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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영화,리뷰,

묵자, 노동이 존중받는 사회를 꿈꾸다

by Casey,Riley 2022. 3.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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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제자백가를 접해보지 못한 독자들도 『묵자』를 이해할 수 있도록 쉽고 간략하게 목자가 누구
인지, 묵자의 사상은 무엇인지 등에 대해 서술한 교양서이다. 저자는 묵자의 사상을 통해 우리에게 노
동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국가가 왜 필요하며 어떤 일을 해야 하는지, 우리는 왜 그리고 무엇을 가르
치고 배워야 하는지, 그리고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등 근본적인 질문에 대해 생각하게 한다.

묵자, 노동이 존중받는 사회를 꿈꾸다
▣ 저자 김승석
고려대학교 경제학과를 졸업하고 서울대학교 대학원에서 석사 및 박사학위를 받았다. 1968년부터
2020년까지 울산대학교 경제학과 교수로 재직하면서 시민사회운동에 적극 참여했으며, 현재 울산대학
교 명예교수이면서 근로복지공단 상임감사로 일하고 있다. 경제학에 회의를 느끼고 제자백가를 공부하
다가 묵자를 만났고, 그의 매력을 탐닉하게 되었다. 2019년 『묵자』를 『경제학자의 묵자 읽기』라는 제
목으로 번역ㆍ출간했으며, 시공을 넘어 개인의 절대적 자유를 추구하는 도가를 부러운 눈으로 바라보
면서도 묵자를 따르는 모순된 인간이기도 하다.

▣ Short Summary
묵자는 제자백가의 하나인 묵가의 시조로 전국시대 초기에 활약한 사상가이다. 묵자의 사상은 전국시
대에 피지배계층인 일반 백성의 이익을 대변하여 민중으로부터 많은 지지를 받았고, 그래서 유가와 더
불어 사상의 양축을 이루었다. 그러나 진시황의 중국 통일 이후 묵자의 사상은 자취를 감추게 된다.
그리고 약 2천 년 후 청(淸)나라 말기에 이르러 필원과 손이양에 의해 다시 조명받기 시작한다.
묵자의 제자들이 스승의 언행을 기록한 『묵자』에 나타난 그의 사상은 천하(天下)에 이익 되는 것(利)
을 북돋우고(興), 천하의 해가 되는 것(害)을 없애는(除) 것을 정치의 원칙으로 하고, 그 실현 방법으로
서 유능하다면 농민이나 수공업자도 관리로 채용하는 상현(尙賢), 백성의 이익에 배치되는 재화와 노
동력의 소비를 금지하는 절용(節用), 지배자가 자신의 이익만을 추구하는 약탈이나 백성 살상의 전쟁
에 반대하고, 타인을 사랑하고 자신과 타인의 이익을 높이는 비공(非攻)과 겸애(兼愛) 등이 있다.
이 책은 제자백가를 접해보지 못한 독자들도 『묵자』를 이해할 수 있도록 쉽고 간략하게 목자가 누구
인지, 묵자의 사상은 무엇인지 등에 대해 서술한 교양서이다. 저자는 묵자의 사상을 통해 우리에게 노
동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국가가 왜 필요하며 어떤 일을 해야 하는지, 우리는 왜 그리고 무엇을 가르
치고 배워야 하는지, 그리고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등 근본적인 질문에 대해 생각하게 한다.

▣ 차례
넋두리
Ⅰ 묵자 신상 털기
이름도 몰라요 성도 몰라?
공자와 맹자 사이
천민 출신의 사상가
『묵자』라는 책
Ⅱ 노동하는 인간
성선설 vs. 성악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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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자, 노동이 존중받는 사회를 꿈꾸다

인간과 동물의 차이
노동이 존중받는 사회
사회적 분업
또 다른 인간의 모습
Ⅲ 하느님의 마을 & 하느님의 백성
왜 국가가 필요한가?
아직도 권력 세습이 존재한다
국가는 어떻게 조직되는가?
누가 현명한 사람인가?
Ⅳ 천하에 남이란 없다
서로 사랑하고 서로 이익을 주라
하늘과 귀신, 그리고 인간
Ⅴ 겸애를 실천하는 다섯 가지 강령
묵자의 방법론
공격전쟁 비판[非攻]
근검절약[節用]
장례 간소화[節葬]
음악 비판[非樂]
운명론 비판[非命]
Ⅵ 배워야 세상을 구한다
수신과 겸애의 차이
농사짓는 법도 배워야
배움에는 귀천이 없다
피부까지 스며들어야
Ⅶ 왜 묵자인가?
묵자에 대한 평가
2천 년을 뛰어넘다
짚신을 신고 천하를 돌아다닌 위대한 실천가
누구를 위하여 종을 울리나?
미주

