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기환 지음 / 인물과사상사
이 책은 조선 시대 양반들의 공무원이 되는 과정과 관료 생활의 진짜 모습을 살펴봄으로써 조선 양반
사회의 또 다른 모습을 살펴본다. 저자는 일반적으로 조선의 양반 하면 떠올리는 백성들 위에 군림하
며 호의호식하는 모습이 아니라, 아래로는 백성들을 돌보고 위로는 왕을 보좌하며, 지금의 우리처럼
먹고살기 위해 부지런히 일하는 생활인으로서 살아간 양반들의 또 다른 모습을 살펴본다.
조선의 공무원은 어떻게 살았을까?
권기환 지음
▣ Short Summary
새로운 정부가 출범할 때마다 가장 먼저 하는 일 중 하나가 공직 사회의 대대적인 조직 개편이다. 이는
국정 운영 이념과 행정 조직이 완비되었다고 하더라도 역량 있는 인재를 확보하지 못하면 정책을 집행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참고로 전 세계에서 유례를 찾아보기 어려울 만큼 조선이 단일 왕조로 500여 년
간 존속할 수 있었던 까닭 중 하나도 우수한 인재들로 이루어진 관료 체제 덕분이라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조선 시대에 양반으로 산다는 건 어떤 의미였을까? 조선 시대의 양반은 가문의 영광을 위해 과
거에 급제해야 하는 숙명을 안고 태어났다. 과거는 관료 세계로 나아가기 위해서 반드시 통과해야 하는 필
수 관문이었기 때문이다. 양반들은 과거를 보기 위해 7, 8세에 서당 공부를 시작해 20~30년간 공부에만
매진했는데, 이렇게 오랜 시간 동안 과거에 도전하려면 경제적 뒷받침과 가족의 지원이 필수적이었다.
설령 과거의 관문을 통과하더라도 고위 공무원인 당상관까지 오르기 위해서는 힘든 시간을 또다시 견
뎌야 했다. 수많은 절차 때문에 관직에 나아가는 데에만 한참을 기다려야 했고, 임용된 후에도 험난한
신입 신고식을 거쳐야 했다. 게다가 새벽 일찍 출근하는 고된 직장 생활도 버텨야 했고, 끊임없이 공
부해야 했다. 그리고 때로는 먼 지방 근무도 거부할 수 없었고, 정치적 다툼에서 밀리면 유배 가는 일
도 빈번했다. 그래서 소수만이 정년인 70세까지 순조롭게 근무하며 명예롭게 은퇴할 수 있었다. 봉급
은 생계를 겨우 꾸릴 정도였는데, 적은 봉급을 받으면서도 청빈한 생활을 한 사람이 있는가 하면, 고
리대금업까지 하며 돈만 밝히는 탐욕스러운 탐관오리도 있었다.
이 책은 조선 시대 양반들의 공무원이 되는 과정과 관료 생활의 진짜 모습을 살펴봄으로써 조선 양반
사회의 또 다른 모습을 살펴본다. 저자는 일반적으로 조선의 양반 하면 떠올리는 백성들 위에 군림하
며 호의호식하는 모습이 아니라, 아래로는 백성들을 돌보고 위로는 왕을 보좌하며, 지금의 우리처럼
먹고살기 위해 부지런히 일하는 생활인으로서 살아간 양반들의 또 다른 모습을 살펴본다.
▣ 차례
머리말
1장 양반, 그들은 누구인가?
조선에서 양반으로 살아가기
양반의 탄생
-2-
조선의 공무원은 어떻게 살았을까?
양반과 사대부, 무엇이 다를까?
2장 과거 급제를 위해 책벌레로 살아가다
식을 줄 모르는 학습 열기
기초 교육의 산실, 서당
서울과 지방의 중등 교육 기관
조선 최고의 교육 기관, 성균관
조선 시대 소문난 공부법
과거계의 일타 강사
3장 공무원을 어떻게 뽑았을까?
과거제의 역사
능력보다 가문이 더 중요한 세상
신분의 한계를 뛰어넘은 사람들
등골이 휘는 과거 준비
과거 시험의 관문을 통과하라!
조선의 별별 시험들
목숨이 왔다 갔다 한 답안지 작성
선접꾼과 거벽과 사수, 조선의 커닝 시스템
어사화를 쓰고 금의환향하다!
과거 시험의 귀재들
4장 조선의 통치 시스템
정1품부터 종9품까지, 조선의 관직
조선의 핵심 행정 기관
모두가 선망하는 자리, 청요직
눈에는 눈 이에는 이, 관료들의 기 싸움
조선의 고위 공무원, 당상관
백성을 수탈하면서 시작하는 지방관 생활
가성비가 뛰어난 제도, 암행어사
5장 조선 공무원 탐구 생활
이이와 정약용도 피하지 못한 신고식, 면신례
조선의 관료를 위한 업무 매뉴얼
살아남기 위한 꾸준한 자기 개발
황희에게 오점을 남긴 조선 시대 ‘김영란법’
귀양살이까지 이어진 빈부격차
70세, 은퇴하기 딱 좋은 나이
유배지에서 꽃피운 문학
참고 문헌
-3-
조선의 공무원은 어떻게 살았을까?
조선의 공무원은 어떻게 살았을까?
권기환 지음
양반, 그들은 누구인가?
