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임스 W. 맥라모어 지음 / 예미
이 책은 버거킹 창업자 제임스 맥라모어가 플로리다의 작은 햄버거 가게를 세계적인 프랜차이즈 기업
으로 키워내기까지의 노력과 시행착오, 그리고 성공의 순간을 담은 책이다. 구체적으로 버거킹 사업에
뛰어들게 된 과정, 타사 제품보다 월등히 큰 ‘와퍼’ 개발 이야기, 맥도날드 추격에 박차를 가하는 버거
킹의 노력과 좌절, 대기업과의 합병 및 인수 과정에서 흔들리는 모습 등을 흥미진진하게 전달한다.
버거킹
제임스 W. 맥라모어 지음
▣ 저자 제임스 휘트먼 맥라모어
제임스 맥라모어는 데이비드 에저튼과 함께 1954년 미국 마이애미에서 버거킹을 창업하고 회사를 세
계 최대 QSR(Quick Service Restaurant) 브랜드 중 하나로 성장시킨 기업인이다. 1967년에 버거킹이
필스버리에 인수된 후에도 5년간 CEO로 일하다가 회사를 떠났지만, 그 후에도 25년간 버거킹을 가까
이에서 지켜보며 회사의 성장에 큰 도움을 주었다. 은퇴한 후에는 여러 기업과 단체의 이사회에서 일
하며 남부 플로리다 지역사회 발전에 헌신했다. 마이애미대학교와 유나이티드웨이, 페어차일드열대식
물원, 오렌지볼 위원회에서 이사회 의장을 지냈다. 여러 해 동안 투자자로서 풋볼팀 마이애미 돌핀스
의 성장에 공헌하고, 1972년 퍼펙트 시즌의 기쁨도 함께했다. 그는 열정적인 원예광이기도 했으며, 그
를 키워준 마운트헤르몬학교와 코넬대학교의 발전에도 기여했다. 1996년 8월 8일에 세상을 떠났다.
▣ Short Summary
패스트푸드산업이 처음 시작되었을 당시에는 소비자들에게 합리적인 가격에 빠른 음식 서비스를 제공
한다는 새로운 개념이 점점 더 바빠지고 있던 미국 사회에 커다란 돌풍을 일으켰고, 버거킹은 그 돌풍
의 한가운데서 선두 자리를 지키고 세계적인 기업으로 성장해나갔다. ‘간단한 메뉴, 저렴한 가격, 빠른
서비스, 청결한 매장, 친절한 직원’이라는 기본 원칙 위에 세워진 이 버거 왕국은 ‘가맹점의 성공이 곧
버거킹의 성공’이라는 프랜차이즈 철학이 더해져 더욱 공고한 성을 쌓아나갔고, 초기부터 효율적인 시
스템 구축에 힘을 기울인 결과 오래도록 살아남는 생명력 있는 브랜드를 만들어냈다.
참고로 맥도날드에 레이 크록이 있었다면 버거킹에는 제임스 맥라모어가 있었다. 제임스 맥라모어는
동업자 데이비드 에저튼을 만나 당시 막 시작되던 버거킹 사업에 함께 뛰어들었고, 미국인이 가장 좋
아하는 햄버거 ‘와퍼’를 개발하여 버거킹 사업을 안정적인 궤도에 올려놓으면서 빅사이즈 햄버거의 기
적을 만들어낸다. 그리고 프랜차이즈 체인을 통해 버거킹을 순식간에 전국적인 기업으로 성장시킨다.
이 책은 버거킹 창업자 제임스 맥라모어가 플로리다의 작은 햄버거 가게를 세계적인 프랜차이즈 기업
으로 키워내기까지의 노력과 시행착오, 그리고 성공의 순간을 담은 책이다. 구체적으로 공동창업자 데
이비드 에저튼과 함께 버거킹 사업에 뛰어들게 된 과정, 타사 제품보다 월등히 큰 ‘와퍼’를 개발하여
파산 직전에 이른 사업을 구해낸 이야기, 1위 기업 맥도날드 추격에 박차를 가하는 버거킹의 노력과
좌절, 그리고 대기업과의 합병 및 인수 과정에서 흔들리는 모습 등을 흥미진진하게 전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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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거킹
▣ 차례
Introduction
Chapter 1 훗날 와퍼를 만들 아이
Chapter 2 인생의 출발선에서
Chapter 3 YMCA와 콜로니얼인
Chapter 4 허우적거리다
Chapter 5 창업
Chapter 6 다시 허우적거리다
Chapter 7 필사적으로 투자자를 찾다
Chapter 8 와퍼의 탄생
Chapter 9 제트여객기를 타고 전국으로
Chapter 10 TV 광고에 등장
Chapter 11 본격적인 경주의 시작
Chapter 12 박차를 가하다
Chapter 13 외식사업과 버거킹의 잠재력
Chapter 14 미션: 식자재와 매장설비를 공급하라!
Chapter 15 선두를 지키기 위한 몸부림
Chapter 16 합병
Chapter 17 합류하다
Chapter 18 합병의 후폭풍
Chapter 19 내려오다
Chapter 20 새로운 삶에 적응하기
Chapter 21 흔들리는 버거 왕국
Chapter 22 런던에서 날아온 선전포고
Chapter 23 인수 전쟁
Chapter 24 매출감소의 악몽
Chapter 25 다시 현장으로 다시 기본으로
Chapter 26 새로운 미션: 포화된 시장에서 살아남기
Chapter 27 다시 처음부터 버거킹을 경영한다면?
Epilogue : 맥라모어가 남긴 유지, 버거킹맥라모어재단 - 스티브 루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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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거킹
버거킹
제임스 W. 맥라모어 지음
훗날 와퍼를 만들 아이 / 인생의 출발선에서
한 사람의 성격이나 태도, 행동, 그리고 가치관은 어떤 것으로 인해 결정되는 것일까? 나는 유년기의
발달상황이 많은 영향을 미친다고 생각한다. 유년기는 사람의 삶의 우선순위가 정립되고, 가치관이 결
정되고, 각자의 사고방식이 형성되는 시기다. 내 경우도 가족을 포함해서 내가 중요하게 여기는 것들
에 대한 인식이 대부분 유년기에 만들어졌다. 나는 3살 때 어머니를 잃었고 아버지는 21살 때 돌아가
셨지만, 그들을 통해 유년기에 부모로부터 받는 인도와 사랑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깨달을 수 있었다.
가족과 함께 보낸 어린 시절은 나의 많은 부분을 형성하고 내게 삶의 목적의식을 심어주었다.
나는 1926년에 뉴욕시에서 태어났고, 다섯 번째 생일이 지나고 몇 개월 후인 1931년 9월부터 학교에
다니기 시작했는데, 센트럴밸리의 공립학교에 8년간 다니면서 나는 지역행사나 다양한 학교행사에서
대중 앞에 나가 연설하는 경험을 쌓을 수 있었다. 그때부터 나는 대중연설이 다른 의사소통기술을 발
달시키는 재능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되돌아보면, 나는 그때 인생에서 성공하고 싶다는 간절한 열
망을 키워가고 있었다. 나는 성공의 가능성을 생각하며 늘 즐거움을 느꼈고, 천성적으로 사람을 좋아
하는 성격이라 그런 만큼 그들도 나를 좋아해 주기를 바랐으며, 실제로 사교적이고 외향적이며 항상
친구를 사귀기 위해 손을 내밀었다. 그런가 하면 누구에게도 지고 싶지 않은 경쟁심도 있었다.
