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격동 30년 1

by Casey,Riley 2023. 6. 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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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격동 30년(1)

            -이영신 역사소설

   1. H아워에 출동하라!
   2. 박 장군, 지금 당신은 어디에
   3. 버마식 쿠데타
   4. 장도영, 양다리 걸쳤는가?
   5. 장도영, 박정희를 감싸고 돌다
   6. 해병대, 자정에 출동하다
   7. 국무총리 장면, 숨어 버리다
   8. 장도영, 그는 야누였는가?
   9. 윤보선, 쿠데타를 지지하다
  10. 곡! 제2공화국



  제 1 부 쿠데타의 새벽 (1)

  1. H아워에 출동하라!


  이제 얘기의 실마리를 1961년 5월 15일,
이날의 상황에서부터 풀어나가기로 한다.
  1961년 5월 15일이라고 하면 장면(張勉)
정권이 출범한 지 만 9개월이 못 될
때이다. 이른바 7.29 총선거를 통해서 장면
정권이 탄생한 것은 1960년 8월
23일이었다.
  그 이래, 장면은 참으로 어수선한 가운데
지난 9개월이란 세월을 까먹어 왔다. 정권
어떻게 까먹으며 오늘에 이르렀는지 꿈만
같았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아무리 일을 하려고
해도 할 수가 없었다. 데모 때문이었다.
그놈의 데모는 도무지 그칠 줄을 몰랐다.
아침에 눈을 뜨기가 무섭게 보고되는 것이
데모에 대한 것이었다. 학생이고
정치집단이고 모든 것을 데모로 해결하려
들었으니 말이다.
  그러니 정부가 아무리 일을 하려고 해도
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런데 그렇게
극성스럽기만 하던 데모가 3월 22일
횃불데모를 고비로 수그러들기 시작했다.
그러더니 5월에 접어들면서는 아예 자취를
감춰버리고 말았던 것이다. 아마도 이래선
나라꼴이 안 되겠다고 모두가 반성을 한
  (고마운지고?)
  국무총리 장면은 학생, 정치집단, 민중의
자각이 너무나 고마웠다. 그는 날마다
데모가 벌어져도 데모하는 자들을
미워하거나 원망할 줄을 몰랐다.
  (이승만 정권하에서 얼마나 욕구불만이
꽉 차 있었으면 저렇게 한꺼번에 불만을
해소시키려 들랴!)
  오히려 그들을 이해하려 애써 왔던
것이다.
  장면이란 사람은 그런 성품의
인물이었다.
  (일은 이제부터다.)
  그는 새삼스럽게 마음에 다짐을 주었다.

  이 무렵, 야당인 신민당(新民黨)의
도쿄(東京)에 머물고 있었다. 그는
필리핀의 마닐라에서 열리는 아시아
반공대회에 한국 대표로 참석하기 위해
국회의원 박준규(朴浚圭), 이종린(李鐘麟),
여류시인 모윤숙(毛允淑) 등과 4월 29일
서울을 떠났다가 대회가 끝난 5월 6일에
일본 도쿄로 와서 일본 정계의 지도급
인물들과 교유하며 유유자적하고 있었던
것이다.
  도쿄에는 유진산뿐만 아니라
유진오(兪鎭午)도 머물고 있었고,
이철승(李哲承), 박병배(朴炳培),
김상흠(金相欽) 등도 머물고 있었다.
  5월 10일에 실시되었던 인제 보궐선거에
민주당 공천을 받아 출마, 당당히 당선의
영예를 차지한 김대중(金大中)이
서울로 올라온 것이 이날이었다.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래 정치에 뜻을 품은 지 만
10년 만에 그는 뜻을 이룰 수가 있었던
것이다.
  약관 24살에 3대 국회의원에 출마,
당선됨으로써 화제를 불러일으켰던
김영삼(金泳三)은 이때 무엇을 하고
있었을까? 그는 신민당 내의 소장파 서클인
신조회(新潮會)의 발전책을 구상하고
있었다. 그는 장차 이 신조회를 발판으로
해서 대권을 잡아볼 생각이었던 것이다.

  이날 저녁 국무총리 공보비서실의
송원영(宋元英)과 박종률(朴鐘律)은 재무부
정무차관인 김재순(金在淳)과 셋이서
무교동 삼희정(三喜亭)에서 통음을 했다.
례 안 한다고 선배에게
알려져 있었다.
  "우리 남산에나 올라가세."
  삼희정 술자리가 파하자 이런 제의를 한
것은 박종률이었다. 그는 남산에라도
올라가서 시원한 바람을 쐬며 술자리에서
나누던 얘기를 매듭지어야겠다 생각했던
것이다.
  "나는 도무지 피곤해서 못 견디겠어.
그러니 먼저 집으로 가겠네."
  송원영은 두 사람이 뭐라 대꾸도 하기
전에 휘청거리며 밖으로 나가는 것이었다.
  두 사람은 굳이 만류하지는 않았다.
술자리에서도 차치고 포치며 얘기를 나눈
것은 김재순과 박종률이었기 때문이었다.
두 사람은 옛 KBS 앞에 차를 두고 걸어서
지금의 야외음악당이 있는 쪽으로 향했다.
  "이거 이래 가지고 되겠어?"
  그는 내일 아침에 서울시 내무국장을
호출해서 단단히 야단을 쳐줘야 되겠다고
마음을 먹었다.
  두 사람은 편안한 곳을 골라 자리를 잡고
앉았다.
  "이봐, 거 고시파와 관료파들을 깡그리
보내버릴 방법이 없을까? 장면 정권을
망쳐놓는 자들은 바로 그 고시파와
관료파들이라구!"
  고시파(考試派)란 고등고시 출신자들을
말한다. 물론 이들은 모두 일제시대에
고등문관 시험에 합격했던 인물이었다.
그리고 관료파(官僚派)란 관리 출신자들로
이들 역시 일제시대의 관리 출신자들이다.
  장면 정권을 이루고 있는 인물들은
출신자들뿐이었다. 독립운동을 했다던가
민족운동을 한 경력을 지니고 있는 인물은
눈을 씻고 봐도 찾아볼 수가 없었다.
이래서, 장면 정권은 친일 정권이라는 말이
나돌게 되었던 것이다.
  김재순은 그러한 세평이 싫었던 것이다.
그래서 술자리에서부터 노상 지겨울 정도로
그 문제만을 가지고 씨름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어쨌든 이것이 1961년 5월 15일의
장면을 위시한 주변의 정황이었다.
  그런데, 장면이 어떤 마음의 결심을 했든
또는 그 밖의 정치인들이 어떻게 움직이고
있었든 상관없이 아주 엄청난 음모가 한쪽
구석에서 진행되고 있었다. 그것은 분명
음모였다.


  여기에서 아예 까놓고 얘기를 진행시켜
나가자. 그들의 음모는 장면 정권을 뒤집어
엎는 것이었다. 바꾸어 말하면 쿠데타를
계획하고 있었다는 얘기다.
  쿠데타의 우두머리는 육군 소장
박정희(朴正熙)였다.
  그들의 음모는 총칼로 정권을 뒤집어
엎는 일이었다. 육군 소위에서 육군 소장에
이르기까지 국민의 세금을 먹고 살며
잔뼈가 굵다시피한 사람들이 그 어떤
이유를 내걸고 정권을 뒤집어 엎을 음모를
구미고 있었던 것이다.
  음모란 아주 극비밀리에 계획되는
일이니만큼 국민이나 정권 담당자가 까맣게
모르고 있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아마도
진행되었던 것 같다. 그들의 음모의 과정은
뒤에 소상히 소개하기로 하고 이들이
음모를 마무리짓고 정권을 뒤집어 엎는
날짜, 그것을 군대에서는 D데이라는 용어로
부르고 있다던가. 그 D데이에서부터 얘기를
풀어가기로 하자.
  그들이 몇 번의 실패를 거듭한 끝에
또다시 잡아놓은 D데이는 5월 15일이었다.
그리고 행동개시의 뜻이라는 H아워는
22시(방 10시)였다.

  이날, 쿠데타의 모의에 가담해 있던
장교들의 움직임은 부산했다. 이날은 바로
월요일, 그들은 각기 부대에 출근하자,
그들에게 주어진 임무 수행을 위해서
은밀하게 행동을 개시했다.
30사단의 작전참모 육군 중령 이백일은
출근하자, 사단참모장인 육군 대령
이갑영(李甲榮)을 찾아갔다.
  "참모장님께 D데이 H아워를 통고해
드리려고 찾아뵈었습니다. D데이는 바로
오늘, H아워는 22시입니다."
  "뭐야?"
  이갑영은 뒤통수를 얻어맞은 기분인
모양이었다. 그만 대꾸할 말을 잊고
말았다. 잇달아 분노가 치솟는 모양이었다.
  (이놈들이 도대체 나를 뭘로 보고 이러는
거야? 핵심조직하고 연결시켜 달라고 해도
연결시켜 주지도 않고 있다가 불쑥
찾아와서 한다는 소리가 D데이는 언제고
H아워는 언제라고?)
  자존심도 상했다. 이백일이 상급자였다면
부하였기 때문에 유달리 자존심이 상했던
것이다.
  "알았어."
  이갑영은 투박하게 대답하고 이백일을
물러가게 했다.
  그가 물러가자, 이갑영의 가슴은 더욱
부글부글 끓었다. 모조리 깨부셔 버리고
싶은 충동이 자꾸만 일었다.

  같은 시각, 김포에 있는 해병
여단사령부.
  여단장 해병 준장 김윤근(金潤根)은 오전
9시에 정례 참모회의를 열었다. 이날의
참모회의는 이렇다할 특색 있는 안건도
없었기 때문에 참모회의는 간단히 끝났다.
다만 이 회의가 끝나갈 무렵, 여단장
정태석(鄭台錫)에게 지시를 내렸다.
  "정 중령, 오늘 밤 12시에 오정근
대대에게 차량에 의한 대대단위 야간
기동훈련을 실시케 할 생각일세. 그 훈련을
위한 만반의 준비를 갖추어 놓도록!"
  "알겠습니다."
  작전참모 정태석은 공손히 여단장
김윤근의 명령을 수령했다. 그는
오정근(吳定根) 대대의 차량에 의한
야간훈련이라는 것이 어떤 의미를 지니고
있는지 전혀 눈치채지 못하고 있는 것
같았다.
  하긴 군령여산(軍令如山)을 생명으로
알고 있던 작전참모 정태석으로서는 그
훈련에 대해서 털끝만한 의심도 품지
않았던 것은 너무나 당연했다. 김윤근이
기동훈련은 가끔 실시해 오고 있었으니
말이다.
  (안됐다, 오늘 밤 오정근 대대 병사들
고생깨나 하겠는걸.)
  오히려 그는 동정심을 품기까지 했다.
  여단 작전참모 정채석에게 야간
기동훈련을 준비하라는 지시가 내려진 것을
신호로 대대장 해병 중령 오정근, 작전참모
해병 중령 조남철(趙南哲), 인사참모 해병
소령 최용관(崔容琯) 등 세 사람은 미리
짜둔 계획에 따라 민첩하게 행동하기
시작했다.

  같은 날 5월 15일 정오 12시.
  이 시간에 이르기까지 이갑영은 번민의
늪에서 허덕이고 있었다. 도무지 무엇을
없었다. 생각다 못해 부사단장 육군 대령
박상훈(朴常勳)을 찾아갔다.
  "거사일이 오늘이라는데 얘기 들었어? 밤
10시 집결, 새벽 2시 출동이라는 거야."
  "뚱딴지같이 그게 무슨 소리야?"
  박상훈도 어지간히 놀라는 것이었다.
  하긴 놀랐을 것이다. 제30사단의 경우,
이갑영을 포섭한 것은 이백일이었고 그에게
포섭당한 이갑영은 다시 박상훈을
포섭했다. 제30사단의 부사단장과 참모장을
포섭하자 쿠데타 그룹은 제30사단을
출동부대의 제1진으로 확정하고 서울로
출동, 서울로 진입할 수 있는 모든 도로를
차단하라는 임무를 맡고 있었다.
  이갑영의 얘기를 전해 듣고 놀란
박상훈은 이갑영만큼이나 노했다.
부사단장실로 불렀다.
  "참모장한테 얘기 들었어! D데이,
H아워가 오늘이라니 무슨 소리야?"
  "죄송합니다. 저도 어젯밤에야 통고를
받았습니다."
  "이봐 작전참모! 적어도 이런 엄청난
일을 하자면 충분한 시간을 갖고 준비를
해야 하잖아? 오늘 통고를 받고 오늘
어떻게 부대를 출동시킨단 말야? 그것도
합법적인 작전이라면 또 몰라! 이건
쿠데타란 말이다, 쿠데타!"
  "그러니 전들 어떻게 합니까? 아까
말씀드린 대로 저도 어젯밤에야 통고를
받았으니 말입니다."
  이백일도 딱하다는 표정을 짓고 극구
변명을 늘어놓는 것이었다.
  이백일은 놀라움에 두 눈이
휘둥그래졌다.
  "부, 부사단장님......."
  "내 말을 들어! 우리 부대가 출동부대
제1진으로 정해져 있는 이상엔 나하고
사전에 협의가 있었어야 옳지 않았는가
말이다. 그것을 네놈들은 우리 결정대로
행동해 주기만 하면 된다는 수작이야
뭐야?"
  "부, 부사단장님!"
  이백일의 목소리는 어느 사이엔가
애원조가 되어 있었다.
  "따져야 할 문제가 있으면 거사를 하고
난 뒤 따지시고, 오늘만은 이 결정에 따라
주십시오!"
  박상훈이 또다시 소리를 질렀다.
없어서 못하겠단 말이다. 알겠나?"
  박상훈의 마음을 뒤집어 놓고 보면
준비할 시간이 없어 못하겠단 것은 하나의
구실에 불과했다. 쿠데타 같은 대사를
며칠씩 두고 준비할 필요는 없었다.
  H아워가 10시라고 했으니까, 10시 전에
비상을 걸면 그뿐이었다.
  비상을 걸면 장병은 일제히 무장을 하고
연병장에 집결하게 마련이다. 그런 다음
시간이 되기를 기다렸다가 트럭에 실어
출동시키면 그뿐이었다.
  그것을 박상훈은 어째서 <못하겠다>고
한마디로 거부해 버렸을까? 그것은 마음의
준비가 안 돼 있었기 때문이었다. 쿠데타와
같은 비합법적 군사행동을 취하려면 사전에
죽음도 불사한다는 단단한 마음의 준비가
했으나 박상훈이나 이갑영은 죽음도
불사한다는 마음의 준비를 가다듬을 시간을
갖지 못했엇다.

  쿠데타에 대한 소문이 난무하고 있을
때였다. 영관급 장교들은 모이기만 하면
쿠데타의 불가피성을 논의해 오고 있기도
했었다. 이백일은 이러저러한 이유에서 왜
쿠데타를 하지 않으면 안 되는가? 하는
쿠데타 불가피성을 이갑영에게 역설했고,
쿠데타의 지도자는 박정희라는 것도
밝혔다. 그래서 이갑영은 한마디로 <좋다,
하자>고 확답을 했다. 그리고 박상훈을
설득해서 끌어들였다.
  그렇다면 이백일은 이들 두 사람을
박정희를 위시한 쿠데타 주모자들을 만날
그는 그런 주선을 하지 않았다.
  "이봐, 쿠데타 지도자가 박정희
장군이라지? 그렇다면 우리가 박 장군을
만날 수 있도록 주선해 주게. 그래야
우리도 상세한 내용도 알 수 있을 것이고
또 거기에 대한 대비도 굳건히 해나갈 수
있을 게 아니겠나?"
  박상훈, 이갑영 두 사람은 이백일에게
쿠데타의 핵심조직과 만날 수 있게
해달라고 여러 차례 요청했었다. 그것을
이백일이 성사시켜 주지를 못했던 것이다.
아니 어쩌면 안했는지도 모른다. 일은
8기생이 꾸미고 있으니 여타의 가담자는
계획에 따라 주어진 임무만 수행하면
그뿐이라는 생각 때문이었는지도 모른다.

참모장실로 이갑영을 찾아왔다.
  "나, 조금 전에 이백일 중령을 불러서
물어봤어. 오늘 출동하는 게 사실이냐구
그랬더니 그렇다더군. 그래 호통을
쳐주었어! 그런 중대사를 출동 몇 시간
전에 통고하는 놈들이 어디 있느냐고
하면서."
  "그랬더니 이 중령이 뭐라고 그래?"
  "자기로서도 어쩔 수 없었다고 변명을
늘어놓더군. 그래서 다시 호통을 쳐주었어!
난 못하겠으니 너희놈들끼리 알아서
하라고."
  얘기를 듣고 있던 이갑영의 표정은 마냥
어둡고 심각하기만 했다.
  "H아워가지는 이제 몇 시간 남지
않았는데 어쩌면 좋지?"
  "발을 빼?"
  이갑영은 꽤나 놀라는 표정이었다.
  "그럼, 쿠데타 계획에 대해서 전혀
캄캄한 우리가 이백일 놈의 말만 믿고
출동해야겠어? 그랬다가 차질이 생기기라두
하는 날엔 우리 반란죄로 총살감이라는 걸
몰라?"
  천한 표현이지만 <빼지도 박지도
못한다>는 말이 있다. 이갑영의 경우가 꼭
그랬다. 발을 빼자니 쿠데타가
성공하기라도 하는 날엔 배신자로 몰릴
것이 틀림없었고, 그렇다고 발을 들여놓은
채 있자니 계획대로 출동은 해야 할
것이고, 좀 고상한 표현을 빌자면 이것이
바로 진퇴양난(進退兩難) 아니겠는가.
  "어쩌겠냐?"
  "......."
  이갑영은 당장에 뭐라 대꾸하기가
어려웠다.
  "어쩌겠냐니까?"
  박상훈이 다시 재촉했다.
  이갑영은 숨막힐 듯한 답답증을 느꼈다.
당장에 어떤 결정을 내려야 할 것인지
마음의 갈피가 잡혀지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이기면 관군(官軍), 지면 적군(賊軍)이
되는 것이 쿠데타일세. 지금 우리는 관군이
되느냐 적군이 되느냐 하는 갈림길에 서
있는 꼴이 돼버렸네만 처음부터 우리가
경솔했어. 군인의 직분을 망각한 탓이야.
군인의 본분은 국토방위에 있지, 정치
따위하고는 무관한 거야. 정치를 잘 하든
일이지, 군인이 왈가왈부할 문제가
아니었어. 후회 막급이군."
  그 순간, 이갑영은 결심을 굳혔다.
  (군인의 길을 지키자, 군인의 길을!
군인이면서 쿠데타를 꿈꾸다니, 어리석어도
너무나 어리석었다.)
  입술을 한일자로 꽉 다문 그의 표정은
어딘가 좀 비장해 보이기조차 했다.

  같은 시각, 다시 김포 해병여단.
  인사참모 해병 소령 최용관과 군수참모
중령 유철수(柳哲秀), 두 사람이 여단장
김윤근을 찾았다.
  "각하, 출동부대에 탄약 1기수를
지급하라고 했더니 병기참모가 말을 듣지
않습니다."
호소하는 것이었다.
  "어째서 말을 듣지 않는 거야?"
  "기동훈련에 무슨 놈의 탄약이
필요하냐는 겁니다."
  탄약 1기수란 한 번 전투에 필요한
분량을 말한다. 병기참모가 무슨 낌새를
챘을 리는 없고, 하여간에 그의 논리는
옳았다. 실전도 아닌 기동훈련에 실탄은
필요 없었다. 김윤근은 잠시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를 궁리한 끝에 병기참모에게
전화를 걸었다.
  "기동훈련 부대에 탄약 1기수를
공급하라고 지시한 것은 나야. 병기참모도
알다시피 휴전 후에 입대한 장교와 사병은
탄약 1기수의 분량이 얼마나 되는지 모르고
있으니 기동훈련에 1기수를 휴대시켜
보려는 게야."
  병기참모 해병 대위 이영상(李永祥)은
여단장의 뜻이라는 것을 알자 어쩔 수
없다고 생각했을까?
  "말씀대로 공급하도록 하겠습니다.
하지만 포장을 뜯으면 분실의 우려가
있으니 포장을 뜯지 말고 상자 단위로
휴대시켜 주셨으면 합니다."
  병기참모 이영상의 정신상태는 참으로
훌륭했다. 그는 탄약의 분실까지도
우려하고 있었던 것이다.
  "나도 대대장한테 그렇게 지시하겠네. 이
대위도 보급받으러 오는 하사관에게 그렇게
지시해 두게."
  이렇게 해서 탄약문제는 해결되었다.
  이런 경우, 병기참모는 여단장의 명령을
이런 경우를 상정(想定)해서 군법(軍法)이
어떻게 정해져 있는지도 모른다. 그저 이
경우 병기참모 해병 대위 이영상은 <절대로
탄약을 지급할 수 없다>고 버텨주지 않은
것이 아쉬울 뿐이다.
  오후 4시, 해병대 제2훈련단장 해병 대령
정세웅(鄭世雄)이 김윤근을 찾아왔다.
출동부대에 합류하기 위해서였다. 김윤근은
그가 오자 정세웅이 담당할 문제를 의논한
다음 함께 수송중대와 오정근 대대를
둘러보았다. 출동태세는 완벽했다.

  오후 6시경.
  H아워 4시간 전이다. 서울 영등포에 있는
제6관구 사령부.
  이 제6관구 사령부는 쿠데타의 H아워
총지휘부로 변신하도록 되어 있었다. 여기
제6관구 사령부 사령관은 육군 소장
서종철(徐鐘哲), 그는 물론 쿠데타가
계획되고 있다는 사실을 까맣게 모르고
있었다. 그가 H아워와 함께 제6관구
사령부가 쿠데타의 총지휘부로 둔갑했다는
소식을 들으면 어떤 표정을 지을까?
  (나의 사령부가 쿠데타의 지휘본부라니?)
  나중에 이 사실을 알고 어이없어하는
서종철의 모습이 머리에 떠올라 김재춘은
빙긋 미소를 지었다.
  이날 서종철은 퇴근시간보다 조금 일찍
사령부를 떠났다. 김재춘은 사령관이
퇴근하기를 기다리고 있다가 이날
당직사령(當直司令)인 육군 중령
하종구(河鐘九)를 참모장실로 불렀다. 그가
  "귀관, 긴급한 일로 대구에 출장 좀
다녀와야겠어."
  "대구에요?"
  하종구는 좀 불만스러운 표정이었다.
일과중에 출장 명령을 내리지 않고, 왜
하필 퇴근시간에 명령을 내리느냐 해서였을
것이다.
  "대구, 어디로 출장가야 합니까?"
  "2군 사령부야, 공병참모 박기석
대령한테 서류를 전해주고 오면 돼."
  서류 하나 전하기 위해서 고급장교를
출장 보내다니? 하종구는 더욱 더
불만스러운 표정이 되었다. 김재춘은
그러한 하종구의 감정을 읽었다.
  "이 서류는 1급 비밀이오. 너무나 중요한
서류가 돼서 그러니 실수가 없어야 할
거요."
  그는 일침을 놓았다.
  "전 오늘 당직사령입니다. 다른 사람을
보내면 안 되겠습니까?"
  "이 서류는 1급 비밀이라 하잖았소! 이런
중요한 일은 사령관 각하의 신임이 두터운
하 중령 같은 사람이 아니고서는 마음이
놓이지 않아서 그래요."
  하종구는 서종철의 심복이었다. 그
심복이 오늘 밤 당직사령인 것이다. 그래서
김재춘은 당직사령을 바꿀 생각에서
하종구에게 출장 명령을 내렸던 것이다.
  "지금 곧 떠나게. 당직사령은 내가
이경화 중령더러 대신 맡으라고 할
테니까."
  "알겠습니다."
  하종구가 참모장실에서 물러가자,
대신 당직사령을 맡도록 명령했다.

  장교들이 모두 퇴근해 버린 제6관구
사령부.
  이 시간, 제6관구 사령부의 표정은 여느
때와 조금도 다를 바가 없었다. 안이나
밖이나 마냥 조용하기만 했다. D데이를
맞았고 H아워가 다가오고 있었는데도
말이다. 이렇게 조용하기만 한 것이 쿠데타
그룹으로서는 천만다행한 일이었을 것이다.
  하여간에 이 시간, 제6관구 사령부
참모장 육군 대령 김재춘(金在春)은 일련의
조치를 취하고 나자, 이번에는 작전참모
육군 중령 박원빈(朴元彬)을 은밀히
참모장실로 불렀다.
  "조금 전에 출동부대에 대한 체크를 전부
H아워까지는 아직 시간이 있으니까 나 잠시
밖에 나갔다 오겠어. 시내 동정이 어떤지
좀 살펴봐야겠어. 내가 없는 동안 박
중령이 사령부를 장악해 주게."
  "알겠습니다. 염려마시구 다녀오십시오."
  작전참모 박원빈은 계급은 김재춘보다 한
계급 아래였으나 나이는 다섯 살이나
위였다. 함경북도 청진(淸津) 태생인
박원빈은 고려대학교 경제학과를 졸업하고
군에 들어갔기 때문에 나이에 비해 계급이
낮을 수밖에 없었다.
  밥그릇으로 따지는 것이 군대사회,
거기에 박원빈은 김재춘과 쿠데타 동지로서
결속되어 있었다. 군말이나 반감이 있을 수
없었다. 박원빈은 호기있게 명령을
수행했다.

  서울 종로 2가
교동국민학교(校洞國民學校) 뒷골목에
은성(銀星)이라는 조용한 한식집이 있었다.
낮에는 점심을 팔고 밤에는 술을 팔았다.
간판이 붙어 있으니 은근짜집은 아니었다.
점심 한 끼를 때우는 데는 5인 가족 1주일
생활비에 해당하는 값을 받고 있었으니
한식집치고는 엄청나게 고급 요정이라는
것을 알 수가 있을 것이다.
  점심을 먹든 술을 먹든 아리따운
아가씨가 곁에 붙어 앉아 시중을 들어주는
요저이었으니, 비싼 값을 치러야 할 밖에.
그녀들을 일컬어 접대부라고 했다. 옛날의
기생(妓生)이 변신한 접대부였다. 옛날의
이르기까지 교육이 엄격했으나, 해방
이후의 이른바 접대부 아가씨들은 기생
앉았던 자리 근처에도 가지 못했다.
예의범절, 풍류, 정조관념에 이르기까지
그들 접대부들은 기생하고 비교할 것이 못
되었다. 그렇다 하더라도 그들 접대부
중에는 고등 교육을 받은 아가씨들도 있어
정치인, 고급관리, 군부의 장성, 사장 족속
등이 이런 요정을 즐겨 드나들고 있었다.

  저녁 7시. 육군 참모총장 육군 중장
장도영(張都暎)이 그의 막료인
정보참모부장 육군 소장 김용배(金容培)와
둘이서, 이 은성 대문 안으로 들어선 것은
이 시간이었다. 저녁을 먹자는 구실로
장도영은 김용배를 이곳으로 안내했던
  두 사람은 별실로 안내되었다. 특별한
손님만을 위해서 마련된 것이 별실이었다.
  방으로 들어서자, 장도영은 참모차장
육군 중장 장창국(張昌國)의 집에 전화를
걸었다. 그는 마침 집에 있었다.
  "아, 여보 장 차장. 나요, 지금 뭘 하고
있소?"
  "예, 지금 막 미군 장성들하고 골프를
끝내고 돌아와 샤워를 하고 있던
참입니다."
  (샤워를 하고 있다면 벌거벗은 채로
전화를 받고 있다는 얘기인가?)
  장도영은 잠시 장창국의 벌거벗은 알몸을
망막 속에 그려보고는 아마터면 풀썩
웃음을 터뜨릴 뻔했다.
  "여보 장 차장, 우리 지금 은성에 와
오시오. 그래야 우리도 저녁을 먹을 수
있을 테니 말이오."
  "예, 알겠습니다."
  육군 참모차장 장창국은 장도영과 계급이
같은 육군 중장이었다. 그러나 장도영의
직책이 한급 위였다. 몸이 고단하다는
이유로 초청을 사양할 수는 없었다.
  그는 서둘러 평복으로 옷을 갈아입고
밖으로 뛰쳐나갔다.

  땅거미가 깔리고 제30사단 사단본부가
자리잡고 있는 영내는 점차 고요에 묻혀
들기 시작했다. 어디선가 향긋한
아카시아의 향기가 풍겨오는 것만 같앗다.
어쩌면 그 향기는 신록의 내음인지도
모른다.
  의자에 무료하게 앉아 어둠이 깃드는
연병장을 무심히 바라보고 있던 사단장
육군 준장 이상국(李相國)은 문득 생각난
듯이 팔목시계를 바라보았다. 수색에서
서울 무교동까지 약속시간에 닿을 수
있을지 시간을 가늠해 보기 위해서였다.
그는 오늘 육군본부의 김판규와 저녁이나
같이 하자는 약속이 되어 있었다. 시계는
7시 20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40분이면 충분하겠지."
  그가 막 자리에서 일어섰을 때였다. 노크
소리가 났다.
  "네."
  문이 열리며 사단장실로 들어선 사람은
부사단장 박상훈과 참모장 이갑영이었다.
  "웬일이오? 아직 퇴근하지 않고 있었소?"
  박상훈은 좀 머뭇거리며 찾아온 용건을
말했다.
  이승만(李承晩)이 통치하던 자유당 시절,
사단의 부사단장은 거의가 육군
대령이었다. 당시 준장 계급 이상자에
대해서는 으레 <각하(閣下)>라는 경칭을
붙여서 부르고 있었다.
  그런데 부사단장은 계급에 있어서는
<장군(將軍)>이라는 칭호를 붙일 수 없는
대령이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사단장
유고시에는 사단당 직무를 대리하는 것이
부사단장이라 해서 부하 사병들은
부사단장을 부를 때도
<부각하(副閣下)>라는 경칭을 붙여 부르고
있었다.
  이것은 결코 우스갯소리가 아니었다.
대통령 이외에는 각하라는 칭호를 쓰지
못하게 했다. 그런데도 군대에서만은 별을
단 장군한테는 여전히 각하라는 칭호를
쓰고 있었다.
  "어떻소? 중대한 문제가 아니면 시내에
나가려던 참인데 내일 얘기하면 안
되겠소?"
  이상국은 약속이 있다는 것을 암시해
주었다.
  (내일? 내일이면 천지개벽이 이루어져
있을지도 모르는 판국인데 이런 중대한
문제를 내일로 미룰 수 있단 말인가?)
  부사단장 박상훈은 그런 생각이
들었는가.
  "각하, 부대가 오늘 밤에 출동한다는
사실을 알고 계십니까?"
홍두깨 같은 질문이었다.
  "무슨 소리오, 그게? 오늘 밤에 부대가
출동하다니, 뭣때문에 출동한단 밀이오?"
  이상국은 꼭 여우에게 홀린 듯한
표정이었다. 박상훈은 금방 뭐라 대꾸해야
할지 적당한 말이 떠오르지를 않아 잠시
머뭇거렸다. 아닌 밤중에 홍두깨 같은
질문을 던졌으면, 뭐라 대꾸가 있어야 하지
않는가. 박상훈이 대꾸도 않고 머뭇거리고
있으니 이상국은 역정이 일었다.
  "말을 해봐요. 대체 그게 무슨 소리요.
부대출동이라는 게? 사단장도 모르는
부대출동도 있단 말이오?"
  그러자 참모장 이갑영이 가로막고
나섰다.
  "각하, 나가서 저녁식사나 하면서
  "밖에 나가서?"
  "예."
  이상국은 별로 마음이 내키지 않았다.
그렇다고 해서 수수께끼 같은 질문을 받고
그냥 흘려버릴 수도 없은 일이었다.
김판규와의 약속은 다가오고 있었고,
그래서 약속 장소로 가는 차에서 수수께끼
같은 얘기를 들으리라 마음 속으로 셈을
했다.
  "그럼 그러지."
  이상국이 앞장서 나갔다.
  "부사단장은 내 차에 오르시오. 가면서
얘기합시다."
  이상국의 지시에 박상훈은 사단장 전용
지프에 올라탔다. 핸들은 이상국이 직접
잡았다. 참모장 이갑영도 운전병을
뒤를 따랐다.

  두 대의 지프가 제30사단 연병장 정문을
나서는 그 무렵, 국무총리 장면은 숙소인
반도호텔(지금의 을지로 1가 롯데호텔
자리) 809호실에서 아내 김윤옥(金允玉)이
집에서 차려 온 저녁상을 막 물리고
있었다.
  참으로 정성이 지극한 장면의 아내였다.
하루 세 끼를 꼬박꼬박 집에서 마련해
가지고 와서 남편을 대접했다. 점심 요기의
경우에는 운전수를 시켜 국무총리 집무실로
들여보냈다.
  장면은 아내의 정성이 언제나 눈물겹도록
고맙기만 했다. 그래서 호텔 주방에서 차려
주겠다는 식사를 사양하고 아내의 정성을
  행여 밥을 남기기라도 하면 건강에
이상이 있는 게 아니냐 해서 아내가 걱정을
할세라 식욕이 부진할 때도 밥그릇
비우기를 게을리하지 않았다.
  "여보."
  "네."
  "오늘은 이만 집으로 돌아가 주겠소?"
  "왜 무슨 일이 있으세요?"
  "8시부터 국무회의가 있어요."
  "그래요? 그럼 돌아갈께요."
  김윤옥은 차려 왔던 밥그릇, 찬그릇을
챙겨 바구니에 담았다.
  "여보, 나이를 생각하셔야 돼요. 너무
무리하지 마세요."
  그녀는 언제나 똑같은 당부를 이 밤에도
하고 다소곳이 방을 나섰다.

  "나한테 하고자 하는 얘기가 뭐요,
부사단장?"
  사단장 이상국은 앞만 주시하면서 하고자
하려던 얘기가 무엇인지 어서 해보라고
채근을 했다. 어지간한 얘기면 시내에
나가는 사이에 끝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오늘 밤에 쿠데타가 벌어집니다."
  박상훈의 목소리는 착 가라앉아 있었다.
  "뭐라구? 쿠데타?"
  이상국은 너무 놀란 나머지 하마터면
핸들을 놓칠 뻔했다.
  "좀 자세히 얘기해 보시오. 쿠데타라니,
도대체 무슨 소리오?"
쿠데타가 모의되어 왔으며 그 지도자는 2군
부사령관 육군 소장 박정희라는 것과 몇
번인가 D데이와 H아워를 변경한 끝에
마침내 오늘 H아워에 거사를 하게 되었다고
설명하고 이렇게 덧붙이는 것이었다.
  "오늘 밤의 거사에는 우리 부대를
비롯해서 해병대, 공수단 등이 출동하기로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 각하께서도 이
문제에 신중히 대처해야 할 줄로 압니다."
  (이런 때려 죽여도 시원치 않을 놈들!
그런 엄청난 비밀을 H아워 몇 시간 전에
나한테 얘기한단 말야?)
  이상국은 오장육부가 뒤집혀 버릴 것
같은 분노가 치솟았다. 그러나 별을 단
사단장 체면에 길길이 뛰면서 악을 쓸 수도
없는 일, 그는 녹번리 사거리에 이르자,
  "부사단장, 참모장하고 차를 바꾸어 타
주시오."
  박상훈이 차에서 내리자 곧 이갑영이
차에 올랐다. 이상국은 다시 차를 몰기
시작했다.
  "참모장, 부사단장한테 대충 얘기는
들었는데, 좀더 구체적으로 알았으면
하는데 참모장이 알고 있는 대로 얘기해
봐요."
  이미 언급한 바와 같이 이갑영이
작전참모 이백일에게 포섭되었다고는 하나
핵심세력과의 접촉이 없었다. 그러니
박상훈 이상으로 알고 있는 것이 있을 리
없었다. 그가 말하는 대강의 내용은
박상훈의 얘기와 같았다.
  그러나 한 가지, 이갑영이 박상훈보다
  "각하, 오늘 밤 행동개시 직전,
30사단장과 6관구 사령관 숙소를 포위해서
두 분을 감금하기로 되어 있습니다."
  이상국의 가슴이 섬뜩해지는 정보를
털어놓는 것이었다.
  "나하고 서종철 장군을?"
  "네."
  이상국은 가슴이 후들후들 떨리는 것을
느꼈다.
  (이 친구가 나하고 서 장군을 체포해서
직결처분해 버리기로 되어 있는 것을
에누리를 해서 말한 것은 아닐까?)
  그런 느낌도 들었다. 있을 수 있는
일이었다. 쿠데타를 모의한 자들로서는
으레 그런 계획을 세울 만한 일이었다.
  1936년 2월 26일. 일본의 국수주의적
사건을 일으켰을 때 그들은 총리대신
고나저로 침입, 경비장관 4명을 사살 또는
찔러 죽이고, 총리대신 오까다
게이스께(岡田啓介)를 일도양단하려 했으나
그가 재빨리 몸을 숨기는 바람에 뜻을
이루지 못하자, 대신 그의 매부 마쯔오
덴조오(松尾傳藏:예비역 육군 중령)을
사살했다.
  뿐만 아니라, 그들은 또 내대신(內大臣)
사이또오 마꼬도(齊藏實)를 죽이려다가
중상을 입혔고, 육군 교육총감 와다나베
죠오따로오(渡邊錠太郞), 오오꾸라
대신(재무대신), 다까하시
시세이(高橋是淸) 등을 사살했다.
  쿠데타란 이런 것이다. 쿠데타의 원인
제공자 그리고 방해꾼이 될 만한 자는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렇다면.......)
  이상국은 생각해 보았다. 제6관구 사령관
서종철은 수도를 경비하는 것이 주어진
임무이고 이상국은 그 임무를 분담하고
있는 제6관구 휘하의 제30사단장이다.
  쿠데타 모의자들이 서종철하고 이상국을
제거하려 들 것은 상식이라 할 수 있었다.
더구나 제30사단이 쿠데타 행동부대로서
출동하게 되어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감금이 아니라 직결처분해 버리려는 계획을
세워놓고 있을 것이 분명한 일이었다.
  (빌어먹을, 그놈들이 언제 내 부대에
마수를 뻗쳤지?)
  이상국은 끓어오르는 분노를 누르며
물었다.
무슨 일을 치르겠다는 거요?"
  "글쎄 말입니다."
  이갑영의 대꾸는 다분히 애매모호하기만
했다.
  "딴생각 말고 참모장이나 부사단장은
모두 내 지시에 따르도록 하시오."
  이상국은 단호하게 명령했다.
  그들이 타고 있는 지프는 어느덧 화신
앞을 가로질러 광교 쪽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바로 그 무렵.
  반도호텔 809호실 장면의 거실에는
밖에서 저녁식사를 마친 각료들이 한 사람,
두 사람 모여들고 있었다. 국무회의에
참석하기 위해서였다.


  밤 8시.
  필동 연합참모본부 앞에 자리잡고 있는
아스토리아호텔 커피숍에는 육군 대령
계급장을 단 제6관구 사령부 참모장
김재춘이 구석진 곳에 앉아 시켜놓은
커피를 마실 생각도 않고 심각한 표정으로
앉아 있었다.
  그는 지금 자신이 생과 사의 갈림길에 서
있다는 비장한 감정에 사로잡혀 있었다.
  (성공하면 모르되 만일 실패할 경우 내
운명은 어찌될 것인가? 아니 내 운명은
어찌돼도 좋다. 사나이로 태어나 신념에
살다 죽는다면 그 이상 영광되고 보람된
일도 없을 것이다. 그러나 가족들의 운명은
어찌될 것인가? 상상조차 하기 어려운
될 것이 아니겠는가?)
  김재춘은 가족의 앞날을 생각하면 가슴이
쑤셨다.
  (제발, 제발 성공해 다오!)
  그는 마음 속으로 빌고 또 빌었다.
어쩌면 오늘 내일이 이승에서의 마지막이
될지도 모른다는 느낌도 들었다. 그렇게
생각해서 그런지 눈물이 핑 돌기까지 했다.
  문득 동기생 동지들은 무엇을 하고
있을까 하는 생각이 일었다. 그는 그의
동기생 동지들의 모습을 하나하나 머리
속에 그려보았다. 그는 육군사관학교 5기
출신이었다.
  제12사단장 육군 준장 박춘식(朴春植),
국방대학원 육군 준장 송찬호(宋贊鎬),
제5사단장 육군 준장 채명신(蔡命新),
문재준(文在駿), 제2군사령부 공병참모
육군 대령 박기석(朴基錫), 제1공수특전단
단장 육군 대령 박치옥(朴致玉),
육군항공학교 교장 육군 대령
이원엽(李元燁), 육군보병학교 참모장 육군
대령 최재명(崔載明) 등 같은
5기생들이지만 벌써 선두그룹은 별을 달고
<장군(將軍)> 칭호를 듣고 있었다.
  누가 먼저 별을 달고 안 달고 하는 것은
그리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김재춘은
생각하고 있었다. 왜냐하면 6.25 전쟁이
발발했을 때 태반의 5기생들은 육군
소령으로서 대대장직을 맡고 실전 경험을
쌓아 갔었다.
  5기생에 대해서 좀더 구체적으로
소개하면 그들 5기생들이 육군사관학교에
?그녀의 두 눈에 담겨
4기생까지는 일본군을 위시해서 만주군,
광복군 등 군사경험을 갖고 있는 사람들이
입교했었으나 5기생부터는 군사경험이 없는
민간출신자들 중에서 뽑았었다.
  이때 5기생으로 입교한 사람은 모두
380명. 만 9개월간의 교육훈련을 받고
그들이 육군 소위로 임관한 것은 1948년
4월 6일이었다. 6.25 전쟁 때 그들이 벌써
육군 소령으로까지 진급해 있었던 것은
한국군의 성장속도가 그만큼 빨랐다는 것을
의미한다.
  전쟁이 휴전으로 매듭지어진 1953년
7월에는 벌써 빠른 사람은 대령으로 진급한
사람들도 있었다. 전쟁이 끝나자 진급이
더디기 시작했다. 인사적체가 생기기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가담하게 되었던 것도 인사적체의 불만도
구실의 하나가 돼 주고 있었다. 표면에
내세운 명분은 그것이 아니었지만.
  그건 그렇고, 김재춘의 경우에는
언젠가는 별을 달게 되리라는 신념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그 자신은 진급문제에 그리
신경을 쓰지 않고 있었던 것이 사실이었다.
  (제발, 제발 좀 성공으로 이끌어 다오.)
  김재춘은 거듭 빌고 또 빌고 있었다.

  밤 8시, 같은 시각.
  해병 여단장 김윤근은 제2연대장 해병
대령 박승도(朴承道)와 여단 작전참모
정태석, 두 사람을 여단장실로 불렀다.
  "두 사람을 부른 것은 다름이 아니오.
나는 오늘 오정근 대대를 이끌고 쿠데타를
  그는 오늘 밤의 거사를 솔직하게
털어놓았다.
  두 사람의 눈이 놀라움에 휘둥그래졌다.
  (쿠데타, 쿠데타를 한다고?)
  두 사람은 숨이 닥 멎어버리는 듯한
충격을 받은 모양이었다.
  김윤근은 어떻게 해서 쿠데타에 가담하게
됐는지를 자세히 설명했다. 두 사람은 자못
긴장해 있으면서도 김윤근의 쿠데타론을
긍정하는 눈빛이었다.
  설명을 끝내고 나자 김윤근은 명령했다.
  "나 없는 동안 여단 지휘를 박 대령이
맡아 해주시오."
  그러자 박승도는 상기된 얼굴로 간청하는
것이었다.
  "여단장님, 부대 지휘는 다른 사람한테
같이 하도록 해주십시오."
  "저 역시 똑같은 심정입니다. 저도
거사부대에 합류시켜 주십시오."
  정태석도 간청하고 나섰다.
  "고마운 일이오만, 두 사람이 여단
지휘를 맡아줘야 내가 안심하고 나갈 수가
있단 말이오!"
  김윤근은 좋은 말로 두 사람을 달랬다.
  박승도와 정태석이 물러나자 김윤근은
부관 홍경식(洪景植)을 불러,
  "지금부터 숙소로 돌아가서 잠시 눈을
붙일 테니까 11시 정각에 깨우도록 해."
하고는 여단장실을 나섰다.
  한번 해병은 영원한 해병이다. 이것이
해병대의 슬로우건이다. 이런 정신으로
뭉쳐져 있기 때문이었을까? 이날 김윤근은
두 사람에게 아무 거리낌없이 쿠데타
계획을 털어놓았던 것이다.
  쿠데타에 가담해 있는 주체가 휘하의
부하에게 쿠데타에 대한 계획을 밝히고
간접으로나마 협력을 구했던 사람은 오직
김윤근 한 사람뿐이었다.











  2. 박 장군, 지금 당신은 어디에......?


  서울 다동(茶洞) 입구에 있던
삼희정(三喜亭)은 대중음식점이었다.
불고기가 전문으로 꽤 번창 일로에 있던
음식점이었다. 늘 손님이 바글바글 끓었다.
사촌이 기와집을 지으면 배가 아프다고
하지만 사촌은 커녕 피 한방울 섞이지 않은
사람도 지나가다가 손님이 바글바글 끓고
있는 광경을 목격하기라도 하는 날엔 배가
아플 정도가 아니라 쑤셨다. 그만큼
번창만을 거듭하고 있던 음식점이었다.
  제30사단장 이상국이 삼희정 안으로
들어서자 그와 저녁식사를 하기로 약속이
담고 맞아 주었다. 동기생 사이인지라 늦은
데 대해서 농담섞인 핀잔 한마디쯤 던질
법도 했으나 김판규는 오히려 이쪽이
미안해할 정도로 미소만으로 맞아 주었다.
  이상국은 김판규에게 늦은 데 대해서
변명 한마디 하지 않았다. 어쩌면 그것은
먼저 별을 달았다는 오만에서였는지도
모른다.
  네 사람은 불고기 냄새와 연기가 범벅이
되어 코를 찌르는 홀 한구석에 자리를 잡고
마주앉았다. 순간, 이상국은 김판규가
정보참모부에 근무무하고 있다는 사실을
상기해냈다. 그는 대령으로서 정보참모부장
김용배 밑에서 일하고 있었다.
  "김 대령!"
  이상국은 심각한 표정을 지으며 아주
  "쿠데타 정보가 있던데, 이게 도시 무슨
놈의 소리인지 모르겠어?"
  이상국은 그렇게 의문스러운 정보가
있다는 사실을 전제하고 지금 삼희정으로
오는 동안 박상훈, 이갑영한테서 들은
얘기를 앵무새 외듯 고스란히 털어놨다.
  얘기를 듣고 나자 김판규는,
  "실은 나도 그런 정보를 들었어." 하는
것이었다.
  "김 대령도 들었어?"
  이상국은 그만 바싹 긴장되었다.
육군본부 정보참모부의 김판규도 들었다면
이건 예삿일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람, 이걸 어떡하면 좋지? 바로 우리
부대가 쿠데타 행동부대 제1진으로 정해져
있는 모양이야."
  김판규는 무척이나 놀라는 것이었다.
그는 젓가락질을 멈추고 휘둥그래진 눈으로
이상국을 응시했다.
  (이 친구가 쿠데타에 가담해 있으면서
나를 떠보려고 그러는 게 아닌가?)
  김판규의 두 눈은 그런 의심을 담고 있는
것같이 느껴지기도 했다.
  "그게 정말인가?"
  김판규의 반문에 이상국은 약간 짜증이
일기도 했다.
  "그럼, 이런 중대한 문제를 내가 허튼
소리 하겠는가?"
  딴을 그렇다. 아무리 동기생 사이라
하더라도 함부로 털어놓을 수 있는 얘기는
아니었다. 김판규의 표정이 사뭇
심각해졌다. 그는 건성으로 젓가락을
  "그렇다면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잖아?
일단 방첩대에 알리는 것이 상책일 거야.
괜히 신고조차 않고 있다가 쿠데타가
실패하는 날엔 그 책임을 어떻게
감당하려고 그래?"
  이상국은 김판규의 말이 옳다고
생각했다. 쿠데타가 실패하는 날에는
사단장한테 제일 먼저 책임을 물으려 할
것은 정한 이치였다. 그제야 이상국은
정신이 번쩍 드는 느낌이었다.
  "식사는 나중에 하기로 하고 우리 모두들
506방첩대로 가세."
  이상국은 박상훈, 이갑영, 김판규를
거느리고 506방첩대로 차를 몰았다.
506방첩대는 서울지구 방첩대로 소공동
조선호텔 맞은편 길 건너에 있었다.
출신인 육군 대령 이희영(李熙永)이었다.
그는 아직도 퇴근하지 않고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방첩대의 업무가 그만큼 폭주해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할 수도 있었다.
  이희영은 예고없이 찾아온 이 동기생들이
못내 의아스럽기만 한 모양이었다.
  "어쩐 일들이오. 네 분이 같이?"
  "실은......."
  이상국이 입을 열었다.
  "쿠데타 정보가 있기 때문......."
  "쿠데타?"
  "예."
  "쿠데타 정보라니요? 좀 자세히 말씀해
주십시오."
  그러면서 이희영은 용지와 펜을 준비하는
것이었다.
또다시 되풀이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이상국은 쿠데타 주모자가 박정희라는
것만은 뺐다. 그로서는 확증을 내세우기가
어려웠기 때문이었다.
  얘기를 듣고 난 이희영은 꽤나
미진하다는 표정이었다.
  "30사단이 쿠데타 행동부대로 나서기로
돼 있다는 것만 알고 쿠데타 주동자들은
모르다니, 이거 어떻게 해석해야
하겠습니까?"
  이갑영이 가로막고 나섰다.
  "실은 저희들이 이백일 중령한테
주동자들을 만나게 해달라고
요청했습니다만, 이백일 중령이 차일피일
미루어 오는 통에 소개받지를 못했습니다."
  "그래서 주동자가 누군지 모른단
  "그렇습니다."
  이희영은 가볍게 끄덕이면서 잠시 생각에
잠기는 눈치였다.
  (박정희 장군이야! 주모자는 박정희
장군일 것이 틀림없어.)
  그는 이렇게 속으로 단정을 내리고
있었던 것이다. 어떤 근거에서 이희영은
이런 단정을 내리고 있었던가?
  잠시 생각에 잠겨 있던 이희영은 서둘러
방첩대 본부대장인 육군 준장
이철희(李哲熙)에게 전화를 걸었다.
  이철희하고는 곧 연결되었다.
  "쿠데타에 관한 중대한 정보가
신고되었습니다. D데이 H아워가 바로 오늘
밤 10시라고 합니다."
  이희영의 보고를 받은 이철희도 꽤나
울려나오는 목소리가 옆의 사람도 들을 수
있을 정도로 쩌렁쩌렁 울리고 있었다.
  "누가 그런 신고를 해왔어?"
  "네, 제30사단장 이상국 준장이십니다."
  "이상국 준장?"
  "네."
  "그 사람 지금 거기 있어?"
  "네, 있습니다."
  "그럼 내가 지금 그리로 가겠어."
  이철희는 금방 달려왔다. 대장실로
들어서는 그는 여간 허둥대고 있는 것이
아니었다. 생각 때문일까? 금붕어의 눈처럼
툭 튀어나온 큰 두 눈이 겁에 질려
있기조차 한 것 같았다.
  이철희가 들어서자 이상국 이하 모두
자리에서 일어섰다. 특히 이희영을 포함한
맞았다.
  "귀관들이오, 쿠데타에 대한 신고를 한
사람들이?"
  이철희는 네 사람을 번갈아 보며 물었다.
  "그렇습니다."
  대꾸를 한 것은 이상국이었다.
  "뭐가 어찌됐다는 것인지 좀 자세히
얘기해 보시오."
  이상국은 다시 세번째로 되풀이 설명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D데이 H아워가 오늘 밤 10시라?"
  "그렇습니다."
  "참모총장 각하는 지금 어디 게시지?"
  이철희는 도무지 제정신이 아니었다.
혼자 중얼거리며 육군본부에 전화를 거는가
하면 참모총장 공관에 전화를 걸며 총장의
없었다. 전화기의 다이알을 돌리는 그의
손이 파르르 떨리고 있기조차 했다.
  마침내 이철희는 참모총장의 행방을
수소문해냈던 모양이었다. 그는 수화기를
놓기가 바쁘게 행선지도 밝히지 않고
밖으로 뛰쳐나가는 것이었다. 그러는 그의
행동은 꼭 실성한 사람 같이만 느껴졌다.
  이철희가 황망히 밖으로 달려나가자,
이상국은 두 부하에게 나직이 명령을
내렸다.
  "박 대령하고 이 대령은 속히 부대로
돌아가서 부대를 장악하시오."


  이름 석 자깨나 알려진 서울 장안의
출입해 보지 않는 사람은 없었다. 때는
신록의 호시절 5월이라고는 하지만 사대문
밖은 한 발만 벗어나면 하루 세 끼는
고사하고 한 끼의 끼니조차도 못하는
소외계층들이 우글거리고 있는 것이 당시의
실정이었다.
  그래서 이 땅에 발을 붙이고 사는
무지렁이 같은 백성들은 5월을
<보릿고개>라 일컬어 왔었다. 이
보릿고개의 5월에 들어서면서 데모가
가라앉은 것은 다행이었으나, 대신
생활대책이 막연한 민생들이 도처에서 삶을
포기하는 사건이 잇달아 일어나 뜻있는
사람들의 가슴을 더없이 아프게 해주고
있었다.
  그런데도 요정 은성은 땅거미가 내릴
민생의 비극적인 얘기는 어느 먼 나라의
얘기인 듯 요정 은성의 출입자들은
관심조차 기울이지 않는 부류의
군상뿐이었다. 그들은 대개가 이름 석 자만
대면 알 만한 이 땅의 지도급
인사들이었는데도 말이다.
  요정 은성은 오늘 밤도 흥청거리고
있었다.
  까르르...... 여인들의 교성이 장지문
밖에까지 울려퍼지고 있는가 하면,
하하...... 하고 기름진 호걸 웃음 또한
장지문 밖으로 새어나와 흩어지곤 했었다.
  이 밤, 요정 은성의 별실.
  요정 은성의 별실에서 술잔을 기울이고
있는 육군 참모총장 장도영은 뭐가 그리
유쾌한지 마냥 싱글벙글이었다.
자다가도 낄낄댈 만한 일이기는 했을
것이다. 공자(孔子)는 30에
입지(立志)한다고 말씀하시지 않았던가.
그런데 이 사나이는 38살에 벌써 별을
3개씩이나 단 육군의 총수인 육군
참모총장인 것이다.
  대장부가 이만하면 엄청난 출세를 했다고
할 수 있잖겠는가. 하기야 장도영뿐 아니라
지금까지 육군의 총수를 지낸 사람은
거의가 삼십대에 그 중책을 맡긴
했지만.......
  그랬다고 하더라도 장도영으로서는
감회가 남달랐을 것이다. 하마터면 벗어야
했던 군복이었다. 그것을 행운의 여신이
편들어 주었던지 군인으로서는 최고의
영예라 할 수 있는 육군 참모총장에까지
  민충이 쑥대 오른 기분이 되어 한껏
취해져 있을 때 마담이 들어와 누가 밖에
와서 참모총장을 찾는다고 귀띔해 주었다.
  장도영이 밖으로 나와보니 방첩부대장
이철희가 서 있었다.
  "무슨 일이야?"
  장도영은 짜증섞인 말투로 물었다. 한창
주흥이 도도해져 가고 있는데 엉뚱한
훼방꾼이 주흥을 깨니 역정이 날 만도 했을
것이다.
  "각하, 큰일났습니다. 쿠데타 모의가
신고되었습니다. D데이 H아워가 바로 오늘
밤 10시랍니다."
  "뭐야?"
  이철희로부터 보고를 받은 장도영은
기절초풍하듯이 놀랐다.
  "박정희 소장이라고 합니다."
  "뭐 박정희 소장?"
  제30사단장 이상국은 이철희에게 쿠데타
주모자가 박정희라고는 하지 않았었다.
그런데 이철희는 쿠데타 주모자가
박정희라는 것을 어떻게 알고 있었을까?
  이유는 간단했다. 그는 박정희가
쿠데타를 모의하고 있다는 정보를 벌써부터
입수해 놓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그는
그 정보를 입수하는 즉시 직속상관인 육군
참모총장에게 보고를 하고 어떤 조치를
강구했어야 옳았다.
  그러나 그는 그 정보를 눌러놓고 있었던
것이다. 군부의 정보를 촐괄하고 있는
방첩부대 본부대장의 직책으로 볼 때, 그는
직무유기를 하고 있었던 것이 된다.
눌러놓고 있음으로써 박정희의 쿠데타
계획을 간접적으로 방조해 주고 있었다는
얘기가 된다.
  왜?
  어찌됐거나 제30사단장 이상국이 쿠데타
모의를 신고함으로써 이제 쿠데타 계획은
실패로 돌아갈 수밖에 없다고 이철희는
판단했던 것이다. 그래서 주모자는 박정희
소장이라고 서슴지 않고 털어놨던 것이다.
  "틀림없나, 박정희 소장이라는 것이?"
  "네, 각하!"
  장도영은 입술을 질근 깨물었다.
  (빌어먹을 새끼, 기어이 하고야 말겠다
그 수작이야?)
  원색적인 욕설이 목구멍을 타고 기어
올라오는 것을 장도영은 간신히 눌렀다.
  장도영은 발길을 돌려 다시 별실로
되돌아갔다.
  "이거 미안하오. 급히 다녀올 데가
있어서 잠시 실례 좀 해야겠소. 그리
시간은 지체하지 않을 거요. 곧 돌아올
테니 두 분께서 천천히 들고 계십시오."
  두 사람이 미처 뭐라 대꾸하기도 전에
휑하니 방을 뛰쳐나가는 것이었다.
  이런 빌어먹을! 세상에 이렇게 기가 막힌
얘기가 또 있을 수 있을까?
  쿠데타는 한 정권을 뒤집어 엎는 행위,
여차하면 엄청난 인명피해를 내게 된다.
그런 대사건이 벌어지려 하고 있다는
정보를 받고도 장도영은 어째서 두
사람한테는 이 사실을 터놓지 않고, 급히
다녀올 데가 있느니 어쩌고 저쩌고
말이다.
  혹시 장도영은 처음부터 쿠데타에 가담돼
있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아니면, 박정희
쿠데타 거사쯤 혼자서라도 얼마든지
꺾어버릴 수 있다고 자신한 때문이었을까?
  세월이 흐른 뒤, 장도영은 <나는 역사의
죄인> 운운하며 5.16 군사 쿠데타 전의
박정희와 인간관계에서부터 쿠데타와
관련된 많은 얘기들을 털어놓은 일이
있지만, 그는 이날 은성에서 같이 회식을
하던 장창국, 김용배 두 사람에게 어째서
쿠데타 정보 보고를 알려주지 않았는지에
대해서는 단 한마디도 언급한 일이 없다.
장도영은 사전에 박정희와 어떤 밀약이
있었던 것이 아니었을까?


  장도영은 이철희를 거느리고 서둘러
506방첩대로 달려왔다. 그때까지 제30사단
사단장 이상국과 육군본부 정보참모부의
김판규는 이희영과 얘기를 나누며
이철희로부터 하회를 기다리고 있었다.
  문이 왈칵 열리면서 장도영이
506대장실로 들어서는 것을 본 세 사람은
마치 용수철에서 튕겨지듯이 벌떡 일어나
부동자세를 취하고 거수경례를 붙이는
것이었다.
  장도영은 그러한 세 사람의 몸가짐에는
관심조차 없다는 듯 이희영을 향해 버럭
소리를 질렀다.
  "지금 박정희 소장은 어디에 있나?"
  "지금 신당동 자택에 한웅진, 장경순 두
  506방첩대장 이희영도 쿠데타의 주모자는
박정희라는 것을 벌써부터 알고 있었다.
그래서 이철희가 뛰쳐나가자 곧 무전으로
박정희를 감시하고 있는 요원들을 불러
그의 소재를 그의 소재를 파악해 놓고
있었던 것이다.
  이 글을 읽는 독자들은 506방첩대장
이희영이 박정희가 쿠데타를 모의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으면 어째서
단호한 조치를 취하지 않았느냐? 하는
의문이 일게 될 줄로 안다. 그러나
이희영은 그 자신의 직책에 충실했었다.
그는 자신의 직책에 충실했으나 이것을
상부선에서 덮어버렸던 것이다.
  "집에 있는 것이 분명한가?"
  "예, 분명합니다."
다소 마음이 놓였던가? 그제야 새삼
이상국의 존재를 인식하듯,
  "이봐, 이 준장."
  이상국 쪽을 향하며 그를 불렀다.
  "네, 각하."
  이상국이 한층 더 꼿꼿하게 부동자세를
취했다.
  "귀관은 명색이 장군이라면서 능력이
고작 그것밖에 못 되더란 말인가?" 하고
호통을 치는 것이었다.
  명색이 장군이라니? 아무리 육군
참모총장이라고 하더라도 대한민국 육군의
<장군>을 그 따위로 모욕할 수 있단
말인가? 이상국은 뜨거운 것이 목구멍으로
치솟았으나, 그는 어쩔 수 없이 그 뜨거운
울화를 누를 수밖에 없었다.
  "이백일인가 하는 중령 하나 제대로
다루지도 못하고 그러고도 장군이야?"
  이상국은 계속 치밀어 오르는 모욕감을
억누르기가 어려웠던지 좀 거칠게
대꾸했다.
  "소관은 그 내용을 오늘 저녁에 듣고
알았을 뿐입니다. 그래서......."
  "잔소리 말어!"
  장도영은 이상국의 변명을 끝까지
들으려고도 하지 않았다. 잔소리 말라는
일갈로 그의 말을 육군 참모총장의 권위로
눌러 버렸다.
  "당장 돌아가서 부대를 장악하라.
알겠나?"
  "예. 각하."
  이상국은 거수경례를 붙이고 그 자리에서
절반쯤은 제정신이 아니었다. 밖으로
나오자 이상국은 공중전화를 찾아 전화를
걸었다. 그는 아내에게 지금 당장 아이들을
데리고 친정으로 가 있으라고 했다.
  아내가 별안간 왜 그러느냐고 의아해하며
반문했다.
  "알 것 없어. 하라는 대로 하기나 해!"
  그는 신경질을 부리며 전화를 끊었다.


  제30사단 사단장 이상국이 지프를 몰고
506방첩대를 막 떠나는 그 시간,
반도호텔에서는 국무회의를 막 마치고
주차장으로 내려온 각료들이 각기 자기
전용차를 찾아 타고 떠나고 있었다.
군용전화기를 들어 잇달아 명령을
하달했다. 그가 제일 먼저 전화를 건 곳은
육군본부.
  "주번사령, 즉시 각급 참모를
비상소집하라!"
  두번째로 그는 헌병감 육군 준장
조흥만(曺興萬)에게 전화를 걸었다.
  "헌병감, 지금 6관구 사령부에 쿠데타
주모자들이 집결해 있다. 즉시 헌병대를
동원해서 반란 모의자 전원을 체포하라!"
  세번째로 그는 제6관구 사령관 관사에
전화를 걸었다. 사령관은 육군 소장
서종철이었다.
  "서 사령관, 지금 귀관의 사령부 안에서
반란모의가 진행중에 있는 것을 알고 있소,
모르고 있소?"
받은 서종철은 날벼락을 맞은 듯한
느낌이었을 것이다.
  "즉각, 진압조치 하시오!"
  장도영은 상대방이 놀라 당황해하거나
말거나 개의치 않고 추상 같은 명령을
내렸다. 네번째로 장도영은 제33사단
사단당 육군 준장 안동순(安東淳)의 집에
전화를 걸었다.
  "안 준장, 지금 즉시 부대로 돌아가서
출동태세를 갖추고 대기하시오. 내
육성명령 이외에는 누구의 명령도 수령하지
마시오."
  다섯번째로는 김포에 있는 공수특전단
단장 육군 대령 박치옥(朴致玉)의 집에
전화를 걸었다.
  "자넨, 지금 뭘 하고 있나?"
시간에 단장이 부대에 있다는 사실이 좀
의외여서 그런 엉뚱한 질문을 던졌는지도
모른다. 술집 아니면 집에 있어야 하는
것이 정상이었을 테니 말이다.
  "각하, 내일 있을 비둘기 작전 때문에
나와 있습니다."
  비둘기 작전이란 무엇인가? 민주당
정권에서 하도 데모가 잇달아 일어나고
있는 데다가 군부 쿠데타설이 귀청 아프게
나돌고 있었기 때문에 거기에 대비해서
세워놓은 작전계획을 말한다.
  "무슨 정보 못 들었나?"
  "예, 각하, 못 들었습니다."
  <무슨 정보 못 들었나?>라니, 이게
도무지 장도영이 맑은 정신으로 하는
질문이었을까, 아니면 경황이 없어
  박상훈은 분명히 이상국에게, 이상국은
이희영과 이철희에게, 이철희는 분명하게
장도영에게 공수특전단도 쿠데타
출동부대라는 점을 강조했었다. 그랬는데
<무슨 정보 못 들었나?>라니. 이것 또한
이날의 장도영의 조치를 의심케 해주는
한가닥이었다.
  "모든 훈련계획을 중지하라. 상황에
이상이 있으면 즉시 보고해. 내 위치는
506방첩대다."
  여기까지 말했던 장도영은 황급히
덧붙였다.
  "아, 그리고 내일 아침 7시까지
부대이동을 금지한다. 별명이 있을 때까지
대기하라!"
  장도영이 공수특전단 단장 박치옥에게
있었다. 그는 박치옥을 자기 사람으로 믿고
철저하게 신임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박치옥을 공수특전단 단장으로 끌어준 것이
장도영 자신이었기 때문이었다.
  장도영 그는 육군 참모총장에 발탁되자
얼마 뒤 박치옥을 공수특전단 단장으로
끌어주었던 것이다. 장도영이 박치옥을
믿을 만한 일이기도 했다.
  (설마 박치옥이 제가 나를 배신이야 하지
않겠지.)
  그래서 은성에서 506방첩대로 달려오는
차중에서 이철희가 공수특전단도 쿠데타의
행동부대의 하나라고 귀띔해 주었던
것이나, 박치옥에게 한해서만은 엉뚱한
질문을 던졌던 것이다.
  그러나 장도영은 마음 한구석에 아무래도
  박치옥과의 통화를 끝내자 장도영은
공수특전감 육군 준장 장호진(張好珍)에게
전화를 걸었다.
  "장 준장은 지금부터 공수단의 동태를
엄중 감시하고 이상이 있을 때는 즉시
보고하시오."
  상대방이 무엇 때문에 그러느냐고
반문하는 것 같았으나, 그는 장호진이 미처
말을 끝내기 전에 전화를 끊어 버렸다.
  이것으로 장도영은 반란 음모를 분쇄해
버릴 수 있는 모든 조치를 취했다고
자신했던 모양이다. 그는 서둘러
506방첩대를 빠져나갔다. 이철희에게도
이희영에게도 별다른 지시를 내리는 일
없이.

돌아오겠다고 하는 한마디를 남기고 자리를
떴으니 곧 돌아오리라 믿고 천천히 술잔을
기울이고 있었다. 아니나 다를까, 장도영이
자리를 뜬 지 한 시간도 못 돼 돌아온
것이다.
  그는 방으로 들어서자 제 자리에 털썩
주저앉으며 술잔을 들어 접대부 앞에
내밀었다.
  접대부가 술잔에 술을 채우고 있는
사이에 사죄하듯 뇌까렸다.
  "미안하오, 자리를 떠서. 별 것도 아닌
것을 가지고 공연히 법석을 떠는
바람에......."
  그러면서 그는 술잔에 술이 다 채워지자
단숨에 목구멍에 쏟아부었다. 그는 쿠데타
모의를 별 것도 아닌 것을 가지고 법석을
기울였다. 인간에게 운명이 있듯이
국가에도 운명이 있다는 것을 느끼지
않았는가?
  훗날, 장도영은 이런한 일련의 사실
때문에 <장도영은 양다리를 걸쳤던
인물>이라는 혹평을 듣게 된다.
  그가 쿠데타 그룹과 장면 정권에게
양다리를 걸쳤든 걸치지 않았든 간에
장도영은 별 볼일 없는 인물이었다는
느낌이 자꾸 드는 것은 어쩔 수가 없다.
엉거주춤하기만 했던 그의 자세, 군인답지
못한 그의 어깨에 별을 세 개씩이나 달아
주었던 인물들 또한 눈뜬 장님이었다는
가시돋친 질책을 퍼붓지 않을 수 없게
한다.


  앵--!
  앵--!
  사이렌 소리가 요란했다. 헌병들을 실은
드리쿼터를 선도하는 헌병 백차가 질주하며
울리는 사이렌 소리였다.
  그 사이렌 소리에 김재춘은 번쩍
제정신으로 돌아왔다. 그는 지금껏 여전히
아스토리아호텔 커피숍 한쪽 구석에 앉아
오늘 밤이 삶과 죽음의 갈림길이라고
단정하고 있었기에 시간이 흐르는 것도
잊은 채 깊은 상념에 사로잡혀 있었던
것이다.
  그의 상념을 깨버린 것이 바로 헌병
백차가 질주하며 울리는 사이렌 소리였던
것이다.
  (저 사이렌 소리는?)
  순간, 불길한 예감이 스친 그는
부지불식간에 시계를 들여다보았다. 9시가
넘어 있었다. 그는 후닥닥 놀란 토기가
튕겨지듯 일어섰다. 그리고는 밖으로
황급히 달려나가 세워둔 지프에
뛰어올랐다.
  (거사 계획이 탄로난 게 아냐?)
  핸들을 잡고 있는 그의 머리 속에는 이
한 가지 생각만으로 꽉 차 있었다.
  액셀러레이터를 힘껏 밟았다. 차량의
통행이 뜸한 것이 천만다행이었다.
  (만일 탄로났다면?)
  어떻게 대처해야 하느냐가 문제였다.
  대처 방안을 생각해 보았으나 묘안이
떠오르지 않았다.
  "빌어먹을!"
터져 나왔다. 경황이 없으니 두뇌도 놀라
회전을 정지했는가 보다. 남대문에 이르자
일단 길 옆에 차를 세웠다. 제6관구
사령부에 전화를 걸어봐야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마침
삼해약방(三海藥房)이라는 간판이 망막
속으로 파고 들어왔다. 차에서 뛰어내리자
그는 약방 안으로 뛰어들어갔다.
공중전화의 송수화기를 집어들기가 무섭게
다이알을 돌렸다. 신호를 보내는 소리가
울리기가 무섭게 상대방에서 전화를 받는
것이었다.
  "나, 참모장이다. 박원빈 중령을
바꿔라."
  "자리에 없습니다."
  (빌어먹을, 어디에 갔기에 자리를
  김재춘은 신경이 송곳처럼 뾰족하게
곤두서는 것을 누르며,
  "그럼, 주번사령 바꿔라!"
  불과 몇 초 사이에 낯익은 육군 중령
이경화(李京華)의 목소리가 귓전을 울렸다.
  "주번사령 이경화 중령입니다."
  "사령부 내의 상황이 어떤가? 이상
없는가?"
  "지금 사령부에 비상이 걸려 전
장병들에게 귀대명령이 내려졌습니다. 뭔가
잘못된 것 같습니다."
  사령부에 비상이 걸리고 전 장병한테
귀대명령이 내려졌다? 이건 잘못돼도 뭔가
크게 잘못된 게 틀림없었다. 이 비상은
물론 말할 것도 없이 사령관 서종철이
당직사령 이경화에게 전화로 명령해서
사령관 서종철이 취한 조치는 이 한
가지뿐이었던 것이다.
  "알았다. 곧 들어가마."
  그는 일단 전화를 끊었다가 다시
다이알을 돌리기 시작했다. 신당동
박정희의 집에 전화를 걸었던 것이다.
박정희와는 곧 연결이 이루어졌다.
  "각하, 시내에는 헌병 백차들이 질주하고
있고, 6관구 사령부에는 비상이
걸렸습니다. 아무래도 계획이 탄로난 것
같습니다."
  "뭐요, 계획이 탄로나?"
  박정희는 꽤나 놀라는 눈치였다.
  "각하, 제가 먼저 사령부로 들어가서
가능한 모든 조치를 취하겠습니다. 예정된
시간보다 좀 늦더라도 꼭 사령부로 와
  "알았소, 내가 도착할 때까지 김 대령이
모든 일을 맡아서 수고해 주시오."

