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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영화,리뷰,

(요약본)바빌론의 역사

by Casey,Riley 2021. 9.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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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렌 라드너 지음 / 더숲
이 책은 메소포타미아에서 가장 중요한 도시인 바빌론의 도시문명 역사서이다. 저자는 바빌론이라는
도시에 집중해 그 지역과 세계사에서 바빌론이 차지한 역할에 초점을 맞춘다. 그리고 다수의 발굴•연
구프로젝트에 참여한 학자답게 기원전의 바빌론과 2천년 만에 모습을 드러낸 바빌론의 생생한 발굴 현
장으로 안내함으로써, 우리를 신전의 도시 바빌론과 현재의 바빌론 사이를 오가게 한다.

바빌론의 역사
카렌 라드너 지음

▣ 저자 카렌 라드너
고대근동 역사 전문가로, 세계적인 연구재단인 알렉산더 폰 훔볼트 재단의 근동 및 중동고대사 석좌이
자 영국의 유니버시티 칼리지 런던의 교수이다. 인류 역사상 최초의 주요 제국으로 꼽히는 신아시리아
제국 시대의 메소포타미아 역사 분야에서 손꼽히는 학자이다. 문화와 사회사를 재구성해 내기 위해 쐐
기문자로 쓰인 자료들을 조사ㆍ연구하며, 좀 더 보편적인 고대사 연구에 힘을 쏟고 있다. 1972년 오스
트리아에서 태어나 빈 대학에서 고대근동 언어와 고고학을 공부하고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이후 헬싱
키대학과 튀빙겐대학에서 연구원으로 활동하는 한편 그리스, 시리아, 이라크, 터키 등지에서 다수의
발굴ㆍ연구프로젝트에 참여했다. 저서로는 『메소포타미아: 유프라테스와 티그리스의 초기 문명』, 『고
대 아시리아』, 『이름의 힘』 등이 있다.

▣ 역자 서경의
서울대학교와 동 대학원을 졸업하고 미국 웨스트민스터 신학교에서 목회학 석사학위를 취득했으며, 현
재 번역에이전시 엔터스코리아에서 번역가로 활동 중이다. 옮긴 책으로는 『팬데믹 1918: 역사상 최악
의 의학적 홀로코스트, 스페인 독감의 목격자들』, 『선은 장벽이 되고 : 인간이 만들어 놓은 경계선, 멕
시코 국경의 현실을 보여 주는 충격 화제작』, 『신화로 읽는 심리학: 다양한 문화권의 신화를 한 권으
로 만나다』, 『정상으로 가는 계단: 지그 지글러가 들려주는 열정과 성공의 메시지』, 『그림과 함께 읽
는 창세기』 등 다수가 있다.

▣ 감수 유흥태
현재 외교부 근무. 한국외대 국제지역대학원에서 중동아프리카 지역학을 공부하고 이란 이스파한대학
에서 정치학 박사학위를 받은 후 영국 런던대학교 중동연구소에서 방문연구원을 지냈다. 이란 내부 정
치 문제와 중동을 둘러싼 국제관계에 꾸준히 관심을 갖고 있으며, 이란의 숨겨진 여행지를 인문학적
시각으로 소개하고 싶은 소망이 있다. 지은 책으로는 『이란의 역사』, 『고대 페르시아의 역사』, 『에
스파한』, 『페르시아의 종교』, 『시아 이슬람』, 『페르시아의 영광을 찾아서! 이스파한』 등이 있다.

▣ Short Summary
우리는 역사 분야에서 종종 익숙한 듯 낯선 이름과 마주하곤 한다. 그 가운데 가장 대표적인 것이 ‘바
빌론’이다. 각종 매체들이 수없이 많은 ‘바빌론’을 언급하고, 비유하고, 차용하지만, 바빌론에 대해 알
고 있고 말할 수 있는 것들은 몇 가지의 사실에 불과하다. 디아스포라의 개시를 알리고 팝 그룹 보니
엠(Boney M.)의 〈바빌론 강가에서〉로 잘 알려져 있는 바빌론유수, 고대의 세계 7대 불가사의인 공중
정원, 신에게 도전했다가 다중 언어 사회로 분열을 촉진한 바벨탑 사건, 함무라비법전 등이다.
이 책은 메소포타미아에서 가장 중요한 도시인 바빌론의 도시문명 역사서이다. 저자는 바빌론이라는
도시에 집중해 그 지역과 세계사에서 바빌론이 차지한 역할에 초점을 맞춘다. 그리고 다수의 발굴•연
구프로젝트에 참여한 학자답게 기원전의 바빌론과 2천년 만에 모습을 드러낸 바빌론의 생생한 발굴 현
장으로 안내함으로써, 우리를 신전의 도시 바빌론과 현재의 바빌론 사이를 오가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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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빌론의 역사

제1장에서는 고대 메소포타미아의 역사 속에서 바빌론이 차지하는 시대와 공간을 다루고, 제2장에서는
바빌론의 쇠락한 폐허와 재발견에 대해 이야기한다. 제3장에서는 기원전 18세기 함무라비가 왕이 되
면서 바빌론이 새로운 정치적 패권국의 수도로 떠오른 사실을, 제4장에서는 기원전 14세기 부르나부
리아시 2세 치세하에서 지식과 정치 네트워크의 구심점이 된 바빌론을 살펴본다. 제5장과 제6장에서
는 기원전 12~기원전 7세기 사이에 메소포타미아 남부 지역이 정치적으로 분열하면서 바빌론이 겪은
정치적 부침을 다룬다. 제7장에서는 기원전 6세기 네부카드네자르 2세 치세하에서 새롭게 단장한 제
국의 수도를 둘러본다. 제8장에서는 기원전 539년 페르시아가 쳐들어오면서 날개가 꺾인 바빌론의 운
명을 다루며, 제9장에서는 기원전 331년 알렉산더 대왕에게 점령된 뒤의 바빌론 역사를 살펴본다.

