생각났다  해도 마찬가지인 
  거구요. 꼭 소설에 나오는 대로만 하겠다고 마음 먹었다면 두번째 범행 
  대상을 억지로라도 게이를 찾아가 그렇게  했을 수도 있겠지만 실제 피
  살자가 게이가 아닌 보통 여자  무용수인 걸로 봐선 억지로 찾기보다는 
  평소 자기가 알고 있는 사람들 가운데 비슷한 사람을 범행 대상으로 삼
  았다는 거죠."

   "그래. 말이 되는구만. 그렇지만 그걸로 범인을 잡아낼 수 있는 건 아
  니잖아."
   "당장 잡는다기보다는 범위를 좁혀  들어갈 수는 있다는 겁니다. 우선 
  노인 소유의 벌집 주변으로 좁혀들어갈 수도 있는 거고,그보다 넓게 잡
  는다 해도 공단 주변일 것 같다는  생각도 들고요. 지금까지 드러난 것
  으로 봐도 그렇고요."

   "다른 사람들 생각은 어때?"
   "한 번 그렇게 좁혀 보죠. 그리고 아직 들어내놓고 접근하지는 않는다 
  하더라도 소설가 이득지 주변도 살펴보고요."
   "이득지 주변?"

   남 형사가 말했고,석 경감이 되받아 물었다.
   "이득지 개인이 그럴 리야  없겠지만 사람 일이라는 건 모르잖습니까? 
  주변 사람 누군가 그럴 수도 있는,아,그래,맞아! 그때......"
   "남 형사는 채  말꼬리를 짓기도 전에 갑자기 무릎을  치듯 책상을 쳤
  다.
   "맞다니,뭐가?"

   "그거 말입니다,반장님. 지금 막 생각났는데 그때 말이죠,두번째 사건 
  나던 날이요. 그때 왜 오후에 제가 이상한 전화 하나를 받았잖습니까?"
   "전화라니?"
   석 경감과 동료 형사들은 일제히 남 형사를 바라보았다.
   
               
 소 제 목 : 걷잡지 못할 사회문제가 될게 뻔한
     "그날 오후  다른 분들은 다 나가고  저하고 반장님만 계실 
    땐데 전화 한 통이  걸려왔습니다. 막 신문을 보고 나서였는
    데,30대 후반쯤되는 남자가 두 번째 피살자가 게이가 아니냐
    고 물었습니다. 그래서 아니라고,보통 여자라고 하니까 알았
    다고 전화를 끊었거든요."

     "그래,생각나는군. 그래서  남 형사가 전화를  끊고 나한테 
    그 얘기를  했고,내가 정신이 온전한 사람이면  그런 전화를 
    하겠느냐고 했고 말이지."

     "그 사람은 사건의 성격을 그때 이미 알았다는 얘긴데 그게 
    잘 이해가 안 갑니다. 그때까지  바깥에 알려진 건 범인이 T
    자 메모지를 남겼다는 것 뿐이지  그 메모지가 어떤 책을 찢
    어낸 것이라는 건 전혀 알려지지 않은 상태였거든요. 그러데
    도 그 사람은 어떻게 알고 그런 전화를 했고요."

     "가만히 있어봐,그럼 그게  범인이거나 이득지가 전화를 했
    다는 얘기가 아닐까요?"

     박 형사였다. 처음엔 이 사건에 대해 그렇게 흥미를 보이지 
    않던 그가 범인 메모지로 찢어 사용한 이득지의 소설 <<압구
    정동>>을 본 다음부턴 누구보다 이 사건에 흥미를 느끼고 있
    었다.

     "범인이야 암만  대담하더라도 쉽게 그런  전화를 경찰서로 
    할 수 없었을 테고,  이득지일 가능성도 충분히 있는 거지만 
    그것도 쉽게 속단할 일은 아니겠지. 좌우지간 우리로선 범인
    을 잡는 게 목적이니까  알아볼 데는 다 알아봐야겠지. 소설 
    내용이 중요한 게 아니라 그 내용을 그대로 현실로 옮기려고 
    하는 한 놈의 범인이 있다는 게 중요하니까."

     "그런데 언제까지 메모지를 공개하지 않을 수도 없는 것 아
    닙니까? 나중에라도 그게 또 언론의 표적이 될 수 있는 거고
    요."

     남 형사였다.

     "그래서 자네 생각은?"

     "공개가 빠르면 빨를수록 좋다는 거죠. 그래야 제보라도 받
    을 거 아닙니까? 얼마나  많이 팔렸는지 모르지만 아무리 많
    이 읽힌 책이라고 대한민국 국민이 다 그 책을 읽은 건 아닐 
    테구요."

     "그 문제는 서장님이 알아서 하실 테니까 조금만 더 기다려 
    보자고. 범인을 잡고 나서 그걸 공개한다면 더 바랄 게 없겠
    지만."

     석 경감은  김형사와 최 형사에겐 첫번째  피살자인 노인의 
    소유였던 벌집의 지난  1년간의 주민등록 상태를 파악 灸箚 
    지시하고,남 형사에겐 이득지의  주변과 그의 인적사항과 지
    금까지 그가 쓴 작품들과 그에 관계된 자료들을 모으라고 지
    시했다. 어차피 사건은 언론에 공개되지 않을 수 없을 테고,
    그렇게 되면 경찰도 나름대로 준비해야 두어야 할 자료가 필
    요했다. 그리고 박 형사에겐 사건 발생하기 한 달 전부터 이
    제까지 그의 집과 사무실의 전화 통화 내역을 뽑으라고 지시
    했다.

     석 경감의 생각은 박 형사가 말한 대로 구로공단 가까이 있
    는 노인 소유의 벌집 주변과  이득지 주변을 함께 살피  것
    으로 이 사건을 접근해 가겠다는 뜻이었다. 현재로선 그것말
    고는 달리 방법이 없는  일이기도 했다. 처음부터 범인은 사
    건 현장이거나 피살자의 신체에 이렇다 할 증거를 남기지 않
    았다.

     "시끄러워지겠는데요."

     어제 박 형사가 알아준 이득지의 사무실로 나가기 전 남 형
    사가 석 경감에게 말했다.  다른 형사들은 이미 지시를 받은 
    곳으로 나간 다음이었다.

     "사건도 사건이지만  사건에 얽힌 얘기 말입니다.  저도 몇 
    년밖에 경찰 생활하지 않았지만  이 사건처럼 시끄러워질 모
    든 요소를 갖춘 사건도 없는 것처럼 보이는데요. 압구정동이
    라는 지역도 그렇고,부녀자 연쇄 살인이라는 것도 그렇고,또 
    어떤 소설의 모방범죄라는 것도 그렇고,그 소설의 사회적 메
    시지도 그렇고 말이죠."

     "나도 그런 생각을 하고 있어.  두 번째 사건 나고 나서 며
    칠 지난 다음 이 사건에 대해 잠잠해지고 있는 게 오히려 더 
    사건을 키우고 있는 게  아닐까 싶을 만큼 불안하기도 하고. 
    여기다가 다음번 사건이 터지기라도  하면 그땐 아무도 걷잡
    지 못할 사회적 문제가 될 테고 말이 ."

     "사건 흐름으로 봐 어차피 세번째 사건이 발생하지 않을 수 
    없겠는데,발생한다면 반장님 생각엔  언제쯤 발생할 것 같습
    니까?"

     "바로 오늘."

     대답을 하고 나서  석 경감은 굳게 입을  다물고 나 형사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소 제 목 : 남형사는 이득지의 자료를 부탁하고
     "예?"

     그리고 남 형사는  석 경감의 어깨 뒤에 걸려  있는 4월 달 
    달력을 쳐다보았다.  자기도 모르게 소설 속의  사건과 현실 
    속의 사건이 혼돈을 일으키는  것이었다. 아니,현실 속의 사
    건도 먼저 발생한 두  사건 다 금요일에 발생했었다. 그러나 
    오늘은 금요일이 아니었다.

     "주기로 봐서 사건이 발생할 때가 되었다는 얘기야. 하루하
    루가 바로 사건 예정일처럼 느껴질 정도로."

     "이번 사건도 금요일에 발생한다면 내일 모레군요."

     "나도 자꾸 그 날이 신경쓰여. 그 전에 어  구체적인 단서
    를 잡았으면 하는데 이건 털 하나 떨어진 걸 들고 어디 있는
    지도 모를 황소를 찾아내는 셈이니......"

     "이제 달라지겠죠. 하나하나 밝혀나가기 시작하니까."

     "그렇다고 당장  다음 사건을 예방할 수  있는 게 아니니까 
    문제지. 경찰이 먼저 곧 사건이 터질 것 같다고 공포할 수도 
    없는 문제고..... 그만 나가봐. 그만."

     "알겠습니다. 그럼 먼저 관할 전화국으로 가 그것부터 부탁
    해 놓고 이득지의 사무실이든 집 주변을 살펴보겠습니다."

     "그래. 무슨 특별한 일이 있 만 전화하고......"

     그러나 남 형사는 전화국으로  나가기 전 지난 번 메모지의 
    출처를 밝혀내는 데 도움을  주었던 출판사 기자부터 찾아보
    았다.

     사무실 안으로 들어가기가 뭐해 그는 그 출판사 건물 밖 다
    방에서 기자를  불러냈다. 그러면서 그는 자신이  정말 현실 
    속의  사건을 쫓고  있는 것인지  아니면 이득지가  쓴 소설 
    <<압구정동>>에 나오는 최형사가  되어있는지 모를 기분이었
    다.

     정말 웃기는 일이었다.  조금은 쓸쓸해지기도 하면서. 명색
    이 형사인 사람이 사건  米搔 뽑으러 다니면서 자신이 소설 
    속의 형사를 그대로 닮고 있다는 생각을 할 때 소설 속의 테
    러리스트로 자처하고 나선 범인의 심정은 또 얼마나 소설 속
    의 그것을 닮고 있다고 생각할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사실 이 사건을 맡은 형사 입장을 벗어나 그 책을 읽었다면 
    소설 속의 그 일보다 더 통괘한 책 읽기도 흔하지 않을 것이
    었다. 사건 수사의 기초  자료로 그것을 읽으면서도 그 테러
    리스트의 모습은 더없는 정의의 한 모습이며 우리 사회 집단 
    윤리의 한 모습처럼 보이기까지 했다. 모  것을 테러리스트
    가 생각하고 판판하는 것이  아니라 독자가 그것을 판단하며 
    그는 그것의 가장 공정한 대리 집행자처럼 보일 뿐이었다.
     그리고 소설  속에 나오는 형사 또한  사건을 수사해나가는 
    동안 남다른 날카로움을 보이면서도 심정적으로는 자기가 쫓
    는 그  테러리스트의 테러 행위를 많은  부분 이해하고 있었
    다.

     그러나 현재 그로선 사건 속의 범인에 대해 전혀 그런 마음
    이 아니었다. 오히려 그가  이해하고 싶은 쪽은 작가 이득지
    였다. 그는 이  사건에 대해 어느 정도까지   江 있는 것일
    까. 아니면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전혀 모르고 있는 것
    일까. 언제 알게 되든  앞으로 이득지로서도 이 사건의 소용
    돌이 한가운데 빠져들지 않을 수 없을 것이었다.

     "많이 기다리셨죠? 교정 보던 거 금방 끝내고 내려오느라고 
    늦었습니다."

     그가 이런 저런 생각을 할 때 출판사 기자가 내려왔다.

     "아닙니다. 또 부탁이 있어서 찾아왔습니다."

     "무슨 일인데요?"

     조금은 의외라는 표정으로 출판사 기자가 물었다.

     "이득지에 대한 자료가 필요합니다."

     "이득지에 대한 자료라니오? 그 사람한테 무슨 문제가 있습
    니까?"

     "이 사건에 소설가 이득지가  연관되었다는 것이 아니라 이
    득지의 소설이 이 사건을 저지르고 있는 범인에게 하나의 지
    침이 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하고 이득지 씨하고는 상관이 없는 일 아닙니까? 이득
    지 씨는 단지 소설을  썼고,어느 독자가 그걸 읽고 압구정동
    으로 테러를 나간 건데."

     "압니다.그건 저희들도.  이득지와 이 사건의  관계 때문이 
    아니라 작품과  사건의 관계 때문에 그러는  거니까. 그리고 
    우리로서도 이득지가 어떤 작가인지를 파악하고 있어야 하고
    요."

     "전  또  이득지 씨가  사건에  관계되었다는  얘긴 줄  알
    고......"

     그제서야 출판사 기자는 굳었던 얼굴을 풀었다.

     "저는 이쪽 일을 잘 모르고 해서 그러는 건데 김 선생이 이
    득지에 대한 자료들을 좀 챙겨 주실 수 있겠습니까? 또 이곳 
    저곳 돌아다니면서 경찰이 직접  자료를 챙기는 것보다는 그
    게 소문도 나지 않고 모양도  나을 것 같아 부탁드리는 건데 
    말씀입니다."

     "이득지씨는 이번  사건이 자기  작품 때문이라는  걸 압니
    까?"

     "모르겠습니다.  현재로선 아는지  모르는지조차도. 그래서 
    일단 저희가 작가 주변을  살펴볼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김 
    선생은 저희가 공식적으로 그것을 발표하기 전엔 이 일에 대
    해 비밀을 지켜주셔야 하고요."

     "그러지 말고 차라리 이득지 씨를  만나 보시는 게 낫지 않
    겠습니까?"

                    
 소 제 목 : 이득지의 대한 자료를 얻기위해선
     "물론 저희도 그 사람을 만나볼  생각을 하지 않고 있는 것
    은 아닙니다. 단지 그랬을  때 문제가 더 시끄러워지지 않을
    까 생각하는 거지요."

     남 형사가 출판사 기자에게 말했다.    

     "그럼 혹시 경찰에서도 작가가 이 사건에 어느 정도 연관성
    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는 겁니까?"

     "거기에 대해서는  아직 뭐라고 말할 입장이  아닙니다. 아
    니,아닌 쪽으로  생각하고 있기 때문에 더  조심스러운 거지
    요. 그렇지만 작가가 이 사건과 관련이 없다 해도 범인이 작
    가와 전혀 관련이 없는 사람이라고 볼 수도 없고...... 아무
    튼 복잡합니다. 일일이 설명하기엔......"

     "자료는 제가  뽑아드리기보다는 뽑을  방법을 알려드리죠. 
    우선 제일 쉬운 방법은  이득지에게 그 자료를 받는 겁니다. 
    작가들의 경우 대부분 자기 작품에 대한 자료들을 가지고 있
    거든요. 그게 신문에 난 자료든 아니면 잡지에 난 자료든 말
    입니다. 제가 이득지를 직접  만나보는 게  어떻겠느냐고 말
    씀드리는 것도 그런 이유입니다."

     "또 다른 방법은요?"

     "이득지의 약력에  보면 이득지가 쓴 책들이  다 나옵니다. 
    또 그책을 어디에서 출판했다는  것도 나오고요. 그럴 경우,
    대개 자기들이 낸 책에 대해서는 해당 출판사들이 그 자료들
    을 가지고 있거든요. 신문에  난 기사 경우는 거의 빠짐없이 
    가지고 있을 테고 또 자기들이 낸 광고도 가지고 있고요. 그
    런데 잡지에 난 자료들을  놓치기가 쉽습니다. 또 이따금 발
    표하는 중단편에  대한 작품 평들도 놓치기가  쉽고요. 그건 
    제가 대신 뽑아주는 경우에도 다 챙길 수 없기는 마찬가집니
    다."

     "<<압구정동>> 경우는 어땠습니까?"

     "대단했죠,아마. 그때까지는 그런  소설이 나오지 않았으니
    까. 더러 압구정동을 야유하는 차원의 단문과 시들이 나오기
    는 했지만 사회과학적으로 오늘의 압구정동 현실을 분석하듯 
    그곳 실상에  대해 깊이 들어갔던 작품이  없었거든요. 그때 
    그 작품에 대한 평들도  대체로 좋았던 것 같습니다. 형식도 
    그랬고,문체도 그랬고...... 안 읽어봤습니까?"

     "아뇨. 봤습니다. 솔직히 말해서  제 직업이 형사만 아니라
    면 같은  생각을 했을 정도로 공감이  가는 부분도 많았습니
    다. 그런데 제가 일부러  그렇게 봐서 그런지는 몰라도 그걸 
    읽으면 독자 스스로 자신도 그 속의 테러리스트가 되고 싶다
    는 충동을 느끼게 한다는 거죠."

     "모르겠습니다,저는. 그렇게  읽힌다 해서 그게  죄가 되는 
    일인지도 잘 모르겠고...... 그런데 어느 정도까지의 자료가 
    필요한지는 모르겠습니만 작품에  대한 자료라면 이득지씨한
    테 직접 뽑는 게 제일 빠를 겁니다."

     "그러잖아 만나보기는 만나 봐야 하는데......"

     "저는 이만 올라가 봐야겠어요. 하던 일도 있고....."

     "그럼 이득지에  대한 얘기만 좀 당분간  비밀로 해 주시길 
    바랍니다. 저희도 언제  만나보더라도 만나봐야 할 사람이니
    까 오래 걸리지는 않을  겁니다. 경찰에서 그런 얘기를 발표
    하기 전까지는 말이죠."

     "알겠습니다.그럼 수고하십시오."

     출판사의 기자가 먼저 나간  다음 남 형사도 찻값을 계산하
    고 밖으로 나왔다. 반장은  서장의 지시라며 이 사건이 언론
    에 다시 공개되는 걸 피하고  있지만 끝까지 그럴 수는 없는 
    일이었다. 그는 지금도 두 번째 사건이 나던 날 경찰서로 전
    화를 했던 게 이득지가 아닐까  하  생각이 자꾸 드는 것이
    었다.

     그는 거리로 나와 택시를 잡았다.  우선 그날 그 시간 경찰
    서로 걸려온 전화 번호들을 뽑아볼 생각이었다.

         
 소 제 목 : 그래 부딪치고 보자 , 부딪치고..
     그날 남 형사는 전화국에  들렸다가 다시 서로 들어오지 않
    을 수 없었다.

     아르바이트 학생이 신문을  현관에 있는 신문함에서 신문을 
    가져와 나눠주는 게 보통 두 시였고,그 신문을 보고 나서 한
    참 있다가였다면 그 전화는 두  시 반 이후부터 세시 무렵까
    지 걸려왔다는 얘기였다.

     남 형사는 서에서 나올  때 미리 만들어온 협조공문을 내밀
    고 그 시간대에 강력계로  걸려온 전화들을 체크하려고 했으
    나 현실적으로 그것은  불가능했다. 강력계 형사들과 형사들
    의 가족,지인들말고는 강력계의  직통 전화를 아는 사람들은 
    그렇게 많지 않았다.

     대부분의 사람이  그러하듯 그 전화도 강남  경찰서의 대표 
    전화로 전화를 해 교환을  통해 돌려졌을 것이었다. 그는 서
    로 들어와 일차적으로 그 시간 경찰서 대표전화와 강력계 직
    통으로 걸려온 전화들의  번호들을 뽑았고,그것을 다시 경찰
    서 내 교환실로 가 시간대별로 통화처를 확인했다.

     그 시간  직통이든 교환이든 강력계로 걸려온  전화는 모두 
    다섯 통이었다. 그 중 세  통은 밖에 나갔던 형사들이 건 전
    화였고,또 하나는 석 경감 집에서,그리고 한 통은 마포 공덕
    동 부근의 공중 전화에서 걸려온 것이었다.

     마포?

     남 형사는 시간대별 통화 자료를 들고 석 경감 앞으로 다가
    갔다.

     "주변에서 살필 게 아니라 아무래도 부딪쳐보는 게 좋을 것 
    같은데요."

     "그것만 가지고 단정지을 수는 없는 일 아니야?"

     "그렇긴 하지만 언제까지고 그냥  가라보기만 할 수도 없는 
    일 아닙니까?"

     "그냥 우리가 은밀히 만나보는 형식으로 한 번 알아보지요. 
    그가 전화를 했다면 처음부터 사건에 대해 알고 있었거나,아
    니면 두번째  사건이 발생해 그게 신문에  실리자 사건 기사 
    내용이 자기 작품과 유사하다고 생각해 전화를 걸 수도 있는 
    일이고 말입니다."

     "알았어. 소리 내지 않도록  하고...... 그리고 말이지. 그
    냥 나갈 게 아니라 그러면  자료실에 가 그날 석간 신문들을 
    다시 한 번  챙겨보고 나가지. 기사 내용만  보고도 그걸 쓴 
    작가라면 혹 그런 생각을 할  수 있는지 아닌지 말이야. T자 
    메모가 나왔다고  했지 그게 책을 찢어낸  것이라는 건 그걸 
    쓴 작가가 누구라도 알 수  愎 일이었을 테니까."

     "알겠습니다."

     그러나 자료실에 올라가 다시 그날 석간 신문들을 챙겨보았
    을 때 어느쪽으로도 선뜻  판단이 서지 않았다. 신문엔 압구
    정동을 중심으로 두 건의 부녀자 연쇄 살인 사건이 발생했다
    고 나왔고,첫 희생자는 사채업을 하는 노인이었으며 두 번째 
    피살자는 그곳 강남 환락가의  나이트 클럽 무용수라고 나와 
    있었다. 그리고 범행 수법에  대해서도 두 피살자 두 뒤에서 
    목을 졸라 살해했으며 피살자의  몸에서 따로 금품을 탈취한 
    흔적은 보이지 않으며  活括 현장에 T자 메모지를 남겼다고 
    했다.

     이 정도  기사 내요안으로도 직감적으로 그게  자기 작품에 
    대한 모방범죄라는 생각을 할 수 있는 건지 아닌지 남형사로
    서는 판단이 서지 않던 것이었다.

     그래,일단 부딪치고 보자. 물어서 아니면 아닌 대로 맞으면 
    맞는 대로 수확은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럼 나가보겠습니다."

     남 형사는 석 경감에게 출동 보고를 하고 밖으로 나와 자신
    의 자동차에 올랐다. 그러면서  서서히 그도 이 사건에 깊은 
    흥미를 느끼지 시작했다. 그가 정신적으로 문제가 있는 사람
    이든 아니든 누군가 어느 작가의  작품을 읽고 그 작품에 나
    오는 것과 똑 같은 뜻을 가지고 똑 같은 방법으로 사람을 살
    해하고 있다. 이럴  때 세상은 과연 또  어떻게 반응할 것인
    지.

     당장 그 당사자인 작가는  이 사건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
    지...... 


 소 제 목 : 문제의 메모지에 적힌 글은 ...

   남 형사는 이득지의  개인 사무실이 있는 건물로 들어가  그 건물 4층 
  복도 끝에 있는 이득지의 사무실을 두드렸다.

   "똑,똑,똑......"

   처음엔 대답이 없었다.

   없나? 남 형사는 다시 문을 두드렸다.

   "들어오십시오."

   그제서야 안에서 대답이 들렸다. 남  형사는 조심스럽게 문을 열고 안
  으로 들어섰다.

   "어디서 오셨는지요?"

   창문 쪽으로 섰던 한 사내가 이쪽으로 향해 돌아서며 물었다. 남 형사
  는 그가 이득지일 거라고 생각했다. <<압구정동>> 책 날개에 나온 사진
  보다 한결 인상이 부드러워보였다. 일부러 테러리스트의 이미지로 찍어
  서 그런지 사진 속의 그의 얼굴은 대단히 강렬해보였다.

   "이득지 선생 맞는지요?"

   "예. 제가 이득지입니다. 무슨 일로 오셨는지요?"

   "강남 경찰서 강력계 남인우 형사입니다."

   "아,예."

   순간 이득지의 얼굴에 한 줄기 바람  같은 그늘이거나 놀람 같은 것이 
  스쳐지나가는 것을 남 형사는 놓치지 않고 보았다.

   "앉으실까요?"

   이득지가 먼저 책 상앞 쪽의 소파에 가 앉았다. 남 형사는 소파쪽으로 
  걸음을 옮기며 사무실  안을 둘러보았다.  邦 사무실  안에 창문 쪽을 
  제외하곤 책상이 놓인 쪽의 벽까지 삼면이 가득 책으로 쌓여 있었다.

   "혹시 제가 여기로 온 이유를 아시는지요?"

   남 형사는 단도직입적으로 그렇게 물었다. 물으면서 그는 정면으로 이
  득지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작가 사무실에 경찰이 찾아오는 일은 특별한 일 아니겠습니까?"

   "그 특별한 일이 무엇인지 선생께서 짐작하시고 계시는가 해서 물었습
  니다."

   "범인을 잡았습니까?"

   이득지도 빠르게 나갔다. 사건은  아직 두 건밖에 발생하지 않았고,그
  것이 자신의 <<압구정동>>과 관련된 사건이라는 걸 범인이 발설하지 않
  는다면 경찰도 아직 그걸 알 단계가  아니었다. 더구나 두 번째의 피살
  자의 경우는 같은 무용수이긴 하지만  게이가 아니라 보통 여자가 아니
  던가.

   "범인이라니요?"
   
  "그럼 그 일로 오신 게 아닙니까?"

   이득지의 얼굴은 차분하면서도  놀라고,놀라면서도 곤혹스러워하는 기
  색이 역력했다.

   "제 책 때문에 말입니다."

   "그래서 왔습니다."

   "그래서 왔다면 사건도 해결되었다는 뜻이군요."

   "해결되지 않았습니다."

   남형사도 차갑고 침착하게 말했다.

   "해결되지 않았다면 어떻게 여기까지......"

   "우선 이것 하나 확인해 주셨으면 합니다."

   남형사는 들고 있던 수 첩 속에서  범인이 남긴 메모지를 같은 크기와 
  같은 형태로 복사한 종이를 꺼냈다.

   "이게 무엇인지 알겠습니까?"

   "이거라니요?"

   "모르겠습니다.잘...... 다른 설명없이는......"

   "그 안에 적혀 있는 내용을 잘 읽어보십시오. 그래도 모르겠습니까?"

   이득지는 형사가 내민 복사지를 들어  찬찬히 그것을 살폈다. 몇 페이
  지라고 정확하게는 말할 수는 없지만  環怜 내민 그 종이 조각은 자신
  의 책 어느 부분을 복사한 것이 분명했다. 그런데 그가 왜 이걸 내밀며 
  읽어보라고 하는지 이득지로선 아직 알 턱이 없는 일이었다.

         
 소 제 목 : 이건 <<압구정동>>의 일부군요.

   "이건 제가 쓴 <<압구정동>> 일부 같은데요. 하나는 주인공 여자가 먼
  저 있던 회사에서 사장 아들에게 당할 때의 얘기고 또 하나는 성도도착
  증에 걸린 노파 이야기가 분명하고......"

   손에 들었던 종이를 소파 앞 탁자에 놓으며 이득지가 말했다.

   "그것말고는 모르겠습니까?"

   "그거 말고 또 뭐가 있는데요?"

   "그 종이를 잘 살펴보십시오. 그 종이 앞면에 뭐라고 쓰여있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이 T자 말입니다."

   "아,이거 말씀이군요......"

   "그렇습니다. 그래도 이 종이가 어떤  씬缺适 모르겠습니까?"

   "그럼 범이이 남긴 T자 메모지라는 게 바로......"

   "그렇습니다."

   이득지는 책상 쪽으로  걸어가 그 위에 놓인  담배와 재떨이를 가져왔
  다. 그러면서 그는 그 안에서 담배 한 가치를 빼어물고 나서 남 형사에
  게 갑을 내밀며 물었다.

   "태우시겠습니까?"

   "감사합니다. 그러잖아 담배가 떨어진지도 모르고 나왔는데......"

   남 형사가 이득지로부터  담배를 받고 불을 받았다.  그러는 동안에도 
  남형사는 이득지의 손과 얼굴을 살폈다. 라이터의 불 켜 내미는 이득지
  의 손이 많이 떨리고 있었다.

   "그럼 범인은 아직 잡아 낸 게 아닌 모양이군요."

   "그렇습니다. 선생님 책을 찢어 메모지로 사용한 걸 몰랐습니까?"

   "예,거기까지는. 그냥 T자 메모지가  있다는 것만 신문과 방송에서 들
  었습니다."

   "그게 바로 이거였습니다. 첫 사건  때 이거였고,두번째 사건 때 이거
  였고요. 그러 이 T자가 무슨 뜻인지도 아십니까?"

   "예.  테러리스트의 이니셜이  아닐까 하는  것은.그런데 의외군요,이
  건....."

   "의외라니요?"

   "첫 사건 때 이걸 남겼다는 건  충분히 이해를 하겠는  두 번째 사건 
  때 이걸 남겼다는 건 말이죠. 저는  지금도 두번재 사건의 희생자를 게
  이 쪽으로 생각하고 있는데......  메모지를 보니 아니군요. 오히려 주
  인공과 같은 여자를 골랐다는 얘긴데,이 책 읽어보았습니까?"

   "예. 바로 어제 이게 바로 선생님이 쓴 <<압구정동>>에서 찢어낸 것이
  라는 걸 알고  난 다음에요. 혹시 두번째 사건 나던  날 우리 사무실로 
  전화를 하지 않았습니까?"

   이제 남 형사도  차근차근 바로 가기로 했다. 그  외에도 그가 물어야 
  할 말은 많았지만 무엇보다 궁금한 것이 그것이었 .

   "그건 어떻게 아십니까?"

   "그럼 하셨군요. 제가 바로 그 전화를 받았습니다."

   "확인해보고 싶었습니다.  신문엔 그냥 나이트 클럽  무용수라고 나와 
  있는데 저는 그 무용수가 게이가 아닌가 생각을 했으니까."

   "사건 두 개를 보고 바로 이 건  내 책을 보고 누군가 모방 범죄를 저
  지르고 있는 거다  생각했던 건 아닌 것 같은데요. 제가  처으 이 방에 
  들어와 경찰이라고 했을 때에도 선생님은 범인이 잡혔으냐고 물었고요. 
  단도직입적으로 묻겠습니다. 선생님은 언제부터 이 사건을 알고 있었습
  니까?"

   "처음부터요. 첫 사건 날 때부터......"

   "지금 첫 사건이 발생하면서부터라고 했습니까?"

   "그렇습니다. 어쩌면 그보다 더 일찍이었는지도 모르고요."

   "그럼 이 사건의 범인을 알고 있습니까?"

   "모릅니다. 그건....."

   이득지는 반쯤 타들어온 담배를 비벼껐다.

   "그럼 어떻게 그걸 알 수 있었던 겁니까?"

   "첫 사건이 발생하기 전 그가 나한테 여러번 전화를 했습니다. 스스로 
  자신을 T라고 말한 그 사람이......"

              
 소 제 목 : 이미 우리의 만남은 시작되고
     이득지는 남 형사에게 지난  겨울 자신이 아내와 하께 설악
    산으로 숨어지내는 여행을 떠났을  때부터 자동 메모리에 입
    력되기 시작한 T의 전화에  대해 이야기했다. 그리고 마지막 
    전화로 피셔킹까지.

     "자동응답 전화라면  혹시 그 사람 목소리가 녹음된 테이프
    를 가지고 계십니까?"

     "아뇨,당시는 그걸  지금처럼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았습니
    다. 그것이 이런 사건으로까지 연결될 거라고 생각했던 것도 
    아니었고요."

     차마 그것까지 사실대로 말할 수 없었다. 그의 목소리가 녹
    음된 테이프를 아내가 없애버렸노라고는.

     "그래도 그건 뜻밖의 일이 아닌가요?"

     "그렇죠. 뜻밖의 일이죠. 그렇지만  그런 사건이 발생한 다
    음 찾아오신 형사님한텐 아주  특별한 뜻밖의 일처럼 보일지 
    모르지만,그때 저한테는  그렇게까지 뜻밖의  일이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꼭  그 사람이 아니더라도 그런  뜻으로 받은 
    전화가 한두 통이 아니었으니까요."

     "한두 통이 아니라면......"

     "전화 내용의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아마 그런 전화를 받은 
    게 지금까지 일백 통은 더 될 겁니다."

     "그런 전화 모두 압구정동으로  테러를 나가겠다고 한 전화
    는 아니었을 것 아닙니까?"

     "물론 그렇지는 않았지요. 그렇지만 대부분 그런 뜻의 전화
    였습니다. 하나같이 누군가 자기 대신 그곳으로 나가 주기를 
    바라는. 거기에 비해 스스로를 T라고 말하는 그 사람의 전화
    가 특별하긴 했지만 그렇다고  그가 정말 압구정동으로 테러
    를 나갈 거라는 확신까지 주었던 건 아닙니다. 그냥 다른 사
    람의 전화처럼 말로만 그러는 건 줄 알았던 거지."

     "아쉽군요. 녹음을 남기지 못했다는 게."

     "아마 그 사람도 내가 녹음을  남기지 않을 거라는 것을 알
    았기 때문에 나갔던 것인지  모르지요. 내가 아니라 다른 작
    가가 그런 작품을 써도 그걸 녹음으로까지 남길 사람이 없다
    는 것을. 그리고 저도  이제까지 수많은 독자로부터 거친 항
    의를 받기도 하고 또  격려를 받기도 했습니다만, 편지는 더
    러 보관하고 있지만 그  사람들의 목소리까지 녹음해 두었던 
    적은 없었습니다. 특별히 그럴 필요를 느꼈던 적도 없고요."

     "한 대 더 피워도 되겠습니까?"

     "그러십시오?"

     "그럼 전화 이후 그가 압구정동으로 나가 사람을 죽이기 시
    작했다는 것은 언제 알았습니까?"

     담배를 당겨 물고 나서 다시  남 형사가 물었다. 그의 손도 
    이득지의 손만큼이나 떨리고 있었다.그러면서도 그는 자신의 
    손 떨림과 이득지의 손 떨림에 대해 차별하여 생각하려고 애
    를 썼다.

     "첫 사건 나고 바로였습니다. 여기 사무실에 나와서 압구정
    동에서 그런  사건이 발생했다는 신문을 읽고  나서 바로 그 
    사람이 정말 압구정동으로  테러를 나갔구나 알았던 거지요. 
    짧은 기사였지만 그  신문에  범인이 피살자 몸에 T자 메모
    지를 남겼다고 나왔으니까요."

     처음엔 경찰의 방문에 놀랐으나 시간이 지나며 이득지도 점
    점 차분해져 가는 자신의  모습을 보고 있었다. 형사와 함께 
    이야기를 한다기보다는 마치 신문  기자와 자신의 소설 압구
    정동의 내용에 대해 일문일답의 인터뷰를 하는 것 같은 마음
    이었다.

     "그럼 그때는 왜 신고를 안 했는지요?"

     "모르겠습니다. 두렵기도 하고 불안하기도 하고 그랬으니
    까."

     "그럼 이번 두번째 사건이 나고 나서도 신고하지 않은 것은
    요?"

     "마찬가지 마음이었겠지요. 그리고 내가 직접 그를 만나 무
    슨 말인가 해야 될 것 같다는 생각도 들고......"

     "그 얘기는 그럼 이득지 선생은  그를 만날 수 있다는 얘깁
    니까?"

     "예. 다른 사람은 몰라도 왠지 저는 그럴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먼저 그와 통화도 했었고......"

     "알 수 없군요. 이해할 수도 없고......"

     "형사님이 누군가를 잡거나 의심하러  온 거지 이해하기 위
    해 오신 게 아니니까 더욱 그런 마음이겠지요. 그 사건이 발
    생하고 나서 壙  저는 어느 곳에도 작품을   발표하지 않고 
    있습니다. 여기 집필실도 글을 쓰기 위해  나오는 게 아닙니
    다. 또 쓰겠다고 마음먹는다고  써질 글이 아니라는 것도 알
    고요. 그러면서도  제가 여기를 나오는 것은  그를 기다리기 
    위해서입니다. 왠지 그가 이곳으로  올 것 같아서 말입니다. 
    글을 쓰자는 게 아니라."

     그러자 남 형사는 더욱  이해할 수 없다는 얼굴로 이득지를 
    바라보았다.

     "그래서 선생님은 그를 만날 수 있다고 생각합니까?"

     "예. 우리는 이미 만나고 있으니까요."

     선문답 같은 대답을 하며 이득지 소파에서 일어났다. 남 형
    사의 시선도 따라 움직였다.


                   
 소 제 목 : 나는 널따라 갈 수 가 없다
     "만나다뇨?"

     남 형사의  눈빛이 빛났다. 모를 이득지가  아니었다. 그는 
    차분하게 생각했다. 이제 더 감출 일도 덮을 일도 아니라고. 
    그러면서도 T에  대해선 어떤 나쁜 감정도  없었다. 또 그런 
    감정으로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스스로 잘 알고 있
    었다. 아니,오히려 바로 얼마 전부터 그는 자신이 조금씩 그
    를 이해하고 싶어하는 걸  느끼고 있었다. 그의 범행에 대한 
    이해가 아나라  아직 어떤 사람인지도 모르는  그의 또 다른 
    인간적 측면을.

     이득지는 창문 쪽으로 걸어갔다.

     "이게 우리가 대화를 나누고 있는 창입니다."

     그는 유리창에 붙여 놓은 흰 종이를 떼어냈다.

     "대화를 나누는 창이라니요?"

     남 형사도 창가로 다가와 물었다.

     "이 종이 말입니다. 언제부턴가  그런 생각을 했습니다. 그
    러니까 두 번째 사건이 나고  나서요. 왠지 그 사람이 내 주
    변을 관찰할 거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소설 속의 테러리스트
    가 자신이  다음번에 테러를 해야 할  사람을 관찰하듯이 그 
    사람도 나를 관찰할 것이라고 말입니다. 그 사람으로선 자신
    의 그런 행위에 대해 아직  다른 사람들은 의미를 모르는 상
    태에서 무엇보다 제 반응이 궁금할 거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형사님 같으면 안 그렇겠습니까?"

     "그래서요?"

     "처음엔 첫  사건 나고 나서 바로  이 사무실을 철수하려고 
    했습니다. 그냥 집으로 들어가  있거나,아니면 글을 쓰는 일
    과는 아주 인연을 끊고  시골로 들어가거나. 아니면 아주 이
    민을 떠날 생각도 했습니다.  그래서 얼마간 이 사무실을 비
    웠던 것도 사실이고요. 그러다 그래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습
    니다. 글을 쓰지 않더라도 그 사람에게 내가 내 자리를 지키
    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했던 것입니
    다. 그래서 매일 아무  일도 않는 상태에서 사무실을 나오곤 
    하다가 두 번째 사건이  터진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사무실
    을 나와 집으로 가려다 경찰서로 전화를 했던 것이고......"

     "계속 말씀하시죠."

     "그때에도 첫  사건이 터졌을 때와 똑  같은 생각을 했습니
    다. 그리고  마지막에 마음을 바꾸었던 것도  바로 지난번과 
    똑 같구요. 첫 사건 때는 며칠 사무실을 비웠지만 두번째 사
    건이 터 側  나선 그러지도 않았습니다. 다음날  아침 다시 
    이 사무실로 나와 앉아  있었습니다. 그냥 자리만 지키기 위
    해서. 그러다 왠지 그가  내 주변을 살필지 모른다는 생각을 
    했던 것입니다.  살핀다면 낮동안 가끔씩 이  사무실 앞으로 
    나오기도 할 거란 생각을 하고요."

     "이 종이 얘기를 해  보십시오. 무얼 어떻게 대화를 나누신
    다는 건지....."

     "처음엔 제가 창가에서 늘 서성거렸습니다. 내가 너에게 신
    경쓰고 있다는 걸 그가  알아달라는 뜻으로요. 먼 곳에서 제 
    사무실을 바라보고  간다고 해도 좋습니다. 그냥 내 모습을 
    봐 주기만 한다면......" 

     "그래서 그를 본 적이 있습니까?"

     "아뇨. 그는 나를 보았지만 나는 어쩌다 그가 눈에 띈다 해
    도 그가 누구인지 알수  없는 일이잖습니까? 그래서 며칠 있
    다가 마침 제 책상 서랍에  주황색 종이 한장이 있길래 그걸 
    바깥에서 볼 수 있도록  붙여놓았습니다. 어떤 뜻을 그 색깔
    에 담아 그랬던 것이 아니라.  그랬더니 이틀 후 그가 제 메
    일 박스에 똑 같은 색의 종이를 넣어 두었습니다. 어떤 식으
    로 그것을 읽었는지 모르지만 내가 그걸 자기에게 보이기 위
    해 그랬다는 것만은 정확하게 읽은 셈이지요."

     "그 다음엔요?"   

     "초록 색을 붙였고, 그가 전처럼 제 메일 박스에 아무 것도 
    넣지 않자 다시 이  흰색을 붙였던 것입니다. 다시 말하지만 
    색깔에 어떤 뜻을 가지고 그랬던 것은 아니고요."

     "그런데 그가  왜 다음부터는 반응하지  않았다고 생각합니
    까."

     '위험 부담이겠지요. 똑 같은 방법으로 그렇게 응대하기엔. 
    그렇지만 그는 제가 붙인  모든 색의 종이를 보았을 겁니다. 
    현재로선 그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건 그 정도입니다. 그
    가 제 책을 찢어  거기에 테러리스트의 이니셜로 T자 메모를 
    남긴 건 세상에 대한 그의 대화 방법이었겠지만......"

     "바쁘지 않으면 저와 함께 우리 서로 좀 가 주시겠습니까?"

     "아뇨. 전혀 그럴 마음이 없습니다. 어떤 동기로든 그는 사
    람을 죽였고,그런 그를 잡기  위한 경찰의 노력에 그의 테러 
    지침이 된 소설을 쓴 작가로서 범인 검거에 협조는 할 수 있
    어도......"

     그 부분에 이르러 이득지는 자신의 분명한 뜻을 밝혔다. 남 
    형사는 다시 이득지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이외면서도 어딘
    가 당당한 구석을 가지고 있는 한 젊은 작가의 얼굴을.



 소 제 목 : 신고를 했을때와 하지 않았을때
     "그럼 마지막으로 오늘 나눈 이야기를 몇 가지로 정리를 해
    주십시오. 제가  묻는 말에 답변을 해  주시면 됩니다. 아까 
    얘기했던 대답 그대로."

     남 형사는 수첩을 펼쳐들었다.  그리고는 범인이 처음 전화
    를 건 게 언제였느냐, 여행중 건 전화는 몇 번이었으냐,통화 
    때마다 무슨 말을 했느냐,<피셔킹> 이야기를 듣고도 정말 그
    런 의심을 안 했느냐,왜 그때 신고를 하지 않았느냐,첫 사건 
    때는 왜 신고를 하지 않았으며,두  번째 사건 때는 또 왜 신
    고를 하지 않았느냐,작가도 사건이 게속 일어나길 바랐던 것
    은 아니냐,하는 것들을 묻고 이득지의 같은 대답을 받아적었
    다.

     "그럼 필요하면 다시 나오겠습니다."

     남 형사는 이득지의 사무실을 나왔다.  정말 알 수 없는 일
    이었다. 그의 말대로 그가 이 사건과 전혀 관련이 없다 하더
    라도 왜 신고조차 하지 않았던 것인지. 범인이 잡히고 안 잡
    히고를 떠나 언제 밝혀지더라도 사건 성격만은 감출 수 없는 
    일이 아니던가. 또 함께  이야기를 나눈 느낌으로 그걸 모를 
    작가도 아니던데.

     서로 들어가자  자신보다 보다 먼저 출장을  나갔던 형사들 
    모두 사무실에 들어와 있었다.

     "어떻게 됐어. 만나는 봤어?"

     석 경감이 물었다.

     "예."

     남 형사는 석 경감에게 이득지를 만난 일을 보고했다.

     "그럼 사전에  충분히 막을 수 있는  일이었다는 얘기 아니
    야?"

     옆에 있던 김 형사가 말했다.  석 경감과 다른 형사들도 우
    선은 같은 생각들인 얼굴이었다.

     "저도 처음엔 그렇게  생각했는데,또 생각하면 그렇지도 않
    은 일 같았습니다."

     "그렇지 않다니?"

     석 경감이 이마를 찡그리며 턱을 문질렀다.

     "사건이 발생하고 나니 문제가 된 거지 그런 전화를 받았다
    고 해서 무조건 처음부터 사건이 일어나리라고 판단할 수 있
    겠냐는 거죠."

     "그 사람이 그런 말을 해?"

     "예. 또 애기를 들으니 그간  그런 전화를 받았던 게 한 두
    번이 아니었던 모양이었고요."

     "그래도 이 경우는 다르잖아."

     "처음부터 다른 것이 아니라  사건이 발생하고 나니까 달라
    진 거죠. 그리고  만약 그때 그 사람이  자기가 그런 전화를 
    받았다고 신고를 했다고 했을 때  우리는 또 그 신고  제대
    로 접수했겠는지도 생각해봐야 하고요. 자신도 그 문제를 전
    혀 생각하지 않았던 건 아니랍니다."

     "그럼 사건이 나고 나선 왜 신고를 하지 않았다는 거야?"

     "겁이 났답니다. 그리곤 거기에 대해선 본인도 확실한 대답
    을 하지 않고요."

     "그건 말이 안 되잖아."

     "그때 신고를 해도 지금같지는 않을 거 아니야?"

     "아니죠, 그건......  그 사람이 그때 신고를  해도 우리가 
    범인을 검거할 수 있었던 게 아니니까. 단지 범행 동기만 보
    다 일찍 파악할 수 있었다는 것 말고는."

     "그가 사건에 직접 개입된 느낌 같은 건 없었고?"

     "제가 판단하기로는 전혀 없었습니다."

     남 형사는 이득지가 이야기하던 범인과의 대화 이야기를 했
    다.

     "그럼 범인이 이득지의 주변을 살피고 있다는 얘긴가?"

     "예."

     "또 언제 그렇게 올지도 모르는 일이고?"

     "그렇습니다. 그런데 다른 쪽에 나갔던 일은 어떻게 되었습
    니다."

     "한강에서 바늘 찾기야.그렇지만  조금씩 조금씩 좁혀 봐야
    지."

     석 경감은  이득지 집의 통화 기록을  언제부터 뽑았느냐고 


 소 제 목 : 세번째의 사건이 터지고
     석 경감의  예감이 맞았던 것일까. 그리고  그날 밤 세번째 
    사건이 발생한 것이었다. 장소는 강남에서도 그 방면으로 유
    명한 스타월드 나이트 클럽 뒤쪽이었고, 피살자는 그 나이트 
    클럽에서 술이 취한 채 나온 20대 초반의 여자였다. 물론 살
    해한 방법도 전과 마찬가지로 피살자의 목을 졸라서였다.
     그리고 현장에서 나온 메모지의 내용도 이득지의 소설 <<압
    구정동>>에 나오는 양재동 빌라의  한 방탕한 여대생에 대한 
    이야기 중의 한 부분이었다.

     <T자 메모가 있는 앞부분>
     [이 있 릿歐 우리나라가 경제적으로 이만큼 튼
     너희들은 자본주의가 뭔지도 모르니? 그런
     왔니? 열심히 일해 노력하면 부자가 되는
     놀면 가난한 게 자본주의 아니니? 이래 가지
     노력하겠니? 부자가 무슨 죄니? 왜 이유]

     <뒷부분>
     [그런 일을 겪었다면 그것이 얼마나 견디기 어
     을 것이다.
     "이건 충고도 아니야.내 다시 확실하게 경고
     부자를 미워하지 말아.그래 가지고야 내 돈 
     겠니?"

     그 여자  아이가 강의실에서 자신의 지나친  씀씀이에 대해 
    지적하는 다른 여학생에게  釜봉 커녕 너희들 왜 부자를 미
    워하느냐는 식으로 충고하는 대목이었다.
     형사들의 연락을 받고 새벽녁 사건 현장에 나갔다가 들어온 
    석경감은 아침 출근 시간이 되자 서장실로 올라가 새로 발생
    한 사건 개요와 함께 어제  형사 한 명이 이득지의 사무실로 
    가 그를 만나고 온 것을 보고했다.

     "지금 기자들이 서로 몰려왔단 말이지."

     "그렇습니다. 신문사에도 나오고 방송국에서도 나오고 했습
    니다."

     "나도 그 책 봤는데 말이야  단순히 부녀자 연쇄 살인 사건
    도 아니잖아. 누군가 악의적으로 압구정동에 대해 그런 범죄
    를 저지르고 있는 거지."

     "그렇습니다."

     "책에 문제가 있는 거라고. 그걸 쓴 놈이 어떤 놈인지 모르
    지만 그 놈에게 문제가 있는 거고. 그런 식으로 사람들을 묘
    한 방법으로 선동하고 있는  거 아니냐는 얘기야. 그러니 또 
    어떤 미친놈이 그걸 읽고  그런 식으로 범죄를 저지르고. 나
    도 여기 살지만 압구정동이 그놈들한테 무슨 죄를 졌어?"

     위치가 다르면 생각도 다른  것일까. 서장의 얘기는 범인이 
    남긴 메모지에  적힌 방탕한 여학생의 말과  조금도 다를 게 
    없었다. 압구정동이  누구에게 죄를 졌냐느냐고.  왜 부자를 
    미워하는 거냐고......

     "그런 놈 때문이 경찰이 다치고 내가 다칠 수는 없는 일 아
    니야? 공개해. 그 놈이 남긴 메모지도 공개하고 책도 공개하
    고......공개해서 그런 놈은 소설가고 뭐고 아주 사회적으로 
    매장을 시켜야 한다구. 범인을  못 잡는 게 경찰의 잘못만도 
    아니라는 걸  알리라는 얘기야. 경찰이 무능해서  범인을 못 
    잡는 게  아니라 소설가라는 놈이 고작  그런 내용의 책이나 
    쓰니까 이런 사건이 일 爭ご 것 아니냐고 얘기를 해."

     어쩌면 서장은 상부로부터 떨어질 질책과 사건 방지 책임을 
    모두 그 소설가에게 떠넘기고 싶었던 것인지도 몰랐다. 자신
    이 그  구덩이를 피하기 위해선 누군가를  대신 그 구덩이로 
    끌어들이지 않을 수 없는  심정으로. 이제 사건은 확대될 것
    이고,그렇게 되면 그 불똥이  그 지역의 치안을 책임지고 있
    는 자신에게 어떤 식으로 떨어질  것이라는 걸 그는 잘 알고 
    있었다.


 소 제 목 : 그럼 당신은 알았습니까?
     서장실에서 내려온  석 경감은 사무실로 몰려와  진을 치고 
    있는 기자들에게 서장실에서 메모를 해 온 것대로 이 사건의 
    성격에 대해 설명했다.

     이건 단순한 부녀자 연쇄 살인  사건이 아니다. 이 사건 뒤
    에 이득지라는 소설가가  있고,그 소설가가 쓴 <<압구정동>>
    이라는 소설이 있다. 어쩌면  범인은 그 소설가의 하수인 역
    할을 하고  있는 것인지 모른다. 그건  이득지가 직접적으로 
    범행을 지시했든 지시하지 않았든 상관없이 그렇다. 

     중요한 것은  이 사건을 이득지는 처음부터  알 年募 것이
    다. 사건 전 범인은 이득지에게 전화를 걸어 자신의 범행 의
    도를 밝혔다. 이것은 경찰이  그간 수사 과정에서 밝혀낸 이
    득지가 한  말이다. 그리고 지금도 이득지는  어떤 형태로든 
    범인과 대화를  시도하고 있다. 그는 두번째  사건이 발생한 
    다음에도 경찰에 전화를 걸어 피살자의 신원까지 확인하면서
    도 이 사건 내용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았던 사람이다. 

     현재까지 밝혀낸 경찰의 중간  수사 과정은 여기까지다. 이
    득지가 왜 그런 생각을  했는지는 아직 모른다. 그래서 경찰
    은 앞으로  이득지 주변부터 이 사건을  수사해 나갈 생각이
    다. 

     경찰의 발표대로라면 꼼짝없이 이  사건 한 가운데 있는 셈
    이었다. 모인  기자들이 몇가지 점을 추가로  물었으나 모든 
    답변의 핵심은 이득지와 연결되어 있었다.

     가자들이 이득지의 사무실로 기자들이 몰려든 것도 그날 오
    전의 일이었다. 그때까지  이득지는 세번째 사건이 발생한지
    도 모른 채  창밖으로 내다보고 있었다. 이번엔 노란색 색종
    이였다. 어제  찾아온 형사에게도 얘기를  했지만,다른 뜻은 
    없었다.

     기자들은 강남 경찰서에서  몰려오듯이 한 꺼번에 들이닥쳤
    다.

     "경찰서에서 이득지 씨 얘기를 들었습니다."

     처음 이득지는 어제 찾아온  형사에게 한 이야기 때문인 줄 
    알았다. 오늘 아침 그는 방송을 보지도 듣지도 못했다. 

     "어젯밤,아니 오늘  새벽 세번째의 사건이 발생한  것 알고 
    계시죠?"

     "예?"

     "그럼 모르고 있었습니까?"

     "무슨 말씀인지."

     "저희들 지금 경찰서에 들렸다 나오는 길입니다. 어제 이득
    지를 만났다는 형사도 여기 와 있고요?"

     "어떻  된 겁니까?"

     이득지가 남 형사에게 물었다.

     "들은 대롭니다. 어제 새벽 두 시쯤 압구정동에서 또 사건
    이 발생했습니다. 세번째 피살자는 스물둘 된 여학생이고,장
    소는 스타월드 나이트  클럽 뒤쪽에서였습니다. 이번에도 범
    인은 피살자의 목을 졸라 살해했습니다."

     "죽이는구만."

     이득지는 혼자소리처럼 말하며 털썩 소파에 주저앉았다. 그
    러다 그는 가까스로 정신을 차려 냉장고 문을 열고 물통에서 
    물을 따라마셨다.

     "그럼 몰랐다는 겁니까?"

     한 기자가 내려오는 안경을  위로 걷어올리며 물었다. 듣고 
    보니 질문 내용이 이상했다. 처음부터 이야기가 이상하게 돌
    아간다 싶었다.

     "그럼 당신은 알았습니까?"

     이득지는 그 기자를 쏘아보았다.

     "우리가 경찰에서 듣기로는 이득지  씨는 처음부터 다 알고 
    있었던 일 아니냐는 겁니다."

     "누가 그런 얘기를 해요?"

     "강력계 반장이요. 그럼 아닙니까?"

     "기가 막혀......"

     이득지는 기자들 옆에 서  있는 남형사 쪽으로 고개를 돌렸
    다.

 소 제 목 : 나도 내가족이 소중하다
     "경찰이 대체 무슨 말을 어떻게 한 거요?"

     이득지는 소파 위에 놓아둔 담배를 빼어 물었다.

     "자자,그러지 말고 차근차근 이야기를 합시다. 우리는 지금 
    이 사건에 대해  이득지 씨의 얘기를 들으러  온 거니까. 첫 
    사건이 발생하기 전 범인과 통화를 했다는데 사실입니까?"

     마이크까지 갖춰둔 국영방송국 기자였다.

     "그렇습니다."

     "통화를 하셨다면 어떤 식으로 통화를 하셨습니까? 통화 내
    용은요?"

     "내가 여행 중 그가  우리집에 전화를 걸었습니다. 저는 그
    때  설악산에 가 있었는데 그가 제게 메모리를 남겼습니다."

     그런 식으로 이득지는 처음부터 이제까지 있었던 일들 가운
    데 아내가 그의 목소리가  녹음된 테이프를 없애버렸다는 것
    말고는 어제 형사에게 말한 그대로를 설명했다. 기자들의 질
    문도 어제 형사가 와서 물었던 것 이상은 없었다.

     "그럼 경찰 발표가 틀린  것도 없잖습니까? 이득지 씨는 처
    음부터 이  사건을 알았고,전화를 받고도 신고를  하지 않았
    고,두번씩이나 사건이 발생한  다음에도 신고를 하지 않았고 
    말이죠. 또 두번째 사건이  나던 다음날 경찰서로 전화를 걸
    어 피살자의 신원에 대해  물었다는 것도 사실이고. 안 그렇
    습니까?"

     "그건 사실이지만,당신들이 제 경우였다면 어떻게 하겠습니
    까?"

     "우리는 지금 어떤 가정된 상황을  놓고 질문을 하는 게 아
    닙니다. 그건 이득지 씨도 잘 아는 일이고요."

     "다시 말씀 드리죠. 경찰도  그렇고 오늘 여기 온 기자들도 
    그렇고 여러분은 제가 왜 신고를  안 했느냐 하는 부분에 대
    해서만 책임  추궁을 하듯 묻는데 제  대답은 아까 이야기한 
    그대로입니다."

     "처음 전화가 걸려왔을 땐 그렇다 하고 그럼  첫 서건 때와 
    두 번째 사건 때는 왜 신고를  하지 않았는지 다시 한 번 말
    씀해 주십시오. 그냥 겁이  났었다는 말로는 이해가 가지 않
    잖습니까?"

     이득지는 다시 물컵을 들었다.

     이부분을 잘 이야기하지 않으면 안 된다. 모든 상황이 자기
    에게 불리하게 돌아가고 있다는  것을 이득지는 그들의 태도
    에서 이미 짐작하고 있었다.  그들은 자신이 돌아가 써야 할 
    기사를 생각하는 사람들이지 사건에  대해 깊은 생각을 가지
    고 있는 사람들이 아니 駭.  더구나 자신에 대한 이해 부분
    에선 더욱 그랬다.

     "제가 신고를 했을 때,그래서 그 신고로 그를 검거할 수 있
    는 정보까지 제가 경찰에 제보할  수 있느냐 하는 점을 생각
    했습니다. 그랬을 때 제게 그 범인의 정보가 있는 것도 아니
    잖습니까?"

     "그건 이득지  씨가 판단할 문제가 아니라  경찰이  판단할 
    문제 아닙니까? 사건  당사자로서 이득지씨는 마당히 신고해
    야 할 도의적 책임이 있는 사람이고 말입니다. 그건 또한 작
    가의 사회적 책임이며 자기 작품에 대한 책임 아닙니까?"

     "또 하나는 제가 왜 그런 생각을 했느냐 하는 것입니다. 전 
    단지 그 사람과 통화만 했다뿐이지 그에 대해 구체적으로 알
    고 있는 것이 없습니다. 최소한 어디에 산다거나 또 무얼 하
    는 사람이라는 걸 알아야 정보가 되는 것 아닙니까?"

     "소설을 쓰시는  분이니까 우리보다 그런 점에  대해 더 잘 
    아실 텐데  지금 하신 얘기로 납득이  갈 거라고 생각하십니
    까?"

