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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영화,리뷰,

다이아몬드의 세계

by Casey,Riley 2021. 12.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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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마키 도시아키 지음 / 미래타임즈
사람들은 왜 다이아몬드를 구매하게 되었을까? 다이아몬드의 역사는 욕망의 역사다. 고가인 다이
아몬드는 사람들의 욕망을 나타낸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사람들의 욕망이 어떻게 강해졌는지를
다이아몬드를 통해 알 수 있다. 다이아몬드에는 많은 상인ㆍ국가ㆍ민족이 얽혀있다. 다이아몬드
채굴ㆍ제조ㆍ무역ㆍ판매는 어떤 변화를 이루었을까? 이 책은 고대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다이아
몬드 산출과 비즈니스의 변화를 살펴보며, 다이아몬드가 세계 경제에 어떤 영향을 끼쳤고, 사람들
의 욕망을 어떻게 반영해 왔는지, '빛나는 돌 다이아몬드'를 통해 인간 탐욕의 역사를 알려준다.

다이아몬드의 세계
다마키 도시아키 지음

▣ 저자 다마키 도시아키
교토산업대학교 경제학부 교수. 오사카시에서 태어나 1987년에 도시샤대학교 문학부 문화학과 졸업.
1993년에 동대학원 박사 과정 중퇴. 교토산업대학교 경제학부 강사, 조교수를 거쳐 현재 교수. 2009년
에 『북유럽의 상업과 경제 1550~1815년』으로 오사카대학교에서 문학 박사학위 취득. 주요 저서 『근
대 유럽의 탄생』, 『해양제국 번영사』, 『유럽 패권사』, 『‘정보’제국의 흥망』, 『선생님도 모르는 세
계사』, 『선생님도 모르는 경제 세계사』, 『세계사의 중심축이 이동한다』 등이 있다.


▣ Short Summary
근세부터 근대에 이르기까지 유럽 국가들은 세계 각지에 식민지를 만들었고, 그와 함께 다른 지역의
향신료ㆍ식자재ㆍ천연자원 나아가 노동력까지도 자국의 배를 이용해 가져올 수 있게 되었다. 다이아몬
드는 그렇게 입수한 것 중 하나였다. 다이아몬드는 산출 지역과 수요 지역이 크게 달랐기 때문에 입수
ㆍ가공ㆍ판매에는 국제적인 상인 네트워크가 필요했다. 근세 인도에서 채굴한 다이아몬드는 중동을 비
롯한 유라시아 대륙 상업에서 활약한 아르메니아인 등 국제 무역상인 네트워크를 통해 유럽으로 들어
왔다. 유럽에서는 동유럽계 유대인 아시케나지가 다이아몬드 연마를 처리했다. 적어도 이 무렵에는 유
대인이 없으면 다이아몬드 거래가 거의 불가능할 정도의 상황이었다.
18세기에 브라질에서 다이아몬드가 발견되자 당시 브라질을 점령하고 있던 포르투갈 왕실이 독점적으
로 다이아몬드를 채굴했다. 세계 다이아몬드 시장을 인도와 브라질이 양분하는 시대가 시작된 것이다.
유럽에서 다이아몬드 거래 시장으로 중요해진 곳은 영국 런던, 네덜란드 암스테르담, 벨기에 안트베르
펜, 포르투갈 리스본, 지중해에 접한 이탈리아의 자유항(세금이 부과되지 않고 자유롭게 출입할 수 있
는 항구)인 리보르노와 베네치아였다. 그리고 이런 다이아몬드 비즈니스의 중심에는 유대인이 있었는
데, 유대인은 농업과 제조업에서 쫓겨났기 때문에 금융업이나 다이아몬드 비즈니스 말고는 달리 종사
할 분야가 없었던 것이다.
1866년에 남아프리카에서 다이아몬드가 발견되었다. 그로부터 22년 후에 영국의 제국주의자 세실 로
즈가 드비어스 합동광산 주식회사를 설립했다. 1900년에는 드비어스가 다이아몬드 세계 원석 생산량의
90퍼센트를 차지했다. 드비어스의 성장은 대영제국의 식민 역사와 궤를 같이하면서 다이아몬드와 대영
제국은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가 되었고, 유대인은 이 관계에도 깊이 관여했다.
다이아몬드에는 많은 국제 상인ㆍ국가ㆍ민족이 얽혀있다. 인간의 욕망이 어른거리는 상품인 다이아몬
드는 사람들의 욕망을 살펴보기에 가장 좋은 상품이다. 이 책에서는 다이아몬드를 통해 사람들의 욕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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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이아몬드의 세계

나아가 욕망과 사회 상황의 관계를 살펴본다. 이 책을 통해 다이아몬드가 세계 경제에 어떤 영향을 끼
쳤고, 사람들이 지닌 욕망의 변화를 어떻게 반영해 왔는지 이해할 수 있기 바란다.

▣ 차례
서장 _ 사람들이 탄소 순물질에 매료되는 이유
제1장 인류와 다이아몬드의 만남 _ 고대부터 중세
악마의 힘을 저지한다 / 출애굽기/ 구약성서에 나오는 ‘다이아몬드’는 진품일까
고대 그리스 ─ 제국주의와 민주제 / 고대 로마 / 그리스인은 다이아몬드를 몰랐다?
플리니우스의

