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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영화,리뷰,

상대적이며 절대적인 세계사

by Casey,Riley 2022. 1.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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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학렬 지음 / 인물과사상사
이 책은 신화, 종교, 정치, 전쟁, 이슬람, 일본, 이상주의자, 여성 지도자, 대도시 등 9개 테마로
세계사의 이면을 살펴봄으로써 상대적 가치의 충돌을 해결하고 서로 공존하는 세상을 열어가기 위
해 쓰였다. 일방적 목소리가 아니라 당사자의 주장을 존중하고 서로에 대한 상호 존중을 목적으로
현대의 우열과 상관없이 각 민족과 나라의 영광과 오욕을 모두 다루고 있다.

상대적이며 절대적인 세계사
표학렬 지음

▣ 저자 표학렬
어릴 때는 역사 드라마를 항상 보았고, 대학교에서는 사학과와 교육대학원 역사교육과를 졸업했으며,
1998년부터는 고등학교에서 역사를 가르치고 있다. 수능에서 한국사가 선택이던 시절 수업 시간에 엎
드려 자는 학생들의 관심을 끌어보고자 재미있고 감동적인 강의 개발에 몰두했다. 그동안 지은 책으로
『카페에서 읽는 조선사』, 『에피소드로 보는 유신의 추억』, 『한 컷 한국 현대사』, 『에피소드 독립
운동사』, 『에피소드 세계사』(상 하), 『하룻밤에 읽는 조선사』, 『에피소드 한국사』(전3권) 등이 있
다. 사람이 살고 있는 역사, 함께 생각하고 풀어가는 역사를 지향하면서 오늘도 역사책을 끼고 언제나
진정한 역사가라고 자부할 수 있을까 고민하며 살고 있다.

▣ Short Summary
과거 역사 교과서는 시대 구분이 특징이었다. 고대, 중세, 근대, 현대 등으로 시대를 나누고 이에 따른
각 시대의 특징을 노예제, 봉건제, 자본주의 등으로 설명했다. 19세기 유럽에서 유행해 우리에게 근대
학문으로 도입되었던 시대 구분에 입각한 발전 사관은 가장 기본적인 역사관이었다. 그러나 이제는 시
대 구분에 입각해 역사를 설명하지 않는다. 대신 그 빈자리를 대체한 것은 다양한 주제사다. 여성사,
종교사, 문화사, 물질사 등이 대유행이다. 우리는 서점에서 세계사를 흔든 약물, 식물, 무역, 교통, 질
병 등을 다룬 역사서를 쉽게 접할 수 있다.
이 책은 오늘날 다원화와 다문화 시대와 관련한 여러 주제 중 특히 우리가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는
각 민족의 신화와 종교, 정치, 전쟁 등의 역사에 대해 서술하려 한다. 신화는 민족 형성기의 역사를 반
영하면서도 현대 문화 콘텐츠의 기본 구조로 강력한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다. 그리스 신화가 영화 <스
타워즈>가 되고 북유럽 신화가 영화 <반지의 제왕>이, 『성경』이 영화 <어벤져스>의 기본 스토리 구
조를 형성한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또한 종교는 항상 정치권력과 밀접한 관계를 맺으며 발전해왔고, 그것이 새로운 역사 발전의 원동력이
되었다. 신탁이 없었다면 그리스는 페르시아에 멸망했을지도 모르고, 종교개혁이 없었다면 영국의 무
적함대도 없었을 것이다. 그리고 선동 정치의 역사에서 선동이 왜 민중과 연관을 맺는지, 오늘날 인터
넷과 미디어의 정치 선동이 왜 중요한지 생각해볼 것이다. 전쟁과 역사의 관계도 이야기하고 싶다. 모
두 평화를 사랑하지만 폭력은 역사를 바꾸는 힘이기도 했다. 전쟁은 그 파괴적 재앙 속에서도 인류에
게 변화의 계기가 되었다. 전쟁만큼 인간의 모순된 얼굴이 또 있을까?
일본의 역사도 소개하고자 한다. 일본 천황이 대부분 무력한 상징적 존재였다가 메이지유신 이후 강력
한 권력을 잡게 되었다고 생각하는 독자가 많다. 그러나 갑자기 일본 천황이 국가의 독재권력을 행사
할 수는 없다. ‘무기력한 천황’론은 패전 후 일본 우익 세력이 천황을 보호하기 위해 만든 이데올로기
중 하나다. 실체가 있는 천황 중심으로 일본사를 보는 것도 흥미로울 것이다.
오늘날 역사를 공부하는 이유는 각자의 목적과 주제에 따라 천차만별이다. 역사를 통해 교훈을 얻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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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대적이며 절대적인 세계사

한다고 하지만, 과거 상황이 그대로 복제되지 않는 한 어떤 교훈이 가장 적절할지 알 수 없다. 따라서
우리는 과거를 특정 위치에 고정시켜서는 안 되고 논쟁해야 한다. 이미 알고 있는 것이라 해도 다른
시각에서 보거나 다른 의미에서 본다면 충분히 논쟁거리가 되는 역사를 가질 수 있지 않을까?

