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해송 지음 / 세종출판사
정해송의 시조집 『보수동 책방골목』은 크게 5부로 나누어져 있으며 정해송 시인의 주옥같은 작
품들을 만나볼 수 있는 책이다. 존재론적인 자아 성찰, 그리고 생생한 시적 이미지의 활용이 돋보
이는 작품들로 구성되어 있다.
보수동 책방골목
정해송 지음
▣ Short Summary
정해송 시조집 『보수동 책방골목』을 통해 인간과 인간이 함께하는 삶의 마당 한가운데서 주변을 향해
이해와 사랑의 눈길과 마음을 건네는 시인과 만날 수 있다. 아울러, 자신의 내면을 깊이 응시하는 시
인의 눈길과도 만날 수 있었다. 정해송 시인의 신작시 가운데 여섯 편이 사람과의 만남이나 인간사를
소재로 한 작품이다. 즉, 좁든 넓든 시인이 살아가는 삶의 공간을 공유하는 사람들과의 직접적인 또는
간접적인 만남이 다수 작품의 시적 소재가 되고 있는데, 이런 경향은 기본적으로 시조란 ‘인간 세상과
현실의 노래’로 규정할 수 있다는 관점에서 보면 당연한 일이라 하겠다.
정해송 시인의 이번 신작시를 놓고 볼 때 또 하나 중요한 유형으로 분류될 수 있는 것은 자아 탐구가
시적 소재 또는 주제가 되고 있는 작품들일 것이다. 사실 자아 탐구는 정해송 시인의 최근 시 세계를 특
징짓는 중요한 화두 가운데 하나로 판단된다. 어찌 보면, 자아 탐구의 순간을 드러내는 시들도 넓게 보
아 시인이 살아가는 삶의 다양한 단면을 노래한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이 같은 작품들도 ‘인간
의 삶에 대한 노래’라는 시조의 기본 전통을 벗어난 것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아니, 시조의 주제와 소
재의 폭을 넓히고 있다는 평가가 이상과 같은 작품에 합당한 것일 수도 있다. 이렇듯 정해송 시인의 시
적 시도와 실험은 시조의 외연을 확장하기 위한 의미 있는 작업으로 평가되어야 할 것이다.
▣ 차례
시인의 말
제1부
안개비 내리는 날
정물화, 사과
난초꽃, 가을
12월, 시간 유희
초록언어를 꿈꾸며
가을, 화제
시와 그림이 있는 배경
가을 통화
들꽃 은유
모니터에 관한 발화
-2-
보수동 책방골목
오드리 헵번은 살아있다
바람개비와 나
유작 한 점
개안
진공청소기
백수의 계절
제2부
가을 교실
바닷가 언덕
다시 오월에
초량동, 시절
종이학 접기
점심식사
자갈치에서
영등포역
질문과 답
달항아리
고향이발관
우리약국
보수동 책방골목
홍제동 시편
공감 전송
동무 생각
제3부
백목련
해일 예감
출근길에서
코로나19 긴급재난지원금
에바다
강변화랑
이별의 부산정거장
다시 구월에
딱풀의 말
종이컵, 시간
오리지날 해법
명장면을 위하여
봄날 한때
安民歌
낮술, 봄날
-3-
보수동 책방골목
폭염, 그 이후
제4부
가을, 난제
서운암
아침 소식
시집 읽기
원고청탁서
난향, 다시 읽기
홈커밍데이
봄날, 치정
달빛시간
문예지, 봄호
채팅창을 닫으며
난향, 읽기
약력에 관한 소감
복사꽃 시간
풀꽃, 가을
시월 감성
제5부
동란 곁에서
4월
고요 속에 손 하나가
시업에 관한 명상
향수
