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따라기
그의 아우는 수건이 벗겨져서 목 뒤로 늘어지고,
저고리 고름이 모두 풀어져 가지고
한편 모퉁이에 서 있고,
아내도 머리채가 모두 뒤로 늘어지고,
치마가 배꼽 아래에 늘어지도록 되어 있으며,
그의 아내와 아우는 그를 보고
어찌할 줄을 모르는 듯이
움직이지도 않고 서 있었다.
김동인 지음
배따라기
김동인 지음
▣ 저 자 김동인(1900~195 1)
최초의 단편소설 『배따라기』를 창작. 단편문학의 미를 추구한 예술지상주의 작가
평양 대부호의 아들 그리고 몰락
김동인은 평양에서 대부호의 아들로 태어났다. 대동강변에서 사방으로 눈에 닿는 땅이 모두 그의 집
안 땅이라고 할 만한 거부의 아들이었으니, 어릴 적부터 먹고 입는 것의 부족함을 알지 못했다. 장성
해서도 그는 재산의 상당 부분을 물려받아서 돈의 소중함을 몰랐다.
그는 자신이 마음대로 쓸 수 있는 돈을 문학과 관련된 일에 많이 쏟아부었다. 잡지 「창조」는 김동
인의 돈으로 만들어졌다. 「영대」라는 문학지도 마찬가지였다. 신문화의 형성기라고 할 수밖에 없는
시대에 순문학잡지가 독자를 끌어모을 수 없었던 건 오히려 당연한 일. 그럼에도 불구하고 경영을 생
각하지 않고 창간한 이들 문학지가 상당기간 존속된 것은 모두 든든한 김동인의 돈이 있었기 때문이
다. 제대로 된 문학지를 통해 문단이 형성되고, 문인이 등장하고, 문학작품이 발표될 수 있었다.
김동인은 돈 많은 재산가답게 언제나 최고급의 정장으로 문인들의 모임에 나타나곤 했다. 양복은 물
론이고 모자와 신발까지도 모두가 당대의 최고품이 아니면 입지 않았다. 평양에 가족이 살았지만, 그
는 도쿄를 산책 삼아 다녀온다고 할 만큼 일본 출입이 잦았고 서울 행차도 많았다. 서울 패밀리 호텔
에 방 하나를 아예 차지하고 몇 달씩 묵으면서 밤마다 술좌석을 차리곤 했다. 그의 주변에는 언제나
술친구, 글친구가 따랐고, 여자가 뒤따랐다.
그러나 물 쓰듯 한 김동인의 재산도 오래 가지는 않았다. 김동인 자신의 무절제한 생활 탓도 있었지
만, 개간사업에 손을 댄 것이 그만 큰 손해를 보고 말았다. 문단생활 10년만에 거의 빈털터리가 됐다.
더구나 패가에 실처라 했듯이, 아내마저 집을 나가버려 그의 행색은 졸지에 초라해졌고 주위에서 망
신만 당할 뿐이었다.
그때야 비로소 그는 돈의 소중함을 알았다. 글을 쓰는 일이 돈을 버는 일이 될 수도 있음을 깨달았다.
1929년에 재혼한 그는 식구들을 이끌고 서울로 올라온 후부터, 돈의 구속으로 붓을 잡아야 하는 고통
을 맛보았다. 해방 이후까지 그의 가난은 계속되었고, 자기 집 한 칸도 마련하지 못한 가난뱅이로 전
전했다. 평양의 대부호였던 그가 전쟁 중에 제대로 돌보아주는 사람 없이 셋방살이에서 반생을 마칠
수밖에 없었던 것은 어쩌면 문인은 가난하다는 말 탓인지도 모를 일이다.
문학은 그저 오락이다
김동인이 문학에 발을 들여놓은 것은 순전히 그의 자만 때문이 아니었나 생각된다. 그의 아버지는 지
금의 부모들도 여전히 그러하듯 아들이 의사나 법률가가 되기를 원했다. 김동인도 어릴 때는 이론적
이고 경우가 바른지라 변호사도 적당할 듯했다. 또 소학교에서는 물리나 화학실험을 좋아했기에 의사
가 되는 것도 괜찮겠다고 생각했다. 열 다섯에 일본 유학을 떠나면서도 그의 머리 속에는 의사와 변
호사가 미래 자신의 모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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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동경에 건너간 그는 생각을 바꾸었다. 소학교 동기로 그보다 1년 먼저 유학을 와 명치학원 중
학부에 다니고 있던 주요한을 만난 것이 그 계기였다. 주요한은 조선인 유학생 선교목사로 일하던 부
친을 따라 일본에 건너온 뒤로, 한창 문학에 심취해 있었다. 김동인은 문학을 공부한다는 주요한의 말
에 저으기 놀랐다. 법학을 한다면 변호사가 되고, 의학을 한다면 의사가 될 텐데, 문학은 장차 무엇이
될 수 있을지 전혀 알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문학에 대한 개념도 모르고 그 윤곽조차 짐작할 수 없
었던 김동인에게는 당연한 일이었다.
김동인은 자신보다 앞서가는 주요한에 대해 이상한 반발심을 느꼈다. 한편으로는 자신의 입장에 열등
감마저 가지게 됐다. 그는 주요한을 따라 그보다 앞장서야 했고, 그러기 위해서는 주요한이 공부한다
는 문학을 자신도 택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신문학 초창기에 문학에 뜻을 둔 그에게 대단한 문학적 신념이나 목표가 있지 않았겠나 하고 생각하
기 쉽지만, 그는 아주 평범한 생각으로 문학을 시작했으며 스스로 언명한 바 있듯이 그의 문학관은
문학은 오락일 뿐이었다. 그는 음식물의 맛을 문학에 비유했는데, 문학은 맛의 역할을 하면 족한 것
이라고 했다.
그러므로 문학을 맛과 구별하고자 했던 많은 문인들과 김동인의 견해는 충돌할 수밖에 없었다. 문학
을 통해 민족성을 예술적으로 개조해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던 이광수의 주장을 당초부터 못마땅
하게 생각했던 사람이 바로 김동인이었고, 문학이 계급투쟁의 선봉에 서야 한다는 프로 문학론자들의
강변에 문학은 그저 문학일 뿐임을 내세운 것도 김동인이었다. 이 고집스런 생각과 오만한 태도를
지키고 있었기 때문에, 그의 작품은 시류적인 교양물도, 이념의 선전물도 아닌 오직 소설이라는 이름
으로 남아 있을 수 있었다.
▣ S ho rt S umma ry
나는 삼월 삼짇날 대동강에서 벌어지는 뱃놀이 축제에 나갔다가 멀리서 들려오는 영유 배따라기 가
락을 듣고 엄청난 이끌림과 감동을 받은 나머지 그 노래의 주인공을 찾게 된다. 용모가 범상치 않을
뿐만 아니라, 운명의 힘이 제일 세다는 그를 만난 나는 그의 말과 그 속에 숨겨져 있는 듯한 삭이지
못할 원한과 뉘우침의 내막, 즉 기구한 생의 내력을 알고자 한다.