▣ 차례
감수의 글
연대표
서론
제1장 바빌론의 시대와 공간
제2장 바빌론의 쇠락한 폐허와 재발견
제3장 패권국의 수도로 떠오르다
제4장 지식의 원천이 되다
제5장 신이 바빌론의 왕을 정하다
제6장 힘의 균형이 요동치다
제7장 세계의 중심으로 피어나다
제8장 이윽고 날개가 꺾이다
제9장 역사에서 사라지다
감사의 말
그림ㆍ지도 출처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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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빌론의 역사

바빌론의 역사
카렌 라드너 지음

바빌론의 시대와 공간
인류 최초의 영구적 정착지는 기원전 1만 년경, 비옥한 초승달 지대의 산록 구릉지에 세워졌다. 비옥
한 초승달 지대는 중동 지역을 감싸는 산맥들을 따라 페르시아만에서 홍해까지 이어지는데, 동쪽에서
서쪽으로 먼저 자그로스산맥이 내달리고 토로스산맥이 뒤를 잇는다. 그리고 지중해와 나란히 산맥이
달리는데, 그중에서 레바논산맥이 가장 두드러진다. 바로 이 지역에서 최초의 정착인들은 보리, 밀, 완
두콩, 렌틸콩 등 콩류를 경작하고 양, 염소, 소, 돼지를 길들여 가축으로 기르기 시작했다.
초기 정착지 중 일부는 니네베(오늘날의 모술), 아르빌(이르빌 또는 에르빌로도 불림), 알레포(아랍어
로는 할라브) 같은 도시로 성장했는데, 이 도시들은 1만 2천 년의 거주 역사를 자랑하며, 꾸준히 인근
지역의 정치적ㆍ경제적 중심지 역할을 수행해 왔다. 이런 도시들과 비교해 볼 때 바빌론(아카드어로는
바빌림)은 상대적으로 뒤늦게 성장했으며, 약 4천여 년 전에 비로소 정치적으로 주목받는 도시가 되었
다. 그리고 그로부터 약 2천 년 후에는 명성이 쇠퇴하면서 때 이른 은퇴를 경험하기도 했다.
바빌론은 메소포타미아의 ‘세 강이 만나는 지역’에 위치하고 있다. 즉 오늘날의 바그다드 지역으로, 유
프라테스강, 티그리스강, 디얄라강이 만나는 지역이다. 이 지역은 주변 지역을 통제할 수 있는 전략적
요충지인데, 바그다드는 이러한 요충지에 세워진 정착지 중 가장 늦게 자리 잡은 도시이다.
유프라테스강과 티그리스강이 만나면서 남쪽 페르시아만으로 흘러가는 지점은 이라크 남부에 위치한
광대한 범람원의 북부 지역에 해당한다. 여기에서 두 강은 많은 지류와 수로를 만나서 삼각주를 이루
는데, 봄이 되면 자그로스산맥과 토로스산맥에서 눈과 얼음이 녹은 물이 평야에 이른다. 그리고 수로
가 범람하면서 소중한 침전물이 함유된 진흙을 땅에 퇴적시킨다. 이는 천연비료 역할을 하여 곡류를
경작하고 대추야자를 재배하기 위한 최상의 환경을 조성한다.
반면 너무 많은 물이 흘러내리면 농작물을 쓸어 가고 경작지를 파괴해 버리기 때문에, 홍수를 관리하
기 위해 기원전 5천년 초반부터 수로ㆍ둑ㆍ댐ㆍ제방 등이 건설되었다. 그런데 변화하는 환경 속에서
영구적인 대형 구조물 없이 전통적 급수시설을 건설하기란 어려운 일이었으므로, 메소포타미아인들은
정교한 산수 능력을 발전시킬 수밖에 없었다. 수리에 관한 이들의 명성은 지금까지 이어지는데, 산술
능력은 공간에서 시간, 사물 및 사람에 이르기까지 사회 전반을 조직화하는 데 이용되고 있다.
한편 메소포타미아에서 경작하기에 좋은 조건을 만들기 위해서는 여러 지역의 사람이 힘을 모아야 했
고, 이 때문에 이라크 남부에서는 ‘도시혁명’의 장면이 연출되었다. 이로써 사람들이 모여 사는 방식이
크게 변하여 촌락에서 도시로, 혈연사회에서 국가로 발전하게 된다. 참고로 사회적 계층화, 기술의 전
문화, 관료체제의 발달과 그에 따른 문자의 발명 등이 도시 생활을 특징짓는데, 도시의 주민들은 빗물
에 의존해 농사짓는 주변의 작은 촌락 주민들과 점차 큰 문화적ㆍ사회적 격차를 보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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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빌론의 역사

