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원두-폭군의_아침
대통령도 시험제였다면 - 지금쯤 어떻게 되어 있을지 모
르지만, 엄연한 직선제. 가까운 장래에 시험제로 개헌될 가
능성이나 낌새도 전연 없다. 때문에 대통령의 꿈은 포기한
지 이미 오래 되었다.
올해 삼십삼 세.
홍수학 총경은 서울시경뿐 아니라 경찰 전체에서도 알아
주는 수재. 경정으로 특채된 이후 남긴 갖가지 수사 일화는
어느새 신화로 자리를 굳히고 있다.
지금은 시경 근무. 그가 맡은 팀은 공식상 기구에는 나타나
있지 않은 무적과(無籍課)이긴 하지만, 중요도로 치면 첫 손
가락에 꼽힌다. 전속과원은 모두 열 명. 필요할 땐 결재없이
병력을 동원할 수 있는 권한이 부여되어 있지만, 그 권한을
쓴 적은 별로 없다.
그가 맡은 일은 일테면 물밑탐사. 아직 사건으로 표면화
되진 않았지만, 위험도가 높고 냄새가 짙은 구석을 뒤지는
것과 미궁에 빠진 사건의 재수사. 따라서 머리 썩히는 일은
많아도 몸을 쓰는 일은 드물다. 때문에 그가 가장 신뢰하는
마 경감은 넘치는 마력(馬力)을 주체못해 다이어트라도 해
야겠다는 불평이 잦다.
지금 홍 총경 앞에 놓인 일감은 두 가지. 하나는 인터폴
을 통해 접수된 마약 밀매자의 신원 추적. 또 하나는 최근
어느 복지시설이 종교법인 - 신흥종교로 탈바꿈하려는 배경
조사였다.
마약 밀매자 추적의 진원은 파리. 최근 파리 포아시 교도
소에서 가석방되어 강제 출국을 당해야 하는 동남아인이 갑
자기 자취를 감추었는데 파리의 갱 '갱드라 팡류슈드'와의
연관이 확인 되었다는 것.
동남아와 아시아 제국에 잠입할 가능성이 많으니까 주목해
달라는 요지와 함께 사진과 지문을 함께 보내 왔다. 그것을
홍 총경이 찾으라는 지시였다. 구름잡는 얘기지만, 무시할
수도 없어 골치를 썩히고 있는 중.
갱드라 팡류슈드 - 프랑스 수사당국이 '테크니크 파티큐
리에'라고 부를 정도의 특수기술을 가진 갱집단. 가발.복면
등 변장이 특기인 이들은 사전계획이 장기였다. 몇달이고
세심하게, 분. 초 단위로 행동 계획을 세운 다음, 바람처럼
범행을 실천한다. 소요시간은 길어도 십분을 넘지 않는다.
은행털이, 명화도둑, 마약이 그들의 주특기. 이런정도의 기
본사항 쯤은 홍수학 총경도 알고 있었다. 그 팡류슈드의 끄
나풀이 동남아 - 어쩌면 한국을 포함한 - 에 까지 영역을
넓히려 든다면 문제는 심각해진다. 더욱 최근엔 영국에서
렘브란트를 도둑맞은 사건이 일어나지 않았는가. 유럽과 미
국에서 처분하기 보다, 아직은 일본, 또는 한국에서 그림을
처분하는 것이 훨씬 손쉬울지 모르는 일이었다.
컴퓨터 총경 - 그것이 바로 시경산하 대부분의 수사 경찰
관에게 알려져 있는 홍 총경의 별명이었다. 거기에 한술 더
떠서 컴퓨터 홈즈로도 불리었다. 홈즈라는 별명은 다분히
자가발전적인 요소가 포함되어 있었다. 원하기만 했으면 -
아니 포기하지만 않았어도 지금쯤은 당당한 판사나 검사가
되어있을 홍수학은 굳이 경찰관을 원했다. 행정시험 합격의
경찰 공무원은 흔할지 모르지만, 사법시험에 합격한 수사경
찰은 그의 말대로 '홍일점(紅一點)'정도였다.
