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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을 바꾼 명연설- 사회 편

by Casey,Riley 2021. 12.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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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인성 지음 / 답
이 책은 어렵고 열악한 환경에서도 민주주의 발전을 위해 용기와 희생정신으로 열 걸음을 앞서 나간 9
명의 위인의 이야기, 그리고 그들이 했던 연설을 수록하여, 이들이 시민들과 함께 만들어 가려 했던
사회가 어떠한 모습인지를 보여준다. 그리고 지금 현대 사회가 그들이 원했던 만큼 좋아졌는지, 우리
가 각자 위치에서 이 사회가 당면한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 수 있는지 질문을 던진다.

세상을 바꾼 명연설: 사회 편
정인성 지음

▣ Short Summary
끊임없이 변화하는 사회 속에서, 시대와 공간을 초월하여 우리의 가슴을 뭉클하게 만든 명연설들이 있
다. 자유가 아니면 죽음을, 흑인 노예제의 야만성을, 여성의 참정권과 아동노동의 인권 등등은 지금은
당연하게 여겨지는 말들이지만, 당시에는 용기와 희생정신이 없었으면 꺼낼 수 없던 주제들인데, 이를
설파한 명연설들이 세상을 조금씩 바꾸고 영향을 끼쳐 오늘날의 지금을 만들었다.
민주주의의 발전은 한 사람이 열 발자국을 가는 것이 아니라, 수천, 수만의 사람들이 한 걸음씩 전진
하는 과정이다. 그런데 불완전한 인간들이 함께하는 만큼 그 결과도 불완전하고 더딜 수밖에 없다. 만
병통치약이나 구원자라는 존재는 신화에만 존재할 뿐, 사회가 한 걸음 나아가기 위해서는 실제로 수많
은 이들의 시간과 희생을 필요로 한다. 그런데 그 수만 명이 한 발자국을 내딛기 위해서는 누군가 열
발자국을 먼저 내딛는 용기를 보여주는 것도 중요하다.
이 책은 어렵고 열악한 환경에서도 민주주의 발전을 위해 용기와 희생정신으로 열 걸음을 앞서 나간 9
명의 위인의 이야기, 그리고 그들이 했던 연설을 수록하여, 이들이 시민들과 함께 만들어 가려 했던
사회가 어떠한 모습인지를 보여준다. 그리고 지금 현대 사회가 그들이 원했던 만큼 좋아졌는지, 우리
가 각자 위치에서 이 사회가 당면한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 수 있는지 질문을 던진다.

▣ 차례
Give Me Liberty or Give Me Death - #자유 #혁명 #시작
The Hypocracy of American Slavery - #노예 #위선 #연대
Are Women Persons? - #여성 #사람 #참정권
On Child Labor - #아동 #노동 #소비
Professions for Women - #자기만의 밤 #경제적 독립
The War is Won, But the Peace is Not - #평화 #꿈 #희망
I have a dream - #인류애 #이해관계 #의심
A New Chapter to Silent Spring - #환경 #이해관계 #의심
The Hope Speech - #LGBTQIA #희망 #우리
작가의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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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을 바꾼 명연설: 사회 편

