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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영화,리뷰,

새로운 공부가 온다

by Casey,Riley 2020. 6.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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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불확실성의 시대를 돌파하는 인문학적 생존 기술을 알려준다. 저자는 AI와 인간이 공존하는 시대에 필요한 것은 새로운 지식을 습득하는 것뿐 아니라, 새로운 지식을 통찰하고 활용하여 연결할수 있는 안목을 갖는 것인데, 이는 벤치 인사이트를 통해 확보될 수 있으며, 벤치 인사이트는 개인의 유니크니스를 필요로 하며, 벤치 인사이트와 유니크니스는 인문학적 사유에서 비롯된다고 역설한다. 
 
새로운 공부가 온다 


▣ Short Summary 
 
한창 경기 중인 운동선수가 있다. 경기가 생각대로 풀리지 않자 선수는 경기장을 빠져나와 벤치에 앉는다. 한숨 돌리고 전체 경기를 관망한다. 그러자 경기 중에는 인식하지 못했던 자신의 문제와 단점이 눈에 들어온다. 이것이 벤치 인사이트(Bench Insight)인데, 운동선수가 필드에서 벗어나 자기 자신을 정비하고 단련시키듯 급격하게 변화하는 세상에서 나를 지키고, 성장시키는 성찰의 기술을 말한다. 
 
이 책은 불확실성의 시대를 돌파하는 인문학적 생존 기술을 알려준다. 저자는 AI와 인간이 공존하는 시대에 필요한 것은 새로운 지식을 습득하는 것뿐 아니라, 새로운 지식을 통찰하고 활용하여 연결할수 있는 안목을 갖는 것인데, 이는 벤치 인사이트를 통해 확보될 수 있으며, 벤치 인사이트는 개인의 유니크니스를 필요로 하며, 벤치 인사이트와 유니크니스는 인문학적 사유에서 비롯된다고 역설한다. 
 
그리고 세계는 있는 그대로 존재하지 않으며 우리가 바라보는 대로 존재하기 때문에, 삶이 좋아지려면 다른 사람의 관점을 이해하고 그들과 함께할 준비가 되어야 하는데, 그 준비를 위해 인문학을 공부해야 한다고 말한다. 아울러 인문학은 우리가 세계를 어떻게 바라봐야 하는지, 어떻게 바라볼 수 있는지를 탐구하게 하며, 우리 마음속에 좋은 관점을 길러주고 훌륭한 태도를 익히게 한다고 말한다. 
 
▣ 차례 
 
서문 
 
1부 새로운 지식이 온다 벤치맨, 지식의 경계에 서다 변방적 지식인이 되자 지식의 숲에서 길을 잃자 인문학, 지식에 날개를 달다 사람을 읽고 변화에 접속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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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부 벤치 인사이트를 키워라 메타인지를 키워라 철학이 필요한 시대 호모나랜스 본능을 깨워라 벤치 인사이트가 강해지는 글쓰기 시를 아는 사람이 벤치 인사이트를 얻는다 벤치 인사이트, 간결한 지식이 아름답다 
 
3부 어떻게 배울 것인가 플랫폼, 공부의 장을 펼쳐라 새로운 독서, 디지털 리터러시가 필요하다 창의성, 어떻게 키울 것인가 지식은 현실을 만나 힘이 된다 공부는 사건이다 학교를 넘어 자기 주도 공부로 
 
4부 벤치 노마드를 위하여 유니크니스가 경쟁력이다 학습 민첩성을 확보하자 지식의 죽음과 절학무우 스스로를 추방하라 앎은 살아 있다 과학과 인문학은 어떻게 만나는가 
 
함께 읽으면 좋을 책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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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지식이 온다 
 
벤치맨(Bench man), 지식의 경계에 서다 새로운 경계인, 벤치맨: 쿠르트 레빈은 과거 자신이 속했던 집단을 버리지 못하고, 새로운 집단에도 적응하지도 못하는 사람을 ‘경계인’이라고 했는데, 우리는 모두 경계인이다. 한편 레이 커즈와일은 『특이 점이 온다』에서 2030년 이후 뇌의 신피질에 클라우드를 연결하는 하이브리드 두뇌의 시대가 올 것이 라고 주장했는데, 그의 주장이 아니더라도 우리는 이미 기계와 하나가 되고 있다. 예로 우리는 모르는 것이 있으면 네이버나 구글에서 검색으로 알아내는데, 검색 도구는 스마트폰이다. 우리는 스마트폰과 한몸처럼 움직인다. 세상 어디서든 접속할 수 있다는 점에서 스마트폰은 유비쿼터스적이다. 점점 우리는 새로운 지식을 얻기 위해서 공부하는 것이 아니라, 지식을 꺼내어 사용하기 위해 배우게 될 것이다.
생각하는 인간이 아닌 꺼내는 인간, 그것은 새로운 경계인이자 벤치맨이다. 
 
벤치맨, 경계에 서다: 벤치맨은 현실의 시간과 벤치의 시간을 구분할 줄 안다. 현실에서 잠시 물러나 벤치에 앉아 삶을 돌아본다. 벤치는 단순히 쉬는 곳이 아니다. 전체 경기를 살피고 새로운 경기를 준비하는 곳이다. 벤치에 앉으면 플레이어가 아닌 코치가 되고 철학자가 된다. 경기에 머물면서도 그것에 집착하지 않는다. 그는 경기 중 뛸 수 있는 시간이 줄어들 것을 안다. 나보다 강한 역대 최고급이 나타났다는 것도 안다. 그 주인공은 인공지능이다. 경기를 풀어가려면 경기를 떠날 줄 알아야 한다. 스스로를 벤치로 내몰아야 한다. 그것은 불안한 일이고 괴로운 일이다. 하지만 필요한 일이다. 
 
