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비장전
알몸으로 썩 나서면서 그래도 소경이 될까
염려되어 두 눈을 잔뜩 감고 이를 악물고
왈칵 두 손을 짚으면서 허우적거린다.
한참 동안 이 모양으로 헤엄쳐 갈 때
동헌 댓돌에다가 대가리를 부딪히니
배비장은 눈에서 불이 번쩍 나서 두 눈을 번쩍
뜨고 자세히 살펴보니⋯.
마당놀이 <배비장전> 의 한 장면
배비장전
작자 미상
기생 줄 돈 있으면 나라를 위해 피흘리는 젊은이에게 주라
옛날에는 기생을 해어화(解語花)라 했다. 규방 규수들이 꼭꼭 닫혀진 대문 속에서 바느질을 하는 동안
기생이라는 특정 계층의 여자들은 남자들의 술자리에서 술시중을 들어 한량들이 일컬어 말하는 꽃이
다 해서 해어화라는 이름을 얻었다.
기생이 언제부터 있었는지는 의견이 분분하나 고대부족사회의 무녀가 그러한 일을 하지 않았겠나 하
는 추측이 일반적이다. 즉 제사와 정치가 하나였던 사회에서의 사제였던 무녀가 왕권과 신권이 분리
되고 국가가 성립되는 과정에서 지방세력가와 결합해 근대의 기생 비슷한 역할을 했을 거라는 얘기
다.
조선 중기 이후 기생문화는 독특하다. 우선 유교문화와 더불어 사대부들의 문학 예술이 기생들 사이
에서 유행하게 되어 황진이, 이매창 같은 명인들이 문명을 날렸다. 한편 말기에 오면서 기생들은 일패
(一牌), 이패, 삼패 등 셋으로 구분되는데, 일패는 전통 무가의 보존, 전승자로 뛰어난 예술감각을 지닌
기생들이다. 일패는 대부분 관기였다. 그들 내부에서는 규율도 엄했고, 자부심도 굉장했다. 이패는 밀
매음(密賣淫), 삼패는 공창(公娼)의 기능을 했다. 일제시대 진주 기생 산홍은 기생 줄 돈이 있으면 나
라를 위해 피흘리는 젊은이에게 주라 고 하릴없는 한량들을 꾸짖었다고 한다. 『배비장전』은 일패기
생 애랑이 양반을 갖고 노는 이야기로 애교 있고, 의기 있고, 재주 뛰어나고, 미모도 있는 애랑이와
배비장의 이야기가 주된 이야기로 전개된다.
중세적 인간형의 위선과 이중성을 고발하는 풍자 한마당
명절이면 어김없이 안방으로 찾아오는 텔레비전 프로그램으로 더욱 친숙한 『배비장전』은, 조선후기
의 대표적인 풍자소설로 알려져 있다. 민중을 대표하는 방자와 애랑을 통해 양반의 위선과 허위의식
을 통렬히 고발하는 풍자소설이라는 것이 『배비장전』에 대한 일반적인 견해다. 『배비장전』은 양
반 계층에 속하는 배비장이 양반의 윤리와 도덕을 내세우다가 기생의 유혹에 빠져들어 망신을 당하는
이야기다.
그러나 『배비장전』의 풍자가 배비장이라는 인물을 웃음거리로 만드는 과정에 집중되어 있다면 이
과정을 배후에서 조정, 혹은 방조하는 인물이 바로 제주목사라는 사실은 『배비장전』에 담긴 풍자의
대상이 단순히 양반계층 그 자체만은 아니라는 것을 암시한다. 더구나 배비장이라는 인물에 대한 풍
자는 연암 박지원의 한문 단편인 『양반전』이나 『호질』 등에서 나타나는 것처럼 직접적이지도, 신
랄하지도 않다. 무엇보다 배비장을 웃음거리로 만드는 과정은 모략이라기보다는 장난에 가까우며, 이
한바탕의 장난이 끝난 후 모든 사람들은 서로 화해할 뿐만 아니라 더욱 가까워진다.
그렇다면 『배비장전』에서 풍자의 대상이 되고 있는 것은 무엇일까? 해학적으로 비틀어서 한바탕 웃
게 한 후에 문득 심각하게 돌아보게 만드는, 그 웃음 속에 숨겨진 날카로운 비수는 과연 무엇일까?
『배비장전』에 담긴 풍자의 의미는 단순히 민중을 수탈한 대가로 호위호식하며 여색이나 밝히는 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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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들의 행태를 비판하는 차원을 넘어서고 있다. 표면의 한 층위를 벗기고 『배비장전』에 담긴 풍자
의 의미를 한층 깊이 탐색해 보면, 풍자의 초점이 바로 중세적인 도덕 관념의 허위성과 관념성을 제
시하는 동시에 지배이데올로기가 요구하는 인간형이 지닌 모순을 지적하는 데 있음을 알 수 있다.
고전소설은 창작과 유통방식이 현대소설과 달라 수많은 이본(異本)들이 존재하며 이 각각의 이본들은
그 나름의 독자적인 개성과 가치를 지닌다. 특정 개인에 의해 창작되어 인쇄, 출판의 과정을 거쳐 유
통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작가가 원본(元本)을 확인하기 어렵다.
누군가에 의해 한 번 씌어진 후 필사하여(때로는 판각하기도 함) 돌려보는 과정에서 읽는 이에 따라
조금씩 수정을 가해 전혀 다른 새로운 본들이 계속 재생산되는 것이다. 어느 본이 높은 가치를 지닌
본이며, 어느 본이 원래의 본에 가까운 것인지 연구과정을 통해 추정할 수는 있지만 쉽게 단정지을
수는 없다. 따라서 고전소설을 읽을 때는 각 이본에 따른 차이점을 고려해야 한다.