  김재춘의 전화를 받고 난 박정희는
하늘이 무너지는 듯한 절망감에
사로잡혔다.
  (탄로가 난 모양이라니?)
  너무나 기가 막혔다. 오늘이 있기를
얼마나 고대했는데 탄로가 나? 그러나 그는
결코 당황하지는 않았다. 육군 정보학교장
육군 준장 한웅진이 얼굴색이 하얗게
질려서 물었다.
  "김 대령이라니 누굽니까?"
  "6관구 사령부 참모장 김재춘 대령이오!"
  "그가 계획이 탄로났다고 했습니까?"
  "아니 탄로난 게 아니라 탄로난 것 같다
  "만일 탄로났다면 이제 어떻게 하실
생각이십니까?"
  "당장 뭘 어떻게 한다기보다도 좀더
하회를 기다려 봅시다."
  계획이 탄로나 잡혀가는 한이 있더라도
의연하게 처신해야 되겠다고 박정희, 그는
스스로를 타이르고 있었다.
  (쿠데타란 죽기 아니면 살기인 것을.)
  그렇다. 쿠데타란 결사의 각오 없이는
전혀 불가능한 일이었다. 어차피 생사관은
뚜렷이 확립해 놓고 있는 처지, 운명의
신이 생과 사, 어느 쪽으로 내몰든 결코
당황하거나 비겁한 몸가짐은 하지
않으리라. 박정희는 스스로를 타이르고 또
타일렀다.
  헤드라이트를 환하게 밝히고 제6관구
옆의 담장을 등지고 군복차림을 한
사람들이 옹기종기 모여 서 있는 것이 눈
속으로 파고 들어왔다. 김재춘은 지프에서
뛰어내려 그들 앞으로 다가갔다.
  헤드라이트의 불빛 덕분에 그들의 모습을
금방 가려볼 수가 있었다. 그들은 육군
준장 윤태일(尹泰日)과 송찬호를 위시해서
모두 8기생들인 이석제(李錫濟),
오치성(吳致成), 김형욱(金炯旭),
길재호(吉在號), 유승원(柳承源), 그리고
육군 소령인 이낙선(李洛善) 등이었다.
이들이 바로 혁명을 모의한 이른바
주체들이었다.
  그들이 H아워 직전까지 제6관구 사령부로
집결하기로 계획되어 있었다. 쿠데타
지휘본부가 바로 여기로 정해져 있었기
  "왜 들어가지 않고 여기 모여 서 있는
거요?"
  "사령부에 비상이 걸렸어요. 그래서
들어가지를 못하고 엉거주춤해 있는
겁니다."
  누군가가 그렇게 대꾸했다.
  "미안하게 됐소, 밖에 일이 있어서
나갔다 오느라 늦어졌소. 잠시 동안만
기다려 주시오."
  김재춘은 정문으로 달려가 위병장교를
불렀다.
  소령 계충의(桂忠義)가 달려왔다.
  "귀관은 어째서 저 장교님들을 밖에 서
있게 했는가? 저 장교님들은 육군본부에서
비상소집 상황을 감독하고자 나오신
감독관이라는 것을 모르더란 말인가?"
  "몰랐습니다. 참모장님!"
  "몰랐다는 게 말이 돼? 위병장교가
모르면 누가 안단 말인가? 어서 통과시켜
드려!"
  "네, 알겠습니다."
  위병들에 의해서 정문 앞에 쳐놓았던
가시철망 바리케이드가 곧 치워졌다. 9명의
쿠데타 그룹 멤버들은 그제야 위세를
부리며 영문 안으로 들어갔다. 우리는
육군본부에서 파견된 감독관이라는 몸짓을
하면서.
  사령부 건물 안으로 들어서자 그때 막
사령관 서종철한테서 김재춘에게 전화가
걸려왔다.
  "참모장이오?"
  "네, 각하."
사령부가 쿠데타의 지휘본부라는데
참모장은 알고 있소?"
  "별안간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김재춘은 시침을 뚝 뗐다.
  "나도 무슨 얘긴지 통 모르겠소. 하여간
나도 곧 그리로 갈 테니 참모장이 부대를
장악해 주시오."
  "네, 각하. 잘 알았습니다."
  "쿠데타 관련 장교들이 있다면 지체없이
체포 감금해 놓도록."
  서종철은 전화를 끊으려다가 한마디
곁들여 지시하는 것이었다.
  김재춘은 긴장된 가운데도 풀썩 웃음이
터지려는 것을 억제하기가 어려웠다.
하기야 사령관 서종철은 김재춘이 쿠데타에
가담해 있다는 사실을 이 순간까지도 전혀
내렸을 수밖에 더 있겠는가? 고양이한테
반찬 가게를 맡겨놓는 격이었다. 이것은
뒷날의 김재춘의 술회다.
  그런데 장도영이 서종철한테 전화를 걸어
귀대해서 사령부를 장악하라고 명령한 것이
언제인데, 그는 아직도 사령부로
돌아오지를 않고 밖에서 전화로만 명령을
내리고 있더란 말인가? 이러한 서종철의
몸가짐을 통해서도 뒤로 자빠져도 코가
깨질 수밖에 없었던 대한민국 장면 정권의
운명을 또다시 절감치 않을 수가 없게
된다.


  제6관구 참모장 육군 대령 김재춘은
그룹 멤버들은 자기 방에서 대기하도록
이른 다음, 사령부 참모들을 부사령관실에
모이라고 지시했다. 이어서 그는 본부사령
계충의에게 명령했다.
  "지금 곧 병력 2개 소대를 차출해서
완전무장시켜 사령부 외곽경비를 담당케
하고, 또한 육군본부에서 파견된
장교들에게 권총과 칼빈총을 지급하라."
  이때 당직사령 이경화가 들어왔다. 그는
김재춘이 귀대하기까지 참모총장 장도영과
사령관 서종철한테서 몇 차례 전화가
있었다는 사실을 알려주었다.
  "지금 사령관 각하께서는 어디에
계시는가?"
  "어디 계신다는 말씀이 없었습니다.
수시로 전화 주시겠다고만 하셨습니다."
잘되었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사령부에 나타났다 하면 어차피 체포를
해서 어디엔가 감금을 해야 한다. 그래도
상관으로 모시고 있던 처지, 아무리 혁명을
일으키는 마당이라 하더라도 지금까지의
상관을 체포해야 한다는 것이 말과 같이
그리 쉬운 노릇인가.
  (차라리 잘된 일이야.)
  김재춘은 속으로 그렇게 생각했다.
  그러나 그것은 김재춘의 입장으로서는
다행한 일이었는지 모르나 역사(歷史)의
입장으로서는 불행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제6관구 사령관 서종철은 이 시간 6관구
사령부 안에 있어야 한다. 육군 참모총장
장도영은 분명히 <지금 귀관의 사령부
안에서 반란 모의가 진행중에 있다는
하시오>라고 서종철에게 명령했었다.
  그랬는데도 그는 어째서 이 자리에
나타나 있지 않았는가? 사령부 안에서
반란모의가 진행되고 있다는 말을 듣자
겁을 집어먹고 감히 귀대를 하지 못하고
있는 건가? 그래서 제6관구 예하의 부대로
피신해서 반란모의를 진압할 대책을
강구라도 하고 있단 말인가?
  서종철은 전화를 통해서 김재춘에게
부대를 장악하라고 지시했다. 참모장
김재춘은 쿠데타에 관련되어 있지 않다고
믿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다면 사령부
안에서 반란모의가 진행중이었다면
반란모의자들에 의해서 김재춘이
체포당했을 법한 일인데 그는 무사했고
사령관의 전화까지를 받지 않는가?
사령부에 나타났어야 옳았다. 그랬어야
군인으로서의 그의 자세는 당당했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도 그는 여지껏 이
시간까지, H아워가 지난 시간까지도
나타나지 않고 있는 것이다. 이것만을
가지고 말한다면 그는 분명히 <명령
불복종죄>를 저질렀고 <직무유기>를 범했다
할 수 있다.
  그러나 그는 육군 소장이다.
육군사관학교를 나와 장교로 임명됐다고
해서 누구나 별을 달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장성 심사위원회 위원들한테 돈보따리를
싸가지고 다니며 뇌물로써 별을 단 것이
아닌 이상에는 그만한 능력이 인정되어
별을 달았을 것이다.
  그런 능력 있는 서종철이 최고 총수의
않고 반란을 진압하려는 적극적인 조치도
취하지 않았다.
  제6관구 사령관 서종철은 지금 어디에
가서 무엇을 하고 있는가? 전화를 끊자,
그는 제6관구 사령부로 가지 않고
육군본부로 차를 몰아 헌병감 육군 준장
조흥만을 찾아갔던 것이다.
  "조 장군, 도대체 어찌된 노릇이오.
6관구 사령부 안에서 반란모의가
진행중이라니? 오늘 퇴근하는 그
시간까지도 반란 같은 징후는 전혀
보이지가 않았는데 무슨 뚱딴지 같은
소린지 모르겠소. 꼭 도깨비한테 홀린 듯한
느낌이오."
  "그러게 말입니다. 총장은 즉시 헌병을
동원해서 반란모의자를 체포하라는 추상
날벼락인지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헌병을 6관구 사령부로 보내기는
보냈습니까?"
  "예, 보냈습니다."
  조흥만이 헌병을 급파했다고 말하자,
서종철은 제6관구 상황이 어찌돼 있는지
알아봐야겠다고 생각했던 모양이었다. 그는
제6관구 사령부에 전화를 걸어 김재춘을
찾았으나 부재중이라고 했다. 5분 간격으로
계속 다이알을 돌려 김재춘을 찾았으나
연결이 되지 않아, 더 이상 지체할 수
없다고 생각한 그는 당직사령을 불러
명령했다.
  "즉각 비상을 걸어 각급 참모들을 전원
소집하고 참모장이 귀대하면 보고하도록
하라!"
김재춘이 귀대하거든 귀대했다는 사실을
자기에게 보고하라는 소리인가, 아니면
비상을 건 사실을 참모장한테 보고하라는
소리인가? 하여간에 서종철이 이런 조치를
취한 것이 9시에서 9시 반 사이, 그리고는
그는 결과만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김재춘이 귀대하기 전 헌병감 조흥만이
급파한 헌병감실 수사관 70명은 이미
제6관구 사령부에 도착해 있었다. 헌병감실
수사요원들을 거느리고 제6관구 사령부로
출동한 지휘자는 헌병차감 대령
이광선(李光善)이었다.
  "이 대령, 귀관은 지금 즉시
수사요원들을 대동, 제6관구 사령부로 긴급
출동해서 거기에 모여 있는 쿠데타 관련
장교들을 전원 체포해 오시오."
사령부로 급파하면서 이렇게 말했던
것이다. 허나, 그들로서는 누가
반란음모자들인지 가려내기가 어려웠다.
모두가 얼키고 설켜 우왕좌왕하고 있을
뿐이었다.
  김재춘은 쿠데타 그룹 멤버들을
참모장실에 대기시켜 놓은 다음
헌병감실에서 파견한 수사요원들을
불러모았다.
  "나는 6관구 사령부 참모장 김재춘이다.
우선은 옥석을 구분해야 제관들의 임무를
수행할 수 있게 될 줄로 안다. 나 역시
지금으로서는 누가 누군지 구분하기가
어렵다. 그러므로 귀관들은 잠시 저기
창고에 가서 대기하고 있도록 하라!"
  제6관구 사령부 건물 옆에는
김재춘은 특파된 수사요원들을 모조리 이
창고 안으로 들어가게 했다.
  "앞으로 내 명령 없이는 절대로 위치를
이탈하지 말라! 알겠나?" 하고, 엄명까지
내렸다. 김재춘의 이 조치로 일단은 위급한
상황은 모면한 셈이었다.
  이때가 10시경이었다. 수사요원들을
창고에 연금시키고 나자 김재춘은 즉시
신당동 집의 박정희에게 전화를 걸었다.
  "각하, 30사단의 부사단장하고
참모장이란 놈이 사단장한테 밀고를 하는
바람에 일이 탄로났습니다. 그래서 30사단
출동도 어렵게 되었고, 지금 제6관구
사령부는 뒤죽박죽입니다."
  "탄로가 났다고?"
  "네, 각하!"
  박정희의 두번째 반문은 거의 비명에
가까운 듯한 목소리였다. 한동안 침묵에
잠겨 있다가 간신히 말소리가 이어졌다.
  "알겠소, 내 곧 그리로 가겠소."
  박정희와 전화통화를 끝내고 나자
김재춘은 이번에는 이광선을 설득하기
시작했다. 이광선은 김재춘과 육사 5기
동기였다.
  "여보 이 대령, 박 장군하고 통화내용을
들어 알겠지만 이 쿠데타는 박 장군이
주도해서 일으키려 하고 있는 거요. 당신은
헌병감의 명령을 받고 출동했겠지만 사실은
자온영 총장 각하께서도 우리를 은근히
지원해 주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하오.
그러니 헌병감의 명령을 수행하려 할 것이
아니라 우리한테 협력하는 것이 좋을
  이광선은 난처하기만 했다. 그는 처음
제6관구 사령부로 수사요원들을 거느리고
달려왔을 때에는 누가 쿠데타 모의자인지
구별을 하지 못하고 있었다. 조흥만이 그를
보낼 때, 쿠데타 음모자들은 이러저러한
장교들이라고 이름을 분명히 밝혀 주었던
것은 아니었다. 덮어놓고 제6관구 사령부로
출동해서 쿠데타 음모자들을 잡아오라고
막연한 명령을 내렸던 것이다. 그가
수사요원들을 거느리고 제6관구 사령부로
들이닥치는 즉시로 체포의 손길을 뻗치지
못했던 것도 이 때문이었다.
  그러다가 시간이 흐르면서 어떤 자들이
쿠데타 음모자들이냐 하는 것은 대강
눈치로 추측할 수 있었다. 그래서 명령을
수행하려 하는데 김재춘이 수사요원들을
이광선은 김 대령이 자기의 사령부에서
일이 벌어지려 하는 것을 알고 책임상 자기
스스로 사태를 수습하려 하는가 보다 하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수사요원들을 창고로 몰아넣고는
박정희에게 쿠데타가 탄로났다고
전화보고를 하는 게 아닌가. 전화보고를
들으면서 이광선은 얼마나 놀랐는지
모른다. 꼭 믿는 도끼에 발등을 찍힌 듯한
느낌이었다.
  (김 대령도 쿠데타에 가담해 있던 사람
중의 한 명이었단 말이지, 그렇다면?)
  그렇다면 어찌해야 하는가?
  (김 대령이 쿠데타 음모자의 한
사람이라는 것을 안 이상에는 동기생이라는
정에 이끌려 방치할 수 없는 일 아닌가?
  이광선이 이렇게 결심을 굳히고 있는데,
김재춘이 그를 붙들고 설득을 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이광선은 황해도 재령(載寧) 출신이며,
재령 명신중학교를 나왔다. 황해도인을
가리켜 석전경우(石田耕牛) 운운하고
있지만 순수 황해도 토박이는 사람됨이
여간 무르지가 않다. 이광선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의 머리 속에는 자꾸
<김재춘은 동기생인데> 하는 생각이 맴돌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김재춘의 입을 막지
못하고 우물쭈물하고 있었던 것인데 그것을
눈치챘는가? 김재춘이 더욱 열을 올리며
그를 설득하였다.
  "이 대령, 우리하고 손을 잡읍시다.
우리가 왜 쿠데타를 하려고 하는지는 이
정권을 이대로 놔두다간 안 되기 때문이오.
그래 군인이 돼 가지고 나라가 망하는 꼴을
바라보고만 있어야 하겠소?"


  "어찌된 노릇이야, 죽든 살든 나오겠다고
했으면 나와야 할 게 아냐?"
  김재춘은 신경이 날카로울 대로
곤두섰다. 당초의 계획은 박정희는 H아워
직전까지 제6관구 사령부로 나오기로 되어
있었다. 그것을 박정희가 H아워까지 나오지
못한 것은 김재춘이 혁명모의가 누설됐다고
보고했기 때문에 시간적인 차질은 있을 수
있었다.
  그렇다 하더라도 일단 나오겠다고 약속한
있어야 옳았다. 그런데 시계는 11시를
가리키고 있는데도 여지껏 코빼기조차 볼
수가 없으니 어찌된 노릇이란 말인가?
  (혹시 출동하다가 방첩대에 체포된
것이나 아닐까?)
  자꾸만 체포됐을 것이라는 상념만이
일었다. 쿠데타 모의가 밀고된 이상에는
주모자가 누구라는 것도 밀고됐을 것이고,
그러고 보면 방첩대에 체포당했을 가능성이
너무나 짙었다.
  (빌어먹을, 사람의 애간장을 이렇게
태우다니?)
  김재춘은 연방 시계만 들여다보다가 다시
한번 확인할 양으로 신당동 집에 또 전화를
걸었다. 전화를 받는 사람은 박정희의 아내
육영수(陸英修)였다. 그녀의 대답은
떠난 지가 한 시간 가량이나 됐다는
것이다. 신당동에서 이태원을 거쳐 영등포
제6관구 사령부까지 오는 데 30분이면
넉넉했다. 집을 떠난 지가 한 시간
가량이나 됐는데도 여지껏 나타나지 않고
있다면 사고임이 분명했다.
  김재춘의 마음은 또다시 조급해지기
시작했다. 그는 박정희가 갔을 만한 곳에
전화를 걸어 수소문해 보았다. 여전히
오리무중일 따름이었다.
  (빌어먹을! 혁명 총지휘자가 거사시간이
넘어도 지휘소에 나타나지를 않고,
그래가지고 무슨 놈의 혁명을 하겠다는
거야?)
  김재춘은 치미는 분노에 몸을 떨었다.
  "참모장님, 뭐라 지시를 내려주셔야
  비상소집에 응해서 허둥대며 달려온
제6관구 사령부 소속 장교들은 한 시간이
넘도록 아무 지시가 없는 데에 뭔가 이상한
공기를 느꼈던 모양이었다.
  육군본부에서 비상소집을 감독하러
나왔다는 장교들도 참모장실에서
웅성거리고 있을 뿐이었다. 헌병감실
수사관들은 무엇 때문에 출동을 했고
참모장은 왜 그들을 제사공장 창고에 쓸어
넣었는가? 모든 움직임이 수상쩍게
보여졌을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었다.
  "참모장님......."
  "별명이 있을 때까지 기다리고 있어!"
  김재춘으로서는 그렇게 말할 수밖에
없었다.
  (박 장군, 당신은 지금 어디에 있는
  김재춘의 속은 자꾸만 타들어갔다.
입술이 바싹바싹 말라붙기조차 했다.














  3. 버마식 쿠데타


  박정희는 D데이 H아워에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었을까? 그의 동정을 살펴보기 전에
여기서 잠깐 숨을 돌리자.
  박정희를 중심으로 한 군부의 일부
영관급 장교들이 쿠데타를 계획하고 동지를
규합해서 쿠데타를 일으키려는 D데이에
이르기까지 장면 정권의 수사기관에서는
여기에 대한 정보를 전혀 입수하지 못하고
있었던가? 아니다. 그렇지는 않았다. 장면
정권하의 수사기관에서도 정보는 입수해
놓고 있었다. 그 내용은 국무총리
장면에게까지 보고되어 있었다. 그러므로
좋을 것 같다.
  장도영이란 인물은 어떤 인물인가?
1960년 8월 민주당의 장면 정권이 출범할
때의 장도영의 계급은 육군 중장으로서
대구에 있는 제2군 사령관이었다.
  그는 평안북도 신의주(新義州)
출신으로서 관서(關西)의 명문인 신의주
동중학교를 거쳐 일본 도쿄(東京)에 있는
도요(東洋)대학 영문학부에 진학했다. 당시
도요대학은 삼류급에 속하는 대학이었다.
그는 대학 2학년 때에 학병으로
끌려나갔다. 다행히 종전이 될 때까지 죽지
않고 살아남았다.
  해방과 함께 고향으로 돌아온 그는
모교에서 영어교사로 봉직했다. 이때
신의주 학생사건이 터졌다. 1945년 11월
아무런 관련이 없었다. 그러나 그는
지주계급 출신이었기 때문에 그에게도 자연
혐의가 씌워지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지체없이 38선 이남으로 월남을
해버렸다. 그러나 서울에 생활 근거가 없는
그로서는 호구지책을 마련할 길조차
막연했다. 그래서 그는 그와 같은 처지의
북한 출신 청년들이 그러했듯이 그도
군대에 들어감으로써 호구지책을 세울
결심을 했다.
  그가 월남해 왔을 그 무렵 때마침 미
군정에서는 군정법령 제28호로
국방사령부를 설치한 다음
군사영어학교(軍事英語學校)를 개설,
학새을 모집하고 있었다. 기초적인
군사영어를 해독하는 미군 지휘관의
목적이었다.
  정원은 모두 60명으로 일본군 출신 20명,
만주군 출신 20명, 광복군 출신
20명이었다. 이렇게 군사경험이 있는 자들
가운데서 60명을 선발, 1945년 1월 14일,
국군의 모체인 남조선 국방경비대가
창설되자 미 군정은 당초의 목적과는 달리
군사영어학교 출신자들을 그들의 예전의
군사 경력을 참작해서 육군 소위에서
대령까지의 계급을 주어 임관시켰다.
  장도영은 11946년 1월 15일부로 육군
소위에 임관되었다. 이때는 경비대 창설
초기라 장도영은 마치 우후죽순처럼 계급이
뻗어올라가 한국전쟁을 치르고 4.19를 거쳐
민주당의 장면 정권이 들어설 무렵에는
벌써 별이 세 개나 되는 육군 중장에까지
  한데, 장도영이 별을 단 직후부터 어느
사이엔가 그에게는 <정치 장군>이란 별명이
붙었다. 그에게 그런 별명이 붙여진
까닭인즉, 자유당 정권의 제2인자인 이른바
서대문 경무대(景武臺)라 불리던 국회의장
이기붕의 집에 이들 부부가 무시로
출입하며 이기붕을 <아버지>라고 부르며
모셨기 때문이었다.
  하긴 그가 권력에 아첨하기 위해서
이기붕의 집을 드나들었던 것이
아니었는지도 모른다. 그의 장인인
백기호(白基昊)는 이기붕과는 일제 때부터
절친한 친구 사이, 그래서 이기붕 또한
백기호의 딸이자 장도영의 아내를 친
조카딸처럼 대하고 있어 서대문 경무대를
드나들게 되었던 것이다.
인간들만이 살고 있지는 않다.
  "장도영이 그 작자 권력에나 아첨을 하고
있고, 그래 가지고서야 국군의 체면이 뭐가
돼?"
  이래서 정치 장군이라는 별명이 붙게
되었던 것이다.
  4.19 혁명으로 이승만은 권좌에서
밀려났고 그와 함께 자유당 정권은
망해버렸다. 난처해진 것은 정치
장군이라는 별명이 붙은 장도영이었다.
세상에서는 그가 육군 중장에까지 오를 수
있었던 것은 전적으로 이기붕이가 뒤에서
봐주었기 때문이라고 쑥덕거리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제 어쩔 수 없이 옷을 벗을 수밖에
없겠지?)
자신의 처지를 각오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더구나 젊은 영관급 장교들이 정군(整軍)을
주장하고 나서기까지 하고 있었다. 그런
그들이 정치 장군으로 낙인찍혀 있는 그를
그냥 내버려둘 리가 없었다.
  (몰골 사납게 젊은 장교들한테
쫓겨나기보다는 스스로 내 발로
걸어나가자.)
  장도영은 끝내 결심을 굳히지 않을 수가
없었다. 결심을 굳히고 나자 민주당의 장면
정권이 출범한 지 1개월 가까이 된 1960년
9월 17일, 육군 참모총장인
최경록(崔景祿)에게 예편원을 제출했다.
  막상 예편원을 제출하고 나니 아쉬움만이
남았다. 이때 그의 보직은 제2군
사령관으로서 운이 좋으면 곧바로 육군
했다.
  (끝내 육군 참모총장 한번 해보지 못하고
군을 떠나고 말아야 하나?)
  그의 꿈은 육군의 총수인 참모총장까지
승진하는 일이었다. 하기야 별을 단
장군치고 육군 참모총장이 되는 것이 꿈이
아닌 장군은 없다. 그러나 그 꿈을 이루는
자는 손으로 꼽을 정도도 얼마 되지
않는다. 대부분의 경우 육군 참모총장 의자
근처에 접근도 해보지 못하고 군을 떠나야
하는 경우가 허다했기 때문이다.
  장도영이 서울로 올라와 육군 참모총장
최경록에게 예편신청을 내고 대구로
내려왔는데, 10여 일 뒤 최경록으로부터
장거리 전화가 걸려왔다.
  "여보, 장 장군, 당신의 예편신청서는
  "반려되었다구요?"
  장도영은 속으로 후유 하고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반문했다. 절로 콧노래가
흘러나올 것 같은 기분이었다.
  "그렇소, 그러니 장 장군, 당분간 예편을
잊고 현직에 더욱 더 충실해 주시면
고맙겠소."
  최경록은 당부까지 하는 것이었다.
  장군이, 그것도 별을 두 개나 셋을 단
장군이 예편원을 내면 군말없이 즉각
받아들여지고 있을 때였다. 이종찬,
백선엽(白善燁), 유재흥(劉載興) 등 6.25
한국전쟁의 영웅들이 4.19 이후의
사회분위기에 밀려 예편해야 했던 대표적인
케이스였다. 장군다운 장군들도 군말없이
예편이 받아들여지고 있을 때 정치
해서 예편원이 반려되었던 것인가?
  그것은 전적으로 그의 아내의 눈부신
활약 덕분이었다. 미국 유학 출신인 그의
아내는 영어가 능통했다. 그로 인해서
한.미 고급 장성들이 부부동반으로 파티를
가질 때는 장도영의 아내는 단연 으뜸가는
스타였다. 그랬기 때문에 한국군 장성들
가운데서는 장도영만큼 미 8군 장성들과
친숙한 장군도 없었다.
  아내가 발 벗고 나서 주었다.
  "젊은 장교들이 부패 장군, 정치 장군
나가라는 소리가 드높지만 저의 남편만큼
오로지 군의 발전을 위해서 수고한 장군도
그리 많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저의
남편은 후배들한테 길을 열어주어야
한다면서 에편원을 냈습니다. 지금 한창
말입니다. 장군 하나 만드는 데 얼마나
많은 돈이 먹힙니까? 그렇게 엄청난 돈을
들여 만들어진 장군인데 이제 젊은
장교들의 성토 소리가 높다해서 군을
떠나야 하다니 이게 말이 됩니까?"
  옳은 말이었다. 장군 하나 만드는 데는
엄청난 돈이 든다. 더구나 장도영은 아직도
정력적으로 일할 나이인 38살이다.
  한국군의 인사문제에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던 미 8군의 수뇌들은 장면 정권에
장도영 장군을 예편시켜서는 절대로 안
된다고 압력을 넣었다.
  대학 시절 영문학을 전공했던 장도영
또한 영어가 능통했다. 한국 장성들
가운데에는 장도영만큼 영어에 능통했던
장군도 없었다. 그 영어 하나 잘하고 있던
<유능한 한국군 장성>으로 인정을 받고
있기까지 했었다.
  이렇게 장도영은 아내의 이면공작과 그의
유창한 영어 덕분에 군에서 밀려나는
치욕을 면할 수 있었던 것이다. 만일
장도영이 낸 예편원이 수리되었더라면
박정희의 운명 또한 삼백육십도로 뒤바뀔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기이한 것이 인간의 운명이었다.


  장도영에 관한 얘기를 늘어놓다 보니
아무래도 장도영과 박정희의 인간관계 또한
미리 밝혀두는 것이 좋을 것 같다.
그래야만 앞으로 벌어지는 사건들에 대해서
믿어지기 때문이다.
  장면의 민주당 정권이 막 출범했을 그
무렵, 육군본부에서는 박정희의 예편문제가
거론되었다.
  "제너럴 박을 예편시키십시오. 사상이
불투명한 사람을 군에 오래 놔두는 것이
아닙니다."
  박정희를 예편시키라고 강력히 요구하고
나선 것은 정군 운동을 일으키고 있던
한국군의 영관급 장교들이 아니라 바로 미
8군 수뇌부였다. 미 8군 수뇌부가 한국군의
장성 인사문제에 깊숙이 관여하고 있기는
했으나 누구를 꼭 집어서 에편시켜라 말라
하고 압력을 가한 일은 없었다. 그런데
이번에 한해서는 박정희를 예편시키라고
대놓고 요구하고 나섰던 것이다.
이유로서 <사상적으로 불투명>을
운운했지만 사실은 그게 아니었다. 그것은
어디까지나 구실이었고 진실된 이유는
박정희를 인간적으로 싫어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어째서 그들은 박정희를 싫어하고 있었던
것이었을까? 그것은 박정희가 다른 한국군
장성들처럼 미 8군의 장성들하고 골프를
친다든가 또 파티를 연가든가 하면서
의식적으로 접근하지도 않았고, 또 미군
고문의 참견에 고분고분하지도 않았기
때문이었다.
  인간사회란 동서를 막론하고 자주
어울림으로써 정도 생기고 유대도 강화되기
마련이다. 그런데 박정희의 경우 영어가
서툴다는 이유에서가 아니라 그는
때문에 박정희는 미 8군 장성들하고
어울리는 것을 극도로 기피하고 있었다.
  그는 어째서 생리적이라 할 만큼 미국
사람을 싫어하고 있었던 것이었을까?
장군이 되고 나서도 <미국놈, 미국놈> 하고
원색적인 욕설을 퍼붓기를 주저하지 않는
그였다. 어째서 그랬을까?
  미 8군 수뇌들이 박정희의 예편을
요구하고 나섰을 때의 그의 보직은
육군본부
작전참모부장(作戰參謀副葬)이었다. 요직
중의 요직이었다. 바꾸어 말하면
누구보다도 미군 장성들하고 우의를 돈독히
해두고 있어야 할 자리라 할 수 있었다.
그래야만 일단 유사시에는 한.미
합동작전을 원만히 수행할 수 있기
  박정희가 미국인을 생리적으로 싫어하는
것을 미 8군 수뇌들도 피부로 느끼고
있었으리라는 것은 십분 짐작할 수 있는
일이다. 그래서 그들은 사상적 불투명을
운운하며 박정희의 예편을 요구하고 나섰던
것이다.
  당황해진 박정희는 미군 장성들하고
누구보다도 친한 장도영에게 <살려 달라>고
SOS를 쳤다. 아무리 주위를 둘러보아도
지금 당장 박정희를 살려줄 수 있는 능력을
지니고 있는 사람은 장도영 말고는 누구도
없었던 것이다.
  박정희로부터 구원의 탄원이 있자,
장도영은 주저치 않고 구원의 손길을
뻗쳤다.
  "최 장군, 박 장군을 제2군 부사령관으로
  장도영은 육군 참모총장 최경록에게
부탁을 했다.
  물론 최경록은 장도영의 부탁을 물리치지
않았다. 그는 박정희의 예편을 강력히
요구하는 미군 장성의 압력을 뿌리치고
그를 제2군 부사령관으로 내려보내 주었던
것이다.
  이로써 박정희는 세번째로 장도영의
은혜를 입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면 박정희는 언제, 어느 때 장도영의
은혜를 입었던 것인가? 첫번째 박정희가
장도영의 은혜를 입은 것은 그가 군복을
벗고 보수 없는 문관으로 재직하고 있을
때였다.
  이미 세상에 널리 알려져 있는
사실이지만 박정희가 공산주의자들의
사실이 탄로난 것은 1949년의 여순반란사건
직후 벌어졌던 숙군작업 때였다. 이때
무기징역을 받고 복역중에 있던 그를 밝은
세상으로 끄집어 내준 것이 만주군관학교
출신 동료들이었던 정일권(丁一權),
백선엽, 김안일(金安一) 등이었다.
  박정희는 옛 동료들의 덕분에 밝은
세상으로 풀려 나오기는 했으나 그로서는
당장에 할 일이 없었다. 공산주의자로
낙인이 찍혀 군에서 불명예 제대한 그를
써주는 일터도 없었다. 이렇게 되고 보니
당장에 호구지책도 막연할 수밖에 없었다.
  "국장님, 어떻게 제가 좀 일할 수 있는
길을 열어 주십시오. 부탁합니다."
  박정희는 육군본부 정보국장인 육군 대령
장도영에게 매달렸다.
매정하게 뿌리치지를 못했다. 그래서 그는
직제에도 없는 정보국 문관으로 채용해
주었다. 직제에 없으니 보수가 있을 리
없었다. 그래서 월급 때만 되면 장도영이
정보비에서 얼마를 쪼개고 또 정보과장
육군  소령 유양수(柳陽洙)로 하여금
과원들의 월급에서 얼마씩을 떼내어
그것으로 박정희의 호구를 해결할 수
있도록 돌봐주었던 것이다.
  장도영이 박정희에게 그런 인정을 베풀지
않았던들 어쩌면 그도 문관 자리마저
얻지를 못하고 다른 직업을 구하지 않으면
안 되었는지도 모른다. 가장 궁한 처지에
빠져 있을 때에 그는 장도영의 은혜로
끼니를 때웠고, 계속 군에 몸을 담을 수가
있었던 것이다.
만족해 있지 않으면 안 되었을 때 김일성
집단의 남침으로 6.25 한국전쟁이 터졌다.
박정희는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붙잡으려
애썼다. 군의 대.소 부대를 지휘하는
장교가 턱없이 부족할 때라 현역으로
복직하기에는 절호의 찬스였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가 복직하는 데에는 장애가
없지도 않았다. 군 인사법에는 전과로
파면된 자는 2년이 경과되지 않으면 장교로
복직될 수 없다고 못박아 놓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전과도 전과 나름이다.
박정희는 사상문제로 해서 파면된 자,
아무리 그가 전향을 했다 해도 현역으로
복직한다는 것은 하늘의 별따기 만큼이나
어려운 일이었다.
  "살려 주시오!"
장도영에게 또다시 매달렸다. 장도영이
정에 무르다는 것은 익히 꿰뚫어 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장도영은 박정희가 가엾기도 하고 해서
백방으로 뛰었다. 당시 육군의 복직
심사위원장은 황헌친(黃憲親)이었다.
장도영은 황헌친에게 매달리기도 했고,
강문봉(姜文奉), 이기건(李奇建) 등을
설득해서 공동으로 육군 총참모장인
정일권(鄭一權)을 움직이기로 했다. 그
결과, 박정희를 파면 때의 계급인 육군
소령으로 복직시켜 줄 수가 있었다.
  "이 은혜 죽을 때까지 잊지 않겠습니다."
  박정희는 눈물로써 장도영의 인정에
감사를 표했다. 장도영이 백방으로 뛰지
않았던들 복직이라니, 그것도 파면 때의
상상조차 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박정희는
장도영의 그 고마움에 어찌
결초보은(結草報恩)을 다짐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렇게 두 번씩이나 은혜를 베풀어
주었던 장도영이 10년 뒤, 다시 또 예편될
수밖에 없었던 박정희에게 구원의 손길을
뻗쳐 제2군 부사령관으로 끌어줌으로써
세번째로 은혜를 베풀었던 것이다.
  따지고 보면 박정희가 육군 소장에
진급할 수 있었던 것은 오로지 장도영의
무른 인정 때문에 가능했던 것이다.


  장도영의 인정 덕분에 예편을 면한
대구로 내려온 지 얼마 뒤의 일이다.
  "박정희를 엄중 감시하고 그의 동태에
대해서 1주일에 한 번씩 보고하라."
  방첩부대장 육군 준장
박창록(朴昌錄)으로부터 이런 지령이 제2군
방첩대장 이희영한테 떨어졌다.
  (무엇 때문에 박정희 장군을 감시하라는
거야. 그분이 뭘 어쨌다고?)
  이희영은 부대장의 지령이 떨어지자 불끈
반발심이 일었다. 그렇다고 명령을 거역할
수는 없었다.
  아마도 6.25 이전의 사상문제에 석연치
않은 점이 있는가 하고 생각한 그는 대원
중에서 몇 사람을 선발해 특별히 감시조를
편성해서 박정희를 감시토록 했다.
이희영한테는 꽤나 괴로운 임무였다. 그럴
사람의 관계는 좀 남달랐기 때문이었다.
  이희영이 5기생으로 육군사관학교에
입교한 것은 1947년 1월 1일, 이때
박정희는 육군 대위로서 생도대의
제1중대장이었다. 그러나 이때는 두 사람
사이에 남다르다 할 만큼의 인간적 유대가
이루어져 있지는 않았다. 이때 박정희는
이미 남로당의 육군사관학교 군사책으로서
비밀활동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38선 이북
평양에서 공산주의가 싫어 월남해 온
이희영을 증오하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렇듯 소원하기만 한 사이였던 두
사람이 인간적으로 급격히 가까워지게
되었던 것은 1954년 박정희가 제2군단의
포병사령관으로 부임해 오고 나서였다.
이때 이희영은 제2군단의 병기참모였다.
출신이었다.
  앞에서도 잠시 언급한 일이 있지만
1951년 이른바 <5.26 정치파동> 이래
오매불망으로 쿠데타에 대해서 꿈꾸고 있던
박정희였다. 그런 그였기 때문에 쿠데타
동지를 만들기 위해서라도 두 사람한테
의식적으로 접근하려 했음직한 일이었다.
  박정희는 의식적으로 이희영, 이회영 두
사람한테 접근을 했다. 인간 생활에 있어
계급이 낮은 사람이 계급이 높은 사람한테
의식적으로 접근하려 드는 법이지만 이
경우에는 사정이 거꾸로 되어 있었다.
  "어떻소? 좋은 막걸리가 있는데 같이
한잔 하지 않겠소?"
  "보신탕 잘하는 집을 발견했소. 우리
오늘 저녁에 보신탕이나 같이 합시다."
보신탕 집으로 초대했다.
  평양 태생인 이희영과 신의주 태생인
이회영은 소주파였다. 그런 그들도 어느
사이엔가 막걸리를 즐기게 되었다.
막걸리파인 박정희와 어울리다 보니 두
사람도 이제는 술이라고 하면 청탁을
가리지 않게 되었던 것이다.
  <오입쟁이가 계집을 가리지 않듯이
애주가라면 청탁을 가리지 않아야지.>
이것이 술에 대한 박정희의 지론이었다.
그러고 보니 술이라고 하면 박정희는
청탁을 가리지 않았었다.
  사나이들이란 술자리에 자주 어울리다
보면 어쩔 수 없이 친숙해지기 마련이다.
이희영(물론 이회영도 마찬가지였지만)은
이렇게 2군단 시절 자주 박정희와 어울리다
남다른 친숙한 사이가 돼 있었던 것이다.
  앞에서 필자는 박정희가 어쩌면 두
사람한테 의식적으로 접근하려 했는지도
모른다고 했다. 1952년 이래 박정희는 앞의
두 사람한테만 의식적으로 접근하려 했던
것만은 아니었다. 그는 새로운 자리로
옮겨갈 때마다 똑똑하다고 느껴지는
장교들이면 어떻게 해서든 자기 품안으로
끌어들이고자 노력을 해왔었다.
  자리를 옮기고 나더라도 이미 유대를
맺어 놓은 장교한테는 가끔 안부편지도
하고, 또 생일 같은 날에는 생일 축하
서신을 띄워 당사자를 감격하게 해 주기도
했었다.
  과묵하기만 한 그의 성품으로 볼 때 어느
구석에 이런 자상한 정이 있었을까 하는
있어서는 그의 그러한 모든 행동은 미래에
대비해 두고자 하는 원대한 포부에서
비롯되고 있었던 것이다.
  이희영은 인간적 의리상 도저히 마음이
내키지 않는 일이었으나 상급자의 명령을
거역할 수는 없는 일, 그래서 박정희
감시반을 편성해서 그를 엄중 감시케
해놓고 있었으나 한 달이라는 시간이
흐르고 두 달, 석 달이 흘러도 도무지
글에게서는 이렇다할 이상한 낌새를 발견할
수가 없었다.
  (차라리 다행스러운 일이다.)
  이희영은 그렇게 생각했다.
  한데, 61년 1월 중순쯤의 일이다.
  "이 대령, 부사령관 관사로 좀 와
주시오."
  그의 부름을 받은 이희영은 적잖게
의아해 했다. 부사령과으로 부임해 온 이래
그는 한번도 관사로 초청한 일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가 관사를 방문했을 때
박정희는 자리에 누워 있었다. 축농증을
수술했다는 것이었다.
  이런 얘기, 저런 얘기 끝에 박정희는
포단 밑에서 한 장의 편지봉투를 꺼내
이희영 앞에 내놓는 것이었다.
  "이 대령, 알맹이를 좀 꺼내 보시오."
  이희영은 그가 하라는 대로 했다.
알맹이를 꺼냈다. 그것은 접은 편지와 한
장의 사진이었다. 이희영은 그 사진을
유심히 살펴보았다. 군고구마 장수를 찍은
사진이었다.
  "이게 누구의 사진입니까?"
  이희영은 접혀 있는 편지를 펼쳤다.
  첫 줄에 <사랑하는 근혜 아빠에게>라고
쓰여 있었다. 박정희의 아내 육영수가
남편에게 보낸 편지였다.
  "사모님의 편지 같은데 읽어 봐도
되겠습니까?"
  "괜찮아, 읽어 봐!!"
  박정희의 목소리가 좀 거칠었다.
평소에는 경어를 쓰던 그가 이때만은
그렇지 않았다.
  이희영은 육영수의 편지를 읽어 보았다.
그 편지를 읽고 나서야 그는 동봉해 있는
사진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알 수가
있었다. 사진의 주인공은 서울 506방첩대
요원이었다. 박정희를 감시하라는 상부
지시를 받은 이 요원은 군고구마 장수로
있었던 것이다. 감시당하고 있다는 것을
눈치챈 육영수가 감시자 모르게 사진을
찍어서 박정희에게 보냈던 것이닫.
  이희영은 다시 한번 그 사진을 자세히
살펴보았다. 드럼통에다 불을 지펴
고구마를 굽고 있는 장사치의 배경에 나와
있는 집의 모양이 낯이 익었다. 바로
박정희의 신당동 집이었던 것이다.
  사진을 살펴보던 이희영은 고개를 쳐들고
누워 있는 박정희에게 시선을 던졌다. 쏘는
듯한 박정희의 두 눈총이 이희영의 시야로
파고들어 왔다. 박정희의 눈빛은 증오에
이글거리며 타고 있었다.
  "이 대령, 방첩대에선 나를 빨갱이라고
해서 감시를 시켜 놓고 있는 모양인데
그래, 내가 빨갱이라면 어떻게 육군
  박정희는 또다시 경어를 쓰고 있었다.
  "안 그렇소, 이 대령?"
  "예, 옳으신 말씀입니다. 각하!"
  이희영은 맞장구를 쳐줄 수밖에 없었다.
  "과거에 내가 어떤 길을 걸었건 간에
지금은 어엿한 대한민국 육군의 장성이오.
그런 장성을 사상적으로 의심을 하고
감시를 시켜놓고 있다니 이게 도무지 말이
되는 소리오?"
  그의 항변에 이희영은 마치 자기가
감시시켜 놓고 있기나 한 듯이 송구스러운
마음이 일었다. 하기야 그런 송구스러운
마음이 일게 된 것은 그의 말이 옳다고
느껴졌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박정희의 과거가 지금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사상이란 경우에 따라 청산할 수도
아닌가. 과거 일을 문제삼아 가지고 육군의
장성을 감시케 하고 있다는 것이야말로
매카시즘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이희영은 박정희에게 동정심이 일기도
했다. 그가 더없이 측은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이 대령, 이 대령이 수고 좀 해주시오."
  "어떻게 말입니까?"
  "방첩대에서 이런 짓 좀 안하게 해달란
말이오."
  "알겠습니다."
  다음날 아침 이희영은 서울행 열차에
몸을 실었다. 박정희와의 인간적인
정리(情理)를 생각해서 감시문제를 해결해
주고자 해서였다.
  서울역에 내리자 그는 먼저 소공동
이때 506방첩대장은 육군 대령
이행주(李幸柱)였다.
  "박 장군 댁을 감시시켜 놓고 있는
이유가 뭐요?"
  이행주는 명확한 대답을 하려고 하지
않았다. 그저 상부의 지시에 따르고 있을
뿐이라고만 했다. 그래서 이번에는
효자동에 있는 본부로 방첩부대장 박창록을
찾아갔다. 이희영은 박창록을 대하자,
박정희를 감시시켜 놓고 있는 처사는
부당하다 역설하고 항의조로 이렇게
말했다.
  "꼭 필요해서 감시를 시켜야겠다면
본인이나 가족들이 눈치채지 못하도록
감시하는 방법도 있잖습니까? 방법은
얼마든지 있는데도 불구하고 그게 뭡니까.
사진으로 찍히고. 이거야말로 미라잡이가
미라가 된 것하고 뭐가 다르단
말씀입니까?"
  그러면서 이희영은 가지고 올라온 사진을
내보였다. 그 사진을 들여다본 박창록도
어이가 없는 모양이었다. 입이 쓴
모양이었다.
  "우리가 박 장군을 감시하고 싶어서
감시하고 있겠소. 위에서 시키니까 할 수
없이 감시하고 있는 것이지."
  방첩부대장 박창록의 윗사람이라면 정보
참모부장, 참모차장, 참모총장 세
사람이다. 참모차장은 육군 중장
김형일(金炯一)이었고, 참모차장은 유군
중장 최경록이었다. 이 두 사람 가운데
누군가 한 사람이 박정희를 감시하도록
  "감시해야 할 이유가 무엇이든 군고구마
장수는 철수시키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정 마음이 놓여지지 않는 인물이라고
느껴지거든 차라리 옷을 벗겨버리는 것이
낫지 않겠습니까?"
  이희영은 그렇게 항의를 하고 대구로
돌아왔다. 돌아오는 길로 박정희를
찾아갔다. 그리고는 이행주, 박창록 등과
주고받은 말을 가식 없이 털어놨다. <정
위험한 인물이라 느껴지거든 차라리 옷을
벗기는 것이 낫지 않겠습니까?> 하고
의견까지 제시했다는 말도 빠뜨리지 않고
털어놓았다.
  그랬더니 심각한 표정으로 듣고 있던
박정희의 입에서 뜻밖의 대꾸가
흘러나왔다.
소리, 아마 저희들이 나보다도 먼저 옷을
벗게 될걸!"
  이게 무엇을 뜻하는 대꾸였을까?
이희영은 그 당시에는 그 의미를 헤아리지
못했다.


  "이 대령, 나하고 영천에나 다녀옵시다."
  박정희가 전화로 이런 제안을 한 것은
군고구마 장수 사건이 있은 한참 뒤인
1961년 1월 하순이었다.
  (갑자기 영천엔 왜 또 가자는 거야?)
  이희영은 마음이 내키지 않았다.
그렇다고 부사령관의 권유를 뿌리칠 수도
없었다.
  그는 혀를 차면서도 동행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영천행은 부사령관 전용 차를
이용하기로 했다. 이희영은 박정희와
동승해 영천으로 떠났다. 그런데 박정희는
영천으로 가는 도중 줄곧 정치적인
얘기로만 화제를 삼았다. 정치인치고
부패하지 않은 놈이 없고, 경에는 마음이
없고 잿밥에만 마음을 쓰는 놈들이
국회의원들이라느니, 또 장면처럼 무능한
국무총리도 없을 것이라며, 그런 무능한
자가 어떻게 내각책임제하의 국무총리가
됐는지 모르겠다는 등, 방첩대장으로서는
듣기 거북스러운 말만 늘어놓는 것이었다.
그렇다고 그의 말을 중단시킬 수도 없었다.
지껄이는 대로 내버려 둘 수밖에 없었다.
  연방 줄담배를 피우며 정치현실을
덧붙이는 것이었다.
  "우리도 버마식 쿠데타를 해야 합니다.
그래야만 나라를 구할 수가 있는 거예요.
아시겠소, 이 대령? 우리도 버마식
쿠데타를 해야 한단 말입니다."
  쿠데타 운운하는 말을 듣는 순간
이희영은 가슴이 섬찝해지면서 후들후들
떨리는 것을 느끼지 않을 수가 없었다.
직책상으로 말한다면 쿠데타 운운하는 말을
들은 이상, 어떤 조치를 취해야 마땅한
일이었다. 고발을 한다든가, 아니면
하다못해 <그런 말은 하시지 않는 것이
신상에 좋습니다> 하고 경고를 한다든가.
  그러나 이희영은 감히 부사령관이 하는
말을 가로막지도 못했고 제지하지도
못했다. 도리어 생소하기만 한 버마식
물어보기까지 했다.
  "그게 어떤 식의 쿠데타입니까?"
  박정희는 이희영의 반문에 대해서
간명하게 설명해 주었다.
  "버마식 쿠데타란, 군부가 거사를 해서
정권을 잡은 다음, 일정 기간 통치하다가
민간 정부에게 정권을 넘겨주는 방식을
말합니다. 그런데 일단 민간 정부에 정권을
넘겨주기는 하되 민간 정부의 정치가
마음에 들지 않을 때에는 다시 쿠데타를
일으켜서 군부가 정권을 잡는 겁니다."
  쿠데타 치고는 참 별난 놈의 쿠데타도 다
있다고 이희영은 생각했다.
  버마식 쿠데타?
  도대체 버마식 쿠데타란 어떤 쿠데타를
말하는가?
위해 버마식 쿠데타가 어떤 종류의
쿠데타인지 한번 더 간략하게 살펴보기로
한다.
  북한의 김일성(金日成) 집단에 의해
야기된 <아웅산 폭발 사건>으로 겨우 그
베일이 벗겨졌던 버마라는 나라의 육군
참모총장이었던 네윈이란 인물이 무혈
쿠데타로 정권을 장악했던 것은 1958년 9월
26일이었다.
  당시 버마는 전쟁과 소수민족 소요로
여간 시달림을 당하고 있지 않았다. 참다
못한 수상 우누는, "참모총장, 귀하가
새로이 조각(組閣)을 해서 이 난국을
수습해 주면 고맙겠소" 하고 정권을 그에게
떠맡겼다.
  호박이 넝쿨째 굴러 들어온다더니
행운이었다. 그는 우누의 요청을 받아들여
심복들로 조각을 한 다음 군정을 폈다.
  형식으로 따질 때는 평화적인
정권이양이라고 할 수 있었지만 그것은
묵계된 쿠데타였던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여기에서 네윈이라는 인물을 재평가해 볼
필요성이 있다. 네윈이란 인물은 1년 6개월
동안 군정을 편 뒤, 국민과 약속한 대로
1960년 2월에 총선거를 실시, 그에게
정권을 떠맡겼던 우누에게 정권을 이양해
주고 군에 복귀했던 것이다.
  한번 정권을 잡으면 권력에 도취한
나머지 절대로 잡은 권력을 놓지 않으려
하는 것이 인간의 속성인데 네윈은
미련없이 우누에게 정권을 되돌려 주었던
것이다. 남의 나라의 인물이지만 네윈이란
않을 수가 없다.
  박정희는 그런 네윈을 본딴 쿠데타를
해야 한다는 것이다. 글쎄, 박정희란
인물이 과연 네윈을 흉내낼 수 있을까?
  우선 두 사람을 비교해 보자.
  네윈은 수도 랭군에 있는 의과대학을
중퇴했다. 독립군에 뛰어들기 위해서였다.
그것이 1940년 10월의 일이다. 그러니까,
태평양 전쟁이 일어나기 2개월 전에 그는
의사가 되어 인술을 펴려던 꿈을
던져버리고 독립군에 뛰어들었다. 그의
군대생활은 이렇게 해서 시작되었던
것이다.
  독립군에 뛰어든 네윈의 활약이 어찌나
눈부셨던지 오늘에 이르기까지 <독립의
아버지>로 불리우고 있는 사령관 아웅산은
네윈이란 태양처럼 빛난다는 뜻이다.
네윈의 본명은 슈마웅이었던 것이다.
아웅산이 네윈이란 이름을 지어 주었던
것과 군사 정부를 청산하고 민정으로
이양할 때 깨끗이 우누에게 정권을
돌려주었던 것을 결부시켜 생각해 보면
네윈이란 인물의 인품이 어떠했는가를 가히
짐작할 수 있을 줄로 안다.
  그런데 박정희는 대구사범학교를 졸업한
뒤, 문경 땅에서 국민학교 선생으로
봉직하다가 일본의 괴뢰국인
만주군관학교를 나왔고, 또 일본
육군사관학교를 거쳤다. 여기까지는 좋다.
그런데, 그는 결코 독립군으로 달아날
생각을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는
달아나려면 얼마든지 가능한 지역에 주둔해
천황에게 충성을 다한 인물이라고 할 수
있다. 그랬던 그가 지금 육군 대령 이래의
꿈을 실현시키고자 쿠데타를 계획하고 있고
버마식, 곧 네윈식 쿠데타를 꿈꾸고 있는
것이다.
  그래, 쿠데타를 해서 모든 질서를
바로잡고 나면 누구한테 정권을 이양해 줄
생각이란 말인가? 과연 박정희가 점치고
있는 한국의 우누는 누구란 말인가?
  그와 함께 이희영의 머리에는 문득 얼마
전 박정희가 씹어뱉듯이 내뱉았던 말이
그의 뇌리에 되살아났다. <흥! 저희들이 내
옷을 벗겨? 어림없는 소리, 아마 저희들이
나보다 먼저 옷을 벗게 될걸.>
  그때의 그 말과 지금 차 안에서 버마식
쿠데타 운운하는 말을 연결시켜 보고 난
하는 확신이 들어 다시 한번 가슴이
섬찝해지는 것이었다.
  이런 확신이 선 때문인지 7년 전 2군단
시절의 박정희의 언동도 다시 되새겨졌다.
7년 전 2군단 시절은 54년이다.
  이 해에도 정치적 사건은 무척이나 많이
벌어졌었다. 그 중에서도 가장 두드러진
사건이 <초대 대통령 중임제 철폐를 위한
개헌 사건>이요, 이 개헌안이 부결됨으로써
벌어졌던 사건이 소위 <사사오입(四捨五入)
사건>이었다.
  크고 작은 정치적 사건이 벌어질 때마다
박정희는 정치인들을 향해 원색적인 욕설을
퍼부었다. 그리고는  꼭 이렇게 덧붙이는
것이었다.
  "이놈의 정권 확 뒤엎어 버려야 해,
  그때의 그의 언사까지를 되새겨보자,
이희영은 박정희가 쿠데타를 계획하고 있는
것이 틀림없다는 확신이 더욱 굳어졌다.
이렇게 확신이 굳어지자 마음에 갈등이
일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의 신분이
방첩대장이었기 때문이었다.
  방첩대가 하는 일이 무엇이었던가? 적의
유형, 무형의 침투를 막고 군령을
어지럽히거나 통수권에 도전하려 들거나
하는 발칙한 불순분자의 도량(跳梁)을 막는
것이 주어진 임무였다.
  (그렇다면, 그렇다면 말이다. 박정희가
쿠데타 같은 짓을 하지 못하도록 어떤
조치를 취해야 할 것이 아닌가?)
  이희영의 마음에서 갈등이 일게 된 것은
직책에 충실해야 한다고 다짐을 하면서도
못하고 있는 데서였다.
  영천에서 돌아온 뒤로 이희영은 몇 날
며칠을 두고 이 갈등 때문에 번민했었다.
  (내가 방첩대장이라는 것을 모르고
있다면 또 몰라! 내 직책이 뭔지 뻔히 알고
있으면서 내 앞에서 쿠데타 운운한 것은
무슨 속셈에서야? 내 반응이 어떤지 그걸
떠보자 그 수작이었는가?)
  어쩌면 속셈을 떠보자는 수작이었는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이런저런 생각으로 번민을 하다보니
방첩부대장이 <엄중감시>를 지시한 것도
까닭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는 생각도
들었다.
  (문제군 문제야. 공(公)은 공, 사(私)는
사라고는 하지만.)
없었다. 박정희가 쿠데타를 계획하고
있다는 확신은 들었지만 증거는 없었다.
그가 <쿠데타를 해야 한다>고 강조하기는
했지만, 그까짓 말로 한 것이야 녹음을
해둔 것도 아니고 부인해 버리면
그만이었다.
  (내가 언제까지 햄릿 같은 고민을 하고
있어야 하지?)
  스스로를 채찍질해 보았지만 끝내 결단을
내리지 못하고 말았다. 그러는 사이에
제2군 사령관이었던 장도영은 육군
참모총장으로 영전돼 대구를 떠났고, 얼마
후 이희영도 장도영이 서울
506방첩대장으로 끌어올리는 바람에
박정희에 대해서는 까맣게 잊는 결과가
되고 말았었다.

  "안녕하십니까? 총장 각하!"
  "아니, 이거 박 장군 아니시오?"
  육군 참모총장실로 들어선 박정희가
부동자세를 취하고 거수경례를 붙이는 것을
보자 장도영은 환하게 웃으며 그를
맞아들였다.
  "언제 올라오셨소?"
  "어제 올라왔습니다. 곧 내려가야
합니다. 내려가기 전에 총장 각하를 뵙고
가려고 찾아왔습니다."
  "찾아줘서 고맙소, 자 앉읍시다."
  두 사람은 쇼파에 자리잡고 마주 앉았다.
  장도영이 먼저 박정희에게 담배를
권했다. 라이터를 켜서 불도 붙여 주었다.
  "예. 별일 없습니다."
  "부인도 안녕하시고요?"
  "예."
  의례적인 인사가 끝난 후, 박정희는
뻐끔뻐끔 서너 모금이나 담배를 빨았을까?
이윽고 그는 정색을 하고 말문을 여는
것이었다. 그 표정이 꽤나 굳어져 있었다.
  "실은, 오늘 총장 각하를 찾아뵌 것은
긴히 말씀드려야 할 중요한 얘기가 있기
때문입니다."
  "중요한 얘기라니요?"
  장도영도 덩달아 정색하며 반문했다.
  "누가 또 박 장군을 모함이라도 했는가?"
  그렇게 묻는 장도영의 얼굴에는 <당신
뒤에는 내가 있지 않느냐?> 하는 표정이
역력히 어려 있었다.
어쩔 수 없이 군을 떠날 수밖에 없다 해서
예편원까지 냈던 그가 전화위복이 되어
꿈에 그리던 육군 참모총장직에까지 오른
처지였다. 불과 반 년 사이에 일어난
변화였다. 그 변화는 장도영을 자신만만한
인물로 만들어 주었다. 세상에 두려울 것이
무엇이겠는가. <박정희 장군 기운을 내요.>
그런 표정이 되어 있었다.
  "총장 각하, 그런 개인적인 문제로
찾아온 것이 아닙니다."
  박정희는 단호하게 부정했다.
  "그럼 나한테 하고자 하는 중요한
얘기라는 게 뭐요?"
  장도영의 반문에 박정희의 표정은 더욱
굳어졌고 눈빛은 더욱 형형하게 빛을
발하고 있었다.
판단하고 있습니다."
  "뭐라구요?"
  장도영의 표정이 금세 굳어졌다. 입가에
맴돌고 있던 미소도 사라졌다.
  (다짜고짜 혁명이라니? 이거 내가 호랑이
새끼를 키워오고 있는 게 아냐?)
  장도영은 순간적으로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박정희는 그러한
장도영의 감정의 변화를 읽으려는 듯 그를
뚫어지게 살피고 있다가 들고 들어온
가방에서 한 뭉치의 서류를 끄집어냈다.
  "이것이 쿠데타 계획서입니다. 한번
훑어봐 주십시오."
  박정히는 그 서류를 장도영의 앞으로
밀어놓았다. 그러나 장도영은 그 서류에는
눈도 주지 않았다. 박정희의 거동만을
  "각하, 그것을 한번 검토해 봐
주십시오."
  "박 장군, 도대체 무슨 소리를 하고 있는
거요? 쿠데타라니?"
  "왜 그러십니까? 각하, 갑자기?"
  "갑자기라니?"
  "각하께서도 대구에 계실 때는 혁명에
대해서는 긍정적이지 않았습니까?"
  그것은 사실이었다. 박정희를 제2군
부사령관으로 끌어준 뒤로 장도영은
박정희와 참모장 육군 소장 이주일(李周一)
셋이서 점심을 함께 하는 일이 허다했다.
  "자꾸 어지러워지기만 하는 정국을
바로잡는 길은 쿠데타밖에 없습니다."
  "옳은 말이오, 아무래도 쿠데타라도 하지
않고는 정국을 바로잡기는 힘들 것 같소!"
  "각하, 그때는 혁명의 필요성에 대해서
동조하시더니 이제는 마음이
변하셨습니까?"
  박정희는 아픈 곳을 찔렀다.
  "그때는 그저 나라를 걱정하는 마음에서
한 소리가 아니었소? 그것을 진담으로 믿고
쿠데타 운운하면 어쩌자는 거요?"
  장도영은 예전의 얘기를 한낱
우국방담이었던 것으로 흘려 버리려 했다.
  (이 양반이 육군 참모총장으로
영전되더니 마음이 변했구나.)
  박정희는 장도영이 변심했다고 단정했다.
그렇다고 물러설 그가 아니었다.
  "각하, 제 말씀을 잘 들어봐 주십시오."
  박정희는 이렇게 운을 떼고 나서 <당신이
혁명의 필요성에 긍정적이었기 때문에 나는
간접적으로 비추고, 지난 몇 개월 동안
추진해 온 쿠데타 진척상황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설명을 했다.
  그런 다음 이렇게 덧붙였다.
  "각하, 우리 혁명동지들은 이에 각하를
혁명의 최고 영도자로 모시기로 합의를
해놓았습니다. 그러니."
  거기까지 말했을 때 장도영이
가로막았다.
  "참, 답답하군. 그게 성공할 수 있을 것
같소?"
  박정희는 단호하게 대꾸했다.
  "승산을 장담할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해야 할 일은 해야만 합니다. 지금 육군의
요소요소에는 우리 혁명동지들이
물샐틈없이 깔려 있습니다. 각하의 심복
동지가 수십 명에 이르고 있습니다."
  장도영의 얼굴이 굳어지다 못해
창백해지기조차 했다.
  "박 장군, 뭣 때문에 그런 위험한 짓을
하려는 거요?"
  "위험한 짓이라니요? 총장 각하. 군인은
국가보위가 본분입니다. 지금 나라는
걷잡을 수 없이 어지럽습니다. 이대로
방치해 두었다간 언제 제2의 6.25가 터져
북한 괴뢰한테 먹힐는지도 모릅니다. 그런
위기상황을 보고 있으면서도 위험하다는
이유만으로 방치해 두어 옳겠습니까?"
  "내가 대구에 있을 때는 나라 안이 온통
시끄러워서 쿠데타라도 해야 나라의 기강을
바로잡을 수 있겠다 생각했던 것은
사실이오. 허나, 보시오. 지금 나라안
민주당 정권에서도 잘해 보려고 애쓰고
있고......."
  이렇게 말하고 장도영은 박정희의 반응을
살폈다.
  "나로서는 박 장군더러 계획을
중지하라는 말밖에 할 말이 없소. 생각해
보시오. 실패할 것도 뻔하고 실패하는
날에는 어찌된다는 것도 뻔한 일 아니오?"
  애원하듯이 계획을 중단하라고 타일렀다.
  그러나 박정희의 태도는 여전히
단호하기만 했다.
  "실패하는 날에는 제가 모든 책임을 지고
사형장으로 가겠습니다. 절대로 각하께
폐를 끼치지 않겠습니다. 그러니 협력해
주십시오."
  쿠데타가 실패하는 날에는 박정희 자신이
장도영한테는 절대로 폐를 끼치는 짓을
하지 않고. 이 얼마나 무서운 집념인가.
쿠데타가 실패하는 날에는 모든 책임을
지고 사형장으로 가겠다는 것은 죽음도
각오하고 있다는 얘기가 아닌가. 장도영은
박정희의 얼굴을 새삼스럽게 뜯어보며 그의
마음 속을 헤아려 보려 애를 썼다.
  (하긴, 일본군에서 교육을 받았고
법정에서 사형구형까지 한번 받았던 사람이
아닌가. 쿠데타를 할 결심을 했다면 죽을
결심도 했을 것이다.)
  그런 생각이 들었다.
  박정희는 만주군관학교를 거쳐 일본
육군사관학교를 나온 인물이다. 일본군에선
사관학교든 졸병이든 먼저 군대에 들어오면
생사관을 확립하는 정신교육부터
<충군애국(忠君愛國). 천황폐하를 위해서
죽을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떳떳하고
자랑스럽고 명예스러운 일인가!> 이런
정신교육을 반복해서 실시하기 때문에
일본군은 전장에서 적탄에 맞아 쓰러지게
되면 <천황폐하, 만세> 하고 소리높여
외치고 숨을 거두는 장졸들이
부지기수였다.
  박정희도 그런 일본군의 정신교육을 받은
사람이다. 목숨 하나쯤 개같이 버릴 수
있는 생사관은 확립돼 있다고 보아야 옳을
것이다. 장도영은 박정희의 마음을 그렇게
읽었다.
  그렇다고 쿠데타에 동조할 수는 없다고
장도영은 스스로를 타이르고 있었다.
  (나로서는 이제 군인으로서는 최고의
쿠데타 같은 위험한 짓을 해야 한단
말인가?)
  이런 생각이 들자 장도영은 자신의
태도를 분명하게 밝혀둬야겠다고 마음을
다졌다. 그래서 장도영은 단호하게 말했다.
  "나는 협력할 수 없습니다."
  그 말을 들은 박정희는 조금 충격을 받은
모양이었다. 관자놀이가 불근거리고 있는
것으로 보아 어금니를 질근질근 씹으며
활활 타는 눈빛으로 장도영을 쏘아보았다.
장도영도 너한테 꺾일 수는 없다는 듯이
박정희를 마주 쏘아봤다.
  (여기서 약한 태도를 보여서는 안 된다.)
  장도영은 수없이 마음 속으로 뇌까렸다.
끝내, 박정희가 시선을 밑으로 내리깔고
말았다. 그리고 애원 어린 목소리로
  "그렇다면 묵인이라도 해주십시오.
그것만으로도 협력 이상의 숨은 공로라고
생각합니다."
  "글쎄요, 딱한 주문이오. 어쨌거나
나로서는 밀고 따위의 그런 비겁한 짓은
하지 않겠소. 그 점만은 안심하시오."
  이게 도대체 무슨 수작인가? 밀고 따위의
비겁한 짓은 하지 않겠다니? 도대체 이게
육군의 총수인 참모총장으로서 할 수 있는
수작인가? 박정희가 <우리 혁명동지들은
이미 각하를 혁명의 최고 영도자로
모시기로 합의를 해놓았습니다>라고 한
말에 감격한 나머지 밀고 따위의 비겁한
짓은 하지 않겠다고 지껄였던 것일까?
  장도영이 밀고 따위의 비겁한 짓은 하지
않겠다고 하는 말을 듣고 박정희는 그 말에
  "잘 알겠습니다, 각하."
  그러면서 자리에서 일어서며 이렇게
덧붙이는 것이었다.
  "그럼, 우리들의 지도자가 돼 주시겠다고
약속한 걸로 이해를 하고 돌아가겠습니다."
  이것이 1961년 4월 10일의 일이었다.
5.16 군사 쿠데타를 일으키기 36일 전의
일이었다.
  이상은 박정희의 진술을 토대로 구성한
것이다.
  그는 누구에게 4월 10일 이날에 있었던
일을 진술했던가? 바로 <장도영 일파
반혁명 사건>을 다루고 있는 검찰관에게
진술했던 것이다. 소위 <장도영 일파
반혁명 사건>이 벌어진 것은 1961년 7월
3일이다. 쿠데타를 일으킨 지 한 달 반
대해서는 뒤에 구체적으로 소개하겠지만 이
사건이 벌어지자 장도영은 물론이고 그의
추종자 모두가 구속되게 되었다. 이때 이
사건을 다루었던 혁명 검찰부의 검찰관
배명인(裵命仁)은 의장공관으로 찾아가
박정희로부터 장도영과 관련된 모든 증언을
들었던 것이다.
  형사 사건의 증인신문을 집으로 찾아가
듣는다는 것도 웃기는 얘기지만 하여간에
박정희는 4월 10일의 일에 대해서 검찰관
배명인에게 다음과 같이 진술했던 것이다.
  "4월 10일경이라 생각되는데, 그때는
계획이 상당히 진전된 때인데 우리가
논의하여 기록해 놓은 혁명위원회의 구성,
정부기구의 개편, 임시헌법 등을 적은
서류를 장 장군에게 보이며 4.19가 무사히
등의 이야기를 한 끝에 그 서류를 장
장군에게 교부하고 돌아왔다. 최초에
우리가 계획한 정보가 누설되어 거사를
중지하고 최종적으로 거사일자가 결정된
것이 5월 16일이며 따라서 장 장군이
군사혁명이 있으리라는 것을 전연 알지
못하였다는 것은 말이 안 되는 말이다."
  그러한데 장도영은 4월 10일경에
박정희가 참모총장실로 찾아왔던 것은
새빨간 거짓말이라고 전적으로 부인하고
있다. 그의 진술에 따르면 4월 10일경이
아니라, 4.19 일주년을 한 4,5일 앞둔
일요일 아침에 참모총장 공관으로
찾아왔다는 것이다. 이때 장도영은
정복으로 단장을 하고 육군본부 교회로
나가려고 막 현관으로 내려서려고 하는데
  "각하, 2군 상황과 4.10 일주년 기념일에
대비할 계획에 대해 보고할 일이 있어서
잠깐 들렀습니다. 잠깐 시간을
내주십시오."
  박정희의 간청이었다.
  "보다시피 지금 예배당으로 가려고 나선
길인데 시간이 다 됐다."
  "시간은 얼마 걸리지 않습니다. 속히
간략하게 말씀드리겠습니다."
  박정희의 재간청에 못 이겨 할 수 없이
현관에서 응접실로 돌아와 둘이
마주앉았다고 한다.
  당시 육군은 이미 3월에 서울지구
주둔부대와 일선 제5사단의 출동을 포함한
서울지구 폭동진압과 질서유지를 위한
<비둘기 작전> 계획의 지휘부 연습을
계엄이 선포되면 계엄업무를 모범적으로
철저히 수행할 준비를 다 갖추고 있었다.
  응접실에서 둘이 마주 앉았다.
  "4.19에는 꼭 무엇이 일어날 것입니다.
지금 2군 사령관도 부재중이고 해서 제가
대략 계엄시행 계획을 작성하여
보았습니다."
  박정희가 접은 원고지 몇 장을
내놓더란다.
  당시 제2군 사령관은 최경록, 그는 이때
도미시찰 여행중에 있었다. 사령관
부재중에는 부사령관이 대행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다. 그러므로 장도영은
당연히 그가 할 일이라고 생각했다.
  "잘했소, 시간이 있을 때 읽어 보지요."
  박정희가 내놓은 원고를 부관에게 주어
  박정희가 내놓은 원고의 표지에는
<서울지구 계엄실시 계획안>이라는 표제가
붙어져 있었다고 한다.
  그날 저녁 장도영은 책상 위에 놓여 있는
서울지구 계엄실시 계획안을 훑어보았다고
한다. 이 계획안에 따르면, <계엄이
선포되면 그 해당지역에 군정을 실시하게
되는 것이며, 전국 혹은 수도 서울지역의
계엄일 경우에는 현행 헌법에 의해 육군
참모총장이 계엄사령관이 되며 계엄업무를
육군의 일상 업무와 분리하기 위해 별도로
계엄사령부를 설치하고 별개의 참모진으로
그 업무를 수행케 한다>는 내용으로 되어
있었다고 한다.
  또한, <서울 근교에 주둔하는 부대를
서울 시내에 배치하고 일선사단을 예비대로
첨부되어 있었다고 한다.
  이것이 이날에 있었던 전부인데 언제
박정희가 검찰관에게 진술한 내용과 같은
일이 있었느냐고 장도영은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이럴 경우 역사를 더듬는 사람은 어느
쪽의 말을 믿어야 옳을까? 한가지 분명한
것은 쿠데타를 일으킨 5월 16일 그날까지
정부기구 개편, 임시헌법 따위의 안은
마련되어 있지 않았다. 이날에 이르기까지
마련된 것이 있었다면 <국가 재건
최고회의> 기구표 정도였으나 이것 역시
김종필의 호주머니에 간직돼 있을 뿐이었던
것이다. 그러고 보면, 4월 10일에 있었다는
박정희의 진술은 아무래도 <창작>이었다는
심증이 일기만 한다.
  여인은 휘청거리며 몇 걸음 뒤? 
 왜냐하면 이미 박정희는 장도영을 내치고
모든 실권을 한 손아귀에 쥐고 있었기
때문에 그 자신에게 유리하게 역사를
창작할 수 있는 힘을 지니고 있었으니
말이다.
  칼자루를 쥔 자와 칼날을 쥔 자의 차이는
이렇듯 엄청나기만 한 것이다.










  4. 장도영, 양다리 걸쳤는가?


