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지 2
나관중
김홍신
제2권 전운 속에 뜨는 태양
권머리에
위나라의 기반을 닦은 조조는 조정을 손아귀에 거머쥐고...
여포는 동탁의 잔당인 이각,곽사가 장안을 점령하자 달아나고, 다시 천하는
곳곳에서 군웅들이 할거하기 시작한다.
조조는 산동을 중심으로 세력을 확장하고 서주를 침공하나 북해의 공융과 유
비 등이 발병하여 서주를 구한다.
조조와 여포는 복양성에서 맞대결하는데 야습을 기하던 조조의 목숨이 오히려
위태로워진다. 이때 사경을 해매는 조조를 전위가 달려와 구하고, 여포는 자기
꾀에 속아 조조군에게 목숨만 간신히 구한 채 쫒겨 달아난다. 한편 서주태수 도
겸은 유비에게 서주를 맡기고 숨을 거둔다.
사지에서 벗어난 조조는 천하호걸 전위와 허저를 얻고 여남과 영주 땅을 차지
한다. 이에 이각과 곽사의 폭정에 시달리던 황제는 조조를 불러들여 반군을 평
정시키고 조정을 맡긴다.
조조는 허물어진 낙양을 보수하느니보다 허창(허도)으로 서울을 옮기고 위나
라의 기반을 마련한다. 조정을 손아귀에 거머쥔 조조는 유비와 여포를 충동질해
서로의 싸움을 부추기나 실패하고 유비로 하여금 원술과 싸우도록 부채질한다.
이때 장비는 술주정으로 하룻밤 사이 여포에게 서주성을 잃고 유비를 뒤따른다.
강동 손견의 아들 손책은 원술 밑에서 보살핌을 받다 전국의 옥새를 담보로
군사를 얻고 장강을 건너 천하대망을 펼친다.
강동을 편정한 손책은 회계 지방까지 점령하여 동쪽을 장악한다. 그 사이 도
적떼에 금창이 터진 주태는 명의 화타의 도움으로 건강을 회복하고 원술은 여포
와 사돈을 맷어 유비를 공략하기로 하나 진대부가 진언하자 신행길을 되돌린다.
조조는 장수를 공격하고 장수는 이에 항복하나 조조가 호궁 부인에 푹 빠져
있는 동안 조조 진영을 공략하여 대승을 거둔다. 이에 조조는 장남과 조카, 명
장 전위까지 잃고 허도로 회군한다.
원술은 전국옥쇄를 가진 것을 기화로 황제위에 오르고 여포에게 사절 한윤을
보낸다. 그러나 여포는 조조가 베푼 인뒤웅이로 인해 혼인을 파기하고 한윤을
조조에게 보내 참수당하게 한다. 이에 화가 난 원술은 여포를 공격하고 여포는
진대부를 사절로 보내 화해를 모색한다.
한편 여포를 치라는 밀서를 받은 유비는 조조에게 답서를 보낸다 그만 여포에
게 들킨다. 이에 여포는 군을 대동하고 소패성으로 달려오나 유.관.장. 삼형제
는 성문을 닫고 일체 싸움에 응하지 않는다.
충신 왕윤도 죽고 전운속에 커가는 영웅들
여포의 무용과 왕윤의 사면 거절로 두려움에 떨던 동탁의 잔당들은 죽기 살기로
공략하여 장안을 점령한다. 여포는 패해 달아나고 왕윤이 처형되자 조정은 다시
반란군 손에 들어간다. 이에 각지의 영웅들이 저마다 분노 속에 할거하기 시작
한다.
동탁의 무리였던 이각, 곽사, 장제, 번주 등 네 장수는 비옹군 3천과 그동안
몰려든 졸개들을 이끌고 서량에 머물고 있었다.
그때 장안에세 모든 죄인에게 특별 사령을 내렸다는 소문을 든고, 사자를 왈
윤에게 보내 용서를 빌었다.
그러나 왕윤이 그걸 받아들일 리 없었다.
"동탁을 등에 업고 세상을 어지럽힌 너희들이 무슨 낯짝으로 찾아왔는가. 지
금 천하에 대사면을 내린다 하나, 그들만은 절대로 용서할 수 없다."
왕윤은 불호령을 내어 사자를 쫒아 보낸 후 그날로 동탁의 잔당에 대한 토벌
령을 내렸다.
양주의 패잔병들은 이에 크게 놀라며 대책을 의논했다.
모사 가후가 근심에 잠겨있는 네 장수에게 결연히 다짐해 두었다.
"동요해서는 아니 되오. 이럴 때일수록 뭉쳐야 하오. 만일 뿔뿔이 흩어진다면
그만큼 힘이 약해져 일개 장수라도 당신을 묶을 수 있을거요. 일이 이미 이렇게
되었으니, 우리는 단결하여 힘을 합쳐야 하오. 힘을 합쳐 동 태사의 원수를 갚
는다는 명분을 세워 장안으로 다시금 쳐들어가야 하오. 만일 일이 잘되면 천하
를 우리의 손아귀에 넣을 수 있을 것입니다. 또힌 실패하게 되면 그때 도망가더
라도 늦지않을 것이오."
네 장수가 들으니 그럴싸한 이야기였다. 어차피 사면을 받지 못할 바에야 이
대로 가만히 앉아 죽음을 기다릴 수 는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장안으로 밀고
들어간다 하더라도 한 가지 문제는 있었다.
네 장수 중 한사람이 말했다.
"장안으로 쳐들어 간다 해도 어떻게 군사를 모을 것이오?"
그러자 괴량이 미리 준비해 둔 계책이 있는 듯 선뜻 입을 열었다.
"내게 좋은 생각이 있소. 이지방은 원래 동태사의 근거지요. 또한 왕윤이 도
량이 넓지 몾하고 편협하니, 왕윤이 양주의 백성들을 모조리 죽이려 한다고 소
문을 퍼뜨리는 것이오. 앉아서 죽음을 기다리는 것보다 함께 싸우자고 하면 백
성들이 뒤따르지않겠소?"
"과연 명안이오."
이각을 미롯한 장수들이 괴량의 말에 무릎을 치며 기뻐했다. 네 장수는 즉시
군사를 풀어 소믄을 퍼뜨렸다.
"동탁을 죽인 왕윤이 백성들을 모조리 주살하려고 한다."
"장안에세 대군이 몰려와 이곳을 쑥대밭을 만들 것이다."
이런 소문이 양주일대에 나돌자 사람들은 깜짝놀라며 이왕 죽을 마에야 싸우
다 죽겠다는 작정으로 모두 군대에 자원하였다.
그리하여 순식간에 이들의 병력은 잡군을 포함해서 10만이라는 대군으로 불어
났다. 우선 그들을 조련하여 그럴 듯한 대오를 갖추었다.
그 즈음 동탁의 사위인 중랑장 우보가 장인늬 원술 갚겠다며 군사 5천을 이끌
고 합류하였다. 이각의 무리는 사기가 충천하여 대군을 이끄고 장안으로 밀물처
럼 나아갔다.
동탁의 잔당들이 대군을 이끌고 밀려온다는 소식을 듣자 장안에서도 급히 대
책을 협의했다.
왕윤은 여포를 불렀다.
"왕 사도께서는 근심하지 마십시오. 그쥐 같은 무리를 단숨에 쳐없애겠소."
다음 날, 여포는 급히 군사 몇 만을 수습하여 이숫을 데리고 출진하였다."
이각ㅢ 선봉장이 된 동탁의 사위 우보는 여포 여포휘하의 이숙과 맞닥뜨려 첫
싸움을 벌였다. 그러나 우보군은 이숙을 당해 내지못하고 군사를 물려 달아났
다. 그러자 모사 가후는 우보에게 전했다.
"여포군과 정면으로 무딪치면 승산이 없으니 되도록 기습을 감행해야 하오."
한편 첫 싸움에세 이긴 이숙의 군대는 그닐 밤 승리감에 도취되어 아무런 방
비도 없이 잠에 빠져들었다. 그런데 밤이 깊어갈 무렵이었다. 요란한 함성과 함
께 우보군이 불의의 기습을 감행하였다.
방비 없이 갑작스럽게 당한 일 이라 이숙의 군사들은 서로 짓밟히며 이리저리
흩어져 30리 밖으로 패주하였다. 패주한 군사들을 점고해 보니 절반으로 줄어
있었다. 이숙은 나머지 군사를 이끌고 여포가 있는 본진으로 돌아가 원병을 요
청했다.
여포는 이숙이 패주하여 오는걸 보자 크게 노했다.
"이 무슨 추태냐. 군사의 예기를 꺾은 죄는 결코 가볍지 않다."
여포는 한칼에 이숙의 목을 베어 버렸다.
여포는 이숙의 목을 군문에 매달게 하였다. 여포와는 고향 친구요, 동탁에게
여포를 이끌었으며, 동탁을 죽이는 일에 가담했던 이숙은 결국 여포의 손에 목
이 잘리운 셈이었다.
다음 날, 여포는 스스로 진두에 서서 군사를 이끄고 우보군을 맞아 싸웠다.
그러나 우보는 여포의 적수가 되지 못했다. 천하의 여포가 군사들을 이끌고 온
다는 말을 듣자 우보군의 군졸들은 싸우기도 전에 겁에 질려 있었다.
우모는 군사를 물린 뒤, 심복인 호적아를 불러서 의논했다.
"여포는 용맹이 뛰어나고 날래니 우리가도저히 이길 수가 없다. 어차피 승산
없는 싸움에 개죽음당하느니 금은보화라도 챙겨 달아나는 것이 어떻겠나?"
"좋습니다, 저또한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호적아 역시 여포의 용맹을 모를 리 없었다. 우보가 그렇게 말하자 그날 밤중
에 야음을 틈타 이각의 진중으로 들어가 보물을 훔쳤다.
우보와 호적아는 가까운 휘하 몇 명을 데리고 이각의 진영을 벗어나 달아났
다.
얼마를 가니 냇물이 가로 놓여 있었다. 냇물을 건너기 위해 짐을 꾸릴 때 호
적아는 엉뚱한 마음을 품게 되었다.
'저놈 우보란 놈을 죽인다면 금은보화는 모두 내 차지가 된다. 그리고 우보의
목을 가지고 여포에게 간다면 상도 듬뿍 받으리라...'
이렇게 생각한 호적아는 정신 없이 보물더미를 묶고있는 무보의 곁으로가 무
조건 그의 목을 베어 버렸다.
"으흑..."
외마디 소리와 함께 우보의 목이 떨어졌다. 호적아는 벤머리를 들고 여포의
진영으로 찾아갔다. 우보를 죽임으로써 보물 훔친 죄를 그에게 뒤집어씌울 수도
있었다. 여포의 진영으로 찾아간 호적아는 여포에게 머리를 조아렸다.
"우보의 목을 바치겠사오니 저를 휘하에 거두어 주십시오."
여포는 그런 호적아를 노려보며 투항해 온 까닭을 물었다. 그때 호적아가 이
끌고 온 몇 명의 군졸들 중 우보의 심복이었던 부하 하나가 재빨리 입을 열었
다.
"호적아는 재물과 출세에 눈이 어두워 우보의 목을 베었습니다."
여포는 그 말에 크게 노했다.
"우보의 머리만으로 부족하다. 너같은 놈을 살려두면 세상이 더러워질 것이
다. 의리 없는 네놈의 목도 내놔라!"
여포는 호적아에게 호통을 친후 그 자라에서 목을 베어 버렸다.
우보가 죽고 또 그를 죽인 호적아도 여포에게 참살되었다는 소문은 이각의 진
영에도 전해졌다.
"사태가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이제는 죽느냐 사느냐로 싸우는 길밖에 없
다."
이각은 군사를 수습하여 각오를 다지며 다른 장수들에게 말했다.
"여포에게 정면으로 부딪쳐서는 승산이 없음은 이미 알려진 바와 같소. 그는
용맹스럽기는 하나 지모가 모자라므로 이점을 노려 계책을 세워야 하오. 나는
군사를 이끌고 계곡을 지키며 그를 유인하겠소. 곽 장군께서는 군사를 이끌고
징과 북을 울리며 후방을 교란시키시오. 장제와 번주 두 장군께서는 군사를 나
누어 장안으로 쳐들어가시오. 그렇게 되면 아무리 여포라도 맥을 추지 못할 거
요."
이각의 무리는 즉시 그 계책에 따라 여포를 산속으로 유인했다.
그 사이 장제,번주 두 장수는 양대로 나누어 장안으로 진격하자, 장안은 불난
집처럼 어수선해졌다.
"장안이 위급하다. 빨리 돌아와 장안을 방비하라."
왕윤은 여포에게 명했다.
한편 여포는 호적아의 목을 베고 이각의 군사가 있는 산 아래에 당도했다. 그
러나 이각은 맞서 ㅆ우지 않고 자꾸만 산 속으로 군사를 물렸다. 여포가 뒤쫓으
면 산봉우리나 계곡에 숨어 있던 군사가 달려나왔다. 이각은 산 위에서 활을 쏘
아 적을 맞으니 여포는 곤경에 처했다. 군사를 물리려하면 이번에는 곽사군이
후방에서 몰려 나왔다. 달갑지 않은 싸움이었지만 맞싸우지 않으면 전멸할 위기
에 처할 판이었다.