박물지(博物誌) / 이 세상에서 가장 비싸다? / 세계에서 유일한 산지였던 인도

유럽에서 높아진 인지도 / 십자군의 영향
제2장 대항해시대와 다이아몬드
1. 대항해 시대 ─ 다이아몬드에 눈뜬 유럽
2. 인도의 다이아몬드를 수입하다
3. 안트베르펜과 암스테르담 ─ 유대인과의 관계
4. 인도와 영국
5. 포르투갈의 지배 - 브라질의 다이아몬드
제3장 제국주의 시대
1. 아프리카와 제국주의
2. 세실 로즈 - 다이아몬드 제국의 창립자
3. 다이아몬드 신디케이트의 형성
4. 세계대전 동안의 다이아몬드 시장
제4장 글로벌라이제이션 시대의 다이아몬드
1. 다이아몬드 가격 결정과 여섯 가지 규칙
2. 인공합성 다이아몬드의 상품화
3. 소비에트 연방의 대두
4. 다이아몬드와 이스라엘
5. 안트베르펜의 분투
6. 뉴욕의 다이아몬드 상인
7. 다이아몬드와 전쟁
8. 중국은 세계 2위의 다이아몬드 소비국
9. 인도와 다이아몬드 - 종교와 가족 네트워크
종장 다이아몬드 거래의 변모
마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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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이아몬드의 세계

다이아몬드의 세계
다마키 도시아키 지음

제1장 인류와 다이아몬드의 만남 _ 고대부터 중세
이 세상에서 가장 비싸다?: 고대 로마의 풍자시인 유베날리스와 플루타르코스는 다이아몬드가 상당히
귀한 물건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로마 시대에는 고귀한 사람들이 몸을 장식하기 위해 다이아몬드를
사용했다. 가치를 높게 평가했다기보다는 다이아몬드가 상징하는 ‘무적’이라는 관념을 장식품으로 치환
한 것이다. 이 상징성이 발전하여, 현실에서도 다이아몬드를 점차 중요한 용도로 쓰는 계기가 되었다.
다이아몬드를 로마로 수입할 때 중간 상인으로 활약한 것은 페르시아인과 아랍인이었다.
세계에서 유일한 산지였던 인도: 2000년 이상에 걸쳐 인도는 세계에서 유일한 다이아몬드 산지였다.
다이아몬드라는 광물이 아주 옛날부터 알려져 있었으나 상품으로 거래되기 시작한 것은 상당한 시간이
지난 후의 일이 틀림없다. 기원전 4세기 인도의 찬드라굽타 마우리아 왕조 때부터 다이아몬드는 인도
의 수출품이었다. 하지만 페르시아의 중간 상인들은 다이아몬드를 높게 평가하지 않았다. 다이아몬드
를 중요한 보석으로 생각한 것은 아랍인뿐이었다. 인도에서 난 다이아몬드는 로마 제국뿐만 아니라 중
국(한나라)에도 수송되었다. 하지만 그 양이 그다지 많았을 것 같지는 않다.
십자군의 영향: 십자군을 통해 사치품이 유럽으로 유입되기 시작했다. 베네치아의 경쟁 상대인 콘스탄
티노플을 공격한 제4차 십자군 원정(1202~1204) 이후, 베네치아 일대 무역 상인은 당시 보석 무역의
거점인 알렉산드리아에 통상 거점을 구축하였다. 당시 보석 수요의 증가에 가장 크게 공헌한 사람은
신성 로마 제국 황제 프리드리히 2세였다. 신성 로마 제국은 십자군의 영향을 받아 무역량이 증가했고,
지역에서 금광과 은광도 발견되어 금과 은을 가지고 보석을 수입했는데 그중 하나가 다이아몬드였다.
그리고 다이아몬드를 절삭ㆍ연마해서 완성품으로 만드는 기술도 향상되었다. 이를 통해 다이아몬드는
서유럽에서 가장 수요가 큰 보석이 되었고, 사람들의 욕망을 채우게 되었다.

제2장 대항해시대와 다이아몬드
대항해 시대 - 다이아몬드에 눈뜬 유럽
금, 꿈을 좇은 대항해 시대: 유럽인들이 바다를 통해서 여러 지역으로 진출한 15세기에서 17세기 전반
기까지를 ‘대항해 시대’라고 부른다. 대항해 시대가 시작된 이유는 아마도 아프리카의 금을 입수하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유럽의 금 소비량이 급속하게 늘어나자 유럽은 금의 새로운 산출지를 서아프리카
에서 찾아냈다, 하지만 유럽과 서아프리카의 교역에는 걸림돌이 있었다. 바로 이슬람교도인 베르베르
족이 사하라 종단 교역을 통해 금을 유럽으로 보내고 있었던 것이다. 이 때문에 유럽인들은 아프리카
의 금을 입수하기 위해 바닷길을 이용할 수밖에 없었다.
다이아몬드와 산호: 대항해 시대에 유럽인은 아시아와 신대륙으로 이주하거나 아시아와 거래했다. 유
럽인이 인도에서 다이아몬드를 수입하면서 그 대가로 수출한 상품은 지중해산 산호였다. 산호는 특히
인도에서 수요가 커서 가격이 올라갔다. 17세기 이후 인도양에서 유럽인들의 무역이 증가했기 때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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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이아몬드의 세계