한편 1938년 외할머니가 심장마비로 돌아가신 것은 비극이었는데, 이제 우리를 돌봐줄 수 있는 사람
이 아버지밖에 남지 않았다는 사실로 인해 나는 이전보다 훨씬 더 많이 나 자신에게 의지해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참고로 아버지는 좋은 교육을 받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잘 알고 있는 분이었고, 당
연히 내가 최고의 교육을 받기를 바라셨다. 그래서 나는 1939년 매사추세츠주에 위치한 마운트헤르몬
학교에 입학했다. 그리고 1940년 새로운 학기가 시작되었을 때, 나는 웨스트홀 주방에서 일하게 되었
는데, 음식과 관련하여 내 생애 처음으로 한 일은 약 600명의 소년과 교직원들의 식사준비를 돕는 것
이었고, 나는 그 일을 무척이나 즐겼다. 그리고 1942년, 나는 다음 학기의 학생회장으로 선출됐다.
이후 대학 진학 준비를 하면서 나는 앞으로의 삶을 성공적인 사업가가 되기 위한 경력을 쌓는 데 초점
을 맞춰 설계하기로 했고, 내 수준에 맞으면서도 사업가라는 나의 미래에 도움이 될 만한 교육을 제공
해줄 대학을 찾아보기 시작했다. 그런데 마침 코넬대학교에서 운영하는 비즈니스 훈련 프로그램으로
호텔경영학교 프로그램이 있어, 나는 그 과정에 입학 지원을 하고 합격했다. 이후 대학교에서 낸시 니
콜이라는 마이애미 출신의 여학생을 만났는데, 그녀는 결국 나의 아내가 되었다.
YMCA와 콜로니얼인
나는 일자리를 찾기 위해 많은 시도를 했지만, 그때마다 전망 좋은 직장을 찾기가 어렵다는 것을 느꼈
다. 그러던 어느 날 내가 입사지원서를 제출했던 델라웨어주 월밍턴에 있는 YMCA로부터 식당 부문
책임자를 구하고 있다며 방문해달라는 편지를 받았고, 1947년 8월 방문해 보니 급여는 한 달 267달러
로 박봉이었지만, 해볼 만한 일이라고 생각되어 받아들였다. 내가 처음 일을 시작했을 때 월밍턴
YMCA의 식당운영은 엉망이었다. 식당 근무경험이 전혀 없었던 내가 보아도 재고 관리는 전혀 안 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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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거킹
고 있었고, 직원들은 의욕이 없어 보였으며, 식당운영의 목표조차 제대로 정립되어 있지 않았다. 내가
해야 할 가장 시급한 일은 창고에 쌓여 있는 엄청난 재고를 소진하는 일이었고, 가장 좋은 방법은 식
욕을 돋우는 음식을 만들어 최대한 싸게 파는 것이었다. 아무튼 YMCA에서의 경험은 인력을 적절하게
배치하고 적절한 운영시스템을 구축하는 것의 중요성을 깨닫게 해주었다.
한편 YMCA에서 일하는 동안 나는 길 건너편의 토들하우스라는 체인 레스토랑을 유심히 지켜보았는데,
그 식당은 24시간 내내 손님으로 북적였다. 참고로 그 식당은 빠른 주문 처리를 내세운 즉석요리 중심
의 식당이었는데, 내가 처음으로 독자적인 사업을 시작하려고 했던 1949년 무렵에는 이미 이러한 형
태의 음식점 체인이 여러 개 등장해 영업망을 구축하고 성공적으로 운영되고 있었다. 아무튼 나는 토
들하우스의 운영방식을 벤치마킹하면 그들 못지않은 경쟁력을 갖춘 식당을 운영할 자신이 있다고 생각
했고, 마침 토들하우스 옆 건물이 비어 있어 나는 월 300달러 정도에 임대했다.
그리고 1949년 여름과 가을 내내 매장을 설계하고, 공사하고, 여러 준비를 하며 보냈다. 그리고 마침
내 식당 이름을 ‘콜로니얼인’으로 정하고, 또 YMCA에서 근무할 때 함께 일했던 오드리 리더를 지배인
으로 채용해 1950년 1월 4일부터 영업을 시작했는데, 꾸준히 잘 되었다. 햄버거나 프렌치프라이, 와
플, 계란, 팬케이크, 안심스테이크, 커피, 그 밖의 여러 즉석요리가 콜로니얼인의 유명한 메뉴가 되었
고, 꽤 괜찮은 식당이라는 소문이 빠르게 퍼져나갔다. 내가 벌인 첫 번째 사업에서의 성공으로 적지
않은 돈을 벌었다는 것도 대단한 일이었지만, 그로 인해 얻게 된 성취감은 더 대단한 것이었다.
허우적거리다
인생은 배움의 연속이다. 실제로 젊은 나이에 비즈니스 세계에 발을 디뎌놓고 보니 배워야 할 것이 엄
청나게 많았다. 나는 가끔 사업가로 시작한 처음 몇 년을 돌이켜보며 내가 저지른 실수를 메모해보고,
그것을 통해 무엇을 배웠는지도 생각해본다. 만일 지금 비즈니스 세계에 첫발을 내딛기를 머뭇거리는
젊은이나 이제 막 새로운 사업을 시작한 청년이 있다면, 그들에게 꼭 해주고 싶은 이야기가 있다. 항
상 여러분이 스스로 생각하는 것만큼 똑똑하지 않을 수도 있다는 사실을 명심하기 바란다.
나는 1951년 2월, 가족과 함께 마이애미를 찾았다. 당시 장인인 니콜 박사는 오랜 세월을 지냈던 마이
애미 시내를 떠나 브리켈가에 ‘550빌딩’이라는 이름의 새로운 건물을 짓고 있었다. 니콜 박사는 1층에
는 식당을 임대할 생각이라며, 나에게 그곳에서 식당을 열 생각이 없느냐고 물었다. 사실 나는 그때
마이애미로 거처를 옮기고 싶어 그 구실을 찾던 차였기 때문에, 상황을 면밀하게 살피지도 않은 채
550빌딩에 식당을 차리기로 결심하고 1층의 절반을 임차하는 계약을 마쳤고, 임대차계약서에 서명하
고 나서 이 장소, 이 위치에는 어떤 형태의 음식점을 여는 것이 가장 좋을지 생각하기 시작했다.