조선에서 양반으로 살아가기
양반은 원래 조선 시대 문관과 무관을 총칭하는 것으로서 현직 관료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조선 중기
까지는 관료만을 가리키는 말이었지만, 점차 대를 이어 관직이 세습되면서 신분적인 성격을 띠게 되자
지배 신분층을 가리키는 의미로 사용되었습니다. 즉 양반 관료 체제가 정비되면서 기존에 관료의 직을
가진 사람뿐만 아니라, 그 가족과 후손들까지도 양반으로 불리게 된 것입니다.
조선 전기에는 양반의 아들이라도 군역을 부담해야 하는 경우가 있었지만, 16세기 이후부터는 점차 양
반 가문의 후손들이 군역을 면제받는 특권까지 누리게 되면서 신분적 성격은 점차 강화되었습니다. 심
지어 잘못을 저질러 처벌을 받아야 할 때에도 양반들은 특혜를 받았습니다. 관료가 죄를 범한 경우에
는 조사를 거쳐 임금에게 보고한 후에야 구속되었고, 도덕과 인륜을 어긴 강상죄가 아니면 사형에 해
당하는 중죄를 저지르더라도 참형에 처하기보다 사약으로 대신했습니다. 정치적 사건과 연루된 경우에
는 주로 유배형을 받았기 때문에 상황이 풀리기만 하면 언제든지 재기할 수도 있었습니다.
지역 사회에서도 양반은 굳건한 사회적 지위를 유지했습니다. 한곳에 대대로 살았던 그들은 지역마다 향
안이라는 명단을 만들고 대표자를 선출했습니다. 그리고 중앙에서 파견된 수령을 보좌하며 지방 통치의
한 측면을 담당하면서 큰 영향력을 행사했습니다. 또 사회적 네트워크를 통해 집단의 결속력을 강화해 나
갔는데, 그들은 수령을 보좌하는 자문 기관이자 향촌의 자치 기구인 유향소, 풍속 교정과 마을 질서의 안
정을 도모하는 향약, 교육과 선현의 제사를 담당하는 서원을 통해 사회적으로 결집했습니다.
조선의 양반은 유학이라는 사상과 가치를 공유하는 하나의 문화 공동체를 형성했습니다. 그들은 계층
내에서는 경쟁 관계였지만 사회 전체에서 보면 같은 목적과 이익을 추구하는 동반 관계였습니다. 그래
서 관직이나 가문, 지역과 관계없이 서로를 예우했으며 서로의 이익을 보호하고 지켜 주었습니다.
과거 급제를 위해 책벌레로 살아가다
기초 교육의 산실, 서당
양반가 아이들은 가정에서 한문 강독 능력을 기른 다음 7, 8세가 되면 서당에 들어가 『천자문』, 『동몽
선습』등 학문의 초보와 습자를 익힌 뒤, 15, 16세가 되면 서울의 아이들은 사학에, 지방의 아이들은 향교
에 들어가 5, 6년간 『소학』, 『효경』을 거쳐 『사략』과 사서삼경을 공부하고 소과에 응시했습니다. 조
선의 서당 교육은 유교적 가치관을 익히게 하는 것이 최우선 목표였습니다. 유교 이념에 입각한 인간 양
성과 충효를 가장 중요하게 생각했고, 남을 존중하는 인성의 함양을 추구했습니다.
서당에서는 보통 하루에 10~12시간 수업이 진행되었으므로 아침 일찍 서당에 나가 해 질 때가 되어
서야 수업이 끝나는 긴 일정이었습니다. 평소 하루 일과를 보면 아침 일찍 훈장 앞에서 전날 배운 것
-4-
조선의 공무원은 어떻게 살았을까?
을 검사받고 그날 공부 과제를 받았습니다. 오전과 오후에는 당일 배운 내용을 암송할 때까지 낭송하
고 문장의 뜻을 파악하거나 쓰기 연습을 했습니다. 그리고 저녁에는 다른 학생들과 함께 그날 배운 내
용을 서로 묻고 답하거나 다음 날 배울 내용을 예습했습니다. 심지어 야간 수업을 하는 서당도 있었다
고 합니다. 이때는 훈장도 함께 합숙하는 것이 일반적이었습니다.
서울과 지방의 중등 교육 기관
많은 양반가 자제가 모여드는 서울에는 그들을 공부시켜야 할 교육 기관이 필요했고, 그 역할을 담당
하도록 국가가 만든 것이 사학이었습니다. 사학(사부학당)은 서울의 4곳(중학, 동학, 남학, 서학)에 위
치한 중등 교육 기관으로, 성균관에 입학하기 위해 필요한 유학 교육을 담당했습니다. 성균관에서 교
수가 파견되었고, 교육법도 성균관의 것을 그대로 따랐기에 사실상 부속 기관으로 운영되었습니다.
지방에 거주하는 이들을 위한 중등 교육 기관으로는 향교와 서원이 있었습니다. 향교는 행정 조직상으
로는 예조에 소속되어 있었으나, 일차적인 관리는 지방 수령이 책임졌습니다. 교육은 중앙에서 파견된
교관이나 지방 행정 책임자가 임명하는 관리가 담당했습니다. 대략 16세 전후의 학생들이 향교에 입학
했으며, 입학 조건은 그다지 까다롭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사학인 서원의 위상이 올라가자 관학인 향
교는 자연스레 쇠퇴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다가 고종 때에 과거제의 폐지와 함께 교육 기관으로서의
기능은 상실한 채 공자를 모신 사당의 역할만을 수행할 뿐이었습니다.
