격동30년(2)
-이영신 역사소설
----- 차 례 -----
1. 인생만사 새옹지마
2. 허정 과도정권 출범
3. 움직이는 8기생들
4. 갈팡질팡 과도정권
5. 민주당의 집안싸움
6. 옥에 티를 남긴 7.29 총선
7. 7월 재판
8. 동상이몽
9. 장면 정권 출범
10. 단군 이래의 첫 민주정권
11. 불길한 징후
1. 인생만사 새옹지마
"올 것이 왔다!"
대통령 윤보선은 5월 16일(1961년)
장도영 그리고 박정희 등의 쿠데타
주체들이 기다리고 있는 접견실로 들어서며
이렇게 중얼거렸다.
윤보선은 뭘 가지고 올 것이 왔다고
중얼거렸던 것일까? 과연 5.16 군사
쿠데타는 올 것이 와야 했던 사건이었던가?
여기에 대한 올바른 평가를 내리자면 도리
없이 민주당 정권이 걸어온 발자취와
민주당 정권의 창출 과정을 더듬어 보지
않을 수 없다. 따라서 4.19 의거로 이승만
시작하지 않을 수가 없게 된다.
좀 지루할지 모르겠으나, 꾹 참고 현대사
공부하는 셈치고 4.19에서 5.16까지의
발자취를 함께 더듬어 보기로 하자!
그래야만 과연 5.16 군사 쿠데타는 와야 할
사건이었는지 올바른 평가를 내릴 수가
있고, 또 쿠데타를 통해서 창출해낸
<박정희 정권 18년>을 평가하는 데
있어서도 크게 도움이 되기 때문이다.
5.16 군사 쿠데타가 벌어지기 꼭 1년 전,
그러니까 1960년 4월 27일의 일이다.
허정(許政)은 꿈에도 생각해 본 일이 없는
대통령 권한대행(權限代行)을 맡았다. 이때
그의 나이 56세.
이틀 전인 4월 25일에 국무원(國務院)의
수석 장관인 외무부장관에 취임하기를
권한대행을 맡게 되리라고는 상상조차 하지
못하고 있었다. 아니, 그 일주일 전까지만
하더라도 대통령 권한대행은 고사하고
외무부장관에 기용되리라는 것조차도 예상
못하고 있던 일이었다.
"이래서 인생만사 새옹지마라 했거늘!"
허정 자신도 기구하게 전개되는 인생에
절로 자탄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가 마지막 벼슬길에 있었던 감투는
서울특별시장이었다. 이 감투를 쓰기만
했다 하면 돈방석에 올라앉는 자리였다.
그래서 세상 사람들은 서울시청을
복마전(伏魔殿)이라 일컬었다. 그가 이
감투를 썼던 것은 1957년 12월 14일이었다.
그의 관력(官歷)으로 봐서는 <작은
감투>였을지도 모른다.
이승만의 총애를 이기붕에게 버금갈 정도로
받고 있던 그는 두 달 동안 장관직에 앉아
있던 민희식(閔熙植)의 뒤를 이어 1948년
10월에 제2대 교통부 장관에 발탁되었던
것을 시발로 해서 1950년 3월에 사회부
장관으로 자리를 바꿔앉아 있다가 같은 해
11월에는 국무총리 서리에 임명되었다.
허정은 국무총리 서리직에는 불과
4개월밖에 앉아 있지 않았지만, 어찌
됐거나 <1인지하 만인지상>의 재상 자리가
아닌가!
이후, 그는 초야에 묻혀 있다가 1957년
서울시장직에 기용됐던 것이다. 그러나
햇수로 따지면 3년이지만 정확히 1년 6개월
만에 타의에 의해서 이 감투를 내던져야만
했다. 1959년 6월 11일의 일이다.
황혼기를 향해서 치닫고 있었다. 그러기에
아예 세상하고 인연을 끊고 칩거해 버리고
말았다. 그가 칩거해 버리자 세상 사람들은
점차 그를 잊어가고 있었다.
그가 공인 생활을 하고 있을 때는 그의
이름 두 자가 꽤나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던 인물 중의 하나였다. 공인,
특히 정치를 한다는 사람의 이름이 대중의
입에 오르내리게 될 때에는 대개 두 가지의
경우에서다. 뭔가 기대를 걸 만한 인물의
경우와 아예 사람 됨됨이부터가 개판일
때다.
허정의 경우는 전자에 속했다.
<대쪽같이 꼬장꼬장한 인물.>
<정치가라기보다는 행정가라고 해야 할
인물.>
測a?
꼬장꼬장하다는 것은 청렴결백하다는
것으로 받아들여지게 된다. 모조리
썩어빠진 이승만의 고굉지신(股肱之臣)들
가운데서 유독 허정한테 이런 세평이
붙었다는 것은 그의 정치생명을 위해서는
천만다행한 일이었다.
허정이 대통령직 권한대행을 맡게 되자,
세상 사람들은 개탄인지 탄성인지 모를
소리들을 중얼거렸다.
"인생만사 새옹지마라더니, 정녕 사람
팔자 알 수 없군!"
인생만사 새옹지마(人生萬事 塞翁之馬).
중국의 고사(故事)에서 유래된 말로,
인생을 살아가자면 화(禍)가 복(福)이 되는
경우도 있고 복이 화가 되는 경우도 있다는
것을 말할 때에 흔히 쓰는 말이다.
권한대행을 맡게 되어 배가 아파서 한
소리는 아니었다. 이승만의 총신(寵臣)들은
모조리 나락의 구렁텅이로 떨어져 버릴
운명에 처하게 됐는데, 총신의 한
사람이었던 허정에게는 도리어
영광스럽게도 <임시 대통령직>이 안겨지게
된 그 행운이 하도 기이하게 느껴져서
내뱉은 중얼거림이었다.
허정이 서울특별시장 자리에 그대로
머물러 있었다면 당시 그의 운명은 어찌
됐을까?
허정을 놓고 그런 가정을 해볼 만했다.
그도 역시 이승만의 충신이요, 고굉지신의
한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그런 허정이 상전인 이승만과 그의
고굉지신들은 모조리 쇠고랑을 차야 할
영광스러운 자리에 앉을 수 있었던 것은
전적으로 타고난 선천적인 기질
덕분이었다.
그러면 그가 선천적으로 타고난 기질이
어떻다는 소리인가?
여담이지만 한국의 경우 정치를 한다는
사람들의 선천적 기질을 분석해 볼 것
같으면 아주 재미있는 사실을 발견할 수가
있다.
첫째, 여당적(與黨的) 기질
둘째, 준여당적(準與黨的) 기질
셋째, 야당적(野黨的) 기질
넷째, 기회주의자적(機會主義者的) 기질
이렇게 네 가지 형의 기질로 나눌 수가
있다.
이 네 가지의 기질에 대해서 좀더
기질의 인물에게는 정치가가 갖추고 있어야
할 조건인 행동력이 없다. 뿐만 아니라
이상적인 비전도 없다. 있다는 것은 오로지
권력의 그늘에 안주하면서 일신의 영달이나
꾀해 보겠다는 이기심(利己心)뿐이다.
이승만 밑에서 장관, 국회의원을 지낸
대부분의 정치인들이 여기에 속하는
인물들이었다. 이렇듯 행동력도 이상적인
비전도 갖지 못하고 있는 집단이
자유당이었으니, 그러한 정당이 제대로
구실을 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이에 반해 준여당적 인물한테는 약간의
뼈가 있다. 당명에 복종은 하나 때로는 제
고집을 내세울 줄도 안다. 그렇다고 해서
당을 박차고 나와서 야당의 대열에 서느냐
하면 그렇지는 않는다. 그저 침묵을
전향할 만한 용기가 없기 때문이다.
여당적 기질의 인물과 준여당적 기질의
인물이 이러한데 반해 야당적 기질의
인물은 어떠한가. 그들에게는 정치가가
갖추어야 할 조건이 거의 고루 갖추어져
있다. 행동력을 위시해서 용기, 결단력,
비전, 예지와 선견지명, 지도력에
이르기까지 갖추지 않은 것이 없다.
그러기에 야당적 기질을 갖추고 있는
인물이야말로 가장 이상적인 정치가라 할
수 있다. 제1공화국 시대의 야당인
민주당에 이런 인물들이 집결해 있었기에
이승만은 카리스마적 권력을 행사하면서도
끝내 독재자가 되지 못했던 이유가 여기에
있었다.
다음 네번째의 기회주의자적 기질의
치사스럽다. 이런 기질의 인물은 여야를
가리지 않고 간에 붙었다 쓸개에 붙었다
하면서 자신의 이익만을 추구한다. 그렇기
때문에 배신(背信)과 변절(變節)을
다반사로 일삼는다. 심한 경우에는 동지를
팔아먹는 행위도 서슴지 않고 저지르기도
한다. 그러므로 이런 기질의 인물은
정치가라고 할 수도 없다. 차라리
정상배(政商輩)라고 하는 것이 알맞은
표현일 것이다. 이런 인물이 많으면
많을수록 나라는 불행해지기 마련이다.
그러면 이 얘기의 첫머리에 등장한
주인공인 우양 허정의 기질은 어떻다는
소리인가?
그는 물론 준여당적 기질의 인물이었다.
"어떤 면을 보고?"
여기에 대한 회답은 간단하다.
<정치가라기보다는 행정가>라는 세평이
그가 준여당적 인물이라는 것을 웅변으로
증명해 주고 있다.
세평이 어떠했든 실제로 <행정형
정치가>라는 것이 있다.
정치학자들은 정치가의 유형을 첫째
이데올로기형 정치가, 둘째
군사독재형(軍事獨裁型) 정치가, 셋째
행정형(行政型) 정치가, 넷째
개발형(開發型) 정치가, 다섯째
정략형(政略型) 정치가 등으로 분류하고
있다.
그런데 여당적 또는 준여당적 인물은
기질적인 유형에 있어 행정형 정치가의
범주에 속한다. 이것은 최고 권력자를
위해서는 더없이 다행한 일이다. 만일
반골(叛骨) 정신이 강해서 권력자가 하는
일에 일일이 자기 주장을 내세운다든가
용훼하려 들었다가는 큰일이기 때문이다.
허정이 대통령 권한대행이 되어 정부를
이끌어 나갔던 기간을 우리는
과도기(過渡期)라 일컫고 있다.
표준 국어사전에 <과도기(過渡期)>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기술해 놓고 있다.
1. 옛 것에서 새로운 시기로 옮겨 가는
시기. 한 고비에서 다른 고비로 넘어가려는
그 동안. 과도시대(過渡時代).
2. 사회의 사상과 제도가 확립되지 않고,
인심이 안정되지 못한 시기.
것 같지는 않다. 그러나 정치사적으로 볼
때는 과도기란 그렇게 바람직스러운 것은
못 된다. 정치적 과도기란 곧 정변(政變)이
있었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한국 현대사에 있어 과도기가 꼭 세 번
있었다. 첫번째는 미군정(美軍政) 때였고,
두번째는 이승만 정권이 넘어진 직후였다.
그리고 세번째는 이 역시 박정희(朴正熙)
정권이 무너진 직후였다. 이렇게 한 정권이
무너지고 나면 꼭 과도기를 거쳐야 했기
때문에 정치적 의미의 과도기란 그리
바람직스러운 것이 못 된다는 얘기다.
이승만 정권이 무너진 뒤에 들어선 것이
허정 과도정권(過渡政權)이라는 것이다.
허정 과도정권이 출범한 것은 1960년 4월
27일이었다. 이 과도정권은 꼭 백 일 동안
백 일 동안이라고는 하지만 <대통령
권한대행>으로서 정권을 담당했다는 것은
허정으로서는 행운이었다. 그는 이승만의
측근 중의 측근자였기 때문에 행운이라는
표현이 더 실감이 난다.
시대의 변화란 평화적으로 이루어져
나가야만 한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우리의
현대사는 피를 통해서만 변화가
촉구되었다. 가슴 아픈 일이 아닐 수 없다.
하여간에 한 시대를 주름잡아 오던
주인공 이승만이 사라지는 것과 함께 묵은
시대는 장막을 내렸다. 그리고 이제 새로운
시대가 열렸다. 아니 아직 새 시대가
열리지는 않았다. 열리려는 진통이
계속되고 있었다. 따지고 보면 허정
과도정권이라는 것을 진통을 가라앉히기
그러면 이 처방제는 어떻게 조제되었던
것인가? 앞의 장과 중복되기는 하나 다시
한번 살펴보고 넘어가기로 한다.
앞에서 잠시 언급했듯이 허정이 대통령
이승만의 부름을 받고 경무대를 방문한
것은 4월 21일이었다. <피의 화요일>이라
일컬어지고 있는 4월 19일에서 사흘째 되는
날이다. 이때 이승만은 허정만이 아니라
변영태(卞榮泰)도 불러들여 입각을
종용했던 것이다.
그런데 다음날인 22일에도 이승만은
허정과 변영태를 다시 경무대로 불렀다.
이승만이 두 사람을 또 부른 이유는 역시
입각을 권고하기 위해서였다. 이날의
이승만의 심정은 물에 빠진 사람이
지푸라기라도 잡으려는 그런 심정이 되어
비롯한 전 국무위원이 사표 한 장을 써서
내던지고 정부를 떠나버렸기 때문이었다.
(이런 사람들을 봤나. 이런 무책임한
자들을 거느리고 내가 정부를 이끌어 왔단
말인가?)
장관이라는 자들이 써서 내던진 사표를
받아든 이승만의 마음은 노여움에 앞서
슬픔이 먼저 일었다. 가슴이 찢어질 듯
아프기만 했다. 사건의 원인은 그자들이
유발해 놓고 벌어진 사태에 대해서는
책임을 지려 하기는커녕 회피하기에 급급해
있었으니, 이승만의 가슴이 미어지게 되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이었다.
"미스터 허, 미스터 변, 두 사람 다
정부에 들어와서 나를 도와주게!"
이승만은 애원하듯 두 사람의 입각을
완곡하게 입각을 거절했다.
4월 22일 당시, 이승만은 개각을
단행하고 대모대가 요구하는 사항을 몇
가지만 들어주면 자신의 대통령직은 유지될
수 있으리라 생각하고 있었다. 그래서
허정과 변영태 두 사람을 입각시켜 사태를
수습하고자 그토록 집요하게 두 사람의
입각을 종용했던 것이다. 그래서 이승만은
두 사람을 종용하는 한편, 4월 23일에는
<나는 자유당과 절연하고 오직
대통령직에만 전념하도록 하겠다>라는
내용의 담화까지를 발표했던 것이다.
이 담화 내용이 허정의 마음을 움직이게
했던 것 같다. 그는 21일의 이승만과의
면담 때 세 가지를 건의했다. 첫째,
이기붕의 부통령 당선을 무효화하고 즉시
총재직을 사임하고 초당적 위치로 되돌아갈
것과 셋째는 각계 각층의 인재를 등용해서
거국내각을 구성하라는 것이었다. 그러니까
허정은 자신의 건의를 이승만이 받아들인
것으로 해석을 내렸던 것이다.
그래서 허정은 이승만의 담화 발표가
있은 직후, 신당동(新堂洞)으로 변영태를
찾아갔다.
"이 어려운 때에 이 대통령을 도와드리는
것은 우리들의 인간적 도리가 아니겠소?
그러니 우리 같이 정부에 들어가서 이
대통령을 도와드리도록 합시다."
변영태는 묵묵히 듣고만 있었다. 허정은
말을 이었다.
"생각해 보시오. 그 어른이 얼마나
어려우면 우리를 찾으셨겠소. 그러니 우리
국무위원인 외무를 맡으시오. 나는 아무
자리라도 좋소."
그러나 변영태는 고개를 좌우로 흔들
뿐이었다.
"아니, 지금은 내가 나설 때가 아니오."
그 태도가 매정할 정도로 차갑기만 했다.
(이럴 순 없잖은가, 이럴 순!)
허정은 야속한 마음이 들었지만 어쩔
수가 없었다.
그는 신당동에서 돌아오는 차 안에서
방송을 통해 장면의 부통령직 사퇴를
알았다.
본인의 사퇴서로 권력에 도취하여 압제와
폭정을 계속하는 이승만 정부에게 경종을
울리고자 해서...... 정권욕의 불법수단이
파괴되었기 때문에...... 집권자의
사병화(私兵化)한 경찰은 평화적
시위학도들에게 총탄을 퍼부었으며, 그것도
부족해서 잔악한 보복살상과 고문을 무수히
감행하여 국민을 격앙케 하고 있기
때문에...... 민주투쟁 전열에서 국민과
더불어 최후 승리의 날까지 분투할 것을
맹세하는 뜻에서......
등등의 이유를 들어 부통령직을
사퇴한다고 성명을 냈다.
장면이 부통령직을 사임하면서 내세운
이유는 명분상으로는 그럴싸했다. 그러나
것이라고 내다보았다.
(장면이 부통령직을 사임한 참 속뜻은
정권 획득을 위한 과감한 포석이야!)
허정은 그렇게 판단했다.
실지로 그랬다. 장면이 부통령직을
사임하도록 헌책을 한 것은 엄상섭이다.
그렇다면 엄상섭이 장면에게 부통령직에서
물러나라고 헌책한 것은 바로 앞의 이유
때문이었을까?
그게 아니었다. 허정이 장면의 속셈을
꿰뚫어 본 바대로 정권 획득을 위한 일련의
포석이었다. 어째서 이러한 정치적 포석이
필요했던가? 그것은 민주당이 정.부통령
선거 때 내걸었던 정치적 공약 때문이었다.
그 공약이란 다름 아니라 정치제도에 있어
민주당은 처음부터
있었다. 3.15 정.부통령 선거에 있어서도
민주당은 이것을 공약으로 내세웠다.
그러했던 만큼 민주당이 집권을 하게 될
경우에는 싫든 좋든 이 공약을 실천에
옮기지 않으면 안 될 형편이었다.
그런데 4월 22일쯤에 이르면서 <이승만을
하야시켜야 한다>는 여론이 이 구석 저
구석에서 일기 시작했다.
만일 이승만이 여론에 굴복해서 대통령을
사임하게 되면 그 결과는 어찌 되는가?
헌법의 규정에 따라 부통령인 장면이
대통령직을 계승하게 될 것은 자명한
일이었다. 장면이 대통령직을 계승하게
된다는 것은 곧 정권이 민주당으로
넘어온다는 것을 의미하게 된다.
그렇다면 이제 정권을 잡은 이상
내각책임제로 바꾸어야만 한다. 장면이
대통령직에 앉아 있으면서도 내각책임제로
개헌을 하게 되면, 민주당 구파는 장면을
상징적인 존재인 대통령직에 그대로 머물게
해놓고 실속 있는 총리직을 그들이 맡으려
할 것은 불을 보기보다도 더 환한
일이었다.
(그럴 수는 없지, 정권을 구파한테
담당시킬 수는 없어!)
이것이 엄상섭의 속셈이었다. 그래서
부랴부랴 장면을 부통령직에서 물러나라고
헌책했던 것이다.
한데, 장관들이 일괄 사표를 제출해 놓고
있는데다 장면마저 부통령직에서
물러났으니, 만일 예기치 않은 사태로 해서
이승만도 대통령직에서 물러나게 되면
국면으로 치달을 수밖에 없게 된다.
헌법기관의 공백으로 무정부 상태가 되어
버리기 때문이다.
허정은 바로 이 점을 걱정했다. 어떤
경우에도 정부를 무정부 상태로 만들어
버릴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그렇다고 이제
새삼스럽게 이승만을 찾아가, <저
입각하겠으니 장관 자리 하나 주시오>라고
할 수는 없었다.
변영태가 입각을 수락한다면 함께
이승만을 찾아가 입각하겠다고 생각했으나
변영태가 입각을 완강하게 거부하고 보니
허정도 따라서 마음이 흔들리게 되었던
것이다.
(딱하군, 딱해!)
허정은 답답했다. 그렇다고 어떤 결단을
그런데 4월 25일, 이승만이 또 허정을
경무대로 불렀다. 다시 입각을 권유하기
위해서 불렀으리라는 것은 물어보나마나 한
일이었다. 다시 이승만의 부름을 받자,
허정은 그제야 결단을 내렸다.
(더 이상 망설이고 있을 필요는 없어!)
그는 지체없이 경무대로 달려갔다.
"나 미스터 허와 미스터 변이 하라는
대로 자유당하고 손을 끊었어. 그러니 어서
입각을 승낙하게."
그렇게 말하는 이승만은 요 며칠 사이에
바싹 늙어버린 것 같은 인상을 풍겼다.
허정은 그저 가슴이 아리고 답답할
뿐이었다.
"어떻게 하겠어? 입각을 하겠어,
않겠어?"
"예, 선생님 말씀대로 입각을
하겠습니다."
허정은 마침내 입각을 승낙했다.
"그럼, 어서 인선을 서두르게."
이승만의 얼굴에 비로소 안도의 숨결이
감도는 것 같았다.
허정은 이렇게 혼란한 때에는 법 정신에
투철한 사람이어야만 질서를 회복할 수
있다고 믿고 내무부 장관으로 이호를,
법무부 장관으로는 권승렬(權承烈)을
추천했다. 이승만은 군말이 없었다.
"좋네, 좋으니."
이 말만 연발할 뿐이었다.
허정은 생각 같아서는 나머지 장관들도
모조리 추천하고 싶었으나 좀더 신중을
기하기 위해서 뒤로 미루었다. 그리고는
다음과 같은 수석 국무위원 취임성명을
발표했다.
1. 비상사태의 신속한 수습
2. 책임정치제의 확립과 공무원, 특히
경찰의 엄정중립
3. 관기(官紀)의 쇄신
물론 이날에 민주당은 <이승만의 하야>를
당론으로 내세우기 시작했지만, 허정은
이승만의 하야에 대해서는 털끝만큼도
생각해 보지를 않았다. 어디까지나
이승만을 대통령으로서 보필하고자 하는
것이 그의 굳은 결심이었다.
한데, 허정의 생각과는 달리
정국(政局)은 도무지 예측을 할 수 없는
방향으로 치닫고 있었다. 허정이 입각을
수락하고 새 각료를 추천하는 등
출마를 비웃기라도 하듯 전보다도 더
격렬한 데모가 4월 25일에 벌어진 것이다.
더구나 이날의 데모대의 구호는
지금까지의 <부정선거 다시 하라>가 아니라
<이승만 물러가라>였다.
여기에 또 곁들여 천만뜻밖에도 상아탑
속의 학자들이 거리로 뛰쳐나왔다. 학생을
가르치고 있는 대학 교수들이 거리로
뛰쳐나온 것이다. 이것은 너무나 충격적인
사건이었다. 세계 대학사상 학생을
가르치고 있는 교수들이 거리로 뛰쳐나와
데모를 벌인 일이 일찍이 어느 나라에서
있었던가? 거리로 뛰쳐나온 대학 교수들은
모두 258명이었다. 전체 대학 교수의
10분의 1도 안 되는 숫자였지만, 이
258명의 대학 교수들이야말로 실로
그들 교수들 가운데에는 백발이 성성한
노교수들도 적지 않았다.
그들 258명의 대학 교수들은 서울대학교
교수회관에서 모임을 갖고, <대통령,
국회의장, 대법원장 등은 즉시 사퇴하라>는
결의를 한 다음, 국회가 있는 태평로로
진출해 시국 선언문을 발표했다. 이 시국
선언문은 한마디로 요약하면 <학생의 피에
보답해야 한다>는 내용이었다.
대학 교수들은 그 구호를 플래카드에 쓴
다음 그것을 앞세우고 데모를 벌였다.
<대학 교수들이 데모를 벌였다!>
이 말이 서울 장안에 퍼지자, 지금까지
팔짱을 끼고 방관하던 사람들까지도 데모
대열로 뛰어들었다. 삽시간에 데모의
인파는 수만 명으로 늘어났고 그들의
데모가 격렬해지면서 서대문 이기붕의
집에서 발포를 하는 사건이 또 벌어졌다.
동대문 경찰서 관내에서도 무차별 사격을
해대는 사건이 벌어졌다. 이렇게 되고 보니
이제는 이승만이 <자유당과 결별하고
초당적 위치에 섰다>는 정도로는 도저히
사태를 수습할 수가 없게 되고 말았다.
이제는 어떤 극적 조치가 취해지지 않는 한
이 사태를 해결하기는 어려울 정도로
매듭이 굵어지고 만 것이다.
날이 밝자, 허정은 다시 경무대로
들어갔다. 뒷날 허정은 <4월 26일 아침
6시에 이 박사에게 하야를 권고할 결심으로
놓고 있는데, 이것은 당시 기억의 착오가
아닌지 모르겠다.
왜냐하면, 하루 전인 4월 25일에 수석
국무위원인 외무부 장관 자리에 갓
취임했을 뿐인 그가 이승만에게 <하야를
권고할 생각이었다>고 한다면 논리적인
모순을 면할 수 없게 되기 때문이다.
허정은 이승만에 의해서 수석 국무위원에
임명된 사람이다. 그런 만큼 이승만이
대통령직에서 물러난다면 그 역시 물러나야
마땅하다. 그것이 정치도의(政治道義)이기
때문이다. 이승만이 물러나는 처지에, 그에
의해서 임명된 사람이 명분을 찾기
어려워서라도 그 자리에 앉아 있을 수는
없는 일이다.
하여간에 허정이 경무대에 들어가니
비서관들이 우왕좌왕하면서 갈피를 못 잡고
있는가 하면, 이미 사표가 수리된 김정열도
거기에 들어와 있었다.
사실은 이날 아침, 이승만은 한
비서관에게 <국민이 원한다면 대통령직에서
물러나겠다>는 성명서를 구술시켜 놓고
있었던 것이다.
이승만은 하야성명 구술을 마치자, 옆에
기립해 있던 김정열에게 매카나기와 유엔군
총사령관 매그루더를 불러들이라고
명령했다. 사전에 대통령직에서 물러나기로
했다는 것을 통고하기 위해서였다.
이승만의 명령에 따라 매카나기와
매그루더가 그 모습을 나타내기도 전에
먼저 계엄사령관인 송요찬이 데모대의
대표라는 사람 다섯 명을 데리고 들어왔다.
대모대의 요구를 대통령에게 전달하고자
송요찬이 그의 부하를 시켜 동대문에서
데모를 벌이고 있던 군중 가운데서
아무렇게나 뽑아 데려온 사람들이었다.
다섯 사람 가운데 두 사람의 이름은 알려져
있다. 유일라(兪一羅:25세, 노동),
김기일(金基日:34세, 독학생) 등이다.
그들은 이승만에게 주워섬겼다.
"저 국민의 아우성을 듣고 계십니까?"
"듣고 있다."
"현 사태를 수습하려면 대통령께서
하야하시는 길밖에 없을 것 같습니다만."
"국민이 나가라고 한다면 나가겠다."
아마도 다섯 사람은 이승만이 <국민이
나가라고 한다면 나가겠다>고 한 말에
적잖이 고무되었던 모양이다.
"대통령께서 하야하신다면 누구에게
정권을 넘기시겠습니까?"
이승만이 뭐라 대꾸하기도 전에 또 한
사람이 잽싸게 이런 의견을 내놓았다.
"저희들 생각으로는 송 장군에게 정권을
인계하시는 게 좋을 듯합니다."
계엄사령관인 송요찬에게 정권을 넘기는
것이 좋겠다고 거침없이 의견을 제시했다.
옆에서 송요찬이 벙글벙글 웃으며 이런
대화가 오고가는 것을 지켜보고 있었다.
뒷날 4.19 학생의거가 벌어지자, 송요찬은
매카나기가 <송 장군이 정권을 인수하도록
하라>고 귀띔해 주더라는 말을 한 일이
있었지만 그건 새빨간 거짓말이다.
문관우위(文官優位)가 체질화되어 있고
하물며 외교사절이 매카나기가 그 따위
대표도 아닌 사람들을 대표라고 데려다가
이승만에게 그런 엉뚱한 의견을
개진시켰는가 하면, 매카나기 어쩌고 하며
한 말을 종합해 볼 때 송요찬은 <60만
대군은 내 명령 한마디에 기계처럼 움직여
주겠다. 빌어먹을, 이 기회를 이용해서
대권을 한번 잡아봐?> 하고 그 나름대로
엉뚱한 꿈을 꾸고 있었던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그렇지 않았다면 어째서
시키지도 않았는데 데모대 대표니 뭐니
하는 청장년들을 데려다가 엉뚱한 수작을
했겠는가?
하여간에 이날 이승만은 <국민이
원한다면 대통령직을 사임하겠다>라고
발표하고야 말았다.
국민이 원한다면, 곧 민의(民意)에 따라
민의는 이미 분명히 밝혀져 있었다.
지금까지 전국 각처에서 벌여온 데코가
바로 그 민의였고 또 어젯밤 대학 교수들이
<학생의 피에 보답하라!>고 절규한 것이
바로 <민의>라는 것이었다.
그런데 새삼스럽게 국민이 원한다면
물러나겠다는 것은 무슨 수작인가?
이승만은 국민이 원한다면 대통령직에서
물러나겠다고 할 때 그 한마디만 한 것이
아니다. 국민이 원한다면 정.부통령 선거도
다시 하고, 또 이기붕을 공직에서도
물러나게 할 것이며 내각책임제로 개헌도
하겠다고 곁들였다.
그는 왜 이런 사족들을 달았던 것인가?
그것은 난마와도 같이 헝클어져 있는
난국을 그의 책임하에 수습하겠다는
해도 이승만이 땅 짚고 헤엄치기로
대통령에 당선될 것은 틀림없는 일이다.
물론 민주당에서 새로이 대통령 후보자를
내놓는다면 그 결과는 가늠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하지만 민주당의 체제에 대한
기본 정책은 내각책임제였다. 모사인
엄상섭이 대통령 계승권이 있는 장면을
서둘러 부통령직에서 물러나게 한 것도
내각책임제로 전환할 때에 대비하기 위한
포석이었다. 그러한 민주당의 처지였고
보면 이제 새삼스럽게 대통령 후보자를 낼
리는 만무한 일이었다. 그렇다면 이승만이
또다시 뽑히게 되리라는 것은 불을 보듯
뻔한 일이었다. 일단 대통령에 당선돼 놓고
보면 내각책임제로 체제를 바꾸었다고 해서
그를 대통령직에서 밀어낼 리는 없을
그건 생각하기 어려운 일이다.
(지금껏 대권을 쥐고 흔들던
대통령이었다가 상징적인 대통령으로
신세가 뒤바뀌어진다는 것은 서운한
일이지만 어쩌겠는가, 사태가 이렇게
돼버렸으니. 상징적인 대통령만으로라도
만족하자!)
이것이 이승만의 속셈이었다.
그런데 이러한 내용의 성명이 발표되자,
주한 미대사관에서 일침을 가해 왔다.
"그따위 미봉책으로 시국을 호도하려 들지
말라."
주한 미대사관만이 아니었다. 데모대가
가만히 있지 않았다.
"어차피 물러날 수밖에 없는데 무슨 놈의
군소리가 그리도 많아? 정말 뜨거운 맛을
외쳐대기 시작했다.
<이승만은 즉각 하야하라.>
데모대의 열기가 또다시 뜨거워지기
시작했다. 그들은 파고다 공원으로 달려가
이승만의 동상을 밧줄로 묶어 쓰러뜨렸다.
그리고는 그것을 오물차에 매달아 가지고
시내로 질질 끌고 다녔다.
데모대의 열기가 뜨거워지기 시작하자
국회에서도 서둘러 <이승만은 즉시
하야해야 할 것이며 정.부통령 선거를 다시
실시하고 개헌을 한 다음 총선거를
실시토록 한다>라는 내용의 시국수습안을
가결했다.
이 <시국수습안>은 민주당에서 제출한
결의안이었다. 국회의 절대 다수당인
자유당 의원들은 데모대의 열기가
야당에 동조해 버리고 말았던 것이다.
일이 이렇게 벌어지게 되자, 이승만도
이제는 더 이상 어쩔 수가 없었다. 그의
정치적 운수도 이제 끝장이라는 것을
절감하지 않을 수 없었다. 다음날 그는
비서를 시켜 국회에 대통령직 사임서를
제출시키고 말았다.
4월 26일에 이승만이 제출한 대통령직
사임서는 국회에서 그 즉시 수리되었다.
(대통령이 사임을 했으니 이제 내가 해야
할 일도 없어지고 말았군.)
허정은 이승만의 대통령직 사임서가
국회에서 수리되었다는 소식을 접하자,
자택으로 돌아가고 말았다.
허정은 이승만에 의해서 수석 국무위원인
외무장관에 취임했던 사람이다. 임명권자가
물러났으니 임명권자와 진퇴를 같이 해야
한다는 것이 허정의 생각이었다. 옳은
판단이었다. 정치적으로나 도의적으로나
응당 그렇게 하는 것이 옳은 처신이었다.
허정이란 사람은 그렇듯 분명한
사람이었다.
국회가 발칵 뒤집혔다.
이승만의 대통령직 사임서를 수리하고 난
국회는 <3.15 정.부통령 선거를 무효화하고
재선거를 실시하며, 과도정부하에서
내각책임제 개헌을 하고 개헌안 통과와
함께 즉시 총선거를 실시해서 과도기를
마무리짓도록 한다> 등의 정치 일정을
말았다는 소식에 접했던 것이었다.
국회가 당황해 하는 것도 무리가
아니었다. 허정이 물러나 버리고 나면 정치
일정이고 뭐고 있을 수가 없다. 무정부
상태가 되어 버리고 말기 때문이다.
"괘씸한 놈들, 잘코사니다. 잘코사니야!"
자유당 강경파 가운데에는 속으로 쾌재를
부른 자도 없지 않았을 것이었다.
어쨌든 국회에서는 서둘러 대표 몇
사람을 뽑아 신교동 허정의 집으로 보냈다.
허정을 달래기 위해 평소 그와 친분을
두텁게 하고 있는 사람을 사절로 선정할
정도로 국회는 신경을 썼다.
"우양! 국회에서는 말이오, 수석
국무위원인 우양이 대통령 권한을 대행해서
시국을 수습하기로 결의를 했소. 그런데
어서 나가서 내각을 완료해야 할 것이
아니겠소?"
"아니, 나는 그렇게 할 수는 없소. 나는
이 박사에 의해서 수석 국무위원이 됐던
사람이오. 그런 내가 이 박사가 물러난 이
마당에 무슨 염치로 대통령 권한대행을
맡는단 말이오? 인간적으로나 또
정치도의상으로나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일이오."
"그 무슨 말씀을! 지금 인간이 어떻다
정치도의가 어떻다 하고 있을 때요?
무엇보다도 먼저 난국에 처한 시국을
수습해 놓고 볼 일이 아니오?"
국회 대표는 대의명분을 내세우며 허정을
억지로 끌고 국회로 향했다. 국회 부의장인
이재학(李在鶴)의 방에는 여.야의 중진들이
직전까지만 해도 입에 게거품을 물고
싸우던 그들이었다. 그러던 그들이
이승만이 물러나고 나자 사이좋게 무릎을
맞대고 시국수습을 논의하고 있었다. 다만
그들한테 차이가 있다면 얼굴에 나타내고
있는 표정 정도였다. 여당인 자유당
중진들의 모습에는 수심이 가득한 반면,
야당인 민주당 중진들의 표정은 지극히
명랑하기만 했다. 인간의 속성이 너무나
노골적으로 드러나 있는 것에 허정은
구역질이 날 정도였다.
이재학이 일동을 대표해서 국회의 결의
사항을 알려주고 속히 과도정권을
출범시키기 위한 조각을 서둘도록 하라고
재촉했다.
"아니, 난 그럴 수 없어요."
거절했다. 아까 자택에서 국회 대표에게
내세웠던 거절의 이유를 되풀이 설명했다.
부의장실 공기가 갑자기 싸늘하게 변하는
것 같았다. 여당 중진들의 표정에는 변화가
없었으나 민주당 중진들의 표정은 적잖이
굳어졌다. 그들은 무정부 상태가 되는 것을
염려하고 있는 것이 틀림없었다.
"우양! 우양의 그 심정 이해 못하는 바는
아니오. 하지만 우양마저 물러나고 나면
행정부는 완전히 공백 상태에 빠지고 말 게
아니겠소? 그렇게 되면 시국수습은 점점
어려워지고 맙니다. 그러니 마음을
돌리도록 해보시오."
이렇게 간곡하게 권고하는 이는 민주당의
중진인 곽상훈(郭尙勳)이었다.
(공백 상태가 되는 것이 두렵거든 어째서
시국을 수습하고 나서 이 박사를 물러나게
하더라도 얼마든지 가능한 일이 아니오?
일은 당신들이 벌여 놓고 나더러는 그
뒷치닥거리나 하고 있으라 그거요?)
허정은 마음껏 호통을 쳐주고 싶은
충동이 일었으나 억지로 속마음을
억눌렀다. 그는 여러 중진들의 간곡한
권고를 완강히 고사하고 집으로 돌아오고야
말았다.
국회에서는 대표 몇 사람을 또 허정의
집으로 보냈다. 이번에도 역시 그와 친분이
두터운 사람들을 골라서 보냈다.
"우양, 고집을 꺾으십시오. 지금이 어느
때입니까? 인간적이다, 도의적이다 하고
따질 때가 아니지 않소?"
"나라를 먼저 생각하셔야죠. 고집 하나
아니오?"
그들은 지성으로 허정의 과도정권 출범을
요청했다.
"알겠소. 재고해 보도록 하지요."
허정은 마침내 재고해 보겠다고 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들 국회 대표가 돌아가고 난 다음,
허정은 밤 늦게까지 조용히 생각하는
시간을 가졌다.
(어떤 경로로 내가 수석 국무위원에
취임했든, 내가 현재 그 수석 자리에
있다는 것만은 엄연한 사실이다. 어느
친구의 말처럼 과도정부를 맡는 것은 나의
운명인지도 모른다.)
국회 대표가 그를 찾아왔을 때, 어느
국회의원인가 이렇게 말했었다.
운명이오. 인간이란 닥친 운명을 회피할
수는 없는 일이 아니겠소. 이승만 박사가
국부(國父)의 자리를 유지하지 못하고
축출당한 것도 운명이었고 우양이 이
혼란한 시국을 떠맡게 된 것도 운명이란
말이오. 아예 운명을 거역할 생각일랑 하지
마시오."
그렇다. 대통령이 돼 보지 못하고 대통령
권한대행을 떠맡게 된 것은 피할 수 없는
운명인지도 모른다. 허정은 이 운명은 피할
수 없는 것이 아닐까 생각했다.
(군부(軍部)의 협력을 얻느냐 얻지
못하느냐에 따라 과도정권의 성패는
가늠된다.)
과도정권의 앞날에 대해서 허정은 이렇게
점쳐 놓고 있었다.
놈 투성이였다. 어느 놈이고 털어 먼지 안
나는 놈 없었고 벗겨서 구리지 않은 자가
없었다.
그런 썩은 놈 천지 속에서 유독
군계일학(群鷄一鶴)격으로 세속에 물들지
않고 고고한 자세를 지니고 있는 일단의
무리가 있었다면 그들은 역시
학생들이었다.
<무슨 놈의 과도내각을 썩은 무리로
구성을 했어? 우린 과도내각을 절대로
지지하지 못하겠어?> 학생들이 이런 주장을
하고 나오기라도 하는 날엔 큰일이었다.
그래서 어느 장관보다도 국방장관 기용에
더 신경이 쓰여졌다.
(누굴 국방장관에 앉힌다?)
아무리 주위를 둘러보아도 적당한 인물이
국가에서는 국방장관을 문관으로서
기용하고 있지만, 이 시점에서는 문관의
등용을 고집할 수만은 없을 것 같았다.
군부에서 존경하는 인물을 기용해야만
군부의 동요를 막을 수 있다는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그러자면 군 출신자를
국방장관으로 기용하는 것이 가장 무난할
것 같았다.
(누굴 국방장관에 기용한다?)
허정은 도시 군부와 인연이 멀었다. 아니
전혀 인연이 없었다는 것이 보다 정확한
표현일 것 같다.
허정은 국방장관감만 생각하면 이마가
찌푸려졌다.
(국방장관에 기용할 만한 인물이
이토록이나 없단 말인가.)
지금까지 귀에 담아온 군의 고급장성들의
이름을 하나하나 되새겨 보았으나 도무지
시큰둥한 느낌만 드는 인물들뿐이었다.
그때 문득, 송요찬이 머리에 떠올랐다.
(송요찬이라......?)
그는 지금 육군 참모총장으로서
계엄사령관을 겸임하고 있었다. 그래서
그의 이름이 머리에 떠오른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며칠 전, 허정이 경무대에 들어갔을 때
데모대 대표하는 젊은이들을 이승만한테
데리고 들어온 그와 얼굴을 마주 대한 일이
있었다. 그때의 인상으로는 꽤 듬직해
보였다. 몸집이 크고 우람해서 장군다운
위풍이 당당했다. 허정은 당당한 장군다운
위풍에 적잖이 마음이 끌렸었다. 이러한
송요찬을 기용하리라 마음에 점찍었다.
그 밖의 여타의 장관 인선은 그리 문제가
되지 않았다, 그는 과도내각을 맡으리라
결심을 굳히는 그 순간에 벌써 머리 속에서
각부 장관감들의 인물 윤곽을 어지간히
잡아놓고 있었기 때문이다. 다만, 여기서
한 가지 문제가 되는 것은 민주주의 지도급
인사들이 허정의 과도내각 조각을 이의
없이 받아주겠느냐 하는 것이 문제라면
문제였다.
그래서 민주주의 지도층의 협력도
당부하고 그들의 속셈을 떠볼 겸해서
안국동으로 해위(海葦) 윤보선을 방문할
생각이었는데, 마침 삼연 곽상훈이 신교동
집으로 방문했다.
그날이 바로 27일 오후 5시였다. 두
진지하게 의논을 나누었다. 그런데
곽상훈은 <과도내각은 우양의 내각이니까
알아서 마음대로 해라>는 투였으나
국방장관에 송요찬을 기용하는 문제에
대해서는 극구 반대하는 것이었다.
허정은 그 반대의 이유가 무엇인지
파고들지 않을 수 없었다.
"좀 구체적으로 반대 이유를 설명해 줄
수 없겠나. 송 장군이 어째서 안 된다는
건지?"
"세론(世論)을 무시할 수 없기
때문이야."
"세론이 어떤데?"
"송 장군의 별명이 석두(石頭)라는 것도
듣지 못했어?"
"석두라니? 돌대가리라 그 뜻인가?"
"그게 어쨌다는 거야? 석두라는 별명이
붙은 걸 보면 어지간히 뱃심도 좋구
고집깨나 있겠군."
"그래서 붙은 별명이 아니라구."
"그래서 붙은 별명이 아니라면?"
"하여간 꼬치꼬치 물을 것 없어. 송요찬
기용은 반대야!"
허정은 송요찬을 국방장관에
기용했다가는 민주당 지도층과 꽤 심하게
대립하게 될 것이라는 것을 직감했다.
허정은 다시 해위 윤보선을 만나 조각
인선문제를 협의했다.
"앞으로 천하는 민주당 것이 뻔한즉,
민주당 정권의 기틀을 잡는다는 뜻에서라도
과도내각 조각에 협조해 주게나."
"과도내각이야 자네가 이끌어 나갈
협조가 필요하겠나?"
윤보선도 곽상훈과 꼭 같은 얘기를 했다.
(그렇다면 내 의지대로 조각을 하리라.)
허정은 그 순간에 결정을 내렸다.
그러면서도 그는 다시 누구누구를 부서에
기용할까 하는데 괜찮겠는지를 물었다.
"뭐, 괜찮겠지. 알아서 하게나."
<어차피 과도내각이야 시한부 내각인데
어떤 부서에 누굴 기용한들 대수냐> 하는
투였다. 허정은 그러한 윤보선이 적잖이
섭섭했으나 내색은 하지 않았다.
"아무래도 국방장관직이 사람 택하기가
제일 어려운데."
여기까지 운을 떼고 난 허정은 힐끔
윤보선의 눈치를 살피고 말을 이었다.
"송요찬 장군을 국방에 기용할까 하는데
"뭐 송요찬?"
윤보선의 반응은 의외로 컸다.
"응, 그 사람이 괜찮을 것 같아. 여러
점으로 미루어 보아서."
"자네 미쳤나?"
"내가?"
"송요찬 씨를 국방에 기용하겠다니
말일세."
"그럼 반대란 말인가?"
"반대일세."
"이유가 뭔가?"
"이유는 말할 필요도 없어."
윤보선도 곽상훈과 마찬가지로 펄쩍
뛰기만 할 뿐, 어째서 반대하는 것인지 그
이유에 대해서는 언급하려 하지를 않았다.
(원, 고얀 사람 같으니! 안 된다는
괘씸한 생각이 들었지만 허정도 그 이상
깊이 따지고 들지는 않았다. 그 반면 그의
의지는 더욱 굳어졌다.
(민주당 친구들하고 더 이상 조각문제를
의논할 필요는 없겠어. 만사는 내가 알아서
하면 그만이야.)
하긴 그렇다. 시한부 정권이든 뭐든 우선
소신껏 일하면 그뿐이다.
(민주당 친구들의 눈치를 살필 필요가
뭐란 말인가? 이쪽은 그래도 생각을 해서
의논을 하는데, 콧대 높게 굴어! 괘씸한
것들!)
허정은 결심을 굳혔다. 결국 그는 자기의
뜻대로 과도내각을 조각하기로 했다.
2. 허정 과도정권 출범
통치권자의 사상, 이념, 그리고
시국관(時局觀)은 정국을 이끌어 나가는 데
있어 중요한 영향을 미치게 된다. 허정이
비록 선거를 통한 대통령이 아니라 시한부
대통령직 권한대행이라 하더라도 그가
통치권자임에는 틀림없었다. 그러므로 그의
사상, 이념, 시국관이 시국수습과
제2공화국 탄생과 진로에 심대한 영향을
미치게 된다는 것은 다시 말할 필요도
없었다.
그런 까닭으로 허정이 4.19라는 것을
어떻게 해석하고 있었는지 살펴보고
과도정권의 임무와 책임은 <헌정의
정상화>였다.
허정이 과도정부를 맡기로 한 것은 자기
자신마저 이승만과 함께 물러나게 되면
헌정의 중단이라는 불행한 사태가 초래되기
때문에 정치도의상의 문제를 떠나 막중한
과도정권의 수반을 맡게 되었던 것이다.
이것은 그의 숨김 없는 진실이었다. 뒷날,
그가 군사정권이 민정이양을 앞두고 실시한
대통령 선거에 <국민의 당> 후보로
대통령에 입후보한 일이 있다고 해서
정권욕에서 과도정권 수반을 맡았던 것이
아니었을까 하고 본다면 그것은 큰
잘못이다.
허정도 정치인이었다. 정권욕이 없을
리가 없었다. 그러나 이 시점에 있어서의
맡았던 것이라고 긍정적으로 바라보기로
하자.
그건 그렇고, 허정은 4.19를 어떤
시각으로 바라보고 있었을까? 그는 4.19를
결코 혁명으로 보고 있지는 않았다. 뒷날
그가 이끌 과도정권의 문교부는 4.19와
4.26을 묶어 <4월 혁명>으로 호칭토록
결정했지만, 허정은 그 시점에 이르러서도
생각을 바꾸지 않았다.
<4.19사태는 꺼져 가는 민주주의의
횃불을 지키려는 의로운 궐기였을 뿐만
아니라 정권에는 조금의 뜻이 없던 한없이
투명한 젊은 애국심의 발로였다. 이러한
의거는 혁명과는 분명히 구별되어야 하고
혁명보다는 차원이 높은 것이다. 4월의
사자(死者)들은 혁명의 전투원은 결코
의사(義士)들이었다.>
이것이 4.19를 보는 허정의 시각이었다.
그러했기 때문에 그는 <4.19 의거가
혁명이 아니었던 것처럼 과도정부가 일을
처리해 나가는 방식도 혁명적이어서는 안
된다. 가능한 한 변칙적인 방법을 피하고
헌법의 테두리 안에서 모든 시책을 수행해
나가는 자세를 취해야 한다>고 했다.
바꾸어 말하면 <비혁명적 방법에 의해서
혁명과업을 수행>하고자 했던 것이다.
앞에서 필자는 허정이 애국심에서
과도정권을 맡게 되었던 것이라고 마치
허정의 뱃속에 들어갔다 나온 것과 같은
말을 했다. 이 말을 웅변으로 증명하는
것이 허정의 <8.15까지 새 정부를
탄생시킨다>는 계획이다.
정부 탄생을 질질 끌면서 정권이양을
지연시킬 수가 있었다. 구실은 충분했다.
사회가 극도로 혼란해져 있는데 그까짓
구실쯤 찾지 못하겠는가?
국회는 아직도 자유당 국회이겠다,
그들을 회유해서 손아귀에 거머쥐고 군부의
실력자들을 무슨 수를 써서든 내 사람으로
만들기만 하면 그깐놈의 정권은 얼마든지
오랫동안 거머쥐고 있을 수가 있는
일이었다. 더구나 아직도 계엄령은
발동중에 있었다.
사령관 조재미를 회유해서 어느 놈이고
꿈틀거리려고만 해도 잡아다 족치고 주리를
틀라고 명령만 내려도 되었다.
생각하기만 하면 방법이야 없겠는가!
그러나 허정은 그따위 생각은 상상조차
정상화시키자>는 것이 그의 확고부동한
의지였다.
8.15까지 헌정을 정상화시키려면 개헌과
총선거를 서둘러야만 했다. 개헌은
민주당의 오랜 꿈이었다. 차기 정권
담당자가 민주당 이외에는 달리 세력이
없고 보면 개헌은 필수적인 정치
과업이었다.
그래서 그는 과도정권의 당면한 목표를
민심수습과 질서회복에 두었다. 뒤에
언급하겠지만 한마디로 말해서 이승만 하야
직후의 사회상은 엉망이었다. 엉망이
돼버린 사회상을 바로잡지 않고는 개헌이고
나발이고 생각하기가 어려웠다. 그러자면
무엇보다도 먼저 4.19의 원인이었던
부정선거 관련자에 대한 처벌이 선행되어야
한데, 부정선거 관련자를 모두 다
처벌하자면 행정력, 경찰력이 모두 마비될
수밖에 없는 실정이었다. 경찰력을 포함한
전 공무원이 부정선거 관련자였기
때문이었다.
여기에서 허정은 1차적으로
원흉(元兇)급만을 처벌하고 나머지
송사리떼들에 대해서는 새 정부에 맡긴다는
기본 방침을 세워 놓았다. 허정의
<과도정부 응급실론>은 이래서 생겨나게
되었다.
<과도정부의 역할은 응급조치에 있다.
그러므로 과도정부는 응급조치만을 취하고
자유당 정권이 저질러 놓은 온갖 부정과
부패로 대수술이 필요한 환부는 새 정부가
맡아야 한다.>
그런데 허정은 이 응급처치의 한계를
어디까지 그어놓고 있었던 것일까?
우리들 한민족의 민족성은 어떤 것일까?
이승만이 하야를 하고 경무대를 떠나
이화장으로 향할 때, 그 근처에 살고 있는
시민들은 <여생을 편안하게 보내시라!>
하며 박수로서 환송했었다.
그러나 또 다른 한편에서는 <인간으로서
어찌 그럴 수 있단 말인가?> 하고 이맛살을
찌푸리게 하는 사건들을 연출해 내고 있다.
그 사건들이란 다름이 아니었다.
어제까지 상사로 깍듯이 모시고 있던
부하라는 무리가 그 상사를 몰아내기
있었던 것이다.
과도정권도 정권은 정권이었다. 비록
시한부라고는 하나 어김없는 정권이었다.
그렇다면 모든 것을 과도정부한테 맡기고
굿이나 보고 떡이나 먹으면 될 일이었다.
그것을 부하들이라는 것들이 <이제 세상은
뒤집혔다!> 하고 두 눈에 불을 켜고 상사를
몰아내고자 광란의 춤을 추고 있었으니
어찌 한민족을 선하고 착한 민족성을 지닌
민족이라 할 수 있겠는가! <주먹은 가깝고
법은 멀다>는 속담을 뼛속 깊숙이
실감해야만 했다.
세상은 분명히 뒤집혔다. 그와 함께
어제까지는 정의였던 것이 오늘은 불의로
전락해 버린 게 사실이다. 한데, 세상이
뒤집혔으니까 과도정권이 들어서게 된
어제까지의 정의에 대해서는 과도정권이
알아서 다스리면 된다. 그래야 법치국가라
할 수 있을 게 아닌가! 그것은 법은 멀고
주먹은 가깝다는 식으로 폭력을
휘둘러댔으니 밝은 세상에 이런 행위가
용납될 수 있단 말인가?
과도정권의 수반인 허정은 이미 결의를
다진 바 있었다. 그는 앞에서 소개한 바와
같이 과도정권이 해야 할 일이 무엇인가를
만천하에 천명한 바 있었다. 또 4월 29일의
첫 국무회의에서도 대통령 권한대행
취임인사를 겸해서,
"여러분, 오늘의 우리 국가가 우리
과도정부에게 무엇을 요구하고 있는가를
같이 인식해 주시기 바랍니다. 오늘의 이
난국을 슬기롭게 개척해 나가는 데
일사보국(一死報國) 일련탁생(一連托生)의
동지적 결합으로 국민이 바라는 바를
유감없이 척결해 나가야 할 줄로 압니다."
하고 과도정권의 사명에 대해서 거듭
천명했던 것이다.
그랬으면 됐다. 과도정권을 믿고
과도정권에게 맡겨 놓고 있었으면 족했다.
그런데 <세상이 뒤집혔으니까> 하고
어제까지 상사로 모시던 사람을 내쫓으려
들었으니, 이게 도대체 무슨 해괴망칙한
짓이란 말인가!
부하들이 야합애 상사를 몰아내려는 소위
<자가숙청>에 불씨를 던진 것은 서울
동대문경찰서 서원들이었다. 그들은
과도정권이 막 출범을 하기 시작하려는 4월
27일, 서원 모두가 사복을 입고 출근을
하여금 서장 앞에 내놓도록 했다.
"서장님, 이건 우리 서원 모두가
서장님의 퇴임을 요구하는 연판장입니다.
우리는 서장님의 명령에 따라 부정선거에
관련한 것인즉, 명령권자인 서장님은
당연히 책임을 지고 물러나야 마땅하다고
생각합니다."
부하 직원들이 내놓은 연판장을
들여다보는 동대문 경찰서장의 심정이
어떠했을까? <이 사람들아, 자네들만
피해자가 아니라 나도 피해자야! 내가
부정선거를 지령하고 싶어서 지령했겠는가?
목구멍이 포도청이라 상사의 명령을 거역
못했던 것이란 말이네. 그것을 번연히 알고
있으면서 날더러 물러나라니 이럴 수가
있단 말인가?> 서장은 이렇게 항변하고
부하직원이 상사를 내몰려는 행위는 좀
심하게 표현하면 똥 묻은 개가 겨 묻은 개
나무라는 격이었다.
원흉(元兇:최고의 지령자)을 제외한
부정선거 관련자들은 모두가 꼭 같은
피해자들이다. 피해자가 피해자를 내몰려는
획책을 하다니, 이런 놈의 세상이 어디에
있겠는가! 그 따위 놈들을 부하라고 믿고
일을 해온 서장도 팔자가 기박했다고 할
수밖에 없는 일이었다.
세상이 뒤집히고 나면 지성(知性)도
개떡이 되고 마는 모양이었다. 같은 날
사법부에서도 자가숙청에 착수했다. 서울
고등법원과 지방법원의 법관 일동은
긴급회의를 열고 대법원장 이하 전
대법관의 사퇴를 권고하는 결의를 했다.
가나, 흔히 <사법부는 민주주의 최후의
보루>라고들 해왔다. 그 민주주의 최후의
보루였던 사법부가 정치권력의 압력에
굴복해 버리고 말았던 것만은 사실이었다.
그런 만큼 대법원장 이하 전체 대법관이
그런 수모를 받아야 하는 것은 어쩌면
인과응보였다고 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러나 말이다. 그런 결의를 한
법관들은 양심에 티끌만큼이라도 가책받을
짓을 하지 않았느냐 말이다.
<나는 어떤 압력, 어떤 유혹에도
굴복하지 않는 법관으로서 양심을 끝까지
지켜왔다> 하고 떳떳이 소리칠 수 있는
법관이 과연 몇이나 됐겠느냔 말이다.
우리는 알고 있었다. 이승만 12년 집권
기간 중 숱하게 벌어졌던 정치음모의
하는 것을. 그런데도 그런 위인까지도
자리를 같이 해서 자가숙청을 합네 하고
설쳐댔으니 울어야 할지 웃어야 할지 그저
기가 막힐 뿐이었다.
마침내 자가숙청의 바람은 회오리 바람이
되어 사방으로 확산됐다. 어디라 할 것
없이 조용한 곳이 없었다.
<세상이 뒤집혔으니까!> 하고 이런
현상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이기에는 우리
민족의 치사스러운 속성이 너무나 알알이
드러나 있어 서글프기만 했다.
정치권도 역시 마찬가지였다. 아니
목청이 더 우람했고 요란했다.
자유당 소속 국회의원과 당 간부는
정치적 형식적 책임을 져야 한다는 것이
정치권 분위기였다.
죽었는지 자유당 소속의 박만원(朴晩元),
최인규(崔仁圭), 손도심(孫道心) 등은 4월
29일에 자진해서 의원직 사퇴서를 국회에
제출했다. 하기야 이런 자들은 원흉에
속하는 무리였으니 물러나는 것이
당연했다. 특히 이날 의원직 사퇴서를
제출한 전 내무부 장관 최인규는 서울
지방검찰청에 자진 출두, 구속을 당했다.
최인규의 자진 출두에는 말도 많았다.
"거 배짱 한번 좋군! 도망갈 생각을 않고
자진 출두를 하다니?"
"뛰어야 벼룩이지, 제놈이 도망간다면
어디로 도망을 가?"
"내무부 장관까지 지낸 위인이야.
도망가자면 일본이구 미국이구 도망갈 데가
없겠나. 그런데도 출두했다는 것은 가상할
나중에 최인규는 사형을 당했지만, 그는
사형을 각오하고 자진 출두했던 것일까?
아니면 <몇 해만 콩밥을 먹으면 밝은
세상을 다시 만날 수 있겠지> 하는 안이한
계산으로 자진 출두했던 것일까? 하여간
자진 출두했다는 사실만은 가상타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정치를 했던 사람으로서는 의당
마음가짐이 그래야 옳았다. 이에 비해서
한희석(韓熙錫), 이존화의 행위는
어떠했던가? 이 두 사람은 최인규에
버금가는 원흉이었다. 그런 중죄인인 이 두
사람은 체포당하는 것이 두려워 삼십육계
위주상계로 줄행랑을 쳤었다. 나중에는
체포당해 재판에 회부되었지만 정치를
했다는 작자들의 그 행위가 얼마나
(누굴 국방장관에 기용해야 옳단
말인가?)
과도내각의 조각에 착수한 허정이 가장
골치를 썩은 것은 국방장관 등용 문제였다.
인재는 제제다사(濟濟多士)였다. 그러나
도무지 적임자를 발견하기가 어려웠다.
허정이 국방장관 기용에 그토록 골치를
썩혔던 이유는, 국방장관에 따라 군부의
지지를 받을 수도 있고 헌신짝 신세가 될
수도 있다고 보기 때문이었다.
처음 민주당 인사들이 과도정권을
맡아달라고 간청을 할 때, 그의 머리에
제일 먼저 떠오른 것이 군부였다.
것인가?> 하는 것이 그로서는 숙제였던
것이다.
허정이 군부 사정에 밝았다면 또 모른다.
그는 군부 사정에 대해서는 전혀
문외한이었다. 그에게는 친근하게 지내는
장성 하나 없었다. 장성들이란 자기의
출세에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세도가하고나 가까이 하려 했지 별볼일
없는 허정하고 가까이 지내려고 접근해
오는 사람은 없었다. 그러니 군부 사정에
대해서 어두울 수밖에 없었다.
장성들이 허정한테 접근하려 하지 않았던
이유는 허정의 소문난 성격에도 원인이
있었다. <원리원칙만을 고집하는 위인,
사람을 끌어올려줄 줄 모르는 위인.>
이것이 허정의 소문난 성격이었다. 그러니,
오겠는가.
누구누구였다고 밝히기는 거북한
일이지만 장성들이 어떻게 한 자리를
얻어볼까 하고 허정에게 접근해 오기
시작한 것은 그가 과도내각을 맡겠다고 한
후부터였다.
이때라도 좀 못 이기는 체하고 그들과
친교라도 맺어두었더라면 이럴 때 자문을
구할 수도 있는 일이었다. 그러나 이때에도
그는 소문난 성격 그대로 행동했다.
물리치기 거북한 사람의 소개장을 들고
오는 사람까지도 그는 일체 수인사(修人事)
정도의 선을 넘지 않도록 애를 썼다. 물론
청탁 따위는 귀조차 빌려주려 하지를
않았다. 자연 접근해 오던 사람들의 수가
뜸해지고 말았다.
허정은 며칠을 두고 고민했다. 그러나
궁하면 통한다고 했듯 허정이 번민에
번민을 거듭하고 있을 때, 문득 그의
뇌리에 떠오르는 인물이 있었다. 그 인물은
이종찬(李鍾贊) 바로 그 사람이었다.
허정은 무릎을 탁 쳤다.
(내가 왜 진작 이 사람을 생각해 내지를
못했지?)
허정은 서둘러 이종찬의 현직이
무엇인가를 알아보았다. 육군대학
총장이라고 했다.
(날이 밝거든 지체없이 연락을
취해야겠군.)
허정은 이종찬이란 인불에 대해서 남다른
외경심과 애정을 품고 있었다. 거기에는
까닭이 있었다. 6.25로 정부가 피난살이를
일이 있다. 그때 이종찬은 육군
참모총장이었다. 이른바 <5.26 정치파동>이
일어난 것이 그 무렵이다. 허정은 5.26
정치파동이 터지기 직전에 국무총리
서리직에서 물러났지만, 이종찬은
정치파동이 한창 벌어지고 있을 때에도
여전히 육군 참모총장이었다. 한데
이승만은 정치파동이 벌어지자, 이종찬에게
병력을 동원하라고 명령했다.
그러나 이종찬은
"군대는 국가민족의 수호를 사명으로
하고 있는 국가의 간성으로서 정치적인
문제에 개입시킬 수는 없습니다" 하고 딱
잘라 거부했다.
대통령은 국군의 통수권자다. 그
통수권자인 대통령의 명령을 정면으로
못할 일이다. 통수권자의 명령을
거부한다는 것은 명령불복종죄에 해당되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이종찬은 대통령의
명령을 정면으로 거부했다. 군부가 정치
문제에 개입한다는 것은, 국가의 간성인
군대의 순수성에 먹칠을 하는 것이라는
그의 신념이 그토록 대담한 행동을 취하게
했던 것이다. 육군본부 작전교육군 차장인
대령 박정희가 군사 쿠데타를 논의했던
것도 이 무렵의 일이다.
이때 이종찬이 대통령의 명령을 정면으로
거부했기 때문에 이승만은 하는 수 없이
원용덕을 이용하게 되었고 이것을 계기로
원용덕은 점차 정치장군(政治將軍)으로서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어쨌든 허정은
이때의 이종찬의 처사를 높이 평가하게
것이다.
국방장관 문제가 일단락되자, 내무와
법무를 제외한 여타의 인물에 대해서도
일사천리로 메모해 나갔다.
재무부 장관 윤호병
문교부 장관 이병도
상공부 장관 전택보
보사부 장관 김성진
교통부 장관 석상옥
부흥부 장관 전예용
과도정권이라는 것이 어차피 시한부
정권이니까 각료인선이 잘 됐느니 안
됐느니 시비할 것도 못 된다. 그리고
허저이 인물등용에 있어서 애쓴 흔적이
보이기도 한다. 그렇기는 하되 허정쯤 되는
인물도 인사문제에 있어서는 다분히
인사를 통해서 엿볼 수가 있다.
비록 시한부의 과도정권이라 할망정 국민
대중은 그래도 산뜻한 느낌을 주는 인물을
등용하겠지 하고 은근히 기대하고
있었는데, 정실에 치우친 인사라는 인상을
받게 되자 적잖이 실망했던 것도 사실이다.
그도 그럴 것이 문교부 장관으로 발탁된
이병도는 허정과 보성전문학교
동기동창이었고, 상공부 장관으로 발탁한
전택보는 보사부 장관으로 발탁한 김성진은
허정과 막역한 친구 사이였다. 그리고
교통부 장관으로 발탁한 석상옥은 허정이
교통부 장관 재임 때의 부하인 교통부
자재국장이었다. 진정 정실을 배제한
인물을 골랐다고 하면 국방부 장관 이종찬
정도였다.
이종찬을 내각에 끌어들이는 데 있어서는
유비 현덕이 삼고초려로 제갈양을
맞아들이듯 해야만 했다.
그 경위를 소개하자면 이렇다.
날이 밝자, 허정은 내무부 장관 이호를
시켜 진해에 있는 이종찬을 불러 올리도록
했다. 군령여산(軍令如山)이 몸에 밴
이종찬은 대통령 권한대행이 부른다는 말에
지체없이 상경했다.
이호의 안내를 받아 내각수반실로 찾아온
이종찬을 대하자 허정은 거두절미하고,
"과도정권의 국방부 장관직을 맡아
주셔야겠소!" 라고 했다.
여기에 대해서 이종찬이 뭐라고
대꾸했는가.
"저한테는 노모가 한 분 계십니다.
상의를 해봐야겠습니다." 하는 것이었다.
허정은 꼭 그래야 한다면 노모하고
상의한 후에 확답을 해달라고 했다.
이종찬은 노모와 입각 문제를 상의한
모양이었다. 곧 다시 찾아온 이종찬은
이렇게 말했다.
"노모께서 한사코 반대하시니 도저히
입각을 수락할 수가 없습니다. "
장관 감투를 씌워 주겠대도 싫단다.
허정은 좀 어리둥절해졌다. 비록 시한부
장관이라 하더라도 장관 감투 한번 써보고
싶어서 자천타천으로 모여드는 인사로
문전성시를 이룰 정도였는데, 장관 감투를
씌워 주겠대도 싫다니 이 사람 제정신인가
하는 의심이 들 정도였다. 여담이지만 건국
이후 숱한 인물들이 장관 감투를 쓰고 벗고
정도가 아니었을까? 역대 정권의 누구라
이름을 들기엔 좀 거북하기 때문에
여기에서 이름을 밝히는 것만은 삼가하지만
그 인물은 개각이 있을 때마다 <이번에는
대통령께서 꼭 나를 부르게 될거야!>
하면서 예복으로 갈아 입고는 종일토록
전화통 앞에 지켜 앉아 연락 오기만
기다리고 있었다 한다. 장관 감투란 그만큼
매력적인 감투임에는 틀림이 없다.
그런데도 이종찬은 감투 따위는 탐을 내지
않고 있었으니, 이종찬이 어떤
인물이었는지는 미루어 짐작할 수 있을
줄로 안다.
각설하고.
허정은 이종찬이 입각을 사양하자,
이호를 대통령 권한대행의 특사자격으로
"지금 우리 나라는 가장 어려운 고비에
있습니다. 이 어려운 고비를 넘기자면
아드님의 협조가 절대적으로 필요합니다.
그러니 나라를 위하는 마음에서 아드님의
입각을 허락해 주십시오."
이호는 계속 고개를 가로젓기만 하는
이종찬의 노모를 설득하느라 진땀깨나
흘려야만 했다. 그렇게 한 결과로 해서
간신히 승낙을 얻어냈던 것이다.
조각을 끝내고 나자, 허정은 과도정권의
임무와 결의를 밝히는 성명을 발표했다.
-극도로 무력해진 경찰의 체계를
바로잡아 엄중 중립을 지키며 질서 회복에
진력토록 한다.
-이번 사태를 통해 나타난 국민의 불만과
등의 적폐를 일소하고 민심을 자발적이고
건설적인 의욕으로 전환시키도록 모든
제도를 개혁하겠다.
-내각책임제 개헌은 바람직하지만 국회의
자율적인 결론을 존중하겠다.
-3개워 띵이내로 새 정부를 수립하겠다.
의욕은 좋았다. 그렇게만 할 수 있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그러나 그 모든 것을
이루기에는 3개월이란 시간은 너무나
짧았다.
정치권에서 벌어졌던 일들에 대해서 좀더
구체적으로 살펴보는 게 좋을 것 같다.
버리자, 그의 추종자들의 축 늘어진 어깨란
보기만 해도 민망할 지경이었다. 여기에
반해 민주당 인사들은 어떠했던가?
<세상이 뒤집혔다. 이제 천하는 민주당
것이다> 하면서 목에 힘을 주며 갑자기
우쭐대기 시작했다. 의기양양했다. 권력이
있을 때는 우쭐거리고 권력이 떨어지면
어깨가 축 처지는 것이 인간의 숨김 없는
속성인 것 같았다. 우쭐해진 민주당은
국회에서 이기붕, 최인규, 이존화(李存華),
장경근(張璟根), 박만원, 신도환(辛道煥),
손도심 등 여덟 명 의원에 대한 사퇴권고
결의안과 부의장 임철호(任哲鎬)와
한희석의 의원직을 사퇴시키는 결의안을
가결시켰다.
국회는 아직도 자유당 국회였다. 만일,
수 없다며 마음을 다부지게 먹기라도 하는
날엔 그러한 결의안이 통과될 리가 없었다.
그러나 갓끈 떨어진 쪽박 신세가 되어 버린
자유당 국회의원들은 민주당의 요구에
응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들도 처해진
현실을 외면할 수는 없었기 때문이었다.
이런 결의를 해주고 의원총회를 연 자유당
의원들은 <3.15 정.부통령 선거는 부정선거
였고, 집권당 소속 국회의원들로서 그런
부정을 저지르는 것을 미연에 방지하지
못한 것을 깊이 사과한다>라고 국민에게
사과하는 사과문을 발표한 다음 <개헌이나
하고 나거든 전원 국회의원직에서
물러나기로 하자>고 결의했다.
개헌이란 물론 대통령 중심제의 정치
제도를 내각책임제로 바꾸는 것을 말한다.
꿈이었다.
대통령제는 독재로 흐를 위험성이 다분히
있으므로 대통령의 독재를 막기 위해서는
내각책임제로 정치 제도를 바꾸어야 한다는
것이 민주당의 주장이었다.
더구나 민주당이 3.15 정.부통령 선거
때도 내각책임제 개헌안을 선거공약으로
내세우고 있었기 때문에 자유당
국회의원들은 민주당이 틀림없이 개헌
문제를 들고 나오리라 믿고 개헌을 하고
나서 총사퇴할 것을 결의했던 것이다.
그것이 이승만 대통령직 사임서가 국회에
접수되어 수리된 1960년 4월 27일이었다.
한데, 각급 기관에서 3.15 부정선거를
둘러싸고 하극상이 벌어지고 있을 뿐만
아니라 다음날인 28일에는 이기붕 일가
내려앉는 큰 충격을 받았다.
"망해도 깡그리 망해 버리게 된 판국에
개헌은 무슨 말라 비틀어진 개헌이란
말이오? 당장 물러나 버리고 말도록
합시다."
충격의 결과이기는 했지만 자유당
소장의원들 가운데서는 이런 주장을 하고
나서는 사람도 없지는 않았다.
만일, 이들 소장의원들의 주장에
동조해서 자유당 국회의원들이 사퇴서 한
장씩 써서 내던지고 물러나 버리는 날에는
큰일이었다. 시국수습의 길은 막막해지기
때문이었다.
따지고 보면 허정에게 과도정권을 맡겼던
것도 그 방법밖에는 달리 대안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혁명적 방법으로 새 술은 새
그러나 그렇게 하자면 시간이 오래 걸리는
것도 문제이거니와 무정부 상태를 어떻게
메꾸어 나가느냐 하는 것도 문제였고,
무엇보다도 우방 각국의 승인도 새로이
얻어야 하기 때문에 그 복잡한 절차란 이루
말할 수가 없었다. 그러므로 헌정의 중단
없이 시국을 수습토록 하는 것이 최선의
방법일 수밖에 없었다. 허정에게
과도정권을 맡기지 않으면 안 되었던
이유가 바로 그 때문이었다.
"자유당 의원들을 달래야 합니다. 자유당
의원들을 달래자면 그들에게 어떤 확고한
보장을 해주어야 합니다."
이래서 부랴부랴 제안하게 된 것이
<보복행위 엄단을 요구하는 대 정부 긴급
건의안>이었다. 이 건의안은 민주당의
되어 제안했었다. 물론 원흉급에 속하는
인물은 이 건의안에서 제외시켜 놓았다. 이
건의안은 자유당 소속 국회의원을
진정시키는 데 큰 효력을 보여주었다. 그
결과 <선개헌(先改憲) 후선거(後選擧)>라는
시국수습의 일환으로서 정치 일정도 세울
수가 있었다.
그런데 문제가 또 터졌다. 이승만이
경무대를 떠나 이화장으로 이사를 간다는
것이었다. 그 소식을 듣자 자유당 소속
위원들은 또 동요하기 시작했다.
"자폭을 해버리고 말자구! 우리 당의
총재가 경무대에서 쫓겨나고 있는 판국인데
시국수습이고 나발이고 다 내동댕이치고
자폭해 버리고 말자구!"
"옳아! 우린 민주당 놈들의 거수기
뭐가 어쨌다구 민주당 놈들의 거수기
노릇이나 하고 있어야 하느냔 말야?"
저마다 악을 바락바락 쓰며 동요하기
시작했다.
이승만은 경무대에서 내쫓긴 것이
아니었다. 당신 스스로의 의사에 따라
경무대를 떠나기로 했던 것이다. 그건
당연한 결정이었다. 이젠 대통령이
아니니까 대통령 관저에 머물러 있을
이유가 없었던 것이다.
이승만이 경무대를 떠나려 한다는 소식을
듣고 허정이 경무대로 달려갔다.
"선생님, 서두르실 것 없습니다. 그대로
머물러 계십시오."
허정은 경무대를 떠나려는 이승만을
만류했다. 그러나 이승만은 고집을 부려
내막을 모르는 자유당 정권들은 이승만이
경무대에서 쫓겨난 것으로 오해를 했던
것이다.
"동지들, 위리는 그래도 명색이 정치를
한다는 사람들이 아니오? 우리가 뿌린 씨는
우리가 거둬야만 해요. 그것이 오늘의 우리
자유당 의원들이 해야 할 일이란 말이오!"
바락바락 악을 쓰는 사람들을 달래고
어루만지고 한 것은 국회 부의장이었던
이재학(李在鶴)이었다.
"이성을 되찾읍시다. 이성을! 더 이상
역사에 큰 죄를 짓지 않기 위해서라도
우리는 이성을 되찾아야만 합니다."
이재학이 달래고 쓰다듬고 나서야 흥분에
휩싸여 있던 소장의원들이 이성을 되찾을
수가 있었다.
이날 흥분한 자유당 의원들을 진정시키고
의사당을 나온 이재학은 우두커니 서서
의원들이 돌아가는 모습을 지그시 지켜
보았다. 만감이 교차했다.
집으로 돌아오자, 그는 우선 목욕부터
했다. 그리고는 서재로 돌아와 담배를 붙여
물었다. 생각을 정리해 보기 위해서였다.
(이제 내가 할 일은 다 한 게 아닐까?)
담배를 붙여 물고 한 모금 길게 내뿜자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그는 개헌안에 서명을 할 때나 국회가
끝나 집으로 돌아올 때도 남들과 같이
어깨가 축 늘어지거나 의기소침하거나
소금물에 절인 배추같이 되지는 않았다.
졌다가 내려 놓았을 때의 거뜬한 그런
기분이었다.
그는 홀가분한 기분에 젖은 채 지난 20여
일 동안 태풍과도 같이 거세기만 했던
소용돌이를 회상해 보았다.
"지탄의 대상이었던 이기붕이 자결로서
속죄했으면 그뿐이지 이제 우리더러 어쩌란
거야?"
"옳아! 무법천지로 권력을 휘두른 것은
만송이었지 우리였던가? 우리가 혁명
대상이 되고 우리가 만송의 잘못을 뒤집어
써야 할 이유가 무엇이란 말인가?"
"내각책임제로 개헌을 해? 그래 우리를
혁명 대상 취급하면서 우리더러 내각책임제
개헌안에 도장을 찍으란 말인가?"
자유당 국회의원들은 어디 해볼 테면
무슨 죄가 있느냐? 죄가 있다면 그것은
이기붕한테 있지, 우리한테는 없다. 이렇게
배창으로 나오고 있었다.
참으로 한심한 일이었다.
"이기붕이 그 허약한 몸을 가지고
지나치게 권력에 집착했기 때문이다."
모든 잘못을 이기붕한테 덮어 씌우려
덤볐다.
어제까지 이기붕이 없으면 당도 안 되고
나라도 안 될 듯이 갖은 미태로 아양을
떨고 꼬리치던 사실을 까맣게 잊고 있는
모양이었다.
사람이란 이렇게 간사스러운 동물이던가?
이 정도 반발하는 것으로 그쳤다면 또
모른다. 한희석(韓熙錫), 임철호(任哲鎬),
장경근(張璟根) 등을 중심으로 한 소위
"뭐 개헌? 누구 마음대로? 혁명이
일어났다고 우리가 저희들 꼭두각시가 될
줄 알고 어디 할 테면 실컷 해보라지."
사실에 있어서 자유당 소속 국회의원들이
죽일 테면 죽여라 하고 나자빠지는 날엔
개헌이란 도저히 성공하리라는 전망이 서지
않았다.
여기에 부채질을 한 것이 민주당 신파
내의 이른바 선선거 후개헌(先選擧
後改憲)론자들이었다.
"우리하고 손을 잡읍시다. 우리하고 손을
잡아 개헌론을 분쇄하도록 합시다."
이래서 어제의 적과 오늘의 적은 한편이
되고자 악수를 했다.
