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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영화,리뷰,

부의 미술관

by Casey,Riley 2022. 6.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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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시오카 후미히코 지음 / 사람과나무사이
이 책은 ‘메디치 가문 지하 금융의 도움이 없었다면 르네상스도 없었을 것이라는 가정’에서부터
‘회화가 가진 강력한 프레젠테이션 기능을 간파하고 정치적 선전 도구로 활용한 나폴레옹 이야기’,
‘한때 잡동사니 취급받던 인상주의 회화의 가치를 알아보고 카브리올 레그와 금테 액자를 활용하
여 부르는 게 값인 ‘귀하신 몸’으로 둔갑시킨 폴 뒤랑뤼엘의 탁월한 마케팅 전략’ 등 자본주의를
태동시킨 8편의 욕망의 명화 이야기를 다룬다.

부의 미술관
니시오카 후미히코 지음

▣ 저자 니시오카 후미히코
1952년생. 다마미술대학교 교수이자 판화가. 1992년 간행한 『별책 다카라지마 회화 읽는 법』, 『명
화 수수께끼 풀이』로 열풍을 일으켜 대중에게 이름을 알렸다. 다수의 미술서와 미술 프로그램 제작ㆍ
기획에 참여했으며, UN 지구 서밋과 아이치 만국 박람회 기획에도 참여했다. 지은 책에 『피카소는 정
말로 대단한가?』, 『명화의 암호』 등이 있다.


▣ Short Summary
1517년에 시작된 마르틴 루터의 종교 개혁은 예술가들의 밥줄을 끊어 놓았다. 유럽 전역을 뒤덮은 종교
개혁의 거센 불길 속에서 프로테스탄트는 종교 미술을 성경이 금지하는 우상 숭배 행위로 규정하고 교
회를 장식한 회화와 조각을 무차별적으로 파괴했기 때문이었다. 특히 대표적인 프로테스탄트 국가였던
네덜란드에서는 그 정도가 한층 더 심해 예술가들은 절망했고 예술의 존립마저 위태로워 보였다.
그러나 잿더미가 된 땅에서도 새싹이 움트는 법이다. 종교 개혁의 여파로 초토화되다시피 한 17세기
네덜란드에 회화 열풍이 거세게 일어났다. 그 한 세기 동안 이 나라에서만 무려 600만 점에 달하는 엄
청난 양의 회화가 그려졌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17세기 네덜란드 미술은 ‘정물화’, ‘풍경화’와 같은 새
로운 예술 장르를 탄생시켰고, 요하네스 페르메이르, 렘브란트 반 레인 등의 걸출한 화가를 배출했다.
그리고 그 흐름은 훗날 위대한 화가 빈센트 반 고흐로 이어졌다.
네덜란드 미술계는 종교 개혁과 맞물려 벌어진 미증유의 위기를 어떻게 그토록 드라마틱한 기회로 바
꾸었을까? 여기에는 두 가지 비결이 있었다. 첫째, 교회ㆍ왕실 등 부와 권력을 손에 쥔 후원자의 주문
에 전적으로 의존하던 생산 시스템이 ‘기성품 전시 판매’ 방식으로 바뀐 덕분이었다. 이는 미술품의 주
요 소비층이 교황ㆍ왕을 비롯한 교회와 세속의 권력자에서 ‘일반 시민’으로 확산된 데 따른 현상이다.
둘째, 그림 소재가 과거의 성경이나 신화 이야기에서 일반 시민의 삶을 구성하는 구체적이고 생동감
넘치는 인물과 물건, 풍경 등으로 바뀐 덕분이었다. 이로써 페르메이르의 걸작 <우유를 따르는 여인>,
<진주 귀걸이를 한 소녀>처럼 당대 평범한 시민을 모델로 그린 작품과 일반 가정집을 장식하기에 좋
은 정물화ㆍ풍경화가 큰 인기를 누렸다.
모네의 <수련>, 르누아르의 <뱃놀이 친구들의 점심 식사>, 고흐의 <아를의 별이 빛나는 밤>은 오늘날
그야말로 천문학적인 가격에 거래되는 인상주의 회화를 대표하는 작품들이다. 이러한 인상주의 회화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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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의 미술관