서원은 선현의 제사를 모시는 ‘사(祠)’와 학생들을 교육하는 ‘재(齋)’가 결합한 곳입니다. 16세기 서원의
사림들이 중앙 정치의 주도권을 장악하면서 그들의 정치적, 학문적 중추 기능을 한 서원이 주목받기
시작했고, 성균관을 중심으로 한 관학이 관리 등용을 위한 출세 수단으로 전락하면서 더욱 위상을 떨
쳤습니다. 하지만 무분별한 설립과 제 역할을 상실한 채 백성을 착취하는 곳으로 변질되면서 지탄을
받다가 결국 1871년(고종 8) 흥선대원군이 47개소만 남기고 전국의 서원들을 철폐했습니다.
조선 최고의 교육 기관, 성균관
『경국대전』에는 성균관을 ‘성현을 봉사하는 사묘의 기능을 겸비하고, 고급 관리 양성을 위한 교육 기
관’으로 규정하고 있습니다. 나라에서는 개국 초기부터 국가 최고 교육 기관으로서 성균관을 중요하게
생각해 토지를 지급하고 노비를 두어 학교 운영을 돕도록 하는 등 물질적인 지원도 아끼지 않았습니다.
성균관의 정원은 조선 개국 초에는 150명이었으나 세종 때 200명으로 증원되었습니다. 참고로 소과에
입격한 유생들은 성균관에 입학해서 문과 급제를 위한 공부를 계속할 수 있었습니다.
성균관의 하루는 아침 식사 후 명륜당에서 유생들이 교수인 학관에게 절을 한 다음 앞서 배운 내용에
대해 질문을 한 뒤 수업에 들어가면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수업은 질의응답식으로 진행되었습니다.
유생들은 주로 과거 과목인 사서오경 등의 유교 경전과 글짓기인 제술을 익혔습니다. 사서오경은 성균
관의 기본 교재였으며 과거 시험의 필수 과목으로서 특히 중요하게 다뤄졌습니다.
유생들의 생활은 수시로 치러지는 시험의 연속이었습니다. 학관일강(學官日講)이라고 해서 매일 학관
이 지정하는 경서의 대목을 외우는 강경 시험을 보고, 열흘마다 학관순제(學官旬製)라는 제술 시험을
쳤습니다. 또한 매달 예조가 주관하는 월강(月講)을 보고, 매년 3월과 9월에는 의정부와 육조에서 실
시하는 제술 시험인 연고(年考) 평가를 받았습니다. 유생들이 고단한 수험 생활을 감내했던 것은 연말
에 시험 결과를 합산해 우수한 자는 추천받아 등용하거나 문과 시험을 볼 때 일부 면제 혜택 등을 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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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공무원은 어떻게 살았을까?
을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성균관의 재학 연한은 제한이 없었으며, 출석 점수인 원점을 따서 초시 응
시 자격을 획득하면 성균관을 나갈 수 있었습니다. 1417년 윤5월에 예조에서 상정한 규정에 따르면,
성균관 유생이 문과에 응시하려면 원점 300점을 따야 했는데, 성균관 식당에서 아침과 저녁 2끼를 먹
어야 원점 1점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이는 곧 300일간 성균관에서 공부해야 함을 의미했습니다.
공무원을 어떻게 뽑았을까?
과거제의 역사
조선 시대 과거에는 문과, 무과, 잡과가 있었는데, 문과에는 예비 시험 성격의 소과가 포함되었고, 소
과는 다시 생원시와 진사시로 나뉘었습니다. 잡과에는 역과, 의과, 음양과, 율과가 있었습니다. 역과에
합격하면 사역원에서 역관으로 생활했고, 의과를 통과하면 내의원과 혜민서 등에서 일했습니다. 음양
과의 합격자는 관상감에서 근무하고, 율과의 합격자는 형조에서 일했습니다. 사회적 분위기와 경제적
부담으로 인해 문과와 무과에는 양반들이 응시했고, 잡과에는 주로 중인과 서얼이 응시했습니다.
문과는 글짓기와 교육을 담당할 관료를 선발하는 시험이다 보니 글짓기의 비중이 높았습니다. 그러나
문과에 급제하기 위해서는 경전뿐만 아니라, 역사, 제도와 문화 등에 대한 폭넓은 이해를 바탕으로 정
해진 형식에 맞추어 글을 지을 수 있는 자질도 갖추어야만 했습니다.
양반들이 주로 응시했던 시험은 생원진사시와 문과(대과)였습니다. 흔히 소과 또는 사마시라고 불리는
생원진사시는 일종의 예비 시험으로 정원은 각 100명이었습니다. 정식 과거가 아니어서 등수 안에 들
어도 합격이라 하지 않고 입격이라고 불렀습니다. 생원시는 유교 경전의 이해도를, 진사시는 문장 능
력을 시험했습니다. 그러다 보니 한정된 교재와 범위에서 출제되는 생원시는 시골 양반들에게 유리했
고, 풍부한 견해와 안목, 화려한 문장력이 요구되었던 진사시는 서울 양반들에게 유리했다고 합니다.
생원진사시에 입격했다고 해서 바로 관직에 나아갈 수 있었던 것은 아니었지만, 유교 사회에서 양반 지식
인으로서의 신분을 유지하는 데에는 효과적이어서 선비들은 시험에 열심히 도전했습니다. 그 결과 생원
진사시의 경우에도 50대 1의 경쟁률을 보였다고 합니다. 과거 제도는 조선 후기로 갈수록 유명무실해지
다가 1894년 5월에 마지막 시험을 치른 뒤, 그해 갑오개혁 때 폐지되었습니다. 과거 제도가 폐지된 이후
에는 고등 문관 시험이 실시되었습니다. 이 시험은 행정관, 외교관, 판사를 뽑는 현대식 고급 관리 시험
이었습니다. 주로 법률 과목과 외국어 능력을 평가했습니다. 이후 1949년 고등 고시와 1973년 행정 고
등 고시 등을 거쳐 2011년부터 지금의 5급 공개 경쟁 채용 시험으로 운영되고 있습니다.
