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고 보면 무시무시한 엽기인물 세계사
▣ Short Summary
인간의 마음만큼 난해한 것도 없다. 심해처럼 바닥을 알 수 없고, 그래서 공포스럽다. ‘영웅’이나 ‘위인’
이라 불리는 인물들이 세계사를 움직여왔다. 그들은 과연 평범한 사람들과는 전혀 다른 마음을 가지고
있을까? 아니, 그렇지 않다. 그들 역시 우리와 다를 바 없는 한 인간이며 야심과 욕망, 교활함과 집착
따위 복합적 감정에 얽매여 있는 비루한 존재일 뿐이다. 그런 구체적인 인간의 감정, 즉 ‘마음’이야말
로 세계 역사를 움직이고 추동해온 진정한 힘이 아닐까.
이 책에서 우리는 널리 알려진 인물들의 가면을 벗기고 그 가면 속에 감춰진 ‘진짜 얼굴’을 들여다본다.
나이팅게일은 그런 대표 사례로 꼽을 만하다. 그는 크림전쟁의 ‘천사’였다. 충격적이게도 ‘백의의 천사’
보다 ‘죽음의 천사’에 가까웠다는 사실이 문제지만. 나이팅게일은 왜 ‘죽음의 천사’라는 오명을 뒤집어
썼을까? 그가 목숨을 구한 환자보다 사망으로 이끈 환자 수가 훨씬 많았기 때문이다. 당시 죽은 환자
중에는 제때 적절한 치료만 받았다면 생명을 구했을 사람도 적지 않았다. 실제로 나이팅게일이 간호
책임자로 근무한 이스탄불 근교 스쿠타리 병원에서는 환자 2만 5,000명 중 사망자가 1만 8,000명에
달할 정도였다.
나이팅게일은 왜 간호사가 되었을까? 사실 나이팅게일은 상당한 재력을 가진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난
상류층이었던 데 반해 당시 병원은 하층계급 사람들을 위한 시설이었으며, 간호사는 누구나 기피하는
비천한 직업으로 인식되었기 때문이다. 심지어 매춘부가 부업으로 간호사를 겸업할 정도였으니 더 말
해 무엇하랴. 그런데도 나이팅게일은 왜 간호사가 되려 했을까? ‘나는 특별한 사람이다’라는 자부심과
‘위대한 인물’이 되어 사람들에게 존경받고 싶은 욕망 때문이 아니었나 싶다. 그러나 마치 어설픈 초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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댄서가 몸과 마음이 따로 놀 듯 이상과 현실에 괴리가 생긴 결과가 그에게 ‘죽음의 천사’라는 오명을
씌운 주요 원인이었던 건 아닐까. 전기작가 휴 스몰이 “플로렌스 나이팅게일은 인류 역사상 가장 유명
한 환자 중 한 명이다”라고 야박하게 평가한 것도 그런 맥락에서였을 것이다.
간디의 경우는 나이팅게일보다 더 심하다. 간디는 비폭력주의를 관철하며 영국의 식민지였던 인도가
마침내 독립국이 되는 데 이바지했다. 인도의 시인 타고르가 존경의 뜻을 담아 그에게 ‘위대한 영웅’이
라는 의미의 ‘마하트마’라는 호칭을 붙여준 것도 그런 맥락에서였다. 그러나 간디는 철저히 이중적인
삶을 살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는 영국에 맞서 싸우며 인도인의 자유와 평등을 일관되게 추구
했지만 다른 한편으로 인도의 전통적 신분제도를 철저히 옹호했을 뿐 아니라 명백한 인종차별 의식까
지 드러냈다. 그런데 진짜 심각한 것은 ‘성 문제’였다. 만년에 그는 아내 이외의 여러 여성과 알몸으로
동침했는데, 충격적이게도 어린 소녀, 지지자, 심지어 조카의 아내까지 포함돼 있었다.
이 책에는 30여 명 역사적 인물들의 은밀하고도 위험천만한 욕망이 예기치 못한 방향으로 세계사를
바꾼 흥미진진한 이야기로 빼곡하다. 자, 함께 책 속으로 들어가 보자.
▣ 차례
서문_ 30여 명 역사적 인물들의 은밀하고도 위험천만한 욕망이 예기치 못한 방향으로 세계사를 바꾸다
1. 우리가 미처 몰랐던 ‘두 얼굴의 위인’ 이야기
episode 01 나이팅게일은 과연 ‘백의의 천사’였을까
episode 02 힌두교 성인이 되고자 애썼으나 성욕의 포로가 돼버린 간디
episode 03 밤에는 연인에게 애교를 부리고 낮에는 연인의 뺨을 때린 무서운 여자 엘리자베스 1세
episode 04 여러 남자를 유혹했으나 자기 자신과 재물, ‘여왕’이라는 직위만을 사랑했던 여인 클레오파
트라
episode 05 방사성 물질 라듐을 자식처럼 아끼고 사랑한 천재 여성 과학자 마리 퀴리
episode 06 인생의 바닥에 내려가서야 비로소 자신이 원한 온전한 자연인의 삶을 살게 된 마리 앙투아
네트
episode 07 신의 음성을 듣고 프랑스를 위기에서 구했으나 마녀로 몰려 세 번이나 화형당한 비운의 여
인 잔 다르크
2. 위대한 군주도 피해가지 못한 위험하고 치명적인 성욕
episode 08 죽은 아내를 그리워해 21년간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영묘 ‘타지마할’을 지은 샤 자한
episode 09 한편으로 전족을 엄격히 금지하면서 다른 한편으로 병적으로 즐긴 청 황제 건륭제
episode 10 ‘왕관을 쓴 창부’ 예카테리나 2세와 그의 연인들
episode 11 한때 자신이 끔찍이 사랑한 여인들을 줄줄이 처형대로 보낸 사이코패스 왕 헨리 8세
episode 12 욕정을 채우기 위해서라면 며느리도 마다치 않은 희대의 호색한 황제 당 현종
episode 13 나폴레옹과 조제핀의 기묘하고도 엽기적인 사랑
3. 평범함 속에 감춰진 비범함으로 세계사를 뒤흔든 기묘한 인물 이야기
episode 14 로마노프 왕조를 멸망으로 몰고 간 악마 성직자 라스푸틴
