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스코리아 살인사건
이승영
----- 차 례 -----
작가소개
1. 죽음의 왕관
2. 캠코더의 암시
3. 살인은 마술이었을까?
4. 범인은 없다
5. 폭로- 미스코리아 진은 자살했다
6. 육감과 다수의 설전
7. 아름다운 표적
8. 문제의 칵테일 잔
9. 사라진 미녀
10. 추녀의 국적
11. 조물주의 미소
12. 죽음의 볼룸댄스
13. 사건은 종결된 것일까?
14. 진실을 향하여
15. 무서운 본능
1. 죽음의 왕관
미스코리아 선발대회가 열리고 있는 S문화회관.
S문화회관의 크림빛 벽에 잠시 머물던 저녁노을이 빌딩 너머로
사라지면서 본선무대에 진출한 53명의 미스코리아 후보들의 미의
축제가 화려하게 펼쳐지기 시작했다.
진주 조개의 내장을 칼로 그르면 화옥진주가 햇빛을 받아
오색영롱한 광채를 발하듯, 미스코리아 선발대회가 열리고 있는
대회장은 탄생되는 미의 여왕에게 찬란한 왕관을 씌워주기 위해
열띤 경연이 벌어지고 있었다.
보름전부터 수유리 아카데미 하우스에 합숙을 하면서
본선대회에 대비해온 미스코리아 후보들은 그 동안 교양강좌와
시립양로원 방문, 서울시청 방문, 경찰대학 방문, 국군부대
위문, TV출연 등 각종 행사에 참가하면서 서로의 우정을
가꾸면서 오늘로서 선의의 경쟁의 날을 맞이하게 되었다.
S문화회관을 꽉 메운 신사 숙녀들은 세 시간 후면 화려하게
탄생될 신데렐라의 모습을 연상하면서 흥분된 눈빛으로
미스코리아 선발대회를 지켜보고 있었다.
드디어, 눈부시도록 아름다운 드레스를 입은 미스코리아 후보
전원이 미스코리아 노래를 합창하면서 중앙무대로 사뿐사뿐
걸어나오고 있었다.
관객들에게 첫선을 보인 다음 순서대로 미스코리아 후보들이
퇴장하자 신사복과 한복을 아름답게 차려 입은 두 남녀 사회자가
대회를 진행시키기 시작했다.
6개의 계단 위에 설치된 무대의 배경은 산과 만발한 꽃그림이
커튼 모양으로 이루어져서 다섯 개의 타원형을 만들고 있었다.
무대 위 천장에는 무수한 작은 등의 불빛과 꽃밭과도 같은
백열등이 휘황찬란하게 그 빛을 발하고 있었다. 그리고 보석처럼
쏟아지는 불빛 아래 무대 앞 우측 박스의 연주석에서는
관현악단의 연주가 은은하게 울려퍼지고 있었다. 기다리던
드레스 심사가 시작되었다. 미스코리아 후보들이 차례대로
대각선으로 출전띠를 두른 모습으로 커튼 형식으로 되어있는
꽃그림 속에서 걸어나오며 얌전한 걸음걸이로 6개의 계단을
내려서서 마이크 앞에 섰다.
"안녕하세요, 4번 미스 서울 윤보혜입니다. 이렇게 영광스런
자리에서 여러분을 만나뵙게 돼서 무척 반가워요. 저희 후보들
용기 잃지 않게 많은 성원 부탁드립니다. 즐겁고 행복한 시간
되세요. 감사합니다."
형형색색의 드레스를 입고 중앙무대에서 공작새처럼 활짝
미소짓는 미녀들의 드레스 행진이 끝나자 막간을 이용하여
초청가수의 축하공연이 있은 후 태양과 백사장을 옮겨놓은 듯한
수영복 심사에 들어갔다.
무대 배경은 어느새 산과 꽃그림에서 석양 아래 파도치는
바다와 시원스럽게 떨어지는 폭포로 바뀌어져 있었다. 이윽고
폭포 속에서 수영복을 입은 미녀들이 순서대로 중앙무대에
등장하기 시작했다. 곡선의 아름다움을 한껏 발휘하며
휘황찬란한 조명빛을 거느리고 워킹을 하고 있는 미녀들의
모습은 그야말로 인어보다도 더 아름다운 인간보석처럼
느껴졌다.
무대 앞 정면의 심사위원석에 앉아 있는 22명의 심사위원들은
신중하고도 숙고한 표정을 지으며 냉철한 시선으로 무대 위의
후보들을 지켜보고 있었다. 수영복 차림의 후보들이 나란히 계단
위에 서서 퇴장을 기다리고 있는 동안 심사위원석의 성형외과
원장인 연성철 박사는 경기 진인 27번-나비향을 주목하고
있었다. 53명의 미녀들 중에 나비향만큼 돋보이는 여자가
없었다.
170cm의 키에 32-24-32의 균형잡힌 몸매와 고른 치열에다
안쪽으로 향하는 옥니형태를 가지고 있었고, 알맞게 긴 얼굴과
큰 눈동자와 높은 코, 그리고 아랫입술에 비해 윗입술이 더
도톰한 서구 미녀의 입체적인 분위기를 풍기는 나비향은
어깨까지 내려오는 긴 머리칼을 물결치듯이 흔들면서 무대
전체를 압도하고 있었다. 그러나 4번인 미스 서울 윤보해도
나비향 못지 않게 관객들의 시선을 한몸에 받고 있었다.
수영복에서는 나비향만큼 스포트라이트를 받지 못하고 있지만
드레스에서는 군계일학처럼 그 자태가 선명하게 드러났었다.
전형적인 동양 미녀상인 윤보혜를 벌써부터 진으로 점찍어둔
관객이 많을 정도로 그녀의 일거수 일투족을 주시하는 심사위원
역시 대세에 영향을 미칠만큼 그 수가 많았다. 그래도 연성철
원장은 나비향을 올해의 미스코리아 진으로 낙점을 찍는데
망설임이 없었다.
어느새 바다색 같은 새파란 원피스 수영복을 입은 미녀들이
2충에서 쏟아지는 대형조명과 무대 좌우에서 비춰지는 소형
조명을 등 뒤로 받으며 폭포 속으로 사라지고 있었다.
잠시 후 제2부가 진행되었다. 미모의 여가수가 무대로 나와
계단을 사뿐히 밟으며 자신의 최근 히트곡인 "핑크빛 달밤"을
열창하기 시작했다. 가슴을 애닯게 만드는 여가수의 목소리가
장내에 메아리치면서 관객들의 박수소리에 함께 묻혀서 사라지자
사회자는 심사위원 소개에 들어갔다. 심사위원장인, 문공위원인
현 국회의원 권중혁 의원을 시작으로 해서 미스코리아 출신 친목
단체인 녹미회 회장 유진숙 여사와 방송국 예능국장인 임종도
국장을 마지막으로 심사위원 소개를 끝냈을 때, 심사위원들의
머리 속에서는 이미 "미의 여왕"이 가려지고 있었다. 사회자인
김진건 아나운서의 손에는 어느 새 하얀 봉투가 들려져 있었다.
53명의 후보들 중에서 15명을 뽑는 1차 결선 명단이 들어있는
봉투였다. 관현악단의 경괘하고 밝은 음이 대회장에 퍼지기
시작하면서 15명의 결선 진출자가 참가 번호대로 호명되었다.
"4번 미스 서울 윤보혜!...... 27번 미스 경기 진
나비향!......"
15명의 결선 진출 미녀들은 수영복 차림으로 중앙무대에
나란히 서서 변함없는 미소를 지으며 가벼운 흥분에 젖어있었다.
관객들은 자신이 점찍어둔 후보가 활짝 웃으며 결선에 진출한
것을 답례하려는 듯 관객을 향해 손을 흔들 때마다 흡족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런데 미스코리아 선발대회가 열리기 1시간 전부터 1층
25열에 ㅇ아있던 전 잡지사 기자인 박만하는 대회가 진행되는
동안 계속 고개를 갸웃거리고 있었다. 낮이 익은 듯한
미스코리아 후보 한 명이 드레스 심사 때부터 유독 그의
망막에서 쉽게 사라지지 않는 것이었다.
"어디서 봤더라?"
박만하는 무대 위에 서 있는 한 미녀를 뚫어지게 쳐다보면서
지나온 인생의 발자욱을 더듬어보고 있었다.
"어디서 봤을까?"
박만하는 1년 전까지 예식장 비디오 기사로 일했던 적을
반추해 보았다. 결혼식장의 하객이었을까?
무대 위에서는 스타상이 주어지고 있었다. 스타상을 받은
나비향은 트로피를 손에 모아쥐고 무릎을 살짝 굽혀 관객에게
인사를 하고는 제자리로 돌아갔다. 이어서 사진기자단이 뽑는
포토제닉상에는 4번 미스 서울 윤보혜가 선정되었다. 웨딩드레스
스타일의 야외복을 입은 그녀의 아름다웠던 자태가 사진기자들로
하여금 매혹적으로 느껴지게 했던 모양이었다. 윤보혜가
관객들에게 손을 살짝 흔들면서 제자리로 돌아가려는 순간, 관객
속의 박만하는 뇌리를 스쳐가는 한 가지 사실에 경악의 눈빛으로
그녀를 다시 쳐다보았다.
"비디오...경리...캐롤송...군고구마..."
15명의 본선 진출 미녀가 확정되고 나자 무대는 텅 빈 채
심사위원들은 다시 최정결선 진출 미녀 8명을 선정하는 심사에
들어갔다. 그러나 그 공백시간 동안 전국에 생방송으로 중계되는
TV에서는 하루 전에 미스코리아 전원이 무대에 모여 고전무용을
추는 것을 녹화한 테이프를 내보내고 있었다. 한복 차림의
미녀들이 고전무용을 추면서 길고 흰 천을 허공에다 흔드는
모습이 화면에 나타났다. 꽹가리와 징, 그리고 장구 소리가
울리면서 미녀들의 춤은 학들의 춤처럼 그 깊이를 더해가고
있었다. 청사초롱과 창호지로 바른 밤 풍경의 방문과 하회탈
그림이 그려져 있는 무대 배경이 재차 겨지는 조명빛에 의해
소멸되면서 야외복으로 갈아입은 15명의 미녀들이 다시
중앙무대에 모습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구수하고 진솔한 화법으로 10년째 사회를 진행하고 있는
김진건 아나운서가 결선 후보들과 인터뷰를 나누고 있었다.
"여러분, 4번 미스 서울 윤보혜입니다. 지금 기분이
어떻습니까?"
"행복하면서 떨리고 기쁘면서 두렵습니다."
윤보혜는 여전히 미소를 잃지 않은 얼굴로 대답하고 있었다.
"미스코리아 진으로 당선된다면 누가 제일 먼저 떠오를까요?"
"그런 생각은 해본 적이 없어서....... 아무래도 저를 이
자리에 나오게끔 물심양면으로 도와주신 강희 선생님이 제일
먼저 떠오를 거예요."
윤보혜의 음성은 약간 떨리고 있었다.
"첫사랑을 해본 경험이 있으십니까?"
"네, 여중생이었을 땐데, 미스코리아 선발대회에서 사회를
맡으신 김진건 아나운서님을 텔레비전 화면으로 뵙게 되었는데
그만 첫눈에 반해버리고 말았어요."
장내에서는 쑥스러워하는 김진건 아나운서의 모습에
웃음소리가 터져나오고 있었다.
"아, 이런 세월이 우리를 갈라놓았군요. 어떤 남자하고
결혼했으면 좋겠습니까?"
"성실하고 저를 이해해 줄 수 있는 남자라면 됩니다."
"이 다음엔 희망이 무엇입니까?"
"아름다운 인생을 사는 것입니다."
김진건 아나운서는 관객에게 윤보혜를 향해 박수를 유도해준
다음 옆에 서 있는 후보로 자리를 옮겼다. 그는 다섯 명의
후보와 일문일답을 더 나눈 뒤 27번 앞으로 걸음을 옮겼다.
"27번 미스 경기 진 나비향입니다. 이름이 참 예쁜데
본명입니까?"
"네, 아버지가 지어주셨어요."
"장차 희망이 프로듀서라고 하셨는데 무슨 프로듀서를
원하십니까?"
"라디오 프로듀서요."
"어떻게 미스코리아에 나오게 됐습니까?"
"부모님의 격려와 제가 다니는 의상실 선생님께서 추천해
주셨습니다. 강희 선생님이라고."
나비향은 루즈를 칠한 입술을 조심스럽게 움직이면서 미소를
잃지 않으려고 애쓰고 있었다.
"덥죠?"
"몸은 여름처럼 덥고 마음은 겨울처럼 떨리네요."
"미스코리아 진으로 당선되면 상금으로 제일 먼저 뭘
하겠습니까?"
"좋은 일에 쓸 생각입니다."
"좋은 일이라면?"
"가난한 사람을 돕고 싶습니다."
"대단히 아름다운 생각이십니다. 여러분, 나비향 양에게
격려의 박수를 부탁드립니다."
김진건 아나운서는 나비향을 손바닥으로 가리키며 관객에게
박수를 청했다. 마지막 후보와 인터뷰를 끝마친 사회자는
중앙무대로 걸어와 입선자 명단이 들어있는 노란 봉투를
받아들였다.
"여러분, 열 다섯 명의 미녀들에게 박수를 부탁드리겠습니다.
이 여덟 명 안에 들어가면 미스코리아 타이틀을 갖게 됩니다.
자, 그럼...... 4번 미스 서울 윤보혜! ......27번 미스 경기 진
나비향! ......자, 이렇게 여덟 명이 최종 관문을 통과해서
미스코리아 타이틀을 갖게 되었습니다."
타이틀을 갖지 못한 7명의 탈락자들이 퇴장하자 조명 불빛이
약해지면서 무대 위에는 어둠이 깔리기 시작했다. 어둠 속의
계단 위에는 의자가 놓여지면서 시상식 준비가 진행되었다.
무대는 어느새 수많은 전구알로 이루어진 왕관 형태가 배경으로
이루어지고 있었다. 전년도 미스코리아 진인 성주라 양이
중앙문을 통해서 등장하고 있었다.
진선미를 남겨놓고 고별행진을 하는 미스코리아 진의 왕관은
1년 동안의 영화를 말해주는 듯 찬란하게 빛나고 있었다. 비록
미의 사절로 나가서 조국의 아름다움을 화려하게 빛내지는
못했지만 진으로서 그녀의 인생을 왕관빛 그 자체였다.
뭇 남성과 시샘 많은 여성들로부터 찬사와 부러움을 받으며
진으로 당선된지 3개월 만에 골든 타임의 주말쇼 MC로 발탁되어
자신이 꿈꾸어왔던 쇼MC의 자리에 올라섰고, 지금까지 그 명성을
차곡차곡 쌓고 있는 성주라 양이었다. 거기에다 CF 모델로서도
왕성한 활동을 하고 있었고, 한달 전에는 은막에도 데뷔하는 등
핑크빛 인생을 살아가는 전년도 미스코리아 진이었다.
미스코리아 진의 고별행진이 끝난 뒤 올해의 미스코리아 미가
발표된 상태에서 최종적으로 남은 후보는 윤보혜와
나비향이었다. 왕관을 쓴 미스코리아 미가 전년도 미스코리아
미와 사이좋게 꽃다발을 들고 여왕자리가 있는 계단으로
올라가자 노련한 사회자는 두 미녀를 바라보면서 곧장 인터뷰에
들어갔다. 그는 윤보혜에게 먼저 질문을 꺼냈다.
"지금 기분은 어때요?"
"믿기지가 않아요. 본선무대에 오른 것만으로도 만족할려고
했는데......"
"앞에 누가 있는지 보입니까?"
"아무도 안 보여요. 저기 기자분들 모습밖에는요."
"제 얼굴은 똑바로 보입니까?"
"예나 지금이나 눈이 부셔서 잘 안 보여요."
윤보혜는 침착함을 되찾으려는 듯 사회자의 쑥스러워하는
얼굴을 보면서 잃어버린 미소를 되찾고 있었다. 장내에서는
또다시 폭소가 터져나왔다.
"윤보혜 양, 이번에 발표되는 것은 먼저 부르는 사람이 진이
된다는 걸 알고 있습니까?"
"네......"
윤보혜는 흥분되는 가슴을 진정시키며 조명 불빛이 쏟아지는
허공을 잠시 응시하였다.
"윤보혜 양, 누가 미스코리아 진이 될 것 같습니까?
본인이라는 생각은 들지 않습니까?"
"잘 모르겠어요......"
사회자는 윤보혜에게 대었던 마이크를 나비향에게 옮겼다
"떨리죠?"
"조금......"
"이런 것이 인생이구나, 하는 생각은 들지 않습니까?"
"네? ......"
나비향은 약간 멍청한 표정을 지으며 사회자를 바라보다가
이내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나비향 양, 옆에 있는 윤보혜 양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윤보혜 양을 먼저 부른다면 기분이 어떻까요?"
"진심으로 축하해야죠."
사회자는 두 미녀 앞으로 나와서 핑크빛 봉투를 열었다.
"누구보다도 지금 이 두 분이 제일 궁금하겠죠. 그러나 지금
이 시간에 있어 사회자에게는 한 가지 특권이 있습니다. 이
봉투의 내용을 먼저 보고, 빨리 부를 수도 있고 늦게 부를 수도
있습니다. 자, 그럼 지금부터 이름을 부르겠습니다. 누구 이름을
부르는지 두 분은 잘 들으세요."
장내는 갑자기 숨죽은 듯이 조용해졌다. 침묵이 흐르는 가운데
발표를 예고하는 드럼소리가 장내를 더욱더 긴장 속으로
빠져들게 했다.
"미스코리아 진! 4번 미스 서울 윤보혜!"
진으로 당선된 윤보혜는 믿기지 않는 듯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리며 눈물 맺힌 눈동자를 어디에 둘지 몰라 헤매고 있었다.
"네, 여러분, 이렇게 해서 각 지역을 대표한 미녀들의
선발대회가 그 막을 내리게 됐습니다."
전년도 미스코리아 진인 성주라 양이 새롭게 탄생된 여왕에게
왕관을 머리 위에다 씌워주고 빰에다 살짝 키스를 해주고
물러나자 사회자가 신데렐라에게 다가갔다.
"지금 기분이 어때요?"
"새처럼 날아갈 것 같아요."
"올해의 미스코리아 진인 윤보혜 양이 여러분 앞에서
축하행진을 벌이겠습니다."
경쾌한 연주곡이 울려퍼지는 것과 동시에 미스코리아 진의
행진이 시작되었다. 중앙무대에서 우로 다시 중앙에서 좌로
사뿐히 걸으면서 축하의 박수를 쳐주는 관객에게 손을 흔들며
윤보혜는 활짝 웃고 있었다. 미스코리아 진이 카메라 기자들을
향해 포즈를 취하는 모습을 객석에서 의자에 그대로 앉은 채
지켜보던 박만하의 눈빛은 진 못지 않게 흥분돼 있었다. 진실을
확인해 보는 절차가 남아 있긴 하지만, 한번 본 사람 얼굴은 잘
잊어먹지 않는 자신의 눈을 확률 백퍼센트라는 듯 확신하고
있었다. 그러면서 그는 혼자 속으로 중얼거리고 있었다.
"이것은 미스코리아 대회가 아니고 쇼가 되어버렸다."
"이것으로 미스코리아 선발대회의 대단원의 막을
내리겠습니다. 내년에 다시 뵙겠습니다."
사회자의 마이크 음성이 장내에 서서히 사라지면서 관객들도
하나둘씩 대회장을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새끼를 밴 암코양이의 울음소리가 용인 근방의 언덕 위에
위치한 이층 하얀 별장 뒤에서 들려오는 가운데 하늘길을
따라가던 보름달이 지붕 위에서 나그네처럼 쉬고 있었다.
향원 동산내에 자리잡은 연성철 박사와 강희 여사의 주말
별장은 나무 울타리에 감싸인, 푸르른 잔디를 가진 하얀
집이었다. 집 뒤쪽에 있는 산의 경사를 이용한 설계가 돋보이는
모던 감각의 별장이었다. 넓은 안마당엔 파란 잔디가 탐스럽게
깔려 있었고, 돌을 쌓아 만든 낮은 담장과 담을 둘러 심은 키큰
나무들로 정원은 경계가 없는 듯했다.
미스코리아 탄생을 축하해 주는 파티 시간이 가까워오자,
표주박이 대롱거리는 초가지붕을 얹은 주차장에 고급 승용차가
속속 도착하고 있었다. 간단한 만찬이 벌어질 넓은 안마당에는
호텔에서 초대한 일류 요리사와 두 명의 보조 요리사가 커다란
수반을 이용해 만든 디쉬가든형 테이블 옆에 유럽 전통 음식을
바쁘게 나르고 있었다. 그리고 테이블 옆의 잔디 위에는 와인이
담긴 웨곤을 준비시켜 놓아 파티 분위기를 고조시켜 놓고
있었다.
별장의 주인인 "연화병원"의 원장인 연박사의 안내를 받으며
제일 먼저 파티장에 도착한 사람은 방송국 예능국장 임종도였다.
바로 뒤로 여변호사인 금지선 변호사가 빨간색 자동차 문을 열고
정원으로 걸어나오고 있었고, 곧이어 턱시도 차림의 박윤성
회장이 훤칠한 키를 드러내며 연박사와 재회의 악수를 나누었다.
샤넬라인풍의 정장 스피리스를 입은 금지선 변소사는 네이브
블루선으로 강조한 금장단추 장식으로 고급스런 분위기를 풍기는
가디건을 입은 모습으로 신흥재벌 회장인 박윤성 회장과 가볍게
악수를 했다. 32세의 젊은 나이로 백대 기업에 진입한 그의 사업
솜씨는 가히 신화적이었다. 부친이 물려준 중소기업을 수년만에
재벌급 기업으로 성장시킨 그의 사업감각은 정말로 대단한
것이었다. 다만 그가 어떤 방법으로 재계의 부러움을 받을
정도로 천재력을 발휘했는지는 베일에 가려져 있지만 국내시장을
석권하고 세계시장까지 잠식해 들어가고 있는 그의 사업수단은
뛰어난 것만은 사실이었다.
그런 박회장이 2년 전부터는 정치에 야망을 품고 부친과
친분관계에 있었던 영화배우 출신인 현 국회의원인 권중혁 의원
사무실로 찾아가 정치자금을 후원해주면서 정계와 줄을 잇고
있는 것이었다.
"박사님의 별장은 백악관을 연상시킬만큼 위풍있게 보이네요."
연예인들의 법정변호를 주로 맡아서 그 명성을 날리고 있는
금지선 변호사는 손목시계를 보고 있는 연박사에게 다정한
목소리로 말했다.
"아내의 취향이지요. 아, 의원님이 도착하셨나 봅니다."
연성철 박사는 헤드라이트 불빛이 주차장 쪽에서 비춰져오자
안색을 바꾸며 빠른 걸음으로 주차장으로 걸어갔다.
"요즘 신문을 보니까 신인 여배우의 변호를 담당하시는 것
같던데, 잘 풀릴 것 같습니까?"
박윤성 회장은 와인을 한 모금 마시며 옆에 서 있는
금변호사에게 따뜻한 눈길을 보냈다.
"상습적으로 마약을 복용한데다 그런 상태에서 성관계를
가졌어요. 세상 모르게 올라가는 인기 앞에 어린 마음이 주체할
수 없었나봐요. 예술성이 뛰어난 신인 여배우라 이대로
사장시키기는 너무나 아까운 애예요. 재기를 할 수 있을지
모르겠어요."
"별장의 보름달이 매우 아름답군요. 사실 초록빛 자연만큼
회색 콘크리트 벽에 갇혀 사는 우리의 피로를 풀어주는 것은
없죠. 이 별장이 참 마음에 드는군요."
박회장은 계단과 연결되어 있는 테라스를 바라보다 큰 유리창
너머로 시선을 옮겼다. 홀인듯 싶은 1층에도 그린 인테리어가 잘
되어 있는 것이 시야에 들어왓다. 하얀 벽의 2층 커다란
유리에는 수직 블라인드 사이로 불빛이 새어나오고 있었다.
"안녕하세요, 박회장님, 금변호사님."
비너스의 토루소를 연상시키는 초미니 원피스를 입은 전년도
미스코리아 진인 성주라가 반가움이 가득 담긴 목소리로 두
사람에게 인사를 하며 다가왔다. 그녀의 허리에서 흘러내리는
튤립꽃 모양으로 디자인된 스커트 밑단 위의 스퍼프가 잎새를
움직이는 작은 바람에 살랑거리고 있었다.
"어머, 임국장님도 오셨네요."
대형 식탁 위에는 고급 요리들이 계속 날라져오고 있었다.
유부 야채조림과 로스트 비프, 꽃게찜, 모듬 바베큐를 해먹을 수
있는 기구들이 준비되어지고 있었다. 와인잔이 놓여지고 풍성한
과일들도 올려지고 있었다. 일류 요리사가 모듬 바베큐를 만들고
있는 동안 베이지색 양복을 입은 권중혁 의원과 그의 부인이
연박사의 마중을 받으며 검은색 승용차에서 내리고 있었다.
미스코리아들의 친목단체인 녹미회 회장인 유진숙 여사는 20년
전의 미스코리아 진 시절의 미모를 그대로 간직하고 있었다.
다만 허리에 약간 살이 붙어 중년부인의 티가 느껴지긴 해도
얼굴은 사십대 초반의 나이답지 않게 무척 젊어보였다. 더욱이
녹색 한복을 입은 그녀는 차분하고 정갈한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 노방처마 밑단의 무지개 단청무늬가 그녀의 살이 붙은
허리를 켜버해 줄 뿐만 아니라 단아한 멋마저 자아내고 있었다.
눈가의 엷은 주름살을 감추기 위해 밝은 색 파우더를 눈 밑에
펴발라 하이라이트를 주고 화려한 색으로 입술선도 뚜렷이
그려서 오히려 우아하고 정숙해 보이는 유여사였다.
"이거 우리가 제일 늦은 모양이구만. 허허허......"
너털웃음이 많은 권의원은 먼저 와 있던 초대객들과 일일이
악수를 나누며 고기타는 냄새가 맵다며 더욱 호쾌하게 웃었다.
3선 의원인 권의원은 개각설이 있는 현 정국에서 문화부장관
자리로 입각설이 나돌만큼 지명도가 높았다. 최고 임명권자의
낙점이 찍히기만 기다리고 있는 대기상태의 권의원이었다.
마지막으로 20일 전에 미스코리아 선발대회의 사회를 맡았던
김진건 아나운서가 흰색 양복에 나비 넥타이를 맨 차림으로 약속
시간보다 10분 늦은 10시 10분에 파티장에 도착한 것을 끝으로
초대객들은 테이블에 둘러서서 화기애애한 분위기로 한 잔의
와인을 마셨다.
"그런데 강여사님과 오늘의 주인공들이 보이지 않습니다 그려,
허허허......"
권의원은 마중에 바빴던 연박사에게 와인을 따라주며 호탕한
웃음으로 물었다.
"아, 네. 여기서 간단한 식사가 끝난 후에 홀에서 사교댄스가
있을 때 모습을 나타내기로 제 안사람이 프로그램을
짜놓았습니다."
연박사가 알 수 없는 비웃음에 가까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허허, 어련하시려구요."
파티에 초대된 사람들의 명단은 이미 일주일 전부터 강여사의
손에 의해 작성되었다. 작년의 미스코리아 진 당선에 이어
올해의 미스코리아 선발대회에서도 두 명의 추천 후보자가
미스코리아 진.선에 나란히 당선되는 쾌거를 이룬 강여사의
미녀를 보는 안목은 심사위원 이상이라는 찬사를 받을 정도로
사교계에 화제가 될만했다. 덕분에 그녀의 의상실은 "미인을
창조해 내는 의상실"로 각광받아 고객이 끊이질 않고 있었다.
이곳에 초대된 사람들 역시 의상실 단골 고객인 셈이었다.
그러나 강여사 역시 17년 전에 미스코리아 진에 당선된
미스코리아 출신이었으므로 발이 무척 넓은 편이었다.
"그러고보니 작년 이맘때 일이 생각나네요. 호텔에서 강희
선생님이 오늘처럼 축하파티를 마련해 주셨지요."
권의원 옆에서 바나나 껍질을 벗기며 성주라가 1년 전의
흥분됐던 시간들을 추억 더듬듯이 떠올리고 있었다. 그러면서
그녀는 작년에 초대되었던 사람들을 한 사람씩 바라다보았다.
1년 전과 마찬가지로 한 사람도 빠짐없이 모두 모여 있었다.
미스코리아 후원회, 여기 모인 사람들의 도움없이는 오늘의
성주라가 존재할 수 없었다. 미스코리아에 출전하는 것에서부터
재능과 소질을 찾아내어 스타로 만들어주는 것까지 모두 여기에
모인 사람들의 숨은 공이 들어가 있는 것이었다.
올해의 미스코리아에 당선된 윤보혜와 나비향도 자신들의 날개
크기에 따라 얼마든지 비약할 수 있는 것이다. 더군다나 그
뒤에는 "여왕벌"이 거대한 날개로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으니
왕관빛은 더욱 빛날 것이다.
밤하늘의 별들이 무수히 반짝이는 가운데 2층의 수직 브라인드
사이로 정원을 내려다보고 있던 강여사는 시원하게 판
네크라인과 퍼프 소매가 잘 어울리는, 성숙미가 느껴지는
드레스를 입은 모습으로 서서 화장대 앞에 있는 두 미녀를
사랑스런 눈길로 바라보았다.
"이제 식사가 끝나가는구나."
연하늘빛과 분홍의 파스텔톤 소파에 두 미녀를 앉힌 강여사는
홀로 내려가기 전에 그린색 카피트 위에 서서 조용한 음성으로
조언을 해주고 있었다.
"......그러니까 미소를 잃으면 안 돼. 특히 남자분들에게는
항상 미소를 지어야 돼. 단, 미소에는 여러 가지 미소가
있으니만큼 상황에 따라서 수줍은 미소, 친근한 미소, 요염한
미소, 거절하는 미소를 잘 짓도록 해."
윤보혜와 나비향은 여학생처럼 가만히 귀담아 듣고 있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미모를 믿고 자만심이나
우월감에 빠지지 말아. 타인에게 질투를 느끼게 한다는 것은
특히 여성분들에게 질투를 느끼게 하는 것은 미인으로서 수치야.
너희들의 선배 언니인 주라는 질투를 인생의 암으로 생각하고
대인관계를 유지해왔어. 그것이 주라의 오늘을 말해주고있는
거야. 앞으로 주라가 니들에게 좋은 얘기를 많이 해줄거야.
그리고 보혜는 내가 아까 했던 말을 명심하고 그대로 행동하고."
"네."
알아듣겠다는 듯 윤보혜가 밝은 음성으로 대답했다.
정원에서의 만찬을 끝낸 초대객들은 연박사의 안내로 테라스를
지나서 홀로 들어섰다. 실내에는 댄스를 위해 설치된 오디오에서
이끼가 촘촘한 두개의 바위 사이로 블루스곡이 흘러나오고
있었고, 홀 반대편 끝에는 두 개의 식탁이 의자와 함께 놓여져
있었다. 그리고 2층으로 올라가는 계단 좌우로 초록의 자연과
흐르는 물로 생동감을 주고 있었다. 실내 조경이 썩 잘 되어
있는 내부 풍경이었다.
천장과 샹들리에 불빛이 환하게 겨지는 순간, 2층에서
미스코리아 진과 선이 미소 띤 얼굴로 계단을 밟아 내려오고
있었다. 얼굴의 곡선과 아름다운 어깨선을 강조하는 업스타일의
의상을 입은 나비향은 스카프로 나비 모양을 만들어 뒷모습을
강조하였고 계단을 한 계단씩 내려올 때마다 포도송이 진주
귀걸이가 찰랑거려 매력이 넘쳐 흐르고 있었다.
선의 뒤에서 내려오고 있는 윤보혜는 적색의 한복을 입고
있었다. 노방치마 저고리엔 수많은 장미꽃이 그려져 있어 눈이
부실 정도로 화려하게 빛나고 있었다. 이국적인 외모를 풍기는
나비향과 동양의 양귀비 같은 윤보혜의 개성이 잘 어울리는
의상들이었다. 그만큼 강여사의 의상선택은 돋보이는 것이었다.
넓은 홀에 내려선 두 미녀 사이에 선 강여사는 긴 뒷머리를
반으로 갈라 볼륨감 있게 중앙으로 걷어올리고 앞머리는
여성스럽게 웨이브지게 빗어내린 헤어 스타일로 초대객들에게
약간 머리 숙여 인사하고 있었다.
더블 금단추와 검정색의 바이어스가 깔끔한 정통 샤넬
투피스를 입은 강여사는 칭찬을 아끼지 않는 초대객들에게 두
미녀를 인사시켜 주고 있었다.
그러는 가운데 홀에는 캠코더를 어깨 위에 걸친 박만하가
초대객들 사이를 오가며 비디오 촬영을 하고 있었다. 초대객들이
정원에서 만찬을 끝내고 홀로 입장하는 순간부터 줌렌즈를
작동시키기 시작했다. 윤보혜와 박윤성 회장이 악수를 나누는
장면을 옆에서 찍고 있는 박만하는 욕정에 불타는 눈빛을 애써
감추며 캠코더 렌즈를 미스코리아 진의 얼굴 정면에 비췄다.
그러자 진은 수줍은 미소에서 일순간 긴장된 표정으로
바뀌었다가 다시 본래의 미소로 되돌아왔다.
초대객들의 귀에 익은 블루스곡이 홀 전체에 울려퍼지자,
테이블 의자에 앉아 있던 권의원에게 강여사가 춤을 청했다.
마음이 맞은 두 남녀는 자연스럽게 홀 중앙으로 걸어가
볼륨댄스를 추기 시작했다.
박회장과 금변호사가 뒤따라서 첫쌍과 합류했다. 이어서
임종도 국장과 성주라가 음악에 맞춰 자연스럽게 서로를
껴안았다. 반대로 두 테이블에 앉아 있던 초대객들은 편안한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보혜양은 댄스를 출 마음이 없어요?"
오른쪽 테이블 의자에 같이 앉아 있던 연박사가 춤출 의향이
없느냐고 묻자 진은 미소를 머금고 자신의 옷을 내려다보았다.
"한복을 입어서요."
연박사는 아내의 의상실에서 근무하는 여비서가 칵테일 잔이
놓인 쟁반을 가지고 다가오자, 한 잔 달라는 눈짓을 보냈다.
진도 한 잔 마시고 싶다고 칵테일 한 잔을 청했다. 여비서가 네
개의 칵테일 잔에서 두 개의 칵테일 잔을 연박사와 윤보혜에게
건네주고는 왼쪽 테이블로 걸음을 옮겼다.
"사교춤은 출 줄 알아요?"
연박사가 칵테일을 단숨에 마시고 나서 농담하듯이 물었다.
"잘 못 춰요."
윤보혜는 칵테일 잔에 다소곳이 시선을 두면서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좌측 테이블에는 김진건 아나운서와 유진숙 여사, 그리고
나비향이 잠시동안 대화를 나누는 듯 싶더니 두 남녀가 의자에서
일어나 홀로 걸어나갔다. 그러자 테이블에 혼자 남게 된
유여사는 여비서가 놓고 간 두 잔의 칵테일을 들고 윤보혜
옆으로 와 앉았다.
"박사님, 우리 의원님 춤추는 것 좀 보세요. 피봇턴이
환상적이네요. 어머, 스핀턴도 프로급이네...... 저 양반 춤박사
다됐네요. 호호호......"
유여사는 남편의 춤솜씨에 애써 흥미가득한 표정을 지으며
즐거운 듯이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자 강여사의 흐느적거리는
몸놀림을 지켜보고 있던 연박사의 표정이 일그러지고 있었다.
"저 양반, 댄스 교습소 차려도 되겠어요. 날이 갈수록
능숙해지니......, 호호......"
유여사는 연신 흥미롭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윤보혜는 반쯤
마신 칵테일 잔을 앞에 둔 채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볼룸댄스를
추는 네 쌍을 바라보고 있었다. 캠코더는 댄스를 추는 네 쌍을
촬영하고 있었다. 음악이 고조되고 있을 때 카메라 렌즈는
서서히 테이블 쪽으로 향해져 왔다.
"정말 의원님 춤솜씨가 훌륭하군요. 네 쌍 중 제일
돋보입니다. 하하......"
연박사는 별로 유쾌하지 않은 웃음소리를 내며 자신의 앞에
있는 칵테일 잔을 집어들었다. 단숨에 칵테일을 들이킨 그는
숨을 한번 훅 토해내고는 다시 분노의 시선이 담긴 눈빛을 홀
중앙으로 뿜었다.
"호호. 임국장님 쌍이 가장 코믹스럽네요. 임국장님은 아주
씨름을 하고 있네요. 호호호. 어머나, 저것 좀 봐. 스텝이 맞지
않아서 멈춰선 표정 좀...... 호호호......"
유여사는 칵테일을 한 모금 홀짝이고는 미안하다는 듯 반쯤
남은 칵테일 잔을 만지작거리고 있는 진에게 따뜻한 시선을
주었다.
"오늘 파티 어때요?"
"무척 즐거워요."
"댄스 출 남자 친구는 없어요?"
미스코리아 진은 미소만 짓고 있었다.
"우리 녹미회 회원으로 가입하세요. 보혜 양의 인생에 많은
도움이 될 거예요."
"감사합니다."
연박사와 유여사는 다시 홀 중앙으로 시선을 고정시키고
있었다. 윤보혜는 방금 전에 유여사가 한 말에 가슴 설레고
있었다. 진은 설레이는 가슴을 진정시키며 칵테일 잔을 들어
입술에 갖다대었다. 반쯤 남은 칵테일을 입 안에 털어넣고
테이블 위에 잔을 내려놓는 순간, 헉 하는 소리와 함께
미스코리아의 손이 자신의 목을 감싸쥐었다. 윤보혜의 얼굴과
손에 심한 경련이 일어나는 듯 하더니 그대로 쓰러지고 있었다.
옆자리에서 연박사가 윤보혜의 죽음을 목격한 것은 담배를
필려고 막 주머니에 손을 집어넣으려던 참이었다.
"보, 보혜양, 왜 그래요......"
놀란 연박사가 의자에 앉은 상태에서 바닥으로 쓰러지려는
윤보혜를 간신히 붙잡으면서 안색을 살폈으나 그녀의 동공은
확대될대로 확대되 있었다.
"보혜양! 보혜양!"
다급한 목소리가 홀 전체에 울려퍼졌을 때 미스코리아 진은
이미 숨이 끊어져 있었다. 동시에 유여사의 날카로운 비명소리가
흐느적거리는 블루스를 잠재웠다. 유여사의 찢어질 듯한 소리를
들은 사람들이 춤동작을 멈추고 한두 사람씩 테이블로 걸어오고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도 캠코더는 계속해서 테이블 쪽을
촬영하고 있었다.
"애석하게도 보혜 양은 이미 숨이 끊어졌습니다."
제일 먼저 달려온 강여사 옆에서 연박사가 축 늘어진
미스코리아 진의 손을 놓으며 비통한 음성으로 말하고 있았다.
2. 캠코더의 암시
"서울시경 특수수사과 남동현 경윕니다."
"윤주희 경윕니다."
미스코리아 진이 독살된 지 두 시간 후, 남형사와 윤형사가
용인의 향원동산 내에 위치한 별장 안으로 들어섰을 때 권의원이
주차장에서 초조한 얼굴로 두 형사를 맞이했다. 연예인 마약사범
일제 단속 때 안면이 있었던 두 형사와 권의원은 홀로 들어가기
전에 짤막한 대화를 주고 받았다.
"자네들의 상관인 오부장과 장과장으로부터 간단한 얘기를
들었겠지만 오늘 밤에 숨진 여자는 3주 전에 미스코리아 진으로
당선된 여자일세."
"의원님, 오늘 밤이 아니라 어젯 밤입니다. 지금 시각이
자정이 넘은 새벽 1십입니다."
남동현 형사가 짙은 눈썹으로 시간을 정정해주고 있었다.
"오, 그래. 그런데 느낌이 영 좋지 않아. 자살인지 타살인지
분명치는 않지만 범인이 존재할 수 있는 사건임이 거의 확실해
보여."
임명권자에게 이번 사건이 알려지면 내각에 입각하기는 영
틀려버릴 것이라고 생각했는지 이맛살을 찌푸리며 얘기해 주고
있었다.
매스컴이나 정가에서 의혹의 눈초리로 바라보고 용의자 명단에
권중혁이라는 이름 석 자가 국회의원 선거 때처럼 요란하게
오르내릴텐데 자칫하다가는 정치생명도 끝장날 판이었다.
"그래서 하는 말인데, 이번 사건을 비공개로 수사해달라는 게
내 간절한 부탁일세."
"그거야 어느 정도의 시간까지는 가능하지 않겠습니까. 다만
사건 해결의 시기가 문제일 뿐이지요. 꼬리가 길면 잡힌다고
타살로 밝혀졌을 경우 범인검거 시기가 늦어지면 주위에서
미스코리아 진의 행방에 대해서 의혹을 가질 테고, 그러다보면
자연히 사냥개 같은 기자들이 수사 냄새를 맡은 것이고......"
"그러니 천재 형사들인 자네 두 형사가 단시간 내에 진실을
가려주길 바라네."
권의원은 더욱 초조한 목소리로 말했다.
"사건 현장은 잘 보존되어 있습니까?"
어깨까지 내려오는 긴 생머리의 윤형사가 권의원의 곤경에
처한 입장을 잘 이해하겠다는 듯 동정의 눈빛으로 권의원을
바라보면서 물었다.
"물론이야. 사건이 발생하자마자 내가 모든 조치를 취해
놨네."
"아무튼 좋습니다. 안으로 들어가시죠, 의원님."
세 사람을 빠른 걸음으로 테라스를 지나 홀 안으로 들어갔다.
홀 중앙에서는 평온을 찾은 초대객들이 둘셋씩 모여서 얘기를
주고 받고 있었다. 그럼에도 긴장과 피곤함이 역력해 보이는
초대객들의 모습이었다.
시체는 원형 테이블 아래의 바닥에 놓여져 있었다. 테이블
아래에서는 10분 전에 먼저 도착한 경찰의와 감식계원들이
순서대로 일을 하고 있었다. 홀 안으로 들어선 두 형사는 시체
쪽으로 걸어가 경찰의와 얘기를 나눈 다음 홀 중앙으로 걸음을
옮겼다.
"이 별장의 주인 되시는 분이 누구신지요?"
남형사가 초대객에게 허리 굽혀 인사를 하고는 사람들을
보았다. TV나 잡지에서 낯이 익은 저명인사들의 얼굴이 여러 명
그의 시야에 들어왔다. 윤형사 뒤에 서 있던 권의원은 연박사
부부를 보이며 수사에 적극적으로 협조해 달라는 눈빛으로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연박사와 강여사가 앞으로 나오자
남형사는 질문의 순서를 생각하는 듯 잠시 생각을 하더니 말문을
열었다.
"의원님으로부터 대충 얘기는 들었습니다만 오늘 모임의
성격이 축하파티였다고 하시던데, 불행하게도 그 주인공이
운명하는 불상사가 생겨서 당혹하셨겠습니다."
남형사는 부부에게 위로의 말을 하고는 곧장 본론으로
들어갔다.
"이 파티에 참석한 분들 중에 집으로 귀가하신 분은
없습니까?"
"한 분도 안 계십니다. 의원님께서 오해의 소지가 없어야
한다고 하셨기에 한 분도 별장 밖으로 나가지 않았습니다."
연박사가 대답했다.
"초대된 분들은 모두 몇 분입니까?"
"의원님 내외분을 비롯해서 모두 아홉 분입니다. 저희부부까지
합치면 11명이지요."
이번에는 강여사가 대답했다. 연박사는 고개를 끄덕이며
손님을 초대한 장본인은 내가 아니라 부인이었다는 걸 강조하는
눈빛으로 남형사를 보았다.
"그 외에 이 홀에 드나들었던 사람들은 없습니까?"
"요리사 세 분하고 칵테일을 나른 여비서 그렇게 넷입니다."
"그 사람들은 지금 어딨습니까?"
"저기 주방에요."
강여사가 손끝으로 테라스 쪽으로 통하는 주방을 가리켰다.
"박사님께서 윤보혜 양이 숨지는 마지막 순간을 지켜보셨다고
하는데 자세히 말씀해 주시겠습니까?"
윤형사가 상냥한 음성으로 물었다.
"저 오른쪽 식탁의자에 저와 윤보혜 양이 같이 앉아
있었습니다. 왼쪽 식탁에는 유여사님과 김진건 아나운서, 그리고
나비향 양이 앉아 있었는데 그때 우리집 의상실 여비서가
쟁반에다 칵테일을 날라왔습니다. 나와 윤보혜양은 여비서가
주는 대로 칵테일 잔을 받았고, 그 여비서는 옆 테이블로
갔습니다. 그리고 잠시 후에 김진건 아나운서와 나비향 양이
춤을 추기 위해 홀 중앙으로 나란히 걸어갔고 왼쪽 식탁에 혼자
남게 된 유여사님이 칵테일 잔을 들고 우리가 앉아 있는
테이블로 오셨습니다."
연박사는 상세하게 그때의 상황을 설명해주었다.
"그럼 그때 나머지 분들은 모두 춤을 추고 있었습니까? 물론
그 문제의 칵테일이 날라오기 전에 말입니다."
"네."
윤형사의 질문에 모두들 이구동성으로 대답하고 있었다.
"남형사, 어서 주방으로 들어가서 요리사하고 여비서 좀
만나봐."
"알았어."
남형사는 고개를 끄덕이며 주방 쪽으로 걸어갔다. 분홍색 커튼
사이로 들어가자 흰색 요리복을 입은 세 명의 요리사와 정장
차림의 여비서가 식탁의자에 앉아 있다가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자리에서 일어났다.
"단도직입적으로 묻겠습니다만 이곳에서 칵테일을 만들 때
누구 누구 있었습니까?"
"모두 다 같이 있었어요."
여비서가 약간 떨리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이 주방에 다른 사람은 출입하지 않았습니까?"
"아니요. 여기에 들어온 사람은 아무도 없었어요."
"그렇다면, 여러분들이 독극물을 타지 않았다면 누가
탓겠습니까? 우리 경찰의의 잠정적인 분석입니다만 윤보혜 양의
칵테일 잔에 파라티온이 타졌을 거라고 하던데 누가 그런
독극물을 탔을까요?"
요리사와 여비서는 한결같이 이 주방에서는 그런 일이 절대로
없었다는 듯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먼저 칵테일을 만든 분에게 묻겠습니다. 이곳에 여러 번
와봤습니까?"
남형사의 질문에 요리사는 어이없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저와 김군은 조선생님의 보조 요리사일 뿐입니다. 칵테일을
만드는 것이 전문입니다만 요리사 자격증도 가지고 있습니다.
저희 호텔이 증축을 위해 쉬고 있기 때문에 부수입 좀 올리려고
같이 따라왔던 겁니다."
"좋습니다."
남형사는 20대 초반쯤 되어보이는 여비서에게 시선을 돌렸다.
"강여사님의 의상실에서 일하고 있다구요?"
"네."
"요리사분들 하고는 아는 사입니까?"
"오늘 처음 뵈었어요."
"윤보혜 양에게 칵테일을 날라준 거 기억나지요?"
"네......"
여비서의 입술이 가느다랗게 떨리고 있었다.
"연박사님의 상황설명을 들으니까 직접 건네주었다구요?"
"네...... 보조 요리사님한테 네 개의 칵테일 잔을 받아
쟁반에 놓고 홀로 나갔어요. 제일 먼저 연박사님에게 드렸고
진에게도 한 잔 내려놓았어요. 그리고 다른 테이블로 가서
유진숙 회장님에게 한 잔 드렸어요. 선도 원해서 한 잔
내려놓았구요. 그러고나서 얼마 안 있다가 유진숙 회장님의
비명소리가 들려서 나가 보았더니......"
"조선생께서는 그때 주방에서 무얼하고 계셨습니까?"
남형사는 주방모자를 쓰고 있는 요리사에게 물었다.
"과일로 쥬스를 만들고 있었소."
"네, 잘 알았습니다."
남형사가 홀로 나왔을 때 초대객들은 강여사의 안내로 2층으로
올라가고 있었다.
"윤형사, 어떻게 된거야?"
"너무 피곤하다고 해서......"
"과장님은 아직 도착하지 않으셨지?"
"응. 곧 오시겠지 뭐."
두 형사는 시체가 놓여 있는 테이블 쪽으로 걸어가며 낮은
음성으로 속삭였다.
"어떻게 생각해 남형사는?"
"타살이야."
"그래, 독살이야."
윤형사가 단정짓듯이 말했다.
"신데렐라 같은 미스코리아 진이 한 달도 채 되지 못해서
독살됐다....... 원한이 아니라면 누가 제일 이득을 볼까?"
두 형사는 하얀 천으로 덮여서 들려나가는 시체를 보며 생각에
잠긴 표정을 지었다.
"남형사, 그것보다도 말이야. 칵테일로 미스코리아 진을
독살한다는 건 대단히 어려운 일 아닐까? 예를 들어서 여비서의
경우만 해도 그래. 범죄를 감추어야 할 판인데도 아주
알몸이잖아. 더군다나 독살시간은 용의자가 한정될 시간이었어.
칵테일을 만들었다는 보조 요리사도 마찬가지야. 그 역시
알몸이었다. 진을 노리고 극독물을 탔다면 용의자는 단 세
사람일 뿐이야. 알몸인 여비사와 같은 테이블의 옆자리에 앉아
있었던 연박사와 진이 죽기 전에 자리를 옮겨온 유진숙 여사,
이렇게 셋이야. 나머지 사람들은 현장 알리바이가 완벽해."
"그러니까 윤형사 말은 독살 대상이 진이 아닐 수도 있다는
추측인 것 같은데, 그렇다면 범인이 노린 사냥감은 구사일생으로
살아났다는 얘기야?"
"지금 이 상황에서는 해결이 불가능하다는 느낌이야.
살인동기도 그렇고 독극물을 탄 시기도 그렇고 모든 것이 혼란
속에 감춰져 있어."
그때 장과장이 자다가 일어난 머리로 홀로 들어서고 있었다.
두 형사에게 출동명령을 내리고 급하게 달려왔는지 양말도
제대로 못신고 온 모양이었다.
"과장님."
윤형삭 아버지 같은 장과장을 반가운 목소리로 불렀다. 두
형사에게 사건정황을 듣고난 장과장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입술을
한쪽으로 치켜올렸다. 깊은 생각을 할 때마다 눈썹이
치켜올라가듯 입술이 치켜올라가는 게 그의 버릇이었다.
"이상한 일이군. 살인보다는 자살 쪽이 더 가능성이 많은 게
아닐까? 실제로는 어떨지 모르겠지만 미스코리아 진을 노리고
이루어진 독살이라는 느낌이 피부에 와닿지 않는군."
"과장님, 자살은 절대로 아닙니다. 이 파티가 축하파티였고
피살자는 3주 전에 미스코리아 진으로 당선된 그야말로 화려한
인생을 막 시작하는 시기였습니다. 그녀에게서 자살의 그림자를
느낀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더군다나 자살 장소를
파티장으로 정한 것도 납득이 가지 않습니다. 파티가 끝난 후
잠자리에서 음독자살했으면 모를까. 더욱이 유서도 없는
상탭니다."
남형사는 자살 가능성은 제로라고 못박고 있었다.
"외부인의 침입 가능성은 없을까?"
"그것 역시 불가능합니다. 테라스에서 주방으로 통하는 문과
홀로 직접 들어올 수 있는 출입문, 그리고 미리 침입해서 2층에
숨어 있다가 살금살금 내려와서 모든 사람들이 댄스에 시선이
쏠려있을 때 파라티온을 칵테일 속에 몇 방울 떨어뜨릴 수
있겠지만 시간상으로나 현장 사람들의 증언으로나 도저히
불가능합니다. 내부인 소행이 확실합니다."
"댄스를 추고 있던 8명을 제외한 나머지 여섯 명이라.......
그것도 주방에 있던 네 명도 진과의 독살에 무관해
보인다....... 그럼 최종적으로 남은 두 사람은 연박사와
유여사뿐인데......"
잠시 후, 여비서의 안내를 받으며 2층으로 올라간 장과장은
응접실 소파에 앉아 있던 권의원과 재회의 악수를 나누었다.
연예인 마약사범 때 변호를 맡았던 금지선 변호사도 함께 일어나
장과장과 악수를 나누었다.
"장과장, 고인에게는 안 된 말이지만 지금 여러 분들이 곤경에
처해 있네. 축하객에서 졸지에 용의자로 몰린 심정을
이해하겠나?"
"의원님의 심정 충분히 이해가 갑니다."
"자살인가?"
"현재로서는 거의 틀림없는 독살입니다."
"내 그럴 줄 알았네."
권의원은 다리 힘이 쭉 바지는지 소파에 털썩 주저앉으며 깊은
한숨을 토해냈다.
"이제 어떻게 사건을 처리할 생각인가?"
"아무래도 동이 틀 때까지 사건을 해결하긴 어려울 것
같습니다. 저도 비공개로 수사를 진행시키고 싶지만 피살자가
워낙 뉴스감이라서 하루도 안 돼서 기자들이 몰려올 겁니다."
"어쩌겠나. 내 안위를 위해서 여러 분들에게 폐를 끼칠 수는
없지. 세상의 온갖 눈초리와 구설수에 올라도 이 또한 내
운명이니 거역할 수 없는 일이겠지. 이제부터는 장과장 방식대로
수사를 진행시키게나. 아름다운 미스코리아 진을 살해한 인간이
어떤 인간인지 장과장의 특수수사과 천재들을 총동원해서라도
검거를 해주기 바라네. 휴, 치명적이야....... 이번에 장관이
되면 문화계를 위해서 할 일이 참 많았는데, 허허허......"
권의원은 허탈한 표정을 지으며 소파 뒤로 머리를 기대고
지그시 눈을 감았다.
"연박사님하고 유여사님하고 얘기를 나누고 싶어서 이렇게
올라왔습니다만......"
잠바 차림의 장과장이 초대객들을 둘러보자 연박사와 유여사가
서로의 얼굴을 흘끗 쳐다보고 나서 장과장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이곳 말고 조용한 장소가 없을까요?"
연박사는 앞장서서 침실 옆에 있는 서재로 장과장과 유여사를
안내했다. 연박사가 두 개 달린 형광등 줄을 연속해서 위 아래로
당기자 서재는 대낮같이 밝아졌다.
"제가 듣기론 미스코리아 진이 숨졌을 때 두 분만이 테이블에
같이 앉아 계셨다는데, 다른 분들처럼 댄스를 추지 못했기에
앉아 있었습니까?"
"아닙니다. 나 역시 댄스를 추고 싶었지만 파트너가
없었습니다. 보혜 양에게 한번 댄스를 청했지만 한복을 입고
있어서 불편하다고 하면서 정중하게 거절하더군요."
"유여사님께서는 어째서......"
"보시다시피 저 역시 한복을 입고 왔어요. 이럴 줄 알았다면
춤 추기 좋은 의상으로 입고 오는 건데......"
유여사는 한복을 원망섞인 눈으로 보며 권의원처럼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유여사님은 윤보혜 양을 언제 보셨습니까."
"미스코리아 지역 예선 때 미스 서울로 선발된 후에 강여사의
의상실에서 봤어요. 그때 나비향 양도 같이 봤어요."
"아, 그렇습니까? 강여사가 추천한 두 미녀가 나란히 진.선에
당선되었군요. 저 역시 미스코리아 선발대회를 TV로 봤는데, 제
기억으로는 나비향이 출신지역이 경기도로 되어 있던 것
같은데......"
"그런 건 중요하지 않아요. 본적지나 연고지가 있으면 어느
지역에서나 출전해도 상관없어요."
"아, 네......, 유여사님은 녹미회의 회장님이라서 잘 알고
계시리라 여겨져서 여쭙는 건데요, 진의 유고시 그 권한은 누가
대행하게 됩니까?"
"당연히 미스코리아 선이 진으로 인정됩니다. 미는 선으로,
4위 입상 미녀는 미로 격상됩니다. 자연적으로 한 계단씩
올라가는 거죠."
"그럼 앞으로는 나비향 양이 진이 되어 왕관을 쓰겠군요."
"그래야 되겠죠. 세계 미녀대회에도 참가해야 되고 또
사절로서 각종 행사에 참석해야 되기 때문에 진 자리를 공석으로
남겨둘 수는 없는 노릇이지요."
장과장은 잠시동안 말이 없다가 의미심장한 눈빛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장과장이 2층에서 두 용의자를 만나고 있을 때 윤주희 형사는
홀에서 강여사와 마주보고 선채로 수첩에다 초대객들의 명단을
적고 있었다.
"초청된 분의 위상을 보면 아시겠지만 모두가 미스코리아를
물심양면으로 후원해 줄 수 있는 분들입니다. 제 의상실
고객이시기도 하구요. 이번 일로 바쁘신 분들에게 엄청난 폐를
끼쳐드리게 되어서 몸둘 바를 모르겠어요."
강여사는 진이 숨진 테이블을 애써 외면하며 눈물을 글썽이고
있었다.
"헌데, 별장에 초대된 여성분들의 명단을 보니까 금지선
변호사님만 빼고 모두 미스코리아 출신들이시군요."
"당연히 그럴수밖에요. 저 역시도 그렇지만 모두가 녹미회
회원이예요. 보혜와 비향이를 후원해 줄 수 있는 사람들이지요."
"이런 파티가 자주 있었나요?"
"석달에 한 번 꼴로 모임이 있었어요. 여기서의 파티는 오늘이
처음이었고, 호텔 같은 장소에서는 여러 번 있었어요. 물론 다른
분들의 별장에서도 여러 번 파티가 있었고요."
강여사는 자연스런 목소리로 대답했다.
"윤보혜양을 미스코리아로 추천하신 걸로 아는데 언제 윤보혜
양을 처음 만났나요?"
"1년 전쯤이예요. 우리 의상실에서 종업원을 한 명 고용하려고
했는데 광고를 보고 지나가는 길에 들렀나봐요. 의상실을 닦고
쓰는 단순 고용직이었기 때문에 성격만 좋으면 아무나 쓸
생각이었는데 보혜가 제일 먼저 우리 의상실에 들어온 거예요.
화장기도 없고 의상 역시 평범하기 짝이 없는 것을 입고
있었는데 같은 여자인 제가 봐도 한눈에 반할 정도로 미모가
뛰어난 애였어요. 영락없는 미스코리아 재목감이었지요."
"올해 나이가 만으로 스무 살로 나와있던데요."
"네, 스물한 살이예요. 보혜는 고아였어요. 성남에 있는
고아원에서 일곱살 때 작은 공장을 운영하는 사람의 양녀로
입적되었는데, 보해가 열여섯 살 때 공장이 불타고 그 화재로
양부를 잃고 양모와 함께 거리로 나앉게 되었대요. 양모가
생선장수를 하면서 단칸방에 세들어 살았는데, 그때 보혜는 야간
고등학교에 다니면서 낮에는 조그만 회사에서 경리 겸 청소를
하면서 학비를 벌었나봐요. 그런데 졸업을 얼마 앞두고 양모마저
암으로 운명하는 바람에 또 고아가 되어 혼자 힘든 세상을
살아가야만 되는 신세가 되어버렸어요. 졸업하고 나서도 그
조그만 비디오 공급회사 사무실에서 경리로 일했는데, 도저히
성격에 맞지 않아 그만두고 며칠 쉬다가 우리 의상실 앞을
우연히 지나가다가 광고를 보고 들르게 되었다는군요. 몇 달만
일하면서 맘에 드는 직장으로 옮길 생각으로 우리 의상실을
들른건데......"
강여사는 다시 눈물을 글썽였다. 윤형사는 진이 마지막으로
앉아 있던 테이블쪽으로 우울한 시선을 두었다. 신데렐라. 바로
윤보혜 같은 여자를 두고 하는 말이다. 어둠에서 화려한
인생으로 날아오르던 그녀는 저렇게 어처구니없이 추락해버린
것이다. 영원한 어둠 속으로......
"비향 양과는 어떤 인연으로 알게 되었나요?"
"비향이는 저희 의상실 고객의 따님이었어요. 현재 S대
가정학과에 다니는 재원인데 이름만 들으면 금방 알 수 있을
정도로 큰 기업체 사장의 외동딸이랍니다. 부모님들이 무척
개방적이라 딸의 미스코리아 출전에 많은 도움을 주셨어요. 춤도
잘 추고 머리도 뛰어나고 성격 또한 여대생답게 발랄하구요.
단지 흠이라면 귀엽고 귀하게 자라선지 남한테 지는 걸 죽기보다
싫어하는 성격이랍니다. 어머, 내가 무슨 말을 하고 있지......"
강여사는 진의 죽음을 떠올리며 실언했다는 표정을 지으며
불길한 예감을 애써 떨쳐버리려고 하는 눈빛을 나타내고 있었다.
"강여사님에게 한 가지 궁금한 게 있는데요. 오늘 파티에 입은
미스코리아 진과 선의 의상은 누가 선택했나요? 본인들이 직접
골라 입었나요?"
"그렇지 않아요. 제가 의상 선택을 했어요. 낮에 보혜와
미향이와 함께 여기에 내려와서 입혀 봤어요. 아름다움을
최대한으로 살려주려고 얼굴 개성에 맞게 의상을 골랐는데
보혜는 한복이 너무나 잘 어울렸어요. 비향이는 내가 디자인한
의상을 입혔구요. 보혜와 비향이의 얼굴을 보셨으면 아시겠지만
동양적인 미모와 서양적인 미모로 확연히 구별되는 두
애였어요."
"한복을 입게 되면 댄스 추기가 매우 불편할텐데요?"
이 질문에서 윤형사는 의도적으로 무신경한 눈빛으로 물었다.
"보혜는 춤을 잘 못춰요. 볼룸댄스는 더더욱이요. 시간이 날
때마다 기초를 가리치고 있지만 제대로 스텝도 밟지 못하는
상태라 댄스를 추긴 무리였어요. 굳이 못출 것도 없지만 품위
문제도 있고, 또 꼭 댄스를 춰야만 될 상황도 아니었구요.
파티에 참석한 적이 없는 보혜로서는 구경하는 것만으로 많은
도움이 될 거라고 생각했어요."
"참으로 아름다운 아가씨였는데 무척 안 됐어요."
"뭐가 뭔지 하나도 모르겠어요. 날 만나지 않았다면 저렇게
되지는 않았을텐데......"
강여사는 진과의 인연 자체에 죄책감을 갖고 있는 듯한 표정을
지으며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보혜 양이 미스코리아가 됨으로 해서 찬란한 왕관을 쓴 게
아니라 죽음의 왕관을 썼다는 느낌이 드는 건 왜인지
모르겠어요. 여자의 직감이랄까요, 보혜양이 자살했다는 느낌은
들지 않나요?"
"자살이요? 무지개 같은 화려한 인생이 펼쳐져 있는데 자살할
여자가 이 세상에 있을까요? 그러나 모르지요. 우리가 모르는
나름대로의 고민이 있었는지요."
강여사는 회의적인 눈빛으로 윤형사를 바라보며 대답했다.
"이건 지나가는 질문인데요, 여비서는 강여사님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있나요?"
"송양이요? 걔를 우리 의상실에 채용한 건 8개월 전이었어요.
일을 순서있게 깔끔하게 잘 해요. 성격도 모난 데가 없고
싹싹해서 아주 마음에 들어요. 보수도 충분한 편인데요."
강여사는 의아한 눈빛으로 윤형사를 보았다.
"네......, 오늘 낮에 이 별장으로 내려오셨다고 했는데, 혹시
이 별장을 어슬렁거리거나 배회한 사람은 못보셨습니까?"
"아니요, 그런 사람은 못봤어요. 오후 4시 쯤에 비디오 기사가
홀에 들어와서 파티 때 찍을 카메라 각도들을 구상하고
연습하고는 별장을 나간 일밖에 없어요."
"비디오 기사요?"
윤형사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강여사를 쳐다보았다.
"어머, 그러고 보니 그 기사 어디 갔지......"
강여사는 홀을 두리번거리면서 비디오 기사를 찾았다.
"사건이 발생할 때 그 기사도 있었어요?"
"있었겠지요. 오늘 파티를 추억용으로 만들어서 나중에
손님에게 한 부씩 배부해 드릴려고 했는데......, 정말 어디로
간 거지...... 송양아, 송양아."
2층에다 생수를 날라주고 쟁반을 한 손에 든 채 계단을 밟고
내려오는 여비서를 부른 강여사는 당황한 목소리로 박기사의
행방을 물었다.
"글쎄요. 저도 경황중이라 밖으로 나가는 걸 못봤는데요."
윤형사는 사건해결에 서광이 비춰오는 듯한 느낌을 받고
있엇다. 사건현장에서 사라진 사람이 있었다면 일단 유력한
용의자로 간주하여도 무방할 것이다. 그 기사의 행방을 쫓는 건
시간문제일 것이다. 앞으로 그 기사의 신변을 확보하는데
수사력을 총동원한다면 사건 해결에 일말의 희망을 가질 수도
있을 것이다.
"강여사님, 그 비디오 기사의 명함이나 연락처 같은 거 가지고
있으세요?"
"명함이요? 아니요."
"그럼 연락처나 주소는요."
"그 기사에 대해서는 잘 몰라요."
"그럼 어떻게......?"
윤형사는 실망한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
"보혜가 소개해주었어요."
"보혜 양이요?"
"여상 때 다녔던 회사의 거래처 사람인데 비디오 촬영 솜씨가
뛰어나다고 해서 데려오라고 했어요."
"그럼 파티장을 촬영하자고 먼저 제의한 사람은
보혜양이었나요?"
"아니예요. 일주일 전의 일이었어요. 미스코리아 진.선.미가
방송국 쇼 프로그램에 함께 출연하고 나서 근처 레스트랑에서
보혜하고 비향이랑 늦은 저녁을 먹다가 우연히 비디오 얘기가
나왔어요. 물론 제가 먼저 기사 예기를 꺼냈지요. 전에 찍은
기사 실력이 형편없어서요. 그랬더니 보혜가 자기가 잘 알고
있는 기사가 한 분 있는데 한번 써보는 게 어떻겠냐고 묻길래
좋을대로 하라고 했어요. 그랬더니 공중전화로 가서 전화를
걸더군요."
그때 장과장과 남형사가 계단을 밟고 홀로 내려오고 있었다.
두 사람의 뒤에는 피곤한 표정이 역력한 초대객들이 같이
2층에서 내려오고 있었다.
"과장님, 문제가 생겼어요. 사건이 발생하자 현장에서 사라진
사람이 있습니다."
"뭐야!"
장과장과 남형사가 급한 걸음으로 윤형사에게 다가왔다.
"비디오 카메라 기산데요, 행방이 묘연합니다."
세 수사관이 주고 받는 대화를 듣고 있던 초대객들도 생각이
난 듯한 표정을 지으며 주위로 몰려들었다.
권의원이 제일 먼저 반응을 보였다.
"이런, 카메라 기사가 있었어. 우리가 정원에서 간단한 식사를
끝내고 홀 안으로 들어섰을 때 캠코더를 어깨에 걸치고 촬영을
시작했었어. 그것 참, 그 기사는 전혀 신경을 안 썼는데......"
권의원은 초대객들을 보면서 캠코더 기사를 마지막으로 본
사람이 누구냐고 물었지만 아무도 대답하는 사람이 없었다.
"우리가 보혜양이 쓰러져 있는 식탁으로 몰려갔을 때 슬쩍
빠져나간 것 같소."
그렇게 말하면서 권의원은 또 초대객들을 바라보았다. 모두들
권의원의 느낌과 일치하는 눈빛들을 보이고 있었다.
"혹시 그 기사가 보혜양을 독살한 범인이 아닐까? 그렇지
않고서야 줄행랑을 칠 이유가 없잖겠소."
권의원의 목소리는 흥분이 섞여 있었다. 유력한 용의자가
나타나서 곤욕을 치루지 않아도 된다는 듯한 희망의 표정이 얼굴
가득히 나타나 있었다.
"맞아요. 그 기사가 수상합니다. 범인이 틀림없어요."
연박사도 단정짓듯이 큰소리로 말했다. 그러자 모두들 그 놈이
범인이 틀림없다며 한마디씩 했다.
"아, 잠깐만요."
장과장은 주위를 정돈하고는 냉철한 눈빛으로 초대객들을
바라보았다.
"눈앞에 놓인 사실만 가지고 확신할 수 없는게
살인사건입니다. 제 말씀은 그 기사가 사건현장을 빠져나갔다고
해서 범인이라고 낙인 찍는 건 대단히 위험한 결론이라는
예깁니다. 여러분들 중에 칵테일이 날라져 왔을 때 그 캠코더
기사가 테이불에 있는 걸 본 분이 있습니까?"
초대객들은 서로의 얼굴만 쳐다볼 뿐이었다.
"아니면 주방에 들어갔다 나오는 걸 본 적이 있습니까? 그
기사가 테이블 근처에 있지 않고 멀리 떨어져 있었다면 홀에서
댄스를 추었던 분들과 마찬가지로 독살은 도저히 불가능한
것입니다. 다만 우리 경찰이 그 캠코더 기사를 반드시 찾아내야
할 필연적인 이유가 한 가지 있습니다. 여러분들이 홀 안에
들어설 때부터 촬영을 시작했다면 독살 순간이 비디오 테이프에
담겨져 있을 수도 있다는 추측입니다. 식탁에서의 상황이
정면으로든 뒷 배경으로든 찍혀만 있다면 그것만큼 진실을
가리는데 명확한 자료는 없을테니까요. 그렇기에 그 사라진
캠코더 기사를 무슨 일이 있어도 찾아내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치더라도 그 캠코더 기사가 도망치듯 사라져버린
사연이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초대객들 뒤에 서 있던 김진건 아나운서가 의문에 가득찬
목소리로 물었다.
"그거야 기사를 찾아내면 자연히 밝혀질 문제 아니겠습니까?"
장과장은 손목시계를 보면서 대답했다. 새벽 3시 반을
넘어서고 있었다.
"이제 귀가하셔도 좋습니다. 수사에 협조를 해주셔서 대단히
감사했습니다. 앞으로도 여러분들의 따뜻한 수사협조를
부탁드립니다."
초대객들은 차례로 현관문을 열고 주차장으로 걸어갔다.
연박사 부부와 요리사들도 함께 그들을 뒤따라나가고 있었다.
죽음의 의혹만 남겨 놓은 하얀 별장엔 세 수사관과 여비서만이
사건 뒷수습을 하고 있었다.
3. 살인은 마술이었을까?
여비서가 이층 청소를 하고 있는 동안 장과장과 두 형사는
윤보혜가 독살된 옆 테이블에 둘러앉아서 사건에 대한 의견을
개진하였다.
"이번 사건은 눈에 드러나는 면보다는 공기처럼 볼 수 없는
면을 더 중시해야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드는군."
장과장이 말했다.
"저 역시 과장님의 생각과 같습니다. 별장에 모인 사람들의
화려한 겉모습보다는 숨겨진 추악한 속모습을 찾아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남형사가 강한 어조로 말했다.
"옳은 얘기야. 과장님, 이곳에 모였던 사람들이 저명인사라
인격 수양이 잘 되어있는 면도 없지 않겠지만 인간관계에서
얽혀있는 살인적인 요소를 찾아내는 것에 수사 초점을 맞추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윤형사는 화려한 의상과 외모에만 신경을 쏟았던 초대객들을
떠올리면서 비웃는 미소를 지었다.
"우리 생각이 일치하는군. 그러면 미스코리아 진의 죽음과
방금 윤형사가 얘기한 대로 살인적인 요소를 연결시켜 이번
사건을 분석해보기로 하지."
장과장은 친근한 눈빛으로 두 부하 형사를 바라보며 말했다.
윤형사가 제일 먼저 의견을 내놓았다.
"저는 제일 먼저 미스코리아 진의 죽음으로 이득을 볼 수 있는
사람을 분류해 보았어요. 생각해 볼 것도 없이 미스코리아 선인
나비향입니다. 반대로 가장 큰 피해를 본 사람은 진을
물심양면으로 도와준 강희 여사였어요. 강여사의 말로는 선의
성격은 지는 것을 죽기보다 싫어하고 이기심이 강한 것이
흠이라고 지적할 정도였어요. 이는 곧 선의 자만심과 이기심,
나아가서는 질투심이 무척 강한 성격이라는 얘기죠. 이에 비해서
진은 학력이나 가정생활, 성장과정 등이 선과는 도저히 비교가
안 도리 정도로 하류층 생활을 해왔어요.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주목해야 할 점은 두 미녀가 강여사의
추천을 받았다는 점입니다. 서로 안면이 없는 상태에서 진과
선으로 정해졌다면 모르겠지만 진의 생활을 적나라하게 알고
있는 선이었다면, 여왕자리를 뺏긴 것이 속상하고 억울할 정도를
넘어서 울음을 터뜨릴 정도로 분하고 원통했을 수도 있는
겁니다. 그런 생각에서 한 단계 더 발전해서 자신은 하녀고 진은
여왕이라고 병적으로 자신을 비하하고 학대했을 수도 있어요."
윤형사는 자신이 여자라서 잘 알고 있다는 듯 입술에 힘을
주며 말했다.
"그러니까 패배의식에 사로잡힌 나머지 충동적으로 진을
독살했을 수도 있다는 가설인가?"
장과장은 비현실적이 아니냐는 듯한 눈빛으로 물었다.
"일단 살인적인 요소는 충분히 존재하고 있다고 보여져요.
사람마다 패배를 받아들이는 감정의 차이는 제각기
다르겠지만요."
장과장은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이내 그럴 수도 있다는 듯
고개를 끄덕여보였다.
"과장님, 저는 독살의 계획성과 즉흥성에 대해 생각해
봤습니다. 미스코리아 진이 사교춤을 출 줄 알았거나 한복을
입지 않았다면 독살은 과연 이루어졌을까 하는 의문입니다.
범인은 진이 댄스를 못춘다는 걸 미리 알고 있었습니다.
아울러서 한복을 입는 것도 사전에 미리 알고 있었습니다.
그렇기에 칵테일에다 극독물을 탈 수 있었을 거라고
생각되어집니다. 즉흥적으로 이루어진 독살이라면 범인은 저 위
이층에 있는 여비서밖에 없습니다. 주방에서 나오자마자 쟁반
위의 칵테일 잔에다 독극물을 타넣고 상대가 누구든지 아무나
마시고 죽으라든지, 그게 아니면 독극물을 탄 잔을 기억해서
보혜양에게 건네주었을 수도 있습니다. 헌데, 여기서 한 가지
생각해보아야 할 점은 칵테일을 내려놓는 것도 상대방의 의향을
물어보고 잔을 내려놓아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연박사와 진이
칵테일을 마시겠다고 뜻을 보였기 때문에 내려놓을 수 있었다는
점이죠. 그리고 무엇보다도 살인이 발생하면 가장 의심을 받는
사람이 자기라는 걸 뻔히 알면서 그런 무모한 짓을 자행할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아무튼 범인은 진이 댄스파티가 벌어질 때 테이블에 앉아 있을
거라는 사실을 예상했거나 알고 있었던 사람일 겁니다. 그렇기에
저는 독살이 이루어졌을 때 진의 근처에 있었던 사람들보다는
볼룸댄스를 추고 있었던 사람들 중에 존재하고 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춤을 추고 있던 사람이?"
장과장은 무슨 뚱딴지 같은 소리냐는 듯 실눈을 크게 뜨고
되물었다.
"이것 봐, 남형사. 홀에서 춤을 추던 사람들이 카퍼필든가
유리겔라인가 아니면 손오공이란 말인가. 파트너와 춤을 추다가
무슨 재주로 이렇게 멀리 떨어져 있는 테이블의 잔에다 독극물을
떨어뜨릴 수 있단 말인가? 여의봉을 가지고 있어도 불가능한
일이야. 더욱기 한손은 파트너의 허리와 손에 자석처럼
붙어있어야 하는데 자자, 현실성 없는 얘기는 그만두자고."
장과장은 손을 내저으며 이맛살을 찌푸렸다. 사건을 복잡하게
만들 필요가 없다는 표정이었다.
"과장님, 절대 불가능한 일이 아닙니다. 목표물이 식탁 의자에
앉아 있을 거라고 예상만 할 수 있다면 카퍼필드도 혀를 내두를
정도로 완벽한 독살 묘기를 보일 수도 있다고 생각됩니다."
"자네 지금 나하고 마술 얘기를 하자는 건가?"
"마술도 하나의 트릭에 불과한 눈장난입니다. 눈뜨고 당하는
게 매직인 것입니다. 유리겔라처럼 초능력자가 아닌 이상에는
속임수에 불과한 것입니다. 콜롬부스의 달걀 세우기와 다를 게
없는 겁니다."
"아니, 그럼 댄스를 추는 사람이 빛을 이용한 트릭이나
착시현상을 일으키게 만들어서 춤을 추게끔 보이게 했단
말인가?"
"과장님, 미스코리아 진은 독극물에 의해서 독살되었습니다."
"그게 마술과 무슨 상관이 있단 말인가?"
장과장은 도무지 이해가 안 간다는 표정이었다.
"앉아있을 거라는 확신과 독극물과는 밀접한 상관관계가
있습니다. 마술과도 같은 독살이 이루어질 수 있는 여건을
갖춰졌다고 할까요. 예를 들어 원격조종을 한다든가 대리모
살인을 한다든가 말입니다."
"이거 갈수록 태산이군. 자네가 천재라는 건 인정하지만
이번만큼은 자네가 환상적이고 애드벌룬적인 생각에 푹 빠져있는
것 같구만. 원격조종이라니, 대리모 살인이라니. 그럼,
리모콘으로 독극물을 움직였다는 얘긴가? 여자 범인이 홀에서
아기를 낳아 그 애기가 몰래 기어가 독극물을 탓다는 얘긴가?"
윤형사는 미소를 지으며 장과장을 보았다. 장과장은 남형사가
좀 돌지 않았냐는 듯한 표정으로 윤형사와 시선을 마주쳤다.
"과장님, 원격조종의 경우는 과학적으로 증명이 되는
살인입니다. 가령 미스코리아 진의 잔에 입술을 댈 수 있는 부위
전체에다가 독극물을 발라놓았다 가정해 보면 살인이 이루어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사건 정황으로 보아 계획적인 독살이
분명한 진의 죽음에서는 잔에 독극물을 발라놓았다거나 탔다는
쪽보다는 진의 입술쪽에 시선을 집중하는 게 더욱 그럴듯한
것입니다. 누군가 진의 화장품에 독극물을 발라놓았다 가정해
봅시다. 진이 입술에 루즈를 바르고 홀로 내려옵니다. 범인은
그녀가 춤을 못춘다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에 멀리 떨어져 있을
수 있는 좋은 기회를 가질 수 있습니다. 일종의 완벽한
알리바이죠. 진이 쥬스나 칵테일을 마시기 위해 독 묻은 입술을
잔에 갖다대면 모든 것은 감쪽같은 일이지요. 부검을 해도, 잔을
검사해도 독극물이 묻어있을 테니까요."
"그, 그렇수도 있겠군. 정말 마술과도 같은 살인이 되겠군."
장과장은 감탄의 표정을 짓고 있었다. 윤형사도 남형사의
추리에 공감의 눈빛을 보이고 있었다.
"그리고 대리모 살인의 경우는 말 그대로 남의 배를 이용해서
살인을 분만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 역시 범인 자신은
미스코리아 진과 되도록 멀리 떨어져 있는 상태에서 주위 사람을
이용해 병균 옮기듯이 독극물을 묻게 만드는 겁니다. 축하파티에
참석한 사람들 중에 춤을 추기 곤란한 사람이 딱 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녹미회 회장인 유진숙 여사지요. 적당한 시기에
살인의 기회만 노리고 있던 범인은 유여사가 한복을 입은 것을
보고 본격적인 살인구상에 들어갑니다. 그 살인구상이 이루어진
시간은 뻔합니다. 모듬 바베큐를 먹었던 정원에서였겠죠.
그곳에서 처음으로 유여사의 한복을 보았을테니까요. 범인은
미스코리아 진과 유여사가 단둘이 남게 될 때까지 최대한으로
주위에서 맴돌았을 겁니다. 초대객들이 쌍쌍이 댄스를 추고 있을
때도 그대로 테이블에 앉아서 결정적인 기회만 엿보고 있었을
겁니다. 때마친 여비서가 칵테일을 날라왔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문제가 생겼습니다. 유여사와 진은 같은 식탁에
앉아있지를 않았습니다. 순간적으로 범인은 망설였을 겁니다. 또
연박사는 파트너가 없었습니다. 유여사를 이용하느냐, 연박사를
이용하느냐, 범인은 계획을 변경했을 겁니다. 연박사 쪽으로
급선회를 했을 겁니다. 범인은 자리를 옮겨 잠깐동안 연박사에게
접근했을 겁니다. 그리고 범인은 자기 테이블로 걸어가
파트너에게 춤을 청해서 홀 중앙으로 걸어갔습니다. 그럼 범인은
연박사에게 접근해서 무엇을 하고 제자리로 돌아갔을까요?
심리적인 마술을 부렸을 뿐입니다."
"심리적인 마술?"
장과장은 남형사의 자신만만한 눈빛을 쳐다보며 물었다.
"연박사를 은연중에 증인으로 이용했을 뿐입니다. 범인은
연박사가 있는 앞에서 카퍼필드처럼 착시현상도 일으키지 않았고
유리겔라처럼 멈춰진 시계를 움직이는 초능력도 발휘하지
않았습니다. 다만 연박사를 가운데 두고 잠깐동안 미스코리아
진과 얘기만 나눴을 겁니다. 다시 한번 진에 당선된 걸
축하한다며, 그런 의미에서 악수 한번 하자고."
윤형사는 이제야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그러나
장과장만은 여전히 아리송한 표정을 짓고있었다.
"악수를 함으로 해서 병균을 옮긴 겁니다. 범인은 자기 손에
치사량의 수 배, 수십 배나 되는 독극물을 손가락과 손바닥
전체에 묻혀서 수줍게 손을 내미는 미스코리아 진의 손가락에
독극물을 묻혔을 겁니다. 그리고 여기서 한 가지 추측할 수 있는
건 악수할 때의 손자세입니다. 남자들끼리의 악수는 서로 힘있게
잡고 흔드는 게 보통이지만 남녀의 악수는 대체적으로 가벼운
편입니다. 즉, 손을 내미는 진의 손가락에 살짝 자신의 손가락을
겹쳐주는 방법으로 악수를 하면 그만인 것입니다. 진이 칵테일을
마시기 전에 잔을 여러번 매만지거나 잔에 묻은 독극물이
두번째쯤 마실 때 같이 섞여들어가면 그것으로 독살은 완벽하게
성공하는 겁니다."
장과장은 그제서야 고개를 크게 끄덕거리며 남형사를 다시
한번 새삼스런 눈빛으로 쳐다보았다.
"그렇다면 악수를 한 장본인은 누굴까?"
"김진건 아나운서밖에 더 있겠습니까."
"그렇지. 김진건 아나운서가 맨 마지막에 나가서 춤을 췄지.
그럼 진의 루즈에 극독물을 칠한 사람은 누굴까?"
장과장이 물었다.
"두 여자 중에 한 여잡니다. 강여사 아니면 비향이지요."
"그러니까 남형사의 용의자는 세 사람이 되겠곤. 윤형사의
용의자는 셋 중에 포함되는 나비향이구."
윤형사와 남형사는 동시에 "네"하고 대답했다.
"아이구, 지금 몇 시야?"
장과장은 네 시가 넘어있는 손목시계를 보면서 피곤한 표정을
지었다. 목운동을 하며 졸음을 쫓던 장과장은 안주머니에서 캡슐
한 개를 꺼내 입속으로 넣었다.
"어? 무슨 약입니까, 과장님? 저도 한 알 주십시오."
남형사는 장과장의 목구멍 속으로 들어간 약을 쳐다보며
장과장의 안주머니에 궁금증을 나타냈다.
"아무 것도 아니야. 잠 안 오는 약이야."
장과장은 별걸 다 달란다는 눈치였다.
"아이, 그러지 마시고 한 알만 주십시오."
장과장은 남형사는 몸에 좋다는 것들은 무엇이든지 가리지
않고 좋아했다. 보약은 물론이고 어디에 좋다, 어디에 효과가
있다 하는 약들은 밥보다 더 먼저 먹는 두 사람이었다. 3년 동안
특수 수사과에 함께 있는 윤주희 형사가 봐도 두 사람은 약에
대해선 유별난 데가 있었다. 다른 것에 대해선 서로에게 넘칠
정도로 후해도 유독 약만큼은 딴 주머니를 차는 두 사람이었다.
아마 두 사람은 박봉만 아니라면 몸에 좋다는 보약이란 보약은
죄다 사재기해서 주식 대신 먹을 성격들이었다.
"남자들이란 그저......"