오전 7시쯤 문을 열어 저녁 7시쯤 문을 닫고, 아침 메뉴와 점심, 저녁 메뉴를 모두 팔기로 했다. 그리
고 일주일에 하루도 쉬지 않고 매일 문을 열기로 했다. 계획은 간단해 보였지만 이로 인해 나의 삶은
굉장히 복잡해지기 일보 직전이었다. 나는 월밍턴으로 돌아가서 우선 콜로니얼인의 경영을 믿고 맡길
적임자를 찾는 일부터 시작해야 했다. 또 하나의 문제는 지금까지 우리 가족이 살던 농장을 파는 일이
었다. 이는 농장의 구매자가 나타날 때까지 낸시와 아이들이 월밍턴에 머물러 있어야 한다는 것을 의
미했다. 나는 식당의 설계가 끝난 5월에 먼저 마이애미로 돌아왔다. 그때부터 개업 시점을 초가을로
잡고 필요한 집기 등을 주문하는 것을 비롯해 여러 가지 준비 작업에 몰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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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개업 준비를 위해 다시 돌아온 5월의 마이애미의 모습은 나에게 큰 충격이었다. 2월에 처음 봤
을 때 마이애미 식당들의 풍경과는 전혀 달랐다! 마이애미는 휴양도시여서 성수기와 비수기가 확연히
다른 도시라는 점을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것이다. 치명적인 실수를 저지른 것이다. 나는 이 위기를
극복하고 살아남기 위해 지금부터라도 더욱 신중하고 분석적으로 임하겠다고 다짐했다. 다행히 몇 달
이 걸리기는 했지만 낸시로부터 농장이 팔렸다는 연락이 왔다. 나는 7월에 월밍턴으로 가서 우리 식구
와 물건을 싣고 마이애미로 돌아왔다. 그리고 8월 초에 브리켈브리지레스토랑을 정식 오픈했다.
그러자 5월 이후 나를 괴롭혔던 두려움과 걱정거리는 모두 현실로 나타났다. 개업은 했으나 매출은 거
의 없었고, 고객을 끌기 위한 나의 초기 판촉활동도 거의 효과가 없었다. 다행히 1951년 12월이 되자
개업 후 첫 성수기가 시작되었다. 그토록 오랫동안, 그리고 간절히 기다려온 관광객이 홍수처럼 밀려
왔다. 성수기는 2월까지 계속되었고 엉망이 된 대차대조표를 복구해줄 매출과 이익이 발생했다.
안타까운 사실은 브리켈브리지레스토랑이 좋은 성과를 거두기 시작할 무렵, 콜로니얼인은 내리막길을
걷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내가 경영을 맡겨놓은 매니저는 원래의 간단했던 음식 서비스의 개념과 맞지
않는 여러 다른 품목을 추가함으로써 운영과 서비스를 복잡하게 만들어버렸다. 그 결과 체계적인 운영
으로 주문을 거의 즉시 처리해주는 햄버거 전문식당이라는 원래의 이미지가 퇴색하고 말았다. 매출감
소와 함께 수익도 떨어졌다. 나는 내가 믿고 맡겼던 경영자가 초래한 문제와 씨름을 해야만 했다.
한편 내가 브리켈브리지레스토랑을 운영하면서 얻은 또 하나의 행운은 바로 빌 빌로호카라는 젊은 친
구를 만난 것이다. 그 당시 빌은 펜실베이니아주립대학교 호텔식당경영학교를 막 졸업한 직후였는데,
어느 날 우리 식당으로 불쑥 들어와 일자리를 구할 수 있느냐고 물었다. 나는 그를 부지배인으로 고용
했고, 그는 처음부터 맡은 일을 아주 잘 해 냈다. 한편 콜로니얼인의 경영이 내리막길을 걷고 있을 즈
음, 나는 빌에게 월밍턴으로 가서 콜로니얼인을 맡아 매각 작업을 진행해줄 수 있는지 물었고, 그는
그러겠다고 대답 했다. 그렇게 하여 빌과 함께 월밍턴에 도착하자마자 나는 매니저를 해고하고 빌을
책임자로 앉혔고, 콜로니얼인이 아주 괜찮은 관리자를 만났다는 확신이 들었다. 이후 빌은 콜로니얼인
매각 작업을 마무리한 후 마이애미로 돌아와 나와 다시 재회했다.
한편 1954년에 접어들어 나는 당시 막 알게 된 데이비드(데이브) 에저튼과 함께 인스타버거킹
(Insta-Burger King) 사업의 가능성을 놓고 많은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데이브가 보여준 열정과 구
상은 상당히 마음에 들었지만, 실제로 이를 실행에 옮기려면 지금 잘 운영되고 있는 브리켈브리지레스
토랑을 팔아야만 했다. 그리고 그해 봄, 그 식당을 사겠다고 돈을 마련해 온 사람이 바로 빌 빌로호카
였다. 콜로니얼인과 브리켈브리지레스토랑의 매각으로 나는 새로운 도전에 뛰어들 준비를 마쳤다.
창업
데이비드 R. 에저튼 주니어는 코넬대학교 호텔경영학교 졸업 후 하워드존슨스에서 차근차근 경력을 쌓
았고, 당시 마이애미 지역을 책임지는 관리자였다. 그리고 그는 내가 브리켈브리지레스토랑을 운영하
던 때와 거의 같은 시기에 마이애미 시내의 듀폰트플라자 구역에서 음식점을 운영하고 있었다. 한편
1953년까지만 해도 데이브는 데어리퀸 매장을 열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는 1953년 여름, 잭
슨빌 해안의 비치대로로 차를 몰고 지나가던 중 데어리퀸 매장처럼 보이는 공사현장을 발견했고, 좀
더 자세히 보기 위해 차를 멈춘 그곳에서 매장의 주인인 키스 크레이머와 매튜 번스를 만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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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거킹
그들은 자신들이 ‘인스타버거(Insta-Burger)’라는 새로운 브랜드 사업을 준비하고 있으며, 햄버거를 18
센트에, 밀크셰이크도 18센트에, 프렌치프라이는 10센트에, 코카콜라와 루트비어와 오렌지음료 등을
10센트에 팔 예정이라고 설명했다. 그들이 생각하는 매장의 콘셉트는 셀프서비스 드라이브인 방식이었
다. 두 사람 모두 외식사업에 대한 경험이 있었고, 캘리포니아주 샌버너디노의 맥도널드 매장을 찾아
가 차량 방문 고객을 위한 맥도날드 특유의 즉석 서비스 시스템을 직접 체험해보았다고 했다.
그리고 그들은 캘리포니아에 머무르는 동안 ‘인스타’라는 기계에 대해서도 듣게 되었으며, 그것이 햄버
거와 밀크셰이크를 자동으로 만들어주는 기계라고 설명하면서, 그 기계가 마음에 쏙 들어 발명가인 조
지 리드와 계약을 체결했는데, 내용은 맥도날드의 혁신적인 방식과 같은 시스템으로 운영되는 식당을
열고, 그 식당에 리드의 기계를 설치한다는 것이었다. 아무튼 그들은 그들의 구상이 성공적일 것이라
고 믿었고, 리드의 인스타브로일러와 인스타 셰이크머신이 경쟁우위를 가져다줄 것이라 생각했다.
리드와 체결한 계약에 의하면, 크레이머와 번스는 이 기계에 대한 최초의 지역 사업권자였고, 그들은
플로리다주에 대한 독점권을 가졌다. 계약에 따라 그들은 자신들이 맡은 지역 안에서 인스타 기계와
인스타라는 이름을 독점적으로 사용할 수 있게 되었고, 이에 따라 식당이 새로 문을 열 때마다 리드는
소정의 프랜차이즈 수수료와 인스타 기계 판매이익, 가맹점주들이 내야 하는 매출의 2% 저작권사용료
를 받게 되었다. 크레이머와 번스는 그들의 첫 식당 이름을 ‘인스타버거’라고 정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공사에 착수했다. 하지만 그들은 이 기계가 얼마나 많은 문제를 일으키게 될지 알지 못했다.