  군사 쿠데타.
  한국인은 정권욕에 사로잡힌 장군이 부하
장졸들을 동원해서 총칼로 합헌정부를
뒤엎어 버리는 이른바 군사 쿠데타라는
것이 중미나 남미, 또는 동남아시아
등에서나 일어나는 것이지 한국에서 그와
같은 불행한 일이 벌어지리라고는 상상조차
못하고 있었다. 그랬던 것이 1961년도에
들어서면서 한국에서도 쿠데타에 대한
소문이 끈질기게 나돌기 시작했다.
  "확 뒤집어 엎어야 돼, 이놈의 장 정권!"
  쿠데타에 대한 소문과 함께 그놈의
하고 기대하는 사람도 점차 늘어나고
있었던 것도 사실이었다.
  장면은 자유민주주의 원칙만 고집하고
혼란을 야기시켜 놓고 있는 무리들에
대해서는 전혀 대응책을 강구하지 않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자유민주주의? 이 지구상에서 제일 좋은
주의와 사사이라 하겠지. 그러나 한국인은
자유민주주의를 누릴 자격이 없어!"
  태반의 지식인들은 벌어지고 있는
사회현상에 환멸을 느껴 이렇게 자조하고
있었다. 그래서 쿠데타를 기대하는 심리가
싹트게 되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그러한 지식인들의 기대에 부응하기라도
하려는 듯이 군부의 일부에서 쿠데타가
모의되고 있다는 정보가 미국 CIA 한국
아마도 1961년 2월경이었던 것 같다. 서울
506방첩대장이었던 이희영이 박정희가 군사
쿠데타를 음모하고 있다는 확신을 갖게 된
그 무렵이 아닌가 여겨진다.
  미국 CIA 해외정보 담당책임자로 있다가
1973년에 은퇴한 피어드 실봐가 그의
회고록에서 밝힌 바에 따르면, 그는
한국군의 한 장교를 통해서 박정희와
그에게 동조하고 있는 무리들이 군사
쿠데타를 계획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고
한다. 정보를 제공해 준 그 장교의 이름은
알려져 있지 않다.
  다만, 박정희의 측근 참모라고만 밝히고
있다. 이 참모는 미국 CIA의 한국 분실의
한 요원과 친한 사이여서 이 정보를 제공해
주었다고 한다.
정보를 입수했습니다. 이 정보를 장면
국무총리에게 알려주고 경각심을
촉구하도록 하는 것이 좋지 않겠습니까?"
  이런 협의를 받은 매카나기는,
  "그게 좋겠지요" 하고 미지근한 태도를
취했을 뿐이었다.
  실봐는 매카나기가 그 정보를 가늠해 볼
능력이 없기 때문에 관망하는 자세를
취했을 것이라고 증언한 바 있다. 실봐는
매카나기의 허락이 떨어지자, 즉시 장면의
숙소인 반도호텔로 찾아가 군사 쿠데타에
관한 정보를 제공해 주었다.
  "즉시 적절한 조치를 취하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거기에 대한 장면의 반응은 어떠했던가?
  "적절한 조치를 취하기는 하겠지만 나는
  장면은 꽤나 미래를 낙관하고 있었던 것
같다.
  이렇게 되면 오히려 정보를 제공해 준
쪽이 민망하기 마련이다. 실봐는 한국의
최고 통치권자가 <무슨 일이
일어나리라고는 믿지 않는다>는데야 더
이상 무슨 말을 하겠는가. 자칫 잘못하면
내정간섭을 하고 있다는 비난이나 받기
십상이다. 그래서 그는 장면에 대해서는 더
이상 무슨 권고도 하지 않기로 작심을
하고, 다만 사태의 추이를 지켜보기로 했을
뿐이었다고 했다.
  실봐의 정보제공이 있었을 때, 군
수사기관을 강화해서 군부의 동향에 대한
감시를 철저하게만 했던들 한국의 현대사는
지금쯤 다른 궤도 위를 달리고 있었을 것을
하는 아쉬움은 지금도 가실 길이 없다.

  박정희가 육군 참모총장실로 장도영을
찾아갔다고 주장하는 그날에서 한 열하루쯤
지나 4월 21일 아침, 육군 중령 계급장을
단 정복차림의 한 고급 장교가 서울
506방첩대에 들어섰다.
  누군가가 그에게 다가가 물었다.
  "어떻게 오셨습니까?"
  "대장님을 좀 뵈려고 찾아왔습니다."
  "누구라고 전해드릴까요?"
  "육군본부 인사참모부의 장세현
중령이라고 전해 주십시오."
  장세현(張世顯)은 곧 대장실로
안내되었다. 이희영이 그의 앞에 나섰다.
  "제가 이희영 대령입니다. 어떻게
오셨습니까?"
장세현 중령입니다. 실은 오늘 아침에
엄청난 정보를 입수했기에 가만히 있을 수
없어 신고하려고 찾아뵈었습니다."
  "엄청난 정보라니요? 우선 좀
앉으십시오."
  이희영은 그를 쇼파로 안내해서 마주
앉았다.
  "엄청난 정보라는 게 뭔가요?"
  "쿠데타에 대한 정보입니다."
  "쿠데타에 대한 정보?"
  쿠데타에 대한 정보라는 말에 이희영의
두 귀가 쫑긋 곤두섰다. 그의 말마따나
엄청난 정보인 것만은 틀림없었다. 그렇지
않아도 족청계(族靑系)의 쿠데타설의
진상이 아직 파악되지 않고 있을 때였다.
  족청계 쿠데타설이란 다름이 아니었다.
참모장이었던 이범석(李範奭)은 난립해
있는 청년단을 하나로 묶을 계획을
세워놓고 모든 청년단체를
대한청년단(大韓靑年團)으로 통합시켜
버렸었다.
  이때 민족청년단 단원들 중 여전히
청년운동에 뜻을 둔 사람들은 기꺼이
대한청년단 깃발 밑으로 들어갔지만 통합을
받아들이지 않은 사람들은 대거 군으로
들어갔는데, 군으로 들어간 족청계
장교들이 주동이 돼서 쿠데타를 일으킬
계획을 세우고 있다는 소문이 그럴싸하게
나돌고 있었던 것이다.
  이런 소문이 나돌고 있는 것은 대구
제2군 방첩대장이었던 이희영이 서울
506방첩대장으로 자리를 바꿔앉은 바로
  (이거 원, 무슨 놈의 팔자가 이
모양이야? 내가 가는 곳마다 쿠데타 소문이
나돌고 있으니!)
  이희영은 탄식하기를 마지않았다. 그럴
법도 했다. 그가 대구에 있을 때는 공군
쿠데타설이 빈번하겐 나돌고 있었다.
1961년 2월의 일이었다.
  이희영은 이 공군 쿠데타설의 진상을
파악하려고 얼마나 애를 썼는지 모른다.
나중에 밝혀진 일이지만 이런 흑색선전을
퍼뜨린 것은 박정희의 쿠데타 그룹이었다.
그들은 자신들의 음모를 은폐하고자 해서
이런 흑색선전을 마구 만들어내 퍼뜨렸던
것이다.
  그는 공군 쿠데타설의 진상을 캐내지
못하고 서울로 올라왔었는데 이번에는
나돌고 있는 게 아닌가.
  박정희는 박정희대로, 족청계는
족청계대로 쿠데타 음모를 꾸미고 있단
말인가?
  이희영은 이번에도 족청계 쿠데타설의
진상을 파악하고자 해서 506방첩대의
정보와 수사의 총역량을 여기에 집중시켜
캐기 시작했다.
  여담이지만 족청계 쿠데타 음모설로 인해
국무총리 장면의 아내 김윤옥과 철기(鐵驥)
이범석이 전화로 대판 싸운 일까지 있었다.
족청계 쿠데타설의 소문을 들은 김윤옥은
어느 날 밤, 신당동에 살고 있는
이범석에게 전화를 걸었다.
  "장군님, 족청계에서 쿠데타를 일으킬
것이라는 소문이 나돌고 있는데 장군께서도
  장면과 이범석은 절친하다고까지 할 수는
없었지만, 그래도 친한 사이였다. 이러한
사이를 잘 알고 있던 김윤옥은 호소를
겸해서 진상이나 알아보려고 이범석에게
전화를 걸었던 것이다. 한데, 이범석은
김윤옥이 미처 말을 끝내기도 전에 벌컥
화부터 내며 쏘아붙였다.
  "지금 세상에 족청계가 어디 있다고 그런
소리를 하는 거요? 당신네들 이젠 정권을
잡으니 족청의 망령까지도 때려잡지 못해
안달이오?"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족청의
망령까지도 때려잡지 못해 안달이라니요?"
  김윤옥도 발끈해졌다.
  "나는 혹시 이런 소문 때문에 장군님한테
행여 해가 돌아갈까, 걱정이 돼서 전화를
때려잡지 못해 안달이냐구요? 그래
장군님의 인격이라는 게 고작 그 정도밖에
안 돼요?"
  "뭐 인격? 아니 이 여편네가......."
  "뭐 여편네?"
  오는 말이 고와야 가는 말이 곱다. 또
가는 말이 고와야 오는 말도 곱다. 남과
여, 그것도 육순이 훨씬 넘은 노인네들이
전화통에 대고 입에 거품을 물고 악을
쓴다는 것은 그리 아름다운 광경이라 할 수
없었다. 족청계 쿠데타설은 이런
일화까지도 만들어내고 있었던 것이다.
  그건 그렇다 치고, 이희영은 족청계
쿠데타의 진상을 가려내고자 모든 역량을
여기에 집중시킨 결과 그에 따른 보상이
있었다. 3월 중순이었던가?
청요리집에서 박정희 장군이 박병권
소장하고 밀담을 나누고 있습니다" 하는
정보가 날아들어 왔다.
  "박정희 장군이 박병권 소장하고?"
  이희영의 촉각이 곤두설 만한 정보였다.
박정희에 대해서는 이미 그가 쿠데타를
음모하고 있다는 확신을 품고 있던 인물,
그런 인물이 지금 박병권(朴炳權)과 만나고
있다면 <뭔가가 있다> 하고 촉각을 세울
만한 일이었다.
  박병권이란 어떤 인물이었던가? 그는
충청남도 논산 태생이었다. 1920년생이니까
박정희보다는 세 살 아래였다. 그러니까
1961년 당시 마흔한 살, 해방 전 해인
1944년 봄에 연희전문학교(延禧專門學校)를
졸업했다. 1946년 3월 군사영어학교에
시초였다.
  그런데 사실에 있어서 그는 민족청년단
출신이 아니었다. 그렇다고 그를
민족청년단 출신이 아니니까 족청계라 할
수도 없었다. 그런데도 세상에서는 그를
족청계 취급을 하고 있었다. 어째서였을까?
  내용을 알고 보면 별 것도 아니었다.
민족청년단을 만든 이범석이 대한민국
정부가 세워지자 대통령 이승만에 의해서
초대 국모총리 겸 국방장관으로
발탁됐는데, 이때 박병권이 이범석의
국방장관직 부관으로 기용됐던 것이다.
  박병권이 족청계로 몰리게 됐던 것은
오직 이 한 가지 인연 때문이었다. 그런
터에 그가 장군으로 승진을 하자,
민족청년단 출신 장교들이 의식적으로
상관없이 족청계로 낙인찍히고 말았었다.
  "두 사람의 대화 내용을 도청하라."
  이희영은 지시와 함께 이 방면에 능통한
요원을 즉시 관해관으로 밀파했다.
  이 무렵에 도청기가 발명돼 있었는지
여부는 알 수 없지만 군 수사기관에 그런
문명의 이기가 마련되어 있지 못한 것만은
분명했다. 그럼 어떤 방법으로 두 사람의
대화 내용을 도청한단 말인가? 가장 손쉬운
방법은 요원이 청요리집 보이로 가장해서
두 사람이 마주앉아 있는 방에
들락날락하면서 도청을 할 수밖에 없는
일이었다. 방법이야 요원들이 알아서 할
일이고, 하여간에 이희영은 사계의
전문요원들을 관해관으로 급파했다.

나누었던가? 여기에는 두 가지 설이 있다.
하나는, 박병권이 먼저 박정희에게 <장군,
두 그룹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쿠데타
계획을 합칩시다>고 제의했던 바, <이미
모든 계획이 완성돼 있는 마당에 두 그룹을
합치게 되면 오히려 혼선을 빚어낼 우려가
있다>는 이유로 박정희가 박병권의 제의를
거절했다는 설이 있다.
  또 하나는 박정희가 박병권에게 <소문에
듣자하니 장군께서 쿠데타를 계획하고 있다
하던데 그게 사실이라면 내가 계획하고
추진중에 있는 것과 합치는 것이 어떻소?>
하고 제의했던 바, 박병권이
<쿠데타라니요? 나는 그런 것을 계획한
일도 없고 상상조차 해본 일도 없소.
군인은 군인의 길이 따로 있는데 무엇
뛰어들려 한단 말이오?> 하고 쿠데타 계획
그 자체를 부인했다는 설이 있다.
  이 두 가지의 설을 놓고 볼 때, 아무래도
후자의 설이 옳지 않나 하는 느낌이 든다.
왜냐하면 박정희 쿠데타 정권하에서
박병권의 언어 행동, 또 그가 정치하고는
전혀 담을 쌓고 여생을 보내고 있는 점
등으로 미루어 보아 후자 쪽이었을
것이라는 느낌이 들게 한다.
  그야 어찌됐든, 이희영이 이렇게
쿠데타에 대한 정보 때문에 노이로제가
걸리다시피 되어 있을 때에 장세현이
쿠데타에 대한 정보를 신고하겠다고 하면서
찾아왔던 것이다.

  "장 중령, 좀 상세히 말씀해
주시겠습니까. 쿠데타에 관한 정보가 어떤
것인지?"
  "네, 말씀드리겠습니다. 오늘 아침의
일입니다만......."
  장세현의 고발 내용은 이러했다.
  오늘 아침의 일이다. 오늘 아침이란
1961년 4월 21일 월요일 아침을 말한다.
  장세현의 집은 인천(仁川)이었다. 그가
아침에 육군본부의 출퇴근용 버스를 타고
가는데 이 버스가 인천역 앞에 정거했을
때였다. 그곳에 같은 육군본부에 근무하고
있는 육군 대령 이종태9李鐘泰)가 서 있는
것이 보였다.
  아마도 합승택시를 타려는 것 같은
눈치였다. 그래서 이 버스를 타라고 손짓을
보자 그제야 이 버스가 육군본부 출퇴근용
버스라는 것을 알아챘던 모양이었다.
  그는 버스에 올라오자 장세현 옆의
빈자리에 앉았다.
  "어쩐 일입니까, 인천엔?"
  "내 집이 인천 아니오. 어제가
일요일이기에 집에 내려왔다가 돌아가는
길이오."
  이종태는 육군본부 근처에서 하숙생활을
하고 있었다.
  두 사람은 출근길의 무료함을 메꾸기
위해 꽤 많은 얘기를 나누었다. 소문으로
나돌고 있는 군부 쿠데타설에도 화제가
미쳤다.
  "이 대령님은 쿠데타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필요하겠지요."
  "긍정적이란 말씀이군요?"
  "학생들이 판문점으로 가자고 데모를
하는가 하면 정치가 이처럼 무질서한
상황이 계속된다면 그런 것도 필요치
않겠소?"
  "나도 힘만 있다면 한번 해봄직한
일이오만."
  이종태는 덧붙였다.
  한데, 바로 이 덧붙인 대목에 대해서 두
사람의 주장은 엇갈리게 된다. 이종태는,
<나도 힘만 있다면 한번 해봄직한
일이오만> 하고 말했을 뿐이라고 주장하는
데 반해서, 장세현은 이종태가 <그래서
지금 박정희 장군을 중심으로 해서 젊은
장교들이 치밀한 계획을 세워 놓고 있는
  두 사람의 주장을 놓고 생각해 볼 때,
이종태의 주장이 사실이라면 장세현이
별것도 아닌 그 말 한마디만을 가지고
일부러 506방첩대까지 찾아가서 <쿠데타
정보가 있다> 운운하며 신고를 했을까?
  이 대목에 관한 한 이종태가 박정희의
쿠데타 내용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발설을
했기 때문에 장세현이 삼각지에 있는
육군본부에서 소공동에 있는 506방첩대로
일부러 찾아가 신고를 하게 된 것이 아니냐
하는 심증이 가게 된다.
  장세현의 신고가 있자, 이희영은
육군본부에 전화를 걸어 즉시 이종태를
호출했다.
  "506방첩대로 나오라."
  여기에 대해서도 이희영과 이종태의
신고가 있자 즉시 이종태를 호출햇다고
하고, 이종태는 자신의 의지에 따라
자진해서 506방첩대로 출두했다는 것이다.
  그러면 이종태의 주장을 그가 남긴
기록에 따라 살펴보기로 하자. 다음에
인용하는 글은 그의 수기임을 밝혀둔다.

  4월 21일 아침 나는 출근하기 위해
인천역에 갔다(20일은 일요일). 아차 하는
사이에 1, 2분 늦게 도착해서 기차를
놓치고 말았다. 다음 열차를 타면 출근이
늦어진다. 합승 택시를 타려고 역전을
서성이고 있는데 군용버스가 왔다. 육본
출퇴근용 버스였다. 나는 그때까지 인천과
육본 사이에 출퇴근 버스가 있다는 사실을
몰랐다.
인사참모부의 장세현 중령이 어서 타라고
손짓했다. 장세현의 옆자리에 앉았다.
이런저런 이야기 끝에, 최근 신문에 보도된
군부 쿠데타설이 화제에 올랐다. 이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장세현의 질문에
학생들이 판문점에 가자고 데모하고 정치가
이처럼 무질서하게 위험한 상황이
계속된다면 그런 것도 필요치 않을까, 나도
힘만 있다면 한번 생각해 봄직한 일이라고
대답했다.
  일반적이고 평범한 이야기였다. 또
시중에 나도는 이야기에 불과했고
조금이라도 의식이 있는 장교라면 할 수
있는 말이었다. 나로서는 장세현을
동조세력으로 포섭하기 위한 첫 시도이기도
했다.
되지 않아 오치성이 찾아왔다. 큰일났다며,
그는 장세현이 내 사상이 의심스럽다고
방첩대에 고발했다는 것이었다. 또 혁명
운운했다는데 혹시 무슨 깊은 이야기를
하지 않았느냐는 것이었다. 이것은
보안부대에 있는 동지로부터 연락받은
사항이라며 많은 동지들이 걱정하고 있다고
말했다.
  <나쁜 놈>이란 소리가 저절로 내 입에서
나왔다. 그리고 초조하고 걱정스럽게 서
있는 오치성에게 "우리와는 아무 관게 없는
말이니 걱정할 것 없다. 개인적인 생각만
이야기했을 뿐이니 추호도 걱정할 것 없고
만약 문제가 된다면 내가 혼자 책임지고
해결할 테니 안심하라"고 말했다.
  그랬더니 오치성은 "최악의 경우 고문을
대령의 사상이 의심스럽고 혁명을 해야
한다고 하더라는 말까지 했다고 하니
주의하고 그리고 서울 방첩대장 이희영
대령은 장도영 총장의 심복이니 최악의
경우 장 장군을 물고 들어가면 해결될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말했다.
  "내 스스로 이희영을 찾아가서 해명하면
어떨까? 나는 장세현에게 별로 한 말이
없는데, 장세현이 말을 만들어 했을 수도
있고....... 나를 잡으러 오기 전에 내가
가는 것이 좋지 않을까?"
  내 질문에 오치성은 "그건 알아서
하시오" 하면서 자리를 떴다. 나는 이것
저것을 생각했다. 정보계통에 근무한 적이
있는 나는 아무래도 잡혀가는 것보다는 내
발로 걸어가는 게 낫겠다는 판단을 내렸다.
이희영은 나를 보자마자 <그렇지 않아도
한번 부르려고 했는데 잘 오셨습니다>라고
말했다.

  이종태가 제발로 걸어서 506방첩대로
찾아갔다는 데 대해서 이희영은 일소에
붙였다.
  "장세현의 고발이 있자, 즉시 이종태를
불렀다. 어떤 혐의를 받고 있다 해서
제발로 찾아 들어오기 어려운 곳이
방첩대인데, 설혹 제 발로 걸어 들어왔다고
해도 누구를 붙들고 무엇이라고 변명할 수
있겠느냐?"
  이희영의 증언이었다.
  그는 또 이렇게 덧붙이기도 했다.
  "만약 이종태가 제발로 걸어들어 왔다면
얘긴데, 그렇다면 이종태의 변명을 듣기
이전에 비밀을 누설시킨 자를 가려내기
위해서 자체 내의 조사부터 시작했어야
마땅했을 게 아니냐?"
  그건 그렇다. 장세현의 신고를 공개했을
리는 만무한 일이었다. 육군 소위에서 육군
대령에 진급하기까지 줄곧 방첩대에서만
근무해 온 이희영이 그런 중대한 정보를
아무한테나 흘렸을 리는 없는 일이다.
  그런데, 이종태를 찾아온 오치성이
<이것은 보안부대에 있는 동지로부터
연락받은 사항>이라고 운운했다고 했다.
506방첩대에도 쿠데타 그룹에 포섭되어
있었던 자가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것은
얼마든지 가능한 일이다. 그러니까 포섭된
자가 있었다고 가정하고 이희영이 혼자서
알아냈을까?? 여기에 대해서는 그 누구도
해명한 일이 없다.
  그러므로 여기에서는 접어두기로 하고,
요는 이종태가 쿠데타 음모에 대해서 그
전모를 털어놨느냐, 아니면 비밀은
비밀대로 지켰느냐 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관건인 것 같다.
  여기에 대해서 이종태는 그의 수기에서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그는 장세현의 고발로 부르려 했다는
것과, 사상이 의심스럽다고 해서 이미 나의
사상과 경력에 대해 알아보았다고 말했다.
여러 조사 결과는 사상적으로 의심할
이유가 없으나 고발이 있으니 불러서
물어보는 것은 자기 책무라면서 이해를
자연스럽게 이뤄졌다.
  "이 대령이 혁명을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는데 무슨 계획이나 생각이 있어서
한 말입니까?"
  "그런 말이야 했지요. 그렇지만 최근
시중에서 떠돌아다니고 신문에 보도된
이야기에 불과한데, 그런 얘기도
못합니까?"
  "아무 의미 없이 혁명 운운했을 리는
없고 무슨 계획이나 조직이 있는 것은
아닙니까?"
  "내가 혁명을 하려는 계획이나 조직이
있으면 뭐하러 그런 얘기를 하겠소. 그런
게 없으니까 누군가 나서야 되지 않을까
해서 한 소립니다."
  변명을 장황하게 늘어놓으면 꼬투리가
수도 없다. 문득 오치성의 충고가
생각났다. 마침 이희영이 물었다.
  "그러면 혹시 누군가가 그런 일을 한다는
소문은 못 들었습니까?"
  "사실인즉, 참모총장이 혁명을 한다는
소문이 있는데, 만약 그게 사실이라면
총장을 지지하겠다는 말을 장 중령에게
말했습니다. 다른 소문은 모르겠소."

  이 대목에 대한 이희영의 증언은
엇갈린다.
  이종태는 방첩대에 불려오자, 처음에는
횡설수설로 일관하려 했다. 그래서 어떻게
해야 이 자의 입을 열게 할 수 있을까 하고
궁리를 하고 있을 때 얼핏 묘안이
떠올랐다.
다 알고 있소. 쿠데타는 장 총장과 박
장군이 손을 잡고 추진중에 있는데 뭐가
두려워 그러시오?"
  그러자 이종태는 술술 전모를 말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이종태, 그는 경상남도 남해 태생이다.
1927년생이니까 1961년 현재의 나이는
34살. 육사 4기 출신이다. 그의 수기에
따르면 그는 1958년도부터 박정희와 쿠데타
모의를 했다고 한다. 어느 정도의 구체적인
진전이 있었는지는 의문이지만 모의 정도는
있을 법한 일이었다고 여겨진다. 박정희는
1951년 이래 오매불망 쿠데타에 대한 꿈을
  이종태는 벌써 그때부터 박정희와
쿠데타를 모의해 온 사람이니까 김종필
외에는 5.16 쿠데타 그룹 중 누구보다도
박정희와 밀착돼 있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바꾸어 말하면, 쿠데타 음모에
대해서는 세부적인 문제에 대해서까지
누구보다도 소상하게 알고 있었으리라
믿어진다.
  하여간에 이종태는 이희영이 <쿠데타는
참모총장과 박 장군이 손을 잡고
추진중>이라고 하자, 쿠데타의 내용을 모두
불었다고 했다. 그는 쿠데타 그룹에 가담해
있는 인물, 그 인물들이 맡고 있는 임무
등에 이르기까지 세세히 진술했다고 했다.
  "혁명공약도 내가 이미 초안을
잡아두었다."
털어놓더라고 했다.
  이희영은 이종태의 진술을 토대로 해서
도표를 작성했다. 박정희를 정점으로
쿠데타 모의에 가담해 있는 장군과 장교들
이름 그들의 소속 부대명과 직책,
동원부대, 거사일자 등. 거사일자 얘기가
나왔으니 말인데 이른바 D데이, 거사일자는
5월 12일로 되어 있었다. 뒤에안 일이지만
쿠데타 그룹은 이종태 누설사건이 벌어지자
5월 16일로 연기했다는 것이다.

  이희영은 또 그동안 입수한 족청계
쿠데타 계획에 대한 정보도 도표로
작성했다. 그런 다음 이것을 가지고 먼저
방첩부대장 이철희를 찾아갔다. 그에게 두
계열의 쿠데타 음모를 브리핑해 주고,
  "각하, 쿠데타 음모에 대한 브리핑을
해드리려고 찾아뵈었습니다."
  그러면서 이희영은 들고 간 보따리를
끄르려 했다.
  "이미 내용을 잘 알고 있어, 그러니
설명할 것도 없어."
  천만 뜻밖이었다.
  내용을 잘 알고 있다? 어떻게? 누군가가
이미 보고를 했단 말인가? 그럴 리가 없을
텐데? 이종태가 쿠데타 음모내용에 대해서
자백을 한 것은 오늘인데, 그 말고 누가
브리핑을 했기에 이미 내용을 알고 있단
말인가? 이철희가 전화로? 그럴 리가 없다.
시간을 다투는 문제도 아닌데 전화보고를
할 리가 있는가. 더구나 이철희에게
브리핑을 끝내고 나서 <지금 육본으로 가서
생각입니다>라고 하자, 그렇게 하라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지 않았던가.
  (젠장, 뭐가 어찌된 거야?)
  이희영은 꼭 여우한테 홀린 듯한
느낌이었다. 육군의 총수가 이미 알고
있다는데야 뭐라 하겠는가. 그래서 무슨
조치에 대한 지시가 있을까 해서
부동자세를 취한 채 기다리고 있었다.
  장도영은 천장을 응시하고 있었다.
무언가 골똘히 생각에 잠겨 있는 것이
틀림없었다.
  "각하."
  이희영은 조용히 장도영을 불렀다.
  힐끗 시선을 이희영한테로 던진 장도영은
가볍게 두어 차례 고개를 끄덕이는
것이었다. 아마도 이희영이 물러가겠다고
  (그게 아닌데?)
  이희영은 잠시 망설이고 있었다.
  "쿠데타 음모에 대해선 이 대령 혼자만
알고 있어. 절대로 발설해선 안 돼."
  갑자기 정도영이 입막음을 하는
것이었다.
  "각하, 즉각 어떤 조치를 취해야 할 줄로
압니다만?"
  "조치?"
  "네."
  어떤 조치를 취해야 한다는 것은 음모를
꾸미고 있는 자들을 일망타진해야 한다는
간접표현이었다.
  (내 직책이 뭔가? 그런 군의
불순분자들의 발호를 미연에 방지하는 게
아닌가.)
하고 여전히 선 채로 버텼다.
  "이 대령, 내가 뭐라고 했어? 쿠데타
음모 문제는 이 대령 혼자만 알고 있어야
한다고 했잖아? 절대로 발설해선 안 돼.
그만 물러가!"
  이희영은 참으로 이상한 양반도 다
보겠다고 생각하며 참모총장실을
물러나왔다.
  문득, 그가 오늘 이종태를 심문하면서
했던 말이 상기되었다.
  <쿠데타는 장 총장과 박 장군이 손을
잡고 추진중에 있는데.......> 그가
이종태에게 이런 말을 했던 이유는 그의
입을 열게 하기 위한 임기응면의 수단에
불과했다. 그랬는데, 그럼 사실에 있어서는
그게 진실이었단 말인가?
받아들여야 할지 꼭 안개 속을 헤매고 있는
것만 같은 느낌이었다.
  문득 대구에서 있었던 일이 되새겨졌다.
장도영이 2군 사령관직에서 육군
참모총장으로 영전된 것이 1961년 2월
중순이었다. 그런데 후임 2군 사령관은
장도영이 서울로 올라가고 나서 새로
발령이 났었다. 장도영은 번거로우나 다시
또 대구로 내려올 수밖에 없었다. 신구
사령관이 이.취임식을 가져야 했기
때문이었다.
  대구로 내려온 장도영이 영접차 나간
이희영에게 한 말이었다.
  "이상 없지?"
  이상 없느냐는 것은 군부의 동향에
이상이 없느냐는 질문이었다.
그쪽에만 신경을 쓰고 있는 중입니다."
  "그래?"
  공군 쿠데타설은 이미 장도영도 익히
알고 있는 일이었다. 그는 이희영의 대답을
듣자 <그래?> 하며 빙그레 미소를 짓는
것이었다.
  그때의 그 미소가 무엇을 의미하고
있었지?
  이희영은 그때의 장도영의 미소하고 지금
입막음을 엄명한 것과를 연관시켜 보았다.
가슴이 철렁 내려앉으며 숨이 콱 막히는
듯한 답답증이 일었다.
  (장 장군이 박정희 장군하고 손을 잡은
게 틀림없어!)
  이희영은 하늘이 노랗게 되는 듯한
느낌이었다.

  <이종태 쿠데타 음모누설 사건>이 있은
지 꼭 보름 만인 5월 6일, 이날 아침
11시경이다. 경상남도 거제 출신 민주당
소속 민의원 윤병한(尹炳漢)이 한 낯선
신사를 거느리고 국무총리 공보비서실로
들어섰다. 당시 국무총리 공보비서실은
중앙청 별관 1층에 자리해 있었다.
  비서실로 들어선 윤병한은 공보비서관
송원영(宋元英) 곁으로 다가갔다.
  "총리를 좀 뵈어야겠소. 송 비서관이
주선 좀 해주이소."
  총리하고의 면담 주선을 요청했다. 무엇
때문에 만나고자 한다는 이유나 설명도
없었다.
수석비서관이자 장면 내각의 대변인이었다.
윤병한의 부탁을 받은 송원영은 조금
짜증이 나는 모양이었다. 그럴 만도 했다.
국무총리를 면회하고자 찾아오는 사람이
하루에도 수십 명에 이르고 있었다. 그들이
국무총리를 만나고자 하는 것은 태반이
개인적인 용무 때문이었다. 고작해야 취직
부탁이 아니면 이권 청탁 이런 것들이었다.
  총리를 만나고자 하는 사람들을 모조리
다 만나게 해주려 했다간 총리는 몸뚱이가
백 개라도 견뎌내지 못할 것이다. 국사를
돌볼 시간을 갖기도 어려운 일이었고,
그래서 어쩔 수 없이 총리 면회신청을
해오는 사람들을 통제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거 윤 의원, 어지간하면 총리의 시간을
아실 만한 국회의원들까지도 자꾸 총리만을
만나려고 하니?"
  송원영은 조금 짜증 섞인 말투로 총리
면담 주선을 할 수 없다는 것을 간접적으로
표현했다.
  "이거 와 이러능기요, 송 비서관? 내가
개인적인 일로 총리를 만나려고 하는 줄
아시오? 중대한 정보가 있어서 만나려는
거요, 중대한 정보가 있어서."
  윤병한은 사적인 일이 아니라 공적인 일
때문이라는 것을 큰소리로 떠들고 나서
송원영의 귀에 바싹 입을 대고 소근거렸다.
  "여보 송 비서관, 여기 이분이 군부
쿠데타 계획에 관한 정보를 제공하려 왔단
말이오."
  "군부 쿠데타 계획?"
곤두섰다. 그렇지 않아도 며칠 전 <장면
국무총리 암살미수 사건> 같은 것이 벌어져
모두가 긴장에 쌓여 있을 때였다.
  이 사건은 황해도 안악(安岳) 출신인
박대완(朴大完)이란 자가 주모자가 된 매우
우스꽝스러운 사건이었다. 그러나 긴장해
있는 가운데서도 송원영은 피식 웃음이
새어 나왔다.
  (이 친구 엉뚱한 소리를 하면서 총리를
만나려는 게 아냐?) 하는 생각이 일었기
때문이었다.
  그가 웃자, 윤병한의 눈꼬리가 치켜졌다.
  "여보, 이게 웃을 일이오? 더구나
구체적인 증거까지도 가지고 왔는데?"
  증거까지 가지고 왔단다. 그렇다면
총리를 만나려는 수단이라고만 해석할 수도
  "알겠습니다. 총리께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송원영은 앞장서서 나가며 비서관
정주성(鄭周成)에게 따라 오라고 눈짓을
했다.
  총리 집무실로 들어섰다.
  "윤병한 의원께서 총리께 중대한 말씀이
있으시답니다."
  윤병한을 만나 줄 필요가 있어서
안내했다는 것을 간접적으로 시사했다.
  "정 비서관이 배석해 있도록 하시오."
  송원영은 정주성에게 귀엣말로 말하고
물러나왔다.
  "중대한 말씀이라니 무슨 말씀인가요?"
  장면이 나직히 물었다.
  "예, 다름이 아니라 군부 쿠데타에 대한
  "군부 쿠데타?"
  장면이 미간을 찌푸리며 되물었다.
  "예."
  윤병한은 안주머니에서 메모지 한 장을
꺼내 장면 앞에 펼쳐 놓았다.
  "여기 적혀 있는 자들은 모두 군부
쿠데타 모의에 가담해 있는 자들입니다.
살펴보십시오."
  장면은 그 메모지를 집어 들었다. 제일
먼저 눈 속으로 파고든 이름이 <제2군
부사령관 육군 소장 박정희>라는 직함과
계급 그리고 이름이었다.
  "박정희? 박정희가 어떤 사람이지?"
  그 누구도 그가 어떤 인물이라는 것을
설명하는 사람은 없었다. 박정희에 대해서
알고 있는 사람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박정희라는 인물에 대해서 알고 있었다면
상황은 어떻게 벌어지게 되었을까? 그의
사상적 경력, 그리고 1951년 5.26 정치파동
때 이종찬에게 쿠데타를 건의했던 사실
등을 알고 있었으면 장면에게 박정희라는
인물을 구체적으로 소개하기만 했던들,
장면은 좀더 다른 방법으로 대처하지
않았을까?
  장면은 그 메모지를 찬찬히 살펴보았다.
육군 소장 이주일(李周一)의 이름도 들어
있었다. 그 밖에는 태반이 육군 중령의
이름들이었다.
  "윤 의원이 이 명단을 용케 입수했구려.
이 명단을 어떻게 입수했소?"
  "예, 바로 이 오 사장이 제보해
주었습니다."
장면에게 소개했다.
  이 신사의 이름은 오인환(吳仁煥),
한양공업(漢陽工業)주식회사 사장으로 그의
설명에 따르면 그가 군부 쿠데타 계획에
대한 정보를 입수하게 된 경위는 이러했다.
  김덕승(金德勝)이라는 인물이 있었다.
일제시대 때 만주땅에 주둔해 있던 일본
관동군(關東軍)의 정보원으로 있었다고
전해지고 있던 인물이었다. 관동군이라고
하면 포악하고 악명 높은 군대였는데 그
관동군의 정보원이었다고 하면 그 인물이
만주땅에서 어떤 짓을 했으리라는 것은
상상하고도 남음이 있다.
  그런데도 그는 해방 후 만주에서
귀국하자 <만주땅에서 독립운동을 했다>고
떠벌리고 다녔다. 만주땅에서 돌아온
모르는 사람이 없을 지경이었는데도
말이다.
  하긴, 그가 광복군(光復軍)에 몸담았던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것은 전전(戰前)
광복군이 아니라 전후(戰後) 광복군이었다.
  8.15 해방이 되자, 광복군에서는
북경(北京)에 광복군 초모처를 설치하고
북지(北支) 또는 만주땅에서 일본군 군적에
있던 한국 청년들을 모아서 광복군에
편입했던 것이다. 그가 관동군 첩자짓을
했다는 것을 광복군 초모처 요원이
알았던들 광복군에 편입시켜 줄 리가
없었다.
  그가 박정희라든가 이주일 등 5.16 군사
쿠데타 후에 쿠데타를 성사시키는 데
협조를 했다고 해서 군사정부에서는
중앙일보 자리 건물을 주어 산업박람회를
열어 치부할 수 있도록 해주었고, 뒤에는
마사회(馬事會) 회장 감투를 씌워주기도
했었다. 전두환(全斗煥)이 정권을 잡은
후에는 중국 요리집을 경영했다던가.
  김덕승은 5.16 군사 쿠데타 전에는
<김용천>이라는 가명으로 행세를 했다.
전후 광복군에서 돌아온 사람들 가운데
군의 요직에 앉은 사람들을 찾아다니며
군납도 하고 그 일의 중개업도 하는 등
그러면서 생계를 꾸려나가고 있었다.
  한양공업 사장인 오인환에게 대구에
내려가 있는 김용천 아니 김덕승으로부터
장거리 전화가 걸려온 것은 1961년 5월
2일이었다. 제2군 사령부에서 큰 공사를
맡게 되었으니 즉시 내려오라는 것이었다.
공사를 맡게 되었다는 소리를 듣고 가슴이
부풀지 않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는
만사 제쳐놓고 대구로 달려 내려갔다.
  오인환을 맞은 김덕승은 그를
중화원(中和園)이라는 중국 요리집으로
안내했다. 방으로 들어서니 거기에는 벌써
선객들이 있었다. 어깨에 번쩍번쩍하는
별들을 달고 있는 장군들이었다.
  "이 어른은 제2군 부사령관 박정희 소장
각하, 이 어른은 참모장 이주일 소장
각하."
  김덕승은 자못 의기양양해져 장군들을
소개했다.
  오인환의 가슴은 설레이기 시작했다.
제2군 사령부에 큰 공사가 있다고 하더니
과연 틀림없는 일이었구나 하는 느낌이
자신이 부담하리라 작심을 했다. 그러면서
그는 장군들하고는 초대면이었으나, 그들의
환심을 사두고자 해서 호기있게 놀았다.
진탕 술을 퍼마신 다음에 여관으로
돌아갔다.
  다음날 아침 김덕승이 여관으로
찾아왔다. 그는 여관으로 찾아가기 전에
부사령관 관사로 박정희부터 찾아갔다.
  "각하, 오인환 그 사람 어떻습니까?"
  "글쎄, 내가 보기엔 괜찮은 사람 같은데
전부터 잘 아는 사이오?"
  "네, 그렇습니다. 저하고는 금전상의
거래도 잦았고......."
  "그래서 내가 부탁한 군자금을 그
사람한테서 조달하려고 불러내렸나?"
  "네, 그렇습니다. 제 주위에는 그만한
사람밖에 없어서......."
  군사 쿠데타를 추진하고 있는 박정희는
군자금 조달이 막막했다. 그래서 김덕승을
불러내렸다. 그리고는 쿠데타에 필요한
자금 5백만 환만 마련해 달라고 부탁했던
것이다.
  "김형, 그래 그 사람이 돈을 선뜻 내놓을
것 같소?"
  박정희는 아무래도 마음이 놓이지 않는
눈치 같았다. 사실에 있어서는 김덕승도
자신은 없었던 것이다.
  "문제는 바로 그것입니다. 큰 공사를
따내게 되었다고 내려오라고 하긴
했습니다만 뭐라고 하면서 5백만 환을
달라고 해야 할지......?"
  박정희는 한동안 말이 없었다. 담배만
  "각하, 이렇게 하면 어떻겠습니까?"
  "어떻게?"
  "지금 각하께서 추진하고 있는 일을
솔직하게 털어 놓고 협조를 해달라고
부탁하는 게......?"
  "쿠데타 계획을 털어놓겠단 말이오?"
  "아무리 생각해도 그 방법밖에는 달리
방법이 없을 것만 같습니다."
  박정희는 한동안 또 말이 없었다. 여전히
담배만 빨고 있었다. 이윽고 그가 입을
열었을 때에는 담배 한 개피를 다 태우고
난 뒤였다.
  "김형이 믿을 수 있다고 자신하거든
생각대로 해보시오."
  김덕승이 방안으로 들어서자, 오인환은
인사를 생략하고 궁금한 것부터 물었다.
공사 내용이 어떤 것입니까?"
  "오 사장."
  김덕승은 오인환을 불러놓고 잠시 뜸을
들였다. 그런 다음 오인환의 의중을
떠보았다.
  "공사 내용을 말하기 전에 먼저 한 가지
물어보겠는데 우선 나한테 5백만 환만 먼저
줄 수 있겠소?"
  "그야 공사만 확실하게
따낸다면야....... 하지만 어떤 공사인지,
규모는 어느 정도인지 그런 것을 알아야
나도 확실한 대답을 할 수 있을 게
아니오?"
  당연한 대꾸였다. 공사 규모가 몇
푼짜리이지도 모르면서 5백만 환이란
대금을 선뜻 내놓을 미친 놈이 어디 있단
  5백만 환이 어느 정도의 큰돈인지
독자들이 이해하는 데 도움을 주고자
1961년 5월 당시(쿠데타 직전)의 쌀값을
소개하면, 한 가마니(10말)에 도매로 1만
9천 5백 환이었다. 그러니까 5백만 환을
지금의 쌀값으로 환산하면 2억 8천만 원에
해당하는 금액이다.
  "오 사장, 꼭 공사 내용을 알아야만 돈을
줄 수 있겠소? 나를 믿고 줄 수는 없겠소?"
  오인환은 힐끔 김덕승의 표정을
살펴봤다.
  (뭐 이런 미친놈이 다 있어? 이놈아 너
같은 브로커를 뭘 믿고 5백만 환이라는
큰돈을 주어?)
  그의 눈은 그렇게 말하고 있었으나
입으로 뱉아 내는 대답은 좀 부드러웠다.
나는 사업가올시다. 5백만 환이란 돈이
크다면 클 수도 있고 작다면 작다고 할
수도 있지요. 그러니 공사 내용을
알아야만......."
  "알겠습니다."
  김덕승은 끝까지 들으려 하지 않았다.
  "그럼, 내 얘기하죠. 공사치곤 아주 큰
공사요."
  "큰 공사라면 어느 정도로 큰 공사냔
말입니다."
  "대한민국을 청부 맡는 공사요."
  "대한민국을 청부 맡는 공사?"
  무슨 뜻인가, 대한민국을 청부 맡는
공사라니? 오인환은 얼핏 납득이 가지
않았다. 알쏭달쏭하기만 했다.
  "김 선생, 속시원히 툭 까놓으시죠? 어떤
돌리기만 하십니까?"
  "그러게 대한민국을 청부 맡는 공사라고
하지 않았소?"
  이렇게 말하고 김덕승은 지금 박정희가
장도영을 업고 쿠데타를 모의하고 있다고
툭 털어놓았다.
  오인환은 놀랐다.
  "아니 장도영 장군도 가담돼 있단
말입니까?"
  오인환은 장도영이 어떻게 해서 육군
참모총장으로 영전되게 됐는지 대강은 알고
있었다. 그러기에 그의 놀라움은 더욱 컸던
것이다.


  장면은 놀라기보다는 믿기지 않는다는
듯한 표정이었다.
  "그 김 무엇인가 하는 사람이 분명히
장도영 장군도 가담돼 있다고 했소?"
  장면이 따지듯이 다시 물었다.
  "가담돼 있다고 한 것이 아니라 장도영
장군을 업고서 할려고 한다 했습니다."
  오인환은 조금 걱정을 했다.
  "그게 모두인가요?"
  오인환이 힐끔 윤병한을 바라보았다.
  "있었던 사실은 모두 말씀드려요."
  윤병한이 재촉했다.
  오인환은 다시 장면을 바라보면서 얘기를
계속했다.
  쿠데타 계획을 털어놓는 김덕승은 비밀을
털어놓는 사실이 아무래도 좀 불안했던
털어놓고 잠시 오인환의 감정의 변화를
살피고 있다가 이렇게 덧붙였다.
  "이제 당신은 장도영 장군과 박정희
장군의 비밀을 알고 났으니 이 비밀을
지키지 않는 한 당신의 목숨을 보장받을 수
없게 됐소. 그리고 당신은 이 시간
이후부터 당신을 미행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을 명심해 두시오."
  김덕승은 협박을 했다. 일제시대
관동군의 첩자노릇을 하던 때의 버릇을
버리지 못하고 다시금 썼던 것이다. 제
버릇 개 주랴. 오인환은 그 말을 듣자
등골이 오싹해지는 오한을 느꼈다.
  김덕승은 이런 협박 한마디로 그치지를
않고, 또 하나의 협박을 보탰던 것이다.
  "이제 오 사장은 돈을 내놓지 않고는 못
없다면 모를까, 능력이 있는 이상엔 싫든
좋든 우리의 요구 조건을 들어줘야 할
거요. 싫다고 하는 것은 곧 우리들의
비밀을 누설시키겠다는 얘기밖에 되지
않으니 말이오. 어떻게 하겠소? 언제 돈을
마련해 주겠소?"
  김덕승은 마치 맡겨둔 돈을 받아내려는
듯한 투의 말을 했다.
  오인환은 오금이 저리며 가슴이 후들후들
떨리는 것을 느꼈다. 엄청난 함정에 빠지게
되었다는 절망감도 일었다.
  "김 선생, 2,3일만 여유를 주십시오.
돈을 반드시 마련해서 드리겠습니다."
  오인환은 약속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런 경우 만일 거절했다가는 어떤 봉변을
당할지도 모르는 일이었기 때문이었다.
사기를 치려는 게 아냐? 하는 생각이
번갯불처럼 일었다.
  박정희가 장도영을 업고 쿠데타를
계획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라면, 그까짓 돈
5백만 환이 없어 한 사업가를 협박해서
돈을 울거내려 하겠는가 하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하긴 그랬다. 박정희는 제2군
부사령관이었다. 2군의 어떤 공사를
주겠다고 가짜 계약서 하나 만들어 주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도 아니었다.
  (틀림없어, 이 사나이는 쿠데타를
빙자해서 사기를 치려는 거야.)
  이것이 사기냐 아니냐 하는 것을
가려내자면 어떤 방법이 있는가?
김덕승이란 인물이 박정희하고 어느 정도로
한 가지만 알아내도 군사 쿠데타의 진부는
가려질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래서
오인환은 한두 가지 꾀를 부렸다.
  "김 선생, 난 대구는 초행이라 이왕에
내려온 김에 구경이라도 하고 올라갔으면
하는데, 박 장군한테 말씀해서 차를 좀
얻어쓸 수 없겠습니까?"
  오인환은 청을 했다.
  "그러십시오. 그거야 뭐 그리 어려운
일이겠습니까?"
  김덕승은 선선히 대답을 하고 여관
대청마루로 나가는 것이었다. 아마도
박정희한테 전화를 걸려는 모양이었다.
  오인환은 두 귀를 대청마루 쪽으로 바싹
모았다. 박정희한테 전화를 거는 것이
분명했다.
20분쯤 되었을까? 밖에서 클랙슨이
요란하게 울렸다.
  "나가 보실까요?"
  김덕승이 먼저 자리에서 일어섰다.
밖으로 나가보니 과연 별판에 두 개의 별이
달려 있는 세단이 대기하고 있었다.
  (두 사람이 가까운 사이인 것만은 틀림이
없군. 그렇다면 쿠데타 계획도 사실이라는
얘기가 아닌가?)
  박정희가 보내준 차에 올라 대구를
한바퀴 돌았다.
  (쿠데타 계획이 사실이라면, 쿠데타
계획이 사실이라면 나는 어떻게 처신해야
한다?)
  구경하는 동안 오인환은 마냥 번민만을
거듭했다.
마련해 줄 수는 없을 것 같았다. 그렇다고
모른 체 내버려 두었다가 쿠데타가
성공하기라도 하는 날엔 김덕승은 보복을
하려 들지도 모른다. 속된 말로 <빼지도
박지도 못하는> 경우가 바로 이런 경우일
것이다.
  김덕승과 함께 대구 시내를 일주하고
여관으로 돌아왔다.
  "김 선생, 실은 내가 어젯밤에 몽땅
털어서 술값을 내버렸더니 수중에 무일푼이
돼 버렸습니다. 죄송하지만 서울까지의
차표를 좀......."
  오인환은 노자돈을 요구했다.
  사실 수중에 무일푼이 돼 버려서
노자돈을 요구했던 것은 아니었다. 둘
사이는 스스럼이 없는 사이가 됐다는 것을
  "나도 마침 가진 돈이 없는데......."
  김덕승은 꽤나 면구스러운 모양이었다.
서울까지의 기차표 값이 얼마라고 그만한
돈도 갖고 있지 못한단 말인가? 명색이
사업가라면서.
  "잠깐만 앉아 계십시오."
  김덕승은 다시 또 대청마루로 나가는
것이었다. 아마도 다시 또 박정희한테
전화를 걸려는 눈치인 것이 분명했다. 그가
방으로 돌아온 지 한 30분 뒤에 박정희의
운전수가 서울까지의 기차표를 전해 주고
돌아갔다.
  여관방을 나서기 전 오인환은 다짐하듯이
물어보았다.
  "김 선생, 쿠데타의 영도자로 장도영
장군을 모시기로 한 것이 틀림없습니까?"
틀림없다면 돈은 어김없이 마련해 주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틀림없습니다."
  김덕승은 한마디로 잘라 대꾸했다.
  "김 선생께서 친히 장 장군을 만나
보셨습니까?"
  "나는 만나본 일이 없습니다. 하지만 박
장군께서 그렇게 말씀하셨는데 틀릴 리가
있겠습니까?"
  오인환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또
이렇게 물었다.
  "내가 5백만 환만 내놓게 되면 나도
대한민국 청부공사에 한몫 끼게 되는
거죠?"
  "물론입니다. 오 사장이 5백만 환만
내놓게 되면 오 사장의 공로야말로
  오인환은 김덕승과 단단이 약속을 하고
서울로 올라왔다. 서울에 도착하자 꼭
호랑이 굴에서 빠져나온 듯한 느낌이었다.
김덕승한테 군사 쿠데타에 대한 계획을
들었던 그의 마음은 그만큼 두려움에
휩싸여져 있었던 것이다.
  집으로 돌아오자, 그는 사흘 동안을
두문불출하며 번민을 했다. 돈을 어떻게
마련해 주어야 할 것인가 하는 문제 때문이
아니었다. 고발을 해야 할 것이냐? 아니면
돈을 마련하는 척 동분서주하면서 시간을
끌어야 할 것인가? 하는 문제 때문이었다.
  끝내, 오인환은 고발 쪽으로 마음을
굳혔다. 그렇다고 군 수사기관이나 경찰에
고발할 수는 없었다. 쿠데타를 계획해 놓고
있는 사람들이고 보면 어디에 손을 뻗쳐
때문이었다.
  그래서 생각다 못해 평소 친하게 지내고
있는 민주당 소속 국회의원인 윤병한을
찾아가 의논을 했다. 그랬더니 윤병한은
당장 총리를 만나자고 하며 이리로 끌고 온
것이었다.
  얘기를 듣고 난 장면은 절로 한숨이 새어
나오는 모양이었다. 흐음 하고 알게 모르게
한숨을 쉬었다.
  "국토방위를 하라고 쥐어준 총칼이지
그게 어디 정권을 뒤집어 엎으라고 쥐어준
총칼인가?"
  또 한번 알게 모르게 한숨을 쉬는
것이었다.
  "박정희라는 사람이 쿠데타 모의를 하고
있는 것이 명백한 이상에는 빨리 손을 쓰는
  윤병한은 꽤나 초조한 모양이었다.
  장면은 거기에는 대답을 않고 기립해 서
있는 비서관 정주성을 돌아보며 말했다.
  "가서 송 비서관더러 어서 좀 올라오라고
해."


  비서관 정주성이 공보비서실로 내려왔다.
그의 표정이 사뭇 긴장되어 있었다.
  송원영은 그러한 정주성을 의아한 듯
바라보며 궁금한 듯 물었다.
  "윤 의원께서 무슨 말씀을 하시던가요?"
  "상세한 말씀은 나중에 올리겠습니다.
어서 위로 올라가 보십시오. 총리께서
부르십니다."
말수도 적은 사람이었다. 어지간한 사람
같으면 놀라움에 호들갑을 떨 법한
일이었으나, 그는 조용히 말하며 자리에
앉는 것이었다.
  장면이 부른다는 말에 송원영은 부리나케
다시 총리실로 올라갔다. 윤병한과
오인환은 그때까지도 자리를 뜨지 않고
앉아 있었다.
  "송 군, 지금 즉시 장도영 육군
참모총장하고 이태희 검찰총장을
들어오라고 해주게."
  지시하는 장면의 표정도 사뭇 딱딱하게
굳어져 있었다.
  장면의 부름을 받고 먼저 달려들어온
사람은 장도영이었다. 그는 총리실로
들어서자 부동자세를 취하고 거수경례를
  장면이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우선 좀 앉으시죠."
  장도영이 쇼파에, 장면하고는 대각선으로
앉았다.
  "바쁘실 텐데 들어오라고 해서
미안하오."
  장면은 이렇게 운을 떼고 난 뒤,
  "장 장군을 들어오라 한 것은 다름이
아니고 박정희라고 하는 2군 부사령관이
쿠데타를 추진하고 있다는데 장 장군은
알고 계시오?"
  장도영은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느낌이었다.
  (어떻게 해서 이 정보가 총리의 귀에까지
들어갔지?)
  그는 가슴이 방망이질을 했으나 시침을
  "각하, 쿠데타라니요? 그 사람은
쿠데타를 할 만한 인물이 못 됩니다."
  "쿠데타를 할 만한 인물이 못 된다구요?"
  "네, 각하! 그 사람 지금까지 쭈욱 제
밑에 있었기 때문에 너무나 잘 알고
있습니다. 절대로 쿠데타를 할 만한 인물이
못 됩니다."
  장도영은 어째서 이렇개 박정희를
두둔하고 나섰던 것일까? 자기를 지도자로
업고 쿠데타를 할 것이라는 박정희의 말에
행여나 대권을 잡을 호기라고 내심
쿠데타를 지지하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그래요?"
  장면은 도시 어떤 판단을 내려야 할지
곤혹스러운 모양이었다.
참모총장직에 있는 한 쿠데타에 대한
염려는 놓으셔도 됩니다."
  장도영은 다시 한번 자신있게 강조하는
것이었다.
  "하여간에 장 장군, 박정희라는 사라미
쿠데타를 추진하고 있다는 믿을 만한
정보가 있으니 조사해서 나한테 보고를
해주시오."
  장면은 조사할 것을 지시했다.
  "네, 각하."
  장도영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일분 일초라도 빨리 이 자리에서 떠나고
싶은 심정이 굴뚝 같은 모양이었다.
  "그럼, 각하, 물러가겠습니다."
  장도영은 거수경례를 붙이고 총리실에서
물러났다. 그는 문을 열기 직전 장면과
눈총으로 바라보았다.
  그의 눈초리는 이렇게 말하고 있었다.
  (군사 쿠데타 어쩌고 하며 제보를 한
놈들이 너희놈들인 모양이구나. 괘씸한
놈들!)
  육군본부로 돌아온 장도영은 즉시 대구에
있는 박정희한테 전화를 걸었다.
  "여보, 박 장군. 좀 조심들 해야겠소. 박
장군이 중심이 돼서 쿠데타를 추진하고
있다는 온갖 소문이 다 돌고 있으니
아무래도 조심해야 할 것 같소."
  장도영의 전화를 받은 박정희는 빙긋
미소를 지었다. 장 장군이 나를 감싸주고
있는 이상엔 쿠데타가 실패로 돌아갈 리가
없다. 이제는 오히려 마음놓고 일을 추진할
수가 있다.

  장면의 부름을 받은 검찰총장
이태희(李太熙)가 총리실에 나타난 것은
장도영이 물러간 직후였다.
  평안남도 강동(江東) 태생인 이태희는
이때 나이는 꽉 찬 오십이었다. 남에게
주는 인상이 꼭 검찰총장에 알맞는 얼굴
모습을 하고 있었다.
  장면이 물었다.
  "이 총장, 군사 쿠데타설이 분분한데 이
총장께서도 소문 들은 일이 있으시오?"
  "예, 그런 풍설은 벌써부터 듣고
있습니다. 3,4월 위기설이 나돌고 있을 때
벌써 퍼져 있던 풍설입니다."
  이태희는 <뭐 그까짓 풍설 같은 것을
가지고 마음을 쓰느냐?> 하는 그런
  "아니 풍설이 아니고 이번엔 구체적인
제보가 있어서요. 2군 부사령관인가 하는
박정희라는 사람이 주동이 되어 있는
모양이오."
  장면의 입에서 <박정희>라는 이름까지
구체적으로 거론되자 이태희는 긴장했다.
  "2군 부사령관이라구요?"
  "그렇소."
  "그렇다면 장도영 장군한테 명령하실 일
아닙니까? 군부의 장성에 대해선 검찰에서
손을 댈 수는 없으니 말씀입니다."
  "아니, 장 장군한테는 벌써 지시를 했소.
박정희라는 사람에 대해서 조사를 해서
보고하라고. 검찰에선 김덕승인가 하는
사람에 대해서 조사를 해주었으면 좋겠소."
  "김덕승이라니요? 처음 듣는
  "김덕승이란 사람에 대해서는 여기 앉아
있는 오 사장이 익히 잘 알고 있소. 그러니
오 사장한테 듣고 그 사람에 대한 조사를
진행시켜 주시오."
  "알겠습니다."
  오인환은 김덕승이란 인물이 어떤
인물이며 쿠데타를 모의하고 있는
박정희와는 어떤 관계인가를 이태희에게
다시 한번 설명을 해주어야만 했다.
  다음날인 5월 7일은 일요일이었다.
  이날 대검찰청 총장실에는
일요일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아침 일찍부터
세 사람이 모여서 구수회의를 하고 있었다.
대검찰청 총장 이태희, 부장검사
김홍수(金洪洙). 서울시 경찰국 부국장
김덕호(金德鎬) 등이었다. 어제
쿠데타에 관한 정보를 어떻게 수사 처리할
것인가를 논의하고자 두 사람을 불러들여
연 구수회의였다.
  한데, 대검찰 총장인 이태희는 어제
오인환한테 들은 얘기를 두 사람한테
되새겨 들려주고 자기 견해를 피력하는
것이었다.
  "내 생각엔 말이외다. 암만 생각해 봐도
이번 정보는 군사 쿠데타를 빙자한 사기
사건 같은 느낌이 든단 말이오. 어제
총리실에서 만난 그 정보 제공자인
오인환이란 사람도 말합니다만, 적어도
엄청난 국가예산을 쓰고 있는 군의 장성이
단돈 5백만 환을 마련할 길이 없어서 그
김덕승인가 김용천인가 하는 사람한테
5백만 환의 군자금을 조달해 달라고
  기가 막힐 노릇이 또 한 번 벌어진
것이다. 생각해 보라, 이 자리가 어떤
자리인가? 이 자리는 총리의 명을 받아
군사 쿠데타 정보를 어떤 방법으로
수사해서 처리할 것이냐를 논의하기 위해
마련된 자리가 아니었던가? 그런 자리였고
보면 이태희는 마땅히 심각하게 이 문제와
씨름을 해야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째서 군사 쿠데타에
대한 정보를 흐려놓는 발언을 했느냔
말이다. 아마도 이태희는 장도영이 군사
쿠데타의 영도자로 추대되어 있다는 말을
듣고 미지근하게 수사를 해주기 바라는
마음에서 이런 발언을 했던 것은
아니었을까? 이태희와 장도영은
사돈(査頓)간이라는 말이 있었으니 말이다.
철두철미한 법률가였다. 법률가가 인정에
끌려서 일을 그릇되게 처리하려 들었을
리는 없다. 하여간에 결과론이지만
이태희가 좀더 적극성을 띠고 수사에
임했더라면 하는 아쉬움은 있다.
  서울시 경찰국 부국장 김덕호가 묘안을
내놓았다.
  "저쪽에다 프락치를 넣어 보면
어떻겠습니까?"
  "프락치라니?"
  "이쪽 사람을 저쪽 사람한테
접근시키도록 한단 말씀입니다."
  김덕호가 내놓은 묘안에 따라 군사
쿠데타 그룹에 프락치를 넣오 보기로 이날
세 사람 사이에는 합의가 이루어졌다.
프락치로서는 김덕호의 친구인
  군사 쿠데타에 대한 정보는 또 다른
루트를 통해서 장면에게 제공되었다. 이
정보는 송우범(宋宇範)이 조폐공사 사장
선우종원(鮮宇宗原)을 통해 장면에게
제공되었다.
  송우범은 경찰출신으로서 제3대 국회의원
선거때 자유당 공천을 받아 충청남도
대덕에서 입후보해서 당선됐던 인물이다.
그는 제3대 국회의원에 당선되자
국방분과위원으로서 활동했기 때문에 군부
사정에 꽤 밝은 편이었다.
  그가 어떤 루트를 통해서 박정희가
주동이 돼서 계획, 추진되고 있는 쿠데타에
관한 정보를 입수했는지는 알 수가 없다.
하여간에 그는 꽤 소상하게 쿠데타 계획에
관한 정보를 입수했었다. 주동자가
것, 여기에 과도정부 때 예편당한 해병소장
김동하(金東河)도 가담돼 있다는 것,
그리고 영관급 장교들의 이름과 육군
참모총장 장도영도 동조하고 있다는 정보를
입수해서 선우종원에게 제공해 주었던
것이다. 송우범은 이 정보를 선우종원에게
제공할 때 그냥 구도로 전하거나 메모지에
간단하게 적어서 제공해 주었던 것이
아니었다. 친절하게도 쿠데타 주동자들의
인맥을 도표로 그려서 제공해 주었던
것이다.
  평양(平壤) 태생인 선우종원은 1942년에
경성제국대학 법과를 졸업, 다음해인
1943년에는 고등문관(高等文官:지금의
고등고시) 시험 사법과에 합격, 해방과
함께 사상검사로서 이름을 날렸던
장면이 대통령중심제하에서 국무총리에
임명되었던 때로 이때 선우종원은 장면의
비서실장으로 발탁되었다. 그러므로
선우종원은 장면의 측근 중의 측근이라 할
수 있었다.
  "열 길 물 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 속은
모른다더니, 장도영이 그자가 쿠데타에
동조를 해?"
  선우종원의 놀라움은 컸다. 분노도 컸다.
그는 송우범이 제공해 준 쿠데타
주동자들에 관한 인맥도표를 장면한테
가지고 갔다.
  "장도영이란 자를 즉시 파면하고 군
수사기관으로 하여금 쿠데타 계획을
추진하고 있는 자들을 모조리 체포해서
엄중 문초하도록 하십시오."
  "장도영 장군이 쿠데타에 동조를 하고
있어?"
  장면은 이때에도 도무지 믿기 어렵다는
표정이었다. 그는 이미 오인환을 통해서
박정희가 장도영을 업고 쿠데타 계획을
추진중에 있다는 제보를 받지 않았던가?
장도영이 쿠데타에 동조를 하고 있다는
것은 쿠데타 그룹에 기울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할 수 있었다.
  그런데도 장면은 송우범이 제공해 준
정보 중에서도 장도영에게 관련된 부분에
대해서는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던 것이다.



  5. 장도영, 박정희를 감싸고 돌다


  국방장관 현석호(玄錫虎), 제3대 국회
때는 자유당 공천을 받아 고향인 경상북도
예천(禮川)에서 당선됐었고 제4대 때는
민주당으로 변신, 민주당 공천을 받아 역시
예천에서 입후보했으나 낙선했었다. 그가
다시 국회에 들어온 것은 4.19 뒤
과도정권에서 치른 7.29 총선 때였다.
그러니까 그는 재선의원이었다.
  일본의 경우 같으면 2선 정도로 내각에
입각한다는 것은 생각조차 못한다. 한국의
경우에도 내각책임제로 정권이 바뀐
이상에는 다선(多選) 위주로 조각을 해야
있었던 것도 사실이었다.
  뒤에 장면 정권에 대한 얘기를 소개할 때
구체적으로 언급하겠지만, 장면이 다선
위주로 조각을 해야겠다는 생각을 품고
있으면서도 재선인 현석호를 처음엔
국방장관으로 입각시켰다가 2개월 만에
내무장관으로, 다시 또 2개월 뒤에는
국방장관으로, 마치 데리고 들어온 자식
끼고 돌듯이 계속해서 내각에 머물게 했던
것은 현석호란 한 정치인이 너무나
성실했기 때문이었다.
  1961년 5월 8일 월요일. 이날 육군
참모총장인 장도영이 아침 일찍
국방장관실로 현석호를 찾아왔다. 적어도
육군의 참모총장이 국방장관을 찾아갈 일이
있으면 사전 양해를 얻는 것이 예의요,
없이 불쑥 찾아왔던 것이다. 현석호가
의아했을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무슨 일로 찾아왔소?"
  현석호는 예고 없이 찾아온 이 사나이의
행동이 꽤나 못마땅한 모양인지 묻는
목소리가 좀 퉁명스러웠다.
  "예. 장관님께 드릴 말씀이
있어서......."
  장도영도 아차 하고 예고를 하지 않은
사실을 그제야 깨달았던가? 잠시
머뭇거렸다.
  "앉으시오."
  현석호는 부동자세를 취하고 있는
장도영에게 눈으로 쇼파를 가리키며 앉기를
권하자 장도영은 앉았다. 군인답게 자세가
흐트러짐 없이 꼿꼿이 바로하고 앉았다.
  몇 번이나 스스로에게 다짐을 주었다.
  이틀 전, 장면에게 불려가 박정희에 대한
조사를 명령받은 장도영은 육군본부로
돌아오자 전화로 박저희에게 조심할 것을
귀띔해 주고 나서 이 문제를 어떻게
수습해야 할 것인가를 곰곰이 생각했다.
박정희의 쿠데타가 성공할 것이라는
확신보다는 불안한 마음만 일었다.
  (어떻게 기어오른 참모총장 자리인데?
결코 이 자리에서 밀려날 수는 없다.
어떻게 해서든 이 자리만은 차고 앉아
있어야 한다. 그런데 박정희 쿠데타 계획이
누설됐으니?)
  장도영은 생각하면 할수록 자꾸만
불안해졌다.
  그렇듯 뒤가 켕기고 불안했으면 육군
않았는가 말이다. 인정에 끌려서 박정희를
잡아넣으라 못하겠거든 전격적으로
예편조치를 취하기라도 했으면 될 게
아니겠는가. 그런 다음 영관급 쿠데타
주동자들을 일망타진해 버렸으면 그것으로
족했을 게 아니겠느냔 말이다.
  한데, 장도영 이 사나이는 그 어떤
조치를 취할 생각도 하지 않았다. 오로지
어떻게 해야만 육군 참모총장직을 고수할
수 있을까? 그것만 생각했던 것이다.
그리고는 월요일이 되자 불쑥 현석호를
찾아갔던 것이다.
  "무슨 일로 찾아왔소?"
  현석호가 다시 한번 물었다.
  마음 속으로 멋진 연기를 해야 한다고
스스로에게 다짐을 주고 있던 장도영은
표정을 지었다.
  "장관님, 군 일부에서 쿠데타 모의를
하고 있다는 소문이 나돌고 있는데
장관님께서도 아시고 계십니까?"
  "그렇소, 들어서 알고 있소."
  물론 현석호는 이미 알고 있었다. 소문은
소문대로 들어서 알고 있었고 장면한테는
구체적으로 들었기 때문에 모의를 하고
있는 자가 어떤 자들이라는 것까지도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그 쿠데타 계획에는 장
총장 당신도 가담돼 있다는 정보던데?>
하고 덧붙이려다가 그 말을 목구멍에서
눌러 버리고 말았다. 도대체 이 자가 무슨
수작을 하려는 것인지 들어봐야겠다는
생각이 얼핏 일었기 때문이었다.
  현석호는 장도영의 가슴 속을 꿰뚫어
보기라도 하려는 듯 그를 날카롭게
쏘아보며 반문했다.
  "장관님, 군부의 군사 쿠데타 음모에는
저도 거기에 가담되어 있다고 모략하는
자들이 있기에 그렇지 않다는 것을 미리
말씀드려 두고자 해서 찾아 뵈었습니다."
  처량한 표정을 짓고 있던 장도영의
얼굴엔 어느 사이엔가 슬픈 그림자가
자욱히 어려 있었다.
  (이 자도 그 소문은 들은 모양이군.
그래서 변명을 해둬야 되겠다 그거지?)
  현석호는 속으로 이렇게 생각하며
장도영의 감정의 추이를 지켜보고 있었다.
  장도영이 말을 이었다.
  "장관님, 제가 누구와 손을 자고 그런
무근입니다. 군부에는 전혀 그런 움직임이
없을 뿐더러 이 장도영이나 박정희
부사령관도 그런 일을 꾸밀 사람이
아닙니다. 그리 아시고 믿어 주십시오."
  "믿어 달라고?"
  "예, 장관님."
  장도영은 더욱 슬픈 빛을 띠며 말을
계속했다.
  "알고 보면 모측에서 참모총장인 저와
2군 부사령관인 박정희 장군을 모해하려는
계획적인 조작입니다. 장관님은 절대로
현혹되는 일이 없었으면 합니다."
  읍소(泣訴)란 아마도 이런 경우를 두고
하는 말인 줄로 안다. 장도영은 눈물을
뚝뚝 흘리지는 않았지만 울음을 터뜨리려는
순간의 표정을 짓고 애원어린 목소리로
  선질(善質)의 인간은 결코 남을 의심할
줄을 모른다. 남의 말을 믿으려 하지 않고
의심하는 사람은 그 자신의 어느
구석인가에 조금이라도 악질(惡質)이
깃들어 있기 때문이다. 현석호는
철저하다고 할 정도로 선질의 인간이었다.
그런 사람이었기 때문에 장도영의 읍소를
듣고 있는 사이에 어느덧 그의 마음에는
측은해하는 동정심이 일고 있었던 것이다.
  (정치 장군이라는 세평을 받고 있는
인물인 만큼 모해하려 드는 자도 있겠지.)
  현석호는 이렇게 장도영의 읍소에
동의하고 있었던 것이다.
  더구나 장도영을 육군 참모총장으로 이끈
것이 바로 현석호 자신이었다. 자기가
밀어서 육군 참모총장에 앉혀 놓은 사람을
흔들어대는 격이나 다를 것이 없다.
현석호는 그래서 장도영의 말을 믿기로
했던 것이다.
  (모측이란 누구를 가리켜 한 말인가?)
  현석호의 마음 한구석에 털끝만한 악질이
깃들여져 있었더라도 그는 이런 질문을
던졌을지도 모른다. 그랬더라면 장도영의
연기는 폭로되고 말았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현석호는 모해하고 있는 모측이
누굴 가리켜 한 말이냐고 묻지를 않았던
것이다.
  거기에 또 현석호는 군사 쿠데타란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것이라고 믿고
있었다. 그러기에 장도영의 읍소를 진정한
것으로 받아들여서 가볍게 넘겨버리고
말았던 것인지도 모른다.
뭬年? 그의
손바닥에선 조금씩 선혈이 배어 나오기
움직이려면 미군의 동의가 필요하고, 설혹
또 동의 없이 병력을 움직인다 해도
작전권을 쥐고 있는 미군 수뇌부가
반란행위를 그냥 내버려둘 리가 있겠는가?)
  이래서 현석호는 쿠데타는 불가능하다고
단정해 놓고 있었던 것이다.