『배비장전』은 전해지는 본이 두 가지다. 1916년 신구서림에서 간행된 구활자본과 김삼불이 교주한
국제문화관본(1950년)이 있는데 두 본 모두 개작한 흔적이 뚜렷하다. 18세기 만화본 춘향가(1754), 19세
기 관우희(송만재:1788~1851), 송남잡지(1855), 신재효본 오섬가(신재효:1812~1884)등에 『배비장전』과
관련된 기록이 나오므로 그 판소리의 형성시기는 18세기에서 19세기 사이로 추정할 수 있다.
신구서림본에는 배비장이 제주 목사의 배려로 정의현감으로 부임한 후 선정을 베풀어 출세하고 애랑
이 배비장의 자식을 낳아 그 자식들이 또한 벼슬에 나아가는 과정이 첨가되어 있는데 현대적인 개작
의 징후가 분명하다.
김삼불본에서는 이러한 결말 부분이 생략된 채 양반들의 부도덕성과 방자의 민중성이 강화되어 있다.
이는 구활자본이 상업적인 대중소설이며 주된 독자층이 여성인 데 반해, 김삼불본은 김삼불의 사회정
치의식이 강하게 개입되었기 때문으로 보인다. 이에 따라 구활자본에서는 배비장이 풍류남자로 묘사
되어 해학적인 성격이 강하게 드러나고 김삼불본에서는 배비장이 호색양반으로 형상화되어 풍자적인
성격이 강하게 드러난다.
『배비장전』은 창(唱)을 잃어버린 판소리 7마당 중의 하나로 판소리적인 문체와 대중문화로서 판소리
가 지닌 대중성과 민중성, 유흥성을 모두 보여준다. 또한 다른 판소리계 소설들과 마찬가지로 여러 설
화들을 그 안에 수용하고 있는데 양반이 기생에게 속아 이빨을 뽑아주는 발치설화나 속임수에 걸려
궤 속에 들어가 수모를 당하는 미궤설화 등은 야담의 여러 작품에서도 종종 나타나는 설화들이다. 그
리고 『배비장전』은 『이춘풍전』과 함께 기생이 양반의 허위의식을 폭로하고 풍자하는 남성훼절담
의 전통 위에 있어 변화한 여성의식을 확인할 수 있는 작품이기도 하다.
한편 『배비장전』은 시정에 대한 뛰어난 묘사로 조선후기의 대표적인 세태소설로 읽히기도 한다. 세
태는 한 사회의 삶의 제반 형편을 일컫는 것으로 경험적 현실과 이에 대한 현실인식을 드러내는데
세태소설에 반영된 세태란, 중세적 관념에 대립되는 근대지향적인 인식에 의해 문제시된 현실이라
할 수 있다. 세태소설은 유교적인 금욕이념을 비판하고, 이데올로기적인 명분이나 방탕한 향락생활을
비판하며, 물질적 풍요를 중요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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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체적인 양상은 경직된 관념체계의 허위성을 폭로, 풍자하면서 하층민의 발랄함이 함께 구현되는 형
태로 드러나는데 이러한 양상의 밑바탕에는 경험지향적인 세계관과 사실적인 예술인식 등이 깔려 있
다. 시정의 일상인들을 등장시킴으로써 낭만적인 환상성과 관념적인 이념성을 떠나 일상성에 주목하
는 새로운 소설사적 흐름이 형성되기 시작한 것이다.
▣ S ho rt S umma ry
한양 양반 김경이 제주목사로 내려가는 길에 배선달은 비장으로 그를 수행한다. 배선달은 겉으로는
유교적인 도덕과 관습을 중요시하는 근엄한 양반이었으나 속으로는 색(色)을 밝히고 풍류를 즐기는 호
색가였다. 한편 제주도의 이름난 기생 애랑은 그 용모가 양귀비를 따라잡을 정도로 뛰어나고 간교한
꾀가 구미호 같아 한번 걸려든 사람이라면 누구든 상투 끝까지 빠져들어 허덕이곤 했다. 구관 사또를
보좌하던 정비장이 제주를 떠나려 하자 애랑은 그를 구슬려 온갖 재산과 의복은 물론 이빨을 빼고 속
옷까지 벗어놓고 가게 만든다.
신관 사또를 수행하던 배비장이 우연히 이 광경을 보고 양반의 체신이 땅에 떨어짐을 한탄하자 방자
는 배비장이 애랑의 유혹에 넘어가는지 여부를 두고 내기를 건다. 배비장이 신임관리라면 누구나 거
쳐야 하는 기생수청을 거부하자 주위 육방관속들과 제주목사, 그리고 애랑이 모두 이 내기에 공모한
다. 한편 방자에게 큰소리를 치던 배비장은 우연히 산 속에서 알몸으로 목욕을 하는 애랑을 보게 되
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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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비장전
작자 미상
▣ 어떤 사람들? 무슨 이야기?
배비장
신임 제주목사인 김경을 수행하는 비장. 겉으로는 군자인 척하지만 속으로는 여색(女色)을
좋아하는 이중적인 인물. 애랑과 방자의 꾀임에 빠져 동헌 마당에서 발가벗고 망신을 당한
다. 후에 애랑과 정식으로 결혼한다.
애랑
제주도의 이름난 기생. 용모와 맵시는 양귀비에 견줄 만하고 지혜 또한 뛰어나 어떤 남자라
도 능히 유혹한다. 제주목사, 방자 등과 공모해 배비장을 유혹하고 나중에 그를 웃음거리로
만드나 나중에 위기에 처한 배비장을 돕는다.
방자
배비장의 시중을 드는 천인. 애랑과 함께 배비장을 웃음거리로 만드는 데 주도적인 역할을
한다.
정비장
배선달과 같은 비장 신분. 애랑의 꾀와 언변에 빠져 갖고 있던 모든 재산은 물론 속옷까지
그녀에게 빼앗기는데 심지어는 자신의 이빨까지 그녀에게 준다.