치나갈 수도 물러설 수도 없는 진퇴양난의 싸움터에서 며칠을 헛되이 보내고
있는 여포였다.
이때 장안을 향해 거센 진격을 감행한 장제,번주의 근사는 말물같이 몰려들어
도성에 육박하고 있었다.
그러나 장안에는 철벽같은 외성이 있었다. 제 아무리 용감한 군사라도 이 철
옹성을 뚫지는 못했다. 장안의 사람들도 이 철옹성을 굳게 믿고 있었다.
그러나 장안에는 동탁의 잔당들이 아직은 많이 남아 있었다. 그 동안 숨소리
를 죽이며 지내 오던 이몽,왕방이 반란군과 내통하고 있었던 것이다.
"때가 왔다!"
잔당들이 외치며 일시에 성문을 여니 장제,먼주의 군사들은 노도와 같이 성
안으로 밀려들었다. 마치 둑을 무너뜨린 탁류처럼 밀려들자 장안은 아비규환 바
로 그것이었다.
장제,번주의 군사들은 급히 모병한, 잡군이 많이 섞인 군사였다. 일단 성 안
에 들어오자 그들은 순식간에 폭도로 돌변했다. 자앙늬 군사들이 자기들을 몰살
시키려 한다는 유언비어를 믿고 있는 이들니었던지라 폭도들은 그 양심까지 뒤
섞여 차마 눈 뜨고는 볼 수 없는 만행을 저질렀다.
바로 얼마 전까지만 해도 술잔을 기울이며 태평스런 나날을 구가했던 장안의
백성들이었다.
일시에 들이닥친 콕도들은 닥치는 대로 목을 베고 찌려 죽였다. 아녀자나 소
녀들은 겁탈을 당한 후 목이 떨어졌다.
집집마다 불을 지르니 그 검은 연기는 해를 가리고 땅을 가려 세상은 암흑으
로 변하고 말았다.
이때 여포는 장안이 위급하다는 급사의 파발을 받고 군사를 수습하여 장안을
향해 진군하였다. 말을 달리는 여포의 눈에는 초선의 얼굴이 아른거리고 있었
다. 후방의 곽사군이 북과 징을 치며 여포군을 맞았으나 여포가 몸소 선두에서
방천화극을 들어 그들을 헤쳐 나갔다.
여포는 곽사군과 싸울 뜻이 없었으므로 일단은 퇴로가 뚫리자 곧장 장안으로
진군했다.
그러나 그가 성 밖 수십 리 지점에 이르자 이미 장안의 밤하늘은 붉은 빛으로
물든 채 불길에 휘싸여 있었다.
"...아뿔사!"
여포는 길게 탄식했다. 성 안의 초선이도 구하지 못한 채 불빛이 가득한 하늘
을 우러러보며 망연자실하였다.
장안성을 단념한 여포는 말을 몰아 좌충우돌, 닥치는 대로 반란군을 치며 청
쇄문으로 달려갔다. 청쇄문은 왕윤이 지키고 있는 곳이었다.
"형세가 위급합니다. 저외 함께 관을 벗어나 따로 계책을 세우는 것이 좋겠습
니다."
그러나 여포의 다급한 언성에 비해 왕윤은 침착하게 고개를 저었다.
"만약 이 한을 지켜 주는 수호신이 계신다면 이 나라를 구해 주실 것이요. 그
렇지 않고 이 나라가 무너진다면 나고 함께 하겠소. 장군은 부디 나를 대신하여
쓰러져 가는 사직을 바로잡도록 힘써 주시오."
그럴 동안 모든 성문이 불길에 휩싸이고, 백성들의 아우성이 장안을 가득 메
웠다. 여포는 가솔들을 이끌 틈도 없이 말머리를 돌렸다.
갈 길이 막연했던 여포의 머리에 원술이 떠올랐다.
'원술이라도 찾아가 뒷일을 의논하자.'
여포는 마음을 정하고 군대를 해산한 후 1백여 기를 이끌고 남양을 향해 말을
몰았다.
여포마저 떠나 버린 장안성에서 이각,곽는 이제 거리낄 것이 없었다. 여포만
을 의지하고 있던 태상경,충불,태복,노규 등을 비롯한 여러 백관들이 죽임을 당
하고 수많은 군사들도 못숨을 잃었다.
반란군은 천자가 있는 내정까지 밀려들었다.
헌제는 창백한 얼굴로 꼼짝 않고 있었다. 장안 이거리 저거리에 날뛰는 화마
가 훤히 모이는 듯 했기 때문이었다.
"황궁이 위급해졌습니다."
헌제는 괴로운 탄식만 토해낼 뿐이었다. 조신들 중 한 사람이 그런 천자에게
나아가 아뢰었다.
"아무리 분별이 없는 잡군이라 하더라도 천자의 자리가 얼마나 지엄한 것인가
는 분간할 것입니다. 원컨대 천자께서 몸소 선평문의 누대에 우르시어 저들을
달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폐하의 명을 거스리지는 않을 듯하옵니다."
이에 헌제는 중신들의 말을 좇아 선편문의 누대에 올랐다.
이각과 곽사는 선평문의 누대에 잇는 황금색 거개를 바라보고 군사들을 멈추
게 한 뒤 천자가 나타나자 소리 높여 만세를 불렀다.
"천자다!"
헌제는 누대 위에서 튼 소리로 꾸짖었다.
"듣거라! 너희들은 어찌하여 짐의 허락도 기다리지 않고 마음대로 이 장안으
로 들이닥쳤는가!"
그러자 이각.곽사가 무릎을 꿇어 절을 올리며 말했다.
"폐하! 동 태사는 폐하께 첫째가는 공신이었습니다. 그러나 무고하게도 왕윤
등의 도당에게 모살되었으며, 그 시긴은 장터에 효시되는 수모를 당하였습니다.
신들은 오직 동 태사의 원수를 갚으며 할 뿐입니다. 지금 폐하의 소매 뒤에 숨
어 있는 왕윤의 몸뚱이만 신들에게 넘겨 주신다면 신들은 즉시 금문에서 물러나
겠습니다."
그때 왕윤은 헌제 옆에 시립해 있었다. 왕윤이 황제에게 간하였다.
"신은 원래 사직을 위해 애석히 여겨 사작을 그르쳐서는 아니 됩니다. 신아
나아가 저들을 맞게 해 주옵소서."
천자는 어찌할 바를 몰라 주저하고 있었다. 그러자 왕윤이 문루위에 오르더
니,
"역적의 무리들아, 왕윤이 여기 있다!"
하고 외치며 아래로 뛰어내렸다.
이각.곽사가 칼을 빼들고 왕윤에게 다가갔다.
"동 태사께 무슨 죄가 있다고 네놈이 모살하였느냐?"
"동탁의 죄는 하늘을 채우고 땅을 덮을 지경이었다. 그가 죽던 날은 장안의
백성들이 춤을 추었거늘 어찌 너희들만 그일을 알지 못했더란 말이냐?"
"태사의 죄는 그렇다 하더라도, 우리는 무슨 죄로 사면을 허락지 않았느냐?"
왕윤은 조금도 굴하지 않고 백배수를 흩날리며 꼬장꼬장 이각과 곽사를 꾸짖
었다.
"이 역적들아, 무슨 말이 그렇게 많으냐? 이 왕윤에겐 오로지 죽음이 있을 뿐
이다."
왕윤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이각.곽사는 그의 목을 쳤다.그들은 사람을 보내
그 가족까지도 몰살시켰다. 지난날 왕윤이 채옹을 죽일 때 마일제가 '왕윤의 명
이 길지 못하리라'고 한 예언이 그대로 들어맞은 셈이었다. 역적 동탁을 죽이고
이제 새로운 천하를 세우기도 전에, 그 또한 목숨을 잃고 말았다.
뒷날 사람들은 왕윤의 죽음을 애석히 여겨 다음과 같은 시를 지었다.
왕윤의 계교로
간신 동탁을 죽였도다!
가슴에는 평화로운 나라에 대한 한이 서리고
얼굴에는 조정에 대한 근심이 차 있네.
하늘에 이어진 영기
충성심은 북두칠성에까지 뻗치네.
그 혼백은 지금도
변함없이 봉황후에 머물러 있네.
이각.곽사의 군대는 왕윤을 참살한 후에더 물러가지 않았다. 무리 중엔 이 기
회에 천자까지 죽여 버리고 천하를 우리의 것으로 만들자는 말도 떠돌았다.
그러나 그 말에 대한 번주와 장제는 고개를 흔들었다.
"그건 안 될 말이오. 지금 천자를 죽인다면 이 천하를 적으로 돌리는 어리석
음을 범하는 일이오. 그러니 이전처럼 천자의 세력을 서서히 제거한 뒤에 그때
가서 대사를 도모하는 것이 현명한 방책이 될 것이오."
이각.곽사는 두 장수의 말을 듣고 마음을 진정시컌 후 칼을 거두었다.
그러나 이각의 무리는 그래도 물러나지 않았다. 헌제가 망루 위에서 그들을
내려다보며 옥음을 내렸다.
"이제 왕윤이 죽었는데 그대들은 어찌하여 군사를 거두지 않느냐?"
"황실에 공을 세운 우리들에게 아직 논공행상도 베풀지 않았소. 그런니 훈작
이라도 내리셔야 할 것이오."
천자는 그들이 물러나지 않고 이 같은 요구를 하자 못마땅한 표정으로 물었
다.
"그래, 바라는 벼슬은 무엇이냐?"
이각.곽사.장제.번조 등 각기 원하는 벼슬을 적어 올리자 천자는 그들이 원하
는 대로 벼슬을 내렸다.
그리하여 이각은 거기장군 지양휴에 봉하고 가례교위에 명한 대원수의 표상인
기와 무기를 내렸다. 그렇게 벼슬을 높인 후 이각.곽사는 모두 조정에서 정사를
놀할 때 참석도록 했다.
그리고 장제는 표기장군 평양후에 번주는 우장군 만년후에 봉해 홍농에 진을
치고 군사를 주둔케했다. 거기다가 이몽과 왕방을 교위에 명하자 그제서야 그들
의 군사를 물리쳤다.
그리하여 하루 아침에 필부들은 위관을 차리고 일약 묘당으로 들어서게 됭었
다.
이제 천하의 대권을 동탁의 손에세 농락당하다 다시 동탁의 잔당 네 사람의
손아귀로 넘어갔다.
의심이 많은 것은 벼락감투를 쓴 자들의 특성이다. 그들은 헌제 주의에 빈틈
없이 밀정을 세워 두고 조정의 대신들을 감시하였다.
그러나 이런 정권일수록 백성들이 바라는 질서와 평화와는 거리가 먼 화를 불
러일으키게 마련이었다.
헌제는 늘상 가시방석에 앉은 듯 불안했다. 조정의 모든 문무백관들은 이각과
곽사의 마음대로 움직였다. 이가고가 곽사는 덕망이 높은 원로인 주전을 청해
태복의 자리에 앉혀 두고 뒤에세 조정의 권세를 마음대로 주물렀다. 조정이 이
렇게 어지러워지자 천하 곳곳에서는 군웅들이 봉기하기 시작했다.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 서량태수 마등과 병조자사 한수 두 사람이 10만
대군을 일으켰다.
"조저을 침범한 적도들을 토벌해야 한다!"
그들으 이렇게 외치며 장안으로 진격해 왔다.
마등과 한수는 이미 군사를 이끌고 오기 전에 장안으로 사람을 보낸 적이 있
었다. 시중인 마우, 간의대무인 충소, 좌중랑장인 유범과 내통하여 역적을 치기
로 계획을 세웠던 것이다.
그리하여 헌제는 이들 세 사람의 말을 좇아 마등을 정서 장군, 한수를 진서
장군에 봉하여 역적을 토벌토록 밀조를 내렸던 것이었다.
이각.곽사는 이들이 장안으로 진격해 온다는 소식을 듣고 모사 가후를 불렀
다.
"마등과 한수가 군사를 일으켰다니 어찌하면 좋은가?"
가후가 한 가지 방책을 내놓았다.
"장안을 둘러싼 외성르 더 높이고 성 밖의 둘레를 깊이 판 후 성문을 굳게 닫
아야 할 것이오. 그들은 먼 곳에서 군사를 이끌고 오는 중이니, 얼마 되지 않아
양초가 바닥이 날 것이오. 그들이 군사를 물릴 때 성문을 열고 기습을 감행하면
적을 손쉽게 섬멸할 수 있을 것이오."
그러나 이 말을 듣고 있던 이몽과 왕방이 반대하며 나섰다.
"그건 좋은 계책이 아닙니다. 저희에게 군사 1만 명만 주신다면 두 사람의 목
을 베어 장군들게 바치겠습니다."
그러자 가후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아니 됩니다. 지금 그들 앞에 나선다면 페할 것은 불을 보듯 뻔한 이치입니
다."
가후가 그들의 말을 가로막자, 왕방과 이몽이 질세라 한 목소리로 말했다.