진리는 길이 없다: 경계인은 이쪽 조직에도 저쪽 조직에도 완전히 몸담지 못한 사람이다. 하지만 덕분에 한쪽에 발을 담그고 다른 쪽을 들여다볼 수 있다. 자기 스스로 문제를 부여안고 대답을 찾아다니며 균형을 유지하기 위해 끊임없이 고민하고 흔들리고 좌절한다. 헤매고 좌충우돌하지만 그러면서도 자기 만의 뭔가를 찾아간다. 그는 자기만의 철학, 규율, 태도 등을 얻는다. 그는 경계를 견디고 긴장을 즐길수 있는 사람이다. 그렇게 경계인은 벤치맨이 된다. 벤치맨은 하나에 매몰되지 않는다. 그들은 길을 모른다. 단지 진리를 추구할 뿐이다. 덕분에 그들은 어떤 길이든 갈 수 있다. 
 
경계인의 빛과 그늘: 경계인은 뛰어난 적응력을 가졌다. 경계인은 기성세대의 규칙이나 신념을 따르지 않고, 과거의 것에 불편함을 느끼고 새로운 것을 받아들이는 데 익숙한데, 그들이 한 집단이나 한 분야에 소속된 존재들이 아니기 때문이다. 경계인은 뭐든 할 수 있는 가능성과 적응력을 예비하는데, 이것이 경계인의 빛이다. 한편 문과와 이과를 통합하려는 움직임도 경계인의 양성과 관련이 깊다. 경영 학만 알고 생물학은 모르는 학자, 전자공학은 알고 인류학은 모르는 전문가들이 아닌 다양한 분야의 학문을 통섭할 수 있는 인간을 양성해야 한다는 사회적 압력이 교육계에 침투한 결과다. 교육은 미래고, 공부는 가능성이다. 나와 우리, 이기심과 이타심, 불안과 확신, 시인과 과학자, 밥벌이와 자유의 경계에 선 인간, 모순의 날 선 긴장 속에서 사유를 지속하는 인간이야말로 미래의 가능성이다. 
 
변방적 지식인이 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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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자와 변방: 동아시아 역사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사람은 공자인데, 그는 변방적 지식인이었다. 그의 사유는 중심이 가진 체계나 경전적 고착이 없다. 그의 사상이 유학 혹은 유교로 체계화되고 교조화된 것은 그의 노력 때문이 아니다. 한나라 이후 유학이 중심부를 차지하면서 체계를 세우고 세상을 해석 하고 다스리는 기준으로 작용하면서 일어난 일이다. 한편 변방적 지식이 중심부의 주류적 지식으로 변질되는 과정은 주변이 중심을 장악하는 과정이기도 한데, 문제는 중심을 장악하고 주류가 된 지식은 현실적 문제해결력을 상실하기 쉽다는 것이다. 
 
변방의 의미: 여기서 변방은 지역적 의미보다 내용적 면이 중요하다. 주류에 포획되지 않고 고유한 것을 지키며, 그것을 밀어붙여 독특함으로 완성하는 것이 변방적 지식의 특성이다. 그들은 한곳에 머물지 않고 새로운 것들을 맞이하며 끊임없이 변한다. 익숙한 것과의 결별과 기존 체계로부터의 탈주를 통해 과거와 선을 긋고 새로운 접속을 시도한다. 그래서 그들에게 고립과 정착은 쇠퇴와 멸망이다. 그들에게는 큰 틀은 있지만 체계적인 규범은 없고, 정체성은 가졌지만 그 내용은 열려 있다. 
 
지식의 죽음: 중심적 지식은 정답에 매몰되어 다른 가능성을 보지 못하도록 만든다. 처음 인문학을 공부하는 사람들은 ‘왜 정답이 없냐’라고 묻는다. 수학과 과학처럼 하나의 정답을 제시하는 학문에 익숙 해진 탓이다. 이런 사고에 익숙해지면 하나의 정답을 찾아야 한다는 생각에 창의적 해답들을 찾지 못한다. 중심적 지식은 현실적 문제해결력이 취약하다. 반면 변방에서 등장한 지식이 주류가 될 수 있었던 것은 시대의 문제를 해결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기 때문이다. 문제는 그 이후다. 세상은 변하고 시대에 따라 직면하는 문제의 성격이 다른데, 과거의 패러다임과 이전의 지식으로 변해버린 세상의 문제를 해결하려니 쉽지가 않다. 현실적 문제해결력을 상실할 만큼 지식이 고착되었기 때문이다. 
 
경계인으로 산다는 것: 변방적 지식인은 경계인인데, 경계인은 두 가지 의미가 있다. 하나는 서로 다른 영역의 경계(境界)에 머문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자신을 경계(儆戒)한다는 의미다. 변방적 지식인은 자기 것만을 고집하지 않는다. 그들은 내 생각이 옳다는 절대적 신념이 없다. 그렇기에 다른 지식과 쉽게 접속하고 융합한다. 또한 여러 지식의 경계에서 긴장을 견뎌낸다. 그 과정에서 자신을 경계한다.
배우고 익힌 것이 고착되어 절대적인 기준이 되지 않는지를 살핀다. 부와 권력과 결탁하여 곡학아세 (曲學阿世)하지 않는지를 경계한다. 변방적 지식은 권력과의 타협을 통해 중심부로 진입하려는 유혹을 견뎌야 한다. 타협을 통한 유입은 포획이나 마찬가지다. 신선하고 생명력 넘치던 지식은 곧 부와 권력의 향유에 백기를 들고 죽어갈 것이다. 우리는 이런 경우를 수없이 목격했다. 
 