"내 이름에서 어떤 숙명을 느꼈지. 홍수학 - 여기서 학을
떼어내면 홍수, 조금만 발음이 바뀌면 홈즈가 되질 않나?
그래 홈즈가, 사건현장에 있질 않고 법정에나 돌아다녀서야
말이 되나?"
그게 컴퓨터 홈즈 - 홍수학이 밝힌 이유의 전부였다.
경정으로 특채된 이후 간부경찰로서보다는 수사경찰관으
로 이름을 날렸었다. 미궁에 빠졌던 옛 사건이나 미궁에 빠
지기 직전의 사건들이 그의 손에 의해 해결된 것이 수없이
많았다. 모두들 그의 수사력 또는 추리력이 정말 이름처럼
샬록 홈즈를 닮았기 때문이라고 감탄했지만, 실상은 그렇지
도 않았다.
샬록 홈즈는 소설에서 만들어진 초능력 인간인 반면, 홍
수학은 피가 끓는 실제의 인간 - 따라서 소설처럼 경천동지
할 만한 능력은 없었다. 단지 그의 수사.추리력을 뒷받침해
준 것은 정확한 자료였다. 그는 경장에 몸을 담으면서 갖가
지 사건. 범죄자료를 패턴별로 정리했었다.
때문에 자료가 보강됨에 따라 - 라고 하면 듣기엔 좋을지
모르지만 세상은 더더욱 어수선해질 것이다 - 계절별로 지
역별로 사건 예고를 할 정도까지 되었다. 더욱 퍼스널 컴
퓨터가 등장하고 나서부터 그의 자료는 훨씬 정밀해졌다.
서울 뿐 아니라, 한국에서 일어나는 거의 모든 사건.범죄는
그가 분류해둔 패턴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잠복근무나 미행
같은 일선근무는 않더라도 수사엔 직접 간접으로 개입되는
경우가 많았다.
총경으로 승진, 시경으로 물러나 앉은 지금도, 일선 수사
팀은 사건현장보다 먼저 홍 총경을 찾았다.
"홈즈 총경님! 이번에도 도와 주십시오."
그런 부하들에게 그는 말없이 커피 한 잔과 컴퓨터
분석결과를 선물해 주었다.
왓슨 의사가 없는 홈즈 - 때로는 밀린 작업 때문에 짜증
도 났지만, 컴퓨터 홈즈라는 별명에 끝없는 자부심과 즐거
움을 느끼고 있었다.
* * 계 속 * *
...후덥지근한 실내엔 그 흔한 선풍기도 한 대 없었다. 바
람이라도, 하고 열어놓은 창문으로는 바람보다 소음이 앞질
러 기승을 부렸다. 이렇게 열악한 환경에선 컴퓨터가 고장을
일으키겠다고 혼자 낄낄 웃음을 흘리고 홈즈 총경은 서류로
눈을 돌렸다.
그 보고서는 최근 석달동안 홈즈 총경이 추적해온 어느 복
지법인 - 무명의 신흥종교에 관한 것이었다. 그 신흥종교의
정체에 홈즈가 관심을 갖게 된 것은 엄청난 경제력이었다.
그들의 자금원이 어딘가를 추적하고 있었다. 그 자금원이 대
강 잡힌 것이다. 보고서를 덮은 홈즈 총경은 인터폰을 눌렀
다.
"네, 총경님."
"마 경감 좀 들어오시라고 전해!"
"네."
마 경감은 홈즈가 가장 신뢰하는 수사 경찰관 중의 하나
였다. 그는 일선서 근무할 때 만난 그를 가능한한 자리가 바
뀔 때마다 함께 옮겨질 수 있도록 신경을 써 왔다.
"부르셨습니까?"
마 경감의 피로한 목소리. 수면부족과 과로 때문에 쌓인
만성피로 때문에 얼굴 전체엔 생기가 없었다.
"거기 앉아. 보고서, 수고했네."
"뭘, 아직 완전한 것도 아닌데요 뭘."
"이 정도면 충분해. 그들이 무슨 범법을 한 것도 아닌데...
이 정도면 충분해... 헌데 자금원은 여기 적힌 대로가 분명한
가?"
"네."
