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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영화,리뷰,

(요약본)비우면 비로소 깨닫는 것들

by Casey,Riley 2021. 9.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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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인츠 지음 / 미래문화사
일상에 지치고 힘든 생활 속 내 마음 같지 않은 현실에서 자신이 가고 있는 길이 맞는지 고민
하고 있다면, 인생을 새롭게 바라보는 관점이 필요합니다. 하루하루 바쁘게 사느라 자신을 돌
아 볼 여유가 없으면서도 무엇인가 해야만 비로소 마음이 편해지나요? 그런 당신에게 비우고
내려놓으라고, 그래도 절대 큰일 나지 않는다고 용기를 줍니다. 이 책은 ‘장자’에 수록된 이야
기 가운데 88개의 핵심적인 이야기를 제시한 후 그에 대해 현대적인 해설을 담았다.

비우면 비로소 깨닫는 것들
천인츠 지음

▣ 저자 천인츠
문학박사, 푸단대학교 중문과 교수, 학과장. 도가, 불교와 중국 고전문학 전문가.
『무위와 소요 : 『장자』 여섯 챕터』, 『불교문학』, 『문학 전통, 그리고 중고 시기의 도가와 불교』
등 여러 종류의 학술 저작이 있다.

▣ 역자 문현선
이화여대 사학과와 중문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 중문과에서 석사 박사 학위를 받았으며, 현재 세종
대학교에 재직 중이다. 인문연구모임 문이원에서 고전 재해석과 다시 쓰기 작업을 진행 중이며, 중한
번역자로서 주로 문학 작품과 인문서를 번역하였다. 『삶에서 앎으로 앎에서 삶으로』, 『무협』, 『삼
자경: 배움이란 무엇인가』(공저), 『거스르지 않는다』(공저), 『신화, 영화와 만나다』(공저), 『중화미
각』(공저) 등 다수 저작이 있다. 옮긴 책에는 문학 작품으로 『암시』, 『거싸얼 왕』, 『나는 남편을 죽
이지 않았다』, 『나 제왕의 생애』, 『끝에서 두 번째 여자친구』, 『투표 합시다』, 『모모의 동전』,
『정말 좋은 걸까?』, 『빨간 물고기를 따라간 날』 등이 있고, 인문서로 『장자를 읽다』, 『꿈의 해
석을 읽다』, 『반경: 전략이란 무엇인가』, 『삼국지 교양 강의』 등이 있다.

▣ Short Summary
흔히 마음을 비우면 모든 것이 편해진다고 합니다. 그러나 왠지 나만 뒤처지는 것 같아 불안하고 우울
해지는 감정이 섞여 혼란스러웠던 경험들이 한번쯤은 있을 것입니다.
공허한 마음을 달래려 책을 뒤적여 보기도 하고, 어디선가 들어본 인생 명언도 찾아보지만, 현실은 언
제나 제자리인 당신에게 세상과 적당한 거리를 두고 자기 삶을 관찰할 수 있는 친절한 인생 안내서가
되어줄 것입니다.
『비우면 비로소 깨닫는 것들』은 단순히 장자가 전하는 이야기를 해석하는 데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지금 여기에서 살고 우리에게 그 이야기들이 어떤 의미가 있는지를 알려줍니다. 이 책을 통해 창조적
사고법을 배울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사물과 현상을 어떻게 바라봐야 하는지, 그동안 우리는 너무 형식
에 얽매여 있지는 않은지 생각해볼 기회를 갖게 될 것입니다. 장자의 말을 이해함으로써 삶의 지혜를
배우고 사회가 만들어놓은 틀에 갇혀 답답했던 마음이 뚫리는 시원함을 느낄 수 있을 것입니다.

▣ 차례
들어가는 말 | 장자는 물고기와 대화할 수 있었을까?
1 사람의 마음이 하늘보다 더 넓다 / 2 물은 배를 띄울 수도, 엎을 수도 있다 / 3 사람이 더 아프다
4 마음속으로 편안함을 누릴 수 있으면 스스로 높아진다 / 5 정말 필요로 하는 것은 무엇인가 / 6 요리
사를 얕잡아 본 것이 아니다 / 7 보아도 보이지 않고 들어도 들리지 않고 / 8 말의 냄새와 맛
9 삶을 되돌아보는 슬픔 / 10 그의 모든 것을 사랑한다는 것, 결점을 포함해서 / 11 저를 알고 나를 아
는 것 / 12 『장자』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면 / 13 자신의 길은 자신이 가는 것 / 14 지금 이 순간을 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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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우면 비로소 꺠닫는 것들