인문학, 지식에 날개를 달다 지식의 넓이: 창의성 논의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이 인문학이다. 인문학은 사람을 탐색한다. 인생의 문제에 대한 통찰을 추구한다. 그 과정에서 기존의 것을 다르게 보고 새롭게 생각하기를 시도한다. 철학은 기존의 생각을 의심하는 학문이다. 의심을 통해 진리에 도달하는 것이야말로 철학이 추구하는 바다.
의심은 창의적 활동의 시작으로, 새로운 해석과 이해의 가능성을 열어준다. 기업이 인문학을 강조하는 이유도 이런 가능성과 연관된다. 한편 인문학은 기존의 콘텐츠를 두 가지 방향(지식의 양을 늘리는 것과 지식의 깊이를 더하는 것)으로 증폭시킨다. 그리고 또 인문학은 하나의 콘텐츠를 다양하게 보고 활용할 수 있는 상상력과 감성을 제공하여, 콘텐츠를 풍부하게 만들어준다. 
 
정신적 풍요: 인문학은 사물을 하나의 관점에서 보지 않고 다르게 보기를 시도하고 허용한다. 이것은 타자에 대한 이해와 수용력을 높이며, 그렇게 되면 스트레스가 적고 인간관계가 원만해진다. 또 폭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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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 수용력은 사물을 다르게 보고 연결하는 창의력으로 이어진다. 인공지능 시대에도 사람은 관계 속에서 살아가야 한다. 그러자면 품격 있고 매력적인 사람이 훨씬 유리한데, 그 중심에 인문학이 있다. 
 
사람을 읽고 변화에 접속하라 변화가 공부다: 우리의 사고와 행동을 바꾸는 패러다임의 변화는 우리가 모르는 사이에 세상으로 퍼져 나가고 어느새 모든 것을 바꾸어놓는다. 따라서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세상의 변화를 읽고 파악할 수 있는 능력이다. 고정된 진리가 없는 세상에서 변화를 감지하는 것은 중요하다. 공부는 진리를 찾는 것이 아니다. 변화의 흐름을 알고 그것을 읽는 것이다. 변화가 곧 공부다. 
 
변화와 유니크니스: 변화를 잘 읽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다보면 자기 자신의 정체성이 희미해지기 쉽다. 하지만 괜찮다. 정체성이 희미한 사람은 새로운 것들을 받아들이는 데 유리하기 때문이다. 이는 정체성이 필요 없다는 말이 아니다. 자기만의 정체성이 없으면 변화를 읽어도 할 수 있는 것이 없기 때문이다. 정체성이 없는 사람은 변화를 따라가기만 하는 수동적 인간일 뿐, 그 속에서 가치를 만들 힘이 없는데, 변화의 흐름 속에서 가치를 만들려면 자기만의 독특함, 유니크니스가 필요하다. 변화의 흐름을 타고 세상을 읽은 후에는 사람들의 선호가 아닌 자기 것을 만들어야 하는데, 이때 유니크니스가 필요하다. 공부하는 사람은 자기만의 관심 분야, 공부가 필요하다. 그런데 결과는 열심히 한다고 얻어 지는 것이 아니다. 결과를 얻으려면 두 가지가 필요하다. 자기 이해와 실패의 경험이다. 
 
유희형 인간: 인공지능 시대가 오면 제품의 생산단가가 혁신적으로 낮춰질 것이라는 전망이 있다. 그러면 안정된 수입원을 가진 사람들은 원하는 제품을 구매하며 여유를 누릴 것이고, 이런 사람들은 개인적인 삶에 집중할 가능성이 크다. 개인적인 삶의 모습 중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것 하나는 유희다.
그래서 게임을 비롯한 놀이산업은 미래사회에도 전망이 밝다. 놀이와 함께 생각할 수 있는 것은 학습 이다. 꼭 뭔가를 해야 하는 학습이 아니라, 세상을 알고 자신을 발견하며 새로운 것에 도전하는 수단 으로서의 학습이다. 물론 앞으로의 학습은 사람이 직접 가르치고 배우는 강의장이 아니라 기계를 통한 접속으로 이루어질 가능성이 크다. 그렇다면 무엇을 학습할 것인가? 사람을 학습해야 한다. 사람이 변화를 만든다. 그리고 변화를 학습해야 한다. 변화의 이면에 사람이 있다. 사람을 읽으면 변화가 보이고, 변화를 들여다보면 사람이 있다. 여기가 우리의 공부가 접속해야 할 곳이다. 
 
벤치 인사이트를 키워라 
 
메타인지를 키워라 공부에 밀도가 없는 이유: 지식과 정보가 아무리 많아도, 무엇이 중요하고 필요한지를 가려내는 눈이 없다면 소용이 없다. 공부를 많이 해도 그것이 어떻게 문제화되고, 어떻게 이용될 수 있는지 알지 못하는 경우가 이런 경우다. 한마디로 그들에게는 벤치 인사이트(Bench Insight)가 없다고 할 수 있다.
한편 시험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내가 무엇을 모르는지 아는 학생은 아는 부분은 빨리 넘어가고 모르는 부분을 집중적으로 공부하는데, 이런 학생은 고득점을 올린다. 그런데 가끔 중하위권에 머무르던 학생이 갑자기 성적이 오르기 시작하는 경우가 있다. 자기가 모르는 부분이 무엇인지를 발견하고 그것을 어떻게 보완해야 하는지 알게 된 경우다. 이런 능력을 메타인지(metacognition)라고 부른다. 
 