  장도영이 현석호를 만나고 있는 그 시각.
   "뭐야? 박정희 장군이 쿠데타를
계획하고 있어?"
  서울 육군 제15범죄수사대 대장 육군
중령 방자명(方滋明)은 범정과장(犯情課長)
육군 대위 오기수(吳箕洙)로부터 박정희가
쿠데타를 계획하고 있다는 정보를 보고받자
놀라움에 눈이 휘둥그래졌다.
  오기수는 구두로 정보를 보고한 것만이
자들의 이름을 도표로 그려가지고 와서
방자명 앞에 내밀기까지 했다.
  그 도표에는 별 세 개가 그려져 있고 그
밑에 별 두 개를 그린 다음 박정희의 이름
석 자가 분명히 쓰여져 있었다. 별 세 개
밑에는 이름이 적혀져 있지 않고
동그라미만 세 개 그려져 있었다. 그리고
박정희 이름 밑에는 김종필,
김형욱(金炯旭), 오치성(吳致成) 등의
이름이 적혀져 있었다.
  (소문대로가 아냐?)
  방자명은 속으로 중얼거렸다. 소문대로란
무슨 뜻인가? 그는 하극상(下剋上) 사건이
일어난 뒤, 그들이 쿠데타를 음모하고
있다는 것을 소문으로 듣고 있었다.
  하극상 사건을 일으켰던 김종필, 김형욱
동기생들이었다. 그래서 그는 그런 소문에
대해서는 그리 신경을 쓰지 않았었다.
그들이 동기생이라고 해서만이 아니었다.
군 내부의 사상적인 문제라든가 쿠데타
같은 반란행위는 방첩대 소관이지 파렴치한
범죄를 다루는 범죄수사대의 소관은
아니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별 셋이 누굴까?)
  방자명은 박정희의 이름 위에 그려져
있는 별 세 개의 주인공은 누굴까 하고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당시 별 세 개를 달고 있는 현역 장군은
다섯 손가락으로 꼽을 정도에 지나지
않았다. 육군 참모총장 장도영, 제1군
사령관 이한림(李翰林), 제2군 사령관
최경록(崔景錄), 육군 참모차장
김종오(金鐘五) 등이 별 세 개를 달고 있는
장군들이었다.
  (박정희 장군이 이 다섯 장군 중의 한
사람을 업고 쿠데타를 모의하고 있는
모양인데, 과연 이 다섯 장군 가운데
박정희가 업고 있는 장군은 누구일까?
최경록?)
  방자명의 마음에 제일 먼저 짚인 장군은
최경록이었다. 다른 어느 장군보다도
최경록이라면 쿠데타를 음모할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렇다고 무슨 증거가 있는
것은 아니었다. 그저 심증으로 그런 느낌이
들었을 뿐이었다.
  "대장님, 이 정보는 정확한 정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 일단 위에 보고해야 옳지
않습니까?"
  "옳은 말이오. 우리 소관은 아니지만
일단 입수된 정보니 위에 보고해 두도록
하세."
  방자명은 즉시 오기수가 제출한 보고서를
가지고 헌병감 육군 준장 조흥만(曺興萬)을
찾아가 보고했다. 그런 다음 그는 이날 밤
이 보고서를 가지고 참모총장 공관으로
장도영을 찾아갔다. 불행하게도 장도영은
부재중이었다. 방자명은 총장 보좌관 육군
소령 김동수(金東洙)에게 <총장 각하께 꼭
보여드려라> 하고는 아쉬운 마음을 안고
물러나올 수밖에 없었다.
  방자명은 평안북도 자성(慈成) 출신으로
이때 나이 서른일곱 살, 별 세 개를 단
장도영보다는 한 살 아래였다. 그는 명문인
경기중학교를 졸업하고 일본
징병 1기로 끌려나가 일본군에 입대했던 군
경력의 소유자였다. 해방으로 귀국한 그가
만일 고향으로 돌아가지 않고
군사영어학교에 입교했더라면 아마
이때쯤에는 아무리 진급이 늦었더라도 별
두 개는 달고 있었을 것이었다.
  그도 평안북도 태생이라 이를테면
장도영의 심복의 한 사람이었다. 그런
유대관계로 해서 그는 오기수가 올린
정보보고서를 가지고 일부러 총장 공관으로
찾아갔던 것이다.
  이틀 후였던가? 아니면 사흘 후쯤의
일이다. 그러니까 5월 10일이나 11일쯤의
일이다. 이때 방자명은 다른 문제로
장도영을 만났다. 이 기회를 이용해서
방자명이 물었다.
말씀입니다만 박 장군이 업고 있는 별 셋이
누굽니까?"
  이 질문에 대해서 장도영은 단 한마디로
잘랐다.
  "그런 보고는 정보 가치가 없어.
쓸데없는 소리야."
  방자명이 올린 보고가 정보 가치가
없다는데 그도 달리 할 말이 없었다.
어쩌면 그도 오기수가 입수한 정보가
정확한 정보가 아니라고 생각하고 있었기에
더 이상 캐물으려 들지 않았는지도 모른다.
  장도영이 육군본부로 돌아오자, 부관이
검찰총장 이태희가 아침부터 찾고 있다고
전해 주는 것이었다. 장도영은 미처 자리에
앉을 겨를도 없이 부리나케 방을 뛰쳐
나갔다. 대검찰청으로 달려갔던 것이다.
  장도영은 검찰총장실로 들어서면서
인사를 겸해서 그렇게 말했다.
  사돈관계 같이 어려운 사이도 없다.
그런데도 장도영과 이태희는 호형호제하며
지내고 있었다. 사회적으로 출세를 했다고
자부하고 있는 두 사람은 오히려 그렇게
지내는 것이 속편했을는지도 모른다.
  "무슨 일로 찾으셨습니까?"
  장도형은 거침없이 쇼파에 앉으면서
물었다.
  "총리께서 나한테 특명을 내리셨소. 군사
쿠데타에 관한 정보를 수사하라고."
  내각책임제하에서는 통치권자인
국무총리의 특명은 검찰에서도 군까지도
수사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이 있다.
그것이 사실인지 아닌지는 법률전문가가
  하여간에 이태희는 장도영에게 총리의
특명사항을 털어놨다.
  그 말을 듣자, 장도영이 펄쩍 뛰었다.
  "형님,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제가
군의 최고 책임자 자리에 올랐는데 저를
봐서라도 그렇게 할 수 있습니까? 제가
명예스럽게 물러날 수 있도록
도와주셔야죠."
  명예스럽게 물러날 수 있도록 도와달라는
것은 군에 대한 검찰의 수사를 중지해
달라는 뜻이었다.
  (뭔가 있기는 있는 모양이구나.)
  이태희는 속으로 생각하며 반문했다.
  "그럼 총리의 특명을 묵살하란 말이오?"
  "그 문제에 대해서는 제가 이미 지시를
내렸습니다. 조만간 조사가 끝나면 총리께
과히 염려하시지 않아도 됩니다."
  "그럼, 그 문제는 아우님한테 맡길 테니,
총리의 근심을 덜어드리기 위해서라도
조사를 서둘도록 하시오."
  장도영하고의 인간관계에 금이 가는 일은
하고 싶지 않은 것이 이태희의 솔직한
심경이었다.
  대검찰청에서 물러나오는 길로 장도영은
육군본부로 돌아가지 않고, 미 8군
사령부로 사령관 매그루더를 찾아갔다. 이
무렵에는 매그루더 역시 박정희의 쿠데타
음모에 관한 정보를 입수해 놓고 있을
때였다.
  물론 이 음모에는 장도영도 동조하고
있다는 정보 또한 입수해 놓고 있었다.
그런데도 그가 이 정보를 한국군 육군
있었던 것은 장본인인 장도영이 쿠데타에
동조하고 있다는 정보 때문이었다.
  그래서 매그루더로서는 이 정보를 어떻게
처리해야 할 것인지 며칠을 두고 고뇌하고
있었는데 장도영이 예고도 없이 불쑥
찾아온 것이다.
  "좀 미리 귀띔해 둘 일이 있기에
찾아뵈었습니다."
  "귀띔해 둘 일이라니요?"
  "지금 한국 사회에는 군 내부에서
쿠데타를 모의하고 있다는 그럴싸한 루머가
끈질기게 나돌고 있습니다. 그런데
어줍잖게도 본인이 그 쿠데타 음모에
동조하고 있다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너무나 기가 막히고 억울해서 장군께 호소
겸 귀띔해 두는 것이 옳겠다는 생각이
  그 말을 들은 매그루더는 장도영의
진의가 어떤 것인지 파악하기 어렵다는
표정이었다. 그것을 장도영도 눈치챘는가?
  "장군, 절대로 그런 뜬소문에 현혹되지
않기를 바랍니다. 쿠데타라니요. 천만의
말씀입니다. 한국군에는 절대로 그런 일이
없습니다. 그러니 장군께서는 너무
심려하지 마십시오."
  장도영이 힘주어 말하는 것이었다.
  매그루더는 일체 침묵을 지키고 말았다.
쿠데타에 동조하고 있다는 장본인이 일부러
찾아과서 해명을 하는데야 뭐라 의사표시를
하겠는가? 그는 다만 이렇게 말했을
뿐이었다.
  "한국 사회도 이제 안정을 되찾은 것
같소. 한국의 안전보장을 책임지고 있는
바랄 뿐이오."


  김덕승이 대구에서 서울로 올라온 것은
5월 10일이었다. 이날 전화 연락을 받은
오인환은 홍경한과 남산동에 있는 김덕승의
집을 방문했다.
  "홍 선생, 아무리 생각해 봐도 저 혼자
김을 만나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김덕승의 집 앞에서 오인환은 홍경한을
밖에 세워두고 혼자 집 안으로 들어갔다.
낯선 사람을 동반할 것 같으면 김덕승이
경계할 것 같은 예감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어떻게 부탁한 돈은 마련했소?"
  김덕승은 오인환과 마주앉아 돈 문제부터
  "아, 이거 정말 미안합니다. 어떻게
마련해 보려고 백방으로 뛰어다녔습니다만
아직......."
  오인환은 무척 송구스럽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게 무슨 소리오. 오늘이 며칠인데
아직껏 돈을 마련하지 못했다는 거요?"
  김덕승은 얼굴빛이 싸악 변하며
채권자처럼 노기를 띠고 나무라는
것이었다.
  "박 장군이 12일쯤 서울로 올라오겠다
했단 말이오, 돈을 가지러!"
  그렇게 덧붙이는 김덕승의 얼굴은
험악하게 일그러지기조차 했다. 누가
말하기를 얼굴 모습은 직업에 따라
변한다던가. 관동군 첩자였던 김덕승은
그랬는지 첩자 때의 얼굴 모습이 별반
변해져 있지 않았다. 그의 일그러진 얼굴
모습은 소름이 끼칠 정도로 악마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오인환은 못내 송구스럽다는 표정으로
일그러진 김덕승의 험상궂은 얼굴을 지그시
살펴보며 말했다.
  "실은 그래서 여러 가지로 생각 끝에 제
친구를 데려왔습니다. 제 친구가 그런
뜻있는 일이라면 자기가 돈을 대겠다고
해서요."
  "친구가?"
  "예."
  "어떤 사이인 친구요?"
  "죽마고웁니다."
  "믿을 만한 사람이오?"
아닙니까? 믿지 못할 친구 같으면 아무리
친구라 한들 이런 중대 문제를 까놓을 리가
있겠습니까?"
  그제야 김덕승의 험악한 표정이 조금
누그러졌다. 그러나 한가닥 경계하는
마음만은 풀지 않고 있는 것 같았다.
  오인환은 밖에 세워둔 홍경한을 불렀다.
수인사가 끝나자 홍경한은 자못 정중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 친구를 통해서 김 선생에 대한
말씀을 많이 들었습니다. 선생이 장군들과
함께 대한민국을 공사할 계획을 추진중에
있다는 말을 듣고 저는 얼마나 감격했는지
모릅니다. 저도 미력하나마 이 친구와 함께
김 선생을 돕고자 단단히 작심했습니다."
  홍경한이 김덕승을 한껏 치켜세우자
허허...... 하고 오만하게 웃음까지
터뜨리는 것이었다.
  홍경한이 다시 말을 이었다.
  "그런데 김 선생님, 이런 대사는 대사를
추진하는 사람이야 응당 결사적이겠지만
뒤에서 자금을 대는 사람도 결사적인
각오가 필요하다고 생각하니다."
  "그야 물론이지요. 이르다
뿐이겠습니까?"
  "그러자면 확신을 가져야 하는데 확신을
갖자면 좀더 구체적인 내용을 알아야
확신을 갖든 말든 할 수 있을 게
아니겠습니까?"
  "좋습니다. 성생이 확신을 갖기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물어보시오. 내가
알고 있는 바는 모조리 털어놓겠소."
꼬치꼬치 묻는 홍경한의 질문에 막힘 없이
대답해 주었다. 김덕승은 달변이었다.
  쿠데타 음모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고
홍경한은 단정했다.
  "선생님께서는 쿠데타의 자금 조달책이신
모양인데 지금 말씀을 듣고 보니 더욱
존경하는 마음이 깊어집니다. 그런 위험한
일이란 어지간한 용기 가지고는 어림도
없는 일이죠."
  그는 감격한 듯이 한껏 김덕승을
치켜세웠다.
  김덕승은 자못 의기양양해 졌다.
  "이제 두고 보십시오. 이 쿠데타는
기필코 성사시키고야 말 것입니다. 그땐
선생한테도 상당한 보상이 있을 줄로
압니다."
같은 말투를 거침없이 내뱉았다.
  홍경한은 더욱 감격했다는 듯이 머리를
조아렸다.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그럼 자금을......."
  김덕승은 돈을 가져왔으면 어서
내놓으라고 독촉을 했다.
  "사실은 좀더 확실한 내용을 알고 나서
제공해 드리려고 오늘은 그냥 왔습니다."
  "그래요? 그럼 언제쯤이나?"
  "모레 해드리겠습니다. 이런 일이란
비밀을 요하는 일인만큼 모레 아침 7시쯤
요 앞 남산길에서 만납시다. 그래야 남의
눈도 피할 수 있을 테니 말입니다."
  홍경한은 5월 13일 오전 7시 남산길에서
다시 만날 것을 굳게 약속하고 오인환과
  두 사람이 물러가자, 김덕승은 즉시
대구로 장거리 전화를 걸었다. 물론
박정희한테였다.

  "쿠데타 음모가 추진되고 있는 것은
틀림없습니다."
  시경으로 돌아오자 홍경한은 즉시
부국장실로 가서 김덕호에게 김덕승을 만난
사실을 보고했다. 홍경한의 보고를 받은
김덕호는 대검찰청으로 달려갔다. 이태희를
만나기 위해서였다.
  "쿠데타 음모가 추진되고 있는 것이
틀림없다고?"
  "네, 총장님."
  이태희는 미간을 잔뜩 찌푸리며 입을
한일자로 꽉 다무는 것이었다.
관련되어 있다고 보고 있소?"
  이태희는 아무래도 장도영이 마음에
걸리는 모양이었다.
  "장 장군이 관련됐다 안 됐다 제가 이
자리에서 뭐라 말씀드릴 수 있겠습니까?
다만 그 김덕승인가 김용천인가 하는 자가
장도영 장군이 쿠데타의 영도자라는 것을
누차 강조하더랍니다."
  김덕호는 이태희의 반문을 이런 식으로
회피했다.
  이태희는 이번에는 자기 나름으로 추리를
해보는 것이었다.
  "쿠데타를 음모하고 있는 무리들이
만일의 경우를 대비해서 물귀신작전을 펴고
있는 것이 아닐까? 장도영 장군이 장면
정권 요인들하고 줄이 연결되어 있다는
  "그런 점도 전적으로 배제하기는 어려울
겁니다."
  한 급이라도 직급이 높은 사람한테는
더없는 외경심을 품고 있는 것이 공권력
기관 사람들이다. 김덕호는 이태희의
비위를 거슬르지 않는 범위 내에서
맞장구를 쳐 주었다.
  "총장님, 김덕승인가 하는 자가 요구한
군자금을 모레 아침 7시에 만나서
건네주겠다고 한 모양입니다. 그래서
김덕승인가 하는 놈을 아예 그때 덮쳐
버릴까 합니다만?"
  "김흥수 부장검사와 상의해서 사건을
처리하도록 하시오."
  "알겠습니다."
  경찰이 검찰의 하부기관인 것만은 어김이
있으니만큼 쿠데타 음모에 대한 수사를
경찰한테만 맡겨 놓기엔 이태희는 조금
마음이 놓이지 않는 것 같았다.

  쿠데타를 주도하고 있는 제2군 부사령관
육군 소장 박정희가 대구에서 서울로
올라온 것은 앞에서 이미 소개한 바와 같이
5월 12일이었다. 그는 신당동 자택으로
들어서자 제일 먼저 김덕승에게 전화를
걸어 상경했음을 알려주었다.
  한데, 이런 경우를 두고
천려일실이라고나 할까? 쿠데타를 저지가
아니라 아예 박살내버릴 기회가 또 한번
주어졌었다.
  이날 서울로 올라온 박정희는 오후
2시경, 506방첩대장 이희영과
두 사람은 각기 별도로 박정희의 신당동
댁을 방문했다.
  그들이 응접실로 드러서자 5,6명의
장교들이 먼저 와서 박정희와 자리를
같이하고 있었다. 예비역 해군 소장
김동하(金東河)도 자리를 같이하고 있었다.
  두 사람이 들어서자 박정희는 김동하를
소개했다. 그리고는 진행중이었던 얘기를
계속하는 것이었다. 박정희는,
  "버마의 네윈식 쿠데타라야 합니다."
  힐끔 두 사람의 표정을 살피는 것이었다.
  (버마의 네윈식 쿠데타?)
  506방첩대장 이희영은 벌써 두번째 듣는
얘기였다.
  박정희 등의 담론의 내용으로 보아
이들이 쿠데타를 논의하고 있는 것만은
동지도 아니고 도리어 쿠데타를 막아야 할
위치에 있는 이희영이나 방자명을 불러놓고
쿠데타에 대한 담론을 들려준 속셈은
무엇이었을까? 쿠데타를 막아야 할 위치에
있는 이희영이나 방자명의 반응이 어떤
것인지 떠보자 해서였을까? 아니면, 나는
너희들을 동지로 믿고 있다. 그러니
우리들의 거사를 눈감아라 하는
뜻에서였을까? 어쨌거나 박정희를 비롯해서
김동하 등 그 자리에 모여 앉아 있는
사람들은 쿠데타에 대한 구체적 의논을
하고 있는 것만은 틀림없는 일이었다.
  그렇다면 이희영이나 방자명은 아예
처음부터 쿠데타가 일어나지 못하도록
박살내 버릴 조치를 취해야 옳았다.
그런데도 그들은 그 조치를 취하지 않았던
사람이 쿠데타 그룹을 박살내 버리고자
기도했다 하더라도 장도영이 그들을
감싸주고 있는 이상엔 그 어떤 손도 쓰지는
못했을 것이다. 그런데도 자꾸 아쉬움이
남는 이유는 무엇 때문일까?
  어찌됐거나 이쯤되면 5.16 쿠데타 그룹은
쿠데타를 공개적으로 진행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자, 우리는 쿠데타를 진행중에
있다. 어디 너희놈들 우리 쿠데타를 막아
보려거든 해봐!> 박정희는 이렇게
공언하면서 쿠데타를 한 것이나 다름없는
것이다.


  5월 13일 아침, 날이 훤히 밝을 무렵
5명을 지금의 남산에 있는 케이블카
발착지점 밑에 매복시켜 놓았다. 김덕승과
만나기로 한 7시 훨씬 전이었다.
  그는 약속 장소에 이르자 마치 아침
공기를 마시러 나온 산책객인 양 팔다리
운동을 하는가 하면 이리저리 서성거리며
시가지를 내려다보기도 하는 등 시간을
재촉했다.
  정각 7시가 되자, 검은 지프 한 대가
나타났다. 그 지프는 물론 김덕승이
서성거리고 있는 곁에서 멈추었다. 차가
서자 내린 사람은 홍경한이었다. 그는
돈뭉치를 싼 듯한 꾸러미를 들고 있었다.
  홍경한이 그의 앞으로 다가서자 김덕승의
얼굴이 금세 환해졌다. 그는 홍경한의
오른손을 힘껏 잡으며 속삭이듯 말했다.
  그러면서 그는 홍경한이 들고 있는
꾸러미를 받으려는 듯 왼손을 내밀었다.
그때였다. 그의 왼손에 철거덕 하고 수갑이
채워졌다. 과연 민완형사들이었다. 어느
사이에 기척도 없이 두 사람한테
다가섰는지 홍경한조차도 눈치채지 못했을
지경이었다.
  꾸러미를 들고 있는 홍경한의 오른손에도
철거덕 하고 수갑이 채워졌다. 수갑이
채워지자, 김덕승은 무척이나 당황하는
것이었다.
  "왜, 왜 이러는 거요? 다 당신들은
도대체 누, 누구요?"
  "잔말 말어, 가 보면 알아."
  한 형사가 김덕승의 어깨를 툭 치며 입을
다물라고 소리쳤다. 홍경한도 조금 연극을
  "죄목이 뭐요, 죄목이? 우리가 뭘
잘못했기에 영장도 없이 수갑을 채우는
거요?"
  형사들한테 대드는 거이었다.

  "김덕승을 체포했다고 합니다."
  김덕승을 체포했다는 보고는 서울시
경찰국장 이귀영(李貴英)을 통해서 즉시
보고되었다. 김덕승 체포 보고를 받자
그제야 장면은 장도영에게 하명했던 일이
떠올랐던 모양이다.
  그는 즉시 장도영을 다시 또 불러들였다.
  "내가 장 장군한테 지시한 일
어찌되었소? 며칠이 지났는데도
감감소식이기만 하니?"
  "죄송합니다. 각하, 군 수사기관에서
  장도영은 얼굴 한번 붉히지 않고 잘도
거짓말을 주워 삼켰다.
  평소 감정의 변화를 잘 나타내지 않는
장면도 이때만은 버럭 화를 냈다.
  "죄송하긴 뭐가 죄송하다는 거요?
경찰에서 김덕승인가 하는 사람을 체포까지
했다는데? 그래, 쿠데타 문제에 대해선
참모총장이 먼저 알아서 나한테 보고해야
할 성질의 사건인데 거꾸로 내가
참모총장한테 지시를 하고 있으니 이래도
되는 거요?"
  무안을 느꼈는가? 그제야 장도영의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내가 박정흰가 하는 사람에 대해서
조사해서 보고하라고 한 지가 언제요? 벌써
열흘이 다 됐잖소? 그런데도 아직도 조사를
  장면은 <내가 어떻게 이런 자를 믿고
참모총장에 기용했던가?> 하고 후회하는
빛이 역력했다.
  장도영이 도 변명을 늘어놓았다.
  "각하, 사실은 군 수사기관에서 박정희
장군에 대한 조사를 했습니다. 그러나
아무런 혐의점도 발견할 수 없다는
보고였습니다."
  "아무런 혐의점도 발견할 수 없다는
보고였다고?"
  "네, 각하."
  "그렇다면 어째서 보고를 하지 않은
거요? 가타부타 뭐라 보고가 있어야 했을
거 아니오?"
  "아닙니다, 각하. 아무런 혐의점도
없는데 어째서 박 장군이 쿠데타를
있는지 재조사하라는 지시를 내려놓고 있던
참입니다."
  거짓말도 이쯤 술술 예사롭게 잘하게
되면 가히 국제 챔피언감이라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장도영 그는 국무총리 장면의
명령를 수행하려 하기는커녕, 어떻게 해야
자신의 동조설을 해소할 수 있을까 하는
데만 급급해하고 있을 뿐이었다. 그것도
모르는 장면이 다시 또 장도영을 불러
보고가 없다고 호통만을 치고 있었으니
이런 경우 장면을 동정해야 할지 힐난해야
할지 갈피를 잡기가 어렵게 된다.
  "장 장군이 군무에 바쁘리라는 것은
짐작이 가지만 내가 지시한 것도 서둘러
조사해서 보고하도록 하시오."
  "예, 각하."
해야 한시바삐 빠져나갈 수 있을까 그것만
궁리하고 있었던 것 같았다. 그는 장면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거수경례를 붙였다.
  "물러가겠습니다. 각하."
  한마디를 던지고는 휑하니 나가버리는
것이었다.
  그러한 장도영의 거동을 살펴보고 있던
장면은 입맛이 쓴 듯 밖으로 시선을 던지는
것이었다.


  김덕승은 체포되자 곧 서울시 경찰국
뒤에 있는 태평(太平) 호텔로
호송되어졌다. 말이 호텔이지 여관 크기의
  5.16 군사 쿠데타로 그가 석방된 것은
5월 17일이었다.
  "취조관들이 나를 홀랑 발가벗기고
구타를 했는가 하면 고춧가루 고문에다가
8시간 동안에 물을 세 초롱이나 먹이고
고문을 했다."
  석방되자 그는 허풍을 떨었다.
  여기에 대해서 수사를 지휘했던 검찰관
김흥수의 증언은 사뭇 천양지차였다.
필자가 1967년 5월 TBC(동양방송)에
<5.16혁명비화>라는 타이틀로 다큐멘터리
드라마를 집필하고 있을 때 김흥수는
필자에게 전화를 걸어왔다. 좀 만나자는
것이었다. 필자가 김흥수를 만난 것은 종로
1가에 있는 조그마한 다방에서였다. 그는
김덕승이 고문을 당했다고 떠벌이고 있는
  "고문을 했다구요? 그런 터무니없는
수작을 함부로 지껄여도 되는 겁니까? 그
자를 고문했다면 그 자를 체포해서 취조를
한 나나, 수사관들이 무사했을
성싶습니까?"
  김흥수는 이렇게 전제하고 자못
흥분하면서 다음 말을 이었다.
  "우리는 고문은커녕 뺨 한 대 때린 일이
없습니다. 최대한으로 인간적인 대접을
해줘 가면서 취조를 했단 말입니다."
  고문을 당했다고 주장하는자와 뺨 한 대
때린 일이 없다고 펄쩍 뛰는 이 양자 중
어느 쪽 말을 믿어야 할까?
  물론 필자는 수사를 지휘했던 부장검사
김흥수의 주장을 믿기로 했다. 그가
부장검사를 역임해서가 아니었다. 그들이
쿠데타가 성공한 뒤에 김흥수나 취조관들이
절대로 무사했을 리가 없기 때문이었다.
  그러면 어째서 김덕승은 엉터리 수작을
떠벌리며 다녔던 것일까? 이 대목에 대해서
필자는 나름대로의 추리를 해서 방송을
했었다. <군사 쿠데타는 성공을 했다.
그런데 김덕승은 박정희가 요구한 자금을
마련해 주기는 커녕, 체포당하자 끝까지
입을 다물지 못하고 음모 전모에 대해서
불어버렸었다.
  일이 이쯤 돼버렸으니 쿠데타의 공로자
대열에 끼지 못하게 되자 한탄하기
시작했을 게 아니겠는가? 쿠데타의 공로자
대열에 끼어 한몫 차지하자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방법은 오직 하나, 체포당해서
지독한 고문을 당했다고 함으로써 박정희의
것뿐이었으리라.> 필자의 이 추리는 물론
전파를 탔다. 당시 이 다큐멘터리 드라마는
쿠데타 주체자들 거의가 들은 것으로 알고
있다.
  만일 필자의 추리가 지나쳤다면 김덕승
당사자든 또 쿠데타 그룹의 누구든 엄중
항의를 해왔을 것이다. 그러나 필자는
일언반구의 항의를 받은 바도 없었다.
털끝만큼도 고문을 한 일이 없다고 주장한
김흥수의 증언은 그의 육성 그대로
삽입해서 전파를 탔었다.
  고문한 일이 없다고 증언한 김흥수의
육성 녹음, 여기에 필자의 추리가 어우러져
전파를 탔는데도 김덕승을 위시해서 그
누구도 일언반구의 항의도 하지 않았었다.
그것은 무엇을 의미하겠는가?
  태평호텔의 한 구석진 방에서 김덕승에
대한 취조는 잠시 틈도 주지 않고
계속되었다.
  "자, 김 선생, 이제 버틸 만큼
버텨봤으니 그만 불어버리시죠?"
  "쿠데타를 주동하고 있는 인물들이 어떤
인물들이오?"
  취조관들의 심문에 김덕승은 처음부터
일관해서 딱 잡아떼기만 할 뿐이었다.
  "군사 쿠데타라니요. 말도 안 되는
소립니다. 그런 엄청난 일을 누가 감히
꾸민단 말씀입니까? 저는 다만 쿠데타를
구실로 사기를 치려고 했던 것뿐입니다."
  이 대목은 수사관들의 증언과 일치했다.
그는 완강히 부인하며 마냥 버티었던
것이다.
하고 고춧가루 고문도 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장면 정권하의 경찰은 4.19라는
격동을 겪은 지 겨우 1년 세월이 흘렀을
때였다. 더구나 쿠데타설은 분분했었고
그래서 꽤나 몸조심을 하고 있을 때였다.
김덕승을 고문하지 않았던 이유는 경찰의
사기가 떨어져 있었던 데에도 있었다.
  취조관들은 도리 없이 홍경한하고
대질시킬 수밖에 없었다. 물론 홍경한이
김덕승과 대질할 때도 피고인으로서의
신분으로 위장하고서였다.
  "김 선생, 모든 것이 탄로난 이상에 이제
버텨봐야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그래서
나는 김 선생한테 들었던 얘기를 모두
불어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러니 김 선생도
더 이상 버티려 들지 말고 자백해 버리는
  홍경한은 자백해 버리라고 권고했다.
  그제야 김덕승이 체념하고 술술
불어버리기 시작했다. 물론 쿠데타에
가담해 있는 장군들과 영관급 장교들
모두의 이름을 불어버렸던 것이다. 그것이
5월 15일 한나절이었다. 김덕승은 체포당한
지 사흘 만에 비로소 입을 열었던 것이다.
  5월 13일 토요일.
  이날 필자는 국무총리 장면의 수석
공보비서관인 송원영과 효창운동장에서
벌어지기로 되어 있는 고려대학교 팀과
일본 와세다(早稻田) 대학 팀의 축구
경기를 구경하러 가기로 약속이 되어
있었다.
  필자 개인에 관한 얘기를 여기에
언급하기는 무척 송구스러운 얘기나 역사
목격했었다는 것을 분명하게 밝히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이 필자 자신을
소개하지 않을 수가 없게 된다.
  민주당 정권이 성립되자 필자는
공보비서관 송원영에 의해서 공보비서실의
촉탁으로 채용되었다. 필자가 담당하는
것은 방송분야였다. 4.19라는 시대정신은
방송에까지 파급되어 방송인들도 민주화를
운운하며 도에 지나친 방송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것을 시정 건의하는 것이
필자에게 주어진 임무였다.
  오후 1시 퇴근 시간이 되자, 필자는
송원영의 전용 지프에 동승해서
효창공원으로 갈 요량으로 중앙청을
나섰다. 조선호텔 앞에 이르자 송원영은
무슨 생각을 했을까?
수는 없을 것 같다. 그러니 구경은
다음으로 미루고 오늘은 이만 헤어지세."
  (송 비서관이 어째서 갑자기 심경에
변화를 일으켰을까?)
  필자는 적잖이 의아하게 생각하며 명동에
있는 목동다방으로 향했다.
  이날, 송 비서관은 어떻게 해서 심경에
변화를 일으키게 되었는지에 대해서는 이틀
뒤인 5월 15일에 들었다.
  갑자기 비서관 정주성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는 것이다. 장면이 장도영을
불렀을 때 그 자리에 입회했던 그는
대검찰청으로, 육군본부로 부지런히
뛰어다녔다. 쿠데타 음모에 대한 정보처리
상황을 체크하기 위해서였다.
  한데, 2,3일 전이었던가? 정주성이
  "제가 못할 말을 하는 것 같습니다만,
아무래도 저는 장도영 참모총장의 태도에
의심이 가는군요."
  어째서 정주성은 장도영의 태도에 의심을
품게 되었던 것인가? 그것은 장면이
장도영에게 박정희에 대해서 조사해서
보고하라고 명령을 내렸음에도 불구하고
전혀 조사에 착수하고 있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정주성이 장도영의 태도에
의심을 품게 된 것은 너무나 당연했다.
  "총리께서 지시하신 일 어떻게
됐습니까?"
  정주성은 장도영에게 독촉하기까지
했었다.
  "아, 지금 조사가 진행중에 있습니다."
  그때마다 장도영은 얼버무리려고만
의심을 품게 될 수밖에.
  축구 경기를 관전하고자 중앙청을 나섰던
송원영은 차 안에서 문득 정주성이 했던
말을 떠올렸던 것이다. 그래서 그는 축구
경기를 단념했던 것이다.
  조선호텔 앞에서 내린 송원영은 조선호텔
안으로 들어갔다. 거기에서 그는 조폐공사
사장 선우종원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는
그때까지도 퇴근하지 않고 자리에 있었다.
  "저녁에 장도영 총장하고 같이
옥류장에서 한잔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송원영이 의향을 묻자 선우종원은 좋다는
것이었다. 선우종원과의 통화를 끝내고
나자, 송원영은 이번에는 장도영에게
전화를 걸었다. 신통하게도 장도영 역시
아직 퇴근을 하지 않고 자리에 있었다.
  세 사람이 종로 화신 뒤에 있는
옥류장에서 술상을 가운데 놓고 마주앉은
것은 7시경이었다. 어지간히 취기가 돌았을
무렵, 송원영은 마치 문득 생각이 나서
묻는다는 듯이 쿠데타에 대한 얘기를
끄집어냈다.
  "참, 장 총장은 어떻게 생각하시오?"
  그렁 그는 손을 휘이휘이 내저으며
한마디로 잘라 버리는 것이었다.
  "아, 그 이야기 말이오? 그거
모략입니다, 모략."
  "모략이라니요? 한 사람뿐이라면
모르지만 선우 사장께서도 송우범
씬가한테서 정보를 입수했다는데, 그런데도
모략이란 말입니까?"
  송원영은 힐책하듯 물었다.
일어나시지요?"
  장도영은 먼저 자리에서 일어서는
것이었다.
  (참으로 알쏭달쏭하기 짝이 없군. 쿠데타
얘기를 꺼내자 갑자기 몸이 불편하다고
자리를 피하려고 해?)
  이번에는 송원영이 부쩍 장도영을
의심하게 되었다.
  한데, 여기 세월이 20여 년 흘렀는데도
아직 풀리지 않고 있는 수수께끼가 있다.
그것은 다름이 아니라 수사를 지휘했던
부장검사 김흥수는 분명히 김덕승이 사흘
만에 쿠데타 음모에 대한 전모를
자백했다고 했다. 그런데 장면한테는
<김덕승이란 자를 체포해서 취조했던 바,
그 자가 돈이 탐이 나서 쿠데타를 빙자해
보고되었던 것이다.
  물론, 이러한 보고는 검찰총장 이태희가
했다. 그러면 이태희가 허위보고를 했단
말인가? 법률가인 이태희가 그런
허위보고를 했을 리는 없다. 그는 예사로운
공인이 아니요, 검찰총장이라는 공권력의
최고 책임자가 아닌가? 더구나 그는
국무총리 장면의 두터운 신임을 받고 있는
인물이었다. 그런 그가 허위보고를 했을
리는 없을 것 같다.
  그러면 김덕승을 취조해서 받아낸 자백이
어디에서 변조되었던 것일까? 서울시
경찰국장 이귀영(李貴永)한테서? 이 선에서
변조되었다고도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는 장면 내각 성립과 함께 정보비서실의
수석비서관으로 있다가 서울시
  장면이 그를 서울시 경찰국장으로
내보냈던 것도 4.19로 사기가 저하된
경찰의 사기진작에 있었다. 그러한 막중한
책임을 지고 전직을 했던 그가 쿠데타
음모의 전모를 변조시키려 들었을 리가
없다.
  그러면 어느 선에서 김덕승의 자백
내용이 변조되어 장면에게 보고되었던
것일까? 바로 이것이 지금껏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로 남아 있다.






  6. 해병대, 자정에 출동하다


  이제 이쯤에서 얘기를 쿠데타 총수인
박정희한테로 돌리자.
  D데이 H아워인 5월 15일 밤 10시경
신당동 자택을 나선 박정희는 어디서 뭘
하고 있었기에, 제6관구 사령부 참모장
김재춘의 애간장을 태우고 있었던 것일까?
  그러니까 박정희에 대한 얘기는 5월 15일
밤 10시 이후의 행적에서부터 시작하는
것이 옳겠으나, 기왕에 그에 대한 얘기를
꺼낸 이상에는 그가 쿠데타를 지휘하기
위해서 대구에서 서울로 올라왔을 때의
그의 행적을 간략하게나마 살펴보고
  박정희의 보직은 제2군 부사령관, 그가
쿠데타 지휘를 위해서 대구에서 서울로
올라온 것은 5월 12일이었다.
  그는 서울로 올라오자 조카사위인 예비역
중령 김종필(金鐘必)로부터 쿠데타에 따른
세부계획에 대한 것까지 자세하게 브리핑을
받았고, 그런 다음 그 자신이 이 계획을
엄중 재검토했다.
  먹느냐 먹히느냐의 쿠데타에는 목숨을
걸어야 한다. 먹으려면 계획 자체에도
차질이 없어야 하고 실행에도 차질이
없어야 한다.
  그런 다음 이틀 뒤인 5월 14일 일요일에
쿠데타 주체 중의 주체인 알짜들만을
김종필의 형인 김종락(金鐘洛)의 집에
불러모았다. 감시의 눈을 피하기 위해서
것이다.
  우선 이 집에 모였던 주체 중의 주체인
알짜들의 면면을 살펴보기로 하자. 공수단
단장 육군 대령 박치옥, 공수단 대대장
육군 중령 김제민(金悌民), 제30사단
작전참모 육군 중령 이백일, 제33사단
작전참모 육군 중령 오학진(吳學鎭),
제6군단 포병단 단장 육군 대령
문재준(文在浚), 제6군단 포병단 대대장
육군 중령 신윤창(申允昌), 제6군단 대대장
육군 중령 구자춘(具滋春), 제6군단 포병단
대대장 육군 중령 백태하(白泰夏), 제6군단
포병단 대대장 육군 중령 정오경(鄭五敬),
제6군단 포병단 대대장 육군 중령
김인화(金仁華), 제6관구 사령부 참모장
육군 대령 김재춘, 제6관구 사령부
해병여단 여단장 해병 준장
김윤근(金潤根), 해병여단 대대장 해병
중령 오정근(吳定根), 해병여단 부연대장
해병 중령 조남철(趙南哲), 해병여단
인사참모 해병 소령 최용관, 육군본부 소속
육군 대령 오치성(吳致成), 육군 중령
옥창호(玉昌鎬), 육군 중령
김형욱(金炯旭), 육군 중령
이석제(李錫濟), 육군 중령
유승원(柳承源), 그리고 예비역 육군 중령
김종필과 박정희 등이다.
  여담부터 미리 한마디 해두자. 지금 여기
김종락의 집에 모인 24명의 주체들은
쿠데타가 성공한 지 불과 1,2개월도 안
되는 사이에 엄청나게 각도가 달라지는
운명의 길을 걷게 된다. 시간이 흐르는
그런가 하면 엄청난 출세를 해서 그
자신들도 상상조차 하지 못했던 엄청난
치부를 해서 떵떵거리며 살게 된다. 이들
24명의 인생 역정만을 살펴보고 연구를
해도 인생이란 것을 대강은 체득하게 된다.
  각설하고.
  이날의 소집은 오전 10시에 이루어졌다.
소집의 목적은 각 부대에게 임무를
부여하는 데 있었다. 모여야 할 사람이 다
모이자 박정희의 인사말이 있었고, 각
부대에 대한 임무부여와 작전계획을
제6관구 사령부 작전참모인 박원빈이
발표했다. 그가 발표한 계획에 따르면
쿠데타에 참가한 각 부대에게 주어진
임무는 다음과 같았다.

대대장 육군 중령 김제민, 중대장 육군
대위 차지철. 육군 제1공수단은 쿠데타에
있어 한강교를 도하, 반도호텔과
중앙방송국(KBS)를 점령하고 요인 체포.
일부 병력은 중앙청, 국회의사당을
장악한다.
  -해병대:여단장 해병 준장 김윤근,
대대장 해병 중령 오정근, 부연대장 해병
중령 조남철. 쿠데타 제2부대로 내무부,
치안국, 서울시 경찰국을 점령한다.
  -제30사단:참모장 육군 대령
이갑영(李甲榮), 부사단장 육군 대령
박상훈, 작전참모 육군 중령 이백일,
전투대대장 육군 소령 고병만. 제30사단은
중앙청, 청와대, 서울시 경찰국 탄약고,
서대문 형무소, KBS 연희 송신소를
  -제33사단:연대장 육군 대령
이병엽(李秉燁), 작전참모 육군 중령
오학진. 제33사단은 서울 시청앞과
덕수궁에 위치, 방송국, 국제 전신전화국,
마포 형무소를 점령한다.
  -제6군단 포병단:포병사령관 육군 대령
문재준, 군단 작전참모 육군 대령 홍종철,
5개 대대장 육군 중령 신윤창, 백태하,
구자춘, 정오경, 김인화. 제6군단 포병단은
5월 16일 새벽 3시 40분까지 육군본부를
점령한다.
  제6관구 사령부:참모장 육군 대령
김재춘, 작전참모 육군 중령 박원빈.
제6관구 사령부를 제1지휘본부로 정한다.
  -반도호텔(국무총리 장면 숙소):육군
소령 박종규(朴鐘圭) 지휘하에 국무총리
같다. 엘리베이터조 육군 대위 차지철,
계단조 육군 대위 김인식(金仁植), 정문
계단조 육군 대위 유국준(柳國俊), 우측
층계조 육군 대위 장종원(張鐘源), 좌측
계단조 육군 대위 차병섭(車炳燮).
  -요인 체포조:내무부장관, 대위
김상목(金相睦). 외무부장관, 대위
오필생(吳泌生). 국방부장관, 대위
손기훈(孫基勳). 무임소장관, 대위
이덕기(李德基). 치안국장, 대위
안충인(安忠仁).
  -특수 활동조:예비역 육군 중령 김종필,
소령 이낙선은 연락업무와 인쇄물을
준비한다. 육군 대령 오치성, 육군 중령
김형욱, 김동환(金東煥)은 반혁명 및
국내외 정보를 취급한다.
조창대(曺昌大), 이종근(李鐘根),
박용기(朴勇琪), 심이섭, 엄병길(嚴秉吉)은
사령부 안에서, 정문순(鄭文淳),
윤필용(尹必鏞)은 방송을 신호로
육군대학에서 각각 혁명세력에 대한
지지활동을 벌인다.

  이상과 같이 발표하고 나서 박원빈은
다음과 같이 엄숙히 말하는 것이었다.
  "먼저 D데이 H아워를 16일 오전 3시로
정했습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제30사단 작전참모
이백일이 참모장 이갑영한테는 D데이
H아워가 15일 오후 10시라고 했던 것을
기억해내지 않을 수가 없다. 이렇게
5시간씩이나 차이가 나게 된 이유는
  박원빈은 각 부대가 수행해야 할 임무에
대해서 설명하고 난 다음 말했다.
  "오전 3시 목표점령을 기준으로 해서 각
부대에서 목표까지의 거리를 감안, 각
부대별로 출발시간을 정해 주십시오.
그리고 한강 서편에 위치한 부대의 한강
인도교 통과 순서를 해병여단, 공수단,
제33사단의 순서로 정했습니다."
  <귀신 잡는 해병>, 한국 해병이 얼만
용감한 군대냐 하는 것은 귀신 잡는
해병이라는 한마디로도 설명이 충분하다고
본다. 눈에 보이지 않는 귀신까지도 잡을
정도니 한국 해병이 얼마나 용감한가는
미루어 짐작할 수 있는 일 아니겠는가.
  쿠데타를 위한 작전계획을 짠 사람들,
그들은 김종필을 위시한 오치성, 옥창호 등
잡는 해병대의 용감성을 가장 높이
평가했기에 한강 다리를 제일 먼저
건너가게 하려고 했던 것이 분명하다.
거사를 하다 보면 어떤 장애가 부딪칠지도
모르기 때문에 그 장애를 물리치는 데 있어
해병대가 가장 적합하다고 판단했을
것이다.
  그런데 해병 여단장인 김윤근이 이의를
제기하고 나섰다.
  "해병여단이 제일 먼 곳에 위치해 있는데
어떻게 한강 인도교를 제일 먼저 건널 수
있단 말이오. 그러니 해병여단을 맨 뒤로
바꾸어 주시오."
  "그래서 각 부대별로 목표까지의 거리를
감안해 가지고 출발시간을 정하도록 한
것이 아닙니까?"
하여간에 이미 세워 놓은 작전계획대로
따라주는 것이 좋겠다는 투로 김윤근의
이의를 물리치려 했다.
  박정희도 한마디 거들었다.
  "귀신 잡는 해병대가 아니오? 아무래도
제일 용감한 부대가 제1진으로 선두에 서는
것이 좋을 것이외다."
  "해병대에 대한 신뢰가 깊다는 것은
고마운 말씀입니다만, 무슨 착오가 생겼을
때 혼란을 덜하게 하자면 해병대가 맨 뒤에
따를 수밖에 없습니다."
  무슨 착오가 생겼을 때라니? 무슨
착오라는 게 무엇을 의미하는지 납득하기가
어려운 이유를 내세우며 김윤근은 자기
주장을 굽히려 하지 않았다.
  "거리가 멀다는 이유로 해병대가 제3진에
해병대의 임무가 경찰을 제압하는 데 있는
만큼."
  해병대에 주어진 임무는 내무부, 치안국,
서울시 경찰국의 점령이었다. 모두가
해병대에 큰 기대를 걸고 있었기 때문에
해병대가 앞장서 줄 것을 간청했으나
김윤근이 끝까지 고집을 부리자 박정희가
단안을 내렸다.
  "그럼 공수부대를 제1진으로 세우도록
합시더."
  박치옥은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그는
오히려 대한민국 사상 최초의 군사혁명에
있어 공수단이 선봉군이 되는 것을
영광으로 생각했는지도 모른다.
  "이제 우리 궐기하는 일만이 남았소.
승패는 하늘에 맡기되, 동지 여러분은
각자의 맡은 바 임무를 수행해 최후의
일인까지라도 싸워서 꼭 이 혁명을
성공으로 이끌도록 해야겠소."
  박정희의 짧은 격려사로서 이날의 회의는
끝났다.
  벌써 어둠이 깃들어져 있었다. 그만큼
회의가 길었던 것이다. 모두 서둘러
자리에서 일어섰다.
  "잠깐만 좀 그대로 앉아 주십시오."
  그때 김종필이 제지했다. 모두 그 자리에
다시 주저앉았다.
  "거사를 하자면 아무래도 군자금이
필요하지 않겠습니까?"
  그는 신문지에 싼 돈을 부대 단위로
나누어 주었다. 일금 30만 환씩이었다.
D데이까지는 앞으로 이틀, 이미 모든
출동을 해서 임무만 수행하면 되도록 되어
있었다.
  그러므로 돈 같은 것이 필요할 리가
없었다. 그래서 해병대의 경우, 나중
일이지만 김윤근은 30만 환을 보관하고
있다가 거사가 성공한 후에 <5.16
혁명기념>이라는 반지를 만들어 출동했던
장병 1,500명에게 하나씩 기념으로 나누어
주었다나......?


  마침내, 마침내 D데이로 정해져 있는 5월
15일은 밝았다.
  이날 아침, 잠자리에서 눈을 뜨기가
무섭게 박정희의 가슴은 고동치기
지경이었다.
  (오늘이 내 운명을 건 대도박의
날이렷다!)
  그는 입을 한일자로 꽉 다물며 천장을
응시하면서 새삼 스스로에게 다짐을
주었다.
  (10년을 두고 가슴에 품어온 계획이
아니냐! 어떤 일이 있어도 어떤 난관이
있어도 이 계획을 성공시키고야 말 테다.)
  그렇다. 10년을 두고 가슴에 품어 왔던
계획이었다.
  (이놈의 나라, 뒤집어 엎어 버리고
말아야 돼!)
  이렇게 내뱉고 그가 군사 쿠데타를
계획했던 것은 1952년 5월 26일, 이른바
5.26 정치파동이 벌어졌을 때였다. 이때의
육군본부 작전국 차장.
  그러나 육군 대령 신분으로 쿠데타를
계획한다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래서 육군 참모총장인 이종찬(李鐘贊)을
업을 계획을 세웠다. 이종찬이 육군의
총수라서가 아니라 그에 대한 군부의
인망이 높았기 때문이었다.
  "각하, 지금의 정치적 혼란을 방치해
두었다간 나라는 망하고 맙니다.
이제야말로 군이 나서서 국정을 바로잡아야
할 때입니다."
  그는 이종찬에게 쿠데타를 건의했다.
  "무슨 허튼 수작을 하고 있어. 오히려
군이 정치에 간섭하게 되면 나라를 망치고
마는 거야!"
  이종찬은 일갈하면서 단 한마디로
  만일 이때, 이종찬이 박정희의 흑심을
외면만 해버릴 것이 아니라 예편조치를
하는 등의 조치를 취했더라면 상황은
달라졌을 것이다. 그러나 그 어떤 적극적인
조치도 취하지 않았기 때문에 박정희는
더욱더 쿠데타에 대한 꿈을 다져나갔고,
끝내는 쿠데타를 단행함으로써 군부
독재정치의 막을 열어 놓고 말았던 것이다.
  천려일실(千廬一失)이었다.
  하여간에 이종찬이
대갈일성(大喝一聲)으로 쿠데타를
반대했다고 해서 그 꿈을 버릴 박정희가
아니었다.
  (그래, 싫어? 싫다면 좋아, 너 아니면
사람이 없는 줄 아냐? 나도 언젠가는 별을
달겠지. 별을 달게 되면 나 스스로
테다.)
  오히려 박정희는 더욱더 쿠데타에 대한
결심을 굳건히 다졌다. 이런 경우
와신상담(臥薪嘗膽)이란 표현이 합당할까?
아무튼 그는 10년 세월을 두고 칼을
갈았고, 급기야는 이제 거사를 하기까지
일을 진행시켰던 것이다.
  이날 신당동 박정희의 집은 참으로
부산했다. 그가 미처 조반상을 대하기도
전에 김종필이 찾아왔고, 김용태(金容泰)도
찾아왔다. 장태화(張太和)도 찾아와서
민주당 정권의 동태를 보고하기도 했다.
  오늘이 거사의 날이라는 것을 익히 알고
있던 박정희의 아내 육영수(陸英修)는
가정부의 아침 설거지가 끝나기를
기다렸다가 그녀를 안방으로 불러들였다.
오세요."
  가정부의 고향은 육영수와 같은
옥천군이었으나 마을이 달랐다. 육영수의
고향은 능월리였고, 가정부의 고향은
청산리라는 곳이었다.
  "갑자기 고향엔 왜요?"
  가정부는 꽤나 의아한 모양이었다. 전혀
예상치 못하고 있던 분부였기 때문이었다.
  "날씨도 좋고 하니 좀 쉬다 오라고
그러는 거예요."
  육영수는 행여 가정부가 언짢아 할세라
미소를 지어보이며 별 뜻이 아님을 암시해
주었다.
  "오늘 따라 손님이 저렇게 많이 오시는데
혼자서 어쩌시려고요?"
  "내 걱정은 마세요. 그깟 하루 이틀쯤
  육영수는 싫다는 가정부를 기어이
설득해서 고향으로 내려보냈다. 노자돈도
넉넉히 주어서.......
  15일 밤 9시 45분.
  H아워인 밤 10시가 가까워지자, 박정희의
가슴은 더욱 뛰기 시작했다. 동시에 숨이
막힐 듯한 중압감이 일기도 했다. 그는 그
무거운 가슴을 털어 버리기라도 하듯이
안방으로 건너갔다. 정장하고 있던 군복을
벗고 작업복에 잠바 차림으로 갈아 입었다.
그런 다음 아내를 돌아보며 말했다.
  "여보, 내 가방 속에 있는 권총 좀 꺼내
주겠소?"
  "예."
  박정희가 대구에서 들고 올라온 가방
속에서 권총을 꺼내는 육영수의 손이
  아내가 건네 주는 권총을 받아 허리에
차고 나자, 박정희는 애써 담담한 표정으로
말했다.
  "다녀오겠소."
  "여보, 아이들 숙제 좀 봐주시고
나가시지 않겠어요?"
  "아이들 숙제를?"
  박정희는 아이들의 숙제를 봐달라는
말뜻이 무엇인지 곧 알아차렸다. 어쩌면
이게 마지막 길이 될지도 모른다.
마지막으로 아이들 얼굴만이라도 한번 보고
떠나라는 암시임을 그는 깨달았던 것이다.
  "그러지."
  박정희는 아이들의 방으로 건너갔다.
  이제 겨우 국민학생인 근혜, 근영 자매가
책상 앞에 엎드려 공부를 하고 있었다.
모습을 물끄러미 지켜보고 있다가
아랫목으로 시선을 돌렸다. 아직
유치원생인 외아들 지만이가 외할머니
무릎을 베고 새근새근 잠들어 있었다. 그는
세 아이의 모습을 한번 더 번갈아 보고
나서 조용히 물러 나왔다.
  다시 응접실로 건너왔을 때가 밤 10시.
  박정희가 막 응접실을 나서려는데
전화벨이 요란하게 울렸다. 늘 같은
파장으로 울리는 전화벨이었으나 이날 밤의
벨소리는 유별나게도 크게 그의 귀청을
두드렸다.
  순간, 이상한 예감이 일었다. 모두가
수포로 돌아간 듯한 느낌이 들었던 것이다.
아마도 H아워가 다 되었는데 전화벨이
울렸기 때문이었으리라.
들었다.
  "신당동이오."
  "각하, 김재춘이올습니다."
  전화의 주인공은 제6관구 사령부 참모장
김재춘이었다.
  "응, 김 대령, 무슨 일이오?"
  "각하, 30사단의 부사단장하고 참모장이
사단장에게 밀고하는 바람에 일이
탄로났습니다."
  "뭐라고?"
  박정희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으며 한순간
숨이 딱 끊어지는 듯한 충격을 받았다.
불길한 예감이 그대로 적중했던 것이다.
  "각하, 부대 출도잉 어렵게 됐으니
어찌하면 좋겠습니까?"
  "이제 뭘 어쩌겠소. 제2안으로 할
  제2안? 제2안이란 어떤 것이었던가?
여기에 대해서는 쿠데타 그룹의 그 누구도
기록으로 남긴 바가 없다.
  그가 응접실을 나서는데 육군정보학교
교장 육군 준장 한웅진(韓雄震)과 육군본부
교육처장 육군 준장 장경순이 나타났다.
원래 이 두 사람들하고는 김포 입구에서
만나기로 약속되어 있었다. 그런데 계획이
탄로나 차질이 생기게 되자, 신당동
박정희의 집으로 달려왔던 것이다.
  "박 장군, 계획이 탄로난 모양인데 이제
어쩌면 좋겠소?"
  한웅진이 물었다.
  "계획이 탄로난 이상 댁에 계시면
위험합니다. 일단 피신하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일단 제가 묵고 있는 여관으로 가시죠.
거기에서 사태를 지켜보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한웅진의 권고였다. 그는 지난 토요일에
서울로 올라와서 종로구 청진동의 한
여관에 투숙하고 있었던 것이다.
  "일단 그렇게 합시다."
  박정희는 앞장서 걸어나갔다. 그는 자기
차에 한웅진과 부관 육군 소령 이낙선을
태우고 나서 차에 올랐다. 장경순이 몰고
온 차에는 그와 한웅진이 데리고 올라와
있던 정보학교 장교 세 사람이 동승했다.
두 대의 지프가 움직이기 시작하자
어디에서 나타났는지 한 대의 검은 지프가
그들 뒤를 따랐다. 506방첩대에서 파견한
박정희 감시조의 지프임이 틀림없었다.

  가슴이 답답했다. 꼭 질식해 버릴 것만
같은 느낌이었다.
  (장도영, 그런 자를 믿고 쿠데타
지도자로 모시느니 어쩌니 하면서 비밀을
털어놓다니.......)
  박정희는 혀를 깨물고 싶은 충동이 일
정도로 후회만이 일었다.
  그가 장도영을 업고 쿠데타를 일으키고자
계획했던 것은 장도영이 예뻐서 업으려고
했던 것은 물론 아니었다. 장도영, 그를
쿠데타 지도자로 초대할 생각 같은 것은
애시당초 털끝만큼도 없었다. 다만, 그가
육군 참모총장으로 영전했기 때문에 그를
이용하고자 했던 것뿐이었다.
위해서 발벗고 나섰다면 박정희는 자기
자신의 착오를 아프게 반성해야 옳았다.
그런데도 그는 반성은 커녕 장도영만을
증오하고 있었던 것이다. 대인관계에
있어서 박정희의 애증(愛憎)은 좀
남달랐다. 한번 사람을 미워하게 되면 그
미워하는 감정의 원인이 자신에게 있다
하더라도 그는 그 감정을 버리려 하지를
않았다. 그러한 성격 형성은 그의 찌든
가정 환경에서부터 비롯됐기 때문이었다.
  지금 이 시간에도 역시 마찬가지였다.
여관방에 쭈그리고 앉은 그는 연방
장도영에 대한 증오심만 불러일으키고
있었다.
  사람을 미워한다는 것도 그리 쉬운 일은
아니다. 남을 미워하는 만큼 자기도 거기에
때문이다.
  "여보, 한 장군. 이거 미치겠구려. 우리
어디 가서 대포나 한잔 합시다."
  박정희는 정 참을 수 없었던 모양이었다.
어디 가서 대포나 한잔 하자고 하면서
자리에서 벌떡 일어서는 것이었다.
  장경순은 어이가 없는 모양이었다. 이
양반이 정신이 있나 없나 하는 눈초리로
바라보며 물었다.
  "동지들이 눈이 빠지게 기다릴 텐데
6관구 사령부로 나가봐야 하잖겠습니까?"
  "이미 탄로가 났다는데 나가 본들
무엇하겠소?"
  박정희의 대꾸는 퉁명스러웠다.
  장경순은 울컥하는 역겨움이 치밀어
올라왔으나 의지로써 그것을 지그시 누르며
  "생사를 같이하기로 맹세한 동지들이
아닙니까? 일단은 나가 봐야 할 줄로
압니다."
  "그렇긴 하오만, 가슴이 터질 것만
같아서 도저히 이대로는 갈 수가 없구려.
한잔 하면서 생각을 해보도록 합시다."
  박정희는 다음의 대꾸는 들을 필요도
없다는 듯이 앞장서 나갔다. 한웅진,
장경순 두 사람도 일어서지 않을 수
없었다.
  여관에서 나온 세 사람은 청진동의 한
대폿집으로 들어갔다. 주모가 꽤나 반기며
맞아주었다.
  술상이 들어오자 박정희는 마치 기갈들린
사람 모양으로 자작으로 연거푸 세
대접이나 대폿잔을 비웠다.
  15일 밤 11시. 해병 제1여단 여단장
숙소.
  "여단장님, 여단장님."
  누군가가 어깨를 가볍게 흔들어 깨우는
소리에 김윤근은 눈을 번쩍 떴다. 그가
눈을 뜨는 것과 동시에 부동자세를 취하고
있는 부관 홍경식의 얼굴이 김윤근의 동공
속으로 파고 들어왔다.
  김윤근은 얼른 손목시계를 들여다보았다.
정확히 11시였다.
  "지금 옆방에서 문성태 중령하고 최용관
소령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부관 홍경식이 귀띔하자, 김윤근은 벌떡
일어나 옆방으로 갔다.
  김윤근이 들어서자 두 사람은 벌떡
일어서며 거수경례를 붙이는 것이었다.
  "출동 준비를 끝내고 출발시간이 되기만
기다리고 있습니다."
  최용관의 대꾸였다.
  "그래, 수고들 했군. 그런데 혹시 김동하
장군이 오시지 않았던가?"
  "김동하 장군께서는 9시경에 여단장실에
오셨습니다. 여단장님께서 눈을 붙이셨다고
말씀드렸더니 오정근 대대로 가신다면서
나가셨습니다."
  부관 홍경식의 보고였다.
  "그런데 저어......."
  문성태가 조금 망설이며 입을 열었다.
  "뭔가?"
  "밤 9시에 전화선을 끊었습니다. 그런데
서울과의 전화선은 절단된 상태로
있습니다만, 군단과의 전화선은 끊은 지
가면서 이상하다는 듯이 고개를
갸우뚱거리기에 다시 끊지를 못했습니다."
  두 번씩이나 거듭해서 끊게 되면 문제가
발생할 것이 틀림없었다.
  "고문단의 동태는?"
  "이상이 없습니다. 조용하기만 합니다."
  김윤근은 알겠다는 듯이 고개를 가볍게
끄덕이고는 입을 한일자로 꽉 다물었다.
자꾸 흔들려지는 마음을 꽉 붙들기
위해서였다.
  밤 11시 30분. 청진동 대폿집.
  박정희는 취했다. 취하자 그의 사고력이
한골수로만 파고 들었다. 그리고는 자꾸 그
한 가지 생각만 곱씹었다.
  (쿠데타를 꿈꾸어 오기 10년, 이제
거사하려는 마당에 탄로났다고 해서 내가
수는 없지 않은가? 체포당하는 한이
있더라도 쿠데타 지휘본부로 가는 것이
떳떳한 장부다운 행동이 아니겠는가!
그렇다. 체포당하는 한이 있더라도 6관구
사령부로 가자!)
  마침내 박정희는 결심을 했다. 취기
덕분이었다. 알콜이 마비시켜 놓은 두뇌는
사고력이 감퇴되고 단순해지기 마련이다.
술이란 그래서 사나이들의 세계에 없어서는
아니될 마약인지도 모른다.
  "한 장군, 장 장군, 상황이 어찌됐든
우리 지휘본부로 갑시다. 여기서 이렇게
앉아서 잡으러 오기를 기다릴 수야 없는 일
아니겠소?"
  박정희는 자리를 털고 일어섰다. 별 한
개가 더 많은 육군 소장이 지휘본부로
사람은 따르지 않을 수 없었다. 자리에서
일어선 장경순의 표정은 순간 비장한
각오가 서렸지만 한웅진은 좀 내키지 않는
듯한 표정이었다.
  "장 장군, 장 장군도 눈치 챘으리라
생각하오만 아까 우리 집에서 나올 때 우리
뒤를 검은 지프차가 미행하지를 않았소?
그들은 우리를 또 미행할 것이 틀림없소.
그러니 장 장군이 그 지프를 맡아서 따돌려
주시오. 그리고 나서 지휘본부로 와
주시오."
  "알겠습니다."
  박정희는 두 사람에게 쿠데타가 실패했을
경우에는 장부답게 어쩌구 하다가 자리를
털고 일어섰다.
  거리에는 쥐새끼 한 마리 얼씬거리지
가리지 않고 발을 묶어 버렸던 것이다.
통행금지시간은 밤 12시 자정에서 새벽
5시까지였다.
  고요에 묻혀 있는 거리를 있는 힘을
다해서 달린다는 것은 참으로 상쾌하고
유쾌한 일이다. 그러나 박정희는 지금
그러한 기분을 만끽할 만한 마음의 여유는
없었다.
  "속력을 낼 수 있는 한 힘껏 달려."
  박정희의 명령에 운전병은 그런 명령을
기다리고 있기나 했던 것처럼
액셀러레이터를 밟았다. 100, 120, 130,
속도계는 쭈욱쭉 뻗어 올라갔다.
  박정희의 지프가 속도를 올리는 것과는
반비례로 장경순의 지프는 처음에는
박정희의 지프에 보조를 맞추어 달렸으나
  죽을 지경인 것은 미행하는 지프였다.
미행 지프는 박정희의 뒤를 따르는
지프에는 관심도 없었다. 오직 박정희의
지프에만 관심을 쏟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박정희의 차가 속도를 내기
시작하자 미행 지프도 덩달아 속도를 냈다.
그것을 장경순의 차가 훼방을 놓았다.
  미행 지프가 오른쪽으로 빠져 나가려
하면 장경순의 차가 오른쪽으로 핸들을
꺾어 진로를 방해했고 왼쪽으로 꺾으면
왼쪽으로 꺾어 훼방을 놓았다. 이날 밤 세
대의 지프가 연출해내는 곡예는 꼭 영화의
한 장면을 방불케 해주고 있었다. 장경순은
미행 지프가 앞으로 나가지 못하도록
훼방만 놓다가 박정희의 지프가 모습을
감추자 그는 미행 지프를 엉뚱한 길로
  심야의 추격전 같은 이 한 장면은 결국
장경순이 미행 지프를 엉뚱한 길로 유도해
놓고 어디론가로 쏜살같이 달아나 버리는
것으로 막을 내리고 말았다.

  같은 시각, 제6관구 사령부.
  H아워는 훨씬 지났다. 그런데도 박정희는
꿩 구워먹은 소식이었다. 도대체 그가
어디에 있는지 소재조차 알고 있는 사람도
없었다. 그런데도 제6관구 사령부 작전참모
육군 중령 박원빈은 출동부대에 전화를
걸어 독려하느라 진땀을 흘리고 있었다.
  "뭐, 장애에 부딪혀 있다고?"
  제33사단 작전참모 오학진은 출동준비를
갖추어 놓고 H아워가 되기만을 기다리고
있었으나 출동할 수 없는 장애게 부딪혀
무엇이었을까? 제30사단의 작전참모
이백일하고는 숫제 전화 연결조차 되지
않았다.
  박원빈은 도무지 제정신이 아니었다.
쿠데타는 여기에서 좌절돼 버리고 말 것
같은 두려움이 일기도 했다. 곁에서
박원빈이 혼자서 애쓰고 있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송찬호가 옆에 있는
윤태일에게 나직히 속삭였다.
  "여보 윤 장군, 우리가 언제가지나
이렇게 앉아서 박 장군을 기다리고 있을
것이 아니라 총장을 찾아가 그분이 어떻게
하고 있는지를 보고 한번 설득해 보는 것이
어떻겠소?"
  "그래요? 그럼, 그래 봅시다. 어차피
쿠데타가 실패했다면 이판사판이 아니오?
  두 사람은 함께 제6관구 사령관실을
나섰다.

  "아차! 이 노릇을 어쩌지?"
  박정희의 지프가 서대문 로터리를 돌아
서울역 쪽으로 달리고 있을 때 박정희는
비명을 지르다시피 부르짖었다.
  "왜 그러십니까?"
  한웅진이 의아해하며 물었다.
  "내가 한 장군의 여관방에 권총을 놔두고
깜빡 잊고 그냥 왔구려."
  박정희는 한웅진의 여관방에서
대폿집으로 갈 때, 권총을 풀어 놓고 갔던
것이다. 대폿집에서 여관에 들르지 않고
그냥 제6관구 사령부로 향하고 있던
박정희는 이때에 이르러서야 몸에 무기를
것이다.
  "한 장군, 여관으로 다시 돌아가야겠소.
가서 권총을 가지고 와야겠소."
  어쩌면 진압군과 한바탕 붙게 될지도
모른다. 그럴 경우를 대비해서 무기를 꼭
지니고 있어야 한다. 이들과 같은
범인(犯人)들이 그렇게 생각하는 것은
정상적일지 모른다. 그러나 사실은 그게
아니었다. 박정희는 체포의 손길을 뻗쳤을
경우를 대비하여 자결용으로 권총이
필요했던 것이다.
  (패자는 군말이 있을 수 없다. 자결로써
깨끗이 최후를 마칠 뿐이다.)
  박정희는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차를 돌려!"
  운전병이 속도를 늦추며 급회전했다.
있었다.

  송찬호, 윤태일 두 육군 중장이
506방첩대에 도착한 것은 박정희가
대폿집을 떠나던 그 무렵이었다. 두 사람이
대장실로 들어서는 것을 본 이희영은 조금
굳어졌다. 그 두 사람은 이희영과는 육사
5기 동기였으나 쿠데타에 가담해 있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어떻게 오셨습니까?"
  이희영은 찾아온 용건을 물었다.
  "우리는 총장 각하를 뵈려고 왔소."
  송찬호가 찾아온 목적을 밝혔다.
  "총장 각하는 지금 여기 안 계십니다."
  "우리가 여기 계시다는 것을 알고
찾아왔는데 안 계시다는 것은 무슨
  "안 계시니까 안 계시다는 것 아닙니까?
계시는데 뭐가 무서워 안 계신다고 한단
말입니까?"
  윤태일이 나섰다.
  "이 대령, 왜 우리를 따돌리려는 거요?"
  "따돌리다니요? 따돌릴 이유가 없는데 뭣
때문에 따돌린단 말이오?"
  육군사관학교 5기 동기생이지만, 지금은
적대관계에 서 있는 이들 세 사람. 한쪽은
쿠데타를 일으키려 하고 있고, 다른 한쪽은
그것을 막으려 애쓰고 있는 이들. 그들은
지금 506방첩대 대장실에서 묘하게 신경을
곤두세우며 입씨름을 벌이고 있었다.

  5.16 군사 쿠데타의 와중에 있었던 또 한
토막의 해프닝이 있었다.
이 무렵이었다. 도대체가 매일 얼굴을
맞대는 참모차장이요, 정보참모부장이다.
무슨 해야 할 얘기가 그리도 많기에
장도영은 자정이 넘도록 술잔을 기울이고
있었더란 말인가? 참으로 배포 한번 유한
장도영이었다. 박정희 등이 쿠데타를
일으키려 하고 있다는 보고를 받고도
요정에 질펀하게 쭈그리고 앉아서 술잔이나
기울이고 있어? 일찍이 세계 역사상에 이런
육군 참모총장이 있었을까?
  하기야 장도영으로서는 쿠데타를
저지하기 위한 조치를 모두 취했으니
그만하면 됐다고 마음을 탁 놓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각하, 육군본부에
비상을 거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고
이희영도 건의를 했고 이철희도 건의를
없어!> 하고 한마디로 잘라 거부했다.
  그리고는 다만 헌병감 조흥만에게 전화로
명령을 내렸을 뿐이었다.
  "본부 헌병을 전부 비상대기시키고
제6관구 사령부로 긴급 출동해서 쿠데타
음모자들을 전원 체포하라."
  이 명령만을 내리고 506방첩대에서 다시
은성으로 돌아온 것이 9시 넘어서였으니까,
그는 은성에서 3시간 가까이를 낭비하고
있는 셈이 된다.
  이 3시간 사이에 쿠데타군을 진압할
진압군 이동은 불가능했던 것일까? 진압군
출동은 또 그렇다 치고 은성에서 함께
술잔을 기울이고 있던 참모차장 장창국이나
정보참모부장 김용배한테는 어째서 박정희
등의 쿠데타 거사에 대해서는 단 한마디도
  참모차장 장창국과 정보참모부장
김용배가 누구인가? 바로 육군본부의 핵심
인물들이 아닌가. 이들 두 사람에게
쿠데타에 대해서 눈꼽만큼이라도
털어놨던들 두 사람은 그 어떤 비상대책을
세웠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그것을
장도영은 이 두 사람에게 단 한마디도
귀띔해 주지 않았던 것이다.
  오오! 하늘이여! 하늘은 어째서 장도영과
같은 인간을 이 당에 내리셨는지
해명하소서.
  역사는 한 인간이 얼마든지 나라를
그르칠 수 있다는 것을, 장도영을 통해
분명하게 실증으로 보여주었다.
  은성에서 술자리가 파하자, 장도영은 두
사람을 집으로 보내고 그 자신은


  16일 자정 0시.
  찌르릉 찌르릉.......
  야전용 전화벨이 요란하게 울렸다.
해병여단장 김윤근은 송수화기를 집어
들었다.
  "여단장님, 지금 막 부대의 선두가
출발했습니다."
  전화보고를 해온 사람은 대대장
오정근이었다.
  순간, 가슴의 고동이 딱 멎으며 숨이 콱
막혀 버리는 듯한 느낌이었다. 마침내
주사위는 던져졌구나! 하는 체념이
번갯불처럼 머리를 두드렸다.
  김윤근은 손목시계를 들여다보았다.
0시에서 1분이 지나고 있었다. 예정돼
있었던 대로 해병대는 0시에 출발했던
것이다.
  "행운을 빈다."
  김윤근은 짤막하게 대꾸하고는
송수화기를 내려놓았다.
  해병대 지휘부는 주력부대의 후미에 붙어
진군하도록 되어 있었다. 그러므로
지휘반의 출발까지는 다소 시간이 있었다.
그래서 김윤근은 기다리는 동안
군종참모(軍宗參謀)를 찾아보고자 숙소를
나섰다. 해병여단에는 신교 예배당이
마련되어 있었다.
  "군종참모를 모셔 오게."
  김윤근은 예배당 안으로 들어가면서 부관
홍경식에게 말했다.
잠자리에 들어 깊은 잠에 빠져 있었다.
홍경식이 그를 깨워 <여단장님이
부르신다>고 하자, 김광덕은 <이 밤중에
무슨 일이야> 하는 표정을 짓고 달려왔다.
  "한밤중에 깨워서 미안하오."
  김윤근은 김광덕을 대하자 사과부터
했다.
  "무슨 언짢은 일이라도......?"
  김광덕은 여단장의 기분부터 살피려
했다.
  "우선 좀 앉으십시오."
  김광덕이 앉기를 기다렸다가 김윤근은
말을 꺼냈다.
  "실은 오늘 밤 우리는 쿠데타를
일으키기로 되어 있소. 선발부대는 이미
0시 정각에 떠났소."
휘둥그래졌다. 쿠데타라는 말을 그는 생전
처음 들었던 것이다.
  김윤근은 왜 쿠데타를 계획하게 되었는지
그리고 어떤 사람들이 주체가 되어
있는지를 간략하게 설명하고 이렇게
덧붙였다.
  "잘하는 일이라고 믿고 하는 일이라 해도
하나님이 보실 때에 잘못된 일이라면
우리가 하려는 일을 깨뜨려 주시겠지요.
다만 출동 목적을 모르고 나가는 많은
장병들이 피 흘리지 않도록 기도해 주시기
바랍니다."
  얘기를 듣고 난 김광덕은 조용히
일어나더니 마루에 꿇어 엎드렸다.
그리고는 차분하면서도 힘있는 목소리로
기도를 올리기 시작했다.
  "박정희 장군 지금 어디 있는지 알고
있나?"
  장도영은 506방첩대장실로 들어서며
소리를 질렀다.
  "10시경가지는 자택에 있었습니다."
  이희영의 대답이었다.
  "지금은?"
  "10시경에 한웅진 장군하고 자택을
나서자 감시조가 미행을 했습니다만
놓쳤다는 보고였습니다."
  "뭐 놓쳐?"
  장도영은 꽤나 착잡한 모양이었다.
의자에 털썩 앉으며 뭔가 골똘히 생각하는
눈치였다.