윤형사는 혀를 끌끌 차며 두 사람을 바라보았다. 장과장이
피같은 약을 한 알 주자 그것을 손으로 집은 남형사는 기쁜듯
입이 헤 벌어지면서 얼른 입으로 가져갔다. 물도 필요없는 두
사람이었다.
"남형사, 그 약이 잠 안 오는데는 최고 잘 듣는 약이야. 난 이
약만 먹어, 다른 약은 질이 떨어지더라구."
장과장이 약의 효력에 대해 말해주자 남형사는 "아,
그래요?"하면서 금새 반짝이는 눈동자로 장과장을 보았다.
장과장과 남형사는 이제부터 상쾌한 새벽이라는 듯 즐거운
표정까지 짓고 있었다. 그런 두 사람을 보는 윤형사의 얼굴
표정은 구제불능이라는 듯 어이없어했다. 집중력이 요구되는
사건분석을 하다가 약 얘기로 화제를 바꿔서 사고력을
정지시키는 두 사람이 어린애처럼 보이기까지 했다.
그때 이층에서 응접실 정리와 청소를 마친 여비서가 홀로
내려오고 있었다. 그녀가 테이블로 다가오자 윤형사가 일어나서
자리를 권했다.
"하루종일 일하느라 피곤하겠어요."
윤형사가 친구 대하듯 다정한 음성으로 말을 건넸다.
"네, 조금요."
여비서는 피곤한 얼굴로 미소를 지었다.
"강여사님의 의상실에서 일한지 8개월이 되었다구요? 파티에
참석한 분들에 대해서 아는 것이 있으면 생각나는 대로 얘기해
주시겠어요?"
여비서는 윤형사의 질문 내용을 잘 모르겠다는 듯
어리둥절했다.
"왜 미용실이나 의상실에서 하는 얘기들 있잖아요. 여기에
오셨던 분들 중에 미스코리아 진에 대해서 좋은 얘기든 지나가는
얘기든 한두 마디씩 했을 거 아니예요. 여기 오셨던 사람들
의상실에 들르곤 하지요?"
"네. 일주일에 한번, 보름에 한번 정도 오세요."
"윤보혜양이 진에 당선되기 전과 당선된 후에 얘기는
어떠했나요?"
윤형사의 질문에 여비서는 대답을 주저하는 기색을 보였다.
그는 윤형사의 미소와 진실이 담긴 눈빛이 마음에 드는지
머뭇거리던 말문을 열었다.
"윤보혜 씨가 당선되기 전까지는 평판이 매우 좋았어요.
그런데 막상 보혜 씨가 진으로 당선되고 나자 앞에서 하는 말고
뒤에서 하는 말이 너무 달랐어요. 보혜 씨 앞에서는 칭찬과
축하의 말을 하고는 없는 자리에서는 흉들을 보는 것이었어요.
허리가 약간 굵어보인다. 미스코리아 선이 백번 낫다, 과거가
의심스럽다는 등 두 혀를 가진 여자들이 대부분이었어요."
여비서는 감정을 얼굴에 나타내지 않고 솔직하고 차분한
음성으로 말하고 있었다.
"이 별장에 왔던 사람들 중에서도 그렇게 말한 사람이
있었나요?"
윤형사는 자연스런 목소리로 핵심을 물어보았다. 그러자
여비서가 조슴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금변호사님, 유진숙 회장님, 정주라씨, 모두가 이중성격을
쓰고 있었어요."
"네...... 남자 분들은 의상실에 안 들러나요?"
"가끔 가다가 동부인해서 오실 적도 있지만 그리 빈번한 편은
아니예요."
"남자 분들은 미스코리아 진을 어떻게 보고 있던가요?"
"모두가 한결같이 역대 미스코리아들 가운데 최고 수준의
미녀라고 칭찬을 아끼지 않았어요."
"부인들이 옆에 있는 자리에서요?"
윤형사가 중요한 대목이라는 듯 목소리에 힘을 주며 물었다.
"있으나 없으나 개의치 않고 말씀들 하셨어요."
"네...... 아참, 조금 전에 한 말이 생각나서 묻는건데요,
미스코리아 선이 훨씬 낫다, 과거가 의심스럽다 하고 흉을 본
사람이 누군지 기억이 나는지요?"
윤형사와 여비서는 어느새 편안한 사이가 되어 있었다. 그만큼
윤형사는 여성심리를 이용한, 대화 분위기를 이끄는 솜씨가
뛰어났다. 여비서는 상류층 여자들에 대해서 심한 반감을 가지고
있었던 게 분명했다. 윤형사는 지금 그 점을 십분 이용하고
있었다.
"보혜 씨를 흉보는 여자들 가운데서도 금지선 변호사가 제일
심했어요. 2주 전쯤이었을 거예요. 강희 선생님과 소파에 앉아서
얘기를 나누는 걸 우연히 들었는데 이것 저것 캐묻는
것이었어요. 물론 처음부터 듣지는 못했지만 그 특유의 목소리로
어느 학교를 나왔느냐, 그 회사가 어디에 있는 어떤 회사냐며
꼬치꼬치 캐묻는 것이었어요. 그러면서 강희 선생님의 기분을
만족시켜주면서 계속 보혜 씨의 과거에 대하서 묻는 것이었어요.
그런 애를 발굴해서 신데렐라로 만든 강여사의 안목에
감탄해마지 않는다며 야누스 짓을 서슴치 않는 것이었어요.
그러나 저는 금지선 변호사가 왜 그러는지 잘 알고 있었어요."
윤형사는 아무 말 없이 듣고만 있었다. 이제는 오히려
여비서의 입을 막으려고 해도 막을 수가 없는 상태에 이르고
있었다. 여비서는 이왕 말난 김에 다 해버리겠다는 듯 마음놓고
험담을 늘어놓았다.
"졸직히 말씀드리면, 금지선 변호사는 박윤성 회장님을
짝사랑하고 있어요. 며칠 전에 권의원님과 유여사님이 의상실에
잠깐 들렀었는데 그때 박회장님도 동행해서 오셨었어요. 마침
보혜씨가 있어서 자연스럽게 저녁식사 약속을 하게 되었어요.
그런데 권의원님과 유여사님은 선약이 있다면서 다른 곳으로
가셨고 박회장님과 보혜씨만이 저녁식사를 하게 되었어요. 헌데,
다음날 그 사실을 알게 된 금변호사가 화를 내면서 되먹지 않은
애라니, 형편없는 애라니, 선이 훨씬 낫다느니, 과거가
의심스럽다니 하는 것이었어요. 지 성질에 못이겨서 내뱉는
말들이었지만 말이예요. 흥,. 이런 말을 하는 건 좀 그렇지만 그
여자는 색골이예요. 이혼경력이 있는 여자에다가 배우들의
변호를 맡아주는 걸 연줄로 사회의 지탄을 받는 남자 배우들과
호텔을 드나들며 사랑행각을 벌이곤 했어요. 그런 여자를 누가
좋아하겠어요. 그러니까 남자한테 이혼을 당했지요. 위자료도
한푼 못받고 말이에요. 콩밥 안 먹은 것만도 다행이지오."
"박회장님과 관계도 그래요. 박회장님이 어디가 아쉬워서 그런
색골하고 다니시겠어요. 더군다나 그 분은 아직 미혼인데다가 뭐
하나 부족할 게 없는 분이신데요. 그런데 그 여자는 자기가
좋아하는 남자는 절대로 놓치지 않는대요. 연하의 남자는
남자대로 잘 생긴 남자는 남자대로 잘 요리한대요. 그런데 그
색골 변호사는 법을 많이 알고 있어서 그런지 유부남한테는
절대로 유혹을 하지 않는대요. 청년이나 이혼남한테만 꼬리를
흔든다고 해요. 그래서 오늘날까지 아무 문제도 없이 변호사
노릇을 할 수 있는 거래요."
"누가 그런 소리를 하나요."
"3개월 전에 의상실을 그만둔 디자이너 언니가 그러셨어요.
그리고 실제로 그 여자 입을 통해서 들었어요. 강희 선생님
하고는 잘 통하거든요. 하여튼, 그때 강희 선생님에게 보혜씨의
과거를 다 물어보고 나서는 과거가 의심스럽다며 이상한 표정을
짓는 것이었어요. 제 과거는 망각한 채 말이에요."
그때까지 잠자코 듣고만 있던 장과장은 치켜올린 입술을
풀면서 여비서의 얼굴을 찬찬히 훑어보았다.
"송지희씨는 죽은 미스코리아 진과 평소 친하게 지냈나요?"
장과장이 물었다.
"네."
"당선되기 전이나 후나 윤보혜양은 송지희씨를 변함없이
대해주었어요?"
다시 윤형사가 질문했다.
"보혜씨는 정이 무척 많은 여자였어요. 얼굴도 아름다웠지만
마음씨도 천사처럼 아름다웠어요. 그런 보혜씨에게 남자분들이
칭찬을 아끼지 않은 건 지극히 당연한 현상이라고 생각해요."
"미스코리아 진의 남자 친구는 없었습니까?"
잠자코 앉아있던 남형사가 궁금한 듯한 목소리로 물었다.
"남자 친구요? 보혜씨는 쑥맥이에요. 의상실에 있을 때
남자한테 걸려오는 전화 한통 없었어요. 휴일에도 의상실에서
하루 종일 시간을 다 보낸 걸요."
"옛날에 사귄 남자 친구 얘기는 못들었습니까?"
"회사에 다닐 때 쫓아다녔던 남자는 있었나봐요. 하도 귀찮게
쫓아다녀서 회사를 그만두고 강희 선생님의 의상실에 들어왔다고
하더군요."
"미스코리아 진이 다녔던 회사가 어디에 있는지 아십니까?"
장과장이 날카롭게 물었다.
"인천 주안에 있는 조그만 비디오 공급 회사에 다녔다고
했어요. 동오기획이라고 들은 걸로 기억나요."
"물론 강여사님도 알고 있는 사실이겠지요?"
"네, 그 변호사에게 얘기해주는 걸 들었어요. 거리가 좀
떨어져 있어서 자세히는 못 들었지만요."
남형사는 미스코리아 진의 과거를 조사해 보는 것이 사건
해결에 도움이 될 것 같은 예감이 들어 회사명을 적었다.
남형사가 볼펜을 놀리고 있는 동안 윤형사는 계속 질문을 했다.
"보혜양은 의상실을 잘 다녔나요?"
"그럼요. 손님들에게 상냥하고 친절하게 잘 대해서 고객들이
모두 좋아했어요. 참, 그런데 이상한 건 작년 9월부턴가 4개월
동안 의상실을 나오지 않았어요. 그때 제가 의상실에
들어갔거든요. 좀 몸이 아파서 몇 개월 쉬는 거라고 강희
선생님이 말씀하신 걸로 기억돼요."
"아, 네. 그건 그렇고 강여사님이 그러시던데, 캠코더 기사를
윤보혜양이 데리고 왔다고 하던데요."
윤형사는 여비서의 눈을 똑바로 보면서 물었다.
"저도 자세히는 모르는 일이예요. 보혜씨가 미스코리아에
당선되고 나서는 얘기할 시간이 별로 없었어요. 보혜씨가 너무
바빴거든요. 다만 한 가지 아는 사실은 전에 다녔던 회사의
거래처 사람이라는 것만 알고 있을 뿐이에요."
"그럼 파티 때 처음 봤겠군요?"
"네."
"칵테일을 날라주었을 때 그 기사가 촬영하고 있는 걸
봤어요?"
"그럼요. 아, 그래요. 확실히 기억나요. 왜나면 금변호사와
박회장님이 어울리지 않게 파트너가 돼서 춤을 추고 있었어요.
그 여자가 먼저 꼬리를 쳤겠지요. 그런데 그 기사는 테이블쪽을
촬영하고 있었어요. 보혜씨쪽을 많이 찍는 것 같았어요.
저기서요."
여비서는 손가락으로 출입문쪽을 가리켰다.
"그래요?"
달아나기 좋은 장소에서 촬영을 하고 있는 기사의 모습이
윤형사의 눈에 환영이 되어 나타났다. 출입문은 테이블과 홀
중앙의 중간이었다.
"주로 현관문 쪽에서 촬영을 하던가요?"
"그랬던 것 같았어요."
여비서의 말이 사실이라면 그 자는 어째서 한 장소에서만
촬영을 했을까? 살인을 예상하고 있었단 말인가? 역시 그 자가
범인인가? 아니면 우연일 뿐인가?
"근접 촬영을 위해 테이블로 가까이 가는 건 못봤나요?"
"글쎄요...... 전 주방에 많이 있어서......"
"고마웠어요, 지희씨. 하루종일 일하느라 피곤할텐데 그만
올라가서 쉬세요. 서울엔 언제 올라갈 건가요?"
윤형사는 다정스럽게 미소지으며 말했다.
"강희 선생님이 별장 정리와 함께 형사님들에게 모든 것을
있는 그대로 말씀드려서 사건해결에 도움을 주라고 하셨어요.
며칠 동안 여기에 머물러 있어야 할 것 같아요."
여비서는 나오려는 하품을 억지로 참으면서 의자에서
일어났다.
"고맙기도 하셔라. 강형사님 충격이 무척 크셨겠어요."
"저 같으면 기절할 거예요. 보혜씨를 위해 얼마나 많은 정성을
쏟으셨는데......"
여비서가 지친 걸음으로 이층으로 올라가자 그녀의 뒷모습이
사라질 때까지 지켜보고 있던 남형사가 굳게 다물었던 입술을
떼었다.
"의외로 수다장이군요. 마음 속에 있는 모든 비밀을 털어놓지
않으면 입에 병이 날 성격이군요. 거기다가 윗사람의 특별한
배려까지 있었으니 그야말로 물고가가 제 세상을 만난
격이네요."
"저 여비서는 금변호사에게 심한 거부감을 가지고 있어.
금변호사에 대한 얘기가 진실이든 헛소문이든 말이야."
장과장은 생각에 잠겨 있는 두 형사를 보며 말했다.
별장의 테라스에는 태양을 잉태한 새벽이 찾아들고 있었다.
"자, 이제 우리가 처음 얘기했던 대로 볼 수 없는 인간들의
마음을 정리해보기로 하지. 남형사는 이번 독살을 어떻게 보고
있나?"
남형사는 약의 보호 속에 있는지 여전히 총명한 눈빛으로 앉아
있었다.
"앞으로의 수사 방향을 잡아보면, 일차적으로 미스코리아 진의
과거를 추적해 보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하루 아침에
신데렐라가 된 보혜양이기에 찬사와 질투를 온몸에 동시에
받았을 겁니다. 그리고 당연한 얘기겠지만 캠코더 기사를 빠른
시일내에 찾아내야 될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그 기사가 갖고
있을, 사건 해결에 결정적인 자료가 될 비디오 테이프를
압수해야만 합니다."
"음...... 그래, 피해자의 과거 조사와 캠코더 기사의 행방을
남형사가 맡기로 하지. 인원이 필요하면 언제든지 보강해
줄테니까."
"윤형사, 어때?"
"저는 이곳에서의 독살이 남형사의 지적처럼 마술식
살인이라는 느낌이 강하게 들어요. 립스킥이나 악수 또는 기타
방법에 착안한 독살일 가능성도 있지만 근본적인 해결책은
별장에 모였던 초대객들의 심리가 진실을 밝히는데 최선책이라고
생각돼요. 마술이라는 것도 눈 뜬 사람들에게 통하지 눈이 안
보이는 사람들에게는 무용지물에 불과한 것이지요. 즉,
사건현장의 움직임들보다는 범인이 행동할 수밖에 없었던
필연적인 동기를 찾는데 주안점을 둘까 해요. 미스코리아 진을
둘러싼 여성들의 심리와 남성들의 심리를 적나라하게 파헤쳐서
운명과도 같은 살인동기를 찾아내겠어요. 심리에도 마술과 같은
트릭이 얼마든지 교묘하게 둥지를 틀고 있는 법이거든요."
"심리가 곧 진실이다. 아주 좋은 말이군. 명언이야. 어차피
인간이란 동물은 유형과 무형으로 이루어진 존재니까."
장과장은 엉덩이가 아픈듯 의자에서 일어나 허리운동을 하고는
홀 중앙으로 걸어갔다.
"사실, 나는 남형사의 그럴듯한 추리를 듣기 전까지는 여기서
춤을 추고 있던 사람들이 범인이 될 수 없다고 굳게 믿고
있었네. 소음권총이나 석궁, 독침 또는 시한폭탄 같은 걸로
살인이 시도되었다면 이 자리에 있던 사람들도 용의자로 간주할
수 있지만, 여기에서 춤을 추고 있던 사람들이 그 테이블에 앉아
있는 미스코리아 진을 독살한다는 건 도저히 불가능하다고
생각했네. 이곳과 그곳의 거리는 백두산과 한라산의 거리만큼
멀다고 느꼈었는데, 나와는 달리 범인은 자신의 육체와 마음만큼
가깝다고 확신한 모양이야.
그래, 맞아. 나는 남형사의 추리가 현실성이 있다고 생각하네.
어쩌면 범인은 여기서 춤을 추고 있었을지도 몰라. 마술을
부렸을지도 몰라. 완벽한 알리바이를 가지기 위해서 말이야.
이제부터 나는 여기서 그 테이블에 앉아 있는 범인에게 수갑을
채울 수 있는 반격의 마술을 부려볼까 해. 우리가 미처 눈치채지
못한 속임수가 분명히 있을 거야. 보이지 않는 그 무엇이."
장과장은 홀 전체를 한번 둘러보고는 단호한 표정을 지었다.
"그런데 과장님, 이 독살이 단독이냐 아니면 공범이
존재하느냐 하는 문제가 대두되어지고 있습니다. 공범이 있을
경우 마술은 더욱 용이해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남형사는 홀 중앙에서 쌍쌍이 춤을 추었을 초대객들을
생각하면서 의혹에 찬 눈빛으로 말했다.
"공범이 있을지도 모른다. 나도 그점에 대해서 생각 안해본 건
아닌데, 이 독살은 공범이 존재할 수 없는 살인이야."
"어째서지요?"
남형사와 윤형사가 홀 중앙으로 걸어가면서 물었다.
"독살에 자신이 없었다면 여러 사람이 모인 장소에서
미스코리아 진을 살해하지는 않았을거야. 혼자서 감쪽같이 일을
처리할 수 있었기 때문에 이곳을 선택했을 거야. 범인은 이
홀에서 빛나는 살인을 발견해냈을거야. 그리고 독살 상황이
공범이 있다고 보기에는 너무 단순해. 한 사람이 아닌 두세 명이
한꺼번에 움직일 시간적인 여유가 거의 없었어. 진이 칵테일을
받아서 마시기까지, 불과 3분도 안 되는 시간에 모든 것이
이루어졌다고 봐. 여비서가 쟁반을 들고 주방을 나오는 것을
동시에 목격하고 일사불란하게 움직여서 마술을 폈다고는 도저히
받아들여지지가 않아. 독살은 단독으로 이루어졌어."
장과장은 단언했다.
"저도 과장님 생각과 같아요. 범인은 그 한정된 시간에 우리가
모르는 살인준비를 끝마치고 홀 중앙으로 걸어나갔다고
생각해요."
윤형사가 장과장의 의견에 공감을 나타냈다.
장과장과 두 형사는 원형 테이블을 바라보면서 초대객들 중에
한 사람을 나름대로 범인으로 떠올려보고 있었다.
"자, 이제부터 본격적인 수사에 착수하도록 하지. 이제 곧
기자들이 벌떼처럼 몰려올거야. 별장을 떠난 사람들의 입이
자물쇠로 잠겨져 있지 않는 한 영원한 비밀은 불가능할테니까
말이야."
세 수사관은 현관문을 열고 정원으로 나갔다. 신선한 새벽
공기가 그들을 반갑게 맞이하고 있었다.
"어, 저 불빛들이 뭐지? 이런, 자동차 행렬 아니야. 빠르기도
하군."
보약 같은 새벽공기를 페부 깊숙이 들여마시던 장과장은 동산
아래의 소로로 꺽어들어오는 자동차의 희뿌연 헤드라이트 불빛을
보면서 이맛살을 찌푸렸다.
"겁나게 달려오네요. 과장님, 윤형사와 저는 서울로
가겠습니다."
"알았네. 나는 여기서 마술 연습을 하고 있을 테니까. 아마
수사본부는 이곳 경찰서에 설치될 거야. 그렇지만 별로 할 일이
없을 거야. 초대객들이 모두 이 지방 사람들이 아니니까.
서울에서 수사하기가 수월할거야."
두 형사는 사진기와 카메라 멘 기자들이 별장으로 돌아오기
전에 샛길로 빠져서 국도로 진입했다. 장과장은 남형사가
운전하는 경찰 승용차가 사라질 때까지 보약 마시듯 공기를
들여마시다가 별장 안으로 들어갔다. 텅 빈 홀에 혼자 선 그는
테이블로 걸어와 앉으며 다시 중앙 홀을 날카로운 눈매로
쏘아보았다.
"여기에 앉아서 저 중앙 홀에 있는 범인에게 수갑을 채우려면
어떤 마술을 펼쳐야 될까?"
장과장은 무심코 테이블 위의 홀 천장을 바라보게 되었다.
"혹시? ......"
4. 범인은 없다
서울로 돌아온 남형사가 특수수사과 낡은 소파에 모로 누워서
간밤의 수면부족을 채우고 있을 때, 윤형사가 청바지 차림으로
특수수사과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왔다. 그녀의 손에는 빵과
우유가 든 봉투가 들려져 있었다.
"남형사, 그만 일어나."
힘겹게 눈을 뜬 남형사는 태극기 반대편에 걸려 있는 벽시계를
보고는 기겁을 해서 일어났다.
"이런, 벌써 12시가 넘었네. 과장님한테서는 연락이 없었어?"
"기자들한테 포위되어서 대변인 노릇을 하느라고 땀을 뻘뻘
흘리시고 있나 봐."
"신경안정제나 갖고 계신지 모르겠네. 허긴, 미스코리아 진의
시신을 발바닥에 무좀이 나도록 달려온 기자들이 허탕치게끔
과학수사연구소로 옮겨놨으니 곱게 넘어가 주지는 않을 거야.
사진 한장 못 찍었으니 좋게 볼 리는 없을 거야."
"불쌍한 우리 과장님. 남형사, 이거 먹어."
윤형사가 스트로우를 우유곽에 꽂아주면서 빵과 함께 주었다.
"고마워."
남형사는 우유를 힘껏 두 번 빨아 목을 축이고는 탁자 위에
놓인 수화기를 한 손에 집어들었다. 인천 지역번호를 누른 다음
114로 전화를 걸었다.
"네, 수고하십니다. 동오기획 전호번호 좀 부탁합니다."
남형사는 볼펜 꼭지를 누르고는 메모지를 앞으로 끌어당겼다.
"4, 2, 3에 ......, 네, 감사합니다."
남형사는 후크를 누르고 다시 숫자를 손가락으로 눌렀다.
"동오기획이지요? 그곳 위치가 어떻게 되지요? ......네, 주안
사거리에서 ......네, 수고하십시오."
남형사는 수화기를 힘있게 내려놓으며 동시에 소파에서
일어났다. 윤형사에게 빗을 빌려서 헝클어진 머리를 빗고는 빵과
우유를 양손에 들고 특수수사과 문을 나섰다.
특수수사과에 혼자 남게 된 윤형사는 금지선 변호사 사무실을
방문하기 진 금변호사의 파티에서의 심리를 분석해 보았다.
금지선 변호사는 턱시도를 입고 있었던 박회장을 짝사랑하고
있었다(여비서의 진술에 전적으로 의지한 사실이지만). 그리고
그녀의 사생활은 매우 문란했다. 그런데 박회장은 미스코리아
진에게 홀딱 반해있었다. 만약에 그녀가 박회장과의 사랑에
인생을 걸었다면 살인이라는 도박을 감행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문란한 성생활을 해온 여자가 박회장과 진의 수면 아래의
만남에 살의까지 느낄 정도로 성급한 판단을 했으리라고는
여겨지지 않는다. 더구나 파티때 박회장은 금변호사와 파트너가
되어 춤을 추었다. 여비서는 금변호사를 은근히 용의자로
몰아넣고 있었다. 어쩌면 여비서가 박회장을 흠모하고 있는지도
모를 일이다. 이는 곧 박회장과 금변호사는 매우 가까운 사이일
수도 있다는 역설이 된다. 여자의 혀는 한 마디로 예술적이다.
여비서의 혀는 진실과 질투로 철저하게 위장될 수도 있다.
그러나 금변호사든 여비서든 독실된 진과의 관계에서는 이렇다
할 뚜렷한 살인동기가 발견되어지지 않는다. 강여사와 유여사도
진을 죽여야만 될 그 어떤 이유도 없어 보인다. 더욱이 진으로
당선된지 3주밖에 되지 않았을 뿐 아니라 공식석상에서의 첫
파티 때라 진이 최근에 원한을 살만한 행동을 할 리가 없다.
오히려 몸조심 말조심 해가며 후원자들의 환심을 사야만 될
진이었다.
나비향은 어떻까?
미스코리아 선은 남에게 지는 것을 죽기보다 싫어하는
성격이라지만 살은 후에 자기 인생을 예측 못할만큼 머리가 텅
빈 여자라고는 생각되어지지 않는다. 명문대학의 재워능로서
선의 왕관을 쓴 그녀로서는 인생의 황금기처럼 영광스러운
일임에 틀림없을 것이다. 같은 의상실의 윤보혜에게 진 자리를
뺏겨서 속상하고 억울한 마음이 들긴 했겠지만 그렇다고 해서
패배심리를 못이겨서 독살을 계획하고 실행에 옮겼다는 건 웬지
현실감이 없어보인다.
그럼 전년도 미스코리아 진은 어떻까?
진에 당선된 후의 1년 동안 성주라는 스타가 되어 있었다. 쇼
프로그램 진행자로, CF모델로, 지금은 영화배우로까지 다방면에
걸쳐 재능을 인정받는 팔방미인이 되어 있었다. 그런 성주라가
무엇이 부족해서 새롭게 태어난 진을 죽일까?
그러면 남자쪽은 어떻까?
권중혁 의원은 미스코리아 진이 독살됨으로 해서 물망에
오르던 장관직에서 의원의 품위를 손상시킨 결과로 해서
자칫하다가는 정치생명까지 위태로울 정도로 궁지에 몰려있는
상태다. 사교 댄스 자체가 일반 국민에게 퇴폐적인 춤이라는
인상을 강하게 풍기고 있고 또 어젯밤의 파티 역시 건전한
사교댄스라고 보기에는 어려울 정도로 음성적인 분위기가 매우
짙었다. 지금 권의원에게는 진의 죽음이 치명적이 되고 있는
상태다.
박윤성 회장 역시 진을 살해할 수밖에 없는 결정적인 동기를
엿볼 수가 없다. 연박사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부인이 정성들여
키운 진이 독살되었다는 것은 연박사에게도 매우 가슴아픈 일일
것이다.
윤형사는 초대객들의 심리를 한 사람씩 한 사람씩 미스코리아
진과 연결시켜서 독살 동기를 유추해 내려고 했지만
지금으로서는 시기상조일 뿐이라는 결론만 얻고만 결과가
되어버렸다.
"혹시 목표물이 잘못 정해진 건 아닐까? 예를 들어 한복을
입은 유여사를 독살할 계획이었는데 실수로 칵테일 잔이 바뀐 건
아닐까?"
윤형사는 지나친 생각이라는 듯 고개를 저었다.
"3주밖에 되지 않은 진이 독살되었다는 것은 정말 불가사의한
일이야. 그러나 어디엔가 분명히 살인동기가 숨어있을거야.
아무리 독살이 완벽하게 성공을 거두었다고 해도 내면의 심리를
집중적으로 해부해 보면 답은 나오게 되어 있어. 범인은 분명히
존재하고 있어. 홀에서 춤을 추던 사람들 중에......"
윤형사는 강남에 있는 금지선 변호사 사무실로 가는 택시
뒷좌석에서도 집요할 정도로 초대객들의 심리를 반복해서
해부하고 있었다.
택시 기사가 틀어놓은 라디오에서는 매시간마다 미스코리아
진의 죽음을 속보로 전해주고 있었다. 잉크 냄새가 막 나는
석간신문에서도 진의 독살을 대서특필하고 있었다. 진에
당선되었을 때의 왕관 쓴 얼굴을 사회면 상단에 박아서 시종
흥미진진한 문체로 써내려가고 있었다. 기자는 범죄동기를
미스코리아 선발대회에 불만을 품은 후보자나 관계자가 독살을
저질렀을 가능성, 진의 미모가 너무 뛰어나서 시기와 질투 끝에
독살되었을 가능성, 진에 반한 정신병자가 죽였을 가능성 등
살인동기가 그럴듯해 보이는 추측 기사만 무성하게 실었다.
금지선 변호사 사무실은 7층에 입주해 있었다. 한강이 내려다
보이는 사무실은 현대식으로 잘 꾸며져 있었다. 컴퓨터와
복사기, 팩시밀리, 전자타자기 등 최신 품종과 각종 법률서적이
책장에 꽂혀 있었고 그녀의 책상 위에는 싱싱한 국화가
피어있었다.
금변호사의 모습은 별장에서 대면했을 때와는 전혀 딴사람을
보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안경을 쓰고 있는 그녀의 모습은
지적인 면과 예리한 눈빛을 가지고 있었다. 정장 차림으로
윤형사를 맞는 그녀는 현대 여성의 표본처럼 느껴졌다.
윤형사는 그녀에게서 바람난 암캐같은 인상을 전혀 찾아볼
수가 없었다. 얼굴 수준은 미녀들에 비해서 떨어지지만 그렇다고
그렇게 크게 대조가 되는 것도 아니었다. 다소 쌀쌀맞은 얇은
입술과 미소가 없는 표정이 대조가 될 뿐 여성으로서 야망과
성공을 거둔 그녀의 모습은 활력과 생가가 넘쳐있었다.
윤형사는 금변호사가 권하는 소파에 앉으면서 잠시동안 속으로
생각했다. 이 여자를 소홀히 대해서는 안 되겠어. 사람을 보는
눈이 너무 날카로워보여. 마치 상대방의 마음을 거울 보듯이
훤히 보고 있는 듯한 눈매야. 이런 타입의 여자에게는 잔머리를
굴리는 것보다 솔직한 대화를 나누는 것이 훨씬 낫겠어. 그게 더
효과적이겠어.
윤형사는 사무장이 가져온 커피를 한 모금 마시고
내려놓으면서 책상 서류를 정리하고 맞은편 소파에 다리를 꼬고
앉는 금변호사를 미소띤 얼굴로 보았다.
"바쁘신가 보군요?"
"모레 있을 공판 자료 좀 뽑아보느라고요."
"거리는 온통 미스코리아 진에 대한 뉴스로 가득 차
있더군요."
"누가 들어도 흥미 가득한 죽음이니까요."
금변호사는 아무런 감정도 나타내지 않고 말했다.
"미스코리아 진과는 많은 대화를 나누었나요?"
"윤보혜양 하고요? 거의 없어요. 강여사님과 함께 두세 번
가벼운 대화를 나눴을 뿐이에요."
"진의 죽음에 대해서 나름대로 분석하신 게 있다면 말씀 좀
해주시겠습니까?"
윤형사는 금변호사의 현학적인 눈빛에 기대를 걸며 말했다.
"글쎄요...... 진이 축하 파티에서 독살되었다는 것이 지금도
이해가 안 돼요. 별장에 오셨던 분들 중에서 진을 죽여야만 될
동기를 가진 분은 한 분도 없다고 단정해요. 그렇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범인은 엄연히 우리들 중에 존재하고 있어요. 그래서
윤형사께서 나를 이렇게 찾아왔겠지만 말이에요."
금변호사가 미소를 지으며 포용력있게 대답했다.
"저희가 진의 성격을 알고 있다면 수사에 도움이 될텐데,
지금은 전혀 그렇지가 못해요. 그래서 금변호사님의 진의 성격에
대한 분석을 도움받고 싶어요."
"성격이요? 그렇지요. 피살자의 성격이 때론 사건 해결에 많은
도움을 주곤 하지요. 내가 느끼기론 진은 비밀이 많아 보이는
성격이었어요. 속으로 감추는 그런 성격이지요. 좋은 의미로는
얌전한 성격이고 나쁘게 해석하면 얌전한 강아지 부뚜막에 먼저
오른다고 내숭을 잘 떠는 성격이지요."
금변호사가 약간 감정이 섞인 얼굴로 말했다.
"네...... 변호사님은 댄스를 잘 추시나 보죠?"
윤형사가 자연스럽게 질문을 바꿨다.
"내가요? 아, 볼룸댄스를 말하는 것 같은데, 솔직히 아주
좋아해요. 육체로 표현하는 영혼의 만남이라고 생각해요.
차밍댄스도 좀 출 줄 알고 차차차도 할 줄 알아요."
금변호사는 춤 얘기가 나오자 금새 표정을 바꾸며 얼굴에
화색이 돌기까지 했다.
"박회장님 하고 댄스를 추는 모습이 너무 잘 어울린다고
그러더군요."
윤형사가 정곡을 찔렀다.
"그래요?"
금변호사는 박회장 얘기가 나오자 표정이 더욱 밝아졌다.
"그런데...... 누가 그런 말을 하던가요?"
"강여사님의 여비서가 그러더군요."
"아, 그 송지희양 말인가요? 애가 아주 싹싹하고 일처리를
시원하게 해요."
"저도 박회장님을 어제 처음 봤지만 호감이 가는
외모시더군요. 훤칠한 키에 좋은 체격을 가지고 계시더군요."
"그렇지요. 정말 멋진 남자지요."
금변호사는 꿈을 꾸는 듯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녀가
박회장을 사랑하고 있는 것이 피부에 느껴졌다.
"그런데, 그날 박회장님의 행동에 약간의 의문점이
발견되었어요."
"박회장님의 행동이요?"
금변호사는 안색을 바꾸며 다시 냉철한 눈빛으로 돌아왔다.
"어제밤에 금변호사님과 춤을 출 때 누가 먼저 춤을
청했나요?"
"그거야 당연히 남자인 박회장님이 먼저 내 의사를
물어왔지요. 의원님과 강여사님이 홀 중앙으로 걸어가서 음악에
맞춰 춤을 추자 곧 박회장님이 내 옆으로 다가와 춤을 청했어요.
그게 진과의 죽음에 무슨 관계가 있는 건가요?"
"네, 있어요. 이 부분이 사건 해결에 중요한 열쇠 구실을 하고
있어요."
"그것 참, 이상하네요. 나도 어젯밤 독살을 깊이 생각해
보았는데, 송양이 칵테일을 날라왔을 때는 나와 박회장님,
그리고 다른 분들은 홀에서 춤을 추고 있었기 때문에 살인을
저지를 수 없는 위치에 있는 걸로 알고 있는데요."
"글쎄요, 과연 그럴까요?"
윤형사는 그녀에게 시선을 던지며 가벼운 미소를 지었다.
"저도 처음에는 금변호사님처럼 그렇게 생각했지요. 그러나
범인은 경계선을 사이에 두고 한쪽 발은 테이블쪽에 두고 한쪽
발을 홀 중앙에 두고 있던 게 분명해요."
윤형사는 금변호사의 박회장의 변호 솜씨에 내심 즐거워하고
있었다.
"금변호사님, 사건 발생 직후에 느끼신 감정은
어떠하셨는지요?"
금변호사는 알 수 없는 한숨을 쉬었다.
"독살이라고는 상상도 할 수 없었어요. 뭐랄까, 진의 죽음이
단순한 사고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러나 차츰
시간이 흐르면서 의도적인 독살임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어요.
진이 자살할 리도 없고, 그렇다고 독극물이 칵테일에 이물질
들어가듯이 들어갔을 리도 만무하고...... 그래서 독살이라고
받아들여진 거요."
"이런 질문을 드리는 건 실례인 줄 압니다만, 홀에 있었던
사람들 중에서 진하고 사이가 좋지 않았던 사람은 누구라고
보시는지요."
"...... 아무래도 나비향이겠지요."
금변호사는 잠시동안 생각하는듯 하더니 거침없이 대답했다.
"어째설까요?"
"비향양은 남한테 지는 것을 죽기보다 싫어해요. 물론 처음에
선으로 뽑혔을 때는 기뻐했겠지요. 그러나 시간이 차츰 차츰
흐르면서 스포트라이트가 진에게 집중되는 것을 보고 마냥
미소만 짓고 있을 수는 없었겠지요."
"그렇게군요. 예를 들어서 비향씨가 좋아하고 있는 남자가
미스코리아 진인 윤보혜양에게 엄청난 찬사와 관심을 보이면 그
분함은 말도 못하겠지요?"
그렇게 말하면서 윤형사는 금변호사의 표정의 변화를 놓치지
않았다. 그러나 표정없는 얼굴은 더욱 무표정이었다. 그녀는
분노를 무표정으로 대신하는 성격임이 분명했다.
"분할 정도가 아니라 거기서부터 살인이 시작되겠지요."
금변호사가 차갑게 말했다.
"그래요. 질투심은 참 무서운 거죠."
"나도 그렇게 생각해요. 비향양은 다 좋은데 그 지기 싫어하는
성격이 큰 단점이지요."
윤형사는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인천행 전철을 타고 주안역에 내린 남형사는 한참동안 주위를
두리번거ㄹ가 우체국 뒤에 있는 동오기획을 발견하고는 출입구
쪽으로 걸어갔다. 비디오 대여 업체인 동오기획 사무실에는 경리
혼자 사무실을 지키고 있었다. 그가 사무실로 들어가자 경리는
속이 몹시 안 좋은 듯 인상을 쓰면서 마지못해 자리에서
일어났다.
"사장님 안 계십니까?"
"사우나 가셨는데요."
남형사는 사장실쪽을 바라보며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아까 전화했던 사람인데요......"
"아, 네......"
"사장님 사우나 가신지 오래됐습니까?"
"얼마 안 됐어요."
"이 회사에 다니신지 오래되었습니까?"
"일년 반 조금 넘었어요."
경리는 여전히 속이 메스꺼은 얼굴로 대답하고 있었다.
"어디 편찮으십니까? 제가 약 사다드릴까요?"
"아, 아니예요."
경리는 갑자기 얼굴색이 변하면서 죄지은 사람처럼 남형사의
눈길을 피했다.
"여기 다니신지 일년 반이 조금 넘었다고 해서 드리는
질문인데요, 실례지만 미스......"
"미스 주예요."
"네, 미스 주는 이곳에서 일했던 윤보혜라고 아는지요?"
그 질문에 경리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보애요? 그럼요. 저하고 한 석달 동안 같이 일했는걸요."
"그런데, 보혜씨가 이 사무실을 왜 그만두었는지 혹시 알고
계신가요?"
"그건 저도 잘 몰라요."
경리가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대답하고 있었다. 뭔가를
감추고 있는 음성이었다.
"혹시 말입니다, 보혜씨에게 남자 친구가 있다는 소리는
못들었습니까?"
"그런데 누구시길래......"
경리는 속이 진정된듯 그제서야 남형사의 신분을 물었다.
"보혜 사촌 오빱니다."
남형사는 친척으로 신분을 속였다.
"이상하네...... 보애 언니한테는 사촌 오빠가 없다는 걸로
들었는데......"
경리는 남형사의 얼굴을 쳐다보면서 핏줄인가를 확인해보고
있었다. 잘 생긴 그의 얼굴을 보고는 별로 의심하지 않는
표정이었다.
"헌데, 저번에는 변호사라 하면서 어떤 여자가
찾아왔었는데......"
경리가 남형사의 얼굴을 다시 훑어보면서 알 수 없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잠깐, 누가 찾아왔었다구요?"
"보애 언니한테 약간의 법적인 문제가 생겼는데 참고로 할
사항이 있다면서 사장님께 이것 저것 물어보던데요. 지금처럼
보애 오빠하고 똑같은 질문을 했어요. 보애 언니한테 남자
친구가 없었냐고요."
남형사는 안경을 쓴 금지선 변호사를 떠올렸다.
"그 변호사가 뭐라고 또 묻던가요?"
"숙식은 어디서 했는지 물어봤어요. 그래서 보애 언니가
자취하던 방을 가르쳐드렸지요."
"언제쯤 그 변호사가 찾아왔습니까?"
"한 2주 전쯤 되었을거예요."
"그리고 또 뭐라고 질문을 하던가요?"
"마침 그때 사장님이 들어오셔서 저하고는 얘기가
중단됐어요."
경리는 꼬치 꼬치 캐묻는 남형사의 얼굴을 이상한 눈빛으로
보았다.
"사장님하고 무슨 대화를 나누었는지 기억나십니까?"
"저기 사장실에서 대화를 나눴기 때문에 전 알 수가 없어요.
여자 변호사님이 돌아가신 뒤에 사장님이 제게 오셔서 뭘
물어봤냐고 물으시길래 지금처럼 사실대로 말씀드렸어요.
그랬더니 사장님이 혼잣말처럼 말씀하시더군요. 말도 안 되는
얘기야, 이렇게 한마디 하셨어요."
"말도 안 되는 얘기라니요? 그게 무슨 뜻일까요?"
"그걸 제가 어떻게 알겠어요."
그러고보니 경리는 윤보혜의 근황에 대해 아는 것이
없어보였다.
"그런데 보혜씨가 여기를 그만두고 나서 한번도 온 적이
없나요?"
"보혜씨라니요......"
경리는 남형사의 사촌 여동생에 대한 호칭에 의심의 눈빛을
노골적으로 드러내면서 다시 입술을 움직였다.
"그만둔 회사를 뭣하러 오겠어요. 저 같아도 얼씬도 하지 않을
거예요."
경리는 회사에 불만이 많은 모양이었다.
"그런데 보애 언니는 지금 뭐해요?"
경리가 여전히 의심섞인 음성으로 물었다. 그러나 이내 궁금한
눈빛으로 남형사의 대답을 기다리고 있는 경리였다.
"윤보혜양은 3주 전에 미스코리아 대회에 출전해서 진에
당선되었어요. 석달 동안 같이 일했다면서 TV나 잡지에 나온
얼굴을 못봤어요?"
경리는 어리둥절해하고 있었다.
"그럼, 그 미스코리아 진이 진짜 보애 언니였단 말이에요?"
경리는 믿을 수 없다는 듯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런데 슬프게도 어젯밤에 살해당했습니다."
남형사는 신분증을 꺼내 경리에게 보여주었다.
"사촌 오빠라고 거짓말을 해서 죄송합니다."
경리는 불쾌한 얼굴로 남형사를 바라보았다.
"미스 주, 이제부터 제가 드리는 질문에 한 마디의 위증없이
진실대로 답해주시기 바랍니다."
남형사는 순진하게 생긴 경리에게 위압적인 얼굴로 말했다.
"이곳에 출입하는 사람들 중에 캠코더 기사가 있지요?"
"카메라 기사요?"
경리는 잠깐동안 생각하는 듯하더니 그를 바라보았다.
"네, 한 사람 있어요. 박기사님이라고요."
"그래요? 그 사람 지금 어디에 삽니까?"
"그건 잘 모르겠어요. 사장님이 아실지 몰라요."
"사장님과는 어떤 관계입니까?"
"거래처 사람이라는 걸로 알고 있어요."
그때 사무실 문이 열리면서 앞이마가 조금 벗겨진 40대 초반의
남자가 들어오고 있었다. 머리를 드라이하고 면도를 한 것으로
보아 경리의 말대로 사우나를 하고 오는 모양이었다.
"저희 사장님이세요."
경리는 사장을 보자 다시 속이 메스꺼운지 트림을 하고는
사장에게 남형사를 소개시켜주었다. 악수를 나눈 뒤 두 사람은
사장실로 들어가 경리가 타온 커피를 마시며 윤보혜에 대한
얘기를 주고받았다.
임종도 국장은 국장실에 놓여 있는 텔레비전을 켰다.
회전의자에 등을 기대고 앉아 리모콘으로 채널을 바꾼 그의 눈에
낮익은 정원이 비춰졌다. 저녁뉴스 시간이었다. 임국장은 기댔던
허리를 똑바로 펴면서 화면에 비치는 별장 내부를 근심스런
눈빛으로 주시하고 있었다.
미스코리아 진이 숨진 테이블과 바닥이 화면에 나타나고
있었다. 마이크를 든 보도국 기자는 테이블 의자에 앉아서
테이블 위에 놓인 동형의 칵테일 잔을 마시는 시늉을 해보였다.
기자의 사건보도는 독수리 눈처럼 정확하고 송곳처럼
날카로웠다.
그때였다. 책상 위의 전화기에서 부드러운 벨이 울렸다.
"국장님, 곤란한 전환데요. 어떤 남자가 미스코리아 진
독살사건에 대한 제보를 할 게 있다고 하면서 국장님 좀
바꿔달라고 하는데요."
짜증섞인 방송국 여직원의 음성이 임국장의 귓가에 들려왔다.
"보도국으로 걸라고 그러지."
"꼭 국장님한테 전해야 한다고 하는데요."
"나를 찾아? 내 이름을 대면서?"
"네."
"연결시켜."
"3번 전ㅎ니다."
임국장은 수화기를 들었다.
"여보세요."
임국장은 긴장된 목소리로 전화를 받았다.
"밤새 안녕하셨습니까, 임종도 국장님?"
젊고 음흉한 음성이었다. 동시에 생소한 목소리이기도 했다.
"실례지만 성함이 어떻게 되시는지요?"
"아, 지금 단계에서 이름을 밝힐 수는 없구요, 요즘 방송국
광고 수입은 좋습니까?"
"이것 보세요. 전화를 건 용건이 있을 것 아닙니까? 바쁘니까
용건만 간단히 말씀하세요."
임국장은 장난 전화라는 느낌이 들어 짜증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지금 나한테 기가 막힌 비디오 테이프가 하나 있는데 그림이
아주 좋습니다. 지금 텔레비전 보고 계십니까? 하얀 별장 뉴스
말입니다."
저쪽에서 들려오는 음성은 상당히 세련되어 있었다. 이런
전화에는 전문이라는 듯 여유있고 침착한 목소리로 통화를 하고
있었다. 바쁘면 끊을테면 끊으라는 식의 느긋한 음성이었다.
"도대체 당신 뭐하는 사람이오?"
"당신? 다아앙신? 국장, 우리 광나는 말만 하고 삽시다.
임구욱자앙님."
상대방은 님자에 힘을 주며 몹시 불쾌해하고 있었다. 임국장은
들고 있는 수화기를 부서지도록 내려놓고 싶었지만 장난 전화는
아닌듯 싶어 한두 마디만 더 들어보기로 마음먹었다.
"국장님, 내가 들고 있는 이 비디오 테이프에는 미스코리아가
죽어가는 장면이 담겨져 있습니다. 마지막 모습이 처절하도록
아름답더군요. 이 테이프를 전국에 내보내면 광고주들이
벌떼처럼 몰려들 겁니다."
"당신 지금 나하고 농담하자는거요? 도대체 당신 누구요?"
"당신 당신 하지 마시오. 당신이 정 그렇게 나오면 나도
화끈하게 무식하게 나오겠소."
상대방은 인격에 대한 손상을 무척 중요하게 여기는 성격
같아보였다.
"아, 성함을 알아야 존칭을 붙이든지 할 것 아니오. 내가 괜히
처음에 당신의 성함을 물어본지 아시오."
임국장은 길어지는 전화에 알 수 없는 불안을 느끼며 상대방의
목소리 하나 하나에 신경을 썼다. 그러면서 음색도 귀에 익히고
있었다.
"아하, 그랬습니까? 그럼 제가 무식한 소리를 들어도 싸군요.
하하하......"
상대방은 무엇이 그리 우스운지 파안대소를 했다. 임국장은
수화기를 귀에서 떼어내며 참을성의 한계를 느꼈다. 저쪽에서
다시 변색한 듯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임국장님 볼룸댄스 솜씨가 형편없으시더군요. 성주라양이
진땀을 빼던데요. 춤을 배우신지 얼마 안 되셨나보군요.
하하하......"
임국장은 성난 얼굴을 했다.
"이것 보세요. 당신 혹시 캠코더 기사 아닙니까?"
"오, 이제서야 감을 잡으셨군요."
"당신 지금 전화거는 데가 어딥니까?"
임국장은 심각한 목소리로 물었다.
"어디긴 어딥니까? 전화 거는 곳에 있지요."
"한번 만납시다."
"개인 일로요, 아니면 직책상으로요?"
"아무튼 만납시다."
임국장은 다급한 음성으로 말하고 있었다.
"아, 난 개인 일로 임국장님을 만날 용의가 전연 없습니다. 이
점 분명히 하시길 바랍니다."
"이런 문제는 국장의 직권만으로는 안 됩니다. 방송국
고위층과 상의를 해봐야 합니다. 일단 한번 만납시다."
임국장은 매달리듯이 말했다.
"그러고보니 임국장님께서 뭔가 켕기시는 게 있나 보군요. 이
테이프에 임국장님의 엄청난 비밀이 담겨져 있다고 생각하시는
모양이지요?"
"뭐라구?"
임국장은 버럭 소리를 질렀다.
"아, 진정하세요, 임국장님. 제가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개인 일로는 만날 필요가 없다구요. 이 테이프의 화면은
임국장님과 상관이 없는 테이프다 이 뜻입니다."
상대방은 임국장을 어린애 다루듯이 다루고 있었다. 임국장의
음성이 갑자기 낮아졌다.
"그건 그렇고, 당신 어젯 밤에 왜 사라진거요? 죄가 없으면
떳떳하게 현장에 남아 있어야 할 것 아니요?"
"오라, 그러니까 임국장님 말씀은, 이 몸이 범인이니까
튀었다라는 얘긴데, 천만에요. 나는 머리가 아주 비상하지요.
순간적인 판단 또한 번개보다 빠르지요. 지금 내 손에 들고 있는
이 테이프, 한 마디로 황금 테이프지요. 이걸 경찰에 넘겨줄
내가 아니지요."
상대방은 능글맞게 웃고 있었다.
"당신 지금 뭔가 황당무계한 생각을 하고 있는 모양인데, 그
테이프는 무용지물이요. 당신도 아시겠지만 미스코리아는 진에
당선된지 한 달도 되지 않은, 세인의 관심 밖에 있는 여자란
말이오."
그 말에 상대방의 숨소리가 갑자기 거칠어졌다.
"당신 지금 나한테 수작을 부리려고 돌대가리를 굴리는 것
같은데, 그럼 나 서운하지. 역대 미스코리아들 중에서 최고의
미녀로 인정되는 윤보혜양의 마지막 순간도 센세이셔널하지만
현장에 있었던 당신을 포함한 저명인사들 또한 화제거리로는
만점이지. 호, 그렇다면 할 수 없지요. 나를 귀빈 대우해줄 다른
방송국을 찾아갈 수밖에. 이거 실례했시다."
"잠깐, 잠깐만요!"
임국장은 다급한 목소리로 상대방을 불렀다.
"허, 이거 왜 이러십니까? 화장지가 필요하십니까?"
임국장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여보시요, 농담은 그만하고...... 당신 지금 경찰의 수배를
받고 있는 거 아시오?"
"수배요? 내 안 그래도 이 전화 끊고 수사본부, 아니
내무장관님한테 직접 전화를 걸 거요. 무능 경찰 모가지
자르라고요. 국민이 민주주의 경찰하라고 세금 낸거지 선량한
시민들을 죄인으로 만들라고 경찰복 입혔느냐고요."
"이거 전화로 계속 이럴 게 아니라 우리 만나서 얘기합시다."
임국장은 인내하며 대답을 기다렸다.
"......그럴 필요가 뭐 있습니까? 난 질질 끄는 건 딱 질색인
성격이라놔서. 이 테이프 필요합니까, 원하지 않습니까?"
임국장은 잠시동안 침묵을 지켰다.
"좋소. 그럼 이따 21시에 다시 전화를 주세요. 윗분들과
상의하고 나서 결과를 알려드리리다."
"임국장님두, 진작에 그렇게 말씀하시지. 그래야 주고 받는
대화 속에 따뜻한 사랑이 피어나지요."
"그럼."
"아, 잠깐. 임국장님한테 한 가지 분명하게 말씀드릴 게
있는데, 이 전화 끊고 나서 경찰에 연락을 하든지 말든지 그건
당신의 자유요. 어차피 나도 경찰에 자진출두해야 할
몸이니까요. 그러나 거래가 끝난 뒤에 경찰에 연락을 하는 게
서로에게 좋을 거요. 서로가 행복하게 살려면 말이오."
저쪽에서 수화기를 내려놓는 소리를 확인하고 나서 임국장도
전화기를 내려놓았다. 그의 좁은 이마에는 땀방울이 맺혀
있었다. 그는 손수건으로 이마와 콧잔등에 묻은 땀을 여러 번
닦아내고는 주저없이 전화를 들었다. 곧 신호음이 울렸다.
전화를 드는 소리가 긴장된 그의 귓가에 들려왔다.
"권중혁 의원님 사무실이죠? 권의원님 계십니까?"
사무실 여비서는 상냥한 목소리로 의원님은 자택에 계신다고
알려주었다. 임국장은 권의원의 전용 전화번호를 눌렀다.
권의원이 직접 전화를 받았다.
"의원님, 임국장입니다."
"오, 임국장. 방송국이오?"
"네, 그런데 문제가 생겼습니다."
"허허허...... 임국장 목소리가 꽤나 급한 모양이오.
허허허......"
권의원의 느긋한 음성에 임국장은 자신도 모르게 편안해짐을
느꼈다.
"어제 밤에 별장에서 사라진 캠코더 기사가 방금 저에게
협박에 가까운 전화를 걸어왔습니다."
"임국장한테 협박전화를요? 허허, 거 무슨 소린지
모르겠군요."
"홀에서 찍은 비디오 테이프를 방송국에 제공해 주는 대신
돈을 요구했습니다."
"그래요? 허허, 그 도망간 기사 배포 한번 크군요."
"제 느낌으로는 전문적인 사기꾼 같습니다. 전문가 냄새가
났습니다."
"그래서 어떻게 하기로 했소?"
"이따 21시에 다시 연락해 달라고 했습니다."
임국장은 분통이 터진다는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 기사 봉 잡았구만. 허허허......"
"웃을 일이 아니라고 봅니다, 의원님. 미스코리아 진이
독살되는 장면이 담긴 테이프가 전국에 방송되면 의원님에게
매우 불리하게 작용됩니다."
"원, 임국장도. 아, 우리가 결백하면 그만이지 두려울 게 뭐
있겠소. 허허허......"
권의원은 크게 웃음을 터뜨리고 있었다.
"임국장, 그 비디오 테이프가 세상에 공개되지 않도록 막을
자신이 있소?"
"그건 불가능합니다. 경찰의 손에 들어가도 마찬가지일
겁니다. 결국 부메랑처럼 방송국에 돌아오게 되어 있습니다.
뉴스를 들어셔서 아시겠지만 각 매스컴, 신문, 주간지 등
대서특필입니다. 마치 3차 세계대전이 터진 양 앞다투어
보도하고 있습니다. 그동안 화제거리가 별로 없었거든요."
"세상도 우리 편이 아니군. 테이프 공개가 불가피하겠어.
방송국 간부들도 테이프 입수에 이의가 없겠군요."
권의원의 음성은 체념에 가까웠다.
"그 캠코더 기사가 엄청난 액수를 요구해오지 않는 한 회의
결과는 자명한 일입니다. 타 방송국에서는 구할 수 없는
테이프를 단독 입수해서 내보내면 시청률이 엄청날 겁니다.
간부들간의 약간의 의견대립이 있을지는 몰라도 진실을 밝혀내야
한다는 명분론과 방송사에 막대한 이익을 준다는 현실론까지
합쳐져서 한 시간이라도 빨리 테이프를 입수하라고 특별지시가
내려질 겁니다."
"헌데 임국장, 한 가지 이상한 건, 그 테이프에 어떤 진실이
담겨져 있다면 그 기사가 굳이 방송국을 상대로 할 필요는 없지
않을까요? 개인에게 요구하는 게 더 안전하고 조용하지
않을까요?"
"저도 그 점에 대해서 그 작자에게 우회적으로 계속 만나자는
식으로 심리를 유도해 보았지만 개인적으로 만날 필요는
없다면서 한 마디로 딱 잘라 말하더군요. 그 자는 살인사건 현장
자체의 흥미성에 큰 의의를 두고 있었습니다."
임국장은 확신에 찬 목소리로 말했다.
"차라리 그 테이프에 진실이 찍혀져 있었으면 좋으련만......"
권의원은 말끝을 흐리며 근심스러워했다.
"그런데 임국장, 임국장 입장에서는 테이프 공개가 어떻게
받아들여지고 있소?"
"무슨 말씀이신지......"
"임국장 본인 자신에게는 아무런 해가 되지 않나요?"
"아, 네...... 저한테는 문제될 게 없습니다. 오히려 의혹의
시선에서 벗어날 뿐 아니라 방송사를 위해서도 유익한
일입니다."
"그럼 얘기는 끝났군요. 그 기사가 매우 치사하긴 하지만 그
또한 기회를 잘 포착한 것 아니겠소. 어차피 진실은 밝혀지게
마련이오. 우리 자신 또한 진실을 밝히는데 앞장서야 할
입장이구요."
"그렇긴 합니다만......"
"허허허. 임국장이 내 생각해주는 마음은 고맙지만 대세의
흐름이라는 게 있지 않겠습니까? 아이고, 그러고보니 시간이 다
되어가는구만."
권의원은 초연한 듯한 목소리로 전화를 끊으려고 했다.
"어디 약속이 있으십니까?"
"허허허. 위로부터 부르심을 받았어요."
"청와대로 올라가시는 겁니까?"
"아무래도 호된 질책을 받아야 할 것 같아요. 비서실장님을
통해서 어젯 밤의 불미스런 일을 보고드렸는데, 대통령께서
진노하셨나봐요."
"그럼 테이프를 공개하면 더욱 난처한 입장에 빠지시는 거
아닙니까?"
"허허허,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는거죠. 진실이
문제인거죠."
"이거 뭐라고 위로의 말씀을 드려야 할지......"
임국장은 할 말을 잃고 있었다.
"전화 줘서 고맙소, 임국장. 전화 끊기 전에 한 마디
당부하겠소. 진실을 외면하지 마시오, 임국장. 진실의 세계는
아름다움이라오."
"네, 잘 알겠습니다, 의원님."
힘없이 수화기를 내려놓은 임국장은 한참동안 멍한 표정을
짓고 있다가 굳게 결심한 듯 회전의다에서 솟구치듯 일어서서
사장실로 통하는 엘리베이터 쪽으로 성큼성큼 걸어갔다.
장과장은 순경과 함께 홀의 천장을 샅샅이 조사해 보았지만
구멍이 뚫린 곳이나 메꾼 자국은 물로 손을 댄 흔적조차 발견할
수가 없었다. 범인이 천장을 통해 극독물을 빗방울처럼
떨어뜨리지 않았나 하는 실낱 같은 희망도 한낱 공상에 지나지
않았다.
그런데 조금 전에 인천에서 걸려온 남형사의 보고 내용은
장과장으로 하여금 이번 독살 사건이 엄청난 파문을 불러일으킬
소지가 다분히 내포되어 있다는 암시를 느끼게 했다.
남형사의 보고 내용은 한 마디로 진의 과거가 매우 의심스러워
보인다는 것이었다. 좀더 탐문수사를 벌여봐야 되겠지만
윤보혜는 미스가 아니고 출산 경험이 있는 여자일 가능성이 매우
높다는 충격적인 보고였다.
여러 개의 방을 세놓고 있는 진이 살았던 자취방 여주인에게
물어보았는데, 윤보혜는 그때 임신중이었다고 얘기해 주었다는
것이다. 주인 아주머니는 윤보혜양이 미스코리아 진이 되었다는
걸 믿지 않으려고 했을 뿐 아니라 미스코리아 선발대회를
텔레비전으로 봤지만 셋방 처녀와는 전혀 닮지 않았다고 오히려
남형사를 설득하려고 했다는 것이었다. 우선 이름이 윤보혜가
아닌 보애였고, 화장과 의상으로 변신한 윤보혜를 제대로 알아볼
리가 만무였다는 느낌이 들었다는 보고내용이었다.
그리고 통화를 끝낼 때쯤에 덧붙여서 보고를 하길, 지금은
인천에 있는 산부인과들을, 인천경찰서의 협조를 얻어 산부인과
병원과 위치 등을 알아보고 있는 중이라고 했다. 아울러서
캠코더 기사가 1년 전에 그만둔 예식장도 알아냈다는 보고였다.
그러니 급히 두 명의 인원을 급파해 달라는 요청을 끝으로
전화를 끊었다.
헌데, 한 시간 전에 서울시경에서 상관인 오부장이 수사본부로
걸어온 전화는 그를 매우 당혹스럽게 만들었다. 오부장의 말인
즉, 서울시경에 박만하라는 캠코더 기사가 항의전화를
걸어왔다는 것이었다. 개인적인 사정으로 홀에서 나왔을 뿐인데
경찰이 수배를 하는 바람에 명예를 훼손당했다고 하면서 이틀
후에 시경으로 자진출두할 것이니 그때까지 양해 좀 해달라는
것이었다. 그러니 그 기사 문제는 장과장이 알아서 처리하고
그보다 더욱 중요한 문제는 이번 독살 사건에 연루된 용의자들
중에서 권의원의 무죄 여부를 신속하게 결정지으라는 지시였다.
그것도 오늘 이내로 진실을 가려서 아침까지 보고서를
제출하라는 것이었다. 부장은 화급을 다투는 일이라고 한 마디
더 덧붙일 뿐 더 이상의 설명이 없었다. 들리는 말로는 권의원이
대통령의 총애를 밭고 있다고 하던데, 정가에 떠도는 그의
입각과 개각설과 맞물려있는 모양이었다.
그러나 장과장은 어떤 말도 할 수가 없었다. 범인을 검거하기
전까진 홀에 있던 초대객들을 용의선상에서 임의로 제외시킬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렇다고 이대로 앉아 있을 수만은 없는
노릇이었다. 최선을 다하다가 보고서 대신 사표를 제출할 수밖에
없는 노릇이었다.
시간은 점점 흘러서 보고서를 써야 할 시간이 임박해오고
있었다. 그동안 부장의 독촉 전화가 두 번이나 있었다. 부장의
목소리는 근심으로 가득차 있었다. 부장은 사실대로 털어놓았다.
"장과장의 보고서는 대통령의 집무실에 올라가게 되어 있네.
그 점을 명심해 주게. 나도 장과장에게 이래라 저래라 할 입장이
못된다네. 나는 자네가 소신대로 일을 처리해 주길 바라네."
부장의 음성은 무언의 압력 같아 보이기도하고 무혐의 처리는
자칫 화를 불러일으킬 수도 있다는 신중론을 뜻하는 것 같기도
하고 도통 그의 의중을 헤아릴 수가 없었다. 자칫하다가는
정치적인 스캔들로 비화될 조짐이 있다는 부장의 마지막 말은
장과장을 무척 혼란스럽게 만들었다.
그 순간 장과장의 뇌리에 떠오른 지금의 상황에 대한 흑막이
섬광처럼 전해져왔다.
권의원과 미스코리아 진의 죽음. 여기에는 엄청난 함수관계가
도사리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섬ㅉ한 생각이 들었다.
남형사의 보고대로 미스코리아 진이 정말로 출산 경험이 있는
여자라면? 그렇다면 진의 남자는 누굴까? 그렇다. 권의원일 수도
있다. 상식적으로 생각해 봐도 임신을 한 경험이 있는 여자가
미스코리아 선발대회에 참가한다는 건 엄두도 못낼 일이다.
그런데도 윤보혜는 대회에 참가했다. 왜였을까? 정신이 나가서?
명예욕 때문에?
여기에는 필연적인 동기가 있다. 그리고 캠코더 기사와의
관계도 그렇다. 파티장에 그 기사를 추천한 건 윤보혜였음이
분명하다.
현재의 상황은 모든 것이 권의원에게 불리하게 작용하고 있다.
절벽 끝까지 몰릴만큼. 이는 뭘 증명하고 있는 건가? 윤보혜는
권의원을 파멸시키려고 일을 저질렀을지도 모른다. 평범한
사람이 알 수 없는 어떤 사무친 원한을 권의원에게 갖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윤보혜는 캠코더 기사를 어째서 현장에
끌어들였을까? 권의원으로부터 위험을 느끼고 보디가드로 채용한
일종의 감시자일까?
그리고 윤보혜가 강여사의 의상실을 찾은 것도 우연인 것만은
아닌듯 싶다. 강여사가 전연도 미스코리아 진인 성주라를
발굴하여 진으로 탄생시킨, 미스코리아의 요람같은 의상실인걸
미리 알고 있었거나 권의원과 친분관계에 있는 것을 알고
의도적으로 접근했는지도 모를 일이다.
장과장은 한숨을 토해냈다. 권의원을 무혐의로 처리한다는 건
형평을 잃은 처사임이 너무도 드러나보였다. 그는 도저히
보고서를 쓸 수가 없었다.
그때였다. 수사본부로 오부장의 전화가 또 걸려왔다.
"장과장인가. 난데, 지금 당장 수사본부에 있는 패트롤카를
타고 서울로 올라오게. 방송국 본관 건물 현관 앞으로 쏜살같이
달려오게."
시계를 보니 자정이 가까워오고 있었다.
"방송사측에서 테이프를 입수한 모양이야. 임국장으로부터
연락이 왔네. 경찰의 사건분석을 필요로 하는 모양이야. 자세한
얘기는 나중에 하자구."
전화를 끊자마자 장과장은 순찰자를 몰고 서울로 달렸다.
오부장은 생각보다 빨리 도착한 장과장과 어깨를 나란히 하며
엘리베이터를 탔다.
"임국장이 캠코더 기사를 만나서 테이프를 입수해 왔는데 그
테이프 내용을 내일 저녁 뉴스 때 1차 방송하고 9시 메인 뉴스
때 2차로 내보낼 방침인가보."
"아직 시사회 전입니까?"
"방송사 최고 경영자와 이사급 몇 분이 테이프를 본 것 같은데
대단히 흡족해하더라는 임국장의 귀띔이었어."
오부장과 장과장은 5층에서 내렸다.
"진실이 담겨져 있더랩니까?"
복도를 걸으며 장과장이 물었다.
"나도 아직 못봤어."
오부장은 보도국 편집실에 당도하자 노크를 하였다.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임국장이 잠긴 문을 열었다. 환하게 불이 켜진
편집실 안에는 여러 명의 보도국 기자들이 철제의자에 앉아
구두회의를 하고 있었다. 두 사람은 반갑게 맞이하는 보도국장과
악수를 나누고는 맨 앞줄에 마련된 철제의자에 앉았다.
"뭣 좀 나타난 게 있습니까?"
오부장은 옆 의자에 같이 앉은 임국장에게 조용한 음성으로
물었다.
"두 번 봤는데, 범인을 발견할 수가 없었어요."
세 대가 놓여진 비디오세트 중에 중앙에 있는 비디오세트를
젊은 기자가 매만지고 있었다.
"15분 짜린데요, 먼저 내용을 보시고 나서 얘기를 나누기로
하지요."
임국장은 젊은 기사에게 스위치를 작동시키라고 눈으로 신호를
주었다. 젊은 기사가 스위치를 눌렀다.
대형 화면에는 홀로 들어오는 초대객들의 모습이 첫 장면으로
나오고 있었다. 권중혁 의원이 베이지색 양복을 입고 특유의
낙천적인 웃음을 터뜨리며 연성철 박사와 나란히 입장하고
있었다.
<테이프에 담긴 내용>
홀에 입장한 초대객들은 연박사의 안내로 두 개의 원형
테이블로 걸어갔다. 초대객들은 의자에 앉거나 선 채로 얘기를
나누고 있었다(카메라의 촬영 위치는 홀 중앙 정도 되어 보임).
3분 후, 미스코리아 선과 미스코리아 진이 수줍게 웃으며 2층
계단을 내려오고 있었다. 강희 여사가 활짝 웃으며 계단을
내려오고 있었다. 박수소리가 들려왔다. 초대객들이 모두
의자에서 일어나 홀 중앙으로 걸어가고 있었다(카메라는 근접
촬영을 하고 있었다).
강여사가 제일 먼저 권의원에게 미스코리아 진을 인사시켰다.
권의원이 손을 내밀어 악수를 청하자 진은 화사한 웃음을
지어보이며 하얀 손을 내밀어 악수에 응했다. 이어서 권의원은
선에게도 악수를 하면서 손등에다 살짝 입술을 갖다대었다.
권의원이 화면에서 사라지자 유진숙 여사의 원숙한 미모가
화면에 나타났다. 유여사는 두 미녀를 다정스럽게 대해주며 몇
마디 대화를 나누었다.
강여사와 두 미스코리아는 차례로 초대객들과 인사를
나누었다.
카메라 촬영이 시작된지 9분 후, 두 개의 테이불에는 다시
초대객이 모여앉아서 얘기를 나누고 있었다. 오른쪽 테이블에는
한복을 입은 진과 연박사, 임국장과 권의원, 그리고 강여사가
둘러앉아서 담소를 나누고 있었고, 왼쪽 테이블에는 선과
박회장, 그리고 금변호사와 성주라양, 유여사가 앉아
있었다(카메라는 계속 중앙 홀에서 촬영을 하고 있었다).
같은 테이불에 앉아 있던 권의원이 옆자리의 강여사에게
귓속말로 속삭이고 있었다. 그러자 강여사가 애교스럽게
미소짓더니 옆자리의 연박사를 보았다. 연박사가 기분 좋은 듯이
고개를 한번 끄덕거렸다(이때 카메라는 촬영 각도가 바뀌어져
있었다. 현관쪽이었다).
블루스곡이 흐르는 가운데 권의원과 강여사가 카메라 앞을
지나서 홀 중앙으로 걸어나갔다. 이어서 턱시도 차림의 박회장과
금변호사가 사이좋게 손을 잡고 카메라 앞을 지나갔다(카메라는
중앙 홀을 비추고 있었다). 두 쌍이 다리를 움직이고 있었다.
(카메라는 1분 동안 춤을 추는 두 쌍을 촬영하다가 두
테이블을 한 화면으로 잡았다) 오른쪽 테이블에 앉아 있던
임국장이 그 사이 왼족 테이블로 자리를 옮겨서 성주라양 옆에
앉아 있었다. 임국장은 팔짱을 낀 채 중앙 홀을 흥미롭게
바라보더니 얼굴을 돌려 성주라양에게 말을 건넸다. 그러자
성주라양은 웃음이 나오는지 한 손으로 입을 가리고 고개가 뒤로
젖혀질 정도로 크게 웃고 있었다. 그러고 나서 성주라양은
임국장의 팔을 잡으면서 의자에서 일어났다. 임국장은 잠시동안
망설이는 듯 했지만 이내 의자에서 일어나 카메라 앞을
지나갔다.
세 쌍이 춤을 추기 시작한 지 30초 후, 카메라는 다시
테이블로 렌즈를 고정시켰다. 카메라에 정장 차림의 여비서가
쟁반을 들고 오른쪽 테이블로 다가오고 있었다. 한잔 달라고
고개짓하는 연박사에게 칵테일 잔을 내려놓고 고개를 끄덕이는
진에게도 칵테일 잔을 내려놓았다. 여비서는 뒷모습을 보인채
왼쪽 테이블로 걸어가서 한복을 입은 유여사에게도 칵테일 잔을
놓았다. 김진건 아나운서가 손을 내저으며 사양하는 모습이
보였다. 그리고 선이 칵테일을 권하는 여비서를 향해 살짝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여비서가 마지막 남은 칵테일
잔을 선 앞에 내려놓고 주방쪽으로 사라지고 있었다.
(카메라는 계속해서 테이블을 잡고 있었다. 이해가 안 될
정도로 오랜 시간을 한 장면에 머물러 있었다) 김진건
아나운서와 나비향양이 손을 잡고 카메라 앞으로 지나가고
있었다.
(카메라는 다시 30초 동안 춤을 추는 네 쌍을 비추다가 테이블
쪽으로 또 렌즈를 고정시켰다. 두 테이블이 잠깐동안 화면에
나타났다. 왼쪽 테이블에는 아무 것도 없었다. 테이블 위에 놓여
있던 나비향양의 칵테일 잔마저 감쪽같이 사라져 있었다)
카메라는 각도를 조금 바꿔서 진이 앉아있는 오른쪽 테이블만을
집중적으로 촬영하고 있었다.
유여사는 무엇이 그렇게 기분이 좋은지 연신 떠들고 있었다.
테이블 위에는 세 잔의 칵테일 잔만이 놓여져 있었다. 연박사가
칵테일 잔을 들어 단숨에 마셨다. 그리고 잠시 후, 한창 예기를
하던 유여사가 잔을 들어 한 모금 마셨다. 그러고 나서 유여사는
반쯤 남은 칵테일 잔을 만지작거리고 있는 진에게 말을 걸었다.
유여사가 진과 잠시동안 얘기를 나누다가 시선을 돌려 중앙 홀을
보자 기쁜 표정을 짓고 있던 진이 갈증을 느낀듯 잔을 들어
입술로 가져갔다. 진이 잔을 내려놓자마자 얼굴색이 순식간에
변하면서 목을 움켜쥐고 있었다(카메라는 얼굴색이 갑자기
변하는 진을 클로오즙했다. 진이 목을 잡고 고통스러워하는
모습이 선명하게 잡혔다. 이때 카메라 화면이 크게 흔들렸다).
연박사가 쓰러지는 진을 힘겹게 부축하고 어쩔 줄을 몰라하고
있었다. 경악의 표정이었다. 동시에 유여사가 비명을 지르고
춤을 추던 사람들이 급한 걸음으로 카메라 앞을 지나가고
있었다(이때도 카메라 화면은 심하게 흔들렸다). 축 늘어진
미스코리아 진이 주위를 둘러싼 사람들 틈으로 보이고 있었다.
장송곡 같은 블루스곡이 흐르는 가운데 혼란에 빠져 있는
초대객들의 뒷모습을 끝으로 화면이 끝났다.
장과장은 젊은 기자에게서 다시 한번 비디오를 틀어주길
요청했다. 똑같은 화면이 다시 나오기 시작하자 장과장은 예리한
눈빛으로 초대객들의 동작 하나하나를 살펴보았다. 그의 뒤에
앉아 있던 보도국 기자들은 수첩에다 뭔가를 부지런히 기록하고
있었다. 다시 화면이 끝나자 장과장은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고 있었다.
"특별한 장면이 들어있습니까?"
보도국장은 두 수사관에게 뭔가를 크게 기대하는 눈치였다.
"장과장, 도움이 될 것 같소?"
오부장은 곤혹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는 장과장을 바라보면서
물었다.
"젊은 기자 분, 수고스럽겠지만 한 번만 더 틀어주시겠습니까?
아, 처음부터는 아니고요, 어느 부분이냐면 여비서가 칵테일을
다 날라주고 화면에서 사라지기 직전의 화면입니다."
장과장의 말에 방송사 관계자와 기자들은 긴장된 표정을
지으며 화면을 응시했다.
"네, 바로 거깁니다. 정지시켜 보세요."
장과장은 철제 의자에서 일어나 안주머니에 있던 볼펜을 꺼내
오른손에 쥐고는 화면 속의 칵테일 잔을 가리켰다.
"제가 관찰력이 그리 뛰어나지는 못한 편이지만, 사람들의
움직임에 가려서 칵테일 잔의 행방이 묘연해지는 장면을
찾아내게 되었습니다. 여기에서는 분명히 양 테이블에 네 개의
칵테일 잔이 놓여져 있습니다."
장과장은 직접 기계를 조작하여 앞으로 배속처리했다. 네 쌍이
춤을 추는 장면에서 테이블로 화면이 바뀌자 그는 정지 스위치를
눌렀다.
"바로 이 그림입니다. 오른쪽 테이블에는 세 개의 잔이 놓여져
있습니다. 그런데 왼쪽 테이블에는 어디를 찾아봐도 그 한 개의
칵테일 잔이 없습니다."
장과장의 지적에 보도국 기자들은 고개를 끄덕이며 화면을
주시하였다. 그러면서 기자들은 중요한 사실인듯 수첩에다
메모하고 있었다.
"그럼 사라진 칵테일 잔이 범인에 의해 운반되어졌다는
얘깁니까?"
보도국장이 물었다.
"그건 확신할 수 없습니다. 불행하게도 30초 동안 공백시간이
있었기 때문에 누가 칵테일 잔을 치웠는지 지금으로서는 뭐라고
판단을 내려야 할 지 애매합니다."
장과장은 화면 옆에 선 채로 말했다.
"질문 한 가지 해도 좋겠습니까?"
흰 와이셔츠에 빨간 넥타이 차림의 기자가 기자회견을 하듯이
의자에서 일어나며 그에게 질문을 했다.
"범인은 화면에 나온 사람들 중에 분명히 숨어있는 게
확실한데, 이렇다 할 행동을 보인 사람은 없습니다. 카메라에 안
잡혔는지도 모르지만, 그렇다면 홀에서 춤을 추던 네 쌍은 아니
여덟 사람은 용의자 명단에서 제외시켜도 무방하다고
생각하십니까?"
장과장은 단호한 어조로 대답했다.
"절대로 그렇지 않습니다. 이 화면에는 범인이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덟 사람도 범인일 수 있는 것입니다."
"범인이 없기 때문에 범인일 수 있는 것입니다."
"범인이 없기 때문에 범인일 수 있다는 논리는 어폐가 있는 것
아닙니까?"
임국장은 불만에 가득찬 음성으로 말했다.
"장과장, 나도 임국장님의 의견과 일치해요. 여덟 분은 범인일
수 없어요. 장과장이 지적했듯이 칵테일이 사라진 시기 또한
여덟 분과는 전혀 무관한 일이예요."
오부장도 회의적인 눈빛으로 장과장을 쳐다보았다.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제가 이 테이프를 보고 확신을 얻은
건데, 홀에서 춤을 추던 사람들을 제외한 나머지 분들은 용의자
대상에서 삭제해도 무방하다고 여겨집니다. 캠코더 기사 역시
마찬가집니다."
장과장은 신념에 찬 목소리로 말했다.
"도대체 무슨 근거로 그런 엉뚱한 말일 하는거요!"
임국장이 언성을 높이며 항의하듯이 말했다. 편집실에
잠깐동안 침묵이 흘렀다.
"그건 바로 범죄의 심리죠. 완전범죄를 확신한 살인에서는 섬
안에 숨어 있는 것이 제일 안전하고 현명하죠. 아주 간단한 예로
캠코더가 쉴새 없이 현장을 찍고 있는 상태에서 몸을 드러내놓고
살인을 시도한다는 것은 자살행위죠. 이판사판이 아닌 바에야
말입니다."
"그렇다면 사라진 칵테일 잔은 범인과 상관이 없다는
말씀입니까?"
이마가 벗겨진 기자가 물었다. 편집실은 어느새 기자회견장이
되어가고 있었다.
"좀전에도 말씀드렸지만 사건과 전혀 관계없는 상황인지는
아직 확답을 드릴 수가 없는 상태입니다. 저는 돌발적인
상황이라고 결론 내리고 있지만, 연관이 있을 수도 있는 매우
의문스런 현상입니다."
기자들이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면서 아리송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러니까 장과장님 말씀은 그 사라진 칵테일 잔이 매우
흥미있는 부분이라는 분석입니까?"
보도국장은 포커스를 맞출 수 있게 ㄷ다는 듯 밝은 표정으로
물었다. 그의 눈빛은 범인이 밝혀지기 보다는 의문만 더
커져가는 지금 분위기가 더 잘 됐다는 표정이었다. 범인이 쉽게
가려져서 뉴스로서의 생명이 단명되기 보다는 시청자들의
지속적인 관심집중쪽에 더 신경을 쓰는 눈치였다.
"그렇습니다. 좀더 테이프 내용을 세밀히 분석해 봐야겠지만
지금까지 나타난 화면상의 자료로는 사라진 한 개의 칵테일 잔이
두드러진 특징입니다. 제 느낌으로는 독살과는 연관성이 없어
보이지만 말입니다."
보도국장은 기분좋게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보도국
기자들도 이만하면 됐다는 듯 더 이상의 질문을 산가하고
있었다.
"이것 보세요, 장과장님. 춤을 추던 여덟 사람이, 물론 나까지
포함됩니다만, 춤추던 사람들이 그 없어진 칵테일 잔을 옮길
수는 없는 노릇 아닙니까. 그 점은 인정하십니까?"
임국장은 장과장을 못마땅한 눈빛으로 쏘아보면서 볼멘
목소리로 물었다.
"인정합니다. 그러나 칵테일 잔이 없어졌다고 해서 범인이
살인에 이용하기 위해 옮겼다는 것은 지나친 추측에 불과합니다.
화면성으로 보셔서 아시겠지만 단순히 없어진 것뿐입니다."
"임국장님, 너무 신경쓰지 마세요. 장과장님의 의견에도
일리가 있어요."
보도국장은 신경이 날카로운 임국장을 향해 미소를 지으면서
대충 넘어가자는 투로 말했다. 기자들도 임국장의 지나친 흥분에
짜증스런 표정을 짓고 있었다.
"나 원, 참. 아, 장과장님 말씀대로라면 내가 미스코리아 진을
독살했다는 얘긴데, 화면 좀 보세요. 간난애기가 보더라고 홀
중앙에 있던 사람들이 범인이 아니라고 외칠텐데 저렇게 황소
고집을 부리고 있으니, 아, 오부장님, 안 그렇습니까?"
오부장은 대답하기가 난처한 듯 바닥만 보면서 침묵을 지키고
있었다.
"장과장님, 저 잠깐 볼까요?"
보도국장은 입술을 굳게 다물고 있는 장과장을 기자들이 앉아
있는 뒤쪽으로 데리고 갔다. 9시 뉴스의 앵커맨이 철제 의자에서
일어나 두 사람 사이로 다가왔다.
"인사하시요. 박성원 앵컵니다."
보도국장은 장과장에게 앵커를 소개시켜 주고나서
어드바이스를 청했다.
"장과장께서 사건을 보는 추이는 일반인의 추리를 정면으로
거부하고 있습니다. 테이블에 앉아 있던 유력한 용의자들을
무혐의로 보시고 오히려 독살과는 전혀 관계없이 보이는 여덟
분을 강력한 용의자로 보고 있는데는 나름대로의 물적증거
내지는 상황근거가 있을텐데, 아시겠지만 테이프를 방송으로
내보내면 기자와 앵커의 인용된 해설이 필수적으로 수반되어야
합니다. 심리론이 아닌 실체론으로 도움을 주셨으면 합니다."
보도국장은 시청률을 의식한듯 시청자에게 흥미 유발을 일으킬
수 있는 현장수사 책임자의 증언을 필요로 하고 있었다.
"좋습니다. 오늘 오후에 사체를 부검한 소견서가
나왔습니다만, 미스코리아 진은 파라티온이라는 독극물,
농약입니다, 그것에 중독되어 즉사했습니다. 그리고 윤보혜양이
마신 칵테일 잔에서 치사량을 훨씬 초과하는 파라티온이
검출되었습니다. 수거한 다른 두 잔의 칵테일 잔에서는 아무
것도 발견되지 않았습니다. 주방에 있던 남은 잔에서도
파라티온은 검출되지 않았습니다. 독살에 사용된 파라티온에
대해서 잘 아시는지 모르겠지만 그 독성이 너무 강해서 두 세
방울만 혀끝에 닿아도 몸부림 한번 제대로 못쳐보고 즉사하게
됩니다. 즉, 파라티온 진액이 손가락 끝에 묻어 있다고 가정해
봅시다 돈을 세던 사람이 침을 묻히기 위해 손가락을 입으로
가져간 순간 그 사람은 그 즉시 중독되어 사망케 됩니다. 매년
농약에 중독되어 천 명 이상이 사망하는 현실입니다만 이는 뭘
의미하느냐면, 독살이 용이해지기 때문에 알리바이를 얼마든지
조작할 수 있다는 해석입니다.
가령, 범인이 자기 손에 파라티온을 묻혀서 윤보혜양과 악수를
했다고 가정합시다. 화면상으로는 단 두 사람이 윤보혜양과
악수를 나누는 장면이 나옵니다. 맨 처음에 권중혁 의원님께서
악수를 했고 조금 후에 박윤성 회장님이 악수를 했습니다.
이렇게 되었을 경우 진의 칵테일 잔에 파라티온을 넣지 않아도
진이 칵테일을 마시기 전에 잔을 만지작거렸다면, 실제로도 잔을
만지작거리는 장면이 나타났지만, 범인은 중앙 홀에 나와있어도
진을 독살시킬 수가 있는 것입니다."
보도국장과 앵커는 놀라움을 금치 못하고 있었다.
"그렇다면 권의원과 박회장이 진범일 수도 있다는
얘긴데......, 이런 수법의 독살을 방송에 내보내면
아무래도......"
박성원 앵커는 곤란하지 않겠느냐는 눈빛으로 보도국장을
바라보았다.
"그렇긴 한데요. 너무나 간단하고 완벽한 살인이라서
방송윤리에도 문제가 있군요. 멘트 방법을 달리할 수밖에
없겠군요."
"그런데 장과장님, 사라진 칵테일 잔에 대한 새로운 시각은
없으신지요?"
앵커가 물었다.
