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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자의 흑역사

by Casey,Riley 2021. 12.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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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젠예 지음 / 현대지성
이 책은 26명의 과학자가 과학 연구에서 겪었던 흑역사를 소개한다. 저자는 때로는 잘못
된 신념 때문에, 때로는 도덕적 결함과 선입관으로 인해 겪었던 과학자들의 흑역사를 소개
함으로써, 우리가 인생에서 비슷한 실수를 하지 않도록 지혜를 주고, 아울러 각각의 일화
에 관한 저자의 해박한 설명과 분석을 통해 과학사 전체를 조망하는 지식과 통찰도 제공
한다.

과학자의 흑역사
양젠예 지음

▣ 저자 양젠예
1961년 란저우대학 물리학과를 졸업하고 화중과학기술대학 물리학과 교수로 재직하다 1995년 퇴직했
다. 일찍부터 과학자들의 실패에 관심이 많아, 아인슈타인, 갈릴레이, 뉴턴, 스티븐 호킹 같은 천재들
에게도 실수와 아집, 흑역사가 따라다니다가, 이것이 실패로 끝나지 않고 새로운 시작과 도약을 위한
영양분이 됨을 발견했다. 과학이야말로 “실패 없이는 아무것도 배울 수 없는 분야”임을 확신하고 그동
안의 연구를 집대성하여 『과학자의 흑역사』를 펴냈다. 2020년에 전면 개정판으로 재출간한 이 책은
2020년 중국 교육부 공인, 전국 독서교육 추천도서로 선정되었다. 그 외 주요 저서로는 『물리학의 아
름다움』, 『양자 역학의 역사』, 『아인슈타인 전기』, 『스티븐 호킹』 등이 있다.


▣ 감수 이정모
연세대학교 및 같은 대학원에서 생화학을 공부하고 독일 본대학교에서 유기화학을 연구했다. 안양대학
교 교양학부 교수와 서대문자연사박물관장, 서울시립과학관장을 거쳐 국립과천과학관장으로 일하면서
과학의 대중화를 위한 저술과 강연 활동을 하고 있다. 지은 책으로 『과학책은 처음입니다만』, 『과학
이 가르쳐준 것들』, 『저도 과학은 어렵습니다만』(전2권), 『공생 멸종 진화』, 『그리스 로마 신화 사
이언스』 등이 있다.

▣ Short Summary
과학자라고 하면 어떤 이미지가 떠오르는가? 흔히 냉철하고 철두철미하게 연구를 계속해나가는 사람,
괴짜이면서 아주 천재적인 인물의 이미지를 떠올리곤 한다. 하지만 과학자들도 때로는, 아니 자주, 바
보 같은 실수를 저지른다. 그들도 때로는 누군가를 시기하면서 부도덕한 판단을 내리고, 자신의 편협
한 의견을 고집하다가 엄청난 발견을 놓치기도 한다. 위대한 과학자들도 예외는 아니다. 한편 과학 이
론을 확립하는 과정에서 실험 결과만이 이론에 영향을 미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과학자들의 심리나
평소 지닌 철학 또한 이론 형성과 연구에 큰 영향을 준다. 그래서 누구보다 객관적이고 냉철해야 할
과학자들이 자신의 신념이나 편협한 철학에 빠져 잘못된 결론을 내리는 일이 비일비재하다. 그런데 언
뜻 보기에 부끄럽고 창피한 흑역사들이 꼭 나쁜 것만은 아니다. 왜냐하면 오히려 과학자들은 그런 실
패를 보완하고 극복하는 과정을 거치면서 지식의 지평을 넓혀왔기 때문이다. 이 책은 26명의 과학자가
과학 연구에서 겪었던 흑역사를 소개한다. 저자는 때로는 잘못된 신념 때문에, 때로는 도덕적 결함과
선입관으로 인해 겪었던 과학자들의 시행착오 등의 흑역사를 소개함으로써 우리가 인생에서 비슷한 실
수를 하지 않도록 지혜를 준다. 아울러 각각의 일화에 관한 저자의 해박한 설명과 분석을 통해 과학사
전체를 조망하는 지식과 통찰도 제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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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자의 흑역사

▣ 차례
들어가며
1부 천문학자의 흑역사
1장 호킹이 이런 짓을 하다니!
2장 아인슈타인이 저지른 가장 멍청한 실수
3장 해왕성의 발견과 르베리에의 실패
4장 에딩턴은 왜 블랙홀의 존재를 부인했을까?
2부 생물학자의 흑역사
5장 생물학계의 독재자가 진화론을 거부한 사연은?
6장 단순함의 함정
7장 필연과 우연, 어느 쪽이 옳은가?
8장 노벨상 수상자 세 사람의 이상한 법정 다툼
9장 염색체를 인정하지 않은 베이트슨
3부 수학자의 흑역사
10장 오일러가 풀지 못한 문제
11장 누가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칼을 휘두를 수 있을까?
12장 수학자와 물리학자의 대결
13장 푸앵카레와 아인슈타인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나?
4부 화학자의 흑역사
14장 자신의 ‘딸’을 인정하지 않은 현대 화학의 아버지
15장 돌턴이 저지른 황당한 실수
16장 위대한 예언자의 자승자박
17장 데이비는 왜 패러데이와 사이가 나빠졌을까?
18장 오스트발트가 원자론을 비판한 이유
19장 멸시받은 ‘독가스 화학자’
20장 원자폭탄의 기초가 된 오토 한의 발견
5부 물리학자의 흑역사
21장 갈릴레이 인생 최대의 실수
22장 실험 결과에 대처하는 올바른 자세
23장 베크렐의 행운, 졸리오퀴리 부부의 불운
24장 N선을 둘러싼 과학 사기극
25장 상대성이론을 괴물 취급한 마이컬슨
26장 파울리는 왜 젊은 물리학자 둘에게 패했을까?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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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자의 흑역사