  "박정희 장군이 오셨습니다."
경비병이 큰 소리로 외쳤다.
  "뭐, 박정희 장군이?"
  김재춘이 먼저 복도로 달려나갔고
여기저기에서 웅성거리고 있던 쿠데타
르룹의 장교들도 달려나갔다. 얼결에
이광선도 달려나갔다.
  복도를 걸어오다가 우르르 몰려나온
장교들에게 둘러싸인 박정희는 그들의
얼굴을 한 사람씩 찬찬히 훑어보았다.
김재춘의 얼굴도 있었고 오치성의 얼굴도
있었다. 또 송찬호의 얼굴도 있었고
윤태일의 얼굴도 있었다.
  (아직은 무사하군.)
  박정희는 안도의 한숨을 쉬며 부사령관실
앞으로 다가와 호기있게 문을 밀치고
안으로 들어갔다.
김천경, 군수참모 육군 중령
김종호(金鐘鎬) 등 사령부 참모들이 모여
앉아 사태의 추이를 지켜보고 있었다.
  박정희가 제6관구 사령관이었을 때 이
부사령관실이 사령관실이었다. 아마도
박정희는 아직도 이 방이 사령관실인 줄로
알고 이리로 들어온 모양이었다.
  박정희를 에워쌌던 장교들도 모두 그의
뒤를 따라 부사령관실로 들어왔다.
그리고는 박정희의 거동만을 주시하고
있었다.
  박정희의 입에서는 주변 사람들이
역겨워할 정도로 심하게 술냄새가 풍겨지고
있었다. 그는 부사령관실로 모여든
장교들이 모두 그 자신의 혁명동지라는
착각이라도 들었는가? 그들을 다시 한번
입을 열었다.
  "여러분, 우리는 4.19 학생혁명 후
그래도 나라가 바로 잡혀지기를 기대해
왔습니다. 그런데 이게 무슨 꼴입니까?"
  박정희가 입을 열 때마다 술냄새가
사방으로 퍼져나갔다. 그러나 목소리만은
또렷했다.
  "국무총리라는 사람을 비롯해서
장관들까지도 멋대로 호텔 방을 잡아 나라
일을 본답시고 돈보따리로 뒷거래하는가
하면 이권운동, 엽관운동에 여념이 없으니
이게 무슨 꼴이란 말입니까? 과거의 자유당
정권을 뺨치는 부패와 무능으로 이 나라를
멸망의 구렁텅이로 몰아넣고 있으니 이게
어디 될 말입니까?
  데모대는 밤낮을 가리지 않고 장안을
나라가 잘 되기를 바라겠습니까? 이러한
절망적 상황을 보다 못해서 우리는 목숨을
내걸고 궐기한 것입니다. 동지들도
이제부터 구국혁명의 대열에 서서 각자
맡은 바 임무에 전력을 다해 주시기
바랍니다."
  이것이 박정희가 쿠데타의 명분을
공개적으로 밝힌 제일성이었다.
  쿠데타의 지도자로서의 연설 내용치고는
좀 치졸한 느낌이 드는 내용이었다.
웅변대회에 나간 중학생의 쿠데타
명분론이었다면 꼭 알맞았을 것 같았다.
  그러나 부사령관실에서 숨을 죽이고 그의
연설에 귀를 기울이고 있던 사람들 가운데
<연설 내용이 너무 치졸하구나> 하고 느낀
사람은 한 사람도 없었다. 모두가 긴장된
멤버들은 <꼭 쿠데타를 성공시키고야
말겠다> 하고 새삼 결의를 다졌고 쿠데타의
내용에 대해서 전혀 모르고 있던 사람들은
엄청난 사실 앞에 넋을 잃고 있었다.
  여기서 잠시 오늘의 현실과 대비해
보기로 하자.
  노태우(盧泰愚) 정권하의 사회상은 장면
정권하의 사회상과 비교가 안 된다. 적어도
장면 정권하에서의 데모에서는 화염병이
날고 공공기물을 기습, 파괴하는 일은
없었다. 정당 당사를 점거해서 며칠씩
농성을 벌였던 일도 없었다.
  그러므로 박정희의 논리대로 말하자면
지금이야말로 군사 쿠데타를 일으켜야 할
때라는 얘기가 된다. 정권욕에 사로잡힌
사람이 쿠데타를 통해서 정권을 잡고자
내세우겠는가. 하여간에 앞의 박정희의
연설 내용이 군사 쿠데타의 구실이었던
명분론이었다는 것을 독자는 분명히
기억하기 바란다.
  연설을 끝내고 나자, 박정희는
김재춘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김 대령, 장도영 참모총장이 어디
계신지 아시오?"
  "506방첩대에 계신 줄로 압니다."
  "그러면 전화를 걸어서 나한테 연결시켜
주시오."
  "알겠습니다."
  김재춘은 명령을 받기가 무섭게 전화
송수화기를 집어 들었다.
  장도영과는 곧 연결되었다. 그는
그때까지도 506방첩대에 그대로 앉아
  대체로 비대한 사람은 알콜기가 있으면
의자에 앉아서 꾸벅꾸벅 잘도 존다.
장도영은 비대하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마른 편도 아니었다. 혹시 그는 취기에 못
이겨 꾸벅꾸벅 졸기라도 했던 것이
아니었을까? 왜냐하면 자정에 박정희와
통화할 때까지 1시간 남짓 움직임은 전혀
정지상태였으니 말이다.
  그가 은성에서 506방첩대로 돌아와서
취한 조치란 박정희가 지금 어디에 있는지
탐지해서 보고하라는 이 한 가지뿐이었던
것이다.
  하여간에 두 사람은 전화기 옆에서 마주
섰다.
  "각하......."
  박정희는 장도영과 연결되자 쿠데타의
  "저희들은 각하를 혁명의 지도자로
모시고 궐기했습니다. 각하께서도 그리
아시고 적극 협조해 주시기 바랍니다."
  "박 장군, 무엇인가 잘못 판단한
모양인데, 지금은 그럴 때가 아니오. 좀더
기다려 보기로 합시다."
  장도영은 박정희한테 사정을 하고
있었다. 좀더 기다려 보자니 뭘 기다려
본단 말인가?
  육군의 총수가 풀이 죽어 있다는 감을
잡았던가? 박정희는 단호하게 말했다.
  "우리는 이미 계획단계를 넘어서 행동할
태세를 갖추고 대기하고 있습니다.
이제부터는 명령 일하에 총궐기하여 최선을
다할 뿐입니다."
  "여러 말 마시오. 이번에는 장면 정권에
자세히 얘기해 보는 것이 어떻소?"
  "내일 다시 만나자구요? 오늘 밤은
어두워서 뜻대로 안 되니까 내일 환할 때
모조리 잡아 넣겠다는 말씀입니까?"
  "그럴 리가 있소? 박 장군 좀 취한 것
같으니 오늘은 이만하고 내일 만나자는
겁니다."
  찰카닥, 송수화기를 놓는 소리가
울려왔다.
  그러나 박정희는 그 소리를 듣지 못했다.
너무 취해 있었기 때문이었다. 박정희는 빈
전화기에 대고 계속 퍼부어대고 있었다.
  "아무리 그래도 소용없습니다. 혁명군은
이미 출동을 개시했습니다. 각하께서는
그저 보고만 계십시오."
  옆에서 통화하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오는 것을 떨쳐 버리기가 어려웠다.
이번에는 CID 수사요원이 아니라 어디선가
진압군이 출동해서 제6관구 사령부를 덮칠
것만 같은 느낌이 들었다.
  (박정희를 격리해야 한다. 우리 모두가
체포돼도 박정희만은 체포돼선 안 된다.)
  이런 생각이 퍼뜩 머리를 스치고
지나가자, 김재춘은 박정희에게 진언을
했다.
  "각하, H아워보다 시간이 많이
지연되었습니다. 혁명군의 사기가
염려됩니다. 한시바삐 공수단으로 떠나셔야
되겠습니다. 서둘러 주십시오. 촌각을
아껴야 할 결정의 순간입니다."
  "알겠소."
  박정희는 김재춘의 건의를 순순히
  김재춘은 사전에 제6관구 수송근무대 중
2개 수송중대를 급유시켜 대기시켜 놓은 바
있었다. 그는 서둘러 책임 장교를 불러
박정희가 떠날 때 그 뒤를 따라가도록
지시했다. 공수특전단에는 자체 수송능력을
갖추고 있지 못했기 때문에 수송수단이
필요했던 것이다.
  그 사이에 박정희는 편지 한 장을 썼다.
장도영에게 보내는 편지였다.
  그는 사령부를 떠나기에 앞서 이 편지를
김재춘에게 주었다.
  "이 편지를 꼭 참모총장에게 전해
주시오."
  "알겠습니다."
  "김 대령, 내가 떠난 후에는 김 대령이
계속해서 혁명군을 지휘해 주시오.
  이렇게 당부를 하고 박정희는 한웅진과
더불어 제6관구 사령부를 떠났다.
  한편, 506방첩대장실에서 장도영이
나타나기를 기다리고 있던 송찬호와
윤태일은 장도영이 나타나자 박정희와
통화하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그 통화를
통해서 두 사람은 박정희가 제6관구
사령부에 나타났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그와 동시에 장도영이 쿠데타에 대처하는
태도가 미온적이라는 것도 깨달았다. 두
사람은 생각했다.
  (굳이 장도영을 자극하게 될지도 모르는
설득 같은 것은 안하는 것이 좋지
않겠는가?)
  그래서 이들 두 사람은 아예 입을 다물어
버리고 말았던 것이다.

  일부 기록에는 송찬호와 윤태일이
박정희의 편지를 가지고 506방첩대로 간
것으로 되어 있으나 사실은 그게 아니라
김재춘의 명에 따라 박정희의 편지를
가지고 506방첩대로 간 사람은 제6관구
작전처에 근무하고 있던 육군 중위
송정택(宋正澤)이었다.
  송정택은 평안북도 신의주(新義州)에
있는 동중학교(東中學校) 출신이었다.
장도영이 신의주 동중학교 출신이라는 것을
알고 있던 김재춘은 일부러 그의 후배인
송정택에게 이 중요한 심부름을 시켰던
것이다.
  그러나 박정희의 편지는 장도영의 손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장도영이 육군본부로
떠난 후였기 때문이었다.
  또, 이 편지는 서울 장악과 동시에
장도영에게 전달키 위해서 김종필이 미리
대필했던 것이라는 설도 있다. 그러나
필적으로 볼 때 박정희의 친필인 것 같은
심증이 간다. 장도영에게 전달되지는
않았지만 당시의 박정희의 생각이 어떤
것이었는지를 헤아리기에 도움이 될 것
같아 여기에 그 전문을 소개한다.

  존경하는 참모총장 각하.
  각하의 충성스러운 육군은 금 16일 3시를
기하여 해.공군 및 해병대와 더불어 국가의
위기를 극복하기 위하여 궐기하였습니다.
  각하의 사전승인을 얻지 않고 독단
생각하옵니다. 그러나 백척간두에 놓인
국가와 민족을 구하고 명일의 번영을
약속할 수 있는 유일한 방도는 오직 이 길
하나밖에 없다는 확고부동한 신념으로
민족적인 사명감에 의하여 결사 감행하게
된 것입니다.
  만약에 우리들이 택한 이 방법이 조국과
겨레에 반역이 되는 결과가 된다면
우리들은 국민들 앞에 사죄하고 전원
자결하기를 맹세합니다.
  각하께서는 저희들의 우국지성을
촌탁하시오 쾌히 승락하시고 동조하시와
나오셔서 이 역사적인 민족 과업을
수행하는 시기에 영도자로서 전두에서
지도해 주시기를 간절히 바라옵니다.
  저희들은 총장 각하를 중심으로 굳건히
신명(身命)을 바칠 것을 다시 한번
맹세합니다. 소관이 직접 각하를
찾아뵈어야 하오나 부대를 지휘중이므로
부득이 동료들을 특파하게 되었사오니
양해하여 주시기 바라옵니다.
  여불비 재배.
  5월 16일
  소장 박정희

  박정희가 제6관구 사령부를 떠나자
여기에 와 있던 쿠데타 그룹 멤버들 중
길재호, 유승원, 강상욱 등은 소사에 있는
제33사단으로, 오치성, 김형욱, 이석제
등은 수색의 제30사단으로 달려갔다.
출전을 독려하기 위해서였다.
  이때 제33사단의 전투단장 육군 대령
H아워에 맞추어 출동할 수 있는 만반의
태세를 갖추고 시간이 되기만을 고대하고
있었다. 그런데 숙소에서 장도영의 전화
연락을 받고 달려온 사단장 안동순이
가로막는 바람에 H아워에 맞춰서 출동을
하지 못하고 있었다.
  여기에서 우리는 1961년 당시 우리
국군의 상명하복(上命下服)의 정신이
얼마나 투철했는지를 실감할 수가 있다.
  쿠데타란 목숨을 내건 반란행위다.
그렇듯 비장한 각오하에 결행하려는
쿠데타를 훼방하는 자가 있다면 그
자리에서 쏴 죽이고라도 출동할 것
같았으나 우리 국군은 그렇게까지
무자비하지가 않았다. 제33사단의 전투단장
이병엽이나 오학진은 그런 무자비한 수단을
속수무책으로 난감해 하고만 있었던
것이다.
  이럴 때에 길재호, 유승원, 강상욱 등이
독려차 들이닥친 것이다.
  "어째서 여지껏 출동치 않고 있는 거야?"
  길재호가 호통치듯 힐난하자, 오학진이
풍이 죽어 대꾸했다.
  "사단장이 가로막고 있으니 어쩔 수가
없잖아?"
  그 말을 듣자, 강상욱이 사단장 안동순을
협박했다.
  "20여 분 후에는 서울에 3개 사단이
진주합니다. 해병대하고 공수단도 이미
출동했구요. 전군의 영관장교가 모두
참여했기 때문에 몇 사람이 방해해도
성사가 된다는 것을 아십시오."
  "입장이 곤란하면 가만히 계셔도
좋습니다. 이제는 결심할 시기가
왔습니다."
  이렇게 사단장 안동순을 붙들고 설득을
펴고 있는 사이에 유승원이 오학진에게
속삭였다.
  "우리가 사단장을 붙들고 있을 테니
부대를 이끌고 나가라!"
  제30사단의 경우도 사정은 제33사단이나
마찬가지였다. 작전참모 육군 중령
이백일은 사단장, 부사단장, 참모장이
부대를 떠난 후 서둘러 출동태세를
갖추었다.
  이미 탄약까지도 지급해 놓고 H아워에
되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데 H아워가
되기도 전에 부사단당과 참모장이 귀대를
아니라 사단장 이상국은 귀대할 때 혼자가
아니었다. 헌병 1개 분대를 거느리고
있었다. 장도영은 이상국에게 귀대명령을
내릴 때 어딘가 미덥지 못한 구석이
있었던지 김시진과 이강배에게 헌병 1개
분대를 이끌고 가서 제30사단의 반란
주모자를 체포해 오라고 지시했던 것이다.
  아상국 등은 부대에 도착하는 즉시
이백일 체포명령을 내렸다. 다급해진
작전참모 이백일은 작전참모실 뒤 창문을
열고 뒷산으로 도망쳤다. 이로써
출동준비를 갖추고 있던 제30사단은 완전히
이상국의 손아귀에 쥐어지고 말았던
것이다.
  전혀 아무런 장애도 받지 않고 예정대로
거사진행을 시킬 수 있었던 부대는 제6군단
설치해 놓고 있던 이 부대는 정각 새벽
1시에 출병, 1시 15분에 X지점에 집결,
서울로 진입하기로 되어 있었다.
  제6군단 포병단의 거병은 한치의 오차도
없었다. 단장 육군 대령 문재준(文在駿) 등
5개 대대장이 이끄는 포병대는 1시 15분,
예정된 X지점에서 합류했다. 이들 포병대를
가로막는 장애물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들
포병들은 그 육중한 포차를 이끌고 마치
무인지경(無人之境)을 가듯 서울을 향해
진군해 나갔다.

  같은 시각 제6관구 사령부.
  박정희가 떠나고 쿠데타 그룹 멤버인
8기생들이 제30사단과 제33사단으로 떠난
지 얼마 안 되어 참모장실에 있던 송찬호,
돌아왔다. 그들은 쇼파에 헌병차감인
이광선이 앉아 있는 것을 보자 재빨리
허리에 차고 있던 권총을 빼드는 것이었다.
두 사람의 거동은 마치 서부극에서 보는
총잡이들처럼 권총을 빼드는 솜씨가
민첩했다.
  김재춘이 미소를 담뿍 담고 일어서며
손을 들어 두 사람을 제지했다.
  "헌병차감도 협력하기로 했어요."
  그제야 두 사람은 다소 안심이 된 듯
권총을 도로 권총집에 집어 넣는 것이었다.
  이광선의 처남 역시 군인이었다. 그의
처남 김성구(金聖九)는 육군 중위 시절
박정희의 부관으로 오랫동안 근무했었다.
이광선은 처남 김성구를 통해서 <군인다운
군인>, <청렴결백한 장군> 등으로 박정희를
그 처남의 영향을 받은 탓이었는지
이광선은 박정희를 존경할 만한 장군으로
여기고 있었다.
  그런 인물이 쿠데타의 지도자로 추대를
받았다면 협력할 가치가 있다고 그는
판단했을 것이다.
  송찬호, 윤태일 두 사람이 사령관실로
들어선 지 채 5분도 안 되어 제6관구
사령관 서종철과 헌병감 조흥만이
사령관실로 들이닥쳤다.
  조흥만은 제6관구 사령부로 올 때, 헌병
1개 중대를 거느리고 왔다.
  사령관실로 들어서자 조흥만은 쇼파에
앉아 있는 이광선을 보자, 신경질을
부렸다.
  "당신 어떻게 된 거야?"
했다. 반란 음모자들을 체포하라고 보낸
헌병차감과 수사관 70명이 꿩 구워먹은
소식이요, 함흥차사가 되어 버려 가슴을
조이고 있다가 급기야는 그 자신이 출동을
했으니 어찌 핏대가 서지 않을 수가
있겠는가.
  "잠깐만!"
  이광선은 눈짓을 하며 서종철, 조흥만을
복도로 끌고 나갔다.
  "왜 그러는 거요?"
  조흥만이 의아해 하는 표정으로 물었다.
  "이미 때가 늦었습니다."
  "때가 늦어? 때가 늦다니?"
  "해병대가 이미 출동했습니다. 공수단도
출동했다는 소식입니다."
  "했으면 했지 그게 어쨌다는 거요?"
  "나도 박 장군에게 협조하기로 했단
말입니다."
  이광섭이 씹어 뱉듯이 선언했다.
  "뭐?"
  조흥만은 놀라서 한동안 멍해져 이광선을
어이없는 표정으로 바라보고만 있었다.
  "이제 체포하든 말든 그것은 헌병감께서
알아서 하십시오."
  이광선을 이렇게 말했다.
  조흥만은 그 말을 들은 둥 마는 둥
말없이 사령관실로 들어갔다. 서종철도
따라 들어갔다. 사령관실로 들어오자, 그는
506방첩대로 전화를 걸었다.
  "각하, 해병대와 공수단이 출동했다고
합니다. 이제 어떻게 해야겠습니까?"
  다음 명령을 기다렸다.
했다는 보고를 나도 받았어. 하지만 이제
뭘 어떻게 해야 할지...... 하여간 좀 두고
기다려 보자."
  장도영의 태도는 어정쩡하기 짝이
없었다.
  반란진압의 총책임을 지고 있는 육군
참모총장이 이 모양이니, 서슬이 시퍼런
기세를 가지고 제6관구 사령부로
들이닥쳤던 조흥만도 깊은 고민에 빠지지
않을 수 없었다. 체포해야 하나? 아니면
방관하고 있어야 하나? 그 어떤 결정도
내리지 못하고 있는 사이에 시간은
자꾸자꾸 흘러만 가고 있었다.



  7. 국무총리 장면, 숨어버리다


  0시 정각, 해병여단의 선두부대가 행동을
개시한 시각.
  여기는 휴전선 근방의 포천 제6군단
사령부 포병단.
  북한 괴뢰군의 도발을 막고 있는
제6군단의 사명은 막중했다. 군단장은 육군
소장 김웅수(金雄洙).
  제6군단 휘하 부대에서 쿠데타에 가담한
자들은 참으로 묘하게도 보병장교들이
아니라 포병장교들이었다. 단장인 육군
대령 문재준을 위시해서 제636대대장인
육군 중령 신윤창, 제933대대장 육군 중령
제99대대장 육군 중령 김인엽, 제6중포
대대장 육군 중령 정오경, 포병단 작전참모
육군 중령 홍종철 등이 바로 박정희에게
아니, 김종필에게 포섭당한 쿠데타
멤버들이었다.
  제6군단 포병단에 주어진 임무는 새벽
3시 40분에 육군본부를 점령하는 일이었다.
  정각 0시, 자정이 되자 포병단장
문재준은 명령을 내렸다.
  "출발!"
  군단장 김웅수가 부재중인 것이
무엇보다도 다행이었다. 그는 군단장회의에
참석하기 위해 지금 제1군 사령부가 있는
원주(原州)에 체류중이었다.
  포병단장 문재준의 명령이 떨어지자 1개
대대 300명씩 편성된 5개 대대 1,500명의
올라탔다. 이 80대의 트럭 꼬리에는 각기
육중한 대포들이 달려 있었다.
  앞에서도 언급했지만, 북한 괴뢰군과
대치하고 있는 제6군단의 임무는 막중했다.
그런 막중한 임무를 지니고 있는 제6군단
포병단이 쥐도새도 모르게 전선(戰線)을
이탈한 것이다.
  만일 이 사실을 김일성이 알기라도
했다면 또 어떤 광기를 부릴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휴전전 북방에 배치돼 있는 북한
괴뢰군은 김일성의 명령 한마디만 떨어지면
단 1초의 여유도 두지 않고 남침을 개시할
수 있는 만반의 태세를 갖추어 놓고
있었다.
  그것을 쿠데타 멤버들이 모르고 있을
리가 없었다. 알고 있어도 너무나 잘 알고
쿠데타를 위해서 후방으로 빼돌린 것이다.
참으로 현기증을 일으킬 정도로 아찔한
순간이었다.
  서울을 향해서 경원가도를 달려 남하하고
있던 제6군단 포병단은 헌병 초소에서
정지당했다.
  "어느 부대입니까?"
  초소 헌병이 물었다.
  "제6군단이다. 야간작전 훈련중이다."
  지프차에 올라 선두에서 부대를 지휘하고
있던 단장 문재준이 헌병의 질문에 이렇게
대꾸했다.
  그러자 초소 헌병이 의아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상부에서 제6군단이 야간작전 훈련을
한다는 통보가 없었습니다."
  "이놈아, 그럼 상부에 물어보면 될 일이
아냐? 어서 비켜."
  초소 헌병은 움찔했다. 문재준이 고급
장교의 위엄으로 일갈하거나 말거나 초소
헌병으로서는 제6군단 휘하부대의 야간작전
훈련 통보가 없는 이상에는 부대의 남하를
저지해야 옳았다. 그것이 그들에게 주어진
임무의 하나였으니 말이다.
  그러나 초소 헌병은 주어진 임무를
포기했다. 문재준의 위세도 위세려니와 1개
분대의 병력으론 포병부대 1개 연대에
해당되는 병력을 저지하기란 역부족이었기
때문이다. 그렇다 하더라도 임무에 투철한
헌병이어서 기를 쓰고 저지하려 들었다면
문재준이나 그 밖의 쿠데타 멤버들은 초소
헌병을 가차없이 쏴 버렸을지도 모르는
  쿠데타를 위해서 궐기한 그들이 한두
명의 생명 따위는 안중에 없었을 것이라는
것은 여기에서 증언부언 하나마나한
일이다.
  "출발!"
  문재준은 다시 명령을 내렸다.
  얼이 빠진 듯한 초소 헌병은 그저 멍한
표정이 되어 포병단의 행동을 지켜보고
있을 뿐이었다. 그들 초소 헌병들은
포병단의 차량행렬이 꼬리를 감춘 뒤에도
상부에 보고할 엄두도 내지 못하고 여전히
멍청해져 있을 뿐이었다.
  제6군단 포병단도 서울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전혀 캄캄한 채 사령부를
떠났었다.
  설마하니 제6군단 포병단이 쿠데타
있었던 육군 참모총장 장도영은 제6군단
포병단에 대해서는 아무런 명령이나 조치도
취하지 않았던 것이다.
  서울에서 벌어지고 있는 상황에 대해서
캄캄하기는 해병대도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들도 서울 상황에 대해서는 캄캄한 채
부대를 출동시켰던 것이다. 하기야
해병대는 육군 참모총장의 권한이 미치지
못하는 별도의 부대였다.
  그러므로 장도영이 해병여단이 쿠데타의
행동부대라는 것을 알았다고 하더라고
해병대 사령관 김성은(金聖恩)에게 통보를
하고 협조 요청은 할 수 있을지언정 그
이상의 조치를 취할 방법은 없었다.
  쿠데타 행동부대로 유일하게 제동이 걸려
있는 것은 오직 육군 공수단뿐이었다.
준장 장호진(張好珍)이 단장실이 턱 버티고
앉아서 부대출동을 가로막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빌어먹을!)
  어차피 목숨을 걸고 쿠데타에 참가하기로
한 이상에는 그까짓 장호진 하나쯤 단
한방에 거꾸러뜨리고 출동하면 그만이었다.
거칠고 용감하기로 말한다면 공수단만한
용사들이 또 있겠는가. 그런데 바로 이
점이 백 개의 입을 가지고 칭찬해도 모자랄
정도로 아름다운(?) 마음씨를 지니고 있는
한국 육군 공수단 용사들이었다.
  <한번 해병은 영원한 해병>이라고 하지만
그 점에 있어서는 육군 공수단 역시
마찬가지였다. 상명하복을 절대적인 신조로
삼고 있는 공수단 용사들은 상관을
않았다.
  (이런 빌어먹을, 이 노릇을 어쩌면
좋지?)
  공수단 단장 육군 대령 박치옥은 도무지
제정신이 아니었다. 출동 예정시간인
0시보다 벌써 30분 이상이나 지나 있었다.
쿠데타 제1선봉부대로 지목되어 있는
공수단이 출동을 하지 못할 경우 쿠데타에
차질을 빚게 될 것은 너무나 자명한
일이었다. 박치옥이 그 어떤 결단도 내리지
못하고 있을 때에 대대장 육군 중령
김제민이 급히 단장실로 뛰어들어 왔다.
  그는 단장실로 뛰어들어 오자 박치옥의
귀에 대고 나직이 보고했다.
  "단장님, 지금 중대장, 소대장 등 위관급
장교들이 무기고를 부수고 야단입니다."
  박치옥은 힐끗 장호진의 표정을
살펴보고는 황급히 밖으로 달려나갔다.
부대 무기고가 있는 곳으로 달려와 보니
중대장 육군 대위 차지철(車智徹)이 도끼로
무기고의 자물쇠를 부수고 있는 중이었다.
  (됐다. 위관장교들이 저렇듯 혈기에 차
있다면.)
  박치옥은 이제는 더 주저할 것도 망설일
것도 없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놈의 자물쇠가 꽤나 단단했다.
황소 같은 몸집을 한 차지철이 아무리 힘을
다해 내리쳐도 연방 불꽃만 튀길 뿐 좀처럼
부서지지를 않았다.

  해병여단 사령부 안에 있는 예배당에서
군종참모인 김광덕의 뜨거운 기도를 듣고
몰았다.
  주력부대를 태운 트럭 종대도 요란한
엔진소리를 내며 어둠이 깔린 김포
통진가도를 달리고 있었다.
  부대 이동차량대를 목격한 사람들은
참으로 장엄하다고 느꼈으리라. 사실
한밤중의 부대 이동차량대는 장엄한
느낌보다는 머리칼이 쭈뼛하고 곤두설
정도의 공포감을 자아내게 해준다.
  김윤근은 차를 세우고 한동안이나
차량대의 행진을 지켜보았다.
믿음직스럽다는 느낌과 함께 영문도 모르고
출동하고 있는 병사들한테 미안한 느낌이
들었다.
  이 시간에 이르기까지 몇몇 지휘관을
제외한 해병용사들은 그들이 왜 한밤중에
그저 야간 연습을 위해서 출동하고 있는
것으로만 알고 있을 뿐이었다.
  한동안 차량대를 지켜보고 있던 김윤근은
차량대가 행진해 오는 반대 방향으로 다시
차를 몰았다. 그가 찾아간 곳은 탱크
중대였다. 정문 보초가 차를 세웠다.
용건을 물으려 다가서다가 범퍼 위의
별판을 보고는 기겁을 하고 놀라서 경례를
붙이는 것이었다. 경례를 받고나자
김윤근은 중대장을 만나려고 하니 깨우라고
지시했다.
  중대장 막사에 들어서자, 해병 대위
김현호(金鉉浩)가 옷을 입고 있다가
김윤근을 맞아 주었다. 그는 김현호에게
쿠데타에 대한 대강의 설명을 해주었다.
그의 말을 다 듣고 나자 김현호는 주저치
않고 말했다.
  "여단장님이 나선 이상에는 저도
나서겠습니다."
  역시 동지애로 뭉쳐진 <한번 해병은
영원한 해병>이었다.
  "오전 4시에 출동할 수 있겠소?"
  김윤근이 물었다.
  "네. 명령만 내리시면 언제든지 출동할
수 있는 태세를 갖추어 놓고 있습니다."
  김현호의 대답은 믿음직스럽기만 했다.
  휴전선을 지척에 두고 있는 해병여단
탱크 중대였다. 그들은 24시간 언제나
출동할 수 있는 태세를 갖추어 놓고 있었던
것이다.
  "좋소! 그러면 오전 4시에 여단을 출발,
서울로 진군해 오시오."
  김윤근은 이 한마디 명령을 남기고
  그때 마침 여단 지휘반이 출발하려 하고
있었다. 김윤근은 그 여단 지휘반에 끼여
여단본부를 나섰다.
  그때가 1시. 그러니까 날짜는 5월
15일에서 16일로 바뀌어져 있었던 것이다.
청진동 대폿집에서 대폿잔을 기울이고 있던
박정희가 비장한 각오를 하고 제6관구
사령부로 달려온 바로 그 시간이었던
것이다.


  새벽 1시 30분.
  장도영이 진치고 있는 506방첩대
대장부속실에는 참모총장의 부관과
보좌관들이 공연히 서성거리고 있었고
앉아 있었다. 그 곁에는 이철희와 이희영도
앉아 있었다. 장도영이 앉아 있는 테이블
위에는 소형 권총이 놓여 있었다. 모젤 4호
권총이었다.
  이때 제5범죄수사대 대장 육군 중령
방자명이 대장실로 들어왔다.
  그를 본 장도영은 반색을 했다.
  "벌써 갔다 왔나?"
  "네. 이상국 사단장하고 헌병차감하고
같이 갔었습니다."
  "그래, 수고했어."
  방자명의 보고를 듣고 나자, 장도영은
문득 생각난 듯이 군용 전화기의
송수화기를 집어 들었다.
  "제30사단의 사단장을 연결해!"
  제30사단 사단장 이상국과는 곧
  "총장이다. 신임할 수 있는 병력으로 4개
소대를 편성해서 대기시켜라. 내 명령
외에는 누구의 지시도 받지 말라."
  장도영은 명령했다.
  이게 도시 무슨 소리인가? <신임>할 수
있는 병력이라니?
  그럼, 제30사단에는 사단장인 이상국이
<신임할 수 없는 병력>도 있단 말인가?
더구나 1개 사단 병력 중에서 신임할 수
있는 4개 소대 병력을 빼내서 뭘 어쩌겠단
말인가? 4개 소대 병력이라면 1개 중대
병력밖에 되지 않는다. 1개 중대 병력으로
쿠데타군을 저지하겠다는 말인가?
  아아, 장도영은 마냥 답답하기만 했다.
  그때 김포에 있는 해병대가 출동했다는
긴급보고가 들어왔다. 아마도 이
같으나 그 경위는 확실치가 않다. 장도영은
다시 군용 전화기의 송수화기를 집어
들었다. 헌병감 조흥만하고 즉시
연결되었다.
  "6관구 사령부에 집결해 있는 반란
음모자들의 처리가 어찌 됐나?"
  "헌병차감 이광선 대령에게 수사요원
70명을 붙여서 보냈습니다만, 지금껏
아무런 보고도 없습니다."
  조흥만의 대꾸였다.
  "지금 몇 신데 아직 보고가 없단 말야!"
  장도영은 버럭 소리를 질렀다.
  "헌병감이 직접 헌병중대를 이끌고 6관구
사령부로 출동해! 그리고 해병대가 출동한
모양이니까 헌병으로 하여금 저지선을
구축해 놓도록 해."
이렇게 미온적인 저지책을 명령하고
있었는지 또다시 의문을 품게 된다.
  알고 있는 사람은 익히 잘 알고 있겠지만
헌병은 전투요원이 아니다. 전쟁이 터졌을
경우 헌병은 독전대로서 투입되는 경우가
있기는 하지만 그들이 전투부대와 똑같이
전투를 하지는 않는다. 그런데 장도영은
어째서 전투부대도 아닌 헌병대로 하여금
한강 다리에 저지선을 구축할 생각을
했던가 말이다.
  서울 근교에도 신속히 동원할 전투부대가
없지는 않았다. 제30사단이 있었고
제33사단이 있었다. 물론 쿠데타 그룹이
행동군으로 이용할 계획을 세워 놓고
있었지만 이미 사전에 그 계획이 탄로나
사단장들이 부대를 장악하고 있지
  그렇다면 어떤 이유에서든 이 두 사단을
동원해서 한강 다리에 저지선을 구축해야
옳았다. 그것을 장도영이 그렇게 하지를
않고 헌병대를 출동시켜 저지선을
구축하도록 명령을 내렸던 그 속셈은
무엇이었던가 말이다.
  그는 진정으로 쿠데타를 저지해야
되겠다는 결연한 의지가 없었던 게
아니었을까? 장도영은 조흥만과의 통화를
끝내고 나자 이번에는 일반전화를 이용,
반도호텔에 묵고 있는 장면에게 전화를
걸었다.
  장도영의 전화를 받은 사람은 장면의
경호대장인 경감(警監)
조인호(趙仁鎬)였다.
  "웬일이십니까, 총장께서 이 밤중에?"
  "해병대가 장난질치는 것을 막도록
조처해 놨으니 안심하라고 총리께 말씀드려
주십시오."
  "아니 밑도 끝도 없이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하여간에 그렇게 말씀드려 주십시오."
  조인호도 쿠데타설이 한창 나돌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는 무엇인가 좀
이상하다는 예감이 들었던 모양이었다.
장도영이 수화기를 놓으려는 눈치를 채자
다급히 소리쳤다.
  "기다리십시오, 총장. 그건 중대한
문제인 만큼 총리께 직접 보고토록
하십시오."
  조인호는 급히 침실로 뛰어들어가 잠들어
있는 총리를 깨웠다.
전화입니다."
  "이 밤중에?"
  눈을 뜬 장면은 의아한 표정으로
머리맡의 송수화기를 집어 들었다.
  "나요. 무슨 일이오, 장 장군!"
  "각하, 30사단에서 반란하려는 것을 막아
놨습니다. 그리고 해병대가 술에 취해
가지고 장난을 하려고 해서 헌병대를 보내
막도록 조치했습니다."
  장도영의 보고는 조인호한테보다는 조금
더 구체적이었지만, 장면의 미간이
찌푸려지며 표정이 굳어졌다.
  "내가 며칠 전에 말하던 그것 아닌가?"
  장면은 다그치듯 물었다.
  "아닙니다. 별것 아닙니다. 총리
각하께서는 그저 그런 일이 있었다는 것만
하겠습니다."
  "이보게, 그게 무슨 소리야? 별일
아니라고만 하지 말고 내게 직접 와서
진상을 보고해!"
  장면이 거칠게 소리쳤다.
  "예, 알겠습니다. 조치를 취하고 바로
그리 가 뵙겠습니다."
  말을 마치자 장도영이 먼저 전화를 툭
끊었다. 불손하기 짝이 없는 행위였다.
윗사람이 먼저 전화를 끊기도 전에 앞질러
전화를 끊는 이런 불손한 행위가 어디 있단
말인가? 장면은 감정이 언짢았으나 참았다.
  (30사단이 반란을 일으키려 했고
해병대가 장난질을 하려 했다? 그렇다면
이게 쿠데타가 아니고 뭐란 말인가?)
  장면은 장도영의 애매모호하기만 한
전화를 끊어버렸으니 구체적으로 꼬치꼬치
따질 수도 없는 일이었다. 그는 가볍게
한숨을 내쉬고 침대에서 내려와 평복으로
갈아 입었다.

  같은 시각.
  제6관구 사령부를 떠난 박정희가 한참
김포가도를 달리고 있을 때 멀리서
달려오고 있는 불빛의 행렬이 보였다.
출동부대의 차량행렬 불빛이라는 것을
첫눈에 알 수 있었다.
  (공수단이 드디어 출동했구나!)
  박정희의 가슴에 감격과 희열이 일었다.
그는 염창교 입구에서 차를 세우도록
명했다.
  이윽고 불빛의 대열이 박정희의 눈앞으로
두 개를 단 장군이 손을 든 것을 보고
운전병이 차를 세웠다.
  차량의 대열이 서자 이상하게 생각한
김윤근이 차를 앞으로 몰아 달려왔다.
헤드라이트의 불빛에 환하게 드러난
박정희의 모습을 발견하자, 김윤근이
재빨리 차에서 내려 그의 앞으로 달려왔다.
  "장군!"
  두 사람은 얼싸안았다.
  "고맙소. 수고가 많소, 김 장군!"
  박정희는 얼싸안았던 두 팔을 풀고
이번에는 김윤근의 두 손을 잡았다. 그의
두 눈에는 눈물이 고여 있었다.
  "공수단은 출동했습니까?"
  김윤근이 물었다.
  "아니오, 30사단에서 기밀이 누설되어
해병대가 선두부대가 됐소."
  그 말을 듣자 김윤근의 가슴은 철렁
내려앉았다.
  (30사단에서 기밀이 누설되는 바람에
공수단이 발이 묶였다? 그렇다면 쿠데타는
실패란 말인가?)
  순간, 그는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김 장군, 어서 진격해 주시오. 김
장군만 믿겠소. 나는 이제부터 공수단으로
가서 상황을 알아보고 출동을 독려할
생각이오."
  박정희의 목소리는 애절하게 들리기조차
했다.
  (이미 엎질러진 물인 것을!)
  김윤근은 어쩔 수 없다고 체념했다.

  쿠데타 지휘본부인 제6관구 사령부.
  장도영의 명령을 받은 헌병감 조흥만이
제6관구 사령관 서종철과 함께 쿠데타
지휘본부인 제6관구 사령부로 들이닥친
것이 바로 이 시간이었다. 제6관구
사령관인 서종철은 그때까지 줄곧
헌병감실에서 죽치고 있다가 조흥만이 헌병
1개 중대를 거느리고 제6관구 사령부로
출동한다고 하자 따라 나섰던 것이다.
  헌병 1개 중대를 거느리고 있다는 사실이
마음 든든해서였을까? 두 사람은 호기있게
사령관실 문을 밀치고 들어갔다. 그런데
사령관실 분위기가 이상했다. 살기가
돌기까지 했다. 두 사람은 어리둥절해
있다가 다시 복도로 나갔다.
  "이보오, 조 장군. 이거 아무래도
  "그러게 말입니다."
  조흥만도 처음의 호기와는 달리
어정쩡해질 수밖에 없었다.
  "김재춘 참모장이 지휘를 하고 있는 것
같고, 거기에 이광선 차감도 동조하고 있는
것 같은 눈치인데, 그렇게 보이지 않았소?"
  아마도 서종철은 방안 분위기를 통해서
그런 눈치를 챈 모양이었다.
  두 사람은 다시 사령관실로 들어왔다.
  "참모장, 이거 어찌된 거요?"
  서종철이 김재춘에게 물었다.
  "지금 사령부는 혁명군에 의해서 완전히
점거되고 있습니다."
  김재춘은 자초지종을 상세히 설명해주고
나서 덧붙였다.
  "각하께서도 지지하고 나서는 것이 좋을
  김재춘의 말을 듣고 나자, 서종철이
허탈한 표정이 되며 중얼거렸다.
  "이젠 막을 길이 없게 됐구먼. 왜 진작
말하지 않았어? 그대로 총장한테 보고할
수밖에 없겠어."


  새벽 1시 45분.
  멍청해져 있는 것인지 아니면 골똘한
생각에 잠겨 있는 것인지 분간하기 어려운
모습을 하고 있던 장도영이 방첩부대장
이철희를 향해 물었다.
  "저들이 앞으로 어떻게 움직일 것
같은가? 어떤 방법으로 막아야 하지?"
  이철희는 큰 두 눈을 껌벅이고 있을 뿐
이희영에게 구원을 바라는 눈빛으로 시선을
돌렸으나 이희영도 대꾸가 없었다. 그에게
뾰족한 묘안이 있을 리가 없었다. 방자명이
답답해 못 견디겠다는 듯 참견했다.
  "각하, 빨리 결단을 내리십시오. 몇 개
부대가 움직이는 모양인데 마침 남산에서
공사를 하고 있는 야전증병단이 있으니
이들을 동원하면 웬만한 일은 해결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방자명의 건의가 끝나기가 무섭게 군용
전화벨이 울렸다.
  해병대 1개 대대가 진격해 온다는
보고였다. 이 보고에 장도영은 그제야 이제
자신이 할 일이 무엇인가를 깨달은 것
같았다.
  옆에대기하고 있는 비서실장
  "육본에 비상을 걸어라!"
  그는 진작 육군본부에 비상을 걸어야
옳았으나, 이 시간에 이르러서야 비상을
걸도록 명령을 내렸던 것이다.
  그런 다음 그는 국방장관 현석호의
집으로 전화를 걸었다. 쿠데타가
일어났음을 알리고 다시 또 국방정무차관
우희창(禹熙昌)에게도 전화를 걸어 사태가
급박함을 알렸다. 이어서 그는 육군본부
헌병대에 전화를 걸어 헌병 대위 김석률을
찾았다. 그와는 곧 연결이 되었다.
  "병력이 얼마나 있나?"
  "백 명 가량 됩니다."
  "그 중 50명을 한강에 배치, 한강 다리를
폐쇄하라. GMC를 가지고 가서 막아라."
  김석률과 통화가 끝나자 장도영은 근처에
  "귀관도 7중대와 같이 한강으로 가서
지휘하라."
  참모총장의 명령에 따르지 않을 수
없었다.
  "각하, 그러면 중화기로 무장하도록
하겠습니다."
  방자명은 자기 의견을 구신했다.
  앞에서도 언급한 바와 같이 헌병은
전투부대가 아니었다.
  4.19 일주년을 앞두고 위기설이 파다하게
퍼져 있었기 때문에 육군본부 헌병대에도
수류탄, 최루탄, 기관총과 철조망 등이
지급되어 있었다. 방자명은 그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출동 헌병대를 중화기로
무장시키겠다고 구신했던 것이다. 그런데
참으로 너무나 뜻밖이었다.
  장도영의 명령이었다.
  쿠데타군이 어떤 무기로 무장되어
있는지도 모르는 판국에 칼빈 총만 가지고
가라니, 방자명은 어이가 없었다. 칼빈
총의 유효 사격거리가 고작 50미터였던가?
  6.25 한국전쟁 때 학도병으로 출정했던
필자는 칼빈 총의 유효 사격거리가 그
정도밖에 안 되는 것으로 기억하고 있다.
  여담이지만 6.25 한국전쟁 때인 1950년
8월 19일 대구 제일모직 공장 마당에서
달랑 칼빈 총 한 자루만으로 무장을 하고,
바로 이날 팔공산 전투에 투입됐던 필자는
전투에 있어서는 칼빈 총이 쓸모없는
무기라는 것을 체험을 통해 알게 되었다.
  지금 장도영은 방자명에게 한강에
방어선을 구축하라고 하면서 아무 쓸모없는
이해하기 어려운 명령이 아닐 수 없었다.
이해하기 어려운 명령은 니것만이 아니다.
장도영은 또 이렇게 명령했던 것이다.
  "한강 다리를 GMC로 막되 차가 한 대
정도 통과할 수 있도록 여유를 남겨두라."
  장도영은 어째서 이렇게 어처구니없는
명령들만을 내렸던 것일까? 행여 서울로
들어오는 민간차량이 통행에 불편을 겪을까
고려해서였을까? 이 글을 쓰고 있는 이
시각. 장도영이 곁에 있다면 어째서 그런
명령을 내렸느냐고 묻고 싶다.
  하여간에 명령을 수령한 방자명은 있는
힘을 다해 액셀러레이터를 밟았다. 덕분에
조선호텔 앞 506방첩대에서 삼각지의
육군본부로 달려오는 데 채 10분도 걸리지
않았다.
헌병들이 왁자지껄하고 있었다.
  방자명을 발견한 김석률이 앞으로
달려왔다.
  "어떻게 된 일입니까?"
  김석률이 답답한 듯 물었다.
  방자명은 그 말에는 대꾸하지도 않고
출동을 재촉했다.
  "어서 한강 다리로 출동하세."
  두 사람은 육군본부의 헌병대를 두 대의
GMC에 나누어 태우고 즉시 출동했다. 한강
다리에 이르자 헌병들을 내리게 한 다음
GMC를 한강 다리 한복판에 여덟팔자 형으로
벌려 놓았다. 그때가 새벽 2시였다.
이시간에 이르러서야 엉성하나마
쿠데타군을 저지하기 위한 방어선을 구축해
놓은 셈이었다.
어떻게 할까요?"
  김석률은 아무래도 마음이 놓이지 않는
모양이었다.
  "김 대위, 귀관은 여기서 끝까지 막아야
한다. 고전을 하는 한이 있더라도 막아야만
한단 말이다. 알겠나?"
  방자명은 다지듯이 명령했다.
  "알겠습니다."
  육척 거구인 김석률은 호기있게 대꾸하고
그 명령을 복창했다.

  새벽 2시 같은 시각.
  염창교에서 김윤근과 헤어진 박정희는
출동한 해병대와는 반대쪽으로 차를 몰아
공수단 정문 앞에 이르러 있었다.
  그때 바로 공수단 장병들은 차지철 등
실탄을 꺼내 완전무장을 하느라 법석을
떨고 있었다. 박정희의 출현에 놀란
박치옥이 그의 앞으로 달려왔다.
  무기고를 부순 차지철 등 위관급
장교들도 달려와서 박정희를 빙 둘러쌌다.
  별을 두 개나 단 장군의 출현에 위관급
장교들은 무척 고무된 듯한 눈치였다.
  "왜 이리 출동이 늦나?"
  박정희는 역정부터 냈다. 공수단 단장
박치옥은 늦은 데 대해서 장황하게 설명할
마음의 여유가 없었다. 그러기엔
출동시간이 너무나 늦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박정희의 역정을 귓등으로 흘려
버리고 차지철을 불렀다.
  "차 대위, 귀관은 지금부터 박 장군의
  "즉시 승차하라!"
  그는 명령한 다음 크게 호령했다.
  한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것이 인간의
운명이라고 하지만 이 순간에 박치옥이
내뱉은 명령 한 마디가 한국의 현대사를 또
한 번 바꾸어 놓는 결과가 되리라고는 신
아닌 인간들이 감히 상상이나 했겠는가.
  <차 대위, 귀관은 지금부터 박 장군의
경호를 책임져라!> 박치옥이 차지철헤게 이
한마디 명령만 내리지 않았으면 박정희와
차지철의 유착이 어찌 이루어질 수
있었겠는가!
  참으로 기이하기만 한 인간의 운명이여!
  박치옥의 호령 한마디에 공수단 병사들은
앞을 다투다시피 하며 박정희가 끌고온 두
대의 트럭에 나누어 탔다. 박정희는 그러한
앞서 공수단을 떠났다. 박정희의 마음은
어느덧 해병대한테로 쏠려져 있었던
것이다.
  (귀신잡는 해병대가 아니냐! 지금쯤은
그들한테 주어진 임무를 무사히
완수했겠지.)

  새벽 2시, 같은 시각.
  아니 정확하게는 2시가 조금 넘어
있었다.
  국방장관인 한석호가 정무차관인
우희창을 거느리고 506방첩대 대장실로
들어왔다. 이때 장도영은 누군가와
전화통화를 하고 있었다. 그러면서 그는
부관이 총장 관사로 달려가 가져온
작업복으로 갈아입고 있었다.
한동안이나 물끄러미 지켜보고 있다가
장도영이 옷을 갈아입고 나자 비로소 입을
열었다.
  "장 총장, 청와대엔 연락을 했나?"
  "아직 못했습니다."
  "아직 못했어?"
  되묻는 현석호의 말투가 좀 거칠었다.
  그럴 만도 한 일이었다. 쿠데타 정보가
입수되었을 때 단호한 조치를 취해야 할
장도영이 어떤 태도를 취했던가? 그걸
생각하면 현석호는 장도영의 뺨이라도
후려갈기면서 단단히 화풀이라도 하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런 끓는 심정을 누르고 있는
것만도 장도영으로서는 고맙게 여겼어야
했다.
  장도영이 일반 전화의 송수화기를 들고
청와대에 거는 눈치였다. 신호가
떨어졌는가?
  "지금 군부에 쿠데타가 일어났습니다.
헌병을 보내서 저지하도록 대책을 세워
놨습니다."
  전화를 받은 사람이 뭐라고 했는지
장도영이 황급히 이렇게 덧붙이는
것이었다.
  "대통력 각하께는 일단 그렇게만
말씀드려 주십시오. 다시
연락드리겠습니다."
  그리고는 상대방이 미처 뭐라고 하기도
전에 전화를 탁 끊는 것이었다.
  이때 한강으로 보냈던 방자명이 대장실로
들어와 경례를 붙였다.
  "어찌 됐나?"
  "네. 저지선을 구축해 놓고 병력을
배치해 놓았습니다."
  방자명은 간략하게 보고를 했다. 병력이
부족하다는 것을 강조하고 싶었으나
국방장관이 서 있고 또 그가 지나치게
걱정을 할 것이라는 생각이 들어 그 말을
목구멍에서 삭여 버리고 말았다.
  "매그루더 장군한테는 연락했나?"
  현석호가 또 물었다.
  "아직 못했습니다."
  "도대체 장 총장은 그동안 뭘하고
있었다는 거야? 연락을 해야 할 사람한테는
하나도 연락을 하지 않고 있었으니?"
  현석호의 꾸중에 그제야 장도영은 다시
또 생각이 난 듯이 매그루더에게 연락하기
위해 전화기를 집어드는 것이었다.
갈아입은 장면은 마냥 방안을 서성거리고
있었다. 군사문제에 대해선 전혀 백지인
장면은 이런 경우 뭘 어떻게 해야 좋은
것인지 도무지 생각이 떠오르지 않았다.
  그래서 이렇게 마냥 서성거리며 나름대로
생각을 모아 보고만 있었다.
  (30사단이 반란을 일으키려 했거
해병대가 장난을 치려 했다는 것은 곧
쿠데타를 하려 했다는 얘기가 아닐까?)
  장면은 아까부터 이 한 가지 생각에
사로잡혀 있었다.
  장도영이 애매모호하게 보고를 할 것이
아니라 <각하. 쿠데타가 일어났습니다.
속히 통수권을 발동해서 1군 휘하의
전투사단에 출동명령를 내려주십시오.>
하고 건의했다면 장면은 지체없이 통수권을
  통수권 문제인데 국군에 대한 통수권이
상징적인 대통령한테 있느냐, 아니면
통치권자인 국무총리한테 있느냐 해서
윤보선과 장면은 적지않은 입씨름을 벌여
왔던 것이다.
  국군 통수권이 대통령과 국무총리 어느
쪽에 있었던간에 장도영이 쿠데타를
분쇄하기 위한 적극적인 대응책을
건의했다면 물론 장면은 그 건의를
이의없이 받아들였을 것이다.
  그런데 장도영은 애매모호하게 보고를
했던 것이다. 그래서 장면은 전혀 상황을
알 수가 없어 답답한 나머지 방안만
서성거리고 있었던 것이다.
  이럴 경우 군사문제에 밝은 측근이라도
한 사람 곁에 있었으면 얼마나
유엔군 사령관한테 주어져 있으니 속히
매그루더 장군한테 연락하셔서 쿠데타
저지책을 강구해 달라 하십시오> 하고
한마디만 건의했던들 장면은 그 건의 또한
지체없이 받아들였을 것이다.
  장면은 군사문제에 대해서는 전혀
백지였기 때문에 국군의 작전 지휘권이
유엔군 사령관한테 있다는 것조차도
생각해내지 못하고 있었다. 방안을
서성거리며 생각에 잠겨 있던 장면은
불현듯 사람이 그리워졌던 모양이었다.
  "이태희 검찰총장을 오시라고 해!"
  경호책임자인 조인호에게 명했다.

  새벽 3시 15분,
  새벽 3시 10분에 중앙청 앞에 당도한
육군본부로 질주해 갔다.
  선두에서 부대를 지휘하고 있던 제6군단
포병단장 육군 대령 문재준은 서울 시청
앞에 이르자 대열에서 이탈했다.
반도호텔로 가기 위해서였다. 그가
반도호텔에 이르러 보니 주변 일대가 마냥
죽은 듯이 고요에 묻혀 있기만 했다.
  새벽 3시 15분. 그 시간에 공수단은
반도호텔 앞에 진출해 있어야 옳았다.
그것이 쿠데타의 작전계획이었는데 공수단
장병은 그림자조차 찾아볼 수 없었다.
  (어찌된 노릇이야? 박치옥 이놈이 막상
거사 순간에 변심을 해버린 게 아냐?)
  그런 의심이 일기도 했다.
문재준으로서는 의심을 품을 만도 했다.
박치옥이 장도영의 심복이라는 것을 알고
  문재준은 즉히 차를 돌려 남산으로
달렸다.
  새벽 3시 20분.
  문재준은 남산 야외음악당에서 박정희와
만나기로 사전 약속이 되어 있었던 것이다.
  한데, 여긴 또 어찌된 노릇인가?
  남산 야외음악당엔 개미새끼 한 마리도
얼씬거리는 것을 볼 수가 없었던 것이다.
  (쿠데타를 하겠다는 놈들이 어째서 모두
이 모양이야?)
  문재준은 분노에 몸을 떨었다.
  원래 그는 열정가였다. 함경남도
함주(咸州) 태생인 그는 관북의 명문인
함흥의 미션계인 영생(永生)중학교
출신이었다. 열정가는 성미가 좀 급하다.
성미가 급하다 보니 상황판단도 즉흥적으로
  (모조리 배신했어, 모조리!)
  문재준은 박치옥도, 박정희도 모두 거사
직전에 변심해 버린 것이라고 단정했다.
  지프에 동승해 있던 대위가 물었다.
  "사령관님, 오늘이 5월 16일이
맞습니까?"
  "물론 5월 16일이구 말구."
  문재준은 대꾸하며 뒤를 돌아보았다.
  대위는 울고 있었다.
  "사령관님, 우리가 속은 겁니다. 속은 게
틀림없습니다."
  대위는 쿠데타 꾀임에 빠진 것으로
곡해를 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일단 육군본부로 가보세."
  문재준은 육군본부로 차를 몰라고
운전병에게 명했다.

  새벽 3시 20분.
  해병대 선두부대가 한강 인도교 남쪽
입구에 도착한 것은 새벽 3시 20분이었다.
예정돼 있던 시간보다 20분이나 늦었던
것이다.
  막상 한강 인도교에 당도해 보니 GMC 두
대가 여덟 팔자로 길 한복판을 가로막고
있었다. 헤드라이트의 불빛으로 살펴보니
헌병들이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것도
보였다.
  선두부대인 오정근(吳定根) 대대의
제2중대장 해병 대위 이준섭(李俊燮)은
트럭 운전대에서 뛰어내리자, 팔자형으로
길을 가로막아 놓은 트럭 쪽으로 달려갔다.
치워달라고 하고자 해서였다.
  <장도영 육군 참모총장도 쿠데타에
가담돼 있다>라고 듣고 있던 이준섭은 한강
다리에 산개해 있는 육군 헌병들이 쿠데타
저지를 위해서 출동한 부대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하고 있었다.
  이준섭이 달려오는 것을 보자 김석률이
쑥 앞으로 나섰다. 같은 대위 계급장을
달고 있는 것을 본 이준섭은 반갑다는 듯
환하게 웃으며 악수를하자고 손을
내밀었다. 기왕에 내민 손이다. 김석률은
해병대가 쿠데타군이라는 것을 알고는
있었지만 상대방이 먼저 손을 내밀기에 그
손을 잡았다. 희극이라고 해야 옳을지
비극이라고 해야 옳을지 표현하기 어려운
한순간의 장면이었다.
  이준섭이 물었다.
  이 질문에 대해서 김석률은 엄청나게
핀트가 빗나간 대꾸를 했다.
  "우리는 어떤 부대도 한강을 건너지
못하게 하라는 육군 참모총장의 명령을
받고 여기 나와 있는 거요."
  "뭐요?"
  이준섭은 그제야 <아차!> 하는 생각이
들었던 모양이었다. 조금 전의 환한 웃음은
온데간데 없었다. 그는 결연히 선언하듯이
말했다.
  "우리는 해병대 사령관의 명령에 따라
움직이는 해병대요. 즉시 장애물을 치워
주시오."
  "말도 안 되는 소리!"
  김석률은 단 한마디로 이준섭의 요구를
  "치우란 말이오!"
  "못 치워요!"
  "치우란 말이오!"
  "못 치운다고 하잖았소!"
  언성이 높아졌다. 언성이 높아지자
살기가 돌았다.
  이 광경을 지켜보고 있던 해병대
선두부대 대대방 오정근은 급히 지프에서
뛰어내려 출동부대 후미에 따라오고 있던
김윤근한테로 달려갔다.
  "여단장님, 무장한 헌병대가 다리를
가로막고 있습니다. 어찌된 노릇인지
모르겠습니다."
  오정근은 육군 참모총장 장도영이
쿠데타에 가담돼 있다고 듣고 있었다.
그랬기 때문에 무장 헌병대의 출동을 보고
  "박 장군 얘기를 들으니 육군
제30사단에서 비밀이 새게 된 모양이오."
  비로소 사실을 털어놨다.
  "하지만......."
  오정근이 다시 의문을 말하려고 하자,
김윤근이 그 말을 가로막듯 명령하는
것이었다.
  "그대로 돌파하시오."
  그 명령에 오정근은 해병대와 육군의 두
대위가 맞서 있는 곳으로 달려갔다.
  "우리는 지금 연천(連川)으로 야간훈련
나가는 중이오. 그러니 장애물을 비켜
주시오."
  그는 김석률에게 공손하게 말했다.
  김석률의 태도는 단호했다.
  "안 됩니다. 우리는 육군 참모총장의
훈련을 위한 출동이라면 돌아서 가
주십시오."
  "돌아서 가라니? 돌아서 가라면 어디로
돌아가란 말인가?"
  오정근이 비로소 눈을 부릅뜨며 거칠게
반문했다.
  "어서 비켜!"
  "못 비킵니다."
  또다시 입씨름이 벌어졌다. 쿠데타를
일으킨 측과 그것을 저지하려는 측이
처음엔 이렇게 입씨름으로 싸움을 벌였던
것이다. 한강 다리에서 오정근과 김석률이
입씨름을 벌이고 있을 때, 김윤근은 해병대
출동부대 후미에 따라오고 있던
박정희한테로 달려갔다.
  "작전이 실패한 것 같습니다."
질렀다.
  "그게 무슨 소립니까. 실패라니요?"
  해병대가 정지하고 있는 사이에 공수단도
어느 사이엔가 달려와 해병대의 후미에
붙어 있었던 것이다.
  "그럼 공수단으로 하여금 돌파시키는
것이 어떻겠소?"
  박정희가 제의를 했다. 바로 이때였다.
  고막을 찢는 듯한 굉음이 울리며 하늘
높이 환하게 불꽃이 이루어졌다. 해병대가
일제히 하늘에 대고 공포를 소아댔던
것이다. 그와 함께 앞으로 달려나온 해병대
트럭이 팔자형으로 세워 놓은 두 대의
트럭을 밀어냈다.
  팔자형 트럭 뒷편에 산개해 있던 50명의
육군 헌병들은 총성이 울려퍼지면서 트럭이
판단을 했던 모양이었다. 김석률이 미처
사격개시의 명령도 내리기 전에 해병대
트럭을 향해 일제 사격을 퍼부었다. 일이
이렇게 되자, 해병대도 공포탄만 쏘아대고
있을 수 없었다. 헌병들을 향해서 실탄을
퍼붓기 시작했다.
  6.25 한국전쟁이 휴전으로 매듭지어진 지
8년 만에 내부에서 골육상잔의 비극이
연출되고 있었던 것이다.
  이때가 정확히 새벽 3시 30분이었다.

  해병대가 저지하는 헌병대를 향해서
공포탄 대신 실탄을 퍼붓기 시작한 바로 그
시각.
  장면의 입인 공보비서 송원영의
제기동(祭基洞) 집 침실의 전화벨이
  송원영은 잠결에 전화를 받았다.
  "송 비서관님이시죠?"
  송원영은 잠결에도 목소리에 낯이 익다고
느꼈다. 장면의 경호원 중 한 사람인 박
경위였다.
  "무슨 일이오, 이 밤중에?"
  "송 비서관님, 놀라지 마십시오."
  "놀라지 말라니?"
  그제야 송원영은 비몽사몽 상태에서 확
깨어났다.
  "놀라지 말라니, 무슨 일이 생겼소?"
  "아, 그럼 거기서는 총 소리를 못
들으셨군요?"
  "총소리?"
  "네, 지금 한강 쪽에서 총격 소리가 나고
있습니다. 전 또 송 비서관님께서도 들으신
  "대체 무슨 소리요. 총격 소리라니?"
  "네, 다름이 아니라 해병대 병사들이
술을 먹고 행패를 부려서 경찰관이
휘협발사를 해서 낸 총소립니다. 걱정할
필요는 없을 것 같습니다."
  경호원 박 경위와 송원영의 전화통화는
이것으로 끝났다. 그런데 경호원 박은
누구한테 들었기에, 해병대 병사들이 술을
먹고 행패를 부려서 경찰관이 위협발사를
해서 낸 총소리 운운했던 것일까?

  국방차관보 신응균(申應均), 장면 정권
때 차관보라는 직제가 유일하게 국방부에만
마련되어 있었다. 그는 예비역 육군
중장으로 1959년에 예편을 했다.
육군본부에 비상이 걸리자 육군본부로
해병대가 교전을 하고 있다고 보고를 받자
급히 한강으로 차를 몰았다. 한강교 북쪽
입구에서 보니 아닌게 아니라 총격전이
치열하게 벌어지고 있었다.
  "사격 중지!"
  신응균은 헌병들에게 사격중지를 명했다.
헌병들이 사격을 중지하자 해병대도 사격을
중지했다. 신응균은 사격전이 멎자 해병대
쪽으로 다가갔다. 만용이라고 할 수밖에
없는 용기였다. 지금 피를 본 쿠데타군은
눈이 뒤집혀 있을 것이 뻔한 일이었다.
그것을 모를 리 없는 신응균이 해병대
쪽으로 다가간 것이다.
  "그쪽 책임자가 누구요? 책임자는
나오시오!"
  신응균의 호통에 박정희가 그의 앞으로
  "아, 박 장군 아니오?"
  신응균은 놀랐다. 해병대의 난동에
육군의 장성이 왜 끼여 있단 말인가?
신응균은 나이는 박정희보다 4살이나
아래였으나 일본 육군사관학교는
박정희보다 4기나 선배였다. 신응균은
53기였고 박정희는 57기였다.
  "어찌된 노릇이오, 박 장군?"
  신응균은 다그쳐 물었다.
  "우리는 지금 혁명을 일으켰소!"
  박정희는 허리팔을 하면서 대꾸했다.
  "혁명이라니, 말도 안 되는 소리. 어서
원대복귀하도록 하시오."
  신응균은 명령했다.
  "원대복귀?"
  박정희는 코웃음을 치면서 생각했다.
파악하지 못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장도영
장군이 전군에 비상을 건 것은 아닌
모양이다.)
  이런 생각이 들자 그는 쾌재를 불렀다.
이제 쿠데타는 의심의 여지 없이 성공할 수
있다는 자신이 생겼던 것이다.
  "혁명군 앞으로 전진!"
  해병대는 의기양양해져서 맹목적인
사격을 가하며 거의 뛰다시피하며 한강
다리를 건넜다.
  해병대가 전진하자 지금껏 저지하고 있던
헌병들은 삼십육계 위주상계라는 듯이
개미떼 흩어지듯 흩어져 도망치기에 여념이
없었다. 신응균은 다리 한가운데 서서
그러한 주위를 그저 멍하니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쿠데타에 있어서의 코미디 같은

  같은 시각.
  포천을 떠난 제6군단 포병단은
무풍지대를 가듯이 서울로 진입해
들어왔다. 그들의 앞을 가로막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너무나 조용한 것이
오히려 출동부대를 불안하게 만들었을
정도였다. 쿠데타군을 저지하기 위해서
어느 구석에 어떤 함정이 마련되어 있을지
모르는 일이기 때문이었다.
  제6군단 포병단이 중앙청 앞에 당도한
것이 3시 13분, 여기에서 17분 만에
육군본부 광장에 들어섰다. 쿠데타군은 그
어떤 장애에 부닥치거나 저항을 받은 일이
없었다. 쿠데타라고 하기가 싱거울 정도로
그들은 수월하게 육군본부로 진입해서
점령해 버렸던 것이다.

  쿠데타 와중에 있어서의 코미디 한토막이
있다.
  육군본부 작전참모부장인 육군 소장
송석하(宋錫夏)는 육군본부에 비상이
걸리자 지체없이 육군본부로 나와 있었다.
그는 제6군단 포병단이 육군본부로 출동,
연병장에 집결했다는 부관의 보고를 받자
즉시 연병장으로 달려나갔다.
  "당신들 어떻게 나왔어?"
  그는 한 장교를 붙들고 물었다. 어깨에
별을 두 개나 달고 있는 것을 본 그 장교는
차례 자세를 취하며 외쳤다.
  "작전명령을 받고 출동했습니다."
  "오, 그래?"
  송석하는 반가웠다. 작전명령을 받고
나온 것이 틀림없다는 판단이 들었다.
  "잘 나왔어. 지금 해병대 반란군이
한강을 건너려 하고 있으니 빨리 부대를
한강으로 이동시켜 진압토록 하라."
  곁에서 이 말을 듣고 있던 다른 장교들은
하마터면 풀썩 하고 웃음을 터뜨릴 뻔했다.
쿠데타군더러 쿠데타군을 진압하라고
명령을 했으니 폭소를 터뜨릴 만한
일이기도 했다.
  한데, 송석하의 명령을 받은 장교가
우물쭈물하자 송석하는 호통을 쳤다.
  "뭘 꾸물거리고 있는 건가. 빨리
한강으로 출동하라는데?"
  일이 이렇게 되자 다른 장교가 나섰다.
  "장군, 우리는 육군본부를 장악하라는
작명을 받고 출동했습니다. 작전명령의
수가 없습니다."
  "무슨 소리야? 내가 작전참모부장인데?"
  송석하는 어떻게 해서든 포병단을 한강
방어에 투입할 생각이었던 모양이었다.
  "각하, 저희는 군단 작명에 의해서
출동했습니다. 군단장 명령 없이는 움직일
수 없습니다."
  장교들이 송석하의 명령을 거부하자,
송석하도 더 이상 뭘 어찌할 수 없는
모양이었다. 그는 한동안이나 장교들을
노려보고 있다가 별관으로 들어가 버리고
마는 것이었다.

  새벽 3시 30분. 같은 시각.
  한강다리 북쪽 입구에 자리잡고 있는
남한강 파출소의 당직 순경은 수십 대의
취해 공포를 쏘며 한강을 건너오고 있다고
치안국 당직자에게 전화보고를 했다.
  이날 밤의 치안국 당직자는 총경
최석원(崔錫元)이었다.
  이 보고를 받은 최석원은 즉시 내무부
당직자 숙직실로 달려가 잠자리에 들어
있던 사무관 이상혁9李相赫)을 깨웠다.
  "술 취한 군인이 수십 대의 트럭에
분승......?"
  이상혁은 도무지 무슨 소리를 하는 건지
최석원의 말을 이해하기가 어려웠다.
아무리 군기가 문란해졌다고 해서 술 취한
군인들이 수십 대의 트럭에 분승해서
공포를 쏘며 한강 다리를 건넌다는 것은
상상조차 하기 어려운 일이었기
때문이었다.
알려야 되지 않겠소?"
  최석원의 재촉에 두 사람은 먼저 내무부
정무차관인 김원만(金元萬)한테 전화를
걸었다. 김원만은 서울 용산 을구 출신
민의원 의원이었다.
  "알겠소, 내 곧 내무부로 나가겠소."
  김원만은 보고에 대답한 후 전화를
끊었다.
  이때 김원만의 집은 갈월동 언덕진 곳에
있었다. 전화를 끊은 그의 귀에 총소리가
귀청을 때렸다. 콩 볶는 듯한 총소리가
아니라 공기를 찢는 금속성 총소리였다.
한강과 갈월동 사이의 거리가 가까운
데다가 집이 언덕진 곳에 있기 때문에
총소리는 좀더 분명하게 울려왔던 것이다.
  김원만에게 보고가 끝나자 두 사람은
이상규(李相圭)에게 전화보고를 했다.
김원만과 이상규는 곧 내무부로
달려나왔다.
  "총소리가 한강 쪽에서 요란했어. 뭐가
어찌 됐다는 것인지 시경에 좀 알아봐."
  이상규의 독촉에 이상혁이 서울시
경찰국에 전화를 걸었다. 한참 만에야
누군가가 전화를 받았다. 순경인 것
같았다.
  "총알이 날아오고 있습니다."
  전화를 받은 순경은 비명을 지르듯이
외쳤다.
  "뭐? 총알이?"
  "네, 모두 도망쳤습니다. 저는 책상 밑에
엎드려서 이 전화를 받고 있습니다. 저도
도망쳐야겠으니 전화를 끊겠습니다."
송수화기를 든 채 전화내용을 보고하려고
뒤를 돌아보았다. 아무도 없었다. 김원만도
이상규도 최석원도 어디로 도망쳤는지
그림자조차 찾아볼 수 없었다. 경비 순경
서너 명만이 긴장에 쌓여 이상혁의 거동을
지켜보고 있을 뿐이었다.
  이상혁은 기가 막혔다. 도망을 치려거든
함께 도망쳐야 할 일이 아닌가. 서울
시경에 상황을 알아보라고 재촉을 해놓고
전화를 걸고 있는 사이에 모조리
도망치다니, 괘씸한 생각이 불끈 치밀어
올라왔다.
  그렇다고 노여움을 터뜨릴 상대도 없는데
여기에서 우물쭈물하고 있을 수도 없었다.
그는 들고 있던 송수화기를
내동댕이치다시피 하고 밖으로 나갔다.