"글세요...... 전 일단 두 가지 각도에서 바라보고 있습니다.
하나는 누군가 아무 생각없이 무의미하게 치운 것 같고, 또
하나는 여기에 어떤 트릭이나 함정이 숨겨져 있지 않나 하는
느낌입니다."
"그렇다면 춤을 추던 여덟 사람은 진범이 될 수 없다는 논리가
되지 않습니까?"
앵커가 말했다.
"꼭 그렇게만 해석될 상황은 아니지요. 우리 수사진에서도
단독범의 소행이라고 보고 있지만 공범이 존재할 수도 있는
일입니다. 칵테일 잔이 그걸 암시하고 있지만, 이 사라진 칵테일
잔은 현장에 내려가서 재분석 해봐야겠습니다. 사실, 칵테일
잔의 미스터리는 제 머리 속을 온통 혼란 속으로 빠져들게 하고
있습니다."
장과장은 솔직한 심정으로 대답했다.
"장과장님 추리에 의하면, 홀에 있었던 사람들은 누구나 할 것
없이 전부 용의자로 간주해도 큰 무리가 없는 듯 보입니다.
장과장님, 우리 방송국에서는 이 테이프를 내일 저녁 뉴스 때 첫
공개를 할 예정인데, 그때까지 시간이 남아 있으니까 좀더
장과장님의 예리한 추리력을 발휘하셔서 우리에게 도움을
주셨으면 합니다. 테이프 복사한 걸 한 부 드릴테니까 신경 좀
써주십시오."
보도국장은 젊은 기자에게 복사한 테이프를 가져오라고 하고는
믿음섞인 눈빛으로 장과장을 다시 보았다.
"물론 테이프가 다른 곳에 흘러다녀서는 안 됩니다. 방송
전까지는 외부로의 유출이 금지되어 있기 때문에 제 입장이
난처해집니다."
"여부가 있겠습니까. 헌데, 임국장님이 가져온 테이프가
원본입니까?"
장과장이 물었다.
"네, 보셔서 아시겠지만 테이프 내용을 편집했거나 조작한
흔적은 없습니다. 그야말로 오리지널 테이픕니다."
"그건 확실합니다."
앵커도 보도국장처럼 고개를 끄덕여보이며 말했다.
오부장과 임국장은 방송국 정문을 나올 때까지 서로 시선을
피한 채 침묵을 치키고 있었다. 주차장에 당도하자 임국장이
먼저 입을 떼었다.
"어떠셨습니까, 테이프를 본 느낌은요?"
임국장은 텅 빈 광장을 보면서 힘없는 목소리로 물었다.
"장과장 말대로 범인이 없더군요."
"오부장님께서 무대포인 그 사람 좀 타일러주셨으면 합니다.
진범일 수 없는 사람을 진범이라니... 이거야 원, 마른 하늘의
날벼락이지..."
"그건 그렇고, 그 캠코더 기사를 만나셨을텐데, 그냥 테이프만
전해받았습니까?"
"호텔 방에서 잠깐동안 몇 마디 얘기를 나눈 게
고작이었습니다. 테이프를 검토해 봐야 했기 때문에 별로 얘기할
시간이 없었어요."
"그 기사에게 얼마를 지불했습니까?"
오부장은 궁금한 눈빛으로 물었다.
"생각보다는 큰 액수는 아닙니다."
임국장은 정확한 액수를 밝히길 꺼려했다.
"그래도 어느 정도의 선은 있지 않겠습니까?"
"처음엔 턱도 없는 액수를 부르더군요. 당연한 거죠. 그러다가
현실을 인정했는지 딱 잘라서 삼백만원을 요구하더군요."
오부장은 실망한 표정을 지었다.
"겨우 삼백만원을......"
"그 기사로서도 테이프 내용에 불만이 많았던 모양입니다.
가장 중요한 범인의 행동이 찍혀져 있지 않았기 때문에 무척
속이 상했던 모양입니다. 범인의 살인 순간이 포착되어 있었다면
우리 방송국에 장사를 할 필요없이 범인에게 직접 거래를
했을텐데 말입니다. 그나마 미스코리아 진의 마지막 모습이
화면에 담겨져 있어서 상품가치로 인정을 받을 수 있었지요.
그러나 그자가 더 많은 액수를 끝내 고집했다면 우리도 그의
요구를 수용했을거요......"
임국장은 고소하다는 투로 말했다. 그때 복제 테이프를 든
서류봉투를 옆구리에 끼고 장과장이 승용차 앞에 서 있는 두
사람에게 다가왔다.
"보도국장이 이 테이프를 주면서 협조 좀 해달라고
그러더군요."
"장과장은 서류봉투를 타고온 순찰차 안에 넣고는 다시 문을
닫았다. 임국장은 여전히 불쾌한 시선으로 장과장을 쏘아보면서
입술을 실룩거리고 있었다.
"장과장님은 아직도 내가 범인일 수도 있다고 생각하시오?"
임국장은 바지 주머니에서 양손을 찔러넣으며 격앙된 음성으로
물었다.
"임국장님뿐만 아니라 권중혁 의원님도 마찬가집니다."
장과장은 안색 하나 변하지 않고 대꾸했다.
"오부장님, 대나무처럼 곧은 부하를 두셔서 참으로
든든하시겠습니다. 속이 텅 비어서 문젭니다만 말입니다. 두 분
다 안녕히 가십시오. 장과장, 당신 후회할 날이 있을거요."
임국장은 등을 돌리면서 거칠게 한 마디 내뱉고는 방송국
안으로 사라졌다.
"이런 걸 무언의 압력이라고 합니까, 부장님?"
장과장은 밤하늘에 뿌옇게 떠 있는 하현달을 쳐다보면서 깊은
한숨을 토해냈다.
"나도 뭐가 진실인지 잘 모르겠어."
"저도 부장님의 의견과 상치되고 싶은 마음은 털끝만큼도
없습니다. 그러나 권의원이 진범이라고 밝혀졌을 경우, 그때는
누가 그 통한의 책임을 집니까? 설사 무관하다고 밝혀져도
마찬가지입니다. 지금은 범인이 없습니다. 그 점이 제겐 가장
중요한 문젭니다."
오부장은 한참동안 침묵을 지키고 있었다. 고뇌하는 표정이
역력해 보였다.
"......그래, 지금은 범인이 없어. 그 분에게는 안 된
일이지만 소신대로 일을 처리하는 수밖에 없어. 나도 장과장의
범인 없음에 찬성하겠네. 그리고 범인은 여덟 사람 중에서도
존재할 수 있다는 것도."
"감사합니다, 부장님."
"가지, 장과장. 현장으로 내려갈건가?"
"보고서를 써야 하니까 시경으로 들어가겠습니다."
"그러게. 그 다음 일은 위에서 알아서 하겠지."
오부장은 장과장의 어깨를 치며 승용차 운전석에 앉았다.
"난 집에 가서 한숨 자야겠어. 보고서는 내 책상 위에
놓아두게."
오부장의 차는 광장 너머로 사라지고 있었다. 장과장은
한참동안 희뿌연 하늘을 올려보다가 방송국 건물로 시선을
돌렸다. 성난 임국장의 얼굴이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는 느낌이
들었다. 그는 방송국 앞에 잠시라도 서 있을 기분이 없어졌다.
"임국장, 내 사전에는 후회라는 단어가 없소이다."
정과장은 패트롤카를 거칠게 회전시켜서 광장을 질주했다.
5. 폭로- 미스코리아 진은 자살했다
방송국에 테이프를 건네주고 난 이튿날, 박만하는 3년 전에
사진기자로 근무한 적이 있던 "퀸서울"사를 찾아갔다. 주로
연예인들의 사생활을 추적해서 흥미위주로 기사를 내는
주간잡지사였다. 5년 전에 창간할 때는 적자 운영을 면치 못하던
잡지사가 지금은 흑자에 넘쳐 더 큰 빌딩으로 이전을 서두르고
있을 정도로 발행부수가 엄청난 퀸서울이었다.
박만하는 3년 전에, 그 잡지사 사진기자로 입사한 지 1년이 채
되지 못해서 모델에게 금품갈취를 했다는 이유로 파면당하고
말았다. 신인 여배우겸 CF모델로 막 꽃봉우리를 터뜨리기
시작하는 신인 여배우의 수영복 입은 반나체를 화보에 담기 위해
청평에 있는 계곡으로 떠났다. 현장에 도착해서 모델을 넓적한
바위 위에 앉혀 무릎을 세우게 하고 섹시한 포즈를 취하게 하는
순간 그녀의 눈빛이 성에 굶주린 여자처럼 요염해지는 것이었다.
불타오르고 있는 계곡의 단풍을 배경으로 해서 셔터를 열댓 번
누른 다음 그녀에게 다가가 새로운 포즈를 취하게 했을 때도
모델의 숨소리는 거칠어져 가고만 있었다. 그 순간 그는 계곡에
거의 다 도착해서 모델이 승용차 옆자리에서 캔과 함께 마신
약봉지가 생각났다. 모델은 더 이상 참을 수 없다는 듯 그의
목을 힘껏 끌어당겨 허벅지 사이로 파묻었다. 결국 그날의 사진
촬영은 엉망이 되어버리고 말았다. 환각에서 깨어난 모델은
서울로 돌아오는 길에 그에게 수표 한장을 건네주면서 비밀을
지켜달라고 신신당부했다.
그리고 닷새 후, 땅딸이 사장은 그를 직접 사장실로 불러
면전에서 파면 통보를 했다. 순진한 모델에게 향정신성 의약을
먹여서 돈을 갈취했다는 이유였다. 그는 조용히 물러나올 수밖에
없었다. 땅딸이 사장 옆에 앉아 있는 모델과 언쟁을 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 모델은 3개월 후에 사장과
결혼식을 올렸다. 열 아홉 나이로 군대 간 두 아들의 계모가 된
모델이었다. 그러나 그 모델은 일년 전에 캔에다 청산가리를
타서 마시고 자살해버렸다.
박만하가 편집부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서자 책상에 앉아서
원고를 검토하고 있던 편집장이 반가운 얼굴로 그를 맞이했다.
"이게 누구야, 박기자 아니야?"
편집장은 악수를 청했다.
잡지사에 들어오기 전에 전화를 건 목적이 이 인간을 이렇게
반갑게 대해주는 속물로 만들었겠지. 파면당한 나를.
"그래, 그동안 어떻게 지냈나."
편집장은 방문객에게 담배 한 개비를 권하면서 자신도 한 대
피워물었다.
"캠코더 기술 좀 배워서 인천에 있는 예식장에서 목구멍에다
풀칠 좀 하다가 지금은 조그만 사업 좀 해볼까 구상중입니다."
박만하는 한 모금을 빨고는 담배맛이 없다는 듯 재떨이에다
거칠게 비벼껐다. 편집장이 재떨이의 짓이겨진 담배를 슬쩍
내려다보면서 조심스럽게 말문을 열었다.
"알다시피 내일이 마감이기 때문에 기자들이 총동원되었어."
편집장은 텅 빈 사무실을 보면서 씁쓸하게 미소지었다.
"퀸서울이 꽤 유명해졌더군요. 물론 내가 있을 때도
그랬지만요."
"그만큼 더 힘들어. 몸이 열 개 있어도 모자랄 지경이야."
편집장은 탐색하듯 그를 보면서 말했다.
"사장과는 연락이 되었습니까?"
박만하는 손목시계를 보면서 물었다.
"물론이지. 투고 내용이 특보감이라면 자네가 요구한 액수를
지불해 주라고 하더구만. 그리고 사장님 말씀이, 자네가
원한다면 우리 잡지사에 다시 채용하고 싶으시다더군. 그리고
조금 아까 나리따 공항에서 전화가 왔는데, 저녁 7시쯤이면
김포공항에 도착하신다더군. 자네 생각은 어때? 사장님 한번
만나볼 의향은 없나?"
"내가 듣고 싶은 건 액수일 뿐입니다."
박만하는 코웃음을 치며 한 마디로 딱 잘라 말했다.
"그런데 한 가지 조건이 있네. 신빙성 문제가 대두되기 때문에
하는 얘긴데, 익명의 투고나 우리 잡지사 기자 이름으로 기사를
내보낼 수는 없다는 점이네. 그러니까 자네 이름으로, 뭐 전
퀸서울 사진부 기자 박만하로 게재해야만 된다는 점일세.
사장님도 그 점에 각별한 주의를 주시더군."
"좋도록 하시죠."
박만하는 개의치 않겠다는 듯 양복 주머니에서 원고가 든 노란
봉투를 꺼내 편집장에게 넘겨주었다. 원고를 읽는 편집장의 눈이
빛나고 있었다.
-미스코리아 진 윤보혜는 한 아이의 엄마였다!-
"아니 이게 무슨 소린가? 윤보혜가 한 아이의 엄마라니!"
편집장은 타이틀을 읽는 순간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경멸에 찬 미소를 흘리고 있는 박만하를 보았다.
"뭘 그렇게 놀라십니까? 이런 일 한두 번 경험해보셨습니까?"
"햐, 이건 특보감이 아니라 대특보감일세, 야......"
편집장은 만화를 보는 소년처럼 신기한 표정을 지으며 원고를
다시 읽기 시작했다.
미스코리아 윤보혜양은 미스코리아에 당선되기 전에 인천에
있는 조그만 비디오 대여업체 경리로 일하고 있었다. 고아
출신인 진은 어릴 적에 화학약품을 생산하는 공장의 사장인 윤xx
씨의 양녀로 들어갔다. 그러나 그녀가 사춘기 때 공장에
대화재가 발생하는 바람에 양부를 잃게 되었다.
그때부터 진은 인천에 모여상 야간학교에 다니면서 학비를
마련하기 위해 서두에서 말한 D기획사에서 사환겸 경리로 일하게
되었다. 미스코리아 진은 D기획사 근처에 자취방을 얻어
야간학교를 다니고 있었다. 양모마저 세상을 떠나고 홀로
살아가는 그녀였다.
그런데 윤보혜양은 S여상을 졸업한 그 달부터 배가 부르기
시작했다. 태아의 아버지는 누군지 알 수가 없다. 내가 진을
처음 만난 곳은 역시 D기획 사무실에서였다. 진이 여상을
졸업하기 4개월 전쯤이었으니까 가로수 입새들이 찬바람에
날리는 가을이었을 것이다. 그 당시 나는 다니던 직장을
그만두고 인천의 간석동에 있는 예식장의 비디오 촬영기사로
일하고 있었는데 테이프 문제로 친분이 있는 D기획 사장을
만나기 위해 사무실에 들렀던 것이다. 사무실의 낡은 책상에
앉아 장부를 적고 있는 진을 처음 본 인상은 솔직한 표현으로
그리 강렬하지가 않았다. 예쁘다는 느낌은 들었지만 진에
당선되었을 때처럼 그 미모가 빼어나지도 않았고 출중하지도
못했다.
그 후로 내가 D기획을 다시 찾은 건 두 달이 좀 지났을
때였다. 길거리에 캐롤송이 한창 울려퍼지고 있을 때니까
크리스마스를 며칠 남겨둔 날일 것이다.
그때 진은 사무실에 켜둔 석유날로 앞에 앉아서 군고구마를
먹고 있었다. 뜨거운 군고구마를 호호 불어가면서 껍질을 벗기고
먹는 진의 얼굴은 처음 봤을 때보다도 형편없었다. 얼굴에
부스럼 같은 것이 나 있어서 그런지 볼 품이 없었다. 그것이
내가 진을 그 사무실에서 본 마지막 기억이었다. 석달 후에 다시
그 사무실을 들렀을 때는 못보던 경리가 대신 진의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그리고 사계절이 지나고 운명의 봄이 찾아왔다. 계절의 여왕인
5월. 바로 올해 5월 17일이었다. 그날은 S문화회관 대강당에서
미스코리아 선발대회가 열린 날이었다.
나는 예식장 기사를 그만두고 비디오 가게나 할까
궁리중이었다. 그날도 서울 시내를 돌아다니다가 가게터를
알아보고 다녔지만 쉽게 구해지지가 않았다. 그러다가 빈 시간도
때울겸 5월 17일이 미스코리아 선발대회가 열리는 날이라는 걸
알고 있었던 나는 S문화회관으로 가는 버스를 탔다. 다른
관객보다 회관에 일찍 입장했기 때문에 비교적 앞좌석에 앉을 수
있었다. 정각 18시가 되자 미스코리아 선발대회의 화려한 막이
올랐다.
나는 지금도 그날의 충격과 경악을 잊을 수가 없었다. 진이
D기획을 그만둔 동기가 출산을 위해서라는 걸 D기획
사장으로부터 들어서 알고 있었으므로 화려한 드레스를 입고
무대 중앙으로 사뿐히 걸어오는 4번 미스 서울 윤보혜양이 경리
윤보애라고는 상상조차 할 수가 없었다. 수영복 심사가 끝나고
15명의 결선무대 진출자가 가려질 때까지도 나는 미스 서울
윤보혜양이 군고구마를 호호 불어가며 맛있게 먹던 그 볼품없는
경리라고는 꿈도 꾸지 못했다.
그러나 한 번 본 얼굴은 잘 잊어먹지 않는 나의 눈을 속일
수는 없었다. 미스 서울이 경리 윤보애양인걸 확인한 순간, 내
머리 속은 꿈 속을 헤메고 있는 듯한 착각에 빠져 아무 것도
생각할 수가 없었다.
그런 내 마음과는 아랑곳없이 미스코리아 대회는 순풍에
돛단듯이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었다. 그리고 내 마음의 혼란과는
달리 4번은 15명에서 8명으로 가려지는 최종 결선무대에
보란듯이 진출했고, 제발 떨어져라 하는 주술같은 내 간절한
소망과는 정반대로 4번은 요녀석아 어림없다는 듯 진선미를
가리는 세 명 속에 들어가는 것이었다. 세 후보 모두가 원하지
않는 미가 가려지고 최종으로 남은 윤보혜양과 나비향의 왕관
쟁탈전은 결국 윤보혜양에게 그 영예가 돌아가고 말았다.
오, 하나님.
나는 하늘이 무너져내리는 것 같은 분노를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심사위원들, 관객들, 수많은 시청자들, 진의 황홀해하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을 수많은 사람들을 생각하니 당장에 무대로
뛰어올라가서 "이 여자는 미스가 아니다!"라고 소리치고
싶었지만, 진이 쓴 왕관을 벗겨버리고 목을 졸라 이 세상에서
사라지게 하고 싶었지만, 그 충동을 억눌러야만 했다. 가증스런
윤보혜, 아니 윤보애의 로보트 같은 미소를 보면서 나는 이것이
제발 현실이 아니길 마음 속 깊이 빌었다. 그리고 한편으론 설마
경리였던 그 여자일리야 하는 의구심을 마음 속에서 일부러
눈덩이처럼 크게 부풀려서 사실이 아닐거라고 억지로 위안을
삼기까지 했다.
나는 다음날 주안에 있는 D기획을 찾아갔다. 사장은 나의
사실확인에 믿으려들지 않았다. 텔리비전을 보지 않아서인지
사장은 세상에 닮은 사람도 많다고 오히려 나를 이상한 눈초리로
바라보는 것이었다.
나는 진의 과거를 추적해 들어가기로 마음먹었다. 윤보애가
자취하던 방을 알아내서 그 집 여주인에게 확인을 하였다. 셋방
처녀가 그 사글세 방에서 나가기 전에 임신중이었다는 걸 분명히
들을 수 있었다.
나는 그것을 기초로 하여 인천에 있는 산부인과 병원들을
찾아다니면서 졸업시즌 때를 즈음해서 입원한 임산부의 명단을
확인해 보았다. 결국 나는 진이 입원했던 산부인과에서 그녀의
이름을 찾아낼 수 있었다. 아들을 낳은 그녀는 입원한 지
나흘만에 친구의 도움으로 퇴원수속을 밟고 아무도 모르는
곳으로 사라져버린 것이다.
진이 미혼모였다는 걸 확인하고 난 다음날 나는 방송국의
프로그램 판배부에 직접 가서 미스코리아 선발대회를 실황중계한
비디오 테이프를 사서 D기획 사장실로 갔다. 사장은 VTR을
보면서도 계속 믿으려 하지 않았다. 여자가 저렇게 변할 수
있다는 사실을 도무지 인정하려 들지를 않았다.
그러나 사장은 진이 윤보애라는 걸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얼굴은 몰라보게 변해있어도 키, 걸음걸이, 목소리 등을
완벽하게 변화시킬 수는 없는 것이었다.
나는 미스코리아 진을 만나보아야겠다고 생각했다. 윤보애가
시간을 보내는 곳이 의상실이라는 걸 알고 그곳 근처에서 진이
나타나기만을 눈이 빠지게 기다렸다. 그래서 나는 진을 볼수
있었고, 기회를 엿보다 혼자 걷는 틈을 타 적당한 장소에서
접근을 시도했다. 물론 나는 진이 끝까지 진실을 거부할 거라고
예상하고 거기에 대한 만반의 준비를 갖춰놓았다. 캠코더를
가지고 있으면 모든 것이 자연스런 접근이 되는 것이었다.
방송국 카메라 기자라고 신분을 속이고 진에게 조용한 장소로
가서 잠깐 얘기 좀 나누자면 대충 순서대로 풀리게 되어 있었던
것이다.
나는 그렇게 진에게 접근해서 그녀의 솔직한 고백을 받아낼 수
있었다. 처음에는 완강하게 부인하다가 급기야 내가 산부인과
병원을 얘기하자 겁에 질린 표정을 지으며 시인을 하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진은 상금으로 탄 돈을 모두 줄테니 제발
영원한 비밀로 해달라고 눈물을 흘리면서 애원을 했다. 그렇게
애원 끝에 진은 그렇지 않으면 자신은 자살할 수밖에 없다며
나를 원망섞인 눈빛으로 노려보기까지 했다. 결연한 의지가
엿보이는 표정이었다.
그런데 선택의 기로에 서게 된 나로서는 어떻게 판단을 내려야
할지 난감하기 이를데 없었다. 자기가 한 아이의 엄마라는
사실이 세상에 알려지면 미련없이 자살을 하겠다는 그녀의
모습은 차마 처절하리만큼 아름다운 모습이었다. 그러면서
그녀는 핸드백을 열고 화장품 샘플 한 개를 꺼냈다. 파라티온
극독물이 든 샘플을 항상 가슴 속에 가지고 다닌다는 진이었다.
이런 경우를 당했을 때, 보통 사람들은 어떤 행동을 취하게
될까?
나는 그 자리에서 조용히 일어설 수밖에 없었다. 입막음조의
돈도 언론에 진의 과거를 폭로할 필요도 내게는 그저 나른한
오후처럼, 자포자기의 심리상태처럼 무의미하게 느껴졌다.
그런데 진에게서 파티가 있기 사흘 전에 내 작업실에 전화가
걸려왔다. 그곳에서 나올 때 진이 사례를 해줄테니까 전화번호를
좀 가르쳐달라고 하기에 별 생각없이 전화번호를 적어둔 건데,
정말로 전화가 온 것이었다. 처음에 만났던 장소에서 진을
두번째 만났을 때, 진은 내게 관계기관에 신고를 해주지 않아서
너무 고맙다며 수표 열 장을 주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전화로
잠깐 얘기했지만 사흘 후에 용인에 있는 별장에서 축하파티가
있을 예정인데 후하게 수고비를 줄테니까 캠코더를 가지고 와서
촬영 좀 해달라는 별도의 부탁까지 하는 것이었다.
나는 늪에 빠진 기분이었다. 무엇이 진실인지 알 수가 없었다.
내가 진의 마력에 빠진건지 엄청남 비밀의 관계를 즐기고
있었는지 그때의 내 행동은 뭐라고 정의내리기 어려운
심리상태였다. 나를 위해 무엇이든지 다 바칠 것 같은 진의 그
눈빛, 나는 어느새 그녀와 비밀의 공범이 되어 있었던 것이다.
미스코리아 진은 수표를 돌려주는 내게 이렇게 속삭였다.
볼룸댄스가 벌어질 때 내 모습을 아름답게 찍어달라고. 특히
칵테일이 테이블로 날라져 왔을 때 캠코드의 초점을 자기를
중심으로 해서 잡아달라며, 마치 여조련사가 순종하는 호랑이를
명령하듯이 내게 무언의 눈빛으로 명령하는 것 같았다.
그래서 나는 축하파티가 벌어지던 날 진이 당부한대로
캠코더를 작동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어찌된 일인가!
미스코리아 진은 계속 칵테일 잔을 만지작거리며 한참을
망설이는 듯 하더니 칵테일을 마시고 나서 목을 움켜쥐는 게
아닌가!
나는 덜컥 겁이 났다. 미스코리아 진은 내게 자살을 암시했던
것이었다.
나는 촬영을 끝마치는둥 마는둥 하고 초대객들이 혼란에 빠진
틈을 타서 무작정 별장에서 멀리 벗어났다.
그것이 내가 미스코리아 진을 본 마지막 순간이었다.
한 아이의 엄마였던 미스코리아 진은, 나로서는 도저히 믿을
수도 받아들일 수도 없는 자살을 한 것이다.
나는 지금 꿈을 꾸고 있는 것일까?
원고를 다 읽은 편집장은 급하게 읽은듯 깊이 숨을 들이마시며
흥분을 감추지 못하고 있었다.
"미스코리아 진이 애기 엄마였다니...... 거기다가 미스터리
같은 자살까지...... 정말 대단해. 퀸서울이 날개 돋히듯이
팔리겠어."
"이제 원고료를 줘야 하지 않겠습니까?"
"물론, 물론이지. 그런데 자네한테 몇 가지 물어볼 게 있네."
"뭐든지 물어보십시오."
박만하는 다시 손목시계를 보고나서 여유있는 목소리로
말했다.
"진의 아이 말일세, 아들이라고 했던가. 지금 어디에 있는지
알고 있나?"
박만하는 모른다고 차갑게 대답했다.
"헌데, 여기서 의문나는 대목이 하나 있는데, 토를 달기 위해
참고적으로 알아두고 싶어서 그러는데 마지막 대목에 이르러서
캠코더로 자기를 찍어달라고 해서 작동했다는 대목 말이야."
"그 대목이 어때서요?"
박만하가 따지듯이 물었다.
"자살을 암시했다는 뜻에서 쓰여졌겠지만 수준이 조금 있는
독자라면 누구나 할 것 없이, 그럼 진의 마지막 모습이 담긴
비디오 테이프는 어떻게 된 거냐고 빗발치듯이 문의전화를
해올텐데."
그는 편집장의 속셈을 눈치채고 속으로 비웃고 있었다.
"오늘 저녁 뉴스에 나올 겁니다."
"아니, 그럼 이 원고는 생명력을 잃은 게 아닌가."
편집장의 얼굴이 순식간에 납빛으로 변하고 있었다.
"참 딱하십니다. 방송국에서 테이프를 내보내면 사람들은
궁금증만 더할 겁니다. 그런데 이틀 후에 해답 같은 이 내용이
퀸서울에 실려나가면 반응이 어떻겠습니까? 오히려 퀸서울에는
잘 된 일이지요."
"그, 그렇군. 그럼 방송국에서는 이런 사실을 모르고
있는거로군."
편집장은 금새 화색이 돈 얼굴로 더욱 흥분을 하고 있었다.
"자네는 정말 운이 좋은 사람이야. 우리 손잡고 일해보지
않겠나? 같이 미스코리아 진의 사생아도 찾아보고, 옛날처럼
한번 힘껏 뛰어보자구."
"고료나 주십시오. 파면은 한 번으로 족합니다."
"그, 그러지......"
편집장은 무안해하며 수표가 든 하얀 봉투를 얼음장처럼 찬
그의 손에 주었다.
"다른 잡지사에 정보를 흘리지 말아야 하네."
"퀸서울이 나올 때까지 경찰한테도 입도 뻥긋 안 할테니까
염려 푹 놓으십시오."
"우리 술 한잔 할까?"
"시간이 없습니다. 지금 경찰에 가봐야 합니다."
"지금 경찰에 간다구?"
"그 점은 걱정하지 말라고 했잖습니까. 그럼 이만
가보겠습니다."
박만하는 볼일 다 봤다는듯 소파에서 벌떡 일어나 뒤도
돌아보지 않고 사무실을 나가버렸다. 그가 문을 세게 닫으며
나가자 편집장은 닫힌 문을 노려보면서 침 뱉듯이 한 마디
내뱉았다.
"사기꾼 새끼, 운도 좋지."
6. 육감과 다수의 설전
미스코리아 진이 의문의 죽음을 당한지 일주일째 되는 날,
서울시경 전체 회의실에는 특수수사 1과 과장과 2과 과장을
비롯하여 경위급 7명의 형사와 오부장이 회의실 나무의자에 앉아
경찰국장을 기다리고 있었다.
잠시 후 경찰국장이 금테안경을 쓴 검사와 함께 회의실로
들어오고 있었다.
장과장은 제복을 입은 국장과 양복을 입은 채 심각한 표정을
짓고 있는 검사를 보는 순간 아찔한 현기증을 느꼈다. 오늘의
호출은 수사회의가 아닐 것이라는 직감이 두 사람의 굳은
표정에서 쉽게 감지할 수가 있었다.
"장과장."
태극기 아래에서 뒷짐을 지고 있던 국장은 굵은 음성으로
장과장을 의자에서 벌떡 일어나게 만들었다.
"박상현 검사님은 이번 미스코리아 진의 죽음을 자살이라고
결론 내리셨어. 또한 2과 과장과 2과 소속 형사들도 이의없이
자살이라는데 의견이 일치했네. 오부장 또한 자살임이
명백하다고 최종 결론을 내렸네. 그런데 유독 장과장만이
지금까지 독살이라고 변함이 없는데, 박만하의 진술을 듣고
나서도 그 생각에는 변함이 없나?"
회의실은 긴장감이 감돌고 있었다. 중간에 앉아 있던 남형사와
윤형사도 자신의 호흡이 빨라지고 있다는 걸 느낄 수가 있었다.
"미스코리아 진은 독살당했습니다."
장과장은 분명한 어조로 국장과 머리가 벗겨진 검사를 보며
대답했다. 그러자 검사가 태극기 밑에서 한 발 앞으로
걸어나오면서 이해할 수 있다는 크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날카로운 눈매로 장과장을 보았다.
"에, 나도 처음엔 미스코리아 진이 독살당했다고 생각했었소.
내가 그렇게 생각한 결정적인 이유는 영광의 길이 펼쳐져 있는
미스코리아 진이 한 달도 되지 않아서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는
게 납득이 가지 않았소. 그러나 이제 미스코리아 진이 자살할
수밖에 없었던 동기가, 그것도 엄청난 동기가 박만하씨로 하여금
밝혀지게 되었소. 어느 누구도 이 점을 부인할 수는 없을
것이오."
검사는 더 이상의 반론을 원치 않는다는 눈빛으로 장과장을
보면서 그렇지 않느냐는 듯 고개를 끄덕여보였다. 그러나
장과장은 시선을 피해버렸다. 그러자 검사는 지었던 미소를
거두면서 이맛살을 찌푸렸다.
"인정할 수 없다......, 좋소. 다수의 의견이 무기화되면
횡포밖에 안 되겠지. 끝까지 독살이라고 주장하는 어떤 물적
증거가 있을 거라고 여겨지는데, 장과장은 다수를 설득할 수
있는 증거를 우리 앞에 보여줄 수 있습니까?"
장과장은 그대로 서 있기만 했다.
"물적 증거도 없다......"
검사는 허공을 향해 손을 내밀었다가는 다시 손을 주머니 속에
집어넣어면서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럼 육감으로만 독살을 주장하는거요?"
장과장은 듣고만 있었다.
"아, 제철을 만난듯 난리법석을 떨었던 TV, 신문, 심지어
주간지들까지 미스코리아 진이 자살이라고 결론 내리고 더
이상의 기사 취급을 하지 않고 있소. 수사본부도 오늘부로
해체된 셈이오. 아, 오부장."
검산는 맨 앞줄 의자에 앉아 있는 오부장을 불러세웠다.
"미스코리아의 과거를 추적한 형사가 누구요?"
"1과 소속의 남동현 경윕니다."
"미스코리아가 출산할 때 입원한 산부인과 병원을
찾아갔었나?"
검사가 물었다.
"네."
"박만하씨의 진술과 상이점을 발견할 수 있었나?"
"없었습니다. 진술은 사실이었습니다."
검사는 다시 장과장에게 독수리 같은 눈빛을 향했다.
"장과장, 내가 왜 장과장의 의견을 끝까지 들어볼려고
인내하는지 알고 있소?"
"네, 알고 있습니다."
"그렇소. 나는 장과장의 의견을 묵살할 수도 있소. 그러나
자살이 아니고 독살이라고 뜻을 굽히지 않는 그 신념에 찬
이유를 알아야만 하겠소. 솔직히 말하자면 청와대에서는
장과장의 보고서를 아직도 믿고 있소. 미스코리아 진이 미스가
아니었다고 밝혀진 지금은 자살쪽으로 기우셨지만 그래도 결론을
못내리고 있소. 장과장의 보고서를 다시 원하시고 있소. 오늘
밤까지 말이오."
장과장은 변함없는 눈빛으로 검사를 바라보며 입술을
움직였다.
"좀전에 비서실장님으로부터 전화를 받았습니다. 거의
일방적으로 하명을 받았기 때문에 보고체계를 갖춰서 부장님에게
보고를 드렸습니다. 제가 지금 검사님께 이런 말씀을 드리는 건
저 역시 위계질서와 법규를 지키고 있다는 걸 알려드리고
싶습니다. 이 점 오해 없으시기 바랍니다. 동시에 항명도 아님을
알려드리고 싶습니다."
"당신 한 사람의 고집 때문에 여기 계신 국장님을 비롯해서
많은 수사관들이 무의미한 정신적 고통과 육체적 고통을 겪게
되도 좋단 말이오?"
검사는 한숨을 쉬면서 다시 말했다.
"좋소. 우리 까놓고 얘기합시다. 비록 대통령께서는, 장과장과
친분이 있다는 걸 알고 있는데, ......에, 비록 대통령께서는
임명된 장관이 살인범이라고 밝혀질 경우를 염려해서 결단을 못
내리시고 있지만 진실은 언제고 밝혀지기 마련이오. 그러니
그것에 위안을 삼고 우리 미스코리아의 죽음에 대해서는
깨끗하게 손뗍시다."
"죄송합니다. 사표를 제출하겠습니다."
장과장은 요지부동이었다. 그때 남형사가 의자에서 일어났다.
"말씀 도중에 죄송합니다만 미스코리아 진은 독살당한 게
확실합니다, 검사님. 미스코리아 진이 출산 경험이 있는
여자이긴 했지만 박만하의 퀸서울에 투고한 내용은 사실과 많이
다릅니다. 그는 사기꾼입니다."
"박만하씨가 사기꾼이라고?"
"그렇습니다. 그는 주로 저명인사의 부인을 상대로 비밀을
파헤쳐 그것을 미끼로 협박해서 거액의 금품을 갈취해온 전문
사기꾼입니다. 그는 퀸서울에 있을 때의 사진기술과 예식장에
있을 때의 캠코더 기술을 십분 발휘하여 현장사진과 화면을
생생하게 담아 불륜을 저지른 부인들에게 금품을 요구해온 것이
틀림없습니다."
"증거가 있나?"
검사는 증거 만능주의자였다.
"박만하가 경찰에 출두하고 난 다음날 저는 그의 작업실을
찾아갔습니다. 물론 그의 집 주소는 개봉동에 있는
아파트였지만, 박만하가 출두하기 전까지 그의 행방을 추적한
끝에 신림동에 있는 한 어두운 작업장을 알아냈습니다. 저는
지하실 작업장에서 여러 개의 협박용 비디오 테이프와 몇 통의
필름을 확보할 수 있었습니다. 물론 이건 압수 수색영장이 없는
상태에서의 변칙 수사였던 점을 이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닫혀있는 것은 뭐든지 잘 여는 기술을 갖고 있는 남형사는
자물쇠로 잠겨진 지하실 작업장에 들어가 금고 안에 들어있던
테이프와 필름 중에서 세 개씩 빼내와 필름은 현상하고 테이프는
복사해서 다시 감쪽같이 금고에 갖다놓고 온 것이었다.
"우선 이 사진들 좀 보시지요."
남형사는 안주머니에서 두 개의 비닐에 든 사진을 꺼내서
검사에게 보여주었다. 검사는 사진을 한장 한장 보면서
이상야릇한 표정을 지었다.
"캠코더로 찍은 테이프 내용도 사진과 별반 다르게 없습니다.
호텔로 들어가는 청년과 나이먹은 귀부인. 숲 속의 고급승용차
안에서 포옹을 하면서 카섹스를 시작하는 장면 등등, 철저하고
완벽하게 촬영을 했습니다. 그러데 금고 안에 분류되어 있던 이
사진들과 테이프는 특급란에 들어 있었습니다. 아마도 언제든
현금화될 수 있는 것들인가 봅니다. 헌데, 문제는 박만하가
미스코리아 선발대회를 구경하기 위해, 그의 투고 내용에는
따분한 시간을 메꾸기 위해 대회장에 일찍 입장했다고 하지만,
여기에는 나름대로의 속사정이 있었던 듯이 보입니다."
검사 옆에 신중하게 듣고 있던 국장은 남형사의 말을 제지하며
굵은 음성으로 말했다.
"미스코리아 진이 자살한 게 아니라면 요점만 간단하게 말해."
"제 추측입니다만, 박만하는 일을 진행하기 위해 대회장에
입장했을 겁니다. 홀에 있었던 사람들 중의 어떤 사람의 불륜을
뒷조사하고 있었던 중이었을 겁니다."
"너무 날개를 달았다는 느낌이군. 박만하씨의 입을 통해서
들은 건 아니잖은가?"
검사는 회의적은 눈빛으로 남형사에게 말했다.
"저는 듣지 않아도 들은거나 다름없다고 확신합니다. 그날
미스코리아 선발대회장에 있던 분은 공개적으로 들어난 사람만
봐도 권중혁 의원님, 연성철 박사, 유진숙 녹미회 회장님,
임종도 국장님, 이렇게 네 분이 심사위원 중에 포함되어
있습니다. 강희 여사님도 대회장에 있을 거라고는 누구나
생각해실 수 있을 겁니다.
그러면, 박만하가 주의를 기울이고 있던 사람은 그의 비열한
성격으로 보아 여자분일 가능성이 매우 높아집니다. 유여사님과
강여사님, 이렇게 두 분 중에 한 분일 수도 있었던거죠.
박만하가 대회장에서 미스코리아 진을 본게 행운이라면 제가
빼내온 세 통의 필름 속에서 한 통의 필름 속에 담긴 내용 또한
제겐 행운이 된 셈이죠."
그렇게 말하면서 남형사는 안주머니에서 또 하나의 비닐봉지를
꺼냈다.
"이 사진 속의 남자와 여자 주인공은 우리 경찰에게 너무나
낮이 익은 얼굴들입니다. 바로 권의원님과 강여사님이죠."
회의장에서는 곳곳에서 신음소리가 터져나오고 있었다. 검사와
국장은 벌린 입을 다물지 못하고 있었다. 남형사가 스무 장이
넘는 사진을 건네줄 때서야 정신이 번쩍 든 두 사람은 울상에
가까운 표정을 지으며 사진을 들여다보았다. 검사는 다섯 장을
채 보지도 않고 국장에게 모두 넘겨버렸다. 국장 또한 혀를 끌끌
차면서 더 볼 필요도 없다는 듯이 오부장을 불러 사진을
넘겨주었다. 이어서 용인 별장의 나무 밑에서의 정사와 표주박이
열린 초가집 주차장에서의 범퍼 위의 정사 등 보기가 민망할
정도의 사진이 모두 돌려졌다.
검사는 사진이 남형사에게 다시 돌아올 때까지 기다렸다가
씁쓸한 표정으로 말문을 꺼냈다.
"에, 여러분들도 잘 아시겠지만 방금 본 사진은 직업상의
비밀취득에 해당되므로 그 어떤 것에 연계될 수 없는 사항이라는
걸 명심하시오. 아, 남형사, 그럼 진의 죽음과 사진과는 밀접한
상관관계가 있다는 얘긴가?"
"있을 거라고 확신합니다. 박만하는 미스코리아 진의 죽음으로
해서, 때를 맞춰 지금 그 사기꾼 솜씨를 유감없이 발휘하고
있습니다. 돌려주었는지는 불확실하지만 미스코리아의 당선금,
방송국과의 테이프 거래, 사실 테이프 액수도 비공식적으로는 그
액수를 훨씬 초과했을 수도 있습니다. 또 퀸서울과의 투고료,
정말 귀신 같은 솜씨로 한밑천 단단히 잡고 있습니다. 거기다가
언제든지 돈이 될 수 있는 필름이 있습니다. 아마
강여사님한테도 금품을 갈취했을 수도 있습니다. 특히 권중혁
의원님이 장관직에 입각했을 경우는 액수가 더 뛰게
되어있습니다.
정말이지 박만하는 시기를 정확히 포착했습니다. 미스코리아
진의 죽음이 자신에게 더 이상의 이익을 가져오지 못한다는 걸
알고 게걸스럽게 다 먹어치우고 나서는 오히려 자신에게 손해가
올지도 모른다는 계산을 한 겁니다. 권중혁 의원이 궁지에
몰릴까봐 퀸서울에 폭로기사를 쓰고는 미스코리아 진이 자살할
수밖에 없었다는 필연적인 동기를 못 박듯이 문장 속에 집어넣은
것입니다. 사건이 종결되거나 잠잠해진 뒤에 권의원님과
강여사님 앞에 나타나기 위해서죠."
남형사는 목이 탄듯 잠시동안 말을 중단했다.
"그런데 진이 출산 경험이 있다는 걸 알고 있는 사람이 또 한
분 있었습니다. 박만하가 최초로 안 인물이라면 열흘 후쯤,
그러니까 윤보애양이 진에 당선된지 열흘 후쯤에 금지선
변호사님이 저와 똑같은 경로를 통해서 진이 자격이 없는
여자라는 걸 확인해 냈습니다. 그런데도 지금까지 그 사실을
꼭꼭 숨기고 있습니다. 이해가 안 되는 금지선 변호사의
심리입니다."
"남형사, 도대체 핵심이 뭔가?'
국장은 회의실이 울릴만큼 큰 목청으로 말했다.
"윤보애양이 미스코리아 선발대회에 출전했다는 것 자체가
자살일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동시에 정상적인 지능을 가진
여자라면 선발대회에 절대 출전할 리가 없습니다. 저는
전면적으로 재수사를 해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지금까지는 저
역시도 미스코리아 진이 출산 경험이 있는 여자라고 확신했지만
어쩌면 우리 모두가 착각하고 있는 줄도 모릅니다. 아니, 우리
모두는 혼란에 빠져있습니다. 윤보혜는 출산 경험이 없는 여자가
확실합니다."
회의장은 또 한번 술렁이고 있었다. 오부장이 어이없는 표정을
지으며 남형사에게 질문을 했다.
"자네가 직접 확인까지 해놓고 그런 소리를 하면 누가
믿어주겠나?"
"저도 처음엔 진이 미혼모라고 단정지었지만 박만하가 투고한
퀸서울을 읽고 고개를 갸웃거리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파라티온이 든 화장품 샘플 운운한 대목 말입니다. 진이 분명히
칵테일을 마시고 숨졌습니다. 그런데 현장에는 샘플이
없었습니다. 핸드백에 넣고 다녔다고 했지만 진의 유품인
핸드백에도 샘플은 발견할 수가 없었습니다. 시신에서도
물론이구요. 그것 참 이상하지 않습니까? 자살을 했다면
파라티온을 담은 샘플이 현장에 남아있어야 하는 것 아닙니까?
그리고 진이 칵테일이 날라올 쯤에 자기를 향해 계속 찍어달라고
해서 그렇게 찍었더니 결국은 자살을 암시했다는 대목 역시
거짓임에 분명합니다. 즉, 박만하는 파티가 있기 사흘 전에
진으로부터 전화가 걸려왔다고, 최초의 전화가 걸려왔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진이 전화를 건 시기는 일주일 전입니다.
강여사님의 진술에 의하면, 미스코리아 선과 쇼 프로 녹화를
마치고 늦은 저녁을 먹고 있을 때 강여사님이 파티 얘기를
하면서 캠코더 기사 얘기를 꺼냈답니다. 그러자 진이 자기가 잘
아는 기사가 있다면서 그 사람을 쓰면 어떻겠냐고 해서
강여사님은 흔쾌히 허락했답니다. 그 자리에서 진은 박만하에게
전화를 걸었다고 했습니다. 결국 이 대목 역시 거짓임이
드러났습니다. 투고 내용을 하나 하나 따지고 든다면 기사는
온통 거짓 투성이입니다. 저는 그래서 이 투고 내용을 전부
뒤집어봤습니다.
먼저 미스코리아 진이 과연 출산 경험이 있느냐는 건데, 저는
이 점에 대해서는 금지선 변호사의 침묵을 제일 먼저 꼽고
있습니다. 만약 금변호사가 진의 과거를 추적해 들어간 결과
엄청난 비림을 발견했다면 지금까지 잠자코 있을 리가 없다는
사실입니다. 어떤 모종의 조치를 취했을 겁니다.
그리고 두번째, 진이 낳은 아들의 행방입니다. 진이 주안에
있는 회사를 그만두고 3개월 후에 강여사의 의상실에 취직을
했을 때 그녀는 진에 당선되기까지 강여사가 마련해준
아파트에서 생활해왔습니다. 젖먹이 아기를 돌봐줄 수 없는
생활을 해온 진이었습니다. 아기와 접촉을 하지 않았던 게
분명합니다. 물론 4개월 동안의 공백이 있긴 합니다만.
그러면 산부인과의 윤보혜양은 어떻게 된 걸까요? 동명이인일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단순히 이름이 같다고 해서 그 산모가
진이었다는 건 성급한 판단이라고 봅니다. 그리고 진이 경리로
일했던 D기획 사장의 증언은 음미해 볼 대목입니다. 제가 사장과
그곳에서 일하는 경리를 만났을 때 두 사람은 진이 윤보애였다는
제 말을 믿으려 하지 않았습니다. 경리는 텔리비전까지
봤으면서도 알아보지 못했답니다. 사장 역시 경리였던 윤보애와
진이 닮지 않았다고 했습니다. 박만하가 퀸서울에 이 대목을
언급했는데, 이 내용만은 사실인 것 같습니다. 사장이 믿으려고
하지않아 진의 과거를 추적하게 되었다고 하면서 자신의 추적을
합리화시키고 있지만, 3년씩이나 같은 사무실에서 마주쳐오던
사장이 진을 못알아 본다는 건 도저히 납득이 가지 않습니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또 하나의 증언인, 진이 세들어 살던
여주인의 말입니다."
남형사는 잠시 말을 멈추고 호흡을 가다듬었다. 회의실은
호수처럼 고요했다.
"......저는 여주인이 세를 살던 처녀가 임신을 하게 되어서
나갔다고 했길래 그 말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였습니다. 그러나
그 처녀가 진이었다는 증거는 어디에고 없습니다. 그 여주인
역시 미스코리아 대회를 봤지만 셋방 처녀하고 닮지 않았다고
했습니다."
"아니, 그럼 윤보혜 말고 또 다른 여자가 있었단 말인가?"
검사는 이해가 안 된다는 눈빛으로 남형사를 보며 물었다.
"비슷한 체격의 여자가 경리로 일하고 있었다는 사실이
확실하게 밝혀지면 진의 출산 여부는 자연적으로 진위가
가려지게 됩니다. 또 진이 자신의 과거를 생각나는대로 적당히
둘러대서 얘기했을 수도 있습니다. 사실 진의 과거는 강여사님의
입으로부터 나왔습니다. 또한 추적 과정에서 실수나 착각을 할
수도 있습니다."
남형사는 말을 마치고 의자에 앉으면서 옆자리의 윤형사에게
시선을 보내자 기다렸다는 듯이 그녀가 일어났다.
"1과의 윤주희 경윕니다. 사건이 발생한 그날, 저는
강여사님으로부터 진의 과거를 들었습니다. 이 진술을 근거로
해서 남형사가 진의 과거를 탐문하게 되었던 겁니다. 그리고
금지선 변호사님 역시 강여사님의 얘기대로 D기획을 찾아간
것으로 보여집니다. 그러나 박만하씨의 경우는 약간 다릅니다.
그는 퀸서울에서 진을 처음 본 인상, 그리고 두번째 봤을 때의
미모 또한 볼품없었다고 썼습니다. 왕관을 쓴 진과 고구마를
먹고 있는 윤보애하고는 공주와 추녀처럼 큰 차이가 있었노라고
스스로 적어놓고 있습니다. 그럴지도 모릅니다. 박만하씨가
착각했을지도 모릅니다. 아니면 박만하씨가 의도적으로 진과
경리를 동일 여자로 탄생시켰는지도 모릅니다."
윤형사가 보충설명을 하고 자리에 앉자 검사는 혼란스러운듯
양손가락으로 관자놀이를 지그시 누르고 있었다.
"진이 미혼모가 아니었다...... 그것이 사실이라면 진이
자살할 이유는 없는 거지......"
검사는 혼잣말처럼 중얼거리고 있었다.
"오부장, 당신의 의견을 듣고 싶소."
국장은 가라앉은 목소리로 오부장을 불렀다. 오부장은
한참동안 침묵을 지키다가 입을 열었다.
"진의 과거가 깨끗하다면 자살이 아니고 독살이 분명합니다.
저 역시 재수사가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오부장은 장과장을 보고 빙그레 미소지었다.
"2과장, 당신은 재수사의 필요성을 느끼오?"
코끼리처럼 큰 체구를 가진 2과장은 의자가 뒤로 밀리는
소리를 내며 일어섰다.
"남경위의 추론에는 아전인수식의 해석이 농후하지만,
나름대로 당위성과 설득력이 있어보입니다. 진의 자살동기를
정면으로 뒤집어 본 것은 천재형사다운 발상입니다. 저 역시
사건은 지금부터 시작이라고 생각합니다."
회의실의 분위기는 처음과는 달리 장과장쪽으로 역전이
되어있었다. 국장은 정면을 바라보면서 참석자들의 의견을
마지막으로 물어보았다.
"재수사에 이의 있습니까?"
수사관들은 이미 재수사에 대한 왕성한 의욕의 눈빛들을
보이고 있었다.
"네, 좋습니다. 그럼 이후의 사건 분담에 대해서 논의해
보기로 합시다."
검사가 목에 힘을 주면서 말했다. 시경국장이 직접 수사
분담을 지휘했다.
"공식적으로는 수사본부를 해체하는 것으로 하겠소. 즉
재수사는 극비로 행해집니다. 자살이 아닌 타살로 밝혀졌을
경우에도 수사는 비밀에 붙여지게됩니다. 그리고 수사팀은
오부장을 팀장으로 해서 1과 2과 특수반 요원들로 구성하시오.
단, 미스코리아 진이 미혼모인 것이 확인되면 그 즉시 수사팀을
해체하겠소. 아울러서 박만하를 구속시킬 수 있는 모든 증거를
수집하시오."
국장이 지시를 끝마치자 검사가 말을 이었다.
"장과장, 당신의 황소고집에 내 손들었소. 남경위, 사진은
어디까지나 그들의 사생활일뿐이오. 진의 재수사에 참고
사항으로만 이용되길 바랄 뿐이오. 이 점 명심해주길 바라오."
시경국장과 검사는 하급 수사관들의 거수경례를 받고는 나란히
회의실을 나갔다.
재수사의 팀장이 된 오부장이 의자에서 일어나 국장과 검사가
서 있던 태극기 아래로 걸어나왔다. 그는 느긋한 음성으로
수사방향을 제시하며 수사방침을 다음과 같이 정했다.
①미스코리아 진의 미혼모 확인 수사
②박만하 범죄 증거 수집
③권중혁 의원과 강희 여사의 불륜관계 수사
④용의자들과 미스코리아 진의 숨겨진 관계에 대한 수사
그렇게 네 가지 수사방침을 정한 오부장은 제1과 특수반에는
①수사와 ④수사를 병행케 했고, 제2과 특수반에는 ②수사를
맡게 했다. 그리고 짝꿍인 남형사와 윤형사에게는 ③수사와 함께
리베로 수사를 할 수 있게끔 특별히 신경을 써 주었다.
그런 후에야 오부장을 포함한 13명의 수사관의 재수사가
본격적으로 개시될 수 있는 여건이 마련된 수사회의가 비로소
끝이 났다.
7. 아름다운 표적
청와대에서는 대변인이 5부 장관을 교체하는 대통령의 일부
개각 단행을 발표하고 있었다. 내무부 장관과 국방부 장관,
건설부 장관, 상공부 장관이 경질되었고 문화부 장관도
교체되었다. 오래전부터 끊임없이 나돌던 개각설이 대통령의
최종 결정으로 이루어지게 되었다. 결질된 5부의 장관들 중에서
상공부 장관만이 건설부 장관으로 부를 이동했을 뿐 나머지
장관들은 인책으로 물러나게 되었다. 그리고 문화부 장관에는
가장 유력했던 권중혁 의원 대신 문화부 차관이 자리 물림으로
장관자리에 앉게 되었다.
안방에서 라디오를 듣고 있던 유여사는 깊은 한숨을 쉬면서
라디오를 껐다. 남편은 아침 일찍 골프를 치러 용인으로
내려갔다. 유여사는 또다시 한숨을 토해내면서 넓은 응접실로
나왔다.
가정부는 주방에서 오후에 올 손님들을 맞기 위해 풍성한
과일들을 씻고 있었다.
유여사는 요즘 보름 후에 있을 총회에서 회장으로 재출마하기
위해 표를 모으고 있었다.
모임 시간이 되자, 제일 먼저 전년도 미스코리아 진인
성주라양이 가슴까지 움푹 파인 드레스를 입고 나타났다. 이어서
80년대 후반의 진선미들이 향수 냄새를 풍기며 응접실로
모여들고 있었다.
유여사는 포트와인을 홀짝거리며 상에 모여 앉아 있는
미스코리아들을 보면서 순간적으로 짖궂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
누가 여왕 중의 여왕일까?
여자들이 모이면 언제든지 화제가 끊이질 않았다. 한 잔의
포트와인이 위로 들어가면 미스코리아들의 수다는 더욱더
길어져만 갔다. 그리고 두 잔의 와인이 더 들어가자 얌전하고
조심스럽게 움직이던 입술들은 분위기에 따라 자유자재로
움직였다.
"참, 별꼴이지. 시에미를 모시고 같이 살자니. 내가 미쳤나.
그저께 걷어차버렸어. 무슨 사내 자식이 그 모양인지......"
"어머, 어머, 그치 대단하다. 야. 클레오파트라도 다시
살아나게 할 수 있는 21세기 문턱에서 너를 시집살이
시키겠다구? 아예 뭉게버리지 그랬니."
미스코리아들은 그동안에 있었던 일상사를 실컷 얘기하고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올해의 미스코리아 진으로 거침없이
화제를 바꾸었다.
"퀸서울 읽었지? 세상에, 세상에. 살다 별꼴 다 본다야.
어떻게 그런 걸레가 미스코리아에 다 나올 생각을 했니. 너라면
그럴수 있겠니?"
"인간의 탈을 쓰고 어떻게 그럴 수 있겠니. 이건 우리
미스코리아들에 대한 모독이고 창피야. 잘 죽었어. 죽어도 싸.
자살을 했다구? 난 그렇게 생각 안 해. 누가 그 사실을 알고
독을 먹여서 죽였을 거야. 나 같아도 그렇게 했겠다."
"기자들도 눈이 뼛지. 뭐, 역대 미스코리아들 중에서 최고의
미녀로 손꼽힌다고? 그럼 우리는 그년 밑도 못닦아주는
나가리들이란 말이야. 아, 아깝다. 내가 일주일만 어렸다면 이
몸이 그년하고 같이 대회에 참가해서 묵사발을 만들어 놓을 수
있었는데. 흥 심사위원들이 눈깔이 뼛지. 그년 얼굴이 어디 사람
얼굴이야. 메주하고 호박을 짬뽕해놓은 잡탕이지."
유여사는 듣기가 민망한듯 자리에서 벗어나 주방으로
들어갔다. 응접실에서는 미스코리아 진에 대한 험담이 끝이
없었다. 성주라는 와인을 홀짝 홀짝 마시면서 아무 말 없이
앉아있기만 했다.
"야, 주라야. 너, 오늘 웬일이니. 요조숙녀처럼 얌전만 빼고
앉아있게."
성주라의 2년 선배인 진은 땅콩을 오징어에다 말다 말고
별일이라는 눈빛으로 어색하게 웃는 그녀를 보았다.
"내가 뭘. 얘기 듣는게 더 재미있어."
"너 요즘 변한 것 같아. 인기라는 거 그거 갈대보다 더 지조가
없어. 하루 아침에 유명해졌다가 그날 저녁으로 사라지는 게
인기라는 거야. 그거 알아 나?"
"언니는, 내가 뭘 어쨌다구. 언니는 괜히 나만 보면 그래."
성주라는 금방이라도 울듯이 눈가에 이슬이 맺히고 있었다.
"알았어, 알았어. 이 울보야. 그런데 주라 너, 진이 죽었을 때
현장에 있었잖아. 화면에 나타난 니 뒷모습을 보고 알았지.
그러기 소문에 많이 나돌고 있는게 사실이야. 방송국에서 편집을
해서, 홀에 있었던 분들의 얼굴을 모두 가려서 그런지 별의별
소문이 무성하게 나돌고 있어. 섹스 파티라는 얘기도 있어야."
"쉿, 그런 소리 하지마, 언니. 회장님이 들으시면 어쩌려고
그래......"
성주라는 주방쪽을 흘끗 돌아보면서 손가락을 입술에다
세웠다.
"괜찮아, 안 들려. 주라 너 윤호혠가 잡년인가 하는 애가
애엄마라는 거 알고 있었어?"
8x년도 진이 지나가는 말투로 물어보았다.
"그걸 내가 어떻게 알아. 왜 자살했었는지도 몰랐었는데."
"야, 자살은 무슨 자살이니. 그런 썩은 몸으로 대회에 출전한
년이 자살을 했다는 건 말이 안 돼. 누가 죽였지."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마, 언니. 퀸서울을 읽었으면서도 못
믿어? 또 독약을 타넣을 사람이 누가 있어? 연박사님과
회장님만이 죽은 보혜와 함게 앉아 있었는데, 화면에서는 아무
장면이 없었잖아."
"얘가 아주 형사가 다 됐네. 너 수상하다, 니가 혹시......."
8x 진은 장난기가 섞인 눈빛으로 성주라를 노려보면서도
입가에는 다정스런 미소를 담고 있었다.
"그래, 내가 죽였어. 그 계집애가 악녀인줄 알고 있었어.
그래서 우리 미스코리아의 명예를 위해서 내가 처치해버렸어.
잘했지? 나, 이뻐?"
성주라는 8x 진에게 입술을 쭉 내밀면서 애교있게 말했다.
"아이구, 내 새끼."
두 미스코리아는 재밌어 죽겠다는 듯 서로를 보며 소리내어
웃었다.
"주라야, 우리 이따가 요거나 한 게임 치러갈까?"
8x 진은 손으로 볼링치는 자세를 취하면서 유혹하듯이 말했다.
그러자 성주라는 갑자기 어두운 표정을 지었다.
"어쩌지, 언니? 나 선약이 있는데......"
"그래? 누구하고?"
"응, 있어. 좀 중요한 약속이라놔서......"
"그럼, 할 수 없지 뭐."
그때 주방에 있던 유여사가 바나나가 가득 담긴 쟁반을 들고
나왔다. 탁자 위에 쟁반을 놓자마자 바나나는 순식간에 바닥을
드러냈다.
"참, 회장님. 이번에 미스코리아 심사위원 전원이 사과성명을
낸다는 소리가 들리는데 사실인가요?"
성주라가 바나나 껍질을 벗기면서 물었다.
"글쎄, 아직은 좀......"
유여사는 말끝을 흐렸다.
"이번에 여러 명이 회장선거에 출마한다고 하던데......"
8x 진이 바나나를 한 입 물어 씹으면서 말했다.
"응. 그러나 저러나 죽은 진 때문에 재출마를 포기해야
할까봐. 강여사도 안 됐어. 힘들게 당선시켜놨더니......"
유여사는 성주라가 까서 건네준 바나나를 힘없이 깨물면서
한숨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그거야 이미 엎질러진 물인데요 뭐. 회장님이 그동안 우리
녹미회를 위해서 얼마나 많은 일을 하셨는데요. 불우노인
돕기운동, 고아원 설립, 사랑의 바자회 등등 이루 헤아릴수
없잖아요. 저는 누가 뭐래도 회장님을 찍을 거예요."
8x 진은 착한 딸처럼 말했다. 다른 미스코리아들도
이구동성으로 유여사를 칭찬하고 있었다. 그러나 성주라만은
아무도 눈치채지 못하게 손목시계를 보면서 근심스런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러다가 시간이 되자 제일 먼저 일어나서
응접실로 나왔다. 성주라가 좀더 놀다가라는 유여사의 친절한
목소리를 뒤로 하고 감시카메라가 설치된 철제문을 나왔을 때는
16시 30분이었다.
사건 발생 16일째.
"뭐라구? 성주라양이 실종됐다구?"
특수수사과에 성주라의 실종신고가 통보된 건 그녀가 유여사
댁을 나선지 24시간이 채 되지 못해서였다. 어저께 오후 16시
30분에 약속이 있다면서 떠난지 하룻밤이 지나도록 집에 전화
한통 없었다는 것이었다.
관할 경찰서에 실종신고를 낸 성주라양의 부모에 의하면,
자정이 넘도록 딸이 귀가하지 않아서 딸이 갈만한 곳을 다
연락해보았지만 어느 한 사람도 주라를 만나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뜬 눈으로 밤을 새운 그날 아침부터 딸을 찾는 전화가
쉴 사이없이 걸려오는데도 주라의 행방은 감감 무소식이었다.
영화촬영 시간을 알려주는 전화, FM 초대손님으로 나오게
되었으니까 잊지 말고 출연해 달라는 전화, CF 광고 계약을 오늘
낮에 해야 된다는 전화 등, 딸을 찾는 전화는 정오까지 계속
왔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점심시간부터는 펑크를 낸 딸을
질타하는 전화가 연속적으로 걸려왔다는 것이었다. 설마했던
성주라양의 부모는 딸의 신상에 좋지 않은 일이 벌어진 거라고
믿고 부랴부랴 경찰서로 달려왔다는 것이었다.
성주라의 실종은 즉각 사건기자의 예리한 시각에 포착되어
석간신문 사회면에 2단 크기로 실렸다. 실종을 기정사실화하는
기사였다. 그리고 다시 하룻밤이 지나자 조간신문들은 일제히
올해의 미스코리아 진이었던 윤보혜의 죽음과 전년도 미스코리아
진인 성주라의 실종을 사회면 톱으로 올려놓았다.
사건 발생 17일째 되는 날, 서울시경 회의실에서는 긴급
수사회의가 열렸다. 국장 이하 시경 간부들이 참석한 수사회의는
시종 무겁고 침울한 분위기에서 이루어졌다.
회의를 끝마치고 특수수사과로 돌아온 오부장과 두 과장은
특수수사과 전원이 참석한 소회의실에서 성주라의 실종수사를
지시하였다.
특수수사과는 윤보혜의 탐문수사를 벌이고 있는 특수반과
지능반, 강력반, 체포반 등 모두 35명의 인원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오부장은 제1과는 윤보혜의 수사를 전담케 했고, 제2과는
성주라의 실종수사에 전력투구할 수 있도록 역할분담을
해주었다. 그런 다음에 오부장은 장과장과 2과장을 양 옆에
대동한 채 심각한 표정으로 수사 지시를 내렸다.
"전년도 미스코리아 진인 성주라양의 실종은 올해의
미스코리아 진이었던 윤보혜양의 죽음과 밀접한 상관관계가
있다는 우리의 분석이다. 성주라양은 납치된 것이 분명하다.
이틀 밤이 지나도록 어느 곳에도 전화 한통이 없다는 건, 그녀의
신상에 중대한 변화가 일어났으리란 걸 삼척동자도 다 느끼는
사실일 것이다.
자, 2과의 특수반은 성주라양의 주변인물에 대한 23일 16시
30분을 전후한 알리바이를 빠른 시간 내에 확인, 2과장에게
보고하도록 한다. 면식범에 의한 납치일 가능성이 높은만큼
23일에 약속한 인물이 주변인물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지능반은 유진숙 여사 댁에서부터 성주라양이 움직였을
거리들을 체크해본 다음 탐문수사를 벌여 약속 장소를 찾아내야
한다. 성주라양이 16시 30분에 출발했다면 17시나 17시 30분
정시에 이루어지는 보통의 약속시간을 계산에 넣길 바란다.
아, 그리고 강력반은 관할 경찰서로 가서 호텔, 모텔, 여관 등
숙박업소에 대한 검색, 탐문수사를 한다. 성주라양의 얼굴이
많이 알려진 편이라 수사하는데는 약간의 도움이 될 것이다. 에,
체포반은 성주라양의 아파트단지 내의 불량배, 유여사님 댁
동네쪽의 불량배나 전과자에 대한 수사를 벌이도록 한다. 오고
가는 길에 불량배로부터 납치되었을 가능성이 있을지도 모른다.
구체적인 사항은 2과장이 지시할 것이다."
오부장이 소회의실을 나가자 2과장은 2과 부하형사들에게
자세한 지시 사항을 내렸다. 2과장의 행동개시 명령이
떨어지기무섭게 2과 형사들이 썰물처럼 소회의실을 빠져나갔다.
소회의실은 교실처럼 넓어보였다. 오부장의 특별배려로 여전히
리베로 수사를 벌이고 있는 남형사와 윤형사는 두 미스코리아의
죽음과 실종을 연계해서 사건을 심도있게 분석해보았다.
"강제납치가 분명하겠지?"
윤형사가 먼저 말했다.
"그럴거야. 스케줄을 펑크내면서 자신만의 시간을 즐길 수도
있지만 현재로서는 납치된 게 틀림없어 보여."
"생명의 위협을 느끼고 있다는 건 아닐까?"
"면식범의 소행이 분명하다면 이미 숨이 끊어졌을지도 몰라."
남형사가 심각한 어조로 말했다.
"그래. 그럴 가능성이 있어. 범인은 사체를 유기했을지도
몰라."
"성주라양이 마음 놓고 만날 수 있는 사람은 몇 안 될거야.
윤보혜를 독살한 범인일 가능성이 매우 높아보여."
"나도 그렇게 생각해. 성주라양의 실종으로 인해 공통점이
하나 부각되었어. 전년도 미스코리아 진과 올해의 미스코리아
진이라는 점이야. 어쩌면 범인은 미스코리아를 상대로 하고
있는지 몰라. 그것도 왕관을 쓴 진만을 상대로 말이야."
"성주라양의 주변인물 중에 성도착증 증세를 가진 정신병자가
존재하고 있는 건 아닐까?"
남형사가 말했다.
"홀에 모였던 사람들 중에서?"
윤형사가 반문하듯이 물었다.
"여왕 같은 미스코리아들을 죽임으로 해서 어떤 쾌감을
맛보려고 살인을 저지를 수도 있어. 이를테면 <미스코리아는
영원히 내 것이다>하는 그런 육욕적인 심리가 거대한 소유욕으로
발전해서 자기 손으로 죽이고야 마는 증세 같은 거 말이야."
"그런 일이 일어날 수 있을까?"
"옆에서 미스코리아들의 향기로운 숨결을 자주 듣게 된다면
일어날 수도 있는 일이라고 생각해. 결국은 사랑인 셈이지.
그러나 자신은 미스코리아를 가질 수 없는 몸이고, 곧 그
아름다운 미스코리아들은 꽃과 벌처럼 사람을 찾아 다른 남자의
품으로 떠날거고, 혼자만의 짝사랑인 셈이지. 그래서 극도의
외로움에 빠진 범인은 위기에 처한 어미 고양이가 자기 새끼를
가차없이 물어죽이는 행위처럼 아름다운 미스코리아가 다른
남자의 육체에 더렵혀지기 전에 자기 손으로 죽여버릴 수도
있지."
"홀에 있던 남자들 중에서 그런 정신병자가 누가 있겠어?"
윤형사가 말했다.
"있지, 딱 한 명이 있어."
남형사는 조용한 음성으로 말했다.
"그게 누군데?"
"바로 김진건 아나운서야. 그 사람은 10년 동안 미스코리아
선발대회 사회자를 맡아왔어. 진은 언제나 그 사람 앞에서
탄생되었어. 가장 가까운 곳에서. 윤형사, 기억나?"
"뭐가."
"미스코리아 선발대회에서 15명의 본선 진출자가 가려졌을
때의 인터뷰 말이야."
"무슨 인터뷴데?"
윤형사는 기억조차 할 수 없다는 눈빛으로 남형사를
바라보았다.
"나도 지금 정확한 인터뷰 대사가 기억나진 않지만 그때
느끼기로는 윤보혜와 김진건 아나운서의 인터뷰는 폭소가
터질만큼 인상적이었어. 김진건 아나운서가 윤보혜에게 첫사랑을
해본 경험이 있느냐고 했을 때 윤보혜는 김진건 아나운서를 복
첫눈에 반했다고 대답한 말 말이야."
"그랬었나? ......그거야 순간적인 재치로 농담에 가까운
얘기잖아."
"물론 별 생각없이 웃어넘길 수 있는 얘기야. 그러나 김진건
아나운서는 그 말을 받아서 세월이 우리를 갈라놓았다고 하면서
어떤 남자와 결혼했으면 좋겠느냐고 살짝 화제를 돌렸던 걸로
기억해."
"대단한 기억력이군."
"당연할 수밖에. 난 4번인 윤보혜를 처음부터 진으로 꼽고
있었으니까."
"뽑힐 여왕이 뽑혔으니까 기분이 좋았겠네?"
윤형사가 퉁명스럽게 말했다.
"질투하는거야?"
남형사가 웃으면서 말했다.
"얘기나 계속해."
윤형사가 뾰로통한 얼굴로 말했다.
"분명히, 생각해보고 말 것도 없이 두 사람의 대화는 아무
의미도 없는 인터뷰일 수도 있어. 그러나 김진건 아나운서가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 정신질환을 가진 사람이라면 그의 인터뷰
대사는 많을 걸 암시해. 마치 속마음을 숨기듯 우리는 이루어질
수 없는 사이라고 못박고 얼른 어떤 남자와 결혼했으면
좋겠느내고 한 말은 그의 심리의 흐름 상태를 대변해주고 있어."
"비약도 엄청난 비약이야. 그건 단순한 인터뷰일 뿐이야. 그런
농담 같은 말 한 마디로 살인동기를 부여한다는 건 지나친
논리야."
윤형사는 강하게 고개를 저었다.
"윤형사는 남자의 속성을 잘 모르는군. 흔한 말로 열 여자
실다는 남자 없어. 그게 상대가 미스코리아라면 어떤 남자건
본성을 가지고 있게 마련이야. 열손가락 깨물어서 안 아픈
손가락이 없다는 부모 심정과 같다고나 할까. 김진건 아나운서가
올해의 진과 전년도 진을 육욕적으로 생각하고 소유욕에 집착한
나머지 살인을 저지를 수도 있는 일이야. 더군다나 김진건
아나운서는 두 진의 향기로운 숨결을 들을 수 있는 가장 가까운
곳에서 있었어. 파라노이아(註: 편집병. 정신병의 일종으로
피해.과대.연애망상증 따위가 있음) 증세가 있다면 살인은
일어날 수 있어."
"말도 안 돼. 한 남자가 여러 여자한테 미쳐서 하나씩 죽인다.
그건 나로서는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살인동기야."
두 형사에게 최초의 의견대립이 발생하고 있었다.
"뚱뚱하고 마귀할멈처럼 못생긴 여자들이 아니고 엄격한
심사를 거쳐서 인정된 미스코리아들이라니까. 그것도 20세
전후의 꽃띠 나이들이야. 처녀성을 간직한 최고의
미녀들이라니까."
"그럼 앞으로 제3의 제4의 미스코리아가 연속해서 살해될 수도
있다는 얘기야?"
"일어나지 말라는 법도 없어. 실제로 진인 두 미스코리아가
죽었거나 실종되었잖아. 두 명의 진이 말이야."
윤형사는 얼굴색이 약간 변하고 있었다.
"그렇지만 성주라양은 실종된 거지 살해당한 건 아니잖아."
"난 살해당했다고 확신해. 이후에도 아름다운 표적은 얼마든지
있어. 나비향양도 아름다운 표적이 될 수 있어. 제3의 희생자가
미스코리아가 된다는 건 대형 거울을 보듯 분명한 사실이야."
"난 도무지 아해할 수가 없어. 극단적으로 표현한다면 자기
것이 아니면서 남주기 아깝다고 무고한 미스코리아를 죽인다는
게 도저히 이해가 안 돼."
"그러게 남녀 관계란 영원한 미스터리랬잖아. 결국 정신병자
짓인걸 뭐. 우리는 과학적인 논리에 따라 사실 여부를 가리면
되는 거니까, 비록 두 진의 살인동기가 비현실적인 면이 있다손
치더라도 윤형사가 협조 좀 해줘. 난 윤보혜의 과거를 더 깊이
파고 들어가야 하니까 시간이 모자라."
"그래, 좋아. 시간 낭비하는 셈치고 김진건 아나운서를 한번
만나보지 뭐. 어차피 윤보혜의 용의자이기도 하니까."
"고마워, 윤형사. 난 윤형사가 이럴 때 최고 아름답더라."
"이미 물건너간 칭찬이야. 오늘로서 남형사의 심보를 다
알았어."
"뭘? 내가 뭘 어쨌다구."
"열 여자 마다 않는 짐승이라는 걸."
윤형사는 정말 심각한 표정으로 말했다.
"예를 들면 그렇다는 거지. 나한테 미스코리아 한 트럭이
실려와도 안 갖는다. 트럭만 갖지."
"당연히 그러겠지. 소유할 수 없으니까 트럭에 묻은
미스코리아들의 향기로운 향수라도 맡아야 하니까. 킁킁대면서
말이아."
윤형사는 소회의실 문을 열고 나가면서 입술을 삐죽 내밀고
힘껏 문을 닫았다.
"어디 가는거야?"
남형사가 문을 열고 뒤따라가면서 빠르게 물었다.
"가긴 어딜가. 월급 받는 처지니까 밥값하러 가는거지. 이따가
수사회의에서 봐."
남형사는 복도를 걸어가는 윤형사의 뒷보습을 보면서 의미있는
미소를 지었다.
"아름다운 표적. 그대는 나의 아름다운 표적이지. 후훗......"
8. 문제의 칵테일 잔
성주라의 실종수사는 오늘도 아무런 소득도 없이 수사관들의
다리품만 팔게 했다.
합동 수사회의를 마치고 일주일만에 집으로 귀가한 장과장은
욕실에서 샤워를 하고 깨끗한 속내의로 갈아입고서 파자마를
걸쳤다.
경찰관 생활 20년 만에 방 두 개짜리 단독주택을 마련한 그는
둥지를 찾아온 새처럼 안락함을 느끼며 머리도 말릴겸 선풍기를
틀었다. 처녀시절에 그렇게 곱기만 했던 아내는 어느새 눈가에
주름살을 멍에처럼 가지고 있었다. 늦은 저녁식사를 마친 그는
포만감에 담배 한 개비를 피워물고 텔리비전을 틀었다. 마감
뉴스가 끝나가고 있었다. 설겆이를 마친 아내가 젖은 손을
닦으면서 안방으로 들어와 이불을 깔려고 했다.
"조금 있다 깔지."
장과장은 담배재를 재떨이에 떨면서 텔리비전 위에 얹혀있는
비디오 세트를 바라보았다. 영화감상을 좋아하는 아내를 위해서
1년 전에 보너스를 탄 돈으로 큰 맘 먹고 구입했는데, 아내는
테이프 빌리는 돈이 아깝다면서 먼지만 쌓이게 하고 있었다.
"자기 전에 비디오 한 편 보자구."
아내는 남편의 옆에 앉아서 호기심이 가득찬 눈빛으로 화면을
바라보았다.
"무슨 테이픈데 그래요?"
"보면 알 거야."
장과장은 리모콘을 작동했다. 그는 심각한 얼굴로 화면을
지켜보기 시작했다. 몇 번씩이나 질리도록 본 화면이지만 볼
때마다 새로운 느낌이 들곤 했다. 테이블 위로 움직이지 않는
잔과 사라진 칵테일 잔 이 두 잔을 그림으로 볼 때마다
마술세계에 빠져드는 듯한 기분이었다.
화면에는 권의원과 강여사가 몸을 밀착시키고 볼룸댄스를 추는
장면이 나오고 있었다.
기대에 부풀어있던 아내는 테이프 내용을 파악하고는 실망한
표정을 짓다가 이내 그림에 관심을 나타내고 있었다.
"캬바레에서 추는 춤보다 더 야한데요."
"응, 건전한 사교댄스는 아니야......, 그런데 당신, 살림하는
여자가 캬바레 춤보다 더 야한 걸 어떻게 알았어?"
장과장은 갑자기 안색을 바꾸며 아내를 의심의 눈초리로
바라보았다.
"나한테 캬바레 갈 돈이 어딨어요. 툭하면 뉴스에 나오던데요,
뭐. 춤바람난 유부녀들이 사회문제라고 그러면서요."
"으응...... 이게 저번에 뉴스에 나왔던 테이프야. 그때
봤어?"
"봤긴 봤는데, 화면이 좀 틀리네요."
"당연하지. 편집을 해서 내보냈으니까. 어때, 볼만하지?"
"영화에 나오는 한 장면 같아요. 저기서 춤추는 사람들은
모두가 부자겠지요?"
아내는 상류사회를 동경하는 듯한 눈빛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부자 정도가 아니지. 이 파티에 들어간 비용만 해도 내
반년치 봉급과 맞먹을거야. 저 사람들한테는 껌값으로 밖에 안
여겨지겠지만 말이야."
"나도 저렇게 한번 살아봤으면......"
아내는 여전히 부러운 시선을 감추지 못하고 있었다.
"어려울 것도 없어. 춤이야 배우면 되니까. 언제 나하고 춤
배우러갈까?"
장과장은 말머리를 살짝 바꾸면서 아내를 보았다.
"당신이 그럴 시간이 어딨어요."
아내는 싫지 않은 기색이었다.
"우리 이번 사건이 종결되면 한번 배워보자구. 건전한 댄스를
가르쳐주는 교습소가 많이 있어. 부부끼리도 얼마나 많이
배우는데."
"당신, 약속했어요."
아내는 소녀처럼 좋아하고 있었다.
"가만 있어봐라......"
화면은 어느새 세 쌍이 춤을 추는 장면을 지나서 테이블이
비춰지고 있었다. 정장 차림의 여비서가 쟁반을 들고 연박사에게
칵테일 잔을 내려놓고 있었다.
"지금부터 이 화면을 잘 봐요. 요술같은 일이 벌어질테니까."
장과장은 꿈속에 젖어있는 아내의 무릎을 치면서 화면으로
다시 돌아오게 했다.
"뭐가 일어난다는 거예요?"
아내는 남편처럼 화면을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자, 이 부분이야."
장과장은 여비서가 네 잔의 투명 칵테일 잔을 다 내려놓는
순간 화면을 정지시켰다.
"분명히 잔이 네 잔이지?"
"그런데요."
장과장은 다시 화면을 작동시켰다. 네 쌍이 춤을 추는 장면이
지나가자 화면에 두 개의 테이블이 나타났다. 그는 얼른 또
화면을 정지시켰다.
"자, 봐봐. 녹색 한복을 입은 여자가 오른쪽 테이블로 옮겨와
앉았지? 그런데 왼쪽 테이블 위에는 아무 것도 없어. 반대로 세
사람이 앉아있는 오른쪽 테이블에는 세 잔의 칵테일이 놓여져
있어. 한 개의 칵테일 잔이 감쪽같이 사라진 거야. 그리고
장미꽃이 수놓아져 있는 한복을 입은 미스코리아 진의 칵테일
잔을 봐봐. 윤호혜라는 여자가 칵테일 잔을 보호하듯이 두
손으로 움켜쥐면서 볼륨댄스를 구경하고 있는 눈빛이야."
"정말 그렇네요."
아내는 이상한 일도 다 있다는 듯 흥미있는 눈빛으로 테이블
위의 칵테일 잔을 보았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칵테일 잔을 치운 사람은 아무도 없어.
아쉬운 것은 30초 가량 테이블이 비춰지지 않았다는 점이야.
별장에 다시 가서 혹시나 잔이 바닥에 떨어져서 깨지지 않았나
해서 쓰레기통을 뒤지고 유리 파편이라도 남아있나 싶어서
돋보기까지 들고 바닥을 살펴보았지만 아무런 흔적도 발견하지
못했어. 귀신이 곡할 노릇이더구만. 잔에 다리가 달려서
걸어나간 것도 아닐텐데 말이야."
영화감상과 함께 추리소설을 즐겨 읽는 아내는 남편이
고전하는 모습을 보자 안스러운 얼굴로 테이블을 노려보았다.
"......어머, 그래요. 사라진 칵테일 잔의 의문은 쉽게
풀겠는데, 윤보혜양이 방어하고 있는듯한 칵테일 잔에 독극물을
집어넣은 수법은 지금으로서는 풀기 어려운데요."
아내는 명석한 두뇌로 두 개의 칵테일 잔 중에서 사라진
칵테일의 의문을 풀었다는듯 아리송한 표정을 짓고 있는 남편을
보았다.
"그건 아주 간단한 논리예요. 잠깐만요."
아내는 주방으로 들어가서 쟁반 위에다 네 개의 양주잔을
올려놓고 들어왔다.
"그리고 더욱 중요한 건, 사라지기 전의 칵테일 잔은 마시지
않은 채로 그대로 놓여 있었다는 사실이예요."
"그렇지. 나비향양이 한 모금도 마시지 않고 김진건
아나운서와 춤을 추러 나갔어."
아내는 차례로 양주잔에다 맹물을 삼분의 일 가량 부었다.
"문제는 30초 가량 변화가 생긴 테이블이 비춰지지 않았다는
점인데요, 이 시기가 찬스인 셈이죠. 여기 두 개의 양주잔을
당신 앞에 놓을게요. 그런데 테이블과 테이블의 간격이 손을
뻗어 닿을 거리냐 아니냐가 중요한데, 화면상으로는 불가능해
보이더군요. 하여튼 내 앞에도 이렇게 두 개의 양주잔을
놓을께요."
아내는 미소를 지어가면서 설명을 하고 있었다. 그런 다음에
아내는 자기 앞에 놓인 양주잔을 집어 단숨에 마셨다.
"냉장고에서 꺼내왔더니 물이 아주 시원하네요. 저기 있는 물
한 잔 좀 나한테 줘보세요."
장과장은 별 생각없이 물이 든 양주잔을 아내에게 건네주었다.
"어머나, 당신 뒤 좀 보세요. 바퀴벌레가 기어오고 있어요."
깜짝 놀란 장과장은 몸을 돌려 바퀴벌레를 찾았다. 그러나
바퀴벌레는 없었다.
"바퀴벌레가 어디 있다고 그래. 아니?......"
장과장은 아내의 무릎 앞에 놓인 양주잔 하나가 감쪽같이
사라져있는 걸 보자 눈이 휘둥그레졌다.
"이게 어떻게 된거야?"
아내는 빙그레 웃우면서 아무 것도 없다는 듯 양손을 벌려
흔들어 보았다. 그러고 나서 아내는 배에다 숨긴 양주잔을
꺼내놓았다.
"간단하잖아요."
장과장은 약간 실망한 듯한 표정을 지으면서 한편으로는
골똘히 생각하는 눈빛을 보였다.
"그러니까 연박사가, 비디오 카메라가 춤추는 사람들을 찍자
시간을 맞춰서 칵테일을 단숨에 마시고 유진숙 여사한테
나비향의 칵테일 잔을 달라고 그랬고, 유여사는 두 개의 칵테일
잔을 들고 오른쪽 테이블로 자리를 옮겼다. 그러고 난 후
연박사는 자신이 마신 빈 칵테일 잔을 주머니 같은 데에 슬쩍
숨겼다, 그런 얘긴가?"
"아니면 유여사라는 여자가 얼른 한 잔 하고 나비향양의 잔을
가지고 오른쪽 테이블로 왔을 수도 있구요. 여기에는 이 두 가지
가능성밖에 없어요."
"그것 참, 알다가도 모를 일이군."
장과장은 빈 잔을 숨겼어야만 될 필연적인 동기를 찾아내려고
두뇌를 회전시켜 봤지만 원점에서만 맴돌고 있었다.
"빈 잔으로는 바꾸치기조차 할 수도 없었을텐데......, 홀에서
춤을 추던 사람들과는 전혀 상관없는 일인데......"
장과장은 자신의 생각을 부정하듯 강하게 고개를 저었다.
아직은 육감에 불과하지만 윤보혜를 독살한 범인은 춤추던 사람
중에 있다고 굳게 확신하고 있었다. 그런데 사라진 잔이 독살과
함수관계에 있다면 이것은 이중벽일 수도 있었다. 풀래야 풀 수
없는 이중벽이었다.