그는 감정적이고 격정적인 성격의 소유자로 냉정하고 이성적인 성격의 아우와는 대조적인 인물이었
다. 그는 잘난 아우에 대한 시기와 아우에게 친절한 아내의 행위를 받아들일 수 없는 열등감과 질투
심을 갖고 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는 아내와 아우가 집에 나타난 쥐를 잡기 위해 함께 애쓰다 땀에
흠뻑 젖은 흐트러진 모습을 보게 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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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따라기
김동인 지음
▣ 어떤 사람들? 무슨 이야기?
나
작가를 대리하는 1인칭의 서술자. 그의 이야기를 독자에게 전달하는 역할을 한다.
그
작품의 실질적인 주인공. 감정적이고 격정적인 성격의 소유자. 아우와 아내의 관계를 오해
해서 그들 모두를 비극적인 운명에 빠뜨리고 자책과 후회의 세월을 보낸다.
아우
늠름한 위엄과 흰 얼굴을 가진 이성적 성격의 소유자. 형의 오해로 인해 가족을 버리고 바
다로 잠적한다.
아내
주인공 그의 아내. 그의 감정적인 격정과 질투에 시달리다 아우와 간통했다는 오해를
받고 자살한다.
대동강 뱃놀이 축제의 배따라기
좋은 일기이다. 좋은 일기라도, 하늘에 구름 한 점 없는 - 우리 사람으로서는 감히 접근치 못할 위
험을 가지고, 높이서 우리 조그만 사람을, 비웃는 듯이 내려다보는, 그런 교만한 하늘은 아니고, 가장
우리 사람의 이해자인 듯이, 낮게 뭉글뭉글 엉기는 분홍빛 구름으로써 우리와 서로 손목을 잡자는
그런 하늘이다. 사랑의 하늘이다. 나는, 잠시도 멎지 않고 푸른 물을 황해로 부어 내리는 대동강을 향
한 모란봉 기슭, 새파랗게 돋아나는 풀 위에 뒹굴고 있었다.
이날은 삼월 삼질, 대동강에 첫 뱃놀이하는 날이다. 까맣게 내려다보이는 물 위에는, 결결이 반짝이는
물결을 푸른 놀잇배들이 타고 넘으며, 거기서는 봄 향기에 취한 형형색색의 선율이 융단보다도 부드
러운 봄 공기를 흔들면서 날아온다. 그리고 거기서 기생들의 노래와 함께 날아오는 조선 아악(雅樂)은
느리게, 길게, 유탕하게, 부드럽게, 그리고 또 애처롭게, 모든 봄의 정다움과 꽃까지 좋아하지 않고는
안 되겠다는 듯이 대동강에 흐르는 시커먼 봄물, 청류벽1)에 돋아나는, 푸르른 풀어음, 심지어 사람의
가슴속에 뛰노는 불붙는 핏줄기까지라도 습기 많은 봄 공기를 다리 놓고, 떨리지 않고는 두지 않는다.
봄이다. 봄이 왔다. 부드럽게 부는 조그만 바람이 시커먼 조선 솔을 깨며, 또는 돋아나는 풀을 스치고
지나갈 때의 그 음악은 다른 데서 듣지 못할 아름다운 음악이다. 아아, 사람을 취케 하는, 푸르른 봄
의 아름다움이여. 열다섯 살부터의 동경 생활에, 마음껏 이런 봄을 보지 못하였던 나는, 늘 이것을 보
는 사람보다 곱 이상의 감명을 여기서 받지 않을 수가 없다.
평양 성내에는, 겨우 툭툭 터진 땅을 헤치면, 파릿파릿 돋아나는 나무색과 돋아나려는 버들의 어움으
로 봄이 온 줄 알 뿐 아직 완전히 봄이 안 이르렀지만, 이 모란봉 일대와 대동강을 넘어 보이는 가나
안 옥토를 연상시키는 장림(長林)에는 마음껏 봄의 정다움이 이르렀다. 그리고 또 꽤 자란 밀보리들로
새파랗게 장식한 장림의 그 푸른 빛, 만족한 웃음을 띠고 그 벌에 서서 내다보는 농부의 모양은 보지
않아도 생각할 수가 있다.
1) 맑게 흐르는 물가에 있는 절벽. 대동강 강가에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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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름은 자꾸 하늘을 날아다니는 모양이다. 그 밀 위에 비치었던 구름의 그림자는, 그 구름과 함께 저
편으로 물러가며, 거기는 세계를 아까 만들어 놓은 것 같은 새로운 녹빛으로 퍼져 나간다. 바람이나
조금 부는 때는, 그 잘 자란 밀들을 물결같이 누웠다 일록일청(一綠一靑)으로 춤을 춘다. 그리고 봄의
한가함을 찬송하는 솔개들은 높은 하늘에서 동그라미를 그리면서 더욱더 아름다운 봄에 향기로운 정
취를 더한다.
다스한 봄정에
솟아나리다.
다스한 봄정에
솟아나리다.
나는 두어 번 소리나게 읊은 뒤에, 담배를 붙여 물었다. 담뱃내는 무럭무럭 하늘로 올라간다. 하늘에
도 봄이 왔다. 하늘은 낮았다. 모란봉 꼭대기에 올라가면, 넉넉히 만질 수가 있으리만큼 하늘은 낮다.
그리고 그 낮은 하늘보다는 오히려 더 높이 있는 듯한 분홍빛 구름은 뭉글뭉글 엉기면서 이리저리 날
아다닌다.
나는 이러한 아름다운 봄 경치에, 이렇게 마음껏 봄의 속삭임을 들을 때는 언제든 유토피아를 생각지
않을 수 없다. 우리가 시시각각으로 애를 쓰며 수고하는 것은, 그 목적은 무엇인가. 역시 유토피아 건
설에 있지 않을까. 유토피아를 생각할 때는 언제든 그 위대한 인격의 소유자며 사람의 위대함을 끝
까지 즐긴 진나라 시황을 생각지 않을 수 없다.
우리가 어찌하면 죽지를 아니할까 하여, 동정남 삼백을 배를 태워 불사약을 얻으러 떠나 보내며, 예술
의 사치를 다하여 아방궁을 지으며, 매일 신하 몇 천 명과 잔치로써 즐기며, 이리하여 여기 한 유토피
아를 세우려던 시황은 몇 만의 역사가가 어떻다고 욕을 하든 그는 참말로 인생의 향락자이며, 역사
이후의 제일 큰 위인이라고 할 수가 있다. 그만한, 순전한 용기 있는 사람이 있고야, 우리 인류의 역
사는 끝이 날지라도 한 사람을 가졌었다고 할 수 있다.
큰사람이댔다. 하면서 나는 머리를 들었다. 이때에 기자묘 근처에서 이상한 슬픈 소리가 들리면서
봄공기를 진동시켜 날아오는 것을 들었다. 나는
무심중, 귀를 기울였다. 영유 배따라기다. 그것도,
웬만한 광대나 기생은 발꿈치에도 미치지 못하리만한 그만큼, 그 배따라기의 주인은 잘 부르는 사람
이었다.
비나이다, 비나이다.
산천후토 일월성신
하나님전 비나이다.
실낱같은 우리 목숨
살려 달라 비나이다.
에- 야, 어그여지야,
여기까지 이르렀을 때에, 저편 아래 물에서 장고 소리와 함께 기생의 노래가 울리어 오며, 배따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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는 그만 안 들리게 되었다.