"만약 우리가 나아가 싸워 패한다면 목을 쳐도 좋소. 그러나 우리가 두 사람
의 모긍ㄹ 베어 온다면 우리가 공의 목을 벨 것이오."
왕방과 이몽이 그토록 결연히 나서나 가후도 더 이상 반대 의견을 펴지 않으
며 이각과 곽사에게 말했다.
"굳이 싸우겠다면 서편 2백여 리 밖에 있는 험한 주절산이 있습니다. 장제와
번주 두 장군에게 명하여 거기에 군사를 매복케 하시고, 이몽.왕방으로 하여금
군사를 이끌고 적군을 맞아 싸우게 하십시오."
이각과 과사는 가후의 말에 따라 군사 1만 5천을 이몽과 왕방에게 주었다. 두
사람은 군사를 이끌고 나가 장안에서 2백 5십 리쯤 떨어진 곳에 진을 치고 있었
다.
서량태수 마등과 병주자사 한수가 군사를 이끌어 그곳에 당도했다. 이몽과 왕
방이 그들을 맞았다.
"역적 이몽과 왕방, 두 놈을 사로잡을 자는 누구냐?"
마등.한수가 선두에 나서며 좌우를 둘러보자 나이 어린 장수 한 사람이 말을
달려 앞으로 나섰다.
"제가 가겠습니다."
얼굴은 관옥처럼 휘고 윤이 났으며, 눈은 별빛처럼 맑게 빛나고 있었다. 그러
나 체구는 호랑이처럼 듬직하고 팔은 원숭이같이 길었다. 표범의 배에 이리처럼
날래 보이는 허리였다.
그는 손에 긴 창을 비껴들고 준마를 박차며 달려나갔다. 그는 바로 서량태수
마 등의 아들 마초로 자를 맹기라 했다. 아직 열일곱의 어린 나이이나 용뱅은
그를 당할 자가 없다는 소문이 나돌고 있었다.
어린 마초가 적진에서 달려나오자 왕방은 제법 큰소리까지 쳐 가며 달려나왔
다.
"그다지도 사람이 없어 애송이를 보내느냐!"
그러나 두 사람이 칼과 창을 부딪친 지 수 합이 되지 읺아 왕방은 마초의 장
창에 찔려 맥없이 나뒹굴고 말았다. 마초가 왕방을 말에거 떨어뜨린 뒤 유유히
말머리를 돌렸다. 그러자 마초를 지켜 보고 있던 이몽이 급히 말을 내몰아 마초
의 뒤을 쫓았다.
마초의 맞은편에서 이 모양을 보고 있던 마등이 황급히 외쳤다.
"조심하라. 네 뒤에 적이 온다!"
마 등의 고함 소리가 끝나기도 전에 마초가 홱 몸을 돌려 이몽을 사로 잡았
다. 마초는 그때 이미 이몽이 뒤따라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모른 체하
며 달려오는 이몽을 급히 서둘게 하여 허점을 만들게 한 뒤 그 허를 노려 그를
사로잡을 욕심이었던 것이다. 이몽이 마초의 등을 향해 창을 찌르자 번개같이
피하니 순간적으로 당황한 것은 이몽이었다. 그러나 이몽이 잠시 허둥대며 자세
를 고치려는 순간 마초는 침착하게도 긴 팔을 내뻗어 그를 사로잡았다.
이몽의 군사들은 대장 두 사람을 장난감 다루듯 하는 적장을 모자 벌써 기가
질렸다. 모두 달아날 길을 찾으며 사방으로 흩어지자 마등과 한수가 이들을 뒤
쫓았다. 그들은 일사천리로 이각과 곽사가 진을 치고 있는 성벽에 다가와 이몽
의 머리를 군문 위에 높이 매달아 기세를 올렸다.
이몽과 왕방이 마등의 아들 마초에 의해 목이 떨어졌다는 소식을 듣고 이각
가.곽사는 그때서야 그후의 말이 옳았음을 깨달았다.
그들은 가후의 말을 좇아 성벽의 방비를 단단히 한 채 성문을 굳게 닫고 진중
에 깊이 박혀 싸움을 피했다.
서량군에서는 예측대로 두 달이 채 못 가 동요가 일기 시작했다. 벌써 양초가
떨어지고 오랫동안 싸움터에서 시갈린 군사들의 전의가 나날이 허물어져 갔다.
마등.한수는 하는 수 없이 군사를 물릴 것을 의논하기로 했다.
이때 마등.한수는 은밀히 성 안으로 사람을 보내어, 내통하고 있던 마우와 충
소.유범에게 이런 사실을 알렸다.
그러나 일은 엉뚱한 곳에거 뒤틀리고 말았다.
마우의 시종 하나가 그나 주인 마우에게 심한 욕설과 꾸중을 들은 데 대해
앙심을 품고 있었다. 마우가 형 밖의 군사와 내통하고 있다는 것을 눈치채고 있
던 시종은 주인에 대한 앙심으로 이 사실을 밀고했다.
이각과 과사는 치응 떨며 마우.충소.유범을 참수하고 그들의 가족까지 모조리
죽인 후 세 사람의 목을 서문 위에 효수했다.
성 안의 내통자들에게 한 가닥 기대를 걸었던 마등과 한수는 그들이 효수되다
하는 수 없이 군사를 물리고 말았다.
기회를 엿보고 있던 이각의 군사들은 일제히 네 곳의 성문을 열고 쏟아져 나
왔다.
이각에게 명을 받은 장제.번조 두 장수는 마등과 한수를 뒤쫓았다.
서량군은 이미 전의마저 상실한 군사라 제대로 싸워 보지도 못한 채 흩어져
도망치기에 바빴다.
마 등을 뒤쫓는 장제를 마초가 매복하고 있다가 가까스로 물리쳤다.
그러나 병주사자 한수는 적장 번주의 추격에 목숨이 경각에 다다를 지경이 되
었다.
한수와 번주는 원래 같은 고향 사람이었다.
한수가 쫓겨 진창 부근에 이르렀을 때 그는 말머리를 돌려 번주에게 호소했
다.
"번주, 공과 나는 동향인으로서, 어찌 이리 무정하게 쫓으시오?"
한수는 마지막 수단으로 동향인의 엤 우정에 호소했다. 번주는 그 말에 마음
이 흔들리지 않는 바 아니었으나 곧 목소리를 높여 말했다.
"여기는 싸움터요. 사사로운 우정이나 인정이 있을 수 있겠소?"
"그렇다면 내가 싸움터에 나온 것도 오직 국가를 위함이오. 귀공이 국사라면
국사의 마음을 알고 있을 것이오. 나는 고에게 죽어도 좋으나 이제 추격을 좀
늦우어 주오."
번주는 한수의 간곡한 호소에 그만 인정에 끌려 차마 그를 베지 못한 채 말머
리를 돌려 돌아가고 말았다.
그러나 이 광경이 이각의 조카 이별의 눈에 띄었다. 이별이 이 사실을 가만히
전하니 이각은 노발대발하며 곧 번주를 베려 하였으나 가후가 말리며 귓속말을
했다.
"아직 인심이 안정되지 않았는데, 휘하의 장수를 처단하여 피를 흘리는 것은
좋지 않습니다. 그보다는 전공을 축하하는 자리를 마련하여 그 자리에서 본주의
목을 베십시오."
이각은 가후의 말을 좇기로 했다.
이튿날, 장안성 안에는 승리를 자축하는 연회가 벌어졌다. 잔치 분위기가 점
차 무르익어 갈 무렵, 이각은 칼을 빼들고 번주의 뒤에 섰다.
"번주, 네놈은 한수와 내통했지? 감히 나를 거스리려 하다니!"
이각은 번주가 밉을 역 사이도 없이 한칼에 목을 쳤다. 번주의 목이 떨어지자
동료인 장제는 까닭도 모른 채 두려움에 떨벼 바닥에 엎드려 대죄앴다.
그러나 이각은 그런 장제를 붙들어 일으켰다.
"공은 아무런 잘못이 없소. 번주는 어제 싸움터에서 병주작사 안수를 살려 주
었기 때문에 목을 벤 거요. 공은 나의 심복이니 마음 편히 술이나 드시오."
이각은 번주가 이끌던 군사들도 장제 휘하에 들게 했다. 장제는 백배 사례하
면서 본부 군마와 번주의 근사까지 거느리고 홍농으로 돌아갔다.
떠오르는 태양 조조 서주의 도겸과 북해의 공융
조조는 산동 일대를 중심으로 천하의 영웅호걸과 당대의 인재를 모아 천
하를 꿈꾼다. 또한 부보형제를 모시고자 하나 도겸의 호위군들에게 살해되
어 원수를 갚고자 발병한다. 도겸은 북해와 청주에 구원병을 요청하는 한
편, 유비에게도 사산을 보낸다.
이각.곽사의 서량의 마등과 한수를 꺾자, 제후들이 모두 두려워하며 그
와 맞서려는 자가 없었다. 모사 가후도 이각과 곽사에게 민심을 얻기위해
백성글을 보살펴야 한다고 권했으므로 조정에서는 차츰 생기가 돌아 한동
안은 평온을 되찾은 듯했다.
그러나 뜻밖에도 그 무렵, 청주에서는 황건적이 또다시 일어났다. 중앙
이 흔들리면 그 흔들림에 대답하듯이 이렇다 할 두목도 없는 초적들이 떼
지어 다니며 백성들을 괴롭혔다.
그러다 그 수가 수십만에 이르렀으며, 그들은 벌떼처럼 일어나 약탈과
살생을 일삼았다.
이각과 곽사는 황건적에 대한 대책을 세우고자 백관을 물러모아 위견을
물었다.
태복 주전이 먼저 말했다.
"산동에서 일어난 황건적을 토멀하려면 그곳 가까이에 있는 조조를 등용
하여아 할 것입니다."
이각과 곽사는 즉시 산동 동군태수로 있는 조조를 천자에게 천거하였다.
그리하여 조조에게 제북상 포신과 힘을 합해 '황건적을 토벌하라'는 천
자의 영이 내려졌다.
조조가 동군으로 오게 된 것은 그 당시 황건적 나릉ㄹ 틈타 일어난 각처
의 도적 떼들 때문이었다. 그들 도적 떼들은 전국 각처에서 일어나 서로
연대를 맺고 있었는데 이들을 흑산적이라 불렀다.
괴수는 장연이란 자였는데, 흩어져 있는 도적의 수가 무려 1백만에 가까
웠다.
하북의 여러 고을들이 이들의 근거지였다. 그러나 조정에서는 이들을 진
압랄 힘이 없었다. 그러다가 괴수 장연이 표문을 올려 조정에 투항하자,
그로 하여금 도적의 잔당들을 진압케 했다. 흑산적은 이렇게 하여 진정되
었으나 그 이후 동탁이 장안으로 천도할 무렵, 어지러운 세상을 틈타 다시
무리를 지어 일어났던 것이다.
그들 무리 중 우독과 백요 등이 수심반을 이끌고 위군과 동군에 출몰했
다. 이에 동구태수 왕굉이 구원을 요청한 장수가 바로 조조였다. 관도의
여러 제후들이 불화와 반목으로 제각기 근거지로 돌아간 후의 일이었다.
조조가 형양에서 참담한 패전을 겼은 후 위병을 이끌며 떠돌고 있었던
때였으므로 조조는 태수 왕굉의 청을 받아들여 위병들을 이끌고 복양에서
백요의 군사들과 맞닥뜨려 이겼다.
이후부터 도적 떼들은 감히 동군을 넘보지 못하니 동구능ㄴ 니저처럼 평
온해졌다. 이로 인해 조조는 동군에 있어 실질적인 태수의 위치에 서게 되
었다.
이때 원소는 조정에 표를 올려 도적 떼들을 물리친 조조의 공을 들어 그
를 동군태수로 천거했다. 그때 원소는 기주태수 한복의 원병 요청을 기화
로 기주를 뺏어 힘을 기르고 있었다. 이럴 때 조조를 도와주면 그와 다시
맷어질 뿐만 아니라 필요하면 그의 힘을 빌 수 있다는 생각에서 표를 올린
것이었다.
조정에서 조조를 동군태수로 봉하자 조조는 확고히 동군을 근거지로 발
판을 다지기 시작했다. 세금으로 군자를 마련할 수 있게 되자 착실히 군사
를 늘리며 조련시키는 한편 각지에서 많은 인걸들을 모았다. 특히 각 처의
현재들을 초빙하고 유능한 선비들에게 융숭한 대접을 했다.
그런 소문을 듣고 그를 찾아가는 어진 선비와 무사들이 많았다.
한편으로 세작(첩자)을 장안에 보내어 동태를 파악케 했다.
"왕윤이 초선이란 가기를 내세워 연환계를 써 동탁과 여포를 이간질 하
였다고 하옵니다."
"왕윤이 여포와 이숙을 끌어들여 동탁을 모살하였다는 소식이 옵니다."
"동탁의 잔당, 이각과 곽사의 무리들이 병권과 정권을 좌지우지 하고 있
답니다."
이런 소식들이 쉴새없이 조조에게 전해지고 있었다.