그렇다면 공범이 존재하고 있다는 것일까? 과연 아내가
말한대로 이 두 가지 가능성밖에 없을까? 결국, 유여사나 연박사
중에 한 명이 범인이란 말인가. 반대로 두 사람이 결단코 범인이
아니라면 그 사라진 칵테일 잔은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그렇다. 이건 캠코더에 의해서 이루어진 고도의 투명벽일 수도
있다. 캠코더를 계산에 넣은 함정일 수도 있는 것이다. 범인은
경찰과의 두뇌싸움을 예상하고 묘하게 이중 방어망을 쳐놓은
것이다. 어차피 캠코더는 테이블을 비추게 될 것이다. 그러면
독살의 불가능과 잔 하나가 없어진 것을 경찰이 눈치챌 것이라고
예상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여기서부터 또 유추의 한계를 느껴야 했다.
그렇다고 해도 춤을 추면서 잔을 숨길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진을 독살시키는 건 악수를 하는 방법 등으로 독을 묻힐 수도
있지만 잔만은 도저히 불가능하다.
"잔을 숨겨야 할 이유가 없잖아......"
장과장은 혼잣말로 중얼거리며 혼란에 빠진 눈빛으로 화면을
쳐다보았다.
"뭘 그렇게 깊이 생각하세요?"
"응......, 필요없는 빈 잔을 왜 숨겼는지 영문을 모르겠어."
장과장은 비디오 테이프를 꺼내 도로 서류봉투에 집어넣으면서
피곤한 음성으로 말했다.
"원인 없는 결과가 어딨어요? 간단한 논리잖아요. 두 사람이
범인이 아니라면 없어진 잔은 진범이 그 원인을 제공했겠지요."
아내는 답답하다는 투로 말했다.
"진범이 원인을 제공했다구?"
서당개 삼년이면 풍월을 읊는다더니 20년 동안 남편의 사고에
익숙해져 있는지 어떤 때는 그보다 사건분석을 더 예리하게 하는
경우도 있었다. 거기다가 추리소설에 대한 많은 독서량이 이론을
튼튼하게 뒷받침해주고 있었다.
"간단하게 밝힐 수 있는 문제였잖아요. 연박사나 유여사라는
여자를 만나서 사라진 칵테일 잔에 대한 참고 진술을 들었으면
어떤 진실이 나왔을 것 아니예요. 두 분 다 모르는 일이라고
하면 공범이 존재할 수도 있고, 둘 중에 한 사람이 진범일 수도
있는 일이지요."
아내는 힐책하듯 말했다.
"그렇지...... 이거, 우리 직업을 서로 바꾸어야겠어. 난 집안
일 하고 당신은 시경으로 출근하고. 아무래도 바꿔야겠어."
장과장은 약간 자존심이 상한 표정으로 말하면서도 입가에는
미소를 잃지 않고 있었다.
"당신은 너무 복잡하게 생각해서 탈이예요. 그러면 모두가
범인 같고 모두가 살인 동기가 있는 것 같이 보여서 그 늪에서
헤어나질 못해요. 엑기스를 뽑아야지요."
"아, 누군 그러고 싶지 않아서 그러나. 괜히 우습게 봤다가 큰
낭패 볼까봐 그러는거지. 요즘은 살인이 워낙 교묘하고 한 치의
오차가 없이 완벽해서 옛날과는 질적으로 달라. 간단하게 사건을
봤다간 뒤통수 얻어맞기 딱 알맞아."
"의심은 의심을 낳을 뿐이예요. 있는 그대로 파악하고 분석할
줄도 알아야 해요."
"맞는 얘기야. 그러나 문명사회에서는 통할 수가 없어. 나뭇잎
걸쳤을 때의 야만인보다도 더 야만스러운게 문명이야. 악의
두뇌를 제압하기가 무척 힘들어졌어."
장과장은 아내가 깐 이부자리 속으로 들어가면서 옆에 나란히
눕는 아내에게 자랑스러운 듯이 말했다.
"어릴 적 같은 동네에 사셨던, 별명이 부처형이었던 대통령도
흥미를 가지시고 있더군."
"어머, 그래요?"
"성주라양의 실종으로 사건이 더욱 커지게 생겼어."
"미스코리아들만 노리는 살인 같아요."
"우연일 수도 있어."
장과장은 하품을 하고는 감겨지는 눈을 스르르 감았다.
"연박사님은 병원에 안 계신다구요? 네, 잘 알겠어요.
수고하세요, 조박사님."
강희 여사가 무선전화기를 끊고 소파에서 막 일어나려는 순간
윤형사가 의상실 문을 열고 들어오고 있었다.
"안녕하세요, 강여사님."
강여사 앞의 소파에 앉은 윤형사는 실내를 한번 휙 둘러보고는
질문을 던졌다.
"성주라양한테서는 아무런 연락도 없었죠?"
"그러게요. 무슨 일이 있으면 나한테 제일 먼저 연락을
했었는데...... 주라한테 무슨 일이 일어난 게
틀림없어요......"
강여사는 슬픔에 젖어있는 눈으로 윤형사를 보며 말끝을 채
잊지 못했다.
"유여사님 댁을 방문하고 나서 그 집을 나오자마자 행방이
묘연해졌는데, 혹시 그날 저녁에 강여사님과 개인적인 약속이
없었나요?"
"나는 그날 경기도에 있었어요. 골프장에요."
강여사는 애써 지명을 피하고 있었다.
"경기도 어디에 있는 골프장인가요?"
"그날은 마침 의상실이 쉬는 날이어서 용인에 있는 골프장으로
골프를 치러갔어요."
"혼자요?"
"골프를 혼자 칠 수는 없지요......"
강여사는 동행인의 이름을 밝히는 걸 망설이는듯 하더니
이제부터는 개의치 않겠다는 눈빛으로 입술을 움직였다.
"권의원님과 함께 골프를 쳤어요."
"네......"
윤형사는 회의실에서 봤던 사진들을 떠올렸다.
"7시쯤에 남산 기슭에 있는 P호텔 레스트랑에서 저녁식사를
하고 9시에 집으로 들어갔어요."
"권의원님과는 자주 골프를 치셨나보지요?"
"자주는 못치고요, 한 달에 한번 두 달에 한번 정도 쳐요."
"연박사님과 유여사님은 두 분이 골프를 치는 걸 알고
계시나요?"
강여사는 쌍거풀 진 유형사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질문 내용이 좀 이상하네요."
"아이, 그런 뜻으로 질문드린 게 아니고요, 연박사님과
유여사님은 골프를 못치시느냐 하는 뜻으로 우회적으로
여쭈어본거예요."
윤형사는 변명하듯이 말했다.
"어머,내가 오해를 했군요. 두 분은 전혀 못쳐요. 그래서 몹시
망설이지요. 그렇지만 사업상 권의원님이 차지하는 비중이 워낙
커서. 아시는지 모르겠지만 우리 의상실 고객 중에는 의원님
사모님들이 상당한 수입원이 되고 있어요."
강여사는 여비서가 가져온 쥬스를 윤형사에게 권하며 상냥하게
미소짓고 있었다. 여비서와 인사를 나눈 후에 예의상 쥬스 한
모금을 마시고 탁자 위에 내려놓은 윤형사는 쥬스로 마른 입술을
축이고 있는 강여사를 빤히 쳐다보았다. 그러자 강여사가 슬쩍
그녀의 시선을 피하며 쥬스잔을 내려놓고 있었다.
"혹시 누구한테 협박 같은 거 받고 있지 않나요?"
윤형사는 강여사를 정면으로 보면서 물었다.
"무, 무슨 말인가요?"
강여사의 얼굴에 당황한 빛이 역력히 나타났다.
"강여사님, 우리 경찰은 수사상의 일로 여러 가지 정보를 얻게
돼요. 그 중에는 개인의 사생활도 은가루 속의 금가루처럼
들어오곤 하지요."
"난 무슨 뜻인지, 무슨 말뜻인지 전혀 모르겠군요."
"윤보혜양과 성주라양은 강여사님이 발굴해낸 미스코리아
진이었는데, 이번 사건으로 인해 아름다운 두 진이 우연하게도
신변에 큰 이상이 생겼어요. 강여사님으로서는 비통한 마음
금하실 길이 없겠지만 사건해결을 위해서는 한가지도 숨김없이
진실을 말해 주셔야 해요. 그래야만 사건의 실마리가 하나 둘씩
풀리게 돼요."
윤형사는 강여사의 양심에 한 가닥 희망을 걸어보았다.
강여사는 그녀의 의도를 간파한 듯 순순히 권의원과의 관계를
털어놓았다.
"......권의원님과는 처녀시절부터 아주 가깝게 지내온
사이였어요. 제가 열아홉 살의 나이로 미스코리아 진에 당선된
후 영화배우셨던 권의원님과 결혼까지 오고갈 정도로 뜨거운
사이였는데 3년 선배인 유여사가 마담뚜를 중간에 넣어서 결혼을
성사시켰어요. 십수년 전의 아픈 첫사랑이었지요. 그후 나는 1년
후에 지금의 남편인 연박사와 중매결혼을 했어요. 그 후로
권의원님은 정계에 진출하셨고 난 대학교 때 전공이었던
의상학을 살려 의상실을 경영하게 되었어요. 사실 지금까지
권의원님의 정치자금 일부가 내 손지갑에서 나오고 있어요.
권의원님과 나하고는 사업상의 관계일 뿐이예요. 과거시절에
결혼이 오고 갔던 옛 연인이라는 사실이 고작일 뿐이예요."
"연박사님을 사랑하시나요?"
강여사는 "사랑?"하면서 어금니가 보일 정도로 소리내어 크게
웃었다.
"사랑 없는 결혼의 끝은 의무밖에 안 남아요."
강여사는 손끝으로 눈가의 눈물을 찍으면서 간신히 울음을
억제하는 듯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자녀는 어떻게 되는지요?"
"없어요. 남자쪽에 문제가 있어요."
"윤보혜양에 관한 질문인데요. 박만하라는 캠코더 기사는
보혜양이 출산 경험이 있는 여자라고 퀸서울에서 주장하던데,
강여사님은 지금도 허위 게재라고 보십니까?"
윤형사는 질문 내용을 바꾸었다.
"퀸서울에는 죽은 보혜에 대한 명예 훼손죄로 고소할
생각이예요. 억울하게 죽은 보혜의 등에 재차 칼을 꽂는 그런
몰상식하고 무자비한 잡지사는 문을 닫아야 해요. 퀸서울이
확인도 하지 않고 그 기사의 엉커리 글을 실은 건 윤리상으로나
도덕적으로나 용납받지 못할 범죄행위예요."
강여사는 박만하의 얘기가 나오자 분노섞인 음성으로 말했다.
그동안의 일이 소름끼치는 모양이었다.
"우리 경찰에서도 지금 진실을 가리기 위해 백방으로
뛰어다니고 있어요. 그런데 보혜양의 과거는 전적으로
강여사님의 증언에 의해 추적해 들어간 결과인데, 혹시 보혜양이
자신의 과거를 거짓으로 얘기하지 않았을까요?"
"사실 보혜의 경우는 마찬가지지만, 몇 년 전에도 잡지사
기자들이 미스코리아의 과거 행적을 눈사람 굴리듯이 크게
불려서 당사자를 곤경에 처하게 만든 적이 여러 번 있었어요.
요정에 출입했다든지 남자 친구와 제주도로 밀월 여행을
갔다와서 혼인신고를 했다든지 가지 가지지요. 생각해 보세요.
아들까지 낳았다는 여자가 미스코리아 대회에 출전한다는 것
자체가 상상도 못할 일 아니겠어요. 여기에는 뭔가 엄청난
음모가 있을거예요. 아니면 착각이구요."
강여사는 몹시도 불쾌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신문을 보니까 권의원께서 개각 명단에 포함되지
않았더군요."
윤형사는 강여사의 표정을 관찰하면서 말했다. 순간 강여사의
얼굴이 슬픔에 젖어있었다.
"운이 없었지요. 보혜가 독살당했을 때 권의원님이 불안해하던
이유가 현실로 나타났어요."
강여사는 무척 안타까운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박만하라는 사람한테 협박 같은 걸 전혀 받지 않았나요?
보혜양이 독살당하기 전후를 해서 특히 말이예요."
"그 기사의 협박과 의원님의 입각과 무슨 연관이 있는건가요?"
강여사는 눈빛을 흐리며 물었다.
"정말 협박이 없었나요?"
"정말 없었어요."
"그것 참 이상하네요. 그 작자는 강여사님과 권의원님을
궁지에 몰아넣을 결정적인 증거를 불법적이고 야비한 방법으로
취득하고 있었어요."
"도대체 그 증거라는 게 뭔데 아까부터 자꾸 협박당하지
않았느냐고 묻는거예요?"
"사진이예요. 두 분이 함께 있는 사진이요."
강여사의 얼굴이 밀납처럼 하얗게 변하고 있었다.
"......그, 그 사진이 지금 어디 있나요......?"
"그 사진에 관해선 걱정하지 않으셔도 돼요. 다만 우리가
확인하고 싶은 것은 강여사님에게든 권의원님에게든 어떤 협박이
있었느냐는 사실이예요."
"다시 한번 분명히 말씀드리지만 나에게도 권의원님에게도
협박은 없었어요."
"그럼 그 기사가 어째서 미스코리아 선발대회장에
나타났을까요? 우연히 S문화회관에 들렀을 리가 만무일텐데요."
"그거야 그 사기꾼한테 가서 물어보아야 자세히 알 일이지요."
강여사는 목이 타는지 반쯤 남은 쥬스를 들이켰다.
윤형사는 어둡고 공포스런 눈빛을 감추고 있는 강여사와
작별인사를 하고는 택시를 집어타고 금지선 변호사 사무실로
갔다.
책상 위의 국화가 시들해져있는 사무실에서 금변호사와 인사를
나눈 윤형사는 밝은 표정으로 소파에 앉았다.
"강여사님 의상실에서 오는 중이예요. 강여사님이 안부
전해달라고 하더군요."
윤형사는 금테안경을 고쳐쓰면서 소파에 마주 앉은
금변호사에게 하지도 않은 말을 만들어 전해주었다.
"강여사께서 무척 상심하고 있지만? 주라양과 보혜양을 자기
목숨만큼이나 사랑했었는데......"
금변호사는 손에 쥔 볼펜 꼭지를 눌렀다 껐다 하변서 안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금변호사님, 퀸서울 읽어보셨나요? 박만하가 쓴 기사
말이예요."
"물론 읽었지요."
"저도 읽어봤는데, 모르는 사람이 읽으면 사실인 것처럼
받아들일 수밖에 없게 게재되어 있더군요."
"질문하는 의도를 알겠는데, 나 역시 퀸서울을 읽고 고개를
끄덕거리지 않을 수 없었어요. 박만하라는 그 잡지사 전 기자가
고의였던 착각이었든 그렇게 쓸수밖에 없었을 거예요. 사실은
나도 보혜양 뒷조사를 해봤으니까요."
금변호사는 손톱에 칠한 메니큐어를 한번 보고나서 다시
윤형사를 쳐다보았다.
"내가 보혜양의 뒷조사를 하게 된 이유는 강여사의 얘기
속에서 심한 모순점을 발견했기 때문이예요. 그래서 나는 인천에
내려가서 진의 과거 행적을 조사해봤어요. 강여사가 말해준대로
거의 사실이었어요. 그런데 그 자취방 여주인이 충격적인 말을
전해주더군요. 셋방 처녀는 임신중이었는데 출산하기 위해서
이사를 갔다고 하더군요. 나도 처음엔 보혜양이 가증스런 애라고
생각하고 치를 떨었는데 그건 하나의 오해에 불과했어요. 그
집에는 방이 여러 개 있었어요. 옆방에 순희라는 진의 친구가
자취를 하였는데, 그 여자는 그때 임신중이었어요. 한데 진의
친구 방은 냉골이라서 산모의 건강에 영향을 끼칠까봐 진이
따뜻한 자기 방을 바꿔준 거예요. 거기서부터 오해가 비롯된
거예요. 여주인은 진과 진의 친구의 이름을 모르고 있었기
때문에 셋방 처녀라고만 불렀던 거예요. 그러다가 진과 친구가
함께 전제를 얻어서 나갔는데, 얘기하기 쉽게 애기를 낳기
위해서 이사갔다고 말한거죠.
그리고 그 동오기획 사장과 경리, 그리고 여주인이 잡지나
왕관을 쓴 진의 사진과 모습을 못알아본 건 충분히 이해될 수
있는 부분이예요. 화장을 전혀 하지 않고 다니던 보애양의
얼굴과 화려한 옷과 완벽하게 변한 헤어스타일, 거기다가
최상급의 화장술로 변신한 새로운 모습의 얼굴을 단번에
알아본다는 건 무리일수밖에 없어요."
"그렇지만 산부인과 병원에 기록된 이름은 분명히 윤보애였지
않은가요?"
"나도 그 점이 이상해서 확인해 봤는데, 윤보애양이 친구인
순희라는 처녀와 같이 산부인과에 갔어요. 진이 일체의 수속을
밟아주었는데 자기 이름으로 대신 기록해 주었어요."
"그럼 그 순희라는 여자가 어디 살고 있는지 아십니까?"
윤형사는 고개를 끄덕이며 물었다.
"인천에 그대로 살고 있어요. 그 동오기획 사장의 후처죠. 그
본부인은 애를 못낳는다는군요. 그래서 딴 여자를 본 거지요.
물론 천성적인 바람둥이긴 하지만요. 이런 말은 해야 될지
모르겠지만 지금 그 회사에 있는 경리도 임신을 시켜놓았어요.
이런 모든 사실은 그 경리의 입을 통해서 나온 사실이지요."
"우리 경찰에서 갔을 때는 그런 얘기가 전혀 없었던 걸로 알고
있었는데요."
"내가 운이 좋았던 거지요. 남자 형사한테는 숨길려고
노력했겠지만 변호사인 나한테는 법에 대해서 알고 싶어
하더군요. 이런 경우를 당했는데 어쩌면 좋겠느냐고. 애기를
떼라고 폭력까지 쓰는데 어떻게 하면 피해보상은 받을 수
있겠느냐고 하면서 모든 사실을 털어놓더군요. 알고 보니까
보혜양이 그 회사를 그만둔 것도 사장의 끈질긴 요구에 도저히
견디다 못해 사표를 냈더군요. 윤보혜양의 이름으로 수속을 밟게
했던 것도 사장의 지시였던 걸로 밝혀졌어요. 그리고 그
의상실에 취직이 될 동안 용현동에 있는 전세집에서 친구의
산후를 보살펴주었더군요."
네에...... 그런데 박만하라는 기사가 그런 사실을 전혀 눈치
못채고 있었다는 게 이해가 안 가는군요."
"그거야 사장이 적당히 둘러댔으면 그만인거지요. 아니면 기사
내용대로 보혜양에 대해서 전혀 관심이 없다가 그녀가 진에
당선되자, 단독으로 뒷조사를 했다가 착각을 했는지도 모를
일이지요. 사장과 친하지 않은 이상에야 서로의 사생활에 대해서
깊은 얘기를 할 까닭이 없는 거니까요."
"결국 퀸서울에 실린 기사는 허구에 불과한 내용이군요."
"한마디로 사기인 셈이지요. 고인이 된 진에 대한 인권침해는
물론이고 이로 인해서 많은 사람들이 정신적 피해를 당하게 된
셈이지요. 모두들 박만하와 잡지사의 사기에 놀아난 결과지요."
금변호사는 책상 위의 시들은 국화꽃을 보자 찡그린 얼굴로
싱싱함을 잃은 꽃 한송이를 빼내서 휴지통에 집어넣었다.
"시들은 꽃만큼 흉해보이는 건 없지요. 더욱이 도시 속의 꽃은
들에 핀 꽃보다도 더 지저분해 보이기 마련이지요."
금변호사는 다리를 꼬고 앉아면서 볼펜 쥔 손으로 팔짱을
꼈다.
"그런데 말이예요, 박만하 기사와 윤보혜양의 사이가 약간
의심스럽다는 느낌이 들더군요."
금변호사는 팔짱을 낀 채 볼펜으로 자기 이마를 톡톡 치면서
신중하게 말하고 있었다. 윤형사는 그녀를 똑바로 보면서 궁금한
목소리로 물었다.
"어떤 점이요?"
"윤보혜양이 있는 곳에는 항상 박만하가 있었다는
사실이예요."
금변호사는 금테안경을 빛네며 말했다.
"그, 그렇군요......"
"어째서 박만하를 파티에 끌어들였느냐는점이예요. 별로
친하지도 좋지도 않은 관계였을텐데요. 강여사는 우연히 얘기가
나왔다고 했지만 그렇지 않을 수도 있지 않을까요? 강여사가
캠코더 기사 일로 고민했다는 건 언뜻 이해가 가지 않아요.
강여사의 능력으로 봐서 캠코더 기사를 하루 저녁 쓰는 건
손가락 움직이듯이 간단한 일이었을텐데 고민까지 했다는 건
강여사의 성격으로 봐서 분명히 이상한 점이예요. 캠코더 기사는
얼마든지 있거든요. 그리고 전에 찍었던 캠코더 기사를 계속
쓰는게 여러 모로 편했을텐데 갑자기 사람을 바꾼 것도 납득이
가지 않아요."
금변호사는 내부 사정을 잘 알고 있다는 눈빛으로 말하고
있었다.
"제가 기억하기로는 전의 기사가 실력이 없다고 해서 교체한
걸로 알고 있는데요."
"아니에요. 여기에는 무슨 속사정이 있는게 분명해요.
강여사는 함부로 사람을 바꾸지 않는 성격을 가지고 있어요.
박만하가 용인 별장에 나타난 건 보혜양과의 숨겨진 관계일 수도
있지만 한편으로는 강여사와 박만하의 일방적인 약속일 수도
있어요."
"그럼 강여사님이 거짓말을 했다는 말씀인가요?"
윤형사는 강여사의 공포에 질린 얼굴을 떠올리면서 금변호사의
의중을 헤아려보고 있었다.
금변호사의 츠측대로라면 강여사는 박만하로부터 협박을
당하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금변호사가 강여사와 권의원의
불륜관계를 눈치채고 있었다면 얼마든지 그런 추측이 가능할 수
있다. 물론 단순한 가정일 수도 있지만 금변호사의 지적수준으로
보아 혀가 움직이는 대로 함부로 말을 뱉어낼 여자는 아닐
것이다. 나름대로 추리를 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말을 하긴 뭣하지만, 강여사는 연박사님과의 이혼을
생각하고 있었어요. 아마 곧 이혼수속을 밟을 모양이예요.
변호사란 직업은 언제나 타인의 얘기를 많이 들어줘야 하는
고달픈 직업이지요."
금변호사는 은근히 강여사에 대해 많이 알고 있다는 듯이
얘기하고 있었다. 윤형사는 흥미있는 표정을 지으며 그녀를
새삼스런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금변호사는 얇은 입술 사이로
미소짓고 있었다. 강여사의 불행을 즐기고 있는 듯한 차가운
미소로 윤형사에게 느껴졌다.
"금변호사님, 성주라양의 실종이 있기 전에 개인적인 약속
같은 거 하신 적 없나요?"
윤형사가 화제를 바꾸며 물었다.
"주라양을 만난건 용인 별장에서가 마지막이었어요. 그동안
서로 연락 한통 없었어요.
금변호사는 쌀쌀맞은 얼굴로 대답했다.
"23일 저녁 때 어디에 있었는지요?"
"내 알리바이를 확인하려는 모양이군요. 호호호......"
금변호사는 꼬고 있던 다리가 들릴 정도로 크게 웃고 있었다.
웃음을 멈추고 난 그녀는 꼬고 있던 다리를 풀어서 반대로
다리를 꼬았다.
"변호사 협의에 있었어요. 의심나면 확인해봐요."
"형식적으로 묻는거니까 마음쓰지 마세요."
윤형사는 상냥한 목소리로 말했다. 금변호사는 이해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혹시 성주라양에게 남자 친구가 있다는 얘기는 못들었나요?"
"내가 알기론 깊이 사귀는 남자는 없는걸로 알고 있어요.
그러나 모르는 일이지요. 주라양이 워낙 미모가 뛰어나니까
첫눈에 반한 남자가 한둘은 아니겠지요. 그러나 설사 애인이
있다고 해도 주라양이 밀월 여행을 떠났을 리는 없을거예요.
정신병자에게 납치당했으면 모를까, 자기 발로 종적을 감췄을
리는 없어요."
"그렇겠지요. 요즘 박윤성 회장님 하고는 자주 만나세요?"
윤형사가 친근한 목소리로 물었다. 그녀에게 좋은 감정을
가지고 있던 금변호사는 박회장 얘기가 나오자 금새 얼굴 표정이
밝아졌다.
"자주 만나지는 못하고 가끔 만나요. 전화는 자주 주고 받는
편이예요. 회장님도 주라양이 실종된 것에 대해서 무척 걱정을
하고 있어요."
"박회장님은 술을 좋아하는 편이신가요?"
"술이요? 글쎄요, 사업상 자주 마시는 걸로 알지만 주량은 잘
모르겠어요. 원래 술이란 게 분위기에 많이 좌우되는 거잖아요."
"금변호사님은 주량이 어느 정도 되시나요?"
"직업이 직업이니만큼 술 친구가 주로 남자 변호사님들이라서
자연적으로 늘게 되더군요. 밤새도록 마신 경험도 여러 번
있어요. 그 다음날 내내 소파 신세를 지긴 하지만요, 호호호."
금변호사는 남자 얘기와 술 얘기가 나오자 얼굴에 화색이 돌
정도로 즐거워했다. 여성들의 알콜 중독이 사회문제화되고 있는
세태의 한 단면을 보고 있는듯한 느낌이 들었다.
"그런데 술에 취하면 자신도 모르게 손버릇이 고약해지는
습관이 있다는 얘기는 들어보신 적 있나요?"
윤형사는 슬쩍 유도심문을 해보았다.
"도착, 도벽심리를 말하는 모양인데, 그런 사람들이 의외로
많아요. 상대방의 고급 라이타를 슬쩍 자기 주머니에 집어넣는
사람도 있고 주위에 탐나는 물건이 있으면 취중이라는 힘을
이용해서 별 죄의식없이 주머니에 집어넣는 사람들이 의외로
많이 있어요. 술이 유죄인 셈이죠."
"그럼 외제 칵테일 잔도 주머니에 넣을 수 있겠군요?"
"물론이죠. 특별히 탐이 났거나 순간적으로 도심이 발동해서
집어넣을 수도 있는 일이지요."
"그러나 용인 별장에서는 취할 정도로 술을 마신 사람은 없지
않았을까요? 정원에서의 식사에서도 한두 잔의 와인밖에 더
들었겠어요?"
"무슨 뜻인지 알겠어요. 나도 그 점이 참 이상했어요. 어째서
한 잔의 칵테일 잔이 없어졌는지 이해가 되지 않더라구요.
아시겠지만 거기 모인 사람들 중에 칵테일 잔을 탐내고 슬쩍할
사람들은 한 분도 없지요. 거기다가 술이 취한 분도 없었구요.
나도 방송국에서 편집해서 내보낸 화면을 유심히 관찰해보았는데
한 가지 결론밖에 나오지 않더군요. 칵테일이 들어있는 잔을
마신 사람이 가져갔다는 결론밖에 나지 않더군요. 칵테일이 든
잔을 그대로 주머니 속에 집어넣는다는 것도 우습잖아요.
확실히는 모르겠지만 유여사님이 한복 속에 숨겼거나 연박사님이
숨겼을지도 모르지요."
"왜 그랬을까요?"
"그거야 낸들 알수 있나요. 윤형사 말대로 도심이
발동해선지도 알 수 없는 일이지요."
"도심이 발동했다면 유여사님이 숨겼겠군요"
"무슨 근거로요?"
"주인이 자기 물건을 훔쳤을 리는 만무일테니까요."
"아, 그렇군요. 그런데 아무리 생각해보아도 보혜양의 칵테일
잔에 파라티온을 집어넣을 시간적 여유가 거의 없었는데, 언제
타넣었는지 알수가 없네요. 정말 눈깜짝할 사이에 이루어진
독살이예요."
금변호사는 시간이 한가한지 사건 속에 빠져있었다.
"그래요, 정말. 헌데, 이제는 윤보혜양이 독살을 당할 이유가
없어졌잖아요. 그렇기에 더욱 의문스러워져요. 보혜양이
누구한테 원한을 샀을 리도 없고, 또 그곳에 모인 초대객들
하고도 사실상 초면들이나 마찬가지였을텐데 말이예요."
윤형사는 진의 과거가 오해였음이 거의 밝혀진 지금, 그녀가
독살을 당할 이유가 없어진 사실에 더욱 혼란스럽기만 했다.
성주라의 실종도 윤보혜의 독살과 마찬가지로 혼란스럽기만
했다. 두 미녀가 무슨 이유로 독살당하고 실종되어야 하는지
감이 잡히지를 않고 있었다.
성도착증에 걸린 인간의 범행은 아닐까?
그렇다고 금전이나 육체를 노리고 독살을 감행한 것도
아니었다. 성주라의 경우에서도 아직까지 이렇다 할 납치목적이
나타나지 않고 있다. 몸값을 요구해오거나 사랑을 위해서
납치했다는 납치자의 항변 메시지조차 없는 것이다.
"윤형사, 혹시 말이예요. 보혜양이 칵테일 잔에 든 파라티온을
마시고 죽은 게 아니라 다른 경우로 죽은 건 아닐까요?"
금변호사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말했다.
"다른 경우라니요?"
"칵테일 잔에 든 파라티온은 일종의 트릭일수 있고 사라진
칵테일 잔이 진짜일 수도 있지 않을까요?"
금변호사는 예리한 눈빛으로 말했다.
"무슨 뜻인지......?"
"잔을 바꿔치기 한건 아닐까요?"
"어떻게 말인가요?"
"범인이 들고 있던 칵테일 잔과 주인을 잃어버린 칵테일 잔,
그리고 보혜양의 칵테일 잔, 이렇게 삼각구도를 이룬 상태에서의
바꿔치기가 교묘하게 이루어질 수도 있었지 않았을까요?"
"삼각 구도라니요?"
"어차피 비디오 테이프로는 진실을 가릴 수 없는 것
아니겠어요. 이를테면 두 개의 칵테일 잔을 하나의 잔으로
만드는 거죠. 범인이 반을 마시고 주인 잃은 잔을 마신 잔에다가
붓는 거예요. 그렇게 되면 범인의 잔은 그대로 한잔이 되고 주인
잃은 잔은 반잔이 남게되죠. 그러고나서 주인 잃은 반잔에다가
파라티온을 집어넣는거예요. 그 반쯤 남은 잔을 보혜양의 칵테일
잔과 바꿔치기 하는거예요. 연박사는 강여사와 권의원이 춤을
추는 것에 정신을 빼앗겨있기 때문에 바꿔치기 한 것을 모르고
있는거지요. 당사자인 보혜양은 별로 개의치 않았을거구요. 곧
죽게 될 여자가 잔이 바뀌는 바람에 죽었다 라고 소리칠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요."
윤형사는 속으로 아차했다. 진의 칵테일 잔은 죽기 전에
반잔이 남아있었다. 그리고 진은 남은 칵테일을 마시고 숨진
것이다.
장과장과 남형사는 진이 칵테일을 처음 마시자마자 숨진 걸로
알고 있었다. 그렇다. 진은 이미 칵테일을 마셨던 상태였다.
그리고나서 두번째로 칵테일을 마셨을 때 파라티온에 중독된
것이다.
그렇다면 이게 어찌된 일인가! 금변호사는 특수수사과
형사들의 두뇌보다 앞서 가고 있는 게 아닌가. 그렇다면 사건을
재구성해 보아야 된다. 남형사가 추리한 입술에 바르는
립스틱에다 파라티온을 바르는 방법도, 악수를 하면서 손가락에
파라티온을 묻혀놓는 수법도 한낱 상상에 불과한 얘기밖에 되지
않는다. 반쯤 남은 칵테일이라는 것을 진작 왜 발견하지
못했을까?
"그래요, 금변호사님. 진의 칵테일 잔은 분명히
반잔이었어요."
윤형사는 흥분을 감추지 못하고 격앙된 어조로 말하고 있었다.
"그러니까 여기에 트릭이 있는게 아니겠어요?"
금변호사는 흥분을 하고 있는 윤형사를 보면서 의아해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건 어디까지나 하나의 가정에 불과한
일이예요. 유여사님밖에 그런 일을 할 사람이 없는데 말도 안
되는 얘기예요. 다만 현장 정황으로 봐서 그럴 가능성이 있다는
추측일 뿐이지요."
금변호사는 자신의 수다에 마음이 걸렸는지 찜찜한 얼굴로
다시 말을 이었다.
"반대로 유여사님이, 물론 당연한 애기겠지만 파라티온과
상관없으셨다면 보혜양의 잔에 파라티온이 타진 것은 그야말로
눈깜짝할 사이에 이루어졌다고밖에 볼 수가 없어요. 기껏해야
보혜양이 첫 잔을 마시고 두번째로 마실 시간 뿐인데 너무나
짧은 시간 아니겠어요. 그 시간에 홀에서 춤을 추고 있던
사람들이 파라티온을 타넣는다는 것은 불가능 중의
불가능이지요."
금변호사의 눈빛은 어느새 자신은 물론이지만 홀에서 춤을
추고 있는 사람들은 절대로 범인이 될 수 없다는 것을
우회적으로 강변하고 있었다. 윤형사는 작게 한숨을 쉬며 단호한
눈빛으로 자신을 보고 있는 금변호사의 시선을 피하면서 난감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래서 금변호사가 이상하리만큼 사건분석에 열을 내고
달려들었단 말인가? 자신의 무죄를 논리적으로 입증하기 위해서
한가한 시간임을 내세워 별 짜증없이 상대를 해주고 있었단
말인가? 금변호사의 말대로라면 홀에 있던 사람들은
용의선상에서 완전히 제외된다. 독살은 도저히 불가능하다. 결국
범인은 연박사와와 유여사, 둘 중의 한 명이었단 말인가? 아니,
보혜양을 독살한 진범은 유여사였단 말인가. 그럼 성주라양의
실종은 어떻게 된 것일까? 진의 독살과는 아무런 연관이 없는
단순 실종이었단 얘긴가. 유여사는 성주라양이 약속장소로
나갔을 그 시각에 미스코리아들과 함께 집에 있었다. 성주라양의
실종과는 직접적인 관계가 없는 유여사였다.
어쨌든, 반쯤 남은 칵테일 잔은 범인이 누구인가를 극명하게
표시해주고 있다. 연박사와 유여사밖에 진범이 나올래야 나올
수가 없는 상황이었다.
"그렇네요. 헌데, 범인이 칵테일 잔을 바꿔치기 할 시간적인
여유가 없었을텐데요. 테이프에 나타난 화면상으로는 불과 30초
여유밖에 없었는데 언제 바꿔치기를 했을까요?"
윤형사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했다.
"아무튼 보혜양이 여비서로부터 칵테일 잔을 받아서 반잔의
칵테일을 마시고 숨졌다는 사실이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잔을 누가 감췄는지는 별개의 문제고, 파라티온이 든 반쯤 남은
칵테일을 마셨다는 건 범인이 한정되어 있다는 결정적인 얘기가
되는거지요. 그렇지 않나요, 윤형사?"
금변호사는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곤혹스러워하는 윤형사를
정면으로 보면서 물었다.
"그, 그렇네요."
윤형사는 착잡한 심정으로 대답했다. 그러나 가슴 한쪽
구석에서는 홀에서 볼룸댄스를 추던 네 쌍에 대한 미련을 쉽게
떨쳐버릴 수가 없었다. 웬지 이중 삼중으로 보호장벽이 쳐졌다는
느낌만 강렬하게 들 뿐이었다.
"그렇지만 윤형사, 연박사님이나 유여사님이 보혜양을
독살할만한 동기를 단 한 가지도 갖고 있지 않다고 생각해요.
오히려 주방쪽에 있던 요리사들이나 여비서를 집중적으로
조사해보는 게 빠를지도 몰라요."
금변호사가 충고하듯이 말했다.
"그럼 홀에서 춤을 추고 있던 분들도 용의자 명단에 그대로
남겨놓아야겠군요.
기분이 상한듯 윤형사는 날카로운 시선을 금변호사에게
꽂았다.
"무슨 말뜻이지요?"
"그 사람들이 반쯤 남은 칵테일을 바꿔치기 할 수 있었다면
춤추던 사람들도 못할 리 없는 일 아니겠어요?"
"이런, 내가 실언을 했네요. 주방에 있던 사람들도
제외시켜야겠네요. 그럼 장말 보혜양이 자살한건가?"
금변호사는 순간적으로 낭패한 표정을 지으며 억지로 미소를
띠우고 있었다.
"오늘 말씀 고마웠어요."
"뭘요. 수사에 도움이 될 일이 있으면 언제든지 찾아오세요.
내가 힘 닿는데까지 도와드릴게요."
"네, 고맙습니다."
윤형사는 사무실 문까지 바래다주는 금변호사와 짧은 인사를
나누고는 힘없는 걸음으로 빌딩을 나왔다.
9. 사라진 미녀
전년도 미스코리아 진인 성주라양의 실종 수사는 열흘이
지나도록 한치의 진전이 없었다. 그녀가 실종 당일날 만났을
약속 장소와 상대방은 물론이고 진을 목격한 증인조차 한 사람도
나타나지 않고 있었다.
그러자 경찰에서는 성주라양이 외국으로 도피 여행을
떠났을지도 모른다는 가정하에 실종된 날을 전후해서 공항의
출국자 명단을 체크해보기도 했지만 진의 이름은 어디에도
없었다. 또 일부 수사요원은 진이 인신매매를 당했을지도
모른다고 주장하는가 하면 다른 수사요원은 어느 깊은 산 속으로
들어가 음독자살을 했을지도 모른다고 의견을 내놓고 있었다.
그러나 성주라양의 부모는 딸이 자살할 이유가 없으며 친하게
사귄 남자 친구는 물론이고 실종 전날 밤과 아침에도 평소와
마찬가지로 일에 대한 의욕이 넘쳤을 뿐만 아니라 화장을 하면서
콧노래를 부를 정도로 명랑했다고 울먹이면서 말했다.
성주라양의 모습은 대중에게 제법 알려진 편인데도 실종
열흘이 지나도록 그녀의 모습을 본 행인이 한 사람도 없다는
사실은 불운이 아닐수 없었다. 더군다나 성주라양은 그날 늘
타고 다녔던 그랜저 승용차를 아파트 주차장에 놔두고 택시를
타고 유여사 집을 방문하였다. 그러면 진이 약속장소에 나갈
때도 택시를 이용했을 것이 분명한데 그녀를 태워다 주었을 택시
운전사도 아직까지 모습을 나타내지 않고 있었다. 더욱이 그녀는
다른 미스크리아들보다 1시간 정도 먼저 유여사 집을 나왔기
때문에 골목길을 혼자 걸어가야 했다. 대로까지는 불과 30미터
거리이긴 했지만 그 사이에 신변에 이상이 생겼을 리는
희박하다.
도대체 지금 성주라양은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는 것일까?
성주라양의 방에서도 이렇다할 단서가 나오지 않았다. 그녀가
일기를 스는 것도 아니었고 메모를 해두는 성격도 아니었다.
스캔들을 의식해서였는지, 진의 콧대가 하늘처럼 높아서였는지
열성적으로 사귀는 남자도 없어보였다. 가끔가다가 그녀를
짝사랑하는 남자 팬으로부터 결혼해 달라는 팬레터와 목숨을
담보로 한 구혼 전화가 있었긴 했지만 사건 당일날 약속했을
사람하고는 거리가 멀어보였다.
성주라양이 선배 언니와의 볼링 제의까지 거절하고 만나려고
했던 사람은 누굴까?
남형사는 진의 실종을 해결하는데는 발로 뛰는 수사보다는
냉정한 마음으로 뇌세포를 움직이는 것이 현재로서는 우위라고
여겼는지, 한참동안 꼼짝도 않고 특수수사과 소파에 앉아 턱을
괸 채 곰곰이 생각하고 있었다.
그동안 탐문수사를 벌인 수사관들의 자료를 종합해보면,
성주라의 모습은 어디에서도 발견할 수가 없었다. 하얀 모자를
쓰고 선글라스를 껴서 얼굴이 알려진 진을 제대로 알아볼 수
있는 목격자들이 없을 수도 있겠지만 서울 시내를 활보하고
다녔을 진을 한 사람도 보지 못했다는 사실이 한편으로는
의아스럽게까지 느껴졌다. 또한 그녀와 친분관계가 있을듯 싶은
사람들의 알리바이를 모두 조사해 보았지만 이렇다할 혐의점이
드러나보이는 사람은 한명도 없었다.
범인은 어떻게 납치를 했길래 그렇게 감쪽같이 사라지게 할 수
있었을까? 그것도 어둠이 내리지 않은 도시의 거리에서
자연스럽게 투명의 세계 속으로 잠적해 버릴수 있었을까?
남형사는 장시간 동안 탁자 위에 놓인 수사자료를
분석해보면서 진의 실종을 분석해 보았지만 그럴듯한 생각조차
떠오르지를 않았다.
빌어먹을, 이런 것을 두고 오리무중이라고 했던가!
그는 일단 성주라양이 범인에 의해 살해당했다고 단정을
지었다. 그리고 그녀의 시체는 땅속에 깊이 매장되었거나 돌에
매어 강물에 버려졌을 거라고 포기하듯 인정해버렸다.
그렇다고 해도 누가 그 짓을 했을까?
남형사는 용인 별장에 모였던 초대객들의 얼굴을 하나 둘씩
떠올려보았다. 권의원과 강여사는 용인에 있는 골프장에 함께
있었고, 금변호사는 협회에 있었고, 유여사는 자택에 있었다.
그리고 임국장은 방송국에서 회의를 하고 있었고, 나비향은
박회장과 함께 영동 고속도로를 드라이브 했던 걸로 밝혀졌다.
연박사는 그 시간에 병원에 있었던 걸로 알리바이가 확인되었다.
모두가 성주라양의 실종과는 거리가 멀어보였다.
그런데 김진건 아나운서만은 그날의 행적에 대해서 불분명하게
얘기했던 걸로 기록되어져 있다. 그날따라 우울한 기분이 들어서
마침 방송 스케줄도 없고 해서 시내 거리를 하릴없이 걷고
다녔다는 것이었다. 그럼에도 그가 그날 진과 약속한
장본인이라는 의혹은 전혀 없어보였다. 설사 그가 진과 비밀스런
만남을 즐겼을지도 모른다고 가정해 보아도 그날의 그는 진을
납치하지 않은 것만은 분명한 사실이었다. 그가 방송국
아나운서실에 모습을 나타낸 건 18시였기 때문에 진이 유여사
집을 나온 시간과는 불과 1시간 30분 차이밖에 나지 않기 때문에
교통시간을 빼면 사실상 30분의 만남조차도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시간 계산이 나오는 것이었다.
그렇게 한참동안 곰곰이 생각하고 있던 남형사는 스쳐가는
한가지 가능성에 찌푸렸던 얼굴을 활짝 폈다. 이어서 한 가지
가능성이 더 그의 뇌를 경주하듯이 흔들어 깨우는 것이었다.
......범인이 성주라양을 죽이기로 작정하고 있었다면 단
5분간의 만남에서도 그녀를 식물인간처럼 만들어놓을 수도 있는
것이었다. 승용차 뒷좌석에서 마취제를 주사하거나, 수면제를
타서 먹이거나, 또는 손수건에 클로로포름을 묻혀 코에 갖다대
축 늘어지게 만든 다음 진이 다시 깨어나는 시간까지 현장에서
벗어나 알리바이를 만들고 다시 되돌아올 수도 있는 일이었다.
그리고 또 한 가지 가능성은, 진의 발자욱이 어디에도 없었던
사실을 역으로 해석해보면 움직이지 않았을 가능성도 내포하고
있다는 점이다. 물건을 놓고 나갔거나 또다른 피치못할 사정으로
유여사밖에 없는 집을 다시 방문할 수도 있었지 않았을까?
그것이 화근이 되어 그 집이 성주라양의 영안실이 되었을 수도
있지 않을까?
남형사는 저녁 늦게 열린 수사회의에서 유진숙 여사댁의
정원을 수색할 것과 납치가 면식범에 의해 이루어졌을 가능성이
매우 높은만큼 일단 수사 대상을 축소해서 용인 별장에 모였던
초대객들에 한해 알리바이를 재수사하자는 의견을 내놓았다.
그러나 후자에 대한 재수사는 별 이견없이 받아들였지만 유여사,
아니 권의원 댁에 대한 가택 수색 영장을 발급받는다는 것을
무리라는 의견이 지배적이어서 편법을 사용하자는 대체 의견으로
조정되었다.
그리하여 권의원의 집을 조사하는 것은 윤형사에게로
맡겨졌다. 그리고 초대객들에 대한 알리바이는 남형사를
비롯하여 계속 2과 형사들이 전담하기로 방침이 정해졌다.
이어서 수사회의 말미에 윤보혜양에 대한 과거가 심도있게
다뤄졌다.
"남형사, 순희라는 진의 친구를 만나봤나?"
장과장은 며칠째 깍지 않은 턱수염을 매만지면서 피곤한
목소리로 물었다.
"금변호사의 말은 모두 사실이었습니다. 진과 친구는 같은
집에서 자취를 했던 것이 사실이었습니다. 친구가 전세로 살고
있는 13평 짜리 주공 아파트에서 그 여자를 만났습니다만 돐이
지난 아들도 함께 있더군요. D기획 사장 또한 깨끗이 시인을
하더군요. 박만하가 퀸서울에 투고한 내용은 거의 사실이
아니라고요. 그 주인집 여주인 역시 윤보혜양의 이름을 모르고
있었고, 키 큰 처녀로만 불렀답니다. 그리고 친구는 셋방
처녀라고 부르고 있었구요."
"그런데 그 바람둥이 사장하고 순희라는 여자하고는 어떻게
해서 그런 관계가 되었다고 하나?"
"순희씨가 보해양의 사무실에 놀러왔다가 사장의 꾐에 빠졌던
모양입니다. 좋은 곳에 취직시켜 준다고 하고선 술에 약을 타서
먹였답니다. 그리고는 여관으로 데려가......"
"알만하군. 음, 이건 사건과는 무관한 질문일 수도 있는데, 그
바람둥이 사장이 보혜양에게 눈독을 들이지 않았다는 게 오히려
더 이상하군. 두 사람 간의 특별한 관계는 발견하지 못했나?"
"윤보혜양이 워낙 몸조심을 해서 사장도 침만 흘리다 만 것
같습니다. 진이 그 회사를 그만둔 것도 사장의 끈질긴 요구에
견디다 못해 박차고 나온 것이라고 순희씨가 얘기해주더군요.
산후에도 같이 있는 보혜양을 계속 괴롭혔다는군요. 그래서
보혜양이 전세집을 나와 의상실에 취직을 했다는군요."
"그런데도 그 순희라는 여자는 바람둥이 사장의 후처로
남아있는 이유는 뭔가?"
"아들을 위해서라더군요. 생활비를 후하게 두는 편이어서
그런대로 견디고 산다고 하더군요."
"산부인과 이름은 어떻게 된건가?"
"금변호사의 말과는 약간 다른데요, 보혜양이 입원수속을 전부
밟은 게 아니고 사장이 수속을 밟았다더군요. 산모의 이름을
윤보애라고 한건 별 생각없이 불러주었기 때문이랍니다.
의료보험 때문에 고의로 속였다고 중얼거리긴 하더군요. 그리고
순희씨도 자기 이름으로 수속을 밟는 걸 원치 않았대요. 그래서
보애양의 이름을 대신 사용했나봐요."
"우스운 일도 다 있군. 그건 그렇고, 박만하와 윤보혜 양의
감춰진 관계 같은 건 없었나?"
"특별한 사이는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두 남녀 사이에 무슨
비밀이 존재했던 것 같지는 않습니다. 사장이나 경리, 여주인 등
보혜양을 알고 있는 사람들은 보혜양이 남자 관계가 깨끗했던
걸로 모두들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런 보혜양이 우연하게 강여사의 눈에 들어 미스코리아에
당선되는 행운을 잡았다......, 그렇다면 역시 진은 원한으로
독살당한 게 아니라는 결론이군."
"그렇습니다. 윤보혜양은 독살당해야 될 이유가 없었습니다."
"그리고 성주라양 역시 지금까지 드러난 수사결과로도
납치당해야 할 이유가 없는거였고."
"그렇습니다. 두 미녀 모두 원한을 산 일이 없는 아름다운
여성들입니다. 물론 인생을 살면서 타인에게 본의 아니게 미움을
샀을지도 모르지만 죽임을 당할 정도로 큰 원한을 산 적은 없을
거라고 자신할 수 있습니다. 더군다나 20대 초반의 나이들인 두
미녀가 특별하게 원한을 살 이유가 어디 있겠습니까?"
남형사는 확신에 찬 눈빛으로 연신 고개를 끄덕이고 있는
장과장을 바라보며 말했다.
"역시 두 미녀가 미스코리아라는 공통점이 독살과 실종에
밀접한 상관관계를 맺고 있다고 봐야 되겠지?"
"현재로서는 그 점이 가장 확연하게 드러나보이는 사건
배경이라고 여겨집니다."
"윤형사."
장과장은 남형사 옆에 앉아서 잠자코 듣고만 있는 윤형사에게
따뜻한 시선을 옮기며 미소띤 얼굴로 그녀를 불렀다.
"금지선 변호사를 만나고 온 기분이 어때? 반쯤 남은 칵테일
잔과 사라진 칵테일 잔이 용의자들을 분명하게 나눠놓았다고
생각하나?"
윤형사는 얼른 대답하지 못했다.
"금지선 변호사의 주장을 뒤집을만한 논리적 대응은
없는건가?"
"......설사 유여사와 연박사가 진을 독살하지 않았다고
밝혀져도 홀에 있던 사람들이 진범이라고는 말할수 없는 상황이
되어버리고 말았어요. 춤을 추던 사람들이 칵테일 잔을 사라지게
만들고 반쯤 남은 칵테일에 파라티온은 탈 수는 없는 것입니다.
홀에서 춤을 추던 네 쌍은 용의자 명단에서 삭제하는 길밖에는
달리 도리가 없어요."
윤형사가 침울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러나 장과장은 빙그레
미소짓고 있었다.
"남형사도 그렇게 생각하나?"
질문을 받은 남형사도 장과장과 마찬가지로 미소를 짓고
있었다.
"유여사와 연박사가 진범이 아니라면 네 쌍 중의 누군가가
범인이 도겠지요. 이중 삼중으로 바리케이트를 치고 있어도
범인은 있는 곳에 있는거니까요. 빈잔에 대한 트릭은 머리만
있으면 얼마든지 벗겨낼 수 있는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남형사는 윤형사와는 대조적으로 활기차게 말했다.
"역시 천재형사답군. 그렇지만 남형사, 여기 모여있는
사람들은 자네의 그 자신감에 찬 행동에 박수를 보내기보다는
우둔한 바보라고 속으로 생각할지도 모르는 일 아닌가?"
장과장은 계속 미소를 머금은채 눈동자를 굴리고 있는
수사관들을 바라보며 말했다.
"반잔은 사실 트릭도 아닙니다. 그러나 지금 이 자리에서
밝히기보다는 범인의 얼굴 윤곽이 뚜렸해졌을 때 반잔에 대한
윤형사의 참담한 패배를 대신 설욕할까 합니다. 아직은 확실한
게 아니기 때문입니다."
회의실은 궁금증에 가득차 있었지만 내일의 수사를 위해
장과장의 해산으로 끝이 났다.
이튿날 오후, 윤형사는 산뜻한 외출복을 입고 어깨에 흰색
핸드백을 걸치고 유여사집의 초인종을 눌렀다.
권의원은 임시국회에 나가 있었다. 응접실은 에어콘이
작동되고 있어서 시원ㅎ다.
윤형사는 대문에서 응접실로 걸어들어오는 동안 정원의 흙을
살펴보았지만 객토를 한 흔적은 발견해낼 수가 없었다. 그러나
대지가 2백 평이 넘는 큰 집을 한눈에 조사해 볼 수도 없는
노릇이었기에 상황을 봐가면서 집 주위를 거닐어 볼 생각이었다.
"정원이 참 잘 가꾸어져있군요."
윤형사는 들고온 수박 한 통을 유여사에게 주면서 인사를
했다. 그러면서 정원을 의미심장한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연못에도 아름다운 물고기들이 노닐고 있고요......"
윤형사는 부러운 듯한 시선으로 정원을 한번 휙 훑어보고는
화채를 들고 들어오는 가정부를 의식하면서 유여사에게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아직도 범인을 못 잡았나요?"
유여사는 화채와 쥬스를 윤형사 앞에 똑바로 놓아주면서
근심섞인 얼굴로 물었다.
"성주라양의 실종이 겹치는 바람에 시일이 좀 걸리고 있어요.
그렇지만 곧 범인이 잡히겠지요."
윤형사는 미소를 지으면서 화채를 두 숟가락 떠먹었다.
"화채가 참 시원하네요."
윤형사는 두 숟가락 더 떠먹고는 입에 든 수박씨를 손바닥으로
받쳐서 뱉아내고 손수건으로 입술을 살짝 훔쳤다.
"처음부터 여사님에게 이런 말씀을 드리긴 좀
그런데요......."
윤형사는 일부러 말에 뜸을 들였다. 그러자 유여사는 여유있는
미소를 지으며 괜찮다고 하면서 허심탄회하게 얘기하라고
윤형사의 마음을 신경써주었다.
"회장님도 별장에서 느끼셨겠지만, 독살당한 보혜양의
옆자리에 앉아 계시는 바람에 본의 아니게 난처한 입장에 처하게
되셨는데, 지금의 상황은 더욱 불리하게 되셨어요."
윤형사는 진실한 목소리와 안타까운 눈빛으로 유여사를
바라보았다. 비록 계산된 태도였지만 유여사는 이해할 수 있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들었다.
"의심을 받을만한 자리에 앉아 있었다는 걸 나도 알고 있어요.
그런데 더욱 불리해졌다는건 무슨 뜻이지요?"
"그래서 회장님에게 질문을 드리는거니까 오해없으시기
바래요."
"물론이예요."
유여사는 정중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녀의 인품이 고결하다는
인상마저 느껴지는 그런 품위있는 태도였다.
"윤보혜양이 여비서로부터 칵테일 잔을 받고 최초로 마시는
것을 보셨는지요?"
"칵테일을 마시고 쓰러지기 전에요?"
"네, 그때는 칵테일이 반 가량 남았었지요."
"그랬던가요?"
유여사가 고개를 갸웃했다.
"기억하기로는...... 보혜양이 잔을 만지작거리고 있는 것만은
생각나는데...... 같이 앉아있던 김아나운서님과 나비향양이
춤을 추러 나가고 나서 혼자 있기가 뭣해서 테이블을
옮겼거든요."
"그때 칵테일 잔은 한 잔만 들고 옮기셨나요?"
"여러 번 수사관들에게 한 얘기지만, 그때 마침 연박사님이
잔을 비웠기 때문에 내 잔과 함께 양손에 두 잔을 들고 윤보혜양
옆 의자에 앉았지요. 그런 다음에 나는 내 잔을 내 앞에
놓고......, 아니지, 아니군요. 내 칵테일 잔을 연박사님에게
줬는지 나비향 잔을 줬는지 기억을 못하겠군요. 양손에 들고
있어서 누구거라는 개념이 순간적으로 사라져버렸나봐요.
그전까지 나는 내 칵테일 잔에 입을 대지 않았으니까요."
"나비향양의 칵테일 잔도 마찬가지였나요?"
"그럼요. 나비향양도 입 한번 대지 않았어요. 김아나운서님이
춤을 청했기에 마실 시간이 없었던 거였죠. 그게 전부예요."
"그럼 나비향양의 잔은 회장님의 의사대로 들고 오신건가요?"
"내 의사대로라니요? 아, 연박사님이 칵테일을 찾으려고
자리에서 일어나셨어요. 그런데 내 쪽 테이블에 있는 칵테일을
보고는 그 칵테일 좀 집어달라고 부탁을 하더군요. 그래서 내가
두 잔의 칵테일을 들고 테이블을 옮기게 된 거예요."
"아, 네...... 그럼 그때까지는 보혜양이 칵테일을 마셨는지
그대로 있었는지 기억이 잘 안 나시겠군요."
"글쎄요. 내가 테이블을 옮겨와 보혜양 옆에 앉았을 때는
칵테일 잔이 조금 비어있는 걸로 생각되었어요. 왜냐하면
연박사님이 칵테일을 찾을 때 보혜양이 지기 칵테일을 양보할
수도 있었는데 전혀 그러지 않았거든요. 아마 자기가 반쯤 마신
칵테일 잔을 연박사님에게 준다는 건 대단한 실례였기 때문에
모른 척 하고 있었기 않았나 생각해요."
"그럴 수도 있겠군요. 그러면 연박사님이 처음 마신 빈 잔은
그때까지도 그대로 테이블 위에 놓여있었겠네요?"
"그렇죠. 그렇지만 난 춤을 추고 있는 홀쪽을 바라보고 있었기
때문에 잔이 없어진 걸 몰랐어요."
"회장님 말씀대로라면 잔을 치운 사람은 연박사님이겠군요?"
"연박사님이요?"
유여사는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한 표정을 짓다가 더욱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그, 그렇긴 한데......, 연, 연박사님이 빈 잔을 뭣하러
치웠을까요? 그대로 놔두면 여비서가 어련히 알아서
치웠을라고요."
윤형사는 잠시동안 생각에 잠겼다.
"......회장님이 치우시지 않으셨다면 연박사님밖에 치울
사람이 없는데, 그 전에 테이블로 다가온 사람은 없었죠?"
"없었어요. 올 사람이 없었죠."
"그때 여비서는 주방에 있었을까요?"
"아마 주방에 있었을거예요. 확인하건데 보혜양이 칵테일을
마시고 쓰러지기 전까지 테이블에 있었던 사람은 나와 연박사님
뿐이었으니까요."
"그런데 참 이상하네요."
"뭐가요?"
윤형사는 의도적으로 크게 고개를 갸웃거렸다.
"저희 경찰에서 병원장실로 연박사님을 찾아뵙고 그날의
사정을 청취했는데 회장님의 말씀과 상치되는 부분이 여러 군데
있네요."
"그래요?"
유여사는 불쾌한 기색으로 윤형사를 보았다.
"연박사님은 회장님이 들고오셨다고 하더군요. 집어달라는
말은 하지 않았던 걸로 알고 있는데요."
"연박사님이 그래요?"
유여사가 눈꼬리를 치켜올리며 노골적으로 불쾌해했다.
"절대로 그렇지 않아요. 연박사님이 착각하셨을거예요. 그날
분명히 나한테 그 칵테일 좀 달라고 해서 내가 집어다주었어요."
"그리고 연박사님 말씀은 회장님이 양손에 칵테일을 들고 오신
건 사실인데, 한 잔은 반잔이 든 칵테일이었고 다른 손에 들린
칵테일은 처음 그대로 잔이 채워져 있었다고 진술할 걸로
기억하고 있어요."
유여사는 궤변이란 듯 강하게 머리를 흔들었다.
"누가 착각하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난 분명히 테이블을
옮기기 전까지 잔에다 입 한번 갖다대지 않았어요. 아무래도 안
되겠군요. 연박사님과 대질심문인가 뭔가를 해봐야겠어요.
이러다가 내가 누명을 쓰는거나 아닌지 모르겠어요. 이런 말
하는 건 도리에 벗어나는 일 같지만 잔을 숨긴건 연박사 말고 그
누가 있겠어요. 이건 한 살짜리도 눈치챌 만한 일이지요. 안
그래요, 윤형사?"
유여사는 어느새 침착함을 잃고 궁지에 몰린 쥐처럼 안절부절
못하고 있었다. 윤형사는 속으로 회심의 미소를 짓고 있었다.
인간은 위기에 처했을 때는 자신의 안위부터 생각한다는
이기주의적인 심리가 그대로 들어맞고 있었다. 그녀가 타인에게
누를 끼치는 것을 염려해서 품위를 되찾기 전데 "테이블의
비밀"을 밝혀낼 필요성이 있었다.
"사실은 저도 회장님과 같은 생각이예요. 그런데 또 한 가지
진술이 다른 점은, 연박사님은 자기 앞에 놓인 빈 잔이 보혜양이
쓰러지기 직전에 없어졌다는 걸 눈치채고 있었다고 했어요.
그때는 단순히 누가 치운 걸로 알고 있었는데 후에 테이블에
아무도 오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닫고는 정신이 멍해지더라고
하더군요."
"그러니까 연박사 말은 내가 감췄다는 얘긴가요? 적반하장도
유분수지, 누구한테 죄를 뒤집어 씌울려고 그래. 그 사람,
그렇게 안 봤는데 아주 속이 시커먼 사람이군."
유여사는 쥬스를 벌컥벌컥 마시고는 거친 숨을 훅 내뿜으면서
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연박사님과는 언제부터 알고 지내셨나요?"
"알고 지내긴요. 강여사와 내가 녹미회 회원인 것이 오늘날
이런 악연이 된 거지요."
"의원님과는 중매결혼하셨나요?"
"그렇게 됐어요."
유여사는 이맛살을 찌푸리며 대답했다.
"이런 질문을 드리는 건 실례가 안 되는지 모르겠습니다만,
의원님과 강여사는 결혼 전에 가까운 사이였다는 소문이
있던데......"
윤형사는 말끝을 잇지 못하고 유여사의 눈치를 살폈다.
순간적으로 유여사의 눈빛에서 질투심이 불타오르는 것을 느낄
수가 있었다.
"누가 그런 소리를 하고 다니는지 모르지만 모르는 사이는
아니였어요. 내가 알기론 결혼까지 오고 갔다는 말도 있지만
직업상의 관계일 뿐이지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고
생각해요."
유여사는 가늘게 떨리고 있는 눈꺼풀을 애써 진정시키면서
본래의 품위있는 자세로 돌아오려는양 짧게 한숨을 내쉬면서
앉은 자세를 고쳤다.
"혹시 회장님한테 누군가가 협박같은 거 해오지 않았습니까?"
"협박이요? 나한테 왜 그런 전화가 옵니까?"
유여사는 오히려 반문하듯 말했다.
"아, 아니예요. 혹시 장난 전화 같은게 오지 않았나 해서요."
윤형사는 말꼬리를 돌리면서 보일듯 말듯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집이 참 시원하고 크네요."
윤형사는 부럽다는 표정을 지으며 사방을 두리번거렸다.
"회장님, 제가 질문드렸던 건 신경쓰지 마세요. 다 형식적인
절차에 불과하거든요."
"참, 그래도 그렇지요. 연박사 그 사람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괘씸하네요. 마치 내가 잔을 훔친 것처럼 뒤집어 띄우다니, 허,
참......"
유여사는 흥분이 가시지 않은 얼굴로 앉아있었다.
"뭐, 연박사님이 착각하셨겠지요. 정말 신경쓰지 않으셔도
돼요. 오해도 다 풀렸는데요, 뭐. 그건 그렇고 이 집 꽤
비싸겠지요? 아마 저는 죽을 때까지 이런 집에서 잠 한번 자보지
못할 거예요."
"......집이 큰 대신 그만큼 불편한 것도 많아요. 잠시도 쉴
틈이 없고 고독하기까지 해요."
유여사가 본래의 미소로 돌아오면서 품위있게 말했다.
"회장님, 집 한번 구경해봐도 될까요?"
윤형사가 소녀처럼 웃으면서 일어서려고 했다.
"그러세요. 넓기만 하지 구경할 건 없어요."
윤형사는 구두를 신고 정원으로 내려왔다. 정원의 나뭇잎을
손으로 만져보고 잔디를 한 포기 잡았다가 놓으면서 땅 모양을
살펴보았다. 뒤따라오려는 유여사를 만류하고 이층 양옥 뒤의
채소밭과 담장 밑까지 현미경으로 보듯이 세밀히 훑어보았지만
달라보이는 흙은 없었다.
"채소도 직접 재배해 잡수시나보지요?"
응접실로 다시 돌아와 앉은 윤형사는 이마와 콧등에 송글송글
맺힌 땀방울을 손수건으로 닦으면서 명랑하게 물었다.
"무공해 배추를 직접 길러서 먹으니까 참 좋더군요. 고추하고
상치도 있지요."
"큰크리트 도시에서 푸른 야채를 보니까 막혔던 가슴이 탁
트이는 것 같아요. 회장님, 이만 가보겠어요. 수사에
협조해주셔서 고마왔어요. 안녕히 계세요."
윤형사는 허리를 굽혀 인사를 하고는 마중나오려는 유여사를
만류하고 골목길을 지나 버스 정류장 앞에 섰다. 시경으로 가는
버스를 기다리며 윤형사는 지나왔던 골목길을 바라보고 있었다.
유여사와 연박사의 진술중 누가 거짓이고 누가 진실일까?
그러나 그 진위 여부를 가리기 전에 빈 칵테일 잔을 왜
감췄는지 이유를 찾을 수가 없었다. 도대체 독살과 무슨 관계가
있다고 빈 잔을 감춰야만 했을까?
......만약에 빈 잔이 그대로 테이블 위에 놓여져 있었다면?
그렇다면 한 가지 사실만은 분명해진다. 연박사가 두 잔의
칵테일을 마신 걸로 된다. 그러나 그 빈 잔이 없어짐으로 해서
변명의 구실이 생겨났다. 그걸 내가 뭣하러 치우겠냐고.
그럼에도 지금으로서는 그런 변명은 궁색하다 못해 유치하기까지
하다. 빈잔을 독살 도구로 이용했다고 해도 마찬가지다. 여기에
무슨 트릭이 있을 수 있단 말인가. 범인은 어차피 둘 중의 한
명인데.
연박사와 유여사의 대질신문이 이루어지지 않아도 칵테일 잔을
마신건 연박사다. 단지 지금의 차이점은 칵테일을 유여사 스스로
들고 왔느냐 연박사가 부탁을 해서 가져왔느냐 하는 엇갈린
진술만이 문제인데, 그럼에도 결과는 마찬가지다.
윤형사는 앞에 선 버스에 올라타면서 괜히 헛걸음만 한 것
같아 울적해했다.
수사2과 수사관들은 용인 별장에 모였던 초대객들의
알리바이를 시간대별로 만들어서 하나의 서류로 철해놓았다.
이제부터는 알리바이의 진실 여부를 조사하는 과정이 남아있긴
했지만 권의원을 비롯하여 용의자 모두에게 성주라양이 실종되던
날의 시간별 알리바이를 당사자의 입을 통해 직접 알아낸 것만
해도 크나큰 소득이었다. 다행이 모두들 별 불쾌감 없이 그날의
알리바이를 기억나는 대로 얘기해 주었기 때문에 수사관들은
생각보다 수월하게 일을 처리할 수 있었다.
직속 상관인 2과장에게 1차 보고를 한 수사관들은 10명의
알리바이를 조사하기 위해서 각 지역으로 출장을 떠났다. 이틀
동안 알리바이를 조사한 수사관들은 다시 직속 상관인 2과장에게
2차 보고서를 제출하였다. 보고서를 읽은 2과장이 흡족해할
정도로 수사에 최선을 다한 흔적들이 곳곳에서 나타나 있었다.
권의원과 강희 여사는 23일 오후에 K골프장에서 골프를 친
것이 캐디의 증언에 의해 확인되었음. 그리고 1시간 동안 용인
별장에 들렀다 나왔음. 이후 서울로 올라와서 P호텔에서
포도주와 프랑스 요리를 시켜먹었음. 종업원들의 증언에 의하면
두 남녀는 식사 후에 미리 예약해놓은 501호에 투숙해서 두 시간
후에 체크 아웃을 했음. 이 시간 동안 두 남녀는 사랑 행위를 한
것으로 보이며 만난 사람은 없었음.
연성철 박사는 4시부터의 수술에 집도를 한 것이 아니라
구경(?)을 한 것으로 밝혀졌음. 한 시간 가량 수술을 지켜보다가
5시 전후에 원장실로 돌아갔음이 수술에 참가했던 닥터들과
간호사들의 증언으로 새롭게 밝혀졌음. 그리고 연박사가 모습을
나타낸 것은 수술이 끝난 7시 무렵으로 수술을 끝낸 닥터들에게
저녁을 샀음. 그 두 시간 동안 연박사는 원장실에서 장부를
조사하고 있었다고 하나 증인은 없는 셈임. 부원장인 조박사가
공금을 횡령한 느낌이 있어 은밀히 내사중이었다고 함. 더욱이
원장실은 비상계단과 연결되어 있어서 사람 눈에 띄지 않고 바깥
출입을 할 수 있음. 연박사 말로는 조박사의 횡령 액수가 크기
때문에 원장실 출입을 금지했다고 하나, 어쨌든 그 두 시간의
공백시간 동안 연박사를 보았다는 증인은 한 명도 없음.
김진건 아나운서가 두 시간 가량 산책을 한 곳은
명동거리였으며 그를 봤다는 목격자를 찾을 길이 없음. 결국
김아나운서의 알리바이는 저녁 6시까지 안개 속이었음이
분명해졌음. 그러니까 오후 2시부터 6시까지 무려 네 시간 동안
그의 알리바이는 공백상태에 있는 셈임.
금지선 변호사는 오후 3시까지 법원에 있었던 것이
확인되었으며 4시에 변호사협회에 들른 것도 사실이었음. 밤
8시까지 변호사들과 함께 있었으며, 중간에 1시간 이상 자리를
비운 적은 없었음. 그녀가 8시 이후에 개인 사무실에 잠깐
들렀다가 9시 30분쯤에 아파트로 귀가한 것은 사실임. 수위의
증언과 옆집에 사는 뚱뚱보 부인이 증언했음.
여비서는 의상실이 쉬는 날을 이용해서 전날 밤에 부모가 계신
춘천에 다녀온 것이 확인되었음. 부모와 동네 아주머니들,
구멍가게 주인 등 모두가 그녀의 알리바이를 증명해 주었음.
나머지 용의자들의 알리바이는 완벽함.
장과장는 2과장에게 넘겨받은 보고서를 탁자 위에
내려놓으면서 담배 한 개비를 빼물었다. 남형사가 2과
수사관들의 보고서를 한번 훑어보고는 암중모색하고 있는 듯한
장과장의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성주라양을 목격한 사람은
아직도 나타나지 않고 있었지만 보고서 내용 중에는 그에 못지
않은 수확이 있어보였다.
"일단 연박사와 김진건 아나운서의 알리바이에 의혹의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다고 봐야겠군요."
남형사는 담배재가 길게 늘어뜨려져 있는 장과장의 얼굴을
다시 보면서 말했다.
"그래, 두 사간의 공백과 4시간의 이유없는 나그네 행동은
성주라양의 실종과 관계가 있을 수 있는 가능성으로 숨쉬고
있어."
"연박사가 원장실에서 비상계단으로 바깥 출입을 했다면, 역시
성주라양의 약속시간과 거의 일치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연박사가 30분 정도 늦게 출발했다는 얘긴데, 연박사가 자기
차로 성주라양과의 약속장소에 나갔다면 알리바이는 얼마든지
조작할 수 있다고 봅니다."
장과장은 연신 고개를 끄덕이다가 꽁초를 재떨이에 비벼껐다.
"그런데 반대로 성주라양이 약속장소로 나간 것이 아니고
사람이 있는 곳으로 갔다면 어떻게 되는 것인가?"
"약속장소가 아니고 방문이라고요?"
남형사는 새로운 가설 앞에 혼란스런 눈빛으로 장과장을
바라보았다.
"아니면 밝혀지지 않은 제3의 장소에서 만날 수도 있지
않은가?"
"그렇다고 해도 의심이 갈만한 대상은 한정되어 있습니다.
연박사와 김아나운서, 그리고 금변호사 이렇게 세 사람
뿐입니다. 성주라양이 금지선 변호사 사무실로 찾아갔다면 5시
30분쯤 되는 시각일텐데, 사무실 사람들이 일찍 퇴근했다면 눈에
띄지 않을 수도 있을 겁니다. 그렇다면 금변호사가 사무실에
도착한 시간은 8시가 넘은 시간이었기 때문에 그 세 시간이 넘는
시간동안 성주라양이 텅 빈 사무실에 혼자 앉아 기다리고
있었다는 것은 설득력이 없어보입니다."
"음, 그렇군. 그런데 말일세. 성주라양의 실종으로 누가 과연
이득을 보겠느냐는 점인데, 연박사나 김진건 아나운서가 이익을
볼리는 만무겠지?"
"금전과는 상관없는 실종이라고 생각되어집니다. 정신적인
면이 실종과 관계가 있어보일듯 합니다."
"연박사와 성주라양의 숨겨진 관계라......, 불륜의 관계가
아니라면 그렇게 가까운 관계가 아니라는 느낌이 드는데, 두
남녀 사이에 우리가 알 수 없는 살인동기가 팽팽하게 맞서고
있었을까?"
"성주라양과 김진건 아나운서의 사이에도 연박사와 별로
다를게 없는데, 바로 이 물같이 투명해보이는 관계가 맹점이기도
합니다."
"음, 그러나 미녀의 실종이라는 건 육체의 구속이 첫번째
동기로 부상되어지는게 아닌가?"
장과장은 아무래도 범인의 납치 목적이 성주라의 미모를
최우선으로 삼았을거라는 고정관념의 틀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일단 용의자들의 알리바이 면에서는 성별이 두 명의 남자라는
사실이 그럴 가능성을 암시해주고 있긴 하지만, 그녀가 지금 이
시간에도 생존해 는지 아니면 결박당한 채 범인의 기분을
만족시켜 주는 인형으로만 존재하고 있는지 답답하기 이를데
없습니다."
"그러게 말이야. 살해당했다면 시체라도 나와야 할텐데
숨바꼭질하듯 꽁꽁 숨어있으니......"
장과장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과장님, 그건 그렇고요. 용인 별장에 모였던 초대객들 가운데
권의원과 강여사는 계속 불륜의 관계를 지속하고 있고 거기다
박회장은 어느새 나비향양하고 장시간의 드라이브를 하고......,
도대체 유여사하고 연박사는 그런 사실을 알고도 모른 척하고
있는건지 아니면 남들은 다 눈치채고 있는데 두 사람만 모르고
있는지 정말 답답하군요."
"그럼 자네가 알려주지 그러니."
"진담이십니까?"
"증거도 있겠다, 사회정의 차원에서 슬쩍 귀뜸해줄 수 있는
문제지. 그러나 우리 경찰은 입에다 지퍼를 달고 있어야 해.
보지도 않았고 듣지도 않은거지."
장과장은 비아냥거리는 투로 말했다.
"그런데 한 가지 이상한 점은 사기꾼인 박만하의 침묵인데요.
그런 봉을 놔두고 어째서 협박을 하지 않았을까요?"
"그게 나도 의아스러운 점이야. 권의원과 강여사가 계속
만나고 다니는 걸 보면 박만하의 협박은 없었던 것이 확실한데,
돈이 되는 일이라면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는 그 사기꾼의
성격치고는 너무 점잖은 행동이군."
"상대가 바뀐건 아닐까요?"
"상대가 바뀌다니?"
"권의원이나 강여사가 아닌 연박사나 유여사에게 접근을
했을지도 모르는 일 아닙니까?"
"글쎄, 굳이 큰길을 놔두고 샛길로 갈 필요가 있었을까?"
장과장은 회의적인 눈빛으로 말했다.
"하긴 그렇군요. 정의감에 불타는 사람이라면 모를까, 금품을
목적으로 한다면 권의원이나 강여사에게 전자계산기를
두드리는게 현명한 생각이겠죠."
"허나, 모를 일이야. 박만하라는 인간이 워낙 교묘하고
영리하기 이를데 없어서 우리 생각으로는 미치지 않는 잔수를
썼을지......"
"과장님, 박만하를 우리 경찰이 너무 등한시하고 있는건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가만히 생각해보니까 보혜양의 독살이나
성주라양의 실종에 있어서 박만하는 언제나 사건 중심에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박만하가?"
장과장은 의외라는 듯 실눈을 조금 크게 떴다.
"가만히 생각해보십시오. 박만하는 미스코리아 진에 당선된
윤보혜양을 알고 있었고 권의원과 강여사의 불륜을 독살 전에도
알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윤보혜양의 독살 현장에도 캠코더
기사로 있었습니다."
"그렇지. 그렇지만 성주라양 하고는 상관이 없지 않은가?"
"바로 그 점이 제가 말씀드리려고 했던 부분입니다. 이번
성주라양의 실종에 우리 경찰에서는 그를 철저히
배제시켰습니다. 그도 한 명의 용의자인 것은 분명하지
않습니까?"
"그렇군. 우리의 시야에서 완전히 벗어나 있는 셈이군."
"초대객들과 마찬가지로 그의 알리바이도 조사해볼 필요성이
있다고 봅니다."
"음, 지금까지의 실종수사에서 성주라양의 개인적 교제관계나
이성관계, 유여사댁 부근과 피해자가 살던 아파트 부근의
불량배나 전과자, 방송가 등에서의 직장관계 등등, 싹쓸이하듯이
조사해 보았지만 모두가 실종과는 무관한 사람들이었어. 가면을
쓴 범인을 그냥 스쳐지나가버렸는지는 모르지만 박만하의
알리바이를 체크해보지 않은 건 둑에 조그만 구멍이 뚫려있는
것처럼 분명 우리 수사진의 근무태만일 수도 있어."
"이러다가 사건이 미궁에 빠지는 건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성주라양의 실종이 혼란만 가중시켜 놓았다는 느낌입니다."
"혹시 범인이 그 점을 노리지 않았을까?"
"수사에 혼선을 주기 위해서요? 벼룩을 잡으려다 초가삼간
태우는 격이지요."
남형사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건 모를 일이야. 용인 별장에서의 독살이 범인에게 큰
약점이 있었다면 경찰의 시선을 유도했을지도 모르잖아. 비록 그
약점을 우리가 모르고 있지만 말이야."
"과연 그럴까요...... 그렇다면, 혹시 사라진 빈 잔에 대한
약점이 아닐까요?"
"그럴 수도 있지. 결국 연박사의 알리바이는 의심이 갈수밖에
없겠군."
"사건의 실마리가 빈 잔에서부터 풀리고 있는 것 같기도
합니다."
"그것이 결정적인 약점이라면 제2의 사건을 은폐용으로
탄생시킬 수도 있다는 얘긴데, 과연 그것이 납치동기일수
있을까? 동기로서는 좀 그렇군......"
"정밀조사를 해보는 것만큼 확실한 건 없겠지요."
"......하여튼 용의자가 대폭 좁혀졌다는 사실은 매우
고무적인 일이야. 압축되었다는 건 그만큼 범인에게 운시의 폭이
좁아졌다는 적신호일 수도 있으니까."
장과장과 남형사는 어느새 사건 해결에 대한 자신감을
되찾아가고 있었다.
10. 추녀의 국적
전년도 미스코리아 진인 성주라양이 실종된지 4개월이
지나도록 생사 여부조차 확인하지 못한 경찰에 가뜩이나 신경이
예민해져 있는 상태에, L호텔에서 아침 일찍 일본인 시체로
보이는 의문의 살인사건이 발생해서 업무의 폭주로 지쳐있는
수사관들을 더욱 휘청거리게 만들었다.
L호텔의 602호에서 호텔의 룸 메이드에 의해 젊은 여자의
변시체가 발견되고 나서 남형사와 동료 형사가 현장으로
달려갔다. 호텔 6층에 있는 2인용 방에는 여느 호텔과 다름없이
내부가 완비되어 있었고 방안은 손님이 들기 전처럼 흐트러진
구석이 한 군데도 없었다. 시체는 더블 침대 위에 자는 듯이
알몸인 채로 반듯이 뉘어져 있었다. 그런데 옷장이나 소파, 욕실
어디를 찾아보아도 젊은 여자가 입었을 의상은 한 벌도 눈에
띄지 않았다. 심지어 구두 한 켤레 양말 한짝조차 발견되지
않았다. 두 형사보다 먼저 현장에 도착한 감식반과 경찰의는
연신 고개를 갸웃거리고만 있었다. 특히 시체의 열 손가락은
지문을 뜰 수 없을 정도로 메스 같은 걸로 파손당해 있었다.
잠시 후, 연락을 받고 달려온 장과장이 두 부하와 함게 죽은
여자의 얼굴을 유심히 살펴보았지만 실종된 성주라양의 얼굴과는
판이하게 달랐다. 보고 싶지 않을 정도로 추녀였다.
추녀 시체는 손가락의 지문이 지워진 것을 빼면 외상은 한
군데도 없었다. 몸 표면에 발진이 있고 근육 경직이 있는 것으로
보아 독극물에 의한 중독사의 증상이 뚜렷해 보였지만 하얀
거품이나 뒤틀린 흔적이 엿보이지 않아 독극물이라고
단정짓기에도 애매한 구석이 있었다. 나중에 시체부검을 해본
결과, 사이클로 프로페인이라는 흡입마취제를 근육에 고의적으로
대량 투여하여 중추신경에 치명적인 위험을 주었으며 급성
간괴사로 사망했음이 사인으로 밝혀졌다. 그것은 추녀의 시체가
명백한 살인에 의해 숨졌다는 사실로 단정지어지는 것이었다.
장과장은 여자의 시체가 지금까지 보아왔던 시체보다
아름다움을 간직하고 있다고 느껴졌다. 얼굴은 추녀였지만
나체의 곡선이 뛰어날만큼 아름다웠던 것이다.
"대략 추정한 사후 경과시간은 5-6시간입니다."
경찰의가 말했다.
"난행된 흔적은 있습니까?"
"없습니다."
경찰의는 딱딱한 어조로 대답했다.
"과장님, 쉽게 해결될 것 같습니까?"
"모르겠어. 하여튼 성주라양의 실종과는 관계없는 살인이야."
"살인이 확실할까요?"
"해부를 해봐야 확실하겠지만 지금으로서는 타인에 의해 숨진
것이 분명해보여."
"아무래도 신원 파악부터 해봐야겠습니다."
"그래야겠어."
장과장과 남형사는 최초로 시체를 발견한 6층 담당 메이드를
복도에서 만났다.
"그 죽은 여자가 이 호텔에 투숙한 건 언제였습니까?"
남형사가 물었다.
"그 여자는 602호 손님이 아닙니다. 더욱이 우리 호텔에
투숙한 손님도 아닙니다."
"그럼 이 호텔에 몰래 들어온 여자란 말입니까?"
"그건 잘 모르겠습니다만, 602호 손님은 40대 중반쯤
되어보이는 일본인이었습니다."
"일본인이라구요?"
"네, 확실합니다. 어제 오후 2시에 우리 호텔에 투숙한 일본인
관광객이었습니다."
"인상착의 좀 말씀해 주시겠습니까?"
"일제시대 때 게다를 신은 전형적인 일본인 상이었다고나
할까요, 머리에 기름을 반질반질하게 발라서 넘겼는데 가리마는
가운데로 탔습니다. 그리고 코 밑에는 네모난 콧수염이
있었습니다. 눈에는 알이 돋보기처럼 동그란 안경을 썼구요.
우리나라 말은 전혀 못했습니다."
"동행은 없었습니까?"
"혼자였습니다. 요즘 그런 일본인 관광객이 많습니다. 일본인
관광객 하면 애니멀 아닙니까."
메이드는 죽은 여자도 그런 부류의 여자가 틀림없다는 듯이
말하고 있었다.
"일본인 관광객은 언제 체크아웃되었습니까?"
"오늘 새벽입니다."
"나가는 것을 봤습니까?"
"어젯밤의 프런트 야근 책임자에게물어보시면 자세히 아실수
있을 겁니다."
장과장과 남형사는 엘리베이터를 타고 프런트로 내려왔다.
프런트 캐셔 주변에 호텔을 떠나는 손님들의 모습이 자주 눈에
띄었다. 장과장과 강형사는 체크인을 담당하는 프런트 클러크
쪽으로 다가갔다.
"이 호텔 602호에 투숙한 일본인에 대해서 몇 가지 좀 질문할
게 있는데요."
예의바르게 생긴 중년의 담당자는 허리를 굽혀 인사를 하고는
체크인을 접수한 카드를 꺼냈다.
"이름은 니시무라 다니구찌씨구요, 도착시간은 어제 오후 2시
15분이었습니다. 제가 602호 열쇠를 전해드렸습니다."
"체크아웃된 시간은 몇 시입니까?"
"오늘 새벽 6시 10분입니다."
"그럼 체크인할 때와 체크아웃할 때 그 602호 손님을
봤습니까?"
"네."
"동행은 없었습니까?"
남형사가 물었다.
"혼자셨습니다."
"룸서비스를 받았습니까?"
"룸서비스는 한 번도 받지 않으셨습니다."
친절이 몸에 밴 담당자는 성심껏 대답하고 있었다.
"혹시......, 저, 말입니다. 객실로 들어가기 전에 그 일본인
사람의 손에 여행용 가방 같은 게 들려져 있었습니까?"