김경
신임 제주목사. 배비장의 상급자로, 관례적으로 이루어지던 신관사또 연회와 기생수청을 배
비장이 거부하자 그를 웃음거리로 만들 계략을 세운다. 후에 배비장과 화해하고 그를 정의
현감으로 제수한다.
신임 제주목사의 비장으로 제주로 내려가는 배선달
제주라 하는 곳이 비록 떨어진 섬이오나 색향(色鄕)이라 하옵디다. 그곳에 계시다가 만일
주색에 몸이 잠겨 돌아오지 못하시면, 부모님께 불효되고, 첩의 신세 그 아니 원통하오?
세상의 모든 사람이 그 씨는 같지만 우열은 판이하게 달라 현인과 군자, 열녀와 음녀가 대를 이으니,
가지각색의 성질을 측량하기 어렵다. 사람의 성질은 산천의 정기를 타고나는데 호남 좌도 제주군 한
라산의 험준하고 아름다운 정기를 타고 기생 애랑이가 생겨났다.
애랑이가 비록 천한 기생으로 태어났을 망정 고운 맵시는 미인으로 유명한 월나라 서시나 양귀비보다
도 뛰어나고 지혜 역시 총명했으며, 간교한 꾀는 구미호가 환생한 듯하여 호색하는 사나이가 한 번
걸려들면 결코 헤어나지 못했다.
한양의 김생이라는 양반은 문필과 재능이 비범하여 일찍이 제주 목사를 제수 받았다. 김경이 도임길
에 오르고자 육방 관속을 뽑을 적에 서강에 사는 배선달을 불러 예방(禮房) 소임을 맡기니 높이 불러
배비장이라 했다.
배비장이 집으로 돌아와 그 사실을 가족들에게 고하자 대부인과 아내가 만류했다. 대부인은 배비장이
떠난 사이에 자신이 세상을 버리게 될까 걱정했으며 배비장의 아내는 배비장이 주색에 빠져 허우적댈
것을 걱정했다. 배비장은 걱정 말라며 큰소리치고는 하직 인사를 마치고 제주도로 길을 떠났다.
신임 제주 목사 일행이 길을 떠난 날, 온 산천은 봄빛으로 아름다웠다. 영주와 강진을 거쳐 해남에 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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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라 제주로 향하는 배를 타니 처음에는 날씨가 청명하고 바람이 순조로와 하늘과 맞닿은 바다와 아
름다운 경치를 구경하며 즐겁게 항해를 시작했다. 그러나 갑자기 비바람이 거세게 불기 시작하여 물
결이 크게 일자 사또를 비롯한 모든 비장들이 겁을 먹고 곧 죽게 된 자신의 신세를 한탄했다.
신관 사또가 사공들에게 명하여 용왕제를 지내게 했다. 온갖 음식과 제물로 정성껏 고사를 지내니 풍
랑이 잠잠해져서 다시 바다 풍경을 즐기며 뱃길을 계속했다. 신관 사또 일행이 어느덧 제주성에 다다
르니 지세도 좋거니와 풍경이 더욱 좋았다.
간교한 꾀와 빼어난 말솜씨로 정비장을 알거지로 만드는 애랑
애랑이란 년 달라는 말 아니하여도 정비장을 물 오른 송기 때 벗기듯 하려는데, 가지고
싶은 대로 달래라고 하니 불한당 같은 마음에 피나무 껍질 벗기듯이 아주 홀랑 벗기려
고⋯.
제주에서 가장 빼어난 경치를 자랑하는 망월루(望月樓)에서 구관 사또의 관속이었던 정비장이 수청기
생 애랑과 애타는 이별을 하고 있다. 정비장이 애랑의 손을 잡고 서울로 떠나야 하는 자신의 신세를
한탄하며 우미인과 이별하던 항우나 양귀비와 이별하던 당명황도 자신의 심정보다 더 애틋하지 않을
것이라고 눈물을 흘렸다.
애랑은 애써 마음에도 없는 슬픔과 눈물을 자아내며, 하루 아침에 이별하게 되니 이제 누구에게 의탁
하여 먹고 입고 살겠냐고 길게 탄식했다. 이 말을 들은 정비장이 자신이 올라간 후에도 한동안 먹고
살 수 있을 정도로 넉넉하게 자신의 볏짐을 풀어줬다. 볏짐에는 제주에서 나는 온갖 이름난 특산물들
과 비단, 고기 등이 포함되어 있었다.
애랑이 정비장이 떠난 후 애타는 그리움과 긴긴 밤의 외로움을 어떻게 달래겠냐며 슬픈 척하자, 정비
장이 노리개를 풀어줬다. 애랑은 이 기회를 틈타 정비장의 모든 것을 빼앗으리라 마음먹고 정비장에
게 갓두루마기를 벗어주고 가면 그것으로 외로움과 시름을 달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정비장이
양가죽으로 만든 갓두루마기를 벗어주며 자신을 잊지 말라 당부했다.
애랑이 추운 겨울날에 귀가 시려워 어떻게 살겠느냐고 하자 정비장이 돼지 가죽으로 만든 휘양을 벗
어주며 자신을 잊지 말라 당부했다. 애랑이 또 칼을 달라고 하나 이번에는 정비장이 거절했다. 애랑이
이별 정표로 달라고 다시 애원해도 끝내 거절하다가 애랑이 자신을 겁탈하려는 젊은 호남자들을 물리
치기 위해 칼이 필요하다고 말하자 정비장은 껄껄 웃으며 자신의 칼을 내어줬다.