백합화
별꽃
상강 무렵
청도, 카페 HIERBA
가을밤
사마리아 여인
청도역
현대시조 100인선
가을 한 컷
염색하는 날
그냥 보기 연습 2
작품 해설 - 만남의 시와 자아 탐구의 시, 그리고 그 너머에 이르기까지 (장경렬)
나의 시조, 나의 시론 / 연보
-4-
보수동 책방골목
보수동 책방골목
정해송 지음
제1부
안개비 내리는 날
오늘은 수양버들이 사념들을 내려놓고
입김 같은 얇은 천을 휘장으로 드리우니
실바람 건듯 불어와 일렁이는 정감 한 필
이 계절 행간에서 너의 맘을 두드리면
연둣빛 머리칼은 그리움에 젖어 있고
내 영혼 닦은 창으로 네 가슴이 열려온다
내가 든 그대 숲은 하늘 숨이 드나들어
시간도 비껴가는 비경 한 점 그려낼 즘
너와 나 안개비 속에 이 둘인가, 하나인가
정물화, 사과
식탁 위 흰 접시에 사과 한 알 붉게 타고
저만치 파란 날 선 과도가 놓인 것을
창에 든 가을 햇살이 극사실로 그려준다
사과와 칼날 빛이 긴장하는 거리 사이
내 안에 또 내가 있어 이 국면을 응시할 제
자장이 서린 시간 딛고 과도를 집어 든다
존재를 싸고 있는 껍질을 깎아들면
사각사각 과육 말은 씨앗으로 돌아가고
극사실 해체가 되고 추상으로 뜨는 시원
난초꽃, 가을
벽공무한 맑은 경을
네 숨결로 필사해서
봉인해 두었다가
오늘에사 뜯는 건가
-5-
보수동 책방골목
은하계
이전 소식이
문향 피는 가을 행간
12월, 시간 유희
풀어둔 손목시계를 서랍에서 꺼내 찬다
세월이 초침처럼 가는 것이 보이는 달
한해를 되감아보며 이 바늘을 응시한다
다이빙 선수들이 아주 짧은 낙하 동안
여러 가지 동작들을 보여주는 순간 늘임
그 늘임 응용학습에 이 바늘을 얹어보자
운동화 끈을 매고 러닝머신 밟고 달려
몸과 맘이 한 숨으로 닫는 그 정점에서
동그란 숫자판 위에 휘어지는 의식의 침
오고 감이 실재하는 시간의 흐름 속을
앞으로 달려가도 이동 없는 중심축에
순간은 뫼비우스 띠같이 엇바뀌는 영겁 회로
초록언어를 꿈꾸며
우린 한때 혁명 같은 철의 말에 탐닉하여
메질과 담금질로 쇠똥 떨 듯 연단한 것
숫돌에 칼날 세우듯 율을 벼린 적이 있지
그 겨울 대장간은 달빛마저 길들이며
풀무와 화로 곁에 자장처럼 서린 혼불
푸른 검 하늘에 묻고 봄이 오는 길을 가자
아주 여린 말씀으로 피어나는 새순 바라
그 순에 내려앉는 부드러운 실비 바라
계절의 빗장이 풀린 초록숨결 들로 가자
제2부
가을 교실
―시간 여행 1
을숙도가 보이는 국어시간 교실에는
방과 후 수업으로 예상 문제 가려내어
입시에 맞춘 답안 따라 해체되는 시 한 편
-6-
보수동 책방골목
살은 죄다 발라내고 뼈만 그린 칠판에는
오수에 바랜 생선마냥 생기 잃은 표정들이
이 가을 지침서 행간을 강물처럼 흘러간다
머리칼 푼 바람이 갈대밭을 지나갈 때
은빛 시간들이 손 흔드는 원경 한 폭
석양이 창에 물들자 시가 숨을 찾아 쉰다
바닷가 언덕
―시간 여행 2
어디서든 수평선은 눈높이로 걸려 있다
바람은 열 손가락 길게 뽑아 선을 당겨
시간이 휘는 공간을 풍경으로 여는 한때
해안선 단선열차 물빛 젖어 돌아오고
라일락 피는 계절 차창 가에 앉은 그대
화첩에 영원이 물든 사연 한 필 풀어낸다
구름송이 피고 지는 경계 밖은 어디던가
레일은 사다린 양 하늘가로 이어지고
