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반의 도시 춘천은 낭만과 추억을 넘어 분단의 흔적과 통일의 마음들을 오롯이 담은 곳이다. 이책은 우리가 지금까지 알던 춘천이 아닌 그 안에 녹여진 분단과 통일의 이야기를 전하려 한다. 춘천의 재발견이라고 해야 할까. 봄의 시냇가(春川)로 함께 ‘통일 감성 여행’을 떠나보자.통일의 눈으로 춘천을 다시보다강동완, 전병길 지음▣ 저자강동완 - 대학교수라는 말보다 통일 덕후로 불리길 원하는 분단 조국의 한 사람이다. 평양을 몇 번 다녀온 건 벌써 십여 년 전의 일이다. 북한을 연구하는 학자가 현장에 직접 갈 수 없기에 북중 국경에라도 가서 북녘의 모습을 사진으로 담는다. 사진은 셔터를 누르는 이의 고뇌에 따라 진실과 사실 사이를오가기에, 세상이 반드시 알아야 할 북한 주민들의 실상만을 전하고자 애쓴다. 바로 “당신이 통일입니다.”를 외치며 『통일의 눈으로 (지역을) 다시보다』라는 시리즈 작업을 하고 있다. ‘통일만 생각하고 통일을 사랑한다(통생통사)’는 의미를 담아 유튜브 ‘강동완 TV’를 운영 중이다.전병길 - 한국 근현대사를 미시적인 관점에서 연구하는 것을 좋아하며 우리 경제와 기업의 역사 속에어린 한(恨)과 매력을 미래지향적인 가치로 풀어내고 싶어 한다. 마케팅과 사회 혁신, 통일 문제를 넘나드는 다양한 활동을 하며 그동안 기업, 공공단체, 비정부기구(NGO), 대학 등에서 강연과 컨설팅을해 왔다. 정주영의 기업가 정신, 앤디 워홀의 상상력, 무하마드 유누스의 실천력을 본받아 세상을 아름답게 만들고 싶은 꿈을 꾼다. 창의적인 통일을 준비하기 위해 현재 재단 법인 통일과 나눔 사무국장으로 일하며, 연세대학교 경영학 박사 과정에서 기업과 사회 그리고 미래 전략에 대해서 고민하고 있다.▣ Short Summary1894년 봄, 영국의 지리학자 이사벨라 비숍은 북한강 ‘탐사’를 나선다. 경기도 양평에서 배를 타고 가평, 춘천, 화천을 거쳐 금강산으로 가는 여정이었다. 비숍은 저서 『조선과 그 이웃 나라들』에서 춘천을 이렇게 묘사했다.“춘천은 북한강의 좌측 4마일쯤에 위치한다. 그곳에는 성곽이 있어 300명을 수용할 수 있는 요새(봉의산성)로 쓰인다. 인구는 3,000명 정도이며, 위치는 농경지의 중심부여서 조선식으로 표현하면 교역의중심지이다. 강둑은 철길의 침목처럼 질서정연하며 하상은 맑고 하얀 석영으로 되어 있다. 조선에서는보기 드문 황소 떼가 시야에 들어온다.”이 견문록은 서양인의 눈으로 춘천을 담은 최초의 기록물이다. 비숍의 이야기에서나 사람들의 추억에서도 춘천 하면 강과 어우러진 아름다운 자연을 빼놓을 수 없다.춘천(春川)은 ‘봄의 시냇가’란 뜻이다. 한겨울 모진 바람을 이겨 내고 푸릇푸릇 새싹 돋는 봄날의 시냇가는 얼마나 싱그럽고 푸르른가. 어여쁜 이름의 춘천은 한 지역의 지명을 넘어 젊은 날의 아른한 추억을 떠올리게 하는 도시다. 물안개 자욱한 호수와 겹겹이 조화를 이룬 산들이 너른 품처럼 감싸 주는춘천은 한 폭의 수채화와 같다. 아름다운 기억을 선물하는 춘천은 수많은 이야기를 담고 있다.춘천은 겉으로 보기에는 잔잔하고 평온하지만 그 이면에는 분단과 전쟁의 아픈 역사를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다. 한반도 유일의 분단 도인 강원도의 도청 소재지가 바로 춘천이다(북한 강원도의 도청은 원산에 있다). 한반도 지도를 위아래, 좌우로 한번 접었을 때 춘천은 거의 정중앙이다. 춘천 하면 대표적-2-통일의 눈으로 춘천을 다시보다으로 소양강댐, 남이섬, 닭갈비 정도를 떠올린다. 우리는 지금까지 춘천이 담고 있는 숨겨진 이야기를잘 알지 못했다. 그리고 통일의 새로운 꿈이 춘천에서 피어나고 있음도….호반의 도시 춘천은 낭만과 추억을 넘어 분단의 흔적과 통일의 마음들을 오롯이 담고 있는 곳이다. 이책은 우리가 지금까지 알고 있던 춘천이 아닌 그 안에 녹여져 있는 분단과 통일의 이야기를 전하려 한다. 춘천의 재발견이라고 해야 할까. 봄의 시냇가로 ‘통일 감성 여행’을 함께 떠나보자.