한편 크레이머와 번스가 잭슨빌에 첫 번째 인스타버거 매장을 짓고 있을 때, 그들은 데이브와 지역영
업권에 관한 대화를 나눴고, 데이브는 자신이 계획하고 있는 데어리퀸 매장에서 인스타라는 이름으로
햄버거를 팔 수 있게 되었다. 그런데 식당 개점이 다가올 즈음, 데이브는 그들에게 ‘인스타버거’라는
이름 대신 ‘인스타버거킹’이라고 하는 것이 어떻겠느냐고 제안했다. 결국 인스타버거킹이라는 이름으로
문을 열었고, 매장 지붕보다 조금 높은 12피트 높이로 세워진 철탑 꼭대기에 햄버거 빵 위에 앉아 있
는 왕의 형상이 설치되었다. 또 그가 앞으로 문을 여는 식당에 ‘인스타버거킹’이라는 이름을 붙일 수
있도록 조지 리드와의 계약서 내용도 수정했다. 이렇게 해서 처음 등장한 ‘버거킹’이라는 이름이 세계
에서 가장 인기 있고 널리 알려진 브랜드 중 하나가 될 운명이라는 것을 그때는 알지 못했다.
데이브는 이와는 별도로 마이애미에 두 번째 인스타버거킹 드라이브인 매장을 짓기로 계약했다. 그리
고 이 아이디어를 사업으로 확장해나가기 위해서는 자본이 더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새로운 파트너를
물색하던 그는 마이애미로 돌아온 후 플래글러 거리에서 식당을 운영하고 있던 하비 풀러를 찾아갔다.
하비는 마이애미에서 손꼽히는 외식업자였고, 나도 브리켈브리지레스토랑을 열 때 그를 찾아간 적이
있었다. 하비는 데이브의 생각을 진지하게 검토했다. 상당히 매력적이고 성공 가능성이 크다고 판단했
지만, 아직 성공이 현실로 증명되지 않은 새로운 형태의 사업에 자금을 투자하는 데는 난색을 표했다.
대신에 그는 나를 찾아가 보라고 소개했다. 나와 데이브의 인연은 이렇게 시작된 것이다.
우리 사이에 친분이 쌓이면서 그는 자신의 사업에 동업자로 합류할 것을 강력하게 권유했다. 나도 그
의 생각에 상당한 흥미를 느꼈다. 문제는 내가 데이브가 원하는 정도의 자금을 마련할 수 있느냐 하는
것이었다. 그러려면 브리켈브리지레스토랑을 팔아야 했고, 그 돈을 데이브와의 사업에 투자한다는 것
은 내 수입원이 일단 봉쇄된다는 것을 의미했다. 한편 우리는 처음부터 동등한 지분을 갖는 동등한 파
트너 관계로 함께 하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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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그렇게 하는 것이 합리적이라고 생각했지만, 먼저 확인해야 할 것은 데이브가 실제로 얼마의 투
자를 했는지, 과연 이 사업이 정말 우리가 기대하는 만큼의 수익성이 있는지였다. 나는 그에게 이런
것들을 확인할 수 있을 만한 재무기록을 보여 달라고 요구했다. 그러자 그는 내게 이렇게 말했다. “짐,
나는 재무서류나 금융장부 같은 건 없어요. 내가 얼마나 많은 수입이 들어왔는지, 또 얼마나 많은 지
출을 했는지는 알려줄 수 있고, 내 수표책도 보여줄 수 있어요. 그러나 정확한 손익을 말해줄 만한 대
차대조표 같은 장부는 없어요.” 그래서 나는 가지고 있는 자료를 전부 모아서 나를 도와주고 있는 회
계사 휴 실링턴에게 보내달라고 했다.
몇 주 후, 실링턴은 인스타버거킹 매장에 대한 재무분석자료를 보내왔는데, 그 결과는 데이브가 추정
한 바와는 거리가 있었다. 그는 28%쯤 수익을 보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실제로는 그때까지 올린 매출
대비 56%의 손실을 보고 있었다. 그럼 나는 왜 이런 암울해 보이는 사업에 투자하려고 했을까? 그 이
유는 재무보고서는 짧은 시간 동안의 영업결과만을 반영하고 있고, 창업 준비를 위해 매출이 없는 상
태에서 지출된 초기투자가 많았기 때문에 손해율이 실제보다 높게 잡혔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실링턴이 작성한 보고서에 의하면 데이브는 지금까지 이 사업에 약 2만 달러 정도를 투자했는데, 이는
그 자신의 말과도 일치했다. 나도 그만큼의 돈을 투자하기로 하고, 1954년 6월 1일, 우리는 함께 버거
킹오브마이애미라는 회사를 설립했다. 새로 설립된 이 회사에서 데이브 소유의 재산소유권과 부채를
모두 인수했고, 우리는 지분을 각각 50%씩 나누어 가졌다.
다시 허우적거리다
회사가 설립되자마자 우리는 버거킹 매장 2곳을 더 열기로 했고 투자자를 물색했는데, 우리는 마이애
미에 있는 부동산 소유자 2명에게 음식점 건물을 짓도록 설득할 수 있었다. 그런데 2곳의 매장 모두
개점 직후부터 영업실적이 좋지 않아 우리는 크게 실망할 수밖에 없었다. 2곳 모두 매장에서 식사하기
를 원하는 손님을 위한 옥외 테라스를 갖추고 있었으나, 손님들은 대개 차 안에서 식사하기를 원했다.
이어서 우리는 홈스테드의 1번 고속도로 옆에 4번째 매장을 열었다. 하지만 새로 연 매장들의 매출은
모두 실망스러웠다. 게다가 인스타 기계들은 툭하면 고장이 났고, 이로 인하여 영업에 막대한 지장을
받았다. 아무튼 영업부진의 결과로 우리는 심각한 재정위기에 직면했다.
1956년이 되었을 때, 회사의 재정 상태는 그야말로 끔찍했다. 우리는 야심만만한 낙관론을 가지고 4
곳의 매장을 열었지만, 사실 형편없는 사업적 판단을 거듭해왔다. 내가 회사에 투자한 2만 달러의 자
금도 소진되었고, 그에 더해 부채까지 짊어지게 되었다. 그로 인한 부담감이 우리를 짓누르고 있었다.
우리는 분명히 이익이 날 것이라는 지나치게 낙관적인 전망 속에서 사업을 너무 크게 확장해놓았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결과는 기대했던 것과는 달랐다. 4곳의 식당이 모두 이익을 내지 못하면서 우리는
커다란 문제에 직면했다. 위기에서 탈출하기 위해서는 당장 또 다른 투자를 받아야 했다.