▣ 차례
프롤로그
제1장 신화 이야기
그리스 신화 / 중국 신화 / 북유럽 신화 / 티베트 신화 / 아메리카 신화
제2장 종교와 정치
신탁과 살라미스 해전 / 불교와 아소카 / 기독교와 콘스탄티누스 / 종교개혁과 영국의 무적함대
과학이라는 신과 근대 정치
제3장 선동의 정치
황건적과 삼국시대 / 마리 앙투아네트와 혁명 / 보스턴 차 사건과 인디언
신해혁명과 한족 민족주의 / 히틀러와 괴벨스
제4장 세계를 바꾼 전쟁
알렉산드로스 원정 / 십자군전쟁 / 몽골의 정복 전쟁 / 제1차 세계대전 / 국공 내전과 베트남전쟁
제5장 이슬람의 역사
이슬람의 창시 / 수니파와 시아파 / 칼리프의 시대 / 술탄의 시대 / 근대의 격랑 속에서
제6장 일본의 정체성
일본의 시작 / 막부 시대와 혼란 / 도요토미 히데요시와 도쿠가와 이에야스
근대화와 민주주의의 발전 / 전후 경제성장과 역사 청산
제7장 실패한 이상주의자
페이시스트라토스 / 왕안석 / 알렉산드르 2세 / 우드로 윌슨 / 체 게바라
제8장 여성 지도자
테오도라 / 예카테리나 2세 / 락슈미바이 / 셜리 치점과 힐러리 클린턴 / 탈코 운동
제9장 대도시
콘스탄티노플 / 장안 / 앙코르톰 / 테노치티틀란 / 게르마니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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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대적이며 절대적인 세계사

상대적이며 절대적인 세계사
표학렬 지음

종교와 정치
기독교와 콘스탄티누스
로마를 분할 통치하다: “그는 해가 정점을 지난 한낮에 태양의 바로 위쪽 하늘에 빛의 십자가가 걸려
있는 것을 분명하게 보았다. 그 십자가에는 ‘Hoc Vince(이것으로 정복하라)’라는 글자가 쓰여 있었다.”
콘스탄티누스가 밀비우스 다리 전투에서 본 이 환영은 세계의 역사를 바꾸었다. 이제 세계는 다신교의
시대를 마감하고 유일신교의 세상으로 나아가기 시작했다. 로마는 카르타고를 멸망시키고 지중해를
‘로마의 호수’로 만들며 거대한 제국을 건설하자마자 심각한 문제에 맞닥뜨려야 했다. 그것은 로마의
공화정이 거대한 영토와 인구를 다스리기에 비효율적인 정치 체제였다는 것이다. 오직 황제의 통치,
즉 왕정을 통해서만 거대한 영토와 인구를 통치할 수 있었기에 로마는 결국 제국으로 나아갔다.
그러나 황제가 다스리는 로마 제국 역시 한계를 드러냈다. 한계는 특히 후계의 문제로 나타났고 황제
가 죽을 따마다 혹은 폭군이 등장할 때마다 격렬한 내전을 유발했다. 후계 문제로 고심하던 디오클레
티아누스 황제는 제국을 4개로 분할해, 아우구스투스 2명과 카이사르 2명이 제국을 분할 통치하게 했
다(로마 황제를 아우구스투스라고 불렀으며, 그에 준하는 지배자를 카이사르라고 불렀다).
그러나 황제들은 서로 유일 지배자가 되기 위해 싸웠고, 로마는 더욱 격렬한 내전에 휩싸였다. 이 싸
움은 대를 이어 계속되었는데, 이 중에서 두각을 드러낸 이는 콘스탄티누스였다. 그는 갈리아 지방(현
재 서유럽)의 카이사르인 콘스탄티우스 1세와 헬레나 사이에서 태어났다. 헬레나는 현재 비티니아 지
방(콘스탄티노플 인근)의 여관집 딸이었다. 그녀는 출신이 비천했기 때문에 얼마 후 남편에게 버림받
았지만, 독실한 기독교인으로서 아들의 신앙에 큰 영향을 미쳤다.
어릴 적 콘스탄티누스는 언제 죽을지 모를 정도로 불쌍한 신세였다. 아버지가 아우구스투스인 막시미
아누스의 양녀 테오도로와 재혼해서 여러 아들을 낳았기 때문에 장남으로서 그 지위는 불안했지만, 황
제 사이에서 인질이 필요할 때는 항상 불려가서 죽음과 대면하며 살았다. 그토록 힘든 청년 시절을 보
낼 때 에우세비우스라는 기독교 신학자를 만났고 이때부터 기독교에 빠져들었다. 그리고 기존의 제우
스 중심 다신교와 기독교 사이에서 교묘한 줄타기를 통해 정치적 입지를 강화해나갔다.
밀비우스 다리 전투: 콘스탄티누스는 여러 황제와 때로는 전쟁을 하고 때로는 정략결혼을 통해 동맹을
맺으며 점차 자신의 세력을 넓혀갔다. 그의 가장 강력한 적수는 아우구스투스였던 막시미아누스의 아
들 막센티우스였다. 막센티우스는 로마와 이탈리아 반도를 지배하면서 콘스탄티누스를 반역자라고 선
포했다. 그러자 콘스탄티누스는 다른 황제와 동맹을 맺고 10만의 병력을 동원해 로마로 쳐들어갔다.
양측은 로마 동북쪽 12킬로미터 지점인 삭사 루브라라는 곳에서 맞붙었다. 전투 직전 콘스탄티누스는
그 유명한 하늘의 십자가 환영을 보았고, 하나님의 가호를 받아 막센티우스 군대를 밀비우스 다리까지
밀어붙였다. 좁은 다리로 몰린 막센티우스 군대는 밟혀 죽고 빠져 죽고 칼에 찔려 죽었고, 그중에는
막센티우스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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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대적이며 절대적인 세계사

