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쉰 소설 전집
본래 의학도였으나 일본 유학중 낙후된 정신을 고
치는 것을 우선으로 생각하여 작가의 길로 나선
루쉰은 대표작「아Q정전」등을 통해 중국인들 뿐
만 아니라 봉건과 식민의 질곡 속에 빠져 있던 아
시아인 모두에게 충격을 준 바 있다.
루쉰 지음
루쉰 소설 전집
루쉰 지음
▣ 독서 나침반Ⅰ - 개관
고전과 만나는 계기는 다양하다. 우연하게 눈에 띄었는데 알지 못할 힘에 끌리기도 하고, 대학입시를
준비하다 만나기도 한다. 글자로만 만나는 것도 아니다. 만화로도 만나고 영화로도 만나며, 요즈음은
컴퓨터 게임을 통해서도 만난다. 고전과 독자의 관계도 일방통행만은 아니다. 첨단의 멀티미디어 환경
과 초국적 자본주의 체계는 고전을 더 이상 순수의 영역에 가둬두지 않는다. 읽고 마음에 담고 실천
하는 방식에서, 인터넷 게시판 소설이나 온라인 게임에서와 같이 읽고 다시 쓰고 변형하는 방식으로
고전이 소비된다. 고전이 안 읽힌다고 하지만 역설적으로 고전의 두루누리(유비쿼터스: 어디서나 존재
함)화가 진척되는 시대가 되고 있다.
고전과 만나는 계기와 방식이 다변화된 시대에, 전통적인 방식으로 고전을 대할 것을 주장하는 일은
고전을 죽이는 행위와 진배없게 된다. 실제로 많은 고전이 그렇게 죽어갔다. 고전의 장점은 그 자체에
시대와 지역을 초월한 절대적인 진리를 내장하고 있음에 있지 않다. 고전은 카오스일 따름이다. 모든
가능성이 발현되지 않은 상태로 담겨 있다. 독자는 저마다의 관심사와 필요를 갖고 고전에 들어가, 각
자의 필요대로 답을 얻고 길을 찾는다. 고전이 안겨주는 삶과 사회, 인간에 대한 본원적인 통찰과 해
석은 이렇듯 고전 바깥에서 이루어진다. 따라서 고전은 일종의 미디어(매체)다. 혼자 있어도 빛을 발하
고 시대와 지역을 초월하여 존재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독자와의 만남 속에서 그 가치가 확인되고
그 쓸모가 확산되는 존재이다.
루쉰(魯迅, 1881 1936)은 이런 면에서 꼭 짚고 넘어갈 우리 시대의 고전이다. 중국현대문학의 아버지
라 불리던 그는 중국에서뿐 아니라 중국 바깥에서도 가장 널리 알려진 현대 중국작가이다. 이는 그의
소설이 지닌 미디어로서의 뛰어난 성능 때문이었다. 실제로 중국인은 그를 통해 자신의 전통과 근대
를 성찰했고, 일본인은 그를 통해 자신의 근대와 근대 너머를 사유했다. 저마다 자신의 문제를 갖고
들어와 그의 소설에 비추어보고 뭔가 답을 얻어갔다. 지금- 여기의 고민을 비쳐볼 수 있는 거울, 루쉰
의 소설은 그래서 고전이 될 수 있었다.
『루쉰소설전집』에는 그가 평생 출간한 3권의 소설집이 모두 담겨 있다. 첫 번째 소설집은 『함성(訥
喊)』이다. 여기에는 중국 최초의 현대소설인 「광인일기」와 중국인의 본성을 날카롭게 해부한 「아
Q정전」 등 15편의 중단편소설이 실려 있다. 두 번째 소설집은 『방황』으로 여기에는 「축복」 등
11편의 단편소설이 담겨 있다. 세 번째 소설집은 『고사신편』이다. 옛 이야기를 다시 쓴다는 제목의
이 소설집은 일반 민중에게도 친숙한 신화나 전설을 현대적으로 각색한 작품 일색이다. 이 방식은 루
쉰이 고대와 현대에서 제재를 취하여 그들을 함께 얘기하는 방식이라고 밝혔듯이 오늘날 우리가 고
전을 대하는 태도에 많은 시사점을 던져준다. 고전은 늘 새롭게 쓰이고 만들어진다. 그건 콘크리트가
아니라 찰흙이다. 따라서 빚는 자의 의도에 따라 다양한 형상으로 빚어진다. 찰흙으로 작품을 빚어내
는 마음. 고전은 마음에 있는 것이다. (김월회 서울대 중어중문학과 교수)
▣ 독서나침반 Ⅱ
루쉰은 1918년 중국 최초의 현대소설인 「광인일기」를 필두로, 1935년까지 모두 33편의 단편소설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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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작하여 3권의 소설집으로 엮어 출간했다. 제1 소설집 『납함』은 1918년부터 1922년까지의 사이에
쓴 단편소설 15편(그 중에서 「아큐정전」만이 유일한 중편이다)을 모아 1923년 8월 베이징의 신조사
출판사에서 출판하였다. 1926년에는 개판하여 북신서국에서 『오합총서』의 첫 책으로 출판하였다.
1930년 1월에 제13판을 낼 때에는 15편 중에서 「부주산」 1편을 빼내어 14편으로 하였고, 이 「부주
산」은 후에 「하늘을 보수한 이야기」라고 제목을 바꾸어 제3 소설집인 『고사신편』에 수록했다.
제2소설집 『방황』은 1924년부터 1925년까지의 사이에 창작한 단편소설 11편을 모아 1926년 8월에
베이징의 북신서국에서 역시 『오합총서』의 하나로 출판하였다. 제3 소설집 『고사신편』은 1922
년~1935년 사이에 창작한 단편소설 8편을 모아 1936년 1월에 상하이의 문화생활출판사에서 빠진이 주
편하던 『문학총간』의 하나로 출판하였다. 루쉰의 작품으로는 소설 외에도 시, 산문, 수필, 평론 등이
있다. 1938년 최초로 『루쉰전집』10권이 루쉰전집출판사에서 출판되었고, 그 후 여러 출판사에서 그
의 전집이 출판되었다.
▶ 제1 소설집 『납함』
「자서」
이 서문은 1922년 12월 3일에 소설집을 펴내기 위하여 쓴 것으로 자서전적인 성격을 띠고 있다. 유년
시절부터 일본유학, 그리고 소설을 쓰게 된 동기 등이 비교적 상세하게 기술되어 있다. 주인공에게 소
설을 쓰게 한 사람인 진신이는 바로 그의 일본유학 시절부터의 친구인 첸센퉁으로, 그는《신청년》
잡지에 일찍부터 관계하였으며 문학 혁명의 기수로 활약하던 인물이다. 이 서문에서 5.4 운동 시기를
전후하여 그의 사상적 배경이 명확히 드러나 있다.
「광인일기」
1918년 5월호인《신청년》제4권 5호에 발표되었다. 중국 최초의 현대소설이라는 점에서 중국현대문학
사에서 획기적인 작품으로 간주된다. 또《신청년》으로서는 중국창작소설을 최초로 게재하였다는 것
으로도 의의가 크다. 그 때까지 중국소설은 문언체의 문인소설과 백화체의 장회소설로 크게 구분할
수 있다. 문인소설은 주로 단편으로 된 문언소설이고, 장회소설은 백화(白話: 중국에서의 구어체)로 된
장편소설이다. 장회소설이 비록 백화소설이라고는 하나 그 형식이 표제부터 고정화되어 있어 천편일
률이었다. 루쉰은 이러한 소설형식의 고정개념을 타파하고 새롭고 대담한 형식을 취했다. 또 형식면에
서뿐만 아니라 내용면에서도 여태까지 감히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예교의 타파를 주장하는 주제로 봉
건 사회의 기본사상을 근본부터 흔들어놓았다. 그는 한 광인의 입을 빌려 예교는 사람을 잡아먹는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이 소설은 수천 년 동안 봉건 사회에서 예교라는 사상에 속박되어 있던 중국
국민들의 기본사상을 뒤흔들어 놓아 독자들로 하여금 경악을 금치 못하게 하였다. 그의 소설은 형식
의 개혁뿐만이 아니라 내용에서도 대개혁을 일으켰다고 하겠다.
루쉰은 후에 「광인일기」를 쓰게 된 근거를 다음과 같이 말했다. 아마도 의지가 되었던 것은 모두가
지난날에 보았던 100여 편의 외국작품과 의학상의 조그마한 지식이 있었고, 이 밖에는 준비가 전혀
없었다. 이 글로 보아「광인일기」는 서양소설에서 영향 받은바 크다는 것을 알 수 있고, 특히 그가
일본유학 시절 심취했던 동구의 소설이 크게 영향을 미쳤던 것으로 여겨진다. 루쉰은 이 한 편의 소
설로 당시 문학혁명의 산실이라고 할 수 있는《신청년》그룹에 참가하게 되었고, 문학혁명운동의 대
열에 나서게 되었으며,「광인일기」는 반봉건 사상의 대표적 작품으로 유명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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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 권장도서 - 루쉰 소설 전집
「작은 사건」
1919년 12월 1일 베이징의《신보》부간에 발표되었다. 이 작품은 루쉰의 다른 어떤 작품보다도 밝은
작품이라는 평을 듣고 있다. 한 인력거꾼의 착한 마음을 묘사한 수필 같은 작품으로서 지극히 간단한
것이다. 루쉰의 작품은 거의 전부가 그렇다고 해도 될 만큼 사회의 어두운 면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
것이 특색이다. 1928년 혁명문학파와의 논쟁에서 혁명문학파가 공격의 대상으로 삼았던 것 중의 하나
가 바로 중국의 암흑만을 묘사하였을 뿐 광명의 희망을 제시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그만큼 루쉰의 작
품은 사회의 어두운 면이 강조되어 있다. 그런데 유독 이 작품만은 중국인의 밝은 면을 제시했다는
것으로 그의 작품 중 독특한 것으로 꼽히고 있다.