필사적으로 투자자를 찾다
우선 장인인 니콜 박사는 우리를 돕기 위해 약간의 지분을 받는 조건으로 3,750달러를 투자했고, 그와
는 별도로 연 6%의 조건으로 1만 달러를 빌려주었다. 한편 우리의 경쟁자들이 플로리다주 밖의 다른
곳에서 운영하는 매장들은 우리보다 훨씬 많은 매출을 올리고 있었다. 서로 비슷한 일을 하고 있는데
우리가 이렇게 힘든 시간을 보내는 동안 그들은 성공하고 있는 이유를 이해하기 어려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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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거킹
어쨌든 음식 제조상의 문제, 음식의 품질, 그리고 전달하는 방식에 문제가 있는 것 같았다. 좀 더 시간
이 흐른 후에는 낮은 가격에 좋은 메뉴를 제공한다는 우리의 정책도 고객에게는 그렇게 설득력 있게
다가가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우리의 경쟁자들은 우리 햄버거보다 조금 작은 것을 15
센트에 팔고 있었는데, 우리는 그보다 조금 크지만 18센트였다. 그렇다면 시장에서는 18센트라는 우리
의 가격이 특별히 싸다고 느껴지지 않을 수도 있었다. 그리고 모든 연령대의 사람들이 저렴한 햄버거
가 건강에 좋지 않을 것이라는 편견을 갖고 있었는데, 이 편견을 극복하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었다.
데이브와 나는 현재의 시스템을 그대로 유지하려면 주문에서 음식 제공까지의 시간을 대폭 줄여 고객
들이 느끼는 혼란을 없애야 한다고 생각했고, 우리는 고객이 주문하고 돈을 내면 불과 몇 초 안에 음
식을 내줄 수 있는 시스템을 고안했다. 우리가 주목한 것은 고객들이 빠른 속도의 서비스를 요구하고
있다는 점이었다. 이에 맞춰 우리는 보다 완벽하고 빠른 주문처리 시스템 개발에 골몰했다.
인스타로부터 공급받고 있는 기계도 골칫덩어리로 판명이 났는데, 데이브는 신경질적으로 소리쳤다.
“이 쓰레기 덩어리를 쓰느니 차라리 내가 하나 새로 만드는 게 낫겠어!” 그러고 나서 데이브는 새 기
계에 대한 자신의 아이디어를 스웨덴 출신의 기술자 칼 선드먼에게 설명했고, 3주 후, 두 사람은 빠르
고 효율적이고 생산적이며, 말썽도 거의 없이 연속생산이 가능한 새로운 브로일러를 실제로 만들어 왔
다. 그 기계의 기본원리는 지금도 버거킹 매장에서 사용하는 모든 브로일러에 충실히 적용되고 있고,
우리와 비슷한 형태의 식당에서 사용되는 장비 제조의 모델 역할을 하고 있다.
한편 크레이머와 번스도 프랜차이즈 모집을 통해서 1950년대 중반에 잭슨빌 지역은 물론이고 할리우
드, 포트로더데일, 웨스트팜비치, 멜버른, 포트피어스, 탬파 등지에도 매장을 냈는데, 이들 매장에서도
우리가 겪었던 것과 똑같은 문제가 발생했고, 그 결과 우리와 마찬가지로 심각한 재정위기에 처했다.
우리는 현재 운영 중인 4개 매장을 흑자로 전환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자본을 추가로 끌어들여야 한다
고 생각했다. 다행히 하비 프루호프가 회사 지분의 절반을 갖는 조건으로 6만 5,000달러 정도를 투자
했다. 나머지 절반의 지분은 데이브와 내가 똑같이 나눠 갖게 될 것이다. 이렇게 하여 우리는 추가자
본 유치에 성공했고, 회사는 파산 위기에서 벗어났다. 이 투자를 계기로 하비는 내게 훌륭한 친구이자
멘토가 되었고, 이러한 관계는 1968년에 그가 세상을 떠날 때까지 변하지 않았다. 하비로부터 투자받
은 자금으로 나와 데이브는 3개의 버거킹 매장을 더 열었다. 이렇게 하여 우리는 7개의 매장을 운영하
게 되었는데, 매출실적은 여전히 저조했기 때문에 또다시 손해가 쌓이기 시작했다.
와퍼의 탄생
데이브와 나는 이 상황에서 탈출하기 위해 끊임없이 생각했다. 한편 1957년 크레이머와 번스는 게인
즈빌에 조립식 건물로 새로운 버거킹 매장을 열었다. 그들이 조립식 매장을 선택한 것은 처음에 시작
한 장소에서 영업이 신통치 않으면 매장을 해체하여 다른 장소로 옮겨 다시 열어 영업하겠다는 발상에
서였다. 이 조립식 매장이 개점했다는 소식을 듣게 된 직후, 데이브와 나는 그들을 만나 그 매장을 둘
러보았다. 그런데 우리는 몇 시간 동안 매장에 앉아 있었지만 손님을 단 한 명도 보지 못했다.
무료해진 나는 이 새로운 버거킹 매장에서 나와 한 블록쯤 떨어진 거리를 우연히 바라보았다. 100야드
도 떨어지지 않은 가까운 곳에 드라이브인 식당이 하나 있었는데, 손님들이 차례를 기다리며 길게 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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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거킹
지어 서 있는 장면이 눈에 들어왔다. 그 식당에는 커다란 햄버거를 광고하는 표지판이 붙어 있었다.
나는 그 식당을 한번 둘러봐야겠다고 마음먹고 거리를 가로질러가서 줄의 맨 끝에 섰다. 줄을 서서 보
니, 방금 나온 손님들이 커다란 햄버거가 몇 개씩 담긴 가방을 들고 나가는 것이 보였다. 나도 내 것과
데이브의 것, 이렇게 두 개를 주문했다. 커다란 햄버거의 포장을 벗겨보니 4분의 1파운드 크기의 패티
와 상추, 토마토, 마요네즈, 피클, 양파, 케첩 등이 5인치 크기의 커다란 빵 사이에 담겨 있었다. 몇
입 먹어보니 왜 고객들이 이 음식을 가방 가득히 사 담아 가는지 금방 알 수 있었다. 일단 크기가 컸
고, 맛이 좋았다. 데이브도 내가 가져온 햄버거 포장을 벗겨내어 내가 그랬던 것처럼 맛있게 먹었다.
바로 그 순간 우리는 우리 사업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치게 될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그것은 내용물이 풍성한 큰 햄버거를 우리 매장에서 파는 것이다. 내 생각을 들은 데이브도 동의했다.
나는 새로운 메뉴의 이름을 ‘와퍼(Whopper)’로 하면 어떻겠느냐고 제안했다. 어감에서 크다는 이미지
를 연상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데이브도 동의했다. 버거킹 간판 바로 아래에 ‘와퍼가 시작된 곳’이라
는 문구를 새겨 넣어 우리가 이 새로운 메뉴의 원조라는 사실을 홍보하자는 내 생각도 이야기했다.
우리는 재빨리 7개 매장의 지붕에 붙어 있던 간판을 내리고, 모든 매장 앞에 “신상품 와퍼 햄버거, 37
센트”라고 쓴 A자형 광고판을 설치했다. 데이브와 내가 가격을 37센트로 정한 것은 2센트의 매출세를
더해도 40센트를 넘기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그보다 비싸면 고객들이 가격에 부담을 느낄 것 같
았다. 그러나 몇 주 후에는 39퍼센트로 인상했다. 그때만 해도 우리는 이 제품이 미국에서, 아니 전
세계에서 가장 잘 알려지고 인기 있는 샌드위치 상품이 될 것이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못했다.