이 전투 이후 콘스탄티누스는 무패의 황제로서 거침없이 정적들을 제거하고 마침내 로마 제국을 다시
통일했다. 그러나 로마는 여전히 분열의 여지가 있었고 왕권도 불안정했다. 기독교에 경도된 콘스탄티
누스는 이제 유일신교로 로마를 통일하고자 했다.
당시 기독교는 여러 종파로 분열되어 있었다. 분열의 주제는 여럿이었지만 그중 대표적인 것은 과연
예수가 인간이냐 신이냐는 것이었다. 아리우스를 중심으로 하는 아리우스파는 예수는 하나님이 창조한
도구로 아버지 하나님에게 복종해야 하는 ‘인간’이라고 주장했다. 아리우스파와 그 반대자들의 갈등은
파문과 폭동으로 이어졌고 이는 기독교를 통해 제국을 통일하고자 하는 콘스탄티누스의 의도에 반하는
것이었다. 결국 325년 니케아에서 공의회를 열어 이 논쟁을 매듭을 짓고자 했다. 이것이 바로 그 유명
한 니케아 공의회다.
콘스탄티누스는 공의회를 철저하게 주도했다. 그는 아리우스를 파문하고 아리우스파 주교들을 벌했으
며 그들의 주장들을 소각했다. 또한 이 무렵 『성경』에 들어갈 경전과 뺄 경전을 정리했는데 『성경』
에 들어가지 못한 경전들을 외경이라고 한다. 외경이 존재한다는 것은 『성경』의 편찬에 콘스탄티누스
의 정치적 입장이 가미되었음을 보여준다는 주장도 있다.
콘스탄티누스의 기독교적 행보에 대해 로마 다신교의 심장인 로마 시민들은 노골적으로 거부감을 드러
냈다. 이제 콘스탄티누스는 로마가 아닌 새로운 수도가 필요했다. 그가 주목한 곳은 중동이었다. 로마
와 이탈리아 반도는 정치 중심지일 뿐 경제 중심지는 아니었다. 경제는 그리스 시대부터 항상 페르시
아 지역이 가장 발달해 있었다. 결국 콘스탄티누스는 가난하고 다신교를 믿는 유럽보다 풍요롭고 기독
교를 믿는 중동에 새로운 수도를 건설하기로 했다. 그가 새로운 수도로 점찍은 곳은 비잔티움이라는
도시였다. 삼면이 바다로 둘러싸여 있고 아시아와 유럽을 잇는 관문으로 경제적ㆍ군사적으로 천혜의
요충지였다. 마침내 비잔티움은 콘스탄티노플로 이름을 바꾸어 로마 제국의 새로운 수도가 되었고, 이
제 로마 제국의 중심이자 기독교의 중심이 되었다.
콘스탄티누스는 기독교를 장려하고 다신교를 억압했다. 기존 신전들을 파괴한 자리에 수많은 성당들이
건설되었고, 이교신을 숭배하는 의식은 금지되었다. 그는 종교의 자유를 허용한 것이 아니라 특정 종
교를 강요해 기독교는 사랑의 종교가 아니라 정치적 종교가 되었다. 그러나 기독교는 여전히 종파 간
대립이 심했고 콘스탄티누스는 갈망하던 통일을 보지 못한 채 죽고 말았다. 그가 죽은 후 로마의 분열
은 가속화되었고, 결국 변두리로 전락한 서로마는 476년 게르만족에 의해 멸망했다. 이후 서유럽은 로
마 교황이 주도하는 로마 가톨릭의 중세 시대로 접어들었고, 반면 새로운 로마의 중심인 동로마는 콘
스탄티노플을 중심으로 1,000년의 역사를 이어갔다.
유럽인들은 자신들이 로마의 역사를 계승했다며 동로마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고 그 역사를 오리엔트의
역사로 취급했다. 나라 이름도 로마가 아니라 비잔티움 제국이라는 오리엔탈식으로 불렀다. 이로써 로
마의 역사는 1,000년을 삭제당한 채 오늘에 이르고 있다.

선동의 정치
마리 앙투아네트와 혁명
황태자와 앙투아네트가 결혼하다: 17세기 절대왕정 시대는 또한 왕위 계승 전쟁의 시대였다. 유럽의
왕위 계승권은 사위나 외손자에게도 있었기 때문이다. 당시 유럽 왕실 전체가 합스부르크 가문과 혼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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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대적이며 절대적인 세계사