▣ 차례1부 춘천대첩 - 역사의 흐름을 바꾼 3일01 38선 표지석02 우두동 충렬탑(忠烈塔)03 애민보육원04 우두감리교회05 소양1교06 소양정(昭陽亭)2부 피스 트레일 - 호수를 따라 걷는 평화의 산책길07 포니 대령 기념비08 북한강-의암호09 춘천대첩기념평화공원10 에티오피아의 향기11 자유회관12 상상마당3부 청춘예찬 - 봄날의 천지(天地)13 죽림동성당14 춘천공회당 자리(현 명동 SR타워 부근)15 단양대(현 춘천시청 자리)16 옛 강원신사, 미국공보원(현 춘천세종호텔)17 한림대학교18 강원대학교 춘천캠퍼스19 옛 춘천사범학교(현 춘천교육대학교)4부 분단 너머 - 다시 사람에게로20 경춘선 춘천역21 옛 미군 부대 자리22 중도와 서면23 함기용 기념비-3-통일의 눈으로 춘천을 다시보다통일의 눈으로 춘천을 다시보다강동완, 전병길 지음1부 춘천대첩 - 역사의 흐름을 바꾼 3일1950년 6월 25일 새벽, 기습적으로 공격을 시작한 북한군은 탱크를 앞세워 남하하기 시작해 단 3일만에 대한민국의 수도 서울을 점령했다. 그런데 북한군은 서울에서 진격을 멈추고 3일을 머물렀다. 세계 어느 나라 전쟁사에서도 초기에 진격을 멈춘 사례는 거의 없다. 적에게 시간을 준다는 것은 군사전략상 아주 치명적인 실수이기 때문이다.그렇다면 북한군은 왜 서울을 점령하고도 3일 동안 진격을 멈추었을까? 바로 강원도 수부 도시인 춘천 지역 점령에 문제가 생겼기 때문이다. 북한군의 계획은 원래 주력 부대가 서울을 점령하여 한국군을 한강 이남으로 밀어내면, 춘천을 점령한 북한군 부대가 경기도 수원 방향으로 내려와 한국군을 포위해서 섬멸하는 것이었다. 이렇게 함으로써 국제 사회가 본격적으로 개입하기 전에 한반도 전역을 공산화한다는 계획이었다.그런데 춘천을 점령한 후 수원으로 내려와야 했던 북한군은 춘천에서 예상치 못한 저항에 직면했다.우리 국군의 결사 항전이 북한군의 남하를 막은 것이다. 결국, 춘천을 하루 만에 점령한다는 북한군의계획은 수포로 돌아갔다. 급기야 춘천 점령 지연으로 인해 전쟁은 북한이 의도했던 것과는 다른 양상으로 전개되었다. 미국을 비롯한 국제 사회가 전쟁에 개입했고 퇴각하던 한국군도 전열을 재정비해 반격하기 시작했다. 한마디로 6ㆍ25 전쟁 초기 ‘춘천대첩’은 역사의 흐름을 바꾼 3일이었다.38선 표지석한반도 분단을 상징하는 ‘북위 38도선’은 강원도 춘천의 북부 지역을 지난다. 제2차 세계 대전 종전직전인 1945년 8월 11일, 미국과 소련은 38선을 경계로 한반도 분할 점령 계획을 세웠다. 이보다 이틀 전인 1945년 8월 9일, 소련은 일본에 전쟁을 선포하고 한반도에 군대를 들여보냈다. 1945년 8월15일 해방되기 불과 6일 전의 일이었다.남북으로 갈라진 춘천: 광복 이후 보름 정도 지난 9월 초에는 강원도 춘천 북부에 있는 위도 38도 선까지 소련군의 점령지가 되었다. 이때부터 1950년 6ㆍ25 전쟁 직전까지 춘천 북부 외곽을 비롯해 인근 화천과 양구는 북한 지역으로 분리되었다. 반면 춘천 시내는 미군 군정청이 담당하는 남한 지역에속했다. 오랜 시간 동일 생활권이었던 지역이 미국과 소련이라는 인위적인 힘에 나눠진 것이다. 소련군은 남북을 잇는 경의선, 경원선을 38선상에서 차단하고 열차 운행을 중지시켜 남북간 교통로를 막았다. 또한 식량과 시설물을 약탈하고 일제 강점기 시절에 건설한 화천수력발전소의 수차변압기, 배전판등을 해체하여 소련으로 가져갔다.1945년 9월 2일 소련군 1개 소대 병력 약 30여 명이 38선을 넘어 미군 담당 예정 지역인 춘천 시내로 들어왔다. 이때 미군은 아직 한반도에 상륙하지 않은 상태였다. 춘천 시내에 들어온 소련군은 강원도청에서 행정권과 경찰권의 이양을 요구했다. 하지만 광복 이후 미군이 들어오기 전까지 38선 이남강원 지역을 관리하던 일본인 관리들은 이를 거절했다.-4-통일의 눈으로 춘천을 다시보다미군이 38선 이남인 남한 지역에 들어온 날은 1945년 9월 9일이었으며 강원도청의 도청 소재지인 춘천에 진주한 건 9월 20일이다. 분단의 비극은 가족처럼 지내던 한마을 사람들을 둘로 갈라놓았다. 춘천군 북산면 추전리와 사북면 원평리는 각각 미소 점령 지역으로 갈라졌다. 광복 직후 남북 사이에 인적ㆍ물적 교류는 통제되었으나 미소는 제한적으로 38선상의 남북교류를 허용했고 일부지만 주민 왕래와 물물 교환이 이루어지기도 했다. 공식적인 남북 교역은 1947년 5월 미군과 소련군의 합의로 시작되었으며, 1949년 3월 교역이 전면 금지될 때까지 약 2년간 지속되었다. 춘천 북부에서도 이러한 남북간의 교역이 시행되었다.집단 월북과 모진교 전투: 분단 이후 남북한에는 각각의 정부가 들어섰고 군대도 만들어졌다. 그리고38선 인근에서는 크고 작은 분쟁이 계속되었다. 1949년 5월 춘천과 홍천에 주둔한 한국군 제8연대 2개 대대 병력이 집단 월북하는 초유의 사태가 발생하기도 했다. 2개 대대장은 국군 내 남로당 계열의장교들로 군 내 좌익 세력 척결에 위기를 느껴 자신들의 휘하 병력을 이끌고 38선을 넘은 것이다. 