"흠, 재벌 사모님과 신흥종교라...."
"하지만, 그 사모님에게도 보기 보다 큰돈은 없나 봐요.
최근엔 아주 쩔쩔 맨다고들 합니다."
"왜?"
"돈줄이 말라서요... 때문에 최근엔 그 사모님보다, 종교단
체 자력에 더 의존한다고들 합니다."
"그것이 껌팔이, 구두닦기야? 그 수입이 얼마나 된다구...."
"사랑과 평화 아닙니까, 그 종교의 인삿말이... 모든 신자
는 형제 자매이구."
"사랑과 평화! 사이비 기독교계통인가? 교리는...."
"그렇지도 않습니다. 불교계통 같기도 하고, 계룡산 신도
안파 같기도 하고...."
"잡탕이겠군! 신흥종교란 대체로 그런 것들이니까!
돈을 대고 있다는 재벌 사모님은 어느 그룹 누구야?"
"거기 까진... 곧 보고 올리겠습니다."
마 경감은, 머리를 숙였다.
길쭉한 얼굴의 말상 - 동료들의 짓궂은 우스개
소리가 아니더라도, 얼굴 모습을 보고 성을 갖다 붙인 게 분
명했다. 얼굴 뿐 아니었다. 활동력도 대단했다. 마력높은 마
경감... 그가 만성피로에 지쳐버린 것은 그만큼 이 세상이 정
직하지 못하다는 증거일 뿐이다.
더욱 지금은 한여름이 아닌가. 가을 바람이 불어 하늘이 높
아지면, 마 경감도 다시 생기를 찾을 것이다. 가을은 천고마
비라고 하지 않는가. 홈즈 총경은 마 경감의 지친 모습이 안
스러웠지만, 그런 논리로 자위할 수밖에 없었다.
"...총경님, 한 가지 드릴 말씀이...."
"뭔가. 휴가원이 아니라면 뭐든지 좋아!"
"...오래된 일입니다만, 김강현이라고 하는 녀석, 기억하시
는지요?"
"김강현?"
"네, 마약에 손을 대고 있던 어느 조직의 중견 간부로 동
남아로 뻔질나게 출국하던...."
기억이 났다. 동남아 - 초생달지역은 세계 삼대 마약산지
의 하나, 그 지역으로 출입이 잦던 폭력조직의 중견 간부.
그러나 눈여겨 추적을 시작했을 무렵, 자취를 감추고만 녀석
이 있었다.
"한 오년쯤 전 얘기 아닌가...."
"그렇습니다."
"그 녀석 이름이 김강현인가. 난 동남아 어디선가에서 죽
어 버렸나 했지! 그런데, 새삼 왜?"
"그가 서울에 나타났다는 첩보가 있었습니다. 어느 호텔에
죽치고 들어 앉아 시간을 죽이고 있음을 확인했습니다."
"음!"
"헌데 이상하지 않습니까. 김강현, 출국 기록은 있는데, 입
국 기록은 없었습니다."
"출국은 했는데, 입국은 안했다? 그런데 서울에 있다 - 그
말이지?"
"네."
"어떻게 확인했나?"
"출입국 기록을 조사 했습니다."
"김강현이라는 동명이인은 몇이던가? 기록에...."
"여섯 사람 있었습니다만 그 녀석의 주민등록번호,
여권번호로는 입국사실이 없었습니다."
"흠!"
출국을 않았거나, 밀입국했다는 얘기가 된다.
밀입국엔 여러 가지 방법이 있겠지만, 가장 손쉬운 것이 가
짜여권을 이용하는 것이다. 그렇지만 왜 그가 당당하게 출국
한 뒤 밀입국을 해야하는가. 홈즈 총경은 갱드라 팡류슈드를
생각했다.
"한번 추적해 봐야하질 않습니까?"
"좋겠지! 누구한테 맡겨. 직접말구 - 마 경감에겐 다른 일
을 맡길 예정이니까 - 오후에 다시 와주게!"
마 경감을 내보낸 뒤, 홈즈 총경은 팔짱을 낀채 생각에 잠
겼다.