등골이 휘는 과거 준비
예나 지금이나 시험을 준비하는 데 많은 돈이 들어갑니다. 과거 합격자들은 대부분 30대 중반이었고
50세를 훌쩍 넘긴 경우도 꽤 있었다고 합니다. 결국 오랜 기간을 공부에만 전념하려면 필요한 건 충분
한 돈과 가족의 희생입니다. 조선의 수험생들은 과거 준비에 상속받은 재산을 몽땅 바치기도 했고, 이
제 막 결혼한 부부라면 1년에 절반 이상을 떨어져 지내야 하는 고통을 감내해야 했습니다.
한편 무관을 선발하는 무과도 문과와 동일하게 3년마다 실시하는 정기 시험인 식년시와 수시로 개최하
는 부정기 시험으로 이루어져 있었습니다. 식년시는 초시, 복시, 전시의 3단계를 거쳐 최종 28명을 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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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공무원은 어떻게 살았을까?
발했습니다. 그러고 나면 임금 앞에서 무술을 직접 겨뤄 갑과 3명, 을과 5명, 병과 20명으로 순위를
가렸습니다. 그러나 시대 상황에 따라 무과의 선발 인원은 자주 변경되었습니다. 양인이면 누구나 무
과에 응시할 수 있었으며, 천민도 시험을 볼 수 있었습니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겪으며 너무나 부
족해진 병력을 채우기 위한 불가피한 선택이었습니다. 그러나 일반적으로는 양반 가문의 자제들이 무
과에 도전했습니다. 기본적으로 한자를 알아야 했고 병법과 경전 시험도 치렀기 때문에 양반에게 유리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또한 양반들에게는 무과가 문과보다 합격하기 쉬웠기 때문에 공부를 못하더라
도 관직에 진출할 수 있는 기회라는 인식이 강했습니다. 게다가 실기 시험을 대비한 말타기와 활쏘기
를 연습하는 데 많은 돈이 필요했기 때문에 양인이 도전하기 힘들었습니다.
과거 시험의 관문을 통과하라!
관직에 나아가는 방법은 과거, 천거, 음서 등 3가지 제도가 있었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것은
과거였고, 과거의 핵심은 뭐니 뭐니 해도 문과였습니다. 문과는 초시와 복시, 전시의 세 차례 시험을
거쳐야 했습니다. 일반적으로 초시는 9월 초에 성균관, 서울, 지방 등 전국에서 동시에 실시했으며, 그
다음 해 봄 서울에서 성균관 50명, 서울 40명, 지방 150명으로 이루어진 초시 입격자 240명을 대상으
로 복시를 시행해 33명의 합격자를 선발했습니다. 전시는 이 33명을 대상으로 대궐에서 임금이 참석
한 가운데 당시 정치 상황이나 민생과 관련된 대책을 물어 순위를 매기는 최종 시험이었습니다.
합격자는 성적순으로 성명과 인적 사항을 기록했는데, 1등에서 33등까지의 합격자를 갑과ㆍ을과ㆍ병과
로 삼등분해 갑과에는 3명, 을과에는 7명, 나머지 23명은 병과로 배정했습니다. 즉 갑과 1등이 장원이
고, 을과 1등은 4등이며, 병과 1등은 전체 11등에 해당합니다. 한편 시험 문제는 시험일 새벽 시험관
들이 모여 상의해서 출제했습니다. 출제 준비가 모두 끝나면 입문관이 응시자 명부인 녹명책을 보고
응시자를 호명하며 들여보냈습니다. 응시자들은 시험장에 한번 들어가면 끝날 때까지 나가지 못했습니
다. 그리고 시험 문제가 게시판에 게시되면 응시자들은 답안을 작성하기 시작했습니다. 시험 시간은
정해진 것이 없었고 통행 금지 시각인 밤 10시까지만 답안지를 내면 되었습니다.
어쨌든 장고 끝에 답안 작성이 끝나면 수권소에 답안지를 냈습니다. 수권관 두 명과 군졸 여러 명이
제출 순서대로 답안지를 정리하고, 시험 시간이 지나면 더 이상 제출할 수 없도록 즉시 포장이나 멍석
을 답안지 위에 덮었습니다. 채점 과정에서도 공정성을 기하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봉미법이라고 해서
응시자의 인적 사항이 기록된 답안지 부분을 3~4번 말아 접은 다음 실로 꿰매어 시험관이 볼 수 없도
록 했습니다. 인적 사항을 기재하는 방식도 엄격한 형식이 정해져 있어서 내용을 누락시키거나 불필요
한 사항을 쓴 경우에는 합격이 취소되었습니다.
조선의 통치 시스템
정1품부터 종9품까지, 조선의 관직
『경국대전』에 의하면 중앙 관제는 크게 문관과 무관으로 나뉘고, 둘은 다시 내와 외의 직으로 나뉘었
습니다. 품계는 종9품에서 정1품까지 모두 18개 등급이 되었고, 품별로 더 세분화된 계를 두고 운영했
습니다. 이 중 정1품부터 종6품까지는 품마다 2개의 계를 둔 반면, 정7품 이하는 1개의 계만을 두었습
니다. 그리고 4품 이상은 ‘~대부’, 5품 이하는 ‘~랑’으로 불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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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공무원은 어떻게 살았을까?