-3-

묵자, 노동이 존중받는 사회를 꿈꾸다

묵자, 노동이 존중받는 사회를 꿈꾸다

묵자 신상 털기
공자 이후 묵자에서부터 한비자에 이르기까지 제자백가는 모두 자신의 학파를 위해 서로 비판하고 논
쟁하는 이데올로기 투쟁을 전개했습니다. 그러나 이들의 논쟁은 단순한 논쟁이 아니라 중국 역사상 가
장 혼란스러웠던 춘추전국시대의 혼란과 무질서를 극복하고자 한 목적이 있었습니다. 그 목적을 달성
하기 위해 인간과 사회 또는 국가에 대한 다양한 의견이 제시되었지요.
묵가(墨家)는 전국시대에 피지배계층인 일반 백성의 이익을 대변하는 사상을 주장하여 민중으로부터
많은 지지를 받았고, 그래서 유가와 더불어 사상의 양축을 이루고 있었지요. 그러나 진시황의 중국 통
일 이후 묵자의 사상은 돌연 자취를 감추게 됩니다. 묵가가 혈연에 의한 세습을 부정하니 당시 지배계
급은 못마땅하게 생각했겠지요. 절대권력을 가진 진시황이 이데올로기적 탄압을 했을 것이고, 묵가의
구성원들은 살아남기 위해 자신이 묵가라는 정체성을 감추고 살았으리라 추측합니다. 통일되기 전부터
묵가들이 진나라로 가서 자신의 신분을 숨기고 하급관리 역할을 하며 살기도 했으니까요.
그 후 2천 년 동안 『묵자』는 도교의 도서관에 유폐되었다가 청(淸)나라 말기에 이르러 필원과 손이양
에 의해 다시 조명받기 시작했습니다. 이때부터 여러 학자에 의해 묵자 개인에 대한 고증이 시작되었
으나, 너무나 오랜 기간 잊힌 인물이라 명확하게 밝혀진 것은 별로 없지요. 묵가가 사상적 탄압을 받
으면서 진시황 이후에 사라졌지만, 선진(先秦) 시대에는 영향력이 가장 큰 학파의 하나였음은 당시의
문헌들이 모두 인정하는 명백한 사실입니다. 이 점을 인정하면서 이제 묵가를 창시한 묵자의 신상을
한번 털어보겠습니다. 우선 묵자(墨子) 하면 묵(墨) 선생님을 의미합니다. 일반적으로 묵자는 성은 묵
(墨) 씨이고, 이름은 적(翟)으로 알려져 있지만, 이에 대해서는 논란이 많습니다.
그리고 여러 연구자의 의견을 종합하면, 묵자는 기원전 490년에서 459년 사이에 태어났고, 기원전
406년에서 376년 사이에 죽은 것으로 나타납니다. 일반적으로 묵자는 공자가 죽은 이후에 태어났으며,
맹자가 태어나기 이전에 죽었다고 받아들여집니다. 또 사마천의 기록과 달리 묵자는 대부가 아니라 하
층계급 출신입니다. 참고로 그가 살았던 시대는 춘추시대(약 B.C.770~B.C.403) 말기에서 전국시대
(약 B.C.403~B.C.221) 초기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는데, 춘추시대 초기에는 140여 개의 제후국이 있
었고, 전국시대 초기로 가면 20여 개의 나라만 남게 됩니다. 360여 년간 치른 전쟁의 결과 나라 수는
줄어들고 각국의 영토는 넓어지는 결과를 가져오게 되지요. 이리하여 전쟁은 규모가 커지고 일상화되
었으며, 이러한 정복전쟁은 백성을 죽음과 공포로 몰아넣고 그들의 삶을 송두리째 파괴했겠지요. 묵자
는 바로 이러한 현실을 목도했으며, 『묵자』는 이러한 시대적 환경의 산물입니다.
묵자의 사상은 『묵자』라는 책에 잘 나타나 있지요. 『묵자』역시 묵자가 쓴 책이 아닙니다. 모두 묵
자의 제자들이 스승의 언행을 기록한 글입니다. 『묵자』는 목록을 제외하고 총 71편으로 구성되어 있
다고 알려져 있으며, 현재는 53편만 전해지고 있습니다. 현존하는 53편의 글은 내용과 성격에 따라 <
입문(入門)>, <십론(十論)>, <묵경(墨經)>, <대화(對話)>, <병법(兵法)>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4-

묵자, 노동이 존중받는 사회를 꿈꾸다

노동하는 인간
인간과 동물의 차이
인간의 특징을 도출하는 데 ‘성선 vs. 성악’이라는 인성론의 유효성이 없지는 않지만, 몇 가지 문제점
으로 인해 인간을 이해하는 접근방식으로서 한계가 있습니다. 인성론과 관련을 가지면서도 인간과 동
물의 차이라는 새로운 프레임으로 접근해보는 편이 더 보편적이고 합리적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참
고로 묵자는 인간이 다른 동물과 달리 노동을 통해서만 생존이 가능하다고 강조하면서 인간과 동물의
차이를 노동에서 찾고 있습니다. 묵자의 육성을 직접 들어보시지요.
‘사람은 본래 사슴 같은 들짐승, 새 같은 날짐승, 벌레와는 다르다. 들짐승과 날짐승, 벌레는 깃털을
옷으로 삼고, 발굽과 발톱을 바지와 신발로 삼으며, 물과 풀을 음식으로 삼는다. 그래서 수컷이 농사짓
고 나무를 심고 가꾸지 않으며, 암컷이 길쌈하고 베를 짜지 않더라도 입고 먹을 재화가 이미 갖추어져
있다. 사람은 이와 달라서 힘들여 일하는 자는 살고, 힘들여 일하지 않는 자는 살지 못한다.’
아마 당시에는 ‘노동’이라는 용어가 없었나 봅니다. 그러나 ‘힘들여 일하다’라는 말은 누가 보아도 지금
의 노동에 해당하는 말이지요. 인간은 노동하면 살아갈 수 있지만, 노동하지 않으면 생존할 수 없다는
의미로 읽히지요. 이처럼 노동은 인간 자체, 나아가 생명과 생활의 재생산에 필요한 물질의 근거라고
말하고 있네요. 노동하는 존재는 인간의 일반적 경향성을 지적하는 것이 아니라 노동 없이는 살아갈
수 없다는 인간의 필수적인 생존조건을 이야기하고 있는 거지요. 선악이라는 본성 이전에 인간은 생존
하기 위해 노동하고, 노동을 통해 자기를 실현하면서 자신의 본성을 구현하는 게 아닐까요? 이와 같은
이유로 묵자는 인간의 가장 중요한 특징을 ‘노동하는 인간’에서 찾고 있습니다. 이러한 견해는 제자백
가 중 독특한 혜안을 지닌 묵자의 가장 가치 있는 공헌 가운데 하나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근대 이전에는 동서양을 막론하고 노동을 아주 천시하는 경향이 매우 강했거든요.
노동이 존중받는 사회
인간과 동물의 차이를 노동에서 찾았다는 사실은 인간이 만들어가는 사회에서 노동이 존중받아야 한다
는 사회질서를 도출하게 됩니다. 이는 직접생산자가 자신의 의지와 관계없이 노동의 결과물을 타인에
게 빼앗기지 않는 사회를 말합니다. 노동하지 않고 노동생산물을 빼앗는 행위는 역사적으로 절도와 착
취가 일반적인 형태이지요. 그래서 묵자는 먼저 절도 행위를 비난합니다. 원시사회가 붕괴하면서 ‘나의
것’이라는 소유 관념이 생기고, 자신이 욕망하지만 가지지 못한 경우 ‘남의 것’을 훔치게 됩니다. 이런
경우를 예로 들어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지금 여기 사람이 있어 남의 농장에 들어가 복숭아와 자두, 오이와 생강을 훔쳤다고 하자. 위에서 알
면 그에게 벌을 내리고, 뭇사람이 들으면 그를 비난한다. 왜 그런가? 노동에 참여하지 않고 과실을 취
했기 때문이다. 그가 가져가야 할 이유가 없다.’
묵자는 남의 과수원에 들어가 과일을 훔치는 행위를 예로 들면서 일하지 않고 과실을 획득하는 것을
비난합니다. 노동에 참여하지 않고 그 과실을 따 먹는 행위는 타인의 노동성과를 무상으로 점유하기
때문에 도덕적으로 비난받아야 마땅하다는 의미이지요. 교조주의자들은 이를 근거로 묵자가 사유재산
을 옹호했다고 비난하지만, ‘절도와 착취가 비도덕적이라는 근거를 제시했다’라고 하는 표현이 더욱 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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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자, 노동이 존중받는 사회를 꿈꾸다