"네, 해외여행용 가방이었습니다. 저희 호텔 종업원이 바퀴가
달린 가방을 602호실까지 운반해드렸던 걸로 기억합니다."
"나갈 때도 그 가방을 들고 나갔습니까?"
"그렇습니다."
오전 9시가 조금 지나자 낮 근무자가 교대를 하기 위해
업무인계를 하러왔다. 잠시 후 로비 한쪽 모퉁이의 소파에 앉은
두 사람과 클러크는 끊겨진 대화를 이었다.
"신장은 어떻게 돼보였습니까?"
남형사가 물었다.
"172쯤 되어보이더군요. 체격은 뚱뚱하지도 마르지도 않은
중간이었습니다."
"일어를 사용했습니까?"
이번에는 장과장이 물었다.
"한국말을 전혀 못하는 것 같았습니다. 그러나 저희 호텔에는
일본인 관광객들이 자주 드나드는 편이라 의사소통에는 별
문제가 없습니다. 저 역시 능통하지는 않지만 일어를 할줄
압니다."
"예약한 방이 싱글이 아니고 더블인데요."
남형사가 수첩에다 메모를 하면서 물었다.
"그 점은 별로 신경쓰지 않았습니다. 일행이 늦게 올 수도
있는 것이고 해서 그 일본인 손님이 원하는대로 방을
잡아드렸습니다."
"죽은 여자를 본 적이 있습니까?"
"없습니다. 사실 얼굴도 모르고 있습니다."
"......이거 죽은 여자의 신원을 밝힐 일이 깜깜하구만."
장과장은 낭패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두 사람은 퇴근하는
클러크와 악수를 하고는 소파에 도로 앉았다.
"무슨 사건이 이래. 시체의 국적조차도 밝혀낼 수 없는
사건이라니."
장과장은 잠바 안주머니에서 청심환 한 알을 꺼내서 얼른
입안에 쏙 집어넣었다. 그러면서 그는 골치아픈 표정을 짓고
있었다.
"어? 지금 드신게 뭡니까?"
남형사가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장과장의 왼쪽 볼에 톡
튀어나온 알약을 보며 물었다.
"청심환이야."
"아이고, 저도 한 알 주십시오."
남형사가 구걸하듯 급하게 손바닥을 내밀었다.
"이게 얼마나 비싼건데, 우리 마누라가 결정적일 때만
먹으라고 신신당부하면서 주머니에 넣어준건데......"
장과장은 남형사의 애원섞인 눈빛을 외면하며 잠바 안주머니에
든 청심환을 만지면서 아까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
"아, 부하 사랑은 상관 아닙니까."
"그래, 기분이다."
장과장은 남형사의 희희낙락하는 얼굴을 보면서 한 개 남은
청심환을 갈고리 같은 손바닥에 내리치듯이 주었다.
"헤헤......"
장과장과 남형사는 나란히 청심환을 씹으면서 새로운
살인사건을 분석하였다.
"지문을 없앤걸 봐서는 여자의 국적이 한국이 아닐까?"
"아무래도 그 일본인의 현지처 아니면 콜걸이 아닐까요?"
"이름이 니시무라 다니구찌였다구? 공항에 가서 우리나라에
언제 입국했는지 확인해봐야겠어."
"그 여자가 동행인이었다면 거 일본인의 아내였지
않았을까요?"
"그런 것 같지는 않아. 40대 중반의 나이와 20대 초반? 중반쯤
되어보이는 여자와의 연령 차이가 많이 나보이잖아."
장과장은 청심환을 목구멍 속으로 삼키면서 편안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레지스터(등록)카드를 보면 성함, 직업, 주소 등이 일본어로
기입되어 있는데, 아무래도 허위로 써넣은 것 같습니다. 제
추측으로는 여행용 가방에 여자를 숨겨가지고 들어온 것 같은데,
내가 범인이오! 하고 사실대로 기입했겠습니까?"
"맞아. 그 일본인은 의식불명인 여자를 가방 속에 넣고 온 게
분명해. 그리고 자정이 지나서 마취주사를 놓아서 숨지게
만들었던거야. 이런, 우리가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야. 니시무라
다니구찌라는 자 일본으로 줄행랑을 놓았을거야. 자기네 집
안방으로. 담당자 어디 갔어?"
장과장은 퇴근한 클러크를 찾았지만 이미 때는 늦었다.
"공항에 가도 그 일본인을 체포하기에는 시간이 너무
늦었습니다, 과장님."
장과장은 손목시계를 보면서 안타까운 표정을 지었다.
"약삭빠른 일본인이군. 죽은 여자가 누구인지 모르지만
원정살인을 하다니......"
초동수사를 끝마치고 시경으로 돌아온 장과장과 남형사는
피곤에 지친듯한 표정을 지으며 소파에 털썩 주저앉았다.
"엎친데 덮친 격이라니......, 미스코리아 사건도 해결 못하고
있는 상태에서 반갑지 않은 국제살인까지 터졌으니...... 휴, 그
빌어먹을 일본놈은 홈 그라운더에서 일을 처리하지 반쪽난
한반도까지 날아와서 주사바늘을 꽂고 튈 건 뭐람."
장과장은 공항으로 급파한 부하 형사에게 전화가 오기를
기다리면서 발걸음만 바쁘게 한 일본인을 괘씸해했다.
30분 후, 전화벨이 울렸다. 장과장이 직접 수화기를 들었으나
통화자는 공항에 파견된 부하 형사가 아니라 국제전화였다.
간단하게 통화를 끝마친 장과장은 예상했다는 듯 수화기를
내려놓으면서 궁금해하는 남형사에게 말문을 꺼냈다.
"일본 경찰의 전환데, 레지스터 카드에 기록된 주소는
엉터리라는군."
장과장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전화벨이 다시 울렸다.
"오, 그래 알아봤나?"
장과장은 부하 형사의 보고를 몇 마디 듣고나더니 공항에 더
있을 필요없다고 하면서 시경으로 들어오라는 명령을 하고는
수화기를 내려놓았다.
"니시무라 다니구찌라는 일본인은 입국도 출국도 하지
않았다는군. 물론 그 이름이 가명일 수도 있지만 그런 일본인은
명단에 없다는군."
"치밀한 놈이군요."
"무엇보다도 죽은 여자의 신원을 빠른 시일내에
확인해야겠는데, 얼굴만으로 쉽게 될 수 있을지 모르겠군."
"할 수 없는 노릇이지요. 사진을 들고 다니면서 탐문수사를
할수밖에요."
"또 다리품 파는 사건이군."
장과장은 지겨운 표정을 지었다.
"일단 그 죽은 여자가 콜걸일 수도 있으니까 그쪽 방면의
사람들에게 사진을 보여주고 언론에도 협조를 얻어야겠지요.
당연히 신문에 살해된 여자의 사진이 실리긴 하겠지만 얼굴
크기를 좀더 크게 실어달라고 시경 출입기자에게
굽신거려봐야겠어요."
"굽신거리긴 왜 굽신거려. 다 공생관곈데."
장과장은 모든 것이 짜증스러운지 웃고 있는 남형사에게
핀찬을 주었다. 그러자 남형사는 호텔 로비에서 얻어먹은 청심환
한알을 떠올리면서, 울화통이 치밀어오르는 표정을 짓고 있는
장과장을 곁눈으로 슬쩍 쳐다보았다. 그러고보니 사건이 발생한
날 용인 별장에서도 잠 안 오는데 최고 좋다는 알약을 얻어먹은
것까지 생각이 떠올랐다. 기브 엔 테이크를 안 해서 그런가?
남형사는 다시 한번 장과장의 안색을 살펴보았다.
"뭘 봐!"
장과장은 또 다시 화를 벌컥 내면서 담배 한 개비를 입에
물었다.
에이 치사해서......
남형사는 잽싸게 주머니에서 성냥을 꺼내 불을 당겨주었다.
장과장은 소리가 나도록 담배를 뻑뻑 피면서 한숨을 토해내듯이
연기를 허공에 뿜어댔다. 남형사는 상관의 느닷없는 심경의
변화에 한숨을 토해내듯이 가만히 앉아있었다.
"으휴, 미스코리아 살인사건도 미궁에 빠질 판인데 세금도
내지 않는 일본인 뒤치다꺼리까지 해야 할 판이니..., 위로,
언론으로 욕을 바가지로 얻어먹을 생각을 하니......"
장과장은 경찰의 무능을 신랄하게 비판한 이틀 전의 신문들을
읽은 간부들로부터 호된 질책을 받은걸 생각하면서 벌레 씹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이번 일본인 호텔 사건으로 만회를 해야 될텐데, 만회는 커녕
고생문이 훤하게 열렸으니..., 으휴."
"과장님, 그 일본인 혹시 국내에 거주하고 있는지도 모를 일
아닙니까. 몽타즈를 작성해서 배포하거나 일본 대사관의 협조를
얻어서 신원을 파악할 수도 있지 않습니까. 프런트 클러크가
얼굴을 기억하고 있으니까 몽타즈 작성은 얼마든지 가능한 것
아닙니까."
"그거야 당연한 거 아닌가. 문제는 여자의 신원 확인이야.
도대체가 신원을 확인할만한 아무런 증거가 없다는 사실이야.
약아빠진 놈. 지문을 없애다니......"
"신체적 특징으로 알아낼 수는 없을까요? 이를테면 치아가
금니로 되어있다거나 반지를 끼고 있었다거나, 아니면 신체
부위에 수술자국이 있다거나 하는 걸로 말입니다."
"한국 여자가 아니고 일본 여자면 무슨 수로 밝혀내나.
헛고생할 필요 뭐 있어."
"그래도 현재로서는 한국 여성일 가능성이 더 높지 않습니까?"
"이거야 원, 뜬 구름 잡기지."
이틀 후, 시체부검 결과가 나왔다. 사인은 마취주사에 의한
간괴사로 판명되었고, 사망 추정 시간은 자정에서 동 1시 사이로
나왔다. 시체의 오른쪽 팔뚝에 다섯 개의 주사바늘이 나 있었고
난행한 흔적은 없었다. 질내에선 정액이 검출되지 않았고,
오히려 처녀막이 그대로 보존되어 있어 숫처녀인 것이 예상을
뒤엎은 부검 결과였다. 그리고 여성의 체위를 보면, 신장이
171센티미터였고 헤어스타일은 짧은 생머리였다. 최근 몇 개월
동안 미용실에 가지 않았던 것이 분명함. 머리카락에 머리와
관련된 일체의 성분이 없었음. 특히 머리는 살해되기 직전에
가위 같은 걸로 자른 것으로 추측됨. 혈액형은 AB형이었고 또한
얼굴의 특이한 점은 생전에 코수술과 눈수술을 했음. 4개월
전쯤에도 성형수술을 받은 것으로 추정됨.
신원 확인이 불가능한 여자 시체에 대한 부검 결과는 사건
수사에 혼선을 주기에 충분했다. 여자가 숫처녀였다는 사실은
그녀의 신분을 180˚로 바꾸어놓는 결과를 낳게 하고 있었다.
유부녀나 육체를 파는 직업여성과는 거리가 먼 신분일뿐 아니라
니시무라 다니구찌라는 일본인과의 관계도 더욱 추정하기 어렵게
만들었다.
경찰은 죽은 여자를 Y로 부르기로 고유 알파벳을 정했다.
Y의 신분은 여대생일지도 모른다는 의견과 성에 굶주린
일본인에 의해 호텔로 납치당했다가 자정쯤에 마취약이 과다
투여되어 부작용을 일으키는 바람에 숨졌을거라는 그럴듯한
의견도 나왔다. 한쪽에서는 Y가 일본인 여성이었는데(한국에
유학온 재일교포일 수도 있다는 가능성도 전제로 깔았다)
니시무라 다니구찌와는 친한 사이여서 마음 놓고 호텔로
놀러와서 시간을 같이 보냈는데 그가 갑자기 흑심을 품고 가지고
있던 주사기로 Y를 마취시키려 했지만 실수로 숨지게 했을 수도
있다는 의견도 내놓았다. Y가 간괴사로 숨지는 바람에 밤새도록
고민하다가 Y의 신원을 숨기기 위해 여행용 가방에다 그녀의
물건을 하나도 남김없이 쓸어갔을 거라는 덧붙인 의견도 나왔다.
그러나 팔뚝에 다섯 개의 주사바늘이 나있었다는 사실은
반항에 의한 결과로서는 너무나 많다는 반론이 제기되었다. Y가
마약을 맞지 않았나 하는 의구심도 가져보았지만 염산 에페트린
같은 원료의 성분은 없었다는 부검 소견서를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결국 다섯 개의 주사바늘은 일본인이 Y를 계속
수면상태에 놓이게 하기 위해서 마취효과가 사라질 때마다
주사를 놓았던 쪽으로 기정사실화 되었다. 더욱이 열 손가락의
지문이 사전에 제거되어 있었다는 사실은 명백한 살인행위임을
증명해주고 있었다. 그리고 Y가 성형수술을 한 것은, 여자라면
누구나 예뻐지고 싶은 욕망을 가지고 있는 것이기 때문에 그렇게
신경쓸 필요가 없긴 해도 혹여 Y가 국내 성형외과에서 수술을
받았을 가능성이 내포되어 있는만큼 Y의 사진을 들고 탐문수사를
벌일 필요성이 있다는 쪽으로 결론이 내려졌다.
특수수사과는 연일 문닫힐 틈도 없이 분주했다. 그러나 수사는
연일 원점에서 원점으로 무에서 무로 돌아올 뿐이었다. 그런
가운데 장과장의 신경질은 날로 늘어가고 있었고 남형사와
윤형사는 이상하리만큼 실마리가 풀리지 않는 세 건의 사건에
의기소침해져갔고, 급기야는 사건이 영원히 미궁에 빠지지
않을까 하는 불안한 심리가 특수수사과 내에 팽배하게 자리잡고
있었다.
윤보혜의 독살은 연성철 박사가 뚜렷한 용의자로
부각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그가 파라티온을 탓을 거라는
심증만으로는 수갑을 채울 수도 없었다. 더욱이 파라티온이라는
농약은 독성이 워낙 강해서 고도의 살인을 가능게 해주기 때문에
섣불리 연박사가 범인이라고 단정짓기에도 성급한 면이 있었다.
성주라양의 실종은 여전히 "실종" 그 자체였다. 이제는 시민의
제보밖에 더 기대할 것이 없었다. 비록 Y의 살인 때문에
연박사와 김진건 아나운서에 대한 알리바이 수사가 잠시
주춤하고 있지만 성과가 있을지는 의문시된다.
Y의 살인은 사건 발생 닷새가 지나도록 Y의 신원조차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다. 나시무라 다니구찌는 정말 일본인일까? 하는
의문이 제기되었긴 했지만 Y의 신원 확인이 안 된 상태에서
백약이 무효라는 듯한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감식반이 찍은 Y의
사진은 성형외과 병원에서도, 일본 경시청의 협조를 얻은
일본에서도 효과가 없었다. 니시무라 다니구찌의 몽타즈도 별
소용이 없었다. Y나 니시무라 나니구찌를 알고 있는 한국인과
일본인은 한 명도 나타나지 않고 있었다.
오늘도 특수수사과는 초상집을 연상케할만큼 동적인 느낌은
전혀 없고 한숨만 푹푹 내쉬는 침체 분위기였다. 국장으로부터
경찰복을 벗을 각오하라는, 국장의 시퍼렇게 뜬 눈을 제대로
보지도 못하고 국장실을 나온 장과장은 청심환을 힘없이 입에
넣으며 낡은 소파에 앉아있는 남형사를 바라보았다.
"한 개 줘?"
"아, 아닙니다."
남형사는 무심결에 내밀었던 손바닥을 얼른 숨기며 고개를
흔들었다.
"그런데 요즘 윤형사가 잘 안 보이는군."
장과장은 안주머니에 꺼냈던 청심환을 도로 집어넣으며
윤형사를 찾았다.
"연박사를 만나러 갔을 겁니다."
"그러는 자네는 왜 여기 죽 때리고 앉아있나?"
장과장은 못마땅한 시선으로 남형사를 보았다. 남형사가
뒷머리를 긁적이며 무안해하고 있었다.
"윤형사를 봐, 얼마나 부지런해. 이게 뭔지 알아? 김진건
아나운서를 만나고 온 보고서야. 내가 없는 사이에 내 책상 위에
놓고 나갔어."
장과장은 보고서를 남형사 앞에 흔들면서 언성을 높였다.
남형사는 고양이 앞의 쥐처럼 고개를 푹 숙이고 앉아있었다.
"읽어봐."
남형사는 성형외과 병원을 돌아다니느라고 알이 배긴 종아리를
한 손으로 맛사지하면서 보고서를 받았다.
-김진건 아나운서는 23일 오후에 명동을 산책한 이유를 다음과
같이 부연설명하고 있었다.
......그날 나는 매우 울적한 기분이었다. 산다는 것에 회의를
느끼고 있었다. 어디론가 여행을 떠나고 싶어도 일년 열 두달
방송 스케줄에 묶여 20년 동안 내 시간을 제대로 가진 적이
없었다. 아나운서직을 그만두고 조그만 사업이라도 운영한다면
나만의 자유시간이 생길수 있지 않을까.
그러나 20년 동안 쌓아놓은 공든 탑을 쉽게 포기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그만한 위치에 오른다는 게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사람 많은 거리를 걸어보면서 우울한 기분을 씻으려고 했다.
그러다가 나는 결국 내 고향이나 마찬가지인 방송국으로
귀환회로 할수밖에 없었다. 방송국 아나운서실은 역시 내
바다였던 것이다. 물고기가 물을 떠나서 살 수 없듯이 마이크를
떠나 살수 없다는 것을 느낀 나는 오히려 아나운서직에 회의를
느끼는 후배 아나운서에게 위로와 격려의 말을 해주는
아이러니한 상황을 맞이하게 되었다. 나는 후배와 같이 술을
마시면서 따뜻한 말로 내 경험과 직업관을 얘기해주었다.
-김진건 아나운서가 명동길을 걸은 것은 그곳에 거주하고 있는
사진사와, 김아나운서가 밝힌 코스를 따라가면서 상점 주인들과
행상을 하는 사람들에게 물어본 결과 여러 사람이 김아나운서를
목격했다고 증언해 주었음. 특히 사진사의 카메라에 잡힌
김아나운서의 모습은 23일의 의상과 똑같았음.
"결국 연박사만이 용의자로 남게 되는 셈이군요."
보고서를 읽고난 남형사가 표정없는 얼굴로 말했다.
"그래. 윤보혜양의 독살과 성주라양의 실종에서도 연박사가
가장 유력한 용의자가 되었어."
장과장은 자기 책상으로 가서 앉으면서 또 한 장의 보고서를
읽기 시작했다. 2과의 손형사의 박만하에 대한 알리바이 조사
내용이었다.
-박만하는 지하실의 사무실을 폐쇄하고 최근에 아파트 한 채를
사서 대부분의 시간을 한정된 공간에서 생활하고 있음. 태이프와
필름은 처분해버렸는지 아니면 깊숙한 곳에 숨겨두었는지 눈에
띄지 않았음. 그는 요즘 B회사에서 주최하는 사진 콘테스트
공모에 응모하기 위해 작품을 만드는 것으로 소일하고 있었음.
23일의 그의 알리바이는 쉽게 확인되었음. 경마장에 있었던
것으로 확인되었음. 그리고 저녁 5시 이후부터는 청량리에 있는
C당구장에서 밤 9시까지 당구를 쳤고 그 이후로부터는 당구를
같이 쳤던 사람들과 밤새도록 포커를 했음. 당구장 주인과 노름
친구들의 증언이 일치함. 화장실에 가는 시간만 제외하고는
당구와 포커에 광적으로 열중했음.
"마지막 용의자가 연박사인 것만 확인시켜준 셈이군......"
장과장은 부하 형사들의 보고서를 취합해서 한데 모으고는
서류함에 집어넣었다.
"이제부터 연박사에 대한 알리바이 깨뜨리기 수사에
들어가는군. 그걸 윤형사게 제일 먼저 스타트를 끊었어......"
남형사가 들을만큼 혼잣말로 중얼거리던 장과장은 소파로 다시
걸어오면서 느닷없이 실눈을 치켜떴다. 지그시 눈을 감고 있는
남형사의 폼이 영락없이 추리를 빙자한 졸음이라고 단정지었는지
장과장은 세월의 훈장인 이마의 주름살을 깊게 잡았다.
"이봐, 남형사."
장과장이 팔짱을 낀 채 눈을 감고 있는 남형사의 어깨를 툭
치자 그는 눈을 번쩍 뜨며 깜짝 놀란 표정으로 상관을
바라보았다.
"과장님!"
"어이쿠, 깜짝이야."
"Y말입니다. Y이요!"
"Y가 뭘 어쨌다구?"
"가능성..., 가능성이 생겨났습니다."
남형사가 솟구치듯 소파에서 일어나며 흥분된 동공으로 허공을
두리번거렸다.
"또 뭘 갖고 그래?"
"Y의 정체를 밝혀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정체를?"
"그렇습니다, 과장님."
"남형사, 흥분 좀 그만하고 차근차근 얘기해 봐. 이거안
되겠군."
장과장은 안주머니에서 청심환을 꺼내 흥분을 감추지 못하고
있는 남형사의 손에 쥐어주었다.
"자자, 이거 먹고 진정 좀 하게."
"아, 고맙습니다, 과장님."
남형사는 청심환을 얼른 입에 집어넣으며 소파에 앉았다.
"Y의 정체를 벗겨낼려면 니시무라 다니구찌가 일본인이
아니라는데서 출발하면 가능성이 생겨납니다."
"뭐야?"
장과장은 이맛살을 찌푸리면서 실망한 낯빛으로 변하고
있었다.
"위장과 변장을 했다면 Y의 정체는 밝혀지기 마련입니다."
"어이구, 내 청심환......"
장과장은 남형사의 불거진 한쪽 뺨을 보면서 아까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
"Y의 신원이 확인이 안 된 상태에서 니시무라 다니구찌가
일본인이 아닐 것이라는 가설이 통용될수 없다는 건 닭이 먼저냐
달걀이 먼저냐 하는 논쟁밖에는 되지 않습니다. 니시무라
나니구찌는 가공의 인물이 틀림없습니다. 즉, 외국인을 가장한
내국인의 소행일 수 있는 것입니다."
"좋아. 자네 말대로 한국 사람이라고 하지. 그것만으로 Y의
정체를 벗겨낼수 있단 말인가?"
"물론입니다. 그리고 Y의 손가락 지문을 없앤 이유는 Y가
한국인이기 때문입니다."
"일본에서도 지문 하나만 있으면 만사 오케이야."
"그렇지 않습니다. 니시무라 다니구찌가 일본인이었다면 Y는
오히려 한국 여성으로 둔갑시켜놓는 게 유리했을 겁니다."
"도대체 무슨 소리를 하고 있는지 모르겠군. 당체 헷갈려서."
"신발부터 속옷까지 모두 벗겨갔다는 건 역으로 말해서 자신이
일본인이라는 사실을 경찰에 강조하기 위해섭니다. 굳이 그럴
필요가 뭐 있겠습니까? 육체를 폭행한 것도 아니고, 이것은 단지
살인을 성공시키기 위한 연극에 지나지 않는겁니다.
클러크(계원)의 진술대로라면 일본인은 영어도 전혀 못하고
일어로 말했다는데 그거야 일어를 못하는 사람도 며칠 동안
시험공부하듯이 달달 외우면 되는 것이고 콧수염이야 그럴듯하게
붙이면 되고 머리도 얼마든지 가운데로 가리마를 만들 수 있는
것 아닙니까?"
"그러나 레지스터 카드에 기입한 글씨체는 숙달된 글씨였어."
"그거야 일본어를 제법 아는 사람이면 더욱 유리한 것이구요.
그래서 그런 범죄를 꾸몄는지 모르겠지만요."
"좋아, 좋아. 자제 말이 다 옳다고 하지. Y가 한국 여성이라고
하지. 그러면 왜 지금까지 Y의 가족이나 친척, 심지어는 친구들,
동네 사람들조차 Y가 아는 얼굴이라고 신고가 들어오고 있지
않지? 신문이나 텔리비전에 Y의 얼굴이 강원도 산골짜기는
물론이고 제주도 끝까지 비췄을텐데."
"그거야 뭐......"
남형사는 이 부분에서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못봤을지도
모른다고 대답했다.
"결국 Y는 일본 여성일 가능성이 높아."
"그렇지만 일본에서도 Y가 누구라고 아무도 나타나지
않았잖습니까?"
"일본하고 우리하고 같아? 일본 신문에 Y의 얼굴은 실리지도
않았다고 하는군. 방송도 마찬가지야. 뉴스 가치도 없어서
기사나 보도는 단 한 줄도 단 일 초도 하지 않았어."
"그래요? 짜식들."
남형사는 적잖이 실망하는 기색이었다.
"경찰 신분으로 이런 말 하긴 좀 그렇지만 그 니시무라
다니구찌라는 일본인은 살인의 천재야."
"아니, 그럼 인터폴이나 일본 대사관에서는 협조를 해준
겁니까, 안 한겁니까?"
"우리나라에서 발생한 사건을 우리가 제대로 해결을 못하고
있는데 그쪽에서 무슨 수로 Y의 정체를 밝혀내겠어. 그쪽도 손을
든 모양이야. 니시무라 다니구찌는 그 점을 노렸던거야. 무대가
달리 한국땅이었겠나."
"그럼 과장님은 Y살인이 완전범죄가 되었다는 말씀입니까?"
남형사가 억울한 눈빛으로 물었다.
"현재로서는 어찌해 볼 방도가 없어."
"반대로 범인이 이런 취약점을 노렸을 수도 있지 않습니까?
일본의 천재가 아닌 한국의 살인 천재가요."
"남형사, 지금 나하고 한국 살인이 천재냐 일본 살인이
천재냐고 논쟁을 벌이자는건가? 이런데서도 애국심을
발동하자는건가?"
"니시무라 다니구찌는 한국인이 틀림없습니다, 과장님."
남형사는 확신하듯이 말했다.
"그러니까 Y는 한국 여성이다, 이 말인가?"
장과장은 조롱하는듯한 눈빛으로 남형사를 보면서 말했다.
"이거, 자꾸만 얘기가 되풀이되는군. 그래서 뭘 어떻게
해보겠다는건가? 일본인이든 한국인이든 니시무라 다니구찌나
Y의 정체를 밝혀내기는 불가능해져버린거야."
"몽타즈가 있지 않습니까?"
"몽타즈?"
"다시 만드는 겁니다. 콧수염도 떼고 안경도 없애고 헤어
스타일도 보통의 중년신사 스타일로 만들어보는 겁니다."
"그렇다고 제대로 된 얼굴이 나올줄 아냐? 첫 인상이라는 건
수정이 불가능할만큼 인간의 놔와 눈에 강렬하게 박혀지는 거야.
괜히 엉뚱한 사람 잡을 생각 말고 미스코리아 살인사건이나
전념하도록 해. 이번 Y살인은 관할 경찰서에서 전담 수사를 하고
우리 특수수사과는 손을 떼기로 했어."
"시작도 안 해보고 수사를 중단한다는 건 너무 무성의합니다."
"남형사, 자네 아이큐가 몇이라고 했지?"
"142입니다."
"관할 경찰서 수사관들은 전부 아이큐가 두 자리 숫자로밖에
안 보이지, 자네 눈에는?"
"무슨 말씀을 그렇게 하십니까?"
"그쪽 강력계 형사들도 일본인 뒤를 쫓아다니느라고 무좀약
바르고 있어. Y의 신원 확인을 위해 밤낮없이 뛰고 있단 말일세.
이제부터 한 마리 토끼만 ㅉ기로 하게. Y살인은 깨끗이 손 떼게.
알았나?"
"네, 과장님. 아, 그치만......"
남형사는 미련이 남은 듯한 눈빛으로 장과장을 바라보다가
이내 입을 다물어버렸다. 장과장의 얼굴이 헐크처럼 변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11. 조물주의 미소
종합병원인 연화병원은 지하 1층과 지상 5층으로 된 건물로서
병동마다 최신 의술기기가 완비되어 있었고 입원실과 수술실,
진료실 등 각 층마다 환자들로 넘쳐있었다.
잔뜩 부풀린 어깨심이 넣어진 정장 차림의 의상을 입고 5층에
있는 원장실 문을 노크한 윤형사는 반갑게 맞이해 주는
연박사에게 허리 숙여 인사를 하고는 소파에 앉았다. 용인
별장에서 첫 대면하고 이번이 네번째 대좌였다.
"병원이 무척 분주하더군요."
"이곳에 드나드는 수사관들보다는 덜 분주하지요."
"어머, 그럼 저도 그 중의 한 사람이겠네요. 죄송해서
어쩌지요."
"홍일점이신데요, 오히려 즐겁지요."
연박사는 은단을 씹으면서 상쾌한 표정을 지었다.
"담배를 끊으시려고 하시나 보지요?"
윤형사는 부드러운 분위기를 이끌어가려고 상대방의 행동에
관심을 나타내보였다.
"끊을 생각은 없지만 줄여야 할 것 같기에... 그런데?"
연박사는 시간이 한가하지 않다는 듯한 눈빛으로 찾아온
용건을 묻고 있었다.
"사건이 미궁에 빠지다보니 처음부터 새로운 각도로
재조명해보기 위해서 이렇게 박사님을 또 찾아뵙게 되었어요."
"이거 또 나보고 앵무새가 되라는군."
그러나 연박사는 불쾌한 표정을 짓지 않고 있었다. 오히려
즐거워보이기까지 했다.
"몇 번씩 받았던 질문이라도 이해해주셨으면 감사하겠어요.
기억나시는 대로 말씀해주시면 고맙겠어요."
윤형사는 짐짓 미안한 표정을 지으며 살며시 미소를 지었다.
그녀의 미소에 연박사는 동화된 듯 같이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마 이번 질문이 박사님에게는 최종적인 질문이 될 거예요.
더 이상 불편하게 해드리지 않겠다고 약속하겠어요."
"괜찮습니다. 윤주희 형사 같은 미녀 형사와는 지청해서라도
만나드리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윤형사는 연박사와의 인간적인 신뢰관계를 돈독히 구축하고
나서 심기가 상할 질문들을 정곡으로 찔러갔다.
"유진숙 여사께서는 박사님이 칵테일 잔을 가져갔을 거라고
주장하시는데, 여기에 대한 반박 같은 건 없으십니까?"
연박사는 희미하게 미소를 지었다. 전에는 칵테일 얘기만
나오면 주눅이 들어있더니 오늘은 여유있게 미소까지 짓고 있는
것이다.
"사실은, 그 칵테일 잔 내가 가져갔소"
"네?"
윤형사는 잘못 들었나 싶어 눈을 동그랗게 뜨면서 반문했다.
"솔직하게 사과드리리다. 그러나 고의적인 것은 아니었소. 내
양복 주머니에, 오른쪽 주머니에 칵테일 잔이 들어있는 걸 알게
된 건 용인 별장의 파티가 엉망이 되고 서울로 돌아오는 차
안에서 담배를 피려고 라이터를 찾다가 주머니 속에 들어 있는걸
알게 되었어요. 너무나 어이가 없어서 곰곰이 생각해 보았더니
그게 그렇게 되었더군요."
연박사는 미소년 같은 미소를 띠면서 말을 계속 이었다.
"처음에는 누군가가 고의로 내 양복 주머니에 집어넣은 게
아닌가 생각했지만 그럴 사람이 누가 있겠소? 기억을 더듬어서
생각해 보니까 명확하지는 못하지만 상황이 떠오르더군요.
그러니까 유여사님이 두 잔의 칵테일을 들고 진과 내가 있는
테이블로 건너오셨을 때 나는 사실 기분이 몹시 상해 있었소.
이건 내 프라이버시에 관계된 일이라 노골적인 얘기를 꺼내고
싶지 않았지만 볼룸댄스를 추는 쌍들의 분위기가 별로 마음에 안
들었소. 그때 나는 내 아내와 권의원이 볼룸댄스를 추는 걸
지켜보고 있었는데 갑자기 담배를 피우고 싶어졌었소. 그때 내
손에는 쭉 들이키고 난 잔이 들려져 있었는데, 나도 모르게
오른쪽 양복 주머니 속으로 손을 집어넣었던 것 같소. 담배와
라이터를 찾으러 손을 집어넣었는데 내 손에 칵테일 잔이 들려져
있었다는 걸 깜빡 잊었던 모양이오. 결국 나는 담배를 찾는
도중에 유여사님께서 말을 붙여오시는 바람에 담배 피우는 것을
잊고 다시 춤구경을 하게 되었던거지요."
윤형사는 고개를 끄덕이면서 잔의 행방에 대해서 궁금증을
나타냈다.
"그럼 그 주머니 속에 있던 칵테일 잔은 어떻게 했습니까?"
"아무 생각없이 차창 밖으로 던져버렸소. 그 잔을 집까지
가져와서 보관한다는 건 우습잖소."
윤형사는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그런 일이 있으셨다고 저한테라도 미리 귀띔해주셨으면
좋았을 걸 그랬어요."
"그러게 말이오. 사실 나 지산도 이해할 수 없었던 건, 괜히
오해를 받지 않을까 하고 염려를 했기 때문이오. 윤형사도
아시다시피 보혜양의 죽음이 내게 매우 불리한 상황 아니오.
아직까지 진범이 검거되지 않은 상태라 지금도 조심스럽긴
합니다만."
연박사는 불안한 표정을 지으면서도 얼굴 전체는 평화가
깃들어 있었다. 윤형사는 연박사의 진술을 믿어야 할지 의혹을
가져야 할지 선뜻 판단이 서지 않았다. 무심코 주머니 속에
집어넣었다는 행위는 그날의 분위기로 보아 이해될 수 있는
상황이긴 했다. 권의원과 강여사가 지나칠 정도로 몸을
밀착시켜가며 댄스를 추고 있는 모습을 연박사가 몹시 불쾌한
눈빛으로 계속 지켜보고 있었던 장면이 비디오 테이프 화면에도
여러 번 나타나곤 했었다. 또한 유여사 역시 지나치게
웃어대면서 춤을 지켜보던 얼굴 표정도 불타는 질투를 웃음 뒤로
숨기려는 기색이 역력해보였다.
그러나 계획적이고 의도적으로 칵테일 잔을 숨겼다면 연박사의
이 어설픈 변명은 자신이 곧 진의 독살과 결정적인 관계가
있다는 것을 자백한 결과나 마찬가지인 셈이다.
연박사는 왜 이 시기에 사라진 칵테일 잔을 자진해서
언급했을까?
윤형사는 연박사의 심리의 흐름을 간파하려고 애썼지만 이렇다
할 해석이 내려지지 않았다.
"윤형사, 안색이 안 좋아 보이는군요."
연박사는 여유있는 목소리로 생각에 잠겨있는 윤형사를
일깨웠다. 그녀는 미소로서 잠시동안의 어색한 분위기를
일신하고는 다른 질문으로 들어갔다.
"6월 23일의 박사님의 알리바이를 다시 묻고 싶은데요,
17시부터 19시까지 이 원장실에 계셨다구요?"
"그렇소."
연박사는 계속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장부정리를 하고 계셨다구요?"
"그렇소."
"네... 그런데 성주라양 하고는, 23일이 아닌 그 전날이나
아무 때라도 좋습니다. 성주라양을 본 지는 언제였는지요?"
"용인 별장에서가 마지막이었소."
"성주라양이 강여사님의 의상실에 자주 들렀다고 하던데,
거기서 잠깐동안 마주친 적도 없으신지요?"
연박사의 눈가에 가느다란 경련이 일고 있는 것을 윤형사는
놓치지 않고 있었다.
"미안한 얘기지만 난 의상실에 들르지 않아요. 솔직히
말씀드리지만 난 지금 아내와 별거중에 있소. 이 병원에서
생활하고 있소."
연박사는 처음과는 달리 딱딱한 어조로 대답했다.
"죄송합니다, 박사님."
윤형사는 고개를 숙여 사과했다. 그러자 연박사는 다시 미소를
되찾으며 부드러운 눈빛으로 윤형사를 바라보았다.
"이거 내가 오히려 윤형사 심기를 불편하게 해드렸군요. 이건
사생활에 대한 얘기라 끝까지 침묵을 지키려고 했지만 아내와
내가 별거하게 된 동기는 성격차이일 뿐입니다. 나는 상냥하고
순종적인 여자를 원하는데 아내는 정반대의 성격을 소유하고
있기 때문에 일치가 잘 안 되는 것뿐이오. 그 이상은 오해가
없으시길 바랍니다."
연박사는 이만하면 진실된 답변이 아니냐는 듯한 얼굴로
윤형사를 보면서 스스로 만족스런 표정을 지었다.
"파티가 끝나고 용인 별장에서 귀경하실 때 차 운전은 누가
했느지요?"
"아내가 했소."
"그럼 칵테일 잔을 버리는 걸 보셨겠네요?"
연박사의 동공이 갑자기 일그러졌다.
"지금 날 의심하는거요?"
"그게 아니라... 사실은, 이 경찰직이라는 게 보고서
작성직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아시겠지만 불성실하고
불충분한 보고서는 호된 질책이 가해져옵니다."
윤형사는 적당히 둘러댔다. 연박사가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봤을거요. 뒷 좌석에 앉아 있었지만 차창 밖으로 내던지는 걸
봤을거요."
"박사님, 운전기사를 두셨나요?"
"우리 병원에요?"
"아니요. 박사님 자가용 기사를 말씀드리는 겁니다."
"병원 기사밖에 없어요. 6개월 전까지 기사를 뒀었는데 요즘은
내가 직접 몰고 다녀요. 피곤할 때는 병원 기사를 임시직으로
운전하게 합니다."
연박사가 관대한 음성으로 대답했다.
"혹시 헙박 같은거 받으신 적 없으시나요?"
"그만둔 운전기사한테요?"
"아니요. 타인으로부터 어떤 제의나 협박 같은거 안
받으셨어요?"
연박사가 이를 보일 정도로 크게 미소지었다.
"그런 일 없어요. 그건 그렇고 이제 5분밖에 시간이 안
남았군요. 중요한 약속이 있어서요."
연박사는 손목시계를 보면서 홀가분한 표정을 지었다.
"아니예요, 이제 거의 다 질문이 끝나가요. 두 가지만 더
질문드려도 되겠지요?"
"좋소. 보고서는 완벽하게 작성하는 게 좋으니까요."
"이건 박사님의 조언을 듣고 싶어서 여쭙는건데요, 윤보혜양의
잔에 파라티온이라는 독극물을 타넣은 장본인은 역시 한
사람밖에 없겠지요?"
"내가 아니면 유여사님을 지칭하는 것 같은데, 천만에요. 난
보혜양이 자살했을 거라고 확신합니다."
"그렇게 자신할 수 있는 이유가 있으시다면 말씀 좀
해주시겠습니까?"
"간단합니다. 거기에 모였던 분들은 보혜양을 죽일 이유가
전혀 없었습니다. 이유없는 반항은 들어봤어요 이유없는 독살은
들어보지 못했습니다."
연박사는 단정짓듯이 말했다.
"마지막 질문인데요, 박사님이 유여사님에게 주인이 없는
칵테일을 가져오라고 말씀하셨습니까?"
"난 그런 말 한 적 없습니다. 유여사님이 내 잔이 빈 걸 알고
가져오셨습니다."
"잘 알겠습니다. 바쁘신 시간인데도 이렇게 질문에 응해주셔서
대단히 감사했어요."
윤형사는 소파에서 일어나며 깊이 허리를 굽혀 작별인사를
했다.
"보고서 잘 쓰길 바래요."
연박사는 윤형사에게 악수를 청하며 승리자처럼 활짝 웃었다.
연화병원을 뒤로 하고 시경으로 향하는 윤형사의 얼굴은 마치
실연을 당한 여자처럼 풀이 죽어 있었다.
두 진의 독살과 실종에 있어서 연박사만큼 유력한 용의자도
없었다. 그렇지만 사라진 칵테일 잔에 대한 연박사와 유여사의
진술은 여전히 상반되어 있었다.
장과장과 남형사는 연박사를 만나고 돌아온 윤형사에게
자세하게 면담 내용을 듣고는 마지막 희망마저 사라졌다는 듯한
표정들을 짓고 있었다.
"미꾸라지가 달리 없군요. 윤형사, 연박사에게 정면으로
물어보지 그랬어. 어느 지점에서 잔을 차창 밖으로 버렸는지
말이야."
남형사는 어깨심이 잔뜩 들어가 있는 웃옷을 벗는 윤형사에게
퉁명한 어조로 말했다.
"물어봤자 모른다고 대답할 건 뻔할텐데 뭐. 그리고 물어볼
분위기가 아니었어."
"저녁 5시부터 7시까지 원장실에서 장부를 조사하고 있었다고
해?"
"그렇다고 한 마디로 딱 잘라 말하는데 무슨 할 말이 있어."
윤형사는 화장한 눈을 아래로 내리깔면서 신경질 섞인
목소리로 대꾸했다.
"과장님, 이제 방법이 없습니다. 연박사와 유여사를 임의동행
식으로 연행해서 결판을 내야 합니다. 둘 중에 하나가 분명한데
시간을 끌 필요가 뭐 있습니까?"
남형사가 강경한 자세로 나왔다.
"이것 봐, 남형사. 그 두 분도 우리 경찰에게 협조할만큼
협조했어. 그런데도 범인을 밝혀내지 못하고 있는 건 우리
책임이야. 자네나 나나 수석이고 고인돌이란 말일세."
"아니 과장님, 무슨 말씀을 그렇게 섭섭하게..."
"아, 생각해봐? 진이 독살되고서부터 4개월, 5개월이
가까워오도록 자네나 나나 실적을 올린 게 뭐 있어? 봐, 쥐뿔도
없잖아. 자네 나한테 뭐라 그랬어. 사라진 칵테일 잔은 유여사가
감춘게 틀림없다구? 빈 잔에 대한 트릭은 유여사에 의해
이루어졌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구? 자네 생각은 틀렸어."
"과장님, 연박사의 진술은 어디까지나 공허한 메아리에
불과합니다. 저는 그 사라진 칵테일 잔이 반드시 독살에
사용되었다고 봅니다. 반 잔에 대한 의문 역시 독살과 결정적인
관계가 있다고 봅니다."
"있으면 뭐해! 연박사나 유여사는 진범이 아닌 것이 점점
기정사실화 되어가고 있는데."
"그러나 과장님, 연박사나 유여사는 똑같은 피해자입니다.
남편과 아내의 불륜으로 인해 정신적인 희생을 당하고 있다는
공동의식을 갖고 있습니다. 두 사람은 협박을, 어떤 제의를 받지
않았다고 말했지만 그건 모를 일입니다. 서로를 감살 수도 있는
관계입니다."
"그럼 자네는 연박사나 유여사가 불륜을 눈치채고 있다고
생각하나?"
"저는 두 사람 모두 알고 있을거라고 확신합니다."
"그런데 진은 왜 죽여? 지네들끼리 치고 받고 싸울 일이지.
성주라는 왜 실종되고?"
"윤보혜양을 독살한 건 강여사에 대한 경고일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뭐야? 자네 지금 그걸 말이라고 하나?"
장과장은 어이없어했다.
"저는 유여사가 강여사에게 최후의 경고를 그런 식으로 했을
수도 있을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질투심과 배신감에 불타 있는
복수의 여신은 냉철하고 냉혹한 행동만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럼 성주라양은 어떻게 된건가?"
"연박사의 분노 폭발이 아닐까요?"
"그럼 두 사람이 공모를 했단 말인가?"
"그건 잘 모르겠습니다. 유여사가 진을 독살함으로 해서
선두주자마냥 복수의 깃발을 올리자 연박사도 포문을
연건지도요."
"무언의 공범이라..., 그러나 자기가 참을수 없다고 애매한
인명을 죽여? 그건 이해할 수 없는 행위야."
"그렇지 않습니다. 두 진은 강여사의 인맥입니다. 효과면으로
봐서는 최대치입니다."
"그러나 권의원과 강여사는 마지막 불꽃을 태우듯이 정열을
불사르고 있어. 마치 아무 것도 모르고 있는듯 또는 죽음이
두렵지 않다는 듯 시간만 나면 하나가 된단 말일세."
"그럼 제3의 살인이 예측되지 않습니까? 아마도 다음 번의
희생자는 강여사가 될지도 모릅니다. 순서가 어떻게 될지는
모르지만 권의원도 다음 번 희생자 속에 포함될 수도 있다고
봅니다."
"그럼 성주라양의 실종은 어떻게 되는건가? 머리카락조차
발견되지 않고 있는 상황인데."
"저는 이미 성주라양은 살해당했다고 봅니다. 시체를 유기한
게 틀림없습니다."
장과장과 윤형사는 성주라가 범인에 의해 살해되었을 거라는
추측에 동감의 표사를 나타냈다.
"결국 성주라양은 연박사가 살해해서 시체를 없앤다는 얘긴데,
어떻게 감쪽같이 일을 처리했을까......"
"성주라양의 실종 이후 교통사고를 당한 여성들이나 여러 가지
사건에 의해 숨진 변사체들에 대한 자료를 수집해서
분석해보았지만 모두 성주라양과는 거리가 먼 여성들이었습니다.
결론적으로 말씀드린다면 성주라양의 시체는 땅 속 깊이
매장되었거나 화장처리되었을 겁니다."
그러나 남형사는 자신없는 음성으로 말했다.
"과장님, 제가 연박사를 만나고 병원문을 나오면서 느낀 것은,
이건 어디까지나 제 육감 또는 느낌에 불과하지만 연박사의
미소에서 저는 승리자의 미소를 엇볼수 있었어요. 23일의
알리바이를 봐도 연박사의 두 시간 동안의 빈 시간은
주목할만해요. 그리고 연박사는 병원에서 출퇴근을 하고 있어요.
강여사와는 별거중이었기 때문에 그의 행동은 비교적 자유로운
편이었어요. 솔직히 말씀드려서 연박사의 눈빛에서 범죄의
냄새를 맡았어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연박사의 대답 한 마디 한
마디는 사건과는 전혀 관계없는 이방인 같아 보였어요. 그가
가장 안전하고 편안하게 범죄를 저지를 수 있는 장소를 확보하고
있어요. 병원이 최적지지요."
"병원 내부에서?"
장과장이 실눈을 떴다.
"만약에 성주라양이 4시 반에 유여사 댁을 나와서 40분 거리에
위치한 연박사의 병원으로 들어갔다면 그것도 비상계단으로
5층의 원장실로 올라갔다면 시간상으로 맞아떨어져요."
"음, 그러니까 성주라양이 원장실에 들어간 시간은 5시
10분이라고 보고 그 시각부터 포로가 되었다, 그렇게 되는건가?"
"그렇지 않으면 연박사가 비상계단으로 내려가서 자가용을
타고 유여사 댁 골목길에 대기해 있었을 수도 있습니다.
성주라양이 그날 그랜저 승용차를 타고 나오지 않은 것도
음미해볼 대목입니다. 연박사와 사전 약속이 있었다면 차를 몰고
나오지 않을 수도 잇는 거니까요. 연박사가 그 두 시간 동안
병원과 유여사 댁을 왕복할 시간은 충분히 됩니다. 그리고
비상계단을 통해서 원장실로 데리고 들어갈 수도 있고, 아니면
남형사가 얘기한 대로 승용차 안에서 클로로포름이나 마취주사
같은 걸로 의식을 잃게 만들어서 비상계단을 통해 원장실로
들어갔을 수도 있고요."
"가능성은 있는 얘기군. 그러나 성주라양은 내가 알기로는
170이 넘는 제법 큰 키야. 사람들 눈에 띄지 않고 그녀를
원장실까지 쉽게 운반할 수 있을까? 그것도 5층이나 되는
비상계단을 어깨에 걸쳐메고 말이야."
"아, 이럴 수도 있겠군요."
남형사가 새로운 사실을 발견한 듯한 음성으로 말을 꺼냈다.
"승용차 안에서 살해하고 나서 여행용 가방 같은 큰 가방 속에
시체를 처박아놓고 정문으로 당당하게 들어가는 겁니다. 1층에
있는 엘리베이터 앞까지 고작해야 몇 미터나 되겠습니까? 설사
아는 사람이 물어봐도 짐이라고 하면 그만이니까요. 설마 그
가방 속에 시체가 들어있을거라곤 누가 상상이나 하겠습니까?"
"그럼 시체는 어떻게 처리했을까?"
"그 곳이 병원이니까 밤중에 관에 몰래 넣어서 공동묘지
같은데 연고 없는 시체라고 하면서 묻었거나 화장터에 가서 재로
만들었을 수도 있지 않을까요? 사망진단서 같은거야 그가
의사니까 얼마든지 위조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비현실적인 얘기 같으면서 사실처럼 받아들여지는군."
장과장은 입술을 치켜올리고 있었다. 그는 한참동안 깊이
생각에 잠겼다가 고개를 가로저으며 천천히 입을 뗐다.
"그러나 연박사와 성주라양의 관계는 매우 투명할 정도로, 두
사람이 은밀하게 약속을 주고 받았을 사이로는 여겨지지 않아."
"특별한 사이로서 만났다기보다는 평범한 관계로 유인했을
수도 있다고 봅니다. 예를 들어서 연박사가 성주라양에게 아내와
결합을 하고 싶은데 중간 역할을 해줄 수 없겠느냐, 또는 이번
사건으로 단둘이 만나서 중요한 얘기를 하고 싶은데 경찰에
정보가 들어갈지 모르니까 아무한테 얘기하지 말라 하면서
얼마든지 유인할 수 있는 것 아닐까요?"
남형사가 말했다.
"음, 자네의 말을 들으니까 유인도 그렇게 어려운 일은
아니군."
"그럼요. 안면이 있고 친분이 있는 관계니까요. 성주라양이
강여사에게 많은 도움을 받아 미스코리아 진에 당선될 수
있었으니까 그녀가 연박사를 생각하는게 좀더 가깝게 여길 수도
있었을 겁니다."
"과장님, 저도 연박사가 성주라양을 납치했을 거라는데는
심증이 가지만 그보다 앞서 용인 별장에서의 독살 상황을 또다시
재분석해볼 필요성이 있다고 생각해요."
"또 재분석인가?"
장과장은 골치 아픈 표정을 지었다.
"윤보혜양이 독살되었을 때 범인은 홀에서 춤을 추고 있던
사람들 중에 숨어있을 거라고 확신했어요. 그런데 시간이 갈수록
홀에서 춤을 추던 사람들은 범인이 될 수 없다는 쪽으로
기울어졌고, 지금은 용의자라고 부를 수 없을 정도로 깨끗이 그
혐의가 사라졌어요. 오히려 지금은 유여사, 특히 연박사가
유력한 용의자로 점찍혀져 있는 상탭니다. 만약에 연박사의
진술대로 사라진 칵테일 잔이 우연하게 호주머니 속에 들어가
있었던 것이 사실이라면 진범은 달라집니다. 윤보혜양이 반 잔을
마시고 두번째로 남은 반 잔을 마신 시간은 불과 30초
사이입니다. 얼핏 생각해보면 두 사람 중에 한 사람이
파라티온을 탔을 거라고 생각되지만 저희가 처음에 추리한 대로
용의자로 몰릴 것을 뻔히 알면서 그런 무모한 짓을 저질렀을
거라고는 상식적으로라도 납득이 가지 않아요."
"그러나 범인은 고정되어 있잖아. 홀에서 춤을 추던 사람이
30초 안에 파라티온을 집어넣을 수는 없어. 사라진 칵테일 잔에
대한 의문이 풀렸다고 해도 범인은 마찬가지야."
장과장은 결론 내리듯이 말했다.
"과장님, 비디오 테이프 복제품 좀 다시 봤으면 하는데요."
윤주희 형사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장과장이 서류함에서 건네준
테이프를 틀었다. 그녀는 석연치 않은 표정을 지으며 초대객들이
입장하는 장면부터 유심히 살펴보기 시작했다. 옆잘에 앉아 있던
장과장과 남형사는 지겨운 표정을 지으며 입이 찢어져라 하품을
하고 있었다. 윤형사는 진이 최초로 잔에 입술을 댄 화면을 찾고
있었다. 그러나 화면 속에서는 그녀가 최초의 잔을 들고 마신
장면이 없었다.
"이상한데요, 화면에는 잔을 들고 마시는 장면이 없는데요."
윤형사는 혼잣말처럼 중얼거리며 화면을 다시 중간으로
돌려놓았다. 여비서가 칵테일을 날라오는 장면부터 예리한
눈빛으로 지켜보던 그녀는 진이 쓰러질 때까지 입술을 꼭 다물고
앉자 있었다. 그러다가 윤형사는 또다시 화면을 중간으로
돌려놓았다.
"이상해......"
윤형사는 화면 속에서 새로운 의문점을 발견했는지 연신
고개를 갸웃거리며 수첩을 꺼내 체크를 하기 시작했다.
김잔건 아나운서와 나비향양이 춤을 추러나갈 때까지 네 잔의
칵테일은 처음 그대로였다. 그리고 30초 후에 보혜양이 칵테일
잔은 반잔으로 둘어들었다. 모든 것은 이 30초 안에 이루어졌다.
유여사가 자리 이동을 했고 칵테일 잔도 한 테이블로 모인
셈이고 칵테일 잔도 사라졌다.
윤형사는 갑자기 뭔가 발견한 듯한 표정을 지으며 화면을
후진시켰다. 여비서가 또 칵테일을 날라오고 있었다.
"역시 잔을 들고 마시는 장면이 없어......"
윤형사는 고개를 끄덕이며 만족스런 표정을 짓고 있었다.
옆에서 윤형사를 지켜보고 있던 남형사가 궁금한 눈빛으로
입술을 움직였다.
"뭐가 없다는거야? 진이 처음으로 잔을 입에 대는 장면은
안찍혔잖아."
"그게 아니고, 연박사가 두번째 칵테일 잔을 마시는 장면이
아니라 최초로 마시는 장면이 없어."
"그게 뭐 대수로운 일이라고 그래. 당연히 안 찍혔겠지."
"그게 아니야. 잘 봐봐. 김진건 아나운서와 나비향이 춤을
추러 나가기 전까지 세 잔의 칵테일, 아니 네 잔의 칵테일 잔은
그대로였어. 그런데 캠코더가 홀을 비추자마자 대변화가
일어난거야. 30초 동안에 말이야. 잘봐봐. 연박사가 두번째로
칵테일을 마시는 장면은 분명히 나타나있어. 유여사가 홀을
보면서 즐거운듯이 얘기를 하고 있고 연박사는 잔을 들어 단숨에
마셨어. 그 시간이 30초가 지난 상태에서 불과 10초도 안 돼."
"난 무슨 얘긴지 하나도 모르겠네."
남형사는 멍청한 눈빛으로 깊은 생각에 잠겨있는 윤형사를
바라보았다.
"연박사와 유여사의 진술에는 분명히 엇갈린 진술이 있어.
한쪽은 유여사가 가져온 것이라고 했고 한쪽은 연박사가
가져오라고 시켰다고 했어. 그러나 연박사가 최초의 잔을 마시지
않았다면 두 사람은 모두 거짓 진술을 하고 있는거야."
"뭐라구? 연박사가 첫 잔을 마시지 않았다구?"
장과장과 남형사는 서로의 얼굴을 쳐다보면서 믿기지 않는
표정을 지었다.
"연박사는 절대로 첫 잔을 마시지 않았어."
윤형사가 단정짓듯이 말했다.
"윤형사, 그건 윤형사의 일방적인 생각일수 있어. 30초
동안이라면 칵테일 한 잔은 얼마든지 마실수 있어. 5초면 빈
잔이 될 수 있단 얘기야. 김진건 아나운서와 나비향양이 춤을
추러 나가자마자 잔을 들어 단숨에 마시고 유여사에게 주인없는
잔을 달라고 할 수도 있는 일이야. 시간상으로도 30초는 결코
짧은 시간이 아니야."
장과장이 지적했다.
"물론 시간상으로는 가능한 일이겠지요. 그러나 한 가지
사실만큼은 시간상의 제약을 받고 있다는 사실예요. 연박사가
범인이라고 가정한다면 그에게는 파라티온을 탈 시간적 여유가
거의 없어요. 자, 30초라는 시간을 계산해보세요. 윤보혜양도 그
30초 동안 잔을 들어 반 잔을 마셨어요. 그리고 유여사가 양손에
잔을 들고 오른쪽 테이블로 건너왔어요. 물론 연박사도 잔을
들어 마셨고 그의 말대로 담배를 피우기 위해 주머니 속의
담배와 라이터를 찾았어요. 시간이 없었어요. 더욱이 아무도
몰래 진의 칵테일 잔에 파라티온을 타려면 유여사가 건너오지
않은 상태에서 일을 실행에 옮기는 게 자연스러운데 오히려
그렇지가 안았어요. 30초는 살인을 시도하기에는 너무나 짧은
시간이예요."
윤형사가 확고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럼 연박사와 유여사는 진의 칵테일 잔에 파라티온을 타넣지
않았다는 얘긴가?"
장과장이 물었다.
"네, 연박사와 유여사는 절대로 진을 독살하지 않았다고
장담할 수 있어요."
"윤형사, 그런 말이 어딨어. 그럼 홀에서 춤추던 사람들 중에
누군가가 그 30초 동안에 투명인간이 돼서 잔에다 파라티온을
타넣었단 말인가? 그리고 화면 속에서 춤을 춘 여덟 사람은
귀신이란 말인가?"
장과장은 윤형사의 자신감에 찬 얼굴을 보면서 머리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유형사, 나도 과장님의 의견에 동감해. 그럼 연박사는 자기
잔을 어디에 숨겼단 말이야. 그것도 칵테일이 들어있는 잔을
말이야."
"어휴, 제 말뜻은 그런게 아니예요. 좀 냉철하게
생각해보세요. 이 테이프를 보면 범인은 연박사와 유여사밖에
없어요. 홀에서 춤을 추던 사람들이 절대로 범인이 될 수
없어요. 그리고 만약에, 그래서 재가 아까 만약에라는 전제를
깔았지만 연박사와 유여사가 범인이 아니라면 윤보혜양은
자살했다는 결론밖에 안 나와요."
"자살? 윤보혜양이 자살했다구? 그건 말도 안 돼."
남형사 부정하면서 큰 소리로 말했다.
"물론 윤보혜양은 절대로 자살하지 않았어요. 그러게 제 말좀
끝까지 들어보라니까. 30초 동안에 나타난 상황을 보면 연박사도
유여사도 범인이기 힘들다는 사실이예요. 그럼, 결론은 딱 한
가지예요. 이 테이프 자체를 부정하는거예요."
"뭐라구?"
장과장이 놀란 얼굴로 말했다.
"이 테이프의 제공자는 박만하라는 사기꾼이예요. 이 테이프는
조작되었을 수도 있어요."
장과장과 남형사는 한참동안 벌린 입을 다물지 못하고 있었다.
"조, 조작을 했다면......"
남형사가 가슴을 진정시키며 윤형사를 보았다.
"지금으로서는 그렇게밖에 달리 해석할 수가 없어요. 이
테이프가 방송국에 넘겨진 시각은 진이 독살된지 20시간이
지나서였어요. 그 동안에 테이프를 얼마든지 조작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해요."
"그게 가능한 일일까? 이렇게 완벽하게 말이야."
"얼마든지 가능해요. 방송국에 준 테이프가 원본이 아닐 수도
있어요. 비디오 두 대만 있으면 조작은 쉽게 이루어질 수
있어요."
"그러나 조작이라는 게 그렇게 간단한 일이 아니잖는가?"
장과장은 자신은 비디오에 관해서는 문회한이라는 듯한
눈빛으로 윤형사를 보며 말했다.
"저 역시 화면 조작에 대한 고차원적인 기술법은 잘 모르지만
조작은 얼마든지 할 수 있다고 생각해요. 예를 들어서 똑같은
장면이나 비슷한 장면이 든 테이프가 또 하나 있다고
가정해보고, 물론 용인 별장 내의 홀과 테이블을 찍은
테이픕니다. 거기다가 박만하 자신이 직접 찍은 그날의 테이프를
가지고 그럴듯하게 끼워 맞추기를 할 수 있어요. 한 화면이나 두
화면 정도는 감쪽같이 바꿔치기할 수 있다고 봐요."
"음, 그건 간단하겠군. 그렇지만 똑같은 화면이나 비슷한
테이프를 어디서 구하겠나? 용인 별장에서의 파티는 이번이
처음이었다는데."
"그, 그렇네요...... 그치만 캠코더가 두 대였거나 하면
가능한 일이라고 생각해요."
"그건 또 그렇군......"
"윤형사, 만약에 윤형사 말대로 테이프가 원본이 아니라면
박만하가 가짜 비디오 테이프를 방송국에 건넨 속셈은 뭘까?"
남형사가 물었다.
"이건 어디까지나 추측에 불과한데, 그 테이프에 진범이
나타나 있지 않았을까?"
"그럼 박만하는 범인을 알고 있다는 얘기가 성립되는군."
"또 돈벌이가 생긴거지."
"아무래도 박만하를 연행해야겠어요."
남형사가 장과장에게 말했다.
"그 전에 테이프가 조작되었다는 증거를 잡아야 해. 그런
다음에 목덜미를 잡고 끌고 와도 늦지 않아."
윤형사는 테이프를 들고 방송국으로 찾아가 베테랑 편집자에게
테이프가 조작되었는지 기술적인 확인 작업을 의뢰하였다.
그러나 베테랑 편집자는 테이프를 다 보고나서 한 마디로
불가능하다는 대답을 했다. 그런데 베테랑 편집자는 실망한
표정이 역력한 윤형사를 보고 안스러웠는지 테이프 조작에 대한
가능성을 두 가지 알려주었다.
"자료를 이용한 게 아니면 리허설 장면을 찍을 수도 있습니다.
이 테이프에서는 지운 흔적이 없어요. 헌데, 이 테이프에 나타난
화면 중에 아주 특이한 촬영이 딱 한군데 있어요. 바로 이
부분이죠. 네 쌍이 춤을 추고 있는 모습을 비추다가 두 테이블을
한 화면으로 잡았습니다. 그러고 난 다음의 화면입니다. 바로 이
부분입니다. 캠코더는 분명히 한 테이블만을 아주 짧게 2초 가량
잡았군요. 사람 얼굴은 포착하지 않고 테이블만 비췄어요. 세
잔의 칵테일 잔만이 화면에 나타나는군요. 바로 이 점이
의문스런 장면입니다. 캠코더는 한 테이블만 비추기 전까지 쉴
사이 없이 움직였어요. 화면이 정지된 적이 없어요. 그런데
이때에는 캠코더가 촬영을 일시 정지한 상탭니다. 그리고 다시
작동 스위치가 움직였습니다.
그런데 그 다음부터는 또다시 쉴 사이 없이 움직이고
있습니다. 끼워맞췄다면 다음 컷트로 넘어가기 전에, 그러니까
유진숙 회장이라는 여자의 얼굴이 이어져 보이지 않고 새로운
컷으로 찍혀져 있어야 되는데 계속 연결되어 있어요. 이 점이 참
애매한 장면입니다. 쉽게 이해를 구해드리면 TV연속극을 볼 때
카메라는 쉴 사이 없이 화면을 내보내는 게 아니라 한 신 한 신
촬영을 한 화면입니다. 영화도 마찬가지지요. 그러나 이
캠코더는 쉴 사이 없이 홀 안을 촬영하고 있어요. 결론적으로
말씀드린다면, 이 테이프를 찍은 캠코더 기사는 한 테이블만을
2초 가량 찍을 때만 캠코더 기능을 일시 멈췄다가 이후부터는
계속 쉴 사이 없이 촬영을 했다는 얘기가 됩니다. 그러니까
조작했다는 건 용어상으로도 맞지 않고 끼워맞추기도 하지
않았다는 결론입니다. 그리고 촬영 위치와 각도를 볼 때 기록용
테이프라는 걸 염두해서인지 자리 이동을 거의 하지 않고 한
군데에서 촬영을 하고 있어요. 조작은 절대로 하지 않았습니다."
"그럼 리허설 장면을 찍을 수도 있다는 말씀은 무슨
뜻인지요?"
"말 그대로 네 쌍이 춤을 추고 난 후의 두 테이블을 찍은
장면부터 다른 파티 장면을 연결시켜 놓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 화면상에 나타난 그림으로는 그것이 불가능하다는
얘기밖에 드릴 수가 없군요. 보면 아시겠지만 전반부의 화면과
후반부의 화면에 나타난 초대객들의 의상과 헤어스타일이 전부
똑같잖습니까. 홀 안에 있던 사람들 모두가 리허설을 하지
않았다면 어림없는 얘기지요. 전반부가 리허설이고 후반부가
실제 파티라 해도 마찬가지입니다. 한 마디로 황당무계한 얘기에
불과합니다."
"가능성조차도 없는 일이예요? 그럼 또 다른 가능성은
없을까요?"
"마지막으로 한 가지가 있습니다. 캠코더가 두 대였다면
조작은 가능합니다."
"두 대로요?"
"그렇습니다. 전반부는 A캠코더로 촬영했고 후반부는
B캠코더로 촬영을 했다면 테이프를 조작할 수도 있습니다."
"쉽게 설명해주시겠습니까"
"거의 같은 장소와 위치에서 처음부터 두 대의 캠코더가
촬영에 들어갑니다. 그러면 촬영이 끝났을 대 두 개의 테이프가
탄생됩니다. 그러면 캠코더 기사는 두 테이블이 화면에 나타나는
그 순간에 제2의 테이프를 연결시킵니다. 그러면 이 테이프처럼
작동이 일시 중단된 화면에 이어 계속 촬영이 되고 있는 그림을
만들어낼 수 있습니다."
"정말 그렇겠네요."
"그러나 캠코더 기사가 한 사람밖에 없었다면 불가능한
촬영이지요. 그러나 이 테이프의 화면을 보건대 후반부라
불리우는 화변은 캠코더의 이동이 전혀 없었어요."
"그렇군요. 미스코리아 진이 숨지기까지 불과 몇 분밖에 안
됐으니까요."
"만약에 캠코더 기사가 두 대의 캠코더로 홀 촬영을 하지
않았다면 이 가능성 역시 무위에 불과합니다. 그러나 제2의
캠코더를 사용한 것이 분명하다면 역시 감시 카메라 같은
고정카메라를 이용했을 수도 있지만 한 사람이 전부
촬영했다고는 보여지지 않는군요. 그 증거로 후반부의 1분
가량의 카메라는 진의 얼굴을 클로즈업했다가 테이블을 잡고
다시 진의 안색이 변하는 얼굴을 보착한 걸로 봐서 불가능한
일이라고 생각해요."
"잘 알았습니다. 정말 고마웠어요."
실낱 같은 가능성을 가지고 시경으로 와 강여사와
금변호사에게 전화를 걸어 확인해 보았지만 박기사는 그날
분명히 한 대의 캠코더 만으로 촬영을 했다고 증언했다. 그리고
리허설 파티가 있었느냐는 윤형사의 질문에 전화응답자들은
어이가 없다는 듯 웃기까지 했다.
결국 박만하에 대한 의심은 여지없이 깨져버린 꼴이 되었다.
테이프가 조작되지 않은게 기정사실이라면 용인 별장에 대한
독살은 완전히 미궁 속으로 빠져버린 결과가 되는 것이다.
장과장과 남형사는 풀이 죽어있는 윤형사를 위로하고 연박사에
대한 용의점을 본격적으로 부각시켜 놓았다.
"역시 모든 용의점은 연박사에게로 집중되고 있어. 윤형사는
30초 동안의 독살이 어렵다고 했지만 연박사가 진의 옆자리에
앉아 있었다는 사실이 모든 것을 증명해 주고 있어. 어쨌든 잔을
사라지게 한 장본인은 연박사고 나비향양의 잔을 유여사에게
가져다 달라고 한 것도 연박사가 틀림없어. 범인은 연박사야.
이제부터 증거를 확보하는 수사에 전력투구해야겠어."
장과장은 비장한 각오로 말했다.
이때, L호텔에서 발생한 변사체 살인사건을 수사중인 관할
경찰서 수사반장한테서 전화가 걸려왔다.
"장과장이시오? 중요한 정보가 있어서 알려드리는 겁니다만,
L호텔에서 간괴사로 숨진 여자의 신원을 알려온 전화 제보가
있었소. 전화 목소리의 주인공은 남자인지 여자인지 잘
모르겠소. 가성을 써서 잘 모르겠다는군요. 당직 순경이 전화를
받았는데 L호텔의 여자 신원은 6월 23일에 실종되었던
성주라양이라고 하더군요."
"뭐라구요?"
장과장은 잘못 들었지 않나 싶어 다시 물었다.
"장난 전화라는 생각을 안 한건 아니지만 제보자는 L호텔에서
죽은 여자는 성주라입니다라고 단 한 마디만 하고 전화를
끊었다는 겁니다."
"일고의 가치도 없는 전화요. 알려준 건 고맙지만 장난 전화에
일일이 신경을 쓰다보면 오래 못 살아요. 그건 그렇고 이번
월급날에 족발집에 가서 소주 한잔 합시다."
수사반장과 동생, 형님하는 사이인 장과장은 즐겁게 전화를
끊었다.
"오총경도 물러날 때가 됐어. 그 돼지코 여자가
성주라양이라니......"
"과장님, 장난 전화라니요......"
남형사가 궁금증을 나타냈다.
"살다보니 별 괴상한 장난 전화 내용도 다 들어보는군. 아,
글쎄 L호텔에서 죽은 그 추녀보더 더 추녀인 여자가
성주라양이라나."
"성주라양이요? 그 Y가요?"
남형사도 장과장과 똑같이 어이없는 표정을 지으며 윤형사를
보았다. 윤형사도 무표정한 얼굴로 두 사람을 보고 있었다.
"이런 장난 전화가 어디 한두 번이야. 그건 그렇고 연박사가
성주라양을 납치해서 시체를 처리한 과정은 샅샅이 파헤쳐야 해.
성주라양이 실종된지 넉달이 훨씬 지났는데도 머리카락 하나
발견되지 않고 있다는 건 우리 경찰의 수치야."
"과장님, 이제야 안개 속에 가려진 범인의 얼굴을 볼 수 있게
됐군요. 그동안 끝없는 미로 속에 갇혀서 갈팡질팡 한걸
생각하면 억울하다 못해 원통하기까지 합니다."
장과장과 남형사는 사건 종결을 눈 앞에 두고 있다는 안도감에
여유까지 찾고 있었다.
"잠깐, 잠깐만요, 과장님. 그런 내용을 전화로 제보한 사람은
누구라고 하던가요?"
"응? 오, 가성을 써서 잘 모르겠다고 하더군."
장과장은 귀찮다는 듯 말했다.
"과장님, Y가 성주라양이라면......"
"장난 전화라니까."
장과장은 신경질을 내면서 윤형사의 말을 가로막았다.
"범인은 연박사가 틀림없어. 살인동기가 아직 희박하긴 하지만
모든 화살표는 연박사에게로 향해져 있어. 그러니까......"
"아니예요, 과장님. Y가 성주라양이 될 수도 있어요.
가능해요."
"자다가 봉창 두드리는 소리 그만하고 연박사를 구속시킬 수
있는 물적 증거나 확보하는데 총력을 다해."
"Y가 성주라양일 수도 있어요."
윤형사는 자기 주장을 굽히지 않았다. 그러자 남형사가 그녀의
눈빛을 찬찬히 살펴보다가 깜짝 놀라는 표정을 지었다.
"윤형사, 그래. 그런 가능성이 있었어."
남형사가 흥분을 하면서 장과장을 보았다.
"과장님, 성주라양의 얼굴이 바뀌었을 수도 있어요, Y로.
윤형사, 그렇지?"
"가능한 일이예요. 성형수술이 이루어졌을 가능성이 있어요.
시체부검 소견서에도 기록되어 있잖아요."
"......"
장과장은 두 형사를 번갈아 바라보면서 고개를 갸웃거렸다.
윤형사가 침착한 어조로 입술을 움직였다.
"과장님 말씀대로 모든 화살표는 연박사에게로 향해져 있어요.
Y가 성주라양이라면 성형외과 박사인 연박사가 진범이라는데는
의심의 여지가 없어요."
"그래?"
장과장은 굳었던 얼굴을 활짝 피면서 생기에 차 있었다.
"성형수술이 이루어졌을 가능성이 있는 이유로서는 성주라양이
납치된 지 넉달이 넘어서 Y가 호텔에 변사체로 등장했다는
점이예요. 소견서 내용과 일치해요. 그리고 성형수술은 넉넉잡고
이틀이면 얼굴을 바꿀 수 있어요. 그 나머지 시일은 수술자국이
아무는데 소요되었을 거예요. 그리고 또 연박사의 수준이라면
성주라양의 얼굴을 아무도 모르게 바꿔놓는 건 쉬운 일이었을
거예요. Y의 팔에 다섯 개의 주사바늘 자국이 나 있었던 것은
마취상태를 유지시키기 위해서 지속적으로 주사를 놓았을 것은
자명한 사실이구요."
"그럼 니시무라 다니구찌라는 일본인의 정체는 어떻게 되는
건가?"
장과장이 물었다.
"Y가 성주라양이 확실하다면 연박사가 일본인 행세를 한 게
분명해요. 지금까지 Y의 신원이 밝혀질 수 없었던 이유가 바로
거기에 있었다고 생각해요. 그 일본인이 Y를 나체로
만들어놓았던 것도 의상에 의해 신원이 밝혀지는 것을 계산에
넣었던 것이 분명해요. 헤어 스타일도 바꿨구요. 성주라양은
실종 당시 퍼머기가 있는 긴머리였는데 Y의 헤어 스타일은 귀가
보일 정도로 짧은 머리였어요. 미용실하고는 거리가 먼
머리였지요."
"음, Y가 성주라양일 수도 있다......, 결코 불가능한 얘기는
아니구만."
장과장은 크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다시 윤형사를 보았다.
"......그렇다면 Y가 성주라양일지도 모른다는 이 가설을
어떻게 증명하지? Y의 시체는 이미 한 줌의 재로 변해서 이
지구상에서 사라졌는데......"
"시체부검 결과가 있잖아요. 그리고 성주라양의 신상자료를
만들면 충분히 비교가 될 수 있어요. 카, 혈액형, 신체부위에
대한 특징 등등 확인은 어렵지 않아요."
"좋아, 그러면 장난 전화에 놀아나는 셈치고 확인수사에
들어가보기로 하지."
이튿날 오전, 윤형사는 성주라양의 아파트를 방문해서 실의에
빠져있는 그녀의 부모를 만나 신체부위에 대한 특징과 어렸을
때부터 납치되기 전까지의 사진들을 입수해서 Y의 현장 사진첩과
비교해보았다. 특히 윤형사가 침대에서 나체로 숨진 Y의 사진을
모친에게 보여주자, 모친은 한참동안 사진 속을 들여다보더니
눈가에 작은 경련을 일으키면서 떨리는 음성으로 말하는
것이었다.
"목길이가 똑같아요. 피부도 똑같아요. 얼굴은 분명히 주라가
아니지만 목이 똑같아요. 젖 모양도, 젖꼭지도 똑같아요. 배꼽
모양도 똑 같아요. 하체도 같아요. 음모 모양도 같고요. 그런데
얼굴은 아니예요. 목 아래부터는 우리 주라하고 비슷한데 얼굴은
아니예요."
"발 모양이나 발톱 모양 좀 봐주시겠어요?"
"발 모양도 비슷한 것 같아요. 발톱 모양도요."
"주라양의 신체에 무슨 특징 같은 건 없나요? 예를 들면
수술한 자국 같은 것 말이예요."
"없어요. 그런데......"
모친은 한참동안 망설이다가 끝내 입을 다물어버렸다. 몹시
고민하는 눈치였다.
"따님을 찾으려면 조금도 꺼려해서는 안 됩니다. 조그만거라도
따님의 행방을 찾는데 결정적인 도움을 줄 수 있어요."
"사실은, 사실은...... 주라가 수술을 한 적이 있어요.
그렇지만 이건 다른 사람들이 알아서는 안 될 비밀이예요.
윤형사님만 알고 계신다고 약속하신다면 말하겠어요."
모친은 윤형사에게 다짐을 받고서 비로소 말문을 받았다.
"주라는 미스코리아에 당선되기 전에 성형수술을 받았어요.
그렇다고 대수술은 아니었어요. 조금 고쳤을 뿐이예요."
"아, 네...... 그럴 수도 있지요."
소견서 내용과 똑같다!
윤형사는 애써 대수롭지 않은 표정을 지으며 마음놓으라는 듯
미소까지 지어보였다.
"어느 병원에서 수술을 했나요?"
"연성철 박사님이 무료로 수술을 해주셨다고 하더군요."
"연박사님이요?"
"참 좋으신 박사님이세요. 그 분의 부인도 현숙하시구요."
"성형수술을 하고 나니까 수술 전보다 더 예뻐졌나요?"
"몰라볼 정도로 이뻐졌어요. 수술이 굉장히 잘 됐다고 주라가
거울 앞에서 무척 좋아했어요. 불쌍한 것...... 내가 보기에도
너무나 잘 됐어요. 그것도 무료로 해주었으니......"
그렇게 말하면서 모친은 눈물을 흘렸다.
"따님이 수술 전에 부모님의 허락을 얻었나요?"
"......사실은 나도 몰랐어요. 강여사님하고 프랑스로 석달
동안 패션쇼를 열기 위해 같이 떠난 줄로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어요. 그동안 연박사님 병원에서 수술을 받았던 거였어요.
수술하는 걸 처음에 알았다면 결사반대했겠지만 다 끝내고 나서
주라에게 자초지종 얘기를 다 들었을 때 오히려 연박사님과
강여사님이 고맙기까지 했어요. 거기다 미스코리아 진에
당선까지 됐으니......"
모친은 계속 울먹였다.
"따님이 스스로 수술을 원했었나요?"
"내, 그렇게 알고 있어요."
모친은 더 이상의 질문은 괴롭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수술한 시기는 언제쯤이었나요?"
"......주라가 미스코리아 대회에 나가기 8개월 전이었어요.
그리고는 두 달 후에 서울지역 예선대회에 출전했으니까요."
"잘 알았습니다."
윤형사는 성주라양의 방에서 머리카락과 음모를 찾아내서
사진과 함께 시경으로 돌아왔다. 성주라양의 머리카락과 음모를
국립과학수사연구소에 보낸 윤형사는 한시간이라도 빨리 결과가
나오기를 고대했다. Y의 머리카락과 음모 등이 사체부검을 했던
연구소에 보관되어 있기 때문에 쉽게 결과가 나오리라.
윤형사는 연구소로 분석 결과를 알아보기 전에 Y의 혈액형과
키, 신장 등을 기록카드에서 알아보았다. 모든 것이 성주라양과
일치하였다.
윤형사는 당연한 일치라는듯 별로 기뻐하지 않는 표정으로
국립과학수사연구소의 특수물리 분석실장에게 전화를 걸었다.
윤형사에게 사건의 개요와 자세한 상황을 들었던 전박사는
특별히 신경을 썼는지 자신있는 음성으로 결과를 알려주었다.
"아직 우리나라에서는 활용되고 있지 않지만 내 특별히
윤형사의 당부도 있고 해서 방사성 동위원소 분석법으로 Y의
머리카락과 피해자의 머리카락을 식별해봤어요. 이 방사성
동위원소분석에 의한 개인 식별은 거의 일백 퍼센트의 정확도를
갖고 있어요. 이번이 비공식적이긴 하지만 DNA활용 수사에
있어서 첫 시험 케이스가 되겠는데 Y의 머리카락과 피해자의
머리카락은 한 개인의 머리카락이 확실해요. 음모도 마찬가지고
L호텔의 시체가 선주라양이라는 사실에 나도 놀랐어요."
"정말 감사합니다, 박사님."
이제 남은 일은 연박사가 성주라양을 유인해서 성형수술한
증거를 확보하는 일만 남았다.
윤형사는 즉시 분석결과를 장과장에게 보고했다.
"가증스런 인간이군. 조물주가 따로 없군."
장과장은 사건 해결의 기쁨보다는 분노의 표정을 짓고 있었다.
"역시 연박사의 두 시간 동안의 불확실한 알리바이가
성주라양을 유인하는데 사용되었군요."
남형사가 말했다.
"과장님, 연박사의 살인동기도 서서히 드러나고 있어요.
성주라양이 성형수술 후에 미스코리아 선발대회에 출전했고,
윤보혜양 역시 성형수술을 받고 미스코리아 대회에 나간 게
확실해요."
윤형사가 자신있게 말했다.
"윤보혜양도?"
"인천에 살고 있는 여러 사람들의 증언을 연상해보면 한결같이
똑같은 대답이었습니다. 사장도 경리도 여주인도 박만하도
윤보혜양의 얼굴을 제대로 못알아봤습니다. 화장과 의상 때문에
못알아 볼 수도 있겠지만 윤보혜양이 성형수술을 했다면
알아보기가 무척 힘들었을 겁니다. 결국 연박사는 성주라양과
윤보혜양을 성형수술해준 게 분명합니다. 바로 여기에서
살인동기가 움텄을 게 확실합니다."
"공통점이 미스코리아 진이라는 사실과 강여사의 추천을
받았다는 점, 대충 이 정도인데......, 연박사가 왜 두
미스코리아 진을 살해해야만 했을까?"
남형사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생각에 잠겼다.
"그런데 지금도 한 가지 이상한 점은, 연박사는 성주라양과
윤보혜양과는 깨끗한 사이였다는 점이예요. 육체적으로
말이예요. Y가 처녀막이 보존되어 있는 숫처녀였다는 사실이
살인동기를 불투명하게 만들고 있어요."
"처녀막 재생수술도 있다고 하던데."
남형사가 말했다.
"소견서에는 인위적인 처녀막이라는 말이 없었어. 자연
처녀막이야."
"그것 참 알다가도 모를 일이군. 그럼 나비향양도 성형수술을
받았단 말이야?"
"그건 나도 알 수가 없어."
"이거 온 세상의 미녀가 전부 인공미녀로 느껴지니......,
이러다가 내 눈이 이상해지는 거나 아닌지 모르겠어."
남형사가 농담 반 진담 반으로 말했다.
"윤형사 남형사, 그 장난 전화를 건 아니 범인 체포에 있어서
결정적인 전화 제보를 한 사람은 누굴까? 연박사가 성주라양을
성형수술해서 L호텔에 버린 걸 어떻게 알고 신고를 했을까?"
장과장은 무척 궁금한 얼굴로 두 형사의 의견을 묻고 있었다.
"글쎄요. 과연 연박사가 단독으로 수술을 했을까요?
성형수술이란 게 혼자서는 무리였을텐데요. 그것도
대수술이었을텐데요."
남형사가 말했다. 이어서 윤형사가 얘기했다.
"제 느낌으로는 병원 내부 사람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어요.
그렇지 않으면 연박사를 수상하게 여긴 용인 별장의 초대객들 중
누군가가 제보를 했을 수도 있구요."
"음,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겠군. 자, 이제부터는 수색영장을
발부받아 연화병원 배부를 샅샅이 조사해봐야겠어. 성주라양이
성형수술을 받았던 흔적과 단서만 찾아내면 그 인간을
구속시키는 데는 별 어려움이 없을거야."
"조물주의 얼굴이 보고 싶군요. 미소가 사라지는 그 가증스런
얼굴을요."
남형사는 연박사의 얼굴을 떠올리며 회심의 미소를 흘리고
있었다.
12. 죽음의 볼룸댄스
수색영장을 손에 쥔 장과장과 수사관들은 경찰차를 타고
개선장군처럼 연화병원으로 달려갔다. 일몰시간쯤에 맞춰서
복잡한 병원을 피할려고 했는데 연박사는 원장실에 없었다. 캡을
쓴 간호사에게 연박사의 행방을 물어도 모른다는 대답뿐이었다.
장과장은 피곤함과 두려움에 굳어있는 햇병아리 간호사에게
병원 책임자를 불러달라고 부탁을 하고나서 복도의 긴 소파에
다리를 꼬고 앉았다.
잠시 후, 40대 중반쯤 되어보이는 남자가 흰 가운을 입은
모습으로 복도 끝에서 빠른 걸음으로 걸어오고 있었다. 간단하게
인사를 나눈 장과장은 수색영장을 내보이며 연박사의 행방을
물었다.
"원장님은 조금 전에 외출하셨습니다."
정중한 음성으로 부원장이자 성형외과 클리닉인 조박사가
대답했다.
"어디 가셨는지 행선지를 알 수 없을까요?"
"전 잘 모르겠습니다. 어느 분의 생신에 초대됐다고만 알고
있을 뿐입니다."
"아무튼 좋습니다. 지금부터 입원 환자에 대한 진료카드와
입원 기록카드, 건물 구조에 대한 조사와 여러 가지 수색이 있을
터이니 협조해 주시기 바랍니다.
"......"
장과장은 부하 형사들에게 수색에 착수하라고 지시 눈빛을
보냈다. 그러자 부하 형사들이 각 층으로 뿔뿔이 사라졌다.
"잠깐 저 좀 보실까요?"
조박사는 침통한 표정을 지으며 장과장의 손을 잡았다. 그는
복도 끝에 있는 부원장실로 장과장을 안내하고는 쿠션 좋은
소파에 마주앉았다. 조박사가 담배를 권하자 그는 한 개비
물었다.
