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학근 지음 / 호밀밭
여행을 떠나는 순간의 기억은 강렬하다. 일상을 벗어나 낯선 곳으로 떠나는 설렘, 새로운 만남에
대한 기대, 상상했던 여행지를 마주했을 때의 흥분. 평소에는 맛보지 못하는 그러한 감정들이 우리
를 먼 나라로, 오래된 유적지나 유명 관광지로 이끈다. 하지만 여행이 끝난 후에는 어떨까? 설렘
과 흥분은 점차 희미해지고, 나중에는 카메라에 담긴 사진 몇 장으로 당시의 감정을 기억하는 경
우가 많다. 저자는 자신이 마주했던 감동을 그냥 흘려보내지 않는다. 직접 찍은 사진들을 펼쳐 놓
고 지나온 여행지를 꼼꼼히 기록하고, 모르는 것을 찾아보고 공부하며 한 편 한 편의 글을 완성한
다. 이 책은 저자의 개인적인 여행 일지이자 찬란했던 그리스 문명의 자취를 엿보는 의미 있는 기
록이다.
아들과 함께 그리스문명 산책
이학근 지음
▣ Short Summary
여행은 우리가 알지 못하는 세계로 이끌어 주고 꿈을 꾸게 만드는 힘이 있다. 하지만 전문적인 여행가
가 아니고 직장을 다녀야 했기에 항상 어딘가로 떠나는 꿈을 꾸면서도 만족할 만큼 떠나지를 못해 불
만이었다. 그래서 시간 나는 대로 국내는 물론이고 외국도 제법 다니면서 내 나름의 여행을 즐기며,
언젠가 자유로운 시간을 가지면 긴 여행을 할 것을 꿈꾸고 있었다.
그 이유는 자연이나 사람들이 살아가는 모습을 보는 것은 내가 걸은 만큼 보고 느낀다는 나름의 여행
철학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자유롭게 배낭을 메고 떠나면 더 많이 보고 많이 느끼기도 한다. 그리
고 나는 여행지에서 유적지나 박물관, 미술관 등을 찾아다니는 것을 우선으로 여행을 한다. 젊을 때부
터 역사학과 고고학을 좋아했고 그 방면의 책도 많이 읽어 호기심이 많기 때문이다.
내가 제법 많은 여행을 한 것 가운데 이번 여행은 그리스 문명의 자취를 보고 싶은 오랜 꿈을 이루기
위해 떠난 여행이다. 이제는 나이도 들어 아무래도 혼자서 떠나는 것이 조금 망설여졌는데 다행히 나
와 취미가 비슷한 아들이 함께 여행하기를 원하여 별 어려움 없이 이 여행을 시작하게 되었다.
사실 나는 역사학이나 고고학, 예술을 단지 좋아할 뿐이지 전공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이 글은 전문적
인 글이 아니고 단순한 여행기로 평범하게 내가 간 곳을 소개하려는 의도이다. 그리고 이 글에서 나오
는 역사적 사실과 지리적 설명은 네이버 지식 백과를 많이 참조했음을 밝혀 둔다. 또한 주로 그리스
문명을 찾아갔지만 시대의 변화에 의해 그리스 문명의 터전 위에 여러 다른 문명의 흔적도 보고 덧붙
였음을 미리 고백한다. 특히 유럽의 초기 기독교의 모습이 많이 보이는 것은 유럽 문명의 특성 상 어
쩔 수 없다.
여행을 마치고 바로 개인 블로그를 통해 사진을 올리고 글을 썼지만 크게 만족하지 않았다. 그러다가
코로나가 전 세계를 공황에 빠뜨려 여행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여행을 떠나지 못하게 되어 그들에게 조
금이나마 위안을 주고 싶은 마음에 블로그의 글을 정리해 책을 내게 되었다.
▣ 차례
그리스 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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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들과 함께 그리스문명 산책
아테네와 그 주변
신들의 고장 아테네 1 - 고대 그리스의 심장 / 신들의 고장 아테네 2 - 박물관과 유적지
신들의 고장 아테네 3 - 국립 고고학 박물관, 고대 아고라
신성한 땅 델피(델포이) - 세상의 중심 델포이 / 잊힌 도시 테베(테바이) - 오이디푸스 비극의 무대
펠레폰네소스반도
올림피아 - 고대 올림픽의 발상지 / 나프플리오와 티린스 - 미케네 시대의 자취
미케네와 아르고스 - 신화에서 역사로 / 코린토스 운하와 시내 - 펠레폰네소스반도의 관문
코린토스1 - 시시포스 신화가 전하는 곳 / 코린토스2 - 고대 코린토스 유적지
크레타섬
크레타1 - 이라클리온 주변 / 크레타2 - 유럽의 가장 오래된 도시 크노소스
터키편
카파도키아
카파도키아 1 - 무작정 걷기 / 카파도키아 2 - 열기구 타기(발룬 투어)
카파도키아 3 - 그린 투어 / 카파도키아 4 - 괴레메 야외 박물관
차낙칼레
차낙칼레(트로이) - 신들의 전쟁에서 인간의 역사로
베르가마
베르가마(페르가몬) - 신전과 학문의 중심 베르가마 / 아크로폴리스 - 고대의 영광, 페르가몬
아스클레피온 - 세계 최초의 종합 병원
이즈미르
이즈미르(스미르나) - 거대한 아고라의 도시
파묵칼레
아프로디시아스 - 아프로디테에게 바친 도시 / 라오디키아(라오디게아) - 고대 최대의 도시
파묵칼레의 석회층 - 자연이 만든 목화성 / 히에라폴리스 - 성스러운 도시
셸축
초기 기독교의 성지 - 성모 마리아의 집, 성 요한교회 / 아르테미스 신전 - 영화롭던 시절의 잔해
에페소스 - 장대하고 화려한 살아 있는 도시 / 에페소스 고고학 박물관 - 고대의 유물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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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들과 함께 그리스문명 산책
아들과 함께 그리스문명 산책
이학근 지음
그리스 편
아테네와 그 주변
신성한 땅 델피(델포이) - 세상의 중심 델포이
아테네에 머물면서 고대 그리스인들이 신성한 땅으로 여기는 델피(델포이)를 다녀왔다.