     "제 얘기 다 끝나지  않았습니다. 제가 신고를 해도 수사에 
    아무런 도움을 줄 수 없는  상항에서 제가 걱정했던 것은 저
    와 제 가족의 안전이었습니다. 저는 범인이 내 책을 찢어 메
    모지로 사용한 것도 몰랐고,단지  그가 현장에 T자 메모지를 
    남겼다는 것만 알고 있었습니다. 그건 어제 저 형사분이  여
    기에 와 가르쳐주기 전까지  저도 여러분과 마찬가지로 몰랐
    던 일입니다. 그런데 제가 제 발로 경찰서로 걸어가 그 사건
    이 어떤 극렬 독자가 제  작품을 읽고 나서 압구정동에 대해 
    테러를 나간 것이라고 말했을 때 그 범인이 어떤 배신감에라
    도 저와 제 가족에게 그런  위해를 하지 않을 거라는 보장이 
    있느냐는 얘기지요."

     이득지는 말을 끊고 기자들을 둘러보았다.

     "첫 사건이 발생한 이후 어제까지  저와 제 가족이 가장 시
    달렸던 부분이 바로  그것이었습니다. 그동안 그가 우리한테
    까지 어떻게  하지 않을까 싶어 아이를  함부로 밖에 내보낼 
    수도 없었습니다. 처음 그가 그런 전화를 했을 때 설마 하면
    서 강릉에 가 있는  아이를 불러 왔었고, 학교도 가까우니까 
    그렇게 할 수 있었겠지만 아이 엄마가 늘 데려다주고 데려오
    고요. 그런데 여러분 같으면  여러분 발로 걸어가 신고를 할 
    수 있었겠 윱歐?  여러분의 가족의 안전과는 전혀 상관없이 
    말입니다."

     그말에 기자들은 잠자코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이득지의 말
    을 말을 받아적을 뿐이었다.

     "아까 어떤 기자가 대놓고 사회적 책임과 작품에 대한 책임
    을 이야기했는데,기자들도  기자로서의 사회적  책임이 있고 
    또 자신의  기사에 대한 책임이 있을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그런 기자로서의 사회적 책임  때문에 자신과 가족을 희생시
    킬 각오를 가지고 제게 책임  추궁을 하듯이 왜 신고를 하지 
    않았느냐고 묻는 거냐 이겁니다. 당신들은 단지 이게 당신들
    의 일이 아니라 남의 일이라  쉽게 그렇게 생각하고 묻는 것 
    아닙니까? 그러다 기사가 넘치면 이 부분은 처음부터 듣지도 
    않은 것처럼  처리할 것이라는 것도 알면서  하는 얘깁니다. 
    아닙니까?"   



 소 제 목 : 같은 모방이라도 차이가 있다
     너무 바로 찌른 것일까. 사무실 가득 모였던 기자들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아니,아무 말도 하지  않은 것이라 잠시 
    이득지의 말에 침묵하고 있었던 것이었다.

     "그럼 범인과 어떤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것입니까?"

     한참 만에 한 방송국의 기자가 물었다.

     "어떤 의미를  가진 대화는 아닙니다. 그냥  서로가 서로의 
    존재를 확인하듯,그렇게  바라보고 있음을  확인하는 것이지
    요. 그것 말고 달리 방법이  있는 것이 아니니까. 내가 너를 
    바라보고 있다,나도 당신을 바라보고 있다,하  정도로 말입
    니다. 처음에 어떤 의미가 없다고 했는데 지금으로선 그것도 
    그 사람이나 나에겐 큰  의미가 있는 일이겠지요. 어떤 형태
    로든 서로가 서로의 관심을 확인한다는 것은."

     아까보다 목소리를 누그려뜨려 이득지가 말했다.

     "그에게 하고 싶은 말은 없습니까?"

     "많지요, 왜 없겠습니까?"

     "그럼 이 기회에 범인에게 하고 싶은 말을 해보지요."

     "아뇨,지금으로선 아무  말도 하고 싶지  않습니다. 그리고 
    내가 무슨 말을 한다 해도 그의 귀엔 아무 말도 들어오지 않
    을 겁니다. 서로 그런 말을  진심으로 할 수가 있고 들을 수
    가 있어야 하는데 우리는 서로  그런 준비가 되지 않은 생태
    입니다. 다만 제 마음으로만  바라는 것이지요. 이제 당신의 
    범행 의도는  충분히 알려졌다,더 이상 무모한  범행을 하지 
    않아도 사람들은 왜 이 사건이 일어났는지 알고 있다고 말입
    니다. 아니,사람들이 그걸 잘못 알거나 잘못 알리기 위해 노
    력한다면 내가 그것을 바로 알리기 위해 노력할 거라고 말입
    니다."

     "그 말을 범인에게 하고 싶은 말로 대신해도 되겠습니까?"

     "예 굳이 그렇게 한다면. 그게 제 진심이니까."

     "하나만 더 묻겠습니다."

     우리나라에서 발행부수가 제일 많다는 조간신문 기자였다.
     외국엔 모르겠는데 이제까지  우리나라에선 아직 이런 사건
    이 없었습니다.영화나 비디오를 보고 그대로 그것을 따라 저
    지르는 모방범죄는 있었지만 소설을  보고 소설 속에 나오는 
    것과 똑  같은 방식으로 똑 같은  대상으로 하여 저질러지는 
    불특정 다수에 대한 모방범죄는  일찍이 없었던 것으로 압니
    다. 작가로서 이 부분을 어떻게 생각합니까?"

     "대답하기 전에 내가 여러분에게  하나 묻고싶은 게 있습니
    다."

     기자들은 또 무슨 이야기가 나오는가 싶어 이득지의 얼굴을 
    살폈다.

     "여러분들 다는  아니라 하더라도 <<압구정동>>을  보신 분 
    계십니까?"

     "봤어요."

     저쪽 뒤쪽에 어느 신문 기잔지 모를 한 기자가 가슴 앞쪽으
    로 반쯤 손을 들어보이며 말했다.

     "보았다면 이태 전쯤일 텐데  지금도 내용을 기억하고 있습
    니까?"

     "예."

     "내가 왜  묻는가 하니,사실 조금 전  C신문 기자가 물었던 
    말은 내가 거기에 대해 대답을  한다 해도 아마 제대로 이해
    되지 않을 부분이 있을 것 같기에 하는 말입니다. 읽지 않고
    는."

     "그래도 말씀해 보시죠."

     "질문이 잘못되었다는  것이 아니라 묻는  의도가 정확하게 
    무엇인지 파악할 수 없기에  하는 얘깁니다. 그래서 내가 같
    은 대답을 해도 읽은 사람과  읽지 않은 사람이 그것을 받아
    들이는데 차이가 있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보통 그런 모방 
    범죄 사건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범행 방법을 모방하는 경우
    가 대부분이겠지요. 누구를  죽여야겠는데  錚뺐 죽일 것인
    가, 며칠  전에 있은 유학생의 부모  살해사건도 보시다시피 
    외국 어느 비디오를 보고 그대로 따라했다고 했습니다. 범인
    을 두둔하자는 게 아니라 이  경우는 또 그것과 다르다는 것
    입니다. 아시겠습니까?"

     "다르다면 무엇이 다르다는 것인지  이야기를 해 달라는 것
    입니다."

     아까와 조금도 다를 것 없는 C신문 기자의 얼굴이었다.


 소 제 목 : 중요한건 범행동기와 의도로서
     "지금 여러분이 중시하는 범행  대상과 범행 방법의 모방보
    다 중요한 게 바로 이 사건의 범행 동기와 범행 의도라는 것
    입니다. 범인이 어떤 동기와  어떤 의도로 내 소설 <<압구정
    동>>을 따라 그런 범행을  저지르고 있는가에 대해서 말입니
    다."

     "그럼 범행동기와 의도까지 모방하고 있다 이겁니까?"

     "아니오. 그건  모방이 아니겠지요. 동기는  스스로 느꼈던 
    우리 사회에 대한 불합리거나  그런 불합리에 대한 울분이었
    을 테고,의도는  제 소설의 주제적 메시지를  소설의 모방적 
    범죄로 드러내고자 하는  것이니까. 제가 여러분에게 부탁드
    리는 것은 기사를 쓰실 때  그 점도 함께 생각해달라는 것입
    니다."

     이득지가 기자들과 일문일답을 하는 동안 남 형사는 유리창
    에 이득지가 붙힌 흰 종이  너머로 바깥 길가를 내다보고 있
    었다.

     "앞으로는 어떻게 할 생각입니까?"

     "어떻게 하고 말고 할 일이  없겠지요. 제가 할 수 있는 일
    이 있는 것도  아니고.그러나 제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얼까 
    생각해보겠습니다. 전혀 방법이 없는 것이 아니라면......"

     그때  麗 사무실에 전화 벨이 울렸다. 이득지는 소파에 앉
    은 채로  전화를 받았다. 기자들의 시선이  부챗살처럼 그의 
    손에 모아졌다.

     "여보세요. 이득지 사무실입니다."

     "저예요."

     어느 때보다 가라앉은 아내의  목소리였다. 그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괜찮아요?"

     조심스럽게 아내가 물었다.

     "난 괜찮아.당신은?"

     "지금 막 방송을 듣고 전화했어요."

     "사무실에 기자들이 와 있어."

     "끊을까요?"

     "괜찮아. 얘기해."

     "아뇨. 나중에 당신이 다시 거세요. 지금 들어올 수 있었으
    면 좋겠고요. 무서워요 정말......"

     "걱정하지마. 당신한텐 아무 일 없을 테니까."

     그는 수화기를 내려놓았다.

     "누굽니까?"

     기자 중 한 사람이 물었다.

     "아냅니다. 방송을 듣고 전화를 했답니다."

     그러는 동안에도 다시 몇  명을 기자들이 더 사무실로 몰려
    왔다. 그리고 아내의 전화를  시작으로 계속 전화 벨이 울렸
    다. 계속 사진 플랫쉬가 터졌고,이득지는 수화기를 내려놓았
    다.

     "이제 그만하죠. 제가 할 수 있는 얘기는 다  像릿歐."
     "그럼 마지막으로 하나만  묻겠습니다. 피해자 가족에 대해 
    하고 싶은 말씀은 없으신지요."

     아까부터 표정을  바꾸지 않고 묻던 C신문  기자였다. 그의 
    질문에 기자들이 다시 들었던 볼펜을 세웠다.

     "여러분과 같은  생각입니다. 일어나선 안 될  일이 일어난 
    데 대해서 누구나 공통적으로 느끼는 생각 말입니다."

     "그런 말말고  문제의 소설을 쓴 작가  개인에게 묻는 겁니
    다."

     "작가 개인으로 어떤 책임을 말하는 것입니까?"

     "예. 우리 묻는 건......"

     "그럼 그 책임이라는 게 제가 잘못된 소설을 썼다는 얘긴가
    요?"

     "그게 아니라......"

     "그게 아니면 뭡니까?"

     "어쨌든 사건은 이득지  씨의 소설 때문에 발생했고,그렇다
    면 작가로서 느껴야 할 어떤  도의적 책임 같은 것도 있어야 
    하는 것 아닌가 생각해  드린 질문입니다. 범인이야 따로 있
    다지만 이득지 씨의 소설이 이 사건의 핵심에 있고......"

     "지금 도의적이라고 했습니까?"

     다시 조금씩 이득지의 목소리가 높아져가고 있었다.


 소 제 목 : 세번째 피살자는 어떤 여잔데요
     "예."

     "그 도의적이라는 것의  범위가 어디까지인지는 모르겠습니
    다만,제가 처음 그런 전화를 받고 나서와,또 두 번의 사건이 
    발생하는 동안  저와 제 가족의 안전을  위해 신고하지 않은 
    것에 대한 책임이라면 도의적 책임뿐 아니라 어떠한 법적 책
    임도 당연히 져야겠지요. 그러나 지금 기자가 질문한 것처럼 
    작가로서 그 작품 때문에 발생한 이 사건의 사회적 책임까지 
    져야 한다는 뜻이라면 거기에 대해서  저는 어떤 말도 할 수
    가 없군요. 이건  당연히 제가 져야 할  어떤 책임을 피하  
    위해서 하는 말도 또 제 작품에 대해 그걸 쓴 작가로서 무조
    건적인 애정만 가지고 하는 얘기가 아닙니다. 당신들이 모든 
    책임이 내게 있다는 식으로 몰고간다 하더라도 그 부분에 대
    한 제 대답은 분명합니다. 이제 제가 여러분 앞에서 해야 할 
    얘기 다 끝났습니다. 나가  주시죠. 여러분이 나가지 않으면 
    제가 나갈 거고......"

     몇개의 추가 질문이 있었지만  이득지는 더 이상 대답을 않
    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기자들은 그대로 사무실에 그런 그를 
    둘러싸고 계속 이것저것 질문을 해대며 사진을 찍어댔다. 이
    득지는 남 형사 앞으로 다가갔다.

     "제가 협조해야 할 일이 있습니까?"

     "예."

     남형사는 굵고 짧게 대답했다.

     "꼭 이 사무실에서 이야기를 해야 할 것입니까?"

     "그렇지는 않습니다. 댁이어도 좋고요."

     "집은 꼭 경찰이 봐야 할  당위가 있는 것이 아니라면 열지 
    않을 것입니다. 꼭  봐야 한다면 영장을 제시하시던가...... 
    이제 기자분들은  그만 나가세요. 있어도 전  어떠한 얘기도 
    하지 않을 거니까."

     "사무실엔 매일 나올 겁니까?"

     "예. 어제도 나왔고,오늘도 나왔듯 내일도 나올 겁니다. 새
    로운 일이  문제가 되면  그때 다시  이야기하도록 하겠습니
    다."

     그는 억지로 기자들을 문밖으로  밀어냈다. 같은 층의 다른 
    사무실 사람들이 복도로 나와 그의 사무실을 기웃거렸다. 그
    는 문을 닫고 손잡이에 달린 잠금장치를 눌렀다.

     대체 뭐가  잘못된 것일까. 오랜 시간  동안 여러 이야기를 
    했지만 기자들이  들은 것과 자신이 한  말이 전혀 달랐다는 
    것말고는 아무 것도 생각나지 않았다. 같은 이야기를 하면서
    도 우리는 서로 다른 이야기를 했다는 게 땀을 빼듯 그의 기
    운을 뽑고 있었다.

     그는 내려진 수화기를 전화기에  올려놓았다. 아주 안 받을 
    것이 아니라 받아야 할 것과 받지 않아야 할 것을 선별해 받
    겠다는 생각이었다. 아니,누군가 나를 위로하기 위해 전화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했던 것인지도 모른다.

     "놀랍군요. 경찰에서 무슨 말을 하고 또 무슨 말을 듣고 온 
    것인지......"

     "경찰은 경찰의 입장이 있는 거니까......"

     "어제 피살자는 어떤  사람이었습니까? 아까 누군가 학생이
    라고 하는 얘기는 들었는데......"

     "그렇습니다. 대학 3학년생이요. 장소는 압구정동 스타월드
    라는 나이트  클럽 뒤쪽이고 추정  시간은 한 시  반 이후고
    요."

     "소설에 나오는 여학생 같은 아이인가요?"

     "예. 일단 드러난 걸로는요.  핸드백에서 나온 소지품 가운
    데  피임약이  없다는  것말고는  유류품도  대체로  비슷하
    고......"

     "묻는 게 어리석기는 합니다만 형사님도 아까 C신문 기자와 
    같은 생각입니까?"

     "글쎄요...... 저희는 그런 문제를 따지는 게 중요한 게 아
    니라 범인을 잡는 게 중요하니까 그 문제에 대해서는 뭐라고 
    말을 할 수가 없군요."

     "이번에도 증거가 없습니까?"

     "예. 아직 나타난 건...... 그런데,범인과 몇 번 통화를 하
    셨다니 그때 목소리는 어땠습니까? 말씨는 또......"

     "일부러 만들어하는 목소리 같지는  않은데 음성이 굵은 20
    대 후반 남자의 목소립니다. 목소리만 가지고 판단한다면 매
    우 건장할 것 같은  느낌이 드는 것도 사사실이고,말씨는 전
    형적이라고까지는 말할 수 없지만  잘 다듬어진 서울 말씨였
    습니다. 사투리는 거의 듣지 못한 것 같습니다. 교육 정도도 
    상당하다는 느낌이 들었고,  차분하다는 느낌도 들고 그랬습
    니다."

     "제 개인적 생각인데,아까  말씀하신 이유를 납득하지 못하
    는 건 아닙니다만 그것이 어떤 법적 책임이 있느냐 없느냐를 
    떠나 그동안 처음부터 사건의 성격에 대해 알고 계시면서 신
    고하지 않은  건 사회적으로도 논란이 되지  않을까 싶군요. 
    그랬더라면 이 선생님을 위해서도  더 낫지 않았을까 싶기도 
    하고 말입니다. 또 모르죠,제가  만약 그런 처지였다면 지금 
    제가  뼈 하는 것처럼 했을지는. 그 전화가 예전에 항의 전
    화가 많이 들어올 때 걸려왔던 목소리 중의 하나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습니까?"

     "아뇨,그는 최근에 그 책을 보았다고 했습니다. 그 책을 보
    던 무렵 그랜저의 프라이드 폭행 사건이 있었고요."

     "서울에 계속 계실 겁니까?"

     "지금  생각으로는  그렇습니다만,모르죠.  또  어떻게  될
    지...... 왜,떠나면 안 됩니까?"

     "안 될 건 없겠지만 가능한 서울에 계셔주셨으면 싶어서 부
    탁드리는 겁니다.언제라도 저희들은  또 협조를 받아야 하니
    까."

     그때 다시 길게 전화벨이  울렸다. 이득지는 수화기를 걷어
    올렸다.

     "예.이득지 사무실입니다."

 소 제 목 : 너는 소설가의 탈을 쓴 악마야!

   "이득지 선생님 계십니까?"
   많이 듣던 목소리였다. 그러나 얼른 생각나지 않았다.
   "접니다."
   "아, 형이예요. 저 최재훈입니다."
   "아,재훈이."
   평소 가까이 지내는 H신문 문화부 기자였다.
   "계셨네요? 사무실에. 없을 줄 알았는데."
   "그럼 사무실에 있지 않으면....."
   그는 평상시대로 전화를 받으려고  노력했다. 정말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아니,무슨 일이 있어도  그 무슨 일이 아무 일
  도 아닌 본래의 자기 모습처럼.

   "저는 혹시나 해서 걸었는데."
   "사건 때문에?"
   "예. 괜찮아요?"
   "괜찮아. 조금 전 사회부 기자들이 몰려왔다가 갔어."
   "걱정했는데,형 목소리 들으니 그래도 좋네요. 생각했던 것보
  다 형은 놀라거나 심각한 것 같지도 않고."
   "그럴려고 노력하고 있으니까. 무슨 일인데?"
   "지금 내가 형 찾아봐도 돼요?"
   "잠깐만."
   그는 송화기의 캡을 막고 남 형사를 쳐다보았다.

   "제가 오늘 서까지 따라 가지 않아도 되지요?"
   "예. 오늘은."
   "그래,와라. 나 지금 많이 화가 나 있으니까."
   "형 혼자 만나고 싶으니까 다른 데 애들 오면 전화 따돌려 주
  고요. 꼭 인터뷰 때문에 전화를 하는 건 아니예요."
   "알아. 무슨 애긴지. 그럼 이따가 보자."
   그는 전화를  끊고 그 자리에서 자동  응답 메모리를 걸었다. 
  안녕하십니까? 저는 지금 외출중입니다, 했다가 다시 처음부터 
  안녕하십니까? 소설가  이득집니다. 당분간 저는  이 사무실로 
  나오지 않습니다. 메시지를 남겨  주시기 바랍니다,로 고쳐 입
  력시켰다.

   "비울 건가요, 사무실?"
   "아닙니다. 전화만 그렇게 해놨습니다."
   "제가 오늘  기자들을 따라온 건 이득지  선생님에 관한 일로 
  선생님께 도움을 청하기 위해서 왔습니다."
   아까 몰려온 나이 어린  기자들은 이득지 씨라고 불렀지만,형
  사는 끝까지  이득지 선생님이거나 이득지  선생이라고 호칭했
  다. 아무래도 그 가자들이 쓸 기사가 마음에 걸렸다. 그들에게 
  중요한 건 사건 해결이 아니었다. 어떻게 해야 그 기사가 다른 
  신문에 비해 돋보일 수 있느냐만 신경쓰는 사람들이었다. 어떻
  게 해야 이 사건이 흥미롭게 전달될 수 있느냐에 만 대해.

   "제가 도울 일이 무언데요."
   "지금까지 쓴 선생님의 작품에 신문이나 다른 책에 실린 글들
  을 가지고 계시면 저희에게 주십사 하고요."
                                                                                                                                                                                                                                                                                                                                                                                                                                                                                                                               대한 것만 골라 하
  셔도 좋고요."
   "아닙니다. 이왕 하는 것 다 하지요."
   그러는 동안 몇 번 전화벨이 울리다 끊어지고 또 울리다 끊어
  지고 했다.

   "참,댁에 있는 전화기도 자동응답장치가 있다고 했지요?"
   "예."
   "그럼,여기 것하고 댁의 것  전화기에 모든 통화에 대해 녹음
  을 걸어주시겠습니까? 혹시 그  놈이 다시 전화를 할지 모르니
  까."
   이득지가 그러지요,하는 사이에  다시 벨이 울렸고,서너번 벨
  이 울리다 멈추자 한 남자의 목소리가 그대로 울려나오는 것이
  었다.
   "소설가 이득지 좋아하네. 임마,네가 소설가야,소설가의 탈을 
  쓴 살인마지."  

                  
 소 제 목 : 그건 문학문제가 아니라 압구정동 문제야

 이득지는 전화기쪽보다 복사기 앞으로 가 있는 형사를 바라보았
다. 얼굴이 화끈거리는 기분이었다.  그러는 동안에도 남자의 목
소리는 계속해 흘러나왔다.

 "나도 그게 우리 동네 얘기라서 당신이 쓴 책 읽었는데 너 같은 
놈이야말로 살아있을 필요가 없는  인간 쓰레기 같은 놈이야. 알
아? 너 같은  놈이 있기 때문에 세상이  시끄럽고 문제가 생기는 
거라구. 이게 도망간다고 해결  될 일 같아? 죽으라구.당신이 당
신 손으로. 악마같이 교활한 놈....."
 그리곤 거칠게 집어던지듯 전화기를 내리는 소리가 들렸다.

 "한동안 시끄러울 것입니다."
 돌아보며 형사가 말했다.
 "세상 사람 모두 그렇게 생각할까요?"
 "그렇지야 않겠지요."
 "형사님 생각은요?"
 "신고를 하는데 얼마간 위험 부담이 따른다 해도 경솔하게 하신 
점은 있지요. 범인을 잡고 못  잡고를 떠나 첫 사건 때만 신고를 
했어도 지금같지는 않을 겁니다.사실 저도 경찰이지만 당분간 이
러지 않을까 싶군요. 범인에 대한 비난과 아직 범인을 잡지 못하
는 경찰에  대한 비난,그리고 압구정동의 어두운  모습까지도 다 
선생님에게 화살이 돌아오는 식으로......"
 "그건 제가 감내를 해야겠지요. 이러다 정말 제 책이 아니라 그 
사건에 대한 모방 범죄거나 동조  범죄 같은 게 일어나지 않을까 
그게 두렵습니다."
 "그러지야 않겠지요. 모르는 일이긴 하지만......"
 "제 소설 속에  그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리고  지금 제가 그 
이야기를 형사님한테 그대로 하는 거고..... 모방 범죄거나 동조 
범죄 얘기 말입니다."
 "압니다. 그런 부분이 있다는 거."
 이득지는 자리에서 일어나 유리창 쪽으로 가 며칠 전에 붙여 놓
았던 흰 종이를 떼어내렸다. 이제 우리는 더 이상의 대화조차 필
요없는가,하는 생각 속에 깊은 절망에 빠져드는 기분이었다.

 그동안에도 벨은  계속 울렸고,더러는 어느  신문사라거나 어느 
잡지사라고 전화를  건 쪽을 밝히는 경우도  있었고,짧은 욕설을 
퍼붓거나 말없이 전화를 끊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러다 낮익은 목소리 하나가 그의 귀에 들려왔다.

 "어,이득지? 나 인서야. 사무실에 없구나. 그냥 전화를 걸었다. 
걱정이 돼서. 혹시 너 있는가 하고. 너무 걱정하지 말아. 소설가
는 소설로만 얘기하면 되는 거니까.  그 다음 일은 이미 네 손을 
떠난 일이야. 그건  문학 문제가 아니라 니  말 그대로 압구정동 
문제고 사 많?┫歐. 이 메모리 듣거든 어렵겠지만 우리집에 전
화라도 해라.친구들 다 궁금해......"
 거기까지 들렸을 때 그는 구인서가 전화를 끊기 전 얼른 수화기
를 들어올렸다.

 "여보세요. 나야. 이득지."
 "어,있으면서 안 받은 거야?"
 "아니,그게  아니라  잠시  물건   챙길  게  있어서  들어왔다
가......"
 "어디 갈려구?"
 "그래. 아무 데나 며칠......"
 "야,이득지. 움직이지 마.니가 어련히 알아서 하겠지만 내 생각
엔 안 움직이는 게 좋을  것 같애. 무슨 얘기냐면 네가 있으면서 
정면으로 맞써야 한다는 얘기야. 방송 들으니까 그래. 마음 단단
히 먹고 해결해 나가야 할 일이라는 거야. 아까도 애기했지만 이
건 문학 문제가 아니라 사회  문제야. 이번 일도 니 소설에 문제
가 있는 게 아니라 사회에 문제가 있는 거라구."
 "위로하는 거냐?"
 "위로는 임마. 네가 쓸데없는 걱정할까봐 한 수 가르쳐 주는 거
지."
 그는 그런 상황에서도 농담을  해주는 친구가 고마웠다. 친구는 
기운내라는 말을 하고 있었다. 네 주변에 우리가 있다는 식으로.  
 

 지금 뭐하냐?"
 "그냥 있지 뭐. 뭘 할 거  있는 것도 아니고,네 얘기 들으니 뭘 
하고 싶은 마음이  獵 것도 아니고. 그냥 그러고 있어. 넌 떠나
면 어디에 가 있으려고? 강릉?"
 "아니."
 "그럼?"
 "안 가. 아무 데도. 여기 있을  거니까 너 지금 내 사무실로 나
와라. 형우한테 전화를 해서 형우 있으면 같이 나오고. 오후까지 
기다릴 테니까. 이것저것 의논할 것도 있고 하니까."
 "친구들하고 조금 전에 통화를 하고 내가 대표로 거는 거야. 그
럼 나갈 테니까 기다려. 움직이면 전화에 메모해놓고."
 "전화는 하지 말고.  안 받으려고 일부러 그렇게  해 놓은 거니
까."
 수화기를 내려놓으며 이득지는 그 전화만으로도 어떤 위로를 받
는 것 같았다.
 이제 어떻게 한다?

 잠시 후면 H신문 최 기자가 올 것이고 몇 명의 소설가 친구들이 
올 것이었다.
 그러나 문밖엔 이런 저런  언론사에서 몰려온 기자들이 문을 열
라며 두드리고 치며 아우성을 치고 있었다.

                 
 소 제 목 : 이건 생각보다 민감한 문제예요

   H신문 최재훈  기자가 이득지의 사무실로 온  건 자료 복사를 
  마친 남 형사가 막 사무실을 나가고 나서였다.

   "잘 지냈어요?"
   들어오며 묻고 나서도 자신의  물음이 조금 이상했던지 최 기
  자는 곈면쩍은 얼굴로 자신의 머리를 긁적였다.

   "묻는 거 하곤. 그래, 잘 지냈다. 됐냐?"
   악수를 나누고  이득지는 다시 소파로 가  앉았다. 최 기자도 
  그 옆에 와 앉았다.

   "담배 있냐? 사무실에 사 놓은 게 다 떨어졌다."
   "대단해. 바깥에선 형을 만나지 못해 아우성인데 안에서는 담
  배 걱정이나 하고 있으 ......"
   "그럼 내가 지금 그거 말고 뭘 해야겠냐?"
   "여기 있어요."
   최 기자가 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내놓았다.
   "지금 어때요?"
   같이 담뱃불을 붙이며 최 기자가 물었다.

   "처음엔 겁나고 두렵고 했었는데  지금은 오히려 담담하다. 5
  분 후를 예측할 수 없으니까  사람이 차라리 담담해지는 것 같
  애."
   그러는 동안에도 복도에 몰려  있는 기자들은 계속 문을 두드
  렸다. 열어봐요, 사진만 찍고 나갈 테니까. 최 기자,같이 합시
  다. 이득지 씨,숨는다고 해결 될 일 아니잖소? 문 열어......
   그러면서  燭   문을  걷어차기도 하고,씨팔,하며 욕설을 뱉
  기도 했다.

   "네 생각엔 내가 어떻게 해야겠냐?"
   "나서긴 나서야 하는데 지금으로선 방법이 없잖아요. 어디 가
  서 쉬고 오는 것도 괜찮겠지만  쉰다고 저절로 해결될 일도 아
  니고.......자초지종을 애기해봐요."
   "이젠 말하고 싶지도 않다.  어제 찾아온 형사한테 애기하고,
  아까 기자들한테 애기하고,그리고 너한테 얘기하고......"
   "생각보다 민감한 문제 같아요."
   "알아."
   "내가 형 얘기를 쓰는 것보다 형이 쓰는 게 어떻겠어요? 싣는 
  건 우리가  할 테니까. 형도  하고 싶은 얘기가 있을  거 아니
  오?"
   "지금은 어떤 애기도 하고 싶지 않아. 해봐야 내 얘기들을 사
  람도 없고."
   "그럼 형이 범인한테 편지를 쓰는 형식으로 하던가......"
   "편지?"
   "어쨋든 형도 더 이상의 사건을  막을 책임이 있는 사람 아니
  오? 그 사람한테 인간적인 호소를  하는 편지를 써 봐요. 신문
  을 통해. 그리고 그 옆에 내가 형 얘기를 쓸 테니까."
   "데스크가 시키더냐?"
   "부장은 내가 여기 나온지도 몰라. 그냥 나왔으니까. 형이 그
  렇게 한다면 회사도 무조건 오케이라는 거지."
   "문화면 기사야? 아니면 사회면 기사야?"
   "어느 쪽이든 상관 없는 것 아니겠어요. 어차피 내가 쓰는 건 
  문학 기사가 되는 거구."
   순간 그러고 싶은 생각이  들기는 했지만 이득지로선 이제 어
  떤 형태의 글이든 컴퓨터 앞에  앉자 자판을 두드리는 일이 왠
  지 끔찍하게 여겨졌다.
   "우리 신문을 가지고 이야기하는 건 아니에요. 우리 신문이든 
  아니면 다른  신문이든 형의 육성을 단일화할  필요가 있어요. 
  이건 내가 H신문 기자로서 얘기하는 게 아니라 그냥 소설가 이
  득지의 글을 좋아하는 문학 담당 기자  얘기하는 거지......"
   "이미 아까 사람들이 몰려와서 내 말 따 갔어.내일 아침 신문
  이면 각 신문마다 일문일답이 나갈 거고......"
   "그렇다 해도  이제부터라도 단일화하는 게 좋을  것 같애요. 
  독자 수가 제일 많은 C신문으로 잡듯 아니면 다른 신문으로 잡
  든...... 아니, 형을 위해선 C신문이 제일 나을 거야."

   이득지는 피우던 담뱃불에서 다시  새 담배로 불을 옮겨 붙였
  다. 
  그러면서 그는 자기의 손이 가늘게 떨리고 있음을 보았다.
   "여기 저기하면  중구난방이 되기 쉬워......  인터뷰도 그렇
  고. 그렇게 해서 다른 신문이 그 신문의 내용을 인용하게끔 하
  라구. 즈들의 의견을 넣을 사이도 없이......"
   "그런다고 기사 안 쓸 놈이들이야? 대한민국 기자들이?"
   그러는 동안에도 복도는 계속 시끄러웠고,전화벨도 연신 울리
  다 끊어지고 다시 울리다 끊어지곤 했다.
   
   "맞아,이렇게 하면 되겠다. 어느 신문으로 하느냐면......"
   이득지는 최 기자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뭔가 새로운 생각이 
  떠올랐다는 얼굴이었다. 최 기자는 피우던 담배를 비벼 껐다.

                          
 소 제 목 : 그게 압구정동의 에스프리이니까

   "득지  형,그거 J일보  출판부에서  나온 책이지요?  <압구정
  동>......"
   "그래......"
   "그럼 그럼 형 창구를 J일보로 단일화시켜요."
   "J일보로?"
   그럼 너는? 너는  회사에서 욕 안 먹어?  최 기자를 바라보는 
  이득지의 눈빛은 아마 그랬을 것이다. 

   "아침에 그 사건 소식 듣고  나서 우리 문화부 기자들이 제일 
  먼저 한 얘가 뭔지 알아요?"
   "뭔데?"
   "이제 그  책 억수로 나가겠구만,이었어요.  희대의 연쇄살인 
  사건 뒤에 기자들이 한다는  소리가. 아마 모르긴 몰라도 지금 
  J신문 출판국엔  각 서적 총판하고 서점에서  걸려오는 전화로 
  불이 날 거라구요."
   "그게 압구정동의 에스프리이자 매춘과  다를 바 없는 자본주
  의의 정신이니까. 걸프전이 나던 날 바그다드에선 무고한 생명
  이 죽기 사작하는데도 뉴욕 증시와  동경 증시는 전쟁 축하 파
  티처럼 전  주식이 상한가를 기록했듯이 말이지.  그리고 지난 
  겨울 그 놈한테서 테러 협박  전화가 걸려왔을 때 내가 첫마디
  에 했던 얘기도 그거였고.  당신이 그런다고 세상 바뀌지 않는
  다. 바뀌는 게 있으면 이제 한  물 간 내 책 불티나게 다시 팔
  리는  拷뺐煮 없을 거라고."
   "다른 기자들한테 그런 말 했어요."
   "아니. 일부러 감추었던 건 아니지만 하지 않았어."
   "하지 말아요. 형이 한 말의 진의와는 다르게 전달되니까. 나
  도 기자지만 아마 그 말을  하면 그 사람들은 형이 의도적으로 
  그걸 노려 일부러 시켰다고  써댈 놈들이야. 직접 그렇게 말하
  지는 않지만 그런 뉘앙스로  말이지. 기사의 진실이 중요한 게 
  아니라 선정성이 중요한 거니까......"
   "넌 기자 아니냐?"
   "기자니까 하는  얘기지. 형 솔직한 얘기로  기자들이 얼마나 
  무식한 놈들인지 알아요? 내  얘길 들어봐요. 형, 신문에 가끔 
  책 해설이라든가 신간 냈을 때  작가 인터뷰 나오는 거 있잖아
  요. 작가들도 그렇고 독자들도  그걸 읽으며 기자가 어련히 그 
  책을 읽고 나가서 인터뷰를  했겠지 생각하지만 천만의 말씀이
  예요. 그걸 당담하는  문화부 기자들도 열에 일곱은  그 책 안 
  읽고 인터뷰를 나가요. 몰라요, 그거?"
   "알지. 왜 모르냐. 나오니까 그냥 인터뷰를 하는 거지."
   "읽는 거라곤 책 뒤에 붙은  해설 몇 줄하고 출판사에서 뿌리
  는 보도자료만 읽고 나가서 작가가 설명하는 작품 줄거리 듣고 
  기사를 쓰는 거잖아요. 안 그런 사람들도 있지만 대개 그런 식
  이고. 신문사 시스템이 책을 읽을 만한 여유를 주는 것도 아니
  고  또 기자가  책을 읽어낼  시간이 충분히  있는 것도  아니
  고...... 그렇지만  읽고 쓰는 사람들은 꼭  읽고 쓰고 그러는 
  거지요. 문화부 문학 담당 기자가 그 정돈데 다른 부 기자들은 
  말할 것도 없는 거  아니겠어요? 그런 사람들한테 문학 얘기한
  다고 통하는 것도 아니고...... 아까 왔다는 애들 사회부 기자
  들이지요?"
   "그래."
   "그럼 더 얘기할  것도 없는 거죠 뭐.  그러니  형 인터뷰를 
  어느 신문 한 기자를  정해서 그 기자하고만 하라는 얘깁니다. 
  그랬을 때도 문제가 없는 건 아니지만......"
   "얘기해봐."
   "그랬을 때 혹시 다른 쪽  신문들이 형을 더 의도적으로 씹을 
  수 있다는 거지요. 형한테는  미안한 얘기지만 이건 사건에 대
  해서보다 먼저 형에 대한 여론재판부터 시작하게 되어 있는 거
  니까. 오늘  나온 방송도 그렇고,오후에 나올  석간도 안 봐도 
  뻔한 거고. 원래 그래요. 그런 여론 재판이 사람잡는 거고."

   대충 짐작은  하고 있던 일이지만 거기까지는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일이었다. 이 사건의  전면에 자기와 자기 작품이 나서
  게 될 것이라는 생각은 했지만,그게 이 후배 기자의 말대로 여
  론 재판으로 흐르게 되리라는 점은.

   복도 밖에서 누군가,이봐요,이득지 씨,그렇게 해봐,그런 식으
  로 해 보라구,하는 소리가 마치 그 소리처럼 들리는 것이었다. 
  당신에  대해서는  어떤  유리한  내용의  기사도  안  쓰겠다
  는......

   이득지로선 그저 가슴만 답답할 뿐이었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늪 한가운데로 누군가 자기를 밀어넣고 있는 듯했다.
   입 안이 까끌한  윰╂ 들었지만 다시 그의 손이 먼저 담뱃갑
  으로 갔다.
   미스터 T,너는 지금 어디에 있는가......
     
 소 제 목 : 사건은 우리시대의 오르가줌과 겹쳐서

   "득지 형,이건 형 한 사람만의  문제가 아니야. 글쓰는 사람 
  모두의  문제라구요. 누구나  이런  일을  당할 수  있는  거
  고....."
   "그래도  특별한 문제겠지.  우리  시대의 오르가즘과  겹쳐
  서...."
   "우리 시대의 정신이라니, 그건 또 무슨 얘긴데요?"
   "압구정동  말이야. 그리고  한국 천민자본주의  정신이거나 
  에스프리......"
   "형수는 알고 있어요?"
   "조금 전에 전화가 왔어."

   이득지는 수화기를 들고 단축 번호판 1번을 눌렀다.

   그러나 이내 통화중 신호가 떨어졌다.  잠시 후 그는 다  1
  번 번호판을  눌렀으나 들리는 소리는 뚜,뚜  뚜,하는 통화중 
  신호 뿐이었다.

   "어디에 전화를 거는 건지......"
   그는 수화기를 내려놓았다.
   "집에 걸었어요?"
   "안 받아."
   "여기 전화통에 불이 나는데 거기라고 그냥 있겠어요."
   사람이 궁지에 몰리면  하나를 생각하면 그 다음  둘은 생각
  나지 않는 것일까. 미처 그 생각을  하지 못했다. 그는 그 일
  로 아내가 여기 저기 전화를 거는 것일 거라고 생각했다.

   "자동 재발신으로 해 놔 봐요."
   그는 다시  수화기를 들고 1번  단축 다이얼  후 자동재발신 
  버튼을 눌렀다.
   "형은 형대로 계획을 세우지 않으면 안 돼요."
   "아까 강남 경철서의  형사가 나와 그동안 내   소설들의 자
  료들을 복사해 갔어."
   "자료라니요?"
   "그간 나온 내 작품에 대한 평론하고 기사들 말이야."
   "맞아! 그래. 그거  나도 줘요, 형. 우리도  필요할 것 같은
  데. 그  생각을 했거든요.형 여론 재판이  시작되면 이쪽에서
  도 작품엔 아무  문제가 없다는 걸 이야기해야  되는데 그2걸 
  인용해 쓰면  되겠어요. 문학의  주제와 작품성이 어떤  사건 
  하나를 경계로 왔다갔다 하는 게 아니니까."
   "그런다고 내  마음의 부담이  없어지는 건 아니야.  어쨌든 
  내 책을 읽은 독자가 압구정동으로 나간 거고......"
   "그 책이 아니어도  누구나 그런 마음을 가지고  있어요. 형
  이나 나나 다 만찬가지로......  우리시대의 작가들이 더러운 
  시대에 더러운  글쓰기를 하고  있는 거라구요. 형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요?"

   그러다 전화기  스피커에서 여보세요,하는  아내의 목소리가 
  들렸다. 조심스럽고  겁에 질린 목소리였다. 그는  얼른 수화
  기를 들어올렸다.

   "나야."
   "어디에요?"
   아내는 그것부터 궁금한 모양이었다.
   "사무실이야? 별일 없지?"
   "여기는 별일 없는데 당신은요?"
   "여기도 별일 없어. 전화 많이 오지?"
   "괜찮아요. 여긴.... 언제 들어올 거예요."
   "저녁 때......  당신 훈이 외가에  가 있어. 저녁  때 내가 
  그리로 갈 테니까."
   "아뇨. 여기 있을 거예요. 나도  피하고 싶지 않아요. 아니,
  아떤 사람들에게도 우리가 피하는  모습 보이고 싶지 않아요. 
  오는 전화도 다 받을 거고......"
   "알았어.그럼 내 또 전화를 할께."
   무엇이 아내를  저토록 강하게 만들고 있는  것일까. 전화기
  를 내려놓으며 그는 자신도 굳게 입술을 물었다.

   피하지 않겠다. 이 일로 따르는  어떤 책임도. 그리고 그 어
  떤 부당한 공격으로부터도 맞서 나갈 것이다.

   "나,너하고 인터뷰할 거니까,  묻고 싶은 거 물어.  대신 내
  가 대담하는 그대로  써야 돼. 날 위해 더  붙이지도 말고 빼
  지도 말고."
   이득지는 똑바로  최 기자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최 기자도 
  아내와의 전화  한 통으로 어떤  결의를 다진  듯한 이득지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형.내가 최선을 다할께요."
   "그래. 나도.   壙故 끝나고 범인한테 보내는  편지도 쓰겠
  어. 이  사건이 우리 사회의  어느 부분,어느  문제에 뿌리를 
  두고 있는가에 대해서도 말할 거고.  이 사건에 대해 내가 알
  고 싶은 것 다 물으라고."
   이득지는 스스로의 결의를 다지듯 자세를 고쳐 앉았다.


 소 제 목 : 이득지 씨 있으면 전화받아

   최 기자와의 인터뷰라고 해서 특별히 달라질 건 없었다. 사건
  이 발생하기까지의 과정과 그간의 심정,그리고 현재의 심정,그
  런 질문 대부분이 먼저 왔던 기자들이 물었던 것이었다.

   거기에 더한다면 사건과 작품 사이의 관계였다.

   최기자는 열심히 질문했고,이득지도 진지하게 그의 질문에 대
  답했다.

   "<<압구정동>>을 쓸 때에도 모방  범죄라든가 동조 범죄에 대
  해서는 전혀 생각하지 않았습니까?"
   "처음엔 그런 생각없이  소설을 써나갔습니다. 그러다 소설을 
  거의 마칠  부분에 이르러 문득 정말   肩 사건이 발생한다면 
  그때는 어떻게 하지,하는 생각을  했더랬습니다. 그래서 그 부
  분에 대해 몇 줄 짧게나마  설마 그런 일이야 생기겠냐는 식으
  로 말했습니다. 심정적으로야 동조한다고 해도......"
   "이후 독자들의 반응 가운데 그런 경우는 없었는지요?"
   "그때는 많았습니다. 저를  테러하겠다는 식으로 협박한 전화
  도 더러 있었고,그 작품에  대해 전적으로 동감을 표시한 사람
  들도 많았고요. 그렇지만 그런  일이 일어날 거라곤 전혀 생각
  하지 못했고,또 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럼 그런 식으로 직접 자 탔 테러를 나가겠다고 말한 독자
  는 지금 압구정동에서 사건을  저지르고 있는 범인이 처음이군
  요."
   "그렇게 강하게 말한 사람은 처음이었습니다. 저 개인에 대한 
  협박은 그보다 더 심하게 한 경우가 더러 있었지만."
   "다른 작품을 썼을 때에도 그런 협박 같은 게 있었습니까?"
   "광주 문제를 다룬 <얼굴>이란  작품을 썼을 때에 몇 번 그런 
  전화가 온  적이 었습니다. 진압군으로 참가한  한 공수부대원 
  입장에서 쓴  글이었는데 거친 항의를 전화를  몇 통 받았습니
  다. 내가 진압군과 똑  같은 상처를 광주시민들에게 입히고 있
  다고......"
   "그래서요?"
   "그건 잘 모르겠는데 당신이 작게는 내 문학에 크게는 우리나
  라 문학 전반에 그런 폭력을 가하고 있는 거라고. 그랬더니 우
  리 집을 폭파하겠다고 욕설을 했던 사람도 있었고....."
   "당시 <<압구정동>>을 발표했을 때 현실보다 더 현실을 잘 설
  명했다는 평가가 있었는데......"
   "제가 그 작품을 쓰며 작품 속에 당시 어느 신문에서 <압구정
  동>의 실상을 기자가 직접 취재해 실은 르뽀 기사 몇개를 그대
  로 인용해  실었습니다. 부유층의 생활 실상과  소비 행태들에 
  대한 기사였는데,소설을 발표하고 나서  그 중 한 기자가 전화
  를 했습니다. <압구정동>이 정말 그런 데냐고. 그래서 제가 그
  건 나보다 그곳을 취재한 당신이 더 잘 알지 않느냐고 말을 했
  더니 그 기자가 그런 말을 했습니다. 취재를 하면서도 보지 못
  한 압구정동의 실상을 자기 글이 인용된 소설을 보고 알았다고 
  말이죠. <압구정동>의 정신 축이 무엇이며 그것이 어디에 뿌리
  를 두고 있는지에 대해서  말입니다. 그리고 나중에 만났을 때 
  그 기자가 이런  말을 했습니다. 제 소설을  읽고 나자 너무도 
  화가 나 세상 살고 싶은 마음이 싹 없어졌다고 말입니다. 그리
  고 잠자는 아이들 방에 들어가니 자기 아이들이 그렇게 불쌍해 
  보일 수가  없더랍니다. 이런 세상에 내  아이들이 던져졌구나 
  하고......"
   "우리 신문사 고 운석 기자 말이지요."
   "예. 지금은 불란서에 가 있는......"
   이어 최 기자는 사건 전에  범인과 나누었던 세 번의 통화 내
  용에 대해 물었다.

   그는 당시의 기억을 떠올려 그대로 대답해 주었다.

   "형,이런 식으로 가면 안 되는데......"
   최기자는 기자와  작가 사이에서 선배와 후배  사이로 돌아와 
  말했다.

   "안 되다니?"
   "형이 범인한테 그런 식으로 말했다고 나가면 안 된다는 얘기
  예요. 형이야  역으로 찔러 그렇게 말했다지만  읽는 사람들은 
  그게 아니거든요. 형이 나갈  테면 나가보라는 식으로 말하고,
  그러면 내 책만 더 팔린다는 식으로 말했다는 게 그 뜻이야 어
  쨌든 그대로 활자로 나가 봐. 그렇게 되면 이건 말 그대로 <피
  셔킹> 수준이  되고 만다 이거예요. 그  사람이 왜 나갔는지에 
  대한 핵심도 그 속에 묻혀 버리고......"
   "그러면 어떻게  하냐? 이제와  무얼 감추고 속일  일도 없는
  데."
   "형이 진정으로 그 사람이 나가길 바랬던 거요?"
   "......"
   "아니잖아. 아니면 아닌 것에 대한 이야기를 해야지. 형은 나
  가지 말라고,나가 봐야 소용없는  일이라는 걸 말하기 위해 그
  렇게 표현했던 거 아니요? 그러면 그렇게 말을 해야 한다 이거
  예요.  꼭 나뿐이  아니라  다른 사람이  물어도 마찬가진  거
  구...... 다른 기자들한테도 그 얘기했어요."
   "아니, 하지 않았어."
   "그럼 나한테도 하지  말아요. 형이 그 사람에게  한 말 뜻을 
  이야기하라구요. 첫번째 전화가 왔을  땐 어떤 뜻을 전 構,두
  번째 전화가 왔을 땐 어떤 뜻을 전하고, 그렇게 말이야."
   그때 다시 전화 벨이 울리던 끝에 구인서의 목소리가 나왔다.

   "어,나 인서. 이득지 있으면 전화 받아."
   그는 얼른 수화기를 들었다.
   
 소 제 목 : 성질나면 우리가 테러를 나갈 거니까
   "나야. 애기해."
   "지금 박형우는 어디 있는지 몰라서 연락이 오면 그리로 오라
  고 그랬고,나하고 재룡이하고 둘이 나갈께."
   "같이 있냐?"
   "조금 전에 재룡이가 왔어. 임마,걱정하지 마. 성질나면 우리
  가 람보처럼 총들고 압구정동으로  나갈 거니까. 총 없으면 니 
  소설 속의 테러리스트처럼 밧줄 하나라도 들고 나갈 거니까."
   "야,구인서. 너 이거 도청 장치되었다는 거 모르고 떠드는 거
  지?"
   "도청 장치?"
   "그래, 그러다 너 나보다 먼저 달려가는 수가 있어."
   "너 나한테 공갈치는 거야?"
   "공갈  임마. 도청 장치가 되어 있으니 있다고 그러지."
   "웃기고 있네, 병신들. 좌우지간 재밌다야. 소설 때문에 그런 
  사건도 발생하고. 좌우지간 너 그 소설 정말 잘 썼어. 이 새끼
  들,진작에 그런 일이 빵빵 터져서 정신을 차려야 하는데 그 놈
  은 뭐하다가 지금 나타난 거야?"
   "천하 명작을 늦게 봤대더라. 때맞춰 그랜저가 프라이드를 폭
  행한 사건이 있었고?"
   "그랜저?"
   "와서 얘기해. 전화로  애기하자면 그거 설명하는데도 복잡하
  니까."
   "알았어. 그런데 정말 도청 장치가 돼 있는 거냐?"
   "네가 경찰이면 안 하겠어?"
   "너 출세했다. 그거 아무나  안 해 주는 거잖아. 병신들,그런
  다고 그 놈이 니 사무실에 전화를 하겠냐? 그러니까 이 사건이 
  왜 터졌는지도  모르고 네 주변이나 어정거리는  거지. 다음에 
  경찰이 오거든  그런 거 압구정동에나 해놓으라고  그래. 거기 
  나라 말아먹을 도둑눔들이 다 모였으니까."
   평소 그렇게  농담을 즐겨 하는  친구가 아니었다.그러면서도 
  구인서는 많은 말을 했다. 만약 저 친구에게 그런 일이 발생했
  어도 나는 그에게  그런 위로를 줄 수  있을까. 그는 아까보다 
  많이 나아진 기분으로 수화기를 내려놓았다.

   복도에선 여전히 기자들이 아우성이었다. 문 뜯어. 문 뜯어버
  리라구. 그 따위로 하니까 사건이 안 나? 뭘 잘했다고 문 걸고 
  있는 거야? 이득지 씨, 당신 그러면 그럴수록 당신한테만 손해
  라는 걸 알라구.
   "끔찍하구만."
   "뭐가요?"
   "내가 저런 놈들하고 이야기를 해야 한다는 게."
   "사건이니까. 그리고 저 사람들은  말 그대로 기자들이고. 아
  까 하던 거 마저 하죠. 첫번째,두번째 하는 식으로."
   "먼저 우리가 설악산으로 여행을 떠났을 때 그가 메모리를 남
  겼어. 스스  미스터 T라고  말하면서. 지금 어디에 있느냐고,
  자기가 나를 기다린다고 말이지."
   "그때 T가 무슨 뜻인지 알았어요?"
   "알긴 어떻게 아냐?"
   "전화는요?"
   "서울로 올라와서 다음날인가,그 다음날인가 왔어. 우리가 저
  녁을 먹을 때. 여행에 대해서 묻고,신문을 봤느냐고 묻고,그랜
  저의 프라이드 폭행에 대해서  내 소설에 대해 이야기를 했어. 
  "
   그런 식으로 이득지는 T가 마지막 전화를 걸어 <피셔킹>을 보
  라고 말하던 것까지의 과정을 이야기했다.

   "그런데 형,전화말고 사무실에 사무실에 도청장치가 되어있는 
  건 아니겠지?"
   "사무실에?"
   "모르잖아."
   "아마,아닐 거야.경찰은 어제야 이 사건 뒤에 내 소설이 있다
  는 걸  알았고,그걸 알자마자 세번째 사건이  터졌으니까 미처 
  그럴 시간도 없는 거고.  전화야 전화국에서 걸면 되니까 상관
  없는 일이지만....."
   "사건도 사건이지만 이러다 문학 논쟁이 붙는 거 아닌지 모르
  겠어요. 이게 실정법 위반이냐 아니냐 하는 식으로 갈 수도 있
  는 거고,또 법정까지 갈 수도 있는 거고 말이죠. 그나 저나 형 
  책은 불티나게 팔리겠어요. 언제까지일지는 모르지만......"
   "언제까지라니?"
   "보나마나 판금(판매금지) 걸  거라는 얘기예요. 우리나라 사
  람들 그런 거 하나는  기민하게 잘 하잖아요. 염통이 썩어문들
  어지는건 모르고  문제는 손톱 밑에 박힌  가시에 모든 문제가 
  있다는 식으로. 아까도 얘기했지만  모든 문제는 형이 그런 작
  품을 썼기 때문에 생겼다는 식으로 말이에요."
   "그게 압구정동식 흡수법이니까.  또 그게 압구정동의 블랙홀
  이기도 하고......"
   "아무튼 형 더 유명해지게는  생겼어. 이 사건 후에 국회의원 
  나와도 좋을 만큼.압구정동에선 안 된고  ? 달동네에서 말이
  지."
   이득지는 저절로 피식,하고 웃음이 나왔다. 자신이 그 소설을 
  발표하고 난 다음 <압구정동엔  비상구가 있다>는 제목의 글을 
  써서 발표한 그 지역 국회의원이 있었다. 누구나 자기 이익 대
  로 움직이는 거니까.단지 차이라면 그 이익이 정의와 부합하느
  냐 아니냐,하는 차이일 뿐...... 
   "앞으로 글은 어떻게 할 거예요."
   "너 같으면 쓰겠냐?"
   "그럼 쓰지. 보라는 식으로 더......"
   "그래서 너는 기자고 나는 소설가인 거구."
   그러면서 이득지는 최 기자가 내놓은 담뱃갑에서 마 嗤 담배
  를 꺼내 물었다.

   "내가 나가서 사 가지고 올까요?"
   "나가면 나가면 나가는 거지  뭐. 어차피 인서 형하고 재룡이 
  형도 저 바리케이트를 뚫고 들어와야 하는데."

               
 소 제 목 : 그날 석간 신문은 이번 사건을...
   최 기자가 담배를 사러 나갈 때 한 바탕 복도에서  소란이 있었고,
  들어올 때 또 소란이 있었다.

   밀고 들어가. 밀고.

   최기자도 들여보내지 말아.

   야 최기자,이 새끼,혼자 먹자는 거야 뭐야.

   들여보내지 말라니까. 잡아. 잡으라구..... 문 열란 말이야.

   구인서와 유재룡도 최기자가 들어올 때 함께 들어왔다.

   "다 죽는 얼굴 할 줄 알앗더니 멀쩡하네."
   유재룡이 뚜꺼비 같이 큰 손을 내밀며 말했다. 이득지는 차례로 
  유재룡과 구인서의 손을 잡았다.

   "자 봐라."
   구인서가 가져온 신문을 던지듯 탁자에 놓았다.

   "석간이야."
   "몇신데 벌써 나왔어?"
   "열두시면 나오고 한시면 가판에 깔리는데 뭐."
   예상대로 사건은 신문 1면 톱으로 올라 있었다.

   [압구정 연쇄피살 소설 모방 범죄로 드러나]
   검은 바탕에 백발로  뽑은 제목이 당사자인 이득지의 눈에도  자극 
  자극적으로 들어왔다. 이득지는 신문을 집어들었다.

   [범인은 이득지의 소설 <압구정동>을 읽고 
    어젯밤에도 또 한 명의 희생자 발생해]
   기사의 부제 역시 그렇게 뽑고 있었다.
   이득지는 호흡을 끊듯 상기된 얼굴로 기사를 읽 爭ぐТ.

   <4월 16일 새벽  강남구 압구정동에선 세번째의 연쇄 살인  사건이 
  발생했다.

   희생자 전은희(21.학생)는 이날 늦은 시간 P호텔  지하 <스타월드> 
  나이트 클럽에  갔다가 집으로 돌아오기  위해 친구들과 헤어진  후 
  나이트 클럽 뒤쪽에서 목이 졸린 채 살해됐다. 범인은  전양을 살해
  한 후 이번에도 현장에 T자 메모지를 남겼다.  

   이같이 올들어 세 건이나 발생한 압구정동 일대의 부녀자  연쇄 살
  해 사건은 한  인기 작가의 소설을 그대로 모방하여 범죄를  저지르
  고 있는 것으로 드러났다.

                                                                                                                                                                                                                                                                                                                                                                                                                                                                                                                              현장에 남긴 T자 메모지가 같은  책을 
  찢어낸 종이임을  중시해 출처를 조사한  결과 그 메모지가  소설가 
  이득지(본명 이수호)의 소설 <<압구정동>>에서 찢어낸  것임을 밝혔
  다.

   또 경찰은 이번 사건의 성격이 소설 속의  내용(압구정동을 대상으
  로 테러를 실행하는)과  흡사함을 들어 이득지 추궁해 이득지가  처
  음부터 이 사건 발생 과정에 연관이 있음을 밝혀냈다.

   경찰의 발표에 따르면 소설가 이득지는 지난 겨울 처음  범인과 통
  화를 했으며,이후 세 차례를 통화를 하는 동안 범인이  자신의 소설
  을 읽고 압구정동으로 테러를 나가겠다는 뜻을 밝혀  자신은 처음부
  터 이 사건을 알고 있었다고 시인했다.

   이후에도 이득지는......>
   "개새끼들......"

   이득지는 읽던 신문을  그 자리에 팽개치고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
  다.
   "바깥에 있는 새끼들도 다 들어오라고 그래."

             
 소 제 목 : 경찰이 밝힌 사건 일지엔 이득지가..

   "진정해 임마."
   구인서가 차분한 목소리로 이득지를 끌어앉혔다.