"사실은 한 가지 고백할 게 있어서 과장님을 이렇게 여기에
모신 겁니다."
조박사는 한숨을 크게 쉬면서 담배를 물고 있는 장과장을
보았다.
"고백이라니요?"
"과장님, 저에게 시간을 주셨으면 고맙겠습니다. 인간적으로
호소합니다."
장과장은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한 표정을 지으면서 조박사를
바라보고 있었다.
"과장님, 연박사와 저는 같은 의대 동기동창입니다. 절친한
친구사이죠."
일순간 장과장은 긴장하고 있었다.
"경찰이 곧 찾아올 줄 알았습니다. 제가 수사본부에 전화를
걸었던 사람입니다."
조박사는 고개를 푹 떨구고 나서 다시 힘없이 고개를 들었다.
"L호텔에서 변사체로 발견된 여자의 얼굴을 신문에서
봤습니다. 그런데 그 얼굴은 연박사와 제가 수술했던 바로 그
여자였습니다."
"그렇습니까?"
장과장은 비로소 놀라는 표정을 지었다.
"그런데......"
"아, 잠깐만요."
장과장은 조박사의 말을 일단 중단시키고 안주머니에서 수첩과
볼펜을 꺼냈다.
"대충 어떤 상황인지 짐작이 갑니다. 구체적으로 알고
싶으니까 제 질문에 진실대로 답해주시면 무척 고맙겠습니다."
"그 전에 제 말씀 좀 들어봐주셨으면 합니다. 연박사와 저는
의형제나 다름없는 사이입니다. 자도 호텔의 여자를 연박사가
정말로 살해했는지는 확실히 모르고 있습니다. 그렇기에
연박사를 설득해서 경찰에 자진출두 형식으로 심문에 응하게
하고 싶습니다."
"아, 좋습니다. 그거야 나중 문제고, 우선 자세한 얘기부터
들어보기로 합시다."
조박사 다시 고개를 떨구었다.
"성주라양이 이 병원에 납치된 날짜가 언제입니까?"
"납치되어 왔다는 사실은 처음에 몰랐습니다. 그날 밤에
연박사와 원장실에서 만나기로 약속이 되어 있었습니다."
"그 날짜가 정확히 언제냐니까요?"
"6월 24일 밤이었습니다."
"24일이라구요?"
"네, 확실합니다."
"23일이 아니구요?"
"연박사가 제게 도움을 청했어요. 교통사고를 냈다고 하면서
수술 좀 도와달라고 하더군요. 젊은 여잔데 얼굴을 크게
다쳤다고 하더군요. 간밤에 지하실에서 수술을 했지만 혼자서는
힘들어 도저히 안 되겠다고 하더군요. 저는 쓰지 않고 있는
지하실 방으로 연박사와 함께 들어갔어요. 여자는 마취상태에
있었습니다. 얼굴은 이미 수술을 해놓은 상태였기 때문에 원래의
얼굴을 알아볼 수가 없었습니다. 수술은 밤새도록
진행되었습니다. 연박사가 원하는 대로 수술을 해주었습니다.
그러나 도중에 연박사는 피곤하다고 해서 인턴과정에 있는 의사
둘을 보조로 일하게 했습니다. 물론 수술은 지하실에서 한 게
아니고 수술실로 옮겨와서 정상적으로 했습니다. 수술이 끝난
후에 연박사는 무척 흡족해했습니다. 원래의 얼굴대로
복원되었다고 하면서 기뻐했습니다."
"잠깐만요, 교통사고를 당한 얼굴인지 그렇지 않은 얼굴인지도
구별 못했습니까?"
장과장은 힐책하듯이 물었다.
"저로서는 연박사의 말을 믿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제가
여자의 얼굴을 봤을 때는 수술중인 얼굴이었습니다. 그리고 달리
다르게 생각할 상황도 아니었구요."
"아, 좋습니다. 수술이 끝난 다음 성주라양을 어떻게
했습니까?"
"저는 연박사에게 입원실로 옮기자고 했습니다. 그랬더니
연박사는 기다렸다는 듯이 비어있는 501호 입원실로 옮기자고
했습니다. 독실이지요. 그래서 그 환자를 501호로 옮겼습니다.
그리고는 환자가 붕대를 풀 때까지 타인의 출입을 일체
금지시키고 연박사만이 후유증에 대한 진료를 계속했습니다.
물론 그 독실은 연박사의 권한으로 임시 폐쇄시켰기 때문에
영리상으로는 이 병원에서 제외되는 입원실이 되었지요. 그러나
그 실무 지시는 부원장인 제가 맡아서 했습니다."
"조박사님은 그 방에 한 번도 안 들어가셨습니까?"
"아니요. 연박사와 저만이 출입을 했습니다."
"피해자 가족한테 연락하자고 하지는 않았습니까?"
"물론 했죠. 그런데 그 환자는 말을 못했습니다."
조박사는 힘없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런데 참으로 이해할 수 없는 건 납치당한 성주라양의
행동이군요. 마취에서 깨어나면 난리를 쳤을텐데 말입니다."
"이런 말 하기는 좀 그렇지만 그 방이 항상 잠잠했던 건
성주라양이 연박사를 인간적으로 무척 신뢰했던 모양입니다.
연박사가 무슨 말로 성주라양을 달랬는지 모르지만 조용하게
보냈던 건 사실입니다."
"그것 참...... 성주라양은 자기 얼굴을 볼 수 없었겠죠?"
"볼 수 없었을 뿐만 아니라 넉달 내내 붕대를 감고 어둠
속에서 생활했습니다."
"기가 막힐 노릇이군."
장과장은 얼굴에 붕대를 감고 얌전하게 침대에 누워있을
성주라양을 떠올려보았다. 환자복을 입은 채 영양주사를 맞고
즐거운 듯이 앉아서 퇴원할 날만 손꼽아 기다렸을 성주라양을
생각하니 무지에 대한 분노감마저 가슴 한가운데서
솟구쳐올라왔다. 아마도 더 예뻐질거라는 미에 대한 끝없는
욕망에 콧노래까지 부르며 침대 생활을 했을 것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반항 한번 없이 그 많은 나날들을 어떻게 감옥같은
병실에서 지낼수 있었을까. 아름다워지고 싶은 여성의 욕망,
그것이 성주라양을 죽음의 구렁텅이에 몰아넣었을 것이리라.
"조박사님, 성주라양이 성형수술을 받은 것이 이번이 처음은
아니죠?"
장과장은 날카로운 눈빛으로 물었다.
"그, 그렇습니다."
"솔직하게 대답해주셔서 고맙군요."
"변명 같지만 성주라양이 적극적으로 원했습니다. 강여사님도
등을 미셨구요. 그래서 수술이 이루어졌던 겁니다."
"물론 성주라양만 성형수술을 한 건 아닐테지요?"
"무, 무슨 말씀이신지......"
"올해의 미스코리아 진인 윤보혜양도 이 병원을
다녀갔겠지요?"
조박사는 얼굴은 들지 못했다.
"윤보혜양도 얼굴 전체를 뜯어고쳤습니까?"
"......사실 저는 보혜양이 미스코리아 대회에 출전하는지를
모르고 있었습니다. 연박사의 집도 하에 이루어진 수술이었기
때문에 전 그저 보조 역할만 했을 뿐입니다."
"성주라양과 윤보혜양이 미스코리아 진에 당선됐을 때 기분이
어떠셨습니까?"
"......저는 관계없는 일입니다. 저는 아무 것도 몰랐습니다."
조박사는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이왕 말이 난 김에 한 가지만 더 물어보기로 하지요.
미스코리아 선에 입상한 나비향양도 이 병원에 와서 수술을
받았습니까?"
"나비향양이라구요? ......그 여자는 나도 모르는 여잡니다."
장과장은 잠바 주머니에서 담배 한 대를 꺼내 불을 붙이고나서
힘껏 두 모금을 빨았다. 작년의 진과 올해의 미스코리아 진이
인공 미녀였다는 사실이 그를 불쾌한 기분에 사로잡히게
만들었다. 속았다는 느낌과 사기당했다는 배신감이 그의 머리
속을 쉽게 떠나지 않고 있었다. 그런 기분과 동시에 그런 비열한
방법을 용인한 조박사에게도 혐오감이 들었다.
그런데 그 순간, 그의 뇌리 속에 한 가지 의문점이 솟구친
것은 담배가 반쯤 타들어가고 있을 때였다. 미스코리아 대회에
출전시키기 위해서 성형수술의 음모를 꾸몄다면 연박사의
독자적인 결정만으로는 성사되기가 어려웠을거라는 점이었다.
여기에는 누가봐도 강여사의 계획에 의해 이루어졌다고밖에 달리
해석할 수가 없다.
그러나 연박사와 강여사의 사이는 이혼 직전의 상황에까지
치닫고 있는 중이었다. 그렇게 부부 사이가 원수지간처럼
변해버린 두 사람이 언제부터 일심동체가 되어서 그런 상상 밖의
일을 척척 진행시킬 수가 있었을까? 그리고 그렇게 해서 부부
사이에 얻어지는 이득은 무엇이란 말인가? 두 인공 미녀가
미스코리아 진에 당선되었다고 해서 두 사람에게 엄청난 이득이
올 건 또 뭐가 있을까? 부부 사이가 악화된 건 최근의 일인가?
"조박사님, 성주라양과 윤보혜양이 수술을 받음으로 해서 수술
전의 얼굴과 수술 후의 미모 수준이 두드러지게 달라졌습니까?"
"미인을 보는 관점이야 각 개인마다 차이가 있겠고, 이상형에
대한 인식도 저마다 천차만별이겠지만, 성형수술의 기본은
얼굴의 단점 보완이 그 주를 이루기 때문에 수술 전보다 수술
후가 훨씬 나아지고 아름다워진 건 사실이지요."
"그럼 수술이 진선미를 구분하는데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고
보십니까?"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다만 좀더 나은 외모로
미스코리아에 출전했기 때문에 그만큼 심사위원들의 주목을 더
받은 게 사실이겠지요. 그러나 두 진에게 행운이었다고 하는 게
더 옳을 겁니다. 예를 들어서 성주라양과 윤보혜양이 같은 해에
미스코리아 대회에 나왔다면 한 사람은 절대로 진이 될 수 없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렇다고 나머지 한 사람이 진이 된다는
보장도 없는 것이라고 봅니다. 다 행운인거지요."
"그렇게 해석할 수도 있겠군요. 그러나 그 꿈 같은 행운이
오늘 이 시점에서는 죽음의 왕관으로 그 빛깔이
바뀌어버렸습니다. 그것도 그 외모를 더욱 아름답게 만들어준
장본인에 의해서 말입니다."
장과장의 일침에 조박사는 고개를 떨구었다.
"그렇지만 과장님, 연박사가 두 진을 수술해준건 사실이지만
저는 지금도 연박사가 성주라양을 살해했다고 믿기지 않습니다."
"믿기지 않는게 아니라 믿고 싶지 않은 것이겠지요. 그건
그렇고, 연박사가 성주라양을 퇴원시킨 걸 보셨습니까?"
"못봤습니다. 어느 날 501호 독실이 비워졌길래 물어보았더니
퇴원했다고만 말하더군요. 보상금조로 수표 한 장을 끊어줬다고
하면서 속상해하더군요."
장과장은 조박사를 한심하다는 듯한 눈빛으로 쳐다보았다.
"그런데 L호텔의 변사체가 성주라양이라는걸 어떻게
알았습니까? 퇴원할 때까지도 그녀는 조박사님하고 대화 한 마디
안 나누었다면서요."
"......신문에 난 여자 변시체의 기사 내용을 읽고 어느 정도
눈치를 챘습니다. 더군다나 성주라양의 실종과 연박사의 그날
알리바이가 일치하고 있었습니다. 처음에는 신문기사를 읽으면서
단순한 육감에 불과했지만 내가 수술한 그 여자가
성주라양일지도 모른다는 의혹과 우려는 거의 사실로
나타났습니다. 그래서 많은 고민을 했습니다. 단지 나는
연박사가 성주라양을 수술해서 얼굴을 변모시켜 놓았지만
일본인으로 변장해서 살해했다고는 믿지 않습니다."
"이것 보세요, 조박사님. L호텔의 여자 얼굴을 보셨으며, 아니
자신이 직접 수술을 해놓고도 예측을 못한단 말입니까? 진에
당선된 성주라양의 얼굴과 불법으로 몰래 수술한 얼굴과
어느쪽이 더 아름답습니까? 흔한 표현으로 진의 얼굴이
장미꽃이라면 몰래 수술한 얼굴은 호박꽃 아닙니까?"
그때 문 밖에서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문이 열리자 캡을 쓴
햇병아리 간호사가 남형사를 안내했다.
"과장님, 입원 수속카드에서 이상한 점을 발견했습니다. 501호
독실이 4개월 동안 고의로 환자를 수용하지 않은 사실이
발견되었습니다. 담당 여직원은 부원장님이 폐쇄 조치를 내렸기
때문에 자기는 잘 모르는 사항이라고 합니다만 제가
보기에는......"
"됐어, 남형사. 거기에 서 있지 말고 이리 와 앉아."
장과장은 조박사와의 대화 내용을 남형사에게 상세히
설명해주고는 앞으로의 일을 논의했다. 조박사의 특별 당부가 두
사람을 난처하게 만들고 있었다.
"제가 연박사를 내일까지 설득해보겠습니다. 그러니 자수할
시간적 여유를 주셨으면 감사하겠습니다."
조박사의 간곡한 부탁은 두 사람의 얼음장처럼 찬 마음을 쉽게
움직이지는 못하고 있었다.
"조박사님의 심정은 충분히 이해가 갑니다만 연박사는 위험한
범인입니다. 언제 또 제3의 범행이 일어날지 예측할수 없습니다.
우리 경찰은 오늘 밤 안으로 체포영장을 발부받아서 연박사를
격리시켜놓을 작정입니다."
장과장은 손목시계를 보면서 소파에서 일어났다.
"그러면 약속이 틀리지 않습니까? 저는 과장님만을 믿고 모든
것을 사실대로 말씀드렸는데 연박사에게 설득할 시간조차 주지
않는다는 건 너무하신 조처라고 생각됩니다."
"죄송합니다, 조박사님. 이런 말씀을 드리고 싶진 않지만
조박사님도 법적으로 약간의 문제가 남아있다는 점을
자각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연박사의 살인에 일조를 하신 건
분명한 사실이니까요."
"이건 약속이 틀립니다."
"저는 약속을 한 적이 없습니다. 그리고 지금은 약속의 진실
여부를 가릴 때가 아닙니다. 또 한 사람의 생명이 위험할 수도
있습니다. 연박사는 어디로 외출했습니까?"
"난 모르오! 생일잔치에 초대되었다는 사실밖에요."
조박사는 실망스런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러고나서 조박사는
두 사람보다 먼저 불쾌한 걸음으로 밖으로 나가버렸다.
"남형사, 용인 별장에 초대됐던 사람들에게 연락해봐.
연박사를 한 시간이라도 빨리 검거해야 돼. 연박사와 가까운
사람들에게 모두 전화를 걸어서 그이 소재를 파악해. 빨리
움직여."
병원 내에 있는 공중전화로 달려가서 여러 곳으로 부지런히
전화번호를 누르고 돌아온 남형사는 복도 소파에서 초조한
얼굴로 기다리고 있는 과장에게 흥분한 목소리로 그의 행선지를
보고했다.
"과장님, 유진숙 여사님 댁에 전화를 걸었는데, 그 집
가정부가 알려주더군요. 오늘이 권의원님 생일이라서 청평에
있는 별장으로 모두들 모였을거라구요."
"청평 별장에?......"
단풍잎이 불타고 있는 산 중턱에 자리잡은 별장 전경은
북한산이 달빛 아래 멈춘듯이 흐르고 있고, 퍼런 강 너머에는
높고 작은 산들이 어둠 속에 묻혀서 거대한 정적을 만들고
있었다. 반달의 고요가 강물 위로 소리없이 안주하고 있는
가운데 오랫만에 주인을 맞은 별장 안에서는 재회의 웃음소리와
음악소리가 기름지게 흘러넘치고 있었다. 축하객을 맞이한 별장
내부는 주인의 탄생일을 빛내려는 듯 최근에 내부장식과
실내가구를 최신식 외제로 새롭게 꾸며놓았다. 홀에는 춤추기
좋게끔 바닥을 번쩍번쩍 장식했고 실내조명도 룩스를 조절할 수
있게끔 특수장치를 부착헤 놓았다.
홀 반대편에는 열 사람 정도가 빙 둘러앉을 수 있는
이탈리아제 대형 테이블 위에 풍성한 각종 추국이 작은 원을
이루며 그 아름다움을 한껏 뽐내고 있었고, 초대객들은 용인
별장에서의 악몽을 깨끗이 망각한 듯 시간가는 줄 모르고 인생의
황금기를 맞이하고 있었다.
둥근 테이블에서는 대형 케익과 촛불이 꺼지고, 권의원과
유여사가 초대객들에게 일일이 샴페인을 따라주며 건배 준비를
하고 있었다. 강여사와 연박사의 잔에 샴페인이 넘치도록 담기고
임국장과 김진건 아나운서의 잔에도 축하에 대한 답례의
샴페인이 가득 넘쳐흘렀다.
"백마처럼 달려오는 21세기의 대한민국 정치를 영도하실
권중혁 의원님의 50회 생신을 진심으로 축하드리면서 우리 모두
축배를 듭시다."
잔을 들고 선 나비향양 옆에서 박윤성 회장이 환한 얼굴로
샴페인 잔을 허공에다 높이 쳐들며 힘차게 건배를 외쳤다.
그러자 초대객들은 권의원을 향해 잔을 높이 쳐들고는
히틀러에게 경의를 표하듯이 별장이 떠나가라 건배를 했다.
"정말 감사합니다. 오늘은 세상만사 모든 것을 잊고 아름다운
인생을 즐겨보도록 합시다."
권의원은 호탕하게 웃으면서 음악이 흐르고 있는 홀로
유여사의 손을 잡고 제일 먼저 걸어갔다. 뒤따라서 연박사
부부가 허리를 껴안고 오랜만의 해후라는 듯 금실좋게 몸을
밀착시키기 시작했고 박회장과 나비향양이 짝을 이루었다.
아울러 금변호사와 임국장이 한 쌍이 되었고, 김진건 아나운서가
처음으로 초대된 인기 급상중에 있는 모델 출신 여배우의
꺽어질듯한 허리를 잡고 스텝을 밟기 시작했다. 블루스가
애절하게 흐르면서 다섯 쌍은 원무를 그리듯 유연하게
볼룸댄스를 추기 시작했다. 적당히 어두운 불빛 아래에서 춤을
추던 다섯 쌍은 세 곡이 끝나자 약속한 듯 대형 테이블로 돌아와
앉았다. 오디오 세트에서 흘러나오던 블루스곡이 여운을 남기며
사라진 후, 나비향과 신인 여배우인 소리미가 홀로 나가서
리듬에 맞춰 버들가지 같은 몸을 흔들기 시작했다. 연속되는
곡선과 곡선의 아름다움에 남성 초대객들은 양주를 마시면서
젊음을 발산하고 있는 두 미녀에게 찬탄의 눈빛을 보내기
바빴다. 두 여자가 숨을 몰아쉬면서 발갛게 상기된 얼굴로
테이블로 걸어오자 남성들은 환호성을 지르며 열렬하게 박수를
쳐주었다.
다음에는 권중혁 의원이 초대객에게 떠밀리다시피해서 홀
중앙으로 걸어나갔다. 맥없이 껄껄거리며 웃고 있던 권의원이
마이크를 잡고 감정을 넣어가면서 "아침이슬"을 부르자
테이블에서는 일제히 "우!"하는 함성이 일었다. "아침 동산에
올라..."라는 가사에 채 오르지 못하고 도중하차해버린 권의원은
잠시 고민하는듯 하더니 내렸던 마이크를 다시 입으로 가져갔다.
"......요리집 문 앞에서 매를 맞는다......왜 맞을까......
으하하하 우습다 으하하하 우습다 으하하하......"
권의원이 히든카드라는듯 "빈대떡 신사"를 부르자 여기저기서
박수소리가 터져나왔다.
별장의 생일 잔치는 시간이 흐를수록 흥이 넘쳐있었다.
초대객들은 외제 양주와 칵테일을 물마시듯이마시면서
육자배기와 볼룸댄스를 즐겼다. 그런 후에 또다시 테이블에서는
왁자지껄한 정담이 오고 가고 술잔이 부딪치는 소리가 계속해서
홀을 울렸다.
그런데 오늘의 생일 파티에서는 지금까지의 관례를 벗어나
파티 장면을 찍지 않고 사진 촬영도 일체 하지 않았다. 또한
용인 별장에서처럼 한복을 입은 여자는 한 명도 없었고 요리사도
일절 채용하지 않았다.
홀 안은 웃음이 멈추지 않고 있었다. 강여사의 옆자리에 앉아
있는 연박사도 다른 초대객들과 마찬가지로 파안대소를 하며
양주잔을 입에 갖다대기 바빴다.
알맞게 어두워진 홀 전체에 초대객들을 유혹하는, 로렐라이
같은 블루스가 안개처럼 퍼져나가자 초대객들을 또다시 파트너를
찾기 시작해다. 그 순간 연박사가 눈빛을 빛내며 반대편에 있는
권의원을 보았다. 그러나 권의원은 술이 거나하게 취했는지 춤출
마음을 내비치지 않고 있었다. 한 곡이 끝나도록 테이블을
일어서는 쌍이 없었다. 강여사는 권의원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는 여전히 침묵을 지키며 묵묵히 양주를 마실 뿐이었다.
강여사는 춤을 출 상대를 골라보았다. 임국장은 여배우인
소리미양과 귓속말을 주고 받고 있었다. 그 사이 연박사와
유여사가 다정스럽게 홀 중앙으로 걸아나가서 볼룸댄스를 추기
시작했다. 두번째 곡이 끝나고 세번째 블루스 곡으로 이어질 때
김진건 아나운서와 나비향양이 홀로 나가서 춤을 추었다. 두
쌍이 춤을 추고 있는 동안 테이블의 여섯 사람은 권의원의
농담을 즐거운 눈빛으로 듣고 있었다.
"전번에 사석에서 대통령을 만나뵈었을 때, 대통령께서 이런
농담을 하십디다. 허허허... 만약에 자신을 포함한 미.영.소
4개국 정상이 한자리에 모인 자리에서 이런 농담을 하면 웃기지
않겠느냐고 하면서 말이오. 허허허, 나원 참, 웃겨서......
글쎄, 대통령께서...... 고르바초프 대통령이 벗겨진 이마를
자랑하면서 <광활한 대지>했더니 영국의 대처 수상이 가슴을
활짝 열어보이면서 <풍부한 자원>이라고 자랑하자 미국의 부시
대통령이 의자에서 벌떡 일아나면서 바지를 벗더니 <강력한
무기>라고 자랑하는데, 우리 대통령은 막상 자랑할 게 없어서
고민하다가 안 되겠다 싶었는지 옛다 모르겠다 하면서
뒤돌아서서 바지를 훌떡 내리고 히프를 보여주면서 하는 말,
<분단된 조국!>"
"하하하...... 호호호......"
임국장은 이미 대학가에서 사라져버린 "4개국 정상 시리즈"를
한 귀로 듣고나서 타임을 맞춰 크게 틀어주었다. 권의원은
초대객들의 반응에 기분이 몹시 좋은듯 껄껄 웃으면서 무척
흡족해하고 있었다. 그런 다음 권의원은 미소띤 얼굴을 돌려
홀을 바라보았다. 두 쌍은 다섯 곡이 흐를 때까지 계속해서
댄스를 추고 있었다.
그런데 바로 그 순간이었다. 유여사의 허리를 잡고 피봇턴을
하던 연박사가 힘없이 무릎을 꺽으면서 스르르 바닥에
주저앉듯이 쓰러지는 것이었ㄷ.
"아악!......"
유여사가 자기 발 밑에 쓰러져있는 연박사를 내려다보면서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비면을 질러댔다. 초대객들은 일제히
홀쪽으로 시선을 돌리며 놀란 동공으로 연박사를 보았다. 같이
춤을 추던 김진건 아나운서와 와 나비향양은 옆에서 통나무처럼
쓰러져있는 연박사에게 두세 발자국 뒤로 물러나면서 공포의
눈으로 서로를 껴안은 채 연박사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별장은 일시에 대혼란에 빠졌다. 초대객들은 반사적으로
의자에서 일어나 홀로 몰려갔다. 그러나 권의원은 테이블에서
일어나다 중심을 못잡고 휘청거리다가 의자에 도로 주저앉았다.
그러면서 그는 무의식적으로 중얼거리고 있었다.
"이건 환상이야, 환상일 뿐이야......"
체포영장을 가지고 청평으로 달려온 장과장과 남형사, 그리고
윤형사가 산중턱의 별장까지 이어진 계산을 크로스 컨트리
하듯이 빠른 걸음으로 밟고 올라가서 거칠게 현관문을 밀치고
들어섰을 때는 이미 연박사가 숨진 지 30분이 지나있는
상태였다.
불안에 떨고 있던 초대객들은 대형 테이블에 둘러앉아서 사후
수습대책을 논의하다가 예고없이 들이닥친 세 수사관을 보자마자
울상을 짓고 있었다.
"아니!"
장과장은 홀바닥에 엎드린 채 쓰러져 있는 시체를 보고는
경악해 하면서 당황하는 초대객들을 노려보았다. 동시에 그는
살의의 느낌이 피부로 엄습해옴을 느꼈는지 허리춤에서 38구경
리벌버 권총을 뽑았다.
"모두들 꼼짝 마!"
뒤따라 들어오던 남형사도 가슴 속에서 권총을 뽑아들고
테이블의 초대객들을 향해 총구를 겨누었다.
"남형사, 누구 시첸지 확인해 봐. 어섯!"
장과장은 공포에 떨고 있는 초대객들에게 당장이라도 방아쉬를
당길 기세로 남형사에게 명령했다.
"과, 과장님......"
남형사가 권총을 도로 허리춤에 꽂으면서 다리를 쪼그리고
시체의 얼굴을 확인하는 동안 금지선 변호사가 떨리는 음성으로
테이블에서 일어났다. 권총을 계속 겨누고 있는 장과장에게
다가온 그녀는 어떻게 말을 꺼내야 할지 몰라 난감해하다가
총부터 치워달라고 부탁했다.
"과장님, 연박삽니다. 연박사가 죽었습니다."
"뭐라구? 연박사가! 누구요, 누가 이런 짓을 했습니까?"
장과장은 금변호사와 초대객들을 차례로 쏘아보면서 험악하게
인상을 썼다.
"진정하세요, 과장님. 제가 차근차근 설명해드릴께요. 제발 그
총부터 치워주세요."
금변호사가 차분한 음성으로 흥분해있는 장과장을 달래자
윤형사가 앞으로 나서서 권총을 집어넣어줄 것을 얘기했다.
"남형사, 살해 무기는 뭔가?"
장과장은 권총을 허리춤에 꽂으면서 시체를 돌아다보았다.
"글쎄요...... 외상이 전혀 없습니다. 혈흔도 발견할 수
없습니다."
"잘 살펴봐."
남형사는 시체를 돌려서 눕혀놓았다. 와이셔츠를 살펴보았지만
피묻은 흔적도 독극물을 마신 흔적도 없었다.
"과장님, 정말 이상한데요......"
"금변호사님, 이게 대체 어떻게 된 일입니까?"
장과장은 시체에서 눈을 떼고 금변호사를 보며 물었다.
"보시다시피 우리도 영문을 모르고 있어요. 춤을 추시다가
갑자기 쓰러지셨어요."
"시신에 손댔습니까?"
윤형사가 물었다.
"네, 쓰러지셨길래......"
"......아무튼 좋아요. 여기서 이럴게 아니라 테이블로 모두
가시지요."
윤형사는 금변호사의 손을 위로하듯 살짝 잡으면서 앞장서서
테이블로 걸어갔다.
"신고를 하셨어요?"
"아직......"
금변호사가 미안한 말투로 윤형사에게 말했다.
"여기 전화 어딨습니까?"
장과장의 뒤에 서있던 남형사가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물었다.
"이층 응접실에 있어요."
유여사가 이층 계단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알려주었다.
남형사가 이층으로 올라가서 감식반을 속히 출동시켜 달라고
전화를 하고 내려왔다.
권의원과 임국장은 술에 취한듯 몸을 제대로 가누지 못하고
있었다. 의자에 비스듬히 앉아서 등을 기댄채 느닷없이 들이닥친
불청객들을 흐릿한 눈빛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테이블 위에는 여러 개의 빈 양주병과 마시다만 술잔들,
바닥이 보이는 양주병과 외제상표가 붙은 반 가량 남은 또 다른
양주병이 세워져 있었고, 과일 안주들이 싱싱함을 잃고 접시에
아무렇게나 담겨져 있었다. 그리고 여성들이마셨을 작은 잔들이
여러잔 놓여 있었고, 테이블 한가운데에는 국화에 가린 모양이
다른 칵테일 잔이 또 하나 나뒹굴어져 있었다.
윤형사는 테이블 위의 내용물을 자세히 살펴보고는 공포와
비탄에 빠져 있는 초대객들에게 시선을 옮겼다. 모두들 오늘의
생일 파티에 참석한 것을 마음 속 깊이 후회하는 표정들을 짓고
있었다. 특히 새로 초재된 소리미양과 금변호사는 운명이라는 듯
옆의 사람들이 들릴 정도로 한숨을 내쉬며 어서 빨리 귀가시켜
주기만 학수고대하는 듯한 눈치였다.
장과장은 홀을 등 뒤로 하고 빈 의자에 앉았다. 남형사는
상관의 뒤에서 수첩에다 부지런히 볼펜을 놀리고 있었다.
"연박사가 숨진 상황을 금변호사께서 자세히 설명해주십시오."
장과장은 앞에 서 있는 금변호사에게 앉기를 권하면서
무뚝뚝한 음성으로 말했다.
금변호사는 입술을 놀리려다 말고 권의원 옆에 앉아 있는
유여사를 힐끗 쳐다보고 있었다. 그녀의 시선을 눈치챈 유여사가
두 손을 무릎 위에 깍지 낀채 안절부절 못하고 있었다.
"......유여사님하고 홀에서 볼룸댄스를 추는 도중에......"
금변호사는 말끝을 흐리면서 다시 유여사를 의식했다.
장과장은 입술에 가느다란 경련이 일고 있는 유여사에게로
날카로운 시선을 꽂았다.
"여사님, 금변호사님의 말이 사실입니까?"
"네......"
장과장과 남형사는 의심의 눈초리로 두려움에 떨고 있는
유여사를 노려보았다.
"난 그저 춤만 추었을 뿐이예요. 저, 정말이예요."
유여사는 수사관들의 눈빛을 의식하고는 더욱 입술을 떨었다.
"여사님, 연박사하고 볼룸댄스를 추었다면 연박사가 쓰러지기
직전의 상황을 누구보다 잘 알고 계시겠군요?"
장과장은 유여사에게 허리를 굽히며 차가운 음성으로 물었다.
"난 그때 양주를 두 잔 하고 칵테일까지 마신 상태라 정신이
맑지 못했어요. 아니, 몽롱했어요. 난 그저 연박사가
리드하는대로 스텝을 밟았을 뿐이예요."
"좋습니다, 여사님. 연박사가 쓰러지기 직전에 어떤 몸짓이나
신음소리 같은 건 내지 않았습니까?"
"잘 모르겠어요. 난 눈을 감고 바다 위의 배가 출렁거리듯이
연박사가 리드하는대로 스텝을 밟고 있었어요. 그, 그래요.
연박사님이 피봇턴을 도는가 싶더니 갑자기 스텝을 멈추고
순간적으로 거친 호흡을 내뿜었어요. 보통 숨소리하고는
달랐어요. 그리고는 아, 하고 짧게 한 마디 하는듯 하더니 내
허리를 잡았던 손이 갑자기 아래로 축 처졌어요. 그리고 내
앞으로 체중이 쏠리는 것이었어요. 하마터면 나도 같이 넘어질
뻔했어요. 그것 뿐이예요. 난 눈을 감고 있어서 아무 것도
몰라요. 지금도 이게 꿈인지 생시인지 분간이 안 갈 정도예요."
유여사는 권의원을 쳐다보면서 지원사격을 해달라는 표정을
지으며 금방이라도 울듯한 눈동자였다.
"홀에서 춤을 추던 분이 여사님뿐이었습니까?"
이번에는 남형사가 물었다.
"아니예요. 한 쌍이 더 있었어요. 나비향양하고 김진건
아나운서님이 옆에서 춤을 추셨어요."
금변호사가 말해주었다.
"그렇습니까?"
남형사는 수첩에다 두 남녀의 이름을 적다가 문득 용인
별장에서도 독살 직전에 같은 파트너였다는 사실이 섬광처럼
뇌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그리고 연박사의 죽음은 용인 별장과
정반대 현상으로 일어났다는 사실도 그의 뇌리에 포착되었다.
"잠깐, 김진건 아나운서님한테 묻겠는데요, 연박사가 쓰러지기
직전에 무슨 느낌 같은 거 못받으셨습니까?"
넥타이 핀을 고쳐달던 김아나운서가 남형사를 바라보며 씁쓸한
표정을 지어보였다.
"아무 것도, 아무런 느낌도 못받았습니다."
"나비향씨도요?"
"저도 아무 느낌도 못받았어요."
옆에 앉은 시리미양의 손을 꼭 붙잡고 있던 나비향은 모기만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럼 이 테이블에 앉아있던 분들은 그 순간에 무얼하고
계셨습니까? 춤을 추던 두 쌍을 지켜보고 계셨던 분은 안
계십니까?"
그때, 지그시 눈을 감고 있던 권의원은 무거운 눈꺼풀을
힘들게 뜨면서 몸을 똑바로 고쳐앉으며 장과장을 보았다.
"내가 보기엔 연박사를 죽일 사람은 아무도 없는 것 같소.
연박사는 심장마비로 사망한 게 분명하오. 용인 별장에서 한 번
불미스러운 일이 있었다고 이번에도 같은 시각으로 본다는 건
지나치다고 생각되오."
권위원은 권위에 찬 눈빛으로 장과장을 보면서 말했다. 위엄이
있어보이는 권의원의 성난 음성에 장과장은 순간적으로
움찔거렸다.
"의원님, 연박사의 시신을 해부해보기 전에는 그 어떤 결론도
내릴 수가 없는 상황이라고 감히 직언드리고 싶습니다."
"장과장, 당신은 끝까지 그 아둔한 머리로 나를 궁지에
몰아넣는군. 이번에도 나를 범인으로 몰 생각인가?"
권의원은 노골적으로 비웃고 있었다.
"오해 없으시길 바랄 뿐입니다."
장과장은 정중한 어조로 말하면서 권의원을 정면으로
바라보았다. 권의원은 금방이라도 호통을 칠듯한 표정을 짓다가
손을 앞으로 내밀며 흔들었다.
"아, 좋소이다. 나는 연박사의 죽음을 단순한 자연사로 보고
있기 때문에 사건화한다는 게 여기 모이신 모든 분들에게 불편을
끼쳐드릴까봐 염려가 됐을 뿐이라오. 장과장, 우리가 언제까지
이러고 있어야 한단 말이오?"
권의원은 약간 누그러진 말투로 물었다.
"저도 의원님의 생신에 이런 불미스런 일이 발생하여 몹시
안타깝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사실 저희들은 연박사를 체포하기
위해 이곳에 왔던 것입니다."
그렇게 말하면서 장과장은 안주머니에서 체포영장을 꺼내
권의원에게 보여주었다.
"아니, 그럼 연박사가 두 미스코리아를?......"
"그렇습니다. 그런데 예상치도 못한 일이 이렇게 일어나고
말았습니다."
초대객들은 놀라움을 금치 못하고 있었다. 그러면서
한편으로는 다행스런 일이라는듯 안도의 한숨까지 내쉬고
있었다. 그리고보니 임국장 옆에 앉아 있던 강여사는 아까부터
고개를 숙인채 얼굴 한번 들지 않고 있었다. 초대객들이
강여사를 의식하면서 감정 표현을 자제하고 있었지만 분위기는
오히려 한층 밝아져 있었다. 이제 괜한 의심을 받지 않아도
된다는 안도감이 테이블 주위에 공통으로 흐르고 있었다.
"강여사님, 저 좀 보실까요?"
장과장이 고개를 떨구고 있는 강여사를 부르자 그제서야
그녀가 천펀히 고개를 들고 있었다. 그녀의 눈에서는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그녀의 눈물을 본 윤현사가 손수건을 건네주자
강여사는 고맙다는 듯 애써 미소를 지어보이며 눈물을
훔쳤다.그러나 이내 다시 눈물을 흘려서 손수건을 얼굴에
갖다대고 있어야 했다.
"연박사께서 성주라양과 윤보혜양을 성형수술한 걸 알고
계셨지요?"
"흑......"
강여사는 어깨가 들썩거릴 정도로 몇 번 흐느껴 울다가 힘겹게
눈물을 멈추고 잠긴 목소리로 말했다.
"그 양반은 아무런 죄가 없어요. 주라하고 보혜가 원했기
때문에 내가 결정을 내란 거예요. 연박사는 내가 하자는대로
해줬을 뿐이예요."
강여사는 남형사가 천으로 덮어놓은 시신을 애써 외면하면서
다시 고개를 떨구었다.
그때였다. 무심코 국화꽃을 내려다보고 있던 유형사의 시야에
아까부터 낯익은 잔 하나가 그녀의 시선을 끌고 있었다. 국화꽃
아래의 테이블에 반쯤 모습을 드러내놓고 있는 칵테일 잔이
어디서 많이 본듯한 모양이었다. 윤형사가 손을 뻗어 잔을
끄집어내어 손에 놓고 살펴보는 순간, 뜻밖에도 그것은 용인
별장에서 사용되었던 칵테일 잔이 아닌가!
"이 잔이 왜 여기 있지?......"
윤형사가 칵테일 잔을 이리저리 살펴보면서 의아해하고
있었다. 그러자 초대객들이 일제히 윤형사에게 시선을 집중했다.
윤형사 옆으로 다가온 남형사도 칵테일 잔을 보고는 눈을 크게
뜬 채 혼란스런 표정을 짓고 있었다.
"강여사님, 이 칵테일 잔 용인 별장에 있었던 것이
분명하지요?"
윤형사는 강여사에게로 다가가서 잔을 보여주며 물었다.
그러자 강여사는 놀란듯한 표정을 지으며 초대객들을
바라보았다. 모두들 강여사의 시선을 피하고 있었다. 장과장은
순간적으로 용인 별장에서 사라졌던 그 칵테일 잔이 아닌가
싶어서 강여사를 날카로운 눈빛으로 노려보았다.
"남형사, 아무래도 이상해. 연박사의 시신을 다시 한번
살펴봐."
"네, 알았습니다."
남형사가 홀이 울리도록 구두굽 소리를 내면서 시체가 있는
곳으로 뛰어갔다. 덮었던 천을 들쳐내고 굳어져있는 시신의
손목과 얼굴, 등 부위와 목 부위를 현미경으로 보듯이 유심히
관찰하던 남형사가 뒷목 바로 아래에 나 있는 바늘 자국을
발견하고는 소리를 질렀다.
"과장님, 빨리 이리 와보세요!"
의자에서 일어난 장과장은 날쌘 걸음으로 남형사에게로 갔다.
그의 옆에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아서 시체의 뒷목에 나 있는
주사바늘을 확인한 그는 벌떡 일어나면서 긴장하고 있는
초대객들을 잔인한 눈빛으로 노려보았다.
"역시 예상한대로군요. 연박사는 춤을 추는 도중에 심장마비로
사망한 것이 아니고 누군가가 찌른 주사바늘에 의해서
절명했습니다. 범인은 바로 이곳에 있습니다."
장과장은 홀 중앙에서 두 형사와 함께 숙의를 했다. 남형사는
48시간 동안의 구류시효를 최대한으로 이용하자는 의견을
내놓았고, 윤형사는 지금 이 자리에서 초대객들의 소지품 검사를
해야 한다고 속삭이는 듯한 목소리로 건의했다. 장과장은
손목시계를 보면서 최종 결심을 굳힌 듯 윤형사의 의견에 일단
따르기로 했다.
"아, 먼저 여러분의 양해를 구하겠습니다. 연박사는 누군가가
찌른 주사바늘에 의해 숨진 게 분명합니다. 아니, 거의
확실합니다. 자신이 주사기 같은 걸로 손을 뒤로 해서 목덜미를
찔러 자살했을 리는 만무합니다. 그렇기에 여러분들의 소지품을
검사해보지 않을수 없습니다."
초대객들은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모두들 장과장의 요구에
순응하는 눈빛들을 보이고 있었다.
남형사가 남자 초대객들이 소지품과 주머니를 검사하고
윤형사가 여자 초대객들을 맡아서 주사기를 찾아보았지만
아무에게도 없었다. 바늘이나 침 같은 끝이 뾰족한 물건들도
염두에 두고 조사해보았지만 살인에 이용할만한 위험한 것들도
나타나지 않았다. 그러나 두 형사가 초대객들의 몸수색에 있어서
극히 조심스럽게 행동해야 됐기 때문에 완벽한 조사는 이루어질
수가 없었다. 바늘 같은 가느다랗고 뾰족한 물체를 숨기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기 때문에 애초부터 성과를 기대하기는
무리였다. 초대객들은 아무한테도 경찰이 기대한 물건이 나오지
않자 처음과는 반대로 투덜거리기 시작했다. 인권유린을
당했다는 표정들이 노골적으로 얼굴에 씌어져 있었다. 특히
권의원의 불쾌감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그는 자존심이 무척
상했는지 장과장을 향해 가시돋힌 말을 내뱉었다.
"장과장, 내 오늘 일은 잊지 않고 기억하겠소. 연박사가
심장마비로 자연사한 것이 사체부검 결과로 밝혀졌을 때는 이
모든 책임을 당신에게 묻겠소."
"의원님, 저는 지금 공무집행을 하고 있을 뿐입니다.
여러분들께 불편을 끼쳐드린 점 널리 이해해주시길 바랍니다.
그러나 한 번 범한 우를 두 번 되풀이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연박사는 춤을 추는 도중에 누군가가 찌른 주사바늘에 의해
피살당했음이 명백합니다. 그렇기에 여러분의 협조가
필요합니다. 김진건 아나운서님!"
장과장은 테이블 위에 꺼내놓았던 소지품을 도로 자기
주머니에 집어넣고 있는 아나운서를 보며 의미있는 미소를
띄웠다.
"나비향양하고 파트너로 춤을 출 때 먼저 춤을 추자고
제의했습니까?"
김진건 아나운서는 만년필을 안주머니에 꽂으려다 말고 경색된
얼굴로 장과장을 보았다.
"그렇습니다만......"
"나비향양하고 춤을 출 때 연박사하고는 어느 정도 거리에
있었습니까?"
"글쎄요. 한 일 미터 정도요."
"연박사가 쓰러질 때는요?"
그 질문에 아나운서는 약간 고개를 갸웃거렸다.
"잘은 기억하지 못하지만 일 미터보다는 더 근접한 위치였다고
생각합니다."
"손을 뻗으면 닿을 거리만큼요?"
"네?......"
아나운서는 장과장의 말뜻을 알아차리고는 굳게 입을
다물어버렸다.
"나비향양, 연박사가 쓰러지는 순간을 봤습니까?"
장과장은 나비향양에게 고개를 돌리면서 물었다.
"못봤어요. 저는 그때 연박사님과는 등을 향해 있었기 때문에
회장님의 목소리를 듣고나서야 뒤돌아봤어요."
"손을 뻗으면 닿을만큼 가까운 위치에서 춤을 춘 게
사실이지요?"
나비향은 아나운서를 힐끗 보고나서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 순간 아나운서는 일부러 시선을 딴 곳으로 향하고 있었다.
"좋습니다. 여기에 대한 질문은 나중에 조용한 장소에서 다시
하기로 하지요. 의원님."
장과장은 홀 중앙에서 권의원이 앉아있는 테이블 쪽으로
걸어오면서 정중한 음성으로 그를 불렀다.
"연박사가 쓰러질 때 그 순간을 목격하셨습니까?"
"못봤소."
"임종도 국장님은 보셨습니까?"
"나도 못봤어요."
"그럼 강여사님은 보셨습니까?"
"못봤어요. 제가 앉은 자리는 홀을 볼 수가 없었어요. 몸을
돌리지 않고서는 볼 수가 없어요."
"나머지 분들도 못보셨습니까?"
박회장과 소리미양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금변호사도 장과장을
보면서 못봤다고 대답했다.
"......그럼 그때 여러분들은 뭘 하고 계셨습니까?"
장과장의 질문에 임국장이 대표로 대답했다.
"우린 의원님의 말씀을 듣고 있었습니다. 한때 대학가에서
유행되었던 4개국 정상 시리즈인데 무척 재미있었습니다. 그
얘기를 듣고 너무 재미있어서 모두들 소리내어 웃었습니다.
그리고 거의 웃음이 멈춰졌을 때 홀에서 춤을 추던 연박사님이
쓰러졌던 겁니다."
"아, 그렇습니까? 그럼 연박사가 쓰러지고 난 뒤 누가 제일
먼저 연박사님에게로 달려갔습니까?"
"의원님이셨습니다. 아, 아니군요. 의원님은 너무 취하셔서
테이블을 채 벗어나기도 전에 중심도 세대로 잡지 못하셔서 제가
부축헤서 의자에 앉혀드렸습니다. 이거, 헷갈려서......"
임국장은 고개를 갸웃거리고 있었다.
"그럼 박회장님이셨습니까?"
장과장은 넘겨짚듯이 말하면서 박회장을 보았다.
"나도 술이 워낙 취해서 몸을 가눌 수가 없었습니다. 정신을
차리면서 홀로 걸어갔는데 강여사님이 연박사님을 살펴보고
계셨던 것으로 기억됩니다. 그치만 하도 정신이 없어서......"
"강여사님, 박회장님 말씀이 맞습니까?"
"그게 무슨 상관이지요? 연박사님이 쓰러진 걸 알았을 때 나는
내 정신이 아니었어요. 김진건 아나운서님이 제 남편을 눕혀서
넥타이를 풀고 숨소리를 확인했지만 소용없는 일이었어요."
"아, 그러니까 연박사가 쓰러진 뒤에 최초로 연박사의 몸에
손을 댄 분은 김진건 아나운섭니까?"
김진건 아나운서는 아무런 대꾸도 없이 서 있기만 했다.
"강여사님, 이 칵테일 잔 용인 별장에서 사용되었던 잔
맞지요?"
윤형사는 조금 전에 했던 질문을 다시 했다.
"네, 맞아요."
"유여사님, 이 칵테일 잔과 똑같은 잔이 여사님 댁에도
있습니까?"
"아니오. 그 잔이 왜 이 테이블에 있는지 이해가 안
되는군요."
유여사는 강여사를 보며 말했다.
"이 칵테일 잔 제가 발견하기 전에 보신 분은 없습니까?"
초대객들은 서로의 얼굴을 쳐다볼 뿐이었다. 윤형사는 골똘히
생각하는 듯하더니 종이를 꺼내 커다란 원에다 테이블이라고
써놓고 원의 한가운데에다 대충 국화꽃이라고 적었다. 그런 후에
윤형사는 초대객들에게 일일이 확인해가면서 권의원이 4개국
정상 시리즈를 얘기할 때의 좌석 위치도를 만들었다.
좌석 이치도를 다 만들고 난 윤형사는 테이블의 크기와 손을
뻗어 국화 밑에 잔을 놓을 수 잇는 거리를 눈으로 계산해보았다.
칵테일 잔을 국화 밑에 놓은 자가 x라 한다면, x가 언제
어떻게 칵테일 잔을 놓았는지는 그 시기가 불확실하지만 초대객
모두가 최초의 발견시까지 못봤다는 진술이 사실이라면 파티
시작 때부터 잔이 테이블에 등장했을 리는 거의 희박한 상황일
것이다. 아무래도 잔이 출현한 시기는 4개국 정상 시리즈
이전이나 이후가 가장 적당해보였다. 더욱이 그 "흰색들 속의
빨간색"처럼 눈에 띄는 칵테일 잔을 국화 밑으로 나뒹굴게
하려면 여간 조심스런 행동이 아닐수 없었을 것이다. 옆 사람이
다른 곳에 신경을 쏟고 있었다 해도 좌우의 두 사람 모두 눈뜬
장님이 되라는 법은 없을 것이다. 아무리 생각해보아도 x가
칵테일 잔을 테이블에 꺼내놓을 시기는 정상적인 시기보다는
혼란한 시기에 꺼내놓았을 가능성이 높아보였다. 그렇지만
초대객들이 테이블에 모여앉은 시간에 잔을 바꿔치기하듯 슬쩍
국화 밑으로 밀어넣었을 가능성도 있는만큼 그 시기에 대한
타당성있는 조사를 해보지 않으면 안 되었다.
<좌석 위치도>
금변호사
연박사
권의원
테이블 강여사
유여사 국화꽃 홀
●
윤형사가 잔을 발견한 곳
박회장
임국장
나비향양
소리미양
김아나운서
윤형사는 잔이 발견된 지점과 위치를 머리 속에 고려해놓고
정반대 방향의 자리에 앉아있던 권의원과 금변호사 그리고
유여사와 임국장을 생각해보았다. 이 네 사람은 앉은 자리에서
칵테일 잔을 문제의 지점에 갖다놓기란 거의 불가능했다. 손의
거리도 거리지만 초대객들의 시선을 피하기란 소나기가 내릴 때
피해갈수 없는 것처럼 도저히 불가능해 보였다.
윤형사는 미련없이 네 사람을 삭제하고는 나머지 다섯 사람을
주목하였다. 잔을 꺼내놓았을 가능성이 제일 많아보였다. 그러나
두 남녀 역시 옆 사람들의 눈을 피해서 잔을 꺼내놓기는 삭제된
네 사람과 마찬가지로 불가능해보였다.
윤형사는 4개국 정상 시리즈 중에 칵테일 잔을 등장시켰다면
누가 가장 가능성이 있을까 하고 생각해보았다.
만약에 4개국 정상 시리즈 이후에 칵테일 잔이 놓여졌다면?
연박사가 쓰러지고나서 초대객들은 모두 홀로 달려나갔다.
그러나 권의원과 임국장만은 테이블을 지키고 앉아있었다.
윤형사는 일단 그 점을 확인해보고 싶었다.
"임국장님, 의원님을 부축해주고 나서 연박사님이 쓰러진 홀로
나가셨나요?"
"그거야 지극히 당연한 행동 아니겠소."
"그럼 의원님만 혼자 앉아계셨군요."
"도대체 무슨 꿍꿍이 속이오?"
권의원은 화를 벌컥 냈다.
"아, 아니예요......"
권의원은 혼자만의 완벽한 시간을 확보하고 있었다.
초대객들이 모두 연박사에게 시선이 집중되고 있는 동안 칵테일
잔을 슬쩍 국화 밑으로 밀어넣을 수 있는 유일한 인물이었다.
그러나 아직은 누가 칵테일 잔을 타인의 눈에 띄지 않게
꺼내놓았다고 판단하기에도 단정짓기에도 성급하다. 마음만
먹는다면 잔을 남의 눈에 뜨지 않게 슬쩍 테이블 위에
올려놓는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닐 것이다. 지금으로서는 잔을
꺼내놓은 자보다 꺼내놓은 의도와 목적을 분석해 보는 것이
사건해결에 큰 도움을 줄 것이다.
왜? 왜? 왜?
윤형사는 손수건에 싸인 잔을 노란 병아리 감싸듯이 손으로
감싸면서 천천히 홀로 걸어나가며, 머리 속은 여전히 회오리
같은 엄청난 혼란에 빠져있었다.
용인 별장에서의 진 독살과 이곳 청평 별장에서의
타살(연박사는 주사기 바늘에 의해 숨진게 확실하다. 주사기에는
성분을 알 수 없는 치명적인 주사약이 들어있었던 게
분명하다)은 칵테일 잔의 등장으로 인해서 "연결고리"를 가지게
되었다. 설사 잔이 발견되지 않았다 하더라도 죽음 자체에
의문을 품었을 건 사실이지만 칵테일 잔으로 인해서 예상치도
못했던 새로운 사태가 전개되고 있는 것이다.
x는 무엇을 노렸을까? x가 연박사를 살해한 진범일까?
윤형사는 시체 머리맡에 서서 x가 될 수 있는 용의자를
떠올려보았다. 그러면서 그녀는 고개를 들어 조명을 보았다.
홀의 조명 밝기는 3룩스쯤 되어보였다. 촛불을 세 개 정도
켜놓은 밝기였다. 그 정도의 밝기라면 테입블에 있던 사람들이
살인 순간을 목격하기에는 별로 어둡지 않은 홀의 밝기다. 살인
순간에 정전이 되었다면 모를까, 춤을 추는 도중에 살해되었다는
것이 믿어지지 않을 지경이었다.
어쨌거나 용의자는 한정되어 보였다. 유여사와 김아나운서,
그리고 나비향양 그렇게 세 명으로 명확하게 구분되어져 있다.
흡사 용인 별장의 독살을 그대로 옮겨놓은 듯한 재판 살인이다.
그런데 지금까지는 연박사가 윤보혜와 성주라를 살해한
진범이라고 알고 있었고 현재도 그가 살인범이라는 데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살인동기는 불투명했지만 성주라는 성형수술을
해서 호텔에서 마취제로 살해되었다.......
그 순간, 윤형사의 뇌리에는 일본인인 니시무라 다니구찌에
대한 수사가 미진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녀는 테이블로 다시
돌아왔다.
"강여사님."
윤형사는 테이블 위에 두 팔을 얹고 얼굴을 묻고 있는
강여사을 불렀다.
"연박사님께서 일어를 유창하게 잘 하셨나요?"
"일본어요? 네. 영어만큼이나요."
"아, 네......"
윤형사는 실망한 얼굴로 힘없이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장과장은 다시 한번 손목시계를 보았다. 감식반원들이 도착할
시간이 되었다. 연박사의 시신을 일초라도 빨리 옮겨서
시체부검을 해보는 것이 살인 순간을 가장 정확하게 파악할 수
있을 거라는 생각에 초조한 기분마저 들었다.
"윤형사, 마치 파도타기를 하고 있는 것 같아."
시체 머리맡으로 다시 와서 깊은 생각에 골몰하고 있는 윤형사
옆으로 다가와 선 남형사는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말을 꺼냈다.
"참 불가사의한 살인이야."
윤형사가 혼자 중얼거리듯이 말했다.
"불가사의해? 뭐가? 이번 살인이?......"
"용인 별장과 이곳에서의 살인이."
"내 느낌은 대담한 살인이라는 느낌밖에 안 들어. 도대체가
인간의 시선을 무시한 살인이 이렇게 완벽할 수 있다는 게
기분나쁠 뿐이야. 여기에 모인 사람들은 전부 눈뜬 장님이야."
"남형사, 두 별장에서 이루어진 살인은 엄연한 밀실 살인이야.
그것도 안에서 문이 잠겨진 상태나 마찬가지인 상황에서
보란듯이 살인이 일어났어."
"누가 아니래? 그러니 더 답답한 일이지."
"그럼으로 해서 다른 연속살인과는 달리 두드러진 공통점이
확연하게 나타난 것도 사실이야."
"그래서 지금 공통점 찾기를 하고 있는 중이야?"
"이 두 별장에서의 살인에는 의문의 여지없이 똑같은 결과에
의해서 용의자와 무혐의자가 명확하게 선이 그어졌다는
사실이야. 용인에서는 테이블에 앉아있던 사람이
용의자였고......"
"반대로 이번 살인에서는 볼룸댄스를 추던 사람이 용의자가
됐다는 말이지?"
"그리고 초대객들이 한 사람만 다르고 똑같은 사람들이구."
"그렇지."
남형사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리고 또 이 칵테일 잔이 의문으로 등장했구."
윤형사가 말했다.
"이 칵테일 잔이 과연 용인 별장에서 사라진 그 칵테일
잔일까?"
"그 칵테일 잔일 가능성이 높아. 물론 조사는 해봐야 되겠지만
말이야."
"그럼 연박사의 진술이 거짓이었군. 자기도 모르게 잔이
주머니 속으로 들어갔다는 진술 말이야. 차창 밖으로
던져버렸다는 말도."
"진실일 수도 있어."
윤형사는 시체를 내려다보며 무표정한 얼굴로 말했다.
"윤형사."
남형사가 갑자기 나지막한 음성으로 그녀의 귀 가까이에
얼굴을 갖다대었다.
"성주라양의 죽음은 예외로 하고 말이야, 두 별장에서
공통적으로 용의자에 들어간 사람은 유여사밖에 없잖아?"
"그래, 과장님이 늘 표현하는 말로 이번에는 모든 화살표가
유여사에게로 향해져 있어."
"연박사를 유여사가 살해했다...... 결국 연박사와 유여사는
공범관계였다, 이렇게 귀결지어지는건가?"
"난 그렇게 생각 안 해. 연박사와 유여사가 볼룸댄스를
추었다는 사실 자체가 이미 용의자 선상에서 벗어났다고 생각해.
그리고 무엇보다도 L호텔의 일본인은 남성이었어."
"아, 그렇지. 그럼 김진건 아나운서가 연박사의 목덜미에
바늘을 꽂았겠군?"
"글쎄, 지금으로서는 김진건 아나운서 역시 유여사와 다를 게
별로 없어. 그로서는 테이블의 눈동자들과 춤을 추고 있는
파트너와 유여사를 한 시야에 넣고 살인 순간을 포착해야 했어.
거기다가 볼룸댄스 자체라는게 말뚝 춤이라기보다는 움직이는
춤이야. 파트너와 춤을 추면서 같이 움직이는 연박사의 목을
정확하게 주사바늘로 꽂는다는 것도 용이한 일은 아니야. 더욱이
바늘만 꽂는다고 해서 한 호흡만에 죽는다는 보장도 없어. 손
안에 감출수 있는 소형 주사기를 사용한 것으로 간주하고, 그
주사기를 목에 꽂았다면 바늘을 꽂는 순간 동시에 주사기도 같이
눌러야 했어."
"그렇지만 연박사가 주사바늘에 의해서 숨진건 사실이잖아."
"그건 트릭일 수도 있어."
"트릭일 수도 있다구?......"
남형사가 이해할 수 없다는 듯한 표정을 지으며 반문했다.
"누군가가 연박사의 술잔에 수면제 같은 걸 타넣었을 수도
있어. 그가 쓰러지는 순간 제일 먼저 달려가서 번개처럼 목
뒤에다가 바늘을 꽂을 수도 있는 일이야. 연박사가 쓰러질 때
앞으로 쓰러졌다는 사실이 일단 그런 가능성을 뒷받침해주고
있어."
"그가 볼룸댄스를 춘다는 보장이 어딨냐구?"
"아니지. 볼룸댄스와는 상관없는 일이야. 그가 테이블이나
홀이나 어디서든 쓰러지기만 하면 되는거야. 그 다음에는 혼란한
틈을 타서 주사바늘을 꽂으면 되는거니까."
"그것 참, 그럼 용인 별장 때와 다를게 뭐 있어. 용의자는 또
초대객 전부 아니야."
남형사, 쓰러진 연박사에게 달려간 순서를 보면 강여사가 단연
선두야. 물론 그 전에 김진건 아나운서가 시체(?)를 건드렸긴
하지만 먼저 달려간 사람을 강여사였어."
윤형사는 입술에 힘을 주면서 말했다.그리고난 후, 그녀는
김진건 아나운서가 앉아있는 테이블 쪽으로 걸어갔다.
"김진건 아나운서님, 연박사님이 쓰러지고 난 뒤에
아나운서님께서는 엎어져있는 연박사님을 어떻게 하셨는지요?"
"아까 강여사님이 말씀하신대로 연박사님을 눕혀서 넥타이를
풀고 와이셔츠 윗단추를 풀었습니다."
"아, 참 그랬었지요. 물론 넥타이를 풀고난 뒤 심장에다 귀를
갖다대고 확인도 하셨겠지요?"
"네."
"심장이 멈춰있던가요?"
"그게......"
김진건 아나운서가 자신없는 눈빛으로 윤형사를 바라다보았다.
"심장이 완전히 멎었다는 느낌은 받지 못했군요?"
"사실은 경험이 없었어요. 내가 막 심장에다 귀를 대고
확인하려는 순간 강여사님이 달려왔어요. 사실 전 의학상식이
거의 없는 편이라서 그 상황에서 어떻게 해야 할 지 몰랐어요.
더군다나 술도 너무 많이 취했고....... 하여튼 강여사님이
오셔서 연박사님의 눈꺼풀을 뒤집어보더니 손목을 잡았어요.
그러고나서 심장에다 귀를 갖다대고 숨소리를 확인하는
거였어요. 강여사님이 갑자기 우시면서 울먹이는 목소리로
연박사님이 숨졌다고 하시는 것이었어요. 그 다음부터는 우리
모두의 머리 속에는 용인 별장의 악몽이 엄습해왔습니다. 우리는
모두 권의원님이 앉아계신 테이블로 돌아왔습니다."
"잠깐만요, 그때 누가 제일 늦게까지 연박사님 옆에
있었나요?"
윤형사는 핵심을 질문했다.
"잘 모르겠습니다. 하도 정신이 없어서......"
"임국장님, 혹시 기억하고 계십니까?"
윤형사가 임국장에게 시선을 돌리며 물었다.
"나 역시 정신이 없어서......"
"그럼 연박사님 시신을 원래대로 해놓은 사람은 누굽니까?"
"그건 나요."
임국장이 대답했다.
"연박사님이 쓰러진지 30분이 지나도록 경찰에 신고를 하지
않은 이유가 뭡니까?"
윤형사가 임국장에게 따지듯이 물었다.
"방금 전에도 김아나운서가 얘기했듯이 우리 모두는 너무
놀라고 충격을 받아서 제 정신들이 아니었어요. 아마 여형사님
같아도 놀랐을거요. 아니, 장과장이 이 별장에 들어설 때
연박사의 시신을 보고 놀라서 우리를 향해 권총을 뽑아들었을
때처럼 우리도 연박사가 숨진 사실에 모두들 겁부터 났소.
의원님과 수습책을 의논하는 도중이었소. 경찰에 신고를
할수밖에 없다는 결론이 막 내려졌을 때 당신들이
들이닥친거요."
그때 산 아래의 도로에서 앰뷸런스와 순찰차가 도착한 소리가
희미하게 들려오고 있었다. 장비를 갖춘 감식반원과 경찰의가 홀
문을 열고 들어서자 어느 틈엔가 냄새를 맡은 기자들이 우르르
계단을 밟고 올라오는 소리가 초대객들의 귓가에 들려왔다.
카메라를 어깨에 멘 방송국 기자가 바주카포를 쏘듯 홀 안의
사람들을 향해 촬영을 시작하자 권의원의 얼굴이 분노와
좌절감으로 엉망으로 일그러지고 있었다.
13. 사건은 종결된 것일까?
무서리가 내리고 난 도시의 밤은 사막처럼 황량하기 이를데
없었다. 명멸하는 네온사인의 불빛도, 울창한 숲처럼 뻗어오른
고층 빌딩의 불빛도 도시 전체를 나뒹굴고 있는 낙엽의 잔해와
함께 죽은듯이 정적에 감싸여 있었다.
늦은 수사회의를 끝마치고 맨션 아파트로 귀가한 윤주희
형사는 욕실에다 물을 받아놓고 옷가지를 한 꺼풀씩 벗었다.
친구 언니가 미국으로 박사학위를 따기 위해 유학을 가는 바람에
그 기간동안 기거할수 있게 된 윤형사는 혼자만의 맨션 아파트
생활이 무척 자유롭고 평화롭게 느껴졌다. 이제 석달 후면
아파트를 내줘야 할 형편이 되었지만 혼자 쓰기에는 너무나 넓은
아파트였다. 친구 언니는 방범비 한푼 안 내고 보금자리를
지키게 되었다고 좋아했지만 윤형사로서는 경제적 부담이 컸다.
그러나 마음씨 좋은 친구는 관리비를 반씩 부담하자고
제의하고는 일주일에 두서너 번은 그녀와 함께 같은 침대를
사용하곤 했다.
알맞게 따뜻한 욕조 속에 미끈한 알몸을 담군 윤형사는 행복한
표정을 지으며 꿈꾸듯이 지그시 눈을 감았다. 그러나 욕조 속의
행복은 머리 속의 퍼즐 게임으로 인해 파문이 일듯 잔잔하게
사라져버렸다.
연박사의 사체부검 결과는 흡입마취제(General anesthetics)에
의한 호흡 억제에 의한 급성 심장사인 것으로 밝혀졌다.
일반병원에서의 대수술 또는 분만시, 그리고 치과에서 소수술시
치통에 사용되는 트릴렌이었다. 거기에다 시클로프로판이라는
할로겐화 마취제를 병용해서 목뼈 왼쪽의 후두부를 주사해
즉사케했다는 부검 결과였다. 더욱이 피살자는 알콜을 섭취하고
있었기 때문에 사망 직전에 흔히 일어날 수 있는 기관지
경련이나 근육 경련 또는 사지마비 증세가 나타나지 않고 잠자듯
즉사했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알콜만으로 춤을 추다가
쓰러지기엔 알콜 농도가 일반적인 선을 넘지 않았다는
결론이었다. 특이한 건 마취제 성분과 함께 수면제 성분도
검출되었다는 사실이었다.
그런데 시클로프로판이라는 할로겐화 마취제는 클로로포름과
같은 흡입마취제이기 때문에 볼룸댄스를 추기 전이나 추는
도중에 맡았다면 가스에 중독되듯 쓰러질 수도 있다는
분석이었다. 시클로프로판이 극약인 트릴렌과 함께 병용되었다는
사실은 살인전에 마취제를 손수건이나 솜에 묻혀서 연박사도
모르게 흡입시켰을 수도 있다는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었다.
그러나 검시의의 소견서만으로는 용의자의 폭을 좁히기가
용이하지 못했다. 같이 춤을 추던 유여사가 연박사에게 마취제를
사용했다 해도 그 이후에는 쓰러져 있는 연박사에게 다가간 적은
없었던 것이다.
윤형사는 복숭아처럼 싱싱하게 매달려 있는 유방에 따뜻한
물을 끼얹으며 유두 꼭지를 부드럽게 돌렸다 놓았다. 그녀는
복잡한 머리를 맑게 할 양으로 욕조에서 나와 샤워를 틀었다.
샴푸로 머리를 감고 몸 구석 구석 비누칠을 해서 새로 태어난 듯
몸을 깨끗이 씻어낸 그녀는 수건으로 젖은 물기를 닦으면서
알몸으로 욕실을 나와서 침대에 놓은 꽃팬티를 허리 굽혀 입고는
양손을 뒤로 해서 블래지어를 잠궜다. 살갗이 내비치는 엷은
나이트 가운을 걸치고 응접실로 나온 그녀는 목욕을 했음에도
심신이 개운치가 못한지 신경질적인 걸음으로 주방으로 들어가서
가스렌지를 틀고 물을 올려놓았다.
종결되리라 믿었던 미스코리아 살인사건은 범인이라
단정지었던 연박사가 뜻하지 않게 살해됨으로 해서 다시 미로
속에 빠져버렸다. 외면상으로는 유여사가 파트너로 춤을 추다가
주사바늘을 꽂은 것으로 살인이 막을 내려야 당연한 귀결인데
무엇 때문에 원점에서 빙빙 맴돌아야 하는지 답답하고
갑갑하기만 했다.
윤형사는 뜨거운 커피 한 잔을 탁자 위에 놓은 채 커피가 식는
것도 잊어버리고 사건의 본질을 꿰뚫어보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그러나 그러면 그럴수록 머리 속은 더 복잡해지기만 할
뿐이었다.
"휴, 과장님하고 남형사가 툭 하면 약을 찾는 이유를
알겠어......"
윤형사는 커피를 입에 대다가 약 한 알로 신경전을 벌이던
장과장과 남형사의 눈싸움을 떠올리면서 피익하고 미소를
지었다. 그녀는 커피를 두 모금 마시고 평온을 되찾은 듯한
표정을 지으며 다시 커피 잔에다 모은 입술을 가져갔다.
연박사를 살해한 자는 의학상식의 해박한 인물이라는데에
수사회의 결과가 모아졌다. 그리고 범인은 대담한 성격의
소유자고 비열할 정도로 영리한 인간이라는데에 의견이
일치했다. 아울러서 두 미스코리아를 살해한 진범은 연박사가
아닐 수도 있다는 의견이 회의 참석자 가운데 절반이 될 정도로
양분되어 있었다. 그러나 수사회의는 매냥 수박 같핥기식으로
사건의 주위에서 빙빙 맴돌다가 산회해버리기 일쑤였다. 오늘의
수사회의도 추측만 무성했을 뿐 달콤한 열매는 하나도 못땄다.
때를 맞춰서 매스컴에서는 살인 현장에서 범인을 체포하지 못한
경찰의 무능을 함포사격하듯 일제히 질타하고 나섰고, 두 별장의
한정된 용의자들에게 의심의 눈초리들을 보내고 있었다.
연박사의 죽음으로 인해 정가에서는 권의원이 당 총재에게
의원직 사퇴서를 제출해서 곧 당 총재가 사퇴서를 수리하게 될
것이라는 풍문이 지배적이었고, 유여사 또한 녹미회 회장직을
자진사퇴하고 집안에만 틀어박혀 있었다. 마찬가지로 강여사
의상실의 정계 고객과 저명인사, 대기업의 단골 고객들도 발길을
끊어버리고 다른 의상실로 등을 돌렸다. 지명이 높았던 금변호사
사무실에도 소송을 의뢰하는 전화상담마저도 전화기가 고장난 듯
뚝 끊겼고, 변호사 협회의 출입도 힘들 정도로 그녀를 보는 눈은
모두 차갑고 냉랭했다. 김진건 아나운서에 대한 방송국 고위층의
반응도 그를 살인사건 용의자로 대하고 있었으며, 가을철
프로그램 개편이 한 달도 채 지나지 않았는데도 그가 일주일에
두 회를 사회로 맡고 있는 저명인사를 초대해서 그들의 인생관과
경험담을 들어보는 토크쇼 성격의 "인생을 얘기합시다"라는
프로가 곧 해체되고, 그 시간에 외화로 대치한다는 게
방송가에서는 이미 기정사실로 받아들여지고 있었다.
임국장이나 나비향양도 그들과 별로 다를게 없었다. 임국장은
방송국 사람들로부터 어색한 관계에 놓여져 있었고
나비향양에게는 방송 출연이나 모델 제의, 그밖에 중요한 행사에
초대장을 보내오는 일조차 없었다.
그만큼 여론의 따가운 시선은 그들의 일상사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고 있었다. 백로의 무리 속에 까마귀가 섞여있는 것을 뻔히
알면서도 백일하에 그 정체를 밝혀낼 수 없는 자신들의 비운에
한숨을 토해놓으며 파티에 참석한 자신을 원망할 수밖에 없는
그들이었다.
그런 상황에 놓이게 되자 초대객들은 경찰의 수사에 없는 말
있는 말 다해가며 적극적으로 수사협조에 나섰다. 그것만이
자신의 무죄를 입증하는 듯, 두 별장에서의 행동 하나 하나를
슬로우 모션으로 보여주듯 생생하고, 정확하게 설명해주었다.
그러면서 그들은 누구든지 범인이 빨리 검거되기를 바라면서
희생양이라도 나와주길 간절히 고대하는 눈치였다. 더 나아가서
그들의 눈빛에는 상대가 누구라도 의문점이 느껴지면 날카로운
이빨을 서슴치 않고 드러내보였다. 악에 대한 응징의 눈빛이
아니라 잃어버린 기득권에 대한 원상회복을 위해 혈안이 되어
있는 그들이었다.
그런 위기의식의 경쟁심은 수사상에 있어서 편리한 점이
한두가지가 아니었다. 전화 한 통화만으로 콧대 높기로 유명한
그들을 맨발로라도 달려나오게끔 할 수 있다는 현실이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신기하기까지 했다.
그러나 여느 사람들과는 달리 권의원만은 쉽게 상대할 수가
없었다. 권의원에게는 전화 한 통화가 아니라 열 통화를 걸어도
목소리조차 듣기 힘들었다.
연박사가 살해된 이튿날, 윤형사는 남형사와 함께 L호텔로
달려가서 니시무라 다니구찌씨가 체크인해서 체크아웃될 때까지
죽은 호텔에 머물렀는지에 대해서 확인해 보았다. 시일이 좀
지나서인지 담당 프런트와 종업원들은 자신있게 말하지 못했다.
다만 그날 밤 9시부터 다음날 새벽까지 콧수염 기른 일본인이
호텔 밖으로 외출하는 걸 본 호텔 종업원은 한 명도 없었다.
결국 니시무라 다니구찌는 그날 밤 9시부터 다음날 새벽까지
호텔방에 있었던 것으로 보고 그날 밤의 연박사 알리바이를 병원
관계자들과 조박사에게 확인해 보았다. 뜻밖에도 그는 밤 9시에
그 병원에서 근무하고 있는 마취전문의의 집인 부천으로 향하는
승용차 안에 있었다. 그 사실을 알아낸 두 형사는 시경으로
전화를 걸어서 동료 형사를 부천으로 급파했다. 마취전문의
부인과 중학교에 다니는 두 자녀에게 물어본 결과 그의 부천행은
사실로 판명되었다. 친척이 외국에 나갔다가 귀국하면서 선물로
갖고 온 최고급 양주 두 병을 새벽 3시까지 마시고 아침 8시가
되어서야 다시 승용차를 타고 병원으로 출근했다는 것이었다.
생각만 해도 아찔한 일이었다. 연박사를 검찰에 기소해서
법정에서 재판을 받게 했다면 마취전문의의 증언으로 인해
망신을 당할 뻔하지 않았는가?
그럼에도 연박사가 성주라양을 유인해서 얼굴을 바꿔버렸다는
사실은 그가 진범일수밖에 없다는 대전제를 뒤집어놓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어째서 멀쩡한 성주라양의 아름다운 얼굴을
추녀로 성형수술해버렸는지 상식적으로 도저히 납득이 가지
않았다. 살인을 위해서만이 가능한 수술행위였을텐데 그가
살해하지 않았다는 것이 이해가 안 될 정도였다.
그런데 부원장실에서 조박사를 만나서 성주라양이 아무도
모르게 퇴원을 하게 된 시기와 시간을 알아보다가 한 가지
의외의 사실을 알게 되었다. 연화병원이 연박사와 강여사의
공동명의로 되어 있었기 때문에 소유주가 강여사가 되어버렸다는
점이었다.
그러나 L호텔의 니시무라 다니구찌가 남성이었다는 명백한
사실은 용인 별장에서의 윤보혜 독살 용의자와는 달리 성주라양
살해에 있어서는 남성이 범인임에는 재론의 여지조차 없는
것이기에 여성들을 연결시키는 것은 무리였다.
하여튼 조박사의 진술을 통해서 성주라양이 퇴원한 시기와
L호텔의 시체로 발견된 시일 차이는 불과 이틀밖에 되지
않았다는 걸 밝혀낸 두 형사는 그 사이에 모종의 음모가
진행되고 있었다는 걸 쉽게 짐작할 수 있었다.
시경으로 돌아온 두 형사는 전화기 두 대를 이용하여 성주라양
살해에 있어서 유력한 용의자가 되어버린 김아나운서와 박회장,
그리고 권의원에게 10월 22일 아침부터 24일 새벽까지의
알리바이를 물어보았다. 김아나운서는 그날 일들을 무슨 수로
기억하느냐고 짜증스러워하다가 한참을 생각하는듯 하더니
기억이 난듯 자신있게 대답했다.
22일과 23일은 "인생을 얘기합시다"의 녹화가 있어서 저녁까지
방송국 스튜디오에 나가 있었고, 밤에는 출연한 저명인사와 그의
가족들, 그리고 프로듀서와 함께 밤 10시까지 서울 근교에 있는
대형 갈비집에서 저녁을 먹었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밤 11시쯤에
집에 귀가했다는 것이었다.
남형사가 몇 번의 전화 끝에 이사회의를 끝마친 박회장과
통화가 이루어졌을 때, 그는 피곤한 음성으로 30분 후에 다시
걸어달라고 하고는 수화기를 내려놓았다. 남형사가 30분 후에
다시 전화를 걸자 박회장은 여비서를 시켜서 22일과 23일의
행적을 생각해냈는지 처음과는 달리 활기찬 음성으로 22일에
자신은 자유의 여신상과 볼룸댄스를 추고 23일에는 태평양
상공에서 휴식을 취하고 있었노라고 농담까지 하는 것이었다.
두 사람의 알리바이가 조사 결과 사실로 밝혀졌다. 방송국을
찾아가 "인생을 얘기합시다" PD를 만나서 확인해보고 출연한
저명인사에게도 물어보았지만 김아나운서의 알리바이는
완벽했다. 박회장 또한 19일 오후에 뉴욕으로 출국한 것이
밝혀졌고, 23일 저녁에 귀국한 것으로 공안 출입국 관리사무소
기록카드에 기록되어 있었다.
이제 남은 사람은 권의원뿐이었다. 그러나 권의원과는
통화조차 어려웠다. 권의원은 의원직 사퇴서를 제출하기전 깊은
밤에 대통령의 부름을 받고 청와대를 다녀오고 난 뒤부터 외부의
전화를 일체 받지 않았다. 사무실은 물론이고 자택에서도
"의원님은 안 계십니다"만 앵무새처럼 되풀이해 말할 뿐이었다.
유여사도 권의원과 마찬가지로 통화하기가 어려울 정도로 좀처럼
수화기 앞에 모습을 나타내지 않고 있었다. 완전한 침묵 속에
빠져버린 권의원과 유여사였다. 그러나 권의원의 22일 행적은
쉽게 알 수가 있었다. 권의원은 그날 정기국회가 열린 국회
의사당에 있었음을 알 수가 있었다. 23일도 마찬가지였다.
윤형사는 빈 커피 잔을 싱크대에 넣고 응접실 소파에 다시 와
앉았다.
권의원은 찬바람이 부는 이 고도 같은 밤에 어디서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그는 어디로 잠적해버린걸까?
윤형사는 드라이로 머리를 말리고 나서 화장지로 얼굴을
깨끗하게 닦아내고는 화장품을 발랐다. 거울 속의 얼굴은
미스코리아의 얼굴처럼 아름다움으로 넘쳐있었다.
이루어질수 없었던 사랑.
운명적으로 다시 얽혀버린 과거의 미스코리아들과 남편들.
순수한 미모가 아닌 인공 미녀들의 연속적인 죽음.
윤형사는 나이트 가운을 침대에다 벗어던지고 전신이 비치는
거울 앞에 서서 양손을 허리에 갖다붙이고 좌우로 몸을
움직여보았다.
윤형사는 속으로 남자를 정의해보았다. 내시가 아니라면
눈부실 정도로 아름다운 여체 앞에서 감상만 하고 있을 늑대는
과연 몇 명이나 될까? 그것도 성욕을 채을 수 있는 완벽한
환경과 조건이 이루어진 상황에서 바지를 안 내릴 남자는 열 명
중에 몇 명이나 될까? 성욕의 문제. 이번 미스코리아 살인에
있어서 이 육욕의 심리가 살인에 어떤 작용을 했느냐 하는
문제가 조금씩 고개를 들고 있었다. 언뜻 생각하기에는
미스코리아의 죽음은 죽이고 싶을 정도로 아름다운 육체와
성욕에 불타있는 눈빛을 연상하게 되지만 실상은 그런 심리와는
하등 관계가 없어보이는 것이 이번 미스코리아 살인사건이었다.
윤형사는 귀찮은 듯 침대에 벌렁 누웠다. 그 순간 그녀의 뇌리
속에 성욕에 대한 의문이 자꾸만 제기되어지고 있었다. 그냥
죽이기에는 아까운 일이 아니었을까?
윤형사는 침대에서 벌떡 상체를 일으키고 팬티 차림으로
불꺼진 응접실로 나갔다. 다시 불을 켜고 벽시계를 보니 자정이
넘어있었다. 그녀는 끈질긴 그 성욕의 의문을 풀지 않고는 잠이
올 것 같지가 않았다. 마음을 가라앉히고 테이블 위에 놓인
수화기를 든 그녀는 나이 잡수신 음성이 제발 들려오지 않길
바라면서 전화번호를 눌렀다. 신호가 가고 있었다. 네번째
신호음이 끝날 때쯤 수화기를 드는 둔탁한 소리가 들려왔다. 두
진이 정사 후에 살해된 것이 아니고 처녀성을 그대로 유지한 채
죽임을 당한 것이 계속 그녀의 마음 속에 앙금처럼 걸려 있었다.
"여보세요."
젊은 남자의 목소리였다. 텔레파시가 통한듯 남형사가 받았던
것이다.
"남형사야? 나야, 안 자고 있었어?"
"나가 누구야!"
어쭈, 황송해하지는 않고 퉁명스럽게 받아?
윤형사는 자존심이 상했는지 수초 동안 침묵을 지켰다.
"여보세요, 여보세요."
남형사의 음성이 다급해졌다. 그러면 그렇지 지가.......
"내 목소리 잊었어?"
"아, 윤형사구나. 또 호출 명령이야?"
누가 장과장 쫄다구 아니랄까봐.
"그게 아니고 뭣 좀 한 가지 물어볼게 있어서......"
"뭔데?"
남형사는 하품을 하면서 묻고 있었다.
"자고 있었어?"
"아니, 막 자려던 중이었어."
팔자 좋군. 누군 골치가 쑤시도록 생각하고 있고...... 그래서
범인을 검거하면 나란히 표창장 받고, 이런 한심한 짝궁을 믿고,
어휴.......
"아, 전화를 걸었으면 용건을 말해야 할 것 아니야,
윤형사답지 않게 뭘 망설여?"
어쭈? 에이, 그냥 확 끊어버려?
"응, 미스코리아의 죽음을 생각하다가 한 가지 궁금한 게
있어서......, 그런데 남형사, 남형사라면 말이야, 미스코리아와
단 둘이 있다면 어떡하겠어?"
"어떡하다니, 뭘 어떡한단 말이야?"
어휴, 이런 답답한 인간이 있나, 척하면 척이지, 멍청하긴.
"그러니까 미스코리아 진과 한 공간에 같이 있게 되었을 때,
물론 호텔방처럼 완벽한 장소야. 간섭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어.
그럴 때 남형사 같으면 어떡하겠느냐는 거야?"
"윤형사, 지금 전화거는 데가 어디야?"
남형사는 새삼스럽다는 듯한 음성으로 질문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있었다.
"어디긴 어디야, 아파트지. 어떻게 하겠느냐니깐?"
"아파트야? 난 또...... 뭐라 그랬지? 아, 미스코리아 진하고
한 방에 있으면 어떡하겠느냐고? 글쎄...... 어째 질문 내용이
좀 그렇다."
"지금 농담하자고 전화건 거 아니야, 어쩌면 미스코리아
살인사건의 해결에 있어서 중요한 열쇠 구실을 하게 될지도
모르는 질문이야. 거짓없이 대답해야 돼. 순수한 마음으로
마음으로 말이야."
윤형사가 진지한 음성으로 말했다.
"남성들의 진실성 문제인 것 같은데...... 하룻밤의 불장난을
얘기하는 건지 진실한 사랑의 행위를 얘기하는 건지 애매하다."
"간단하게 생각해. 남형사라면 어떡하겠어? 영원히 비밀이
보장된다면 말이야."
"성적 욕구라. 솔직히 얘기해야 돼?"
"그래야 돼."
"이건 인격과는 상관없는 일이지?"
"그렇다니까."
"전에도 말했지만, 일단 비밀이 보장되어 있으면 나는 분명히
미스코리아 진과 하룻밤을 침대에서 보낼거야."
"육체의 행위를 말하는거지?"
"당연한 얘기지."
흥. 너하고 인생을 얘기하나 봐라, 순 날강도 같은 자식.
하나도 안 변했어. 실망이다, 실망!
"역시 남형사 생각과 내 생각이 일치해."
윤형사는 만족하게 웃었다.
"윤형사, 생각이 일치한다는게 무슨 뜻이야?"
남형사가 궁금해했다.
"남자에 대한 정의를 내리기가 무척 힘들어서 남형사의 조언을
좀 구해봤어. 말난 김에 한 가지 더 물어보고 싶은데,
미스코리아 진의 아름다운 여체를 외면할 수 있는 남자가
존재할까?"
"글쎄, 이 문제는 쉽게 정의를 내릴 성질의 것이 아니라고
생각해. 사람마다 다 다를 수 있거든. 난 노총각이니까 그렇게
생각하는거지. 직접 그런 상황에 직면했다면 장담은 할 수
없다고 얘기할 수 있어."
"그럼 뭐야, 하겠다는 얘기야 안 하겠다는 얘기야?"