합하다고 생각합니다. 이는 노동하지 않고 그 과실을 향유하는 귀족을 향해 던지는 경고로 해석될 뿐
아니라, 오히려 ‘노동에 의한 소유’를 전제로 제공한 노동이 많으면 그 성과도 더 많이 향유해야 한다
는 의미로도 해석됩니다. 따라서 노동을 많이 하는 사람이 일하지 않는 사람보다 더 많은 부를 가질
수 있다는 빈부의 격차를 어느 정도 용인하고 있다고 보여 집니다. 그래서 당연한 말이지만, 목자는
누구나 열심히 일해야 한다고 힘주어 강조하지요. 아무튼 묵자는 노동이 존중받는 사회, 노동과정에
공정하게 참여할 수 있는 사회, 노동의 결과는 공평하게 분배받는 사회를 추구했습니다. 그러나 춘추
전국시대의 지배층은 부를 독점하고 호화로운 생활을 영위한 반면, 재화를 생산하는 하층민은 계속되
는 겸병전쟁 속에서 추위와 굶주림에 내몰리는 광경을 목격하면서 묵자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백성에게는 세 가지 근심이 있다. 굶주린 자가 먹지 못하고, 추운 자가 입지 못하고, 일하는 자가 쉬
지 못한다. 이 세 가지가 백성의 커다란 근심이다.’
생산직 노동을 담당하는 백성은 사시사철 일 년 내내 일해도 제대로 먹지 못하고 입지 못하고 쉬지도
못한다고 한탄하네요. 묵자는 당시 노예 같이 일하며 금수 같은 취급을 받았던 백성을 먹여주고 입혀
주고 쉴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지혜로운 하늘의 뜻이고, 그 뜻을 성실하게 수행하는 것이 지배자의 역
할이며, 그 역할이 잘 수행되어야 나라가 안정되고 잘 다스려질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현대적으로
표현하면 사회적 약자에게도 인간으로서 최소한의 생활을 보장해주어야 한다고 말입니다. 따라서 모든
재판과 정치는 백성의 의식주를 해결하는 데 이바지해야 한다는 것이 묵자의 문제의식이었지요.
동시에 다음과 같은 사회질서를 제시하는데, 이와 비슷한 문장은 『묵자』여기저기에서 관용구처럼 종
종 나오며, 아마도 묵가에서 금과옥조처럼 중요하게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큰 나라(또는 가문)가 작은 나라(또는 가문)를 공격하지 않고, 강자가 약자를 업신여기지 않고, 다수가
소수를 해치지 않으며, 영리한 자가 어리숙한 자를 속이지 않는다. 또한 귀족이 천민에게 오만하지 않
고, 부자가 가난한 자에게 교만하지 않으며, 젊은이가 노인을 약탈하지 않는다.’
의로운 정치를 하면 이렇게 된다고 하네요. 구구절절 옳은 말이긴 하지만, 현대 세계에서도 달성하지
못한 사회질서이지요. 그런데 눈에 띄는 부분이 있습니다. 다수와 소수를 언급하고 있습니다. 아마 당
시에도 다수가 소수를 해치고, 영리한 자가 어리숙한 자를 속이는 경우가 많았던 모양입니다. 저는 이
부분을 읽으면서 신체적 소수자인 장애인과 성 소수자가 우리 사회에서 법적ㆍ제도적 보호를 ‘거의’ 또
는 ‘전혀’ 받지 못하고 너무나 차별받고 있다는 사실을 떠올렸습니다. 정치적ㆍ이념적 소수자들도 마찬
가지이지요. 사회적 약자이면서 동시에 소수이기 때문에 그들은 더욱더 자신의 목소리를 내기 어렵고,
그래서 기댈 언덕이 없는 사람들인데, 묵자는 그들을 해쳐서는 안 된다고 하네요.

하느님의 마을 & 하느님의 백성
왜 국가가 필요한가?
제자백가는 혼란의 상징이었던 춘추전국시대의 산물이라고 말씀드렸지요. 그래서 그들의 사상은 대부
분 당시의 혼란을 극복하는 데 초점이 맞춰져 있습니다. 따라서 그들의 이론은 직접 또는 간접적으로
국가와 사회제도에 대해 설명하고 있으며, 거기에는 계급 문제에 대한 많은 암시를 포함하고 있지요.