자유당 강경론자들과 민주당 선선거
후개헌론자들이 악수를 한 것은 그들의
아니었다. <못 먹는 밥에 재나 뿌리자!>
이러한 심사에서였다.
그들이 이런 고약한 심사를 품게 된
원인은 어디에 있는가? 그것은 그들이
정치적 보복을 두려워했기 때문이었다.
(어차피 새 정부가 들어서 봐라. 그 새
정부란 10년 야당을 해온 민주당 정권이 될
것이고 그러면 그들은 10년 동안
괄시받았던 서러움을 풀기 위해서라도
반드시 정치보복을 하려 들 테니.)
그들은 민주당이 반드시 정치보복을
하고야 말 것이라고 단정하고 있었다.
자유당 사람들의 이러한 심정을
누구보다도 잘 꿰뜰어보고 있던 민주당의
권중돈(權仲敦) 외 몇몇 국회의원들은
정치보복을 엄단해야 한다는 대정부 긴급
그러한 긴급 동의안도 별 효력을 거두지
못하고 있었다.
자유당 강경파 의원들이 민주당 신파의
선선거 후개헌을 주장하는 사람들과 손을
잡고 개헌을 훼방, 조금이라도 더 지금의
혼란스러운 사태를 연장해가며 살 길을
찾고자 몸부림친 것은 어쩌면 그게 인간의
적나라한 모습이요, 인지상정이었는지도
모른다.
한데, 이렇게 자유당 강경파 의원들이 살
길을 찾아내느라 몸부림치고 있을 때,
여기에 가담해 줌으로써 반개헌파 세력을
은근히 키워준 사람들이 있었다.
그것은 자유당 내의 조경규(趙瓊奎)를
보스로 한 재건파였다. 3.15 전까지 자유당
내의 반 이기붕파로서 적지 않은 세력을
물실호기(勿失好機)라 속으로 상당히
쾌재를 불렀다.
(이참에 자유당을 우리 재건파에서 한
손아귀에 거머쥐자!)
그들의 속셈인즉 바로 이것이었다.
350만의 당원을 자랑하던 자유당이다.
이러한 방대한 세력의 조직체를 하루
아침에 무너뜨려 버리기에는 너무나
아까웠다. 그래서 그들은 지금까지
이기붕한테 붙어서 돼먹지 않게 세력이나
부리려던 못난 자들(물론 그들은 강경파를
지목해서 하는 말이었다)을 밀어내고
재건파의 손으로 당을 재정비하자는 속셈을
차렸다.
보스인 조경규는 뻔질나게 민주당
신구파의 주요 간부들과 빈번한 접촉을
"당신들이 정권을 잡게 될 경우, 우리
재건파에서 자유당을 재건하는 것을 묵인해
주시겠소?"
그는 이렇게 애매한 태도로서 흥정을
걸었다.
"만일 당신들이 우리가 자유당을
재건하는 것을 묵인만 해준다면 당신들이
주장하는 개헌에 전적으로 지지와 성원을
보내 주겠소."
이런 정치적 흥정에 김도연(金度演)과
유진산(柳珍山)은 선뜻 그러마고 약속하는
언질을 주었다. 김도연이나 유진산이
거침없이 정치흥정에 응해 준 것 역시 그들
나름대로의 속셈이 있었다.
(민심이 이미 자유당한테서 떠나간 지
오래지 않느냐. 자유당이 350만 이 아니라
출마해서 정계에 복귀하기는 어려울 게다.)
이런 계산이 서 있는 데다가 또 하나
중요한 문제가 가로놓여져 있었다. 그것은
앞서 말한 바와 같이 4대 국회의 마지막
임무라 할 수 있는 개헌안을 속히
통과시키는 일이었다.
(만일 혁명 기분에 젖은 대로 자꾸만
자유당 소속 국회의원들을 자극시키려
들다간 죽도 밥도 안 된다. 어쩔 수 없이
민주당 신파 사람들의 주장대로 선선거
후개헌을 하지 않을 수 없는 입장에 서게
될 것인즉, 그게 될 법이나 한 소리냐!
그러니까 어떻게 해서든 자유당 사람들을
달래고 무마시켜서 개헌안을 통과시켜 놓고
볼 일이다.)
이렇게 치밀한 계산을 해놓고 있었던
그런데 조경규란 사람은 민주당
구파하고만 정치흥저을 해놓고 있는 것은
아니었다. 민주당이 집권하게 되더라도
신파냐 구파냐 하는 문제가 있었다. 어쩌면
정권을 놓고 서로 자파에서 잡으려 들다가
끝내는 집안 싸움을 일으켜 갈라 서게
될는지도 모른다. 그는 여기까지 내다보고
있었다.
(그렇다면 신파하고도 적당한 흥정을
해두는 게 낫지 않겠느냐. 신파가 집권하게
될지 구파가 집권하게 될지 앞날을
가늠하기가 매우 어려운 형편이니.)
이래서 그는 신파에도 동조하는 척하며
되도록 자기한테 이롭도록 교묘히 정국을
헤엄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그토록 강경하게 배짱을 부리던
소금에 절인 배추처럼 추욱 늘어지고
말았다. 과도정부에서 장경근, 박만원,
이존화(李存華), 신도환(辛道煥),
손도심(孫道心)에게 체포령을 내리는
동시에 한희석, 박용익, 임철호,
조순(趙淳) 등을 체포 구속해 버렸기
때문이다.
검찰의 태도는 마치 민주당을 대신하는
듯 추상 같기만 했다.
그렇다고 자유당 강경파 의원들이 풀이
죽었다고는 하나 고분고분 수그러들려
하지는 않았다.
"우리 자유당 없이는 개헌안을 통과시킬
수 없으며 일체의 정치보복은 배제할
것이라 장담하던 그들이 이제 새삼스럽게
우리 보스들을 잡아간다는 것은 명백한
그러니까 민주당에서 협력을 요구해 오는
일은 무슨 일이든 무조건 거부해 버리자는
태도로 나왔다.
정치 기상도가 이렇게 급변해 버리자,
당황한 것은 누구보다도 자유당 혁신파의
보스인 이재학이었다. 그는 여러 번에 걸쳐
국회의장인 곽상훈과 접촉하면서
정치보복을 금지해 줄 것을 호소했다.
"여보, 삼연(三然), 이게 무슨 짓이요?
이렇게 정치보복을 하려 들면 점점 더
거세게 반발만 일으킬 뿐인데, 이래 가지고
무슨 수로 정국 수습을 하겠다는 게요?"
"글쎄, 나두 그런 걸 모르는 바는
아니지만."
곽상훈도 무척 딱한 눈치였다.
"우양(牛洋)을 만나 되도록 정치보복을
달라 부탁을 하긴 했소만 만사가 여의치
않은 모양이구려."
그것도 그랬다. 만일 3.15 부정선거의
원흉이라 지목되는 자유당의 강경파를
잡아넣지 않고서는 우선 분노에 끓고 있는
민중을 무마할 길이 없었다.
어쨌든 우선 분노해 있는 민중의
노여움을 풀어놓고 봐야 할 일이 아니든가.
그래서 과도정부에서도 어쩔 수 없이
임철호, 박용익, 한희석, 이존화 등 강경파
의원들을 기어이 잡아넣을 눈치 같았다.
이래서 이재학은 마냥 반발하려고만 드는
자유당 소속 국회의원들을 무마하기에
더욱더 진땀을 흘려야만 했다.
"무슨 욕을 먹든 신중하게 과거를 씻기
위해 내각책임제 개헌안을 통과시켜
한결같이 바라고 있는 바이고, 우리는
그것으로 과거를 속죄하는 뜻으로 삼으면
될 게 아니겠소?"
이재학이 반발하는 사람들을 이렇게
위로하며 무마하려 들면 핏발 선 눈을 하고
대드는 사람도 적지 않았다.
"욕까지 얻어먹어 가면서도 내각책임제
개헌을 해주란 말이오? 그까짓 개헌을
해준댔자 어차피 자유당은 멸망해 버릴
길밖에 없는데, 뭣 때문에 민주당 놈들한테
동조를 해준단 말이오?"
"그게 그런 게 아니라니까."
"뭐가 그런 게 아니란 말이오?"
"내각책임제 개헌은 국민의 여망이란
말씀이외다. 우리가 내각책임제 개헌안에
동의하는 게 어디 민주당한테 동조해 주는
그래도 그들은 좀처럼 이재학의 설득을
수긍하려 들지를 않았다.
"그까짓 내각책임제구 뭐구 다 된 굿인데
자폭해 버려요. 자폭해도 지금 당장 자폭할
것이 아니라 내각책임제 개헌안을 표결하기
직전에 자폭해 버리는 거야. 무슨 꼴이
되나 보게."
이와 같이 극도로 비관해서 자포자기로
나오는 사람들도 적지 않았다. 하여간에
그러한 사람들을 일일이 설득해서,
이재학은 자유당 소속 의원들로 하여금
내각책임제 개헌안에 서명토록 하는 데
성공했다.
그래서 그런지 그는 마냥 홀가분하기만
했다.
(이제 내 할 일은 다 했다. 이제부터
낚시질이나 부지런히 다닐까?)
그는 자신이 부정선거 원흉의 한
사람으로 몰려 영어의 몸이 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않고 있었다. 하늘과 땅을
바라보아 양심에 꺼릴 것이 없으면 마음에
불안은 없게 마련이었다. 그런데.......
조각을 끝낸 허정 과도정권이 출범의
돛을 올리자, 그와 함께 검거 선풍이
불었다.
<최인규 검찰에 자진 출두.>
신문에서는 최인규가 검찰에 자진
출두했다고 대서특필을 했으나 사실은
자진출두가 아니었다. 그는 체포되어 갔던
3.15 부정선거의 원흉은 많다. 원흉 중의
원흉은 최인규였다. 그러므로 그의
사람됨과 체포 경위에 대해서는 좀
소개하고 넘어가는 것이 좋을 것 같다.
최인규, 그는 무척 호방한 사나이였던 것
같다. 호방은 미련하다는 것과 상통하는
것이 아닌지 모르겠다.
"미련하기가 곰 같은 친구 같으니, 아니
그래 일본이나 홍콩, 아니면 미국 같은
데로 달아날 일이지 도살장으로 제 발로
걸어 들어가?"
그가 서울 지방검찰청에 자진 출두했다는
신문기사에 접한 그의 친구들은 그가 진짜
제 발로 걸어들어간 줄 알고 이렇게
안타까워했다.
최인규, 그는 아무래도 미련하긴 미련한
위주상계로 달아났더라면 그는 목숨만은
부지할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설마하니 나를 죽이기야 할라구.)
그는 이렇게 판단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미련하기 때문에, 아니 호방하기
때문에 세상을 얕잡아 보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는 분명 성품이 호방한 것만은
사실이었다. 그의 호방한 성품을
증명이라도 하듯 그에게는 이런 에피소드가
있다. 그는 X라는 여배우에게 반해
있었다(그녀는 아직 생존해 있기 때문에
명예를 위해 이름만은 굳이 숨겨둔다).
그러나 좀처럼 손길을 뻗치기가
어려웠다. 곁에서 지켜 보기에도 민망할
정도로 속만 태우고 있을 뿐이었다.
해보자꾸나.> 호방한 사나이였고 보면 이런
말로 접근할 법도 한 일이었으나, 그는
크리스천이었다. 더구나 그는 출세에
혈안이 돼 있던 참이라 계집으로 말미암아
끓어오르는 정열은 억누를 수밖에 없었다.
내무부 장관이 되었다. 이제 1차적인
출세의 목표는 이룬 셈이었다. 출세를
위해서 쓰고 있던 크리스천의 가면도
내던질 때가 됐다. 내무부 장관의 감투를
썼다고 해서 <1인지하 만인지상>의 지위는
아니지만 <3인지하 만인지상>의 지위라고
하기에 족했다. 그가 무서워하는 인물은
대통령 이승만과 국회의장 이기붕, 그리고
이승만의 호위인 곽영주 단 세
사람뿐이었기 때문이었다.
하여간 내무부 장관 감투를 제수받은 지
"돈이 좀 필요하네. 한 천만 환쯤 수표로
한 장 만들어 주게."
총무과장이 천만 환짜리 보증수표 한
장을 만들어 주자, 최인규는 그걸
웃주머니에 넣고 부리나케
청수장(淸水莊)으로 향했다. 그리고는 그
여배우를 불렀다.
내무장관의 불리움을 받았다는 것은
여배우 X에게 있어서도 일생 일대의
영광이었을 것이다. 장관이라는 감투의
마력에 이끌리어 X는 스스로 몸을
내맡겼다. 간절히 소망하던 여배우를
하룻밤 품고나자 사나이는 다음날
주머니에서 일금 천만 환짜리 보증수표를
호기있게 내던져 주었다.
"받아, 적지만."
사나이는 적은 액수라는 데에 힘을 주어
말하며 또 한번 호기를 부렸다.
"그렇다구 하룻밤 몸값으로 주는 건
아냐. 내가 얼마나 너를 사모하고 있었느냐
하는 정표로서 주는 거니까, 조금도
부끄럽게 생각할 건 없어."
X는 그것이 하룻밤의 몸값이라고 하면서
주어도 상관없을 것 같았다. 그저 입이 딱
벌어질 뿐이었다. 영화 10편에 출연을 해야
만져볼 수 있을까 말까 할 정도의 큰
돈이었기 때문이었다. 오입 한 번에 일금
천만 환을 아낌없이 뿌릴 수 있는 사나이란
그리 흔치가 않다. 그것도 한국에서
엄지손가락쯤 되는 사나이라면 모를까 일개
내무부 장관으로서 그쯤의 호기를 부릴 수
있는 사나이는 최인규를 내놓고는 달리
최인규란 그런 사나이였다. 통이 그쯤
되니까 3.15 부정선거 같은 사상
전무후무한 범죄를 저지를 수 있었던
것이다.
장관 사표를 내던지고 나서 최인규가
은신해 있던 곳은 반도호텔이었다. 4월
29일 아침 서울 지방검찰청 수사관들이
그의 방을 노크했다. 침대에 벌렁 나자빠져
있다가 노크 소리에 놀라 벌떡 몸을 일으킨
최인규는 숨을 죽였다.
"똑 똑 똑."
다시 노크 소리가 울렸다. 최인규는
그래도 숨을 죽이고 있었다. 응답이 없자,
수사관들이 도어를 힘껏 밀치고 들어왔다.
최인규는 용수철에 튕겨진 것처럼 후다닥
일어섰다.
단정적으로 물었다.
"전 내무부 장관 최인규 씨죠?"
수사관의 손에는 어느덧 수갑이 들려져
있었다.
(아아, 이제는 옴치고 뛸 수도 없게 되고
말았구나!)
최인규는 너무나 커다란 충격에 넋을
잃고 말았다. 간덩이가 큰 사나이일수록
이런 경우 커다란 충격을 받게 된다고
하던가?
또 다른 수사관이 또렷한 어조로 말했다.
"검찰헤서 선생을 부정선거의 최고
책임자로 지목하고 구속하기로
결정했습니다. 동행해 주신다면 수갑은
채우지 않겠습니다. 같이 가
주시겠습니까?"
장관에 대한 예우임이 틀림없었다. 수갑을
보고 혼비백산해져 있던 최인규는 번쩍 제
정신이 드는 모양이었다.
"선생."
최인규는 자기를 잡으러 온 수사관에게
<선생>이라는 존칭을 붙였다.
"선생."
최인규의 목소리는 어느새 애원으로
바뀌어져 있었다.
"기왕에 봐주시려거든 끝까지 좀 봐
주십시오."
"무슨 말씀이신지......?"
수갑을 손에 들고 있는 수사관이 의아한
표정을 붙였다.
"다름이 아닙니다."
최인규는 목이 타는 듯 마른 침을 꿀꺽
"내가 숨어 있다가 체포당했다는 것과
자진 출두했다는 것과는 형량에 있어서
상당한 차이가 있는 게 아니겠습니까?"
그제야 수사관들은 최인규가 무슨 부탁을
하려고 했는지, 그 속셈을 헤아렸던
모양이었다. 두 수사관은 서로 눈길을
모았다. 어쩌면 좋겠느냐 하는 것을 눈으로
의논했던 것이다.
그것을 눈치챈 최인규는 한껏 더
애원하는 목소리로 매달렸다.
"그렇잖아도 난 이승만 박사께서
하야하시고 이화장으로 옮겼다는 뉴스를
듣고 오늘이라도 자수를 해야 되겠다고
결심을 굳히고 있었습니다. 내가 자수를
해야만 그 어른께 누를 끼치지 않을 테니
말씀입니다. 부정선거의 원흉은 이
이렇게 애원을 하느 사이에 최인규는
마음속에 결심을 했다.
(그렇다. 모든 책임은 내가 한 몸에
걸머지자. 그 어른한테 누를 끼칠 수야
없는 일이 아닌가! 일개 보험회사 사원에
불과했던 내가 외자청장이 되고 교통부
장관이 되고 내무부 장관이 되어 영화를
누릴 수 있었던 것도 모두가 그 어른의
덕분이 아니더냐. 그렇다. 지난 모든
잘못은 모조리 내가 책임을 지는 것이다.
그리고 깨끗이 죽는 거다.)
죽음에 대한 결심을 굳히고 나니
지금까지의 번뇌가 말끔히 가시는 것
같았다. 그는 조용히 두 손을 모아 수사관
앞으로 내밀었다. 수갑을 채우겠으면
채우라 해서였다.
모시고 가겠습니다."
수갑을 들고 있던 수사관이 그렇게
말하면서 앞장서서 걸어나갔다.
최인규 구속의 과정은 이러했던 것이다.
서울 지방검찰청에서는 최인규를
체포하고는 자진 출두한 것으로 발표했다.
사나이의 소망에 마지막 꽃다발을 안겨주기
위해서였다. 그리고는 5월 3일에 정식으로
구속했다고 발표했다. 그쯤 인정을
베풀었다고 해서 조금도 나무랄 것은
없었다. 도망칠 수 있는 것을 도망치지
않은 것만도 감사해야 할 일이었는지도
모른다. 5월 3일, 이날 치안국장이었던
이강학도 구속되었다. 죄명은 모두 선거법
위반이었다. 전 내무부 차관
이성우(李成雨)와 지방국장이었던
정부 수립 직후 내무부 총무과장에서부터
입신출세의 길을 걸어 이기붕을 업고
자유당 제3의 실력자로까지 출세했던
한희석은, 4.19가 터지자 삼십육계
위주상계로 줄행랑을 쳤던 것이다. 끝내
꼭꼭 숨지를 못하고 5월 7일에 잡히고야
말았다.
"뛰어야 벼룩이지 제 놈이 도망을 치면
어디로 도망을 쳐?"
정치를 하던 사람답게 <잡아갈 테면
잡아가라>고 떡 집안에 버티고 있었던들
욕이라도 덜 먹을 것을 치사스럽게
도망쳤다가 잡히는 바람에 그는
국민들로부터 바가지로 욕을 먹어야만
했다.
무식하기로 둘째 가라면 서러워하던
10일에 구속되었다. 이승만에게 있어
곽영주만한 충견(忠犬)도 없었다. 그는
살신성인의 마음가짐으로 이승만을
섬겨왔다. 이승만이 경무대를 내놓고
이화장으로 이사를 하자, 그는 이승만을
따라 이화장으로 따라가 잠시도 이승만의
곁을 떠나는 법이 없었다.
검찰에서도 곽영주를 구속하는 데
있어서는 신중을 기했다. 서울 지방검찰청
검사 황은환(黃銀煥)은 하루 전인 5월
9일에 출두 명령서를 발송했었다. 정치깡패
이정재(李丁載), 임화수(林和秀) 사건
관계에 증언을 하라는 이유를 들어 출두
명령서를 발송했던 것이다.
옛날 같으면야 검찰에서 감히 출두
명령서를 발송하지도 못했겠지만 설혹
쳐버렸을 곽영주였다. 그러나 이제 세상은
뒤집힌 것이다. 출두하지 않았다가는 어떤
날벼락을 맞게 될지 모를 일이었다.
5월 10일 오후 1시, 곽영주는 이승만이
점심 식사를 끝내기를 기다리고 있다가
그의 앞에 가서 머리를 조아렸다.
"잠시, 서울 지방검찰청에
다녀오겠습니다."
이승만의 안색이 흐려졌다.
"무슨 일인데 그러나?"
"뭐 별일 아닙니다. 몇 마디 물어볼 것이
있다고 해서 다녀오려고 합니다. 곧
다녀오도록 하겠습니다."
곽영주는 다시 머리를 조아렸다.
이승만은 안스러운 모습으로 물러가는
곽영주의 뒷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처지가 못내 한스럽기만 한 것 같은
눈치였다.
검찰이 이화장으로 달려가 곽영주를
체포하지 않은 것은 이승만에 대한
배려였다. 아무리 세상이 뒤집혔다고 해도
전직 대통령 앞에서 그의 경호원을
체포하는 무례한 행동은 삼가했던 것이다.
(증인 심문 정도겠지.)
별반 깊이 생각하지도 않고 검찰에
출두했던 곽영주는 출두 즉시 황은환에
의해 쇠고랑을 차고 말았다. 권력의
무상함을 또 한번 실감하게 되는 한
순간이었다. 곽영주에 적용된 죄명은
<권리행사 방해혐의>였다.
반공청년단(反共靑年團)이라고 하면
국민의 혐오의 대상이었다. 그들이 그들의
어찌 국민이 그토록 혐오를 했겠는가.
그들은 반공을 위해서 뭉친 청년단체가
아니라 오로지 이승만, 이기붕의 정치적
전위대 구실을 하기 위해서 뭉쳤던
폭력단체였다. 그 청년단의 우두머리였던
신도환이 체포 구속당한 것은 5월
16일이었다. 그에게 적용된 죄명은 선거법
위반 및 횡령이었다.
전 재무장관 송인상(宋仁相), 전
산업은행 총재 김진형(金鎭炯)이 선거법
위반, 중뢰혐의로 구속된 것은 5월
17일이었다. 세칭 <민주당 전복
음모사건>의 열쇠를 쥐고 있는 전 법무장관
홍진기가 체포, 구속된 것은 5월
18일이었다. 이날 이중재(李重宰)와
정기섭(鄭起燮)도 체포, 구속되었다. 전
전성천(全聖天), 전 서울특별시장
임흥순(任興淳)은 5월 20일에 구속되었다.
특히 임흥순은 부통령 장면
암살미수사건에도 연루되어 있던 자였다.
"백두산 호랑이다!"
이 한마디로 울던 아이도 울음을 그칠
만큼 권세를 부리던 백두산 호랑이
김종원(金宗元)이 구속된 것은 5월
20일이었다. 이 자는 곽영주 이상 무식하기
짝이 없던 자로서 이승만의 총애를 방패로
해서 자행한 불법, 무법은 한 권의 소설을
엮고도 남음이 있을 지경이었다. 김종원이
구속될 때 서울시 경찰국의
장영복(張永福)과 오충환(吳忠煥)도
구속되었다.
잡아들여야 할 굵직한 자들은 아직도
정부에서 이재학, 임철호,
박용익(朴容益), 정존수(鄭存秀),
정문흠(鄭文欽), 조순(趙淳) 등을
잡아들이고자 국회에 그들에 대한 구속
동의요청을 한 것은 5월 23일이었고, 이
동의요청은 5월 26일에 가결되었다.
굵직한 사람들은 또 있을 텐데?
그렇다. 3.15 부정선거 당시의 각료들
가운데 아직 체포되지 않고 있는 자들이
있었다. 전 문교부 장관 최재유(崔在裕),
전 농림부 장관 이근직(李根直), 전 보사부
장관 손창환(孫昌煥), 전 부흥부 장관
신현확, 그리고 전 상공부 장관
구용서(具鏞書), 전 한국은행 수석 부총재
김영휘(金永徽), 4.19 당시의 치안국장
조인구(趙寅九) 등이 5월 30일에 체포,
이것으로 잡아들여야 할 굵직한 자들은
거의 다 잡아들인 셈이었다. 물론, 이
밖에도 잡아들여야 할 자들은 아직도
많았다. 그러나 허정은 <과도정부
응급실론>에 따라 우선 응급처치를 위해서
이들 굵직한 자들만 잡아들였던 것이다.
3. 움직이는 8기생들
군인을 일러 <국가의 간성>이라고 한다.
국토방위의 중책이 지워져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국토방위의 신성한 의무를 지니고
있는 군인이 권력에 매료되게 되면 어떤
결과가 빚어지게 될까? 그야 두말할 것도
없이 국토방위를 하라고 안겨준 총칼을
휘둘러 권력을 잡으려 안간힘을 쓰게 될
것이다.
이것이 바로 <쿠데타>라는 것이다.
어느 나라에서나 다 마찬가지지만
쿠데타를 일으키는 군인치고 권력에
매료되어 쿠데타를 일으켰다고는 하지
이 명분은 물론 대의(大義)로써 받아들여질
수 있는 명분들이다. 불행하게도 한국의
경우에도 쿠데타로 권력을 잡아보고자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고 있는 군인이
있었다. 육군 소장 박정희(朴正熙)와 육군
중령 김종필(金鍾泌)이 바로 그들이었다.
<권력을 잡고자 해서 쿠데타를
일으켰다고? 무슨 당치 않은 수작을
늘어놓고 있는 거야? 우린 백척간두에 선
국가의 위난을 보다 못해 쿠데타를
일으켰던 거야!> 하고 눈을 부라릴지도
모른다.
하긴 어쩌면 애국심에서 쿠데타를
도모하게 되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결과론으로서는 권력에 매료되어 쿠데타를
일으켰던 것이라고 볼 수밖에 없다. 어째서
대해서는 뒤에 언급하기로 한다.
박정희와 김종필은 이미 자유당 정권
때에 쿠데타 계획을 세워 놓고 있었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그것이 4.19로 해서
좌절됐다. 내세울 명분이 없어졌던 것이다.
이것은 물론 그들이 내세우고 있는
주장이다. 그러나 자유당 때에 쿠데타를
계획했었다는 흔적은 어디에서도 찾아보기
힘들다. 쿠데타의 명분을 강조하기 위해서
지어낸 얘기는 아닌지?
그렇다고 해서 그들이 쿠데타에 대한
계획을 포기했느냐 하면 그렇지는 않았다.
여전히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고 있었다.
아주 그럴싸한 대의명분이 주어질 때까지
참으로 지혜롭게 일을 추진시켜 나갔다.
그것이 이른바 정군운동(整軍運動)이라는
<군을 정화하자!>
그럴싸하지 않은가! 아주 훌륭한
명분이라 할 수 있었다.
사실에 있어 정군의 필요성은 절실했다.
전쟁의 포화가 멎은 지도 7년, 북한의
김일성 집단은 GNP의 25퍼센트를
국방예산에 투입하며 군사력 증강에 혈안이
되어 있었다. 우리라고 해서 현상유지에
만족만 하고 있을 수는 없었다. 그러자면
군사력 증강에 앞서 선행되어야 할 것이
정군이었다. 왜 정군이 필요했던가?
해방의 소용돌이 속에서 미군정에 의해
창군된 국방경비대에는 잡다한 성분의
출신자들이 모여 있었다. 일본군 출신자를
비롯해서 만군(滿軍), 중국군, 광복군 등의
이질적인 요소들이 모여서 군대를 만들어
겨를도 없었다. 그러다가 막 걸음마를
시작할 무렵에 6.25라는 미증유(未曾有)의
시련을 겪어야 했으니 필연적으로 질보다는
양적으로 성장할 수밖에 없었다.
전쟁은 자꾸만 계급을 높여 주었다. 창군
때에도 양적으로 팽창하기 시작하자 1년에
두서너 계단씩 올라가던 계급이 전쟁이
벌어지자 계급 진급은 더욱 가속화되었다.
20대 장군이 수두룩한 판국이었다. 더구나
전쟁은 진급에 있어 옥석을 구분할 수 없게
해주었다. 그러다 보니 자질이 의심스러울
정도의 장군들도 흔했다. 그런 무능한
장군일수록 정치권력과 결탁했거나 아니면
돈보따리를 안겨 주고 별을 단 자들이었다.
여기에 또 하나의 문제가 있었다. 그것은
지휘관의 부패였다.
뱃속을 드러내 놓고 있는 지휘관들도 적지
않았다. 휴전으로 긴장이 풀린 탓이었을까?
군대가 어느 정도로 썩어 있었던가? 한두
가지의 예를 들어보기로 한다.
어떤 군단장이 있었다. 황금이라고 하면
사족을 못 쓰는 장군이었다. 돈을 좀
긁어모으기는 모아야겠는데 그렇다고
부하들더러 덮어놓고 현금을 상납하라고
강요할 수는 없었다. 그래서 짜낸 묘안이
<섰다판>이었다. 그는 휘하의 사단장들한테
전화를 건다.
"이 보라우, 오늘 밤 심심한데 내 숙소에
모여서 섰다판이나 한판 벌이자구."
군단장이 심심하다고 섰다판을
벌이자는데 감히 바쁘다든가 또 다른
핑계로 섰다판 참석을 거부하지는 못한다.
돈을 긁어모으기 위해서 섰다판 구실을
내세우고 있다는 것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울며 겨자먹기로
여기저기서 돈을 긁어모아 한 부대씩 지고
군단장 숙소로 향한다. 그리고는 섰다판이
벌어지면 자꾸 잃어주도록 애를 쓴다. 돈을
일부러 잃어준다는 것도 그리 용이한 일은
아니다. 어쩌다 장땡을 잡게 되면,
"허어 이거 재수 옴붙었는 걸, 오늘 왜
이렇게 패가 이 모양이야?" 하고 미련없이
장땡패를 내던져 버리고 만다.
결국 사단장들이 짊어지고 간 돈부대는
군단장 주머니 안으로 들어갈 수밖에 없는
일이다.
"사람들, 어째 섰다 실력이 그
모양이지?"
미소를 지으며 그런 너스레를 떤다.
또 하나의 예를 들면 이 역시 황금을
사랑하는 사단장이 있었다. 군대 생활을
하는 동안에 한껏 긁어모아 두어야겠는데
도무지 바치는 사람이 없었다. 그래서
궁리해낸 것이 사병들한테 회충약을 먹이는
일이었다. 우선 휘하의 연대를 시찰한다.
그리고 나선 연대장에게 호통을 친다.
"이 보라우 연대장, 귀관의 연대
사병들은 어째서 얼굴색이 모두 그
모양이야? 회충약을 먹이지 않으니까 모두
회충에 감염돼서 얼굴색이 노오랗게 떠
있는 게 아냐! 즉시 전 연대 장병에게
회충약을 먹이고 두 끼 정도 굶기도록 해!"
1개 사단은 3개 연대로 편성되어 있었다.
1개 사단의 병력은 족히 2만 명이 넘는다.
몇 가마니나 될까? 하여간에 사단장은 그
절약된 쌀을 내다팔아 자기 배를 채우는
것이다.
썩은 장성들은 이런 식으로 돈을 긁어
모았다. 그렇게 해서 모은 돈으로 잘 살면
얼마나 더 잘 살 수 있는 것일까? 그렇게
부정한 수법으로 모은 돈은 당대에나 좀 잘
살 수 있을까? 2대, 3대 자손에게 유산으로
물려주게 되지는 못한다. 부정하게 모은
돈은 부정하게 없어지기 마련이다.
그런데도 국토방위라는 신성한 책임을 지고
있는 장성들 가운데서는 그런 식으로 돈을
모으는 위인이 적지 않았다.
"도둑놈의 자식 같으니. 저게 장군이야,
날강도지."
소장 장교들은 분노에 치를 떨었지만
군령여산을 조직의 생명으로 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각하, 부정한 방법으로 돈을 긁어들이는
짓은 중지해 주십시오.> 만일 이런 충고를
하든가 항변을 해보라. 당장 어떤 누명을
뒤집어 쓰고 군법회의 감이 될지 모르는
일이었다. 그래서 치밀어 오르는 분노를
스스로 삭이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정군>은 이래서 필요했다.
한데 4.19 사태가 벌어졌고 세상이
뒤집혔다. 이 기회를 이용하면 정군은
가능할 것 같았다. 정군운동을 착안한 것이
바로 육군 소장 박정희였고, 육군 중령
김종필이었다. 두 사람은 처숙질 간이었다.
김종필이 박정희의 처 조카사위였던
것이다.
걸세. 정군운동을 일으켜서 군 수뇌부가
어떻게 나오는지를 지켜보세. 그리고
정군운동은 동지획득의 길도 돼, 두 눈이
똑바로 박힌 사람이라면 누구나가
정군운동에 찬성해 줄 걸세. 정군운동으로
동지를 획득해 놓고 혁명으로 급선회하는
걸세."
군령여산(軍令如山)을 조직의 생명으로
하고 있는 군대에서 부패, 무능한 지휘관을
몰아내기 위해서 <정군>이 필요불가결의
요소였다는 데에 한국군의 비극이 있었다.
그렇더라도 말이다. 군대는
특수조직체다. 물리적인 힘으러 정군을
하려 할 것이 아니라 순리로
자연도태시키는 방법으로 해야만 옳은
일이었다. 허정 과도정권도, 또 영향력
필요하다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요란스럽게 떠들며 정군을
단행치 않고 있는 것은 군대가
특수조직체라는 것을 너무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더구나 대한민국은
당장에 무력을 방패로 해서 대치하고 있는
적이 바로 우리 눈앞에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어떤 경우도 군대에 동요를 일으켜
사기를 저하시키는 따위의 행위는
삼가해야만 했다. 지금 우리와 대처하고
있는 적은 동서고금을 통틀어 처음 보는
무뢰한들이었다. 그들에게 어떤 털구멍만한
틈도 드러내 보여서는 안 되었다. 이
흉악하기 짝이 없는 적은 오늘의 이
시점에서도 여전히 마찬가지지만 그들은
남한을 이리 찔러 보고 저리 찔러 보며
그런 처지에 군부에 동요를 일으키는
행위를 자행하는 따위는 절대적인 금기라고
할 수 있었다.
그런데도 김종필은 했다. 이른바
정군운동을 일의키기 위해서 동지포섭에
나선 것이다. 그는 육군본부에 근무하고
있는 동기생들을 중심으로 해서 공작을
폈다. 서로 흉허물 없이 귓속말을
주고받기가 용이했기 때문이었다.
"우리가 흘렸어야 할 피를 학생들이 대신
흘려주지를 않았는가? 우리는 그들의 피에
보답을 해야 한다. 그들의 피에 보답하는
길은 무엇인가? 그것은 군부의 부패무능한
장성들을 숙청해 버림으로써 정예 국군을
만드는 일이야."
"옳아! 보다 더 강한 군대, 백전백승 할
무능한 장성은 싸악 쓸어버려야 해."
김종필의 논리에는 명분이 뚜렷했다.
그렇지 않아도 모두가 정군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있을 때였다. 그럴 때에 김종필이
나서서 불을 지르는 역할을 한 셈이었다.
육군 중령들, 그들은 30대라고는 하나
아직 20대처럼 패기가 왕성했다. 6.25 전쟁
때는 육군 중위로서 중대장들이었다.
지금은 중대장의 계급은 대위급이었으나,
그때는 장교가 부족한 때라 중위로
중대장을 보하고 있었다. 김종필만이 일선
지휘관 경험이 없을 뿐, 태반이 사선을
넘어도 골백번 넘은 역전의 용사들이었다.
패기와 아울러 정의감이 넘쳐 있었으리라는
것은 짐작할 수 있는 일이었다.
정군에 대한 이들의 열의를 나쁘게
대한 불만의 분출을 여기에서 찾으려
했다고도 할 수 있다. 1960년 당시 70만
군대를 포용하고 있던 국군은 장교의 포화
상태를 이루어 놓고 있었다. 자연도태라도
되어야만 진급의 기회가 주어질 것이나
수뇌부가 너무나 젊으니 자연도태를
기다리고 있기도 어려운 일이었다.
수뇌부가 나이 들어 물러나자면 줄잡아도
족히 20년은 걸린다는 계산이었다.
장교는 자꾸 양성돼 배출되고 있는
실정이고 진급의 길은 막혀 있으니 자연
불평이 일기 마련이었다. 어쩌다 T.
O.(편제표)상에 자리가 나서 밑에서 한
사람 진급시켜 끌어올릴 경우가 생기게
되면 백 대 일의 경쟁률이었다. 불평이
일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러므로
숨통을 터 보고자 했다고도 할 수 있다.
그렇다고 군령여산을 생명으로 하고 있는
군대에서 함부로 정군운동을 펼 수도 없는
일이었다. 그것은 하극상으로 간주될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섣불리 <정군> 어쩌고
늘어놓다가는 어떤 누명을 뒤집어 쓰고
군법회의감이 될는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때는 지금이야. 우리 군대에서도 이때에
정화 작업을 벌여야 해. 부패 무능한
장성들을 쓸어내고 군대다운 군대를 만들어
보자구!"
4.19가 혁명으로 간주되고 있을 때다.
군대에서도 정군으로 혁명과업을 완수해야
한다고 주장하게 되면 감히 누구도 반론을
제기하지 못할 것 같았다. 소장 장교들이
김종필의 주장에 공감을 하고 발 벗고 나설
떨어졌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모두가 육사 8기 출신인
중령들이었다. 중령이란 계급은 일선
사단의 대대장급으로서 군대에서는
핵심적인 계급이었다.
육군본부에 근무중인 8기 출신 중령들이
정군을 위해서 모임을 가진 것은 4.19
직후였다. 용산 우체국 옆에 있는
중국집에서였다. 이 날의 첫 모임에는
120여 명이나 되는 중령들이 모였다.
"지금 혁명의 회오리 바람이 전국을
휩쓸고 있다. 이때에 우리도 혁명에
발맞추어 군대다운 군대,
임전무퇴(臨戰無退)의 군대를 만들기
위해서 우리의 젊음을 불살라야 햐 때가
아니겠는가?"
것이다.
"군대다운 군대, 임전무퇴의 군대를
만들자면 어떻게 해야 하겠는가?"
그들은 이 문제를 주제로 해서 토의를
했다. 그 끝에 이들이 얻어낸 결론은
이러했다.
<정치권과 야합한 장성들은 군부에서
축출해 버려야 하며, 직권을 이용해서
돈벌이에만 급급했던 장성들도 축출해
버려야 한다.>
대강 이런 정도였다.
그러면 그 방법론은? 역시 방법론이
문제였다. 군대는 군령여산이 조직의
생명이다. 하물며 중령 따위가 장군을 향해
<당신은 무능 부패한 군인이니까 옷을 벗고
나가는 것이 좋겠소!>라고 할 수는 없는
물론 영창에 들어갈 각오가 돼 있다면
못할 것도 없는 것이다. 죽을 각오가 되어
있다면 나랏님 상투도 잡을 수가 있다.
그까짓 것 몇 해 감옥에서 썩을 각오만
되어 있다면야 그까짓쯤의 말 한마디 못할
것이 무엇이겠는가! 그러나 그것은 쥐를
잡으려고 독을 깨는 이상의 우매한 짓밖에
될 것이 없다는 것이었다. 성사시키지 못할
일에 말 한마디로 자신의 신세를 망쳐
놓는다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은 짓이냐
말이다.
그러니 역시 방법이 문제가 아닐 수
없었다.
그들은 왈가왈부 끝에 어떤 결론도 얻지
못하고 다음날을 기약하고 헤어졌다.
회합은 계속되었다. 그런데 방법론을
처음에는 120여 명이나 되던 인원이 60여
명, 30여 명, 20여 명으로 점차 줄어 갔던
것이다.
<정군운동도 좋지만 내 신세 망치게 되면
뉘 있어 내 처자식을 돌봐 준단 말인가?>
정군운동에서 발을 빼는 인원이 늘게
되었던 이유가 오직 이 한 가지
때문이었다. 비범한 인물과 속인의 차이가
바로 이런 점에서 나타나게 된다.
옛 성현은 <의를 보고 행치 않으면
용기가 없는 탓이다>라고 했다.
사나이가 한번 칼을 뽑은 이상에는 죽이
되든 밥이 되든 한번 휘둘러 볼 일이다.
칼을 뺏다가 어물어물 칼집에 도로
꽂는대서야 어찌 사나이라 할 수 있겠는가!
하여간에 정군운동에 나섰던 8기생 출신
관철하고자 남은 사람들은 불과 8명에
지나지 않았다. 김종필(金鍾泌),
김형욱(金炯旭), 신윤창(申允昌),
오치성(吳致成), 길재호(吉在號),
옥창호(玉昌鎬), 최준명(崔俊明),
오상균(吳尙均) 등이 그들이었다.
여기에서 이 한 가지 사실을 주목해 주기
바란다. 이 여덟 명의 정군파 소장 장교들
가운데 38 이남 출신은 오직 김종필 단 한
사람뿐이었고, 나머지 일곱 명은 모조리 38
이북 출신들이었다는 사실이다. 이 일곱 명
가운데 옥창호는 만주 출신이었고,
김형욱과 오치성은 석전경우(石田耕牛)라는
별명이 붙은 황해도 출신이었다. 나머지
다섯 명은 맹호출림(猛虎出林)의 별명이
붙어 있는 평안도 출신들이었다.
들먹이는가? 이 점에 대해서는 이 글을
읽어 가노라면 자연히 이해할 수 있게 될
것이라 생각된다.
허정이 과도정권을 맡기로 하고 조각을
완료했을 때, 그리고 육군본부의
중령급들이 <4월혁명>을 기화로 해서
<정군운동>의 방법론을 모색하고 있을 때,
여기 어깨에 두 개의 별을 단 한 장군이
슬슬 용트림을 하기 시작했다.
그의 이름은 박정희, 계급은 육군 소장,
보직은 부산 군수기지 사령관.
박 장군이 서서히 용트림을 시작하기
전까지는 그의 이름 석 자는 세상에 별로
번쩍이는 별 두 개씩을 달고 있다고 해서
이름 석 자가 세상에 알려지는 것은
아니다. 이때쯤 한국의 국군은 60만
대군으로 성장해 있었고 그래서 어깨에
별을 단 이른바 장군은 밤하늘의
별만큼이나 많았다. 그러니 어지간해서는
이름 석 자를 세상에 알리기가 그리
용이하지가 않았다. 그런 형편이었는데, 이
육군 소장 박정희,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는지 1960년 5월 8일 부관
손영길(孫永吉)을 시켜 한 통의 편지를
육군 참모총장 송요찬에게 전달케 했다.
부관 손영길은 이날 잠자리 비행기라
불리우는 L-19 경비행기를 타고 올라와 그
편지를 송요찬에게 전달했던 것이다.
편지를 읽고 있던 송요찬의 표정이
그는 노여움을 억누르기가 어려운 듯
편지로 책상을 치며 벌떡 일어났다.
"이봐, 부관."
"넷, 각하!"
편지를 전달하고 부관실로 돌아갔던
부관이 황망히 총장실로 달려들어왔다.
"어느 놈이 이 편지를 가져왔어!"
"네, 박정희 장군의 부관이
가져왔습니다."
"그놈을 이리 당장 끌어와!"
송요찬은 총장실이 쩡쩡 울릴 만큼
큰소리를 질렀다.
"벌써 돌아갔습니다만."
"뭐야?"
부관은 박정희의 부관이 돌아간 것이
자기 잘못이나 되는 듯 황송해서 어찌할
"이 빨갱이같이 의리 없는 놈, 뭐가 어째
부정선거에 책임을 지구 물러나라구?
박정희 이놈, 지금까지 내가 이리저리
감싸주어 왔더니, 겨우 한다는 수작이
물러나라야! 의리 없는 놈 같으니라구!"
송요찬은 노여움을 억누를 길이 없어
한동안 씨근대기만 했다.
박정희는 편지에서 뭐라고 했기에
송요찬이 이토록 길길이 뛰며 노발대발한
것이었을까?
박정희는 이 편지에서 송요찬더러 군부의
부정선거에 책임을 지고 물러나라고 했던
것이다.
군은 상명하복(上命下服)의 엄격한
통수관계임으로 군의 최고명령자이신
정화(淨化)의 태풍이 군 내에 파급되기
전에 용퇴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믿습니다.......
이런 내용의 편지를 받고도 노여워하지
않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정신병자가
아니면 탈속한 성인일 것이다.
한데, 박정희는 어떤 속셈에서 그런
내용의 편지를 송요찬에게 보냈느냐 하는
바로 그 점이다. 박정희가 송요찬더러
<국군 부정선거의 전 책임을 지고
물러나도록 하라>고 했다는 자체가
해괴하기 짝이 없다.
5.16 군사 쿠데타로 박정희가 대권을
거머쥐자, 몇몇 어용 필자들이 그를
미화하는 글을 쓰면서 이 대목을 언급한
박정희가 그런 내용의 편지를 보내게
되었는지 그 점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언급한 일은 없었다.
이유는 간단했다. 젊은 장교들이 논의를
거듭하고 있는 정군운동에 불을 지르자는
것이 박정희의 속셈이었다. 물론, 필자는
이 대목에 대해서 당자인 박정희로부터
송요찬에게 편지를 보내게 되었던 이유에
대해서 들은 바는 없다.
그러나 앞에서 이미 소개한 박정희의
편지 가운데 있는 <정화의 태풍이 군 내에
파급되기 전에> 운운한 이 글귀로 미루어
볼 때, 박정희는 육군본부 내의 중령급
소장 장교들이 정군운동을 논의하고 있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논의하기 위해서 모였던 중령급들은 120명
이상이나 되는 엄청난 인원이었다. 그러던
것이 두 번 모이고 세 번 모이는 동안에
점점 그 수가 줄어들어 나중에는 열
손가락으로 셀 수 있는 정도의 인원밖에
남지 않았던 것이다.
(그런 숫자로 무슨 놈의 정군운동을
일으킬 수가 있겠는가. 이래서는 안
되겠다. 내가 앞장서서 정군운동에 불을
지르자. 그렇게 해서 젊은 장교들이 고무
격려되어 궐기하도록 하자!)
이런 속셈에서 감히 붓을 들어
송요찬더러 부정선거에 전 책임을 지고
물러가라는 편지를 보내게 되었던 것이라는
추리는 충분히 성립될 줄로 안다.
그러면 부산 군수기지 사령관인 박정희가
서울에서 극비밀리에 추진되고 있던
정군운동의 내막을 어떻게 알 수
있었느냐는 의문이 일게 될 줄로 안다. 이
의문을 푸는 열쇠는 간단하다. 정군운동의
주모자 격인 김종필은 바로 박정희의
조카사위였던 것이다. 어쩌면 이들 두 사람
사이에는 정군운동 이상의 것이 벌써부터
논의되고 있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그러면 어째서 박정희는 굳이 정군운동에
불을 지르려 했던 것일까? 여기에 대해서
살펴보기 전에 먼저 이쯤에서 박정희란
인물은 어떤 인물이었는지 그 점에 대해서
먼저 살펴보고 얘기를 계속하는 것이 좋을
것 같다.
나이 44세. 동양적 사고방식으로 말하면
불혹의 연륜이었다. 1960년을 기준으로
해서 말할 때 40대가 된 세대는 현대사에
있어 가장 비극적인 세대라 하는가? 이
세대는 일본 제국주의의 교육을 받고 일본
제국주의를 위해서 목숨을 바쳐 충성을
다할 것을 강요받았기 때문이다. 그들은
징병이란 이름으로 일본군에 끌려가
총알막이가 되어야 했고 또 징용이란
이름으로 끌려가 그들의 노동력을
착취당해야만 했기 때문이다.
박정희의 경우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는
징병이나 징용으로 끌려가는 수모는 겪지
않았지만 대신 그는 스스로 자진해서 일본
제국주의에 충성을 다하는 길을 택했다.
그가 청소년 시절을 어떻게 보냈는가를
탓으로 보통학교(지금의 국민학교)를
졸업하자, 국비로 공부할 수 있는 길을
택하기 위해 사범학교로 진학을 해야만
했다. 사범학교를 졸업하고 나면 싫든 좋든
간에 의무적으로 3년간 국민학교
훈도(訓導)로 봉직을 해야만 했다. 국비로
공부를 했으니 빚을 갚으라는 뜻에서였다.
박정희는 대구 사범학교를 졸업하자 문경
공립 보통학교에서 의무 연한 3년 동안
훈도로서 봉직을 했다. 이 의무 연한이
끝나자 그는 곧 만주로 건너갔다.
박정희가 군사 쿠데타를 통해서 국가
권력을 한 손아귀에 거머쥐고 나자, 어떤
쓸개 빠진 어용작가는 <박정희 장군은 문경
공립 보통학교에 재직중, 학교 시찰을 나온
일본인 시학(視學:지금의 장학사)이 하도
자리에서 그 자를 두들겨 패주고 만주로
달아나게 되었던 것이다>라고 기술한 바
있다.
이렇게 당치도 않은 수작으로 미화시켜
놓은 일이 있지만 그것은 새빨간
거짓말이다. 보통학교 훈도가 언감생심,
시학이 거드름을 피운다는 단 하나의
이유로 두들겨 팰 수 있단 말인가? 더구나
그런 사건은 일제 35년간의 통치 기간 중
단 한 건도 없었다. 민족저항운동과
관련되는 그런 문제는 쉽게 밝혀지기
마련이다. 그것을 터무니없는 수작으로
창작을 한다고 해서 그것을 곧이곧대로
믿을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어용작가는 어떻게
돼서 그런 허무맹랑한 날조극을 창작해
가슴 속에도 민족주의 사상은 깃들어
있었다는 것을 은연중에 보여주기
위해서였다.
1961년이라고 하면 해방된 지 아직
세월은 15년밖에 흐르지 않았을 때이다.
일본에 대한 국민적인 증오심은 여전했다.
그런 때인데 일본 제국주의를 위해서
충성을 다한 자가 통치권을 거머쥔다고
하는 것은 국민 감정이 결코 용납 못할
일이었다.
물론, 박정희는 <친일파는 아니었다>고
강변할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의
발자취는 분명히 친일파로서의 길을 걷고
있지를 않았는가. 그는 만주국의
군관학교를 졸업하고 다시 일본
육군사관학교로 진학을 했다. 졸업하고
독립군으로 뛸 수 있는 지리적 여건이 좋은
북지(北支)에서 복무하고 있었으면서도
그는 결코 독립운동 진영으로 탈출할
생각을 하지 않았던 것이다.
어용작가 얘기가 나온 김에 한 가지 더
곁들여야겠다. 박영만(朴英晩)이란 작가가
있다. 라디오 방송극도 서너 편 쓴 일이
있는 작가다. 중경(重慶:중국 사천성
동부에 있는 도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국군으로 광복군 선전처에서 과장으로
활동하다가 해방과 함께 귀국한 경력의
소유자다. 이 작가가
[광복군(光復軍:상.하권 1967년
간행)]이라는 실록소설을 썼다. 실록소설인
만큼 등장 인물을 실명(實名)으로 썼다. 이
소설에 박정희가 등장하는데, 그에 대해서
제3지대의 지하공작원인 이용기(李龍基)가
일본군에서 복무하고 있던 박정희와 접선을
하는 데 성공했다. 그래서 박정희는
광복군의 비밀요원이 되었다>는 것이다.
있음직한 일이다. 그러나 그것을
인정하는 광복군 출신자는 단 한 사람도
없다. 박정희가 광복군에 합류한 것은
일본이 항복을 한 뒤였다. 그때 광복군
제3지대에서 일본군에서 복무하고 있던
한적(韓籍) 장병을 초모하자, 그때 비로소
북경으로 가서 광복군에 합류했던 것이다.
박정희의 경력만을 가지고 얘기하다
보니까 그에게는 전혀 민족주의 사상이
없었다고 단정하는 것으로 해석할지는
모르지만 그에게도 민족주의 사상은
있었다. 대구 사범학교를 졸업하고 문경
박정희는, 그 무렵의 조선 지식 청년들이
그러했듯이 그 역시 진로 문제를 놓고
번민했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그는 이
번민을 해결하기 위해서 경상북도
김천(金泉)에서 동아일보 지국을
경영하면서 공산주의 운동에 투신해 있던
황태성(黃泰成)을 가끔 찾아가 의논을
했다고 한다.
이 황태성이란 인물은 박정희가 군사
쿠데타를 통해서 대권을 잡고 나자
김일성의 밀사로서 남파되어 왔던
인물이다. 여기에 대해서는 뒤에
언급하기로 한다. 경상북도 상주(尙州)
태생인 황태성은 연희전문학교(연세대학
전신)를 나온 인텔리, 더구나 그는
조선공산당에 몸담고 사상운동을 전개하고
조언을 해주었을 것이라는 것은 짐작할 수
있는 일이다.
"선생님, 저는 만주로 갔으면 합니다만."
"만주로? 만주로 가서 뭘 하게?"
"만주로 가서 군사교육을 받고 싶습니다.
군사교육을 받고 나면 독립군이 있는
곳으로 찾아가서 독립운동을 하고자
합니다."
"그거 아주 훌륭한 생각일세, 암 훌륭한
생각이구 말구. 눈앞이 똑바로 박힌
조선청년이라면 의당 그래야 하지. 그래야
하구말구."
황태성은 박정희를 적잖이 격려해
주었다고 한다. 세계 정세, 동양의 정세,
일본의 장래 등에 대해 자기 나름대로 보는
견해를 말해주고,
말 걸세. 그때 박정희 군과 같이 정식으로
군사교육을 받은 사람이 필요하게 될 걸세.
의지를 꺾지 말고 소신을 관철해 보도록
하게"라고 조언했다.
박정희는 그가 뜻하고 있던 바대로
군관학교를 졸업하고 다시 일본에 건너가
육군사관학교에 편입해서 좀더 전문적으로
군사교육을 받았다. 이렇게 군사교육을
받고 났으면 처음 계획하고 있던 대로
북지에서 근무하게 된 것을 기화로
독립운동 진영으로 탈출해서 독립운동
대열에 섰더라면 그에 대한 평가는 180도로
달라질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유감스럽게도 종전이 되는 그날까지
일본군에 머물러 있었던 것이다. 일본
천황폐하의 충성스러운 초급 장교로서.
제2차 대전 종전과 함께 북경으로 가서
광복군에 합류했던 박정희가 해방된
조국으로 돌아온 것은 1946년 6월이었다.
그는 고국으로 돌아온 3개월 뒤에
국방경비대 사관학교(육군사관학교 전신)
2기생 모집에 응모, 같은 해 9월에
입교함으로써 또다시 군인의 길을 택했다.
군관학교 생도 생활을 포함해서 5년간 군대
생활을 했고 보면 군대 생활이 지겨울 만할
것도 같았으나 그는 다시 또 군인의 길을
택했던 것이다. 일본 제국주의에 충성을
다했으니 속죄의 뜻으로라도 국가의 간성이
되어야 되겠다고 해서 군인의 길을
택했다면 우리는 그의 애국심에 경의를
행적을 통해서 볼 때, 애국심이 아닌 다른
목적에서 군인의 길을 택했던 것이 아니냐
하는 느낌이 적지 않게 든다.
왜냐하면 박정희는 2개월간의 사관
후보생 과정을 마치고 임관과 함께
사관학교에서 생도대장으로 봉직하게 되자,
이 사이에 남로당 연락부 책임자인
이재복(李在福)에 의해 남로당 군사부장에
임명되어 국방경비대 내의 남로당
세포조직을 통괄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박정희가 조국으로
돌아왔을 당시의 그의 주변 환경에 눈을
돌려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박정희가
돌아온 1946년 6월은 남로당으로서는
전성기라고 할 수 있을 때였다. 그럴 때에
그는 고국으로 돌아왔던 것인데 공교롭게도
이번에는 남로당의 고위 간부로서 눈부신
활동을 벌이고 있었던 것이다.
황태성이란 인물은 앞에서 소개한 바와
같이 고등교육도 받고 또 일제 때부터
공산주의 운동을 전개해 온 인물이다. 그런
경력이 높이 평가되어 조선공산당(남로당
전신)이 주동이 되어 소위 인민공화국
정권을 세웠을 때 황태성은 20명의 후보
인민위원회의 한 사람으로서 발탁되기까지
했던 인물이었다. 속된 말로 표현하면
거물이었다고 할 수 있다. 박정희가
육군사관학교에 입교하기 전까지는
3개월이라는 시간적인 여유가 있었다. 이
사이에 황태성한테 공산주의 사상교육을
받았던 것이 아닐까?
박정희를 공산주의자들의 무리 속으로
지목되는 인물이 또 하나 있다. 그 인물은
다름아닌 박정희의 셋째 형
박상희(朴相熙)다. 박상희는 보통학교밖에
나오지 못했으나 대단히 총명하고 지도력도
있던 인물로 전해지고 있다. 그가
초등교육밖에 받지 못해다고 하나
일제시대에는 초등교육만 받고도 면서기
정도는 충분히 감당할 수 있는 실력이
갖춰졌었다. 더구나 총명했다고 하니
그만하면 사상 문제쯤에 십분 눈을 뜨고도
남음이 있었다.
미루어 짐작컨대 박상희를 공산주의 운동
진영으로 끌어넣었던 것도 황태성이
아니었던가 짐작된다. 일제시대에 황태성은
김천에서 동아일보 지국을 경영했고,
박상희는 구미에서 동아일보 지국을
친숙해졌고 더군다나 박상희와 아내
조씨와는 황태성의 중매로 결혼한
사이였다. 이 두 사람이 모두 공산주의
운동에 가담해 있었고 보면 박정희가
공산주의에 기울 수 있는 충분한 조건이 될
수 있다 할 수 있다.
박상희의 죽음이 박정희로 하여금
감정적으로 공산주의에 기울게 되는 충분한
조건이 되었을 것이라고 볼 수도 있다.
박상희가 죽은 것은 1946년 10월 1일 대구
폭동사건 때였다. 이 사건은
공산주의자들이 일으킨 사건이었다. 이때
박상희는 구미면의 인민위원장이었다. 그
신분이 탄로되어 박상희는 진압차 출동한
경찰에 의해서 즉결처분 당했다. 박정희는
위로 세 형이 있었으나 셋째 형인 박상희를
형을 잃었으니 박정희의 슬픔이
어떠했겠는가! 감정적으로라도 공산주의
진영으로 기울 수 있는 충분한
조건이었다고 할 수 있다.
1948년 10월 20일, 여수의 국군 14연대가
반란을 일으킴으로써 남로당은
결과적으로는 자기들의 조직을 세상에
드러내는 결과를 빚고 말았다. 이때 남로당
조직책임자인 이중업(李重業)과 군부
연락책임자인 이재복이 체포당함으로써
군대 안에 거미줄을 쳐놓고 있던 군부 내
세포조직은 백일하에 폭로되고 말았다.
박정희가 남로당 군사부장이라는 사실은
이때 밝혀졌던 것이다.
박정희는 군사재판에서 무기형을
언도받았다. 그런 그는 조사받는 과정에서
밝혀 주었기 때문에 군부 내 적색분자들을
일망타진하는 데 공헌했다고 해서 얼마 뒤,
형집행정지를 받고 석방되었던 것이다.
군사재판에서 유죄판결을 받았으니
박정희는 군복을 벗어야만 했다. 실의에 차
있었을 이때의 그의 심정이 어떠했겠는가는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다. 20대에서는 일본
제국주의를 위해서 충성을 다해야만 했고,
입지(立志)를 해야 할 나이 때인 30대는
공산주의 무리와 연루되었다고 해서 군복을
벗어야만 했으니, 그는 무척 자신의 기구한
운명을 한탄했으리라 본다.
그는 남로당 군사부 부장까지
역임했다고는 하나 공산주의 사상이 그의
뇌리에 깊이 뿌리박혀 있었던 것은
아니었던 것 같다. 그에게 만일 공산주의
있었다면 그는 형집행정지로 풀려남과
동시에 월북해 버리고 말았을 것이다. 그가
월북을 하지 않은 것은 공산주의 사상이
그의 뇌리에 깊이 뿌리박고 있지를 못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는 월북을 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무보수(無報酬)
문관(文官)으로서 육군본부 정보국에서
근무를 했다. 보수가 없는 문관이니 그의
생활은 조반석죽이어야 할 만큼 어려웠을
것은 말할 것도 없다.
그래서 육군본부 정보국 정보과장이었던
유양수(柳陽洙)는 정보비에서 일부를 떼고
또 과원들의 봉급에서 얼마씩을 떼서 그의
생활비로 보태줘 왔다고 한다. 일본
육군사관학교 정규 코오스를 밟은 박정희가
남의 봉급에서 얼마씩 떼주는 동정금으로
느끼고 있었겠는가. 그의 가슴 한편
구석에서는 대상 없는 분노가 무럭무럭
자라고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마음속에
어떤 결의를 다지고 있었을 것이 틀림없다.
무보수 문관으로 보람없는 나날을 보내고
있던 박정희에게 구원의 손길을 뻗은 것은
장도영이었다. 평안북도 용천(龍川) 태생인
장도영은 일본 동양문학 문학부 2학년에
재학중일 때 학병으로 끌려나갔던
인물이다. 그것이 1944년 1월이었으니까
일본군에 있어서의 군 경력은 박정희한테는
비교할 수도 없을 만큼 뒤처져 있던
후배였다. 나이도 박정희보다는 여섯
살이나 아래였다. 계급도 박정희는
중위로서 종전을 맞은 데 비해 장도영은
겨우 풋내기 소위로서 종전을 맞았었다.
돌아왔던 장도영은 해뱝된 그 해 12월에
월남, 다음 해 2월에
군사영어학교(軍事英語學校)가 개설되자,
이것저것 생각해 볼 것도 없이 여기에
지원해 입교했다. 1개월간의 교육을 마치고
소위로 임관된 것은 1946년 3월이었다.
박정희도 좀더 일찍 돌아와서
군사영어학교를 거쳤더라면 진급에 있어
장도영을 앞질렀을 것은 다시 말할 필요도
없다. 그도 그럴 것이 장도영이 학병
출신인데 반해 박정희는 정규 육군사관학교
출신이었기 때문이다.
6.25가 발발한 1950년 7월, 육군본부가
대전으로 후퇴했을 때의 일이다.
(장교가 부족한 이때에 박정희를 그냥
문관으로 놔둘 것이 아니라 현역으로
이렇게 생각한 당시 육군본부
정보국장이었던 장도영은 즉시 육군
총참모장인 정일권(丁一權)을 찾아가
부탁을 했다.
"박정희 문관을 현역으로 복직시켜
주십시오."
"지금 이런 상황에서 갑자기 복직을
시키면 쓸데없는 말썽이 일지 않겠소?"
정일권은 걱정스럽게 반문했다.
육군의 최고책임자인 정일권으로서는
충분히 이유 있는 걱정이었다.
"지금이 어느 때요? 침략해 온
공산당하고 전쟁을 하고 있는 때가
아닙니까? 이런 전시에 좌익으로 낙인이
찍혀 무기언도를 받았던 사람을 현역으로
복귀시키다니 말이나 되는 소리요?"
모두가 두 눈에 시뻘겋게 핏발이 서
있었다. 이런 항변으로 말썽을 일으키지
않을 것이라고는 누구도 보장할 수 없었다.
"지금 전쟁 때문에 모두가 제정신이
아닙니다. 박정희 문관에 대해서 신경을 쓸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장도영은 집요하리 만큼 정일권을
설득하려 들었다.
정일권이 장도영의 동료애에 감동이
되었던가.
"어디 좀 두고 생각해 봅시다."
이쯤 되면 반 승낙한 것이나 다름없다고
장도영은 생각했다. 그는 강문봉(姜文奉),
이기건(李奇建)에게도 박정희의 딱한
사정을 설명하고 협력을 요청하기도 했다.
그런데 정일권이 아무리 박정희를 현역으로
장애가 되는 것은 군
인사법(人事法)이었다.
<파면 전과자는 만 2년을 경과하지
않으면 현역으로 복귀할 수 없다.> 이것이
당시의 군 인사법의 한 조문으로 삽입되어
있었다. 그러므로 박정희가 현역으로
복귀하려면 형이 확정되었던 날부터 2년이
경과되어야만 가능한 일이었다.
장도영은 어떻게 해서든 박정희의
현역복귀를 도와주고자, 이번에는
복직심사위원장(復職審査委員長)인
황헌친(黃憲親)을 설득했다.
"상사(上士)를 현지 임관시켜 전쟁을
치르고 있는 이 마당에 박정희 같은
군사학에 밝은 유능한 인재를 썩혀 놓을
수가 있소? 박정희에 대해서 딱 한 번만
박정희에 대한 장도영의 그것은
전우애라는 군인 특유의 보편적인 사랑이
아니라 지극한 애정이었다. 모두가
장도영의 애정에 감복을 했다. 마침내
정일권이 군 인사법을 무시하고 국방부
장관 신성모(申性模)에게 상신을 했다.
그래서 복직이 이루어졌다.
장도영이 박정희의 신세를 딱하게 여겨
현역복귀를 도와주지 않았더라면 아마도
박정희의 인생은 엉뚱한 방향으로 흐르게
되었을 것이고 따라서 대한민국의 현대사도
전혀 엉뚱한 방향에서 창조되고 있을
것이었다.
군복을 벗을 때 박정희의 계급은
소령이었다. 그는 현역으로 복귀할 때 소령
계급 그대로 복직할 수가 있었다.
걸어야 했기 때문에 그랬는지 그의
마음에는 더욱더 강렬한 의지가 불붙고
있기만 했다. 그 강렬한 의지란 말할 것도
없이 군사 쿠데타를 통해서라도 한번
세상을 뒤집어 엎어 버리고야 말겠다는
의지였다.
1952년에 이른바 <5.26 정치파동>이
벌어지자, 그는 육군 총참모총장인
이종찬을 찾아가,
"불법적인 방법으로 권력을 유지하려는
이승만의 야욕은 저지되어야 합니다.
그러자면 군사 쿠데타를 일으킬 도리밖에
없습니다" 하고 군사 쿠데타를 건의했었다.
그러나 이종찬은 박정희의 건의를
한마디로 물리쳐 버렸다.
"군인이란 국토방위가 주어진 임무야!
벌어지고 있는 판국에 쿠데타라니, 당치도
않은 소리. 다시는 그런 말 하지 말어!
군인의 본분은 정치적 중립에 있다는 것을
명심하게."
이종찬의 일갈로 박정희는 군사 쿠데타의
야욕을 단념할 수밖에 없었지만 그렇다고
그가 세상을 뒤집어 엎어 버리고야
말겠다는 야망까지를 단념했던 것은
아니었다.
민주주의 국가에서 군인의 정치 관여는
금기 사항으로 되어 있다. 공산주의나
전체주의 국가가 아닌 민주주의 국가에서
<문관 우위>의 원칙을 고수하고 있는 것도
한데, 육군 대령 박정희는 어떻게 해서
군사 쿠데타 같은 엉뚱한 꿈을 꾸게 되었던
것일까? 그것은 그가 지난 몇 해 동안
걸어온 길이 너무나 굴욕적인 길이었고
인간으로서 감내해 내기 어려운 형극의
길이었기 때문이었다. 박정희, 그는
좌.우익의 사상투쟁의 와중에서 그가 가장
존경하던 형 박상희를 잃었다. 골육의 정은
사상을 초월하기 마련이다. 아끼고
사랑하던 형을 그놈의 사상 때문에 잃어야
한다는 것은 처절한 비극이었다. 이런
비극이 그의 가슴에 응어리진 한이 되지
않을 수가 없었을 것이다.
또 그 자신도 그놈의 사상 때문에 모진
고초를 겪어야만 했다. 그가 어떠한
동기에서 남로당의 비밀당원으로서
밝혀진 일은 없으나, 그가 공산주의자는
아니었다는 것은 너무나 명명백백했다.
만일 그가 공산주의자였다면 6.25 동란
발발과 함께 국군이 패퇴할 때 북으로
넘어갔지 무보수 문관의 서러움을 당하고
있으면서 육군본부 정복국 요원들과
피난길에 올랐을 리가 없다.
한데, 박정희는 현역으로 복귀한 뒤에도
갖가지의 굴욕을 참아내지 않으면 안
되었었다. 그놈의 사상관계 전과가 무슨
꼬리처럼 노상 따라다니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 때문에 애를 먹어야만
했다. 뿐만 아니라 일선 지휘관 보직에서도
번번히 제외되기만 했다. 직업군인이 위를
향해서 뻗어나가려면 일선 지휘관 경력은
절대적인 필수 요건이었다.
주어지지를 않았다. 그럴 때의 그의 심정은
어떠했겠는가?
<이놈의 세상 확 뒤집어 엎어 버렸으면
속이 후련하겠다.>
이런 분노가 가슴 밑바닥에서부터
치밀어올라 몸을 떨었으리라는 것은 가히
짐작할 수 있는 일이었다.
<오냐, 두고 보자. 내가 군복을 입고
있는 한 언젠가는 이놈의 세상 한 번은
뒤집어 엎어 버리고 말 테니.> 이런 다부진
결심을 했으리라는 것도 짐작할 수 있는
일이었다.
박정희의 군생활을 하는 동안에 있어서의
그의 일관된 자세와 대인관계는 이런
추리를 가능케 한다. 그는 철저하리만큼
청빈을 고수했다. 모두가 재물에 눈이
부정을 외면했다.
군인 사회란 단세포적이라 할 수 있을
만큼 단순한 사회다. 시간이 흐르는 사이에
박정희의 청빈이 소문이 되지 않을 리가
없었다.
"박정희야말로 군인으로서의 귀감이다."
박정희의 청빈을 전해들은 사람들은
누구나가 이렇게 칭찬하기를 마지 않았고,
그 칭찬은 어느덧 존경으로 바뀌어져
나갔다.
그의 대인 관계 또한 남달랐다. 6.25
동란과 함께 현역으로 복귀한 박정희는
2군단 포병사령관(1953년), 3군단
포병사령관(1953년), 2군단
포병사령관(1954년),
육군포병학교장(1954년), 5사단장(1956년),
1군 참모장(1958년), 6관구
사령관(1959년), 군수기지 사령관(1960년)
등을 거치는 동안 그가 거느렸던 부하들에
대해서는 꼭 잊지 않고 안부 편지 또는
연하장 등을 보내며 친분을 유지하도록
했다. 좀 쓸 만하다고 생각되었던
부하한테는 그의 생일을 기억해 두었다가
축하카드를 보내 줄 정도로 인간 관리에
신경을 썼다.
그는 어째서 이다지도 지독하다 할
정도로 인간 관계를 철저히 해왔겠는가?
그건 말할 것도 없이 그의 마음에 다짐해
둔 계획을 실천에 옮길 때 유용하게
써먹고자 해서였다고 해석할 도리밖에
없다.
이른바 <5.26 정치파동> 때 육군
건의했다가 일언지하에 거절을 당한
박정희는 그랬다고 해서 쿠데타에 대한
계획을 포기했던 것은 아니다. 그는
1959년에도 군사 쿠데타를 계획했었다고
김덕승(金德勝)은 증언하고 있다. 그의
증언으로 미루어 보더라도 박정희는
1952년에 품었던 군사 쿠데타에 대한
욕망을 버리지 않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1960년도에 들어와 박정희의 군사
쿠데타에 대한 계획은 좀더 구체화되었다.
그의 계획을 실천에 옮기는 데 단단히 한몫
해줄 수 있는 인물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 인물은 다름아닌 김종필(金鍾泌)이었다.
그의 조카사위이기도 한 김종필과는 쉽게
의기투합되었다. 좋은 협력자를 구했으니
간직해 두었던 계획을 실천해 보려
했음직한 일이었다.
여기에 대해서 [영시(零時)의 횃불]의
저자인 김종신(金鍾信)은 이렇게 기술하고
있다.
......이미 말했듯이 박 장군 등이
불의에 항거하여 칼집에 손을 댄 지는 이미
오래 전의 일이었다. 불의에 양심을 팔지
않기로 결의한 고급 장교들은 박 장군을
선봉장으로 벌써 오래 전에 군사혁명의
거사일자를 잡고 있었다......
이 저자는 <이미 말했듯이>라고 전제해
놓고 있지만 박정희가 언제 어디서
누구하고 군사 쿠데타를 모의하고
전혀 언급이 없다. 막연하기 짝이 없는
서술법을 구사하고 있지만 이 [영시의
횃불]이라는 책이 박정희 집권 기간인
1966년 10월에 출간된 것으로 보아 군사
쿠데타를 계획하고 있었다는 것은 인정치
않을 수가 없다. 이미 군사 쿠데타
거사일자를 잡아놓고 있었으나 4.19 의거로
중단하게 됐다는 것이다.
그럼 4.19 의거가 터져서 이승만 정권이
쓰러졌으니 박정희는 이제 시대가
바뀌었다고 해서 종래 마음속 깊이
품어오고 있던 군사 쿠데타의 의욕을
버렸던가? 그는 결코 버리지 않고 있었던
것이다. 버리기는 커녕 쿠데타에 대한
계획을 더욱 다져나갔다고 볼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그는 정군운동에 대해서 끊임없이
정군운동은 군사 쿠데타를 성사시키기 위한
일종의 양동작전이었던 것이다.
그뿐만 아니었다. 그 스스로 나서서
송요찬에게 편지를 보내 물러가라고
대갈일성을 질렀던 것도 그 나름의
계산이었다고 볼 수 있다. 박정희는 1958년
6월 17일에서 이듬해인 1959년 7월 1일까지
만 1년간 1군 참모장을 역임했는데, 이때의
1군 사령관은 다른 사람도 아닌
송요찬이었다. 만 1년간이라는 시간이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길다고 할 수 있는
시간이지만 어쨌거나 만 1년간 상사로
모시고 있던 사람한테 아무리 편지라고는
하지만 <군의 부정선거 관련에 전적인
책임을 지고 물러가라!>고 할 수 있겠는가?
이러한 행위를 통해서 박정희가 얼마나
수 있거니와 목적을 위해서는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을 만큼 박정희의 마음속에
다져놓고 있던 군사 쿠데타의 꿈은 그만큼
철석 같았던 것이다.
처음 박정희는 송요찬에게 물러가라고
편지를 낸 사실이 군부 내에 알려지게 되면
소장 장교측에서 적지 않은 동요가 일어날
것이 틀림없다고 보고 있었던 것 같다.
<그렇게 동요가 일어나게 되면
정군운동에서 몸을 뺐던 사람들도 다시
정군운동파 쪽으로 기울어 줄 것이
아니겠느냐.> 이런 기대를 걸고 있었던 것
같다.
화제가 되었던 것만은 사실이었다.
"거참, 박정희 장군 대단한 인물인 걸,
어떻게 그렇게 감히 내놓고 부정선거에
책임을 지고 물러가라고 할 수 있지?"
"그러게 말일세. 장군치고 그만한 배짱을
갖고 있는 장군도 드물걸세."
편지사건에 대해서 누구나 할 것 없이
혀를 차면서 감탄해 하기를 마지 않았으나,
그러나 정군운동파 쪽으로 발길을 돌리는
젊은 장교는 아무도 없었다.
박정희가 송요찬에게 편지를 보냈던 5월
8일 바로 그날 밤, 서울 신당동에 있던
김종필의 집에 모였다. 이 자리에 모인
얼굴들은 주인인 김종필을 비롯해서
길재호, 옥창호, 석창희, 최준명, 오상균,
김형욱 등 8명이었다. 이들은 가볍게 한잔
벌일 것인지를 의논했다.
"정군운동이 무슨 혁명을 하자는 운동도
아닌 바에야 정정당당히 정공법으로 나가야
할 것이 아니겠어?"
"정정당당히 나간다는 것도 역시 방법이
문제가 아니겠어? 덮어놓고 참모총장이나
국방부 장관을 찾아가서 이러이러한 장군은
부패무능한 장군이니 옷을 벗기고 내보내
버리라고 할 수도 없는 일이구!"
"정군을 요구하는 연판장을 내면
어떨까?"
4.19 직후부터 이놈의 연판장은 하나의
유해처럼 번지고 있었다. 동대문 경찰서
서원들도 연판장을 작성해서 서장을 내몰려
했고 또 법원의 법관들도 연판장을
작성해서 대법원장 이하 대법관들을 내몰려
공보실(公報室)에서는 이놈의 연판장으로
동료직원을 내몰려 했던 사건도
벌어졌었다.
김종필이 단안을 내렸다.
"역시 방법은 연판장을 제출하는 길밖에
없겠어."
이렇게 서두를 꺼낸 그는,
"하지만 우리 여덟 명의 이름만으로는
효력을 보기가 어려울 걸세. 그러니까 좀더
많은 동지를 획득해서 다수의 힘으로
정군운동을 밀고 나가도록 해야 할 걸세."
하고 덧붙였다.
그건 옳은 판단이라 할 수 있었다. 여덟
명만의 이름으로 연판장을 작성해서 제출해
보아야,
"이놈들 무슨 불평불만이 있기에 이 따위
당하기가 십상이었다.
그래서 이들은 의논을 거듭한 끝에 한
사람당 10명씩의 동지를 규합해서
정군운동을 전국적 규모로 하며, 연판장은
김종필이 초안해서 전원이 재검토를 가해서
확정짓고, 연판장 제출일을 5월 18일
경으로 한다는 이런 내용의 결의를 하고
이날 밤은 흩어졌다.
그러니까 이제 이들이 할 일은 10명씩의
동지들을 확보해야 하는 것이 급선무가
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김종필은 구상에
구상을 가다듬은 끝에 연판장에 첨부할
<건의서>를 작성했다.
<건의서>
1. 참모총장을 비롯한 부대 지휘관의
처벌 내지 자진퇴진에 관한 건.
2. 수제의 건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건의합니다.
내용: 각하께서 주지하시는 바와 같이
지난 4월 19일 학생들은 그들의 고귀한
피로 우리에게 다시 자유와 평화를
회복시켜 주었고 민주주의의 참뜻을
알려주었습니다. 재삼 4.19 혁명의 의의를
부연할 필요는 없으리라 생각합니다만,
고귀한 학생들의 피를 모독하는 구악이
아직도 우리의 군 내부에 구태의연하게
잔존하고 있음을 심히 유감으로
생각합니다. 그리하여 우리 군대의 앞날의
발전과 번영을 위하여 3.15 부정선거에
부패 지휘관들의 처벌 내지 자진퇴직을
아울러 강력히 건의하는 바입니다.