"어감이 좀 이상하다, 윤형사. 하여튼 이 문제는 여론조사로서
확률을 잡아보는 방법밖에 별 도리가 없어. 나는 하룻밤을
자겠다는 쪽으로 대답하겠지만 다른 남자들은 어느 쪽에다
응답을 할지 알 수 없어. 내 상식적인 생각으로는 하룻밤을
자겠다는 응답이 압도적일거라고 추측되지만 지금까지 그런
여론조사는 공식적으로 한 예가 없으니까 알 수 없는 일이지."
"알았어. 그럼 끊어."
"그래, 잘 자."
"남형사, 잠깐. 과장님 지금 주무시고 계시겠지?"
"그렇겠지. 그런데 왜?"
"과장님한테 한번 여쭈어볼려고."
"도대체 남성의 심리가 이번 살인과 무슨 밀접한 관계가
있다고 그러는 거야?"
"미스코리아 진이 숫처녀였다는 사실은 살인 동기의 파악에
실마리를 제공해주고 있다고 생각해. 아울러서 용의자의 얼굴도
희미하게나마 부각될수 있다고 생각해."
"그래? 아하, 그렇지. 범인이 남자였다면 과연 성주라양의
육체를 그냥 놔뒀겠느냐는 의문이 대두되게 마련이지."
"역시 빠르군. 두 미스코리아를 살해한 범인의 성별이 여자일
수도 있다는 것을 암시해주는 방향표시야."
"그렇지만 이 세 명의 죽음이 한 여자에 의해 이루어졌다고
보기에는 의문점이 한두 가지가 아니야."
"금맥만 찾으면 의외로 범인의 윤곽이 쉽게 드러날 수도
있겠지. 동기없는 살인은 없을테니까 말이야."
"골치 아픈 살인이야."
"내일 시경에서 봐."
"그래, 끊는다."
수화기를 내려놓은 윤형사는 하얀 다리를 꼬고 앉아서 서너 번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그녀의 머리 속은 서서히 용인 별장의
살인 현장으로 미끄러져 들어가고 있었다.
볼룸댄스를 추던 중에 살인이 발생했고, 파라티온을 탈 수
있었던 사람은 연박사와 유여사뿐이었다. 마찬가지로 청평
별장에서도 볼룸댄스를 추는 도중에 연박사가 주사바늘에 의해
살해당했다. 그럼으로 해서 용인 별장에서의 범인은 자연히
유여사로 인정되어지게 된다. 이 점을 연결시켜보면 청평
별장에서도 파트너였던 유여사가 순간적으로 살인 찬스를
포착해서 연박사를 죽인 것으로 결론지어진다.
그러면 성주라양의 살해는 유여사와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는
것인가?
연박사와 유여사는 공범관계였다고 인정된다. 실종 당시
성주라양은 유여사 댁에서 나와 사라졌고 이후에는 연박사
병원에서 입원(?)해 있었던 것으로 밝혀짐으로 해서 연결고리를
맺고 있다.
그런데 L호텔에 등장한 니시무라 다니구찌는 유여사와 어떤
관계에 놓여있는 인물일까? 연박사는 그 날의 알리바이로 보아
L호텔에 도저히 모습을 나타낼 수 없었다. 그렇게 되면 연박사와
유여사가 공범관계였다는 것이 성립이 안된다.
그렇다면 연박사는 어째서 성주라양을 성형수술해서 L호텔의
변사체로 만들어버리게끔 원인제공을 해주었을까? 그만의 이유가
있었을까? 그럴 리는 절대 없을 것이다. 연박사는 직간접으로 두
미스코리아 살인에 연관되어 있을 것이다. 니시무라 다니구찌,
그 일본인이 연박사였다면 상황은 대체로 맞아떨어진다. 청평
별장에 숨겨지듯 놓여 있었던 칵테일 잔도 연박사의 손에 의해
옮겨졌으리라는 것을 누구든지 별 의심없이 받아들였을 것이다.
연박사 스스로가 차창 밖으로 던져버렸다고 거짓 진술을
했으므로 그 칵테일 잔을 보관하고 있던 자는 연박사임이 너무나
자명한 사실이 되는 것이다.
그러나 이와는 반대로 유여사가 진범이 아닐 것이라는데에
한쪽 손이 높이 들려지는 것도 사실이다. 용인 별장에서의 진의
독살은 용의자가 단 둘뿐이었다. 더욱이 연박사가 살해당하고
나자 유여사가 진범인데에는 의문의 여지가 없을 정도로
완벽하게 그 정체가 드러나버렸다. 그렇게 어리숙하게 살인을
저지를 사람이 있을까? 그런 상황은 어쩌면 유여사를 범인으로
몰아넣기 위한 이중의 효과를 노린 범행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유여사가 두 미스코리아 진을 살해할만한 그 어떤
동기도 엿보이지 않는다. 오히려 유여사의 살해 대상은 남편인
권의원이나 강여사쪽이어야만 했다. 유여사와 연박사가 두
사람의 불륜을 눈치채고 그 분노를 도저히 억누를 길 없어
공범관계로 악수를 했다고 쳐도 두 진을 살해할 이유가 하등
없는 것이다.
그렇지만 이런 가능성을 내재하고 있을 수도 있다. 최후의
목적 달성을 위해 모든 시선을 엉뚱한 곳으로 쏠리게 한 다음
불륜의 남녀를 마지막으로 살해하려는 계산이 깔려있을 수도
있다. 그러나 그렇게 하기까지는 위험부담이 너무 크고 실현
불가능한 살인계획이 아닐수 없다. 정상에 도달하기도 전에
추락사하기 꼭 알맞은 자살행위나 마찬가지인 복선인 것이다.
윤형사는 응접실의 불을 끄고 침실로 들어왔다. 침대 머리맡에
있는, 갓이 씌워져있는 스탠드의 분홍빛 불을 켜고 자리에 누운
그녀는 왕관을 쓰고 고른 치아를 보이며 환하게 웃고 있는 두
미스코리아 진의 얼굴을 떠올려보았다.
여자라면 누구나 아름다워지고 싶은 욕망을 가지고 있다.
얼굴에 칵을 대서라도 더욱 아름다워지고 싶었던 두 미녀의
마음도 같은 여자로서 십분 이해가 간다. 그러나 두
미스코리아는 자신이 왜 살해당해야만 했는지 그 이유조차도
모르고 숨져갔을지 모른다. 단지 성형수술을 했다는 이유만으로
그런 사실을 알고 있는 주변 사람에게 죽음의 표적이 될수
있을까?
그러나 지금까지는 성형수술로 인한 두 미스코리아와 연박사가
살해당한 것이 하나의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만약에 그
공통점이 범인의 살해동기로 작용하고 있다면 그 파티 속의 숨은
얼굴은 누구일까?
윤형사는 다시 침대에서 일어나앉으며 두 무릎을 세우고 그
위에다 얼굴을 묻었다.
유진숙 여사. 어째서 그 여자의 얼굴이 자꾸만 떠오르는걸까?
두 별장에서 살인을 저지른 인물이 유여사라고 일단 못박아보자.
그렇다면 L호텔의 니시무라 다니구찌는 어떻게 된걸까?
그것은 오직 한 가지 가능성밖에 없다. 유여사가 남장을 하고
성주라양을 살해했다고밖에 달리 해석할 방법이 없다. 남장을
했다면 연박사와의 공범관계는 더욱 뚜렷해진다. 연박사를
살해함으로 해서 자신의 범행을 혼자만의 영원한 비밀로 간직할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렇게 확대해석해 볼 수도 있지 않을까?
그렇다면 사라진 칵테일 잔에 대한 모든 의문이 동시에
풀리기도 한다. 용인 별장에서 두 공범은 진의 양 옆에 앉아서
그녀의 잔에 파라티온을 타넣어 숨지게 했고, 칵테일 잔을 숨긴
건 연박사가 아니라 유여사인 것이 확실하다. 연박사가 차창
밖으로 잔을 버렸다는 건 유여사에게로 향해지는 경찰의 의심의
눈초리를 벗어나게 해주기 위한 거짓 진술일 수도 있으며
연박사는 유여사가 칵테일 잔을 숨긴 이유를 죽을 때까지 몰랐을
수도 있다.
그럼 유여사는 어째서 칵테일 잔을 숨긴 것일까?
유여사는 처음부터 연박사도 살해 대상에 넣고 있었던 게
분명하다. 성주라양의 살인을 성공으로 이끈 다음 남편의 생일
파티에서 그를 살해하기로 마음 먹고 숨겼던 칵테일 잔을 테이블
위에 몰래 꺼내놓음으로 해서 연박사가 용인 별장에서
윤보혜양을 독살한 진범임을 암시해놓은 것이다.
그렇다면 청평 별장에서의 이 살인은 어떻게 해석하여야
하는가?
유여사는 연박사가 심장마비로 숨진 것으로 위장하려고
했을지도 모른다.
장과장님과 우리가 현장에 들이닥쳤기 망정이지 그렇지
않았으면 권의원을 비롯해서 그 파티에 참석했던 초대객들은
연박사가 심장마비로 숨진 것으로 단정짓고 경찰도 모르게
장례식을 치렀을지도 모른다. 우리가 별장 안으로 들어갔을 때
파티에 참석했던 사람들이 상의를 하고 있었던 모습이 그 점을
잘 설명해주고 있다. 권의원을 비롯하여 어느 누구도 연박사의
죽음을 사건화시키고 싶지는 않았을 것이다. 강여사 또한 남편의
죽음에 애도의 눈물을 흘리기보다는 차라리 잘 됐다는 표정을
권의원 뒤에서 지었을 것이다. 아마도 유여사가 칵테일 잔을
테이블 위에 슬쩍 올려놓은 것은 다른 사람이 발견해내거나
그렇지 못하면 어느 시간에 자신이 발견한 것처럼 해서 칵테일
잔에 대한 부연설명을 열심히 했을 것이다. 이 칵테일 잔은 용인
별장에서 연박사가 숨긴 것이라고 떠들어댔을 것이다.
그렇다면 유여사는 무엇 때문에 두 미스코리아와 연박사를
살해했을까? 미스코리아에 대한 품위를 손상시키고 모독을
했다는 이유로 두 미스코리아를 살해하고 연박사마저 처치해버린
것일까?
아무리 생각해봐도 그런 이유만으로 세 목숨을 숨지게 한 건
살인동기로서 너무나 미약했다.
그리고 유여사와 연박사가 두 미스코리아를 살해해야만 될
뚜렷한 동기도 나타나지 않고 있다.
두 남녀는 어떻게 공범관계로 맺어질 수 있었을까? 이유는
하나밖에 없다. 되풀이되는 생각이지만 두 사람은 권의원과
강여사의 불륜을 서로 알고 있었다. 그러나 두 사람은 그에 못지
않게 자기의 남편과 아내를 그 누구보다도 사랑하고 있었다.
그래서 미스코리아를 살해함으로 해서 경고를 주었을 것이다.
강력한 경고를. 그러나 두 남녀의 불륜은 멈출줄 모르고
계속되었다. 성주라양을 다음 희생양으로 삼았음에도 두 남녀의
관계는 마지막 불꽃을 태우듯 격정적이고, 유여사는 두 개의
살인을 저지르고 나자 두려움에 떤 나머지 만약을 위해서
대비해놓은 연박사에 대한 덫을 놓아버린 것이다.
윤형사는 머리맡의 탁상시계를 보았다. 어느새 새벽 2시가
넘어가고 있었다. 그녀는 한숨을 푹 내쉬면서 침대에서 내려와
컴컴한 응접실로 나갔다.
"아유, 신경질 나. 왜 이렇게 잠이 안 온담."
윤형사는 어둠 속에 익숙해지자 미로에 갇힌 쥐처럼 응접실을
돌아다니면서 안정을 찾으려고 애쓰고 있었다.
유여사가 범인일거라는 심증은 시간이 흐르면 흐를수록 엷어져
가기만 했다. 재봉틀로 조각난 헝겊들을 꿰맞추듯 엉성하게 꿰맨
느낌을 떨쳐버릴 수가 없었다.
"유여사는 범인이 아니냐...... 그럼 유여사 말고 누가 또
있지......아무도 없잖아. 정말 알다가도 모를 살인이야......
어휴, 신경질 나......"
신경질을 내면서 응접실의 불을 켠 윤형사는 주방으로 들어가
또 한 잔의 커피를 타서 응접실로 가지고 나왔다.
"좋다구. 어디 오늘 날밤 좀 세워보자. 니가 이기나 내가
이기나 어디 한번 해보자구."
윤형사는 마치 앞에 범인이 있는 것처럼 말하면서 김이 나는
커피를 입으로 가져갔다.
"연박사도 범인이 아니고 유여사도 범인이 아니라면 도대체
누가 범인이란 말이야? 내가 범인이고 남형사가 공범이란
말이야? 어휴, 커피가 왜 이렇게 짜."
윤형사는 커피에다 소금을 탄 사실을 깨닫고는 주방으로 가서
싱크대에다 커피를 쏟아붓고 냉장고 문을 열어보았다. 마땅하게
먹을만한 것이 눈에 띄지않아 냉장고가 흔들거릴 정도로 문을 꽝
닫고는 그 자리에 멈춰서 방금 전에 자신이 앉아있던 응접실의
소파를 노려보았다.
말도 안 돼. 30초 동안에 무슨 수로 저 거리에 떨어져 있는
미스코리아를 독살할수 있단 말이야. 그것도 감시카메라 같은
카메라가 비추고 있는 저 곳의 미스코리아를 무슨 수로 죽일수
있단 말이야. 윤보혜......, 윤보혜......, 미스코리아 진,
당신은 알고 있나요, 침묵의 신데렐라여.
윤형사는 마지막이라는듯 입술을 꼭 깨물고 두 별장에서의
살인을 떠올려보았다. 그러자 제일 먼저 떠오르는건 살인 순간의
경계선이었다. 춤과 테이블의 앙상블, 유여사가 범인이 아니라면
두 별장에서의 진범은 의외로 제3의 인물이 될 수도 있다.
안전지대에 있던 사람이 범인일 수도 있는 것이다. 카퍼필드가
만리장성을 뚫고 통과했듯이 제3의 인물도 그 차단된 만리장성
같은 벽을 방패삼아 완벽한 살인을 저질렀을 수도 있다.
불가능한 살인이라 할지라도 알고 보면 마술처럼 간단한 살인이
될 수도 있을 터였다. 살인 순간에 포커스를 맞추기보다는
마술이 이루어지기 전후를 유의해볼 필요성이 있는 것이다.
윤형사는 냉장고 앞에 서서 한참동안 소파를 응시하고 있었다.
두 별장에서 안전지대에 있었던 사람들은 권의원과 강여사와
임국장, 그리고 박회장, 이렇게 네 사람뿐이었다. 소리미양은
용인 별장에서의 독살과는 무관한 여배우이기에 용의자 명단에서
삭제해도 무방할 것이다.
이 네 사람은 윤보혜 독살 때는 볼룸댄스를 추고 있었고
연박사 살해 때는 테이블에 앉아있었다. 두 살인과는 철저하게
무관한 인물인듯 보이는 네 사람이다. 만약에 이 네 사람 중에
범인이 숨어있다면 그들은 용인 별장에서 어떻게 윤보혜를
독살시킬 수가 있었을까? 춤을 추고 있으면서 그것도 캠코더에
모습을 나타내지 않고 어떻게 칵테일 잔에 파라티온을 타넣을수
있었을까?
이 네 사람은 윤보혜가 최초로 반잔의 칵테일을 마시기도
전인, 칵테일이 날라져오기도 전에 이미 중앙 홀로 나가서
파트너와 함께 춤을 추고 있었다. 그리고 윤보혜가 남은 반잔을
마시고 숨질 때까지도 계속해서 볼룸댄스를 추고 있었다. 비디오
테이프에 찍힌 화면을 보더라도 거기에는 그 어떤 속임수나
의문점도 발견할 수가 없었다. 이 네 사람은 파트너와 함께
처음부터 끝까지 춤을 추고 있었던 것이다. 이런 네 사람에게는
손에 파라티온을 묻혀서 윤보혜와 악수를 해 그 결과로 그녀가
잔에 묻은 파라티온을 혀에 묻게해서 숨지게 하는 수법도,
루즈에 파라티온을 발라서 숨지게 하는 방법도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윤보혜가 최초의 잔을 마신 후에 쓰러졌으면 그런쪽으로
의심도 해볼수 있지만 최초의 반잔을 마시고 나서도 진이
멀쩡했다는 사실 자체는 그런 류의 살해 방법이 사용되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할 뿐이었다.
청평 별장에서의 살인도 마찬가지였다. 연박사가 유여사와
볼룸댄스를 추는 도중에 앞으로 쓰러졌다는 사실도, 그가
그때까지 숨지지 않았다 하더라도, 그를 쓰러지게 할 수 있는
사람은 볼룸댄스를 추던 사람들이 가능한거지 테이블에 앉아
있던 제 사람은 용인 별장에서와 마찬가지로 만리장성 뒤의
세계에 있었던 것이다.
윤형사는 포기했다는 듯 크게 한숨을 내쉬면서 주방에서 나와
응접실에 털썩 주저않았다. 그러면서 자신도 모르게 주방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여기 앉아서 저기에서 볼룸댄스를 추고 있는 연박사의
목덜미에 주사바늘을 꽂는다고? 그것도 정지된 표적이 아니고
신나게 빙글빙글 돌고 있는 목표물을 무슨 수로 명중시켜? 설사
독침을 불었다고 해도 마찬가지지. 불가능한 살인이야. 윤형사는
네 사람에 대한 의심을 풀기로 했다. 그럼 뭐야...... 유여사가
진범이잖아...... 어휴, 신경질 나!
윤형사는 텔리비전 옆에 놓은 오디오 세트에 연주곡이 담긴
테이프를 집언혹고 스위치를 눌렀다. "나자리노"가 응접실을
메아리치기 시작했다.
윤형사는 리듬에 따라 콧노래를 흥얼거리면서 지그시 눈을
감았다. 어느새 나자리노가 끝나고 "알함브라 궁전의 추억"이
새로운 리듬으로 흘러나오고 있었다. 머리를 흔들면서 음악
감상을 하던 윤형사가 갑자기 알함브라 궁전이 폭파된듯 번쩍
눈을 뜨면서 솟구치듯 소파에서 일어났다.
"그래, 맞았어! 바로 그거였어! 세상에...... 그런 감쪽같은
수법이 있었다니......"
윤형사는 너무나 흥분한 나머지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그자리에 서서 다음 행동을 잊고 있었다. 오디오를 꺼야 할지
침대로 가서 눈을 붙여야 할지 남형사에게 전화를 걸어야 할지
다리만 서성거리고 있었다. 그녀는 마른 침을 꿀꺽 삼키면서
손바닥을 가슴에 갖다대었다.
"아니야, 좀더 냉정하게 생각해야 돼. 침착해야 돼......"
제일 먼저 음악을 끄고난 윤형사는 냉장고로 가서 콜라를 따서
병째 쭉 들이키고는 응접실을 지나서 침대 위로 와앉았다.
윤보혜는 볼룸댄스를 추던 사람에 의해서 독살되었어......
자, 이제부터 지금까지의 살인을 하나 하나 분석해보아야 돼.
실마리가 풀린 이상 청평 별장에서의 연박사 살인도 범인의
행동에 맞춰 풀면 쉽게 풀릴거야. 용인 별장의 독살을 보호하고
있던 철옹성도 무너졌으니까 앞으로의 수사는 보강수사에 불과할
거야. 아, 미녀형사 윤주희 만세!
윤형사는 탁상시계를 보았다. 시계는 어느새 새벽 4시를 향해
치닫고 있었다.
잠자기는 다 틀렸네. 지금 잤다가는 출근시간에
못일어날거구...... 까짓거 뭐, 하룻밤 잠 못자면 어때. 매일
자는게 잠인데.
윤형사는 맑은 눈동자로 허공을 응시하면서 퍼즐을 맞추듯
흩어져있는 의문점들을 하나로 집합시키는데 생각을 몰두했다.
그러면 용인 별장에서 사라진 칵테일 잔은 어떻게 된거지?
처음과는 달리 사라진 칵테일 잔에 대해서 새로운 시각으로
바라보게 되자 일순간 윤형사의 얼굴에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워지고 있었다.
아, 이런. 내가 왜 청평 별장에 요술처럼 나타난 칵테일 잔을
계산 못했지? 그래, 바로 그거야. 바로 그거였어. 연박사의
진술은 사실이었어. 담배를 피우기 위해 주머니 속에다 손을
집어넣었던 건 사실이었어. 연박사는 그때 정신이 없었어.
강여사와 권의원의 지나칠 정도로 밀착되어 있는 볼룸댄스에
모든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었어. 볼룸댄스라는 것, 연박사에게는
강여사와 권의원의 춤이 공개석상이었기에 겉으로는 뭐라 그럴수
없고 속으로만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질투심과 분노감을 삭이고
있었을 것이다. 그런 상태에서 손에 쥐고 있던 칵테일 잔이
주머니 속에 들어가는 것도 모르고 댄스 구경을 했을
연박사였다. 역시 청평 별장의 칵테일 잔은 유여사를 범인으로
몰아넣기 위한 함정이었어. 용인 별장의 칵테일 잔을 연박사가
가져가지 않았다면 그것을 가져간 사람은 유여사밖에 없으니까.
그것도 연박사가 죽고난 후의 칵테일 잔은 유여사가 용인
별장에서 가져갔다는 걸 확실하게 뒷받침해주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중요한 사실은 연박사가 자기 주머니 속에
칵테일 잔이 들어가는 것도 모르게 볼룸댄스에 온 신경이
집중되었던 데에는 박만하의 사진이 결정적인 작용을 했으리라.
윤형사는 사라진 칵테일 잔과 요술처럼 등장한 칵테일 잔에
대한 의문이 대충 풀리자 성주라양의 살인으로 생각을 돌렸다.
용인 별장에서의 윤보혜양 독살은 단독으로 이루어졌어.
그런데 성주라양의 살인에서는 연박사가 공범으로 그것도 주범일
정도로 하루 아침에 처지가 바뀌어버렸어.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이야...... 그리고 연박사는 성주라양을 죽이지 않고 그
시간에 부천에서 밤새도록 후배 마취전문의와 부라보를 외치며
양주병을 비우고 있었어...... 그럼 니시무라 다니구찌는 누구란
말닌가.......
윤형사는 거대한 성벽 앞에 난장이처럼 서 있는 자신의 왜소한
체구를 의식하지 않을 수 없었다. 에베레스트보다 높은 벽이
이중 삼중으로 머리 위에 버티고 있는 듯한 기분이었다.
권의원일까? 아니면 임종도 국장일까? 강여사가 남장을 했던
건 아닐까......?
윤형사는 머리를 좌우로 흔들면서 박회장의 얼굴을
떠올려보았다. 그 대형 여행가방을 들고 L호텔의 프런트로
지나가는 모습이 연상되어지지 않았다. 비서와 함께 검은색
서류가방을 들고 호텔 출입을 하는 세련된 모습으로만 머리 속에
나타날뿐 방금 전에 공항에 내려서 호텔로 여장을 풀러 들어가는
모습은 쉽게 떠오르질 않았다.
누굴까? 니시무라 다니구찌 역을 완벽하게 한 자가......
가만, 수사선상에서 제외된 인물이라면!
윤형사는 사기꾼 같은 얼굴이 눈 앞에 크로데스크하게
나타나자 퍼즐을 다시 되돌려맞추듯 재빠르게 두뇌를 회전했다.
박만하가 있었어! 박만하라면 능히 그런 짓을 하고도 남을
위인이야. 그 인간도 용인 별장에 있었어. 그것도 나중에
사건해결이 기대되던 비디오테이프를 직접 만든 장본인이었어.
권의원과 강여사의 불륜현장이 담긴 필름을 보관하고 있었던 자!
윤형사는 새롭게 떠오른 공범자와 연박사와의 관계를
맞추어보았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연결고리가 없었다. 범인을
포함해서 세 사람이 공범이 되기에는 피와 물과 기름처럼 제각기
달라보였다. 범인과 박만하와는 공범의 가능성이 있어보이지만
그 두 사람 사이에 연박사가 공범으로 개입되어있다는 것은
부자연스럽다 못해 폐차 직전의 고물차처럼 엉망진창인 관계로
느껴지는 것이다.
어쩌면 공범은 시야에 모습을 나타내지 않고 있는 뜻밖의
인물일 수도 있어. 살인 현장에서 철저하게 벗어나있는 인물일
수도 있어...... 그게 누굴까? 박만하가 아닌 또 다른 인물은
누굴까.......
윤형사는 범인의 주변 인물에 대해서 사진첩을 뒤적거리듯 한
사람씩 한 사람씩 손가락으로 꼽아보았다. 그러는 순간, 그녀는
니시무라 다니구찌를 닮은 한 사람을 지목해낼수 있었다. 드디어
그 일본인 아닌 한국인을 찾아낸 것이다!
윤형사는 사건해결이 점차 눈앞에 다가오고 있는 예감에
희열을 느끼고 있었다. 용인 별장의 독살 수법이 풀리자 뒤에
줄사탕처럼 줄줄이 매달려있던 의문점들이 하나둘씩 껍질이
벗겨지듯이 벗겨지고 있었다. 실타래가 풀리듯 술술 풀리고
있었다.
역시 범인과 연박사는 공범관계가 될 수 없어. 그러나 아직
속단하기는 일러. 범인과 니시무라 다니구찌와의 관계를 자세히
조사해볼 필요성이 있어. 지금으로서는 니시무라 다니구찌가 그
사람이 틀림없지만 호랑이가 토끼를 잡을 때처럼 최선을 다해야
돼. 수면 하의 관계이기 때문에 조심해야 돼. 흥, 그러나 한국산
암호랑이가 얼마나 무서운지 그 위력을 맛보여줄테다!
아파트 베란다에 여명의 아침이 찾아들고 있었다. 그녀는
스탠드 불을 끄고 형광등을 켰다. 밖은 아직도 엷은 어둠에
잠겨있었다.
윤형사는 청바지를 줏어입고 블래지어 위에다 추리닝을
걸쳐입었다. 출근시간은 아직도 많이 남아있었다. 욕실에
들어가서 새수를 하고 화장대 앞에 앉은 그녀는 콜드 크림으로
얼굴을 바르고는 여유있게 화장을 시작했다.
청평 별장에서 범인은 어떻게 연박사를 테이블에 앉아서
목덜미에 주사바늘을 꽂을 수 있었을까?
윤형사는 화장지로 얼굴을 닦아내다 말고 거울 속을
노려보았다.
손바닥에 감출수 있는 소형 주사기를 사용했다고 해도 범인이
춤을 추고 있는 연박사를 쓰러뜨릴 수는 없는 노릇인데.......
윤형사는 연박사가 춤을 추다가 갑자기 쓰러진 점에 주안점을
두고 용인 별장에서처럼 불가능해보이는 살인의 핵심을
파악해보았다.
용인 별장에서는 춤을 추고만 있으면 되었지만 청평
별장에서는 연박사와 유여사가 춤을 추기 전에 어떤 모종의
조치를 취해두어야만 했어. 역시 연박사가 테이블에 앉아있을 때
1단계 조치를 취했던게 분명해. 그가 춤을 추기 전에 잔에다
강력한 수면제를 타넣어면 가능한 일이야. 그렇지만 설사 강력한
수면제를 타넣었다고 해도 연박사와 유여사가 파트너로 춤을
출지 어떻게 알 수 있단 말인가.......
윤형사는 범인이 신이 아니고 한낱 인간인 점에 착안치 못한
자신의 추리에 회의를 느끼고 있었다. 그러다가 한 가지 사실을
생각해내고는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그래, 바로 그거야. 범인은 연박사의 술잔에 몰래 강력한
수면제를 타넣기만 하면 그 다음부터는 돌아가는 상황만
예의주시하면 되는 거였어. 연박사와 반대로 행동만 하면 용인
별장에서와 마찬가지로 만리장성 같은 경계선을 만들수 있는
거였어. 연박사가 춤을 추면 테이블에 앉아 있고 연박사가 계속
테이블에 앉아 있으면 잽싸게 파트너를 구해서 볼룸댄스를 추고
있으면 1단계는 성공한거야. 용인 별장의 독살을 보호막으로
해서 말이야. 정말 고도로 계산된 심리전 살인이야. 정말 기가
막힌 방법이야. 자라보고 놀란 가슴 솥뚜껑 보고 놀란다고,
초대객들의 심리를 기가 막히게 파악하고 있었어.
윤형사는 배가 출출하자 루즈를 바르기 전에 주방으로
들어가서 쇠고기 스프를 끓여 식탁 위에 올려놓고 후후 불면서
숟가락으로 떠먹기 시작했다.
그래, 그 다음에는 연박사가 쓰러지기만 기다리고 있으면 되는
것이었어. 김진건 아나운서, 그 사람은 연박사의 심장이
멈췄는지 뛰고 있었는지 알 수가 없었다고 했지만 사망하지
않았어. 연박사는 쓰러진 이후에 주사바늘에 의해 절명했던게
거의 틀림없어. 수초 동안이면 목덜미에 주사바늘을 꽂고 힘껏
주사기를 눌러버리면 즉사시키는건 별로 어려운 일이 아니야.
스프를 다 먹고난 윤형사는 최종 확인을 하려는 듯 핸드백에서
연박사가 유여사와 볼룸댄스를 추기 전의 좌석 위치도가 그려진
종이를 꺼내 펼쳐보았다. 재론의 여지가 없었다.
출근시간까지는 아직도 조금 여유가 있었다. 응접실로 나와서
수첩을 꺼내 오늘 만날 사람들과 질문의 요지를 간단하게 적고는
약간 흥분된 손놀림으로 탁자 위의 전화번호를 눌렀다.
"여보세요."
간밤에 들었던 목소리가 또다시 그녀의 귓가에 들려왔다.
"남형사야? 나야."
"웬일이야, 이렇게 아침 일찍. 호출이야?"
아이고, 이 영원한 장과장 쫄다구야!
"간밤에 잘 잤어?"
"그럼. 환상적인 꿈세계에 있었지."
남형사의 입 안에 음식물이 들어있는지 말 중간 중간마다
무엇인가 씹는 소리가 함께 들려져왔다.
"밥 먹고 있는 중이야?"
윤형사가 밝은 음성으로 물었다.
"음, 안 그래도 출근하기 전에 윤형사한테 전화걸려고 했는데
마침 잘 됐어."
"그래? 뭣 때문에?"
"새벽 3시에 과장님한테서 전화가 왔는데 오늘 오전에 다시
법원으로 가서 체포영장을 발부받아서 움직이라고
그러시더라구."
"무슨 소리야."
"더 이상 시간 끌어봤자 소용없는 일이라고 하면서 유진숙
여사를 연행해오라고 하시더라구."
"유여사를? 과장님은 유여사가 범인이라고 결론내리셨어?"
"과장님뿐만 아니라 부장님도 마찬가지야. 특수수사과
분위기도 마찬가지야."
"남형사도 그렇게 생각해?"
"유여사와 연박사가 무슨 이유로 두 미스코리아를 살해해야만
했는지 그 동기를 밝혀낼 순 없지만 용인 별장에서 사라진
칵테일 잔이 청평 별장에 다시 등장했다는 건 더 이상의 추리를
필요로 하지 않아. 연박사가 살해된 이상 세상 없어도 범인은
유여사일수밖에 없어."
남형사는 입 속의 음식물을 목구멍으로 꿀꺽 삼키면서 말했다.
"과장님 아직 출근 전이시겠지?"
"그렇겠지."
"이따가 봐."
"보는건 어렵지 않은데, 전화는 왜 한거야?"
"아니야, 끊어."
윤형사는 후크를 누르고 장과장 댁 전화번호를 눌렀다.
신호음이 뚝 떨어지면서 수화기를 드는 소리에 이어 장과장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장과장의 목소리에서도 음식을 씹는 소리가
섞여 들려왔다.
"안녕하세요, 과장님. 저, 윤형산데요."
"오, 어쩐 일이야?"
"방금 남형사한테 전화 걸었었는데요, 유여사를
연행하신다구요?"
"그래야 할 것 같아. 아직은 증거 부족이지만 자백을
받아내는게 빠를 것 같아서 말이야."
"과장님, 아직은 시기상조라고 생각해요. 보강 수사를 좀더
해봐야 되겠지만 범인은 유여사가 아닌게 분명해요."
"무슨 뚱단지 같은 소리야. 용인 별장 하나만 봐도 유여사가
아니고서는 진을 독살시킬만한 용의자가 없어. 사건은
종결된거야."
"그렇지 않아요, 과장님. 유여사는 우연히 함정에 빠진
것뿐이예요."
"우연한 함정? 고의적인 함정이면 함정이지 우연한 함정은 또
뭐야. 하여튼간 난 이 골치 아픈 살인사건을 빨리 끝내고 싶을
뿐이야. 모든건 법정에서 판가름 나겠지. 우리는 증거 불충분만
막으면 그만이야. 구속수사를 벌이는 게 지금으로서는
최선책이라고 생각해."
"과장님, 범인은......"
윤형사는 연속살인에 대한 결론을 간단명료하게 말했다.
그러자 장과장은 놀라움을 금치 못하고 한동안 말이 없었다.
"유, 윤형사, 그렇다면 살인동기는?......"
"그 점이 불확실하지만 어느 정도 감이 잡히는건 사실이예요."
"음, 용인 별장의 비밀이 벗겨지니까 뒤의 살인은 양파 껍질
벗겨지듯이 술술 벗겨지는군. 이거 또 실수할 뻔했군. 영장 발부
받는건 취소해야겠군. 기가 막힌 살해 수법이야."
"식사중이셨어요?"
윤형사는 즐거운 음성으로 말했다.
"다 먹었어. 좀 있다 시경에서 봐, 윤형사."
"네, 과장님."
수화기를 내려놓은 윤형사는 화장대 앞으로 와서 간단하게
눈화장을 하고 립스틱을 돌려서 입술에다 예쁘게 칠했다. 화장을
마친 그녀는 정장 차림의 아래 위 감청색 투피스를 입고
어깨에다 핸드백을 걸치고 난 다음 나비리본이 달려있는 빨간
구두를 신고 시경으로 출근했다.
14. 진실을 향하여
"제게 사흘간의 여유를 주십시오."
유진숙 여사를 두 미스코리아 살인과 연성철 박사의 살인의
진범으로 인정하고 즉각 구속수사를 벌여야 한다는 의견이
지배적인 가운데 장과장의 신중론은 수세에 밀리고 있었다.
직속상관인 오부장도 매스컴의 경찰 무능에 대한 끔찍한 비판과
경찰 수뇌부의 파면 조치의 으름장을 의식해서인지 유여사를
연행해오자는 의견쪽에 가세를 하고 있었다. 시경 출입
기자들에게 범인임이 틀림없는 인물이 부각되었다는 정보가
새나가면 앞으로의 보강수사에 있어 매우 불리하게 작용할
것이기에 사건 종결시까지 침묵을 지켜야 한다는 윤형사의
신신당부를 받은 장과장은 간부들에게 사흘간의 여유를 달라고
하면서 유여사의 구속수사를 만류하고 있었다. 그는
경찰국장실에 불려가서 단독 면담을 하고 나와서야 유여사의
체포 명령은 사흘 동안 보류되는 것과 동시에 영장 발부 지시도
취소되었다.
장과장이 국장에게 사건의 전모를 얘기하고 있을 때 윤형사는
파란 원피스 수영복을 입고 수영장에서 접영을 하고 있었다.
앞에서 능숙한 폼으로 물살을 가르는 늘씬한 몸매의 여자를 바짝
뒤따르던 윤형사는 곧 물에서 나와 로커의 긴 의자에 누우려고
하는 미녀 옆에 앉았다.
"어머, 나비향씨 아니예요?"
우연을 가장한 윤형사는 동그랗게 뜬 눈을 얼른 반가운
눈빛으로 바꾸면서 미소를 지었다.
"윤주희 형사님 아니세요? 이 시간에 여긴 어떻게......"
풍만한 가슴을 윤형사쪽으로 향하면서 그녀를 쳐다보던
나비향의 얼굴이 잠시동안 어두운 그림자가 머물고 있었다.
"여기로 가끔 수영하러 와요. 나비향씨도 수영장에 자주
오나보죠?"
"언니들하고 가끔 와요."
"아, 네...... 그런데 오늘은 어째서......"
"이제 곧 언니들이 올거예요."
"언니들이라면?"
"미스코리아 선배 언니들이예요. 저한테 참 잘해주셔요."
윤형사와 나비향양은 쥬스잔에 스트로우를 넣어서 입술로
빨아마시면서 어느새 친한 자매처럼 익숙해져 있었다.
"범인은 아직 못잡으셨어요?"
노란 쥬스잔을 든 채 편안한 표정으로 나비향양이 묻고
있었다.
"쉽게 잡을 수 있다고 생각했는데 의외로 늦어지네요."
"범인을 하루라도 빨리 잡았으면 좋겠어요. 주위 사람들도
그렇고 모두들 저를 편하게 대해주질 않아요."
나비향양은 다시 어두운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나비향씨, 윤보혜양이 미스코리아에 출전하기 전에
성형수술을 받은걸 알고 있었나요?"
윤형사가 자연스런 음성으로 물었다.
"솔직히 몰랐어요. 주라 언니가 그렇게 처참한 죽음을
당했다는 걸 알고 얼마나 놀랐는지 몰라요. 주라 언니도
성형수술을 했는지 몰랐어요."
"실망이 컸겠네요."
"그렇지는 않아요. 여자라면 누구나 아름다워지고 싶은 욕망이
있는 거니까요."
나비향양은 담담하게 대답하고 있었다.
"연박사님이 성주라양을 그렇게 살해했다고 생각하나요?"
"그 사람밖에 그런 짓을 할 사람이 누가 또 있겠어요?"
"그럼 청평 별장에서 연박사를 살해한 얼굴은 누굴까요?"
윤형사는 나비향양을 똑바로 보면서 물었다.
"그건 저도 잘 모르겠어요."
나비향양은 아리송한 표정을 지었다.
"죽은 보혜양하고 성주라양이 성형수술을 받게 된 건 아무래도
강여사의 영향이 컸겠지요?"
윤형사가 물었다.
"보혜하고 주라 언니가 원했을 수도 있어요. 만약에 주라
언니가 연박사한테 성형수술을 받고 진에 당선된 걸 알았다면
저도 얼굴에 칼을 댔을거예요."
나비향양은 서슴치 않고 말했다.
"그런데 강여사님은 나비향씨에게 그런 제의를 하지
않았군요."
그 말에 나비향양은 서운한 표정을 짓고만 있었다.
"보혜양은 파티 같은데 참석해본 경험이 별로 없었나 보지요?"
윤형사는 다이빙대 위에서 새처럼 낙하하는 남자를 쳐다보면서
물었다.
"보혜는 볼룸댄스도 출줄 몰랐어요. 파티에는 어울리지 않는
보혜였어요. 강희 선생님은 무척 걱정하셨어요. 저는 어렸을
때부터 그런 파티에 많이 익숙해 있어서 별 어려움이 없었지만
보혜는 시골뜨기나 마찬가지였어요. 그래서 강희 선생님이 무척
신경써 주셨어요. 의상에서부터 몸동작, 표정 하나하나에까지
일일이 신경을 서주셨어요. 더욱이 보혜는 그날 파티의 사실상의
주인공이었으니까요."
나비향양의 얼굴에는 막내같은 질투심이 드러나있었다.
"참, 갑자기 생각나서 묻는건데요, 용인 별장에서 파티가
시작되기 전에 강여사님과 함께 용인 별장에 내려간게 오후 몇
시쯤이었지요?"
"글쎄요. 정확한 시간은 잘 모르겠고 1시나 2시쯤이었던 걸로
기억해요."
"그리고 두세 시간 후쯤에 박만하라는 캠코더 기사가 별장으로
왔지요?"
"네, 4신가? 아마 그쯤이었을 거예요."
"그 캠코더 기사가 홀에 서있을 때 강여사님 말고 옆에 누가
또 있었나요?"
"보혜하고 저하고 같이 있었어요. 그런데 그건 왜요?"
나비향양은 궁금한 눈빛으로 윤형사를 보았다.
"그때 강여사님하고 캠코더 기사 간에 무슨 대화가 오고
갔는지 기억나세요?"
"별로요...... 그냥 그런 얘기였어요. 강희 선생님이 늘상
하는 얘기로 보혜하고 저를 이쁘고 아름답게 나오게끔 잘 좀
찍어달라고 했어요. 오늘의 주인공이 보혜하고 저라고 하시면서
우리 둘을 중심으로 해서 비디오를 구상해달라고 했어요. 마치
결혼식장의 신랑 신부가 기록용 비디오 카메라의 독점 촬영
대상이 되듯 저희 둘을 최대한으로 아름답게 찍어달라고
하셨어요."
"그 외에 또다른 주문 사항은 없었나요?"
"촬영이 끝나면 별장에 좀 머물러서 술 한잔 하고 가시라고
말하셨어요. 그랬더니 그 기사가 무척 고마워하더군요. 그리고
비디오가 좋게 나오면 사례는 충분히 해드리겠다고 말한 것
밖에는...... 그런 다음 그 기사는 홀과 테이블을
왔다갔다하면서 갖고온 켐코더로 촬영 연습을 5분 정도 했어요."
"대상도 없는 상태에서요?"
"아니죠. 보혜와 제가 리허설을 할 때처럼 5분 동안 모델
노릇을 했어요."
나비향양은 당연한 절차가 아니겠느냐는 듯한 눈빛으로
윤형사를 보며 대답했다.
"그런데 그 캠코더 기사는 어째서 정원에서의 만찬을 카메라에
담지 않았을까요?"
"그거야 강희 선생님이 찍지 말라고 사전에 말씀하셨겠지요.
보혜와 제가 첫 등장하는게 이층 계단을 내려오면서부터니까,
초대객들이 홀에 입장하는 장면부터 찍는 게 자연스런 화면
구성이 될 수 있는거니까요."
"그렇군요......"
"그런데 그런건 왜 자꾸 묻죠?"
나비향양은 뒷탈을 염려해서인지 미간을 찡그리며 물었다.
"형식상 질문하는 것뿐이예요. 보고서를 써야 하거든요."
"아, 네."
윤형사에게 있어서 보고서라는 핑계는 언제든지 유용하게
써먹을 수 있는 만병통치약이었다. 그녀의 말에 나비향양은
수긍이 간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나비향씨, 용인 별장에서 김진건 아나운서님하고 파트너가
되어 춤을 추다가 윤보혜양이 숨지는 걸 보게 되었고, 청평
별장에서도 김진건 아나운서님하고 또 파트너가 돼서 춤을
추다가 연박사님이 쓰러지셨는데, 그것도 우연이라면
우연일까요?"
윤형사의 미소를 보던 나비향양은 그 미소의 숨은 의도가
있는지 조심스럽게 살펴보는 기색이었다.
"......저도 그 점이 참 이상했어요. 다른 분들하고 파트너가
돼서 춤을 추고 아무 일이 없었는데 꼭 김진건 아나운서님하고
춤을 추고 있으면 그런 일이 일어나서...... 다시는 그런 파티에
참석 안 할거예요."
"언제나 김진건 아나운서님이 먼저 춤을 추자고 청하셨나요?"
"네."
"청평 별장에서 볼룸댄스를 출 때 김진건 아나운서님의 손이
나비향씨의 손과 허리에서 떨어진 적이 한 번이라도 있었나요?"
"없었어요. 그 볼룸댄스라는 게 육체로 표현되는 영혼의
만남이기 때문에 쉽게 감지될 수 있어요."
윤형사는 고개를 끄덕이면서 다시 질문을 했다.
"연박사님이 쓰러지고 난 뒤 김진건 아나운서님께서
연박사님을 똑바로 눕혀서 심장에다 귀를 가까이 댔다는데,
그렇게 하는 걸 처음부터 끝까지 지켜봤나요?"
"네, 아나운서님과 저는 처음에 너무 당황해서 어찌할 바를
모르고 멍하게 서 있기만 했어요. 그러는데 아나운서님이
무서움에 떨고 있는 제 어깨를 두 번 토닥거려주면서 안심을
시켜주더니 바로 옆에 쓰러져 있는 박사님에게 다가가 무릎을
꿇으셨어요. 그러자마자 강희 선생님과 금변호사님이 놀란
얼굴로 달려오셨어요. 저는 옆에서 박사님의 시신을 보다가
다리가 떨리고 심장마저 떨려서 거기에 그대로 서있을 수가
없었어요. 제 옆에서 같이 떨고 있는 유회장님하고 권의원님이
앉아계신 테이블로 걸어가서 의자에 앉았어요. 그리고 조금
있으니까 아나운서님하고 국장님이 창백한 얼굴로 의원님 옆
의자에 나란히 앉으셨어요. 그때부터 두 분은 술이 몹시 취하신
권의원님에게 무언가를 상의하는 것 같았어요. "어떡하면
좋을까요"라고 말하는 두 분의 음성이 제 귓가에 들려왔어요.
헌데, 그때까지 정신을 못차리고 계시던 의원님이 정신을
가다듬으면서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이었어요. 지금부터 우리는
한 마음이 되어야 하며 침착하게 대처해야 한다고 하셨어요.
그러니까 금변호사님도 경거망동하면 안 된다고 우리 모두에게
주의를 주시면서 대책을 논의하자고 나서셨어요. 강여사님이
눈물을 흘리시면서 테이블 의자에 앉으시자 그때부터 여러가지
의견이 본격적으로 나왔지만 딱히 이렇다할 결론은 나오지
못했어요. 그러나 저도 물론이었지만 모두들 조ㅇ하게 수습되길
바라는 눈치들이셨어요. 의원님이 막 최종적으로 말씀하시려는데
그때 경찰이 문을 열고 들어온거예요."
"그럼 대책마련을 하고 있을 때 테이블을 벗어난 사람은
없었나요?"
"아무도 없었어요. 중간쯤에 의원님이 일단은 현장을 그대로
보존해두는게 좋다고 하시면서 아나운서님에게 쓰러진 자세대로
해놓으라고 하셔서 아나운서님만이 잠시 테이블을 떠나셨을
뿐이예요."
"그러니까 그때는 모두들 당황을 했겠군요. 거기다가 술이
많이 취해 있는 상태였구요."
"용인 별장에서 보혜가 그렇게 되고난 후 또 박사님이
쓰러졌으니 모두들 놀라고 당황할수밖에 없었어요."
"청평 별장에 모였던 초대객들 모두 술에 취해 있었다고 봐도
무방할까요?"
"모두들 많이 마셨어요. 박사님이 돌아가시기 전에 홀에 곡이
흘러너오고 있었지만 댄스를 추려고 하는 분들이 별로 없었어요.
오히려 술을 한잔 더 하려고 하는 분위기였어요."
"그러니까 범인은 연박사님을 살해하기 위해서 알콜 농도를
머리 속으로 계산하고 있었던거군요."
윤형사는 주사바늘을 꽂을수 있는 10초 정도의 시간을 범인이
충분히 확보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간파하고는 서너 번 고개를
끄덕였다. 더욱이 모두가 술에 취해있는 상태였다면 10초 정도의
"사각시간"은 얼마든지 확보할 수 있는 것이다.
"나비향씨는 기억력이 무척 좋은 편이군요."
윤형사가 활짝 미소지으며 칭찬하듯이 말했다.
"뭘요. 박사님이 쓰러졌을 때는 정신이 너무 없어서 뭐가 뭔지
몰랐지만 테이블에 앉자 서서히 정신이 들었어요. 그러면서 머리
속 한가운데에서는 지금부터 행동을 똑바로 하자. 여기서 자칫
잘못 행동했다가는 억울한 누명을 쓸지 모른다고 몇 번이나
되풀이 다짐했는지 몰라요. 일종의 자기보호본능이라고 할까요?"
나비향양은 고른 치아를 보이며 수줍게 미소지었다.
그때, 탈의실쪽에서 비키니 수영복을 입은 두 미녀가
나비향양을 향해 손을 흔들며 걸어오고 있었다. 늘씬하게 뻗은
각선미와 탄력있는 몸매의 두 미녀는 한눈에 봐도 상상한 미모의
소유자라는 걸 느낄수 있었다.
"어머, 언니들이 오네요."
나비향양은 두 미녀에게 손을 흔들며 반가움을 표시했다.
"나비향씨, 이만 가봐야겠어요. 고마웠어요."
윤형사는 로커에서 일어나 두 미녀 곁을 스쳐지나갔다. 그녀가
몇 걸음 걸어갔을 때 등 뒤에서 속삭이는듯한 소리가 들려왔다.
"여형사라구? 여형사 치고는 너무 이쁘다. 미스코리아 대회에
나왔더라면 타이틀 하나 차지했겠다......"
샤워실로 들어가서 깨끗하게 몸을 씻고 수영장을 나온
윤형사는 금방이라도 첫눈이 내릴 것만 같은 회색빛 하늘을
올려다보면서 상쾌한 표정을 지었다.
"그 미스코리아가 누군지 모르겠지만 미녀 볼 줄 아는
미스코리아네. 아이, 기분 좋아."
연화병원은 원장의 죽음에도 무관하게 톱니바퀴 돌듯이 잘
운영되고 있었다.
장과장과 남형사는 부원장실에서 수술실에 들어가있는
조박사를 기다리고 있었다. 20분 후쯤 조박사가 손을 닦고 가운
차림으로 안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악수를 나눈 세 사람은
소파에 마주 앉으면서 잠시동안 날씨 얘기를 나눈 후 본론으로
들어갔다.
"조박사님의 말씀이 맞았군요."
장과장은 미안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무슨 말씀이신지......"
조박사는 소파에 깔린 흰 가운을 똑바로 고쳐입으면서 조용한
음성으로 물었다.
"연박사님은 성주라양을 살해하지 않았더군요."
조박사는 묵묵히 앉아서 듣고만 있었다.
"이 병원 마취 전문의이신 분과 부천에서 밤새도록 술을
마셨더군요."
조박사는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연박사님과 같은 의대 동창이시라구요?"
"그렇습니다만......"
조박사의 눈빛에 갑자기 경계의 빛이 담겨졌다.
"연박사님은 이 병원 원장이었는데, 성형수술시에 직접 집도를
하셨나요?"
장과장이 물었다.
"그렇지 않습니다. 연박사는 주로 병원 경영에 많은 시간을
보냈지요. 몇 달에 한번씩 중요한 수술시에만 수술실에 들어오긴
했지만 직접 집도를 한 적은 드물었어요."
"들리는 소문에 의하면 이 연화병원을 내놓았다고 하던데
사실입니까?"
"금시초문인데요. 상속인이신 강여사님 맘이겠지만 아직까지
법적인 처리도 안 되어있는 상태인데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만약에 이 연화병원이 팔린다면 액수가 엄청나겠지요?"
장과장은 월급장이의 머리로는 도저히 계산이 안 된다는
눈빛으로 물어보았다.
"강여사님이 병원을 매각한다는건 루머에 지나지 않을 겁니다.
병원의 경영 상태나 재정 상태가 악화되어 있거나 회복
불능이라면 모를까......, 강여사님이 이사장으로 취임하시면
될텐데......"
조박사는 소문의 진상에 무척 신경쓰고 있었다.
"조박사님, 제가 의학에 대해서는 까막눈인데요. 그래서
박사님의 조언 좀 얻을까 하는데요. 마취제라는 것 말입니다. 저
혼자서 밤새도록 메디컬 사전을 뒤져보고 영어 사전도
뒤져보면서 때 아닌 의학공부를 하고 있습니다만, 이번에
연박사님이 마취제에 의해서 살해된 것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이름도 들어보지 못한, 기억하기도 힘든
마취제를 사용해서 살해했는데 의학상식이 전혀 없는 나 같은
무지한 사람이 살인할 수는 없었겠죠?"
"......무슨 뜻인지 알겠습니다. 저도 신문기사를 읽고
느꼈습니다만 연박사를 살해한 범인은 의학에 무척 조예가 깊은
인물인것 같더군요."
"그런데 문제는, 별장에 모였던 사람들 중에 의학과 관계있는
사람이 한 분도 없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또 한 가지 사실은
그런 마취제를 어떻게 알고 손쉽게 구했는지 도통 감이 잡히지를
않는군요."
"글쎄요...... 그건 저로서도 알수 없는 일이군요."
조박사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말했다.
"저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범인의 주위에는 의학과 관계있는
사람이 연결되어 있다고 봅니다."
남형사가 자신있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럴 가능성이 높겠군요."
조박사는 고개를 끄덕이며 턱을 만졌다. 장과장의 조박사의
얼굴을 바라보면서 그의 등 뒤에 세워져 있는 책장에 시선을
두었다. 의학관계 서적과 성형에 관계된 원서들이 가지런히
꽂혀있었다. 의학 대사전도 보였다. 책장은 주로 영어로 된
원서들이 주종을 이루고 있었고 간간이 일어와 영문으로
겉표지가 된 의학 서적들도 눈에 띄었다.
"의학이라는 거 영어를 모르면 사전 찾기도 힘들더군요. 나도
가방끈은 좀 긴 편인데 영어에 관해서만은 일자무식이니......
저한테 경찰병원에 근무하고 있는 친구가 있어서 의학사전을
빌려 읽었는데 처음 몇 장 넘기다가 덮어버리고 말았지요."
그렇게 말하면서 장과장은 소파에서 일어나며 의학서적이
꽂혀있는 책장쪽으로 걸어갔다.
"의사라는 직업, 정말 어려운 직업이지요? 책 한 권만 잠깐
꺼내봐도 되겠습니까?"
장과장은 조박사의 잘 손질된 뒷머리를 보면서 물어보았다.
조박사가 반쯤 고개를 돌려 그를 보면서 미소를 지으며
"그러세요"하고 허락했다. 장과장은 감사하다는 말을 하면서
책장 유리문을 열었다. 일어로 된 두툼한 책 한 권을 꺼낸 그는
한 손에 받쳐들고 단번에 중간쯤을 펼쳤다. 영어와 일어가 한데
어우러져 있어서 마치 난해한 암호문을 보는 것 같았다. 그는
아는 영어와 일어가 있나 잠시동안 훑어보는듯 하더니 이내
책에서 눈을 떼었다.
"이거야 원, 무식의 최첨단을 달리고 있으니......"
장과장은 책을 한 손에 들고 자리로 돌아와 앉으면서 무릎
위에 사전을 올려놓았다.
"조박사님, 이건 좀 껄끄러운 질문이라서 주저가 됩니다만
연박사님과 강여사님이 별거를 하게 된 동기를 대충 아시면
말씀해주시겠습니까?"
"이미 고인이 된 친구의 사생활을 얘기하는건 도리가
아니겠지만 과장님이 물으셨기에 얘기해드리는 겁니다만, 연박사
부부는 처음부터 사랑없는 결혼을 했던걸로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후에도 애정없는 결혼 생활이 지속되었던 걸로 알고
있습니다."
"연박사님이 그렇게 말씀하던가요?"
"결혼 생활을 무척 후회했습니다."
"그러면 이혼을 했으면 서로가 더 나은 삶을 살수 있지
않았을까요?"
"그것도 최선의 선택일수 있었겠지요. 그러나 이혼만은 서로가
원치 않았던 것 같습니다. 저도 고민하는 연박사에게 그런
쪽으로 카운셀링을 해보았지만 이혼에는 자신이 없었던
모양입니다."
"두 부부 사이에 자녀가 없던데......"
"그것도 별거의 한 이유가 되었지요. 연박사가 동남아로
여행을 갔었는데 거기서 좀 문제가 있었나봐요."
"연박사님이 이곳에서 침식을 한건 언제부터였습니까?"
장과장이 물었다.
"5월 말경이었지요, 아마."
"그럼 별거중에 강여사님이 이 병원에 들린 적은 없었겠군요?"
"네, 한번도 없었어요."
"조박사님 가정은 화목합니까?"
장과장은 미소를 지으며 농담조로 물었다.
"하하......, 장과장님 말씀대로 어려운 의학공부를 하느라고
아직 장가를 못갔습니다."
"허, 그렇습니까? 독신주의십니까?"
장과장은 새삼스런 눈빛으로 조박사를 쳐다보았다.
"그런건 아닌데 어떻게 이렇게 됐습니다. 하하......"
조박사가 미소년처럼 웃으며 뒷머리를 긁적였다.
"그럼 노총각 생활이 이만 저만 불편한 게 아니겠습니다.
밥하랴, 빨래하랴."
"그렇지도 않습니다. 이곳에서 병원 밥을 먹고 있습니다."
"아, 그렇습니까? 그럼 여기서 침식을 하고 계십니까?"
"벌써 3년이 지났습니다. 연박사가 5층 일부를 거실로 꾸며
놓아서 생활하기에는 불편이 없어요."
"그럼 5월 말부터는 같이 지내셨군요."
"그런 셈이죠. 거실은 세 개가 있어서 서로 다른 침대를
사용했지만, 그렇다고 연박사가 매일 이 병원에서 잔건
아닙니다. 외면적으로는 이곳에다 잠자리를 정한건 사실이지만
여기서 잔적은 일주일에 한두 번밖에 되지 않아요."
"그럼 다른 날은 어디서 잠을 잤을까요?"
"호텔을 정해놓았던 것 같습니다."
"그렇습니까? 그 호텔이 어느 호텔인지 아십니까?"
"아마, 신사동에 있는 A호텔이란 걸로 들은 기억이
납니다만......"
조박사가 말했다.
"근데 조박사님, 성주라양 수술에 관해서 묻고 싶은 게 한
가지 있는데요, 연박사님이 성주라양의 얼굴을 완전히 딴 여자로
바꾸어놓았는데, 어쩨서 그래야만 했을까요?"
장과장은 날카로운 시선으로 조박사를 쏘아보며 물었다.
"글쎄요, 저도 정말 이해가 안 갑니다."
"그럴까요?"
장과장은 희미하게 미소지으면서 조박사를 정면으로
노려보았다. 갑자기 조박사의 얼굴 표정이 굳어져 있었다.
"조박사님, 의학이라는 거 말입니다. 특히 성형수술이라는 것,
보통 실력 가지고는 매우 어려운 분야더군요. 며칠 밤을
세워가며 의학공부를 한 결과로 저는 이런 사실을 알아낼 수
있었죠. 저는 기억력이 나빠서 의학용어를 제대로 기억하고 있지
못합니다만, 성형수술에도 여러 가지 수술이 있더군요. 코수술,
눈수술, 지방 제거수술, 기미.주근깨 제거수술 등등 종류도
만더군요. 정말이지 유능한 의사가 마음만 먹으면 한 사람
얼굴을 다른 사람의 얼굴로 만들어버리는건 우스운 일이더군요.
그런데 성주라양의 수술에 있어서 조박사님의 수술에 임하는
기본정신을 이해할 수 없더군요."
그 말에 조박사는 싸늘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나는 히포크라테스의 선서니 뭐니 하는 그런 순결한 말을
하고 싶지 않습니다. 성형수술이라는 것 자체가 여성의 화장과
마찬가지로 하나의 고결한 예술행위라고 생각합니다. 조박사님의
진술대로 연박사님이 미리 대부분의 수술을 끝내놓고 보조정도의
도움을 청했기 때문에 연박사님이 지시하는대로 수술했다면
그만이겠지만, 성주라양의 코수술 하나만 봐도 미의 창조와는
거리가 먼 범죄행위였습니다. 적어도 성형수술이 뭔지를 알고
있는 조박사님이셨다면 그 당시 했던 수술은 의료행위도
예술행위도 아닌 메스 장난이었다는걸 분명히 자각하셨을줄로
믿고 싶습니다."
"도대체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지 모르겠군요."
조박사가 눈을 가늘게 뜨면서 장과장을 노려보며 말했다.
"조박사님, 성주라양의 코는 성형외과 전문의가 표본으로
말하는 <아름다운 코>의 이상적인 형태의 전형적인
모델이었습니다. 미스코리아 진인 성주라양의 코는, 코가
시작되는 비근점은 정면을 바라보았을 때의 쌍거풀선을 이은
선과 일등하고 콧등은 비교적 곧았으며 옆에서 보았을 때 코끝이
가장 앞으로 돌출되어 있었습니다. 코끝에서 입술로 이어지는
선은 부드러운 곡선을 이루고 있었고 콧기둥과 입술을 이루는
비순각은 둔각이었고 코와 입술이 만나는 점은 적당히 튀어나와
있었습니다.
코를 성형하는 수술은 크게 세 가지로 나눈다고 하더군요.
낮은 코를 오똑하게 세워주는 융비술, 매부리 코나 너무 큰 코를
작게 만들어주는 축비술, 외상 등에 의해 콧등이 휘어진 것을
곧게 만들어주는 비만곡 교정술 등이 있다고 하더군요. 그런데
성주라양의 코는 실라스틱을 삽입하는 방법인 융비술은 필요가
없겠죠. 그렇다고 매부리코로 만들 이유도 없는 것이었죠.
내가 가장 이해할수 없는 부분은, 한 여자의 코 모양을 봤으면
연박사님이 수술을 어느 정도 해놓은 뒤였다고 해도 수술이
대단히 잘못되었다는걸 단박에 알수 있었지 않았나 하는
조박사님의 기본 양식입니다. 수술한 성주라양의 코, 그것은 한
마디로 돼지코를 연상할만큼 형편없는 수술이었습니다. 코뼈와
연골을 떼어내서 코를 납작하게 만들어놓고 거기다 콧구멍을
돼지 콧구멍처럼 하늘을 향하게 만들어 놓은걸 보고 해도
너무했다는 것을 자각하지 못했다면 조박사께서는 평생 공부
헛하신 겁니다."
조박사는 입술을 부르르 떨고 있었다.
"입술은 말할 것도 없구요. 눈까지 찢어놓았습니다. 그
외에도...... 그만하지요. 내 말이 지나쳤다면 용서바랍니다."
장과장은 한참동안 침묵을 지켰다가 다시 말문을 열었다.
"조박사님, 이 책 일본 의학서적 맞지요?"
장과장은 겉표지를 손가락으로 언더라인치듯 만지면서 싸늘한
미소를 지었다. 그러자 조박사는 책 제목을 힐끗 보고는 아무
대답없이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이런 정도의 의학서적을 탐독하실 수 있다면 일어에 대해서도
상당히 능통하시겠군요."
이렇게 말하면서 장과장은 안주머니에서 수첩을 꺼내 볼펜으로
책 제목을 적었다.
"어이구, 한글만 쓰다보니까 섬나라 글씨는 잘 안 되는군요.
죄송하지만 요 아래에다 이 일어 제목 좀 써주시겠습니까?"
장과장은 수첩을 조박사 앞으로 내밀면서 볼펜도 건네주었다.
순간, 두 사람의 눈빛이 줄다리기를 하듯 팽팽하게 맞서고
있었다. 받기를 망설이는 조박사에게 고갯짓으로 다시 한번
부탁을 하자 그는 마지못해 볼펜을 받아쥐었다.
"이왕 써주시는 김에 그 아래에 있는 출판사 이름도
써주시겠습니까?"
장과장은 손가락으로 표지 하단에 있는 인쇄체도 가리켰다.
"이 책 제목은 적어서 뭐 하실려구요?"
조박사가 출판사를 수첩에 옮겨적으면서 무신경한 목소리로
물었다.
"의학공부 좀 할까 해서요. 매년 수천 건씩 발생하는
의료사고중에 제법 많은 수사신고가 들어오고 있거든요. 교사의
체벌이 도를 지나쳤느냐 아니냐처럼 의사의 의료행위가 과연
정당했느냐 과실이 인정되느냐 하는 문제는 매우 골치 아픈
부분이거든요. 의사님들이 워낙 똑똑하신지는 모르지만
의료사고가 났을 경우 피해를 당하는 쪽은 언제나 메디컬 사전
한번 본 적이 없는 힘없는 시민들이건든요. 빙판길에 넘어져서
팔 골절상을 당한 환자가 할로텐이라는 흡입 마취제로 수술을
받은 후에 사망해도 보상 한푼 받지 못하고 가족의 피눈물만
흘리게 하는게 요즘의 세태 아닙니까?"
장과장은 조박사에게 수첩을 건네받아 안주머니에 집어넣고는
의학책을 남형사에게 주어 책장에 꽂게 했다.
"장과장님, 저한테 의학서적 몇 권이 있는데 드릴까요?"
"아, 아닙니다."
장과장은 손을 내저으며 정색을 했다.
"조박사님, 갑자기 생각이 난게 한 가지 있어서 드리는
질문인데요. 수면제라는 것 말입니다."
"수면제요?"
조박사가 앞으로 고개를 숙이면서 물었다.
"네, 수면제도 그 약효가 가지 가지더군요. 우리의 일반적인
상식으로는 수면제 수십 알을 대량으로 복용하고 잠이 들면
죽음에 이른다고 생각하는데 특별한 수면제 같은건 한두 알
정도로 의식불명 상태에 놓이게 할 수도 있다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특히 알콜에 타넣어서 같이 마시면, 물론 알콜 농도가
높은 상태라면 절명한 것처럼 쓰러질 수도 있겠죠?"
"물론이지요."
조박사가 대답했다.
"그런 수면제 종류로는 어떤 것이 있을까요? 발륨 정도면
될까요?"
"그것으로는 약하지요."
"그럼 세코날 정도면 가능하겠지요?"
"잘 아시는군요."
"의학서적 좀 읽은 덕분입니다."
그 순간 조박사의 얼굴 표정이 심하게 일그러지고 있었다.
"거기다가 세코날이라는 수면제를 과다 투약했을 경우에는
생명까지 일을 수도 있겠지요?"
"......"
조박사는 노골적으로 장과장의 얼굴을 정면으로 쏘아보고
있었다.
"알콜과 수면제를 마신 연박사님이 춤을 추다가 쓰러졌을 때
사망했을 수도 있고 의식을 잃었을 수도 있겠지요?"
"그, 그럴 수도 있었겠죠."
"그러나 연박사를 죽인 범인은 그런 불확실한 상태를
방치하지는 않았습니다. 10초 정도의 단독 시간을 확보해서
아무도 눈치채지 못하게 주사기로 목덜미를 쿡하고 찔렀습니다.
알콜과 수면제, 그리고 마취제, 이 세 가지가 혼용되면 살아남을
수는 없겠지요?"
"그렇겠죠."
"그래서 나는 연박사님을 죽인 범인이 의학에 매우 조예가
깊은 사람이라는 걸 알게 되었습니다. 아주 전문적인 의학지식을
갖춘 사람이지요. 조박사님 정도의 수준을 갖춘 사람이
아니고서는 어려운 일이지요. 또한 마취제나 수면제를 쉽게
구할수 있는 위치에 있는 사람임에 분명하구요. 그러나 청평
별장에 모인 초대객들은 약국에서 감기약 사듯 아주 쉽게 그런
수면제와 마취제에 접근할 수 있는 사람은 없어보이는듯
합니다."
장과장은 고개를 돌리고 있는 조박사를 보면서 미소를 지었다.
"이거 지금까지 쓸데없는 질문을 많이 드렸던 것 같습니다.
나중에 다시 뵙게 된다면 꼭 드리고 싶은 질문이 한 가지
있는데......"
장과장은 망설이는 기색을 보이다가 입을 다물어버렸다.
그러자 조박사가 궁금한 눈빛으로 소파에서 일어나려는
장과장에게 물었다.
"뭔데 그러십니까? 괜찮습니다, 말씀해보시지요."
"아, 아닙니다. 갑자기 질문할 내용을 까먹었습니다. 아,
나오지 마십시오."
장과장은 남형사와 함께 부언장실을 나왔다. 병원을 나와
주차장으로 걸어가면서 장과장은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탈출구를 열다가 퇴로를 차단당한 기분은 어떤걸까?......"
강여사의 의상실은 문이 닫혀있었다.
윤형사는 공중전화 박스에 들어가 용인 별장에서 칵테일을
날랐던 여비서의 전세집으로 전화를 걸었다. 마침 여비서가 집에
있어서 그녀의 동네에 있는 아담한 커피숍에서 만날수 있었다.
"의상실 문이 닫혀있더군요."
커피를 주문하고난 윤형사는 화장기 없는 수수한 얼굴로
앞자리에 앉아있는 송양에게 친근한 음성으로 말했다.
"강희 선생님이 며칠 전에 의상실을 내놓았다."
"그럼 어떡하죠?"
"저요?"
"네."
"제 친구가 모 기업에서 디자이너로 일하고 있는데 자리
하나가 비었다고 하면서 저보고 들어오라고 했어요. 어저께
이력서를 냈어요. 다음주부터 출근하기로 되었어요."
"그것 참 잘 됐네요."
긴 머리를 뒤로 말아올려서 리본으로 묶은 송지희양은
윤형사를 오랜만에 만나서 무척 반가운지 시종 미소를 잃지 않고
있었다.
"지희씨, 내가 이렇게 나오라고 한건 다름이 아니고, 용인
별장에서 사용했던 칵테일 잔에 대해서 궁금한 게 있어서 확인
좀 해볼려구요."
그렇게 말하면서 윤형사는 핸드백 속에 든 칵테일 잔을
꺼냈다. 비닐봉지 안에 든 칵테일 잔은 청평 별장에 있었던
잔이었다.
"어머, 이 잔은 우리가 파티 때 썼던 칵테일 잔
아니예요?......"
송지희양은 칵테일 잔과 윤형사를 번갈아보면서 흥미있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래요. 이 잔이 연박사님이 살해되던 날 청평 별장의 테이블
위에 있었어요."
"그래요?"
송지희양은 진지한 표정으로 칵테일 잔을 내려다보았다.
"그래서 내가 알고 싶은건, 이런 칵테일 잔이 시중에 많이
나돌고 있는가 해서요. 용인 파티 때 이 잔을 어디서
구입했는지요?"
"아, 네."
송지희양은 질문의 뜻을 알겠다는듯 크게 고개를 끄덕이며
입술을 움직였다.
"이 잔은 외제예요. 파티 때 쓸려고 강희 선생님이 세 통을
샀는데 한 통에 여섯 개 들어있어요. 그러니까 모두 18개였어요.
그리고 일곱 개가 들어있는 와인 잔도 두 통 샀어요."
"어디서 샀나요?"
"명동에 있는 백화점에서 샀어요. 강희 선생님과 함께 저도
같이 갔었어요."
"그래요?"
윤형사는 밝은 눈망울로 다시 질문했다.
"그럼 이런 칵테일 잔이 그 백화점에 여러 통 진열되어
있었겠네요?"
"글쎄요......, 진열된 건 그 세 통밖에 못봤지만 그게 마지막
잔이었다고 장담할수 없어요."
송지희양은 자신없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외제긴 해도 이 잔을 샀던 백화점이나 다른 백화점에서
또다시 살 수도 있겠군요?"
"아마 이 잔과 똑같은건 얼마든지 살수 있을거예요.
수입업자가 이 칵테일 잔을 세 통밖에 수입했을 리는
만무일테니까요."
"잔들은 모두 경찰에서 수거해갔는데, 도대체 이 잔은 어떻게
된걸까요? 누가 새로 산 잔이 틀림없겠지요?"
"맞아요. 누군가가 백화점에 가서 똑같은걸 산 게 분명해요.
똑같은 걸 샀다면 누가 그런 쓸데없는 짓을 했을까요?
......설마......"
"그러게 말이예요. 지희씨, 미안하지만 시간 좀 있으면 이
칵테일 잔을 샀던 백화점까지 같이 가줄수 있을까요? 물론
택시비는 내가 내겠어요."
"택시비야 아무나 내면 어때요. 범인을 잡는데 도움이 된다면
기꺼이 가드려야죠. 그리고 아직은 실업자인데요, 뭐."
윤형사와 송지희양은 자매처럼 마주 앉아서 커피를 마시며
과소비가 어떻다느니, 호스트바가 서울 곳곳에 생겨났다느니,
시집은 언제 갈거냐 하면서 시간가는줄 모르고 수다를 떨었다.
두 여자는 택시 뒷자석에서도 텔런트 누가 어떻고, 가수 누가
어떻고 하면서 잠시도 입을 가만두지 않았다.
백화점 정문 앞에서 택시를 내린 윤형사와 송지희양은
식기류를 파는 코너로 들어가서 정장 차림의 판매원에게 칵테일
잔을 보였다. 그러고나서 한참동안 대화를 주고 받은 끝에
윤형사가 핸드백에서 네 장의 사진을 꺼내 판매원에게 보였다.
그러자 덧니가 난 판매원은 머뭇거림없이 한 장의 사진을
손가락으로 찍었다.
"보름 전에 이런 칵테일 잔을 한 통 사갔어요."
윤형사는 사진 속의 얼굴을 보면서 예상하고 있었다는듯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장과장과 남형사는 연화병원에서 뽑아왔던 자료들을
재검토하면서 성주라양이 실종된 날부터 L호텔에서
살해되기까지의 4개월여 동안 입원해있던 환자들 명단을
체크해보기 시작했다. 4개월여 동안 장기 입원해 있던 성형수술
환자는 모두 6명으로 나와 있었다. 그 중에서 두 명은 남성으로
확인되어서 제외시켜버렸다. 그리고 나머지 4명의 여성 중에 두
명은 40대 중반의 자매 사이라는게 카드 조사 결과 밝혀져서
나머지 두 여자에게 시선을 집중시켰다.
도지미= 21세, 쌍꺼풀 수술과 코수술을 받았음.
김원랑= 26세, 코수술과 기미.주근깨 제거 수술을 받았음.
장과장과 남형사는 두 여자의 연락처로 전화를 걸었다. 도지미
환자가 연화병원에서 성형수술을 받은 것이 확인되었다. 그러나
김원랑 환자의 경우는 전화번호와 집주소가 허위 기재된 것으로
밝혀졌다.
남형사는 경찰차를 몰고 다시 연화병원으로 달려갔다.
김원랑이 입원해있던 301호 담당 간호사를 만나서 자세한 얘기를
들어본 결과, 김원랑양의 수술 기록카드 작성은 변칙적으로
이루어졌다는 걸 솔직하게 인정했다. 내용인즉, 김원랑은
교통사고 환자였는데 조박사님의 집도하에 수술이 이루어졌고
수술 비용도 모두 조박사님이 완납했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
환자의 병실은 301호가 아니고 501호였다고 정정해주었다.
남형사는 그 즉시 젊은 인턴을 병원 휴게실에서 만나 자세한
얘기를 들을수 있었다. 자신이 다른 인턴과 수술실에 들어갔을
때는 환자의 얼굴은 이미 형테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수술이
진행되어 있는 상태였고 자신들의 조박사의 지시에 따라 메스를
움직였다는 것이었다. 수술이 대수술인만큼 마취 전문의 없이
조박사님 단신으로 집도를 하고 있는 것이 이해가 되지 않았지만
교통사고라는 말에, 그것도 자신의 운전 실수로 그렇게 됐다는
조박사의 인간적인 호소에 두 인턴은 별 생각없이 수술에 최선을
다했다는 것이었다.
연화병원을 나오면서 남형사는 시경에다 전화를 걸어 체포반의
형사 두 명을 병원에다 잠복근부시켜놓고 다시 시경으로
들어갔다. 장과장은 자리에 없었다. 그러나 잠시 후 득의에 찬
장과장이 안주머니의 수첩을 꺼내보면서 특수수사과로 들어오고
있었다.
"아, 남형사, 갔다온 일은 잘 됐어?"
낡은 소파에 마주 앉은 두 수사관은 밝은 표정을 지으며
서로를 바라보았다.
"역시 501호의 폐쇄 명령은 조박사의 단독 지시였습니다."
"우리가 조박사의 말을 액면 그대로 믿었던 게 실수였어.
L호텔의 니시무라 다니구찌, 그 일본인은 조박사였던 것이
확인됐어. 좀전에 필적 전문가로부터 감정결과가 나왔는데,
L호텔에 기재된 카드 글씨체와 수첩의 글씨체는 동일 인물에
의해서 씌어진 것이 틀림없다는군."
"이제야 먹구름 뒤에 감춰진 태양을 볼수 있게 됐군요."
남형사가 활기에 찬 목소리로 말했다.
"윤형사의 추리가 맞았어."
"이제 남은건 용인 별장과 청평 별장에서의 범인을 검거하는
일만 남았군요."
"그런 셈이지."
"조박사는 이제 어떻게 할까요? 이만하면 구속시키는데
부족한데 없을 것 같은데요. 지금 당장 잠복근부를 하고 있는
형사들에게 이리로 연행해오라고 하지요."
"아니야, 아니야. 급하게 서두를 이유는 하나도 없어.
조박사도 조박사지만 주범의 증거도 철저하게 확보해놓을 필요가
있어. 자백만으로는 어림없는게 이번 살인사건이야. 용인 별장
살인의 경우 증거가 있을수 없잖은가?"
"정말 그렇군요. 증거가 있을수 없겠군요......"
"그리고 비록 범인의 윤곽이 드러나긴 했지만 아직도 풀리지
않는 여러 가지 의문점이 남아있어. 두 미스코리아를 살해해야만
됐을 필연적인 살인동기가 없다는 게 법정에 가서 검찰측에
불리하게 작용된다는 사실이야. 윤형사가 용인 별장의 살해
수법을 간파해서 엉켜있는 사건을 풀고 있기는 하지만 추리
자체만 가지고서는 한계가 있기 마련이야."
장과장은 수첩의 글씨를 다시 보면서 한숨을 쉬었다.
"두 미스코리아 진을 희생양으로 삼았지 않았을까요?
살인동기를 은폐하기 위해서 말이예요."
"그러기에는 너무나 무모한 살인이야. 어째서 가엾은 두
미스코리아 진을 죽여야만 했을까?......"
"사실 저도 그 점이 이해가 안 갑니다. 살해된 두
미스코리아가 너무 불쌍해보입니다. 범인이 성주라양을 살해한
건, 어쩌면 성주라양이 용인 별장의 살인을 눈치채서 입을 막기
위해 죽였다고 해석할 수도 있지만 윤보혜양은 죽어야 할 이유가
없는데도 죽임을 당했습니다."
"그 점도 그렇지만 조박사의 행동 또한 이해할 수가 없어.
어쨌거나 조박사가 수사본부에 전화를 걸어오지 않았다면
L호텔의 살인은 영원히 미궁 속으로 빠져버릴 수도 있었지
않는가?"
"그렇긴 합니다......"
남형사가 혼란스런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난 이렇게 생각해보았다.조박사는 청평 별장에서의 살인을
미리 알고 있었기 때문에 모든 죄를 연박사에게 뒤집어씌울
생각을 했던거야. 연박사가 죽던 날 병원에서의 조박사 행동을
봐. 자진출두하게끔 내일까지 시간 좀 달라고 했던 말 말이야.
분명 의미심장한 말이야. 그와 범인한테는 우리의 행보가 문제가
됐던거야. 아무튼 연박사 살인은 사전에 계획된 각본이었어.
계획대로 연박사가 청평 별장에서 사망하게 되면 그의 시체는
단순사로 처리되어 해부되는 일 없이 화장터로 운반되어 모든
것은 완벽하게 끝나는 것이었지. 유가족인 강여사님이 살인에
의심을 갖고 있지 않는 한 사건화될 리는 없을테니까. 그리고
용인 별장에서의 살인이 있었던 터라 청평 별장의 초대객들도
진실에 대한 추구보다는 적당한 해결책을 원했을거야. 그런
공감대가 형성되는게 어쩌면 지극히 당연한 현상이겠지.
그러니까 윤보혜양의 죽음은 연박사의 죽음을 계산에 넣은
심리살인일 수도 있어. 우리가 그 청평 별장에 들이닥치지
않았다면 연박사의 시체는 연화병원으로 옮겨져서 조박사의
사망진단서와 함께 조용하게 장례식이 치춰졌을지도 모르는
일이야. 결국 조박사는 각본에 의해 경찰에 전화를 걸었던
것으로 생각되어져."
"그럴 수도 있겠군요. 그러나 성주라양이 사건의 진상과는
상관없이 살해당했다면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요? 성주라양 역시
죽임을 당할 이유가 없는데 말이예요. 그것도 숫처녀인
미스코리아가 말입니다."
"가만 생각해보면 성주라양이 처녀성을 간직하고 있었기
ㄸ문에 사건의 가닥이 잡힐 수도 있어. 최소한 미스코리아의
육체를 노리고 이루어진 살인은 아니라는 결론을 얻을수 있고,
또 그런 성적 충동이랄까, 치정에 의한 살인이 아닐 가능성이
높았기 때문에 살인 공모의 상황을 파악할수 있었으니까 말이야.
그래서 나는 이렇게 생각해. 성주라양 역시 윤보혜양과 똑같이
연박사의 죽음을 은폐하기 위한 하나의 도구로 사용됐을 수도
있어. 결론적으로 얘가한다면, 윤보혜양의 죽음은 연박사의
죽음을 심장마비로 은폐하기 위한 공동심리를 이끌어냐기 위한
살인이었고, 성주라양의 살인 경우에는 범인이 연박사였다는
것을 기정사실화시키기 위한 함정이었다고 생각해. 그러나 모를
일이지."
남형사는 고개를 끄덕이다가 다시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럼 두 미스코리아 진은 결국 희생양이었다는 말씀인가요?
제물로 쓰여졌다고 봐야 하나요?"
"글쎄...... 결국은 원점으로 또 돌아온 셈이군."
"윤주희라고 합니다."
윤형사가 인터폰에 대고 자기 신분을 밝히자 굳게 닫혀있던
대문이 열렸다.
유여사는 응접실 소파에 앉아있다가 정원을 가로질러오는
윤형사의 모습을 보면서 불안한 표정을 감추지 못하고 있었다.
소파에 앉은 그녀의 손끝이 가느다랗게 떨리고 있었다.
"안녕하세요?"
윤형사가 상냥하게 미소지으며 허리를 숙여 인사하자 유여사는
소파에서 일어나면서 목례를 했다.
"이리 앉아요."
유여사는 자기가 앉았던 자리를 비워주며 조심스런 눈빛으로
윤형사의 얼굴을 보았다.
"의원님은 외출중이신가요?"
가정부가 내온 율무차를 한 모금 마시고난 윤형사는 여전히
상냥한 얼굴로 물었다.
"며칠째 소식이 없어요. 당 총재께서 의원직 사퇴서를
반려하셨다는 소식을 들으셨을텐데 연락 한통 없네요."
유여사가 수심에 가득찬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여사님, 오늘 제가 이렇게 여사님 댁을 방문한 것은 마지막
진실을 듣기 위해섭니다. 이런 말씀 드리기는 죄송하지만
여사님께서는 현재 매우 불리한 상황에 직면해있어요. 그래서
드리는 말씀인데, 제가 어떤 질문을 드려도 숨김없이
대답해주실수 있는지?"
윤형사의 친근한 말투에 유여사의 얼굴 표정이 갑자기
밝아지고 있었다.
"뭐든 물어보세요. 내가 알고 있는 건 뭐든지
말해드리겠어요."
"고맙습니다. 먼저 청평 별장에서의 일인데, 그 당시
볼룸댄스를 췄던 사람들의 파트너를 기억하실수 있는지요? 그날
여사님께서 댄스를 춘 파트너 분이 연박사님 뿐이었는지요?"
"파트너요? ......케익을 자르고 나서 의원님과 내가
손님들에게 샴페인을 따뤄드렸고...... 그 다음에는 나와
의원님이 제일 먼저 볼룸댄스를 췄어요. 그리고 댄스가 끝난
뒤에는 장기자랑 코너로 이어졌어요. 나비향양과 소리미양이
람바다 춤을 추었고 의원님이 노래를 부르셨지요. 그렇게 시간이
흘렀고......, 그 다음에는 테이블에 모여서 축하주를 마셨어요.
분위기는 아주 흥겨웠어요."
"아, 네. 그럼 처음 춤출 때 다른 쌍의 파트너가 누구였는지
기억나는대로 말씀해주시겠어요?"
"......그러니까 연박사님이 강여사와 춤을 추었고, 박회장과
나비향양이 짝을 이루었고......"
"잠깐만요, 여사님. 연박사님과 강여사가 함께 춤을
추었다고요?"
"네, 그랬는데요......, 그게 뭐......"
"그것 참 이상하네요. 연박사님과 강여사는 별거중에 있는
사이라는 걸로 알았는데요."
"그렇다고 해서 의식적으로 서로를 기피할 필요가 없는 거
아니겠어요?"
"그렇긴 하네요. 그런데 여사님은 그 부부가 왜 별거하게
되었는지 그 이유를 알고 계셨나요?"
그 질문에 유여사는 그녀의 시선을 피하며 잠시동안 침묵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러다가 결심한듯 윤형사의 눈동자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그건 강여사의 돼먹지 못한 사생활 때문이었어요. 강희는
여우보다 더 약아빠졌고 미스코리아 시절부터 남자 관계가
복잡했어요. 나는 다 알고 있었어요. 의원님이 그년의 꼬리질에
넘어간걸요. 그러나 난 모든 사실을 다 알고난 뒤에도 의원님
스스로 청산하리라 믿고 모른 척했어요. 그 년은 자기 본분을
망각한 더러운 년이예요. 자기가 미스코리아 진 출신이라는걸
마치 암행어사가 마패 꺼내듯이 떠들어대면서 세상 남자가 다
자기 미모에 빠져서 헤어나오지 못하고 있다고 착각하며 사는
년이었어요. 자기는 여왕이고 세상 모든 남자는 장작 패는
머슴이라고 착각하면서 살아왔던 거예요."