유프라테스강과 티그리스강이 평원으로 흘러들어 오기 전에 굽이치면서 바닥을 침식하는 고지대 지역
과 아래쪽 범람원 사이의 접점에 ‘세 강이 만나는 지역’이 위치하는데, 고지대 지역에서는 빗물로도 농
사를 지을 수 없었을 뿐 아니라 농지에 물을 대기 위한 관개시설도 없었다. 그런데 이 지역은 가축을
방목하기에는 적합한 환경이었다. 기원전 9천 년경 최초로 길들인 가축이 바로 양과 염소인데, 처음에
는 고기를 목적으로 사육하다가 나중에는 젖까지 얻을 수 있었다. 양과 염소의 털이 방직 섬유로서 가
치를 가지게 된 것은 훨씬 나중의 일로, 대략 기원전 6500년경이다. 세련된 직물의 생산은 장거리 무
역에서 매우 중요했기 때문에 고대 이라크 경제에서 양털은 주요 상품이었다.
이제 세 번째 강에 대해 알아보자. 디얄라강은 자그로스산맥의 넓은 원류에서 흘러내린 물이 모인 것
으로, 바그다드 지역에 이르러 범람원으로 흘러들어 가 티그리스강과 합류한다. 이란으로 가는 육로에
접근하기 위한 이상적인 통로인 디얄라강은 풍부한 금속광물 퇴적물을 함유하고 있으며, 아프가니스탄
과 인도 같은 더 먼 지역으로의 무역을 위한 훌륭한 연결로가 된다. 먼 나라들은 인기 있는 암청색 청
금석 그리고 혈적색 홍옥수 원석을 들여왔는데, 페르시아만을 통한 해상무역보다 육상무역이 선호되던
시기에는 항상 이 세 강 유역이 이상적인 지정학적 요충지로서 지역 간 무역의 핵심 역할을 수행했다.
바빌론이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한 기원전 2천 년 초기가 바로 그러한 시기였다.
바그다드의 세 강 유역에서 페르시아만까지 펼쳐지는 범람원을 오늘날 우리는 ‘바빌로니아’라고 부르는
데, 바빌로니아는 기원전 6세기 경 바빌론이 바빌론제국의 수도로서 이라크에서 가장 중요한 도시로
명성을 날리던 무렵, 그리스어권 사람들이 만들어낸 명칭이다.
한편 이라크 남부 지역은 미국의 고고학자 로버트 매코믹 애덤스가 명명한 것처럼 ‘도시들의 중심’이었
다. 많은 도시가 바빌론과 경쟁했고, 그중에는 바빌론보다 긴 역사를 자랑하는 도시도 많았다. 우루크
ㆍ우르ㆍ키시ㆍ니푸르와 같은 도시들은 건축ㆍ문학ㆍ축제 및 공동체의 삶이라는 측면에서 풍부한 문화
유산을 자랑했으며, 바빌론보다 퍽 오래 기록된 역사를 가지고 있다. 이 도시들의 주민들은 이러한 사
실을 자랑스러워했고, 그래서 그들은 이라크 남부 지역이라는 공통분모를 강조하는 명칭을 쓰지 않고
스스로를 ‘바빌론의 아들’, ‘우루크의 아들’, ‘니푸르의 아들’ 등으로 불렀다.
세 강 유역인 바빌로니아의 북부 지역과 여러 물길이 페르시아만의 습지로 합쳐지는 바빌로니아의 남
부 지역을 구분하기 위해서 좀 더 조심스러운 명칭이 사용되어, 남부 지역은 주로 ‘해국’이라고 불렸고,
기원전 3천 년 중기 이후 북부 지역은 그곳에 자리 잡은 국가의 수도 및 언어의 명칭을 따라 ‘아카드
의 땅’으로 불렸다. 이들의 언어인 아카드어는 셈어 계열로 바빌로니아어로 이어지며, 아시리아어와는
가까우면서도 뚜렷한 차이를 보인다. 한편 남부 지역은 그곳의 언어인 수메르어의 이름을 따서 ‘수메
르의 땅’이라 불렸는데, 수메르어는 현존하는 또는 사어가 된 어떤 언어와도 연관이 없는 것으로 알려
져 있다. 바빌로니아에 가장 근접한 명칭은 두 지역을 함께 부르는 ‘수메르와 아카드의 땅’이다.
이 두 언어는 모두 쐐기문자로 기록되었는데, 젖은 점토판에 갈대철필로 새긴 문자의 모양이 쐐기 같
다고 하여 그러한 이름이 붙여졌다. 현대인의 관점에서 볼 때 기록문자의 발명은 도시혁명이 이루어
낸 가장 놀라운 성취이다. 참고로 쐐기문자는 본래 장부를 기록하기 위해 고안된 것으로, 서서히 음절
기호와 어표를 포함한 문자체계로 발전하여 구어를 기록할 수 있게 되었고, 이후 3천 년간 중동 전역
의 여러 언어권에서 문서 기록에 사용되었다. 기원전 3천 년대 중기의 바빌론에 대해서는 거의 알려진
바가 없지만, 이러한 쐐기문자 텍스트를 통해 약간의 정보를 얻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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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빌론의 역사