  새벽 3시 30분.
  506방첩대의 무전기는 잠시도 쉴 틈이
없었다. 영등포 방면에서, 육군본부에서
쿠데타군의 움직임을 빼놓지 않고 보고해
오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던 무전기가 3시 30분쯤에 한강의
총소리까지도 전해 주었다. 그 총소리로
한강 다리에서 쿠데타군과 저지군이
총격전을 벌이고 있다는 것을 알 수가
있었다. 그 총소리들이 무전기를 통해서
전해진 직후 육군본부가 쿠데타군에 의해서
점령되었다는 보고가 들어왔다.
  "뭐, 육군본부가?"
보고를 듣는 순간 한 대 얻어맞은 듯한
멍청한 표정이 돼 버렸다.
  그 둘레에 모여 앉아 있던 국방부 수뇌나
장도영의 참모진이나 서로 상대방의 감정의
추이만 살피고 있을 뿐 말이 없었다.
  국방장관 현석호를 위시해서 국방부
정무차관 우희창, 사무차관 김업(金業),
참모차장 장창국, 정보참모부장 김용배
등이 506방첩대에 나타난 것이 새벽
2시에서 3시 20분 사이였다.
  모두 장도영의 전화 연락을 받고 이리로
나와 있었던 것이다.
  한동안 멍청해져 있던 장도영이 다시
군용 전화기의 송수화기를 집어들었다.
  "30사단 사단장을 연결해!"
  제30사단 사단장 이상국과는 곧 연결이
  "귀관, 지체없이 귀관의 휘하부대를 시청
앞으로 진입시켜!"
  장도영은 그 한마디를 남기고 전화를
끊었다. 그런 다음 그는 제6관구 사령부와
제33사단과의 통화를 시도했으나 전화선이
끊겼는지 연결이 되지 않았다.
  장도영의 이러한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현석호는 도무지 가슴이 조여들어 견딜
수가 없었다. 그는 육군본부가
접수되었다는 무전보고를 듣는 순간 앞으로
이 쿠데타에 어떻게 대처해야 할 것인가를
골똘히 생각했다.
  (쿠데타는 이제 돌이킬 수 없는
상황으로까지 번지고 말았다. 그렇다면?)
  그러나 현석호 역시 군사지식을 전혀
갖지 못하고 있는 인물이었다. 그에게
장면의 신상도 걱정이 되었다.
  "장 총장, 나는 반도호텔로 가서 장
총리에 대한 대책을 세우고 올 테니 장
총장은 즉시 육군본부로 달려가 사태수습에
만전을 기해 주기 바라오."
  현석호는 말했다.
  "알겠습니다. 저도 사태수습을 해놓고
그쪽으로 가겠습니다."
  장도영은 그의 사태수습을 지켜보고 있는
현석호가 꽤나 부담스러웠던 것 같았다.
그가 반도호텔로 가겠다고 하자 표정이
밝아졌다. 현석호는 국방부 사무차관
김업에게 따라나서라고 눈짓을 했다.
  같은 시각, 새벽 3시 30분.
  국무총리 장면은 아직도 도무지 마음을
진정시키고 있지를 못했다. 아니 그는 더
오겠다던 장도영이 한 시간 반이나
됐는데도 꿩 구워먹은 소식이기 때문에
더욱 마음이 산란해져 가기만 했다.
  (오겠다고 했으면 와야지. 와서 상황이
어찌됐는지 보고해 줘야 할 게 아닌가?
어디서 뭘하고 있기에 여지껏 나타나질
않는 거야?)
  불안하기까지 했다.
  여기서 우리는 이때의 장면의 처신을 또
한번 생각해 보지 않을 수 없다.
506방첩대와 반도호텔은 지척이었다.
150미터 내지는 200미터쯤 거리였을까?
장도영이 잠자리에 들어 있는 장면한테
전화를 걸었을 때, 그는 비서관이나 아니면
하다못해 경호원이라도 506방첩대로 보내서
상황을 체크시켰어야 옳았다.
매그루더나, 미국 대리 대사
마샬그린한테라도 전화를 걸어 일련의
정치적 조치를 취했어야 했다. 그는
아무것도 하지 않고 마냥 장도영이
나타나기만을 목을 늘이고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역사에는 <만약에>라는 가정이 있을 수
없다. 허나, 한번 가정을 해보자. 만약에
장면이 이런 일련의 조치를 취했더라면
역사의 궤도는 어느 쪽으로 향해서
놓여지게 되었을까?
  어디에서 쏘아대는 총소리인지 가늠하기
어려웠으나 총소리가 아련하게 울려왔다.
뭔가 심상치 않은 상황이 벌어지고 있는
것이 틀림없는 것이다.

  장면의 부름을 받고 검찰총장 이태희가
반도호텔에 나타난 것은 이 시간이었다.
이태희가 모습을 나타내자 장면은 꼭
지옥에서 부처님을 만난 듯한 느낌이었다.
  멀리서 총소리가 또다시 들려왔다.
  "박사님, 일단 피신하시는 것이
좋겠습니다."
  이태희는 피신을 권고했다.
  "아니야, 참모총장이 오기로 돼 있어."
  장면은 아직도 장도영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있었다. 하기야 장면이
지금으로선 믿고 의지할 사람이
장도영밖에는 없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박사님. 상황이 어떤지도
모르면서 여기서 이렇게 무작정 기다리고만
있을 수도 없는 일 아닙니까?"
  생각 탓인지 총소리가 자꾸 가까워지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그래, 일단 아래로 내려가세."
  장면이 마침내 응낙하고 방을 나섰다.
아래층 로비로 내려왔다.
  "박사님, 세단은 눈에 띄니까 제 지프를
타고 가시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일단
제 집으로 모시겠습니다."
  사건을 많이 다루어 오고 있는
검찰총장다운 두뇌회전이었다.
  장면은 고개만 가볍게 끄덕이었다.
  이태희는 급히 주차장으로 달려갔다.
한데, 이게 어찌된 노릇인가? 의당 지프
운전대에서 대기하고 있어야 할 운전수가
없었다.
  (어찌된 노릇이야? 총소리에 겁을 먹고
  이태희는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찾아보았으나 행방이 묘연하기만 했다.
  이 사이에 국방장관 현석호와 사무차관
김업 그리고 체신장관 한통숙(韓通淑)이
함께 반도호텔로 들어왔다.
  장면을 먼저 발견한 것은 현석호였다.
  "박사님!"
  "아아, 현 장관!"
  장면은 현석호의 출현이 꽤나 반가운
모양이었다. 덥석 그의 두 손을 잡는
것이었다.
  "여기서 긴 말씀 올릴 수는 없고 일단
피신하셔야겠습니다."
  "음."
  장면은 짧게 대꾸했다.
  "어디 가실 만한 곳이라두?"
  그러면서 장면은 그때 로비로 들어선
이태희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럼 됐습니다. 저는 육군본부로 가서
사태를 수습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러니
박사님 너무 심려하지 마십시오."
  "그래, 수고를 좀 해주오."
  장면은 떠날 생각으로 잡고 있던
현석호의 손을 놓았다.
  "이거 운전수가 어딜 갔는지......?"
  이태희는 꽤나 당황해져 있었다. 집으로
모시겠다 해놓고 운전수가 행방을 감춰
버렸으니 당황할 법도 한 일이었다.
  이번에는 장면의 경호원들이 이태희의
운전수를 찾느라 헤매었다. 호텔 안팎을
샅샅이 뒤지다시피 했으나 끝내 운전수의
그림자조차도 발견하지를 못했다. 이렇게
때, 장면의 머리에 한 생각이 떠올랐다.
  (옳지, 일단 미국 대사관으로 피신하자.)
  그 생각을 진작 했더라면 얼마나
다행이었을까? 주한 미국 대사관은 바로
반도호텔 길 건너에 자리잡고 있었으니
말이다.
  장도영의 보고를 받은 직후 일단
그곳으로 거처를 옮기기만 했더라도 역사는
다시 또 바뀌었을지도 모른다. 장면은
경호대장인 조인호를 미국 대사관으로 급히
보냈다.
  하지만 재수가 없으면 뒤로 자빠져도
코가 깨진다고 하는 속담 그대로 미국
대사관으로 달려간 조인호가 아무리 셔터를
두드려도 안에서는 전혀 응답이 없었던
것이다. 이것이 장면의 운명이었을까.
  새벽 4시.
  원주에 있는 제1군 사령관 육군 중장
이한림(李翰林)도 요란한 전화벨 때문에
눈을 떴다.
  그는 침대 머리맡의 전화 송수화기를
집어 들었다.
  "여보세요?"
  이한림이 아직 잠에서 덜 깬 목소리로
상대방을 불렀다.
  "이 장군이십니까? 나, 장창국입니다."
  "아, 장 장군, 무슨 일이오. 이 된
새벽에?"
  전화를 건 사람은 육군 참모차장 육군
중장 장창국이었다.
  "쿠데타가 일어났습니다."
  "뭐, 쿠데타?"
달아나 버렸다.
  "쿠데타라니 무슨 소리오?"
  "공수단과 해병대가 한강 다리를 건너
서울로 진입했어요. 박정희 소장이
지휘하고 있소. 장 총장은 진압에 나서고
있고."
  장창국은 다급하게 이렇게 말하고 전화를
끊었다.
  쿠데타가 일어났으니 제1군에서 어떻게
하라는 지시도 없이 장창국은 전화를
끊었던 것이다. 그것으로 보아 서울의
상황이 상당히 급박해져 있는 모양이라고
이한림은 판단했다. 그는 사령부 당직
장교에게 전화를 걸어 사단장급 이상의
지휘관을 모두 사령관실로 긴급소집하라고
명령했다.
휘하의 군단장, 사단장들이 모두 원주에
머물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5월 15일은 제1군 창설 기념일이었다. 이
기념식에 참석하기 위해 제1군 휘하의
사단장급 이상의 지휘관들이 모두 원주에
와서 머물고 있었던 것이다. 그들은
기념식이 끝났는데도 소속부대로 돌아가지
않고 있었던 것은 5월 16일에는
지휘관회의가 예정돼 있었기 때문이었다.
  원주의 각 여관에 유숙하고 있던
사단장급 이상의 지휘관들은 곧 사령관
숙소로 달려왔다. 그러나 그 중에는 1시간
이상이나 늑장을 부리다가 나타난 지휘관도
있었다. 아마도 어젯밤에 퍼마신 술 때문인
것 같았다.
  만약에 또다시 6.25 때와 같이 김일성이
긴급소집에 1시간씩이나 늑장을 부리는
지휘관이 있다면 전쟁의 양상이 어떻게 될
것인가?

  새벽 4시 5분.
  장면은 애꿎은 시간만 허비하고 있었다.
조인호는 계속해서 미국 대사관 정문의
셔터를 두드리고 있었다.
  "군인들이다앗!"
  누가 먼저 보고 외쳤는지 모른다. 그
소리에 모두의 시선이 일제히 서울 시청
쪽으로 던져졌다. 군인들을 실은 트럭이
달려오고 있었다. 헤드라이트의 불빛이
너무나 눈부셨다. 당황한 장면의
경호원들은 장면을 국무총리 전용차에
밀어넣었다. 그러는 바람에 장면의 안경이
  "이 총장도 함께 가야지!"
  그러나 운전수를 찾느라 이태희는 헤매고
있었기 때문에 그를 기다릴 여유가 없었다.
장면의 운전수는 그대로 속력을 내며
질주했다.

  현석호 등이 506방첩대를 떠난 지 얼마
안 되어 예비역 해병 소장인
김동하(金東河)가 506방첩대에 나타났다.
그의 출현에 누구보다도 크게 놀란 사람은
506방첩대장 이희영이었다.
  (아니 저 자가 여기엔 어떻게?)
  어이가 없어도 너무나 없었다. 쿠데타
주동자의 한 사람인 김동하가 다른 곳도
아닌 쿠데타 저지 지휘본부에 모습을
나타냈으니 어리벙벙해질 수밖에 없는
  이 시간 김동하는 한강에서 쿠데타군과
저지 헌병의 총격전이 멎자 곧장 이리로
달려왔던 것이다.
  "이제는 도리 없이 육본으로 가야 할 것
같소."
  장도영은 누구에게라 할 것 없이
중얼거리듯 말하면서 자리에서 일어섰다.
  (육본은 이미 쿠데타군의 손에
들어갔다는데 거기로 가서 뭘 어떻게
하겠다는 거야!)
  육군 참모차장 장창국은 장도영의 행동을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모양이었다. 그의
마음에 의심의 검은 구름이 인 것은
이것만이 아니었다. 은성에서의 그의
행동도 이해할 수가 없었다. 물론 장도영의
전화를 받고 506방첩대로 달려나와서야 안
때 찾아온 이철희가 쿠데타에 대한 보고를
했을 때 왜 참모차장인 자기에게는 귀띔
한마디 해주지 않았던가 말이다.
  <박정희가 쿠데타를 일으켰습니다.> 그때
이 한마디만 귀띔을 해주었더라도 상황이
이 지경으로 벌어지지는 않았을 게 아니냐
하고 줄곧 그 생각만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이번엔 또 쿠데타군이 장악해
버린 육군본부로 가야겠다는 것이다.
그러한 장도영의 몸가짐을 어찌 이해할 수
있단 말인가.
  장도영은 일어서 나가려다가 말고
일반전화의 송수화기를 들고 다이알을
돌리기 시작했다. 이때 그는 청와대에
전화를 해두어야 되겠다 생각했던 것이다.
전화가 적막을 깨뜨리며 요란하게 울려퍼진
것은 새벽 4시 조금 지나서였다. 전화를
받은 사람은 대통령 비서실장
이재항(李載沆)이었다. 그는 장도영의
전화를 받자, 잠깐 기다려 달라 해놓고는
대통령 침실이 있는 2층으로 단숨에
뛰어올라 갔다. 그리고는 세차게 노크했다.
  얼마 만에 잠옷 위에 가운을 걸친 대통령
윤보선이 나왔다.
  "무슨 일인가?"
  "장도영 참모총장의 전화입니다. 각하께
직접 보고드려야 할 급한 일이라고
합니다."
  비서실장 이재항은 쿠데타 운운했다가
노인이 놀라면 어쩌나 해서 차마 바른 대로
말을 하지 못하고 그저 급한 일이라고
  윤보선은 다시 침실로 들어가서 침대
머리맡의 전화 송수화기를 집어 들었다.
  "나 대통령일세. 이 된 새벽에 급한
일이라니 무슨 일인가?"
  "각하, 지금 쿠데타가 일어났습니다."
  "뭐? 쿠데타?"
  그러나 이재항이 생각했던 것과는 달리
윤보선은 걱정할 정도로 놀라지는 않았다.
장도영의 다급한 목소리는 계속 송수화기
안에서 울려나오고 있었다.
  "각하, 헌병을 동원해서 한강 다리에서
저지했으나 중과부적이었습니다. 저지선이
무너졌습니다. 이미 서울 장안까지
들어왔습니다. 쉽게 진압될 것 같지가
않습니다."
  "그러니 날더러 뭘 어떻게 하라는 건가?"
은신했습니다. 각하께서도 신변안전에 극히
조심해 주시기 바랍니다."
  전화가 뚝 끊겼다. 장도영의 그러한
무례한 행동을 통해서 윤보선은 그가 꽤나
서둘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 윤보선은 선
채로 잠시 생각을 가다듬어 보았다.
  (이럴 땐 대통령인 나는 쿠데타에 어떻게
대처해야 할 것인가?)
  그러나 도무지 그 어떤 적절한 생각도
떠오르지 않았다.
  "이 실장."
  그는 이재항을 불렀다.
  "국무총리한테 전화를 해보게."
  윤보선의 명에 따라 이재항은 반도호텔로
전화를 걸었다. 신호는 울리고 있었으나
받는 사람이 없었다.
보았다. 연결이 안 되기는 역시
마찬가지였다.
  "각하, 우선 피신부터 하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이재항이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피신할
것을 권했다.
  "이 사람아, 피하기는 어디로 피한단
말인가?"
  그렇다. 명색이 대통령인 사람이
피신하겠다고 법석댈 수는 없었다.
  그는 조용히 청와대에 버티고 앉아서
사태의 귀추를 지켜보고자 마음에 다짐을
주었다.

  참으로 아슬아슬한 순간이었다.
  <장면 체포조>가 반도호텔로 들이닥친
  만일 운전수를 찾고 있는 이태희를 태워
가고자 해서 기다리고 있었더라면 장면은
여지없이 장면 체포조에 체포당하고 말았을
것이다. 그것은 장면의 운전수가 이태희도
태워가자고 장면이 말했음에도 불구하고
시동을 걸기가 무섭게 발차를 시켰기
때문에 장면은 체포당하는 수모를 면할
수가 있었던 것이다.
  장면 체포조는 모두 11명의 공수단원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지휘책임자는 육군 소령
박종규(朴鐘圭)였다. 박종규, 차지철 등
11명의 장면 체포조는 미리 반도호텔을
답사, 장면을 체포하는 계획을 치밀하게
세워놓고 있었던 것이다.
  "국무총리가 도망친 것 같습니다. 체포에
실패했습니다."
  국무총리 장면을 체포하는 데 실패했다고
박치옥에게 보고를 한 사람은
차지철이었다.
  "국무총리를 놓치면 어쩌는 거야? 이거
야단 아냐?"
  박치옥은 장면 체포에 실패했다는 보고를
받자 머리가 아찔해졌다.
  아닌게 아니라 야단은 야단이었다. 만일
장면이 원주로 도망쳐 제1군 사령관
이한림에게 출동을 명하기라도 했다간
동족간에 피를 흘리게 되지 않는다고
단언할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더구나
제1군 사령관 이한림은 독실한 천주교
신자로서 장면과는 아주 가까운 사이가
아닌가.
  <이 장군, 이 장군만 믿겠소. 즉시
장면이 원주로 피신해서 이한림에게 이렇게
명령하는 날엔 쿠데타는 도로 아미타불이
돼 버리고 말 것은 눈으로 보나마나 뻔한
일이었다.
  장면이 미국 대사관이나 미 제8군 사령부
영내로 피신했을 경우도 가상할 수 있었다.
이 두 군데 모두 치외법권 지역이었다.
이곳의 전화를 이용해서도 얼마든지
이한림에게 명령을 내릴 수가 있었다.
  이럴 경우에는 차선책이라도 써야 한다고
박치옥은 생각했다. 그 차선책이란 장면
정권의 요인들을 모조리 수중에 넣어두는
것이었다. 제1군이 반격전으로 나왔다 하게
될 것 같으면 이 인질들을 미끼로 협상도
벌일 수 있는 일이다. [삼국지 연의]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전략이었다.
체포조?"
  박치옥은 요인 체포조를 찾았다.
  공수단에게 맡겨진 요인 체포는 오직 한
사람 장면뿐이었다. 나머지 장면 정권의
요인들에 대한 체포는 육군본부에서
근무하고 있는 쿠데타 멤버들한테 맡겨져
있었다.
  "요인 체포조 아직 여기에 오지 않았어?"
  박치옥은 시청앞 광장 일대를
두리번거리면서 요인 체포조를 찾았으나 한
사람도 눈에 띄지 않았다.
  "도대체 어찌된 일이야?"
  박치옥의 신경질이 머리끝까지 치솟았을
때에 육군본부 근무자인 육군 중령
김원희(金元熙)가 나타났다. 그를 보자
박치옥은 다그치듯이 물었다.
됐소?"
  한데, 김원희의 대꾸는 너무나 엉뚱했다.
  "요인 체포요? 집을 알아야 요인을
체포할 게 아닙니까?"
  "뭐, 집을 알아야?"
  박치옥은 하도 기가 막혀 벌어진 입이
다물어지지가 않았다.
  (이런 놈들을 동지라고 믿고 그런 중책을
맡겨?)
  한 대 갈겨주고 싶은 분노가 물 끓듯이
끓었다.
  요인 체포를 책임졌으면 미리 집부터
알아둬야 할 일이었다. 그런데 미리 집도
알아두지를 않았으니 이런 놈들을 어떻게
동지라고 믿을 수 있단 말인가?
  거기에다가 해병대와 공수단이 한강의
있은 지가 언제인가? 겨우 어슬렁거리며
나타나 요인들의 집을 몰라 체포를 하지
못했다? 문제는 또 있었다. 다른 놈들은 다
어쩌고 김원희 혼자만 나타났느냔 말이다.
  (이놈들이 장도영이 진압작전에 나섰다는
것을 알고 모조리 발뺌을 하려고 숨어버린
게 틀림없어. 그렇지 않다면 어째서 김원희
혼자만 나타났느냔 말이다.)
  그런 의심도 들었다. 박치옥이 분노가
끓을 만도 했다.
  이건 나중에 알게 된 일이지만 쿠데타가
일어난 이날 아침까지 체포된 장면 정권의
요인은 국방부 장관 현석호를 위시해서
체신부 장관 한통숙, 국방부 사무차관 김업
뿐이었다.
  그리고 이날 오후 3시경, 부산에
조재천(曺在千)과 무임소장관
오위영(吳慰永)은 각기 동래온천 대성관과
자택에서 체포했을 뿐이었다. 이들 두
요인을 체포한 부대는 육군 준장
김용순(金容殉)이 이끄는 부산 군수기지
사령부 소속의 부대였다.

  한편, 장면이 떠나자 현석호는 체신부
장관 한통숙과 국방부 사무차관 김업을
먼저 지프에 오르게 했다. 그런 다음
자기는 앞자리에 앉았다.
  "506방첩대로 가세."
  진압상황이 마냥 궁금하기만 했던
현석호는 다시 506방첩대로 돌아갈
생각이었다.
  지프가 서울 시청 앞 로터리를 돌
세웠다.
  "뭣하는 사람이오?"
  무장병사 하나가 물었다.
  "나 국방장관일세."
  현석호는 아주 조용히 대꾸했다.
국방장관이라는 말에 무장병사는 일순간
찔끔해 하는 것 같았다. 다른 병사가
끼어들었다.
  "국방장관이 혁명이 일어났다는 것도
모른단 말이오? 어서 차에서 내리시오."
  현석호는 감히 국방장관에게 거칠은
말투를 쓰는 것으로 보아 이들이 반란군이
틀림없다고 단정하며, 아무 소리 앉고
차에서 내렸다. 현석호가 내리자 한통숙과
김업도 따라 내렸다.
  "따라 오시오."
수밖에 없었다.
  그들은 서울 시청 뒤로 끌려갔다.
  "여기 서 계시오."
  무장군인들이 세 사람을 세워 놓은 곳은
시청 뒤의 담벼락 앞이었다.
  현석호 등 세 사람이 무장군인들한테
이끌려 서울 시청 뒤로 가고 있는 바로 그
시각, 장면의 차는 중학동 한국일보 길
건너 맞은편에 있는 미국 대사관 직원숙소
앞에서 정차했다.
  "미스터 실바를 찾게. 미국 대사관의
정보책임자일세."
  장면이 앞자리에 앉은 조인호에게
명했다.
  미국 대사관으로의 피신에 실패한 장면은
미국 대사관 직원숙소에 은신할 생각을
  조인호는 차에서 내리자 숙소 정문
앞으로 달려갔다. 굳게 잠긴 철문을
한동안이나 두들기고 나서야 수위가
손전등을 들고 어슬렁어슬렁 나타났다.
  "누구십니까?"
  한국말이었다. 수위가 한국 사람이었던
것이다. 조인호는 수위가 한국 사람인 것이
조금은 꺼림칙했다.
  "급한 사정이 있어서 그럽니다. 미스터
실바한테 조인호라는 사람이 찾아왔다고
전해 주십시오."
  "잠깐 기다리십시오."
  수위는 그 한마디만 남기고 다시 또
어슬렁어슬렁 안으로 사라졌다. 몸가짐이
꼭 굼벵이 같았다. 여기서 한 5분은
지체했을까? 아니 10분 이상을
들어간 수위한테서는 아무런 기척도
없었다. 조인호는 속이 탔다. 장면도 속이
탔다. 군용 지프의 내왕이 갑자기 늘어나기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이제 더는 지체할 수
없을 것 같았다.
  "그만 가세."
  장면은 조인호를 불렀다.
  "일단 내 집으로 가세."
  장면의 집은 명륜동에 있었다.
  운전수는 속력을 낼 수 있는 한
액셀러레이터를 밟았다. 그런데 혜화동
로터리에 이르렀을 무렵이었다.
  원남동 쪽에서 달려오고 있는 트럭의
행렬이 보였다.
  이제 더는 우물쭈물하고 있을 여유가
없었다. 궁하면 통한다고 했던가? 여기
장면의 머리에 번갯불처럼 떠올랐다.
  "수녀원으로 들어가게."
  장면은 다급하게 소리쳤다.


  해병대는 무난히 한강 다리를 건넜다.
공수단도 건넜다. 한강 다리를 건넌
해병대는 서울 시청 쪽으로 달려가면서
분산하기 시작했다.
  그때가 새벽 4시 20분.
  그들한테 주어진 임무는 서울시 경찰국
산하의 각 경찰서와 경찰국, 치안국,
내무부를 접수하는 일이었다. 해병대가
삼각지에 이르렀을 때 손을 흔들며
환영하는 장병들이 있었다. 이미
장병들이었다.
  "시내는 무방비 상태다. 자동차를 타고
가라!"
  그 중의 어떤 장교가 고함을 질러대기도
했다.
  새벽 4시 30분.
  해병대 선두부대의 일부가 위협사격을
가하며 용산경찰서로 돌격해 들어갔다.
그렇지 않아도 한강 다리 쪽에서
울려퍼지고 있는 총소리에 전전긍긍하고
있던 숙직서원들은 별안간에 위협사격을
가하며 돌격해 들어오는 해병대에
혼비백산, 도망칠 구멍을 찾느라
아우성이었다. 어떤 자는 엉겁결에 책상
밑에 숨는가 하면 또 어떤 자는 지붕 위로
기어오르기도 했다.
  윤보선과의 통화를 끝내고 506방첩대를
떠난 장도영이 육군본부 참모총장실로
들어선 것이 바로 이 시간이었다.
  그는 비서실장 김병삼을 통해서
쿠데타군이 육군본부를 장악하고 있다는
것을 재확인했다.
  "참모부장들은 뭘 하고 있나?"
  장도영이 물었다.
  "지금껏 참모부장 회의를 열고
있습니다."
  그것은 사실이었다. 육군본부에 비상이
걸리자 달려나온 각 참모부장들은
자기들끼리 회의를 열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니까 참모총장이나 참모차장이 주재한
회의가 아니니까 그저 의견교환을 하고
있었다는 표현이 적절할 것 같다. 그들
일치를 보고 있었다.
  쿠데타군과 싸우게 되면 모두가 자멸하게
된다. 그러니까 희생자를 적게 사태수습을
하도록 해야 한다. 그 의견은 옳았던 것
같다. 동족간의 유혈사태만은 막아야 했다.
  그런데 문제는 쿠데타를 지지하느냐,
아니면 반대하느냐 하는 데 대해서는
참모부장들은 그 어떤 결론도 내리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니까 그들의
의견일치라는 것은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닌 애매모호한 것이라고 할 수 있었다.
  "각하, 이제 각하께서 육군본부로
오셨으니 각하께서 친히 참모부장 회의를
주재하시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비서실장 김병삼이 의견을 구신했다.
  (육군본부가 이미 쿠데타군의 손아귀에
들어갔고 또 다른 쿠데타군이 지금 서울
시내로 진입해 들어가고 있을 텐데
참모부장 회의를 주재해서 그 어떤 결정을
내린단 말인가?)
  아마도 장도영은 그렇게 생각했던 것
같다. 그러기에 그는 김병삼의 의견따윈
들은 척도 하지 않고 왼손을 턱에 고이며
눈을 지그시 감고 생각에 잠겨 있는 것이
아니겠는가.
  (도대체 이 양반은 지금 무엇을 생각하고
있는 건가? 쿠데타 진압을 생각하고 있는
건가, 아니면 지지할 것을 생각하고 있는
건가?)
  김병삼은 도무지 장도영의 마음속을
읽기가 어려웠다.

  공수단과 함께 한강 다리를 건넌
환하게 밝혀져 있는 것을 목격했다.
  (비상이 걸린 모양이군. 불이 환히
밝혀져 있는 것을 보니.)
  그는 한동안 그 불빛들을 노려보고
있다가 차를 남산으로 몰았다.
  KBS 서울 중앙방송국으로 가기
위해서였다. 그들의 계획으로는 KBS가
제2지휘부로 정해져 있었다.
  아마도 그때가 새벽 4시경이었을 것이다.
  헌병감 조흥만은 헌병 1개 분대를 보내
KBS 경비 임무에 다하도록 조치한 바 있다.
그러나 한강의 저지선이 무너졌다는 소식이
들려오자 조흥만은 서둘러 KBS에 파견했던
헌병분대에게 철수하도록 명령을 내렸었다.
그는 이 시간까지도 제6관구 사령부에
있으면서 이 철수명령을 내렸던 것이다.
공수단 1개 중대 병력이 그를 따라 붙었다.
박정희를 경호하기 위해서였다. 박정희와
그를 경호하는 공수단 병력이 남산 KBS
청사 앞에 당도한 것은 경비헌병이 철수한
직후였다.
  이때 시간은 새벽 4시 30분쯤.
  KBS 앞에 이르자 드리쿼터에서 뛰어내린
공수단 장병들은 공중에 대고 잇따라
위협사격을 퍼부어 댔다.
  그때 마침 아침 방송을 위해 막
숙직실에서 나와 양치질과 세수를 하고
아나운서실로 향하고 있던 숙직 아나운서
박종세(朴鐘世)는, 별안간 고막을 찢어대는
총소리에 놀라 아나운서실로 뛰어들기가
무섭게 책상 밑으로 기어들어가 꼭꼭
숨어버렸다.
기습공격하고 있는 게 아냐?)
  그는 된 새벽의 총소리가 어김없는
괴뢰군 게릴라 부대의 기습공격이라고
판단했었다. KBS 뜰에서 퍼부어대는
총소리에 놀란 것은 박종세만이 아니었다.
  그때 방송준비를 하느라 방송기재를
점검하고 있던 숙직 엔지니어도 총소리에
놀라 후다닥 믹서실에서 뛰쳐나가 방송국
뒷담을 넘어 도망쳤다.
  공수단이 방송국 청사를 완전히
장악하자, 박정희가 들어왔다.
  "혁명공약을 방송해야겠어."
  그러나 방송 기술자들이 없었다.
  "방송 기술자들을 찾아내!"
  박정희의 명령에 집총을 하고 경호하고
있던 공수단원들이 사방으로 흩어졌다.
기술자를 찾느라 부산을 떠는 소리가 온
청사 안에 메아리쳤다. 이윽고 한 공수단
병사가 책상 밑에 숨어 있는 박종세를
발견했다.
  "이리 나와!"
  총구를 들이대고 호통을 치는 바람에
박종세는 엉금엉금 기어나오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병사의 총부리에 밀리어
박정희 앞으로 끌려갔다.
  "이름이 뭔가?"
  박정희가 물었다.
  "박종세라고 합니다."
  박종세라는 이름은 박정희도 라디오를
들어 익히 알고 있었다.
  그는 이때 한창 이름을 날리던
아나운서였다.
혁명방송을 좀 해줘야겠소."
  박정희의 말투가 갑자기 공손해졌다.
  혁명방송이라니 어떤 방송을 하란
말인가? 그렇다 하더라도 엔지니어가
있어야 방송을 할 것이 아닌가?
  "방송은 저 혼자 하는 것이 아닙니다.
기술자가 있어야만 합니다."
  박종세는 기술자가 없는 것을 다행으로
여기며 꽁무니를 빼려 했다.
  이들이 혁명군이라고 자칭하고 있지만
어떤 종류의 혁명군인지 도무지 종잡을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총칼의 강요에 못
이겨 어쩔 수 없이 방송을 했다 하더라도
사태가 급전직하(急轉直下)하게 되면
방송을 한 책임을 면하기 어렵다는 것을
절감하고 있었던 것이다.
  박정희는 다시 명령했다.
  한데 총소리에 놀라 뒷담을 넘어
도망쳤던 숙직 엔지니어는 일단 위급을
면하기 위해서 도망치기는 했으나
방송시간은 다가오고 있었고, 그래서 더
이상 어디 먼 데로 도망을 치지 못하고
방송국 밑 민가의 처마 밑에 숨어 있었다.
그러다가 그는 총소리가 멎자 다시
방송국으로 올라오고 있었다. 아무래도
방송을 해야겠다는 책임감 때문이었다.
그는 언덕을 올라와 청사 안으로
들어가려다가 공수단 병사에게 붙들리고
말았다. 방송 기술자라고 하자 병사는 그를
박정희 앞으로 끌고 갔다.
  이제 방송을 할 수 있는 여건은
갖추어졌으나 문제가 또 생겼다.
  "종필이, 종필이, 어디 있어?"
  박정희는 두리번거리며 김종필을 찾았다.
방송원고는 김종필이 갖고 오기로 되어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그 김종필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 것이다.
  "이 소령, 이 소령은 어디 있어?"
  김종필의 모습이 보이지 않자, 박정희는
이번에는 부관 이낙선(李洛善)을 찾았다.
그의 모습도 보이지 않았다.
  "도대체 어디서 뭘 하구 있기에 여지껏
나타나지 않고 있는 거야?"
  박정희는 역정을 냈다.
  김종필, 이낙선 이 두 사람은 이 시간에
뭘 하고 있었을까?
  "내가 갔다 오지!"
  박정희는 부리나케 밖으로 뛰쳐 나갔다.

  같은 시각. 새벽 4시 40분.
  장도영으로부터 즉시 시청 앞으로
출동하라는 명령을 받은 제30사단 사단장
이상국은 휘하의 연대장인 육군 대령
권용성(權用性)에게 3개 소대를 지휘케
하고, 자신은 1개 소대를 지휘하며
지체없이 시청 앞으로 달려왔다.
  그때가 새벽 4시 40분이었다.
  막상 시청 앞에 이르러 보니 공수단과
제6관구 사령부 병력으로 꽉 차 있었다.
이상국은 기가 막혔다. 공수단과 제6관구
사령부 병력이 쿠데타군이라는 것을 그는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부대를
대기시켜 놓고 506방첩대로 달려갔다.
장도영을 만나기 위해서였다. 한데
  "총장께선 어디로 가셨습니까?"
  이희영에게 물었다.
  "총장께선 육군본부로 가셨습니다."
  이희영의 대답을 듣자, 이상국은 또 한번
기가 막혔다. 시청 앞으로 출동하라고
했으면 어떤 후속 조치를 취해 주어야 할
것이 아닌가.
  (뭐 이런 참모총장이 다 있어? 쿠데타를
방조하자는 거야?)
  욕설이 절로 솟았다.
  그는 육군본부로 전화를 걸었다.
  "나, 30사단 이상국 사단장이오.
총장님을 좀 바꿔 주시오."
  "지금 회의중입니다."
  전화를 받는 자가 부관인 모양이었다.
  "그럼 총장님께 내가 부대를 이끌고 서울
기다리고 있다고 전달해 주시오."
  전화를 끊었다.
  (이제 어떻게 한다?)
  그는 막막하기만 했다. 서울 시청 앞
광장에는 쿠데타군이 꽉 차 있고, 그렇다고
명령 없이 부대를 귀대조치할 수도 없고,
그는 답답한 가슴을 안고 대기시켜 놓은
부대로 돌아왔다. 그가 부대로 돌아온 것을
보았는지 제6관구 사령부 작전참모인 육군
중령 박원빈이 이상국 앞으로 달려왔다.
  "사단장님은 부대를 이끌고 중앙청으로
가서 경계임무를 맡아 주시오."
  (중앙청으로 가서 경계임무를 맡으라?
그러면 날더러 쿠데타군으로 둔갑을 하란
말인가?)
  그는 반감이 불끈 일었다. 그렇다고
있기도 싫었다. 그들하고 떨어지게 된
것만도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상국은 지체하지 않고 부대를 돌려
중앙청으로 향했다.

  새벽 4시 59분.
  KBS의 전파는 애국가를 실어보내고
있었다. 방송은 이미 시작되고 있었다.
그런데도 원고를 가질러 간 박정희는 아직
모습을 나타내지 않고 있었다.
  새벽 5시 정각.
  시보가 울리자 박종세의 목소리가 전파를
타고 퍼져나가기 시작했다.
  "여러분, 안녕히 주무셨습니까? 지금부터
5월 16일 아침 방송을 시작하겠습니다."
  박종세의 목소리가 조금 떨리고 있는 것
  아나운서 멘트가 끝나자 새벽의
방송담당자들은 우선 잔잔한 음악을
내보냈다. 혁명을 했다는 사람들이
방송준비를 하라고 명령하고는 어떤 방송을
하라는 후속 조치를 취해 주지 않았기
때문에 잔잔한 음악을 대신 내보내고
있었던 것이다.
  혁명이 성공할 때에 대비해서 혁명공약
인쇄를 맡겨 놓은 인쇄소는 안국동에 있는
이학수(李學洙)가 운영하는
광명인쇄소였다. 이 인쇄물의 담당이 바로
김종필과 이낙선이었다. 박정희는
방송시간이 돼도 김종필이 나타나지 않자
몸소 광명인쇄소로 달려가 인쇄물을 가지고
다시 KBS로 달려왔던 것이다.
  그때가 새벽 5시 2분.
원고지를 박종세 앞에 내놓고 읽으라고
눈으로 신호를 했다. 박종세는 읽지 않을
수 없었다.

  친애하는 애국동포 여러분!
  은인자중하는 군부는 드디어 금조 미명을
기해서 일제히 행동을 개시하여 국가의
행정, 입법, 사법의 삼권을 완전히
장악하고 이어 군사혁명위원회를
조직하였습니다.
  군부가 궐기한 것은 부패하고 무능한 현
정권과 기성 정치인들에게 더 이상 국가와
민족의 운명을 맡길 수 없다고 단정하고
백척간두에서 방황하는 조국의 위기를
극복하기 위한 것입니다.
  군사혁명위원회는.......
  군사혁명위원회는 6개 항의 공약을
내세우고 있었다.

  제1군 사령관 관저에서의 회의는 KBS에서
이른바 <혁명방송>을 한 직후였다. 육군
참모차장으로부터 쿠데타 소식이 있은 지
1시간 남짓해서야 지휘관들이 다 모였다는
것은 신랄한 비판을 받아 마땅한 줄로
안다.
  "조금 전 서울에서 쿠데타가 일어났다고
장창국 참모차장이 알려왔소. 박정희
소장이 지휘하고 있다 했소. 그러나 아직
정확한 소식은 모르겠소."
  모든 지휘관이 다 모이자 이한림은
간단하게 서울에서 쿠데타가 일어났다는
소식을 전해 주었다.
돌아가서 예하부대를 장악하고 출동준비를
갖추어 주시오."
  제3사단장 육군 중장 최석(崔錫)이
이의를 제기하고 나서서 당장 출동할 것을
완강히 주장했다.
  "출동준비를 하고 대기하고 있을 것이
아니라 당장 출동해서 서울의 외곽 통로를
차단해야 합니다."
  제1군 휘하에는 폭동이나 쿠데타 같은
사건에 대비해서 따로 예비군단을 마련해
둔 부대가 있었다. 그러니까 이 예비군단에
대해 <즉시 서울로 출동하라> 하고 명령만
내리면 그뿐이었다.
  그런데 어찌된 노릇일까? 이한림도 다른
지휘관들도 최석의 건의에 단 한 사람도
반응을 보여주지 않았다. 어째서였을까?
돌아갈 수 있는 모든 편의를 제공해
주었다.
  각급 지휘관들이 돌아가자 이한림은
부사령관 육군 소장 윤춘근(尹春根),
참모장 육군 소장 황헌친(黃憲親)을
불렀다.
  "언제든지 출동할 수 있는 태세를 갖추어
놔야 할 것 같소. 수송자동차 대대는 2군단
예하사단의 출동에 대비해 놓도록 하고
전차대대도 출동준비를 해두는 것이 좋을
것 같으니 즉시 지시하시오."





  8. 장도영, 그는 야누스였는가?


  새벽 5시 15분.
  소위 <혁명방송>이라는 것이 끝났다.

  군사혁명위원회는
  첫째, 반공을 국시(國是)의 제1로 삼고
지금까지 형식적이고 구호에만 그친
반공태세를 재정비 강화할 것입니다.
  둘째, 유엔헌장을 준수하고 국제협약을
충실히 이행할 것이며 미국을 위시한 자유
우방과의 유대를 더욱 공고히 할 것입니다.
  셋째, 이 나라 사회의 모든 부패와
구악을 일소하고 퇴폐한 국민도의와
기풍을 진작할 것입니다.
  넷째, 절망과 기아선상에서 허덕이는
민생고를 시급히 해결하고 국가 자주 경제
재건에 총력을 경주할 것입니다.
  다섯째, 민족적 숙원인 국토통일을
위하여 공산주의와 대결할 수 있는 실력의
배양에 전력을 집중할 것입니다.
  여섯째, 이와 같은 우리의 과업이
성취되면 참신하고도 양심적인
정치인들에게 얼마든지 정권을 이양하고
우리들 본연의 임무에 복귀할 준비를
갖추겠습니다.
  애국동포 여러분,
  여러분은 본 군사혁명위원회를
전폭적으로 신뢰하고 동요 없이 각인의
직장과 정업을 평상과 다름없이 유지하시기
  우리들의 조국은 이 순간부터 우리들의
희망에 의한 새롭고 힘찬 역사가 창조되어
가고 있습니다.
  우리들의 조국은 우리들의 단결과 인내와
용기와 전진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대한민국 만세!
  궐기군 만세!
  -군사혁명위원회 의장 육군 중장 장도영-

  이 <혁명공약>은 김종필의 작품으로
알려져 있다.
  쿠데타를 모의할 때나 이 혁명공약을
작성할 때만 해도 김종필의 마음은
순수했으리라. 하여간에 이 혁명공약이
전파를 타고 흘러나가는 것을 지켜보며
박정희는 얼마나 감격에 몸을 떨었는지
쿠데타였다. 그는 이제 그것을 해낸
것이다.
  (나는 해냈다. 기어이 해냈다.)
  44세의 박정희는 마음속으로
부르짖었는지도 모른다.
  하필이면 그때 비서실장 김병삼이 총장실
라디오를 켜놓았던 것일까? 하기야
김병삼이도 바깥 소식이 궁금해 뉴스라도
들으려고 라디오를 켜놓았던 것인지도
모른다.
  장도영의 명상을 방해하지 않으려고
라디오의 볼륨을 작게 줄여 놓고 있었던
것이나 장도영도 소위 <혁명방송>이라는
것을 들었다. 그 끝머리에 <군사혁명위원회
의장 육군 중장 장도영> 하는 끝말이
흘러나오자 눈을 번쩍 뜨며 고개를
  "뭐? 나를 의장이라고?"
  그는 어이가 없다는 표정이었다.
  한동안 물끄러미 김병삼을 바라보고 있던
그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나를 위원장이라고 추대했으니 좀
나가도 되겠군. 비켜라!"
  그는 의연한 자세로 총장실을 나갔다.
경비 장교들은 누구도 그의 앞을 가로막지
못했다. <어디로 가시려고
그러십니까?>라고 묻지도 못했다. 그들도
방송을 들었기 때문이었다.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전혀 알 길이 엇는 경비
장교들은, 장도영이 군사혁명위원회의
의장이라는 소리를 들었기에 그에게 어떤
불손한 행동도 취할 수가 없었다.

나왔다. 그는 박종세가 원고를 읽고 있는
동안 줄곧 그의 등 뒤에 지켜서 있었던
것이다.
  그가 스튜디오를 나서자 복도에는 많은
쿠데타 주체자들이 서 있었다. 육군
정보학교장 한웅진은 어젯밤부터 줄곧
박정희와 행도을 같이 했던 사람이고, 그
밖에 해병 준장 김윤근, 육군 준장 윤태일,
예비역 육군 중령 김종필, 육군 중령
이석제, 육군 중령 정문순(鄭文淳), 육군
중령 이형계(李亨桂), 육군 중령
박순권(朴順權), 육군 소령 이낙선 등이
언제 모여들었는지 방송국 복도에 모여
웅성거리고 있었던 것이다.
  "이젠 육본으로 가야겠지?"
  스튜디오를 나서면서 박정희는 쿠데타
사람 그래야 한다고 동의하는 사람이
없었다.
  괴이한 일이었다. 이미 육군본부가
쿠데타군의 한 가닥인 제6군단 포병단의
손에 들어가 있고 해병대와 공수단이 이미
행동을 개시해서 점령목표를 모조리 점령해
놓고 있는 지가 거의 1시간이나 가까워지고
있는데 육군본부로 가는 것이 좋겠다고
동의하는 사람이 없다는 것은 어찌된
노릇이란 말인가?
  사실은 그들 모두가 겁을 먹고 있었던
것이다. 그들이 여기로 와 있는 사이에
육군본부에서 어떤 상황 변화가 있었는지
전혀 가늠하기조차 못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만일 장도영이 쿠데타를
저지한다면 얼마든지 저지할 수 있다고
지키며 서로의 눈치만 살피고 있자
한웅진이 입을 열었다.
  "육본으로 가시더라도 일단 육본의
상황을 알아보고 나서 가시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육본의 상황을 알아본다면 어떤
방법으로 알아본단 말이오?"
  그렇다. 육군본부의 상황을 알아본다면
어떤 방법으로 알아봐야 한단 말인가?
정찰병이라도 보내본단 말인가? 한웅진은
박정희의 이 질문에 대해서 대꾸를 하지
못했다.
  그때였다. 김재춘과 한국찬(韓國贊)이
KBS로 달려온 것이다. 일행이 복도에 서
있는 것을 보자 김재춘이 덤비기 시작했다.
워낙 성질이 급한 인물이라 더듬기까지
  "큰일났는데 여기서 뭣들 하고 있습니까?
지금 장도영 총장이 하우즈 소장과 혁명군
진압계획을 세우고 있단 말입니다. 빨리
육본으로 가셔야겠습니다."
  미 육군 소장 하우즈는 미 군사고문단의
단장이었다. 장도영이 하우즈와 진압계획을
세우고 있다면 쿠데타는 도리없이 진압당할
수밖에 없는 일이었다. 그 말을 들은 모든
사람들의 얼굴이 백지장처럼 하얗게
질렸다. 그렇지 않아도 그들은 누구나가 입
밖에 내지는 않고 있었지만 과연 미군
수뇌부가 어떻게 나올 것인가, 그 점을
가장 염려하고 있었던 것이다.
  "죽든 살든 육본으로 가서 결판냅시다."
  그러면서 박정희가 먼저 걸어 나갔다.
  쿠데타의 최고지도자가 <죽든 살든
비겁하게 꽁무니를 뺄 수도 없는 일이었다.
일행은 무거운 마음을 안고 박정희의 뒤를
따랐다.
  육군본부에서 KBS로 달려온 최영택은
정문 앞에 차를 세우고 내렸다. 허리총을
한 공수단 병사들이 삼엄한 경계를 펴고
있었다. 시계를 보니 5시 30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최영택이 정문을 들어서자, 그때
막 박정희 일행이 현관으로 나오고 있었다.
  그는 잠시 걸음을 멈추고 그들이
나오기를 기다렸다. 박정희가 그의 앞으로
다가서자 최영택은 말없이 거수경례를
붙였다.
  박정희는 걸음을 멈추더니 최영택을
뚫어지게 바라보며 경례를 받았다.
그리고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더니 다시
최영택 앞으로 다가왔다. 그는 자주색
바지에 야전잠바 차림이었다. 그는 탈모한
자기의 이마로 최영택의 이마를 가볍게 툭
하고 받았다.
  "봤지? 우리는 기어이 해내고야 말았어!"
  그러면서 김종필은 씽긋 미소를 짓는
것이었다.
  "이제부터는 우리 서로 협력해서 하는
거야! 어때, 같이 하는 거지?"
  김종필이 덧붙였다.
  "그래, 해야지 해야 하구말구. 정말이지
수고가 많았어."
  이 순간 최영택은 쿠데타 편에 서서 일할
마음을 굳혔다.
  이 두 사람의 관계에 대해서는 뒤에 다시
소개할 기회가 있을 줄로 알지만 쿠데타
있었다.
  그렇지만 그런 그가 결과적으로 중도에
탈락하다시피 했던 것은 그의 직책상의
문제 때문이었다. HID 본부의
첩보과장이라고 하면 대공 첩보관계는 모두
관장하고 있어야만 했다. 특히, 민주당
정권이 들어선 뒤로 북한 김일성 집단의
도발이 워낙 치열하게 벌어지고 있었기
때문에 여기에 대응하기 위한 조치를
취하는 데도 시간이 모자랄 지경이었다.
쿠데타도 국가안보를 유지하고 난 이후에
생각할 문제였다. 그래서 최영택은
탈락하는 결과가 되었던 것이다.
  "차 가지고 왔어?"
  "응!"
  "그럼 난 최 형 차로 가야겠네."
  최영택은 김종필을 자기 차에 태웠다.
  (이 친구한테 무엇보다도 먼저 차하고
호신용 권총부터 마련해 줘야 되겠군.)
최영택은 핸들을 잡으며 생각했다.
  박정희의 지프를 두 대의 드리쿼터가
호위하며 밝아 오는 남산 길을 달렸다.
육군본부에 도착하자 최영택은 김종필을
내려놓고 HID 본부로 향했다. 공작처장
육군 중령 김영민(金永旼)이 그를
맞아주었다. 그는 상황이 꽤나 궁금한
모양이었다.
  "쿠데타지?"
  조급히 물었다.
  "응."
  최영택은 짧게 대답하고 잠시 생각한
끝에 말했다.
도와줘야겠어. 그러니 뒷일을 좀
부탁하겠어."
  "응, 좋아. 여기 일은 걱정하지 말구
나서라구. 그래, 내가 뭐 도와줄 일은
없어?"
  김영민은 아주 시원스럽게 물었다.
  "종필이가 차가 없어. 권총두 없구."
  "그럼 내 차를 가져다 줘."
  그는 권총 한 자루를 내주는 것이었다.
  최영택은 권총을 받자 자기 차는 놔두고
김영민의 차와 운전수를 인계받은 다음
휘발유를 만탱크 시킨 다음 다시
육군본부로 향했다. 김종필이 호신용
권총과 전용으로 쓸 수 있는 차가 생긴
것을 무척 기뻐하리라 생각하니 그의
마음도 그지없이 흐뭇하기만 했다.
하나 사이를 두고 이웃하고 있는 미 8군
사령부로 갔던 것이다. 그때쯤에는 유엔군
사령관 겸 미 8군 사령관인 매그루더도
사태의 긴박한 소식을 듣고 사령관실로
나와서 분초를 다투며 들어오는 쿠데타군의
동정에 대한 보고를 받고 있었다.
  이미 여러 정보 경로를 통해 박정희가
장도영을 업고 쿠데타 음모를 꾸미고
있다는 보고를 받고 있던 매그루더는
장도영이 찾아왔는데도 반겨 주지조차
않았다.
  "어찌 찾아왔소?"
  매그루더는 차갑게 물었다.
  "장군께서도 보고를 받았으리라고
믿습니다만 쿠데타가 일어났습니다."
  "쿠데타가 일어난 것은 알고 있소.
장의 태도요. 장군은 이 쿠데타를 어찌할
생각이오? 받아들일 생각이오?"
  "받아들이다니요? 천만의 말씀입니다."
  장도영이 펄쩍 뛰었다.
  "받아들일 생각이 아니라면 왜 즉각
쿠데타 분쇄를 위한 조치를 취하지
않았소?"
  "방법이 없습니다."
  "방법이 없다는 것이 말이 됩니까? 나는
제너럴 장이 쿠데타에 대한 보고를 몇 시에
받았는지 알고 있습니다. 장군은 보고를
받은 즉시 필요한 조치를 취하지
않았습니다."
  "그, 그것은 동족간에 피를 흘리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되겠기에......."
  "제너럴 장, 잘 들으십시오. 대한민국은
없습니다. 미국은 그동안 모든
피원조국들에 대해서 대한민국을
본받으라고 하며 대한민국의 민주주의
성장을 얼마나 자랑해 왔는지 모릅니다.
그런 나라에서 쿠데타가 일어나다니 도저히
용서할 수 없습니다. 쿠데타는 반드시
진압돼야 합니다."
  매그루더의 쿠데타에 대한 태도는
완강했다.
  그도 그럴 법한 일이었다. 미국은 45년
8월 15일 이래 대한민국을 민주주의 국가로
키우기 위해 얼마나 많은 돈을
쏟아부었던가. 더구나 김일성 집단이
남침을 감행함으로써 야기되었던 6.25
한국전쟁 때는 3만여 명의 미국의 아들들을
희생시켜 가며 민주주의 국가로 자라고
않았던가.
  매그루더는 문제가 또 있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쿠데타를 주도한 박정희라는
인물의 사상이 불투명한 점이었다. 그래서
박정희를 예편시켜 버리라고 그렇듯 한국
군부에 대해서 압력을 넣었음에도 불구하고
의붓자식 끼고 돌듯이 하고 있다가 오늘 이
지경에 이른 것이 아닌가. 박정희, 그를
끼고 돈 사람이 누구였던가? 바로 장도영
이 사람이 아니던가.
  <쿠데타는 절대 용납 못합니다. 결단코
쿠데타는 분쇄돼야만 합니다.> 매그루더의
마지막 이 한마디는 장도영으로 하여금
경각심을 불어넣어 주기 위한 말이었다.
<나는 네가 박정희에게 업혀 왔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만일 박정희에게 업혀져
않겠다>는 간접적인 경고이기도 했던
것이다.


  새벽 5시 45분.
  장도영은 다시 육군본부로 돌아왔다.
그가 매그루더의 방을 나서자, 미
군사고문단장인 하우즈가 뒤따라왔다.
참모총장실로 들어오자 장도영은 하우즈와
단 둘이 밀담을 나누었다.
  "어떻게 하면 좋겠소, 장군?"
  장도영은 답답했다. 쿠데타군은 이미
육군본부뿐만 아니라 서울 시내에 있는 전
기관을 장악했다고 보아야 옳을 것 같았다.
거기에 그놈의 혁명방송이라는 것이 이미
  "만일 군사행동이 필요하다면 매그루더
사령관이 작전 지휘권을 행사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최악의 경우이고 우선은
쿠데타군더러 원대복귀를 명할 것으로
봅니다."
  쿠데타 진압계획으로서는 다시 없는
온건한 방법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목숨을 걸고 궐기한 쿠데타군이 그렇게
선뜻 원대복귀 명령에 순응하려 들까?
  아무래도 이 점은 미심쩍기만 했다.
  (매그루더가 쿠데타에 대해서 단호한
태도를 취하고 있는 이상엔 쿠데타는 어쩔
수 없이 실패하고 만다.)
  이런 판단이 서자 장도영은 결심을 했다.
쿠데타를 진압하기로. 그런데 참으로
이해할 수 없는 장도영이었다. 그는
소극적, 너무나 소극적이기는 했지만
쿠데타를 저지하기 위한 조치를 취해
왔었다.
  그런 그가 매그루더를 만나고 하우즈와
의논하는 사이에 새삼스럽게 쿠데타를
진압할 결심을 굳혔다는 것은 또 무슨
소리인가? 그러면 그는 지금껏 건성으로
쿠데타 진압을 취해오고 있었다는 얘기밖에
더 되는가? 그렇다, 그는 지금까지는
건성으로 쿠데타 진압조치를 취해 오고
있었떤 것이다.
  제2군단 사령관 시절, 그는 번번이
<이놈의 나라 쿠데타로 뒤집어 엎어야
한다>고도 했었다. 또 박정희는 그를
<쿠데타의 지도자로 추대하겠다>고도
했었다. 그래서 요행 대권을 잡아볼 기회가
그는 쿠데타를 저지하는 척만 해왔던
것이다.
  어쨌거나 그는 새벽 5시 45분에 쿠데타를
진압해야겠다고 스스로에게 다짐을 주었다.
그가 이렇게 스스로에게 다짐을 주고 있을
때에 갑자기 밖이 꽤 시끄러워졌다. 그것은
박정희가 육군본부에 발을 들여놓았기
때문이었다.
  "쏴라! 쏴라!"
  박정희 일행이 별관 건물 앞에서 차를
세우고 내리는 것을 본 육군본부 교육처장
송석하는 경비병에게 쏘라고 명령했다.
  이때가 새벽 6기.
  날이 훤하게 밝아 있어 사람의 모습을
분간할 수 있는 시간이었다.
  그는 이때 무엇 때문에 별관 현관에
쿠데타 주동자들이 별관 현관 앞에서 차를
세우고 내리는 것을 보자 덮어놓고 그들을
쏘라고 명령했던 것이다. 육군본부
경비병들은 이 또한 제6군단 포병단
병사들로서 쿠데타군이었는데도 말이다.
그는 아직도 적과 내편을 구분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쏘라니 누굴 쏘라는 거야?"
  현관으로 들어서는 박정희는 매서운
눈초리로 송석하를 노려보았다.
  그러나 박정희는 더 이상 송석하에게
관심을 두지 않았다. 2층 계단을
올라가다가 그때 마침 내려오고 있던
하우즈와 마주쳤다. 하우즈도 박정희의
모습을 알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그는
박정희와 마주치자 노기를 띠고 힐난했다.
엎으려 하는가?"
  박정희는 영어가 짧았다. 아니
짧다기보다는 캄캄했다고 하는 편이 옳을
것 같다. 그는 사범학교 시절에 조금 배운
영어를 모조리 까먹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영어는 모르나 그는 하우즈가
뭐라고 힐난하는지를 그의 눈빛을 보고
알아차렸던 것이다.
  "너 이놈! 네놈이 뭔데 남의 나라 일에
내정간섭을 하려 드느냐?"
  박정희는 목청껏 소리쳤다. 박정희는
너무나 긴장돼 있었기 때문에 부지불식간에
목젖이 떨어져라 하고 소리쳤던 것이다.
그러자 하우즈는 뭐라 중얼중얼 알아듣지
못할 말을 중얼거리고 휘잉하니 계단을
내려가는 것이었다.
거기에는 언제부터 와 있었는지 예비역
해병 소장 김동하를 비롯해서 육군 대령
유원식(柳原植), 박창암(朴倉岩), 박치옥,
장면 체포조장이었던 육군 소령 박종규
등이 앉아 있다가 박정희를 반갑게
맞아주는 것이었다.
  "수고들 많았소."
  박정희는 허리에 차고 있던 권총을 풀어
박종규에게 주고 노크도 없이 참모총장실로
들어갔다. 이때 장도영은 혼자 생각에 잠겨
있었다. 박정희는 그의 앞으로 다가가서
부동자세를 취하고 거수경례를 했다.
  "각하, 출동 전에 미리 보고드리지
못하고 이렇게 일을 저질러 죄송합니다.
그러나 계획 당초부터 각하와 함께 일을
결행하려고 했던 것과 같이 이 순간에도
없습니다. 우리의 충성을 이해하시고
지금부터 선두에 서서 지도해 주시기
바랍니다."
  장도영은 한참 동안이나 박정희를
바라보았다. 그의 눈빛은 결코 미워하는
증오의 빛은 아니었다.
  (이 친구야, 네가 이럴 수 있어?)
  그런 눈빛이었다.
  장도영의 그 눈빛에 박정희는 안심하는
마음과 자신감이 겹쳐졌다.
  (됐다. 너는 결코 쿠데타에 반대는
아니었구나!)
  "박 장군, 나는 지금 뭐라고 해야 좋을지
모르겠소. 다만, 내가 박 장군한테 할 수
있는 말은 지금은 사태를 수습할 때라는
말밖에 못하겠소."
짝이 없었다.
  사태를 수습할 때라니 어떻게 사태를
수습하자는 말인가? 쿠데타는 이미
기정사실화돼 있는데?
  장도영이 덧붙였다.
  "박 장군도 익히 알다시피 작전지휘권은
유엔 사령관한테 있소. 그런데 매그루더
장군은 쿠데타에 대해서 한사코 반대가
아니겠소? 쿠데타는 절대로 안 된다는
거예요. 그러니......."
  장도영은 <그러니> 하고 말하고는 잠시
숨을 돌렸다. 그리고 나서 다시 이었다.
  "그러니 이번만은 민주당 정부에
충고하는 정도로 하고 병력을 철수시켜
주시오. 거사는 불문에 붙이도록 하겠소."
  참으로 별난 쿠데타도 다 있었다.
쿠데타를 진압하겠다고 마음에 다짐을 준
장도영 역시 마찬가지였다. 오십보
백보라고나 할까? 쿠데타란 폭력으로
정권을 뒤집어 엎는 것을 말한다. 그런데
지금 두 사람은 흥정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면 박정희는 어째서 장도영한테
흥정을 걸었던가? 그것은 작전지휘권을
쥐고 있는 매그루더가 두려웠기
때문이었다. 매그루더의 결심 여하에 따라
쿠데타는 성공할 수도 실패할 수도 있다는
것을 박정희는 익히 알고 있었다. 그러므로
매그루더의 관여를 배제하자면 누구보다도
가장 친근한 사이인 장도영을 끌어들여야만
쿠데타는 성공할 수 있다고 계산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면 쿠데타 진압을 결심하고 있는
장도영은 어째서 <민주당 정부에 충고>
또는 <거사 불문> 운운했던 것인가?
  쿠데타가 실패한 경우 그 자신이
박정희와 나란히 군법 재판정에 서야
한다는 것을 장도영은 너무나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그는 이
쿠데타를 <없었던 일>로 해결하고자
궁리하고 있었던 것이다. 충고나
거사불문을 운운했던 것도 그 때문이었다.
  이미 장도영의 마음을 읽고 있던
박정희는 좀 거칠게 말했다.
  "각하, 젊은 장교들이 목숨을 걸고
일으킨 혁명입니다. 그런 젊은 장교들이
이쯤에서 물러날 성싶습니까? 더구나
불문에 붙인다고 하지만 그 말을 믿을
  장도영도 언성을 높였다.
  "쿠데타는 성공할 수 없다고 하잖았소?
여러 여건으로 보아서 쿠데타는 성공할 수
없다는 것을 아는데 어찌 쿠데타를 지지할
수 있단 말이오? 그러니 박 장군, 여러 말
말고 젊은 장교들을 설득해서
원대복귀시키도록 하시오."
  장도영의 목소리가 높아지자 이번에는
박정희가 수그러지며 애원하듯이 말했다.
  "각하, 저희들의 지도자가 돼 주십시오.
저희들은 각하를 모시고 기울어져 가는 이
나라를 재건하도록 하겠습니다."
  "나는 못합니다."
  장도영은 단호하게 한마디로 잘랐다.
  박정희는 도저히 장도영을 설득할 수
없다고 단념했는지, 침통한 표정으로
  그와 엇갈리듯이 이번에는 장면의
정치고문인 도널드 워태커가 총장실로
들어왔다. 이 도널드 워태커는 1945년 9월
8일 맥아더 휘하의 제24군단이 한국에
진주할 때 CIC 요원으로 들어왔다. 이때의
그의 계급은 육군 소령이었다. 그는 하지의
미군정 시절, 미군정의 정책과는 달리 좌익
소탕을 위해서 헌신했었다.
  미군정하에서 이른바 <남조선
대한국민대표 민주의원(南朝鮮
大韓國民代表 民主議員)>이 개설된 것은
1946년 2월 14일, 이때 장면이 민주의원의
의원으로 피선되자 이때부터 워태커와
장면의 친교는 맺어졌던 것이다.
  그는 대한민국 정부수립과 함께 일단
미국으로 물러갔다가 6.25 한국전쟁 때
것은 1952년이었다. 이미 예편해 있던 그는
UNKA 직원으로 한국에 나왔던 것이다. 이때
그는 한 한국 여성을 지독히도 사랑하게
되어 끝내는 결혼까지 하게 되었다. 그가
바로 지금의 부인인 임수영(任秀英)이다.
  워태커가 임수영을 알게 된 것은 그녀가
이화여대 법과 2학년 때였다. 워태커는
무척이나 임수영을 사랑했다. 그러나
이때만 해도 국제결혼을 사안시하고 있을
때였던 만큼 그녀는 무척이나 많은 고민을
했다. 그랬으나 결국엔 너무나 뜨거운
워태커의 사랑에 넘어가고 말았던 것이다.
  워태커는 총장실로 들어서자
불문곡직하고 소리쳤다.
  "장 총장, 속히 군을 동원해서 쿠데타를
진압하도록 하시오. 대한민국 육군
이것은 부끄러운 일이오. 만일 쿠데타를
진압하지 않는다면 미국의 대한 군사원조가
중단된다는 것은 장군도 익히 알고 있을 게
아니오?"
  장도영이 워태커의 위세에 눌렸는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며 비서실장 김병삼을
향해 소리쳤다.
  "즉시 참모부장 회의를 소집하라!"
  참모부장 회의는 곧 열렸다. 그러나
참모부장 회의를 열어봐야 뭐 뾰족한
신통수도 없었다. 누구 한 사람 이 위급한
상황을 타개할 뾰족한 명안을 갖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한편, 장도영이
참모부장 회의를 열고 있는 그 시각,
상황실로 돌아온 박정희는 제1군 사령관
이한림과 통화를 하고 있었다.
도와줘야겠소. 내가 왜 혁명을
일으켰는지는 이 장군도 잘 알고 있을 게
아니오?"
  박정희의 쿠데타 요청에 이한림은 엉뚱한
말을 했다.
  "방송은 나도 들었소. 혁명위원회에
장도영은 왜 참여시켰소?"
  "거기에 대한 이유는 나중에 설명하기로
하고, 어쩌겠소 이 장군. 나를 도와주겠소,
못 도와주겠소?"
  "혁명사령부를 이곳으로 옮기시오.
그러면 도와드릴 테니!"
  "여보 이 장군, 동기생끼리 정말
이러기요?"
  이한림과 박정희는 만주군관학교
동기생이었다. 나이는 박정희가 4살이나
  "좋소. 그럼 마음대로 하시오."
  박정희는 씹어뱉듯이 소리지르고는 쾅
하고 송수화기를 내던지는 것이었다.
  이 광경을 지켜보고 있던 박치옥이
물었다.
  "왜 그러십니까?"
  "이한림, 그 새끼가 말을 들어먹어야지!
개 같은 새끼!"
  "그럼 체포해 버리죠?"
  "그게 그리 쉬워야 말이지! 하여간에
이한림은 체포해야 돼!"
  유진산(柳珍山)이 쿠데타 소식을 들은
것은 5월 16일 아침 6시, 일본의 옛 서울인
교토(京都)의 요시다(吉田)라는
산장호텔에서였다. 그가 교토로 온 것은
하루 전이었다.
16일 아침 하꼬네(箱根)로 떠나기 위해
짐을 챙기고 있는데 호텔 여종업원이
올라와 서울에서 국제전화가 걸려왔으니
받으라는 것이었다. 비서가 뛰어내려가
전화를 받고 올라왔다.
  "쿠데타가 일어났다고 합니다."
  "뭐 쿠데타?"
  순간 유진산은 아찔한 현기증을 느꼈다.
  "하꼬네행은 취소야. 동경으로
돌아가세."
  그는 서둘러 짐을 챙겨가지고 정거장으로
향했다.
  교토 역으로 나오자 유진산을 알아본
많은 일본 기자들이 그를 둘러쌌다.
  "한국에서 쿠데타가 일어났다는데 선생의
소감 한 말씀만."
불러올 정도로 문란했다고 보십니까?"
  "선생은 앞으로 거취를 어떻게 하실
생각이십니까?"
  기자들은 그들의 궁금증을 풀려고
한꺼번에 질문을 퍼부어댔으나 유진산은
그들의 질문에 대해서 한마디도 대꾸를
하지 못했다. 본국에서 벌어진 쿠데타에
대해서 알고 있는 것이 하나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가 도쿄 역에 내리자 이번에도 또 신문
기자들이 몰려들어 그를 에워쌌다. 교토
역에서와 똑같은 질문이 되풀이됐지만 역시
그는 침묵으로 일관하고 말았다. 비통한
마음뿐, 할 말이 없었던 것이다.
  도쿄 역에서 주일대표부(駐日代表部)로
직행을 했다. 모두가 넋 나간 사람들처럼
역시 정확한 정보를 입수해 놓고 있지를
못했으니 그럴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도대체 쿠데타를 일으킨 자는 누구야?
앞으로 뭘 어떻게 하겠다는 것일까?)
  유진산을 속이 탔다.

  다음에서 벌어지고 있는 상황들은 아침
7시에서 7시 30분 사이에 벌어진
상황들이었다. 각기 5분에서 30분까지의
차이를 두고 다음의 상황들은 벌어졌었다.
이 상황들은 물론 1군 휘하부대인
군단사령부, 또는 사단사령부 등에서
벌어졌던 상황들이다.
  제1군 사령관 관저에서 긴급 소집되었던
제1군 휘하의 각급 지휘관들은 회의가
끝나자 서둘러 소속부대로 돌아갔다. 1군
1초라도 빨리 소속부대로 돌아갈 수 있도록
해주기 위해 경비행기와 헬리콥터를
총동원해서 돌아가도록 조치해 주었다.
그것만으로도 이한림이 쿠데타에 분명하게
대응하려 했다는 것을 알 수가 있을
것이다.

  서울 육군본부 상황실에서 박정희가
이한림에게 전화를 걸어왔을 때 군단장
최석은 그 자리에 있었다. 이때 이한림은
지휘관 회의를 주재하고 있었다.


