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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영화,리뷰,

배낭 속 예술여행

by Casey,Riley 2022. 3.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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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성 지음 / 린
이 책은 고난 속에서 예술의 혼을 추구한 미술가와 음악가들의 작품, 현장감 있는 자료와 답사를
통해 목격한 거장들의 흔적을 섬세한 스토리텔링을 통해 들려준다. 예술은 성찰을 통해 보여준다
고 한다. 그렇다고 소나기 속에서 배를 저으며 성찰할 수 없다. 소나기가 멎고 수면이 어느 정도
가라앉으면 우리는 전에 느끼지 못했던 새로운 형태의 아름다움에 홀연히 눈뜰 것이다. 바로 그때
우리는 위대한 예술가의 진면목(眞面目)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배낭 속 예술여행
진성 지음

▣ Short Summary
우리가 누군가에게 사랑을 고백할 때 말이나 글로 ‘사랑한다’고 전달하기가 매우 쑥스러워 좀처럼 실행
하지 못할 때가 있다. 하지만 선물이나 노래 등 사랑을 대신할 수 있는 다른 형태로 전달하면 훨씬 부
드럽고 간접적이지만 강한 인상을 남길 수 있다. 예술은 이런 형태와 비슷하다고 하겠다.
레프 톨스토이는 『예술이란 무엇인가』에서 ‘예술이란 사람과 사람을 결합하는 수단’이라고 했다. 톨스
토이의 말처럼 예술은 같은 분모를 느끼며 향유하는 사람들의 시각일지 모른다. 왜냐면 예술은 받아들
이는 사람에 따라 그 아름다움의 기준이 다르기 때문이다. 전형적인 미인을 묘사한 그림보다 그물을
끌어 올리는 늙은 어부를 그린 그림에서 더 매력적인 아름다움을 느끼는 사람들도 있고, 클래스 음악
을 아름답게 느끼는 사람도 있는가 하면 반면에 록 음악을 통해 아름다움을 느끼는 사람들도 있는 것
이다. 그렇기에 ‘미’라는 것 자체도 하나의 절대적인 기준이 아니다. 이처럼 예술에는 부동의 가치라는
건 존재할 수 없다. 예술작품은 사람들이 주관으로 느끼며, 사람들의 주관은 영원불멸하는 절대적인
요소가 아니기 때문이다.
하지만 저마다 각기 다른 예술을 추구하는 예술가들의 고뇌에 찬 행위만은 공통적이다. 흔히 이름난
예술가를 우리는 천재나 아니면 거장이라 부른다. 그들의 명칭은 후대에 이르러 헌정된 것으로 생전
당시에는 처절한 경쟁과 고뇌 속에서 작품을 만들었다. 그들 대부분은 빈민으로 살다가 사후에 재해석
과 재발견의 과정을 거치고 나서야 작품을 인정받았다. 빈센트 반 고흐와 폴 고갱, 모딜리아니 등 수
많은 거장이 생전에는 빛을 보지 못하다가 사후에야 빛을 보았다. 그들은 생전에 서로 교류하거나 경
쟁하며 예술을 추구했다. 그들은 스승에게서 예술을 배웠으며 기량이 뛰어난 제자는 스승을 뛰어넘는
예술을 펼쳤다. 또한, 경쟁자를 통해서 기량을 키웠다.
미켈란젤로는 자신보다 스무 살 더 많은 레오나르도 다 빈치와 경쟁하며 그의 명성에 도전했다. 베키
오 궁전에 다 빈치가 <앙기아리 전투>를 그리자 미켈란젤로는 <카시나의 전투>를 그려 대결했다. 이
때 미켈란젤로는 조각이 전문이었지 회화는 처음이었다. 그러나 그는 과감하게 대화가인 다 빈치에게
도전장을 내민 것이다. 안타깝게도 두 거장의 작품은 완성을 보지 못해 미완의 승부로 남았으나 분명
한 것은 이를 계기로 미켈란젤로가 회화에 눈을 뜨게 되었다는 것이다.
라이벌은 비슷한 실력을 갖추어야 경쟁 관계가 형성된다. 실력에 차이가 나면 아무리 노력해도 라이벌
로 인정하지 않는다. 따라서 라이벌은 자신의 실력을 발전시킬 수 있는 사람을 말한다. 하지만 한편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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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낭 속 예술여행

로 라이벌은 아무리 노력해도 안 된다는 절망감을 느끼게 하는 사람이기도 하다. 따라서 라이벌 관계
를 어떻게 받아들이는가에 따라 인생이 달라질 수 있다. 라이벌을 끊임없이 질투하고 끊임없이 비교함
으로써 자신의 예술적 경지를 끌어올린 화가가 빈센트 반 고흐다. 고흐는 고갱과의 만남이 있었기에
자신의 예술 세계를 변화시킬 수 있었다.
고흐는 아들의 노란 집에 화가들의 공동체를 만들어 예술을 논하고자 했다. 누구도 찾아오지 않은 그
곳에 폴 고갱이 나타났다. 그리고 그와 예술적인 부분뿐만 아니라 시시콜콜한 문제까지도 라이벌 의식
이 발동하여 결국 파국으로 치닫는다. 결국 두 사람은 공교롭게도 자살이라는 극단적 선택을 했으나
그들의 작품은 미술계의 최고로 인정받고 있다.
이 책은 예술가들의 라이벌과 인간관계를 조망한 내용을 위주로 하여 여행이라는 콘셉트를 추가하여
꾸몄다. 음악의 도시 오스트리아의 빈과 예술가의 언덕이라 할 수 있는 몽마르트르, 그리고 이탈리아
르네상스 발상지로 알려진 피렌체의 모습을 현장감 있는 자료와 답사를 통해 목격한 거장들의 흔적을
살펴본다.