세상을 바꾼 명연설: 사회 편
정인성 지음

Give Me Liberty or Give Me Death - #자유 #혁명 #시작
1775년 3월 23일, 미국 버지니아 리치먼드의 세인트 존 교회에서 제2차 버지니아 회의가 열리고 있었
다. 어수선한 분위기에서 한 남자가 연단에 섰다. 영국의 폭정에 대하여 어떻게 대응할 것인가를 두고
의견이 분분한 가운데, 그 남자는 힘찬 어조로 연설을 이어갔고, 청중들은 숨을 죽였다. 그리고 이윽고
연설이 절정으로 치닫고 연사는 손으로 가슴을 찌르는 시늉을 하며 외친다. “자유가 아니면 죽음을 달
라!” 이 연설 원문 중 일부분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It is in vain, sir, to extenuate the matter. Gentlemen may cry, Peace, Peace-- but there is no peace.
The war is actually begun! The next gale that sweeps from the north will bring to our ears the clash of
resounding arms! Out brethren are already in the field! Why stand we here idle? What is it that gentlemen
wish? What would they have? Is life so dear, or peace so sweet, as to be purchased at the price of
chains and slavery? Forbid it, Almighty God! I know not what course others may take but as for me, give
me liberty or give me death!’
패트릭 헨리, 1736년 5월 29일생. 그는 스코틀랜드 출신의 이민자 농부의 집안에서 태어나 미국 버지
니아에서 자랐고, 지역의 또 다른 농장주의 딸 새라 셸턴과 결혼하여 농장주로 사회에 진출했다. 결혼
선물로 300에이커의 땅과 6명의 흑인 노예를 선물로 받을 정도였으니 형편은 나쁘지 않았던 것 같다.
그런데 1757년 집이 불에 타 없어지고, 상점을 하나 오픈했지만 실패한다. 그래도 그 농지는 그대로
남았으니 농장을 일구며(물론, 노예들이 일구었겠지만) 법을 공부해 법률가가 된다.
그래도 법률가로서의 직업이 확실히 천성에 잘 맞았던 것 같다. 변호사로서 맡은 사건에서 승승장구하
며 이름을 알렸는데, 특히 연설능력이 뛰어나 배심원 선동에 능했다. 이후 1763년 영국의 조세정책과
버지니아 식민들의 이해가 충돌한 ‘사제의 소송’에서 버지니아 시민의 편에서 영국 국왕 제임스 3세를
독재자로 규정하는 등 맹렬히 비판하며 버지니아 식민의 승리를 이끌어 일약 스타로 떠올랐고, 여세를
몰아 정계에 진출해 1765년 버지니아주 하원의원에 당선되었다.
헨리의 정치 노선은 영국의 부조리에 맞선 투쟁이었다. 버지니아주 하원의원으로서의 첫 행보로 자신
의 당선 직전 영국이 통과시킨 인지세법에 맞선 인지세법 결의안을 발의했다. 당시 영국은 미 대륙에
서의 패권을 둘러싼 프랑스와의 7년 전쟁에서의 승리를 통해 아메리카 대륙을 지배할 수 있게 되었지
만, 엄청난 재정손실을 보게 되면서 왕실 채무의 규모가 두 배로 늘었다. 영국은 급증한 채무와 군의
유지비를 충당하기 위해 무리하게 식민지에 세금을 부과하는데, 그 시도 중 하나가 미국에서 출판되는
거의 모든 인쇄물에 영국 정부의 인지를 받도록 하여 직접세를 걷도록 하는 것이 인지세법이었다.
헨리가 결의안을 발의하면서 연단에 올라 “카이사르에게는 브루투스가 있었고, 찰스 1세에게 크롬웰이
있었듯이, 조지 3세도…”라고 말했을 때쯤 의장을 포함한 의원들 사이에서 “반역자!”라 외치기 시작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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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을 바꾼 명연설: 사회 편

다고 한다. 엄청난 야유와 방해 시도에도 불구하고 헨리는 연설을 끝까지 이어나갔고, 이후 “No
taxation without representation(대표 없이 과세 없다)”는 슬로건을 내걸고 반대 투쟁에 나섰다. 미국인
대표자가 없는 영국 의회에서 미국에 대한 세금을 부과할 권한이 없다는 선언이다. 이 선언은 오늘날
‘조세법정주의’의 뿌리가 되며 실제로 이 문구 자체를 조세법정주의라 해석하기도 한다. 헨리가 이끄는
반대 투쟁은 미국 시민의 큰 호응을 얻었고, 영국 의회는 결국 인지세를 철회하기에 이른다.
이후 헨리는 애국파 세력을 결집해 투쟁을 이어갔다. 미국 건국의 아버지 중 하나이자 독립선언문을
작성했으며 훗날 미국의 2번째 대통령이 되는 토마스 제퍼슨 등과 함께 영국의 수탈정책에 대응할 여
러 조직을 만들어냈는데, 그중 하나가 앞에서 언급한 연설의 무대가 되는 버지니아 회의다.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헨리는 1775년 3월 23일 버지니아 회의에서 갈팡질팡하는 지도자들 사이에서
단상에 올라 미국인들에게 역사의 운명을 받아들이고 함께 무장투쟁을 통해 자유를 쟁취하자는 ‘자유
가 아니면 죽음을 달라’ 연설을 펼쳤는데, 이 연설에 감명 받은 지도자들은 각성하여 미국 시민들이 영
국으로부터 독립한다는 내용의 결의안을 채택하고, 헨리를 시민군 창설을 위한 위원회의 위원장에 임
명하였다. 한편 시민군이 창설되어 훈련 중이라는 첩보를 입수한 영국군은 결국 1775년 4월 19일 렉
싱턴과 콘코드에서 시민군과 충돌하였고, 이 사건으로 미국혁명 전쟁이 시작된다.
헨리의 연설은 불안에 떠는 시민들이 자신들의 다름을 극복하고 ‘자유’라는 가치 아래 연대하여 영국군
에 맞설 수 있도록 목적을 부여했다. 헨리가 외친 자유는 제국의 착취와 억압으로부터 독립하여 시민
들이 스스로의 운명을 결정할 자유인 자주권의 요청이었다. 이 추상적인 요청에 미국 시민들이 마음을
움직일 수 있었던 것은 그동안 쌓여온 미국 시민들의 희생과 헨리가 보여준 승리의 경험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정의와 자유’가 무엇인지 정의하기는 어렵지만, 정의롭지 못하고 자유롭지 못한 것이 무엇인
지는 직관으로 알 수 있다. 영국은 통치 권력을 활용해 미국인들에게 희생을 강요하고 시민의 자유를
제한했다. 이에 미국인들은 스스로의 운명을 결정짓기로 결심했고, 함께 그것을 쟁취해냈다.
하지만 모든 혁명이 그러하듯, 승리의 과실이 모두에게 돌아간 것은 아니다. 미국 시민들은 혁명을 통
해 새로운 국가를 건설하였지만, 모두에게 ‘자유’ 혹은 자주권이 주어지지는 않았다. 백인 남성을 제외
하고는 ‘시민’으로 인정받지도 못했고, 남부의 주들을 중심으로 노예제는 계속 이어졌다. 이 때문에 미
국의 혁명이 백인들만의 이권 투쟁이라고 하는 의견도 있지만, 이는 단기적 결과만을 놓고 평가했을
뿐 아니라 여성들과 흑인들의 참여를 평가절하한 것이라 동의하기 어렵다. 패트릭 헨리와 미국 시민들
이 함께 일군 미국 혁명은 민주주의 국가를 세우고 함께 민주주의 발전의 역사를 써 내려가는 과정의
중요한 챕터라고 보는 것이 옳을 것이다.
민주주의의 발전은 한 사람이 열 발자국을 가는 것이 아니라, 수천, 수만의 사람들이 한 걸음씩 전진
하는 과정이다. 그런데 불완전한 인간들이 함께하는 만큼 그 결과도 불완전하고 더딜 수밖에 없다. 만
병통치약이나 구원자라는 존재는 신화에만 존재할 뿐, 사회가 한 걸음 나아가기 위해서는 실제로 수많
은 이들의 시간과 희생을 필요로 한다. 그런데 그 수만 명이 한 발자국을 내딛기 위해서는 누군가 열
발자국을 먼저 내딛는 용기를 보여주는 것도 중요하다. 미국 혁명의 과정에서도 열 발자국 먼저 앞서
간 헨리와 같은 사람들, 이른바 ‘건국의 아버지들’이 있었기 때문에 다수가 따를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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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을 바꾼 명연설: 사회 편