처음 세상에 선보였을 때 ‘잡동사니’ 혹은 ‘불량품’ 취급을 받았다. 실제로 그런 연유에서 그림이 도무
지 팔리지 않아 먹고살 길이 막막해진 모네는 진지하게 자살을 생각할 정도였고, 고흐는 그림 한 점
제대로 팔지 못해 평생 궁핍하게 살다가 스스로 생을 마감했다.
그런 인상주의 회화는 어떻게 미술 시장에서 그야말로 부르는 게 값인 ‘귀하신 몸’이 되었을까? 이는
거의 전적으로 19세기 파리를 주름잡은 최고 미술상 폴 뒤랑뤼엘의 탁월한 안목과 혜안, 그리고 빛나
는 마케팅 전략 덕분이었다. 그는 프랑스 혁명 이후 구시대의 유물이 되어 버린 화려한 궁정 문화에
대한 일반 시민의 은밀한 욕구를 간파하고 궁정 문화의 상징처럼 여겨지는 ‘카브리올 레그’와 ‘금테 액
자’를 인상주의 회화의 전시와 홍보에 적극 활용했다. 뒤랑뤼엘은 여기에 더해 19세기 이후 ‘전 세계의
돈줄’이 된 미국인 부호들의 ‘귀족 콤플렉스’를 절묘하게 공략해 인상주의 회화를 최고가 미술품으로
둔갑시켰으며, 그 대가로 엄청난 부와 명예를 손에 넣었다.
이 책은 르네상스와 종교 개혁 이후 ‘자본주의를 태동시킨 욕망의 명화 이야기’로, 14~16세기 이후
600여 년간 유럽의 이탈리아와 프랑스, 그리고 네덜란드를 중심으로 전개된 미술사와 문화사의 중심
부를 관통하는 8편의 이야기를 소개한다. ‘<우유를 따르는 여인>이 페르메이르 집안의 3년 치 빵값으
로 팔려 빵집 광고로 활용됐다는데?’, ‘레오나르도 다빈치와 미켈란젤로는 왜 정물화와 풍경화를 한 점
도 그리지 않았을까?’, ‘렘브란트는 왜 자기 그림을 모사하는 가짜 그림을 적극적으로 양산했을까?’, ‘다
빈치의 <최후의 만찬>이 <모나리자>와 달리 유네스코 지정 세계 문화유산으로 등록된 이유는 부동산
이기 때문이다?’, ‘메디치 가문 지하 금융의 도움이 없었다면 르네상스도 없었다?’, ‘피카소가 끊임없이
파격적인 기법을 탐구하고 창조한 이유가 사진의 등장으로 화가의 밥줄이 끊어질지 모른다는 염려 때
문이었다고?’, ‘기성 작품 판매 전략에서 비평을 통한 브랜드화가 필수 요소일 수밖에 없는 까닭은?’
등. 이들 이야기 속에는 흥미진진하면서도 지적 호기심을 자극하는 내용이 가득해 미술사에 관한 ‘지
적 호기심’을 충족하게 될 것이다.
▣ 차례
서문_ 인간의 욕망과 뒤얽힌 명화는 어떻게 부를 창조하고 역사를 발전시켰나?
제1장_ 빵집 광고로 활용된 페르메이르 그림 〈우유를 따르는 여인〉
제2장_ 천재 중의 천재 다빈치가 경제적으로 궁핍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
제3장_ 렘브란트는 왜 자기 그림을 모사하는 ‘가짜 그림’을 양산했나
제4장_ 메디치 가문 지하 금융의 도움이 없었다면 르네상스도 없었다?
제5장_ ‘신의 길드’와 ‘왕의 아카데미’가 날카롭게 대립하던 시대
제6장_ 미술의 ‘프레젠테이션 기능’을 영리하게 활용한 인물, 나폴레옹
제7장_ 폴 뒤랑뤼엘은 어떻게 ‘잡동사니’ 취급받던 인상주의 회화에 가치를 불어넣었나
제8장_ ‘비평을 통한 브랜드화’가 예술의 가치를 좌우하던 시대
후기_ 인간의 욕망은 미술사와 세계사를 움직이는 원동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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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의 미술관

부의 미술관
니시오카 후미히코 지음

빵집 광고로 활용된 페르메이르의 <우유를 따르는 여인>
마르틴 루터의 종교 개혁은 왜 16세기 유럽 예술가들의 밥줄을 끊어 놓았나
16세기 종교 개혁으로 유럽 미술사는 그 이전에는 경험하지 못한 심각한 위기를 맞이했다. 이유는 뭘
까? 프로테스탄트는 성경의 가르침에 따라 우상 숭배를 엄격히 금지하고 교회를 장식하는 회화와 조각
등을 무차별적으로 파괴했다. 그런 살벌한 분위기가 이어지자 예술가들이 몸을 사리며 새로운 작품 제
작에 극도로 신중을 기하는 분위기가 형성되었다. 미술계의 큰손이자 든든한 후원자였던 교회에서 들어
오는 주문이 딱 끊기자 예술가들은 글자 그대로 ‘밥줄이 끊기는’ 절체절명의 위기에 맞닥뜨렸다.
그러나 위기라는 씨앗 안에 새로운 기회의 싹이 숨어 있다고 하지 않던가! 놀랍게도 이후 17세기 네덜
란드에서 회화 열풍이 거세게 일어났다. 한 세기 동안 이 나라에서만 무려 600만 점에 달하는 엄청난
양의 회화가 그려졌으니 과연 ‘열풍’이라 할 만했다. 어떻게 그런 기적 같은 일이 가능했을까? 그것은
미술계가 위기를 기회로 바꾸고 새로운 가능성을 현실화하는 데 성공한 덕분이었다. 그로 인해 17세기
네덜란드에서 미증유의 회화 열풍이 불게 된 것이다. 지금은 회화의 대명사가 된 정물화와 풍경화는
바로 이 시기 네덜란드의 평범한 시민이 주도한 회화 시장에서 독립 장르로 탄생했다. 대표적으로 네
덜란드 화가 요하네스 페르메이르가 그린 <우유를 따르는 여인>과 <진주 귀걸이를 한 소녀>는 이러한
새로운 미술 마케팅의 생생한 목격자이자 시금석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 시작은 1517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독일 수도사 마르틴 루터가 작센의 소도시 비텐베르크의 교
회 문에 95개 조에 달하는 반박문을 정리한 벽보를 붙여 로마 교황청의 부패한 실태를 고발한 역사적
사건이 바로 그때 있었다. 이 사건은 훗날 ‘종교 개혁’이라는 이름으로 불린 일련의 움직임에 불을 붙
이는 부싯돌 역할을 했다. 종교 개혁 운동으로 유럽의 기독교는 신교인 프로테스탄트와 구교인 가톨릭
으로 양분되었고 유럽 전역에서 피어오른 종교 개혁의 불길이 갈수록 뜨거워졌다. 이 과정에서 프로테
스탄트는 종교 미술을 성경이 엄격히 금지하는 우상 숭배 행위로 규정하고 교회를 장식한 회화와 조각
을 무차별적으로 파괴하기 시작했다.
이때 프로테스탄트가 근거로 삼은 것은 무엇이었을까? 『구약 성경』에 나오는 모세의 「십계명」이 바
로 그것이다. 「십계명」은 『신약 성경』의 「산상 수훈」과 함께 기독교의 기본 가르침을 설파하는 내
용을 담고 있는데 “살인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 “도둑질하지 말라.” 등의 율법이 널리 알려져 있
다. 그런데 “너는 나 이외에 다른 신들을 네게 두지 말라.”라는 두 번째 계명이 우상 숭배를 금하는 내
용이라는 사실은 상대적으로 잘 알려지지 않았다. 이 두 번째 계명은 다음과 같이 이어진다. “너를 위
하여 새긴 우상을 만들지 말고, 또 위로 하늘에 있는 것이나 아래로 땅에 있는 것이나 땅 아래 물속에
있는 것의 어떤 형상도 만들지 말며, 그것들에 절하지 말며, 그것들을 섬기지 말라.”
애초에 마르틴 루터가 95개 반박문을 교회 문에 붙이며 로마 교황청을 고발한 진짜 이유도 사실 이 문
제에서 기인했다고 할 수 있다. 즉, 루터는 당시 화려한 그림과 호화로운 조각으로 장식해 우상의 소
굴이 돼 버린 로마 교황청이 가톨릭교회의 개보수 자금을 마련하는 방편으로 신도의 죄를 사해 주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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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의 미술관