나는 이년 전 한여름을 영유서 지내본 일이 있다. 배따라기의 본고장인 영유에 몇 달 있어 본 사람
은, 그 배따라기에 대하여 언제든 한 속절없는 애처로움을 깨달을 터이다. 영유, 이름은 모르지만 ×
산에 올라가서 내다보면, 앞에는 망망한 황해이니, 거기 저녁때의 경치는 한 번 본 사람은 영구히 잊
을 수가 없으리라. 불덩이 같은 커다란 시뻘건 해가 남실남실 넘치는 바다에 도로 빠질 듯 도로 솟아
오를 듯 춤을 추며, 거기서 때때로 보이지는 않는 배에서 배따라기만 슬프게 날아오는 것을 들을 때
엔, 눈물 많은 나는 때때로 눈물을 흘렸다. 이로 보아서, 어떤 원(員)의 아내가, 자기의 모든 영화를 낡
은 신과 같이 내어던지고, 뱃사람과 정처없는 물길을 떠났다 함도 믿지 못할 말이랄 수가 없다.
영유서 돌아온 뒤에도, 그 배따라기는 내 마음에 깊이 새기어져 잊을래야 잊을 수가 없었고, 언제 한
번 다시 영유를 가서 그 노래를 한 번 더 들어보고, 그 경치를 다시 한 번 보고 싶은 생각이 늘 떠나
지를 않았다.
장고 소리와 기생의 노래는 멎고, 배따라기만 슬프게 날아온다. 결결이 부는 바람으로 말미암아 때때
로는 들을 수가 없으되, 나의 기억과 곡조를 부합하여 들은 배따라기는 여기이다.
강변에 나왔다가,
나를 보더니만
혼비백산하여,
꿈인지 생시인지,
생시인지 꿈인지,
와르륵 달려들어
섬섬옥수로 부쳐잡고,
호천망극 하는 말이,
하늘로써 떨어지며
땅으로써 솟아났나.
바람결에 묻어 오고
구름길에 새어 왔나.
이리 서로 붙들고 울음 울 제,
인리 제인(隣里諸人)이며
일가 친척이 모도 모혀
여기까지 들은 나는, 마침내 참지 못하고 벌떡 일어서서 소나무 가지에 걸었던 모자를 내려쓰고, 그
곳을 찾으러 모란봉 꼭대기에 올라섰다. 꼭대기는 좀더 노랫소리가 잘 들린다. 그는 배따라기의 맨
마지막 여기를 부른다.
밥을 빌어서
죽을 쑬지라도,
제발 덕분에
뱃놈 노릇은 하지 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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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 - 야, 어그여지야.
그의 소리로써, 방향을 찾으려던 나는 그만 그 자리에 섰다. 어딘가? 기자묘, 혹은 을밀대? 그러나
나는 오래 서 있을 수가 없었다. 어떻든 찾아보자, 하고 현무문으로 가서 문 밖에 썩 나섰다. 기자묘
의 깊은 솔밭은 눈앞에 쫙 퍼진다. 어딘가? 나는 또 물어 보았다. 이 때에, 그는 또다시 배따라기를
첫번부터 부른다. 그 소리는 왼편에서 온다.
왼편이구나, 하면서 소리나는 곳을 더듬어서 소나무 틈으로 한참을 돌다가 겨우 기자묘 대고는 그 중
하늘이 넓고 밝은 곳에 혼자서 뒹굴고 있는 그를 찾아내었다. 나의 생각한 바와 같은 얼굴이다. 얼굴,
코, 입, 눈, 몸집이 모두 네모나고 - 그의 이마의 굵은 주름살과 시커먼 눈썹은 고생을 많이 함과 순
전한 성격을 나타낸다.
그는 어떤 신사가 자기를 들여다보는 것을 보고, 노래를 그치고 일어나 앉는다. 왜, 그냥 하지요. 하
면서, 나는 그의 곁에 가 앉았다. 머⋯⋯. 할 뿐, 그는 눈을 들어서 터진 하늘을 쳐다본다. 좋은 눈이
었다. 바다의 넓고 큼이 유감없이 그의 눈에 나타나 있다. 그는 뱃사람이다, 나는 짐작하였다. 고향이
영유요?
예, 머, 영유서 나기는 했지만, 한 이십 년 영유 가 보지두 않았시오.
엘 안 가요?
왜, 이십 년씩 고향
사람의 일이라니 마음대로 됩데까? 그는 왜 그러는지 한숨을 짓는다. 그저, 운명이 제
일 힘셉데다. 운명의 힘이 제일 세다는 그의 소리에는, 삭이지 못할 원한과 뉘우침이 섞여 있다. 그
래요?
나는 다만 그를 쳐다볼 뿐이다. 한참 잠잠하니 있다가, 나는 다시 말하였다. 자, 노형의 경험담이나
한 번 들어봅시다. 감출 일이 아니면 한 번 이야기해 보쇼.
머 감출 일은 ⋯⋯.
그럼 어디 한번 들
어봅시다 그려⋯⋯. 그는 다시 하늘을 쳐다보았다. 그러나 좀 있다가, 하디요. 하면서, 내가 담배를
붙이는 것을 보고, 자기도 담배를 붙여 물고 이야기를 꺼낸다. 19년 전 8월 열하룻날 일인데요⋯⋯
하면서, 그가 이야기한 바는 대략 이와 같은 것이다.
그와 아우, 그리고 그의 아내가 겪는 갈등과 오해
그의 살던 마을은, 영유 고을서 한 이십 리 떠나 있는 바다를 향한, 조그만 동리이다. 그의 살던 - 그
조그만 마을(서른 집쯤 되는)에서 그는 꽤 유명한 사람이었다. 그의 부모는 모두 열댓 살 때 없었고,
남은 친척은 곁집에 딴살림하는 그의 아우 부처와 그 자기 부처뿐이었다. 그들 형제가 그 마을에서
제일 부자이고, 또 제일 고기잡이를 잘하였고, 그 중 글이 있었고, 배따라기도 그 마을에서 빼어나게
그 형제가 잘하였다. 말하자면, 그 형제가 그 동리의 대표적인 사람이었다.
8월 보름은 추석 명절이다. 8월 열하룻날, 그는 명절에 쓸 장도 볼 겸, 그의 아내가 늘 부러워하는 거
울도 하나 사올 겸 장으로 향하였다. 당손네 집에 있는 것보다 큰 것이요. 닞디 말구요. 그의 아내는
길까지 따라나오면서 잊지 않도록 부탁하였다. 안 닞어. 하면서, 그는 떠오르는 새빨간 햇빛을 앞으
로 받으면서 자기 마을을 나섰다. 그는, 아내를 이렇게 말하기는 우습지만 고와했다 . 그의 아내는, 촌
에는 드물도록 연연하고도 예쁘게 생겼다(그는 나에게 이렇게 말하였다). 성내(평양) 덴줏골(갈보촌)을
가두, 그만한 거, 쉽디 않가시오. 그러니까 촌에서는, 그리고 그 당시에는 남에게 우습게 보이도록 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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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처의 사이는 좋았다. 늙은이들은 계집에게 혹하지 말라고 흔히 그에게 권고하였다.
부처의 사이는 좋았지만 - 아니, 오히려 좋으므로 그는 아내에게 시기를 많이 하였다. 그리고 그의 아
내는 시기를 받을 일을 많이 하였다. 품행이 나쁘다는 것이 아니라, 그의 아내는 대단히 쾌활한 성질
로서 아무에게나 말 잘하고 애교를 잘 부렸다.