Are Women Persons? - #여성 #사람 #참정권
1873년 미국 뉴욕지역 연방법원, 한 여자에 대한 3차 공판이 열리고 있었다. 이미 전 공판에서 유죄
선고가 확정되었고, 그간 피고에게 어떠한 발언권도 주어지지 않았던 터라, 판사는 피고 여성에게 마
지막으로 할 말은 없냐고 묻는다. 덤덤한 표정으로 일어선 여자는 연설을 시작한다. 점점 힘을 더해가
는 연설에 당황한 판사는 여러 차례 제지하지만, 여자는 끝까지 연설을 이어나가며 청중들에게 물었다.
“여성은 사람입니까?” 이 연설 원문 중 일부분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Webster, Worcester, and Bouvier all define a citizen to be a person in the United States, entitled to vote
and hold office. The only question left to be settled now is Are women persons? And I hardly believe any
of our opponents will have the hardihood to say they are not. Being persons, then, women are citizens
and no state has a right to make any law, or to enforce any old law, that shall abridge their privileges or
immunities. Hence, every discrimination against women in the constitutions and laws of the several
states is today null and void, precisely as is every one against Negroes.’
수전 B. 앤써니. 한국에서는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미국사나 여성 인권에 관심이 있는 독자라면 한
번쯤 들어봤을 이름이다. 미국뿐 아니라 국제 여성 인권과 참정권에 있어 큰 획을 그은 인물이고 여성
운동계의 대모라 할 수 있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이번에 살펴볼 연설은 그녀가 법정에서 최후진술로
발표한 것으로 타임지에서 뽑은 역대 10대 연설로 뽑힐 정도로 역사적 중요성이 있는 연설이다.
1820년 2월 15일, 7남매의 둘째로 태어난 그는 인권 문제에 있어 급진적인 성향을 띠던 퀘이커교도
아버지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그녀의 집안에서 운영하는 뉴욕 로체스터의 농장에서는 인권 운동가들
의 모임이 종종 열렸는데, 앤써니는 평생 친구가 되는 프레드릭 더글러스도 이곳에서 만났다. 한편 아
버지가 보험업에 종사하게 되면서 농장의 운영을 맡게 된 앤써니는 모임을 주관하며 어린 나이에 본격
적으로 활동가로서의 면모를 갖추게 되었다.
노예해방 전선과 여성운동 진영의 연대 활동에 합류한 앤써니는 17세가 되던 해에 노예해방을 촉구하
는 서명을 모았고, 1856년 미국 반(反) 노예사회의 뉴욕 대표에 임명될 정도로 노예제 폐지에 앞장섰
다. 당시 노예해방 진영과 여성 참정권 진영은 공민권(公民權) 확대라는 목표 아래 공동전선을 구축하
고 연대했는데, 이들의 연대는 북부의 노예해방 여론을 고조시켰고, 공화당의 집권, 링컨의 노예해방
선언, 남부의 연방 탈퇴 선언, 남북전쟁 등으로 이어졌다. 하지만 앤써니와 여성 운동 진영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남북전쟁 이후 제정된 수정헌법에서, 여성은 인종을 불문하고, ‘시민’으로 인정받지 못하였고,
이에 따라 여성운동 진영은 투쟁노선을 변경하게 되었다.
이후 앤써니가 이끄는 여성참정권협회는 1871년 대법원판결을 통해 여성의 참정권 제한이 위헌이라는
판단을 얻어내는 전략을 총회에서 의결했다. 보충 설명하면, 수정헌법 제14조 제1항에 시민으로서 권
리를 취득하는 대상으로 명기된 ‘모든 사람(all persons)’에 여성이 포함되는지를 따지게 하여 여성 참
정권의 헌법적 근거를 확보하고자 한 것이다. 이러한 전략에 따라 앤써니는 1872년 뉴욕주 로체스터
의 대통령 선거 투표장에 50여 명의 여성을 이끌고 투표를 시도했는데, 이 중 앤써니를 포함한 15명
이 투표에 성공했다. 하지만 1872년 11월 18일, 앤써니는 불법적으로 투표권을 행사한 혐의로 체포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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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을 바꾼 명연설: 사회 편