이럴 즈음 조정에서 조조에게 황건적을 토벌하라는 영이 내려온 것이었
다. 조조는 애당초 이각 등 조정에서 권력을 휘두르고 있는 새로은 조신들
을 인정하지 않고 있었다. 그러나 천자의 영으로 내려온 명령이니 복종하
지 않을 수도 없었다.
한편으로는 오랜 조련을 거친 자기의 병마를 움직일 좋은 기회라고 여겼
다.
조조는 수양에서 제북까지 쳐들어가며, 가는 곳마다 승리를 거두었다.
투항해 오는 황건적들을 다시 선봉으로 내세우고 몰아치니 도처에서 항
복해 오는 적의 수는 헤아릴 수 없을 지경이었다.
조조가 출진한 지 불과 1백여 일 만에 30만에 이르는 포로를 잡고 황건
적을 완전히 소탕하였다.
조정에서는 그의 공훈을 높이 여겨 진동장군에 명했다.
이로 인해 그의 위명은 날이 갈수록 천하에 퍼져 가니 실리는 조정에서
내린 그런 관직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조조는 항복한 30만의 군사에다 백성들 가운데 힘센 장정들을 뽑아 모두
백만에 가까운 군대를 양성했다.
제북, 제남의 땅은 미옥하여 이들 군사를 기를 군량이나 재화도 넘칠 정
도로 많았다.
때는 초평 3년 11월이었다.
조조는 휘하의 1백만 대군 중에서 정예병을 뽑아 '청주병'이라 칭한 뒤
다른 군사들은 모두 돌아가 농사를 짓도록 했다.
농민의 장정을 중핵으로 하여 특별히 훈련을 시킨 이 청주병을 조조는
휘하의 주력군으로 만들 계획이었다.
조조는 연주에 머물러 있으면서 천하의 명사들을 초청하는 한편, 전국
방방곡곡에서 찾아드는 인재와 영웅들을 받아들이고 있었다.
모여든 사람 가운데 영주 영음 사람 순욱과 그의 조카 순유가 있었다.
순욱의 자는 문약으로 그의 조부 순숙은 순 환제때에 이름을 천하에 떨
친 사람이었다. 그에게는 여덟 명의 아들이 있었는데 '순가팔용'으로 불리
워지는 아들 중 둘째 곤과 여섯째 상이 뛰어났다. 순욱은 제남상을 지낸
곤의 아들로 어려서부터 재주가 뛰어나 사람들은 그를 '왕좌지재'로 일컬
었으며, 그가 성년이 되자 조정에서는 수궁령의 벼슬을 내렸다. 이후 동탁
이 그를 향부령으로 삼았으나, 그는 벼슬을 사양하고 고향으로 돌아갔다.
고향 영주에 돌아온 순욱은 어느 날 부모에게 기주로 거처를 옮기도록
권했다.
"뒷날 천하에 난이 일어나면 군사들이 이곳에서 맞닥뜨리게 되니 떠나는
것이 좋겠습니다."
마을 사람들에게도 그렇게 권하였으나 대부분 순욱의 말을 듣지 않았다.
기주엔 이미 원소가 태수로 부임해 있었다.
원소는 극진한 예를 베풀며 그를 맞았다. 그러나 순욱은 원소가 그릇이
크지 않음을 알고 조조에게 찾아온 것이었다.
그때 그의 나이 스물아롭이었다.
조조는 그가 찾아오자 기뻐했다.
"그대는 나에게 한 고조 유방을 도와 천하를 얻게 한 장자방과 같은 분
이오."
조조는 그에게 행군사마의 벼슬을 주며 짐심으로 자기를 도와 달라고 청
했다.
또 그의 조카이며 황문시랑의 벼슬을 지낸 바 있는 순유에게는 행군교수
의 직책을 주었다. 순유는 자가 공달인데 그 역시 출중한 인물이었다.
그런 어느 날 순욱이 조조에게 한 사람을 천거하며 말했다.
"연주에 한 인물이 있는데, 지금 어디 있는지 알 수가 없습니다."
"그가 누구요?"
"동군 동아사람으로 자는 중덕, 이름은 정욱이라 합니다."
"나도 그 이름은 들은 바 있소."
조조는 즉시 사람을 풀어 그를 찾도록 하니 정욱은 신 속에서 글만 읽으
며 은거하고 있었다. 조조는 정중히 그를 청해 맞아들였다.
"나는 보고 들은 바가 좁고 재주 또한 얕습니다. 공과 동향인 곽가야말
로 당대의 현사인데 어찌 그를 부르지 않습니까?"
정욱의 말에 조조도 무릎을 치며 기뻐했다.
"내가 어찌 그를 잊고 있었던가?"
그리하여 정욱이 천거햐여 준 연주 사람 곽가를 초빙하고, 곽가의 천거
로 광무 황제의 직손 회남 성덕사람 유엽을 맞았다. 유엽의 자는 자양이었
다.
유엽은 또 두 사람의 현사를 천거했다. 산양 창읍에 사는 만총으로 자는
백령이라 했으며, 또 한 사람은 무성의 여건으로 자를 자각이라 했다.
이미 이름이 알려진 이들이라 조조는 그들을 군중종사로 삼았다. 또한
그들 두 사람이 천거한 진류 평구사람이며 자가 효선인 모개를 맞으니 조
조의 주위는 인재가 기라성처럼 모여들었다.
이들 몾지않게 태산 거평 사람으로 자를 문칙이라고 하는 우근과 진류
사람 전위를 얻은 것은 조조의 군사를 강화하는 데 큰 힘이 되었다.
우금은 활쏘기, 말 달리기 등 무예가 출중한 장수로 그의 군사 수백 명
을 이끌고 찾아왔다.
또한 전위는 체격이 장대한 장수로 무게80근이나 되는 양지철극을 비껴
들고도, 말 위에 올라 창을 쓸때는 마치 하능을 나는 듯하다는 천하장사였
다. 원래는 장막의 휘하에 있었으나, 장막의 다른 부하와 다툼이 생기자
전위는 한 주먹으로 때려 죽이고 몸을 피해 산 속에 숨어 지내던 중 하후
돈이 그를 조조에게 소개한 것이다.
"제가 어느 날 사냥을 나갔다가, 이 사람이 호랑이를 쫓아 냇물을 한 달
음에 건너뛰는 것을 보고 데려다가 군중에 두었는데 공께 특별히 추천하는
바입니다."
조조는 그에게 무예시범을 청했다.
전위는 80근의 양지철극을 들고 가볍게 맘 위레 올라 쏜살같이 달리더
니, 허공을 가로지르며 양지철극을 나무막대기 휘두르듯 놀리며 춤을 추었
다.
과연 천하장사의 기막힌 창솜씨였다.
때마침 거센 바람이 불어 홀연 영정의 장대 앞에 서 있는 커다란 대장기
가 바람에 휩쓸리며 넘어지려 했다.
부근에 있던 군사들이 몇십 명이 달려가 기를 붙들었으나 강풍을 이기지
못해 기가 한쪽으로 기을고 있었다.
전위가 이를 보고 한달음에 달려갔다.
"모두 물러서라!"
한소리 지르더니 한 손에 번쩍 기를 일으켜 세웠다. 한참 동안 세찬 바
람이 깃발을 찢을 듯이 불어 왔으나 그는 결코 두 손을 쓰지 않았다.
조조는 감탄해 마지않았다.
"음-. 옛 악래보다 월등한 역사로다!"
조조는 그에게 백금란의 전포에 명마를 주고 장전도위에 명했다.
조조가 전위의 힘에 감탄하여 비유한 아래는 예날 은나라 주와의 신하
로, 천하무적의 장사였다. 조조가 전위에게 그보다 월등하다 했다 해서 이
후부터는 그의 별호가 악래가 되었다.
그 뒤로도 조조를 찾아오는 사람이 끊이질 않으니, 조조의 위세는 산동
일대를 떨쳐 울렸다.
조조는 휘하에 수십만의 군사와 수백을 헤아리는 모사와 장수를 거느리
게 되자 시선을 천하로 돌렸다.
그러나 이때 순욱이 나서며 조조를 일깨웠다.
주공깨서는 아직도 움직여선 아니 됩니다. 지금 이각과 곽사가 조정에
들어섰다고는 하나 그들은 조정에 뿌리박을 만한 무리가 되지 못합니다.
가벼이 군사를 움직이면 그들과 같은 무리로 오인받을 우려가 있습니다.
아직은 대국을 주재할 만한 인물이 나설 때가 아닙니다. 병마를 쉬게
하면서 형세를 살피시는 게 좋겠습니다.
문약의 말이 옳소. 나 또한 그 같은 생각이었으나 조정이 워낙 어지러워
잠시 울분이 치솟았을 뿐이오.
조조는 이렇게 말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어느 날, 만총과 여건의 천거로 맏아들인 항장과 모개가 조조에게
진언했다.
주공, 천하를 잡기 위해서는 다음과 같은 원칙이 필요합니다.
즉 첫째가 천자를 받들여 대의명분을 세움이요, 둘째가 농민 출신자를
군사로 써야 한다는 점입니다. 백성들의 대부분이 농민이며, 농민이야말로
강병의 근원입니다. 셋째가 영내의 농업을 진흥시켜야 할 것입니다. 농업
을 진흥시킴으로서 경제력을 높이고 군비를 강화할 수 있습니다. 이 세가
지 윈칙을 지키신다면, 주공처럼 영명한 자질과 강대한 역량을 가지고 계
신 분은 천하의 패자가 되실 수 있습니다.
조조는 즉시 이 진언을 받아들였다.
원대한 야망을 실현하기 위해 어긋남이 없는 원칙이요, 정책이라 여겼기
때문이었다.
이후 조조가 일생에 걸쳐 실시한 존왕봉제, 농엄진흥, 둔전병제도, 경제
력 중시, 부국강병 인재등용 등의여려 가지 정책은 이때부터 그 기초가 다
져진 것이었다.
그런 조조는 어느 날 태산태수 응소를 불렀다.
"내 가친을 모셔 오라."
조조는 천하를 다투기 전에 일가권속을 자기의 근거지로 불러들일 작정
이었다.
이제는 산동일대에 기반을 굳히고 일신의 안정도 이루어지자 늙은 부친
을 그대로 두어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또한 언제 어니서 나타날
지 모르는 적대 세력으로부터 가솔들을 불러들여 후환을 없앤다는 뜻도 있
었다.
조조의 부친 조숭은 진류에서 난을 피하여 낭야라는 벽촌에 은거하고 있
었다.
조조는 서신을 응소에게 주어 낭야로 보내 부친을 모셔 오도록 했다.
조조가 보낸 사신을 맞은 부친 조숭의 기쁨은 컷다. 조숭은 주위 사람들
에게 아들 자랑을 하며 말했다.
"그 애의 숙부인 귀도, 친척들도 조조가 소년 시절에는 장래가 염려스러
은 부랑배라는 등 무던히 험담을 했었지. 그러나 나는 그 애의 장래를 믿
고 있었다네. 역시 내 눈은 어긋남이 없지 않았는가."
조숭의 집안은 가세가 기울었다 하나 일가족 40여 명에, 하인도 1백여
병이나 되었다. 이들 가솔들과 가재도구를 1백여 대의 수레에 싣고 연주를
향하여 길을 떠났다.
이때 서주태수 도겸은 이전부터 조조와 친분을 맺고 싶었으나 기허ㅣ를
얻지 봇하고 있었다. 마침 조조의 부친이 그곳을 지난다는 말을 듣고 성
밖까지 나와 영접하며 이틀 동안 잔치를 열어 떠나는 길을 축하했다.
'한 고을의 태수가 하잘것없는 늙은 나를 이렇게 대할 아유가 있겠는가.
다만 아들 조조 때문일 것이다.'
조숭은 속으로 그렇게 생각하며 즐거은 여행길에 올랐다.
도겸은 친히 성 밖까지 전송하며, 휘하의 도위 장개에게 5백의 군사를
주어 호송토록 했다.
'참 좋은 위인이다.'
조조의 부친 조숭은 도겸의 사람됨에 감복했다. 도겸은 온후한 군자라는
것은 그 일대에서도 잘 알려져 있었다. 조숭은 환대에 고마움을 표하고 길
을 떠났다.
계절은 때마침 중추가절 이었다.
그런데 일행이 화비라는 산중에 당도하자, 변덕이 심한 가을 날씨가 갑
자기 흐리기 시작하더니 어느 새 굵은 빗방울이 뚝, 뚝 떨어졌다. 나뭇잎
들이 바람에 휘날리고, 산봉우리도, 계곡도 안개 속에 휘감긴 사나운 나씨
로 변했다.
"소나기다, 어디 비를 피할 만한 곳이 없을까?"
"저기 절이 있는가 보군. 산사의 문이 보이는데..."
일행은 비에 흠뻑 젖은 채 하룻밤을 절에서 묵어 가기로 했다.
중들은 조숭 일행만 안으로 불러 편히 쉬게 하고 장개와 군사들은 바깥
회랑에 머물도록 했다.
차가운 가을비는 주룩주룩 한밤중까지 내라고 있었다.
어두운 복도에서 비에 젖은 채 잠을 청하는 군사들의 불평이 심했다.