고 있는 모두가 기뻐하는 쪽으로 / 15 우리는 어디서 세계를 보는가 / 16 더 이상 고독하지 않다 / 17
미인을 보기가 두려워라 / 18 놀라서 잠에서 깬 뒤 길게 한숨을 쉬누나 / 19 몽상이 현실을 비추어 준
다 / 20 잎새 하나가 떨어지는 것을 보고도 가을인 것을 안다 / 21 나쁜 일을 하지 말고 좋은 일도 하
지 마라 / 22 감정에 대한 일은 우리 스스로가 조절할 수 있다 / 23 스스로 먼저 하고 남을 뒤로 하라
/ 24 그린 눈썹의 진하기가 유행에는 맞는지 / 25 새는 날아가면서 흔적을 남기지 않는다 / 26 우회하
여 전진하다 / 27 『장자』에서 감동을 주는 건 주동인물이 아니다 / 28 굽어보기부터 우러러보기까지 /
29 때리는 것은 친해서이고 욕하는 것은 사랑해서이다 / 30 ‘쓸모 있다’는 것은 어떤 쓸모인가 / 31 아
버지와 아들, 그리고 쌍둥이 / 32 고요함이야말로 모든 것을 움직이게 한다 / 33 정치, 종교, 문학 속
의 거울 / 34 다시 보아야 알 수 있는 아름다움 / 35 사물에 미련을 두지 마라 / 36 도 안에서 모두를
잊다 / 37 혼돈에게 한 표를 / 38 큰일에서는 흐리멍덩하지 않는다 / 39 살신성인이 옳은 일인가 / 40
작은 도둑이든 큰 도둑이든 마찬가지 / 41 큰 도둑의 경험으로 이룬 큰 성공 / 42 나쁜 사람들이 더 잘
가지고 논다 / 43 큰 도둑의 두 손44 가장 좋은 통치자는 감각되지 않는다 / 45 힘을 쓰는가, 아니면
마음을 쓰는가 / 46 호랑이는 아름다운가 / 47 그래도 책은 읽어야 하는가 / 48 서시가 가슴앓이를 하
지 않았더라면 / 49 멱을 감는 원숭이는 관을 쓰지 않는다
50 여가는 사유의 온상 / 51 순수한 즐거움은 생명에 뿌리를 내린다 / 52 파리에서 선포하는 유행 컬
러 / 53 지나치게 교양이 있어서도 안 된다 / 54 장자와 수다를 / 55 우리는 지금 도 위에 서 있다 /
56 큰 것을 쓰는 데 어설프다 / 57 도를 아는 것과 잘 활용하는 것 / 58 하늘과 땅 사이에 자연인 하
나 / 59 난세에서 구차히 생명을 보존하려면 / 60 눈으로 기러기를 배웅하다 / 61 칠보 누대는 산산이
부서져도 사금파리가 되지 않는다 / 62 이치를 감정으로 바꾸어 / 63 어떤 사람은 살아 있지만, 이미
죽은 몸이다 / 64 알지 못하는 사람은 두려움이 없다 / 65 장자와 맹자의 공통 언어 / 66 판돈이 커질
때 / 67 똑똑한 바보 / 68 외로운 돛단배 먼 그림자 푸른 하늘 끝까지 / 69 난세를 가늠하는 표준 / 70
까닭 없이 합해지면 까닭 없이 갈라진다 / 71 그른 것이 익숙해져 바른 것이 된다
72 사람의 마음이 산이나 강보다 험하다 / 73 마음이 죽은 것, 그리고 마음이 재처럼 식은 것 / 74 겸
허하게 귀를 기울이고 살펴 알기를 / 75 「난정집서」라는 복제품 / 76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서는 침
묵을 지킨다 / 77 현인은 어떻게 스스로 머물 곳을 찾는가 / 78 있음과 없음 사이 / 79 당신은 어쨌거
나 다리를 건너야 한다 / 80 천하가 흐리거든 장자와 이야기하지 마라 / 81 당신 자신을 소중히 여기세
요 / 82 은거하는 선비를 자처하면서 / 83 손바닥 뒤집듯 구름이 뒤덮고 비가 내리면 / 84 일주일에 한
가지 즐거움 / 85 더할 나위 없는 즐거움 / 86 형체를 감추고 그림자를 없애다 / 87 진정한 감정은 형
식에 얽매이지 않는다 / 88 장례를 치르지 않는 게 낫다
나오는 말 | 마음 가는 대로 장자의 말을 음미해 보라
옮긴이의 말 | 장자의 언어 안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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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우면 비로소 꺠닫는 것들