episode 15 인류가 낳은 가장 유명하고 논쟁적인 예언가 노스트라다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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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고 보면 무시무시한 엽기인물 세계사
episode 16 끔찍한 방법으로 사형당하는 범죄자 못지않게 끔찍한 삶을 산 사형집행인 상송 가문
episode 17 나폴레옹과 히틀러를 광기로 몰고 간 성유물 롱기누스의 창
episode 18 고귀한 피를 지키려는 노력을 대대로 흐르는 저주로 돌려받은 합스부르크 가문 사람들
episode 19 가장 비루하지만 가장 생명력이 질긴 사람, 환관
4. 인간에게 가장 잔혹했던 인간들 이야기
episode 20 ‘하멜른의 피리 부는 사나이’의 정체는 과연 무엇이었을까
episode 21 인간이 인간에게 할 수 있는 가장 잔인하고 야만적 행위, ‘마녀사냥’
episode 22 왕권신수설을 증명하는 중요한 행위, 로열 터치
episode 23 아내의 그곳에 정조대를 채워서라도 순결을 보장받고 싶어 했던 중세 유럽의 남성들
episode 24 르네상스 시대 전 유럽에 열풍을 몰고 온 독특한 남성 패션 아이템, 샅보대
episode 25 기독교가 인정하는 최고 등급의 성유물, 성인의 유해
5. ‘성’과 ‘사랑’을 도구로 부와 권력을 쟁취하려 분투한 사람들 이야기
episode 26 ‘성’을 무기로 신분 상승의 꿈을 이룬 여성, 퐁파두르 부인
episode 27 남편의 관과 함께 황야를 떠돈 스페인의 ‘미친 여왕’ 후아나
episode 28 ‘블러디 메리’라는 악명을 얻은 메리 여왕의 황당한 ‘상상 임신’
episode 29 합스부르크가의 걸출한 여제이자 위험하고 해로운 독을 품은 어머니였던 마리아 테레지
6. 인간의 내면에 감춰진 ‘악마’의 본성이 깨어나다
episode 30 권력만 믿고 수많은 사람에게 잔학행위를 일삼다가 천벌 받은 이반 뇌제
episode 31 19세기 말 런던을 공포의 도가니에 몰아넣은 역사상 가장 잔혹한 살인마 잭 더 리퍼
episode 32 인류를 품종 개량한 역사상 최악의 독재자 히틀러의 ‘진짜 목적’은?
episode 33 때로 광기에 사로잡혀 성인과 죄인을 넘나든 종교개혁의 선봉장 마르틴 루터
episode 34 300명의 미소년을 무참히 살해한 희대의 살인마 질 드 레
episode 35 환상적 세계관에 광적으로 집착하다 비극적 죽음을 맞이한 군주 루트비히 2세
episode 36 나치의 비뚤어진 철학이 부른 당 고위 간부의 엽기적인 아이 유괴사건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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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고 보면 무시무시한 엽기인물 세계사
알고 보면 무시무시한 엽기인물 세계사
호리에 히로키 지음
사람과나무사이 / 2021년 11월 / 316쪽 / 17,500원
우리가 미처 몰랐던 ‘두 얼굴의 위인’ 이야기
힌두교 성인이 되고자 애썼으나 성욕의 포로가 돼버린 간디
비폭력주의의 상징과도 같은 간디가 자기 가족에게는 폭력을 일삼았다고?: 마하트마 간디(Mahatma
Gandhi, 1869~1948)는 20세기를 대표하는 위인이다. ‘마하트마’는 인도의 위대한 시인 타고르가 존경
의 뜻을 담아 지어준 이름으로, ‘위대한 영혼’이라는 의미의 산스크리트어다. 간디는 어떻게 이 특별한
호칭을 얻을 수 있었을까?
여기에는 그의 두 가지 업적이 배경이 되어주었다. 하나는 100년 가까이 영국의 식민지였던 인도가 독
립국이 되는 데 그가 크게 이바지했다는 점이다. 다른 하나는 이 업적이 ‘비폭력주의’를 일관되게 관철
하며 이루어낸 성과라는 점이다. 간디는 독보적인 업적으로 명성을 얻었으며 ‘위대한 영혼의 소유자’라
는 별칭까지 얻었다. 하지만 간디의 삶 속으로 한 발짝 더 들어가 보면 그의 내면과 외양, 그리고 사상
과 행위 사이에 심각한 모순이 발견된다. 특히 비폭력주의의 상징과도 같은 그가 자기 가족에게 오히
려 폭력적인 모습을 뚜렷이 드러내곤 했다는 대목이 우리를 더욱 놀라게 한다.
위대한 사상가나 정치가라기보다는 힌두교 성인이 되고자 애쓰다가 미묘한 차이로 실패한 인물, 간디:
간디는 제국주의 영국에 맞서 싸우며 억압받는 인도인의 자유와 평등을 일관되게 추구했다. 그러나 그
는 다른 한편으로 인도의 전통적 신분제도를 옹호하고 고집했다. 간디는 독실한 힌두교도였다. 힌두교
에서 인간은 ‘브라만(사제)’, ‘크샤트리아(왕족과 무사)’, ‘바이샤(평민)’, ‘수드라(노예)’ 네 가지 카스트로
구분되며 이 제도는 완벽하게 세습되었다. 여기에 더해 ‘달리트’라는 불가촉천민이 있다. 간디 집안은
평민인 바이샤 계급에 속했다. 수드라 이하의 사람이 인도 전체 인구의 85퍼센트 수를 차지한다.
인도에서 세습신분과 직업문화는 떼려야 뗄 수 없는 불가분의 관계다. 그러므로 카스트의 해체는 인도
사회와 전통문화의 해체를 의미한다. 간디는 이러한 상황을 우려했다. 실제로 간디는 매우 보수적인
사상가였다. 또한 그는 이중적인 모습도 드러냈다. 예컨대 그는 주변 사람들에게는 불가촉천민과의 결
혼을 권장하면서 다른 한편으로 자기 아들이 신분이 낮은 이슬람교 여성과 결혼하려고 하자 완강히 반
대했다. 이것은 그가 힌두교라는 전통적 가치관을 지나치게 중시해서 생긴 일로 볼 수 있다. 우리는
간디를 위대한 정치가나 사상가로 생각하지만, 실제로 그는 힌두교 성인이 되고자 애쓰다가 미묘한 차
이로 실패한 인물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든다.