이렇게 해서 애랑에게 의복은 물론 고의적삼까지 벗어준 정비장은 알몸이 되고 말았다. 그러나 애랑
은 여기서 그만 두지 않고 정비장에게 상투를 베어 달라 하고 정비장이 이를 거절하자 앞니를 빼달라
했다. 죽은 후에 관에 넣어 가겠다는 애랑의 말에 미혹된 정비장이 방자를 시켜 자신의 이빨을 뽑으
려 했으나 잘못하여 코를 다치고 말았다. 마침내 떠날 시간이 임박하여 두 사람은 죽어서라도 다시
만날 것을 기약하며 헤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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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생수청을 거부한 후 계락에 말려 알몸으로 목욕하는 애랑에게 빠져드는 배비장
우르렁 출렁 목욕하는 저 거동, 손도 씻고 발도 씻고, 배, 가슴, 젖도 씻고 예도 씻고 게도
씻고 샅도 씻고 한창 이렇게 목욕할 때에 배비장은 그 거동을 보고 어깨가 실룩해지고 정
신을 잃어 구대정남(九代貞男) 간 데 없고 도리어 음남(淫男)이 되어 눈을 모로 뜨고 도둑
나무하다가 쫓기는 듯 숨을 헐떡거리며 혼자 이르는 말이, 어! 저 여인이 누구인지는 모
르겠으나 사람 여럿 녹였겠구나.
배비장이 정비장과 애랑이 이별하는 장면을 보고 양반의 체신이 땅에 떨어졌다며 탄식했다. 곁에 있
던 방자가 코웃음을 치며 누구라도 애랑에게 빠지지 않을 수 없을 것이라며 응수하자 배비장이 그의
경솔함을 나무랐다. 이에 방자가 내기를 제안하는데, 그 내기의 내용인즉, 배비장이 올라가기 전까지
애랑에게 빠져들지 않으면 자신의 가솔들이 모두 배비장의 든안밥 머슴(머슴이긴 하지만 잠은 아니자
고 밥만 얻어먹는 머슴)이 되고 애랑에게 반하면 타던 말을 방자에게 준다는 것이었다.
이윽고 신관 사또가 부임하고 모든 비장들이 여러 기생들을 골라 각기 기생수청을 받는데 배비장만이
이를 거부했다. 배비장 역시 속마음은 그들처럼 즐기고 싶었으나 방자와 내기한 바가 있어 어쩌지 못
하고 참았다. 동료 비장들이 계속 권하자 속이 뒤틀린 배비장은 자기 눈앞에 기생을 보이는 자는 엄
벌하겠다는 엄포를 놓았다.
이러한 사실을 사또가 듣고 일등 명기들을 모두 불러모아 제안하기를, 배비장을 즐겁게 하여 웃게 하
는 자가 있으면 후한 상을 주겠다고 했다. 이때 애랑이 선뜻 나서 배비장을 유혹하겠다고 했다. 애랑
이 계책을 내 다음날 신관 사또를 비롯한 모든 비장들이 꽃놀이를 가기로 했다.
때는 봄날이라 온 산에 꽃이 만발하고 온갖 새들이 지저귀며 폭포수와 계곡물이 굽이굽이 흘러가니,
사또와 비장들이 춘흥에 겨워 기생들과 함께 술을 마시며 즐거워했다. 이때 배비장만은 혼자 고고한
척하며 이를 외면하는데 문득 수풀 사이에서 알몸으로 목욕을 하는 애랑을 발견했다.
애랑의 아름다운 자태와 용모, 그리고 알몸을 보고 배비장은 끓어오르는 정욕을 참을 수 없었다. 배비
장은 가장 정숙한 남자인 척하던 이제까지의 품행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애랑을 탐하기 시작하여 사또
와 모든 비장들이 돌아갈 때 혼자 꾀병으로 숲 속에 남겠다고 했다. 육방 관속들이 이를 눈치채고 그
병은 여인이 만져주어야 낫는 병이라며 그를 우롱하나 배비장은 애랑에 대한 탐욕에 사로잡혀 이를
눈치채지 못했다.
방자와 함께 산 속에 남겨진 배비장은 경치를 구경하는 척하며 애랑의 모습을 훔쳐보다가 방자에게
놀림과 풍자의 대상이 되었다. 방자는 이제 더 이상 배비장에게 말을 높이지 않고 색(色)을 밝히는 인
간이라며 배비장을 나무랐다. 방자가 일부러 헛기침을 하자 애랑은 짐짓 놀란 척하며 수풀 속으로 숨
고 애간장이 타는 배비장은 방자를 시켜 애랑을 만나게 해달라고 사정을 했다.
배비장의 심부름으로 애랑을 찾아간 방자는 배고픔이 심하니 음식을 좀 나누어 달라 하고 애랑은 미
리 준비해 두었던 음식으로 정성스레 상을 차렸다. 음식상을 받아든 배비장은 애랑이 이빨로 꼭지를
물어뗀 감을 맛있게 먹고 방자를 시켜 다시 만나고 싶다는 의사를 전했다. 애랑이 이를 거절하자 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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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장은 어쩔 수 없이 길게 탄식하고 하릴없이 산을 내려왔다.
그러나 배비장은 애랑을 잊지 못해 시름에 잠기고 죽더라도 애랑을 한 번 보고 죽으리라고 결심하고
급기야 방자를 불러 애랑을 만나보게 해달라고 애원하나 방자는 이를 거절했다. 할 수 없이 방자와
함께 소설책을 보던 배비장은 여전히 애랑의 생각을 떨쳐버리지 못하고 구전으로 삼백 냥을 주고 노
모를 보살펴주겠다는 조건으로 방자에게 다시 애랑 만나보기를 간청했다.