비우면 비로소 깨닫는 것들
천인츠 지음

마음속으로 편안함을 누릴 수 있으면 스스로 높아진다
온 세상이 찬미하더라도 그 때문에 더욱더 노력하며 분발하지 않고, 온 세상이 반대하더라도 그 때문
에 더욱더 풀이 죽거나 실망하지 않는다. 그는 자기에게 내재하는 것과 몸 밖의 사물을 분명히 구분할
줄 알며, 영예와 치욕의 한계 또한 분명히 안다. - <소요유>
사람은 사회 속에서 살아갑니다. 중국 문화에서 유가적인 전통은 특히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를 중
시하지요. 이른바 “임금은 임금답고 신하는 신하다우며, 아버지는 아버지답고 아들은 아들다워야 한
다”)『논어』 <자로>)와 같은 말은 각각의 사람들이 자신의 사회적인 역할을 잘 수행해야 한다는 점을
특별히 강조합니다. 이것은 물론 긍정적인 의미를 지닙니다.
어쨌거나 이러한 사회라야 안정되는 법이지요. 하지만 사회의 조직은 각각의 개인이 자기 권리의 일부
를 양보하고 서로 협조한 결과로 구성되는 것이므로, 결국 자아의 욕망과 이익, 자유가 어느 정도 제
한될 수밖에 없었다. 어찌할 수 없이 그렇게 되는 측면이 있지요. 하지만 더 나쁜 상황은 적지 않은 사
람들이 그와 같은 이치를 이해하지 못한 채 외재적인 가치를 경쟁의 목표로 삼고 지나치게 추구한 나
머지 자아를 상실하는 지경에 이르는 것입니다.
장자가 의미하는 바는 바로 이 지점에서 눈에 띄게 드러납니다. 키워드는 “내재하는 것과 몸 밖의 사
물을 분명히 구분” 하는 데 있습니다. 무엇이 내 몸 밖의 사물이고, 무엇이 내 안에 내재하는 것인지에
대한 구별은 개인에게 있어서 무척이나 중요한 것입니다. 남과 관계를 맺고 지내는 일은 한편으로는
외재적인 것이지요. 어쨌든 나와 다른 개체가 관계를 맺는 일이다. 외재적인 것과 별개로 자아의 내적
수요와 가치를 파악하고 유지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자아의 내재적인 추구를 불 보듯 훤하게 알고 있다면, 외재적인 영욕은 더 이상 나를 좌우하지 못합니
다. 세상의 들끓는 논쟁거리들도 자아의 본성에 명백히 부합하는 것을 알면 “비록 천만 사람이 아니라
해도 나는 간다”(『맹자』<공손추> 상)라는 담대한 마음이 생겨 물러서지 않게 되는 겁니다. 또한 세상
사람 모두가 찬사를 아끼지 않더라도 마음을 들썩대며 스스로 추구하지 않는 것은, 하는 일이 외재적
인 것을 얻기 위함이 아니라 스스로 추구하는 바에 뿌리를 두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외재적인
것들은 모두 무게를 둘 만한 것이 아니라는 이야깁니다. 이 세속적인 삶의 무대에서 이와 같은 태도는
매우 높은 경지를 보여 주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이와 같은 경지에 이른 사람은 마음속으로 편안함
을 누릴 수 있어 스스로 높아진 것입니다.

정말 필요로 하는 것은 무엇인가
뱁새는 깊은 숲속에 둥지를 틀지만 가지 하나를 넘기지 않으며, 두더지는 황하의 물을 마신다 해도 배
를 채우는 데서 더 나아가지 않는다. - <소요유>
장자는 <추수>편에서 이미 사람이 하늘과 땅 사이에서 점하는 위치란 기껏해야 큰 산 속의 작은 바위
하나거나 작은 풀과 가지 따위라고 말했습니다. 작은 풀과 작은 바위는 큰 산의 관점에서는 송곳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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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우면 비로소 꺠닫는 것들

꽂을 곳에 불과하니 굳이 말을 할 것도 없지요. 이 작은 풀과 작은 바위의 필요는 물론 훨씬 더 적어
질 수도 있습니다. 어쩌면 한 방울 이슬이나 한 줌의 햇볕일 수도 있지요.
사람이 한 세상을 사는 동안 정말 필요로 하는 것은 아주 적습니다. 문제는 사람의 마음이 필요로 하
는 것, 그 욕망이 무지막지하게 크다는 사실이지요. 옛날의 제왕들은 삼천 명의 아름다운 미녀를 후궁
에 두었지만 평생 한 명의 사랑하는 사람을 얻어 행복하기도 어려웠지요. 요즘 여성들이 신는 신발은
높고 낮고 뾰족하고 둥글고 온갖 형태를 갖추고 있지만, 한 종류의 신발이 10년 동안 유행하는 일은
거의 없습니다. 이러한 만족은 허구의 욕망이라고 할 수 있으며 실재적인 삶의 필요는 아니라고 할 것
입니다. 장자는 가장 실재적인 삶의 입장에서 진실된 말을 전하고 있는 셈입니다.
만족함을 알아야 늘 즐겁다는 말이 있지요.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다고 하면 아마도 즐겁기가 매우 어
려울 것입니다. 그러나 몸이 쉴 만한 가지 하나, 배부르도록 먹을 음식을 갖추고 난 뒤라면, 점점 더
많은 것을 가진다고 해서 점점 더 즐거워지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어린 시절의 소소한 즐거움을 돌이
켜 볼 때, 사람들은 종종 그 즐거움이 더욱 풍부한 유형의 자원 위에 세워진 것은 아니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지요. 오늘날 물질적 삶의 수준 향상은 의심할 여지가 없는 것이지만, 조사에 따르면 행복감
은 절대로 이와 비례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오히려 그와는 반비례하는 경우도 있지요.