이후 춘천에는 국군 제6사단 제7연대가 배치된다. 연대 본부의 위치는 춘천역 부근이었다. 제7연대는 춘천 지역의 관공서와 주민들의 지원을 받아 춘천 북쪽 38선의 진지를 정비했다.1950년 6월 25일 북한군은 38선을 넘어 남한을 공격했다. 6ㆍ25 전쟁이 발발하자 중부 지역 38선에자리 잡았던 춘천은 전쟁의 한가운데에 휘말렸다. 춘천에서의 6ㆍ25 전쟁은 춘천과 화천을 잇는 5번도로상의 ‘모진교’라는 길이 250m의 다리에서 시작된다. 당시 38선상에 걸쳐 있던 이 다리에 북한군은 화력을 집중했다. 그 결과 현장에 있던 국군 1개 분대가 폭사했다. 열악한 병력과 장비로는 더 버티기 힘겨웠을 것이다. 치열한 전투가 이어졌지만 안타깝게도 국군은 모진교를 북한군에 내주고 말았다. 당시 국군에는 없던 북한군 탱크가 모진교를 건너 춘천 시내로 향했다.우두동 충렬탑(忠烈塔)춘천은 6ㆍ25 전쟁 초기 치열한 격전지였다. 전쟁의 판세를 바꿀 만큼 큰 역할을 했기에 춘천대첩이라부른다. 전쟁을 일으킨 북한의 김일성은 소련과 중국의 군사 지원을 받으며 국제 사회가 개입하기 전에 속전속결로 전쟁을 마무리한다는 계획을 세웠다. 당시 북한군 남침 작전 계획의 핵심은 경기도 파주와 의정부 지역을 통해 진입한 북한 병력이 서울을 3일 이내 점령하고, 춘천 지역을 통해 진입한 병력이 수도권 외곽에 거대한 포위망을 구축해 한국군 주력을 섬멸하는 것이었다. 당시 북한군의 전력은국군보다 우위였다.하지만 춘천 지역에 주둔하던 국군 6사단 7연대와 춘천 시민들의 강력한 저항으로 이 계획은 수포가된다. 특히 이 전투에서 춘천 시민, 고등학생, 우두동 제사 공장의 여성 근로자들이 탄약을 운반하는등 전투에 직접 뛰어들었다. 전쟁의 소용돌이에서 군인과 민간인이라는 신분을 뛰어넘어, 오직 나라를지킨다는 굳은 결의와 한마음뿐이었다.인천 상륙 작전, 낙동강 전투 그리고 춘천대첩: 전쟁 초기 국군은 북한군의 공격에 제대로 대응 한 번못 하고 후퇴했다. 하지만 ‘춘천’ 지역만큼은 전반적인 열세에도 불구하고 지형을 활용한 방어선을 구축하고 3일 이상을 버텼다. 춘천 지역 전투는 북한군의 포위망 구축을 사실상 어렵게 만들었고 국군이전열을 재정비하고 대비할 수 있는 시간을 벌어 준 것이다. 전쟁 초기 춘천이 버텨 준 3일은 6ㆍ25 전쟁의 ‘골든타임’이었다. 그래서 춘천 전투는 인천 상륙 작전, 낙동강 전투와 함께 6ㆍ25 전쟁 초기 3대전승 전투로 기억된다.-5-통일의 눈으로 춘천을 다시보다이러한 전승의 의미를 기억하기 위해 1955년 3군단 예하 제29사단 장병들과 춘천 시민 등이 합심하여우두산에 충렬탑을 건립했다. 우두산이 위치한 우두벌은 북한강과 소양강 두 줄기가 만나는 곳에 흙모래가 축적되면서 형성된 평원이다. 우두산은 굵은 고구마 모양의 반도처럼 생긴 평원 위쪽(동쪽)의 소양강과 맞닿은 곳에 있는 해발 134m의 나지막한 산이다. 그러나 당시 군사적인 면에서 우두산은 매우중요한 곳이었다. 북한군이 화천ㆍ양구 방면에서 춘천으로 진입하지 못하도록 막는 전초 기지가 바로우두산이었다. 또한 북한군을 관제ㆍ공격할 수 있는 중요한 전략적 요충지이기도 했다. 지금도 신년초와 6월 6일 현충일에는 조국을 위해 희생한 분들을 추모하는 행사가 이곳에서 열린다.장군에서 중령으로 스스로 계급을 낮추다: 우두산 충렬탑에는 6ㆍ25 전쟁 당시 프랑스군의 참전 기념비가 세워져 있다. 당시 프랑스군 대대의 지휘관은 랄프 몽클라르(1892~1964)였다. 몽클라르 장군은6ㆍ25 전쟁이 발발하자 “한반도의 자유를 지키겠다.”라며 자진해서 프랑스군 600여 명을 모집해 참전한 인물이다. 3성 장군 출신이었지만, ‘대대 병력은 중령이 이끈다’라는 프랑스군 규정에 따라 계급을스스로 중령으로 강등시켰다. 몽클라르 장군은 미군과 함께 1951년 2월 경기도 양평군 지평리에서 중공군 3만 병력을 맞아 백병전 끝에 승리를 이끌었다. 몽클라르 장군이 이끈 지평리 전투는 6ㆍ25의전세를 바꾸었다는 평가를 받는다. 프랑스군은 중부 전선에서 큰 활약을 펼쳤다.소양1교1933년 12월 20일 자 동아일보에는 “강원도의 신명물(新名物) 춘천 소양교 준공”이라는 제목의 기사한 편이 실렸다. 이 기사에 따르면 12월 16일 3백여 명이 모인 가운데 준공 축하식이 열렸다. 길이397m, 공사 비용 18만 원, 공사 참여 연인원이 8만 4천 563명이라고 한다. 또한 이 다리는 경성(서울)으로부터 춘천을 지나 동해안 고성으로 이어지는 도로에 주요한 역할을 하며 강원도 문화 향상과산업 발전에 이바지할 것이라 보도했다.