패권국의 수도로 떠오르다 - 함무라비의 바빌론
여기에서는 기원전 18세기 함무라비 왕 치세 하에 작은 왕국의 중심부에서 현대 이라크의 대부분을
아우르는 메소포타미아의 정치적 패권국의 수도로 부상하여 전성기를 누린 바빌론을 찾아간다. 기원전
2천 년대의 첫 세기 동안은 국가 간의 전쟁이 끊이지 않았다. 이는 곧 크나큰 정치적 기회를 의미하여
많은 왕이 출현했다. 통치자들은 보통 ‘아모리인’의 후손을 자처했다. ‘서방인’을 의미하는 이 용어는
기원전 3천 년 대 후기 우르 왕국 재상들의 텍스트에서 처음 등장했는데, 이는 메소포타미아로 이주해
온 셈어를 사용하는 이민자들을 가리키는 말이었다.
우르 왕국은 많은 아모리인을 용병으로 고용했고, 왕국이 멸망한 후 그들 중 일부는 왕조를 열었는데,
바빌론 왕가는 그중 하나였다. 당시 함무라비 왕이 스스로 ‘아모리인과 아카드인’의 통치자임을 천명했
을 때에는 이를테면 군사엘리트 대 평민과 같이 사회적ㆍ정치적 구별을 의미했을 수도 있다. 그러나
더 이상 민족언어상의 특정 집단을 의미하지는 않았다.
함무라비가 할아버지와 아버지로부터 작은 영토를 물려받아 바빌론 왕위에 오를 무렵, 중동의 패권국
은 중앙 시리아와 남서부 이란에 근거지를 두고 있었는데, 얌하드 왕국의 수도는 고대도시 할라브였고,
엘람 왕국의 수도는 당시 가장 큰 도시 중 하나인 거대 도시 수사(이란 쿠제스탄주의 슈시)였다. 유프
라테스강과 티그리스강 주변 지역은 수십 개의 공국으로 나뉘어 있었는데, 이신ㆍ라르사ㆍ우르ㆍ에쉬
눈나 등 제법 규모가 큰 나라가 몇몇 있었고, 바빌론ㆍ마리 등 비교적 작은 나라들도 있었다. 이 작은
국가들은 얌하드와 엘람 양대 세력의 완충 역할을 했고, 국가들 사이의 동맹은 자주 바뀌었다.
한편 기원전 18세기에는 주요 무역로에 중대한 변화가 있어 변화와 기회의 시대였다. 그전까지는 페르
시아만을 이용한 해상무역로가 중심을 이루었는데, 남부 메소포타미아의 항구에서 바레인과 오만을 거
쳐 인더스평원의 하라파 문명 도시들과 교역을 했다. 그러나 알 수 없는 이유로 이 도시들이 쇠퇴하면
서 해상무역도 시들해졌고, 그 결과 이 도시들은 더 이상 장거리 무역의 거점이 되지 못했다. 아무튼
페르시아만을 거쳐 인도반도로 가는 해상무역로가 폐쇄되어도 동방과의 무역은 지속되어야 했다. 그래
서 자그로스산맥의 낮은 산길을 통한 육상무역로가 어느 때보다 중요해졌다. 이렇게 장거리 무역과 여
로가 변화하면서 메소포타미아의 정치적 중심지는 항구들이 위치한 최남단에서 유프라테스강, 티그리
스강, 디얄라강이 만나는 세 강 유역으로 서서히 옮겨 갔다. 현재 이 지역의 중심지는 중세 초기 이후
이라크에서 가장 큰 도시인 바그다드다. 하지만 바그다드보다 3천 년 앞서 바빌론이 있었으며, 함무라
비가 왕위에 있던 기원전 18세기 바빌론은 메소포타미아의 중심 도시가 되었다.
이러한 변화의 시대에 세 강 유역에 자리 잡은 바빌론의 지정학적 위치는 대단한 상업적ㆍ전략적 가치
를 지녔으므로, 인접한 강력한 도시국가들은 바빌론을 차지하기 위해 각축을 벌였다. 함무라비의 부친
신무발리트는 메소포타미아의 정치적 강자인 남쪽의 라르사 왕국으로부터 영토를 지키기 위해 분투했
다. 그의 재위 기간과 43년간 통치한 그의 아들 함무라비의 재위 초기까지 가장 두각을 나타낸 국가는
에쉬눈나 왕국이었다. 티그리스강과 디얄라강의 합류 지점에 위치하고 동쪽의 강자 엘람 왕국과 동맹
을 맺은 에쉬눈나는 육상무역로의 중요성이 커지면서 가장 큰 수혜를 입었다. 반면에 바빌론 왕국은
단지 몇몇 도시를 포함한 반경 60킬로미터 정도의 지역에 불과했다. 하지만 함무라비는 기회가 찾아오
자 에쉬눈나를 밀어내고 영토를 합병함으로써 메소포타미아 전 지역의 패권자로 떠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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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빌론의 역사