한편 와퍼를 출시할 무렵 도저히 믿음이 가지 않던 인스타의 밀크셰이크 머신을 없애고, 새니서브의
회분식 셰이크머신을 새로 들여왔다. 또 데이브가 직접 고안해낸 브로일러는 조리의 속도를 빠르게 했
을 뿐 아니라, 일반적인 패티와 와퍼 패티를 함께 구울 수도 있었다. 만일 그가 이 기계를 고안해내지
못했다면 주문받은 와퍼를 바로 내놓는 데 애로가 많았을 것이다. 이렇게 두 가지 기계를 새로 바꾸면
서 직원들의 생산성이 전반적으로 크게 향상되었다. 더욱 중요한 것은 고객들도 더 빨라진 우리의 서
비스를 인정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와퍼의 도입으로 우리 사업에는 엄청난 변화가 일어났다.
잭슨빌과의 관계를 계속 유지할 필요가 있을지에 대해서는 와퍼를 출시하기 오래전부터 회의적이었다.
플로리다주 내에 존재하는 몇 안 되는 그들의 프랜차이즈 매장들조차 우리가 가는 방향으로 그대로 따
라오고 있는 형편이었다. 데이브와 나는 크레이머와 번스 측에 그들로부터 받은 인스타 기계와 비효율
적인 티켓 시스템을 매장에서 없앴다는 사실을 알리고, 앞으로 우리 매장의 메뉴와 규격 그리고 사용
하는 설비는 우리가 독자적으로 정할 것이라고 통보했다. 또 우리 매장의 운영방식과 매뉴얼도 우리
스스로 정할 것이고, 머지않은 시일 내에 매장의 내부와 외부 디자인도 독자적으로 결정하겠다고 알렸
다. 그런데 그들은 우리의 이러한 생각을 이해해주는 정도를 넘어서 우리가 그 정도의 경영능력을 갖
추게 된 것을 감사하는 듯한 반응을 보였다. 그로부터 몇 개월이 지나자 우리의 사업활동과 매출은 놀
라운 속도로 늘어났다. 데이브와 나는 우리 미래에 꼭 필요했던 자신감을 충분히 회복했다.
제트여객기를 타고 전국으로
와퍼를 판매하기 시작한 지 몇 년이 지난 후 어느 날, 찰리 크레브스라는 사람이 우리 회사로 찾아와
버거킹 5호점을 자신에게 팔 생각이 없느냐고 물었다. 그는 매장을 자신에게 파는 대가로 2만 달러의
현금을 내겠다고 제안했다. 당시 우리는 현금이 절실하던 때였다. 우리는 긴 시간의 논의를 거쳐 5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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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거킹
점을 그에게 넘기기로 하고, 그 매장을 버거킹의 프랜차이즈 가맹점으로 한다는 내용의 계약서에 서명
했다. 찰리는 우리와의 계약에 따라 매월 매출의 2.9%의 가맹수수료와 2%의 광고비를 내기로 했다.
또 그는 우리가 만든 ‘운영 데이터 매뉴얼’에 따라 매장을 운영해야 했다.
결과적으로 우리는 프랜차이즈사업에 뛰어들게 된 것인데, 이번에는 전과 달리 프랜차이즈 권리를 따
려는 사람이 아니라 주는 사람의 입장이 되어 있었다. 5호점 매각을 계기로 우리는 앞으로 프랜차이즈
매장을 늘리는 데 초점을 두고 역량을 집중하겠다는 전략적 결정을 내렸다. 나머지 4곳의 매장도 얼마
지나지 않아 매각했고, 그 대금으로 프랜차이즈를 확대하고 빨리 사업을 성장시키기 위해 버거킹 매장
들을 추가로 오픈했다. 아무튼 1957년은 우리가 문자 그대로 식당을 운영하는 회사에서 식당 프랜차
이즈업을 하는 회사로 변신하는 분수령이 된 해였는데, 그것은 적절한 시점에 내린 올바른 결정이었
다.
그즈음 크레이머와 번스는 포트로더데일과 할리우드, 그리고 웨스트팜 비치에 있는 자신들의 프랜차이
즈 매장을 매각함으로써 투자한 돈의 일부를 회수하기를 바라면서 우리에게 도움을 청했다. 우리는 그
들의 매장을 인수하여 개조하고 조금 업그레이드한 후 적절한 희망자가 나타나면 넘기기로 했다. 크레
이머와 번스는 우리의 결정에 기뻐하며 플로리다주 동쪽 해안의 팜비치와 브로워드, 먼로 카운티와 서
쪽 해안의 다른 몇몇 카운티에 지역 독점영업권을 갖는 계약을 체결해주었다. 이제 우리는 남부 플로
리다 전역에서 버거킹 레스토랑을 세울 수 있는 독점적인 권리를 갖게 된 것이다.
이후 크레이머와 번스는 잭슨빌 지역에서 명성이 높았던 지역사업가 벤 스타인을 파트너로 삼아 계약
을 체결했다. 스타인은 그들의 회사 버거킹플로리다의 지분 50%를 갖기로 하고 사업 확장을 돕기 위
해 상당한 자금을 투자했다. 새로 들어온 자금에 힘입어 크레이머와 번스는 잭슨빌 지역에 예닐곱 곳
의 매장을 새로 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이 새로운 매장 가운데 몇 군데는 장소 선택이 부적절했고,
그 결과 매출도 저조했다. 더 큰 문제는 이들 매장도 상당히 부실하게 운영되었다는 점이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들의 회사는 재정이 매우 위태로운 상황에 빠졌다. 크레이머와 번스, 그리고 버거
킹플로리다는 스타인으로부터 빌린 채무를 감당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고, 스타인이 자신의 투자자
금을 회수할 방법은 회사를 인수하는 것 말고는 없었다. 이 시점에서 크레이머와 번스는 버거킹 사업
에서 완전히 손을 떼게 된다. 이렇게 회사의 주인이 바뀌는 바람에 데이브와 나는 그때부터 스타인과
그의 소유로 남겨진 부실하기 짝이 없는 회사를 상대해야 했다.
한편 우리는 1959년 들어 빠르게 성장했다. 우리 매장이 여러 곳에 개점하며 플로리다 주민은 물론
외부에서 마이애미를 찾은 여행객에게도 소문이 나기 시작했다. 그 결과, 플로리다주 밖의 다른 지역
에서도 가맹점을 내고 싶다는 문의가 쇄도했다. 우리는 그들과 즐겁고 진지하게 대화를 나눴고, 실제
로 플로리다 남부의 우리 매장이 어떻게 운영되는지 보여주었다. 그러나 우리는 그런 문의를 받을 때
마다 그들을 본사 운영자인 벤 스타인에게 연결해주고 빠질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우리가 잭슨빌로 보낸 가맹점 개설 희망자들은 그곳 매장들의 형편없는 모습을 보고 줄줄이 좌
절하고 실망할 수밖에 없었다. 벤도 버거킹에 대한 사람들의 관심을 프랜차이즈 계약 성사로 이어지도
록 할 능력이 자신에게는 없다는 사실에 점점 좌절했다. 그렇게 몇 차례 가맹점 개설 희망자들을 만나
고 난 벤은 나와 데이브에게 프랜차이즈사업 일체를 맡아달라고 요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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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거킹
박차를 가하다
1950년대와 1960년대 초까지 버거킹은 아직 전국적으로 널리 알려진 브랜드는 아니었기 때문에 가맹
점을 개설하는 문제로 고민하는 예비 점주들을 좀 더 자극할 필요가 있었다. 그중 하나의 방법은 신문
광고를 꾸준히 내는 것이었고, 또 하나는 특정 점주들에게 특정 지역에서 가맹점 영업에 대한 독점권
을 주는 것이었다. 이는 당시 점주들에게는 아주 매력적인 인센티브였지만, 요즘에는 더 사용할 수 없
는 방법이다. 지금은 해당 주소에 명기된 거리에 대해서만 영업권을 보호해주고 있을 뿐이다.