<상세>
1) 3.15 부정선거를 방조한 고위 책임자
2) 부정축재 장성
3) 무능 내지 파렴치한 지휘관 등
이 건의서의 내용만 가지고 말한다면, 이
건의서에는 군대를 사랑하고 나라의 장래를
우려하는 젊은이들의 우국충정이 알알이
배어 있다. 오직 나라의 장래를 걱정하고
있었으면 군령여산, 상명하복을 조직의
생명으로 하고 있는 군대 내에서 하극상
행위라고 볼 수밖에 없는 연판장 운동을
벌였겠느냐 해서 그들의 우국충정에 감탄을
금치 못하게 된다.
담당하고 있는 군대라는 특수조직체 내에서
이런 하극상의 행위가 과연 바람직한
행위냐 하는 데 대해선 한번 깊이
자기반성을 해 보았어야 옳았다. 왜냐하면
큰 조직은 잡다한 인간들로 구성되기
마련이고 그러다 보면 지탄을 받을 만한
인간이 끼기 마련이다.
더구나 한국군이 잉태될 때 어디
정상적인 방법으로 잉태되었던가? 잉태의
과정부터가 비정상적이었다. 자격 미달자,
무능한 자, 욕심꾸러기 등등 갖가지 잡다한
성분의 인물들이 모여 비정상적인 방법으로
잉태되어 태어난 국군을 키워야만 했다.
성장 과정에 있어 6.25라는 미증유의
시련만 없었어도 자라나오는 동안에 옥석은
구분될 수 있었다. 그것이 채 걸음마도
구분해 낼 겨를도 없었다.
무능하다, 부패하다 하더라도 국군은
그러한 인물들이 초석이 돼 주었기에 60만
대군으로 자랄 수가 있었다. 그러므로
이제는 자연도태될 때만 기다리고 있으면
그것으로 족했다. 그것을 인위적으로
옥석을 구분하려 든다는 것은 군대라는
특수조직체 내에서는 한번 심각하게 생각해
봐야 할 문제가 아닐 수 없다.
하여간에 그건 그렇고 이들 여덟 명의
중령들은 육군 참모총장 송요찬에게 미처
연판장을 제출해 보기도 전에 서울지구
육군 방첩대에 체포당해 버리고 말았다.
그들이 체포당한 것은 5월 17일이었다.
"어느 놈이야, 우릴 배신한 놈이?"
그들은 동지 가운데서 누군가가 밀고를
한 것은 최준명이라고 단정을 했다.
조사과정에서 조사관들이 <최준명> 어쩌고
하며 그의 이름을 떠올렸기 때문이었다.
그러면 최준명의 밀고로 이들은
체포당하게 되었던 것인가? 그렇지는 않다.
최준명은 밀고한 것이 아니었다. <믿거라>
하고 말을 했던 것이 화근이 되었던
것이다. 이 경위는 이러했다. 최준명은
정군파에서 정군운동의 확대와 조직화를
위해서 한 사람당 10명씩의 동지를
포섭하기로 결의를 하자, 누구보다도 먼저
동지 포섭에 발벗고 나섰다. 그는 그만큼
정군운동에 열성이었던 것이다.
최준명이 동지를 포섭하고자 눈독을 들인
곳이 서울에 출동중인 계엄부대였다.
다행히도 사단장 조재미(趙在美)는 평소
처지였다. 최준명이 계엄부대에서 동지를
얻으려 했던 것도 그 연이 있었기
때문이었던 것 같다.
어느 날, 그러니까 정군파 그룹의 결의가
있은 직후였으니까 5월 10일경이
아니었는지 모르겠다. 최준명이 게엄부대를
방문했으나 사단장은 출타중이었다.
자연스럽게 부관과 잡담을 나누면서
최준명은 슬쩍 정군운동을 화제로 올렸다.
"이제 우리 국군도 자랄 만큼 자랐으니
강군(强軍)을 만들기 위해서도 4.19를
계기로 정군을 해야 하잖겠는가? 군대란
지휘관에 따라서 정예부대가 될 수도 있고
허약한 군대가 될 수도 있는 법, 그렇게
생각지 않는가?"
"옳은 말씀입니다."
이에 용기를 얻은 최준명은 8기생이
중심이 돼서 정군운동을 벌이기로 하고
동지를 포섭중에 있다는 것을 털어놨다.
그런데 이 부관, 무슨 생각에선지
조재미가 귀대하자, 전혀 얼토당토 않은
보고를 했다.
"조금 전에 최준명 중령이 찾아왔다가
돌아갔는데, 8기생이 중심이 되어 쿠데타
모의를 하고 있는 모양입니다."
쿠데타란 말에 조재미의 두 눈이
번쩍했다.
"쿠데타라니 구게 무슨 소리야?"
"확실한 건 모르겠습니다만 하여간에
8기생이 중심이 돼 가지고 그런 모의를
하고 있는 것만은 틀림없는 것 같습니다."
"그래?"
상부에 보고하기 전에 최준명을 불러 사실
여부를 캐보았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것을 부관이 엉뚱한 한마디를 더
곁들였던 것이다.
"최 중령께서 하시는 말씀이 쿠데타가
일어나더라도 조 장군께서 중립을
지켜주셨으면 좋겠다고 부탁하고
돌아갔습니다."
중립을 지켜달라고 부탁하고 돌아갔다면
일은 구체적으로 진척돼 있는 모양이라고
조재미는 판단했다.
"주동 인물이 누구라고 하던가?"
"김종필, 김형욱 등 육군본부에 근무하고
있는 중령들이라고 합니다."
"군인이 정치에 개입하려 들다니!"
이렇게 씹어뱉듯이 내뱉고 난 조재미는
했다. 그렇지 않아도 4.19가 터지는 것과
함께 군부 내에는 별의별 소문이 다 떠돌고
있을 때였다. 송요찬의 촉각이 곤두서게
되었을 것이라는 것은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는 일이었다.
"영관급 장교들의 동태에 대해서
내사하라!"
송요찬은 즉시 방첩부대장인 육군 준장
이소동(李召東)에게 명령했다.
영관급 장교들의 내사에 그리 시간이
걸리지는 않았다. 육군본부에 근무중인
중령급은 거의가 다 정군운동에 가담했던
일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5월 17일 최준명이 김종필과 함께
서울지구 방첩부대에 잡혀 갔다. 이어서
다음날인 5월 18일에는 김형욱, 옥창호,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정군파
장교들은 5월 18일에 연판장을 송요찬에게
제출할 계획이었다. 그랬던 것이 5월
17일에 이들은 방첩대에 구속되는 몸이
되었기 때문에 연판장이나 건의서는 미처
송요찬한테 제출해 보지도 못했던 것이다.
여기에서 한 가지 덧붙여 둘 것이 있다.
그것은 다름이 아니라 연판장을 작성한
여덟 명의 중령들은 송요찬을 찾아가서
연판장을 제출한 것으로 세상에 알려져
있다. 김종필, 김형욱 등이 송요찬과
대면하는 장면은 상당히 드라마틱하게
묘사되어 있다.
그러나 그들은 송요찬에게 연판장을
제출하기 전에 체포당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떻게 해서 여덟 명이 송요찬을
이것 역시 그들이 군사 쿠데타에 성공하자
아첨 잘하는 어느 어용작가가 그들의
정군운동을 과대하게 창작해 냄으로써
세상에는 그렇게 훤자하게 되었던 것이다.
한국에 있어서는 <역사는 강자에 의해서
창작되는 것이다>라는 좋은 본보기인 줄로
안다.
육군 참모총장 송요찬은 끝내 물러나기는
물러났다. 그가 물러난 것은 1960년 5월
20일. 송요찬의 퇴임은 갑자기 이루어졌다.
하루 전인 5월 19일까지만 해도 그가
참모총장 자리를 내놓을 것이라고 예측하고
있던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이종찬 이 두 사람과 일언반구도 의논하지
않았다. 송요찬이 군인으로서는 최고의
명예인 육군 참모총장직을 헌신짝처럼
내던지는 용기있는 행동을 취하고도 <역시
돌대가리는 할 수 없군> 하고 영예롭지
못한 세평을 받게 된 것도 그 때문이다.
하여간에, 그는 사표를 제출하기 전날인
5월 19일 밤, 방첩대에 구속되어 있는 여덟
명의 정군파 장교들을 참모총장실로
데려오도록 했다.
"귀관들의 용기있는 행동에 나는 탄복을
금치 못하네."
여덟 명의 중령들을 앞에 놓고 입을 연
송요찬이 한 첫마디가 이것이었다.
"귀관들의 주장은 옳았어! 나는 나의
행동을 무척 부끄럽게 생각하여 왔네.
생각할 필요가 없어. 그런데도 나는 정치
문제에 개입을 했으니 부끄럽기 짝이 없네.
앞으로 귀관들이 있는 한 우리 국군은
건전하게 발전해 나갈 수 있으리라 믿네.
그런 만큼 나는 안심하고 물러갈 수가 있을
것 같네."
이 말을 들은 여덟 명은 감격했다.
송요찬이 이렇게 깨끗이 물러나 주리라고는
전혀 예상치 않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육군 중장 송요찬, 그는 일제 시대의
지원병 출신이다. 조선인으로서 일본군에
지원을 한다는 것은 곧 친일을 의미했다.
그렇다고 지원병들을 가리켜 덮어 놓고
<네놈은 친일파> 하고 몰아치기는 어려운
일이었다. 무슨 친일사상이 있어서
일본군에 지원을 한 것이 아니라 단순히
없지 않았기 때문이다.
해방이 될 때까지의 송요찬의 일본군에서
계급은 군조(軍曺:중사)였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송요찬은 지원병 2기로
입대했으니까, 그가 일본군으로 나간 것은
1939년이다. 햇수로 6년간 일본군에
복무했다는 얘기가 된다.
해방 후, 군사영어학교에 입교함으로써
송요찬의 군인 생활은 계속되었다.
초등교육밖에 받지 못했던 관계로 해서
그가 장군으로 진급한 뒤부터 그에게는
석두(石頭:돌대가리)라는 명예롭지 못한
별명이 붙었으나 6.25 전쟁 때의
용맹성으로 해서 미군들은 그를 <타이거
송>이라 부르며 외경하고 있을 정도였다.
하여간에 그건 그렇고, 여덟 명의
모를 말을 하고 난 송요찬은,
"이들을 즉시 석방하라!"고 명령했다.
그런 조치를 취하고 난 다음, 그는
다음날 국방장관에게 사표를 제출했던
것이다.
송요찬의 사표 제출에 놀란 것은
허정이었다.
"이게 도대체 어찌된 노릇이오, 나하고
한마디 상의도 없이?"
허정은 국방장관인 이종찬에게 물었다.
"글쎄올시다. 저하고도 한마디의 상의도
없었습니다. 불쑥 찾아와서 사표를
내던지고는 아무 말 없이 돌아가 버리니
무슨 영문인지 원......."
"이 장군, 수고스럽지만 이 장군께서
경위를 조사해서 보고토록 해주시오."
캄캄하기만 했던 허정으로서는 당장
송요찬의 사표를 수리하기도 무엇하고 해서
그렇게 말할 수밖에 없었다.
한데, 이종찬이 내각수반실을 물러난
직후, 유엔 사령관인 매그루더가 찾아왔다.
"제너럴 송이 사표를 제출했다고 하는데,
그게 사실입니까?"
"예, 지금 막 국방장관을 통해서 말씀을
들었습니다. 한데, 장군께선 그 사실을
어떻게 아셨습니까?"
"신문을 통해서 알았습니다.
참모총장직에서 물러나겠다고 기자회견을
했더군요."
송요찬은 국방장관에게 사표를 제출하고
나자, 그 즉시 자진해서 기자회견을 갖고
물러날 것을 천명했던 것이다.
수리해선 안 됩니다. 한국군으로는 지금이
가장 중요한 때입니다. 정치적으로 혼란할
때 군의 최고책임자를 바꾸게 되면
군부에도 혼란이 야기될 우려가 있습니다."
매그루더는 애써 송요찬의 사표를 반려해
줄 것을 간청했다.
허정도 군부의 동요는 원치 않고 있는
바였다. 과도정권을 맡을 때도 과연 군부가
그를 지지해 줄 것인지에 대해서 무척
우려한 바 있었다. 때문에 그는 군부에
대해서는 일체 손을 대지 않고 현상을
유지해 나갈 생각이었다. 그랬기 때문에
그는 매그루더의 간청을 쾌히 받아들여
마음속에 새겨놨던 것이다.
다음날, 국방장관 이종찬이 송요찬의
사표제출 경위에 대해서 보고해 왔다.
해서 연판장 운동을 벌인 것이 사표 제출의
동기였던가 봅니다."
이렇게 보고를 하고 난 이종찬은
허정에게 아주 정중하게 사과를 하는
것이었다.
"죄송합니다 각하, 제가 미숙한 탓으로
그런 불상사가 야기되었습니다. 마냥
송구스럽기만 합니다."
허정은 거기에 대해서는 일체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그래, 이 장군으로서는 어떻게
처리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시오?" 하고
송요찬의 사표를 어떻게 처리하는 것이
좋을지 의견을 물었다.
"송 장군 스스로가 앞질러서 물러난다고
기자회견을 해버렸으니 어쩔 도리가 없는
딴은 그랬다. 물러난다고 세상에 대고
공표를 해벼렸으니 이제는 그를 붙들어
앉힐 수도 없는 일이었다. 매그루더의
간곡한 부탁이 있었다 하더라도. 그러면
송요찬은 어떻게 해서 갑자기 스스로
물러나게 되었던 것일까? 박정희가 보낸
편지에 자극을 받아서? 아니면 김종필 등
8기생들의 정군운동에 겁을 집어먹고?
송요찬이 김종필이 작성한 정군 건의서를
읽어본 것은 방첩대에서 김종필을 구속한
직후였다. 어쩌면 그 모든 것이 물러날
결심을 촉구하게 했던 것인지도 모른다.
어쨌거나 송요찬은 어려운 결단을 내렸다.
인간이란 욕심의 동물인데 임명권자에
의해서 자리를 내놓게 된다면야 어쩔 수
없는 일이지만 스스로 자리를 내놓기란
육군 참모총장직, 그게 어떤 자리인가!
군인으로서는 최고의 영예스러운 직책이다.
군복을 입고 별을 달았다고 해서 누구나가
넘볼 수 있는 자리가 아니다. 그런
영예스러운 자리를 스스로 물러났다. 그
용기있는 행동에 감복을 금하기가
어려웠다.
한데, 송요찬이 물러서더라도 일단은
행정수반인 허정이나 아니면 국방장관
이종찬과 상의하고 물러났어야 옳았다.
다른 직책도 아닌 육군 참모총장이라는
막중한 직책을 맡고 있는 사람이 제멋대로
진퇴를 결정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고, 또
공표하지 않았다면 모를까? 물러난다고
공표를 해버렸으니 사표를 반려할 수도
없는 처지가 돼버렸던 것이다.
송요찬의 후임으로는 최영희(崔榮喜)가
육군 참모총장에, 그리고 차장에는
최경록(崔景祿)이 발탁되었다. 어떤 기록에
<그때 강한 발언권을 가진 계엄군 부대장
조재미 준장은 송요찬 중장의 유임을
강력히 건의하면서 부득이한 경우의
대안으로 최영희 중장을 추천, 이 장관이
추천한 유 중장에 맞섰다. 이번 경우 허정
과도정권 수반은 이 장관의 건의보다 몇
번에 걸친 조재미 준장의 건의에 더
기울어졌던 것 같다>고 했는데, 이것은
천만의 말씀이다.
과도정권이 아무리 시한부 정권이요,
허정 역시 시한부 행정수반이었다 하더라도
자리가 계엄군 부대장이라고 해서 군
인사문제에 끼어든다는 것은 상상도 못할
일이다.
송요찬의 사표를 수리한 뒤 허정이
국방장관 이종찬에게 의견을 물었다.
"누굴 송 장군의 후임으로 임명하는 것이
좋겠소?"
"글쎄올습니다. 시국이 시국인 만큼
참모총장 문제는 신중을 기해야 할 것
같습니다."
그는 당장 누가 좋다는 등의 의견 제시를
삼가했다.
왜냐하면 이종찬도 젊은 장교들의 불온한
움직임에 대해서 이미 보고를 받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그는 좀더 시간을 두고
적절한 인물을 물색할 생각이었던 것이다.
최영희를 추천해 왔다. 송요찬이 최영희를
추천한 데는 그 나름대로의 깊은 생각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미 널리 알려져 있는
바와 같이 국군은 창군 초기에 잡다한 출신
성분을 지닌 사람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일본 육군사관학교 출신자를 비롯해서
학병, 지원병 출신자, 만주 군관학교
출신자, 그런가 하면 독립군 출신자,
중국군 출신자 등등.
그중 유대의식이 가장 강한 것이 일본
육군사관학교 출신자들과 학병 출신자들,
그리고 지원병 출신자들이었다. 일본
육군사관학교 출신자들은 그 나름대로
상당한 프라이드를 지니고 있었기 때문에
그들끼리 똘똘 뭉쳐 있었고, 학병 출신은
학병 출신대로 지원병 출신은 지원병
있었던 것이다.
일본군 지원병 출신으로서의 최고 영예인
육군 참모총장직에 올랐던 송요찬이
참모총장직에서 물러나는 데 즈음해서
혼란기의 국군이 건재하자면 파벌의식을
지양하고 화합하는 것뿐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일본 육군사관학교 출신자가
국방장관이니, 지원병 출신자였던 내가
물러나면 그 자리에 학병 출신자를
앉힘으로써 국군의 화합을 이룰 수 있다.)
이렇게 생각했던 것이다. 그래서
최영희를 추천했던 것이다. 최영희는 일본
센슈우(專修) 대학을 다니다가 일본군에
끌려나갔던 학병 출신자였다. 군대의
서열로 보더라도 육군 참모총장직에
군대에서 물러나면서 군대의 장래까지도
생각했다는 것은 훌륭한 몸가짐이라 하지
않을 수가 없다. 그래서 최영희를 추천했던
것인데 때마침 국방장관 이종찬도 최영희를
추천해 왔다. 송요찬이 이종찬한테로
최영희를 밀었는지 확인할 길은 없으나
허정은 송요찬이 추천한 인물을 국방장관인
이종찬도 <적임자>라고 추천해 오자, 두말
없이 최영희를 육군 참모총장에 기용했던
것이다. 그와 함께 군의 화합을 이루어
보자는 뜻에서 육군 참모차장직에는 지원병
출신인 최경록을 앉혔다. 최경록은 지원병
출신이기는 하나 일본군 육군 소위에까지
진급했다가 해방을 맞은 인물이었다.
졸병으로 입대해서 장교인 소위로까지
진급했다면 최경록이 얼마나 근면하고
있을 것이다.
4. 갈팡질팡 과도정권
허정이란 인물은 맺고 끊는 것이 분명한
인물이었다. 그가 관직에 있을 때,
<정치가라기보다는 행정가>라는 세평이
나돌았던 것도 그 때문이었다. 그런
인물이었기 때문에 결단력도 남달랐다.
옳다고 생각한 일에 대해서는 주저하지
않고 밀고 나갔다. 그 좋은 예가 이승만을
하와이로 망명시킨 일이었다.
이승만이 대통령직을 내놓고 경무대를
떠나는 날, 서울 시민들은 연도에 서서
박수로써 전송을 했다. 심지어 어떤
사람들은 그가 거처할 이화장 담벽에
내걸기도 했다.
얼마나 착한 한국의 민초(民草)들인가!
12년 동안 독재를 했지만 이제 권좌에서
물러났으니 <독립 건국의 아버지>로서의
여생이나마 편안히 모시도록 하자는 것이
갸륵하기 이를 데 없는 민초들의
생각이었다.
그러나 젊은 학생들의 생각은 달랐다.
<이승만이 권력을 미끼로 법을 어겼으니
설혹 독립 건국에 공로가 컸다 하더라도
혁명법정에 세워야 한다>라는 것이 그들의
생각이었다.
그 젊은 학생들의 생각을 대변한 것이
고려대학교의 고성민(高盛敏) 등 10명의
학생들이었다. 그들은 이승만뿐만 아니라
발췌 개헌 당시와 4사 5입 개헌 당시의 전
150여 명을 서울 지방검찰청에 고발을
했다.
이것이 여론에 불을 지르는 결과가
되었다.
<이승만을 혁명법정에 세워라!>
사방에서 벌떼처럼 일어나서 아우성을
쳤다. 이런 여론의 열기로 보아서 이승만을
혁명재판에 회부하지 않으면 안 될 만큼
사태는 점차 험악해져만 갔다.
허정의 걱정은 태산 같았다. 그가 아무리
과도정권의 수반이라 하더라도 그의
힘으로도 이승만의 혁명재판 회부는 도저히
막아내기가 어려울 정도로 여론은 고조되어
있었다.
그럴 때인데 이승만을 하와이로
망명시키는 데 앞장섰다는 것은 여간한
그런 행위는 반혁명으로 몰려 돌을 맞아
죽어도 변명의 여지가 없는 행위였기
때문이었다. 그런데도 그는 결과에서 오는
피해 따위는 일체 고려하지 않고 결단력을
발휘했던 것이다.
이승만 부처가 하와이로 망명할 수
있었던 경위는 이러했다.
5월 26일이던가? 이날 허정은 정동의
미국 대사관을 방문했다. 망중한담을 하기
위해서가 아니고 주한 미국대사 매카나기와
진전돼 가고 있는 정국의 앞날에 대해서
상호 의견을 교환하기 위해서였다.
5월 26일, 이날에는 주한 유엔군 사령관
매그루더도 자리를 같이했다. 한동안
얘기를 주고받고 있던 중 미국대사가,
"장군, 나 미스터 허하고 단 둘이 할
주셨으면 고맙겠습니다"라고 부탁했다.
한국 사람 같으면 셋이서 얘기하다가 한
사람더러 자리를 비켜 달라고 할 것 같으면
아마도 <이럴 수가?> 하고 못내 섭섭해
할지도 모른다. 그런데 역시 미국인이었다.
사성 장군인 매그루더는 추호도 섭섭해
하는 빛 같은 것은 보이지 않고 자리를
비켜 주는 것이었다.
단 둘이 남게 되자, 매카나기는 불쑥
이런 말을 하는 것이었다.
"사실은 마담 리가 우리 집사람에게 몇
번 전화를 걸기도 했고 찾아오기도
했답니다. 용건이 무엇이냐 하면 요즈음 이
박사의 건강이 좋지 않아 하와이로 휴양을
갔으면 좋겠다는 것입니다. 미스터 허는 이
문제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최고 책임자로 법정에 서게 되지나 않을까
해서 여간 조바심을 일으키고 있던 처지가
아니었다. 기실 이승만을 법정에 끌어내야
한다고 입에 거품을 물고 있는 여론도
없지는 않았다. 경찰의 총탄에 희생된
학생의 유가족들이 누구보다도 그렇게
하기를 강력히 요구하고 있던 처지였다.
그랬으므로 허정이 조바심을 일으키고
있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허정은
이승만의 고굉지신의 한 사람이었으니까.
인간의 정리로서 그렇게 걱정을 하는 것이
당연했다.
그런 처지였으므로 허정은 두말 않고
찬성했다.
"그것 참 잘 됐습니다. 노경에 큰일을
당하셨으니 충격인들 오죽 하겠습니까? 곧
이렇게 찬성을 하고 난 다음 허정은,
"그런데 대사, 이 박사를 어떤 방법으로
출국시키느냐 하는 것이 문젠데 대사께서
미국 군용기를 주선해 주실 수
있겠습니까?"
"군용기 주선은 어렵겠습니다. 하지만
항공편은 걱정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하와이의 한국인 교포들이 이미 전세
비행기를 얻어 놓고 있으니 그걸 이용하면
될 줄로 압니다."
하와이의 한국인 교포들이 이승만의
망명을 위해서 이미 전세 비행기까지 얻어
놓고 있단다. 그렇다면 허정으로서는
걱정할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이승만의
출국에 대해서 대통령 권한대행으로서
정치적 결단만 내리고 여권만 내주면 되는
정부 수반실로 돌아온 허정은 지체없이
외무차관 이수영(李壽榮)을 불렀다.
"이 박사께서 하와이에 가셔서 요양을
하고 싶어한다고 들었는데 이화장으로 가서
사실을 확인하고 오시오."
이화장으로 달려갔던 이수영은 곧 그
사실을 확인하고 돌아왔다.
"그럼, 서둘러 여권을 만들어 드리도록
하시오. 외부에 누설되지 않도록 이 차관이
직접 여권을 작성토록 하십시오."
이승만 부처의 여권은 이틀 만에
만들어져 극 비밀리에 그들 부처에게
전달되었다. 하와이 교포들이 전세낸 CAT
항공기가 이날 김포공항으로 날아와 나래를
접고 대기하고 있었다.
김포공항까지 모셔서 비행기에 오르게
하느냐가 문제였다. 허정은 행여 이승만이
해외로 도망치지 않을까 해서 이화장을
감시하고 있는 사람이 있을 것이라고 믿고
있었다. 그래서 걱정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궁리를 거듭하던 끝에 허정은 유엔군
사령관 매그루더에게 전화를 걸었다.
"장군, 어려운 청 한 가지를 들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어려운 청이라니요? 뭔가요?"
"이화장에서 김포공항까지 이 박사
부처를 어떻게 해야 안전하게 모실 수
있느냐 하는 것이 여간 걱정이 아닙니다.
그래서 부탁하는 것입니다만 MP를 차출해서
좀 경호를 해줄 수 있겠습니까?"
이승만 박사의 하와이 망명은 자칫
정치문제화할 염려도 없지 않은데,
유엔군이 그런 정치성을 띤 문제에 개입할
수야 없지 않습니까?"
옳은 말이었다. 매그루더가 한국의
내정문제에 끼어들려 하지 않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었다.
생각다 못해 허정은 한국군의 한 고위
장성을 신교동 집으로 불렀다. 그 장성은
이승만의 총애를 입어 별을 달았기에
어쩌면 허정의 부탁을 쾌히 승낙해
주리라는 믿음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얘기를 듣고 난 그 장군은 펄쩍 뛰었다.
"헌병을 동원해서 경호를 해달란
말씀입니까? 아니 그렇게 하면 지금 이
박사께서 망명길에 오른다는 것을 세상에
얘기인즉 옳았다. 그러나 허정은 섭섭한
마음이 이는 것을 어쩔 수가 없었다.
염량세태(炎凉世態)라더니 인간의 추한
속성이 슬프기조차 했다.
이제는 어쩔 수 없었다. 운명을 하늘에
맡길 수밖에 없었다.
5월 29일 새벽, 허정은 외무차관
이수영을 이화장으로 보냈다. 이승만
부처를 김포공항으로 모시고 나오라
해서였다. 그런 다음 그는 김포공항으로
직행했다. 이른 새벽이라 공항 숙직
직원들은 아직 잠자리에서 일어나지도 않고
있었다. 허정은 친히 그들을 깨워 이승만의
출국 준비를 갖추도록 했다.
한편, 이화장으로 간 외무차관 이수영은
서둘러 이승만 부처을 차에 오르도록 했다.
눈에도 띄지 않게 감쪽같이 이화장을
빠져나올 수가 있었다.
어둠이 걷히기 시작한 것은 한참
김포가도를 달리고 있을 때였다. 무심코
뒤를 돌아보던 이수영은 아찔해지는
현기증을 느꼈다.
(아니 이럴 수가?)
경향신문사(京鄕新聞社) 깃발을 나부끼며
검은 지프가 뒤따르고 있는 것이었다.
(경향신문 기자가 이화장을 감시하고
있었단 말인가?)
밤을 새우면서 감시하고 있었던 게
틀림없는 것 같았다. 그렇지 않고야
극비밀리에 진행한 이승만의 망명을 눈치챌
리가 없었다. 이건 나중에 밝혀진 일이지만
이승만에게 호되게 탄압을 받았던
않을까 해서 늘 기자를 파견, 이화장을
감시시키고 있었던 것이다.
김포공항에 도착하자, 차에서 내린
이승만의 몰골은 보기조차 민망할
정도였다. 얼굴은 까칠했고 중절모자를 술
취한 사람 모양 머리에 걸치고 있었다.
먼저 공항에 나와 있던 허정을 보자,
이승만은 다가가 그의 손을 잡았다.
"바쁜데 왜 여기까지......."
이승만은 슬픔이 미려 올라오는지 채
말끝을 맺지도 못했다.
그때 뒤따라온 경향신문 기자가 지프에서
내려 이승만 곁으로 다가왔다.
"이 박사께서 어떻게 이렇게 갑자기
출국하시게 되었습니까?"
"나 휴양 좀 하려구 해. 오래 있지는
"출국에 즈음해서 소감을 한 말씀
해주시겠습니까?"
이승만의 아내 프란체스카가 남편을
가로막고 나섰다.
"그는 한국 국민을 존경하고 있습니다."
경향신문 기자가 다시 뭐라 물으려는
눈치를 보이자, 이번에는 허정이 가로막고
나섰다.
"선생님, 날씨가 찹니다. 어서 비행기에
오르시죠."
"음."
이승만이 트랩으로 올라가자,
프란체스카가 분주히 그 뒤를 따랐다.
이어서 허정이 따라 올라갔다. 비행기
안에서 마지막 작별 인사를 하기
위해서였다.
있으면서 대통령 권한대행으로서의 <권한
행사>를 한 것은 오직 이 한 가지뿐이었다.
그의 정치적 결단이 없었던들 이승만의
하와이 망명은 도저히 불가능한 일이었다.
앞서 필자는 허정이 맺고 끊는 것이
분명한 인물이라고 했다. 그래서
정치가라기보다는 행정가라는 세평이
나돌았다는 것도 덧붙여서 언급했다.
한데, 역시 허정은 세평과 마찬가지로
행정관 이상의 역량은 없었던지 과도정권을
이끌어가면서 발휘한 그의 지도역량은 그리
탐탁한 것이 못 되었다.
허정, 그는 누구인가? 대통령 권한대행인
군부부터 휘어잡고 손아귀에 넣고 있어야
옳았다. 그래 가지고 군부에서 제기되는
문제에 대해서는 그의 판단에 따라 어떤
조치를 내렸어야 옳았다. 그것을
군부문제는 일체 국방장관인 이종찬한테
맡겨 놓고 있었으니 여기서 들썩, 저기서
들썩 할 수밖에 없는 일이었다.
6월 8일에 있었던 육군 주요 지휘관
회의만 해도 그렇다. 이 회의의 내용에
대해서 그는 참모총장인 최영희나
국방장관인 이종찬에게 보고를 들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다시는 군부에서
국토방위 이외의 문제에 대해서는 추호도
거론하는 일이 없도록 조치를 취했어야
옳았다. 그것을 허정은 그냥 내버려두고
말았다. 이러니 군부의 위계질서가 유지될
6월 8일의 육군 주요 지휘관 회의에서는
어떤 일이 있었던가?
이날의 회의는 오후 1시에 열렸다.
최영희가 육군 참모총장에 취임해서 연
최초의 육군 주요 지휘관 회의였다. 주요
지휘관 회의라는 명칭이 말해 주듯이
소장급 이상의 지휘관들은 한 사람도
빠짐없이 참석했던 회의였다.
회의는 먼저 국방장관 이종찬의
인사말에서부터 시작되었다.
"이 어려운 시기에 각급 지휘관은
명령계통을 엄수하고 융화단결해서
국토방위에 매진하고 있음을 치하한다."
대공사찰과 임전태세 강화에 대한 문제가
토의되고, 이어서 인사관리의 쇄신문제가
토의되려는 찰나였다. 부산 군수기지
"오늘 이 회의에서 어떤 문제를 토의하려
하고 있는지는 모르겠습니다만, 그것이
어떤 문제이든 간에 가장 시급하고 긴급을
요하는 문제는 정군문제입니다."
이렇게 전제한 다음 박정희는 자유당
치하에서 저질러진 군의 부패상을 하나하나
실례를 들어가면서 규탄했다. 그런 다음,
"나는 그 책임을 마땅히 지도적 위치에
있는 지휘관이 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면 그 책임을 어떻게 져야 하는가?
새삼스럽게 말씀드릴 것도 없이 4.19
혁명정신에 입각해서 스스로 물러가도록
해야만 합니다. 부정부패에 대한 척결 없이
그 어떤 문제를 협의하는 것은 전혀
무의미할 뿐입니다" 하고 정군문제를 들고
나왔다.
생명으로 하고 있는 군대에서는
폭탄선언이나 다름이 없었다. 갑작스럽게
회의장 분위기는 긴장이 쌓이고 싸늘한
바람이 일기 시작했다.
박정희는 어쩌자고 주요 지휘관 회의에서
그런 폭탄선언 같은 주장을 하게 되었던
것일까? 그는 1개월 전에 송요찬에게
편지를 보내 <군의 부정선거에 전적인
책임을 지고 물러나라>고 했었다. 송요찬이
이 편지에 충격을 받고 물러났는지는
확인할 수 없으나 하여간에 송요찬이
물러난 것은 군의 부정선거에 전 책임을
지고 물러난 것이라 간주할 수 있었다.
그렇다면 그것으로 족한 일이었다. 그런데
어쩌자고 박정희는 또 정군문제를 들고
나오더란 말인가?
이유를 유추할 수가 있다.
첫째로 생각할 수 있는 것은 정군파 소장
장교들에 대한 계속적인 고무 격려였다.
김종필, 김형욱, 등 정군파 장교들은 5월
19일 송요찬의 배려로 전원 석방되었는데,
그들이 그 시점에서 주저해서는 안 된다고
박정희는 생각했을 법한 일이었다.
그러자면 그들은 고무 격려할 필요가
있었다.
둘째로 생각할 수 있는 것은 장성들에
대한 박정희의 혐오감이었다. 자유당
치하의 장성들 가운데에는 정치권력에
아첨해서 자신의 영달을 도모한 자들이
적지 않았다. 정치 권력자한테 줄을 내지
못한 자는 금력으로 자신의 영달을
도모하려 들었다. 장성 진급심사가 있을
밑천을 들였으면 들인 만큼의 밑천을
뽑아야만 했다. 그러니 부정부패는 더욱더
심화돼 나갈 수밖에 없는 일이었다. 국가에
대한 공로 또는 탁월한 실력으로 진급을
하려 들지 않고 정치 권력에 아첨하거나
금력으로 진급을 하려 들었으니 그것이
어찌 망국적 현상이라 하지 않겠는가!
윗물이 맑아야 아랫물이 맑은 법이다.
중국의 장개석이 어찌해서 대만으로
쫓겨나야 했던가? 군대가 썩었기 때문이다.
박정희는 그러한 사실들을 너무나 많이
목격했다.
(썩은 놈들, 썩은 놈들!)
그는 그 썩은 놈들을 눈으로 보거나 귀로
들을 때마다 그들에 대한 증오심을 다졌다.
이미 널리 알려져 있는 사실이지만 그가
굉장히 청빈한 생활을 했다. 집 한 칸
마련하지 못해 셋방살이 신세를 면치
못했고 땔감, 끼니 걱정이 늘 끊일 날이
없었다고 한다.
하긴 박정희로서는 부정을 할래야 할
수도 없는 처지였다. 소령 시절에
군사법정에 섰었고, 무기형을 받았다는
경력이 꼬리표처럼 그를 따라다니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런 만큼 만일 잘못 삐꺼덕
하게 되는 날에는 그의 운명은 어떻게
뒤바뀌게 될는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하여간에 청빈을 고수하다 보면
부정부패에 대해서는 혐오감을 품게 되기
마련이다. 그래서 그는 끝까지 정군을
고집했던 것인지도 모를 일이었다.
셋째는 <5.26 정치파동> 때에 이미 군사
정군운동을 군사 쿠데타로 확대시킬
의도에서 끈질기게 정군문제를 물고
늘어졌던 게 아니냐 하는 추리다. 1960년
6월, 이 시점까지 박정희는 정군파
장교들하고 단 한 번이라도 얼굴을 맞대고
정군문제를 위시해서 군사 쿠데타에 대해서
논의한 바 없지만 정군파의 김종필하고는
빈번한 접촉이 있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므로 김종필이 정군운동을 일으킨 그
무렵, 두 사람 사이에는 이미 군사
쿠데타에 대한 계획 같은 것이 논의되고
있지 않았느냐 하는 추리다. 그래서 이
정군운동을 군사 쿠데타로 확대 발전시키는
방법으로써 그토록 끈질기게 정군문제를
물고 늘어졌을 가능성도 충분히 유추할
수가 있다.
순수한 애국심의 발로로는 보지 않고
삐딱하게만 해석하려 드느냐고
힐난할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역사는
결과를 가지고 과정을 해석하게 마련인
것을 어쩌랴.
그건 그렇고, 박정희가 정군문제를 들고
나오자. 그의 주장을 반박하고 나섰던 것은
제2군단장 육군 중장 김형일이었다.
"박 장군, 도대체 장군은 무슨 속셈에서
그런 주장을 하고 나서는 거요! 지금이
어떤 때요? 사회가 혼란하다고 해서 우리가
거기에 부화뇌동해야 옳단 말이오? 설혹
정군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고 합시다.
그렇더라도 사회와 정치가 안정된 다음에
그런 주장을 해도 충분할 게 아니오?"
김형일은 다분히 노기마저 띠고 있었다.
하자, 국방장관인 이종찬이 제동을 걸었다.
"회의 주제에서 벗어난 논쟁은 그 정도로
해두고 어서 회의 주제를 토의하도록 하는
것이 좋을 것 같소."
이래서 이날의 주요 지휘관 회의는 더
이상의 파란을 일으키지는 않았다.
한데, 문제는 과도정부의 수반인 허정의
애매모호한 태도였다. 그는 국방장관
이종찬을 통해서 주요 지휘관 회의에 대한
보고를 받았을 것이 틀림없는 일이었다.
그렇다면 과도정부 수반답게 군부에 대해서
어떤 조치를 취했어야 옳았다. 정군문제를
가지고 다시는 논란하지 않도록 한다든가,
아니면 아예 주어진 권한을 행사해서
정군에 손을 댄다든가 어느 쪽으로든
조치를 취했어야 옳았다. 그것을 그저
국방장관이 알아서 해 주겠지> 하고 방치한
것이 그의 일생을 두고 후회할 결과를
빚어내기에 이르렀기 때문이다.
뒤에 언급하게 되겠지만, 허정은 군부의
동요를 막는다고 7월 17일
제헌절(制憲節)을 맞아 삼군 참모총장과
해병대 사령관을 불러모아 <정치에 중립을
지키도록 하겠다>라는 선서를 시킨 것이
군부에 대한 유일한 조치였다.
허정이 과도내각을 이끌면서
애매모호하게 처리한 것은 비단 군부에
대해서만이 아니었다. 부정축재자에 대한
처리도 그 중의 하나였다. 그는 과도내각
뭐라고 천명했던가? <이번 사태를 통해
나타나는 국민의 불만과 요구를 충분히
받아들여 부정, 불법, 부패, 혼란 등의
적폐를 일소하고 민심을 자발적이고
건설적인 의욕으로 전환시키도록 하겠다>고
공약하지 않았던가! 그렇다면 <부정축재자
처리 문제>에 있어서도 과감해야만 했다.
"부정축재자를 처벌하라!"
이승만이 하야하고 나자 <부정선거>
규탄의 구호는 어느덧 부정축재자 문제로
모아져 있었다. 그렇다면 과도정권은 이
문제에 심각하게 달라 붙었어야 옳았다.
그런데도 허정은 이 문제에 심각하게
달라붙지를 않았다. 왜 그랬을까?
허정은 부정축재자를 처벌하는 일에
있어서 미온적이었던 것에 대해서 이렇게
"부정축재자를 처벌하라고 하지만 무슨
법으로 처벌하란 말인가? 또 설혹 그들을
처벌한다 해도 부정축재자를 가려내기가
그렇게 용이한 일은 아니었다."
이게 납득할 수 있는 소린가? 법이
없었으면 법을 만들면 되었을 것이고
부정축재자를 가려내기가 어려웠으면
공권력을 여기에 총집중시켰으면 되었을
것이다. 이것은 어디까지나 구차한 변명에
지나지 않았다.
여기서 부정축재자에 대한 문제가 어떻게
처리되었는가를 살펴보기 전에 자유당
치하에서는 어떤 방법으로 부정축재를
했는지 그 유형을 살펴보기로 하자.
자유당 치하의 부정축재는 군사정권에서
제4공화국에 이르는 사이에 벌어졌던
달랐다. 권력형 부정축재는 대형화되어
있는 데 반해 자유당 치하의 부정축재는
<새발의 피> 같은 것이었다. 부정한
방법으로 축재를 하는 유아기였다고나
할까?
부정축재의 방법은 첫째로 꼽을 수 있는
것이 부정한 방법에 의한 불하(拂下)였다.
귀속재산이라 함은 해방 전까지 일본인들이
이 땅에서 차지하고 있던 재산을 말한다.
토지를 비롯해서 빌딩, 개인주택, 공장 등
재사닝 적지 않았다. 이것을 정당한
방법으로 제값만 받고 불하를 했어도 몇 해
동안 국민한테 세금 한푼 거두어 들이지
않고도 충분히 나라 살림을 꾸려나갈 수
있을 정도였다.
그것을 이승만 정권은 그렇게 하지를
쥐고 있는 사람이, 빌딩이나 개인주택 등은
큰 권력에 버금가는 권력을 쥐고 있는
사람들이 이원화해서 불하를 받기도 하고
불하를 해주기도 했다. 경찰서장쯤만 되면
대지 100평에 건평 50평 정도의 개인주택을
불하받기는 누워서 떡먹기였다. 정당한
값을 받고 불하를 해주었다 해도
<특혜>라고 해서 아우성을 칠 판인데,
그것을 시가의 10분의 1도 못 되는
헐값으로 팔아 넘겼으니 어찌 국민들이
가만히 있겠는가!
<귀속재산을 이원화하지 말라! 정당한
절차를 밟아 공매하도록 하라!> 하고
아우성을 쳤다.
그러나 권력을 쥐고 있는 놈들은 숫제
<어느 개가 짖고 있느냐?> 하는 식이었다.
불하하는 것도 좋다고 치자. 불하를 받는
작자들은 불하대금을 어떤 식으로
마련했느냐 하면 전적으로 은행융자에
의존했던 것이다. 그러니까 제 호주머니
돈은 10원 한장 들이지 않고 엄청난 치부를
할 수 있었다는 얘기가 된다.
그러면 은행에서 융자를 받은 그 돈은
누구의 돈인가? 그것은 바로 서민들의
돈이었던 것이다. 서민들이 한 푼, 두 푼
모아서 은행에 예금을 하면 그 돈을
특정인에게 대부를 해주어 그놈들의 치부를
도와주었던 것이다. 이런 식의 치부 방법은
군사정권하에서도 원용되었다. 이때는
불하받을 귀속재산이 없으니까, 주로
국유지 불하에 원용되었던 것이다. 죽일
놈들 같으니!
방법이었다. ICA란 미국의 국제
협조처(國際協調處)로서 여기에서는
대한민국을 비롯한 신생독립국가들에
대해서 막대한 금액의 원조를 제공해 주고
있었다. 이것을 ICA 원조 자금이라고 한다.
미국은 이 ICA 자금으로 반드시 필요한
물건을 미국에서 사도록 했었다. 정부는 이
ICA 자금으로 미국에서 물건을 사오면
이것을 민간에 불하하는 방식을 취하고
있었는데, 이 과정에서 부정이 생기기
마련이었다. 물품을 구입할 때 비싸게
구입한 것처럼 해서 우수리 돈을 먹기도
했고, 이것을 민간인에게 불하할 때도
헐값으로 불하해서 불하를 받은 사람이
비싼 값으로 되팔도록 했다. 그런가 하면
이 불하대금을 기업이나 개인한테 대출해
등 어지간한 머리로는 상상조차 할 수 없는
방법으로 치부를 할 수 있도록 해주었다.
셋째로는 세금포탈을 들 수가 있다. 이
방법은 지금도 근절되지 못하고 원용되고
있는데 치부를 하는 데 있어서는
세금포탈도 상당히 기여를 했다. 자유당
치하 때, 시정에는 <시바 시바>라는
국적불명의 낱말이 유행되고 있었는데, 이
말은 은밀히 청탁을 하는 것을 의미하고
있었다.
권력을 잡고 있는 놈이나 그 권력에
아부해서 사리나 취하고 있던 놈들이나
모조리 도둑놈뿐이었다. 불쌍한 것은 그
도둑놈들 무리에 끼지 못한 국민들이었다.
4.19로 이승만의 권세가 땅에 떨어지자.
<과도정권은 부정축재자를 색출해서
것은 너무나 당연했다.
3.15 부정선거에 관련돼 있는 원흉급들은
거의가 국회에 몸담고 있었다. 그래서
검찰에서는 그자들을 잡아들이기
시작했는데 그렇다고 해서 국회의 기능이
마비된 것은 아니었다.
그렇다면 허정이 의당 부정축재자 처벌을
위한 특별입법을 해야 옳았다. 그런데도
허정은 처음부터 아예 특별입법 따위는
생각지도 않고 있었다. 왜 그랬을까?
자유당이 동조해 줄 리가 없다고 판단하고
있었기 때문이었을까?
하긴 국회는 아직도 <자유당 국회>인
잡아들여야 할 놈들을 다 잡아들이고
나서도 국회는 여전히 자유당 국회로서의
면목(?)을 유지하고 있을 것만은 틀림이
없다. 그렇기 때문에 부정축재자를
처벌하기 위한 특별입법이라도 하려고
들면, 자유당 소속 국회의원들은 <우리를
처벌하기 위한 법률을 우리 손으로 만들란
말이냐?> 하고 반발하고 나설 것은 예상할
수 있는 일이었다.
그렇다고 구더기 무서워 장 못 담겠느냐.
그들이 그렇게 반발하고 나서거든 <아직도
정신이 덜 들었어? 지금의 이 판국이 어떤
판국인지를 몰라?> 하고 한 번만 눈알을
굴리기만 하면 자유당 소속 국회의원들이
어찌 감히 끝까지 반발할 수 있단 말인가?
그것도 그들 모두가 특별입법 법률에 묶일
양심적인 인물은 있었다. 아니 묶이지 않을
자들이 오히려 압도적으로 많은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것을 허정은 아예 처음부터
특별입법 따위는 외면해 버렸다. 그리고는
뭐라고 했던가?
"부정축재를 한 자들은 주로
탈세(脫稅)를 해서 축재를 한 것임으로
그들한테서는 탈세액을 추징토록 하고,
그들에 대한 처벌 문제는 새 정권에 맡기는
것이 좋겠어."
이게 도무지 무슨 놈의 어불성설이란
말인가? 부정축재를 한 자들은 주로 탈세를
해서 축재했다니, 그럼 어제까지
빈털털이였던 자들이 하루 아침에 졸부가
된 것도 탈세를 해서 졸부가 됐단 말인가?
"허정이 무슨 꿍꿍이 속이 있어 부정축재
"열 길 물 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 속은
모른다고 했어. 허정도 정치에 야심이 있는
사람이고 보니 정치 자금 긁어 모으기에는
절호의 기회가 아니겠나!"
세상 사람들은 허정에 대해서 의심의
눈초리를 던지기 시작했다. 처녀의
넙적다리를 보면 뭘 봤다고 훤자하는 것이
인간의 심리였다. 허정에 대한 의심의
눈초리는 마치 현장을 목격이라도 한 양,
사실처럼 날조되어 확대돼 갔다.
"허정이 부정축재를 해서 엄청난 돈을
먹었다면서?"
"먹었다면서가 아니라 먹었어!"
"그럴 수가 있어. 이건 마치 고양이한테
반찬가게 맡긴 꼴이 돼버렸잖아?"
여론은 들끓었으나 허정은
떠들라 하고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았다.
실컷 떠들다 입이 아프면 제풀에 꺾일
것이라 생각하고 있는 눈치 같았다.
그는 관계 기관에 지시해서 6월 20일까지
자수 기간이라는 것을 설정했다.
<탈세로 부정축재를 했거나 자인하는
자는 자수를 하라. 그러면 형사처벌은
면하게 해주겠다.> 정부가 이런 기간을
정해 놓았다고 해서 <네, 제가 탈세를
했습니다> 하고 자수를 하는 자가 있을까?
이의 실효성도 극히 의심스럽기만 했다.
이건 나중 얘기지만 이 자수 기간에
탈세를 했다고 해서 자수를 한 자는
7,8명에 불과했다. 부정축재자 자진신고
제1호는 삼호재벌의 정재호였지만 고작
7,8명밖에 신고를 하지 않았다는 것은 정부
않았다.
한데, 허정은 여론을 무시한 채 한술 더
떴다. 부정축재자 자진신고 기간을 설정해
놓은 어느 날 허정은 부정축재자로
지목되고 있는 재벌들을 정부수반실로
초대해 말했다.
"아마 여러분도 여론이 어떻다는 것을 잘
알고 계실 것이오. 지금 부정축재자를
처벌하라는 소리가 여간 높지가 않소.
그렇다고 여러분을 처벌하자면 많은
부작용이 따를 것이 뻔한 일이오. 그래서
하는 소린데, 여러분이 양심에 호소해서
나는 부정한 방법으로 얼마만큼을
축재했으니 차라리 이참에 그만한 액수를
나라에 바치도록 하는 것이 어떻겠소?
그러면 당신들도 좋고 나라도 좋은 결과가
이거야말로 부정축재자들로서는
불감청이언정 고소원이었다.
한데, 세상만사가 엿장수 마음대로
된다면야 얼마나 좋겠는가. 그것이
불행하게도 마음대로 되지가 않았다. 서울
검찰청의 젊은 검사들이 허정의 부정축재자
처리방안에 강하게 반발하고 나선 것이다.
"무슨 소릴 하고 있어. 그래 가지고
혁명과업이라 할 수 있어?"
"수반께선 세상이 제대로 돌고 있는지,
아니면 거꾸로 돌고 있는지 도통 캄캄한 게
아냐?"
"수반이 뭐라고 하든 우리 검찰로서는
차제에 부정축재자를 엄격히 다스리면
그뿐이야."
"옳아, 우린 검찰의 명예를 위해서라도
당면한 우리의 과업이야."
허정으로서는 뜻밖이 아닐 수 없었다.
검사들이 반발을 하고 나서리라고는
상상조차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는 심사숙고 끝에 검찰총장
이태희(李太熙)에게 전화를 걸었다.
이태희는 이화여자대학(梨花女子大學)
법정대학장을 역임한 변호사로서 5월 5일,
허정에 의해서 검찰총장에 발탁된
인물이었다.
"내 부정축재자 처리방안에 대해서 젊은
검사들이 강력히 반발하고 있다는데, 그들
중 몇 사람만 나한테로 좀 보내주시오.
어째서 그들이 반발하고 있는지 얘기나 좀
들어보게."
젊은 검사 세 사람이 곧 내각수반실로
말했다.
"지금 정치적 갈등으로 해서 경제가 말이
아니게 타격을 입고 있는데, 이제 또
부정축재자를 처벌하게 될 것 같으면 우리
경제가 어찌 될 것 같소? 경제가 마비되게
되면 민생문제가 큰 문제가 아니겠소?
그래서 우선 무엇보다도 민생문제를
생각해야겠기에 부정축재자 처벌 문제는
다음 정권의 숙제로 넘기려 하고 있는
게요. 그러니 그리 알고 여러분의 협조를
당부하겠소."
허정이 젊은 검사를 불렀던 속셈은
그들을 설득하면서 그들이 자신의 주장에
먹혀들리라 여기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젊은 검사들의 반발은 의외로
강경했다.
부정축재자를 처벌치 않는다는 것은 법
운용의 형평에 어긋납니다."
젊은 검사들은 이런 이유에서
부정축재자를 단호하게 처벌해야만 한다는
것이었다.
자고로 법률을 다루는 사람은 코 막고
답답할 때가 허다하다. 법률 조문하고만
씨름을 하고 있어서 그런지 융통성이 없고
인간의 폭이 좁고 메말라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사실에 있어서 법률을 다루는
사람이란 의당 그래야만 했다. 법률 조문에
인간성을 개입시킬 필요는 없는 것이다.
그럼으로써 법률을 양심에 어긋남이 없이
공정하게 다룰 수 있는 것이다.
허정도 그 점은 깊이 인식하고 있었다.
그러기에 그는 법의 형평을 고집하는
검사의 주장을 기어이 꺾으려 든다면 못
꺾을 것도 없었지만, 그것은 결과적으로
검찰을 무시하는 결과가 되겠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그는 이렇게 말했다.
"좋소. 여러분의 견해가 그런 이상
나로서는 내 주장을 고집할 생각은 추호도
없소. 그러면 이렇게 하도록 합시더.
과도정부로서는 부정축재자에 대한
자료조사만을 하도록 하고, 그 자료를
앞으로 세워질 새 정부에 넘겨서
부정축재자를 처벌토록 합시다."
검찰로서는 이론이 있을 리가 없었다.
어차치 부정축재자를 처벌하자면 조사부터
착수해야 할 것이고, 조사를 벌이다보면
과도정권은 수명이 다해 버리고 말 것은
부정축재자를 처벌한다는 원칙만 세워
놓으면 그것으로 족했다. 혁명과업을
수행할 책임을 졌던 과도정부가 그것을
마무리짓지 못하면 그 과업은 자연 새
정부가 승계하게 될 것이었으니까.
거듭 또 언급하게 되지만 과도정권이
아무리 시한부 정권이라 하더라도 얼마든지
국가권력을 행사할 수 있는 정권이었다.
그리고 허정은 그 과도정권의 수반이었다.
그러므로 과도정권의 정책에 대한 최종
결정권은 허정에게 있었다. 그것을 모를
서울 지방검찰청 검사들이 아니었다.
그러면 그것을 번연히 잘 알고
결정에 젊은 검사들이 반대하고 나섰던
이유는 무엇이었던가?
이유는 간단했다. 이승만 집권 12년
동안에 벌어졌던 부정부패의 규모가 너무나
엄청나게 큰 데에 경풍을 일으킬 정도로
놀랐기 때문이었다.
"이럴 수가? 이건 우리들의 상상을
초월했어! 부정, 부정 해도 이렇게
대규모적인 부정이 저질러졌으리라고는
감히 상상조차 못했던 일이야."
군사정권에서 제4공화국에 이르기까지의
대형적인 부정부패에 비교하면 새발의 피,
아직 유아기의 부정부패였지만 당시로서는
놀라 자빠질 정도의 엄청난 부정부패라
치부하지 않을 수 없다.
<이 땅에서 이 따위 부정부패는
이래서 반발을 하게 되었던 것이다.
자유당의 정치자금 관계를 주무르던
한희석(韓熙錫)이 체포된 것은 1960년 5월
7일이엇다. 정치자금 관계는 한희석만이
주무르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박용익(朴容益)도 한희석과 한가지로
정치자금을 주무르고 있었다. 검찰에서는
물론 박용익도 체포, 구속했다.
검찰에서는 처음 그 두 사람한테는 3.15
정.부통령 선거에 소요된 선거자금을
중점적으로 캤다. 이제는 세상이 바뀐
것이다. 조금이라도 숨겼다가 그것이
들통이 나는 날에는 어떤 형벌이 더해지게
될는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두 사람은 아예
모든 것을 체념해 버리고 모든 것을 순순히
자백했다.
얼마씩의 정치자금을 거두어 선거자금으로
썼다고 구체적으로 불어버렸다.
검찰에서는 두 사람의 자백을 토대로
해서 정치자금을 제공한 자에 대한 조사를
했다. 그 결과 두 사람의 자백은 허위가
아니었다는 것을 확인할 수가 있었다.
참고로 검찰이 조사한 1959년 8월부터
1960년 3월까지 8개월 동안에 걸쳐
자유당한테 2천만 환 이상 정치자금을
제공한 기업인과 경제단체의 목록은 다음과
같다.
대한양탄(이정임) 12억 3천만환
경남모방(조봉구) 4천만환
삼호종적(정재호) 6억 5천만환
동양방적(서정익) 2천 5백만환
동양맥주(박두명) 3천만환
한국강업(이광우) 5천만환
조선견직(이지태) 5천만환
태창방적(백남일) 5억환
대동공업(이용범) 7천 5백만환
대한방적(소향동) 3억환
유한양행(유일한) 5천만환
중앙산업(조성길) 2억 6천4백만환
대한중앙산업(이하영) 1억환
동양시멘트(이양구) 2억 3천6백만환
대한양비(박응철) 1억환
삼성물산(이병철) 3억환
동창실업(이동녕) 5천만환
한국나일론(이원천) 8천만환
삼풍제지(이태용) 3천만환
한국교과서(이병후) 5천만환
동신화학(현수덕) 4천만환
대한발효(이영천) 2천만환
대한중기(김운규) 6천만환
방직협회 5억환
기아산업(김길호) 5천만환
소모방협회 1억 9천만환
한국타이어(배동환) 5천만환
석유협회 1억 1천만환
한국유리(최태보) 1억환
생어조합 2천만환
극동해운(남궁련) 4천만환
경무협회 4천만환
전매청출입업자 2천 7백만환
곡물협회 4천만환
자유민주주의 국가치고 이놈의
나라가 없다. 정당을 운용하는 데 있어서도
막대한 자금이 필요하거나 국회의원,
정.부통령 선거를 치르자면 천문학적인
자금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정당이나 정치인은 기업가와 결탁해서
자금을 끌어들이고 있기 때문에 말썽이
일지 않을 수가 없다. 막대한 정치자금을
얻어 썼으니 어떤 방법으로든 그만한
보상을 해주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선진국의 경우 정당이고
정치인에게 헌금을 내는 기업인은 자기
주머니나 자기 회사 돈을 털어서 내놓는다.
여기에 비해 한국의 기업인들은 자기
주머니나 회사 돈을 털어서 내놓는 법은
절대로 없다. 그러면 어떤 방법으로
정치헌금을 하는가 하면 집권당의 힘을
일부를 떼어내어 정치헌금으로 내놓았던
것이다. 앞에 열거한 29개 업체의 모든
경영자들이 은행에서 현금 액수의 배 내지
10배의 융자를 받아 그 중에서 일부를
빼내어 정치헌금을 해왔다. 그런 식으로
정치헌금을 하고도 그들은 또 반대
급부로써 갖가지 혜택을 받기도 했었다.
이렇게까지 하면서도 돈을 벌지 못하는
기업인이 있다면 그는 바보가 아니면
천치일런지도 모른다.
은행에서 융자를 받아 그 돈에서 얼마를
떼어 정치자금으로 헌납하는 따위의 행위는
제4공화국에 이르기까지 지속되었다. 그건
나중 일이고, 정치자금 헌납문제를
캐다보니 소위 재벌이라는 것들이 어떻게
해서 돈을 모으게 되었느냐는 사실도
"정치권력과 결탁해서 부정한 방법으로
돈을 모았다는 것은 절대로 용납 못해.
절대로 용서 못하겠어! 다시는 이런 부정이
일어나지 않도록 본보기를 보여주는
뜻에서라도 재벌들의 부정축재는 만천하에
파헤쳐져야 해!"
이래서 허정의 부정축재 처리방안에
반박하고 나섰던 것인데, 그러나
검사들한테는 정책결정권이 없었다. 따라서
그들은 아무리 정의감에 불타 있었다
하더라도 그것을 구현하기는 어려웠다.
허정의 설득에 그 젊은 검사들은 불만이
태산 같았으나 어쩔 수가 없었다. 허정의
정책에 따를 수밖에 없는 일이었다.
허정이 부정축재자 처리에 단호히
대처하지를 못하고 애매모호한 태도로
역사에 치적으로 기록될 만한 것이
아무것도 없게 되고 말았다.
여기에서 한 가지 더 곁들여 밝혀 둘
것은 과도정권은 부정축재자에 대해서 6월
20일까지의 자수 기간을 설정했었는데, 6월
초하루부터 20일까지의 자수 기간 동안에
자수를 한 부정축재자는 불과 7명에
불과했다. 그 명단은 다음과 같다.
삼성재벌의 이병철은 5개 업체에서 21억
4천만환의 탈세를 했다고 자수했다.
삼로재별의 정재호는 4개 업체에서 5억
6천만환, 삼양재벌의 김상홍(金相鴻)은 1억
9천만환, 전주방직의 송영수(宋英洙)는 2억
9천만환, 태창방직의 백남일은 3억
1천만환, 럭키화학의 구인희는 3천만환,
대한양회의 이정림은 6백만환, 중앙산업의
부정축재를 했다고 자수했다.
웃기는 얘기였다. 점잖치 못한
표현이지만 삶은 소대가리라고 폭소를
터뜨릴 일이었다. 그들이 스스로 밝힌 세금
포탈액이 1년 분치라면 모를까 5년 동안에
걸쳐 고작 그 정도의 세금밖에 포탈하지
않았다고 했으니 그것을 누가 진실이라고
믿겠는가?
부정축재자들이 자수를 하면서 신고한
세금 포탈액에 대해서는 의심의 여지가
많았으나, 허정은 관계 기관에 지시해서
사실 여부를 밝히라고 하지 않았다.
깨끗한 일생을 살아왔다고 자부하는
허정이 도저히 돌이킬 수 없는 실책을
하필이면 이때에 저질렀는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민주당은 처음에는 과도정권의
부정축재자 처리문제에 그리 신경을 쓰지
않고 있었다.
"혁명과업 수행이야, 우양이 알아서 다
잘해 줄 것으로 믿어. 그러니 공연히
간섭해서 불필요한 잡음을 일으킬 필요는
없어."
그래서 과도정권의 정책에는 될수록
용훼하려 들지 않고 있었다. 여기에는 그럴
만한 이유도 있었다. 첫째는 민주당은
허정을 자기편 사람이라고 믿고 있었다.
그렇게 믿고 있는 것은 당연하다면
당연하다 할 수 있었다. 허정은 민주당의
전신(前身)의 또 전신인 한국민주당의 창당
때문이다. 그런 관계로 해서 허정은
한국민주당을 떠나 이승만의 고굉지신 역을
다하면서도 한국민주당 사람들과의
인간적인 유대 관계를 줄곧 끊지 않고
지속해 나오고 있었던 것이다. 둘째는
허정의 고지식할 정도의 정직성에 신뢰를
두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의 <행정가적
기질>은 반드시 혁명과업을 효과적으로
수행해 주리라고 믿고 있었던 것이다.
그렝는데 부정축재자 문제를 자수로써
해결하려 하자, <너무 미온적이 아니냐?>
해서 곽상훈이 허정에게 전화를 걸어 그의
속셈을 타진했었다.
"우양, 부정축재자 문제를 좀더 과감하게
척결할 수는 없겠소?"
"삼연, 나도 그러고 싶은 생각이 꿀떡
부정축재자를 과감하게 척결할 법이
없는데야 어쩌겠소? 그러니 부정축재자에
대한 처리문제는 당신네 민주당이 정권을
잡고 나거든 손을 대도록 해요."
부정축재자를 처벌할 법이 없다는데야
어쩔 수가 없었다.
(여론이 그 문제에 대해선 좀 침묵을
지켜 주면 좋겠는데.......)
그랬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나, 여론은
침묵을 지키지 않았다. 과도정권의
미온적인 태도를 지탄하던 여론은 마침내는
민주당까지도 도매금으로 묶어서 후려치기
시작했다.
"민주당 놈들, 부정축재자 놈들한테 돈을
먹었다더라!"
끝내는 이런 소문이 퍼졌다.
놈 믿을 놈이 없어!"
민중이 민주당에 대해서 실망을 느끼게
될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이러다간 민주당에 대한 불신은
고사하고 이것이 구실이 되어 대학생
데모가 격화되기라도 하는 날엔
큰일인데.......)
국회의장으로 새로 선출된 곽상훈은 태산
같은 걱정을 하고 있으면서도 거기에 대한
적절한 조치를 취할 생각은 하지 않았다.
그 무렵 곽상훈 못지 않게 과도정권의
부정축재자 처리에 불만을 품고 있는
민주당 소속 국회의원이 있었다. 그는
김동욱(金東郁)이었다. 그는 사안(私案)을
만들어 이 안의 찬동자를 구했다.
박해정(朴海禎)이 찬동해 주었다. 두 사람
사안에 찬성을 하고 나선 사람들은 모두가
구파뿐이었다.
김동욱은 10여 명의 찬동자를 얻자,
<부정축재자 처단법안>이라 붙여진 이
사안을 민주당 정책위원회 의장인
주요한(朱耀翰)한테 내놓았다.
"당을 살리려고 그럽니까, 죽일려고
그럽니까? 부정축재자에 대해서
과도정권에서 미온적인 태도를 취하자
여론이 뭐라고 아우성치는지 알고
있습니까? 민주당이 부정축재자들과
결탁했다고 지탄하고 있단 말입니다. 이
여론이 데모의 구실이 되었다가는 민주당은
정권도 잡기 전에 제2의 4.19를 맞게
됩니다. 우리 당 정책위원회에서 속히 이
법안을 심의해서 국회에 제출할 수 있도록
그는 이렇게 강력히 요구했다.
주요한은 김동욱이 사안으로 만든 법안을
검토해 보았다. 전문 8조 부칙으로 되어
있는 이 법안은 권력자가 불법수단으로
공공재산을 취득한 것을 다스리는 것이
골자로 되어 있었다.
이 법안을 검토하고 나서, 주요한은
가만히 생각해 보았다.
(자유당 국회의 마지막 국회에서 이
법안을 통과시키기는 어려울 것이고,
민주당이 부정축재자에 대해서 단호히
대처하려 하고 있다는 인상을 줄 수
있겠는걸.)
이것이 6월 7일의 일이다.
주요한이 어째서 이 법안에 대해서
신중한 태도를 취하게 되었느냐 하면 이미
마감해 놓고 심사에 들어가 있던 처지였다.
이때는 아직 선거 날짜를 결정해 놓고 있던
것은 아니었지만 허정이 정권이양을
8.15까지는 한다는 정치 일정을 짜놓고
있었기 때문에 조만간 총선거를 실시하게
될 것은 틀림없는 일이다.
그런데 만일 이 법안을 국회에 상정해서
통과시킨다 할 것 같으면 민주당으로서는
스스로 정치자금의 파이프 구멍을
막아버리는 결과가 되는 것이다.
부정축재자를 처벌하라 어쩌라 해도 역시
막대한 선거자금이 필요한 총선거를
치르자면 재벌이나 기업인들한테 기댈
수밖에 없는 일이다.
그렇다고 부정축재자 처리문제에서
외면을 하자니 국민 여론이 그것을 용서할
진정시키는 방편으로 김동욱이 만든 법안을
국회에 제출은 하되, <자유당 국회>에서
자동폐기케 하는 방법을 취하고자 했는데,
이는 정치자금의 돈줄인 재벌이나 기업가의
감정을 자극하는 일이 없도록 하자
해서였다.
<부정축재자 처단법안>은 6월 7일 오후에
국회에 제출되었다. 물론 이 법안은 결과에
있어서는 주요한이 생각하고 있던 대로
처리되었다. 그래서 정치란 요지경 속이라
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5. 민주당의 집안싸움
자부월족(自斧월足)
이게 무슨 뜻인가 하면 제 도끼에 발등
찍힌다는 뜻이다.
<사람이 오죽 미련하면 제 도끼로 제
발등을 찍어>라고 할는지 모른다.
그런데 참으로 묘한 일이었다. 미련한
놈이 제 도끼로 제 발등을 찍는 경우는
극히 드물었다. 오히려 약삭빠른 놈,
자신만만해서 오만에 가득 차 있는 놈이 제
도끼로 제 발등을 찍기가 일쑤였다.
왜 서두에서 이런 말을 하는가? 바로
민주당이 그 꼴이었기 때문이다.
정권은 군사 쿠데타로 탈권을 당할 수밖에
없는 운명 속으로 스스로를 이끌어 갔다는
것을 느낄 수가 있다. 물론 민주당
인사들은 역사의 진행 과정에 있어서는
그것을 의식하지 못하고 있었을 것이다.
의식하고 있었더라면 그들은 제 도끼로
스스로 제 발등을 찍고 스스로 묘혈을 파는
우매한 짓은 하지 않았을 것이다.
민주당은 어째서 제 도끼로 제 발등을
찍고 스스로 묘혈을 파는 결과를 빚어 내게
되었던가. 그것은 오만 때문이었다.
<차기 정권은 내 것이다> 하는 오만이
민주당 인사들 가슴속에 꽉 차 있었던
것이다.
속된 인간이 오만에 차게 되면
안하무인이 되기 마련이다. 문제는 이놈의
괜스레 우쭐대는 것쯤이야 그냥 보아 넘길
수도 있었다. 그러나 그 안하무인이
행동으로 나타날 때는 이것은 그냥 보아
넘기기는 어려운 일이다.
한두 가지의 예를 들어보자.
민주당 소속 국회의원들 가운데에는 어느
사이엔가 정상배와 손을 잡고 이권에
개입하는 자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앞으로 총선거를 치러야 할 판이니 돈도
필요했을 것이다. 그런데 그놈의
정상배라는 것이 어제까지 자유당
권력자들의 꽁무니를 따라다니던
작자들이었다. 손바닥만한 나라였으니까.
한데, 이 정상배들이란 작자들의 노는
꼴이 가관이었다. 그들은 민주당 소속
국회의원의 명함이나 소개장을 얻어들고
것이었다.
"자유당 치하 때 당신들의 관료주의
때문에 내가 얼마나 애를 먹었는지 아시오?
내가 제출한 서류를 당장 결재하지 않으면
당신의 모가지는 없다는 것을 아시오!"
이런 협박을 눈썹 한번 찡긋하지 않고
해댔다.
이권에 개입한 것은 비단 중앙의
국회의원들뿐만이 아니었다. 지방에서는 별
볼일 없는 친구가 민주당 당원이라는 것을
크게 걸고 이권에 끼어들려 하기도 했다.
또 한 가지의 실례로는 과도정권이
출발해서 한창 됐을 때의 얘기다. 민주당
소속 국회의원인 김선태(金善太)가 현직
경찰간부인 모 경감의 뺨을 때렸다. 그
경위는 이러했다. 6월 19일에 한국의
20일 오후에 국회로 연설하러 가던 도중,
대통령 전용차를 뒤따르고 있던 김선태의
지프차를 모 경감이 가로막고 정차를
시켰다. 길을 가로막고 정차를 시킨 것이
바로 그 경감이었다.
"왜 길을 가로막는 거야?"
김선태는 차 안에서 소리쳤다.
"경비 관계상 국빈의 차를 일체 뒤따르지
못하게 되어 있습니다."
"뭐가 어째?"
화가 머리 꼭대기까지 치솟은 김선태는
차에서 내리기가 무섭게,
"이놈아, 난 국회의원 김선태야.
국회의원도 몰라 봐?" 하면서 다짜고짜로
그 경감의 따귀를 올려 붙였다.
"죄송합니다, 몰라 뵈어서."
차에 오르자 쏜살같이 달려갔다.
따귀를 때린 국회의원과 따귀를 맞은
경찰관. 이 정도의 사건이야 신문의
1단짜리 기사감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므로
그냥 덮어 버리면 그만이었다. 따귀를 때린
국회의원은 이제 목에 힘을 줄 수 있는
민주당 소속 국회의원이었고 따귀를 맞은
경감은 출세하지 못한 것을 한탄하면서
한숨 한번 쉬고 나면 그것으로 끝나버릴 수
있는 일이었다. 그러나 사건은 그렇게
끝나지를 않았다. 따귀를 맞는 것을
현장에서 지켜보고 있던 그의 부하들이
가만히 있지를 않았다.
"민주당 소속 국회의원이면 다야? 제깐
놈이 뭔데 제복을 입은 경찰관의 따귀를
함부로 때려?"
경찰간부의 따귀를 때린다는 것은 경찰에
대한 중대한 모욕 행위야! 우린 결코 이
사건을 그냥 보아 넘길 수 없어!"
"옳소! 경찰이 동네 북이요?
부정선거문제로 두들겨 맞고, 권력을 쥐게
된 정당의 국회의원한테 두들겨 맞고,
지렁이도 밟히면 꿈틀한다고 했어요!
따귀를 맞고 가만 있을 수가 없어요.
따귀를 때린 자를 규탄해서 사과를 받도록
합시다."
마침내 600여 명이나 되는 제복의
경찰관들이 김선태의 행위를 규탄하는
데모를 벌였다.
<김선태 의원은 우리 앞에 나와 공개
사과를 하라!>
<국회는 폭력 국회의원을 추방하라!>
외치면서 국회의사당을 향해 세종로 거리로
나섰다.
제복을 입은 경찰관의 데모. 이런 일이
세계 경찰 사상 어느 나라에서 있었단
말인가? 이것은 세계적인 토픽감이
되기에도 충분했다. 그러니 국가의
위신이나 체면은 무엇이 되겠는가?
그런데 과도정권의 그 누구도 나서서 이
데모를 막으려 하는 사람은 없었다. 그저
팔짱을 끼고 구경만 하고 있을 뿐이었다.
한심한 정부라고 하지 않을 수 없었다.
경찰관들의 데모를 보다 못해 이것을
만류시키고자 뛰쳐나간 사람들은
대학생들이었다.
"여러분들이 분노를 터뜨리는 것도
무리는 아닙니다. 여러분의 분노는
데모를 벌이다니 말이 됩니가? 나라의
체면도 생각해야 할 게 아니겠습니까?"
"김선태 위원을 폭력 국회의원으로
우리가 검찰에 고발을 하겠습니다. 그러니
데모만은 중지해 주십시오."
대학생들은 이런 말로 데모를
저지시키려고 애를 썼다. 4.19 때와
정반대의 현상이 벌어졌던 것이다. 그러나
한번 불이 붙은 경찰관들은 막무가내였다.
더구나 그들 데모에 나선 경찰관들은
태반이 성격이 괄괄한 경상도
사나이들이었다. 그들은 아이젠하워의
방한에 즈음해서 경비관계로 차출되어
있었던 것이다.
경찰관들은 대학생들의 만류를 뿌리쳤다.
기어이 태평로 국회 앞에 이르러서야
<김선태 의원은 나와서 사과하라!>
<국회는 폭력의원을 추방하라!>
경찰관의 데모는 군대에도 영향을 미칠
우려가 없지 않았다. 다급해진 내무부
장관은 서울 시경국장에게 전화를 걸었다.
"시경국장이 나가서 달래 보시오! 만약,
명령에 복종하지 않으면 전원 파면
조치하고 의법 처단하겠소!"
장관의 명령을 받은 시경국장은 즉시
데모 현장으로 출동을 했다.
"경찰관이 데모를 벌이다니 말이나
되는가! 즉시 해산토록 하라!"
서울 시경국장은 한껏 시경국장의 위엄을
부려 보았으나 데모 경찰관들은 어디 개가
짖느냐는 태도였다.
시경국장은 김선태에게 뺨을 맞은
"뺨 한 대 때문에 이런 소동을 벌이도록
하다니 이게 말이 되는가? 서 경감이
책임을 지고 해산을 시키도록 해!" 하고
명령했다.
그러나 서대조는 국장의 명령에
불응했다.
"국장님, 제 동료들이 데모를 벌일 때는
이미 파면 처분을 각오하고 데모를 벌이고
있는 것입니다."
이제는 시경국장이 나서서 데모를
만류시킬 수밖에 없었다.
"뺨을 때린 김선태한테는 내무부 장관을
통해서 정식 항의를 하고 사과를
받아내도록 하겠다. 그러니 이 정도면
여러분의 의사는 충분히 관철됐다고 볼 수
있지 않겠는가? 국가의 체면을
달라!"
서울 시경국장이 명령이 아니라 애원을
해서야 겨우 정복의 경찰관들은 데모를
중지했던 것이다.
데모 만능의 풍조도 문제였다고 할 수
있었지만, 그보다도 더 문제였던 것은
민주당의 오만이었다. 그 오만은 결국 군사
쿠데타까지 이어지게 되지만, 하여간에
민주당은 애써 겸손해야만 했었다.
그런데 <차기 정권은 내 것이다>라니?
이승만 정권은 학생들의 의거로 무너졌던
것이다. 학생들이 학생 신분이 아니라
정치집단의 신분이었다면 다음 정권은 으레
그들의 차지였을 것이었다. 그것을
민주당이 어부지리로 얻게 되었던 것인데
겸손할 줄 모르고 오만하게 굴었으니 말이
어떻게 보면 민주당의 오만은 그리 큰
문제가 아니었는지도 모른다. 12년간을
두고 줄곧 갖은 수모와 탄압을 받아왔으니
그쯤 우쭐해지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이해할 수도 있었다.
지식인들을 우려케 한 것은 민주당의
신.구파의 싸움이었다.
"정권이 굴러들어오게 돼 있으니
무사하지는 않을걸."
이것이 민주당을 바라보는 식자들의
시각이었다.
어떻게 해서 식자들이 민주당을 그런
눈으로 바라보게 되었는가 하면 민주당이
보고,
"민주당의 신파와 구파는 물과 기름이야.
도저히 하나의 정당으로서 발전해 나가기는
어려워"라고 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민주주의 국가의 정당의 내분은 으레
있기 마련이다. 그런 차원에서 민주당의
내분을 바라본다면, 이 또한 그리 걱정할
것이 못 되었을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민주당의 파벌 싸움의 내용은
다른 민주주의 국가의 파벌 싸움과는 사뭇
내용을 달리하고 있었다. 그들은 오로지
<감투>만 놓고 싸웠다. 감투문제만
제기되면 서로 자파에서 그것을 차지하고자
으르렁거렸다. 그런 그들이었으니 정권이
굴러들어오게 된 판국인데 정치 집단이
최고 목표로 하고 있는 <정권>을 앞에 놓고
리가 있겠느냐, 이렇게 보고 있었던
것이다.
이쯤해서 우리는 민주당이라는 한
정치집단의 집안 사정이 어떤 것이었는지
좀 살펴보고 넘어가는 것이 좋을 것 같다.
1954년에 자유당이 소위 <4사5입
개헌파동>을 통해서 이승만의 3선의 길을
터놓자, 야당인 민주국민당이나 재야의
정치 세력은 이승만 정권을 타도하기
위해서는 모든 힘의 결집뿐이라는 것을
자각하게 되었다.