함무라비는 많은 군소 국가를 합병하여 거대한 메소포타미아의 국가를 건설했는데, 이는 그의 먼 친척
뻘인 삼시아두(샴시아다드 1세)의 위업을 이어받은 것이다. 함무라비가 바빌론의 왕위에 막 올랐을 무
렵 삼사이두는 강력한 왕국을 건설했다. 참고로 삼시아두는 타고난 능력으로 기회를 잘 활용한 유능한
정치가이자 치밀한 군사 지휘관이었으나, 자식들을 잔인하고 강압적으로 양육하여 좋은 부모는 아니었
다. 그러나 먼 친척뻘인 함무라비에게는 영감과 자극을 준 사람이었다.
함무라비의 선조들이 통치하던 시기에 바빌론 왕국은 남쪽의 카잘루와 북쪽의 에쉬눈나 사이에 끼인
약소국에 불과했다. 그런데 엘람 왕국의 군대가 에쉬눈나 연합국을 침략하여 정치적 지형에 큰 변화가
생기자, 함무라비는 야망을 위해 이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엘람 왕에게 충성의 의무가 있었던 그는
엘람의 분봉왕(分封王)으로서 이 전쟁에 참여했다. 이는 마리의 왕 짐리림 역시 마찬가지였다.
엘람 왕국의 통치자가 지명한 에쉬눈나의 새로운 군주는 자신의 왕위를 지키지 못했고, 함무라비는 이
상황을 이용해 전략적 요충지인 에쉬눈나의 여러 국경 도시를 바빌론 왕국에 편입시키면서 자그로스산
맥으로 이어지는 동방교역로를 확보했다. 엘람의 통치자는 즉각 군대를 보내 이러한 반역 행위를 응징
하려 했다. 하지만 함무라비는 마리 왕 짐리림의 도움과 특히 신속히 보충 병력을 파견해 준 서쪽의
강대국 얌하드의 지원에 힘입어 이 공격을 막아 내 새로 확보한 영토를 지킬 수 있었다. 이 일을 계기
로 얌하드에 대한 지지를 천명하는 한편 엘람과의 동맹을 확실히 끝냈다.
이후 함무라비는 새로운 상황을 적극적으로 활용하여 메소포타미아에서 엘람의 가장 중요한 동맹국인
남쪽의 라르사 왕국을 합병하여 바빌론을 고대 수메르의 유산을 물려받은 강력한 국가로 부상시켰다.
고고학자 도미니크 샤르팽은 바빌론의 라르사 합병이 갖는 중요성을 강조하면서 이를 통해 바빌론의
문화적 영향력이 이후 2천 년 동안 중동에서 지속될 수 있었다고 주장했다. 특히 라르사 궁정의 세련
되고 교양 있는 인물들이 소박한 함무라비 궁정에 편입되면서, 바빌론의 정치ㆍ종교ㆍ문화ㆍ문학ㆍ예
술 등 다방면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고, 이를 통해 ‘바빌론’ 문화가 새로이 모습을 드러냈다.
한편 오늘날 함무라비 시대의 건축물은 남아 있지 않지만, 쐐기문자 텍스트를 통해서 바빌론 시대의
생생하고 상세한 모습을 엿볼 수 있다. 그중 가장 중요한 자료는 함무라비법전이다. 이 법전은 함무라
비가 새로이 건설한 왕국의 통합을 공고히 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오늘날 함무라비법전으로 불
리는 유물은 아카드어로 기록된 쐐기문자 비문으로 큰 석비에 새겨져 있다. 석비에는 함무라비가 정의
의 수호자 태양신 샤마시에게서 왕의 휘장을 받는 모습도 담겨 있다.
함무라비의 긴 비문에는 왕의 업적이 기록되어 있는데, 그 업적은 신들의 도움, 특히 바빌론의 수호신
마르두크의 도움으로 가능했다고 쓰여 있다. 텍스트 첫 줄의 기록에 따르면 가장 높은 두 신, 즉 신들
의 주인 아누와 땅의 주인 엔릴이 함무라비를 통치자로 정하고, 바빌론과 마르두크의 위상을 끌어올렸
다고 기록되어 있다. 참고로 함무라비가 군사적으로 성공을 거두면서 수도 바빌론이 새 왕국 내에서
명성을 떨치자, 바빌론의 도시 신 역시 신들 사이에서 명성을 얻게 되었다. 이를 통해 지역 신에 불과
하던 마르두크가 서서히 전 세계의 독보적인 지배 신으로 변모하기 시작했다.
한편 텍스트의 첫 줄에서 함무라비는 모든 백성을 공평하게 대하는 ‘정의로운 왕’으로 소개되고, 이를
뒷받침하기 위해 판결문 275개가 자세히 기록되었는데, 그중 일부는 왕이 직접 판결한 것이다. 이 판
결문은 함무라비가 전 영토에 임명한 판관들에게 지침서 역할을 했으며 모든 백성이 활용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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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빌론의 역사

판결문을 보면 함무라비는 납세와 공공사업 노역으로 국가에 충성하는 사람들의 권리를 보호하는 데
특별히 관심을 기울였다. 예컨대 바빌론의 공무로 해외에 나간 군인이나 상인이 해외 체류 중 국내 재
산을 잃을 경우, 귀국 시 처와 자식을 포함한 재산을 되찾을 수 있도록 보장했다.
또한 함무라비는 통합된 바빌론 사회를 만들고 유지하는 데 각별히 노력을 기울였는데, 이는 결혼과
상속에 관한 복잡한 판결문들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그중에는 ‘수녀(나디툼)’에 관한 내용이 많은데,
이는 수녀의 독특한 사회적 지위 때문이었다. 수녀는 신전에 부속된 수녀원에 살면서 신에게 헌신하는
자로서 살아 있는 가족뿐 아니라 특히 죽은 가족을 위해 기도하는 데 전념했다. 그래서 딸을 수녀로
보내는 것은 신에 대한 존경심의 표현이자, 죽은 조상을 보살피는 일이었다. 참고로 수녀 대부분은 부
유한 가문 출신이어서 신전의 경제적 지원에 의존하지 않았다. 아무튼 바빌론이 패권을 잡은 이후 왕
국 전역의 귀족 가문에서는 딸을 바빌론의 마르두크에게 수녀로 보내는 것이 유행했다.
한편 함무라비의 아들이자 후계자인 삼수일루나(37년), 아들인 아비에슈(28년), 손자인 암미디타나(37
년), 증손자인 암미샤두카(아마도 19년), 고손자인 삼수디타나(아마도 26년)로 이어지는 긴 통치 기간
과 비교적 순탄한 바빌론 왕위의 계승을 통해 볼 때 함무라비 왕조는 왕국의 중심으로서 순조롭게 받
아들여진 것으로 보이며, 이 왕들 중에서 적어도 1명은 이집트와 외교적 관계를 수립한 것 같다.
그런데 함무라비 사후 바빌론의 영토는 급격히 축소되었다. 삼수일루나가 왕위에 오른 지 몇 년 지나
지 않아 남부 지역에서 반란이 일어나 라르사와 우루크가 독립을 선포했다. 반란은 진압되었지만 이후
곧 삼수일루나는 남부의 통제권을 신흥 강자에게 넘겨주고 만다. 즉 페르시아만을 따라 형성된 습지에
근거지를 둔 일루마일룸 왕의 해국이 급부상했다. 그러자 우루크, 우르, 니푸르 같은 도시의 주민들이
집을 버리고 수도 바빌론으로 이주했다. 그런데 이주를 촉발한 것은 반드시 전쟁 때문만은 아니었다.
또 다른 이유, 더 근본적인 갈등의 뿌리는 심각한 물 부족 사태였다. 바빌론 북부 도시 키시 근처의 유
프라테스강 지류의 방향이 바뀌어, 하류에 자리한 여러 정착지로 이어지는 강물의 공급이 끊어졌다.
결국 남부의 여러 도시는 버려졌고, 니푸르와 같은 중부의 도시들은 큰 어려움을 겪게 되었다. 여러
사료에서 삼수일루나 통치기에 바빌론 전역에서 대규모 기근이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바빌론 왕국의 마지막 세기에 대해서는 기록된 자료가 거의 없어 이 시기의 역사를 재구성하기란 쉽지
않다. 이 시기에 이라크 남부 지역은 극적인 변화를 겪었다. 최남단의 도시들과 티그리스강 동쪽 지역
의 많은 도시가 버려졌다. 이전에 이란과의 연대를 통해 메소포타미아에서 중요한 전략적 역할을 해온
에쉬눈나가 통치하던 지역에는 새로운 집단이 등장하여 사회질서를 바꾸어 나갔다. 그중에서 가장 두
각을 나타낸 카시트인은 결국 바빌론을 장악하게 된다. 하지만 이는 아나톨리아에서 군대(히타이트 세
력)가 쳐들어와 바빌론의 신상들을 가져가고 함무라비 왕조를 멸망시킨 뒤의 일이다.
아나톨리아의 군대가 유프라테스 남쪽으로 진군해 올 때, 바빌론은 함무라비의 5대손 삼수디타나의 통
치 하에 있었다. 히타이트의 목적은 영토 획득보다는 약탈이었다. 아나톨리아 군대는 왕궁, 일반 주택,
신전들에서 엄청난 전리품을 거두었고, 수많은 주민이 전쟁 포로로 끌려갔다. 함무라비 때 라르사 왕
국 등의 포로 유입으로 바빌론 사회가 심각한 변화를 겪은 것처럼, 바빌론 포로의 유입은 아나톨리아
의 문화적 역사를 크게 변화시키는 전환점이 되었다. 메소포타미아의 전통을 적극적으로 수용하고 결
국 다양한 쐐기문자 비문들을 모두 받아들였다. 히타이트의 하투샤(보가즈쾨이) 궁정은 바빌론 문화
수용에 적극적이었으며, 이들이 남긴 기록 문서는 메소포타미아의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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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빌론의 역사