지지자와 친척의 아내, 심지어 조카의 아내와도 알몸으로 동침한 간디: 실제로 간디는 성자가 되고자
절대금욕을 유지하려 했지만 번번이 실패했다. 1882년 그는 열세 살 나이에 동갑내기인 카스투르바와
중매로 결혼했다. 성욕이 가장 왕성한 시기를 아내와의 잠자리로 나름대로 욕구를 해소하며 지낸 간디
는 열여덟 살 이른 나이에 아버지가 되었다. 그러나 열여덟 살 간디는 어느 날 갓 태어난 아들과 아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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를 두고 홀연히 영국으로 유학을 떠났다. 당시 영국은 금욕주의가 대세였기에 그곳에서 그는 자신의
분방한 성생활과 영국인 삶 사이에 위화감을 느꼈다. 젊은 시절 금욕으로 애태우던 간디는 성욕이 한
풀 꺾인 서른일곱 살이 되었을 때 ‘성관계를 하지 않겠다’라고 공개적으로 선언했다. 물론 이는 아내와
한마디 상의도 없이 일방적으로 내린 결정이었다.
훗날 간디는 한 지지자에게 보낸 편지에서 다음과 같이 언급했다. “제 아내는 (성적) 욕망의 대상이었
을 때는 열등한 존재였습니다. 그러나 그녀가 제 곁에서 알몸으로도 여동생처럼 잠잘 수 있게 되면서
더는 열등한 존재가 아니게 되었습니다.” 자기 입으로 이렇게 단언했으니 부부간 섹스를 더는 하지 않
았을 것이다. 더구나 만년의 간디와 함께 잔 사람은 아내가 아니라 간디의 개인비서의 여동생이자 의
사로서 간디를 간호한 수실라 나야르였다.
더욱 충격적인 사실은 간디가 그 외에도 어린 소녀, 지지자, 친척의 아내를 포함한 여러 여성에게 알
몸 동침을 요구했다는 것이다. 간디는 혼자서는 추워서 잘 수 없다는 이유로 조카의 아내인 아바라는
여성의 옷까지 벗겨 한 이불에 들었다. 졸지에 아내를 빼앗기게 된 조카가 황급히 말했다. “몸을 데울
생각이시라면 아내 대신 제가 함께 자겠습니다.” 그러나 간디는 조카의 제안을 일언지하에 거절했다.
간디는 왜 주위 여성들에게 자신을 ‘어머니’라고 부르게 했을까?: 오랫동안 간디와 알몸으로 같이 잔
소녀 마누는 “엄마랑 같이 자는 게 뭐가 문제야?”라고 오히려 반문했다. 간디는 주위 여성들에게 자신
을 ‘어머니’라고 부르게 했다. 간디의 ‘절대금욕’의 목적은 무엇이었을까? 성욕을 절제하라는 힌두 교리
를 충실히 따르고자 했던 그는 자신의 남성성을 굴복시킴으로써 자신을 여성화, 양성구유화했다고 한
다. 밤마다 시달리던 오한을 핑계 삼아 알몸 여성과 함께 자면서 그것을 성욕 제어 훈련 또는 제어하
지 못한 욕구에 대한 속죄의 고통의식이라고 변명하는 논란을 일으키고 거센 항의를 받기도 했다.
이쯤 되면 우리는 ‘간디의 위대함을 과연 어디에서 찾아야 할까’ 하는 난감한 생각마저 든다. 여러 면
에서 그는 베일에 싸인 ‘수수께끼의 인물’이자, 종교적 성인과 세속적 정치가 사이를 아슬아슬 줄타기
하는 입체적이고도 기묘한 존재이기도 했다. 그가 역사적 위인 반열에 오를 수 있었던 진짜 비결은 어
쩌면 수많은 민중의 시선을 오롯이 자신에게 집중시킬 수 있었던 희귀한 재능에 있었던 게 아닐까.
밤에는 연인에게 애교를 부리고 낮에는 연인의 뺨을 때린 무서운 여자 엘리자베스 1세
원조 ‘해가 지지 않는 나라’ 스페인을 뛰어넘어 잉글랜드를 최강대국으로 만든 걸출한 여제 엘리자베
스 1세: 오래도록 유럽 변방의 ‘북쪽 섬나라’에 지나지 않았던 잉글랜드는 엘리자베스 1세(재위
1558~1603) 여왕 시대에 이르러 전 유럽을 호령하는 강대국으로 부상했다. 엘리자베스 1세가 통치하
던 시대에 전 세계를 통틀어 최강대국으로 군림하던 나라는 스페인이었다. ‘해가 지지 않는 나라’ 하면
우리는 영국을 떠올리지만 사실 ‘원조 해가 지지 않는 나라’는 스페인일 정도로 1492년 콜럼버스의 아
메리카대륙 발견 이후 스페인은 한동안 경쟁국이 없을 정도의 막강한 패권을 휘둘렀다.
엘리자베스 1세는 잉글랜드를 어떻게 스페인을 뛰어넘는 막강한 나라로 만들 수 있었을까? 엘리자베
스 1세는 앞선 잉글랜드 군주들이 범죄자로 엄격히 단속하던 해적 일당을 아군으로 끌어들여 적극적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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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 활용할 정도의 예리한 판단력과 과감한 결단력으로 스페인의 무적함대 아르마다를 격파하고 제해권
을 장악했다. 엘리자베스 1세 당시만 해도 군주란 신에게 선택받은 특별한 존재로 막강한 힘을 지닌
절대 권력자였다. 그녀는 남성 군주가 일반적이던 당시 여성 군주로서 자신이 무엇을 할 수 있을지 신
중하게 생각한 뒤 차근차근 그러나 집요하게 목표를 실현해 나간 걸출한 여장부였다.
지독한 구두쇠인 엘리자베스 1세의 옷장에 6,000벌이 넘는 호화로운 드레스가 빼곡히 채워져 있었다
고?: 엘리자베스 1세는 스물다섯 살 나이에 왕위에 올라 평생 동안 ‘처녀 군주’로 통치했다. 그녀가 성
적으로 순결한 상태는 아니었겠으나 죽는 날까지 결혼을 하지 않은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많은 우여
곡절과 시련 끝에 왕위에 오른 엘리자베스 1세에게 국내외 왕족과 귀족들로부터 혼담이 쏟아져 들어왔
다. 그러나 엘리자베스 1세와 결혼하고 싶어 하는 귀족 남성들은 그녀의 막대한 재산 ‘여왕의 남편’이
라는 지위를 이용해 국가를 통째로 주무를 수 있다는 흑심을 품고 접근했다. 영리한 엘리자베스 1세는
혼담이 들어오는 족족 매몰차게 퇴짜를 놓았다. 그녀는 풍부한 감성 이상으로 날카로운 이성과 냉철한
판단력의 소유자였기에 결혼하지 않고 평생을 ‘처녀 군주’로 살기로 결심했던 것 같다.