한편 관과 직은 이와는 다르게 구분했습니다. 정3품을 기준으로 크게 당상관과 당하관으로, 6품을 기
준으로 다시 참상관과 참하관으로 구분했습니다. 여기서 당상은 조정에서 업무를 볼 때 대청에 올라가
의자에 앉을 자격을 갖춘 자를 가리킵니다. 즉 임금과 함께 중대사를 논하고 정치적 책임이 있는 관서
의 장관을 맡을 자격 요건을 갖춘 최고위 관료층인 것입니다. 그리고 6품으로 승진하면 지방 수령으로
나아갈 자격이 주어졌고, 참상관은 반역, 불효, 살인 같은 강상죄를 짓지 않는 한 관직을 빼앗지 않았
습니다. 7품 이하의 참하관은 관청의 실무를 담당하는 하급 관리였습니다.
과거 시험 급제자 중 11~33등에 해당하는 병과는 정9품, 4~11등에 해당하는 을과는 정8품, 갑과 2등
과 3등은 정7품의 관직에 임용되었습니다. 그리고 갑과 1등인 장원은 종6품 관직을 제수받았습니다.
종6품은 지방 현감에 해당하는 지위였기 때문에 이는 파격적인 대우일 뿐 아니라 9품에서 6품까지 승
진하는 데 대략 8~10년이 걸리므로 동기들보다 엄청 앞서가는 것이었습니다. 제도적으로 장원에게는
종6품직을 제수하게 되어 있었지만 실제로는 중앙 관직을 내리기도 해, 정6품인 육조의 좌랑 등에 임
용되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그만큼 장원 급제자를 더 존중하고 우대했던 것입니다.
한편 문반과 무반은 동일한 지위로 규정되어 있었습니다. 그러나 실제적으로는 문반이 무반에 비해 정
치적으로나 사회적으로 더 대접받았습니다. 국정을 논의하고 집행하는 의정부와 육조의 당상관은 거의
문반으로만 임명되었고, 인재를 추천하거나 각종 국가 행사에 참여하는 경우에도 무반보다 높은 대우
를 받았습니다. 무인의 품계는 정3품 절충장군이 가장 높았기 때문에 정2품 이상의 관직은 문인이 거
의 독차지했습니다. 따라서 군의 최고 통솔권도 문인이 가지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제한된 관직 수에
비해 관직을 받고자 하는 사람이 많아서 관직은 자주 교체되었는데, 이는 장기 집권을 통한 권력자의
출현을 막고 중앙 집권 체제를 유지하려는 목적과도 관련이 있었습니다.
조선의 핵심 행정 기관
최고 행정 기관은 의정부였는데, 의정부는 모든 관리를 통솔하고 행정 업무를 총괄 처리하는 일을 담
당했습니다. 의정부의 삼정승은 업무와 역할이 달랐는데, 영의정은 전체 행정 기관을 총괄했고, 좌의
정과 우의정은 각각 이ㆍ호ㆍ예와 병ㆍ형ㆍ공의 육조 업무를 분담해서 관장했습니다. 육조는 의정부에
모든 업무를 보고했고, 의정부는 이를 검토해서 임금의 결재를 받은 후 다시 육조에 지시했습니다.
육조는 행정 업무를 6개로 구분해 사무를 분담했으며, 여러 소속 부서와 관청을 운영했습니다. 각 관
서는 고위 관원인 당상관과 실무자인 낭관으로 구성되었고, 지위와 책무가 엄정하게 구분되었습니다.
예를 들어 인사를 관장하는 이조는 관리 임명을 맡아보는 문선사, 직위를 부여하는 고훈사, 근무 성적
을 평가하는 고공사를 두었는데, 각 부서에는 정랑 1인과 좌랑 1인을 배치해 업무를 처리했습니다.
이 밖에 특수한 업무를 담당하는 기관으로 의정부와 육조의 지휘ㆍ감독을 받지 않는 승정원, 사헌부,
사간원, 홍문관 등이 있었으며, 서울을 관장하는 한성부와 지방을 책임지는 8도가 있었습니다. 비록
이름은 다르지만, 조선과 현재의 행정 기관들은 역할과 담당 업무에서 비슷한 면이 많습니다. 한편 조
선의 핵심적인 업무를 담당한 관청들은 경복궁의 정문인 광화문 앞에 위치해 있었습니다. 광화문을 중
심으로 왼쪽에는 의정부, 이조, 호조 등이 있었고, 오른쪽에는 사헌부, 병조, 형조 등이 자리 잡았습니
다. 주요 관청일수록 입궐 빈도수가 높았기 때문에 접근성이 뛰어난 곳에 위치해 있었습니다.
조선의 고위 공무원, 당상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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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공무원은 어떻게 살았을까?
