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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식의 헌법: 왜 우리는 진실을 공유하지 못하는가

by Casey,Riley 2022. 3.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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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너선 라우시 지음 / 에코리브르
이 책은 오늘날의 인식론적 위기를 진단하고 그 원인을 분석하여 해결책을 모색한다. 저자는 부족중심
주의와 편향이라는 인지적 오류를 인간 본성의 중요한 일부로 인정하며, 그동안 신조 전쟁이 여러 차
례 맹위를 떨쳤지만 인류가 자멸하지 않은 이유는 견해차를 지식으로 변환하는 사회 체제인 ‘지식의
헌법’ 때문이라면서, 지식의 헌법을 수호하려면 자신감과 맞불 동원이 필요하다고 역설한다.

지식의 헌법: 왜 우리는 진실을 공유하지 못하는가
조너선 라우시 지음

▣ 저자 조너선 라우시
브루킹스 연구소 선임 연구원이자 《애틀랜틱》 기고 작가이다. 1982년 예일 대학교를 졸업하고 기자를
시작으로 주로 언론계에서 일했다. 정치, 공공 정책, 문화, LGBT 인권을 포함해 다양한 주제에 관한
책과 기사를 썼다. 2005년 내셔널 매거진 어워드, 2010년 내셔널 헤드라이너 어워드를 수상했다. 《뉴
리퍼블릭》, 《뉴욕 타임스》, 《월스트리트 저널》, 《워싱턴 포스트》, 《이코노미스트》, 《타임》, 《리
더스 다이제스트》 등 여러 매체에 글을 쓰고 있다. 지은 책으로 우리나라에도 번역 출판된 『인생은 왜
50부터 반등하는가』를 비롯해, 『정치적 현실주의』, 『친절한 심문관』, 『부인』, 『동성 결혼』, 『정
부의 종말』, 『21세기를 위한 미국 금융』 등이 있다.


▣ Short Summary
21세기 들어 디지털 미디어를 통해 가짜 뉴스, 음모론, 트롤링, 취소 문화 등이 더욱더 빠르게 퍼지면
서 우리의 일상생활이 흔들릴 지경인데, 어느 누구도 방심은 금물이다. 언제 이 유행병의 다음 희생자
로 지목될지 알 수 없으며, 알게 모르게 이 유행병의 동조자가 되어 있을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한편
온ㆍ오프라인을 가리지 않고 만인의 만인에 대한 분노를 연일 분출하고, 정치적 양극화로 치닫는 싸움
에서의 목표는 하나다. 누가 진실을 추구하느냐가 아니라, 적이라고 상정된 대상을 이기는 것이다. 그
속에서 사실과 허구, 진짜와 가짜를 구별하는 우리의 능력은 나날이 약해져간다. 아무것도 믿을 수 없
지만, 또 무엇이든 믿을 수 있을 것 같은 세상. 바야흐로 우리는 인식론적 위기에 빠져 있다.
이 책은 오늘날의 인식론적 위기를 진단하고 그 원인을 분석하여 해결책을 모색한다. 저자는 부족중심
주의와 편향이라는 인지적 오류를 인간 본성의 중요한 일부로 인정하며, 그동안 신조 전쟁이 여러 차
례 맹위를 떨쳤지만 인류가 자멸하지 않은 이유는 견해차를 지식으로 변환하는 사회 체제인 ‘지식의
헌법’ 때문이라면서, 지식의 헌법을 수호하려면 자신감과 맞불 동원이 필요하다고 역설한다.
또 인류가 인지적 오류를 극복한 해결책인 ‘지식의 헌법’에는 과학을 비롯한 학문의 세계, 저널리즘,
정부 기관 및 법률 등의 제도, 진실성과 팩트 체크 같은 밀도 높은 규범 및 원칙의 네트워크, 동료 평
가자와 전문가들의 전문 지식, 소셜 미디어 플랫폼 같은 시스템 등등과 같은 가치•규칙•제도가 포함되
며, 이 체제 전체는 지식을 만드는 방식에 옳고 그른 게 있다는 공동의 이해에 의존한다고 말한다.

▣ 차례
1 “무사히 빠져나가지 않는다면 끔찍한 발언이네요” - 혼돈과 동조가 인식론적 위기를 초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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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식의 헌법

2 자연 상태: 부족적 진실 ­ 편향, 집단 사고, 만인의 만인에 대한 인식론적 전쟁
3 현실로 부팅: 네트워크 지식의 부상 ­ 소셜 네트워크에 현실을 위탁한 것은 인류 최대의 혁신이다
4 지식의 헌법 ­ 현실 기반 공동체의 운영 체계
5 허위 정보 테크놀로지: 디지털 미디어의 도전 ­ 온라인 세상을 진실 친화적으로 만드는 것은 어렵지
만 가능하다
6 트롤러 인식론: “그 일대에 거짓말이 범란하게 하라” - 허위 정보는 신무기와 강력한 지지자들로 무
장한 오랜 적이다
7 취소 문화: 소수의 횡포 ­ 강압적 동조가 현실 기반 공동체를 타락시키고 있다
8 침묵을 깨라: 반박하기 ­ 지식의 헌법을 수호하려면 자신감과 맞불 동원이 필요하다
감사의 글

찾아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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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식의 헌법