   "진정?"
   "그래,진정하라구. 흥분한다고 해결될 일이 아니잖아."
   "흥분한다고 해결될 일이면 내가 왜 흥분하겠어.  흥분해도 해결될 
  일이 아니니까 흥분하는 거지."
   "이런 식으로 얘기가 나올 거라는 걸 예상 못했어?"
   "예상이야 했지. 재훈이하고도 그 얘기를 했던 거고."
   "그럼 더 진정해야지. 진정하고 신문이나 마저 봐.오늘  이득지 얘
  기로 완전히 도배했으니까."
   "담배 좀 줘."
   "이게 맛이 갔네. 손에 들고 있는 건 담배 아 毬?"
   그만큼 이득지는  흥분하고 있었다.  아니,흥분하지 않을 수  없었
  다. 전혀  예상 못한 일은 아니지만  시작부터 이건 사건  한가운데 
  범인과 같은 자리에 자기를 놓고 있었다.

   "그냥 남의 기사 읽듯 읽으라니까. 아니,기사가 아니라  그냥 소설
  이거나 각본 보듯이 읽으라구."
   이득지는 피우던 담배를 던져버리고 새 담배를 문 다음  다시 신문
  을 끌어 당겼다.

   <이후에도 이득지는 이  사건에 대해 범인과 나름대로  의사교환을 
  하고 있는 것으로 드러났다.

   그러나 이득지는 범인의  목소리는  蓚點舊嗤 얼굴은 본 적이  없
  다고 말했다.

   경찰은 범인이 이득지를 잘  아는 주변 사람일 것으로 보고 이  부
  분에 수사를 보강하고 있다고 말했다.(관련기사 3,5,11,12,21,22,
  23면)>


   3면 관련기사

   [사건일지]
   1993년 12월 15일부터 22일까지
   이득지 설악산 여행 중.
   이때 범인은 이득지 집에 여덟 차레의 통화 시도.
   범인 이득지의 자동응답기에  "나는 T입니다. 선생님은 지금  어디 
  있습니까? 빨리 돌아오십시오. 선생님의 소설  <<압구정동>>드릴 말
  씀이 있습니다." 하는 내용의 음성  貧 남김.
   이득지는 이 음성 메모를 설악산에서 전화 연결로 호출해 들음.

   12월 22일:이득지 범인의 음성 메모를 듣고 여행에서 돌아옴.

   12월 23일:범인,다시 이득지에게 전화를 걸어 압구정동에  대한 테
  러의 뜻을 밝힘. 그랜저의 프라이드 폭행 사건에 대해 이야기함. 

   12월 27일:범인,다시 전화를  걸어 소설과 같은 방식의 터러를  할 
  것임을 이야기함. 같은  날 두번째 통화에서 범인은 영화  <피셔킹> 
  이야기를 함.

   1994년 1월 21일  밤: 첫 희생자 발생.희생자는 사채업을 하는  67
  세 된 노인으   목졸라 살해. 범인 <<압구정동>>에서 찍은 T자  메
  모를 남김.

   3월 11일 밤,12일  새벽 사이:두번째 희생자 발생. 희생자는  23세
  된 나이트 클럽 무희로 목졸라 살해. 범인 같은 방법으로  현장에 T
  자 메모 남김.

   4월 15일 밤,16일  새벽 사이:세번째 희생자 발생. 희생자는  21세
  된 학생으로  나이트 클럽에서 나오던 중  목졸라 살해. 범인  같은 
  방법으로 현장에 T자 메모 남김.

   1994년 X월 X일 밤: 네 번째 사건?
   
            
 소 제 목 : 선정적 제목 아래의 기사들

   이득지의 눈은 사건 일지  바로 아래에 붙어 있는 또 한개의  박스
  로 갔다.

   <실제 사건과 소설 <<압구정동>> 속의 사건 비교>

   범인
   실제 사건:20대 후반으로 추정되는 목소리의 남자
   소설 압구정동:얼굴을 비추지 않는 테러리스트
   범행동기
   실제 사건:소설을 읽고 소설 모방 범행[그랜저의  프라이드 폭행에 
  분노(?)]
   소설 압구정동:자본의 부패와 타락에 대한 경고 및 응징
   첫 희생자
   실제 사건:압구정동에 사는 67세된 노인(사채업)    
   소설 압구정동:성도착증에 걸린 노인(정부 고위  桓? 모친)
   두번째 희생자
   실제 사건:시골에서 상경한 나이트 클럽 무희
   소설 압구정동:남자로 태어나 여자로 살아가는  성전환증환자(나이
  트 클럽 무희)
   *이부분에서 범인은 범행 대상을 시골에서 상경한 소설  속의 여자 
  주인공과 성전환증환자(일명 게이)를 합친 인물로 선정한 듯함
   세번째 희생자
   실제 사건: 22세 된 여대생
   소설 압구정동:21세된 방탕한 오렌지족 여대생
   네번째 희생자
   실제 사건:?
   소설 압구정동:룸살롱을  경영하는 일명  까만 가죽치마로  불리는 
  40대의 복부인
    模많枰 희생자
   실제 사건:?
   소설 압구정동:섹스와 마약 도박을 일삼는 재벌 2세
   사건 발생 시간
   실제 사건:1월 21일 밤부터 한 달 간격 사이로  금요일밤부터 토요
  일 새벽 사이
   소설 압구정동:첫 사건 이후 매주 금요일 밤
   범행 수법
   실제 사건:맨손,피살자의  스커프,범인이 준비한  끈 등으로  목을 
  졸라 살해 후  자신이 모방 범죄를 저지르는 소설책 일부분을  찢어 
  T자 메모를 남김.  이때 찢어낸 부분은 실제 피살자와 유사한  부분
  의 인물을 설명한 곳을 찢어 사용함. 
   소설 압구정동:맨손,피살자의  코트 허리띠,끈  등으로 목을  졸라 
  살해.
   범행 특기 사항:
   실제 사건: 목을  조르는 중 군데군데 외상이 있으나 대체로  세체
  가 깨꿋함.피살자의  소지품을 절대로  건들지 않음. 현재로선  T자 
  메모지 외엔 단서가 나오지 않음.
   소설 압구정동:목을  조른 자리 외에는  외상이 거의 없거나  반항 
  중 조금은  찰과상이 있음.현금을  포함한 피살자의 소지품  절대로 
  건들지 않음. 범행에 대한 어떠한 단서도 발견되지 않음.
   범행 장소
   실제 사건:첫 사건  압구정동 아파트 앞 공터.두번째 사건  도산공
  원 뒤.세번째 사건 H호텔 스타월 나이트 클럽 뒤.
   소설 압구정동: 첫  사건 압구정동 주택가 공터.두번째 사건  도산
  공원 안 후미진 곳.세번째 사건 양재동 호화빌라  단지 입구.도산대
  로변 공사장 시설물 야적장.

   이득지는 다시 신문을 넘겼다.

   11면에 이런 기사의 제목이 다시 그의 시선을 잡았다.

   [소설 속의 테러가 실제 테러를 부른 
   <<압구정동>>은 어떤 어떤 소설인가]
   그 아래 부제 역시 자극적으로 뽑혀 있었다.

   [천민자본주의의 부패와 타락 경고했지만
   계층간의 위화감 적개심 부를 소지 담고 있어]
   본문을 읽기 전 이득지는 잠시 눈을 감았다. 읽지 않아도  무슨 얘
  기를 썼는지 짐작이 갔다.그러면서도 그는 다시 그 부분을  읽지 않
  을 수 없었다.

   "누구 나 물 좀 줘라."
   목이 마른 소리로 이득지가 말했다.


 소 제 목 : 우리시대의 성감대와 불감지대

   최 기자가  사무실 한 곁에 커피셋트와  함께 놓아둔 생수를  컵과 
  함께 병째 소파로 들고 들고 왔다.

   "자요."
   이득지는 여전히 신문에 눈을 둔 채 손만 내밀어 물컵을 받았다.

   <소설 속의 테러가 현실 속의 테러를 부른  이득지의 <<압구정동>>
  은 일종의 사회비판 소설이자 풍자 소설로 이태 전 작품이  처음 발
  표되었을 때부터 많은 화제를 불러 일으킨 작품이다.

   배경은 제목 그대로 1990년대의 압구정동.

   작품을 통해  작가가 말하는 압구정동은  [좋게 말하면 이땅  신흥 
  상류층의 집단 대명 玲  넘치는 부의 상징이지만,체면 가릴 것  없
  이 기분대로 부르면 이 땅 졸부들의 끝없는 욕망과  타락의 전시장,
  아니 똥통같이 왜곡된  한국 자본주의가 미덕처럼 내세우는  화락의 
  별칭적 대명사이다. 

   그런 까닭에 흔히 하듯 그 환락의  대명사로서 '압구정동'이라거나 
  '압구정동 사람들'이라고 했을 때 그것은 단순히 압구정동  한 동네
  만을 말하는 것이 아닌  강남 인근의 다른 여러 동네일 수도  있고,
  넓게는 강북의  신문로이거나 평창동일 수도 있고,시간적으로는  70
  년대의 도둑촌일 수도  있고,5공 이 커 형성된 얀재동의  빌라촌일 
  수도 있고,해운대의 달맞이 고개일 수도 있다. 

   그리고 같은  동네에서도 어떤  가구는 은혜처럼 포함되기도  하고 
  또 어떤 가구는 그 은혜로부터 벗어나 있을 수도 있다.

    소설은 작가 스스로  정의한 그런 압구정동을 배경으로  발생하는 
  연쇄 테러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미국 딸네  집으로 다니러 갔다가  그곳에서 포르노 테이프를  본 
  이후 성도착증에  걸린 노파가 얼굴  모르는 한 테러리스트로  부터 
  살해된 이후 매주  압구정동에선 한 사람씩 그런 식으로 테러를  당
  해 나가는 것이다. 노파에 이어 남자로 태어나 여자로  살아가는 강
  남 환락가의 무희(게이),남자와의 동침을 예사로 아는  양재동 호화
  빌라의 방탕한 여대생,부동산  투기로 떼돈을 번 다음 고급  룸살롱
  을 경영하며 호스트바를 무시로 출입하는 40대의  복부인,도박과 마
  약과 섹스를 인생의 유일한 낙으로 알고 살아가는 재벌  2세등이 매
  주 금요일마다 이 얼굴없는 테러리스트에게 테터를 당하는 것이다.

   작품 후기를 통해  작가는 [압구정동은 우리 시대의 거의 모든  사
  람들이 꿈꾸거나 배출하고 있는 욕망  타락의 끝자리  위치한 가장 
  민감한 '성감대'인 동시에  도덕적 절제 등 다른 한 일면에  대해서
  는 지독히도 어두운 '불감지대'로서의 이중성이  '압구정동'이 영원
  히 '압구정동'이게 하는 두 정신의 축으로 하고 있다]고 말한다.

   또 작가는 [그 그릇된 두 정신과의 대결은 비판적 경고를  통한 소
  설적 대응보다 차라리  물리적 대결이 더 효과 있고 설득력이  있을
  지 모른다]는 식으로 거칠게 말한다.

   실제 이 소설을 압구정동과 관계없는 비압구정동  사람들에게는 일
  면 통쾌하고 일면  우울하게 읽힌다. 통괘하다는 것은 테러를  통한 
  대리 복수심을  어느 정도 충족시킨다는 뜻이며,우울하게  읽힌다는 
  것은 그 대리 복수심이 소설 속의 지상 테러로 끝난다는  점일 것이
  다.

   그런 점에서 이 소설은 처음부터 이번 사건을 예고하고  있었던 것
  인지 모른다.독자는 소설을  소설로서만 읽지 않는다. 아직  잡히지 
  않은 범인은 어쩌면  이 소설을 문학이 아니라 하나의 테러  지침서
  로 읽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또한 압구정동 사람들에게 이  소설
  은 이제  소설적 경고가 아니라  테러의 직접적 경고장으로  읽히게 
  될지도 모른다.

   소설이 소설로 읽히지  않고 한 독자에게 테러 지침서로  읽혔다면 
  그것은 문학 문제가  아니라 그 본령을 넘어선 사회적 문제일  것이
  다. 아직 범인은  잡히지 않고,테러가 계속된다면 그것보다  불안한 
  일도 없을 것이다.

  다시 문학과 사회를 생각하기에 이 작품은 처음부터  끔찍한 내용을 
  담고 있고,그 끔찍한  내용은 소설 밖으로 나와 현실로  압구정동을 
  위협하고 있는 것이다.

                     
 소 제 목 : 이미 여론재판은 시작되고...

 뭐가 뭔지도 모를  말로 쓰여진 기사였다. 읽고도 이득지는 이  기자
가 과연 그 작품을  제대로 읽기나 하고 기사를 쓴 것인가 하는  생각
이 들었다. 작품을 누군에겐가 이야기를 듣고,그리고 작품  후기 정도
를 읽고 시간에 쫓겨 단지 신문의 한 지면을 채우기 위해 쓴  글 같다
는 느낌이 들었다. 작품을 제대로 읽지도 않았면서도 그  작품에 대한 
사회적 책임과 문제를 기자는 말하고 있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 옆에  범인이 흥분했던 <그랜저의 프라이드 폭행  사건>에 
대한 간략한 해설과  영화 <피셔킹>에 대한 해설 기사가 박스로  앉아 
있었다. 

 뒤쪽에 붙은 관련기사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소설이 무모한 테러를 불렀다>는 기사 속엔 문학의 사회적  책임 영
역이 어디까지인가,하는 의문 제기와 함께 얼마 전 외설  시비가 붙은 
다른 작가의 작품과 이득지의 <<압구정동>>을 함께 놓고  같은 차원에
서 이야기를 끌어내기도 했고,이 작품의 경우도 그 작품에  못지 않는 
외설 부분이 많다는 식으로 이야기를 이끌기도 했다. 

 그러면서 기사는 이제  다음번 사건이 언제 어디에서 어떤  방식으로 
터질 것인가에 대해 조심스럽게  말했다. 네 컷 자리 만화 역시  요즘
도 부동산 투기를  하느냐,그러면 조심해야겠다,하는 식으로 이  사건
에 대해 말하고 있었다.

 그러는 동안에도 벨은 쉴 새 없이 울렸고,복도에서의  소란도 여전했
다.

 <압구정동 작가 이득지 인터뷰>
 [지금도 그는 나와 대화를 나누고 있다

 -이   사건이 자신의 작품과 관련이  있다는 것을 언제 처음  알았는
가.

 이득지:처음부터 알았다.그는 나에게 여러번 전화를 걸었다.
 -구체적으로 얘기해 달라.
 이득지:여행중 그가 전화를  걸어 음성 메로리를 남겼다. 그리고  돌
아와 통화를 했다.
 - 錚 내용의 통화였는가.  
 이득지:그는 내게 <그랜저의  프라이드 폭행 사건>에 대해  이야기를 
했다. 그는 내가  <<압구정동>>을 쓸 때나 지금이나 지금이나  달라진 
게 없다고 말했다. 그래서 테러를 나가겠다고 말했다.
 -말리지 않았는가?
 이득지:나는 그와 비슷한  전화를 여러번 받았다. 그가 테러를  나갈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범인은 <피셔킹>에 대한 이야기도 하지 않았는가?
 이득지:그런 식으로  신고한다면 나는 그  작품을 읽고 내게  전화를 
건 독자의 절반을 신고해야 한다. 테러는 생각하지 않았다.
 -이해  가지 않는다.모두 그런 식으로 전화를 하지는 않았을  것 아
닌가.
 이득지:나에 대한 직적접  테러 위협 전화도 많았다. 그때에도  나는 
신고하지 않았다.또 익명성이 보장되는 전화로는 누구나  과격하게 말
할 수 있는 것 아닌가.
 -그럼 첫 사건이 나고 나선 왜 신고를 하지 않았는가?
 이득지:나도 두려웠다.그리고 신고를  했을 때 내 가족의 안전을  생
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신고를 하면  내가 일차적으로 테러  대상이 
될 거라고 생각했다.
 -두번째 사건의 경우도 마찬가진가?
 이득지:그렇다. 신고를 한다는 것이 생각처럼 쉬운 일은 아니었다.
 -그렇다 해도 방조했다는 비난을 피하기 어려울 텐데.
 이득지:......
 -범인과는 이후 연락이 없었는가.
 이득지:있었다.우리는 말이  아니라 다른  무엇을 통해 대화를  하고 
있다.(대화 방식 소개)
 -지금 심경은? 사건에 대한 개인적 생각이랄지....
 이득지:나는 소설가로서  소설을 썼을  뿐이다. 사건에 대한  직접적 
책임은 느끼지 않는다. 또 내가 책임져야 할 부분도 없다.
 -범인에게 하고 싶은 말은?
 이득지:이제 당신의 뜻이 무엇이라는 걸 사람들이 알고  있다는 이야
기를 하고 싶다. 더 무모  희생자를 내지 않아도 그  뜻의 전달이 충
분하다면 더 이상의 범행을 저지를 필요가 없다는 이야기다.
 -범인이 사회 정의차원에서 이 사건을 저지른다고 생각하는가?
 이득지:범인 스스로는 그렇게 생각하고 있을 것이다.  방법이 잘못되
었지만 우리 사회는  충분히 그런 요소를 안고 있다.받아들이는  것은 
우리의 문제다.
 -그밖에 하고 싶은 말은?
 이득지: 이 사건이 왜 발생했는지 생각해봐야 한다. 단지  내 소설을 
모방한 범죄라는 생각을  벗어나 왜 그런 사건이 실제 일어나고  있는
가를 생각해봐야 한다.이 사건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그것이다. 누가 
어떻게 사건을 저질렀는가가 아니라 왜 이런 사건을  저지르게 되었는
가에 대해 모두 생각해야 한다.

 이득지는 신문을 던지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자기가 한  말들이긴 했지만,그러나 기사가  주는 느낌은 또  그것이 
아니었다. 자신의 말은  설득력 없게 전달되었으며,무언가 범인을  감
싸고 있는 듯한  분위기로,그러면서 뻔뻔스러울 만큼 책임 회피를  하
고 있는 모습으로 그러져 있었다.

 이제 새로운 여론재판이 시작될 것이었다. 아니 이미  시작되고 있었
다.


 소 제 목 : 작가가 읽은 <<압구정동>>

   "미치겠군."
   그는 사무실을  서성이며 창밖을  바라보았다. 언제가 T가  이곳에 
  와 자신을  바라보고 갔다. 어쩌면 그는  다시 이곳으로 올지  모른
  다. 아니,어떤 식으로든 계속해서 자신을 보고 있을 것이다.

   "인서 형이나 재룡이 형,우리 원고 하나 써 줘요."
   H신문 최 기자가 말했다.

   "이판에 무슨 원고 임마."
   유재룡이 말했다.

   "필요하니까 부탁하는 거지요."
   "뭔데?"
   "작가가  읽은 <<압구정동>>이란  제목으로요.우린 원고가  빠르면 
  빠를수록 좋으니까."
   "둘 다 써야 되는 거야?"
   구인서가 흘러내리는 머리를 쓸어올리며 물었다.
   "그러면 더욱 좋지요. 이틀 간격으로 나가면 되니까."
   "그러면 독자가 읽은 <<압구정동>>,그런 것도 있을 거 아니야."
   "그것도 나와야겠지요. 이쪽 저쪽 원고를 다 받아서....."
   "이쪽 저쪽이라니......"
   "서로 읽은 느낌이  다르게 받을 수도 있고,지역적으로 이쪽  저쪽
  일 수도 있다는 거지요."
   "알았어. 늦어도 모레 신문엔 들어갈 수 있도록 내일  아침에 넘길 
  테니까. 소설보다 더 과격하게 써도 되지?"
   유재룡이 말했다.

   "의도적으로 그럴  필요는 없고요.  저도 이만  들어가봐야겠어요. 
  내일 아침 원고넘기자면......"
   "이득지,너는 안 들어갈 거야?"
   유재룡이 물을 때까지 이득지는 여전히 창밖에 눈을  두고 있었다. 
  들어가면 무얼 해야 될지 아직 알 수가 없었다.  복도에서 아우성치
  는 기자들의 숲은 또 어떻게 뚫고 나갈 것인가. 

   "나가려면 함께 나가야  할 거에요. 혼자 남았다가는 무슨  봉변을 
  당할지 모르니까. 형도 이제 그만 들어가세요."
   "그래.들어가거라,이득지. 네가  내일 여기 나오면 우리도  이리로 
  나와 줄 테니까 오늘은 그만 들어가. 집에도 가봐야 하잖아."
   "가봐야겠지."
   그는 자리로 돌아와  수화기를 들고 바쁘게 번호판을  눌렀다.잠시 
  후 아내가 나왔다.

   "뭐해?"
   "그냥 집에 있어요. 당신은요?"
   "나도 그냥 있어."
   "혼자요?"
   "친구들하고...... 인서하고 재룡이가 왔어. 훈이는?"
   "같이 있어요."
   "지금도 전화 많이 와?"
   "예."
   아내는 겁을 먹은 목소리였다. 겁을 먹지 않았다면  그것이 오히려 
  이상할 것이었다.

   "나 지금 들어갈께. 해야 할 일도 있고."
   "지금요? 여기도 기자들이 와 있는데......  문밖에요. 도어폰으로 
  자꾸 무얼 물어요."
   "대답하지 마.당신은 무조건 모르는 일이라고 해."
   "내 걱정말고 밖에서 해야 할 일 있으면 해요."
   "괜찮아. 지금은...... 끊어 그럼."


 소 제 목 : 범인에게 보내는 작가의 편지


 그날밤 이득지는 늦은 시간까지 책상에 앉아 <범인에게  보내는 작가
의 편지>를 썼다. 

 미스터 T.

 오랫만이라고 인사하지 않을  없습니다. 가능한 정중하게 인사를  하
고 싶습니다. 미스터 T 오랫만입니다,하고.....
 정말 오랫만입니다,미스터 T.

 나는 신문을 통해  당신에게 이 편지를 씁니다. 그렇게 말고는  달리 
방법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나는 당신이 이 편지를 꼭 읽을  것
이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신문에 쓰는 것인 만큼 이 편지를  읽는 
사람은 당신 혼자가 아니라 보다 많은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나는 그
들이 보는  편지를 쓰는 것이 아니라  당신 한 사람에게 편지를  씁니
다.

 다른 사람이  본다고 하여 당신을  매도하지도 않을 것이며,또  모든 
책임을 당신에게 떠넘기는 식으로 내 책임을 피할 짓도 하지  않을 것
입니다.

 지난 겨울,당신이 내게  전화를 걸었을 때,그때 나는 당신을  신고해
야 했을까요? 지금 편지를  쓰고 있는 동안에도 내가 가장 깊이  생각
하는 것이 그것입니다. 아니,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나는  지금 당신을 
신고하지 않은 것에  대해 뒤늦은 후회를 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릅니
다.

 미스터 T.

 그러나 나는 당신이  왜 압구정동으로 나갔으며,왜 그토록  끔찍하고 
무모한 일을  벌이고 있는지 누구보다 잘  압니다. <잘 안다>는  말이 
또다른 논란을 불러일으킬  것도 압니다만 나는 정말 당신이 왜  압구
정동으로 나갔는지 거듭  잘 알고 있습니다. 소설 속의  테러리스트가 
되고 싶어 나간 것이 아니라는 것도 나는 잘  압니다.사람들은 당신의 
범행을 모방 범죄라고  말하지만, 그것이 단순한 모방 범죄의  차원이 
아니라는 것도 잘 압니다.  이 말을 나는 내게 다가오는 세상  사람들
의 비난을 피하기 위하여 하는 말이 아닙니다. 

 당신은 내가 그 책을  썼을 때나 지금이나 조금도 달라진 게  없다고 
했습니다. 아니,더  나빠졌다고 말했고,나는 그것이 바로  압구정동이 
영원히 압구정동으로 남는 정신의 블랙홀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런 내 
말이 당신의 테러를 더 부추겼는지도 모릅니다.  아니,그랬겠지요. 나
는 당신이 테러를 나간다 해도 달라질 게 아무것도 없다고  말한 사람
이니까.

 당신은 세번째의 범행을  저질렀습니다. 아주 큰 범죄를  저질렀습니
다.당신이 그걸로 무얼  이야기하고자 했든 그것은 분명 용서받지  못
할 범죄 遮 걸 이미 압구정동으로 나가기 전 당신도 잘  알고 있었을 
겁니다. 그럼에도  당신은 압구정동으로  나가 사람들을  죽였습니다. 
그런 것까지도 감수하겠다는 결심이었는지도 모르지요.

 그러나 이제 세상 사람들은 당신이 왜 그런 범죄를  저질렀는지 알고 
있습니다. 아직 모르는  부분이 있다면 그 부분도 알게 될  것입니다. 
처음부터 당신의 뜻이 그것 아니었는지요. 살인이라는  용서받지 못할 
범죄를 저지르더라도 왜 그렇게 하고 있는지에 대해서만은  세상에 알
리겠다는 것 말입니다.그 범죄로 장차 당신이 받게 될  죄값 沮層 감
수하면서 말입니다.

 미스터 T.

 아직 세상에 더 알려야 할 것이 있습니까? 세번의 범행으로도  다 알
리지 못한 당신의 뜻이 남았습니까? 

 나는 지금  지나간 일에 대하여 당신의  잘못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
다. 내가 그말을 하지  않아도 그 잘못을 당신이 더 잘 알고 있을  테
니까. 나는 지금 당신에게  아직도 더 그래야 하느냐 하는 것을  묻고 
있는 것입니다. 정말 더 그렇게 해야만 합니까?

 처음 범행을 나섰을 때,아니  그 전에 내게 전화를 걸어 그 뜻을  밝
혔을 때 당신이 가졌던 그 범행 의도가 내 소   <<압구정동>>의 주제
를 보다 명확히 <압구정동> 사람들에게 심어  주는 것이었다면,그래서 
범행 때마다 내 소설을 찢어 메시지를 남긴 것이라면 이제  그 범행을 
끝내십시오. 이제 당신이 왜 그런 범행을 저지르고 있는지  세상 사람
들이 충분히 알았으니까  더 이상 무모한 범죄를 저지르지 말하고  진
심으로 당신에게 호소하고 있는 것입니다.

 더 많은 희생자가 발생하게  되면 애초에 세운 당신의 뜻은 당신  개
인의 한풀이로  떨어지고 말  것입니다.사람들은 이제 충분히  당신의 
범행 의도를  알고 있습니다. 그 범죄가  단순한 살인 유희가  아니라 
당신의 사회적  메시지라는 것도  알고 있습니다.  끔찍하지만,그리고 
인정하고 싶지 않겠지만  그게 사실이라는 것도 이제 알고  있습니다. 
당신의 메시지를 위해서도 더 이상 살인을 멈추십시오.

 그럼에도 아직 당신이  압구정동으로 나가 그런 범죄를 저지르고  있
는 뜻을 확실히  해 줄 또 한  명의 희생자가 필요하다면, 그때엔  그 
희생자를 저로 선택해 주십시오. 범행 전,전화로 당신이  말했듯 나도 
압구정동의 거품을  탄,아니 그런  소설로 오히려 압구정동의  명성만 
올려준,그리하여  당 탔  직접  그곳으로  나가게  만든  장본인이니
까......

 오늘 사무실을 나오며 나는 푸른 종이를 유리창에 붙였습니다.
 어떤 식으로든 당신의  연락을 기다리겠습니다. 외람되게도 나는  그 
푸른 종이에 평화의 뜻을 담았습니다.
 첫 인사는 어렵지 않게 했지만,끝 인사를 하기가 난감하군요.
 안녕하라고 말하기조차 힘들고 어색한 상황이란 뜻입니다.
 그러나 세상  사람들 다하지 않아도 나는  당신에게 인사를 해야  할 
것 같습니다.
 안녕하십시오.
 그리고 당신의  마음 속에 두고 있는  다음 희생자 역시  안녕하도록 
해 주십시오.
 마지막 부탁으로 연락 기다리겠습니다.
 1994년 4월 16일 밤
 이 득 지 씀.   


 소 제 목 : 왜 그를 잡아들이지 않는거야
      경찰은 그날로 이 사건을 공개 수사로 전환했다. 수사인력
    되고 보강되고, 또 네번째의  사건을 막기 위한 치안 대책도 
    강화되었다.

     사건은 이미 알려질 대로 알려진 셈이었다. 달리 방법이 없
    었다. 뒤늦게 이 사건 수사에 합류하는 형사들에겐 이득지의
    <<압구정동>> 한 권씩이  주어졌고,그들은 소설과 이 사건이 
    너무도  흡사하게 발생되고,또  해석되고,수사가 진행되는데 
    놀랐다.

     소설 속에서도 사건이 표면적으로 떠오름과 동시에 많은 수
    사 인력이 보강되었다.  그리고 현실에서도 그것은 마찬가지
    였다. 다른  곳이 아니라 바로 사건  현장이 압구정동이라는 
    것만으로도 그것은 충분히  다른 사건보다 대접(?)받을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이었다.

     경찰의 입장에선 두 개의  싸움을 동시에 하고 있는 셈이었
    다. 하나는 범인과의  싸움이었고,다른 하나는 경찰에서보면 
    이 사건의 배후조종자나 다를  것 없는 이득지와의 싸움이었
    다.

     며칠 사이  신문에 난 이득지의 말들은  범인의 잘못보다는 
    이 사건이 왜 발생하게  되었는가에 대해 <압구정동> 사람들
    이 범인보다 더 큰 죄를 짓고 있기라도 하듯 말했다. 특히 H
    신문의 기사가 더욱 그러했다.

     세번째의 희생로 전은희가 피살되던 날 아침에 한 인터뷰말
    고는 이득지는 모든 인터뷰를 H신문을 통해서 했으며 자신의 
    심경도 H신문을 통해서만 밝혔다.  경찰의 입장에서 보면 그
    런 기사에마다  이득지는 범인을 나무라면서도  그를 두둔했
    고,사건의 모든 책임을 오히려  그의 불특정 다수의 범행 대
    상인 압구정동  사람들에게 떠넘기기 위해서  노력하는 듯한 
    인상마저 풍기던 것이었다.

     서장은 범인  아직 검거되지  않는 것보다 어쩌면 그 점이 
    더 못마땅했는지 모른다. 그는 아침에 나오면 신문들부터 챙
    겨 읽었으며,저녁이면 그 사건에 대한 텔레비젼 뉴스를 보곤 
    했다.

     어쩌면 그건 서장 한 사람만의 생각이 아닐지도 몰랐다.

     강남 경찰서엔 왜 이득지 같은 놈을 잡아들이지 않는거냐는 
    전화로 불이 나고 있었다.  그놈을 그냥 내버려두는 한 앞으
    로도 계속  사건은 일어날 것이며,이 사건을  막기 위해서도 
    그런 놈부터 잡아 죽여버려야  한다는 식의 극단적인 말까지 
    하는 항의  恍?俑 있었다.

     일반 시민들도  그런 전화를 했고,바깥에  누구라고 말하면 
    알만한 사람들도 그런 자신의  지위를 내세워 서장과의 직접 
    통화를 통해 같은 말을 하기도 했다. 많이 배운 사람이나 배
    우지 않은 사람이나 자신들이 <압구정동> 사람들이라는 것만
    으로도 그들은  그 한 가지의 일에  대해서만은 의견 일치를 
    보고 있는 셈이었다. 

     "우리도 그러고 싶지만 아직 그가 사건에 직접 가담하고 있
    다는 증거도 없고 해서......"

     그런 식으로 설명하면 그들은 지금까지 드러난 걸로도 충분
    하지 더이상 무슨  증거가 필요하느냐는 식으로 말했다.

     또 구청과 동사무소를 통해 임시 반상회가 열리고,거기에서 
    모여진 주민들의 의견도 항의 전화와 같은 내용의 것이었다.

     겉으로 들어나는 양상은 마치 범인과의 싸움이 아니라 이득
    지와의 싸움인 셈이었다. 그들은 신문에 나는 이득지의 말을 
    읽을 때마다  다시 거칠게 왜 아직도  그런 놈을 잡아들이지 
    않느냐는 식으로 항의했다.

                     
 소 제 목 : 그는 어떤 세상을 구상하고 있을까
  물론 그 동안에도 이득지는 여전히 자신의 사무실로 출근했고,복도에서
  의 시끄러움에 귀를 막고 있다가,귀가 시간이 되면 어김없이 집으로 들
  어가곤 했다.

  어떤 신문은 이득지의 인터뷰 불응에  대한 보복처럼 그가 사무실로 와 
  자동차에서 내리는 모습이거나   집으로 들어가기 위해  자동차의 문을 
  여는 모습들을 찍어 이 사람이 바로 이 사건의 배후조정자라는 식의 뉘
  앙스가 풍기도록 사진 설명을 달기도 했다.

   [사건 후에도 매일  원고 가방을 들고 사무실로  나오는 이득지. 그는 
  지금 어떤 세상을 구상 構 있는 것일까.]

   그즈음 서울은 온통 압구정동과 이득지 한 사람에게 모든 초점과 모여
  진 듯했다.

   알면서도 이득지는 그 일을 전혀 모르는 것처럼 매일같이 사무실을 나
  왔다.

   나와서 그는 언제나처럼 할일없이  신문을 읽고,창밖을 바라보며 하루 
  시간을 보냈다. 여전히 복도엔 그를 만나러 온 사람들로 붐볐고,전화도 
  쉬지 않고 걸려왔다. 

   나쁜 내용의 전화만 있는 건 아니었다. 더러는 이득지에게 큰 힘이 되
  는 내용의 전화도 많았고,외부로  알리지 않았지만 어떻게 번호를 알았
  던 건지 그를 격려하는 내용의 편지가 팩스로 전달되기도 했다.

   며칠 동안 그의 사무실 전화와 팩스는  쉴 새가 없었다. 열에 일곱 개
  는 협박전화거나 협박 편지였고,세  개는 그를 위로하고 격려하는 내용
  의 것이었다.

   그 중 몇개만 대표적으로 뽑으면 다음과 같은 내용의 것들이었다.

   살인 배후 조종자 이득지

   어제 텔레비전에서 당신의 뻔뻔한 얼굴을 보았다.

   어떻게 당신 같은 사람이 하늘 아래에  얼굴을 들고들고 다닐 수 있는
  가.

   스스로 선택하라.
   자결하든가 당신 발로 걸어 감옥으로 가든가.

   세상을 이렇게 뒤 흔들어놓고도  아무렇지 않다는 식으로 사무실에 나
  가 글을 쓰고 있는 당신의 모습을 볼 때 우리는 피가 꺼꾸로 섬을 느낀
  다.

   나오라.압구정동으로.
   우리가 당신을 테러하겠다.
   아니면 그 전에 스스로 자폭하라.

   -당신의 소설을 읽었다는 것이 치욕인
    압구정동의 어느 선량한 시민이-

   이득지 개작식에게 주는 글
  대체 네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가.
   우리의 목인가.
   그 전에 우리가 네 목을 원한다.
   자본의 타락과 부패에 대한 테러라고?
   그런 말로 교묘하게 세상을 선동하지 마라.
   마지막으로 너에게 경고한다.
   이곳에 또 다른 희생자가 발생하기 전  내가 너를 그렇게 없애버릴 것
  이다.

   더럽고 교활한 사이비 소설가.
   너 같은 놈에겐 어떤 욕설도 부족하다.
   오직 네가 우리에게 했던 대로의 테러가 있을 뿐이다.
   공산당보다 더 잔인한 놈.

   그 전에 스스로 자폭하길.....
   -정의로운 세상을 꿈꾸는 압구정동의 S부터-

   살인마 이득지 
   저는 지금 전화를 받을 수 없는 상황이라고?
   용건이 있으신 분은 메시지를 남겨 달라고?
   여러번 전화를 했지만 너 같은 놈에  메시지도 필요없다.
   말이 필요 없는 놈.

   이 칼을 받고 혀를 깨물라라.

   (그 아래 칼이 그려져 있는 그림,칼을 맞고 쓰러져 있는 사람의 그림.
  그 그림에 화살표를 하고 이득지 살인마)



 소 제 목 : 우리가 보다 일찍 흥분했어야 할 일은

   이제 그런 것에  대해서는 큰 신경도 쓰이지 않았다.  아니,무시하
  기로 했다. 그런 소리가  듣기 싫어서가 아니라 그런 거친 항의  또
  한 압구정동의 한 모습일 것이며 정신일 것이었다. 네가  우리를 미
  워하고 음해하므로 우리가  너를 미워하고 증오하겠다는 수준의  얘
  기라면 깊이 가슴에 담을 것도 없는 것이었다.

   팩스로 들어오는 격려  또한 그랬다. 비난하거나 협박하는  글보다 
  형식이 좀 더 점잖다뿐이지 그쪽에서 이쪽을 증오하고  불안해 하는 
  것처럼 이쪽에서도 그쪽에 대해 미묘한 질시와 적의를  드러내며 자
  기들과는 상관없는 이번 사건을 은근히 즐기며 확대되길  바라고 있
  는 내용의 격려문도  있었다. 단지 그것을 노골적으로 표현하고  있
  지 않다뿐이었다.

   그런 가운데  집으로 배달되어온 어느 한  독자의 긴 편지는  아주 
  특별하게 느껴졌다.


   이득지 선생님께.

   이 글이 이득지 선생님에게 직접 전달될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저는 의정부에 사는  32살된, 선생님의 독자입니다. 요즘 그  사건 
  이후 흔히 하는 편가르기 식이라면 저는 <비압구정동>  사람이 되겠
  지요.

   저는 지금 沮  선생님이 발표한  소설들을 대부분  읽어왔습니다. 
  <<압구정동>>도 최근에 읽은 것이 아니라 그 소설이  발표될 당시에 
  읽었습니다.

   그리고 최근 압구정동에서  선생님의 소설을 모방한 연쇄 살인  사
  건이 발생했다는 (아니,그 연쇄 살인 사건이 선생님의  소설 <<압구
  정동>>을 읽고 모방한 모방 범죄라는) 기사를 접하고 나서  다시 그 
  소설을 읽었습니다.

   그리고 얼마전  H신문에 실린  선생님의 <범인에게 보내는  작가의 
  편지>도 읽었습니다.

   그 일련의  사건을 보며 저는 우리가  사는 세상이  窄떨  끔찍한 
  것인가를 다시 깨닫게 되었습니다.

   선생님의 소설 속에 그려진 현실도 우리를 끔찍하게  하고,또 선생
  님의 소설을 읽고 어느 독자가 소설과 똑 같은 방식의  테러를 나갔
  다는 것도 끔찍하게 느껴집니다.

   사람들은 소설의 이야기는  가상으로 생각하고,그 소설을 읽고  어
  느 한 사람이  테러를 나섰다는 것을 현실로 생각하지만 저는  오히
  려 그 반대로  생각합니다. 선생님의 소설 <<압구정동>>이 현실  같
  고,최근 발생하고 일련의  모방 범죄가 오히려 소설 속의  이야기처
  럼 느껴집니다.

                                                                                                                                                                                                                                                                                                                                                                                                                                                                                                                              寗 같은  현
  실>은 일어나지 않았을 거라는 안타까움이 듭니다.

   처음 저는 그  소설을 사회적 메시지보다는 흥미 쪽으로  읽었습니
  다.그러나 최근 다시 그  소설을 읽고 났을 때 그것은 흥미가  아니
  라 보다 일찍  모든 사람들이 스스로 받아들였어야 할 메시지가  아
  니었던가 하는 뒤늦은 안타까움이 듭니다.
                                  
                   
 소 제 목 : <독일인의 사랑>을 아십니까

   지금 선생님께서는 무얼하고 계시는지요?

   혹 이글을 읽을 수 없는 곳에 가 계시지는 않는지요?

   그럼에도 저는 감히  선생님에게 이글을 쓰는 이유는 다음  말씀을 
  드리기 위해서입니다.

   최근 압구정동에서  발생하고 있는  일련의 사건이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믿듯  선생님의 작품을  모방한 것이든 아니든,또  처음부터 
  압구정동의 구조적 문제가  안고 있던 것이든 아니든,소설 속의  이
  야기로가 아니라 실제  상황으로 발생하고 있는 그 연쇄  범죄 사건 
  자체가 한 비압구정동의  시민이 지켜보기에도 너무도 무모하고  끔
  찍하다는 것입니다. 정말  어쩌다 우리 사회에 이런 사건까지  발생
  하고 있는지 말입니다.

   그런 사건이 일어나도록 만든 것이 압구정동의  책임이냐 선생님의 
  책임이냐 하는 것조차 지금 상황으로서는 제게 너무도  작은 일처럼 
  느껴집니다. 중요한 것은 지난번 선생님이 범인에게  보내는 편지에 
  썼던 것처럼 더 이상의 무모한 희생은 없어야 한다는 것이지요.

   제가 이제까지 한 번 본 적도 없고,또 지금 어디  계실지도 모르는 
  선생님에게 이 편지를 드리는 뜻은 그렇습니다.

   저  이 사건에 대하여 남들이 관심을 갖듯 선생님의  책임이 어디
  까지이며,또 어떤  책임을 져야 하는지도  모릅니다. 또 이  사건과 
  선생님의 소설은 전혀 상관없다는 식으로 말할 입장도 아닙니다.

   그런 문제는 법을 따지는 사람들과 문학을 하는 사람들이  할 일이
  겠지요. 요즘 신문에  자주 나오는 말대로 <문학의 사회적  기능,역
  기능>에 대해서라면 저는  한마디의 말도 할 수 없습니다. 그  문제
  에 대해서라면 다만  심정적으로 선생님의 편이 되고 싶다는 것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닙니다.  그것은 제가 문학을   이해하거나  선생
  님의 소설을 잘 이해해서가 아니라 선생님의 소설을  오랫동안 보아
  온 한 독자로서의 애정 때문일 것입니다.

   이득지 선생님.

   선생님은 소설을 쓰시는 분이니까 괴에테의 <<젊은  베르테르의 슬
  픔>>을 읽어보셨겠지요.  그리고 그  소설이 발표될 당시  독일에선 
  실연을 당한 많은  청년들이 그 소설 속의 주인공처럼 노란  쪼끼를 
  입고 권총 자살을 했다는 것도 잘 아시겠지요. 그리고  그것이 당시 
  독일 내에서 커다란 사회적 사건이 되었던 것도 잘 아시겠지요.

   물론 괴에테는 그 일 쳄  권총 자살에 대해 어떤 책임도 지지  않
  았습니다. 그가 했던 것은 소설을 쓰는 일이었지 권총  자살을 부추
  긴 일이 아니었으니까요.  당시 독일 사회도 괴에테에게 그  책임을 
  묻지 않았습니다. 어쩌면  선생님도 알고 계실 그 일화가  선생님에
  겐 마음의 큰 응원이 될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저는 지금 그 이야기를 하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바로 그 뒤의 이야기입니다. 

   그 권총자살이 사회적 문제가  되었을 때 그것을 막은 또 한  사람
  의 지성이 있었고 작품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바로  렘 밀러의 <<독일인의 사랑>>입니다. 그 글이  발표된 다음 
  독일의 젊은이들은 실연을  당해도 더 이상 권총 자살을 하지  않았
  습니다.

   그 글이  어떤 내용인지 저는 읽어보지  않아 여기에 소개할  수는 
  없습니다. 물론 선생님은  그 작품까지도 읽으셨겠지요. 저는  다만 
  언제가 들은 이야기일 뿐입니다. 또 그 일화가 사실인지  아닌지 저
  로서는 정확히  알 수가 없습니다. 단지  전에 들었던 그  이야기를 
  사실로 믿고 싶을 뿐입니다.


 소 제 목 : 한밤중에 걸려온 불길한 전화

   아내는 이민이라고 말했다.

   이제까지 한 번도 하지 않았던 소리였다.

   "이민?"
   하고 그가 물었다.

   "낮에 하도 답답해서 삼촌한테  전화를 해 봤어요. 우리가 갈 
  수 있겠느냐고?"

   그래,그제사야 처삼촌이 엘에이에서  큰 수퍼마켓과 한식당을 
  하고 있다는 생각이 떠올랐다.  아마 그런 삼촌이 없다고 해도 
  아내는 이민을 가자고 말했을지 모른다. 이득지 자신도 때로는 
  모든 것 다 걷어버리고 훌쩍 이땅을 떠나고 싶은 충동 같은 것
  을 느끼곤 했다. 그러나  그건 현실이 그만큼 암담하다는 생각
                                                                                                                                                                                                                                                                                                                                                                                                                                                                                                                              무슨 말 나올지 모르니까."
   "그런데 당신은 이제 정말 원고 안 쓰기로 했나요?"

   "묻지마. 그런 것도,"

   "그럼 내가 안 물으면 누가 물어요?"

   "당분간 내 생각은 그래.  아니,당분간이 아니라 지금 같아서
  는 영원히 그렇게 될지도  모르고. 그리고 이 일이 잠잠해지고 
  나면 그때 다른 인생을 계획할 수도 있는 거고."

   "난 지난번 당신에게 온 독자 편지를 보고 큰 힘을 얻었어요. 
  의정부에서 온  노재곤 씨 편지요."

   "힘을 얻으면 내가 더 크게 얻었겠지. 그러나 지금은 그럴 마
  음이 아니야."

   그날 아내와  그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글을  쓰지 않게 되면 
  나중에라도 서울의 모든 것을 정리해 시골로 내려가야 되지 않
  겠는가 하는 이야기도 나누고 당분간 학교를 쉬고 있는 아이를 
  또 어떻게 해야 되는가 하는 이야기도 나누고.

   "사는 게 사는 것 같지 않아요."

   "나도 그래. 사는  게 아니라 살아지는 게  아닌가 싶기도 하
  고....."

   "솔직히 말해봐요.  당신은 공개 편지를 쓰며  어느 부분 T를 
  믿는 것 같던데 정말 그렇나요?"

   "믿고야 싶지. 믿고야...... 아니,끔찍한 겪은 다음인데도 사
  람은 믿을 것 같애. 그런데 상황이 그렇지 못하니까 불안한 거
  지. 무슨 얘긴지 알지?"

   "알아요. 나도 같은 마음이니까......."

   "단  한번만이라도 그를  봤으면 좋겠어.  그가  어떤 사람인
  지......"

   그날밤 그는 오랫만에 술을 마시고 자리에 누웠다.

   그러다 한밤중 자신의 몽롱한 의식을 흔들듯 울려대는 벨소리
  에 잠이 깨었다. 야광 탁상  시계가 두 시 반을 가리키고 있었
  다.

   누구지?

   아무리 많은 전화가 걸려와도  그 시간에 걸려온 전화는 없었
  다. 한가닥 불길한 마음이  그의 가슴을 바람처럼 훑고 지나갔
  다. 그는 게속해 울려대는 전화기의 수화기를 뽑아들었다.

   "여보세요."
   "......."
   "여보세요."
   "......."
   그래도 대답이 없었다.

   "여보세요. 이득집니다."
   "......"
   "여보세요.미스터 T ?"


 소 제 목 : 범인이 걸어온 침묵의 전화를 받고

   "미스터 T ."
   다시 그렇게 불러도 저쪽은 대답이 없었다.

   "무슨일입니까? 대답하세요."
   "......."
   "여보세요,미스터 T. 이득집니다. 아무  말이든 해 보세요. 여보세요,
  여보세요....."

   그러다 전화는 한참 후 아무 말  없이 끊기고 뚜,뚜,하는 소리가 들렸
  다.

   "무슨 전환데 그래요."
   놀라서 함께 일어난 아내가 물었다.

   "미스터 T 전화야."
   그대로 수화기를 든 채 이득지가 말했다.

   "뭐라고 해요?"
   "아무 말도 안 해."

   "자기가 T라는 말은 했어요?"
   "아니,그런 말도  坪......"

   "그럼 아닐 수도 있잖아요. 잘못 걸려온 전화일 수도 있고요."
   "그래,그럴 수도 있겠지. 그러나 이 경우는 달라. 잘못 걸려온 전화면 
  그렇게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오래  붙잡고 있을 수 없잖아. 숨소리조차 
  들리지 않게 전화기를 잡고......"

   "왜 전화를 했는데요?"
   "그걸 모르니까 하는  얘기지. 느낌으로만 알 뿐......  틀림없는 T의 
  전화였어.그가 이밤중에 전화를 한 거라구."

   잠은 이미 달아난 다음이었다. 그는 침대에서 일어나 앉았다.

   "무서워요......"
   아내도 함께 일어나 앉 만 말했다.

   "그런데 그가 왜 전화를 한 거에요? 지금 이 시간에......"
   "모르니까 하는 얘기지. 왜 전화를  했는지 모르니까. 느낌으로 그 사
  람이 전화를 한 게 틀림없는데 말이지."

   "또  일을 저지른  건  아닐까요? 그리고  나서  당신한테 전화를  하
  고......"

   아내가 먼저 그 말을 했다. 이득지도  같은 생각이었다. 처음 벨이 울
  려 수화기를 들어올릴 때  머릿속을 찢고 지나가는 생각이 그것이었다. 
  뭔가 또 다른 일이 생겼구나. 벨 소리를 들으며 그가 제일 처음 떠올린 
  생각이 그것이었다. 그 전화가 T의  전화라는 생각보다 먼저 그 생각이 
  떠올랐던 것이었다. 그러다 상대가 아무 말도 하지 않자 그는 상대가 T
  라고 생각했던 것이었다.

   틀릴 수 있는 예감이기도 하지만 이쪽에서 여러 차례 T가 아니냐고 물
  었을 때 아무  말없이 듣기만 하다가 전화를 끊는  태도로 봐 틀림없는 
  일이었다.

   "또 일을 저지른 거면......"

   그것은 네 번째 사건이었다. 이제까지 사건 뒤에 한 번도 전화를 걸어
  왔던 적이 없었다. 그런데 그는 왜 이 밤중에 전화를 걸어선 아무 말없
  이 수화기를 내렸던 것일까. 그 부분  이해가 갔다. 사건의 의도와 성
  격이 밝혀진 후,아니 그것이 이득지의 소설을 모방한 범죄라는 것이 밝
  혀진 후 이득지의 집 전화기에도 녹음장치가  되어 있을 거라는 걸 T도 
  모르지 않을 것이다.

   알면서 그는 전화를  걸었고,중간에서 수화기를 내려놓았다. 틀림없는 
  T였다. 잘못 걸려온  전화거나 다른 사람이라면 그렇게  전화를 걸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러고 보니 이득지도 전화를  받는 동안 제 정신이 아
  니었던 모양이었다. 그것이 T의 전화라고  느끼는 순간 그가 제일 처음 
  취해야 할 조치는 녹음 장치  버튼을 누르는 일이었다. 

   그러나 일부러 피할 생각도 없이 그는  그것을 누르지 않은 채 상대방
  이 T인지 아닌지만 확인했던 것이었다.

   "이제 어떻게 해요?"
   아내가 물었다.

   그래,이제 어떻게 해야 하는가. 전화를 끊고도 왠지 머리가 쭈뼛 서는 
  기분이었다. 그냥 전화를 했을 리가 없었다.

   그는 조금 전 자신이 내려놓았던 전화기를 들었다.

   "뭐하실려구요?"

   아내가 물었지만 그는 그 말에  대한 대답 대신 번호판을 눌러나갔다. 
  그의 손이 어떤 놀라움과 두려움 속에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

   정말 이럴 수는 없는 일이었다. 아니,이럴 수 없는 일이 이미 지금 발
  생한 다음인지도 모를 일이었다.  자신이 그토록 간절한 마음으로 편지
  를 쓰면서까지 막고자 했던 네 번째의 사건이....... 


 소 제 목 : 기어이 네번째의 사건이 터지고

   잠시 후 발신음이 떨어지고 강남 경찰서의 당직 형사가 전화를 받았다.

   "수고하십니다. 늦은 시간 죄송합니다만 강력계 좀 부탁합니다."
   "강력계요?"
   "예."
   "조금 전 강력계  직원들 출동하는 것 같던데  누가 있는지 모르겠습니    
   다.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그렇다면 사건이 터졌다는 얘기였다.  전화기를 잡은 이득지의 손에 식 
  은 땀이 배어나왔다.

    전화가 돌아가는 잠시 동안 간첩  신고 폭력 신고에 대한 안내가 나오 
  던 끝에 다시 벨이 울리기 시작했다.

   "강력계 김형삽니다."
   전화기를 받는 목소리에 긴장이 실려 있었다.

   "안녕하십니까? 이득지입니다. 늦은 밤 죄송합니다."
   "아, 그 이득지 씨. 압구정동...." 
   그의 전화에 형사도 놀라는 목소리였다.

   "그렇습니다."
   "무슨 일이 있습니까?"
   "그 일이 궁금해서 전화를 했습니다. 오늘 밤 사건이 터진 게 아닌가 
    해서...."
   "예. 한 시간 쯤 전에 신고가 들어와 출동했습니다. 그런데 이득지 씨
    가 그걸 어떻게 압니까?"
    
   "조금 전 T한테서 전화가 왔습니다."
   "범인 말입니까?"
   "예."
   "뭐라고 전화를 했습 歐?"
   "불러도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전화를 끊었습니다.  그래서 혹시 전화를
    건 사람이 T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어 전화를 하는 겁니다. 정말 사  
    건 이 터진 겁니까?"

   그는 조금 전에 물은 같은 말을 다시 물었다.

   "일단 살인사건이 터졌다고 해서  출동했습니다. 그놈이 틀림없을 겁니
  다. 끈으로 목을  졸라 죽인 시체 같다고  했으니까.... 그런데 그 놈이 
  집으로 전화를 했다는 말이죠?

   "예, 조금 전입니다. 이 전화를 걸기 바로 전에요. 장소는 어딥니까?"
   "압구정도 유흥가 주변 골목입니다. 요금 그곳이 썰렁하니까...."
   "그러면 제게 전화를 한 사람이 T가 맞군요."
   "틀림없이 그놈일 겁니다. 그런데 녹음은 거셨습니까?"
   "그럴 사이도 없었습니다. 벨이  울려서 받았더니 아무 말도 하지 않길 
  래 저도 한참 기다렸다가 퍼뜩  그 생각이 들어 혹시 미스터 T가 아니냐
  고 물었더니 대답을 않고 그냥 끊었습니다."
   "대단한 놈이구만."

    그러면서 김형사는 이득지에게 수고스럽지만 지금 강남 경찰서로 나와 
  줄 수 있겠느냐고 물었다.

  "우리도 이선생한테 이것저것 물어봐야 하니까....."

  이득지  알았다고 대답하고 전화를 끊었다.

  "정말 사건이 일어난 거예요?"

  기다렸다는 듯 아내가 물었다.  그러나 아내도 옆에서 통화 내용을 들어 
  사건이 터진 것인지 아닌지  알고 있는 얼굴이었다. 놀라운 일을 당하면 
  누구나 아는 것도 아니길 바라는 마음으로 다시 묻기 마련이었다.

  "한 시간 전에 신고를 받고 출동했다는군."
  "끔찍해. 정말...."
  "그래. 그런 세상에 우리가 사는 거니까. 터졌다 하면 하루가 멀다 하고 
  끔찍한 일뿐인 세상에서 끔찍히도 돈을 밝히면서....."
  이득지는 걸터 앉은 침대에서 일어  주섬주섬 옷을 갈아입었다.

  "어디 가려고요."
  "경찰서."
  "당신보고 나오래요?"
  아내의 얼굴에 한가닥 불안이 스쳐지나갔다.
  "걱정하지마. 내 진술이 필요해 그러는 거니까."
  "정말 떠나고 싶어요. 여기....."
  "나 말고 다른 사람 듣는데선 그런 소리하지 마. 어차피 나는 이땅에 갚
  아야 할게 많은 사람이니까. 뿌린 것도 많고....."

  옷을 갈아입은 다음 일부러 아이의 방으로 잠자는 아이의 얼굴을 쓰다듬
  어본 다음 이득지는 현관을 나왔다. 버튼을 누르자 1층에 대기하고 있던 
  엘리베이터가 상승하기 시 徘杉.

  그래. 다시 부딪치는 수밖에 없다. 이젠 더 피할 수도 없이.
  이득지는 스스로에게 다집하듯잉 주먹을 쥐었다.

  "걱정하지마. 아무 일없이 다녀올 테니까."

  그는 현관문을 열고 내다보는 아내의  겁에 질린 얼굴을 뒤로 하고 상자 
  안으로 자신의 몸을 넣었다.

  미스터 T, 너는 어디에 있는 누구인가.

  어디에서 내게 전화를 걸었는가.


                   
 소 제 목 : 저런것들도 기자라고...

   현장으로 출동했던  남 형사가 서(署)로 들어온  건 이득지가 
  그곳으로 나가서도 두 시간이나 지난 다음의 일이었다.

   출동했던 형사들 모두 들어온 것은 아니었다. 이득지가 와 있
  다고 하니까 전에도  그를 여러 번 만난 적이  있는 남 형사가 
  그 소리를 들은 다른 기자들 몇 명과 함께 그를 만나러 들어온 
  것이었다.

   "그동안 잘 지내셨습니까?"

   남 형사가 먼저 인사를 했다.

   "잘 지낼 처지들도 아니잖습니까? 나나 남 형사님이나...."

   이득지도 손을  내밀어 남 형사의 손을  잡았다. 그리고 나선 
  두 사람이 더 대화를 나눌  수도 없게 기자들이 이런저런 질문
  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전화는 언제 왔습니까?"
   "전화로 무슨 말들을 했습니까?"
   "범인은 어떤 사람인 것 같습니까?"
   이득지가 아무 말도 하지 않자 이번엔 더 심한 질문들도 거침
  없이 쏟아졌다.

   "이번 일에 대해 그런 소설을 쓴 작가로 뭐 특별히 느끼는 점
  은 없습니까?"
   "이번에도 전처럼 사전에 알았던 것 아닙니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는데 뭘 감추고 있는 건 아닙니까?"
   정말 무차별한 질문들이었다.그런 질문들에 대해 인상을 쓰고 
  마주 쳐다보자  이번엔 피의자 사진을 찍듯  그런 그의 모습을 
  카메라에 담기 시작했다. 안 봐도 뻔했다.

   [사건 나던 날 새벽 경찰서로  나온 이득지] 혹은 [경찰로 출
  두한 압구정동 작가]
   아마 그런 제목의 사진이 오늘 석간부터 실릴 것이었다.

   기자들의 태도는 그를 완전히 피의자 대하듯했다.질문들은 하
  나같이 거칠고 무례했다. 더러  텔레비전 뉴스에서 본 대로 그
  런 사건과  관련하여 검거된 용의자들에게  카메라를 들이밀고 
  묻는 것과 똑 같은 분위기에서 똑 같은 말투들을 사용했 . 언
  제나 사건과 함께 한다는 그들이.