면죄부를 판매하는 참담한 상황에 정면으로 이의를 제기한 것이었다. 이렇듯 “성경의 정신으로 돌아가
자.”라는 모토를 내건 당대 프로테스탄트는 교회를 장식한 제단화와 조각상을 성경 계명에 어긋나는
죄악의 상징으로 여겼다. 종교 개혁 운동과 함께 독일에서 불씨가 지펴지기 시작한 교회 미술 파괴 운
동은 거대한 불길이 되어 유럽 전역으로 퍼져 나갔다.
‘우상 숭배’라는 죄목으로 교회 미술을 강하게 탄압한 네덜란드에서 근대 시민 회화가 화려하게 꽃피다
그러나 종교 개혁의 불씨를 지핀 마르틴 루터는 미술에 대해 관대한 편이었다. 실제로 그는 회화와 조
각이 오히려 기독교 교리를 전파하는 데 도움 되는 부분이 있다고 인정했다. 하지만 루터의 뒤를 이은
프로테스탄트 지도자들 중에는 교회에서 온갖 미술품을 단호히 거부하고 몰아내야 한다고 주장하는 이
가 많았다. 그중에서도 구교도를 망설임 없이 화형대에 세우는 등 냉혹하리만치 엄격한 신권 정치가로
알려진 장 칼뱅은 교회 미술을 철저히 배격하고 파괴해야 한다고 부르짖었다.
프랑스에서 태어난 장 칼뱅은 루터 사상의 열렬한 신봉자였다. 그는 개혁파에 대한 탄압이 갈수록 거
세지는 고국 프랑스를 떠나 스위스로 망명했고 이후 그곳에서 프로테스탄트를 대표하는 논객으로 자리
매김했다. 칼뱅은 “나무와 돌 등을 깎아 만든 상을 하나님이나 성인으로 보이게 만드는 우상이 인간의
감각을 현혹하고 마비시켜 주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지 못하게 한다.”라며 강력히 규탄했다. 또한 칼
뱅은 불순한 제단화와 조각상을 완벽하게 처분한 ‘순수한’ 교회만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에 적합한 장
소라고 주장했다. 그리고 그의 주장에 따라 프로테스탄트 교회는 철저한 ‘교회 정화’ 운동에 착수했으
며 제단화와 조각상을 찾아내 집요하게 파괴했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십계명」을 가장 엄격히 지킨 대표적 프로테스탄트 국가 네덜란드에서 렘브란
트와 페르메이르라는 시대를 대표하는 거장을 시작으로 오늘날까지 최고 인기를 구가하는 인상주의 화
가 고흐, 추상 회화의 시조이자 최고봉으로 꼽히는 몬드리안 등 전 세계적 명성을 떨친 예술가들이 줄
줄이 등장했다. 실로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위기가 기회가 될 수 있다’라는 가르침을 이보다 더
명징하게 보여 주는 역사적 사례도 드물지 않을까.

천재 중의 천재 다빈치가 경제적으로 궁핍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
다빈치의 <최후의 만찬>이 <모나리자>와 달리 유네스코 지정 세계 문화유산으로 등록된 이유
1796년 밀라노를 침공한 나폴레옹은 서둘러 산타 마리아 델레 그라치에 성당을 찾아갔다. 그는 왜 만
사를 제쳐 놓고 이 성당부터 찾았을까? 그것은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그린 그림 <최후의 만찬>을 자신
의 눈으로 직접 보기 위해서였다고 한다. 나폴레옹은 델레 그라치에 성당 식당 벽에 그려진 벽화를 프
랑스로 가져갈 궁리를 진지하게 했다. 하지만 작품이 그려진 거대한 벽의 무게를 고려하면 애초 불가
능에 가까운 일이었다. 회화가 벽화나 천장화로 교회나 궁전 등 건축물의 일부로 존재했을 때 사람들
은 오로지 그 회화가 존재하는 공간에서만 그림을 제대로 감상할 수 있었다.
<최후의 만찬>은 작품의 ‘부동성’을 인정받아 회화로서는 매우 드물게 유네스코 지정 세계 문화유산으
로 등록되었다. 1980년의 일이다. 반면 목판에 그려진 ‘동산’인 <모나리자>는 <최후의 만찬>보다 훨씬
많은 관람자를 루브르 미술관으로 불러 모으고 있으나 세계 문화유산으로 인정받지 못했다. 유네스코
가 정한 세계 문화유산 등록 기준과 인정 대상이 ‘부동산’으로 제한되어 있기 때문이다. 사실 회화가
시장에서 사고파는 상품이 되기 위해서는 ‘동산화’가 필수 전제다. 부동산인 벽화와 천장화는 세계 문
화유산으로 등록될 수 있으나 동산인 회화는 개인 자산이기에 등록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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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의 미술관