▣ 차례
◆예술로 빛나는 그랜드 투어_ 르네상스의 탄생지 피렌체
◆르네상스 부조의 영원한 라이벌_ 필리포 브루넬레스키와 로렌초 기베르티
◆예술로 빛나는 그랜드 투어_ 야외 박물관 시뇨리아 광장
◆르네상스 거장들의 자존심 대결_ 레오나르도 다 빈치와 미켈란젤로
◆레오나르도 다 빈치와 미켈란젤로의 프레스코 대결_ 앙기아리 전투와 카시나의 전투
◆거장의 위대한 지혜_ 조루조 바사리와 레오나르도 다 빈치
◆예술로 빛나는 그랜드 투어_ 신의 은총이 깃든 바티칸 미술관
◆자존심과 끈기의 대결_ 미켈란젤로와 라파엘로 산치오
◆예술로 빛나는 그랜드 투어_ 운하와 낭만의 도시 베네치아
◆음악과 희극의 언쟁_ 안토니오 비발디와 카를로 골도니
◆예술로 빛나는 그랜드 투어_ 베네치아 화파의 명화를 찾아서
◆거장들의 우정_ 조르조네와 티치아노 베셀리오
◆조르조네와 티치아노의 합작을 이루다_ 잠자는 비너스 최초의 도상으로 태어나다
◆화공에서 백작이 되다_ 카를 5세와 티치아노 베셀리오
◆예술로 빛나는 그랜드 투어_ 베네치아 운하의 곤돌라 여행
◆스승을 뛰어넘어라_ 틴토레토와 파울로 베로네세
◆예술로 빛나는 그랜드 투어_ 바흐의 숨결이 흐르는 라이프치히
◆음악의 아버지와 어머니_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와 게오르크 프리드리히 헨델
◆예술로 빛나는 그랜드 투어_ 피렌체의 보물 우피치 미술관
◆살인과 도망자가 된 예술가_ 카라바조의 두 얼굴
◆페미니스트 여류 화가의 페미니즘_ 아고스티노 타시와 아르테미시아 젠틸레스키
◆예술로 빛나는 그랜드 투어_ 태양왕의 거처 베르사유 궁전
◆왕의 춤을 위해 목숨을 걸다_ 루이 14세와 장 바티스트 륄리
◆예술로 빛나는 그랜드 투어_ 루벤스의 흔적이 깃든 안트베르펜
◆거장들의 극명한 삶과 죽음_ 프란스 할스와 페테르 파울 루벤스
◆예술로 빛나는 그랜드 투어_ 음악의 도시 오스트리아 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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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기의 피아노 대결_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와 무치오 클레멘티
◆예술로 빛나는 그랜드 투어_ 모차르트의 고향 잘츠부르크
◆질투와 애증이 부른 광기_ 안토니오 살리에리와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
◆세계 3대 악처의 오명을 쓰다_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와 콘스탄체 모차르트
◆예술로 빛나는 그랜드 투어_ 역사와 예술로 빛나는 도시 로마
◆로마를 놓고 겨루다_ 잔 로렌초 베르니니와 프란체스코 보로미니
◆역동적 동세의 다비드상을 표현하다_ 베르니니의 다비드상
◆베르니니의 걸작 중의 걸작_ 페르세포네의 납치
◆베르니니의 미의식을 보여주는 미학의 조각상_ 아폴론과 다프네
◆베르니니의 에로티즘을 나타낸 조각상_ 베르니니의 문제작
◆로마 최고의 분수 조각을 만나다_ 베르니니의 분수
◆비운으로 삶을 마감한 보로미니의 예술을 만나다_ 보로미니의 작품세계
◆예술로 빛나는 그랜드 투어_ 태양과 정열의 스페인 마드리드
◆궁중 화가와 서민의 화가_ 디에고 벨라스케스와 바르톨로메 에스테반 무리요
◆노예에서 화가가 되다_ 디에고 벨라스케스와 후안 드 파레야
◆예술로 빛나는 그랜드 투어_ 풍차와 튤립의 나라 네덜란드
◆사랑과 애증의 관계_ 헨드리케 스토펠스와 렘브란트 하르먼스 존 반 레인
◆예술로 빛나는 그랜드 투어_ 로코코의 여행 프랑스 궁전
◆에로티즘과 풍속화_ 프랑수아 부셰와 장 바티스트 그뢰즈
◆동갑내기 왕비와 여류 화가_ 마리 앙투아네트와 엘리자베스 비제 르 브룅
◆예술로 빛나는 그랜드 투어_ 베토벤과 슈베르트가 영면한 빈의 중앙묘지
◆두 영웅의 뒤늦은 만남_ 루트비히 판 베토벤과 프란츠 슈베르트
◆예술로 빛나는 그랜드 투어_ 프랑스의 자랑 루브르 박물관
◆신고전주의와 낭만주의의 라이벌_ 외젠 들라크루아와 장 오귀스트 도미니크 앵그르
◆예술로 빛나는 그랜드 투어_ 음악이 넘치는 라이프리치
◆거장들의 삼각관계_ 로베르트 슈만과 클라라와 브람스
◆예술로 빛나는 그랜드 투어_ 클래식의 전당 파리 음악당
◆피아니스트 거장과 그들의 연인_ 프레데리크 쇼팽과 프란츠 리스트
◆예술로 빛나는 그랜드 투어_ 자연주의 미술의 산실 바르비종
◆거장들의 진정한 우정_ 테오도르 루소와 장 프랑수아 밀레
◆예술로 빛나는 그랜드 투어_ 조각의 성전 파리 로댕 미술관
◆집착을 낳은 애증의 관계_ 오귀스트 로댕과 카미유 클로텔
◆예술로 빛나는 그랜드 투어_ 예술가의 언덕 몽마르트르
◆예술을 빛낸 화가의 모델들_ 에두아르 마네와 그의 뮤즈들
◆예술로 빛나는 그랜드 투어_ 별이 빛나는 프랑스 아를의 정취
◆후기 인상주의 라이벌_ 빈센트 반 고흐와 폴 고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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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낭 속 예술여행

배낭 속 예술여행
진성 지음

예술로 빛나는 그랜드 투어_ 르네상스의 탄생지 피렌체
피렌체는 이탈리아 토스카나의 중심 도시이자 역사상 중세, 르네상스 시대에는 건축과 예술로 유명한
도시이다. 이탈리아 르네상스가 이곳에서 발흥하였고 도시 중심에는 둥근 돔을 가진 성당인 산타 마리
아 델 피오레가 존재감을 과시하고 있는데, 이는 피렌체의 상징으로 여겨진다.
매년 수백만 명의 관광객을 끌어 모으고 있는 피렌체는 도시 전체가 문화유산이다 보니 거리 곳곳의
모든 게 예술품이자 이탈리아 정부의 중요재산이다. 과거 피렌체를 호령했던 메디치 가문의 예술애호
사상에 따라 배출된 르네상스 대표 예술가들의 작품이 곳곳에 널려있어 마치 도시 전체가 박물관 같은
느낌을 준다. 굵직굵직한 르네상스의 예술가, 철학자, 과학자들이 모두 메디치 가문의 후원 아래 수많
은 작품을 피렌체에 남겼다. 이 때문에 도시 전체가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선정되었다.