어느 날, 제우스는 독수리 (혹은 비둘기) 두 마리를 날려 세상의 중심을 찾았다. 서로 반대편으로 날려
보낸 독수리가 만나는 곳을 세상의 중심으로 정하고 그곳에 원추형 돌(옴파로스)을 땅속에 묻었는데
그곳이 바로 델포이로 현재는 델피로 불린다. 그리스 중부 지방의 고대 도시인 델피는 파르나소스 남
쪽 산허리, 파이드리아데스 암벽을 배경으로 멀리 코린토스만의 바다를 바라보는 절경에 있는 아폴론
의 성지로 옛날에는 여신 가이아(대지)를 모셨으며, 지금도 그 성스러운 사적이 남아 있다.
B.C. 6세기 무렵 아폴론의 신탁을 들을 수 있는 델피 신전은 그리스뿐만 아니라 그 주변 국가들에게도
성스러운 장소로 여겨졌던 곳이다. 그들은 신탁을 얻기 위해서 이곳을 방문하였고 제물을 바치기 위해
그들의 보물 창고를 이곳에 건립하였다. 고대 그리스인들은 델포이를 이름하여 ‘세상의 배꼽(navel of
the world)’이라 부르고 아폴론 신전 가운데 옴팔로스라는 돌을 묻었다.
아테네에서 하루에 다녀오기는 좀 먼 거리라 일찍 서둘러 호텔을 나왔다. 델피로 가는 시외버스 터미
널을 찾기가 좀 어려워 택시를 타려니 아들 녀석이 우버 택시를 타자고 한다. 자기가 유럽에서 많이
이용하여 안다고 해서 우버 택시를 호출하여 이용하니 참 편리하다. 요금도 인터넷으로 결제되어 바가
지를 걱정하지 않아도 되었다.
리오시온 버스 터미널에서 델피행 버스를 타고 약 3시간 정도를 가니 버스 터미널도 없이 길가에 간이
정류소만 있는 조그마한 시골 동네에 내려 준다. 작은 마을이지만 이곳은 고대 그리스인들이 하늘과
지하 세계를 연결하는 통로이자 온 세계의 중심이라 여겼던 신성한 장소이다. 우선 가볍게 아침을 먹
으려고 카페에 들어갔는데 카페에서 보는 경치가 두 눈을 황홀하게 하였다. 협곡 위에 카페가 줄지어
서 있는데 어느 곳을 들어가도 깊은 계곡과 저 멀리에는 코린토스만의 바다가 보이는 풍경이었다. 과
연 신탁을 받을 만한 장소라고 느꼈다.
버스 정류소에서 가까운 유적지는 델피 성역(아폴론 신전 지구)이지만 조금 떨어진 곳에 있는 아테네
프로나이아 성역에서 거슬러 올라오기로 하고 도로를 따라 걸어간다. 미세 먼지에 찌든 한국의 하늘을
보다가 만난 먼지 하나 없이 파랗게 보이는 맑은 12월의 그리스 하늘을 보니 기분이 상쾌했다. 그리스
여행에서 여러 유적지나 박물관과 함께 우리가 즐긴 많은 것 가운데 하나가 맑고 푸른 하늘이었다. 기
온이 제법 높아서 조금 걸으니 이마에 땀이 맺힐 정도로 햇살이 따가웠다. 한적한 도로에는 차도 사람
도 다니지 않아 천천히 경치를 구경하면서 걸어갔다.
한 20분을 걸어가니 아테네 사람들이 세운 아테네 여신의 신전과 성역인 ‘아테네프로나이아 성역’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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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들과 함께 그리스문명 산책
나타난다. ‘프로나이아’란 신전 앞이라는 의미로 아폴론 신전에 가기 전에 아테네 신전이 있다는 뜻이
다. 현재도 버스로 아테네에서 3시간여가 걸리는 거리인데 고대에 이곳에 아테네의 주신인 아테네 신
전이 있다는 것은, 도시 국가 아테네가 아주 강력했음을 나타내는 징표로 여겨진다.