  아침 8시.
  장도영이 육군본부 참모들을 거느리고
족의 앞날을 생각하면 가슴이
쑤셨다.
그들의 뒤를 따라 미 군사고문 단장인
하우즈도 따라 들어왔다.
  장도영은 박정희에게 제의했다.
  "박 장군, 우리 육군본부 일반 참모들과
혁명군측과의 합동회의를 열어 문제를
해결하도록 합시다."
  "좋습니다."
  박정희는 즉각 응낙했다. 회의는 곧
열렸다. 이 또한 세계 쿠데타 사상
보기드문 진풍경이었다. 아니 희극이라는
표현이 옳을지도 모른다. 쿠데타를 일으킨
자들과 그것을 반대하는 자들이 마주앉아
연 회의. 여기서 어떤 결론을 도출해낼 수
있다는 것일까?
  이 자리에 참석한 쿠데타군의 면면은
다음과 같았다.
장경순, 김윤근, 유양수, 한웅진, 문중섭,
윤태일, 송찬호 등이었다.
  대령으로는 오치성, 박치옥, 문재준,
유승원, 박창암, 이종태, 전두열, 김창파,
이원엽, 서봉희, 유원식, 방원철, 최재명,
한국찬, 이병엽, 김재춘, 정세웅, 홍종철
등이다.
  중령급으로는 옥창호, 길재호, 신윤창,
이석제, 김종필(예비역), 김형욱, 조남철,
오정근, 구자춘, 박배근, 백태하, 윤필용,
김인화, 이형주, 정오경, 이지찬, 장수영,
김성룡, 강상욱, 김동환, 김제인, 정문순,
정치갑, 김재후, 박순권, 최홍순, 김원희,
이창희 등이었다.
  그런데 여기 이름을 든 장성급이나
대령급, 또는 중령급 인물들 중에는
있었다. 그러니까 이들 인물들은 하루
아침에 쿠데타군으로 급조된 인물들이었던
것이다.
  장도영이 거느린 일반 참모들은 열
손가락으로 꼽을 정도였는데 반해
쿠데타군측을 50여 명이나 되었다. 더구나
그들은 살기등등한 형편이었고 하여간에
양측이 마주앉은 가운데 회의는 열렸다.
  장도영이 먼저 입을 열었다.
  "오늘의 사태는 사전에 알지 못했소.
그러나 여러분이 나라 사랑하는 마음에서
궐기했다는 것은 충분히 이해하오. 혁명을
일으켰다는 그것만으로 여러분의 뜻은
충분히 표시되었다고 보오. 그러니
여러분의 행동은 이 정도에서 그치는 것이
좋겠소."
  "뭐가 어쩌구 어째?"
  쿠데타군 쪽에서 분노의 목소리가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장도영은 그들의 분노를 말살하고 말을
이었다.
  "그러니 이것으로 민주당 정부에
충고하는 것으로 하고 모두 철수해
주십시오. 이 사태는 내가 꼭 책임지고
불문에 붙이도록 하겠소."
  "뭐요? 뭐가 어째?"
  "우리를 어린애로 아는 거요? 우리가
부대를 철수했을 때 민주당 정부가 이
사실을 불문에 붙이리라 생각하십니까?"
  "총장! 우리가 이 회의에 참석한 것은
유혈사태를 원치 않기 때문이라는 것을
모르시오?"
  "우리는 물러설 곳이 없어요! 총장이
없단 말입니다."
  여기저기에서 고함소리가 한꺼번에 터져
나왔다. 별자리들은 역시 장군이라는 체면
때문이었는지 위신을 지키고 있었고,
고함소리는 주로 대령과 중령들 사이에서
터져 나왔다.
  박정희 역시 침묵을 지키고 있었다. 그는
지금 심각한 고뇌에 빠져 있었던 것이다.
장도영의 권고를 받아들이느냐 아니면 그냥
밀고 나가야 하느냐 해서.
  장도영으로 볼 때에는 대령, 중령은
새까만 하급장교에 불과했다. 그러한 대령,
중령 등이 아우성을 치자 장도영은 적지
않게 자존심이 상했던 것 같다. 그는
한동안이나 그들을 무섭게 노려보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생각하오. 치안유지에 만전도 기해야겠고
그러기 위해서는 윤 대통령이나 기타
정치인들하고 타협할 시간적 여유를
주시오."
  그러자 벌떡 일어서서 권총으로 탁상을
쾅 내리치며 고함을 지르는 자가 있었다.
  제6군단 포병단 대대장 백태하였다.
  "우리는 지금 혁명을 하고 있어. 말을
듣지 않으면 쏴 버릴 테야. 지금에 와서
누구와 타협한단 말인가?"
  백태하의 고함소리가 끝나기도 전에
쿠데타군측 테이블 뒤에 서 있던 소령
대위급 무리 쪽에서 찰칵찰칵 하고 권총의
안전장치를 푸는 소리가 들려왔다. 자칫
잘못했다가는 이 상황실에서 유혈사태가
벌어질 판국이었다.
번쩍 들더니 손으로 그들을 제지했다.
그리고는 무겁게 입을 열었다.
  "각하, 각하께서는 치안유지를
걱정하시는데 치안유지를 위해서는 계엄
선포가 필요합니다. 총장께서 동의해
주시기 바랍니다."
  "그 문제는 내가 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지 않소? 합법적인 수속을 하자면
대통령과 협의해서 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박 장군은 모르시오?"
  장도영은 계엄령 선포도 자기 권한이
아니라고 일축해 버렸다. 영관급들이 또
거칠어지기 시작했다.
  "시간을 끌려는 지연작전이다!"
  "쏴 죽여 버려!"
  장성 중에 벌떡 일어서며 소리를 치는
  "조용들 하시오!"
  장경순이었다. 거구의 장경순이
조용하라고 일갈하자 잠시 조용해졌다.
  좌중을 침묵시키고 난 그는 호통치듯이
말했다.
  "혁명은 혁명이오, 혁명을 했는데
대통령이니 정치인이니 무슨 소용이란
말이오? 그대로 밀고 나가는 길밖에
없어요."
  장도영은 도저히 이 자리에서는 그 어떤
결론도 내릴 수 없다는 판단을 내렸다.
  "박 장군, 나하고 단 둘이 얘기 좀
합시다."
  그래서 곁에 앉아 있는 박정희에게
말하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박정희도 다라
일어섰다. 두 사람은 상황실 밖으로
  그러자 문재준이 벌떡 일어서며
소리쳤다.
  "야아! 총장이 박 장군을 납치해 간다!"
  그는 이어서 명령했다.
  "빨리 육본을 엄중 포위하라!"
  포병단장의 명령에 대대장들인 신윤창,
구자춘이 급히 밖으로 뛰쳐나갔다. 그들의
손에는 어느 사이엔가 권총이 쥐어져
있었다.
  두 사람이 밖으로 뛰쳐나간 뒤 백태하는
더는 참기 어려웠던 모양이었다. 들고 있던
권총을 천장을 향해 <탕! 탕! 탕!> 세 발을
쏘며 외쳐댔다.
  "말을 듣지 않는 총장은 내가 쏴 죽여
버리고 말겠어."
  백태하는 밖으로 뛰쳐나가려 했다.
사람이 허리를 껴안는 등 간신히
진정시켰다.
  밖으로 뛰쳐나온 신윤창, 구자춘은
어찌했던가? 그들은 급히 육군본부를
경비하고 있는 제6군단 포병단 병사들을
불러 모았다.
  "사격준비!"
  명령 일하에 1개 중대 가량의 병사들이
사격준비를 갖추었다.
  "하늘로 쏴!"
  백여 명이 넘는 쿠데타군의 소총에서
뿜어내는 화약 터지는 소리가 육군본부의
연병장을 때렸다.
  "쏴!"
  "쏴!"
  명령은 계속 떨어졌다. 쏘라는 명령이
쏘아댔다.
  연발로 계속해서 쏘아대는 총소리에 용산
구민들은 기어이 유혈의 참극을 빚어내고야
말았구나 하며 가슴을 졸였었다.
  나중에 밝혀진 일이지만 이날 이들이
허비한 탄환이 무려 1만 발이나 되었다.
국민의 혈세로 마련한 총알을 이런 식으로
허비해도 된단 말인가?
  상황실 밀실에서 박정희와 얘기를 나누고
있던 장도영도 연병장에서 쏘아대는
총소리를 들었다. 그는 총소리가 자신을
겁주기 위해서 쏘아대는 총소리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때 부관이 들어와 이한림에게 서울
육군본부에서 전화가 걸려왔다고 전갈했다.
이한림이 전화를 받기 위해 안으로 들어갈
때 최석도 뒤따라 들어갔다. 전화로
주고받는 말을 통해서 최석은 전화를 건
사람이 박정희라는 것을 직감했다.
  그래서 이한림이 전화를 끊고 나자, 한
번 더 강조했다.
  "당장 출동해야 합니다. 서울 외곽의
통로만 차단하면 쿠데타는 아주 가볍게
진압해 버릴 수가 있습니다."
  최석은 쿠데타는 물론이고 박정희에
대해서 상당히 거부감을 느끼고 있었다.
그래서 이토록 집요하게 <즉시 출동>을
건의했는지도 모른다.
  최석은 군단사령부로 돌아오자 예하
양찬우(楊燦宇), 김희준(金熙俊)과 그리고
참모장 육군 준장 이준성(李準晟)을 불러
서울 사태를 전해 주었다.
  "군대의 반란은 절대로 용서할 수 없는
일이오."
  그는 덧붙여 명령했다.
  "나는 이 반란은 당연히 진압돼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소. 그러므로 참모장은 즉시
출동태세를 갖추도록 명하고 기갑부대는
군단사령부를 경비하라 하시오."
  쿠데타가 하나의 반란행위임은 틀림이
없다. 그러나 쿠데타와 반란행위는 전혀 그
성격이 다르다. 최석은 박정희의 쿠데타를
반란행위로 규정했다. 쿠데타라는 낱말
대신에 반란이란 낱말을 쓴 지휘관은 오직
최석 한 사람뿐이었다.
막상 군단사령부로 돌아왔으나 심정이
착잡하기 이를 데 없었다. 쿠데타라는
사실이 도무지 현실 같지가 않았다. 그는
군단장실에서 서울의 상황을 알아보려고
육군본부에 전화를 걸려고 했으나 전화선은
이미 끊어져 있었다. 그는 하는 수 없이 미
군사고문단실로 가서 고문단실 전화를
이용하여 연합참모본부에 전화를 걸었다.
  본부장 육군 소장 김점곤(金点坤)하고는
곧 연결이 되었다.
  "임부택이올시다. 서울에서 쿠데타가
일어났다는데 도대체 서울의 상황이 어찌
돼 있습니까?"
  "글쎄요. 쿠데타가 일어난 것만은
틀림없는 사실인데 나도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전혀 알 수가 없습니다."
  임부택은 이번에는 연합참모본부 총장
육군 소장 김종오(金鐘五)에게 전화를
걸었다.
  "이한림 사령관으로부터 서울 외곽으로
출동할 수 있는 준비를 갖추어 놓고
있으라는 명령을 받았습니다만, 서울의
상황을 모르니 도무지 어떻게 해야 좋을지
모르겠습니다. 내가 어떻게 했으면
좋겠는지 김 장군의 의견을 들었으면
합니다."
  "글쎄올시다. 나도 뭐라 하기가
어렵군요. 당신이 알아서 하는 게 좋을 것
같소."
  이런 반응으로 보아 김점곤이나 김종오나
사태파악을 제대로 못하고 있었던 것만은
틀림없었던 것 같다.
  그는 짜증이 일었다. 안타깝기만 했다.
생각 끝에 참모회의를 소집했다. 그는
서울의 소식과 사령관 이한림으로부터
수령한 명령 내용을 밝혔다.
  "어떻게 했으면 좋겠소?"
  참모들의 의견을 물어보았다.
  이 질문에 대해서 참모들은 모두가
<지휘관의 명령에 따르겠다>는
대답뿐이었다.
  여기에서 임부택은 자신의 판단에 따라
행동방침을 결정할 수밖에 없다고
작심했다. 그래서 육군 준장
김병길(金炳吉)을 불렀다.
  "김 장군, 수고스럽겠지만 서울엘 좀
다녀와 주시오."
  김병길을 서울로 밀파하고 난 임부택은
연합참모본부에 전화를 걸어서 정보제공을
부탁했다.
  "여기는 일선지구라 서울의 상황이
캄캄하기만 하니 쿠데타군에 대한 상세한
정보를 알았으면 하오."
  이 부탁을 받은 연합참모본부에서는
정보가 입수되는 대로 곧 알려주겠다는
대꾸였다.

  제1군 휘하의 예비사단 사단장은 육군
준장 박영준(朴英俊)이었다. 그는
독립운동사상으로 너무나 유명한
남파(南坡) 박찬익(朴贊翊)의 아들이었다.
바로 이 예비사단이 폭동 또는 쿠데타 같은
위급한 사태가 벌어질 경우에 대처하기
위해 마련된 사단이었다.
이한림이 제공해 준 헬리콥터로 돌아왔다.
그도 출동준비를 갖추고 대기하라는 명령을
수행하고 있었다. 그도 사단본부로
돌아오자 즉시 참모회의부터 소집했다.
그런 다음 그도 역시 임부택이나
마찬가지로 서울의 쿠데타 소식을 전해
주고 어떻게 했으면 좋겠느냐고 물었다.
  사단장의 그 질문에 대해서 참모들은
서로 눈치만 살피고 있을 뿐 성큼 의견을
개진하는 자가 없었다.
  "쿠데타를 지지하는 것이 옳을 것
같습니다."
  한참만에 포병단장 육군 대령
황종갑(黃鐘甲)이 의견을 말했다.
  황종갑이 침묵을 깨고 쿠데타 지지발언을
하자, 이번에는 작전참모 육군 중령
역설하고 나섰다. 그랬으나 여타의
참모들은 여전히 침묵으로만 일관할
뿐이었다.
  (쿠데타를 지지하는 사람은 겨우 두
사람밖에 안 되는 게 아닌가? 이 두 참모의
의견만 듣고 쿠데타를 지지하고 나설 수는
없다.)
  박영준은 마음을 작정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그는 사령관
이한림의 다음 명령을 기다리기로 했던
것이다.
  한데, 이한림이 휘하부대에 출동준비
태세를 갖추라는 명령을 내린 사실이
누군가를 통해서 서울 육군본부의 쿠데타
지휘본부인 상황실로 급보되었다.
  당초 이한림은 새벽에 관사에서 각급
중에 쿠데타에 가담해 있는 장성이
있으리라는 것은 전혀 예상치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군단장 박임항(朴林恒)이
바로 쿠데타에 가담해 있던 장성이었다.
뿐만 아니라, 이미 5월 15일인 전날 밤부터
1군 내의 중령급들이 움직이고 있었던
것이다. 조창대(曺昌大), 엄병길(嚴秉吉),
이종근(李鐘根) 등이 바로 그들이었다.
  이들에게 주어진 과업은 <5월 16일 새벽
5시, 거사했다는 방송이 나오면 즉시
사령관 이한림에게로 달려가 쿠데타 지지를
설득한다. 만일 이한림이 쿠데타 지지를
거부하면 체포한다>는 것이었다.
  이러한 과업을 지니고 대기상태에 있었던
것이다.
  그렇듯 1군 내에 이미 쿠데타의 조직이
있었던 것이다.
  서울의 박정희는 가만히 앉아서도
이한림의 일거수 일투족을 손바닥을
들여다보듯이 알고 있었을 것이라는 것은
새삼 되뇌일 필요도 없을 줄로 안다.
  그보다도 이한림은 큰 실수를
저질렀었다. 그 실수란 다름이 아니었다.
새벽 4시에 참모차장 장창국의 전화를 받은
이한림이 그 즉시로 박임항이 묵고 있는
숙소로 전화를 걸었던 사실이다.
  "박 장군, 서울에서 박정희 등이 반란을
일으켰다고 합니다. 빨리 부대로 돌아가
예하부대를 장악해 주시오."
  그를 군단사령부로 돌려보냈던 것이다.
  우리에 갇혀 있는 호랑이를 산으로
돌려보내면 어떤 결과가 되겠는가? 그를
군단사령부로 돌려 보내다니.
  물론 이한림으로서야 박임항이 쿠데타
세력에 가담해 있으리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러한 조치를
취했을 것임은 의심의 여지가 없는 일이다.
  (하늘이 나를 살렸다.)
  이한림의 전화를 받은 박임항은 도망치듯
군단사령부로 돌아갔던 것이다. 이래서
박임항만은 이날 아침 사령관 관사에 긴급
소집된 각급 지휘관 회의에 참석치 않았던
것이다.


  아침 8시.
  이 시간에 이르기까지 밀실에서 마주
얻어내지 못하고 있었다.
  <계엄령부터 선포해 놓고 보자.>
  박정희는 한사코 강권했으나 장도영은
그것은 내 권한이 아니다. 대통령과 협의를
해서 결정할 문제다라고 앵무새 외듯 하며
논전을 거듭하고 있었다. 참으로 우습기
짝이 없는 논전이었다.
  생각해 보라. 장도영은 이미 쿠데타를
진압하기로 굳게 마음에 다짐해 놓고 있지
않았는가 말이다. 그랬으면 <나는 쿠데타
그 자첼르 찬성할 수가 없다.
원대복귀하라> 하고 처음부터 주장을
고수했어야 옳았다. 그것을 장도영은
박정희가 계엄령부터 선포해 놓고 보잔다고
해서, <그건 내 권한이 아니다. 대통려과
협의해서 결정할 문제다> 하고 계엄령
태도부터가 벌써 장도영의 모순이 아닐 수
없다.
  그러면 대통령이 계엄령을 선포해도
좋다고 한다면 거기에 동조하겠다 그건가?
그렇다면 장도영은 쿠데타를 지지하기로
마음을 바꾼다는 얘기가 되는 게 아닌가.
  장도영과의 담판에서 박정희는 손을 들지
않을 수가 없었다. 장도영의 생각을
바꿔놓기 어렵다고 판단되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한 발 뒤로 물러섰다.
  "좋습니다. 그러면 대통령을 만나서
문제를 해결하도록 합시아."
  박정희는 상황실로 들어갔다.
  쿠데타 지휘본부인 상황실로 들어오자
박정희는 급히 김종필을 불렀다.
  "계엄문제에 대해서 장 장군이 도무지
언제까지나 합법적으로 계엄령을 선포할
때까지 기다리고 있을 수도 없는 일이구
허니, 임자가 방송국으로 가서 계엄령을
선포했다고 방송을 해버리게."
  "알겠습니다. 일단 선포를 해놓고 나중에
대통령의 추인을 받아도 될 줄로 압니다."
  김종필은 그렇게 말하고
최영택(崔英澤)과 함께 부리나케 바깥으로
나갔다.
  해군 참모총장 중장 이성호(李成浩),
공군 참모총장 중장 김신(金信), 해병대
사령관 중장 이성은(李聖恩) 이 세 사람이
육군 참모총장실로 들어선 것이 바로
김종필과 최영택이 상황실을 막 나설
무렵이었다. 그들 세 사람이 이 시간에
함께 육군본부로 찾아온 것은 쿠데타의
  해.공군 참모총장과 해병대 사령관이
육군 참모총장실에 나타났다는 보고를
받았는지 박정희가 몇 사람의 쿠데타
주체자들을 거느리고 다시 총장실로
들어섰다. 세 사람을 맞자 육군
참모총장실에서는 국군 수뇌회의가 열렸다.
먼저 박정희를 비롯한 쿠데타 주체자들이
왜 쿠데타를 단행했는가 하는 데 대한
명분론을 그럴싸하게 설명했다. 그 설명이
끝나자 박정희는,
  "해군, 공군, 해병대 모두가 우리
육군하고 보조를 같이 해서 혁명을 지지해
주면 고맙겠소."
  쿠데타를 지지해 줄 것을 호소했다.
  박정희는 <우리 육군하고 보조를 같이
해서> 운운했지만 이 시간에 이르기까지
쿠데타를 지지하고 나선 육군 부대는 단
하나도 없었다.
  세 사람은 대꾸가 없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이들 세 사람은 박정희가 내세운
<쿠데타 명분론>을 귀담아 듣기는 했지만,
그것이 정당한 명분론이라고 동의하고 있지
않았기 때문에 입을 다물고 있었던 것이다.
  이날 아침 국군 수뇌회의에서는 어떤
문제가 논의되었는지에 대해서는 자세히
알려져 있지 않다. 미루어 짐작컨데
쿠데타군측에서 집요하게 <혁명을 지지해
달라>고 간청을 하자 끝까지 침묵만을
지키고 있을 수 없게 된 세 사람이,
<육군에서 지지하면 우리도
지지하겠다>고만 했고, 이 한 문제만을
가지고 실랑이를 벌이다가 산회한 것이
  "혁명을 지지해 주십시오!"
  "육군에서 지지하면 우리도 지지하겠소."
  "그러지 말고 지금 지지성명을
내주십시오."
  "글쎄, 육군에서 지지성명을 내면 우리도
내겠단 말이오."
  이렇게 다람쥐 쳇바퀴 도는 문답만을
되풀이했을 가능성이 크다.

  아침 8시 30분.
  이성호, 김신, 그리고 김성은 세 사람이
돌아가려고 육군 참모총장실을 나섰을
때였다. 쿠데타 주체자로 보이는 자들이
우르르 몰려들어 세 사람의 앞을
가로막았다.
  "혁명 지지성명을 내주시오."
입수했는지 세 사람의 코 앞에 마이크를
들이대며 쿠데타 지지성명을 내달라고 아주
위압적으로 요구했다.
  김신이 조용히 타이르듯 말했다.
  "아직 육군도 지지성명을 내지 않지
않았소? 육군이 지지하면 우리들도
지지하기로 했으니 그리 아시오."
  "안 됩니다. 지금 당장 지지성명을
내주십시오."
  마이크를 들이댄 자는 지지성명을 내지
않으면 결코 이 자리에서 살아 돌아가지
못할 것이라는 몸가짐을 했다.
  세 사람은 너무나 기가 막히다 못해
어이가 없는 모양이었다.
  (원 이런 무례한 놈들을 봤나? 아무리
쿠데타를 일으켰다고 해서 이다지도 무례할
  세 사람은 치미는 울화를 입 밖으로
내지는 않았지만 무례한 놈들이라는
표정으로 둘러싼 무리들을 노려보았다.
  하긴, 쿠데타를 일으키는 그 순간에 이미
위계질서는 무너져 버리고 말았었다. 그
따위 위계질서에 매여 있어 가지고는
쿠데타는 엄두도 내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목숨을 내건 쿠데타 주체자들로서는
위계질서를 무시해 버릴 수밖에 없는
노릇이렀을지 모르지만 당하는
사람으로서는 적잖이 가슴이 아플 수밖에
없는 일이었을 것이다.
  "자, 어서 혁명을 지지한다고 한 말씀만
해주십시오."
  마이크를 들이댄 자의 눈에는 핏발이 서
있었다. 핏발만 서 있었던 것이 아니었다.
  세 사람 중 해병대 사령관 김성은은 정
참기가 어려웠던 모양이었다.
  "야아 이놈들아, 나도 불알을 달고 있는
사내자식이야! 육군이 지지한다면 우리도
지지한다는데 무슨 잔말이 그리도 많아?"
  복도 유리창이 쩌렁 울릴 정도의 큰
목소리로 호통을 쳤다.
  별을 세 개나 단 장성의 호통이었다. 그
호통에 마이크를 들이댄 자는 조금
찔끔해지는 눈치 같았다. 그러나 그것도
한순간만의 얘기고 그 자는 계속했다.
  "안 됩니다. 지금 이 자리에서 말씀해
주고 나가십시오."
  더욱 집요하게 달라붙는 것이었다.
  정훈감실 차감인 육군 대령
원충연(元忠淵)이 놀란 표정을 하고
호통치는 소리를 들은 모양이었다.
  "왜들 이러십니까? 자, 어서 가시지요."
  원충연은 세 사람을 감싸듯이 하고
둘러서 있는 무리들을 헤치며 나가려 했다.
  그대였다. 어느 한 장교가 달려나와
원충연의 귀에 대고 속삭이는 것이었다.
  "대령님은 계단까지 가시지 마십시오."
  "왜?"
  "계단 아래에는 기관총이 배치되어
있습니다. 저 세 사람이 계단을 내려갈 때
양쪽에서 집중사격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뭐야?"
  그 말을 들은 원충연은 하마터면 기절을
해버릴 뻔했다. 상상조차 하기 어려운
일이었기 때문이었다.
  "좀더 말씀을 나누다 가십시오!"
있다는 말을 할 수는 없었다. 그래서 좀더
말씀이나 나누다 가라고 했다. 그러한
원충연의 행동이 도리어 세 사람의 의심을
품게 해준 모양이었다.
  "아니 지금 당장 돌아가야 한다."
  그러면서 그들은 한사코 계단 쪽으로
걸어가는 것이었다.
  원충연은 도무지 제정신이 아니었다.
  "누구 좀 나와서 도와줘!"
  그가 소리쳤다.
  이 비명에 가까운 소리를 듣고 뛰쳐나온
사람이 바로 원충연의 동생인 육군 대령
원갑연(元甲淵)이었다.
  "이 세 분을 어서 총장실로 모셔."
  원충연은 동생을 보자 다시 한번
소리쳤다.
가로막아 섰다. 그리고는 몰이를 하듯이 세
사람을 총장실 쪽으로 몰고 갔다.
  세 사람은 점잖은 체면에 항거도 못하고
끝내는 밀려서 다시 총장실로 들어갔다.
다시 총장실로 밀려 들어선 세 사람은 마치
연금을 당한 상태가 되어 한동안이나
시간을 까먹고 있어야만 했다.
  그들 세 사람이 연금상태와 같은
상황에서 벗어날 수 있었던 것은 장도영과
박정희 등이 청와대를 방문하기 위해
총장실을 나설 때 동행하면서였다.
  그들 세 사람은 원충연 덕분에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다는 사실을 알고나 있는지?
  그러면 계단 밑에 기관총을 설치해 놓고,
<세 사람이 계단을 내려올 때 갈겨
버려라!> 하고 명령을 내렸던 자는 과연


  아침 9시.
  KBS의 라디오에서는 9시를 알리는 시보가
울리더니 곧 행진곡이 잠시 흘렀다.
그러다가 행진곡이 뚝 멎으며 귀에 익은
아나운서 강찬선(康贊宣)의 목소리가
전파를 타고 흘렀다.

  친애하는 국민 여러분,
  군사혁명위원회는 오늘 오전 9시를
기하여 전국에 비상계엄령을 선포했습니다.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군사혁명위원회령 제1호 비상계엄령
선포.
안녕질서를 유지하기 위하여 단기 4294년
5월 16일 9시 현재로 대한민국 전역에
긍하여 비상계엄을 선포한다.
  4294년 5월 16일 군사혁명위원회 의장
육군 중장 장도영, 부의장 육군 소장
박정열

  아마도 박정희의 한자 이름을 김종필이
흘려썼던 모양이었다. 강찬선은 박정희라로
읽어야 할 것을 박정열이라고 오독을 했다.
스튜디오 안에 들어간 강찬선이 주어진
원고를 정확하게 읽는지 감시하고 있던
최영택이 황급히 강찬선의 귀에 대고
속삭였다.
  "박정희, 희, 희."
  강찬선은 원고를 다시 한번 살펴보았다.
정정했다.
  "실례했습니다. 부의장 육군 소장
박정희였습니다."
  계엄령 선포를 알리고 난 강찬선은
이어서 <군사혁명위원회 포고 제1호>에
대한 원고를 읽어 내려갔다.

  군사혁명위원회 포고 제1호.
  군사혁명위원회는 위원회령 제1호로서
대한민국 전역에 긍하여 단기 4294년 5월
16일 오전 9시를 기하여 비상계엄을 선포
실시하였음.
  본관은 계엄법에 정하는 바에 따라
국내질서의 유지와 치안확보상 필요한 한도
내에서 엄정하게 이를 운영할 것임. 국민
제위는 군을 신뢰하고 국가재건을 위한
다음 사항을 포고함.
  1. 일체의 옥내.옥외 집회를 금한다(단,
종교단체는 제외한다)
  2. 수하를 막론하고 국외 여행을 금한다.
  3. 언론, 출판, 보도 등은 사전검열을
받는다. 이에 대해서는 치안확보상
유해로운 시사해설, 만화, 사설, 논설,
사진 등으로 본 혁명에 관련하여 선동,
왜곡, 과장 비판하는 내용을 공개하여서는
안 된다. 본 혁명에 관련된 일체 기사를
사전에 검열을 받아야 하며 외국통신의
전재도 이에 준한다.
  4. 일체의 보복행위를 불허한다.
  5. 수하를 막론하고 직장을 무단히
포기하거나 파괴, 태업을 금한다.
  6. 유언비어의 날조 유포를 금한다.
다음날 아침 5시까지.
  이상의 위반자 및 위법행위자는 법원의
영장 없이 체포, 구금하고 극형에 처한다.

  참으로 무시무시한 제1호 포고령이었다.
이 포고령을 낭독하는 강찬선도 소름이
끼치는 모양이었다. 읽고 난 그의 안색이
마냥 창백하기만 했다.
  그럴 것이었다. 위의 사항을 위반했을
때에는 극형에 처한단다. 뉘라서 제1호
포고령 방송을 듣고 소름이 끼치지
않았겠는가.
  서울의 경우, 아마도 라디오를 갖고 있던
가정치고 이 방송을 듣지 않은 가정은 단
하나도 없었을 것이라고 믿어진다. 이미
서울 장안은 이때쯤에는 이원엽이
등 말할 수 없이 어수선해져 있었고
방송에서는 새벽 5시 혁명공약을 방송한
뒤로 그것을 되풀이해서 방송을 해주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제1군 사령관 육군 중장 이한림은 휘하에
5개 군단을 거느리고 있었다. 제1군단장
육군 중장 임부택, 제2군단장 육군 중장
민기식, 제3군단장 육군 중장 최석,
제5군단장 육군 중장 박임항, 제6군단장
육군 소장 김응수.
  사나이 마흔 살에 장군으로서 호령할 수
있는 군단을 5개 군단씩이나 거느리고
있다는 것은 대단한 긍지요, 자랑이라 할
수 있었다. 하기야 정일권(丁一權) 같은
사람은 나이 서른세 살에 육.해.공군
있었지만 그것은 건국이 일천한 데다가
김일성 괴뢰도당의 불법남침으로 말미암은
과도기 때의 얘기니까 비교할 것도 못
되겠지만.
  아침 9시.
  제1군 사령관 이한림은 휘하의 군단에
대해서 총점검을 해보았다. 어느 부대고
모두 완벽하게 출동태세를 갖추고 있는 것
같았다. 적어도 그는 그렇게 판단했다.
이때까지도 그는 아직 제5군단장 박임항이
쿠데타에 가담해 있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어쨌거나 출동태세를 총점검해 본
이상에는 그는 출동명령을 내리면
그뿐이었다. 야전군이란 물론 북괴의
도발에 대응하는 것이 주어진 임무요
이상에는 북괴군과 꼭같이 간주해서 대처할
의무가 있었다.
  그런데 그는 흔들리고 있었던 것이다.
박정희의 전화를 받았다고 해서 흔들리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출동명령을 내릴 경우, 적지 않게 피를
흘리게 될 텐데 그렇게 동족간에 피를
흘리게 해도 되는 건가?)
  그래서 흔들리고 있었던 것이다.
  물론 장면이나 윤보선이, <즉시 출동해서
반란군을 진압하라!> 하는 명령이 있었다면
싫든 좋든 그 명령에 따랐을 것이다.
그런데 아침 9시. 이 시간에 이르기가지
장면이나 윤보선한테서 출동하라는 명령이
없는 것이다.
  이 명령이 없는 것이 그에게 출동명령을
  <통수권자의 명령 없이 어떻게 출동을
명령할 수 있단 말인가?> 속된 말로 충분히
말이 되는 구실이었다.
  만일 제1군 휘하의 어느 군단에서
출동명령을 내렸다가 그 군단의 작전지역에
구멍이 뚫렸다고 판단한 북한 괴뢰군이
6.25 때처럼 불시에 또 공격해 오지
않는다고는 누구도 장담할 수 없는
일이었다.
  <동족간에 피 흘릴 수 있는가?> 흔들리고
있던 이한림으로서는 통수권자의
출동명령이 없는 것이 천만다행이었는지도
모른다.
  이미 앞에서 언급한 바 있지만 제2공화국
때에는 <통수권>이 대통령과 국무총리 어느
쪽에 귀속돼 있는지 명확하지가 않았다. 그
자기에게 있다고 해서 입씨름을 벌이기조차
했었지만, 이한림으로서는 대통령이든
국무총리든 어느 한쪽에서라도 출동명령을
내렸다면 그는 서슴지 않고 그 명령에
따랐을 것이다.
  거듭 강조하거니와 동족간에 피를 흘릴
수는 없지 않느냐 해서 망설이고 있었던
이한림은, 대통령이나 국무총리의
출동명령이 없는 것을 기화로 해서
휘하부대에게 진압출동을 명령할 것을
보류해 놓고 있었던 것이다.


  아침 9시 10분.
  청와대 비서실장 이재항이 2층에 있는
이때의 시간이 9시 40분이었던 것으로
기록돼 있기도 하다.
  "각하, 현석호 국방장관하고 삼군
참모총장, 해병대 사령관 그 밖에 쿠데타에
관련돼 있는 듯한 사람들이 각하를
뵙겠다고 찾아왔습니다."
  이재항의 전갈에 윤보선은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지금 뭐라고 했나? 현석호 국방장관이
삼군 참모총장들하고 같이 들어왔다구?"
  "네, 각하."
  "현석호 장관이 삼군 참모총장들하고
같이 들어왔다?"
  윤보선은 이 사실을 어떻게 해석해야
좋을지 도무지 감을 잡을 수가 없었다.
어째서 감을 잡기가 어려웠느냐 하면
청와대에 전화를 걸었을 때 장도영이
뭐라고 했던가? <지금 반란이 일어나
진압작전을 펴고 있다>고 하지 않았던가?
그랬던 그가 불과 한 시간 뒤에는 그
자신의 이름으로 <혁명공약>인가 하는 것을
방송하고 있었다.
  그런 장도영의 둔갑을 보고 윤보선은
현석호 역시 쿠데타군 쪽으로 둔갑을 한 게
아닐까 하는 의심이 일었기 때문이었다.
  사실은 이때 현석호가 삼군 참모총장들과
같이 청와대에 들어오게 됐던 것은,
장도영이 육군본부에서 청와대로 들어오는
도중에 서울 시청에 들러 현석호와 같이
들어왔던 것이다.
  반도호텔에서 506방첩대로 향하다
무장군인들한테 체포당했던 현석호는 시청
시장실로 연행되어 연금당해 있었던
것이다.
  윤보선은 이재항을 앞세우고 접견실로
내려왔다. 그는 접견실로 들어서면서
부지불식간에 중얼거렸다.
  "올 것이 왔구먼."
  올 것이 왔다니 뭐가 왔단 말인가?
  그가 이때 부지불식간에 중얼거렸던 이
한마디는 뒷날 두고두고 말썽을
불러일으키게 되는 불씨가 된다.
  접견실로 들어온 그는 의자에 앉으며 빙
둘러서 있는 면면들을 한 사람씩 유심히
살펴보았다. 장도영 옆에는 작달막한 키의
박정희가 서 있었으나 윤보선은 그가
누군지 처음에는 알아보지를 못했다. 처음
대하는 얼굴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누가 주모자요?"
  그랬더니 키가 작달막한 인물이 거침없이
대꾸했다.
  "접니다."
  "그대도 장군이요?"
  "그렇습니다. 육군 소장입니다."
  "희생자는 없었소?"
  "없었습니다."
  "어째서 쿠데타를 일으켰소?"
  "대통령 각하, 심려를 끼쳐드려 대단히
죄송합니다. 저희도 처자가 있는 몸으로
오직 국가와 민족을 위하는 애국일념에서
목숨을 걸고 이 혁명을 일으켰습니다.
서울은 혁명군 수중에 들어와 있고 계엄이
선포되었습니다."
  박정희의 다음 말을 유원식이 냉큼
  "각하, 계엄령을 승인해 주십시오."
  "계엄령을 승인해 달라고?"
  "네, 각하!"
  윤보선은 한동안이나 우람한 체구의
유원식을 쏘아보았다. 어이가 없다는
표정이었다.
  "대통령의 승인은 계엄을 선포하기 전에
있어야 하는 것이지 이미 선포한 계엄을
승인하라니 순서가 뒤바뀌지 않았소?"
  "그야 물론 각하, 정상적일 때는
대통령의 승인을 얻은 다음에 계엄령을
선포하는 것이 순서인 것만은 틀림이
없습니다. 하지만 저희들은 혁명을 했단
말씀입니다. 혁명을 하는 마당에 순서 같은
것이 문제가 되겠습니까?"
  "그렇다면 굳이 내 승인을 받으려 할
  "따지고 보면 그렇기도 합니다. 하지만
저희들의 혁명 대상은 장면 정권이지
대통령은 아닙니다. 그러므로 각하께서는
주어진 권한만 행사해 주시면 됩니다."
  "이왕 계엄이 선포되었다 하니 그대들의
말이 법이요? 생사가 그대들 말 한마디로
결정될 것 아니오? 굳이 승인이니 뭐니 할
게 뭐가 있겠소?"
  이치로 따지면 윤보선의 말이 옳았다.
쿠데타란 어김없는 폭력이었다. 폭력으로
정권을 뒤집어 엎으려는 마당에 굳이
선포해 놓은 계엄령의 추인을 받으려 할
필요는 없었다.
  윤보선이 계엄령 추인을 해주지
못하겠다는 태도를 보이자 접견실 내에
갑자기 냉기가 감돌았다. 윤보선도 그
  그는 늘어서 있는 면면들을 다시 한번
훑어보고는 말문을 열었다.
  "그대들이 만일 애국하기 위해서 혁명을
했다면 애국하는 방향으로 일해야 하지
않겠소? 오늘의 사태에 대한 책임은 물론
우리 정치하는 사람들에게 있다고 나는
보고 있소.
  민주당 정권이 무능했던 것도 사실이오.
사회가 하도 혼란스러우니까 결국은
그대들이 목숨을 걸고 거사하기까지
이르렀을 것이오. 필경 이런 일이
일어나고야 말리라고 나도 보고 있었소."
  윤보선이 여기까지 말했을 때 현석호가
그의 말을 가로막았다. 그는 민주당 정권을
무능한 정권으로 매도하고 쿠데타를
찬양하는 듯한 뉘앙스를 풍기는 말을 듣자
  "군의 책임자로서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하지만 대통령께서 헌정을 문란케 한
행위를 찬양하는 듯한 말씀을 하셔서야
되겠습니까? 대통령께서는 헌정질서를
유지하는 각도에서 지금의 비상사태를 잘
수습해야 옳다고 봅니다."
  그는, 더 이상 쿠데타를 지지하는 듯한
발언을 하지 못하도록 쐐기를 박아 놓고
이렇게 덧붙였다.
  "그러나 합법적 절차에 의하지 않고는
정권 인수란 있을 수 없다고 봅니다."
  현석호는 결코 쿠데타를 인정할 수
없다는 태도를 분명히 했다.
  한 목숨 버릴 각오가 돼 있지 않고는
감히 쿠데타를 주도한 사람 앞에서는
도저히 뱉아낼 수 없는 말이었다.
험악해지는 것이었다.
  (장도영이 이놈의 새끼, 현석호란 놈을
어째서 이 자리에 데려온 거야? 다된 밥에
재를 뿌리자는 수작이야 뭐야?)
  험악해진 표정으로 옆에 서 있는
장도영을 매섭게 노려보는 폼으로 보아
박정희는 현석호보다는 장도영을 더
나무라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한데, 윤보선도 현석호의 말이 귀에
거슬린 모양이었다.
  "나라를 구하는 길이 이 길밖에 더
있겠소?"
  거칠게 대꾸했다.
  "이 길밖에 없다니요?"
  현석호도 지지 않고 되물었다. 그러면
쿠데타를 지지하겠다는 그 소리냐고 물었던
뜻밖이었다.
  "그럼 군사혁명이 일어난 이 마당에 뭘
어떻게 하자는 말이오?"
  윤보선은 쿠데타를 기정사실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지 않느냐 하는 태도였다.
  현석호는 더욱 울화가 치미는
모양이었다. 대들듯이 억양을 높였다.
  "물론 우리가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고
정권을 유지하겠다는 것은 아닙니다. 허나,
민주당 정권은 합헌정부인 만큼 합법적
절차가 아니고는 정권을 넘길 수 없다는
기본 입장을 밝힌 것뿐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대통령께서도 우리가 군부에
의해 타도되어야 할 근원적 과오가 뭐란
말씀입니까?"
  윤보선도 억양을 높였다.
그대들의 처사가 옳다고 보오? 거국내각을
제대로 한 것도 없고, 국민의 여망에 따라
정치를 해온 것도 없으니 일이 이렇게
벌어지게 된 게 아니오? 이번에는 단념하는
것이 좋을 것이외다."
  윤보선은 끝내 참지 못하고 장면에 대한
묵은 감정을 이 자리에서 털어 놓고야 말
속셈인 것 같았다. 뒤에 구체적으로
소개하게 되겠지만 윤보선은 장면에게 수차
<거국내각을 조각하라> 권고했던 것이다.
  그것을 장면이 거부하자 윤보선은
이때부터 장면 정권 타도를 구상하기까지
하고 있었던 것이다.
  현석호는 윤보선의 지탄을 되받았다.
  "대통령은 우리가 국민의 여망에 따라
정치를 하지 못했다고 하지만 우리가 무슨
있었습니까? 있었으면 있었다고 말씀해
보십시오!"
  "내가 뭐라고 했어? 그렇게 싸우지
말라고 했는데도 내 말을 안 듣더니."
  "그걸 말씀이라고 하십니까?
정쟁(政爭)이란 어느 나라에나 있는 것
아닙니까? 그 정쟁이 쿠데타의 이유가 될
수 있단 말씀입니까?"
  윤보선은 그만 입을 다물고 말았다. 이
마당에 너희들이 잘했다 못했다 논쟁을
해봐야 속된 말로 스타일만 구길 뿐이라고
생각했던 모양이었다.
  그러자 현석호가 따지듯이 다시 이었다.
  "이제 계엄령이 선포된 비상사태의
수습을 대통령께서 잘 처리하셔야 할
차례라고 생각합니다. 어디까지나
  현석호가 <합헌적> 운운한 것은 물론
<네가 헌법을 지켜야 할 대통령으로서
탈권을 하려 드는 쿠데타를 지지해서야
되겠느냐?> 하는 간접적인 경고였음은 다시
말할 필요도 없는 일이었다.
  윤보선과 현석호의 논쟁을 듣고 있던
박정희는 윤보선의 속마음을 헤아렸다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이제 저희들은 그만 물러가겠습니다,
각하."
  거수경례를 붙이고는 앞장서 나가자
여타의 인물들은 윤보선과 더 나눌 얘기가
없었다. 장도영을 위시한 해.공군
참모총장들도 일제히 거수경례를 붙이더니
박정희의 뒤를 따르는 것이었다.

군사 쿠데타가 일어난 지 28년 만인 1989년
5월 16일자부터 [동아일보]에 <외로운
선택의 나날>이라는 제목으로 회고록을
집필한 바 있다. 이때 현석호와의 논쟁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기술해 놓고 있다.

  ......여기에서 짚고 넘어갈 대목이
있다. 현석호 국방장관이 삼군 재휘관들과
함께 들어왔을 때다. 내가 계엄령의 추인을
거부하고 난 직후, 현 장관은 그
경황중에서도 혁명이 벌어진 책임문제를
들고 나왔다.
  사실 당시 현 장관에게 격한 어조로 말을
했던 것 같다. 당시 현 장관이 혁명군에게
체포된 상태에서 끌려왔다는 것을 알았다면
그렇게 격한 어조가 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감정이 격해진 데에는 나름대로의 이유가
있었다.
  5.16 군사 혁명이 일어나기 두 달 전의
어느 날 밤, 나는 장면 총리와 자정이
넘도록 시국문제를 논의했다. 당시
학생들의 데모가 연일 벌어졌다. 그로 인해
정치적, 사회적 불안심리는 고조되고
있었다.
  나는 장 총리에게 어떤 비상대책이라도
세워 시국을 수습할 것을 권유했다. 장
총리는 눈을 감은 채 내 얘기를 듣기만
했다. 잠시 후 장 총리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표정이 창백했다. 불쾌하다는
표정이었다. 그리고는 한마디를 던지고
방을 나섰다.
  "이승만 씨도 10년 집권을 했는데 어디
  지금 생각해도 몹시 언짢은 밤이었다.
  그로부터 얼마 후 현석호 국방장관을
청와대로 불렀다.
  "데모가 아침 저녁으로 끊일 줄 모르고
일부 과격학생들은 남북회담을 하겠다고
하고 있소. 또 일부에서는 장 정권 파괴를
목표로 해서 음모를 꾸미는 모양이오. 무슨
비상대책을 세워야 하지 않겠소?"
  그러나 현 장관은 여유만만했다.
  "비유를 하겠습니다. 자동차가 언덕
위에서 고장이 나서 굴러 내려간다고
합시다. 굴러 내리는 중간에서는 어떻게
손을 쓸 수가 없습니다. 밑으로 완전히
내려가 요행히 서든지, 전복이 되든지 해야
그때 가서 대책을 세울 수 있지 않습니까?
도중에는 어떻게 할 수가 없습니다."
하던 현 장관을 5월 16일 아침 청와대에서
군인들과 함께 만났던 것이다.......

  장도영도 84년 9월호 [신동아]에 기고한
<나는 역사의 죄인이다>라는 글에서 당시
상황을 이렇게 기술했다.

  현 장관은 윤 대통령의 말이 불법행동에
대한 단호한 반대 표시로서는 불충분한
것으로 생각하는 듯한 발언을 했다. 이어
윤 대통령과 현 장관은 사태가 벌어지게 된
데 대한 민주당과 정부의 책임에 관해 서로
엇갈린 말을 주고받았다.

  박정희 등이 접견실을 물러날 때 맨
마지막에 나간 사람은 유원식이었다.
때 의자에서 일어나 그의 앞을 가로막았다.
  "유 대령, 박 소장하고 단 둘이 좀 만날
수 없겠소?"
  박정희와의 단독회담을 요구했다.
  "알겠습니다. 박 장군을 곧 모시고
오겠습니다."
  유원식은 일단 물러났다가 잠시 후
박정희와 함께 다시 들어왔다. 유원식은
윤보선 앞에 서자 거수경례를 붙이고 나서
이렇게 주워 섬기는 것이었다.
  "각하, 우리들은 대통령 각하께 과거에도
충성을 다했고 지금도 그러합니다.
앞으로도 그 충성에는 변함이 없을
것입니다."
  이 말을 듣자 윤보선은 알아들었다는
듯이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었다.
  유원식이 말을 이었다.
  "그리고 저희는 이 혁명을 인조반정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인조반정(仁祖反正)이라......? 그럴싸한
비유였다.
  유원식이 말을 끝내자 박정희가 그 뒤를
이었다.
  "각하, 각하께서 이 혁명을 지지하는
성명을 내주십시오."
  윤보선은 혁명을 지지해 달라는 박정희의
요구에 대해서 이렇게 말했다.
  "계엄령 선포는 잘한 것으로 알고
있소이다."
  그 말을 듣자 박정희는 보일 듯 말 듯
빙긋 회심의 비소를 짓는 것이었다.
  그러면 윤보선은 어째서 박정희와 단
둘이 만나기를 바랐던가? 그것은 말할 것도
때문이었다.
  (쿠데타를 한 자들이 나를 어찌
처리하려고 하고 있는 것일까?)
  그는 대통령직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박정희와 단
둘이 만나기를 요청했던 것인데, 다시
만나자 유원식이 박정희가 입을 열기도
전에 <각하, 우리들은 대통령 각하께
과거에도 충성을 다했고 지금도
그러합니다.> 어쩌고 하며 대통령 자리에
변동이 없을 것이라는 것을 분명히
해주지를 않았는가.
  윤보선이 입이 헤에 하고 벌어졌을 것은
보나마나한 일이었다.
  윤보선은 대통령 자리에 변동이 없다면
쿠데타 쪽에 협력을 하는 것이 현명한
  그래서 조금 전에 계엄령 추인을
거부했던 처지라 당장에 뒤집어 엎기는
체통도 서지 않을 것 같고 해서, <계엄령
선포는 잘한 것으로 알고 있소이다> 했던
것이다.
  이것을 뒤집으면 쿠데타를 지지하고
협력하겠다는 그 뜻이었던 것이다.
  내각책임제하의 대통령직이란 상징적인
국가원수에 지나지 않는다. 대통령으로서의
예우는 받을 수 있어도 행사할 수 있는
권력은 주어져 있지 않다.
  대통령이기 이전에 정치인은 윤보선이
대통령직에 미련을 갖고 박정희를 불러들여
흥정하는 듯한 언행을 한 것은 아무리 좋게
해석하려 해도 좋게 해석되어지지가
않는다.
  청와대에서 윤보선이 박정희를 불러들여
밀담을 나누고 있는 그 시각.
  서울시 경찰국장에는 출동부대의
지휘관들이 모였다. 해병여단장 해병 준장
김윤근을 위시해서 제6군단 포병단당 육군
대령 문재준, 그리고 공수단 단장 육군
대령 박치옥 등과 그들이 거느리고 있는
대대장급 지휘관들이었다.
  "제관들을 이 자리에 소집한 이유는
다름이 아닙니다. 일단 정부 각 기관을
장악함으로써 혁명의 제1단계는 성공했다고
할 수 있으나 그러나 제1군이라든지 또 미
8군의 동태가 애매한 이상에는 수도
방위문제를 심각하게 검토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김윤근으로부터 회의 소집의 목적을 듣자
끄덕였다.
  회의는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수도방위사령부를 설치해야 한다는
김윤근의 주장에 이의를 제기하는 지휘관은
아무도 없었다. 수도방위사령부 설치문제가
이의 없이 통과되자 각급 지휘관들은
출동부대 중 제일 계급이 높은 김윤근을
사령관으로 추대했다.
  이에 김윤근은 사령관 취임을 흔쾌히
승락하고 제6군단 포병단의 대대장인 육군
중령 신윤창을 수도방위사령부 참모장으로
임명했다. 수도방위사령부는 반혁명군의
출동에 대비해서 방어의 목적에서
임시적으로 설치됐던 것이나 쿠데타가
성공하자 그것이 기정사실화되어 뒤에
수도경비사령부로 개칭되었다.
  9. 윤보선, 쿠데타를 지지하다


  오전 10시.
  제1군 사령관 육군 중장 이한림은
휘하부대의 출동태세를 점검한 뒤, 근
1시간 동안이나 번민에 거듭했다.
  (출동명령을 내려서 쿠데타를 진압해야
하나? 아니다. 북한 괴뢰군의 재침입에
대비하고 있는 제1군이 통수권자의 명령
없이 진지를 이탈할 수야 없지 않느냐?)
  그는 이 두 가지 문제를 놓고 어느 쪽을
택해야 좋을지 몰라 번민에 번민을
거듭하고 있었던 것이다.
  새벽 5시 2분에 쿠데타가 방송됐으니만큼
있다고 봐야 했다. 그런 만큼 만일
휴전선에서 북한 괴뢰군하고 대치하고 있는
부대를 빼돌렸다가 북한 괴뢰군이 구멍
뚫린 곳이 어디라는 것을 알고 또다시
기습남침을 감행하는 날에는 쿠데타 진압이
문제가 아니었다.
  그러고 보면 이한림이 고민하는 것도
당연하다 할 수 있었다.
  1시간 동안이나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던
이한림은 한 통의 편지를 쓰고 난 다음
부관을 불렀다.
  "귀관, 귀관은 즉시 사복으로 갈아입고
서울로 가서 이 편지를 장면 총리에게
전하라. 만일 장면 총리의 거처를 알 수
없거든 명동 성당으로 가서 노기남(盧基南)
주교를 찾거나 경향신문사로 가서
  지금 막 쓴 편지를 건네주었다.
  그는 장면에게 보내는 밀서에서, <제1군
사령부의 임무가 무엇인가?> 하는 것을
설명했다. 그러나 군의 지휘관은
통수권자의 명령에 절대 복종할 의무가
있으니만큼 국무총리 각하의 명령이 있기를
고대하고 있다고 했던 것이다.
  당시의 이한림의 처지로 보아서는 이렇게
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러나
말이다. 이한림이 처했던 처지를 이해는
하면서도 자꾸만 아쉬운 마음이 이는 것을
금할 길이 없다. 이 무렵 그에 대한 세평이
군인다운 군인이라는 칭송의 소리가 높아져
있었기 때문이었는지도 모른다.

  청와대를 물러나오자 장도영은 현석호를
주고 육군본부로 향하다가 도중에 생각을
고쳐먹고 미8군 사령부로 향했다.
매그루더를 만나기 위해서였다.
  장도영이 사령관실로 들어서자
매그루더가 먼저 입을 열었다.
  "제너럴 장, 나는 지금 합법적으로
수립된 장면 정권을 지지한다는 성명을
발표했소. 그와 함께 쿠데타군은 지체없이
원대복귀하라는 명령도 말했소. 내가
성명을 발표하자 마샬 그린 대리대사도
장면 정권을 지지한다는 성명을 발표했소.
아시겠소?"
  유엔군 총사령관 겸 미8군 사령관인
매그루더의 성명이 발표된 것은 오전 10시
18분이었다. 한국방송인 KBS, MBC, TBC 3개
방송은 이미 쿠데타군에 의해 접수되었기
8군 소속의 방송과 일본 오끼나와에서
방송을 하고 있던 VUNC, 곧 유엔군
총사령부의 방송을 통해 방송되었다.
  매그루더의 성명내용은 이러했다.

  본관은 유엔군 총사령관의 자격으로
휘하의 모든 장병에게 장면 총리가 수반인
정당하게 인정된 한국 정부를 지지할 것을
요구한다. 본관은 한국군 삼군 총장들이
그들의 권위와 영향력을 행사해서 통치권이
즉각 정부당국에 이얗하고 군의 질서가
회복되도록 해줄 것을 기대한다.

  또한 미국 대리대사 마샬 그린의
성명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한국 정부를 지지함에 있어 유엔군
총사령관이 취한 입장에 나는 전적으로
동조한다. 나는 지난 7월 한국 국민이
선출했으며, 지난 8월 총리 선출에 의해
구성된 한국의 합헌정부를 미국이 지지하고
있음을 강조하며 명백히 하고 싶다.

  두 사람이 미 8군 방송과 유엔군
총사령부의 방송을 통해 이 성명을
발표하기에 앞서 의논했음은 말할 것도
없다.
  "제너럴 장, 우리 두 사람의 성명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겠소? 그것은 곧 미국
정부는 장면 정권을 지지한다는 것을
의미하는 거요."
  매그루더는 덧붙이며 눈을 부라렸다.
단정했다.
  (미국이 장면 정권을 지지하고 나선
이상에는 박정희의 쿠데타는 실패할 수밖에
없다.)
  미국 정부의 뜻이 어디 있는가를 확인한
장도영은 다시 육군본부로 돌아왔다.
참모총장실에 들어서니 박정희와 유원식
등이 이미 와서 그가 돌아오기만을
고대하고 있었다.
  "각하, 속히 계엄사령관 취임을
승락하시고 계엄업무를 지휘감독해 주시기
바랍니다."
  박정희의 요청이었다.
  장도영은 지금 막 매그루더를 만나고
돌아오는 길이었으나 그렇다고 매그루더가
하던 말을 정직하게 전해 줄 수는 없었다.
<너희들의 쿠데타는 실패했어. 미국 정부는
장면 정권을 지지하고 나섰어> 했다가는
어디에서 총알이 날아와 배때기에
바람구멍을 낼는지 모르는 일이었다.
그래서 지연작전을 쓰기로 했다.
  "계엄은 국무회의의 의결을 거쳐야
유효한데 지금의 실정으로서는 국무회의
의결을 거칠 방법이 없지 않소?"
  그러자 유원식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며
고함을 질렀다.
  "대통령이 이미 계엄령을 추인했거늘
국무회의는 뭐 말라 비틀어진 국무회의란
말이오?"
  그와 함께 사방에서 장도영을 매도하는
욕설이 한꺼번에 날아들었다.
  "또 지연작전이야, 또?"
  "해치워 버려!"
  욕설을 퍼붓는 자들은 물론
중령급들이었다.
  길길이 날뛰는 그들을 이번에는 박정희가
제지했다.
  "그럼, 어떻게 하시겠다는 겁니까?"
  따지듯이 물었다.
  "나도 모르겠소, 어떻게 해야 할지."
  장도영은 이런 경우 어떻게 행동하고
처신해야 할지 갈피를 못 잡고 있었던 것이
사실이었다. 여기는 쿠데타 주체자들의
소굴이었으니까.
  장면의 입인 공보비서관 송원영이 미8군
사령부에 전화를 건 것은 바로 이
무렵이었다.
  새벽에 용산에 있는 친구로부터 쿠데타가
그는 단숨에 차를 몰아 반도호텔로
달려왔으나 그때는 이미 쿠데타군에 의해서
반도호텔이 장악된 뒤였다.
  그는 그 시간 이후 인사동에 있는
삼양사의 김영태(金永泰)라는 자의 집에
은신해 있으면서 사태의 추이를 지켜보고
있었다. 그러다가 오전 10시가 조금 지나
매그루더와 그린의 성명방송을 듣자
소리쳤다.
  "이젠 됐다."
  한국군의 작전지휘권을 쥐고 있는
매그루더와 미 행정부를 대표한 주한 미국
대리대사 그린이 장면 정권을 지지하고
있는 이상에는 쿠데타는 실패할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판단했던 것이다.
  (그렇다면.)
무엇일까 하고 생각해 보았다. 그는
이모저모로 생각을 더듬은 끝에 미국
대사관에 전화를 걸었다.
  "나는 장면 총리의 공보비서요. 혹시 장
총리와 연락할 방법은 없겠습니까?"
  그는 이 상황에서는 장면과 연락할 수
있는 길은 미대사관밖에 없다고 판단했던
것이다. 그러나 대사관의 대답은 신통치가
않았다. 자기들도 장면과 연락을 취하고
싶으나 도무지 어디로 은신했는지 소재를
파악하기가 어렵다는 것이었다.
  송원영은 이번에는 미8군 사령부에
전화를 걸었다. 그의 전화를 받은 사람은
매그루더의 부관이었다. 그 부관은
송원영의 전화를 꽤나 반겼다.
  "당신이 장 총리 공보비서관이라면
  대면하기를 요구하는 것이었다.
  아마도 그쪽에서도 장면과 연결을 갖고
싶으나 소재를 몰라 애를 태우고 있는
모양이었다. 송원영은 다시 연락하겠다고
하고는 일단 전화를 끊었다.

  오전 10시 30분경.
  장도영과 박정희 등이 청와대를 다녀간
뒤, 윤보선은 마냥 거실을 서성대기만
했다. 산란해진 마음이 도무지 가라앉지를
않았기 때문이었다. (뭔가를 해야지,
이러고만 있을 수는 없지 않은가?)
  쿠데타 측에서는 쿠데타 대상은 장면
정권이라고 했지 대통령은 아니라고 했다.
또 대통령직에는 변동이 없을 것이라는
암시도 받았다. 그렇다며 이제 자신이
손을 대야 할지 도무지 엄두가 나지를
않았다.
  매그루더와 마샬 그린의 성명이 윤보선의
머리를 혼란케 하는 원인이 되어준 것도
사실이었다. 쿠데타의 주동자인
박정희에게는 이미 쿠데타를 지지하는 듯한
암시를 해주었는데 매그루더와 마샬 그린이
장면 정권을 지지하고 나선 것이다.
  특히 매그루더의 경우에는 한국군의
작전지휘권을 쥐고 있었다. 그러므로 그는
쿠데타 행동군이 아닌 여타의 한국군에게
<출동해서 쿠데타군을 분쇄하라> 하고
명령을 내릴 경우 한국군은 그의 명령에
따르지 않을 수가 없었다. 이렇게 되면
내전으로 확대될 것은 너무나 자명한
일이었다.
  그는 비서에게 명했다. 이어서 그는
덧붙였다.
  "그린 대리대사도 부르게."
  그린을 부르라고 한 것은 한국의
쿠데타에 대해서 미 행정부에서 어떤
조치를 취하고 있는지를 알아보기
위해서였다.
  윤보선이 이렇게 두 사람을 부르라고
명한 것이 오전 10시 30분경이었다.


  윤보선의 부름을 받은 매그루더와 그린이
접견실로 들어왔다.
  두 사람은 윤보선과 대좌하자 매그루더가
먼저 입을 열었다.
정부를 전복시키려는 쿠데타는 도저히
용납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반란행위는 당연히 진압돼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매그루더의 태도는 사뭇 결연했다.
  "진압한다면 어떻게 진압한다는 거요?"
  (이거 큰일났구나. 이러다간 동족간에
피를 흘리게 되는 게 아냐?)
  윤보선은 속으로 반문했다.
  "지금 서울 시내에 들어온 혁명군의
병력은 대략 3,600명에 불과합니다. 그리고
제1군 휘하 병력은 요지부동이구요. 대구
지방에서도 약간의 병력이 쿠데타에
참가했으나 현재 속속 원대로
복귀중입니다."
  대구 지방에서 쿠데타에 참가한 병력이
매그루더의 착각이 아니었는지 모르겠다.
대구하고 하면 제2군 사령부가 있는
곳이다. 제2군에서 쿠데타에 가담해 있던
사람은 제2군 공병참모인 육군 대령
박기석(朴基錫)과 공병대 대장 육군 중령
장동운(張東雲)이었다.
  5월 16일, 이날 KBS의 혁명공약 방송과
함께 행동을 개시한 장동운은 대구 시내에
있는 주요 관공서를 점령했으며 원대로
복귀하지는 않았었다.
  하여간에 그건 어떻든, 매그루더의
얘기를 계속 들어보기로 하자.
  "제1군 휘하의 병력 중에서 3,600명의
쿠데타군 병력의 10배인 36,000명만
동원하면 됩니다. 이 병력으로 서울을
포위하면 쿠데타군은 곧 항복할 것이고 이
  매그루더의 얘기를 듣고 나자 윤보선은
놀랍다는 표정을 지었다.
  "장군, 일선 병력을 빼돌리잔
말씀인가요?"
  "그렇습니다. 만약 항복하지 않을
경우에는 공격을 하면 사태진압은 빠른
시간 안에 이루어질 수가 있습니다."
  윤보선은 이번에는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가 어떤 반응을 나타내든
매그루더는 하고자 하는 얘기를 주저치
않고 다했다.
  "대통령 각하, 그러나 지금 장면 총리의
행방이 묘연합니다. 행정부가 없는
셈입니다. 다른 국무위원들의 소재도 알
수가 없습니다. 국가 원수인 대통령 각하가
유일한 헌법기관입니다. 그러니 대통령
바랍니다."
  결국 매그루더의 목적이 병력을
동원해서라도 쿠데타를 진압하려는 데
있다는 것이 분명해진 셈이다.
  지금까지 매그루더의 말을 경청하고 있던
그린이 끼어들었다.
  "대통령 각하, 각하는 국가원수로서
헌법을 지킬 의무와 책임이 있습니다.
헌법질서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쿠데타를
분쇄해야만 합니다."
  윤보선의 가슴이 갑자기 답답해지기
시작했다. 두 사람의 말이 모두 옳다고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그렇다고 선뜻
<좋소, 그렇게 합시다> 할 수도 없었다.
그렇게 할 경우 휴전선이 걱정되었고
동족간에 유혈사태를 초래하게 될 결과가
  "워싱턴의 동정은 어떻습니까?"
  윤보선으로서는 무엇보다도 궁금한 것이
미국 행정부의 동정이었다. 그것을 확실히
알아야만 두 사람의 건의에 가타부타
결정을 내릴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그래서
워싱턴의 동정을 물었던 것인데 그린이
조금 신경질적인 반응을 보였다.
  "대통령 각하, 지금 매그루더 장군이나
저는 미국 행정부의 의사를 대변하고 있는
것입니다."
  옳은 말이었다. 미국 행정부를 대표해서
현지에 나와 있는 외교관이 본국 정부의
의사에 반한 행동을 할 리는 없는
일이었다. 윤보선은 더욱더 자신의 입장이
궁지에 빠지게 되었다는 것을 의식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괴뢰군이 휴전선 일대에 집결중이라는
보고를 받았는데 장군은 그 사실을 알고
있소?"
  "예, 각하. 우리도 그 정보를 알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일선에서 병력을 빼돌렸다가
북괴군이 물밀듯 쳐들어오면 그땐 어떻게
하겠소? 그럴 경우 막을 준비는 다 돼
있소?"
  "휴전선을 걱정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매그루더는 윤보선의 우려를 단 한마디로
부정했다.
  사실, 휴전선에서 1,2개 사단을
빼돌렸다고 해서 우려할 필요는 없었다.
군사력에 있어 한국군보다 월등하게 우세한
북괴군이 쳐내려 올 생각이 있었다면 벌써
  그들 북괴군은 미군이 두려웠던 것이다.
잠시도 쉴틈없이 적화통일의 야욕에 불타고
있는 북괴군은 쳐내려가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았으나 미군의 존재가 두려워 감히
모험을 저지르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윤보선은 이번에는 다른 구실을 또
내세웠다.
  "장군, 우리 국군끼리의 유혈사태는
휴전선에 집결해 있는 공산군한테 이로운
일이 아닙니까? 그것은 곧 이적행위란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국군을 일선에서
빼돌린다는 것에 찬성할 수가 없습니다."
  윤보선의 이 말에 매그루더와 그린은
어이가 없는 모양이었다. 헌법을 지켜야 할
의무와 책임이 있는 국가원수가 동족간의
유혈을 염려해서 책임을 회피하려 하다니?
반문을 하고 있었다.
  윤보선이 다시 말을 이으며 매그루더의
의향을 타진했다.
  "장군 생각대로 해야 한다면 차라리
미군을 동원해서 진압하는 것이 어떻겠소?"
  그 말을 들은 매그루더는 더욱더
어이없어 하는 표정이 되었다.
  "대통령 각하, 유엔군의 군사행동은
외적과의 대결이라면 몰라도 내전에는
원칙적으로 개입할 수 없습니다."
  이렇게 말하고 나서 매그루더는 윤보선의
표정을 살피고 있다가 다시 말을 이었다.
  "각하께서 한국군의 병력동원에
동의하시면 내 명령 없이 지역을 이탈한
부대의 복귀를 가능하게 해서 사태를
수습토록 하겠습니다. 각하께서는 시가전
걱정하시는 모양입니다만 3,4만 명의
병력이 서울 일원을 포위하고 공군을
동원해서 삐라를 뿌리며 원대복귀의 통로만
열어놓으면 3일에서 1주일 사이에 이렇다할
유혈사태 없이 진압할 수 있습니다."
  매그루더가 이렇게까지 적극적으로
나오고 있는 이상에는 가부간 어떤 결단을
내리지 않으면 안 되겠다고 윤보선은
생각했다. 잠시 생각을 정리한 끝에
윤보선은 이렇게 말했다.
  "나는 이 나라의 원수인 만큼 그
입장에서 국가의 중대사를 처리하지 않을
수 없소. 휴전선을 지척에 두고 적과
대치하고 있는 현실에서 불행한 사태가
벌어진다면 누가 책임지고 막아낼 수
있겠소?"
반응을 번갈아 살펴보았다.
  그린의 표정에는 변화가 없었으나
매그루더의 표정에는 노여움이 부글부글
일고 있었다.
  윤보선이 다시 말을 이었다.
  "내가 무엇보다 이 국가의 안전과 국민의
안전을 고려해야 하는 지금 호헌만을
생각할 수는 없소. 호헌은 국토와 국가가
있는 다음에 생각할 문제라고 보는 것이오.
정부가 국민의 신망을 잃고 무질서와
혼란이 극도에 달한 이때에 유혈비극과
적의 남침을 방지할 확고한 대책이 없는 한
장군의 진압군 동원 승인 요청에 동의할
수는 없소."
  이 말을 듣자 매그루더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그는 짧게 한마디 던지고는 접견실
밖으로 나갔다.
  이때가 정오 12시였다.
  매그루더가 나가고 나자 그린은 자리에서
일어나 윤보선의 곁으로 다가갔다.
  "대통령 각하, 오찬을 주신다면 좀더
남아서 말씀을 드릴까 합니다."
  "그러시오. 식당으로 가십시다."
  윤보선은 그린을 식당으로 안내했다.
  점심식사가 준비되는 동안 마샬 그린은
어떻게 해서든 윤보선을 설득하려 들었다.
  "각하, 이 쿠데타가 성공하게 되면
한국은 아마도 장기간 군사통치를 겪게 될
것입니다."
  그는 미래에 대한 예언부터 했다. 실로
간담이 서늘해지지 않을 수 없는
승인을 거부한 윤보선은 장기간의 군사통치
운운하는 말에 그리 큰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 것 같았다.
  마샬 그린은 그러한 윤보선의 태도에
안타까운 듯이 한마디 더 덧붙였다.
  "각하, 헌법 61조 1항에 뭐라고
했습니까? <대통령은 헌법과 법률이 정하는
바에 의하여 국군을 통수한다>라고 규정해
놓고 있지 않습니까? 그러므로 각하께서는
이 헌법에 따라 통수권을 발동해서 헌법을
수호하도록 해야만 합니다. 각하께서
그렇게 하시는 것이 미국 정부의
의사하고도 합치된단 말씀입니다. 쿠데타는
절대 지지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마샬 그린이 아무리 <쿠데타
진압>을 역설해도 윤보선의 귀에는

  "가앗댐!"
  청와대를 물러나와 용산 미8군 사령부로
돌아온 매그루더는 연방 <가앗댐>을
연발하고 있었다. 윤보선에 대한 노여움이
도무지 풀리지 않아서였다.
  자존심도 상했다. 그 자존심을 살리는
길은 한시바삐 장면을 찾아 통수권을
발동해서 쿠데타군을 진압하는 길뿐이라고
생각했다.
  (도대체 장면 총리는 어디로 행방을 감춘
거야?)
  혜화동 칼멜 수녀원에 숨어버린 장면이
매그루더가 그의 행방을 몰라 애를 태우고
있다는 것을 알았으면 무슨 수를 써서라도
매그루더에게 연락을 취했을 것이다.
수녀한테 부탁해서 라디오 한 대를 그의
방에 갖다 놓았다. 그랬기 때문에 그는
매그루더나 그린의 성명을 방송을 들어
알고 있었다. 그렇다면 미8군 사령부나
또는 미 대사관에 즉시 연락을 취할 법한
일이었다. 그러나 그는 연락을 취하지
않았다. 어째서였을까?
  한동안 생각을 가다듬고 있던 매그루더는
인쇄돼 있는 <명령서> 용지를 꺼내
분주하게 만년필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정오 12시 20분.

  <유엔군 사령부 예하 장병은 장면 총리가
지휘관들은 그들의 권한과 영향력을
구사하여 통치권이 즉각적으로 정부 당국에
돌아가도록 할 것을 기대한다.>

  제1군 사령관 이한림이 이러한 내용의
매그루더 메시지를 받은 것이 정오 12시
20분이었다. 이 메시지는 미 고문단을 통해
전달받았다. 매그루더의 메시지와 함께
이한림은 또 한 통의 메시지를 전달받았다.
미국 대리대사 마샬 그린의 메시지였다.

  <자유롭게 선출되고 합헌적으로 수립된
대한민국 정부를 지지하는 유엔군 사령관의
입장은 나의 입장과 전적으로 일치된다.
미국은 작년 7월 선거에서 한국 국민이
대통령을 선출하고 8월에는 국무총리를
지지한다는 것을 강조하는 바이다.>

  정오 12시 20분이라고 하면 마샬 그린은
청와대 식당에서 윤보선을 설득하느라 열을
올리고 있는 그 시간이다. 그렇다면
이한림에게 전달된 이 메시지는 누구에
의해서 미 고문단에 타전됐느냐 하는
의문이 생긴다. 추측컨대 아마도
매그루더가 오전 10시 18분에 방송으로
발표된 성명서를 조금 손질해서 타전한
것은 아닐는지? 지금으로서는 이것을
가려낼 방법이 없다.
  이 두 개의 메시지를 전달받은 이한림은
지극히 만족스러웠다. 미국 정부가
합헌적으로 수립된 장면 정권을 지지하고
나섰다는 것이 기뻤고 평소 같은 천주교
않던 장면이 계속해서 정권을 담당할 수
있게 돼서 기뻤다.
  그는 즉시 이 두 개의 메시지를 예하
전부대에 고지하도록 참모에게 명했다.
그런 다음 그는 생각을 모았다.
  (매그루더의 메시지는 내가 작전명령을
하달할 수 있는 근거가 되는 것이 아닐까?)
  원리원칙대로 따진다면 <출동해서
쿠데타군을 진압하라>는 명령이 아니기
때문에 작전명령을 내릴 수 있는 근거가 될
수는 없었다. 그러나 모든 통신수단이
단절돼 있는 지금의 상황을 감안할 때는
작전명령을 내릴 수 있는 근거가 될 수도
있었다.
  (어떻게 한다?)
  이한림은 또 한번 번민을 했다.
보냈으니 그 어떤 소식이 있을 때까지
기다려야 하나?)
  번민에 번민을 거듭하던 이한림은 후자를
택하기로 했다. 밀사가 어떤 소식을 가져온
다음에 행동을 해도 늦지는 않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정오 12시 30분 같은 시각.
  제1군 사령관 이한림이 밀파한 밀사가
소공동에 있는 경향신문사 사장실로 들어선
것이 바로 이 시간이었다. 이때,
경향신문사 사장실에는 사장 한창우를
위시해서 선우종원(鮮于宗源), 민의원
조연하(趙淵夏), 치안국 인사계장 총경
노영균(盧永均) 등 장면의 측근자들이 모여
백방으로 수소문하며 장면을 찾고 있던
한창우에게 밀서를 전해 주었던 것이다.
  그렇지 않아도 장면의 행방을 몰라 애를
태우고 있던 한창우는 이한림의 밀서를
읽고 나자 더욱 애가 탔다.
  (이 장군이 작전명령에 대한 총리의
서명만 해서 보내오면 즉시 출동을 하겠다
했는데 총리가 있어야 서명을 해서
보내든가 말든가 할 게 아니야?)
  좀 저속한 표현이지만 조급증이 일
경우를 똥줄이 탄다고 할 때가 있다.
정말이지 한창우는 똥줄이 탔다.
  "숨기는 왜 숨어? 뭐가 무서워서 숨는
거야? 숨더라도 우리한테는 연락이라도
해줘야 할 게 아닌가?"
  한창우는 이젠 장면을 호되게 비평까지
했다.
  동석했던 누군가가 소리쳤다.
  "운전수는 알 게 아닙니까? 운전수를
잡아다가 족칩시다."
  "그래, 이제는 도리 없어. 그놈의 자식을
잡아다가 족치기라도 해서 입을 열게
해야겠어."
  한창우도 마침내 장면의 전속 운전사를
잡아다 족치는 데에 동의했다.
  치안국 인사계장 노영균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제가 가서 데려오겠습니다."
  그는 이 한마디를 남겨 놓고 밖으로
나갔다.
  노영균이 스스로 자청해서 나선 것은
그가 전속 운전사의 집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 노영균이란 인물에
대해서는 미처 소개할 겨를이 없었지만
동시에 총리 경호대장으로 임명됐던
인물이었다. 그랬다가 그는 1961년 3월
치안국 인사계장으로 자리를 바꿔
앉았었다. 노영균은 이날 오전에도 장면의
전속 운전사의 집을 찾아간 일이 있었다.
  "총리께서 어디에 은신하셨는가?"
  노영균이 끈질기게 물었으나 전속
운전사는 그저 <모른다, 모른다>로만
일관했던 것이다.

  오후 1시.
  주한 미국 대리대사 마샬 그린은 그의
생애에 있어 가장 맛없는 점심을 먹었다.
청와대의 전속 요리사가 아무리 수준급
이상의 요리를 정성들여 내놓았다 하더라도
그의 입에는 쓴 약이나 마찬가지였을
어떻게 해서든 윤보선을 설득해서
호헌하도옥 하려 했던 그의 노력도 수포로
돌아가고 말았기 때문이었다.
  점심식사가 끝나자 그린은 물러가고자
식탁에서 일어섰다. 윤보선은 그의 곁으로
다가가서 악수를 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나는 대통령으로서 호헌이 얼마나
중요하냐 하는 것을 잘 알고 있소. 그러나
국가가 있고서야 호헌도 할 수 있는 게
아니겠소?"
  윤보선은 끝까지 자기의 견해가
정당하다는 것을 재인식시키려 들었던
것이다.
  "각하, 각하의 오늘 이 결정에 따라
대한민국엔 군정이 수년간 계속될
것입니다."
네 배 꼴리는 대로 하라는 모멸적인
말이었다.