훗날 엘리자베스 1세는 많은 연인을 두었다. 그러나 이는 모두 즉흥적 감정에 이끌린 선택이 아닌, 치
밀한 계산 끝에 맺은 냉철한 관계였다. 또한 그녀는 지나치게 신중한 성격 탓에 차츰 욕구불만이 쌓였
고, 그러한 욕구불만을 다소 도발적인 취미생활로 발산하기도 했다. 그녀는 상반신을 덮은 부분이 좌
우로 벌어져 있어 가슴과 배가 슬쩍슬쩍 드러나는 옷을 입고 공식 석상에 나타나 사람들을 놀라게 하
기도 했다. 엘리자베스 1세는 당시 귀족 여성들은 몇 번 입은 드레스를 시녀들에게 하사하곤 했는데,
구두쇠였던 엘리자베스 1세는 단 한 벌도 내주지 않았다. 그리하여 그녀의 옷장에는 6,000벌이 넘는
호화로운 드레스가 빼곡히 채워져 있었다.
밤에는 여느 여자들처럼 연인에게 애교를 부리고 낮에는 거침없이 연인의 따귀를 때리는 ‘무서운’ 여
자: 한편 엘리자베스 1세는 남성적 매력을 물씬 풍기는 잘생긴 남자를 특히 좋아해서 총애하는 연인에
게 통 크게 인심을 쓰기도 했다. 그리고 그 대가로 열렬한 사랑을 요구했다. 엘리자베스 1세의 남성
취향은 ‘강하고 나쁜 남성’에 가까웠다. 그녀는 낮에는 강한 모습을 보여주고 밤에는 여린 모습을 보여
주는 반전 매력의 소유자였다. 연인과 단둘이 있을 때는 응석을 부리기도 하고 달콤한 말로 속삭였지
만 공식적인 자리에서 그 남자가 애인 행세를 할라치면 격노해서 거침없이 그의 따귀를 때리고 망신을
주었다. 총신이자 연인이던 에식스 백작의 경우 엘리자베스 1세에게 손찌검 당하는 장면이 여러 번 사
람들에게 목격되기도 했다. 또한 에식스 백작이 전쟁터에서 무모하게 지휘한 점이 빌미가 되어 반역자
로 몰리게 되었지만 엘리자베스 1세는 끝내 그를 구해주지 않았다.
에식스 백작이 처형당해 비어 있던 여왕의 옆자리는 월터 롤리 경이 채웠다. 롤리 경은 과감히 아메리
카대륙으로 건너간 탐험가이기도 했는데, 이런 부류의 남자가 흔히 그렇듯 그는 세상이 자신을 중심으
로 돌아간다고 믿으며 제 잘난 맛에 사는 전형적인 ‘나쁜 남자’ 유형에 속했다. 롤리 경은 엘리자베스
1세의 총애만으로는 성에 차지 않았는지 여왕이 아끼는 시녀를 건드려 아이가 생기자 서둘러 결혼하는
스캔들을 일으켰다. 당연히 여왕은 크게 분노해 시녀는 면직하고 롤리 경은 투옥시켜버렸다(그러나 그
는 롤리 경에 대한 미련이 남았는지 나중에 관계를 회복했다). 이처럼 쉬지 않고 연애를 즐긴 ‘처녀
왕’ 엘리자베스 1세였지만 정작 연인과 분위기가 무르익어 침대에 드는 순간이 되면 히스테리와 경련
증상을 일으켰다고 알려져 있다. 어쩌면 엘리자베스 1세는 자신이 말한 대로 ‘국가와 결혼’ 하는 게 가
장 바람직하고 이상적이었던 게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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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에게 가장 잔혹했던 인간들 이야기
인간이 인간에게 할 수 있는 가장 잔인하고 야만적 행위, ‘마녀사냥’
마녀사냥으로 처형당한 사람 수가 많았던 나라일수록 ‘종교개혁’ 당시 가톨릭을 버리고 프로테스탄트
로 개종하는 사람이 많았던 이유: 중세 유럽에서는 페스트와 천연두 등 치사율이 높은 감염병이 주기
적으로 창궐해 그때마다 대규모 사상자가 나왔고 때로는 흉작이 들어 굶어 죽는 사람이 속출하기도 했
다. 어제까지 멀쩡히 살아 돌아다니던 가족이나 이웃이 갑자기 죽어가는 현실을 마주한 사람들은 누군
가에게 이유를 따져 묻고 싶었고, 죽음의 공포를 마주하는 인생에 대해 ‘왜?’라는 의문을 품었다. ‘병원
성 세균이 질병을 일으킨다’라는 사실이 독일의 로베르트 코흐 박사 연구팀에 의해 밝혀지고 대중에게
받아들여진 것은 19세기 중반이 지나서였다.
중세인은 ‘악마와 계약을 하거나 성교를 해서 무시무시한 힘을 얻게 된 마녀나 그리스도교의 가르침을
따르지 않는 ’이단‘이 기독교 공동체에 은밀히 숨어들었기 때문에 천벌이 내려 재앙이 일어났다’라는
억지 논리를 만들어냈다. 그 결과 공동체에서 배척당하거나 소외당하는 사람이 사냥감이 되고 산 제물
이 되어 합법적으로 처형되는 마녀사냥이 이루어졌다. 15세기부터 18세기에 걸쳐 유럽 각지에서 ‘마녀
사냥’이 맹위를 떨쳤다. 특히 1580년 무렵부터 1650년까지 마녀사냥이 가장 극렬했다. 흥미롭게도 마
녀사냥으로 처형당한 사람 수가 많은 나라일수록 16세기에 절정에 이른 ‘종교개혁’ 당시 가톨릭을 버
리고 프로테스탄트로 개종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아마도 걸핏하면 마녀사냥에 나서는 가톨릭 신앙으로
는 절대 구원받을 수 없다는 걸 많은 사람들이 깨달았기 때문이지 않을까.
마녀로 몰려 처형되는 사람 중 왜 50~60대 여성이 많았을까?: 1630년대 후반 독일의 지크부르크 지
방의 사형수 명부를 보면 당시 독일에서는 대략 2,000명 중 3명 정도가 마녀로 처형되었다. 1636년 7
월 24일 지크부르크라는 평범한 중소도시에서 쿠니군데 모이러라는 여성이 마녀로 체포되었다. 당시
누군가를 마녀로 체포하려면 그 전에 마녀에 대한 밀고를 받은 당국이 본격적으로 조사를 해야 했다.