배비장은 스스로를 걸덕쇠라 칭하며 자신의 애타는 마음을 편지로 쓰고 방자는 이 편지를 들고 애랑
을 찾아갔다. 방자는 애랑에게 답장을 하되 쉽게 허락하지 말고 애타게 하라고 주문하고 다시 애랑의
편지를 받아들고 배비장에게 돌아온다. 자신을 호되게 나무라는 애랑의 편지를 읽은 배비장은 낙담했
다. 그러나 편지의 맨 아래쪽을 읽어보라는 방자의 말을 듣고 이를 살피던 배비장은 북쪽 창의 빈틈
으로 들어오라는 애랑의 뜻을 읽고 뛸 듯이 기뻐했다.
발가벗고 궤 속에 들어갔다 동헌 마당에서 망신당하는 배비장
함정같이 잠긴 금거북쇠를 덜커덕 열어 놓으니, 배비장은 알몸으로 썩 나서면서 그래도
소경이 될까 염려되어 두 눈을 잔뜩 감고 이를 악물고 왈칵 두 손을 짚으면서 허우적거린
다. 한참 동안 이 모양으로 헤엄쳐 갈 때 동헌 댓돌에다가 대가리를 부딪히니 배비장은
눈에서 불이 번쩍 나서 두 눈을 번쩍 뜨고 자세히 살펴보니, 동헌에 사또가 앉고 대청에
삼공형(三公兄)이며 전후 좌우에 기생들과 육방 관속 노령배(奴令輩)가 일시에 두 손으로
입을 막고 참는 것이 웃음이다.
애랑의 전갈에 씻은 듯이 병이 나은 배비장은 해가 지자마자 의관을 정제하고 애랑의 집을 찾아갔다.
배비장을 따라 가던 방자는 배비장에게 양반 의복을 벗고 개가죽 두루마기와 놋벙거지를 쓰기를 권하
고, 배비장은 제주사람 옷차림이어야 의심을 받지 않는다는 방자의 말에 속아 그의 말대로 다시 옷을
차려 입었다. 마침내 애랑의 집에 도착한 배비장은 담 구멍으로 들어가다가 배가 걸려 빠져나가지 못
하자 방자가 배비장의 상투를 잡아당겨 겨우 빠져나갔다.
집안으로 들어간 배비장은 문구멍을 뚫어 몰래 애랑의 고운 자태를 엿보다 담배 연기에 기침을 하고
말았다. 애랑이 누구냐고 묻자 자신을 배걸덕쇠라고 소개한 배비장은 애랑과 이부자리에 들기를 서
두르는데 갑자기 방자가 소리를 지르며 들어왔다. 깜짝 놀란 배비장은 알몸으로 이불을 뒤집어 쓰고
애랑에게 누구냐고 묻었다. 애랑이 자신의 남편인데 기운이 항우와 같고 화가 나면 몹시 무섭다고 하
니 배비장은 겁에 질려 애랑에게 자신의 목숨을 구할 방도를 내달라고 애걸했다.
애랑이 미리 준비해둔 커다란 자루에 들어가라고 하자 배비장은 그대로 따랐다. 애랑은 자루의 끈을
배비장의 상투에 모두어 감아 매고 방구석에 세워 둔 뒤 불을 켰다. 방자가 문을 열고 들어서며 방구
석에 세워둔 자루가 무엇이냐며 묻자 애랑이 거문고에 새 줄을 달아 세워둔 것이라 하니, 방자가 거
문고면 한 번 타보라고 하며 대꼬챙이로 자루를 찌르자 배비장은 아픈 것을 참고 마치 거문고인 냥
둥덩 둥덩 소리를 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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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자가 잠시 소피를 보겠다며 나간 사이 배비장은 애랑에게 필시 자루를 열어볼 듯 하니 자신을 다른
곳으로 옮겨 달라 했다. 애랑이 피나무 궤를 열고 들어가라고 하자 배비장은 작은 궤에 들어가 몸을
옹송그린 채 자신의 신세를 한탄했다. 애랑이 자물쇠를 채우자 방자가 들어오면서 아까 꿈을 꾸니 백
수 노인이 이르기를, 궤 속에 금신(金神)이 들었다고 했으니 저 궤를 당장 불에 태워버리라고 말했다.
그러자 애랑이 악을 쓰며 궤 속에는 업귀신이 들어 그 덕에 먹고사니 절대 그리할 수 없다고 했다.
궤를 두고 옥신각신하던 방자와 애랑은 결국 궤를 톱으로 잘라 반으로 가르기로 하고 이 말을 들은
배비장은 방자를 타이르기 시작했다. 배비장의 말을 들은 방자는 업귀신이 말을 한다고 하며 물에다
넣어 버리자고 했다. 방자가 궤짝을 짊어지고 상두꾼 소리를 하며 문을 나서는데 갑자기 한 사람이
나타나 업귀신의 자지가 장질병에 좋다며 궤를 팔라고 했다. 배비장은 목숨이라도 건져야 겠다는 생
각에서 업귀신인 척하며 그 사람에게 궤를 팔라고 소리 질렀다.
그러나 방자는 바닷물에 띄워보내겠다며 궤를 던져버렸다. 주위에서 궤 틈에 물을 부으며 마구 흔들
어대자 배비장은 자신이 바다에 떨어진 것이라 생각했다. 사또가 하인들을 불러 사공들이 배를 몰고
가다 닻을 감고 노를 젓는 소리를 흉내내게 하자 배비장은 배를 탄 사공들이 자기 주변에 있다고 생
각하고 살려달라며 소리를 질렀다. 곁에 있던 사령이 소리를 들은 척하며 구해주겠다고 하자 배비장
은 자신을 배걸덕쇠라고 말했다.