기차가 떠난 세월 뒤편에 여운처럼 남은 낮달
다시 오월에
―시간 여행 3
빛바랜 앨범 열고 물감 푸는 손길 앞에
맘은 다시 초록으로 새 피 돌아 설레느니
청순한 시절이 돌아와 기억 한 등 밝힌다
검은 스커트에 흰 블라우스가 환한 오월
손에 든 책갈피는 아카시아 향기 나고
그 하얀 바람길 따라 사진 속을 나선 너는…
신간 표지 색상같이 감성 맑은 네 미소는
내가 맺은 시간 끈의 아퀴들을 이냥 풀어
계절의 푸른 문장이 숨결 속에 피고 있다
초량동, 시절
―시간 여행 4
중앙극장 뒷길 따라 명절 같은 장을 가면
골목 안 우물가에 대추나무 서 있는 집
-7-
보수동 책방골목
내 친구 눈 맑은 누이가 그린 듯이 살고 있지
별이 필 녘 돌아올 때 건네주던 봉지 안에
잘 영근 대추알은 뺨이 달은 너랑 닮아
봉긋한 수줍음 안고 달빛 속을 걸어온 길
입영 통지 날아온 날 우리 셋은 극장에서
무기여 잘 있거라, 그 시간에 젖었다가
손으로 햇살 가리고 가을 속을 걸어간 너…
초로에 든 옛 친구와 대추차를 하던 여일
누이는 전방부대 아들 면회 갔다 와선
비로소 그 가을을 딛고, 무기는 잘 있더라네
종이학 접기
―시간 여행 5
종이학 천 마리를 유리상자 고이 담아
내 가슴에 안겨주던 여학생이 걸어온다
초승달 그린 눈썹 아래 샛별 돋은 눈망울로…
그날 나는 제자 앞에 대쪽 깎은 말을 듣고
수공 시간 펼친 위에 입시 전황 비춰주자
천 마리 학이 되어서 세월 속을 날아간 꿈
빈 상자에 영원처럼 내 맘 속에 남은 얼굴
일천 번 손을 모아 첫정 빗던 푸른 밤들
내 오늘 노을 진 하늘에 그 순수로 시를 접다
제3부
백목련
우한폐렴 재앙에도 산과 물은 몸을 푼다
봄이 오는 기척을 가슴으로 먼저 듣고
겹겹이 여문 믿음에 눈시울이 환한 여인
철 이른 꽃바람이 시샘하여 스치던 밤
부대껴 흔들리며 사무치던 정염이사
아침 해 빛살을 받고 씻은 혼이 투명하다
전염병이 온 세상을 휩쓰는 난리 딛고
시원의 숨결 따라 하늘물레 짓더니만
-8-
보수동 책방골목
이 시절 하얀 마스크 맑은 실로 짜고 있다
해일 예감
귀 막고
색깔대로
파도 타고 노는 이들
이 한철을 지켜보며
머릿속이 하얘질 녘
해안선
멀어져간다
접은 날개
가다듬자
출근길에서
꽃눈이 몽우리 진 도심지 가로수길
유리창 진열대에 신상품이 나와 있다
산뜻한 색상과 디자인, 봄을 걸어 놓았다
그러나 봄은 아직 길목에서 서성이고
바람 냄새 맵싸하여 코끝이 빨간 아침
행인들 곤비한 삶에 좋은 소식 피어날까
온 나라가 코로나로 긴장을 증폭하고
이념으로 갈등 빚어 골이 깊은 정국인데
큰 그림 그린 치세로 봄옷 새로 입을 날은…
강변화랑
강촌 벌 신도시는 고층들로 조경되어
미루나무 강변길을 자전거가 달려가고
이 봄날 맑은 태양이 찌든 맘을 걷어주네
살진 강물 산을 품어 복사꽃잎 흐르는데
기차는 시간들이 휘는 경계 들어선 듯
시오리 화랑에 걸린 설화 속을 가고 있네
누가 이런 수채화를 그려내고 있는 걸까
인위와 무위가 한 화실에 동거하여
계절이 붓질한 문명도 초록 물로 생기 도네
-9-
보수동 책방골목
다시 구월에
외로운 늑대 같이 독이 오른 나날에도
구월은 어김없이 우리 곁에 다가와서
달 뜨는 맑은 밤이면 둥근 사랑 품자하네