피렌체 대성당이라 부르는 산타 마리아 델 피오레 대성당의 거대한 둥근 돔은 르네상스의 상징이 되었
다. 한편 미켈란젤로, 갈릴레오, 마키아벨리, 시인 포스콜로, 철학자 젠틸레, 작곡가 로시니 같은 이탈
리아의 가장 저명한 이들이 묻힌 산타 크로체 성당은 아름다운 외관인 파사드를 자랑하고 있다. 또한
가치를 매길 수 없는 작품들의 컬랙션을 소장하고 있는 우피치 미술관은 세계적으로 유일하게 약탈품
이 없어 피렌체의 정신이 잘 담겨있다. 피렌체 아카데미 미술관에는 미켈라젤로의 다비드상이 있으며
시뇨리아 광장에서는 피렌체의 역사적 사건과 관련된 동상들과 이곳에서 처형당한 지롤라모 사보나롤
라를 기념하는 동판을 찾아볼 수 있다. 이외에 고고학 박물관, 바르젤로 미술관, 피티 미술관, 그리고
베키오 궁전과 산 로렌초 성당 등등 이루 열거할 수 없을 정도로 세계적으로 유명한 예술 작품이 집중
되어 있다.
르네상스 거장들의 자존심 대결_ 레오나르도 다 빈치와 미켈란젤로
1499년, 피렌체 시의회는 도시의 랜드마크와 같은 상징성을 갖는 조각상을 제작하기 위해 조각가를
공모한다. 이 무렵 피렌체 출신 미켈란젤로는 로마에서 피에타 조각상을 만들고 있었다. <피에타>는
십자가에 매달려 죽은 후에 어머니인 성모 마리아의 무릎에 놓인 예수 그리스도의 시신을 묘사한 것이
다. 미켈란젤로는 피에타 조각에 미쳐 몸을 씻지도 않고 부츠를 신은 채 그대로 잠을 자기도 했다. 그
는 항상 가난에 찌든 것처럼 살았고, 먹는 것에도 관심 없이 오직 조각에만 열중하였다. 이렇게 완성
된 <피에타>는 대단한 찬사를 받으며 스물세 살의 미켈란젤로는 일약 로마의 별로 떠올랐다.
미켈란젤로는 고향 피렌체에서 조각가를 선발한다는 소문을 듣고 한달음에 달려갔다. 그리고 산타 마
리아 델 피오레 대성당 인근 공터 한 편에 놓여 있던 거대한 대리석을 보자마자 마음을 빼앗겼다. 이
대리석은 유명한 조각가인 도나텔로가 사들였으나 돌에 난 갈라진 틈을 발견하고는 반품하여 방치되고
있었다. 갈라진 틈 때문에 여러 조각가가 도전했지만 결국 포기했다. 하지만 미켈란젤로는 지금까지
없었던 독창적인 형태로 <다비드> 조각상을 구상하였다. 그는 갈라진 대리석 안에 있는 거인의 모습
을 보고 있었다. 누구도 이 대리석으로 조각하겠다고 나서지 않자 마침내 그 대리석은 미켈란젤로에게
돌아갔다. 그는 두오모 성당 근처에 작업장을 만들고 2년 동안 대리석과 씨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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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낭 속 예술여행

미켈란젤로가 피렌체로 돌아왔을 때, 레오나르도 다 빈치도 그곳에 있었다. 미켈란젤로는 익히 다 빈
치의 명성을 알고 있었기에 처음에는 그를 존경했으나 예술가적 관점에서 자신도 그에 못지않다 생각
했다. 미켈란젤로는 조각가였고, 다 빈치는 천재적 화가이자 만능 예술가였다. 당시 다 빈치는 피렌체
에서 이미 최고의 대우를 받는 인사였다. 피에타의 성공으로 자신감에 찬 젊은 미켈란젤로는 조각에서
만큼은 다 빈치를 능가하는 절대적 우위에 있다고 자부하였다. 그런데 다 빈치가 조각을 폄훼하고 다
니자 화가 났다. 다 빈치는 조각가는 예술인이 아니라 돌을 쪼개는 노동자일 뿐이라고 일갈했다. “조각
가는 무거운 도구를 들고 종일 중노동을 해야 한다. 그리고 작업이 끝났을 때 온통 돌가루 먼지를 뒤
집어 쓴 몰골은 공사판 노동자 같다. 반면에 화가는 작업이 끝나도 처음과 같은 우아한 모습을 그대로
유지하기 때문에 예술의 가장 고귀한 정점은 회화이다.”
이 말에 자존심이 상한 미켈란젤로는 가만히 있지 못했다. 그는 어떤 모임에서 다 빈치를 향해 반박하
였다. “최초의 인류는 동굴 벽에 그림을 그리기 훨씬 전부터 돌에 새겼소. 그러니 조각이야말로 최초의
독창적인 예술이 아니겠소?” 이를 듣던 다 빈치는 예의 차분한 목소리로 미켈란젤로의 주장을 인정했
다. 하지만 뒤이어 내뱉은 말이 더 아팠다. “적어도 그림이 생겨나기까지는 그랬소.”
잔뜩 화가 난 미켈란젤로는 다 빈치가 밀라노에서 실패했던 청동기마상을 언급하였다. 그가 언급한 청
동기마상은 다 빈치가 밀라노의 통치자 프란체스코 스포르차를 기념하는 기마상을 의뢰받아 작업했던
것이다. 1489년부터 착수한 이 작업에서 다 빈치는 말의 높이만 7미터가 넘는 거대한 점토 모형을 만
든 다음에는 청동으로 주조해야 했다. 그런데 마침 프랑스군이 밀라노로 쳐들어왔고, 스포르차 가문은
다 빈치의 작품에 쓸 청동으로 대포를 만들어야 했다. 다 빈치가 만든 점토 모형은 한동안 그대로 방
치되다가 밀라노를 장악한 프랑스군이 사격 연습용으로 쓰는 바람에 무너져 버렸다. 미켈란젤로는 다
빈치의 아픈 구석을 찔렀다. 그리고 다 빈치가 지금까지 제대로 끝낸 작품이 없다고 조롱했다. 또한
과거 동성애 문제로 고발당했던 다 빈치의 이력을 끄집어내어 힐난하였다.