후대 사람들은 이 시기 바빌론의 종교가 큰 타격을 입어서 신상을 강탈당한 것을 매우 애석해했다. 현
대인의 관점에서 보면 신들이 도시를 저버리는 것은 도시의 통치자, 즉 신의 대리인에게 실망했기 때
문이다. 바빌론이 수호신들에게 공개적으로 버림받음으로써 함무라비 왕조는 종말을 고했다. 하지만
많은 주민을 잃었음에도 바빌론은 살아남았으며, 카시트 왕조 하에서 새로운 삶을 이어 나갔다.

세계의 중심으로 피어나다 - 네부카드네자르 2세의 바빌론
기원전 6세기에 만들어진 유명한〈바빌론 세계지도〉에는 세계가 기하학적으로 묘사되어 있으며, 그 중
심에 바빌론 도시가 있다. 원과 자로 그려진 그림에는 바다로 둘러싸인 큰 원형의 대륙이 있으며, 바
다 둘레에는 원래 별 모양을 이루도록 삼각형이 8개 배치되어 있었다. 대륙에는 여러 강과 산맥 그리
고 도시와 아시리아, 우라르투, 비트야킨 같은 지역들이 표시되어 있다. 도시와 지역들은 작은 원으로
표시되고 그 이름은 원 안에 기록되었다. 유일한 예외가 바빌론(TIN, TIR, KI로 표시됨)이다. 이 도시는
유프라테스강을 가로지르는 사각형으로 표시되었다. 비록 바빌론은 대륙과 세상의 중심에서 벗어나 다
소 북쪽에 표시되었지만, 지도에서 가장 눈에 띄는 곳이다.
이 지도는 바빌론이 중동의 헤게모니를 장악하고, 오랜 숙적인 아시리아와 비트야킨이 쇠락한 기원전
600년경의 세계관을 반영한다. 이후 수십 년간 도시 바빌론은 고대 세계의 중심지이자 바빌로니아제
국의 수도로서 번영을 구가했으며, 바빌론의 영토는 지중해 연안의 유다와 실리시아로부터 자그로스산
맥에 이르렀다. 통치자들은 이 도시를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도시로 만들고 싶어 했으며, 그러한 희망
은 제법 성공을 거두었다. 기원전 6세기의 바빌론 유적들은 8제곱킬로미터 이상의 넓은 지역에 퍼져
있는데, 이는 중동 전체에서 가장 큰 고고학 유적지에 해당한다. 하지만 바빌론 출신 왕들의 통치가
곧 끝나 버렸기 때문에 영광은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기원전 539년 페르시아의 키루스 대왕, 즉 키루스 2세(재위 기원전 550~기원전 530년)가 바빌론을
정복하여 바빌론의 독립은 영원히 종식되었다. 그는 가장 성공적인 군대 지휘관이었고, 당시 알려진
세계의 상당 부분을 정복했는데, 바빌론제국으로 발걸음을 옮기기 전에 이미 이란 전역과 중앙아시아
내륙을 복속시켰고, 아나톨리아의 패자 리디아 왕국을 무찔렀다. 그리고 바빌론을 완파하자 눈부신 전
리품으로 이집트를 얻을 길이 열렸다. 하지만 이 위업은 아들이자 후계자인 캄비세스에게 맡겨졌다.
키루스는 기원전 530년 광대한 영토의 동쪽 국경에서 전투 중에 사망했다.
참고로 페르시아인들에게 왕의 업적을 기록으로 영구히 남기는 전통이 아직 없었던 탓에 키루스 통치
시대의 자료는 흔치 않다. 다만 바빌론의 관습에 따라 제작된 비문이 하나 남아 있는데, 그것이 바로
바빌론에서 발굴된 ‘키루스원통’이다. 바빌론제국의 왕들은 공식 비문 수백 개를 남겼는데, 대부분 이
러한 ‘원통’에 새겨졌다. 점토 원통은 왕의 명령으로 제작해 왕이 건축하거나 보수한 왕궁과 신전의 기
초 아래 깊은 곳에 매장했다. 이는 이러한 건축물을 개ㆍ보수하게 될 장래의 통치자들이 원통을 발굴
할 때 전임자들의 행적을 인정하고 감사하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원통에 쓰인 비문들은 대규모 건축 사역을 기록하고 있으며, 대부분 제국의 중심부인 바빌론과 시파르
ㆍ우르와 같은 주요 도시에서 발견되었다. 또한 바빌론이 찬란한 건축물을 통해 고대 세계 전역에서
명성을 떨치는 거대 도시로 변모해 간 사실을 잘 보여준다. 건축물로는 새롭게 단장한 마르두크의 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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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빌론의 역사