메타인지의 힘: 메타인지는 자신이 무엇을 모르는지 아는 것 혹은 자신의 상황을 객관적으로 인지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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능력이다. 모르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면 자신에게 무엇이 필요하며 어떻게 배울 수 있을지 판단할 뿐아니라, 학습을 실천하고 배움의 방법을 통제할 수 있다. 자신의 상황을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능력은 학습에서 매우 중요하다. 학습 목표를 정하고 실천하며 피드백하는 힘이 여기에 기반을 두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자면 자신을 벤치에 앉혀야 한다. 벤치에서 자신의 공부와 문제를 돌아봐야 한다. 벤치맨이 되어야 메타인지를 얻을 수 있다. 
 
메타인지력 높이기: 어떻게 하면 메타인지력을 키울 수 있을까? 첫 번째 방법은 질문하고 스스로 피드 백하는 습관을 갖는 것이다. ‘내가 모르는 것은 무엇인가?’, ‘지금 잘하고 있는가?’, ‘무엇을 더 배워야 하는가?’, ‘나의 판단이 맞는가?’ 이런 질문은 자기성찰과 상황에 대한 주의력을 높여주고, 질문에 답하는 과정에서 자기를 알게 되고 자신의 객관적 상황을 이해하게 된다. 자기를 알고 상황을 이해하면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지 예측해보고 방향을 잡을 힘이 생긴다. 그런데 메타 질문을 하려면 자신을 벤치에 앉혀야 한다. 일에 열중한 상태로, 공부에 몰입한 상태로 메타 질문을 던질 수는 없다. 
 
두 번째 방법은 자신이 처한 상황을 객관적으로 바라보는 연습을 하는 것이다. 이른바 자기 객관화 연습이다. 세 번째 방법은 자극을 주는 멘토를 얻는 것이다. 참고로 그리스 청년들의 멘토였던 소크라테 스는 아고라 광장에서 질문을 통해 청년들의 사유를 자극했다. 소크라테스는 이론이나 사상을 가르치지 않고 철학하는 방법을 가르쳤다. 이런 방법을 통해 제자들이 얻은 것은 무엇일까? 스스로 생각하는힘, 자기 생각을 만들어내는 기본적 역량, 즉 메타인지였다. 미래의 스승은 정답을 찾아내는 방법을 알려주기보다 무지를 깨우치고 생각을 자극하며 벤치 인사이트를 키워주는 멘토여야 한다. 
 
철학이 필요한 시대 철학의 이유: 미국의 정신분석학자 에릭 에릭슨은 청소년기에 가장 중요한 것이 자아정체성의 확립이 라고 말한다. 청소년기에 어떤 경험을 하고 어떤 자아정체성을 획득하느냐에 따라 어른이 되어 해낼수 있는 역량이 달라지기 때문이다. 자아정체성이란 자기 안에 지속적인 동일성이 존재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물론 자신만의 동일성은 타인과의 지속적인 교류를 통해서 수정되고 발달하며, 사회적 현실 안에서 능동적으로 작동한다. 그러자면 과거 자신의 모습을 돌아보고 이해하면서 미래의 모습을 연상 하여 일관된 자아정체성을 만들어가야 한다. 한마디로 자신만의 유니크니스를 확립해야 하는데, 이것은 수학이나 영어 공부로는 성취할 수 없는 일이고, 규격화된 도덕인 윤리 수업에서 배울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이 과업을 수행할 수 있는 학문은 철학뿐이다. 
 
큰 그림 공부: 한 분야에서 중요시하는 내용을 이해하려면 큰 그림, 벤치 인사이트가 필요하다. 그 분야와 시대, 사상의 배경을 알아야 하기 때문이다. 단편적인 주장이나 사건만 봐서는 왜 그런 주장을 하고 일들이 생기는지 이해하기 어렵다. 공부는 미시적이기 이전에 거시적이어야 한다. 빅 픽처, 큰 그림을 그리는 공부여야 한다. 성공하는 방법을 공부할 것이 아니라, 성공이란 무엇이고 왜 그래야 하는 지를 생각해봐야 한다. 사람을 설득하는 방법이 아닌 사람이란 어떤 존재이고, 왜 사는지를 알아야 한다. 돈 버는 방법이 아닌 돈 없이도 풍요로운 방법을 생각할 수 있어야 한다. 대중은 생존과 돈에 집착 한다. 하지만 생각이 있는 사람들은 다르다. 돈도 중요하지만 그보다 돈에 관한 생각이 중요하다는 것을 안다. 그들은 세상을 배우고 인간을 알 수 있는 공부에 집중한다. 바로 역사, 철학, 문학, 예술 등이다. 이들의 선택 배경에는 세상을 알아야 좋은 삶을 살 수 있다는 큰 그림이 작동하고 있다. 
 