이것을 위해 발 벗고 나선 것이
민주국민당이다.
"이제는 정권을 경쟁한다는 차원을
넘어서 대 독재투쟁을 해야 할 때입니다.
이승만 독재정권을 타도하기 위해서라면
합시다."
이승만 정권을 가리켜 <독재정권> 운운한
것도 이때부터였다.
이승만의 장기집권의 획책에 진절머리를
느끼고 있던 재야 세력들이 흔쾌히 호응해
왔다. 독립투사 안창호(安昌浩)가 세운
흥사단(興士團) 인사를 비롯해서 피난지의
임시 수도 부산 시절의
원내자유당(院內自由黨)에 소속해 있던
인사, 학생운동 출신 그룹 등이
민주국민당의 주장에 호응, 여기에
모여들었다. 정일형(鄭一亨), 주요한 등이
흥사단의 대표적인 인물이었고
오위영(吳緯泳), 김영선(金永善),
김재순(金在淳), 함종빈 등은 학생운동
그룹의 대표적인 인물들이다. 그 밖에
조재천, 엄상섭 등은 재야 법조계를
대표한다고 할 수 있었다.
민주국민당은 이들 재야 세력과 하나가
되기 위하여 당을 발전적으로 해체하고
민주당(民主黨)을 창당했다. 이 과정에
있어서 창당이 위험에 부딪치는 고비가
없지도 않았다.
<지팡이 짚고라도 신당에 참여하겠다>고
선언한 조봉암(曺奉岩) 영입문제를
둘러싸고 심각한 의견대립이 빚어졌기
때문이었다.
조봉암은 이른바 혁신계(革新系)를
대표하는 인물이었다. 재야 세력의
대동단결(大同團結)이라는 대원칙하에
민주국민당 당수 신익희(申翼熙)는
조봉암을 받아들여야 한다고 주장한 반면에
영입을 완강히 반대하고 나섰기
때문이었다. 이 때문에 조봉암은 나중에
진보당(進步黨)을 창당했다가 이승만
정권에 의해 간첩이라는 누명을 쓰고
정치적 타살을 당하는 비운을 겪었다.
이승만 정권 타도라는 꼭 같은 목적 아래
결합된 민주국민당과 재야 세력은 민주당의
기치 밑에 하나로 뭉쳐질 수 있었으나
시간이 흐름에 따라 이승만에 대한 격앙된
감정이 사그라들고 정치적인 이해관계가
제기되게 되자, 어느 사이엔가 민주당은
신.구파라는 두 개의 파벌로 세포분열을
일으켰다. 구파는 종래의 민주국민당
출신자들이고, 신파는 신참 세력들이
장면을 리더로 해서 똘똘 뭉쳤던 것이다.
거듭 언급하게 되지만 민주주의 국가의
마련이었다. 그런데도 지식인들이 민주당의
신.구파의 세포분열을 우려하게 되었던
것은 어떤 까닭이었을까? 그것은 파벌이
당의 이익을 우선시키기보다는 자파의
이익을 우선시키는 정치행위를 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다 보니 민주당의
신.구파는 어느덧 감정적인 대립으로
발전하게 되었고 대립 때마다 축적돼 나온
감정은 어느 시점에 가서는 폭발해 버리게
되지 않을까 해서였다.
그러한 우려는 4.19 의거로 해서
이승만이 쓰러질 듯 휘청거리기 시작하자
벌써 그 징후을 보여주기 시작했다.
1960년 3월 24일이라고 하면 이승만이
하야를 결심하기 이틀 전이다. 이날까지도
이승만은 하야를 할 생각을 하기는커녕
대통령으로서의 직책에만 충실하겠다>고
담화를 발표할 정도였다.
이런 내용의 담화가 있자, 자유당
온건파의 리더인 국회 부의장 이재학이
민주당에 대해서 <대통령 중심제를
내각책임제로 고치는 것으로 시국수습을
하도록 하자>고 제의했다.
이재학의 생각으로는 이승만이 독립을
위해서 평생을 바친 데다가 건국을 한
대통령이니만큼 대접상 대통령직에 머물러
있게 하되 대신 정치제도를 내각책임제로
바꾸게 되면 더 이상 불만을 확대함이 없이
시국을 수습할 수 있지 않느냐 해서였다.
이재학의 제의를 받은 민주당에서는 그
즉시 순화동에 있는 부통령 관저에서
간부회의를 열었다. 이 회의에는
간부들이 참석했다.
"앞을 가늠하기 어려운 지금의 정국을
효과적으로 수습하는 길은 내각책임제로의
개헌뿐이라고 생각합니다. 더구나 종래의
우리 당의 정책이 내각책임제였던 만큼
시급히 당론을 모아서 시국을 수습하도록
하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원내총무인 유진산(柳珍山)이 모임의
뜻을 밝혔다.
아직 이승만이 물러설 결심을 굳히기
전이었으므로 시국수습책으로서는 그것이
최선책이었는지도 모른다. 이승만을
상징적인 대통령직에 머물러 있게 하는
정치제도를 내각책임제로 바꿨다고 하면
학생들이 진정해 줄 것이다. 구파는 그렇게
보고 있었던 것이다.
정면으로 그 수습안을 반대하고 나섰다.
"그것은 시국수습책이 될 수 없습니다."
유진산이 물었다.
"어째서 시국수습책이 될 수 없단
말이오?"
"학생데모가 어째서 일어났습니까?
부정선거가 원인이 되어 일어난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렇다면 정.부통령 선거를
치뤄야 학생들이 납득을 하지 내각책임제로
개헌을 한다고 해서 납득할 것이라고 볼
수도 없는 일 아니겠습니까?"
하긴 조재천의 주장에도 일리가 없는
것은 아니었다. 학생들이 데모를 일으키게
되었던 것은 부정선거가 원인이었다.
그렇다면 그 원인 제거부터 해야 할
일이었다.
받았다.
"이치로 따지자면 그렇소. 하나
부정선거의 원인을 또 따지면 정치제도의
잘못에 보다 큰 원인이 있는 것이
아니겠소. 그러니 차제에 그 큰 원인을
제거해서 다시는 오늘날과 같은 불행이
일어나지 않도록 조치를 취해 두자 그
말씀이오!"
"그것은 정.부통령 선거를 먼저 치르고
나서 생각해 볼 문제입니다. 당장 발등에
떨어진 불을 끄지 않고 언젠가 일어날지
모를 화재예방을 해 두자니 말도 안 되는
소립니다."
유진산이 직선적으로 물었다.
"조 의원이 한사코 정.부통령 선거부터
치뤄야 한다고 주장하는 속셈이 뭐요? 우리
아니었소? 자유당에서도 시국수습책으로
내각책임제 개헌에 찬성할 뜻을 비쳤기에
이참에 내각책임제로 개헌을 해서 시국을
수습하고자 하는데, 나는 조 의원이 한사코
반대하는 그 속셈이 무엇인지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소."
"나는 아무런 속셈도 없습니다. 문제를
순리로 풀어나가자는 것뿐입니다. 만일
우리가 지금의 이 기회를 이용해서
내각책임제 개헌을 단행한다면 그건
학생들의 의거를 이용해서 정치목적을
달성했다는 욕밖에 먹을 것이 더 있겠소?"
"무슨 그런 말씀을!"
유진산의 얼굴 표정에느 노여움이 알알이
배어 있었다.
"조 의원은 그런 말로 신파의 속셈을
뭔지 훤히 꿰뚫어 보고 있어요. 신파에서
뭐라 하든 우린 고귀한 학생의 피에
보답하기 위해서 국회의원직 총사퇴를
전제로 한 순수 내각책임제 개헌을
추진하도록 하겠소. 지금 재선거를 한다는
것은 극도의 혼란만 초래할 뿐이에요.
그리고 지금과 같은 대통령 중심제를 그냥
유지해 나가면 어떤 사람을 대통령으로
뽑든 올바른 민주 정치가 시행될 것이라고
보장할 길이 없어요."
구파는 유진산의 이 말을 마지막으로
모두 퇴장해 버리고 말았다. 팽팽히 맞선
신.구파의 주장은 평행선만 달리고 있을 뿐
어느 쪽도 양보하려 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신파의 모사인 조재천이 구파에서 제기한
시국수습책을 반대했던 이유는
무엇이었던가?
조재천은 학생데모의 원인이 부정선거에
있었던 만큼 원인 제거라는 명분 밑에
정.부통령 성거를 다시 실시해서 장면을
대통령에 당선시키자는 속셈이었다. 당시의
정세로 보아서는 장면을 대통령에
입후보시키면 당선은 따놓은 당상
격이었다.
만일, 민주당 대통령 후보였던 조병옥이
타계하지 않고 살아 있었다면 조재천은
구파에서 제기한 내각책임제로
개헌함으로써 시국을 수습하자는 구파의
주장에 동조했을 것이다. 그러나 조병옥이
내세울 인물은 장면 하나밖에 없다고
단언해도 좋을 형편이었다. 물론 정.부통령
후보를 다시 지명할 때 구파에서 대통령
후보로 밀 만한 인물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김도연이 있었고 윤보선도
있었다. 인물로 따지면 모두 대통령
후보감으로 손색이 없었다. 그렇기는
했으나 지명전을 벌여도 장면이 당당히
구파를 누르고 대통령 후보로 지명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이 조재천의 계산이었다.
조재천은 어째서 이런 계산을 하고
있었던 것인가? 그것은 민주당의
정치제도에 대해서 내각책임제를 정책으로
내걸고 있기는 했지만 조재천 개인적으로는
내각책임제보다는 대통령책임제에 큰
매력을 느끼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것은
생각을 품고 있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하여간에 부통령 공관에서의 회의가
신.구파 간에 팽팽한 평행선만을 긋다가
구파가 분연히 자리를 차고 퇴장해 버리자,
그 자리에는 신파 인사들만이 남게 되었다.
그렇게 되면 자연 신파만으로 회의를
연장하는 꼴이 되었다.
바로 어제 부통령직을 사임한 장면이
사뭇 걱정스러운 듯 조재천에게 물었다.
"조 의원, 구파는 내각책임제로
개헌함으로써 시국을 수습하자는 안을
끝까지 고집한 눈치 같은데 이렇게 양 파가
자파의 주장만 고집하다간 어느 세월에
시국을 수습할 수 있겠소?"
"시국수습은 이 박사가 권좌에서 물러나
주기만 하면 그것으로 깨끗이 이루어질
"하지만 이 박사가 어디 물러날
사람이오? 학생들이 그토록 많은 피를
흘렸지만 고작 한다는 소리가 자유당
총재를 그만두겠다고 하는 정도가 아니오?"
"그러니까 어떻게 해서든 이 박사가
물러나지 않고는 못 배기도록 정치 공세를
취해야겠지요."
조재천의 옆에 앉아 있던 주요한이
끼어들었다.
"구파에서는 자유당 온건파하고 야합을
해서 내각책임제 개헌으로 시국을
수습하자고 하지만, 이 박사가
상징적이든지 뭐든 대통령 자리에 앉아
있는 한 학생들이 절대로 승복하려 들지
않을 겁니다."
주요한의 견해에 동조하고 나선 것은
"옳습니다."
그는 천장을 한번 쳐다보았다가 이렇게
덧붙였다.
"지금의 사태를 수습하는 시국수습책이란
이 박사를 권좌에서 물러나게 하고
정.부통령 선거를 다시 하는 것뿐입니다.
그것이 최선의 길입니다."
장면은 도무지 미덥지도 않고 마음도
놓이지 않는 눈치였다.
"그렇기는 하나 우리 당의 정책이
내각책임제가 아니겠소? 그러고 보면
구파에서 들고 나온 시국수습책을 무조건
배척할 것도 아니라고 생각되오만."
"박사님."
조재천은 이렇게 불러놓고 마치 구파
사람들한테 쏘아붙이듯 격한 어조로
"구파 사람들이 조 박사가 살아 계신다고
하더라도 내각책임제 개헌 시국수습책을
들고 나왔으리라고 보십니까? 전 그렇게 안
봅니다. 그 사람들 조 박사를 잃었으니까,
그런 수습책을 들고 나온 것입니다."
"그럼 내각책임제로 정국을 수습한다고
할 때, 앞으로 정국은 어찌 될 것 같소?"
"그야 뻔하지 않습니까? 내각책임제로
개헌을 하고 나면 구파 사람들, 자유당
온건파하고 제휴해서 저희들이 정권을
잡으려 들겠지요."
"잘 보셨소."
이상철(李相喆)이 조재천의 견해를
뒷받침했다.
"그 사람들 조 박사가 살아 계셨더라면
우리하고 똑같은 주장을 하고 나섰을
이 박사 하야, 정.부통령 재선거를 기본
전략으로 밀고 나가도록 해요."
어쩌면 그랬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우선
구파가 자유당 온건파하고 손을 잡았다는
것부터가 목적을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정치 행위라 할 수 있었다.
자유당은 이승만의 당이다. 그 이승만의
자유당이 부정선거를 저질렀기 때문에 4.19
사태와 같은 유혈극이 벌어지게 된 것이다.
그렇다면 자유당도 타도해 버려야만 했다.
그런 판국에 구파가 자유당 온건파하고
손을 잡다니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구파는 어째서 자유당 온건파와 손을
잡았던가?
그것은 <장면의 집권을 막자!> 해서였다.
지금 정국은 신파한테 유리하게 전개되어
나가다가는 장면의 집권은 틀림없이
현실화될 것 같았다. 그러므로 무엇보다도
시급하게 장면한테 유리하게 전개되어
나가는 시국에 쐐기를 박아 놓을 필요가
있었다. 그래서 내각책임제도의 개헌을
들고 나왔던 것이다. 거기에는 물론 자유당
온건파하고 제휴할 수 있었다는 것도 큰
힘이 되어 주었다. 자유당 온건파는 앞으로
정국이 어떤 방향으로 치닫게 되든 민주당
구파와 제휴함으로써 살 길이 열린다고
판단했던 것이다. 그래서
자구책(自救策)으로써 내각책임제 개헌을
촉구, 시국을 수습해 보고자 구파에게
제의하게 됐던 것이다.
순화동 부통령 공관에서 물러나온 구파
인사들은 무교동 당사로 돌아오자, 즉시
표정들이었다. 회의는 유진산의 주재로
진행되었다.
"신파는 정국이 자파한테 유리하게
전개돼 나가고 있다 보고 벌써 오리발을
내밀려 하고 있소. 만일 신파의 주장대로
정.부통령 선거를 먼저 치른다 합시다.
그래 가지고 장 박사가 대통령이 된다고
합시다. 그때 정권을 잡고 난 신파가
내각책임제 개헌에 동의할 성싶습니까?
그들은 절대로 내각책임제 개헌에 동의하지
않을 것이오. 그리고 또 장 박사가 정권을
잡고 나서 총선거를 치르게 될 경우, 과연
우리 구파에서 몇 명이나 국회의원에
당선될 수 있을 것 같소? 나는 극히
비관적이 아니 될 수 없소이다."
유진산의 말투는 자못 비장했다. 그의
"그러니까 우린 어떤 일이 있어도 지금
이 기회를 이용해서 내각책임제 개헌을
단행해야 된다 그 말씀이에요. 대통령
후보를 잃은 우리 구파가 살 길은
그것뿐입니다."
이날의 전략회의에서는 내각책임제
개헌을 하고 난 연후에 총사퇴를 해서
총선거를 실시한다는 데에 의견일치를
보았다.
이렇듯 민주당 신.구파는 벌써 3월
24일에 저마다 꿍꿍이 속을 안고 정국에
대처해 나가기 시작했던 것이다.
<이승만 정권 타도>라는 똑같은 목표
아래서 동지로 뭉쳤던 이들은 정권이 바로
눈앞에 다가서자 <네가 잡느냐, 내가
잡느냐?> 해서 으르렁대기 시작했던
상황이 이렇게 벌어졌으니 이제 그들은
동지가 아니었다. 마치 칼 끝에 피묻은
원수처럼 그들의 사이는 이날을 기점으로
해서 점점 벌어져 가기 시작했던 것이다.
분란이 그치지 않는 집안을 <콩가루
집안>이라 한다. 서로 자파의 이익을
전제로 해서 정략을 세우다보니 신.구파
사이에는 분란이 그칠 날이 없었다.
이 분란은 신파가 구파의 정략에
일패도지하게 되자 더욱 심화되어 나갔다.
정.부통령 선거부터 다시 실시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신파의 속셈이 어디에
있는지를 꿰뚫어 본 구파는 자유당
대통령은 즉시 하야할 것, 선개헌(先改憲)
총선거를 통해서 시국을 수습하도록
한다>는 결의안을 통과시켜 버렸던 것이다.
신파는 구파의 날쌘 행동에 책상을
치면서 통분해 했으나 어쩔 도리가 없었다.
신파로서는 도무지 손 쓸 겨를도 없었고
손을 쓴대야 자유당 온건파한테 먹혀
들어갈 리도 없자 멍청하게 앉아 있다가
당하고 말았던 것이다.
내각책임제를 반대하는 원외(院外)의
소리가 없었던 것도 아니었다. 변영태,
고정훈(高貞勳) 등은 내각책임제
반대여론을 일으켜 보고자 무진 애를
썼으나 여기에 호응해 오는 여론은 없었다.
특히 고정훈은 이 일로 해서 신파는
고정훈한테 2천만 환이나 되는 자금을 주어
했다는 모함을 받게 되었다.
고정훈이 신파한테서 2천만환의 자금을
먹었는지의 여부는 가려낼 길이 없다. 이
문제는 고정훈 본인이 입을 열어야만
진상은 밝혀질 수가 있다. 돈을 먹었다면
모함이랄 수는 없고 먹지 않았다면 모함이
된다. 하여간에 그건 나중에 있었던
일이다.
구파한테 보기 좋게 한 대 얻어맞은
신파는 원의(院義)를 받아들이려 하기 전에
최후의 안간힘을 써서 정치 공세를 취했다.
선개헌 후총선의 결의안이 통과된 다음날인
4월 27일, 조재천은,
"어제 국회가 개헌 후, 해산을
결의했지만 많은 의원들이 동조한다면
26일의 결의는 재론할 수도 있다. 현
3.15 선거에서 투표권을 완전히 박탈당한
국민이 그 투표권을 회복하기 위해서
총궐기를 한 것이기 때문에 이번 정.부통령
선거에 한해서는 국민의 직접선거로 하는
것이 영예로운 혁명의 의의를 살리는
길이다" 하고 여론에 호소하려 들었다.
주요한도 한마디 했다.
"4.19 사태는 혁명이다. 그러므로 현행
헌법은 기능이 정지돼야 하고 국회도
해산해야 한다. 학도, 교수단, 서울
변호사협회, 편집인협회, 공명선거
추진위원회 대표, 비자유당계 대표 등으로
<비상 입법의회>를 구성, 정.부통령 선거를
실시하고 새 헌법을 제정해야 한다."
그런데 이들의 주장에는 전혀 메아리가
없었다. 메아리가 있어야 그나마 어떤
당선시켜 정권을 잡아 보겠는데, 어느 한쪽
구석에서도 메아리가 없으니 미치고 환장할
노릇이었다.
그 사이에 들어선 허정의 과도정권에서는
8.15까지는 정권을 이양토록 한다는 정치
일정을 짜놓고 그대로 밀고 나가고
있었으니 싫으나 좋으나 거기에 따라갈
수밖에 없었다.
내각책임제 개헌안이 국회를 통과한 것은
1960년 6월 15일이다. 그리고
과도정권에서는 내각책임제 개헌안이
국회를 통과하자, 7월 29일에 총선거를
실시하기로 정치 일정을 잡아 놓았다.
과도정권의 이런 정치 일정에 맞추자면
당으로서도 서둘러야 할 일이 많았다. 우선
가장 시급한 것이 총선거에 입후보할
공세를 펴고 있던 신파는 장면이 <국회의
결의를 존중해서 내각책임제 개헌,
총선거의 정치 일정을 지지한다>라고
담화를 발표하자 어쩔 수 없이 또 구파와
이마를 맞대고 당면한 문제를 협의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들은 정치적인
동지였으니까.
그러나 눈 앞에까지 굴러 들어왔던
정권을 잡으려는 순간 놓친 꼴이 된 신파는
구파에 대한 원한이 골수에 사무쳐 있었다.
이 원한을 푸는 방법으로써 구사되었는지는
모르지만 한창 공천 작업을 진행시키고
있을 때, 당내에 이런 말이 퍼지기
시작했다.
"강영훈(姜永薰) 의원이 이기붕의
비서한테서 백만환을 받아 먹었다면서?"
송인상(宋仁相)이란 놈한테 백만환이나
되는 돈을 받아 먹었다던데 뭘!"
"송인상이란 놈 조영규 의원한테만
백만환을 준 게 아니래, 조한백(趙漢柏),
유홍(柳鴻)한테도 30만환씩 따로 주었다는
거야!"
이런 말이 누구의 입에서 먼저
발설되었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분명한
것은 돈을 받아 먹었다는 의원들이 모두
구파이고 보면 신파의 어느 누군가의
입에서 발설된 것만은 틀림없는 일이었다.
심지어 조병옥이 수술차 미국으로 떠날 때
자유당이 비용에 보태 쓰라고 준 5백만환도
말썽의 씨앗이 되었다.
"구파하고 자유당하고 어떤 묵계가
있었던 게 틀림없어. 그렇지 않고야
정적한테 내놓을 리가 있어?"
듣고 보면 그럴싸했다. 이승만한테
대적하려는 정적은 무슨 수를 써서라도
제거하려 했던 것이 자유당의 기본
태도였다. 그런 놈들이 민주당 대통령
후보로서 이승만에게 맞서려는 조병옥한테
5백만환씩이나 되는 자금을 비용으로
주었다는 것은 상식적으로 납득하기
어려웠다.
<어떤 정치적 묵계가 있는 것은
틀림없어> 하고 신파가 의심의 눈초리를
던질 만한 일이었다.
5백만환은 당시의 금액으로는 큰
돈이었다. 쌀 한 가마에 1만 7천2백환을
했으니까, 오백만환이라면 얼마만큼 큰
돈인지 짐작할 수 있을 줄로 안다.
타계해서 이 세상에는 없지 않은가. 이미
고인이 된 사람의 생존시에 있었던 일을
가지고 따지자면 코너에 몰리게 될 것은
구파가 아니라 신파였다.
<이 친일파놈들! 너희놈들 일제 침략자의
앞잡이가 되서 벼슬을 산 놈들 아냐? 우린
적어도 항일운동을 벌여온 애국자들이야!
똥 묻은 개가 겨 묻은 개 나무란다더니,
뭣이 어쩌고 어째?> 하고 반격에
나서기라도 할 것 같으면 신파 사람들은
궁지에 몰리게 될 것은 보나마나한
일이었다.
어떤 묵계가 있었는지 확실한 증거도
없이 이미 고인이 된 사람의 생존시에
있었던 일을 가지고 왈가왈부한다는 것은
점잖치 못한 행위였다.
"9월 26일에 이승만이 하야하기 전에
신파는 이승만 하야운동의 무마공작비로
자유당한테서 수억환의 돈을 받았다더군."
"그뿐이면 또 괜찮게, 신파에서 그 돈
가운데서 2천만환을 떼어 고정훈한테 주어
개헌반대운동을 펴도록 부탁했다는 거야."
"김훈(金勳) 의원도 자유당 입당조로
1천만환을 받아먹은 일이 있다는 거야!"
이쯤 되면 <장군, 멍군>으로 끝날 문제가
아니었다. 더구나 김훈의 경우 와이셔츠를
세탁소에 맡겼는데, 그 와이셔츠
주머니에서 1천만환짜리 수표와 자유당
입당원서가 나옴으로써 이 사실이 세상에
알려지게 된 것이라는 주석까지 달려
있었다.
3.15 정.부통령 선거를 앞두고
국회의원 매수공작을 벌였던 것은
사실이었다. 1959년 10월 9일 민주당 소속
국회의원이었던 조정훈(趙定勳)이 민주당을
탈당하는 성명을 발표한 것을 효시로 해서
10월 15일에는 김주묵(金周默)이, 23일에는
송영주(宋榮柱)가, 25일에는
유승준(兪昇濬)이, 11월 9일에는
김삭(金朔)이, 24일에는 홍순희(洪淳熙)가
탈당하고 자유당에 입당했다. 1960년에
들어서자 1월 6일 허윤수(許潤秀)가,
8일에는 권오종(權五鍾)이, 26일에는
김규만(金圭晩)이, 2월 1일에는
구철회(具喆會)가, 3월 2일에는
박창화(朴昌華)가 각각 민주당을 탈당하고
자유당에 입당했다. 이들이 자유당에
매수당한 액수는 2천만환 또는
"더러운 자식들, 그래 이 자식들아!
정치를 한다는 놈들이 고작 2,3천만환의
돈에 지조를 팔더란 말야?"
"계집은 정조, 사나이는 지조라고 했어!
그래 명색이 사나이요, 정치를 한다는
놈들이 어디 지조 팔아먹을 데가 없어
망조가 든 자유당놈들한테 2,3천만환의
돈에 지조를 팔아? 때려 죽여도 속이
시원치 않을 놈들아!"
민주당을 탈당한 10명의 변절자들을
매도하는 소리는 혹독하기만 했다.
그러나 이들 10명의 국회의원은 별 볼일
없는 인물들이었다. 그저 어쩌다
국회의원이 되기는 되었으나 원내에서 발언
한마디 제대로 하던 인물들은 아니었다.
그런 별 볼일 없는 인물들을 자유당이 빼내
가려울 것도 없었다. 그런데도 이들 10명을
자유당이 돈으로 매수해서 빼내 간 이유는
무엇이었던가? 그것은 오직 한 가지 이유
<선전적인 목적>을 위해서였다. <민주당은
신.구파의 파벌 싸움으로 해서 정당 본래의
사명을 다할 수 없어 탈당을 결심하게
되었다>라는 그들의 한결같은 탈당 이유만
보더라도 선전목적을 위해 매수공작이
벌어졌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런 일이 있었기 때문에 김훈의
와이셔츠 주머니에서 1천만환짜리 수표와
자유당 입당원서가 나왔다는 말이
그럴싸하게 들리지 않을 리가 없었다.
"김훈이 그런 인물이었어?"
"기왕에 팔려갈 것이라면 남들처럼 하다
못해 2,3천만환에 팔릴 일이지 그래 고작
이쯤 야유하는 말이 퍼지게 되면 김훈의
인격은 차치하고라도 그의 정치생명은
끝장이다. 그러기에 김훈의 노여움은 열화
같았다.
"고담룡(高湛龍)이 이놈, 네놈이 나하고
무슨 원수진 일이 있다고 그따위 허튼
수작을 부리고 다녀?"
김훈의 생각 같아서는 고담룡을 씹어먹고
싶었을 것이다. 김훈에 관련된 발설자는
구파에 속해 있는 고담룡이었던 것이다.
김훈은 6월 13일 국회 본회의 때에
신상발언을 통해, 자기는 자유당으로부터
1천만환을 받은 일도 없거니와 자유당에
입당하고자 한 일도 없다고 해명하고
사회자인 부의장 이재형(李載灐)에게,
"고담룡이 무슨 까닭으로 내게 대한
해명하고 피해자인 나한테 사과를 시키도록
하라"고 요구했다.
민주당의 집안 싸움은 마침내
의사당으로까지 번지게 되었다.
한데 이재형은 김훈의 요구에 대해서,
"고 의원이 의사당 내에서 그런 발언을
했다면 모를까, 고 의원이 자진해서
해명하려 하기 전에는 사회자가 해명을
요구할 수는 없습니다." 하고 김훈의
요구를 거절해 버렸다.
동료들 앞에서 누명을 벗고자 했던
김훈의 기도는 좌절되고 만 것이다. 화가
머리 끝까지 치받힌 김훈은 단상에서
내려가 고담룡이 앉아 있는 의석으로
다가가 다짜고짜로 그의 뒤통수를
후려갈겼다.
해명해. 해명을 하지 않으면 죽여버리고
말겠다."
김훈의 서슬은 퍼랬다. 당장에 요절을
내버리고 말 것처럼 길길이 뛰었다. 그때
구파의 유진산이 발언권을 얻어 단상으로
올라갔다.
"김훈 의원의 천만환 건은 고담룡 의원이
발설한 것이 아니에요. 바로 민주당
특별조사위원회에서 나온 말이란 말입니다.
그러므로 거기에 대한 해명은 위원장인
임문석(林文碩) 의원한테 요구해야 옳을
것입니다."
우선 고담룡을 감싸고 돌았다.
이어서 유진산은,
"나는 조병옥 박사로부터 5백만환을 받은
일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모측에서는 조
내가 다시 넘겨 받았다고 주장하고 있으니
앞으로 이 문제는 마땅히 당이나
사직당국에서 밝혀야 할 일인 줄로 압니다"
하고 핏대를 돋구었다.
유진산이 감싸주자 용기가 생겼는지,
김훈에게 뒤통수를 얻어맞은 고담룡이
발언권도 얻지 않고 단상으로 달려
올라왔다.
"김훈 의원이 날더러 자진 해명토록
하라고 하니 해명하겠습니다."
그가 미처 말끝도 맺기 전에 이재형이
가로막고 나섰다.
"고 의원, 여기가 민주당 의원 총회장인
줄 아시오? 발언을 하려거든 발언권을 얻고
나와야 할 게 아니오?" 하고 고담룡을
호되게 나무랬다. 그런 다음 이재형은
"의원 동지 여러분, 여기는 민주당의
의원 총회장이 아니라는 것을 분명히
해둡니다. 그러므로 정치자금문제와 관련된
문제에 대해서는 일체 발언권을 주지
않겠습니다."
의사당에서 벌어질 듯하던 민주당의 집안
싸움에 이재형은 한마디로 쐐기를 박았다.
그렇지 않았더라면 의사당 내에는 폭력이
난무하게 되었을 것이고 그랬더라면, 글쎄
결과가 어떻게 되었을까?
"창피한 놈들! 민주당놈들은 좀 낫겠지
했더니 자유당놈들보다 나을 게 하나도
없어."
누군데? 그놈들도 이승만한테서 잔뼈가
굵은 놈들이 아냐."
민주당 인사들 태반이 이승만 밑에서
벼슬을 한 자들이었지만 잔뼈가
굵었다고까지는 할 수 없었다. 어쨌거나
민주당은 신.구파 가릴 것 없이 여론에
귀를 좀 기울여야 옳았다. 그런데도 그들은
여론에 귀를 기울일 생각도 하지 않았다.
너무 지나치게 싸움에 열중해 있었기
때문이라고나 할까?
정치자금문제는 어느 나라나 말썽의
씨앗이 되고 있지만, 그러나 정치를 하는
사람끼리는 그것을 캐려 들지 않는 것이
하나의 불문율로 되어 있다.
하물며 <아무개가 아무개한테 얼마의
돈을 받았더라>라고 공개한다는 것은
그런데도 민주당 신.구파는 이
정치자금문제를 가지고 서로 상대방을
비방했고 중상을 했다. 그래 가지고 얻는
소득이란 무엇인가? 서로가 상처를 입는
소득 이외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그것을
정치를 한다는 민주당 신.구파 인사들이
모를 리가 없었다. 알고 있으면서도 그들은
어떻게 해서든 상대방을 녹아웃 시키고자
이전투구의 싸움을 벌였다.
마침내 정치자금문제를 둘러싼 싸움은
제2라운드로 접어들었다. 싸움의 발단은
백두진(白斗鎭) 때문이었다. 그 경위는
이러했다.
백두진 하면, 그가 어떤 인물인지는 알
만한 사람은 다 잘 알고 있다. 그는 황해도
신천(信川) 태생, 일본 도쿄 상과대학을
이사를 역임했다. 그에게는 고향과 얼킨
유명한 에피소드가 있다.
신천군민회(信川郡民會)라는 친목단체가
있다. 명칭 그대로 여기의 회원들은 신천군
출신자들이다. 공산 치하가 된 고향땅을
버리고 남하해 온 실향민들인 만큼 그들의
우애는 남다른 데가 있었다.
백두진이 박 정권에 붙어서 한창
득세하고 있을 때, 신천군민회 간부들이
찬조금을 얻으러 갔다. 1년에 한두 번씩
모임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군민회에서는
그 비용에 좀 보태 쓸까 해서 찬조금을
얻으러 갔던 것이다.
"선생님께서 고향 사람들을 위해서
얼마간 좀 보태 주셨으면 감사하겠습니다."
군민회 간부가 찬조금을 조금 희사해 줄
이 말을 들은 백두진은 펄쩍 뛰었다.
"이 사람들 무슨 소릴 하고 있어? 고향
사람들 위해서라니? 내 고향이 어째서
황해도 신천이야? 내 고향은 충청도
대전이야!"
백두진은 고향이 대전이라는 이유를
내세우면서 단 한푼도 찬조하지 않았다. 좀
창피한 꼴이 된 군민회 간부들은 이렇게
중얼거렸다.
"고향을 이북이라고 하면 출세에 지장이
있다 이거지. 그렇거든 차라리 경상북도
구미요, 할 일이지 대전은 또 뭐 말라
비틀어진 대전이야? 치사스러운 작자
같으니!"
그의 말마따나 고향이 황해도 신천이
아니라고 하자. 그렇더라도 신천에서 몇 해
실향민들을 위해서 조금이나마 보태
주었던들 <치사스러운 작자>라는 욕은 면할
수 있었을 것이 아닌가.
백두진이라는 인물은 그런 인물이었다.
그런데 이 인물이 민주당에 공천을 신청한
것이다. 당원도 아니었던 그가 경기도
이천에서 출마을 하겠다고 공천을 신청한
것이다.
백두진이 민주당에 공천 신청을 냈다
해서 조금도 이상할 것은 없었다. 그는
황해도 신천에서 월남해 오자, 처음에는
이범석(李範奭)과 손을 잡고 청년운동을
벌였다. 민족청년단 재정부장으로서 그는
정계로 입문하는 첫발을 내디뎠다. 그런
그가 1951년 3월에는 이승만에 의해 재무부
장관으로 발탁되었다. 고작해야 청년단의
발탁되었다는 것은 파격적인 인사였고
그로서는 분에 넘치는 영광이었다. 뿐만
아니라 다음해인 1952년 10월에는 국무총리
서리를 겸임했고, 다시 1953년 4월에는
정식으로 국회의 인준을 받아 국무총리로
영정했었다.
황해도 신천 군민들은 <우리 고을 출신이
재상이 되었다>고 해서 얼마나 자랑스럽게
여겼는지 모른다.
국무총리까지 역임했다고 하면 한국
정계에서는 거물 중의 거물이라고 할
만했다. 장면이 민주당 신파의 리더가 될
수 있었던 것도, 또 부통령 후보로 지명될
수 있었던 것도 국무총리를 역임했다는
관록 때문이었다. 그런데 6월 3일
의원총회에서 조영규, 민관식(閔寬植),
공천 신청을 문제삼아 신파에서 정치적
공세를 취했다.
"백두진 그 사람이 누구야? 그 사람 저
유명한 중석불 사건을 일으킨 장본인이
아니오. 여러분은 그런 인물을 우리 당에서
받아들여도 된다고 생각하고 있습니까?"
민관식이 포문을 열자, 김의택이 그 뒤를
이었다.
"우리가 이 정권의 독재하에서 10여
년간을 고생을 했고 학생들이 피를 흘려
나라를 구했는데, 이제 와서 다 지어 놓은
밥에 수저를 들고 덤벼들다니 이게 도시
말이 되는 소리요? 신파도 어째서 이 따위
인물을 끌어들였는지 이실직고 해주기를
요구하오. 내가 듣기로는 백씨가 신파의
수천만환의 정치자금을 제공해 주고 그
하는데 이 점에 대해서도 흑백을 분명히
해주십시오."
신파는 도시 꿀먹은 벙어리였다.
조영규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호통을
쳤다.
"백씨가 신파에게 수천만환의 자금을
제공했다는 말은 나도 듣고 있어요.
유성권(劉聖權) 의원, 당신이 다리를
놓았다면서? 그렇다면 누구보다도 진상을
잘 알고 있을 게 아니오? 어서 이 자리에서
진상을 공개하도록 하시오!"
난처해진 것은 유성권이었다. 뭐라고
해명을 해야만 옳단 말인가? 조영규가
이름까지 대면서 해명을 요구하자,
유성권은 침묵만을 지키고 있을 수도
없었다. 그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것은 사실이나 정치자금 제공 운운은
어불성설입니다. 나는 다만 민주당의
문호개방 정책에 따라 백씨를 입당시키고자
했을 뿐이에요" 하고 앉아 버렸다.
구파에서는 한동안 신파를 성토하는
화살을 쏘아댔다. 그런 다음
정성태(鄭成太)가 백두진 입당문제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동의(動議)를 했다.
"첫째, 백두진 씨의 입당을 거부하는
건의를 중앙상무위원회에서 한다. 두번째,
입당 심사규정에 의한 정당한 절차를
밟았는가 하는 것을 해명한다. 셋째,
정당한 심사규정을 거치지 않았다면 어떻게
이천에 공천 신청을 낼 수 있었는지
중앙상위는 해명하도록 합시다."
이 동의는 신파도 손을 들지 않을 수
신파는 구파의 정치 공세에 두 손을 들고
말았던 것이다. 정치자금문제를 둘러싼
제2라운드는 좀 싱겁게 끝난 감이 없지
않았으나 그러나 이것은 태풍을 예고하는
바람에 지나지 않았다.
"빌어먹을! 이놈들아, 언제까지
파벌싸움을 끌어갈 생각이야? 그렇게 질질
끌면서 파벌싸움을 벌일 바엔 차라리
갈라서라, 갈라서!"
"참, 이상한 사람들이야. 그렇게 뜻이 안
맞는데 동거하고 있는 게 뭐야? 차라리
갈라서고 말 일이지!"
정치싸움도 구경할 맛이 날 때가 있다.
정치싸움이 없다면 민주주의란 곧 싫증이
나고 권태로워질는지도 모른다. 그렇기
때문에 정치싸움이란 없는 것보다는 있는
것이 바람직했다. 그래야 민주주의에
대해서 싫증이나 권태를 느끼지 않게 되기
때문이다. 무슨 놈의 개수작을 늘어
놓느냐고 쌍심지를 켤 독자가 있을는지로
모르겠다. 하지만 정치싸움이 없는
사회에서 산다고 상상해 보라, 얼마나
세상이 삭막하겠는가.
다만 정치싸움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그
싸움의 질이 어떤 것이냐, 하는 데 있다.
여기에 대해서도 혹자는 눈을 부라릴지도
모른다.
"정치싸움에 무슨 놈의 질이 있어?"
하고.
있다. 양질의 정치싸움은 멀찍이에서
바라보기만 해도 신바람이 난다. 깨끗한
매너로 벌였던 운동경기를 구경했을 때처럼
가슴이 후련해진다.
예를 들면, 미국의 민주.공화 양당의
대통령 후보 지명전, 또 양당 후보가
겨루는 대통령 선거전 같은 것이 양질의
정치싸움이다. 남의 나라에서 벌어지고
있는 정치싸움이지만 그 싸움을 구경하고
있노라면 삼년 묵은 체증이 내려간 것처럼
후련해진다.
거기에 비해서 악질의 정치싸움을
목격하게 되면 구역질이 솟구친다.
민주당의 신.구파 싸움이 바로 대표적인
악질의 정치싸움이었다.
"아무개가 누구한테서 얼마만큼의
정적한테 이런 중상모략을 했다면 또
조금은 이해할 수가 있었다. 한 집안
식구끼리 이 따위 식으로 서로 물고 뜯고
했으니 구경꾼으로서야 구토증을 일으키지
않을래야 않을 도리가 없었다. 오죽했으면
"빌어먹을! 이놈들아, 언제까지
파벌싸움을 끌고 갈 생각이야?" 하고
대중이 역정을 일으켰겠는가. 매스껍고
구역질이 났기 때문이었다.
싸움을 벌여도 그런 식의 치사스러운
싸움을 벌이고 있을 바에야 서로 갈라서는
게 나을 것이었다. 그러나 어쩐 일인지
민주당 신.구파는 갈라설 생각도 하지 않고
있었다. 아니, 사실에 있어서는 그것이
표출되지 않았을 뿐, 이면에는 갈라서고자
해서 움직였던 사람도 없지는 않았다. 그는
(민주당 신.구파는 어차피 갈라설 수밖에
없는 운명, 도리없이 갈라질 수밖에 없다면
선거를 치르기 전에 갈라지는 것이
낫겠다.)
이렇게 생각한 조영규는 어느 날
아현동으로 김도연을 찾아갔다. 조병옥이
타계한 뒤로 구파의 리더는 어느덧
윤보선한테로 넘어가 있었다. 당의
서열로도 윤보선이 최고위원인데 반해
김도연은 중앙위원회 의장이었던 관계도
있었지만 그보다도 윤보선이 정치자금의
파이프 라인을 쥐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조병옥이 생존시에는 파이프 라인을
고흥문(高興門)한테 맡겨 놓고 있었지만,
조병옥이 타계한 뒤로 윤보선이 이것도
서서히 거머쥐기 시작했던 것이다. 정당에
라인을 쥐고 있는 자가 왕이었다.
실질적으로 당수 다음의 서열이라 할 수
있었다.
김도연은 미국 컬럼비아대학에서
경제학을 전공한 박사였지만 청빈한 생활을
즐겨온 그는 정치자금에는 일체
무관심했다. 그도 대한민국 정부의 초대
재무부 장관을 역임했고 보면 정치자금을
만들 능력이 없지는 않았을 텐데, 그런
데는 아예 의식적으로 외면을 했다. 아마도
지사적(志士的) 기질이 돈과는 거리를
멀리하게 해 주었던 것이 아닌가 추측된다.
중국 북경대학에서 경제학을 전공한
조영규는 독학으로 의사시험에 합격한
이를테면 좀 특이한 인물이었다. 그는
윤보선보다는 김도연을 인간적인 면에서
"웬일로 우리집엔?"
이것이 조영규가 찾아오자, 그에게 던진
김도연의 첫마디였다.
"내각책임제 개헌안도 통과됐고, 그래서
머지않아 선생님이 정권을 잡을 것 같아서
잘 보여 둘려구요."
이때 조영규는 46세였고, 김도연은
환갑이 막 지난 61세였다. 나이차이가
15년이나 되었으나 두 사람은 스스럼없이
농담을 주고받는 사이였다. 정치를 하는 두
사람이 마주앉은 지라 화제는 자연 시국에
대해서였다.
이 얘기 저 얘기 끝에 조영규는
분당문제를 끄집어냈다.
"서로 심한 상처를 입고 갈라서기보다는
아직 상처가 깊지 않을 때 갈라서는 것이
호호야인 김도연의 얼굴에 먹구름이
끼었다.
"조 의원, 나도 신.구파는 갈라질 수밖에
없는 운명이란 것을 느끼고는 있지만
갈라질 명분이 없는 게 아니겠소? 정치에는
명분이 따라야 한다는 것, 조 의원도
그것을 잘 알고 있을 게 아니오."
"내세울 명분은 있습니다. 보수(保守)
양당 정치를 구현하기 위해서라고 하면
됩니다. 이보다 더 뚜렷한 명분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리고 우리가 분당을
서둘러야 할 이유가 한 가지 더 있습니다.
지금 자유당 의원들이 신당을 만들
움직임을 보여주고 있는데, 우리가 분당을
하게 되면 자유당의 신당운동도 자연
무산되고 말 것입니다."
하나의 목적을 설정해 놓는 조 의원의
버릇은 여전하군, 허허......."
김도연은 잠시 웃으면서 생각을 가다듬는
눈치였다. 이윽고 중얼거렸다.
"어려운 문제군, 어려운 문제야."
"절대로 어려운 문제가 아니라구 해두
그러십니다. 오히려 쉬운 문젭니다."
조영규는 말을 끊고 김도연의 표정을
살피다가 다시 말을 이었다.
"공천 심사과정에서 정치자금문제를
가지고 서로 물고 뜯고한 저희들이
아닙니까? 그런 형편인데 이제 정권이 앞에
놓여 있어 보십시오. 어떤 중상모략이
난무하게 될지 모르는 일입니다."
그러니 지금이 분당의 적기라고 하며
조영규는 힘주어 강조했다.
권한을 쥐고 있는 사람들이 있으니
그분들하고 상의를 해봐야 어떤 결론을
내릴 수 있겠지."
김도연은 다음날 안국동 윤보선의 집에서
구파 중진들이 모였을 때, 이 분당론을
끄집어냈다. 윤보선이 펄쩍 뛰었다.
"분당? 언제고 분당을 아니할 수야
없겠지. 하지만 총선거를 앞두고 우리가
먼저 분당론을 제기해 보십시오. 아마도
신파는 이 분당론을 선거전에 최대로
활용하려 들 것이외다."
그런 윤보선이 보는 견해가 옳았다.
총선거에 내걸 공약이란 분당을 하더라도
대동소이할 것은 뻔한 일이었다. 다른 점이
있다면 공약의 문장 표현의 차이 정도가 될
것이었다. 그렇다면 뭘 가지고 상대방을
공격할 것인가? 분당론이 신파의 좋은
공격의 무기가 될 것은 다시 말할 필요도
없었다.
결국 이 시점에서 분당론은 윤보선의
한마디로 기가 꺾이고 말았다.
6. 옥에 티를 남긴 7.29 총선
흔히들 초선임에도 불구하고 국회의원에
당선만 되면 <정치가(政治家)>로 대접을
하고 또 그렇게 호칭해 주고 있다. 웃기는
얘기다. 국회의원에 당선되었다고 다
정치가는 아니다. 일단은
정치인(政治人)으로 호칭해야 마땅하다.
정치인과 정치가는 그 뜻이 하늘과 땅
사이만큼이나 차이가 있다.
어떤 경우에 정치인이 정치가로 승격할
수 있는가? 여기 사나이다운 사나이, 세
사람의 경우를 한 예로 들어 보기로 한다.
정치제도를 바꾸는 내각책임제 개헌안이
개헌시 재적 218인 중 투표에 참가한 자는
211인이었다. 그리고 그중 찬성표를 던진
것이 208표였다. 누군가 세 사람이
찬성표를 던지지 않았다는 얘기가 된다.
감히 반대표를 던진 사람은 누구였을까?
당초, 내각책임제 개헌안을 투표에 붙일
때는 기명(記名) 투표토록 했다. 행여
부결되는 경우에 있어서는 <정국 수습이
혼란을 야기하게 된다>는 것이 기명투표를
하려던 이유였다.
아닌게 아니라 내각책임제 개헌안이
부결될 경우, 정국이 혼란에 빠질 것이라는
예상도 할 수 있는 일이었다. 8.15까지 새
정부를 세워야 한다는 과도정권의 정치
일정에 차질이 생기게 되는 것은
고사하고라도 민주당 신파에서 어떤 정략을
때문이었다.
거기에다가 국회의 동태를 주시하고 있는
국민의 눈도 전혀 의식 밖으로 내몰 수는
없는 일이었다. 이제는 대학생만 의식하고
있을 것이 아니라 국민 전체를 의식해야 할
판이었다.
<국민혁명으로 승화시키자>는 의식이
팽배해 있었기 때문이었다.
내각책임제 개헌안에 반대투표를 한
국회의원은 누구였을까?
사실은 이런 의문을 제기할 필요도
없었다. 왜냐하면 내각책임제 개헌안이
표결에 붙여지기 전에 <나는 내각책임제
개헌안에 반대투표를 하겠다>고 이미
자신의 입장을 천명해 놓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김창동(金彰東), 김공평(金公平) 등 세
사람이었다.
이옥동의 반대 이유는 이러했다.
"나는 내각책임제 개헌안에 서명을 하지
않고 반대했던 사람인데 그 이유는 <자유당
의원들은 불법과 부정과 관권과 금권으로
당선되었다>고 국민으로부터 지탄을 받는
자격 없는 국회의원들로서 양심이 부끄러워
더 이상 의석에 앉아 있을 수가 없었는데,
이러한 차제에 모든 사회적 부정과 불법 및
부패가 원인이 되어 이 나라를 소생시킨
고귀한 혁명이 일어났으므로 우리가 보답할
수 있는 길은 사과와 속죄를 하고, 혁명
세력이 국회를 즉시 해산하라고 외치는
것처럼 총사퇴하는 것으로 생각하고 또
그와 같이 하기 위하여 자유당 의원
원내총무에게 맡기기로 했다. 따라서 이
이상 법률을 심의할 수 없고 더불어 오늘의
사태를 수습할 능력도 부족함으로......."
즉, 지금의 국회의원은 물러나고 새
국회가 구성된 다음에 이 법률안을 맡기는
것이 좋을 것이라고 이옥동은 말했던
것이다.
지금이 어느 때인가? 이승만이 하야했고
이기붕은 일가족이 집단자살을 했으며
자유당의 당무위원급들은 모조리 잡혀가고
있는 판국이라 자유당 소속 국회의원치고
풀이 죽지 않는 사람이 없는 형편인데
자기의 시국관대로 행동했다는 것은
칭찬하고도 남음이 있는 일이었다.
정치인이란 모름지기 그래야 하는 것이다.
신념이 없는 정치인이 무슨 놈의
이 세 사람은 국회에서 그렇게 활발한
의정 활동을 별였던 사람들은 아니었다.
어느 구석에 앉아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
별반 이름 석 자도 그리 널리 알려져 있지
않았다. 그랬지만 세 사람은 용감했다.
그들은 자기들의 소신대로 행동했다.
<너 이 새끼, 그게 무슨 허튼 수작이야?
내각책임제 개헌안에 찬성투표를 던지지
않으면 당장에 죽여 버리고 말겠어> 하고
목에 칼을 갖다댔다 하더라도 그들은
서슴지 않고 소신대로의 행동을 했을 것이
틀림없다.
아니 사실에 있어서 그들은 수없이
협박을 당했다. 한밤중만 되면 요란하게
울려대는 전화벨 소리에 신경쇠약이 될
지경이었다.
자식아, 자격 없다는 놈이 그 자리에 왜
앉아 있어? 당장 물러나! 당장 물러나지
않으면 네놈의 자식, 귀신도 모르게 없애
버리고 말겠어!"
실컷 욕설을 듣고 수화기를 놓으면
따르릉 하고 벨이 또 울린다. 수화기를
집어든다.
"이봐, 잘난 체하지 말어! 네놈이 아직도
뜨거운 맛을 덜 봤구나. 아예 두 눈깔에서
번쩍하고 불꽃이 튀도록 패 줘야 정신을
차리겠다는 거야, 뭐야 잉?"
욕설이니까 그렇긴 하겠지만 점잖은
욕설은 하나도 없었다.
그런 욕설 듣기 싫으면 수화기를 내려
놓고 있으면 그만 아니냐 할는지 모르지만
이들의 뱃심 또한 두둑했다.
소신대로 했을 뿐, 네놈들이 그런다고 내가
네놈들 앞에 굴복할 줄 알았어? 천만의
말씀!)
그들의 어떤 협박 전화에도 눈썹 한번
찡긋 하지 않았다.
어떤 사람을 정치가(政治家)라 하는가?
바로 이런 소신 있는 정치인을 정치가라
하는 것이다. 이해 관계에 따라 간에
붙었다 쓸개에 붙었다 하는 정치인은 결코
정치가라 할 수 없다. 소신을 위해서는
기꺼이 목숨을 바치는 그런 위인을
정치가라 하는 것이다.
한국 같은 정치적 후진 국가에서는 바로
이들 세 사람 같은 정치인이 요구되는
것이다. 신념을 위해서는 그까짓 목숨쯤
가볍게 내밀 수 있는 정치인!
펼치다보니 이 세 사람에 대한 얘기를
소개할 자리를 잃어 이쯤에서 소개하기로
한다.
민주당의 공천신청 마감은 6월
2일이었다. 허정은 민주당의 당책에
맞추어야 되겠다고 생각했는지 6월 15일,
내각책임제 개헌안이 국회를 통과, 정부에
이송되자 그날로 이것을 공포했다.
빨랐다. 정말 빨랐다. 허정이 얼마나
그의 정치 일정에 맞추려고 애를 쓰고
있었는지 짐작할 수 있는 일이었다.
국회의장인 곽상훈이 내각수반실로
허정을 찾아온 것은 바로 그날 저녁
"우양, 나 우양하고 의논을 해보고
국회의장직을 사임할까 해서 찾아왔소."
허정은 좀 어리둥절해지는 모양이었다.
"새 헌법에 따라 대통령직 권한대행을
맡도록 되어 있는 국회의장이 아니겠소.
내가 대통령직 권한대행을 맡게 될 것
같으면 여러 가지 잡음도 일 것이고 또
우양이 과도내각을 이끌어가는 데 있어서도
여러 가지 번거로움이 많을 것 같고 해서
사임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하게 되었단
말이오."
하긴 그렇다. 새 헌법이 공포되었으니
궐위중에 있는 대통령직은 새 헌법에 따라
국회의장이 그 직무를 대행해야 했다.
그러자면 과도내각으로서는 번거롭게 되는
것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우선
필요했다. 새 헌법에 따라 허정은
내각수반이 아니라 행정수반인 국무총리가
되는 셈이었다. 그러므로 새 헌법에 따라
대통령 권한대행인 곽상훈이 국무총리를
새로 지명해야 할 형편이었고, 새로 지명을
하면 국회의 인준을 받아야 하는 절차가
있었다. 그러나 곽상훈이 국회의장을
사임하고 지금의 국회를 즉시 해산해
버리면 허정의 과도정부는 여전히
과도정권으로 존재하게 된다.
"어떻소 우양? 새 정부가 들어설
때가지는 우양이 계속해서 과도정권을
맡아나가 줘야 하지 않겠소?"
허정은 잠시 생각을 가다듬어 보았다.
곽상훈의 말이 옳을 것 같았다. 새
국무총리 지명이다, 인준이다 해가지고
난마처럼 엉클어져 있는 시국을 하루 속히
수습하기 위해서는 시간을 재촉해서 새
정부의 탄생을 서둘러야 할 형편이었다.
"예, 삼연(三然)의 생각에 전적으로
동감이외다."
이래서 곽상훈은 다음날 즉시 국회에
국회의장직 사임서를 제출했다. 그러나
그것이 원의로서 수리된 것은 6월
23일이었다.
미국 대통령 아이젠하워가 한국을 방문한
날은 새 헌법이 국회를 통과한 지 나흘
만인 6월 19일이었다. 아이젠하워가 그의
생전에 한국을 방문했을 때처럼 열광적인
환영을 받아온 일이 있었을까? 과거에 외국
귀빈 누가 한국을 방문한다 하면 으레
통.반을 통해서 관권으로 시민을
관권동원을 금지했었다.
"어디까지나 시민 스스로가 자발적으로
장군을 환영하도록!"
이렇게 원칙을 세우고 관권으로 시민을
동원하는 행위를 일체 금했다. 그런데도
그를 환영하고자 거리로 쏟아져 나온
인파는 관권동원의 몇 배나 되는
대성황이었다.
당시 아이젠하워는 동남아 각국을
순방하고 일본에 이어 마지막으로 6월
22일에 한국을 방문하도록 일정이 짜여져
있었다. 그러나 일본에서는 마침
안보(安保)문제로 해서 전학련(全學聯)과
좌익계가 아이젠하워의 방문을 반대하는
데모를 벌이자, 일본 방문을 취소하고
한국으로 직행하게 되었던 것이다.
흐뭇했던 한때가 아이젠하워를 영접했을
때가 아니었을까?
김포공항에서 아이젠하워를 영접한
허정은 그와 함께 헬리콥터 편으로 용산의
미군 콤파운드로 갔다. 거기에서 자동차로
갈아탄 아이젠하워는 열렬한 서울 시민의
환영을 받으며 정동의 미국 대사관으로
향했다.
그런데 그의 자동차는 서울역 앞에
이르러 한치도 더 앞으로 나갈 수가
없었다.
"아이젠하워, 아이젠하워!"
환호성을 지르는 인파가 그 넓다란 길을
꽉 메웠기 때문이었다. 아이젠하워는 어쩔
수 없이 차에서 내렸다. 아마도 걸어갈
수밖에 없다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더욱더 밀려들기만 했다. 어떻게 해서 그와
악수 한번이라도 하고 싶은 충동에서였다.
당황한 것은 허정이었고 아이젠하워의
경호원들이었다. 그렇다고 밀려드는 군중을
어떻게 할 수는 없었다.
아이젠하워의 탑승차가 서울 시청 앞에
이르면 거기에서 성대한 환영식을 가질
예정이었으나 허정은 그 환영식을 취소해
버리고 말았다. 서울역에서 서울 시청까지
이르자면 대포라도 쏴서 군중을 해산하지
않는 한 도저히 앞으로 나아갈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결국 아이젠하워의 탑승차는
옆 골목으로 빠져서야 정동의 미국
대사관에 이를 수가 있었다.
경무성에서 신선로가 곁들여진
환영오찬회가 있기 전, 허정은
아이젠하워의 한국 방문을 진심으로
환영한다고 말한 다음,
"한국을 방문하기 전에 각하께서
후르시쵸프 소련 수상과 여러 번 만난
것으로 알고 있는데 한국문제에 관해서
의견교환을 한 일이 있으십니까?"라고
물었다.
"한국문제에 관해서 직접 얘기한 일은
없습니다. 하지만 후르시쵸프하고
의견교환을 해본 결과, 3차 대전을 유발할
생각은 없는 것으로 느끼게 되었소. 그러니
한국의 안보에 대해서도 크게 걱정할 것은
없는 것 같소이다."
허정은 약간 고개를 끄덕이고 나서,
"각하, 일본은 믿을 수 없는 나랍니다.
보십시오, 미국이 진주만을 기습한 일본에
뿐만 아니라 지금껏 경제부흥을 돕고
있으나 미군의 군사기지 문제로 저렇듯
소동을 벌이고 있잖습니까? 그러니 일본에
있는 군사기지를 한국으로 옮기도록 하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심각한 표정으로 얘기를 듣고 있던
아이젠하워의 얼굴에 가득 환한 웃음이
번졌다.
"아주 중요하고 좋은 말씀을 해 주셨소.
하지만 나는 임기가 거의 다 끝난 대통령이
아니겠소. 그러니 그런 중요한 결정을 내릴
수 있는 위치가 못 됩니다. 말하자면
레임덕(Lame duck:절름발이 오리)이죠.
그렇기는 하나 돌아가면 각하의 뜻을 주위
사람들한테 전해서 각하의 뜻이
이루어지도록 힘써 보겠소이다."
-대한 공약을 재확인
-통일에 대한 한국민의 갈망을 인정
-계속적인 경제원조의 필요성을 인정
-유엔에서 결정된 여러 원칙을 준수할
것을 골자로 하는 공동성명을 발표
새 국회를 구성하고 새 정부를
탄생시키기 위한 민.참 양의원 총선거가
실시된 것은 1960년 7월 29일이다.
민.참 양의원 후보가 등록이 개시된 것이
6월 28일부터였으니까, 선거운동을 할 수
있는 기간은 꼭 한 달 동안이었다. 7월
2일에 마감한 민의원 입후보자는
1,524명이었고 참의원 입후보자는
민의원은 7대 1, 의석수가 58석인 참의원은
4대 1의 경쟁률이었다.
차기 정권담당자로 자처하고 있던
민주당의 민의원 입후보자를 계파별로 볼
것 같으면 신파가 113명에 구파가 106명,
중도파가 8명이었다. 이들은 물론
민주당에서 <공천>이라는 이름으로 내세운
인물들이었다. 공천을 받지 못한 인물은
무소속으로 입후보를 했기 때문에
민주당원으로서 입후보를 한 자의 수는
실질적으로는 3백 명을 웃돌고 있었다.
구파 공천자에 비해 신파 공천자가
7명이나 더 많았다. 그 이유는 당선
가능성을 원칙으로 했기 때문이었다.
참의원은 신.구파 각기 29명씩 동수를
공천해 놓고 있었다.
7명이나 더 많이 공천된 것을 보면, 그
과정에서 꽤 티격태격 심한 진통을 겪었을
것 같으나 사실에 있어서는 그렇지가
않았다. 꽤 오손도손 잘해 주었다.
"역시 정치를 하는 사람은 다른걸. 줄곧
파벌싸움만 벌이고 있기에 저놈의 집안
꼴도 다 됐다 했더니, 역시 정치하는
사람은 달라. 됐어, 됐어!"
정당에 있어 가장 골치 아픈 것이 공천
심사였다. 공천이 떨어지게 되면 행패를
부리는 자들도 적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러니 신.구파의 싸움이 잦은 집안이기에
반드시 공천 심사과정에서 치고받고 하는
싸움이 벌어지고야 말 것이다, 이렇게
내다보고 있었던 것이다. 그것이 오손도손
말썽이 없으니 권외의 사람들이 오히려
이때의 공천 심사위원은 신파에서는
홍익표(洪翼杓), 이철승(李哲承),
강영훈(姜永薰) 세 사람을, 그리고
구파에서는 유진산, 이영준(李榮俊),
김영삼(金泳三) 세 사람을, 이렇게 6명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모두가 정치에는 관록이
붙은 이른바 정치가라 호칭할 만한
인물들이었다. 그런 인물들이었으니 말썽을
일으키는 일 없이 오손도손 일처리를 잘
해낸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한데, 공천 심사과정에서는 별 탈이
없었으나 <준비 땅!> 하고 막상 선거전에
뛰어들자 상황이 확 바뀌어 버렸다. 신파는
신파대로, 구파는 구파대로 각기 파벌
위주로 선거전을 치르려는 태세를 갖추어
놓은 것이다. 신파는 중앙당사 안에
구파는 따로 살림을 내 가지고
전업회관(電業會館) 안에 선거지휘본부를
차렸던 것이다.
"공천도 말썽 없이 끝냈기에 이제부터는
꽤 잘 하려는가 보다 했더니 역시 제
버릇은 개를 못 주는가 보군."
아마 이때 언론에서 이들이 딴 살림을
차린 것을 참을성 있게 눈감아 주고
있었기에 그렇지, 만일 <민주당 사실상
분열!> 하고 선동적으로 대서특필했더라면
아마도 선거 결과는 엄청난 양상을
보여주게 되었을지도 모른다.
민주당은 선거를 치르면서 단 살림만
차렸던 것이 아니었다. 공천에서 떨어진
자를 슬쩍 무소속으로 입후보시켜켜 놓고는
집중적으로 그런 자들을 지원해 주었던
용서받을 수 없는 행위였다. 파벌의 이익을
위해서라면 어떤 부도덕한 것도 마다않는
그런 그들이 만일 정권을 잡았을 경우,
이승만 이상으로 권력을 남용하지 않는다고
누가 장담할 수 있겠는가!
하여간에 마침내 선거전은 벌어졌다.
열기가 대단했다. 자유당 치하에서 흔히 볼
수 있던 타락된 양상은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가 없었다. 모두가 정정당당하게 싸움을
벌이고 있었다. 정치권 외의 구경꾼들의
마음도 흐뭇했다.
"됐어, 됐어. 민주주의 국가의 선거란
바로 이래야 하는 거야."
"박수를 보내고 싶어. 이제 이것으로
우리나라의 민주주의도 기틀을 잡았다 할
수 있게 됐어."
벌써 뿌리를 내렸을 게 아냐?"
누구 할 것 없이 흐뭇해 했고
즐거워했다.
한데, 총선거에 불이 붙은 7월 17일,
허정은 난데없이 삼군 참모총장과 해병대
사령관으로 하여금 <국군은 정치적 중립을
엄수하겠다>는 선서를 하도록 했다.
삼군 수뇌의 <헌법 준수 선서식>은
중앙청 국무회의실에서 열렸다. 전
국무위원이 참석한 가운데 헌법 준수
선서는 먼저 육군 참모총장인 최영희의
순으로 시작되었다.
"나는 국토방위의 신성한 의무수행을
사명으로 하는 국군의 참모총장으로 국헌을
준수하고 정치에 관여함이 없이
엄정중립하여 맡은 바 임무를 성실히
오른손을 <대한민국 헌법 원본>에 얹고
왼손에 선서문을 들고 선서를 하는 군
수뇌의 표정은 자못 진지하기만 했다.
최영희에 이어 해군 참모총장인
이용운(李龍雲)이, 이어서 공군 참모총장
김창규(金昌圭), 그리고 해병대 사령관
김성은(金聖恩)의 순으로 진행되었다.
선서를 한 참모총장들은 선서를 하고 나자,
선서문에 각기 서명을 했다.
각 군 참모총장이 이런 헌법 준수
선서식을 가진 것은 창군 이래 처음 있는
일이었다. 대한민국 헌법 제2조, 제6조,
그리고 제27조에는 국군은 정치에 관여할
수 없다는 것이 명백히 규정되어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허정이 삼군 참모총장과
해병대 사령관을 불러모아 헌법을 준수할
그것은 그 무렵 난데없이 군부 쿠데타설이
시정에 유포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군대에 들어가 있는 족청계가
이범석(李範奭)을 업고 쿠데타를 일으킬
것이라는 소문이더군."
"이범석이 능히 쿠데타를 일으킬 만한
인물이지."
"아무렴!"
이런 소문은 한쪽 귀로 듣고 한쪽 귀로
흘려버릴 수는 없는 일이었다. 선거 기간
중에 이런 소문이 나돈다는 것은 극히
우려할 만한 일이었다. 더구나 이범석의
족청계가 쿠데타 음모를 꾸미고 있다는
데에 문제가 있었다. 세상 사람들은
이범석을 보기에 이태리의 무솔리니나
일본의 도예죠오 히데끼에 버금가는
족청계의 쿠데타설에는 촉각을 세우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허정이 제헌절(制憲節)을 맞아
삼군 참모총장과 해병대 사령관을 불러모아
대한민국 헌법 원문에 손을 얹고 정치적
중립을 선서시켰던 것이다.
한편에서는 선거전이 벌어지고 또
한편에서는 혁명재판(?)이 벌어지고 있던
1960년의 7월은 너무나 어수선하기만 했다.
3.15 부정선거 관련자에 대한 재판은
두번째부터 본격적으로 사실심리에
들어갔으나, 그 내용을 전부 소개하기는
어려운 일이므로 여기에서는 최인규에 대한
정.부통령 선거 때 최인규가 어떤 방법으로
부정선거를 자행했는지 그 편모만을 엿볼
수 있도록 하기로 한다. 왜냐하면 관련
피고인 전원에 대한 사실심리를 소개하자면
방대한 시간과 지면이 요구되기 때문이다.
부정선거 관련 피고인들에 대한 두번째
공판은 제1회 공판이 열린 지 사흘 만인
7월 8일에 열렸다. 방청객은 언제나
초만원을 이루었다. 7월의 폭염과 인체에서
내뿜는 열기로 해서 법정 안은 어김없는
찜통이었다.
그런데 공판 전, 방청객들이 입정할 때
정장을 한 30대 여인이 20대 아가씨와 손을
마주 잡고 들어와 자리를 잡고 앉았다.
여인은 껌을 질겅질겅 씹고 있었다.
"아니, 저 사람 최인규 마누라 아냐?"
몰려 있던 각 신문기자들이 일제히
여인한테로 시선을 집중시켰다.
"맞아 틀림없어, 어김없는 최인규의
마누라야!"
최인규의 아내 강(康) 여인은 남편이
내무부 장관에 취임할 때 식장에까지
나왔던 일도 있었고 또 소위 <공무원
친목회> 회장으로 치맛바람을 날렸던 일이
있었기 때문에 사진기자들 사이에는 꽤
얼굴이 알려져 있었다.
사진기자들은 무슨 특종기사감이라도
발견한 듯이 우하고 몰려갔다. 그와 함께
여기저기에서 플래시가 번쩍번쩍 터졌다.
그제야 강 여인은 <아차> 하는 모양이었다.
잽싸게 일어나 쏜살같이 법정 밖으로
달아나는 것이었다. 그것을 뒤쫓는 짓궂은
난다는 듯이 내뱉았다.
"남편의 장래가 걱정스러워서 방청을
나왔거든 좀 수수하게 차리고 나올 일이지,
그래 여기가 파티장이야! 값진 갑사 치마
저고리로 호사스럽게 차려입고 나오게. 그
몸가짐은 뭐야, 껌을 질겅질겅 씹구.......
그 남편에 그 아내라니까!"
결국 최인규는 먹지 않아도 좋을 욕을
아내 때문에 또 한번 먹은 꼴이 되었다.
법정 밖에는 아침부터 궂은 비가 내리고
있었다. 하필이면 사실심리가 시작되는
날에 궂은 비가 내리는 것일까, 부정선거
관련 피고인들의 운명을 서러워하고 있는
것 같아 마음이 그리 유쾌하지가 않았다.
공판은 오전 9시 10분에 열렸다.
법정에 입정한 피고인들은 더욱 형편없이
국가보안법 제1조가 적용되어 기소되었다고
통보되었기 때문이었다. 법정 태도가
공손했다는 동정을 얻고자 해선지
몸가짐에는 무척 신경을 쓰는 것 같았다.
그래서 그런지 방청객의 동정을 자아내기도
했다.
이날에 있었던 사실심리에 대해서 중요한
대목만을 소개하기로 한다.
"최인규 피고인, 4292(1959)년
김일환(金一煥)이 내무부 장관으로 임명된
지 불과 7개월 만에 피고인이 다시 내무부
장관을로 임명된 것은 이승만, 이기붕을
반드시 정.부통령에 당선시키고야 말겠다고
사전에 맹세한 까닭이지?"
재판장 정영조의 물음에 최인규는 펄쩍
진술을 했다.
"그렇지 않습니다. 이기붕 씨로부터
통지를 받고 중앙의료원에 갔더니 이기붕
씨가 김일환의 후임으로 저를 내무장관에
추천했으니 일 잘 하라고 했으며 사전
약속은 없었습니다."
"4285(1952)년 7월 14일 발췌 개헌안을
통과시키고 대통령 선거를 직접선거로
개헌한 이유를 알고 있는가?"
"죄송합니다. 재판장님, 그 당시에는
정계에 있지 않았기 때문에 잘은
모르겠습니다만 아마도 이승만이
간접선거로는 당선될 수 없었기 때문에
개헌했던 것이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발췌 개헌안은 계엄령을 선포한 후,
국회의원을 협박해서 통과시켰다는 사실을
"네, 그렇게 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4사 5입 개헌이란 무엇인가?"
"초대 대통령은 종신 집권하도록 하기
위한 것으로 압니다."
"4사 5입 개헌 이전의 헌법 55조에는
<대통령은 두 번 이상 재선될 수 없다>고
명시하고 있었는데 이 조문은 무엇을
뜻하는가?"
"한 사람이 오래 집권하면 독재의 우려가
있다는 것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2.4 파동은 무엇인가?"
"개정 국가보안법을 통과시킬 때 일어난
파동을 말합니다."
"선거제도였던 지방자치제를 임명제로
개정한 이유는?"
"정부 시책에 대해서 지방행정을 강력히
심문하는 재판장의 태도는 꼭 대학
입시생을 앞에 두고 구두 시험을 치르는 것
같았고, 최인규의 태도는 구두 시험을
치르는 수험생 이상으로 고분고분하기만
했다.
재판장 정영조는 최인규하고는 별로
관련이 없는 문제들을 질문하고 나서야
본격적으로 사실심리에 들어갔다.
"피고인 최인규, 피고는 4292(1959)년
3월 20일에 내무부 장관에 취임할 때, 전
내무부 직원에게 취임사를 했는데 그때
뭐라고 했는가?"
"이 대통령에게 충성을 다해야 하며 전
공무원은 정.부통령 선거에서 이승만
박사와 이기붕 씨를 당선시켜야 한다고
강조했습니다."
"할 수 없습니다."
"그럼 왜 내무부 장관으로서 첫날부터
선거운동을 지시했는가?"
"......."
재판장이 매섭게 쏘아붙이는 바람에
최인규의 심장이 얼어붙었는가. 이 질문에
대해서는 입을 다물고 말았다. 답변을
하자니 궁색하기도 했을 것이다.
"매월 1일 내무부 월례회의에서
선거운동을 지시하고 1962년 5월부터
11월까지 전국 각지를 순회하며 공무원
선거운동을 독려했지?"
"네."
"국무회의에 6인위원회라는 게
있었는가?"
"6인위원회는 4292년 3월경에 조직이
국무회의에 상정하기 전에 예비적으로
상의하고, 대통령의 특명 사항을 토의하는
것입니다. 구성원은 내무, 법무, 외무,
재무, 체신, 교통장관 등이었습니다."
"공무원의 선거운동을 6인위원회에서
합의한 일이 있는가?"
"작년 3월경, 6인위원회를 지방행정
연구위원회라고 이름을 붙인 후 비공식
양해로 합의했습니다."
"국무회의에서도 의결했는가?"
"역시 비공식으로 합의하고 각부
장관에게 공무원 선거운동을 지시하도록
요청한 일이 있습니다."
"공무원 친목회는 언제 조직했는가?"
"4292(1959)년 7월경, 유충렬(柳忠烈)
시경국장에게 지시해서 서울에서 10월경
국무회의의 의결에 따라 각 소속 장관의
협조를 얻어서 지방경찰의 사찰 담당자가
책임을 지고 지방공무원 친목회를
조직했습니다. 공무원 가족 친목회는 각
기관장이 책임지고 조직하도록 했습니다."
"공무원 친목회는 왜 만들었는가?"
"차기 정.부통령 선거에서 이승만,
이기붕을 당선시키기 위해서
만들었습니다."
"전국 경찰국장, 사찰국장 등을
개별적으로 불러서 부정선거를 지시한 일이
있지?"
"네."
"이번 선거에서 만약 뜻대로 되지 않을
경우에는 투표함을 바꿔치는 등 갖가지
방법을 다하고, 그래도 안 될 때는
하라고 했다던데 사실인가?"
"그렇게 말한 적은 없습니다. 다만
선거의 의의를 참작해서 그런 뜻의 말을 한
적은 있습니다."
"유권자의 4할에 해당하는 표를 사전에
투표하라고 지시했다지."
"그런 일이 있습니다."
"3인조, 9인조 공개투표로 지시했다지?"
"네."
"피고인은 선거 당시 뜻대로 안 되면
민주당 선거위원을 투표장에서 축출하라고
했다면서?"
"매수되지 않으면 축출하라고 했습니다."
최인규에 대한 재판장의 심문 내용은
이미 3.15 정.부통령 선거전이 한창
벌어지고 있을 때에 언론에 의해서
하더라도 저지른 죄과에 대해서 애써
변명을 늘어놓을 생각을 않는 최인규의
법정 태도는 참으로 훌륭했다.
최인규는 역시 사나이였다.
제5대 민의원과 초대 참의원 의원을
뽑았던 선거를 세칭 <7.29 총선거>라
호칭한다. 1960년 7월 29일에 총선거를
실시했기 때문이다.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이때에
민의원에 입후보한 자는 1,500여 명이나
되었다. 이렇게 많은 입후보자들이
난립하게 되었던 이유는 이른바
<혁신정객>들의 정치 참여가 현저하게
혁신정객이란 말할 것도 없이 사회주의자
또는 사회민주주의자를 말한다. 4.19
사태로 해서 이승만 정권이 쓰러지고
완전한 민주주의가 확립되는 것 같이
보여지게 되자 그동안 숨을 죽이고 있던
혁신정객들이 대거 정계로 뛰어들어
끼리끼리 모여 사회민주주의를 표방하는
정당들을 만들었다. 그런 정당들 가운데의
대표적인 정당이
사회대중당(社會大衆黨)이었다. 이
정치집단은 과거 조봉암을 당수로 해서
결당되었던 진보당(進步黨) 출신자들이 그
주류를 이루고 있었다.
보수 세력에 대항하려면 혁신 세력도
하나로 뭉쳐지는 것이 바람직한 일이었으나
역시 한국인의 생리는 분파 작용에서
그들은 대중의 지지를 받기가 어렵다는
것을 처음부터 점쳐놓고 있던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정당 간부라는 감투나
하나 얻어 쓰자 해서 끼리끼리 정당을
만들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4.19 직후의 두드러진 현상은 혁신
정당의 출현만이 아니었다. 교육자인
중.고등학교 교사들이
교원노조(敎員勞組)를 결성하는 등 의식화
경향이 짙게 표출되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교육자가 노조를 결성하는 따위 사회운동을
벌이는 것이 과연 바람직한 일이냐 해서
논란도 많았다. 교육자도 어떤 면에서는
노동자인 것만은 틀림이 없었다. 그러나
교육자는 노동자이기 이전에 교육자였다.
교육자에게는 교육자로서의 긍지와 자세가
내동댕이치고 의식화 경향을 보여주고
있었으니 그것도 군사 쿠데타의 구실이
되어 주었었다.
그건 그렇고, 7.29 총선거는 투표에
이르기까지는 유례없이 공명했다.
"어떻게 해서 지켜낸 자유민주주의던가?
젊은 학생들의 피를 숱하게 흘려놓고야
겨우 지켜낸 자유요, 민주주의가 아니던가!
이것을 우리가 지키지 않으면 누가
지키랴!"
국민 각자의 마음에 누구나가 이런
결연한 의지가 깃들어 있었기 때문에 결코
부정한 방법으로 선거를 치르려 하지
않았으므로 공명선거를 치를 수가 있었다.
그런데 문제는 개표가 시작되자
공명선거에 먹칠을 하기 시작했다.
반혁명 분자의 표가 압도적으로 나올 수
있단 말이오? 투표에 부정이 없었던들 내
표가 이렇게 적게 나올 수 있단 말인가?
이건 부정선거의 결과야! 그놈의 투표함을
모조리 불살라 버려!"
이래서 개표가 진행되던 중 곳곳에서
잇달아 불상사가 야기되었다. 반혁명
분자의 표가 많이 나왔다고 해서 투표함을
불지르는가 하면 난동을 부렸던 선거구는
어떤 곳이었던가? 역사의 준엄한 심판을
위해서 폭력으로 자유 민주주의를 짓밟았던
무법자들을 여기에 구체적으로 적시하기로
한다.