지중해 산호가 더욱 중요해졌다. 포르투갈은 초기부터 인도의 다이아몬드에 눈독을 들여서 오스만 제
국의 레반트를 거쳐 유럽으로 수송했다. 중세에는 인도 다이아몬드의 대부분을 베네치아에서 절삭ㆍ연
마한 뒤 지금의 벨기에에 있는 안트베르펜, 포르투갈의 리스본, 프랑스의 파리로 보냈다.
안트베르펜과 암스테르담-유대인과의 관계
유럽 최대의 다이아몬드 무역 도시의 탄생: 16세기 안트베르펜은 유럽 상업의 중심지이자 최대의 다이
아몬드 무역 도시로 성장했다. 포르투갈이 새로운 항로를 개척한 결과 다이아몬드 거래 거점이었던 베
네치아의 지위가 낮아지고 다이아몬드 시장이자 원석을 제품으로 마감할 수 있는 안트베르펜의 지위가
높아졌다. 16세기 초까지는 베네치아가 다이아몬드 원석을 공급하는 주요 지역이었지만, 16세기 말에
는 리스본이 그 자리를 차지했다. 그리고 안트베르펜은 인도의 산출품이 리스본을 거쳐 유럽으로 들어
올 때의 유통 거점이 되었다. 그래서 안트베르펜에서는 다이아몬드의 거래가 활발했다.
암스테르담의 대두: 1540년대부터는 안트베르펜에서 암스테르담으로 이주가 시작되었다. 지금의 네덜
란드와 벨기에가 스페인과 독립전쟁을 치르던 1585년에 스페인군이 안트베르펜을 함락했고, 이를 계
기로 암스테르담이 안트베르펜을 대신해서 융성하게 되었다. 이후 18세기가 되면 암스테르담이 다이아
몬드 무역과 완성품 판매에서 독점적 지위를 차지하게 된다. 네덜란드는 인도의 다이아몬드를 두고 포
르투갈과 경쟁했으나, 1650년 이후부터는 포르투갈의 다이아몬드 구매량이 크게 감소해서 네덜란드가
우위에 서게 되었다. 이후 안트베르펜을 대신해서 암스테르담이 다이아몬드 무역의 중심으로 되었으며
안트베르펜은 절삭한 다이아몬드, 암스테르담은 미가공 다이아몬드를 주로 거래하게 되었다.
포르투갈의 지배-브라질의 다이아몬드
빛나는 돌을 발견하다: 근세까지의 다이아몬드 공급은 인도가 거의 독점하고 있었다. 하지만 장기간에
걸쳐 채굴한 탓에 인도의 다이아몬드는 차츰 고갈되기 시작했다. 이와 함께 인도에서 유럽 시장으로
공급되는 다이아몬드는 점차 줄어들었지만, 가격은 상승하지 않았다. 당시 유럽 사람들의 가처분소득
은 여전히 낮았고 다이아몬드에 대한 수요가 적었기 때문이다. 그러던 중 1725년에 브라질 미나스제
라이스 주에서 다이아몬드가 발견되었다. 1729년 포르투갈 왕실은 미나스제라이스 주에서 다이아몬드
가 발견되었다는 사실을 공표하고, 1730년에는 포르투갈 왕실이 브라질에서 다이아몬드가 묻힌 지역을
소유한다고 선언했다. 이후 브라질에서의 다이아몬드 산출은 계속해서 증가했다.
거의 유일한 수출국으로: 새로 발견된 브라질 다이아몬드 광산에서 다이아몬드를 채굴하려면 포르투갈
정부가 발급하는 면허가 필요했다. 브라질 다이아몬드 산출량은 1740~1772년이 최전성기였던 것으로
보이며 인도보다 더 많은 다이아몬드를 수출했다고 추측할 수 있다. 18세기에 유럽이 브라질에서 수입
하는 다이아몬드 량이 증가하면서 다이아몬드 가격은 1캐럿 당 100금프랑에서 30금프랑으로 70퍼센
트 정도 떨어졌다. 1840년대가 되자 브라질의 다이아몬드 산출량이 20만 캐럿 정도에 이르렀다. 이 무
렵부터 1870년대까지 브라질은 전 세계에서 거의 유일한 다이아몬드 수출국이었다. 인도와 보르네오
의 다이아몬드 산출량은 브라질의 1퍼센트에도 미치지 못했다.

제3장 제국주의 시대
아프리카와 제국주의
아프리카는 아시아보다 먼저 유럽에 알려졌으며 비교적 일찍부터 유럽 사람들이 이주했다. 특히 영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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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이아몬드의 세계