었고, 이 사실이 알려지면서 미국 사회는 술렁였다. 함께 투표한 혐의를 받은 14명과 함께 재판이 열
릴 때까지 석방된 앤써니는 재판이 열리기 전까지 재판이 열릴 뉴욕주 먼로 카운티의 29개 마을을 돌
며 연설을 통해 자신의 정당성을 주장하였다. “미국 시민이 투표를 하는 것이 범죄입니까?”라고 질문
을 던진 그녀는 수정헌법 제14조가 모든 사람에게 시민의 권리를 명기하고 있으므로, 여성들이 더는
의회에 여성의 참정권을 보장하는 법을 통과시켜 달라고 청원할 것 없이, 오래도록 묵살 당해온 시민
으로서의 권리를 바로 행사하면 된다고 주장했다. 이후 그녀의 이러한 주장은 로체스터 일간지에 실렸
고, 지역에 큰 반향을 일으켰다. 한편 앤써니의 연설이 배심원 판결에 영향을 미칠까 우려한 지방검찰
은 사건을 주 법원이 아닌 연방법원으로 옮겼고, 재판은 먼로 카운티 옆에 위치한 온타리오 카운티에
서 열리게 되었다. 이에 앤써니는 온타리오의 모든 마을을 돌며 연설을 이어나가며 맞섰다. 재판 전까
지 발표한 연설이 50여 차례가 되었다고 하니 엄청난 열정이 아닐 수 없다.
당시 연방 재판은 보통법에 따라 피고인에 대한 증언을 못 하도록 하였는데, 제2차 공판에서는 양측
변호인들이 변론하고, 판사가 의견을 개진하는 형식을 취했다. 그런데 판사가 배심원들에게 앤써니에
대해 유죄판결을 하라는 지시를 내리기도 했는데, 이는 당시에도 충분히 논란이 될 만큼 직권을 남용
한 행위였다. 그리고 마지막 3차 공판에서 판사는 앤써니에게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말을 하라고 지시
를 내렸고 앤써니는 앞에서 언급한 명연설로 답했다.
당황한 판사가 제지하였지만, 앤써니는 꿋꿋이 연설을 이어나갔고, 연설을 마친 후에도 여성이 참여하
지 않는 배심원단이 무슨 정당성을 가지냐며 따져 물었다. 결국 앤써니는 불법적인 투표권 행사 혐의
로 유죄를 인정받아 벌금 $100을 부과 받았는데, 그녀는 평생 이 돈을 내지 않았다. 어차피 항소를 통
해 대법원으로 사건을 옮기는 것이 목표였기에 오히려 이러한 처벌이 달가웠을 것이다.
하지만 야심차게 준비한 앤써니의 법정투쟁은 결국 실패로 돌아갔다. 1875년 유사한 사례인 Minor v.
Happersett에서 연방대법원이 여성을 시민으로 인정하더라도 모든 시민이 투표권을 갖는 것은 아니라
고 판결한 것이다. 그래서 앤써니는 전략을 수정하여 개헌을 통한 참정권 확보에 나섰다. 1878년 1월,
앤써니는 열차에서 우연히 만나 친구가 된 캘리포니아 공화당 상원의원 애론 사젠트에게 의뢰해 여성
의 참정권을 보장하는 수정헌법안을 제출하였는데, 이 안은 최초 발의되었을 때는 부결되었고, 42년이
지난 1920년이 되어서야 수정헌법 제19조라는 이름으로 통과되었다. 그런데 애석하게도 정작 앤써니
는 1906년 3월 13일 84세의 나이에 심부전과 폐렴으로 사망했기 때문에 수정헌법의 통과를 보지는
못했지만, 미국인들은 그녀를 기리는 의미에서 수정헌법 제19조를 앤써니 수정헌법이라 부른다.
수정헌법 제15조를 통해 흑인 남성의 참정권이 보장되었다고 해서 그들에게 평등한 지위가 부여된 것
이 아니듯, 수정헌법 제19조의 통과가 여성의 지위를 남성의 그것과 동등하게 만들어주지는 않았다.
참정권의 보장은 사회진출을 보장하지 않았고, 사회진출이 허용된다고 하더라도 넘지 못할 유리천장이
늘 존재했다. 그럼에도 수많은 시간과 희생을 통해 미국 사회는 인간성을 파괴해온 과두정의 벽을 허
물며 문명을 발전시켜나갔다. 그리고 앤써니가 사망한 지 100년째가 되는 2016년 미국 대선에는 힐러
리 클린턴이 민주당 대선후보로 확정되며 미국 첫 여성 대통령이 탄생하기 직전까지 갔다.
‘여성은 사람입니까?’라는 질문은 사람으로 인정받지 못하고 사회적으로 배제되는 사람들과 이로 인해
상실되는 사회 전체의 인간성에 관한 질문이었다. 배제되는 사람의 존재를 인정하기 위해서는 우리가
모두 경험과 편견의 노예일 수 있다는 점부터 인지하고 받아들여야 한다. 이것을 인지하는 것에서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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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을 바꾼 명연설: 사회 편