-6-

묵자, 노동이 존중받는 사회를 꿈꾸다

그러면 국가적 혼란을 어떻게 해결해야 할까요? 중국 고대의 사상가들이 제시한 혼란을 해결하는 방식
은 3가지로 유형화할 수 있습니다. 하나는 개인이 스스로 자신의 욕망을 줄여서 사회구성원 사이에 이
해관계가 충돌하지 않게 하는 방식입니다. 이는 공자와 맹자가 제시하는 해결 방법이지요. 교육을 통
해 스스로 수양하고 덕을 쌓으면 이익을 마음에 품지 않게 된다고 하지요. 그리하여 각자의 욕망을 줄
이면 다른 사람의 이해관계와 충돌이 적어지거나 없어지고 나라가 잘 다스려진다는 식이지요.
다른 하나는 인간 내부의 수용이 아니라 외부의 힘을 빌려 이기적인 개인의 욕망을 제어하는 방식입니
다. 이는 순자와 한비자가 제안하는 방식입니다. 순자는 인간의 욕망을 식욕과 성욕으로 보고 예(禮)를
통해 자제해야 한다고 합니다. 그런데 한비자는 인간의 탐욕을 주로 권력욕, 소유욕, 명예욕으로 규정
하면서 법(法)으로써 개인을 제어하면 효과적이라고 주장합니다. 앞에 언급한 두 방식은 사회 혼란의
원인이 인간의 욕망과 탐욕에 있다고 전제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묵자는 개인의 욕망을 제어하는 데
초점을 두지 않고, 적극적으로 욕망을 인정하면서 그것을 충족시키는 방향으로 나아갑니다.
춘추시대 이전의 아주 먼 옛날에는 개인들이 자신만의 욕망을 추구하게 되면 욕망 자체가 실현되기 어
렵고 오히려 손해를 초래한다고 묵자는 생각했지요. 그래서 이를 극복하기 위해 사회구성원들 사이에
서로 다른 이해관계를 조화시켜 공동의 이익으로 일치시키는 방식을 제안합니다. 그리하여 사람들의
이해관계를 조화시키고 통일시키는 권력체계를 창출해야 한다고 힘주어 말하지요. 그래야만 금수 같은
혼란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현대식으로 표현하면 국가는 개인의 욕망을 충족시켜 그들
의 이익을 보호하고, 나아가 전체의 이익을 지키기 위해 만들어진다는 의미이지요.
묵자가 바라는 세상을 구현하기 위해 국가는 어떻게 구성되어야 할까요? 묵자는 정복전쟁이 본격화되
는 시대에 살았습니다. 전쟁의 승자는 영토와 백성을 독차지하고, 전쟁의 패자는 모든 것을 잃고 노예
로 전락하는 그런 시대였지요. 이런 살벌한 현실을 보면서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모든 나라는 크기에 관계없이 모두 하느님의 마을이며, 사람은 나이와 귀천에 관계없이 모두 하느님
의 백성이다.’
마치 예수의 말 같지 않나요? ‘모두 하느님의 마을인데, 왜 서로 빼앗고 빼앗기는가?’, ‘모두 하느님의
백성인데, 왜 서로 죽이고 죽임을 당하는가?’ 이렇게 생각했지요. 그런데 현실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그리하여 묵자는 한편으로 귀천에 따른 불평등한 질서를 인정한 유가를 부정하며 모두 하느님 앞에 평
등함을 강조하고 있으며, 나아가 혈연에 의해 세습되는 신분제를 비판합니다. 다른 한편으로 이를 실
현하기 위한 정치질서를 담보하는 국가의 필요성을 제기하지요. 국가에 대한 그의 생각은「상동(尙同)」
상ㆍ중ㆍ하 편에서 중점적으로 거론되는데, 각 편의 내용은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묵자는 원시시대 같은 아주 먼 옛날 정치권력이 생기기 이전의 상태를 상정합니다. 정치권력이 공백인
상태에서 사람들마다 의로움이 달라 서로 비방하고 원망하여 천하가 금수의 세계와 같이 혼란스럽다고
사유하지요. 여기에서의 의로움은 유가에서 말하는 윤리적ㆍ도덕적 의로움이 아니라, 이익 또는 이해
관계를 의미합니다.
‘지금 옛날로 돌아가 백성이 처음 생겨 아직 정치의 우두머리가 없었을 때 “천하의 사람들은 의로움이
다르다”라는 말이 있었다. 한 사람이 있으면 하나의 의로움이 있고, 열 사람이 있으면 열 개의 의로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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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자, 노동이 존중받는 사회를 꿈꾸다

이 있으며, 백 사람이 있으면 백 개의 의로움이 있다. 사람의 수가 늘어나면 소위 의로움 역시 늘어난
다. 그래서 사람들은 자신의 의로움은 옳고, 다른 사람의 의로움은 그르다 하여 서로 비난했다. 안으로
어버이와 자식, 형과 동생이 원수가 되고 모두 마음이 흩어져 서로 화합할 수 없었다. 힘이 남아 버리
더라도 서로 돕지 않으며, 좋은 방도가 있어도 감추어 서로 가르치지 않으며, 남은 재산이 썩어도 서
로 나누지 않았다. 천하의 혼란은 금수의 세계와 같았다.’
여기에서 인용한 묵자의 말은 사회과학적으로 대단히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우선, 인간 최
초의 상태를 전제합니다. 태초에 정치와 국가권력이 없는 상태가 역사적 사실인지 또는 논리적 가설인
지는 분명히 밝히고 있지 않지만, 당시로서는 대단한 사유의 실험이지요. 그런 상태에서 인간은 욕망
을 가지고 있으며, 자신의 욕망을 실현하려고 노력하는 자유의지를 가진 개별적이고 독립적 존재라고
생각하고 있어요. 그런데 이런 독립적인 존재가 저마다 자신의 이익을 주장하면 이익이 충돌하여 싸움
이 일어나고 세상이 혼란스러워진다고 말합니다. 이와 같은 태초의 혼란은 약 2천 년 후에 홉스가 근
대국가를 도출하기 위해 상정한 ‘자연상태’와 놀라울 정도로 유사합니다. 그가 『묵자』를 베낀 게 아닌
가 하는 의심이 들 정도로요. 홉스는 자연이 인간을 신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평등하게 만들었다고 전
제합니다. 즉, 인간 최초의 조건인 자연 상태는 근본적으로 자유롭고 평등한 개인으로 구성되어 있다
는 의미이지요. 그는 자연 상태가 역사적 사실이 아니라 논리적 가설이라고 분명히 밝히고 있지만, 공
통의 권력이 없는 곳에서는 정의도 불의도 존재하지 않으며, 사람들은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 같은
전쟁상태에서 살아갈 수밖에 없다고 하지요. 이와 같은 전쟁상태에서는 예의도 지배권도 없으며, 내
것과 네 것의 구분도 없기 때문에 혼란과 공포 속에서 살아가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정치의 우두머리가 없어서 초래되는 ‘금수의 세계’는 공통의 권력이 없는 ‘자연 상태’에 해당합니다. 금
수의 세계에 사는 묵자의 ‘개인’은 자신만의 이해관계를 가지고 그것을 실현하려고 노력하는 개별적 인
간이지만, 자연 상태에서 살아가는 홉스의 ‘개인’은 무한한 자유를 가진 육체적으로도 정신적으로도 평
등한 인간이지요. 그들이 상정하는 인간은 무한한 욕구를 추구하면서 자신의 이익과 생명을 지키려는
합리적 사고를 가진 그런 인간입니다. 그러면서 두 사람 모두 인간의 욕구가 혼란상태를 초래한다고
말하지요. 물론 홉스의 자연 상태는 원시사회뿐만 아니라 문명화된 사회의 내전이나 정치적 혼란 상태
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혼란의 결과 묵자는 사회구성원이 자신의 이해관계를 충족시키지 못하고 따라
서 화합하지도 못한다고 생각했으며, 홉스는 죽음의 공포에 휩싸인다고 사유합니다. 이를 해결하기 위
해 묵자는 상동(尙同)이론을, 홉스는 사회계약론을 제기하지요.
다시 묵자의 이야기를 들어보시지요. ‘백성이 우두머리가 없어서 천하의 의로움을 하나로 통일시키지
못하면 천하가 혼란스러워진다는 사실은 분명하다. 그리하여 천하에 현명하고, 지식이 있으며, 지혜로
운 사람을 선택하여 천자로 세우고, 천하의 의로움을 통일시키는 일에 종사하게 한다.’
묵자와 홉스가 혼란의 상태에서 벗어나기 위해 제기한 대안은 모두 새로운 권력을 창출하는 것이지요.
묵자는 현명한 사람을 선발하여 천자로 세우고, 홉스는 한 명의 자연인에게 권력을 위임하여 절대군주
를 세우는 일입니다. 천자는 많은 사람의 이해관계를 조정하고 통일시키는 임무를 부여받고, 절대군주
는 시민을 죽음의 공포로부터 탈출시켜 자유와 평등을 보장하는 역할을 부여 받게 되지요. 묵자와 홉
스 모두 백성과 시민이라는 보통 사람에게 주목했고, 국가가 이들의 이익에 봉사해야 한다고 생각했지
요. 그래서 묵자는 훗날 맹자와 순자의 공격을 받았고, 홉스는 왕당파로부터 반종교적이라는 이유로
비난받았을 뿐 아니라, 개혁적 의회파로부터는 절대왕정을 옹호했다는 이유로 거부당했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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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자, 노동이 존중받는 사회를 꿈꾸다