이 이 지역을 노리고 식민지로 삼은 것은 이곳에 다이아몬드와 금이 있었기 때문이다. 19세기의 마지
막 30년 동안 영국은 호사족ㆍ페디족ㆍ줄루족과 벌인 전쟁에서 승리했다. 이후 영국이 패권을 확대해
가면서 아프리카의 부족민들은 예비 노동력으로 바뀌었다. 그들이 없었다면 다이아몬드 광산 개발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이후 1880년대부터 제1차 세계대전까지의 기간 동안 유럽의 제국주의 열강들은
아프리카를 거의 전부 분할해서 식민지로 만들었다.
거의 유일한 수출국으로: 19세기에 유럽은 제국주의 시대로 접어들며 아프리카와 아시아 여러 나라를
정치적으로 지배해 갔다. 이것은 상인들이 국경을 넘나들며 활동했던 과거와는 크게 다른 것이었다.
국가가 다이아몬드 채굴에 깊이 관여하기 시작해 상인이 아니라 국가가 다이아몬드 비즈니스의 중심이
되었다. 그 대표적인 예는 당연히 영국 제국주의였고, 이 제국주의 이데올로기는 다이아몬드 비즈니스
와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었다.
킴벌리에서 발견: 브라질의 다이아몬드 산출량이 감소하던 19세기 중반에 남아프리카 킴벌리에서 다이
아몬드가 발견되었다. 1867년, 한 소년이 오렌지강 제방 옆에 있는 농장에서 작고 투명한 돌을 두 개
발견했다. 소년은 그 돌을 아버지에게 건넸고, 소년의 아버지는 그것을 이웃 주민인 판니커르크에게
보여줬다. 판니커르크는 이 돌을 지질학자인 가이본 아더스톤에게 보냈고 얼마 후 무려 21.24캐럿짜리
다이아몬드라는 답을 들었다. 훗날, 이 다이아몬드는 유레카 다이아몬드라고 불리게 된다. 이 일을 계
기로 남아프리카는 다이아몬드 산출의 중심지가 된다. 판니커르크는 양 500마리, 소 10마리, 말 1마
리를 주고 보석을 손에 넣었다. 그는 그 보석을 11,200파운드에 팔았는데, 이 보석은 나중에 어마어마
한 가격으로 뛰어올랐다. 이제 킴벌리에 다이아몬드가 묻혀 있다는 것이 확실해졌다.
1870년까지 남아프리카는 단지 농업 식민지에 불과했다. 당시 남아프리카에는 약 25만 명의 백인이
있었다고 하는데 대부분은 농업에 종사했다. 특히 목축업이 중심이었고, 수출액의 70퍼센트 이상을 양
털이 차지했다. 이런 산업 구조가 단숨에 변하게 된 것이다. 다이아몬드가 발견된 킴벌리에는 거액의
부가 창출되었고, 1870~1880년대에는 많은 사람이 이 지역으로 쇄도했다. 그 중에서도 영국에서 온
세실 로즈와 바니 바나토가 유명하다. 그들은 모두 다이아몬드 광산을 경영했고, 최종적으로 로즈가
경쟁에서 승리해 세계 최대 규모의 회사가 되었다. 그 회사가 지금도 세계 다이아몬드 시장을 좌지우
지하고 있는 드비어스다.
1880년대가 되자 다이아몬드를 얻기 위해서는 더 깊게 땅을 파야 했고 채굴에 막대한 비용이 들게 되
었다. 중요한 광산은 대개 거대하고 깊어서 땅을 팔 장비와 물을 퍼올릴 장치가 필요해 큰 비용이 들
었다. 다이아몬드 관련 기업이 주식회사로 발전한 사례가 많은 것도 거액의 자금 조달이 필요했기 때
문이다. 이런 상황은 당시 유럽과 미국에서 일어난 제2차 산업혁명의 양태와 깊은 관계가 있었다. 제2
차 산업혁명의 핵심인 철강업과 화학공업 같은 중화학공업은 경공업인 면직공업보다 훨씬 많은 자본이
필요해 주식회사의 출현이 불가피했다. 나아가 제2차 산업혁명에는 과학적인 방식이 도입되었으며 다
이아몬드 채굴도 경험에 바탕을 둔 생산 방식에서 과학적 생산 방식으로 변하기 시작했다.
다이아몬드 러시: 아프리카에서 다이아몬드가 발견되자 사람들이 아프리카로 몰려들기 시작했다.
1871년 5월에는 드바이스 형제가 소유하고 있던 농장에서 다이아몬드 원석이 발견되었다. 이와 함께
커다란 다이아몬드 광산들이 잇달아 발견되면서 많은 사람들이 킴벌리로 몰려들었다. 1848년에 미국
캘리포니아주에서 금이 발견되어 일어난 골드러시와 비슷한 소위 ‘다이아몬드 러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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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이아몬드의 세계

1882년에는 다이아몬드 광산 지대인 킴벌리와 비컨스필드가 철도로 연결되었다. 그리고 남아프리카에
서 최초로 도로를 비추는 전등이 설치되었다. 다이아몬드로 인해 남아프리카가 크게 변하기 시작했다.
이런 일련의 과정에서 장래 다이아몬드 시장의 모습을 결정짓는 사건이 일어났다. 드비어스 형제가 자
신들의 농장을 영국인 세실 로즈에게 겨우 6천 파운드, 오늘날 돈으로 환산하면 약 65만 달러 정도를
받고 팔아버린 것이다.
브라질의 여섯 배나 되는 산출량: 남아프리카 다이아몬드의 유입으로, 절삭된 다이아몬드 가격이 크게
하락했다. 그러자 다이아몬드의 가격 관리를 위해 산출과 판매에서 있어서 중앙집권화가 필요해졌다.
이는 18세기에 겪은 가격 하락 경험에서 나온 것이었다. 1730년대에는 브라질에서 미가공 다이아몬드
공급이 크게 늘어났지만, 유럽에서 다이아몬드 수요가 그다지 증가하지 않아 다이아몬드 가격이 예전
의 4분의 1 수준까지 떨어졌었다.
1872년에 남아프리카의 다이아몬드 광산은 1861년 브라질 다이아몬드의 여섯 배나 되는 산출량을 기
록했다. 1887년에는 남아프리카 다이아몬드의 연간 산출량이 300만~600만 캐럿에 달했다. 다이아몬
드 시장은 이런 급격한 공급 확대를 흡수할 정도로 컸고, 가격은 안정되어 있었다. 1874년까지 미가공
다이아몬드의 평균 가격은 30~37금프랑으로 안정적이었다. 이 가격은 17세기의 평균 가격과 크게 다
르지 않았다. 이후 남아프리카의 다이아몬드 산출량은 급증해서 1870~1875년에는 연간 520만 캐럿
을 넘어섰지만, 가격은 내려가지 않았다. 급격한 가격 하락은 그 후에 발생했다. 아마도 19세기 마지
막 불황이 1873~1876년에 발생했기 때문일 것이다.
세실 로즈 - 다이아몬드 제국의 창립자
아프리카로 건너간 이유: 세실 로즈는 1852년 7월 5일에 태어났다. 아버지는 아홉 명의 아들과 두 명
의 딸을 둔 영국 국교회 목사였다. 세실 로즈는 학교를 졸업한 후 폐가 좋지 않아 요양하기 위해 남아
프리카 나탈주에 있는 형 허버트를 찾아갔다. 이때 로즈는 17세였다. 남아프리카의 기후가 그에게 잘
맞았는지 건강이 좋아졌다. 농장을 경영하던 형이 킴벌리의 다이아몬드 광산으로 옮겨간 뒤, 로즈는
면을 재배하고 판매해서 이익을 얻었다. 하지만 그도 곧 다이아몬드 사업으로 눈을 돌렸다.
1871년 10월에 로즈는 형이 있는 킴벌리로 이주해 형과 함께 채굴 사업을 했다. 1873년, 로즈는 파트
너인 러드에게 다이아몬드 광산 경영을 맡기고 영국으로 귀국해서 옥스퍼드 대학교 오리엘 칼리지에
입학했다. 로즈의 인생철학은 영국인은 세계에서 가장 위대하며, 영국인이 지배하면 전 세계가 행복해
진다는 것이었다. 이는 로즈 자신의 토지 매입과 영국의 영토 확장을 정당화하는 것이었다.
로즈의 꿈-3C 정책: 로즈가 가졌던 가장 큰 꿈은 남아프리카에서 이집트까지 아프리카 전체를 지배하
는 것이었다. 이런 비전 중 일부가 케이프타운에서 카이로, 더 나아가 캘커타까지 이어지는 철도망을
완성하는 것이었다. 이를 케이프타운ㆍ카이로ㆍ캘커타의 영문 머리글자를 따서 3C 정책이라고 불렀다.
그는 대영제국의 확대야말로 자신의 사명이라고 생각했다. 실제로 로즈는 대영제국 건설에 크게 공헌
했다. 분명히 로즈에게는 놀라운 창의력과 비전이 있었고 그의 수완과 열정은 사람들의 감탄을 자아냈
다. 하지만 영국인들조차도 그가 식민지 사람들에게 행한 비인도적인 처사에는 미간을 찌푸렸다. 광대
한 아프리카 대륙을 영국 지배하에 두려고 취한 행동에는 광포한 제국주의자의 면모가 있었다. 그의
이러한 내면은 다이아몬드 산업을 지배하기 위한 그의 행동에서도 엿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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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이아몬드의 세계