우리는 앤써니가 이야기한 과두정이 우리 안에 존재하지 않는지에 관한 질문을 던질 수 있을 것이고,
그 질문에 대한 답을 함께 찾아갈 수 있게 될 것이다.

The War is Won, But the Peace is Not - #평화 #꿈 #희망
1945년 12월 10일, 뉴욕 아스터 호텔에서 열린 제5회 노벨상 만찬. 불과 4개월 전, 미국이 히로시마
와 나가사키에 핵폭탄을 투하하며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시점. 한 저명한 학자가 죄책감을 안고 연단
에 오른다. 다이너마이트를 발명한 노벨의 죄책감과 자신의 죄책감을 비교한 학자는 전쟁 전후에 인류
가 크게 달라진 적이 없다는 것을 다음과 같이 지적한다. “전쟁은 승리했지만, 평화는 그렇지 않습니
다.” 이 연설 원문 중 일부분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The Nobel Anniversary celebration takes on a special significance this year. Well after our deadly
struggle of many years, we are at peace again or what we are supposed to consider as peace. And it
bears a still more significant significance for the physicists who, in one way or another, were connected
with the construction of the use of the atomic bomb. For these physicists find themselves in a position
not unlike to that of Alfred Nobel himself. Alfred Nobel invented the most powerful explosive ever known
up to his time, a means of destruction par excellence. In order to atone for this, in order to relieve his
human conscience, he instituted his awards for the promotion of peace and for achievements of
peace.
Today, the physicists who participated in forging the most formidable and dangerous weapon of all
times are harassed by an equal feeling of responsibility, not to say guilt. We cannot desist from warning,
and warning again, we cannot and should not slacken in out efforts to make the nations of the world,
and especially their governments, aware of the unspeakable disaster they are certain to provoke unless
they change their attitude toward each other and toward the task of shaping the future. We helped in
creating this new weapon in order to prevent the enemies of mankind from achieving it ahead of us,
which, given the mentality of the Nazis, would have meant inconceivable destruction and the
enslavement of the rest of the world.
We delivered this weapon into the hands of the Americans and the British people as trustees of the
whole [of] mankind, as fighters for peace and liberty. But so far, we fail to see any guarantee of peace.
We do not see any guarantee of the freedoms that were promised to the nations in the Atlantic Charter.
The war is won, but the peace is not.’
앨버트 아인슈타인. 천재의 동의어. 물리학은 아인슈타인 이전과 이후로 나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그런데 그의 업적이나 어렸을 때 지진아였다가 천재 물리학자가 된 서사 등은 잘 알려져 있지
만, 그의 철학이나 실제 삶에 관한 이야기는 사람들이 관심을 많이 두지 않는데, 위의 연설은 물리학
자로서 그리고 인류사회의 한 구성원으로서의 철학이 담겨있다.
1879년 3월 14일 독일의 유대인 집안에서 태어난 아인슈타인은 어려서부터 수학과 물리학에 관심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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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을 바꾼 명연설: 사회 편