「고향」
1921년 5월, 《신청년》제9권 1호에 발표되었다. 루신은 1919년 말에 고향에 돌아가서 시골집을 정리
하고 전 가족이 북경으로 이사한 사실이 있는데 당시 고향에 돌아갔을 때의 사실을 작품화한 것으로
여겨진다. 루쉰의 작품 중에서 그 구성이나 묘사법이 뛰어난 걸작 중의 한 편으로 꼽힌다. 이 작품에
는 고향의 현재와 과거, 주인공 나와 어렸을 때의 친구 룬투와의 현재와 과거, 우리들 현시대의 좌절
과 희망, 우리의 다음 세대인 조카와 룬투의 아들에게 거는 미래의 희망 등이 아름다운 수처럼 곱게
무늬진 작품이라고 하겠다. 지금은 좌절의 시대에 살고 있으나 미래에 대하여 어렴풋이나마 희망을
거는 내용으로 루쉰의 작품 중에서는 드문 묘사라고 하겠다.
「아큐정전」
1921년 12월 4일부터 1922년 2월 12일까지《신보》부간에 주 1회 또는 격주로 연재 발표되었다. 루쉰
의 소설 중에서 유일한 중편소설이며 그의 대표작으로 손꼽히고 있다. 전편이 9장으로 되어 있다. 중
국의 농촌에서도 가장 하층의 인물에 속하는 날품팔이꾼 아큐라는 주인공을 등장시켜 신해혁명이라
는 거대한 사회의 변혁기를 거쳐가는 우매한 중국인의 실상을 폭로하고 있다. 마을에서 가장 무력하
고 비겁하면서도 남에게 모욕을 당하면 자기보다 못한 약한 자를 찾아 정신승리법이라는 자기도취에
빠지는 주인공 아큐는 바로 중국인의 모습을 그린 것이라고 하겠다. 작품「아큐정전」에 대한 비평
은 시대에 따라 변하고 있다. 1928년에 혁명문학파의 한 사람인 첸싱춘은 <아큐의 시대는 죽어버렸다
>(1928년)는 논문을 써서 루쉰의「아큐정전」은 시대착오적인 작품이라고 신랄하게 비판하였다. 혹자
는 이 작품이 신해혁명기의 농촌의 실상을 정확하게 묘사한 걸작이라고 찬사를 보내는가 하면, 시대
착오적인 작품이라고 비난하기도 하고 있다. 어떻든 당시의 문제작으로 크게 세상사람들의 주목을 끌
었던 작품이며 오늘날까지도 많은 현대문학 연구가들의 연구대상이 되고 있다.
▶ 제2 소설집 『방황』
이 소설집은 1926년 8월에 출간되었는데 서문이 없고 다만 전국시대 초나라의 취위엔이 지었다는
『초사』 중 <이소> 편의 두 구절이 서문 대신에 실려 있을 뿐이다. 『방황』이라는 제목에 대하여는
1932년 12월 14일에 쓴 <자선집자서>에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비교적 정제된 재료를 얻게 되면 역시 단편소설을 썼다. 다만 유격병이 되어 포진을 이루지
못하였기 때문에 기술은 비록 전보다 조금 좋아졌고, 생각도 비교적 구속됨이 없는 것 같았으
나 전투의 의기는 오히려 적지 않게 냉각되었다. 새로운 전우는 어디 있는가? 나는 이것은 매
우 좋지 않은 일이라고 생각한다. 이리하여 이 시기의 작품 11편을 모아 인쇄하여 『방황』이
라 하고 이후부터 다시는 이렇지 않기를 바랐다. 길은 아득하여 그것은 멀고도 멀도다. 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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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 권장도서 - 루쉰 소설 전집
장차 오르고 내리며 찾아 구하고자 하노라. 뜻하지 않게 이런 큰소리는 결국 그림자도 없고
자취도 없게 되었다.]
위의 글로 보아 이 책의 제목은 진리를 찾으려고 지적 방황을 하던 시기여서 그 당시에 씌었던 작
품을 이렇게 명명하였던 것으로 여겨진다. 이 제2 소설집은 제1 소설집 『납함』과 비교하여 내용면
에서 크게 차이가 난다고 할 수는 없겠으나 그 자신이 말한 것과 같이 창작의 기술상 매우 원숙하여
졌음을 알 수 있고, 또 『납함』 시기의 충동적인 묘사보다는 매우 침착하고 내면의 세계를 표현하는
원숙함을 보이고 있다. 특히 이 곳에서는 지식인을 주인공으로 다룬 작품이 전보다 많은 것이 눈에
띈다.
「복을 비는 제사」
1924년 3월,《동방잡지》21권 6호에 발표되었다. 농촌의 가난하고 무지한 과부가 봉건사회의 윤리도덕
의 희생물이 되어 결국은 죽음이라는 비극에 이르는 내용이다. 이 작품은 소설적인 기교가 매우 뛰어
난 것으로 평가되며 농촌을 소재로 한 루쉰의 작품 중 걸작으로 꼽히고 있다. 제1 소설집에 수록된
작품들에 비하여 매우 냉정하고 침착하게 이야기를 전개시키고 있으며 과부의 처참한 생을 잔인할 만
큼 냉철하게 추적하고 있다.「축복」이라는 제목은 소설의 내용에 나오다시피 우리가 보통 말하는 축
복이 아니다. 중국 농촌, 특히 사오싱 지방에서 섣달 그믐에 부엌신을 하늘로 보내고, 새해에는 더 많
은 복을 내려주십사 하고 비는 제례의 일종이다. 과거의 번역본에는 대부분이 원제목 그대로「축복」
이라 했으나, 원 뜻을 살리기 위하여「복을 비는 제사」라고 번역했다.
「술집에서」
1924년 5월,《소설월보》제15권 5호에 발표되었다. 루쉰의 소설 중 문제작으로 꼽히는 작품이며, 1928
년 혁명문학파와의 논쟁에서 상대방이 공격시에 가장 많이 거론했던 작품이다. 지식인인 주인공이 과
거에 혁명운동에 가담하여 매우 열정적인 활동을 하였으나 지금은 세상으로부터 버림을 받고 좌절과
실의 속에서 회의하는, 당시 지식인의 고뇌를 묘사한 작품이다. 화자인 내가 보는 주인공 뤼웨이푸는
루쉰과 친했던 친구인 판아이눙을 상징적으로 묘사한 것이며, 작가 자신이 그에게 가졌던 죄책감이
복합되어 이루어진 작품이라 하겠다. 1928년 창조사의 펑나이차오는 '예술과 사회생활'(1928)이라는 글
에서 이 작품을 들어 다음과 같은 내용으로 루쉰을 비난했다. 루쉰이라는 늙은 서생은 어두컴컴한 술
집 다락에 앉아 술 취한 멍청한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며 몰락한 봉건 정서나 추억하고 있는 혁명의
낙오자이다.
「비누」
1924년 5월 27일, 28일 양 일간에 걸쳐《신보》부간에 발표되었다. 이 작품은 풍자적 성격을 많이 띠
고 있다. 자식에게는 새로운 시대의 학문을 익히게 하면서도, 또 새로운 문물의 혜택을 알면서도, 자
기가 알고 자기에게 이해되는 시대의 산물에 연연하는 인간들을 풍자하고 있다. 루쉰 특유의 신랄한
풍자가 매우 짜임새있게 구성된 작품이다.
「고독한 사람」
1925년 10월에 쓴 것으로 당시에 발표하지 않고 소설집으로 엮을 때 수록한 것 같다. 한 지식인이 격
동기에 처하여 방황하다가 종당에는 자신의 갈 길을 찾지 못하고 죽는, 지식인의 고뇌를 묘사한 작품
이다. 이 소설은「술집에서」와 맥을 같이하는 것으로 주인공 웨이리엔수는「술집에서」의 뤼웨이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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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 권장도서 - 루쉰 소설 전집
와 동일형의 인물이다. 루쉰의 소설이 주로 체험적인 것으로 보아 모델이 있었던 것으로 여겨지며, 루
쉰의 침울하고 무거운 분위기가 잘 묘사된 작품으로 수작의 하나로 꼽히고 있다.
「죽음을 슬퍼하며」
1925년 10월에 쓴 것으로, 발표되었던 것 같지는 않고 소설집으로 엮을 때 수록된 것 같다. 루쉰의 소
설 중에서 구태여 연애소설을 고르라면 이 작품을 꼽을 수 있겠으나, 작품이 풍기는 분위기는 루쉰
특유의 무겁고 침울한 내용이다.「술집에서」나「고독한 사람」과 같은 유의 작품으로 지식인의 방황
이 주제를 이루고 있다. 처가에서 반대하는 자유연애결혼, 실직, 아내의 가출, 죽음 등 좌절과 방황의
침울한 분위기가 예외 없이 묘사된 작품이다. 루쉰과 쉬꾸앙핑간의 동거생활의 면모가 다분히 보인다
는 평도 있으나 그들의 동거는 1927년 10월부터이므로 시기적으로 보아 맞지 않는 설이다.
「이혼」
1925년 11월에 썼으며, 같은 달에《어사》제 54기에 발표되었다. 봉건사회에서 농촌의 여인이 부당하
게 이혼당한 데 대하여 용감하게 반항하고 자기주장을 하나, 결국은 봉건사회의 권위구조에 의하여
굴복하고 만다는 내용이다. 봉건사회의 농촌 부녀자일지라도 남자로부터 부당한 대우를 받으면 정정
당당하게 항변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을 암시하는 작품이다. 소설작법상 매우 뛰어난 기량을 보인 작
품으로 수작 중의 하나로 꼽히고 있다.