지식의 헌법: 왜 우리는 진실을 공유하지 못하는가
조너선 라우시 지음

“무사히 빠져나가지 않는다면 끔찍한 발언이네요”
- 혼돈과 동조가 인식론적 위기를 초래했다
인식론적 위기: 견해차로 가득한 세상에서 어떻게 진리를 찾을지 생각할 때면 미국인은 보통 비유에
의지한다. 바로 사상의 시장이라는 비유가 그것이다. 어느 정도는 괜찮은 비유지만, 불완전하다. 일종
의 벼룩시장에서 생각들이 개인에 의해 거래되는 이미지, 혹은 육신을 떠난 생각들이 자체의 천상계에
서 충돌하고 경쟁하는 이미지를 떠올리게 한다. 그러나 시장에 있는 사상들이 서로 직접 말을 거는 것
은 아니며, 그보다 우리의 대화는 학술지와 신문과 소셜 미디어 플랫폼 같은 제도를 통해 중재된다.
그리고 진실성과 팩트 체크 같은 밀도 높은 규범 및 원칙의 네트워크에 의존하고, 동료 평가자와 편집
자 같은 전문가들의 전문 지식에도 의존하며, 시스템 전체가 가치의 기초, 곧 지식을 만드는 방식에는
옳고 그른 게 있다는 공동의 이해에 의존한다. 그런데 이런 가치ㆍ규칙ㆍ제도는 미국 헌법이 정치를
위해 하는 역할을 지식을 위해 수행하는데, 사회적 경합을 평화롭고 생산적인 경로 쪽으로 밀어붙이는
통치 구조를 창출하는 것이다. 고로 나는 그것들을 통틀어 ‘지식의 헌법’이라 부르려 한다.
과학ㆍ저널리즘ㆍ정치ㆍ일상생활에서 진실성이란 보통은 법률적 요건이 아닌 시민 규범인데, 그것이
21세기에 극심한 압력을 받았다. 가장 충격적인 건 미국의 대통령이 거짓말에 관한 한 알려진 모든 기
록을 신나게 갈아치웠다는 점이다. 정치인은 하나같이 거짓말쟁이라고 끼적이고 싶은 분도 있겠지만,
미국 정치계의 어떤 거물도 그만큼 뻔뻔하고 방자하고 왕성하게 거짓말을 한 적은 없었다.
사실에 대한 그의 경멸적 태도보다 한층 더 강력한 것이 어쩌면 정정(correction)에 대한 그의 경멸적
태도였을 게다. 참고로 1690년 북아메리카 최초의 신문이 인쇄에 들어갔는데, 《퍼블릭 오커런스》라
는 이름의 신문은 곧 검열 당국에 의해 짓밟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신문은 깊은 인상을 남겼는데,
1면에서 다음과 같이 자사의 강령을 선언한 것이 한몫했다. ‘수정(Curing)을 위해, 아니 적어도 우리 사
이에 팽배한 거짓된 기운의 미혹에 대해서는 어떤 조치를 취할 것입니다. 그런 까닭에 저희가 마땅히
진실이라고 믿는 것을 제외하면 아무것도 적지 않을 것이며, 최고의 정보 출처를 찾아 나설 것입니다.
그리고 수집한 정보에 어떤 중대한 실수가 발생하면 정정할 것입니다…….’
진실에 대한 책임, 그에 따라 기록을 바로잡는 책임이라는 발상은 주류 언론을 확립하는 데 문턱이 되
는 개념이었고, 오늘날에도 여전히 기초로 남아 있다. 참고로 2017년 CNN의 몇몇 중진 언론인은 트
럼프 대통령의 한 심복이 위험한 러시아 헤지펀드와 연계되어 있다고 보도했는데, 그것이 오보로 밝혀
졌다. CNN은 보도를 철회하며 사과했고, 거기에 책임 있는 언론인들이 CNN의 기준을 위반했다고 결
론지은 후 강제 퇴출시켰다. 다음과 같은 트위터 메시지가 한 가지 반응이었다. “보도를 정정하고 불필
요한 인원을 정리할 만큼 진실에 유념하는 CNN에 찬사를 보낸다. 이게 진짜 뉴스지!” 하지만 대통령
이 트위터로 날린 말은 이랬다. “와, CNN ‘러시아’ 특종 철회와 직원 3명 강제 사임. 그들이 내보내는
다른 사기 보도는 전부 어떨까? 가짜 뉴스!” 그리고 이것도 있다. “이렇게 해서 가짜 뉴스 CNN이 곤경
에 빠졌다는데, NBC와 CBS와 ABC는 어떨까? 망해가는 @nytimes( 《 뉴욕 타임스 》 )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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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식의 헌법

@washingtonpost(《워싱턴 포스트》)는? 그것들 전부 가짜 뉴스!” 대통령의 세계관에서는 방송사가 책
임을 추궁하다가 진정성이 아닌 자신들의 부패 ­ 그리고 사실상 뉴스업계 전체의 부패 ­ 를 입증한 격
이었다. 거의 같은 분위기로, 2018년 대통령과 공화당전국위원회는 자칭 ‘가짜 뉴스 시상식’을 요란하
게 홍보했다. 대통령과 위원회가 주목하지 않은 것은 가짜 뉴스라고 추정된 11건 중 최소 7건은 그걸
발표한 매체가 즉시 정정 보도를 냈다는 사실이다. 바꿔 말하면, 대통령과 위원회는 해당 뉴스 매체가
가짜라고 말했기 때문에, 그 보도들이 가짜인 걸 알았다는 얘기다.
대통령의 행위가 어느 정도는 강박적이거나 과대망상적이거나 병적이었을 수 있다. 그렇더라도 그것
역시 의도적이지 않았을 리 없다. 2013년 @backupwraith란 아이디 사용자는 이런 트윗을 했다. “나는
@realDonalTrump가 트위터 전체에서 가장 뛰어난 트롤링(trolling, 게임 문화에서 파생된 용어로 악의
적이거나 주제와 무관한 온라인 게시글을 고의로 올려 분란을 일으키는 행위를 가리킴)의 대가라고 굳
게 믿는다.” 그런데 트럼프는 그 트윗을 인용하며 이렇게 언급했다. “멋진 칭찬!”
2018년 CBS 뉴스의 레슬리 스탈(Lesley Stahl)은 선거 캠페인 중인 트럼프에게 언론 공격을 그만둘 계
획이 있냐고 되물었다. “그는 ‘내가 왜 그러는지 알아요? 당신들 전부의 신임을 떨어뜨리고 품위를 손
상시키려고 그러는 겁니다. 그래서 나에 대해 부정적인 기사를 쓰면 아무도 당신들을 믿지 않도록 말
이지’라고 말했다.” 백악관도 스탈의 이런 언급을 부인하지 않았다. 왜 그러겠는가? 트럼프와 그의 댓
글 부대는 자신들의 생각에 따라 자신들이 하고 있는 일을 자랑스러워할 충분한 이유가 있었는데.
그리고 그들은 정말로 자신들이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 알았다. 우리는 트럼프도 알고 있었다는 걸 안
다. 그가 우리한테 경고했었기 때문에. 참고로 2004년 트럼프는 NBC 뉴스의 크리스 매슈스가 진행한
인터뷰에서 방금 끝난 공화당 대선 후보 전당 대회에 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질문을 받았다. 그해
대통령 경선에서 공화당원들의 골칫거리는 자신들의 후보인 조지 W. 부시는 안전하게 텍사스주 방위
공군으로 있으면서 베트남전이 끝나길 기다렸던 반면, 그의 적수인 존 케리 상원의원은 전투에서 은성
훈장ㆍ동성훈장에 용맹한 군인에게 수여하는 2개의 퍼플하트 훈장을 받았다는 사실이었다. ‘진실을 위
한 고속정 참전 용사들’이라는 집단은 케리의 전시 기록에 이의를 제기하는 성공적인 프로파간다 캠페
인을 벌였다. 아래의 대화를 주고받은 것은 바로 이런 맥락에서였다.
‘[트럼프] 저는 끝까지 뉴욕 전당 대회 자리를 지켰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정말 잘 해냈죠, 공화당원들
말입니다. 그런데 제가 여태껏 본 가장 위대한 반전은, 부시가 전쟁 영웅이고 케리는 아니라는 구도로
거의 되어가고 있다는 겁니다. 제가 본 것 중에 가장 위대한 반전일 거라는 생각이 드네요. [매슈스]
왜죠? [트럼프] 글쎄요, 분명 부시와 부시 사람들에 의해 진행되고 있을 고속정 집단의 모든 일이 공
교롭게도 탁월했다는 거죠. 케리한테서 전쟁 영웅 그딴 걸 모두 빼앗아 부시한테 거의 안겨준 셈이잖
아요. 그런데 솔직히 부시는 군 복무를 안 하고 있었어요. 그건 우리가 알잖아요. [매슈스] ……어쩌면
정치에 불필요한 거친 질문이라고 말씀하실지 모르겠는데, 거기에 관해 여쭤보겠습니다. 이번 주에 엄
청난 터프 가이 딕 체니 부통령이 만일 우리 미국인이 케리를 선출한다면, 치명적인 (테러리스트) 공격
의 위협에 근본적으로 직면하게 될 거라고 했습니다. 민주당을 뽑으면 공격을 받게 될 거라는 얘깁니
다. [트럼프] 글쎄요, 그가 무사히 빠져나가지 않는다면 끔찍한 발언이네요.’
‘무사히 빠져나가지 않는다면 끔찍한 발언’이라니. 트럼프는 최초의 거짓말쟁이 정치인은 아니다. 하지
만 10여 년 뒤의 대통령으로서 그는 고속정 캠페인처럼 사전 계획된 여느 정치적 음해의 수준을 한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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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식의 헌법