많았다. 그런데 당시의 주입식 교육방식에 따분함을 느낀 그는 학교를 제대로 나가지 않았지만, 독학
을 통해 지식을 쌓아나갔다. 다행히 스위스에서는 검정고시와 비슷한 방식을 통해 학업을 계속할 기회
가 주어져 그곳에서 학업을 이어갔다. 한편 물리학자로서의 아인슈타인은 1900년 학업을 마치고 학교
에 더 이상 얽매이지 않으며 꽃피기 시작했다. 1902년 스위스의 특허 사무실에서 일하면서 이론물리학
에 관한 연구를 이어갔고, 지속적으로 논문을 발표했다. 그리고 1905년 논문들을 발표하며 취리히대학
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했는데, 그의 논문들은 최초에 물리학계에서 주목받지 못하다가 양자역학의 창시
자이자 저명한 물리학자 막스 플랑크가 아인슈타인의 논문에 찬사를 보내기 시작하면서 인정을 받기
시작했다. 이후 1909년 취리히 대학의 교수로 취임한 아인슈타인은 본격적으로 연구 활동에 몰입하였
고, 1916년 발표한 일반상대성이론은 1921년 그에게 노벨 물리학상을 안겨주었다.
아인슈타인의 물리학적 업적은 여기서 굳이 더 다룰 필요는 없어 보이고, 잘 다루어지지 않는 아인슈
타인의 행동하는 양심에 대해 이야기해 보고자 한다. 1933년 미국을 방문하고 있던 그는 나치의 집권
소식을 접하고 미국에 망명을 신청하여 미국 생활을 시작했다. 이후 미국 흑인들에 대한 분리ㆍ차별
정책에 반대하는 운동에도 참여했고, 평화주의 운동, 동물권 운동 등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이후 1939년 9월 1일 독일의 폴란드 침공으로 세계는 또 하나의 대전을 치르게 되는데, 같은 해, 평
화를 추구하는 자신의 양심에 충실하며 행동해온 그에게 평생의 죄책감을 안겨준 사건이 발생한다. 바
로 나치 독일의 원자폭탄 개발계획을 미국에 알려 미국이 먼저 무기를 완성할 것을 촉구하는 이른바
아인슈타인-실라르드 편지에 서명한 것이다. 아인슈타인은 편지에 명의만을 제공했지만, 당대 가장 저
명한 물리학자의 서명은 편지의 공신력과 설득력을 제공하기에 충분했고, 편지를 받은 프랭클린 루스
벨트는 핵무기 개발 착수를 지시하고 이른바 맨해튼 프로젝트가 시작되었다. 결국 맨해튼 프로젝트의
결과물로 탄생한 원자폭탄이 1945년 8월 6일 히로시마에 그리고 8월 9일 나가사키에 투하되고, 1945
년 8월 15일 일본제국이 무조건 항복을 선언하며 제2차 세계대전은 마무리된다.
수백만의 유대인이 ‘인종청소’라는 이름으로 학살당하고 미국의 참전 전까지 독일을 중심으로 한 추축
국들이 빠르게 유럽과 아시아를 점령해가고 있던 상황에서, 나치 독일이 인류의 가장 강력한 무기인
원자폭탄까지 먼저 확보하게 되었을 경우 벌어질 상황을 고려해보았을 때, 아인슈타인의 선택이 과연
잘못되었다고 볼 수 있는지 확신할 수 없다. 하지만 그 폭탄이 실제로 사용되고서 그 참상에 대해 알
게 된 아인슈타인은 사망하기 1년 전인 1954년 라이너스 폴링에게 그것이 자신이 살면서 저지른 최악
의 실수라고 전할 정도로 큰 충격과 죄책감에 빠졌다. 원자폭탄 개발에 참여한 것은 아니지만, 자신의
상대성 이론이 원자폭탄 개발의 기초 개념을 제공했던 것도 무시할 수 없었다. 이후 아인슈타인은 영
국의 철학자 버트런드 러셀과 함께 과학 기술의 평화적 이용과 핵무기 사용의 금지를 촉구하는 러셀
아인슈타인 선언을 발표하는 등 핵무기 금지 운동에 참여하다가 1955년 4월 18일 사망했다.
본 연설은 제2차 세계대전 종전 직후에 노벨상 만찬에서 발표한 것이다. 다이너마이트를 개발하여 인
류의 기술 발전을 이끈 노벨이 자신의 기술이 살상용으로 활용되는 것에 죄책감을 느끼고 설립한 것이
노벨상이다. 아인슈타인은 원자폭탄이 실전에 활용된 것에 대해 자신과 물리학자들이 느끼는 죄책감을
노벨의 그것에 비교하며, 인류에 대한 관대함과 동지애가 없는 과학기술의 발전은 인류의 멸망으로 이
어질 것을 경고했다. 우리가 아인슈타인을 이야기할 때 그가 자신의 능력을 이용해 만든 결과물에 대
해 얼마나 큰 책임감을 가진 인물이었는지에 대해서는 잘 이야기하지 않는다. 그는 인류의 미래를 결
정지을 수 있을 만큼의 능력을 갖추고 있었고, 이를 인류를 위해 사용할 수 있도록 하였으며, 그로 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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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을 바꾼 명연설: 사회 편

해 발생한 결과에 대한 책임을 지기 위해 인생을 바쳤다. 이런 리더십은 어느 분야에나 필요하지만, 4
차 산업혁명이라 불리는 기술진보의 시대에서 개발자들과 기업에 더 크게 요구된다.