과학자의 흑역사
양젠예 지음

천문학자의 흑역사
호킹이 이런 짓을 하다니!
스티븐 호킹은 주로 블랙홀을 연구했다. 블랙홀은 우주 공간에서 물질이 존재하는 특수한 형태 중 하
나이며, 블랙홀에서는 물질의 밀도가 상상할 수 없이 높아진다. 그래서 블랙홀에서는 빛도 빠져나오지
못한다. 당연히 인간의 눈에도 보이지 않으므로 이 공간을 ‘블랙홀’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블랙홀에 한
번 들어가면 어떤 물질도 다시는 밖으로 나올 수 없다. 블랙홀은 중력이 엄청나게 크기 때문에 미사일
이든 빛이든 모두 일정 거리까지 날아간 다음에는 급커브를 돌아 블랙홀 안으로 들어와야 한다.
빛이 가장 멀리까지 날아간 지점을 re라고 할 때, 이 re를 반지름으로 그린 원의 경계를 ‘사건의 지평
선’이라고 하는데, 사건의 지평선이란 일반상대성이론에 나오는 개념으로, 내부에서 일어난 사건이 그
외부에 영향을 줄 수 없는 경계면이다. 외부에서는 물질이나 빛이 안쪽으로 빨려들어갈 수 있지만, 내
부에서는 블랙홀의 중력에 의한 붕괴 속도가 탈출하려는 빛의 속도보다 커지므로 내부로 들어온 물질
이나 빛은 사건의 지평선 바깥으로 빠져나갈 수 없다. 사건의 지평선은 곧 블랙홀의 경계다. 블랙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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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수록 사건의 지평선이 가지는 표면적(re를 반경으로 하는 원의 면적인 πre )도 커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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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킹의 위대한 공헌은 이 원의 면적 πre 을 연구한 것이다. 1970년 11월, 잠자리에 들려던 호킹은 블
랙홀 경계의 면적이 줄어들지 않고 변함없이 유지되거나 증가하기만 할 것이라는 생각을 떠올렸다. 이
런 규칙을 적용하면 블랙홀의 성질과 작용에 중요한 제한을 둘 수 있고, 이 블랙홀 면적과 열역학의
엔트로피(entropy) 사이에 있는 유사성을 일깨워줄 수 있다. 열역학 제2법칙은 ‘고립계의 엔트로피가
줄어들지 않고 그대로 유지되거나 증가하기만 한다’라는 것인데(그래서 열역학 제2법칙을 엔트로피 증
가의 법칙이라고도 함), 특이하게 블랙홀 면적(사건의 지평선 면적)이 엔트로피와 동일한 차원을 가진
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러니 나중에 미국 물리학자 찬드라세카르가 다음과 같이 감탄했을 것이다.
‘열역학과 통계물리학은 일반상대성이론에서 엔트로피를 얻으려고 기대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 이론에
서 나온 결과는 열역학과 통계물리학의 규칙에 어긋나지 않는다. (……) 이런 사실로 사람들은 일반상
대성이론을 확신하게 되었다. (……) 이는 일반상대성이론의 미학적 토대와 관련이 있다.’ 호킹의 이런
중대한 발견은 당시 이론물리학자들의 환호를 받았다. 그런데 얼마 후,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던 일이
발생했다. 호킹이 자신의 새로운 견해(블랙홀의 경계가 가진 성질이 열역학의 엔트로피 법칙과 같다는
사실)에서 시작하여 블랙홀에 관한 통념을 단번에 뒤집은 것이다. 그러면서 이론물리학자들이 가장 좋
아하는 “블랙홀은 검지 않다”라는 개념을 전하기 시작했다. 이것은 곧 어떤 물질(기본 입자 등)은 블랙
홀에서도 빠져나올 수 있다는 의미다.
이 획기적인 발견으로 호킹은 당대 우주학에서 최고의 인물이자 공인된 권위자가 됐다. 그런데 이 놀
라운 발견이 실수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을 믿을 수 있겠는가? 처음에 호킹은 블랙홀 경계의 면적이 가
지는 불변성을 엔트로피 증가의 법칙과 연결 짓지 않았다. 오히려 이러한 연계에 반대하는 입장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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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자의 흑역사

그는 이 둘을 ‘숫자적으로 늘지 않는다’라는 점에서 연결했을 뿐 본질적인 연관성이 있다고 보지는 않
았다. 그랬던 호킹은 나중에 어떤 논문에서 미국 프린스턴대학교의 교수 존 휠러의 대학원생인 야코브
베켄슈타인이 블랙홀 경계의 면적이 블랙홀의 엔트로피와 관련이 있을 가능성이 크며, 이 면적이 블랙
홀의 엔트로피량일지도 모른다고 주장한 사실을 뒤늦게 알게 되었다.
호킹은 베켄슈타인의 의견에 울화통을 터트리며 분개했다. “뭘 모르는 대학원생이 나대는군! 블랙홀 사
건의 지평선 면적이 엔트로피량이라면 그건 곧 온도량이라는 뜻이 되잖아. 블랙홀에 정말로 온도가 있
다면 열이 블랙홀에서 빠져 나와 우주에서 가장 추운 곳(-273 )으로 흘러간다는 뜻인데, 그러면 에너
지가 블랙홀에서 유실된다는 것을 의미해. 이게 어떻게 가능하다는 거지?” 1973년에 호킹과 그의 동료
두 사람은 논문을 발표해 베켄슈타인의 논문에 나타난 ‘치명적인 약점’을 지적했다. 사실상 블랙홀의
유효 온도는 절대영도이며, 어떤 복사열도 블랙홀 밖으로 방출되지 않는다고 말이다.
그러나 호킹은 나중에 베켄슈타인이 아니라 자신이 틀렸음을 알게 되었다. 과학사에서 몇 번이나 반복
해서 이와 비슷한 일이 일어났다. 보수적인 전통 사상에 속박되지 않으려 애쓰면서 대담하게 도전하는
젊은 과학자는 예외 없이 권위자들의 분노와 반대에 직면한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과학의 중대한 발견
은 이런 젊은이들의 쉼 없는 도전 끝에 이루어졌다. 권위자와 노인들은 대부분 그 발전 과정에서 반대
세력의 역할을 맡는다. 이번에는 30살을 막 넘겨 나이는 많지 않지만 명성은 대단한 호킹이 이 역할을
맡은 것이다. 더 재미있는 부분은 호킹이 좀 더 연구를 진행시켜 도출한 수학 공식이 베켄슈타인의 관
점에 몹시 유리했다는 사실이다. 하지만 호킹은 이를 믿으려 하지 않았다.
한동안 호킹은 수많은 노력을 기울여 베켄슈타인의 ‘잘못된 견해’에서 벗어나려 했지만 성공하지 못했
다. 그러다가 결국 호킹은 베켄슈타인의 견해와 자신의 수학 공식에서 얻은 결론을 인정하고 편견을
내려놓았다. 그리고 잘못을 인정한 후에 호킹은 한 시대의 획을 긋는 과학적 발견을 하게 된다. “실패
는 성공의 어머니”라는 말이 최고의 진리임을 보여주는 사례다.