현재의 고위 공무원단 제도는 정부의 정책 결정 및 관리에 있어서 핵심적 역할을 담당하는 실ㆍ국장급
공무원을 범정부적 차원에서 활용하기 위해 운영하고 있는데, 1,500여 명의 중앙 부처 국장급 이상 공
무원들이 고위 공무원단에 속해 있으며, 5급 공채로 공무원 생활을 시작하더라도 보통 20년은 지나야
고위 공무원이 될 수 있습니다. 조선 시대로 치면 당상관이 비슷한 관직입니다. 일단 당상관이 되면
관료를 추천할 수 있는 인사권, 소속 관료의 근무 실적을 평가할 수 있는 포폄권, 군사를 지휘할 수 있
는 군사권 등의 주요 권한을 행사할 수 있었습니다. 또한 의복이나 가마 사용에서도 당하관과 구별되
었습니다. 예를 들어 영조 때 관복 기준을 보면, 당상관은 분홍색을 입고 당하관은 빨간색을 입도록
해 멀리서도 명확하게 직급을 구별할 수 있었습니다. 그뿐 아니라 당상관은 퇴직 후에도 일정 부분 녹
봉을 계속 받고 중요 국정에 자문하거나 국가 행사에 참여할 수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당상관에 오를 수 있었을까요? 문과 급제자는 일단 참하관을 제수받아 근무 일
수를 채워야 승진이 가능했습니다. 참하관들은 450일의 근무 일수를 채우면 한 단계 승진하지만, 참상
관들은 900일을 근무해야 다음 단계로 승진할 수 있었습니다. 만약 20세에 종9품으로 관직을 시작했
다고 하면 60세가 되어서야 정3품에 오를 수 있었습니다. 즉 당상관까지 대략 40년이 걸린다는 계산
이 나오게 됩니다. 일반적인 관료라면 현실적으로 4품 이상으로 올라가기 어려웠고, 왕의 특별 명령이
나 과거에 급제한 사람이 아니면 당상관이 되기는 힘들었습니다. 다만 삼사(사헌부, 사간원, 홍문관)와
같은 청요직을 지낸 사람은 승진이 빨라 비교적 쉽게 당상관이 될 수 있었습니다. 게다가 이 자리에
오르려면 실력뿐만 아니라 가문과 인품에도 문제가 없어야 했습니다.
백성을 수탈하면서 시작하는 지방관 생활
조선 시대의 관직은 서울에서 근무하는 경관직과 지방에서 일하는 외관직으로 나뉘었는데, 지방관의
핵심은 관찰사(방백, 감사)와 수령(부윤, 군수, 현감)이었습니다. 관찰사는 지방의 행정 책임자로서 왕
을 대신해 수령을 통솔하고 감독했고, 수령은 한 지역을 관할했습니다. 참고로 중앙 관리들은 힘든 지
방 근무를 꺼렸습니다. 생활 여건이 열악했을 뿐만 아니라 교통이 불편하다 보니 오가는 일도 위험했
고 끊임없이 이동해야 하는 바쁜 일정은 늘 건강을 위협했기 때문입니다.
한편 지방으로 발령을 받은 관리는 떠나기 전에 임금에게 하직 인사를 해야 했습니다. 문제는 인사를
하러 궁궐에 들어갈 때부터 여러 관리에게 일종의 통과세를 내야 했다는 것입니다. 적게는 60냥에서
많게는 300냥이 들었다고 하는데, 당시 300냥이면 쌀 90가마니에 해당하는 큰돈이었습니다. 궁궐 관
리들은 돈을 충분히 주지 않으면 궁궐에 들여보내 주지 않았고 욕설을 하거나 시비를 걸기도 했는데,
부당했음에도 이들의 봉급이 적었기 때문에 통과세를 용인해 주는 게 관례였다고 합니다. 그래서 지방
으로 가는 사람들은 발령지에 미리 연락해서 통행세로 쓸 돈을 가져오라고 지시했습니다. 물론 그 돈
은 지역 주민들에게 빼앗거나 상납 받은 돈이었을 가능성이 큽니다.
임금에게 하직 인사를 드리고 나면 이번에는 자신을 지방관으로 추천한 여러 관리를 만나서 작별 인사
를 했습니다. 이때도 감사 사례를 하거나 온갖 청탁을 해야 했습니다. 또 발령지로 가는 길에도 많은
돈이 필요했습니다. 그곳에서 쓸 물품을 챙기고 같이 갈 사람을 정해야 했습니다. 그런데 동행할 사람
의 숫자가 많을수록 짐은 늘어났고, 짐이 많으면 당연히 짐을 옮길 말도 늘어났습니다. 나라에서는 15
마리의 말을 빌릴 정도의 돈을 주었는데, 그 정도로는 턱없이 부족했다고 합니다. 이때도 발령지의 백
성들이 부담한 돈을 사용했습니다. 참고로 수령으로 발령받으면 향리가 관리와 마을 대표들을 데리고
서울로 올라와 수령에게 인사했고, 이때 돈을 갖다 바쳤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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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공무원은 어떻게 살았을까?
수령의 임기는 5년이었지만 대부분은 그보다 짧게 근무하다가 떠났습니다. 그러다 보니 지방 사정을
잘 아는 향리들의 권한이 강해졌고 백성들은 그들의 눈치를 살필 수밖에 없었습니다. 게다가 무능한
수령일수록 모든 업무를 향리에게 위임하는 경향이 강했으며, 이런 현상은 혼탁한 조선 후기로 접어들
면서 더욱 심해졌습니다. 대부분의 향리는 지역 사회에 든든한 경제적 기반을 구축하고 있어서 정해진
봉급이 없었음에도 생계에는 큰 어려움이 없었습니다. 그렇지만 이 때문에 오히려 백성을 괴롭히고 부
정부패와 결탁할 가능성이 아주 높았습니다. 이에 정약용은 『목민심서』에 잘못된 현실을 개탄하며 향
리를 잘 단속해야 한다고 경고하기도 했습니다.