그러자 장개가 부하 두목 몇을 부르더니 인적 없는 곳으로 데리고 가 소
곤거렸다.
"여보게, 저녁 무렵 군시들이 모두 불만이 가득 찬 얼굴들을 하고 있지
않던가?"
"요즈음 대우도 제대로 받지 못하는데다, 이런 쓰데없는 임무까지 떠맡
아 비에 젖은 채 잠을 자야 하니... 연주까지 상전도 아닌 저런 늙은이를
호송해 간들 우리에게 돌아오는 것이 무엇이게ㄸ습니까? 군사들을 탓할 수
도 없는 일입니다."
부하 두목니 장개의 꾸짖음을 각오하고 거리낌없이 말했다.
그러나 장개는 꾸짖기는커녕,
"그럴 테지. 무리도 아니지."
하도니 말을 이었다.
"여모게, 우리가 본시 황건 여당으로서 마음내키는 대로 자유롭게 지낸
사람들이 아닌가. 지금은 하는 수 없이 도겸의 수하 노릇을 하고 있으나
아렇다할 좋은 대접도 받지 못하네. 지금은 우리가 호위하는 조숭 일행의
짐이 1백여 대의 수레나 되니 아마도 금은 재화도 많이 가지고 있음에 틀
림없네. 이것들을 가로챈다면 부귀도 누릴 수 있을 것 같네. 어떤가, 오늘
밤 이것들을 가로채서 산채에 들어가는 것이 좋지 않겠는가?"
그렇잖아도 불만에 차 있던 수하들이 장개의 말을 마다할 리 없었다.
이런 흉계가 꾸며지고 있는 줄도 모르고 조숭은 방 안에서 깊이 잠들어
있었다.
밤 삼경이 가까이 올 무렵이었다.
갑자기 절간 주위에 소란스런 발자국 소리가 들리자 조조의 친동생 조덕
이 놀라 칼을 차고 밖으로 나오며 물었다.
"누구냐, 무슨 일이냐?"
조덕이 속옷 바람에 방문을 열고 뛰쳐나가자 장개가 기다렸다는 듯이 단
칼에 그를 베었다. 이어 비명 소리가 여기저기서 물려 퍼져 조용하던 절간
은 순식간에 수라장이 되었다.
장개 일다은 흉악한 비적으로 변해 닥치는 대로 살육을 자행했다.
조조의 부친 조숭은 황망히 첩과 함께 소란을 피해 뒷간에 숨어 있었으
나 끝내 발각외어 난도질을 당하게 말았다. 그 밖에 가족과 하인 등 1백여
명에 이르는 사람들도 모조리 도륙당했다.
사신 응소는 이 흉변에 혼비백산하여 겨우 몇 명의 부하만을 데리고 도
망쳐 나왔다. 그러나 조조늬 부친 조숭이 참변을 당한 터라 후환이 두려워
조조에게는 돌아가지 못하고 원소에게 몸을 의탁 하였다.
피비린내를 풍기던 밤이 밝았다.
아직 부슬부슬 내리고 있는 가을비 속에 산사는 불타고 있었다. 장개일
당은 재물과 가재도구를 실은 수레를 이끌고 사라졌다.
뒷날 사람들은 그때의 참혹한 광경을 이렇게 노래했다.
천하가 다 아는 영웅 조조
지난날 여백사의 전가족을 몰살하더니
이제 살해당함을 어찌 막지 못하는가
하늘의 이치, 인과응보는 잘못됨이 없구나.
응소의 졸개 중 살아 남은 자가 이 소식을 조조에게 전했다.
조조는 이 흉변을 전해 듣자 땅을 치며 통곡하다가 혼절했다.
조조는 어디까지나 노부의 죽음이 도겸의 탓이라 여겼다. 젊었을 시절,
자기의 판단 잘못으로 여백사의 가족을 모조리 죽였던 조조였다. 그러나
그와 비슷한 흉변이 자기에게 일어나자 조조는 그 잔악함에 치를 떨지 않
을 수 없었다.
"도겸이란 놈이 부하를 시켜 내 아버님을 죽이다니, 아들로서 불구대천
의 원수를 갚지 않고 어찌 하늘을 볼 수 있을 것인가, 당장 군사를 이끌고
서주에 풀 힌 포기 나지 못하게 하리라."
조조는 그날로 대군 동원령을 내렸다.
순욱과 정욱에게 군사 3만을 주어 견성, 범현, 동아의 세 현을 방비케
하고, 조조는 스스로 나머지 군사를 이끌고 서주를 향해 말을 몰았다. 선
봉은 하후돈, 우금, 정위가 맡도록 했다. 조조는 '보수설한'이라고 쓴 깃
발을 펄럭이고 말을 달리며 외쳤다. 원수를 갚고 한을 풀겠다는 뜻이었다.
"성을 빼앗거든 성 안의 사람들을 모조리 죽이고 불태워 나의 아버지 원
수를 갚도록 하라!"
부친의 원수를 갚기 위해 조조가 대군을 일으켜 소주로 향하고 있다는
소문은 존국 방방곡곡에 퍼졌다.
이때 도겸과 교분이 두터운 구강태수 변냥이 군사 5천을 거느리고 도겸
을 돕기 위해 길을 나섰다. 이말을 들은 조조가 격노하여 하후돈에게 영을
내렸다.
"구강태수 변양이 도겸을 구하러 온다 하니 너는 서주로 향하는 변양의
길을 끊어 그들을 쳐라!"
하후돈은 군사를 몰아 구강으로 내달렸다.
마침 구강의 동군종사로 진궁이란 사람이 있었다.
진궁은 이전에 조조가 동탁을 죽이려다 실패한 후, 도중에 붙잡히는 몸
이 되었으나 그를 살려 준 사람이었다. 두 사람은 뜻을 함께 하기로 맹세
한 사이였으나 여백사 일가족을 죽이는 잔인함에 조조에게 크게 실망하여
행방을 감춘 사람이었다.
진궁 역시 도겸과 교분이 두터운 사이여서 조조를 만나기 위해 밤낮을
가리지 않고 달려와 조조 만나기를 청했다.
조조는 진궁을 보자 대뜸 그가 무엇 때문에 자기를 만나러 온 것인지를
짐작했다.
"공은 지금 무얼하며 지내고 있소?"
조조의 물음에 진궁은 다소 계면쩍은 얼굴로 대답했다.
"동군의 종사라는 말직을 맡고 있습니다."
조조는 그 말에 냉소를 머금었다.
"그렇다면 서주의 도겸과는 친분이 두터운 사이겠구려. 짐작건대 공은
그 자를 위한 세객같은데, 아마 공의 간청도 이 조조의 마음을 돌릴 수는
없을 것이오. 이왕 먼길을 왔으니 쉬었다가나 가시오."
"말씀하신 대로 그런 목적으로 찾아뵈었습니다. 소생이 아는 도겸은 세
상에 어진 군자입니다. 춘부장께서 참혹한 변을 당한 것은 도겸과는 전혀
무관한, 장개의 소행입니다. 소생은 죄 없는 군자가 고통 받으며, 장군의
성망에 흠이 생길까 하여 근심스럽습니다."
"그런 헛소리 마시오. 공께서 전에 나를 버리고 떠나시더니 이제 무슨
면목으로 나를 다시 찾으셨소!"
조조는 진궁의 간언에 지금까지의 미소가 호통으로 변했다.
"우리 일가족을 몰살시킨 원한을 씻는 일이 어째서 내 성망에 흠이 된다
는 말이오?"
조조가 격앙돈 목소리로 이렇게 말을 잇자 진궁은 더 말을 붙이지도 못
하고 물러갔다. 그러나 조조를 설득시키지 멋한 것을 도겸에게 알릴 목
도 없었다. 그리하여 진류태수 장막에게로 갔다.
'보수설한'이라는 커다란 깃발은 조조의 분노를 싣고 일사천리로 소주성
을 향해 진격해 갔다.
조조의 군사는 가는 곳마다 무고한 백성을 죽였다. 적과 내통한 혐의가
있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심지어 백성들의 무덤까지 파헤치니 백성들은
두려움에 떨었다.
서주의 늙은 태수 도겸은 조조가 죄 없는 백성까지 씨를 말린다 하니 땅
을 치고 하늘을 우러러 피는믈 지으며 한탄했다.
"내가 사람을 잘못 두어 하늘을 거스렸기에 내가 다스리는 뱃성들이 무
고하게 재앙을 당하는구나!"
도겸은 여러 장수들을 불러모았다.
"조조의 군사를 꺾을 수는 없다. 그의 원한을 산 것은 모두 내가 부덕한
소치이다... 나는 그의 결박을 받은 후 기꺼이 이 목을 바치려 한다. 그
대신 백성들이나 우리 군사들의 생명만은 보전토록 청할 것이다."
그러나 여러 장수들은 도겸의 말에 일제히 부복하며 말했다.
"그럴 스는 없습니다. 어찌 태수님을 희생시키고 저희들만 살겠다고 하
겠습니까!"
장수 중의 조표가 다시 입을 열었다.
"앉아서 죽음을 기다릴 수는 없습니다. 제가 모자람이 많으나 태수님을
도와 조조를 물리칠까 하옵니다."
조표의 말에 도겸은 부득이 군사를 이끌고 조조를 맞으러 나갔다.
조조의 군사들은 눈사태가 난 것처럼 물밀듯이 밀려오고 있었다. 본진이
세워진 깃발에 '보수설한'이란 글귀가 큼지막하게 새겨져 펄럭이고 있었
다.
전열을 가다듬은 군마는 그 위풍이 하늘을 찌를 듯했다.
조조는 흰 상복을 입고 진두에서 지휘하고 있었다.
이에 도겸이 말을 달려 문기앞으로 나와 조조에게 예를 갖추며 말했다.
"나 도겸은 이전부터 공과 교우를 맺고자 햇던 사람이오. 그래서 장개로
하여금 공의 부친을 호위하라고 했었소. 그러나 장개란 놈이 도둑의 심보
를 버리지 못해 그런 흉변이일어났소. 걸코 니의 본의가 아니니 공은 이
점을 밝게 헤아려 주기 바라오."
그러나 눈에 핏발이 선 조조의 귀에 그 말이 들어올 리 맘무였다.
"이 늙은 놈아, 네놈이 우리 가친을 멸하고 이제와서 무슨 망발을 하는
거냐. 누가 저 늙은 도적을 사로잡을 텐가!"
조조가 소라 지르자 하후돈이 말을 달려나갔다.
도겸은 급히 말을 무려 성 안으로 들어갔다. 하후돈이 그 뒤를 질풍처럼
달려오자, 조표가 나섰다. 두 사람이 부딪쳐 싸울 때였다.
때아닌 광풍이 불어닦쳐 모래가 흩날리고 돌이 굴러 눈을 뜰 수 없는 지
경이 되자 양편은 싸울 수가 없어 각기 군사들을 물렸다.
도겸은 긴함숨을 돌리며 성 안의 장수들과 대책을 협의했다.
"조조의 대군을 막을 방책이 없으니 이제 내 발로 조조의 진영에 들어가
죄 없는 서즈의 백성들을 구하는 길밖에 없는 것 같소. 조조의 대군을 막
을 방책이 없겠나들 말씀들 좀 해 보십시오."
"아니 되옵니다. 오랫동안 선정을 베푸시어 서주의 백성들은 모두 태수
님의 음혜에 감사하고 았습니다. 조조의 군사가 아무리 대군이라 하나, 성
은 쉽사리 함락되지 않을 것입니다. 제가 한 가지 계책을 써 저저로 하여
금 죽어도 묻힐 자리가 없도록 하겠습니다."
그 사람을 보니 별가종사 미축으로, 자를 자중이라 했다.
미츅의 계책이란 한꺼번에 두 군데에 응원군을 요청하는 것이었다.
한 사람은 북해의 공융에게 원병을 청하고, 또 하나는 청주의 전해에게
구원을 청하는 것이었다.
도겸은 그의 말에 따라 두 통의 서한을 써 진등으로 하여금 청주로 보내
고 미축은 북해로 떠나게 했다.
도겨음 성문을 귿게 닫고 구원군이 올 때를 기다리며 조조군의 공겻에
대베하기로 했다.
한편 미축의 친구이며 자를 문거라고 하는 공융은, 원래 노나라 곡부사
람이었다. 어려서부터 총명함이 남달라 이미 그 이름이 알려지기 시작했
다.
그의 나이 열 살 때의 일이었다.
하남윤 이응이란 사람을 만나러 갔는데 문지기가 멋 들어가게 하자 공융
은 큰 소리로 말했다.
"우리 짐안과 이씨 집안은 옛부터 잘 아는 사이이니 문을 여시오."
문지기는 그 말에 얼른 문을 열어 주었다.
이응이 공융을 맞으며 물었다.
"어찌하여 너의 집안과 우리 집안이 아는 사이냐?"
"옛날에 우리 조상 공자님께서 이씨이신 노자님께 예에 대한 가르침을
받으셨지요."
이응은 공융의 대답을 듣고 감탄했다. 때마침 태중태부 진위가 이응을
방문했다. 이응이 공융을 가리키며 영특한 아이라고 말했다. 그러자 진위
가 말했다.