너와 내가 선을 긋고 양립해서 날을 세워
분노 서린 흰 이빨을 드러낸 야성들이
적의를 뿜는 그 현장 달빛으로 물들이며…
물소리 시린 대밭 피리 하나 다듬어서
신명 든 구멍 뚫어 세상바람 갈앉히고
가을강 쪽빛 긴 한도 이 성률로 풀자하네
제4부
가을, 난제
꽃을 가만 두고 보며 향기를 읽어내듯
집착을 하지 않고 사랑할 수 있기까진
얼마나 영혼을 맑혀야 그런 마음 경계 들까
오늘도 생각 하나 산마루에 안고 서면
수평선 돛배 가듯 멀어가는 세월 곁에
흰 낮달 가녀린 미소가 손톱 밑에 아리누나
순례 길을 걸어가며 영성을 닦는 그대
도라지 꽃빛 같은 청초한 삶이지만
뒤태엔 보랏빛 슬픔이 묻어나는 이 가을
난향, 다시 읽기
―코로나19 봄날
봄을 잃은 빈자리에
난을 두고 피워낸 봄
내 마음 담뿍 주면
향기 풀어 정을 뿜네
유리잔
알칼리 이온수
머금은 듯 맑은 말로…
난향, 읽기
- 10 -
보수동 책방골목
느리게 숨을 쉬며
가을 난이 피고 있다
숨과 숨 행간으로
고요 속에 갈앉으면
저 은하
새벽 물소리
향낭 풀고 일어선다
풀꽃, 가을
밤마다 싸락별이
그리움을 떨군 걸까
방울종 소리 피는
색깔 맑은 풀꽃들이
해상도
높은 들녘에
고향처럼 손짓한다
홈커밍데이
가을 익자 연어처럼 그들이 돌아왔다
하늘은 층층 높아 물소리 서는 산협
그 배경 기운이 서린 요람으로 돌아왔다
희끗해진 세월 이고 추억 속을 찾은 오늘
중후한 풍모 속에 피어나는 동안들이
그날의 은어를 풀어 바랜 정을 색칠한다
생가지 회초리를 심어 가꾼 꿈나무들
성목으로 청청 자라 열매를 단 교정에는
갈바람 푸른 손질로 붉은 광택 뿜고 있다
제5부
향수
하늘에 뜬 별들도 저마다 외로워서
깊은 밤엔 그리움을 남 몰래 떨구더니
그 눈물 씨앗이 되어 풀꽃들이 피어났다
- 11 -
보수동 책방골목
풀꽃이 갈바람에 저리 마냥 흔들림은
제가 온 고향 하늘 그리운 몸짓이지
외로운 영혼들이 빚는 그리움의 빛과 향기
별꽃
눈물로도, 기도로도
회향할 수 없는 길목
그대로 순명해야
달빛 드는 생이 되어
너 가고
남은 이름이
내 맘 속에 별로 핀 것
상강 무렵
꽁지 긴 새 한 마리 감나무 가지 앉아
운수승 영혼인 양 송경하고 날아간 뒤
늦가을 잎 진 후원에 우물 빛이 깊어졌다
가을밤
고전 있는 서가에서 목월을 뽑아든 밤
기러기 울어 예는 달빛 물든 행간에는
자수정 맑은 슬픔이 영원처럼 서려 있다
가을 한 컷
우물처럼 눈빛 깊은 가을 여인 긴 머리채
소슬바람 불어들어 우수의 올을 날리며
가로수 낙엽 진 길로 액자 속을 걸어간다
그냥 보기 연습 2
―A는 본체, B는 현상일 때
A와 B 사이에 A´가 들어 있다
A´는 분명히 A가 아닌데도
자기가 주인 노릇하며 B를 보고 덧칠한다
- 12 -
보수동 책방골목
그래서 B는 항시 제 모습이 굴절된다
예를 들면 생화가 가화되는 순간이다
이 모든 허상을 만드는 A´는 범인이다
B를 바로 보는 방편은 안에 있어
A를 가로막은 A´를 제하는 일
만유는 A와 B가 독대할 때 선명하다
- 13 -
보수동 책방골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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