사령들이 사공인 척하며 짠물이 들어가면 눈이 상하니 눈을 감고 나오라고 했다. 사령들이 궤를 열자
배비장은 알몸으로 나와 허우적대다 동헌 댓돌에 머리를 부딪혔다. 놀라 눈을 뜨고 보니 동헌 마루에
알몸으로 허우적대는 자신을 보고 사또와 육방관속, 사령들이 모두 웃고 있는 것이 아닌가. 사또가 웃
으며 웬일이냐고 묻자 근래에 곤손풍(坤巽風. 서남풍. 곧 조상의 무덤에 대하여 반대방향에서 부는 바
람)이 불어 이리 되었다고 대답했다. 사또가 웃으며 의복을 내어주고 동료들이 그를 위로했다.
다시 애랑에게 속아 제주로 돌아온 후 정의현감이 되는 배비장
나으리 떠나실 때에 제주목사께서 애랑을 시켜 나으리를 중도에 가서 한달만 머무르게
하라 하시더니, 과연 오늘 이 경사 있게 하셨구려. 속담에 물에 잡아 넣으면 건져낼 힘도
있다 하더니, 사또께서 나으리를 여지없이 속이시고 다시 이와 같이 보살펴 생각하시니
첫째는 나으리의 복이요, 둘째는 사또의 은덕이오.
사또가 애랑으로 하여금 배비장의 수청을 들게 하며 머물길 권하나 배비장은 더 이상 고개들 면목이
없어 서울로 돌아가려 했다. 해진 도포를 입고 망가진 갓을 쓴 초라한 행색으로 해변에 앉아 있던 배
비장은 마침 일을 끝내고 바다에서 나오는 해녀에게 뭍으로 가는 배가 있는지 묻었다. 그러나 해녀는
배비장의 하대에 버럭 성을 내며 세도가 대단하던 배비장도 궤 속 귀신이 될 뻔한 판에 웬 양반 흉내
냐고 따졌다. 이에 배비장은 참담함을 금치 못하고 자기 신세를 한탄하는데 뭍으로 가는 배가 이미
떠나 며칠을 기다려야 한다는 해녀의 말에 더욱 절망했다.
그러나 제주성 안의 어느 양반 부인이 단독으로 배를 내어 친정인 해남으로 간다는 말을 들은 배비장
은 그 배 사공들에게 하소연하고 애걸하여 몰래 배를 얻어 타기로 했다. 배를 타고 가던 배비장은 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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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도 모르게 기침을 하고 이 소리를 들은 부인이 사공들에게 호통을 치자 사공들이 사실을 고했다.
이에 부인은 몹시 화를 내며 배삯을 다 낼 수 없으니 자신이 내지 않은 나머지 삯은 그 사람에게 받
으라 했다. 화가 난 사공들이 삯을 낼 수 없는 배비장을 어느 집 방안에 가두자 배비장은 허기진 배
를 움켜잡고 하릴없이 신세만 한탄했다.
그런데 갑자기 한 미인이 들어와 먹을 것을 주니 이가 곧 애랑이었다. 배비장이 또 무슨 속임수냐며
화를 내자 애랑이 그를 살살 달래며 갖은 아양과 교태를 부렸다. 애랑의 애교에 넘어간 배비장은 자
초지종을 듣게 되는데 애랑은 그대로 이별할 수 없어 이러한 계책을 꾸몄음을 실토했다. 애랑의 속임
수로 다시 제주로 돌아온 배비장은 애랑과 즐거운 한 달을 보내는데, 한 달 뒤 갑자기 사령이 당도하
여 배비장이 정의현감에 제수되었음을 알렸다. 배비장이 어리둥절해하자 애랑이 이 모두가 제주 목사
가 꾸민 일임을 밝혔다.
정의현감이 된 배비장은 선정을 베풀어 곳곳에 송덕비가 서고 이후에 동부승지와 이조참판까지 지내
게 됐다. 후에 애랑도 아들 형제를 낳았는데 이 아들들 역시 본부인 소생의 뒤를 이어 등과한 후 벼
슬길에 올랐으며 배비장의 집안과 목사 김경의 집안은 대대로 친척처럼 친하게 지냈다.
▣ 더 재미있게 읽기 위하여
유교적인 도덕 관념의 이중성에 대한 비판과 중세적 인간형에 대한 풍자
『배비장전』은 유교사회의 도덕관을 신랄하게 풍자하는 소설이다. 군자인 척하는 배비장이 사람들의
꾀임에 빠져 온갖 추한 꼴을 보이며 양반으로서의 위신과 체모는 땅에 떨어지고 웃음거리가 된다. 이
것은 배비장이 겉으로는 점잖은 양반이지만 그 속은 하나의 타락한 인물일 뿐이라는 신랄한 비판정신
이 숨어있다.
애초에 방자가 배비장에게 내기를 건 것이나 제주목사와 동료 관속들이 배비장을 놀림감으로 만들려
고 한 것, 그리고 제주목사의 제안에 애랑이 선뜻 나선 것은 모두 군자인 척하는 배비장의 위선적인
태도 때문이었다. 정비장과 애랑이 헤어지는 장면을 보고 배비장은 양반의 체모를 떨어뜨린다며 정비
장을 탓하며 사또와 동료들이 모두 기생 수청을 받을 때도 배비장만 이를 거부한다. 문제는 배비장의
이러한 행동이 자발적인 도덕적 자각이나 내면적인 성숙에 의해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는 데 있다.