회화가 동산이 되도록 촉진한 것은 바로 르네상스 중기에 등장한 ‘캔버스’다. 배의 돛과 깃발에 쓰이던
직물을 활용한 캔버스는 그 무렵 급속히 부상하던 유화의 가장 적합한 밑바탕이 되어 주었다. 화폭이
커지더라도 둘둘 말아서 운반할 수 있는 편리성도 한몫한 덕분에 캔버스는 매우 빠르게 보급되어 기존
의 벽화, 천장화, 제단화에는 존재하지 않던 상품으로서의 유동성을 회화에 부여했다.
보티첼리가 비너스를 주제로 그린 두 점의 유명한 작품이 있다. <봄>과 <비너스의 탄생>이다. 이 중 <
봄>은 목판에 그려진 데 반해 <비너스의 탄생>은 캔버스에 그려졌다. 두 작품의 공통점은 달걀노른자
로 안료를 녹인 물감인 템페라로 그려졌다는 점이다. 그 무렵 템페라를 대신해 급속히 보급된 기법이
바로 ‘유화’다. 네덜란드에서 탄생한 유화는 템페라보다 훨씬 풍부한 색채와 음영을 표현할 수 있었다.
그 덕분에 사실주의 묘사 기법이 비약적으로 발전했으며 유화의 밑바탕으로 적합한 재질이던 캔버스도
매우 빠르게 보급되기 시작했다.
캔버스의 등장은 회화라는 예술의 존재 양식을 근본부터 뒤바꿔 놓는 일대 사건이었다. 그도 그럴 것
이 목제 틀에 못을 박아 고정하기만 하면 바로 그림을 그릴 수 있는 장점이 있기 때문이었다. 또한 캔
버스는 무게가 가벼워 대형 작품도 둘둘 말아서 운반할 수 있는 이점이 있다. 이런 장점 덕분에 캔버
스는 회화라는 형식의 예술에 ‘그리는 공간’과 ‘장식하는 공간’을 가리지 않는 획기적인 유동성과 기동
성을 갖게 해 주었다.
기존의 목판은 어느 정도 이상 크기의 그림을 그리려면 제작과 관리가 까다로워 적지 않은 수고를 감
수해야 했다. 실제로 보티첼리의 그림 <봄>도 세로로 긴 포플러 판자 여덟 개를 옆으로 연결한 패널에
전나무 목재 두 개를 가로질러 접착해 강도를 보강했다. 온도와 습도 차이에 따라 휘거나 갈라지는 현
상을 방지하기 위한 처리로, 목재 접착에는 석탄과 치즈를 혼합해 강력 접착제와 함께 서른 개가량의
금속 재질 보강 장치를 사용했다. 두께도 3센티미터 정도로 두툼하고 무게는 캔버스에 그린 <비너스의
탄생>보다 훨씬 무겁다. 목재라서 충해에도 약한 <봄> 패널을 복원 검사하던 중 나무를 갉아 먹은, 미
라가 된 벌레가 발견되기도 했다.
이처럼 목판에 그려진 제단화와 교회·궁전의 벽화, 천장화가 특정 건축에 부속되는 형태로 보여지는
데 반해 캔버스에 그려진 회화는 자유롭게 옮길 수 있어 소유자가 좋아하는 공간을 장식할 수 있는 고
급 소비재로 거듭날 수 있었다. 르네상스에 뒤이은 바로크 시대에 네덜란드에서 시민 회화가 폭발적으
로 꽃핀 것도 캔버스가 도입되면서 그림에 본격적으로 ‘동산성’이 부여되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이러한 회화의 ‘동산성’은 화가의 작업 방식을 근본부터 바꾸어 놓았다. 그도 그럴 것이 벽화와 천장화
는 화가가 그곳에 가서 그려야 하지만 동산인 회화는 화가가 자기 집이나 작업실에서 그릴 수 있기 때
문이었다.
불후의 명작으로 남은 <최후의 만찬>이 당대에는 실패한 회화로 간주될 수밖에 없었던 이유
<최후의 만찬>이 완성된 직후 밀라노를 침공한 프랑스 국왕 루이 12세 역시 후대의 나폴레옹과 마찬
가지로 수도원을 통째로 부수고 벽화를 들어내서라도 <최후의 만찬>을 프랑스로 가져가고 싶어 했다.
그러나 아무리 절대 권력을 가졌더라도 벽화를 마치 휴대 가능한 미술품처럼 가져간다는 것은 기술적
인 차원에서 불가능한 일이었다. 말하자면 벽화를 떼어 내 온전히 소유한다는 것은 당시 기술 수준으
로는 그야말로 그림의 떡이었다. 벽화는 건축물이 파괴되면 그 건축물과 운명을 함께할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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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의 미술관

반면 캔버스에 그려진 동산 회화는 피난길에 가져갈 수 있다. 실제로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수많은 명
화가 방공호와 지하 수장고로 옮겨졌는데, <최후의 만찬>은 이동할 수 없는 작품이었기에 수도원과 함
께 연합군의 폭격으로 인한 엄청난 충격을 고스란히 견뎌 내야 했다. 무참히 파괴된 수도원 잔해 속에
이 벽화만 남아 고고한 자태를 뽐내는 당시 사진을 보고 있노라면 기독교 신자가 아니라도 마치 기적
의 순간을 생생히 목격한 것 같은 감격을 느끼게 된다.
동산 회화, 부동산 회화 모두 일장일단이 있다. 좋든 나쁘든 프레스코(회반죽 벽에 그리는 벽화 기법)
는 부동산 회화인 벽화에 가장 적합한 기법이었다. 게다가 다빈치가 질색하던 투박한 붓질도 벽화와
천장화를 감상할 관람객과의 거리를 고려하면 오히려 투박한 터치가 대담하고 시원시원하게 느껴지는
효과를 기대할 수 있다. 미켈란젤로가 <천지창조>를 그린 시스티나 예배당의 천장 높이는 20미터가
넘는다. 그런 터라 이 작품을 마주하는 사람은 가장 짧게 잡아도 20미터 이상 떨어진 거리에서 그림을
볼 수밖에 없다. 이 거리는 물리적으로 더는 좁혀질 수 없다. 시스티나 예배당 정면 제단에 그려진 <
최후의 심판>도 최소 6미터는 떨어진 지점에서 감상하게 된다. 프레스코는 이렇게 어느 정도 떨어진
거리에서 감상한다는 점을 전제로 그려졌기에 섬세한 묘사보다는 전체적인 조형미와 균형감을 잘 살려
야 웅장한 느낌을 제대로 담아낼 수 있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캔버스에 유화 물감으로 그리는 작품의 경우 몇 밀리미터의 근거리에서 감상하는
상황까지 고려해야 한다. 프레스코가 공공 공간에서 일정한 거리를 두고 감상하게 되는 부동산 회화에
적합한 기법이라면 유화는 사적 공간에서 감상하게 되는 동산 회화에 적합한 기법으로 가까이에서 감
상해도 실망하지 않을 만큼 정밀한 묘사가 요구되었다. 다빈치가 <최후의 만찬>에서 범한 뼈아픈 실
패 원인은 동산 회화에 필요한 정밀 묘사를 부동산 회화인 벽화에서 추구한 데 있었다.