논리의 전개방식이나 결론에서 묵자와 홉스의 공통점을 너무나 많이 발견할 수 있습니다. 홉스의 권리
양도나 권력의 위임과 묵자의 현명한 사람의 선택이라는 차이점은 있지만요. 시간적 차이와 중국과 영
국이라는 공간의 거리를 고려하면 두 사람의 이론은 거의 같다고 평가할 수 있지 않을까요?

천하에 남이란 없다
서로 사랑하고 서로 이익을 주라
앞에서 살펴본 묵자의 생각을 정리해봅시다. 태초에 모든 인간은 자신의 이익을 추구하는데, 이익이
충돌하는 상황에서 지도자가 없으면 금수의 세계 같은 혼란이 일어난다. 그래서 현명한 사람을 지도자
로 선발하고, 그들에게 직위와 권한을 주어 국가기구를 만들고, 현명한 지도자가 많은 사람의 다양한
이해관계를 조정하면 혼란을 해소할 수 있다. 그럼에도 묵자는 그것만으로는 시스템이 완비되지 않았
다고 생각했나 봅니다. 아니, 좀 더 정확하게 말하면 현실 세계는 묵자가 제시한 시스템을 따라가지
못하고 엄청난 혼란에 빠져 있었지요. 그래서 묵자는 의사가 병을 고치기 위해서는 병의 원인을 알아
야 하듯이 세상의 혼란을 제거하기 위해서는 혼란의 근원을 알아야 한다고 강조합니다. 그리고 현실을
분석한 후 다음과 같은 진단을 내립니다.
‘잠시 이렇게 많은 해로움이 생긴 연유를 따져보자. 이것은 어디에서 생겨나는가? 이것은 다른 사람을
사랑하고 이롭게 함에서 생겨났는가? 결코 그렇지 않다. 반드시 다른 사람을 미워하고 해치는 데서 생
겨났다고 말할 수 있다.’
서로 사랑하지 않고 미워하기 때문에 세상의 모든 혼란이 생긴다고 하네요. 그래서 겸애(兼愛)를 들고
나옵니다. 묵자의 겸애는 무조건적인 사랑이라고 보기는 어렵고, 대단히 정치적이고 목적이 있는 사랑
이라고 생각됩니다. 세상 사람들에게 해로움은 혼란이며, 혼란은 서로 사랑하지 않기 때문이라고 진단
합니다. 그러니 혼란을 극복하려면 서로 사랑해야 한다고 말하기에 겸애가 합목적적인 정치적 성격을
가지고 있다고 말할 수밖에 없어요. 묵자에게 겸애의 목적은 혼란을 극복하여 세상 사람들에게 이익을
주는 데 있으며, 따라서 겸애는 세상의 혼란을 제거하기 위한 강력한 처방전이지요.
그러면서 혼란의 구체적인 상황을 열거합니다. 신하와 자식이 임금과 어버이에게 충성하고 효도하지
않으면 혼란이 생긴다고 합니다. 또한 임금과 어버이가 신하와 자식을 사랑하지 않으면 이 또한 혼란
이라고 말합니다. 나라의 우두머리인 제후들끼리, 그리고 집안의 우두머리인 대부들끼리 서로 사랑하
지 않아도 혼란이라고 말합니다. 위에서 아래를 억압하고, 아래에서 위로 대들어도 혼란이 생기며, 같
은 지위에 있는 사람들끼리도 자신의 이익만을 탐하면 혼란이라고 이야기하지요. 그래서 다른 나라를
자기 나라와 같이 사랑하고, 다른 집안을 자기 집안같이 사랑하고, 남의 부모와 자식을 자기 부모와
자식처럼 사랑하고, 다른 사람의 몸을 자기 몸과 같이 사랑하라고 권유합니다.
또 능력을 강조했고, ‘노동에 의한 소유’를 주장했던 묵자도 노동력을 상실하거나 능력이 부족한 과부
와 홀아비, 고아에 대해서도 기본적인 생활을 할 수 있도록 하려면 겸애해야 한다고 합니다. 이처럼
묵자 사상의 상징처럼 알려진 겸애는 추상적인 숭고하고 도덕적인 사랑이 아니라, 혼란을 잘 다스리고
천하의 해로움을 제거하려는 명확한 목적을 가진 사랑으로 보아야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겸애는 합목
적적이며, 따라서 개인의 윤리적 도덕률이라기보다는 통치 원리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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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자, 노동이 존중받는 사회를 꿈꾸다

그리고 천자가 겸애하면 제후 또는 국군(國君)이 겸애할 수 있고, 제후 또는 국군이 겸애하면 향장(鄕
長)이 겸애할 수 있으며, 향장이 겸애하면 이장(里長)이 겸애할 수 있으며, 이장이 겸애하면 마을 사람
들이 서로 더불어 사랑할 수 있게 되지요. 이와 같이 상동의 원리가 아래로부터 위로 진행되는 과정이
라면, 겸애는 위에서 아래로 발현되는 결과를 가져오게 된다고 묵자는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천자가
겸애를 실천하면 모두 따라간다고 하지요. 강자와 약자, 다수와 소수, 부자와 빈자, 귀한 자와 천한 자,
똑똑한 자와 어리숙한 자의 관계에서 전자가 후자를 사랑해야 한다고도 합니다.
묵자는 이를 실천하는 지도자를 ‘겸군(兼君)’, ‘겸사(兼士)’라고 불렀고, 그렇지 못한 사람들을 ‘별군(別
君)’, ‘별사(別士)’라고 했습니다. 즉, 겸애는 위로, 아래로, 그리고 옆으로 모든 인간관계에 적용되지만,
상동과는 반대 방향으로 ‘내리사랑’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혹시 묵자는 윗사람에 대한 복종과 아랫사람
에 대한 겸애가 서로 주고받는 사회적 계약이라고 생각한 건 아닐까요?