이 신전 앞의 톨로스는 너무나 유명해 관광 엽서에 자주 등장하는 원형 건물이다. 원래 용도가 무엇이
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지금 남아 있는 세 개의 기둥만으로도 그 위용을 자랑한다. 그리스 신화에 나
오는 켄타우로스와 아마조네스의 전투 장면을 묘사한 메토프는 델피 고고학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다.
이 톨로스가 너무 유명하고 신전은 폐허가 되어 돌무더기만 남아 있어 사람들은 이 톨로스를 신전인양
착각하기도 한다.
톨로스 왼쪽 위에 있는 유적은 보물 창고로 고대 도시 국가들이 경쟁적으로 신에게 봉헌했던 보물들을
보관하는 창고이다. 어느 국가에서 만들었는지는 밝혀지지 않았으나 두 개 중 서쪽의 것은 지금의 프
랑스 마르세유의 교역항으로 번창했던 도시 국가였던 ‘마실리아의 보물 창고’이다. 이것으로 보아 그
당시에 델피가 얼마나 신탁으로 유명한 고장이었는지를 짐작할 수 있다. 그리스뿐만 아니라, 소아시아,
심지어 이집트까지 신탁의 유명함이 널리 퍼져 신탁을 받기 위해 델피에 머무르는 기간이 심지어 1년
을 넘기도 했다고 한다.
아테네프로나이아 성역을 구경하고 다시 델피 마을 쪽으로 조금 걸어가면 젊은이들의 교육과 훈련을
위한 장소로 대부분의 도시 국가에 있었던 김나지움 유적지가 나온다. 특히 델피의 김나지움은 4년마
다 열렸던 피티아 제전에 참가하는 선수들이 경연을 준비하는 곳으로 의미가 크다. 그런데 아쉽게도
내가 간 때에는 김나지움에 직접 내려가는 것을 금지하고 있어서 멀리서 구경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
만 멀리서 보는 김나지움 규모를 짐작하면 지금의 올림픽 경기장보다 더 크게 보인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심지어 육상을 하던 직선 주로는 100m도 훨씬 넘어 그 크기가 우리를 압도한다.
이어서 델피 신전 쪽으로 가니 ‘카스탈리아의 샘’이 나온다. 카스탈리아의 샘은 신성하게 여겨지는 샘
으로, 피티아 여사제가 신탁을 전하거나 아폴론 신전으로 들어가기 전에, 그리고 운동선수나 사제와
순례자들 역시 성역에 들어가기 전에 이 샘에서 몸을 깨끗이 씻어야 했다. 수조 위의 바위에 있는 움
푹하게 파여 있는 곳은 샘물의 요정 카스탈리아에게 바치는 봉헌 예물을 담아 두기 위한 것이었다. 이
계곡에는 월계수가 많이 자라는데 델피의 피티아 제전 경기의 승자에게 월계수로 만든 관을 씌워 주었
다고 한다. 하지만 아쉽게도 지금은 붕괴의 위험이 있다 하여 출입을 금지해 놓았다. 카스탈리아의 샘
을 지나 이제 델피의 신탁과 전설이 서려 있는 가장 중요한 유적 델피 성역으로 올라간다.
델피의 아폴론 신전에는 신탁을 받기 위해 그 당시 전 세계에서 사람들이 몰려왔다고 한다. 이 신탁은
그리스도교를 국교로 받아들인 테오도시우스 1세가 델피를 폐쇄할 때까지 성행하였다. 그리스도교에서
는 신탁을 우상 숭배라 하여 델피를 철저하게 파괴했다. 신탁에서 얻은 예언은 무수히 많았겠지만 우
리가 모두 알고 있는 예언이 하나 있다. 바로 유명한 ‘오이디푸스의 비극’이다. 내용을 간단히 이야기
하면, 테베의 왕 라이오스는 델피 신탁에서 ‘아들에게 살해된다.’는 신탁을 받는다. 라이오스는 예언을
두려워하여 갓난아이였던 자신의 아들 오이디푸스를 산속에 버린다. 하지만 목동에게 발견되어 살아남
은 아이는 이웃 나라의 왕자로 성장하여, 결국 신탁의 예언대로 아버지를 죽이고 테베의 왕이 된다.
예언을 미리 들어도 운명을 벗어날 수 없다니 우리 인생이 참으로 아이러니한 것 같다.
성역 입구에서 아폴론 신전을 올라가는 길은 ‘신성한 길’이라 부르는 구불구불한 길이다. 신탁을 받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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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들과 함께 그리스문명 산책
위해서 온 사람들은 이 길을 온 정신을 가다듬고 경건하게 걸었을 것이다. 이 길의 주위를 보면 고대
국가들이 신탁을 받기 위한 봉헌 예물을 보관하던 보물 창고를 볼 수 있다. 아폴론의 신탁을 받는 아
폴론 신전은 델피 유적에서 가장 중요한 곳으로 고대 그리스의 한복판을 상징한다. 실제로 그리스인은
이 신전이 세계의 중심에 서 있다고 믿었다. ‘옴팔로스’(배꼽)라는 이름의 돌이 그곳을 표시하고 있으며,
돌을 중심으로 전능한 그리스의 신 아폴론에게 바치는 신전을 세웠다. 그래서 이곳은 고대 세계에서
가장 널리 경배받는 신탁이 내려지는 장소가 되어, 그리스 도시 국가의 군주들은 전쟁 등 중대한 결정
을 앞두고 아폴론의 조언을 구하러 찾아오곤 했다.