메디치 가문 지하 금융의 도움이 없었다면 르네상스도 없었다?
메디치 은행을 유럽 최고 은행으로 키운 뛰어난 경영자 코시모 데 메디치가 교회와 예술 후원에 그토
록 열성적이었던 숨은 이유
오늘날 ‘예술 후원’의 좋은 본보기처럼 받아들여지는 메디치 가문은 알고 보면 오히려 예술에 의해 보
호받은, 즉 예술을 매우 유용한 보호막으로 활용한 영리한 가문이다. 피렌체 서적상 베스파시아노 다
비스티치는 자신이 거래하던 메디치가에 관한 전기를 남겼다. 여기에 소개하는 에피소드는 그 책에 나
오는 내용이다.
로마 교황 에우게니우스 4세가 피렌체를 방문했을 때의 일이다. 메디치가의 주요 인물로 메디치 가문
이 세운 은행을 유럽 최고의 대은행으로 키운 뛰어난 경영자 코시모 데 메디치는 마음의 안식을 얻으
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교황에게 조언을 구했다. 코시모는 왜 교황에게 그런 조언을 구했을까? 자신
이 저지른 ‘불미스러운’ 행실로 인한 양심의 가책으로 마음이 말할 수 없이 괴로웠기 때문이다. 코시모
가 저지른 ‘불미스러운 행실’이란 뭘까? 그것은 흔히 생각하기 쉬운 성적 타락, 문란한 취미나 행위가
아니라 메디치 가문의 생업이던 금융 사업상의 부도덕함을 말한다. 당시 기독교가 금지한 이자 징수,
즉 금융업으로 막대한 부를 축적한 코시모는 교황을 알현해 죄를 사면받고자 했다.
코시모가 그 일로 오래도록 번민하고 어떻게든 사면을 받고자 애쓴 데는 그럴 만한 사정이 있었다. 당
시 금융업자는 사망한 후에도 교회 묘지에 매장되지 못했기 때문이다. 교회는 불경죄를 저지른 금융업
자의 장례 미사를 거부했으며, 유해도 마치 동물의 그것처럼 취급하는 등, 오늘날에는 상상도 할 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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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의 미술관

없을 만큼 부당하게 대우했다. 실제로 금융업자 중에는 민중의 집단 공격을 받아 살해당한 뒤 아무도
유해를 수습하지 않아 들짐승의 먹이가 되는 비참한 운명에 처한 자도 있었다. 또 사후에 묘가 파헤쳐
지고 교수형에 처해진 후 강에 폐기되는 끔찍한 일을 당한 금융업자도 있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교회 미사에서 ‘금융업은 저주받은 직업이다.’라는 메시지가 성직자의 입을 통해
자주 화제에 올랐다. 그리고 세상을 떠난 금융업자의 장례식 날 밤 지옥의 악마들이 그를 마중 나왔다
는 이야기, 죽어서도 영혼의 안식을 얻지 못한 채 망령이 되어 이승을 떠돈다는 이야기 등이 반복적으
로 전해지고 확대 재생산되며 금융업자의 부도덕성을 민중의 뇌리에 각인시켰다. 성직자 중에는 당시
창궐한 페스트를 금융업자에게 내리는 천벌이라고 주장하는 사람까지 있었다. 그 시대 금융업자의 삶
은 여러모로 서글프고 고달플 수밖에 없었다. 살아서는 삿대질과 조롱, 돌팔매질을 당하며 생지옥에
살고 죽어서는 지옥행이 예약돼 있는, 안식을 얻을 수 없는 가련한 영혼이었다고나 할까.
르네상스 문학의 효시로 인정받는 『신곡』은 시인 단테가 지옥과 천국을 순회하는 대서사시다. 이 작
품 속에서 금융업자는 지옥의 불꽃에 영원히 태워지는 것으로 묘사된다. 르네상스 문학의 또 다른 대
표작 중 하나인 보카치오의『데카메론』은 페스트가 창궐한 피렌체 교외의 별장에서 열 명의 남녀가 서
로 나눈 여러 편의 이야기를 갈무리한 모음집이다. 단테의 작품이 ‘신곡’이라면 인간의 생생한 삶을 주
로 다룬 『데카메론』은 ‘인곡’이라 할 만하다. 이 책에서 작가는 보복 폭행을 두려워하는 금융업자의 이
야기로 시작해 이야기를 풀어 나간다. 이 내용을 통해서도 우리는 당시 금융업이 그야말로 ‘금단의 직
업’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금융업으로 막대한 재산을 일군 메디치 가문의 수장 코시모가 로마 교황 에우게니우스 4세에게 죄 사
함을 받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조언을 구한 것도 그런 맥락에서였다. 교황은 코시모에게 어떤 조
언을 해 주었을까? 교황은 코시모에게 12세기에 세워진 피렌체의 산마르코 수도원 재건을 위해 거액
의 현금을 내고 수도원 유지비에서 수도사들의 생활비에 이르기까지 모든 비용을 부담하게 했다. 그리
고 그 밖에 로마 교황청에도 엄청난 금액의 기부금을 헌납하도록 했다.
코시모 데 메디치는 세상을 떠난 후 피렌체 정부에서 ‘조국의 아버지’로 불렸으며, 타고난 정치적 수완
가로 실질적인 피렌체 군주이자 덕망 높은 경영인으로 이름이 높았다. 하지만 그는 살아생전 ‘불미스
러운 일’로 성공을 거둔 자신의 인생을 오랫동안 자책했다고 한다. 그런 터라 그가 ‘교회와 예술의 후
원자’를 자처한 것도 당대인에게 매우 실용적인 목적이던 ‘신앙’에서 비롯된 행위였다고 볼 수 있다.
또한 당시 사회 상황을 고려할 때 코시모는 자신이 가진 막대한 재력을 동원해 일종의 ‘종교적 보험’을
듦으로써 메디치 가문을 보호할 수 있었던 셈이다.