당시 그녀에게는 ‘성서를 갖고 있지 않았다’라는 사유가 붙었다. 독실한 신자가 아니었다지만 고작 그
정도 이유만으로 억울하게 투옥된 것이다. 투옥된 후 그녀는 가혹한 고문을 받고 그로부터 두 달쯤 지
난 9월 16일에 처형되었다. 사람들에게 ‘마녀를 처형해 악의 싹을 도려냈으니 안심하라’는 것을 내보
이기 위해 속전속결로 판결과 집행이 이루어졌다.
마녀 심문에는 정해진 절차가 있었다. 심문 과정에서 마녀라고 자백하든 부인하든 고문을 피할 수는
없었다. 또한 마녀로 지목된 여성을 물에 빠뜨려 물 위로 떠오르면 마녀로 판명하는 황당한 방법도 사
용되었다. 결국 마녀로 고발당해 체포된 사람은 어떻게 하면 그나마 조금이라도 덜 고통스럽게 죽을
수 있을지를 궁리하는 게 최선이었다.
체포된 후에는 가택수색이 이루어졌고 주술의 흔적으로 보이는 물건이 거의 예외 없이 발견되어 마녀
로 단정되고 법원에서 사형(일반적으로 화형) 선고를 받고 형이 집행된다. 그야말로 번갯불에 콩 구워
먹듯 엄청난 속도로 처형까지 일련의 과정이 빠르게 진행되었다. 마녀로 몰려 처형되는 사람은 50~60
대가 많았는데, 주로 노인층이나 사회적으로 고립된 소외 계층 여성이 손쉬운 표적이 되곤 했다.
1636년 당시 독일은 30년 전쟁 후반기를 맞아 사회 전체가 말할 수 없이 피폐해진 상황이었다. 그 무
렵 스웨덴 등의 외국 군대가 독일을 침공해 서민들 사이에 ‘말세가 도래했다’며 불안감이 급속도로 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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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고 보면 무시무시한 엽기인물 세계사
져나갔다. 어쩌면 사람들은 힘든 세상을 탓하며 원망할 대상을 찾았고 그 모든 원인을 마녀의 탓으로
돌리며 한풀이하고 싶었던 게 아닌가 싶다.
독일 예수회 소속 프리드리히 슈페 신부는 1631년에 펴낸 『재판관에게 경고하다』라는 책에서 마녀재
판을 강력하게 비판했다. 그리고 예수회 내부인이 마녀사냥의 부당함을 조목조목 규탄했다는 사실이
대중 여론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슈페 신부의 책에 따르면, 마녀가 줄줄이 발견되는 이유가 있었다. 그
것은 마녀로 판정받은 사람에게 “네 동료는 누구인가? OO라는 여자를 아는가?” 식으로 추궁하는 심문
이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게다가 “네, 그 여자도 마녀입니다”라는 자백이 나올 때까지 상상을 초월하
는 고문이 가해졌다. 그런데도 조서에는 “강압적 심문 없이 자발적으로 털어놓았다” 등의 거짓 진술이
기록되었다. 교회가 마녀재판의 폐해를 바로잡은 것은 슈페 신부가 선종한 후 크리스티안 토마지우스
라는 기독교 법학자의 열정적인 호소를 받아들이고 난 뒤의 일이다.
‘성’과 ‘사랑’을 도구로 부와 권력을 쟁취하려 분투한 사람들 이야기
합스부르크가의 걸출한 여제이자 위험하고 해로운 독을 품은 어머니였던 마리아 테레지아
남편 프란츠 슈테판을 허수아비 황제로 만들고 사실상 여제로 군림한 마리아 테레지아: 오스트리아 빈
중심부에는 합스부르크 가문 사람들이 살던 궁전 호프부르크가 있다. 그들은 1918년까지 호프부르크
궁에 살았으며 궁전 바로 옆에는 카푸치너성당이 있다. 카푸치너성당에는 넓은 지하 공간이 마련되어
있어 빈의 주인이던 합스부르크 가문 사람들의 관이 빼곡히 들어 차 있다. 그리고 그 한가운데에 단연
화려한 장식이 돋보이고 한결 널찍한 공간에 안치된 거대한 관에 빈 합스부르크 가문의 최전성기를 이
룩한 여제 마리아 테레지아(1717~1780)가 잠들어 있다.
마리아 테레지아는 아버지 카를 6세의 4남매 중 둘째로 그녀보다 한 해 앞서 태어난 오빠는 태어난 지
얼마 안 되어 죽었다. 그 때문에 첫째 딸인 마리아 테레지아는 ‘여제’로 불렸으나 실제로는 남편 프란
츠 슈테판이 프란츠 1세(재위 1745~1765)로 황제 자리에 올랐다. 합스부르크 가문의 법에 따르면 여
성은 황제가 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프란츠 슈테판은 허수아비에 불과했고 마리아 테레지아가
정무를 장악했다.
추악한 결과를 불러온 마리아 테리지아 법안, ‘순결 협정’: 마리아 테레지아는 그야말로 뛰어난 지도자
였다. 대외 정책도 탁월한 한편 다른 나라와 비교해 50~100년 이상 일찍 의무교육을 시행하고 공립병
원을 충실히 갖추는 등 민생 관련 법안도 빈틈없이 챙겼다. 반면 추악한 결과를 불러온 법안도 있다.
마리아 테레지아는 전 국민에게 ‘순결 협정’이라는 이름으로 불린 도덕 규칙을 강제로 따르게 했다. 이
도덕 규칙은 ‘남녀 모두 결혼 전 잠자리를 가져서는 안 되고, 불륜을 저질러서도 안 되며, 당연히 동성
애도 금지한다’는 내용이었으며 이를 어긴 사람은 엄하게 처벌하는 강압적 정책이었다. 특히, 독신 여
성이 복수의 남성과 성관계를 맺는 일은 매우 엄격하게 금지되었다. 마리아 테레지아는 자신의 엄격한
정조 관념을 국민 모두에게 강요하는 무서운 여제였다.