▶ 제3 소설집 『고사신편』
『고사신편』에는 서언과 단편소설 8편이 수록되어 있다. 이 8편 중 맨 끝의「죽은 자 살리기」1편은
희곡의 형식으로 씌어졌는데 그렇다고 완전히 각본화된 것은 아니다. 아마도 루쉰이 만년에 희곡을
쓰고자 의도했던 습작형의 작품이 아닌가 여겨진다.『고사신편』에 수록된 작품의 소재는 모두가 신
화와 전설, 그리고 고대사에서 취재하고 있다. 그렇다고 역사소설이라고 하기에는 풍격을 달리하고 있
다. 그것들은 다분히 현대사회를 투영하여 신화, 전설, 고대사의 인물이나 배경을 빌어 작가 나름대로
작품세계를 전개시키고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신화나 전설, 고대사의 인물이나 배경 속에 현대사
회의 인물과 배경이 활동하고 전개된다는 것이다.
이 소설집이 다른 소설집과 다른 것은 작품을 집필순으로 배열하지 않고 각 작품의 소재의 연대순으
로 배열하였다는 것이다. 순서는 신화, 전설에서 시작하여 고대사로 이어지고 있다. 루쉰 자신이 서언
에서 밝혔듯이 이 소설들은 창작시기의 폭이 매우 넓어 13년이나 걸렸다고 한다. 이 작품집은 루쉰의
소설집 중에서 특이한 소재의 작품으로 알려지고 있을 뿐만 아니라, 루쉰의 해박한 지식을 피력한 작
품으로 꼽히고 있다. 그는 베이징에 있을 때 대학강단에 서면서 소설연구에 심취하여 고소설의 집성
에 힘을 기울여 주옥같은 소설 연구의 업적을 남겼다. 이러한 연구에서 얻어진 해박한 지식이 『고사
신편』에 고스란히 나타나 있다. 그는 신화, 전설이나 고대사에서의 작은 인물들을 소설 속에서 부각
시켜 소설의 흥취를 증가시키고 생동감 있게 하고 있다. 근년에 와서 이 작품집에 대한 학계의 흥미
가 증가되면서 이 작품들에 대한 연구가 점차 일고 있다.
「서언」
1935년 12월 26일에 『고사신편』의 출판을 위하여 쓴 것이다. 루쉰은 이 서문의 끝부분에서 그 중에
는 역시 스케치한 것이 많아, 문학개론에서 말하는 소설이라 부르기에는 부족하다. 사건의 서술에 때
로는 옛책에 조금 근거를 두기도 했으나, 때로는 생각나는 대로 썼다. 라고 하여 전편을 역사소설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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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 권장도서 - 루쉰 소설 전집
고 하기에는 부족함을 스스로도 서술하고 있다.
「하늘을 보수한 이야기」
이 작품은 천지창조 신화에서 여호와의 인류창조설을 우화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여호와의 전설은 옛
서적의 기재와 동일하지 않다. 작자는 『산해경』,『회남자』,『열자』의 기록과 『교사지』,『한무고
사』에 나오는 신선설화까지 혼합하여 이야기를 전개시키고 있다. 공공과 전욱의 전쟁묘사에서는 현
대사회의 문명에 대한 비판의식이 강하게 표현되어 있다. 전쟁으로 파괴된 하늘을 보수하는 여호와의
노력은 작자의 현실에 대한 이상의 표현이라고 하겠다.
「치수」
우왕의 치수 전설을 내용으로 하고 있다. 소재는 『사기』,『열자』등이며『상서』,『좌전』,『주역』
에 기재된 기록도 인용되어 있다. 이 작품은 『고사신편』 8편 중에서 가장 현실비판적이고 풍자적인
색채를 강하게 나타내고 있다. 실천적인 정치가인 우와 탁상공론만을 일삼는 학자와 관료, 그리고 노
예근성에 젖어 있는 백성 등이 공존하는 사회는 바로 현실사회의 투영이라 하겠다. 작자의 현실비판
의 의도가 강한 작품이다.
「죽은 자 살리기」
1935년 12월에 쓰고, 잡지나 신문에는 발표되지 않았다. 루쉰의 소설 창작 중에서 마지막 작품으로 알
려지고 있다. 이미 위에서 말한 바와 같이 루쉰의 작품 중에서 유일하게 희곡식으로 쓴 작품이나 그
렇다고 완전한 각본은 아니다. 루쉰은 아마 만년에 희곡창작에도 뜻을 두었던 것이 아닌가 여겨진다.
이 작품은 소재가 장자라고 하겠으나, 오히려 장자의 사상을 풍자적으로 비판한 것이라고 할 수 있
다. 루쉰은 노자의 형이상학이나 장자의 달관 사상으로 상징되는 은둔사상에 크게 흥미를 느끼면서도
한편으로는 현실참여라는 실천궁행주의를 버리지 못하고 있는 것 같다. 루쉰은 이 작품에서 장자의
초월주의를 희화적으로 묘사하여 풍자하고 있다.
1935년 12월에 쓴 것으로 기록되어 있는「고사리를 캐는 사람」「출국」「죽은 자 살리기」 3편은 매
우 서둘러 쓴 느낌이 드는 작품이다. 그 이유가 서둘러 『고사신편』이라는 소설집을 꾸미기 위해서
였던 것인지, 또는 루쉰이 건강이 좋지 않아 무언가 생의 마무리를 짓기 전에 정리하는 뜻이 있어서
였는지는 알 수 없다. 이 3편에서는 시국비판의 의도가 강하게 보이는데 아마도 좌련 내에서 일어났
던 내분이 작품창작에도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으리라 여겨진다. 그러나 작품의 구성이나 기교는 더
욱 원숙하고 섬세하다는 것이 비평가들의 의견이다. (김시준 서울대학교 인문대학 교수)
▣ 작가
루쉰(188 1. 9 . 25 . ~ 1936 . 10 . 19 .)
사상가인 루쉰은 1881년, 예부터 절경으로 소문난 중국 절강성 소흥부에서 출생했다. 본명은 주수인.
필명인 루쉰은 투르게네프의 루딘을 모방한 것이었다. 당시 이름만 대도 다 알아주던 대지주의 장남
으로 태어나 온 가족과 하인들의 애지중지 속에서 자랐다. 출신배경이 이런 루쉰이 급진적인 혁명사
상에 눈을 뜬다는 것은 하나의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어릴 적부터 글 잘하는 수재로 소문난 루쉰
이 13세 때 할아버지가 아버지를 위한 과거시험에 연루되어 투옥되고, 아버지는 이때 받은 충격으로
병을 얻어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거의 동시에 모두 사망, 집안이 하루아침에 풍비박산이 된다. 훗날 루
쉰은 "나는 그때 비로소 세상 돌아가는 진면목에 눈을 뜨게 되었다"고 그 당시의 충격을 회고했다. 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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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 권장도서 - 루쉰 소설 전집
리고 그의 고향 소흥은 실패로 끝난 두 혁명인 태평천국의 난(1861)과 신해혁명의 중심 영향권에 들었
고, 당시 중국대륙을 유린한 외세진출의 통로 앞에 늘 놓여 있었다.
급진 혁명사상에 눈뜬 루쉰이 신학문을 배워 쓰러져가는 조국을 구하기 위해 일본에 유학길을 오른
것은 스무 살인 1900년. 당시 우매한 중국 한의술 때문에 부친을 잃었다고 생각한 루쉰은 서양의학을
공부하여 의학구국을 생각했다. 그러나 세균학 시간에 우연히 본 러일전쟁 시사영화에서 한 중국인이
러시아를 위한 스파이 혐의로 일본군에 의해 총살되는 모습을 아무 생각 없이 멍하니 구경만 하고 있
는 중국군중을 본 뒤, 그는 민중의 육체적 질병을 고치는 일보다 민족적 자각을 시키는 일, 즉 정신적
질병을 고치는 것이 급선무라 여기고 의학을 중단하고 문학으로 전향했다. 그 후 신문화운동에 참여
하여 동경에서《신생》을 발간하려고 했으나 실패하고, 동생 주작인과 공동으로 성외소설집을 번역했
다. 성외소설이란 당시 외국(유럽) 소설을 의미한다. 이때 그는 유럽의 약소민족의 문학, 슬라브 민족
의 저항시, 니체 철학에 심취했다. 잠시 귀향하여 인습적인 결혼을 했으나, 그것은 그에게 큰 마음의
상처를 남겼다.
신해혁명이 성공하자 북경에 가서 채원배에 초청되어 교육부직원으로 일하면서 처녀작「광인일기
(1918)」를 썼다. 잡지《신청년》에서 활동하는 한편 백화운동, 문학혁명에 참가했으며, 북경대학 사범
대학에서 교편을 잡으면서 경사 도서관장을 겸했다. 「광인일기」는 낡은 봉건왕조를 청산하려는 중
국 젊은이들에게 큰 자극제가 되었으며, 중국 신문예를 탄생시키는 출발이 되었다. 그로부터 3년 후
발표된「아큐정전」은 중국 국민적 성격의 전형을 풍자한 소설로서, 중국이 역사적으로 계승하여온
중화의식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항상 자기만족으로 스스로를 기만하며 사는 정신 승리법과 우매성, 약
점을 아큐에 집약하여 냉철하게 묘사한다. 찬반이 일어나지만 반봉건의 신문화운동을 기원하는 젊은
진보파들에 의해 옹호되었으며, 5. 4운동, 비공 운동의 기수로 앞장서기 시작한다.