미술의 ‘프레젠테이션 기능’을 영리하게 활용한 인물, 나폴레옹
히틀러를 거쳐 현대 광고 기법으로 이어진 나폴레옹의 이미지 전략
나폴레옹 보나파르트. 그는 미술이 지닌 프레젠테이션 기능을 가장 적극적으로 활용한 근대 황제로 알
려져 있다. 나폴레옹은 프랑스 수도 파리를 고대 로마와 같은 제국의 수도로 만들겠다는 야심만만한
꿈을 오랫동안 꾸었다. 그런 터라 그는 개선문과 오벨리스크 등 로마 분위기를 물씬 풍기는 기념 건축
물을 파리 시내 곳곳에 배치해 근대 제국의 수도 파리의 위엄과 영광을 대내외에 과시했다.
뛰어난 통찰력을 지닌 리더였던 나폴레옹은 미술이 대중에게 미치는 영향력을 정확히 간파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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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의 미술관

요즘식으로 말하면 그는 ‘인스타 셀카 장인’이라고나 할까. 따지고 보면 그는 SNS라는 서비스에 꼭 맞
는 시각 연출 전략을 디지털 시대가 오기 전에 이미 실현한, 시대를 앞서간 인물이었다. 나폴레옹의
프레젠테이션 능력은 건축, 회화, 조각, 인테리어, 보석, 패션 등 여러 영역을 넘나들었다. 그는 고대
유물에서 발굴한 것으로 보이는 고전적인 기념 메달을 만들고, 신문 보도를 통제하는 등 광범위하고도
정교한 미디어 관리와 홍보 전략으로 자신의 영웅적 이미지를 대대적으로 선전했다.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히틀러가 이끄는 나치스 독일은 군복에서 건축까지 고대 로마 제국을 철저히 모방해 카리스마 넘
치는 디자인으로 통일함으로써 대중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히틀러는 나폴레옹 전략을 계승했으며, 현
대의 광고 기법은 이러한 나폴레옹의 이미지 전략을 원형으로 확립되었다.
그뿐이 아니다. 현대 미국 대통령 관저인 백악관이 고대 신전 콘셉트로 지어진 배경에도 나폴레옹이
자리하고 있다. 또한 미국의 수도 워싱턴 중심부에 우뚝 서 있는 기념탑이 미국사와 무관한 이집트의
오벨리스크를 본뜬 데에도 나폴레옹에서 시작된 근대의 고대 제국 부활 움직임을 계승하고자 하는 의
지가 잘 반영되어 있다. 그러고 보면 나폴레옹, 히틀러, 그리고 미국의 대통령들……. 권력의 정점에
오르는 사람은 누구나 ‘모든 길은 로마로 통한다’고 믿는 모양이다.
1793년 프랑스 왕당파의 반란군이 농성 중이던 항만 도시 툴롱으로 군대가 파견되어 전투가 벌어졌다.
이른바 ‘툴롱 포위전’으로 알려진 사건이다. 이 일을 계기로 권력으로 향하는 초고속 엘리베이터에 오
른 인물이 있다. 바로 코르시카섬 출신 포병 장교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였다. 나폴레옹은 기존의 충돌
전법을 답습하지 않고 고지에서 대포로 적을 공격하는 근대적인 전술의 가치를 최초로 증명한 탁월한
전략가였다. 그러한 점을 인정받으며 폭넓은 지지를 얻은 나폴레옹은 스물네 살 젊은 나이에 소장으로
초고속 승진했다. 이러한 능력 위주 인재 발탁은 프랑스 혁명에서 등장한 국민 징병제가 그 바탕이 되
었다. 그 덕분에 귀족 자제에게 특혜를 주던 혁명 이전의 장교 인사는 프랑스 혁명으로 인해 군대에서
급속히 자취를 감추었다.
그로부터 3년 후 나폴레옹군은 오스트리아군과의 전투에서 승리를 거두었고 군대 내에서 나폴레옹의
입지는 더욱더 탄탄해졌다. 이때 나폴레옹은 미술이 총 못지않게 강력한 ‘무기’가 될 수 있음을 간파했
다. 그랬기에 그는 이탈리아 북부에 드넓은 프랑스 영토를 획득하게 된 이탈리아 원정 당시 종군 화가
를 대동했다. 원정에 앞서 나폴레옹은 프랑스 화단의 거장 자크 루이 다비드에게 종군 화가 보직을 제
안했다. 그러나 다비드는 고령을 이유로 거절했고, 대신 그의 제자 앙투안 장 그로가 종군 화가가 되
었다. 그때까지 왕이 종군 화가를 대동한 사례는 있었으나 당시 나폴레옹처럼 일개 장군이 화가를 대
동한 사례는 없었다.
국민 행복을 위해 분투하는 나폴레옹의 이미지를 효과적으로 홍보하는 데 성공한 다비드의 그림 <튀
일리궁 서재의 나폴레옹>
자크 루이 다비드가 그린 <튀일리궁 서재의 나폴레옹>은 국민 행복을 위해 분투하는 나폴레옹의 이미
지를 대중에게 널리 홍보하기 위한 용도로 계획된 작품이다. 동트기 전 어슴푸레한 새벽녘 튀일리궁
서재에서 『나폴레옹 법전』을 탈고한 뒤 살짝 지친 모습으로 비스듬하게 서 있는 나폴레옹은 위풍당당
한 황제라기보다는 자연인에 가까운 모습으로 그려졌다.
『나폴레옹 법전』은 여러 번 개정이 이루어지며 현행 프랑스 법전으로 완성되었다. 법 앞의 평등, 개
인의 자유, 종교의 자유, 개인 소유권의 불가침 등을 기본 원칙으로 삼아 만들어진 이 법전은 다른 나
라의 민법 제정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나폴레옹 법전』은 기원전 18세기 고대 메소포타미아에서 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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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의 미술관