그 동리에서는 무슨 명절이나 되면, 집이 그 중 깨끗함을 핑계삼아 젊은이들은 모두 그의 집에 모이
곤 하였다. 그 젊은이들은, 모두 그의 아내에게 아즈마니라 부르고, 그의 아내는 아즈바니 하며, 그
들과 지껄이고 즐기며, 그 웃기 잘하는 입에는, 늘 웃음을 흘리고 있었다. 그럴 때마다 그는 한편 구
석에서 눈만 힐끔거리며 있다가, 젊은이들이 돌아간 뒤에는 불문곡직(不問曲直)하고 아내에게 덤벼들
어 발길로 차고 때리며, 이전에 사다 두었던 것을 모두 거두어 올린다. 싸움을 할 때에는 언제든 곁집
에 있는 아우 부처가 말리러 오며, 그렇게 되면 언제든 그는 아우 부처까지 때렸다.
그 아우에게 그렇게 구는 데는 이유가 있었다. 그의 아우는 촌사람에게는 다시없도록 늠름한 위엄이
있었고, 맨날 바닷바람을 쏘였지만 얼굴이 희었다. 이것뿐으로 시기가 된다 하면 되지만, 특별히 아내
가 그의 아우에게 친절히 하는 데는, 그는 속상하여 못 견디었다.
그가 영유를 떠나기 반년 전쯤 - 다시 말하면, 그가 거울을 사러 장에 갈 때부터 반 년 전쯤, 2월 열
엿샛날이 그의 생일이었다. 그의 집에서는 음식을 차려서 잘 먹었는데, 그에게는 한 버릇이 있어서,
맛있는 음식은 남겨 두었다가 좀 있다 먹고 하는 것을 예사로 하였다. 그의 아내도 이 버릇은 잘 아
는 터인데, 그의 아우가 점심때쯤 오니까, 아까 그가 아껴서 남겨 두었던 그 음식을 아우에게 주려 하
였다. 그는 눈을 부릅뜨고 못 주리라고 암호를 하였지만, 아내는 그것을 보았는지 못 보았는지 그의
아우에게 주어버렸다. 그는 마음속이 자못 편치를 못하였다. 트집만 있으면 이 년을⋯⋯, 그는 마음먹
었다. 그의 아내는 시아우에게 상을 준 뒤에 물러오다가 그만 그의 발을 조금 밟았다. 이 년! 그는
힘껏 발을 들어서 아내를 냅다 찼다. 그의 아내는 상 위에 고꾸라졌다가 일어난다. 이 년, 사나이 발
을 짓밟는 년이 어데 있어! 거, 좀 밟어서 발이 부러뎃쉐까? 아내는 낯이 새빨개져서 울음 섞인 소
리로 고함친다. 이 년! 말대답이⋯⋯. 그는 일어서서 아내의 머리채를 휘어잡았다. 형님! 왜 이리십
네까? 아우가 일어서면서, 그를 붙여잡았다. 가만 있가라, 이 놈에 자식! 하며 그는 아우를 밀친 뒤
에 아내를 되는 대로 내려찧었다. 죽일, 이 년! 나가거라!
나가! 못 나가?
죽여라 죽여라, 난 죽어두 이 집에선 못
못 나가디 않구, 뉘 집이게⋯⋯
이 때다, 그의 마음에는, 그 못 나가겠다는 아내의 마음이 푹 들이박혔다. 그 이상 때리기가 싫었다.
망할 년, 그럼 내 나갈라. 하고 그는 문 밖으로 뛰어나갔다. 형님, 어디 갑네까? 하는 아우의 말을
대답도 않고, 그는 곁동리 탁줏집으로 뒤도 안 돌아보고 가서, 거기 있는 술 파는 계집과 술상 앞에
마주앉았다. 그 날 저녁, 얼큰히 취한 그는, 아내를 위하여 떡을 한 돈 어치 사 가지고 집으로 돌아왔
다. 이리하여 또 서너 달은 평화가 이르렀다. 그러나 이 평화가 언제까지든 연속할 수는 없었다. 그의
아우로 말미암아 또 평화는 짜개져 나갔다.
5월 초승부터 영유 고을 출입이 잦던 그의 아우는, 5월 그믐께부터는 고을서 며칠씩 묵어 오는 일이
많았다. 함께, 고을에 첩을 얻어 두었다는 소문이 퍼졌다. 이 소문이 있은 뒤는, 아내는 그의 아우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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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을 들어가는 것을 벌레보다도 싫어하고, 며칠 묵어 오는 때면 곧 아우의 집으로 가서 그와 담판을
하며, 심지어 동서인 아우의 처에게까지 못 가게 하지 않는다고 싸우는 일이 있었다. 7월 초승께, 그
의 아우는 고을에 들어가서 열흘쯤 묵어 온 일이 있었다. 이때도 전과 같이 그의 아내는 그의 아우와
제수와 싸우다 못하여, 마침내 그에게까지 와서 아우가 그런 못된 데를 다니는 것을 그냥 둔다고 해
보자 한다. 그 꼴을 곱게 보지 않았던 그는 첫마디로 고함을 쳤다.
네게 상관이 무에가? 듣기 싫다.
못난둥이. 아우가 그런 델 댕기는 걸 말리디두 못하구! 분김에, 그
의 아내는 고함쳤다. 이 년, 무얼? 그는 벌떡 일어섰다. 못난둥이! 그 말이 채 끝나기 전에, 그의
아내는 악 소리와 함께 그 자리에 꼬꾸라졌다. 이 년! 사나이에게 그따웃 말버릇 어디서 배완! 에미
네 때리는 것 어디서 배왔노! 못난둥이. 그의 아내는 울음소리로 부르짖었다. 샹년, 그냥? 나갈!, 우
리 집에 있디 말구 나갈! 그는 내리찧으면서 부르짖었다. 그리고 아내를 문을 열고 밀쳤다.
나가디 않으리! 하고, 그의 아내는 울면서 뛰어나갔다. 망할 년! 토하는 듯이 중얼거리고, 그는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그의 아내는 해가 져서 어두워져도 돌아오지를 않았다. 일단 내쫓기는 하였지만,
그는 아내의 돌아옴을 기다리고 있었다. 어두워져서도, 그는 불도 안 켜고 성이 나서 우들우들 떨면서
아내의 돌아오기를 기다렸다. 그러나 그의 아내의 참 기쁜 듯이 웃는 소리가 그의 아우의 집에서 밤
새도록 울리었다. 그는 움쩍도 않고 고 자리에 앉아서 밤을 새운 뒤에, 새벽 동 터 올 때 아내와 아우
를 죽이려고 부엌에 들어가 식칼을 가지고 들어와서 문을 벌컥 열었다. 그의 아내로서 만약 근심스러
운 얼굴을 하고 그 문 밖에 우두커니 서서 문을 들여다보고 있지 않았으면, 그는 아내와 아우를 죽이
고야 말았으리라.
그는 아내를 보는 순간, 마음에 가득 차는 사랑을 깨달으면서 칼을 내어던지고 뛰어나가서, 아내의 머
리채를 휘어잡고 이 년 하면서 들어오더니, 뺨을 물어뜯으면서 함께 이리저리 자빠져서 뒹굴었다⋯⋯.