끝까지 소양교를 사수하라: 1933년 개통된 소양교는 실제로 1950년대 초반까지 춘천의 남과 북을 잇는 유일한 교량 역할을 했다. 6ㆍ25 전쟁 초반에는 소양교를 사이에 두고 국군과 북한군의 치열한 교전이 벌어졌다. 1950년 6월 25일과 26일 전투에서 패한 북한군은 27일 오전 춘천 시내에 무차별 포격을 가한 후 보병 부대를 앞세워 소양교를 건너오기 시작했다. 그러나 소양교 남쪽 봉의산 기슭에 배치된 국군의 사격으로 더는 전진할 수 없었다. 당시 북한군의 시체가 소양교 위에 가득 쌓일 정도였다고하니 전투가 얼마나 치열했는지 가히 짐작할 수 있다. 북한군은 최후 수단으로 오전 11시쯤 T-34 전차를 앞세워 다시 공격해 왔다.국군 6사단 7연대 공병 중대는 소양교 파괴를 위해 미리 설치된 폭약의 폭파 스위치를 눌렀다. 하지만포격으로 인해 뇌관과 연결된 선이 끊어지는 바람에 교량을 파괴하지 못했다. 마침내 북한군의 탱크는소양교를 넘어 춘천 시내로 들어왔고 3일을 버티던 춘천은 결국 북한군에 함락되고 말았다. 춘천에서퇴각한 국군은 원창고개를 거쳐 홍천 방면으로 후퇴했다. 춘천 전투가 높게 평가받는 이유는 당시 열악한 조건에서도 북한군 제2군단 2사단, 12사단을 맞아 국군이 처음 거둔 승전이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춘천을 함락하고 수원을 거쳐 서울을 포위하려던 북한군의 초기 진격전 계획은 이 전투로 인해 무산되었다.교각에 새겨진 총탄 흔적: 지금도 옛 소양교(지금의 소양1교) 교각에는 6ㆍ25 당시 탄환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다. 70여 년의 시간이 흘렀지만, 총탄 자국은 그대로 남아 당시의 처절한 상황을 웅변-6-통일의 눈으로 춘천을 다시보다한다. 현재 소양강 주변에는 크고 웅장한 여러 개의 다리가 건설되어 춘천의 남과 북을 연결한다. 그에 비교해 편도 1차선 다리인 소양교는 역사의 뒤안길에 가려져 왜소하게 보인다. 하지만 1933년 이래 그 모습 그대로 서 있는 소양교는 그 존재만으로도 많은 것을 이야기해 준다. 한 가지 아쉬운 건교각 어디에도 6ㆍ25 전쟁의 흔적임을 말해 주는 안내판이 설치되어 있지 않다는 점이다.2부 피스 트레일 - 호수를 따라 걷는 평화의 산책길포니 대령 기념비미국 버지니아 페어팩스 출신의 프랭크 포니 대령은 웨스트포인트 출신의 엘리트 군인이었다. 제2차세계 대전 참전 용사이기도 한 포니 대령은 미 24사단 19공병단 소속으로 6ㆍ25 전쟁에 참전했다가1950년 11월 29일 청천강 전투에서 전사했다. 청천강 전투는 1950년 11월 24일부터 12월 2일까지벌어진 전투로 흔히 중공군 2차 공세라고 부른다. 압록강까지 진격한 미군을 중심으로 한 유엔군은 예상하지 못한 중공군의 개입을 맞게 된다. 이때 유엔군은 중공군의 전력을 얕잡아 봤고 전략적인 대응에 실패하며 청천강 일대에서 물러나야만 했다. 그리고 청천강 전투 한 달 뒤에는 중공군의 위세에 밀려 다시 수도 서울을 내줘야만 했다.청천강 전투에는 2만여 명의 전사자와 부상자가 발생했다. 그중에는 미 19공병단 프랭크 포니 대령도있었다. 포니 대령의 이름은 1951년 춘천 소양강 지역의 병참선 유지 등 군수 물자 보급을 위해 건설된 나무다리 ‘포니 브릿지’ 명칭에 부여되었다. 1951년 7월 8일부터 8월 1일까지 미 62건설공병대대가불과 26일 만에 건설한 이 다리는 길이 573m, 폭은 4.15m였다. 이 다리는 당시 미군 공병 부대가 한국에서 건설한 교량 중 가장 긴 교량으로 기록되어 있다. 실제로 1960년대 초까지 춘천 시민들의 주요 교통수단으로 사용되었다. 1967년 4월 콘크리트 다리로 교체돼 ‘소양2교’라는 이름으로 바뀌면서‘포니 브릿지’는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사라져 갔다.포니 대령을 기리는 기념비는 최초에 목교가 구축된 장소였던 현재 소양2교 초입에 설치됐으나, 세월이 지나면서 덤불로 덮이는 등 관리가 제대로 되지 않았다. 2014년 현재 장소인 소양강 처녀상 옆으로기념비를 이전하고 포니 브릿지 유래에 관한 기념비를 추가 설치함으로써, 이곳을 찾는 시민들에게 포니 브릿지의 기원과 역사적 의미를 되새기고 있다.기억하는 건 우리들의 몫: 1950년~1953년까지 벌어졌던 6ㆍ25 전쟁은 이해 관계자에 따라 그 호칭이달라진다. 아마도 전쟁에 대한 의미가 각기 다르기 때문이다. 