전 에산길라와 계단식 탑 에테메난키(하늘과 땅의 연결고리), 경이로운 정원이 있는 거대한 왕궁, 복원
되고 확장된 도시 성벽 임구르엔릴(높은 내벽)과 사각형 도시 내부를 둘러싼 니메트엔릴(엔릴의 방어
벽. 낮은 바깥 성곽) 등이 있었다. 이러한 거대한 건축물들과 이것들을 건설한 네부카드네자르 2세의
명성이 너무나 높았기에, 『성경』과 그리스어 및 라틴으로 쓰인 작품에도 등장했다. 이러한 기록은 건
축물들이 이미 폐허가 되어 버린 지 오랜 뒤까지 전해졌으며, 폐허만 남은 유적을 목격한 2세기 초 로
마 황제 트라야누스 같은 후대의 방문객들에게 적잖은 실망을 안겨주었다.
네부카드네자르 2세의 바빌론 건축물이 세상에 다시 모습을 드러낸 것은 독일의 건축가 겸 고고학자
로베르트 콜데바이가 한 18년 동안의 발굴을 통해서였다. 그는 에산길라 신전 단지, 거대한 남쪽 왕궁
그리고 이 두 건축물을 이어주는 화려한 행진도로에 초점을 맞추어 발굴을 진행했다. 네부카드네자르
의 건축물이 바빌론 유적지를 압도하는 또 다른 이유는 전례 없이 광범위하게 사용된 구운 벽돌 때문
이다. 이전 세대의 건축가들은 구운 벽돌을 제한적으로 사용한 대신 햇볕에 말린 벽돌을 주로 썼다.
구운 벽돌은 연료를 사용하여 가마에서 구워서 만들었으므로 생산하는 데 많은 비용이 들지만, 내구성
이 매우 뛰어나 그 덕분에 네부카드네자르의 건축물들은 폐허가 된 후에도 고대로부터 콜데바이의 발
굴 초기까지 끊임없이 건축 재료로 재사용되었다.
바빌론제국의 왕들은 비문을 건축물에 남겼을 뿐 아니라 자신들의 업적을 기리는 텍스트와 모습을 담
은 양각을 자연석에 새기기도 했다. 오늘날 레바논, 요르단, 사우디아라비아의 산맥에서 발견된 그러
한 유적들은 왕의 이미지와 비문으로 장식되어 신전과 같은 중요한 위치에 세워진 돌 유적들(석비)과
개념적으로 밀접한 관계가 있다. 비문은 함무라비 시대와 마찬가지로 쐐기문자와 아카드어로 쓰였다.

역사에서 사라지다 - 알렉산더 대왕 이후의 바빌론
기원전 331년 마케도니아의 왕 알렉산더 대왕이 페르시아제국을 정복했다. 알렉산더는 페르시아의 마
지막 왕 다리우스 3세(재위 기원전 336~기원전 330년)를 가우가멜라(오늘날의 모습과 아르빌 북쪽에
있는 텔고멜) 전투에서 격퇴한 후 바빌론으로 향했다. 바빌론 주민들은 세계의 수도로서의 역할을 되
찾기를 기대하며 정복자 알렉산더를 받아들였고, 그는 그 기대에 걸맞은 후보로 보였다. 이후 알렉산
더의 전쟁과 그의 때 이른 죽음으로 인한 혼란, 그리고 마케도니아와 그리스 정착민들의 유입에도 불
구하고 바빌로니아는 사회적ㆍ경제적 연속성을 잃지 않았다.
바빌론은 아케메네스 통치에서 알렉산더 치하로 넘어갔다가 다시 셀레우코스제국에 병합되었는데, 알
렉산더와 셀레우코스 왕조의 왕들은 왕권을 받은 후 도성에 잔류하며 바빌론 주민에게 열렬한 환영을
받았다. 그래서 잠시나마 바빌론은 세상에서 가장 강력한 통치자의 도성이라는 명성을 되찾은 것처럼
보였다. 역사상 처음으로 네부카드네자르 2세가 만든 넓고 포장된 행진도로에 어울리는 코끼리들이 바
빌론 거리를 거닐었고, 도시 북부에는 그리스 양식의 극장이 세워져 그리스 연극의 공연장이자 정치적
회합의 장으로 이용되었다. 아마도 에산길라 신전을 대체하는 용도였을 것이다. 하지만 기원전 305년
티그리스강의 셀레우키아가 셀레우코스제국의 정치적 중심지로 세워지면서 바빌론은 20년이 채 못 되
어 제국 수도로서의 지위를 잃어버렸고, 마케도니아 정착민은 이 신도시로 이주했다. 그리고 기원전
293년 제국의 수도는 더욱더 먼 시리아 북부 오론테스강의 안티오키아로 옮겨갔다. 바빌론은 비록 영
화로운 과거를 자랑했지만, 이제 지방 도시로 전락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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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빌론의 역사