관계를 맺었기 때문에 사실상 모든 유럽의 왕과 왕자가 유럽 국가의 왕위 계승권을 갖고 있었다. 그래
서 왕이 죽을 때까지 왕위 계승 전쟁이 일어났다. 이 과정에서 가장 치열하게 대립한 나라가 프랑스와
오스트리아였다. 각각 서유럽과 중부 유럽을 대표하는 두 강대국은 왕위 계승 전쟁이 일어날 때마다
개입해 유럽의 패권을 차지하려 했다. 하지만 오랜 전쟁으로 양국의 재정은 피폐해졌고 성과 없는 전
쟁으로 왕의 권위도 실추되었다. 양국은 전쟁을 종식시키고 평화체제 구축을 갈망해 결국 결혼동맹이
성사되었는데, 프랑스의 황태자와 오스트리아의 공주 마리 앙투아네트가 결혼한 것이다.
앙투아네트는 오스트리아의 여왕 마리아 테레지아의 16남매 중 15번째로 딸 중에 막내였다. 응석받이
로 성장한 그녀는 아름답고 활달했지만 공부나 예의는 빵점이다. 테레지아는 막내딸이 평범하게 성장
해서 좋은 남자의 아내로 행복하게 살기를 바랐기 때문에 공부나 예의를 강요하지 않았다. 그렇기에
15세의 막내딸이 덜컥 프랑스 황태자에게 시집가게 되자 걱정이 태산 같았다. 그녀는 끊임없이 편지를
쓰고 심지어 장남 요제프를 프랑스에 보내서까지 그녀를 돌보려 애썼다. “그 애는 가장 영광스러운 왕
비가 되거나 가장 비극적인 왕비가 될 거야.”
그러나 자존심 강한 공주였던 앙투아네트는 어머니의 충고를 듣지 않고 베르사유 궁전에서 수많은 시
종과 귀족들에게 둘러싸인 채 천방지축으로 생활했다. 남편이 루이 16세로 즉위하자 프랑스의 왕비가
되었지만 그녀의 생활은 더욱 사치와 유흥에 빠졌다. 이 무렵 프랑스는 재정 악화로 서서히 쇠퇴해가
고 있었다. 잦은 전쟁으로 국고가 비었고 베르사유 궁전 등 왕실의 재정 낭비도 심각했다. 일례로 베
르사유 궁전에서는 매일 300여 명의 요리사가 1,000여 명분의 최고급 식사를 만들었다. 가혹한 세금
에 시달리던 평민들의 불만이 고조되고 바야흐로 프랑스에는 혁명의 기운이 무르익었다.
하지만 평범한 국민들은 여전히 왕과 왕비를 하늘처럼 떠받들었다. 그들은 자신들의 어려움을 하나님
의 징벌이나 몇몇 탐욕스러운 귀족 탓이라고 생각했다. 국민들은 어려우면 어려울수록 왕과 왕비가 그
들의 목소리를 듣고 구원해주기를 바랐다. 그러나 이래서는 세상이 변할 리 없다. 혁명가들은 국민들
이 왕과 왕비에 대해 불타는 적개심을 갖기를 원했다. 혁명가들은 상상력을 발휘해 오스트리아 출신
왕비의 난잡한 밤 생활을 소재로 한 소설을 창작해 파리 시내에 뿌렸다. 이놈 저놈과 아무데서나 사랑
을 나누고 향락을 위해 돈을 펑펑 쓰고, 멍청한 왕은 그것도 모르고 왕비에게 헤헤거리기만 하고…….
점점 분위기는 오스트리아 여자가 나라를 망쳐먹는다는 쪽으로 무르익어갔다.
그 무렵 결정적인 스캔들이 터졌다. 유명한 왕실 보석상이 지금 시가로 80억 원에 해당하는 엄청난 보
석 목걸이를 만들었다. 하지만 아무리 왕비가 사치스럽다 해도 목걸이 하나에 그 돈을 지불할 수는 없
었다. 그러자 사기꾼들이 보석상에 접근했다. 왕비에게 팔아주겠다고 하고 목걸이를 가로채서 달아난
것이다. 하지만 국민들은 왕비가 목걸이를 꿀꺽하고 시치미를 떼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소문의 영향력
이 진실을 가릴 정도로 커진 것이다.
루이 16세는 평민들의 조세 저항이 거세지자 삼부회(성직자, 귀족, 평민 대표로 구성된 신분제 의회)
를 소집해 귀족이나 성직자가 적절히 고통 분담을 하는 대안을 생각해냈다. 하지만 삼부회는 평민들에
게 일방적으로 세금을 부담시켰고 이에 평민 대표들이 반발해 국민의회를 구성하고 저항에 나섰다. 정
부가 국민의회를 탄압하자 분노한 파리 시민들이 시위에 나섰다. 그리고 운명의 날인 1789년 7월 14
일이 밝았다.
앙투아네트와 거짓 선동: 혁명가들은 왕의 군대가 곧 파리로 들어와 대규모 진압에 나설 것이라고 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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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대적이며 절대적인 세계사

각했다. 그전에 무기를 확보해 시민군을 조작해야만 했다. 그들은 바스티유 감옥에 무기가 있다는 정
보를 입수하고 즉각 행동에 들어갔다. “그동안 시위를 벌이다 체포된 사람들이 바스티유에 있다. 그들
은 오늘 아침 처형된다고 한다. 바스티유로 가자. 바스티유에 가서 동지들을 구출하자.” 성난 시민들이
바스티유로 몰려갔고 시민들의 손에 무기가 넘어갔다.
시민들이 무장하면서 혁명은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왕과 왕비는 파리 외곽의 작은 궁에 유폐되었다.
혁명가들은 왕비가 오스트리아의 군대를 불러와 시민들을 학살할 것이라며 선동했다. 왕과 왕비에 대
한 시민들의 적개심에 앙투아네트는 탈출을 결심했다. 왕과 왕비는 자식들과 함께 마차를 타고 오스트
리아로 탈출을 감행했지만 국경 근처에서 잡히고 말았다. 그러자 자국에도 혁명이 전파될 것을 우려한
오스트리아와 프로이센이 직접 개입했다. 전쟁이 일어나고 수많은 프랑스 청년들이 죽었다. 혁명가들
은 혁명에는 유능했지만 전쟁에는 무능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유럽 귀족이라는 존재가 바로 장
군과 장교를 의미했기에 귀족이 없으면 전쟁도 할 수 없었다.
국민들은 동요했다. 혁명으로 민생이 나아지기를 원했지만 죽는 사람만 늘어나고 경제는 더 나빠졌다.
왕과 왕비에 대한 여론이 동정으로 변해갔다. 혁명가 생쥐스트가 말했다. “루이 16세는 죽어야 합니다.
이유는 오직 하나. 그가 왕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루이 16세가 처형당했고, 다음 차례는 앙투아네
트였다. 그녀는 재판에 회부되었는데 죄목은 모두 파리에서 유행한 소문들이었다(기소 내용은 오스트
리아에 군대를 요청한 반역죄와 근친상간 등 난잡한 성생활이었다). 그녀는 강하게 부인했다. 사실 증
거도 없었다. 그러나 그녀는 죽어야 했다. 새벽 4시에 사형이 선고되었고, 정오에 집행되었다.
그녀는 당당하게 죽음에 임했다. 철없던 소녀 황태자비는 어느새 성숙하고 의연한 왕비로 변해 있었다.
그녀는 재판에서 자신을 변호했고, 사생활에 대해서는 동정적 여론을 끌어내기도 했다. 수레에 실려
형장으로 갈 때 그녀는 당당하게 고개를 들었으며, 기요틴 앞에 설 때는 집행자를 배려하는 모습도 보
였다. 그녀는 기요틴이 그녀의 목을 자를 때까지 두려운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반혁명적 귀족들은 그
녀가 왕비답게 죽었다고 찬양했다.
프랑스혁명은 거짓 선동으로 얼룩졌고 특히 그녀에 대해서 심각했다. 억울한 시련 속에 앙투아네트는
강하게 단련되었고 의연해졌다. 혹자는 “왕비가 필요할 때 왕비답지 못했고, 왕비가 필요 없을 때 왕
비다웠다”고 평가하기도 했다.
혁명의 시기, 거짓 선동은 양면성을 갖는다. 거짓으로 사람을 현혹시켜 목적을 달성하려는 측면과 현
재의 정치적 본질을 국민적 눈높이에 맞춰 표현하려는 측면이 있다. 국민의 90퍼센트가 문맹인 시절
선동은 필수적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선동이 분명 혁명의 광기를 강화하고 반혁명을 야기하는 것도 사
실이다. 선동이야말로 우리가 근대 혁명사를 공부할 때 진지하게 분석할 과제라는 것을 잘 보여준 것
이 바로 프랑스 혁명이다.
신해혁명과 한족 민족주의
캉유웨이의 변법자강운동: 19세기 서양에서 근대 민족주의가 들어왔다. 민족국가 건설은 근대화의 핵
심 요소였다. 하지만 청나라는 민족주의 때문에 망했다. 민족국가가 정답이 아니라는 뜻이다. 1840년
아편전쟁은 마약 수출을 위해 영국이 일으킨 전쟁이다. 말도 안 되는 전쟁이지만 19세기는 극단적인
국가 이기주의 시대, 국익을 위해서는 마약을 팔고 그것을 방해하면 전쟁을 일으키는 시대였다. 그 소
용돌이 속에서 청나라는 서서히 서양에 영토와 이권을 빼앗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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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대적이며 절대적인 세계사