그의 모든 것을 사랑한다는 것, 결점을 포함해서
이치라는 것은 작은 성과에 의해 가려지고, 말이라는 것은 화려한 수사에 의해 가려진다. - <제물론>
“말이라는 것은 화려한 수사에 의해 가려진다.” 이 말은 비교적 쉽게 이해가 갑니다. 화려한 미사여구
는 종종 진심이 담긴 말의 참뜻을 가려 버리곤 하지요. 오늘날의 세계를 생각해보면, 한 가지 사건에
대해서도 서로 다른 입장의 말들이 존재하고 정보는 넘쳐나는데, 도대체 무엇이 진리인지는 알기가 더
어려워지고 있습니다. 왁자지껄한 소음은 사람들이 고요하게 진리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기 힘들게 만
들지요. “이치라는 것은 작은 성과에 의해 가려진다” 이 말은 아무래도 약간의 설명이 필요한 듯합니
다.
장자는 큰 이치라고 하는 것이 일종의 전체라고 생각했습니다. 세상의 만물은 모두 이치 안에서 서로
통하고 어우러지는 것이지요. 만약 우리가 어떤 한 부분을 돋보이게 하고 두드러지게 만든다면, 그 돋
보이고 두드러진 부분은 일단 어느 정도 성과를 보이는 것처럼 느껴지겠지만, 실제로 전체 이치의 관
점에서 본다면 역시 어떤 부분의 훼손이 되는 겁니다. 예를 들어, 큰 나무를 잘라서 들보나 서까래를
만드는 것은 물론 좋은 일이겠지만, 그런 경우 곁가지나 잎은 어찌 될까요? 그런 부분들은 버려지고
말 것이니 훼손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곁가지나 잎만 훼손되는 것이 아니고, 다른 한편으로는 멀쩡
하게 서 있던 나무 한 그루가 사라지는 것이니, 이 또한 훼손이 아니겠습니까?
아마도 어떤 사람들은 이렇게 말할 겁니다. 그것들은 쭉정이를 버리고 알곡을 취하는 이치와 같지 않
습니까? 무엇이 나쁘다는 겁니까? 장자는 이에 대해 동의할 수 없다고 했습니다. <추수> 편에서 올바
르다고 하는 것만 취하고 그르다고 하는 것은 모두 버리는 것이 왜 온당치 않은지에 대해 나름의 대답
을 보여 주었지요. “이것은 천지와 만물의 이치에 밝지 못한 것이다. 어찌 하늘만 있고 땅이 없으며,
양만 있고 음은 없을 수 있겠는가?”
세상 모든 것은 서로 상대되는 짝으로 이루어집니다. “모든 사물은 서로 상대적으로 대비를 이루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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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우면 비로소 꺠닫는 것들

이지, 하나만 단독으로 이루어지는 경우는 없다.” 만물에는 양면이 있는 법이지요. 중국 근대의 홍일법
사 리수퉁 큰스님도 원적 전에 다음과 같은 유언을 남겼습니다. “슬픔과 기쁨이 교차한다.” 삶 전체는
놓고 보자면, 모두가 그렇지 않을까요? 즐거움만큼 슬픔도 있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는 서로를 이해하면서 마주하고 더 관대하게 공감하며 알아가는 마음을 가져야 하는 겁니
다. 어떤 사람에게 좋은 면이 있다면 우리는 물론 기뻐하고 그것을 마음에 들어 할 겁니다. 하지만 그
처럼 좋지는 않더라도, 또는 아주 나쁜 부분이 있더라도, 사실 그것은 필연적으로 그렇게 될 수밖에
없는 요인을 가지고 있을 겁니다. 연애를 할 때는 종종 그런 말들을 합니다. 상대방의 모든 것을 사랑
한다, 상대방의 결점까지도 사랑한다고 말이죠. 장자도 연애할 때 틀림없이 그런 생각을 했을 겁니다.

자신의 길은 자신이 가는 것
길이라는 것은 사람이 다녀서 만들어지는 것이다. 사물이라는 것은 사람이 이름을 붙여서 의미가 생기
는 것이다. - <제물론>
루쉰은 일찍이 다음과 같은 명언을 남긴 적이 있습니다. “세상에는 원래 길이 없었다. 다니는 사람들이
많아지니, 그대로 길이 된 것이다.”(<고향>) 이와 같은 뜻을 장자는 위의 글을 통해 이미 밝혔던 것입
니다.
현대 사회에서, 우리는 길에 대해 그다지 특별한 느낌을 갖지 못합니다. 길이라는 것은 이미 존재하는
것이고, 우리 앞에 펼쳐져 있어서 설사 ‘문을 걸어 닫고 차를 우리지’ 않더라도 ‘문을 나서면 그대로 길
이 있는’ 상황에 놓여 있습니다. 문을 열고 집을 나서면 어디든 길인 거지요. 그러나 이러한 길은 원래
부터 있던 것이 아닙니다. 길은 사람들이 어디론가 다니기 시작하면서 만들어진 것입니다.
이미 존재하는 길을 다닐 때, 우리는 선택의 문제에 직면합니다. 미국 시인 프로스트의 시 중에 <가지
않은 길>이라는 제목의 시가 있지요. 시인은 노란 잎이 우거진 숲속에서 고요하고 한적한 두 갈래 작
은 오솔길을 발견하고, 결국 그중에 더 조용한 길을 선택하지요. 수많은 시간이 흐른 뒤, 시인은 처음
그때의 결정을 돌이켜 생각하며 그 선택이야말로 자신의 일생을 결정지은 중요한 선택이었다는 사실을
절감합니다.
“나는 사람들이 덜 밟은 길을 택했고, 그리고 그것은 모든 것을 바꾸어 놓았다.” 걸어가야 할 길을 결
정하는 과정이 시인에게 인생에 대한 감상을 불러일으킨 것입니다. 인생의 길은 형태가 없는 듯하지만,
그래도 같은 이치를 따릅니다. 게다가 우리는 어떤 길이라도 다른 사람이 이미 밟은 것과 같은 길을
따라갈 수가 없지요. 사람들은 오직 그 자신의 길을 직면하고 스스로 그 길을 선택하며 나아갈 수밖에
없으니까요.