   이득지는 기자들과는 어떤 말도  하지 않았다. 그동안 기사로 
  내 소설을 폭력소설이거나 범죄소설로 몰아부쳤던 이들 가운데 
  대체 몇 명이나 그 소설을  보았겠는가. 그들은 책 한 줄 읽지 
  않고 당장의 여론이 만들어내는  분위기만으로 그의 소설을 폭
  력 소설로 몰고 범죄 소설로 몰았던 사람들이었다. 

   "왜 말을 않는 겁니까? 우리들  말이 말 같지 않다는 건가,씨
  팔. 사람을 그렇게 죽여놓고 말이지."
   그렇게 말하는 기자도 있었다.

   참자. 이들과 싸울 이유   싸울 필요도 없었다. 만약 그런다
  고 하면 그것도 이들에겐 악의에 찬 공격 빌미만 줄 뿐이었다. 
  무슨 사건이건 조금만 끔찍하다 싶으면 우선 범인이 결손 가정
  의 자녀가 아닌가부터 찾고 범인의 성장기의 환경이 모든 사건
  의 원인이다,하는 식으로 말하는 인간들이었다.

   "애기도 안할 거 무엇하러 나온 거야?"
   "사진 찍으러 나왔나?"
   "야,H신문. 니가 한 번 물어봐라. 뭘 먹였는지 느들하고는 말
  하던데."
   그러면서 그들은 다시 중구난방으로 이득지가 대답도 않을 질
  문이라는 걸 해대고 또 플랫쉬를 터뜨렸다.
   "경찰이 특별히 저에게 할 말이 없다면 저는 들어가겠습니다. 
  사진을 찍자고 나온 것도 아니고....."

   한참 만에야 이득지가 남 형사에게 말했다.
   "회의실로 가시죠."

   남형사가 앞에서 걷자 기자들도 이득지의 뒤를 따랐다.
   "이봐요,당신 그런다고 우리가 안 쓸 사람들도 아니야."
   "그런 걸 소설이라고 쓴 사람이나 범인이나 말이지......"

   참자. 거듭......
   다시 이제 하루 이틀을 두고  당할 일도 아니잖는가. 그는 남
  형사와 김 형사를 따라  회의실 안으로 들어갔다. 뒤다라 들어
  오려는 기자를 두 형사가 몸으로 막았다.

   "이봐요. 우선 우리  조사나 끝난 다음에 묻든  말든 해야 할 
  것 아니오."
   "잠시 후에 물어요. 잠시 후에....."
   


 소 제 목 : 범인이 남긴 메모지는 뜻밖으로 ...

   회의실 안으로까지 들어오려는 기자들을  억지로 밀어내고 나서 남 형
  사와 김 형사가 이득지 앞에 와 앉았다.

   "아까 김 형사님과 대충 얘기를 했겠지만 다시 묻겠습니다."

   그런 남 형사에게 이득지는 자신의 T의 전화를 받았던 상황을 다시 설
  명했다.

   "그렇게 아무 말도 없이 끊었단 말이죠?"

   "그렇습니다."

   "그게 얼마만큼의 시간이었습니까?"

   "아마 15초에서 20초 정도 될  겁니다. 이쪽에서 미스터 T가 아니냐고 
  물어도 대답도 않고...... 그래서 여기로 전화를 한 겁니다."

   "어디서 전화를 걸었는지야 날이 밝으면 알  수 있는 거고. 아뭏든 대
  단한 놈입니다.  이선생도 보셨겠지만 지난 번  텔레비전을 통해서까지 
  그렇게 목격자를 찾으려  해도 나타나지 않을 만큼  말이죠. 그때 정말 
  책을 빌려본 것이라고 했습니까?"

   "예,제 기억이 틀리지 않다면요. 그런데  오늘 변을 당한 네번째 피살
  자는 어떤 사람입니까?"

   "여잡니다. 마흔다섯 살된......"

   "복부인인 모양이군요."

   "그렇습니다. 핸드백 안에 주민등록증과 집 연락처가 있어서 가족들도 
  사체 확인을 하고요. 선생 소설에 나 윱  대로 전에 부동산 투기를 하
  지 않았느냐고 그러니까 처음엔 가족들도  아니라고 잡아떼더니 나중엔 
  그렇다고 그러더군요."

   "또 제 책을 찢은 메모지가 나왔습니까?"

   "예. 그런데 이번엔 다른 것과 함께 나왔습니다."

   "또 다른 거라니요?"

   "이 선생 책과  함께 며칠자 것인지는 아직 잘  모르겠고 이번 사건의 
  성격과 사회 분위기에 대해서 쓴 C신문 사설이 나왔습니다."

   "어떤 내용인데요?"

   "내용은 미처 못봤는데 <부(富)를  죄악시하는 풍토부터 고쳐야> 하는 
  제목의 글이었습니다. C신  그런 사설 본 적이 있습니까?"

   "예.아뇨,보지 않았지만 대충 어떤 논지의 글이라는 건 알 것 같군요. 
  더구나 C신문 사설이었다면......"

   "이 선생 소설엔 T라고 썼는데 이번 나온 사설엔 붉은 매직으로 X라고 
  쓴 게 전번 사건들과 차이라면  차이일 수도 있고.....X자 아래 뭐라고 
  쓴 줄 아십니까?"

   "뭐라고 썼는데요?"

   "나를 부추기는 건 바로 이런 글을 쓰는 놈들이다,라고 썼어요."

   "경찰은 그걸 어떻게 어떻게 파악하는데요?"

   "자세한 거야 나중에 분석해봐야겠지만  우선은 자기가 저지른 사건을 
  그런 식으로 해석하고 주장하는 게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뜻으로 말입
  니다. 이 선생은 어떻게 생각하는데요?"

   "제 생각은 말하지 않는 게 나을 것 같군요."

   "왜요?"

   "그런 것들도 하나하나 문제가 되는 거니까."

   "애기해보세요."

   "그만두겠습니다. 그것이 바른 방향이든 아니든,또 마음에 들든 안 들
  든 우리 사회의 여론을 이끄는 게 바로 C신문이니까. 전에 어떤 신방과 
  교수가 그런 글을 쓴 걸 본  적이 있습니다. 우리는 통일도 C신문이 원
  해야 된다고 말이죠. 그럼 전 그만 일어나 보겠습니다. 연락하실 일 있
  으면 하십시오."

   "사무실에 계실 겁니까?"

   "모르겠습니다. 다시 사건이 터진  다음에도 꼭 사무실로 나가 있어야 
  하는지도 잘 모르겠고요."

   회의실을 나오자 다시 기자들이 몰려들었다. 그는 자기 앞을 막아서서 
  다시 중구난방으로 질문하는 기자들과 몸싸움을 하듯 해서 겨우 사무실
  을 벗어났다.기자 몇몇이 계속해 따라오며 질문을 하고 사진을 찍곤 했
  다.

   "C신문 사설이 나왔다는 얘기들었지요?"

   "작가로서 그건 어떻게 생각합니까?"

   처음으로 그는 딱 한가지 질 ?「 대답했다.

   "그건 그걸 쓴 사람에게  가서 물어보십시오. 나는 돈이 아까워서라도 
  C신문 같은 건 보지 않아 어떤 어떤 내용의 글인지도 모르니까."

   "C신문이면 C 신문이지 C신문 같은 거라니?"

   이득지는 대꾸를 하지 않고 밖으로 나왔다. 한가지 분명한 건 그가 바
  로 C신문 기자일 거라는 것이었다.


 소 제 목 : 네번째 테러가 의미하는 것은

      돌아오는 길.  이득지는 범인이 남겼다는   C신문의  사설을 생각했
   다. 보지 않아   어떤 내용인지는 몰라도   <부(富)를 죄악시하는 풍토
   부터 고쳐야>라는 제목이 이미 모든 것을 말하고 있었다.

       T가 저지르고 있는 일련의 연쇄 살인  사건에 대한 현실 진단이 부
   를 죄악시하는 풍토부터 고쳐야 하는  것이라면 그 사건은 부를 죄악시
   하는 풍토가 불러일으킨   사건이며, 그런 사건이  일어난 사회적 원인
   을 따질 때에도 그 부분의 책임이 가장 크다는 얘기였다. 

      그러니까 가난한 자들이  가  자에  대한  부를 죄악시하는 풍토만 
   아니라면 일어나지 않을 일이 일어났다는  뜻이기도 했다. 그런 이분법
   속에 자연스럽게 가진자들을 선한 피핍박자의   위치에 놓고 가지지 못
   한 자들이 공격적인 핍박자의 위치에  놓았다. 그러니까 그의 이분법대
   로라면 문제는  능력없는 너희들의  공격적 태도와 공격적  시각이라는 
   뜻이었다.

       어쩌면 T는 경찰이  생각하고 있는 것보다 한  수 위의 사람일지도 
   몰랐다. 자신의 책과  함께 그런 사설을 찢어 X표를 한  다음 <나를 부
   추기는 건   바로 이런 글  쓰는  놈들이다>는  메시지를 남겼다는 것
   은 어떤 의미로든 그의 이번 테러 속엔  자신의 범행을 그런 구도로 몰
   고 가는 언론에 대해서까지 테러를 병행하고 있는 셈이었다.

       물론 그런 사설을 쓴  C신문의  논객이야 그걸 인정하려 들지 않겠
   지만 자신이 보기에  T의  뜻은 그런 것이었다.  그러나 인정하지 않는
   다 해도 어쩌면 그걸  쓴 논객도  T의 뜻을  짐작할 것이다. 단지 그것
   을 인정하려들지 않을  뿐. 이제  그 논객은 다시  교묘한 방법으로 그 
   의미를 왜곡하려들지 모른다. 아니, 틀림없이 그  것이다.

       어쨌거나 현장에 나가  사건을  본 기자들은 오늘 오후 석간신문부
   터 시작해 그 부분에 대한  기사를  쓸 것이다. 이제까지 세 번의 사건
   에선 범인이 이득지의  소설 한 부분을 찢어  메시지로 사용했는데, 오
   늘 터진 네번째 사건에서 범인은 그 소설의  한 부분과 함께 몇월 몇일
   자 C신문의 사설을 함께 찢어  메시지를 남겼다고. 그리고 메시지로 사
   용한 그  사설의 내용은  바로  이런 것이며, 그 아래  <나를 부추기는 
   건 바로 이런 글을 쓰는 놈들이다>는 글을 남겼다고.

       네번째  怜퓽  터진 것에 대한 어떤   두려움과 허탈 속에서도 그
   는 그 부분이  앞으로 어떻게 보도되고   또 어떻게 해석되어질 것인가
   에 대해 또다른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과연 언론은  그 부분을 어떻게 해석해   낼 것인가. 아니,그 해석
   을 어떤 식으로  몰아갈 것인가. 특히 C신문  태도가 궁금했다. 그리고 
   사회적 문제와 관련해선   비교적 객관적 보도  태도를 유지해왔던 H신
   문은 또 그것을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

       미리부터 왠지 자신의  생각과는  다른 기사들이 그의 머릿속에 떠
   올랐다.

                                                                                                                                                                                                                                                                                                                                                                                                                                                                                                                              만  읽지  않았다면 처음부터 이런 사건은 일
   어날 수 없다는  식으로 우리 사회가 안고 있는  문제점보다는 그런 소
   설을 써서  발표한 이득지 개인에  대해서 일방적인 공격  태도를 취해 
   온 것이었다. 하기야 이 사건뿐 아니라  이 땅에서 일어난 대부분의 사
   회적 범죄에  대한 해석이  그런  셈이었다. 사회는 별  문제가 없는데 
   몇몇 개인이 늘  문제가 있어 그런 사건이  일어난다는 식으로. 그러면
   서도 그들은  사회 이야기를  하고  범죄 이야기를 했다.  그러나 어느 
   쪽도 정확하게 그 실상을 짚지 못했다. 아니, 짚지 않았다.


 소 제 목 : 범인은 다시 전화를 걸어....

   집으로 들어오자 이미 날이 밝아 있었다.

   그러고 보니 경찰서로 나간  다음 다시 들어올 때까지 집으로 
  전화도 한 통 걸지 않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사람들의 눈
  을 피하듯 조심스럽게 경비실 앞을 지나 엘리베이터를 타고 12
  층으로 올라갔다.

   뭐가 뭔지 모를 심정으로  그는 다시 조심스럽게 초인종을 눌
  렀다.

   "누구세요?"

   오토폰으로 비치는 얼굴을 보았을 텐데도 아내가 물었다.

   "나야."

   "혼자예요?"

   "그래."

   그제서야 아내가  문을 열었다. 처제 역시  아내 옆에 불안한 
  얼굴로 서 있었다.

   혼자세요? 어쩌면 그 말 한마디에 아내의 불안이 다 들어있는
  지도 몰랐다. 나갈 때는 남편 혼자 나갔지만 돌아올 땐 혼자가 
  아닐 수도 있다는 생각. 아내는 그 것을 걱정하고 있었을 것이
  다.

   그가 아무말 없이 서재  쪽으로 들어가자 처제는 거실에 남고 
  아내 혼자 그를 따라들어왔다.

   "무슨 일 있었던 거예요?"

   다시 아내가 조심스럽게 그의 얼굴을 살폈다.

   "나한테?"

   "예."

   "나한테 무슨 일 있을 건 아니잖아."

   "걱정했어요."

   "돌아오지 못할까봐?"

   "아뇨."

   그러면서 아내는 당신이 나간 다음 한 시간쯤 후에 다시 그런 
  전화가 왔었다고 말했다.

   "T가 말이지?"

   "그런 것 같았어요."

   "뭐라고 그래?"

   "벨이 울려서 받으니까 아무 말도 안했어요."

   "당신은 뭐라고 그랬는데?"

   "처음엔 나도 놀라서 아무 말을  안하고 있다가 그 사람이 당
  신이 경찰서로 나간 걸 알면 안  될 것 같아서 당신이 옆에 있
  는 것처럼  애기 아빠 바꿔줄까요,하고 물었더니  다시 전화를 
  끊었어요."

   "틀림없이 그 사람 같았단 말이지."

   "예. 느낌이......"

   그렇게 두 번이나 전화를  걸었다면 그는 틀림없이 내게 무슨 
  말인가 하고 싶은 것이  있다는 뜻이었다. 그러나 이제 전화로
  는 어떤 말도  할 수 없다는 건 그가 더  잘 알고 있을 것이었
  다. 무슨 말인가 해야 하는데도 말을 할 수 없는 상황......

   "이번 피살자도 여잔가요?"

   "책에 나오는대로야." 

   이득지는 아내에게 자신이 나가  들은 이야기를 했다. 자신의 
  책을 찢은 메모지와 C 신문의 사설 이야기였다.

   "당신 생각엔 그 사람이 왜 그런 전화를 걸었다고 생각해?"

   "모르겠어요. 나는 잘......"

   "무슨 할 애기 같은 게 있다는 생각 들지 않았어?"

   "전화를 받을 때  나도 제 정신이 아니었어요.  난 그 사람이 
  이제 당신을 어떻게 하려고 그러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을 자
  꾸 하게 돼요?"

   "나한테?"

   "모르겠어요,왜 자꾸 그런 생각이 드는지......"

  
 소 제 목 : 그래, 피하지 않겠다. 이제....

   "나를 어떻게 하겠다는 것이 아니라 나한테 하고 싶은 얘기가 
  있다는 거겠지. 단순히 자신이 네번째 사건을 일으켰다는 것을 
  알리겠다는 뜻이 아니라......"

   "우리 당분간 강릉에 가 있는  게 있는 게 어떻겠어요?  거기 
  가면 당신 부딪칠 일 도 없고 훈이 학교도 가지 않으니까."

   "아니야. 나는 있어야 돼.  당신과 훈이가 내려가더라도 나는 
  서울에 있으면서 하나하나 부딪쳐 나가야 돼."

   "당신이 안 내려가면 우리도 내려가지 못해요."

   "나도 그렇고  당신도 그렇고,전보다 더  힘들어질지도 몰라. 
  이미 상황이 그렇게 우리를 몰고 가는 거니까." 

   "알아요.그런데 당신 T한테 쓰던 편지는 이제 어떻게 할 건가
  요?"

   "글쎄..... 이젠 거 쓰고 싶어도 쓸 일이 없는 거겠지."

   그 생각도 아까 경찰서로 나가는 동안 문득 했던 생각이었다. 

  이젠 그럴 일도  없어졌구나. 이젠 쓰고 싶어도  어떤 글도 쓸 
  수가 없구나. 글을  쓰지 않는다면 이제 나는  무엇을 해야 되
  나. 의정부의 어느 독자는 그럴수록 내가 글을 써야 한다고 했
  지만 이런 일을 겪고 보면  그런 열의도 생각도 없어지고 마는 
  것이었다. 그동안 언론에서 떠들던 것처럼,그리고 내가 아무리 
  부인한다 하더라도  내 소설이 그의 테러  지침서가 되고 있는 
  것만은 분명한 사실이었다.

   단지 참을 수 없었던 건  그런 희대의 연쇄 살인 사건이 발생
  하고 있는 원인을 전적으로 자신의 소설에만 돌리고 있다는 것
  이었다. 마땅히  따라야 할 작가로서의 책임을  지지 않겠다는 
  것이 아니라,그래서 그  그물로부터 벗어나겠다는 것이 아니라 
  어떤 또다른 목적으로 가진  계획적 음모처럼 그들이 몰고가는 
  그런 식의 분위기를 참을 수 없었던 것이었다.

    뗑 문제는 <압구정동>으로 상징되는 이땅의 천민자본주의가 
  보여주고 있는 그들의 집단적 부패와 타락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내 소설  <<압구정동>>에 모든 것이 있다는  식으로. 그러면서 
  그들은 백번 양보하는 듯한  태도로 무엇이 없는자들의 소외감
  과 턱없는 적개심을 느끼게 하는가에 대해 반성을 촉구하는 제
  스추어를 보일 뿐이었다. 우리  사회 이대로 안된다,하는 식으
  로......

   "오늘도 사무실로 나갈 건가요.?"

   "가야지."

   "그러면 또 사람들이 몰려올 텐데......"

   "이젠 나도 전처럼  피하  않겠어. 해야 할  말도 분명히 할 
  거고."

   "어떻게 할 생각인데요?"

   그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러는  동안에도 거실에선 계속 벨이 
  울렸고,처음 몇 번 그것을 받던 처제가 같은 물음과 같은 대답
  에 지친 듯 나중엔 코드를 뽑아버렸다.

   "아무래도 사무실로 나가야겠어."

   "이렇게 일찍요?"

   그는 거실로 나와 처제가 뽑은 꼬드를 다시 꽂고 빠른 목소리
  로 자신의 메시지를 넣었다.

   "소설가 이득집니다. 저는 지금  사무실에 나가 있습니다. 용
  건이 있으신 분은 사무실로  전화를 하거나 찾아오시기를 바랍
  니다."

   그리고 그는 또박또박 끊어  말하듯 사무실 전화 번호를 입력
  하고 자동응답 장치를 걸었다.

   "목소리를 들어봐서 받아야 할 사람들만 받어."

   그는 서랍에 넣어두었던 자동차  키를 꺼내들고 집을 나왔다. 
  아내가 불안 얼굴로 현관까지 나왔지만 그는 그런 아내의 얼굴
  조차 애써 외면 하고 밖으로 나왔다.

   그래. 이제 나도 피하지 않겠다.

   지금까지 참았던 내가 해야  할 말들을 감추거나 묻어두지 않
  겠다.


 소 제 목 : 네번째 피살자의 신원은

   그 시간 강남 경찰서 강력계 형사들은 사건 현장에 박 형사만 
  남겨 두고 일단 모두  서로 철수했다. 감식반의 현장 감식까지 
  일차로 끝난 다음이었다.

   "그놈이 신문에 쓴 글이 어떤 단서가 될지도 몰라. 전에도 없
  었던 건 기대하지도 말고......"
   돌아오는 차안에서 석 경감이 말했다.

   그놈이 신문에  쓴 글이란 범인이 C신문의  사설을 찢어 남긴 
  "나를 부추기는  놈은 바로 이런 글을  쓰는 놈들이다"를 두고 
  하는 말이었고,전에도 없었다는  건 피살자의 몸이나 핸드백과 
  같은 소지품에 남았을지 모를 범인의 흔적을 두고 하는 말이었
  다.

   실제로 이번에도 범인은 또 한 여자의 목을 졸라 살해하며 피
  살자의 핸드백 안에 들어  있는 6백만원 상당의 수표와 현금엔 
  손을 대지 않았다. 아니,겉보기부터  고급스러워 보이는 그 핸
  드백을 열어보지조차 않은 듯했다.

   자신이 읽고 따라하는  소설에서와 마찬가지로 피살자의 목에
  도 보석이 매달린 목걸이가  그대로 걸려 있었고, 반항하던 중
  에 떨어진 듯 팔찌만 주변에 끈이 끊어진 채 떨어져 있을 뿐이
  었다.

   "나도 요즘 하도 그런  얘기가 많아 그 소설 읽어보았는데,부
  동산에 손을 대긴 했어도 아내는 그런 여자는 아니었습니다."

   처음엔 경찰을  잡고,이 좁은 동네의 치안  하나 제대로 하지 
  못하는 너희가 무슨 경찰이냐며  형사들의 목을 돌아가며 잡던 
  피살자의 남편도 어느 정도 마음을 진정하고 나선 기자들과 형
  사들 앞에 그런 소리를 했다.

   그런 여자는 아니었다......

   소설 속의 네번째 피살자  까만 가죽치마의 연인은 가난한 어
  린 시절과 젊은 시절을  보냈고,그러다 남의 돈을 꾸어들여 몇 
  번 목 좋은 곳의 땅을 구입해  되팔 던 끝에 꿈에도  琉? 압
  구정동으로 진입한 다음 다시  본격적으로 부동산 투기에 나서 
  큰 돈을 번 여자였다. 그리고  그렇게 큰 돈을 번 다음에도 부
  동산 투기는 부동산 투기대로  하면서 고급 룸살롱을 경영하며 
  자신은 호스트바  같은 델 무시로 드나드는  여자였다. 남편이 
  변명하듯 그런 여자는 아니었다는  말은 아마 룸살롱을 경영하
  며 호스트바 같은 델 무시로  드나드는 부분을 두고 하는 말이
  었다.

    기자들이 부인이 모은 재산은 대략 어느 정도 되느냐고 물엇
  을 때에도 남편은 대답하지  않았다. 연고자 신원 확인을 확인
  할 때 오래도록 공무원 생활을 하고 있다는 말만 했다.

   "필체 감정이라는 것도 일단 용의자가 좁혀져야 가능한 것 아
  니겠습니까?"
   최 형사가 석 경감에게 말했다.

   "그렇긴 해도 아무런 증거가 없는 것보단 낫지 않겠느냐는 얘
  기지. 의외로 목격자가 있을 수도 있는 일이고. 다시 시끄러워
  지겠어. 경찰이 뭐하느냐는 소리가 또 나올 거고......."

   서로 들어와 석  경감은 일단 서장에게 사건  발생 보고를 한 
  다음 강력계로  돌아와 다시 형사들을 소집했다.  이번에 잡지 
  못하면 자신의 경찰  煇갠 어떻게 될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
  다. 경찰 생활 30년 가까운 세월 동안 자신이 이토록 무능하다
  고 느껴본 적이 없었다.  한적한 시골도 아닌 서울에서 어떻게 
  이런 일이 연달아  네 건이나 생길 수  있는지,그런 치안의 한 
  부분을 담당하는 경찰로서도 믿어지지 않는 일이었다.

   "이득지 집으로는 어디서 전화를 건 거야?"

   다시 석 경감이 남 형사에게 물었다.

        
 소 제 목 : 범인은 왜 전화를 했을까, 이득지에게


   "대림 역 앞입니다. 시간은 정확하게 두 시 반이고요. 그리고 
  아까 이득지 씨한테서 전화가 왔는데  네시 무렵에도 한 번 더 
  전화가 왔었답니다. 부인 혼자 집에 있을 때......"

   "그건 어디서 걸려온 거야?"

   "구로공단역앞입니다."

   "뭔가 잡힐 듯 잡힐 듯하면서도 잡히질 않아. 두시 반에 전화
  를 걸고,다시  네시에 같은  장소를 이동해 전화를  걸고 말이
  지."

   "저도 들어와  생각을 해봤는데,우리가 사건 연락을  받은 한 
  시 반이었잖습니까? 그리고 사망  추정 시간이야 부검을 해 봐
  야 확실하게 알겠지만,제 생각엔 신고자가 사체를 발견한 시간
  으로부터 30분을 넘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사람 왕
  래가 없는 외진 곳이라지만 압구정동의 외진 곳이라는 게 같은 
  압구정동에 비해서 그렇다는 거지 아주 사람 왕래가 없는 길이
  라는 게 아니니까......"

   다시 남 형사였다.

   "그래서?"

   석 경감의 꿈틀 위로 움직였다.

   "처음부터 우리가  무언가를 잘못 쫓고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것도  어디까지나 추리인데 범인은 우리
  가 생각하고 있는 것처럼  대림역이나  틈玖 구로공단 부근에 
  있는 놈이 아니라 오히려 현장 가까운 데 거처를 두고 있는 놈
  이 아닌가 싶기도 하고....."

   "가까운 곳에 있다?"

   "예. 대림 역 앞에서  전화를 걸었다면 피살자를 살해하고 나
  서 어떤 방법을 통해서든 현장에서 그곳으로 이동을 했다는 얘
  긴데,아무리 현장 부근을 벗어나와 이동한다 해도 차편을 이용
  하지 않고는 움직일 수 없다는 거죠. 방법은 택시를 다거나 아
  니면 자기 차편으로 이동했다는 얘기 아닙니까? 그런데 택시로 
  이동한다는 게 쉬운 일도  아닐 테고 말이죠. 그런데도  痢? 
  지난 밤 그 시간 이후에 사건 현장 이삼킬로 반경 부근에서 대
  림역 쪽으로 가는 승객을 태운 운전자를 수소문할 수밖에 없고 
  말입니다."

   "계속 얘길 해봐."

   "그리고 또 대림역에서 공단역  쪽으로 이동할 때 이용했을지 
  모를 택시를 찾고 말이죠. 그런데 지금까지 사건을 볼 때 그토
  록 뒷수습을 치밀하게 하는 놈이  그런 식으로 허튼 구석을 보
  이겠냐는 겁니다. 제 생각엔 이득지의 집에도 이득지에게 무슨 
  할 말이 있어서라기 보다 일부러  전화를 건 것이 아닐까 싶습
  니다. 자신이 전화를 건  汰 위치를 그런 식으로 이쪽으로 흘
  리겠다는 식으로......"

   "그럼 자네가 생각하고 있는 또 하나의 가능성은 뭐야?"

   "범인이 다음번  범행 대상으로 정한  피살자를 주도면밀하게 
  살펴볼 수 있는 위치에  있다는 겁니다. 그리고 자신의 범행용 
  자동차를 가지고 있는 게  아닌가 싶고요. 이번 사건 경우라면 
  미리 압구정동 어디에 자신의  자동차를 놓아두고 범행을 저지
  른 다음  그 자동차를 타고 대림역과  공단역으로 나가 전화를 
  걸었다는 거죠. 자신의 자동차  없이 사건 현장 부근에서 대림
  역까지 택 첩 타고 이동한다는 건 아무래도 다른 사람들 눈에 
  노출될 위험이 크고,또 거기서 공단역까지 다시 택시로 이동하
  거나 걸어서 이동한다는 것도 그렇고 말입니다."

   "남 형사,자네 말을 들으면  그럴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 
  그런데 누군가 또 다른 식으로 추리를 하면 그것도 그럴 수 있
  다는 생각이 들고. 이번 사건  성격이 그래. 어떤 식으로든 종
  잡을 수가 없다는  거지. 코에 걸면 코걸이  식으로 어떤 식의 
  추리로 다 들어맞을 수 있고 말이야. 그게 왜 그런 줄 알아? "

   "왜 그렇다고 생각하는데요?"

                                                                                                                                                                                                                                                                                                                                                                                                                                                                                                                              뼈  못해서 그렇지 나도 아까  사건 현장에 나가면서 
  그런 생각을 했어. 어느  무고한 사람이 죽었구나 하는 생각보
  다 이번엔 그놈이 또 어떤  적임자를 골랐나 하는 생각이 말이
  지. 차라리 어떤 원한에  의한 살인이든가 치정 살인이면 물증
  없이 심증만으로도 범인은 좁혀지기 마련인데 이건 지문이라든
  가 혈흔 같이 확실한 물증이 나오기 전엔 어렵다는 뜻이야."

   "그래도 목격자부터 찾아봐야 하는 거 아니겠습니까?"

   "그래야겠지. 사건 현장하고 그  시간 그 놈이 전화를 걸었던 
  데를 중심으로 알아 볼  수 있는데까지는 알아 보야지. 기대할 
  게 있든 없든......"


 소 제 목 : 부에 대한 증오. 비상구가 없다
   그날 점심시간이 지나 이득지의 사무실로 배달되어온  석간 신문은 
  일면 톱으로 그 사건을 올리고 자극적 문구로
   [시민 경악,또 부녀자 연쇄 살인
    부에 대한 증오,비상구가 없는가]
   라는 제목을 뽑았다.

   오인방 친구중  제일 나이가 어린 윤호녕이  그 신문을 들고  왔을 
  때 이득지의  사무실엔 이미 많은  언론사의 기자들이 몰려와  있었
  다. 아니,윤호녕이 신문을  가져오기 전 그는 신문을 받듯 이미  한
  차례 기자들의 질문 세례를 받고 난 터였다.

   그들의 첫 질문은  이런 사건에 대해 작가로서 어 뺐  생각하느냐
  는 것이었고,그것을 사전에 알고 있지는 않았나 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범인이 남긴 메시지로  당신의 소설과 함께 C 신문 5월  19
  일자 사설이 함께  나왔는데 거기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것이었다.

   처음 그는 그 사설을  보지 않아 무어라 말할 입장이 아니라고  했
  다. 그러다 누군가 미리 준비해 온 그 신문을 보았을  땐 정말 어떻
  게 대답을 해야 하나 난감한 생각이 들었다.

   여기에 옮겨 적을 것도 없이 그 사설은 제목만 봤을  때 느끼고 예
  상했던 그대로의 내용이었다.  活 스스로 <나를 부추기는  건 바로 
  이런 글을 쓰는  놈들이다>라고 밝혔듯 이득지도 거기에 대해  이야
  기를 하자면 할 말이 많았다. 그러나 그는 자신이 그  말을 할 입장
  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아무리 피하지 않겠다고  다짐을 했
  지만 할 이야기가 있고 하지 못할 이야기가 있었다.

   자신이 만약 마음  속으로 느끼는 바를 그대로  이야기하면,그것은 
  이 사건에 대해  범인이 그대로 사건을 따라 저지르고 있는  소설을 
  쓴 작가로서 져야  할 책임을 남에게 넘기고 빠져나갈 궁리를  하는 
  것으로 오해되기 딱  좋았다. 사실이 그렇지 않다 하더라도  상황이 
  그러했다.

   "거기에 대해서는 할 이야기가 있어도 내가 얘기할  입장이 아니군
  요."

   "아니라는 뜻은 뭡니까?"

   "나와 이 사건 사이에 어떤 상관 관계가 있다는 겁니다."

   그는 그 <상관 관계>에 대한 설명을 했다. 자신이 거기에  대해 왜 
  말하기 여려운가에 대하여.

   "그러나 분명한 건  범인 스스로는 이 사설의 내용대로 단순히  가
  난한 자가  많이 가진 자들에  대한 터무니없는 증오심만으로  그런 
  범행을 저지르고 있는 게 아니라는 걸 이  聘쳅嗤 통해  강하게 주
  장하고 있다는 겁니다.  그게 기자들이나 또 일반 시민들에게  어떻
  게 받아들여질지는 몰라도......"

   "우리가 묻는 건 이득지 씨의 생각입니다."

   "제가 얘기할  수 있는 건 범인의  뜻이 그렇다는 것뿐입니다.  이 
  사설의 논조가 옳고  그른 것을 떠나 범인을 자극했던 것만은  틀림
  없지 않겠냐는 겁니다."

   "사설의 논조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합니까?"

   "말하지 않겠습니다."

   "말하지 않는다는 건 범인의 메시지에 공감한다는 뜻입니까?"

   그런 일이 언제나 그렇듯 먼저 싸움을 걸어온  쪽은 기자들이었다.
  또 그렇게 물어온 기자 역시 C 신문의 키작은 사회부 기자였다.

   "이 사건 해석을  두고 또 다른 형태의 매카시즘으로 몰고갈  생각
  입니까?"
   쏘아보는 눈길로 이득지가 말했다.

   "메카시즘이라니 무슨 뜻입니까?"

   "이 사설의 논조에  동조할 수 있다,없다의 대답과 범인의  메시지
  가 그런 뜻이다, 아니다의 대답은 별개의 것이라는  뜻입니다. 내가 
  그 질문에 대해 대답을 피하는 것도 바로 그래서입니다.  이 사설의 
  논조에 문제가 있다고 말하면 여러분은 곧바로 내가  범인의 메시지
  에 공감한다는 뜻으로 받아들이고,또 그걸로 범인의  범행에까지 동
  조하고 있는 것으로 확대해석하려 든다는 걸 알기 때문입니다."

   "지금까지 한 얘기로는  이 사설의 논조에 공감할 수 없다는  얘긴
  데....."

   "아닙니다."

   "그럼 공감한다는 뜻입니까?"

   "아닙니다. 어느  쪽도...... 분명히 말할 수  있는 건 내  대답이 
  아니라 이 신문 사설의 논조가 범인을 자극했던  것만은 틀림없다는 
  거죠. 여러분은 범인이 자신의 범행에 대해 정곡을 찌른  어느 신문
  의 사설에 대하여 적의를  藥  쨈鳴 표현할지 모르지만  그런 것은 
  아닐 거라는 겁니다. 이런 류의 논조가 범인뿐 아니라  그것을 읽는 
  다른 많은 사람들까지 자극할 요소가 충분히 있다는 거죠.  옳고 그
  른 것을 떠나서......"

   이득지로선 참으로 어려운 이야기를 돌려서 한 셈이었다

       
 소 제 목 : 선정적인 보도의 뒤끝은 언제나

   그러나 그런 이야기가  무슨 소용이겠는가. 전에도 비슷한  사건에 
  대한 비슷한 시각의 말들이 있었지 않은가.

   어느 탈주범이 텔레비전에까지 중계된 자신들의 이질극  범행 현장
  에서 악에 받쳐 말한 <유전무죄,유전무죄>라는 말도 그 말이  왜 나
  왔으며,또 많은 사람들이 한 흉악범의 입에서 나온 말을  통해 우리 
  사회의 한 단면을  보고 있음에도,처음 그런 말을 보도했던  언론들
  이 끝에 가서 뱉는 말은 또 그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이제까지 T가 저지러오고 있는 범죄와 비슷한  사회 범죄의 
  경우도  뗏弼≠熾눼.  처음엔 그런  사회에 대한 원망섞인  범인의 
  말을 아무 여과없이 선정적으로 보도하다가도 그 반향이  일정 수준
  을 넘게 되면 또 어김없이 따르는 말이 있었다.

   그런 범죄를 저지른  자들은 범행 후 하나같이 자신들은  경제적으
  로 소외된 계층에서 태어나 아무리 노력해도 잘 살 수가  없어 부도
  덕하게 돈을  모은 <있는 자>들에  대한 복수로 범죄를  저질렀다는 
  식으로 마치 자신들의 범행이 사회 구조적 모순에서  파생된 것처럼 
  강변하고 있다고.

   그러면서 그들은 거기에 덧붙여  잘 사는 사람은 그냥 잘 사는  것
  이 아니다,하는 식으로 그런 범법자들이 한탕주의와  배금주의에 탐
  닉,결국은 쉽게  떼돈을 벌겠다는  저열한 욕망 때문에  흉악범죄를 
  저지르게 된다고 말해왔다.

   그러나 이번 압구정동 부녀자 연쇄 살인 사건 경우엔  그들의 그런 
  논리가 쉽게 먹혀들어갈  틈을 주지 않고 연이어 발생하고 있는  것
  이었다. 지금까지 발생한 네번의 사건 중 어느 경우에나  범인은 피
  살자의 금품에 손을 대지 않음으로써 끔찍한 사건임에도  최소한 한
  탕주의니 배금주의니 하는  식의 저열한 비난을 원천적으로  차단하
  고 있는 것이었다.

   아니,이제까지 언론에서  자신의 범행을  어떻게 진단했든  오히려 
  이 끔찍한 사건은 그 연쇄 사건의 다음 피해자가 될  개연성이 없는
  (안다,우리는 그것이  축복이 아니라  상대적 가치 박탈임을)  많은 
  비압구정동 사람들에게  오히려 가진자들의  저열한 욕망에  뿌리를 
  둔 한탕주의와 배금주의에 대한 마지막 경고처럼 읽혀지고  있는 것
  이었다.

   T가 C신문의 사설을 찢어 남긴 메시지도 그랬다.   

   그것조차 이제 또다른  말로 그의 의도가 왜곡되고 말겠지만  지난
  밤에 발생한 네번째의  사건이 그런 언론에 대한 테러의 의미를  함
  께 가지는 것만은 분명한 사실이었다. 단지 그 부분을  오늘 자신을 
  찾아온 이들이 어떻게 말하고 해석하느냐 하는 차이일뿐......

   "앞으로도 계속 범인에 대한 편지를 쓸 생각입니까?"

   석간 J 신문 기자였다.

   "아뇨. 이젠 그럴  필요가 없겠지요. 어쩌면 당분간 나는 그런  편
  지를 포함한 어떤 글도 쓰지 않을 생각입니다."

   "그 말은 창작활동을 하지 않겠다는 뜻인가요."

   "그렇습니다. 지금 생각으로는......"

   "이번 사건에 대  작가로서의 책임 때문입니까?"

   "그건 어떻게 해석해도  좋습니다. 그러나 그런 부분도 적지  않겠
  지만 우리 현실에서 소설이라거나 문학이 가지고 있는  기능에 대한 
  궁극적인 회의도 크다는 것이지요."

   "다시 하나 묻겠습니다."

   다시 C신문 기자였다.

   "말해보십시오."

   "아까도 물었던 건데 확실한 대답을 하지 않아 다시  묻습니다. 범
  인은 우리 신문 사설을  찢어 거기에 <나를 부추기는 것은 바로  이
  런 글을 쓰는  놈들이다> 라는 메모를 남겼는데, 이득지 씨도  정말 
  그렇게 생각하는냐는 겁니다."

   "거기에 대한 질문이라면 내 대답은 아까와 같습니다."

   "우리 신문이라서가 아니라  우리가 상식적으로 그건 단지  범인이 
  어떤 핑계를 대기 위한  것일 뿐 정말 그 범인을 부추겼던 건  이득
  지 씨의 편지가 아닐까 하는 생각은 해보지 않았는지요?"

   "아뇨."

   이득지는 C신문 기자를 쏘아보며 단호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잠시 
  사무실 안이 술렁거렸다. 그러나 틈을 주지 않고 이득지가 말했다.

   "대답하지  않았던  조금  전의  질문까지  분명하게  대답하죠,이
  제......."


 소 제 목 : 그테러는 왜 에스컬레이트 되어가는가 ?
     그러자 옆에 앉아 있었던 유재룡이 그의 팔을 툭,치듯 잡았
    다.

     참아.

     친구의 눈이 말했다.

     놔 둬. 얘기할 테니까.

     참으로라니까.

     짧은 순간 서로의 눈길 속에 잠시 그런 말이 오고갔다.

     "이봐요,김 기자.내가 얘기할까요?"

     그러다 이득지가 입을 열기 전 먼저 입을 연 것은 유재룡이
    었다.

     "그 사설 누가 썼듯 어쨌거나 사설이라는 이름을 달았을 땐 
    C신문사의 공식적인  입장에서의 발언이라는  뜻인데 솔직히 
    그거 읽고 나서 나도 기분나빴어요. 어  정도로 기분나빴느
    냐 하면 범인이 누군지 모르지만 테러를 하려면 이런 놈들부
    터 테러를 해야한다고 내 입으로 다른 사람에게 말했을 정도
    로 기분나쁘더라 이거요. 범인이 한 얘기니까 다 거짓말이고 
    핑계다,하는 식으로 생각할 게 아니라 내가 봐도 그래요. 솔
    직한 얘기로  테러를 부추기는 건 이번  사건에 대한 언론의 
    그런 태도들이 아니냐 이겁니다. 어떤 의미로든 자신의 범행 
    의도를  전혀  이상한  방향으로  끌고  가지  못해  애쓰니
    까...... 여기 있는 다른  사람들에게 다 물어봐요. 내 애기
    가 틀리는지 맞는지......

     당신은 그 대답을 꼭 이 친구한테 들어서 뭔가 또달리 이상
    한 방향으로 이야기를 끌고  나가고 싶어하는데 지금까지 이 
    친구가 당신들 인터뷰에 응하지 않았던 것도 사실 그런 이유 
    때문이다 이거예요. 

     쓰고 싶으면 써요. 이득지의  친구 소설가 유재룡이 문제의 
    C신문 사설보고 항문으로 해도  좋을 말을 괜히 애써 입으로 
    하고 글로 해서 문제를 만들었다고 그러더라고......

     그리고 이득지 너,옆에서 지켜봤는데  이런 식의 인터뷰 더 
    이상 하지도 마라. 이건  기자가 무식한 건지 작가가 무식한 
    건지,옆에서 보자니 열불이 터져서......"

     "우리는 지금 유선생한테 묻는 게 아니잖습니까?"

     "누구한테 물어도 마찬가지 대답  아니오? 그런 걸 꼭 이득
    지 입으로  듣겠다는 건데 그걸 여기에  모르고 있는 사람이 
    어디 있어? 당신 솔직히 말해봐. 당신 이득지가 쓴 <<압구정
    동>> 봤어?"

     "......."

     "보지도 않았지? 보지도 않고 지금까지 폭력 소설이니 범죄 
    소설이니 떠든 거 아니야? 그 소설 처음 발표되었을 때 대한
    민국 문단 반응이 어땠는지  알아? 그 소설을 계몽주의 소설
    이라고 말한  평론가도 있어. 우리 사회의  경제구조에 대한 
    임상 보고서라고 말한 평론가도 있었고. 당신 신문의 문화부 
    김기자도 90년대 우리 사회가 안고 있는 가장 핵심적인 문제
    에 대한 정확하고도 우울한 진단이라고 말했어. 지금까지 아
    무 소리 안하고 옆에서 지켜봤는데 이런 식의 인터뷰를 해서 
    대체 뭐하자는 거야. 당신은  지금 범인이 나를 부추기는 건 
    바로 이런 글을 쓰는 놈이다,하는 자리에 당신 신문 사설 대
    신 이득지를  貂  싶은 거 아니냐구. 배운  건 있어 가지고 
    요리조리 교묘하게 말을 만들어서 말이지......"

     그러자 사무실 분위기가  갑자기 험악해졌다. C신문 기자는 
    연신 붉으락푸르락하는  얼굴로 씩씩거렸고,유재룡은 유재룡
    대로 큰 덩치로 일어서서 분위기를 그런 식으로 이끌어갔다. 
     옆에 있는 친구들이  유재룡을 말렸고,기자들이 C신문 기자
    를 붙잡아 자리에 앉혔다. 그냥 두었다가는 더 큰 싸움이 일
    어날지도 몰랐다.

     "얘기합시다.계속.... 어치피 얘기하기로 한 거니까."

     이득지가 말 杉.

     "이득지씨 생각도 유재룡 씨 생각과 같은 생각입니까?"

     자리에 앉아서 다시 C신문 기자가 씨근덕거리듯 물었다.

     "이득지 생각은 아니고 여기 모인 우리 친구들은 전에도 그 
    얘기를 했어요. 같은 생각으로...... 꼭 네번째 사건이 발생
    해서가 아니라 이득지가 암만 편지를 쓰며 노력을 해도 언론
    들이 이런 식으로 나가면  거기에 열받아서라도 다음번 일을 
    저지르겠다고."

     구인서였다.

     "친구들말고 이득지씨 생각을 말해봐요. 친구들이 대변인인 
    것도 아니고......"

     "나도 같은 생각이고 같은  말을 했어요. 그리고 네번째 사
    건이 발생할 수밖에 없는 또 하나의 이유는 무엇에 고무되고 
    또 무엇에 화가 나고 해서가  아니라 그게 단순 연쇄 살인이
    든 사회적 메시지를 위한  범행이든 지금까지 범행이 진행되
    어온 상황으로 봐 다음번 범행을 멈추기 힘든 상황이 아닌가 
    하는 애기도 했었고."

     "범행을 멈추기 힘든 상황이라는 게 어떤 상황을 두고 하는 
    말입니까?"

     H 신문 사회부 기자였다.

     이득지는 자신의 소설  속에서와 같은 범행의 에스컬레이 
    에 대해  이야기했다. 소설의 내용을 따라  저지르는 일종의 
    모방범죄며 사회적 범죄이긴 하지만 현실적으로 먼저 발생한 
    세 번의  사건만으로는 그것이 <압구정동>에  대한 테러라는 
    의미를 세우기에  부족한 감이 있는 것  아니겠느냐고. 이번 
    사건을 저지르며 범인은 소설에서와  같은 테러 대상의 에스
    컬레이트를 시도했던 것 같다고.... 그리고 자신의 짐작으로
    는 범인이 잡히지 않는다면  머지 않아 다섯번째의 희생자가 
    발생할 것이며,그때는 보다  확실한 피살자 신분의 에스컬레
    이 ? 있을 것 같다고......



 소 제 목 : 소설 모방범죄에서 범죄 모방범죄로
     그러나 다음날 신문과 방송들은 마치 내부적으로 어떤 모의
    를 하듯 네번째의 사건에 대하여 이제까지와는 다른 보도 태
    도들로 나왔다.

     사건이 사건인 만큼 많은 지면을 할애하면서도 구석구석 전
    의 사건 때와는 확실히 다른 모습들을 보여주었다.
     C 신문의 사건 자체에 대해서도 현장 취재보다는 경찰의 발
    표를 위주로  하여 기사를 썼으며,왜 이런  사건이 일어나고 
    있는가에 대해서도 전과 다른  입장을 취해 말했다. 예전 이
    득지와의 통화를 바탕으로 일반적으로  유추할 수 있는 가난
    한 자의 가진 자에 대한  극도의 증오와 적개심에 대한 이야
    기는 변함없이 강조되었으나,우리 사회가 왜 이런 지경의 사
    건이 끊이지 않는가에 대한 사회적 분석은 확실히 눈에 띄게 
    줄어들었다.

     대신 이번 사건이 이득지의 소설에 나오는 네번째의 사건과
    는 얼마나 흡사한가에 대해서  해설 기사까지 붙여 설명하는 
    식으로 전적으로 이 사건의  책임이 이득지의 소설에 있음을 
    강조하고 있는 듯한 인상을 풍겼다.

     그러면서도 이제까지는  피살자의 신원에  대해서 자세하게 
    설명하던  痼 약속이라도 한 듯 그 부분을 의도적으로 축소
    하고 있었다. 소설과 실제 사건의 흡사함은 강조하면서도 자
    칫 가진자들의 부도덕성에 초점이 맞추어질지 모를 피살자의 
    신원과 이제까지 살아온 피살자의  결코 떳떳하지 못한 삶에 
    대해서는 [박정선(46세,주부)]하는 식으로 넘어가고 있는 것
    이었다. 어느 구석에도 피살자가 그 바닥에서 소문난 복부인
    이었다는 것이 기사 속에서는 나오지 않았다.

     단지 그 사건이 소설  속의 사건과 얼마나 흡사한 것인가를 
    말하기 위해 피살자가 많은 땅과  몇 개의 건물을 가지고 있
    는 숨은 부자라는 정도로만 이야기할 뿐이었다.

     범인의 메시지로  사용한 C 신문의 사설  <부를 죄악시하는 
    풍토부터 고쳐야>의 전문도 소개되고  거기에 적은 <나를 부
    추기는 건 바로 이런 글을 쓰는 놈들이다> 도 범인의 필체까
    지 자세하게 실었지만,그 의미는 전혀 다르게 해석하고 있었
    다.

     "범인은 이번  사건을 저지르며 전의  사건들과 마찬가지로 
    자신의 테러지침서가  되고 있는 이득지의  소설의 <<압구정
    동>> 일부분을 찢어 쓴 T자  메모와 함께 <부를  鱇퓰 하는 
    풍토부터 고쳐야>하는 C 신문  사설(5월 19일자)에 <나를 부
    추기는 건 바로 이런 글을 쓰는 놈들이다> 하는 메모를 피살
    자의 몸에 남겼다.

     그렇게 함으로써 범인은 자신의 범행이 부를 죄악시하여 저
    지르는 범행이  아님을 강변하고 있지만  오리혀 전문가들은 
    범인이 그런 메시지를 남긴  부분에 대하여 하나같이 범인의 
    얼마나 교활한가를 지적하고 있다.(관련기사 5면)"

     <5면 관련기사>
     [정신과의사가 진단하는 범인의 심리
     범인은 잔혹하고도 교활한 이중적 성격]
     이세현 K병원 정신과 과장의 진단
     "어떤 범죄든 사회적인 범죄가  아닌 것이 없다지만 압구정
    동에서 발생하고 있는 이번  연쇄살인 사건은 여러 의미에서 
    우리에게 커다란 충격을 주고 있다.

     어젯밤에 발생한  네번째의 사건에서  범인은 이제까지와는 
    달리 자신의 범행을 진단한 한 신문의 사설에 거친 욕설까지 
    써서 마치 그것이 자신의 사회적 메시지라도 되는 듯이 남겼
    다.

     그러나 그 사설은  누가 보든 이 연쇄  사건이 많은 사회적 
    문제를 안고 있지만 그중에서도  우리 사회  심화되어 있는 
    계층간의 갈등,다시 말해 부에 대한 무조건적인 증오와 적개
    심에 뿌리를 둔 사건이 아닌가 하는 점을 조심스럽고도 용기
    있게 진단한 글이다.

     그러나 범인은 자신의 범행에  대한 그런 언론의 시회적 진
    단을 비웃기라도 하듯,그리고  자신의 범행 책임이 전적으로 
    그런 언론 쪽으로 떠넘기듯 거친 욕설의 메시지를 남긴 것이
    다. 마치 자신은 더 이상의 범행 의도가 없었는데 언론이 그
    런 식으로 그릇되게 자신의 범행을 해석하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이번 사건을 저지른다   식의 이중적 교활함을 드러내
    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범죄심리학적으로 볼 때 자신의 범행 의도를 정확하
    게 지적할 때 범인들은 오히려 그것이 아니라는 식으로 흥분
    하며 다시 잔혹성을 드러내기  마련이다. 그런 심리는 또 발
    전하여 자기가 저지르는 범죄조차  사회 정의의 한 차원이며
    (이 경우 범인은 틀림없이 그렇게 생각할 것이다) 그러기 위
    해선 어떠한 수단과 방법도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극단적인 
    자기 합리화내지는 자기 영웅화 심리를 굳힌다.

     범인은 한 작가의 소설을 읽고 그 소설 속의 주인공과 자신
    을 동일시하고 있으며,그  소설에서 나타난 극단적인 테러리
    즘을 사회 정의의 실현으로 이해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가 영화를 볼 때  느끼듯 보통 사람들에게도 이런 심리
    가 어느 정도 내재되어 있기 마련인데,이번 사건을 기점으로 
    소설에 대한 모방 범죄에서  범죄에 대한 모방범죄로 유사한 
    사건들이 발생하지 않을까 우려된다."

  
 소 제 목 : 그들은 항문으로 해도 좋은 말을 입으로
     그리고 그 옆엔 범인이  남긴 메모지 글씨를 바탕으로 범인
    의 정신  상태를 감정한 필체감정사의 진단도  함께 실렸다. 
    필체 감정사는 범인이 이 메모지를  쓸 당시 몹시 흥분한 상
    태이며(당연하지 않겠는가),어떤 정신상의 혼란에 빠져 있는 
    듯하다고 말했다.

     또 범인이 범행을 저지른  후 압구정동 사건 현장에서 대림
    역쪽으로 이동해 한시간  후 이득지에게 전화를 걸었으며,다
    시 한  시간 후 구로공단 역에서  전화를 하기까지의 범인의 
    시간별 행동 반경에 대한 도표와 설명이 실리고,  그렇듯이 
    사건에 대한 시민들의 반응이  5단 통광고를 뺀 신문의 반면
    에 실렸다.

     전엔 그런 시민의 반응에도 그런 말을 한 시민의 사진이 함
    께 실렸지만 이번엔 사진을 뺀 뒤에 <신문 편집 방침상 취재
    에 응해주신 시민들을 보호하기  위해 시민들의 사진은 게재
    하지 않았습니다>하는  역시 C 신문다운  순발력의 안내문을 
    넣어 다른 신문들과의 차별화를 시도했다.

     "정말 대단한 C 신문이야. 그 교활함은 아무도 따라갈 수가 
    없어."

     사무실에 나와 함께 신문을 보던 박형우가 말했다.

     "이런 식으로  자기들의 사설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간단히 
    뒤집고 나가는 거지 뭐. 다른 신문이 놓치는 작은 부분에 대
    해서까지 시민들의 안전을 생각하는 신문이니까."

     "득지 형 얘기는 뭐라고 나왔는데요?"

     "뭐라고 나오긴. 그동안 범인에게  공개 편지를 썼던 게 오
    히려 범인을 고무시키고 다음  범행을 부추긴 구석은 없는가 
    생각해봐야 한다고 말했더라."

     윤호녕이 묻고 다시 박형우가 말했다.

     "누가 말리겠어요? 천하의  C신문을......어제 재룡이 형이 
    그 자식 깐죽거릴 때 패 죽여야 하는 건데 형들은 왜 말려가
    지고......"

     "그런 소리 말아,임마. 넌 아침에 C신문 안 보고 왔냐?"

     "그 신문 안 봐요,나."

     "누구는 집에서 보냐? 뭐라고  썼는가 전철 타고 오면서 사 
    보는 거지."

     "또 뭐라고 했는데요?"

     "여기 <기자석>이라는 박스 기사를  한 번 봐라. 어제 유재
    룡이 난리 떨던 게  나왔으니까. 친구를 위하는 마음도 좋지
    만 한 시대의 정신을 읽고 그린다는 작가라는 사람들이 이득
    지 사무실에 나와서 자기들이 취재를 하는 동안  嬖 분위기
    를 만들었단다. 이득지에 대해서는  또 뭐랬는지 아냐? <<압
    구정동>> 같은  폭력 범죄 소설을 써서  처음 범인을 부추긴 
    작가가 네번째의 사건이 터지자  오히려 범인을 두둔하는 식
    으로 이번 사건에 이어 다섯  번째 사건도 일어날 거라고 말
    했단다. 어제 이득지가 사건이  안고 있는 정황의 문제와 테
    러의  에스컬레이트  문제에  대해  이야기를  한  걸  가지
    고......"

     "줘 봐요,뭐라고 썼는지."

     "다 볼 것도  없고 여기 이 부분만  읽어봐라. 어제 재룡이 
    말대로 그게 입으로 할 말인지 항문으로 할 말인지......"

     박형우가 윤호녕에게 신문을 넘겼다.

     그리고 그때 자동응답을 걸어놓은 전화기의 벨이 울리며 겁
    에 질린 듯한 이득지의 아내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훈이 아빠,훈이 아빠.  훈이 엄마예요.사무실에 있으면 전
    화 받아봐요."


 소 제 목 : 다시 미스터 T의 전화가 집으로 오고

   이득지는 소파에 앉았다가 얼른 수화기를 들어올렸다.

   "나야, 말해."
   "훈이 아빠....."
   "얘기하라니까."
   "조금 전에 그 사람이 다시 전화를 걸었어요."

   아내의 목소리는 겁에 질려 있었다.

   "그 사람이라니?"
   "미스터 T가......"
   "T가?"
   "예."
   "뭐라고 그래?"
   "이번에도 아무 애기하지 않고 전화를 끊었어요."
   "그럼 그 사람인지 당신이 어떻게 알아?"
   "느낌이 그랬어요.그래서 물어봤어요,내가. 미스터 T가  아니냐고. 
  세번이나요."
   "그랬더니?"
   "무얼 두드리는  건지  溜㎏떪 딱,딱  소리가 났어요. 내가  같이 
  아무 말을  안하면 소리가 안나고 미스터  T냐고 물으면 소리가  나
  고......"
   "무슨 소리였는데?"
   "모르겠어요,그건......"

   그러면서 아내는  그 사람이 지금 당신이  사무실에 나가 있는  걸 
  왜 모르겠느냐,
  그런데도 집으로 전화를  왜 했는지 모르겠다고 말했다. 어떤  메시
  지를 보내기  위한 통화라 하더라도  집보다는 당신 사무실로  해야 
  하는 것 아니겠느냐고.

   "여기 전화는 자동응답으로 묶어놨어."

   "그래도 그렇지요. 불안해요. 지금 들어올   있어요?"

   거듭 아내는 불안하다고 말했다.

   "그때 당신이 전화를 받자마자 경찰서로 나갔잖아요?  경찰서로 나
  간 당신 사진이 그대로 신문에 실리고..... 그래서 그  사람이 우리
  한테 다른 마음을 먹고 그러는 게 아닌가 걱정이 돼서요."

   "아닐 거야.그런 게......."

   "당신은 그 사람을 믿어도 난 믿을 수가 없어요.  시골로 내려가든
  가 어디 아무도  모르는 곳으로 몸을 피하든가 해야지 불안해서  살 
  수가 없어요. 지금 들어와요,당신."

   "훈이는?"
   "있어요, 집에......"
   "처제는?"

   "조금 전  집으로 갔어요. 요즘 내가  아무 것도 못하니까  엄마가 
  밑반찬 가져가라고 해서...... 저녁 때나 올 거예요."
   "알았어."

   그는 전화를 끊었다.  그리고 곰곰히 생각을 했다. 전에는  그러지 
  않더니 그가 왜 나에게 어떤 메시지를 전달하려 하는  것일까. 그리
  고 그 메시지를 내가 있는 사무실로 보내지 않고 집으로  보내고 있
  는 것일까. 혹시 다른  사람이 신문을 보고 그의 흉내를 내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러면서 또 한 편으로는 이런 생각이 들었다.