서양의 압도적인 힘은 군사력에서 나왔다. 아편전쟁에서 그 힘을 경험한 청나라 한족 지식인들은 이홍
장(1823~1901)을 중심으로 서양의 무기와 기계를 수입하자는 양무운동을 일으켰다. 하지만 청나라
지배족인 만주족은 한족이 군사력을 장악하면 장차 만주족을 몰아내고 새로운 왕조를 건설할 수도 있
을 거라고 생각하여 양무운동을 방해하려 했다.
양무운동이 가능했던 것은 서태후(1835~1908) 덕이었다. 서태후는 함풍제의 후궁이었는데 그의 사랑
을 받아 장남 재순을 낳았다. 서태후는 함풍제가 일찍 죽고 재순이 즉위해 동치제가 되자 섭정이 되었
다. 단지 후궁이기 때문에 황후인 동태후와 공동 섭정이 되었다. 동태후는 만주족 왕조의 유지만을 중
시했지만, 서태후는 근대적 개혁도 중시해 양무운동의 후원자가 되었다. 동태후와 만주족 귀족의 반대
로 양무운동이 중단되면 서태후가 재개하는 일이 잦았고, 이 과정에서 양무운동이 주도한 정치세력,
소위 양무파는 서태후의 권력 기반이 되었다. 1874년 동치제가 후사 없이 죽자 서태후는 동치제의 조
카뻘인 불과 3세의 광서제를 즉위시킴으로써 섭정의 권력을 더욱 강화시킬 수 있었다.
그러나 양무운동은 실패였다. 무기와 기계는 서양의 힘의 원천이 아니었다. 서양의 힘은 제도와 체제
에서 나왔다. 그 체제를 수용한 것은 일본이었고, 결국 청일전쟁에서 일본이 승리하고 청나라가 패배
하면서 30년 양무운동이 헛된 것에 지나지 않았음이 밝혀졌다.
청일전쟁 패전에 낙담한 광서제는 과거 시험을 위해 베이징에 몰려온 유생들에게 국난을 타개할 계책
을 물었다. 유생들 중에서 캉유웨이(1858~1927)가 써낸 개혁안이 광서제의 마음에 쏙 들었다. 일본식
개혁을 수용하자는 이 제안에 따라 추진한 근대적 개혁운동을 변법자강운동, 즉 무술변법이라고 하며,
캉유웨이는 일약 정국의 중심으로 부상했다. 하지만 서태후는 군대를 동원해 광서제를 유폐하고 변법
파들을 숙청하는 무술정변(1898년)을 일으켰다. 결국 캉유웨이 등이 일본으로 망명하면서 무술변법은
실패하고 말았다.
무술변법이 추구한 것은 입헌 군주제로서 의회가 핵심이었다. 문제는 청나라 인구의 90퍼센트가 한족
이라는 점이다. 국민이 선출하는 의회에 권력을 넘겨주면 당연히 권력은 한족에게 넘어간다. 소수민족
인 만주족의 지배를 유지하려면 왕조 체제가 유일한 길이었다. 따라서 청나라에서 의회를 설치하는 것
은 가장 급진적인 국가 전복 사상이 되는 것이다. 아무리 서태후라 해도 나라를 넘겨주는 개혁을 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청나라는 청일전쟁 이후 급속도로 약화되었다. 외세의 침략이 가중되면서 민중들의 반외세 의식이 고
조되자 서태후는 이를 이용해 외세를 물리치고 청나라를 지키고자 했다. 하지만 민중들의 반외세 투쟁
인 의회단의 봉기(1900년)는 서양 8개국 연합군의 무력 앞에 패배하고 말았다. 서태후는 서양의 압력
에 굴복해 할 수 없이 이런저런 개혁 조치를 발표했지만, 시늉만 하는 수준이었고 어떻게든 청나라를
지키려고 노력했다.
무능한 정부 밑에서 민중은 고통을 받는다. 서양 선교사들은 기독교를 믿지 않는 이교의 무리를 벌해
야 한다며 절과 도교 사원을 방화하고 불교나 도교 신자들을 구타하고 심지어 죽이기까지 했다. 서양
인들은 무덤을 도굴하고 농토를 빼앗았으며 그들의 공장에서 중국인에게 극도의 저임금 장시간 노동을
강요했다. 참다못한 민중들이 반발하자 서양 군대나 그들에 협조하는 중국인 무장집단이 학살을 자행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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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대적이며 절대적인 세계사