드디어 <다비드> 조각상이 완성되었다. 거대한 거인의 다비드는 위풍당당하게 돌을 던지려는 벌거벗
은 나체였다. 보통 사람 키의 세 배 가까이 되는 4m 높이의 <다비드상>은 건강한 신체와 고전적 자세
를 지닌 영웅의 면모를 담고 있다. 순간적으로 찡그린 표정 묘사와 손과 발, 혈관의 세부적이고 사실
적인 묘사에서 보이는 정신적 긴장감은 <다비드상>의 고전적이고도 르네상스적인 생동감을 잘 보여준
다. 다비드의 자세에는 다소 긴장감이 감돌고 있다. 날카로운 눈매, 꼭 다문 입은 힘과 분노를 표현하
고 있으며, 왼손에 쥔 돌멩이를 거인 골리앗을 향해 막 던질 듯 보인다. 피렌체를 구하기 위한 저항과
독립의 상징으로 느끼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다 빈치도 미켈란젤로의 <다비드상>을 보고 감탄하였다.
그러나 그는 결코 겉으로는 드러내지 않았다. 아니 그는 애써 미켈란젤로의 조각상을 깎아내리려고 했
다.
시의회는 <다비드상>을 어디에 놓을지 결정하기 위해 자문단을 꾸렸다. 자문단에는 다 빈치도 포함되
어 있었다. 그 사실을 안 미켈란젤로는 매우 불쾌했다. 다 빈치는 다비드의 드러나는 생식기를 문제
삼아 구석진 자리에 하반신이 가려질 위치를 찾자고 말하고 싶었으나 <다비드상>의 위용만은 거부할
수가 없었다. 여러 논의와 공방을 거쳐 지금의 베키오궁 문 앞에 세우기로 결론이 났다. 하지만 이 거
대한 조각상을 옮기는 일도 쉽지 않았다. 운반구에 조각상을 단단히 고정하고 마흔 명 이상이 달라붙
어야 했다. 이동 속도 또한 시간당 몇 미터 정도에 불과했다. 결국, 조각상을 옮기는 데만 거의 일주일
이상 걸렸다. 이동 기간에 미켈란젤로는 매일 밤 잠을 자지 않고 조각상 옆을 지켜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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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낭 속 예술여행

그러던 어느 날 밤, 다비드 조각상에 돌이 날아왔다. 미켈란젤로는 소리치며 쫓아갔으나 범인을 놓치
고 말았다. 조각상에 흠집이라도 날까 봐 노심초사하던 미켈란젤로는 시의회에 부탁하여 무장 경비원
을 잠복시켰다. 그리고 다시 괴한들이 나타났을 때 그들 중 여덟 명을 체포하였다. 돌을 던진 범인은
열다섯 살의 소년들이었다. 대부분 가족이 벌금을 내고 풀려났으나 주동자 세 명은 재판을 받았다. 그
들은 벌거벗은 다비드가 신의 뜻을 거스르는 음란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들은 몇 년 전 극단적인 금
욕주의로 피렌체를 휘어잡았던 사보나롤라의 추종자였다. 재판관은 ‘예술에는 무식이라는 적이 있다’는
속담을 인용하며 그들을 감옥에 가둔다.
드디어 <다비드상>이 베키오궁 앞에 자리 잡았다. 사람들은 <다비드상>을 프랑스에 대한 피렌체 공화
국의 승리를 상징하는 조각이자 수호신이라고 찬양하였다. 미켈란젤로에게는 최고의 시간이었지만 그
리 길게 가지 못한다. 당시 베키오궁 건물 내 벽화를 맡은 다 빈치가 밑그림을 공개했는데, 이를 본 사
람들이 역시 다 빈치가 최고라며 여론이 바뀌어 버린 것이다. 자존심이 상한 미켈란젤로는 다 빈치가
그렇게 자랑하는 회화로 정면 승부를 펼치기로 한다.
예술로 빛나는 그랜드 투어_ 운하와 낭만의 도시 베네치아
유럽 여행에서 빼놓을 수 없는 운하의 도시 베네치아는 영어식 발음으로 베니스로 알려져 있다. 오늘
날의 베네치아는 5세기경 시작된 것으로 보인다. 5세기 고트족과 훈족 등 온갖 이민족들의 끊임없는
침략으로부터 도망친 고대 로마 출신 난민들이 이 석호(潟湖)의 섬으로 들어왔다. 이들은 섬 전체가 습
지대인 이 섬에 영구히 정착할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고, 고트족이 떠날 때까지 잠시 머무를 생각
이었다. 그러나 고트족이 이탈리아에 정착하자 이제 베네치아인들은 자신들의 영구 정착지를 늪지대
위에 건설해야 했다. 그때 그들이 떠올린 방법은 물컹한 토층 아래 단단한 층까지 닿는 기다란 나무판
자들을 수직으로 섬 전체에 빼곡하게 박는 것이었다. 베네치아인들은 이 어마어마한 일을 기어코 해냈
고 그 위에 석판을 깔아 비로소 건물을 지어 올린 ‘땅’을 마련할 수 있었다.
베네치아는 이후 유럽의 역사에서 동로마 제국의 지배와 프랑크 왕국으로부터 외침을 겪어야 했고 그
와중에도 간척을 게을리하지 않아 도시가 성장하였고, 11~12세기 제4차 십자군 원정에서는 콘스탄티
노플을 공격하여 동 지중해의 영토를 확보하고 막대한 영향력을 행사하게 되었다. 이후로는 북부 이탈
리아의 도시들과 지역 패권을 두고 치열한 전쟁을 하게 된다.
15세기 들어 베네치아는 문화적ㆍ군사적으로 전성기가 된다. 특히 1527년 사코디 로마(로마 약탈) 이
후 로마가 쇠락하자 베네치아가 르네상스 건축의 중심으로 떠오르게 되었다. 이탈리아의 가장 유명한
광장인 ‘산 마르코 광장’과 비잔티움 양식으로 건설된 ‘산 마르코 대성당’, 베네치아 공화국 정부 청사
인 ‘두칼레 궁전’ 등과 운하를 따라 지은 도시의 미관은 이 세상 어느 곳에서도 볼 수 없는 멋진 광경
을 보여주고 있다.
베네치아는 유럽의 귀족들이 선망하는 ‘그랜드 투어’ 장소였다. 그랜드 투어란 영국을 중심으로 한 유
럽의 귀족 계층 자제들이 사회에 나가기 전에 이탈리아를 돌아보며 문물을 익히는 여행을 말하는데,
당시 베네치아는 지금의 라스베이거스처럼 주로 남성 귀족 상류층이 여행하였다. 그러나 19세기 후반
증기선의 등장으로 세계여행이 점차 일반화되면서 귀족 계층의 특권으로 여겨졌던 그랜드 투어가 막을
내렸다. 인상파의 거장 클로드 모네는 1908년 베네치아를 여행해 여러 그림을 남겼다.