   네번째 사건에서  그는 자신의 책 말고  또 하나의 메시지를  남겼
  다. 그것은 자신의 범행을 부추기는 건 이득지의 소설이  아니라 자
  신의 범행 의도를  그런 식으로 해석하는 언론에 대한 테러라는  뜻
  이었다. 그런데 이득지  자신은 그런 T가 어떤 메시지를 보내기  위
  해 건 전화를 받고  바로 경찰서로 나갔다. 이 부분에 대해 T가  어
  떤 섭섭함을 느끼고 있는 것은 아닐까.

   아니라고,거듭 아니라고 하면서도 왠지 그 부분이 마음에 걸렸다.

   그는 왜 이 시간  사무실이 아닌 집으로 전화를 걸어 자신의  존재
  를 밝히는 것일까. 동시에 지금 자신이 있는 위치까지  함께 밝히는 
  위험을 무릅쓰고......

 
 소 제 목 : 나는 왜 사건을 저지르고 있는가

   이득지 선생.

   나는 지금 당신이 나 때문에 어떤 곤경에 처해 있는지 안다.

   당신이 그간  H신문을 통하여 나에게 보낸  일곱 번의 편지도 
  어느 한 줄 어느 한자 놓치지 않고 보았다. 두번째의 편지에서
  인가 당신이 신문사로  보낸 원고에서인지,아니면 그것을 편집
  하는  과정에서인지  오자가 두  군데  났던  것도 기억할  만
  큼......

   첫 편지에서 일곱번째의 편지까지,나는 그것으로 당신이 어떤 
  마음으로 그 편지를 썼는지도 알고 있다.

   당신은 말했다. 내가 이걸 미스터 T 당신에 보내는 뜻은  陋
  으로 내가 내 작품에 대하여 어떤 변명을 하자는 것도 아니고,
  그리고 당신의 안녕을 염려해서 하는 편지도 아니며,오직 하나 
  당신이 이미 계획하고 있거나  계획할지 모를 네번째의 사건을 
  막기 위함이라고.

   그러면서도 그 가운데 당신은  편지 행간 행간에서 나는 당신
  이  나에 대해 가지고 있는 어떤 믿음 같은 것을 읽었다.

   내가 네번째의  사건을 저지르지 않을 거라는  믿음이 아니라 
  최소한 내가 경찰이나 언론들이 말하는 것처럼 그런 뜻으로 범
  행을 저지르고 있는 것이 아님을 당신은 말했다.

                                                                                                                                                                                                                                                                                                                                                                                                                                                                                                                              건적
  인 증오와 적개심의 표출이라고 말했다.

   그렇다. 당신이 소설에서 말한  <압구정동>에 대한 나의 증와 
  적개심은 분명 극단적이고 병적임을 알고 있다. 그러나 연이은 
  세번의 극단적인 증오와 적개심으로도  그 의미가 전달되지 않
  는 우리 시대의 <압구정동>은 과연 얼마나 거대한 블랙홀인가.

   그들이 내 테러의 진정한 의미를 몰라서 그렇게 말했을까.

   아니다. 그들은 충분히 그 의미를 알고 있다. 아니,알고 있기
  에 더욱 그렇게 말하고 있지 않은 것인지도 모른다. 그 부분에 
  대해 당신도 당신의 소 낮  이미 말했던 터였다. 그들이 말하
  는 이 사회(그러나 알고 보면  한주먹도 안 되는 그들의 사회)
  가 그것을 알면서도 인정할 수  없는 구조를 가지고 있기 때문
  에.

   어떤 메시지도 그래서 그들에겐 그들 방식대로 해석될 수밖에 
  없다. 그것이 그들 <압구정동>이라는 블랙홀이 가지고 있는 자
  기 생산의  논리이며,자기 보호의 논리며,자기  방어인 동시에 
  방어적 공격 논리이므로.

   그들은 내가 정상적인 교육도 받지 못한 사람처럼 말한다. 그
  래서 당신이 쓴 그 삼류 폭력 범죄 소설을 그대로 수용해 모방
                                                                                                                                                                                                                                                                                                                                                                                                                                                                                                                                그럼 내일 다시 최근의  일들에 대하여 다시 당신에게 말하겠
  다. 내가 당신에게 무슨 말을  하고 싶으며,또 당신에게 왜 전
  화를 걸었던가에 대해......

    
 소 제 목 : 네가 나를 유혹했었다

   세번째 사건 후에도  나는 가끔 당신 사무실 앞으로 나갔다.  나는 
  경찰이 내가  현장에 남기는 메시지가 바로 당신 소설의  어떤 부분
  들을 찢은  것임을 안 다음 나는  당신이 더 이상 사무실로  나오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

   나에게 보내는 편지를 보내리라고는 더더욱 생각하지 않았다.

   당신의 첫 편지가 H신문에 실리던 날 나는 어느 전철  안에서 그것
  을 샀다. 그때 나는 다른 신문을 읽고 있었고,신문  판매원이 <편지
  가 있습니다.이득지가  범인에게 보내는 편지>를 반복하고  다녔다. 
  정말 뜻밖이었다.  사무실을 안 나올  줄 알았던 사람이  나에게(그
  래,당신에겐 범인에게) 공개 편지까지 쓰다니.....

   보던 신문을  시렁에 던져놓고 나는  그 신문을 샀다.어느  신문에 
  실린 것인지 몰라 편지 실린 신문을 달라고......

   그러면서도 큰 기대는 하지 않았다. 당신이 어떤  사람인지를 몰라
  서가 아니라 내가 저지르고 있는 사건이 어떤 것이며,또  공개 편지
  가 갖는 하고 싶은  말,아니 해야 할 말의 한계를 먼저  생각했으므
  로......

   그런데 아니었다.

   그런 경우,우리가 이와 비슷한 일이 경우 텔레비전에서  흔히 보듯 
  피해자의 가족이거나 슬픔에  잠겨 있는 피해자의 가족을  화면으로 
  보여준 다음 아나운서가 범인에게 진심으로  부탁합니다,지금이라도 
  이제까지의 잘못을 조금이라도  반성한다면 그리고 이 방송을  듣고 
  있다면 꼭 자수하여 마음의 죄를 씻길 바랍니다,하는  식이었다. 나
  에게 대해서도 여러 번 그들은 그렇게 말했다.

   당신의 편지가 그런  수준까지는 아니라 하더라도 공개 편지의  한
  계를 넘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이었다.

   당신은 그  편지를 쓰는 것이  나를 위해서 쓰는  편지라거나,마치 
  그래서 쓰는 것인 듯 말하지 않았다. 그러면서 당신은  이땅 대부분
  의 언론들이 내가  메시지로 사용한 당신의 소설을 바탕으로  <가난
  한 자들이 가진  자에 대한 무차별한 증오와 적개심>으로  끌어내린 
  네 테러의 정확한 의미를 말했다.

   사실 나는 그때 네번째의 사건을 준비하지 않고 있었다.

   아니,이 말에 대해  다시 설명을 달아야겠다. 네번째의 사건을  준
  비하지 않고 있었다는  것은 세번째 사건을 실행한 후 구체적인  계
  획을 세우지 않았다는 것이지 네번째 사건 자체를  생각하지 않았다
  는 뜻은 아니다. 

   그런 상태에서 당신의 첫  편지를 읽었을 때 나는 이제 나의  테러
  를 멈추고 싶은 강한 유혹을 느꼈다.

   당신은 나에게 말했다.  세 번의 사건으로도 당신이 왜 그런  끔찍
  한 범행을 벌이고 있는지,거기에 대해 이 땅의 언론들이  어떻게 말
  하더라도 많은 사람들이  그 의미를 충분히 짐작하고 있다고.  당신
  의 압구정동으로 나갔던 애초의 의도가 그런 메시지의  전달을 위한 
  것이라면 이제 더 이상의 범행을 멈추라고. 그것은 다음  번 사건을 
  저지르지 않더라도 충분히 전달된  일이라고.

   그리고 또  당신은 말했다. 그럼에도  당신이 아직 전달하지  못한 
  게 있어 네번째 사건을 꼭 저질러야 하는 것이라면 그  네번째의 범
  행 대상으로 나를 택하라고. 그것보다 더 확실하게 당신의  뜻을 보
  여줄 방법이 어디 있겠는냐고......

   그 부분을 읽을 때,거듭 말하지만 나는 강한 유혹을 느꼈다.

   그리고 당신이 이제  나는 이 편지 말고는 당분간(어쩌면  영원히) 
  글을 쓰지 않겠다고 했던  말도 나에게 그 유혹을 강하게 했다.  당
  신이 나를 유혹한 것이 아니라 당신의 글을 보고 내가  나를 유혹하
  고 있었다.

   당신이 내게 보낸 첫 공개 편지를 읽을 때만 해도 그랬다.

 소 제 목 : 그것이 정말 폭력 범죄소설이었다면

   그러나 이후의  세상 모든  일들은 나를 실망시켰다.  아니,그들이 
  나를 실망시킨 것이 아니라 내가 그들에게 실망했다.

   지금도 내가 이득지  선생,당신에게 가장 미안하고 죄송스럽게  생
  각하는 부분이 그것이다.  당신의 소설을 그대로 모방한 테러를  실
  행함으로써 당신에게 입힌 마음의 부담보다 더 큰  죄송스러움이 나
  에게 있다.

   물론 그것도 내가 당신에게 한,못할 일 중의 하나일  것이다. 어느 
  한 사람이 다른 한 사람에게 이보다 더 큰 충격을 줄 일이  어디 있
  겠는가.

   안다. 그렇지만 내   보다 더 당신에게 못할 일을 저지르고  죄송
  해 하는 것은 그것과 같으면서도 또 다른 분분에 대해서이다.

   나는 당신이 내가  실행하는 테러 이후,정확하게 압구정동에  대한 
  나의 테러가  당신의 소설을 그대로  모방하고 있는 것이라는  것이 
  밝혀진 이후,아니  그보다 더 정확하게는  나의 첫 테러  이후,나는 
  어떤 글도 쓰지 않으며 발표하지 않는다는 소리를 뒤늦게 들었다. 

   그것도 작가인 당신에 대하여 내가 저지른 크나큰 죄일 것이다.

   전에 나는 당신에 관계되는 자료를 뽑으러 다니며 당신이  쓴 책  
  아닌 다른 책에서  작가는 하나의 작은 우주며,또 우주의  관조자란 
  얘기를 들었다. 그것은  그의 문학 세계가 우주처럼 하나의  독립된 
  정신 세계를 갖는다는 말로  나는 해석했다. 그 세계 안에 또  하나
  의 세계 정신이 있으며,또 그 세계를 움직이는 질서가  있다는 말로 
  해석했다.

   그런데 나는 이제 나로  하여 한 작가가 더 이상 글을 쓸 수  없게 
  만들었다. 물론 그  결심은 당신이 내렸다. 당신의 가장 현명한  판
  단으로...... 결과적으로 나는  당신에게 그런 판단을 강요한  셈이
  다. 아니,그것은  ?娥  아니라 일방적인 공격과도 같은  박탈이었
  는지도 모른다.

   글을 쓸  수 없는 작가. 직접적으로  말해 T라는 한  테러리스트에 
  의해 앞으로 글을 쓰고 싶어도 쓸 수 없는 상태로  내몰린 당신에게 
  그 당사자인 내가 무어라고  더 할 말이 있겠는가. 나는 당신이  구
  축할 미래의 세계와 미래의 정신과 미래의 우주를  폭파한 테러리스
  트임에 다름 아니다.

   그러나 그것보다 더  큰 죄를 나는 당신에게 지었다. 이미  당신이 
  이 세상에  내보였던 질서에 대해서마저  나는 파괴와 같은  손상을 
  입힌 것이 . 앞에도  얘기를 했듯 나는 압구정동로 테러를  나서기 
  전 내 나름대로 많은 준비를 했다.

   물론 당신과 당신의 작품에 대해서도 나는 많은  연구를 하고,자료
  를 모았다.그리고 당신의 작품을 나의 직접적  메시지로 선택하기로 
  했다.

   그런데,나의 테러가 당신의 소설을 그대로 옮긴 것이라는  것이 밝
  혀진 후,당신도 상처를 입었지만,당신의 작품은 그보다 더  큰 상처
  를 입었다.아니,내가 당신뿐  아니라 당신의 정신적 자식인  당신의 
  작품에 이루 말할 수 없는 상처를 입힌 것이다. 다른  것은 다 에측
  했어도 그것만은 정말 짐작조차 못한 일이었다.

   나의 테러 이후,정확하게 나의 테러가 무엇에 뿌리를  두고 있으며 
  어떤 의도에서 실행된  것이라는 것이 밝혀진 이후,이 땅의  언론들
  이 공격한 건 범인 내가 아니라 바로 그 소설을 쓴 당신이었다.

   얼굴없는 범인보다는 사건 후 이제 누구라고 이름만 대면  알게 된 
  당신이 보다 큰 표적으로 떠오른 것이다. 더불어 당신의  작품 <<압
  구정동>>과 함께......

   이 사건에 대하여 제일  처음 그들이 취한 행동은 범인인 나를  잡
  는 것이 아니라 그보다 중요하게  營탔 소설을  폭력 소설이라거나 
  범죄 소설로 폄하하고  부정하는 작업이었다. 어쩌면 그 작업은  네
  번째 사건 후 더 집요하게 이루어질지 모른다.

   문학이라는 것이,그래, 이  경우 어떤 소설의 문학적 평가라는  것
  이 어떤 한 사건의  발생을 기점으로 그 전과 그 이후가 이렇게  틀
  릴 수 있다는 것에 대해 나는 놀랐다.

   내가 뽑은 자료로는 당시  당신이 그 소설을 발표했을 때 그  작품
  에 대한  작품평과 해설,기사만도 족히 책  한 권이 될 듯  싶었다. 
  물론 그런 것들이 한 작품에 대한 대한 모든  평가는 아니지만,최소
  한 당시로서 그 작품의 문학성과 사회성에 대한 보편적  검증(이 말
  을 나는  강조하고자 한다.)은  이루어졌다고 나는 생각했다.  정말 
  그것이 폭력  소설이고 범죄 소설이었다면  나는 당신의 그  소설을 
  내 테러의 지침으로 삼지 않았을 것이다. 아니,그러길  내가 거부했
  을 것이다. 

   그런데 나의 테러가,그 테러의 의도가 세상에 밝혀진  이후 가차없
  이 내려진 것은  그런 당신의 소설에 대한 무차별한 폄하와  의미의 
  훼손 내지는 부정이었다.

   나는 그들의 왜 그토록 사건 자체보다는 당 탔 작품에  대해 하이
  에나적 보도 태도를 취하는지 뒤늦게야 알았다.

   당신의 소설 <<압구정동>>의 의미를 폄하하고 부정하는  것이 바로 
  이 사건의 의미와 의도를 부정하는 것이므로. 그것이 바로  내가 실
  행하는 이런 극단  같은 유형의  대사회적 경고까지   <압구정동식>
  이라는 거대한 블랙홀과도 같은 <압구정동> 정신이라는  것을. 나는 
  당신에게 이글을 쓰면서도 그 불랙홀 한가운데 갇혀  끊임없이 흡수
  되어가는 느낌을 받는다.

   아아,그런데 시간이 되었다. 나는 또 나가봐야 할  데가 있다.오래
  도  책상에  앉아 이 기록을 남길  수도 없고 그리고 하루에  많은 
  글을 쓸 수도 없다. 

   이득지 선생,내일 다시 내 생각을 정리하여 말하겠다.

   그럼 내일 다시......

 소 제 목 : 사건으로 세상은 발칵 뒤집혔지만....

   이득지 선생.

   어제 나는 당신 소설에 대한 그들의 하이에나적 보도  태도에 대해 
  이야기했다.그러나 모든 사람이 다 그렇게 생각할까.  아닐 것이다. 
  솔직한 얘기로 그들은  당신의 <<압구정동>>이 제대로 된  소설이든 
  아니든 상관하지 않는다. 

   그것이 일찍이 많은  문학관계자들이 말한 1990년대 우리 삶을  그
  린 사회소설이든 아니면 그들이 이 사건 후 강변하는 대로  폭력 범
  죄소설이든 사람들은 오히려 그것을 상관하지 않는다.  사람들은 그
  가 이득지든 누구든  관계없이 어떤 작가가 그런 소설을  썼고,그리
  고 스스로 T라고  말하는 어떤 테러리스트(아니,범인이다)가 그  소
  설에 나오는 방식대로 압구정동으로 테러를 나갔다는 것에  더 많은 
  관심을 갖는다. 

   우리 사회에  이보다 더 쇼킹한 일이  어디 있겠느냐는 식의  태도
  로. 나도 다니며 들은 이야기가 많다. 더러는 불안해  하고,또 자기
  가 그런  테러의 타깃이 아닌 더  많은 한쪽의 사람들은 오히려  그 
  일을 은밀히 즐기고 있는  것이다. 이 말로 나는 내가 실행하고  있
  는 테러를  변명할 생각은 없다. 내  테러의 목적은 그것이  아니므
  로.....

   거듭 말하지만 내  테러의 목적은 당신이 <<압구정동>>을 쓴  의미 
  그대로이다. 당신은 당신의 소설로,<압구정동>으로 상징되는  이 땅
  의 부패와  타락을 경고했지만  그것으로 대체 무엇이  바뀌었는가? 
  그 경고가 제대로 전달되기나 했던 것인가. 그들은 그런  당신의 소
  설조차 자기들의 방식대로 흡수해 버리지 않았던가.  그래 너희들은 
  떠들어라. 그게 너희들의  몫이니까. 그러면 그럴수록 우리의  명성
  은 더 올라가는 거니까. 네가 그렇게 떠들어봤자 그건  그냥 하나의 
  소설,하나의 책,하나의  이야기 ㉧,그것을 담은 하나의 상품에  지
  나지 않는 거니까......

   그래서 내가 나서기로  했던 것이다. 이제 보다 분명한 뜻을  전달
  하기 위한 직접적 경고가 필요하다는 뜻으로.

   그러나 그들은 나의 테러까지 자기들의 방식대로  흡수해버리려 했
  다. 그 첫 작업이  당신의 소설에 대한 무차별한 폄하와 부정인  것
  이다. 

   내가 저지른 사건의 사건의 쇼킹함이거나 끔찍함  때문이기도 하겠
  지만 사실 그들의  집요한 의도는 그것이 아니다.내가 보기엔  그렇
  다. 그들은 당신의 소설의 의미를 폄하하는 것으로 이  사건을 통해 
  내가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를 희석하고 있는 것이다.

   한 테러리스트,그래,그들의 말대로 범인이라고 표현해도  좋다. 어
  떤 한 범인이 어떤  한 소설을 읽고 그 소설에 담긴 의미를  강하게 
  전달하고자 테러를 나갔다. 그 일련의 연쇄 테러가 바로  이런 목적
  의 메시지와 경고를 담고 있는 것임을 남의 일이 아니라  바로 자신
  의 일로 느낄 수 있도록......

   그래서 일단 세상은 발칵 뒤집혔다. 처음엔 당신의  소설 줄거리가 
  소개되고 그것이 <압구정동>으로 상징되는 이땅  천민자본주의의 부
  패와 타락에 대한 경고라는 이야기도 나왔다. 그러다 이내  보도 태
  도를 바꾸어 당신과 내가 어떤 끈을 가지고 있는  듯,그리고 당신이 
  나를 배후 조종하고 있는 듯 분위기를 이끌며 <이득지  소설 압구정
  동=범죄 폭력 소설> 하는 등식으로 나온 것이다.

   그 이유는 간단하다.

   당신의 소설이,그리고 그  소설의 주제가 부각되면 될수록  그들에
  게 유리할 것이 하나도 없기 때문이다. 그들에게 범인이  따라한 소
  설은 우리시대의 실상을 그린 사회소설이 아니라 범죄  폭력 소설이
  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당  소설이 가지고 있는  메시지를 희
  석시키고 단지 범인이  그 소설을 읽고 같은 방식으로 연쇄  살인을 
  저지르고 있다는 것을 부각해야 하는 것이다. 그래야만 내가  왜 그
  런 무모한 테러를 저지르고 있는가,하는 것이 희석되고 단지  그 무
  모함과 끔찍함만 남게  되는 것이므로. 그것이 바로 그들이  의도하
  는 바인 것이다. 나는 그것을 알고 있다. 그것이 바로  그들이 가지
  고 있는 여론에 관한 압구정동식의 블랙홀이며,그  블랙홀의 흡입력
  이라는 것을.  그들은 그런 의도로 당신  소설을 삼류 작가의  삼류 
  소 낮 흡수해 버린  것이다. 자신들에 대한 비판과 경고의  메시지
  를......    

                        
 소 제 목 : 내가 일찍이 몰랐던 것은 ....

   이득지 선생.

   내가 당신에게 가장  미안하고 죄송스러워하는 것이 바로 그  부분
  이다. 당신의 정신적 자식  하나가 전혀 알지도 못하는 어떤 한  사
  람이 저지른 사회적  범행으로 어느날 갑자기 삼류 작가의 삼류  소
  설로 급락하는 현실 속에서......

   물론 그런다고 당신  작품의 본질이 오염되고 훼손되는 것은  아니
  겠지만 아마  당장은 많은 사람들의  뇌리 속엔 그렇게  남으리라는 
  것이......

   지난 겨울 내가 당신의 소설을 바탕으로,또 당신의  소설을 그대로 
  압구정동의 한 현실로 옮기기 시작했을 때,그것으로  당신을 당혹하
  게 했던 것보다 더 큰 죄스러움을 지금 느끼고 있는 것이다.

   처음 나는 그런  생각을 했다. 그 작품은 실제로 많은  사람들에게 
  읽히고,또 그것의 바른  의미의 전달을 위하여 많은 평자들과  문학
  관계자들이 그 작품에 대해 이야기하고 해설을 썼다.

   지금 당신의 작품 <<압구정동>>을 폄하하고,의미를  축소하기 위해 
  혈안이 된  그 신문들에 실린  단평이거나 기사들의 제목들만  해도 
  그랬다.

   <부패한 사회가  내뿜는 '절망의 악취'가  바로 우리의 내면  속에 
  스며들어 동화된 요소임을 일깨운다는 점에서 그  가치가 돋보인다>
  거나,<압구정동의 타락한  풍경에 대한  가역 반응으로서의  문학>,
  <압구정동의 왜곡된 욕망,부패한 삶에 대한 테러를 통해  다시 한번 
  도덕적 재무장을 촉구하는 계몽주의 소설>,<뒤틀린 삶의  욕망에 따
  른 부패와 타락을  경고해>,<천민 자본주의의 타락상과 왜곡된  성,
  부패환 환부 도려내는 '테러'시도해>,<우리 사회의 타락에  대한 서
  글픈 현실과  그것에 대한 사회과학적 분석>  등이 나의 테러  실행 
  이후,예전 그 작품에 대해 그런 평가들을 내렸던 신문들의  같은 지
  면을 통해  그 의미가 <어느 삼류  작가의 삼류 범죄 폭력  소설>로 
  무차별하게 훼손되고 있는  것이다. 이제 그들은 그렇게 하지  않으
  면 안 되므로.당신의 소설의 진정한 의미를 이제는 이야기할  수 없
  으므로.

   나의 범행 이후,당신의 소설 <<압구정동>의 의미를  제대로 세우게 
  되면 그건 아울러 네 범행의 의미까지 세우게 되는  일이므로. 그리
  고 그것은 그들 스스로 그런 바탕을 만들어온  <압구정동>의 부패와 
  타락을 인정하는 것이므로. 

  그런데,그 기본적 구도를 나는 왜 테러를  ぜ? 전  일찍이 몰랐는
  지 모르겠다. 이미 그들은 그것을 알면서도 인정할 수  없는 단계의 
  부패와 타락의 늪 한가운데 들어와 있음을.

   하여,그들에게 이  사건은 또 다른  그림으로 그려지고 있는  것이
  다. 가진자들에 대한  갖지 못한 자들의 터무니없는 증오와  적개심
  으로......

   사실 이 문제에 대하여 나도 많은 생각을 했었다. 이왕  테러를 실
  행하기로 작정한 것이라면  당신 소설과는 달리 첫 희생자부터  <압
  구정동> 부파와 타락을 이끄는 실세들로 접근을 할까 하는  생각 말
  이다. 그러나 그랬을  때 내가 걱정했던 것이 바로 그것이었다.  두
  번째 사건  이후에도 독백처럼 말했듯  만약 그렇게 한다면  그들은 
  그것은 가진자들에 대한 갖지 못한 자들의 터무니없는  증오와 적개
  심이라는 식으로 단번에  단정지을 거라는 생각...... 그래서  이미 
  알려질 만큼 알려지고,작품의 의미와 울림에 대해서  일차적 검증이 
  끝난 당신의 소설을 내 메시지로 하기로.

   그런데 지금은 내가  오히려 그들의 블랙홀 한가운데 갇힌  느낌마
  저 드는 것이다.그들은 그들 필요에 의한 새로운 올가미를  당신 작
  품에 던지고 그것으로 나의 테러의 의미를 가리고 있는 것이다.

   물론 그것이 네번째  사건을 준비한 직접적 원인의 전부는  아니지
  만,당신 편지를 보고  내가 잠시 나를 유혹했던 생각으로부터  벗어
  나게 해  준 것만은 틀림없는 일이다.  변명이 아니라 사실이  그랬
  다. 이제 내가 이 일을 변명하고 말고 할 것이  어디 있는가.어쨌거
  나 이제까지 내가 저지른 네 번의 살인이 그런 변명으로  죄를 벗거
  나 용서될 일도 아닌 마당에......

   그래서 그 신문을 당신의  소설과 함께 또 다른 나의 메시지로  사
  용한 것이었다.  <부  죄악시하는  풍토부터 고쳐야>하는  C신문의 
  사설을 찢어.....

       
 소 제 목 : 하이텔 여론광장에도 조만간 이 사건이...

 과연 그들은 정말  이번 나의 테러를 그렇게 생각했을까. 아닐  것이
다. 아니,아님을 나는 안다. 그들은 결코 그것을 모르지  않을 사람들
이므로. 아니,알아도 누구보다 먼저 알 사람이므로.

 그 신문을 찢어 내가  처음 쓰고 싶었던 말은 <나를 부추기는 건  바
로 이런 글을  쓰는 놈들이다>가 아니라 <나를 부추기는 건  이득지의 
<<압구정>>이 아니라 바로 이런 글을 쓰는 놈들이다>였다.  그러나 나
는 <이득지의 압구정동>이 아니라>하는 말을 지울 수밖에  없었다. 이
미 지운 말로도 그뜻을 포괄적으로 담고 있지만,만약 그랬을  때 당신
의 작품에 또 어떤 폄하와 훼손이 따를지 모르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나는  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앞으로 당신의 소설에  대한 
의미 낮추기 작업은 집요하게 계속될 것이다.

 거듭 말하지만 지금  상황으로 당신의 소설이 부각되면 될수록  그건 
<압구정동>만이 문제가 아니라 체제 유지에 유리할 것도 없으므로. 

 어쩌면 그들은  당신의 소설에 대한 폄하와  의미의 훼손 뿐  아니라 
그것이 여의치 않으면 당신의 사상에 의문을 던지고  그것을 지상으로 
검증할지도 모른다. 신문의  여론 광장과 일테면 하이텔의 여론  광장 
같은 데에 당신은 올려 세우게 될지도.....

 이미 당신의 작품에 대하여 시작된 저들의 폄하와 의미  훼손은 또다
른 형태의 메카시즘의 시작일지도 모른다.

 나는 그 점이  가장 당신에게 미안하고 죄송스러웠다. 너로 하여  한 
작가의 정신 세계가  저희들의 어떤 목적을 가진 집요한 공격으로  그 
의미가 훼손되고 있다는 것이......

 이제 당신도 다시 읽었겠지만 그 사설의 일부를 옮기면 그렇다.

 <정말 어쩌다 우리 사회에 이런 일까지 벌어지게 되었는가.  대체 이
런 식이라면 누가 열심히 일을 해서 돈  벌려  하겠는가.비록 불우한 
가정에서 태어나 불우하게  성장하였다 하더라도 자기만 열심히  하면 
아직 우리는 잘 살 수 있는 건강한 사회를 유지하고  있다. 그런 우리 
사회에 어쩌다 이런  유형의 범죄까지 나타나게 되었는가. 오늘날  우
리 사회가 이만큼  발전하고,머지않아 선진 대열에 진입하게 된  것도 
저마다 나은  미래를 위해 노력해 왔기  때문이다. 그런 우리  사회에 
언제부턴가 부를 죄악시하는 풍토가 독초처럼 자라고,급기야  부에 대
한 무조건적인  증오와 적개심이 이번 <압구정동  주민 연쇄 살인  사
건>으로 터져  나오고야 만 것이다.  한 사회가 건강하게  유지되자면 
우선 그 사회를 지배하는 정신부터 건강해야 한다. 이번  사건에서 보
듯 마치  시회 구성원간의 반목과  갈등처럼 부를 죄악시하는  풍토가 
낳은 그런 극단적인 범행을  보며 이제 누가 애써 열심히 일을 해  자
신의 나은 미래를  준비하려 하겠는가. 그런 노력 자체가  죄악시되고 
또 언제 어떤 식으로  유사 범죄의 범행 대상이 될지 모를 위험과  두
려움을 감수하겠는가.범인은 압구정동 주민 몇 사람에게  테러를 가한 
것이다. 범인은  바로 우리 미래의 희망에  대하여 테러를 가한  것이
다.>

 그들은 말했다.한 사회가 건강하게 유지되자면 우선 그  사회를 지배
하는 정신부터 건강해야 한다고...... 

 그렇다면 그러게  말하는 것이 그들의  건강인가. 진정 그것이  지금 
내가 실행하고 있는 테러의 가장 깊은 뿌리인가. 나는  그들이 말하는 
대로 <부에 대한  극단적인 증오와 적개심>으로 지금 이 테러를  실행
하고 있는가. 내가 꿈꾸는 사회와 그들이 꿈꾸는 사회는  무엇이 같고 
무엇이 다른가.

 만약 내가 머지  않은 어느 시기에 검거되고,그리고 그들이 지금  내
가 남기고 있는 이 기록을 찾게 된다면 나는 그들이 또 어떤  말을 할
지도 안다. 범인은 가증스럽게도 그런 범행 일지를 쓰며  자신의 범행
을 미화하고 있었다고......또 그런 말로 <가진자들에  대한 극단적인 
증오와 적개심>이  마치 또다른  사회의 정의인  양 은폐하고  있었다
고......

 그날 네번째의 사건 후  당신에게 전화를 걸었던 건 내 범행을  누구
보다 먼저 알려 알 사람이 당신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당신이 그
토록 간절하게 다음번  범행을 만류했음에도 내가 다시  압구정동으로 
나가야 했던 이유를  설명하고 싶었다. 아니,당신이 그렇게  말했음에
도  나는  나가고야 말았습니다,하는  것을  알리고  싶었다.  당신에
게......


 소 제 목 : 내가 당신에게 전화를 한 뜻은

   당신이 받았다. 그 전화.....

   나는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당신은 직감처럼 내게 미스터 T냐고 
  묻고,이어서 다시 미스터 T가 맞느냐고 물었다.

   그렇다고 대답하고 싶었다. 당신이 대답을 유혹하는 것이 아니라 전화
  를 걸 때부터 내가 나를 유혹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러지 않았다. 내가 
  대답하지 않았다는 것을 안 것도 전화를  끊고 나서였다. 그때 나는 이
  미 당신에게 처음 전화를 걸었던 대림역 부근에 와 있었다.

   그리고 그런 생각을 했다.

   내 전화를 받고 이득지 선생,당신은 어떻게  할까. 처음 전화를 걸 때
  엔 그 생각을 하지 못했는데 전화를  끊고 나자 먼저 처음 떠오른 생각
  이 그것이었다. 그  생각과 함께 너무도 당연한  것처럼 이제는 당신이 
  당신 발로 경찰서로 나갈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것은 내가 이제 당신에게 대해서 조금은  알 수 있다는 얘기일 것이
  다. 당신은 나를  다른 사람이 나를 생각하는  것처럼 생각하지는 않지
  만,처음 편지에서 밝혔듯 나보다는  다음번 사건과 희생자가 없어야 한
  다는 생각을 더 하고 있었으므로 당연히 그럴 거라고 생각했다.

   거기에 대해 혹,그리고 지금 당신은 불안해 할지 모른다. 어쩌면 내
  가 그 일로 당신에게 어떤 배신감  같은 것을 느끼지는 않을까,하는 생
  각 같은 것......

   그러나 아니다. 나는 당신이 나의 테러를 동조하지는 않는다 하더라도 
  그 의미가 무엇인지 알고 있는 것만으로도 족하다. 아니,당신은 나에게 
  보내는 편지를 통해서 그 점을 충분히 이야기했다.

   마지막 편지에서 당신은  말했다. 어쩌면 미스터 T  당신은 나의 이런 
  간청에도 불구하고 다시 테러를  계획하고 있을지 모르겠다고. 그 말을 
  하며 당신은 내가  저지른 일련의 사건과 나의 범행  의도가 안고 있는 
  어떤 정황의  문제,테러의 에스컬레이트에 대해  이야기했다. 그러면서 
  꼭 그러한 에스컬레이트가  필요한 것이라면 다시 그  마지막 범행으로 
  당신을 찾아오라고 했다.

   나는 당신이 그 말을 얼마나 비장한 마음으로 했을까를 알고 있다. 내
  게 보내는 그 편지를 읽는 다른 사람들은 그 말을 당신 소설이 현실 속
  의 테러로 나타난 것에 대한 어떤 변명처럼 읽었다 하더라도 나는 그것
  이 아님을 알고 있다.

   언젠가 나는 당신에게 다가갈지  모른다. 그러나 지금은 아니다. 설사 
  언제가 당신에게 다가간다 하더라도 그보다  먼저 다가야 할 몇 표적들
  이 있다. 만약 내가 이번에  당신 말대로 당신을 찾아갔을 경우,그래서 
  그 마지막 희생자가 당신이 되엇을 때 그들은 무어라고 말하겠는가. 당
  신은 그들이 그것을 당신이 내게  쓴 편지의 의미대로 해석해줄 것이라
  고 생각하는가. 절대 그렇지 않을 것이다. 오히려 그들은 한 삼류 작가
  가 고작 그런  소설을 쓰더니 급기야는 스스로 그  소설 속의 희생자가 
  되고 말았다는 식으로 말할 것이다. 그리고 그것으로 그들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제자리로 돌아갈 것이다.

   C신문의 사설도 그래서 일부러  준비한 것이었다. 최소한 나의 테러가 
  그들이 말하는 식으로 가진자에 대한 턱없고 근거없는 증오와 적개심으
  로 그러는 것이 아님을 말하고 싶었다. 

   그러나 그 어떤 뜻으로 저지르는 범행이라 하더라도 이제까지 내가 저
  질러온 사건들은 또 하나의 씻을 수 없는 범죄임을 알고 있다. 아마 당
  신이 망설이지 않고 경찰서로 나간 것도 그런 뜻으로 나는 이해하고 있
  다. 다시 말해 나는 당신이 내 전화를 받고 당신 스스로 경찰서로 나간 
  것에 대해 그것이 많은  宕湧 그렇게 생각하듯 당신과 나를 한 묶음
  으로 묶는 끈을 벗어나기 위한 어떤 자구책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이
  제까지 나는 매번 사건을  저지를 때마다 주의깊게 당신을 관찰했고,또 
  그런 믿음을 당신으로부터 받았다.

   한 시간 후 장소를 이동하여 전화를  건 것도 당신이 나갔는가 나가지 
  않았는가를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나갔다면  그 전화는 당신 아내가 받
  을 것이므로. 당신이 집에 있으면서 그  전화를 당신 아내에게 받게 하
  지 않을 것이므로. 그때 나는  차리리 담담한 심정이었다. 경찰과 언론
  은  뺐 수사에 어떤 혼선을 주기 위해 그랬을 거라고 말하지만 그것은 
  아니다. 최소한 그런 일에까지 당신을 끌어들이고 싶지는 않으므로. 그 
  일이 아니더라도 이미  나는 한 작가인 당신에게 많은  못할 짓을 하고 
  있으므로.

                      
 소 제 목 : 테러는 순교가 아니다, 다만....

   정말 당신하고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아니, 이야기를 하고  싶다. 
  어쩌면 이 기록도 그런 생각으로 쓰는 것인지  모르겠다. 훗날,이것
  이 공개되었을 때 다시 이 땅의 언론들이 그것을 당시  범인은 가증
  스럽게도  이런  범행일지를  남겼다고,정말  가증스럽게  말할지라
  도......

   내 테러의 의도가 아직 세상이 발혀지지 않았을 때만  해도 우리는 
  어떤 식으로도 대화를  나누었다. 당신은 나를 위하여 당신  사무실
  의 유리창에 이런 저런 색깔의 종이를 붙이고 나 역시  당신 우편물
  함에 같은 색깔의 종이를 넣었을 때도 있었을 만큼......

   그러나 이젠 어느  일도 쉽지가 않다. 당신에게 전화를 거는  일도  
  말을 하지 않더라도 나에겐 쉬운 일이 아니다. 그것은  최소한 내가 
  그 전화를  걸 당시 어디 있었는가  하는 것은 분명하게  밝히고(아
  니,밝혀지고) 하는 일이므로.

   내가 당신과 허심탄회하게  이야기를 한다면 가장 하고 싶은  이야
  기는 무엇일까.

   지금 나는  내가 저지른 일련의 사건에  대해 가장 염려하는  것이 
  있다. 훗날(아니,어쩌면 더 빠를지도 모르겠다) 이 기록을  볼 어떤 
  사람도 나의 이런 심정을 이해  못하겠지만 당신이라면 나의  그런 
  말을 이해할 것이다.

   내가 지금  가장 염려하는 것은 내가  지금 저지르고 있는  범행에 
  한 모방 범죄이다. 당신은 내가 그것을 가장 염려한다면  어떻게 생
  각하는가. 나는 앞서  당신이라면 이해를 할 것이라고  말하고,다시 
  어떻게 생각할 것인가를 묻고 있다.

   그것은 당신도 처음부터  나의 그 말을 이해하지 못하리라는  생각
  에서였다. 아니,어쩌면 당신은 처음부터 나의 그 말을  이해할지 모
  르겠다. 경찰도 언론도 그리고 지금 내가 벌이고 있는  테러의 희생
  자가 될지 모를  <압구정동>의 모든 사람들도 정작 내  테러보다 어
  느 순간 불붙기 시작할지 모를 모방 범죄를 더 경계하고  있는 것인
  지 모르겠다. 물론  당신도 그걸 염려하고 있을 것이다. 그렇게  된
  다면 그것은  마치 현대판 계급간의  갈등과도 같은 불특정  다수에 
  대한 불특정 다수의 직접적 공격이 될 테니까.

   그러나 현재 내가 실행하고 있는 테러는 그런 모방  범죄를 부추기
  기 위한 것이 아니다. 자칫 그것이 부추겨졌을 땐  가진자들을 상대
  로 벌이는 어떠한  목적의 범죄들도(그 범죄가 또  摸  압구정동식 
  욕망으로 그것을 통해 일확천금을 확보하려는  식의 것까지도),그리
  고 그런  범죄일수록 마치 자신들의  범행이 어떤 사회적  메시지를 
  가지고 있는 듯 여기고 미화하고 또 강변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것은 현재  내가 저지르고 있는  테러의 진정한 의도와  메시지까지 
  흐리게 하는 일이므로. 
  물론 이득지  선생,당신 눈에도 내  테러가 그렇게 보일지  모른다. 
  나는 지금까지  내가 압구정동을 상대로  실행해온 테러가 그  어떤 
  동기와 명분으로도 용서받지 못할 죄라는 것을 알고 있다.

   당신이 내  전화를 받고 경찰서로 나간  것에 대해 내가  당신에게 
  어떤 배신감을 느끼기보다 그것을 지극히 당연한 일로  여기는 것도 
  같은 맥락에서이다. 지금  내가 저지르고 있는 테러는 어쩌면  우리 
  사회가 정말 마지막까지 갔을 때 나올 유형의 범죄인지도 모른다.

   나는 지금 그런 범죄를 저지르고 있다. 당신은 내게  말했다. 당신 
  책이 아니라 그  어떤 것으로도 <압구정동>으로 상징되는 이 땅  천
  민자본주의의 부패와 타락의
  브레이크는 멈추지 않는다고.

   나는 내가 이 땅에 이제 씻을 수 없는 범죄를  저지르고 있는 범죄
  자이지,순교자가 아님을 알고 있다. 그러나 그 부패와  타락의 멈추
  지 않은 브레이크 앞에 범죄 또한 순교적인 면이 있음을  당신은 아
  는가. 그 멈추지 않은  브레이크 앞에 그 브레이크를 경고할 수  있
  는 마지막 수단이  바로 지금 내가 저지르고 있는 극단적인  방법의 
  테러와 같은 범죄 뿐이라고 느껴질 때,그 범죄를 저지르며  나는 차
  라리 담담해질 때가 있다.

   이득지 선생.

   이 글 역시 나는 그런 심정으로 쓰고 있다. 무엇을  변명하고 더할 
  것도 없는 마음으로.    

   아니, 이해하리라 믿고 이 기록을 남긴다.
    
 

 소 제 목 : 잘 안되는 모양이죠?

   거리에서 문득 남형사는 계절을 느꼈다.

   아제 여름이  가고 있다는 생각,지난  겨울부터 오직 한  사건에만 
  매달려와 두번의 계절이 가고 있는 것이었다.

   그 두 계절이 지나는  동안 남 형사는 왠지 모르게 자신의  직업에 
  깊은 회의를 느끼고  있었다. 그는 지금 이득지의 사무실로  사무실
  로 찾아가고 있는 중이었다.  그가 이득지를 처음 본 건 세번  째의 
  사건이 막 일어나던 지난 오월의 일이었다.

   이태 전 한 소설가가 <압구정동>을 무대로 우리의 있는  현실을 그
  대로 소설로 썼고,그로부터  이태 후 한 독자가 그 소설을  읽고,소
  설에 나오는 내용과 똑 같이 
  압구정동으로 테러를 나간  것이었다. 그가 이득지를 만난 건  바로 
  그런 과정 속에서였다.

   그 관계도 처음엔 철저하게 형사와 그런 소설을 쓴  소설가와의 만
  남이었다. 이득지의 주변을  관찰하며 남형사는 늘 작가와 범인  사
  이의 어딘가 놓여있을지 모를 끈을 찾곤 했다. 범인이  결코 이득지
  의 주변을 벗어나지  못하리란 생각으로 그는 특별한 일이 있을  때
  나 없을 때나 자주 이득지 사무실로 나가곤 했다. 

   그러다 지난 유월,  네번째 사건이 발생한 후 오히려 그는  이득지
  를 이해할 수 입장으로 바뀌어가는 자신을 보게 되었다.

   아니 그건 그 자신의 변화라기보다는 네번째 사건  이후,그 사건에 
  대한 여론의 어떤 흐름을  보고 나서였다. 그는 그 여름 동안  여론
  이라는 것이 한  작가이기 전에 한 사람을 얼마나 철저하게  짓밟을 
  수 있는 것인가를 직접 보고 느꼈다. 그러면서 거기에  아직 범인에 
  대해 어떠한 단서도 못 찾아내고 있는 경찰 또한 그런  자기 책임을 
  변명하듯 심정적으로는 이득지와 범인을 거의 동일 선상에  놓고 수
  사를 진행하고 있었다.

   사무실에 들어섰을 때  이득지는 혼자 막 배달되어온 석간  신문을 
  보고 있었다.

   "뭐 좋은 거 났습니까?"

   "좋은 거요?"

   계절 탓까지 겹쳐 이득지의 얼굴은 처음 보았을 때보다  많이 야윈 
  것 같았다. 그러면서 이득지는 힘없이 빙그레 웃어보였다. 

   "요즘도 원고를 안 쓰시는 모양이죠?"

   "쓸 일도 없고 쓸 것도 없고 하니까...... 무슨 일입니까?"

   "그냥 답답해서 나왔습니다. 이런 저런 얘기나 하려고."

   "잘 안 되는 모양이죠?"

   "그런 모양입니다. 수사야 신문들이 다 했으니까......  요즘 심정
  은 그렇습니다. 직업이 형산데도 제 마음은 T가 다시 안  나서나 기
  다려지는 것  같기도 하고,차라리  그래서 어떤 결정적인  단서라도 
  나왔으면 싶기도 하고요."

   "뭘 물어보고 싶어서 그러는데요?"

   "요즘도 T한테서 어떤 사인 같은 게 옵니까?"

   "잘 모르겠습니다. 저쪽에선  송신을 하는데 제가 수신을 잘  못해
  서 그런지 그런 것도 없는 것 같고......"

   "이걸로 끝날까요?"

   "경찰은 어떻게 보는데요?"

   "우리도  이  선생님이 말한  테러의  어떤  속성을  믿는  쪽이니
  까......에스컬레이트 말입니다. 아닌가요?"

   "모르죠. 저야....... 이미 받을 상처 받은 몸이니까."

   "요즘 그 쪽 난리던데......"

   "그쪽이라니요?"

   "압구정동 말입니다. 언제 그 동네에 그런 일이 있었느냐  싶을 정
  도로......"

   "그게 생업이니까....."

   그러면서 이득지는 다시 쓸쓸하게 웃었다.



 소 제 목 : 비압구정동 사람들에게 범인은...

   "사무실은 언제까지 운영할 생각입니까?"

   조금은 조심스러운 얼굴로 남 형사가 물었다. 그것은  이제 자기가 
  보기에도 당분간,아니 어쩌면 더 긴 시간 동안 이득지가  글을 쓰지 
  않을 거라는 생각에서였다.  또 이득지 스스로도 여러번 그렇게  말
  했었다. 이득지는  당분간이라고 말했지만  그 당분간이 한  작가의 
  평생이 될 수 있다는 걸 그는 알고 있었다.

   "모르겠습니다. 제  생각보다는 남  형사님 손에  달린 문제  같아
  서......"

   "무슨 말씀인지......"

   "경찰이 T를 검거할 때까지는 가지고 있을 생각입니다.  왠지 그래
  야 할 것 같다는 생각도 들고......"

   "그때,댁으로 전화가 온  이후로는 다시 연락이 없었습니까?  범인
  이......"

   "없었습니다."

   "그때 범인이 왜 전화를 했을까요?"

   "모르죠,그거야 제가."

   "전화를 건 시간의 자기 위치가 알려지는 것까지  감수하면서 전화
  를 걸 땐 어떤  이유가 있을 것 같은데 말이죠. 나중에 건 건  혹시 
  이득지 선생을 협박하기 위해서 그랬던 게 아닐까요? 왠지  동지 같
  은 마음을 가지고  있었는데 이득지 선생이 그걸 신고하자 어떤  배
  신감 같은 것을 느꼈거나......"

   "경찰은 수사의 혼선을 위해서라면서요?"

   "그건 그냥 발표하는 얘긴 거구요."

   "사건 이후의  어떤 일련의 과정을  보면서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
  다. 보통의 사건 경우는 사건 보도 자체만으로도 그런  사건을 저지
  른 범인이 얼마나 포악하거나 비정한가 하는 것이  들어나는데도 이 
  사건은 그렇지가 않다는 거죠. 서로 자기가 있는 위치에  따라 다른 
  해석들을 하니까. 그  해석이 옳다,그르다가 아니라 나중엔  언론이 
  사건 보도나 수사 진행 상황에 대한 보도보다 이제 더  흠집낼 것도 
  없는 범인에 대한  흠집내기에 열중하고 있는 게 아닌가 하고  말입
  니다."

   "어떤 식으로 말입니까?"

   "끔찍하다,비정하다,하는 식으로는 오히려  그가 제 소설 속의  테
  러리스트와 동일시되어 그가  끔찍한 범죄를 저지르고 있는  범법자
  임에도 어떤 도덕적인 헤게모니를 그가 쥐고 있는  것처럼 비압구정
  동 사람들에게 비친다는  거죠. 또 실제 그가 살인을  저지르면서도 
  보여주는 프로다운 면모도  있고 하니까.실제 사건 현장을 봐도  잔
  혹하게 다가오지는 않는다 이거죠. 흉기를  사용하지도 않고,사체를 
  훼손하지도 않고 금품에 손을 대지도 않고......"

   "그래서요?"

   "그러니까 언론이 앞장서서  당신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그게  아니
  라는 걸 애기해야 되는데 그러자니 교활한  성격 같다,정신분열증이 
  있는 것 같다,소설과  현실을 구분조차 못하는 수준이다,하는  식으
  로 나온다는 거죠. 제 눈엔 네번째 사건 후 이  사건을 보도하는 언
  론의 태도는 그런 것 같습니다. 제 소설 속에서와  마찬가지로 아직 
  범인이 누군지 얼굴조차 알려지지 않았으니까......"

   "그런 게 선생님 눈에 보인단 말이죠?"

   "그렇습니다. 그게 이 사건의 사회적 파장을 줄이기 위한  그들 나
  름대로의 방법이며 노력인지 모르지만......"

   "저도 경찰이지만,사실 경찰도  거기에 일조하고 있는 거죠.  대외
  적으로 발표하는 수사 상황과 범인에 대한  분석이 다르고,내부적으
  로 내리는 수사 지침이 다른 식으로......"


 소 제 목 : 당신은 나를 이해하기 바란다...

   사실 경찰로서 그런 이야기까지 하면 안 되었다.  알면서도 남형사는 했
  다. 언제부턴가 이득지의  사무실로 나오며 그가 느낀 정직한  감정은 그
  랬다.

   처음 그 사건이  발생했을 때,이득지는 곧 범인을 자기 손으로  잡을 것
  처럼 생각을 했다.  두번째 사건 때에도 그랬다. 그러다 이건  보통 수준
  이 아니구나,하는 것을 느꼈고,세번째 사건이 터지기  직전 T의 메시지를 
  읽어내고 그는 잠시 충격을 받았다.

   그때만 해도 남 형사도 이득지와 T를 한 끈으로  생각했다. T가 일찍 신
  고만 했더라면 이 사건은 쉽게 해결될 일로  생각했다. 아니,처음 이득지
  를 보았을 때  남 형사는 이득지가 범인을 비호하고 있다는  인상을 받았
  다.

   그래서 그를 의심했다.  이 사건 뒤엔 이득지와 범인 사이에  어떤 끈이 
  있을 거라고. 그는  그 끈을 찾아 그의 사무실로 나와  그를 관찰하고,그
  의 친구들을 관찰하고, 사무실을 찾아오는  기자들을 관찰하고,그리고 들
  어가서는 이 사건 수사의 한가운데 있는 자신과  동료들을 보고,또 이 사
  건을 보도하는 언론들의 태도를 보았다.

   "아까 직접적인 대답은  피하셨는데 선생님은 범인이 왜  선생님께 전화
  를 한다고 생각하십니까?"

   "그것도 수사에 들어가는 거지요."

   "경우에 따라서는요?"

   "제 생각은 그렇습니다.  신문들도 그것을 제가 경찰로 나가  신고한 것
  에 대해 그가 어떤 배신감 같은 걸 작가에게  느끼고 있는 것인지도 모르
  겠다고 했습니다만 아까도 얘기했다시피 제 생각은 다릅니다."

   "정말 그런 걸 느끼지 않을까요?"

   "아주 없지야  않겠죠. 그렇지만 다른 뜻이  더 많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요. 이제까지  하지 않던  전화를 배신감이 들어  한다는 것도  그렇
  고...... 전화를 한다는  건 무언가 할 이야기가 있다는  건데,물론 배신
  감이 들었을 때도  전화를 할 수 있겠죠.  어떤 협박을 할 수도 있는  거
  고...... 그런데 이상하게  저는 그게 그가 내게 어떤 이해를  구하기 위
  해 전화를 했던 게 아닌가 싶습니다."

   "무슨 말씀인지....."

   "일테면,차라리 누구한테 고백하고 싶은 마음 같은 것  말입니다. 이 세
  상 사람들은 다 아니어도 당신은 저를 이해해 주십시오,라든가......"

   "그렇지만 보통 사람들이야 그렇게 생각하지 않죠."

   "그렇습니다. 제 아내도 그런 보통 사람들 가운데  하나고요. 그런데 경
  찰도 그렇고 신문들도 그렇고 발표하는 걸 보면  그런 생각이 들어요. 그
  가 저한테  전화를 한 걸  필요 이상으로  강조하고 있다는 생각  말입니
  다."

   "필요 이상이라면......"

   "정말 그런 의도로 그런 것인지 아닌지는 몰라도  처음부터 지금까지 줄
  기차게 우리가  한끈으로 묶여  있는 사이인 것처럼,아뇨,그런  뉘앙스로 
  기사를 쓰거나 중간 수사를 발표하면서도 또 정작  저와 T사이에 그런 끈
  이 있는 거라면 그걸 갈라놓지 못해 애쓰고  있다는 생각 말입니다. 저한
  테 T의 전화를  어떻게 생각하냐고 물으면 늘 같은  대답이니까,아니, 같
  은 대답이라기보다 그쪽에서  원하는 대답이 아니니까 어제는  떼로 몰려 
  우리집을 찾아와 물은 모양입니다."

   "집에요?"

   "예. 제  아내한테..... 그런 전화를  받고 불안하지 않았느냐,그가  왜 
  전화를 했다고 생각하느냐......"

   "그래서 뭐라고 하셨답니까?"

   소파에 앉은 채 이득지 쪽으로 몸을 숙이며 남 형사가 물었다.  
   

 소 제 목 : 범인은 범인대로, 언론은 언론대로...


 "혹시 그러지  않을까 싶어 제가  아내에게 미리 이야기를  했습니다.만약 
누가 와서  그런 걸 물으면 불안하더라도  그렇게 대답하지 말라고  말입니
다. 당신이 불안하다,그가 우리를 어떻게 할까  두렵다,하는 식으로 말하면 
그때는  정말 T가  당신 말에  그런 걸  느껴 우리를  어떻게 할지  모른다
고..... 그래서 아내도 기자들한테 제가 시킨대로 말을 했는가 봐요."

 "그러니까요?"

 "여러번 같은 말을  물으면서 그 대답을 요구하더라는 거죠.  끝까지 그런 
게 아니라니까 이번엔  그럼 그 얘기는 그가 압구정동으로 테러를  나간 걸 
심정적으로 이해한다는 얘기냐,하는 식으로 묻고.....  그것도 아니라니까,
그럼 앞 뒤 말이 맞지 않는 것 아니냐는  식으로 나오고...... 제가 언론의 
생리상 그럴 수도 있는 일을 너무 깊이 생각하는  건지 아니면 정말 그들이 
어떤 의도를 가지고 와서 그러는 건지 알 수는 없지만......"

 "오늘 신문에 그런 말 없는 것 같은데......"

 "자기들에게 필요한 말이  아니니까,또다른 형태로 필요한 부분을  만들어
내는 거죠. 그런 끔찍한  사건 이후에도 아이가 학교를 나가지 않는  것 말
고는 이득지와 그 가족은 이상하리만큼 그 일을 별로  불안해 하는 것 같지 
않다는 식으로. 그러니까  그와 그 가족은 심정적으로 범인을  두둔하는 것 
같다는 얘기를 돌려쓰는  거죠. 그것 자체가 또 하나의 흠집이니까.  한 시
간 이상을 했다는  일문 일답은 신문도 그렇고 방송도 그렇고  우리가 언제 
그런 걸  물었느냐는 식으로 흔적도 없이  빼고...... 정말 내가  과민하게 
생각하는  건지,아니면 그들이  그러는 뒤집어보지  않으니  알 수는  없지
만...... 거기에 비하다면  정작 피살자 주변의 얘기는 거의 하지  않는 것 
같고......"

 "느끼십니까?"

 "예. 솔직한 얘기로 판매  부수가 제일 적은 H 신문 말고는.  전에 세번째 
사건  때만  해도 이게  신문인지  옐로  페이펀지 구분이  안  갈  정도더
니......"

 "그래서 소문으로만 얘기가 돌고 있는 것 아닙니까?  어느 집안 누구 며느
리라더라,그 집안이 어떻게  돈을 벌었다더라,몸에 지니고 있는  패물이 얼
마라더라,그런데도 안 건들었다라,하는 식으로......"

 "신문은 또 부분에  대해 그게 범인이 보여주고자 하는 어떤  의도적 절제
라기보다는 그런  패물과 보석은 가져가 봐야  오히려 증거만 될  뿐이라는 
식으로 말하고. 따로 노는 거죠. 범인의 의도와 언론의 의도가....."

 "그런데 요즘도 선생님은 그와 어떤 대화를 시도합니까?"

 "아뇨. 생각은 그러고 싶지만, 이미 그럴 때가 아니라는 걸 아니까....."

 "안다는 건......"

 "말하기가 곤란하군요.거기에 대해선......"

 "알겠습니다. 무슨 말씀인지.  저도 같은 생각이니까. 어쩌면 지금  이 순
간에도 범인은 다음 번 사건을 계획하고 있을지 모르니까......"

 남 형사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가 강남 경찰서로  돌아왔을 때,서엔 석 경감 혼자 책상을  지키고 앉아 
있었다.

 "어때?"

 "뭐가 말입니까?"

 "이득지 사무실 갔다온다고 나가지 않았어?"

 "예. 거기서 오는 길입니다."

 "그러니까 어떻더냐고? 이득지 주변 말이야."

 석 경감도 이제 어느 정도 이 사건에 지친 얼굴이었다.

 "늘 그렇죠. 그 사람이야. 안 됐다는 생각도 들고......"

 안 됐다? 안  된 건 그 사람이  아니라 우리야,하는 눈으로 석 경감이  남 
형사를 쳐다보았다.

      
 소 제 목 : 압구정동의 생각이야 다르겠지만....

   "이리 와봐."

   다시 석 경감이 남 형사를 불렀다.

   "사건은 벌써 네 개가 터지고 언제 다섯번째 사건이  터질지 몰라. 
  그런데도  우리는  거기에  대해 무얼  하나  붙잡고  있는  게  없
  고......"

   "그러니까 언론이고 경찰이고 이득지 씨만 붙들고 있는  것 아니겠
  습니까? 그에
  게 더 나올  것도 없는데 말이죠...... 다른 분들은 어디로들  나갔
  습니까?"

   "김 형사와 남  형사는 대림역쪽으로 잠복을 나가고,최 형사는  전
  화국으로 나갔어. 그놈이  언제 또 이득지에게 전화를 걸지  모르는 
  일이니까....."

   "이젠 쉽게 그러기야 하겠습니까? 사실 지금까지 했던 걸  보면 늘 
  우리 머리 위
  에서 놀고 있는데......"