청나라가 망하고 중화민국이 탄생하다: 이제 청나라를 타도하지 못하면 중국인 전체가 죽을 판이었다.
이때 쑨원이 나섰다. 그는 청나라를 타도하고 한족 민족국가를 세우는 것만이 살 길이라고 주장했다.
하지만 많은 한족 지식인이 청나라에 충성했고, 무엇보다 청나라 최강의 군대인 양무군이 서태후를 지
지했다. 캉유웨이조차도 청나라 타도에는 반대했다. 결국 쑨원의 반청 봉기는 실패했고 쑨원은 일본으
로 망명했다.
근대 경제를 일으키려면 교통의 혁명이 필요했는데, 당시 교통의 혁명은 철도였다. 청나라 역시 철도
를 놓기 위해 많은 공을 들였다. 그러나 철도는 중국을 침략하려는 서양에도 꼭 필요한 것이었다. 서
양은 청나라가 공들여 건설한 철도를 빼앗았다. 한족의 뜻 있는 사람들은 철도를 잃으면 근대화가 어
렵다고 믿었다. 그들은 모금운동을 벌여 철도를 조금씩 사들이거나 민영으로 건설했다. 1910년이 되자
많은 철도가 한족의 수중에 들어갔다. 그러나 개인 소유였기 때문에 방만하게 운영되고 있어 정부의
효율적 통제가 필요했다. 청나라 조정은 철도 국유화를 발표했다.
하지만 한족 혁명가들은 이를 서양의 철도 침략의 사전 단계로 보았다. 철도를 국유화해 정부에 일원
화한 뒤 서양이 한꺼번에 빼앗는다는 것이다. 한족 혁명가들은 이러한 상황을 민중들에게 설명했다.
그러자 분노한 민중들이 철도 국유화에 반대하는 저항운동에 나섰다. 청나라 조정은 지방군인 신군에
게 즉각 저항운동을 진압하라고 명했다. 1911년 9월이었고, 서태후는 벌써 3년 전에 죽고 없었다.
문제는 신군이었다. 쑨원의 반청 봉기가 실패한 후 혁명가들은 군대가 필요하다고 생각하고 대거 신군
에 입대했다. 신군이야말로 한족의 혁명 무력이었던 것이다. 신군은 진압 명령을 받고 합법적으로 중
무장한 채 병영을 나올 수 있었다. 지역별로 신군이 봉기해 혁명정부를 세웠다. 마침내 신해혁명이 일
어난 것이다. 쑨원은 혁명 소식이 들려오자 급히 귀국해 임시혁명정부를 수립했다. 그러자 청나라 조
정에서는 양무군에 진압을 명했다. 양무군 사령관은 위안스카이였다. 하지만 서태후가 없는 청나라는
양무군의 충성의 대상이 아니었다. 한편 쑨원은 양무군의 등장에 벌벌 떨었다. 지방군인 신군은 50년
동안 서양식 군대로 양성된 양무군에 비하면 오합지졸에 지나지 않았다. 그는 위안스카이를 설득하기
위해 담판에 나섰다. 위안스카이가 쑨원에게 말했다. “모든 권력을 내게 넘기시오. 그러면 내가 혁명정
부 대총통으로서 청나라를 타도하고 신중국을 건설하겠소.” 쑨원은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그
렇게 청나라는 망하고 중화민국이 탄생했다.
특정 민족이 다수를 차지하고 수많은 소수민족이 공존하는 나라에서 민족국가 건설이나 의회를 통한
민주정치는 불가능했다. 민족국가와 절차적 민주주의를 강조하는 근데 국가 이념은 청나라에 어울리지
않았고, 결국 청나라는 한족 민족주의에 타도되고 말았다. 하지만 21세기 중국 역시 19세기 말 청나라
가 직면했던 것과 똑같은 고민에 처해 있다. 중국 같은 다민족 국가에 어울리는 새로운 국가체제는 과
연 어떤 것일까?

세계를 바꾼 전쟁
국공 내전과 베트남전쟁
5ㆍ4운동이 일어나다: 중국 현대사는 1919년 5ㆍ4운동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신해혁명으로 수립된 중
화민국은 총통 위안스카이가 죽은 뒤 여러 개의 군벌이 난립하는 무정부 상태에 빠졌다. 군벌들은 상
대 군벌에 우위를 점하기 위해 외세와 결탁했는데, 이것이 중국을 더욱 수렁에 빠뜨렸다. 특히, 중국은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일본이 요구한 21개조를 수용함으로써 일본의 식민지로 전락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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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대적이며 절대적인 세계사