지금은 6개의 기둥만 남아 있지만 처음에는 38개의 기둥이 있었다고 한다. 신전에서 가장 중요한 장소
는 피티아(무녀)가 신탁을 받기 위해 앉아 있던 장소인데, 그 의자가 ‘트리푸스(세발 의자 혹은 세발
솥)’이다. 그리고 그 옆에는 대지의 배꼽인 옴파루스가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복원된 것밖에 볼 수 없
다. 그렇다면 트리푸스의 발이 되는 기둥은 어디에 있을까? 그 궁금증은 나중에 터키에서 풀렸다. 이
스탄불의 술탄 아흐멧 광장에 가면 이상한 청동 기둥이 놓여 있다. 처음 이 기둥을 보고 이 광장에 전
혀 어울리지 않는 유물이라 궁금했는데 이 기둥이 바로 이 트리푸스의 받침대 기둥이다. 그리고 이스
탄불 고고학 박물관에서는 이 트리푸스의 뱀의 머리를 보관하고 있다.
아폴론 신전을 한참 보고 즐기고 나서 다시 발걸음을 위로 향해 가면 고대 원형 극장이 나온다. 이곳
은 피티아 제전에서 음악 경연 대회가 열렸던 곳으로 보존 상태가 좋아 오늘날에도 여름에는 공연 장
소로 쓰인다고 한다. 뜨거운 여름에 신탁의 신성한 장소에서 시원한 바람을 맞으며 음악을 듣는다는
것은 상상만으로도 즐겁다. 그리스 문명을 구경하면서 각 도시의 유적마다 원형 극장이 있는 것을 보
고 그 당시 사람들이 얼마나 예술을 즐겼는지 상상이 되었다. 고대 극장을 구경하고 그 길을 따라 위
로 가면 델피 성역에서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하고 있는 스타디온이 나온다. 피티아 제전에서 스포츠 경
연이 열리던 장소이다. 그런데 트랙의 길이가 눈대중으로 보아도 약 200m는 될 것 같다.
이 스타디온을 끝으로 델피 성역을 뒤로 하고, 델피 성역에서 발굴된 많은 유물을 전시하고 있는 델피
고고학 박물관으로 간다. 델피 성역에서 마을 쪽으로 조금만 가면 보이는 박물관은 규모는 작지만, 사
실 그리스에서 가장 중요한 박물관 중 하나이다. 박물관의 입구를 보면 어디선가 본 듯한 느낌이 드는
데 바로 델피 성역의 ‘신성한 길’을 재현해 놓은 듯하다. 이 박물관에 전시된 유물은 모두 델피 성역과
아테나프로나이아에서 발굴된 것이다.
이 박물관의 주요한 유물 중에서 전차를 모는 청동 마부상은 피티아 제전 전차 경주에서 승리한 것을
기념하여 바친 청동상으로 4마리의 말과 마부상이 한 세트라 하는데 말들은 어디로 달려가 버렸는지
알 수가 없고, 남아 있는 마부의 생생한 표정이 압권이다. 마부만 남겨 두고 달려간 말들은 지금 베네
치아의 산마르코 성당 안에서 휴식을 취하고 있다고 한다.
박물관을 구경하고 나오니 시간이 제법 늦었다. 마을로 돌아가서 카페에 앉아 늦은 점심을 먹는데 창
밖으로 보이는 풍경이 너무나 아름답다. 그냥 우연히 들어간 카페는 알고 보니 상당히 유명한 레스토
랑이었다. 델피에서 현지인들이 가장 많이 추천해 주는 식당으로 소박한 가정식 요리를 메뉴로 하는
전통적인 그리스 식당이었다. 음식도 상당히 좋았고, 무엇보다 그곳에서 보는 경치가 아주 좋았다. 이
조그마한 델피가 천혜의 아름다움을 간직하고 있기에 옛날부터 이곳에 신탁이 있었으리라는 생각이 다
시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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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들과 함께 그리스문명 산책
점심을 먹고 아테네로 돌아갈 버스를 기다리며 마을을 돌아보았다. 마을에는 조그마한 건물들이 줄지
어 서 있는데 대부분 카페와 마을 집을 개조하여 만든 것 같은 호텔이었다. 하지만 모두가 아름다운
자연의 풍광을 즐길 수 있게 만들어 놓았다. 시간만 많으면 조용히 휴식을 취하기에 알맞은 마을이다.
오후 늦게 버스를 타고 아테네로 돌아왔다. 아테네에서 델피까지 왕복 6시간을 버스를 탔지만 조금도
지루하지 않은 여정이었다.
펠레폰네소스반도
코린토스1 - 시시포스 신화가 전하는 곳
고대 코린토스는 신 코린토스 시내에서 제법 떨어져 있다. 코린토스는 B.C. 5,000년 전부터 사람이 살
기 시작해 B.C. 8세기에는 25만 정도의 인구가 머문 거대 상업 도시로 발전하여 그리스인, 로마인, 유
대인, 동양인 등 여러 인종이 어울리는 국제 도시로 성장했다. 그런데 이 도시는 사도 바오로가 코린
토 신자들에게 보내는 서간에서 알 수 있듯이 타락한 모습을 보여 주는 대표적 도시였다.