* * 계 속 * *
여인은 뱀처럼 감겨 왔다. 땀에 젖기 시작한 팔 다리엔 끈
끈한 여성의 힘이 더해졌고 혓바닥은 남자의 입술에서 목줄
기로, 이윽고는 귓속에까지 파고 들었다. 여인의 끈적거리는
타액으로 인해 정욕에 새로운 불이 붙은 탓일까, 남자의 움
직임이 차츰 격렬해져 갔다.
마침내 감겨들던 사지에 힘이 쭉 빠지면서 여인은 무너져
갔다. 땀에 흠뻑젖은 머리를 한껏 뒤로 제치면서, 그것도 모
자라 좌우로 흔들어 대기 시작했다. 그에 따라 여인의 코끝
에 걸려 흘러나오는 신음소리도 높아져 갔다.
남자도 차츰씩 높아져 가는 여인의 신음소리에 맞추어 골
인을 서둘기 시작했다. 그는 여인의 속도에 자신을 맞출 때
마다 강인한 생명력을 느낀다.
오늘밤은 그것이 한층더 강렬하게, 손에 잡힐듯이 느껴져 왔
다. 지금 자신의 몸에 깔려 흐트러지고 무너지는 여체가 특
별해서가 아니었다.
여인을 품기 시작한 지 얼마 안 되어서부터 느끼기 시작
한 바깥의 이상 신호 때문이었다. 처음엔 위험신호로 받아들
여졌지만 곧이어 자신에겐 무관한, 그러나 절대로 정상적이
아닌 리듬을 느끼기 시작한 것이다. 그 리듬은 정사 중에도
끊임없이 그의 육체를 자극해 왔고, 그 자극 때문에 참으로
오랫만에 남자를 불태울 수 있었다.
절정에 이르렀던 여인의 신음이 뚝 그침과 함께 주위엔
바닷밑 같은 정적이 밀려 들었다. 남자는 죽은 듯이 늘어진
여인으로부터 몸을 떼면서 침대 옆 테이블의 시계로 눈길을
던졌다. 스몰 라이트의 인색한 조명 속에 시계는 두시를 가
리키고 있었다.
한시간 십분, 여인과의 외설스런 축제는 한시간 십분 만에
끝을 본 것이다. 남자는 담배에 불을 붙이면서 조용히 귀를
기울여 자신을 자극해 온 그 이상리듬의 정체를 더듬기
시작했다.
...자동차 엔진 소린가?
그가 몸을 일으키려는 순간, 여인이 가까스로 몸을 추스리
면서 스탠드 스위치 쪽으로 팔을 뻗었다.
"불 켜지마. 이대루가 좋아!"
"어머! 보기 보단 로맨티스트군요. 당신은...."
"불을 켜지 않는다구 로맨티스인가?"
"그럼요. 무드를 좋아하는...."
"무드라... 흠! 한 가지 물어 봐두 돼?"
"왜 이런 직업을 갖게 됐느냐는 것 빼고는 뭐든지 물어보
세요."
"고맙군. 여자들은 왜 머리를 흔들어 대지?"
"머리를 흔들어 대다니요?"
"그 짓할 때 말야. 조금 전에 당신도 그랬지만... 엉덩이만
흔들어도 되는 데 머리까지 왜 흔들어 대누? 어지럽게...."
남자의 말은 덮쳐오는 여인에게 눌려 끝을 맺지 못했다.
"짖궂긴. 머리를 흔들어 댔는지, 소리를 질렀는지, 그걸 어
떻게 알아요? 새삼 그런 건 왜 물어요? 창피하게...."
여인은 키들키들 대면서 다시 감겨들었지만, 이번엔
남자의 억센 힘이 여인을 밀어냈다. 침대에서 몸을
일으킨 남자는 여인에게 몇 장의 지폐를 던져 주었다.
"이것이면 됐지? 자, 어서 가라구!"
남자의 목소리에는 이미 조금 전의 끈끈한 정사의 여운은
조금도 남아 있지 않았다.
"자구 가면 안 되나요? 날샐 때까지 몇시간 남지두 않았
는데...."
"안 돼! 여자가 옆에 있음, 잠을 못자! 오분 안에 나가지
않으면 집어 던져버릴테니까 알아서 해!"