생물학자의 흑역사
염색체를 인정하지 않은 윌리엄 베이트슨
베이트슨은 영국의 유전학자인데, 국제적으로 ‘위대한 유전학의 선구자’라는 명예를 얻었고, 유전학에
서 케임브리지 학파의 위치를 확립했다. 또 그의 노력으로 수십 년 전에 잊힌 멘델의 유전 법칙이 사
람들에게 인정받았다. 그런데 베이트슨과 관련한 이상한 일도 적잖다. 미국의 토머스 헌트 모건을 중
심으로 한 생물학자들이 멘델 유전학설을 염색체 이론에 적용하려 했을 때 베이트슨은 모건 이론을 단
호하게 반대했고, 20년이라는 긴 시간 동안 ‘보수파’의 역할을 했다. 반면 모건은 멘델 이론에 반대하
는 입장이었지만, 1년 만에 미국에서 가장 열광적인 지지자로 바뀌었다.
처음 모건이 멘델 이론을 반대한 이유는 멘델 이론에 몇 가지 오류가 있었고, 새롭게 밝혀진 몇몇 실
험 결과를 설명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멘델 이론의 깊은 본질을 이해하고, 부족한 부분을
정확히 평가한 이후에는 멘델 이론을 적극적으로 알리고 발전시키기 시작했다. 베이트슨과 모건의 태
도는 분명히 달랐다. 베이트슨은 멘델 이론을 무조건적으로 지지했고, 모건은 멘델 이론의 결점을 극
복하고 더 완벽하게 만들고자 했다. 멘델 이론을 발전시키는 과정에서 모건은 초파리를 연구 대상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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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자의 흑역사

삼고 새로운 유전 규칙을 발견했으며, 염색체 유전학설을 제창했다. 모건은 염색체가 멘델이 말했던
‘유전적 형상 전달 메커니즘’ 속의 유전 물질을 운반하는 존재라고 여겼고, 유전자 학설을 세우고, 유
전자야말로 염색체를 구성하는 유전의 기본단위라고 여겼다. 한편 생물 개체의 발육 과정에서 유전자
는 일정한 조건에 따라 대사 과정을 통제하고 유전적 특징을 발현시키는데, 유전 과정에서 염색체가
하는 작용을 발견한 탁월한 성취를 인정받아 모건은 1933년에 노벨생리의학상을 받았다.
베이트슨은 모건이 염색체 개념을 제시하자 곧바로 반대 의견을 표명했다. 염색체는 근본적으로 멘델
이론과 아무 관련도 없다는 것이었다. 그때부터 베이트슨은 염색체 이론과의 투쟁을 시작했다가 1922
년 직접 모건의 실험실을 방문한 후에야 염색체 이론에 대한 의심을 포기했다. 그러기까지 걸린 세월
이 무려 20년이었다. 그리고 이 20년 동안 미국 생물학 연구는 세계 선두에 자리잡았다. 모건과 그의
동료들이 두각을 드러내던 시기에 베이트슨은 좋은 기회를 놓쳤을 뿐 아니라, 스스로 ‘수구세력’의 대
표 인물이 되었고, 영국 유전학 연구도 20년이나 뒤떨어졌다.
베이트슨이 유전학 발전의 방향을 알아차리지 못하게 된 원인이 무엇일까? 과학 발전은 일반적으로
‘현상학적 이론’이라는 단계를 거치는데, 현상학은 표출된 현상과 변화를 연구하며 표상 내부의 심층적
인 메커니즘은 깊이 탐구하지 않는다. 예를 들어 물리학자가 열학을 연구하는 과정에서 열역학 제1법
칙, 제2법칙을 발견했는데, 이는 현상학적 규칙에 해당한다. 그 내부(미시적 차원)의 메커니즘은 현상
적 연구가 상당히 진척한 후에야 물리학자들의 관심을 끌었다. 그 이후로 기체의 분자운동이론, 통계
역학 같은 현상학 범주를 벗어난 좀 더 고차원적인 이론 구조 단계에 접어들었다.
물리학은 일찌감치 이런 변화를 겪었다. 반면 생물학은 1920년대부터 현상학적 이론에서 벗어나 생명
신비의 심층부를 탐구하게 되었다. 열역학에서 분자운동이론으로의 전환 중 수많은 반대자가 나타났던
것처럼, 생물학도 이러한 ‘탈바꿈’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회의론자의 반대에 부딪혔다. 게다가 물리학에
서 그랬듯, 이런 반대자의 대부분은 현상학적 이론에서 공헌도가 높았던 탁월한 과학자들이었다.
베이트슨은 생물학의 탈바꿈 과정에서 악역을 담당했는데, 그가 반대했던 이유는 2가지다. 모건은 생
물 유전학의 현상학적 서술 방식을 끝내기 위해 유전 물질의 매개체를 찾았고, 멘델이 추상적인 ‘인자’
로 표현한 것을 ‘염색체 입자’로 귀결했고, 물질의 구조라는 측면에서 유전학의 규칙을 찾았다. 이런
접근법은 분명히 한 단계 진보한 것이었다. 물리학자들이 물질의 원자-분자 구조에서 열 현상의 본질
을 찾으려 한 것과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베이트슨은 모건의 탐구 과정이 황당무계하다고 여겼다.
또 다른 이유는 모건이 내놓은 염색체에 대한 해설에는 스스로 찾아낸, 믿을 만하고 독립된 증거가 없
다고 여겼다. 그래서 모건의 실험팀에게 염색체에 유전자가 있다는 증거를 내놓으라고 요구했다.
모건이 염색체 이론을 제창하고 있을 때, 베이트슨은 갖은 방법을 동원해 모건을 질책하며 이게 틀렸
다, 저게 부족하다, 이걸 증명해라, 저걸 실험해라 난리였다. 지금에 와서 보면 베이트슨의 이런 태도
가 억지처럼 보이지만, 과학 발전의 역사에는 논쟁이 빠질 수 없다. 논쟁이 없다면 과학은 더 이상 발
전하지 못할 것이다. 새로운 이론이 막 나왔을 때는 불완전하기 마련이고, 반대파의 엄격하고 까다로
운 흠집 잡기가 필요할 때도 있다. 따라서 베이트슨의 반대 자체가 잘못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그렇다면 베이트슨의 실수는 어떤 면에서 우리에게 교훈을 주는가? 독일 화학자 오스트발트는 20세기
초에도 원자 이론을 반대했는데, 그가 남긴 유명한 말이 있다. ‘내가 원자 가설을 믿기 바란다면 내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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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자의 흑역사