몽상이 현실을 비추어 준다
옛날에 장주가 꿈에서 나비가 되었다. 하늘하늘 나는 나비는 얼마나 자유로운가! 자신이 장주인 줄도
몰랐다. 순간 깨어 보니 여전히 장주 자신이었다. 장주가 꿈에 나비로 변한 것인지, 나비가 꿈에 장주
로 변한 것인지? 장주와 나비는 틀림없이 서로 나뉘어 있는 존재다. 이것을 일컬어 사물 변화의 이치
라 한다. - <제물론>
이것은 아마도 고대 중국에서 가장 아름답고 가장 아스라하면서 황홀한 꿈일 것입니다. 『장자』라는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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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우면 비로소 꺠닫는 것들

에는 여러 차례 꿈이 등장합니다. 이 이야기 속에서 장자는 자기 자신을 주인공으로 삼고 있지요. 갑
자기 꿈에서 깨어났을 때, 그는 아직 팔랑대며 날아다니는 나비의 상태에서 빠져나오지 못했습니다.
어쩌면 살짝 믿을 수 없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순간의 황홀함이 현실과 꿈을 구별할 수 없게 만들었
던 것이겠지요. 그러나 그는 알고 있었습니다.
두 세계 사이에는 분명한 경계와 제한이 있으며, 분명히 나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이러한
의식은 장자가 이 순간 현실에 속해 있다는 사실을 알려줍니다. 만약 그가 여전히 나비의 상태로 즐기
고 있었다면, 스스로 그 즐거움을 누리며 거짓이 아니라고 여기고 있었다면, 어떻게 이처럼 분명히 현
실을 인식할 수 있었겠습니까?
그렇다면 이런 판단은 절대적인 것일까요? ‘갑작스럽게 깨달음’ 이전에 장자와 나비를 구별하는 것은
중요한 일이었을까요? 그와 같이 스스로 즐거움을 누리는 느낌은 참된 것이 아니었을까요? 그저 헛된
환상에 지나지 않았을까요?
꿈은 분명 현실 속에서 쉽게 손에 넣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와 아주 깊은 연관
을 맺고 있지요. 그것을 통해서 우리는 확연히 다른 세계와 소통할 수 있는 채널을 갖는 것입니다. 이
러한 소통은 참된 것이고, 그래서 우리는 한 걸음 더 나아가 다른 세계를 경험할 수 있게 됩니다. 우리
는 자기 자신과 세상의 만물이 서로 통할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지요.
장주와 나비, 현실과 몽상 사이의 결합은 장자를 곤혹스럽게 하기도 하고 집착하게 하기도 했습니다.
장자의 경험과 연관되는 것으로서 무한한 상상 속으로 그를 인도하였을 뿐 아니라 실재 세계에서 마주
하는 대상의 본질을 반성하고 궁리하게 만든 것입니다.

굽어보기부터 우러러보기까지
시작은 단순하지만, 그 끝은 장차 번다하리라. - <인간세>
장자의 이 말은 일상적인 관찰과 경험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아주 평범하면서도 심오한 이치를 담고
있지요. <인간세>를 둘러싼 환경에서 보건대, 장자는 아마도 부정적인 측면의 의미를 말하고자 했던
것 같습니다. 그는 관찰을 통해 인간 세상의 여러 상황에 통달했습니다. 지혜와 계교로 서로 이기고자
다투는 사람들도 처음에는 모두 광명정대한 방법을 사용합니다.
하지만 결국 마지막에는 차마 눈 뜨고 보기 힘든 비열한 방식을 동원하게 되지요. 극단에 이르면, 그
괴상망측함을 이루 다 헤아릴 수도 없게 됩니다. 예의에 걸맞게 술을 마시는 사람들도 처음에는 매우
단정하게 규율을 준수하지만 나중에는 취해서 이성을 잃고 극단적으로 나아가게 되면 소란을 떨면서
자신의 즐거움만 탐닉하게 되지요.
세상 일이 모두 다 이러합니다. 처음에는 서로를 믿다가 결국 나중에는 종종 서로를 속이고 배신하는
지경에 이르지요. 그래서 장자는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시작할 때는 모든 일이 다만 소소해 보이지만,
결국 나중이 되면 커다란 재앙으로 변해 버린다고, 가장 명확한 대책은 아직 미미해서 잘 보이지 않을
때 완벽하게 단속해야 미연에 화를 방지할 수 있다는 것이 장자의 생각입니다.
하지만 이 말은 맥락을 떠나게 되면 제대로 이해하기가 힘들어집니다. 세상의 모든 일에는 시작이 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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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우면 비로소 꺠닫는 것들

고 중간이 있고 끝이 있습니다. 싹이 트고 잎이 자라고 꽃이 피고 열매를 맺기까지 장대한 과정이 있
는 법이지요. 까마득히 높은 빌딩이라도 모두 땅에서부터 지어 올리는 것입니다. 처음에는 모두 땅에
서, 심지어는 위를 감당할 수 있을 만큼 아래로 땅을 파는 것에서 시작하지요. 굽어보기부터 시작해서
점점 우러러보는 쪽으로 변화하는 게 아니겠습니까?