하면서 남자는 주섬주섬 옷을 입기 시작했다.
남자가 옷을 다 입었을 때, 여인은 이미 도어 앞에 서 있었
다.
* * 계 속 * *
"또 불러 주시겠어요?"
"아니! 난 한 여자와 두 번 자지는 않아."
"결혼을 하구서두요?"
"결혼? 내가?"
남자는 화난 표정으로 여인에게 다가가서 철썩 엉덩이를
때렸다.
"더 맞기전에 썩 꺼져!"
여인을 밀어 낸 다음 남자는 침대 테이블의 스몰 라이트
까지 끈 다음, 눈이 어둠에 익기를 기다려 창께로 다가섰다.
커텐을 조금 연 뒤 바깥을 주의깊게 살폈다.
호텔앞 도로엔 자동차가 줄지어 주차해 있었다. 아무런 이
상도 발견할 수 없었다. 그는 커텐을 여민다음, 옷장 속의
트렁크에서 스타 라이트 스코프(星光증幅機)를 끄집어 내어
다시 창께로 다가갔다.
스타 라이트 스코프는, 별빛만으로 표적을 조준할 수 있는
감광장치(感光裝置)였다. 70년대초 야간 저격용으로 미국에
서 개발된 무기였지만, 80년대에 들어서면서 야간 사냥용으
로 보편화 된 장비였다.
보통 야간 저격용으로 많이 쓰이는 것은 적외선 탐지기로
알려져 있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구식이었다. 구식이라기
보다 거추장스럽다는 것이 단점이었다. 우선 적외선을 발전
시켜줄 전원(電源)이 필요했기 때문에 언제 어디서나 자유로
이 사용할 수가 없는 것이 결점이었다.
이런 단점을 극복하기 위해 미국방성에서 개발한 것이 스
타 라이트 스코프였다. 아무리 칠흙같이 어두운 밤이라도,
날씨만 맑다면, 밤하늘엔 무수한 별들이 반짝거린다. 이 반
짝이는 별빛만 있다면, 스타 라이트 스코프는 백 미터 바깥
의 새앙쥐 눈알까지도 조준이 가능한 것이다.
군사용으로 개발된 이 스타 라이트 스코프는 마침내 사냥
꾼들의 수요에 부응하기 위해서 민수용으로도 허가가 내린
것이다. 그러나 그건 어디까지나 미국에서의 얘기일 뿐, 대
부분의 국가에서는 금수.금제품(禁輸.禁製品)으로 묶여 있다.
특히 유럽에서는 철저한 감시로 이의 반입을 막고 있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공식적인 입장일 뿐, 실제로는 암시장에
서 얼마든지 구입할 수가 있는 것이다. 다만 값이 미국의 세
배라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을 뿐이다.
김강현도 이 스타 라이트 스코프를 파리에서 입수했다.
귀국 때 김포공항에선 카메라의 망원렌즈쯤으로 알고 그
대로 패스시켜 주었었다. 그것을 손에 쥘 때미다, 이제 라이
플만 수입하면, 어떤 일감이든지 보다 손쉽게 치러낼 수 있
다는 자신에 찬 힘이 솟아 올랐다. 그 스타 라이트 스코프로
그는 창밖 도로에 주차해 있는 자동차를 한 대 한 대 살펴
나갔다.
짐작했던 대로였다 스타 라이트 스코프는 도로 옆 녹지대
가로수 밑에 주차해 있는 봉고가 조심스레 배기 가스를 내
뿜고 있는 것을 확인해 주었다. 조용하게 가스를 내뿜는 배
기구의 잔잔한 진동이 렌즈를 통해 손에 잡힐 듯 들어왔고,
그 진동의 리듬에 맞춘 은은한 엔진 소리는 여태까지 자신
을 자극해 준 이상리듬과 맞아 떨어졌다.
김강현은 봉고의 주변을 살피기 시작했다. 봉고가 주차한
지점은 야트막한 언덕의 정점이었다. 뒷부분이 정점에 걸려
있으니까, 봉고의 앞부분은 이미 언덕 내리막에 걸려 있다는
계산이 된다.