들어진 『함무라비 법전』, 6세기 동로마 제국 황제 유스티니아누스가 편찬한 로마법 대전인『유스티니
아누스 법전』과 더불어 세계 3대 법전으로 인정받는다.
그림에는 법안을 막 탈고한 듯한 모습으로 서 있는 나폴레옹이 등장하는데, 그의 뒤로 보이는 배경 속
시계의 시곗바늘은 새벽 네 시를 지나고 있다. 가물가물 꺼질 듯한 촛불이 나폴레옹이 꽤 오랜 시간
동안 작업했음을 암시한다. 나폴레옹의 위대한 업적을 후세에 전하는 의미에서는 옆얼굴이 나았을 수
도 있겠으나 화가는 약간 비스듬한 자세를 선택했다. 어떤 의도에서 이런 구도를 택했을까? 시민의 행
복을 위한 법전 기초 다지기에 전념하는 황제의 모습을 보여 주고 친밀한 이미지를 연출하는 데 이런
구도가 적합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으로 보인다.
흔히 ‘나폴레옹 법전’이라고 부르는 프랑스 민법전은 봉건 사회에서는 보장되지 않았던 사유 재산 소유
권을 명기한 대목에서 역사적 의의를 찾을 수 있다. 재산권은 봉건 귀족을 대신해 시민 계급이 된 부
유한 부르주아 계층의 지지를 얻기 위한 필수적인 제도였다. 사유 재산 소유권을 비롯한 관련 법안은
경작지를 매개로 한 봉건제의 자의적인 착취에서 해방하는 형태를 표방해 제정되었다. 그러나 그 이상
으로 징병제의 기반인 애국심 고취에 필수적인 법 정비 과정이었다는 의미가 있다. 징병제는 국민이
직접 군인이 되어 목숨을 걸고 국가를 지키기 위한 취지로 제정한 제도다.
이런 취지의 징병제가 성립하기 위해서는 국민이 국가를 ‘조국’으로 인식하는 마음가짐이 필수이며 사
적 재산 소유권은 그 절대적인 전제 사항이었기 때문이다. ‘조국’이라는 새로운 국가 개념은 절대적 불
가침 영역인 사유 재산을 양식으로 삼아 사생활의 연장선에서만 성립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징병제
가 제대로 기능하려면 국민이 군인으로 목숨을 걸 정도의 애국심을 고취하는 과정이 필수적이었다. 사
실 이러한 이미지 창출에서 미술만큼 효과적인 프레젠테이션 장치도 없었다. 나폴레옹이 프랑스 미술
의 우위성을 유지한다는 명목으로 예술계에 전폭적인 지원을 아끼지 않던 것도 그 때문이다.

폴 뒤랑뤼엘은 어떻게 ‘잡동사니’ 취급받던 인상주의 회화에 가치를 불어넣었나
폴 뒤랑뤼엘이 인상주의 회화의 가치를 높이기 위해 사용한 두 가지 비밀 무기, ‘카브리올 레그’와 ‘금
테 액자’
고풍스러운 유럽풍 앤티크 가구에 관심이 있는 독자라면 한 번쯤 귀동냥이라도 했을 용어가 있다. 바
로 ‘카브리올 레그’다. 카브리올 레그는 프랑스 루이 15세 시대 궁정 양식을 대표하는 디자인이다. 이
는 다리가 우아한 S자 곡선을 그리는 화려한 가구다. 대다수 사람은 ‘카브리올 레그’라는 용어는 생소
해도 카페나 백화점 등 어디에선가 한 번쯤 본 적이 있는, 꽤 눈에 익은 디자인이다.
사실 인상주의 그림은 등장 초기에만 해도 전위 예술의 일종으로 ‘잡동사니’ 혹은 ‘불량품’ 취급을 받았
다. 그런데 천덕꾸러기 신세였던 인상주의 그림이 어떻게 부르는 게 값인 고가 상품으로 변신했을까?
그것은 바로 폴 뒤랑뤼엘이라는 천재 미술상이 사용한 두 가지 비밀 무기, 바로 ‘카브리올 레그’와 ‘금
테 액자’ 덕분이었다. 카브리올 레그와 금테 액자를 동원한 뒤랑뤼엘의 판매 전략이 멋지게 효과를 발
휘하며 인상주의 그림은 거저 주어도 가져가지 않던 잡동사니에서 명품으로 거듭났다.
그 덕분에 지금까지 화려한 가구와 인상주의 그림은 인테리어를 완성하는 세트 상품처럼 활용돼 왔다.
지금도 유명 호텔 로비나 유럽풍 고급스러운 분위기를 연출하는 카페나 레스토랑에 가면 금테 액자를
두른 인상주의 복제화와 화려한 가구가 어우러진 인테리어를 볼 수 있다. 그러나 사실 화려한 궁정 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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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의 미술관