택시를 불러 타고 아크로코린토스로 갔다. 여담이지만 그리스 택시비는 우리나라보다 많이 싸기 때문
에 요금 걱정하지 않고 이용해도 된다. 고대 코린토스에서 가장 중요한 건물들 중 하나인 아크로코린
토스는 아크로폴리스에 위치하고 있는데 고대 그리스 시대부터 고도가 높은 지역에 요새를 지어 외부
로부터의 침입을 막았고 다양한 양식의 건축물을 세웠다. 입구는 산의 서쪽에 있고 문은 3개가 있는데
각각 투르크식, 프랑크식, 비잔틴 양식으로 지어졌다.
아크로코린토스의 외성은 겉으로는 매우 아름답게 보이나 이 성은 피로 반죽하고 살로 구웠다고 하는
처절한 역사가 숨어 있다. 평소 성정이 차갑고 잔인했던 아크로코린토스의 성주였던 레온 스구로스는
프랑크족이 침입하자 항복하지 않고 자신의 애마와 성벽에서 뛰어내렸다고 한다. 레온 스구로스가 뛰
어내리자 비로소 열렸다고 하는 지금의 이 문은 베네치아 시대에 재건한 것이다.
아크로코린토스의 성채가 있는 곳에는 원래 아프로디테의 신전이 있었다고 한다. 아프로디테는 현대에
서는 사랑의 여신, 미의 여신이라 불리지만 옛날에는 저속한 세속성이 강조되기도 했다고 한다. 이 성
의 아프로디테의 성역에는 1,000여 명이나 되는 히에로두로이라 부르는 신역 직속의 창부가 있었다고
한다. 그래서 이곳은 타락의 도시로 유명했던 코린토스의 한 단면을 보여 주었다. 그러니 코린토 신자
들에게 보내는 서간을 쓴 사도 바오로의 눈에는 온갖 음행이 자행되는 도시로 보였을 것이다. 아프로
디테의 여사제들이 춤과 노래로 사내들을 유혹하여 웃음을 팔던 이곳이 지금은 폐허로 변했다.
크레타섬
크레타2 - 유럽의 가장 오래된 도시 크노소스
크레타는 유럽에서 문명이 가장 먼저 꽃핀 곳이며 고대 그리스 문명의 모태가 된 곳으로 수많은 신화
가 전해지는 땅이다. 고대에 가장 발달되었던 이집트 문명이 유럽으로 전파되는 도중에 지중해를 건너
면서 처음 도달한 곳이 아마 크레타일 것이다. 그리고 크레타에서 펠레폰네소스반도로 상륙하여 미케
네 문명을 만들고 다시 이 미케네에서 아테네로 문명이 이동했으리라는 것이 대개의 의견인 듯하다.
이 유럽 문명의 기초가 되는 크레타 문명의 중심은 바로 미노아 문명이며, 신화의 궁전 크노소스는 미
노아 문명의 상징이다. 우리가 잘 아는 라비린토스(미궁), 미노타우로스, 테세우스, 다이달로스, 이카
로스 등 수많은 신화가 모두 이곳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크노소스 궁전은 그리스 신화에서 미노스 왕이 아내가 낳은 반은 인간, 반은 황소였던 미노타우로스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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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들과 함께 그리스문명 산책
가두기 위해 지은 궁전이라 한다. 이 궁전은 섬의 북쪽 해안인 현재의 이라클리온시 남쪽 약 6km 지
점 구릉 위에 있는 크노소스에 있던 고대 왕국의 궁전으로, 동서 170m 남북 180m 규모로 장방향 구
조를 이루고 있다. 가로 60m 세로 29m 정도의 직사각형의 중앙 광장을 사이에 두고 동쪽으로 왕과
그 가족을 위한 거주구와 공방, 서쪽으로 제례와 정치를 위한 공실, 창고 등 약 1,200 내지 1,400개의
작은 방이 미로와 같이 촘촘하게 들어서 있었다. 심한 붕괴로 상부 구조는 분명치 않으나 2층 또는 3
층 부분이 있었던 것은 확실하며, 일종의 수세식 변소, 도관을 이용한 하수도 등도 발굴되었다.
크노소스 궁전의 한 가지 특징은 다른 고대 도시들이 대개 신전 중심의 도시라면 크노소스는 왕궁 중
심의 도시라서 신에 관한 장식은 찾아보기 힘들다는 것이다. 그래서 내부의 벽이나 천장은 대부분 궁
정 풍속, 동물, 식물, 새, 물고기 등을 그린 회화로 장식되어 있다. 현재 궁정의 프레스코는 모두 복제
품으로, 진품은 이라클리온 고고학 박물관에 있다. 크노소스는 고대의 왕궁 건축 중 가장 규모가 큰
궁전 중의 하나이며, 또한 그 복잡한 설계로 옛날부터 ‘라비린토스(미궁)’로서 유명하였다. 그리스의 영
웅 테세우스가 이 미궁 깊숙이 살고 있는 미노타우로스를 퇴치하고, 왕녀 아리아드네와 함께 섬을 탈
출하는 이야기는 잘 알려졌다.