원자를 보여주시오.’ 당시 물리학자들은 원자 이론으로 수많은 물리 현상을 정확히 해석할 수 있었고,
또한 여러 현상을 예측했다(게다가 실험을 통해 이런 예측을 증명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토록 작은 원
자를 다른 사람에게 ‘보여주는 것’은 정말 쉽지 않은 일이었다. 베이트슨이 모건의 염색체 이론에 대해
가지는 태도가 딱 그랬다. 그는 모건에게 염색체를 증명할 독립적인 증거를 원했다. 베이트슨 자신도
유전학 연구에 평생 종사한 사람인 만큼 이런 요구가 너무 과하다는 것을 모를 리 없었다. 베이트슨
역시 하나의 가설은 한 단계 한 단계 성공을 향해 나아가는 것이지, 갑자기 하늘에서 뚝 떨어지듯 성
취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잘 알았다. 그러니 그런 과정을 기다려주어야 했다.
베이트슨이 인내심 없이 모건에게 염색체 가설을 당장 증명하라고 힐문한 것은 그의 철학적 관점 때문
이었다. 그는 일찌감치 생명 현상은 물질 그 자체에서 설명을 얻을 수 없으며, 그래서도 안 된다고 단
언했다. 그가 보기에 어떠한 물질 구조를 이용한 가설로도 생명의 신비를 해석할 수는 없었다. 베이트
슨은 염색체든 혹은 다른 어떤 ‘복잡한’ 물질 단위든 절대로 유전 물질 매개체가 될 수 없다고 여러 차
례 강조했다. 다시 말해 생명을 신비화하는 관념주의 철학을 가지고 있었다. 관념주의 철학에서는 생
명과 물질이 절대로 상호 독립적인 존재가 될 수 없다. 또한 물질 활동으로 생명 현상을 설명하는 것
도 불가하다. 유전이란 생명 현상 중에서도 특히 신비한 영역으로 여겨졌다. 이런 철학 사상을 가진
베이트슨은 당연히 염색체 가설에 반대했으며, 그 가설이 일고의 가치도 없다고 여겼다.
베이트슨이 저지른 이런 실수에 대해 앨런은 정확하게 분석했다. ‘베이트슨의 논점 이면에는 그 자신도
알아차리지 못한 경향성이 숨겨져 있었다. 그것은 바로 관념주의 철학 그리고 과학 영역에서 유물주의
이론을 인정하지 않는 것이었다. (……) 베이트슨의 실수는 추상적이고 관념적인 멘델 이론과 염색체
이론이 결합해야 한다는 필요성을 간과한 데 있었다.’ 베이트슨의 반대는 당시 유전학의 발전을 크게
저해했다. 지금 우리는 생명 현상에서 유전 물질이 무언가에 의해 운반된다는 개념에 익숙하기에 누군
가 이런 사실에 이의를 제기하면 깜짝 놀랄 것이다. 하지만 생명 현상이 모종의 실체가 있는 ‘매개체’
를 기초로 하여 일어난다는 생각은 1920년대에는 몹시 낯설고 대담한 것이었다. 이는 과거의 전통과
근본적으로 결별하는 위대한 움직임이었다. 이런 중요한 전환기에 베이트슨은 자신의 철학 사상 때문
에 시대의 흐름에 역행하는 보수파가 되고 말았다.

수학자의 흑역사
수학자와 물리학자의 대결
수학자 다비트 힐베르트 평전에는 이런 말이 있다. ‘만약 “가장 위대한 현대 물리학자가 누구인가?”라
고 묻는다면 대개 “아인슈타인”이라고 답할 것이다. 그럼 “아인슈타인과 비슷할 정도로 위대한 수학자
가 누구인가?”라고 묻는다면, 정답은 “힐베르트”다.’ 힐베르트는 다른 수학자들과 마찬가지로 독일 수
학의 우수한 전통을 이어받아 발전시켰으며, 수학 이론을 깊이 연구하면서 물리학에도 깊은 관심을 보
였다. 전기 작가인 콘스탄스 리드는 힐베르트가 1912년(당시 50세였음)에 “물리학자가 되었다”라고 썼
으며, 그때 다음과 같이 말했다고 했다. “물리학은 물리학자들에게 너무 힘든 일이다.” 이 말은 물리학
이 자신과 같은 수학자들이 해야 할 일이며 물리학자들은 잘하려고 해봐야 소용없다는 뜻이었다. 그래
서 그는 아주 자신만만하게 말했다. “우리는 이미 수학을 개조했다. 다음 단계는 물리학을 개조하는 것
이며, 그다음 차례는 화학이다.” 힐베르트는 화학을 물리학보다 더 낮잡아 보았다. 그러나 10년이 지
나 1922년이 되자 “힐베르트는 더 이상 물리학자가 아니었다.” 물리학이 10년 전에 생각했던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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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자의 흑역사