"어려서 영리하다거 자라서도 반드시 크게 되는 법은 아니지요."
그러자 옆에서 듣고 있던 공융이 물었다.
"그럼 어르신네께서는 분명히 영리하셨던 모양이죠?"
그 말에 진위는 크게 웃으며 칭찬했다.
"이 아이는 자라서 큰그릇이 되겠구먼..."
소년 공융이 자라서 중랑장이 되더니, 점점 벼슬이 올라 북해군의 태수
가 된 것이었다.
그는 항상 그를 찾는 사람을 반겨 맞았다.
"집에는 손님이 가득하고, 술통에는 술이 가득, 이것이 내가 가장 바라
는 바이오."
그는 곧잘 이렇게 말했다. 북해에 부임한 지 6년, 그 동안 이곳 백성들
로부터 민심도 크게 얻고 있었다.
그런 공융에게 미축이 찾아오자 공융은 그를 반기며 온 까닭을 물었다.
미축은 전후 사정을 애기하고 도겸의 서한을 꺼내 보였다.
공융이 편지를 다 읽고 나서 말했다.
"나와 도겸과는 우의가 두터운 사이이며 또한 미축 공께서 친히 오셨으
니 어찌 아니 가겠소. 그러나 조조와는 아무런 원한도 없으니 먼저 서한을
보내 화해를 청해 보겠소. 만일 그에 응하지 않는다면 그때 군사를 일으키
도록 합시다."
"조조의 군사는 방대합니다. 그 군사를 믿고 결코 화해하려 들지 않을
것입니다."
미축이 다급한 목소리로 공융을 일깨웠다.
이에 공융운 진병을 준비하는 한편, 조조에게 서한을 보내 화평을 청하
기로 했다.
그런데 공윤에게 뜻하지 않았던 사태가 벌어졌다. 돌연 황건적 관해가
수만의 무리를 이끄고 쳐들어온다는 소식이 전해진 것이었다.
공융은 우선 급히 군사를 수습하여 성 밖으로 나아가 황건적을 맞아야
했다.
황건적의 괴수가 말을 달려나오며 외쳤다.
"북해 땅은 넓고 기름져 양곡이 넘쳐 흐를 지경이라는 말을 듣고 왔다.
우리에게 양곡 1만 석만 달라. 그러면 즉시 물러나겠다. 만일 거절한다면
우리는 성을 짓밟고 백성들을 모조리 죽이겠다."
이 말에 공융은 크게 노하며 소리쳤다.
"나는 한나라의 신하로 한나라의 땅을 지키고 있다. 곡식이 있다 한들
어찌 너희 도적 떼에게 양곡을 주겠느냐?"
이에 관해는 칼을 높이 쳐들고 이를 갈며 쳐들어왔다. 공융의 휘하 장수
종보가 창을 치켜들고 맞섰다. 그러나 몇 합 싸우지도 못하고 관해의 칼에
쓰러졌다.
종보가 쓰러지자 공융의 군사는 성 안으로 몰려들기에 바빴다. 군사들이
성 안으로 물러가니 관해는 성을 에워싸고 있었다.
공융은 우울하고 괴로운 마음으로 성루에 올라 황건적들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갈 길이 바쁜 미축 또한 근심에 빠져 있었다.
이때 성 밖으로부터 힌 장수가 나타나더니 화건적의 진을 헤집고 성쪽으
로 달려오고 있었다.
그는 달려드는 도적의 무리를 향해 번개같이 창으로 후려치는가 하면,
찌르고 베며 무인지경을 달리듯이 다가왔다.
그는 곧장 성벽 아래로 와서 큰 소리로 외쳤다.
"문을 열라, 성문을 열어라!"
공윤은 선뚯 문을 열 수가 없었다. 그가 누구인지 알 수가 없었기 때문
이었다. 이러는 사이 적근 수십 명이 해자 가까이 그 무사를 향해 달려오
고 있었다. 무사는 훌쩍 말머리를 돌리더니 순식간에 10여 명을 찔러 넘어
뜨렸다.
도둑들이 주춤거리는 사이 공융은 급히 성문을 열어 그를 맞아들였다.
그 젊은 무사는 말에서 내려 공융에게 예를 올렸다.
공융은 그제서야 누구냐고 물었다.
"성은 태사이며, 이름은 자입니다. 동래의 황현 사람으로 태사자, 자는
자의라고 합니다. 저의 노모께서 공의 은덕을 많이 입었다는 말을 들었습
니다. 저는 어저께 요동에서 돌아와 이 난리를 당한신 것을 알았습니다.
노모께서 '빨리 가서 태수님을 도와 드리라'고 하시기에 말을 달려왔습니
다."
공융은 그 말을 듣고 매우 기뻐했다. 비록 그를 처음 대하나 이미 그의
용맹을 잔해 듣고 있던 터였다.
성문 밖 20여 리쯤에 태사자의 노모가 살고 있었다. 태사자는 항상 집을
떠나 있는 터라 늙은 노모의 생활이 여간 어렵지가 않았다. 이를 공융이
알고 식량과 의복을 보내 준 적이 있었던 것이다. 노모는 그때의 도움을
받은 태수를 잊지 않고 아들을 보내 돕게 했던 것이다.
공윤은 갑옷과 주마, 안장을 태사자에게 내리며 후히 대접했다.
태사자가 고마움의 예를 표하며 공융에게 말했다.
"저에게 정예 군사 1천만 주시면 성 밖으로 나가 도적을 물리치겠습니
다."
그러자 공융이 태사자를 만류했다.
"그대가 아무리 용맹스럽다 하더라도 지금은 도족들의 수가 너무 많으
니, 섣불리 나서서는 안 되네."
"만일 제가 이들을 물리치지 못한다면 무슨 낯으로 노모를 다시 뵈올 수
있겠습니까. 설령 싸우다 목숨을 잃는 한이 있더라도 좋으니 내보내 주십
시오."
그러자 공융은 잠시 고개를 숙여 깊이 생각에 잠기다, 무겁게 입을 열어
태사자에게 청했다.
"나는 유현덕이란 분이 당대의 영웅이라는 소문을 들은 적이 있네. 만약
그가 와 준다면 이 도적은 능히 물리칠 수 있으리라 여겨지네. 그러나 도
적들에게 둘러싸인 판국이라 마땅히 보낼 사람이 없네."
"그 점은 염려 마십시오. 제가 다녀오겠습니다."
태사자는 주저하지 않고 선뜻 나섰다.
공융은 기뻐하며 유비에게 보내는 글을 써 주었다.
태사자는 갑옷을 입고 말 위에 올랐다. 에깨에는 활을 메고 손에는 쇠창
을 들었다. 성문이 열리고 태사자가 달려나오자 성 밖 언못 둑에 있던 황
건적 한 무리가 달려들었다. 태사자는 가까이 다가오는 도적들 몇 명을 창
을 휘둘러 찔렀자.
순식간에 태사자의 창에 대여섯 명이 나뒹굴자 도적들은 잠시 주춤했다.
그 틈을 이용하여 태사자는 말을 달렸다. 적장 관해는 태사자가 혼자 말을
달리자 필시 구원병을 청하러 가는 것이 분명하다고 여겼다. 관해는 수백
기의 병마를 이끌고 뒤쫓았다. 그러나 태사자는 창을 활로 바꿔잡고 화살
을 쏘니, 하나도 빗나가는 화살이 없었다. 눈 깜짝할 사이 수십 명이 그
화살에 쓰러지자 도적들도 더 이상 뒤쫓지 못했다.
태사자는 포위를 뚫고 그날 밤 안으로 말을 달려 평원현에 당도했다.
유현덕의 출진 도겸은 서주를 맡기려 하고
황건적과 조조의 침공으로 서주태수 도겸은 미축과 함께 북해의 공융에게 원
병을 청하고, 공융은 유비에게 부탁하여 서주에 도착한다. 유비는 조조에게 화해
의 사신을 보내나 조조는 이를 거절하고 여포가 연주를 침략했다는 소식에 급히
회군한다.
평원현에 당도한 태사자는 유비 앞으로 나아가 절을 올리고 공융이 황건적에
게 포위되어 위급하다는 얘기를 전했다.
유비는 태사자가 전해 준 공융의 글을 읽어 본 후 태사자에게 물었다.
"그대는 누구시오?"
"예. 태사자라 하오며 동해에 사는 사람입니다. 공융 태수와는 혈연관계도 아
니며, 동향도 아닙니다만 제 노모께서 입은 은혜를 갚고자 하여 달려온 것입니
다. 묵해성이 황건적의 괴수 관해에게 짓밟힐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이에 공융
태수는 인(인)과 의(의)를 중히 여기시는 장군의 의협심을 믿고 도움을 청하러
저를 보내신 것입니다."
유비는 공융이 자기에게 구원을 청한 것이 흐뭇해 옷깃을 바로잡으며 말했다.
"북해의 공(공) 태수가 세상에 유비가 있다는 것을 알아주는구나!"
공융의 서찰과 태사자의 말을 듣고 사정을 알게 되자 유비는 관우와 장비, 두
아우에게 출진을 서두르게 했다.
유비는 평원현을 청주자사 전해(전해)에게 부탁한 뒤 군사 3천을 이끌고 북해
로 떠났다.
이때, 적장 관해는 멀리서 구원군이 달려오는 것을 보자 부하들을 이끌어 유비
를 대적고자 나왔다. 그는 구원군의 수가 얼마 되지 않자 코웃음을 쳤다.
"구원군의 수가 겨우 몇천밖에 되지 않으니 단숨에 짓밟아 버려라."
유비는 관우, 장비, 태사자와 함께 진두에서 말을 나란히 하여 나섰다.
관해가 얕잡아보고 위세를 부리며 나왔다. 이에 태사자가 말을 몰아 달려나가
려 했으나 한 발짝 먼저 관운장이 관해를 가로막았다.
양쪽 군사들은 관우와 관해가 양 진영 가운데에서 맞서자 일제히 함성을 질렀
다.
관우의 청룡도와 관해의 긴 칼이 흰 무지개를 그리며 부딪쳤다. 그러나 관해
는 관우의 적수가 아니였다. 수십 합을 어우르고 부딪는가 하더니 관우의 청룡
도가 한 번 번뜩이자 관해의 머리채가 말 아래로 굴러 떨어졌다.
"와아 와아!"
유비의 대열에서는 천지가 떠나갈 듯한 함성이 일었고, 관해의 부하들은 기가
죽어 머뭇거렸다.
그러자 유비, 장비, 태사자가 한꺼번에 적진으로 밀고 들어가니 마치 호랑이가
들판의 양떼들 속에 뛰어든 듯했다. 유비의 쌍고검, 장비의 장팔사모, 태사자의
장창이 적진에서 춤을 출 때마다 수십 명의 목이 떨어져 나갔다.
성문 위에서 이 광경을 바라보던 공융은 급히 군사를 풀어 도적 떼들을 협공
했다.
유비군에게 짓밟히던 도적 떼들은 공융에게 협공까지 당하자 무기를 놓고 항
복하는 자가 태반이나 되었다. 관해의 부하들 중 극히 적은 수만이 이리저리 흩
어져 달아났을 뿐이었다.
공융은 유비를 성 안으로 맞아들여 예를 올린 후 성대하게 축하연을 베풀었
다.
축하연이 무르익어 갈 무렵 공융은 미축(미축)을 불러 유비에게 소개했다.
"유 상공(유상공)께 문후 드리게 됨은 소인에게는 큰 기쁨이옵니다."
미축이 유비에게 정중히 절하며 예를 올렸다.
깨끗하고 수려한 용모를 지닌 미축을 보자 유비는 까닭 모를 따뜻한 정감을
맛보고 있었다. 이전에 한 번도 그를 대한 적은 없었으나 오랫동안 가깝게 대해
왔던 것처럼 친근감을 느꼈다.
미축(미축)은 동해 구현(구현) 사람으로, 자를 자중(자중)이라 했다. 그의 집은
대대로 이어온 큰 부호의 집이었다.
어느 날 일은 보고 수레를 타고 오는데 길에서 우연히 용모가 뛰어나게 아름
다운 한 여인을 만났다. 그 여인은 수레에 태워 주기를 청하였다. 미축은 그 여
인을 태우고 자신은 걸어갔다. 그러자 그 여인은 미축에게 수레에 타기를 간청
했다.
수레 주인이 자기 때문에 걷고 있는 곳을 안쓰러워하던 여인의 권유에 미축도
마지못해 수레에 올랐다. 그러나 수레에 올라서도 미축은 아름다운 그 여인에게
곁눈질 한 번하지 않고 단정한 자세로 앉아 있었다. 얼마 가지 않아 그 여인은
수레에서 내리며 뜻밖의 말을 남겼다.
"저는 남방의 화덕진군(화덕진군 : 불을 관장하는 신)으로 옥황상제의 명을 받
들어 그대의 집을 불태우러 가는 길입니다. 그러나 그대의 예의가 깍듯하고 인
품이 곧음에 감탄하여 이 사실을 알려 드립니다. 집으로 가는 즉시 재물을 건져
내도록 하시오. 나는 오늘 밤중에 그대의 집에 이를 것이오."