그런 이야기를 다 하려면 끝이 없으되, 다만 그 , 그의 아내 , 그의 아우 , 그 세 사람의 삼각관계는
대략 이와 같았다. 각설 —
쥐잡기에 얽힌 그의 오해와 비극적 파탄
거울은 마침 장에, 마음에 맞는 것이 있었다. 지금 것과 대보면 어떤 때는 코도 크게 보이고 입이 작
게도 보이는 것이지만, 그 당시에는, 그리고 그런 촌에서는 둘이 없는 귀물이었다. 거울을 사 가지고
장을 본 뒤에, 그는 이 거울을 아내에게 주면 그 기뻐할 모양을 생각하면서 새빨간 저녁 햇빛을 받은,
넘치는 듯한 바다를 안고 자기 집으로, 늘 들러 오던 탁줏집에도 안 들러서 돌아왔다. 그러나 그가 그
의 집 방 안에 들어선 때에는 뜻하지도 않았던 광경이 그의 눈앞에 벌어져 있었다.
방 가운데는 떡상이 있고, 그의 아우는 수건이 벗겨져서 목뒤로 늘어지고, 저고리 고름이 모두 풀어져
가지고 한편 모퉁이에 서 있고, 아내도 머리채가 모두 뒤로 늘어지고, 치마가 배꼽 아래에 늘어지도록
되어 있으며, 그의 아내와 아우는 그를 보고 어찌할 줄을 모르는 듯이 움직이지도 안하고 서 있었다.
세 사람은 한참 동안, 어이가 없어서 서 있었다. 그러다 좀 있다가 마침내 그의 아우가 겨우 말했다.
그 놈의 쥐, 어디 갔니?
흥! 쥐? 훌륭한 쥐 잡댔구다. 그는 말을 끝내지도 않고 짐을 벗어던지고
뛰어가서 아우의 멱살을 그러쥐었다. 형님, 정말 쥐가! 뭐? 이 놈, 형수와 그런 쥐 잡는 놈 어디 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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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
그는 따귀를 몇 번 때린 뒤에 등을 밀어서 문 밖에 집어 던졌다. 그런 뒤에, 이제 자기에게 이를 매를
생각하고 우들우들 떨면서 아랫목에 서 있는 아내에게 달려들었다. 이 년! 시아우와 그런 쥐 잡는 년
이 어디 있어! 그는 아내를 거꾸러뜨리고 함부로 내리찧었다. 정말 쥐가⋯⋯, 아이 죽갔다!
이 년!
너두 쥐? 죽어라. 그의 팔다리는 함부로 아내의 몸 위에 오르내렸다. 아이, 죽갔다. 정말 아까 적은
이가 왔게, 떡 먹으라고 내놨더니⋯⋯.
정말이야요, 쥐가 한 마리 나⋯⋯.
듣기 싫다, 시아우 붙은 년이 무슨 잔소릴⋯⋯.
그냥 쥐?
쥐 잡을래다가⋯⋯.
아이, 아이
샹년 죽얼! 물에래도 빠데 죽
얼⋯⋯
그는 실컷 때린 뒤에 아내도 아우와 같이 등을 밀어 내어쫓았다. 그 뒤에 그의 등에로, 고기 배때기
에 장사해라! 고 토하였다. 분풀이는 실컷 하였지만, 그래도 마음속이 자못 편치 못하였다. 그는 아랫
목으로 가서, 바람벽을 의지하고 실신한 사람같이 우두커니 서서 떡상만 들여다보고 있었다.
서편으로 바다를 향한 마을이라 다른 곳보다는 늦게 어둡지만, 그래도 술시(戌時)쯤 되어서는 깜깜하
니 어두워졌다. 그는 불을 켜려고, 바람벽에서 떠나서 성냥을 찾으러 돌아갔다. 성냥은 늘 있던 자리
에 있지 않았다. 그래서 여기저기 뒤적이노라니까, 어떤 낡은 옷뭉치를 들칠 때에, 쥐소리가 나면서
무엇이 후덕덕 뛰어나온다. 그리하여 저편으로 기어서 도망간다. 역시 쥐댔다. 그는 조그만 소리로
부르짖었다. 그리고 그만 그 자리에 맥없이 덜썩 주저앉았다. 아까 그가 보지 못한 때의 광경이 활동
사진과 같이 그의 머리에 지나갔다.
아우가 집에를 왔다. 아우에게 친절한 아내는 떡을 먹으라고 아우에게 떡상을 내어놓는다. 그때에 어
디선가 쥐가 한 마리 뛰어나온다. 둘이서 쥐를 잡느라고 돌아간다. 한참 성화시키던 쥐는 어느 구석에
숨어버린다. 그들은 쥐를 잡느라고 두리번거린다. 그 때에 그가 들어선 것이다. 샹년, 좀 있으믄 안
들어오리? 그는 억지로 마음먹고, 그 자리에 드러누웠다. 그러나 그의 아내는 밤이 가고, 밝기는커녕
해가 중천에 떠올라도 들어오지를 않았다. 그는 차차 걱정이 나서 찾아보러 나섰다.
아우의 집에도 없었다. 동리를 모두 찾아보아도 본 사람도 없다 한다. 그리하여 낮쯤 한 3, 4리 내려
가서 바닷가에서 겨우 아내를 찾기를 찾았지만, 그 아내는 이전과 같은 생기가 찬 산 아내가 아니요,
몸은 불어서 곱이나 크게 되고 이전에 늘 웃음을 흘리던 예쁜 입에는 거품을 잔뜩 물은 죽은 아내다.
그는 아내를 업고 집에 오기까지는 정신이 없었다.
이튿날, 간단하게 장사를 하였다. 뒤에 따라오는 아우의 얼굴에는, 형님, 이게 웬일이오니까? 하는 기
운이 떠돌았다. 장사를 지낸 이튿날부터 아우는 그 조그만 마을에서 없어졌다. 하루 이틀은 심상히 지
냈지만 닷새 엿새가 지나도 아우는 돌아오지 않았다. 그래서 알아보니까, 꼭 그의 아우와 같이 생긴
사람이 5, 6일 전에 뫼 산(山) 자 봇짐을 하여 진 뒤에, 시뻘건 저녁 해를 등뒤로 받고 더벅더벅 동편
으로 가더라 한다. 그리하여 열흘이 지나고 스무날이 지났지만, 한 번 떠난 그의 아우는, 돌아올 길이
없고, 혼자 남은 아우의 아내는 맨날 한숨으로 세월을 보내게 되었다. 그도 이것을 잠자코 보고 있을
수가 없었다. 그 불행의 모든 죄, 죄 그에게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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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책과 후회에 잠긴 그의 유랑
그도 마침내 뱃사람이 되어 적으나마 아내를 삼킨 바다와 늘 접근하며, 가는 곳마다 아우의 소식을
알아보려고 어떤 배를 얻어 타고 물길을 나섰다. 그는 가는 곳마다 아우의 이름과 모양을 말하며 물
었으되, 아우의 소식은 알 수가 없었다. 이리하여 꿈결같이 10년을 지나서, 9년 전 가을, 탁탁히 낀 안
개를 깨며, 연안 바다를 지나가던 그의 배는 몹시 부는 바람으로 말미암아 파선을 하여, 벗 몇 사람은
죽고, 그는 정신을 잃고 물 위에 떠돌고 있었다.