이에 분노한 베이징의 대학생들이 일본의 21개조에 반대하는 5ㆍ4운동을 일으켰다. 5ㆍ4운동은 전국
적으로 번졌고 결국 일본은 21개조를 철회하기에 이르렀다. 신해혁명의 지도자 쑨원은 이 운동에 영감
을 받고 국민당을 건설해 군벌을 타도하고 중국에 혁명정부를 수립하기로 마음먹었다. 한편 5ㆍ4운동
을 주도한 학생과 지식인들은 공산당을 조직해 혁명운동에 나섰다. 쑨원은 공산당과 제1차 국공합작을
통해 힘을 모아 군벌을 타도하는 북벌에 나섰다.
그런데 북벌 도중 쑨원이 죽고 장제스(1887~1975)가 새로운 국민당 지도자가 되었다. 장제스는 쑨원
이 일본에 망명해 있을 때 그 수하가 된 인물로 친일파였고 극우 폭력 조직 청방과 연계되었다는 소문
이 있을 정도로 극우적이었다. 그는 북벌이 성공한 후 직후 쿠데타를 일으켜 공산당을 숙청했다. 공산
당은 도시에서 노동자들의 무장 봉기를 통해 반격을 시도했지만, 이로 인해 초기 공산당원 대부분이
죽음을 당하고 말았다.
당시 중국 공산당은 코민테른의 ‘지도’를 받았고 마르크스ㆍ레닌주의를 맹목적으로 추종했다. 그러나
공업화가 되지 않은 중국에서 노동자는 극소수였고 이들의 무력 투쟁을 통해 혁명을 한다는 것은 몽상
이었다. 이에 지방 출신 공산당원들이 마오쩌둥(1893~1976)을 중심으로 농촌에 기반한 새로운 공산
당 활동을 모색했다. 소위 마오주의였다.
마오쩌둥의 공산당은 국민당의 토벌을 피해 내륙 깊숙이 달아났는데, 이를 ‘대장정’이라고 한다. 마침
내 내륙 오지인 옌안에 도착했을 때 공산당은 빈사 상태였고 당원은 경우 10퍼센트만 생존해 있었다.
하지만 대장정은 일방적으로 공산당이 패주한 것이 아니었다. 공산당은 가는 길마다 농촌에 들어가 지
주를 죽이고 농지를 분배했다. 그러면 국민당군이 들어와 농지를 유족에게 돌려주고 공산당에 협조한
사람들을 죽였다. 대장정 기간에 중국의 광활한 농촌 지역에는 ‘공산당=농민 편’, ‘국민당=지주 편’이라
는 공식이 세워졌다. 국민당은 공산당을 토벌했다고 믿었지만 중국의 90퍼센트에 해당하는 농촌이 공
산당에 넘어가고 있었던 것이다.
미국이 패전한 이유: 공산당은 아무리 죽여도 사라지지 않았다. 친일파인 장제스는 공산당은 암이고
일본은 감기라고 믿고 일본이 쳐들어와도 군대를 옌안에서 돌리지 않았다. 그러나 당시 옌안 토벌의
핵심 부대인 만주군을 이끌던 장쉐량이 쿠데타를 일으켜 장제스에게 일본과 싸울 것을 요구하는 바람
에 제2차 국공합작이 이루어졌다. 제2차 국공합작의 최대 수혜자는 공산당이었다. 이로 인해 민심이
완전히 공산당으로 돌아섰기 때문이다.
일본이 패망하자 미국은 국민당이 국민의 지지를 받지 못하는 것에 크게 우려했다. 미군은 국민당군에
게 공산당군과의 휴전을 종용하며 장제스에게 민주적 개혁을 먼저 추진하라고 설득했다. 그러나 장제
스는 민주주의에 관심이 없었다. 그는 민주주의를 요구하는 국민의 목소리를 공산당의 목소리로 받아
들였다. 미국에서 지원받은 신형 무기로 무장한 400만 국민당군이 일본군이 버리고 간 무기로 무장한
100만 공산당군을 공격했다. 공산당군은 뿔뿔이 흩어졌고 옌안이 함락되었다. 전쟁은 곧 끝날 것 같았
다. 그러나 민심이 동요했고 장제스가 점령한 곳은 겨우 몇몇 도시와 도시를 연결하는 도로망뿐이었다.
장제스는 선과 점을 점령했고 공산당군은 면을 점령하고 있었다. 장제스는 자신이 승리했다고 착각하
고 있었지만 실제로는 포위당한 상태였다.
1947년 7월 공산당군의 대반격이 시작되었다. 곳곳에서 국민당군이 패퇴했다. 국민당군은 수는 많았
지만 대부분의 군인이 농민의 자식으로 농민군인 공산당군과 싸울 의지가 없었다. 그들은 미제 무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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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대적이며 절대적인 세계사

들고 공산당군에 투항했다. 장제스에 대한 충성심이 없었던 국민당 장교들은 공산당군에게 무기를 팔
아 돈을 챙겨 미국으로 망명하려고 했다. 400만 국민당군은 불과 1년 만에 궤멸되고 말았다.
그 후 10년 뒤 비슷한 일이 베트남에서 벌어졌다. 1956년 디엔비엔푸 전투에서 프랑스군이 패하자 미
국이 개입해 베트남을 남북으로 분단시키고 남베트남(월남)에 친미 정부를 수립했다. 미국은 자신의
압도적 무력과 합리적이고 효율적인 체제에 자신감이 넘쳤다. 그러나 공산 게릴라들의 공격은 집요했
다. 미 공군은 북베트남을 폭격하고 주요 도로를 파괴했다. 북베트남의 물자가 라오스와 캄보디아를
거쳐 내려온다고 생각하고 캄보디아에도 폭격을 가해 베트남전쟁은 인도차이나 반도 전역으로 확대되
었다. 그러나 1968년 1월 공산당군의 소위 ‘구정 대공세’를 계기로 전 세계에 반전 여론이 일어나면서
결국 미군은 철수하고 베트남은 공산화되었다.
첨단 무기로 무장한 압도적 다수의 군대가 소수 게릴라에게 무릎을 꿇었다. 이는 전쟁의 승리가 거점
의 점령이 아니라 민심의 장악에 있다는 평범한 진리를 외면했기 때문이다. 고대 전쟁에서 21세기 첨
단 전쟁에 이르기까지 변하지 않는 전쟁의 절대 원칙은 민심을 잡는 쪽이 궁극의 승리를 거둔다는 것
이다. 이는 지금도 중동과 아프리카에서 증명되고 있다.