폭력이 가장 처절한 정도로 난무했던
선거구는 경상남도 창녕(昌寧)이었다. 이
선거구는 박기정이란 인물이 민주당 공천을
도의원(道議員)을 지낸 신파에 속한
인물이다. 이 박기정과 대결한 인물이 당년
45세인 신영주(辛泳株)였다. 자유당에서는
성보경(成輔慶)이란 인물을 공천자로
내세웠기 때문에 신영주는 자유당
당원이었으나 무소속으로 입후보해야만
했다. 이 밖에 무소속으로 5명이 출마를
했기 때문에 창녕 선거구는 8대 1의 치열한
경쟁률을 보여주고 있었다.
그런데 개표가 시작되자 쏟아져 나오는
표는 모두가 신영주를 찍은 표들뿐이었다.
으레 당선될 것이라고 자만해 있던
박기정이 분통이 터질 지경에
이르렀으리라는 것은 불문가지의 일이다.
"투표함을 모조리 불사르고 신영주란
놈을 잡아다가 혼줄을 내버려!"
어떤지 확인할 길은 없다. 어쩜 그의 선거
참모들이 이런 지령을 내렸는지도 모를
일이다. 그렇지 않고야 어찌 군민이 감히
트럭 등을 탈취해 타고 개표장으로 몰려가
88개의 민.참의원 투표함을 모조리
불사르는 만용을 부릴 수가 있겠는가! 그들
폭도화한 군민들 3천여 명은 투표함만
불살랐던 것이 아니었다. 압도적으로 표를
얻고 있던 신영주를 잡아다가 개 패듯
팼다.
"너 이놈, 선거위원들을 돈으로
매수했지? 어서 매수했다고 자백을 해!
자백을 하지 않으면 죽여 버리고 말 테다."
박기정의 지지자들은 이런 자백을
강요하며 신영주를 떡이 되도록 팼다.
이런 상황이 벌어지자, 신영주의
지지자들이 박기정 지지자들과 맞섰다.
마침내 난투극이 벌어졌다. 치고 받고
때리는 난투극 끝에 양쪽 도합 80명이나
되는 부상자를 내는 결과를 빚었다.
전라남도 광산(光山).
광산 선거구는 11명이 입후보했다.
민주당 공천 입후보자는
고몽우(高夢尤)라는 구파 소속의
인물이었다.
문제의 발단은 개표 도중 고몽우와
민주당원(신하)이지만 공천을 받지 못해
무소속으로 입후보한 김삼길(金三吉) 두
사람한테 똑같이 찍은 <쌍가락지> 표가
발단이었다.
이것을 발견한 것이 사회대중당 후보인
강대창이었다.
이건 명백한 개표부정이요! 따라서 이
투표는 무효요!"
강대창이 이렇게 외치자 <옳소!> 하고
호응하는 것이 고몽우의 참관인들을 제외한
여타 후보자들의 참관인들이었다.
"개표부정이 저질러지고 있다!"
"이 선거는 무효다!"
"투표함을 모조리 불질러 버려라!"
급기야는 난동이 벌어졌고 개표장 밖에서
개표 상황을 지켜보고 있던 구경꾼들
80명이 이 난동에 가세했다. 투표함이
불살라지고 개표소는 아수라장이 되었다.
경비경찰이 진압에 나섰으나 이미 폭도화해
버린 무리를 진압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급기야는 군대가 출동했다. 그렇게 해서
겨우 난동은 진압되었으나 26개나 되는
재선거를 치르지 않고는 당선자를 가려낼
수 없는 지경에 이르고 말았던 것이다.
충청북도 괴산(槐山).
충청도 양반도 이제는 옛말이던가? 괴산
선거구에서는 타도에 질세라 투표함을
파괴하는 난동을 벌였다.
괴산 선거구에는 모두 6명이 입후보했다.
훨씬 뒤에 윤보선과 박정희가 대통령직을
놓고 자웅을 겨룰 때, <경상도에는
빨갱이가 많다>라는 말로 결과적으로
윤보선에게 갈 야당 지지표를 박정희한테
던지게 하는 발언을 했던 김사만(金思萬)이
민주당 공천을 받아 입후보했고 여기에
대항한 인물은 자유당원이나 무소속으로
입후보해야 했던 안동준(安東濬)과 자유당
공천을 받아 입후보했던 김원태(金元泰)
한데, 68개 투표함 중 38개의 투표함을
개표한 결과 안동준의 표가 7천여 표나
김사만을 누르고 있었다. 이것을 본
김사만의 지지자들은,
"우리 괴산 땅에서 반혁명 세력을 민의의
대변자로 낼 수는 없다"며 고함을 지르고
투표장으로 몰려들어와 22개나 되는
투표함을 파괴해 버렸던 것이다.
강원도 인제(麟蹄).
강원도 인제땅 유권자들도 결코 타도에
질 수는 없었던 모양이었다. 이 선거구에는
민주당 신파의 김대중(金大中)이 공천을
받아 입후보했고 자유당에서는
전형산(全亨山)을 공천자로 내세웠다.
여기에서는 투표지 전부를 불살라 버리는
난동을 벌였는데, 원인은 30일 하오
선거관리위원회에서 <전형산 후보의 당선을
선포합니다> 하고 전형산이 당선되었음을
선포했기 때문이었다.
그런 지 3시간 뒤인 저녁 6시경에 약
400명의 군중이 선거관리위원회로
몰려왔다.
"4.19 정신에 위배된 반혁명 분자는
사과하라!"
아우성치며 데모를 벌였는가 하면
8시경에는 참의원의 개표가 진행중에 있는
개표장으로 몰려와서 이미 개표가 끝난
민의원의 투표용지를 모조리 불살라 버렸던
것이다.
이 밖에 대전(大田) 갑.을 선거구에서
18개의 투표함을 불살랐고, 부산영도(影島)
을구와 경기도 화성(華城) 을구에서는
도망치는 불상사를 빚어내기도 했다.
각지에서 난동을 부린 난동자들은
하나같이 <4.19 정신>과 <반민주혁명
분자>를 들먹였는데 아전인수(我田引水)도
이에 이르르면 더 이상 뭐라 할 말을 잃고
만다.
분명히 말하지만 한국의 헌정사는 이런
아전인수를 떡먹듯이 잘 하는 무리로 해서
얼룩이 지게 된 것이다. 이러한 무리야말로
정권의 아첨자였으며 불의를 정당화하는
전위대들이었던 것이다. 이런 무리가 판을
치고 있는 한 한국의 민주주의는 [런던
타임스] 기자가 혹평했듯이 <시궁창에서
장미꼬칭 피기를 기다리는 것과
마찬가지>의 난제라 할 수밖에 없는
일이었다.
신파가 80명의 당선자를 냈고 구파에서는
신파보다 하나가 부족한 79명의 당선자를
냄으로써 모두 167석을 얻었다. 233석 중
167석이라면 압도적인 승리라 장담해도
무방했다. 그래서 총선 결과에 대해서
식자들은,
"민주당이라고 하면 막대기를 꽂았어도
투표해 주었을 것이다"라며 입을
삐쭉거렸다.
그도 그럴 것이 <저런 것도 인물이라고
국회의원으로 뽑았느니> 하고 빈축을
사기에 족한 경력의 인물들도 적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233개의 의석 중 나머지 66개의 의석
분포는 어떠했던가? 구 자유당계가 11석,
순무소속이 24석, 무소속 중 신파 1석,
사회대중당 3석 등이었다. 나머지 19석은
개표 때에 난동으로 재선거를 치르거나
일부 재선거를 실시해야만 당선자를 낼 수
있는 지역들의 몫이었다.
한데, 7.29 총선거에서는 우리가 상상할
수 없었던 이변이 일어났다. 3.15 부정선거
혐의로 구속돼 있는 전 심계원장
최하영(崔夏永)과 전국회부의장
이재학(李在鶴)이 옥중 출마를 해서 당선된
것이다. 최하영은 경기도 이천(利川)
선거구에서, 그리고 이재학은 강원도
홍천(洪川) 선거구에서. 이 사실을 놓고
사람들은,
"두 사람이 평소에 선거구 관리를 잘한
덕분이다."
"한국 사람은 원래 심성이 곱고, 약자
사람한테 표를 몰아주게 된 것이다."
"두 사람은 부정선거에 가담할 그런
부도덕한 인물이 아닌 인격자로서 존경받을
만한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등의 이유로 옥중 당선의 명예를 안을 수
있었던 것이라고 평했다.
어느 평이 진실성을 띠고 있는지는
하늘과 본인만이 알고 있을 것이다. 어쨌든
옥중 당선은 역사에 기록할 만한 이변이
아닐 수 없었다.
7. 7월 재판
잡아들여야 할 놈들은 아직도 많았다.
이제 세상은 뒤집힌 것이다. 4.19가
부정선거를 규탄하는 데 목적을 두고
있었다고 해서 부정선거 관련자만을
잡아들여 가지고 다스리는 것만으로는 국민
감정이 진정될 리가 없었다. 혁명을
혁명답게 승화시키기도 어려운 일이었다.
이승만 정권 12년간에 걸쳐 얼마나 많은
비정과 부정이 저질러졌던가!
어디 그뿐인가. 이승만의 독재정치
지속을 위해서 저지른 <정치 음모극>은 또
얼마나 많았던가. 이승만의 최대의
암살사건을 비롯해서 뉴델리 밀회
조작사건, 김성주(金聖株) 불법감금
총살사건, 간첩죄를 적용하여 합법을
가장해서 죽인 조봉암(曺奉岩) 사건,
부통령 장면 암살 미수사건, 민주당 전복
음모사건 등 열거하자면 한이 없다.
이 모든 사건은 이승만의 영구 집권을
꾀하기 위해 저질렀던 사건들이었다. 사건
관련자들은 단매에 때려 죽여도 시원치
않을 놈들이었다. 그러한 정치음모극은
역사를 바로잡아 놓기 위해서도 분명히
흑백을 가려 놓아야만 했다. 그러자면 사건
관련자들이 살아 있고 세상이 뒤집힌 이
기회에 손을 대어야만 했다. 세월이 흐르다
보면 관련자들이 자연사해 버릴 수도 있고
또 증거를 인멸해 버릴 우려도 없지 않다.
분명히 해놓을 절호의 기회였다. 정치
음모극에 억울하게 희생된 원혼을 달래고
위로하기 위해서도 저질러진 정치 음모극의
진상은 반드시 밝혀야 옳았다.
그런데도 어쩐 일인지 허정은 이런
사건들을 파헤칠 생각을 하지 않고 있는 것
같았다. 비혁명적 방법으로 혁명과업을
수행하려는 생각 때문이었을까? 구국청년단
대표 고정훈(高貞勳)만이,
"백범 김구 선생을 암살한 배후에는
김준연(金俊淵)을 비롯한 OOO, OOO 등이
있다. 이들을 잡아들여 엄중 취조를 하면
김구 선생의 암살 배후는 백일하에 밝혀질
수 있다"며 목청을 돋구고 있을 뿐이었다.
고정훈이 김구 암살문제만을 거론했던
것은 아니었다. 국회위원장이었던 신익희가
함상훈(咸尙勳)이 떠들어댔던 사건, 동해안
반란사건의 내막, 김성주 사건 등에
대해서도 폭로했다.
6.25 전쟁 때는 육군 중령으로서 KLO
부대 책임자였고, 군에서 나온 뒤에는
조선일보 논설위원으로 활약하고 있었기
때문에 정보 입수가 가장 용이한 위치에
있었다. 그랬기 때문에 그는 모든 정치
음모극에 대한 정보를 입수해 놓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모든 흑막을
보이려는 그의 투쟁은 메아리 없는 포효에
지나지 않았다. 그것을 척결해 줄
과도정권이 그의 포효에 귀를 기울여 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물론 사건에 따라서는 국회에서 조사단을
구성하기도 했고 또 검찰에서 진상 조사를
했었다. 그러나 <일사부재리(一事不再理)의
원칙>인가 뭔가 때문에 지나간 사건을 다시
심리하기는 어렵다고 하던가?
"그렇다면 뭐가 혁명이란 말인가?"
이러한 의문이 제기될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었다. <4월혁명>은
혁명이면서도 혁명이라 하기가 어려운 점이
바로 여기에 있었다.
내각책임제 개헌안이 국회에 상정되어
대체토론에 붙여졌을 때, 무소속의
박세경(朴世徑)이 의정단상에서 이런 말을
했다.
"4.19와 4.26의 사태를 신문에서는
혁명이라고 하나, 혁명이라고 할 때는 어떤
조직적인 단체가 정권을 장악하는 것이므로
이 사태가 과연 혁명이냐 하는 것을
글깨나 배웠다는 식자라면 누구나 이
말에 공감하고 있었을 줄로 안다. 혁명이란
어떤 조직적인 단체가 혁명 대상을 뒤집어
엎고 정권을 장악함으로써 비로소 혁명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4월혁명에는 조직적인
단체가 없었다. 과도정권이라는 것도
이승만이 임명했던 외무장관이 수반이 되어
정부를 이끌어가고 있는 형편이었다. 그런
판국에 4월혁명이라니 말도 안 되는
수작이라는 반론이 제기될 만한 일이기도
했다.
더구나 4월혁명의 직접적인 도화선이었던
3.15 부정선거 관련자들에 대한 재판을
하자면 마땅히 이들을 처벌하기 위한
법률을 따로 특별히 만들어서 재판을
해야만 했다. 그래야만 <혁명재판>이라 할
처음부터 특별입법 따위는 생각도 않고
있었다. 기존의 법률로써 재판을 하려
했다. 특별입법을 하자 해도 아직은 국회가
자유당 국회이기 때문에 혁명입법은
어렵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을까?
만일 자유당 소속 국회의원들이 말을
들으려 하지 않거든 <혁명입법에 반대하는
자들은 민주 반역자다. 그런 자들은 다른
죄상을 들추어 내서라도 이 사회에서
도태시켜 버리고 말겠다>는 이 한마디로
엄포를 놓아도 따라올 것이 틀림없었다.
그런데도 과도정권은 처음부터 혁명입법
따위는 생각지도 않고 있었던 것이다.
괘씸하기 짝이 없는 일이었다. 그래 가지고
무슨 재간으로 혁명과업을 수행하겠다는
것인지 답답하기만 했다.
그래서 그런지 처음 3.15 부정선거
관련자에 대한 재판이 벌어지자 언론에서는
<혁명재판> 어쩌구 했으나, 혁명재판
운운하기에는 좀 멋적었던지 아니면 그
모순성을 깨달았던지 <7월재판>이라 호칭을
바꾸어 부르기 시작했다. 7월에 들어서면서
재판이 열리기 시작했기 때문에
7월재판이라 일컫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필자도 여기에서는 7월재판이라
표현하기로 한다.
한데, 그까짓 명령에 따라 움직였던
송사리떼들에 재판 따위야 소개해서
무엇하겠는가. 그들도 민초(民草)와
다름없는 불쌍한 무리에 지나지 않았으니
이른바 <원흉(元兇)>들에 대한 재판만
소개하기로 한다.
7월재판의 첫 공판이 열린 것은 1960년
7월 5일이었다. 그 무렵은 민.참의원
선거전이 한창 열기를 띄어가기 시작했다.
3.15 부정선거에 관련된 자들에 대한
7월재판은 모두 부정선거관리,
부정선거모의, 부정선거지령, 부정선거자금
등 4개 부분으로 나누어 심리되었다. 이
밖에 발표명령자를 가려내기 위한 것과
정치깡패 등이 7월재판에서 다루어졌다.
7월 5일의 첫 공판은 <부정선거관리>에
대한 것이 먼저 심판대에 올랐다. 심판대에
오른 피고인들은 전 내무부 장관 최인규를
비롯해서 전 내무부 차관 이성우(李成雨),
전 치안국장 이강학(李康學), 전 내무부
선거대책위원장이었던 한희석(韓熙錫) 등
5명이다. 그렇다고 해서 이날 법정에
출정했던 피고인들은 5명만이 아니다. 3.15
부정선거에 관련된 자들은 전원이
출정했다.
이들 부정선거 관리문제로 해서 재판에
회부된 자들을 심판할 법관은 주심에
부장판사인 정영조(鄭永祚), 배석판사에
석은만(石銀萬), 유현석(柳鉉錫)이었고,
관여 검사는 김병리(金秉離),
오탁근(吳鐸根), 황은환(黃銀煥) 등
7명이다. 여기에 이들 피고인들의
범죄사실을 변호하기 위해 동원된 변호삭
무려 38명이나 되었다. 그러니 법정 안이
얼마나 장관이었겠는가. 이렇게 많은
변호사들이 한꺼번에 출정했다는 것은 해방
따라서 변호사들은 신바람이 나 있었다.
(해방 후 처음인 대사건에서 한번
멋들어진 변론을 펼쳐 보이리라.)
저마다 스스로에게 다짐을 주고 있었다.
하긴 변호사로서의 명성은 이런 사건에서
빛을 발하게 되는 법이니 변호사들이
신바람이 나 있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7월재판의 첫 공판은 서울 지방법원의
대법정이었다. 300여 명 가량의 방청객들이
몰려들어 가뜩이나 삼복더위에 시달리고
있는 법정 안을 더욱더 물켜 놓았다.
KBS에서는 이 역사적인 심판을
중계하겠다고 아나운서와 엔지니어 등
중계반이 파견되어 마이크를 설치해 놓고
있었다. 그런가 하면 법정 밖 뜰에는 미처
방청권을 얻지 못한 시민들이 입추의 여지
무릅쓰고 공판이 열리기만을 학수고대하고
있었다.
오전 10시가 되자, 오랏줄에 묶인
배제인(裵濟人)을 선두로 해서
손창환(孫昌煥), 최재유(崔在裕),
최인규(崔仁圭)의 순으로 입정했다.
어제까지 국회부의장이었던
이재학(李在鶴)의 얼굴도 보였고
임철호(林哲鎬)의 얼굴도 보였다. 출정
피고인들은 모두 30명이었다. 그들 뒤를
이어 불구속의 곽의영(郭義榮)과
유각경(兪珏卿)이 입정했다. 남성만의
피의자 속에 뚱뚱한 여자가 한 사람 끼어
있다는 것은 다분히 이채롭기만 했다.
그들 피고인들은 모두가 하얀 모시로
몸을 감싸고 있었다. 푸른 수의를 걸치고
금방 손질한 것처럼 단정하게 손질되어
있었다. 여기가 법정이 아니라면 꼭 더위를
피해 마실 나온 동네 아저씨로 보기에
알맞을 것 같았다.
"단기 4293년 형(形) 제 3173호......."
재판장 정영조가 개정을 선언했다. 법정
안은 물을 끼얹은 듯 삽시간에 숨을
죽였다.
먼저 간단한 인정심문이 있었다.
"피고인 최인규."
재판장의 호명에 최인규가 숙이고 있던
고개를 번쩍 쳐들었다. 구속되어 있는
사이에 죄과에 대한 번민을 했는지 장관
재직 때보다는 조금 야위어 보였다.
"피고인 최인규의 나이는?"
"마흔 둘입니다."
사뭇 달랐다. 꽤나 고분고분한 목소리였다.
"재산은 얼마나 되는가."
"한 3,4천만환쯤 됩니다."
"자유당원으로서의 직책은?"
"국회의원이므로 자동적인 중앙위원이
되었습니다."
"전과는 없는가?"
"없습니다."
"피고인 이성우, 나이는?"
"마흔 살입니다."
"재산은 얼마나 되는가?"
"동산, 부동산 합해서 1억환입니다."
"정당 관계는?"
"없습니다."
"피고인 이강학, 나이는?"
"서름 여덟입니다."
"3천만환쯤 됩니다."
"학력은?"
"일본대학 경제과를 나왔습니다. 경력
가운데 일본군 육군소좌(陸軍少佐:소령)라
함은 소위(少尉)의 잘못입니다."
이강학은 묻지 않은 말까지도 곁들였다.
"피고인 최병환은 몇 살인가?"
"마흔 셋입니다."
"재산은?"
"부동산이 오백만환, 동산이 백만환쯤
됩니다."
"정당 관계는 없는가?"
"없습니다."
"학력은?"
"홍익대학을 졸업했습니다."
"피고인 한희석 나이는?"
"주소는?"
"이사한 지 이틀 만에 일을 당했기
때문에 지금은 어딘지 기억할 수가
없습니다."
하긴 그럴 것이었다. 4.19가 터지자 겁을
집어먹었던 그는 부랴부랴 거처를 옮겼던
것이었으니까.
"재산은?"
"글세요. 집이 남아 있었더라면
3천만환쯤 될 텐데, 가재 도구까지 다
깨어졌으니 지금은 알 수가 없습니다."
"자유당에 언제 가입했나?"
"4285년 5.20 선거 전에 가입했습니다."
"자유당 선거대책위원장이었지?"
"네, 기획위원회 의장도 겸하고
있었습니다."
수심이 가득한 표정들을 짓고 있었는데
유독 한희석만이 벙긋벙긋 웃음을 머금고
있었다. 그의 얼굴에서는 처음부터 끝까지
웃음이 사라질 줄을 몰랐다. 그 웃음은 이
재판을 비웃고 있는 것처럼 받아들여지기도
했고 자신을 조소하고 있는 것처럼
받아들여지기도 했다.
이어서 관여 검사 김병리가 일어나
그들에 대한 공소장을 낭독했다. 공소장
낭독은 1시간이나 걸렸다.
"첫째, 공무원이 지방장관들에게
선거운동을 지시 강요했고, 둘째는 선거인
명부를 거짓으로 꾸몄으며, 셋째는 수많은
선거자금을 뿌려 투표권을 사들이게 했다.
넷째는 선거의 자유분위기를 깨뜨리고
3인조, 9인조를 동원해서 공개투표를
동원해서 야당참관인을 축출했고, 여섯째는
4할 무더기표를 사전 투입했는가 하면,
일곱째는 직권을 남용했고, 여덟째는 허위
공문서를 만들어 이것을 행사했다......."
이것이 공소장의 내용이었다.
공소장의 낭독이 끝나자 사실심리에
들어갔다. 그들은 재판장의 물음에
대체적으로 시인하는 진술을 했다.
사실심리는 짤막한 시간 동안에 간단히 몇
가지만 묻는 데 불과했다.
부정선거 관리에 관련된 피고인들에 대한
인정심문과 범죄사실에 대한 간단한 심문이
끝나자, 이어서 부정선거 모의에 관련된
피고인들에 대한 인정심문과 공소장이
낭독되었다.
이 사건에 관련된 피고인들은 꽤나
최인규, 이강학, 한희석을 비롯해서
이재학, 이중재(李重宰), 정기섭(鄭起燮),
정문흠, 유각경, 이존화(李存華), 정존수,
박용익, 조순, 장경근(張璟根),
박만원(朴晩元), 임철호 등 무려 15명에
이르고 있었다.
이들에 대한 공소장은 부장검사
오탁근(吳鐸根)이 낭독했다.
<야당이 한강 백사장을 연설 장소로
사용하려고 해도 그것을 관권으로 쓰지
못하도록 했을 뿐만 아니라 전국 각지에서
민주당의 선거연설을 경찰로 하여금 방해케
했고, 이승만과 이기붕의 득표수가 너무
많아지자 전국의 각급 선거위원회로 하여금
득표수를 조절케 했으며 공무원으로 하여금
선거운동을 하도록 강요하는 모의를 했다.>
공소장 낭독이 끝나자, 재판장 정영조는
피고인들을 한바퀴 훑어보고 엄숙한
목소리로 주의를 환기시켰다.
"피고인들에 대한 공소사실을 지금
검사가 낭독했으니까, 각자는 자기의
범죄사실을 잘 알고 있으리라 본다. 그
범죄사실에 대해서 심문하겠는데 순순히 다
진술하겠지? 묵비권을 행사하거나 해서
재판 진행에 차질이 없도록 바란다."
이 말을 들은 전 피고인들은 감히 <네>
하고 대답하기도 송구한 듯 고개만 가볍게
숙였을 뿐이었다.
이어서 인정심문에 들어갔다.
"이중재 피고인의 가족은?"
"조모와 처와 4남 2녀가 있습니다."
"재산 관계는?"
됩니다."
"검찰에서 진술한 경력이 틀림이
없는가?"
"네, 없습니다."
"언제 자유당에 입당했지?"
"4288년 11월입니다."
"누구의 권유를 받았는가?"
"이기붕의 권유입니다."
"지금 자유당 중앙위원이며, 기획위원회
부의장이지?"
"네."
"피고인 박만원! 가족과 재산은?"
"양친이 계시고 처와 4남 4녀로 모두
열둘입니다. 재산은 모두 4천만환 가량
됩니다."
"피고인 박용익, 가족과 재산은?"
3천만환 가량 됩니다."
"이재학과의 관계는?"
"학교 동창입니다."
"자유당 원내총무는 언제 했지?"
"작년입니다."
"피고인 조순, 가족 관계와 재산은?"
"서울에 처와 3남 3녀가 있고 고향에
모친과 아우가 있습니다. 재산은 한
1천5백만환 가량 될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부동산이 많다던데?"
"서울에 2천만환 가량 나가는 집이 있고
잡혀 있는 지프차가 한 대 있습니다."
"지프가 어디 부동산인가!"
재판장 정영조는 처음으로 피고인의
엉뚱한 진술을 날카롭게 쏘아붙였다.
만주 파견 연락원으로 해방될 때까지
종사했다던데 사실인가?"
"네, 사실입니다."
독립운동에 종사했다고 해서 그럴까?
재판장 정영조는 다음 질문부터는 깍듯이
존대말을 썼다.
"만주에 언제 어떻게 갔소?"
"스물두 살 때 갔습니다. 농민운동을
하다가 일제의 등살에 못 이겨 망명을
했습니다."
"임시정부 연락원이란 우리나라의
연락이요?"
"아닙니다. 중국 내의 연락입니다."
이존화는 국내에서 농민운동을 하다가
22세 때 만주로 망명했다고 했다. 망명
뒤에는 임시정부 연락원으로서 독립운동에
기록에서도 <이존화>란 이름 석 자를
발견할 수 없으니 어찌된 노릇일까? 하긴
군사 쿠데타 후의 일이지만 만주에서 일본
관동군의 정보원(밀정) 노릇하던 놈도
경력에는 독립운동을 했다고 내세우던
판국이었으니까. 오죽하면 해방 직후 <미국
가서 박사 못 되고, 만주 가서 독립군 못
되고, 중국 가서 장군 못 된 건 바보>라는
말이 돌기까지 했겠는가!
그건 그렇고.
"피고인 유각경, 가족과 재산은?"
"2남 2녀입니다. 집 하나밖에 없는데,
그것이 아마 한 2천만환은 나갈 것입니다."
"학교는?"
"정신(貞信)을 나오고 부모가 북경으로
유학을 보내서 거기서 전문학교를
"대한부인회 최고위원은 언제 되었나?"
"한 6년 되었습니다."
"최고위원이 몇인가?"
"박마리아, 임영신, 저하고 셋입니다."
"피고인 정기섭, 가족과 재산!"
"노모가 계시고 저의 내외와 6남 5녀가
있습니다. 또 손자가 여덟 명, 손녀가 세
명, 또 제 선친의 아우 둘이 있어 모두
스물 일곱 명입니다. 재산은 한 5천만환
됩니다. 병원을 하니까 동산 부동산이
많습니다."
"피고인 정존수, 가족과 재산?"
"처와 4남 1녀가 있고, 재산은 한
2천만환 가량 되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피고인 이재학, 재산은?"
"한 1천만환 가량 됩니다."
"그건 집만 5백만환쯤 나가기
때문에......."
"피고인 임철호, 가족과 재산은?"
"내외하고 2남 1녀를 데리고 있습니다.
재산은 모두 합해서 3천 5백만환 가량
된다고 했는데 빚이 한 5,6백만환 됩니다."
"피고인 정문흠, 가족과 재산은?"
"제 내외하고 자식 내외, 손자 셋, 손녀
둘 이렇게 아홉 명입니다. 재산은 동지들이
돈을 모아서 사주었는데, 집이 한 1천
2백만환 나갈 것 같고 자동차까지 합해서
한 1천 5백만환 가량 되지 않나 싶습니다."
"교육은?"
"교육은 제대로 못 받았습니다.
독립운동자로서 공부는 둘째로 하고 총
쏘기만 배웠지요."
강조했다. 공부는 둘째로 하고 총쏘기만
배웠다는 그는 언제 어디서 독립운동에
종사했다는 것일까? 언제 어디서 누구하고
독립운동을 벌였다는 것인지 좀 구체적으로
진술했던들 독립운동사 연구에 도움이라도
됐을 것을.
이상은 피고인들에 대한 인정심문
가운데서 가족 관계와 재산 관계만
발췌해서 소개했다.
그러면 어째서 그다지 중요하지도 않은
가족 관계와 재산 관계만을 발췌해서
소개했는가? 그것은 이들이 선택되었다고
할 수 있을 만큼 유복한 생활을 하고
있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다. 그들은
자손 관계에 있어 얼마나 다복했던가. 재산
관계에 있어서는 얼마나 유복했던가!
이기붕을 위해서 부정선거를 모의했던가?
이날, 필자도 법정에 들어가 이들의
재판을 지켜보았다. 그리고 얻은 결론은
오직 하나였다.
<정치를 한다면서 역사를 두려워할 줄
몰랐기 때문에 저들은 오랏줄에 묶여
역사의 심판을 받게 된 것이다.>
역사(歷史)를 두려워할 줄 모르는
정치인에게는 반드시 역사의 심판이
따른다는 것을 역사 스스로가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3.15 부정선거 관련자들을 심판하는 재판
광경을 지켜보고 있노라면 법관(法官)이란
느낌이 든다. 하루종일 범법자들과
<했느냐, 안 했느냐?> 하고 범죄 내용을
파헤치느라 씨름을 하고 있어야 하니 <저
노릇을 하려고 그 어렵고 고된 사법시험의
난관을 뚫고자 고생을 했는가?> 하고
오히려 동정을 하게 된다.
부정선거관리와 부정선거모의 관련자들에
대한 1차적인 공판이 끝나자 관계
사법관들은 이어서 <부정선거지령>
관련자들에 대한 공판을 진행했다.
그러자니 그들 사법관들의 정신적 육체적
피로가 어떠했겠는가!
부정선거지령에 관한 피고인들은 모두가
전직 장관들이었다. 홍진기(전 법무부
장관)를 비롯해서 송인상(宋仁相:전
재무장관), 최재유(崔在裕:전 문교장관),
이근직(李根直:전 농림장관),
구용서(具鎔書:전 상공장관),
손창환(孫昌煥:전 보사장관),
김일환(金一煥:전 교통장관),
곽의영(郭義榮:전 체신장관) 등 9명이었다.
그들에 대한 공소장은 부장검사
염창렬(廉昌烈)이 낭독했다.
"피고인 등은 기타 국무위원과 같이 각기
자유당 중앙위원으로 있는......
국무회의에 참석하여 안건 의결 및 양해
사항 등의 합의에 관여하여 오던 자들인
바...... 이들은 이승만, 이기붕을 각각
정.부통령에 당선케 할 목적으로 작년 3월
국무회의에서 공무원의 선거운동을
의결하고 이를 각 부처를 통하여 전국
공무원에게 지시하여 <공무원 친목회>라는
선거운동을 하게 하였고...... 지금 3월
15일에는 자유당 기획위원인 한희석,
이존화 등으로부터 자유당의 투표율이
95퍼센트를 초과한다는 통고가 있자, 이날
국무회의 투표수를 조작 삭감케 하도록
이강을 통하여 각 도지사, 경찰국장에게
지시하도록 의결, 투표수를 제멋대로
증감케 하였다......."
이것이 공소장의 주요 골자였다.
이들에 대한 첫번째 공판 역시
인정심문에 그쳤던 것이나 장관 감투를
쓰고 있던 이들의 생활상을 엿보기 위해서
인정심문의 내용을 개략적이나마
소개하기로 한다.
심문은 먼저 재무부 장관이었던
송인상에서부터 시작되었다. 재판장
경어를 또 때로는 경어인지 하대인지 모를
애매모호한 말투를 썼다. 어째서 그랬을까?
"송인상, 가족과 재산 관계를 말하시오."
"부모가 있고 아내와 1남 4녀가
있습니다. 재산은 3천만환입니다."
"교육 관계는?"
"경성고등상업학교(서울 상과대학
전신)를 졸업했습니다."
"정당에 가입한 일은?"
"부흥부 장관으로 있을 때 자유당
중앙위원이 되었습니다."
정당에 가입한 일이 있느냐는데 부흥부
장관으로 있을 때 자유당 중앙위원이
되었다는 것은 또 무슨 소리인가?
"당에 입당을 해야 중앙위원이 되구말구
하는 게 아니겠소?"
국무위원이 한 분만 빼놓고 다 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재판장 정영조는 애매모호한 대답에
역정이 솟구치는 모양이었다. 신경질적으로
심문을 되풀이했다.
"결국은 가입의사를 표명했기 때문에 된
것이 아닌가?"
"가입원을 낸 일은 없습니다."
"가입원을 낸 일은 없어도 중앙위원을
감수했으니 의사표명이나 같잖아!"
송인상의 이 답변을 통해서 자유당은
국무위원으로 등용한 인물은 의무적으로
당에 입당시키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재판장은 송인상에 이어 홍진기에 대한
인정심문을 시작했다.
"예, 모친과 처와 2남 4녀입니다."
홍진기의 태도는 송인상보다 한껏 더
공손했다. 법정 태도만이라도 좋은 인상을
주어 형량을 가볍게 해보자는 속셈인 것
같았다.
"재산은?"
"예, 약 3천만환 가량 됩니다."
홍진기는 편모 슬하에서 자랐다. 그의
모친은 왕십리에서 채소 장사를 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었다. 그런 하찮은 장사를
하면서도 자식을 고등교육까지 시킨 것을
보면 홍진기의 모친은 상당히 여장부였던
것 같다. 한데, 그렇듯 가난했던 홍진기가
어느 사이에 3천만환씩이나 되는 재산을
형성할 수 있었던 것일까?
"교육과 경력은 검찰에서 말한 것이
"네."
"법무부 장관은 언제 했소?"
"4291년 2월 20일부터 4293년 3월
28일까지 했습니다."
"그 후 내무부 장관으로 갔지? 사임한
것은?"
"4월 25일입니다."
"피고인은 본 건 이외에도 다른 사건으로
제소된 적이 있지?"
"네, 있습니다."
"무슨 사건이요?"
"살인교사, 무고교사로 되어 있습니다."
홍진기는 부정선거 지령사건 이외에도
발포명령자 사건과 이른바 민주당
전복음모사건으로 기소되어 있었다. 이
민주당 전복음모사건에 대해서는 필자가
있지만 사건 내용을 간단히 설명하면
이렇다.
1952년 6월 25일 부산 충무로 광장에서
있었던 6.25 2주년 기념식장에서 대통령
이승만에 대한 암살미수사건이 벌어진 일이
있었다. 범인은 김시현(金時顯)과
유시태(柳時泰)였다.
한데, 1958년에 이르러 마산 형무소에서
복역중이던 김시현이 재심을 청구하는
탄원서를 냈다. 이 탄원서에 김시현은
<이승만을 암살하려 한 것은 본인의 의사가
아니라 민주국민당(民主國民黨:민주당
전신)의 조병옥, 장면, 서상일 등의 교사에
의하여 암살하려 했던 것이다>라고 밝혔던
것이다.
물론, 김시현이 탄원서에서 밝힌 조병옥,
허위였다.
김시현은 어떻게 해서 이런 허위를
날조해서 재심을 탄원하게 되었던 것인가?
바로 배후에서 이기붕, 홍진기 등이
이태희(李台熙)라는 사람을 내세워 <그렇게
탄원하기만 하면 밝은 햇빛을 쏘이게 해줄
뿐만 아니라 여생을 편안히 살 수 있도록
해주겠다>고 교사해서 그런 날조된 탄원을
하게 되었다고 한다.
그들의 목적은 물론 이 탄원서를 근거로
해서 조병옥, 장면 등을 때려 잡자는 데
있었음은 새삼 부연할 필요도 없다. 그런
까닭으로 해서 이 사건을 세칭 <민주당
전복음모사건>이라 일컫게 되었고 4.19가
터지자, 홍진기는 <무고교사혐의>로
기소되어 있었던 것이다.
"가족은 처와 2남 4녀가 있습니다.
재산은 2천만환입니다."
"정당 관계는?"
"다른 피고의 말과 같이 4292년 10월경에
자동적으로 자유당 중앙위원이 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피고인 신현확, 가족과 재산은?"
"처와 1남 4녀가 있고 재산은 약 3천만환
됩니다."
"교육은?"
"경성제대(京城帝大:서울대학 전신)
문학부를 졸업했습니다."
"피고인 이근직, 가족과 재산은?"
"가족은 3남 3녀에 처가 있습니다.
재산은 2천만환 됩니다."
"피고인 구용서, 가족과 재산 관계를
"아내와 1남 1녀입니다. 재산은
3천만환입니다."
"피고인 손창환, 가족과 재산은?"
"처와 2남 1녀가 있고 재산은 병원을
하고 있기 때문에 시설까지 하면 한
5천만환 됩니다."
"정당 관계는?"
"없습니다."
"다른 장관은 다 자유당 중앙위원이
되었다는데, 피고인 한 사람만 안 된
이유가 뭐요?"
"저 자신은 정당에 취미가 없고, 또
대한적십자 총재이고 해서 보사부 장관이라
해도 사회복지 사업은 정당을 초월해서
해야 사업이라는 신념을 가졌기
때문에......."
"가족은 모친, 처, 2남 5녀입니다.
재산은 1천만환 정도입니다. 집이 작기
때문에......."
"피고인 곽의영, 가족과 재산은?"
"딸이 다섯이고 아들이 셋, 해서
8남매이고 모친하고 처, 그리고 제
남동생이 있어 열두 식구올시다. 재산은
서울에 집이 하나 있고 지프차가 있으며
모친이 농사 짓는 부동산이 있습니다."
"재산이 전부 얼마나 돼?"
"약 2천만환 가량 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3.15 부정선거에 관련된 이들 피고인들은
마치 똑같이 의논이나 한 듯이 그들의 재산
정도가 2천만환이 아니면 3천만환이라고
진술하고 있었다. 그들이 살고 있던 집만
호가하고 있는 집들이었는데, 그렇다면
이들은 덩그라니 집 한 채 이외에는 전혀
재산이 없었다는 얘기가 된다. 그런 점으로
미루어 볼 때, 이들은 그들의 재산 정도를
줄여서 답변했던 것이 분명했다. 행여
곧이곧대로 답변했다가 <권력을 미끼로
부정축재를 한 게 아니냐?> 하고 재산
형성에 대한 추문을 받을 것이 두려워 재산
정도를 줄여서 답변했던 것일까?
부정선거지령 관련자들에 대한
인정심문이 끝나자, 이어 부정선거자금
관련자들에 대한 공판이 열렸다. 이
사건으로 법정에 세워진 인물들은 박용익,
송인상을 포함해서 금융계의 거물들이라는
김영찬(金永燦:전 산업은행 총재),
김진형(金鎭炯:전 한국은행 총재),
배제인(전 한국은행 업무담당 부총재) 등
6명이었다.
이 공판에 관여한 검사는
이용훈(李龍薰), 이택규(李宅硅) 두
사람이었다. 검사의 공소장 낭독에 이어
인정심문이 있었을 뿐 구체적인 사실심리에
들어가지 않았으므로 이들에 대한 인정심문
내용에 대해서는 생략하기로 한다.
"이런 죽일 놈들, 이놈들 이거 아직
제대로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는 게
아냐?"
이 무렵의 말투는 누구라 할 것이 없이
<죽일 놈 살릴 놈> 하며 거칠기만 했다.
"이런 놈들을 데려다 놓고 뭐 이것저것
물을 게 뭐가 있어? 모조리 광화문
네거리에 세워 놓고 탕탕 해 버리고 말
일이지."
"그러게 말일세. 어차피 이놈들 모조리
죽여 버릴 놈들 아닌가. 공연히 시간
낭비하고 있을 게 뭐야, 에이 답답한
친구들 같으니."
"옳은 말일세. 이런 놈들은 모조리
요절을 내가지고 옛날처럼 광화문 네거리에
효수를 해야 옳아, 그래야 정권 쥔 놈들이
다시는 극악무도한 짓을 못하는 법이라고."
파고다 공원이든 또는 다방이든 두세
사람 모이기만 하면 화제는 의논이나 한
듯이 꼭 같았다. 바로 어제 있었던
부정선거관리 관련자들에 대한 것이
어제 공판은 KBS 라디오 방송으로 전국에
중계되었다. 또 신문에서도 상세히
보도되었다. 화제가 될 수밖에 없었다.
재판을 받는 피고인들이 좀 사나이답게,
그리고 정직한 자세로 재판을 받았다면
오히려 동정을 받았을지 모를 일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정직하지가 못했다.
인정심문에서 재판장이,
"그대들의 재산 정도는 각각 어느
정도지?" 하고 물었을 때 정직하게 대답한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
모두가 의논이라도 한 듯이 줄이고 또
줄여서 대답을 했다.
앞의 인정심문 내용을 통해서 독자들도,
"그래 자유당 내에서도 최고위직에 있던
자들의 재산 정도가 기껏해야 몇
품게 되었을 것으로 알지만 그때에도 역시
일반 대중은 그런 의심을 품었던 것이다.
"야아, 이놈들 이거 웃겨도 보통 웃기는
놈들이 아니구나. 그래 배제인, 손창환이가
기껏해야 5천만환 정도의 재산밖에 갖고
있지 않단 말야?"
"자유당 선거대책위원인 이존화란 놈은
또 어떻고. 그놈 고작 재산이 2백만환밖에
안 된다고 하잖았어?"
죽일 놈, 살릴 놈하며 욕설이 그들에게
집중되었다. 내무부 지방국장이었던
최병환의 경우는 어떤가? 그는 재산이 고작
6백만환 정도밖에 되지 않는다고 했다.
내무부의 경우, 지방 국장직은 관료로서는
노른자위라고 했다. 시장, 군수의 인사를
좌지우지할 수 있는 권한이 주어져 있는
최병환이 그 자리에 앉아 있으면서도 단돈
한푼도 긁어먹지 않았단 말인가? 그의 재산
정도가 고작 6백만환 정도밖에 되지 않는
것이 사실이라면 그는 <청백리>라 할 수
있었다. 자고로 청백리란 재물에만 탐을
내지 않았던 것은 아니었다. 권력에 빌붙는
것까지도 치사스럽게 여기고 있었다. 만일
권력이 부당한 요구가 있게 되면 기꺼이
괘관(掛冠)해 버리는 것이 청백리의
마음가짐이었다. 최병환이 청백리였다면
부정선거를 자행하려는 무리 속으로 휩쓸려
들어갈 것이 아니라 깨끗이 벼슬을 내놓고
물러 앉아야만 옳았다.
한마디로 개수작이었다.
재산 정도를 밝힌 부정선거관리
관련자들의 개수작을 종합해 보니까,
되지 않았다.
"이런 좁쌀 같은 놈들을 장관이다 뭐다
감투를 씌워가지고 고굉지신역을
당부했으니 이승만이 망하지 않고 배겨날
수가 있어?"
마침내는 욕설이 이승만에게까지 미쳤다.
이승만은 먹지 않아도 될 욕설까지도
공짜로 먹게 된 것이다.
"왜 사나이답게 떳떳한 태도를 유지하지
못해! 내 재산이 얼마다 하고 사실대로
밝혔다고 해서 누가 빼앗을 것도 아닌
바에야 왜 좀 떳떳하게 굴지를 못해?"
일반 서민대중의 이들에 대한 욕설을
여기에 소개하자면 한이 없다.
하여간에 그들은 또 부정축재자로 불리면
어쩌나 하고 걱정을 했는지도 모를
된 몸, 부정축재자로 몰리면 또 어떤가.
몸뚱이 하나만 제외하고는 모조리 국가에
헌납함으로써 민족 앞에 저지른 죄과를
속죄하겠다고 했던들 그들은 오히려 동정을
받았을 것이고 그들의 인생에 막을 내리고
관뚜껑을 닫게 되었을 때 그들에 대한
평가는 좀더 달라지게 되었을지도 모른다.
부정선거관리와 부정선거모의에 관련된
자들에 대한 공판이 열린 다음날, 검찰은
부정선거관리에 관한 5명의 피고인들에게
국가보안법 제1조 반국가 단체 구성죄를
적용키로 하고 이들을 추가 기소했다.
국가보안법을 적용한다는 것은 아주 중요한
의미를 지니게 된다. 왜냐하면 이 법의
제1조를 적용하게 될 경우, 무기징역에서
사형(死刑)까지의 중형이 내려질 수 있기
세상사(世上事)란 참으로 기기묘묘하다
할 수밖에 없다. 최인규, 한희석이 속해
있던 자유당이라는 집단의 패거리들이 종래
시행되고 있던 <국가보안법>을 보안해서
다시 만들지만 않았던들 그들이 법의
적용을 받는 일은 없었던 것이 아니냐는
느낌이 들어서 하는 소리다.
종래 시행되고 있던 국가보안법은 1948년
11월, 제헌국회에 의해서 만들어졌다. 이때
법률을 만들게 되었던 배경은 지하로
들어가 준동하고 있는 남로당(南勞黨)을
때려잡기 위해서였다. 대한민국 독립정부
수립과 함께 지하로 들어간 공산주의자들은
대한민국 정부의 파괴를 목적으로
여수.순천 반란사건을 일으키는가 하면
무장 게릴라 전법을 써 약탈, 방화, 살인을
있었다. 여기에 곁들여 김일성 괴뢰집단은
어떠했는가 하면 그놈들 역시 무장
게릴라를 남파해서 양민을 학살하는 등
만행의 도수가 점점 짙어만 가고 있었다.
그래서 그놈의 공산주의자 놈들을
응징하고자 해서 만든 법률이었다. 그런
까닭에 법조문도 고작 6개조에 불과했다.
공산주의자들을 응징하는 데 많은 법조문이
필요없었기 때문이다.
그것을 자유당은 10년 뒤인 1958년
11월에 이르러 <전문 3장 40조 부칙>이라는
방대한 법률로 개작을 했다. 이유는
간단했다.
<현재, 시행중에 있는 국가보안법으로는
규정 형식이 단순해서 6.25 사변 이후의
착잡한 정세, 특히 현재 북한 괴뢰정권의
어렵기 때문에...... 국가보안법은
보완개정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자유당이 진정 그들이 내세우는 이유에만
목적을 두고 있었다면 굳이 이 법률의
개정을 반대할 이유는 없었다. 전문 40조나
되는 이 법률 조항을 하나하나 깊이 따져볼
때, 자유당의 속셈은 반드시 그들이 내세운
이유에만 목적을 두고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대번에 꿰뚫어 볼 수가 있다.
"이 국가보안법 개정 법률안은
공산주의자나 간첩을 때려잡기 위해서가
아니라 앞으로 2년 뒤에 있을 정.부통령
선거를 앞두고 야당의 입을 틀어막고
여차하면 야당을 때려잡자는 데에 목적을
두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 민주당은 당의
존폐를 걸고 이 법률안의 통과를 막겠다."
같이 자유당의 속셈은 민주당의 입을
틀어막고 국가보안법으로 올가미를 씌워
때려잡자는 데 있었다. 이렇게 해서 야당의
입을 틀어막고 때려잡지 않고는 앞으로
있을 정.부통령 선거에서는 도저히 승산이
없었기 때문이다.
민주당은 이 법률안 저지에 당의 목숨을
걸었다. 11월 19일의 법사위원회에서
자유당이 이 법안을 전격적으로 모조리
가결시키자 민주당은 소속 의원 전원을
동원, 의사당 본회의장에서 농성에
들어갔다. 본회의에서 통과되는 것을
막고자 해서였다.
그러나 자유당도 속수무책으로 가만히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너희 야당놈들이 본회의장을 점거해서
그런다고 우리가 하고자 하는 일을 못할 줄
알았어?"
자유당에서는 마침내 의장의 직권으로
<경위권(警衛權)>을 발동시켰다. 그러나
국회에는 경위의 소가 그리 많지 않았다.
그래서 자유당에서는 편법으로 전국에서
무술깨나 쓰는 경찰관을 선발, 상경하게
해서 국회 경위로 임시 채용하는 형식을
취해 그들로 하여금 본회의장에 진출시켜
농성중에 있는 민주당 국회의원을 번쩍
들어서 의사당 밖으로 내동댕이치도록
했다.
"야아! 이놈들아, 너희놈들이 이 따위
야만적인 짓을 할 수 있어?"
민주당 소속 국회의원들은 끌려나각지
않으려고 고래고래 악을 쓰며 버텼으나
없었다. <법은 멀고 주먹이 가깝다>는 우리
속담이 바로 그대로였다.
이것이 11월 24일, 민주당 소속
국회의원들이 농성을 벌인 지 닷새 만의
일이었다. 그래서 우리 헌정사에서
<24파동>이라 일컫고 있는 것이다.
자유당은 농성중인 민주당 소속
국회의원들을 깡그리 의사당 밖으로 내몰고
나자, 저희들끼리 오손도손 모여 앉아 단
1분도 못 되는 사이에 국가보안법을
통과시켜 버리고 말았다. <번갯불에 콩
구워먹는다>는 말은 이런 경우를 두고 하는
말인지도 모른다.
자유당은 국가보안법을 개정하기는
했으나, 야당 특히 민주당을 때려잡는
일에는 단 한 번도 써보지를 못하고
만들었던 법률에 되려 거꾸로 그 법률을
만든 장본인인 최인규, 한희석이 얻어맞게
된 것이다. 그러니 어찌 세상사 요지경 속
같다 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국가보안법
제1조를 적용하게 될 경우,운명의 결과가
어찌될 것인지는 누구보다도 자신이 잘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래서 그런지 두번째
공판에 끌려나온 부정선거 관리 피고인들의
표정을 살펴보니 그들은 이제 살아남기는
글렀다는 체념의 표정들이었다.
자승자박이란 이런 경우를 두고 하는
말일 것이다. 야당을 때려잡기 위해서
만들어 놓았던 올가미가 자기들 모가지에
씌워졌으니 이게 도무지 무슨 꼴이란
말인가!
<억울하거든 출세하라!>
7월 재판이 시작되자 다방가에서는 한때
이런 말이 유행했다.
억울하거든 출세하라. 출세, 한국적
출세는 관리가 되어 고관대작이 되는
것이다. 민주주의 시대라고 하면서도
고관대작으로 출세를 하기만 하면 갖가지
특권이 부여되었다.
최인규, 홍진기 등 이른바 3.15 부정선거
원흉들이 영어의 신세가 되었지만 그들은
여전히 특권을 누리고 있었다. 무엇이
특권이었던가? 재판을 질질 끌어주는 것이
특권이라 할 수 있었다. 재판을 질질
끌기만 하면 이 세상에서 하루라도 더, 한
시간이라도 더 생을 누릴 수가 있었다.
해당되었다. 아무리 법이 온정을 베푼다고
해도 그들은 도저히 살아나기는 어렵다고
보고 있는 것이 일반적인 관측이었다. 숱한
젊은 꽃들이 목숨을 빼앗기고 다치고
했는데, 원흉으로 지목된 자들이 죽음을
면하기는 어려울 것이라고 보고 있었다.
아마도 어쩌면 당사자들도 생을 체념하고
있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러니까 재판을 질질 끄는 것이다.
하루라도 더 생을 누리라고 해서. 혹시 또
누가 알겠는가. 세상이 또다시 뒤집히는
일이 있을는지. 그렇게 되면 살아날 구멍이
생길는지도 모르지 않는가! 그러니까
재판을 질질 끄는 것이다. 물론 질질 끄는
구실은 얼마든지 제시할 수가 있었다.
"원흉들이라 캐내야 할 것이 너무나
이 한마디면 족했다.
한데, 원흉들의 재판 양상과는 달리
출세하지 못한 자에 대한 재판은 글자
그대로 <전격적>이었다. 그들 보잘 것 없는
저질들한테서는 캐낼 것도 없고 오로지
저지른 죄과만으로 충분했기 때문에
전격적으로 재판을 진행했던 것일까?
7월 7일 서울 지방법원에서 열린 밤초
경관에 대한 재판에서는 두 경찰관들에게
사형이 언도되었다. 7월 재판의 첫
판결에서 극형선고를 받은 경찰관은 서울
성북(城北) 경찰서에 근무하던 순경
정완종(鄭玩鍾)과 권희용(權熙瑢)이었다.
먼저 그들에 대한 기소장 내용을
살펴보기로 하자.
관내 북선(北仙) 파출소 앞에서
경비근무중, 때마침 이승만 정권 타도를
외치며 지프차를 타고 지나가는 서라벌
고교생 오경섭(吳京燮),
박천기(朴天基)에게 발포를 하였으며
총탄에 쓰러지면서 신음하는 17세
소년들에게 달려들어 <공산당 같은 놈이다>
하면서 총을 쏘았다. 총에 맞은 오경섭
군이 <물을 달라>고 하자 사경에 처해
있는데도 불구하고 무자비하게 복부에
상해를 입혔다. 동료인 김원철(金元哲)
순경이 제지한 일까지 있다(이상 정 피고).
또한 데모대원 박천기 군을 뒤쫓아
발포하였다(권 피고).
그들 두 경찰관이 기소장 내용과 같은
받았다고 해서 동정은커녕 정상조차
참작하려 하지 않은 재판장의 심정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어떻게 어린
소년에게 두 번씩이나 총질을 할 수 있단
말인가. 악마와도 같은 그들의 비정한
인간성에 누구나가 치를 떨었을 것이라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는 일이었다.
언론에서도 박수 갈채를 보냈다.
<이번 판결은 과연 법이 법 구실을 했다.
살인자는 사(死)라는 원칙에
의해서라기보다는 국민의 총의를 그대로
반영했다는 데서 환성이 오른다.......>
한데, 정상은 마땅히 참작됐어야 옳았다.
우선 인간이란 피를 보게 되면 극도로
흥분을 하게 된다. 두 눈에는 핏발이 서고
이성은 완전히 마비되어 버린다.
이래서 가능하다. 상사의 명령도 있었겠다,
다른 것은 생각할 여지도 없는 일이었다.
그래서 잔학 행위는 벌어지게 되었던
것이다.
두 피고에게 사형이 언도되자 그들의
가족들은,
"진정 억울하오. 명령에 따라 행동했는데
어떻게 그런 가혹한 형벌을 내릴 수 있단
말이오. 쏘라고 한 놈이 원수요" 하면서
통곡을 터뜨렸는데 명령에 따른 행동은
마땅히 참작되었어야 옳았다.
재판관은 판결문에서 뭐라고 했던가?
본건 공소 내용에 지적된 바, 피고인들이
4.19 의거 당시 데모 군중에게 실탄을
발사하여 사상자를 발생케 한 사실을
또한 피해자측의 각 증언과 증거물 등에
의하여 공소 내용에 대한 증거가 있다고
인정한다.
피고들은 경찰관으로서 국민의 재산과
생명을 보호할 의무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의거 학생들을 살상하였음은 재판사상
용서될 수 없는 일이며 양형의 차이나
정상을 참작할 수 없으므로 사형을
언도한다.
언론 또한 이 판결에 맞장구를 쳤다.
<사정(私情)은 사정이요, 대의(大義)는
대의다. 아무리 쏘라고 했더라도 대의를
만분의 일이라도 염두에 두었더라면 쏘는
체 마는 체하고 그 자리를 슬쩍 피했을
수도 있었을 걸.......>
행위를 매도하며 판결문을 지지했다.
도무지 말도 되지 않는 수작을
언론에서는 지껄이고 있었다. 경찰은
군대와 마찬가지로 상명하복(上命下服)이
생명이다. <쏘는 체 마는 체>, 또 <그
자리를 슬쩍 피했을 수도 있었을> 것이라니
이게 도대체 말이나 되는 수작인가? 4.19
사태가 의거로써 가치를 지니게 되었으니
망정이지 만일 이 사태가 진압되었더라면
쏘는 체 마는 체했던 경찰관의 운명은 어찌
됐을 것인가?
상명불복죄가 적용하게 되었을 것은
두말하면 잔소리가 된다. 재하자(在下者)는
유규무언이다.
<데모 학생들을 쏘라>는 상사의 명령이
부당하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 명령에 따를
출세하라>는 말이 유행하게 되었던 것이다.
상관의 명령에 따라 데모 학생에게
총격을 가해 살상을 일삼았다가 체포되어
7월 재판에 회부된 경찰관은 앞의 두
사람뿐만이 아니었다. 마산 경찰서의
박종표(朴鍾杓)가 <살인 경관>이라 해서
체포되었고 서울의 김종호(金鍾浩),
심영구(沈泳求), 이태수(李泰洙) 등도
태평로 파출소 앞에서 데모 학생에게
총질한 것이 <살인 경찰관>이라 해서
체포되었다. 또 서울역전 파출소의
주임으로 있던 백기순(白基淳)도 같은
혐의로 체포, 구속되었다.
그런데 4.19 사태 때 200명 가까운 청년
학생들이 희생이 되었고 헤아리기 어려운
수의 젊은이들이 총상을 입었는데, 이들을
살인 경찰관에 대한 극형 언도는 4.19
사태에 희생된 자의 유가족이나 또는
부상자, 그리고 일반 국민의 가슴속을
후련하게 해주었던 것은 사실이었다.
그리고 언도 그 자체도 국민의 가슴을
후련케 해주자 하는 목적의식이 다분히
적용되었던 것 같은 인상이 짙었다. 이
판결 결과 뒤에 발포멸령자에 대해서
내려졌던 판결을 비교해 보면 더욱더 그런
느낌이 짙어진다. 뭐가 법관의 양심인가?
8. 동상이몽
"누굴 찍었나?"
"누굴 찍었을 것 같나?"
"민주당?"
"물론이지. 민주당 아니고야 찍어줄 놈
있어?"
"민주당 후보하고 잘 아는 사인가?"
"알긴 뭘 알아! 더구나 그 사람은
외지(外地) 사람인데, 민주당이라니까 찍어
줬지. 민주당 말고 찍어줄 놈이 누가
있어?"
민심이 이랬다. 그러니 막대기를
꽂았어도 표를 얻었을 것이었다. 유권자의
바람이었다. 그 덕분에 민주당은 1960년
8월 1일 현재로 167석이라는 압도적인
의석수를 확보했다. 이 숫자는 물론
난동으로 투표함 등이 소각되어 재선거를
치르게 된 선거구를 제외한 숫자였다.
재선거를 치르게 되면 의석수가 불어나게
될 것은 다시 말할 필요도 없었다.
어쨌든 167석만으로도 3분의 2가 넘는
숫자였다. 의석수 233석의 3분의 2는 154,
그러고 보면 13석이 많다는 계산이었다.
이제 민주당은 여자를 남자로 만드는 일
말고는 불가능이란 없게 되었다. 마음만
먹으면 내각책임제를 대통령중심제로
환원할 수도 있게 되었다. 물론 이것은
이론상으로 그렇다는 얘기다. 신.구파가
합작하지 않는 한 그것은 꿈조차 꿀 수
국민이 얼마나 민주당에 기대를 걸고
있었으면 이렇게 압도적인 승리를 안겨
주었던 것일까?
그런데 참 묘한 일이었다. 1960년 8월
1일 현재로 민주당이 얻은 의석수를
파벌별로 구분해 볼 것 같으면 구파가
84석이었고 신파가 83석이었다. 신파가
구파보다 한 자리가 부족했다. 그러니까
총선거에 있어서는 일단 구파가 승리했다고
할 수 있었다. 물론 재선거에 따라 이것이
뒤집힐 가능성은 충분했다.
그러나 구파가 신파보다도 몇 자리 더
많다든가, 신파가 구파보다 몇 자리
부족하다든가 하는 따위는 문제가 되지
않았다. 문제는 양파의 세력이 백중하다는
데 있었다. 어차피 신.구파 어느 쪽도
정파의 협조를 얻어야만 집권이 가능했다.
1960년 8월 1일 민주당 이외의 당선자
분포를 볼 것 같으면 무소속 24석, 구
자유당계 11석, 기타 2석으로 모두
37석이었다. 그러니까 신파든 구파든 이
무소속의 협조를 얻어야만 비로소 집권의
틀을 마련할 수가 있게 되었던 것이다.
정국 안정을 위해서는 어느 한쪽으로
훨씬 세력이 기울어야만 했다. 그래야만
정국은 파탄 없이 자연스럽게 제2공화국
정부의 돛을 올릴 수가 있었다. 그것이
이렇게 신.구파의 세력이 백중하다 보니
아무래도 정국의 앞날이 심상치가 않을 것
같았다.
선거 결과를 보고 신파에서는 대통령직은
구파한테 주고 국무총리를 차지함으로써
정했다.
<어차피 분당은 피할 수 없는 운명인
것인데 그것을 전제로 한다면 책임정치
구현을 위해서는 두 요직을 다 차지해야
한다>는 것이 구파의 생각이었다.
내세우는 이유는 참 그럴싸했다.
<책임정치 구현?> 그렇지, 그것이 바로
정당정치니까. 하나, 실은 그게 아니었다.
그런 생각을 하게 된 것은 구파의 집안
사정 때문이었다. 그 사정이란 다름이
아니라 구파에는 집권을 노리고 있는
사람이 두 사람이나 있었다. 윤보선과
김도연이 바로 그들이었다.
두 사람은 각기 국무총리는 자신이
맡음으로써 정권을 담당하겠다고 의지를
다지고 있었다. 그러므로 두 사람 중 어느
한, 구파는 또 자체 내에서 세포분열을
일으키지 않는다고 장담할 수 없는
처지였다.
그래서 이런 문제에 대해서는 매듭을
지어두자 하는 뜻에서 모인 것이 8월 3일
일이다. 민모 씨의 집에 21명이 참석했다.
윤보선, 백남훈, 김도연, 안동원, 송필만,
이영준, 유진산, 서범석, 소선규, 김의택,
김산, 강영훈, 조영규, 조한백, 윤제술,
양일동, 민관식, 유옥우, 백해정, 이충환,
정중섭 등이었다.
"아무래도 우리는 오늘 이 자리에서 우리
구파의 진로에 대해서 확연한 태도를 정해
두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회의 주재는 원내총무인 유진산이 맡아
진행했다. 그는 구파의 총참모장 격이었다.
유진산은 이렇게 의제 문제를 끄집어내고
조영규를 힐끗 바라보았다. 그더러
분당론에 대해서 설명하라는 눈신호였다.
조영규는 그 눈치를 알아차리고 자세를
가다듬었다.
"분당론에 대해서는 제가 말씀드리도록
하겠습니다."
그는 안주머니에서 메모해 둔 것을
끄집어 들었다.
"우리 분당은 운명적이라 할 수밖에
없습니다. 어째서 운명적이냐!"
조영규는 분당의 불가피성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첫째, 민주당의 신.구파가 합작할 경우
원내 의석 3분의 2를 초과하고 있기 때문에
국민이 민주당의 일당 독재를 우려하게
보수야당 제도를 이룩할 수 없다. 셋째,
도저히 융합할 수 없는 신.구파가 합작해서
억지로 조각하는 경우 국무회의에서도
신.구파가 대립하게 될 것은 필연적인
것이므로 정책 수행에 차질을 초래하게
된다. 그러므로 우리는 분당을 해야 한다."
이것이 조영규의 분당론의 명분이었다.
이론적으로 옳았다. 명분도 뚜렷했다.
누구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이 자리에
모인 21명은 모두가 구파의 집권을
기정사실로 확신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공천 당선자의 경우에 있어서는
신파보다 1석이 부족했으나, 공천에서
떨어져 무소속으로 입후보 당선된 의석을
합하면 오히려 신파보다 1석이 많았다.
그런데다가 그들은 또 자유당계 11석과 순
위해서는 얼마든지 이들의 표를 구파
쪽으로 끌어들일 수 있다는 자신을 갖고
있었던 것이다. 아무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고 침묵만을 지키고 있자 윤보선이
단서를 달았다.
"내가 보기에도 분당은 피할 수 없어요.
하나, 지금 당장 분당을 단행하기보다는
대통령 선출, 국무총리 인준 등 일련의
정치적인 문제가 매듭지어진 다음에 분당을
하는 것이 좋을 것 같소이다."
"알겠습니다. 다음에는 곧 있을 정치
일정에 우리 구파에서도 단단히 대비를
해두어야겠습니다. 그래서 오늘 이
자리에서 대통령하고 국무총리 문제를
협의해 두는 것이 좋을까 생각합니다.
여기에 대해서 기탄없는 의견을 말씀해
유진산이 대통령하고 국무총리 문제를
꺼내자 윤보선, 김도연 두 사람의 얼굴
표정이 굳어졌다.
이 문제에 관한 한 누구도 먼저 입을
열려고 하지 않았다. 두 사람 모두
대통령보다는 국무총리에 군침을 삼키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 자리에 두 사람이
없다면 모를까, 두 사람의 면전에서 어느
한쪽으로 기울어진 듯한 발언은 거북하기
짝이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한동안 침묵이 흐르자 윤제술이 입을
열었다.
"우리 구파로서야 대통령, 국무총리로
내세울 분이 상산 선생하고 해위 선생 외에
달리 누가 있겠소? 그러니 이 두 분
가운데서 어느 한 분은 대통령으로 모시고
해야겠는데, 어떻소, 이 문제는 당선자
총회에서 한번 여러 사람의 의견을
들어보도록 하는 것이오."
"아닙니다."
유진산이 윤제술의 의견에 반대를 하고
나섰다.
"오늘 이 자리에서 대체적인 윤곽을 잡아
놔야 일사분란하게 밀고 나갈 수가
있습니다."
유진산은 무소속 공작상 미리 내정을
해두는 것이 좋겠다는 의견이었다. 또다시
침묵이 흘렀다.
백남훈이 불쑥 김도연의 옆구리를 쿡
찔렀다.
"상산, 상산이 양보해요. 다음에도
기회는 있을 거니까."
그는 얼굴에 미소를 짓고 말했다.
"나야 언제나 당명에 따라 행동하는
사람이 아니오? 당명이라면 기꺼이
따르겠소이다."
참으로 대범한 마음가짐이었다. 당명에
따르겠다는 그 말 이외에 어떤 군소리도
늘어놓지를 않았다. 좌중 인사들은 비로소
숨통이 트이는 듯한 느낌이었다.
백남훈이 어째서 김도연더러 양보를
하라고 했던가? 그것은 그에게는
재력(財力)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국무총리
인준을 받자면 막대한 자금이 소요될
것이라고 백남훈은 계산하고 있었다. 그럴
것이었다. 구 자유당계를 비롯한 대 무소속
포섭공작을 벌이자면 자금이 필요할
것이라는 것은 새삼 운위할 필요조차
포섭공작을 벌여야 할지도 모를 일이었다.
청빈한 생활을 고집해 온 김도연이 그
막대한 자금을 감당할 수 있을 것 같지가
않았기 때문이었다.
다음날 저녁, 구파는 마침내 신파와의
결별을 선언했다.
<내각책임제하에서 건전 야당이 없는 이
정국에서 너무 비대해져 있는 민주당은 두
개의 정당으로 갈라져야 하며, 강력한
국정의 수행은 뜻맞는 인사들끼리의 책임을
지는 정치를 통해서만 가능하다.>
이것이 신파와의 결별 선언에 내걸은
명분이었다.
뜻맞는 인사들끼리의 책임지는 정치란
무엇을 의미했는가? 대통령뿐 아니라
국무총리까지도 구파가 독점해서 정권을
표현했던 것이다.
이것은 곧 분당을 선언한 것으로
받아들여졌다.
신파에 대한 구파의 결별 선언에
누구보다도 쌍수를 들어 환영한 것은
무소속과 재야 세력이었다.
국회에 의석을 차지한 무소속 의원
가운데는,
"이거 잘만 하면 나한테도 장관 감투
하나쯤은 돌아올지도 모르겠는걸" 하고
허허거리기조차 했다.
물론 이 무소속 의원은 농담반
진담반으로 시시덕거렸던 것이지만 그런
신.구파가 갈라서게 되면 어차피
무소속으로 제휴를 해야만 집권은 가능한
일이었으니까.
그런 감투 욕심보다는 무소속이나 재야
세력이 구파의 분당론에 환영을 했던
이유는 너무나 오랜 시간을 두고 신.구파의
싸움을 지켜봐 왔기 때문이었다.
"신.구파는 도저히 동거하지 못할
부부야. 너무 때늦은 감이 있어. 진작 갈라
섰어야 했던 거야."
이것이 무소속이나 재야 세력의
반응이었다.
하긴 그랬다. 갈라질 바에는 진작
갈라졌어야 옳았다. 최소한 선거전이
벌어지기 전에 갈라졌어야 옳았다.
그랬더라면 신.구파 모두 233개 선거구에
지금과 같은 진통을 겪지 않아도 될
일이었다. 모든 선거구에 신.구파가 각기
집권을 하도록 했더라면 정국수습은
수월하게 이루어질 수 있었을 것이다.
그것을 신.구파의 각기 비슷한 숫자를
공천해서 내세웠기 때문에 결과적으로는
이런 진통을 겪게 된 것이었다. 이것은
신.구파 가릴 것 없이 민주당으로서는 큰
실책이었다. 민주당이 단명으로 끝날
수밖에 없었던 운명이 벌써 이때에 싹텄다
할 수 있었다.
민주당에 앞을 내다볼 줄 아는 인물이
그토록 없었던가? 신.구파가 공천
심사위원회를 구성해 가지고 동수의
비율(신파가 7명 더 많았지만)로 내세울
때, 선거 결과 어떤 결과가 빚어지리라는
얘기였다.
그토록이나 단견(短見)이었다니!
한편 구파의 결별 선언에 민주당 대표
최고위원 장면은 급기야 노여움을
터뜨리고야 말았다.
"그 사람들 지금의 시국을 제대로
인식하고 있는지가 의심스럽다. 국민이
우리 민주당에 투표해 준 것이 분당을
하라고 표를 몰아주었단 말인가! 설혹
분당할 의사가 있다면 먼저 책임있는 이가
당의 공식 기구에 제의를 하고 난 연후에
분당을 선언해도 선언했어야 할 게 아닌가!
내가 알기에는 구파 안에도 분당론에
반대하는 인사가 많을 줄로 안다. 우리는
어떤 일이 있어도 그들하고 손을 잡고
분당을 막겠으며, 조각에 있어 신.구파의
부응토록 할 것이다."
신파는 어떻게든 분당만은 막자는 것이
기본 태도였다. 이유는 오직 한 가지
때문이었다. 신파든 구파든 무소속하고
제휴를 해야만 정권 유지가 가능했기
때문이었다. 무소속하고 제휴를 한다는
것은 곧 연립내각을 구성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했다. 그럴 경우 구 자유당계 인사가
입각하게 되지 않는다고 보장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그럴 바에는 신.구파가 제휴해서
내각을 구성하는 것이 보다 더 국민 여망에
부응하는 길이라고 보고 있었던 것이다.
구파의 결별 선언에 제일 먼저 반기를
들고 나선 것은 중도파인 태완성, 윤중,
서정귀 등이었는데 이들은
"지금은 신.구파가 합심해서 정국 타개에
할 때가 아니다"라며 분당 반대를
표명하고,
"우리는 구파 대통령에 신파 국무총리,
어느 쪽이든 균형의 원칙을 전제로 해서
정권을 담당해 주기를 요구한다"고
덧붙였다.
중도파에서 분당을 반대하고 나서
주었다는 것은 신파에게 있어서는 상당히
고무적이었다. 기회를 놓치지 않고
신파에서는 즉시 구파에 대해서 정치적
공세를 취했다.
신파에서는 끝까지 신.구파 균형의
원칙을 견지해서 구파의 윤보선 씨를
대통령으로, 그리고 신파의 장면 씨를
국무총리로 추대해서 새 정부를 구성하기로
했다.
쳐서 구파의 윤보선을 대통령으로
추대하겠다고 하자, 구파에서도 동요하는
빛이 완연했다. 구파가 중도파의 반대를
무릅쓰고 분당을 강행할 경우, 구파의
집권은 어렵게 된다는 판단에서였다.
"이놈의 신.구파 싸움이 어떻게 될
것인가?"
벌어져 나가고 있는 사태를 그 누구도
가늠하기가 어렵게 되어 있었다. 민주당에
몸담고 있는 사람도, 또 팔짱을 끼고
구경을 하고 있는 국민도 결과를
예측하기가 어려웠다.
그런 혼미 속에서 민주당 신.구파는 각기
따로 당선자 총회를 열었다. 8월 6일의
일이었다. 신파는 대명관에서, 그리고
구파는 아서원에서 각기 당선자 총회를
언론에서는 <어느 쪽에 더 많은 당선자가
모일 것이냐?> 해서 촉각을 세웠다.
그러나 어느 쪽에 몇 사람 더 많이
모인다고 해서 그것이 정국의 앞날을 점칠
수 있는 바로미터가 되지는 못했다.
왜냐하면 개인적 사정으로 참석치 못한
사람도 있고 또 개중에는 어느 한쪽에
기우는 것을 꺼려 양다리를 걸쳤던 사람도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언론에서 단정했듯이 <세력 분포가 뚜렷이
판명된 것>은 아니었다. 그 증거가 구파의
최경식과 김명운의 신파총회 참석이었다.
그럼, 구파 당선자 총회에 신파 소속의
당선자가 참석한 일은 없겠느냐 했을 때,
이것은 누구도 장담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하여간에 신파 당선자 총회에서는
밀도록 한다는 것을 재확인했고, 구파
당선자 총회에서는 대통령, 총리 후보
문제를 23인위원회에 일임한다는 것과 분당
선언을 추인하는 정도로 이날의 모임을
마무리지었다.
<이승만 정권 타도>라는 공동의 목적을
위해 민주당이라는 한울타리에서 5년
동안이나 동지로서 같이 살아온 신.구파가
어떻게 해서 이렇게 팽팽하게 평행선만
치닫고 있었던 것이었을까? 그것은 민주당
안에 강력한 지도력을 발휘할 수 있는
인물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신파를
대표하는 장면과 구파를 대표하는 윤보선,
이 두 인물 가운데서 어느 한 사람이라도
좀 그릇이 컸던들 민주당은 이렇게까지
티격태격은 하지 않게 되었을는지도
장면, 윤보선 두 사람 모두 <온실 속의
꽃>처럼 자란 인물들이었다. 온실 속의
꽃처럼 자랐으니 그릇이 클 리가 없었다.
소갈머리도 작기 마련이었다.
좋은 보기가 8월 9일의 외교
구락부에서의 장면과 윤보선의
몸가짐이었다.
기독교계 지도자들은,
"이번 총선거에서 당선된 기독교인
의원들을 축하 격려도 할겸 원수처럼
반목만 거듭하고 있는 민주당 신.구파의
화해 분위기를 조성해 보자" 해서 이날
장면, 윤보선을 비롯한 기독교인
당선자들을 외교 구락부에 초청해 오찬회를
베풀었었다.
이 회식 자리에서 공교롭게도 장면과
초청자의 배려가 아니었나 싶다. 그런데
장면과 윤보선은 이웃해 있으면서, 단
한마디도 얘기를 나누지 않았다. 참 지독한
사람들이었다. 그토록 옹졸할 수가 있단
말인가? 그러고도 그들은 크리스천이라고
자처할 수 있을까?
"해위(윤보선의 아호), 우리가 이승만
독재 정권을 타도하기 위해서 뭉쳤던
사람들이 아니오? 우리 어떻소, 그때의
순수했던 마음으로 돌아가는 것이?
구파에서는 자꾸 분당을 하겠다 고집하고
있는데 분당을 해가지고는 난국 수습은
어려워요. 그러니 난국 수습이라는
차원에서만이라도 분당은 포기해 주시오.
그 대신 구파에서 먼저 집권을 해봐요.
그랬다가 힘들다고 생각되거든 우리한테
있겠소? 우리도 어렵다고 느껴지거든 그땐
신.구파가 합작을 해서 정권을 이끌어
나가도록 해봅시다 그려."
"아니 윤석(장면의 아호), 정권은 먼저
신파에서 맡도록 해봐요. 세상에선
신.구파라 일컫고 있지, 구.신파라 일컫고
있지는 않지 않소. 그러니 정권은 먼저
신파에서 맡도록 해봅시다."
왜 좀 이렇게 대인(大人)다운 아량을
베풀지를 못했느냔 말이다. 정권이 어디 딴
데로 달아나기라도 하려고 하던가? 천하는
이제 어김없는 민주당 것이었다. 국민은
총선거에서 3분의 2 이상이나 되는
의석수를 안겨 주지를 않았던가! 한 2년씩
교대로 해봐도 되고 2년이 너무 길어서
지루하다는 생각이 들 것 같으면 1년씩
당장 정권을 잡지 못하게 되면 숨이라도
넘어갈 듯이 조급증을 부렸으니.......
이날 장면과 윤보선은 이 회식 자리에서
2시간 동안이나 이웃해 있으면서도 단
한마디도 얘기를 나누지 않았다. 얼마나
옹졸한 처사였던가! 지도자의 그릇이
작았다는 것, 아무래도 이것도 민주당
비극의 한 원인으로 꼽아야만 할 것 같다.
지도자란 역시 투쟁을 통해서 단련된
인물이어야 한다는 것을 새삼 느끼게 된다.
정치에 정략이 따르지 않을 수는 없다.
그러나 정략이 치사스럽거나 비겁한
술수여서는 안 된다. 정정당당한
도마 위에 오른 정권을 놓고 서로
으르렁거리고 있던 신.구파 두 파벌이
마침내 더티 플레이를 시작했다. 더티
플레이는 새삼스러운 것이 아니었다.
총선거를 앞데 놓고도 한판 단단히
겨루었던 일이었다.
<신파의 아무개가 자유당의 아무개한테서
얼마를 먹었다.>
<똥 묻은 개 겨 묻은 개 나무라듯 하지
마라. 구파의 아무개는 부정축재자인
아무개한테 얼마를 얻어먹었다고 하더라.>
이때 정치자금 수수를 놓고 벌였던
신.구파의 싸움은 아직도 매듭이 지어지지
않고 있었다. 그런 터에 이번엔 구파에서
<매수설>을 가지고 신파에 대한 선제
공격에 나섰다.