간단한 일이 아님을 알아차렸기 때문이었다. 힐베르트는 한숨을 쉬며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물리학은
역시 물리학자가 하는 것이 좋겠다.” 자기 분야를 넘어 월권행위를 하려 들면 꼭 사달이 난다. 이제 정
확히 어떤 월권행위와 사달이 있었는지 살펴보기로 하자.
힐베르트가 수학계에서 전성기를 누릴 때, 물리학계에서도 격변이 일어나고 있었다. 1895년, 독일 뮌
헨대학교의 교수 빌헬름 콘라트 뢴트겐이 X선을 발견했고, 1896년에는 프랑스 물리학자 앙투안 앙리
베크렐이 방사선을 발견했으며, 1897년에는 영국 물리학자 조지프 존 톰슨이 전자를 발견했다. 연이은
물리학적 발견은 고전물리학에 큰 충격으로 작용했다. 물리학은 심각한 위기에 봉착했고, 이론적으로
혼란이 가중되었다. 1900년에 독일의 막스 플랑크는 양자 이론을 제창했고, 1905년에는 아인슈타인이
특수상대성이론을 발표했다. 10년이란 짧은 기간에 위대한 물리학 발견이 우후죽순 쏟아졌다. 힐베르
트는 단지 기뻐하는 데 그치지 않고, 물리학 혁명 과정에 직접 참여했다. 가장 놀라운 부분은 그와 아
인슈타인이 거의 동시에 일반상대성이론의 목적지에 도착했다는 것이다. 아인슈타인은 1915년 11월
11일과 25일에 2편의 일반상대성이론 논문을 제출했다. 힐베르트는 같은 해 11월 20일에 「물리학의
기초」라는 논문을 발표했는데, 이 역시 일반상대성이론의 여러 내용을 다룬다. 그런데 목적지는 같았
지만 도달하는 방식은 달랐다. 아인슈타인은 우회적이면서 물리학자의 사고방식이 잘 드러나는 방법을
썼고, 힐베르트는 직접적이면서 수학자의 사고방식이 확연한 방법을 썼다.
한편 아인슈타인이 4차원 시공에 관한 수학적 접근에 익숙하지 않아 힘에 부칠 때 힐베르트는 조롱하
기도 했고, 어느 강연에서는 우스갯소리로 다음과 같이 말을 한 적도 있다. ‘아인슈타인이 오늘날 시간
과 공간에 관한 가장 창조적이고 심도 깊은 관점을 제시할 수 있었던 이유를 아십니까? 그가 시간과
공간을 다루는 철학과 수학을 제대로 공부한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비록 농담이었지만, 힐베르트의
마음 깊은 곳에 담긴 생각이 어떤지 짐작할 수 있다. 그는 혁명적 발견이 쏟아지는 물리학계를 보면서
물리학자들이 어찌할 바를 모른다고 여겼다. 물리학에는 확실히 질서가 부족했다. 이런 이유 때문에
힐베르트는 수학처럼 물리학도 공리화하는 방법으로 개조하고자 했다. 말하자면 기본이 되는 물리 현
상을 하나의 ‘공리(公理)’로 선정하고, 이렇게 선정된 몇 가지 공리에서 출발해 엄격한 수학적 연역을
거쳐 관측할 수 있는 전체적인 사실을 유도해내고자 했다. 유클리드 기하학이 5가지 공리에서 시작해
전체적인 기하학 정리를 도출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힐베르트는 이런 목표를 실현할 수 있는 것은 오
로지 수학자뿐이라고 여겼고, 그 사람이 다름 아닌 자신일 거라 믿었다.
그는 곧바로 실행에 옮겼다. 연구 및 고찰을 거쳐, 기체운동이론이 수학의 확률론과 결합하기 좋을 것
이라는 결론을 내리고, 기체운동이론부터 연구를 시작하면 분명 큰 성과를 올리리라 생각했다. 그러나
물리학 ‘개조’ 과정에서 힐베르트는 “수학의 힘만으로 물리학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라고도 생각했다.
다시 말해 그에게는 물리학을 잘 아는 조수가 필요했다. 그래서 그는 뮌헨대학교 아르놀트 조미펠트에
게 조수를 구해달라고 요청했다. 조미펠트는 자신이 가장 아끼는 제자인 폴 피터 에월드, 알프레드 란
데, 피터 조지프 윌리엄 디바이 등을 차례차례 보내주었다. 이들의 역할은 최신 물리학 논문을 읽고
정리해 힐베르트와 수학 전공 연구원들에게 보고하는 것이었고, 이런 도움을 받으면서 힐베르트는 분
자운동, 열복사, 물질 구조 등 물리학 최전방에 위치한 연구 과제를 탐구했다.
하지만 그 꿈과 의기양양한 기세는 오래가지 못했다. 앞에서 말했듯 1922년 그는 한숨을 쉬며 물리학
은 물리학자가 하는 것이 좋고, 수학자가 할 수 없는 일이라고 말하게 되었다. 그럼에도 힐베르트가
물리학에 공헌한 것만 따진다면, 그를 세계적인 물리학자로 인정할 수밖에 없다. 비록 수학자의 ‘월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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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자의 흑역사

행위’는 인정받지 못했더라도 수학적 사고방식은 미궁에 빠졌던 물리학자들에게 많은 도움을 주었다.
영국의 이론물리학자 폴 디랙은 이렇게 말했다. ‘수학은 추상적인 개념을 다루는 데 특히 적합한 도구
다. 추상적인 개념을 다룰 때 수학의 힘은 한계가 없다. 그러므로 새로운 물리학이 실험만 다루는 것
이 아니라면 기본적으로 수학적 형식과 방법론에 기반하여야 한다.’