로즈는 다이아몬드를 판매하는 회사가 많으면 가격 경쟁으로 인해 이익이 감소할 것이므로 이런 상황
을 피하려면 독점이 필요하고, 독점이 가능한 회사만이 살아남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이런 점을 파악
한 로즈는 파트너인 찰스 러드와 함께 여러 광산의 합병을 계획했다. 로즈와 러드는 드비어스 형제가
소유한 광산의 채굴권을 사들였다. 훗날 다이아몬드의 지배자 ‘드비어스’는 이렇게 시작됐다.
다이아몬드 산업의 성장 과정을 살펴보면 경기가 좋을 때와 나쁠 때가 있다. 로즈는 이를 피하기 다이
아몬드의 산출과 유통을 동시에 장악하려고 했다. 1874년부터 1875년에 걸쳐 다이아몬드 산업은 불황
을 맞았지만, 로즈와 러드는 굴하지 않고 계속 채굴권을 사들였다. 1888년 4월에는 다이아몬드 산출을
장악하기 위해 드비어스 연합 광산 회사를 설립했다. 결국 로즈는 남아프리카 광산 최대 소유자가 되
어 다이아몬드 산업을 좌지우지할 수 있게 되었다. 전 세계에 다이아몬드를 공급하는 광산 대부분을
손에 넣었기 때문에 로즈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부자가 되었으며, 그는 그 부를 대영제국을 위해 사
용했다. 이후 로즈는 젊은 나이에 케이프 식민지 의회 의원이 되었다.
남아프리카 정복: 1888년, 대영제국의 영토 확대를 꿈꾸던 로즈는 지금의 잠비아에 해당하는 마타벨렐
란드와 마쇼날란드로 눈을 돌렸다. 이 두 지역은 나중에 ‘로디지아(로즈의 땅)’라는 이름으로 통합된다.
로즈는 네덜란드와 독일이 마타벨렐란드를 손에 넣을까 두려워했고, 이 지역에서 배타적 채굴권을 얻
기 위해 자신의 정책을 영토 관리와 관련지었다. 그는 파트너였던 러드와 협력해서 남부 아프리카 지
역의 무역을 목적으로 하는 국책회사인 영국 남아프리카회사(BSAC)를 설립했다. 이 회사는 경찰대를
창설했고, 군대 깃발을 휘날리며 도로와 철도 및 전신 시설을 만들고 금융기관도 설립했다.
정치가 세실 로즈: 1890년 7월, 로즈는 케이프 식민지 정부의 수상이 되었다. 1894년 7월 27일에 행
한 연설에서 로즈는 광산 채굴에 도움이 될 수 있도록 ‘더 많은 아프리카인을 임금 노동자 시장으로
보내기 위한 법안’과 ‘아프리카인 노동자들이 토지에 관한 권리를 취득하지 못하게 하는 법안’의 필요
성을 강조했다. 이와 함께 아프리카인의 참정권을 제한하고 노동세도 신설했다. 세실 로즈가 이렇게
한 것은 남아프리카 연방을 영국의 지배하에 놓기 위해서였다.
권력의 정점에 도달한 1895년, 로즈는 사실상 남아프리카의 지배자였으며, 전 세계 다이아몬드 대부분
을 장악했다. 하지만 그 절정은 순식간에 끝나버렸다. 옛 친구인 리앤더 제임슨이 트란스발 침공을 꾸
미자 로즈는 이를 계기로 회사 군대를 파견하여 트란스발 공화국을 합병하려 했으나 실패하고 말았다.
이로 인해 로즈는 1896년 케이프 식민지 수상 자리와 영국 남아프리카회사 사장 자리에서 물러나야
했다. 1899년 제2차 보어전쟁이 발발하자 로즈는 건강 상태가 나빠져 일단 유럽으로 돌아갔다. 이후
1902년 2월에 다시 케이프타운으로 돌아와 다음 달인 3월 26일에 사망했다. 세실 로즈가 없었다면 영
국이 남아프리카에서 차지한 영토는 훨씬 작았을 것이다. 또한 한편으로 로즈가 영국 제국주의를 이용
해서 다이아몬드 생산과 판매를 독점하다시피 한 것도 사실이다. 로즈에게 대영제국의 확장과 다이아
몬드 독점 중 어느 것이 더 중요했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다이아몬드 신디케이트의 형성
드비어스의 가장 큰 특징은 다이아몬드의 산출과 유통을 장악함으로서 손쉽게 가격 관리를 했다는 점
이다. 일반적으로 한 기업이 물품의 생산과 유통을 모두 장악하기는 쉽지 않다. 그런데 드비어스는
어떻게 그럴 수 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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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이아몬드의 세계