사람인 조영규가 엉뚱하게 기자들에게 이런
말을 했던 것이다.
"최근 4,5일 동안에 20여 억환의 자금이
금융기관으로부터 모측에 방출되어
정치자금으로 쓰여지고 있다는 소문이 있어
내사해 보기로 했어요. 의원 한 사람 앞에
1천만환에서 5천만환까지 뿌려졌다는 게
아니겠어요? 이것은 어디까지나
풍설이지만요."
조영규는 분명히 풍설이라는 단서를
달았다.
그러나 명색이 정치를 한다는 사람이
풍설을 가지고 세상에 공언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조영규가 비록 풍설이라는
단서를 달았다 하더라도 그가 시장 잡배의
부류가 아니라 책임있는 공당의 무게 있는
그의 발언은 비상한 방향을 불러일으키지
않을 수가 없었다.
신파는 구파의 협조를 얻기가 어렵게
되어 있었고 구파 또한 신파의 협조를
얻기가 어렵게 되어 있는 이상 무소속을
상대로 정치자금이 살포되리라는 것은
짐작되고 있던 일이었다. 이것은 신.구파가
똑같은 상황이었다. 어느 쪽이고 무소속
포섭 없이 정권을 쥐기는 어려운
상황이었다.
똑같은 조건의 상황에 놓여 있으면서
조영규는 신파에서 무소속을 포섭하기
위해서 돈을 뿌렸다고 폭로한 것이다.
물론, 조영규는 돈을 뿌린 것이 신파라고
못박지는 않았고 또 자금살포의 대상이
무소속이었다고 못박지도 않았다. 그러나
때, <신파가 무소속한테 돈을 뿌렸다>고 한
것만은 어김이 없었다.
조영규의 이 발언에 발끈한 것은
신파보다도 무소속이었다.
"이건 우리 무소속에 대한 중대한
모욕이야. 조 의원의 발언은 어떤 일이
있어도 가려내야 돼. 누가 얼마를 먹었는지
증거 제시를 요구해야 한단 말야."
무소속 의원들은 발끈하다 못해 길길이
뛰면서 조영규에게 따지리라 결의를
다졌다.
미리 설명해 둬야 하는 건데 순서가 좀
뒤바뀐 감이 있지만, 제2공화국 탄생을
위한 제5대 민의원과 초대 참의원은 8월
8일 개원했다. 이날 민의원에서는 참으로
오래간만에 신.구파가 의견의 일치를 보아
부의장으로는 신파에서는 무소속의
이재형을, 구파에서는 이영준을 밀었었다.
그런데 결과에 있어서는 곽상훈과 이영준이
예상했던 대로 당선이 되었으나 신파에서
민 이재형이 낙선되고 구파에서 민
서민호가 당선이 되었던 것이다. 이때
서민호도 무소속이었으나 그가 한국민주당
출신이었고 보면 친 구파계라 할 수
있었다.
신파에서 이재형을 부의장으로 밀었던
이유는 그가 무소속을 리드할 수 있는
인물이라 생각하고 정권담당문제가
제기되었을 때 무소속표를 끌어들이자는
속셈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신파에서 민 이재형이 부의장 선거에서
떨어졌다는 것은 중대한 의미를 내포하고
선거에 던져진 표가 곧 국무총리 인준 때
나타날 표로 간주할 수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니까 신표는 초전에서
구파에게 일패도지했다고 할 수가 있었다.
이재형 개인으로 말하더라도 신파가
밀어주었음에도 불구하고 구파의 반대로
부의장 선거에서 낙선되고 보니 구파에
대한 감정이 좋을 리가 없었다. 이건
추측이지만 그도 사나이였다.
(좋아! 구파가 나를 반대했겠다.
그렇다면 나도 한번 거기에 대한 은혜를
갚도록 하지.)
하여간에 조영규가 <신파에서 무소속을
매수했다>는 뉴스가 풍기는 발언을 한 것이
바로 국회가 개원된 다음날이었다.
다음날인 8월 10일, 마침내 조영규의
민주당 신파인 함종빈과 무소속의 계광순,
김봉재 등이 조영규의 발언을 문제삼은
것이다. 특히 김봉재는 <금전수수설의 진상
조사위원회> 구성안을 제의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나는 선거인에게 내가 규탄받을 일을 할
때에는 내 목을 치라고 했어요. 무소속
의원이 고깃덩이 모양으로 이리 팔리고
저리 팔리고 하는 것 같은 인상을 주는
이런 엄청난 풍설을 신문에 퍼뜨리니 내
꼴이 뭐가 되겠어요? 그렇잖아도 내
선거구의 유권자들이 지금 서울에 올라와서
여관에 묵고 있는데, 조영규 의원의 발언은
기어이 진상을 가려서 책임을 물어야만
하겠습니다."
그의 조사위원회 구성 결의안은 신파의
그런데 문제는 조사위원회가 구성되고 안
되는 데 있는 것이 아니었다. 구파에서
그런 발설을 했으니 진상이야 어떻든
구파에 대한 무소속의 감정이 좋을 리가
있겠는가 말이다.
우리 속담에 <방귀 뀐 놈이 먼저
성낸다>라는 말이 있다. 하물며 의원
상호간의 불문율로 되어 있는 정치자금을
놓고 운운했으니 이런 발언이 결과적으로
어떤 영향을 미치게 될 것이냐는 것을
조영규는 한번 깊이 생각해 본 연후에
발설했어야 할 일이었다. 뒤에 김도연이
총리지명 인준을 받게 되었을 때 그의
발언이 투표에 영향을 주지 않았다고는
결코 장담할 수 없는 일이었다.
새 헌법에 따른 대통령 선거가 실시된
것은 1960년 8월 12일이었다.
대통령중심제가 내각책임제로 바뀐 이때의
헌법에는 대통령을 민의원과 참의원의
합동회의에서 뽑도록 되어 있었다.
이날 실시된 대통령 선거에서는 민주당
구파의 보스인 윤보선이 새 공화국의
대통령으로 뽑혔다. 재석 259표 중 208표를
얻었었다. 나머지 51표는 김창숙에게 표를
던졌던 것이다.
김창숙, 이때 나이 81세, 호는 심산.
항일 독립운동가 중에서 마지막 남은
거물이었다. 물론 그는 이때 야인이었다.
백범 김구가 암살당하자,
"백범(김구의 아호)을 죽인 것은
김구 암살의 배후 인물을 이승만이라고
단정한 그는 경무대 쪽을 향해선 오줌도
누지 않을 만큼 꼬장꼬장한 인물이었다.
정치에는 일체 관여를 않고 오로지 이승만
타도를 위한 <반독재 투쟁>만 벌여온
인물이었다. 그는 1962년에 타계했다.
정당 관계를 일체 하지 않고 있던 야인
김창숙이 어떻게 해서 이때 대통령 선거에
그의 이름 석 자가 튀어나오게 됐던
것인가?
그것은 민주당 구파에 대한 무소속
반발의 결과였다.
"조영규 의원은 우리가 신파한테
매수당했다고 했는데, 김봉재 의원의
말마따나 우리는 이리 팔리고 저리 팔리는
고깃덩이가 아니에요. 우리 이참에
보여줍시다."
이런 제의를 한 것은 이재형이었다.
<조영규 발언>에 모두 분통을 터뜨리고
있던 무소속 의원들이었던지라 그의 제의에
반대하는 사람은 없었다. 그럼, 무소속의
기개를 보여주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민주당 신.구파가 똑같이 지지하고 있는
윤보선에 부표를 던지는 소극적인 행위를
지양하고 김창숙을 밀기로 의견을 모았던
것이다. 아예 묻혀 있던 김창숙은
엉뚱하게도 조영규 발언의 덕분에
제2공화국 대통령 선출시에 무소속에
의해서 대통령 후보로 옹립되었다는 역사적
기록을 남기게 되었던 것이다.
앞에서 이미 소개했듯이 민주당
구파에서는 대통령에 김도연, 국무총리에
국회전략을 숙의해 오고 있었다. 그러던
것이 어떻게 해서 갑자기 윤보선으로
바뀌게 되었던가? 여기에는 그럴 수밖에
없는 까닭이 있었다.
민주당 신파에서는 대통령직은 구파에게
주고 신파는 국무총리직을 맡아 정권을
담당토록 한다는 것이 처음부터 일관된
구상이었다. 구파가 대통령직과
국무총리직을 모두 독점하겠다고 벼르고
있던 것과는 참으로 대조적이라고 할 수
있었다. 하기야 구파는 분당을 전제로 하고
있었고, 신파는 <절대로 갈라지지
않겠다>고 고집하고 있었으니까 그런
구상을 하게 되었던 것일 것이다.
하여간에 구파는 그런 구상 밑에서
구파와의 정치적 협상을 모색했던 것이나
틈을 주지 않는 것이었다. 이렇게 되자
신파의 몇몇 사람이 그만 비위사 상해졌던
것이다.
"정치는 대환데, 그래 한 집안 식구끼리
대화조차 않겠다는 것이 무슨 수작이야.
좋아! 대화하기 싫으면 그만 두라고!
우리한테도 생각이 있어!"
잔뜩 화가 난 그들은 차라리 과도정권
수반인 허정을 대통령으로 옹립하자며
공작을 벌이기 시작했던 것이다.
이런 움직임에 대해서 신파의 보스인
장면도 결코 반대를 하지 않았다. 구파가
끝까지 싫다고 고집을 부린다면
대안으로서는 가장 바람직하다고 그는
생각했던 것이다.
신파의 일부 의원들의 움직임에 대해서
보였던가?
"나는 신파의 일부 의원들이 그런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는 것을 전혀 모르고
있다. 그런 처지에 내가 대통령 옹립문제에
싫다 좋다는 의사표시를 할 수야 없지
않은가?"
이것이 허정의 공식적인 반응이었지만
신파가 통틀어 대통령 옹립에 나선다면
결코 사양을 하지 않겠다는 눈치였다.
사태가 이렇게 돌아가자 구파는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들은 8월 11일에 열린
23인위원회에서 이 문제를 예의 검토했다.
23인위원회란 구파의 당선자 총회가 있던
그날 대통령과 국무총리 후보문제에 대해서
매듭을 짓기 위해 각 시.도 대표 한
사람씩을 뽑아 23명으로 구성했던 임시적인
이날 모임에서 유진산이 이렇게 말했다.
"신파에서 우리 구파한테 대통령직을
주겠다고 하는데 굳이 마다할 필요는 없을
것 같습니다. 더구나 지금 신파 일부에서는
허정 씨를 대통령으로 옹립할 움직임까지
보이고 있다고 합니다. 이렇게 되면 대통령
선거에 있어 혼란이 야기될 것은 필지의
사실이고, 그러니 대통령에 관한 한 신파의
제의를 받아들이는 것이 좋겠습니다.
그것은 원내 전략을 세워나가는 데
있어서도 여러 가지 이점이 있습니다. 우선
생각할 수 있는 것이 국무총리 지명권은
대통령의 고유 권한인 만큼 우리 구파
인사가 대통령이 될 것 같으면 의당 우리
구파 인사를 국무총리로 지명해 줄 것이
아니겠습니까!"
정해 놓고 있던 구파의 기본적인 구상이
앞서와 같은 이유에서 윤보선을 대통령에,
김도연을 국무총리로 갑자기 바뀌게 되었던
것이다.
아무튼 윤보선이 대통령에 당선됨으로써
제2공화국 탄생의 기틀은 마련되었다.
흔히들 내각책임제하의 대통령은 국가의
상징적 존재에 불과하다고들 말하고
있지만, 제2공화국의 대통령은 반드시
그렇지만은 않았다.
물론 대통령 중심제의 대통령만큼의
권력은 없다 하더라도 크게는 국군 통수권,
긴급 재정처분권, 외교권, 계엄선포권,
국회에 대한 임시집회 요구권, 헌법개정안
발의권과 같은 정치 권력과 작게는
계엄선포 거부권, 정당소추에 대한 승인권,
주어져 있었다.
이러한 권력이 주어져 있었다면 결코
<상징적 존재>라고만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제2공화국 헌법 제69조.
국무총리는 대통령이 지명하되, 민의원의
동의를 얻어야 한다. 단 대통령이
민의원에서 동의를 얻지 못한 날부터 5일
이내에 다시 지명하지 아니하거나 2차에
걸쳐 민의원이 대통령의 지명에 동의를
하지 아니할 때에는 국무총리는 민의원에서
이를 선거한다.
전항의 동의나 선거에는 민의원 의원
대통령이 국무총리를 지명한 때에는
민의원은 그 지명을 받은 때로부터 24시간
이후 48시간 이내에 동의에 대한 표결을
하여야 하며, 제1항 단서에 의하여
국무총리를 선거할 때에는 그 사유가
발생한 날로부터 5일 이내에 선거를 하여야
한다.
대통령은 민의원 의원 선거 후, 민의원이
집회한 날로부터 5일 이내에 국무총리를
지명하여야 한다.
꽤나 긴 헌법 조문이었다. 하여간에 이
헌법이 명시하는 데 따라 제2공화국
대통령으로 뽑힌 윤보선은 5일 이내에
국무총리를 지명하지 않으면 안 되게 되어
있었다.
있는 민의원 의사당(지금의 시민회관 별관)
양원 합동회의에서 거행되었다.
한데, 윤보선이 헌법 제54조에 명시한
대로,
"나는 국헌을 준수하며 국민의 복리를
증진하고 국가를 보위하여 대통령의 직무를
성실히 수행할 것을 국민에게 엄숙히
선서한다"고 선서한 다음 참의원 의장
백낙준이 대한민국의 이름으로 주는 무궁화
대훈장을 목에 건 후 막 취임 인사를
하려고 할 때였다.
갑자기 정전이 되었다. 글쎄 하필이면 새
공화국의 대통령이 취임사를 하려는 순간에
전기가 나가버릴 것이 뭐란 말인가!
그렇다고 황송스럽게도 대통령더러,
"지금 전기가 나가서 그러니, 전기가
주십시오"라고 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이게 무슨 불길한 징조야?"
의석에 앉아 있는 의원들 가운데에는
순간 상서롭지 못한 느낌이 든 사람들도
있었던 모양이었다.
그들은 군사 쿠데타를 당하게 되자,
이날에 있었던 불길한 예감을 털어 놓았다.
윤보선은 정전이 됐다는 것을 느끼지
못했던지 미리 작성된 연설문을 천천히
읽었다.
"제2공화국의 초대 대통령으로 영예의
당선을 얻은 어제 나의 감격은 선서식을
거행하는 오늘에는 영광된 의무감과
책임감으로 변해졌습니다......."
이렇게 시작되는 취임 연설문은 뭐 그리
특이할 만한 것은 못 되었다. 이런 경우의
이제 윤보선이 대통령 취임 선서까지
마쳤으니 그가 할 일은 대통령의 고유
권한인 국무총리를 지명하는 일이었다.
민주당 구파는 처음부터 대통령직과
국무총리직을 모두 다 차지하자는 것이었던
만큼 국무총리는 김도연을 지명할 것이
틀림없었다. 그래서 김도연은 지명됐을
때에 대비해서 벌써부터 반도호텔에 방을
얻어 득표공작을 벌였다.
(민주당은 오만에 빠져 있어. 정치에
오만은 금물이야. 오만한 자의 콧대를 꺾어
놔야 돼.)
이렇게 생각한 것은 이제 무소속의
보스가 된 이재형이었다. 그는 35세에
상공장관을 지냈다. 대한민국 장관사에
있어서는 최연소 장관의 기록을 세워놓고
청년이라고 하면 아직도 청년이라 할 수
있는 그 나이에 닭의 머리격밖에 안 되지만
어쨌거나 무소속의 보스가 되어 있었다.
장관을 지냈다는 경력과 그리고 그에게는
웬만큼 쓸 수 있는 정치 자금을 댈 능력도
있었다. 그리고 보면 대한민국에서는 한
정치파에 보스가 되는 데 있어 장관을
지냈다는 경력이 얼마나 큰 위력을
발휘하게 되었는지 알 수 있을 줄로 안다.
이재형은 무소속 의원들을 모아 놓고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민주당 신.구파에게 무소속이
건재하다는 사실을 재인식시켜 줄 필요가
있어요. 우리 무소속의 협조를 얻지 못하는
이상에 너희들 신.구파는 어느 쪽도 정권을
맡지 못한다는 것을 각성시켜 줄 필요가
무소속으로서 민주당 신.구파에 대해서
정책질의를 했으면 하는데, 거기에 대해서
반대하는 사람은 없겠죠?"
보스의 생각에 대해서 감히 왈가왈부할
사람이 누가 있겠는가. 그것은 또한
무소속으로서는 바람직한 일이기도 했다.
무소속에서는 즉시 정책질의를 하는
공함을 민주당 신.구파에 각기 띄웠다.
-4월혁명 과업의 완수방안은 무엇인가?
-원내 소수파의 권한 보장 방안은
무엇인가?
-거족적 구성 및 국방, 업무의 독립성
유지방안은 무엇인가?
-경제정책 심의회의기구 구성에 대해서
알고 싶다.
-농어촌 경제안정 대책이 어떤 것인지
이상 다섯 가지에 대해서였다.
무소속에서 보내 온 이 정책질의서를
훑어본 김도연은 (핵심을 찌르기는
찔렀는데 이 시점에서 이런 정책질의서를
보내 온 이유가 뭐야? 무소속도 한몫 끼고
싶다 그건가?)라고 생각하며 풀썩 웃었다.
무소속의 속셈이 무엇인지 훤히
들여다보이는 것 같았기 때문이었따. 그는
이것을 23인위원회로 돌렸다. 알아서
처리하라고 해서였다. 그에게는 그것보다도
중요한 과제가 더 많았기 때문이었다.
23인위원회는 김도연이 지명을 받게 될
것이 틀림없다는 전제하에 이면에서 활발한
득표 공작을 벌이고 있었던 때였다.
23인위원회에서는 물론 무소속의
정책질의서에 대해서 답변을 해보냈다.
조영규가 김도연과 상의 끝에 간략하게
답변서를 작성해서 보냈던 것이다. 어떻게
보면 그 답변서는 성의가 없는 것처럼
느껴질 만했다. 구체적인 설명 없이 단 한
줄씩으로 요약해서 기술된 내용이었기
때문이었다.
구파의 답변에 비해 신파의 답변서는 꽤
구체적이었다. 신파의 답변서는 정책위원회
의장인 주요한이 김영선과 상의 끝에
작성된 것이었다. 내용이 구체적이었던
만큼 꽤 성의가 있다고 느낄 수가 있었다.
(우리 무소속이 도울 파벌은 구파가
아니라 신파야.)
이재형은 속으로 이렇게 중얼거렸다.
8.15까지 새 정부를 세워서 정권을
이양토록 한다는 것이 허정의 계획이었다는
것은 이미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다.
그러나 허정의 계획에는 차질이 생겼다.
대통령에 취임한 윤보선이 아직도 국무총리
지명권을 행사치 않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초조해 하는 것은 정당이 아니라
국민이었다. 어서 하루속히 정식 정부가
들어서기를 고대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국무총리 지명이 늦어지자 항간에는
별의별 소문이 다 나돌고 있었다.
<대통령이 지명권을 행사치 않고 있는
것은 구파에서 김도연에게 시간을 벌어
주기 위해서다.>
갖가지 소문이 난무하고 있는 가운데서
가장 그럴싸한 소문이 이것이었다.
무소속을 포섭할 수 있는 충분한 시간을
벌어 주기 위해서라는 해석이었다. 있을
법한 일이었다. 가뜩이나 <조영규
발언>으로 해서 토라진 무소속이었다.
그들을 달래서 설득도 하려면 시간이
필요할 법한 일이었다. 그렇다고 신파가
가만히 있다면 모를까, 절대로 가만히 있을
그들이 아니었다.
<구파는 요직을 독점해서 분당해 나가려
하고 있다. 민주당의 분당은 정국의 혼란을
가중시킬 뿐이다. 정국의 안정을 기하려면
우리 신파의 주장처럼 요직을 안분해서
분당부터 막아야 한다. 고로 구파의 김도연
박사를 지명하더라도 절대로 인준을 해
주어서는 안 된다.> 이런 명분론으로
무소속 공작을 벌이고 있을 것은 틀림없는
경회루에서 8.15 경축 파티가 있었던
그날 저녁 8시쯤 허정은 경무대로 윤보선을
찾아갔다. 제3자가 있다면 모를까 단 둘이
마주 앉으면 <하게>를 할 만큼 두 사람의
친분은 두터웠다.
"이 시점에서 파벌의 이익보다는 정국의
안정을 먼저 생각해야 할 걸세. 구파에서는
요직을 독점하자는 것이 기본 정략인
모양일세만, 만일 그렇게 된다면 정국은
걷잡을 수 없으리 만큼 혼란에 빠지게 될
걸세."
허정은 먼저 자기의 견해부터 털어놨다.
윤보선은 묵묵히 듣고만 있었다.
"그래 누굴 지명할 생각인가?" 하고
허정은 물었다.
윤보선은 여전히 무겁게 침묵만 지켰다.
"해위, 민의원 의장에는 중도파인 곽상훈
씨가 당선되었고 대통령은 구파에서
나왔으니 국무총리로 신파의 장면 씨를
지명하는 것이 정치도의에 맞는 일이라고
생각하네. 그러니 대통령으로서 파벌을
초월해서 지명권을 행사하도록 하는 것이
좋을 걸세."
윤보선의 입가에 빙긋 미소가 감돌았다.
"장면 씨는 안 돼! 당내 공기도
그렇고......."
"무슨 소릴 하고 있나? 이건 장면 씨
개인 문제가 아냐. 개인적 역량의 문제가
아니라 정치도의상의 문제야. 대통령도
국무총리도 모두 구파에서 차지하는 법은
없어. 정치는 타협이 아닌가?"
허정의 말투는 좀 거칠었다.
열었다.
"해위, 혹시 내가 장면 씨하고 친하니까
이런 권고를 하고 있는 것으로 오해를 하고
있는 건 아니겠지? 친한 면으로 말한다면야
내가 김도연 박사하고 더 친하지 장면
씨하고 더 친하겠나?"
윤보선은 여전히 또 침묵만을 고집하고
있었다.
그때 비서가 들어와 김도연, 유진산,
조한백 세 사람의 방문을 고했다.
구파의 간부들이 찾아왔다는 말에 허정은
더 이상 앉아 있을 수가 없었다. 그는
윤보선한테서 아무런 시원한 대답도 듣지
못한 채 물러나올 수밖에 없었다.
<헌법 제69조의 규정에 따라 국무총리로
김도연 씨를 지명하오니 동의하여 주시기
대통령 윤보선이 서명하고 국무총리
허정과 내무부 장관 겸 국무원 사무처장
이호가 부서(副署)를 한 국무총리
인준요청서가 국회 사무처에 접수된 것은
8월 16일 오전 11시 25분이었다. 민의원
사무처에서는 즉시 이것을 본회의에 보고케
함으로써 발의했다.
윤보선은 김도연을 국무총리에 지명한
직후 담화를 발표했다.
"신중에 신중을 기하면서 생각한 끝에
김도연을 국무총리로 지명했다. 그는
항일투사일 뿐만 아니라 원만한 인격,
종용한 과단성, 조예 깊은 경제 경륜은 이
난국을 담당할 제1인자라 생각되기
때문에......."
신파가 발끈해졌을 것이라는 것은 다시
지명하게 될 것이라는 것을 십중팔구
추측하고 있으면서도 <설마> 하는 마음에
한 가닥 기대를 걸고 있었던 것이다. 그 한
가닥이란 정치도의였음은 다시 말할 필요도
없었다.
"지금이 어느 때인가? 정국 안정이 가장
다급한 때가 아닌가? 국민의 여망인 정국
안정을 도외시하고 분당론자인 김도연
박사를 지명했다는 것은 대통령의
양식(良識)을 의심치 않을 수가 없다. 윤
대통령은 반드시 그 저의가 무엇인지를
밝혀라."
이것은 민주당 신파 내의 소장파인
김재순의 공박성명의 한 구절이지만
민주당은 그들의 노여움을 성명 따위로만
표현하지를 않았다. 그들은,
공작으로 돈을 쓰고 있으며, 그 중 한
의원은 5백만환을 주겠다는 약속하에 우선
2백만환을 보증수표 두 장으로 받은 사실이
있다" 하고 폭로전술을 쓰기까지 했다.
윤보선이 정치도의를 무시하고 김도연을
지명했다고 해서 길길이 뛰며 그를
성토하는 성명발표쯤은 이해할 수 있지만
포섭 공작에 뿌린 정치자금을 문제삼아
폭로전술을 쓴다는 것은 비열하기 짝이
없는 이야기였다. 그럼 그들은 장면의
인준을 위해서 무소속 포섭에 돈을 쓰지
않을 것이란 말이었단 말인가? 이건 뒤에
밝혀진 일이지만 신파에서도 무소속 포섭을
위해서 돈을 뿌렸다. 그랬던 그들 신파가
자기들은 마치 고고한 자세로 정치를 하는
양 <돈> 문제를 가지고 폭로전술을 썼으니
되지 못했다. 그것을 그들은 어째서 깨닫지
못하고 있었을까? 또 언급하게 되지만 어떤
경우에든 정치자금을 가지고 문제삼는 것이
아니다. 참으로 답답하기만 한 일이었다.
한데, 국무총리에 지명을 받은 김도연은,
"5일 이내에 거국내각을 조각할
생각이거니와 조각의 원칙이 거국적이며
거당적인 것이기 때문에 신.구파를
초월해서 인물 본위로 등용하겠다"고
말했다.
구상을 밝힌 것까지는 좋았는데, 그의
의욕은 단 몇 시간도 못 돼 커다란
장애물에 부딪혔다. 그 장애란 다름이
아니라, 대통령이 김도연을 국무총리에
지명하자, 무소속의 민정구락부는 이날 밤
김봉재의 집에서 모임을 가졌다.
수 없어요. 조영규 발언은 또 그렇다고
치고 우리 무소속을 대하던 김도연 의원의
그 태도가 뭐예요? 우리가 낸 정책질의서에
대해서 이 따위로 성의 없게 답변할 수
있단 말입니까?"
이재형은 구파에서 보내 온 답변서를
흔들어 보이며 김도연을 성토했다.
하긴 김도연이 성토당할 만하기도 했다.
민정구락부에서 낸 정책질의서 중 소수파의
원내 활동문제와 법무.국방의 정치적 중립
유지방안에 대해서는 성의있는 답변을
회피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우리 민정구락부는 김도연 의원의
국무총리 인준을 거부키로 합의했다는 것을
성명으로 발표하기로 했다. 그와 함께
민정구락부의 행동 통일을 기하기 위해서
같다는 정준 의원의 제의에 따라 그 자리에
참석한 무소속 의원 25명 전부가 서명을
했다. 그 명단을 다음과 같다.
서정원, 박권희, 이재형, 조종호,
김성숙, 송영선, 박재환, 송능운, 박병배,
서태원, 신준원, 정해영, 전형산, 김갑수,
김석원, 이찬두, 윤길중, 이정석, 김세영,
김봉재, 정준.
무소속 의원들의 원내 교섭단체인
민정구락부의 반발이 구파로서는 큰 타격이
아닐 수 없었다. 그들의 협조 없이는
김도연과 민의원 인준은 거의 가망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8월 17일은 민의원에서 김도연의
국무총리 인준이 표결에 붙여지는
날이었다.
민의원 의원들은 장외에서 벌어지고 있는
상황에 적잖이 어안이 벙벙해졌으리라
여겨진다. 적지 않은 인파가 의사당 밖으로
몰려와서 진을 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그냥 호기심에 몰려와 있던 인파는
아니었다.
<민주당 구파 정권 독점을 반대한다.>
<독재와 싸운 인사 다시 지명하라.>
이런 구호를 쓴 플래카드를 펼쳐 들고
구호를 외치고 있는 일단의 아낙네들이
있었는가 하면, 또 한켠에는 <질서 없는
곳에 민주주의 없다>는 구호를 쓴
플래카드를 들고 일단의 사나이들이 역시
목이 터져라고 구호를 외쳐대고 있었다.
이것은 분명히 <김도연을 인준하라>는
패거리와 <김도연을 인준해서는 안 된다>는
구호를 외치고 있던 패거리들은 마침내
저희들끼리 맞붙었다.
"야아 이 쌍년들아, 계집년들이 집안에
틀어박혀 살림이나 하고 있을 일이지 뭘
안다고 거리로 뛰쳐나와 떠들고 있는
거야?"
아낙네들한테 먼저 욕설을 퍼부은 것은
사나이들이었다.
"야아 뭐이 어드레? 뭘 하나 더 달고
있다고 해서 다 사나인 줄 알아?"
아낙네들도 지지 않고 입을 놀렸다.
입씨름에는 사나이들이 아낙네들한테
당하기 마련이다. 사나이들의 무리 속에서
한 사나이가 뛰쳐나와 아낙네들한테로
달려가더니 그 중 한 아낙의 따귀를
때렸다.
와아 하고 아낙네들이 몰려들어 뺨을
때린 사나이의 옷자락을 붙들고 늘어지는가
하면 머리채를 움켜쥐고 요동을 쳤다.
그러나 사내들도 가만히 있지 않았다. 와아
몰려오자 아낙네들한테 발길질을 해대는가
하면 머리채를 휘어잡고 땅바닥에
메다꽂기도 했다. 마침내 사나이들과
아낙네들의 집단 싸움이 벌어진 것이다.
"죽여라, 죽여!"
아낙네들은 죽이라고 하며 사나이들한테
대들었다.
"죽이라면 못 죽일 줄 알어?"
주먹질, 발길질이 난무했다. 아낙네들의
비명 소리가 요란했다. 아낙네들이 입고
있는 옷고름이 뜯겨나갔는가 하면 치마가
갈기갈기 찢겨지기도 했다. 어떤 아낙네는
될 곳까지 훤히 드러나 보이기도 했다.
이 소동은 경찰이 출동해서야 겨우
진정시킬 수 있었다.
민의원 의사당 내에서 김도연 인준에
대한 투표가 시작된 것은 장외의 소란이
가라앉은 직후였다.
투표가 시작된 의사당 안은 흡사
시장바닥을 방불케 했다. 구파
소속의원들이 무소속을 상대로 마지막
득표공작을 벌이느라 법석댔기 때문이었다.
2시간이 채 못 되어 투표 결과는
밝혀졌다. 재적 227명 중 총 투표자 수는
224명이었고 가(可) 111표, 부(否) 112표,
무효 1표였다. 결국 김도연은 민의원의
동의를 얻는 데 실패하고 말았던 것이다.
재적 227의 과반수는 114였다. 그러니까
인준에 실패했던 것이다.
투표 결과가 발표되자 와아 하고 함성을
질러댄 것은 신파 의원들이었다.
"꼴 좋다. 저게 무슨 꼴이야? 대통령께선
완전히 스타일 구긴 꼴이 되고 말았잖어?"
이건 정치하고는 하등 관계가 없는
민중의 관전평이었다.
아닌게 아니라 좀 점잖치 못한
표현이지만 대통령 윤보선은 완전히
스타일이 구겨진 셈이었다. 대통령으로
선출된 지 이제 며칠이 되었던가? 고작
닷새밖에 더 되었던가! 대통령으로
당선되고 나서 처음으로 행사한
묵사발이 돼 버리고 만 것이다. 그러니
대통령으로서의 체면이 뭐가 되겠는가?
따지고 보면 대통령으로서의 위신에
손상을 입게 된 원인을 윤보선 스스로가
유발했다고 해도 결코 지나친 말은
아니었다. 순리대로 정치만 했더라도
윤보선은 대통령으로서의 권위에 손상은
입지 않았을 것이다. 이 경우 <순리의
정치!>란 정치도의를 의미한다. 김도연을
지명하고 싶은 마음이 꿀떡 같더라도
일단은 장면을 지명했어야 옳았다. 그것이
정치도의이기도 했거니와 여론이기도 했다.
국민은 민주당이 갈라지는 것을 원치 않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구파가 요직을 독점해 버리고 나면
분당을 반대하던 신파도 이제는 어쩔 수
그 경우 원내 안전세력을 이루지 못하고
있을 구파가 무슨 힘으로 정치를 해 나간단
말인가?
과욕.
구파는 너무 과욕을 부렸던 것이다.
오랫동안 권력에 굶주려 있어서 그랬던
것인가? 그렇더라도 누울 자리를 보고
다리를 뻗으라 하지 않았던가!
김도연에 대한 인준이 부결되자, 무소속
의원들 가운데에는 백낙준을 국무총리로
옹립하자는 움직임이 있었다. 그들도 물론
구 자유당 출신자들이었다. 그런가 하면
서인호를 옹립하자는 움직임도 있었다.
이런 움직임은 그저 조금 움직이다가
말았다. 몇몇이 논의하다가 흐지부지되고
말았다. 본격적으로 움직이기에는 시간이
"정신 나간 작자들!"
그런 움직임이 있을 때, 같은
무소속에서도 그들에 대해서 냉소를
퍼부었다. 정신 나갔다고 하기보다는
도무지 정치가 뭔지도 모르는
백치들이었다고 하는 것이 옳은 표현일 것
같다.
원내에 기반이 없는 사람을 옹립해서
무슨 재간으로 국무총리를 시키겠다는
것인지 도시 옳은 정신으로는 판단하기
어려운 행위였다. 그렇게 정치감각이 무딘
인물들이 어떻게 민의원에 당선될 수
있었는지 모를 일이었다. 그건 그렇고.
<헌법 제 69조의 규정에 따라 제 2차로
장면 씨를 국무총리로 지명하오니 동의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국무총리로 지명한 것은 8월 18일이었다.
윤보선은 장면을 지명해 놓고 이번에도
담화를 발표했다.
<장면 의원의 반공.반독재의 저항 생애는
현 난국 담당의 적임자이기에 국민의
상식적인 견해를 존중해서.......>
장면을 지명한 것이라고 했다.
이미 예상하고 있던 일이기는 하지만
신파는 신바람이 났다.
<이번에는 어떤 일이 있어도 기어이
인준을 받도록 하자>며 밤을 새가며 득표
공작에 열을 올렸다.
그들의 득표 공작의 대상은 물론
무소속이었다. 대상 인물과 친분 관계가
있는 사람을 동원해서 득표공작을 벌였다.
김도연이 지명되었을 때 길길이 뛰다못해
폭로전술까지 썼던 신파였지만 그랬던
그들도 막상 장면이 지명되자, 1인당
백만환에서 3백만환까지의 돈을 뿌렸다.
한편 구파도 가만히 있지를 않았다.
<한 번 더 기회를 잡기 위해서 장면
인준을 결사적으로 부결시키자!>
구파도 장면의 인준 저지를 위해서 밤을
새가며 인준 부결 공작을 벌였다.
장면에 대한 인준이 부결되면 그땐
민의원에서 국무총리를 선출하도록 헌법에
명시되어 있었다. 그러므로 구파에서는
장면의 인준을 부결시켜 버리면 한 번 더
기회를 잡을 수 있었기 때문에 장면의 인준
부결공작을 밤을 새가며 벌였던 것이다.
한데, 괴이하기 짝이 없는 것은 무소속,
곧 민정구락부 소속 의원들의 이해할 수
이날 밤 무소속의 25의원은 또다시
김갑수의 집에서 모임을 가졌다.
그들은 이날 밤에 무엇 때문에 모임을
가졌던가?
그것은 장면에 대한 인준도 거부하자는
결의를 하기 위해서였다. 그들 25의원은
전번에 김봉재의 집에서 모임을 가질 때
거기에 참석했던 똑같은 인물들이었다.
그들은 장면에 대한 인준을 부결시키기로
하고 역시 또 서명을 했다. 그리고는
뭐라고 했던가?
"2차에 걸친 국무총리 인준 부결로
정국이 불안정 상태에 빠지더라도 그것은
민의원 의석의 9할을 차지하고 있는
민주당의 책임이다. 민주당의 신.구파
알력은 정책적 차이에 기인한 것이 아니며
같은 위협적인 시위로 정권 장악의
도움으로 삼으려는 어느 편에도 협조해서는
안 된다는 판단하에 부표를 던지기로
했다"고 했다.
그러면 그들이 어떤 대안을 제시했던가
하면 그렇지가 않았다. 이 얼마나 답답한
얘긴가. 장면마저 인준을 얻지 못하게 될
경우 국무총리는 어쩔 수 없이 민의원에서
뽑을 수밖에 없게 되는데 과연 파란 없이
일이 진행될 것인지, 도시 알다가도 모를
일이었다.
한국 정치인의 병폐는 바로 이런 데에
문제가 있었다. 현실이 어떻다는 것은
고려해 볼 생각조차 하지 않고 자파의
주장만을 고집하는 바로 이것이 병이었다.
무소속 25명의 의원이 장면의 국무총리
꿈을 버리지 않을 수 없는 형편이었다.
그런데 여기 천군만마의 힘에 필적할 만한
원군이 나타난 것이다. 그는 다름 아닌
과도정권 수반 허정이었다. 그도 이날 밤
친분 관계가 두터운 무소속 의원 20여 명을
신교동 자택으로 초청을 했다. 여기에는
구파로 지목되고 있는 인물도 몇 끼어
있었다. 그들은 대부분이 경상남도 출신
의원들이었다.
"내가 여러분들을 내 집으로 초청한 것은
여러분이 소아를 버리고 대의를 위해서
일해 주십사 하는 것을 부탁하기
위해서예요. 나는 윤 대통령에게 구파가
요직을 독점하려는 것은 정치적 탐욕이다,
그러니 그 탐욕을 버리고 대국적 견지에서
장면 씨를 지명해야 한다고
권고를 물리치고 김도연 씨를 지명했던 게
아니었겠소. 이번에 또 장면 씨 인준이
부결되는 날엔 정국은 걷잡을 수 없이
혼란에 빠지고 말 것입니다. 그러니
이번만은 여러분이 파벌이나 이해 관계를
떠나서 장면 씨가 인준될 수 있도록
적극적으로 협조해 주시면 감사하겠소."
허정은 어째서 스스로 장면을 돕고
나섰던 것일까?
인맥(人脈)으로 따지면 허정은 신파를
도우려 할 것이 아니라 구파를 도우려
했어야 옳았다. 그는 한국민주당 창당 때
8총무의 한 사람이었으니까. 그런데도 그는
구파가 아닌 신파를 돕고자 스스로 발벗고
나섰던 것이다. 그 이유에 대해선 아무도
모른다. 허정 자신이 밝히지 않는 한
없을 것 같다.
장면에 대한 인준 투표는 8월 19일 오후
1시에 시작되었다. 결과는 재적 228명 중
225명이 투표에 참가했다. 김도연에 대한
인준 투표를 할 때는 224명이었던 것이
이날 4명이나 늘어났던 이유는 그 사이에
재선거를 실시한 선거구에서 4명의
당선자를 냈기 때문이었다.
장면은 마침내 인준을 획득하는 데
성공했다. 228의 과반수는 115였다. 그에게
던져진 가표는 117표였고 부표는
107표였다. 무효표가 역시 1표였다. 장면이
인준을 획득하자, 신파는 <만세>를 불렀고
구파는 더욱더 침울해졌다.
참고로 내각책임제 정치제도하에서의
국무총리에게 주어지는 권한이 어떤
제2공화국의 헌법을 중심으로 한 것임을
밝혀 둔다).
-국무총리는 그를 포함해서
국무원(國務院)을 조직한다.
-국무총리는 국회의원이 과반수인
국무원(8인 이상 15인 이내)을 임명한다.
-국무총리는 국무회의를 소집하고 의장이
된다.
-국무총리는 국무회의의 결의에 따라
행정 각부를 지휘, 감독한다.
-국무총리는 법률에서 인정한 범위를
정하여 위임을 받은 사항과 법률을
실시하기 위해 필요한 사항에 관해서
국무회의의 의결을 거쳐 국무원령을 발할
수 있다.
명령이 위법 또는 부당하다고 인정한
때에는 이를 중지 또는 취소하고
국무회의에서 국무원의 방침을 결정하게 할
수 있다.
-국무총리는 국무위원을 대표하여
의안(議案)을 국회에 제출한다.
-국무총리는, 내우외환 천재지변 또는
중대한 재정상의 위기에 대해 대통령이
국무회의 의결을 거쳐 취한 긴급조치와
재정상 필요한 처분을 집행하기 위하여
법률의 효력을 가진 명령을 발할 수 있다.
이 명령은 지체없이 국회에 보고해서
승인을 얻지 못하면 효력을 상실하게 된다.
-국무총리는 대통령의 국무 및 군사에
관한 문서에 관계 국무위원과 부서를 해야
한다.
이것이 제2공화국 때의 국무총리에게
주어진 권한이었다.
대통령에서 국무총리에 이르는 일련의
정치 과정을 지켜보면서 국민은 비로소
멋있는 정치는 어떤 것이냐 하는 것을 처음
피부로 느꼈다.
"민주주의 정치란 곁에서 구경하기에도
신바람이 나는걸. 진작 이런 정치 제도를
도입했던들 4.19 같은 비극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었는데......."
대다수의 국민들은 신바람이 나
있으면서도 4.19를 생각하고는 우울해
하기도 했다.
9. 장면 정권 출범
장면이 새 정부의 국무총리로 인준을
받음으로써 허정의 과도정권도 이날로써
막을 내리게 되었다. 허정은 8월 19일
이날,
"오늘 새로 선출된 국무총리에게 나의
과도적 소임을 대과 없이 이양하게 된 것을
기쁘게 생각한다"며 물로나는 소감을
피력했지만 과도정권을 이끌어 나왔던
허정의 팔자도 따지로 보면 기구하다 할
수밖에 없었다.
허정이 이승만을 대신해서 대통령직
권한대행을 맡았던 것은 4월
과도정권의 시기로 치면 꼭 116일 집권한
셈이 된다. 이 사이에 그는 대통령직
권한대행을 두 번 내놔야 했었다.
내각책임제 개헌안이 통과되어 이것을
공고하게 되자 개정 헌법에 따라 대통령직
권한대행은 국회의장인 곽상훈에게
물려줘야만 했었다. 개정 헌법에는 <대통령
유고시에는 국회의장이 그 권한을
대행>하도록 되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때는 다행히 곽상훈이 국회의장직을
내놓고 허정으로 하여금 대통령직을
대행하도록 해주었기 때문에 다시 또
대통령직 권한대행을 물려받을 수 있었지만
윤보선이 대통령으로 선출되자 또다시 그
대행직을 내놓아야 했었다.
허정으로서야 그까짓 대통령직에 머물러
역사의 창조 과정에서 이런 우여곡절을
겪고 보니 한 가닥 감회가 없을 수 없었다.
그가 윤보선이 대통령으로 선출됨으로써
재선거를 실시하게 된 종로 갑구의
보궐선거에 출마하라는 주위의 권고를
물리쳤던 것도 정치 와중에서 겪어야 했던
권력 무상을 느꼈기 때문이었으리라.
그건 그렇고 장면이 국무총리 인준을
획득함으로써 제2공화국은 탄생되었다.
역사의 한 장은 막을 내렸고, 이제 새로운
역사의 장이 막을 연 것이다. 장면이 각부
장관을 임명해서 국무원만 구성이 되면
희망찬 내일을 향해 닻을 올리면 되었다.
그런데 이것 참 기가 찰 노릇이었다.
장면이 막상 국무원을 구성하려고 하자,
그의 앞에는 넘어야 할 험준한 산이 잇달아
"총리, 나에게 내무를 맡겨 주십시오."
"총리, 나는 법률가이니만큼 나에게는
법무를 맡겨 주십시오."
"총리, 우리가 당면한 시급한 문제는
경제 난국을 어떻게 타개해야 하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 중차대한 문제를
내가 책임지고 수행할 테니, 나한테는
재무부를 맡겨 주십시오."
박순천, 김상돈, 김선태 하면 모두가
이승만 정권 타도를 위해서 앞장서 온
사람들로, 그들은 아예 장면의 면전에서
장관 감투를 요구했다.
소장파도 가만히 있지 않았다. 장면이
국무총리 인준을 받은 다음날, 즉 8월 20일
이철승, 김재곤, 김재순, 신중하, 함종빈,
우희창 등은 중앙청 국무총리실로 장면을
것을 요구했다.
"소장파한테 두 자리를?"
장면은 어이없는 표정이었다.
"우리 소장파한테도 응분의 안배를 해야
하는 것은 당연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래, 소장파에선 어떤 자리를 주었으면
좋겠다는 거요?"
그 물음에 대해서는 김재순이 대꾸했다.
"박사님께서도 익히 잘 아시고
계시겠지만 지금 군부의 동태가 심상치
않습니다. 그러므로 군부를 휘어잡자면
군부에 대해서 정통한 사람이 국방부 장관
자리에 앉아 있어야만 합니다. 그런 점으로
미루어 볼 때, 이철승 의원이 가장
적임자라고 생각합니다. 오랫동안
국방의원으로 있었으니 말씀입니다."
살펴보더니 결연히 말했다.
"지금 가장 시급한 것은 원내 안정세력
확보요. 그러니 철저히
논공행상(論功行賞)할 자리가 없소."
논공행상을 할 자리가 없다는 것은
소장파를 입각시킬 수 없다는 거절의
표현이었다.
장면은 소장파의 입각을 거부할 경우
그들이 반발할 것이라는 것을 십분
숙지하고 있었다. 그렇다고 그들의 반발을
무마하고자 해서 그들에게 각료 자리를
배분해 줄 수는 없었다.
구파에서도 개별적으로 입각을 희망해
오는 인물이 없지는 않았다.
신각휴(申珏休)가 그 대표적인 인물이었다.
그는 사람을 내세워,
적극적으로 협조해 주겠다"고 요청해 왔다.
여기에 대해서 장면은,
"농림부는 어렵고 체신부나 보사부를
맡겠다고 한다면 고려해 보겠다"고
대답했다.
그러나 신각휴는 농림부가 아니면 싫다고
일언지하에 거절했다. 구파 골수분자라 할
수 있는 그가 어째서 신파 내각에
입각하기를 희망했던 것일까? 이때 그의
나이 65세, 인생의 황혼길에 접어들자
<장관님> 소리라도 한번 들어보고 인생을
마무리 지어야겠다는 생각에서 구파에서
이탈하려 했던 것일까?
장면을 괴롭게 만드는 또 하나의 문제가
있었다. 그것은 <이북 출신자를 쓰지
말라>는 압력이었다. 장면의 귀에 대고
사람은 의외로 많았다. 손바닥만한
땅덩어리에 살고 있으면서 이북, 이남을
가리는 이유가 무엇이었을까?
이태조(李太祖) 성계(成桂)의 유훈
10조에도 <관서 사람을 쓰지 말라>는
조목이 하나 들어 있다. 이씨 왕조 5백년을
통해서 이 유훈은 금과옥조로 지켜져 왔다.
그 때문에 관서지방 인물치고 벼슬길에서
큰 인물은 하나도 없었다. 그것이 나라를
위해서 얼마나 불행한 일이었는데 20세기
후반에서 또 어째서 그런 악폐를 재현하려
들었는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었다.
이북 사람, 곧 관서지방 사람들이 욱하는
성미에다가 반골 정신이 강한 것만은
사실이었다. 해방 뒤, 그 욱하는 성미가
숱한 암살사건을 빚어내었다.
여운형을 암살한 이필현(李弼顯:일명
韓指根), 장덕수(張德秀)를 암살한
박광옥(朴光玉), 김구를 암살한
안두희(安斗熙), 김창룡(金昌龍)을
암살하라는 지령을 내린 허태영(許泰榮),
부통령 장면을 암살하려다가 미수에 그친
김상붕(金相鵬) 등은 공교롭게도 모두
관서, 특히 평안도 출신자들이기도 했다.
그렇다고 해서 <이북 사람을 쓰지 말라>는
것은 도무지 납득할 수 없는 처사였다.
장면을 괴롭히는 문제가 또 있었다.
그것은 그의 참모들의 지나친 용훼였다.
<××부에는 갑이 적격자이고, OO부에는
을이 적격자니 꼭 이 사람들을 쓰도록
하십시오.>
그들은 장면이 달가워하거나 말거나
일선에서는 오위영(吳緯泳)과 김영선,
주요한, 조재천 등이 1급 참모였고 정계
이면에서는 신부 김철규(金喆圭)와
한창우(韓昌愚) 두 사람이 1급
참모들이었다. 그들은 장면의 자문에
응한다던가 건의에 그치고 있었던 것이
아니라 <얍력>을 구사하고 있었던 것이다.
장면의 주변 환경이 그런데다가 그가
처해져 있는 정치적 여건이 단독내각을
구성할 수 있는 여건이 못 되었기 때문에
그는 더욱더 조각에 어려움을 겪지 않을
수가 없었다.
(어떻게 해야 원내 안정세력을
유지한다?)
장면이 당면한 최대의 과제는
이것이었다. 원내 안정세력을 유지하자면
하는데 신파만으로는 2분의 1일 조금
웃도는 의석수밖에 안 되었기 때문이다.
결국 장면은 구파하고 제휴해서 내각을
구성하는 도리밖에 없다고 판단했다.
구파를 내각에 끌어들임으로써 그는 집권이
가능하다는 결론을 내렸던 것이다.
정치인도 인간이다. 때로는 이성보다
감정이 앞서는 경우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정치인은 공인(公人)이다. 공인의 감정적인
처사는 어떤 경우에도 용납될 수가 없다.
공인의 감정적인 처사는 국가와 국민에게
불행한 결과를 초래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정치인은 감정이 이성보다 앞서는
슬기가 있어야 한다. 그럼으로써
공인으로서의 책무를 다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면에서 민주당 구파의 처사를
평가한다면 이 무렵의 민주당 구파는
공인으로서의 자세가 낙제점이었다고 할
수밖에 없다. 국가라는 전체를 생각하기에
앞서 구파라는 부분의 이익에만 집착해서
활동했기 때문이다. 이제 집권의 꿈이
깨어진 구파가 그들의 파벌의 이익을
위해서 어떻게 움직였나를 살펴보자.
집권의 꿈이 깨어졌다고 해서 구파는 닭
쫓던 개 지붕 쳐다보는 격으로 한숨만
내쉬고 있지는 않았다.
(기회는 얼마든지 있다!)
그들이 품고 있던 한결같은 계산이었고
아니었다.
도각(倒閣), 그것이었다.
내각을 쓰러뜨리면 되었다. 장면 내각을
쓰러뜨리기만 하면 싫다고 해도 정권은
구파한테로 굴러들어오기 마련이었다.
어떻게 해야 장면 내각이 쓰러질 것인가?
구파는 그것을 위한 1차적인 작업에
착수했다.
장면이 국무총리 인준을 획득한 8월 19일
오후 늦게 그들 구파의 23인위원회는
관훈동의 민모 씨의 집에서 긴급회의를
열었다. 총선거 때는 선거에 대비해서,
국회가 구성된 후에는 집권을 위해서
구파의 작전참모부 역할을 맡고 있던
23인위원회는 이제는 <도각>을 위해서
그들의 머리를 쥐어 짜내기 시작했던
말했다.
"이제 우리는 패배를 현실적 상황으로
받아들이고 우리의 진로를 결정하는 것이
좋을 것 같소. 내 생각은 그렇소. 건전한
보수 야당제의 확립이라는 차원에서
신파하고는 완전히 결별하고 무소속과
제휴해서 야당으로 새 출발하는 것이
옳다고 말이오."
무소속과의 제휴가 이루어질 수만 있다면
얼마나 다행한 일일까! 무소속과 이탈자
없이 제휴만 할 수 있다면 과반수는
확보하고도 남기 때문에 도각은 식은 죽
먹기가 될 수 있었다. 그러나 무소속도
신파한테 기대려는 면이 있기 때문에
무소속과 제휴해서 과반수를 확보할 수
있느냐 하는 것은 숙제라고 할 수밖에
그도 그럴 것이 이 무렵 이재형을
중심으로 한 무소속은 <장면 인준 부결>을
결의했었음에도 불구하고 막상 장면이
인준되자, 그가 <거국내각 조직>을
천명했던 것에 한 가닥 희망을 걸고 무소속
입각을 위한 막후 절충을 벌이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여간에 <갈라져야 되겠다. 갈라져야
되겠어> 하고 신파와 결별을 운위한 것은
오늘이 처음이 아니었다.
총선거가 막바지에 이르렀을 때부터
갈라서기로 공언해 왔던 그들이었다.
그러므로 구파에 속해 있는 인물치고
분당에 마음의 준비를 갖추어 놓고 있지
않은 인물은 거의 없는 형현이었다. 물론
장관 감투의 매력에 끌려 신파 쪽에 가담해
제기하지 않았다.
"그럼 우선은 별도의 교섭단체 등록에
필요하니, 우선 여기 모인 의원들부터
서명을 하도록 해주십시오."
유진산의 요청에 따라 참석자들은 그
자리에서 서명을 했다.
그들은 분당을 위한 기초 작업으로
별도의 교섭단체를 구성할 경우 국가의
운명에 어떤 영향을 미치게 될 것이라는 데
대해서는 눈꼽만큼도 생각해 보지를
않았다. 그들 구파는 그저 어떻게 해야
신파의 정권을 쓰러뜨릴 수 있느냐 하는
데에만 집착하고 있었다.
같은 시각, 전업회관에 모인 원외 지구당
위원장들도 한시바삐 신파하고 결별,
야당으로서 새 출발할 것을 결의했다.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신파는 처음부터
분당에 반대였지만 그에 동조해서 중도파가
분당에 한사코 반대를 하고 있었다. 이
중도파는 윤택중(尹宅重), 정재완(鄭在浣)
등이 중심이 되어 있었지만 그들의 수는
고작 18명. 더구나 이름이 중도파지,
개인적인 이해관계에 따라서 친신파,
친구파가 될 수 있는 결합체였다. 그랬기
때문에 그들의 발언권이란 그리 대단한
것이 못 되었다.
그런가 하면 분당에 부채질하는 무리가
없었던 것도 아니었다. 그 대표적인 인물이
이승만 밑에서 초대 법무부 장관직을 지낸
이인(李仁)이었다. 그는 구파
23인위원회에서 분당으로 건전 야당을
지향하기로 결의했다는 소식을 듣자,
결성한다는 것은 국가의 앞날을 위해
경하할 일이다"라고 전제한 다음,
"분당해서 나오는 사람들의 정책과
이념이 합치만 된다면 한데 규합해서 한
당을 하겠다"고 했던 것이다.
여기에서 잠시 과거의 우리 정치인들의
정치적 지적 수준이 어느 정도였는지를
살펴보고 넘어가기로 하자.
이인은 분당해서 나오는 사람들의 정책과
이념이 합치만 된다면 어쩌고 했다. 민주당
구파가 분당해서 나온다고 해서 정책이나
이념이 다른 것은 무엇이겠는가? 민주당이
내세우고 있던 정책이나 이념이 구파
신파의 정책이요, 이념이었다. 그것을
분당을 했다고 해서 구파가 정책이나
이념을 180도로 전환시켜 버릴 것이라고
그것은 상식이다. 그것을 정책, 이념
운운한다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그 집 참 잘 탄다. 그 집 다 타버리고
나서 새 집 짓게 되면 나도 투자를 할 테니
같이 짓도록 하자>고 제의하는 어리석음과
똑같은 행위였다.
이렇듯 이 무렵의 정치인들이라는 것이
민주당의 분당을 국가적 차원에서 생각하려
했던 것이 아니라 개인, 또는 파벌의
이익이라는 차원에서만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니 이런 무리로 둘러싸여 있는
민주당 정권이 용 빼는 재주가 없는 한
정권 지탱이 가능할 리가 없었다.
이루어진 것은 8월 20일 아침이었다. 아직
월급쟁이들의 출근시간 전이었다.
이 모임은 장면의 요청으로 이루어졌다.
구파가 원내에 별도의 교섭단체를
등록하기로 하고 그 명칭을
<구파민주당(舊派民主黨)>으로 호칭하기로
했다는 소식을 듣자, 장면은 어떻게 해서든
분당도 막고 조각도 서둘러야겠다는
생각에서 전날 밤 느지막하게
사택(私宅)으로 백남훈을 찾아갔던 것이다.
"선생님, 이제 신.구파의 싸움은 끝나지
않았소? 그러니 이제부터는 신.구파가
합심해서 국가를 위해서 이바지하도록 해
봅시다. 난 내가 국무총리가 됐다고 해서
신파 일색의 내각을 조직할 생각은 없어요.
또 그래 가지고는 난국 수습도 안 될
의논 상대라도 좀 돼 주시오."
장면의 얘기를 듣고 난 백남훈은 가만히
생각해 보았다. 현실적으로 볼 때 구파의
협조 없이 신파 단독으로 정국을 이끌어
나가기는 어려운 일이었다. 구파가 끝까지
고집을 부릴 경우, 정국은 또 어떤
방향으로 치닫을지 가늠조차 하기가
어려웠다. 그는 장면에게 내일 아침에
김도연과 함께 반도호텔로 찾아가겠다고
약속해 놓고, 8월 20일 이날 아침에
김도연을 찾아갔다.
황해도 장련(長連) 태생인 백남훈은
1885년생이니까. 만 75세. 한국민주당 창당
멤버인 그는 이 무렵 유일한 원로였다.
그에게는 정치적 운이 없었던지 7.29
총선거에서 겨우 민의원 의석을 차지할 수
밀양이었다. 그로서는 전혀 연고가 없는
지역이었으나 그의 맏아들 명기(命基)가
6.25 당시 밀양으로 옮겨간
수도육군병원에서 군의관으로 근무한 일이
있었고 제대한 후에도 계속해서 그 땅에서
병원을 개업하고 있었기 때문에 아들의
연고에 의지해서 밀양을 선거구로 택했던
것이다. 막대기라도 꽂으면 표를 찍어 주는
<민주당 바람>이 아니었던들 어쩌면 그의
당선은 어려웠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상산, 수고스럽지만 나하고 같이 가서
장 박사를 좀 만나 봅시다."
김도연은 좀 의아스러운 표정이었다.
"아니 갑자기 장 박사는 왜요?"
"아무래도 구파 협조 없이 신파 내각은
어렵지 않겠소? 가서 장 박사가 어떤
것이 좋을 것 같구려."
"그러지요."
백남훈은 황해도 사람의 특성을 대표할
만한 인물이라 할 수 있었다. 우선 성품이
정직하다 못해 우직할 정도였다. 대인
관계가 부드럽고 관대했다. 7.29 총선거 때
서울 성동(城東) 을구에서 입후보하기로
작정을 해놓고 있던 그는 조병옥의 아들
조준형(趙俊衡)이 입후보한다고 하자, 아예
공천 경쟁조차 해볼 생각을 않고 밀양으로
선거구를 옮길 만큼 그는 동지끼리 다투는
것을 싫어했다. 정치에 뛰어들었으니
권력욕이 있을 법도 했으나 그는 그것도
없었다. 그가 민주당 최고위원이 될 수
있었던 것은 당시 원로로서 추대하니까
받아들였을 뿐이었다. 어떻게 보면
그러나 그의 의지만은 굳건했다. 이것이
황해도 사람의 특성이었다.
반도호텔로 찾아간 백남훈, 김도연 두
사람은 829호실에서 장면과 마주 앉았다.
829호실은 장면의 조각본부였다. 7.29
총선거가 끝나고 민의원 집회가
가까워오자, 장면은 이 829호실에 진을
치고 국무총리 득표 공작을 벌여 왔던
것이다.
"지금 정국이 어떻다는 것을 김 박사나
해온(海溫:백남훈의 아호) 선생남께서는
누구보다도 잘 아시고 있는 일이
아니겠습니까? 아까 김 박사한테는
전화로도 말씀드렸습니다만 이제 신.구파의
싸움도 끝났으니 혼연히 정국 수습의 길로
나서 주셨으면 합니다. 그 길은 신.구파가
것뿐입니다. 그러니 신.구파가 다시
합작하도록 하십시다."
장면의 말투에는 진정이 어려 있었다.
그의 고충을 말투에서도 느낄 수가 있었다.
"합작에는 이의가 없어요."
김도연은 이렇게 전제하고,
"합작을 하는 데는 이의가 없는데,
아무래도 거기에는 전제 조건이 있어야 할
것이 아니겠소? 장 박사께서 어떤 생각을
하고 계신지 그걸 좀 미리 말씀해 주셨으면
합니다만" 하며 먼저 전제 조건을
밝혀주기를 요구했다.
어떤 기록에는 김도연을 가리켜 그가
배타적인 파벌색이 짙다고 기록해 놓고
있지만 그것은 김도연을 옳게 평가하지
못한 것 같다. 김도연이란 인물은 성격이
못하는 것이 흠이라면 흠이었다. 당초
총선거 직후, 구파가 정권문제를 놓고
김도연을 대통령으로, 윤보선을 국무총리로
정해 놓고 있었던 것도 그가 파벌이나
경쟁의식에 초연해 있었기 때문이었다.
<배타적이고 파벌색이 짙다>면 어느 정도
권모술수에 능했다고 할 수 있는데
김도연은 권모술수에 있어서도 백지에
가까웠다. 그가 조금이라도 권모술수에
능했던들 단 3표 부족으로 국무총리 인준에
쓴 잔을 마시지는 않았을 것이다.
김도연이 그런 인물이었기 때문에 구파를
이끌어 나갔던 것은 유진산이었다. 그는
지모가 남달리 출중했다. 더구나 그는
유석(維石) 조병옥 밑에서 정치 훈련을
쌓은 조병옥의 수제자였다. 그랬기 때문에
짜내졌고 유진산은 스스로 짜낸 전략에
따라 구파를 이끌어 나가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김도연은 그저 구파의 상징적인
보스로서 유진산한테 업혀 있었다고나
할까. 그건 그렇고 김도연이 신.구파
합작의 전제 조건이 무엇이냐고 묻자,
장면은 조각의 대원칙을 제시했다. "신파
5, 구파 5, 무소속 2의 비율로 내각을
조직하고자 생각하고 있소."
백남훈이 아주 조용한 목소리로 자기의
견해를 밝혔다.
"내 생각으론 그렇소. 신파 5, 구파
5라면 연립내각이라 할 수 있을 게
아니겠소? 연립내각이라면야 구파에서 굳이
마다할 것이 없는 것 같소만" 하면서
김도연을 힐끗 바라보았다.
까닭이 무엇이겠소?"
김도연은 이렇게 긍정적인 의사 표명을
하고 나서도 뭔가 마음이 놓이지 않았던지,
"하나, 그건 우리 두 사람의 생각이고,
일단은 구파 중진들하고도 의논을 해봐야
어떤 최종적인 결론이 내려질 수 있을 것
같소. 그러니 그에 대한 해답은 일단 구파
중진들하고 의논해 보고 난 뒤에 다시
구체적으로 협의하도록 하십시다."
두 사람이 물러가고 나자 장면의 참모인
오위영, 조재천이 길길이 뛰었다.
"신파 5에 구파 5의 비율이라니 말도 안
되는 소립니다. 만일 구파가 무소속하고
제휴해 보십시오. 국무회의는 밤낮
왈가왈부만으로 시종하게 되고 맙니다."
그들의 주장에도 일리가 없는 것은
경우, 항상 의견이 대립되어 효과적인 국정
요리가 어려운 일이기는 했다.
조재천이 단호하게 말했다.
"총리의 고충은 저도 잘 압니다만, 동수
비율은 절대로 안 됩니다. 꼭 구파를
입각시켜야만 정국 안정을 도모할 수
있겠다 생각하신다면 두서너 자리만 주도록
하십시오. 그래야만 국무회의를 원만히
이끌어 나갈 수가 있습니다."
조재천은 국무회의의 원만한 진행을
구실로 구파에게 5개의 장관 감투를
배분하는 것을 반대했지만 사실에 있어서는
그의 속셈은 딴 데 있었다. 장관 감투를
요구하는 자천타천의 인물들이 너무나
많았다. 장관 감투가 백 개라도 희망자
전원에게 씌워 주기는 부족할 형편이었다.
못한다 하더라도 최소한 신파에게 한
개라도 더 씌워 줌으로써 단 한 사람이라도
불평불만자를 줄이자는 것이 그의
속셈이었던 것이다.
조재천이 하도 강하게 반대하므로 장면도
어쩔 수가 없었던가?
"구파에서 어떤 태도로 나오는지 귀추를
봐 가면서 우리의 태도를 정합시다."
<사랑을 따르자니 스승이 울고 스승을
따르자니 사랑이 울고>라는 유행가의 한
구절 같은 것이 장면의 심정이었을 것이다.
장면은 한나절을 목을 늘이고 기다렸다.
그러나 김도연이나 백남훈에게서는 아무런
(구파는 신파한테 절대로 협조할 수
없다. 그 배포가 분명하군.)
이런 생각이 들자, 장면의 마음도 조금
더 조급해졌다. 자꾸만 조각을 질질 끌
수도 없었다. 한나절을 기다리는 동안에도
신파 참모들의 독촉은 성화 같았다.
"그만했으면 구파의 배포가 어떻다는
것은 알조가 아니겠습니까? 어서 조각을
서둘도록 하십시다."
참모들은 과연 그들한테 어떤 장관
감투가 배당될지 몰라 조급증을 일으키고
있었던 것이었다.
"조각이 늦으니 나도 여러분과
마찬가지로 조급증이 나오. 하나
어떡하겠소. 구파의 협조가 없이는 정국
안정을 도모하기가 어려운 것을! 그러니
조금만 더 기다려 봅시다."
장면은 참모들을 달랠 수밖에 없었다.
해가 저물어도 구파한테서는 아무런
기별이 없자, 장면은 상도동 유진산의
집으로 특사를 파견했다. 이 특사의 임무를
맡은 것이 누구냐 하는 데 대해서는 밝혀진
일이 없다. 다만 추측으로 그 임무를 맡은
것은 장면의 재야 참모인 한창우일
것이라는 설만이 있을 뿐이다.
이 특사에게 주어진 사명은 유진산을
설득해서 대통령 윤보선의 힘을 빌리자는
데 있었다. 구파의 총참모장격인 유진산이
장면의 특사에게 설득당하지는 않을 것
같은 느낌이 들었던가? 장면은 특사에게
<유진산을 내무부 장관에 임명하고자
내정하고 있다>는 것을 강조하도록 미끼를
옥계(玉溪:유진산의 아호) 유진산은
1905년생이니까 이때 그의 나이 55세. 그는
타고난 성품과 지략이 뛰어난 데다가
조병옥 밑에서 정치를 익혔다. 그러므로
그의 정치 스타일은 흡사 조병옥
그대로였다. 그는 내무부 장관 감투가 탐이
나서가 아니라 조병옥이 일찍이 간파했듯이
<빈대잡기 위해서 초가삼간 태울 수
없다>는 고사에 따라 요청을 쾌락했던
것으로 그의 측근자들은 회고하고 있다.
이래서 세칭 열리게 된 것이 <경무대
4자회담>이었다. 유진산의 결단이
아니었던들 역사상에 경무대 4자회담은
기록되지 못했을 것이다.
경무대 4자회담이 열린 것은 8월
21일이었다. 대통령 윤보선의 초청
인사는 장면을 비롯해서 민의원 의장
곽상훈(중도파)과 구파의 총참모장
유진산이었다. 이날은 일요일이었다.
독실한 기독교 신자인 윤보선은 예배당에
나가야 하는 것을 마다하고 초청인사들과
자리를 함께 했다.
회담 장소는 경무대 뒤뜰이었다. 일체
외부의 접근이 차단되었다.
"운석께서 조각의 원칙을 5, 5, 2로
하기로 했다던데, 이 원칙에 변동은 없소?"
"변동이 있을 리가 있겠소?"
장면이 짤막하게 대꾸했다.
"조각 원칙을 5, 5, 2로 정했다면
명실공히 거국내각이라 할 수 있겠소.
그러니 구파에서도 조각에 참여해서 이
난국을 수습토록 하는 것이 좋을 것 같소."
"예, 국가 장래를 위해서 장 박사께서
아주 어려운 결정을 내렸다고 생각합니다."
유진산은 이렇게 장면을 추켜 세우고 난
다음,
"하나, 우리 구파가 거국내각에 참여하는
데 있어서는 한 가지 조건이 있습니다"라고
덧붙였다.
"한 가지 조건?"
장면은 조건이 있다는 유진산의 말이
언뜻 납득하기가 어려운 모양이었다.
곽상훈이 조급히 물었다.
"진산, 그 조건이라는 것이 대체
무엇이오?"
민주당에서는 젊은이고 늙은이고
유진산을 곧잘 <진산>이라 불렀다. 진산은
그의 이름이었으나 어느 사이엔가 그에
여담이지만 유진산의 본명은
영필(永弼)이었다. 그것을 유진산이 해방이
되고 정부가 수립되기 전에 실시한
제헌국회에 진출하고자 입후보할 때, 그가
태어난 충청남도 금산군 진산면(5.16 군사
쿠데타 전에는 금산군은 전라북도에 속해
있었다) 향리의 지명을 따라 스스로
유진산이라는 이름을 써오고 있었던
것이다.
유진산이 장면과 곽상훈을 번갈아 보면서
입을 열었다.
"그 조건이란 다름이 아니외다. 우리
구파는 이미 분당을 선언했고, 또 원내에서
별도의 교섭단체로써 활동하기로 결의까지
해놓았습니다. 그것을 조각에 응한다고
해서 지금 그 결의를 번복하기는 어려운
활동하는 것을 인정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조건이란 바로 그것입니다."
윤보선은 장면에게 물었다.
"어떻소? 신파에서 그 조건을
받아들이겠소?"
장면이 뭐라 대꾸하기도 전에 윤보선이
덧붙였다.
"거국내각이라고 한 이상에는 구파가
별도의 교섭단체를 형성했다고 해서 문제될
것이 없지 않겠소? 오히려 별도의
교섭단체를 구성했으니까, 거국내각이라
하기에 손색이 없는 것 같소."
장면은 어쩔 수가 없었다. 유진산이
제시한 조건을 거부할 경우에는 거국내각의
꿈도 무산되고 말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해서 신.구파의 합작은 수월하게
소속의원들이 이 합작을 수락하겠느냐 하는
것이 문제였다. 유진산은 이번에는 구파
설득공작에 나서지 않으면 안 되었다.
오전 10시부터 시작되었던 경무대
4자회담은 거의 1시간 만에 끝났다.
"경무대 4자회담에서 구파가 당 내각에
협조하겠다고 언약했다면서?"
"그렇다더군. 장 총리가 신.구파 동수
비율로 각료 자리를 배분해 주기로 확약을
했다더군."
"그게 무슨 소리야? 장 내각에 협조
않기로 결의한 게 언젠데?"
누구의 입에서 4자회담의 비밀이
새나갔는지 모르나 정오가 지나면서 구파
의원들 사이에 회담 내용이 퍼지기
시작했다.
구파의 긴급 의원총회를 소집했다. 그는
경무대 4자회담의 내용에 대해서 소상히
설명한 다음,
"어제 우리는 이 자리에서 구파의 나아갈
길에 대해 결의한 바 있습니다. 그러나
의원동지 여러분, 우리는 먼저 파벌보다는
지금 정국이 처해져 있는 상황부터
생각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 우리
정치인들이 가져야 할 마음의 자세라
생각합니다. 그래서 장면 내각에 우선은
협조하기로 합의를 했으니 그 점
양해하시고 대국적 견지에서 찬성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그게 무슨 당찮은 수작이야?"
유진산의 말이 미처 끝나기도 전에
사방에서 노성이 터져나왔다.
교섭단체를 등록하기로 결의한 지 1년이
되었소, 2년이 되었소? 바로 어제 이
자리에서 결의했는데 불과 24시간도 못
돼서 전체가 결의한 것을 뒤집어 놓더란
말이오? 그러고도 당신이 정치를 한다는
사람이오?"
당연히 제기될 법한 시비였다. 시비를
제기한 의원들 가운데에는 원색적인 욕설을
퍼붓는 사람도 적지 않았다.
그러나 정치는 현실이니까, 그 현실에
대처해 나가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도 꽤
많았다. 갑론을박이 장장 4시간이나
계속되었다. 그래도 어떤 결론에
도달하지는 못했다. 유진산이 마침내
단안을 내렸다.
"어제 결의한 것을 오늘 뒤집어 엎는다는
나도 십분 알고 있어요. 하지만 어제
결의한 것을 오늘 뒤집어야 하는 내 심정을
이해 못해 주겠소? 만일 장면 내각이 약체
내각이 돼 가지고 지금의 이 비상시국을
이끌어나가게 될 때, 과연 장 내각은
혼자의 힘으로 이 난국을 수습해 나갈 수
있으리라 보고 있소? 중요한 것은 정국의
안정입니다. 우선은 장 내각이 일을 할 수
있도록 기틀을 잡아주자 그거예요. 그런
다음 우리는 얼마든지 우리의 갈 길을 갈
수 있을 게 아니겠소! 그리고 또 한 가지
우리가 장 내각에 각료를 보내기로 했다고
해서 그냥 보내는 것이 아니에요. 첫째,
구파 민주당은 예정했던 대로 따로 원내
교섭단체를 등록할 것이며, 둘째는 구파의
총의에 따라 구파 각료는 언제든지 소환할
한해서 입각시키자는 조건부로 장 내각에
협력하기로 했으니까 장 내각에 협조하기로
한 데 대해서 양해를 해주었으면
고맙겠소."
갑론을박으로 소란스럽기만 하던
총회의장이 비로소 조용해졌다. 유진산은
지체하지 않고 가부를 물었다.
태반의 의원들이 신파 내각에 협조하는
데 대해서 찬성을 해주었다.
유진산은 곧 김도연과 더불어 중앙청으로
향했다. 그때 시계는 벌써 11시 반을
가리키고 있었다. 유진산은 그제야
시장기를 느꼈다. 저녁도 거른 채 그는
동분서주 했던 것이다.
장면은 그때까지도 퇴정을 하지 않고
구파로부터 전갈을 고대하고 있었다.
1급 참모들도 자리를 같이 하고 있었다. 두
사람이 총리실로 들어서기가 무섭게 장면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서더니 급히 묻는
것이었다.
"어떻게 되었소?"
유진산이 대꾸했다.
"우리는 조각에 협력하기로 했소."
"그래요?"
장면의 얼굴에 환한 웃음이 번졌다.
"그러면 서둘러 입각시킬 의원의 명단을
주었으면 좋겠소만."
"알겠소. 입각자에 대해선 우리끼리 다시
협의를 해야 할 테니까, 늦어도 내일 아침
10시까지는 명단을 수교토록 하겠소."
유진산은 이상의 간단한 대화만을
교환하고, 김도연을 재촉해서 총리실을
명단을 제시하기로 한 만큼 밤을 새는 한이
있어도 입각자 선정을 해 놓아야 했기
때문이었다.
(어디로 가서 협의한다지?)
유진산은 2층 계단을 내려오며
머리속에서 협의할 장소를 물색해 보았다.
(아, 그렇지 해온 선생 댁으로 가야겠군.
아무래도 셋이서 협의해야 할 테니까.)
밖으로 나온 두 사람이 막 지프차에
오르려고 할 때였다. 수위가 헐레벌떡
달려나왔다.
"아, 저 선생님들, 총리 각하께서 다시
좀 뵙자고 하십니다."
지으며 김도연을 힐끗 바라보았다. 어둠
때문에 김도연의 표정은 살필 수가 없었다.
김도연이 중얼거렸다.
"할 얘기는 다 했는데 뭣 때문에
보자는구?"
두 사람은 다시 2층의 총리실로 향했다.
"무슨 일로 그러십니까?"
유진산은 총리실로 들어서며 성급하게
물었다.
장면은 조금 난처한 표정을 지으면서,
"사정이 좀 달라졌소."
"사정이 달라지다니요!"
유진산은 다시 장면의 말뜻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는 되물었다.
"사정이 달라졌다니, 어떻게 달라졌다는
말씀입니까?"
조재천이 가로막고 나섰다.
"진산 선생, 구파 민주당의 별도
교섭단체 등록을 보류해 주실 수
있겠습니까?"
이 질문에 대해서 유진산이 버럭 역정을
냈다.
"그게 무슨 소리요? 구파에서 입각하는
것하고 별도 교섭단체 등록이 무슨
상관이란 말이오?"
"왜 상관이 없겠습니까? 상관이 있어도
많이 있습니다."
"대체 무슨 상관이 있다는 거요?"
"구파가 별도의 교섭단체 등록을
하게되면 국무원에서 의견일치를 보기가
어렵게 된단 말씀입니다. 그런 만큼
구파에서 별도의 교섭단체 등록을 보류하지
없습니다."
그 말을 듣자, 유진산은 그만 노성을
터뜨리고 말았다.
"이 무슨 신의 없는 수작을 늘어놓는
거야?"
"장 박사께서 분명히 말씀하십시오.
경무대 4자회담에서 내가 구파의 별도
교섭단체 등록을 인정하는 조건이라면
조각에 협력할 수 있다고 말했을 때, 장
박사께서 뭐라고 말씀하셨습니까? 좋다고
했습니까, 안 된다고 하셨습니까?"
유진산의 험악한 공박에 장면은 좀
면구스러워진 모양이었다.
"물론 좋다고 했소만......."
장면은 수긍하며 말꼬리를 흐렸다.
유진산이 더는 참고 있지 못하겠다는 듯
"세상에 단 5분도 못 되어 상황을 뒤집어
놓는 법도 있소? 내가 구파 동지들을
설득하느라 얼마나 진땀을 뺐는지 아시오?
4시간이나 걸려서 설득을 해놓고 왔는데
처음엔 구파의 입각을 환영하더니 그것이
단 5분도 못 되어 사정이 달라졌느니
어쩌니 하면서 뒤집어놔? 그러고도 당신들
정치를 한다는 사람들이오?"
유진산은 마음껏 호통을 쳐주고 도어를
기운껏 여닫고 나와 버렸다.
그는 한동안 씨근거렸다. 도무지
치밀어오르는 분노를 삭이기가 어려운
모양이었다.
그랬을 것이다. 반발하는 구파 동지들을
겨우 무마시켜 놓고 조각 협조를 통고하러
왔는데 처음에는 좋아하던 장면이 돌아가는
어쩌니 하니 어찌 분통이 터지지 않겠는가!