   "차라리 머리 위에서 놀면 손이나 올려 잡을 수나 있지......"

   "반장님도 다음 번 사건이 터진다고 보십니까?"

   남 형사가 책상을 짚고 물었다.

   "그럼 자네는 아니라고 생각해?"

   "아뇨. 같은 생각이니까  문젠 거죠...... 요즘 심정은 다섯  번째 
  사건을 막는 것이  아니라 솔직한 얘기로 하루라도 빨리 터져  전에 
  없던 단서라도 나왔으면 하는 심정이니까......"

   "이 사람..... 행여  기자들 듣는 데서 그런 소리하지 말어.  그런 
  심정이더라도 경찰로서 해야 할 말이 있고 해선 안 될  말이라는 게 
  있는 거야."

   "알죠,아니까 반장님께만 하는 얘기고......"

   "만약 그  소리 기자들이 들었다고  해봐, 뭐라고 써댈지.  범인을 
  검거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경찰이 네번째 사건이 터졌는데도  범인
  의 행방은  커녕 다시 다섯 번째  사건이 터져 어떤 단서라도  찾을 
  수 있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고.....  그렇게 되면 자네만  다치는 
  게 아니야. 나도  다치고 위로 올라가며 줄줄이 다쳐......  그러잖
  아 요즘  기자들도 무슨 얘기거리가  없는가 눈이 뻘개  기웃거리는
  데......"

   "안다니까요."

   "아는 사람이 그런 말을 해?"

   "그럼 반장님은 전혀 그런 생각을 안 하시는 모양이죠?"

   그러자 석 경감은 다시 만류하듯 손을 들어보였다.

   "가슴에 있는 말고 입  밖으로 나온 말이 달라. 가슴에 있는  말은 
  누구나 같은 거고. 이득지는 뭐래?"

   "뭐라긴요. 그 사람이야말로 가슴에 든 말을 입밖으로 안  뱉고 있
  는 거죠."

   "소설가들은 그 만큼 영악하다니까. 말의 어려움도 알고......"

   "아뇨,그렇게 안 보이던데요. 오히려 영악한 건 그  사람이 아니라 
  세상이 아닌가  싶을 만큼요.  특히 언론들하고  우리 경찰이  말이
  죠."   

   "우리가?"

   석 경감 이마의 눈썹이 꿈틀 거렸다. 남 형사는 그게  강한 부정을 
  나타내는 표정임을 알고 알고 있었다.

   "반장님은 아니시라고 그러겠지만......"

   "우리는 수사를 하고 있는 거야. 그걸 제대로 못해서  이러고 있는 
  거고."

   "바깥에 나가면  전혀 얘기가  다릅니다.신문과 경찰 발표가  암만 
  그렇게 나와도 사람들이  생각하는 건 전혀 달라요. 언론은  범인을 
  미치광이 수준으로까지  몰 생각이지만  사람들은 범인이  미치광이
  냐,아니냐 하는 걸 중요하게 여기지 않는다는 겁니다.  나가서 들어
  보십시오. 사람들이  뭐라고 말하는지...... 잡히지 않아야  한답니
  다. 무조건 잡히지  않아야...... 그리고 이따끔 그렇게 발생할  게 
  아니라 하루에 열두  번씩 발생해도 부족할 거라고 말하고  말이죠. 
  신문이나 방송에서 말하는 것 따로 사람들 느끼는 것  따로인 거죠. 
  비압구정동 표정은  그렇습니다. 압구정동이야 또 다른  생각이겠지
  만......"


 소 제 목 : T가 금품에 손대지 않은 것도 왜곡되면...

   "이봐,남 형사."

   남 형사의 말이 길어지자 석 경감이 정색을 하고 그를 불렀다.

   "예. 반장님."

   "우리는 그런 여론을 조사하러 다니는 사람들이  아니라 경찰이야. 
  자네하고 나하고는  그런 경찰 중에서도  그 범인을 잡아내야  하는 
  강력계 형사들이고. 여론  같은 건 우리하고 상관이 없어. 설사  그 
  놈이 홍길동 같은 의적이거나 서울 보통 사람들한테  독립군처럼 보
  인다 해도 우리는 그 놈을 잡아내야 하는 경찰이라구."

   "누가 안 잡겠답니까?"

   "잡겠다는 사람이 그런 말을 해? 자네 말이지.지금에야  내가 하는 
  말이지만,자네 이 사건이 처음 터졌을 때만 해도 누구보다  이 사건
  에 의욕적이었어.그런데 세번째  사건 나고 나서부터 왠지  자네,이 
  사건에 흥미를 잃고 있는 것 같애. 아니,흥미를 잃은  건 아니지.범
  인을 검거하기  위한 수사가 아니라 이  사건의 다른 부분에 더  큰 
  흥미를 느끼고 있는 것  같다는 얘기야. 쓸데 없는 사건 주변  얘기
  에 말이지."

   "그거야 진이 빠지니  그러죠. 무엇 하나 단서라도 있어야  범인을 
  검거하든 말든 할 것 아닙니까?"

   "그럼 그  단서를 누가 찾나? 다른  사람이 찾아 경찰에  갖다주는 
  거야? 아니잖아.우리가 찾아야지."

   "저도 그러자고  다니는 것  아닙니까? 여기저기.....  그러다보니 
  듣게 되는 얘기도 있는 거고. 그런데 말이죠. 오늘 이득지  씨 사무
  실에 나갔다가 그런 느낌을 받았습니다."

   "느낌이라니? 어떤?"

   이야기가 그런  부분에 이르면 석  경감은 특유의 표정을  지었다. 
  넓은 이마와  그 위에 두 마리  누에처럼 누워 있는 눈썹이  지어내
  는.

   "조만간 범인이 이득지  씨에게 어떤 직접적인 연락을 해 올  거라
  는 생각 말입니다."

   "무슨 얘긴지 자세히  해봐. 그럼 지난번 전화를 걸었던  것말고도 
  그런 일이 있었다는 건지 없었다는 건지......"

   "아뇨. 어떤 근거를  가지고 얘기를 하는 건 아닙니다. 근거가  된
  다면 전에 범인이  그렇게 전화를 걸었다는 것과 지금도 이득지  씨
  가 범인이 자기에게  어떤 연락이든 연락을 해 올 걸  기다리는다는 
  거죠. 그건 그냥  기다릴 수도 있는 거지만  다시 연락을 해 올  걸 
  알고 기다릴 수도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어떤 이유로든  이번 사건 
  때문에 파살자들 말고는  가장 큰 피해를 보는 사람이 이득지  씨니
  까."

   "자기가 그런 소설을 쓴  거니까 피해랄 것도 없는 거지. 요즘  보
  니까 정부에서도 그런  걸 강화하는 모양이던데. 영화도 그렇고  비
  디오도 그렇고 도서잡지에  대해서도 폭력 심의를 강화하는  모양이
  야."

   "문제는 늘 그런  것 아니겠습니까? 자기들은 깨끗한데 그런  것들
  이 깨끗하지 못해  이런 사건이 터진다는 식으로......어떻게  보면 
  사회를 바로잡자는  의도가 아니라 왜  그런 사건이 터지는가  하는 
  원인을 다른  데로 돌려 스스로의  잘못들을 은폐하자는 것  아니냐 
  이겁니다. 늘 하는 얘기지만...... 마치 이 사건도 이득지  씨가 그
  런 소설만 안 썼으면 터지지 않을 사건이 터졌다는  식으로 말이죠. 
  그런다고,이득지 씨가 그런 소설을 안 썼다고 이번 사건이  안 터질 
  사건이었습니까?"

   "안 터질 수도 있는  거지. 그럼 어떻게 그 사건이 소설을  그대로 
  따갈 수 있는 거야? 사건에 직접 가담하지만 않았다  뿐이지 이득지
  도 사실 따지고 보면 범인과 공범인 거나 마찬가지야.직접  손을 안 
  됐으니 교사범이랄 수도 있는 거고. 단지 그 소설을 쓸  때 그런 의
  도를 가지고 썼던 게 아니라는 차이뿐이지. 그렇지만 그건  또 누가 
  알아? 그런 생각으로 썼는지 다른 생각으로 썼는지.  신문들도 그러
  잖아. 이득지도 사실  실정법이 어떻게 할 수 없어 그런  거지,사건 
  자체로 놓고 본다면 피살자의 신분이라든가 범인의 범행  수법 등으
  로 볼 때 이 사건의 가장 큰 책임을 져야 할 사람이라고."

   "그렇죠. 그건  득지  씨 스스로도 자기가 쓴 소설에 대하여  도의
  적 책임을 느끼고  있는 거니까. 그렇지만 범인이 피살자의  몸에서 
  어떠한 금품도  걷어내지 않는 것까지  범행 수법이 같다는  식으로 
  말하면 안 된다는 거죠. 그 문제 하나를 놓고 본다면  그건 그가 자
  신의 범행 의도를 확실하게 하기 위해 금품에 손을 대지  않은 것이
  지 손을 대지 않은 것까지 그 범행의 어떤 수법인  것은 아니니까."  
       

        
 소 제 목 : 모방범죄가 잘생하지 않는건....

    "어쨌거나 프로야. 무얼  보더라도. 경찰 생활 20년 동안에  만난 
  최고의 프로라는 생각이  들어. 현장에 나가보면 살인 사건에서  피
  살자의 그 정도로 사체가 깨끗하게 있었던 적도 없었고,또  여러 차
  례 같은 살인을 저지르면서도 어디 하나 물증을 남긴 게  없이 말이
  지. 어떤 곳은 충분히 목격자가 있을 만한 대로변인데도  목격자 하
  나 없이 그렇게 사람을 살해할 수 있다는 건....."

   "한 손으로는 목을  조르고 다른 한 손으로 반항하는 피살자의  두 
  손을 막았다는 얘긴데 그러자면 어느 정도의 완력이어야 할까요?"

   "보통 사람들로선 생각할  수도 없는 완력이어야겠지. 두 손이  아
  니라 옴몸으로 말 그대로 필사의 저항을 했을 테니까.  그러니까 피
  살자의 손톱에 남은 이물질이라는 게 고작 범인이  중무장하듯 입은 
  가죽점버라든가 그냥 옷의 실 보푸라기만 나오는  거고..... 뒤에서 
  느닷없이 목이 졸리니까  신체 균형을 잡을 수 없는 상태에서  반항
  하자면......"

   "범인이 이득지 씨에게 사건 전에 먼저 전화를 걸었다는 걸  안 다
  음부터 우리는 단독범으로만  생각해왔는데 어쩌면 범죄 조직  단체
  와 같이 몇 명의 공범이 있는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어요. 전화
  는 T라고 한 그 놈이 전담해서 걸을 수도 있는 거구."

   "단독범이든 공동범이든 증거가 없으니까 그러는 거지.  그러니 그
  게 단독범 소행인지  공동범들의 소행인지도 알 수  없고......시민 
  제보도 그래. 전혀  안 들어오는 것도 아니잖아. 그런데 수사에  결
  정적으로 도움을 못  주니까 문젠 거고. 언론은 심심하면  이득지를 
  두들겼다,경찰을 두들겼다  하는데 이게 두들기기만 한다고  해결될 
  일도 아닌데 말이지.  수사를 원점에서부터 다시 철저하게 해야  한
  다는데 지금으로선 어느  게 원점인지도 모를 상황이잖아. 사건  별
  로 따지면 지난  겨울 노파 살해 사건이겠지만 그 사건이라고  증거
  가 있어야 원점으로 가든  말든 하지. 그리고 그런 말로 언론은  자
  기 책임 다 벗어버리는 거고."

   "그래도 여러번 사건이 터졌는데도 모방 범죄가 일어나지  않는 걸 
  보면 또 이상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보통 어떤 사건이  터지면 비슷
  한 사건이 같이 터지는 게 범죄 사회학인데......"

   "자넨 그걸 어떻게 생각하는데?"

   "반장님 말씀대로 워낙 수법이 프로라서 그런 게  아닌지 모르겠습
  니다. 차마 따라할 엄두를 내지 못한달까, 뭐  그런 거요......그리
  고 모방 범죄가  발생한다는 범죄 수법의 모방뿐 범죄 대상이나  범
  죄 의도까지도 모방한다는  얘기인데,또 한 가지 이유라면 아직  범
  인이 잡히지 않고  있으니까 지켜보기만 한다는 뜻일 수도 있는  거
  고 말입니다. 제 생각은 모방 범죄가 발생한다면 오히려  범인이 잡
  힌 후가 되지 않을까 싶은데요. 정말 그런 사건이  발생한다면 말입
  니다. "

   "모르지. 우리로선 아직까지  그런 모방 범죄가 일어나지 않고  있
  다는 것만으로도 다행이니까."

   강력계 사무실에서 두 사람이 그런 이야기를 나누고 있을  때 밖에 
  나갔던 김 형사와 박 형사가 안으로 들어왔다.

   "뭐 좀 있어?"

   "모르겠습니다. 있는  건지 없는  건지도...... 일단 시경  팀하고 
  잠복 교대를 하고 들어왔으니까."

   "다들 회의실로 모여봐."

   무슨 생각인지  골똘히 하다 석  경감이 먼저 자리에서  일어섰다. 
  형사들이 뒤를 따랐다.

   "앉아. 편하게."

   그리고 석 경감은 형사들을 둘러보았다.

   "다들 이렇게 한번 생각해봐."

   남 형사는 석 경감의 얼굴이 다시 전에 없이 빛난다고 생각했다.

                          
 소 제 목 : 고정관념을 버리고 수사를 하라

   "이번 사건 말이야.  아까 신문을 보다가 이런 생각을 했거든.  신
  문은 경찰이 아직  범인에 대해 어떤 단서조차 못찾는 것  같다면서 
  수사를 원점에서부터  다시 시작해야 한다고 하는데,자네들  생각엔 
  이 수사의  원점이 어디라고  생각는가 말이야?  최 형사부터  말해
  봐."

   "그거야 첫 사건부터가  아니겠습니까? 지난 겨울 노파 살인  사건 
  말입니다."

   "박 형사는?"

   "저도 그런데요. 원점부터  다시 시작한다면 그 사건부터 정밀  분
  석을 해야 한다는 애기겠죠.  그때 처음엔 뭐가 잡힐 것 같지  않았
  습니까? 목격자는 아니지만 신고자가 있었고,범죄  추정 시간까지도 
  10분 간격으로 나오고...... 그러다 현장에 범인이 남긴  증거가 없
  자 아무 것도 아닌 식으로 되었지만....."

   "김 형사,자네는."

   "저도 같은 생각입니다.  더 거슬러 올라간다면 범인이 처음  이득
  지한테 전화를 할 때부터인데 그건 사건 준비 단계인 거구......"

   "남 형사는  자네들 들어오기  전에 얘기를 했으니까  나두고..... 
  문득 들었던 건데 내  생각은 그래. 나도 처음엔 자네들과 똑  같이 
  생각했어.그리고 지금까지  우리가 수사를 해온 것도  원점에서부터 
  출발했던 거고. 우리가 어떤  사건을 수사할 때 어느 정도 그  수사
  를 진행하다가 다시 원점에서 출발한다는 건 처음부터  다시 하자는 
  것이 아니라 다른  각도에서 수사를 하자는 얘기야. 지금까지  우리
  가 이 사건을 원점에서 다시 출발했던 것도  여러 차례고......그래
  서 범인이 대림역  일대거나 구로공단 역 부근에 사는 놈이  아닐까 
  하고 여러 차례 이런저런 조건으로 좁혀도 보고 또 지금도  잠복 근
  무를 하고 있는 거고. 담배들 피워. 자네들도."

   석 경감이 주머니에서  담배갑을 꺼내자 다른 형사들도 저마다  주
  머니에서 담배를 꺼내 물었다.

   "그런데 그 놈이  거기서 전화를 걸었다는 것말고는 아무 것도  좁
  혀진 게 없어. 또  이제와 원점에서 수사를 한다고 해서 전에  찾지 
  못한 증거를 현장에서 찾을 수 있는 것도  아니고......그런데 우리
  가 한 번 이렇게 생각을 해보자구. 이렇게 말이지."

   "어떻게 말입니까?"

   최 형사가 물었다.  

   "어떤 사건에도 증거가 나오지 않았다면 그건 어느  사건이나 원점
  이 될 수 있다는 얘기가 아니냐는 거지. 만약 지금까지  네 번의 사
  건 가운데 어느 한 사건에서 증거를 찾는다면 그 사건의  증거가 수
  사의 원점이 되는  거고..... 그래서 얘긴데,우리는 지금까지  그놈
  이 이득지에게 전화를  걸었던 장소와 또 노파의 벌집이 그  부근이
  라는 거,또 두번째 피살자 김현희가 전에  구로공단의 여공이었다는 
  점만 가지고  범인이 그 부근에  있는 놈이라고 단정지어  생각했던 
  게 아닌가 하고 말이야. 전에 네번째 사건 나고 나서  남 형사도 한 
  번 그런 말을 한 적이 있는데,그놈의 거처가 그쪽이  아니라 이쪽일 
  수도 있다는 거지.  만약 우리가 이번 사건을 말이지. 네번째  서건
  에서부터 거꾸로 추적해 들어간다면 말이지."

   "그럴 수도 있겠는데요.  어느 지역에서 계획된 연쇄 살인을  저지
  른다면 우선 그 지역의 지리에 밝아야 한다는  점도 그렇고......또 
  전화야 이동하면서  걸어도 되는  거고, 근거지를 압구정동에  두고 
  있다고 해도 노파나 김현희를 꼭 몰라야 하는 것도 없고......"

   박형사였다.

   "원점이라는 게 그렇게 오리무중이라는 얘기야. 단서가  없고 증거
  가 없을 땐......그런데도 또 그것을 찾아야 하는 게  우리 일이고. 
  내가 특별한 생각이 나서  모이라고 한 게 아니야. 최근 보면  말이
  지. 우리가 윗사람들한테 휘달리고 언론에 휘달리고  하다보니 수사
  를 하고 있는 게  아니라 수사를 하고 있는 모습을 보여 주기  위해 
  뛰어다니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단 말이지. 나도  그렇고 자네
  들도 그렇고....."

   "그럼 어떻게....."

   "그건 나도 몰라.  알면 바로 이것이다,하고 바로 지시를 할  텐데 
  나도 그게 아니니까. 그렇지만 지금 이 순간부터,이제까지  네 번의 
  사건을 겪으며 어떤  증거나 단서도 없이 우리가 알게 모르게  가져
  왔던 고정관념을 버리고 수사를  해 나가자는 얘기야.  다들 내  얘
  기가 무슨 얘긴지 알았지?"

   "예."

   반장의 말에 형사들이 합창하듯 대답했다.

  
 소 제 목 : 구로공단에서 압구정동까지의 거리는 얼마?

   다음날 남 형사는  이제까지와는 달리 전혀 다른 각도에서  범인을 
  추적해보기로 했다.

   이제까지 네 차례의 범행에서 범인은 네번 다 피살자의  목을 졸라 
  살해했다.그 수법까지 범인은 이득지의 소설을 모방한 것이었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소설에 그렇게 쓰여있다고 해서  실제 사건에서
  까지 그렇게 하기가 쉬운  일이 아니었다. 누구나 그 책을 읽고  똑 
  같은 모방 범죄의  충동을 느낀다 해도 실제 사건에서 그것은  불가
  능한 일이었다. 맨손으로  범행을 저지르든 아니면 다른 끈과  같은 
  기구를 이용하든 우선  그럴만한 완력과 한손으로는 피살자의  목을 
  조르고 다른 한  손으로는 피살자의 거친 저항을 제압할 기술과  힘
  이 필요했다.아무나 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그것은 살해수법의 모방 충동과는 또 별개의 문제였다.  만약 범인
  이 살해 수법까지  이득지의 소설에 나오는 것과 똑 같이  따라하고 
  싶어도 그럴 완력과 기술이 없으면 불가능한 일어었다.

   전에도 회의 때마다  여러번 지적된 문제였기는 하지만 그동안  수
  사에서는 사건의 정황  분석으로부터 늘 수사를 진행하곤 했다.  피
  살자의 살해 시간과  장소,어떤 증거가 있는가 없는가,목격자를  찾
  을 수 있는가 없는가,등등.....

   그러다 세번째 사건이  터지기 직전 이득지와 이득지의 소설이  사
  건 전면에 떠오르고,범인이 이득지와 통화를 했다는 것과 또  두 사
  람이 어떤 방법으로든 대화를 나누었다는 점을 중시해  혹시 범인이 
  이득지 주변 인물인가  아닌가,또 첫 피살인 노인과 두번째  피살자 
  김현희의 인적  사항의 공통점,범인이  이득지에게 전화를 건  곳이 
  대림전철역과 구로공단  부근의 공중전화였다는  점을 중시해  모든 
  수사력을 그쪽으로만 맞추어  온 것이었다. 마치 그 부근과  이득지
  의 주변만 제대로 지키면 범인을 잡아낼 수 있다는 식으로.

   그러나 반장의  말대로 전화는 이동만 하면  어디서든 걸 수  있는 
  것이며,또 피살자가 누가  되더라도 같은 서울 지역  안에서,지금까
  지 그것이  사건의 어떤 연결고리처럼  느껴졌던 공단 부근에  있는 
  노인 소유의 벌집이라든가  강남 환락가의 무희로 일하던  김현희가 
  한때는 그  벌집 부근에서 살았다는  정도의 연결 고리는  얼마든지 
  만들어질 수 있는 것이었다.

   그러나 범인이 어디에 살든 분명한 것은 그가 압구정동  일대와 자
  신이 나가 전화를 걸었던 대림역 부근이라든가 공단  부근의 지리에 
  누구보다 익숙할  거라는 것이었다.  또 대림역 부근이라든가  공단 
  부근의 지리는 미리  수사의 혼선을 위해 몇 번의 답사로도  가능하
  지만 자신이 범행을 계획한 압구정동 일대의 지리에  대해서는 평소 
  그보다 더 확실하게 알고 있지 않으면 안 될 것이었다.

   어쩌면 범인은 대림역 부근이나 구로공단 부근이  자기의 근거지인 
  것처럼(또 근거지가 거기라 하더라도) 그곳에서  이득지에게 전화를 
  했던 건  사건을 저지르기 전  처음부터 어떤 계산을  깔고서였는지 
  모른다. 범인은 처음부터  자신의 범행을 어떤 사회적 메시지로  전
  달되기로 바랐고,아니 강력하게 그런 뜻으로  범행을 저질렀고,그러
  자면 그도 그  메시지의 울림을 위하여 일부러 공단 부근으로  나와 
  전화를 걸 수도 있었다는 뜻이었다. 

   이득지의 소설에 나오는 한 구절대로 우리는 매일 아침  자기가 자
  고 일어난 자리에서  하루 30cm씩 압구정동으로 가는 꿈을 꾸고  있
  다면,평생을 두고 다가가고 다가갈 수 없는 같은 서울  하늘의 압구
  정동과 구로공단의 심정적 거리까지 계산한다면.....


 소 제 목 : 그동안 경찰이 매달렸던 건

   어쩌면 처음부터  범인은 그런  계산으로 대림역이나 구로공단  역 
  부근에서 이득지에게  전화를 걸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그리고  네 
  번째 사건 뒤 직후에 건 전화도 얼마든지 그럴 수 있는 일이었다.

   반장은 우리가 수사를  하면서 너무 어떤 고정관념을 가지고  있는 
  게 아닌가,라고 말했다.  이 사건에 대하여 우리가 알게 모르게  가
  져왔던 심증들.....  압구정동과 비압구정의 심증이 범인의  위치까
  지 그렇게 생각하도록 했던 것인지 모른다.

   "반장님."

   남 형사는 석경감에게로 나가갔다.

   "오늘은 안 나가?"

   그건 이득지의 주변을 살피러 나가지 않느냐는 얘기였다.

   "나갈 겁니다."

   "그럼 왜 안 나가고 그래?"

   "말씀 드릴 게 있습니다."

   "뭔데 그래?"

   반장이 자신의 옆에 있는 접대용 의자를 끌어당겼다.  앉으라는 소
  리였다.

   "이번 사건 말입니다.  우리는 이제까지 사건 현장에서부터 늘  수
  사를 진행해왔는데,거기에서 어떤  단서를 못 찾은 거야 우리  잘못
  이더라도 그게 불가능하다면 다른 쪽으로도 생각을 해보는  게 어떨
  까 싶습니다."

   "다른 쪽 어디?"

   "이건 그냥 제 생각인데...... 물론 범위도 넓고요."

   "말해봐."

   "범행 수법 말입니다. 네번 다 목을 졸라서  살해를 했는데,그것도 
  도심에서 말이죠. 더러는 골목이기도 하고 으슥한  곳이기도 하지만 
  순간 소리를 지를 위험은 어느 경우에나 잊지 않겠습니까?"

   "그건 흉기를 사용해서  살해를 한다 해도 마찬가지야. 그럴  경우
  에도 피살자는  소리를 지를 수  있으니까...... 오히려 목을  졸라 
  살해하는 쪽이 소리를 못  지르게 할 수도 있는 거지. 입을  막음과 
  동시에 목을 조르는 식으로....."

   "그게 피살자가 어떤 사람이냐에 따라 틀리겠지만 대개  목을 졸라 
  살해하다는 것은 피살자와  범인간의 체격과 완력이 월등하게  차이
  가 날 때야만 가능하지 않겠느냐는 거지요."

   "그래.어린이 유괴라든가 노약자를 살해할 때라든가......"
   "물론 이번 사건도 부녀자들을 대상으로 한 범행이긴  하지만 부녀
  자들이라고 해서 모두  그렇게 전혀 반항 못할 정도로 약하지는  않
  다는 거죠...... 두번째 피살자인 김현희 경우는 더욱 그렇고요."

   "얘기해 봐. 무슨 얘긴지....."

   "반장님도 범인은  프로라고 그랬는데,범행의 프로만도 아닐  거라
  는 겁니다."

   "범행의 프로만도 아니다?"

   "순간적으로 소리를  못지르게 입을 막고  그와 동시에 목을  조를 
  수 있다는  점에서 본다면  말입니다.처음부터 그런 얘기가  나오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그동안  우리는 살해 현장의 주변 정황과  목격
  자를 찾는데 너무  매달렸던 게 아닌가 싶습니다.또 제보가  들어오
  면 제보가 들어오는 쪽으로 수사를 하다보니 우리도  모르게 갈팡질
  팡했던 것도 사실이고요."

   "얘길 하라니까....."

   "이번 사건을  떠나 우리가 생각하기에  평소 그럴 정도의  완력과 
  능숙한 솜씨를 갖출만한 사람이 어떤 사람이냐 하는  건데...... 하
  고 싶어도 아무나 하는 건 아니잖습니까."

   "그러니까 프로라는 거지..... 현장 뒷수습도 그렇고....."

   "만약 우리 형사들  중에서 박형사 같은 사람은 어떨까요.  저하고 
  박형사 중에  누가 그런 쪽  솜씨에 가까운가를 비교한다면  말입니
  다?"

   "무슨 얘기야?"

   반장의 눈이 다시 빛나기 시작했다.

               
 소 제 목 : 범인의 그런 기술은 어디에서 나왔을까

   "저는 태권도를  했고,박형사는 유도를  했다는 얘기입니다.  우리 
  두 사람의 체격이 비슷해도 두 사람이 한 운동이 틀리다는 거죠."

   "그러면 범인이 유도 선수라는 얘긴가?"

   "아뇨. 단정적으로 말할 수는 없는 거지만,제 경우도  보통 사람보
  다 큰  체격인데 과연 제가 그런  범행을 저지른다면 그렇게 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을 했던 겁니다. 입을  막는 동시에 목을  조르는 
  식으로...... 그건 범행의 어떤 기술이겠지요. 아무리  단기간에 연
  마하려 해도 연마되지 않는...... 그리고 또 하나는  두번째 피살자
  인 김현희가 살해 될 때 얘긴데......"

   이제 반장은 말없이 턱을 문지르고 있었다. 그러면서  함께 눈썹을 
  떨고 있었다.남 형사는 말을 이었다.

   "그때 현장에 범인이 김현희의 뒤에서 목을  조르고,김현희가 목이 
  졸린 채 뒤로 끌려갔던 신발 자국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얼마큼 끌
  려가다 벗겨진 김현희의 구두가 있었고요.....아까 그  구두를 찍은 
  사진을 다시 봤습니다."

   "그랬더니....."

   "뒤로 비스듬히 누운  채로 끌려갔다는 얘기죠. 한자리에 멈춰  서
  서 목을 조르면 피살자가 아무래도 몸을 균형을 잡고 더  거칠게 반
  항을 하니까......"

   "그것 나도 봤어.  그런 자국이 있었던 건......그래서 우리가  그 
  자리에서 살해 당시의 모습을 그대로 재연해보았던 거고."
   "피살자의 턱  밑 상처로 볼 때  목이 졸리면서도 또 목이  쳐들렸
  고......김현희의 키가 여자 키로는 적은 키가 아니었습니다."

   "170cm였던가?"

   "예. 제 추측입니다만 범인은  그보다 10cm나 15cm쯤 더 클 거  같
  고......"

   "그  정도는 돼야겠지.거기다  완력과  목을 조르는  기술을  갖추
  고....."

   "그게 어느날 그런  범행을 계획한 다음 혼자 배우고 익힌다고  될 
  기술이 아니라면 어디서 그런 기술을 익혔겠냐는 겁니다."

   "말해봐."

   "범인이 근거를 어디에  두고 있는 사람이다,하는 것을 생각할  것 
  없이 서울 시내 안의 모든 체육관 이용자를 알아보는 건  어떨까 싶
  습니다. 특히  유도 도장을 중심으로  키가 180 이상인  유단자들을 
  대상으로......"

   "그렇다고 운동하는  사람을 다 찾을 수는  없는 일 아니야?  그런 
  사람들을 다 조사할 수는 없고....."

   "시경쪽으로 보고를 각 서가 각기 관할 구역의  체육관들을 내사하
  는  거죠. 어차피  이  사건의  수사본부는 시경으로  되어  있으니
  까......사건을 저지른 후에도 계속 체육관을 다니지 않을  것 같다
  면 그 이전부터 조사해도 될 테고요."

   "그래. 일단 그렇게라도 좁혀봐야지."

   "그리고 한 가지 더 있습니다."

   "한 가지 더?"

   반장은 두손을 깍지끼어 턱 밑을 받쳤다. 
     
        
 소 제 목 : 이득지가 감추고 있는 것은 무엇일까

   "이득지 씨 쪽입니다."

   "이득지가 왜?"

   다시 반장이 눈썹 사이를 좁히며 물었다.

   "최근 그 사람 사무실로 자주 나갔었는데 뭐가 감추고 있는  것 같
  다는 느낌이 들 때가 많습니다. 처음엔 이 사건에 대해  어쩔 수 없
  이 느끼는 불안인가 생각했는데 꼭 그런 것만 같지는 않습니다."

   "그런 게 아니라면  사건과 이득지가 직접 관계된 것 같다는  얘긴
  가?"

   반장의 목소리가 낮아지고 있었다. 말을 하며 반장은  빠른 눈빛으
  로 주위를 살폈다.

   "그건 알 수가 없습니다. 만나 이야기를 하면 때로는  담담한 듯도 
  하다가 무엇엔가 쫓기는 듯한 얼굴도 하고  그러는데,그게 범인에게 
  쫓기거나 혹은 범인 때문에 갖는 그런 불안이 아니라는  거죠. 범인
  이 다음 번 사건을 저지를까봐 우려를 하면서도 그 이야기를  할 땐 
  정작 크게 불안해 하지  않는데,다른 이야기를 할 때 보면 무척  불
  안한 얼굴을 하기도  하고...... 뭔가 있기는 있는 것 같은데  그게 
  뭐냐고 물을 수도 없고....."

   "그럼 그가 이  사건에 직접적으로 어떤 연관이 있는 것처럼  보인
  다는 얘기야?"

   "아마 그렇지는 않을  겁니다. 어차피 이번 사건에서 피살자와  피
  살자 가족말고는 이득지 씨가 최대의 피해자니까......"

   "그럼 뭐가 이상하다는 거야?"

   "말로는 최근 범인의  연락이 전혀 없다고는 하지만 두 사람  사이
  에 어떤  연락 같은 게 있었던  것 같기도 하고...... 제가  당신이 
  보기엔 범인이 어떤  사람 같느냐고 물으면 경찰이 모르는 걸  내가 
  그걸 어떻게 아느냐고 하지만....."

   "사건 전 그와 통화를 해 목소리를 들어서 그런 것 아니고?"

   "반장님도 어제 제게  그런 말씀을 했습니다만,사실 저는 요즘  이
  득지씨의 입장을 많이  이해하고 있는 입장입니다. 이 사건으로  한 
  작가가 철저하게 매도되고 있다는 느낌도 들고,언론이  또다른 목적
  을 위해 그와 그의 작품에 상처를 입히고 있다는 생각도  들고 그렇
  습니다.그렇지만 그와 이야기를 하면 왠지 그가 이 사건에  대해 무
  언가를 감추고 있는 것 아닌가 하는 느낌이 올 때가 있다는 거죠."

   "그러니까 잘 지켜봐,계속. 어쩌면 그가 우리 모르는  방법으로 범
  인과 이야기를 할 수 있는 거니까. 전에 하던 식으로  그게 서로 뜻
  모를 메시지를 주고 받는  것일 수도 있고 또 다른 방법의 것일  수
  도 있는 거니까 말이지."

   "그래서 요즘 매일  한 차례씩 그쪽 사무실로 나가기는 하는데  가
  면 저도 또 여러 마음이 되고 하니까......"

   "이봐,남 형사.  우리는 범인을  잡는 사람들이야. 누구의  처지를 
  이해하고 말고 하는 사람들이 아니라. 더 지켜봐.  그렇다고 지금으
  로서 우리가  그를 불러 감추고 있는  게 무어냐고 물어볼 수  있는 
  것도 아니니까."

   그리고 나서 오후에 남 형사가 마포에 있는 그의  사무실로 나갔을 
  때,이득지는 전에 볼 수 없던 모습으로 책상에 앉자  컴퓨터를 두드
  리고 있었다. 그건  정말 뜻밖의 일이었다. 어제만 해도 그는  앞으
  로 어떤 원고도 쓰지 않겠다는 생각을 분명히 밝혔던 터였다.

   "제가 방해를 한 모양이군요?"

   사무실로 들어서며 남 형사가 먼저 인사를 했다.

   "아닙니다."

   이득지는 컴퓨터의 전원을 끄고 소파 쪽으로 건너왔다.

   "저한테는 아주 반가운  모습인데요. 무얼 쓰시든 이 선생님이  책
  상에 앉아 컴퓨터를 치고 있으니 말이죠."

   "그럴 일이 좀 있어서요."

   "다시 범인한테 편지를 쓰시는 건지요?"

   "아닙니다. 그런 게 아니라......"

   이득지는 조금 쓸쓸하게 웃어보였다.

   "그럼....."

   "설문조사 초안을 잡고 있습니다."

   "설문조사요?"

   다시 남 형사가  원고가 아니고 말이죠? 하는 얼굴로 이득지를  쳐
  다보았다.
   

 소 제 목 : 다음 설문에 답하시오

   원고라도 놀랄 일인데,설문조사라니.....

   지금 이득지의 상황이  한가하게 설문조사나 하고 있을 때가  아니
  잖는가.

   "이번 사건에 대해서 설문조사를 해보려고 합니다."

   이득지는 책상에서 일어났다.

   "저희들이 알면 안 되는 것입니까?"

   "아뇨,어차피 알 일이니까."

   "어떤 내용의 설문 조산데요?"

   "그냥 이번 사건과 관련하여 이런저런 것들을 알아보려고요."

   처음 그것을 생각한 것은 세번째 사건이 발생한  직후였다. 그러나 
  그때는 생각은  있어도 마음이 한가하게  설문의 초안을 잡을  수가 
  없었다. 가까운 친구들에게도  묻지 않고 혼자 생각하고 혼자  결정
  한 일이었다. 그는 그것을 아내에게도 말하지 않았다.

   이득지는 책상에서 일어나  설문 초안을 들고 소파 쪽으로  자리를 
  옮겼다.

   "앉으시죠?"

   "저로서는 보기가 좋군요.  늘 아무 일 없이  앉아계시더니,오늘은 
  책상에 앉아 일을 하시는 걸 보니까......"

   "일은요, 무슨......"

   "봐도 되겠습니까?"

   "예.  그러십시오. 그러잖아도  오시면 한  부 드릴  생각이었으니
  까....."

   남 형사는 이득지가 잡은 설문조사 초안을 집어 얼굴  앞으로 가져
  갔다.

   1.귀하의 성별은? (남,여)

   2.귀하의 연령은? (10대,20대,30대,40대,50대 이상)

   3.귀하의 거주 지역은?(서울,부산 등 각 시도)

   4.귀하의 직업은(학생,회사원,전문직,자유업,주부,기타)

   5.귀하의 최종학력(재학중은 졸업으로 답해 주십시오)

   6.귀하 월  평균 소득은(50원부터  50만원 단위로 250만원  이상까
  지)

   .........

   15.귀하는 최근 발생하고 있는 압구정동 부녀자 연쇄살인  사건 전
  에도 이득지의 <압구정동>이라는 소설이 있다는 것을 아셨습니까?

   1)알고 있었다.
   2)사건 후 알았다.
   3)모른다.

   16.그 소설을 읽어보신 적은 있습니까?

   1)있다.
   2)없다.

   17.이제 사건  후 많은 이야기로 읽지  않아도 어느 정도 그  소설 
  내용에 대해 이해하리라  생각합니다. 그 소설 속의 범죄가  현실화 
  되고있는 것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1)소설의 내용과는 무관하다.
   2)작가의 책임도 무시할 수 없다.
   3)전적으로 작가의 책임이다

   18.앞의 17번 문항을 대답하는데,최근 신문이나 방송을  통해 보고 
  들은 것이 많은 부분 대답을 결정하는데 영향을  미치지는 않았습니
  까? 

   1)그렇다. 
   2)아니다.

   19.<압구정동>이라는 말을 떠올렸을  때 귀하의 생각과 가장  가까
  운 것은?

   1)유행 선도  
   2)유흥가
   3)불평등
   4)오렌지족
   5)서울의 한 동네


 소 제 목 : 여론이 모는 분위기와 실제 분위기

   어제의 설문에 이어 다음 항목을 대답해 주시기 바랍니다.

   20.우리 사회의 빈부 격차는 어느 정도라고 생각하십니까?

   1)심한편이다
   2)조금 심한 편이다.
   3)전혀 그렇지 않다.

   21.최근 발생하고 있는 일련의 압구정동 부녀자 연쇄  살인 사건에 
  대한 질문입니다. 당신이 생각하기엔 범인이 어떤  인물이라고 생각
  하십니까?

   1)무분별한 대중문화가 만들어낸 인물이다
   2)소외된 부류의 사람일 것이다
   3)이기주의적인 사람일 것이다
   4)영웅심리에 빠진 인물일 것이다
   5)정신질환자일 것이다
   6)사건만으로는 전혀 짐작할 수가 없다.

   22.이번 사건의 발생원인은 어디에 있다고 보십니까.

   1)작가 이득지의 소설 때문이다
   2)물질 만능주의가 빚어낸 사건이다
   3)우리사회의 구조적 모순 때문이다
   4)범인 개인의 증오와 적개심 때문이다
   5)치안부재의 한 현상이다

   23.이번 사건으로 당신은 어떤 카타르시스를 느꼈는지요?

   1)그렇다
   2)그렇지 않다  
   3)잘 모르겠다

   24.범인이 검거된 후에도 이런 사건이 다시 발생할  거라고 보시는
  지요?

   1)그럴 가능성이 아주 많다
   2)어느 정도 그럴 가능성이 있다    
   3)가능성이 없다

   25.이번 질문은 설문응답자  자신이 이와 유사한 사건의  피의자가 
  될 두려움에 대한 경험입니다. 불특정 다수를 상대로 한  이런 사건
  을 겪을  때 당신은 그런 사건의  피의자가 될 두려움을 느낀  적이 
  있는지요?

   1)자주 있다
   2)가끔 있다
   3)거의 없다.
   4)아주 없다

   26.이번 사건의 범인 T와 T가 직접 범행 대상으로 삼는  이른바 야
  타족이나 오렌지족을 포함한  <압구정족> 가운데 어느쪽이 더  사회
  적으로 악영향을 끼친다고 생각하십니까?

   1)T
   2)압구정족

   27.실행 여부에 관계없이  당신도 마음 속으로 특정 계층,특정  지
  역 사람들에 대하여 범죄 충동을 느끼거나 순간적으로  그런 생각을 
  해보신 적이 있습니까?
   1)있다
   2)없다

   28.이런 시회적 범죄의 가장 합당한 예방책 및  해결책은 무엇이라
  고 생각하십니까?

   1)종교를 통한 교화
   2)가정 교육 강화
   3)사회의 제도적 개선
   4)치안 강화
   5)근본적으로 해결책이 없다.

   지금까지 설문에 응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남형사는 설문 초안을 탁자에 내려 놓았다.

   "무엇에 쓸 것인지 제가 알아도 되겠습니까?"

   "이른바 여론이  몰고 가는 분위기와  실제 사람들이 느끼고  있는 
  분위기에 어떤 차이가 있는지 알고 싶어서 하는 것입니다.  물론 같
  은 것에 현상에 대한 질문이더라도 제가 질문하는 것과 또  다른 언
  론사가 질문하는  것에 따라,그러니까  조사를 누가 하느냐에  따라 
  편차가 크게 나올 수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말이죠."

   남형사는 그 말을  그만큼 이득지가 답답해 있다는 것으로  이해했
  다. 하기야 그런  일을 겪으면서 답답해하지 않는다면 오히려  그것
  이 이상할 것이었다.


 소 제 목 : 여름이 가고 가을이 가는 동안....

   여름이 가고 가을이 갔다.

   사건에 대해 아무 것도  밝혀진 것도 또 진전된 것도 없이  그렇게 
  계절과 계절이 가고 겨울이 왔다.

   지난 여름의 끝,사람들은 압구정동에서 똑 같은 사건이  발생할 것
  이라고 생각했다. 네번째  사건이 발생한 다음 한달쯤,전에처럼  아
  무 일도 없이  한달쯤 시간이 지났을 때,사람들은 곧이어  압구정동
  에서 다섯번째 사건이 터질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 한달째가 되는 주간과 그 다음 주간 동안  경찰청은 내부적으로 
  <강력범죄 예방 기간>으로  정해놓고 압구정동을 중심으로 한  강남 
  일대의 치안에 온 힘을 기울일 정도로 많은 사람들의 생각  속에 다
  섯 번째 사건은 마치 피할 수 없는 일처럼 보였다.

   그러나 아무런 사건  없이 여름이 갔다. 이후에도 경찰은 더  오랫
  동안,누구나 발생할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그 강력 범죄에  온 힘
  을 기울였다. 마치 군사정권 시절 대학가에 경찰 병력이  깔리듯 그
  렇게 압구정동 일대에 경찰 병력이 깔려 있었다.

   오히려 그렇게 깔린 경찰 병력 때문에 압구정의 모든  가게가 문을 
  닫게 생겼다고 아우성를  칠 정도로 뒤이은 사건 없이 여름이  가고 
  가을이 깊어갔던 것이다.

   그 사이 강남 경찰서의 강력계도 백방으로 범인 검거에  총력을 기
  울였다.그러나 처음에 어떤  흔적을 남긴 것도 없는 사건에  흔적을 
  남긴 게 없는 범인을 찾는 일 역시 수사에 큰 진전을 보지 못했다.

   남 형사가 말한 비밀리 체육관을 중심으로 한 범인  검거도 처음엔 
  그렇게 하면 금방 범인을  잡아낼 수 있을 것 같았던 일이 막상  그
  런 저인망 식의 그물을 펼쳐 들어갔을 땐 허술한  구멍이 많았고,그 
  그물을 놓아야  할 곳도 실제보다 넓었다.  또 대놓고 그런  식으로 
  수사를 할 수 없는 것이 그러면 운동하는 사람은 다  용의자로 본다
  는 거냐,하고 거칠게 항의해 온다면 거기에 대해서도 할  말이 없는 
  것이었다. 자칫 그랬을 경우,운동을 하는 키큰 사람들은  일단 용의
  자라는 이야기가  될 터였다.  범인을 잡으랬더니 잡으라는  범인은 
  잡지 못하고 선량한 시민들을 범인으로 몬다는 여론도  만만찮을 것
  이었다.

   그 기간  동안 이득지도 매일같이  자신의 사무실로 나왔다.  전에 
  그가 어느 설문조사  기관에 의뢰한 <강남 부녀자 연쇄살인  사건에 
  대한 시민들의 반응>도 이미 조사와 분석이 끝난 상태였다.

   설문 조사 결과 언론이 앞장서서 이끄는 여론과 또  설문조사로 나
  타난 실제 시민들의  생각에 많은 차이가 있음에도 이득지는 남  형
  사에게 한 부 그것을 건넨 것 말고는 어디에도 발표하지  않고 있었
  다. 

   이득지의 생각은 그랬다. 이득지 자신으로선 그 조사  결과를 신문
  이나 잡지를 통해  발표하고 싶은 마음도 있었지만,그때엔 모두  언
  제 다음  사건이 발생하는가를  기다리고 있었고,이득지 역시  같은 
  생각으로 하루하루 마음을  졸이고 있었다. 그러다 여름이 가고  가
  을이 깊어질 때까지 다음번 사건이 발생하지 않자 그 여론  조사 결
  과는 자연히 이득지의 책상 서랍 속으로 들어갔다.

   자료로서 가치가 없다는 것이 아니라,지금은 그것을 발표할  수 없
  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모두들 발생할 줄 알았던 다음번  사건이 발
  생하지 않고 있는  이때,그것을 작가가 발표한다는 것은 자칫  이득
  지 스스로  범인을 자극할 수도  있는 일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
  다.

   그러니까 그 설문 조사는 다음번 사건이 발생하면  하는대로,또 발
  생하지 않으면 않는대로 처음부터 발표할 수 없는  상태로 실시되었
  던 것인지도 모른다. 이득지 스스로도 이득지 자신만 알면  될 일로 
  조사를 한 것이긴 했지만,어쨌거나 결과는 그렇게 되었다.

   앞으로도 그럴 일이  없겠지만 이 다음,이 사건을 소재로 글을  쓰
  거나,아니면 보다 먼 훗날 지금의 일을 회고할 때말고는  그 자료가 
  세상 밖으로 나올 일은 없어진 것이었다.

   압구정동은  압구정동대로,경찰은  경찰대로,이득지는  이득지대로 
  그렇게 여름을 보내고 가을을 보냈다.

   매달 한 달 단위로 발생했던 그 연쇄 살인 사건의  다음 사건이 발
  생하지 않은 여름과 가을을......


 소 제 목 : 예전에 없애버린 범인의 음성 테이프가...

   그리고 찬 바람이 불어왔다.

   그 찬바람 속에 사람들은 이상하게 지난 일들을 쉽게  잊어버린 듯
  했다. 지난 1월 첫  사건이 터진 다음 여름까지 한 달이거나 한  달 
  반 사이로  발생한 그 끔찍한 일도  사람들은 벌써 그게 언제  적의 
  일인지조차 모를 정도로 잊고 있었다.

   물론 거기에 대해 중간 중간 여러 이야기가 없었던 건 아니었다.

   이제 그  범인이 더 이상 압구정동으로  테러를 나오지 않은  것에 
  대한 분석도 여러가지였다.

   예전보다 강화된  압구정동과 강남  일대의 방범과 치안  이야기도 
  나오고,또 이제까지의  사건으로 범인이  어느 정도 자신의  목적한 
  바를 전달했다는  이야기도 나오고,이젠  그가 자신의 꼬리가  밟힐 
  것이 두려워 나오지 않는다는 말도 있었다.

   그러나 어느 쪽으로든 경찰과 이득지에게 그 사건은 끝이  난 것이 
  아니었다.

   설사 그가 네  번째의 사건으로 자신의 테러를 종결한다  하더라도 
  경찰 입장에서도 그리고  그 사건의 직접적인 당사자인  이득지에게
  도 그것은 결코 끝이 난 일이 아닌 것이었다.

   어떤 이유로든 경찰은 그를 검거해야 했고,이득지는 지난  한해 동
  안 거의 아무 일도  하지 못한 채 그 사건의 중심에서 방황하고  고
  민했다.

   그리고 최근 또 하나의  고민이 그의 마음 속에 오랜 빚처럼  간직
  되어 있다 조금씩 고개를 들기 시작했다.

   참 이상한 일이었다.

   전에 한참 사건이 진행중일 때는 그도 그리고 그의  아내도 감추고 
  싶어했던 이 사건에 대한 두 사람만의 비밀......

   처음 T가 그에게  전화를 걸어왔을 때,아니,여행에서 돌아온  다음 
  몇 번의 통화 때,그와 아내는 T의 목소리를 녹음했었다.

   그때 T의 목소리가  녹음된 테이프를 들고 경찰에 나가 신고를  했
  더라면 그는 아마 첫 사건 직후에 바로 검거되었을  것이었다. 이득
  지와 그의 아내는  첫 사건이 발생할 때가지도 그의 목소리가  녹음
  된 테이프를 가지고 있었다.

   만약 그때 그것을 들고  나갔다면 최소한 뒤에 발생한 세 번의  사
  건은 막을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그러지 못했다.

   첫 사건이 발생한 것을 안 다음날 새벽,아내가 T의  목소리가 녹음
  된 마그네틱 테이프를 뽑아 가스레인지 위에 그것을  얹어버린 것이
  었다.

   그러나 그건 아내의 의지만도 아닐 것이다. 어쩌면  이득지 자신도 
  아내가 그렇게 해 주길 마음 속으로 간절히 바랐던  일일지 몰랐다. 
  아니,바라고 있었다.  스스로는 그것을  어쩌지 못하더라도  아내가 
  그것을 없애주길.....

   그리고 아내가 그것을  없애버린 다음 이득지가 느낀 정직한  감정
  은 어떤 안도감이었다.이제 이  세상에 그 일을 알 수 있는  사람도 
  없으며,그것을 증명해줄 물건도 없다는 것.......

   어디,그 테이프에 대한 두려움이 아내 한 사람만  느낀 두려움이었
  을까. 아내가 그것을  없애기 전날 밤,그는 불안과 두려움 속에  유
  일한 위안처를  찾듯 아내의  몸을 탐했고,깊이  잠들었으며,새벽에 
  아내는 이득지  몰래 일어나 이득지  대신 그것을 없애버린  것이었
  다. 그것을  어떻게 아내가 없애버린  것이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 
  다만 그렇게 말을  하지 않았다뿐이지,내가 잠든 사이 그것을  없애
  버리라고 그는 마음 속으로 무수히 말했던 것인지 모른다. 

   아니,아내가 그런 그의 마음 속의 말을 들었을 것이다.

   그것을 없애버림으로써 장차 어떤 일이 계속 될 것이라는  걸 알면
  서도......

   그러나 불꽃을 올린 가스레인지가 그 마그네틱  테이프를 불살라버
  렸다 하더라도 이득지 마음 속에 있는 그것까지  그렇게 불살라버려
  졌던 것은 아니었다.

   지금도 그는 혼자 잠들다 깬 밤중이거나 새벽이면 그  테이프 안에 
  들어있던 T의 목소리를 듣고 했다.

   이득지 선생,미스터 T입니다.......


 소 제 목 : 내가 나에게 묻는 책임처럼...

   한 번 귀에 들린  그 목소리는 떠나지 않고 오래도록 그의  귓가에 
  맴돌곤 했다.그것이 사건의 시작이었다. 그리고 일찍 그  사건을 막
  을 수 있는 단 하나의 끈이었다.

   처음에도 때늦은  후회처럼 그런  생각을 했지만 지금도  이득지는 
  그때 내가 당신의  목소리를 녹음하고 있다고 말하지 못한 것을  두
  고두고 애석해 했다. 이제는 그것이 이 사건에 대한  어떤 안타까움
  과 미련처럼 나는 왜 그때 그러지 못했는가 하는 생각이  드는 것이
  었다.

   그러나 그 같은 생각도  사건이 처음 터졌던 지난 겨울과 지금  많
  이 달라진 것이 있었다.  처음 사건이 터졌을 때만 해도 만약  자신
  이 당신의 목소리를 녹음한 테이프를 가지고 있다는  말만 했어도,T
  는 절대 압구정동으로 나오지 않았을 거라는 생각을 했었다.

   그런데 지금은 그때 왜 나는 그 말을  하지 못했는가,안타까워하면
  서도 그때 내가 그 말을 하였다 하더라도 어쩌면  T가 압구정동으로 
  나가고 말았을 것 같다는 생각이 문득문득 드는 것이었다.

   네번의 사건이  터지고,이제 사건 없는  여름과 가을이 가고  나서 
  어느날 불현듯 그런 생각이 들기 시작한 것이었다. 만약  그때 그말
  을 했다면,T도 내게 당신은 절대 그것을 신고할 수  없을 것이다,하
  는 식으로 말하고  나갔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아니,당신은  신고를 
  할 수 없을 것이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당신은 신고를  하지 않는
  다는 걸 자기가 먼저 안다는 식으로.....

   어떤 방법으로든 이득지는 T와 이야기를 하고  싶었고,이야기를 하
  게 되면,정말 허심탄회하게  이야기할 기회가 주어지면 그는 그  말
  을 묻고 싶었다. 만약  그때 내가 그렇게 말해도 당신은 나갔을  것
  이냐고......

   아직 아내에겐 그  말을 하지 않았다. 없앤 녹음 테이프에  대해서
  는 그것을 없애던 당시에 말고는 그도 아내도 입밖으로 그  말을 내
  지 않았다. 두 사람이 있을 동안에도 의식적으로 그  말만은 피해왔
  다.

   그러나 언제 이야기를 하더라도 그 이야기를 영원히 감출  수는 없
  을 것이었다. 최근 그는  이 이야기를 언젠가 자기 입으로 하게  될 
  것이라는 어떤 불안한 예감 같은 것을 느끼곤 했다.

   언젠가 그가 검거된다면,뒤늦게라도 나는 그 이야기를 하게  될 것
  이다,하는 생각이 자기  암시처럼 그렇게 머릿속 한 구석에  들어와 
  자리를 잡기 사작한 것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이득지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만약 불쑥 지금 그 이야기를  해
  버리고 나면 오히려 그것은 T를 자극할 수도 있는 말이었다.

   한 번 머릿속에  그 생각이 들어오기 시작한 다음부터는  이상하게 
  혼자 창밖을 바라보고 있거나 멍하니 앉아 그 사건을  생각하고 T를 
  생각할 때마다 불쑥불쑥 그것이 자신의 마음을  괴롭히고,양심의 한 
  끄터머리를 괴롭히고 있는 것이었다.

   나는 언젠가 그 말을 하게 될 것이다.

   먼 훗날이 아니라,언젠가 그가 검거되면......

   그래서 모든 사람들이  그 사건이 단락지어졌다고 생각할  때,내가 
  막을 수  있었던 사건을 막지 못한  죄값을 스스로 청하듯 나는  그 
  이야기를 그때엔 하게 되고 말 것이다......

   요즘도 며칠마다 한 번씩 사무실로 찾아오는 형사의 얼굴을  볼 때
  에도 그는 그래서 괴로웠다. 쉽게 그를 검거하고,또  두번째 사건부
  터는 충분히 막을 수도 있는 것을 자신이 오히려 그것을  확대해 온 
  것이나 마찬가지인 지난 일에 대해서......

   나는 더 이상 글도  쓰지 않는 한 때의 작가일 뿐이고,그 일에  대
  하여  내  스스로  나에게 책임을  물어야  할  일도  적지  않으니
  까......


 소 제 목 : 범인이 이득지를 살해할 것이다?

   "해를 넘기겠는데요,이러다가......"

   이득지가 그런 고민을 하고 있을 때,강남 경찰서  강력계 형사들은 
  언제나처럼 가닥조차 잡히지 않는 사건을 붙잡고 회의를  하고 있었
  다.

   "해를 넘기든 않든  더 이상 사건이 발생하지 않는 것만으로도  일
  단은 다행으로 여겨야 할 텐데 그게 그렇지가 못하니 문제지....."

   석 경감이 형사들을 둘러보며 말했다.

   "그러게 말입니다.  연초에 터진  사건을 연말이 되어도  해결하지 
  못하고 있으니까...... 올해 십대 뉴스에도 아마 이번  사건이 들어
  갈 텐데......"

   "그것도 그거지만,왠지 내 생각은 그냥 해를 넘기지 않을  것 같은 
  느낌이 든단 얘기야......."

   "해를 넘기지 않다니요?"

   석 경감의 말에 박형사가 의문을 달았다.

   "모르겠어. 오래 경찰밥을 먹어 생긴 어떤 감인지,아니면  직업 때
  문에 생긴 노파심인지......"

   "반장님은 전에도  그랬잖습니까? 여름을  안 넘기고 사건이  터질 
  것 같다고 그랬고,또  가을 중에 한 번  그런 일이 있을 것  같다고 
  말이지요. 그러다  가을까지 넘어가니까  지금은 올해가 가기  전에 
  무슨 일이 있을 것 같다고 그러시고....."

   "계절이 문제가 아니라,사건의 성격으로 봐 네번째의  사건이 마지
  막 사건이  아닐 것 같다는  얘기야. 그것도 한  과정이이지,범인이 
  준비한 마지막 사건은 따로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서 그래."

   "마지막 사건이라니요?"

   "그거야 아무도 모르는  거지. 다섯번째 사건이 발생한다 해서  그
  게 마지막 사건이라고 말할 수도 없는 거고..... 그건  그때 가봐야 
  아니까. 좌우지간 네번째  사건이 마지막 사건 같지 않다는  느낌만
  은 틀림없어. 이건 나  혼자 느끼는 것이 아니라 우리 모두  느끼는 
  거니까......"

   "그랬죠. 네 번째 사건이 터질 때가지만 해도요.  우리들뿐 아니라 
  위에서도 그렇게 생각하고 언론도 그렇고,또 바깥에서  느끼는 것도 
  그랬고요. 그렇지만 매달 터지던  사건이 몇 달 동안 잠잠한 것  아
  닙니까. 터질  거면 반장님 말씀대로 여름을  안 넘기고 가을을  안 
  넘기고 터졌지......"

   "그러니까 불안하다는 거지. 마침표를 찍을 자리가  아닌데도 마침
  표가 찍힌 것처럼 사람들은 생각하는데,범인의 생각은  따로 있을지 
  모르니까."