과학과 철학: 의학이 사람을 살리는 기술을 연구한다면, 철학은 삶이란 무엇인지를 탐구한다. 심리학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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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이 행복해지는 방법을 발견하려 한다면, 철학은 행복이 무엇인지 왜 중요한지 묻는다. 과학이 화성에 갈 방법을 연구한다면, 철학은 우주의 의미와 화성에 가는 것이 바람직한지를 판단한다. 공학이 원자력을 효율적으로 개발한다면, 철학은 원자력 발전이 필요한지를 묻는다. 다른 학문이 발전을 위해 노력할 때 철학은 ‘발전’이 무엇인지를 묻는다. 문명의 성장을 이야기할 때 왜 성장인가를 묻는다. 철학은 삶의 속도를 조절하고 바람직한 선택을 하는 데 중요한 기반을 제공한다. 
 
벤치 인사이트, 간결한 지식이 아름답다 버려야 간결하다: 『21세기 핵심역량』의 저자 버니 트릴링은 급변하는 사회를 대비하기 위해서는 간결 함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그는 간결함을 가벼운 간결함과 깊은 간결함으로 구분하는데, 가벼운 간결함 이란 정확한 이해가 부족한 상태에서 짧게 말하는 것이고, 깊은 간결함이란 전문지식을 충분히 갖춘 상태에서 핵심을 간단명료하게 표현하는 것이다. 가벼운 간결함은 누구나 할 수 있지만, 깊은 간결함은 통찰력을 가진 사람만이 할 수 있다. 사물의 이치와 기계의 작동원리, 사람의 본성, 문제의 원인과 해결책을 정확히 꿰뚫고 있는 사람만이 단순하고 명쾌한 표현이 가능하다. 그렇다면 이런 간결한 통찰 력을 얻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무엇보다 버릴 줄 알아야 한다. 
 
벤치 인사이트, 어떻게 얻을 것인가?: 첫 번째 방법은 원인과 결과에 대한 논리력을 기르는 것이다. 왜냐하면 세상은 인과관계로 움직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결과만 보지 말고 원인을 볼 수 있어야 하는데, 이때 필요한 질문이 ‘왜?’라는 질문이다. 두 번째 방법은 사건의 흐름을 파악하는 것이다.
어떤 사건이나 문제가 발생했다면 그것의 시작이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시작된 시간으로 거슬러 가서 당시의 모양을 살펴보면 문제의 발단을 알 수 있다. 여기에 사건이 흘러가는 추세를 따라가 보면 어떤 변화를 거쳐 어떤 대응이 나왔고 어떤 결과에 도달했는지를 한눈에 파악할 수 있다. 세 번째 방법은 주제의식 연습이다. 책을 많이 읽지만 밀도가 없는 사람들의 특징은 읽고 이해하기에 급급하다는 것이다. 이런 경우 잠시 읽기를 멈추고 생각해보는 시간을 가질 필요가 있다. 예로 ‘여기에서 말하고자 하는 것이 무엇인가?’, ‘왜 이 책을 썼나?’ 이런 질문은 책 전체의 주제를 생각하게 한다. 주제의식을 찾으려고 연습하다 보면 숨겨진 이면을 엿볼 수 있고 중요한 키워드와 연결하는 통찰을 발휘할 수 있다. 그리고 이런 방식에 익숙해진 사람들은 책 제목만 보고도 내용을 짐작할 수 있다. 
 
벤치 인사이트, 교육의 종착지: 벤치 인사이트는 미래 교육의 종착지다. 사회가 복잡해지고, 문제가 다양해지고, 지식이 고도화될수록 핵심을 가려내는 힘이 중요해지기 때문이다. 한편 인사이트를 얻으려면 자기 공부를 주도해야 한다. 좋아하고 잘하는 분야가 있어야 하고 그것에 정통해야 한다. 아무런 지식이나 경험 없이 통찰을 얻기 어렵기 때문이다. 여기에 자기만의 생각하는 방법도 활용해야 한다.
그 분야에 관한 생각의 경험들이 다양하게 펼쳐져, 지식을 추론하고 비판하고 비틀어본 누적된 고통이 있어야 한다. 물론 이 과정은 다른 사람과 문제를 토론하고 생각을 말해보는 과정, 현장에서 뛰어본 경험을 바탕으로 한다. 결국 자기 삶과 세상 일에 호기심을 갖고 문제를 풀어보려는 주도성이야말로 인사이트의 중심이고, 교육은 아이들에게 그 중심을 만나게 하는 일이다. 
 
어떻게 배울 것인가 
 
플랫폼, 공부의 장을 펼쳐라부(富)는 플랫폼에서 온다: 언제부터인가 우리는 플랫폼이라는 개념에 익숙해졌다. 애플, 구글, 페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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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 아마존이라는 거대 플랫폼들 때문인데, 이런 기업들의 성공은 플랫폼에 기초하고 있다. 일단 플랫 폼을 ‘다양한 사람들이 모여 필요한 것을 찾아내고 공유하며 문제해결의 실마리를 발견하는 곳’ 정도로 이해해두자. 한편 플랫폼은 ‘생태계’라는 개념과 연관해서 파악할 필요가 있다. 참고로 제임스 무어는 『경쟁의 종말』에서 ‘기업 생태계’ 개념을 강조하는데, 그에 따르면, 기업 생태계는 ‘상호작용하는 조직 이나 개인들에 기반을 둔 경제공동체’다. 그러므로 당연히 다른 구성원들과 함께 협력을 통해서 상생을 추구하며 발전해나가야 한다. 이런 관점은 신선하고 새로운 패러다임을 가져왔다. 기업이 경쟁자 혹은 고객들과 함께 살아갈 방법을 모색하기 시작한 것이다. 
 