그는 구파 동지들한테 웃음거리가 될
결과를 생각하니 등에서 진땀이 흐를
지경이었다.
처음에 구파의 입각결정 통고를 기꺼운
마음으로 받아들였던 장면이 어째서
돌아가던 유진산, 김도연을 불러들여
구파의 입각문제를 백지화시키려 들었던가?
그것은 장면이 참모들의 심한 반발을 꺾지
못했기 때문이다.
당초 장면의 참모들은,
"설마하니 구파가 입각에 참여할 리야
있을라구! 아무리 총리께서 거국내각을
표방하고 5, 5, 2의 조각원칙을 언약했다
하더라도 구파는 이미 별도의 교섭단체를
만들겠다고 결의까지 하지 않았는가!" 하며
판단을 내리고 있었다.
그랬는데 의원총회의 결의를 통해
입각하기로 결정을 지었다고 하자, 그들
장면의 참모들은 적잖이 당황했던 것이다.
그래서 구파의 입각을 배제시킬 요량으로,
"총리께 누차 말씀 올렸지만 구파가
별도의 교섭단체를 고집하는 한 절대로
원만한 국무원 운영이 어렵단 말씀입니다.
그런데도 총리께서 정 구파를
입각히켜야겠다고 하신다면 저희들이
입각을 포기할 수밖에 없습니다" 하고
장면을 몰아쳤던 것이다.
장면도 5, 5, 2의 조각원칙이 얼마나
무모하냐 하는 것을 모르는 것은 아니었다.
구파 각료들이 무소속과 결탁하기만 하는
날엔 국무회의는 언제나 겉돌게 될
있었다. 그러나 국민에게 이미
<거국내각.을 공약했었고, 또 민주당의
분당도 막아야겠기에 고육지책으로 경무대
4자회담을 열어가면서까지 구파를 조각에
끌어들이고자 애썼던 것이다.
다음날인 8월 22일 유진산이 혼자서
장면을 찾아왔다.
"박사님, 오늘 내가 다시 찾아온 것은
경무대 4자회담을 박사님께서 상기해
주십사 해섭니다. 박사님께서 뭐라고
하셨습니까? 구파의 별도 교섭단체를
인정하겠다 하시잖았습니까? 그것을 지금에
와서 뒤집어 엎는다는 것은 신파가 구파를
교란시키기 위해서 장난을 쳤다고 볼
수밖에 없습니다."
유진산은 구파의 교섭단체 인정을 전제로
"그랬으면 난들 얼마나 좋겠소. 그러지를
못하니, 이 아니 답답한 일이오?"
장면은 그저 난처하다는 표정만 지을
뿐이었다.
유진산은 행여나 타협의 여지가 있지
않을까 해서 다시 한번 찾아왔던 것이나
장면이 전혀 타협의 눈치를 보이지 않자
그만 자리를 뜰 수밖에 없었다. 그가
자리에사 일어나자 장면이 좀 멋적은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진산, 구파에서 입각시키고자 했던
명단이나 좀 보여줄 수 없겠소?"
유진산은 왈칵 역정이 솟구치는
모양이었다.
"그건 보셔서 뭘 하시겠습니까. 다된
밥에 코 풀어 놓고."
유진산이 물러가는 뒷모습을 지켜보고 있는
장면의 표정은 자못 쓸쓸해 보였다.
장면이 조각명단을 배표한 것은 8월
23일이었다. 각료 명단은 다음과 같다.
외무부 정일형 농림부 박제환
내무부 홍익표 상공부 이래용
재무부 김영선 보사부 신현돈
법무부 조재천 교통부 정헌주
국방부 현석호 체신부 이상철
문교부 오천석 무임소 김선태
국무원 사무처장(국무위원) 오위영
12부 1처의 각료 가운데서 무소속이
둘이었고, 구파가 하나 끼어 있었다. 그
밖에는 모두가 신파 일색이었다.
교통부 장관으로 등용된
정헌주(鄭憲柱)가 바로 구파에 속해 있는
멤버였기 때문에 구파의 중견이라 할 수
있었다. 그런 인물이 어떻게 해서 신파
내각에 끼일 수 있었던가? 그것은 그는
구파에 속해 있으면서도 신파 내각의
출현을 위해서 대단한 공로를 세웠기
때문이었다. 그 공로란 물론 국무총리 인준
때 장면에게 던진 한 표를 말한다. 그는
장관 감투 하나 차지하기 위해 구파에
대해서 정치적 배신을 했던 것이다.
구파의 신각휴가 요구했던 농림부 장관
감투가 무소속의 박제환(朴濟煥)한테
돌아갔던 것은 하나의 논공행상의
결과였다. 당초 무소속의 도움으로
국무총리 인준을 획득할 수 있었던 장면은
이재형을 입각시켰으면 했던 것이나 그가
족청(族靑) 출신이라는 이유에서 이재형
감투를 씌워주게 되었던 것이다. 모두가
정치적 이유에서 등용하게 되었던
인물들이었지만 오직 한 사람 문교부
장관으로 등용된 오천석(吳天錫)만이
순수하게 기용된 각료였다.
하여간 이제 조각을 끝냄으로써 대한민국
초유의 내각책임제 정부는 이로써 닻을
올릴 수가 있었다. 조각에 있어 상당한
우여곡절과 진통을 겪었지만 그것이 바로
민주주의라는 것이 아니겠는가? 가히 장면
내각이야말로 대한민국 초유의 완전한
민주주의 정부로서 탄생되었던 것이다.
"한데, 이게 뭐야 이게! 모조리 고시파,
관료파가 아냐. 이래 가지고 나라꼴이
제대로 되겠어? 총리도 망쪼가 들었지.
몽땅 고시파, 관료파로만 내각을 구성해
거야?"
조각 명단을 놓고 누구보다도 가장
분개한 것이 신파 내의 이철승, 김재순,
함종빈 등 소장파들이었다. 그들이 말하는
고시파(高試派)란 일제시대의 고등문관
시험에 합격해서 관리의 길을 걸어온
사람들을 말한다. 그러니까 고시파가
관료파로서 관리로 출세하는 데 있어
반드시 고등고시를 거쳐야만 하는 것은
아니다. 말단에서부터 관리 생활을
시작하더라도 본인의 노력 여하에 따라서는
고시파 이상으로 출세할 수도 있는 것이다.
고시파는 곧 관료파라는 등식이면서도
관료파란 호칭을 하나 더 만들어 놓고 있는
이유가 이들 비고시파들 때문이다.
장면이 임명한 각료들 중 김영선,
따지고 보면 고시파는 친일파라 할 수
있었다. 일본왕이 억압하던 시절에 관리가
되어 일본왕의 녹을 먹고 뼈대가 굵어진
자들이니, 친일파라고 못박아도 이의가
없을 줄로 안다.
이들 고시파를 제외한 나머지가
관료파들이었는데 단 정일형과 오천석만은
관료파가 아니었다.
장면은 어쩌자고 이런 고시파나 관료파를
중심으로 조각을 했던 것일까? 이유는
간단했다. 장면의 주위에는 고시파나
관료파를 제쳐놓고서는 인물이 없었던
것이다. 어째서 그의 주변에는 이들 말고는
인물이 없었던 것일까?
민주국민당(民主國民黨)이 자유당
이탈자와 재야의 일부 보수주의자들을
일이다. 장면이 정당 생활을 시작한 것이
이때인데, 바로 이때 재야에서 들어온
보수주의자들이 바로 고시출신,
관료출신자들이었던 것이다.
정치를 하는 사람은 도량이 넓어야
한다고 하지만 아무래도 독립운동을 했던
사람과 민족운동을 한 사람은 일본왕에게
충성을 다했던 자들과는 어우러지지가
않았던 것이다. 민주국민당을 해온
사람들은 이승만을 꺾기 위해서 과거의
경력을 불문에 붙이고 이들 고시파,
관료파들을 받아들이기는 했으나 속으로는
(민족을 배신했던 놈들!) 하며 멸시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
물론 그들은 고시파, 관료파를
노골적으로 멸시했던 것은 아니었다.
겉으로 나타나기 마련이다. 고시파,
관료파들은 그들의 그러한 속마음을 읽게
되자, 자연 장면을 중심으로 해서 뭉치게
되었다. 민주주의 신파는 이렇게 해서
태어나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니 장면의
주변에 고시파, 관료파 말고는 인물이 있을
리가 없었던 것이다.
하여간에 그건 그렇고, 신파의
소장파들은 <어디 두고 보자> 하고 단단히
벼르기 시작했다.
민주당 신파만의 단독 내각조각은 마침내
역겨운 후유증을 부러일으키고 말았다.
장면 정권의 초대 내각 각료 명단이
방송을 통해서 정헌주가 입각한 것을 안
구파의 청년 당원들이 분노를 터뜨리고야
말았다.
"배신자! 정헌주란 놈은 배신자야! 이런
배신자는 그냥 내버려둘 수 없어!"
청년당원들은 그 즉시로 정헌주의 집으로
몰려갔다.
"배신자! 정헌주 나와라! 나와서
신파한테 얼마 받아 먹었는지 밝혀라."
처음 청년 당원들은 정헌주의 집 앞에서
그를 성토하는 데모를 벌였으나 점차
열기가 고조되자, 그의 집 안으로
뛰어들어가 부수고 깨고 하며 쑥밭을
만들어 버렸다.
구파 청년 당원들은 이것으로 그치지를
않았다. 다음날에도 또 몰려가 정헌주를
벌였다. 첫날과 둘째날에 동원되었던 청년
당원들은 고작 백여 명에 지나지 않았지만
사흘째 되는 날엔 그 수가 3백여 명으로
불어나 있었다. 그들은 정헌주의 집
앞에서만 데모를 별였던 것은 아니었다.
용산의 교통부 청사에까지 몰려가서 데모를
벌였다.
죽을 지경인 것은 가족들이었다.
<배신자 정헌주, 배신자 정헌주>라는
소리에 가족들은 노이로제가 될
지경이었다.
옛글에도 <계집은 정절, 사내는
지조>라고 했다. 하물며 정치를 한다는
공인이 지조를 팔았으니 야유와 공박을
당할 만도 했다. 지조를 팔 때는 어쩌면 그
정도의 수모와 창피를 각오하고 있어야 할
그렇지 않아도 장면이 국무총리에 인준된
직후, <구파 의원 5명이 배신을 했다>는
소문이 나돌고 있었다. 그래서 구파 소속
의원이나 청년 당원들은,
"배신을 한 놈이 어떤 놈이냐?" 하며
배신자를 가려내기 위해서 혈안이 되어
있던 참이었다.
그들에 대해서는 시간이 지날수록 점차
윤곽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제일 먼저
배신자로서 정체를 드러낸 것은
유진영(兪鎭靈)이었다. 그를 배신자로 낙인
찍어 발설을 한 것은 유옥우(劉沃祐)였다.
그는 어떻게 해서 유진영을 배신자로 낙인
찍게 되었던가?
7.29 총선거에서 유진영은 구파에서
밀어준 덕분에 당선의 영광을 차지할 수
날이었다. 서울역에서 그를 기다리고 있던
것은 신파의 이석기(李錫基)와 김선태였다.
두 사람은 유진영이 출구에서 나오자
재빨리 대기시켜 놓은 자동차로 안내, 그를
태우고는 어디론가로 사라졌다.
현장에서 이 광경을 목격한 유옥우는
생각했다.
(신파인 이석기, 김선태가 어째서 구파인
유진영을 칙사대접하듯 했겠는가?)
미루어 볼 때, 유진영이 신파한테
매수당한 것이 틀림없다고 유옥우는
해석하고 있었던 것이다.
구파 소속 의원 가운데에는,
"당장 유진영을 불러다가 사실을
밝히자"고 아우성을 치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러나 유진산이,
내부 혼란을 일으켜선 안 된다"고 만류했기
때문에 우선 덮어두고 있었던 것이다.
유진영에 대한 구파의 감정은 장면이
국무총리 인준을 받은 다음날인 8월 20일에
폭발해 버렸다.
이날 아침 유진영이 구파의
김천수(金千洙)가 묵고 있는 관철동의
광신여관에 들렀다. 김천수의 방에는 마침
역시 구파인 박찬(朴燦)도 자리를 같이
하고 있었다. 유진영이 찾아왔는데도
김천수는 조금도 반기는 눈치가 없었다.
반기기는 커녕 더러운 오물이라도 대하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무슨 일로 찾아왔어?"
유진영은 뜻하지 않은 김천수의 곱지
않은 표정을 대하자, 좀 섬뜩한 느낌이
너스레를 떨었다.
"허허...... 이 사람, 마치 내가 오지
못할 곳을 왔다는 말투로군, 허허......."
"뭐가 어째?"
반문과 함께 김천수의 오른손이 번쩍
들리며 유진영의 왼쪽 뺨을 후려갈겼다.
"이 새끼야, 그럼 너 같은 배신자가
찾아올 곳이야, 여기가?"
박찬도 가만 있지를 않았다.
"이런 배신자는 죽여 버려야 돼!"
박찬은 김천수보다 한술 더 떴다.
주먹으로 유진영을 난타했던 것이다. 실컷
주먹을 휘두르고 나니 박찬은 좀 속이
후련해졌던지,
"이 새깨야, 빨랑 돌아가지 못해! 너
같은 배신자하고 마주 앉아 있는 것조차
유진영은 괜스레 찾아갔다가 공매만 실컷
얻어맞고 쫓겨나고 말았다. 10만
선량이라는 국회의원 신분으로서 동료
의원한테 철권제재를 당하다니 이런 창피한
일이 또 있을 수 없다.
유진영 구타사건은 배신자에 대한 구파의
감정이 어떠했느냐 하는 것을 증명해 준
예였다. 그렇듯 구파의 감정이 격앙돼 있을
때. 신파 일색의 내각에 구파인 정헌주가
꼭 한 사람 교통부 장관으로 입각이
되었느니 <정헌주 이놈도 배신자다!> 하고
단정을 하게 되었고 그래서 그를 매도하게
되었던 것이다.
정헌주는 데모대의 매도데모에 도저히
견디기가 어려웠던 모양이었다. 8월 26일,
그는 민의원 본회의장에서 <신상발언>을
주는 것이 하나의 관례였다. 그는 단상으로
올라가자 구파의 청년 당원들이 자신을
매도 규탄하는 데모를 벌여 괴롭히고
있다는 진상을 밝히고,
"소위 신파니, 구파니 하는 것은 정책을
중심으로 모인 정치집단이 아니고 개인적인
친소 관계로써 자연적으로 만들어진 하나의
인간적인 클럽입니다. 7.29 총선거 때 일부
구파 의원들에 의해 민주당 분당론이
제기되어 국민들이 걱정할 때, 나는
민주당이 쪼개지지 않고 한 덩어리가 되어
일하겠다고 사천(泗川) 군민들에게
공약하여 다수표를 얻었습니다. 이같은
입장에 따라 나는 구파 간부회의에서
대통령, 총리겸정에 대해 정면 반대를
했습니다."
그는 신념의 정치인이라 할 수 있었다.
<민주당은 쪼개어져서는 안 된다, 구파가
대통령과 총리를 겸정해서는 안 된다>는
지론에 따라 행동했다면 어찌 그를 나무랄
수 있겠는가?
한데, 의석에 앉아서 정헌주의
신상발언을 듣고 있던 구파 의원들은 그의
발언을 진실로 받아들이려 하지를 않았다.
사방에서 노성이 터져나왔다.
"그게 신상발언이야?"
"신상발언만 해!"
"배신자가 하는 수작이 겨우 그거야?"
정헌주의 배짱도 어지간히 두둑했다.
그는 구파 의원의 노성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오히려 목청을 한껏 더 돋구었다.
"독재정권에 대해 다 같이 싸워 왔는데
신파에 주어서 화해해 나가야지, 일파
독점은 사리에 맞지 않고 정리에도 맞지
않는 일입니다."
그 나름대로 옳은 말이다. 파벌이 없다면
모른다. 두 파로 갈라져 있는 이상에는
안배가 원칙이었다. 그러나 구파는
자파만의 집권욕에서 이미 선거 도중에
분당을 선언했던 것이다. 어차피 신파와
구파는 물과 기름, 도저히 융합이 안
되겠다는 판단이 섰기 때문에 분당을
전제로 해서 <요직 독정>의 전략을 세웠던
것이다. 그런 만큼 구파는 또 구파
나름대로 그 이유가 타당하기도 했다.
세 사람이 동시에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유진산, 조영규,
양일동(梁一東)이었다. 단상에서 발언하고
소리쳤다.
"이 후안무치한 자야!"
"변절자가 무슨 개수작이야!"
"더러운 배신자야!"
세 사람은 모두 구파의 중진들이었다.
사회를 맡아보던 곽상훈이,
"여기는 민주당 의원 총회 자리가 아니니
조용히 해요" 하고 경고를 했다.
곽상훈은 중도파를 자처하고 있었지만 그
경고는 다분히 정헌주를 감싸주는 듯한
인상이 짙었다.
소장파 의원들이 벌떼처럼 일어났다.
"신상발언이면, 신상발언만 해!"
정헌주는 소장파 쪽을 향해 눈을
부라렸다.
"내 발언만 신상발언이야!"
정헌주는 구파 23인위원회의 멤버였다.
"그래 23인 위원이야. 그게 어떻단
말이야?"
"의장, 왜 가만 있소? 발언을
중지시키시오."
여기저기에서 발언을 중지시키라는
고함이 터져나왔다.
"그런다고 내가 내려갈 줄 아시오!
여러분! 내가 사실대로 이야기하는 것이
무엇이 무서워서 야단이냔 말야? 그리도
겁이 나요?"
양일동이 더는 못 참겠던 모양이었다. 그
거구가 표범처럼 어깨로 바람을 일으키며
단숨에 단상으로 뛰어 올라갔다. 그리고는
정헌주의 멱살을 움켜쥐었다.
"이 철면피한 자야!"
정헌주도 맞섰다.
"뭐가 어때!"
그도 양일동을 발길로 찼다.
마침내 난투극이 벌어졌다.
정헌주도 신체는 건강했으나 양일동의
적수는 못 되는 것 같았다. 멱살을 잡힌 채
단 아래로 끌려 내려갔다. 경위들이
달려왔고 앞줄의 일부 의원들이
달려나갔다. 두 사람을 떼어 놓으려고 애를
썼으나 엉겨붙은 두 사람은 좀처럼
떨어지지를 않았다.
그때 구파의 이경(李京)과
신인우(申仁雨)가 달려나왔다. 이경은
유도가 6단으로 알려져 있던 인물이었다.
그는 정헌주의 허리띠를 잡더니 허리치기로
의사당 바닥에다가 메다꽂았다. 그러자
급기야 신.구파의 난투극으로 번졌던
것이다. 국정의 장이 민주당 신.구파의
싸움의 장으로 변해버리고 말았던 것이다.
한동안이나 멀거니 서서 싸움을 바라보고
있던 의장 곽상훈이,
"5분간 정회를 선포합니다" 하며
의사봉을 세 번 탕탕 쳤다.
그제서야 싸움이 멈추었다.
국정을 논의하는 신성한 국회의사당에서
이런 육탄전을 벌이는 것이 옳은 짓이냐
하는 데 대해서는 필자는 잘 모른다.
그러나 한 가지 분명한 역설적인 것은
관전자인 국민은 그런 광경을 목격하게 될
때 민주주의 맛을 느끼게 된다는 것이다.
또한 국정에 골몰하느라 스트레스가 쌓일
때로 쌓인 국회의원들도 간혹 가다가는
스트레스를 풀 수 있는 게 아니냐 느낌도
든다는 것이다.
우리 속담에 <손톱 곪는 것은 알면서
염통 썩는 것은 모른다>는 말이 있다. 겉에
드러나 있는 문제보다는 드러나 있지 않은
문제가 더 큰 문제로 되어 있을 때에 항상
비유해서 쓰고 있는 말이다.
앞에서 소개한 후유증 따위는 이미
갈라서기로 한 구파와의 문제니까 손톱이
썩는 문제라고까지는 할 수 없었을는지도
모른다. 어쨌든 민주당 내부에는 각료
인선이 끝나자 서서히 동지 상호간의
알력이 눈에 보이지 않게 일기 시작했다.
돈과 정치와의 함수 관계를 이루어 놓고
있는 것은 자유 민주주의 국가에서는
공통된 요소였다. 돈줄을 쥐고 있는 자가
권력을 쥐기 마련이었다.
민주당의 정치자금의 파이프 라인은
오위영이었다. 구파를 끌어들이고 무소속을
회유하는 데 쓰여진 정치자금은 모두
오위영의 주머니를 털어서 충당됐었다.
장면이 오위영이 차고 있는 주머니가
아니었던들 국무총리 인준은 도저히
바라보기조차 어려운 일이었다. 그런
점에서 오위영의 공로는 절대적이었고,
그것은 곧 오위영이 제2인자의 위치를
굳히는 결과가 되었다. 은행가 출신인 그가
재무나 상공 같은 정치자금과 직결되는
부서를 맡지 않고 인사권을 관장하고 있는
제2인자로서의 권한을 십분 행사하고
싶어서였다.
한데, 오위영의 제2인자의 위치를 빼앗고
도전한 그의 동지가 있었다. 재무부
장관으로 발탁된 김영선이 바로 그였다.
<장면 박사의 후계자는 바로 나다> 하는
꿈이 그에게는 진작부터 있었다.
김영선은 족히 그런 꿈을 꿀 만한 능력을
갖춘 인물이었다. 당년 42세인 김영선은
경성제국대학(京城帝國大學:서울대학교
전신) 법과 출신으로서 벌써 20대에
고등문관 시험에 합격, 군수(郡守)를
역임한 경력을 지니고 있는 수재였다.
법률을 전공한 그가 언제 경제학 공부를
했는지 모르지만 민주당이 내건 경제
정책은 거의가 그의 창작물이었다.
편이었다. 또한 그는 기독교 장로였다.
종교 생활은 그의 성품을 겸손하게
해주었고, 큰 얼굴과 뚱뚱한 몸매는 중후한
인품을 풍겨주기에 족했다. 타고난 재질과
중후한 인품을 갖추고 있는 김영선은
스스로 제2인자가 될 것을 다짐했다.
그러나 제2인자의 조건은 중후한
인품만으로는 부족했다. 돈을 만들 줄 아는
것이 절대적인 조건이었다. 민주주의
국가에서는 정치와 돈은 함수 관계를
이루고 있었다. 정당 생활을 통해 이
사실을 그는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
(돈을 만들어야 한다, 돈을!)
돈을 만들어 오위영을 능가할 수 있는
만큼의 돈을 만들어야 했다. 그래서
김영선은 재무부 장관으로 발탁되자, 먼저
야합을 하기란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재무부 장관과 재벌은 끊을래야 끊을 수
없는 함수 관계에 있었다. 그러므로
김영선이 <우리 야합을 합시다> 하고
프로포즈를 하지 않더라도 재벌들 스스로가
그것을 원하고 있었기 때문에 유대는 쉽게
이루어질 수가 있는 일이었다.
이른바 7.29 총선 때 민주당의
정치자금을 모으기에 앞장섰던 인물은
이한원(李漢垣)이었다. 그는
대한제분(大韓製粉)과
동아상사(東亞商社)를 경영하고 있는
기업인이었다. 그는 관북(關北) 출신자였기
때문에 관서(關西) 출신인 주요한과 쉽게
유대를 맺을 수가 있었다.
김영선은 재무부 장관으로 등용되자
이병철, 삼호재벌의 정재호 등을 쉽게 그의
영향력 밑으로 끌어들였다. 모두가
부정축재가들로 낙인찍혀 있었기 때문에
조만간 어떤 처벌을 받아야 할 처지에 있던
것이 이들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로서는 처벌을 가볍게 하기 위해서는
재무부 장관과 유대를 맺어둬야 할
필요성이 있었던 것이다.
김영선이 재벌들을 그의 영향력 밑으로
끌어들이자 당황한 것은 오위영이었다.
(김영선이 재벌들하고 야합해 가지고
정치자금을 만들 수 있는 길이 트여져선 안
돼! 어떤 일이 있어도 그가 정치자금을
만들 수 있는 능력을 갖추게 해서는 안
돼!)
실질적인 제2인자가 되기 위해서는
봉쇄를 해야만 했다. 그러나 그가 봉쇄를
해야 되겠다고 생각했을 때에는 이미 때가
늦어 있었다. 김영선이 재무부 장관으로
등용되는 것을 막지 못한 것부터가 그의 큰
실책이었다.
(김영선을 재무부 장관 시키는 것이
아니었어.)
오위영은 후회막급니었다. 그러나 그가
아무리 김영선에게 재무부 장관의 포스트가
돌아가는 것을 막으려 했다고 해도
그것만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김영선의
재무부 장관 취임은 이미 기정사실이었다.
민주당의 경제 정책을 혼자서 입안해 온
김영선에게 재부부 장관의 포스트를 안기지
않고 누구에게 안기겠는가. 구파까지도
김영선을 재무에 앉인 것을 적재적소라고
처음부터 김영선을 라이벌로 점찍고 있던
당년 57세의 오위영이 김영선을 꺾자면
그의 자금동원 능력을 능가할 수 있을
만큼의 정치자금을 마련해 놓는
길뿐이었다.
그래서 오위영은 부지런히 일본땅을
드나들었다. 일본에는 <교포재벌>이라
일컬을 만한 재벌들이 꽤 있었다.
서갑호(徐甲號), 손원달(孫元達) 등이 바로
교포재벌이었다. 오위영은 그들에게 눈독을
들이게 되었던 것이다. 하긴 재일
교포재벌들에게 눈독을 들이고 있는
정치인은 오위영 한 사람만이 아니었다.
지연(地緣)과 인연(人緣)의 끈을 대어
어떻게 해서든 그들 교포재벌에게
접근하고자 시도하는 정객들은 많았다.
않았다. 산 설고 물 설은 타국 땅에 가서
피와 눈물과 땀으로 재력을 쌓은
그들이었다. 지연이나 인연으로 움직일
그들이 아니었다. 권력의 최고핵과 연줄이
이어진다면 모를까 정치인이라는 이름 석
자에 끌려 주머니 끈을 풀 만큼 그들
교포재벌들은 녹녹치가 않았다.
그런 점에서는 오위영이 으뜸 가는
위치에 있었다고 할 수 있었다. 질적인
면에서는 어찌 됐든간에 누구나가 그를
제2인자로 지목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재일 교포재벌을 국내로 끌어들이면
누이 좋고 매부 좋은 결과가 된다.)
이래서 오위영은 부지런히 일본땅을
드나들게 되었던 것이다.
누이 좋고 매부 좋은 결과가 된다는
AGI3
SING
국내에 투자를 하게 하는 것은 산업을
일으키는 첩경이 될 것이었고 그것은 곧
실업자 해소책도 된다. 한국에 자본을
투자하려는 외국 자본가가 없는 이상에는
산업을 일으켜 경제부흥을 꾀하는 길은
재일 교포재벌들로 하여금 본국에
투자하도록 유도하는 이외에 달리 방법이
없었다. 누구보다도 이 점에 먼저 착안한
오위영은 교포재벌을 국내로 끌어들이기
위해 뻔질나게 일본땅을 드나들고 있었던
것이다.
이렇게 교포재벌을 국내로 끌어들여
정치자금을 마련해 보자는 속셈은 결코
바람직스러운 일은 못 되었으나 산업을
일으킨다는 명분으로 쌍수를 들어 환영할
만한 발상이었다.
10. 단군 이래의 첫 민주정권
완전 자유 민주주의 정권.
얼마나 멋진 낱말들이냐. 완전 자유
민주주의 정권, 이런 정권을 세우기 위해서
4월의 사자들은 그렇듯 많은 피를 흘렸던
것이다. 장면 내각은 완전 자유 민주주의의
요람 속에서 태어났다. 이것은 곧 한국에
자유 민주주의가 정착하게 되었다는 세계에
대한 신호이기도 했다.
<한국은 미국 민주주의의 쇼윈도다.>
이것이 무슨 뜻인가? 여기에는 약간의
설명이 필요할 것 같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에 강대국의 숱한
신생국들은 정치적으로나 경제적으로 또
문화적으로 하나같이 후진성을 면치 못하고
있었다.
그냥 내버려 두었다가는 공산주의의 밥이
되기에 꼭 알맞았다. 그래서 미국은
젖먹이를 키우는 심정으로 이들 후진적인
신생 독립국가들을 원조해 주었다.
민주주의 국가로 자라야 한다. 민주주의
국가로!
이 한 가지 바램으로 해서 미국은 그들의
국민들이 피땀 흘려 벌어낸 세금으로 아낌
없이 원조해 주었다. 그래야만 공산주의가
쉽게 넘보지 못하기 때문이었다.
한데, 굶주렸던 자는 소화불량을 생각지
않고 처먹으려 든다. 이들 후진국에서
정치를 한다는 작자들이 꼭 그 꼴이었다.
하면 절대로 내놓으려 들지 않았다. 관
속에 들어갈 때까지 해먹으려고
늘어붙었다. 그러자니 별의별 정치적
권모술수를 다 써야만 했다. 뻔한
일이었다.
정치적 악순환이 되풀이되면서
군부(軍部)가 고개를 불쑥 쳐들었다.
<국가가 누란의 위기에 처해진 것을 좌시할
수 없다>는 것이 정치에 끼어들려는 군부의
구실이었다.
미국의 가장 큰 두통거리가 바로 이놈의
군사 쿠데타였다.
(우리 미국을 본받아서 미국처럼
자라라는데 너희놈들은 어째 그 모양이냐?)
개탄을 하며 타일러 보아도 소용이
없었다. 중이 고기 맛을 알면 절간에
정치한다는 사람들의 생리가 꼭 고기맛을
알게 된 중 같았다.
(그냥 내버려 뒀다간 안 되겠어. 손을
써야지!)
참다 못한 미국은 간혹 가다가는 그
나름의 독특한 술책을 써서 권력자를
갈아치우는 일도 했다.
한국의 경우는 어떠했는가?
한국이라고 해서 예외는 아니었다.
이승만의 카리스마적 권력 행사로 해서
도무지 나라가 조용할 날이 없었다.
(이놈의 노인을 갈아치워야 옳은가,
내버려둬야 옳은가?)
미국은 한국문제로 골치를 썩혔다.
그래서 이승만을 갈아치워야 할 것인가
하는 문제로 적잖이 고민을 해야 했다.
암울할 정도로 짙기만 했었다.
콜론 보고서란 다름 아니라, 미국
상원(上院) 외교위원회가 콜론협회에
위촉해서 한국의 정치 상황을 진단케 한
보고서를 말한다. 콜론 보고서가 미국 상원
외교위원회에 제출된 것은 1959년 11월
1일이다. 이 보고서에는 한국 민주정치의
발전상과 아울러 그 앞날을 어둡게 하는
면이 선명하게 묘사되어 있었다.
대한민국은 건국 이후 짤막한 역사의 전
기간을 통해서 정치적 폭력과 난폭한
억압행위와 그리고 모종의 경찰국가적
수법에 의하여 많은 손상을 입어 왔다.
현재로 말하더라도 1960년 대통령 선거가
임박해 옴에 따라 집권당인 자유당 정부는
수 없는 일련의 조치를 자행하고 있다.
야당인 민주당은 협박을 당하고 그의
지도자들은 위협을 받고 그의 언론기관은
제한을 받고 그의 일반적인 권리는
침해되고 있다. 또 이러한 조치를
정당화하기 위해서
국가보안법(國家保安法)과 같은 법률이
맹렬한 반대를 무릅쓰고 국회에서 강제
통과되었다. 동시에 지방자치법이
수정되었는데 이것은 시장.읍.면장을
선거제로부터 임명제로 고치려는 것으로써
확고부동한 태세를 갖추고 선거에 임하려는
명백한 기도 밑에서 중앙 정부의 권한을
대폭 증강시키려는 것이다. 아마 한국은
양당 제도라기보다 한 개 반당 제도를
가졌다고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야당의
때문이다.
이렇게 콜론 보고서는 한국의 정치
현실을 소개한 다음, 다각적인 대책을
제시했다.
미국은 한국의 자유와 민주발전을 위해서
무엇을 할 수 있을 것인가?
첫째로 미국 국민과 의회는 한국의
정치적 실정에 대하여 더욱 충분한 주의를
기울여야 할 것이다. 한국의 지도자들은
한국이 반공국가로 존재하는 한 한국에서
무슨 사태가 벌어지든지 미국 국민은
무관심하리라고 믿고 있다. 그러므로
미국의 언론계는 한국 정국을 보도하기
위하여 더욱 많은 지면을 소비해야 하고,
사건을 보도하기 위하여 더욱 많은 외국
특파원을 파견해야 하고, 미국의
지도자들은 한국을 방문하고 거기에 머물고
있는 동안 민주사회의 기본 조건이
무엇인가에 관하여 되풀이 얘기해야 한다.
이승만의 카리스마적 권력 행사에 골치를
썩히고 있을 때에 이런 비관적인 콜론
보고서가 제출됐으니, 미국은 더욱더
골치가 지끈거렸을 것은 뻔한 일이다.
그런데도 그들이 다른 나라에서와 같이
권력자를 갈아치우는 따위의 극단적인
술책을 쓰지 않고 있는 것은 첫째, 한국은
미국 민주주의의 쇼윈도라고 선전해 오고
있던 체면상의 문제와, 둘째는 한국의
군부가 정치적 중립을 지키고 있어 군사
셋째로는 한국민은 능히 그들 자신의
힘으로 민주주의를 건설해 나갈 수 있는
능력을 갖추고 있다고 믿고 있었다는
점이라는 이유에서였다. 그래서 우선은
좀더 두고 관망하기로 했다. <이제 도저히
손을 쓰지 않고는 안 되겠다> 하고, 참는
것이 한계에 도달할 때까지 두고 보기로
했던 것이다.
이럴 때에 4.19 학생의거가 터졌다. 이
학생의거로 이승만이 하야를 했고
허정(許政)의 과도정부나 또 그 뒤의 정식
정부인 민주당(民主黨) 정권이 드러서서
하는 일을 보고는 아낌 없는 박수를
보냈다.
"역시 한국민은 위대하다. 한국은 미국
민주주의 쇼윈도가 되기에 족하다"고
이것으로 <한국은 미국 민주주의의
쇼윈도다>란 말이 무슨 뜻인지 이해가 갔을
줄로 안다.
완전 자유 민주주의 정권인 장면 내각은
닻을 올리고 출범하기로 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장면은 이 정권의 키를 잡고
미처 항구를 벗어나기도 전에 심한 격랑에
홍역을 치러야만 했다.
첫째는 한 자리 원하는 당원드르이
성화였다.
"우리 당원들은 그 무지막지한 자유당
놈들의 탄압을 용케 이겨내고 민주당
깃발을 지켜낸 전위대들이다. 이제 미주당
자리씩을 줘야 할 것이 아닌가!"
당원들은 이렇게 노골적인 말로 한
자리를 요구했던 것은 아니지만 장면은
당원들의 마음속에 그런 생각이 자리잡고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당원들에게도 한 자리씩 나누어주기는
줘야 할 텐데.......)
장면이 이런 생각을 하는 것은 당연했다.
그들이 없었던들 어찌 민주당이라는 정당이
존립할 수 있었을 것이며, 장면이 권좌에
올라 앉을 수 있었겠는가!
미국에서도 정권이 바뀌게 되면 대통령의
권한으로 3천 명까지는 자리를 줄 수
있도록 제도화되어 있다고 들었다. 그러나
미국 같은 나라야 워낙 큰 나라니까 줄 수
있는 자리를 얼마든지 마련해 줄 수 있는
달랐다. 자리가 너무나 비좁아 한 자리
요구하는 당원들한테 자리를 마련해 주자면
이미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자들의 목을
치지 않는 한 그것은 도저히 불가능에
가까웠다.
장면으로서는 이것이 크나큰 고민이었따.
(어떻게 해야 모두에게 자리를 마련해 줄
수 있을까.)
그는 자나깨나 그놈의 자리 때문에
골치를 썩혀야 했다. 만일 자리를 마련해
주지 못할 것 같으면,
<뭐야, 죽 쑤어서 개 줄려고 우리가
민주당에서 그 고생을 한 줄 알아> 하고
물어뜯고자 덤벼들 게 틀림없었다.
장면은 우선 그 중에서 쓸 만한 몇
사람의 당원을 비서로 발탁했다. 장면이
그러나 다른 직종도 아닌 비서직은
정말이지 그만한 능력을 갖춘 인물이라야만
했다. 그러자니 당원 가운데서는 손꼽을
정도밖에 발탁할 수밖에 없었다. 또 설혹
32명을 모두 당원으로 채운다 해도 그
정도의 숫자는 새발의 피였다. 한 자리
요구하는 당원의 천 분의 일밖에 안 되는
숫자였다.
(어디다 자리를 마련한다, 어디다?)
당원들한테 자리를 마련해 줘야 하는
어려움을 생각하면 우울해지기조차 했다.
그러니 이쯤의 고민은 아직 약과였다. 더
큰 고민이 있었다. 그것은 다름이 아니라
대부분의 알력이었다. 장관 감투를
배당받지 못한 박순천, 김상돈 두 사람의
탈당계는 장면이 안주머니에 간직해 두고
반발은 아직도 약과였다. 이철승, 김재곤의
입각에 실패한 소장파들이 똘똘 뭉쳐,
<장면 내각 타도>를 외치고 나선 것이다.
장면은 조각에 있어 소장파를
제외시켰지만, 그 대신 소장파를 대거
정무차관에 기용했었다. 외무
우희창(禹熙昌), 재무 서정귀(徐廷貴),
교통 천세기(千世基), 체신 김학준(金學俊)
등, 이렇게 장면이 소장파를 대거
정무차관으로 기용했던 것은 그들로 하여금
일을 배우게 해서 장차 유능한 인재가
되라는 원대한 배려에서였다. 그런데도
소장파는 불만을 품고 <장면 내각 타도>를
외치고 나섰던 것이다.
그들 신파 내의 소장파들은 구파 내의
소장파들과 제휴해서 그저 입으로만
이철승을 보스로 해서 신풍회(新風會)라는
그룹을 만들었다. 당 내의 새 바람을
일으키자는 뜻에서 신풍회라 호칭했던
것이지만 장면 내각에 있어선, 이 신풍회가
눈 속의 가시 같은 존재가 아닐 수가
없었다. 뒤에 언급하게 되겠지만 장면
내각이 출범한 직후의 원내 의석수는 97석,
별도 교섭단체를 구성한 구파동지회가
86석, 민정구락부로 등록한 무소속이 56석
등 이것이 원내 세력의 분표였다. 때문에
시시비비를 표방한 무소속을 잘만
구슬리기만 하면 정치를 해나갈 수가
있었다. 그것을 소장파들 20여 명이 똘똘
뭉쳐 장면 내각 타도를 외치고 나섰으니,
이것이 가장 큰 골칫거리가 아닐 수
없었다.
교섭단체 등록이었다. 구파는
<구파동지회(舊派同志會)>라는 이름으로,
무소속은 <민정구락부(民政俱樂部)>라는
이름으로 각기 국회에 별도의 교섭단체로
등록을 했던 것이다.
무소속 인물들 가운데에는 장면 내각을
지지하며 은근히 추파를 보내는 인물들이
적지 않았다. 그러나 막상 조각이 끝나자,
이들 역시 닭 쫓던 개 지붕 쳐다보는 격이
돼버리자 민정구락부에 아예 합류해 버리고
말았던 것이다.
여기에 곁들여 여전하기만 한 사회적
혼란도 신파 일색의 내각으로는 해결하기가
어려운 일들이 잇달았다. 도대체
경찰이라는 것이 아직도 제 자리를 찾지
못하고 곁돌고만 있었다. 4.19 사태로
그래도 경찰은 경찰이 아니던가. 주어진
공권력을 행사하면 얼마든지 사회 기강을
바로잡을 수 있는 일이었으나 이때까지도
허탈한 상태에서 헤어나지를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렇게 경찰이 무력해져 있으니 모든
불만은 데모로 해결지으려는 풍조가
만연해져 있었다. 데모만능의 악폐를
시정하자면 경찰이 경찰다워야 한다.
그러나 경찰이 경찰답지를 못했으니
데모만능의 풍조는 더욱더 만연될 수밖에
없었다.
그는 제2공화국 출범 후 처음으로 열린
정기국회가 개회된 며칠 뒤, 오위영과 단
둘이 마주 앉았다.
"오 위원, 아무래도 개각을 해서 구파를
수가 있을 것 같소."
장면은 정기국회를 무사히 넘기느냐 못
넘기느냐에 따라 내각의 운명이 좌우될 수
있을 것 같다고 걱정을 했다.
"박사님, 조각을 놓고 구파하고
우여곡절이 이렇듯 많았는데 구파가 다시
또 개각에 협력을 할 것 같습니까?"
오위영은 구파의 협력 따위는 포기하는
것이 좋을 것이라는 의견이었다.
"구파는 갈라졌다고는 하지만 아직은
민주당이라는 큰집에 같이 살고 있는
처지가 아니오? 그들도 현 시국이 어떻다는
것을 잘 알고 있을 것이고, 설사 고개를
가로젓는 한이 있더라도 설득을 해서
끌어들이도록 해야지요."
"꼭 그러셔야겠다면 총리께서 생각한
댈 생각이십니까?"
"그게 바로 내 고민거리요. 조각을 한 지
열흘 만에 각료직에서 물러나라 한다면
좋아할 사람이 누가 있겠소? 그러니 이
아니 답답한 일이오?"
장면은 한숨까지 길게 내뿜었다.
아무리 정치를 하는 사람의 마음이 돌
같이 차야 한다고 하지만, 또 아무리
개각이 절박한 상황이라고 하지만 장관
감투 씌워준 지 열흘 만에 <사정상 당신이
장관 감투 좀 내놔줘야 하겠소> 하기는
어려운 일이었다.
더구나 천주교라는 종교적 분위기 속에서
자라나온 탓인지 장면은 그렇게 모질지가
못했다.
"알겠습니다. 제가 나서 보겠습니다."
시켜서 욕을 먹일 수는 없었다. 그런 일은
당연히 1급 참모가 해야 할 일이었다.
오위영은 스스로 십자가를 지리라
다짐했다.
두 사람의 대화가 있은 지 4,5일 뒤인
9월 일 아침, 오위영이 장면을 찾아와 넉
장의 봉투를 내놨다. 장관들의 사표였다.
국무원 사무처정인 오위영을 위시해서
내무부 홍익표, 국방부 현석호, 상공부
이태용 등의 사표였다.
봉투에서 한 장씩 꺼내 사표를
들여다보는 장면의 표정은 자못 침통했다.
"이거 이분들한테 미안해서 어떡하지!"
그는 목이 메어 중얼거렸다.
"과히 심려하실 건 없습니다. 모두
애당하는 마음에서 기꺼이 사표를
오위영은 장면을 위로했다.
장관 감투. 세상에 그토록 매력적인
감투도 또 없을 것이다. 정치를 한다는
사람치고 이 장관 감투에 군침을 흘리지
않는 사람이 없다. 어쩌면 그 장관 감투의
매력에 이끌려 사나이들은 행여나 하는
마음에서 정치에 뛰어들런지도 모른다.
아니 장관 감투에 대해 매력을 느끼고 있는
것은 여성도 마찬가지인 것 같다. 그러기에
민주당의 홍일점 최고위원인 박순천이
조각에서 제외되었다고 해서 홧김에
탈당계까지 내는 해프닝을 벌였던 게
아니겠는가.
그렇듯 매력적인 장관 감투를 홍익표,
현석호, 이태용, 오위영 등 4명은
<애당하는 마음에서> 헌신짝처럼 내던졌다.
했던 그들의 마음도 유쾌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다음날 밤, 장면은 이제는
<구파동지회>의 원내총무로 변신한
유진산을 반도호텔 829호실로 초치(招致),
단 둘이 마주 앉아 흉금을 털어놓고 얘기를
나누었다.
"진산, 진산한테는 미안하다는 말
이외에는 달리 할 말이 없구려."
두 사람의 대화는 장면의 사과에서부터
화제의 실마리가 풀려나가기 시작했다.
"진산, 파벌의 이익도 중요하겠지만 보다
더 중요한 것은 국가 이익이 아니겠소? 나,
경무대 4자회담의 원칙을 이행하도록
하겠소. 그러니 진산, 이 정국을 타개해
나가기 위해서 구파에서 흔쾌히 입각을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장면의 말을
듣고 있던 유진산은,
"박사님의 고충이 어떠하리라는 것을
저도 십분 이해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구파의 입각문제가 그리 용이하리라고는
생각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왜 진작 경무대
4자회담의 원칙을 이행치 않고 있다가
이제와서 이행하겠다고 하느냐 하고 반박할
것이 틀림없으리라 보여지기 때문입니다."
"진산 자신의 생각은 어떠시오? 나는
진산의 생각이 어떤지가 더 중요하다고
봅니다."
"나도 구파 조직의 일원입니다. 과연
반발을 무마할 수 있겠는지가 더
중요하다고 봅니다."
"나는 진산만 믿겠소. 부디 지난
구파의 협력을 기대하겠소."
두 사람의 단독 면담은 밤 9시부터 10시
반까지, 1시간 반 동안에 걸쳐서
이루어졌으나 중요한 내용은 대강 이상과
같은 것이었다.
유진산, 그는 어떤 것이 민주정치인가
하는 것을 너무나 잘 알고 있던
정치가였다. 여담이지만 5공화국 시절
신한민주당(新韓民主黨)의 전당대회
의장이자 국회의원인 송원영(宋元英)의
5.16 군사 쿠데타 이전까지의 꿈은
유진산과 함께 정치를 해보는 것이었다.
그는 장면이 국무총리가 되자 그에게
자리를 옮겨 앉기 전까지 줄곧 경향신문사
정치부 일선 기자로서 활약해 온 인물이다.
그래서 그는 언제나 가까이에서 유진산의
일거수 일투족을 지켜볼 수가 있었다.
그리고 내린 결론이 <유진산이야말로
정치가 무엇인지를 아는 사람이다>라는
것이었다.
그랬기 때문에 그는 유진산과 함께
정치를 해고는 것을 하나의 꿈으로
새겨왔다.
거듭 또 되풀이 언급하지만 유진산은
정치가 무엇인지를 아는 인물이었다. 그는
이미 장면과 마주 앉아 있을 때 장면
내각에 협조해야겠다고 마음을 굳혀놓고
있었다.
그러나 문제는 있었다.8월 31일, 구파의
등록할 때부터 누구나가 유진산을 가리켜,
<구파의 국무총리>라 일컬어 오고 있었다.
그것은 곧 구파의 보스는 유진산이라는
뜻이었다. 어느 사이엔가 구파에 대한 그의
영향력은 그만큼 커져 있었던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구파 전체가 그가 생각하는
대로 따라주느냐 하는 것이 문제였다.
어떻게 보면 장면이 경무대 4자회담의
합의 사항을 뒤집어 버리고 신파
단독내각을 조직했다는 것은 정치적 신의를
저버린 행위라 할 수 있었다. 그런 장면에
대해서 <비상시국임을 감안하여 대국적
견지에서 협조를 하도록 하자> 한다고 해서
과연 구파가 유진산의 주장을 받아들일
것이냐 하는 것은 비관적이라 할 수밖에
없을 것 같았다.
동원예식장에서 구파의 의원총회를 긴급히
열었다. 유진산이 예상했던 대로였다. 장면
내각에 협력하는 문제를 끄집어내자 모두가
한결같이 장면의 신의 없는 행위를
규탄하며 협력에 반대를 하는 것이었다.
조영규는,
"신파는 이제 남이에요. 남의 집안 일을
애써서 거들어 준들 이제 저들의 정치
역량은 드러났는데 무슨 성과를 기대할 수
있단 말이오? 더구나 결과가 재미없게 되면
그들하고 같이 공동 책임을 져야 할 텐데,
그래 진산은 그들하고 실정에 대한 책임도
함께 지겠단 말이오?" 하면서 대들었다.
해질 무렵에 열린 의원총회는 자정이
가까울 무렵까지 계속되었다. 80여 명의
의원들이 모두 한 마디식 하는 참이라
말을 일일이 참을성 있게 듣고 나서 이렇게
말했다.
"국민의 여망에 부응해서 제2공화국의
헌정을 정상화하고 정국의 안정을 도모해야
한다고 믿고 있소. 이것은 내 신념이오.
당보다는 먼저 국가를 생각해야 할 게
아니겠소? 시국의 중대성에 비추어 장
정권을 이대로 두고 볼 수만은 없는
일이오. 4.19 정신을 계승하고 국민의
여망에 부응하는 입장에서 이번에도
협력해야 한다는 것이 우리의 기본 자세인
줄로 아오. 여러분은 장면 씨의 신의문제를
운위하고 있지만 그 집안은 그 집안
나름대로의 사정이 있을 게 아니오? 우리
이렇게 좋은 면으로 해석을 하도록
합시다."
나용균이 첫번째로 조건을 내걸었다.
"장면 내각을 처음으로 백지환원하는
것을 전제로 한다면 협력해도 무방하다고
생각합니다."
그 뒤를 조영규가 이었다.
"장 총리는 구파한테 다섯 자리를 줄
모양인데 현재 사표를 낸 장관은 넷밖에 안
되지 않소? 그리고 우리 구파한테 다섯
자리를 준다 하더라도 장 총리 마음대로
자리를 정할 것이 아니라 우리 구파가
마음대로 차지하고 싶은 자리를 차지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을 전제 조건으로
해주십시오."
이런 제의에 대해서 유진산을 이렇게
대꾸했다.
"남의 집에 일을 도와주러 간 사람이
맡아하겠다고 할 수야 없는 일 아니오?
설사 그렇게 할 수 있다 하더라도 기왕에
도와주고자 마음먹은 일, 조건 없이
도와주는 것도 미덕이 아니겠소? 우리,
우리가 장 내각의 입장이 되었을 때를
생각해서라도 아예 벌거벗고 도와주도록
합시다."
참으로 기묘한 일이었다. 구파에는
이른바 원로라 일컬을 수 있는 인물들이
제제다사였다. 백남훈, 김도연, 나용균,
양일동,서범석 등. 그런데 유진산이 입을
열기만 하면 지금껏 게거품을 토하면서
반대를 하던 사람들까지도 끽 소리 하지
않고 입을 다물었다. 유진산이 신체가
건장한 것도 아니었는데 그의 입은 열기만
하면 반대론자들을 눌러버렸다.
파견할 인물 선정을 유진산, 김도연,
백남훈에게 일임한다는 결의까지 했다.
밤이 늦었으나 세 사람은 구파에서
파견할 5명의 장관 인선에 착수했다.
유진산은 그것을 다음날 아침 반도호텔로
가지고 가서 장면에게 내밀었다.
구파에서 입각시키고자 선정한 인물은
권중돈, 나용균, 김우평, 박해정, 신각휴
등이었다.
장면은 명단을 훑어보고 나서,
"진산, 언젠가도 말했지만 진산이 들어와
주시오. 진산이 희망하는 부처를 맡기도록
하겠소" 하며 유진산이 입각하기를
성심으로 요청했다.
"박사님, 말씀은 감사하나 만일 내가
입각을 해 보십시오. 남의 말하기를
장관 감투가 쓰고 싶어서 신파 내각에
협조해야 한다고 역설했던 것이라고 하지
않겠습니까."
유진산은 이렇게 좋은 말로 사양을 하고
덧붙였다.
"구파에서 다섯 사람을 보냅니다만
협력의 조건은 구파의 별도 교섭단체를
인정해 줄 것과 필요할 땐 언제든지 5명의
장관을 소환할 수 있다는 이 두
가지뿐입니다."
그런데 장면이 막상 개작에 착수하기는
했는데 조그마한 문제가 생겼다. 장면이
구파에서 보낸 신각휴에게 체신부를 맡기려
하자 그는,
"나한테는 농림을 맡겨 주시오" 하는
것이었다.
신각휴는 개인적으로 농림부 장관을
시켜달라고 감투운동을 한 일이 있었다.
그것을 장면이 보사부나 체신부라도 좋다고
한다면 고려해 보겠다고 했었다. 그랬는데
신각휴는 농림부가 아니면 싫다고 하면서
제물에 나가 떨어졌던 것이다.
그런 일이 있었는데 이번에도 신각휴는
집요하게 농림부를 요구했다.
어차피 구파의 협조를 바라고 구파 다섯
사람에게 장관 감투를 안겨줄 생각을 한
이상에는 체신이나 농림이나 그게 그거라
할 수 있었다. 신각휴가 농림 정책을
맡았다고 해서 제멋대로 할 수 있는 것도
아닌 바에는 희망하는 대로 안겨줄 법도 한
일이었으나, 이 경우 장면은 고집을
부렸다.
"싫소이다."
"그러시지 말고 체신부를 맡아
주십시오."
"싫다고 하지 않소?"
신각휴는 고집을 부렸다. 어느 한쪽이
고집을 꺾어야만 하루속히 개각 발표를 할
수가 있는데 어느 쪽도 고집을 꺾으려 하지
않으니 시간이 걸릴 수밖에 없었다. 사흘이
걸렸다.
결국 장면은 신각휴한테 안겨주려던
체신부는 보류해 놓은 채 발표를 할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개각에 착수한 지
사흘 만인 9월 13일 장면은 개각 내용을
다음과 같이 발표했다.
외무부 정일형(유임), 문교부
오천석(유임), 내무부 이상철, 부흥부
농림부 박제환(유임), 법무부
조재천(유임), 상공부 주요한, 국방부
권중돈(구파), 보사부 나용균(구파),
교통부 박해정(구파), 국무원 사무처장
정헌주, 무임소 김선태(유임) 신현돈.
체신부는 우선은 그냥 공석으로 남겨둘
수밖에 없었다. 며칠 뒤, 보류해 두었던
체신부 장관 자리는 다시 구파의 천거를
받아 조한백에게 그 자리를 안겨주었다.
그럼 이제 구파를 내각에 끌어들였으니
장면은 마음놓고 정치를 해나갈 수 있게
되었던가? 그렇지를 못했다. 이번에는
국무원 사무처장 자리를 내놓은 오위영이
장면에게 반발할 자기 세력 규합을 꾀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은행가 출신인 오위영은 신파의
있는 인물들이 적지 않았다. 그들은 태반이
경상남도 출신 국회의원들이었지만 그들을
하나로 묶기만 하면 족히 한 파벌은 이룰
수 있을 만한 숫자는 되었다. 애당하는
마음에서 국무위원 감투를 헌신짝 내던지듯
깨끗이 내던졌던 오위영이 어째서 장면에게
반발하고자 꿈틀대기 시작했던 것인가?
앞을 가로막는 험준한 산, 그 산을 숨을
헐떡이며 힘겹게 넘으면서도 국무총리
장면의 일에 대한 열정은 대단했다. 계획을
세우고 그 계획을 실천에 옮기기 위해서
그는 몸 속에서 돌고 있는 피를 온통 다
말려가고 있었다.
1시 전에 퇴정해 본 일이 없었다. 아침이면
어김없이 7시면 출근을 했다. 총리가 이
모양이니 여타 장관들도 그 본을 따르지
않을 수가 없었다.
또 그는 점심시간이 되어도 나가서 외식
한번 하지를 않았다. 반드시 집에서
도시락을 날라다 먹었다. 끼니란 가족이나
친구들과 어울려서 먹어야 맛도 나도
소화도 잘 되는 법이다. 그런데도 장면은
집에서 도시락을 날라다가 그것을 책상에
펼쳐 놓고서 먹었다. 그러면 왜 집에서
날라다 먹었겠는가? 그는 밥술을 입에 떠
넣으면서도 어떻게 해야 이 나라, 이
국민을 보다 잘 살 수 있게 할 수 있을까를
생각했다.
장면은 그의 내각의 목표를 <경제
<의식이 족해야 예의를 안다>는 옛말과
같이 무엇보다도 경제 건설이 급선무라는
판단에서였다.
이 무렵의 한국의 경제 실정은 파탄 일보
직전에 놓여져 있었다. 국고는 텅 비어
있었고 잠재 실업가가 3백만 명에 이르는
형편이었다. 우선 먹이고 입히는 것이
급선무가 아닐 수 없었다. 그래서 시정의
최고 목표로 설정해 놓은 것이 경제
제1주의였다.
이 시정목표에 따라 재정 경제 2개년
계획이 세워졌다. 또 경제부흥을 위한
제1차 5개년 계획도 세웠다. 농촌의 빈곤
구제를 위한 고리채(高利債) 계획도 세워
놓았다.
국토의 종합적인 건설을 위해서
여기에 투입될 인력은 병역 기피자의
노동력을 활용하기로 했다. 이 무렵 병역
기피자, 미필자의 수가 상당한 숫자에
이르고 있었다. 그 때문에 그들 태반이
잠재 실업자 군상을 이루고 있는
형편이었다. 그러한 그들에게 얼마 동안의
기간을 정해서 국토건설 사업에 참여케
함으로써 병역 의무를 상쇄시켜 주어
떳떳하게 인생을 영위케 하자는 것이
정부의 배려였다.
이승만의 자유당 정권이 정권 유지에만
혈안이 되어 있을 뿐 무엇 하나 해놓은
것이 없는 반면에 장면 정권이 이만한
청사진을 만들어 놓았다는 것은 그들의
열의가 어떠했느냐 하는 것을 짐작케
해주고도 남음이 있다. 여담이지만 민주당
군사정권에서 고스란히 물려받았다. 그들은
마치 그들 자신이 그런 청사진을 만들어낸
양 선전했지만 천만의 말씀이다. 그들은
숫자 하나 시정함이 없이 그대로
시행했었다.
<민주주의 정부란 정부가 하고 있는 일,
또 하고자 하는 일을 숨김없이 국민에게
알리도록 해야 한다>는 공보비서관
송원영의 건의를 받아들여 KBS 프로그램
가운데 <정무보고(政務報告)> 시간을 마련,
한 달에 한 번씩 국민에게 정부가 하고
있는 일에 대해서 알려주었다. 물론 이
정무보고는 장면이 직접 KBS 마이크를 통해
방송을 했다. 한두 달 뒤에 송원영이 다시,
"한 달에 한 번만의 방송으로는 국민이
정부가 하는 일을 소상히 알기는 어려우니
좋겠습니다"라고 건의하자, 장면은 이
건의도 쾌히 받아들였다.
그래서 매주 토요일 저녁 6시 30분을
아예 <정무보고> 시간으로 못박아 놓고
방송을 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방송은 여.야에 관계없이 공정해야 하며
정치의 예속물이 되어서는 안 된다"고
하면서 전문가들로 하여금 <방송의 중립화
법안>을 연구해서 만들도록 하기도 했다.
또 경찰 역시 집권자의 사병(私兵)이
되어서는 안 된다고 하여, <경찰의 중립화
법안>을 만들도록 했다. 특히 경찰의
정치적 중립을 위해서는
공안위원회(公安委員會)를 만들어 경찰의
독립을 도모하기도 했었다. 교과서에
그대로의 정치제도와 정치풍토를 건설하는
것이 장면의 정치 이상이었다.
군대문제에 대해서는 그는 남달리 신경을
썼다. 당초 민주당은 10만 감군(感軍)을
선거 공약으로 내걸었다. 여기에 대해서는
북한과의 군사적 균형이 깨진다고 해서
많은 비판이 일었지만 국군문제에 있어
장면은 수보다는 질에 무게를 두고
정예군대를 만들기 위해서 10만 감군을
공약하게 되었던 것이다.
국방장관 권중돈은 구파에서 파견한
인물이었지만 다행히 그는 장면과 손발이
척척 맞았다. 그는 장면의 생각이 어떤
것이라는 것을 헤아려 정군(整軍)에 대한
청사진을 만들었다.
극비로 작업이 진행된 이 정군 계획의
첫째, 직위를 이용 부정축재를 한 장성은
예비역에 편입시킨다.
둘째, 부정선거에 관여하여 현저하게
악질적으로 행동한 지휘관 등은
예편시킨다.
셋째, 퇴역장성 중 유능한 인물을 선발,
국방 자문기관을 신설, 수용토록 한다.
대강 이런 내용의 정군 원칙을 세웠다.
세부적으로 삼성 장군(중장) 이상에
대해서는 총리 책임하에 거의 전원을 예편,
인사의 적체에 숨통이 트이도록 하며, 소장
이하 준장에 이르기까지는 부정축재,
부정선거에 현저하게 드러나 있는 자만을
골라서 예편 또는 이동을 시킨다는
세부원칙도 세워 놓고 있었다.
여기에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점은
가려내는 정군 원칙에 그들에 대한 처벌을
전혀 고려치 않고 있었다는 점이다.
"장성으로서 정년까지 봉사를 하지
못하고 중도에 옷을 벗는다는 것이 곧
처벌이 아니겠소. 그러니 그들의 죄질이
얼마나 크든 그것으로 그들에 대한 처벌은
끝난 셈입니다."
장면은 아무리 부패한 장성이라 해도
6.25 때의 그들의 공로를 참작하지
않아서는 안 된다는 주장이었다. 그들이
아니었던들 오늘 이 나라가 어찌 있을 수
있겠는가 하는 것이 그의 지론이었다. 총리
장면이 이 지론에 따라 정군 대상자에
대해서 이렇듯 관대이 취급하려 하고
있었던 것이다.
국방부에서 정군에 대한 논의가 극비리에
장도영(張都暎)이 사표를 제출했다. 이
인물에 대해서는 뒤에 구체적으로
언급하겠지만 그도 자신이 정치장군이라는
것을 인식하고 있었던지 아직 정군 요강이
확정되기도 전에 미리 사표를 내버렸던
것이다. 국방장관 권중돈은 이때 두말 않고
장도영의 사표를 수리하고 그와 함께
예편을 시켜버렸어야 했다. 그것을
권중돈이 <아직 정군 요강이 확정된 것도
아니고 하니>라는 이유로 육군
참모총작에게 명해서 그 사표를 반려토록
했다.
참 기막힌 역사의 한 순간이었다.
역사를 가정해 본다는 것처럼 부질없는
것도 없지만 한번 가정을 해볼 경우 어떤
역사적 결론을 얻을 수 있을까? 우선
버렸더라면 군사 쿠데타의 리더인
박정희(朴正熙)를 제2군 부사령관으로
끌어가지는 못했을 것이다. 여기에
대해서도 뒤에 구체적으로 언급하겠지만
이때 박정희는 어쩔 수 없이 예편당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 놓여져 있었다. 그것을
장도영이 제2군 부사령관으로 끌어감으로써
구제해 준 꼴이 되었던 것이다.
이런 아찔했던 역사의 한순간을 들여다볼
때마다 인간에게 운명(運命)이라는 것이
있듯이 국가에도 운명이라는 것이 있는 게
아니냐 하는 느낌이 자주 일곤 한다. 그건
그렇고, 역사의 줄기를 앞에 놓고 살펴볼
때, 우리는 때론 납득하기 어려운 상황에
부딪쳐 당황하게 될 때가 있다. 그것은
다름이 아닌 정군파 장교들의 움직임에
이른바 주체들이라는 사람들의 입을 통해서
환전된 일이지만 그들은 <새로운 정부의
수립과 더불어 육군 참모총장의 경질문제가
대두되자, 정군파 장교들은 국방장관
현석호와 면담, 정군을 단행할 참모총장의
임명을 건의하기로 의견을 모았다>라고
했는데 이 대목을 도무지 납득할 수가
없다.
이들은 이러한 결의를 9월 9일 오후 6시
30분에 했다는 것이다.
이날의 이들의 움직임을 좀더 상세히
살펴보기로 하자.
9월 9일, 오후 6시 30분. 충무로에 있는
충무장에는 정군파 장교들이 모여들었다.
그러나 그들은 세상의 눈길을 피하기 위해
장소를 바꿔 충무로에서 회합을 갖지 않고
이태근, 중령 김종필 두 사람의 지프와
택시 한 대에 나눠 타고 한강으로 달렸다.
당시 방한중인 월남 장교단 환영 행사를
가져야 했던 이태근은 하차하고 나머지
장교들은 한강에 도착, 놀잇배 위에서 다시
정군문제를 논의하기 시작했다. 이들은 이
모임에서 다음과 같이 의견을 모은 후에
헤어졌다.
첫째, 현석호 장관을 만나기 위해 내일
9월 10일 오전 10시 30분까지 국방부 앞
2층 다방에 개별적으로 집합한다.
둘째, 장관을 만나면 모든 3성 장군의
예편을 건의한다.
셋째, 만약 3성 장군을 참모총장에
임명한다면 나머지 모든 3선 장군은
예편하고 신임 총장도 1960년 12월
조건부로 할 것을 건의한다.
넷째, 앞으로 참모총장, 차장을 모두 2성
장군으로 보하도록 한다.
이상이 이른바 군사 쿠데타 그룹의
주체들이 훤전하고 있던 정군의 결의
내용이다.
이런 그들의 주장이 전혀 이해도 안 되고
납득도 할 수 없다는 것은 다음과 같은
이유에서다.
현석호가 장면 내각의 국방장관으로
기용된 것은 8월 23일, 그는 엿새 만인 8월
29일에 이미 육군 참모총장을 갈아치웠다.
최영희는
연합참모본부(聯合參謀本部:지금의
합동참모회의) 총장으로 전보를 하고
후임에 최경록을 기용했던 것이다.
있으면서 한 일이라고는 이 육군 수뇌부의
인사이동 한 가지뿐이었다. 그랬는데 <만약
3성 장군을 참모총장에 임명한다>는 소리가
무슨 소리인지 전혀 이해가 가지를 않는다.
또 9월 10일에 국방장관 현석호를 만나기
위해서 운운하고 있지만 이때 이미
현석호는 장면의 개각 방침에 따라 사표를
낸 뒤였고 후임 장관이 임명된 것은 9월
12일 오후였으니까, 이때 국방장관은
공석이었다. 그랬는데 이날 장관을 만나기
위해서 찾아가기까지 했었다고 주장하고
있으니 도무지 무슨 놈의 꽹꽹이 놀음인지
모르겠다.
이들이 신문.방송을 접하기 어려운 일선
근무자였다면 글쎄 그랬을까? 하고 의심을
하면서도 일단 수긍을 할 수 있는 여지는
아니었다. 바로 서울에 있는 육군본부
근무자들이었다. 장면 내각의 개각문제에
대해서 신문.방송이 연일 떠들어대고
있었는데 현석호가 국방장관직을
내놓았다는 것을 몰랐을 리가 없다.
그런 판국이었는데 군사 쿠데타의
주체라는 사람들이 그런 믿기 어려운
얘기를 만들어 퍼뜨린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일본 속담에 <이기면 관군(官軍), 지면
적군(賊軍)>이란 말이 있다. 총칼로 권력을
잡았든, 물로 권력을 잡았든 잡은 자가
땡이다. 그래서 <엿장수 마음대로>라는
곧 정의(正義)다>라고 갈파하지를
않았던가!
하여간에 그건 나중 일이고, 김종필 등
이른바 정군파 장교들은 9월 10일 서울
충무로에 있는 충무장(忠武場)이라는 왜식
음식점에서 모임을 가졌다. 물론 극비의
집회였다.
이날 음식점에 모인 인물들은 김종필을
비롯해서 오치성(吳致成), 길재호(吉在號),
옥창호(玉昌鎬), 석정선(石正善),
신윤창(申允昌), 석창희(石昌熙),
이택근(李澤根), 김달근(金達勤) 등 8기생
출신 9명이었다.
"우리가 애국애군하는 마음에서
정군운동을 펴 왔소만 도무지 실효를
거두지 못하고 있으니, 이 아니 딱하오."
약간의 허스키가 사람의 마음을 사로잡는
마력을 지니고 있었다.
김종필은 자못 침통한 듯한 표정을 짓고
이렇게 서두를 꺼냈다.
"우리의 정군운동을 도 그렇다 하고 나는
민주당이 집권하면 그들 자신이 알아서
정군을 해주겠지 했더니 전혀 그런 기미도
보이지 않고 있고......."
김종필은 이쯤에서 말을 뚝 끊고,
동기생들의 표정을 살펴보았다.
"성급한 기대는 금물이에요.실망할 것이
아니라 꾸준히 정군운동을 펴 나가느라면
빛을 볼 날도 있을 게 아니오?"
김종필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또
누군가가 물었다.
"그럼, 여기에서 주저앉고 말자 그거요?"
"사나이가 한번 칼을 뽑았으면 어떤
결말을 봐야 할 게 아니겠소?"
오치성이 맞장구를 쳤다.
"옳은 말이오. 사나이가 한번 칼을
뽑았다가 휘둘러 보지도 못하고 칼집에
꽂을 수야 없지 않소? 우리 이 자리에 모인
김에 방법론이나 한번 연구해 보도록
합시다."
"방법론은 없어요."
김종필이 단정적으로 말했다.
"방법론이 없다면 오늘 우린 여기에 왜
모였지?"
신윤창이 중얼거렸다.
"방법론이 있다면 딱 한 가지가 있을
뿐이에요."
김종필이 더욱 가라앉은 목소리로 단호히
"어떤?"
"쿠데타."
"쿠데타?"
모두 놀라서 눈이 휘둥그래졌다. 한순간
숨소리를 죽였다. 시간까지도 뚝 정지한 것
같았다.
"그것이 가능할까?"
석정선이 겁에 질린 듯한 목소리로
반문했다.
"히틀러는 일곱 명의 나찌망을 만들어
가지고 정권을 잡았어. 우린 그것보다도 두
명이나 더 많잖아? 더구나 우린 민간인이
아니라 군인이야. 우리가 치밀하게 계획만
세워서 추진한다면 불가능이 어디 있겠어."
김종필이 결연한 의지를 보여주었다. 그
자신으로서는 숨막히는 듯한 한순간이기도
쿠데타에 반대한다면 그가 지금껏 박정희와
세워온 군사 쿠데타의 꿈은 수포로
돌아간다고 봐야 했기 때문이다.
"우린 맨주먹이야. 병력을 거느린
지휘관이 아니잖아?"
"그러니까, 지휘관을 포섭해야지."
"지도자는?"
"지도자는 있어. 우리가 합의를 보이기만
하면 지도자의 이름을 밝히겠어."
오치성이 식탁을 탕 치며 말했다.
"나는 찬성이야. 정군운동 방법을 아무리
모색해 봐도 방법은 없어. 이놈의
고리타분한 정권을 확 뒤집어 엎어버리는
것만이 우리의 목적 관철의 길이야."
"실패하는 날엔 목숨을 부지하기가
어려울걸?"
아냐? 이까짓 목숨 아까울 게 뭐가 있어?"
오치성이 결연한 의지를 보여주었다.
6.25 운운한 것이 모두에게 용기를
불어넣어 준 모양이었다. 모두가 한 마디씩
결연히 의사표시를 했다.
김종필은 빙긋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우리는 박정희 장군을 지도자로 모시고
거사를 하도록 합시다."
"박정희 장군?"
그들은 박정희가 어떤 인물이냐 하는
것을 알고 있었다. 6관구 사령관에서
1960년 1월에 부산 군수기지 사령관으로
전보되었던 박정희는 불과 반 년만에 1관구
사령관으로 좌천되어 광주에서 근무를 하고
있었다. 박정희는 군대 안에서는 꽤
강직하고 청렴결백한 장군으로 소문이 나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자, 그럼 부서를 정하도록 합시다."
의논 끝에 총무 김종필, 정보 김형욱,
정문순(鄭文淳), 인사 오치성, 경제
김동환(金東換), 사법 길재호, 작전
옥창호, 신윤창, 우형룡(禹瑩龍)으로
부서가 짜여졌다.
한데, 운명인가? 이들이 충무장에서
쿠데타를 일으키기로 결의한 바로 다음날인
9월 11일 박정희는 1관구 사령관의
한직에서 육군본부 작전참모부장으로
영전이 된 것이다. 육군의 작전 지휘권을
한 손아귀에 쥐고 있는 작전참모부장으로
영전이 됐으니 김종필의 기쁨이
어떠했겠는가. 쿠데타는 반드시 성공하고
말 것이라는 신념이 굳어지게 되었을 것은
<중이 고기 맛을 알게 되면 절간에
빈대가 없어진다>고 했다.
권력에 매료되어 쿠데타를 도모하고 있는
사람들의 계획이 성공되는 날 이 나라의
역사는 어느 방향으로 치닫게 될 것인가?
이렇게 역사는 누구도 의식할 수 없는
어둠 속에서 이루어져 나가고 있었다.
앞에서 언급했듯이 장면 정권은 많은
청사진을 만들어 놓았다. 그 청사진들은
모두가 실현성이 있는 것들이었다. 현실을
무시하고 전시효과를 노리기 위해서
엉터리로 만들어 놓은 청사진은 단 하나도
없었다.
있다가 군사 쿠데타라는 비극에 봉착하게
되지만 이 모든 청사진이 실시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성과가 눈에
뜨이지 않았던 까닭은 무엇이었던가?
그것을 시행하기는 했으나 지지부진 일이
진척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앞에서 장면
정권이 일하기 어려웠던 몇 가지의 큰
요인만 들었지만 그 밖에도 일하기 어려운
요인은 얼마든지 있었다.
첫째는 언론의 무정견한 비판이었다.
장면 정권에서 어떤 청사진을 제시하면
언론이라는 것들이 <반대를 하기 위한
반대>만을 일삼았다. 그런데 그놈의 신문
통신이라는 것들이 어쩌면 그다지도 많이
출현하는지 자고 나면 새 신문사요, 새
통신사가 생겨났다.
언론의 자유는 언론기관 설립의
자유까지도 허용해 놓고 있었다.
콧구멍만한 사무실 하나에 등사기 한 대
갖다 놓고 <통신사> 간판을 내걸었는가
하면, 인쇄 시설을 갖추지 못한 녀석들이
<일간 신문사> 간판을 내걸어 놓고 장면
정권을 마구 후려치는 신문을 발간하고
있었다.
그런 신문과 통신사야 독자층이라는 것이
별로 보잘 것이 없었으니까 그렇게 신경쓸
것은 못 되었지만, 이 무렵의 언론의
난맥상이 어떠했느냐 하는 것을 이런
측면에서 가늠해 보기에는 좋은 예가 될
줄로 여겨 필자가 미국의 실정을 잘 모르는
관계로 여기에서는 장면의
공보비서관이었던 송원영의 지론을
<미국 같은 안정된 나라에서도 새 정부와
의회, 신문은 6개월의 밀월 기간을
갖는다.>
이게 무슨 소리냐 하면 새 정부가
들어서면 6개월 동안은 그 정부가 일을 할
수 있도록 도와는 줄지언정 두들겨 패는
일은 없다는 소리다.
미국의 예를 들지 않더라도 <6개월
밀월>은 당연에 속하는 문제라고 생각한다.
일을 할 수 있는 기틀도 마련해 놓기 전에
왜 일을 못하느냐고 나무라거나 다그친다면
그 어떤 기대도 할 수는 없는 일이다.
그런데도 언론에서는 연일 장면 정권을
비판하고 두들겨 팼다. 꼭 이승만 정권에
대해서 하지 못했던 분풀이를 장면 정권에
대해서 하는 것 같았다.
장면 정권이 청사진을 마련해 놓고
아직은 일하기 위한 터전을 차분히 닦고
있을 때 구파가 갈라져 나갈 준비를
서두르기 시작했다. 신당 발기
준비위원회의 구성이 바로 그것이었다.
다섯 사람을 신파내각에 협조하라고 해서
입각시킨 지 열흘도 못 된 9월 22일의
일이었다.
어차피 구파는 민주당이라는 한울타리
안에 있으면서도 서로가 쓴 외 보듯 하고
있었기 때문에 분당을 한다고 해도 사실에
있어서는 서로가 아프지도 가렵지도
않았다. 다만 장면으로서는 완전히 결별을
함으로써 꼭 필요할 때 협력을 얻지 못하게
된 것이 한이었을 것이다.
한데, 막상 분당 작업에 들어가자 몇
구파이면서도 구파를 따라 신당으로 가기를
주저하는 사람이 나타난 것이다. 그들은
집권당인 신파에 기대고 싶어서 구파를
따라 신당으로 가기를 주저했던 것이다.
이런 경우 소인배였다면 그런 태도를
취하는 인물들에 대해서 뭐라고 했을까?
<이런 덜 돼 먹은 놈들! 그래 동지를
버리고 권력을 쥔 놈측에 붙겠다 그거야?
그러고도 정치인이야? 배신을 떡 먹듯이
일삼으면서도 정치인이라 할 수 있느냔
말야?> 하고 입에 게거품을 물고 매도하려
했을 것이다.
아니 실제로 구파에서는 이렇게 주저하고
있는 인물에 대해서 입에 담지 못할
원색적인 욕설로 매도하는 무리가 없지도
않았다.
유진산의 생각은 전혀 달랐다.
"정국의 안정을 위해 민주당 정권에
협력하는 것은 절대로 변절이나 배신이
아니오. 오히려 정국 안정이라는 차원에서
우리는 신파에 남기를 원하는 동료가
있다면 그를 격려해서 장 내각에 협조토록
하는 것이 바람직한 일이오. 그러므로
누구도 그들의 입장을 저지해서는 안
되오."
참으로 기가 막힌 얘기였다. 우리는 참된
민주 정치가의 참모습을 유진산한테서만이
찾을 수 있을 것 같다. 아무리 속이 넓은
사람이라 하더라도 자기파의 인물이
떨어져나가려 하면 소매를 붙들고 만류하기
마련이다. 파벌이 약세화되는 것이 두렵기
때문이다. 그것을 유진산은 파벌의
내각책임제하에서 원내 세력이 과반수가 못
되면 언제나 도각의 위협에 허덕일 수밖에
없는 일이었다. 현실적으로는 신파 내의
소장파가 구파의 소장파와 제휴해서 <장면
내각 도각>을 소리높여 외쳐대고 있는
판국이었다. 그런 판국에 이제는 장면의
정적으로 돌아서게 된 유진산이 때를
만났다 하고 박장대소하기 전에 장면
내각의 안정세력 구축을 위햐서 이렇게
노골적으로 지원사격을 퍼부었던 것이다.