주식회사 드비어스의 탄생: 원래 남아프리카에서는 다이아몬드 광산 채굴권을 분산해서 소유했기 때문
에 효율적으로 채굴하기가 매우 어려웠다. 그런데 1877년에 제정된 광산에 관한 법규는 이런 분산 방
식을 없애고 거액의 자본을 가진 사람이 채굴권을 독점할 수 있게 해 주식회사의 탄생을 가능하게 했
다. 이를 철저히 이용한 인물이 바로 세실 로즈였다.
1873년 로즈는 드비어스 형제가 가진 땅의 채굴권 4분의 1을 획득했다. 그리고 채굴권의 또 다른 4분
의 1일을 가지고 있던 러드와의 파트너십을 맺은 후 몇 명을 더 추가해서 1881년에 드비어스 광산 회
사를 설립했다. 최초 출자액 20만 파운드로 출발한 드비어스는 1887년에는 출자액이 250만 파운드에
이르렀다. 1889년 로즈는 마침내 세계 다이아몬드 산출량의 90퍼센트를 지배하며 다이아몬드 가격을
조정할 수 있는 힘을 손에 쥐었다. 로즈의 궁극적인 목적은 미가공 다이아몬드 공급을 관리해서 산출
관리를 중앙집권화하고, 이를 통해 다이아몬드를 시장에 적절하게 공급하는 것이었다. 로즈는 다이아
몬드의 수요 변동에 따라 가격이 영향을 받는다는 점에 주목해 수요에 맞춰 공급량을 조절할 필요가
있음을 깨달았다. 다이아몬드는 비싸니까 사는 상품이라는 점을 로즈는 잘 알고 있었다.
시장에 맞춰 공급하는 생산관리: 1890년대부터 현재까지 드비어스의 다이아몬드 정책은 지극히 단순하
다. 그리고 기본적인 생산과 시장 정책의 바탕에는 예외 없이 로즈의 생각이 깔려 있다. 가장 중요한
것은 미가공 다이아몬드 공급량을 변화하는 시장에 맞춘다는 것이다. 즉 공급량이 지나치게 많아져서
다이아몬드 가격이 하락하면 공급량을 줄인다. 이것은 드비어스가 다이아몬드 시장을 독점하고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정책이었다.
그러나 1902년 세실 로즈가 죽은 후로는 다이아몬드 채굴권 매입을 소홀히 한 탓에 드비어스는 전 세
계 다이아몬드 산출액의 40퍼센트밖에 차지하지 못했다. 당시 드비어스의 주요 경쟁자는 트란스발의
프리미어 광산 회사와 독일 남아프리카회사였다. 1908년에는 남서아프리카(현재 나미비아)에서 다이아
몬드가 발견되었고 산출량이 증가하자 당연히 다이아몬드 가격이 하락했다. 드비어스는 이런 사태를
피하기 위해 산출량을 약 3분의 1로 줄였다. 드비어스는 프리미어 광산 회사와도 교섭해 그들의 산출
량도 줄일 것을 제안했고, 프리미어 역시 드비어스의 제안을 받아들여 산출량을 줄였다. 독일 남아프
리카회사 역시 1914년 3월에 개최된 다이아몬드 생산회사 회의에서 합의해 자사의 생산량을 결정했다.
이것이 최초의 다이아몬드 카르텔 협정이 되었다.
가격 결정권을 가지기 위해: 다이아몬드 시장에서 가격 결정권을 가지려면 중앙집권적인 생산관리 시
스템을 발전시킬 필요가 있었다. 즉, 산출과 유통을 지배해야만 하는데, 기본적으로 다음 두 가지 방식
이 있다. 첫 번째는 산출량 제한이다. 드비어스 그룹은 산출량을 제한하기 위해 다른 회사가 시장에
들어오면 자신들의 산출량을 줄여서 손쉽게 상대기업의 생산과 마케팅 기반을 파괴할 수 있었다. 1890
년대에 드비어스는 자신들의 그룹이 출하하는 미가공 다이아몬드 판매권을 몇몇 다이아몬드 무역회사
에 맡겼다. 이것이 드비어스 그룹의 다이아몬드 신디케이트의 시작이다. 신디케이트 구성원이 명확하
게 정해진 것은 1914년이며, 드비어스 연합 광산 회사, 프리미어(트란스발) 광산 회사, 신(新)야헤르스
폰테인 광산개발 회사, 서남아프리카 합동 다이아몬드 광산 회사가 신디케이트를 형성한 네 회사였다.
이때부터 드비어스의 카르텔과 신디케이트가 분명한 형태로 만들어졌다.
판매 경로를 하나로 통일: 두 번째는 경로를 하나로 통일하는 것이다. 세계 다이아몬드 시장의 판매
경로를 하나로 통일한다는 방침은 로즈가 생각한 것이며, 산출 관리와 함께 지금까지 드비어스가 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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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이아몬드의 세계