유여사의 동공은 어느새 분노로 불타있었다. 유여사는
강여사에 대한 분노를 누그러뜨리지 않고 계속 말을 이었다.
"나도 한때는 그런 기분에 빠져든 적이 있었어요. 찬란한
미모만 있으면 그 어떤 남자도 내 하인으로 만들수 있다는
자만감에 빠져서 구혼을 해오는 남자들을 거들떠보지도 않은
적이 여러 번 있었어요. 그러나 그년은 천성적인 악녀의
딸이었어요. 키르케 같은 년이지요. 남자의 욕정과 소유욕이
악을 불러일으킨다는 걸 모르고 뭇 남성들로부터 추앙받고
있다는 착각에 빠져서 미스코리아 시적부터 지금까지 여왕의
세계 속에서 살아온 년이예요. 한 마디로 미스쾨아 얼굴에
똥칠을 하고 다니는 갈보년이예요."
윤형사는 유여사의 흥분이 가라앉을 때까지 잠자코 앉아만
있었다.
"저도 여사님의 심정을 충분히 이해해요. 저 같아도 그런
경우를 당했다면 가만있지 못했을 거예요."
"그래도 난 끝까지 참았어요. 의원님의 정치적 야망을
위해서요. 그러나 이젠 달라요. 내 인생을 남편의 인생 속에
포함시켜서 살 수는 없어요."
유여사는 단호한 어조로 말했다.
"여사님, 진실은 언제나 정의의 편이라고 생각해요. 그래서
드리는 질문인데, 의원님과 강여사의 사이를 안건 언제 어떻게
아셨는지요?"
"5월달에 있는 미스코리아 선발대회가 열리기 며칠
전이었어요. 아시겠지만 나와 연박사님은 심사위원으로
위촉되었기 때문에 자주 만날 기회가 있었어요. 그때
연박사님께서 나를 조용한 커피숍으로 데려가시더니 구석진
장소에서 한 장의 사진을 꺼내 보여주시는 것이었어요.
세상에......, 자동차 위에서 벌거벗은 그 년과 내
남편이......"
유여사는 말을 멈추고는 손으로 이마를 만지면서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 사진을 어디서 구했냐고 물어보았지요. 박사님은 이
사진을 찍은 사람에게 필름값을 지불하고 받았다는 것이었어요.
나는 물었죠. 왜 이런 것을 나한테 보여주냐고요. 그랬더니
박사님은 금방이라도 울듯한 목소리로 말하더군요. 그 년은
사람의 탈을 쓴 악녀하고 하면서 죽여버리고 싶다고
얘기했어요."
"그래도 여사님은 뭐라고 하셨나요?"
윤형사가 재촉하듯이 물었다.
"나도 처음엔 그 사진을 보고 둘 다 죽여버리고 싶은 충동을
강하게 느꼈어요. 그리고 박사님이 그 년을 죽여버리고 싶다고
했을 때도 그게 오히려 당연한 게 아니냐는듯 동조의 눈빛을
보냈어요. 그리고 동시에 남편에 대한 배신감에 할 수만 있다면
나도 박사님과 불륜을 저지르고 불륜의 현장이 담긴 사진을 여러
장 찍어서 내 남편과 그 년에게 보여주고 싶었어요. 나로서는
어떤 것이 가장 충격적이고 극적일까를 궁리하고 또 궁리하면서
끓어오르는 분노와 머리 속에서 끊이지 않는 살의에 휩싸여
있었어요. 나는 순각적으로 냉정해지자고 생각하면서 박사님에게
살인의 마음을 감추려는 의도에서 그러면 차라리 강여사하고
이혼을 하라고 얘기했어요. 그러나 내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우리 두 사람은 다시 서로의 머리 속에 떠오르는 상상 앞에
분노를 느껴야만 했어요. 우리가 이혼하면 그 둘은 메뚜기가
제철 만난듯 활개치고 다닐게 뻔한데, 그런 생각을 하고
있으니까 울화통이 치밀어오르는 것이었어요. 이럴 수도 없고
저럴 수도 없고......, 그때 그 기분은 뭐라고 설명할수 없을
정도로 처참한 기분이었어요."
유여사는 다시 생각하고 싶지도 않다는 얼굴로 고개를 젓고
있었다.
"그럼 여사님은 용인 별장에서 윤보혜양이 독살되었을 때
연박사님이 일을 저지른거라고 생각하셨나요?"
윤형사가 물었다.
"나로서는 그렇게밖에 생각하지 않을수 없었어요. 박사님이
둘중의 누군가를 독살하려다가 실수로 그 착한 진을 죽게
한거라고 생각했어요. 더군다나 무슨 이유에서인지 몰라도
칵테일 잔마저 사라졌으니 점차 박사님에 대한 의심과 확신은
굳어져갔어요."
"그럼 반대로 연박사님은 여사님이 누군가를 독살하려다가
실수한 걸로 생각했겠네요?"
"박사님이 그렇게 생각하는 것도 무리가 아니었을 거예요.
그때 박사님과 나는 홀에서 춤을 추고 있는 그 년과 내 남편의
꼴불견을 보면서 죽이고 싶을 정도로 분노를 느끼고
있었으니까요."
윤형사는 그제서야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추측한대로,
아내와 권의원의 불륜을 알고 있던 연박사로서는 보란듯이 춤을
추고 있는 두 남녀에게 모든 신경을 쏟은 나머지 마시고난
칵테일 잔이 자기 양복 주머니로 들어가는지도 모르고 있을
정도로 제정신이 아니었던 것이 분명했다.
"여사님, 기억을 잘 더듬어셔서 청평 별장에서 연박사님이
운명하시기 전에, 그러니까 박사님과 함께 춤을 추기 전에
테이블에 앉아있던 위치를 그림으로 그려주시겠어요?"
윤형사는 준비해온 백지 위에다 동그랗게 테이블을 그려놓고
의자를 표시했다.유여사는 잠시동안 허공에다 시선을 두고
생각하는 듯하더니 자신의 좌석 위치부터 이름을 적기 시작했다.
유여사가 마지막 사람의 이름을 적어서 종이를 건네주었을 때
윤형사는 현장에서 만든 그림과 똑같음을 한눈에 파악할 수
있었다.
"여사님, 의원님과 강여사의 사이를 알고 나서도 지금까지
모른 척하고 계셨는지, 아니면......"
윤형사가 조심스런 눈빛으로 유여사를 보며 묻자 그녀는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나는 내 남편에게 분명히 얘기했어요. 더 이상의 관계를 원치
않는다고요. 그때 당시 문화부 장관설이나 돌고 있었던 때라
스캔들화하고 싶지 않아서 한두 마디로 끝냈지만 지금은
그렇게밖에 표현하지 못한 내 자신을 후회하고 있어요."
"그렇다면 다른 사람들은 두 사람의 관계를 눈치채지
못했는지요?"
"누굴 말씀하는건가요? 연박사님 말고 다른 사람이요?"
"네."
"알 수가 없었겠죠. 나도 연박사님이 얘기해주는 바람에 알게
되었으니까요."
"네...... 마지막으로 한 가지만 더 질문드리겠는데요, 춤을
추다가 박사님이 쓰러지고 나서 김진건 아나운서가 제일 먼저
신체에 손을 댔다는데 그때 무슨 이상한 느낌 같은건
못받으셨나요?"
"글쎄요...... 나는 너무 정신이 없었어요. 박사님이나 나나
술에 취해 있었어요. 박사님과 나는 곡이 완전히 멈출 때까지
10분이고 20분이고 계속 출 생각이었어요. 박사님이 춤을 추자고
제의할 때 서로의 눈빛만으로도 충분히 알 수 있는 일이었지요.
그런데 박사님은 춤을 추는 동안 스텝을 제대로 밟지 못했어요.
숨이 무척 가쁜 상태였다. 그러다가 갑자기 쓰러지는 거였어요.
자라 보고 놀란 가슴 솥뚜껑 보고 놀란다고 박사님이 쓰러진 게
우연이라는 느낌은 전혀 들지 않았어요. 또 살인이 벌어졌구나,
이런 불안감이 빛처럼 뇌리에 엄습해오는 것이었어요. 난
박사님이 운명하신 거라고 생각했어요. 그런 기분은
김아나운서도 마찬가지였을거예요. 거기 모여있던 사람들도 나와
똑같은 생각이었을거예요."
유여사의 말을 듣고난 윤형사는 다시 한번 고개를 끄덕이면서
생각난듯 새로운 질문을 했다.
"여사님, 우리 경찰이 현장에 막 도착했을 때 연박사님의
시신을 어떻게 처리할려고 했나요?"
"내 남편과 다른 모든 사람들은 경찰에 신고할 필요없이
시신을 서울로 옮기자고 막 합의를 보던 순간이었어요."
"모두들 말인가요?"
"네."
"임종도 국장님도요?"
"네."
윤형사는 이상야릇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서너 번 끄덕이고
있었다.
"여사님, 그날 모였던 초대객들 중에 술을 많이 마셨던 분들은
누구 누구였는지요?"
"내 남편과 임국장님...... 남자분들은 전부 다 술을 많이
드셨어요."
"여성분들은요?"
"글쎄요, 모두들 많이 먹은 것 같기도 하고...... 잘
모르겠어요."
"그럼 쓰러진 연박사님 옆에서 5초 이상 동안 앉아있었던
사람은 누구 누구였는지요?"
"글쎄요, 금변호사도 있었고 김아나운서도 있었고...... 아,
그 년도 있었고요. 그리곤 잘 기억이 안 나요."
"그럼 의원님은 박사님의 시신 옆에 가지도 않으셨나요?"
"내 기억으로는 근처에 가지도 않았어요."
"나비향씨의 말을 들어보면 의원님만 제외하고 모두들
박사님의 시신 주위에 몰려있었다고 하던데, 사후 대책
수습회의라할까 박사님의 시신 처리 문제를 숙의하기 위해
테이블에 모두 모였을 때부터 우리 경찰이 당도할 때까지
테이블을 이탈한 사람은 한 명도 없겠지요?"
"한 명도 없었어요. 모두들 의자에 앉아있었어요."
"그렇다면 목덜미에 주사기가 꽂힌 시기는 박사님이 쓰러진
순간부터 모두 모여서 상의를 할 때까지의 사이인데, 어떻게
주사바늘을 꽂을 수 있었을까......"
윤형사는 혼자 중얼거리듯이 말하면서 생각에 잠겼다.
나비향과 유여사의 진술을 들어보면 범인이 기회를 포착해서
주사바늘을 꽂는 모습이 시간상으로 드러나보이긴 하지만
완벽하게 확보할 수 있는 살인 순간은 아니었다. 주사기를 꽂는
순간은 칼로 심장을 찌르는 모습처럼 살인이 명백하게 드러나는
순간인데 그렇게 대담하게 주사기를 꽂을수 있다니.......
초대객들이 취중이었기 때문에 쉽게 실행에 옮길수 있다고
확신했을까? 그리고 범인은 현장에서 주사기를 어디다 숨겼을까?
윤형사는 초대객의 소지품 검사에만 신경을 쏟았던 자신들의
좁은 시야를 새삼스럽게 느끼면서 청평 별장의 내부를 다시
수색해볼 필요성이 있음을 절감했다. 청평 별장 어딘가에
주사기가 감춰져 있다면 그 주사기에서 지문을 채취할수 있지
않을까? 우리가 들이닥치자 당황한 범인이 재빨리 주사기를
숨길만한 장소를 찾아내어 감췄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그러나
몸수색의 한계상 범인이 몸 깊숙한 곳에 감췄다면 소지품 검사나
몸수색은 한낱 형식에 불과한 조사가 되었으리라.
"여사님, 무척 고마웠어요. 진실은 언제나 정의의 편이라는 걸
다시 말씀드리고 싶어요. 제가 며칠 후에 여사님을 파티에
초대하고 싶은데 의원님하고 꼭 같이 오셨으면 감사하겠어요."
"무슨 파틴데요?"
"파티의 내용을 말씀드리긴 아직 이르지만 아마 며칠 후쯤이면
이번 미스코리아 살인사건의 진실이 의혹 한 점 없이
밝혀질거예요. 그러니 그때 의원님과 꼭 참석해주셨으면해요.
장소가 어디라도요."
윤형사는 정원에서 유여사와 재회의 약속을 하고는 시경으로
가는 버스에 올라탔다.
아파트의 초인종을 누르자 안에서 경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남형사의 얼굴을 문구멍으로 본 박만하는 골치 아픈 표정을
지으면서 문을 열어주었다.
"아이고, 남형사님이 이 누추한 곳까지 어인 행차십니까?"
박만하는 능글맞게 웃으면서 큰 목소리로 반가움을 표시했다.
그가 반쯤 펴진 주간지와 꽁초가 수북이 쌓인 재떨이, 휴지들이
어지럽게 널려져있는 탁자 위를 치우는 동안 남형사는 실내를
휘돌아보면서 서 있었다.
"앉으시지요, 남형사님."
탁자 위를 정리한 박만하는 새로 들여놓은지 얼마 안 된
깨끗한 소파를 손으로 가리키며 여전히 능글맞게 웃고 있었다.
남형사는 소파에 턱썩 앉자마자 거침없이 질문으로 들어갔다.
"박만하씨, 당신 때문에 우리가 얼마나 헛돈지 아시오?"
"무, 무슨 말씀입니까, 남형사님?"
"연박사한테 부인의 불륜 현장이 담긴 사진을 돈을 받고
건네주었잖아요."
"어이구, 무슨 그런 섭섭한 말씀을. 난 그런 적이 전혀
없습니다, 남형사님."
"연박사가 돌아가셨으니까 입다물고 있으면 만사 오케이다?
그러나 어림없는 일이오, 박만하씨."
"그것 때문에 절 찾아오신 겁니까, 남형사님?"
박만하는 말끝마다 남형사님을 강조하면서 피곤한 표정을
지었다.
"이것 봐요, 박만하씨. 미스코리아 진 윤보혜양이
미혼모였다는 폭로기사가 전부 허위라는거 알고 있었지요?"
"남형사님, 우리 이러지 말고 따뜻한 대화를 나눕시다. 난
그저 산 입에 거미줄 좀 칠려고 했을 뿐입니다."
"연박사 말고 또 누구한테 돈을 받고 사진을 건네주었지요?
강여사님한테도 공갈 협박을 해서 돈을 뜯어냈지요?"
"이거 정말 왜 이러십니까, 남형사님. 아, 진정하세요."
"박만하는 담배 한 개비를 남형사에게 두 손으로 공손하게
건네면서 허리마저 굽신거려가며 라이터불을 켰다.
"아, 좋아요. 박만하씨가 따뜻한 대화를 나누자고 하니 나도
그렇고 싶으니까 지금부터 내가 묻는 질문에 거짓없이 대답해
주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을 경우 박만하씨 당신의 죄를 끝까지
추적해서 콩밥을 먹일테니까 단단히 각오하시오."
"여부가 있겠습니까, 남형사님."
박만하는 연신 허리를 굽히면서 비굴한 웃음을 보였다.
"미스코리아 선발대회가 열린 S문화회관은 왜 들어갔어요."
"그게......"
박만하는 남형사의 눈치를 슬슬 살피면서 더듬거리고 있었다.
남형사가 험악한 표정을 짓자 기가 죽은 그는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사실대로 털어놓기 시작했다.
"강여사의 약점을 알게된 나는 상대방의 신분과 남편이
누군가를 알아야 했습니다. 소위 말해서 상품가치가 있는지
없는지를 조사해볼 필요성이 있었던 것이었지요. 상대방 남자가
권중혁 국회의원이라는걸 아는 건 별로 어렵지 않았습니다. TV
뉴스시간만 되면 쌈질만 해대는, 국회의원 나리들의 얼굴을 만히
보아왔기 때문에 현장을 찍을 때부터 대충 짐작은 했었어요.
그리고 강여사의 남편이 병원 원장이라는 것도 알아낼수
있었지요. 한마디로 봉황이었지요."
"이것 봐요, 박만하씨. 내가 알고 싶은 건 그런 뻔한 스토리가
아니라 대회가 열리고 있는 회관에는 왜 들어갔느냐는거요."
남형사가 답답한 표정을 지으며 성난 목소리로 지적해주었다.
"어휴, 그래서 지금 얘기하지 않습니까, 남형사님."
박만하가 볼멘 소리로 말하면서 서운하다는듯이 남형사를
쳐다보았다.
"아, 좋아요. 어서 얘기해보시오."
"나는 그날 연박사와 만나기로 약속을 했습니다. 연박사가
그러더군요. 미스코리아 선발대회가 끝난 후에 근처 호텔에서
만나자고요. 그래서 약속시간에 맞추기 위해서 회관에 들어가
미스코리아 선발대회를 구경하게 되었던 겁니다."
"솔직하게 말해줘서 고맙군요. 그런데 어째서 의원님이나
강여사님에게 협박을 하지 않고 연박사를 선택했습니까?"
"협박이라니요, 남형사님. 난 불의를 보면 참지 못하는
성격입니다. 연박사님에게 진실을 진실대로 알려준 것뿐인데
그게 무슨 죄가 됩니까? 난 분명히 말하지만 연박사님에게 땡전
한 푼 받지 않았습니다. 수천 원이나 되는 필름값조차도 안
받았단 말입니다, 남형사님."
"허, 참. 이것봐요, 박만하씨. 입에 침이나 바르고 거짓말 좀
하쇼. 내가 당신한테 당한 피해자들을 찾아내는건 식은 죽
먹기요. 나한테는 모든 증거가 확보되어 있단 말이오."
"증거요? 진실을 알려준 것도 죄가 된단 말입니까? 나원 참.
표창장 한 장 주지는 못할망정 죄인 취급을 하다니...... 허,
참."
박만하는 허공을 쳐다보면서 어이없어했다.
"당신 정말 이럴거야? 따뜻한 대화를 나누자고 했으면 따뜻한
대화를 나누어야 할거 아니요?"
"난 거짓말 한거 하나도 없습니다, 남형사님. 난 지금 따뜻한
대화를 열심히 나누고 있는 중입니다. 남형사님이 괜히
지레짐작해서 시베리아 대화를 하는거지요."
"이거 정말 구제불능이군...... 아, 좋습니다, 좋아요. 서로의
인격을 존중해가면서 계속 하와이 같은 대화를 나눠봅시다.
강여사님에게는 진실을 말해주었소?"
"무슨 진실을요? 난 강여사님에게 가정으로 돌아가라고 충고한
적밖에 없습니다."
"얼마 받았소?"
"받았다니요? 뭘 말입니까? 돈이요? 남형사님, 정말
이러실겁니까? 난 그런 치사한 짓은 절대로 안 합니다. 다만,
워낙 카메라를 좋아하기 때문에 상대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찍는게 도가 지나칠 뿐이지만 그게 내 작품의 모티브가 되는걸
어떡합니까?"
박만하는 계속 억울하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박만하씨, 윤보혜양을 미스코리아 선발대회에서 본건
우연이었소?"
"몇 번을 말해야 됩니까? 내가 녹음깁니까, 앵무샙니까?
이번까지 말하면 아침에 빠진 머리카락 열 개를 뺀 내 머리털
수와 똑같습니다."
"그러니까 연박사에게 사진을 건네준 건 미스코리아
선발대회가 있기 전이었고, 강여사에게 가정으로 돌아가라고
충고를 한 건 미스코리아 선발대회가 끝난 뒤었죠?"
"네, 남형사님."
"윤보혜양이 미스코리아에 당선된 후 당신은 보혜양이
미혼모였다고 믿고 있었던 모양인데, 그럼에도 고의적으로
허위사실을 유포한건 아닙니까?"
"하늘에 맹세하지만 보혜양이 죽은 후에도 난 걔가 미혼모인줄
알고 있었습니다."
"좋습니다. 사실대로 믿죠. 어차피 강여사님과 대질 심문을
벌이게 되면 모든 사실이 소상하게 밝혀질테니까 지금의 우리
대화가 따뜻한 대환지 뒤통수 때리는 대환지 곧 밝혀지겠지요."
"여부가 있겠읍니까?"
"정말 강여사님한테 금품을 받지 않았습니까?"
"남형사님, 내가 강여사님한테 십원 한장 받았다면 남형사님
집 강아집니다."
"영양탕값 안 들어서 좋겠군."
"뭐라구요?......"
"아, 아니오. 내 당신 말을 믿지요. 돈을 안 받았다면 뭘
원했지요?"
박만하의 얼굴 표정이 갑자기 굳어졌다.
"원하다니요? 오히려 쥬스값도 제가 냈는데요."
"박만하씨! 내가 지금 어디서 오는줄 아시오? 강여사님을
만나고 오는 길이오."
남형사가 짙은 눈썹을 티켜올리면서 말아쥔 주먹으로 탁자를
내리치자 그가 찔끔해하다가 다시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강여사님을 만나고 오셨다면 새삼스럽게 금품을 받고
안 받고를 확인할 필요가 뭐 있습니까? 난 처음부터
강여사님한테 돈을 받을 생각이 손톱만큼도 없었어요. 같은
남자끼리니까 형사님한테 솔직하게 고백하는 건데, 윤보혜양이
미스코리아 진에 당선되었을 때 내 기분이 어땠는지 아세요?
인천의 비디오 회사에 경리로 있던 윤보애가 미스코리아 진으로
당선된 것을 안 순간, 내 가슴 속에는 저런 미녀를 근처에
두고도 손 한번 잡아보지 못한 내 자신이 한심스럽기까지
했어요. 좋아요, 다 까놓고 얘기하지요. 솔직히 나는 미스코리아
선발대회를 보고난 후 윤보혜한테 홀딱 반해버렸습니다. 좋은
말로 표현하면 윤보혜가 너무나 아름다워서 내 자신을 어떻게
할수 없을 정도로 진의 미모와 몸매에 흠뻑 빠져버렸던 겁니다.
그런 기분 남형사님도 이해하실 겁니다. 낚시하다가 놓친 고기가
너무나 아깝다 못해 피라미도 대어처럼 보이는 그런 기분
말입니다. 난 그때 내 정신이 아니었습니다. 윤보혜, 신데렐라가
된 윤보혜를 내 여자로 만들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강여사님을 협박했군......"
남형사가 싸늘한 음성으로 말했다.
"협박이라구요? 물론 해석하기 따라서 협박일 수도 있지요. 난
여사님에게 제의했습니다. 비열한 짓인지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어떡하겠습니까? 내 마음은 이미 돌아오지 못할 사랑의
강을 건넌걸요."
"그러니까, 강여사님의 비밀을 지켜주는 댓가로 윤보혜양을
나한테 넘기라?"
"남형사님, 윤보혜가 어디 물건입니까? 그리고 보혜가 어디
허수아빕니까? 내 말은 보혜양과 따뜻한 시간을 좀 갖고
싶으니까 자리 좀 만들어달라고 진심어린 부탁을 한
것뿐입니다."
"그랬더니 강여사님은 뭐라고 하던가요?"
남형사는 다 알고 있다는듯한 눈빛으로 물었다.
"처음엔 내게 이렇게 묻더군요. 어디서 보혜를 만나고
싶냐고요. 나는 서슴치 않고 대답했지요. 사람 눈도 있으니까
호텔 방에서 단 둘이 만났으면 좋겠다고 했지요. 그랬더니
강여사가 입술을 파르르 떨더군요. 그럴 수는 없다며 액수를
말하라고 하더군요. 젠장, 난 보혜가 아니고는 다 필요없다고
했지요."
"아니, 연박사한테 사진을 제공해놓고나서 강여사님에게
협박을 하면 그게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어차피 남편이 다 알게
될 일 이판사판 식으로 생각하면 그만 아니겠소."
"남형사님, 참 둔하시군요. 강여사가 남편을 사랑했으면
그렇게 행동했겠습니까? 강여사는 원장이라는 남편을
무서워하지도 뒷탈을 두려워하지도 않았습니다. 강여사는 오로지
권의원 한 사람밖에 사랑하지 않았습니다. 그 불륜의 사진이
전단 뿌려지듯이 각 주간지에 들어가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강여사가 염려했던 건 바로 그 점이었습니다. 권의원의
정치생명을 걱정했던 겁니다. 빌어먹을."
"그래서 어떡했습니까? 꿩 대신 닭이라고 여자의 육체 대신
돈을 받았습니까?"
"제가 몇 번이나 말씀드렸습니까? 돈은 절대로 받지
않았다고요. 여사는 생각할 시간을 달라고 하더군요.
미스코리아를 축하하는 파티가 끝난 후에 생각해보겠다고
하더군요."
"그래서 뭐라고 그랬습니까?"
"약속을 꼭 지키라고 그랬지요."
박만하가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그럼 파티 때 캠코더 기사로 일하게 된 건 어떻게 된
겁니까?"
"그건 내가 요구했소. 파티 때마다 기록용 비디오를 찍는다는
걸 사전에 알고 있었던 나는 윤보혜양도 직접 볼겸 강여사가
딴짓을 못하게끔 무언의 압력을 가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었소."
"솔직하게 말해줘서 고맙군요. 테이블의 사진을 찍고 있을 때
보혜양이 숨지는 장면이 촬영되어 있던데, 우연하게 찍혔다고
생각합니까?"
"우연이고 뭐고 있겠습니까? 그 날의 주인공은 윤보혜였고, 나
또한 보혜의 아름다운 얼굴을 많이 찍고 싶었고, 또한 강여사가
미스코리아 진을 중심으로해서 비디오를 찍으라고 특별주문을
했기 때문에 당연히 보혜의 마지막 모습이 찍힐수
있었던거지요."
"그렇군요."
남형사는 고개를 끄덕이면서 다음 질문으로 넘어갔다.
"헌데, 윤보혜양이 숨진 후에 뭣 때문에 현장에서
사라졌습니까?"
"어휴, 이 앵무새 신세. 남형사님 같으면 황홀한 하룻밤이
기대되던 여자가 눈 앞에서 목을 움켜쥐고 쓰러졌는데 슬퍼만
해고 있을 겁니까? 난 피곤한건 질색이거든요. 이렇게
시달리는게 무척 싫단 말입니다. 윤보혜가 자살했든 독살당했든
그날 밤의 나의 분노는 강여사를 죽여버리고 싶을 정도로 폭발
일보 직전이었습니다. 난 다음날 밤에, 테이프를 임국장에게
넘기지 전에 강여사에게 전화를 걸었지요. 다 불어버리겠다구요.
그랬더니 참, 뭐라고 하는줄 압니까? 지금 불난 집에 부채질
하느냐고 되려 화를 냅디다. 그래서 나는 목소리를 깔고
말했습니다. 지금 이 시간부터 나는 사진을 만장 정도 현상해서
대한민국 방방곡곡에 뿌리겠다고 엄포를 놓았지요. 그랬더니
강여사의 목소리가 갑자기 부드러워지면서 제법 큰 액수를
부르더군요. 난 돈은 싫다고 했지요. 윤보혜 대신 작년도
미스코리아 진인 성주라양을 호텔 방을 보내라고했지요. 아니면
당신이 오던가. 만약 오늘 밤 자정까지 호텔 몇 호로 오지
않으면 윤보혜가 미혼모였다는걸 폭로해버리겠다고 했지요."
"왜 하필 성주라양을 지목했습니까?"
"진 아닙니까, 진. 파티 때 성주라의 미모를 보고 한눈에
반해버렸습니다. 정말 환상적이더군요. 너무나 아름답더군요."
박만하는 꿈을 꾸는듯한 시선으로 남형사를 바라보며 말했다.
"아니, 설사 강여사가 성주라양한테 무슨 호텔 몇 호로
가란다고 시켜도 그 미스코리아 진이 올 여잡니까?"
"그러니까 강여사의 협조가 필요한 것 아닙니까? 동행해서
호텔에 데리고 오기만 하면 그 다음부터는 내가 알아서 하면
되는건데 뭘 그렇게 깊이 생각하십니까? 호텔 방에만 들어오면
그때부터는 완전히 나의 독무대일텐데요, 뭐."
"그래서 그날 밤 강여사가 성주라양을 호텔로 데려왔습니까?"
"데려와요? 눈빠지게 기다리고 있는데 오라는 미스코리아는 안
오고 개 같은 전화만 왔습니다."
"누구한테요?"
"누구 전화긴 누구 전화겠습니까? 성주라양 전화였죠.
강선생님한테 말을 들었다고. 그리고 갈려고 했는데 급한 사정이
생겨서 다음에 꼭 가겠다고요. 제가 박선생님의 전화번호를 알고
있으니까 조용한 시간에 전화를 드리겠다고요."
"그때 강여사님도 전화 옆에 있었습니까?"
"강여사가 성주라양한테 전화를 바꿔줬으니까 같이
있었겠지요."
"그래서 당신은 뭐라고 말했습니까?"
남형사가 긴장된 목소리로 말했다.
"못온다는데 별수 있습니까? 전화통화만 한걸로
만족할수밖에요. 더군다나 살살 녹이는 목소리로 본인이 직접
좋은 밤을 만들어서 전화드리겠다고 하는데 뭐라 그럴수
있습니까? 빌어먹을. 그러고나서 보름이 채 안 돼서
실종되어버렸지 뭡니까? 개 같은."
박만하는 못이룬 하룻밤의 정사가 못내 분통터지는지 자신도
모르게 욕을 내뱉고 있었다.
"성주라양이 실종되기 전에 강여사한테 또 전화를
걸었습니까?"
"세 번 정도 더 걸었지요. 그때 난 하루가 일 년
같았었거든요."
"성주라양이 실종된 후에는 전화를 자주 걸었습니까?"
"전화를 걸어요? 두 미스코리아 때문에 매스컴이 떠들썩하고
경찰이 눈에 독기를 품고 설쳐대는데 난들 별수 있습니까?
강여사에 대한 분노야 언제든 폭발시켜버리면 그만이지만 괜히
설치고 다니다가 쓸데없는 오해를 받으면 나만 손해 아닙니까?
그래서 지금까지 쥐죽은듯이 이 아파트에 엎드려있는 겁니다."
"박만하씨, 당신 참 뻔뻔하기가 악어 등가죽보다 더 두껍구만.
이게 뭔지 아나, 이 악마 같은 자식아!"
남형사는 체포영장과 수갑을 동시에 꺼내면서 엉겁결에
도망치려는 그의 뒷목을 움켜잡고 한 쪽 팔을 뒤로 꺽어 수갑을
채웠다.
"너 같은 놈은 미스코리아의 얼굴을 볼 자격도 없어, 이
추악한 자식아!"
사건해결을 목전에 둔 장과장과 두 형사는 낡은 소파에 마주
앉아서 마지막 수사회의를 가졌다. 여행에서 돌아온 권의원을
비롯하여 두 별장에 초대었던 모든 사람을 오늘 밤 10시까지
모두 참석하라고 연락을 끝낸 뒤라 세 수사관의 마음은 오히려
홀가분한 기분보다는 착잡한 심정부터 앞섰다.
"윤형사, 오늘 밤 윤형사의 대관식이 참 멋있겠군. 미스코리아
진으로 탄생되는 기분이 어때?"
남형사가 씁쓸하게 웃으면서 우울한 표정을 짓고 있는
윤형사를 바라보며 물었다.
"한복 입은 내 모습이 윤보혜양만 할라구."
"왜, 우리 윤형사의 미모도 결코 미스코리아 진에 뒤떨어지지
않아. 아마 우리 경찰에서도 미스 폴리스 선발대회를 열면
윤형사가 단연 여왕감일거야."
"그렇게까지 봐주니 고맙기는 한데, 빈 말과 알맹이 있는
말씀을 구분할줄 아는 나야. 미스코리아와 하룻밤 못자서 안달이
나다 못해 온갖 수단과 갖은 협박을 총동원하는 남자들의
속성이란...... 똑같애, 똑같애."
윤형사는 테이블의 비밀을 밝혀내던 날 밤의 남형사의 통화
내용을 생각하면서 그를 비웃고 있었다.
"어허, 윤형사. 진실과 참고는 다른거야. 어디까지나 그럴
수도 있다는 얘기지 꼭 그렇게 할 거라는 얘기는 아니었잖아.
정말 오해없길 바래."
"아, 됐어. 이제 난 남자의 마음을 다 알았어. 사랑과는
관계없는 행동을 얼마든지 할 수 있는 애니멀이라는 것을."
"윤형사, 남형사, 도대체 무슨 소리야?"
두 형사의 얘기를 잠자코 듣고 있던 장과장은 영문을
모르겠다는 눈빛으로 두 남녀를 번갈아 쳐다보고 있었다.
"아, 글쎄, 과장님. 윤형사가 오밤중에 전화를 걸어서
묻더라구요. 미스코리아와 하룻밤을 보낼수 있느냐고요. 영원한
비밀이 보장된다면 말이야, 하면서 말입니다."
"그래서 자네는 뭐라고 대답했나? 침대에서 하룻밤을
보내겠노라 대답했나?"
"그, 그런 셈입니다만......"
"윤형사, 우리 남형사 다시 봐야겠어. 영원한 순정파인줄
알았는데 우리 몰래 여러 번 출입했나봐."
"그럼 과장님은 미스코리아와 하룻밤을 즐길 기회가 생긴다고
해도 외눈 하나 꿈쩍 안 하실건가요?"
윤형사가 반가운 음성으로 물었다.
"난 죽었다 깨어나도 나를 위해 죽도록 고생만 해온 아내를
위해서 상대가 누구든 그런 짓은 못해."
"어머, 과장님......"
윤형사가 장과장을 존경하는 눈빛으로 바라보며 한쪽 눈으로는
찝찝해하는 남형사를 쏘아보았다.
그때였다. 책상 위의 전화가 요란스럽게 울렸다. 소파에서
일어난 남형사가 수화기를 들고 귀에 갖다대자 연화병원에서
잠복근무를 하고 있는 형사의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뭐야, 조박사가 김포공항으로 가고 있다구? 과장님!"
급한 손놀림으로 수화기를 든 장과장은 공중전화에서 정보를
보내오고 있는 부하 형사에게 단호한 목소리로 명령했다.
"지금 즉시 체포해서 이리로 데려와! 국외로 도피하면
곤란하니까 비행기를 타기 전에 수갑을 채워!"
장과장은 힘있게 수화기를 내려놓고는 손목시계를 보았다.
"조박사도 용인 별장으로 데려가야겠어."
저녁을 먹고난 후, 장과장과 두 형사는 시경 앞에 경찰 차를
대기시켜놓고 있다가 부하 형사가 김포공항에서 조박사를
붙잡아오자 박만하와 함께 뒷좌석에 태우고 용인 별장으로
출발했다.
15. 무서운 본능
어둠 속에 잠긴 용인 별장의 홀에 샹들리에 불빛이 환하게
켜져있는 가운데 정각 10시에 권의원과 유여사가 홀로 들어오는
것을 끝으로 장과장과 초대객들이 모두 모였다.
장과장은 양복 차림의 권의원과 악수를 나눈 다음 그를 오른쪽
테이블의 빈 의자로 안내했다. 남형사는 장과장의 별도 지시가
있을 때까지 경찰차 안에서 조박사와 박만하를 감시하고 있었고,
윤형사는 이층 응접실에서 장미꽃이 그려진, 윤보혜양이
마지막으로 입었던 한복을 곱게 차려입은 모습으로 소파에
앉아있었다.
어느 사이에 홀 임구에는 정복 차림의 순경 두 명이 열중 쉬엇
자세로 입구를 지켜서 있었고, 초대객들을 모두 두 개의 원형
테이블로 안내한 장과장은 감청색 싱글 차림의 양복을 말쑥하게
차려입은 모습으로 중앙 홀에 섰다.
"저희가 여러분을 최초의 살인이 발생한 이곳에 모여주십사
하고 부탁을 드린건, 여러분들이 모두 모여있는 자리에서 두
미스코리아의 죽음과 연박사님의 죽음에 대한 진실을
밝혀드릴까해서입니다."
장과장은 오랜만에 맨 넥타이가 거북한듯 한쪽으로 조금
돌리고 나서 다시 초대객들을 바라보았다. 왼쪽 테이블에
앉아있는 여자 초대객들과 오른쪽 테이블에 앉아서 담배를
피우고 있는 남자 초대객들은 테이블 위에 놓인 커피를 마실
생각도 않고 긴장된 눈빛으로 장과장의 여유있는 얼굴을
쳐다보고 있었다. 장과장은 초대객들을 바라보기보다는 허공을
향해 천천히 무거운 침묵을 깼다.
"마술과 완전범죄의 공통점은 관객들과 형사들을 감쪽같이
속이는데 그 승패가 달려있는 것입니다. 십원짜리 동전이
백원짜리 동전으로 둔갑하든, 살인을 할수 없는 위치에 있는
사람이 백리 밖에 떨어져 있는 사람의 칵테일 잔에 독극물을
타넣어서 독살시키듯이 불가능한 살인을 하든, 거기에는 반드시
평범한 사람의 두뇌로는 풀수 없는 교묘함이 숨어있기
마련입니다. 초능력자가 아닌 이상에는 속임수라는 껍데기로
평범한 눈동자들을 가려야만 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의 눈을
안대로 가려버린다는 것, 그것만큼 살인을 성공시키는데 완벽한
조건은 없지요.
이 용인별장에서 발생했던 윤보혜양의 독살 살인, 이 살인은
마술처럼 불가능에 가까운 독살이었습니다. 어떻게 자신이
죽이고 싶은 사람을 감쪽같이 죽일수 있었을까요?
그 전에, 마지막 살인이라 할 수 있는 청평 별장에서의
연박사님 살인부터 거꾸로 풀어나가보죠. 두 번 되풀이해서 말할
필요없이 연박사님은 볼룸댄스를 추다가 쓰러져서 숨졌습니다.
그러나 연박사님은 수면제의 인체 반응을 잘 알고 있는 사람이
건네준, 즉 범인이 건네준 술잔 속의 수면제를 마신 후에 춤을
추다가 쓰러진 겁니다. 생명에 지장이 있을 정도로 강한
수면제였습니다. 그러나 그 수면제만으로는 연박사님을 저
세상으로 보낼 수는 없었습니다. 쓰러진 염박사님에게
그림자처럼 다가가서 목덜미에 주사바늘을 꽂으면 그 즉시
즉사하게 되어있었습니다. 의학 상식이 별로 없는 분들은 마취제
이름 자체가 생경하고 생소하겠지만 그쪽 일에 종사하고 있는
마취전문의들한테는 갑순이 갑돌이라는 이름처럼 귀에 익은
마취제들이겠지요. 의사들도 마찬가지겠지요. 여러분, 이 그림을
한번 보시겠습니까?"
장과장은 싸인펜으로 크게 그려진 달력같이 큰 종이를
순경에게 들고 서있게 하고는 초대객들을 한번 쳐다보았다.
"연박사님이 숨지기 전에 앉았던 좌석 위치도입니다.
장기자랑이 끝나고 나서부터 앉았던 위치도입니다. 자,
보시지요. 연박사님이 술잔에 몰래 타넣어진 수면제를 마신건 이
시간대입니다. 그러나 이 위치도는 그렇게 중요한 그림은 되지
못합니다. 다만 위치도로 봐서는 누가 가장 연박사님의 술잔에
수면제를 탈 수 있었을까 하는 가능성 높음의 한 예라 할까요.
마찬가지로 이곳 용인 별장에서 사용되었던 칵테일 잔이 청평
별장에 나타난 희안한 상황, 이 매직 역시 범인이 누군가를
화살표 해주고 있지요.
이 사라졌다가 나타난 칵테일 잔의 신비스러움은 사실
투명글씨의 원리처럼 그렇게 환상적이지 못합니다. 범인은
칵테일 잔을 이용해서 연박사님이 심장마비로 숨진 것으로
기정사실화하려는 속셈이었습니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주머니
속으로 들어갔다던 칵테일 잔이, 귀경하는 도중에 차창 밖으로
던져버렸다는 칵테일 잔이 멀쩡하게 청평 별장에 나타났다면
윤보혜양을 독살한 진범이 연박사였을지도 모른다는 의식의
공동체를 만들어낼수 있었던 겁니다. 그렇지 않을 경우, 반대로
살해당했다는 의혹이 짙어진다면 그 모든 눈총은 유여사님에게로
쏠려집니다."
그러자 초대객들의 시선이 불안에 떨고 있는 유여사에게로
향해졌다. 오직 한 사람만은 장과장의 실눈을 정면으로 노려보고
있었다.
"그러나 유진숙 여사님, 여사님은 이 별장에서 있었던 독살
계획에서 사라진 칵테일 잔과 마찬가지로 범인의 계산 속에
넣어져 있지는 않았습니다. 단지 춤을 추지 않았기 때문에
유력한 용의자로 몰린 것뿐입니다. 그렇지만 청평 별장에서의
연박사님 살해 계획에는 여사님이 모든 죄를 뒤집어씌울
대상으로 점찍혔습니다. 다만 청평 별장에서도 불운하게
연박사님의 파트너가 되는 바람에 변명조차 할수 없게
되어버렸던 것이었죠. 흔한 표현으로 뒤로 자빠져도 코가
깨진다고 억세게 재수없는 생일파티였죠."
초대객들의 의혹에 찬 시선을 의식하고 안절부절 못하고 있던
유여사는 샹들리에의 밝은 불빛이 눈에 들어오는듯 환한 표정을
지으면서 뒷짐을 지고 중앙 홀에 서있는 장과장에게 신뢰의
미소를 보내고 있었다.
"이제 마술의 트릭을, 아니 이제 완전범죄의 허상을 낱낱이
벗겨내기에 앞서서 제 가슴 속에 숨겨진 두 가지 성격을
범인에게 선전포고하듯이 알려드리고 싶군요. 난 두 얼굴을
가지고 있습니다. 살인이 발생하면 난 약자가 되어버리지요.
반대로 범인이 누군가를 알게 되는 순간 세상 부러울 것 없는
강한 인간이 되어버리지요. 어떤 표현이 정확할까, 그렇군요.
지금의 내 성격은 쥐를 잡은 고양이의 손놀림, 발놀림,
몸놀림이랄까요. 한끼의 포식을 앞둔 생쥐와의 일방적인
워밍업이라고 할까요. 솔직히 난 지금 즐기고 있습니다. 범인은
지금 속으로 생각하시겠지요. 자백만 하지 않으면 구속시킬수
없을거라구요. 그래서 태연하게 용인 별장으로의 초대를
원하셨겠지요. 물론 그렇게 생각하시는 것도 무리는 아닐
겁니다.
자, 여러분. 이제 감을 잡으셨을 겁니다. 유여사님이
윤보혜양의 독살과 연박사님의 죽음에 아무런 관계가 없다면
결국 범인은 이 용인 별장에서 볼룸댄스를 추고 있던 분들 중에
있다는 결론이 나오게 됩니다."
초대객들은 깊은 한숨을 토해내면서 서로의 얼굴들을 외면하고
있었다.
"자, 이제부터 진실의 핵심으로 들어가기로 하지요. 용인
별장에서의 윤보혜양 독살과 L호텔에서의 성주라양 살인, 그리고
청평 별장에서의 살인은 같은 살인으로서 시리즈를 이루고
있습니다.
그런데 성주라양 살인의 경우, 범인과 정체가 밝혀진 니시무라
다니구찌와의 사이는 처음부터 끝까지 두 사람의 관계가 이 세상
누구한테도 드러나지 않고 둘만의 관계로만 유지되어온
상태였습니다. 사실, 공범자의 제보가 없었으면 성주라양 살인은
범인의 계획대로 영원한 미궁에 빠질 뻔했습니다. 연박사님의
오랜 친구이자 의대 동창생인 조박사의 전화는 연박사님을 두
미스코리아 살해범으로 기정사실화시키려는 사전 의도에서
이루어진 계획적인 제보였지만, 포기상태에 빠져있는 우리
수사진에게는 일대의 전기를 마련해준, 범인과 조박사로서는
악수를 둔 결과였습니다. 정말 그 제보전화는 훌륭했습니다.
연박사님이 두 미스코리아을 살해한 진범이라는걸 우리 경찰에게
알려주기 위한 계략은 뛰어난 것이었습니다. 조박사의 거짓
진술을 믿고 체포영장을 청구해서 발부받았을 정도였으니까요.
김순경!"
장과장은 오른쪽 입구에 서있는 순경에게 눈짓을 했다. 그러자
김순경은 명령을 떨어지자마자 밖으로 나가서 앞으로 수갑이
채워져있는 조박사를 데리고 들어왔다. 고개를 푹 떨구고 있는
조박사 옆에 다가선 장과장은 미소를 흘리면서 테이블의 한
얼굴을 바라보았다.
"제 옆에 서있는 분은 조박사라는 분입니다. 연화병원의
부원장이지요. 이 사람이 미국으로 도피해버리면 범인은 두 발
뻗고 잘 수 있었겠지요. 아마 범인으로부터 피하라는 전화를
받고 공항으로 달려갔을 겁니다. 조박사님, 성주라양하고는 어떤
관계였죠?"
장과장은 냉혹한 얼굴로 물었다.
"아무 관계도 아닙니다."
"그럼 범인과는 어떤 관계죠?"
"......"
조박사는 실어증에 걸린듯 침묵을 지키고 있었다.
"말씀하시지 않아도 됩니다. 어차피 잠시 후면 모든 진실이
밝혀질테니까요."
장과장은 조박사를 홀 끝에 앉히게 하고는 다시 테이블을
보았다.
"성주라양 살인은 처음부터 끝까지 조박사님에 의해서
성형수술이 이루어졌고, 수술자국이 아문 후에 L호텔로 옮겨져서
조박사에 의해 살인이 자행되었습니다. 여기서 알수 있듯이
조박사의 자백이 없으면 범인은 무죄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럼 연박사의 살인은 어떻게 된걸까요?
좌석 위치도를 보셨으면 알겠지만, 박사님의 술잔에 수면제를
타넣을수 있는 위치에 있었던 사람은, 강여사님과 박윤성
회장님으로 샌드위치처럼 연박사님 좌우에 앉아있었습니다.
연박사님에게 수면제를 탄 술잔을 마시게 하는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었겠지요. 아무도 몰래 자기 잔에 수면제를 타서 한잔
하라고 건네줄 수도 있고 상황에 따라서 적당한 기회에 수면제를
타넣으면 되겠지요. 문제는 수면제를 어떻게 타느냐보다는
수면제를 먹인 후에 어떻게 행동을 하느냐는 점이었지요. 그러나
범인이 용의자 그룹에서 벗어나는건 아주 간단하고 쉬운
일이었습니다. 연박사가 수면제에 의해서 쓰러질 때까지
테이블에 그대로 앉아있으면 범인은 홀로 나가서 춤을 추면
되었고, 연박사가 홀로 나가서 춤을 추면 테이블에 앉아서 그가
쓰러질 때만 기다리면 되는 것이었습니다. 주사기를 꽂을 기회만
노리면 되었던 것이었습니다. 그리하여 연박사님은 블루스곡이
흘러나오자 춤을 추러 나갔습니다. 그리고 약효에 의해
쓰러졌고, 범인은 쓰러진 연박사에게 다가가 기회를
엿보았습니다. 그 연박사의 주위로 모여있던 초대객들이 제
정신이 아닌 상태에서 테이불로 하나 둘씩 돌아가앉자 범인은
찬스를 맞게 되었습니다. 목덜미에 주사기를 푹 찌르고 일어났을
때 범인은 테이블에 등을 보이고 있었기 때문에 범인의 주사기를
본 사람은 아무도 없었죠. 설사, 최악의 경우 누구한테 들켰다
하더라도 마침 주사기가 나한테 있어서 기적이 일어나길
바라면서 한번 주사기를 사용해본거라고 그럴듯하게 둘러대면
무사하게 넘어갈 수도 있는거지요.
그리고 30분 후, 우리 경찰이 현장에 도착했고, 시신에 주사
바늘 자국이 있는 걸 발견한 우리 경찰은 여러분의 양해와
협조를 얻어서 소지품 검사에 들어갔지요. 그러나 몸수색에는
한계가 있었기 때문에 제대로 찾아낼 수는 없었어요. 그러나 이
주사기를 출입이 금지되어 있는 청평 별장 빈 양주병 속에서
뒤늦게 찾아낼 수 있었죠. 고동색으로 된 외제 양주병에서
말입니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범인의 지문을 발견해내지는
못했습니다. 범인에게는 무척 다행한 일이겠지요. 위기일발의
순간을 극적으로 모면했으니까요."
장과장은 양복 안주머니에서 손수건에 싸인 볼펜보다 조금
작은 주사기를 꺼내보이고는 다시 여유있는 미소를 지어보였다.
"김순경."
장과장의 명령을 받은 김순경은 부동자세를 풀고 밖으로
나갔다. 잠시 후에 남형사가 수갑을 채운 박만하를 데리고 홀로
들어왔다.
"박만하씨, 당신을 왜 이 별장으로 데리고 온지 아십니까?"
장과장이 묻자 박만하는 방울뱀처럼 고개를 쳐들고 테이블에
앉아있는 초대객들을 보며 말했다.
"모르겠는데요."
"모를수밖에."
장과장은 비꼬는 말투로 한 마디 내뱉고는 권의원에게로
시선을 고정시켰다.
"의원님, 여기 서있는 자로부터 어떤 협박이나 공갈 같은거
받지 않으셨나요?"
"내가요? 천만에."
"그렇습니까? 그럼 유여사님은요?"
왼쪽 테이블에 앉아있는 유여사가 장과장과 박만하를 차례로
쳐다보면서 고개를 가로저었다.
"저도 그런 일이 없는데요."
"네, 잘 알았습니다. 박만하씨, 그럼 당신은 누구에게 공갈
협박을 했습니까?"
"전 공갈 협박을 하지 않았습니다. 다만 강여사님한테 불타는
마음 좀 잘 헤아려 달라고 부탁을 한 것뿐입니다."
"어떤 부탁을요?"
"윤보혜양과 즐거운 시간을 갖게끔 자리 좀 마련해달라고
부탁을 한 것밖에 없습니다."
"강여사님, 박만하씨 말이 사실입니까?"
장과장은 2보 앞으로 걸어나가면서 곱게 화장한 얼굴로
박만하를 노려보고 있는 강여사에게 확인해 보았다.
"난 그런 부탁을 받은 적이 없어요. 기억도 없구요."
"박만하씨, 당신의 말이 새빨간 거짓말이라고 하시는군요."
박만하가 어처구니 없다는듯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남형사, 박만하씨를 조박사님 옆 의자에 앉히고 이층으로
올라가서 윤형사를 내려오게 해."
남형사가 이층으로 올라가서 윤형사를 내려오게 하는 동안
장과장은 양 테이블의 초대객들에게 자리에서 일어나 중앙 홀로
가 있어달라고 부탁을 했다. 유여사만 오른쪽 테이블로 옮겨와
윤보혜양이 독살되었을 당시대로 앉게했다.
이윽고 적색 한복을 입은 윤형사와 남형사가 계단을 밟고
내려오자 두 형사를 빈 의자에 앉게했다. 그리고난 후 장과장은
홀과 테이블 중간에서 홀에 모여 서있는 초대객들을 향해 근엄한
목소리로 말하기 시작했다.
"자, 이제 테이블의 비밀을 벗겨드리겠습니다. 불가능해보이던
독살의 트릭을 곧 밝혀드리겠습니다. 여러분들은 조용히
지켜봐주시길 바랍니다."
그렇게 말하면서 장과장은 초대객들 맨 뒤에 서 있는 한
얼굴을 노려보았다.
"윤형사, 테이블 위에 놓인 칵테일 잔을 들어 두 모금만
마셔보지. 그 안에 들어있는 건 홍차니까 술취할 염려는 없어."
남형사와 유여사 사이에 앉은 윤형사는 장과장이 시키는대로
칵테일 잔을 들어 홍차를 두 모금 마셨다.
"자, 그런 다음에 준비해온 안약을 꺼내 그 속에 들어있는
물을 아무도 모르게 칵테일 잔에 몇 방울 떨어뜨려봐."
윤형사는 장과장의 지시가 떨어지자 한복 저고리에서 안약병을
꺼내 한 손에 감추고 칵테일 잔을 집는 척하면서 두 손으로
감쌌다. 그러고난 후 안약병을 다시 한복 저고리에 집어넣고
나서 한참 후에 칵테일 잔을 들고 나머지 홍차를 마셨다. 그
순간 윤형사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두 손을 목에 갖다대고
경련을 하더니 맥없이 옆으로 쓰러졌다. 그러자 옆 자리에
앉아있던 남형사가 기겁을 하면서 바닥으로 쓰러지려는 윤형사를
잡았다.
"됐어, 윤형사. 아주 잘했어."
장과장은 윤형사를 향해 세 번 정도 정도 박수를 치고는
혼란에 빠져있는 초대객들에게 다시 시선을 돌리면서 승리의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러면서 초대객들 중의 한 여자를 찾았다.
그러나 강여사의 얼굴은 어디론가 사라지고 안 보였다. 바로 그
순간이었다. 그의 시야에 홀 끝의 의자에 앉아있는 조박사와
박만하에게 다가가는 한 여인의 뒷모습이 포착되었다. 수갑을 찬
두 손을 무릎 위에 올려놓고 힘없이 앉아있는 박만하 앞으로
다가가는 여인의 손에서 샹들리에 불빛에 반사된 금속빛이
번쩍했다.
"안 돼!"
그러나 장과장의 외침은 소용이 없었다. 초대객들의
비명소리와 박만하의 비명소리가 한데 섞여서 홀을 아비규환으로
만들고 있었다.
"더러운 새애끼! 죽어!"
강여사는 홀이 울리도록 악을 쓰면서 박만하의 심장에 꽂은
재크나이프를 헌 번 더 힘을 줘서 깊숙이 박고는 그가 죽은 것을
확인하자 싸늘한 미소를 흘리며 곧 미친듯이 웃어댔다.
박만하의 시체가 경찰 차에 급히 실려간 뒤, 손목에 수갑이
채워진 강여사는 테이블 의자에 혼자 앉아서 중앙 홀에 서있는
수사관들과 초대객들을 향해 여전히 싸늘한 미소를 흘리고
있었다. 윤형사가 다가가 강여사의 얼굴에 묻은 피를 닦아주자
그녀는 고마운 눈빛으로 윤형사를 바라보고나서 중앙 홀을 향해
또박 또박 분명한 어조로 붉은 입술을 열었다.
"장과장님, 저에게 진실의 모습을 보일수 있는 시간과 기회를
주셔서 대단히 감사하게 생각합니다. 고양이가 생쥐를 갖고
놀아주셨기에 마지막 살인을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강여사는 낭패한 표정을 짓고 있는 장과장에게 진심으로
감사하다는 듯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하늘이 주신 기회라 생각했기에 승냥이 같은 그 더러운
인간에게 망설임없이 저주의 칼을 꽂을수 있었어요.
호호호......"
강여사는 고개를 뒤로 제끼면서 큰 소리로 웃고는 다시
박만하를 살해할 때의 잔인한 눈빛으로 초대객들을 쳐다보았다.
"이제 내 인생은 막을 내렸어요. 그렇지만 그 더러운 인간을
죽이지 않을수 없었어요. 그래요, 이제 모든 진실을 내 스스로
밝혀드리죠."
강여사는 초대객들 앞에 서있는 권의원을 애정이 듬뿍 담긴
눈으로 바라보면서 슬픈 미소를 지었다.
"이 모든 악몽의 시작은 의원님과 제가 못이룬 사랑을
이루어보려는 둘만의 비밀스런 사랑과 만남에서부터
출발되었어요. 다른 사람들이 눈치 못채게 둘만의 사랑을
나누다가 박만하의 카메라에 모텔을 나오는 모습이 찍혀졌던
겁니다. 그것도 모르고 의원님과 저는 이루지 못할 사랑을
불태우듯 계속 태웠어요. 그러던 어느 날이었어요. 박만하로부터
전화가 걸려왔어요. 그때부터 저는 거미줄에 걸린 먹이 신세가
되어버렸던 거예요. 미스코리아 선발대회가 시작되기
전이었어요. 저는 박만하에게 거액의 돈을 건네주었어요. 그러나
그 인간은 한 통의 필름만 갖고 있었던게 아니고 여러 통의
필름을 보관하고 있었어요. 2차분을 요구해왔어요. 나는
미스코리아 대회가 끝난 후에 2차분을 주기로 약속을 했어요.
그런데 2차분을 건네주던 날, 그 인간은 나에게 새로운 요구를
해왔어요. 올해 당선된 보혜양을 잘 안다고 하면서 보혜를 한번
만나보고 싶다고 했어요. 그러면서 말하길 보혜는 미혼모였다고
하는 것이었어요. 나는 보혜가 미혼모였다는 걸 도저히 믿을
수가 없었어요. 그래서 금지선 변호사님에게 사실 여부를 확인해
달라고 부탁을 했어요. 확인 결과 보혜는 남자 경험이 한 번도
없는 그야말로 깨끗한 숫처녀였어요. 그럼에도 그 인간의 요구는
지속되었어요. 이제 돈은 필요없다고 하면서 보혜와 호텔방에서
하룻밤만 자게 해주면 다시는 괴롭히지 않겠다고 두 번 세 번
반복해서 얘기하는 것이었어요.
그러나 나는 차마 그럴 수가 없었어요. 견디다 못한 나는 그
인간을 죽여버릴 생각을 했어요. 그러나 그 인간은 자신이
폭력조직의 일원이라고 하면서 은근히 뒷배경을 과시하는
것이었어요. 그러기에 나는 박만하를 죽이는 것을 포기하지
않을수 없었어요. 박만하를 죽였다가는, 사실 박만하를 죽일
힘도 없었지만 나중에 폭력조직으로부터 엄청난 보복을 당할까
두려워서 이럴 수도 저럴 수도 없는 상태에 빠져버렸어요.
그러는 가운데 그가 원하는 날짜는 다가오고 그 인간이
원하는대로 해주지 않으면 의원님의 정치적 야망과 내 인생,
그리고 제 명예가 하루 아침에 물거품이 되는 순간이 일초 일초
다가오고 있었어요.
그렇다고 해도 내 안전과 이익을 위해서 아무것도 모르는
순진한 보혜를 호텔방에 가있게 할 수는 없었어요. 그 더러운
인간에게 꽃같이 아름다운 보혜를 보내서 시궁창 인생으로
만들수는 없었어요. 그때의 내 심정은 자살을 생각할만큼 궁지에
몰릴대로 몰려있었어요. 그런 상태가 며칠 지속되자 내 마음속에
나도 모르는 무서운 본능이 꿈틀거리기 시작했어요. 아름다운
보혜를 그 인간에게 더럽힘을 당하게 하기보다는 어미 고양이가
자기 새끼를 물어 죽여버리는 것처럼 보혜를 죽여버리는 것이
낫겠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어요. 더군다나 그 인간의 성격은
한 번의 욕구로 만족할 인간이 절대로 아니었기 때문에 신용할수
없는 인간이었어요. 그래서 나는 보혜를 깨끗하게 죽여버리는게
훨씬 낫다고 결심했어요. 그렇지만, 그렇지만...... 나 자신을
위해서 보혜를 죽인다는 생각이 들자 내 마음은 또 지옥이
돼있었어요. 자살할 용기가 없어 보혜를 죽여야만 했던 그
추악한 내 본성...... 그래서 미스코리아 축하파티가 있기
전날까지도 내 마음은 연옥 그 자체였어요. 그러나 내 본능은
이미 내가 정한 살인 계획대로 움직이고 있었어요. 박만하를
캠코더 기사로 채용하기로 결심을 굳였지요. 그래서 보혜에게
전화를 걸게했어요. 물론 비향이에게는 상황에 맞게 어느 정도의
거짓말을 했구요.
운명의 날이 밝았고 파티 시간은 다가오고 있었어요. 난
박만하에게 전화로 약속을 했어요. 파티가 끝난 후에 별장에서
하룻밤을 보내라구요. 보혜에게는 밀 다 말해놓았다구요. 오후
4시쯤에 그 인간이 이 별장에 들어왔을 때도 알아듣게끔 돌려서
얘기를 했어요. 파티가 끝난 뒤에 술좀 마시고 가라구요.
그랬더니 그 인간의 입이 찢어지더군요. 그 인간은 신이
나있었어요. 나는 하룻밤의 정사에 신이 나있는 그 인간에게
부드러운 음성으로 얘기했어요. 될수 있는한 카메라를 보혜가
앉아있는 테이블쪽을 자주 비추라고요. 그 인간이 묻더군요.
보혜는 춤을 안 추냐고. 보혜는 춤을 추지 못하기 때문에
테이블에 앉아있을 거라고 말했지요. 그랬더니 그 인간 입이 더
찢어지더군요. 여러 남자들과 어울려서 볼룸댄스를 추기보다는
얌전한 신부처럼 테이블에 앉아있는 게 기분상으로도 무척
좋았던 모양입니다. 마지막으로 나는 그 인간에게 다시 한번 더
주의를 주었지요. 그렇다고 처음부터 끝까지 보혜만 비추면
나중에 비디오를 보고 손님들이 섭섭해할테니까 30초 정도
간격을 볼룸댄스를 추는 손님들의 모습도 카메라에 담아줘야
한다고 하자 군말 없이 고개를 끄덕이더니 헤헤거리며 웃더군요.
그렇게 한 다음에 나는 이층으로 올라가서 파티 경험이 없는
보혜에게 파티장에서의 예의와 행동, 인사하는 방법 등을 상세히
가르쳐주고나서 비향이가 서재 옆에 있는 샤워실에서 머리를
감고 있는 동안 엄숙하게 주의를 주었어요. 오늘의 파티는 보혜
니가 주인공이기 때문에 실수를 하면 안된다고 거듭 주의를
주면서, 칵테일도 여러 잔 마시면 취하니까 한꺼번에 마시지
말고 반잔씩 마시라고 일러주었어요. 그리고 손님들이 댄스를
청하면 상대가 누구라도 미소를 보이며 정중하게 거절하라고
일렀어요. 한복을 입고 있기 때문에 죄송하다고 하라고 했어요.
그러고나서 손님들이 홀로 나가서 춤을 추기 시작하면 송양이
칵테일을 날라올테니까 한 잔 달라고 해서 마시라고 했어오.
카메라가 중앙 홀을 비출 때 반잔 정도 마시고나서 암도 몰래
잔을 내려좋으라고 했어요. 그런 다음 파라티온이 든 아주 작은
약병을 보혜에게 주면서 반쯤 마시고난 후 재빨리 아무도 모르게
칵테일 잔에 타넣으라고 했어요. 긴장과 불안 초조를 없애주는
약인데 칵테일에 타마시면 그렇게 좋을 수가 없다면서 꼭 술에
타서 마시라고 했어요. 그리고 덧붙여 말하기를 타서 마실 때는
캠코더가 보혜 너를 촬영하고 있을 때니 예쁘고 아름답게
바시라고 했어요. 보혜는 무슨 일이 있어도 내 말을 믿고
따라주었기 때문에 걱정할 필요가 없었어요. 주라도
마찬가지였지요. 그리고 보혜에게 한복을 입힌 것은 볼룸댄스의
청을 거절시키기 위한 하나의 구실을 만들기 위해 파티 의상
대신 불편한 한복을 입혔던 것이었어요.
그래요. 나는 보혜를 자살로 위장할 생각이었어요. 보혜를
포함해서 초대된 손님들의 수가 홀수를 이루고 있었기 때문에
자살로 꾸미기에는 별 어려움이 없었어요. 보혜는 아무 것도
모르고 내가 시키는 대로 행동했을 뿐이예요. 그리고 보혜가
죽고난 뒤, 나는 보혜의 가슴 속에 있는 약병을 슬쩍 빼내서
가지고 있다가 이층으로 올라가서 싸구려 도자기 속에
숨겨놓았어요. 그리고 주라가 실종되던 날에 의원님과 골프를
치러 용인으로 내려왔다가 이 별장의 잠시 들러 의원님 몰래
약병을 꺼내 아무데나 버렸어요."
강여사는 목이 타는지 마른 침을 억지로 삼키면서 웅성거리는
초대객들을 보았다.
"여사님, 조박사와의 관계를 말씀해주셨으면 해요."
강여사 옆에 앉은 한복 차림의 윤형사가 가라앉은 목소리로
물었다.
"그보다 앞서 내 손에 죽은, 아니 죽일수밖에 없었던 그
더러운 인간에 대한 얘기를 더해야겠어요. 그 인간은 보혜가
자살한 것으로 알고는 하룻밤의 정사가 물거품이 되어버리자 제
정신이 아니었어요. 이번에는 작년도 미스코리아 진인 주라를
요구하는 것이었어요. 꿩 대신 닭이라고, 이번에는 무슨 일이
있어도 주라를 정복해야겠다는 것이었어요. 나는 보혜의
자살로서 모든 일이 끝나는 줄 알았어요. 이 일로 경찰이 사건에
개입하게 되고 그럼으로 해서 자연적으로 현장에 있던 박만하의
인간성이 더럽고 추악한 죄가 ㅂ혀져서 철장신세를 지게 되는줄
알았어요. 그 인간이 기겁을 해서 별장을 도망쳐나갈 때 내
기분이 얼마나 통쾌했는지 아세요? 그러나 내 예상과는 달리 그
인간은 방송국에 사건 테이프를 제공하고 주간지에 보혜가
미혼모였다는 허위사실을 유포하고 내게 위협사격을 가해왔어요.
그런데 나는 보혜의 독살로 인해 한 가지 실수를 저지르고
말았어요. 나의 계획으로 인해 의원님의 위상에 적지않은 품위를
손상시킨 결과가 되어버렸어요. 이곳에서 볼룸댄스가 있을 때
내가 먼저 춤을 청해서 의원님과 파트너가 되 것도 결국은
의원님과 나는 무죄라는 걸 입증하기 위해서 같이 춤을 춘 건데
경찰에서는 쉽게 사건을 포기하지 않았어요. 이점 의원님께
죄송할 따름이예요."
강여사는 장과장을 원망섞인 눈빛으로 쏘아보고는 고개를
떨구고 있는 권의원에게 또다시 따뜻한 눈길을 보냈다.
"그 더러운 인간, 그 인간의 주라에 대한 욕정은 불같았어요.
심야에 걸려오는 그놈의 전화는 공포 그 자체였어요. 전하를 할
때마다 주리를 보내지 않으면 조직을 동원해서 당신은 물론
성주라양과 나비향양을 납치해서 개 같은 인생으로
만들어놓겠다며 빨리빨리 데려오라는 것이었어요. 나는 더이상
견딜 수가 없었어요. 나는 모레 밤 보내겠다고 약속해버렸어요.
그러나 보혜 때와 마찬가지로 내 자신의 인생을 위해서 주라를
그 악의 소굴로 보낼 수는 없었어요. 차라리 내 손으로 죽이면
죽였지 그 인간에게 주라를 더럽히게 할 수는 없었어요.
또 약속 시간은 다가오고 있었어요. 나는 주라의 아름다운
모습을 떠올리면서 밤새도록 울었어요. 어떻게 내 신세가 이렇게
된건지, 꽃보다 더 아름답고 진주보다 찬란한 보혜를 죽여야만
했던 파렴치한 살인자가 됐는지...... 내 자신이 죽도록
미워졌어요, 흑흑.......
......나는 지금도 내 자신을 이해할 수가 없어요. 내 자신
스스로 목숨을 끊든가 자수를 하든가 했어야 됐는데 마음 한
구석에서는 또 삶에 대한 미련과 나만의 이기적인 욕심이 무섭게
불타오르는 것이었어요. 내 인생을 살기 위해서는 예쁜 주라를
그 더러운 인간에게 제물로 바치지 않으면 안 된다는걸 알고
있었기 때문에 또 다시 솟구치듯 일어나는 살의를 억제치 못하고
말았어요. 그놈에게 주라를 더럽히게 만드느니 모든걸 포기하고
내 스스로 그 놈의 호텔방으로 찾아가서 정사중에 죽여버리자.
그리고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자 결심했지만 그것 또한 쉽게
결심이 서지지 않았어요. 생각하고 생각해봐도 어느 것 하나 내
마음을 진정시켜주는게 없었어요. 정말, 정말 방법이 없었어요.
자수할 수도, 자살을 할수도, 그 인간을 죽여버릴 수도, 아무
것도, 아무 것도 할 수가 없었어요. 너무나, 너무나...... 내
자신이 미쳐가고 있다는 생각밖에 아무 것도, 아무 것도......"
강여사는 눈물을 주르르 흘리면서 목이 긴 사슴처럼
초대객들을 보면서 흐느껴 울었다. 그러나 그녀는 곧 눈물을
삼키면서 입술을 지그시 깨물며 의무라는듯 다시 천천히 입술을
움직였다.
"......나는 그 인간의 성격을 잘 알고 있었어요. 그 인간은
한번 문 고기는 절대로 놓지 않는 인간이었어요. 주라를 욕정의
대상으로 삼은 이상 내 사랑 주라는 그 인간의 시야에서
벗어날수 없다고 생각했어요. 나는 내가 얼마나 잔인한
여자라는걸 그 인간에게 보여주고 싶었어요. 다시는 내게
협박해오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 불쌍한 주라를 살해하기로 마음
먹었어요. 주라가 없어진걸 알고도 또 다른 여자를 호텔방으로
데려오라고 협박을 하면 그때는 그 인간한테 개죽음을 당하는
한이 있더라도 그놈을 찾아가서 심장에 비수를 꽂고 말리라고
마음 먹고는 살해 계획을 짰어요. 여러 가지 계획 끝에 주라를
성형수술하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이라고 결론 내리고는 주라와
보혜를 성형수술해준 조박사님을 떠올렸어요. 남편의 친구인
조박사님은 내가 의원님과 실연 후에 홧김에 애정없는 결혼을
했을 때부터 서로 편하게 대해오던 사이였어요. 그리고 세월이
흘러가면서 조박사님이 나를 대하는 눈빛이 친분관계 이상을
넘고 있다는 것도 알고 있었어요. 그래서인지 조박사님은 내
고민을 잘 들어주었고 언제나 이해해 주셨던 분이셨어요. 나는
조박사님을 이용해야겠다고 생각했어요. 남편과는 이혼
전이라는걸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던 조박사님에게 미스코리아
시절의 영화배우를 했던 내 연기실력을 발휘해서 쉽게 마음을
사로잡았어요. 내가 진정으로 사랑했던 분은 바로
조박사님이었다고 고백하자 조박사는 알고 있었다는듯 그저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어요. 그러면서 깊은 한숨을 내쉬더군요.
우정과 사랑의 기로에 선듯 말이예요. 나는 조박사가 병원
공금을 횡령해서 그 비리가 남편에게 들켜서 고민하고 있다는 걸
남편의 거친 입을 통해서 알고 있었기에 수억이 든 통장을
조박사에게 보이면서, 우리 미국이나 유럽으로 이민가서 살자고
얘기했어요. 그러나 조박사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더군요.
자기에게는 그럴만한 돈이 없다면서 괴로워하더군요. 조박사는
먼 친척에게 빚보증을 잘못 선데다가 증권에 손 댄 것마저
막대한 손해를 입어서 조그만 성형외과조차 개원 못하고
지금까지 남편의 병원에서 일해왔어요. 나는 그런 물질 따위는
걱정하지 말라고 했어요. 결국 조박사는 깊은 고뇌 끝에 내
사랑을 받아주더군요. 어차피 남편과 내가 이혼하게 될 것을
알고 있었던 조박사였기에 그점에 위안을 찾으려고 하는 것
같았어요. 그리고 남편과의 이혼이 자신을 마음속 깊이 사랑해온
결과라 느꼈는지 죄책감에서 벗어나 알수 없는 우월감에
차있는듯 했어요.
그순간 나는 내 연기 실력을 최대한으로 발휘해서 눈물을
흘리면서 그동안 너무나 가슴이 아팠다고 하면서 감격해했어요.
조박사는 내 어깨를 어루만지면서 자신도 혼자만의 사랑에
너무나 외롭고 괴로웠다면서 감동해하더군요.
그러나 나는 곧 표정을 바꾸어서 미안하다고 말했어요. 나는
지금 협박을 받고 있기 때문에 그 여파가 조박사님에게 미칠까봐
두렵다면서 서로 마음 속의 사랑으로만 간직하자고 했어요.
그랬더니 조박사는 그럴 수는 없다는 눈빛으로 나를 한참동안
바라보더니 내 사랑의 눈빛을 확인하자 다시 자신감 있는 얼굴로
무슨 일이냐며 급한 음성으로 물어보는 것이었어요. 나는
한참동안 뜸을 들이다가 주라를 세상에 둘도 없는 못된 애로
만들어버렸어요. 내가 주라에게 조박사님을 사랑한다고 말하자
주라가 그런 병신만도 못한 돼지 같은 자식을 뭣하러
좋아하냐면서 당장 원장님에게 일러서 병원에서 내쫓아버리게
하겠다고 하더라고 했더니 조박사의 표정이 온통 분노로
일그러지더군요. 은혜도 모르는 배은망덕한 년이라고 욕을
하면서 부르르 입술을 떨더군요.
그런데 나는 그 인간한테 전화가 왔을 때 아무 것도 모르는
주라에게 내가 시키는대로 말만 하라고 했었어요. 욕정에
넘쳐있는 그 인간에게 좋은 밤을 만들어서 연락드리겠다는
내용의 전화였어요. 주라는 내가 시키는대로 그 추악한 인간에게
전화를 하고 끊고는 나를 이상한 눈빛으로 바라보는 것이었어요.
그러면서 묻더군요. 무슨 일이냐고 하면서 안색이 창백해지는
것이었어요. 나는 주라에게 모든 사실을 털어놓고 싶었지만 이미
보혜를 하늘나라로 보낸 인간 이하의 죄인이었기 때문에
거짓말을 할수밖에 없었어요. 저 인간이 주라 니가 미스코리아
대회에 출전하기 전에 성형수술을 한 걸 알고 협박을 해오고
있다니까 어이없다는듯 웃더군요. 그래서 자기를 호텔방으로
불러달라고 하는거냐면서 별 미친놈 다 보겠다면서 경찰에
신고하자는 것이었어요. 그러나 나는 전화를 걸려는 주라를
만류하고는 같이 포도주를 마셨어요. 같이 포도주를 마시면서
나는 주라의 아름다운 얼굴을 보며 나도 모르게 또 눈물이......
포도주를 한 잔 마신 주라의 홍조띤 얼굴을 보면서 나는 내
자신을 저주하며 흐느껴 울지 않을수 없었어요......
그리고 주라가 실종되기 하루 전에 주라하고 같이 또 포도주를
마시면서 나는 주라에게 내가 미리 누른 전화를 건네주면서, 그
전에 미리 상대가 전화를 들자마자 병신만도 못한 돼지 같은
새끼야, 니 꼬락서니를 알아라 하고 무조건 욕설을 내뱉고
끊으라고 했어요. 주라는 내가 시키는대로 갈라진 목소리로
욕설을 퍼붓고는 전화를 부서져라 내려놓았어요. 그러나 그
전화번호는 조박사님의 전화번호였어요. 주라는 박만하에게 건
전화인줄 알고 있었겠지만 일방적으로 전화를 받은 조박사님의
분노는 보지 않아도 상상이 될만 했어요.
다음날 새벽 일찍 자가용 안에서 만난 조박사의 마음을
움직이긴 쉬웠어요. 이번 일로 주라에게 협박당하고 있다니까
조박사는 은혜도 모르는 그런 년은 사회에서 매장시켜버려야
한다면서 분노를 삭이지 못했어요. 나는 순박한 조박사님에게
한술 더 떠서 주라가 내게 조박사님의 사이를 미끼로 엄청난
액수의 돈을 요구해오고 있다고 했어요. 연박사에게 말하지
말라는 조건으로 5천만 원을 건네주었다고 하니까 입술을 부르르
떨더군요. 그런 상태에서 그런 되먹지 않은 계집년에게는 따끔한
맛을 보여주어야 한다는 보복 심리가 자연히 오고 가게
되었어요. 나는 그런 분위기를 이용해서 분노를 살의로
상승시키기 위해 조박사의 심리를 더욱 그런 쪽으로
몰아붙였어요. 그 뻔뻔한 얼굴을 추한 얼굴로 만들어놔야 정신을
차릴거라고 하자 조박사님은 내 말뜻을 알아들었는지
그것만으로는 모자란다고 하면서 그런 배은망덕한 계집년은 아예
추녀로 만들어서 지옥에 보내야 한다고 노골적으로 말더군요.
그리고 더욱 흥분하면서 그 빼앗긴 5천만 원도 도로 찾아와야
한다면서 이글거리는 눈빛으로 나를 보는 것이었어요. 그때부터
조박사와 나는 주라를 감쪽같이 없앨 계획을 짰어요. 계획대로
살인이 성공하면 주라에게 뺏긴 5천만 원과 남편에게 받는
위자료, 그리고 내 명의로 된 의상실 등을 처분해서 미국으로
이민가기로 굳게 약속을 하고는 일에 착수했어요.
나는 알리바이를 만들기 위해 그날 용인에 있는 골프장에 가
있기로 하고(물론 별장 이층에 있는 도자기 속의 약병을 없애기
위한 목적이었지만) 조박사는 오후 4시 반에 유여사집 골목길에
차를 대기시켜놓고 있다가 주라를 태운 후에 그 자리에서
클로로포름으로 마취를 시켜 잠들게 하고는 대형 가방 속에
집어넣어 그날 밤으로 수술실에서 성형수술을 하기로 했어요.
문제는 주라를 조박사의 승용차에 동승하게 만드는 일인데
그것은 간단한 일이였어요. 박만하의 협박으로 조박사님도
곤경에 처해있는데, 조박사님의 말씀이 폭력 조직배가 주라 너를
납치할 가능성이 높으니까, 조박사님이 유여사 댁 골목길에서
승용차로 너를 보호해주려고 대기하고 있으니까 그 차를 타고
조박사님과 같이 C호텔 커피숍으로 오라고 했어요. 물론 전날에
유여사 댁을 방문할 때는 그랜저 승용차를 타고 가지 말라고
했어요. 그들의 표적이 되기 쉽다면서요. 그리고 아무한테도
말하지 말고 오랬어요. 만에 하나 연예 기자들이 눈치를 채는
날이면 엄청난 스캔들에 휘말릴 위험성이 있으니까 입조심을
하라고 했어요. 박만하에 대한 대책을 상의해야 하니까 정확히
시간을 맞춰서 유여사 댁을 나오라고 했어요. 아무 것도 모르는
주라는 내가 시키는 대로 행동......"
강여사는 눈물이 마른 얼굴로 허공을 응시하며 괴로워하다가
힘없이 고개를 떨구었다.
"아름다운 두 미스코리아 진을 죽인 동기가 어미 고양이가
새끼 고양이를 물어죽이는 본능에서가 아니라 자신의 인생을
연장시키기 위한 악녀의 본능이었군요."
장과장은 성난 눈빛으로 강여사를 노려보았다.
"이혼만 하면 그만이지 연박사님은 왜 죽였습니까?"
남형사가 성난 목소리로 물었다.
"주라가 실종되고난 후 연박사가 의상실로 찾아와서는 한 장의
사진을 꺼내보이더군요. 위자료는 한 푼도 못주겠다면서
이혼서류에 도장을 찍으라고 하더군요. 치사한 인간. 그럼 누가
두 손을 싹싹 빌줄 알았나. 결혼한지 3년도 못되서 동남아
여행을 갔다왔다가 매독에 걸려서 남자 구실도 제대로 못한
더러운 인간. 난 끝까지 도장을 찍지 않았어요. 치사하고 더러운
내 남편과 산 세월이 아깝고 억울해서라도 도장을 찍을 수가
없었어요. 그랫더니 고소를 하겠다고 그러더군요. 그러면서 뭐,
제발 자기한테로 돌아오라고? 흥, 치사한 인간."
"그래서 살해했습니까? 연박사님이 지구상에서 사라지면
상속권이 전부 당신에게 오기 때문에요?"
장과장이 경멸하는 어조로 말했다.
"그런 이유도 있었지만 동시에 유여사를 보혜의 살인범으로
뒤집어씌울 목적도 있었어요."
강여사는 권의원 옆에 서있는 유여사를 노려보면서 말했다.
유여사와 강여사는 불꽃이 튀길듯이 눈싸움을 하다가 섬뜩함을
느낀 유여사가 시선을 피하자 그제서야 눈싸움이 멈춰졌다.
"명동에 있는 백화점에 가서 칵테일 잔을 샀을 때 유여사님이
함정에 빠질거라고 확신했나요?"
윤형사가 묻자 강여사는 희미하게 미소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 시간에 당신들이 들이닥치지만 않았더라도 완전범죄가
되어 유여사는 내 거미줄에 보기좋게 걸려들었을 거예요.
연박사가 승용차 안에서 칵테일 잔을 버린 것을 난 알고
있었지요. 의원님과 여러분들은 연박사의 죽음을 단순사로
처리하고 싶어했지만, 난 어떤 상황 하에서도 완전범죄를
자신하고 있었기 때문에 연박사와 유여사가 볼룸댄스를
추러나가고 한 쌍이 더 볼룸댄스를 추러나갈 때의 혼란한 틈을
타서 백화점에서 산, 물론 지문이 지워진 칵테일 잔을 국화꽃
밑으로 살짝 굴려놓았어요. 그 칵테일 잔을 다른 사람이
나중에라도 봐서 의아해하면 편한 일이었고, 아무도 보지
못했다면 적당한 시간에 내 스스로 칵테일 잔을 발견한 것처럼
꾸밀려고 했는데...... 당신들이 느닷없이 들이닥치는
바람에...... 더욱이 연박사와 유여사가 파트너가 되어서 춤을
추게 되니, 이런 기회야말로 하늘이 주신 기회가 아니고
뭐겠어요. 너무나 완벽한 함정이었는데......"
강여사는 입술을 지그시 깨물고 있었다.
"강여사님, 의원님의 생일파티에서 처음에 연박사님과
볼룸댄스를 춘 것도 살해 전에 옆 자리에 앉은 것도 다
계획적이었군요."
장과장이 말했다.
"처음에 연박사와의 볼룸댄스는 한 마디로 죽음의
볼룸댄스였어요. 이혼을 허락한다고 하면사 마지막으로
볼룸댄스나 추자고 하니까 싫어하지 않더군요. 사실 그날은
의원님의 생신파티였지만 연박사와 내게는 이혼파티였지요.
그래서 연박사의 옆자리에 자연스럽게 앉아서 술잔을 따라줄
수도 있었고 내 잔에 수면제를 탄 술잔도 바꿔 마실수 있게
했죠. 물론 내 속주머니에는 조박사님이 준 장난감처럼 작은
주사기가 플라스틱 용기에 담겨져서 빛을 보기만 학수고대하고
있었지요. 내가 고동색 술병에다 주사기를 집어넣은 건 칵테일
잔과 마찬가지로 연박사의 죽음를 살인이라는 걸 증명하기
위해서였는데...... 당신들은 내가 주사기를 숨긴 시간이
당신들이 별장에 들어온 이후라고 알고 있는데, 천만에요.
아실런지 모르겠지만 당신들은 홀에 들어오자마자 우리들을 꼼짝
못하게 했어요. 아무도 모르게 주사기를 병 속에 넣을 기회는
제로였어요."
강여사는 장과장을 보고 비웃고 있었다.
"강여사님, 그럼 조박사님은 어떻게 할려고 했나요? 여사님의
마음 속에는 한 사람밖에 없었는데요."
윤형사가 물었다.
"내겐 앞일이 중요하지 않았어요. 내겐 눈앞의 현실만이
전부였어요. 조박사님이 해외로 나가시면 살인은 영원히 미궁에
빠질거라고 생각했어요. 그런 후의 내 인생은 한번도 생각해본
적이 없어요."
"그렇겠지요. 당신은 본능대로 움직였으니까요."
장과장이 침통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래요. 내가 마음 속 깊이 사랑했던 보혜와 주라를 깨끗한
죽음의 셰계로 보낸게 본능이었다면 내 인생을 유지하려고 했던
것도 본능이었겠지요. 그리고 최근에 다시 내게 전화를 걸기
시작해서 비향이를 호텔로 데리고 오라고 하는 미스코리아에
미쳐있는 그 인간을 항상 핸드백 속에 가지고 다녔던
재크나이프로 죽여버린 것도 본능이겠지요."
그 순간, 초대객들 틈에 섞여있던 나비향양이 경악을 하고
있었다.
"......어차피 인간이란 동물은 본능의 동물이니까요. 그런데
저도 이해할수 없는건 원치 않은 수술을 강제로 당한 성주라양의
독실 입원실에서의 본능입니다."
남형사가 궁금한 눈빛으로 물었다.
"주라에게는 인간의 본능과 본성이 상실되어져 있었어요.
조박사님의 본능은 주라의 얼굴을 돼지처럼 만들어놓았을
뿐아니라 마취제를 계속 투여해서 뇌를 견디지 못하게 해 백치로
만들어버렸으니까요. 제가 의상실에서 조박사님한테 전화를
걸었을 때 자랑스럽게 말하더군요. 내가 돼지 같은 년으로
만들어놓았다고요."
용인 별장의 밤은 깊어져가고만 있었다. 텅 빈 별장 뒤에서
고양이 울음 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두 마리의 새끼 고양이를
거느린 암코양이의 울음 소리가 무서우리만큼 별장을 떠나는
사람들의 귓가에 들려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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