우리에게 잘 알려진 테세우스의 신화 중 미궁에 대한 부분만을 소개하면, 미노타우로스를 퇴치하기로
결심하여 스스로 제물이 되겠다고 자원한 테세우스는 무기를 갖고 들어갈 수 없었지만 맨손으로도 충
분히 괴물을 쓰러뜨릴 자신이 있었다. 하지만 그 후의 탈출 방법이 문제였다. 일단 라비린토스(미궁)에
들어간 사람은 설령 미노타우로스를 죽인다고 해도 복잡하게 얽힌 미로를 헤매다가 두 번 다시 빠져나
올 수 없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사랑은 모든 것을 뛰어넘는 것이다. 테세우스에게 한눈에 반한 미노
스 왕의 딸 아리아드네가 미궁에서 탈출하는 방법으로 실뭉치를 주면서 실 끝을 입구에 묶은 다음 미
궁으로 들어가서 그 실을 따라 나오라고 한다. 아리아드네의 말을 따른 테세우스는 미노타우로스를 맨
손으로 때려죽이고 실을 따라 무사히 미궁을 탈출했다. 약 1,400개의 방이 있었다니 오죽하였겠나 생
각이 든다.
20세기가 되기 전까지만 해도 크레타 문명은 트로이와 같이 신화 속에나 존재하는 이야기였다. 하지만
트로이를 발견한 슐리이만과 같이 미노스 왕의 전설을 믿고 크레타 문명을 찾아 나선 사람이 바로 영
국의 고고학자 아서 에반스였다. 그는 크레타 문명의 존재를 믿고 입증하기 위해 크노소스 궁전이 있
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게파라 언덕을 사들여 1900년부터 발굴을 시작했다. 발굴을 시작한 지 며칠 지
나지 않아 로마와 그리스에서는 볼 수 없었던 독특한 양식의 건축물들이 차례로 발견되었다. 크레타
문명이 3,000년 동안의 기나긴 잠에서 깨어나 세상의 빛을 보게 되는 순간이었다. 에반스는 그의 전
생애를 크레타 문명 연구에 바쳤는데, 그의 공헌으로 크레타 문명에 대한 연구는 커다란 진전을 이루
었다. 에반스의 공을 기려 크노소스 궁전 입구에는 그의 흉상이 세워져 있다.
그 뒤 크레타섬 이곳저곳에서 크레타 유적이 속속 발견되었다. 오늘날의 크노소스는 옛날의 궁전의 자
취만 상상할 수 있을 뿐이다. 비록 복원하였다고 하지만 허물어져 있는 건물의 일부와 돌덩이들, 그리
고 조금은 조잡해 보이는 프레스코화의 일부를 볼 수 있다. 하지만 여기는 크노소스다. 이것만으로도
가치가 있다.
크노소스를 찾아가는 날에 비가 제법 내렸다. 크노소스 궁전은 정말 복잡하여 건물이 정확하게 지하
몇 층인지도 모르겠고 지상의 건물과 어떻게 연결이 되는지도 분간할 수가 없다. 이 궁전의 동쪽 면의
중간에 거대한 계단이 있는데 이것을 따라 내려가면 동쪽 날개에 이른다. 이 동쪽 날개에는 왕과 여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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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들과 함께 그리스문명 산책
을 위한 왕가의 방들이 있다. 거기에는 훌륭한 프레스코화와 욕실, 화장실, 왕좌의 방들이 있는 거대한
방들이 있다. 크노소스에 있는 모든 유물들은 복제품이고 건물들의 모습은 에반스 이후에 복원된 것이
다. 크노소스의 진짜 유물과 프레스코 벽화 등은 이라클리온 고고학 박물관에서 볼 수 있다.
이렇게 번창했던 크레타는 왜 사라졌는가? 하는 의문은 지금까지도 확실하게 밝혀지지 않고 있다. 에
반스는 대규모 천재지변으로 멸망했을 것이라고 주장했지만, 확실한 증거가 있는 것은 아니다. 일부
학자들은 B.C. 17세기에 일어난 산토리니섬의 대폭발을 천재지변의 증거로 말하지만, 이 주장 역시 확
실하게 증명되지는 않았다.
크노소스 주변에는 기념품 가게와 레스토랑이 많았으나 비수기라 대부분이 문을 열지 않았다. 아쉬운
마음이 가득했지만 버스를 타고 이라클리온으로 돌아왔다. 크노소스를 마지막으로 그리스에서의 그리
스 문명을 찾아다니는 여행은 끝났고 이제 다른 그리스 문명을 찾아 터키로 간다.
터키편
차낙칼레
차낙칼레(트로이) - 신들의 전쟁에서 인간의 역사로
드디어 일찍부터 반드시 오기를 기대했던 트로이에 왔다. 내가 트로이를 꿈꾸며 동경했던 때가 언제부
터였을까? 50여 년도 더 되는 옛날에 일리아드 오디세이를 소설로 처음 읽었고, 이후 실제 역사의 현
장을 호머가 대서사시로 썼고, 슐리이만에 의해 트로이가 발굴되었다는 것을 알게 되면서 언젠가는 꼭
트로이를 내 눈으로 보겠다고 생각했는데 이제야 트로이를 오게 되었다.