기업 생태계에 새로운 패러다임을 가져온 대표적인 기업이 구글이다. 구글은 강력한 검색 서비스를 제공하는 포털을 운영하는데, 이곳에 접속한 사람들은 필요한 자료를 검색하고 동영상 서비스를 즐기고 메일을 주고받으며 자신의 필요를 충족시킨다. 그리고 구글은 접속자들과의 상호작용을 통해서 자신들의 서비스를 진화시키고 플랫폼을 더욱 극적인 것으로 만들어간다. 구글은 제품을 만드는 기업이 아니다. 어떤 제품도 없이 엄청난 수익을 올릴 수 있는 것은 플랫폼에 접속하는 사람들 덕분이다. 구글 수입의 90퍼센트는 광고라는 사실이 이것을 증명해준다. 아마존, 애플, 마이크로소프트, 알리바바, 넷플 릭스 등의 수많은 기업이 플랫폼에 기반한 사업을 통해 수익을 창출하고 진화를 거듭하고 있다. 
 
플랫폼 성공의 조건: 중요한 것은 참여자에게 어떤 가치를 제공해줄 수 있느냐다. 사람들이 접속하는 이유는 필요의 충족인데, 이때 플랫폼이 어떤 필요를 충족시키느냐는 중요하다. 그래서 플랫폼의 핵심은 참여자들의 경험에 있다. 참가자들이 플랫폼에서의 경험에 만족할 수 있느냐는 플랫폼의 질을 결정 하는 핵심적 요소다. 두 번째 요소는 핵심 콘텐츠 유무다. 구글은 검색, 유튜브는 영상, 인스타그램은 사진, 아마존은 배송, 넷플릭스는 영화라는 핵심 콘텐츠가 있다. 이른바 ‘킬러 콘텐츠’다. 킬러 콘텐츠를 바탕으로 다양한 서비스 체계를 구축하는 것이 플랫폼이 발전할 수 있는 중요한 기반이다. 
 
세 번째 요소는 상호작용의 활발함이다. 플랫폼은 많은 사람이 모여 자신의 소리를 내고 필요를 충족 시키는 곳이다. 이 과정에서 활발한 소통이 이루어지지 못하면 플랫폼은 바람 빠진 풍선처럼 금방 힘을 잃는다. 활발한 의사소통은 수익 등 상호 이익을 위한 바탕이 됨은 물론 플랫폼을 개선하고 성장시 키는 원동력이 된다. 그러자면 관리자의 역할이 중요하다. 참여자들의 소통을 장려하고 필요한 가치를 획득할 수 있도록 돕는 역할에 충실해야 한다. 플랫폼의 핵심은 상호 협력과 상생의 정신이다. 
 
내 삶의 플랫폼: 이제 나만의 삶을 위한 플랫폼을 가져볼 때다. 지식공동체도 좋고, 독서 모임도 좋고, 도서관도 좋다. 자신이 실천적으로 참여하고 협력을 통해 상생할 수 있으면 된다. 참여가 즐겁고 활동에 자극을 받는 모양이라면 더욱 좋겠다. 그러다 보면 뭔가 기여할 수 있는 순간이 올 것이다. 
 
온라인 플랫폼도 필요하다. 카카오의 블로그 서비스인 브런치(Brunch)를 활용하는 것도 좋다. 블로그 활동도 도움이 된다. 중요한 것은 개방적 적극성과 꾸준함이다. 일시적으로 시작했다. 그만두는 활동 으로는 제대로 된 플랫폼의 이점을 얻을 수 없다. 한편 유튜브는 누구나 쉽게 참여할 수 있는 플랫폼 이다. 전문가에서 초등학생까지 쉽게 계정을 만들고 자신만의 영상을 업로드할 수 있다. 어떤 활동을할 것인가는 내가 무엇을 할 수 있는지 살펴보면 쉽게 답이 나온다. 내가 가장 잘 알고 잘 할 수 있는 콘텐츠를 만들면 된다. 수백만 명이 접속하는 인기 콘텐츠도 처음엔 사소한 것으로 시작되었다. 
 
답은 자신에게 있다. 함께 공부할 수 있는 사람들을 모아보자. 마음이 맞는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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께 모여 책을 읽고 일상을 나누고 글을 쓰다 보면 새로운 일들이 생긴다. 플랫폼은 각자가 모여 함께 상생을 추구하는 즐거운 공간이자 가능성의 장이다. 상호 협력과 상생이라는 큰 철학만 공유할 수 있다면 각자의 삶을 비옥하게 함은 물론 그 플랫폼은 앎의 충만으로 넘치는 행복한 공간이 될 것이다. 
 
새로운 독서, 디지털 리터러시(literacy)가 필요하다 디지털 리터러시: 4차 산업혁명의 분위기가 몰아치면서 독서 교육과 함께 디지털 리터러시의 문제가 대두되고 있다. 글을 읽고 이해할 수 있는 능력을 리터러시라고 하는데, 우리말로는 문해력이다. 리터 러시가 없거나 부족하면 글을 이해하는 능력이 부족해지고, 글을 써도 다른 사람과 소통이 어려운 이야기만 쏟아낼 수 있다. 디지털 리터러시는 디지털 기계를 통해 정보를 얻고 이해하며 사용할 수 있는 능력을 일컫는데, 이는 인터넷 정보를 찾아내고 평가하고 공유하며 새롭게 만들어내는 능력이다. 
 