화학자의 흑역사
멸시받은 ‘독가스 화학자’
독일의 화학자 프리츠 하버는 1868년 독일의 어느 유태인 가정에서 태어났다. 고등학교를 졸업한 후,
하버는 베를린, 하이델베르크, 취리히에서 차례로 대학교를 다녔고, 대학생 시절에는 몇몇 공장을 돌
아다니며 화학 지식을 실제로 활용하는 경험을 쌓았다. 한편 베를린대학교에 다닐 때, 하버는 호프민
교수의 도움을 받아가며 유기화학에 관한 학위 논문을 완성했고, 학교 당국은 하버의 논문을 베를린
왕립 공과대학교에 보내 전문가의 평가를 받아보기로 했다. 그런데 평가 결과, 19살인 프리츠 하버에
게 박사 학위를 수여해도 좋다는 답변을 받았다. 그 후 사람들은 그를 ‘하버 박사’라고 불렀다. 그 시
절 농업과 군수공업의 발달로 질소 비료와 질소 화학물의 수요가 늘어났다. 그런데 공기 중 약 80퍼센
트가 질소이기 때문에 20세기 초 화학자들의 관심은 공기에 있었다. 공기에서 질소를 분리해 수소와
합성하여 암모니아를 만들면 규모가 큰 암모니아 제조업이 형성된다. 이 암모니아를 이용해 질소 비료
든 폭약이든 만들 수 있었다. 그러나 공기에서 이 보물을 빼내는 것이 쉽지 않았다.
1904년 하버는 암모니아 합성을 공업화하여 대량 생산하는 연구에 착수했고, 몇 년간의 험난한 연구
끝에 1909년 작은 성공을 거뒀다. 기업가들은 하버의 신기한 방법에 완전히 매료되어 그의 방식을 사
용하기로 결정하고 실험공장을 건설했다. 그리고 1911년 세계 최초의 암모니아 제조공장이 문을 열었
고 1913년부터 정식 생산을 시작했는데 그해 6500톤의 암모니아를 만들었다. 암모니아를 대량으로 합
성하는 데 성공한 것은 중대한 의의를 가진다. 인류가 천연 질소 비료에 의존하는 수동적 입장에서 벗
어나 농업 발전이 빠르게 진행되었기 때문이다. 하버도 이때부터 세계적으로 이름을 떨치는 과학자로
자리매김했다. 한편 당시 암모니아 제조 공업은 독일에서 특히 중요한 의미를 가졌는데, 독일은 질소
비료의 원료를 칠레에서 수입하고 있었고, 전쟁 때문에 운송 경로가 막히면 비료 수입이 중단되어 농
업에 심각한 타격을 입었기 때문이었다.
이후 1911년 어느 날, 독일 황제 빌헬름 2세가 하버의 실험실이 있는 작은 도시를 방문해 하버의 전
기화학연구소로 향했다. 사람들은 깜짝 놀랐다. 설마 하버 한 사람 때문에 황제가 직접 이 조그만 도
시까지 왔단 말인가? 사실 빌헬름 2세가 직접 이곳에 온 중요한 다른 목적이 있었다. 먼저 황제는 하
버를 베를린에 세워질 카이저 빌헬름 물리화학 및 전기화학 연구소 소장으로 임명할 생각이었다. 그날
하버는 황제의 일행을 따라 베를린으로 갔다. 하버에게는 참으로 대단한 영예였다. 그런데 빌헬름 2세
가 하버에게 높은 직책을 준 데는 암모니아 합성 연구의 성과를 치하하는 것 외에 또 다른 숨은 의미
가 있었다. 당시 독일 황제는 전 세계 식민지를 빼앗기 위한 전쟁 준비를 하고 있었는데, 빌헬름 2세
는 하버에게 전쟁에서 적군을 무찌를 수 있는 신기한 무기를 발명하라고 명령했다. 제1차 세계대전에
서 하버의 암모니아 합성법은 독일에 그야말로 엄청난 공로였다. 이런 공로를 두고 사람들은 하버에게
죄가 있다고 묻지는 않았다. 암모니아 합성법은 인류의 행복을 위한 위대하고 가치 있는 발견이었다.
그러나 이후 하버는 사람들이 용납할 수 없는 더 나쁜 짓을 저질렀다. 하버는 맹목적인 애국심과 황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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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자의 흑역사