한국에서는 6ㆍ25 동란, 6ㆍ25 사변 등으로 주로 부르고, 북한에서는 ‘조국 해방 전쟁’으로, 일본은 ‘조선 전쟁’, 중국은 미국에 대항하며 조선을 도왔다는 ‘항미 원조 전쟁’, 그리고 미국은 6ㆍ25를 ‘한국 전쟁’(The Korean War)이라 부른다. 미국 워싱턴 D.C. National Park에 있는 한국전 참전 기념비에 가면 다음과 같은 문구가 있다.“Our nation honors Her sons and daughters who answered the call to defend a country they never knew,and A people they never met.” “그들이 알지도 못했던 나라, 만나 보지도 못했던 국민들을 지켜 주기위해 나라의 부름을 받고 응답한 우리의 아들들과 딸들을 존경하며 영예롭게 여긴다.”6ㆍ25 전쟁에 대한 미국과 미국 사람들의 일반적인 생각을 너무나도 잘 반영한 문구다. 또한 6ㆍ25전쟁은 제2차 세계 대전과 베트남 전쟁 사이에 끼어 잊혔다는 의미로 잊혀진 전쟁(the Unknown War)으로 불리기도 한다. 2차 대전 종전 5년 만에 벌어진 전쟁이라 주변 강대국들 모두 확전이 되면 3차-7-통일의 눈으로 춘천을 다시보다세계 대전으로 간다는 적지 않은 부담감이 있었다. 따라서 휴전이란 미봉책으로 상황을 빨리 덮으려했고, ‘베트남 전쟁’처럼 명분도 약하고 치욕적인 패배를 준 전쟁도 아니기에 6ㆍ25 전쟁은 사람들의기억 속에서 잊혀졌다. 그리고 미국 워싱턴 D.C. 내 한국전 참전 기념 공원도 베트남 참전 기념 공원보다 더 늦게 생겼다.포니 대령은 산화해 북한 자강도 청천강 유역 어디엔가 유해가 있을 것이다. 그 희생에 감사하며 기념하고자 하는 이들의 노력은 소양2교의 옛 포니 브릿지 주변에 비석으로 남아 있다. 기억하는 건 온전히 우리들의 몫이다.에티오피아의 향기한국과 에티오피아의 인연은 6ㆍ25 때로 거슬러 올라간다. 에티오피아는 6ㆍ25 전쟁에 유엔군을 파병한 16개국 중 유일하게 전투병을 파병한 아프리카 국가다(남아프리카공화국은 공군 비행단을 파병).에티오피아의 한국전 참전에는 어떤 특별한 사연이 있는 걸까?1935년 이탈리아가 에티오피아를 침략했다. 에티오피아는 세계 각국에 도움을 요청했으나 외면당했다.빈약한 장비에 제대로 훈련조차 받지 못한 에티오피아군의 저항은 무력할 수밖에 없었다. 수도 아디스아바바는 함락당했고 황제는 망명 길에 오르는 아픔을 겪어야만 했다.침략으로부터 자유를 지키기 위한 신념: 이런 아픔을 겪은 하일레 셀라시에 1세 에티오피아 황제는 6ㆍ25 전쟁이 발발하자 파병을 결정한다. 바로 ‘침략으로부터 자유를 지키기 위한 신념’ 때문이었다. 자유의 전사들이라 그랬을까? 한국에 파병된 에티오피아 군대는 강원도 춘천, 철원 등 중ㆍ동부 전선에서 253번의 전투 동안 단 한 번도 패하지 않을 만큼 강인했다. 총 6,037명이 파병되었으며 파병 기간121명이 전사하고 536명이 다쳤으나, 포로는 단 한 명도 없었다.1968년 5월, 에티오피아군의 참전과 희생을 기려 공지천에 에티오피아 참전 기념비를 세웠다. 당시파병을 결정했던 하일레 셀라시에 1세 에티오피아 황제가 제막식에 직접 참석했다. 참전 기념비에는“자유 수호를 위하여 6ㆍ25 전쟁 시 이 땅에서 공헌한 영웅적인 <에티오피아> 제국의 용사들에게 바친다”라는 문구가 새겨져 있다.단 하루도 쉬는 날 없이 커피 향이 나도록 하였습니다: 1968년 한국을 방문한 에티오피아 하엘레 셀레시에 1세 황제는 한국 정부에 에티오피아 기념 공관 건립을 건의했다. 이 소식을 들은 조용이ㆍ김옥희씨 부부는 개인 재산을 털어 황제가 앉았던 자리 인근에 건물을 지었다. 그리고는 1968년 11월 25일드디어 ‘이디오피아 집’이 문을 열었다.‘이디오피아 집’이 문을 열자 황제는 ‘이디오피아벳(집)’이란 이름을 지어 주고 현판을 보냈다. 이후 황제의 각별한 사랑은 계속 이어진다. 에티오피아가 공산화되기 전인 1974년까지 커피 생두를 보내 주었다.에티오피아는 아라비카 커피의 원산지로 ‘커피의 고향’이자 아프리카 최대 커피 생산국이기도 하다. 커피는 에티오피아 카파(Kaffaㆍ현재 Jimma)라는 고원 지대에서 처음 발견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이러한 인연으로 ‘이디오피아벳(집)’은 에티오피아 원두커피를 내리는 카페로 자리 잡았다. 카페 앞에세워진 특별한 안내판이 눈길을 끈다. 바로 개관 이래 현재까지 “단 하루도 쉬는 날 없이 커피향이 나도록 하였습니다”라는 문구다. 