디지털 리터러시가 부족하면 구글에서 검색한 것이 정확한지, 어떤 과정을 거쳐 나온 결과인지, 결과가 우리에게 미치는 영향은 어떤 것인지 등을 파악하는 데 어려움을 겪을 수 있다. 거짓 정보나 잘못된 기술, 편향적이고 자극적인 이념에 노출, 특정인에 대한 비하와 공격 등의 문제에 직면하는 것이다.
디지털 리터러시가 없는 이들은 무용지식, 아니 해로운 지식에 물들기 쉽다. 그리고 인공지능 시대의 중요한 문제 중 하나가 디지털 리터러시의 불균형이다. 디지털 리터러시를 갖춘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은 삶의 질이 크게 달라지는데, 미래는 이런 격차가 훨씬 크게 벌어질 것이다. 
 
디지털 리터러시를 갖추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일단 디지털 기기의 사용 경험이 풍부해야 한다. 인간은 경험으로 배우기 때문이다. 그런데 디바이스 사용 경험만으로는 부족하다. 어쩌면 이것이 더 중요할 수도 있는데 디지털 기기가 자신을 조정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필요한 정보와 지식을 선택할 수있는 주도성을 확보해야 한다. 어디에 접속할 것인지, 즉 어떤 정보와 지식을 취할 것인지를 스스로 결정하는 힘이 필요한데, 이럴 때 중요해지는 것이 자기 정체성이다. 나는 어떤 사람이고 무엇을 좋아 하고 어떤 정보를 취할 것인지를 결정하는 것, 자기 정체성은 이런 역할을 수행하는 기준이 된다. 
 
지식은 현실을 만나 힘이 된다 공부와 현실: 학창시절 수업을 잘하고 학생들에게 많은 영향력을 끼쳤던 선생님들의 공통점은 수업의 내용과 현실을 연결한다. 그들은 학생들에게 오늘 공부한 내용이 우리의 생활과 무슨 관련이 있는지를 찾도록 도와준다. 그것이 학습의 동기부여와 지식의 힘을 증대시킨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반면 교습 기술이 부족한 선생님은 이렇게 말한다. “교과서 105쪽을 펴세요. 오늘은 나눗셈을 공부하겠 습니다.” 그러고는 열심히 지식을 설명한다. 우리는 이런 광경에 익숙하다. 지식을 받아들이는 데 급급 해지면 무슨 일이 일어날까? 일단 지식을 익히는 데 어려움이 생긴다. 선생님의 설명에 의존해서 지식을 이해해야 하고 외워야 하기 때문이다. 더 큰 문제는 지식을 머릿속에 담은 후에 일어난다. 아무리 많은 내용을 머릿속에 담아도 현실 속에서 활용되지 않기 때문에 쓰레기가 되어버리는 것이다. 
 
제대로 안다는 것: 그렇다면 지식은 쓸모없는 것일까? 그렇지 않다. 지식 그 자체가 중요하다는 것이 아니라, 지식의 활용이 중요하다는 말이다. 지식은 현실과 만나야 한다. 실천적 지식, 생활지향형 지식, 문제해결형 지식이 되어야 한다. 이것이 지식의 출구이고 미래 지식의 길이다. 공부의 성격과 방향도 바뀌어야 한다. 지식과 현실을 연결하는 실천적 공부가 되어야 하는데, 실천적 공부의 시작은 기초를 단단히 하는 것이다. 내가 배운 지식이 무엇인지를 정확하게 아는 것이 시작이다. 이때 내가 배운 것을 확실하게 하는 방법은 그것을 누군가에게 설명해보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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벤치 노마드를 위하여 
 
지식의 죽음과 절학무우(絶學無憂) 두려움의 시대: 우리는 인공지능 시대에 대한 기대와 두려움을 함께 가지고 있다. 생산성의 향상으로 풍요와 편리를 향유할 것이라는 기대, 지식 격차가 심해지고 빈부의 차이가 극명하게 드러날 것이라는 두려움이 그것이다. 이런 두려움은 인공지능에 의해 인간이 지배당할 것이라는 터미네이터적인 암울함이 깔려 있다. 하지만 두 가지 전망 모두 가능성일 뿐 현실은 아니다. 결국 우리가 어떤 방향을 선택하 느냐에 따라 가능성은 현실이 될 것이다. 두 경우 모두 인간의 역할이 중요하다. 이제 선택을 해야 한다. 과거처럼 지식의 양을 측정하고 많이 아는 학생을 양산하기 위해 열을 올릴 것인지, 양에 대한 환상을 버리고 생각을 장려하고 대화를 통해 다양한 사유를 횡단할 수 있는 열린 지식인을 육성할 것인지, 선택은 우리에게 달려 있다. 그 선택을 하는 데 공멸의 두려움이 큰 도움을 줄 것이다. 
 
절학무우: ‘절학무우’. 이것이 지식 엔트로피 문제에 대한 노자의 해답이었다. 배움을 끊으면 근심이 사라진다. 배우려는 마음이 지식을 낳고 지식은 이론과 사상을 구축한다. 이론과 사상은 새로운 배움으로 안내하고 우리는 그렇게 끊임없이 공부에 몰두한다. 지식은 복잡해지고 사상은 난해해져 어떤 것이 옳고 그른지 혼란스럽기만 하다. 지구상에 일어나는 문제 중 상당수가 지식과 사상 때문에 발생한다.
나의 지식이, 우리 사상이, 우리 종교가 옳다는 믿음으로 충돌한다. 지식은 길을 제시하고 그 길을 먼저 가기 위해 달음박질하다 시기, 질투, 협잡, 갈등이 난무하게 된다. 노자는 기준을 세우지 말라고 한다. 기준을 세우면 그것을 향해 달려갈 것이고 충돌과 갈등을 피할 수 없다는 것이다. 
 