해온 다이아몬드 전략에서 중요한 부분을 차지한다. 다이아몬드는 1908년 불황기를 기점으로 제1차
세계대전을 거치며 점차 수요가 증가해 1919년에는 가격이 저점 대비 약 7.5배가 되었다. 제1차 세계
대전이 발발한 1914년에 미국에서 다이아몬드 수요가 증가했다. 런던에 있는 드비어스 신디케이트 대
리인은 이 틈을 타 가격을 30~40퍼센트 올리는 데 성공한다. 이후 대리인은 다양한 방법으로 가격을
관리할 수 있었고, 드비어스 가격 관리는 점점 힘을 가지게 되었다. 신디케이트 대리인은 다이아몬드
의 품질을 조정하기까지 했다. 제1차 세계대전 기간 동안 세계 최대 다이아몬드 시장은 미국이었으며
미국에 다이아몬드를 공급할 수 있었던 것은 드비어스뿐이었다.
세계대전 동안의 다이아몬드 시장
에르네스트 오펜하이머 등장: 세실 로즈가 죽은 뒤로는 드비어스 그룹에 카리스마를 지닌 지도자가 나
타나지 않았다. 이를 깬 것이 1929년 사장에 취임한 에르네스트 오펜하이머다. 그는 세실 로즈 못지않
은 유능한 리더였다. 오펜하이머는 1880년 독일 프리트베르크에서 태어났고, 나중에 남아프리카공화
국으로 귀화한다. 담배 장사를 하는 에두아르트 오펜하이머의 아들로 태어난 그는 15세 때 런던의 다
이아몬드 중개 회사에 입사했다. 아주 유능했으며 수완을 인정받아서 남아프리카로 가게 됐고 킴벌리
에서 바이어로 일했다.
오펜하이머는 영국에서 기사 작위를 받은 인물의 딸과 1906년에 결혼했으며 1912년에는 킴벌리 시장
에 취임했다. 1924년부터 1938년까지 오펜하이머는 킴벌리 의원으로 활동했다. 그의 관심은 오로지
경제와 금융 분야에 있었지만 한편으로는 흑인 광산 노동자에게 제대로 된 주거를 제공하자고 발언한
최초의 인물이기도 했다. 오펜하이머는 1917년에 남아프리카의 금을 취급하는 남아프리카 앵글로 아
메리칸 회사를 존 피어폰트 모건과 공동으로 설립했다. 훗날 앵글로 아메리칸 회사는 드비어스의 모기
업이 된다.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나자 다이아몬드 산출량은 수요를 넘어서게 되었고, 가격은 급락하여
킴벌리 광산은 폐쇄되고 말았다. 오펜하이머는 최종적으로 다이아몬드 가격을 조종하는 카르텔을 만들
기 위해 로즈가 형성했던 모델을 참고하여 중앙판매기구(CSO)를 설립하고, 주요 판매업자와 생산업자
를 드비어스 신디케이트에 편입시켰다.
1926년, 오펜하이머는 드비어스 임원이 되었다. 다음 해인 1927년 남아프리카 연방의 나마콸랜드에서
다이아몬드가 발견되자 남아프리카 정부는 그에게 다이아몬드 사업 문제를 상담하기에 이르렀다. 이로
인해 오펜하이머는 순식간에 다이아몬드 비즈니스의 지도자가 되었고, 1929년에는 드비어스의 사장으
로 취임했다. 불황으로 다이아몬드 공급이 수요보다 많아지자 오펜하이머는 할 수 없이 드비어스의 많
은 광산을 폐쇄해야 했다.
드비어스의 위기와 역습: 영국이 1922년에 단행한 광산 규제 완화로 이제 누구라도 왕의 땅에서 시굴
권을 청구할 수 있게 되었다. 이때 광물을 발견하면 30일 이내에 정부에 보고해야 했다. 또한, 산출액
의 60퍼센트는 세금으로 내야 했고 나머지 40퍼센트만 광산 소유주가 가질 수 있었다. 단, 이 법에 따
르면 국가가 생산과 무역에는 영향을 미칠 수는 없게 되었다.
1925년에는 요하네스버그에서 약 190킬로미터 떨어진 리히텐버그에서 다이아몬드가 발견되었고,
1926년에는 독일인 메렌스키가 대서양 쪽에 있는 소(小)나마콸랜드에서도 다이아몬드가 발견되었다.
리히텐버그와 소나마콸랜드의 다이아몬드 산출량은 전 세계 다이아몬드 시장에 영향을 줄 정도였다.
그 다이아몬드는 드비어스가 아닌 독립 바이어를 통해 시장에서 유통되었다. 이는 다이아몬드 판매 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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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이아몬드의 세계

점을 노리는 드비어스에 커다란 위협이 될 수 있는 사태였다.
이런 위기 속에서도 드비어스는 다시 일어섰다. 드비어스는 1928년부터 1929년까지 산출량을 대폭
줄였다. 리히텐버그에서는 소규모 사업자들이 채굴했기 때문에 드비어스의 방대한 산출량에 대항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했다. 하지만 드비어스가 승리하려면 그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았다. 오펜하이머는
드비어스 신디케이트 구성원에게 드비어스의 유통 루트 밖에서도 다이아몬드를 사들이도록 요청했다.
더 나아가 남아프리카 정부 이외에 산출량이 많았던 콩고와 앙골라와도 장기 계약을 맺어서 그 지역에
서 산출된 다이아몬드를 사도록 제안했다. 나아가 1930년에 오펜하이머는 새로운 회사인 다이아몬드
회사(Diamond Corporation)를 설립하고 이 회사가 신디케이트의 판매를 대행하도록 했다. 이렇게 오
펜하이머는 다이아몬드 회사와 드비어스 연합 광산 회사의 사장이 되었고, 마침내 미가공 다이아몬드
생산을 지배하는 사람이 되었다.