에티오피아와의 인연을 소중하게 간직하려는 주인장의 마음이다. 그 어-8-통일의 눈으로 춘천을 다시보다떤 민간 외교 사절단도 이보다 더 향긋할 수는 없을 듯하다.영웅적인 제국의 용사들이 반역자로 낙인되다: 에티오피아의 현대사는 파란만장하다. 1975년 에티오피아 내에서 사회주의 독재 세력의 쿠데타가 성공하면서 셀라시에 국왕은 폐위된다. 이후 에티오피아는한국과 멀어지고 북한과 우호 관계를 맺는다. 그때부터는 6ㆍ25 전쟁 기념식에 불참하는가 하면,1988년 서울 올림픽에는 아예 선수단을 파견하지 않을 정도로 관계가 멀어졌다. 이 당시 에티오피아내 6ㆍ25 전쟁 참전 용사들은 사회주의 체제에 총을 쏜 반역자라는 이유로 홀대를 받았다. 자유를 지키기 위해 목숨을 걸었던 영웅적인 “제국의 용사들”이 하루아침에 반역자라는 오명을 뒤집어썼다. 다행스럽게도 1991년 에티오피아 사회주의 정권이 붕괴한 이후 한국-에티오피아는 과거의 우호 관계를회복했다.‘에티오피아 길’로 기억되다: 2007년에는 ‘이디오피아 집’ 인근에 ‘에티오피아 한국전 참전 기념관’이문을 열었다. 기념관은 참전 전시 기념실, 풍물 기념실, 교류 전시실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6ㆍ25 전쟁 당시의 에티오피아군의 활약상뿐 아니라 아프리카 특유의 토속 문화와 에티오피아의 기독교 문화까지 전시실에 담았다. 또한, 2011년 도로명 주소 체계가 도입되면서 ‘이디오피아 집’ 근처는 ‘에티오피아 길’로 불렸다. 춘천시 근화동 에티오피아 기념관 입구에서 공지천과 의암호를 끼고 돌아 춘천대첩기념평화공원 입구까지 2.2km 구간이다. 에티오피아와의 오랜 인연과 춘천의 낭만이 어우러진 도로가만들어진 셈이다. 다른 나라의 전쟁이지만 자유 수호를 위해 기꺼이 대륙을 넘어 한 걸음에 달려온 그들의 숭고한 희생과 정신이 이 길 위에 오롯이 새겨지기를 바랄 뿐이다.3부 청춘예찬 - 봄날의 천지한림대학교피천득의 <인연>과 춘천: “오는 주말에는 춘천에 갔다 오려 한다. 소양강 가을 경치가 아름다울 것이다.”피천득의 수필 <인연> 中피천득의 수필 <인연>은 교과서에도 실렸던 작품이라 누구나 한 번쯤은 읽어 보았을 글이다. 수필 속에서 피천득 선생은 일본 유학 시절 만났던 일본 소녀 아사코를 향한 순수한 감정을 표현했다. 이 작품은 한국 수필 문학의 백미(白眉)로 꼽힌다. 그런데 작품을 유심히 보면 첫 문장과 마지막 문장에 ‘춘천(春川)’이 나온다. 수필의 배경 지역은 일본 동경이지만 춘천이란 도시가 피천득 선생님을 예전 순수했던 감정의 기억 속으로 이끄는 듯하다.그것은 춘천의 아름다운 자연환경과 당시 있었던 성심(聖心)여자대학 때문일 것이다. 성심여대는 가톨릭 성심회가 운영했는데 이 단체는 세계 여러 군데에 교육 기관을 두고 있다. 수필 <인연> 속에서 아사코가 다니던 학교도 성심(聖心)여학원이라 아마도 피천득 선생은 아사코에 대한 추억을 기억하며 성심여대에 출강했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수업이 끝나면 춘천의 강과 호수를 거닐며 커피 한 잔의 추억과 여유를 가졌을 것이란 생각이 든다.당시 춘천에 있던 성심여대는 지금의 부천 가톨릭대학교의 전신이다. 성심여대는 원래 춘천에서 개교했는데 1980년대 초반 부천으로 이전했다. 춘천 봉의산 중턱에 있던 옛 성심여대 자리에는 지금 한림대학교가 있다.-9-통일의 눈으로 춘천을 다시보다주춧돌 정신과 한림대학교: 한림대학교는 1982년 일송 윤덕선 박사(1921~1996)에 의해 설립되었다.평안남도 용강에서 태어난 윤덕선 박사는 평양고보 3학년 때 선생님으로부터 “땅에 묻힐 주춧돌 노릇을 해라. 주춧돌은 겉으로 드러나지 않지만, 그 위에 세워지는 건물을 튼튼하게 받들고 있다”라는 말씀을 들었다. 그리고는 ‘주춧돌 정신’을 평생의 좌우명으로 삼았다. 1942년 경성의전(현 서울대 의과대학)을 졸업하고 백인제 외과에서 수련의로 근무했다. 1945년 고향 용강에서 개업의로 일하며 해방을맞았다. 해방 이후 윤덕선은 필동 성심병원, 한강 성심병원 등을 개원하며 의업을 이룬다.1982년 윤덕선은 명망 있는 석학들과 함께 춘천에 한림대학교를 세운다. 한림대 개교 초창기에 참여한 석학들은 평안도 출신들이 많았다. 설립자 윤덕선을 비롯하여 현승종(법학, 평남 개척), 양호민(정치학, 평양), 김원용(고고학, 평북 태천), 이기백(사학, 평북 정주), 최영희(사학, 평양), 장왕록(영문학,평남 용강), 지명관(종교학, 평북 정주)이 바로 그들이다. 