카파도키아에서 버스로 약 5시간을 걸려서 앙카라에 도착하여 앙카라 공항에서 오후 11시 40분 비행
기로 차낙칼레에 도착하니 새벽 1시 30분이다. 차낙칼레는 항구 도시로 차낙칼레주의 주도이며, 유럽
과 아시아를 이어 주는 다르다넬스 해협을 사이에 두고 킬리트바히르시와 마주보고 있다. 차낙칼레는
고대부터 해상 교통수단 및 해군 시설이 발달하여 역사적으로 중요한 해군 기지의 역할을 해 왔다. 특
히 차낙칼레는 고대 그리스의 영웅 서사시에 나오는 트로이로 향하는 항구 도시이기도 하며, 1차 세계
대전 때 방어 진지 역할을 했던 치멘리크 요새가 있는 곳이다. 시 외곽으로는 고대 유적지가 많고 특
히 남쪽의 트로이가 유명하다. 해안에는 브래드 피트가 주연한 영화 <트로이>의 대형 목마가 세워져
있어 최근에는 관광지로도 각광받는 곳이다.
일단 호텔을 찾아 잠을 자고 아침에 일어나 택시를 불러 드디어 트로이로 향했다. 참고로 터키는 교통
편이 좀 좋지 않으니 버스를 기다리며 시간을 헛되이 보내기보다는 택시를 타기를 권하고 싶다. 택시
비가 우리나라보다 엄청 싸다. 트로이까지 왕복 30Km도 더 되는 거리인데 우리가 트로이를 관광할 때
까지 기다려 주고 다시 시내까지 데려다주는 요금으로 우리 돈으로 약 50,000원 정도에 계약하고 편
하게 다녀오기로 했다.
호머에게는 일리오스라 불리었던 트로이는 헬레스폰트 해협의 남쪽 어귀로부터 약 6.4km 떨어진 트로
아스 평야 히사를리크 언덕에 있다. 학자들은 이 유적지를 결코 ‘트로이’(미국식)나 ‘트루바’(터키식),
‘트로야’(독일식) 등으로 부르지 않고 ‘히사를리크 언덕’이라고만 부른다고 한다. 그들에게는 트로이라
고 부르는 것만으로도 하나의 단편적인 역사적 사실로 이미 확정되기 때문이다. 이곳은 에게해와 흑해
를 잇는 헬레스폰트(다르다넬스 해협)의 입구에 있어, 옛날부터 번영을 누려 왔다. 트로이의 발굴은 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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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 잘 알려져 있어 간단하게 말하겠다.
어릴 때 호머의 일리아드와 오디세이를 읽고 이것이 신화가 아니라 역사라고 믿은 독일 고고학자 슐리
이만이 1870년 4월, 이 지역에서 처음 발굴을 시작하여 1873년 6월 드디어 트로이의 유적을 발견했
다. 그 후 1930년대 칼버트의 연구와 슐리이만의 노력으로 발견된 트로이는 도시 위에 도시가 건설되
어 있는 대단히 복잡한 복합 유적으로, 유적은 9층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런데 트로이를 발굴하는 과정에서 슐리이만은 중대한 실수를 저질렀다. 그는 호머의 서사시에 등장
하는 시대만을 염두에 두고 발굴했기 때문에 B.C. 2,000년 이후의 유적은 모두 파괴하고 말았다. 그래
서 그리스 이후의 유적은 영원히 잃어버리게 되었다. 사실 트로이는 폐허로 변해 온전하게 갖추어진
유적은 없다. 그러나 여기는 트로이다.
트로이 전쟁이 신화냐? 역사냐? 하는 의문은 슐리이만뿐만 아니라 우리 모두에게 주어지는 질문이었
다. 전쟁의 시작은 신화에 기초한다. 어느 날 여신 헤라와 아테네, 아프로디테가 서로 자신이 가장 아
름답다고 다투는 일이 있었다. 심판을 맡았던 트로이의 왕자 파리스는 아프로디테의 손을 들어 주고,
그 대가로 그리스 제일의 미녀 헬레네를 차지하게 되었다. 하지만 유부녀였던 헬레네를 빼앗긴 남편
메넬라오스는 아내를 되찾기 위해 미케네의 왕 아가멤논을 총사령관으로 하는 대규모 원정군을 이끌고
트로이로 쳐들어갔다. 수많은 영웅과 신들이 양쪽의 군대에 참가하여 전투를 벌이고 여러 신화적 이야
기가 전개되며 이후 10년 동안 양측의 싸움으로 수많은 영웅들이 피를 흘리며 쓰러졌다. 그러나 그리
스는 ‘트로이의 목마’ 작전으로 승리를 거두어 마침내 길고도 지루했던 전쟁을 끝맺게 되었다.
호머의 대서사시 ‘일리아드’에 등장하는 트로이 전쟁은 실제 유적이 발굴되기 전까지만 해도 신화 속의
이야기라고 생각되었다. 하지만 이 이야기가 사실에 기초한 것이라고 생각하고 마침내 땅속에 묻혀 있
던 전설 속의 트로이를 발견한 하인리히 슐리이만은 고고학 역사상 가장 위대한 발굴을 한 사람으로
널리 알려져 있으며, 후에 미케네도 발견하여 고고학 역사에 커다란 발자취를 남겼다.