말을 마친 여인은 홀연히 자취를 감추었다. 미축은 그 말을 듣곤 깜짝 놀라,
수레를 재촉하여 집에 이르자마자 재물들을 끄집어내었다.
한밤중이 되자 과연 부엌에서 불길이 일더니 온 집안으로 번졌다. 미축은 집
이 모두 불탔으나 재물은 모두 건졌으므로 별 어려움 없이 다시 집을 지을 수
있었다.
미축은 그 후 크게 깨달은 바가 있어 이전처럼 재물을 탐하지 않았으며, 재산
을 풀어 가난하고 불쌍한 사람들을 도와주었다.
이 소식을 듣게된 태수 도겸은 미축을 불러들여 별가종사(별가종사)로 삼았던
것이었다. 그러다 조조의 대군이 몰려오자 친구인 공융에게 원병을 청하러 왔던
것이었다.
미축은 유비에게 서주태수 도겸이 조조의 대군에게 포위 당하게 된 경위를 소
상히 설명했다.
이야기를 듣고 난 유비는 미축을 위로했다.
"원래 도겸 공께서는 어진 군자이신 데 이토록 터무니 없는 누명을 쓰시다니
애석하기 짝이 없소."
옆에 있던 공융이 유비에게 물었다.
"유 공, 억울한 도겸 공과 백성들이 조조에게 죽임을 당하는 것을 가만히 보고
만 있을 수는 없지 않겠소?"
그러나 유비는 공융의 말을 듣고서도 선뜻 도겸을 도우러 가겠다는 말을 하지
않았다.
이를 본 공융이 다시 입을 열었다.
"공께서는 한실의 혈통을 이으신 분입니다. 조조가 죄없는 백성을 죽이고, 강
한 힘만 믿고 약한 자를 괴롭히는데도 어찌 이를 보고만 계시겠습니까. 저와 함
께 가서 서주 도겸을 구하지 않으시렵니까?"
유비는 그제서야 속마음을 밝혔다.
"거절할 생각은 추호도 없습니다만, 실은 거느린 군사가 얼마되지 않습니다.
가볍게 움직였다간 서주를 구하지도 못하고 조조의 기세만 그 높이가 드높일까
그것이 염려됩니다."
"제가 도겸을 구하려 드는 것은 옛 친구의 정리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보다 대
의(대의)를 저버릴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공은 어찌 그 대의를 염두해 두
지 앉으십니까?"
공융이 안타까운 마음이 치받쳐 다소 격앙된 목소리가 되었다.
유비도 공융이 그렇게까지 말하자 더 이상은 주저하지 않았다.
"정히 그러시다면 태수께서 먼저 가십시오. 저는 공손찬에게 군사 몇천을 더
청해 뒤따르겠습니다."
"고맙습니다. 약속을 어겨서는 아니 됩니다."
공융이 유비에게 다짐했다. 그 말에 유비가 다소 불쾌한 마음을 누르며 말했
다.
"공께서는 저를 어찌 보시고 하시는 말씀입니까? 옛말에 이르되 '사람은 원래
죽게 마련이나, 신의가 없으면 인간일 수 없다.'고 하였습니다. 군사를 구하든 못
구하든 서주로 갈 것입니다."
유비의 말에 공융은 입을 다물었다.
공융은 이 사실을 도겸에게 알리기 위해 미축을 먼저 서주로 보내고, 자신도
출발준비를 갖추었다.
그때 태사자가 작별을 고했다.
"어머니의 분부를 받들어 달려왔습니다만, 이제 걱정거리가 없어져 다행스럽습
니다. 동향인 양주자사 유요(유요)가 저에게 서찰을 보내 부르니, 이제 그만 가
보아야겠습니다. 훗날 다시 뵙기로 하겠습니다."
공융은 황금과 비단을 주며 공을 사례했으나 태사자는 굳이 사양한 후 돌아갔
다.
아들 태사자가 돌아오자 노모는 몹시 기뻐했다.
"네가 공(공) 태수의 은혜를 갚았으니 이 어미가 실로 기쁘구나!"
태사자는 노모를 북해에 남겨두고 양주로 떠나갔다.
공융도 군사를 재촉해 서주로 향했다.
한편, 공융을 뒤따르기로 한 유비는 공손찬을 찾아가 서주를 구원하고 싶으니
군사 4, 5천을 빌려 달라고 청했다.
그러나 공손찬은 유비의 말에 달갑지 않다는 표정으로 그를 말렸다.
"그만두는 게 어떻겠나. 공은 원래 조조에게 무슨 원한이 있는 것도 아니고 그
렇다고 도겸에게 은혜를 입은 바도 없지 않은가. 왜 남의 싸움에 말려들어 어려
움을 자초하는가?"
"그러나 이미 약조를 한 바이니 어길 수는 없습니다."
공손찬은 유비의 말을 듣고 마지못한 듯 허락했다.
"정히 그렇다면 군마 2천을 빌려주겠네."
유비에게는 생각보다 못 미치는 군사였다. 불현듯 조운이 생각나 그를 딸려
주기를 청했다. 공손찬이 선선히 허락하자 유비는 부족한 군마의 수효보다 조운
과 함께 가게 된 것을 기뻐했다.
유비는 선발대로 3천의 군마를 관우와 장비에게 주고 조운에게 빌린 2천의 보졸
로 뒤를 바치게 했다.
한편 미축은 서주에 당도하여 북해태수 공융과 유비가 그 뒤를 따라 구원 온
다는 소식을 전했다. 때마침 미축과 함께 청주로 구원을 청하러 갔던 진등도 돌
아왔다. 그는 청주자사 전해(전해)가 구원을 오기로 했다고 알렸다. 전해도 공손
찬이 세력 아래에 있는 사람이었다.
미축과 진동이 이토록 생각지도 않았던 원병을 청해 오자 도겸은 비로소 마음
이 놓였다.
이윽고 공융과 전해의 군사가 서주에 이르자 일단 공격을 뒤로 미룬 채 멀리
산중턱에 진영부터 마련했다. 조조군의 위세가 드세어 감히 먼저 공격을 펼칠
수가 없었던 것이다. 조조군 또한 양쪽에서 구원병이 오자 서주성 공격을 중단
하고 군사를 나누어 대비하고 있었다.
이때 유비가 군사를 이끌고 공융의 진으로 찾아왔다.
공융이 우선 조조군의 형세를 유비에게 전했다.
"조조의 군사는 강대하고 조조 또한 병법에 능하니 군사를 함부로 움직이지
않는 것이 좋을 듯하오. 먼저 그 움직임을 살핀 뒤에 군사를 내보내십시다."
유비가 공융을 대하고 보니 그는 이미 조조군의 위세에 기가 죽은 듯이 보였
다.
"잘 알겠습니다. 그러나 군량이 없으면 싸움에도 승산이 서지 않을 것입니다.
관운장과 조자룡에게 군사 4천을 주어 공(공) 태수의 휘하에 힘을 합치고, 나는
군사 1천으로 조조의 진을 뚫겠습니다. 서주성 안으로 들어가 도겸과 다음 일을
상의 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공융이 들으니 반대할 이유가 없었다. 비록 구원을 왔다고는 하나 서주성과는
떨어져 있어 합동작전을 펴지 못하고 있는 처지였다. 유비가 그 일을 맡겠다고
하니 공융은 기꺼이 동의했다.
공융은 전해와 협의하여 군사를 좌우로 나누어 적과 맞서게 하고, 관우와 조
운으로 하여금 양군을 오가며 가세하도록 했다.
군사 배치가 완료되자 유비는 군사 1천을 거느리고 장비와 함께 서주성을 향
했다. 조조 진영의 한 곳을 택해 유비가 뛰어들자 조조군에서는 뜻하지 않는 기
습에 일시 혼란이 일었다. 그러나 다음 순간 북소리가 요란하게 울리더니 기마
병과 보졸들이 쏟아져 나왔다.
그들의 선두에 있던 우금(우금)이 나서며 말했다.
"이 미친놈들아, 여기가 어디라고 감히 돌진하느냐?"
우금이 말 위에서 소리치는 걸 보자 장비는 대꾸도 하지 않고 말을 박찼다. 장
비가 장팔사모를 휘두르며 달려나가자 우금이 기다렸다는 듯이 그를 맞았다.
말과 말이 부딪고 병기가 불을 뿜었다. 유비가 군사를 이끌고 쌍고검을 휘두
르며 치달았다.
우금은 처음부터 유비를 가벼이 보았다가 몹시 당황했다. 장비의 장팔사모도
의외로 무서운 기세여서 기가 꺾였다. 우금은 유비가 군사를 이끌고 가까이 다
가오자 말머리를 돌려 달아났다.
유비는 달아나는 적을 베며 서주성을 향해 말을 달렸다.
장비가 먼저 서주성 아래로 다가갔다. 성에서는 '평원 유현덕(평원 유현덕)'이
라고 쓴 붉은 깃발을 보자 성문을 활짝 열어 주었다.
유비가 성 안으로 들자 도겸은 친히 맞으며 예를 갖추었다.
"귀공 같은 의인이 지금 같은 세상에도 있었단 말입니까?"
도겸은 감격하며 유비의 손을 부여잡았다.
도겸은 유비 일행을 위해 크게 잔치를 베풀고 노고를 달랬다. 유비의 군졸들
에게도 술과 안주를 내렸다.
유비군이 서주성으로 입성하자 서주군의 사기가 드높아졌다.
고립무원이 되어 전전긍긍하고 있던 성 안의 병사들은 유비군을 보자 환호성을
울리며 기뻐했다.
도겸은 유비에게서 활달한 기상을 지닌 영웅의 풍모를 갖추었으면서도 온화한
가운데 폭이 넓은 대인(대인)의 품격을 엿보았다. 도겸은 그런 유비를 만나 내
심 기뻐했다.
도겸은 원래 장수라기보다는 선비에 가까웠다. 이제 나이도 들어 지금처럼 천
하의 군웅이 할거하는 시대에 그들과 맞서 이 땅을 지키기가 벅차다는 것을 느
껴 오던 터였다.
도겸은 미축에게 서주(서주)자사의 패인(패인:인뒤웅이)을 가져오게 했다.
미축이 패인을 가져오자 도겸은 유비에게 상좌를 권했다.
"오늘부터는 이 도겸을 대신하여 공(공)이 서주태수가 되시어 성주자리를 맡
아 주십시오."
도겸은 패인을 현덕에게 바치며 말했다. 도겸의 뜻밖의 행동에 유비가 소스라
치게 놀랐다.
"공께서는 무슨 뜻으로 이러십니까?"
그러자 도겸이 정색을 하며 말했다.
"지금 천하는 어지럽고, 조정의 기강이 무너진 지도 오래입니다. 내가 듣기로
공(공)은 한(한)의 종친(종친)으로 문란해진 왕통을 바로잡으며, 사직을 도와 만
백성에게 군림할 자질을 지닌 분이시고, 이 늙은이는 이제 재능도 시들어 무능
한 몸이라 근심하고 있던 중이었습니다. 이제 공을 만나서 제마음이 흡족하기
이를 데 없소, 부디 공께서 이 서주를 맡아 다스려 주기를 바랄 뿐이오니, 원컨
대 충정을 살피시어 청을 물리치지 말아 주십시오. 나는 유 공을 천거하기 위해
조정에 표문(표문)을 상주하겠소."
도겸의 말에는 진정이 어려 있었다. 천하를 근심하고 백성을 사랑하는 마음이
배어 있는 음성이었다.
이에 유비가 자리에서 일어나 두 번 절을 한 후 말했다.
"이 유비가 비록 한실의 후예라고 하나, 아직 공을 세운 바도 없고, 덕 또한
없습니다. 제가 이곳에 온 것은 대의를 받들어 공을 도우러 온 것뿐입니다. 공
께서 이처럼 말씀하시니 이는 제가 사사로운 욕심이라도 있는 것으로 여기심과
같습니다. 제가 만약 그릇된 생각을 품었다면 하늘의 보살핌을 받지 못할 것입
니다. "
유비도 진심으로 사양하고 있었다.
"아닙니다. 이 늙은이가 충정으로 공께 드린 말씀이오. 그러니 사양치 말고 받
아주시기 바랍니다. "
도겸이 다시 유비에게 청했다. 그러나 유비는 끝내 이를 사양했다. 옆에서 이를
지켜보던 미축이 입을 열었다.
"이 문제는 후일 다시 상의하시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지금은 조조의 군사들
이 성 밖에 와 있으니 먼저 그들을 물리칠 계책을 마련하는 것이 급합니다. "
두 사람은 미축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유비가 조조군에 대한 대책
을 말했다.
"우선 조조에게 글을 보내 화해를 권해 보는 게 어떨까 합니다. 만약 조조가
이를 듣지 않는다면 그때 군사를 움직여도 늦지 않을 것입니다. "
유비의 말에 도겸과 미축도 동의했다. 유비는 아군의 진영에 명이 있을 동안
일체 군사를 움직이지 않도록 전한 뒤 서찰을 써 사람을 시켜 조조군 진영으로
보냈다.