그가 겨우 정신을 차린 때는 밤이었다. 그리고 어느덧 그는 뭍 위에 올라와 있었고, 그를 말리려고 새
빨갛게 피워 놓은 불빛으로 자기를 간호하는 아우를 보았다. 그는 이상하게 놀라지도 않고 천연히 물
었다. 너, 어떻게 여기 완? 아우는 잠자코 한참 있다가 겨우 대답하였다. 형님, 거저 다 운명이외
다. 따뜻한 불기운에 잠들려 하던 그는 화닥닥 깨이면서 또 말하였다. 10년 동안에, 되게 파리했구
나! 형님, 나두 변했거니와, 형님두 되게 변하셋쉐다!
이 말을 꿈결같이 들으면서 그는 또 혼혼히 잠이 들었다. 그리하여 두어 시간 꿀보담도 단 잠을 잔
뒤에 깨어 보니, 아까처럼 새빨간 불은 피워 있지만, 아우는 어디로 갔는지 없어졌다. 곁에 사람에게
물어 보니까, 아까 아우는 그의 얼굴을 물끄러미 한참 들여다보고 있다가, 새빨간 불빛을 등으로 받으
면서 더벅더벅 아무 말 없이 어두움 가운데로 사라졌다 한다.
이튿날, 아무리 알아보아도 그의 아우는 종적이 없어지고, 알 수 없으므로, 그는 할 수 없이 다른 배
를 얻어 타고, 또 물길을 나섰다. 그리하여 그의 배가 해주에 이르렀을 때, 그는 해주장에를 들어가서
무엇을 사려다가, 저편 맞은편 가에 얼핏 그의 아우와 같은 사람이 있으므로 뛰어가서 보니, 그는 벌
써 없었다. 배가 해주에는 오래 머물지 않으므로 그는 마음은 해주에 남겨 두고 또다시 바닷길을 떠
났다. 그 뒤에 3년을 이리저리 돌아다녔어도 아우는 다시 볼 수가 없었다.
그리하여 3년을 지나서 지금부터 6년 전에, 그가 탄 배가 강화도를 지날 때에 바다로 향한 가파른 뫼
켠에서, 바다로 향하여 날아오는 배따라기를 들었다. 그것도 어떤 구절과 곡조는, 그의 아우 특색으
로 변경된 - 그의 아우가 아니면 부를 사람이 없는, 그 배따라기다.
배가 강화도에는 머물지 않아서 그냥 지나갔으나, 인천서 열흘쯤 머물게 되었으므로 그는 곧 내려서
강화도로 건너갔다. 거기서 여기저기 찾아다니다가 어떤 조그만 객줏집에서 물어 보니, 이름도 그의
아우요 생긴 모양도 그의 아우인 사람이 묵어 있기는 하였으나, 사나흘 전에 도로 인천으로 갔다 한
다. 곧 돌아서서 인천으로 건너가서 찾아보았지만, 그 조그만 인천서도 그의 아우를 찾을 바가 없었
다. 그 뒤에 눈오고 비 오며, 6년이 지났지만, 그는 다시 아우를 만나 보지 못하고, 아우의 생사까지
알 수가 없었다.
떠나간 그 에 대한 나 의 추억
말을 끝낸 그의 눈에는 저녁 해에 반사하여, 몇 방울의 눈물이 번득이다. 나는 한참 있다가 겨우 물었
다. 노형의 계수는?
모르디요, 20년을 영유는 안 가 봤으니깐요.
노형은 이제 어디로 갈 테요?
것두 모르디요. 정처가 있나요? 바람 부는 대로 몰려댕기디요. 그는 한 번 다시 나를 위하여 배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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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를 불렀다. 아아, 그 속에 잠겨 있는 삭이지 못할 뉘우침, 바다에 대한 애처로운 그리움.
노래를 끝낸 다음에, 그는 일어서서 시뻘건 저녁 해를 잔뜩 등으로 받고, 을밀대로 향하여 더벅더벅
걸어간다. 나는 그를 말릴 힘이 없어서 눈이 멀거니 그의 등을 바라보고 앉아 있었다. 그 날 밤, 집에
돌아와서도 그 배따라기와 그의 숙명적 경험담이 귀에 쟁쟁히 울리어서 한잠도 못 이루고, 이튿날
아침에 깨어서 조반도 못 먹고 기자묘로 뛰어가서 또다시 그를 찾아보았다. 그가 어제 깔고 앉았던
돌은 모두 한편으로 누워서 그가 다녀감은 기념하되, 그는 그 근처에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그러나, 배따라기는 어디선가 쟁쟁히 울리어서, 모든 소나무들은 떨리지 않고는 안 되겠다
는 듯이 날아온다. 모란봉이다, 모란봉에 있다. 하고 나는 한숨에 모란봉으로 뛰어갔다. 모란봉에는
사람이 하나도 없다. 부벽루에도 없다. 을밀대다. 하고, 나는 다시 을밀대로 갔다. 을밀대에서 부벽루
를 연한, 지옥까지 연한 듯한 구렁텅이에 물 한 방울 안 새라고 빽빽이 난 소나무의 그 모든 잎잎은
떨리는 배따라기를 읊고 있지만, 그는 여기도 있지 않다. 기자묘의, 하늘을 향하여 퍼져 나간 그 모
든 소나무의 천만의 잎잎도, 그 아래 쭉 퍼진 천만의 풀들도, 모두 그 배따라기를 슬프게 부르고 있
지만, 그는 이 조그만 모란봉 일대에서 찾을 수가 없었다. 강가에 나가서 알아보니, 그의 배는 오늘
새벽에 떠났다 한다. 그 뒤에 여름과 가을이 가고, 1년이 지나서 다시 봄이 이르렀으되, 잠깐 평양을
다녀간 그는 그 숙명적 경험담과 슬픈 배따라기를 남겨 둘 뿐 다시 조그만 모란봉에 나타나지 않았
다.
모란봉과 기자묘에 다시 봄이 이르러서, 작년에 그가 깔고 앉아서 부러졌던 풀들도 다시 곧게 대가
나서 자줏빛 꽃이 피려 하지만, 끝없는 뉘우침을 다만 한낱 배따라기로 하소연하는 그는, 이 조그만
모란봉과 기자묘에서 다시 볼 수가 없었다. 다만 그가 남기고 간 배따라기만, 추억하는 듯이 모든 잎
잎이 속삭이고 있을 따름이다.
발표지「창조(創造)」(1921, 제9호)
▣ 더 재미있게 읽기 위하여
액자 소설의 형식을 통한 비극적 운명의 강조
1921년 6월「창조」에 발표된 단편소설 「배따라기」는 오해가 빚은 파멸과 방랑의 이야기로 한국 최
초의 단편소설로 알려져 있다. 물론 이전에도 짧은 형태의 소설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그것들이 대
개 단일 형태의 서간체 또는 일기체의 혼용에서 벗어나지 못함으로 해서, 진정한 의미로서의 짜임새
있는 단편소설의 단계까지는 접근하지 못했다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같은 짧은 형태의 소설이면서
도 이 작품을 조선 글 조선말로 된 최초의 단편소설로 규정할 수 있게 한 구체적인 이유는 무엇인
가?