최초 발굴 당시 슐리이만은 제 2층의 트로이를 호머가 말한 트로이라고 단정했으나, 그 후 연구를 통
해 트로이 전쟁의 무대는 제 7층인 것으로 밝혀졌다. 그리고 당시 트로이는 미케네 문화권에 속했으며,
주변 해협을 지배할 수 있는 유리한 위치여서 무역으로 번영을 누렸다는 사실도 밝혀졌다. 트로이는
지금도 계속 조사 발굴이 이루어지고 있다. 1930년대에 미국의 블레겐이 트로이 유적에 대한 과학적인
재조사를 시행한 결과, 트로이 전쟁이 사실성을 갖는다면 9층으로 이루어진 유적 가운데 B.C. 1,250년
의 것으로 추정되는 제 7층 A가 여기에 해당한다고 주장하였다.
사람들은 흔히 말했다. 트로이에 가 봤자 폐허만 볼 뿐이고 실망한다고. 물론 트로이는 폐허지만, 역사
의 엄청난 현장이기에 트로이 유적을 보고 나니 큰 감동이 밀려왔다. 트로이를 보면서 영화에서 보던
트로이의 한 장면을 실감하고, 그리스 연합군과 맞서고 있는 트로이 군대를 생각해 본다. 이 역사의
현장이 지금 폐허면 어떠랴. 내가 여기에서 역사의 숨결을 느낄 수 있으므로 가장 복 받은 여행지인
것이다.
트로이를 보고 나니 차낙칼레의 모든 것은 나에게 지나가는 과정에 불과했지만 트로이를 보고 난 후
시내 항구로 가서 차낙칼레 일대를 구경했다. 항구 주변은 사람들로 북적거린다. 시가지가 항구와 연
결되어 있어서인지 사람들이 항구 주변에 즐비하게 늘어선 카페에 앉아 담소를 나누거나 망중한을 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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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있다. 터키 사람들은 우리가 커피를 즐겨 마시듯이 차를 참 좋아하여 수시로 차를 마시면서 삶의
여유를 즐기고 있는 것 같아 보인다. 바쁘게만 움직이는 우리나라 사람의 눈으로는 좀 이해하기가 어
려울 것이다.
거리를 거닐며 항구 일대를 구경하고 차낙칼레 군사 박물관으로 갔다. 차낙칼레 군사 박물관은 차낙칼
레시 중심부 치멘리크 요새에 있는 박물관으로 오스만 투르크 시대와 제1차 세계 대전 당시의 차낙칼
레 지역에서 벌어진 주요 해전에 관한 자료를 주로 전시하고 있으며, 해군 관련 유물 및 전함을 소장
하고 있다. 치멘리크 요새는 술탄 메메드 2세가 다르다넬스 해협을 오가는 선박을 통제하기 위해
1452년에 세운 것으로, 매우 견고하여 제1차 세계 대전 당시에도 유용하게 활용되었다.
주요 전시물은 터키 해군 및 제1차 세계 대전 당시 최대 접전 가운데 하나로 꼽히는 겔리볼루(갈리폴
리) 전투에 관한 자료들이다. 겔리볼루 전투는 제1차 세계 대전 때 터키가 영국, 프랑스의 연합군 함
대와 겔리볼루반도에서 접전을 벌인 전투로 양측 모두 25만 명이 넘는 사상자를 낸 격렬한 전투 끝에
터키 군대가 승리했다. 이곳이 차낙칼레이기에 차낙칼레 전투라고도 하지만 정확히는 겔리볼루(갈리폴
리) 전투다. 이 전투는 열악한 조건의 터키가 거대한 연합군을 물리친 전투로 전쟁사에 기록되어 있는
유명한 전투다. 전투의 상세한 설명은 생략하고 훗날 아타튀르크(터키인의 아버지)로 추앙받는 무스타
파 케말 대령이 장병들에게 한 연설로 그 전투를 대신한다.
“우리가 무너지면 오스만 제국 본국이 무너지고, 우리가 노예가 되는 생활이 기다리고 있다. 제군들에
게 미안한 말이지만 오늘은 살아남기 위해서 싸우는 것이 아니라 죽기 위해서 싸워야 한다. 그러나 이
는 개죽음이 아니다. 오늘 우리들의 죽음이 조국을 지키는 밑거름이 될 것이며 그대들 이름은 남을 것
이다. 나 역시 여기에서 무너지면 제군들과 같이 시체로 뒹굴고 있으리라.”
박물관을 나와 거리를 돌아다니며 구경을 하다 카페에 앉아 한가로이 항구를 구경하며 오늘 보았던 트
로이에 대해 아들과 이야기를 한다. 서로의 관심과 취향이 같다는 것이 여행을 하는 데는 참으로 좋은
일이다. 사실 역사에 관심을 가질 수는 있지만 고고학적 유적이나 유물에 관심을 가지는 사람들은 많
지 않다. 그런데 아들과 나는 좀 특이하게 이런 점에 관심이 많아서 함께 여행하면 이야기가 끊이지를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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