15세기 베네치아는 레반트의 여왕이라 불리며 동지중해 무역을 독점하였다. 1453년 동로마 제국이 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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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낭 속 예술여행

망하자 베네치아는 마침내 르네상스의 주역으로 떠오르고 동로마 제국을 멸망시킨 오스만 제국과 끊임
없는 전쟁을 벌이게 된다. 베네치아는 최전성기인 15세기에서 18세기 말에 이르기까지 약 3세기 동안
음악, 미술, 연극, 출판 등 문화 전 분야에 걸쳐 황금기를 누리게 된다. 베네치아 풍경에서 가장 눈에
띄는 바로크 양식의 웅장한 산타 마리아 델라 살루테 성당은 1687년에 완공되었는데, 베네치아를 대
표하는 음악가 안토니오 비발디는 당시 아홉 살의 소년이었다. 베네치아 음악은 산 마르코 대성당을
중심으로 활약한 음악가들이 이루었다. 플랑드르 출신의 작곡가 아드리안 빌라르트를 비롯하여 안드레
아 가브리엘리, 조반니 가브리엘리 등이 베네치아악파의 르네상스 음악을 전개하였다.
예술로 빛나는 그랜드 투어_ 음악의 도시 오스트리아 빈
영어로 비엔나로 부르는 오스트리아의 수도 빈은 흔히 음악의 도시라고 불린다. 음악 도시답게 빈 필
하모닉 오케스트라 신년 음악회와 빈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무도회 등이 열린다. 또한 빈에서 열리는
큰 축제 중 하나인 빈 축제는 매년 5월 중순~6월 중순에 열리며 다양한 예술 프로그램을 선보인다.
매년 7월 중순~9월 중순에는 뮤직 페스티벌을 펼친다.
빈은 모차르트와 베토벤 등 유명한 음악가들을 배출하였고, 가곡의 왕 슈베르트가 태어났으며, 요한
슈트라우스가 감미로운 빈의 왈츠를 작곡했다. 주요 관광지는 오스트리아에서 가장 훌륭한 고딕 양식
의 건축물로 꼽히는 슈테판 대성당과 합스부르크 왕가의 여름 별궁으로 사용되던 쇤브룬 궁전, 벨베데
레 궁전, 빈 시립공원, 빈 중앙묘지 등이 유명하다.
슈테판 성당은 빈을 상징하는 모자이크 지붕을 하고 있는데 공사 기간만 65년이 소요되었다고 한다.
건립연도가 1359년으로 당시의 기술로 이처럼 정교한 건축물을 만들었다는 게 믿기 어려울 정도로 웅
장하다. 매년 12월 31일 빈 시민은 슈테판 대성당 앞 광장에 모여 새해를 맞이한다. 이때 와인을 마신
다음 잔을 바닥에 던져 깨뜨리고 자정이 되면 서로 키스를 하며 새해를 맞이하는 풍습이 내려오고 있
다. 또한, 1782년에는 모차르트의 결혼식이 있었고, 1791년에는 모차르트의 장례식을 치른 곳으로도
유명하다.
쇤브룬 궁전은 17세기 초 마티아스 황제가 사냥 중 우연히 샘을 발견해 성을 세우고 ‘아름다운 샘’을
뜻하는 쇤브룬이라는 이름으로 부르게 되었다. 궁전 내부에는 화려한 로코코 양식의 1,441개의 방이
있고, 넓은 부지 안에는 마차 박물관, 궁전 극장, 식물원, 동물원 등을 갖추고 있다. 쇤브룬 궁전의 동
물원은 현존하는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동물원으로 프란츠 카를 대공이 1752년에 개장한 것이다. 이
궁전은 황제인 프란츠 요제프가 태어나고 결혼식을 올린 곳이기도 하다. 궁전 내부의 서관에는 프란츠
요제프와 황후 엘리자베스의 살롱이, 동관에는 마리아 테레지아와 프란츠 카를 대공의 살롱이 있다.
마리아 테레지아의 딸인 마리 앙투아네트가 프랑스 왕비가 되기 전에 사용했던 방도 서관에 있다. 거
울의 방은 마리아 테레지아 앞에서 어린 모차르트가 피아노를 연주했던 장소로 유명하다.
벨베데레 궁전은 이탈리아어로 전망이 좋다는 뜻으로 궁전 테라스에서 보이는 경치가 매우 아름다우며
상궁과 하궁 사이에는 프랑스식 정원이 있어 산책을 즐기기에 좋다. 특히, 이곳은 구스타브 클림트의
회화 컬렉션이 충실하다. 그의 대표작 <키스> 한 점을 보기 위해 많은 관광객이 이곳을 찾는다. 하지
만 자크 루이 다비드의 <알프스 산맥을 넘는 나폴레옹>과 클림트에게 수학한 에곤 실러의 걸작 <죽음
과 소녀>나 <포옹>, 오스카 코코슈카의 작품 등도 인기가 있다. 회화 작품 외에 독일 조각가인 프란츠
메서슈미트의 찌푸린 얼굴을 주제로 한 두상 연작 등도 만나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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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낭 속 예술여행

빈에서 첫 번째로 설립된 빈 시립공원은 1862년에 조성된 공원이며 빈강을 중심으로 동쪽과 서쪽 두
구역으로 나뉜다. 요한 슈트라우스, 슈베르트, 브루크너 등 빈의 저명한 예술가들의 동상이 세워진 공
원으로도 잘 알려져 있다. 공원 남서쪽에 있는 르네상스 스타일의 고풍스러운 건물은 쿠어살롱으로 다
양한 공연이 열리는 이벤트홀이다. 현재도 크고 작은 클래식 공연이 자주 열린다. 가장 대중적으로 잘
알려진 공원 내 볼거리는 바이올린을 켜는 요한 슈트라우스 상이다. 공원을 찾은 많은 이들이 황금색
의 슈트라우스 조각상 앞에서 사진을 찍는다.
빈 중앙묘지는 세계에서 가장 큰 공동묘지 중 한 곳으로 무덤만 33만 개에 달한다. 이는 빈 거주자 수
의 2배 이상이다. 묘지 중앙에는 돔 형태의 묘지 교회가 자리하고 있다. 묘지는 종교별로 구획되어 있
으며 정치인, 예술가, 연구가 등 여러 분야의 명사들의 묘가 곳곳에 자리한다. 그중 유명한 곳은 음악
가들의 묘가 모여 있는 32A 구역이다. 이 구역에는 베토벤, 슈베르트, 브람스, 요한 슈트라우스 등의
묘가 모여 있다. 구역의 중심에는 커다란 모차르트 기념비가 세워져 있다. 하지만 모차르트 묘는 이곳
에 없고 구시가와 중앙묘지 사이에 있는 마르크스 묘지에 있다.