넘어섰다. 많은 이들이 그가 한 거짓말의 규모와 뻔뻔함에서 예사로운 정치적 의견 제시 및 과장과는
다른 무언가를, 더 불길한 목적을 가졌고 훨씬 혼란스러운 결과를 불러올 무언가를 감지했다. 조지 오
웰의 『1984』 세계에 나왔던 무언가를, “당이 여러분의 눈과 귀의 증거를 거부하라고 명했다. 그것이
그들이 내린 가장 필수적인 최종 명령이다.” 트럼프와 그의 미디어 반향실은 공적 영역에서 진실과 허
위의 구분을 없애기 위해 거짓말을 정상화하고 있었다.
그들은 허위 정보의 기술을 갈고닦았다. 그들은 진실에 대한 경멸을 보이려는 게 아니고서야 거짓말을
할 아무런 이유가 없을 때조차 사소한 거짓말을 했다. 트럼프가 자신의 취임식 날 비가 내리지 않았다
고 우겼을 때처럼 말이다. 거창하고 기상천외한 거짓말도 했다. 트럼프가 명명백백하게 패배한 선거를
이겼다고 우기며, 수 개월간 허위 정보 캠페인(폭력적인 내란 선동죄로 탄핵에 들어갔을 때에야 종지
부를 찍었던 캠페인)을 벌였을 때처럼 말이다. 그들은 진실과 거짓, 아니 크고 작은 거짓말을 가리지
않고 내뱉었다. 그들의 목표는 대중의 구분 능력을 어떻게든 없애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사건들을 지켜보며 여러 시사평론가와 학자들은 자유주의 질서 자체의 토대가 위협받고 있다고 생각했
다. 그리고 이러한 위협은 단지 트럼프와 그의 정치적 협력자뿐 아니라 트롤러(troller, 트롤링 행위를
하는 사람들. ‘어그로꾼’과 비슷한 뜻), 외국 활동가, 심지어 검색 봇(bot, 로봇의 약자로 자동 인터넷
프로그램을 가리킴)과 알고리즘한테서도 왔다. 펜실베이니아 대학의 역사학자 소피아 로젠펠드는 자신
의 저서 『민주주의와 진실: 짧은 역사』에서 “우리의 현재 관행은 민주주의적 삶에 필요한 지적(知的)
신뢰 및 협동의 형태를 약화시키려고 하고 갈수록 더 극명하게 막강한 힘의 결과로 ‘진실’이 결정되도
록 만들면서 민주주의 자체를 위협한다”라고 썼다.
사상 초유의 묘안: 이 책은 자유주의의 인식론적 운영 체제인 지식의 헌법, 즉 견해차를 지식으로 변
환하는 우리 사회의 원칙을 설명하고 옹호한다. 그런데 이 체제는 사회적 마법에 의해 자동으로 자체
조립된 것이 아니며, 힘겹게 싸운 전투와 힘들게 얻어낸 규범 및 제도의 산물이고, 그 과정에서 많은
사람이 고통 받고 피를 흘렸다. 그리고 그것은 자체적으로 유지되지 않는다. 이따금 무너지기 쉬운 일
련의 사회적 환경 및 이해에 의존하므로, 그것을 알고, 확인하고, 보호할 필요가 있다. 나는 지식의 헌
법을 설명하고 그에 대한 현대의 위협을 탐구함으로써 무엇을 보호해야 하고, 왜 그리고 어떻게 보호
해야 하는지에 관한 더 명확한 이해로 그 옹호자들을 무장시키고 싶다.
이 책은 인간이 인지적 오류를 저지르고, 그것을 부족(tribe)의 견해차로 전환시키고, 지식을 두고 전쟁
으로 치닫는 이유에 대한 연구를 플라톤의 『테아이테토스』에 업데이트하는 것으로 출발한다. 그러고
나서는 어떻게 여러 세대의 철학자 및 과학자들이 현대의 인식론적 질서를 발전시켰는지 보여준다. 그
리고 그것을 배경으로 이 책은 지식의 헌법의 설계 방식 ­ 미국 헌법처럼 조정을 강제하는 사회적 메
커니즘 ­ 과 현실 기반 공동체의 경계를 탐구한다. 그리고 후반부는 역사와 이론으로부터 동시대의 여
러 가지 도전 과제로 넘어가며, 21세기의 가장 불편한 인식론적 놀라움에서 시작한다.
요컨대 디지털 미디어가 대화와 지식보다는 분노와 허위 정보에 더 잘 맞춰져 있는 것으로 밝혀졌다는
점이다. 진실 친화적인 디지털 설계 방식은 가능하며, 이는 디지털 플랫폼이 사실에 대한 제도적 책임
을 떠맡기 시작함에 따라 이미 부상하고 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들 ­ 그리고 우리 ­ 은 두 가지
반란과의 싸움을 맞이할 처지에 있다. 바로 트롤링 문화라고도 부르는 바이럴(viral) 허위 정보와 대체
현실(alternative reality)의 전파, 그리고 취소 문화라고도 부르는 강압적 동조와 이념적 블랙리스트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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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식의 헌법