1925년에는 청년지도기관인 주명사를 설립하여 계속 문학혁명에 앞장섰으며, 그가 관계한 여자사범대
학에서 학생 운동이 일어나자 그에 동참, 당시 단기서 정부의 탄압(체포령)을 피해 북경을 탈출하여
교직을 광동 중산대학으로 옮겼다. 1927년 4월 국공 분열 후 다시 국민당의 탄압이 시작되자 불안한
사회정세를 피해 상해조계에 숨어서 운동을 계속했다. 1931년 여름에는 뉴욕에서 열린 노동자문화 연
합대회의 중국측 명예주석으로 추대되었다. 한편 그는 북경대학 근무 당시의 제자 허광평과의 동거로
중국의 인습을 깨뜨렸다. 그는 중국작가동맹 좌익계의 중심 인물로 활동하면서 극좌와 대립하여 참된
프롤레타리아 문학논쟁의 중심이 되었다. 그의 문학은 초기의 소설에서 차츰 평론, 수필로 옮겨갔다.
중일전쟁 발발의 전년 1936년, 폐결핵과 천식이 악화되어 향년 56세로 사망했다. 유해는 만국공묘에
매장되었으며, 그의 비석에는 '민족혼'이란 글자가 새겨졌다. 그는 중국에서 최초로 현대소설을 쓴 소
설가이고, 또 초기 중국현대문학계를 이끈 지도자이기도 하다. 중국이 근대화하는 과도기에 태어나서
문학으로 국민을 계몽하고 각성시켜 중국을 근대화시키는 데 일생을 바쳤다. 따라서 그의 작품에는
반봉건·반미신·반군벌·반제국주의·지식인의 각성 등 근대화를 위한 계몽사상의 고취로 점철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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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 권장도서 - 루쉰 소설 전집
루쉰 소설 전집
루쉰 지음
이 요약본에서는「광인일기」와「죽음을 슬퍼하며」는 원작의 느낌을 최대한 살려서 요약하였으
며,「아큐정전」은 근간화소(根幹話素) 위주로 요약되어 있습니다.
「광인일기」
민국 7년 4월 2일. 모군 형제는, 지금 그 이름을 덮어두지만, 모두 나의 중학교 때 친한 친구들이었다.
여러 해 서로 떨어져 있는 동안에 점차 소식마저 끊어져버렸다. 일전에 우연히 그 형제 중 한 친구가
큰 병을 앓는다는 소식을 듣고 마침 귀향하던 참에 길을 돌아 찾아갔었다. 가까스로 친구를 만나긴
했는데, 병을 앓았던 것은 그의 아우라고 했다. 일부러 먼 곳에서 병문안을 와주어 감사하지만 그는
이미 완쾌되어 모지에 가서 임관을 기다리는 중이라고 하였다. 그리고는 껄껄 웃더니, 일기장 두 권을
꺼내 보이면서 그 무렵의 증세를 잘 알 수 있을 것이라며, 옛 친구에게 주어도 무방하리라고 말했다.
그것을 가지고 돌아와 읽어보고 그 병이 피해망상증과 유사한 것임을 알았다. 적혀 있는 문장이 어색
하고 잡다한데다가 일정한 순서도 없었으며 황당한 말도 많았다. 날짜도 씌어 있지 않았지만 희미한
색깔과 글씨체가 일정하지 않은 것으로 보아 한꺼번에 쓰지 않은 것임을 알 수 있었다. 그 사이에 문
맥이 닿는 것도 있어 여기 몇 편 뽑아내어 의학자들의 연구자료로 제공하려 한다. 글 중에서 틀린 말
이라 해도 한 자도 고치지 않았다. 비록 시골사람들이고 세상에 알려져 있지도 않으니 어쨌든 상관은
없겠지만, 그래도 인명만은 모두 고쳤다. 책이름은 저자 본인이 완쾌한 후에 스스로 붙인 것이므로 고
치지 않고 그대로 두었다.
〔오늘밤은 참 달이 밝다. 달을 보지 못한 지가 벌써 30여 년이나 되었다. 지나온 30여 년 동안을 완
전히 혼미 속에서 지내왔음을 이제 겨우 알았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조심하지 않으면 안 될 것 같다.
그렇지 않으면 저 짜오가네 집 개가 왜 날 흘긋흘긋 쳐다보는 것일까? 내가 무서워하는 것도 당연한
일이다.〕
〔밤에는 전혀 잠을 이룰 수가 없다. 낮에 봤던 기괴한 사람들 중에서 제일 괴상한 것은 어제 길거리
에서 만난 그 여자이다. 제 아이를 때리면서 입으로는, 이 녀석! 네 놈을 몇 번 물어뜯어 놔야 직성이
풀리겠다. 라고 소리를 지르면서도 그녀의 눈은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나는 섬뜩하게 놀랐고, 그 놀라
움을 감출 길이 없었다. 그러자 흉악한 얼굴에 이를 드러낸 한 무리의 사람들이 모두 큰소리로 웃었
다.
며칠 전, 늑대촌의 소작인이 흉작을 호소하러 와서는, 큰형에게 말하기를, 그들 마을에 큰 악당놈이
여러 사람에게 맞아 죽었는데, 그 중 몇 사람은 담이 세어진다고 하며 그 악당의 간과 심장을 꺼내어
기름에 튀겨먹었다 한다. 그러면서 소작인과 큰형이 나를 흘긋흘긋 쳐다보는 것이었다. 오늘에야 비로
소 그들의 눈초리가 밖에 있는 괴상한 그들과 아주 똑같다는 것을 알았다. 머리 끝에서 발끝까지 소
름이 끼친다. 그들이 사람을 잡아먹을 수 있다면 나라고 못 잡아먹을 리가 없을 것이다. 그 여자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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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를 물어뜯어 놓겠다! 고 한 말이나, 험상궂은 얼굴에 이빨을 드러낸 무리들의 웃음이나, 엊그제 소
작인의 말이나, 모두 틀림없이 저희들만의 암호였다. 그들의 말에는 독이 가득 차 있고, 웃음 속에는
칼이 숨어 있으며, 그들의 이빨은 온통 새하얗고 뾰족뾰족하게 나란히 박혀 있었는데, 이것이 바로 사
람을 잡아먹는 도구인 것이다.
나는 잠을 잘 수 없었기 때문에 오밤중까지 자세히 살펴보다가 비로소 역사책의 글자와 글자 사이에
서 또 다른 글자를 찾아내었다. 책 가득히 씌어 있는 두 개의 글자는 식인이라는 것이었다. 책에도
이렇게 많이 씌어 있고, 소작인들도 그렇게 이야기하곤 했는데도 모두들 히죽이죽 웃으며 괴상한 눈
초리로 나를 노려보았던 것이다. 나도 사람이다. 그들이 날 잡아먹으려고 하는구나!〕
〔아침에 나는 한동안 조용히 앉아 있었다. 천라오우가 밥을 날라왔다. 채소 한 접시, 찐 생선 한 접
시. 이 생선의 눈깔은 희고도 단단했다. 입을 벌리고 있는 모양이 사람을 잡아먹으려는 그 놈들과 흡
사했다. 몇 젓가락 먹어봤지만 생선인지 사람인지 미끌미끌한 게 도무지 분간할 수 없어서 뱃속의 것
을 전부 토해 버렸다.〕
〔나는 그 놈들의 수법을 깨달았다. 직접 손으로 죽이지는 못하고, 또 화가 미칠까 두려워서 그렇게
할 배짱도 없는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여럿이 연락을 취하고 그물을 쳐서 내가 자살하도록 몰아넣고
있는 것이다. 며칠 전 거리에서 만난 사람들의 태도나, 요즈음 큰형의 거동을 살펴보면 그 십중팔구는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제일 좋은 것은 허리띠를 풀어 대들보에다 매달고 스스로 목을 매어 죽는 일
이다. 그들은 살인의 죄명도 쓰지 않고 소원을 성취하게 되어 대단히 기뻐하며 웃음소리를 낼 것이
틀림없다. 그렇지 않고 놀라움과 근심 때문에 죽게 된다면, 비록 살은 좀 빠졌어도 이만하면 됐다고
몇 번이고 머리를 끄덕일 것이다. 하지만 그들은 죽은 고기밖에 먹을 줄 모른다. 어느 책에선가 하이
에나라는, 눈초리와 모습이 보기에도 흉측한 동물을 본 기억이 난다.
제일 가련한 것은 내 큰 형이다. 그도 사람인데, 어찌 조금치의 두려움도 없이 패거리를 모아 나를 잡
아먹으려 하는 걸까? 오랫동안 습관이 되어서 나쁜 줄 모르는 걸까? 아니면 양심을 잃어버려서 잘 알
면서도 일부러 죄를 짓는 걸까? 나는 사람 잡아먹는 사람을 저주해도 우선 형으로부터 시작해야겠고,
사람 잡아먹는 것을 말리는 것도 우선 형부터 손을 써야겠다.〕
〔자신은 사람을 잡아먹으려 하면서도 다른 사람에게 잡아먹히는 건 두려워서 모두들 지극히 의심스
러운 눈초리로 서로 상대의 얼굴을 몰래 훔쳐본다. 그런 생각을 버리고, 마음 편히 일하고 길을 걷고
밥먹고 잠을 잘 수 있다면 얼마나 평안할까! 그건 단지 문지방 하나, 고비 하나 차이인데⋯. 그래도
그들은 부자, 형제, 부부, 친구, 사제, 원수들과 서로 모르는 사람들이 모두 한 패가 되어 서로 격려하
고 견제하면서 죽어도 그 한 걸음을 넘어서려 하지 않는 것이다.〕
〔아침 일찍 큰 형을 찾아갔다. 큰형님, 제가 형님께 할 말이 있습니다. 큰형님, 아마 최초의 원시시
대에는 야만인들이 모두 사람을 잡아먹었겠지요. 그 후 생각이 달라져서, 어떤 자는 사람을 잡아먹지
않고 오로지 착하게 살려고 사람으로 변하여 참된 사람으로 변하였습니다. 반면에 어떤 자는 여전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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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을 잡아먹었습니다 - 마치 벌레와도 같이 말예요. 사람을 잡아먹는 인간은 사람을 잡아먹지 않는
인간에 비해 얼마나 부끄러운 존재입니까. 이것은 아마도 벌레가 원숭이에 비해 부끄러운 것과는 도
저히 비교도 안 될 만큼 부끄러운 일일 겁니다.