다시 보아야 알 수 있는 아름다움
사람의 덕이 뛰어나면, 그 외형은 잊히기 마련이다. 사람이 잊어도 되는 것을 잊지 않고, 잊지 말아야
할 것을 잊는 것, 그야말로 진짜 ‘잊음’이라 할 것이다. - <덕충부>
사람의 외형은 타고나는 것이며, 일반적으로 이 외형적인 모습은 수많은 변화의 가능성을 지닙니다.
그러나 사람의 내면적인 수양은 전적으로 그 자신의 마음가짐과 노력 여하에 달려 있지요. 이 두 가지
표현이 밖으로 드러나면, 하나의 외모는 아름다움이 되고, 다른 하나는 기질의 아름다움이 됩니다. 외
모의 아름다움은 첫눈에 들어오는 아름다움이고, 기질의 아름다움을 다시 보아야 알 수 있는 아름다움
이라고 하겠지요.
처음의 인상, 그러니까 첫눈에 들어오는 아름다움은 말할 것도 없이 압도적인 힘을 지니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모두 아름다움을 사랑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지요. 이것은 ‘아름다움’이라는 것이 주로 외모의
형상에서 온다는 사실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점점 시간이 지날수록 기질의 아름다움이 소리 없이 드러
나는 법이지요.
위령공이 좋아하는 사람은 등이 굽은 곱사등이었습니다. 입술이 없고 목에는 커다란 종기까지 나 있었
지요. 이러한 외모를 가진 사람에게 한눈에 반하는 일은 거의 불가능합니다. 아마도 처음에는 두려워
꺼리는 마음이 있었을 것이고 싫어하거나 미워할 수도 있었을 겁니다. 그러나 점차 군주의 마음을 얻
게 된 것은 내면적인 미덕 때문이었을 테지요. ‘덕’은 ‘덕성’을 가리킵니다. 동시에 여기서 ‘덕’은 ‘얻는
다’라는 뜻도 지니고 있습니다. 말하자면, 사람이 ‘얻은’, ‘도’의 일부라는 뜻이지요. 스스로 ‘도’로부터
얻어낸 ‘덕’은 그 사람의 완전한 소유이며, 절대로 잊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잊히지 않는 것이기도
하지요). 외형적인 적들은 굳이 기억해야 하는 것도 아니고, 또 아예 기억할 필요가 없는 것이기도 합
니다.
외모가 추악한 사람의 내면을 좋아하고 그 외형적인 특징을 잊는 것은, 그 사람이 지니고 있는 내면적
인 미덕이 전체가 될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 ‘덕’이 진실로 ‘뛰어난’ 경우에만 가능한 일이겠지요. 그렇
지 않다면, 우리가 외형적인 추악함을 잊은 다음에 또 무엇을 기억할 수 있겠습니까?

작은 도둑이든 큰 도둑이든 마찬가지
세상 사람들은 모두 뭔가를 위해 죽는다. 어떤 사람은 인의를 위해 죽어서 사람들이 그를 군자라 일컫
는다. 어떤 사람은 재물을 위해 죽어서 사람들이 그를 소인이라 일컫는다. (그래도) 뭔가를 위해 죽었
다는 점에서는 모두 같다. 군자라고 일컫기도 하고 소인이라 일컫기도 하는 경우가 있을 뿐이다. - <병
무>
모두가 “자신의 본성을 상하게 하고 결국 죽음에 이른다”라는 점에서 범하고 있는 잘못이 기본적으로
마찬가지라면, 그럼 그 가운데서 고하와 경중을 논하는 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요? 인의와 재물 사이에
분명한 차이가 있다는 생각은 세속적인 관념에서 나온 것입니다. 추구하는 목표에 고상함과 저열함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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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우면 비로소 꺠닫는 것들

차이가 있고, 그래서 군자와 소인이라는 서로 다른 이름을 붙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실, 그럴 필요가
있을까요?
비유를 하자면, 누구는 동전 몇 푼을 훔치고, 누구는 황금 같은 진귀한 보배를 훔치는 것의 차이가 있
더라도, 도둑질이라는 본질에는 차이가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일 텐데요. 크고 작음의 차이가 그리 큰
것일까요? 절도는 모두 자신의 것이 아닌 물건을 자기 것으로 만든 행위입니다. 가치의 크고 작음에는
차이가 있겠지만, 적은 돈을 훔친다고 해서 도둑질한 것이 아니라고 말할 수는 없지 않을까요?
장자는 『열자』에 등장하는 백이와 도척을 사례로 들었습니다. 백이는 원래 고죽국의 왕자였습니다. 그
는 주나라 무왕이 폭군인 상나라 주왕을 정벌하는 것은 명분이 있는 일일지라도 하극상이라고 생각하
고 그의 말고삐를 잡았습니다. 그는 주 무왕을 말리는 데 성공하지 못했지만, 스스로의 원칙을 지키기
위해 주나라의 곡식을 먹지 않고 결국 수양산에서 굶어죽었습니다.
도척은 “구천 명의 무리를 이끌고 세상을 멋대로 쏘다니며” “다른 사람의 소와 말을 몰아대고 남의 여
자들을 맘대로 취했”(<도척>)던 아주 유명한 강도로 결국은 동릉에서 죽게 됐지요. 그들 사이에는 ‘의’
와 ‘리’의 서로 다른 지향이 있었습니다만, 자신이 원하는 것을 쫓아다니다가 죽게 되었다는 점에서는
마찬가지로 그 자신의 근본을 잃은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만약 정말 저승이라는 것이 존재한다면 말
입니다. 백이는 도척을 동료로 여기지 않을지 몰라도 도척은 백이를 동지로 여길지 모릅니다. 도척은
‘성(聖)’, ‘용(勇)’, ‘의(義)’, ‘지(智)’, ‘인(仁)’을 언급한 적이 있으니까요.