   "그럼 반장님께서 생각하는 마지막 사건이란 어떤 것인데요?"
   지금까지 잠자코 동료 형사들의 생각을 듣고 있던 남  형사가 물었
  다.

   "그걸 내가 어떻게 알아? 범인 스스로나 아는 일이지......."

   "그래도 짐작이라는 게 있지 않습니까?"

   "그놈 생각대로 그게 사회적 테러라면 그 테러의  확실한 에스컬레
  이트 같은 것일 수도 있겠지....."

   "그리고 그게 아니라면요?"

   "그말은 자네 생각  다른 것일 수도 있다는 말처럼  들리는데,그런 
  거야?"
   이번엔 석 경감이 눈썹을 꿈틀대며 남 형사를 쳐다보았다.

   "혹 이득지 씨라든가,하는 식으로 말이죠."

   "이득지? 범인이 이득지를 말이지?"

   석 경감의 얼굴은 그럴  수도 있겠다는 것이 아니라 그건 그럴  수
  가 없어,하는 얼굴이었다. 그 반문 속에 그는 남 형사의  말에 대한 
  강한 부정을  깔고 있었다. 그러면서 그는  강한 눈빛으로 다시  남 
  형사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소 제 목 : 연말을 맞은 압구정동은 표정은

   "전에 이득지 씨도 공개적으로 그런 편지를 쓴 적이 있고....."

   "그렇지만 두 사람은 한 끈이잖아. 누가 누구를 어쩔 수 없는. 그때 그 
  편지라는 것도 그랬어.어떻게 보면  이득지는 그 편지를 그 놈의 다음번 
  범행을 막기 위해 썼던 게 아니라 오히려 범인의 범행에 어떤 의미를 두
  기 위해 썼다고도 볼 수 있는 거니까."

   "그거야 받아들이는 사람이 어떻게  받아들이는 차이 아니었을까요. 실
  제 그런 뜻으로 우리가 받아들여야  할 부분이 아주 없었던 것도 아니고 
  말입니다. 요즘도 가끔 나가보면 이득지 씨는 그렇습니다.오히려 우리는 
  범인만 잡힐  수 있다면 다음번 사건이  일어나도 좋다는 식이고,이득지 
  씨는 어떤 이유로든 그가 사건을  더 이상 안 저지르는 것만으로도 크게 
  다행으로 여기고 있고......"

   "그건 사건이 터지면 자신도 함께 궁지에 몰리기 때문이이겠지."

   "아뇨,그렇게만 볼 것도 아닙니다. 이제 사건이 더 터진다고 해서 이득
  지씨가 더 떨어질 나락이 있는 것도 아니고요."

   "어쨌거나 다음번 그 놈의  마지막 목표가 이득지는 아닐 거라는 거지.
  만약 다음번 범행이 일어난다고 해도 그렇고....."

   "그거야 아무도 모르는 일이죠.  지난번 자신이 범행 후에 남길 사설을 
  쓴 신문사 논설위원이 될지도 모르는 거고......"

   "이봐,남형사. 말조심해. 어디 나가서 그렇게 함부로 말하지 말고."

   "안 합니다."

   강남 경찰서의 강력계 형사들은  그런저런 이야기를 주고 받고 있었다. 
  이득지가 범인의 목소리가 녹음된  테이프를 자신이 없애버린 것에 대해 
  이런저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그러나 이득지와  경찰말고는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제 그런 일이 
  있었다는 사실조차 거의 잊고  있는 듯했다. 모두들 쉽게 흥분하고 쉽게 
  잊는 건 이번 사건에서도 예외는 아니었다.

   불과 몇 달이  지난 사이,실제 그 일은 아주  오래 전에 발생되어 이제 
  영구미제로 남은 사건으로 생각될 정도로 그 일을 말하는 사람들이 없었
  다.어쩌다 비슷한 일을 경험하거나  가진자들의 어떤 횡포 같은 것을 피
  부로 느낄 때야 비로소  입버릇처럼 그놈은 어디서 뭘하고 있나,이럴 때 
  저런 놈들이나 확 쓸어버리지 하는 식이었다.

   압구정동의 표정 역시 그랬다.

   대학 입시 수능고사가 끝나고 나서 오히려 표면적으로 압구정동은 젊은
  이들의 새로운 해방구가 된 듯한 분위기였다. 정말 몇달 사이 그것은 그
  저 한때 그곳에 이상한 정신이상자가 나타나 연쇄살인을 벌였던 동네,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것이 되고 말았다. 연말 방범 단속이라는 것도 그곳
  의 그런 분위기를 어떻게 하지  못했다. 몇 달전 서울 한강의 한 다리가 
  끊어진 일을 그 다리가 다시  이어지기 전에 이미 오래된 옛일처럼 생각
  되듯 압구정동의 부녀자 연쇄 살인  사건 역시 아주 오래된 일처럼 생각
  되고 있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것이 전부였을까.

   그 사건은 정말 어느날  그렇게 네번째의 희생자로 테러가 종결되고 말
  았던 것일까......


 소 제 목 : 다시 그가 움직인다

   그것은 아무도 모르는 일이었다. 경찰도,그리고 그 사건의 직접적 당사
  자인 이득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그 모르는 일 속에 경찰도 이득지도 그 
  사건을 사건을 마지막 사건이라고  생각하지 않고 있었다. 다음 사건 발
  생 전에 경찰은 범인을  잡아야 했고,이득지로선 언제가 자신이 하지 않
  으면 안 될 마음의 커다란 부담 같은 고백에 대해서 고민하고 있었다.

   그러면서 하루하루 시간은 가고,그렇게  흐르는 시간 속에 다음번 사건
  을 계획하고 있는 T가 아무도 모르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는 예전 이득지에게 남기는 편지에 이어 그 겨울 하루하루 자신의 기
  록을 다시 정리하기 시작했다.

   1994년 12월 XX일

   어제 표적물이 귀국했다.      

   나는 진작에 그 정보를 입수했다. 그러나 그 정보를 어떻게 구했는지는 
  여기에 자세히 옮기지 않겠다.

   그 대신 내가 먼저 해야 밝혀두어야 할 말이 있다.

   지난 여름,네 번째 사건 후,나는  한 동안 꼼짝도 않고 서울에 붙어 있
  었다. 내가 저지른 네번째의 사건으로 서울은,아니 서울 강남은 마치 벌
  집을 쑤셔놓은  듯했다. 아마 그것이 네번째  사건이라는 것보다는 내가 
  이득지의 소설 압구정동 한 부분 외에 C신문의 사설을 메시지로 남긴 때
  문일 것이다.

   그때 내가 남긴 이득지의 소설 <압구정동>의 한 부분은
   [전국을 거의 안 가 본 데 없이 누비고 다
   그것을 쫓아다니던 논다는 여자들과도 놀아
   자기들 군단에 대로 들어온 <까만 가죽치
   러나  돈으로 해결 안 되는 일이 없고 돈으
   없다는 것을 알았을 때 여자는 그런 여자들]

   [그런 일의 뒷감당으로 자신이 두려워 해야
   닥에서 알아주는 룸싸롱 하나를 거느릴 땐
   하나 부러뜨리는 건 식은 죽 먹기보다 쉬운
   나온 서른몇 살의 지배인도 여자 앞에서는
   돈으로 안 되는 일이 나이를 고치는 것말고는]

   부분이었다.

   그렇게 찢어낸 책의 앞 부분에 나는 전처럼 T라고 쓰고,<부를 죄악시하
  는 풍토부터 고쳐야> 하는 C  신문 사설에 <나를 부추기는 건 바로 이런 
  글을 쓰는 놈들이다>를 썼다.

   그러나 나 여기서  내가 어떤 사람인지,또 어떤  가정에서 태어나 어떤 
  환경에서 자랐으며 학교는 또  어떻게 다녔는지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을 
  것이다. 내가 범행 현장에 잡힌다면  애써 감추고 말고 할 것도 없이 그
  들은 그것을 알아낼 것이고,그렇게  되면 사건의 모든 이면이 거기에 있
  다는 식으로 그것을  써댈 것이다. 그러나 나는  내가 쉽게 그들의 손에 
  잡히지 않는다. 아니,나는 잡혀서는 안 된다.그것은 그런 사건을 저지르
  고 내가  무사해야겠다는 생각 때문이  아니라,내 출생과 가정환경,그런 
  것들이 내 테러의 의도를 왜곡하는 데로 틀림 없이 쓰이기 때문이다.

   최소한 내가 말할  수 있는 건 나는 이 땅의  언론이 강력 사건 뒤마다 
  그렇게 분류하고 쓰기 좋아하는 <결손가정>의 사람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나 거기에 대해서는 더  이상 말하지 않겠다. 나중에 내가 그들에게 
  붙잡혀 어쩔 수 없이 내 과거의 모든 것이 드러난다 하더라도 지금은 내
  가 어떤 사람이란 걸 말할 수가 없다. 내 출생과 가정 환경이,그리고 성
  장 환경이 내 테러의 모든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므로. 오히려 내 테러
  의 가장 큰 부분의 설명은 내가 아니라 이득지가 소설로 정의한 <압구정
  동>에서 찾아져야 할 것이므로. 

         
 소 제 목 : 내 테러의 마지막 표적물

   그리고 그 말은  나의 테러가 전적으로 이득지의 소설  <압구정동> 
  때문에 이루어졌다는 것과는 전혀 다른 의미의 말임을  분명히 해두
  어야겠다.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누구나 그 의미를 짐작할  말에 다
  시 설명을 다는 것은,그럼에도  내가 이 설명을 달지 않으면 그  말
  이 또 다른 필요에 의해 충분히 그렇게 해석될 것이기 때문이다.

   내가 내  테러의 가장 큰 부분의  설명이 이득지가 소설로  정의한 
  <압구정동>에서 찾아져야 한다고  말하는 것은 한권의 소설로  나의 
  테러가 시작되었다는  것이 아니라 그런  소설의 무대가 이미  나의 
  테러를 일찍부터 준비해왔다는 말의 다름 아니다.  이득지의 소설까
  지,그리고 그 안의  비판들까지 하나의 상품으로 흡수하고,이제  나
  의 테러까지 자기식의 해석으로 흡수해버리는.

   어쨌거나 어제 표적물은 귀국했다.

   생각보다 그는 큰 짐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그가 조금 전 내린 비행기에서 대합실로 들어오는 동안  나는 그를 
  마중 나온 가족들 뒤편에 서 있었다.

   "처음엔 안 들어오겠다고 그래도 들어왔다 가라고 했어."

   그렇게 말한 중년의 귀부인은 아마 내가 마지막 테러의  표적을 삼
  고 있는 놈의 어머니일 것이다.

   "지난 번 마음 고생은 또 얼마나 했는데....."

   다시 그 어머니라는 여자가 말했다.

   "처음부터  합의를  볼 걸  그놈이  여기저기  떠들어가지고  말이
  지......"

   그건 놈과의 관계를 알 수 없는 젊은 부인이었다. 그러나  앞서 말
  한 귀부인의 동생 같지는 않았다.

   "좌우지간 그렇다니까. 세상  일이라는 게....... 그래서 있는  사
  람들이 조심하고 살아야지."

   다시 귀부인.

   "이건 누가 뭐 어떻다 하면 다른 사람 같으면 넘어갈  일도 넘어가
  지 않고  사사건건 붙들고  들어지니....... 그놈은 지금  뭘하는데
  요?"

   다른 젊은 부인.

   "모르지. 그때 그 난리를 떨어 쥐어준 돈으로 팔자를  고쳤는지 어
  쨌는지.결국엔돈 몇푼 받고 떨어지고 말 놈이 남의 자식  신센 생각
  지도 않고 그 난리를 떨었으니 집안은 또 무슨  망신이야. 애한테는 
  또 평생에 얼마나 큰 상처고....." 

   "그러게 말이에요.근본이 다른 것들은 원래.....'

   "시간 됐지?"

   귀부인.

   "곧 들어올 겁니다."

   기사로 보이는 젊은 남자.

   "나가서 공부를  하는 애들이 그렇게  들어오게 되면 젊은  애들이 
  누가 그러고 싶지 않겠어. 혼자도 아니고 친구들과 어울리면....."

   귀부인.

   "참, 전에 그 아이는 어떻게 됐어요?"

   젊은 부인

   "그 아이라니?"

   "전에 왜 호정이가 들어와서 그 집에 가 있었다는 얘 있잖아요."

   "모르겠어. 이젠 상관 없는 일이니까."

   "둘이 연락하고 그러는 건 아닐까."

   "아닐 거야. 나갈  때 단단히 일러 내 보냈으니까. 그때에도  하필
  이면 그런 아이 집에  가 있어 가지고. 그때  아이 때문에 집엔  얘
  기도 않고 살짝 들어와 그랬던 거잖아. 배워먹지도 않은  어린 것이 
  아이한테 꼬리를 쳐서......"

   "저기 들어오는데요."

   부인 옆에 섰던 운전기사의 말을 듣고 나도 사람들이  나오는 쪽을 
  쳐다보았다. 먼저 기사가 표적물에게 다가갔다. 

   너구나.바로....

   나는 뒤에서 그렇게 말하고 내 마지막 표적물의 첫  인상을 꼼꼼히 
  살폈다.
   
      
   
 소 제 목 : 너는 처음부터 나의 표적이었다

   그의 키는 대략 178cm쯤 되어보였다.

   한 눈에 보고  내가 그렇게 말하는 건 175보다는 커보이고  나보다
  는 조금 작아보인다는 이야기가 되겠다.

   이것으로 나는 나에  대해 한가지를 발설했다. 내 키가 대략  어느 
  정도 되라는 것을  말한 것이다. 178cm 정도의 남자를 나보다  조금 
  작아보인다고 말 할 수 있는 키는 대략 얼마쯤일까,  그것은 이득지 
  선생,당신의 짐작에  맡긴다. 만약 당신이  누구보다 먼저 나의  이 
  비밀 파일을 볼 수 있게 된다면......

   그는 커다란  가방을 끌고 나왔다.  첫눈에 그는 귀공자다워  보였
  다.적당하게 큰 키,그리고  그 적당한 키에 잘 어울리는 옷을  입고 
  있었다.엉덩이 아래로  내려오는 갈색  자켓도 그랬고,갈색의  모직 
  바지도 그렇게 보였다.

   기사가 먼저 그에게 뛰어갔고,그가 짐을 기사에게 맡기고  작은 손
  가방만 하나 어깨에 둘러멘 채 귀부인 앞으로 와 인사를 했다.

   "나오지 말라니까 무엇하러 나왔어요."

   그가 그의 어머니로 보이는 귀부인에게 한 첫마디였다.

   "그럼 안 나올 수 있냐?"

   "그냥 혼자 집으로 들어가겠다고 그랬잖아요."

   아마 그들의  대화는 지난 겨울의 불미스러운  일을 두고 하는  말 
  같았다. 표적은 그것  때문에 어머니가 여기까지 나온 것이  아니냐
  는 듯했고,귀부인은 자식이 귀국한다는데 그럼 안 나와 볼  수 있겠
  느냐는 얼굴로 말했다.

   "가자."

   귀부인은 아들의 손을 잡고 말했다.

   그러자 옆에 있던 젊은  부인이 뭐라고 물었는데 그 말을 나는  듣
  지 못했다.

   그 물음에  표적이 말하는 것도 들을  수 없었다. 두 사람은  거의 
  입안으로 웅얼거리듯이 말했고,그런데도 두 사람은 서로의  말을 충
  분히 알아들은 듯한 얼굴이었다.

   다시 귀부인이 자신보다 훨씬 더 큰 아들의  어깨를 두드렸고,그때
  에도 표적은 뻣뻣하게 선 자세로 머머니가 공항까지  자신을 데리러 
  나온 것을 못마땅해 하는 얼굴이었다.

   그리고 그들은 바로  출구쪽으로 걸어나갔다. 기사는 벌써  보이지 
  않았고,귀부인은 앞서 걷는 아들을 무척이나 대견한  얼굴을 바라보
  았다.

   "바로 집으로 가는 거죠?"

   젊은 부인이 묻고,  나이든 귀부인이 그렇다고 말했다. 표적은  여
  전히 못마땅한 얼굴......

   전에 어떤 일이 있었든 일년간 해외에 나가 있다가  들어오는 아들
  의 표정치고는 마치  너무 덤덤하고 불손하게 보였다. 마치  어머니
  가 중고등학교  때 수학여행을 다녀온  아들을 역까지 바래러  나와 
  친구들 앞에 위신이 안 선다고 지을 때의 그런 표정으로.....

   그날 나는 그들이 잠시 후 기사가 끌고 온 차에  오르는 것까지 지
  켜보았다. 나보다 조듬 더 작아보이는 그 귀동자 타입의  내 마지막 
  표적을.......

   이 테러를 나서기 전 그는 내가 처음부터 너라고  정해놓은 표적이
  었다. 지금처럼 나의 테러가 중간에서 무슨 증거를 남기는  식의 실
  수로 중단되는 일이 없다면.....

   그럼 다시 보자,너......

   뒤에   몰끄러미 섰다가 저만치 걸어가는  표적의 등에 대고  내가 
  말했다.

   우리 다시 보자고

 소 제 목 : 그 표적을 자동차로 추격하였다

   다음날부터 나는 매일 그 표적을 관찰했다.

   지금으로서 그 표적의 제일 마음에 들지 않는 건 그의  키였다. 처
  음부터 부녀자들만 상대로 테러를 하겠다는 생각은 없었다.

   아마 그건 <압구정동>에 대한 을 쓰며 이득지 선생의  경우도 마찬
  가지였을 것이다. 단지  그곳의 부패와 타락의 일차적 징후를  성적 
  부패와 타락으로  진단하는 과정에서,그리고 그 밑바닥으로부터  테
  러의 대상을 에스컬레이트시키는 과정에서 우연의  일치처럼 부녀자
  들이 그  대상이 되었다는 것이지  처음부터 그런 구도로  이야기를 
  그린 것은 아닐 것이다.

   그리고 선생의 소설을 내  테러의 메시지로 삼고 있는 나 역시  그
  것은 마찬가지였다. 나로선 우선 그 소설 속의 인물들과  유사한 인
  물을 찾지 않을 수 없었던 점이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마지막 나의 표적은 그렇게 찾아진 표적이 아니다.

   처음부터 나는  그를 내 테레의  마지막 표적물로 삼았다.  어쩌면 
  그는 선생의 소설 <압구정동>에 나오는 마지막 인물과  유사한 점이 
  많은지도 모른다. 그러나  소설 속의 마지막 인물이 마약과  도박과 
  섹스를 인생의 유일한 낙으로 삼는 인물이어서 그를  선택하기로 한 
  것은 아니었다.

   거듭 말한다. 그는  처음부터 내가 내 테러의 마지막 표적물로  삼
  았던 인물이다.아마 내가  그에 대한 테러를 실행하고 나면  사람들
  도 그것을 인정할  것이다. 아니,그것조차 인정하지 않을  사람들이 
  있음도 나는 알고 있다.  그는 내가 이 테러를 실행하기 전에  이미 
  내 테러의 표적물이 된 인물이므로.

   이땅의 모든  언론들은 또 다른  시각에서 그것을 보리라는  것을. 
  내 마지막 표적물조차  소설을 통해 이득지 선생,당신이 선정해  준 
  것처럼 다시 당신을  공격해들어오게 되리라는 것을. 단지 하나  그
  들에게서 찾아지는 것이 쓰레기와 같은 생각을 가지고 있는  재벌 2
  세라는 점에서......

   178cm정도의 키를  가진 건장한  청년. 몸무게도 대략  75kg정도는 
  될 것이다. 

   거기에 비한다면 이제까지의  내 테러는 크게 어려움이 없는  상태
  에서 진행되어왔다고 볼  수 있다. 네 번 다 여자였고,내가  그들의 
  목을 조를 때 그들도 나름대로 안감힘을 쓰며  거칠게 반항해왔지만 
  나는 그런 그들의 반항을 나의 완력으로 거침없이 제압했다.

   그러나 상대는 이제까지의 희생자들과는 다르다.  섣부르게 접근할 
  수 없다는 얘기가 되겠다. 어쩌면 내가 생각하고 있는  것보다 놈에 
  대한 접근은 더 많은 준비와 시간이 필요할지 모르겠다.

   하여 나는 다음날부터  주의 깊게 그를 다시 관찰했다. 프로는  프
  로다운 준비가 있어야 하므로.....

   그리고 무엇보다  이제까지의 테러가  바로 놈에게 이어질  테러로 
  가기 위한 일련의 과정들이나 다름없으므로......

   다음날 놈은 정오가  조금 넘은 시간 집에서 나왔다. 나는  오랫동
  안 기다렸다가  차고 밖으로 미끄러져  나오는 놈의 승용차를  보았
  다. 직감적으로 나는  자동차에 탄 것이 나의 표적임을 알았다.  그
  리고 대기 상태의 내 자동차의 시동을 걸었다. 자동차  키를 비트는 
  순간 묘한 흥분 같은 것이 내 손끝으로 전달되었다.

   이 손으로 내가 너에게 다가가리라......

   이 겨울,그러나 결코 길지 않은 시간을 두고.....

   나는 엑셀의 페달을 밟았다.

   손끝에서 느꼈던 것과 마찬가지로 전해지는 발끝의 촉감.  이제 우
  리의 게임은 시작되었다.  

      
 소 제 목 : 너는 여자와 함께 자동차를 타고

   자동차의 뒤를 추격하며,이제 나는 너를 너라고 부르겠다.

   가능한 나는 너의 뒤를 붙었다. 네가 차를 멈춘 곳은 압구정동 로데오 
  거리의 뒷골목이었다.너는 공터에 차를  세우고 길가 카페로 들어갔다. 
  아니,들어가기 전 너는 자동차 안에서 어디와 통화를 하는 것 같았다.

   통화를 끝내고 손바닥을 올려치듯  핸드폰의 뚜껑을 닫는 너의 모습에
  서 나는 어느 인기 탈렌트의 모습을 떠올렸다.

   여전히 마음에 걸리는 건 너의 큰 키......

   너는 그 큰 키로 자동차에서 나와 카페로 들어갔던 것이다.

   가능할까. 

   저만치 멀리 자동차를 세우고  나는 내 자동차에서 느닷없는 공격처럼 
  운전석 옆자리 시트의  등받이 윗부분에 불룩 솟아있는  머리받침을 내 
  팔로 목을 조이듯 졸라보았다.

   정말 그것이 가능할까.

   두번 세 번 나는 같은 동작을  반복해보았다. 자동차 시트의  머리 받
  침이 마치 너의 머리와 목이기라도 하듯이.....

   잠시 후,한 여자가 너에게로 왔다.그러나 나는 너희의 대화를 들을 수
  가 없었다. 직감적으로  너의 어머니가 말하던 지나  겨울의 그 여자는 
  아니라고 생각했다. 카페에서 나와  너는 여자를 태우고 자동차에 올랐
  다.

   애석하게 거기서 그날  나의 추격은 멈추어야 했다. 큰  길로 나온 네 
  자동차가 갑자기 U턴을 해선 안 될 곳에서 U턴을 해버렸기 때문에.....

   물론 나도 따라서 할 수가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의외의 일이고 자칫 
  너에게 이상한 낌새를 느끼게 할지 모르는 일이므로 나는 바로 내 거처
  로 돌아왔다.

   이 거처에 대해서도 나는 당분간  말하지 않을 생각이다. 어쩌면 거처
  를 알리는 일도 내가 계획하고  이제까지 실행해온 테러의 의미를 왜곡
  하는 쪽으로 작용할지 모르므로.

   아뭏든 그날 너에 대한 나의 추격은 그렇게 실패하고 말았다.

   집으로 돌아와 나는 너에 대한 나의  테러의 구체적 계획을 세우기 시
  작했다.

   우선 어떤 기구를 사용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178cm의 키를 가진 
  건장한 젊은 남자를 단숨에 제압할 수 있는......

   그렇다고 흉기를 사용하겠다는 뜻은 아니다.  어떤 끈 같은 것이 내겐 
  필요 할 것 같다. 실처럼 부드럽게 잘 휘어지는 조금은 굵은 철사와 자
  건저 체인,나이론 줄,태권도복이거나  유도복의 띠,아니면 플래스틱 띠 
  같은 것......

   가능한 이번에도 나는 너의 몸에  흉칙한 상처를 남기지 않을 것이다. 
  같은 살인에도 사용한 흉기에 따라,또 살해  방법에 따라  보다 잔혹하
  게 보일 수도 있고,잔혹하게 보이지 않을 수도 있다. 가능한 나는 너에
  게 그렇게 접근하고 싶다.  아니,접근하여 너를 그렇게 처치하고 있다. 
  누가 보든 이제까지 내가 보여주었던  테러의 마지막 희생자 답게 너도 
  내가 조용히 잠재워 버렸다는 인상으로.

   이제까지 나는 네 목을 기다려왔다.

   너는 이미 처음부터 내 마음 속에  정해진 이번 테러의 첫 도화선이자 
  그 테러를 계획하기 전부터 이미 예정되어 있던 마지막 목표물이었으므
  로.

          
 소 제 목 : 이 사건에서 네가 갖는 상징성은

   또 범행 장소에 대해 나는 깊이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이제까지 나는  압구정동을 중심으로 나의 테러를  계획하고 실행해왔
  다. 그러나 이번 내 마지막 테러가 될 너에 대해서는 굳이 장소엔 구애
  받지 않을 생각이다.  그러지 않아도 사람들은 내가  너를 그렇게 했으
  며,그 사건이 앞서 있은 네 번의 사건에 연결되어 있는 것임을 쉽게 짐
  작할 수 있을 것이므로.

   그러나 무엇보다 장소를 따지지 않겠다는 말은 너의 건장한 체격 때문
  일지 모른다. 네가 갖는 이 사건의  어떤 상징성과 또 희생자가 너였을 
  때 불러일으키게 될 반향을 고려한다면 당연히 그 장소도 압구정동이어
  야겠지만,그곳에서 너를 공격하기엔 너무 많은 위험 부담이 따른다.

   테러리스트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자신의 그런 테러가 성공하느냐,실
  패하느냐 일 것이다. 그건 어떤 정치적  목적을 갖는 국제 테러 집단의 
  경우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나도 가장  그것에 신경쓰지 않을 수 없다. 
  아니,가장 신경쓰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마치 이 테러의 목적과 의도
  만큼이나......

   실패한 테러의 사회적 반향도 결코 적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안다. 그
  러나 자신의 테러가  성공하느냐,실패하느냐 만큼 테러리스트에게 중요
  한 것도 없을 것이다. 지난 겨울 처음 <압구정동>을 읽고 테러리스트의 
  몫을 자처하고 나섰을 때,나는 단계적으로 너에게 다가가기까지의 과정
  을 내 머릿속에 그렸던 것이다. 어느 목표물이든 마치 너에게 접근하듯 
  그렇게 접근을 했다.

   그러나 지난 겨울,네가 우리 모두에  대한 테러처럼 길에서 그런 일을 
  저질렀을 때,그 일이 알려지고 나서도 나는 너를 직접 보지 못했다. 텔
  레비전에 언뜻 너의 모습이 나왔다는데  그때에도 나는 너를 보지 못했
  다. 신문에서 한 번 전혀 반성의 기미가  없는 너의 사진을 본 것과 그
  냥 마음 속으로 너에 대해 생각하고만 있었던 것이다.

   그러다 겨울이 다가오며 네가  귀국할지 모른다는 희망을 가졌고,귀국
  할 것이라는 정보를 알아냈으며  공항에서 처음 너를 보았을 때,그때에
  도 느꼈지만 지금도  내 머릿속을 지배하는 것은 너의  큰 키와 건장한 
  체격이다.

   그런 너를 압구정동에서,그러니까 전혀 예측할 수 없는 어떤 느닷없는 
  상황이 벌어질지 모를 그곳에서 너에게 접근해 너를 잠재울 수 있을까,
  하는 것이 결코 쉽지 않은 일이라는  걸 너를 보는 순간 체념하듯 알게 
  된 것이다.

   이제까지 실행한 그 어느 때의 테러보다  비장해져 있는 내 자신을 보
  며,나는 너에 대한 테러를 무슨 수를  쓰든 꼭 성공시켜야 한다는 결의
  를 스스로에게 다진다. 꼭  압구정동에서 이루어지길 희망하는 너에 대
  하 나의 테러가 너를 보는 순간 꼭 압구정동이 아니어도 좋다는 생각으
  로......

   보다 공격이 용이하거나 아니면 네가 내 공격으로부터 보다 무방비 상
  태에 있는 곳이면 장소를 가리지 않고 어디든.....

   중요한 것은 이 사건에서 갖는 마지막  희생자인 네가 가지고 있는 상
  징성이니까. 나 역시,그것을 우선적으로 생각하지 않을 수 없는 입장에
  서.

   어쨌거나 언제라고 단정할 수 없는 이 겨울 어느 날,너와 나는 그렇게 
  생의 기로에서 마주치게 될 것이다. 나는  내 테러의 마지막 의미를 위
  해,그리고 너로선 너의 하나뿐인 목숨을 위해......

   이미 지난 겨울,우리의 게임은  시작되었고,이제 그 운명의 날이 다고 
  오고 있는 것이다. 나는 하루하루 그  날을 기다리듯 너와 그렇게 마주
  칠 날을 기다리고,너는 전혀 그런 눈치를 모른 채 나와 마주치게 될 것
  이다.

   한가지 분명한 것은 우리 사이에 던져진  그 주사위는 내가 던진 것이 
  아니라 네가 던진 것이라는 것이다.

   단지 그것이 내 앞에 내 몫으로 던져졌을 뿐......

   그럼 다시.....
    
 
 소 제 목 : 그랜저의 프라이드 폭행사건 아시죠?

   그 연쇄 살인 사건의   다섯 번째 사건이 터진 건 연말을 며칠  앞 
  둔 어느 날이었다.

   아니 사건이 터진 것이 그날이었던 것이 아니라 사건  신고가 들어
  온 날이 크리스마스를  이틀 지난 12월 27일이었다. 그러니까  사건
  이 있었던 건  24일 밤이자 크리스마스인 25일 새벽이 되는  셈이었
  다.

   신고가 들어오던  시간 강남  경찰서의 강력계 형사들은  아무래도 
  사건이 해를 넘길 것 같다는 이야기를 주고 받고  있었다. 형사들이 
  주고 받은 그  말도 사건 해결이 해를  넘길 것 같다는 뜻 외에  이 
  연쇄 사건의  다음 번 사건이 발생한다  해도 해를 넘겨 발생할  것 
  같다는 뜻으로 한 말들이었다.

   사건은 지금까지 압구정동을 중심으로 하여  발생했고,어느 때보다 
  늦은 밤의 통행이 많은 연말에 이곳에서 지금까지  한동안 발생하지 
  않고 있던 사건이 어떻게 발생할 수 있겠냐는 것이었다.

   석 경감 책상을 중심으로  둘러앉아 그 말을 한 사람은 박  형사였
  다. 그리고 다른 형사들 모두 박 형사의 말을 동조했다.  연말을 맞
  아 위로부터  비상 치안 강화령이 내려왔지만,다들 그건  연말 분위
  기에 들뜬  잡범들과 금품을 노린  노상강도들에 대한 특별  단속령 
  정도로 생각했었다.

   "하지만 사건이란 모르는 거야. 방심할 일도 아니고."

   석 경감이 다른 형사들에게 말했다.

   무엇보다 석경감이 이번  연쇄 살인 사건에 대해 연말을  신경쓰는 
  건 그 나름대로 가지고 있는 오랜 경찰 생활의 경험 때문이었다.

   "어떤 사건이든  형사 입장이 아니라  범인 입장에서 생각을  해야 
  돼. 우리는 그렇게  생각하지만 범인으로선 연말에 일을 벌일  계획
  으로 지금까지 참아왔던 것일지도 모르니까."

   "그건 반장님께서 늘  하신 말씀이잖습니까? 여름이 가기 전에  무
  슨 일이 일어날 것 같다고 그랬고,또 가을 가기 전에  그럴 것 같다
  고 그러고,또 이번엔 해를 넘기기 전에 무슨 일이 날  것 같다고 그
  러시고......"

   "노파심이긴 하지만 우리로도 만반의 준비를 해야  한다는 거야.언
  제 어떤 일이 발생할지 모르니까."

   "준비야 하죠. 그래서 특별 단속에 나서는 거고......"

   "내가 범인 입장에서 생각하라는 건 다른 뜻이 아니야.  우리가 그
  를 잡을 생각보다 먼저  범인의 마음 속을 읽어야 한다는 거야.  우
  리는 연말이라 아무래도 사람들의 통행이 많을 테니까  범인이 다른 
  때보다 쉽게 나설  수 없으리라고 보는 데 반대로 연말이기  때문에 
  들뜬 분위기를  한 번 뒤엎겠다는 식으로  나설 수도 있다는  거지. 
  다소 위험 부담을  안고라도 나설 수만 있다면 평소 때보다는  그런 
  분위기를 더 타고 싶지 않겠느냐는 얘기야."

   바로 그런 이야기를 주고 받을 때 늘 출입하는 J신문  기자가 강력
  계 사무실로 들어와 그 이야기를 했던 것이었다.

   "한가하네요? 여긴......"

   뭔가 꼬리가 달린 말이었다.

   "무슨 일이 있어?"

   이제 기자와 안면이 익은 석 경감이 나서서 물었다.

   "무슨 일이라기보다는 이것도  재미있는 일이 아닌가 싶어서  혹시 
  아시는가 하고 물으러 들어왔습니다."

   "무슨 일인데....."

   "반장님,지난 겨울에 있은 P군 사건 알지요?"

   "P군 사건이라니?"

   "왜이러십니까 다 알고 왔는데......"

   "다 알다니 뭘?"

   "그 사건이요. 지난  겨울에 있은 그랜저의 프라이드 폭행사건  말
  입니다. 아시잖아요.그 P군......"

   순간 석 경감은  이야기가 이상하게 돌아간다고 생각했다.  기자의 
  말이 뜬금없긴 했지만 이미 석 경감의 눈은 조금 전  형사들과 이야
  기를 나눌 때의 눈빛이 아니었다.

   뭔가 있기는 있구나,지금......

   우리도 모르는 사이......

   석 경감은 얼른 자리에서 일어나 가자의 팔을 끌었다.


 소 제 목 : 혹시 그 놈이 나선 것은 아닐까?

   "무슨 일이야? 말해봐.김 기자."

   "정말 모르고  있는 겁니까?  아니면 알면서도 일부러  따돌리려고 
  그러는 겁니까?"

   "그 P군이 어쨌다는 거야? 또 사고라도 친 거야?"

   "그런 게 아니라......  나는 아는 줄 알고 취재 협조를  받으러왔
  더니 아닌 모양이군요."

   "아닌 건 뭐고,사고는 뭔지 자세히 얘기를 해보라니까......"

   주위를 살피며 석 경감은 기자의 양복 소매를 잡고  회의실로 그를 
  데려갔다. 그런  반장과 기자의  뒤를 엉거주춤한 자세로  형사들이 
  따랐다.

   "말해봐. 무슨 얘긴지 자세하게......"

   다시 석 경감이 기자의 말을 재촉했다.

   "저도 보지는  못하고 그냥  얘기만 들었습니다.그래서 여기  오면 
  알 수 있나 해서 온 건데......"

   "무슨 얘기를 어떻게 들은 건데?"

   "그 P군을 본 적은 있습니까?"

   한쪽 손을 회의용 탁자를  짚은 자세로 비스듬히 선 채 기자가  물
  었다.

   "지난 겨울에 사건 났을  땐 봤지. 사실 강력계가 나설 일도  아닌
  데 위에서 엄히 조사하라고 지시가 내려와서...... 그때  우리 형사
  들도 다 보고......"

   "제가 어제 신문사에 있다가 이상한 전화를  받았습니다. 독자라면
  서 사회부 기자를 바꾸어달라고 해서 받았는데 다짜고짜  이름을 대
  며 그 P군을 아느냐고 묻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처음엔 잘 모르겠다고 했더니 지난해 겨울  특종까지는 아
  니지만 제가 처음  기사를 썼던 그랜저를 탄 유학생의 프라이드  폭
  행 사건을 이야기하면서 바로 그 P군이라는 겁니다.  그렇게 설명을 
  하니까 안다고 그랬죠. 지금 다시 외국에 나가  있지 않느냐고.나는 
  그렇게 알고  있다고......그랬더니 지금  방학이라 귀국해  국내에 
  들어와 있다는 겁니다."

   "그런데?"

   "전화를 하는 사람 말로는 지금 병원에 있다는 겁니다.  어느 병원
  인지는 자기도 모르고 아마 무슨 사고가 있었던 것 같다고......."

   "사고?"

   순간 석 경감의 눈썹이 얼굴 전체를 일그러뜨리듯 꿈틀거렸다.

   "예. 제보자는  그렇게까지만 얘기했습니다. 누군가로부터  공격을 
  받아 아주 죽을  뻔하다가 살아나 지금 병원에  있다고......그래서 
  난 혹시  여기에 접수된 사건인가 싶어  물으러 온 건데 나보다  더 
  모르고 있으니......"

   "알 방법이 없잖아. 신고가 들어오지 않으면 우리야......"

   "아마 무슨 일이 있긴 있는 모양입니다. 제보자 말로는  자동차 사
  고는 아닌데 죽을 뻔하다가 살아나 입원을 했다고  했고,P군 집으로 
  전화를 하니 지금  미국에 나가 이번 방학엔 들어오지 않았다고  그
  러고...... 아직 뭐가  뭔지 모르겠어요.사고는 정말 난 건지  아니
  면 들어오지도 않은 사람한테 그런 헛소문이 난 건지.  정말 신고된 
  것 없습니까? 그런 사건?"

   "이봐 김기자. 없으니까 없다는 거지."

   "혹시 위에서 압력받아  감추는 것 아닙니까? 일부러 모르는  척하
  면서......"

   "나, 이 사람......"

   "그럼 한 번  알아보세요. 무슨 일이 있는 건지..... 있다면  그것
  도 적은 일이 아닐 테니까. 그리고 자료가 나오면   다른 사(社) 기
  자들한테 알리지 말고 저한테 먼저 연락을 주고요. 저도  지금 다른 
  데로 알아보다가 사실이면 이쪽으로 연락을 드릴 테니까......"

   "알았어.그렇게 하자구."

   무엇엔가 쫓기듯 서둘러  그렇게 대답하고 석 경감은 기자를  내보
  냈다.

   "다들 앉아봐. 저기 문 닫고."

   그런 석경감의 말이 무겁게 기자들을 눌렀다. 만일  사고가 있었다
  면 기자는 우연의  일치와도 같은 단순 폭행 사건으로 신문  한귀퉁
  이를 장식할 한꼭지의 기사로 이야기했지만,그 이야기를  처음 들을 
  때부터 석 경감은 어떤 불길한 예감 같은 것을 가지고 있었다.

   혹시 그놈이 나선 것은 아닐까.

   그 T라는 놈이......
    

 소 제 목 : 경찰과 언론이 왜곡한 사건 동기

   "들었지, 다들......"

   석 경감은 형사들을 둘러보았다.

   "예."

   선임자인 김 형사가 다른 형사들을 대신해 대답했다.

   "무슨 일일 것 같애? 자네들 생각엔......"

   "저희들보단 반장님 생각이 어떤지....."

   다시 김 형사가 말했다.

   "아니야. 그냥 얘기들을 해봐."

   "반장님은 혹시 그 놈이 나선 게 아닐까 생각하시는 건지요?"

   박 형사가 반장의 생각을 먼저 짚고 나섰다.

   "그래. 아까 김  기자가 와서 P군 어쩌고 할때부터 그럴지도  모른
  다는 생각이 들었어.김기자가  말한 게 사실이라면 어쩌면 그  놈이 
  P군이 귀국할 때가지 기다리고 있었던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말이
  지. 자네들은 그런 생각 들지 않았어?"

   "저도 왠지 그런 생각이 들긴 했습니다. 작년 그 사건의  P군이 누
  군가로부터  죽을  뻔하다가  살아나  병원에  있다는   얘기를  듣
  고......"

   남 형사였다.

   기자가 와 그런 이야기를  하는 동안 남 형사도 어쩌면 그것은  잘
  못된 제보가 아니라  제대로 된 제보일 거라는 생각이 먼저  들었던 
  것이다. 그리고 반장의 말대로 지난 여름 네번째 사건  이후 가을이 
  가고 겨울이 가도록 다음 번 사건이 뒤이어 발생하지 않은  것도 어
  쩌면 범인이 그  P군을 마지막 희생자로 지목하고 있었던  때문인지
  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어쨌거나 이 사건의  시작은 지난해 겨울에 있은 한떼의  유학생들
  이 백주에 강남대로에서 벌인 <그랜저의 프라이드 폭행  사건>에 있
  었다.

   이제까지 발생한 네 번의  연쇄 살인 사건과 그 사건 사이엔  직접
  적 관련이 없었지만,그러나  그 네 번의 사건이 연쇄적으로  발생하
  기에까지 이른  과정과 직접적 동기를  본다면 그 사건들의  뿌리에 
  <그랜저의 프라이드 폭행 사건>이 있었다.

   처음 그것이 밝혀진  건 이득지의 말을 통해서였지만,그동안  언론
  들은 의도적으로 그 부분을 축소해 보도했다.

   이번 테러의 직접적  원인으로 그 사건 자체가  강조된다면,그것은 
  어떤 이유로든 많은 사람들에게 심정적으로 그 테러의  어떤 명분을 
  심어줄지 모를 일이었다.  아니,그 테러 사건이 발생하는  중간중간 
  튀어나온 단발적인  강,절도사건에서도 "압구정동의 야타족이  미워
  서"라든가 "아무리 노력해도 우리는 부자가 될 수 없기  때문에" 강
  도짓을 했다는 잡범들의 말들도 일단 그렇게 말하는  것만으로도 그
  들의 범행에 어떤 심정적인 이해의 폭이 형성됨을 보지 않았던가.

   그래서 그간 언론과  경찰도 오직 모든 책임은 이득지와  이득지의 
  책에 있다는 식으로 그와 그의 소설 <<압구정동>>을  몰아부쳐 오지 
  않았던가.

   그간 일련의  부녀자 연쇄  살인 사건을  보도해오면서 그  사건이 
  <그랜저의 프라이드 폭행 사건>에 뿌리를 두고 있다는  말도 이득지
  가 사건 전면에 났섰던 세번째 사건 때 처음  잠시였고,시간이 흐를
  수록 언론도 경찰도 그 부분에 대해서는 의도적으로  은폐해왔던 것
  이었다.

   경찰이 상부에  보고하고 언론  쪽으로 돌린 보도자료에도  경찰이 
  파악하는 범행 의도나 범행 동기에 그 사건은  <그랜저>의 <그>자조
  차 들어가지 않았던 것이었다. 처음엔 그 부분에 대한  이야기도 썼
  지만 서(署)에서 청(廳)으로  넘어가는 단계에서부터 그 말은  누가 
  뺐다는 말도  없이 슬그머니 빠져버리고  그 자리에 이득지와  그의 
  소설이 모든 책임을 떠맡은 것이었다.

   그러나 사실 범인 입장에서  보면 그 연쇄 살인 사건의 마지막  표
  적물로 한 사람을  지목한다면 그건 당연히 자신이 그런 테러를  자
  극했던,그때 그 <그랜저>를 탔던 일군의 유학생 중 한  사람일 수밖
  에 없을 것이었다.

   단지 경찰이 거기에까지  생각이 미치지 못했던 것이었다.  그리고 
  그 사건을 수사하고 있는  남 형사 자신도 한 때는 엉뚱하게 그  마
  지막 상징적 희생자를 이득지로 생각했던 것이었다.   

 소 제 목 : 여기가 그 유명한 장군집 아닙니까?

   그건 지난번에  이득지가 범인에게  보내는 편지에 그렇게  썼다고 
  해서만은 아니었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남 형사는 이득지의  그런 
  편지가 단순히 범인의 다음번 사건 사건을 막기 위해 한  말이 아님
  을 알고 있었다.

   잠시 남 형사는 그런 생각을 했다.

   "그럼 김 형사하고 남 형사가 한 번 알아봐. 김  기자 말이 사실인
  지 아닌지."
   석 경감은 일단 그 일을 두 형사에게 지시했다.

   "사실이라면 이 사건과 관계가 있을지 모르니까."
   다시 석 경감이 말했다.

   "알겠습니다."

   김 형사가 대답했다.

   "소문나지 않게 잘 알아봐. 지난 겨울 사건은 우리  관할에서 발생
  해도 P군 주소가  우리 관할이 아니니까 조심스럽게 접근해서  말이
  지. 무슨 말인지 알지?"

   "압니다."

   "소문나서 좋을 것 없다는 얘기야. 그리고....."
   자리에서 일어서려다 말고 석 경감은 다시 두 형사를 불렀다.

   "섣불리 접근해선  안 돼. 잘못하면 괜히  위에서 무슨 말  나올지 
  모르니까. 또  혹 아닐지도  모르니까 내부적으로도 소리나지  않게 
  하고....."

   "알겠습니다."

   석 경감의 말은 그런 정도의 집안이라면 사실 여부의  조사 자체도 
  쉽지 않다는 뜻이었다. 신분이 특별한 만큼 실제 그런  사건이 있었
  다 하더라도 피해자  쪽에서 먼저 쉬쉬해 버리기 쉽기  때문이었다. 
  더구나 지난 겨울 그런 사건까지 있고 보면 이번 일이  밖으로 알려
  지는 걸 더욱 꺼릴 것이었다.

   반장으로부터 지시를 받은 김 형사나 남 형사는 지난  겨울의 사건
  을 뒤져 우선  P군의 인적 사항을 뽑았다.그러고 그걸 공항  출입국
  관리소 쪽으로 전화를 걸어 P군의 입국을 일단 확인했다.

   "뭔가 있기는 있는 모양인데요."

   남 형사가 김 형사에게 말했다.

   "그것만 가지고 있다고 말할 수는 없잖아."

   "그렇긴 하지만 아까  김 기자가 그랬잖습니까? 집으로 전화를  거
  니까 공부를 하러  나가 이번 방학엔 들어오지 않는다는 식으로  말
  하라고 말이죠."

   "그거야 이번  사건과 관계없이 그렇게 말할  수도 있는 거지.  한 
  번 그런 사건이  있고 난 다음이니까 의식적으로 매스컴을 피할  수
  도 있는 거구 말이지. 또 무얼 알아보려고 그러나 하고......."

   "좌우지간 나가서 부딪쳐보는 방법 밖에 없겠는데요?"

   "집으로?"

   "우선은 그렇게 해야  되지 않겠습니까? 그쪽에서 문전 박대를  하
  든 않든  일단 순서가......  가족들도 모르게 알아본다면  모를까. 
  그럴 수도  없는 일이잖습니까?  혹,지난번처럼 집에는  들어온다는 
  말없이 혼자 들어왔다고 해도 그렇고 말이죠."

   "그래.나가지."

   주소지가 양재동이면 서초서  관할이었다. 기자에게 들은 그  사건 
  자체만을 위한  조사라면 당연히 서초서에서  나서 조사를 해야  할 
  일이었지만,일의 성격 상 그쪽 서에 협조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양재동 우면산 아래의  P군의 집까지 찾아가는 동안 젊은  남 형사
  가 운전대를 잡았다.

   "선배님,선배님은  바깥에선 이  동네를 뭐라고  부르는지  아십니
  까?"

   "뭐라고 부르는데?"

   "여기가 그 유명한 장군촌 아닙니까?"

   핸들을 꺾으며 남 형사가 말했다. 


 소 제 목 : 장군촌이라는 동네에 대하여
   "장군촌?"

   "5공 때 날리던 장군들이 모였다는  얘깁니다. 80년대 이후 새로운 지
  도층들이 새로운 귀족 단지를 만든 데가 여기 우면산 아래라는 거죠."

   "그렇다고 다 장군들만 사는 동네는 아니잖아."

   "장군이 많이 모여서가 아니라 새로운 상징적 의미의 이름으로 장군촌
  이라는 거죠.압구정동이라는 말에 어떤 상징적 의미가 있듯.....그러니
  까 정계,재계,관계,언론,법조 해서 쟁쟁한 사람들만 모여들었다는 얘기
  예요. 군사정권 시절엔 높은 자리에 있는  사람들은 출신 성분 가릴 것
  없이 다 장군이니까. 평범한 사람들은 졸병인 거구....."

   "정말 그런 이름으로 붙이 거야?"

   "처음엔 군부 핵심세력들도 많이  있은 모양이예요. 지금은 어떤지 모
  르지만.....전 중앙정부장도 여기에 살고,전에 떠오르는 태양이라는 사
  람도 여기 살고....돈많은 예능계  대학 교수들도 여기에 살고..... 뭐 
  지금은 두루두루  각 방면에서 내로라 하는  사람들이 모여사니까..... 
  전에 어느 신문에서도 여기를  취재했는데,우리 같은 사람은 그냥 살라
  고 해도 못 산답니다."

   "왜?"

   "사는 건 그냥 삽니까? 이 정도  동네에서 저기 보이는 호화빌라 안에
  서 잘 사면 월 몇천만원은 기본으로 들어간다는 거죠. 애들 과외비만도 
  수백만원씩 하는 동네니까....."

   "동네는 좋네. 조용하고 깨끗하고..... 산 아래에 있으니까 운치도 있
  고."

   "안으로 들어가면 더  운치가 있는 거죠. 돈으로  세우고 돈으로 바른 
  집 안에서 내다보는 바깥 세상은 늘 아름다운 법이니까....."

   남 형사는 스스로도 모르게 조금은  시니컬하게 말했다. 그 모습이 김 
  형사에게도 이상하게 보인 보인 것이었다.

   "이제 보니 많이 아네. 남 형사,형사 안 해도 되겠어."

   "그래도 해야지요.그러니까 이런 데도 와 보는 거고." 

   "집 앞까지 갈 거야?"

   언덕길 중간쯤 오르다 다시 김 형사가 물었다.

   "들어가자면 가겠지만,내려서 걸어들어가죠. 남의  이목을 끌 것도 없
  이."

   "그러지."

   두 사람은 길 중간에 차를 세우고 내렸다.

   찾아가는 P군의 집은 내린 곳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자리 잡은 5층 
  호화 빌라였다.들리는 말로는 눈내리는  한 겨울에 마당까지 난방을 해 
  봄 꽃을 피운다는 바로 그런 동네에 찾아든 것이었다.

   그리고 이  동네에 대해서는 이득지의 소설  <압구정동>에도 자세하게 
  나와 있었다.

   이득지의 소설엔 서울시 서초구  양재동 50--70번지 일대 주택가엔 대
  낮에도 사복경관과  경비원이 삼엄한 경비를 펴고,곳곳에  경비 초소가 
  자리잡고 있어  자나가는 시민들의 발길을 잡는다고  했지만,두 형사가 
  찾아갔을 땐,사복 경관은 보이지 않고 경비원들만 곳곳에서 방문객들의 
  방문 용무를 묻고 있었다.

   "저긴 모양인데요?"

   두 사람은 4-5미터 정도의 높은  담으로 둘러싸인 빌라 입구에서 다시 
  경비원의 제지를 받았다. 김 형사가 익숙한 동작으로 경찰증을 내 보이
  고 도로 경비원을 불렀다.

   "여기서 일 한지는 얼마나 됩니까?"

   "한 2년 되는데요.왜 그러십니까?"

   "그럼 여기 3층 사시는 분들에 대해서도 잘 아시겠군요."
   우선 P군에 대해 물어볼 생각이었다.
    

 소 제 목 : 두 형사는 경비에게 P군에 대해

   "왜 그러시는데요?"

   이쪽에서 경찰증을 보여주었는데 경비는 아직도 뭔가  잔뜩 경계하
  는 눈빛이었다. 아니,증명서를 보여주었기에 더  경계하는 것인지도 
  몰랐다.

   "이건 중요한 겁니다.여기 3층에 사는 사람이 누군지 잘 아시죠?"

   목소리의 무게를 실어 김 형사가 물었다.

   "예,뭐....."

   "어떤 집안이라는 것도 잘 알고......"

   "예."

   "이태 전부터 여기 있었다면 지난해 겨울 이 집 아들한테  무슨 일
  이 있었는지도 잘 아시겠군요."

   "지난해 겨울이라니요?"

   경비는 전혀 모르는 사람처럼 대답했다.

   "지난해 겨울,신문에도 왜 이 집 아들이 났었잖습니까?"

   남 형사가 김 형사를 거들었다.

   "아,예. 그 일은 다 끝나지 않았습니까?"

   "끝났죠. 그 일  때문이 아니라 다른 걸 좀 물어보려고  왔습니다. 
  당신 이 집 아들 얼굴도 알지요?"

   "......."

   김 형사사로서는 나이든  경비에게 당신이라는 말로 조금 세게  나
  갔다. 경비는 머뭇거리며 대답을 피했다.

   "알아요,몰라요?"

   남 형사 역시 심문을 하듯 세게 밀어부쳤다.

   "알기는 하지만...... 어느 아들 얘긴지......."

   "어느  아들이 어디  있어요?  지난해  신문에 난  그  아들  얘기
  지......"

   "그 아들은 자주 보지  못해 얼굴을 잘 모릅니다. 큰 아들은  여기 
  있으니까 잘 알지만......"

   "이거 왜 이래,정말...... 그 아들 얼굴은 잘 모른다고  해도 얼마 
  전 귀국한 건 알 거 아니야?"

   "......."

   "몰라요?"

   다시 김 형사가  다그치듯 물었다. 경비는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그런 그의 표정으로봐선 알지만 자기로선 어떤 말도  하기 힘들다는 
  뜻 같았다.

   "알아요.몰라요?"

   "......."

   "이봐요,아저씨. 우리도  다 알고  왔어요. 그 아들이  귀국했다는 
  거. 그리고 병원에 입원해 있다는 것까지. 당신한테  들었다는 얘기 
  안 할 테니  얘기해봐요. 그 아들이 지금 병원에 있는  건지,아니면 
  집에 있는 건지."

   "저는 정말 몰라요. 모릅니다."

   "귀국한 것도 몰라요?"

   "......"

   "우리는 지금 공무를 수행하고 있는 거예요. 그냥 묻는  것이 아니
  라. 귀국한 것도 모르냐구요?"

   "귀국한 건 알지만......"

   "지금 병원에 입원해 있는 건 모른다?"

   "예....."

   "당신한테 어느 병원이냐고는 안 물을 테니,걱정하지  말고 말해봐
  요. 당신이야 병원에  입원해 있는지 아닌지는 알아도 어느  병원인
  지는 모를 테니까....."

   "나는 말 모릅니다. 몰라요....."

   "알았어요. 됐어요.  그것도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일이니까..... 
  경비 잘 서세요,그럼."

   경비는 두 형사가  더 묻지 않는 것만으로도 일단은  다행스럽다는 
  얼굴로 물러섰다. 그러다  경비는 안으로 들어가려는 김 형사를  다
  시 불렀다.

   "이봐요,경찰 양반....."


 소 제 목 : 그 여자의 뒤를 따라가면 저절로

   "왜 그래요? 무슨 할 말이라도 있어요?"

   "나는 아무 말도 안 했어요.나하테 무슨 말을 들었다는  얘기는 하
  지 마십시오. 난 아무 얘기도 안 했으니까."

   "알았어요. 그런데 지금 안에 누가 있습니까?"

   "아마 사모님이 계실 겁니다. 나오시지 않았으니까."

   "알았어요."

   "찾아오셨다고 연락을 드릴까요."

   "아니,나둬요. 연락하지 말고......"

   "그럼 제  입장이 난처해집니다.  그게 여기서  제가 하는  일이니
  까....."

   "그럼 어떻게 하지?"

   김 형사는 남 형사 쪽을 쳐다보았다.

   "이봐요,경비 양반."

   이번엔 남 형사가 경비를 불렀다.

   "예."

   "우리 이 안으로  안 들어갈 테니까 나중에라도 당신 우리가  여기
  에 왔었다는 말을 하지 마십시오."

   "무슨 말씀인지....."

   "우리가 지금 이 집 안으로 안 들어가겠다는 얘깁니다.  당신 입장
  을 생각해서...... 그러니까 당신도 이 집안 사람들한테  우리가 여
  기 왔었다는 얘기를 하지 말라는 얘깁니다."

   "그거야 어렵지  않지요. 사실  이렇게 불쑥 찾아오면  나중에라도 
  제가 입장이 난처한데......  그렇다고 제가 경찰이 안으로  들어가
  겠다는 것까지 막을 수가 있는 것도 아니고 말이죠."

   "안 들어가다니? 무슨 얘기야?"

   김 형사가 남 형사를 쳐다보았다.

   "생각해보니 그게 낫겠어요."

   남 형사가 짧게 대답했다.

   "낫다니?"

   그러나 남 형사는 김 형사가 묻는 말에 대한 대답  대신 다시 경비 
  쪽을 향해 물었다.

   "이집 사모님이라는 사람,안에 있다고 했죠."

   "예."

   "아들이 병원에 입원해  있으니까 그럼 하루에 한번씩은  병원으로 
  다니겠군요. 사모님이....."

   "......."

   "대답해봐요. 그래야 우리가  안으로 들어갈  건지 아니면  아니면 
  밖에서 일을 볼 건지 결정할 것 아니요?"

   "예. 병원인지 어딘지는 모르지만,잠시 후면 나가실 겁니다."

   "그게 병원인지는 모른다 이거지요?"

   "예. 저는 모릅니다. 우리는 그런 거 알려고 하지도 않고....."

   "알았어요. 그럼 당신 일 보세요. 그리고 누구한테도  우리가 여기 
  와서 이것저것 물었다는 말을 하지 말고...... 우리도  당신 입장을 
  생각해서 여기 왔었다는 말을 하지 않을 테니까......"

   "그래만 주시면 서로가 좋지요.서로가....."

   남 형사가 그 집 안으로 들어가지 않겠다는 말만으로도  경비는 일
  단 마음의 짐을 덜은 듯한 얼굴로 말했다.

   "어떻게 하려고?"

   그러자 다시 김 형사가 남 형사를 쳐다보았다.

   "일단 내려가서 얘기를 하죠."

   "그럼 여기 와서까지도 안 들어가겠다는 얘기야?"

   "그게 아니라....."

   "그게 아니면?"

   남 형사는 김 형사의  소매를 끌고 경비 초소에서 조금 벗어난  곳
  으로 내려왔다.