확산이다. 전자는 주로 우익과 포퓰리스트(populist, 대중의 인기에만 영합하려는 정치인), 후자는 주로
좌익과 엘리트주의자다. 전자는 무질서와 혼란을, 후자는 동조와 사회적 강요를 조장한다. 그러나 그
들의 목표는 비슷하고, 묘하게도 사실상 협력자처럼 행동할 때가 많다.
트롤링 문화와 취소 문화의 공통점은 프로파간다 전문가들이 보통 정보 전쟁이라 부르는 것의 기법이
다. 그들은 진리를 추구하기 위해 합리적 설득을 활용하기보다, 정치적 이익을 위해 사회 및 미디어
환경을 조작하는데, 그들은 하찮거나 비체계적이거나 흐트러져 있는 듯 보일지 몰라도, 공격적이고 팽
창적이며 인간의 인지적ㆍ감정적 취약성에 대한 정교한 이해에 뿌리를 두고 있다. 그들은 백악관(4년
간)과 학계의 상당 부분을 비롯해 지휘 기관의 고지를 확보해왔고, 디지털 기술 역량을 이용해 자신들
의 속도와 도달 범위를 증폭시키고 있다. 그러나 그들이 사용하는 방법과 그들이 제기하는 위험에 대
한 의식이 고취됨에 따라 고무적인 반발을 초래하기도 했다.
자연 상태: 부족적 진실
­ 편향, 집단 사고, 만인의 만인에 대한 인식론적 전쟁
당신은 편향됐고, 나는 그렇지 않아: 인지는 온갖 종류의 왜곡에 시달린다. 벤 야고다는 《애틀랜틱》에
“100가지 정도의 굳건한 (인지적) 편향이 존재하는 것으로 반복해서 나타났으며, 그것들이 우리의 삶
을 망칠 수 있다”고 썼다. 우리에게 왜 지식의 헌법이 필요한지를 이해하려는 목적에 비춰본다면, 몇
가지 편향이 특히 중요한 듯하다. 하나는 확증 편향으로 주로 개인적 차원에서 작용하며, 우리의 사고
방식을 편파적으로 만든다 ­ 가까운 친족인 동기화된 논증이 그러하듯. 또 하나는 동조 편향으로 사회
적 차원에서 더 많이 작용하며, 우리의 상호 작용 방식을 편파적으로 만든다 ­ 가까운 사촌인 인식론
적 부족중심주의가 그러하듯.
“확증 편향과 동기화된 논증은 정치적 맥락과 비정치적 맥락 양쪽에서 널리 조사 및 탐구되어 왔다.”
이는 랜드 연구소의 제니퍼 카바나와 마이클 리치가 2018년 보고서 《진실의 쇠퇴: 미국의 공적 생활
에서 감소하고 있는 사실 및 분석에 대한 초기 탐구》에서 쓴 내용이다. 신념에 대해 겸손하고, 자신이
틀릴 때가 많다는 걸 가정하고, 자신과 반대되는 정보와 견해를 찾아내라고 우리에게 가르치는 소크라
테스와 달리 우리는 마음 맞는 신념을 찾아낸 다음, 그것을 방어할 증거와 논거를 모색한다.
‘확증 편향’이란 용어를 만든 영국 심리학자 피터 웨이슨은 1960년대에 수행한 실험에서, 추가 숫자를
제시해 일련의 숫자(가령 2, 4, 6)를 생성하는 데 사용한 규칙을 추측하라는 요구를 받은 사람들이 규
칙은 쉽게 찾아냈으나 자신의 짐작을 확증해주는 추가 숫자(가령 8, 10, 12)만을 제시함으로써 그 규칙
을 시험하곤 한다는 것을 알아냈다. 그들이 자신의 생각을 확증하지 않는 7, 8, 9 같은 숫자 ­ 규칙이
‘증가하는 정수’이므로 이 숫자들도 맞았을 것이다 ­ 를 제시하며 추측을 시험하는 일은 거의 없었다.
확증에 어긋나는 정보를 찾는 데 소홀한 것은 검은 고양이 세 마리를 보고 모든 고양이는 검다는 가설
을 세운 다음, 검지 않은 고양이를 찾으려고 굳이 여기저기 둘러보지 않는 것과 같다.
이후 다른 조사들에서도 동일한 경향을 확인했다. 랜드 연구소의 카바나와 리치는 “사람들은 최상의
정보를 주는 결과가 아니라, 바라던 결과로 귀결될 가능성이 가장 높은 조사 및 결정 방법을 선택할
것”이라는 연구 결과를 이용한다. 하이트에 따르면, 정파적 신념을 확증하면 뇌에 약간의 도파민을 촉
발해 만족감을 전달한다고 한다. “정파성으로 무장한 이들은 버튼 누르기를 멈출 수 없는 쥐처럼 이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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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식의 헌법

한 것을 믿는 행위를 그저 멈출 수 없는 것인지도 모른다”고 그는 썼다. “극단적 정파성은 말 그대로
중독적일 수 있다.” 연구들은 같은 이유로 사람들이 자신의 신념에 반하는 정보를 찾거나, 거기에 귀
기울이거나, 심지어 알아채는 것조차 강하게 혐오한다고 밝힌다. 2017년의 한 조사에 따르면, 대상자
의 3분의 2가 상대편의 정치적 견해에 노출되는 불편을 피하기 위해서라면 돈을 지불하겠다고 했다.
《이코노미스트》는 이 실험을 설명하면서 “오바마에게 투표한 사람의 3분의 1, 롬니에게 투표한 사람
의 반 이상이 상대편 유권자의 의견에 귀 기울이는 걸 치아를 빼는 것에 비유했다”고 보도했다.
식별하고 대응하기 쉽다면 동기화된 논증과 확증 편향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을 터이다. 하지만 애초에
우리의 사고를 왜곡하는 그 편향들이 우리에게 그것들을 은폐하고, 우리가 그것들을 찾아내는 걸 꺼리
도록 만들며, 그것들을 인정하는 건 더더욱 꺼리게 만든다. 당신은 편향됐지만, 당연히 나는 그렇지 않
아! 그 결과, 오류를 찾고 정정하는 일은 오류를 범하기 쉽고 자연스러운 바로 그 모든 이유 때문에 어
렵고 불편하다. 지능은 그다지 도움이 되지 않는다. 동기화된 논증이 그것을 무기화한다.
가끔 증거와 논지가 효험이 있을 때도 있다. 그러나 그것들은 우리가 별로 신경 쓰지 않는 답변을 가
진 질문에서 훨씬 더 잘 작동한다. 반면 어떤 명제에 신경 쓸 때는 그것에 대한 우리의 생각을 바꾸기
어려울 것이다. 반대되는 사실을 밀어내도록 합리화하거나, 그것의 출처를 무시하거나, 그 영향을 거
부하거나, 그것의 진실성을 전면적으로 부인하려 들 터이기 때문이다. 정치학자 브렌던 나이헌은 “대
부분 형태의 정치적 설득이 전혀 효과가 없는 것 같다”고 썼다.
나는 동성 결혼에 관한 사람들의 생각을 바꾸는 일을 하며 20년을 보냈는데, 이성에 대한 호소와 증거
가 설득력 있을 수 있지만, 나는 사람들이 정서적으로 설득당할 수 있는 지점으로 옮겨가고 나서야 비
로소 그게 가능하다는 것을 알았다. 즉 게이 또는 게이 커플을 안다거나, 친구 또는 가족 사이에 심경
의 변화가 있다거나, 믿을 만한 지도자나 당국으로부터 동성 결혼을 지지해도 괜찮다는 신호를 받았을
때 같은 경우다. 사람들의 사적인 견해, 정치적 동질감 및 또래 집단의 규범도 동시에 일제히 은근슬
쩍 유도하고 회유해야 했는데, 이는 길고 느린 ­ 결국에는 대단히 효과적이기는 했지만 ­ 과정이었다.
한 가지 절대 먹히지 않는 것은 사람들에게 그들이 편파적이라고 말하거나 아예 그들의 편향을 본인들
에게 보여주는 것이었다. 타인들의 편견은 눈에 보이지만, 자신들의 편견은 그렇지 않다.
허위 정보 테크놀로지: 디지털 미디어의 도전
­ 온라인 세상을 진실 친화적으로 만드는 것은 어렵지만 가능하다
견제와 가치: 현대의 사실 기반 저널리즘의 제도화가 이뤄낸 일은 정보를 받아들여 전달할지 여부를
선택할 수 있는 교점 ­ 전문 보도국 ­ 시스템의 창출이었다. 현실 기반 공동체는 이러한 교점들의 네
트워크다. 발행인, 동료 검토자, 대학, 통신사, 법정, 규제 기관 등 많은 교점이 있는데, 이 시스템의
제도적 교점을 나는 사안들이 흘러가는 필터실과 펌프실로 상상하고 싶다. 각 단계는 사안들을 획득해
평가하고, 그것들을 저장된 지식과 비교하고, 오류를 찾아내고, 그런 다음 일부 명제를 걸러내고 살아
남은 명제들을 다음 단계로 배분한다. 그리고 거기서도 똑같은 일을 한다. 중요한 점은 그것들이 위계
가 아닌 네트워크를 형성한다는 것이다. 어느 게이트키퍼도 혼자서는 어떤 가설이 시스템에 들어올지
결정할 수 없으며, 그것을 통과하는 경로는 무한히 많다. 만일 한 신문이나 언론 기관이 당신의 주장
을 거절한다면, 다른 곳, 또 다른 곳을 접촉하면 된다. 만일 모든 교점이 여전히 각자 자기가 맡은 업
무를 하고 있다면, 시스템 전체는 강력하게 긍정적인 인식론적 가치를 획득할 것이다. 입증하기에 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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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식의 헌법