그들이 날 잡아먹으려 하고 있습니다. 형님 혼자서는 어떻게 할 수도 없겠지요. 그렇다고 사람을 잡아
먹는 놈들과 한패가 되시려는 겁니까? 사람을 잡아먹는 놈들이 무슨 일인들 못하겠습니까. 그들은 나
를 잡아먹을 수도 있고, 형님을 잡아먹을 수도 있으며, 심지어 같은 패거리 안에서도 서로 잡아먹을
겁니다. 하지만 한 걸음 방향을 돌리기만 하면, 모두 태평스럽게 지낼 수 있습니다. 옛날부터 늘 그랬
다고 해도 오늘부터라도 각별히 착하게 되고자 마음먹고 우리는 사람을 잡아먹을 수는 없는 것이라고
말하십시오.
처음에 형은 그저 냉소할 뿐이더니, 곧 이어서 눈초리는 험악해지고, 내가 그들의 비밀을 들추어내자
온통 새파랗게 질렸다. 대문 밖에 서있던 한패들이, 그 속에는 짜오꿰이 영감과 그의 개도 있었는데,
모두가 머리를 쑤셔박으며 문 안으로 들어왔다. 모두 나가! 미치광이가 뭐 볼 게 있다고! 큰 형이 별
안간 흉측한 얼굴로 큰소리를 질렀다. 나는 이 때 다시금 그들의 교묘한 수법을 알았다. 그들은 개심
하려 하지 않을뿐더러 벌써 모든 일을 꾸며놓고 미치광이라는 이름을 준비하여 두었다가 내게 뒤집어
씌운 것이다. 이것이 그들의 상투수법인 것이다.〕
〔젓가락을 들자 큰 형이 생각났다. 누이동생이 죽은 원인도 전적으로 그에게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
다. 그 때 누이동생은 겨우 다섯 살이었다. 그 귀엽고 가련한 모습이 지금도 눈앞에 아른거린다. 어머
니는 한없이 우셨다. 형은 울지 말라고 하며 어머니를 달랬는데, 아마 자기가 누이동생을 잡아먹었으
니까 어머니가 울자 미안함을 금치 못했을 것이다.〕
〔더 이상 생각할 수 없게 되었다. 4천 년 동안 내내 사람을 잡아먹어 온 곳, 거기서 나도 오랜 세월
을 함께 살아왔다는 것을 깨닫게 된 것이다. 마침 누이동생이 죽었을 때는 큰형이 집안일을 주관하던
때였다. 형이 밥이나 반찬 속에 섞어서 몰래 우리에게 먹이지 않았다고도 할 수 없는 것이다. 나도 모
르는 사이에 내 누이동생의 살조각을 먹지 않았다고 할 수 없다. 이번에는 또 내 차례인 것이다.〕
〔사람을 잡아먹어 본 적이 없는 아이들이 혹 아직도 있을는지? 아이들을 구해야지.....〕
「아큐정전」
아큐는 이름도 성도 없이 조씨 댁에 얹혀살면서 조씨 집안의 허드렛일을 하는 인물로 떠돌이패의 한
사람이다. 전형적 노예근성을 지닌 무지몽매한 쿨리(중국 하층민, coolie, 중국이나 인도의 하층 육체
노동자, 막일꾼)의 상징이다. 아큐에 대해서는 이름과 출신지, 그리고 행적에 관해서도 결코 알 수가
없다. 그는 집도 없이 웨이장에 있는 동구 밖 사당에서 기거하고 있다. 그는 일정한 직업이 없었으므
로 닥치는 대로 일을 하며 사는 사람이다. 그러나 하는 일과는 달리 매우 자존심(自尊心)이 강한 인물
이어서, 마을사람들이 그를 건드려도 그런 사소한 문제 따위에는 관심도 없다는 듯이 일관한다. 그의
신체적인 결함은 머리가 조금 벗겨진 대머리라는 것이고, 마을사람들이 그의 이러한 결점에 대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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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 권장도서 - 루쉰 소설 전집
언급해도, 노름에서 많은 돈을 잃어도 상관하지 않는다.
아큐는 매사에 자신있게 처신했고 따라서 자연히 승리하는 입장에 서 있다. 그러나 아큐가 유명해진
것은 마을의 세도가 자오씨의 아들에게 폭행을 당하고 난 뒤부터이다. 그에게는 매우 싫어하는 인물
들이 있는데, 거지인 왕과 첸, 그리고 지주인 첸가(家)의 아들이 그들이다. 특히 첸가의 아들은 서양식
학교와 일본유학을 아침 저녁으로 드나들 듯했고, 변발도 잘라버렸기 때문에 아큐는 그를 양놈이라고
욕했다. 그런데 아큐의 욕이 그의 귀에 들어가 화가 난 첸의 아들이 지팡이로 아큐를 두들겨 팬 적도
있었다.
아큐는 장난도 몹시 즐겼다. 한번은 그가 비구니를 놀리려고 그녀의 볼을 꼬집었는데, 이상한 감정에
사로잡히기 시작했다. 아큐가 여자를 안 것이다. 결국 이러한 아큐의 변화는 자오씨의 집에 쌀을 찧으
러 갔을 때 일어나고 말았다. 그는 자오씨의 집에서 일하는 젊은 과부 우마에게 수작을 걸었다. 우마
의 울음소리를 듣고 달려온 자오씨는 아큐를 사정없이 내리치기 시작했고, 결국 아큐는 금 2천 문과
이불을 그 대가로 지불해야 했다. 그런 아큐는 우마와의 사건이 있은 후부터 달라지기 시작했다. 마을
여자들은 아큐만 보아도 도망갔고, 남자들은 아큐를 이상한 눈으로 쳐다보고는 외상술도 주지 않았다.
전에는 친하던 사당지기도 아큐를 보면 언짢아하고, 더구나 그를 고용하고자 하는 사람들이 없었다.
그가 다시 웨이장으로 돌아온 것은 중추절 직후였는데, 그는 사람이 달라져 있었다. 새로 산 옷에다
모든 거래를 현찰로 지불했기 때문이다. 그는 또한 신기하고 새로운 물건들을 가지고 돌아왔는데, 여
자들은 아큐가 가지고 온 물건들에 대해 흥미를 느끼고 은근히 만나고 싶어하기까지 했다. 그러나 아
큐가 도둑이의 앞잡이였다는 소문이 나돌자 이러한 흥미는 자연히 시들해지고 말았다.
1911년 신해혁명이 일어나던 해, 9월 14일에 뜸으로 갑판을 위장한 파이 어른의 배가 자오씨의 선착
장에 닿게 되었다. 혁명당을 피해서 이곳에 들어온 것이라고 했다. 아큐는 혁명당을 알고 있었다. 마
을사람들이 혁명당에 놀라 떨고 있는 것을 보고 아큐는 혁명당이 자신의 편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4, 5일이 자나자 민심은 가라앉고 혁명당이 온다고 해도 별반 다를 것이 없다고 안심하게 된다. 아큐
가 혁명당에 가입하기 위해 첸가의 아들을 찾아간 날 밤에 자오씨의 집이 습격을 당했다. 아큐는 자
신을 내쫓은 자오씨에 대해서 감정이 있었고, 마을사람들도 자오씨의 집이 습격당한 것을 은근히 속
으로는 기뻐했다. 그러는 한편 그들은 두려움도 느꼈다.
어느 날 갑자기 아큐가 체포되었는데 누가 누명을 씌웠는지 몰라도 아큐가 자오씨의 집을 습격한 장
본인이라는 것이었다. 아큐는 생전 처음 붓을 들고, 서명하는 대신에 동그라미를 그렸다. 형장으로 끌
려가면서 군중 속에 서 있는 우마의 모습을 보았다. 그리고 얼마 후 아큐는 무수한 인파들의 눈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총살형을 받았다.
「죽음을 슬퍼하며」
- 쥐엔성의 수기 만약 할 수만 있다면, 나는 나의 회한과 비애를, 쯔쥔을 위해서, 또 나를 위해서 적어두려고 한다.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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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 권장도서 - 루쉰 소설 전집
관 한쪽 구석에 있는 잊혀진 낡은 방은 그토록 조용하고 공허하다. 세월은 정말 빠르다. 내가 쯔쥔을
사랑하고, 그녀에게 의지하며 이 적막함과 공허에서 도망친 지 벌써 만 1년이 되었다. 세상은 참 공교
롭다. 내가 다시 이 곳으로 돌아왔을 때 의외로 비어 있는 것은 그 방 한 칸뿐이었다. 전과 같이 깨어
진 창, 창 밖의 반쯤 말라죽은 홰나무와 늙은 등나무 덩굴, 허물어져가는 벽, 벽에 기댄 나무판자로
만든 침대, 한밤중에 혼자서 침대에 누워 있으면, 아직 쯔쥔과 동거하기 이전과 똑같다. 지나간 1년이
온통 지워져서 전혀 없었던 일 같다. 나는 이 허름한 방에서 나와 지짜오 골목에서 희망에 부풀어 작
은 가정을 마련했었던 일 따위는 없었던 것이 되고 만다.
그뿐만이 아니다. 1년 전의 조용함과 공허감은 결코 이것과는 달랐다. 언제나 기대로 가득 차 있었다.
쯔쥔이 와주리라는 기대였다. 오랜 기다림의 초조함 속에서, 구두의 높은 뒤축이 벽돌길에 닿는 맑은
음향이 들리기만 하면, 얼마나 나를 생기 있게 하였던가! 그러면 이내 보조개가 패인 창백한 둥근 얼
굴, 희고 여윈 팔, 무명의 세로줄 무늬의 상의에 검정 스커트 차림의 모습이 보였다. 그러나 지금은
적막함과 공허감이 예전과 다름없으며, 쯔쥔은 결코 두 번 다시 오지 않는다. 또한 영원히 영원히⋯.