구와 금테 액자는 프랑스 왕실 미술을 상징하는 도구였으며, 인상주의 회화는 그 왕실을 타도한 프랑
스 혁명 이후의 시민 사회에서조차 푸대접받은 잡동사니 전위 예술로 여겨졌다. 그랬기에 이 둘은 너
무도 어울리지 않는 한 쌍이었다.
이 거슬리는 조합을 역이용한 마케팅 천재가 바로 19세기 파리를 주름잡은 미술상 폴 뒤랑뤼엘이다.
그는 마네, 드가, 모네, 르누아르 등의 인상주의 화가를 길러 낸 탁월한 안목을 가진 사람이었다. 그의
탁월한 마케팅 전략 덕분에 팔리지 않던 인상주의 작품이 초고가 상품으로 변신했고, 경매에서 천문학
적 액수로 날개 돋친 듯 팔려 나가 거품 시장을 형성할 정도로 몸값이 높아지기도 했다.
폴 뒤랑뤼엘이 본격적으로 판매에 착수하던 시점에 인상주의 작품은 사람들의 이해를 넘어선 전위 예
술로 푸대접받았다. 당시 프랑스 유력 일간지 《피가로》는 인상주의 그림을 고양이가 앞발로 괴발개발
그린 낙서라고 빈정댈 정도였다. 인상주의 그림의 시장 가치는 형편없었고 공짜로 주면 불쏘시개로나
쓸까 돈을 내고 가져갈 사람이 거의 없을 정도로 인기 없는 회화였다.
오늘날에는 인상주의 그림의 경쾌한 붓놀림과 밝은 색채가 널리 사랑받지만 당시 사람들은 사진처럼
사실적인 그림을 훨씬 선호했다. 사물과 사실을 정확히 묘사하고 붓 자국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공들
인 완성도를 인정받아야만 비로소 작품 대접을 받을 수 있었다. 붓 자국이 선명하게 보이는 인상주의
그림은 회화의 기본도 모르는 어설픈 초보 예술가들이 끄적인 낙서나 다름없다는 평가를 받고 미술상
의 창고에 처박히는 신세를 면치 못했다. 그런 연유로 그림이 팔리지 않아 먹고살 길이 막막해진 모네
는 자살을 진지하게 생각할 정도였고, 고흐는 평생 불우하게 살다가 권총으로 생을 마감했다.
그런데 폴 뒤랑뤼엘이 마치 마술사가 지팡이를 휘둘러 모자 속에서 토끼를 꺼내듯 카브리올 레그 가구
와 금테 액자를 활용해 인상주의 화가들을 황금알을 낳는 거위로 변신시켰다. 폴 뒤랑뤼엘의 전략은
한마디로 한껏 고급스러운 분위기를 연출한 매장에 화려한 소도구를 적절히 배치해 상품을 돋보이게
만들어 고객의 넋을 빼놓은 다음 빙긋 웃으며 청구서를 들이미는 고도의 마케팅 기법이었다. 재미있게
도 고객은 분위기에 취해 가격표에 높은 금액이 붙어 있을수록 지갑을 활짝 연다.
고객의 욕망과 허영심을 자극하는 이런 심리 전략은 오늘날 마케팅 분야의 기본 기법이다. 화랑은 물
론이고 보석이나 귀금속 매장과 명품 매장, 고급 호텔과 유명 레스토랑, 회원제 클럽, 미용실 등 고가
의 상품과 서비스를 제공하는 상업 시설에서 꾸준히 위력을 발휘하고 있다. 설령 상품이 고객의 이해
수준을 넘어서더라도 이런 식의 연출은 상품을 유서 깊은 명품으로 보이게 하는 마법 같은 효과를 발
휘한다. 또한 고객을 왕처럼 모시는 전략은 고객이 그 전략에 어울리는 신분이라고 믿게 만드는 효과
를 발휘한다. 돈을 아끼는 쩨쩨한 모습을 보이고 싶어 하지 않는 고객은 가격을 따지지 않고 상품을
구매하게 된다.
19세기 파리의 미술상 폴 뒤랑뤼엘은 사람들의 심리를 조종하는 마케팅 전략의 선구자였다. 그는 마케
팅 효과를 높이기 위한 도구로 화려한 카브리올 레그 가구와 금테 액자를 선택했다. 이유는 간단하다.
그 소도구들이 모두 프랑스 왕실이 가장 잘나가던 시기를 대변하는 디자인이었기 때문이다.
‘전 세계의 돈줄’ 미국인 부호의 ‘귀족 콤플렉스’를 절묘하게 공략하여 인상주의 회화를 최고가 상품으
로 둔갑시킨 폴 뒤랑뤼엘
1776년 영국의 식민지 지배에서 벗어나 미국이라는 새로운 독립국이 건국되었다. 최초의 인상주의 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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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의 미술관

시회는 이보다 100년 후인 1874년에 개최되었다. 역사적 전통이 빈약한 미국에는 유럽과 같은 명예로
운 작위를 받을 수 있는 귀족 계급의 전통이 없다. 백악관의 주인인 대통령이라는 미국 최고 지도자조
차 선거에 의해 선출되는 ‘공직’일 뿐이며, 유럽 국가의 왕위와 귀족 칭호처럼 오랜 세월을 걸쳐 이어
져 내려온 전통과 엄격한 인습에 따라 세습되는 ‘신분’은 아니다. 미국에서 특권적 지위란 경제적, 정
치적 투쟁을 통해 획득할 수 있는 재력과 권력을 의미한다. 미국이 한편으로 ‘기회의 땅’이면서 동시에
이 나라의 부유층이 귀족 문화에 강한 콤플렉스를 갖게 된 것은 그런 연유에서다.
귀족 문화는 전통이라는 역사적 축적과 격식이라는 세련된 양식으로 사람들에게 경외감을 불러일으킨
다. 사람들이 평등한 사회를 염원하며 혁명을 통해 출현시킨 프랑스 시민 사회에서조차 대중은 여전히
귀족 문화를 은연중 동경했다. 수많은 모순과 폐해를 안고 있으면서도 전통과 격식에는 사람들의 마음
속에 존경심을 일으키는 무언가가 깃들어 있기 때문이다.
미국은 아메리칸드림을 꿈꾸는 유능한 인재가 전 세계에서 부나비처럼 몰려들고, 경제적 활력이 넘쳐
나는 기회의 땅이었다. 그러나 전통과 격식 등 문화 자산의 결실로 볼 수 있는 귀족 제도 자체가 없다
는 사실은 이 나라의 신흥 부유층 사람들에게는 도저히 채울 수 없는 허무함의 원천이 되었다. 미국의
부유층이 미술품 수집에 병적일 정도로 열을 올리는 행태도 바로 이러한 허무감을 채우기 위한 몸부림
으로 이해할 수 있다. 엄청나게 많은 돈을 벌고 사회적으로 크게 성공해도 귀족이 될 수 없는 미국인
은 귀족과 귀부인을 그린 회화와 조각, 그들의 생활상을 아로새긴 공예품을 소유함으로써 특권 계층의
증표로 삼고자 했다. 그런 까닭에서인지 지금도 트럼프 타워를 비롯한 뉴욕 호화 저택의 인테리어는
하나같이 루이 15세 양식으로 뒤덮여 있다.
구세계 귀족이 소유한 미술 공예품을 ‘돈을 주고 사는 방법’으로만 간접적으로 ‘귀족적’ 생활을 누릴 수
있는 미국인 부유층. 폴 뒤랑뤼엘의 카브리올 레그 가구와 금테 액자를 도구로 활용하는 마케팅 전략
은 그런 미국인 부유층의 정체성과 욕구를 정확히 겨냥하여 그들이 절대로 손에 넣을 수 없는 귀족 작
위의 꿈을 실현시켜 주는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키는 방향으로 구사되었다. 폴 뒤랑뤼엘은 카브리올 레
그 가구로 가득 채운 살롱 안에 금테 액자에 넣은 인상주의 그림을 장식해 세계 그림 시장을 이끄는
최고가 상품으로 둔갑시켰다. 과녁을 정확히 맞춘 그는 마르지 않는 샘과도 같은 돈줄인 미국인의 ‘재
력’에서 비롯된 사재기 열풍 덕분에 거물 미술상으로 입지전적인 성공을 거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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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의 미술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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