충분한 주장이 필터 하나를 통과할 가능성은 50퍼센트지만, 그 뒤 2개의 필터를 통과할 가능성은 25
퍼센트이고, 3개를 통과할 가능성은 1.25퍼센트인데, 그것은 최종적으로 (보통은 빠르게) 사장된다. 강
력하게 입증된 주장은 훨씬 잘 먹힐 것이고, 많은 이들이 수용한다면 네트워크 전체에 보급되어 지식
의 토대로 들어갈 것인데, 펌프와 필터의 공동 작업이 정보를 진실 쪽으로 가도록 내보낸다.
펌프 뒤집기: 이제 그것들이 역으로 흐른다고 상상해보자. 어떤 악마가 중앙관제소에 침투해 펌프와
필터를 뒤집어놓았다고 가정하자. 오류를 걸러내는 대신 다음으로 넘긴다. 그러면 거짓되고 오도된 주
장의 보급을 늦추는 대신 가속화시키고, 인신공격을 무시하는 대신 부추기고, 전문 지식에 특혜를 주
는 대신 아마추어의 솜씨를 선호한다. 또 주장을 입증하는 대신 공유하고, 소통을 나누는 대신 과시로
거래하며, 출처를 밝히는 대신 숨기고, 다른 사람을 설득하는 이들 대신 자기 홍보를 하는 이들에게
보상한다. 이런 게 필터실과 펌프실이 돌아가는 방식이라면, 이 시스템은 부정적인 인식론적 가치를
획득할 것이며, 그것은 진실에 불리하게 작용할 것이다. 그것은 정보 기술이 아니라 ‘허위’ 정보 기술
이다.
아무도 그런 일이 일어날 줄 몰랐다. 우리 ­ 분명 나 자신을 포함해 ­ 는 디지털 테크놀로지가 사상의
시장을 더 넓고 깊이 있게 만들어줄 거라고 기대했다. 더 많은 가설, 더 많은 검토자, 더 나은 전문 지
식 접근성이 있을 것이라고. 이것이 어찌 진리를 향한 도약이 아닐 수 있겠는가? 최악의 경우, 디지털
생태계는 중립적일 거라고 우리는 생각했다. 현실 쪽으로 반드시 기울지 않을 수 있지만, 조직적으로
현실에 반(反)해 기울지도 않을 것이라고 말이다. 불행히도 우리는 현실과의 지속적 접촉이 규칙 및 제
도에 달려 있다는 걸 잊었다. 우리는 우리의 인지적ㆍ부족적 편향을 극복하는 것은 그 규칙 및 제도를
무색무형의 ‘플랫폼’ 속에서 평준화시키는 게 아니라, 그것들에 특혜를 주는 데 달려 있다는 걸 잊었다.
정보는 간단히 내보낼 수 있지만, 풍부한 사회적 상호작용의 산물인 지식은 성취해야 한다. 그리고 정
보를 지식으로 전환하려면 중요한 장려책과 설계 선택을 제대로 고민해야 한다. 그런데 애석하게도 디
지털 미디어는 그것들을 잘못 생각했다.
상업용 인터넷은 인식론적 결함을 갖고 태어났다. 그것의 사업 모델은 일차적으로 광고 중심이었고,
따라서 주목도를 최우선 가치로 뒀다. 물론 전통적 미디어 기업도 부분적으로(종종 전면적으로) 광고
수익에 의존했다. 하지만 일반 사용자 및 유료 소비자인 시청자를 확보해 광고주를 끌어들였고, 다수
는 자신들을 알고 신뢰하는 공동체 사회에 뿌리를 뒀으므로 평판상으로나 재정상으로 책임감을 느끼는
지지층을 구축하는 경향이 있었다. 저질 신문과 한탕 하고 튀려는 매체도 존재했지만, 그것들은 적어
도 현대에 와서는 통례라기보다는 예외였다.
반면 디지털 미디어는 유료 고객을 가져본 적이 거의 없었고, 시선을 끌기 위해서라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경주에 착수해 순식간의 ‘인상(impressions)’과 ‘약속(engagement)’으로 광고주를 현혹했
다. 디지털 미디어 기업은 구독자를 세분화하고 분류하기 위해 세밀한 측정법(metrics)을 활용할 수 있
었지만, 그 통계 자료는 사용자와 공동체 그리고 광고주의 책임 있는 관계와는 매우 달랐다.
시스템 전체가 이처럼 누가 어떤 정보를 사람들 앞에 갖다놓고 싶든, 거기에 즉각 반응하는 구독자를
모아들이는 쪽으로 최적화됐고, 정보의 정확성에 대한 고려는 (있다고 해도) 부수적일 뿐이었다. 측정
법, 알고리즘 및 최적화 도구는 인기에는 민감하지만 진실에는 무관심했다. 계산 엔진은 심지어 의미
에도 무관심했다. 왜냐하면 퍼뜨리고 있는 내용을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것은 오로지, 그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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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식의 헌법