순수한 즐거움은 생명에 뿌리를 내린다
옛날에는 뜻을 얻었다는 것이 수레와 관모를 얻음을 일컫는 것이 아니었고 더할 나위 없이 즐거움을
가리킬 따름이었다. 지금 뜻을 얻었다고 하는 것은 수레와 관모를 얻었음을 가리킨다. 수레와 관모가
몸에 있다 한들 생명 자체는 아닌 것을. 사물은 어쩌다가 와서 몸에 의지하는 것뿐이다. - <선성>
이백은 시에서 이렇게 읊었다. “사람이 태어나 뜻을 얻으면 모름지기 즐거움을 다할 것이라.”(<장진주
>) 그가 말하는 ‘사람이 태어나 뜻을 얻음’은 아마도 평생의 정치적인 포부를 펼치며 “임금을 위해 담
소를 나누어 북방을 안정”(<영왕동순가> 11수 가운데 제2수)시키는 일이거나 도가의 선경으로 날아가
“무지개로 옷을 삼고 바람으로 말을 삼았더라. 구름 같은 님들이 펄럭펄럭 나는 듯 오시네. 호랑이가
비파를 타며 난새가 수레를 돌리나니, 신선들이 어지러운 삼실 같더라”(<몽유천모음유별>)는 선경에
오르는 것이었겠지요. 시선의 즐거움에는 이유가 있었습니다. 그 이유는 장자가 보기에는 어쩌면 참으
로 가치가 있는 즐거움은 아니었을지 모릅니다. 장자는 세속적인 공적에 대해 동의하지 않았으니까요.
영원히 사는 일에 대해서도 역시 자연스럽지 않다고 여겼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모두 중요하게 생각하는 지위와 권세에 대해서도 장자는 우연히 얻어지기도 하고 우연
히 사라지기도 하는 것이라 여겼지요. <전자방>에는 손숙방의 이야기가 실려 있습니다. 견오가 그에게
이렇게 물었지요. “세 번이나 영윤이 되셨다가 세 번이나 물러나셨습니다. 그런데 어째서 좋아하거나
분노하거나 슬퍼하거나 원망하지 않으십니까?” 그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그런 것들은 모두 왔을 때
물리칠 수 없고 떠날 때 잡을 수 없는 것이다. 득실이 모두 나에게 달린 것이 아니기 때문이지. 그래서
걱정하는 기색도 없는 것이고, 내게 무슨 남보다 나은 구석이 있겠느냐!” 권세와 지위는 모두 타고난
그대로의 생명에 고유한 것이 아니라 우연히 찾아오는 것입니다. 그저 잠시 내 곁에 머물렀다가 가는
것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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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우면 비로소 꺠닫는 것들

장자가 마음을 기울인 것은 진정으로 순수한 즐거움이었습니다. 이러한 즐거움은 생명 자체에 뿌리를
내리는 것이고 사람의 본성 가운데 깃드는 것입니다. 본연의 생명을 보전할 수 있어야 누릴 수 있는
가장 가치 있는 즐거움이지요. 이와 같은 즐거움은 세상 사람들이 인정하는 갖가지 외부적인 가치에
의해 늘어나거나 줄어들지 않습니다. 이야말로 장자가 인정하는 ‘뜻을 얻음’이라 할 것입니다.