역동적 동세의 다비드상을 표현하다_ 베르니니의 다비드상
서양 미술사에서 다비드는 많은 예술가의 주제로 선택되어 조각되거나 회화로 표현되었다. 조각에서는
도나텔로의 <다비드상>과 미켈란젤로의 <다비드상>이 대표적이다. 도나텔로의 <다비드상>은 골리앗
의 머리를 벤 승리자를 나타내는 작품으로 르네상스를 대표하는 기념비적인 청동 조각상이다. 또한 미
켈란젤로의 <다비드상>은 적장인 골리앗을 노려보고 있는 인물의 생생한 감정묘사가 뛰어난 르네상스
의 대표적인 대리석 조각상이다. 여기에 로마의 보르게세 미술관에 소장된 또 하나의 <다비드상>은
잔 로렌초 베르니니의 작품으로 앞의 두 점의 <다비드상>과 비교해도 손색이 없을 정도로 뛰어난 예
술성을 나타내고 있다.
미켈란젤로의 <다비드상>은 골리앗에게 돌팔매질하기 전의 긴장된 순간을 차분하고 정적으로 묘사한
데 비해 베르니니의 <다비드상>은 사력을 다해 돌팔매 동작을 취하고 있다. 상체는 투척 직전의 투포
환 선수처럼 오른쪽으로 바짝 돌리고 왼손도 오른쪽으로 쏠렸다. 최대한의 힘이 들어간 상태이다. 하
체는 이와는 반대로 오른쪽 다리는 앞으로 바짝 내밀고 왼쪽 다리는 뒤로 뻗었다. 그러면서 얼굴은 골
리앗을 정면으로 매섭게 바라보고 있다.
얼굴에서 손동작 하나까지 그 어느 것 하나 동일한 수직선상에 있지 않다. 미켈란젤로의 <다비드상>
에서 볼 수 있는 수직적인 외양은 사선과 대각선이 조합된 <다비드상>으로 바뀌었다. 이처럼 똑같은
<다비드상>의 주제를 놓고 이렇게 다르게 묘사한 점은 시대와도 관계가 깊다. 베르니니가 활동했던
시기는 ‘바로크 양식’의 시대였다. 17세기 초부터 시작되는 바로크 시대는 이탈리아에서 가톨릭 세력이
종교개혁의 움직임을 억누르고 결정적인 승기를 잡은 시기이다. 로마 교황청을 비롯하여 가톨릭 지도
부는 자신들의 승리를 자축하는 한편, 교회 밖으로 나간 신도들을 다시금 불러들이기 위해 여러 가지
기념비적인 예술품을 제작한다.
신도들의 마음을 움직이려면 르네상스 시대의 차분하고 정적인 미감에 호소해서는 효과가 별로 없다.
그보다는 좀 더 박진감 넘치고 감정에 호소하는 미술품이 필요했다. 베르니니의 <다비드상>은 그런
점에서 매우 시의적절하고 사람들에게 강하게 어필이 되는 조각상이다. 또한 베르니니는 극작에도 탁
월한 재능을 지녔다고 한다. 작품에 대한 영감이 떠오르지 않으면 연극 대본을 썼는데 특히 등장인물
의 심리적 긴장감을 탁월한 솜씨로 묘사했다고 한다. 그리고 그런 심리적 긴장감을 조각 작품의 격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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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낭 속 예술여행

한 동작과 표정에 실어 연극적으로 표현하였다.
예술로 빛나는 그랜드 투어_ 프랑스의 자랑 루브르 박물관
루브르 박물관은 영국의 대영 박물관, 바티칸 시티의 바티칸 박물관과 함께 세계 3대 박물관으로 꼽힌
다. 루브르 박물관은 한 해 동안 세계에서 가장 많은 사람이 방문하는 미술관으로 센강 오른쪽 파리
중심가 1구역에 위치한다. 1190년 지어졌을 당시에는 요새에 불과했지만 16세기 중반 왕궁으로 재건
축되면서 그 규모가 커졌다. 1793년 궁전 일부가 중앙 미술관으로 사용되면서 루브르는 궁전의 틀을
벗고 박물관으로 탈바꿈하기 시작했다.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루브르 박물관에는 기원전 4천 년부
터 19세기에 걸쳐 세계 각국의 예술 작품들이 총 38만 점 이상 소장되어 있으며 그 중 약 3만 5천여
점을 전시하고 있다. 전체를 다 돌아보려면 며칠은 걸리므로 관심 있는 작품이 있으면 그 위치를 파악
해 미리 동선을 짜두는 것이 좋다.
오늘날 박물관 건물의 모습은 1874년 당시의 외관과 구조를 유지하고 있다. 1989년에는 중국계 미국
인 모더니즘 건축가 ‘이오 밍 페이’가 설계한 유리 피라미드인 ‘루브르 피라미드’가 박물관 중정에 완공
되었다. 유리 피라미드는 건축 당시 큰 반대를 불러일으켰으나 현재는 루브르의 랜드마크로 자리하고
있다. 유리 피라미드 아래로 들어가면 지하에 신설된 나폴레옹 홀로 이어지는데, 여기에는 안내 센터,
매표소, 서점, 물품 보관소, 뮤지엄 숍 등이 있다. 안내 센터에서 한국어 팸플릿을 받아 두도록 하자.
컬러판으로 주요 작품의 위치가 명기되어 큰 도움이 된다. 전시관은 크게 리슐리외관, 드농관, 쉴리관
으로 나뉜다. 참고로 잘 알려진 대작, 명작들은 주로 드농관과 쉴리관에 있으므로 짧게 관람하려는 사
람들은 참고하도록 하자. 각각의 전시관은 1층에서 3층까지로 이뤄져 있고, 지역과 시대에 따라 세밀
하게 구분되어 있다. 계단을 오르내리기 힘들기 때문에 가능한 한 같은 층에서 다른 전시관으로 옮겨
다니며 감상하는 편이 낫다.
반지하층에는 고대 오리엔트ㆍ이슬람 미술작품과 이탈리아ㆍ스페인ㆍ북유럽 조각품이 전시되어 있다.
프랑스 조각품은 리슐리외관의 반지하층과 1층에 전시되어 있다. 유리로 이뤄진 천장에서 들어오는 자
연광으로 더욱 입체감 있는 작품을 감상할 수 있다.