집요하게, 클릭 수와 페이지뷰(page view)는 알고 있었다. 검색 또는 브라우징(browsing) 시간은 사람
들이 무엇을 클릭하느냐에 따라 정보를 찾아낼 수도 있고 ‘허위’ 정보를 찾아낼 수도 있다. 화장실 수
리법 안내 영상은 보통 꽤 믿을 만했다. 반면 예방 접종 관련 정보와 논란 있는 정치적 쟁점에 관한
주장은 그다지 신뢰할 만하지 못했다. 그러나 무엇이든 상관없다. 사용자가 가려낼 테니까.
디지털 시대는 중립적인 정보 매체가 진실에 반하는 쪽으로 기울어진 최초의 시기는 아니었다. 시선을
끌려는 쟁탈전은 19세기 미국 언론을 반쪽짜리 진실과 가짜 뉴스의 초현실적 왕국으로 몰고 갔는데,
바로잡는 데 수십 년의 제도적 개혁이 필요했다. 정보를 즉각적으로 거의 아무런 비용 없이 퍼뜨리는
능력을 가진 디지털 기술도 비슷한 문제를 제기했지만, 그 규모의 자릿수는 1~2배 더 커졌다.
일반적으로 정보 기술 시스템이 참인 결과만큼이나 거짓인 결과를 산출할 가능성이 있을 경우, 혹은
둘을 구분하지 못할 경우, 우리는 그 시스템이 고장 났다고 말한다. 그러고 나서 무엇이 참인지 거짓
인지 스스로 파악하지 못한 사용자에게 잘못이 있다는 얘길 들으면, 우리는 오류를 일으키기 쉬운 인
간에겐 도움이 필요하다고 대답한다. 우리는 정보 시스템이 우리를 오류와 편견으로부터 멀리 있게 해
주길 원하며, 바로 그것을 위해 현대 과학 및 언론의 제도와 표준을 마련했다. 디지털 미디어에 내장
된, 모든 정보를 광고처럼 취급하는 사업 모델은 철저히 관심을 끌려는 경쟁을 제법 보장해줬다. 그것
은 충분히 도전 의식을 북돋웠을 터이다. 그러나 디지털 정보 생태계는 단지 허위 정보에 눈이 먼 게
아니라, 그것을 증폭시키는 특성을 발달시킴으로써 문제를 복잡하게 만들었다.
10억 가지 사적인 현실: 디지털 미디어는 현실을 파편화시켰다. 지식의 헌법의 요지는 현실이란 당신
이나 내가 아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아는 것이라는 점이다. 순전히 개인적인 믿음은 당신이나 내가 아
무리 많은 장점이 거기에 있다고 생각한들 지식이 될 수 없다. 찰스 샌더스 퍼스의 다음 금언들을 상
기하자. “개인주의와 거짓은 마찬가지로 보일 것이다.” “진실이 공개적으로 인정받지 않는다면 우리 각
자가 다른 모든 사람이 믿지도 않을 완전히 무익한 자기만의 신념을 채택하지 않도록 막아줄 방안은
아무것도 없다.”
현실 기반 공동체의 구성원이 그들의 다양성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모두 한 가지 현실의 측면을 탐구하
고 있음을 받아들이는 것은 당연한 귀결이다. 지식의 헌법은 그들에게 같은 방식으로 세상을 보거나
사실을 놓고 합의를 보라고 요구하지 않는다. 실제로 그것은 사람들이 세상을 다르게 보고, 사실을 놓
고 의견을 달리하는 곳에서만 효과가 있다. 그래야 생각을 시험해보고 편견을 극복할 수 있기 때문이
다. 하지만 그것의 독특한 능력은 개별적 차이가 어쩔 수 없이 사회적 수렴을 향해 가게끔 하는 것이
다. 그것은 설득을 요구함으로써 가능하며, 설득은 결과적으로 우리의 차이를 비교함으로써 설명하도
록 요구한다. 연구 보고서는 이전의 연구를 조사해 저자들의 결과물이 어떻게 들어맞는지를 보여주며
시작한다. 언론인은 자신의 보도를 교정하기 위해 경쟁지의 기사와 자신의 것을 비교한다.
견해차는 수십 년간 또는 심지어 무기한 지속될 수 있지만, 적어도 우리가 의견을 달리하는 지점, 그
것에 관해 건설적으로 얘기하는 방법, 견해차를 해결할 유형의 대화나 실험을 놓고 합의를 이룰 가능
성은 있다. 현실 기반 공동체는 견해차를 해결할 수 없을 때조차 우리가 같은 것에 대해 얘기하거나
그러려고 노력할 수 있도록 합의를 조직한다. 그것은 경합성(contestability), 즉 다양한 명제와 견해를
생산적 논쟁에 부치는 능력을 제공한다. 우리는 흔히 그리고 강경하게 의견을 달리하지만, 적어도 우
리가 무엇에 대해 의견을 달리하는지를 두고 합의하는 데는 협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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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식의 헌법

그런 맥락에서 디지털 기술이 어떻게 분노에 대한 호소를 미세하게 조정하고 가장 수용적인 구독자를
겨냥할 수 있는지 생각해보자. 그것은 뉴스 피드(news feed, 게시된 뉴스의 내용을 한 뉴스 서버에서
다른 뉴스 서버로 전달하는 것)와 메시지를 개개인에게 맞춤 설정할 수 있다. 우리는 각자 개인화한
분노 식단을 가질 수 있다. 하나같이 모든 클릭을 주시하며 우리를 어떻게 자극할지 학습하는 자동화
한 소프트웨어의 지원을 받는 낚시성 매체와 정파적 활동가와 정부 후원 댓글 부대가 우리에게 먹여주
는 식단이다. 이와 같은 시스템은 현실을 다르게 바라보는 다른 사람들과의 의견 교환으로부터 우리를
밀어낼 수 있다. 다른 사람들의 관점에는 아예 노출조차 되지 않을지도 모른다. 다른 사람들은 뭐라
말할까? 우리의 차이는 뭘까? 도대체 어느 지점에서 우리의 의견이 다른 걸까?
우리는 알지 못할 수 있다. 알고 싶지 않거나 알 필요가 없을 수도 있다. 훨씬 더 이상한 건 이것이다.
즉, 우리 자신의 정보 식단이 우리에게 뭘 보여주려 고르고 있는 건지 우리한테 말해줄 수 없는 소프
트웨어에 영향을 받을 수 있다는 것. 왜냐하면 그것도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우리가 클릭하는
것과 우리하고 비슷한 다른 사람들이 클릭하는 것을 학습하고, 그런 다음에는 우리의 가상 아바타를
구축하고, 그 다음에는 우리의 아바타가 원하는 것이면 뭐든지 우리에게 더 많이 공급해준다. 우리가
보고 있는 것을 우리가 왜 보는 건지 말 그대로 아무도 모른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이 정확히 무엇을
보고 있는지 말 그대로 아무도 모른다.
지식의 헌법은 모든 주관적 세계, 모든 소셜 버블(social bubble, 코로나19 사태로 생긴 신조어. 거리
두기를 유지해야 하는 상황에서 구성원과 만날 수 있도록 허용된 제한적인 규모의 모임)이 어쩔 수 없
이 다른 주관적 세계 및 소셜 버블과 접촉하고 대화하게 만들어 현실 기반 공동체를 창출하려 한다.
반면 디지털 미디어는 정보 소비자를 누군가 ‘나라는 일간지(Daily me)’라고 불렀던 유아론(唯我論)의
방향으로 몰아간다. 정치학자 데이비드 바커가 말했듯 사상의 시장은 현실의 시장(marketplace of
realities)과 더 흡사한 것으로 대체됐다. 그와 모건 마리에타는 2019년 공저 『하나의 나라, 두 개의 현
실: 미국 민주주의에서 사실들의 싸움』에서 정파적이고 양극화한 현실의 비전들을 기술하기 위해 “사
실 인식 결투(dueling fact perceptions)”라는 말을 쓴다. “그 결과, 뜻이 맞는 버블들로 더욱 후퇴해 더
많은 거리감과 불신을 창출하고 더 큰 양극화를 조성한다.”
학자들은 소셜 미디어에서 필터 역할을 하는 버블의 보급에 관해 혼재된 결과물을 내놓았다. 바커에
따르면, 정파적 텔레비전과 라디오 토크쇼의 양극화 및 필터링 효과는 소셜 미디어의 버블 조성
(bubble-making) 효과보다 문서화가 잘되어 있고 규모도 크다. 그러나 소셜 미디어는 연구하기가 더
어렵다. 바로 어떤 두 사람도 동일한 현실을 보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지식의 헌법은 경합성을 고집
하고 다수의 현실에서 하나의 현실을 구축하면서 견해차가 어쩔 수 없이 비교와 해결을 향해 가도록
설계되어 있다. 디지털 미디어는 경합성을 약화시키고 하나의 현실을 여러 개로 파편화하면서 정확히
상반된 작업을 하도록 설계되었다. 설상가상으로, 우리가 정정하는 것은 고사하고 감지할 수 없는 방
식으로 말이다. 기이한 것은 기계들조차 자기 알고리즘이 뭘 하고 있는지 몰랐다는 점이다.
침묵을 깨라: 반박하기
­ 지식의 헌법을 수호하려면 자신감과 맞불 동원이 필요하다
문제는 제도야, 바보야!: 이 책이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가 하나 있다면, 바로 이거다. 개인들이 서로
얘기하는 것은 네트워크가 아무리 크다 해도 그냥 사람들이 수다를 떠는 데 불과하다. 엄격함과 정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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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식의 헌법