A New Chapter to Silent Spring - #환경 #이해관계 #의심
1963년 1월 8일, 뉴욕 가든 클럽. 주로 여성 정원사들이 중심이 된 자리. 미국 사회를 뒤흔든 작품 <
침묵의 봄>이 출판되고 1년이 채 되지 않았을 시점. 논란의 중심에 선 작가는 연단에 오른다. 대중연
설 경험이 없던 그의 연설은 청중을 사로잡는 데 부족함이 없었고, 이후의 사회운동가들이 과학에 근
거한 이익단체들의 비판에 맞설 수 있는 가장 중요한 화두를 던진다. “누가 이야기를 하고 있나요? 그
는 그 이야기를 왜 하고 있나요?” 이 연설 원문 중 일부분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We see scientific acknowledging as “sustaining associates” a dozen or more giants of a related
industry. When the scientific organization speaks, whose voice do we hear ­ that of science or of the
sustaining industry? The public assumes it is hearing the voice of science.
Another cause of concern is the increasing size and number of industry grants to the universities. On
first thought, such support of education seems desirable, but on reflection we see that this does not
make for unbiased research ­ it does not promote a truly scientific spirit. To an increasing extent, the
man who brings the largest grants to his university becomes an untouchable, with whom even the
University president and trustees do not argue. These are large problems and there is no easy solution.
But the problem must be faced. As you listen to the present controversy about pesticides, I recommend
that you ask yourself ­ Who speaks? - And Why?’
레이첼 카슨. 환경 운동계의 대모. 해양생물학자이자 작가로 활동하며 그가 쓴 DDT 및 살충제의 남용
에 의한 폐해를 폭로한 『침묵의 봄』은 현대 과학의 활용 범위 및 방향에 대한 새로운 고찰과 더불어
현대 환경운동의 초석을 놓았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1907년 5월 27일 펜실베니아에서 태어난 그는
어려서부터 책을 읽고 글을 쓰는 것을 즐겼다. 그는 우수한 성적으로 대학을 졸업한 후 존스홉킨스 대
학에서 동물학 석사 학위를 받았다. 이후 박사학위 과정을 밟고자 했던 그는 1934년 대공황으로 인해
어려워진 집안 경제에 도움이 되고자 강사가 되었다.
1935년 아버지가 사망하고 병든 어머니를 간호해야 했던 그는 학부 시절 멘토였던 엘머 허긴스의 추
천으로 어업국의 라디오 프로그램에 해양생물에 관한 원고를 쓰게 되었는데, 그의 능력을 높게 평가한
그의 상사는 그에게 정규직으로 근무할 것을 제안하였고, 공무원 채용시험을 최우수 성적으로 통과한
것을 계기로 어류 야생생물청에 여성으로서 두 번째로 채용되어 16년간 근무했다.
카슨은 어류 야생생물청에서 근무하며 지속적으로 언론사 기고와 출판을 통해 작가로서의 입지를 다져
나갔다. 해양 자연사를 다룬 1941년 『해풍 아래』를 시작으로 1951년 『우리를 둘러싼 바다』, 1955
년 『바닷가』는 그를 유명인사로 만들어주었다. 특히 『우리를 둘러싼 바다』는 86주간 《뉴욕타임즈》
베스트셀러에 이름을 올리며 1952년 그가 은퇴 후 전업 작가로 활동할 수 있도록 해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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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을 바꾼 명연설: 사회 편