제국의 기반을 뿌리째 흔든 마리아 테레지아의 도를 넘은 결벽증: 마리아 테레지아는 당시 맹위를 떨
치던 매독의 온상이 된 매춘업 박멸에 적극적이었다. 숙박업소 간판을 내걸고 은밀히 매춘을 알선하는
윤락업소는 당국의 조치로 적발되는 족족 폐쇄되었다. 그러나 아무리 단속을 엄하게 해도 윤락 여성을
찾는 수요 자체는 줄어들지 않았다. 하녀나 침모로 둔갑한 ‘전직 창부’들이 단속을 피해 음지로 숨어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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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고 보면 무시무시한 엽기인물 세계사
어 끈질기게 매춘을 계속했다. 은밀한 매춘을 적발하기 위해 비밀경찰들이 움직였다. 만약 체포되면
매춘업을 한 여성은 채찍을 맞거나 머리를 삭발당하는 수모를 겪었다. 가장 가벼운 처벌은 도로 청소
였다. 그 덕분에 그 시절 빈뇨로 범벅된 흙탕길의 파리와 달리 빈은 아름답고 청결한 도시라는 평판을
얻었다. 몸 파는 여성이 ‘손님에게 성병을 옮겼다’라고 판명되면 매춘 여성은 삭발당했고, 빡빡 깎인
머리에 타르나 수지를 바르고 알몸에 마대를 둘둘 감은 채 거리를 순회해야 했다. 그렇게 한바탕 망신
을 당한 뒤에는 채찍으로 흠씬 두들겨 맞는 혹독한 형벌이 기다리고 있었다.
몸 파는 여성은 당장 끼니를 때울 빵 한 조각을 얻기 위해 거리로 나설 수밖에 없는 경우도 있던 터라
아무리 법률로 엄격히 금지한다고 해도 그런 여성들은 몸을 팔아 생계를 유지할 수밖에 없었다. 이러
한 현실을 외면한 채 엄격한 처벌만 내세운 마리아 테레지에게서 공감능력 없고 약간 병적인 일면마저
엿볼 수 있다.
한편으로는 몸 파는 여성뿐 아니라 돈을 주고 성을 산 남성에게도 엄벌이 가해졌다. 윤락여성과 함께
있다가 적발된 남성은 독신일 경우 그 여성과 강제로 결혼해야 했고 유부남일 경우 간음죄로 기소되었
다. 그러자 법적으로 결혼할 수 없는 상대와 관계를 맺어 임신한 여성이 낙태하거나 영아를 살해하는
사건이 급증했다. 게다가 지하로 숨어든 윤락여성들이 제대로 된 검사도 받지 않고 매춘을 일삼다가
성병이 창궐하는 결과를 초래했다. 아름다운 도시 빈이라는 겉모습과 달리 당시 합스부르크 가문이 통
치하던 대도시는 사실상 속으로 곪아 썩어 문드러지고 있었다. 마리아 테레지아의 도를 넘은 결벽증이
제국의 기반을 송두리째 흔들어놓고 있었던 셈이다.
마리아 테레지아가 그토록 강박적 ‘정조 관념’을 갖게 된 근원적 이유는?: 마리아 테레지아는 ‘남편이
바람을 피워 눈이 뒤집힌 질투심 많은 여제’라고 국민적 비난을 받았는데, 그녀가 ‘순결’에 그토록 집
착한 데는 말 못 할 이유가 있었다. 그의 조상 중 한 명이 애첩과 밀회를 즐기다가 매독에 걸려 합스
부르크 가문 혈통에 선천성 매독균이 잠복해 있다는 설이 전해 내려왔던 것이다. 진위는 알 수 없으나
선천성 매독에 걸리면 사산율과 영아 사망률이 높아진다. 그러고 보면 마리아 테레지아 자신도 카를 6
세 자식 중 유일하게 건강하게 자라 성인이 된 딸이었다.
여성은 몇 번의 임신 과정에서 자신의 선천성 매독 증상이 가벼워질 가능성도 있다고 한다. 그러나 마
리아 테레지아는 항생물질이 발견되기 전부터 수은을 이용한 매독 치료로 명성을 얻은 헤라르트 판 스
비턴이라는 의사에게 의지했다. 수은으로 매독을 치료하던 사람들은 고통스러운 수은 중독 부작용에
시달려야 했다. 힘든 치료를 이겨내고 운 좋게 건강을 되찾은 마리아 테레지아는 남편이 밖으로 나돌
지 못하도록 발을 묶어두기 위해 열여섯 명의 자식을 낳았다.
딸을 ‘정략결혼의 도구’로 보고 가치가 없어지면 실패작으로 여기며 가차 없이 몰아내는 비정한 어머
니: 매독 치료를 받기 전 마리아 테레지아가 출산한 첫째 딸 마리아 엘리자베스는 세 살 때 세상을 떠
났다. 다음에 얻은 둘째 딸 마리아 안나는 선천적으로 외모와 건강에 문제가 있었다. 그녀는 과학에
관심이 많은 총명한 여성이었으나 스물 살 무렵 등뼈가 활처럼 휘는 병으로 고통받았고 , 훗날 고질병
으로 달고 살았다. 다섯 번째 딸로 어려서 죽은 언니와 이름이 같은 마리아 엘리자베스는 건강하게 태
어난 미녀(아마 이때쯤 마리아 테레지아의 선천성 매독이 완치되었던 게 아닌가 싶다)였기에 어머니의
기대를 한몸에 받았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엘리자베스는 천연두에 걸렸고 마마 자국이 남아 흉한 얼굴
이 되어버렸다. 그러자 마리아 테레지아는 ‘못난이’가 된 딸을 구박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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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고 보면 무시무시한 엽기인물 세계사
골골대기만 하던 안나와 미운 오리 새끼 신세가 된 엘리자베스는 체코 프라하에 있는 귀족 여성 기숙
학교로 보내져 그곳에서 평생 독신으로 살아야 했다. 마리아 테레지아는 딸을 ‘정략결혼의 도구’로 보
았고, 가치가 없어지면 실패작으로 여기며 가차 없이 몰아내는 비정한 어머니였다. 비교적 사랑받고
자란 열한 번째 딸 마리 앙투아네트는 정략결혼으로 프랑스 루이 16세의 왕비가 되었지만 괴물에 가
까웠던 어머니 아래에서 자랐기에 결국 정서적으로 불안정하게 되었던 것 아닐까? 합스부르크 가문의
위대한 여제는 어머니로서는 위험하고 해로운 독을 지닌 존재일 뿐이었다.
인간의 내면에 감춰진 ‘악마’의 본성이 깨어나다
인류를 품종 개량한 역사상 최악의 독재자 히틀러의 ‘진짜 목적’은?