가 자신의 가치를 알아준 데 대한 고마움으로 열정을 쏟아 군수공업에 필요한 연구에 매진했다. 한랭
한 기후에서 쓸 수 있는 휘발유를 연구하고, 폭약의 재료를 생산했다. 그중 가장 용서받을 수 없는 일
은 염소 가스, 이페리트 가스 등 독가스를 연구 개발한 것이었다. 하버는 새로 건설한 화학병기 공장
의 공장장을 맡아 독가스의 연구 개발, 생산 감독을 총괄했다.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한 직후에는 독
일 군대가 우세를 점했다. 그러나 1914년 말이 되자 독일군의 우세는 사라지고 양측이 교착 상태에
들어갔다. 이를 타개하기 위해 독일군은 1915년 4월 처음으로 하버가 개발한 염소가스를 사용했다.
하버의 지휘 아래 독일군은 6천 킬로미터에 달하는 벨기에 전역에서 프랑스 군대에 가스통 5천 개를
뿌렸다. 프랑스군은 대비책도 없이 독가스 공격을 당해 5만 명이 사망하고 1만 명이 중상을 입었다.
이 끔찍했던 날 이후 두 나라는 살상력이 더 강한 독가스를 사용하려고 경쟁을 벌였다. 1918년에 전쟁
이 끝났을 때, 독가스로 사망한 숫자는 1백만 명을 넘겼다.
하버의 죄악은 미국, 영국, 프랑스 등 각국 과학자의 비난을 받았다. 아내도 자살이라는 방식으로 남편
의 죄악에 항의했다. 전쟁이 끝난 후 독가스 연구를 책임졌던 하버는 오랫동안 숨어 살아야 했다. 수
많은 과학자의 비난을 받았기 때문에, 전범으로 몰려 군사 법정에 세워질까 봐 두려워서였다. 그런데
1919년 스웨덴 왕립과학한림원은 1918년 노벨화학상 수상자가 하버라고 발표했다. 그러자 수많은 과
학자들이 항의했다. 독가스를 만들어 전쟁에서 인명을 살상하는 데 사용한 죄인에게 노벨상을 주는 것
은 이 상의 명성을 훼손하는 일이었다. 또한 많은 과학자가 여러 학술회의에서 하버가 보이면 그대로
회의장을 빠져나가곤 했다. 하버 같은 인간과 같이 학회를 진행할 수 없다는 항의 표시였다. 하버는
정말 많은 사람에게 멸시받았고, 때로는 대놓고 그를 모욕하는 사람도 있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잘
못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했다. 그는 전쟁을 빨리 끝내기 위해, 다시 말해 더 많은 사람을 구하기 위해
살상력 강한 독가스를 만든 것이라고 여전히 생각했다. 분명 암모니아는 중요한 화학 비료였고 공기
중 질소를 분리해 암모니아로 합성한 것은 인류에게 큰 도움이 되는 과학적 성과였다. 따라서 스웨덴
왕립과학한림원이 노벨화학상을 하버에게 수여한 것도 어느 정도 이치에 맞는 일이었다. 그러나 하버
가 전쟁 무기를 만든 것은 그의 일생에서 가장 수치스러운 행동이었음이 분명하다.
하버의 일생은 공로도 크지만 과실도 적지 않았다. 그는 천재 화학자였지만 맹목적인 애국자였다. 자
신이 독일에 충성을 다하면 그 공로로 유태인이라는 출신을 씻어내고 “진정하고 훌륭한 독일인”이 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친구였던 아인슈타인은 여러 차례 그를 비판했다. 그러나 하버는 아인슈타인의
비판이나 충고에 귀 기울이지 않았고, 반대로 아인슈타인 같은 행동이 유태인에 대한 평판을 떨어뜨린
다고 생각했다. 결국 죽음에 이르렀을 때야 하버는 자신이 잘못 생각했음을 깨달았다. 과학자는 매우
똑똑하고 예민한 감각을 보이지만, 사회적인 지식은 보통 사람보다 떨어질 때가 있다. 이런 사례는 세
상 어느 나라에서든 쉽게 볼 수 있고, 하버는 그중에서 가장 확실한 사례다.

물리학자의 흑역사
갈릴레이 인생 최대의 실수
과학의 할 일은 객관적 사물이 ‘왜’ 그런지 알아내는 것이다. 물리학은 특히 그렇다. 이는 케플러의 다
음과 같은 말과도 일치한다. “나는 천체의 수, 천체 간 거리, 천체 운동을 탐구하는 데 이끌린다. 나는
천체가 왜 지금의 모습이 되었는지, 왜 다른 모습이 아닌지를 알아내고 싶다.” 그런데 이런 ‘왜’에 대
답하는 과정에서 시대마다 생각의 틀이 달라지곤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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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자의 흑역사

고대 그리스 시대 물리학자들은 ‘조화’를 이용해 객관적 사물의 ‘왜’를 설명하려 했다. 예를 들어보자.
항성은 왜 원운동을 할까? 원운동이 균형 있고 충만하며 안정적이므로 가장 조화롭기 때문이다. 그런
데 뉴턴 시대에는 이런 사고방식이 불완전하고 정확도가 떨어지는 것으로 치부되었다. 물리학자는 마
땅히 ‘힘’을 중심으로 사고해야 했다. 오늘날 천체물리학자도 연구할 때 갖가지 방법으로 힘을 찾으려
한다. 힘을 찾으면 ‘왜’라는 질문에 대답할 수 있다는 생각 때문이다. 힘을 중심으로 살피면 예전에는
해결할 수 없었던 문제를 더 정확하게 해석할 수 있었고, 자연현상도 더 정확하게 예측할 수 있었다.
갈릴레이가 살았던 시대는 고대 그리스식의 낡은 이론이 위협받고 동요하던 때였다. 예를 들면, 16세
기 이탈리아와 영국에서는 심장과 혈관 그리고 혈액순환에 관한 중요한 과학적 사실이 연이어 발견되
었다. 그러면서 유명한 고대 그리스 의사인 갈레노스의 견해가 잘못된 것임이 밝혀졌고, 고대 그리스
시절의 지식에 의구심을 품는 움직임이 생겼다. 당연히 물체가 운동하는 원인을 찾으려는 운동학 문제
도 ‘조화’라는 생각의 틀로는 해결할 수 없었다.
한편 아리스토텔레스는 운동을 2종류로 구분했다. 하나는 자연운동이고, 다른 하나는 강제운동(비자연
운동)이다. 자연운동은 천체의 원주운동, 무거운 물체의 낙하운동 등이고, 강제운동은 돌을 던지는 경
우나 물체를 수평으로 움직이는 운동 등을 말한다. 그런데 자연운동의 원인은 모든 물체가 가지고 있
는 자연적인 위치를 찾아가려는 본능이다. 무거운 물체는 땅속으로 향하려는 본능이 있어 낙하운동이
일어난다. 그리고 천체가 지구 주위를 도는 운동도 조화롭고 시작도 끝도 없이 영원불변한 자연운동이
다. 반면 강제운동은 다른 물체의 강제적 작용을 발생하는 운동으로 아리스토텔레스는 “어떤 물체를
밀어내는 힘이 더 이상 그 물체를 밀지 않을 때, 물체는 곧 정지 상태로 돌아간다”라고 했는데, 아리스
토텔레스는 이와 같은 결론을 직관적인 추론으로만 내렸기에 일찍부터 그 결함을 지적받았다. 갈릴레
이는 선배들과 달리 추론은 직관이 아닌 실험의 기초 위에서 이루어져야 한다고 생각했다.
갈릴레이는 무거운 물체가 낙하하는 것은 원래 위치를 추구하는 움직임 같은 것이 아니라, 모든 물체
에 중력이 작용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물체는 중력의 작용을 받아 균일한 가속운동을 하는데, 이
가속도는 보편상수 g라고 하며 물체의 무게나 성분과 무관하다. 갈릴레이는 경사면 실험에 이상적인
환경을 가정하는 논리적 추론을 더하여 관성의 법칙을 알아냈는데, 이 법칙은 “힘은 속도의 원인이 아
니라 가속도의 원인이다”라는 것을 말해준다. 이렇게 갈릴레이는 동역학의 올바른 기초를 다졌고, 아
리스토텔레스의 운동 이론은 발붙일 곳을 잃었다. 갈릴레이가 지면에서의 운동에 관한 옛 사고방식을
깨뜨렸으니 하늘의 천체운동에 관한 옛 사고방식도 흔들 수 있을 것 같았지만 그렇지 않았다.
어떤 과학자는 이렇게 생각했다. 지구도 하나의 행성일 뿐이라는 코페르니쿠스의 학설, 지면에서의 운
동 법칙에 관한 갈릴레이의 여러 가지 발견 등에 따라 천체뿐 아니라 지구 운동에도 적용할 수 있는
이론을 만들어야 한다고 말이다. 그런데 이 사람이 바로 케플러였다. 그는 갈릴레이와 자주 편지를 주
고받았는데, 1605년에 케플러는 이런 편지를 썼다. ‘나는 진심으로 그 물리적 원인을 탐구합니다. 내
목표는 천체란 신성한 유기체가 아닌 시계에 비유되어야 마땅하다는 것을 알리는 것입니다. (……) 천
체의 거의 모든 운동은 그저 단일하고도 간단한 자력(磁力) 때문에 나타나는 것이니까요. 시계의 각종
움직임이 오직 그 무거운 추 때문에 생기는 것처럼 말이지요. 저는 이런 물리적 개념을 계산식이나 기
하학으로 표현 가능하다는 것도 증명할 수 있습니다.’
케플러가 1605년에 일종의 역학적 사고방식으로 하늘과 땅의 물리학을 아우르려 했다는 것은 놀랍다.
그는 원래 행성 운동 속도의 각종 비례관계를 탐구하면서 조화의 규칙에 열중했는데, 이처럼 ‘조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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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자의 흑역사