안타깝게도 노자의 절학무우는 현실성이 없어 보인다. 끝없는 욕망을 향해 달려가는 인간에게 학문을 끊는 일은 불가능하다. 문명의 속도는 인간이 통제할 수 있는 상황을 넘어섰다. 남들이 폭주하는 상황 에서 혼자 내려놓는 것은 허용될 수 없다. 낙오와 패배라는 두려움을 감당할 만큼 인간은 강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조기교육 열풍과 사교육의 번성은 낙오의 두려움을 견딜 수 없는 인간의 자기 방어기제다. 이런 시대에 노자의 목소리는 공허한 메아리로 남을 것인가? 그럼 어떻게 해야 할까? 
 
잡다한 공부를 멈춰야 한다. 지식 엔트로피를 낮춰야 한다. 이것저것 난삽한 것들을 주워 담는 공부를 멈추고 큰 맥락을 찾는 공부를 해야 한다. 국어, 영어, 수학, 사회, 과학, 역사 등으로 학문을 나누고 세부사항을 외우는 방식에서 벗어나야 한다. 인간과 세상에 대한 큰 그림을 그리고 방향을 잡는 것이 먼저다. 참고로 공학은 엄청난 규모의 엔트로피를 양산한다. 지식을 대규모로 응용하여 현실에 유용한 것들을 만들어낸다. 우리 주변에 산재한 공학적 제품들(스마트폰에서 노트북까지)을 보면 알 수 있다.
제품 자체가 엔트로피를 높이고 그것들이 재창조하는 정보와 지식의 결과물이 세상을 복잡하게 만들고 있다. 그에 비해 인문학은 저엔트로피 학문이다. 기껏해야 나무를 소비하고 인쇄물로 드러나는 정도다.
그런데 인문학은 생각을 자극하고 사유의 확장을 장려한다. 공학이 달리자고 외칠 때 인문학은 멈추고 돌아보라고 말한다. 인문학은 공학적 엔트로피를 낮춘다. 
 
인문학은 방향이다: 세계는 있는 그대로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가 바라보는 대로 존재한다. 우리가 세상을 선하게 본다면 선할 것이고 악하게 본다면 악할 것이다. 우리가 주변 사람을 보는 것도 마찬가지다. 따라서 삶이 좋아지려면 다른 사람의 관점을 이해하고 그들과 함께할 준비가 되어야 하는데, 그준비를 위해 인문학을 공부해야 한다. 모든 학문이 인문학으로 통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인문학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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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세계를 어떻게 바라봐야 하는지, 어떻게 바라볼 수 있는지를 탐구한다. 우리 마음속에 좋은 관점을 길러주고 훌륭한 태도를 익히게 한다. 인문학은 초등학교 때부터 시작하는 것이 좋다. 
 
세상과 사람에 대한 인식이 일찍 갖추어진다면 학문에 임하는 태도가 달라질 것이다. 인문학을 통해 자신의 가치관을 확립할 수 있다면 어떤 것을 배우고 어떤 일을 할지에 대한 갈등과 방황이 지금처럼 심하지 않을 것이다. 청소년들이 직업 선택에 어려움을 겪고 꿈이 선명하지 않은 것은 직업이 너무 많기 때문이 아니라, 자기 가치관이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진로는 직업을 결정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나아가고자 하는 방향이고 흐름이다. 자신이 어떤 삶을 살고 싶은지 마음의 갈래가 잡히면 진로는 자연스럽게 해결된다. 만약 다른 사람들이 삶의 의미를 찾는 것을 돕고 싶다는 방향을 가진 청소년이라면, 선생님이 되든 심리상담사가 되든 작가가 되든 크게 중요하지 않을 것이다. 방향이 있기에 그것과 맞는 일이라면 어떤 것이든 할 수 있다. 중요한 것은 직업이 아니라 가치관과 방향이다. 
 
통섭: 과학은 맹목적이다. 앞으로 달려간다. 가설을 세우고, 실험으로 증명하고, 새로운 법칙으로 정착 시키고, 또 다른 가설을 세우는 것이 과학이다. 과학은 미네르바의 눈이 없다. 이런 과학이라는 질주마에 고삐를 채우는 것은 인문학의 몫이다. 우리 문명이 어디로 향할지, 과학으로 무엇을 해야 할지, 인공지능에 어떤 정보를 제공해야 할지를 결정하는 것이 인문학의 역할이다. 
 
한편 과학은 인문학에 새로운 눈을 안겨준다. 우주와 사물에 대한 과학적 지식은 세계를 바라보는 관점에 타격을 가한다. 양자역학이 물질과 파동, 있음과 없음에 대한 관점을 바꾼 것처럼, 진화생물학이 인간의 본성에 대한 철학적 인식에 변화를 가져온 것처럼, 기초과학의 발달은 인문학에 새로운 자극을 가하고 시대가 요구하는 지혜를 찾도록 돕는다. 따라서 과학과 인문학의 융합을 위해서 학문은 열려 있어야 한다. 인문정신을 지키면서 과학의 성과를 포용하고, 인문정신을 수용하면서 과학은 나아가야 한다. 지식 엔트로피를 넘어서 절학무우의 정신이 꽃을 피우려면 융합과 통섭이 필수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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