히틀러와 나치스를 거세게 비판한 라우슈닝의 책『히틀러와의 대화』에 적국 영국 정부가 출판 금지 처
분을 내린 이유는?: 1939년 영국에서 출간된 책 한 권이 종이 출판 금지 처분을 받았다. 이 책의 저자
는 헤르만 라우슈닝으로 독일 지방 귀족 출신인 그는 한때 히틀러 나치스 사상의 열렬한 신봉자였다.
제2차 세계대전이 한창이던 때 투쟁에서 승리한 강자가 정의이고 약육강식에서 승리한 자만 살아남을
권리가 있다는 나치스의 주장은 단순명쾌해서 이해하기 쉬운 측면이 있었다. 나치즘 신봉자들은 자신
들이 ‘승자독식’ 세계에서 승자가 되어야 한다고 믿었으며, 시간이 갈수록 유럽 각 지역에서 꾸준히
‘신도’가 증가했다. 그중 대표적인 인물이 헤르만 라우슈닝이었다. 히틀러는 라우슈닝을 나치스의 두뇌
로 인정하고 단치히 시장과 주요 요직을 맡기는 등 파격적인 대우를 해주었다. 다른 사람을 좀처럼 믿
지 않았던 히틀러에게 특별한 총애를 받은 라우슈닝은 히틀러를 중심으로 뭉친 소수 정예 추종자 무리
에 들어갈 권리를 획득했다.
그런데 히틀러를 가까이에서 모시며 나치즘의 진짜 목적을 히틀러의 입을 통해 직접 전해들은 라우슈
닝은 공포에 사로잡혀 도망칠 궁리를 하기 시작했다. 절대 권력자 히틀러를 배신하고 다른 나라로 망
명할 경우 자칫 자신은 물론이고 가족의 목숨까지 위험해질 것이었지만 라우슈닝에게는 목숨을 걸고라
도 꼭 발표하고 싶은 진실이 있었다. 그는 가족을 다른 나라로 도피시킨 뒤 폭풍우가 몰아치는 밤에
모터보트를 타고 천신만고 끝에 영국에 도착했다.
영국에 도착한 라우슈닝은 나치 독일에서 보고 들은 내용을 책으로 정리했다. 그러나 그의 책 『히틀러
와의 대화』는 출간 직후 영국에서 출판 금지 처분을 받았다. 그 무렵 히틀러는 이미 독일 총통으로 무
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고 있었다. 또 당시까지만 해도 독일은 이웃 나라를 상대로 무리한 영토 분쟁
을 벌이는 정도의 비교적 사소한(?) 문제 행동만 보였다. 한 나라 통치자의 실명을 직접 거론하며 공
격하는 책은 외교적으로 문제의 소지가 될 수 있다고 판단한 영국 정부가 개입해 출간 금지 처분을 내
린 것이었다.
청년들의 유전자를 ‘품종 개량’해 인류를 인공적으로 진화시킬 계획을 구상하고 실행에 옮긴 히틀러:
라우슈닝에 따르면, 히틀러는 인류에게 신과 맞먹는 잠재력이 숨어 있다고 믿었다고 한다. 실제로 히
틀러는 “인류는 생성 도중인 신”이라고 말한 적이 있다. 그런데 그는 모든 인류가 신과 같은 존재가
아니며, 민족에 따라 우열의 차이가 존재한다고 보았다. 좀 더 구체적으로 그는 자신이 속한 아리안족
은 가장 우월한 민족일 뿐 아니라 인류를 신의 경지로 이끌 능력을 가진 민족인 데 반해 유대인 등 열
등 민족은 세상을 멸망의 길로 이끌 위험한 민족이라고 굳게 믿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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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고 보면 무시무시한 엽기인물 세계사
히틀러와 나치스의 최종 목적은 지상에서 그들이 규정한 ‘유해 민족’을 몰아내고 박멸하는 수준에 그치
지 않았다. 그는 실제로 인류를 신과 맞먹는 존재로 격상시키기 위한 구체적인 계획을 세웠다. 그것은
전 인류 중에서 가장 우수하다고 여기는 아리안족을, 그중에서도 더욱 우수한 혈통을 지닌 청년들의
유전자를 ‘품종 개량’해 인류를 인공적으로 진화시킨다는 계획이었다.
라우슈닝은 히틀러의 목적과 계획을 공개했다. “고귀한 피(생물학적으로 우수하다는 의미)의 은혜를 누
리는 상황을 만들어내면(중략) 위대한 인종의 사나이가 나타난다. (나는 독일 민족으로 정치 운동을 시
작했으나) 민족이라는 개념은 이제 무의미해졌다. (중략) 인류야말로 미래의 질서를 보여주는 개념이다.
인류라는 개념으로 나치즘은 혁명의 바다를 건너 세계를 개조하리라. 다양한 언어를 사용해도 지배자
인종에 속하는 사람 사이에는 상호 이해가 형성되리라.”
즉, 히틀러가 라우슈닝에게 요구한 일이란 우수한 인간을 가축이나 작물처럼 교배하는 이른바 ‘정원사’
나 ‘가축 사육사’로서의 ‘육종’ 사업인 셈이었다. ‘인류를 인공적으로 진화시킨다’는 발상은 현실이 아닌
애니메이션이나 SF영화에나 나올 만한 아이디어다. 이 과대망상적 발상이 자신을 제2의 그리스도이자
구세주라고 믿어 의심치 않은 히틀러가 ‘신’의 대리인으로서 이루어야 할 최종 목표였다. 실제로 나치
즘은 종교를 능가하는 위대한 사상이라고 입버릇처럼 이야기했던 히틀러. 그가 진심으로 자신의 계획
을 실행에 옮기려 한다는 사실을 깨닫고 라우슈닝은 목숨 걸고 독일을 탈출했다.
라우슈닝이 망명하고 2년 후인 1941년 나치스는 마침내 과격하고도 충격적인 발상을 현실 세계에서
구현하고자 시도했다. 바로 나치스가 점령한 각지의 유대인을 강제수용소에 가두고 대량 학살한 홀로
코스트였다. 히틀러에게 각별한 총애를 받던 라우슈닝이 나치즘을 버린 것은 인간을 가축처럼 취급하
는 히틀러와 나치스의 본질을 가까이에서 지켜보며 그 해악을 깨달았기 때문이 아닐까.