엔진이 걸린 채 내리막에 걸려 있는 차에 브레이크 라이
트가 켜져 있지 않은 것은, 핸드 브레이크를 걸어 두었다는
얘기가 된다. 김강현은 자동차 앞부분 운적선을 확인하려 했
지만 그것은 불가능했다.
별빛을 아무리 증폭해도 커텐이 쳐진 자동차 뒤창을 투시
할 수는 없었다. 그는 자동차 번호판으로 초점을 맞추었지
만, 역시 판독이 불가능했다. 번호판에는 흙먼지가 엄청나게
쌓여 있었다.
...이건 뭔가가 있다!
김강현은 그렇게 결론을 내리면서, 봉고가 향하고 있는 앞
쪽으로 눈을 돌렸다. 호텔앞 8미터 도로는, 얕은 내리막을
백미터쯤 내려간 곳에서 간선도로와 맞물리게 되어 있었다.
T자의 정면은 성좌빌딩 본관의 후문쪽 주차장이었다. 주차
장의 조명등과 가로등이 졸고 있을 뿐 인적이라고는 전연
없었다. 이틀 연휴가 시작되는 새벽 두시의 빌딩가는 묘지처
럼 조용했다. 다만 그런 정적을 조용히 흔들고 있는 것은 봉
고차의 엔진 소리뿐이었다.
* * 계 속 * *
그는 끈기 싸움을 하기로 결심했다. 봉고차와 빌딩 후문
쪽을 번갈아 지켜보기 위해, 그는 창가에 의자를 당겨놓고
앉았다. 그렇게 십분쯤 흘렀을까. 변화는 빌딩 후문 쪽에서
일어났다. T자형 정면, 불빛 속에 취객 한 사람이 비틀거리
며 나타났다.
취객은 비틀걸음을 몇 발자국 옮기다가, 빌딩 주차장을 향
해 기분좋게 오줌을 내쏟기 시작했다. 오줌을 끝내기도 전
에, 두 사람의 경비원이 달려와서 취객과 옥신각신하기 시작
했고, 마침내 경비원은 취객을 끌고 들어가면서 김강현의 시
야에서 사라졌다. 창문으로 내다보는 그의 시야는 극히 좁았
다. T자형의 정면이외는 모두 사각에 가까웠다. 때문에 경비
원이 취객을 끌고 간 곳이, 경비실인지 아니면 다른 곳에 내
팽개쳐 버린 것인지 확인할 수가 없었다.
다만, 새벽 두시 빌딩가의 취객은 어쩌면 함정인지도 모른
다는 생각이 그를 바짝 긴장시켰을 뿐이다. 그 예감이 적중
한 것은 시간으로 따져 정확하게 삼분 뒤였다. 긴장한 김강
현은 자신의 맥박으로 시간을 재기 시작한 것이다. 오랜 경
험으로 그의 시간 계측은 오분에 삼십초의 오차가 있을까
말까 할 정도로 정확했다.
삼분 뒤, 끌려갔던 취객이 다시 김강현의 시야에 나타났
다. 그러나 이번엔 비틀거리지 않았다. 취객이 손을 크게 흔
듬과 동시에, 엔진이 걸려있던 봉고가 소리없이 미끄러져 내
리기 시작했다. 속도로 봐서 내리막 길을, 준비해 두었던 2
단 기어로, 변속없이 미끄러져 내려갔고, 그 뒤를 취객이 잽
싼 걸음으로 뒤쫓아 갔다.
김강현은 조용히 그러나 제비처럼 날렵하게 호텔을
빠져 나와 빌딩 쪽으로 몸을 날렸다. 아스팔트에
부딪치는 구둣소리를 죽이기 위해 그는 발뒤꿈치를 든
채 달렸다.
빌딩 주차장에 봉고는 없었다. 그는 경비실 쪽으로 몸을
날렸다. 제복을 입은 경비원 두 사람은 경비실 한구석에 뻗
어 있었다. 입에는 마스킹 테이프가, 손은 뒤로 묶여진 채
쓰러져 있었다.
상처는 없었다. 매
책,영화,리뷰,
이원두-폭군의_아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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