이 낡은 방에 쯔쥔이 없을 땐, 나는 아무것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었다. 무료함 속에서 손에 잡히는 대
로 책을 꺼내본다. 그게 과학책이건, 문학책이건, 무엇이든 마찬가지였다. 읽어내려가다 퍼뜩 정신이
들어보면 벌써 십여 페이지가 넘어가 있었지만 책에 씌어 있는 말은 전혀 기억할 수가 없었다. 다만
귀만은 특별히 민감해서, 마치 대문 밖을 왕래하는 모든 신발소리가 들리는 듯했고 그 중에서 쯔쥔의
구두소리가 점점 다가오는 것 같았다. - 그러나 그 소리는 왕왕 점점 멀어져서 마침내 다른 발자국들
의 어지러운 소리 속에 섞여 사라져버린다. 나는 쯔쥔의 구두소리와는 전혀 딴판인 운동화를 신고 있
는 소사 아들의 신발소리를 증오했다. 또 항상 새구두를 신어서, 쯔쥔의 구두소리와 너무나 같은 옆집
멋쟁이 아가씨의 구두소리를 미워했다. 쯔쥔이 탄 차가 뒤집힌 게 아닐까? 전차에 부딪혀 다친 건 아
닐까?
나는 곧 모자를 집어들고 그녀를 만나러 가기로 했다. 그러나 그녀의 숙부는 나를 앞에 세워놓고 욕
한 적도 있다. 갑자기 한 발짝 한 발짝 그녀의 구두소리가 가까워졌다. 마중 나가보면 벌써 등나무 덩
굴 밑을 지나오면서 얼굴에는 미소의 보조개를 띠고 있었다. 숙부네 집에서 야단을 맞지는 않은 것
같다. 나의 마음은 안정되어 잠시 동안은 묵묵히 서로 얼굴만 쳐다본 후 낡은 방안에 점차 나의 말소
리가 가득 차게 된다. 가정의 전제, 구습타파, 남녀평등, 입센, 타고르, 셸리 등에 관해서 이야기하는
것이다. ..... 그녀는 언제나 미소지으며 고개를 끄덕이고, 두 눈에는 순진하고 귀여운 호기심의 빛이
가득 차는 것이었다. 벽에는 동판으로 된 셸리의 반신상이 걸려 있다. 잡지에서 오려낸 것으로 셸리의
가장 아름다운 초상이다. 내가 그녀에게 그것을 보라고 가리키자, 그녀는 힐긋 쳐다보고는 이내 머리
를 숙이고 말았다. 부끄러워하는 것 같았다. 이런 점들은 쯔쥔이 아직도 구사상의 속박에서 완전히 벗
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 같았다. - 나중에야 생각한 것이지만, 셸리가 바다에서 익사한 기념상이라든
가, 아니면 입센의 초상으로 바꾸는 편이 좋았을 것이다.
나는 나 자신의 것이에요. 그 분들, 아무도 내게 간섭할 권리가 없어요! 이것은 우리가 교제한 지 반
년 만에, 이 곳에 있는 그녀의 숙부와 시골에 있는 부친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을 때, 한동안 말없이
생각하던 그녀가 분명하고 단호하게 그리고 조용히 한 말이다. 그 때 나는 자신의 생각, 자신의 신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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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 권장도서 - 루쉰 소설 전집
자신의 결점까지도 거의 숨기지 않고 이미 모조리 말한 뒤였고, 그녀도 완전히 이해하고 있었다. 그래
서 이 말은 내 영혼을 강하게 흔들었고, 그 후로도 오랫동안 귓속에 울려오는 것이었다. 그리고 나는
염세가들이 말하듯이 중국여성은 결코 구제할 수 없는 것이 아니며, 멀지 않은 장래에 빛나는 여명이
있을 것이라는 것을 알고는 말할 수 없이 큰 기쁨을 느꼈다.
나는 그 때 나의 순수하고 열렬한 애정을 어떻게 그녀에게 표현했는지, 이미 잊어버렸다. 어찌 지금뿐
이겠는가. 그 때 애정을 고백한 뒤에 이미 모호해졌고 밤에 다시 생각해 보아도 단지 몇몇 단편밖에
남아 있지 않았다. 동거한 지 한두 달 후에는 그 단편들조차도 종적을 찾을 수 없는 한바탕 꿈으로
변해 버렸다. 다만 나는 당시 십여 일 전부터 표현의 태도, 말을 늘어놓는 순서 그리고 혹시 만약 거
절당한 이후의 상황에 대하여 자세히 연구했던 일만은 기억하고 있다. 그러나 막상 그 때가 되니 모
든 것이 쓸모가 없는 것 같았다. 몹시 당황한 나머지 몸이 말을 듣지 않아서 결국 영화에서 보았던
방법으로 했다. 후에 그 일을 회상할 때마다 나도 몹시 부끄러웠다. 그러나 내가 눈물을 머금고 그녀
의 손을 잡고는 한쪽 무릎을 꿇은 일만은 지금까지도 항상 어두운 방을 비추는 등불처럼 영원히 남아
있다.
내 자신의 일뿐만 아니라 쯔쥔이 한 말이나 행동에 대해서도 나는 그 때 똑똑히 보지 못했다. 그녀가
이제 나에게 승낙했다는 것만을 알았을 뿐이었다. 그녀 쪽에서는 오히려 모든 것을 잘 기억하고 있었
다. 내가 한 말을 마치 숙독한 책처럼 술술 암송하는 것이었다. 내가 한 행동을 마치 나에게는 보이지
않는 필름을 눈앞에 걸어놓은 것처럼 생생하고 매우 자세하게 서술하는 것이었다. 물론 내게는 두 번
다시 생각하고 싶지 않은 천박한 영화의 한 장면 같은 것조차도 말이다. 밤이 깊이 주위가 고요해지
면 두 사람이 마주 앉아 복습하는 시간이 된다. 나는 언제나 질문을 받고, 시험당하며 게다가 당시에
한 말을 다시 말해 보라는 명령을 받는다. 그러나 나는 마치 열등생처럼 언제고 그녀로부터 보충을
받고 정정을 받아야만 했다.
이 복습도 얼마 후엔 차차 드물어져 갔다. 그러나 그녀가 허공을 주시하고 넋 나간 듯이 생각에 잠겼
다가, 이어서 표정이 더욱 부드러워지며 보조개가 깊어지는 것을 보면 그것은 그녀가 또 혼자서 옛것
을 복습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나는 그녀가 그 우스꽝스러운 영화의 한 장면을 보는 것을 매우 두
려워했다. 그러나 그녀는 그것을 꼭 보고 싶어 했고, 보지 않고는 못 배긴다는 것을 또한 알고 있었
다. 그녀는 그것을 결코 우스꽝스럽다고는 여기지 않았다. 이 일은 내가 아주 잘 알고 있었다. 그녀가
나를 사랑하는 것이 그토록 열렬하고 그토록 순수했기 때문이었다.
작년 늦봄은 가장 행복스럽고, 또 가장 바쁜 때였다. 내 마음은 안정되었으나 다른 걱정 때문에 몸도
마음도 분주하였다. 이 무렵이 되어서야 비로소 우리들은 함께 길을 걸었다. 공원에도 몇 번 갔지만
그보다도 살 곳을 찾으러 다닌 적이 더 많았다. 나는 길거리에서 때때로 탐색하고, 조소하며, 천시하
고 경멸하는 눈초리와 마주치는 것을 느꼈다. 잠시라도 조심하지 않으면 온몸이 움츠러들었기에, 즉각
나의 오만과 반항심으로 버티어 나가는 수밖에 없었다. 오히려 그녀는 조금도 두려워하는 빛이 없고,
이런 일들에 대해서는 전혀 무관심했으며, 의젓하게 느릿느릿 걸어가는 것이 마치 태연히 무인지경에
들어가는 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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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 권장도서 - 루쉰 소설 전집
집을 구하는 일은 사실 쉽지 않았다. 대부분은 저 쪽에서 이유를 내세우고 거절했다. 스무 군데 이상
이나 보고서야 겨우 얼마 동안 그런 대로 살아갈 만한 곳을 찾아냈다. 우리의 가재도구는 아주 간단
했다. 하지만 이미 내가 장만한 돈을 대부분 썼기 때문에 쯔쥔은 그녀의 유일한 패물인 금반지와 금
귀걸이를 팔았다. 나는 그녀를 말렸지만 아무래도 팔겠다고 하기에 나 역시 더 이상은 우기지 않았다.
그녀는 이미 숙부와 다투고 나왔으므로 그녀의 숙부는 다시는 조카딸로 인정하지 않겠다고 노발대발
하였다. 나도 역시 나를 위해 충고하는 체하면서, 실은 내가 하는 일에 겁을 먹고, 혹은 질투까지 하
고 있는 몇몇 친구들과 잇달아 절교했다. 매일 일이 끝나는 것은 비록 저녁 무렵이었고, 인력거꾼은
그토록 느렸지만 그래도 어쨌든 둘만이 마주하는 시간이 있었다. 우리는 먼저 말없이 서로 지켜보다
가, 이윽고 마음을 터놓고 친밀한 대화를 나누고, 그리고는 또 침묵에 잠기는 것이었다. 나는 점차 똑
똑히 그녀의 육체와 그녀의 영혼을 읽고 있었다. 3주일이 못되어 나는 그녀에 대해 더욱 깊이 이해하
였다.