1층에는 고대 이집트ㆍ그리스ㆍ로마 미술품도 전시되어 있다. <밀로의 비너스>도 이곳에서 만나볼 수
있다. 2층은 유명한 작품이 많아 항상 붐비는 곳이다. 이탈리아ㆍ스페인ㆍ영국의 회화 및 19세기 프랑
스 회화가 전시되어 있는데 다비드 <황제 나폴레옹 1세의 대관식>, <사비니 여인의 중재>, <호라티우
스 형제의 맹세>, <테르모필라이에서의 레오니다스>, 앵그르의 <그랑드 오달리스크>, <목욕하는 여인
>, <발팽송의 욕녀>, <터키목욕탕>, 들라크루아의 <민중을 이끄는 자유의 여신>, <침대 위의 오달리스
크>, <키오스 섬의 학살>, <사르다나팔루스의 죽음> 등과 같은 거장의 작품을 감상할 수 있다. 헬레니
즘 조각의 걸작인 <사모트라케의 니케>,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모나리자>도 2층에 전시되어 있다. 3
층 역시 프랑스 회화를 시대별로 전시해 놓았다. 2층과 함께 관람객에게 무척 인기 있는 곳으로, 네덜
란드ㆍ플랑드르ㆍ독일의 회화도 전시되어 있다. 렘브란트, 루벤스, 반 다이크 등의 작품을 살펴볼 수
있다.
고대 회화 명작도 꽤 많다. 드농관 지하 1층의 ‘이집트의 유럽 여인’ 일명 <유로페엔>도 안내 브로슈
어에서 빠져본 적이 없는 명작이다. 서기 2세기경의 작품. 회화에 가려서 잘 알려지지 않은 감이 있지
만 함무라비 법전의 원본, 크기에서 관광객을 압도하는 라마수 조각상, 그리고 이집트 서기의 좌상 등
유명한 고대 금석문이나 조각들도 루브르 소장품 목록에 올라 있다. 이집트 상형문자 비석들은 셀 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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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낭 속 예술여행

도 없을 만큼 많으며, 미라를 넣은 석관들도 볼거리다. 샹폴리옹이 이집트에서 직접 가져왔다는 스핑
크스 진품도 만나 볼 수 있다. 로피탈의 정리를 발견한 로피탈의 대리석상도 소장하고 있다. 또한 루
브르의 야경은 절대 놓쳐서는 안 된다. 은은하게 빛나는 웅장한 건물에 둘러싸여 화려한 빛을 뿜어내
는 피라미드 앞의 기념사진을 건지기 좋은 포인트이다.
예술로 빛나는 그랜드 투어_ 예술가의 언덕 몽마르트르
프랑스 파리하면 떠오르는 단어 중에 몽마르트르 언덕을 빼놓을 수 없다. 화가들의 언덕으로도 잘 알
려진 이곳은 예술가들의 성지와도 같은 곳이다. 파리 18구에 있는 몽마르트르는 해발 130미터로 파리
에서 가장 높은 지역이다. 오늘날에는 손꼽히는 파리의 광광 명소가 되어 있지만, 20세기 초까지만 해
도 이 지역은 파리에서 집세가 가장 싼 지역이었다. ‘몽마르트르’라는 이름은 순교자의 언덕이라는 뜻
이다. 보헤미안풍의 아이언 지붕이 고혹스러운 몽마르트르 역을 올라와 시작되는 몽마르트르 언덕은
다양한 나라의 언어가 새겨진 타일 벽을 만나게 되는데, 그 속에는 한글로 ‘사랑해’라는 단어가 반겨준
다.
몽마르트의 꼬불꼬불한 골목길을 따라 계단을 오르다 보면 시내를 한눈에 굽어볼 수 있는 꼭대기에 다
다른다. 이어서 넋을 잃게 하는 19세기 로마-비잔틴 양식의 사크레쾨르 대성당의 전경이 눈을 압도한
다. 사크레쾨르 대성당은 1870년의 프랑스-프로이센 전쟁(보불전쟁)과 1871년의 파리 코뮌으로 프랑
스가 혼란을 겪을 때 상처 입은 파리 시민과 가톨릭교도의 마음을 달래기 위해 지어진 곳이다.
사크레쾨르 대성당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는 언덕에 테르트르 광장이 있다. 광장 주변은 관광객의 초
상화를 그려주는 무명 화가들과 이를 구경하는 사람들로 항상 붐빈다. 19세기 중반부터 몽마르트르는
파리를 찾아 지방에서, 또는 외국에서 온 뜨내기 예술가들의 아지트가 되었다. 몽마르트르는 파리에서
도 워낙 낙후된 지역이었기 때문에 급격히 도시화가 이루어지던 19세기 말엽까지도 시골스러운 분위
기가 남아 있었다. 시골에서 꿈을 품고 상경했던 르누아르 같은 화가들에게 몽마르트르의 포도밭과 풍
차는 묘한 안도감을 느끼게 해 주었다.
몽마르트르 언덕의 채석장 터에 조성된 몽마르트르 묘지에는 스탕달 등 문인과 화가들의 묘지가 조성
되어 많은 사람들이 참배하기 위해 방문한다. 또 유서 깊은 저택과 물랭루주 등의 카바레가 있다. 그
외에도 옛집이 늘어선 거리는 19세기의 모습을 그대로 지니고 있어, 아직도 화가들이 많이 찾아든다.
몽마르트르 근처에는 고흐와 동생 테오가 함께 살았던 ‘반 고흐의 집’, 다다이즘의 대표 시인 차라가
살았던 ‘트리스탄 차라의 집’, 작곡가 비제가 살았던 ‘조르주 비제의 집’ 등 볼거리가 있다.
특히, 몽마르트르가 시작되는 부분인 바티뇰가(현재의 쿠리시가 9번지)에 있었던 카페 ‘게르부아’는 에
두아르 마네를 필두로 한 예술가 그룹이 모임을 하던 장소였다. 이들은 1870년 낙선전을 계기로 이곳
에 모였는데 스스로 집시 같은 사람들, 보헤미안이라고 불렀다. 이들은 매주 일요일과 목요일마다 게
르부아에 모여 격렬한 난상 토론을 벌였다. 마네를 중심으로 에밀 졸라, 뒤랑티, 뒤레 등의 작가, 비평
가들과 바질, 드가, 르누아르, 피사로, 모네, 시슬리, 세잔느 등의 화가들이 모여 새로운 예술에 대해
서 의견을 나누었다. 이 모임은 인상주의 미술의 탄생 계기가 되었다.