이런 행동을 감히 범인이 할 수
있겠는가? 유진산이 남고 싶은 사람은
남으라고 하자, 구파 소속 의원 가운데서
25명이나 신파로 옮겨 앉았다. 25명이라는
숫자는 능히 국회의 교섭단체를 구성하고도
남는 숫자였다. 국회법에 따르면 20명
그것이 25명인 것이다. 한 정당에서
25명이나 되는 소속 의원이 떨어져
나갔다는 것은 예삿일이 아니었다. 그것을
소맷자락을 붙들기는 커녕 도리어 격려를
해서 보내주었던 것이다. 웬만큼 대범한
인물이라 해도 흉내도 못 낼 만큼 경탄 또
경탄할 수밖에 없는 쾌거를 유진산이 해낸
것이다. 기가 막힌 이야기가 아닐 수
없었다.
구파에서 신당 발기에 서명을 한
민의원은 65명에 참의원 17명이었다. 그들
구파들은 이제 신당을 발기하기 위해 서명
작업을 끝내고 신당을 만들기 위한 터전을
닦아가고 있었다.
신당 발기를 위한 서명 작업이 끝난 10월
초, 유진산은 반도호텔로 장면을 찾아갔다.
할 수 없었다.
"진산, 고맙소. 진정으로 고맙소."
장면이 몇 번이고 고맙다는 인사를
되풀이했다. 유진산 덕분에 신파는 25명의
구파 소속의원을 맞아들임으로써 과반수에
육박할 수가 있었던 것이다. 233석의
과반수는 117석, 구파 25명을 합해서
신파는 115석을 확보해 놓을 수가 있었다.
과반수에서 2석이 모자랐으나 그 2석의
값어치에 대해서는 임기응변으로 정치력을
구사하면 될 판국이었다. 장면이
유진산에게 곡두재배로 감사한 마음을
표시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유진산은 쓰디쓴 미소를 입가에 띄우며,
"오늘 내가 찾아온 것은 치하를 받고자
찾아온 것이 아니라 몇 가지 건의할 일이
이렇게 전제한 다음,
"첫째, 비상시국 선언을 하고, 둘째는
경제 재건을 위한 광범위한 정책적 노력을
기울이며, 셋째는 법치질서의 권위를
확립하는 등의 세 가지를 건의드리고
싶습니다"라고 말했다.
유진산이 제의한 첫째 항목 말고 둘째,
셋째는 이미 장면이 혼신의 힘으로
노력하고 있는 중이었다. 문제는 첫째
항목인데 <비상시국 선언>을 할 것 같으면
헌법의 일부 기능을 정지해야 할 판이었다.
헌법의 일부 기능을 정지한다는 것은
국민에게 주어진 자유를 속박한다는 얘기가
되었다.
장면이 첫째 항목에 대해 난색을
표명했다.
나가라는 말씀인데, 그렇게 해서 정권
유지를 한다면 자유당 정권과 다를 것이
뭐가 있겠소? 국민에게 모든 자유를
안겨주기 위해서 자유당 독재정권들하고
싸워왔던 게 아니었소? 나는 정권 유지를
못하면 말지 물리적 힘으로 정권을 유지할
생각은 추호도 없소."
유진산은 딱하기만 했다.
"지금 경찰이 아직도 위축에서 벗어나고
있지를 못합니다. 특히 데모만능의 사태를
그냥 내버려두었다간 어떤 예측하지 못했던
사태가 벌어지게 될지도 모릅니다."
"진산, 지금의 사태를 나는 그렇게 보고
있지를 않소. 그동안 국민은 너무도 억눌려
왔던 거예요. 그 억눌려 있기만 했던
불평불만을 지금 한꺼번에 쏟아버리고 있는
제풀에 가라앉고 말리라고 봅니다."
"민주주의 원리원칙에서 벗어난 정치는
하지 않겠다 그 말씀이군요."
"그렇지요. 이제 우리는 완전히
민주주의를 되찾는 것입니다. 우리의
민주주의는 교과서에 기록돼 있는 그대로를
실현시켜야만 합니다. 그것이 나의 정치
이상이기도 하고요."
유진산은 장면의 정치철학이 무엇이라는
것을 처음으로 느낄 수가 있었다. 그는
비상시국 선언에 대해서는 그 이상 권고를
하지 않고 화제를 돌려버리고 말았다.
<우리의 민주주의는 교과서에 기록돼
있는 그대로를 실현시켜야만 합니다>라고
한 장면의 말은 유진산의 뇌리에 깊숙이
못박혔다.
먼저 그의 뇌리에 떠오르곤 했었다.
정군파 젊은 장교들 얘기가 나온 김에 한
가지 더 곁들여 둘 조그마한 사건이 있다.
그것은 다름이 아니라, 소위 <16인 하극상
사건>이라는 것이다. 5.16 군사 쿠데타가
성공한 뒤, 이른바 주체들은 이 16인
하극상 사건을 무슨 큰 사건이나 됐던
것처럼 환전을 했는데, 알고 보면 그렇게
대단한 사건도 아니었다. 사건 내용은
다음과 같은 것이었다.
연합참모본부 총장으로 전보된 최영희가
미국방성 군원국장인 육군대장 파머를
초청한 것은 9월 18일이었다. 파머의
최영희가 파머를 무엇 때문에 초청했는지는
물어보나 마나한 일이었다.
파머는 한국을 방문하자, 한국에 주둔해
있는 유엔군 총사령관 육군대장
매그루더하고도 만났을 것은 자명한
일이고, 이때 두 사람 사이에는 한국
정부와 한국군의 내부 사정에 대해서
얘기가 오고갔던 모양이었다.
이 파머가 한국을 떠날 때 곱게 떠났으면
말썽이 일지를 않았을 것이다. 그는
귀국길에 오르면서 이례적으로 성명서를
발표하고 떠났던 것이다. 그는 뭐라고
했던가?
<정군 계획은 전투경험이 있는 유능한
장성들을 잃게 함으로써 전투력을
약화시키는 결과를 빚게 되고 또 감군
감군 계획은 민주당의 선거공약이었다.
7.29 총선거에 즈음해서 민주당은 10만
명을 감군하겠다고 선거공약으로
내걸었었다. 그러므로 이 감군 계획은
세상에 널리 알려졌던 일이니까 그다지
문제될 것은 못 되었다. 요는 정군
계획이었다. 이 정군 계획은 정부에서
알고는 있었으나 파머가 한국을 방문했다
떠나는 9월 20일 현재 세상에 공표된 바가
없었다. 미루어 짐작컨대 민주당
정권에서는 정군 계획에 대해서 유엔군
총사령관한테 통고했던 게 아닌가
짐작된다. 그렇지 않고야 극비리에 작업을
하고 있는 정군 계획에 대해서 파머가 알
리가 없었을 것이다.
어쨌거나 한국의 최대의 우방국이자
미국방성의 군원국장이 정군과 감군을
반대했다고 해서 크게 문제 삼을 것은 못
되었다. 좋게 보아 우정어린 충고라고도 할
수 있었기 대문이다.
그것을 육군 참모총장인 최경록이,
"미국이 한국에 대해서 원조를
해주었다고 해서 내부문제에 지나친 간섭을
함으로써 한국을 소국으로 생각케 하는
일이 있다면 엄연한 주권을 가지고 있는
한국민의 국민성이 용서치 않을
것이다"라고 반박을 했던 것이다.
파머의 성명 내용이 내정간섭이라고까지
할 것은 못 되었다. 물심양면으로 원조를
해주고 있는 미국의 국방성 군원국장쯤
되고 보면 총고를 겸해서 그쯤의 말은 할
수 있었다. 듣기 거북하면 한쪽 귀로 듣고
국방성의 일개 국장이 그런 말을 했다고
해서 미국의 대한 정책이 바뀔 것도 아닌
다음엔 조그마한 문제를 가지고 시비를
벌일 것은 못 되었다. 그것을 최경록이
반박성명을 내는 등으로 대응했기 때문에
오히려 젊은 장교들의 관심을 끄는 결과가
되어버린 것이다.
"최영희 장군은 개인적인 친분을 이용해
파머 대장을 불러다가 정권의 의미를
왜곡해서 설명한 게 틀림없어. 그런 식으로
국군의 자존심을 망칠 수가 있어?"
"그 따위 짓은 미국측의 환심을 사서
개인적인 영달을 꾀하려는 비열한 행위야.
절대로 용서할 수 없어!"
"도대체 어떻게 돼서 파머가 그 따위
성명을 냈는지 이것은 최영희 장군을
최영희를 성토하던 정군파 장교드른 그를
찾아가서 따지자는 데에 의견을 모았다.
따지자면 어떻게 따져야 하는가?
첫째, 파머 성명에 대해서 연합참모본부
총장의 소신 여하.
둘째, 육군 참모총장의 대 파머
반박성명에 대한 견해 여하.
셋째, 정군문제에 대한 연합참모본부
총장의 소신 여하.
넷째, 연합참모본부 총장의 사퇴에 대한
견해 여하.
이상 네 가지를 따지기로 했다.
이들은 필동이 있는 연합참모본부로
찾아가 최영희를 만났다. 그들은 따지러
갔으니만큼 살기등등해져 있었을 것 같았고
그래서 분위기가 자못 살벌해져 있었을
그러나 사실은 그렇지 않았다. 찾아가기
직전의 격앙되어 있던 분위기와는 달리
그들은 오손도손 아주 부드러운 분위기
속에서 대화를 나누었다. 그들은 파머
성명이 나오게 된 배경에 대해 질문했도
정군문제에 대해서도 앞으로 어떻게 할
것인지를 물었다. 그러나 그 중 한
가지만은 묻지 못한 것이 있었다. 그것은
연합참모본부 총장 최영희의 진퇴에 대한
것이었다. 육군 중령과 육군 중장과는
하늘과 땅만큼이나 거리가 있었다. 젊은
장교들이 아무리 정군에 대해서 열기를
뿜고 있었다 하더라도 육군 중장을 면전에
놓고 <우리는 각하의 용퇴를
건의합니다>라고 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이른바 16인 하극상 사건의 내용이란
쿠데타 주체들은 어째서 이 사건을 마치
무슨 큰 사건이나 저질렀던 것처럼
훤전했던 것인가?
그것은 그들이 모두 붙잡혀 들어가서
조사를 받는 동안 얼마간 고생을 했기
때문이었다. 이들이 군 수사기관에 연행돼
간 것은 다음날인 9월 24일이었다.
최경록이 육군 참모총장으로 승진하면서
차장으로 기용되었던 김형일(金炯一)이
젊은 장교들이 파머 성명을 트집잡아
최영희를 찾아가 따졌다는 보고를 받자
격노해 버렸던 것이다.
"군대란 위계질서가 생명인데 하급자가
상급자를 찾아가 따진다는 것은 말도 안
돼! 그들을 당장 잡아다가 구속해 버려!"
김형일은 헌병감 심흥선(沈興善)에게
정군운동을 펴려 하는 젊은 장교들의
행위를 못마땅하게 여기고 있었기
때문이다.
따지고 보면 <군기확립>이라는
측면에서는 김형일의 조치가 마땅했다.
그러나 그냥 묵살해 버렸다면 군사
쿠데타의 구실은 하나를 덜 수가 있었다.
<구속당하는 시련까지를 겪으면서도
끈질기게 정군운동을 폈던 것이나 이러한
우국충정이 받아들여지지 않기에.>
부득불 쿠데타를 일으키지 않을 수
없었다는 그럴싸한 구실 하나를 더
보태주는 결과가 되었던 것이다. 군사
쿠데타 그룹의 주체들이 <16인 하극상
사건>을 대단했던 사건인 양 훤전했던
속셈이 바로 거기에 있었던 것이다.
장면은 흡족했다. 115석이면 그럭저럭
원내 안정세력을 확보한 셈이었기
때문이었다. 지난 두 달 동안 겪어야 했던
숱한 고초도 이제는 꿈만 같은 느낌이었다.
(이제 어느 정도 원내 안정세력도 구축해
놨겠다. 일을 해야지, 그래 본격적으로 일
좀 해야겠어.)
장면은 새로운 의욕이 용솟음치는 것을
느꼈다. 이미 마련해 놓은 청사진을
하나하나 시행하기만 하면 한국의 장래는
한껏 더 밝기만 할 것 같았다. 민주당
정권이 애쓴 보람으로 한국의 장래가 어떤
모습으로 바뀌어 나갈까 하고 생각하니
그것만으로도 마냥 가슴이 뿌듯해졌다.
사건이라는 게 있었다지? 군부에서까지
동요를 일으켜서는 안 될 텐데.......)
장면이 군부문제에 대해서 깊이 걱정해
볼 겨를도 없이 국방장관 권중돈이,
"연합참모본부 총장인 최영희 장군이
사표를 냈으니 후임으로 누굴 임명했으면
좋겠습니까?" 하고 보고를 해왔다.
장면도 군부의 인물에 대해서는 백지나
다름이 없었다.
"후임자에 대해서는 장관이 알아서
하게."
아예 권중돈에게 일임해 버렸다.
최영희가 사표를 제출한 것은 10월
7일이었고, 다음날인 10월 8일 아침에
권중돈이 최영희의 후임으로는
김종오(金鍾五)를 임명하겠다고 통보해
추천했다고도 전해지고 있다.
바로 그날 사건이 터졌다. 데모대가 국회
민의원 의사당을 점거했던 기가 막힌
사건이었다. 민주주의 국가의 국회의사당은
민의를 반영하는 정치의 현장이다. 그
현장을 데모대가 점거한 것이다. 독일의
히틀러가 공산주의자들을 때려잡기 위해서
1932년 2월 27일 한밤중에 국회의사당을
불지르는 정치음모극을 연출했던 사건은
있었지만 데모대가 민의의 대면기관인
국회의사당을 점거하는 따위의 사건은 세계
의회 민주주의 사상 처음 있는 일이었다.
그 처음 있는 사건이 다른 곳도 아닌 바로
한국에서 벌어진 것이다.
데모대가 국회 민의원 의사당을 점거하게
된 원인은 서울 지방법원에서
언도하면서 검찰의 공소를 파기하고 발포
관계자인 유충열(柳忠烈)에게만 사형을
언도하고 나머니 피고인들에게 대해서는
거의가 무죄 아니면 도저히 상식으로는
이해하기 어려운 가벼운 형벌을 내렸기
때문이다.
이 6대 사건에 대한 언도공판이 있었던
것은 10월 8일이었다. 재판장은 서울
지방법원 형사 제1부 부장판사인
장준택(張俊澤)이었다.
이제 이날 6대 사건의 피고들에 대해서는
어떤 법률 조항이 적용되었으며 얼마만큼의
형량이 내려졌었는지 먼저 살펴보기로
하자(괄호 안은 검사의 구형 형량이다).
-발포(發砲)명령사건
적용. 징역 9월(사형)
조인구(趙寅九):전 치안국장, 무죄(징역
3년)
유충열:전 시경국장, 사형(사형)
곽영주:전 경무대 경찰서 경무관, 징역
3년(사형)
백남규(白南圭):전 서울시경 경비과장,
무기(사형)
-장 부통령 저격배후사건
임흥순:전 서울시장, 징역 5년(사형),
추징금 3억 2천333만 6천환
이익흥(李益興):전 내무부 장관,
무죄(사형)
김종원(金宗元):전 치안국장, 무죄(사형)
장영복(張永福):전 치안국 정보과, 징역
8월, 1년간 집행유예(사형)
중앙분실장, 징역 3년(사형)
오충환(吳忠煥):전 서울시경 사찰과장,
징역 8월, 1년간 집행유예(사형)
-정치깡패사건
신도환:전 반공청년단 단장, 무죄(징역
7년)
임화수(林和秀):전 반공예술인 단장,
징역 2년 6월, 추징금 3천3백만환(징역
10년)
유지광(柳志光):화랑동지회, 징역
5년(징역 10년)
박호(朴虎):징역 10월, 단 2년간
집행유예(징역 2년 6월)
임상억(林相億):징역 3년(징역 5년)
강승일(姜昇一):징역 2년 6월(징역 5년)
문장주(文狀柱):징역 2년(징역 5년)
신동호(申東鎬):징역 3년(징역 5년)
주요한(朱耀翰):징역 2년 6월(징역 5년)
김성종(金聲鍾):징역 2년(징역 5년)
오윤석(吳允錫):징역 10월(징역 1년 6월)
김태련(金泰鍊):징역 2년 6월(징역 5년)
홍영철(洪榮喆):징역 1년(징역 3년)
이정식(李政植):징역 2년 6월(징역 5년)
이경수(李景洙):무죄(징역 3년)
조열승(曺烈承):징역 10월, 단 2년간
집행유예(징역 5년)
김복록(金福祿):벌금 3만환(징역 1년
6월)
최창수(崔昌洙):징역 1년(징역 2년)
*백청일(白靑一):징역 단기 1년 6월,
장기 2년
*원민수(元敏洙):징역 2년
*김재운:징역 2년
*강효상(姜孝相):무죄
(* 이상 5피고에 대한 구형량은 징역
단기 3년, 장기 5년이었음.)
-민주당 전복음모사건
신언한(申彦瀚):전 법무부 차관, 징역
10월, 2년간 집행유예(징역 2년)
이태희(李台熙):징역 10월(징역 4년)
김시현(金始縣):형 면제(징역 8월)
유시태(柳時泰):형 면제(징역 8월)
-소위 제3세력 제거음모사건
이정재(李丁載):징역 10월, 단 2년간
집행유예(징역 10년)
-서울시 및 경기도 선거사범사건
최응복(崔應福):전 서울시 부시장,
공고기각(징역 2년 6월)
면소(免訴)(징역 5년)
강남희(姜南熙):전 서울시경 사찰과장,
징역 2년 6월(징역 5년)
최헌길(崔獻吉):전 경기도 지사, 징역
3년(징역 7년)
이순구(李舜九):전 경기도 내무국장,
무죄(징역 3년)
고종엽(高鍾燁):전 경기도경 사찰과장,
징역 2년(징역 5년)
고상원(高尙遠):전 서울시경 보안과장,
징역 2년(징역 3년)
이상국(李相國):전 치안국 특정과장,
공소기각(징역 3년)
이 밖에 3.15 부정선거 원흉인 최인규,
한희석, 박만원, 박용익, 정존수, 유각경,
이강학, 최성우, 최병환, 신현확, 이근직,
손창환, 김일환, 구용서, 최재유, 임철호,
이재학, 정기섭, 이중재, 김영찬, 김진형,
김영휘, 배제인 등 29명의 피고인에 대한
언도공판은 3월 25일에 개정할 예정으로
있었다. 이들 29명의 피고인에 대해서는
9월 26일의 구형공판에서 최인규, 이성우,
이강학, 최병환 등 4피고인에 대해서는
사형이, 그리고 나머지 25명의 피고인에
대해서는 10년에서 15년까지의 구형이
내려져 있었다.
6대 사건에 대한 형량이 뜻밖에 너무나
가벼운 데에 놀란 것은 다름아닌 피고
자신이었다. 발포명령사건으로 사형을
구형받았던 홍진기나 곽영주 또는 백남규
등은 사형까지는 가지 않더라도 최소한
장 부통령 저격배후사건 관련자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였다. 임흥순, 이익흥, 김종원,
장영복, 박사일, 오충한 등 이들도 10년
이상은 먹게 될 것이라고 각오하고 있었고,
최소한 무기까지는 먹여야 한다는 것이
국민 감정이었다. 그것이 홍진기의 경우
겨우 징역 9월이었고, 이익흥, 김종원의
경우는 무죄가 언도된 것이다. 장 부통령
저격배후사건의 경우 그때의
내무장관이었던 이익흥이나 치안국장이었던
김종원이 틀림없이 관련돼 있다고 국민은
심증을 굳혀 놓고 있었다. 그런데 그들에
대해서 무죄가 선고된 것이다. 가슴을
조이며 어떤 형벌을 받게 될지 몰라
조마조마해 하던 피고들이 의외로 형량이
가벼운 데에 놀라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
놀랐다. 정치하는 사람들은 과연 국민이
법원의 판결을 승복할지가 여간 걱정이
아니었다.
한데, 마산 시민들은 정치인들이 걱정할
겨를조차 주지 않았다.
<망국 역적들을 모조리 사형에 처하라!>
<특별법을 제정하라!>
마산 시민들은 일각의 여유도 지체하지
않고 언도 공판이 있었던 10월 8일 오후
4시 조금 지나 앞의 구호를 외치며 거리로
뛰쳐나왔다.
마산은 4.19 의거의 진원지였다. 4.19
의거는 마산 시민들에 의해서 항거의
불길이 당겨졌던 것이다. 그 마산 시민들이
6대 사건의 판결에 불만을 품고 7천여
명이나 되는 시민들이 뛰쳐나온 것이다.
짙었다.
서울에서도 마산 시민의 항의데모에
호응하듯 8일 <4월혁명 유족회>, <민주학생
총연맹> 등에서 판결을 도저히 묵과할 수
없다는 성명을 발표하고 특별법을 제정할
때까지 데모를 벌이겠다고 공언했다.
장면이 이제 좀 본격적으로 일을 해볼 수
있게 됐다고 좋아하며 마음을 먹고 있을
때에 생각지도 않고 있던 곳에서 방해의
요인이 툭 터졌으니 죽을 지경이 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는 즉시 내무부 장관
이상철과 법무부 장관 조재천을 불러
지시했다.
"이것 자칫 잘못했다간 아무래도 또 한
고비 홍역을 치르게 될 것 같소. 이래
가지고야 어디 무슨 일들을 할 수 있겠소?
주시오."
장면이 그런 지시를 내렸다고 해서 두
사람한테 당장에 어떤 뾰족한 수가 있을
리가 없었다. 우려하던 사태는 마침내
벌어지고야 말았다. 6대 사건 판결 내용에
불만을 품고 국회 민의원 앞에서 데모를
벌이고 있던 <4월의 부상자>들이 의사당
안으로 밀고 들어와 단상을 점거해 버린
것이다.
"당신들 민주당 신.구파 싸움이나 하라고
우리가 독재에 항거한 줄 알아?"
"당신네들같이 정쟁이나 일삼는
국회의원은 필요없어. 이런 놈의 국회는
당장 해산해 버려!"
부상자들 중에는 흰 가운 차림이 많았다.
그들은 아직도 병원에 입원해서 치료를
단상을 점거한 부상자들은 저마다 6대
사건 판결에 불만을 토뢍며 정치인마저
싸잡아 성토했으나 국회의원들로서는
그들의 분노를 가라앉힐 능력이 없었다.
그저 어안이 벙벙해져 부상자들의 노호를
멍하니 지켜보고 있을 도리밖에 없었다.
부상자들이 의사당 안으로 밀려들어오자,
잠시 피신했던 의장 곽상훈이 부상자들
앞으로 나섰다.
"여러분의 울분은 십분 이해하고도
남습니다. 6대 사건의 판결 내용에
대해서는 우리도 적잖이 놀라고 당황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혁명입법을 서둘러야
되겠다고 3부(입법, 행정, 사법)가 합의를
했으니, 조금만 시간적인 여유를 주십시오.
그러면 여러분의 뜻에 반드시 부응하도록
두 손을 모아 싹싹 빌듯이 하며
부상자들을 달랬다.
"좋아요. 혁명입법을 하지 않을 때는
결코 우리가 용서치 않을 것이오. 그리고
민주당 신.구파의 싸움 좀 집어치우란
말이오. 지금이 싸움이나 하고 있을 때요.
정신나간 놈들 같으니."
부상자들은 저마다 한 마디씩 민주당을
성토하였다.
"잘 알겠소. 싸움도 이제 그치도록
하겠소."
곽상훈은 정쟁을 지양할 것도 다짐했다.
그랬더니 한 부상자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
"안돼! 말로만의 약속이 무슨 소용이
있어. 당장 이 자리에 민주당 신.구파
대표를 불러요. 그래가지고 우리들 앞에서
곽상훈은 어쩔 수가 없었다. 민주당
신.구파 사람을 각기 한 사람씩 불러 그들
앞에서 화해의 악수를 시키고 정쟁을
지양할 것을 약속시킬 수밖에 없었다.
11. 불길한 징후
하얀 환자 가운을 걸친 사이 학생들
앞에서 민주당 신.구파 대표 각기 한
사람씩이 선생님에게 꾸중 듣는 어린이
자세를 하고 서 있었다.
그 중, 한 상이 학생이 오연한 자세로
명령을 내렸다.
"두 사람은 손을 잡고 악수를 하렷다."
마음이 내키지 않는 일이었지만 어쩔 수
없었다.
두 사람은 오른손을 내밀어 악수를 했다.
"손을 풀지 말고 그 자세대로 있어."
상이 학생은 이렇게 소리치고,
오늘 이후의 민주당 신.구파는 정쟁을
지양하고 오로지 국사에만 전념하겠는가?"
"네."
두 사람은 기어드는 목소리로 대답을
했다.
명령을 내렸던 상이 학생이 두 눈을
부릅떴다.
"좀더 큰 소리로 대답하지 못해? 의사당
안이 쩌렁 울릴 정도로 큰 소리로 대답을
하란 말야!"
"네에!"
두 사람은 기운껏 소리치듯 길게
대답했다.
"좋아, 그래야지. 두 사람은 분명히
맹세한 것이렷다?"
"네에!"
했다.
"만일, 지금 이 자리에서 맹세를 하고도
다시 또 장마 뒤의 개구리 떠들듯 시끌시끌
정쟁만 일삼고 있으면 그땐 절대로 용서
않겠어. 알겠는가?"
"네에!"
두 사람은 다시 또 기운껏 소리치며 길게
대답을 했다.
상이 학생들 위력은 대단했다. 명색이
10만 선량이라는 국회의원들이 그들 앞에서
꼼짝없이 정쟁을 지양하겠다는 맹세를
했으니, 이것이야말로 한 토막 희극이었다.
대학생이라고 하면 신분은 배움의 길에
있는 학생이지만 그러나 명색이 어엿한
지식인이다. 지식인의 대변기관인 의사당을
점거하고 국회의원을 앞에 놓고
않을 것만 같아 꺼림칙하기만 했다.
하여간에 이 사건으로 혼줄이 빠졌던
국회의원들은 그제야 번쩍 제정신이 들었던
모양이었다. 특히 민의원 법제 사법위원회
위원들은 밤을 새워가며, 민주 반역자들에
대한 형사사건 임시 처리법안을 만들었다.
그리고는 날이 밝자, 서둘러 이것을
본회의에서 상정했다.
"의원동지 여러분은 이 법안이 얼마나
화급을 요하는 법안인가를 잘 아시고 계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2.3 독회를 생략하도록
하겠습니다."
사회를 보던 국회의원 곽상훈이 아예 2.3
독회를 생략하겠다고 선언해 버렸다.
본회의에 상정된 법률을 독회도 거치지
않고 가.부를 물은 것은 아마 대한민국
상이 학생들의 의사당 점거라는
전무후무했던 사태에 민의원 의원들은
어지간히 혼줄이 빠져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룻밤 새에 만들어진 법률안이 다음날에
벌써 본회의를 통과했다는 것도 처음 있는
기록이었다. 제5대 국회(민의원)는 이렇듯
많은 기록들을 세워 놓고 있었다.
전문 5조로 되어 있는 이 법안의 주요
골자는 다음과 같다.
첫째, 민주 반역자에 대한 재판 절차를
특별입법이 이룩될 때까지 정지한다.
둘째, 그 재판에 회부된 피고들은
형사소송법 상의 구속기간 제한을 받지
않는다.
셋째, 재판 결과 석방된 자들도 즉시
구속한다.
참의원도 이 법안의 통과에 대해서
이의가 없었다. 참의원이 이 법안을
통과시킨 것은 10월 13일이었다. 참의원이
통과 즉시 이 법안을 정부로 이송하자,
장면 내각은 다음날인 10월 14일에
공포했다.
참으로 빨랐다. 민의원, 참의원, 정부
모두가 쫓기는 심정에서 법안을 입안했고
통과시켰으며 공포했다. 법률안 하나를 단
사흘 만에 입안해서 국회를 통과,
공포시켰던 일은 아마도 대한민국 헌정사상
처음 있는 일이었는지 모른다. 물론 이것은
1960년 10월까지를 한계로 해서 하는
얘기다. 군사 쿠데타 직후에는 그보다 더
빨랐던 일이 한두 번이 아니었으니까.
정부에서 이 법안을 공포하자,
무죄선고와 함께 석방했던 민주반역자들을
다시 잡아들이기 위해서였다.
한데, 상이 학생들이 의사당을 점거했을
때, 그들은 민주당 신.구파간의 정쟁을
지양시키고자 신.구파 대표를 불러세운
다음 <정쟁을 하지 않겠다>고 악수를
시키고 맹세를 시켰었다는 사실을 기억해
주기 바란다.
국회의원들이 학생들 앞에서 <서약>을
했다는 것은 이유야 어찌 됐든 국회의
위신을 스스로 격하시키는 행위였다. 10만
선량이 학생들 앞에서,
"앞으로는 정쟁을 하지 않고 오손도손
국사를 의논할 것을 서약합니다" 하고 자못
엄숙한 표정을 짓고 맹세를 해야 했던 일도
아마 세계 헌정사상 처음 있는 일이었을
그런 추태를 연출해야 했다면 부끄러움을
느꼈어야 옳았다. 설혹 신.구파 사이가 칼
끝에 피묻은 원수지간이었다 하더라도
<혁명입법>의 법률에 따라 원흉들에 대한
심판이 끝날 때까지만이라도 자중했어야
옳았다. 그래야 옳았는데, 이 신.구파
사람들은 맹세를 한 그 순간뿐이었다.
"오늘 부상학생들에 의해서 의사당이
점거당하는 사태를 빚어내게 된 것은
전적으로 장 정권의 실정에 그 원인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구파는 장 총리에
대해서 불신임안을 제안함으로써 장 총리의
실정에 대해서 책임을 물어야 합니다."
"부정선거 원흉과 부정축재자에 대한
처벌은 현행법만으로도 가능하다고 하면서
특별입법을 반대한 것이 누굽니까? 바로
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당연히 장면
내각에 대해서 오늘의 사태를 빚어내게 된
데 대한 책임을 물어야 합니다."
이런 주장을 하고 나섰던 것이
누구였던가? 양일동, 신인우(申仁雨)
등이었다. 특히 신인우는,
"장 총리에 대한 불신임안을
제안하더라도 그의 결단성 없는 인간성에
비추어 물러나려 할 리가 없으므로 차라리
우리 의원들이 물러나도록 하자"며 의원
총사퇴론을 주장하기도 했다.
그런 주장을 한 것이 상이 학생들이
의사당을 점거했던 바로 다음날이었다.
이날 아침에 소집된 구파의 확대
간부회의에서 양일동, 신인우 등은 그렇듯
강경한 주장을 하고 나섰던 것이다.
되었더라면 결과가 어찌 되었을까? 그건
물어보나마나 한 일이었다. <내가 옳으니
네가 옳으니> 하고 또 언제 끝날지도 모를
입씨름만을 벌이고 있게 되었을 것이다.
구파 의원들의 강경한 주장에 브레이크를
건 것이 유진산이었다.
"여러분은 특별입법을 하지 않았던 것이
마치 장 총리나 조 법무의 책임인 양
성토하고 있지만 그건 두 분의 책임이
아니에요. 거기에 대한 책임은 정치를 하는
우리 모두의 공동책임입니다. 웬지
아시겠소? 특별입법을 하려면 이승만
박사가 물러난 직후에 했어야 옳았다 그
말씀입니다. 그때에 우리 국회에서
과도정권에 요구해서 속히 혁명입법을
만들라고 촉구했어야 했어요. 과도정권에서
의원입법이라도 했어야 옳았어요. 그것을
우리는 하지 않지를 않았소! 법률을 만들든
뭘 만들든 다 때가 있는 법인데, 행차 뒤에
나팔 격으로 장면 정권한테 책임을 묻자고
하니 이게 도시 말이나 되는 소리요?"
뜻하지 않았던 유진산의 브레이크에
모두들 눈이 휘둥그래졌다. 장면 정권에게
정치 공세를 취할 좋은 미끼가 생겼는데
무슨 놈의 뚱딴지 같은 소리를 하느냐 하고
힐난하는 표정들이었다.
"그럼, 총무께선 뭘 어떻게 하겠다는
거요?"
양일동이 물었다.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하느냐 하는 것은
이미 명백하지 않아요? 혁명입법에
공동노력을 기울여야 해요. 해서 4.19
말이오."
유진산의 태도는 단호했다. 그에게는
누르는 힘이 있었다. 장면 정권 타도에
호기도래라며 가슴이 설레어 설치던
친구들은 유진산의 단호한 태도에 그만
머쓱해지며 쑥 들어가고 말았다.
무소속의 모임인 민정구락부에서도 장면
정권에 대해서 정치적 공세를 취하자고
의견을 모았으나, 구파가 빼어 들려고 하던
칼을 미처 빼어 보지도 않고 내던져버리고
말자 그들도 어쩔 수 없이 주저않고 말
수밖에 없었다.
반민주 행위자에 대한 재판을
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부터가 벌써
<반민주 행위>였다.
홍진기 등 49명의 민주 반역자에 대한
10월 8일의 판결이 상식으로는 납득하기
어려운 형량이기는 했다.
3.15 선거 당시 법무부 장관에 내무부
장관을 지낸 홍진기의 경우만 보더라도
그에게 씌워진 죄목은 살인교사, 무고교사,
선거법 위반, 허위 공문서 작성과 동 행사
등 무려 네 가지나 되었다. 이 네 가지의
죄목을 종합하면 <사형감>이라 해서
검찰에서도 사형을 구형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런 죄목으로 구속 기소되었던
홍진기에게 내려진 선고는 <징역 9월에
처한다>였다.
"도대체 재판을 어떻게 했기에 징역
그래 가지고 무슨 놈의 혁명재판이라는
거야?"
세상이 온통 비분강개해져 재판장
장준택을 성토하고 매도했지만 재판은
어디까지나 적법했다.
재판장인 장준택도,
"아무리 혁명 정신에 입각하더라도
현행법의 테두리 안에서 무죄를 유죄로
판단할 수는 없었다"고 답변했다.
세상의 비난에 대해서 항의했지만
현행법의 테두리 안에서 그 이상의 형법을
줄 수 없다고 하는 이상에는 논란의 여지가
없는 것이다.
엄격히 책임을 따져야 한다면 그것은
유진산의 말과 같이 <정치인 모두의
책임>이었다.
먼저 이승만의 하야와 함께 국회를
해산하고 비상 입법회의부터 구성했어야
옳았다. 학생을 현실 정치 속으로
끌어들이는 것이 옳으냐 그르냐 하는
문제는 차치하고 4.19 의거의 주체가
학생들이었던 만큼 전체 학생의 의견을
수렴하기 위해서라도 학생대표를 포함한
비상 입법회의를 구성해서 <혁명과업
수행의 기틀>을 마련했던들 학생들이
의사당을 점거하는 것과 같은 불행한
사태는 빚지 않았을 것이다.
그건 그렇고, 판결까지 내렸던 재판을
무효화시키고 혁명입법을 해서 <민주
반역자>에 대한 재판을 다시 하려면
헌법부터 고치는 작업을 해야만 했다.
<일사부재리의 원칙>이 있는 이상, 한번
없었기 때문이다.
헌법을 고치자면 제2공화국 헌법 78조에
의거해서 민의원 의원 3분의 1 이상의
찬성을 얻으면 제안할 수가 있었다. 이때의
민의원 의원수는 233명이었으니까, 3분의
1은 78명이었다.
헌법 개정안은 민의원 법사위원회에서
마련했다. 이 개정안 하나 마련하는 데도
이러쿵 저러쿵 여러 말이 많았으나, 10월
17일 마침내 민의원 법사위원장
윤형남(尹亨南)의 117인의 찬성 서명을
받아 곧 발의되어 그날로 정부에 이송
공고토록 했다. 개정안의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이 헌법 시행 당시의 국회는 단기 4293년
관련하여 부정 행위를 한 자와 그 부정
행위에 항의하는 국민에 대하여 살상, 기타
부정 행위를 한 자를 처벌 또는 단기
4293년 4월 26일 이전에 특정지위에 있음을
이용하여 현저한 반민주 행위를 한 자의
공민권을 제한하기 위한 특별법을 제정할
수 있으며, 단기 4293년 4월 26일 이전에
지위 또는 권력을 이용하여 부정한
방법으로 재산을 축적한 자에 대한 행정상
또는 형사상의 처리를 하기 위하여
특별법을 제정할 수 있다. 전 2항의 규정에
의한 특별법은 이를 제정한 후 다시
개정하지 못한다. 이 헌법은 공포한
날로부터 시행한다.
한데, 바로 이날 구파 안에서
다시 한번 들썩해졌다.
어떻게 해서 구파 안에서 자중지란이
일어나게 됐느냐 하면 유옥우가 어떤
사석에서 정치인에게는 치명적이 될 수
있는 금품수수설을 말함으로써 이 말이
퍼져나갔기 때문이다.
유옥우가 뭐라고 했는가 하면,
"합작파에서 신파한테 1천만환씩이나
돈을 받아 먹었다더군. 그뿐인 줄 아는가,
신파에선 합작파 한 사람당 2백 명씩
취직을 책임지고 알선해 주겠다는 약속을
받았다는 거야."
이렇게 말했던 것이다.
이 말이 소문이 되어 퍼져나가지 않을
리가 없었다. 모두가 돈에 궁색해져 있던
참이라 구파 잔류파 의원들은 합작파가
아니라 2백 명씩이나 취직 알선을
확약했다고 하니 군침 흐르는 얘기가 아닐
수 없었다. 잠재실업자까지 합해서
3백만이나 되는 실업자가 우글거리고 있을
때였다. 국회의원으로 당선될 수 있었던
사람들은 취직을 부탁하는 선거구민으로
해서 여간 골치를 썩히고 있었던 것이
아니었다. 2백 명을 취직시켜 줄 수 있다면
취직을 부탁하는 선거구민 모두의 소원을
풀어주고도 남는 숫자였다.
"돈도 궁하고 선거구민에 시달리느라
죽을 지경인데 나두 합작파에 합류해
버릴까?"
국회의원이기는 하나 변변한 당직 하나
차지하지 못하고 있는 별볼일 없는 구파
인물 가운데에는 이런 생각을 갖는
합작파란 무엇인가? 그것은 구파가
신당을 발기하자 민주당에 남기를 희망했던
사람들을 말한다. 이들이 민주당에 남기를
희망하고 있으면서도 혹시 변절자라는
오해를 받게 되지나 않을까 해서 결단을
내리지 못하고 있을 때 유진산이,
"정국의 안정을 위해서 민주당 정권에
협력하는 것은 변절이나 배신이 아니다.
누구도 그들의 민주당 입당을 제재해서는
안 된다"고 말했다.
이 한 마디에 용기를 얻어 그들은 구파의
신당에 가담하지를 않고 민주당에 남기로
작정하고 있었던 것이다.
당초 이들은 합작파가 아니라 분당
반대자들이었다. 그 수가 자그만치 구파의
절반 가량이나 되는 32명이었다. 이들은,
갈라지는 것을 반대했었다. 그러다가
구파가 기어이 갈라서겠다고 별도의
교섭단체로서 등록을 하는가 하면 신당
발기를 착수하자, 유진산의 고무적(?)인
말에 용기를 얻어 민주당에 남기로
작심하고 있었던 것이다. 구파가 신당을
발기할 즈음에는 이들의 수는 32명에서
25명으로 줄어들어 있었다. 세상에서는
이들 25명을 합작파라 부르고 있었다.
하여간에 유옥우의 말에 발끈해진
민관식은 개헌안이 발의된 10월 17일, 이날
국회 본회의에서 정식으로 <합작파
금품수수설>을 문제삼았다.
"나는 오늘 의원직 사퇴서를 써서 곽상훈
의장에게 맡겼소."
민관식은 단상에 서자 먼저 이렇게
곽상훈에게 갖다준 것은 사실이었다.
"나는 왜 의원직 사퇴서를 써서 의장에게
맡겼는가? 유옥우 의원은 소위 세상에서
말하는 합작파가 신파로부터 1천만환씩
돈을 받았고 또 2백 명 한도로 취직 알선
보장을 받았다고 했다기에 이 문제는 내
개인의 명예와도 관계가 되기 때문에 이미
의원직 사퇴서를 써서 의장에게 맡겨 놓은
것이오. 만일 내가 유옥우 의원의 말처럼
돈을 받아먹은 일이 있다면 나는 깨끗이
물러나겠소. 조사 결과 유 의원이 허위에
낭설을 퍼뜨렸다면 유 의원이 의원직을
사퇴해야 마땅할 것이오. 그러니
법사위원회에서 이 문제를 가려주도록
하시오."
민관식이 이렇게 금품수수설을 문제삼고
등도 가세하고 나섰다. 유옥우에게 해명을
요구하는 박해충의 발언 내용은 더욱더
강경했다.
유옥우가 해명에 나섰다.
"내 말은 근거 없는 조작이 아니오. 나는
합작파로 알려져 있는 모 의원한테서
들었어요. 이 문제를 법사위에서 다루게
되면 그 자리에서 제시할 것도 있고 요구할
것도 있어요. 그리고 나는 특정인을
지적해서 말한 일은 없었소. 그건 지상에서
민 의원을 들먹였지, 내가 민 의원 이름을
들먹인 일은 없어요. 지상에서 민 의원
이름을 들먹이게 된 것은 민 의원의 요즘
행동이 수상했기 때문에 그랬을 게 아니오.
그러므로 그 책임은 민 의원 스스로가 질
일이지, 내가 질 일이 아니오." 하고
신.구파 가릴 것 없이 이 문제는
법사위에 회부해서 조사하라고 아우성을
쳤다.
보다 못해 유진산이 등단했다.
"우리가 상이 학생들 앞에서 신.구파
싸움을 하지 않겠다고 서약한 것이 언제요?
불과 엿새밖에 안 되지 않았소? 그런데도
여러분은 벌써 그때의 수치심을 잊었단
말이오? 금품수수설은 이쯤에서 덮어
둡시다. 돈을 받았든 안 받았든 이런 것을
따지고 조사한다고 하는 것은 정치하는
우리 모두의 수치란 말입니다. 누워서
침뱉기나 다름없는 말이외다" 하고 법사위
회부를 완강히 반대했다.
그러나 중과부적이었다. 금품수수설은
법사위에 회부해서 조사하기로 하고 구파
이 금품수수설은 뜻하지 않은 후유증을
낳았다. 그때까지는 그래도, 그래도 하고
주저하고 있던 구파동지회 소속 의원과
무소속 가운데서 이제는 내놓고 민주당
교섭단체에 등록하는 의원들이 늘어났기
때문이었다. 이 덕분에 1960년 10월 22일
현재로 민주당은 125석이라는 과반수를
훨씬 넘는 의석수를 확보할 수 있었고
반면에 구파동지회는 62석으로 줄어들엇다.
민정구락부 30석에 순무소속 10석을 합해도
야당은 108석밖에 안 되었기 때문에 이제
장면 내각은 한시름 푸욱 놓고 정치를
해나갈 수가 있게 되었다.
4.19 이후의 정국을 이런 말로밖에는
달리 표현할 길이 없다. 정국이 널 뛰듯
하니 사회도 덩달아서 널 뛰듯 했다.
그러던 정국이 점차 안정되어 가자,
거기에 따라서 사회도 진정되어 갔다.
(안 되겠어. 서둘러야지.)
사회가 진정되고 점차 틀을 잡아 나가기
시작하자, 이것을 초조한 마음으로
지켜보고 있는 사나이가 있었다. 그는
다름아닌 육군 소장 박정희였다. 이미 군사
쿠데타에 대한 계획을 세우고 조직에
착수하고 있던 박정희로서는 사회가
안정된다는 것은 그의 목적을 위해서는
차질을 가져올 수도 있는 일이었다. 더구나
그가 요사이 마음이 더욱 초조해 있는 데는
또 하나의 이유가 있었다.
수뇌부에서 국군 수뇌부에 끈질기게 압력을
넣고 있다는 것을 그는 알고 있었다.
미군 수뇌부에서는 젊은 장교들을
선동해서 정군운동을 일으키도록 한
배후인물이 박정희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처음부터 정군에 반대를 하고 있던 미군
수뇌부에서는 배후인물만 제거해 버리면
정군운동은 제풀에 가라앉을 수 있다는
판단에서 박정희의 예편을 강력히 요구하고
있었던 것이다.
육군 참모총장 최경록이 대가 약한
인물이었다면 미군 수뇌부의 압력에 쉬
손을 들어 버렸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는
그렇게 호락호락한 인물이 아니었다.
"무슨 소릴 하고 있는 거야? 한국군의
총책임자는 나야. 당신들이 우릴 좀
대추 놓아라 할 수 있어? 그 따위 간섭은
일체 받아들일 수 없어!"
최경록의 뚝심은 대단했다. 미군
수뇌부의 압력을 일언지하에 거절해
버렸다.
"우리는 간섭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조언을 하고 있는 것이다. 한국군 내부에서
정군이다 뭐다 해가지고 압력이 일게 되면
사기에도 영향을 미치는 일, 우방 국민이
혼돈 속으로 말려드는 것을 보고만 있을
수는 없지 않은가?"
미군 수뇌부의 압력은 집요했다.
"염려 말아. 우리한테는 우리 스스로
해결할 수 있는 슬기가 있으니."
미군 수뇌부의 압력이 아무리 집요해도
최경록은 눈썹 한번 까딱하지를 않았다.
최경록과 미군 수뇌부의 관계가 원만할
리가 없었다.
박정희가 옷을 벗지 않고 여전히 현역에
머물러 있을 수 있었던 것은 전적으로
최경록의 두둑한 뱃심 덕분이었다. 1960년
11월 당시 박정희의 보직은 육군본부 작전
참모부장이었다. 그것은 요직 중의
요직이다. 군사 쿠데타를 계획해 놓고 있는
박정희로서는 어떤 일이 있어도 이
자리만은 고수하고 있어야만 했다.
그래야만 쿠데타군의 작전이 용이해질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한데, 박정희는 최경록이 육군
참모총장직에 오래 머물러 있지 못할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미군
수뇌부와의 관계가 원만치 못한 데다가 이
나돌고 있었기 때문이다.
"후임에는 이한림(李翰林)이
유력하다면서?"
임명권자의 입에서는 아직 아무런 언급도
없었으나 시정에는 벌써 후임 인물의
이름이 구체적으로 나돌고 있었다.
(서둘러야겠어. 총장이 바뀌기라도 하는
날엔.......)
박정희는 미군 수뇌부와 죽이 맞는 자가
육군 참모총장에 기용되게 되는 날엔
자기의 예편은 지정사실로 받아들이지
않으면 안 될 형편이었다. 그만큼 그는
미군 수뇌부의 눈밖에 있었던 것이다.
마음이 더없이 초조해져 있는 박정희의
마음을 더욱 초조하게 만드는 사건이
벌어졌다. 그것은 국내에서 벌어진 사건이
사건이었다. 1960년 11월 11일, 월남
공화국의 공정대가 쿠데타를 일으켰다가
실패한 것이다.
처음 월남에서 쿠데타가 일어났다는
소식에 접하자, 박정희는 꽤나 가슴이 뛰는
것을 느꼈었다.
(그놈의 고딘 디 엠 정권도 썩을 대로
썩어 있다더기 드디어 군인이 궐기했군.)
그는 그 귀추가 어찌될 것인지 가슴을
조이며 주목했었다. 그랬는데 그놈의
쿠데타는 그만 하루 반도 채 넘기지 못해서
정부군에 백기를 들고 만 것이다.
(실패의 원인이 뭐지? 썩은 정부를
뒤집어 엎겠다는데 어째서 여타의 부대는
쿠데타에 호응을 하지 않은 거야?)
박정희는 마음이 침통해지기조차 했었다.
못했던 데 있어.)
이렇게 결론을 내린 박정희는 월남
공화국의 쿠데타가 완전히 진압된 11월
16일 밤, 장견순, 한웅진 두 사람을 그의
자택으로 불렀다. 두 사람 모두 육군 준장,
이미 박정희에게 포섭되어 있던
인물들이었다.
이날 밤, 그가 두 사람을 부른 이유는
혹시 월남 쿠데타 실패에 자극을 받고
마음이 흔들리고 있지나 않을까 해서였다.
"두 분, 월남 쿠데타 실패의 원인이 어디
있다고 보시오?"
박정희가 물었다.
"확실한 것은 모르겠습니다만 조직이
너무 미약했던 게 아닙니까? 공정대
단독으로 쿠데타를 일으켰던 모양인데 그래
전군적인 지지가 있어야 성공을 기약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한웅진이 월남 쿠데타를
개괄적으로 본 평가였다.
"옳은 말씀이오. 쿠데타의 성공은 역시
전군적인 지지가 있어야 해요."
박정희는 한웅진의 말에 공감을
표시하며,
"한데, 그 조직의 일환으로 우리의
계획을 좀더 확대시켜 나가야겠는데 두 분
장군, CIC 대장직이나 인근 9사단장직을
맡도록 하는 방법이 없을는지
모르겠습니다."
육군 방첩대장직의 TO는 육군
준장이었다. 두 사람 모두 육군
준장이었으나, 그 중 누구 하나가
조직 확대가 용이할 것 같았다. 그뿐만
아니라 만일의 경우,군사 쿠데타에 관한
정보가 누설되는 경우가 있다고 하더라도
그 정보를 정권 담당자의 귀에 들어가기
전에 차단시킬 수가 있었다. 또 거사의
경우, 정권에 대해서 충성을 다짐하고 있는
지휘관은 그 어떤 방법으로든 지휘권을
박탈해서 쿠데타군에 대항하지 못하도록 할
수 있는 일석삼조의 효과를 기대할 수가
있었다.
서울 근교 모 지구에 주둔해 있는
9사단의 경우도 그러했다. 이 무렵,
박정희는 아직 쿠데타에 동원할 병력을
확보해 놓고 있지 못했다. 그래서 그
병력으로 눈독을 들이고 있었던 것이
9사단이었다. 서울에서 가장 가까운 곳에
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어떻소, 두 분 장군, 이 두 개의 보직을
차지하기 위해서 한번 뛰어 보겠소?"
박정희는 두 사람의 의향을 타진했다.
<좋다, 뛰어 보겠다>고 할 것 같으면 두
사람의 마음은 확고부동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박정희는 이렇게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좋습니다. 해보죠."
두 사람은 두말 않고 응락을 했다. 그
말을 듣자, 박정희는 속으로 후유 하고
한숨을 내쉬었다. 두 사람의 마음이 추호도
흔들리지 않고 있다는 것을 확인할 수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한국의 앞날은 험난하기만 했다. 자유
민주주의의 이름으로 만주주의가 광란의
춤을 추고 있을 때, 멀리 태평양 건너
한국에 자유 민주주의의 사상을 주입시키고
그 뿌리를 내리게 도와주었던 미국에서는
한국에서 4.19 사태가 벌어지고 있을 때,
벌써 대통령 선거전의 막은 올라 있었고,
치열한 접전이 벌어진 끝에 마침내 43세의
민주당 출신 후보인 존 에프 케네디가 현직
부통령인 공화당 대통령 후보 리처드
닉슨을 누르고 당당히 대통령으로
당선되었다.
"참 멋있다, 멋있어!"
미국 대통령 선거전을 멀리 바다
건너에서 바라보고 있기만 해도 유쾌하기만
했다. 그 나라에서는 도대체가 부정선거란
조그마한 선거부정 사건이라도 들려올 것
같았으나 유감(?)스럽게도 그런 소식은
귀를 씻고 들을래야 들을 길이 없었다.
"멋있다 멋있어! 과연 자유 민주주의
나라라고!"
찬사가 절로 터져 나왔다. 어떤 기가
막힐 만한 축제에 참가했다고 해도 이렇게
유쾌한 마음은 경험해 보지 못할 것
같았다.
"한국도 배워야지, 배워서 남 주나?
배워야 돼. 미국을 배워야 한다!"
"암 배워야지, 배워야 하고말고.
미국에서는 가톨릭 신자가 대통령에
당선되기란 하늘의 별 따기보다도 어렵대.
그런 정치 의식이 팽배한 나라에서 가톨릭
신자가 대통령에 취임했다는 것은 무엇을
한다고!"
젊은이들은 마냥 미국을 부러워했다.
그러나 그들은 부러워하는 것으로 그치지는
않았다.
(우리들의 세대에는 반드시 미국을
능가하는 자유 민주주의 국가로서의
발전상을 보여주고 말 테야) 하고 마음에
다짐을 주고 있었다.
나이 많은 노인들은,
"거 미국의 대통령 당선자가 천주교
신자라면서? 그렇다면 장면 국무총리도
천주교 신자이니만큼 한.미간의 유대가 잘
이루어지겠는걸" 하면서 케네디의 대통령
당선을 진심으로 축하했다.
그건 그렇고, 1960년 11월 한 달은 4.19
의거를 혁명으로 승화시킨 달이기도 했다.
달에 학생들이 건의한 4.19 의거를
혁명으로 승화시킬 수 있었다는 것은 자못
뜻깊은 일이라고 할 수 있었다.
이달 23일에 개헌안이 민의원을
통과했다. 11월 23일은 <신의주 학생사건>
기념일이기도 했다. 이날 개헌안이
통과되었다는 것은 우연이기는 했지만
그래도 학생들한테는 남다른 감회를
안겨주기에 족했다.
이 개헌안에 따라 마련되었던 <부정선거
관련자 처벌법안>과 <특별재판소>,
<특별검찰부> 조직법안이 민의원을 통과한
것은 11월 30일이었다.
이제 3.15 부정선거 관련자를 처벌할
법률도 마련되었고 또 그놈들의 죄를 다룰
특별검찰부와 특별재판소도 마련되었으니
일이었다.
4.19 의거를 혁명으로 승화시킨 이런
일련의 작업이 벌어지고 있을 때 물론
조그마한 말썽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3.15
부정 선거의 원흉의 하나인 장경근이
병보석으로 서울대학 병원에 입원해 있다가
일본으로 도망을 친 사건이 벌어졌다.
1960년 11월 12일의 일이었다. 그는 아내와
더불어 부산으로 내려가 밀선을 타고
일본으로 도망쳐 버렸던 것이다.
구파로서는 얼씨구나 좋다고 춤을 추며
좋아할 만큼의 일이 생긴 셈이었다. 장면
정권에 대해서 정치 공세를 펼 구실이
생겼으니 말이다.
"도대체 장면 정권은 부정선거 원흉 하나
똑똑히 감시하고 있지 못할 만큼 무능한
정권한테 어떻게 나라를 맡길 수가 있어?
당장 정권을 내놓고 물러가 버려!"
구파는 당장 요절이라도 내버리고 말려는
듯이 아우성을 쳤다.
"물러가라, 물러가라!"
도무지 귀청이 따가울 정도였다.
참 해도 너무했다. 경찰관 열 명이 도둑
하나를 막지 못한다는 속담도 있다. 도망을
칠려고 치밀한 계획을 세워 놓고
덤비는데야 경찰인들 무슨 뾰족한 수가
있겠는가?
만일 구파가 정권을 잡았다 가정하고
장경근 도피사건을 한번 생각해 보라.
"쯧쯧....... 이거 우리 구파 정권이 큰
실수를 저질렀는걸. 이건 우리 구파 정권의
무능을 표징하는 거야. 그러므로 우리
구파는 이렇게 나왔을까?
천만의 말씀이다. 정권을 내놓으려
하다니, 상상조차 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그랬을 그들이 어째서 장경근 도피사건을
정치문제화 해가지고 물고 늘어졌던가?
그것은 <신파 정권>이었기 때문이었다.
여형약제(如兄若弟), 피를 나눈 한 형제
사이처럼 오손도손한 사이는 못 되었다
하더라도 그래도 민주당이라는 한 울타리
속에서 5년을 같이 정치를 해 나왔으면
조금은 이해심을 발휘할 법도 했다.
그런데도 구파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새발의 피만큼의 거리만 생겨도 물고
늘어지려고만 들었다. 아아, 하늘이여!
(그래 좋다, 내가 물러나지.)
내무부 장관 현석호는 스스로 정치적
미련 없이 장관 감투를 벗어 던져 버렸다.
장면은 현석호의 퇴진이 못내 아쉬웠다.
"장관이 책임질 것까지야 없지 않소?
장경근의 감시를 맡았던 경찰을 문책하면
될 일인데."
그의 퇴진을 만류했다.
"아니올시다. 구파에서 정치적인 책임을
물으니 정치적 책임을 지도록 합시다. 우리
신파 정권은 어떤 문제에 대해서도 깨끗이
책임을 질 줄 안다는 것을 저들 구파나
국민한테 보여줘야 합니다."
현석호는 장관 감투 따위에는 조금도
미련이 없는 것 같았다.
"우리 신파 동지들이 모두 현 의원
같다면 얼마나 정치를 해나가기가
용이하겠소? 한집안 식구이면서도 감투를
없는 말 있는 말 다 쏟아 놓으며 자해
행위를 하려 드니......."
장면은 크게 한숨을 쉬며 현석호의
사표를 수리했다. 그의 후임에는 무임소
장관인 신현돈을 앉혔다. 불과 4개월
사이에 장관이 네 번이나 바뀌었다.
내각책임제 정치제도하에서는 내무부 장관
자리는 마가 끼어 있는 감투라고 할 수밖에
없었다.
이제 장경근 도피사건에 대해서는 정치적
책임을 졌으니 한동안은 구파한테 시달림을
받지 않아도 되겠거니 하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또 문제가 터졌다.
그 문제란 다름이 아니었다.
<국군통수권은 대통령과 국무총리 중
어느 쪽에 있느냐?> 하는 문제였다.
문제였다. 헌법상으로는 대통령에게 주어져
있는 것 같았으나 내각책임제하에서는
정치적인 책임은 국무총리한테 있으니
실질적인 통수권은 국무총리한테 있는 것
같기도 해서 해석이 저마다 구구했다.
그래서 이 문제에 명확한 선을 그어두자
해서 거론한 것이 민정구락부 소속의
이찬우였다. 그는 11월 26일의 민의원
예산결산위원회에서 국방부 예산을
심의하는 자리에서 국방부 장관
권중돈에게,
"헌법에는 국군통수권이 대통령에게 있는
것으로 명문화되어 있는데 내각책임제
정치제도한에서는 정치적 책임이
국무총리에 있으니만큼 대통령한테
통수권이 주어져 있다는 것은 모순이
여기에 대해서 권중돈은,
"내각책임제하에서는 실질적인
국군통수권은 국무총리에게 있다는 소신
밑에 지금 정부에서 국군 조직법 개정안을
준비중에 있다" 하고 답변했다.
그러자 구파 소속 의원들이 벌떼처럼
들고 일어났다.
"그게 무슨 당치 않은 소리요. 권 장관."
자리에서 벌떡 일어선 이민우(李敏雨)는
미처 발언권도 얻기 전에 반박을
늘어놓았다.
"내각책임제 정치제도이기에 오히려 정당
소속을 갖지 않는 대통령에게 통수권을
귀속시키는 것이 헌법상의 규정으로나
국군의 엄정중립을 위해서나 타당하단
말입니다."
벌어졌다. 구파는 통수권이 대통령에게
있다고 입에 게거품을 물었고, 신파는 또
신파대로 국무총리에게 통수권이 있다고
악을 썼다. 양측이 모두 자기편에게
유리하도록 논리를 폈다. 그러니 이
자리에서는 어떤 결론이 내려질 수가
없었다.
그러자 구파에서는,
"통수권 문제에 대해서 명확한 결론이
내려지기 전에는 국방부 예산은 심의할 수
없다" 하고 전가의 보도를 뽑아들었다.
그렇다고 신파가 수그러졌느냐 하면 결코
그렇지가 않았다.
"좋아, 예산 심의권을 방패삼아 횡포를
부려 보려거든 얼마든지 부려 보아라. 우린
본회의에서 원의로 여기에 대한 결론을
국군통수권 문제는 애매하다면 애매하다
할 수 있었다. 헌법상 국군통수권은
대통령에게 있다고 명문화되어 있는 것만은
사실이었다. 그렇다면 어째서 대통령
윤보선은 군에 대한 인사권을 행사하려고
하지 않았던가? 장면이 최영희를
연합참모본부 총장으로 전보하고 그의
후임으로 최경록을 육군 참모총장에 기용할
때 대통령 윤보선은 일체 쓰다달다 말이
없었다.
그것은 곧 <헌법상 국군통수권은 곧
대통령에게 주어져 있으나 실질적인
권한만은 국무총리에게 있다>고 해석하고
있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국무회의 석상에서 예산결산위원회에서
있었던 설전 내용을 국방장관 권중돈한테서
소리>라고 구파의 주장을 일축하고
통수권은 엄연히 국무총리에게 있는
것이라고 하며 이렇게 말했다.
"헌법상 대통령에게 통수권이 주어져
있다고 하나 대통령에게는 계엄령
선포거부권만이 주어져 있을 뿐이고 그
밖에는 의례적인 통수권만이 주어져 있을
뿐이에요. 군의 인사, 작전 등
행정면에서는 총리에게 통수권잉 있다는
것을 각료 여러분도 명심해 두기를
바라겠소."
장면은 국무회의에서 했던 말과 똑같은
말을 11월 30일의 기자회견석상에서 되풀이
강조했다. 대통령 윤보선을 의식해서였다.
(만일 내 견해가 틀렸다면 어디 반박해
보라) 해서였다.
반응도 없었다. 통수권이 주어져 있는
대통령이 침묵을 지키고 있는데야 구파에서
뭐라 또다기 이의를 제기할 수 있겠는가.
결국 통수권 문제는 이쯤에서 흐지부지
되고 말았다. 구파 출신 대통령이라고 해서
어떻게 해서든 실질적인 권한을 대통령에게
안겨주고자 안간힘을 쓰던 구파만이 스타일
구기는 꼴이 되고 말았었다.
저잎가 안정되니,4.19 이래 집요하게
대남 선전공세를 펴고 있는 북한
괴뢰정권에 대해서 <굶주리는 북한 동포의
구휼을 위해서 쌀을 보내줄 용의가 있다>고
할 수 있게도 되었다.
4.19 직후부터 김일성 도당은 <남북
연방안>이라는 그럴싸한 제의를 하며
끈질기게 대남 선전공세를 펴오고 있었다.
생리가 어떻다는 것을 뼈저리게 체험한
것이 대한민국 국민들인데 그들의 대남
선전공세에 귀를 기울일 사람이 있을 리가
없었다. 그런 중에 정치가 다소 안정되고
제 궤도를 달리기 시작하자 대한민국에서는
우선 굶주리는 북한 동포의 딱한 정경을
생각하면서 쌀 원조를 제의하고 나섰던
것이다. 여기에 대해서 북한 괴뢰당에서는
일언반구의 반응도 보이지 않았음은
물론이다.
누가 말했던가?
<한국을 망치는 자는 바로 한국인
자신이다>라고.
사회적 혼란으로 말미암아 이제는 진이
빠져 기진맥진한 탓이었을까? 정치도
사회도 안정이 되어 점차 틀을 잡아나가고
있었다면 모두가 새로운 각오와 열의로써
새나라 건설에 동참해야 옳았다. 그런데도
국민은 어느 곳에서도 그런 열의를 보이지
않았다.
무엇을 가지고 이런 말을 하는가 하면
바로 12월 12일에 실시된 지방 의회의원,
지방장관 선거결과를 두고 하는 말이다.
얼마나 갈망하던 자유 민주주의였던가.
이 자유 민주주의의 쟁취를 위해서 4.19
의거에 그렇듯 많은 햐생들이 피를 흘렸던
게 아닌가?
완전한 자유 민주주의는 지방자치제를
실시함으로써 비로소 제 모습을 갖추게
비롯해서 각도 의회의원 선거가 실시된
것은 12월 12일이었다. 그리고 19일에는
시.읍.면 의회의원 선거, 26일에는
시.읍.면장 선거, 29일에는 서울특별시장을
비롯한 각도의 지사 선거가 잇달아
실시되었다. 지방장관까지도 내 손으로
뽑는 이 선거는 대한민국 헌정사상 처음
있는 일이었다. 그러니 얼마나 경사스러운
일인가. 마땅히 덩실덩실 춤이라도 추며
축제 분위기를 이루었어야 옳았다. 그래야
4.19 의거에 피를 흘린 의사들이 빙긋
미소를 지으며 안심하고 영면할 수 있는
일이었다.
그런데 이것 참 또 기가 막히다는
표현밖에 달리 적당한 말을 찾기가 어렵다.
축제는 고사하고 도시 관심조차 기울이지
경우가 더욱 심했다. 지방의회의원 선거의
투표에 참가한 사람은 지방의 경우
65퍼센트에 이르고 있었는데 서울의 경우는
45퍼선트에 불과했던 것이다. 열 사람
가운데 다섯 사람 반이 무관심했다는 것은
한국의 자유 민주주의 정착을 위해서
문제가 된다고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야아 이놈들아, 우리가 너희놈들을
위해서 목숨까지 바쳤거늘, 이놈들아 그래
물을 주고 비료를 주어 가꿀 생각은 않고
무관심으로 있어? 이런 죽일 놈들 같으니,
한국을 망치는 놈들은 바로 너희들
한국놈들 자신이라는 것을 알렷다.> 4.19
영령들은 이렇게 원성을 터뜨리며 통곡을
했을 게 틀림없는 일이었다.
그건 그렇고, 지방의회의원 선거가
군사법정에서는 세칭 <16인 하극상 사건>의
피고들에 대한 재판이 열렸다. 사건이 사건
같지도 않았고 또 선거가 있어서 그런지
일반의 관심을 끌지는 못했다. 하여간에
16명의 피고 가운데서 대령
김동복(金東複)을 제외한 나머지 15명에
대해서 무죄판정이 난 것이 이렇듯 정국이
안정되고 사회질서가 점차 제 자리를
잡아가고 있을 때였다. 그러니까 정확히
1960년 12월 12일이었다.
이들 16명의 사건을 처음에는 하극상
사건 어쩌고 하며 떠들어댔으나, 심리가
계속되는 동안 어느덧 죄명도 <부대 내
무질서 사건>으로 죄명이 바뀌어 불리고
있었다. 태산명동에서 서일필이라더니 꼭
그 꼴이었다. 이들에 대한 군재는 무려
인물이었던 최영희가 증언에서,
"그들은 항의를 하러 온 것이 아니라
파머 성명의 배경을 들으러 왔기 때문에
군의 선후배로서 대화를 나눈 데
불과했다"고 증언함으로써 무죄판정을 받고
풀려나온 것이다.
한데 미리 밝혀두지만, 이 사건은 해를
넘긴 다음해에 다시 <사건>으로
재연되었다. 16명 중 오직 한 사람 <상관
불경죄>로 유죄판결을 받았던 김동복이
혼자만 유죄선고를 받은 것이 좀 억울했던
모양이었다. 그는 해를 넘긴 다음해인
1961년 1월 30일 재심을 청구하는 탄원서를
관계 요로에 제출했다.
"첫째, 16명 하극상 사건의 주모자는
김종필, 석정선 중령인데 본인은 억울하게
인물은 군 장성이 분명함에도 불구하고
검찰은 편파적으로 관련 장성에 대한
조사를 일체 하지를 않았으니 이럴 수가
있느냐?"
그러니 재심을 하도록 해달라 하는 것이
김동복의 탄원서의 골자였다.
이 탄원서에 따라 군 수사기관에서는
즉시 재수사를 개시했다. 그 결과 김종필,
석정선 두 사람은 또다시 구속되었다.
그러나 아무리 재수사를 해봐야 두 중령은
물론이고 여타의 장교들에 대해서도 사건이
될 만한 혐의 사실을 발견하기가 어려웠다.
"말썽을 부리려 했던 점은 인정됩니다만
그렇다고 해서 형벌을 가할 만한 죄목을
찾기는 어렵습니다."
이런 보고를 받자 국방장관 현석호는,
예편시켜 버려" 했다.
김종필, 석정선이 구속에서 패제되어
예편을 한 것은 1961년 2월 8일이었다.
10만 감군(減軍).
이것이 민주당의 선거공약이었다는 것은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다. 이 감군문제를
놓고 장면 정권은 주한 미군 수뇌부와
논란이 많았다.
감군 반대.
이것이 주한 미군 수뇌부의 한결같은
지론이었다. 그러나 양보다는 질에 무게를
두고 징병주의를 지향하고 있던 장면
정권이 주한 미군과 끈질긴 협의를 거친
1960년도 저물어가는 12월이었다.
이 합의에 따라 장면 정권은 12월
27일까지 감군을 완료했다.
당초 육군본부의 중령급 젊은 장교들은
정군에 대해서 집요하리만큼 물고
늘어졌지만 장면 정권은 정군이란 이름으로
지탄의 대상이 된 인물의 군복을 벗기는
수법을 쓰지 않았다.
"군부 내에 3.15 부정선거 관련자,
부정축재자가 현저히 많다는 것을 모르는
바가 아니다. 그러한 지탄의 대상이 된
인물들은 당장 옷을 벗기거나 의법 처단을
한다면야 모두들 속이 후련해 하겠지.
하나, 이런 식으로 정군을 단행해서 군에
주는 이익이 무엇인가? 정군 대상 인물들은
지금은 지탄의 대상일지 모르나 그들은
막아낸 영웅들이 아닌가? 그들에게는
명예롭게 퇴진할 수 있는 길을 열어줘야
한다."
이것이 국무총리 장면의 일관된
지론이었다. 옳은 생각이었다.
목숨을 걸고 조국을 지킨 영웅들.
그렇다. 그들은 진정 영웅들이었다. 그들이
없었던들 오늘의 조국은 생각할 수조차도
없는 것이다. 국가에 이바지한 그들의
공로와 해독을 끼친 과오가 상쇄하자는 데
무슨 이론이 있을 수 있느냐. 그래서
장면은 소리 소문 없이 조용하게, 명예롭게
퇴진하는 길을 열어주고자 했던 것이다.
12월 27일까지 진행된 감군에서
1,534명의 직업군인이 전역을 했다. 대령
506명, 중위.소위 188명, 준위 53명, 상사
157명, 중사 39명 등이었다.
이들 전역하는 직업군인들에게는 1년분의
봉급과 똑같은 액수의 연금을 특별
급여금으로 지급해 주었다. 연금제도가
아직 마련되어 있지 않은 이때에
이만큼이라도 생활대책을 마련해서
내보냈다는 것은 <잘한 일이다>라고 박수를
보낼 만한 일이었다.
하극상 사건의 주모자로 낙인 찍혔던
김종필, 석정선도 따지고 보면 이 감군
계획의 일환으로서 예편되었던 것이다.
혐의 사실을 발견하기는 어렵다고 하나
그렇다고 말썽꾸러기를 그냥 군에 머물러
있게 할 수도 없는 일이고 그럴 바엔
예편으로 명예롭게 퇴진시켜 주자 해서
받들어 두 사람을 예편시켰던 것이다.
어떤 기록에는 <수사당국은 사건의
중대성에 비추어 협상과 절충의 편법으로
사건을 매듭짓고자 해서 군복을 벗는다면
사건을 확대치 않고 종결짓겠다고 제의, 두
중령도 제의에 동의함으로써 이들은 1961년
2월 8일에 석방되었던 것이다>라고
기술되어 있지만 이것은 천만의 말씀이다.
다른 조직도 아닌 군대에서 협상과
절충의 편법을 썼다니 말도 안 되는
소리다. 군인이 무슨 장사꾼인가? 협상과
절충을 해서 군인의 죄과를 묵인한
군대라면 그놈의 군대를 어디다 써
먹겠는가? 어떤 국가 유공자라 하더라도
역사를 왜곡시키는 행위나 글을 남겨서는
안 된다. 역사의 진실을 위해서.
나이 만 34세였다. 어떤 기록에는 <대학
2학년 때인 1947년 3월, 고향에서 날아온
한 장의 전보가 그의 생을 커다랗게
바꿔놓은 결과를 가져왔다>라고 했지만
필자가 조사한 바로는 부친 사망이라는 한
장의 전보가 교직자가 되겠다는 김종필의
장래 설계를 산산히 허물어뜨리게 되었던
것은 아닌 것 같다. 김종필은 이른바
국대안(國大案)으로 부르고 있는 국립
서울대학교 안에 반대하다가 서울 명동에
있던 <대동강 동지회>에 잡혀가 구타를
당한 것이 다니고 있던 서울 사범대학
자퇴의 이유라고 했다.
서울 법정전문학교를 비롯해서 서울
광업전문학교, 그리고 예전의 경성제국대학
등을 합쳐 국립 서울대학교로 만들자는
다음해인 1946년 9월이었다.
미군정에서 하고자 하는 일이면 무조건
반대부터 하는 것이 좌익의 생리였다.
이래서 국대안 반대투쟁이라는 것이 역사의
한 귀퉁이에 기록되어 있었는데 김종필이
이 국대안 반대투쟁 대열에 섰던 까닭으로
해서 <대동강 동지회>에 잡혀가 린치를
당하는 결과를 빚었다.
해방 직후, 공산당의 학정에 못 이겨
서울로 월남해 온 북한 출신 청년들은
동향의 인연으로 끼리끼리 뭉쳐 청년단을
조직해 놓고 있었다. <압록강 동지회>,
<대동강 동지회>, <황해 청년회>, <황남
청년회>, <함북 청년회> 등 수를
헤아리기조차 어려울 지경이었다. 이들
청년단체들은 나중에 <서북 청년회>로
일이고, 이들 청년단체들이 하는 일이라는
게 좌익을 때려잡는 일이었다. 공산 학정에
못이겨 월남해 온 젊은이들이라 좌익이라고
지목되기만 하면 이성을 잃고, 감정을
폭발시켰다. 국대안을 반대하던 좌익계열의
학생들은 국립 서울대학교가 발족한 뒤에도
이 투쟁을 끈질기게 벌였다. 그들 좌익
계열 학생들이 끈질기면 끈질길수록 월남해
온 청년단체들도 눈에 핏발을 세웠다.
법보다 주먹이 앞선다고 좌익이라 하면
불문곡직 그들의 사무실로 납치해다가
린치를 가했다.
이렇듯 월남 청년단체들이 공산당 타도에
혈안이 되어 있었기 때문에 부작용이
없지도 않았다. 좌익 사상에 물들지도 않는
청년학생들을 잡아다 족치는 바람에
경우도 없지는 않았다.
서울대학교 사범대학 재학 시절의
김종필이 사상적으로 좌경화되어 있었느냐
하는 데 대해서는 본인이 해명을 하지 않는
한 확인할 길이 없다. 그가 국대안
반대투쟁에 가담했었다는 것과 그의 실형인
김종익이 고향인 충청남도 부여에서
좌익단체의 위원장을 했던 일이 있었다는
점으로 미루어 볼 때, 다분히 동경적이었던
것이 아닌가 하는 추측이 간다. 김종필의
실부인 김상배가 뇌졸중으로 쓰러지게
되었던 것도 월남해 온 청년단체가
좌익단체의 위원장으로 있는 김종익의 집을
덮치게 됨으로써 그 충격을 받아 쓰러지게
되었던 것이라고 한다.
1946년 시점으로 김종필의 나이 만
있었다고 보기는 어렵고 가정환경이 그로
하여금 사상적 동경심을 일으키게 했었던
것이라고 보아야 할 것 같다.
대동강 동지회에 끌려가 린치를 당한
김종필은 당시 온양에 주둔해 있었다던가?
국방경비대 제13연대 사병으로 입대를
했다. 국방경비대 초기에는 교육은
미국식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기간 장교나
사병들이 일본군 촐신자들이 태반이어서
그랬던지 기합이 여간 심하지가 않았다.
사나이들의 조직체가 군대이기 때문에 거칠
것을 짐작할 수 있는 일이지만 철권제재란
일본군의 악습이었다. 지원병이나 징병으로
일본군에 끌려 나갔다 돌아온 자들이
배워가지고 왔다는 것이 고작 이놈의
철권제재였다.
하루라도 먼저 입대한 자는 톡톡히
선임자 구실을 하고자 주먹을 휘둘렀다.
그야 맞을 짓을 했다면야 제재를 당해도
어쩔 수 없는 일이었지만 시비거리도 되지
못하는 일 가지고 주먹을 휘두르니
김종필은 같은 지식청년이 견뎌낼 도리가
없었을 것이다. 그는 결국 입대 일주일
만에 탈영을 해버렸다.
육군사관학교에서 8기생을 모집한 것은
1948년 12월이었으니까, 대한민국이 수립된
직후의 일이다. 그가 13연대를 탈영한 뒤,
제8기생으로 육군사관학교에 입교하기
전까지 1년 반 남짓한 세월을 어디서 무얼
했는지는 소상치가 않다.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하자, 그는 육군본부 정보국 북한과에
배속되었다. 그가 박정희를 알게 된 것이
박상희의 딸 영옥(榮玉)과 혼인함으로써
혈연을 맺게 되었다.
해방된 조국에서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기까지 혼돈의 세월을 걸어온 두
사람의 발자취에는 비슷한 점이 없지도
않다. 사상적인 고초를 겪어야 했던 두
사람의 쓰라린 인생풍파가 두 사람을
친밀케 해주는 끈이 되었고 한 걸음 더
나아가서는 혈연까지 맺게 해주는 결과가
되었는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하여간에 군부에서 중령 계급으로서 대령
계급까지 포함한 영관급들을 움직여
정군운동을 폈던 김종필은 그것으로 두각을
나타내기에 충분했다. 이제 군부에서는
<김종필>이라는 그의 이름 석 자를 모르는
장교는 없게 된 셈이었다.
이제 그가 박정희와 더불어 계획한 목적을
위해서 자유로운 위치에서 용트림을 하려고
들 것은 불문가지의 일이었다.
'책,영화,리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세계사의 9가지 오해와 편견 (0) | 2023.06.29 |
---|---|
격동30년 3 (0) | 2023.06.29 |
격동 30년 1 (0) | 2023.06.29 |
과학원 아이들 (0) | 2023.06.29 |
아름다운 전쟁 -하 (0) | 2023.06.2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