  오후 1시 15분.
  장도영이 이번에는 혼자서 청와대를
방문했다.
  "어찌 또 들어왔소?"
  윤보선이 물었다.
  "각하, 군사혁명위원회에서 참모총장인
제가 계엄사령관직을 맡아야 한다고
야단입니다. 생각다 못해서 각하께 의논을
드리려고 찾아뵈었습니다."
  생각 탓인지 장도영의 표정은 꽤나
번민스러운 것 같았다. 사실 그는 여태껏
쿠데타 주체자들인 <중령>들한테 시달릴
대로 시달리다가 청와대를 찾아왔던
  "총장은 왜 아직도 태도를 결정하지
못하고 있는가? 총장이 마냥 애매모호한
태도만 취하려 한다면 차라리 육군본부를
포격해 버리고 말겠소!"
  되풀이 언급하게 되지만 군대에서 중령과
중장의 계급 차이는 하늘과 땅 만큼이나
까마득하다. 그런데도 쿠데타를 일으킨
중령들한테는 중장 따위의 계급은 안중에도
없었다. 그들이 필요로 하는 것은 <육군
참모총장>으로서의 직책이었지 장도영이나
그의 계급은 아니었다.
  장도영이 이렇게 시간을 끌며 계엄사령관
취임을 승락하지 않고 있었던 것은
매그루더와 그린이 장면 정부를 지지하는
성명을 냈기 때문이었다. 장면 정부
지지성명을 낸 이상에는 후속 조치가 있을
기미가 눈꼽만큼도 보이지 않는 것이다.
그렇다고 언제까지나 우유부단한 태도만을
취하고 있을 수도 없는 일이었다. 그래서
대통령 각하를 뵙고 나서 태도를 분명히
하겠다 하고는 청와대로 달려왔던 것이다.
  "각하, 어떻게 했으면 좋겠습니까?"
  장도영이 재차 물었다.
  윤보선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이 사태를 수습하는 데 있어서는 그래도
장 총장이 적격이라고 생각하오. 일단
계엄사령관 직책을 수락하고 봅시다.
군사혁명을 일으킨 장본인들이
게엄사령관을 맡게 되면 사후 수습에
원활치 못한 일이 일어날지도 모르는
일이니 말이오. 이런 점을 배려해서 우선
다급한 불길부터 잡도록 하시오. 장 총장이
  윤보선의 말을 듣고 나자 장도영의
얼굴에서 금세 근심이 날아가고 환하게
화색이 감도는 것이었다. 쿠테타가 실패로
돌아가더라도 대통령 윤보선과 상의해서
계엄사령관직을 맡았던 것인 만큼 문제될
것은 없게 된다고 그는 속으로 셈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오후 1시 40분.
  참의원 의장 백낙준(白樂濬)을 위시해서
[동아일보] 사장 최두선(崔斗善),
[조선일보] 회장 홍종인, [한국일보] 사장
장기영(張基榮) 등이 속속 청와대로 달려
들어왔다.
  매그루더가 청와대를 물러나가자
윤보선은 비서실에 앞의 사람들을 불러오라
명해 놓았었다. 윤보선은 그들과 마주앉자
소개했다. 그런 다음 그는 네 사람의
의견을 물었다.
  "내가 내린 결단에 대해서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시오?"
  백낙준이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대꾸했다.
  "현 상황에서 대통령께서 취하신 조처는
잘하신 것 같습니다."
  백낙준이 이렇게 말하자, 세 사람도
동감이라는 듯 고개를 가볍게 끄덕였다.
  "동족끼리 피 흘리는 사태가 일어나선 안
될 것입니다."
  이것은 홍종인의 의견이었다.
  "문제는 야전군에서 어떻게 나올 것인지
그것이 걱정입니다."
  야전군의 동정에 대해서 걱정을 하고
  "대통령께서 서울의 군부 봉기상태는
대통령이 수습할 테니까 일선 장병들은
동요하지 말고 주어진 임무에 충실하라는
친서를 전달하면 어떠할는지요?"
  이런 건의를 한 것은 최두선이었다.
  윤보선은 초청 인사들이 모두 한결같이
그가 취한 조치를 잘했다고 긍정적인
태도를 보이자 지극히 만족했다.

  오후 2시.
  제1군 사령부 사령관실. 이한림이
참모회의를 소집한 것이 이 시간이었다.
서울로 보낸 밀사한테서 아무런 소식이
없자 그는 참모회의를 소집해서 참모들의
의견을 물었다.
  "제관들, 군사 쿠데타에 우리
것인지 기탄없이 의견을 개진해 주기를
바라겠소. 우리 제1군은 여기에 어떻게
대처해 나가야 한다고 생각하오?"
  "야전군의 동의 없는 군사혁명은 절대로
성공할 수 없습니다. 군사혁명위원회를
야전군 사령부로 옮겨 오지 않는 한 혁명을
지지해서는 안 됩니다."
  "유혈사태만은 절대로 막아야 합니다.
유혈사태를 일으키게 되면 내란으로
확대되지 않는다고 장담하기도
어렵습니다."
  "유혈방지에는 동의하지만 쿠데타는
지지할 수 없습니다."
  참모회의의 대체적인 흐름은 쿠데타를
지지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다.
  유혈을 방지해야 한다면서 쿠데타는
써야 한단 말인가? 바로 이것이 문제였다.
쿠데타를 분쇄하자면 어쩔 수 없이
진압군을 동원할 수밖에 없는데 유혈사태를
빚지 않고 과연 쿠데타군을 진압시킬 수가
있을까? 참모들의 의견을 듣고 나자
이한림이 이렇게 결론을 내렸다.
  "일단 야전군의 태도 결정을 보류해
두겠소."
  서울의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또 서울로 밀파한 밀사가 어떤 회신을
가지고 오는지 그 결과를 봐 가지고
이한림은 그 자신의 결단을 내릴 결심을
했다.


  청와대를 물러나온 장도영은 다시 미8군
사령부로 매그루더를 찾아갔다.
  "아무래도 쿠데타측의 요구대로 내가
계엄사령관직 취임을 승락해야 할 것
같습니다."
  "지금 나는 쿠데타를 진압할 계획을 세워
놓고 있는데 제너럴 장이 계엄사령관직
취임을 승락해 가지고 뭘 어쩌겠다는
거요?"
  매그루더는 다분히 힐난하는 말투였다.
  "장군, 내가 끝까지 버티고 있다가는
육군본부 안에서 유혈사태가 벌어질 위험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전제하고 그는 육군본부 안의
공기가 얼마나 험악한가를 대충 설명했다.
그런 다음 그의 이해를 촉구했다.
  "이 문제에 대해서는 이미 윤
대통령하고도 상의를 해서 그분의 동의를
얻었으니 장군께서도 양해해 주셨으면
고맙겠습니다."
  매그루더는 한동안이나 말이 없다가
간신히 입을 열었다.
  "쿠데타를 진압해야겠다는 내 결심은
확고하오. 그러니 그리 알고 장군 문제는
장군이 알아서 처신하시오."

  오후 3시 30분.
  경향신문사 사장실에서는 장면의
운전수에 대한 고문(?)이 벌써 1시간 30분
이상이나 계속되고 있었다.
  "이놈아, 지금이 중대한 고비란 말이다.
우리가 장 총리의 은신처를 알아야
쿠데타를 진압할 수 있단 말이다. 그러니
  노영균이 장면의 전속 운전수를이리
데려온 뒤부터 이 한 가지 사실을 알아내기
위해서 닥달을 했으나 장면의 충직스러운
이 운전수는 그저 <모릅니다> 이 한마디
대답뿐이었다.
  참다 못한 한창우, 선우종원, 조연하는
체면불구하고 주먹을 날렸으나 전속
운전수는 코피가 터지고 눈두덩이에
주먹만한 혹을 달면서도 여전히 그저
<모릅니다>만 되풀이하고 있을 뿐이었다.
  한창우는 닥달을 하다 그만 제풀에
지치고 말았다. 선우종원도 지쳤고
조연하도 지쳤다.
  같은 시각.
  을지로 입구에 있는 장면의 공보비서관인
박춘거(朴春拒)의 집. 인사동 김영태의
송원영이 박춘거의 집으로 찾아온 것이
조금 전이었다.
  영어가 능통한 박춘거는 장면의 외국인
담당 공보비서였다. 그는 키가 훤칠하게 큰
데다가 눈이 움푹 들어가고 눈썹이 굵어
한국인이면서 꼭 서구인 인상을 풍기는
미남형이었다. 송원영이 박춘거를 찾아온
것은 그가 영어에 능통하기 때문에
매그루더와 연락을 취하기 위해서였다.
송원영은 박춘거를 대하자, 오전에 미8군
사령관과 통화를 했던 내용을 설명하고
그에게 다시 미8군 사령부에 전화를 걸도록
일렀다.
  박춘거는 전화를 걸었다.
  "지금 우리가 그곳으로 가겠는데
쿠데타군의 검문을 뚫고 용산의 사령부까지
갈 방법이 없다."
  그랬더니 전화를 받은 부관이 묻는
것이었다.
  "지금 당신들 위치가 어딥니까?"
  "을지로 입구에 있습니다."
  "그럼 이쪽에서 차를 보내겠습니다. 어떤
모습으로 어디서 대기하겠습니까?"
  "곤색 싱글을 입고 흰 모자를 쓴
차림입니다. 저는 키가 6척입니다.
그만하면 알아보시겠습니까?"
  "예, 좋습니다. 지금이 3시 30분이니까
4시 정각에 을지로 입구 남쪽가도에서
기다리십시오."
  이렇게 해서 송원영과 박춘거는 미8군
사령부로 갈 수가 있었다. 한국인이
운전하는 덮개로 씌운 지프가 그들을
태우러 왔던 것이다.
매그루더의 옆에는 건장한 인상의 50대
대령이 배석하고 있었다.
  두 사람을 대하자 매그루더가 먼저 입을
열었다.
  "귀하가 대동한 통역을 쓰기를 원하면
그렇게 하시오. 나에게도 통역 장교가
있기는 하지만."
  매그루더는 먼저 통역문제를 제기했다.
  그때 마침 육군 중령 계급장을 단 해맑은
한국군 중령이 들어왔다. 뒤에 안 일이지만
이 한국군 육군 중령의 이름은
한상국(韓相國)이었다. 그가 바로
매그루더의 통역담당이었던 것이다.
  한상국이 사령관실로 들어온 것을 보자
순간 송원영의 마음이 꺼림칙해졌다.
우리들이 찾아온 목적을 그가 알게 되면
때문이었다. 그래서 송원영은 이 자의
감정을 건드려 놓는 일을 삼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닙니다. 장군의 통역에게 수고를
부탁하겠습니다."
  매그루더는 한시바삐 장면 총리를 만나야
한다고 누누이 강조했다. 그는 지금 서울에
진주한 반란군은 3,600명밖에 안 되며
우리는 실력으로 그들을 격퇴할 수 있다고
자신감을 피력했다.
  "오늘 오전 윤 대통령을 만났더니 그는
유혈참극을 원치 않는다고 하는 게
아니겠소. 그리고 지금 장도영 장군이
쿠데타군 총사령관으로 되어 있지만 실은
그것도 사실이 아니오. 조금 전에도 나한테
다녀갔는데 그는 아직도 쿠데타를 인정치
있다면 이 사태는 쉽게 수습될 수가 있는
거요."
  한시바삐 장면과 연락이 닿을 수 있도록
해달라고 요청하는 것이었다.
  매그루더의 말을 듣자 송원영의 가슴은
고동치기 시작했다. 매그루더가 쿠데타를
진압할 결심을 굳히고 있는 이상 쿠데타는
수포로 돌아가고 만다는 확신이 섰기
때문이었다.
  "장 총리를 속히 찾아서 장군께 연락을
취하겠습니다."
  송원영과 박춘거는 사령관실을 물러
나왔다.

  오후 4시 30분.
  청와대와 미8군 사령부를 방문하고
참모회의를 소집했다. 그는 윤보선과
주고받은 대화내용을 소개하고 쿠데타측에
가담할 것을 선언했다.
  "지금의 위기상황을 슬기롭게 극복하는
길은 내가 계엄사령관직을 맡는 것만이
최선의 길이라 믿어져 계엄사령관직을
맡기로 했소."
  그는 윤보선을 만나서 주고받은
대화내용에 대해서는 소개했으나
매그루더를 만난 사실에 대해서는
덮어버리고 말았다. 매그루더를 만나서
주고받은 대화내용을 소개했다가는
참모들이 동요하게 되리라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참모회의에서 자기의 태도를 밝히고 난
장도영은 박정희와 단 둘이 만나 역시
주고 말했다.
  "혁명과업 수행을 위해서 계엄사령관직을
맡겠소."
  "잘 생각하셨습니다."
  박정희는 입으로 잘 생각했다고 반가운
듯이 말을 했으나 그의 표정은 <네가 이
직책을 맡지 않으면 어떻게 하겠단
말이냐?> 하고 조소하는 듯한 감정이 어려
있었다.
  "그런데 말이오, 박 장군. 혁명을 한
이상에는 정권을 인수해야만 혁명정부를
출범시킬 수가 있을 텐데 박 장군한테 무슨
좋은 구상이라도 있소?"
  장도영이 물었다.
  "총장 각하께서도 익히 아시다시피 지금
장면 총리가 도피중에 있지 않소? 장면
인수할 수가 있겠소? 그러니 정권
인수문제는 총장 각하가 윤 대통령하고
상의해서 해결해 주셨으면 합니다."
  "그러면 그 문제에 한해서 나한테 전권을
위임해 주겠소?"
  "물론입니다."
  "알겠소. 그러면 다시 청와대를 방문해서
대통령하고 상의하도록 하겠소."
  장도영이 다시 청와대를 방문할 뜻을
비추자 박정희는 갑자기 생각이 났다는
듯이 말했다.
  "총장 각하, 기왕에 청와대를
방문하시려거든 대통령께서 사태수습을
위해서 대 국민방송을 해달라고 요청해
주십시오."
  "대 국민방송?"
하셨으니 그건 뭐 어려운 부탁도 아니지
않겠습니까?"
  "알겠어요. 부탁해 보겠소."
  장도영은 다시 또 청와대로 달려갔다.
이때가 오후 5시 반에서 6시 사이였다.
  "어찌 또 들어왔소?"
  장도영을 대하는 윤보선의 태도는 어딘가
좀 냉랭했다. 4시간 전쯤에 만났을
때하고는 그의 태도가 사뭇 달랐다.
  "대통령 각하, 지금의 사태를 한시바삐
수습하자면 장명 총리를 위시한 전
각료들이 속히 나와주어야만 하겠습니다.
어떻게 그 사람들을 불러내 올 방법이
없겠습니까?"
  "그건 옳은 말이오만, 겁을 먹고
숨어버린 사람들이 신변에 대한 보장도
  "대통령 각하, 장면 박사나 내각의
각료들 신변안전에 대해서는 제가 책임을
지겠습니다. 절대 책임을 질 테니 안심하고
나오라 해주십시오."
  장도영은 아주 자신만만하게 신변보장을
책임질 것을 강조했다.
  "알겠소이다. 장 총장이 그들의
신변보장을 책임을 지겠다면 내 그들더러
속히 나와서 사태수습에 전력하라 권해
보겠소이다."
  윤보선이 수락을 했다. 그러나 그 말투가
그리 자신이 있는 것 같지는 않은 느낌을
주었다.

  같은 무렵.
  장면 수색작전에 나서 있던 노영균이
조인호와 우연히 딱 마주쳤다.
  "아니 조 경감 아니오?"
  노영균이 조인호의 어깨를 툭 치자
뒤돌아본 조인호는 무척 당황하는
것이었다. 노영균은 그러한 조인호를 끌고
골목으로 들어갔다. 무척 반가운 표정을
지으며 노영균은 물었다.
  "그렇지 않아도 지금 장 박사의 측근들이
장 박사를 찾느라 총동원이 돼 있소. 장
박사께서는 지금 어디에 은신해 계시오?"
  "노 계장님, 저는 모릅니다."
  조인호는 시침을 뚝 뗐다.
  "몰라?"
  "예, 모릅니다."
  "아니 여보, 조 경감, 오늘 새벽에 조
경감이 모시고 반도호텔을 떠났다던데
  노영균은 따지듯이 되물었다.
  "장 박사님을 모시고 반도호텔을 떠난
것은 사실입니다만, 저는 도중에서 내렸기
때문에 어디로 가셔서 은신했는지
모릅니다."
  "그게 사실이오?"
  "예, 사실입니다. 제가 왜 노 계장님께
거짓말을 하겠습니까?"
  노영균이 다시 한번 따졌다.
  "분명 모른단 말이지?"
  "예, 모릅니다."
  이런 경우를 두고 <운명>이라고 하는
것일까?
  노영균이 조인호를 만난 5월 16일 오후
6시. 이 시간까지는 아직도 희망은 있었다.
그러므로 조인호가 장면의 은신처를
제자리로 수정해 놓을 충분한 시간적
여유가 있었다.
  그것을 조인호는 모른다고 딱 잡아뗐던
것이다. 곤두박질하려는 역사를 바로잡을
절호의 기회가 조인호의 고지식함으로 해서
또다시 그 기회가 잃어지고 말았던 것이다.
  이날, 장면과 함께 칼멜수녀원에 은신해
있던 조인호는 혼자서 집을 지키고 있을
딸아이를 걱정했다. 조인호 자신이
고아로서 자랐기 때문에 그는 혈육에 대한
정이 남달랐다.
  조인호가 하도 딸아이 때문에 근심에
싸여 있자 보다 못한 장면은 외출을
허락했다.
  "그럼 잠시 집에 다녀오게. 집에
다녀오는 길에 정세도 좀 살펴보고
것일세."
  그래서 혜화동에서 전차를 타고 을지로
4가에 와서 내렸던 참이었다. 그러면
조인호는 장면의 전임 경호대장인
노영균에게 어째서 장면의 은신처를 가르쳐
주지를 않았던가?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그것은 그의 고지식한 성품 때문이었다.
  천주교 주교인 노기남의 보살핌으로
잔뼈가 굵은 조인호는 장면이 거두어
경호원으로 측근에 둠으로써 경감에까지
승진할 수가 있었다. 그러므로 그는 장면의
지시 없이 그 자신의 의사로 문제를 처리한
일이 단 한 번도 없었다. 노영균을 만났을
때에도 장면에게 물어볼 수도 없는 일이고
해서 일단 <모른다>로 일관했을 것이다.
  이것이 이미 정해진 <국가적 운명>이
           슭틈構藉?어찌 이다지도 자꾸 일이 꼬일
수만 있었겠는가! 인간에게 운명이 있듯이
나라에도 운명이라는 게 있는 것이 아니냐
하는 생각이 자꾸 안개 퍼지듯 일기만
한다.












  10. 곡! 제2공화국


  밤 10시.
  KBS에서는 대통령 윤보선의 특별담화가
방송되고 있었다.

  친애하는 국민 여러분,
  우리나라는 지금 중대한 시국에 놓여
있습니다. 오늘의 사태를 우리가 어떻게
수습하느냐 하는 것에 우리나라의 운명이
달려 있습니다. 우리는 지금 이 사태를
무사히 수습해야 하고 공산주의를 막는
힘에 약화를 초래해서는 안 되는 일입니다.
  지금 전세계는 우리를 주시하고
냉정하게 이 나라의 일을 판단해야 하며
희생 없이 최선의 방법으로서 이 사태를
수습하는 데 우리의 성의와 노력을
다해야겠습니다.
  나는 지금 이 중대한 사태에 처해서
혼란방지와 질서유지에 국민 여러분들이
특별히 노력해 주시기를 간절히 호소하는
바입니다. 더욱이 장 총리 이하 전
국무위원은 한시바삐 나와서 이 중대한
사태를 성의있게 합법적으로 처리하여
주기를 바랍니다. 군사혁명위원회의 말에
의하면 국무회의에 출석하는 모든
국무위원들의 신변은 보장된다고 합니다.

  쿠데타가 일어났는데 일을 합법적으로
처리하라는 것이 무슨 소리였을까?
사령관한테 명령해서 쿠데타를 진압하는 일
외에는 달리 길이 없다. 정권이 호헌을
위해서 쿠데타 진압을 명령하는 것만이
합법적인 행위였기 때문이다.
  윤보선의 특별담화 방송을 듣고 있던
장면은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감정을
억제하기가 어려웠다.
  (내가 뭘 잘못했어? 내가 뭘 잘못했기에
쿠데타를 당해야 한다는 거야?)
  종일 이 한 가지 생각에 얽매여 번민을
해오고 있던 참이었다.
  그런데 윤보선이 한시바삐 나와서
합법적으로 일을 처리하라는 것이다.
두말할 것도 없이 윤보선의 이 말은 <어서
나와서 쿠데타 쪽에 정권을 넘겨 주라>는
간접적인 권고 이외에 달리 해석할 수가
  (내가 민주주의에 입각해서 정치를
해왔다는 것은 누구보다도 <해위>가 더 잘
알고 있을 터인데 쿠데타를 지지하는
방송을 해?)
  장면의 속이 부글부글 끓을 만도 한
일이었다.
  윤보선의 특별담화가 방송된 지 5분도 안
되어 청와대의 전화벨이 요란하게 울렸다.
부흥부장관 주요한(朱耀翰)으로부터 걸려온
전화였다.
  "사태수습을 위해서 청와대로 오라면
가겠으나 신변을 어떻게 보장한다는
것입니까?"
  "계엄사령관 장도영 총장한테 직접
확약을 받았으니 안심하고 협력해 주시오."
  윤보선은 대꾸했다.
없습니다. 장도영의 말을 누가 믿는단
말씀입니까?"
  주요한은 비꼬듯이 반문했다.
  이 말에 윤보선은 짜증을 부렸다.
  "그럼, 이 판국에 뭘 어쩌겠다는 거요?
달리 수습할 방법이 없지 않소?"
  "신변보장을 장도영한테 미루지 말고
각하께서 책임을 져 주십시오. 그러면
우리는 나가서 사태수습에
노력하겠습니다."
  "내가?"
  "그렇습니다. 대통령 각하!"
  그리고는 전화가 뚝 끊겼다.
  (목숨은 두려워할 줄 알면서 책임을 질
줄은 모르니 쿠데타를 당할 밖에.)
윤보선은 송수화기를 내려놓으면서 마치
냈다.
  "김준하 비서를 들라고 해!"
  윤보선은 주요한의 통화를 끝내자 비서관
김준하를 들라고 했다.
  김준하가 들어오자 윤보선은 지시했다.
  "야전군의 이한림 장군하고 각
군단장한테 보낼 친서를 준비하게."


  제1군 사령관 이한림을 위시해서 각
군단장에게 보낼 친서를 마련하라는
윤보선의 지시를 받은 비서관
김준하(金準河)는 몇 사람의 동료들과 함께
끙끙거리며 밤을 새다시피 해서 친서
원고를 마련했다.
  김준하는 윤보선이 침실에서 나오기를
기다렸다가 원고를 보여 주었다.
  "잘됐군먼, 속히 서둘러 정서하도록
하게."
  김준하는 원고가 잘됐다는 칭찬을 듣자
그것을 서둘러 정서했다.
  그때, 미8군 사령관이 진압작전을 펼
모양 같다는 정보가 입수되었다. 진상은
어떠했던가?

  5월 17일 오전 8시.
  매그루더는 미8군 사령부 회의실에서
<야전군을 주측으로 한
서울진압작전회의>를 위한 참모회의를 연
것은 사실이었다. 그러나 매그루더는
<진압작전>을 위한 참모회의를 연 것은
제1군에 출동명령을 내린 것은 아니었다.
  아마도 유일한 헌법기관으로 남아 있는
대통렬 윤보선이 진압작전을 반대하고 있는
데다가 장면의 요청이 없기 때문에
출동명령을 내리는 것만은 보류해 놓고
있었던 것 같다.
  그 대신 이날 아침 미8군 사령부를
방문한 계엄사령관 장도영에게 매그루더는
명령했다.
  "제너럴 장, 본관은 귀관에게 본관의
작전지휘권을 침해한 한국군의 처사에
대해서 강경하게 항의하는 동시에 유엔군
총사령관으로서 6군단 포병단과 해병여단의
원대복귀를 강력하게 명령하오."
  어제까지만 해도 매그루더와 장도영의
우정은 남이 부러워할 정도로 짙었다.
갔다. 장도영에 대한 매그루더의 차거운
<명령>이 그것을 웅변으로 입증해 주고
있었다.
  매그루더로부터 6군단 포병단과
해병여단의 원대복귀 명령을 수령한
장도영은 여간 입장이 난처하지가 않았다.
만일 이 명령에 복종치 않을 경우 분노한
매그루더는 군법회의에 회부할 것이라는
것을 피부로 느낄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육군본부로 돌아온 장도영은 이 문제를
박정희와 의논하지 않을 수 없었다.
  "어쩌면 좋겠소, 박 장군? 매그루더의
태도가 저토록 강경하니 만일 저 사람의
명령을 거부했다간 한.미군의 충돌로
발전할지도 모르겠으니 말이오?"
  얘기를 듣고 난 박정희도 난처하기만
  "혁명 거사군에게 원대복귀를 명령한다는
것은 우리더러 손을 들라는 얘기가
아닙니까? 상황은 아직도 유동적인데
거사군은 모조리 원대복귀시키게 되면
우리는 팔 다리를 잘리는 것과 무엇이
다릅니까?"
  박정희는 매그루더의 명령에 따를 수
없다는 태도를 분명히 밝혔다.
  "박 장군, 지금 이때에 매그루더와
감정적인 대립을 보이는 것은 우리한테
불리하면 불리하지 결코 이로운 것이 못 될
것 같소."
  장도영은 어떻게 해서든 박정희를
설득하려 들었으나 그는 좀처럼 고개를
끄덕이려 하지 않았다.

  청와대에는 참의원 의장 백낙준을
위시해서 윤보선의 초청을 받은 사람들이
속속 모여들었다. 민의원 부의장
이영준(李榮俊), 신민당 당수
김도연(金度演), 서울대학교 법과 대학생
신태환(申泰煥), 고려대학교 교수
남흥우(南興祐) 등이었다.
  윤보선이 이들 몇 사람을 초지한 것은
야전군에 친서를 보내는 데 대한 의견을
묻기 위해서였다. 윤보선은 야전군에
친서를 보내는 문제에 대해서 그만큼
신중에 신중을 기했던 것이다.
  왜냐하면 만일 매그루더가 어떤 방법을
쓰든 쿠데타를 진압해서 장면 정권을
그대로 유지시켜 놓을 경우, 야전군에
친서를 보내 진압부대의 출동을 저지하려
것은 너무나 뻔한 일이었기 때문이었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상황에 따라서는 윤보선의
행위에 법적인 제재가 가해지지 않는다고는
누구도 단언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런데 <동족간에 피를 흘리지 않기
위해서>라는 명분으로 야전군 사령관한테
<자제를 요청하는 친서>를 보내는 문제에
대해서 다른 의견을 내놓거나 잘못된
처사라고 비판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모두가 한결같이 이 시점에서 대통령이
취하려는 조처는 가장 적절하고 옳은
처사올시다 하면서, 이구동성으로 찬성해
주는 것이었다. 윤보선은 거듭
만족스럽기만 했다. 만약에 있을지도 모를
대한민국의 불행을 혼자의 힘으로 막아내고
있다는 긍지도 있었다.
인사들이 돌아간 직후였다.
  "장 장군, 지금 곧 야전군에 밀사를
보내려고 하니 장 장군이 그들이 무사히
사명을 완수할 수 있도록 편의를 제공해
주시오."
  이 전화를 받은 장도영은 무척이나
기뻤다. 그는 박정희에게 그 말을 전했다.
  "여보 박 장군, 대통령이 야전군에
밀사를 보내겠다고 알려왔소. 밀사의
삼여이 출동만류에 있는 것인즉, 매그루더
장군의 명령을 이행해도 되지 않겠소?"
  박정희는 한동안이나 생각하는 눈치였다.
  "그럼, 6군단 포병단만 원대복귀시키도록
합시다."
  한참만에 그는 일부 병력의 철수에만
동의를 했다.
사령관들도 대통령의 지시에 따르지 않을
수 없을 게 아니오? 그러니 매그루더
장군의 명령대로 해병여단도
원대복귀시키도록 합시다."
  "해병여단만은 어려울 것 같습니다."
  박정희는 해병여단의 원대복귀만은
동의하려 들지 않았다.
  "하여간에 대통령께서 일선에 보낼
밀사가 무사히 사명을 완수할 수 있도록
편의제공을 요청하고 있으니, 이 문제를 박
장군이 알아서 조치해 주시오."
  그리고 장도영은 밖으로 나갔다.

  오후 2시.
  두 대의 지프가 청와대 본관 앞으로
올라왔다. 야전군으로 떠날 밀사들을
군사혁명위원회에서 보낸 차량이었다.
  밀사의 임무를 띠고 야전군으로 떠나도록
되어 있는 청와대 비서관은 김준하를
위시해서 김남(金楠), 윤성구(尹聖求),
홍금선(洪金善) 등 네 명이었다.
  김준하와 김남을 1개조로 한 비서관들은
제1군 사령관 이한림과 그의 휘하의 군단장
민기식, 최석을 만나는 것이 주어진
사명이었고 윤성구, 홍금선 1개조로 한
비서관들을 박임항, 김응수, 임부택을
만나는 것이 주어진 사명이었다.
  그들이 여의도에 도착해 보니 이미
그들을 태우고 야전군으로 날아갈 L-19기가
준비되어 있었다. 이 비행기에 오를 때 네
명의 비서관은 그들이 수행해야 할 사명이
얼마나 중대한가를 새삼스럽게 느끼는 것

  오후 2시 같은 시각.
  해병대 사령관 해병 중장 김성은이 미8군
사령부로 매그루더를 방문했다. 이미
쿠데타 지지로 돌아서 있던 김성은이
매그루더를 방문한 것은 미8군의 동태를
살피기 위해서였다.
  김성은을 맞은 매그루더는 노여움부터
터뜨렸다.
  "제너럴 김, 내 명령은 해병여단이
김포에 있도록 되어 있는데 서울 진입은
누구 명령이오? 귀관은 한국 해병대가
본관의 작전지휘권을 무시하고 독단적인
행동을 해도 좋다고 생각하시오?
해병여단을 즉시 원대복귀시키시오."
  이 명령에 김성은은 매그루더의 감정을
목소리로 응대했다.
  "장군, 쿠데타를 하는 사람들이 상관의
의향을 물어가면서 쿠데타를 하겠습니까?
그들은 이미 목숨을 걸고 쿠데타를 한
장병들입니다. 내가 명령한다고 따를
사람들이 아닙니다."
  "그러면 해병사단을 동원하면 될 게
아니오? 해병사단을 동원해서 야전군과
함께 쿠데타군을 서울 외곽으로 내몰도록
하시오. 병력 수송은 우리가 책임지겠소."
  그 말을 듣자 김성은은 그만 풀썩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장군, 해병사단을 끌어들여
쿠데타군으로 둔갑시키란 말씀입니까.
해병사단을 동원할 경우 쿠데타군에
합류하려 들지언정 동료 해병대를 문책하는
아십니까? 해병대는 단결을 가장 소중히
하고 있는 군대니 말씀입니다."
  한데, 박정희가 해병대의 원대복귀엔
한사코 반대 입장을 취하고 있는 것과는
달리 장도영은 창경원에 주둔해 있는
해병여단 사령부로 찾아와 직접 윈대복귀할
것을 명령했다.
  평상시라면 해병대가 육군 참모총장의
명령에 따를 필요는 없었다. 그러나 지금은
장도영은 군사혁명위원회 의장에
계엄사령관이었다. 그의 명령에 따르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렇다고 또 순진하게
명령에 따를 수만도 없었다. 그래서 해병대
지휘관들은 숙의 끝에 명령에 따르는 체
흉내만 내기로 했다.
  어떻게 했던가? 태반의 해병대 병사들은
동원한 해병대 수송차량 30대에 대당
6명씩의 병사를 태운 다음 포장을 늘리고
철수하는 척만 했던 것이다. 30대의 트럭에
대당 6명씩의 병사를 태워봐야 모두
180명이면 족했던 것이다.
  5월 17일 저녁, 창경원 정문 앞에서
30대의 트럭이 열을 지어 김포로 향했다.
누가 봐도 어김없는 해병대의
철수작전이었다.
  이렇게 일단 김포로 철수하는 척
장도영의 눈을 속여 180명만 철수시켰던
것이나, 이들은 5월 18일 새벽까지 각개
약진으로 180명 전원이 다시 창경원으로
돌아왔던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아직도
상황이 유동적이었던 5월 17일 오후
6시경의 일이고.
희극적인 쇼도 벌여야 했던 것이다.


  5월 17일 오후 2시 40분경.
  김준하, 김남 두 비서관이 제일 먼저
찾아간 곳은 제1군 사령부였다.
  원주 비행장에 도착하자마자 두 사람은
제1군 사령부 안에 있는 미 고문단실로
안내되었다.
  거기에는 이한림이 헌병참모를 거느리고
대기하고 있었다.
  이한림은 두 사람이 자리를 잡고 앉자
거친 목소리로 물었다.
  "쿠데타 지휘관들의 정체를 당신들은
알고 있소?"
알고 있느냐 하는 질문 같았다. 두 사람은
얼른 뭐라 대꾸할 말을 찾지 못했다. 이 두
사람은 우선 이한림의 위엄에 주눅이
들었던 것이다.
  군복이란 어지간한 사람은 압도해 버리는
마력을 지니고 있다. 거기다 어깨에
번쩍거리는 별이라도 달고 있고 보면, 괜히
외경심이 일게 마련이다.
  이한림은 우락부락하게 생긴 모습이
아니라 영화배우를 연상케 할 정도의
미남이었다. 그런데도 오랜 세월
지휘관으로서 갈고 닦은 위엄이 몸에 배어
있었던 탓인지 초대면의 보통사람들은 그의
몸에서 풍기는 위엄에 압도당하기가
일쑤였다.
  이한림이 말을 이었다.
쿠데타는 당연히 진압돼야 하오. 그렇기는
하되 우리는 진압군을 출동시킨다 해도
유혈사태 없이 상황을 수습할 생각이오."
  김준하는 간신이 입을 열었다.
  "장군님, 여기 윤 대통령 각하의 친서를
휴대해 왔습니다. 각하께 전해드리라고
해서 가져왔습니다."
  그러면서 김준하의 안주머니에서 친서를
꺼내 이한림 앞에 놓았다. 이한림은 그러한
김준하를 한번 날카롭게 쏘아보더니 편지를
집어 들어 알맹이를 꺼내 읽기 시작했다.
  한동안 정적이 흘렀다. 이한림은 친서를
읽고 나서도 한동안 골똘히 생각에 잠기는
것이었다. 그렇게 정적이 흐르는 동안 두
사람의 가슴속은 조마조마하게 타들어
갔다. 이한림이 어떤 반응을 보일지를
  이윽고 이한림이 입을 열었다.
  "잘 알았소. 대통령 각하의 지시에
따르겠다 전해 주시오."
  순간, 두 사람은 알게 모르게 휴우 하고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오후 3시.
  한편 제1군 사령부를 방문한 윤보선의
밀사가 미 고문단실에서 이한림과 마주앉고
있는 그 시각.
  군사혁명위원회는 삼군 참모총장 회의를
소집했다. 이것이 아마도 세번째의 삼군
참모총장 회의였을 것이다.
군사혁명위원회가 삼군 참모총장 회의를
소집한 것이 <군사혁명을 지지한다>는
그들의 공식적인 지지성명을 얻어내고자
  해군 중장 이성호, 공군 중장 김신은
육군에서 쿠데타를 일으켜 놓고 오라가라
하는 데에 적잖이 자존심이 상했으나
그렇다고 <군사혁명위원회의 지시>를
무시할 수도 없었다.
  더구나 육군측에서 해.공군 참모총장과
해병대 사령관을 살해해 버릴 계획까지
세워 놓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고 난
뒤로는, (이놈의 쿠데타 분쇄해 버려?)
하는 마음도 들었다.
  그들이 쿠데타를 분쇄하자면 못할 것도
없었다. 해군은 그만두고라도 공군에서
전투기 몇 대만 띄워도 고작해야 제6군단
포병단과 해병여단의 탱크 몇 대를
거느리고 있는 쿠데타군쯤 눈 한번
깜짝하는 사이에 분쇄해 버릴 수가 있었다.
참혹할 것이냐 하는 것을 생각하면
감정대로 행동하기도 어려웠다.
  김신이나 이성호는 군사혁명위원회에서
하라는 대로 할 수밖에 없었다. 삼군
참모총장과 해병대 사령관이 자리를 잡고
앉자 박정희가 그들의 앞에 나섰다.
  "삼군 참모총장의 공개적인 지지성명이
늦어져 심각한 부작용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특히 지지성명을 직접 녹음
방송하는 일이 시급합니다. 이 자리에서
태도를 결정해 성명을 발표해 주십시오."
  그는 요청했다.
  그들 삼군 참모총장과 해병대 사령관이
회의장에 들어섰을 때. 쿠데타 주체자들이
둘러싸고 있었다. 그중 누군가가 소리쳤다.
  "출동부대의 한 사람으로서 묻겠습니다.
우리의 혁명을 지지하는 겁니까, 아니면
반대하는 겁니까?"
  이성호와 김신은 대꾸를 하지 않았다.
침묵을 지켰다. 그러자 장도영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여기 모인 삼군 총장은 모두가 혁명을
지지한다고 했잖았소. 그러니 지지냐
반대냐 하고 묻는 것은 의미가 없어요."
  젊은 중령들을 달래듯이 말했다.
  "그렇다면 녹음을 해주시오!"
  누군가가 소리쳤다.
  한데, 이런 친구들을 뫘나. 그들은
녹음기를 준비해 놓고 있지도 않았던
것이다.
  "어서 빨리 가서 녹음기를 가져와!"
  누군가가 또 소리쳤다.
황급히 밖으로 뛰어나갔다.
  (망할 놈의 자식들, 너희놈들이 강제로
우리한테 지지성명을 얻어내려 해?
그런다고 우리가 너희놈들 강요에 못 이겨
움직일 것 같냐?)
  이성호의 얼굴에는 어느 사이엔가 분노가
역력히 어려 있었다. 그는 젊은 중령들의
말투, 행동에 적잖이 분개했던 것이다.
그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그리고는
아무 말없이 조용히 걸어나갔다. 누구도
그의 앞을 가로막지 못했다.
  이성호가 일어나 나가자, 잠시 뒤 김신도
조용히 일어나 밖으로 나갔다. 그가 돌아갈
때에도 누구도 <안 된다>고 그의 앞을
가로막지는 못했다.
  이성호와 김신, 이 두 사람은 5월 17일
전혀 없었던 것이다.
  <쿠데타는 민주주의의 적이다>라는 데
대해서 두 사람의 신념은 일치돼 있었던
것이다.

  육군본부 쿠데타 지휘본부에서 앞서와
같은 해프닝이 벌어지고 있을 때, 제1군
사령부 미 고문단실에서 이한림을 만나고
난 대통령 밀사 김준하과 김남은, 헬리콥터
편을 이용 제1군단으로 군단장 민기식을
찾아갔다. 군단장실로 안내된 두 사람이
민기식과 수인사를 나누고 자리에 앉자
민기식이 먼저 입을 열었다.
  "장면 정권에 문제가 없는 것은 아니오.
그렇다고 쿠데타를 일으키는 것이 과연
옳은 처사라 할 수 있을는지......."
것을 듣자 속으로 (이거 야단났구나) 하고
걱정을 했다. 군단장인 민기식이
쿠데타에는 반대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었다.
  (그렇다면?)
  김준하는 민기식이 어떤 행동을 취할
것인가를 점쳐 보았다. 이한림의
출동명령이 있으면 지체없이 출동할
것이라는 판단이 섰다. 그래서 얼른 친서를
꺼내 건네 주려는데 야전복 차림의 철모에
별을 하나 단 장군이 노크도 없이
들어왔다. 그는 민기식 휘하의 사단장인
박춘식(朴春植)이었다.
  그는 마치 상급자인 민기식에게 대들듯이
단호하게 말하는 것이었다.
  "저는 누가 뭐라고 해도 장면 박사
군단장께서는 군의 거사를 지지해야 할
줄로 압니다."
  박춘식의 이 한마디로 방안 공기가
갑자기 싸늘하게 식어졌다.
  김준하는 친서를 내놓는 것뿐이라는
생각이 들자 얼른 안주머니에서 친서를
꺼내 민기식의 앞에 놓았다.
  "장군께 드리라고 대통령 각하께서 보낸
친섭니다."
  민기식은 친서를 찬찬이 읽고 나자,
  "잘 알겠소. 대통령 각하께 각하의 뜻에
따르겠다 하더라고 전해 주시오."
  아주 조용히 의사표시를 하는 것이었다.
  김준하는 속으로 (아주 조용한 분이군)
하고 생각하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민기식에 이어 두 사람이 찾아간
  두 사람을 맞은 최석은 대통령 친서를
읽고 나자, 그 부리부리한 두 눈을 굴리며
호통치듯이 말했다.
  "반란은 진압돼야 하오."
  "하지만 장군, 대통령 각하께서는
동족간에 피흘리는 것을 염려하신 나머지
저희들을 장군께......."
  "아니 잠깐!"
  최석은 김준하의 말을 끝까지 들으려
하지 않았다. <아니 잠깐> 하고 말을
가로막고 도도히 자기 주장을 폈다.
  "우리 대한민국 육군사에 쿠데타라는
나쁜 선례를 남기는 것은 용서할 수가
없어요. 그러므로 쿠데타는 당연히
진압돼야 하오."
  다시 또 그 부리부리한 눈알을 굴려 두
  "대통령 각하께서는 동족간에 피를
흘리게 되는 것을 염려하고 계시지만, 그런
염려를 하실 필요는 조금도 없어요."
  단숨에 엮고난 다음, 한번 숨을 몰아쉬고
나서 다시 말을 이었다.
  "그러면 어떻게 하면 피를 흘리지 않고
쿠데타를 분쇄하느냐? 의정부, 불광동,
한강 등에 야전군 부대를 출동시켜 서울
일원을 봉쇄한단 말이오. 일주일 또는
열흘만 봉쇄해 놓고 있어 보시오. 서울
시내의 반란군은 자연 궤멸되고 만단
말이오. 아시겠소? 그런데 유혈은 무슨
놈의 유혈?"
  최석은 아주 자신만만했다.
  그는 여기까지 말하고 두 사람의 반응을
살폈다. 그렇다고 밀서를 전달하는
뭐라 반응을 보이겠는가. 어쩔 수 없이
침묵만 지키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두 사람이 전혀 반응을 보이지 않자
최석이 다시 말을 이었다.
  "육군의 명예를 더럽힌 쿠데타는 일단
제압하고 나서 그 뒤에 쿠데타군들이
뜻했던 바를 논해야 하는 거요. 대통령
각하께 우리의 입장을 그대로 보고해
주시오."
  한편 박임항과 임부택을 찾아가 전달한
윤보선의 밀서에 대한 두 군단장의 반응은
어떠했던가?
  "우리는 설혹 누가 쿠데타를 진압하러
서둘러 출동하라고 명령을 해도 그 명령에
따르지 않을 것이오."

  오후 4시라는 이 시간은 확실치가 않다.
다만 관계자들의 기억을 근거로 해서
얘기를 진행시켜 나가기로 한다.
  장면의 전속 운전수가 비로소 입을
열었다.
  "총리 각하께서는 칼멜수녀원에 은신해
있습니다."
  장면의 은신처를 실토했던 것이다.
  한창우는 그 즉시로 칼멜수녀원으로
달려가 장면을 만났다. 반가움보다도
울분이 앞섰다.
  "이게 무슨 꼴입니까? 숨어 계실 데가
여기밖에 없더란 말씀입니까?"
  한창우는 소리를 질렀다.
  장면은 대꾸가 없었다. 그저 침통한
표정만 짓고 있을 뿐이었다.
저희들한테 연락이라도 취해 주셨으면
정권이 무너지는 비극은 막을 수 있었을 게
아닙니까?"
  한창우는 장면을 계속 질책했다.
  그는 생각하면 할수록 통분했던 것이다.
어제는 그만두고라도 오늘 오전중에만
은신처를 알려주었더라면 하는 아쉬움도
있었다. 그러기만 했어도 정권유지는
무난했을 것 같았다. 그런 아쉬움이 짙었기
때문에 한창우는 체면불구하고 장면을
몰아세웠던 것이다.
  장면은 한창우의 아우성을 조용히 듣고만
있었다. 그러다가 한창우가 분한 나머지
울음을 터뜨리자 들릴 듯 말 듯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이게 천주님의 뜻인지도 모르지. 이게
맹세하거니와 나는 쿠데타를 당해야 할
만큼 잘못을 저지른 일이 없네. 내가 뭘
잘못했다는 말인가? 내게 잘못이 있었다면
민주주의대로 할려고 한 잘못밖에 더
있겠나?"

  오후 7시.
  이 시간에 이르기까지 김종필과 줄곧
행동을 같이하고 있던 최영택은 문득
쿠데타 출동병사들의 사기를 북돋워 주지
않으면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쿠데타가 벌어진 지 40시간이 넘도록
아직도 쿠데타가 확고하게 굳혀지지를
못하고 있자 출동부대의 사병들 사이에서
은연중 동요가 일고 있었던 것이다.
  그는 상황실 한켠 구석에서 생각에 잠겨
것인지 분간하기 어려운 김종필에게 다가가
그의 귀에 대고 나직이 속삭였다.
  "김 형, 출동부대 병사들의 사기를 좀
북돋워 줘야 할 것 같소."
  김종필이 번쩍 눈을 떴다.
  "최 형, 지금 뭐라고 했소?"
  최영택이 경어를 쓴 탓이었을까?
김종필도 경어로 반문했다.
  최영택이 김종필에게 경어를 쓰기 시작한
것이 바로 이 순간부터였다. 김종필이
쿠데타의 실질적인 제2인자인 이상에는
가장 가까운 사이인 자신부터 깍듯한
예우를 해야만 여타 동료들도 그 예우에
따를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최영택은 되풀이했다.
  "내가 보기엔 출동부대 병사들의 사기가
같습니다. 그러니 병사들의 사기를 북돋워
줄 필요가 있을 것 같단 말씀입니다."
  "어떻게 해야 병사들의 사기를 진작시킬
수가 있겠소?"
  "혁명군 완장을 만들어서 차게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혁명군 완장?"
  "혁명군 완장을 만들어서 차게 해주면
나는 다른 병사들하고는 다르다는 긍지가
일게 될 것이 아니겠습니까? 긍지가 일게
되면 사기가 충천해질 것은 말할 것도 없을
것이고......."
  김종필은 무릎을 탁 쳤다.
  "갑시다, 최 형!"
  김종필은 옳다는 판단이 서면 말보다는
행동이 앞섰다. 그는 벌떡 일어나기가
있었다.
  두 사람이 지프를 세운 곳은 을지로
2가에 있는 조그마한 깃발 제조업체였다.
  "이 밤 안으로 완장 7천 장만 만들어
주시오."
  최영택의 주문에 주인은 눈이
휘둥그래졌다.
  "7천 장은 고사하고 7백 장 만들기도
어렵습니다."
  주인의 대꾸였다.
  깃발 제조업체라는 것이 거의가 재봉틀
한두 대 놓고 영업을 하는
영세업체들이었기 때문이었다. 더구나
통행금지시간이 저녁 7시라 어느 업체를
막론하고 재봉공을 일찍 시간을 당겨
귀가시키고 있었기 때문에 그들을 다시
일이었기 때문에 주인이 난색을 표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이에 최영택은 손수 지프의 핸들을 잡고
여공을 데려온다, 시장에 가서 닫힌 문을
두드려 광목을 끊어 온다 하면서
한동안이나 법석을 떨어야만 했다.
  여공들이 광목을 잘라 완장을 만들고
있는 사이에 최영택은 또 도장공집을
수소문해서 도장공을 데려다가
<군사혁명위원회>라는 도장을 새기도록
했다. 그것을 완장에 찍기 위해서였다.
  이런 법석을 떨면서 18일 새벽 5시가지
겨우 4천 장의 완장을 만들어 그것을
가져다 출동부대 병사들에게 하나씩 나누어
주어 차게 했다.
  하얀 바탕에 하늘색으로 <혁명군>이라
시뻘건 도장이 찍혀진 완장을 찬 출동부대
병사들의 사기가 금방 치솟아 오른 것은
말할 것도 없었다.


  윤보선의 밀서에 대한 이한림과 그의
휘하 군단장들의 반응은 지체없이
군사혁명위원회의 박정희에게 전달되었다.
  최석 이외에는 모두 대통령의 지시에
따르겠다고 했다는 정보를 입수한 박정희는
비로소 안도의 한숨을 휴우 하고 길게
내뿜었다.
  (이제 이한림이 그 새끼만 체포해 버리면
쿠데타는 성공했다고 장담해도 되겠군.)
  이렇게 생각한 박정희는 쿠데타 동지인
  "오 동지, 이한림이만 체포하면 이제
혁명은 성공이오. 그러니 오 동지가 1군에
있는 동지들한테 비밀리 연락을 취해서
이한림 체포작전을 개시하라 하시오."
  "알겠습니다. 곧 지체없이 체포작전을
개시하라고 지령하겠습니다."
  오치성은 호기있게 명령을 수령했다.
  사실은 이한림 체포문제도 5월 16일
서울에서 쿠데타가 일어난 그날부터
구상되어 왔다. 이 구상은 제1군에서
쿠데타에 가담해 있던 조창대(曺昌大),
이종근(李鐘根), 심이섭(沈怡燮),
엄병길(嚴秉吉) 등에 의해서 논의되었다.
그들 모두는 계급이 육군 중령으로서 육사
8기 출신자들이었다.
  그러나 그들이 아무리 쿠데타
체포한다는 것이 그리 용이한 일은
아니었다. 여건상의 문제도 있었지만
여기에는 다분히 정리론(情理論)도
작용되었다.
  육사 8기 출신자들만 하더라도 유교적인
가정 분위기와 유교적인 교육을 철저히
받은 세대들이다. 그랬기 때문에 이한림
체포문제에 있어 정리론이 작용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오치성으로부터 조창대에게 <이한림을
체포하라!>고 지령이 떨어진 것은 5월 17일
한밤중이었다.
  이날 밤 10시.
  제1군 내의 쿠데타 가담자 전원이
포병참모실에 모였다. 오치성의 지령에
따라 조창대가 전체회의를 소집했던
출신 중령들 외에 헌병참모 육군 대령
박태원(朴泰元), 포병참모 정봉욱(鄭鳳旭),
심리전참모 육군 대령 허순오(許順五) 등도
참석을 했다.
  "군사혁명위원회에서는 왜 여지껏
사령관을 체포하지 않았느냐고 하면서 어서
체포하라고 독촉이 성화 같습니다. 어차피
해결해야 할 사안이고 보면 오늘 밤 안으로
단행했으면 합니다."
  조창대가 <이한림 체포>를
서둘러야겠다고 강조했다. 그러자 헌병참모
박태원이 브레이크를 걸고 나섰다.
  "오늘밤 하루만 더 참고 기다려 봅시다."
  "기다려야 할 이유가 무엇입니까?"
  "우리들이 모시고 있던 상관이 아니오?
사령관이 체포할 수밖에 없는 행위를 하고
체포하지 않아서는 안 되겠다는 상황에
이를 때까지 좀 기다려 보잔 말입니다."
  또다시 정리론이 작용했던 것이다.
  8기 출신 중령들도 솔직하게 속마음을
털어 놓으라고 한다면 <모시고 있는 상관을
차마 어떻게 체포한단 말이냐> 하는 것이
그들의 숨김없는 참마음이었을 것이다.
  그러면서도 그들 8기 출신 중령들은
오치성의 지령을 충실히 이행하지 않으면
안 될 절박한 이유가 있었다. 그것은
<쿠데타 공로> 문제였다. 어느 시대 어느
역사를 보더라도 혁명 후에는 반드시
<논공행상(論功行賞)>을 베풀기
마련이었다.
  그런데 제1군 쿠데타 주체자들은
서울에서 쿠데타가 일어났음에도 불구하고
못하고 있었다.
  (이러다간 이거 우리는 혁명 후의
논공행상에서 탈락되는 게 아냐?) 하는
초조감이 있었던 것이다.
  그런 이유에서 이한림 체포를 서둘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는데, 대령급들이
반대를 하고 나서니 계급이 하나 아래인
중령들로서는 그들의 주장을 고집하기가
어려웠다. 때문에 이한림 체포를 위한
회의는 또다시 흐지부지되고 말았는데
오치성의 독촉은 빗발치듯 했다.
  "뭘 하고 있어, 아직도 사령관을 체포치
않고? 이것은 박 소장의 강력한 지시야!
혁명의 주체자로서 혁명 영도자의 지령을
거역하겠다 그건가?"
  날이 새면 5월 18일이다.
이겨 새벽 4시에 다시 모였다.
  <어서 이한림을 체포하도록 하라>는 것이
혁명 최고 영도자의 지령이라고 하자,
그때는 대령급들의 정리론도 쑥 들어가고
말았다.
  5월 18일 새벽 6시.
  새벽 4시에 다시 모여 <이한림
체포작전>을 숙의한 끝에 이들이 행동을
개시한 것은 새벽 6시였다.
  먼저 헌병참모 박태원으로 하여금 사령관
숙소에 배치해 놓은 100명의 경비헌병을
철수시키는 일에서부터 <이한림
체포작전>은 개시되었다.
  헌병참모 박태원은 5월 16일 서울에서
쿠데타가 발생했다는 정보를 입수하자,
그는 사령관 관사의 경비헌병을 100명으로
그룹에 가담해 있었으면서도 말이다. 이 한
가지 사실만으로 보더라도 한국군의 상관과
부하 사이가 얼마나 끈끈한 <정리>로
맺어져 있었느냐 하는 것을 가히 짐작할 수
있을 줄로 안다.
  그런 다음 허순오가 지휘하는 80여 명의
심리전 선전중대를 완전무장시켜 사령관
관사를 포위케 했다. 그러는 한편, 야전군
연병장에는 12문의 고사포를 배치, 만일의
사태에 대비케 했다. 이제는 사령관 관사로
뛰어들어가 이한림을 체포하기만 하면 될
상황이었다.
  그런데 <사령관 체포>를 누가 담당하는가
하는 것이 문제였다. 모시고 있는 상관을
체포하기란 아무리 얼굴에 철판을 깔았다
해도 어려운 일이기만 했다. 더구나
별명이 무엇을 의미하느냐 하는 것은 굳이
설명이 필요치 않을 줄로 안다. 그러므로
평소 사령관에게 외경심을 품고 있던
부하들로서는 주저할 수밖에 없는
일이었다.
  한데, 이때 지원자가 나섰다. 엄병길,
박용기(朴容琪), 그리고 육군 대위 안찬희
등 세 사람이었다. 그들이 지원을 하고
나서자 박태원은 그들에게 헌병 완장을
차게 하고 헌병 헬멧을 씌워 헌병으로
위장을 시켰다. 그런 다음 그들이 사령관
숙소로 향하려고 할 때 박태원은 이렇게
말했다.
  "만일 사령관의 호송 도중에 사령관에게
손가락 하나라도 까딱하는 날엔 호송장교를
모조리 사살해 버리고 말겠어. 알겠나? 그
  박태원으로서는 <사령관 체포작전>에
꽤나 가슴을 앓았던 모양이었다. 쿠데타
그룹에 가담해 있는 이상 최고 영도자의
지령에 따르지는 않을 수 없고, 그래서
<사령관 체포작전>을 수행하기는 하나
사령관의 신변안전만은 완전무결하게
유지해 주고 싶었던 모양이었다. 어쩌면
그는 사령관 체포작전을 펴면서 속으로는
통곡을 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아침 6시 40분.
  헌병으로 위장한 세 장교가 사령관
관사에 도착한 것이 이 시간이었다. 이때
제1군 사령관 이한림은 참모장 육군 소장
황헌친(黃憲親)과 군수참모 육군 준장
박원근(朴元根) 셋이서 아침상을 받아 놓고
식사중이었다.
사령관을 박임항 장군으로 교체한다고
날아든 전통(電通)에 모아져 있었다.
  이날 아침 이한림은 식사를 하면서
황헌친에게 이 사실을 알렸다.
  "인수인계할 준비를 하도록 하시오."
  독자 제씨는 파면당했던 박정희가 현역에
복귀할 때 애를 써준 한 사람이
이한림이라는 것을 기억해 주기 바란다.
  헌병장교로 위장한 세 사람이 식사중인
자리로 뛰어든 것이 이때였다. 이한림이
그들을 보자,
  "박정희가 날 잡아오라고 시키드냐?"
하고 호령을 했다. 그렇지 않고야 사령관이
식사중인 자리에 무례하게 뛰어들 놈들은
없었을 테니 말이다.
  엄병길이 말했다.
포위되었습니다. 순순히
가주셔야겠습니다."
  "가자니 어디로 가잔 말이냐?"
  "서울 혁명위원회로 가셔야겠습니다."
  "그래? 알았다. 비행기로 가도록 하자."
  "안 됩니다. 차로 가셔야 합니다."
  "알았다."
  이한림은 그러면서 천천히 일어나 풀어
놓았던 권총혁대를 맸다. 그러한 이한림의
거동을 지켜보고 있던 박용기가 앞으로
다가섰다.
  "사령관님, 무기는 안 됩니다. 그 권총을
이리 주십시오."
  박용기가 손을 내밀자, 이한림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이놈들아, 적장의 투항을 받을 때도
너희놈들이 감히 그럴 수가 있어? 야전군
사령부 마크를 단 장교는 나를 체포할 수
없어! 군인이 무장을 해제당하면 생명을
빼앗긴 것과 마찬가지야. 나는 그렇게 할
수 없어!"
  과연 이한림은 진시황이었다. 조금도
흐트러짐이 없었다. 마냥 당당하기만 했다.
보다 못해 군수참모 박원근이 나섰다.
  "사령관님, 그럼 제가 탄창만 빼고
권총은 그대로 드리겠습니다."
  그는 이한림의 권총을 뽑아 탄창을 빼고
도로 권총집에 넣어 주었다.
  이한림을 호송하는 지프의 핸들은
엄병길이 잡았다. 옆에 대위 안찬희가
타고, 이한림과 그의 부관 한 사람은
뒷좌석에 태워졌다. 그들의 차를 헌병 1개
에스코트했다.
  이한림이 서울로 압송되어 오는
하늘에서는 줄곧 헬리콥터가 압송차량을
감시하며 따라붙었다. 미 고문단장
재브로스키가 이한림의 신상을 염려한
나머지 감시역으로 띄운 헬리콥터였다.
  오전 10시. 이한림의 압송차는 덕수궁
앞에서 세워졌다. 이때 공수단은 덕수궁에
진을 치고 있었다. 쿠데타 그룹은 반쿠데타
장성을 체포해 올 때마다 덕수궁에
연금시켜 공수단으로 하여금 파수케 하고
있었던 것이다.
  조금 떨어진 대한문 앞에서는 지프에서
내리는 이한림을 쏘는 듯한 눈매로
지켜보고 있는 두 사람이 있었다. 박정희와
김종필이었다. 그들은 이한림이 헌병들의
시작하자 슬그머니 자취를 감추는
것이었다.
  이한림과는 만주군관학교 동기생인
박정희는, 체포당해 오는 이한림을
대하기가 좀 불편했던 모양이었다. 그는
이한림한테는 유독 묘하게 콤플렉스를
느끼고 있었으니까.
  쿠데타 그룹이 이한림 체포에 성공했다는
것은 곧 쿠데타 그 자체를 성공의 궤도
위로 올려 놓았다는 것을 의미했다.
  "가앗댐!"
  이한림이 체포당했다는 보고를 받은
매그루더는 한마디 내뱉았을 뿐이었다.
  이한림 체포 소식에 <쿠데타는 진압돼야
한다>고 전의을 다지던 최석도 맥이 탁
풀리는 모양이었다.
됐는가 보군."
  힘없이 중얼거렸다.
  맥이 빠지기는 김응수도 마찬가지인
모양이었다.
  "이젠 도리 없이 패전지장의 신세가 되고
말았군. 허허......."
  그는 어이없다는 듯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인간이란 너무나 어이없는 경우를 당하게
되면 비감보다는 너털웃음만이 터지게 되는
것인지도 모른다.
  5월 18일 이날 아침, 유진산은 도쿄에
머물고 있던 이철승, 박준규, 모윤숙,
박병배, 이종린, 박권희(朴權熙), 김상흠
등을 뉴우쟈팬호텔로 불러 모았다.
  "오늘이 쿠데타가 일어난 지 벌써
모양인데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 것인지
우리들의 거취를 정해야 할 것이
아니겠소?"
  누구나 이 문제 때문에 고민을 하고
있으면서도 두려움에 눌려 말을
끄집어내지를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당분간 여기에 머물러 있으면서
앞으로의 사태를 지켜보고 있을 수밖에
없지 않겠습니까?"
  대부분의 의견을 이러했다.
  "방송을 들으니 쿠데타는 반공혁명인 것
같은데, 그렇다면 과거에 정치인으로
활동했다고 해서 사람을 어떻게 하지는
못할 것 같소만?"
  "아니, 그렇지 않아요!"
  모윤숙이 반론을 폈다.
쿠데타를 일으킬 때 피를 얼마만큼
흘렸는지느 모르겠지만 목숨을 걸고
쿠데타를 일으킨 사람들인데 국회의원이고
정부 사람이고 간에 그냥 내버려둘 리가
없어요. 그런 만큼 사태가 진정되고 신분에
대한 보장을 받을 수 있는 어떤 조치가
취해질 때까지는 여기 그냥 눌러 있어야만
합니다."
  쿠데타 소식을 들은 그 순간부터 그들은
모두 불안에 싸여 있었다. 그들의 운명이
어찌될지 모르기 때문이었다.
  그런 불안에 싸일 수밖에 없었다.
도대체가 쿠데타를 일으킨 자가 누군지
그자는 어떤 사상을 품고 있는지 전혀
정보를 입수해 놓고 있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다만 분명한 것은 쿠데타를
분명했다. 만일 쿠데타를 일으킨 자가
공산주의를 위해서였다면 반공사상이
투철한 60만 국군장병이 방관하고 있을
리가 없었다.
  문제는 쿠데타를 주도한 자의
인품이었다. 사람됨이 제대로 돼 있다면
피를 보는 일이 없을 테지만 만일 성격이
괴팍하다든가 포악한 인물일 때는 쿠데타의
명분을 극명하게 부각시키기 위해서
집권자를 위시한 그 주변 인물들을
처형하지 않는다고 누구도 장담할 수 없는
일이었다. 이래서 그들은 불안했던 것이다.
  이렇듯 가뜩이나 불안에 싸여 있는
그들이었는데 모윤숙이 국회의원이고 정부
사람이고 가만둘 리가 없다고 단언하듯이
말했으니 그들의 불안은 더욱 가중될
  유진산은 한동안 깊은 생각에 잠겨
있다가 이렇게 말했다.
  "쿠데타의 명분이 무엇인지는 모르겠지만
우리 모두는 대한민국이라는 나라를 세우기
위해서 피땀 흘려온 사람들인데 저들이
우리를 함부로 다루려고 할 리야 있겠소?"
  "아니, 반드시 그렇지만도 않습니다.
쿠데타를 일으킨 사람들은 그들의 쿠데타를
정당화하기 위해선 없는 죄도 만들어
뒤집어 씌우려 할지도 모릅니다. 그런 만큼
모 선생 말씀과 같이 당분간 여기에 머물고
있으면서 추이를 지켜보구 나서 태도를
결정하는 것이 좋을 성싶습니다."
  이렇게 말한 사람은 이종린이었다.
  여기에 모윤숙이 덧붙였다.
  "그렇게 하십시오, 진산 선생님. 공연히
말구요."
  "아니, 나는 그들이 나를 어떻게
취급하든 빠른 시일 안에 돌아가도록
해야겠소!"
  유진산의 의지는 단호했다.
  그의 의지가 너무나 단호했던 탓인지 그
이상 그를 설득하려는 사람은 없었다.


  5월 18일 오전 9시.
  동대문에 집결한 육군사관학교 생도들이
쿠데타를 지지하는 시가행진을 벌이기
시작했다. 그들 생도대의 앞에는
쿠데타군으로 동원된 공수단 장병들이
사관생도들을 에스코트하듯이 선도행진을
  이 사관생들의 쿠데타 지지행진을 보며
많은 식자들이 길게 탄식을 했다. 장차 이
나라 국군의 간성이 될 사관생도들을
쿠데타 지지 시가행진에 내게웠다는 것은,
그들에게 쿠데타를 교육시키는 행위나
다름이 없다고 보여졌기 때문이었다.
  사관생도들을 내세워 쿠데타 지지시위를
벌이게 하는 발상을 한 것은 물론
박정희였다. 그는 육군사관학교 생도들을
쿠데타 지지시위를 위해 거리로
내세움으로써 정치에는 중립을 지켜온
자랑스러운 한국군의 전통을 무너뜨렸다.
앞으로 박정희에게 불만을 품은 장교들이
있어 쿠데타를 단행해도 그는 한마디
항변도 할 수 없도록 스스로를 결박짓는
우를 범했던 것이다.
潔駭?
서울 시청 앞 광장에 이르자 곧 <혁명
축하식>이 벌어졌다. 식이 벌어지자
장도영이 박정희, 오치성, 유원식 등
쿠데타 그룹들을 거느리고 사관생도대의
사열을 받았다.
  어제 그러니까 5월 17일 오후 4시 30분
전까지만 해도 갈팡질팡 어찌할 바를
몰라하던 장도영은 사관생도대의 사열을
받으며 이렇게 지껄여댔다.
  "남북한의 동포와 자유, 평화, 평등을
사랑하는 전인류가 우리를 지지할 것이다."
  그의 목소리에는 힘이 있었고 자신감이
넘쳐 있었다. 과연 재빠른 변신이었다.
  오전 10시 30분.
  장면의 정치고문인 위태커가 육군본부로
장도영을 찾아왔다. 부관실로 들어선 그는
서로가 잘 알고 있는 사이에 새삼스럽게
명함을 내놓는 것을 의아하게 생각한
보좌관은 받아든 명함의 뒷면을
살펴보았다. 거기엔 영어로 이렇게 쓰여져
있었다.
  <I have very important
information(내게 중요한 정보가 있다)>
  보좌관은 지체 않고 위태커를
장도영한테로 안내했다.
  "중요한 정보라는 게 뭣입니까?"
  장도영이 물었다.
  "장면 총리의 은신처를 알고 있소."
  "그래요?"
  장도영은 반가움에 눈이 휘둥그래졌다.
  "미스터 위태커, 어서 같이 가십시다."
  장도영은 무척이나 서둘고 있었다.
장도영은 벌써 방을 뛰쳐나가고 있었다.
  오전 11시 10분.
  장도영은 장면이 은신해 있는 방으로
들어오자 입부터 씰룩거렸다. 터지려는
울음을 참느라고 애쓰고 있는 것이
틀림없었다.
  "각하, 죽을 죄를 지었습니다......."
  장도영은 한마디 뇌까리고 기어이 울음을
터뜨리고야 말았다. 그는 입을
씰룩거리면서 다시 이었다.
  "각하. 모든 것이 제 불찰로 이런 사태가
벌어지고야 말았습니다. 각하를 뵈올
면목이 없습니다."
  장면은 말이 없었다. 그저 물끄러미
장도영을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장도영은 좀 멋적어졌다. 스스로 생각해도
처음 위태커가 장면의 거처를 알려주었을
때는 너무 반가운 김에 앞뒤 재볼 겨를이
없이 달려왔던 것이나, 장면이 감정을 잃은
사람처럼 노여움도 또 그 어떤 반응도
보여주지 않자 머쓱해졌던 것이다.
  이 경우를 제3자가 보았다 해도 장도영의
강심장에 놀라지 않을 사람은 없었을
것이다. 쿠데타를 막는 체 흉내만 냈을 뿐
그 어떤 강력한 조치도 취하지 않아 정권이
넘어가게 된 마당에 상판대기에 철판을
깔지 않고야 어찌 장면 앞에 나설 수 있단
말인가.
  장면이 그 어떤 반응도 보여주지 않자,
장도영은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한동안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
장도영으로서는 질식해 버릴 것만 같은
  (어서 이 무거운 분위기에서
벗어나야지.)
  그는 마음을 도사려 먹고 다시 입을
열었다.
  "각하, 송구스럽습니다만 이제 쿠데타를
인정할 수밖에 없을 것 같습니다. 그러니
어서 이 길로 나가셔서 수습을 해주셨으면
합니다."
  그러나 장면은 여전히 대꾸가 없었다.
시선을 창 밖으로 던져놓은 채 미동도 하지
않았다.
  장도영은 어색함을 털어내기 위해
계속해서 지껄여댔다.
  "각하, 각하나 여타 각료들의 신변은
제가 책임을 지고 보호해 드리겠습니다.
그러니 안심하시고 이 길로 나가 주시면
  그제야 장면이 밖으로 던져 놓고 있던
시선을 장도영 쪽으로 돌렸다.
  그의 두 눈은 이렇게 말하고 있었다.
  (야아, 이놈아. 내가 쿠데타 정보를
입수하고 너한테 박정희에 대해서
조사하라고 했더니, 그때 네놈이 뭐라고
했지? 박정희는 쿠데타 같은 것을 일으킬
만한 인물이 못 된다고? 그리고 이놈아,
16일 새벽에 네놈은 나한테 뭐라고 했지?
해병대가 술에 취해가지고 주정을 부리고
있다고? 이 개만도 못한 놈! 네놈이 나하구
쿠데타 그룹 양쪽에 각기 한다리씩 걸치지
않고 있었다면 그따위 식으로 쿠데타를
막으려고 했을 리가 있겠어? 이 개만도
못한 놈! 네놈을 같은 인동 장(仁同張)
씨라고 해서 참모총장에 기용을 했으니
던져버리고 싶은 심정이다. 이 고얀 놈!)
  장면의 두 눈은 점차 증오에 이글거리며
타오르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결코
장도영에 대한 증오심을 밖으로 표출시비지
않았다.
  "각하......."
  장도영이 다시 재촉하려고 입을 열었다.
  "알았네."
  장면은 한마디로 가로막았다.
  우리 현대사에서 가장 불행하고도
비극적인 날로서 기억되어져야 할 1961년
5월 18일 정오 12시 30분.
  장면이 중앙청 국무회의실로 들어섰다.
그가 들어서자 미리 와서 자리를 잡고 앉아
있던 국무위원들이 일제히 자리에서
일어서서 그를 맞았다. 외무부장관
국방부장관 현석호, 부흥부장관 주요한,
상공부장관 태완선(太完善), 체신부장관
한통숙, 무임소장관 오위영, 그리고
국무원사무처장 정헌주(鄭憲柱) 등
9명이었다.
  장면은 정헌주에게 재무부장관
김영선(金永善)과 문교부장관
윤택중(尹宅重)은 어찌 됐느냐고 조용히
물었다.
  "윤 장관은 병원에 입원중이라 위임장을
보내왔습니다. 김 장관은 아무래도 좀 늦는
모양입니다."
  정헌주의 보고를 듣고 나자 장면은
의사봉을 세 번 두드렸다. 힘이 하나도
배어 있지가 않았다.
  "그럼 지금부터 제69차 임시 국무회의를
  "오늘의 안건은 계엄령 추인과 내각
총사퇴 문제요. 계엄령을 추인하는 데
이의가 없소?"
  누구도 이의 있다고 대답하는 국무위원은
없었다. 모두가 침묵을 지키고 있을
뿐이었다.
  "그러면 계엄령 추인은 만장일치로
통과되었소."
  장면은 일방적으로 선언을 하고 의사봉을
두드렸다.
  "다음은 내각 총사퇴에 대한 안건이오.
여기에 대해서도 누구도 이의 없으시죠?"
  장면은 이렇게 묻고 또 일방적으로
의사봉을 세 번 두드렸다.
  국무회의가 시작된 지 채 5분도 안
걸려서 끝마쳤다.
향했다. 국무위원 모두가 그의 뒤를
따랐다. 재무부장관 김영선이 모습을 보인
것은 이때였다. 기자실로 들어서자 장면은
안주머니에 넣어 두었던 메모지를 꺼내
읽어 내려갔다.
  성명서. 정치인 장면으로서는 어쩌면
마지막이 될는지도 모르는 성명서였다.
장면은 그저 아무 감정 없이 담담하게 읽어
내려갔다.

  금번 군부 쿠데타 발생에 대하여 우리
일동은 정치적, 도의적 책임을 통감하고
총사퇴하는 바이니 국민 제위의 양해
있으시길 바라는 바이다. 그리고
사태수습에 있어서는 유혈을 방지하고
반공태세를 강화하여 국제적인 지위를

  이것으로 민주당의 장면 정권, 곧
제2공화국은 막을 내리고 말았다. 아니
막을 내렸다는 표현은 너무나 미지근한지도
모르겠다. 총칼의 위력에 맥없이 쓰러지고
말았던 것이다. 9개월간의 짧은 생애였다.
  현대사에 있어서 가장 민주주의가
화사하게 꽃피었던 제2공화국, 과연 장면
정권은 5.16 군사 쿠데타 그룹이
지탄했듯이 쿠데타의 대상이 되지 않으면
안 될 만큼 <부패하고 무능했던
정권>이었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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