성을 귀하게 여기며 진리를 추구하는 게 개인일지라도 소음 속에서는 들리지 않을 가능성이 높다. 현
실 기반 네트워크의 제도적 교점 ­ 필터실과 펌프실 ­ 이 바로 체제에 긍정적인 인식론적 가치를 주는
것들이다. 정보 혁명의 테크노 유토피아는 지식이 제멋대로 뻗어나가는 개인 간 네트워크를 종횡무진
하며 중재되지 않은 상호작용 속에서 자발적으로 생겨날 거라 추정했고, 예상대로 그 결과는 실망스러
웠다. 전문가와 편집자 그리고 동료 검토자 같은 전문직 종사자들이 대화를 조직하고 명제를 비교하고
능력을 평가하고 책임을 규정하는 공간 ­ 과학 학술지부터 위키피디아 페이지에 이르는 모든 곳 ­ 없
이는 사상의 시장도 없다. 교전을 벌이면서 파편화한 컬트 집단과 소란을 피우며 돌아다니는 개인들이
있을 뿐이다.
그것이 현실 기반 제도의 부패가 그토록 위험한 이유다. 가령 미국 대통령이 일기 예보를 변경하고,
거짓으로 살인 혐의를 제기하고, 뉴스 매체와 법률 집행 그리고 정보기관과 다른 모든 현실 기반 제도
를 공격할 때, 대학들이 사회 정의와 학생의 안위 그리고 압력 집단의 요구와 행정가들의 의제 등에
연구의 진실성이 자리를 내주도록 내버려 둘 때가 그런 경우다. 따라서 지식의 헌법의 수호자들은 뱃
심만이 아니라 제도적인 힘에 관해서도 고민해봐야 한다.
미디어와 정부: 이 내용을 집필하는 시점에 ­ 어쩌면 놀랍게도 ­ 프로파간다와 협박에 대한 제도적 장
벽을 구축하기 위해 가장 열심히 일하고 있는 조직은 거의 하는 일이 없다고 가장 빈번하게 지탄받던
조직, 바로 소셜 미디어 기업들이다. 주요 기업들 ­ 페이스북, 구글, 트위터 ­ 은 수백만 달러를 투입
하고, 수천 명을 고용하고, 더 잘하기 위해 혁신 중이다. 그에 비해 프로파간다와 따돌림에 맞서 가장
열심히 싸울 거라고 기대했던 부문인 학계는 가장 일을 안 하고 있다.
주류 언론 기관은 그 중간이다. 현실에 기반을 둔 언론인은 트럼프 정부 시대에 대통령과 많은 그 협
력자들의 끈질긴 비방에도 불구하고 투지와 전문가 의식으로 자신의 임무를 수행한 데 대해 자부심을
가질 수 있다. 하지만 한편으로 최대한 객관적으로 보도하겠다는 그들의 약속 ­ 한 세기 넘게 정파주
의와 황색 신문으로부터 벗어나 힘겹게 얻어낸 규범 ­ 은 여느 때보다 시험대에 놓였다. 주류 언론 매
체는 그 내부에 있는 활동가와 이익 집단으로부터 보도 방향을 사회 정의(보통은 정치적 좌파에 의해
규정된다) 쪽으로 바꾸고, 반대 견해는 공개 토론에 참여시키지 말거나 적어도 냉대하라는 압력을 점
점 더 크게 받는다고 느낀다. 일부 언론인, 특히 젊은 언론인일수록 객관성 개념을 “난데없는 시각”이
라고 비웃으면서 자신들의 정치관을 의미하는 듯한 “도덕적 확실성”으로 교체할 것을 요구한다. 진보
계의 도덕주의가 보도국을 통해 스며들면서 보수파와 중도우파 그리고 온건파 언론인마저 편집자 및
동료들과 곤란해지는 일을 피하기 위해 자기 검열을 한다고 보고한다.
건강한 논쟁을 보장하는 최상의 방법은 견해의 다양성을 보장하는 것이다. 아무도 놀라지 않겠지만,
설문 조사들은 주류 보도국이 - 가령 대학 인문학부만큼 획일적이거나 극단적이지는 않아도 - 좌편향
되어 있다고 밝힌다. “이념적으로 더욱 다양한 보도국 인력을 모집해야 합니다. 그러지 않으면 결과물
은 그것을 만들어내는 언론인이 인식하지도 못할 무의식적인 편향을 겪게 됩니다. 그런데 제 생각에는
그게 우리가 현재 와 있는 지점입니다”라고 로젠스틸은 말했다. “그런 일은 트럼프 이전에도 벌어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이것이 난제로 떠올랐고, 한편으로 이런 보도국은 보수주의자가 너무나 적기 때
문에 그들에게 훨씬 덜 호의적이죠.” 그러므로 이런 순환의 고리를 끊으려면 언론 기관은 더욱 표준적
인 다양성 범주에 덧붙여 이념적 다양성을 위한 인력 채용을 할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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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식의 헌법