겸애를 실천하는 다섯 가지 강령
묵자의 방법론
『묵자』를 읽다 보면 어디에서나 관철되는 원칙이 있는데, 그것은 그가 ‘삼표(三表)’, 또는 ‘삼법(三法)’
이라고 부르는 방법론입니다. 이것은 어떤 원칙을 주장하거나 아니면 다른 주장을 판단할 때도 적용되
는 기준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묵자는 “천하의 진실과 거짓은 알기 어렵다”라고 하면서 “말
을 하거나 글을 쓴다면 우선 기준을 세우지 않으면 안 된다”라고 하지요. 그러고는 다음과 같이 세 가
지 기준을 제시합니다.
‘세 가지 기준은 무엇인가? 근본[本] 되는 것이 있어야 하고, 근원[原] 되는 것이 있어야 하며, 쓰임
[用] 되는 것이 있어야 한다. 어디에 근본을 두어야 하는가? 위로는 옛날 성황들의 업적에 근본을 두
어야 한다. 무엇에 근원해야 하는가? 아래로는 백성이 보고 듣는 실정을 살피는 데 근원해야 한다. 무
엇에 쓰여야 하는가? 형벌과 정치에 드러나고, 나라와 백성의 이익에 부합하는지 살피는 데 쓰여야 한
다. 이것이 내가 말하는 세 가지 기준이다.’
우선 성왕들의 업적에 근본을 두어야 한다고 말하네요. 여기에서 성왕은 요(堯)ㆍ순(舜)ㆍ우(禹)ㆍ탕
(湯)ㆍ문(文)ㆍ무(武)를 말합니다. 그런데 유가와 묵자는 성왕들에 대한 인식에 있어 차이가 존재합니
다. 공자가 성왕들을 자기수양에 철저했던 인격적인 사람이었다는 데 방점을 두고 있다면, 묵자는 그
들의 업적이 겸애를 통해 세상 사람들에게 이익을 가져다주었다는 점을 강조하지요. 두 번째로 백성이
보고 들은 실정을 살펴야 한다고 말하네요. 이 말은 백성의 입장과 처지를 객관적으로 이해하기 위해
백성과 끊임없이 소통하라는 의미로 읽힙니다. 결국 근본[本]과 근원[原]은 과거와 현재를 아우르는
경험의 총체입니다. 이를 철저하게 연구하고 소통하여 쓰임[用]을 판단하자는 말입니다.
마지막으로 쓰임의 내용으로 형벌과 정치를 통해 백성의 이익에 부합하는지 살펴야 한다고 말하는데요,
성인들의 업적과 백성의 실정을 알고, 그 앎이 재판과 정치에 반영되어 백성의 이익에 부합하면 행하
고, 그들의 이익에 반하면 행하지 말아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백성의 이익 여부가 가장 중요한 기준입
니다. 앞에서 말한 두 기준의 존재근거가 세 번째 기준에 있듯이, 재판과 정치의 존재이유가 백성의
이익을 늘리는 데 있답니다. 묵자는 관용어처럼 “천하의 이익을 일으키고, 천하의 해로움을 제거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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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자, 노동이 존중받는 사회를 꿈꾸다

한다”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천하는 세상 사람들을 의미하지요. 그는 이 명제를 논증이 필요 없는 명
백한 진리이며, 다른 주장의 전제가 되는 공리(公理)로 생각하고 있지요. 바로 이런 이유로 묵자는 제
자백가 중에서 하층민의 이익을 대변하는 유일한 사람으로 꼽히지요. 여기에서 우리는 묵자가 경험주
의자이면서 동시에 실용주의자라는 사실을 다시 한 번 확인하게 됩니다.

배워야 세상을 구한다
수신과 겸애의 차이
배우고 가르치는 교육에 대해 공자와 묵자는 많은 공통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두 사람 모두 배우고 가
르치는 일의 중요성을 크게 강조했고, 교육의 대상에 대해서도 신분과 직업의 귀천에 차별을 두지 않
았을 뿐 아니라, 사회적으로 소외되고 지탄받는 사람들마저 가르침의 대상에 포함했지요. 또한 천하를
돌아다니며 입으로는 자신의 신념과 철학을 전하며 몸으로는 그 뜻을 실천했다는 점도 유사합니다. 그
럼에도 교육의 목표와 내용 등에서는 명확한 차이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공자에게 학문과 교육의 목표
는 수기(修己)를 통한 치인(治人)이었다고 말할 수 있지요. 자신의 인격을 수양하여 재덕을 겸비한 군
자가 되고, 그들이 관료가 되어 정치를 하면 주(周)나라의 종법적(宗法的) 질서를 회복할 수 있다고 굳
게 믿었습니다. 따라서 공자의 학문과 교육은 도덕과 윤리, 나아가 정치가 한 덩어리로 일체성을 가지
고 있습니다. 이런 점에서 공자의 후예를 자처하는 맹자와 순자도 마찬가지입니다.
묵자도 학문과 교육은 그의 정치사상과 따로 떨어져 존재하지 않으며, 그가 지향하는 국가와 사회를
건설하는 데 꼭 필요한 조건이었습니다. 묵자의 사상을 한마디로 요약하면 ‘겸애’입니다. 겸애는 하늘
의 뜻이라고 말하지요. 겸애를 실천하는 임금을 ‘겸군(兼君)’이라 부르고, 이를 실천하는 선비를 ‘겸사
(兼士)’라고 불렀지요. 겸군과 겸사의 말과 행동에 대해 묵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모든 백성을 살펴보
고 굶주리면 먹여주고, 추우면 입혀주고, 병이 들면 보살펴주고, 죽으면 장례를 치르고 묻어준다.’
이들은 모두 ‘천하의 이로움을 일으키고 천하의 해로움을 제거하는 일’을 자신의 임무로 삼고 있다고도
하지요. 여기에서 ‘천하’란 세상 사람들을 의미합니다. 즉 세상 사람들을 이롭게 하는 행위를 의로움
[義]이라고 정의합니다. 그런데 묵자는 가르치는 일도 배우는 일도 모두 의로움을 실행하는[爲義] 행
위로 간주하고 있습니다. 가르침만이 아니라 배움도 남을 이롭게 한다는 의미이지요. 묵자는 나 자신
의 수양을 위해 또는 나의 출세를 위해서가 아니라 남을 위해 배운다고 생각했습니다.
또한 가르침을 먼저 주장한다는 의미의 ‘창(唱)’에. 배움을 응답한다는 의미의 ‘화(和)’에 비유하면서
“가르침과 배움은 같은 근심을 가진다(唱和同患)”고 합니다. 같은 근심은 같은 목적이라 말할 수 있는
데, 다시 말하면 가르침과 배움은 바로 백성을 이롭게 하는 데 목적이 있다는 의미로 읽히네요. 그러
면서 다음과 같이 가르침과 배움의 관계를 말합니다.
‘주장에 잘못이 없어도 두루 영향을 미치지 않으면 쓸모없는 돌피와 같다. 응답에 잘못이 없어도 그렇
게 되면 그칠 수 없다. 주장하지만 응답이 없으면 이는 배우지 않는 것이다. 지혜가 적은데 배우지 않
으면 성과는 반드시 적다. 응답하지만 주장이 없으면 이는 가르치지 않는 것이다. 지혜는 있지만 가르
치지 않으면 성과는 마침내 멈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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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자, 노동이 존중받는 사회를 꿈꾸다