그것은 바로 액자소설로서의 형태를 성공적으로 갖추었다는 점에서 찾을 수 있다. 일반적으로 액자소
설이란 외부의 이야기들 속에 또 하나의, 또는 여러 개의 내부의 이야기를 내포하는 소설의 형식을
지칭하는 개념이다. 이러한 액자소설은 그 형식 자체가 외부의 이야기를 통해서 내부의 이야기를 이
미 있는 또는 실제 있는 일로 기정사실화해 쉽게 개연성을 확보할 수 있는 장점이 있다.
「배따라기」는 이러한 액자소설의 형식을 십분 활용, 내부의 이야기와 외부의 이야기를 단단한 고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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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 연결시킴으로써 확고한 형식을 갖추고 있다. 이 작품은 삼중의 층으로 구성되는데, 형을 방랑하게
하는 계기가 되는 부분, 형의 방랑과정, 그리고 화자의 서술부분이 그것이다. 가장 안쪽에 자리잡고
있는 부분은 어떤 어촌에서 벌어진 슬픈 파멸의 사건이다. 양순하고 다감한 아우와 붙임성 있으면서
도 성미 급한 형수, 그리고 선량하나 난폭한 형, 이들 사이의 일상적인 관계가 어느날의 우연한 사건
으로 처절한 파국을 가져온다. 쥐잡기로 표현된 우연한 순간의 오해 때문에 아내는 자살하고, 동생은
영영 떠난다. 이러한 세계를 지배하는 것은 우연이다. 합리적으로 통제되지 않는 우연에 의해 일상적
인 세계는 파탄하고 만다는 것이 그 안에 있는 이야기의 핵심이다.
중간부분의 이야기는 형의 방랑과정이다. 그는 옛날에 있었던 일을 조금이나마 회복하기 위해 동생을
찾아나선다. 그러나 그 뜻은 이루어지지 않으며, 따라서 가장 안쪽의 이야기는 가운데 부분의 이야기
를 통해 더욱 견고하고 회복불가능한 실재로 굳어진다.
이에 대해 타인인 나가 중심이 된 맨 바깥의 이야기는 맨 안쪽의 이야기를 더 이상 손댈 수도, 간여
할 수도 없는 저편의 이야기로 기정사실화함으로써, 우연에 의한 절망의 세계는 절대화된다. 이렇듯
「배따라기」는 우연에 의해 훼손된 삶의 가치, 그것 자체만을 문제 삼고 있으며, 그것을 통한 미의
추구가 동인문학의 본령임을 다시 한번 확인시켜 준다.
인형 조종술의 창작방식과 낭만적인 미의식
흔히 김동인은 근대문학 일세대인 이광수, 최남선 등의 계몽주의문학으로부터 문학 자체의 존재 의의
를 강조하는 순수예술주의를 개척한 작가로 평가되어 왔다. 「배따라기」는 그의 이러한 경향을 잘
보여주는 작품이다. 그는 「약한 자의 슬픔」이나 「마음이 옅은 자여」와 같은 기왕에 먼저 발표된
소설들을 제쳐놓고 이 소설부터 진짜 소설이라고 주장한다.
그가 생각하는 소설의 예술성은 인형조종술이라는 독특한 창작방법에서 집약적으로 드러난다. 인형
조종술이란 작가가 신의 입장에 서서 등장인물들의 생각이나 운명을 인형 놀리듯 조종할 수 있어야
한다는 입장인데, 이는 소설 속에 등장하는 한 인물의 눈을 통해서 모든 대상을 관찰하는 이른바 일
원묘사 형식을 통해서 달성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인형조종술의 창작방식은 그의 독특한 미의식과 연관된다. 이 글의 주제는 인간적인 운명을
초극하려는 노력의 부질없음과 거기에서 나오는 낭만적인 미의식이라고 할 수 있다. 외부의 이야기에
서 나는 따뜻한 봄날 유토피아를 떠올리며 사람의 위대함을 끝까지 즐긴 진시황을 예찬한다. 그는
후세의 역사가들이 무어라고 하든간에 참 삶의 향락자이자 역사 이후의 제일 큰 위인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진시황 예찬은 내부의 이야기에 나타나는 아우와 자신의 처를 의심하며 폭력을 휘두르는 형
의 운명과 관련되어 그가 부르는 배따라기 노랫소리에 대한 예술적 예찬으로 되살아난다. 즉 사람의
위대함을 끝까지 누리려는 자가 맞는 운명적 파탄으로부터 예술이 갖는 아름다움이 나온다는 것이 김
동인의 미의식이다. 누구나 진시황처럼 위대할 수는 없으므로 진시황의 위대함을 닮고자 하는 자, 곧
인생의 향락을 끝까지 누리려는 자는 운명적으로 비극적 파탄의 결말을 맞이할 수밖에 없으며, 그러
한 파탄과 비극이 아름다움을 잉태한다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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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김동인이 생각하는 아름다움은 모든 것을 희생한 뒤에 나오는 허무함과 깊은 관련을 가지며 배
따라기 노랫소리의 아름다움 역시 그 노래를 부르는 형이 갖고 있는 한에서 나왔다고 할 수 있다.
성적 갈등과 자살로의 갈등해소
「배따라기」의 내부의 이야기에서는 성적 갈등과 자살로의 갈등해소 처리의 태도가 두드러지는데,
이는 김동인의 소설에 많이 등장하는 사건 처리 방식이다. 김동인은 그의 첫 소설 「약한 자의 슬
픔」에서도 성의 문제를 소설의 갈등구조로 선택했는데,「배따라기」에서는 형수와 시동생이라는 보
다 심도 깊은 금기의 성을 선택했다. 이것은 인생과 현실을 있는 그대로 제시하겠다는 그의 자연주의
적 태도와 무관하지 않겠지만, 성에 대한 특별한 관심은 그의 다음 소설의 방향에 하나의 암시를 던
져준다.
아내와 동생의 불륜을 오해하는 남편, 그 오해에 항거해 물에 빠져 죽은 아내, 그 충격 속에 집을 떠
나 방황하는 동생, 그 갈등의 후회 속에 떠돌며 배따라기를 부르는 남편이 이 소설의 이야기이다.
여기서 아내의 죽음은 세 가지의 문제를 암시한다. 우선 아내의 죽음으로 현실적인 갈등이 해소된 것
이며, 그녀가 빠져 죽은 물에서 남편이 일생을 두고 떠나지 못하고 맴돌고 있는 공간으로의 물의 상
징성, 아내의 죽음이 가져온 작품구조상의 전환기능이다. 어촌이라는 작은 공간 속, 예쁘고 애교 있고
쾌활한 아내와 맨날 바닷바람을 쏘였지만 얼굴이 희고 늠름한 시동생은 결국 죽음과 멀리 떠남으로
해서만 성적 오해로 빚어진 갈등을 해소할 수 있었다. 더구나 아내의 죽음은 물을 통해서 이루어지
며 남편이 20년 넘도록 떠날 수 없는 공간으로 바다가 설정되어 있어서 갈등해소 장치로서의 물의
상징성을 더해준다.
아내를 삼킨 공간이고 아우와의 만남이 기대되는 공간으로 설정된 바다는 일반적으로 소멸과 재생을
상징한다. 심청이 빠졌던 인당수 물이 재생적 상징성을 가졌듯이, 「배따라기」의 바닷물은 아직은 그
남편에게 새로운 삶을 허락하지 않지만 그들 부부 사이의 오해를 해소시키는 상징적 공간일 수도 있
는 것이다.