   "지금 들어간들 별  소득이 없을 거라는 얘깁니다. 우리가  아들이 
  귀국을 한 것을 안다고 해도 끝까지 귀국 안 했다는  식으로 잡아뗄 
  테고,어느 병원에 입원을 했으냐고 물어도 그럴 테고  말입니다. 그
  러면 우리로선 정작 알아야 할 걸 알 수 없다는  얘기죠. 그리고 우
  리가 돌아가면 이런  사람들 그렇잖습니까? 언제 이런 사람들이  우
  리와 직접 이야기를 나눕니까. 위로 어디로 전화를 해서  거기에 대
  해서 더 이상 알아보거나 문제 삼지 말라는 식으로 압력을  넣을 게 
  뻔하고,그러면 일을 진행하면서도 힘만 더 들지 않겠습니까?"

   "그럼 어떰게 하겠다는 거야?"

   "어머니 아닙니까?  자식이 병원에  입원해 있는데 안  나가보겠어
  요. 그러니까 잠시 그 놈 어머니가 외출을 할 때  따라붙자는 거죠. 
  그럼 어디에  입원해 있는지 병원을 묻지  않아도 바로 알 수  있는 
  거구요. 또  우리가 아들이 병원에 입원해  있는 것을 우리  눈으로 
  확인한 다음 묻는다면 저쪽도 무조건 잡아떼거나 압력을  넓기 힘들
  다는 거죠.우리가 먼저 그걸 확인한 다음엔....."
     
        
 소 제 목 : P군은 가명으로 입원해 있고

   "여기서 기다리자는 얘기야?"

   "어차피 그래야되지 않겠습니까?  우리는  누가 P군 어머니인지  모르
  니까 경비한테 부탁을 하는 거죠.  당신에게 더 알아야 것도 없고,물어
  야 할 것도 없으니 그집 사모님이라는 사람 나오면 우리에게 알려 달라
  고 말입니다."

   "그래. 그게 낫겠어. 얘기를 들어보니까."

   이번엔 남 형사 혼자  다시 경비실로 가 그 부탁을 했다. 그 집  주인 
  여자가 나오면 모자를 벗어 이쪽으로 한 번 흔드는 사인을 보내 달라고.
  그러면 우리도 당신에 대해선 무얼 물었다는 이야기를 하지 않겠다고 말
  했다.

   그리고 경비실이   보이는 쪽으로 한참  길을  내려와  거기에 아래에  
  주차 시켰던 자동차를 끌고 올라와 곧바로 출발할 수 있도록 준비시켜두
  었다. 

   경비한테서 사인이 온  건  그러고도 거의 한  시간쯤 후였다. 그동안  
  몇 대의 자동차가 그쪽에서 나왔지만 경비는  그냥 물끄러미 이쪽을 바 
  라보기만 했다. 그래서 이미 그 집 주인 여자가 나갔는데도 일부러 사인
  을 보내지 않고 있었던 게 아닌가 생각하고 있을 때 경비가 이쪽을 향해
  모자를 벗어 흔들었다.

   "자,타."

   김 형사가 먼저 조수석을 오르며 말했다.

   "알았어요."

   "지나가거든 바짝 붙어. 아래 신호등에서 놓지지 않도록......"

   "괜찮아요."

   그러는 사이 창문까지  검은색의 벤츠  560SEL이 그들  옆으로 미끄러
  지듯 지나갔다.

   "놓치면 내일 다시 나와야 돼."

   "괜찮다니까요. 주인을 태우고 난폭운전을 하는 기사는 없으니까."

   앞차는 양재동 사거리로 나와 강남대로  쪽으로 들어섰고,남형사도 바
  짝 그 뒤쪽으로  붙었다.그리고 큰 길에서 들어서선  바로  추격한다는 
  느낌을 주지 않도록 중간중간 차선을  바꾸어가며  일정한 거리를 두고 
  따랐다.  이윽고 자동차는 올림픽 대로변에 최근 크게 지어올린 병원으
  로 들어섰다.

   주차장에 도착해 우선  김 형사만  저쪽에서 눈치채지  못하도록 자동
  차에서 내렸다. 아무리 특수한   신분의 사람이더라도 자동차를 가지고  
  병원 현관으로 들어가는 사람은 없을 테니까.

   그러는 사이 남  형사도 저쪽과는 멀찍이 떨어진 쪽에 자동차를  주차 
  시키고 차에서 내렸다.

   "저 아주머니야......"

   "따라붙죠."

   여자는 기사와 함께  병원 현관문을 들어섰다.  두  사람도 뒤를 따랐
  다. 무엇보다 병실이 어딘지부터 확인하는  게 중요했다. 자동차  안에
  서도 두 형사는 그 이야기를 하고 왔다.

   우선 병실을 확인한 다음,환자와 직접 부딪치기  전에 병원 측을 통해 
  환자의 상태부터 체크해보기로 했다. 제보자의 말로는 목이  졸려 반은 
  죽다 살아났다고 했으니,상처의  상태라든가 진단 소견서만으로 공격을  
  받았으면 어떤 공격을 받았는지 알 수 있을 것이었다.

   여자는 병원 본관  건물 현관을 지나  그쪽과 통로가 연결된  다른 작
  은 병동으로가 엘리베티어를 탔다. VIP병실이 있는 동이었다.  김 형사
  는 여자와 함께 엘리베이터를  탔고,함께타면 이상할지 모르니까 남 형
  사는 계단으로 올라 뛰었다.

   여자는 5층에서 내려 다시 기사의 안내를  받으며 복도 끝쪽으로 걸어
  갔다. 엘리베이터보다 조금 늦게 남형사가  가쁜  숨으로 5층으로 올라
  왔고,두 사람은 여자가 들어가는 병실을 확인했다.

   "이제 병원 쪽에 알아보는 일만 남았군."

   그것을 알아본 다음   병실엔 여자가 나온 다음  들어가보기로  했다. 
  아무래도 보호자가 있을 때보다는  없을  때가 나을 것이었다. 사건 당
  시에  대한 이야기도 어차피 보호자가 아니라 본인에게 들어야 했다.

   그러나 병원 원무광에 내려가 알아본 바로는  환자의 이름부터 틀리게 
  나와 있었다. P군이  입원해 있는 병실 환자가   원무과의 기록 카드엔 
  정영훈으로 나와 있었다.

   "이름까지 바꾸어 입원한 것보니까 찾기는 제대로 찾은 모양인데요."
   남 형사가 말했다. 그러나 그쪽 기록  카드엔 가명으로 적은 인적사항
  만 나와 있을  뿐  환자의 상태에 대해서는 어차피   담당 의사나 병실 
  간호사와 부딪쳐야 했다.
     

 소 제 목 : 목을 조른 끈은 자전거 체인으로

   복도 중앙에 마련된  로비에서 서성이며 시간을 보내다 한  시간쯤 
  뒤 P군의 어머니가 나간 다음 김형사는 다른 간호원을 통해  P군 병
  실 담당 간호원을 불렀다.

   "경찰입니다."

   김 형사가  아까 빌라촌의  경비에게 했든 간호원에게도  경찰증을 
  보였다.어차피 정공법으로 나가야 할 것이었다.

   "무슨 일인데요?"

   병원까지 찾아온 경찰에 대해 간호원은 일단 놀라는  얼굴을 했다.
  김 형사는  아가씨에게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니라 환자에게  문제가 
  있어 먼저 아가씨를 보자고 했다고 말했다.

   아직 확실한  건 모르지만 환자는 지금  어떤 사건과 관련이  있는 
  것 같다.우리도 곧 환자를  만날 것이지만 그 전에 먼저 환자의  상
  태에 대해서 알고  싶다.그런 뜻을 전하자 간호사도 순순히  환자의 
  상태에 대해서 말했다.  무엇엔가 졸린 듯 목에 큰 상처가  있고,그
  곳 한 곳이 찢겨져 여러 바늘을 꿰맨 수술도 받았다고 했다.

   "다른 데는요?"

   "몸에 여러군데 멍이 든 것 말고는 없어요."

   "입원은 어느 정도 해야 합니까?"

   "본인도 그렇고 보호자들도 빨리 데려갔으면 하는 것  같은데 아마 
  며칠은 더 있어야 할 것 같아요."

   처음 끊어진 진단은 4주라고 했다.

   "그 환자가 무슨 죄를 지었나요? 부잣집 아들 같던데....."

   "아뇨,환자가 지은 게 아니라 다른 사람이 환자에게요."

   "그런 사람으론 보이지 않던데......"

   "다른 사람의 공격을  받은 모양입니다.혹시 사고 당시 경위에  대
  해 무슨 말을 하는 걸 들은 적은 없습니까?"

   "일체 안 해요. 왜그랬냐니까,집에서 어떤 끈을 가지고  장난을 하
  다가 그  끈에 목이 걸려서 다쳤다고만  했어요. 보니까 보통  헝겊 
  끈에 그랬던 것 같지 않던데......"

   "병원에서 보기엔 뭐로 그랬건 같습니까?"

   "우리는 모르고 선생님들 말씀으론 자전거  체인 같다고......목에 
  멍으로 남은 흔적도 그렇고......"

   "잘 알았습니다. 지금 면회가 되죠?"

   "되긴 하지만,경찰에서  오셨으면 먼저  담당 선생님을 보고  나서 
  찾아가는 게 좋을 거예요."

   간호사의 말에 따라  김 형사는 의사를 좀 불러달라고 말했다.  이
  제 어느 정도  심증은 굳었지만 아우래도 의사를 만나 처음  병원에 
  왔을 때의 상태와 과정에 대한 이야기를 듣는 게 좋을 것 같았다.

   간호사가 전화로 호출하자  잠시 후 의사가 왔다. 이번에도 김  형
  사가 나서서 인사를 하고 환자에 대해 물었다.

   "우리들도 어떤 사람인지 모르고 있었는데......"

   "처음 여기는 어떻게 왔습니까?"

   "보호자가 자동차를 태워 데리고 왔어요. 그날  제가 당직이었는데 
  아마 밤 한시가  헐씬 지나 다음이었을 겁니다. 그래서  응급실에서 
  지혈을  하고  바로 수술실로  옮겨  목부분에  난  상처를  꿰맸는
  데......."
         
 소 제 목 : 경찰과 대면한 그 오렌지족은
   "사고 경위에 대해 무슨 말을 들은 건 없는지요?"

   "집에서 혼자 위험한 장난을  하나가 실수를 해서 그렇다고 했습니다. 
  그렇게 보이지 않았지만 그건 우리  의사들이 알 일이 아니라서 이상하
  다,하면서도 그냥 넘겼지요."

   "환자가 어떤 집안의 자제라는 것도 아셨습니까?"

   "예. 저는 대충 나중에 들었습니다."

   "그럼 지난  겨울 저 학생  때문에 세상이 떠들썩했던  일도 아시는지
  요."

   "예. 그 얘기도 나중에요. 그러니까  여기에 입원해 있는 것도 비밀로 
  해달라는 얘기를 했구요."

   "아시는군요. 저희들도 어떤 제보를  받고 찾아왔습니다. 혹시 환자의 
  사고가 그때 그 일이거나 또다른  일과 관련이 있을지 모른다는 제보가 
  들어왔습니다."

   그러면서 김형사는 의사에게 처음 입원할  당시 P군의 몸에 난 상체에 
  대해서 집중적으로 물었다. 의사는 상처 상태가 환자의 생명을  위협할 
  정도까지는 아니었지만 상처가 부위가 바로 목이라는 점에서 조금만 더 
  큰 상처를 입었다면 정말 생명까지 잃게 되었을지 모를 일이라고 했다. 
  그건 허벅지에 깊숙이  한 상처보다 가슴에 작게 난  상처가 더 위험해 
  보이는 것과 같은 것이라고 했다.

   "우리가 환자를 면담해도 되겠지요."

   "우리로선 막을 방법이  없는 거지요. 환자의 상태도  면담에 못 응할 
  정도가 아니고 이제......"

   "일부러 기다렸습니다. 보호자가 없을  때 만나보는 게 여러가지로 좋
  을 것 같아서.......그리고 또 한가지 부탁드리고 싶은 것은........"

   김 형사는 다시 담당의사에게 면담을 할 때 담당의사나 간호원도 들어
  오지 않은 상태에서 하고 싶다고 말했다.

   "그건 좀 곤란한데요.어떤 환자든 병원 수칙도 그렇고......"

   "그래서 부탁드리는 겁니다. 사람이 있는 경우와 없는 경우,진술 태도
  가 달라지기 때문에......  저희가 환자를 따로 어떻게  하겠다는 것이 
  아니라......."

   "압니다.그렇지만...... 우리가  걱정하는 건 그런 면담  도중 환자가 
  또다른 자해 행위라든가 돌발 행위를 할 수 있다는 거지요."

   "그건 저희들이 책임지겠습니다. 저희들도  그런 상황을 전혜 예측 않
  고 환자를 만나는  것도 아니고요. 그리고 면담이  끝나기 전 선생님께 
  연락을 저희와 환자 관찰에 대해 차질이 없도록 하겠습니다."

   "그럼 처음 면담을 하러 들어갈 때에도 저희하고 같이 들어가죠. 그럼 
  되겠지요?"

   김 형사는 좋다고 말했다.

   의사가 앞에 서고 두 형사가 뒤에 따랐다. 병실엔 목과 머리에 붕대를 
  감은 환자 P군 혼자 비스듬히 누워 있었다.

   "좀 어때요? 학생."

   의사가 물었다.

   그러나 첫눈에 P군은  의사의 말보다 뒤에 따라들어오는  두 형사에게 
  신경을 쓰는 것 같았다. 아무리 사복을  입어도 달리 보이는 구석이 있
  을 것이었다.

   "괜찮습니다.그런데......"

   "아,학생을 찾아온 손님입니다. 경찰이예요."

   다시 의사에 그 말에 P군은 얼굴을 찡그렸다.
    
          
 소 제 목 : 여자친구를 데리고 호텔로 가서

  "다친 데는 좀 어때요?"
   
   남 형사가 P군에게 물었다.

   "그래서 다친 게 아니라니까요."

   "그래서 다친 게 아니라는 게 무슨 뜻이죠?"

   이번에도 남 형사가 다그치듯 물었다.

   "경찰이 생각하는 것처럼 사고로 다친 게 아니라는 얘깁니다."

   "이봐요,학생.우리도 여기 올  때는 알 것 다 알고 왔습니다.  P군
  을 그렇게 한 사람이 자기가 그렇게 했다고  말했는데도 아니라고만 
  할 겁니까?"

   "......."

   "그렇게 한 사람은  있는데 당한 사람이 아니라면 그것도 말이  되
  지 않는 소리 아니오? 안 그래요?"

   "그럼 잡았습니까? 그 사람......"

   "아직 붙잡지는 않았지만 그 놈이 제보를 해  왔어요.자기가 P군을 
  그렇게 했다고.....크리스마스 바로 전전날,맞지요?"

   "......"

   "얘기를 해 봐요. 그날 무슨 일이 있었는지 자세히......  이미 이 
  일은 우리 경찰뿐 아니라 신문사한테도 다 알려졌어요.  이제 P군이 
  P군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은 그날 P군이 당한 일을 그대로  설명하
  는 것밖에 없어요. 그놈이 신문사에 말한 것처럼 기사에  나가는 것
  보다는 P군이 겪은 대로  말하는 게 나가는 게 그래도 낫다는  거예
  요. 그놈도 제보를  하면서 P군을 의도적으로 나쁘게 말할 수도  있
  으니까......"

   "정말 그 놈이 전화를 한 겁니까?"

   "그러잖으면 우리가 어떻게 알겠어요.그놈하고 P군하고  두 사람만 
  아는 사이의 일을. 그  놈을 전에도 본 적이 있습니까? P군을  그렇
  게 만든 놈을 말이요."

   "아닙니다. 없어요."

   "그럼 그날  있은 일을 다 얘기해봐요.어디서  어떤 일이 있은  거
  지.우리도 그놈 말만 들을 수 없는 거고."

   "정말 그 놈이 전화로 자기가 그랬다고 말했습니까?"

   "그렇다니까요. 자기가 화가 나서 P군을  그렇게 했다고......그러
  면서 어디 한 번 자기를 잡아보라고 말이오."

   "나는 그 놈을 몰라요. 그 놈이 나한테 느닷없이  달려들어 그랬던 
  거지......"

   "그러니까 P군 입장에서  자초지종을 말해 보라는 얘기예요.  우리
  한테.그래야 우리도 그놈의  인상 착의를 가지고 그놈을 검거할  수 
  있는 거니까...... 정말 모르는 사람이었어요. 아니면  아는 사람이
  었어요?"

   "모르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럼 그날 밤 어디서 그랬어요.말해봐요?"

   "양평으로 가는 길 쪽이었습니다."

   "그렇게 말하지 말고 거기 어디서 어떻게 그랬는지  자세히 말해봐
  요."

   그러자 처음과  달리 P군은 옆에  의사가 있는 걸  부담스러워하는 
  것 같았다.  얼굴에 많은 부분 붕대를  감고 있었지만 이제  어차피 
  말하지 않을 수  없다고 판단한 얼굴이었다.대개 그런 경우  처음엔 
  경찰을 불편하게 여기며  잡아떼던 사람들도 이제 어쩔 수  없구나,
  하고 판단되면 그 다음엔 경찰보다는 자기 옆의  사람들을 곤혹스럽
  게 여기기 마련이었다.

   "저희들끼리 조용히 얘기를 하고 싶은데요."

   김 형사가 그런 P군의 눈치를 알고 의사에게 말했다.

   "그렇게 해도 되겠어?"

   의사가 P군에게 물었다.

   "예."

   이제 그도 반은 체념한 얼굴을 했다.

   "자 다시 처음부터 얘기를 해봅시다. 그날 어떻게 된 건지......"

   의사가 나가고 이제 그와 두 사람의 형사만 남게 되자  다시 남 형
  사가 물었다.

   "양평 가는 길 어디에서 그랬어요."

   "거기 이름은 모르고 어느 호텔에서 그랬습니다."

   "거기 러브호텔 많은데 말이오?"

   "예."

   "거기 그 시간에 혼자  갔을 리는 없을 테고 누구하고 같이 간  거
  지요?"

   "예."

   "여자 친구입니까?"

   "예."

   "그런데 어떻게 된 건지를 얘기해봐요."

   "방에 있는데  전화가 왔습니다. 자동차를 좀  빼달라고......그래
  서 옷을 입고 키를 가지고 내려갔는데......"

            
 소 제 목 : T는 그 오렌지족을 불러낸 다음...

   "그게 몇 시입니까?"

   남 형사가 P군의 말을 자르고 물었다.

   "열 시 반이 조금 넘어서입니다."

   "그래서요?"

   "저는 자동차를  주차장에 제대로 주차  시켜놓았는데,이상하다,하
  면서도 내려갔습니다.호텔 바깥 주차장에요."

   "계속 얘기를 해봐요."

   "자동차가 있는 곳으로  내려갔더니 제 자동차 앞에 아무 것도  없
  는 겁니다.그래서 호텔  프론트에서 뭔가 잘못 알고 그랬는가  보다 
  하고 자동차를 다시  둘러보고 올라오려고 그러는데 그놈이  다가왔
  습니다.주차장 저쪽에서 제 자동차가 있는 쪽으로요."

   "그럼 그 놈도 자동차를 가지고 왔다는 얘긴가요?"

   "아뇨.나중에 보니까 그놈은 바깥에 세워두었던 것 같습니다."

   "그렇게 다가와서는요?"

   "제 이름을 대며 맞느냐고 그래요."

   "얼굴은 보았어요?"

   "예. 어두워서 자세히는 못 보았지만......"

   "이름을 묻고 나서는요?"

   "자기는 어느 신문사 기자인데,나한테 조용히 알아볼  것이 있어서 
  그렇게 뒤를 따라와 내려오라고 했다면서 지난 겨울에  있은 이야기
  를 하며 맞느냐고  다시 물었습니다. 대답을 안하니까 다시  맞느냐
  고 물었고요."

   "신문 기자라고 말입니까? 그래서 그걸 믿었습니까?"

   "지난 겨울 그 일을 이야기를 하니까......."

   "그랬더니요?"

   "몇 가지만 물으면  된다면서 여기서 그러면 다른 사람들 눈에  띄
  고 그러니까 밖에  자기 자동차 있는데로 가서 얘기를 하자고  했어
  요. 내일  아침까지 넘겨야 할 기사인데  그냥 몇가지 확인할  것만 
  물으러만 온 거니까  제가 협조하는 것에 따라 기사 내용이  달라질 
  수도  있다고 했어요.  또 여자  친구하고 함께  온 것도  안  다면
  서......"

   "그래서 밖으로 따라 나간 거야?"

   이번엔 김 형사가 말을 놓으며 물었다.

   "예. 저는  잘 모르고,또  같이 온  여자 친구  애기도 하고  하니
  까......"

   "자동차 있는 데로?"

   "아뇨.자동차가 있는 데로  걸어가면서 내가 외국에 나가 있는  동
  안 국내에서 그런 일이 터지고 있었던 걸 아느냐고 물었어요."

   "그래,참 그 일은 알고 있었던 거야?"

   "예.재판 중에  첫 사건이 터졌으니까 그런  일이 있다는 건  알고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그게 지난 겨울,우리 일 때문에  그랬다는 건 
  전혀 모르고 있었습니다. 그놈도 그걸 물었고요."

   "그래서 자네는 모른다고 얘기를 했고?"

   다시 김 형사.

   "예."

   "국내에 들어와서도 그 얘기를 못 들은 거야?"

   "예. 누구도 얘기를 해주는 사람이 없었어요."

   "그동안 친구들도 안 만났어."

   "친구들도 그런 얘기를 안 했어요."

   "그래,모른다니까 뭐래?"

   "그놈이 장본인이  모르면 되겠느냐면서 얘기를 했어요.세번째  사
  건이 발생하면서 그 연쇄 살인 사건의 직접적 동기가 지난  겨울 우
  리가 그랬던 폭행 사건이었다는 게 드러났다고......"

   "그리곤?"

   "그때 그 놈이  그놈이 제 몸 바로 옆에 붙어서서,이봐,담배  가진 
  것 있어,하고 묻고 나선,제가 담배를 꺼내려고 주머니에  손을 넣는
  데 순식간에 그 놈이  어떤 쇠줄로 갑자기 제 목을 졸랐습니다.  제
  가 어떻게 할 사이도 없이......"

   
 소 제 목 : 그가 사건을 신고하지 않은 이유는

   "그리고는?"

   "모르겠습니다. 얼마만큼이나  그렇게 목이  졸렸는지......그러다 
  제가 손으로는 줄을  잡고 뒤로 발로 그를 공격했습니다.아마  그때 
  그의 급소를 친  모양입니다.그렇지 않았으면 저는 그 자리에서  죽
  었을 겁니다. 급소를  맞았는지 그 놈이 윽,하고 짧은 비명을  질렀
  고,그 사이 제가 손으로 잡은 줄을 잡아챘습니다."

   "그래서 풀려난 거야?"

   "예.그러자 그 놈이 다시 공격해올 생각보다는  앞쪽으로 도망가기 
  시작했습니다. 저도 그땐 그 놈을 더 쫓을 힘이 없었습니다."

   "그러고 나선......"

   "목이 졸린 자리에  피를 많이 흘리고 있어,이러다가 잘못되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으로  주차장으로 와 친구한테 얘기도 안 하고  바
  로 집으로 차를 몰고 왔습니다."

   "이러다가 잘못되는 것 아니냐고 느낄 정도인데도 호텔에  있는 다
  른 사람들한테 도움을 안 청하고 말이지?"

   "예....."

   "그건 왜 그랬는데?"

   "알려지면 시끄러워질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지난 겨울  일과 겹쳐
  서....."

   "가해자가 누구라고 생각했어요? 그때 느낌으로......"

   "목이 졸릴 때  순간적으로 그 놈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피를  많이 
  흘리면서도 도움을 받을  생각보다 집으로 와야겠다고 생각한  것도 
  사실 제가 그놈한테  공격을 당했다는 걸 알려지는 걸 원하지  않아
  서였구요."

   "그러니까,공격       받을 때  처음부터 알고  있었다 이  말이지
  요?"

   "예......"

   "나중에 신고를 안 한 이유도 그래서고 말입니까?"

   "예."

   "집안 어른들도 같은 생각이었나?"

   "예."

   "그럼 이제 그놈에 대해서 말해봐요."

   남 형사가 침대 옆으로 다가가 앉으며 말했다.

   "꽤 오랫동안 같이  있었는데도 키가 크다는 것 말고는 크게  기억
  나는 게 없습니다. 다시 보면 얼굴이 생각나도......"

   "좋습니다.그럼 그 기억만으로도 몽타지는 만들 수 있겠군요."

   "예. 얼굴 부분은.....  바깥이 추워 털모자를 쓰고 있어 머리  부
  분과 옆 얼굴은 볼 수 없었지만...... 키가 무척  컸습니다. 저보다
  는 5cm 이상 큰 것 같았고,힘도 대답히 좋았습니다.  제가 뒷발길로 
  한 공격이 급소를  치지 않았다면 아마 그대로 당하고 말았을  정도
  로......"

   "됐습니다. 잠시 후 다시 이야기하도록 하죠....."

   거기까지 이야기하고 김 형사와 남 형사는 일단 복도  밖으로 나왔
  다. 아직 확실한 건 아니지만 이제 그 연쇄 살인  사건의 마지막 피
  해자인 동시에 제대로 된 목격자가 나타난  것이었다.두사람은 밖으
  로 나와 서에 남아 있는 반장에게 무전 연락을 했다.

   "바로 그 놈입니다."
   

 소 제 목 : 이제 사건의 동기와 그 끝이

   연락을 하며 김 형사는 얼마간 흥분하고 있었다.

   "P군 말이야?"

   저쪽에서 석 경감이 물었다.

   "P군도 그렇고 그놈도 그렇고요. T라는 놈 말입니다.  그놈이 공격
  을 했어요.P군이 여자친구와  양평 어디 러브호텔에 가  있는데까지 
  찾아가 쇠줄로 목을 조르는 식으로 공격을 했던 것입니다."

   "T가 확실해....."

   "예,저희 생각엔요...... 기자를 사칭해서 접근한 다음  연쇄 살인 
  사건에  대해  말하더랍니다.그  사건의  직접적  동기가  너였다면
  서......"

   "사람을 더 보낼까. 아니,내가 나가겠어. 거기 어디야?"

   "병원입니다. 올림픽 대로 변에 있는..... 그 병원  브이아이피 동 
  5층 503호실입니다. 신고는 왜 안 했다는 거야?"

   "저희가 짐작했던  대롭니다. 지난  겨울에도 그런 일이  있었는데 
  다시 시끄러워질까봐 그랬답니다. 지금 나오실 겁니까?"

   "나가야지. 뭐 따로 필요한 건 없고....."

   그때 남 형사가 김 형사에게 자신을 좀 바꾸어달라는  사인을 보냈
  다.

   "잠시만요.남 형사가 뭐 할 이야기가 있는 모양인데요?"

   "바꿔봐."

   "남 형삽니다."

   "그래. 애썼구만......"

   이제 범인을 잡을 수 있는 단서를 찾게 되었다는 것에  대해 석 경
  감도 흥분하고 있는 듯했다.

   "저,아침에 왔던 김기자 말입니다."

   "김 기자가 왜?"

   "김기자한테 연락이 되면 바로 연락을 좀 해주십시오."

   "그건 천천히 해도 되잖아."

   "아닙니다. 제 생각인데,먼저  언론에 사건을 터뜨려놓는 게  나을 
  것 같습니다.그래야 수사를 하는데 외압도 없을  것 같고......사건 
  성격상 어치피 공개 수사를 해야 한니까......."

   남 형사가 말하는  외압이 어디서 어떻게 들어올 외압을  말하는지 
  석경감도 본능적으로 눈치를 챘다.

   "알았어. 그렇게 하지.그런데 보호자들도 만나본 거야?"

   "아닙니다. 일단 보호자들을 따돌리고 접근을 했습니다."

   "알았어. 계속 알아봐. 지금 나갈 테니까....."

   일단 중간보고를 끝낸  다음,두 형사는 다시 P군의 병실로  들어갔
  다. P군은 아까보다  조금은 초조해 하는 얼굴로 침대 등받이를  기
  대고 앉아 있었다.

   "집엔 연락을 했습니까?"

   "예......"

   "뭐라고 해요? 어른들이."

   "경찰이 어떻게 알았느냐고.그리고 아무 말도 하지  말고 기다리라
  고....."

   "이건 아무 말을 하지 않는다고 해결될 일이 아님을 알죠?"

   "......"

   "그리고 실제로도 그  연쇄 살인 사건의 직접적 동기가 지난  겨울 
  학생들이 벌인 소란 때문이었다는 것도 알고......"

   "......."

   "이건 비빌리 수사를 할 일이 아닙니다. 이제 학생의  진술을 바탕
  으로 공개적으로 범인을  찾아야 해요. 비밀리 수사를 한다면  그놈
  이 학생을 공격해왔던 일도 어떻게 묻을 수 있겠지만 이  사건은 그
  럴 성격의 사건이 아닙니다. 앞으로 학생도 현장에 우리와  함께 나
  가야 하고....."

   못을 박듯 남  형사가 말했다. 잠시 후면 서에서 반장이  나오고,P
  군의 집에서 보호자가 나올 것이었다.


 소 제 목 : 그럼 사건의 제보자는 누구인가?

   지난 겨울,첫 사건이 발생했던 강남 부녀자  연쇄 살인 사건은 그렇
  게 다시 경찰의 수사 전면에  떠올랐다. 아니,경찰 수사에만 그런 게  
  아니라 한동안 잠잠하던 모든 언론 매체의 전면 떠오른 것이었다. 

   사람들은 한동안 잠잠하던  그 연쇄 살인 사건이 비록 미수에  그치
  긴 했지만 다시  발생했다는 것 만큼이나 그  다섯 번째의  표적물이 
  지난해 이맘 때 발생한 <그랜저의 프라이드 폭행  사건>의 직접적 당
  사자인 P군이라는 사실을  더 놀라워 했다.

   신문과 방송도 이젠 더 이상 가리고 말고 할 게 없었다.

   사건을 특종보도한  H신문 역시 <강남 시민   연쇄 살인 사건>(다섯 
  번째 목표물이 P군이었음이 드러나며 <부녀자>라는  말 대신 그 자리
  에  자연스럽게 <시민>이  들어서고)의 사건 발생  일지와,범인이 이
  득지를 통해 말한   사건 발단 동기,그리고 <그랜저의 프라이드 폭행 
  사건>에 대해 당시의   정황과 이후 재판 과정 등을 자세하게 설명하
  고 있었다. 붕대를 감고  누운  P군의 사진도 크게 나오고,사건이 발
  생 당시 P군이 투숙했던 호텔 사진도 크게 실렸다.

   강남서의 석 경감이 나오고  H신문 김 기자가 나왔을 때 뒤늦게  연
  락을 받고 나온 P군의   부모들도 이미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사건
  은  언론사 기자들에게까지 흘러들어가 어떠한 영향력도 발휘할 수가 
  없었던 것이었다.

   H신문 김 기자는 다섯 번째 사건이  발생하고도 나흘 후에야 그것이 
  세상에 알려지게  된 과정에   대해서도 자세하게  설명했다. 범인의   
  공격으로부터 목숨을 잃을 뻔한 피해자가 먼저 사건을 감추고 있었다
  는  점에 대해 기자는 기사의 많은 비중을 두었다.

   문제는 그것을  처음 신문사에 알려온  제보자가 누구냐 하는  점이
  었다. 기사를 쓰며 그곳  호텔에 연락을 했을 때,호텔  종업원들조차 
  그런 일이 발생했는지 까마득히  모르고  있었다. P군과 함께 투숙한  
  여대생 역시 그러 일을   모른 채,P군이 자기를 두고 혼자 집으로 돌
  아갔다고만 생각하고 있었다. 

   김 기자는 혹시 그 제보자가 역으로 범인일지도 모르는 일이라고 썼
  다. 
   만약 그렇다면 그것은  무엇을 말하는가. 목숨을 잃을 뻔한  피해자
  는 오히려 쉬쉬하고 남의  목숨을 앗으려했던 범인은 언론사에  그것
  을 연락해 오고. 어쩌면  이 사건을 통해 범인이 자신의 뜻을 알리고
  자  했던 가장 핵심적인 의미들이 그 질문에 있는 것이 아닐까?  

    <피해자는 쉬쉬하고 범인이  제보해(?)>라는 제목으로 쓴 박스  기
  사는 그런 의문을 마지막 문장에 달았다.

   사실 경찰로서도 가장 궁금한 것이 그것이었다.

   과연 누가 그 사건을 경찰이 아닌 신문사 쪽으로 제보를 했겠는가.

   "어떻게들 생각해?"

   형사들과 함께 P군을 사건 현장에  데리고  나갔다 온 석 경감이 형
  사들에게 물었다.

   현장에 나갔을 때,호텔  종업들을 상대로 이미 알아볼 만한  사항들
  을 알아본 다음이었다.

   그리고 비록 미수에 그치긴  했지만,이번 역시  사건 현장에 이렇다 
  할 증거 같은 것은 없었다. 그러나  석 경감은 이번엔 틀림없다는 자
  신을  하고 있었다. 범인의  얼굴을 본 P군이 있었고,  사건 실패 후 
  도주하는 범인의 차량을   본 목격자가 나타날지 모를  일이었다. 아
  니,그 목격자가  아니더라도 아직  병원에  입원해 있는 채 P군이 경
  찰의 몽타지 제작을 돕고 있었다.
         

 소 제 목 : 우리시대의 가장 상징적인 사회적 사건

   "김 기자 추측대로 과연 그 놈이 전화를 했겠느냐는 거야?"

   다시 석 경감이 형사들을 둘러보며 물었다.

   "현재로선 그렇게밖엔 생각할 수 없겠는데요."

   박 형사였다.

   "그렇게밖엔 생각할 수 없다는 건 뭐야?"

   "일단 그 사건을 알고 있는  사람이  없잖습니까? P군도 현장에서 바로 
  집으로 와 병원에 입원을 했고,P군  가족이 그걸 다른 데 알릴 일도  없
  었을 테고요. 그래도 유일하게 알 만한 쪽은 호텔 쪽인데 그곳에도 사건 
  자체를 몰랐다는 식이고."

   "그럼 그 놈이 왜 아무도 모르는  일을  자기 입으로 제보를 했냐는 거
  야? 그것도 앞 뒤가 안 맞잖아.  사건 나고 나서도 나흘 후에 연락을 한  
  거라면 이제 자기만 입을 다물면 아무도 모를 일을 말이지."

   "그게 신문에 난대로 이번 사건의 핵심적 상징이니까요."

   잠자코 뒤에 있던 남 형사가 앞으로 나섰다.

   "뭐가 가장 핵심적 상징이데?"

   "그놈도 처음부터 제보할 생각은 아니었겠죠. "  

   "그럼?"

   "처음부터 제보를 할 생각이면 그때  제보를 하지 않았겠습니까? 아니,
  처음엔 제보를 하고 말고  할 생각조차 필요가 없었던 거겠지요. 누구나  
  그런 일을 당하고 나면 자연히  피해  신고를 할 테니까. 그런데 며칠이 
  지나도  신문에 그것이  나지 않는다는 얘기죠.하루를 기다리고  이틀을 
  기다리고 사흘을 기다려도  말이죠. 그러니까 비로소 P군 집에서 신고를 
  하지 않는구나 하는 걸 알았겠구요."

   "이봐,남 형사."

   이번엔 반장 대신 김 형사가 남 형사를 불렀다.

   "예."

   "그럼 범인   입장에선 천만 대행인  거 아니야?  살인은  미수로 그쳤
  고,피해자가 신고를 않으면 범인  입장에서야 하늘이 돕는 거지. 신고를 
  하면  앞에 있었던 일까지 다  드러나는데. 거기다 피해자가  자기를 분
  명 보았을   테고,현장에 자신도 모르는 어떤  물증 같은 걸 남겨놓았을 
  수도 있는 거고......"

   "바로 그 점입니다."

   "그점이라니?"

   석 경감이 이마 사이를 좁히고 물었다.

   "범인이 자기 안전보다 더 크게 생각했던  것이 이번 사건이 바같에 알
  려지는 것이라는 거죠. 그러니까   그 일로 자기가 붙잡히는 한이  있더
  라도 P군이 자기에게 그런 공격을 받았다는 것을 알리고  싶었다,이겁니
  다. 그동안 우리도 그렇고 언론도  그렇고,  아무리 그것을 인정하지 않
  으려  해도 이건 단순한   연쇄살인 사건이 아닌 우리 시대의 가장 상징
  적인 사회적  사건이니까.  비록 미수에 그쳤다 하더라도 응징만 미수에 
  그친 것이지 범인  입장에서 보면 사건의 반향은 성공했을 때와 같을 테
  니까. 아뇨,결과론이긴  하지만 지금으로선 미수에 그친 것이  더 큰 울
  림으로 다가오고  있는 것인지도  모르죠.  자기의 범행을 증언할  증언
  자도 있고,또 그 증언자가  이번 사건의 직접적 동기를 부여한 장본인이
  기도 하니까."

   "그렇다고 해도 자기가  저지른  사건을 자기가 제보할 수 있는  거야? 
  범행이 성공한 다음 어떠한 물증도  남기지 않고  목격자도 없는 상태에
  서 세상을 비웃듯  그렇게 대담하게 자기 범행을  제보하는 것도 아니고 
  말이지."

   "제 생각은  그렇습니다. 처음 P군이 그런  공격을 당했을 때 김  형사
  하고 같이 그쪽으로 나가면서부터 왠지   제보자가 그 놈일 것 같은  생
  각이 들었습니다. P군이 공격 당했다고 했을 때,이제  이 사건은 끝나는
  구나 생각했었으니까요. 그놈이 붙잡혀서도  끝나겠지만 누가 보든 범인 
  입장에서  P군이나 그때  그랜저를 타고 있었던 사람들만한 마지막 표적
  물도 없다는 거죠.

   그 놈이  제보를 해왔다는   것도 같은 뜻으로 해석하면  됩니다. 다음  
  번 공격 표적물이 있다면 미수에  그쳐도 절대 그 놈은 신고를 하지  않
  았을 겁니다. 왜냐면 다음번  표적물을 공격해야  하니까 오히려 자신한
  테 수사망이 좁혀지기  전  그 일을 서두를지도 모르죠.  그러나 범인이 
  테러 상대를 P군으로  정했다는 것은 이번 사건의 동기로 보나  뭐로 보
  나 이제 그것으로 자신의  테러를 정리하겠다는 뜻이 된다는 겁니다. 그
  러니 미수에 그쳐도 자기   스스로 제보할 수 있는 거구요. 그놈한테 현
  재 중요한 건 자신의 안전보다   이 사건이 사회적으로 알려지길 바라는 
  쪽이니까."

   남 형사는  자신의 생각으로 명쾌하게  그 부분을 설명했다.서로  묻고 
  대답하곤 했지만 다들 어느 정도 같은 생각들을 하고  있던 부분을 단지 
  그가 좀 더 논리적으로 설명했던 뿐이었다.

   이미 사건은 그런 사건이  아무도 모르는  사이 발생했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세상을 뒤집어놓고 있는 다음......   

       
 소 제 목 : 사건 제보자에 대한 여러 추측들

   정말 그 사건으로  세상은 발칵 뒤집힌 듯했다. 경찰은 경찰  대로 
  범인 추적에 바빴고,언론은 이제까지의 사건과  경찰의 움직임,그리
  고 그 사건이 불러일으킨 사회적 관심을 알리기에 바빴다.

   예전 같으면 연말을 맞아 흥청망청할 압구정동과  서울의 유흥가도 
  그 사건 보도 이후  예년과 다른 연말을 맞이하고 있었다. 둘만  모
  이면 사람들은 그 사건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정말 범인이 자신의 범행을 스스로 제보했겠느냐,하는 것도  이 사
  건의 수수께끼이자 많은 사람들의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만약 그랬
  다면 그런 제보 자체가 자신의 목을 걸 올가미임을 누구보다  잘 알 
  사람이 바로 범인이지  않는가. 그런데도 범인이 미수로 그친  자신
  의 범행을 제보한다는 것은 보통 뜻이 담긴 것이 아닐 것이었다.

   신문과 방송들도 처음엔 사건 자체에 많은 초점을 맞추다  점차 그 
  제보자가 누구냐 하는 쪽에 관심을 두기 시작했다. 그건  경찰도 마
  찬가지였다.

   그러나 이 경우도 두 가지 이상의 가능성은 없었다.

   하나는 그 사건을  목격했거나 들은 제 3의 인물이 있을  것이라는 
  것이었고,또 하나는 범인 스스로 그랬을 경우였다. 그것  역시 범인
  이 어디에 사는  누구이며 어떤 사람인가 하는 것 만큼이나  세인들
  의 관심의 대상이자 흥미의 대상이었다.

   또 제 3의  인물일 가능성을 이야기하는 부분에서도 그 사건의  목
  격자는 처음부터부터  배제될 수밖에 없었다.  우선 제 3의  인물이 
  목격자일 경우엔 처음엔  익명의 제보를 하더라도 그것으로  사건이 
  표면으로 드러난  다음에까지 익명으로  남아 있을 이유가  없었다. 
  호텔 종업원이라도 그렇고 인근의 주민이라도 그랬다.  또 이제까지 
  경찰의 탐문 수사로도  가장 가능성이 높은 호텔 쪽 사람들은  처음
  부터 그 일을 모르고 있었다.

   그러면 제 3의 인물 중 남는 건 P군의 친구들이거나  가까운 친척,
  혹은 주변 사람들인데  가족들의 말을 빌리면 누구도 그 일을  알고 
  있는 사람이 없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건 병원 쪽도  마찬가지였
  다. 그날 밤늦게 병원으로 와 응급수술을 받고 이후  며칠간 입원해 
  있는 동안 그가  지난해 겨울 <그랜저의 프라이드 폭행 사건>의  당
  사자인 P군임을  알고 있었던 사람은 병원장  외에 몇 명밖에  없었
  다. 모두들 뭔가  좀 대단한 집안의 아들인가보다 하는  정도였다고 
  했다.

   그렇다면 처음  H신문의 기자가 쓴  대로 범인 스스로일  가능성인
  데,이제 언론은 그 부분에 대해서까지 침묵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범인이 제보자라면 그는  왜 피해자조차 침묵하고 있는 사건을  자
  신의 검거 위험까지 무릅쓰고 제보를 했는가?

   그 부분에 대해  신문들은 범인의 대담성과 제보 이후에도  수사망
  을 피할 수 있다는  확신에서 그랬을 수도 있고,또 하나는 앞서  남 
  형사가 지적한 부분들에  대한 이유들을 이야기했다. 물론 두  가지 
  가능성 다 함께 이야기했지만 힘과 설득력은 앞쪽보다  뒤쪽에 실렸
  다.

   그러다 P군의  사고 당시 진술을  바탕으로 만든 범인의  엉성하기 
  짝이 없는 몽타지가 나오고,그것이 전 신문에 실린  이후,앞쪽의 이
  야기도 조금씩 설득력을  갖고 고개를 들기 시작했다. 당시  범인은 
  머리와 이마 부분을  완전히 가릴 에스키모 형 털모자를 쓰고  있어 
  우선 얼굴의 전체적인  윤곽이 모호했고,눈과 코와 입 부분들도  나
  중에 범인을  검거하여 범인의 실제  얼굴과 몽타지로 잡은  얼굴이 
  과연 그 얼굴이 이  얼굴일까 미리 걱정하지 않을 수 없을 만큼  시
  작부터 몽타지 자체가  뭔가 잘못된 게 아닌가 하는 느낌을  주기에 
  충분했다. 

   나이 20대 후반.키  185cm 정도. 체격 건장함.서울말을 씀. 그  설
  명만으로는  아무래도  부족한  몽타지였고,하루가  지난  다음에도 
  <185cm 정도의 키에 체격 건장한 서울말을 쓰는 20대  후반의 남자>
  혹은 <P군이 말한 사건  당시의 복장을 전에 입고 다니던 키 큰  남
  자>에 대한 제보들은  들어와서 <몽타지와 비슷한 얼굴>에 대한  제
  보는 거의  들어오지 않았다. 몽타지를  만들 당시 P군조차도  밤에 
  잠시 본 범인의 얼굴에 대해 뚜렷한 윤곽을 잡지 못하고  있던 것이
  었다. 눈은 잘 모르겠어요. 정면으로 자세히 안 봐서 컸던  것 같기
  도 하고 그런 것  같지 않은 것 같기도 하고,하는 진술을  바탕으로 
  만든 몽타지인 셈이었다. 

   그러자 다시 자연스럽게  고개를 쳐들고 나온 것이 범인의  대담성
  과 제보 이후에도 범인 스스로 수사망을 피할 수 있다는  확신을 가
  졌기에 그런 제보를 할 수 있었던 것 아니냐는 식의 이야기였다. 


 소 제 목 : 이 사건에 대해 이득지는

   바같으로 그런 이야기가  오가는 중에 남 형사는 오랫만에  이득지
  의 사무실을 찾아갔다.

   지난 번 네번째 사건  이후 한 때 잠잠하던 이득지의 사무실도  사
  건과 함께 다시 많은 사람들의 발길로 붐볐다.

   "그동안 잘 지내셨는지요?" 

   문을 열고 들어서며 다른 사람과 함께 소파에 앉아  있는 이득지에
  게 남 형사가 인사를 했다.

   "어서 오십시오."

   이득지가 소파에서 일어나 손을 잡으며 인사를 했다.

   "바쁘신 모양이군요."

   "저야 뭐,바쁘신 거야 남 형사님이 바쁘시겠지요."

   아마 소파에 둘러앉은 사람들도 기자인 듯했다.

   남 형사는 비어있는 이득지의  책상에 앉아 그 쪽 일이 끝나길  기
  다렸다.

   "우리가 보기엔 이번에도 범인이 전처럼 메모지를 준비했을  듯 싶
  은데 작가가 생각하기엔 <압구정동> 어느 부분을 찢었을  것 같습니
  까?"

   한 기자의 물음으로 보아 인터뷰라는 것도 거의 다  끝나가고 있는 
  듯했다.

   "모르죠. 그거야. 준비를 했는지도 안 했는지도."

   "그래도......"

   "제 생각은 그렇습니다.  물론 다른 이야기를 하다 나온  이야기이
  긴 하지만 그 사건에 대하여 고작 우리가 그런 질문이나  주고 받아
  야 하는가 하는 생각 말입니다. 이걸로 오늘 제 얘기  끝내죠. 나올 
  얘기는 다 나오고 했으니까."

   이득지가 먼저 인터뷰의  파장을 선언하고 기자들을 내몰았다.  한 
  두 사람이 뒤늦게 이득지의 얼굴에 플랫쉬를 터뜨렸다.

   "놀랐죠?"

   기자들이 나가고  난 다음 남 형사가  소파 쪽으로 다가가며  물었
  다.

   "예."

   이득지는 짧게 대답했다.

   "어느 정도 예상은 하고 있었는지요?"

   "아뇨. 전혀요. 지난 번 여름에 있은 네번째 사건이 끝은  아닐 거
  다고 생각은 했지만 마지막 테러 대상이 그 P군이었다는  것은 전혀 
  뜻밖입니다. 아니,사건이 나고  나서 생각하면 지금까지의 일을  보
  더라도 충분히 그럴 수도 있겠구나 싶은데 전에는  생각하지 못했어
  요. 오히려 제 소설에  나오는 대로 어느 다른 재벌 2세가 되지  않
  을까 했는데......."

   "저희들도 그런  생각을 했습니다. 사실  따지고 보면 P군도  소설 
  속에 나오는 재벌 2세나  크게 다를 바가 없는데 그런 생각은  전혀 
  하지 않았던 거죠."

   "지난 겨울 그가 처음 전화를 걸어올 때 무척 흥분해서  말한 부분
  이 바로 그것이었는데......"

   "혹시 사건 전에 그놈 한테서 어떤 연락이라도 있었는지요?"
   남 형사가 조심스럽게 이득지를 쳐다보았다.

   "아뇨. 없었습니다. 전화 같은 것은 물론이고 다른  방법으로 보내
  온  사인 같은  것도  없었구요.  나는 여름부터  기다리고  있었는
  데......."

   "선생님이 보기엔 제보자가 누굴 거라고 생각합니까?"

   "그걸 제가 어떻게 압니까? 대한민국 경찰이 모르는 일을......."
   그동안 이런 저런 일로 오래 경찰과,그리고 언론사의  기자들과 부
  딪치는 동안 이득지도 말 한마디 한마디가 조심스러워진 느낌었다.

   "말해 보세요,그래도 생각하시는 건 있을 텐데......"

   "그자겠지요. 테러에 성공하든 실패하든 그가 원하던  분위기가 바
  로 이것이었으니까,그걸로  그도 마지막  테러에 성공한 셈일  테고 
  말이죠. 경찰이 보기엔 미수에 그칠 사건일지 모르지만......"

   지난 번 마지막  봤을 때보다 조심스러워하는 부분은 있어도  이득
  지 역시 한결 여유가  있어보였다. 남 형사 생각에 어쩌면 그도  언
  론이나 경찰이 이번 사건을 제대로 읽어주길 바라는  계기를 기다려
  왔던 것인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그런데,수사는 어떻게 진행되고 있습니까?"

   이번엔 이득지가 남형사에게 물었다.


 소 제 목 : 범인이 이득지에게 연락하지 않은 것은

   "아직까지 결정적인 것은 없지만 곧 검거할 수 있을  겁니다. 아무
  리 자세히 보지  못했다 하더라도 그래도 목격자가 있는 범인을  못 
  잡는 법은 없으니까......"

   "신문에선 미수로 그친 사건의 범인도 못 잡는다고 난리던데."

   "곧 해결이 나겠지요. 신문이라는 게 원래 그런 거니까......"

   "T가 제보를 한 거면 자신의 메시지를 읽어달라는  뜻도 있겠지만,
  자신이 잡힐 것을 각오하고 있다는 뜻 아니겠습니까?"

   "경찰로 보자면 잡혀  주겠다는 얘기겠지요. 아직 우리가 못  잡아
  서 그렇지.  그런데도 P군 진술이  왔다갔다 하니까 신문은  범인이 
  스스로 사건을 제보하고도  잡히지 않을 자신이 있으니까  그런다는 
  얘기도 하고....."

   "그건 나도 읽었어요.범인이 P군 진술이 왔다갔다 할지  어떻게 안
  다고 잡히지 않을 자신이 있어서 그러느니 아니니 그렇게 쓸  수 있
  는 건지. 대담한 거야  처음 이런 사건을 일으킬 때부터 누구나  아
  는 일이지만 자기가  저지른 사건을 스스로 제보한 것까지 그런  식
  으로 읽으면 안 되는 게 아닌가 싶기도 하고......"

   "아직 결정적인 건  없지만 제보도 계속 들어오고 하니까 오래  가
  지는 않을  겁니다.저는 혹시 사건 전에  그 놈이 이  선생님한테는 
  무슨 연락을 하지 않았나 해서 왔습니다. 아까 여쭌 대로......"

   "연락이 오면 제가 경찰로 나가지요,먼저. 지난번처럼......"

   "경찰에까지 제보하는 놈이  왜 이선생님한테는 연락을 않는  걸까
  요?"

   "글쎄요......"

   이득지는 말을 아꼈다.

   자기와 관련된  부분이기도 하지만  실제 이득지 스스로도  신문을 
  통해 사건을 알고 난 다음 그런 생각을 했었다.

   네번째 사건 때엔 한밤중에 그에게 전화를 걸어 일부러  그것을 알
  려주었던 T가  아니던가. 그렇다면 이번에도  충분히 그렇게 할  수 
  있는 일이었을 것이다. 테러를 떠나기 전이든 후이든.  더구나 스스
  로 신문사에까지 제보할  정도라면 나중에라도 그에게 연락을  못할 
  일은 없을 것이다.

   "그 놈이 어떤 식으로든 연락을 하긴 했는데,이 선생님이  그걸 못 
  읽고 있는 건 아닌가요?"

   "그럴 수도 있겠지만,이왕  연락을 한다면 제가 읽지 못할  정도로 
  난해하게는 안 하겠지요."

   "그러면......"

   "저는 좀 다르게 생각하는 건 있는데......."

   "어떻게요?"

   소파에 앉은 채 남 형사가 제세를 앞으로 굽혔다.

   "지난 번 네번째 사건  때 말입니다. 사건 후 밤늦게 그가  전화를 
  했을 때 제가 경찰로 나가지 않았습니까?"

   "예."

   "혹시 그 일로  나한테 섭섭한 감정을 가지고 있어 이번엔  의도적
  으로 나한테연락하기보다는 신문사로 제보를 한 게 아닌가  하는 생
  각도 들고......또 하나는 그보다 좀 더 깊은 생각인데......"

   "어떤 생각인데요?"

   "이건 경찰하고도  관련되는 얘기니까  기분나쁘게는 듣지  마시고
  요."

   "예,말씀해 보십시오." 
  
 소 제 목 : 그는 무얼 정리하고 싶은 것일까

   "만약 나한테 전화를 했다면 그 전화를 받고 내가  어떻게 했을까,
  하고 말이죠. 아니 우선  그 전에 여기로 하든 집으로 하든  녹음장
  치가 되어 있으니 목소리가 남겠지요."

   "그렇긴 하지만  그걸 두려워할  사항 같지는 않은데요.  목소리가 
  남는 걸 두려워한다면 자기가 잡힌다는 것을  두려워한다는 얘긴데,
  그러면 애초 신문사로도  사건을 제보하고 말고 할 것도 없는  거지
  요. 또 그런  이유로 이득지 선생님한테는 연락을 못하고  신문사로 
  한 것이라면 그러고도 잡히지 않을 자신이  있어서라는 얘긴데,그건 
  목격자가 있는 사건에 누구나 자신할 수 없는 것  아니겠습니까? 아
  뇨,자신할 수 없는  정도로 아니라 목소리를 남기는 것과  마찬가지
  로 자기가  자기를 드러내는  것이죠. 목소리보다  더 확실한  얼굴
  을......"

   "그리고 또 하나는  나한테 전화를 했을 땐,내가 그것을  지난번처
  럼 경찰에 제보할 거라는 거죠. 지난 번에 그랬으니 T도  충분히 그
  렇게 예상할 테고."

   "그렇겠지요."

   "그런데,그걸 염려했던 게 아닌가 싶어요."

   "이선생님이 우리한테 연락하는 걸 말입니까?"

   남 형사는 그것도 크게 걱정할 일은 아니잖습니까,하는  얼굴로 이
  득지를 쳐다보았다.어느 쪽으로 하든 결국 경찰은 알게 되는  것 아
  니냐는 식으로.

   "그러니까 내가 경찰에  제보를 하는 것 자체를 마음에 안  들어한
  다거나 못미더워한다는 것이 아니라 T 입장에선 그 다음  일을 말입
  니다."

   "그 다음 어떤 일을요?"

   "만약 내가 경찰에  연락을 했다면 경찰은 이 사건을 어떻게  수사
  를 했을까요?"

   "저는 무슨 얘기인지......"

   "다시 말해  T가 경찰을 믿을 수  없다는 거죠. 이 사건의  수사에 
  대해서. 아니,이 사건의 수사 전과정에 대해서......"

   "다시 말해주시죠. 아직 저는......"

   "내가 만약 경찰에  제보를 하면,경찰은 이 사건을 수사한다  하더
  라도 처음 얼마 동안은 뒤로 비밀 수사를 하겠지요. P군  진술을 듣
  는 것도  비밀리 듣고,현장에도 P군만  몰래 데리고 나가  확인하는 
  식으로..... 물론 나중에야  몽타지 전단을 뿌리고 해야 하니까  공
  개수사가 되더라도  사건 자체의 열기는  사건 자체가 먼저  언론에 
  보도되는 것보다는 확  식어버린다는 것입니다. 또 그런 수사  과정
  에 P군 부모가 다른  방식을 통해 사건축소 로비도 충분히 벌일  수 
  있는 일이고,또 그 사이 P군이 다시 출국할 수도 있는  거고 말입니
  다. 안 그런가요?"

   "아,예....."

   "나는 그렇게 생각해요.  그가 신문에 제보를 한 건  사건자체부터 
  공개하자는 뜻일  거라고. 아까도 말씀드렸지만,T입장에선 자기  목
  숨을 내 놓고서라도 이 사건이 사회적 충격으로  받아들여지길 원하
  는 거니까 나를  통해 경찰로 제보가 들어가는 것보다 언론사에  먼
  저 알리는 게 낫다는 거죠. 더구나 T입장에서 이건 목숨을  내 걸고 
  경찰과 하는 게임도 아니니까......"

   "그렇게 생각할 수 있겠군요."

   "그렇게 생각할 수  있는 게 아니라 나는 전적으로 그렇게  생각을 
  합니다. 나한테  섭섭한 점도  있었겠지만 오히려 그보다는  목숨을 
  내놓고서라도 사건 자체가 사회적으로 극대화될 수 있는  방법을 말
  입니다."

   "기자들한테도 그 얘기를 했습니까?"

   "예. 아까......"

   "이선생님은 요즘도 글을 안 쓰시죠?"

   남 형사는 자리에서 일어서기 전 사건과 관계없이 조금은  편한 질
  문들을 했다. 그러나  듣는 이득지의 입장에선 편한 질문도  아니었
  다. 단지 그렇게 묻는 사람이 신문사 문화부 기자라든가  문예지 기
  자가 아니어서 조금은  편하게 들리고 편하게 대답할 수 있다는  차
  이 정도였다.

   "예. 쓰고 싶다고 써질 상황도 아니고,쓰고 싶지도 않고....."

   "언제까지 그러실 생각인데요?"

   "모르죠. 그거야.그렇지만 사건 해결되고 나면 나도 정리할  게 있
  을 것 같고....."

   "그러시겠죠."

   "사무실도 그렇고 다른 일도 그렇고....."

   그 말을 하며  이득지는 조금 쓸쓸해지는 기분이었다.  누구에게도 
  이야기할 수 없는 마음의 큰 부담 하나가 그에게 있었다.

   "앞으로도 매일 나오실 겁니까?"

   "모르겠어요. 며칠 있다 저도 여행을 좀 떠났다  올까 싶은데..... 
  그렇게 될지 어떻게 될지......"

   "아,예......."

   "이제 이 사건에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는 게 있는 것도  아니니
  까. 그러면서도 연관이 전혀 없는 것도  아니고......아무튼 나한테
  도 어떤 정리는 필요할  듯 싶다는 거죠.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할
  지도 생각해야 할 테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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