쯔쥔은 나날이 발랄해졌다. 그녀는 동물을 좋아했다. 아마도 집주인에게서 전염되었는지 모르지만, 한
달도 못 되어 우리 가족은, 아쉐이라 부르는 얼룩 강아지 한 마리와 4마리의 병아리로 늘어났다. 애정
이란 반드시 때때로 새롭게 생겨나고 성장하며 창조되지 않으면 안 된다. 이것은 사실이다. 내가 쯔쥔
에게 이 말을 하자 그녀도 잘 알고 있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아, 그것은 얼마나 편안하고 행복
스러운 밤이었던가!
안녕과 행복은 함께 응고되어야만 이렇게 영원한 안녕과 행복이 된다. 쯔쥔은 몸이 나고 혈색도 좋아
졌지만 애석하게도 일이 바빴다. 집안일에 쫓겨 세상 이야기를 할 틈도 없었고, 하물며 독서 산책 따
위는 말할 것도 없었다. 저녁때 집에 돌아와 그녀가 우울한 얼굴을 하고 있으면, 나 역시 불쾌하였다.
더욱이 나를 즐겁지 못하게 하는 것은, 그녀가 억지로 웃는 얼굴을 꾸미는 일이었다. 다행히 그 내용
을 듣고 보니, 별일은 아니었다. 주인집과 병아리 때문에 말다툼을 한 것이었다.
요리 만드는 것이 비록 쯔쥔의 장기는 아니었지만 그녀는 이것에 전력을 기울였다. 그녀의 밤낮 없는
마음씀에 대해 나도 또한 고락을 함께 하기 위해 마음을 쓰지 않을 수 없었다. 더구나 그녀는 아침부
터 밤까지 온통 땀을 흘려서 짧은 머리카락이 이마에 붙고 두 손은 또 그토록 거칠어졌다. 게다가 아
쉐이를 기르고, 병아리를 돌보고⋯ 모든 것이 그녀가 아니면 안 될 일들이었다. 나는 그녀에게 충고를
했다. 나는 안 먹어도 괜찮으니 절대로 이렇게 애쓰지 말아요! 그녀는 흘깃 나를 바라볼 뿐 입을 열
지 않았으며, 쓸쓸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나도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녀는 여전히 힘겨
운 일을 했다.
진작부터 예상하고 있던 타격이 마침내 닥쳐왔다. 대문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서 내가 문을 열어 보니,
내 사무실의 사환이었다. 그는 내게 해고한다는 내용이 담긴 한 장의 프린트한 종이쪽지를 건네주었
다. 동거한다는 이야기가 국장의 귀에까지 들어간 것이다. 사실 이것이 타격이라고 할 수는 없다고 생
각하려 애썼다. 남의 글을 베껴 써주거나 글을 가르쳐주거나 혹은 힘을 들겠지만 책 번역 같은 일을
할 수도 있다고 벌써부터 작정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래도 나의 가슴은 두근거렸다. 그렇게
도 겁이 없던 쯔쥔의 얼굴빛이 변한 것은 더욱이 내 가슴을 아프게 했다. 그녀는 요즘 마음이 약해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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것 같았다. 인간이란 참으로 우스운 동물이어서 아주 자질구레하고 조그만 일에도 매우 심각한 영향
을 받게 되는 것이다.
우리는 처음에 말없이 서로 지켜만 보다가 점차 의논을 시작했다. 수중에 있는 돈을 최대한 절약하고,
글을 베껴주거나 글을 가르칠 데를 구하는 작은 광고를 내며, 한편으로는 『자유의 벗』 편집장에게
도 편지를 써서 현재 나의 처지를 설명하고, 나의 번역본을 채택하여 어려운 시기를 도와달라고 부탁
해 보기로 했다. 그녀는 몹시 수척하고 쓸쓸해보였다. 이처럼 보잘것없는 작은 일이, 의연하고 두려움
을 모르던 쯔쥔에게 이토록 현저한 변화를 주리라고는 정말 생각지도 못했었다.
작은 광고는 별다른 효과를 내지 못했고, 책 번역 역시 용이한 일은 아니었다. 하지만 나는 열심히 했
다. 별로 낡지도 않은 자전이 반달도 못되어 가장자리에 새까만 손가락 자국이 짙게 생겼다. 좋은 원
고를 썩히지 않는다는 이야기를 했던『자유의 벗』편집장이 나의 원고를 채택해 주리라 믿으며 나는
계속 열심히 작업을 했다.
유감스럽게도 내게는 조용한 방이 없었다. 쯔쥔에게서는 이전의 정숙과 깊은 사려가 없어졌다. 방안에
는 항상 그릇들이 흐트러져 있고, 연기가 자욱하여 제대로 안정된 마음으로 일을 할 수가 없었다. 그
녀는 이전에 알고 있던 일을 완전히 잊어버린 듯 했고 또 나의 구상이 언제고 밥을 먹으라는 재촉 때
문에 단절된다는 것도 생각하지 않는 것 같았다. 자리에 앉아 조금 화내는 기색을 보여도 그녀는 전
혀 고치려 하지 않고 여전히 전혀 느끼지 못하는 듯이 밥만 먹어대는 것이었다.
그에 더하여 시냇물의 흐름이 쉼 없듯이 매일매일의 식사가 있었다. 쯔쥔의 공로는 완전히 이 식사
위에 세워지고 있는 듯했다. 먹고는 돈을 변통하고, 돈을 변통해 와서는 또 먹었다. 더욱이 아쉐이도
먹이고 닭도 길러야 했다. 그녀는, 아쉐이와 병아리들이 너무 가엾을만큼 말랐고 집주인 아주머니가
그것 때문에 우리를 비웃고 있으므로 이런 모욕을 참을 수 없다고 이야기했다. 그래서 내가 먹다 남
긴 밥은 닭들과 아쉐이가 먹었다. 헉슬리가 우주에 있어서의 인류의 위치에서 결론지었듯이, 나의 이
집에서의 위치가 개와 닭의 중간에 지나지 않음을 스스로 깨닫게 되었다.
그 후 몇 차례의 다툼과 독촉을 거쳐 닭들은 점차 반찬으로 변했다. 그 후로는 아주 조용해졌다. 단지
쯔쥔만이 매우 기운이 없고 항상 쓸쓸하고 무료함을 느끼는 듯했으며 별로 말을 하고 싶어하지 않았
다. 인간이란 정말 쉽게도 변하는 것이로구나!하고 나는 생각했다. 그러나 아쉐이도 둘 수 없게 되었
다. 우리는 이미 아무 데서라도 일자리 의뢰가 오리라는 것을 더 이상 바랄 수 없게 되었다. 쯔쥔에게
는 이미 아쉐이에게 절을 시키거나 재롱을 부리게 하기 위하여 줄 한조각의 먹이도 없었다. 겨울은
이토록 빨리 다가오는지 난로가 커다란 문제가 되었다. 나는 아쉐이를 책보로 머리를 싸서, 교외까지
데리고 가서 버렸다. 그래도 쫓아오려 하기에 별로 깊지 않은 구덩이에 밀어넣었다.
나는 집에 돌아오자 훨씬 조용해졌음을 느꼈다. 그러나 쯔쥔의 비통해 하는 기색은 나를 몹시 놀라게
했다. 게다가 차가움까지 가해졌다. 그것은 여지껏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표정이었다. 물론 아쉐이 때
문이었다. 하지만 어찌 이 지경에 이른단 말인가. 나는 그녀의 말투와 표정에서, 그녀가 나를 잔인한
인간이라고 여기고 있음을 알았다. 사실 나 혼자뿐이라면 생활해 가기는 용이했다. 지금 이런 생활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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압박에서 오는 고통을 참아내는 것도 대부분은 그녀를 위한 것이고 아쉐이를 버린 것도 그녀를 위한
것이 아니겠는가. 그러나 쯔쥔의 식견은 이런 점조차도 생각하지 못할 지경으로 천박해진 것 같았다.
차가운 날씨와 싸늘한 표정은 나를 편안하게 가정에 있을 수 없게 핍박했다. 나는 일반 도서관에서
나의 천당을 찾아냈다. 그 곳은 표를 살 필요가 없었고, 열람실에는 두 개의 난로까지 있었다. 거기엔
비록 내가 읽을 만한 책은 없었지만 내가 생각할 수 없는 편안함이 있었다. 혼자 멍하니 앉아 지난
일들을 돌이켜 보니, 지난 반 년 동안 오직 사랑을 위하여 - 맹목적인 사랑을- 그 밖의 인생의 의의를
모두 소흘히 했음을 깨달았다. 첫째는 생활이다. 사람은 반드시 생활을 해야만 사랑도 비로소 따르게
되는 것이다.
그녀의 용기는 모두 상실되었다. 단지 아쉐이 때문에 슬퍼하고, 밥상을 마련하기에 골몰할 뿐이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그다지 야위지 않았다는 것이다. 쯔쥔도 알아차린 것 같다. 그 이후로는 무감각한
것 같았던 냉정을 잃고, 비록 감추려고 애를 쓰나 역시 때때로 근심과 의혹의 빛을 나타내는 것이었
다. 그러나 내게 대해서는 훨씬 부드러워졌다. 나는 그녀에게 확실히 이야기하려고 하면서도 차마 말
을 꺼낼 용기가 없었다. 결심을 하고 난 다음에도, 막상 그녀의 어린아이 같은 눈을 보면 잠시라도 억
지웃음을 짓지 않을 수 없게 되는 것이었다.
그녀는 그 이후로, 다시금 지나간 옛일의 복습과 새로운 시험을 시작했다. 나에게 숱한 친절한 답안을
허위로 작성하여, 그녀에게 친절함을 보여주게 하고, 그 허위의 초고를 자신의 마음속에 쓰도록 하는
것이었다. 나의 마음속은 점차 이들 초고에 의해 메워져 숨쉬기조차 어려웠다. 나는 고뇌 속에서 항상
생각했다. 진실을 말함에는 지극히 커다란 용기가 있어야만 한다. 가령 이런 용기가 없어 허위에 안주
한다면, 그야말로 새로운 삶의 길을 열 수 없는 인간이 되고 만다. 나는 이런 사람이 아닐 뿐만이 아
니라 이런 사람은 있지도 않았다.