여기에 아내의 죽음이 계기가 되어 동생은 저녁 해를 등으로 받고 더벅더벅 동쪽으로 떠났고, 역시
쥐댔구나로 시작되는 남편의 후회는 어쩌면 아내가 머물러 있을 지도 모르는 바다를 떠돌게 하는 전
환점이 된다. 아내의 장례와 더불어 동생이 떠났고, 십 년이 지나 폭풍우의 바다에서 의식을 잃었던
형은 잠시 동생을 상면하지만, 형의 얼굴을 물끄러미 들여다보고 있다가 새빨간 불빛을 등으로 받으
며 더벅더벅 다시 어디로인가 떠나고 있다. 배따라기 노래를 끝낸 그 형 역시 시뻘건 저녁 해를 잔
뜩 등으로 받고 을밀대를 향하여 더벅더벅 떠난다.
결론적으로 「배따라기」는 성적 문제로 인하여 발생한 갈등을 아내의 자살을 통해 해소하는 사건구
조를 지녔다. 이때 아내의 자살은 세 가지의 의미를 갖는데, 아내 자신의 갈등을 자살을 통해 해소하
는 기능을 할 뿐만 아니라, 물이 갖는 재생의 이미지를 통하여 소설 배경의 상징성을 더하는 기능을
하며, 또한 새로운 사건의 전개, 즉 아우와 형의 방랑과 우연한 만남을 가능하게 하는 계기로 작용한
다. 그러나 새로운 사건전개 역시 궁극적인 갈등의 해소와 인물간의 화해를 이끌어내지 못한다는 점
에서 우연에 의해 인간에게 닥치는 비극적 운명의 힘이라고 하는 이 소설의 주제가 더욱 강조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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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동인의 생애와 작품
1900
10월 평양에서 대지주이자 기독교 장로인 김대윤과 후실인 옥씨 사이에서 3남1녀 중 차남으
로 태어났다.
1912
1913
기독교 계통인 평양 숭덕소학교를 졸업하고 평양 숭실중학교에 입학
숭실중학교 2학년 때, 성경 암송시험에서 성경책을 꺼내 놓고 보다가 심한 꾸중을 듣고는
자퇴
1914
일본에 혼자가 도쿄학원 중학부 입학. 집에서는 메이지학원에 가기를 바랐지만, 소학교 동창
인
주요한이 한 학년 위에 있어서 그 아래로 들어가기를 싫어해 결국 도쿄학원으로 갔다.
1915
도쿄학원 폐쇄로 메이지학원 2학년에 편입
1917
부친 별세로 귀국. 학업은 메이지학원 3학년으로 중단한다.
쌀 3천 석에 해당하는 막대한 유산을 물려받았다.
1918
평양에서 수산물을 도매하는 부유한 상인의 딸 김혜인과 결혼하고 다시 일본으로 간다.
1919
2월에 주요한, 전영택, 김환 등과 함께 한국 최초의 순문예동인지「창조」를 자비로 발간한
다.
처녀작 단편 「약한 자의 슬픔」을「창조」창간호에 발표한다.
유학생 독립선언행사에 참여했다가 붙잡혀 하루만에 풀려난다. 이 소식을 듣고 놀란 집에서
전보를 쳐서 곧바로 귀국한다.
아우 동편의 부탁으로 3·1운동 격문을 써 주었다가 출판법 위반으로 투옥됐다.
1920
장남 일환 출생. 염상섭과 비평가의 태도에 관해 논전을 벌인다.
1921
「배따라기」를「창조」에 발표. 명월관 기생 등과 방탕한 생활에 빠져 가세가 기울기 시작
했다.
1923
단편 「이 잔을」을 「개벽」에, 「태형」을 「동광」에 발표
1924
「창조」의 후신인 「영대」를 주재. 그 창간호에 단편 「유서」를 발표한다.
1925
「감자」를 「조선문단」에 발표. 또다시 방탕한 생활에 빠졌다.
1926
단편 「원보부처」(신민)를 발표한 후 수리사업을 시작했다가 실패하고, 막대한 부채 때문
에 가산을 모두 팔아 서울로 이사한다. 6개월간 하숙생활을 하며 마작 등으로 소일했다.
1927
평양으로 돌아옴. 평양 본가가 남의 손으로 넘어가고 부인은 네 살 난 딸을 데리고 가출한
다.
일본으로 간 부인을 찾아가 딸만 데리고 돌아온다.
단편 「딸의 업을 이으려」 「명화 리디아」를 발표한다.
1928
동생 동평과 함께 영화 흥행업에 손을 댔다가 실패한다.
1929
재혼하기로 결정하고 스스로 훼절이라고 한 신문연재를 시작한다. 중편 「여인」을 시작
으로 장편 「태평행」과 「여인」을 연재. 평론 「조선근대소설고」를 발표한다.
1930
단편 「죄와 벌」 「증거」 「신앙으로」 「광염소나타」 등을 잇따라 발표한다.
평양 숭의여중을 나온 열한 살 아래의 김경애와 약혼한다.
1931
김경애와 혼인하여 서울 서대문구 행촌동으로 이사한다.
단편 「박첨지의 죽음」 「거지」 등을 발표한다.
1932
「잡초」, 「붉은 산」 등을 발표했다.
단편 「발가락이 닮았다」가 염상섭을 모델로 하였다고 하여 오랫동안 둘 사이에 불화
1933
조선일보 학예부장으로 있으면서 「운현궁의 봄」을 같은 신문에 연재
- 15 -
1934
모친 옥씨 사망. 아편중독을 일으킴. 「춘원연구」를 「삼천리」에 연재
1935
「야담」을 발간. 그 창간호에 「광화사」와 「왕자의 최후」(연재물)를 쓰고 2호부터는 아
예 야담작가로 나선다.
1937
「야담」을 다른 사람에게 인계하고 형이 경영하는 평남 영원의 탄광촌으로 간다.
이 무렵 형은 이광수와 함께 수양동우회 사건으로 구속됐다.
1938
정부 관리가 곁에 있는 줄 모르고 한 말이 빌미가 되어 천황모독죄로 반년간 헌병대에서 옥
살이
1939
「김동인 단편집」간행. 중편 「김연실전」(문장)을 발표. 박영희·임학수 등과 북지황군 위
문에 협력, 조선 신궁을 참배한 뒤 만주까지 다녀왔다.
1943
친일단체인 조선문인보국회 조직개편에서 제외되었으나 징용을 면하려고 간사 정인택에게
청하여 간사 자리를 얻었다.
1945
군정청 광공국장의 호의로 호미토모 경금속회사 사장 사택을 불하받는다.
1946
우익단체인 전조선문필가협회 결성을 주도한다.
일제 때 불하받은 집이 미군 당국에 접수되어 하왕십리로 이사한다.
1948
건강상태가 나빠진다.
1950
움직이기가 어려워 피난을 가지 못한다. 서울 함락 뒤에 인민군에게 심문을 받았다.
형 동원은 이때 납북되나, 자신은 운신이 어려워 납북을 면했다.
1951
1월 5일 하왕십리 자택에서 별세
▣ 참고 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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