일본의 정체성
근대화와 민주주의의 발전
번벌 세력과 사무라이 세력: 1842년 아편전쟁의 결과 중국이 개항하자 일본은 위기감에 빠졌고, 1853
년 미국의 매슈 페리 제독이 전함을 이끌고 개항을 요구하자 막부는 순순히 받아들였다. 이후 서양 문
물이 밀물처럼 들어왔고 일본은 대혼란에 빠졌다. 일본인들은 이 모든 재앙을 무책임하게 개항한 막부
탓으로 돌리고 막부 타도와 존왕양이(尊王攘夷) 운동을 펼쳤다. 마침내 1868년 에도 막부가 멸망하고
메이지 천황이 직접 다스리는 천황 친정의 시대가 열렸다.
메이지 천황은 무서운 천황이었다. 개항 직후 일본은 사쓰마번과 조슈번 같은 근대화를 추구하는 번벌
세력, 존왕양이를 주장하는 몰락 사무라이 세력 등이 어지럽게 난립했고 농민 봉기도 심심찮게 일어났
다. 이러한 정치적 혼란과 민중 봉기 속에서 서양 세력의 침략을 물리치고 근대화를 추진하려면 강력
한 리더십이 필요하다고 천황은 판단했다. 천황은 곧 지방 순회를 통해 과거 영주들의 충성을 다짐받
았다. 또한 입을 꾹 다문 화난 듯한 표정의 초상화를 유포해 국민들을 압박했다. 신격화된 권위적 천
황은 국민들 위에 군림했다.
사무라이 세력은 천황 친정의 1등 공신이었지만 근대화에 저항함으로써 버림받았다. 이들은 암살, 폭
동, 봉기 등으로 정부에 대항했지만 모두 실패했다. 1877년 세이난 전쟁을 일으켰지만 실패하고 사이
고 다카모리가 할복하면서 최후의 저항은 분쇄되었다. 그러나 권력에서 소외된 세력들은 새로운 운동
을 통해 재기를 도모했다. 바로 민주화 투쟁이었다. 존왕양이를 주장하던 소외 세력은 일본의 모든 문
제는 번벌 세력이 권력을 독점하고 천황의 총기를 흐리게 하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그래서 번벌세력
을 견제할 제도적 장치로 의회정치를 생각해냈다. 의회를 토대로 하는 서양식 입헌군주제 운동이 반근
대화 세력의 지지 속에 일어나자 천황은 이를 수용하기로 결정했다. 이토 히로부미는 독일 헌법을 참
고해 강력한 천황권 중심의 입헌군주제 헌법을 만들어냈다.
침략 전쟁을 일으키다: 1912년 메이지 천황이 죽고 다이쇼 천황이 즉위했다. 다이쇼 천황은 정신질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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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대적이며 절대적인 세계사

을 앓고 있어 정부에 의존했고 이로 인해 정당정치가 비약적으로 발전했다. 또 한일병합과 제1차 세계
대전으로 경제는 엄청난 호황이었고 중산층이 성장하고 소비문화가 폭발하는 등 일본인은 한 번도 경
험해보지 못한 풍요와 자유를 누렸다. 이를 ‘다이쇼 데모크라시 시대’라고 한다. 선거권자가 확대되어
점점 보통선거 시대로 진입했고, 수만 명이 시위를 벌여 집권 여당을 교체하기도 했으며, 공산당이 의
회에 진출해 식민 지배를 비판하는 것이 일상적 풍경이었다.
그러나 다이쇼 데모크라시 시대는 오래가지 못했다. 1920년대 초반 과도하게 팽창한 군수산업으로 인
해 경제의 균형이 무너지면서 불황이 닥쳤다. 사회주의의 활동과 노동자의 파업은 중산층의 불안감을
부채질했다. 일본 재벌과 군부는 대외 팽창으로 이 문제를 해결하고자 했다. 마침 다이쇼 천황의 건강
이 악화로 섭정을 맡았던 황태자 히로히토 역시 그들과 같은 생각이었다. 1925년 치안유지법이 통과되
어 반정부 인사와 사회주의자 등을 잡아들이기 시작했다. 천황 중심의 독재정치 강화는 1926년 히로
히토가 쇼와 천황으로 즉위하면서 더욱 강화되었다.
1931년 만주를 침략하면서 일본의 침략 전쟁이 시작되었다. 국제 연맹을 탈퇴하고 독일의 히틀러, 이
탈리아의 무솔리니, 스페인의 프랑코 등과 손잡고 전체주의 진영의 일원으로 중국에 대한 공세를 강화
했다. 1932년 상하이 사변, 1935년 화베이 사변으로 중국 본토를 넘보더니 마침내 1937년 중일전쟁을
일으켰다. 그리고 이를 저지하던 미국에 대항해 1941년 12월 태평양 전쟁을 일으켰다. 일본은 15년간
의 전쟁 기간에 군수산업 중심의 중화학 공업이 비정상적으로 발달했고 이로 인해 민생이 크게 악화되
었다. 일본인들은 권력에 철저하게 억압되었고, 청년들은 전쟁터로 끌려가 무사도 운운하는 세뇌 교육
을 받고 총알받이가 되었다. 200만 명 이상의 청년이 전쟁터에서 죽었다.
메이지유신부터 1945년 패전까지 일본의 1차 근대화는 실패였다. 그러나 경제성장과 민주주의에 대한
기억만큼은 분명 전후 일본에 긍정적인 영향을 끼치기에 충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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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대적이며 절대적인 세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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