한마디로 한림대는 북한이 고향인 실향민이설립하고 실향민 학자들에 의해 기초가 닦인 셈이다.영화 <길소뜸> 촬영 장소: 한림대학교 캠퍼스 옆에는 한림대 의과대학 부속 춘천성심병원이 있다.1984년에 개원한 춘천성심병원은 춘천의 대표적인 종합 병원으로 1985년 이산가족 이야기를 다룬 임권택 감독의 영화 <길소뜸>의 배경이 된 곳이기도 하다. 영화의 이야기는 대략 이렇다.‘이산가족 찾기 운동’이 뜨거웠던 1983년, 황해도가 고향인 화영(김지미 역)은 이산가족 상봉의 순간들을 보며 밤늦도록 잠을 이루지 못한다. 현재 남편과 자녀 셋을 두고, 단란한 가정을 꾸리며 사는 화영에게는 전쟁 통에 헤어진 연인 동진(신성일 역)과 아들 성운이 있었다. 이 사실을 알고 있는 지금의 남편(전무송 역)은 화영에게 헤어진 가족을 찾아볼 것을 권한다. 지난 기억을 되새기며 방송국 주변을 맴돌던 화영은 대형 TV 화면을 통해 얼굴도 모르는 부모를 찾아 헤매던 춘천의 한 사내(한지일 역)의 모습을 보게 된다. 순간 바로 그가 아들 성운일지도 모른다는 직감에 사로잡힌다. 그리고 춘천의 그 사내를 찾던 중 우연히 옛 연인 동진과 마주친다. 화영과 동진은 전쟁 이후 각자 가정을 이루었으나 옛사랑에 대한 기억은 가슴속 아련함으로 남아 있다.화영과 동진이 살아온 지난 세월의 틈은 서로에게 아픔이었다. 어색한 만남 속에서 살아온 얘기를 해오던 이들은 헤어진 아들 성운일 것만 같은 사내를 만나기 위해 함께 춘천으로 간다. 석철이란 이름으로 살아가고 있는 사내는 배운 것도 가진 것도 없이 하루하루 막일로 살아가고 있었다. 화영은 석철이자신의 아들 성운이라고 본능적으로 느끼지만, 그의 생활고에 찌든 모습에서 전해지는 이질감에 당황한다. 또한, 물질적인 도움을 노골적으로 표시하는 석철과 그 가족들에게 환멸감마저 느낀다.결국, 친자 확인을 위해 춘천의 대학 병원에서 피 검사를 마치고 집에 돌아온 동진은 그 사내가 아들인 것이 증명되면 친자로 호적에 입적하겠다고 말해 평화롭던 집안을 발칵 뒤집어 놓는다. 피 검사에서 친자임을 부정할 근거를 찾을 수 없다는 의사의 검사 결과가 나왔지만, 화영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는다. 오랜 세월 계속된 삶의 틈은 천륜(天倫)인 모자 관계마저도 부정하게 했다. 냉정하게 친자임을거부했던 화영은 서울로 돌아가던 도로에서 순간 운전하던 차를 멈추고 핏줄에 대한 그리움과 현실 사이에서 갈등하며 괴로워한다.영화 속에서 피 검사를 하고 결과를 통보받았던 대학 병원이 바로 춘천성심병원이다. 춘천성심병원은영화 속 등장인물들이 핏줄과 현실의 이해관계 속에서 갈등하고 고민한 장소다. 영화 <길소뜸>은 이산가족이 격동의 시대 속에서 겪은 이별과 재회, 반복되는 헤어짐을 통해 분단의 비극은 전쟁이 끝난- 10 -통일의 눈으로 춘천을 다시보다지금도 계속됨을 차분히 이야기해 준다.4부 분단 너머 - 다시 사람에게로경춘선 춘천역춘천은 원래 강원도의 도청 소재지가 아니었다. 강원도란 지명과 행정 구역은 조선 왕조 초기의 1394년에 생겼고 강릉의 ‘강’ 자와 원주의 ‘원’자를 따서 ‘강원’이란 지명이 시작되었다. 1896년까지 지금의도청 격인 강원 감영(監營)은 원주에 있었다. 원주에 있던 감영은 19세기 후반 ‘춘천’으로 이사를 오게된다. 이사를 오게 된 이유는 여러 가지 학설이 있으나 가장 널리 인정받는 설은 국가적 비상사태를대비하여 춘천에 설치된 왕실의 이궁(離宮)을 지원하기 위해서다.춘천은 서울과 100km 정도의 거리다. 주변이 산악 분지 지형으로 유사시 왕실이 대피할 수 있고 외부로부터의 침입에 대비할 수 있는 환경을 갖추었다. 그래서 춘천에 이궁을 설치하고 기본적인 행정 조직을 갖추기 위해 원주에 있는 도청을 옮겨 놓았다. 춘천으로 도청이 이전된 1890년대의 조선은 외세의 침입과 나라 안의 각종 민란으로 한 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풍전등화(風前燈火)와 같았다. 암울한시대 속에 진행된 강원도청 춘천 이전은 이에 대한 핀잔과 다른 시군의 도청 이전 요청 등 다른 지역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특이한 일들을 겪게 된다.지금으로부터 80여 년 전인 일제 강점기에는 ‘강원도청 이전설’이 수차례 제기되어 왔다. 그때와 지금의 도청 이전이 다른 것이 있다면 지금은 그 대상이 원주이지만 당시는 주 대상이 ‘철원’이었다는 것이다. 1920년대 강원도 춘천과 철원 사이에도 강원도청 이전을 두고 미묘한 갈등이 있었다. 