아무튼 데이브와 나는 원하는 점주들에게 특정 지역에 대한 영업 독점권을 적극적으로 보장해주었다.
우리는 이러한 방법이 우리 회사를 경쟁력을 갖추고 전국적으로 성장하는 회사로 만들 방법이라고 생
각했다. 버거킹이 업계 최고 기업으로 자리 잡으려면 영업망을 빠르게 확장해야 하기 때문에, 우리는
나름의 판단기준을 가지고 우수 가맹점주를 가려내어 그들이 원한다면 지역 내에서 가맹점을 모집하고
관리할 수 있는 배타적 독점권을 부여하고, 서로가 동의할 수 있는 목표를 설정해 정해진 기간 내에
정해진 수 이상의 매장을 출점시키도록 했다. 만일 그들이 약속된 일정에 맞춰서 가맹점을 개설하는
데 실패하면 그들이 가진 독점권은 취소되었다. 이러한 방법으로 그들은 목표를 달성하는 데 따라 일
종의 성과급과도 같은 수입을 얻게 되었고, 우리는 영업망을 확대해야 한다는 숙제를 풀 수 있었다.
이러한 전략은 우리가 프랜차이즈 외식업계에서 세계적인 선두기업이 되는 데 큰 역할을 했다.
선두를 지키기 위한 몸부림
1965년 무렵 외식산업의 가파른 확장은 금융시장의 큰 관심사이자 경제신문에서 단골로 다루는 중요
한 주제였다. 프랜차이즈 매장에 투자했다가 큰돈을 벌게 된 사람들의 이야기는 어디에서나 뉴스거리
였다. 그리고 TV의 보급과 함께 맥도날드와 버거킹 같은 업체들의 광고가 전파를 타면서 외식산업에
대한 대중의 인식도 높아졌다. 1965년 4월 15일, 맥도날드가 주식시장에 상장되었다. 이는 그렇지 않
아도 급성장하고 있는 패스트푸드의 성장과 확대를 또 한 번 자극하는 사건이었다.
데이브와 나는 맥도날드를 주목하면서 그들의 성장과정을 면밀히 관찰하고 있었다. 1960년대 초반, 그
들은 우리보다 훨씬 많은 매장을 연 것은 사실이었지만, 우리의 성장세도 그들과 비슷했다. 우리는 맥
도날드와 약 40개월 정도의 격차를 두고 뒤따르고 있다고 추정했다. 그리고 큰 실수나 무리한 일을 저
지르지 않는다면 그들을 따라잡을 적절한 기회가 있을 것이라고 믿었다.
맥도날드는 상장에 성공함으로써 얻을 수 있는 이점을 확실히 누리고 있었다. 그들은 가맹점의 임대보
증금을 계약금으로 이용하여 땅을 사거나 빌리고 그 위에 매장을 지었고, 가맹점의 임대료를 이용하여
자신들이 책임져야 하는 부동산 관련 비용을 충당했다. 1960년대 초, 우리도 비슷한 전략을 만들어보
려고 했으나 영업망의 전국적 확대 전략을 이제 막 추진한 우리에게는 위험부담이 커 보였다.
그러나 전국의 도시와 마을에 새로운 매장을 열면서 자신감도 커졌고, 거의 모든 매장의 운영상태가
양호했기 때문에 조금 더 모험을 걸어볼 용기가 생겼다. 그래서 우리는 매입한 토지 위에 매장을 지어
가맹점주에게 임대하는 대신 직영매장을 만들기로 했다. 또 외부 투자자들에 의해 지어진 토지와 건물
에 대해 임차계약을 체결하고, 그렇게 해서 확보한 매장을 점주들에게 재임대하기도 했다. 당시 우리
는 맥도날드 방식을 그대로 적용할 수 있을 만큼 재정상태가 튼튼하거나 수준 높은 경영을 하지는 못
했지만, 이러한 우리의 부동산 운영방식은 전체적인 사업전략 안에서 수익성을 높여주는 데 큰 역할을
했다. 우리는 부동산에 대한 투자를 늘리기 위한 장기적인 자금조달을 시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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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거킹
한편 1965년 어느 날, 우리는 필스버리사로부터 전화를 받았다. 그들은 자신들과의 합병에 관심이 있
는지 물었는데, 당시의 상황에서 생각해볼 때 이는 최소한 검토할 만한 가치는 있어 보였다. 참고로
그 전화를 받기 전까지 우리는 주식발행을 생각하고 있었다. 아무튼 하비 프루호프는 블리스앤드컴퍼
니와 이 문제를 논의하고, 그와 내가 함께 뉴욕으로 가서 가능성을 타진해보자고 제안했다. 우리는 블
리스앤드컴퍼니를 방문했고, 그들에게 검토할 기회를 준다는 의미로 우리 회사에 관한 정보를 담은 문
서 일체를 남겨두고 마이애미로 돌아왔다.
그로부터 얼마 후, 우리는 다시 뉴욕을 찾았지만 실망스러운 소식이 기다리고 있었다. 블리스 측으로
부터 현재 시점에서 상장을 검토하는 것은 시기상조라고 생각한다는 답변을 들은 것이다. 그들은 우리
회사가 상당히 빠른 속도로 성장하고 있고 수익도 함께 인상적인 속도로 상승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으며, 우리 회사의 미래에 대해서도 낙관하고 있지만, 너무 신생기업인 데다 아직 경험이 충분하지
않고 자본 규모도 부족하다고 그 이유를 설명했다.
참고로 우리가 블리스앤드컴퍼니와 여러 이야기를 나누던 때는 버거킹의 역사상 가장 중요한 시기였다.
1966년 5월에 우리는 전국 206개 매장을 운영하고 있었고, 체인레스토랑 업계에서 선두 그룹에 들어
있는 회사였다. 새로이 등장한 패스트푸드산업은 아직 걸음마 단계였으며, 우리보다 더 많은 매장을
운영하고 있거나 더 빠른 속도로 확장하고 있다고 여겨지는 체인기업은 거의 없었다. 1966년 당시에
우리 앞에 놓여 있는 숙제는 확장에 필요한 자금을 어떻게 조달하느냐 하는 것이었다. 선두기업이라는
위치를 계속 유지하기 위해서는 빠른 속도로 사업을 키워야 했기 때문이다.
합병
1966년에는 켄터키프라이드치킨이 기업공개에 성공하여 상장기업이 되었고, 이어 마이애미 지역 내에
서 우리와 경쟁을 벌이던 로열캐슬 등이 잇따라 상장했다. 그에 따라 우리가 받는 압박감도 커졌다.
1966년 2월 2일, 하비와 나는 다시 블리스앤드컴퍼니와 만나 상장 추진 가능성을 논의했다. 이후 3월
26일 시카고에 있는 JMB 컨설턴트라는 회사의 대표라고 자신을 소개한 짐 무어라는 사람으로부터 전
화를 받았는데, 그는 필스버리가 합병 가능성에 관해 이야기를 나누고 싶어 한다고 전하면서 내게 이
문제를 논의할 의향이 있는지 물었다.