한편 현실에 기반한 정부 기관 및 전문 조직 ­ CIA와 FBI에서부터 기상청에 이르기까지 ­ 도 객관성
전쟁에 직면했다. “언제나 미국 정부의 보증 마크였던 객관성과 독자성의 규범을 왜곡하는 강력하고 끊
임없는 압박이 트럼프와 그의 백악관으로부터 있어왔다.”라고 전직 FBI 요원 피터 스트럭은 2020년
인터뷰에서 《로페어》의 벤저민 위테스에게 말했다. 사정이 이러할진대 정부의 많은 전문 기관이 어떻
게 자기 입장을 고수해왔는지 놀라워 보인다. 이번 장을 쓰는 동안 전직 국토안보부 정보과 책임자가
러시아의 선거 개입에 관한 평가를 완화시키려는 정무직 지명자의 노력을 밀고한 뉴스가 터졌다. 자기
상사들을 국가의 적을 묵인한 죄목으로 고발하러 나선 공무원에게는 ‘영웅적’이란 말밖에는 맞는 표현
이 없다. 정부의 다른 사람들은, 국립알레르기전염병연구소의 앤서니 파우치 소장처럼, 코로나19 팬데
믹에 관한 진실을 가리려는 백악관의 노력에 저항하기 위해 이를 악물고 싸웠다. 법무부 검사들은 사
람들을 호도하는 준비 서면에 서명하고 자신의 법률 사무를 정치화하기보다 사건들에서 손을 뗐다. 국
무부와 군 관계자들은 의회에 진실을 말하기 위해 자신의 경력을 희생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용감한 개인들마저 비현실의 맹공을 언제까지 배겨낼 수는 없다. 그들에게는 법적
ㆍ제도적 지원이 필요하다. 새로운 법률을 통과시키고, 오래된 법률을 강화해야 한다. 대통령의 명분
없는 감사관 해고를 금지하는 법률, 과학 기구와 법 집행 기관과 정보기관의 정무직 지명자를 줄이는
법률, 검사를 정치적 압박으로부터 보호하는 법률, 감사관과 특별검사의 보고를 대중 및 의회와 공유
하도록 요구하는 법률, 내부 고발자를 더욱 강력하게 보호하는 법률, 그리고 트럼프와 그 패거리들이
현실에 기반한 정부의 기본 구조에 뚫어놓은 그 밖의 수많은 구멍을 수선할 법률이 필요하다.
집단을 막는 데는 집단이 필요하다: 정치학자이자 표현의 자유 옹호자 도널드 다운즈는 그의 책 『표현
의 자유와 교양 교육』에서 맞불 동원의 중요성을 다음과 같이 강조한다. “반대 목소리와 반대 행동이
잠자코 있으면 소수 학생들의 행동이 조직의 일반적 풍조를 만들 수 있다.” 워싱턴의 자유지상주의 싱
크탱크인 케이토 연구소에서 그는 다음과 같이 자세히 설명했다. ‘이런 걸 밀어붙이는 이들은 정말로
소수의 학생입니다. ……그들에게 아무도 반박하지 않고 있어요. 그들은 캠퍼스의 관료들과 소셜 미디
어로부터 약간의 지지를 받고 있죠. ……그리고 그것이 표현의 자유에 찬성하는 반대 견해로 사람들이
공적 공간을 채우길 두려워하도록 만들고 있고요. 그러니 소수의 견해가 이기는 겁니다. ……따라서
표현의 자유 원칙을 지지하고 싶은 사람들은 정말로 반드시 목소리를 내고 조직하고 동원해야 합니
다.’
정말 그렇다. 조직된 소수가 조직되지 않은 다수를 매번 이긴다. 압력단체는 조직된 반대에 맞닥뜨리
면 후퇴한다. 반대가 없으면 그들은 전진한다. 그런데 한쪽으로 치우친 공공 선택의 계산법 때문에 맞
불 동원을 한다는 것은 도전이다. 모든 개인은 주저앉고 싶고, 위험하고 힘든 조직 일은 다른 누군가
가 해주길 바랄 것이며, 이는 곧 아무도 그렇게 하지 않을 때가 많다는 뜻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
국의 시민 문화는 취소와 강압에 맞서 대항 집단을 조직할 수 있으며 이미 그렇게 하고 있다. 동성애
자 공동체가 몇십 년 전에 깨달았듯 자유를 향한 첫걸음은 다른 이들을 찾아 힘을 합치는 것이다.
우리는 눈송이를 만났고, 그들이 우리다: 제도와 조직이 필수이기는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국
은 개개인이 관건이다. 방법과 정치적 견해가 아무리 다르다 해도 허위 정보와 강압적 동조는 정보 전
쟁의 두 가지 형태다. 캔슬러와 트롤러는 인간 표적의 사기를 꺾음으로써 맞서 싸우는 것을 단념하도
록 혼란을 주거나, 고립시키거나, 아무도 그들의 말을 듣지 않게 하거나, 공개 토론 참여를 차단하거나,
망신을 주거나 압도함으로써 정보 공간을 지배한다는 목표를 공유한다. 의기소침해지면 동원하지 못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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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식의 헌법

다. 개개인은 내심 굴복할지를 결정해야 하는데, 그래서 개개인에게 하고 싶은 가장 중요한 말은 이것
이다. 눈송이가 되지 말라.
투쟁적 신념: 지식의 헌법은 인류사에서 가장 성공한 사회 설계이지만, 가장 반(反)직관적이기도 하다.
지식과 자유와 평화를 얻는 대가로, 우리의 감각과 우리의 부족을 불신하고, 우리의 신성한 믿음에 의
문을 제기하고, 확신의 안락을 포기하도록 요구한다. 그것은 우리의 오류 가능성을 수용하고, 스스로
를 비판에 노출시키고, 비난받아 마땅한 사람을 용인하고, 현실을 낯선 사람의 네트워크 전체에 위탁
하라고 우리에게 주장한다. 그것을 하루하루, 영원히, 변신하지만 절대 물러나지는 않는 상대들에 맞
서 지키는 것은 소모적이고 마음을 상하게 하고 심각한 스트레스를 줄 수 있다. 그러나 우리는 눈송이
가 될 수는 없다. 인식론적 자유주의는 정치적 자유주의처럼 투쟁적 신념이다.
나의 가장 큰 걱정은 링컨이 했던 가장 큰 걱정이기도 하다. “만일 파멸이 우리의 운명이라면, 우리 자
신이 그것의 창조자이자 완성자가 되어야 합니다.” 혼란과 강압의 힘은 그것만으로는 지식의 헌법을
제자리에서 몰아낼 위력이 부족하며, 만일 몰아낸다 해도 수백만 개의 개인적ㆍ부족적 현실 하나하나
의 나머지 현실들 전부에 대한 홉스식 전쟁을 제외하면 절대로 대체할 게 없을 터이다. 하지만 선전가,
소셜 미디어 가해자, 감정적 안전주의자, 주관주의자 그리고 나머지 전부가 잘하는 것은 현실 기반 공
동체가 낙담하고 굴복하도록 기를 꺾고 혼란을 일으키고 겁을 주는 일이다. 트롤러한테 조롱받고, 캔
슬러한테 습격당하고, 좌파로부터 인종차별주의와 식민주의로 비난받고, 우파로부터 그림자 국가 음모
론으로 매도당하는 현실 기반 공동체는 포위되고 허약해 보인다.
엄청나게 많은 구성원이 허위 정보는 천하무적이며, 객관성은 지킬 수 없고, 견해의 다양성은 소수자
에게 피해를 입히며, 말은 폭력이고, 취소는 단순한 비판이라고 믿게 될지도 모른다. 트롤러와 음모론
자 그리고 봇과 미국 대통령이 허위 정보를 퍼뜨릴 때, 소셜 미디어가 망신 주기와 따돌림을 재미 삼
아 하는 데스크톱 취미 생활로 만들 때, 슈퍼컴퓨터가 우리의 분노를 현금화하고 알고리즘이 우리의
관심사를 조작할 때, 대학생과 일반 대중의 절반 이상이 평판이나 생계를 잃을까 두려워 자신의 진짜
의견을 표현하길 주저할 때 ­ 그런 순간에, 지적 다원주의와 자유로운 탐구의 적들은 우쭐대는 것처럼
보인다. 바로 그들이 보이고 싶어 하는 모습이다.
하지만 현실 기반 공동체는 이보다 훨씬 더 나쁜 것도 견뎌왔다. 갈릴레이를 감옥에 가뒀던 재판관,
대륙마다 노동수용소를 갖고 있던 독재자, 자유의 목소리를 침묵시키려 했던 인종차별주의자, 그리고
동성애 혐오자도 물리쳤다. 나는 나의 학생 동지에게 말한다. “우리가 우리의 머리와 마음으로 ­ 링컨
이 처방했듯 숭배와 이성으로 ­ 지식의 헌법을 지지할 때, 그리고 다른 사람들이 우리와 똑같이 그리
할 때, 자부심을 느끼는 건 적들이 아닙니다. 바로 우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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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식의 헌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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