그녀는 벌써부터 아무 책도 읽지 않고 있었다. 생활의 길을 개척하려면 반드시 손을 맞잡고 함께 나
아가거나, 또는 홀로 분투하며 나아가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모르고 있었다. 남의 옷자락에 매달리
는 것만 알게 되면 비록 전사라 할지라도 전투를 할 수 없게 되고 함께 멸망할 수밖에 없게 된다. 나
는 새로운 희망은 우리 두 사람이 헤어지는 길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그녀를 단호히 버리고 떠나가야
만 한다. - 나는 갑자기 그녀의 죽음을 상상했다. 그러나 곧 자책이 되어 참회했다.
나는 그녀와 한담하면서 고의로 우리의 지난 일들을 끄집어냈다. 문학에 관해서 이야기하고, 외국작가
들과 그들의 작품에 대해서 언급했다. <인형의 집> 같은 작품 이야기를 하며 노라의 과단성을 칭찬하
기도 했다. 그런 것들은 모두 작년에 낡은 방에서 이야기한 적이 있는 것들이었으나, 현재는 이미 공
허한 것으로 변하였다. 나의 입에서 나온 말이 나의 귀로 전해 올 때마다 몸을 숨긴 나쁜 아이가 등
뒤에 숨어 짓궂고 냉혹하게 나를 흉내 내고 있는 것이 아닌가 의심이 되었다. 그녀는 잠시 침묵하더
니 이렇게 말했다. 하지만.... 당신, 제 생각에는 요즈음 당신이 아주 달라지신 것 같아요. 그렇지요?
당신 - 사실대로 솔직히 말씀해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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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마치 머리를 한 대 얻어맞은 것같이 느껴졌다. 그러나 곧 정신을 가다듬고 나의 생각과 나의 주
장을 말했다. 함께 멸망하는 것을 면하기 위해서는 새로운 길을 개척하고, 새로운 생활을 재건해야 한
다고. 마지막에 나는 굳게 결심하고 다음과 같은 말을 덧붙였다. ..... 더구나 당신은 이미 조금도 거리
끼지 않고 용감히 전진할 수 있게 되었소. 당신은 내게 솔직히 말하라고 하는데, 옳은 말이오. 인간은
허위적이어서는 안 되오. 솔직히 말하겠소! 왜냐하면 나는 이미 당신을 사랑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오!
그러나 이것은 당신에겐 훨씬 다행스러운 일이오. 당신은 아무런 걱정없이 일을 해나갈 수 있기 때문
이오.....
나는 동시에 커다란 변화가 닥쳐오리라고 예상했다. 그러나 침묵만이 있을 뿐이었다. 그녀의 안색은
갑자기 흙빛으로 변하고 마치 죽은 사람 같더니 금세 생기를 되찾고, 눈에서도 순진하고 반짝이는 밝
은 빛이 나타났다. 그 눈빛은 마치 기갈이 들린 어린아이가 자애로운 어머니를 찾는 것같이 사방으로
쏘아보았으나 다만 허공 중에서 찾고 있을 뿐 두려운 듯이 내 시선을 피하고 있었다. 나는 더 이상
볼 수가 없었다. 다행히 아침이었으므로, 나는 추위를 무릅쓰고 일반 도서관으로 달려갔다. 거기에서
『자유의 벗』에 나의 소품문들이 모두 게재되어 있음을 발견했다. 생활의 길이 열리기 시작했다. 그
러나 역시 현재의 상태는 안 된다. 나는 오랫동안 소식을 끊었던 친구들을 방문하기 시작했다. 추위의
바늘은 내 영혼을 찌르고, 나를 마비의 고통으로 영원히 괴롭혔다. 나도 아직 날개 치는 것을 잊지 않
고 있다. 나는 생각했다. 별안간 그녀의 죽음을 생각했다. 그러나 곧 자책하고 참회했다.
며칠이 지난, 겨울에서 봄철로 접어들 무렵의 일이었다. 평소처럼 오랫동안 밖에서 배회하고 상당히
어두워져서 집에 들어갔는데 불이 켜져 있지 않았다. 집주인의 부인이 그녀의 부친이 그녀를 데려갔
다고 간단히 말했다. 아무 말도 없이 갔다고 한다. 나는 못 믿겠다. 그러나 방안은 이상하게 적막하고
공허했다. 나는 여기저기 돌아보며 쯔쥔을 찾았지만, 단지 몇 개의 낡아 거무죽죽해진 가구들만이 보
일 뿐, 그것들이 사람 하나, 물건 한 가지를 숨길 능력이 없음을 증명해 주고 있었다. 편지나 쪽지도
없었다. 다만 몇 십 개쯤 되는 동전이 있을 뿐이었다. 이것은 우리 두 사람의 생활비의 전부였다. 지
금 그녀는 정중하게 이것을 나 한 사람에게 남겨주고, 무언중에 이것으로 며칠이든 오래 생활을 유지
하도록 일러주는 것이었다.
마음이 얼마간 가벼워지고 풀렸다. 하지만 이내 마음이 더 무거워짐을 느꼈다. 나는 무엇 때문에 며칠
을 더 참지 못하고 그녀에게 그처럼 성급하게, 사실대로 말했던 것일까? 지금 그녀는 알고 있다. 그녀
의 앞길은 단지 그녀 아버지의 - 자녀의 채권자로서의- 열화 같은 위엄과, 주위 사람들의 서리보다도
차가운 눈초리뿐이라는 것을. 공허의 무거운 짐을 짊어지고 위엄과 차가운 눈초리 속에서, 이른바 인
생이라는 길을 걸어간다는 것은 이 얼마나 무서운 일인가!
나는 쯔쥔에게 사실을 말하지 말았어야 했다. 우리는 서로 사랑하였으므로 나는 그녀에게 영원히 나
의 거짓말을 바쳐야만 했다. 내가 허위의 무거운 짐을 짊어질 용기가 없었던 탓으로 도리어 그녀에게
진실의 무거운 짐을 지웠다. 나는 그녀의 죽음을 생각했다. 나는 자신이 비겁자임을 알았다. 비겁자는
당연히 강한 사람들에 의해 그것이 진실한 인간이든 허위의 인간이든 간에 배격되지 않으면 안된다.
그럼에도 그녀는 오히려 내가 얼마간이라도 생활할 수 있기를 바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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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자리를 부탁하러, 그간 문안도 드리지 않던 백부를 찾아갔다. 그는 우리들의 지난 일을 모두 알고
있었고, 매우 냉담했다. 물론 자네는 여기 있을 수 없네. 그 뭔가, 자네 친구인가, 쯔쥔이라는 여자,
자네도 알고 있을 테지만, 그 여자 죽었네. 정말이구 말구. 이유? 누가 아나? 여하튼 죽었다더군. 나
는 이미 어떻게 그에게 작별하고 집으로 돌아왔는지 기억나지 않는다. 쯔쥔은 이제 다시는 작년처럼
올 수 없게 되었다. 그녀의 운명은 이미 내가 준 진실로 결정지어졌던 것이다. - 사랑 없는 인간은 죽
고 만다는 진실. 물론 나는 여기에 있을 수 없다. 그러나 어디로 가야 할까?
주위는 광대한 공허이고 또 죽음의 정적이 있었다. 나는 이제 거의 외출하지 않았다. 다만 광대한 공
허 속에 앉아서, 이 죽음의 정적이 나의 영혼을 침식하는 대로 맡겨두었다. 하늘이 잔뜩 찌푸린 어느
날, 한 마리의 작은 짐승이 주위를 어슬렁거리고 있었다. 야위어 거의 반은 죽어가고 있는, 온 몸이
흙투성이인 개, 그것은 아쉐이였다. 내가 지짜오 골목을 떠난 것은 집주인들이나, 그 집 식모의 차가
운 눈초리 때문만은 아니었다. 태반이 이 아쉐이 때문이었다.
그러나 어디로 가야 할까? 나는 쯔쥔의 장례식을 떠올렸다. 혼자서 공허의 무거운 짐을 짊어지고 회
색의 머나먼 길을 걸어간다. 그러나 이내 주위의 위엄과 차가운 눈초리 속에서 사라져버렸다. 나는 정
말로 귀신이라든가 지옥이라는 것이 있기를 바란다. 그렇다면 요사스러운 바람이 노호하는 곳일지라
도 나는 쯔쥔을 찾아 나설 것이고, 그녀의 면전에서 나의 회한과 비애를 이야기하며, 그녀에게 용서를
구할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지옥의 독화염이 나를 둘러싸고 격렬하게 나의 회한과 비애를 모두 태워
버리길 원한다. 나는 요사스러운 바람과 독화염 속에서 쯔쥔을 끌어안고 그녀에게 용서를 빌거나 혹
은 그녀의 마음을 달래줄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새로운 삶의 길보다도 더욱 공허한 것이다. 지금 있는 것은 이른 봄의 밤뿐이다. 아직
도 그토록 긴, 나는 살아 있다. 나는 반드시 새로운 삶의 길을 향해 발을 내딛지 않으면 안 된다. 그
첫 걸음은 - 오히려 나의 회한과 비애를 적는 것이다. 쯔쥔을 위해서, 나 자신을 위해서. 나는 역시,
단지 노래 부르는 것 같은 울음소리로 쯔쥔을 장송하고, 망각 속에 묻어버리리라. 나는 잊어야만 한
다. 나는 나 자신을 위해서 쯔쥔을 장송하는 것마저 결코 다시 생각해서는 안 된다. 나는 새로운 삶의
길을 향해 첫걸음을 내디뎌야만 한다. 나는 마음의 상처 속 깊숙이 진실을 감추어 묵묵히 전진해야
한다. 망각과 거짓말을 나의 길잡이로 삼고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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