배비장은 자기 안에 내재한 성적인 욕망과 인간적인 욕구를 애써 부정하며, 겉으로는 중세 조선 사회
가 요구하는 양반이라는 신분에 걸맞은 행동과 품위를 유지하려 애쓴다. 따라서 배비장의 도덕성은
내면의 자각과 인식을 통해 자발적으로 성숙된 것이 아니라 사회적인 이념과 관습의 보이지 않는 견
제와 억압에 의해 강제된 것이다. 그러므로 배비장의 도덕성은 가식적이고 관념적인 것일 수밖에 없
으며, 이로 인해 그 실체를 마주하면 언제든지 허물어질 수밖에 없을 만큼 허약한 것이다. 자기 내면
의 욕구를 억누르던 배비장이 애랑이라는 구체적인 욕망의 대상을 접했을 때 한순간에 허물어질 수밖
에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또한 자신의 도덕성을 유지하려는 배비장의 행동은 계급적 질서가 요구하는 사회 덕목을 준수함으로
써 자신의 계급적 지위를 유지하려는 신분의식의 발로이다. 배비장이 애랑을 만나기 전까지 양반답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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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신하는 데 치중하는 모습이나 양반답지 못한 행동을 할 때마다 문자를 쓰며 자신의 행동을 변명하
는 모습, 또 놀림감이 된 후 초라한 행색으로 바닷가에서 해녀를 만났을 때 해녀가 자신에게 하대를
하자 절망하고 좌절하는 모습에서 그가 얼마나 신분의식에 얽매인 인물인지 알 수 있다. 그리고 이러
한 그의 신분의식은 차별적인 신분 질서를 유지하고 이를 공고히 하려는 지배 이데올로기의 영향에
의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중세적인 도덕 관념은 인간의 욕구와 욕망을 전면적으로 부정하고 관념적인 덕목만을 앞세운다는 점
에서 한계를 지닐 수밖에 없으며, 신분의식에 얽매인 중세적인 인간형은 중세적인 신분 질서가 해체
되어 가는 시대 상황 속에서 자체의 모순을 스스로 드러낼 수밖에 없음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배비장전』은 이렇듯 중세적인 관념과 질서로부터 이탈하여 점차 근대로 나아가는 당시의 시대상황
과 시대의식을 심층적인 풍자를 통해 보여주고 있다.
양반들의 향락적인 세태 비판
19세기에는 개혁의 열기가 후퇴하고 세도 정치로 지배층의 매관매직과 부패타락이 극심했는데 이때
중간 계층의 주도로 소비적이고 유흥적인 분위기가 성행했다. 조선 후기의 시대적 전환기를 맞아 신
분 질서가 흔들리면서 점차 규범적 지향성을 상실하기 시작한 양반들 역시 이러한 유흥 세태에 적극
편입하기 시작했다. 민중으로부터 수탈한 재화들이 양반들의 향락적 문화의 물적 토대가 되기도 했다.
관념적이고 이념 지향적인 소설에서 점차 인정물태를 그려내는 소설로 소설사의 중심축이 이동하는
흐름 속에 있던 『배비장전』 역시 이러한 시정의 모습을 그려내고 있다. 신임 목사의 행장은 온갖
진귀한 장신구들과 비단, 보물 등으로 장식돼 있고, 정비장이 애랑에게 풀어놓는 볏짐 속에는 온갖 약
재와 어물, 도자기, 비단, 보물이 들어 있으며, 꽃놀이 나가는 사또의 행장 역시 화려하기 그지없다.
이러한 장면들은 모두 당대의 향락적인 문화를 보여준다. 특히 신임 관료가 부임하는 날 기생의 수청
을 받는 신참례(新參禮)는 이 소설에서 핵심적인 사건으로 경제적인 부를 획득한 상층 유흥 문화의 극
단을 보여준다.
다산 정약용은 『목민심서』에서 지방관이 새로 부임하면 관아에 속한 기생들과 질탕하게 놀고 수청
을 들이는 당시의 관례를 비판하고 있는데, 당대 이러한 풍습이 하나의 관례로 자리잡고 있었음을 보
여준다. 양반 관료들의 이러한 행태는 조선 후기에 극심해졌는데, 이러한 현상은 민중들에 대한 수탈
이 그만큼 심해지고 관료들의 부패가 극심해졌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다른 한편으론 유교적인 이념과
윤리가 개개인에게 미치는 영향력이 줄어들고 신분 질서와 신분 의식이 동요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결국 『배비장전』에서는 신참례 등의 시정 세태를 묘사함으로써 관료들의 부정부패와 당대의 향락적
인 세태를 간접적으로 비판하고 있는 셈이다.
『배비장전』에서 주목할 것은 당대 세태에 대한 묘사만이 아니다. 이전 소설과 달리 『배비장전』과
같은 소설에서는 영웅성이나 관념적 이념성보다는 일상성에 대한 관심이 크게 확대되어 당시의 풍속
이나 인정물태에 대한 묘사가 구체적으로 제시되고 있다. 신관 사또가 부임하는 길에 치르는 용왕제
에 대한 묘사나 주위 풍경에 대한 묘사, 도임 행차나 기생들의 차림새에 대한 묘사 등에서 당대의 사
회상을 구체적으로 짐작해 볼 수 있다. 영웅소설이나 장편 가문소설의 환상성이나 관념성에서 벗어나
일상에서 살아숨쉬는 공간과 인물을 그려내고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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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히 애랑이 목욕하는 장면에 대한 묘사나 배비장과 애랑의 행태에 대한 묘사는 소설에서 그려지는
남녀 간의 애정이 더 이상 영웅성과 이념성에 머물러 있지 않음을 보여준다. 영웅소설이나 조선 전기
의 애정소설에 등장하는 남녀 주인공들은 빼어난 용모와 뛰어난 재주를 가졌을 뿐만 아니라 유교적인
이념과 가치를 적극적으로 구현하는 인물이기에 그들의 사랑 역시 지극히 관념적이고 이상적인 성격
을 띤다. 그들의 사랑에 육체적인 욕망이나 일상 속에서 생동하는 구체적인 관계는 개입될 여지가 없
었다.
그러나 『배비장전』의 배비장과 애랑은 상대방을 성적 욕망의 대상으로서 갈망하기도 하고, 미워하
고, 사랑하고, 또 놀림감으로 만들기까지 하는 구체적인 일상 속에 살아 있는 인물이다. 그들은 자신
들이 느끼는 희노애락의 감정과 인간적인 욕구는 물론, 내면화된 이념과 윤리에 반발하는 심리까지
표현함으로써 생동감을 느끼게 한다.