한편 8도에는 종2품인 관찰사를 파견해 관할하도록 했는데, 관찰사의 임기는 1년 정도였습니다. 관찰사
는 관내의 수령과 관리를 만나 공무 수행의 적절성 등을 점검했습니다. 그러나 도의 여러 지역을 끊임없
이 돌아다니는 생활은 힘들고 지치는 일이었습니다. 관찰사는 해마다 두 차례씩 지방 관리의 근무 성적을
매겼는데, 이때 상ㆍ중ㆍ하 3등급으로 매겨지는 근무 성적은 지방관들의 인사 이동을 좌우하는 중요한
근거 자료로 활용되었습니다. 그러니 지방 수령들도 근무 성적 평가 시기에는 긴장하고 민감해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관찰사가 지방 수령들과 한통속이 되는 경우도 발생했습니다. 정약용도『목민심
서』에서 관찰사와 수령들이 결탁하는 행태에 대해 강력히 비판한 바 있습니다.
조선 공무원 탐구 생활
이이와 정약용도 피하지 못한 신고식, 면신례
조선 시대에도 과거에 급제한 후 관리가 되면 면신례라는 신고식을 거쳐야 했습니다. 신참 관료들은
관직에 제수되는 즉시 허참례라는 일차 향응을 베풀어 선배 관료들에게 소속을 허락받고, 며칠 뒤에
다시 성의를 표시하는 면신례를 거쳐야 했습니다. 허참이나 면신을 위한 잔치에는 광대와 기녀들이 필
수적으로 따랐고, 밤새도록 술과 노래, 춤을 포함한 풍류를 즐겼는데, 잔치가 끝나는 새벽에는 참석자
전원이 유생들의 학문적 자부심을 담은 「한림별곡」을 불렀다고 합니다.
일단 신참이 들어오면 선배들은 그를 말석에도 끼워 주지 않았습니다. 동료나 사람 취급을 하지 않은
것입니다. 신입 관료들은 면신례가 끝날 때까지 50일 동안 얼굴에 분칠을 한 채 다 떨어진 옷을 입고
선배들을 찾아다니며 온갖 수모를 겪어야 했습니다. 어쩌다 인사라도 하려고 찾아가면 어떤 선배는 돌
아앉아 맞이하기도 했습니다. 심지어 금품을 상납하기도 했는데, 이런 경우에는 관직 생활이 순탄하게
흘러갔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에는 조직에서 견디기 어려웠습니다. 무려 9번 장원에 빛나는 이이도 신
고식을 견디지 못해 면신이 이루어지지 않아 낙향했을 정도로 고생했습니다. 신고식에서 선배들의 지
시를 따르지 않아 미움을 산 정약용도 나중에는 본인의 행동을 해명하는 편지까지 써야 했습니다.
면신례는 가혹 행위뿐만 아니라 엄청난 비용도 문제가 되었습니다. 가산을 탕진할 정도로 많은 돈이 들
었고, 심한 경우에는 이 때문에 부유한 장사치 집의 데릴사위로 들어갔다고도 합니다. 면신례는 문과에
급제한 최고 엘리트 집단에서 시작된 일종의 험난한 통과 의례였습니다. 여기에는 특권층이 되기 위한
좁은 문을 통과했다는 것과 장차 국가를 이끌 엘리트들이 결속을 다진다는 의미가 동시에 내포되어 있
고, 가혹한 통과 의례를 통해 위계질서를 다잡고 동료 의식을 강화하려는 목적도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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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공무원은 어떻게 살았을까?
조선의 관료를 위한 업무 매뉴얼
누구나 처음에는 일이 낯설고 어려운 법입니다. 따라서 업무 매뉴얼 같은 것이 있다면 일하기에 한결
수월할 것입니다. 조선 시대에도 업무에 익숙하지 않던 신입 관리들을 위한 책이 있었습니다. 일을 살
핌에 필요한 지식을 요령 있게 뽑아서 만든 책이라는 뜻의 『고사촬요』인데, 이 책은 1554년(명종 9)
한림학관으로 일하던 어숙권이 처음 만들었습니다. 이름대로 업무와 일상생활에서 손쉽게 활용할 수
있는 지식이나 규정 등을 담고 있어서 언제라도 쉽고 편리하게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이 책은 1771
년(영조 47)까지 200년 넘게 12차례 수정을 거쳐 계속 발간되었습니다. 처음에는 2권이었던 책의 분
량도 나중에는 15권까지 늘어나게 되었습니다. 초반에는 외교와 행정 업무 중심으로 기술하다가, 이후
에는 실생활에 활용할 수 있는 의학, 음식, 술 등에 관한 정보도 많이 포함했습니다.
그럼 조선의 관료들은 어떻게 일했을까요? 현재 중앙 부처 공무원의 공식적인 근무 시간은 아침 9시
부터 오후 6시까지입니다. 물론 바쁠 때에는 초과 근무도 자주 하고, 심지어 밤샘 근무를 할 때도 심
심찮게 있습니다. 그런데 조선의 공무원들은 지금보다 더 일찍 출근했습니다. 조선의 관료들은 평상시
에는 묘시(오전 5~7시)에, 겨울에는 진시(오전 7~9시)에 출근했고, 출근부인 공좌부에 서명하는 것으
로 업무를 시작했는데, 공좌부에 기록되는 출근 일수는 근무 성적 평가와 승진에 반영되었습니다.
한편 중앙 관료들은 궁궐에서 열리는 정기 조회에 참여했습니다. 매월 1일과 보름에 축하 조회가 열렸
고, 매월 4번(5, 11, 21, 25일) 조회가 정기적으로 열렸습니다. 조회에는 모든 관리가 정복을 입고 궁궐
에 들어가 임금에게 인사를 올려야 했습니다. 참고로 궁궐의 정기 조회는 보통 아침 5시쯤에 열렸는데,
당연히 관료들은 이보다 더 일찍 일어나서 준비해야 했습니다.