는 생각의 틀을 적극적으로 추구했던 케플러가 동시에 역학의 새로운 사고방식도 열렬히 탐구했다는
것은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이다. 결국 케플러는 조화라는 사고방식에 강하게 매혹되어 올바른 동역학
개념을 가지지 못했기 때문에 천체의 운동과 지면의 운동을 통합하지 못했다.
하지만 갈릴레이의 상황은 좀 달랐다. 그는 관성의 법칙을 발견했고 자유낙하 하는 물체의 가속도를
연구하면서 중력을 알아냈다. 그리고 스스로 제작한 망원경으로 모든 행성이 둥근 구체임을 밝혔고,
태양에 흑점이 있다는 것과 달 표면이 매끈하지 않고 울퉁불퉁하다는 것도 발견했다. 이로 인해 천체
는 완벽하고 영원불변하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주장이 깨졌다. 나아가 갈릴레이는 모든 별과 지구는
다를 것이 없으며 물집이 응집하려는 힘에 의해 구체로 형성된다고 보았다. 이처럼 탁월하고 예리한
견해를 가졌으니 갈릴레이가 천체의 운동에 대한 문제를 해결할 가능성이 상당히 높았다. 또한 만유인
력 개념에도 거의 닿은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앞으로 한 발짝만 내디뎠다면 역학의 새로운 법칙을 발
견하는 역사적인 역할은 갈릴레이의 것이 되었을 터였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갈릴레이는 그 한 발짝을 내딛지 못했다. 오히려 케플러가 태양이 내뿜는 강한 힘
에 의해 지구와 여러 행성이 운동한다고 주장했고, 달의 힘으로 조석의 변화가 일어난다고 해석했다.
이런 케플러의 견해는 만유인력을 찾아낼 수 있는 중요한 시사점이었지만, 갈릴레이를 깨닫게 하기는
커녕 혐오감만 불러일으켰다. 갈릴레이는 이렇게 말했다. ‘조석의 변화에 관심을 가진 (……) 위인들 중,
케플러처럼 나를 놀라게 한 사람이 없다. 그는 넓고도 날카로운 사고를 가진 사람이며 지구의 운동에
정통했는데, 달이 바다의 움직임을 관할한다는 괴상하고 어린애 장난 같은 이야기를 믿는다.’
갈릴레이가 만유인력의 개념을 제창하지 못한 데는 시대적인 한계(속도가 벡터양인 점을 이해하지 못
한 것과 구심가속도의 개념을 몰랐던 것 등) 외에 한 가지 더 주의 깊게 살펴보아야 할 원인이 있다.
갈릴레이는 천체가 운동할 때 지구상에서 물체가 운동하는 것과 완전히 다른 법칙을 가진다고 여겼다.
결국 그도 천체는 자연적이며 시작과 끝이 없고 조화로운 운동을 한다는 전통적 관념에서 벗어나지 못
한 것이다. 갈릴레이는 천체가 균일한 속도로 원운동하는 것을 일종의 관성운동이라고 생각했다. 그런
데 천체 운동이 관성운동이라면 외부의 힘이 작용할 필요가 없어진다. 갈릴레이는 이처럼 잘못된 결론
을 내림으로써 위대한 과학적 발견을 할 기회를 잃었고, 이로 인해 인류는 꽤 오랫동안 만유인력에 대
한 탐구를 소홀히 하게 되었다. 이와 같은 일화를 살펴보면, 낡은 사고방식과 편견이 올바른 탐구 활
동에 큰 장애물이 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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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자의 흑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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