이는 바로 작품의 창작과 수용 과정에 참여한 문학 담당 계층의 관심이 이념적이고 환상적인 세계에
서 구체적인 일상 세계로 돌아오고 중세 규범이 요구하는 이상적이고 관념적인 인물에서 일상 속에
살아있는, 생동감 넘치는 인물로 변모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또한 『배비장전』을 통해 소설에서 흔히
등장하던 남녀 간의 애정담 역시 관념적이고 이념적인 성격에서 벗어나 현실성과 구체성을 띠기 시작
했음도 알 수 있다. 이 시기 고전소설은 점차 중세적인 구심에서 벗어나 조금씩 근대를 향해 나아가
기 시작했다.
애랑과 방자의 솔직함과 발랄함
『배비장전』에서 가장 생동감 있게 그려지는 인물은 다름아닌 애랑과 방자다. 이들은 유교적인 가치
와 윤리에 냉소할 뿐만 아니라 양반들의 위선과 권위를 통렬하게 공격하여 민중들의 욕망을 대리 표
현하고 있다. 또한 이들의 솔직함과 발랄함은 겉으로만 군자의 도덕을 내세우는 양반들의 위선과 경
직성을 간접적으로 비판하고 있다.
비장이라는 직책은 관료 사회에서 그리 높은 직책은 아니다. 따라서 배비장은 양반이기는 하되 최상
층의 양반이라고 하기는 어렵다. 다른 한편으로 배비장은 신임 관리에 대한 신참례를 거부함으로써
양반 사회 내부에서 따돌림당하는 대상이다. 결국 배비장은 민중에 대해서는 상층 계급에 속하는 사
회적 지위에 있으면서도 상층 계급 내부에서는 소외당하는 중간적 존재다.
중간적 위치에 있는 배비장은 필연적으로 양반 계급으로서의 지위를 확고히 하려는 욕망을 품게 된
다. 그리하여 계급적 상승을 꿈꾸며 이를 위해 당대의 지배적 이념과 가치를 준수하고 양반으로서 지
켜야 할 규범적 덕목들을 지켜내는 데 더욱 열중할 수밖에 없다. 따라서 배비장의 경직된 성의식과
행동 양식들은 그의 신분 상승 욕구, 혹은 경화된 신분의식과 깊이 맞물려 있다. 어떠한 경우에도 양
반으로서 인정받고 대우받기를 원하며 자신이 양반이라는 사실을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배비장의 태도
는 배비장의 이와 같은 사회적 욕망이 표출이라 할 수 있다.
배비장에 대한 풍자는 특정 개인에 대한 공격이 아니라 유교적인 사회이념과 왜곡된 신분의식, 이중
적인 도덕규범 등 전체 사회질서의 경직성에 대한 일종의 시비걸기다. 그 공격이 신랄하지 않은 이
유도 여기에 있다. 풍자의 주된 공격 대상은 배비장이라는 인물 자체가 아니라 그 인물의 내면에 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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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되어 인물의 행동과 의식을 통해 표출되는 중세적인 가치와 사회질서다. 풍자를 감행하는 주체는
바로 애랑과 방자다.
배비장을 놀림감으로 만들자고 맨 처음 제안한 사람은 제주 목사이나 구체적인 꾀를 내어 위선과 가
식이 완전히 드러나도록 그를 발가벗긴 것은 애랑과 방자이다. 배비장을 풍자하는 데 있어서 방자가
연출가라면 애랑은 주연인 셈이다. 애랑은 성적 매력으로 똘똘 뭉친 자신의 육체를 앞세워 배비장을
유혹하고 있는데 욕망의 구체적인 실체인 몸을 내세워 배비장의 권위를 추락시킴으로써 그의 도덕성,
곧 중세적인 가치규범이 한낱 관념에 지나지 않음을 보여준다.
이에 비하면 방자는 좀더 직접적으로 그의 행동과 언변을 통해 중세적인 신분질서와 유교적인 가치
규범을 꼬집는다. 이와 같은 인물 유형은 『춘향전』과 같은 소설 작품이나 <봉산탈춤> 같은 민속극
에서 흔히 등장하는데, 이처럼 민중의 입장에서 양반들의 위선과 권위를 고발하고 공격하는 역할을
하는 인물 유형들을 일컬어 방자형 인물이라 한다.
방자는 양반으로서의 신분의식이나 행동 규범을 내세워 군자- 성리학적 가치 규범이 요구하는 가장
이상적인 인간형- 인 척하던 배비장의 실체가 한 번 드러나자 그를 쉴새없이 몰아붙인다. 그리고 배비
장이 가장 우려해마지 않던 상황, 즉 배비장 자신을 더 이상 양반으로 대우하지 않는 지경에까지 이
른다. 방자는 배비장에게 더 이상 존칭을 쓰지 않을 뿐만 아니라 면전에서 그를 조롱하고 우회적으로
그의 이중성을 지적한다. 실체로 다가온 구체적인 욕망의 대상 앞에서 자신의 이중성을 스스로 노출
시켜 양반으로서의 권위와 체통이 일시에 허물어져 버린 배비장은 더 이상 방자를 나무라거나 호통치
지 못한다.
실제의 신분 질서 속에서는 상하의 구분이 엄격한 관계지만 구체적인 관계 속에서는 두 사람의 위치
가 오히려 역전되고 있다. 이러한 상황의 역전은 방자가 애랑의 거짓 남편이 되어 배비장을 벌거벗은
채 궤 속에 들어가게 만드는 장면에서 극에 달한다. 바로 이 역전의 풍자 속에 유교 사회의 신분 질
서의 전복을 꿈꾸는 근대적인 지향이 숨어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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