티그리스강 왼쪽 셀레우키아 맞은편에는 또 다른 도시가 세워졌다. 기원전 141년 바빌로니아를 정복
한 파르티아인들이 세운 크테시폰으로, 파르티아제국과 이후 사산제국의 수도가 되었다. 지리적 측면
에서 볼 때, 바빌론은 제국의 궁정에 가까워졌으나 정치적 중심지로서의 지위는 회복하지 못했다. 하
지만 바빌론은 여전히 문화적 중심지였고, 마르두크의 에산길라 신전은 방대한 장서와 사제들의 학문
으로 명성을 유지했다. 파르티아 시대의 바빌론 인구는 상당히 감소했지만 그래도 2만~3만 명에 달했
을 것으로 추산된다. 바빌론어가 더 이상 바빌론과 여타 고대도시들에서 일상생활 언어로 사용되지 않
고, 아랍어가 주로 사용된 지 수세기가 지났다. 그러나 전통적인 쐐기문자 기록법은 여전히 신전과 신
전 공동체에서 바빌론어와 이미 사어가 된 수메르어 텍스트를 읽고 기록하는 데 사용되었다.
이후 쐐기문자 문화는 에산길라 및 바빌로니아의 다른 신전들에서 살아남았지만, 점차 의례ㆍ주술ㆍ의
식 및 천문학의 용도로만 쓰이게 되었다. 가장 마지막으로 알려진 쐐기문자 텍스트는 천체의 움직임에
대한 관찰 보고서인데, 이는 미래에 대한 신의 설계를 이해하는 데 꼭 필요했다. 바빌론에서 알려진
가장 마지막 텍스트는 서기 74년에 쓰인 것이고, 우루크의 경우는 몇 년 후인 서기 79년이다.
한편 바빌론 신전의 의례는 많은 비용과 시간, 인력을 필요로 했다. 매일 신들을 돌보고 먹이고 즐겁
게 하기 위해서 수십 명이 참여했다. 그런데 기원전 484년 반란 이후 실시된 크세르크세스의 개혁은
신전 숭배 참여의 매력이었던 주요 특권, 즉 세금과 부역 면제를 없애 버렸다. 이렇게 신전 의례가 사
회적 중요성을 잃어 가자, 신전들은 버려지기 시작했다. 자연스럽게 쐐기문자의 시대 역시 종말을 고
했다. 바빌론어와 수메르어로 기록된 전례와 기도문, 의식과 노래들은 더 이상 필요하지 않았다.
서기 3세기 또는 4세기에 에산길라의 예배가 중단되자, 바빌론의 심장부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게 되
었다. 하지만 주민들은 여전히 그곳에서 삶을 이어갔다. 네부카드네자르의 여름 궁전이 있었고, 북쪽
끝에는 파르티아의 요새가 있었으며, 서기 10세기에 지리학자 이븐 호갈이 ‘이라크에서 가장 오래된
도시’라고 부른 바빌 마을은 그 후에도 명맥을 이어갔다. 화려한 과거의 발굴이 시작될 때까지도 잊힌
대도시의 명성을 유지했다. 파르티아, 사산 및 아랍 시대에 걸쳐 바빌과 기타 고대도시에서 발견된 동
전을 통해 주민들이 계속해서 정착해 왔음을 알 수 있다. 한편 에산길라의 마르두크 숭배가 끝난 후에
도 일부 전통적인 바빌론 학문은 신전공동체와 쐐기문자의 제약을 넘어 가치를 인정받았다.
아무튼 서기 1세기의 원본 텍스트뿐 아니라 다양한 학문의 전통적 기록을 통해 바빌론의 지식이 후대
로 이어졌다. 바빌론의 장서 〈에누마아누 엔릴〉ㆍ〈이쿠르 이푸시〉ㆍ〈슈마 알루〉에 담긴 육상 및 천
상의 징조는 만다교의 황도십이궁 서책에 보존되었으며, 바빌론 주술문의 내용은 만다교 주술 필사본
에 잘 드러나 있다. 『바빌론 탈무드』 또한 고대 바빌론의 지식을 후대에 전해준다. 『바빌론 탈무드』
는 서기 3~5세기 사이 이라크 남부의 사산제국 지역에서 유대교 학자들에 의해 편집되었는데, 바빌론
이라는 이름은 바빌론 도시뿐 아니라 바빌로니아 전역에서 가져온 것이다. 이 지역은 ‘순수한 혈통’으
로 여겨졌으며, 이곳의 유대인은 별다른 확인 없이 통혼이 가능하다고 인정되었다. 만다교 서책과 마
찬가지로 『바빌론 탈무드』는 고대 바빌론의 징조와 의학 및 주술 지식을 보존하고 있다.
이것들은 모두 지식 전수의 통로가 되었다. 한때 철저하게 통제되던 바빌론의 관측천문학과 수리천문
학은 이제 고대 세계 전역으로 전파되어 각광받았다. 예로 스트라본( 『지리학』 ⅩⅥ 1.6)과 장로 플리
니(서기 23~79년, 『박물지』 Ⅵ 123)의 저술에는 바빌론과 자매도시인 보르시파와 시파르, 남부의 우
루크(그리스어로 오르코에)에서 활동한 유명한 천문학자들이 언급되어 있다. 바빌론 천문학의 업적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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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빌론의 역사

학자들을 통해 전파되었는데, 그중 가장 유명한 것은 알렉산드리아의 클라우디오스 프톨레마이오스(서
기 100~170년)의 저술이다. 그리스어로 쓰인 그의 저술은 이후 라틴어와 아랍어로 번역되었고, 근대
초기에 이르기까지 천문학과 점성술에 큰 영향을 미쳤다. 오늘날 우리가 이용하고 있는 많은 별자리와
황도십이궁은 바빌론의 유산이다. 또한 60진법은 우리의 매 순간을 시간, 날짜, 달과 연으로 구분하는
기초로 사용되고 있다. 다음번에 시간을 확인하게 되면 바빌론을 떠올려 보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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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빌론의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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