제2차 세계대전을 계기로 미군은 군사적 활용을 목적으로 합성 살충제 개발을 지원해왔는데, 가장 효
율적이고 효과적인 해충박멸 수단으로 DDT와 같은 합성 살충제가 떠오르기 시작했고, 일곱 가구 중
한 가구가 농업에 종사하던 미국에서 그 수요가 급증했다. 수요가 증가함에 따라 화학업계는 더욱 강
력하고 효과적이며 저렴한 살충제를 경쟁적으로 내놓기 시작했고, 그 위험성에 대한 연구 결과에 대해
서는 함구한 채 살충제는 무분별하게 사용되었다. 그런 상황에서 살충제 남용에 반대하는 미국의 비영
리단체 오듀본 협회는 카슨을 영입하여 정부의 살충제 활용실태에 관한 연구와 문제의 공론화를 요청
하였다. 평소에도 합성살충제의 피해사례에 관심을 두고 있던 카슨은 1957년 연방정부의 매미나방 박
멸프로그램과 그로 인해 발생한 피해자들의 소송에 대한 소식을 접하고 제안을 받아들였고, 4년간의
연구조사는 역사의 한 획을 그은 명저 ‘침묵의 봄’의 탄생으로 이어졌다.
『침묵의 봄』은 1962년 6월 16일 ‘뉴요커’에 첫 번째 요약본이 실리면서 사회에 큰 파장을 일으켰다.
그러자 미국의 화학회사들은 물론, 농무부를 비롯해 농장주들까지 반격에 나섰고, 각종 소송에 휘말렸
다. 내성적인 성격 탓에 공개석상에 나서는 것을 극도로 꺼렸던 그는 건강 상태가 좋지 않았음에도 언
론과 사회의 무차별적인 공격에 더 이상 침묵할 수 없음을 깨닫고 각종 강연과 연설에 나섰다.
카슨은 당시 사용되던 합성 살충제의 오남용을 반대한 것이지 해충에 대한 통제에 반대한 것이 아니다.
연설에서도 이를 분명히 했다. ‘해충에 대한 통제에 찬성하는가, 혹은 반대하는가’는 프레임에 갇히면
논의가 공회전하게 되는데, 문제의 본질을 호도해서 유리한 고지를 차지하고자 하는 자들이 흔히 쓰는
수법이다. 이런 식의 이분법적 프레임은 문제를 단순화시켜 대중을 현혹시키는 용도로 활용된다. 그래
서 누군가가 어떤 사안에 대해 찬성하냐 반대하냐 물어보면, 질문하는 사람의 의도를 한 번쯤은 의심
해보고 질문이 제대로 된 질문은 맞는지 살펴보는 지혜를 발휘해야 한다.
이런 논란은 오히려 책의 판매를 부추겼고, 과학자들의 양심선언까지 이어지며 합성 살충제에 대한 사
회적 인식에 불을 지폈다. 『침묵의 봄』은 60만 부 이상 판매되며 베스트셀러가 되었고, 미국 여론은
카슨의 편에 섰다. 그리하여 여러 주에서 40여 건의 법안이 상정되었고, 1963년에는 연방정부 산하에
환경자문위원회가 구성되었으며, 이는 1969년 국가 환경정책 법안 통과를 통해 환경보호청의 탄생으
로 이어졌다. 그리고 환경보호청은 1972년 DDT의 사용을 금지시켰다.
최근에 환경과 관련된 문제에 대한 사회적 관심이 증가함에 따라 유해물질에 대한 소비자들의 불매운
동과 각종 친환경 제품 소비, 피해 문제에 대한 관심과 연대가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다. 하지만 본인
의 건강이나 이해와 직접적인 관계가 없는 것으로 여겨지는 부분이나 거시적인 문제에서는 그것이 쉽
지 않다. 예를 들면 지구온난화나 탈원전과 같은 문제가 그렇다. 이러한 주제는 정치적으로나 이념적
으로 첨예하게 대립할 정도로 큰 이슈지만, 전문지식도 없는 일반인들이 접근하기에는 관련 정보와 지
식이 워낙 방대하고 참가자들의 이해관계도 워낙 복잡하다. 하지만 더 조심해야 하는 부류가 있다. 대
외적으로 자신이 공익을 대변한다고 말하면서 이를 수익화하는 사람들이다.
누구나 손쉽게 타인과 소통할 수 있고 이를 수익화할 수 있는 환경이 되면서 ‘가짜뉴스’ 문제가 점점
심각해지고 있다. 방송과 광고를 구분할 수 없는 지경에 와버린 것이다. 아침 방송에 나와 건강을 위
협하는 무언가를 없애려면 어떤 걸 먹어야 한다고 소개하면서, 사실은 옆 홈쇼핑 채널에서 파는 음식
을 홍보하고 있는 쇼닥터들은 그나마 귀여운 수준이다. 이들은 그나마 산업이 고용한 전문가기 때문에
책임소재가 분명하기 때문이다. 문제는 사회적 갈등을 수익 모델로 삼는 이들이다. 이들은 ‘정의’, ‘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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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을 바꾼 명연설: 사회 편

정’, ‘애국’, ‘자유’, ‘민주주의’, ‘진보’, ‘보수’와 같은 추상적인 단어들 뒤에 숨어 자신의 영향력과 수익을
극대화한다. 이들은 어떤 사안에 대해 그 사안의 본질이나 진실이 무엇인지를 알리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대중이 혹은 특정 성향의 집단이 듣고 싶은 이야기를 해주며 돈을 번다. 이것이 도를 넘게 되
면 진실을 호도하는 것을 넘어서 진실을 조작하기에 이른다는 것을 우리는 종종 목격한다.
영화 <매트릭스>에서 주인공 네오는 주어진 세계를 그대로 받아들이는 파란 약을 먹을 것인가, 혼란
스럽더라도 진실된 모습을 바라보는 빨간 약을 먹을 것인가 선택한다. 주체적인 삶을 결정하는 것은
빨간 약을 선택하는 것과 같다. 빨간 약을 먹는 것은 내가 ‘상식’이라 여기는 것들을 의심해보는 것에
서 시작한다. 따라서 나의 사고방식을 타인에게 맡길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의심하고 다음과 같은 질
문을 던져보아야 한다. “누가 이야기를 하고 있나요? 그는 그 이야기를 왜 하고 있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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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을 바꾼 명연설: 사회 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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