나는 동의했다. 그리고 3월 30일 점심때 우리는 필스버리의 부사장으로 인수와 합병을 담당하고 있는
테드 저지를 만났다. 나는 저지에게 버거킹의 역사와 최근의 성장, 그리고 앞으로의 성장 가능성에 대
한 우리의 견해 등 전반적인 사항을 전달했다. 또 나는 그에게 필스버리에 대한 정보를 달라고 요청했
고, 그도 그에 대한 충분한 정보를 내게 주었다.
이후 한동안 소강상태에 놓여 있던 필스버리와의 협상은 1966년 8월말, 다시 본격적으로 재개되었다.
그리고 1967년 1월 19일, 폴 제롯과 나는 공동 발표를 통해 두 회사의 합병 의사를 공식적으로 발표
했고, 버거킹 가족에게도 이 사실을 알렸다. 합병은 6월 21일에 완전하게 마무리되었다. 9월이 되면
필스버리의 연례주주총회가 열릴 것이고, 그때 나는 필스버리 이사회의 이사로 선출되도록 되어 있었
고, 즉시 필스버리 경영진의 일원으로서 버거킹의 사장 겸 CEO 직을 맡게 될 예정이었다.
아무튼 나는 필스버리 경영진의 일원이자 회사의 최고경영자라는 새로운 역할이 기다리고 있는 마이애
미로 돌아왔다. 나를 둘러싼 상황은 합병과 함께 완전히 달라져 있었다. 우선 내 연봉이 합병 전 3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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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거킹
2.500달러에서 6만 7,500달러로 껑충 올랐다. 거기에 더하여 버거킹이 정해진 목표 이상의 영업성과
를 달성할 경우 별도의 상여금이 보장되었다. 합병과 함께 받게 된 필스버리 주식 덕에 매년 9만 달러
이상의 배당을 받게 되었고, 시간이 갈수록 내게 돌아올 배당액은 늘어날 가능성이 매우 컸다.
합병의 후폭풍
필스버리의 최고경영진은 1968년에 마이애미로 산업심리학자를 파견하여 버거킹의 사업경영 방식에
대해 파악할 것을 지시했고, 그는 나를 포함하여 우리 회사의 최고위 임원들 한 사람 한 사람과 인터
뷰를 하고 우리의 경영 스타일이나 장점, 약점 등에 대한 평가를 담은 보고서를 제출하라는 지시를 받
고 있었다. 나는 이런 종류의 업무과정이 매우 낯설었지만, 우리는 최대한 그의 활동에 협조했다. 그의
조사와 보고가 있은 후, 나는 회사의 다른 경영진에게 더 많은 책임과 권한을 위임하라는 압력을 많이
받게 되었다. 나는 갑자기 나의 경영 스타일을 바꾸라는 요구도 받아들이기 어려웠고, 그보다 더 실망
스럽고 화나는 것은 필스버리의 일원이 되자마자 그러한 요구를 받았다는 사실이었다.
나는 항상 최고경영자로서 회사 내의 임원들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고 의사결정의 과정에도 적극적으
로 개입해야 한다고 생각해왔다. 또 여러 해 동안 매장 점주들에 대해서도 깊은 헌신과 유대를 키워왔
고, 이런 끈끈한 관계를 약화시키고 퇴색시키고 싶지 않았다. 사업에 대한 현장 감각을 계속 유지하기
위해서라도 나는 부동산 취득, 프랜차이즈 권한 부여, 새로운 지역 개척, 사업자금 조달 등 지난 여러
해 동안 우리의 성공에 꼭 필요했던 많은 사안들에 대해 계속 현황을 파악할 필요가 있었다.
하지만 나는 필스버리의 요구를 존중하여 아서 로스월을 부사장단의 일원으로 승진시키고 매장과 프랜
차이즈 운영 책임을 맡겼다. 아서 로스월은 관리자로서 풍부한 경험이 있었고, 그는 자신에게 맡겨진
책임을 수행하는 데 필요한 조직개편을 단행했다. 필스버리 경영진은 그러한 그의 행보에 만족했지만,
내가 보기에는 그가 원하는 대로 조직이 개편되면 갈등의 불꽃이 튀기 시작하는 것은 시간문제였다.
실제로 그러한 갈등은 내 주변에서부터 시작되고 있었다. 그들의 요구에 따라 경영현장에서 한발 멀어
지자, 늘 내게서 떠난 적이 없었던 일과 회사에 대한 열정도 덩달아 떨어지는 것 같았다.
1970년을 지나 1971년에 접어들면서 프랜차이즈 확장과 이를 위한 부동산개발에 대해 필스버리의 시
각은 점점 더 부정적으로 변해가는 것 같았다. 나는 프랜차이즈 확장 없이 버거킹 사업을 키울 수 있
다는 그들의 생각을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그들은 오히려 프랜차이즈망을 축소할 생각을 하고 있
었다. 버거킹 이사회에서 우리 측 경영진은 여러 차례에 걸쳐서 프랜차이즈 확장과 부동산개발이 회사
의 장기적인 이익극대화를 위해 꼭 필요한 전략이라는 것을 설득하기 위해 애를 썼다. 그러나 필스버
리 측 경영진은 이러한 주장을 번번이 무시했다. 이로 인해 양측 간의 긴장이 고조되었다.
1970년대, 즉 필스버리의 주도로 버거킹의 성장을 억제하려는 계획이 추진되고 있을 당시, 맥도날드는
엄청나게 빠른 속도로 앞서 나갔다. 1967년에 105개의 매장을 새로 열고, 1968년에는 109개의 매장을
열었는데, 1969년에는 211개, 1970년에는 294개, 1971년에는 312개, 1972년에는 368개, 1973년에는
445개, 1974년에는 515개의 매장을 열었다. 반면 우리는 1974년까지 그들에 비하면 길가에 떨어져
있는 부스러기나 집어먹는 정도의 성장을 기록하고 있었다. 맥도날드는 이제 부동의 1위 자리를 차지
했다. 만약 그때 우리가 용기를 내어 우리의 방침을 유지했다면, 버거킹이 어떤 놀라운 성취를 거둘
수 있었을지 모른다는 생각을 하면 여전히 마음이 괴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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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거킹
내가 폴 제롯과 이사회에 약속한 기간은 5년이었다. 그 이후에는 계속해서 적극적으로 회사를 위해 일
하겠다고 약속한 바가 없었다. 그들과의 약속 기간 5년이 종료된 1972년 5월, 나는 버거킹의 CEO 직
에서 물러났다. 나는 직책에서 물러나면서 버거킹이 정상궤도에 오르는 것을 보지 못하고 떠나는 것이
너무 아쉬웠다. 내가 가장 중요하게 생각한 것은 버거킹이 앞으로 계속 성장하고 뻗어 나가야 한다는
것이었고, 그러려면 프랜차이즈와 이를 위한 부동산개발이라는 원래의 뿌리와도 같은 모습으로 돌아가
야 한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1972년 당시에 버거킹은 그와는 다른 방향으로 달려가고 있었고, 나는 가
능한 한 빨리 방향이 재정립되기를 바랄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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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거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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