묵자는 가르침과 배움의 유기적 상호관계를 언급하면서 그 목적을 명확하게 설정하고 있네요. 이처럼
교육의 사회적 가치는 겸사(兼士)를 배양하여 모든 사람을 이롭게 하는 공공선에 있다고 주장합니다.
그래서 대중 속으로 들어가 가르침과 배움을 실천해야 한다는 교육철학을 가지고 있었다고 평가되지요.
공자와 마찬가지로 묵자 역시 비록 사교육업자이지만 공공의 이익을 지향하는 셈이지요. 그래서 두 사
람은 도무 사명감을 가지고 천하를 돌아다니며 유세하고 배움을 권유합니다.
일부 학자들은 묵자에게 사랑과 이익이 불안한 동거를 한다고 평가하지만, 결국 겸애는 의로움이며 동
시에 이로움입니다. 그래서 “의로움보다 더 귀중한 것은 없다”라고 합니다. 묵자는 의로움을 행하는
이런 사람들을 현명하다고 말하면서 그들을 존중해야 한다고 말하지요. 현명하기 위해서는 힘이 있으
면 재빠르게 남을 돕고, 재산이 있으면 꾸준히 남에게 나누어주고, 도리를 알면 권하여 남을 가르쳐야
한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힘이 남아도 서로 돕지 않고, 남은 재산이 썩어도 나누지 않으며, 좋은 방도
가 있어도 감추며 서로 가르쳐주지 않으니 천하의 혼란은 마치 금수와 같다”라고도 말합니다.
묵자가 제시한 세 가지 유형의 행위, 즉 남을 돕고 재산을 나누고 가르치는 행위는 겸애이자 의로움의
준거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모두 이를 실천한다면 서로 사랑하고 서로 이익을 주는 더불어 사는 사회
에 좀 더 가까이 접근할 수 있다고 생각됩니다. 그래서 도리를 알면 권하여 남을 가르쳐야 한다고 강
조하지요. 여기에서 도리는 겸애를 의미하니 교육의 목적은 겸애를 널리 전파하는 데 있겠네요.

왜 묵자인가?
누구를 위하여 종을 울리나?
모든 사회이론이나 사회사상, 그리고 거기에 기초한 정책은 그것이 의도하건 의도하지 않건 특정한 집
단이나 계급의 이해관계를 반영하고 있습니다. 물론 그 이론이나 사상들이 지배계급에 의해 자신들의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해 왜곡되는 경우도 종종 있지만 말이지요. 그뿐만 아니라 의도하지 않거나 의도
와는 반대 방향으로 이해관계에 영향을 미치는 경우도 종종 나타나지요.
묵자 사상은 누구의 이익을 대변했을까요? 그의 사상을 어떻게 이해하느냐에 따라 어떤 사람은 노예주
계급의 입장에 섰다고 말하고, 다른 사람은 농민과 수공업자의 이익을 대변한다고 주장합니다. 그의
실천적 개혁과 관련해서도 어떤 사람은 그를 ‘혁명적’이라 말하고, 다른 사람은 ‘타협적’이라고 말하며,
또 다른 사람은 ‘보수적’이며 ‘반동적’이라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그의 이념적 지표에 대해서도 어떤 사
람은 ‘민주주의’라고 말하고, 다른 사람은 ‘이상적 사회주의자’라고 평가합니다. 묵자는 인류의 유년기
인 ‘축의 시대’에 살았던 인물이기에 그의 사상에는 복합적인 성격이 내재되어 있습니다.
묵자는 다른 제자백가에 비해 먹고사는 문제를 중요하게 생각했고, 경제 문제를 말할 때는 두 가지 원
칙을 지켜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하나는 생산과 관련된 문제로서 근본에 충실하고 근본을 강화
해야 한다는 원칙[强本]이지요. 재화와 서비스의 생산이 근본에 해당합니다. 묵자에게 정치의 근본은
현명한 사람을 존중하고 등용하는 일이지만, 경제의 근본은 사회적 분업을 지칭하고 있지요.
즉 왕공대인은 재판을 통해 옥사를 다스리고, 선비와 군자들은 안으로는 관청을 다스리고 밖으로는 이
익을 거두어들여 창고를 채워야 한다고 말하지요. 이들은 지금 식으로 말하면 정치와 재판 그리고 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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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자, 노동이 존중받는 사회를 꿈꾸다