마음이 죽은 것, 그리고 마음이 재처럼 식은 것
슬픔 가운데 마음이 죽은 것보다 더한 것이 없으며, 사람이 죽어도 또한 그보다는 못하다. - <전자방>
몸의 죽음이라는 것은 물론 사람들이 슬퍼할 만한 것입니다. 그러나 일단 이것은 불가항력적인 자연의
일이지요. 장자는 이런 문제에 대해서 때에 따라 그에 순응해야 하며 평정심을 가지고 받아들일 수 있
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더욱이 장자가 비록 사람의 생명을 중요시한다 하더라도 그의 마음속에서 형체
를 기르는 일은 언제나 부차적인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마음’은 사람의 정신을 대변합니다. 마음이 죽
었을 때는 형체가 여전히 존재한다 하더라도 마치 좀비처럼 주검이 걸어 다니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마음이 죽었다는 것은 자아에 대해 긍정하는 마음을 잃었다는 뜻이지요. 자아의 자각적인 인식을 잃고,
생의 의지나 생의 추구를 잃었다는 의미입니다. 그것은 사람이 이 세상에서의 삶을 포기했다는, 아무
것도 마음대로 하지 못하게 되었거나 할 수 없다는 사실을 의미합니다. 언급할 필요가 있는 것은 여기
서 “마음이 죽은 것”과 장자가 즐겨 말하는 “마음이 재처럼 식은 것”이라는 상태입니다.(<재물론>). 이
두 가지는 절대 같은 것이 아니지요. “마음이 재처럼 식은 것”은 지극한 경지에 대한 한 가지 묘사라
하겠습니다. 번잡한 욕망이나 넘치는 지식 등을 일절 배제하고 마음을 완전히 비워서 평정의 극치에
이른 상태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때 사람의 마음속은 죽은 듯 적막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큰 도의 빛
을 찾아갈 준비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대종사> 편에서 공자와 안회는 ‘좌망’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좌망’은 형체를 잊고 총명을 묻은 채 커다란 도에 서로 합해지는 것이지요.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서는 침묵을 지킨다
알 수 없는 것에서 아는 것을 그칠 수 있다면, 지극히 아는 것이라! - <경상초>
도가는 무한한 지식 추구에 대해 회의하는 태도를 보여 줍니다. 한편으로, 그것은 생명을 얻는 지혜와
같은 것이 아니지요. 다른 한편, 지식은 무한한 것입니다. 우리는 고대 그리스의 어떤 이야기를 통해
이를 확인해 볼 수 있습니다.
고대 그리스의 어떤 철학자에게 학생이 있었습니다. 그가 어느 날 이런 질문을 했지요. “선생님, 선생
님의 지식은 우리들에 비해 몇 배나 많습니다. 선생님께서 말씀하시는 답안도 정확할 때가 많지요. 그
런데 어째서 선생님께서는 자신의 답을 끊임없이 회의하시는 겁니까?” 철학자는 손가락으로 책상 위에
크고 작은 원을 하나씩 그려 보이며 말했습니다. “큰 원은 나의 지식을 가리키는 것이고, 작은 원은 여
러분의 지식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두 원의 바깥쪽은 우리가 알지 못하는 부분을 가리키지요. 내가 아
는 것이 아마도 여러분이 아는 것보다는 클 것입니다. 그러니 내가 닿아 있는 알지 못함의 범위 또한
당연히 여러분보다 넓은 것이죠.”
이러한 어려움에 대해서 장자가 대응하는 방법은 자신의 지식 영역을 더 확대하고, 그럼으로써 다시
그 원의 면적을 넓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게 한다면 그가 마주하고 있는 무지의 면접 또한 자연히
늘어나겠지요. 그래서 그는 오히려 물러서는 쪽을 선택합니다. 영원히 점유할 수 없는 세계가 있다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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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우면 비로소 꺠닫는 것들

사실을 인정하는 것이지요. 그는 진정한 지혜라는 것은 오히려 접근할 수 없는 세계 앞에서 멈출 줄
아는 것이라고 생각한 겁니다.
현대의 철학자 비트겐슈타인도 이런 말을 남겼습니다.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서, 우리는 모름지기 침
묵을 지켜야만 한다.” 장자의 말도 같은 깨달음에서 온 것이라 하겠습니다.

더할 나위 없는 즐거움
하늘과 땅은 끝이 없지만, 사람이 죽는 데는 때가 있다. 이 유한한 육체를 무한한 세계에 맡기는 것은
신비로운 준마가 좁은 틈을 내달리는 것과 같이 갑작스러운 일이다. 그러므로 자신의 뜻을 기쁘게 하
지 못하고 그 생명을 잘 기르지 못하는 이는 모두 도에 통하지 못한 사람이다. - <도척>
생명은 유한한 것입니다. 순식간에 스쳐 지나가 버리지요. 마치 발 빠른 말이 작은 틈을 뚫고 지나가
는 이미지가 떠오릅니다. <장자>에는 이런 표현이 자주 보이기 때문에 낯설지 않습니다. <지북해>에도
비슷한 글귀가 있지요. “사람이 하늘과 땅 사이에서 사는 시간은 마치 백마가 작은 틈을 뚫고 지나는
것처럼 갑작스러운 일이다.”
이러한 현실에 우리는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 걸까요? 뭔가를 알고 있어야 그대로 해 나갈 수 있게 됩
니다. 결국 장자는 평온한 태도로 자연스럽게 삶을 받아들이라는 점을 다시 강조합니다. 이런 과정 속
에서 나의 즐거움을 다하는 것이 마땅한 일이라며, 우리는 또 왜 굳이 스스로를 괴롭히는 걸까요? 아
무거리낌도 없이 나의 모든 즐거움을 다할 수는 있는 걸까요?
물론 여기에도 어떤 선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장자는 언제 어디서든 원하는 만큼 즐기라고 주장한 것
이 아닙니다. 원하는 만큼 있는 대로 즐긴다는 것은, 결국 모든 것은 지나가 버릴 테니 온 힘을 다해
눈앞의 즐거움을 움켜쥐는 행위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일종의 절망적인 선택이라고 할 수 있지요. 거기
에는 일종의 퇴폐성, 기울어져 가는 운명에 저항하지 못하는 자포자기의 심정이 반영되어 있습니다.
장자의 즐거움은 좀 더 안온한 것입니다. 이 더할 나위 없는 즐거움은, 마치 다리 위에서 유유자족 노
니는 물고기들을 바라보는 것처럼, 대상과 내가 합일되는 물아일체의 자유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
마음의 뜻을 즐겁게 하는 것은 주어진 생명을 잘 보존하는 것이지 자신의 생명을 내버리는 일이 아닙
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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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우면 비로소 꺠닫는 것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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