그리고 대부분의 관청은 유시(17~19시)에 퇴근을 했고, 겨울에는 신시(15~17시)로 앞당겨졌습니다.
퇴근 후 관료들은 자연스럽게 술자리를 마련했고, 부서 내외의 모임이 자주 열렸습니다. 한편 많은 관
서에서는 중하위직 관원들이 담당하는 숙직 제도를 두었습니다. 숙직은 일반적으로 자리를 지키는 정
도의 일이었으나, 홍문관 관원들은 간혹 임금 앞에 나가서 학문을 논하는 약식 경연인 야대에 참석해
야 할 때도 있어 엄청난 부담감을 느꼈다고 합니다.
재임 중인 관료들의 근무 성적을 매기는 것을 포폄 고과라고 합니다. 1년에 2차례 실시했는데 중앙은
소속 기관의 당상관들이, 지방은 관찰사가 포폄권을 행사했습니다. 부하 직원의 실적이나 근무 태도를
가장 잘 알고 있는 직속 상관에게 근무 성적 평가 권한을 부여함으로써 관료 사회의 질서 체계를 확립
하고자 한 것입니다. 총 10번 고과해 10번 모두 상이면 1계급 올리지만, 2번 중이면 좌천을, 3번 중이
면 파직하도록 했습니다. 포폄 성적은 인사 발령에 반영되었습니다.
한편 관리들은 하지나 동지처럼 한 달에 2번 있는 절기에 휴가를 받았습니다. 또한 연간 1~3회 지방
에 거주 중인 부모를 찾아뵐 수 있는 부모 방문 휴가도 사용할 수 있었습니다. 지방 방문은 일주일을
기준으로 왕복 거리를 감안해 휴가 기간을 추가로 지급받았다고 합니다. 당상관 이상의 고위 관료들은
조상의 산소를 돌본다는 명분으로 5년마다 ‘소분’이라는 일주일 정도의 추가 휴가도 받을 수 있었습니
다. 이 외에 선왕의 제사일 같은 국경일에도 쉬었습니다.
살아남기 위한 꾸준한 자기 개발
조선의 관리들은 과거 합격 후에도 계속되는 공부의 늪에서 벗어날 수 없었습니다. 여러 시험과 숙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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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공무원은 어떻게 살았을까?
를 통과해야 했기 때문에 공부를 게을리 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부정한 방법으로 과거 시험에 합격
한 관리들은 간단한 글조차 제대로 쓰지 못하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한편 젊은 관리 중에서 학문이 뛰
어난 사람을 뽑아 책 읽는 휴가를 주어 오로지 공부에 전념하게 하는 서재인 독서당도 있었습니다. 독
서당은 세종 때 젊은 관료 중에 재주가 뛰어난 자들에게 유급 휴가를 주어 책을 읽게 한 사가독서제에
서 유래했습니다. 독서당에 선발된 사람은 총 48차례에 걸쳐 320명이었다고 합니다. 독서당은 국비로
운영되었으며, 임금의 특별 배려를 받았습니다. 독서당은 언제나 궁중에서 만든 음식들로 가득했고,
궁궐에서는 좋은 술과 안주 등 물품이 부족하지 않도록 계속 지급했습니다. 참고로 신숙주, 이황, 유성
룡 같은 조선을 대표하는 학자들이 독서당을 거쳐 갔습니다.
70세, 은퇴하기 딱 좋은 나이
조선 시대에는 몇 살 때까지 공무원으로 일할 수 있었을까요? 조선은 70세를 은퇴 시기로 규정했습니
다. 관료들은 70세가 되면 관직을 반납한다는 뜻으로 사직을 청하는 상소를 올렸는데, 이를 ‘치사’라고
합니다. 사직이 받아들여지면 관직 명부에서 이름이 지워지고 녹봉도 더 이상 받지 못했습니다. 그러
나 그것은 규정일 뿐 임금이 은퇴하지 못하게 막고 계속 일을 시키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이런 경우에
는 궤장(지팡이와 안락의자)을 내려 관직에 더 머물게 했습니다. 결국 중요한 건 임금의 마음이었습니
다. 실제로 세종 때 오랜 기간 재상을 역임한 황희와 맹사성은 각각 87세와 76세까지 일했습니다. 게
다가 이들은 은퇴한 뒤에도 중요한 업무가 있을 때는 여러 차례 자문에 응해야 했습니다.
한편 노인을 존경하는 기풍을 만들고 편안한 여생을 보내도록 하기 위한 제도도 있었는데, 이름하여
기로소라는 명예 기구입니다. 관리 중에서 문과 출신의 정2품 이상 전현직 문관으로 나이가 70세 이상
인 경우에만 기로소에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사실 기로소는 일종의 경로당과 같은 친목 기구일 뿐,
특별한 기능을 가지고 있지는 않았습니다. 다만 임금의 탄생일과 설날, 나라에 경사가 있거나 임금이
행차할 때 모임 행사를 갖거나 간혹 중요한 국정 논의에 참여해 자문에 응하는 정도였습니다.
조선을 통틀어 기로소에 들어간 사람은 700여 명이었습니다. 그중 최고령은 98세의 윤경과 97세의 이
구원이었습니다. 참고로 임금들도 기로소에 들어갔는데, 70세가 되지 않아도 입소할 수 있었습니다. 태
조는 60세에, 영조와 고종은 51세에 기로소에 들어갔습니다. 아무튼 조선의 관리들은 퇴직 후에 기로
소에 입소하는 것을 개인과 가문의 큰 영광으로 여겼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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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공무원은 어떻게 살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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