히틀러가 ‘악마의 목소리’를 듣고 지시에 따라 세계대전을 일으켰다고?: 히틀러가 이끄는 나치스가 지
배하는 동안 그리스도교도들 또한 박해를 피할 수 없었다. 신을 두려워하지 않은 듯한 히틀러의 거침
없는 행보를 보고 그가 종교를 전혀 믿지 않았으리라 생각하는 사람이 많다. 그러나 사실 그는 그리스
도교 등의 일반적인 종교는 믿지 않았으나 신비주의(오컬트)에 푹 빠져 종교 이상으로 맹신했다. 라우
슈닝의 말에 따르면, 히틀러는 1910년쯤부터 자신의 영적 재능을 깨달았다고 한다. 스무 살 무렵 히틀
러는 아버지의 유산과 어머니의 아들 사랑에 기대어 취직도 하지 않고, 미대 입학을 목표로 그림을 그
리며 백수나 다름없는 생활을 하고 있었다. 라우슈닝은 평소 히틀러가 ‘그 녀석’ 또는 ‘그 남자’ 등으로
부르는 보이지 않는 존재. 즉, 악마에 빙의 되는 순간을 목격한 적이 있다고 주장했다.
“그 녀석이다! 그 녀석이다! 그 녀석이 지금 여기에 있다고!” 히틀러는 숨을 헐떡이며 절규했다. 공포
에 질린 입술은 잘 익은 포도 알처럼 보랏빛으로 물들었다. 땀이 얼굴에 차올라 흐르며 뚝뚝 떨어지기
시작했다. 그는 또 갑작스럽게 기묘한 환상을 보고 의미가 불분명한 기묘한 단어를 쉴 새 없이 중얼거
렸다. 온몸을 떨며 신음하고 괴상한 문법으로 도저히 독일어라고 할 수 없는 언어를 구사했다. 그러다
가 히틀러는 잠깐 정신이 돌아오면 잠시 후 곧 “저 구석에 있는 건 누구냐!”라며 비명을 지르고 소란
을 피우다가 주위 사람들의 부축을 받아 자리에 누워 눈을 감고 몇 시간이고 잠을 잤다.
악마와 히틀러와의 ‘대화’를 목격한 사람은 라우슈닝만이 아니었다. 영국 저널리스트 조지 프라이스도
히틀러 자신이 얘기했다는, 스물다섯 살의 히틀러가 제1차 세계대전에 병사로 참전했을 때 경험한 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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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적 현상에 관한 일화를 듣고 증언한 일이 있다. 그에 따르면 전우들과 함께 저녁 식사를 하다가
뜬금없이 히틀러가 혼자 “(의자에서) 일어나 저쪽으로 가라!”라는 낯선 남자의 목소리를 들었다는 것이
다. 히틀러는 그 남자의 목소리에 “상관의 명령을 들은 듯 기계적으로 따랐으며, 18미터가량 이동했다”
그 직후 히틀러가 있던 자리에 포탄이 날아들었고 전우들은 모두 산산조각이 났다. 그 목소리의 주인
공은 히틀러가 ‘그 녀석’이라고 부르던 존재, 즉 악마였다. 그 후로도 히틀러는 불가사의한 목소리를
몇 번이나 더 듣고 사지에서 극적으로 탈출할 수 있었다. 이런 불가사의한 일이 반복되자 앞으로 일어
날 미래의 일을 히틀러가 ‘알고 있다’는 분위기가 만들어졌고, 그의 예지력은 ‘그 녀석’이 히틀러에게
선사한 특수한 능력으로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졌다.
마침내 ‘그 녀석’은 ‘히틀러의 몸속에 둥지를 틀었고’ 그를 선택받은 존재로 여기게 만들었다. ‘그 녀석’
은 히틀러에게 “유대인의 세계 지배를 막아라”라고 명령했다. 급기야 그 목소리는 히틀러에게 “너는
쉰 살에 세계 정복 전쟁을 일으키게 될 것이다”라고 예언했다.
히틀러와 나치스의 인큐베이터가 된 오컬트 조직 ‘툴레 협회’: 히틀러는 툴레 협회라는 신비주의 조직
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었다. 실제로 1920년 유명한 어느 호텔에서 열린 툴레 협회 정기모임에 히
틀러가 참석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당시 툴레 협회는 뮌헨을 중심으로 남부 독일 상류계급의 지지
를 받아 넉넉한 운영 자금을 확보했다. 회원 명부에는 법조계 거물과 명문 귀족, 사업가와 대학교수
등의 이름이 올라 있었다. 협회는 상류계급 곳곳에 다양한 직군의 회원을 거느리고 세력을 과시했다.
이 툴레 협회 정치 부문이 바로 나치스의 전신으로, 히틀러를 당수로 내세운 ‘독일 노동자당’이었다는
사실은 그다지 알려져 있지 않다.
나치스는 태생부터 오컬트 조직이었다. 나치스의 상징인 갈고리 십자가 하켄크로이츠는 툴레 협회에서
오랫동안 사용해온 엠블렘이었다. 나치스의 확장과 더불어 툴레 협회의 세력도 점점 강해지다가 양자
의 힘의 균형이 무너지는 날이 왔다. 악마에 빙의 된 히틀러가 이끄는 나치스가 툴레 협회를 집어 삼
켜버린 것이었다. 1937년, 툴레 협회는 해산 위기에 직면했다. 나치스는 프리메이슨 등의 종교 활동
단체 금지 정책을 표방했다. 이는 이 시점에 이미 나치스가 유럽에서 그 실명과 함께 최강의 오컬트
조직으로 성장했음을 의미한다.
라우슈닝의 이야기가 진실인지 거짓인지를 명확히 확인할 방도는 없다. 그러나 히틀러가 이끄는 나치
스 독일과 그들에게 세뇌된 사람들의 소행이 이 세상 사람의 것이 아니라고 느껴지는 광기로 충만했던
것을 보면 그들을 조종한 보이지 않는 손이 악마였기 때문이라고 생각하는 게 오히려 가장 설득력 있
는 주장이지 않을까. 히틀러는 평범한 가정에서 태어나 성장했다. 그의 이력을 프로파일링하기만 해서
는 히틀러가 왜 세상을 집어 삼킬 수준의 광기를 품게 되었는지 설명할 길이 없다. 히틀러는 “나치스
독일이 전쟁에서 패배해도 나치스의 정신은 부활한다”고 예언했다. 그 예언을 믿는다면 우리는 앞으로
새로운 공포의 시대가 도래할 수도 있다고 여기고 마음을 단단히 먹고 대비해야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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