예술로 빛나는 그랜드 투어_ 별이 빛나는 프랑스 아를의 정취
남프랑스 아를은 빈센트 반 고흐가 사랑하는 마을이다. 그는 이곳에서 200여 점이 넘는 작품을 남겼는
데 <해바라기> 등 주옥같은 명작이 그려졌다. 아를을 여행한다면 그것은 고흐가 있기 때문이다. 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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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낭 속 예술여행

안내서는 그의 자취를 따라 노란 동선을 마련해주고 있다. 그가 걸었을 론강의 강변, 해질녘의 카페
거리 등을 걸어서 호적하게 둘러볼 수 있다.
고흐의 호흡이 닿았던 장소들은 거의 그의 캔버스에 그려져 있다. 고흐가 머물던 병원인 에스파스 반
고흐는 문화센터로 변모하였다. 그러나 고흐의 흔적을 찾아오는 예술의 순례자를 위해 고흐가 묘사한
그림과 같게 꾸며져 발길을 가볍게 한다. 당시 이곳은 고흐가 귀를 치료하기 위해서 입원했고 20대의
인턴 의사였던 펠릭스 레이의 도움을 받으며 머물렀다. 구석 한편에 세워진 반 고흐의 동상을 만날 수
있는데, 남프랑스에서의 아를을 대표하는 해바라기와 열정적으로 작품 활동을 하느라 야윈 그의 모습
을 만날 수 있다.
<밤의 카페 테라스>의 배경이 된 카페는 아를에 대한 추억과 휴식이 서려 있다. 카페 반 고흐라는 이
름으로, 노란색으로 치장된 채 여전히 성업 중이다. 고흐는 아를에 200여 점의 작품을 남겼는데, <밤
의 카페 테라스>는 그중 가장 유명한 작품이다. 아를에 오는 이들이라면 이곳을 꼭 떠올리며 방문한다.
고흐는 이 작품을 그릴 때 캔버스를 세우는 이젤을 아예 땅에 박고 그림을 그렸다고 한다. 이 작품에
나오는 카페의 이름은 ‘테라스’였으나 그림이 유명해지면서 많은 사람이 찾아오자 ‘카페 반 고흐’로 이
름이 바뀌었다. 고흐의 그림과 같은 장면을 보고 싶다면 입구 간판이 위치한 곳에서 보는 것이 적당하
다.
카페와 술집이 술렁이는 골목을 벗어나면 론강으로 연결된다. 프랑스를 대표하는 3개의 강 중 하나인
론강은 고흐가 <아를의 별이 빛나는 밤>을 그려낸 낭만적인 공간이다. 아를은 당일치기로 여행할 수
도 있지만, 하룻밤 머물다 가기를 추천한다. 왜냐하면, 고흐의 흔적이 남은 론강의 밤 배경을 만끽할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론강에는 고흐가 그렸던 <아를의 다리와 빨래하는 여인들>에 나왔던 고흐의
개폐교를 만날 수 있다. 어둠이 깔리기 전 푸른 강변과 주황색 지붕의 낮은 건물들이 이뤄내는 프로방
스 마을의 단상은 소담스럽다. 강둑에 몸과 어깨를 기댄 연인들의 모습이 시선을 사로잡는다.
<아를의 노란집>은 고흐가 고갱과 함께 지내기 위해 기존에 혼자 살던 작은집에서 조금 더 큰 하숙집
으로 이사한 곳이다. 원래 있었던 집은 제2차 세계대전의 폭격으로 완전히 무너졌고, 고흐가 그렸던
노란 집 간판만이 그 흔적을 느낄 수 있다.
아를은 또한 역사적인 유적 도시이기도 하다. 고흐와 고객이 만나서 함께 그림을 그렸다는 알라스캄프
는 아를 시내를 벗어나 있는 곳으로 이 지역의 첫 번째 주인인 로마 사람들의 무덤이 있는 곳이다. 유
네스코 문화유산에 등재된 장소로 고흐의 흔적을 찾는 이들이나 혹은 로마인들의 독특한 무덤의 문화
를 경험하고자 하는 이들은 방문할 만한 가치가 있는 곳이다. 전통적으로 로마인들은 사람들이 사는
도시 경계 내에 매장하는 것을 금지했기 때문에 외각에 무덤이 차례로 늘어서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4
세기 이후에 기독교가 공인된 이후 로마 사람들이 떠난 후에도 주변 사람들은 이곳에 묻히는 것을 선
호할 정도로 유명한 곳이었다. 이후 약 1,500여 년 동안 무덤으로 이용되었다.
프랑스에서 고대 로마의 유적을 체험한다는 것이 매우 이색적이다. 바로 아를의 원형 경기장인데 아를
역에서 마을 방향으로 가다 보면 눈에 들어오는 유적이다. 아를의 원형 경기장은 로마의 콜로세움에서
영향을 받은 건물로 높이 21미터, 길이 136미터에 25,000명을 수용할 수 있는 거대한 규모다.
영화 <글레디에이터>의 검투사들이 이곳에서 서로 겨루어 승자가 로마의 콜로세움에 원정했을 거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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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추해본다. 로마인들의 시기가 끝나고 6세기 말 경기장 안에 사람들이 들어와서 거주하는 공간으로
변하면서 많이 훼손되었다. 이후 19세기에 국가사업으로 이곳이 유적지로 지정되면서, 집을 철거하고
현재 원형 경기장으로 복원되었다. 그리고 투우 경기를 하는 곳으로 활용했는데, 부활절을 맞이해 4월,
축제 시즌인 7월, 그리고 9월에 수많은 사람이 와서 구경하는 지역을 대표하는 축제가 열린다. 남프랑
스의 투우 경기는 스페인과 다르게 소를 죽이는 경기가 아닌 소의 머리에 리본을 묶는 형태로 이루어
진다. 이곳에도 원형 경기장 입구에 고흐의 그림 간판이 세워져 있다.
아를의 중심지인 리퍼블리크 광장 또한 빼놓을 수 없는 곳으로 주요 이벤트가 열리는 곳이다. 토요일
에 방문하면 종종 결혼으로 모여 있는 인파를 만날 수 있는데, 아를의 시청사와 로마네스크식 전형적
인 팀파늄의 형태를 가진 생 트로페 성당이 있다. 성당으로 들어가는 입구에는 최후의 심판의 그리스
도가 조각되어 있다. 광장 중앙에는 오벨리스크가 보이는데, 유네스코 문화유산으로 지정되어 있다. 4
세기경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명령으로 세워진 오벨리스크는 두 동강 나는 등 수난을 겪다가 루이 14
세에 의해 현재의 자리에 배치되었다. 광장에서 시청사로 들어가면, 루브르에 있는 <아를의 비너스상>
복제품을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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