지금 ‘철원’은 북한과 대치하고 있는 접경 지역이고 낙후된 전방 지역의 이미지가 강하지만 일제 강점기의 철원은한반도의 남북을 잇는 교통의 요지였고 곡창 지대였다. 그리고 근대화의 상징인 철도가 강원도에서 가장 먼저 들어온 지역이었다. 1914년 개통된 서울-원산 간 경원선의 중간 기착지가 철원이었고 1931년철원과 내금강을 연결하는 금강산 철도가 개설되기도 했다.일본은 날씨가 따뜻하고 평야가 많은 한반도 남부를 농업과 경공업을 중심으로 개발했고 자원이 풍부하고 중국 · 러시아 국경과 가까운 한반도 북부를 자원 채취와 중공업을 중심으로 개발시켜 나갔다.특히 자원이 필요했고 대륙 진출을 염두에 두고 있던 일본은 한반도 북부 개발에 더 많은 관심을 두었다. 한반도 북부 동해안 지역과 서울을 잇는 기간 철도망이 경원선이었고 경원선의 중간 기차역이 바로 철원이었다. 일제 강점기 철원의 가치는 분단과 전쟁의 아픔을 고스란히 가진 지금의 철원과는 비교할 수 없었다. 당시에는 철원과 비교할 때 춘천은 참으로 열악했다. 1939년 이전까지 경춘선은 존재하지 않았고 춘천으로 통하는 육로는 험한 준령을 넘어야 했으나 여러모로 불편한 점이 많았다. 심지어 춘천까지 길이 좋지 않아 우편물을 수상 비행기를 통해 운반했을 정도다.도청 이전 반대 춘천 군민 대회: 일제 강점기 춘천과 비교할 때 여러모로 유리한 조건의 철원은 강원도청 이전을 시도한다. 일제 강점기 때 발간된 당시 신문 기사를 보면 춘천에 소재한 강원도청을 두고다른 지역에서 이전을 시도하려는 움직임과 이에 대응하는 춘천의 모습을 생생하게 엿볼 수 있다.동아일보 1926년 1월 13일 자에는 ‘도청 이전 반대 춘천 군민 대회’에 관한 자세한 기사가 실렸다. 기사 내용을 보면 1월 10일 춘천 군민 대회가 개최되었는데 춘천군내 12개면 단위로 깃발을 앞세우고수천의 군중이 모였는데 기사에서는 춘천 역사 이래 모인 최대 군중으로 묘사하고 있다.- 11 -통일의 눈으로 춘천을 다시보다이날 춘천 군민 대회에서는 3개의 결의 사항이 채택되었는데 내용은 다음과 같다.1. 경성(서울) - 춘천간 철도 개설의 급속 실현을 기함2. 강원도의 행정 집행 기관인 도청의 소재지는 춘천이 최적지임3. 춘천 군민들 각자 지역 발전을 위해 노력함2항과 3항은 의례적인 사항이지만 1항을 보면 도청 이전과 경춘철도와의 연관성을 엿볼 수 있다. 도청이전 반대 군민 대회를 하면서 결의 사항 제1항을 ‘경춘철도’ 개설로 정해 놓은 이유는 당시 춘천에 철도가 개설되지 않아 이로 인해 도청이 옮겨질지 모른다는 일종의 위기의식 때문이다.춘천 군민들의 반발이 거세지자 조선 총독부 내무국(지금의 행정 안전부)까지 나서서 도청이 옮겨지는일은 없을 거라며 사태 진화에 나서기도 했다. 도청 이전 반대 춘천 군민 대회가 열려 경춘철도의 개설을 요구한 것이 1926년인데 실제로 개통된 건 이로부터 13년 뒤인 1939년이다.1939년 7월 동아일보에는 “강원도 심장을 관통하는 경춘철도 개통식”이라는 머리기사로 경춘선 개통을 알리는 기사가 실린다. 총사업비는 당시 화폐로 1천 4백여만 원 정도이고 연인원 264만 명이 공사에 참여했다고 한다. 이 기사는 지역의 자원 개발, 물류 수송, 관광의 발전을 위해 이 철도를 개설했다고 보도했고, 특히 관광과 관련된 코스를 중점적으로 소개하고 있다. 경춘선이 개통 초기부터 관광부문을 많이 염두에 두고 있었음을 짐작해 볼 수 있는 대목이다.경춘선 개통식은 1939년 7월 23일 12시 30분 지금의 춘천역 광장 앞에서 거행되었다. 이에 앞서 서울 성동역에서 오전 8시 25분 경춘선의 첫 열차가 춘천을 향해 첫 출발을 했다. 개통 초기에는 하루에서울-춘천을 왕복 6회 운행했다. 소요 시간은 3시간이고 요금은 3등칸 일반석이 2.57원이었다.경춘선은 개통 이후 지역과 수도권을 연결하는 중추적인 역할을 했으며 경춘선 역 곳곳의 관광지는 여행객들에게 추억을 남기며 지금까지 이어져 오고 있다. 물론 그사이에 전쟁으로 철도 운행이 중지된적도 있고 크고 작은 사고와 노후화로 인해 ‘낙후된 철도’의 이미지를 갖고 있기도 했다. 2010년 경춘선이 수도권 광역복선전철화 되었고 2012년 ITX 청춘 급행열차가 도입되면서 경춘선은 이전과는 다른모습을 만들어 나가고 있다.- 12 -통일의 눈으로 춘천을 다시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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