제4장 글로벌라이제이션 시대의 다이아몬드
인공합성 다이아몬드의 상품화
시행착오 300년: 1950년까지 드비어스는 전 세계 천연 다이아몬드 산출을 거의 독점하고 있었다. 만일
드비어스에 대항하는 방법이 있다면 그것은 인공합성 다이아몬드를 제조하는 것뿐이다. 인공합성 다이
아몬드 제조는 적어도 300년에 걸쳐 끊임없이 시도되었다. 오펜하이머는 “오로지 신만이 다이아몬드
를 만들 수 있다”고 말했지만 그의 생각은 명백한 잘못이었다.
제너럴 일렉트릭의 성공: 1954년 제너럴 일렉트릭의 과학자들이 마침내 인공합성 다이아몬드 제조에
성공했다. 하지만 당시 제너럴 일렉트릭이 제조한 다이아몬드는 매우 작고, 촉매작용 때문에 변색된
것이어서 보석으로 팔 만한 수준은 아니었다. 하지만 공업용으로는 충분히 사용할 만했다. 공업용 다
이아몬드가 차지하는 비율은 다이아몬드 비즈니스 전체 시장의 4분의 1에 달했기 때문에 드비어스는
강력한 경쟁 상대를 만난 셈이었다.
위기에 처한 드비어스: 1955년 9월, 제너럴 일렉트릭은 인공합성 다이아몬드로 특허를 취득했고 인공
합성 다이아몬드 제조방법을 공개했다. 드비어스는 공업용 다이아몬드 분야에서도 세계적인 판매 네트
워크를 구축하고 있었고, 막대한 금융자산도 있었다. 드비어스는 합의를 통해 제너럴 일렉트릭에 800
만 달러의 합의금과 특허사용료를 지급하고 그와 동시에 제너럴 일렉트릭과 일련의 크로스라이선스(특
허권 등의 행사를 서로 허락하는 것)에 합의했다. 그래서 이 두 회사를 제외한 다른 회사가 인공합성
다이아몬드 시장에 참여하는 것은 불가능해졌다.
이렇게 제너럴 일렉트릭과 드비어스는 서방세계의 다이아몬드 비즈니스를 분할ㆍ지배하는 데 성공했다.
하지만 당시는 냉전 시대였고 소련은 키예프에 인공합성 다이아몬드 공장을 건설했다. 소련은 기본적
으로 제너럴 일렉트릭의 제조공정을 사용했지만 규모는 훨씬 거대했다. 그 결과 소련은 연간 1,000만
캐럿이 넘는 다이아몬드를 생산할 수 있게 되었다. 1960년대 중반에는 남아프리카ㆍ미국ㆍ소련에서 생
산한 다이아몬드가 캐럿이 아닌 ‘톤’ 단위로 표시할 정도로 규모가 커졌다. 당시 보석 다이아몬드 가격
은 상승했지만, 공업용 다이아몬드 가격은 많이 하락한 상태였다. 이런 변화는 품질이 낮아 공업용으
로 쓰이던 천연 다이아몬드를 인공합성 다이아몬드가 완전히 대체할 수 있음을 의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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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이아몬드의 세계

1970년 5월 제너럴 일렉트릭이 1캐럿 이상의 인공합성 다이아몬드 제조에 성공했다. 이제 인공합성
다이아몬드가 장식용 수준의 크기로 재탄생했으며 품질 또한 천연 다이아몬드와 비교해 손색이 없었다.
제너럴 일렉트릭은 인공합성 다이아몬드를 보석으로 판매할 계획을 세웠지만 공장에서 다이아몬드를
무한정 생산하게 되면 시장이 바로 붕괴할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제너럴 일렉트릭으로서도 다이
아몬드 가격이 하락하는 것은 바라지 않았으므로 인공합성 다이아몬드를 보석으로 판매하려던 계획을
접게 되었다.
다이아몬드와 전쟁
분쟁 다이아몬드: 다이아몬드 비즈니스는 큰 이익을 낳기 때문에 때로 비합법적으로 거래가 이루어질
뿐만 아니라 전쟁을 위한 자금원이 되기도 한다. 실제로 아프리카에서 발생하는 군사 분쟁에서 다이아
몬드를 자금원으로 사용하는 경우도 많아 ‘분쟁 다이아몬드’라는 용어까지 나왔다. 또한 다이아몬드는
상당히 작으므로 밀수가 용이하다. 밀수품은 반란군의 자금원이 되고 있고, 드비어스가 분쟁 자체에
관여했을 가능성도 있다.
분쟁 다이아몬드 문제를 없애기 위해 킴벌리 프로세스가 도입되었다. 이에 따르면 다이아몬드 원석을
거래하는 나라는 원산지 증명서(킴벌리 프로세스 증명서)를 첨부할 의무가 있다. 그렇다고 해도 이것
이 적절하게 기능하는 것은 아니다. 여전히 밀수 문제는 존재하고 있다. 이런 불투명성은 드비어스가
어느 정도 의도적으로 초래하고 있는 것으로 생각한다. 만일 다이아몬드 시장이 완전하게 투명해지면
카르텔이 가격을 조정하는 것 자체가 불가능해지기 때문이다. 분쟁 다이아몬드는 또한 ‘블러드 다이
아몬드(Blood Diamond)’라고도 부른다. 전쟁으로 피를 흘리는 것뿐만 아니라 밀수로 얻은 이익으로
구매한 무기가 군인뿐만 아니라 일반 시민들을 살상하는데 사용되고 있기 때문이다.
아프리카는 오랫동안 서구 열강의 식민지였다. 아프리카 국가들은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차례로 독
립했지만, 식민지였던 기간이 길었고 공업 발전은 종주국의 방해를 받았기 때문에 남아 있는 것은 제1
차 산업의 생산품을 수출하는 것뿐이었다. 그중에 다이아몬드가 있다. 만일 다이아몬드가 없었다면,
그리고 서구 열강이 식민지의 산업 육성에 힘썼다면 아프리카의 분쟁이 이 정도까지 격화되지는 않았
을 것이다. 결국 다이아몬드 분쟁은 서구 제국주의의 욕망이 낳은 부정적인 유산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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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이아몬드의 세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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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이아몬드의 세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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