정 같은 서비스를 생산하는 셈입니다. 그리고 농부는 밭을 갈아 농사짓고 나무 심어 식량을 생산하고,
아녀자는 길쌈하고 베를 짜서 베나 명주 같은 옷을 만들어야 한다고 하지요. 이들은 인간의 생명 유지
에 필요한 재화를 생산하는 직접생산자이지요. 현대에는 훨씬 더 다양한 재화와 서비스가 생산되고 있
지만, 이러한 분업체계는 지금도 유지되고 있습니다.
한편 묵자는 나라가 안정되기 위해서는 모든 사람이 자신이 맡은 직무를 충실하게 수행해야 한다고 강
조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왕공대인과 경대부, 농민과 아녀자를 포함한 모든 사회계층의 사람들이 누
구나 아침 일찍 나와서 저녁 늦게까지 일해야 한다고 강조하지요. 그런데 공격전쟁이나 ‘후한 장례와
오랜 초상’, 그리고 음악에 대한 탐닉은 그러한 노동시간을 박탈하기 때문에 사회적 분업체계를 교란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거기에다가 백성은 힘들여 일하지만 쉬지 못한다고 인식하고 있었습니다. 종합
해보면 백성은 쉬지도 못하고 열심히 일하지만, 사대부 이상의 지배층은 그렇지 못하다고 지적하고 있
는 셈이지요. 바로 그들이 근본을 지키지 못하는 사회적 혼란의 주범이라는 결론이 도출됩니다.
또 다른 하나의 원칙은 소비와 관련된 문제의식인데, 쓰임을 절약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인간은 노동
과정을 거쳐 인간에게 유용한 생산물을 만들어내지요. 다시 말해 모든 재화나 서비스, 나아가 사회적
제도는 각기 나름대로 쓸모나 쓰임새를 가지고 있습니다. 경제학에서는 이를 ‘사용가치’라고 말하지요.
그런데 묵자는 그 쓸모가 누구를 위한 쓰임새인지를 구분하고 있습니다. 호화로운 궁궐은 왕공대인에
게는 쓸모가 있지만, 백성에게는 아무 쓸모가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겸병전쟁은 군주 한 사람에게는
정말로 쓸모가 있겠지만, 백성에게는 공포와 기아의 원인을 제공하겠지요. 후한 장례와 오랜 초상도
왕후장상과 경대부에게는 쓰임새가 있지만, 백성에게는 생활고의 원천이 되는 제도일 수밖에 없겠지요.
이렇게 생각한 묵자는 ‘백성을 위한 쓸모’를 기준으로 이론을 전개합니다.
그래서 재화의 생산은 백성이 쓰기에 충분할 정도로 공급되어야 하지만, 백성이 사용하기에 충분하면
생산을 그만두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묵자가 살았던 시대에는 생산력 수준이 매우 낮았을 뿐
아니라 위에서는 쾌락에 싫증 내지 않을 정도로 사치했기에 백성이 사용하기에 충분한 재화의 생산은
어려웠습니다. 그래서 두 가지 대안을 제시합니다. 하나는 지배층의 사치를 줄이면 백성이 필요한 재
화를 두 배로 늘릴 수 있다고 하네요. 과시를 위한 낭비와 희귀한 재화를 수집하는 취미가 여기에 속
하지요. 다른 하나는 쓸모없는 비용을 줄이는 일입니다. 백성에게 유용하면 비용을 들이고 백성에게
유용하지 않으면 비용을 추가하지 말아야 한다고 말입니다. 옷에 수를 놓거나 진귀한 음식과 향료를
장만하고, 배와 수레를 장식하는 일이 여기에 속하지요. 그래서 다음과 같이 결론을 내립니다. ‘쓸모없
는 낭비를 제거하는 것이 성왕의 길이며, 천하의 큰 이익이다.’
결국 묵자의 쓸모는 백성의 입장에서 그들의 이익에 기준이 맞춰져 있다고 보여 집니다. 모든 재화는
백성의 쓰임새만 충족하면 거기에서 그쳐야 한다고 말하지요. 그래야만 백성이 굶주리지 않고 추위에
서 해방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결국 근본을 강화해야 하고 쓰임을 절약해야 한다는 두 가지 원칙
은 모두 지배층을 향한 질타입니다. 이러한 원칙은 그동안 수차례 말씀드렸던 삼표법에도 그대로 관철
됩니다. 다시 한 번 정리하여 말씀드리면 삼표는 옳고 그름의 기준인 성왕들의 업적을 근본[本]으로
삼고, 백성이 보고 듣는 실정[原]에 기반을 두고 그들의 눈높이에서 여론을 수렴해야 하며, 나라와 백
성의 이익에 부합[用]해야 한다는 기준입니다. 이 3가지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나라와 백성의 이
익에 부합하는 여부’이지요. 하층민인 백성의 이익은 곧 나라의 이익이며, 그들의 이익에 부합하지 않
으면 그 어떤 제도와 정책도 그 의미가 사라진다는 묵자의 철저한 계급적 성격을 보여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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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자, 노동이 존중받는 사회를 꿈꾸다

한편 묵자는 노동의 중요성을 언급하면서 자연적 분업을 넘어 사회적 분업과 작업장 내 분업을 강조했
습니다. 이는 그가 분업이 노동의 사회적 생산력을 증대시킨다는 사실을 인지했음을 의미하지요.
그리고 묵자가 대변했던 농민, 수공업자, 상인은 소생산자의 형태를 띠었지만, 그들이 부르주아지가
되기 위해서는 2천 년 이상을 기다리지 않으면 안 되는 그런 존재였지요. 따라서 묵자의 농민, 수공업
자, 상인은 ‘소생산자’로 분류하지 않고, 단순하게 피지배계층인 ‘백성’으로 범주화하는 것이 더 정확하
다고 생각됩니다. 계급이론의 기계적ㆍ도식적 적용이 정반대의 결론을 도출하는 오류를 저지르고 있다
고 보아야 합니다. 묵자가 살아서 돌아온다면 땅을 치며 억울해하지 않을까요?
겸애의 실천 강령인 비공(非攻), 절용(節用), 절장(節葬), 비악(非樂), 비명(非命)에 대한 주장도 그 기
준은 모두 백성에게 이로운가 해로운가에 달려 있었지요. 공격전쟁을 반대하고, 사치와 낭비를 없애고,
호화 장례와 오랜 초상을 간소하게 하고, 음악을 비난하며, 운명론을 배격하는 이유가 당시의 사회제
도가 재생산구조를 파괴하여 굶주리고 헐벗은 백성의 생존을 위협했기 때문입니다. 묵자는 현실 속에
서 신음하는 백성에게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이 아니라 ‘최대 다수의 기본적 욕구를 충족’시키려고 노
력했습니다. 위계질서 또는 수직적 사회구조를 자연법칙으로 인정한 순자와 한비자는 국가가 개인을
제어하는 데 초점을 두었다면, 수직적 질서를 의로움이 구현되는 수단으로 생각한 묵자는 국가를 통해
개인의 이익을 중재하고 조정하여 이 땅에 하느님의 공의(公義)를 실현하려고 했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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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자, 노동이 존중받는 사회를 꿈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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