관외에서 한 번 공의 얼굴을 뵈온 적이 있으나, 서로 멀리 떨어져 있어 오래
도록 뵙지 못했습니다. 이에 문안을 드림과 함께 한 가지를 청하고자 합니다. 지
난번 공의 부친께서 뜻밖의 변을 당하신 것은 바로 이전에 황건적이었던 장개란
자가 흉악하여 저지른 일이 오며 결코 도겸의 잘못이 아닙니다. 바야흐로 밖으
로는 황건적의 무리가 들끓고, 안에서는 동탁의 잔당들이 날뛰고 있는 이때입
니다. 바라건대 사사로운 원한은 뒤로 물리시고 서주의 군사를 거두어 나라의
어려움을 먼저 구하신다면 천하를 위해서도 다행한 일이 될 것입니다.
유비의 서찰을 읽고 난 조조가 서찰을 북북 찢으며 노기등등한 목소리로 외쳤
다.
"뭐라고?.... 나의 복수를 뒤로 미루고 조정을 먼저 구하라고? 유비 따위의 말
을 듣지 않더라도 이 조조에게 얼마든지 생각이 있다. 건방진 놈 같으니 나를
비웃고 있구나."
조조는 화가 치솟아 좌우에게 명했다.
"그 사자의 목을 쳐라! 그리고 당장 서주성을 공격한다!"
그러자 곽가가 급히 나서며 말렸다.
"유비는 멀리 군사를 이끌고 왔음에도, 먼저 주공께 예를 갖춘 다음에 싸우려
는 여유를 부리고 있습니다. 그러니 주공께서도 좋은 말로 답을 보내 그가 마음
을 놓도록 만든 뒤, 일시에 군사를 몰아간다면 손쉽게 성을 무너뜨릴 수 있을
것입니다. "
곽가의 말을 들으니 그 또한 좋은 방책인 듯했다.
조조는 곽가의 말을 따라 사자에게 줄 답서를 마련하게 했다.
이때 파발마가 뛰어들며 급한 일을 아뢰었다.
"큰일났습니다!"
전령이 숨가쁘게 말을 이었다.
"무슨 일인가?"
"장군 님이 계시지 않는 틈을 타 여포가 연주를 공격하여 빼앗은 뒤, 다시 복
양으로 진격해 오고 있습니다."
조조는 크게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여포라면 천하의 맹장이었다. 그가 앞 뒤 가리지 않고 날뛴다면 조조는 자칫
자신의 근거지조차 잃고 말 형편이었다.
"연주를 잃게 되면 내가 설 곳이 없어진다. 우선 연주부터 되찾고 볼일이다."
그러자 곽가가 나서며 입을 열었다.
"이렇게 된 바에야 유비의 청을 받아들여 고향으로 돌아가는 것처럼 서찰을
써 보내십시오. 그러면 주공께서 현덕에게 은혜를 베푸시는 것이 됩니다. "
조조는 곽가의 말이 그럴 듯했다. 그의 말에 따라 유비에게 답신을 전한 후 군
사를 물렸다.
사자가 서주성으로 돌아와 조조의 군사가 물러났다는 걸 알리며 서찰을 전하
자 도겸은 크게 기뻐하였다.
한편 여포는 이각·곽사의 난이 일어나자 장안을 떠나 원술 에게 몸을 의탁하
러 갔으나 원술은 그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정원을 목벤 후 동탁에게 갔으며 다
시 동탁을 주살한 여포를 부하로 두는 것이 꺼림칙했기 때문이었다. 여포는 하
는 수 없이 원소에게 가 그에게 의탁하였다.
원소는 그를 맞아 함께 상산 땅에서 장연을 쳤다. 원소 아래서 공을 세우자
여포는 오만해졌다. 같은 장수도 하찮게 보며 거드럼을 피우자 휘하 장수들의
미움을 사게 됐다. 원소가 이를 알고 그를 잡아죽이려 하자, 여포는 이를 눈치채
고 도주했다. 여포는 다시 떠돌다 장양의 휘하로 들어갔다.
이때 방서라는 여포의 친구가 장안에서 여포의 가족을 숨겨 두었다가 여포에
게 보냈다.
이각,곽사가 이 일을 알게 되었다. 그들은 방서를 죽이는 한편, 장양에게 밀서
를 내려 여포를 처치하도록 명했다. 여포는 하는 수 없이 장양의 곁을 몰래 벗
어나 장막의 휘하로 들어갔다.
이때가 바로 장막의 아우 장초가 막 진궁을 데리고 왔을 때였다. 진궁은 도겸
을 구하려 조조에게 찾아갔다가 뜻을 이루지 못해 서주성으로 가지 못하고 장초
를 찾아오자 장초가 형 장막을 뵙게 했다.
진궁이 장막을 보자 한 계책을 내었다.
"지금 천하가 무너져 곳곳에서 영웅들이 들고일어나 천하를 취하려 하고 있습
니다. 장군께서는 광대한 영토와 수많은 백성들을 거느리시고 계시면서 어찌 이
각, 곽사에게 몸을 굽혀 명을 받드십니까? 조조가 군사를 일으켜 서주로 향했습
니다. 그의 근거지인 연주는 비어 있는 거나 다름없습니다. 이런 호기를 살려 연
주를 취하십시오,. 장군의 휘하에는 천하의 맹장 여포가 있지 않습니까. 여포와
함께 군사를 이끄신다면 연주는 물론, 천하를 취하실 수도 있을 것입니다."
진궁의 말에 장막은 귀가 솔깃하여 그 말에 따르기로 하고 곧 군사를 일으켜
연주로 향했다. 장막은 여포에게 군사를 주어 연주를 친 뒤 여세를 몰아 복양까
지 진격했다. 불시에 여포군을 맞은 조조의 여러 고을은 손쉽게 무너졌다. 다만
견성, 동아, 범현만이 조조 휘하의 장수 순욱, 정욱의 결사적인 저항으로 지켜졌
다./
한편 우연의 일치이긴 했으나 유비의 화해 서찰에 의해 조조가 군사를 물리자
도겸은 큰 잔치를 베풀었다.
잔치가 무르익자 도겸은 유비를 청하여 상좌에 구너하고 여러 사람들을 둘러
보며 말했다.
"부디 나를 대신하여 서주태수가 되어 주시오. 나에게도 두 아들이 있으나 그
들은 나라의 중임을 맡을 만한 그릇이 못 됩니다. 이 늙은이는 쉬면서 병이나
고칠 수 있도록 허락해 주시기 바랍니다."
그러나 유비는 끝내 도겸의 간청을 물리쳤다.
"북해의 공 태수께서 나를 이곳에 보낸 것은 오직 의를 위해서였습니다. 지금
제가 서주에 눌러앉아 태수직을 받는다면 찬하가 이 비를 어떳게 생각하겠습니
까?"
그러자 옆에 있던 미축도 거들고나섰다.
"지금 한나라의 황실은 기울대로 기울었고, 천하의 혼란은 극에 달했습니다.
뜻이 있는 사람이라면 그 뜻을 세워야 할 때입니다. 물자가 풍부하고 호구가 백
반이나 되니 부디 물리치지 않기를 바랍니다."
이에 진등도 가만히 있지 않았다.
"도 태수께서는 병환이 잦으시니 백성을 다스리는 데 힘이 듭니다. 유공께서
너무 사양하심은 도리가 아닙니다."
유비는 두 사람의 말을 듣고 있다가 입을 열었다.
"원 공로(원술)는 사세 삼공(사세삼공)을 지낸 명문의 후예로서 민심또한 그에
게 쏠려 있습니다. 거기다가 여기에서 가까운 수춘성(수춘성)에 있으므로 그에게
서주를 물려주시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유비가 그렇게 말하자 공융이 대답했다.
"원술 그자는 무덤 속의 뼈다귀와 다름없소. 이 일은 하늘이 공께 내리시는 일
입니다. 이 기회를 마다하시면 뒷날 크게 뉘우치시게 될 것입니다."
유비는 그래도 사양할 따름이었다. 도겸이 유비에게 눈물을 글썽이며 말했다.
"유 공께서 끝내 뿌리치고 가신다면 나는 죽더라도 편히 눈을 감지 못할 것이
오."
그때까지 이 광경을 지켜보고 있던 관우, 장비도 보다못해 거들었다.
"이토록 말씀하시니, 형님께서 거두시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이쪽에서 먼저 청한 것도 아니지 않습니까? 그토록 굳이 받지 않으시고 사양
하실게 뭡니까?"
그러자 유비가 두 아우를 꾸짖었다.
"너희들은 나를 불위에 빠뜨리려 드느냐?"
유비는 끝내 도겸의 청을 물리쳤다. 도겸은 유비가 기어이 패인을 받지않자
가까운 소패(소패)라도 맡아, 서주를 지켜 달라고 청하였다. 유비는 그마저 거절
할 수 없어 승낙했다.
축하잔치가 끝나자 조운은 군사를 이끌고 작별을 고했다. 유비와 조운은 눈물
을 흘리며 석별의 정을 나누었다.
이어 공융과 전해도 각기 군사를 거두러 고향으로 돌아갔다.
이때 조조는 대군을 이끌고 연주로 회군했다. 조조가 돌아오자 조인(조인)이
먼 곳까지 마중 나와 그 동안의 전황을 상세히 설명하며 여포 군사의 위세가 강
대함을 들려 주었다.
그러나 조조는 조금도 놀라는 기색 없이 껄걸 웃으며 말했다.
"여포에게는 힘은 있으나 지모가 없다. 크게 염려할 바가 아니다."
조조는 진을 내린 후 여포를 칠 계책을 의논했다.
군사를 둘로 나누고 조인으로 하여금 연주를 에워싸게 하고 몸소 복양(복양)
으로 진격하기로 했다. 여포가 복양성을 점령한 후, 그곳에 머물고 있을 것으로
짐작했기 때문이었다.
조조는 군마를 이끌고 질풍처럼 복양으로 진군하였다. 복양이 가까워오자 군
사를 일단 머물게 하여 군마에게 휴식을 취하게 했다.
조조는 붉은 석양이 기울어질 때까지 형세를 관망 할 뿐 꼼짝하지 않았다.
한편 여포는 조조가 등현(등현)을 통과했다는 것을 알고 부장 설란(설란)과 이
봉(이봉)을 불러 영을 내렸다.
"나와 조조 두 사람은 오래 전부터 한 번 싸워 보고 싶었다. 군사 1만을 줄 터
이니 연주를 지켜라. 내가 직접 가 조조를 쳐 없애 버리겠다."
영을 내린 여포는 곧 출진을 서둘렀다. 이때 이를 알고 진궁이 여포를 만나러
왔다.
"연주를 두고 어디로 가시려 합니까?"
"복양에서 조조군을 무너뜨릴 포진을 마련하겠소."
진궁은 서두르기만 하는 여포를 보고 말했다.
"설란에게 연주를 맡겨 두는 것은 위험합니다. 그보다 여기서 1백 80리쯤 가면
태산에 험한 길이 있으니 그곳에 군사 1만을 매복케 하십시오. 조조는 연주가
함락되었다는 말을 들으면 필시 군사를 급히 내몰 것입니다. 그들의 군사가 태
산을 지나갈 무렵, 그들을 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능히 조조를 사로잡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여포는 진궁의 말에 귀를 귀울이지 않았다.
"복양으로 가 포진하자는 것은 달리 좋은 계책이 있기 때문이오."
여포의 말에 진궁도 더 이상 입을 열 수가 없었다. 여포는 나머지 군사를 이끌
어 복양으로 향했다.
진궁의 예측은 어긋나지 않았다.
조조가 군사를 이끌고 태산의 좁은 길목을 지나칠 때였다.
"이곳은 병사를 매복시키기 좋은 곳이니 조심하십시오."
곽가가 조조에게 말했으나 조조는 조용히 웃을 뿐이었다.
"여포가 힘은 있되 꾀가 없음을 이르지 않았더냐. 무도한 여포가 설란에게 연
주를 맡기고, 자신은 아마 복양으로 갔을 게다. 이곳에 복병을 베풀 만한 지혜가
없었을 테니 근심 말라."
조조는 여포가 복양으로 가는 걸 보자 이미 미루어 그렇게 짐작하고 있었다.
여포의 진영에서는 조조가 군사를 내몰아 온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진궁이 여포
에게 간했다.
"조조군이 먼길을 급히 오느라 지쳐 있을 때, 기습을 가하는 것이 어떻습니까.
기력을 되찾을 기회를 주어서는 안 되지 않습니까?"
그러나 여포는 이번에도 진궁의 말을 듣지 않았다.
"나는 한 필의 말로 천하를 종횡한 사람이오. 어찌 조조 따위를 걱정하겠소.
그놈이 나타나면 단번에 사로잡을 테니 두고 보시오."
여포가 조조군을 가벼이 여겨 큰소리치고 있을 때 조조는 이미 복양에 당도하
여 군사들을 쉬게 했던 것이다.
조조가 복양 들에 진을 치자, 여포는 다음날 군사를 이끌고 나와 조조군을 맞
았다.
조조가 그들을 바라보니, 여덟 명의 장수가 여포를 가운데 두고 나란히 말을
세우고 북 소리 등으로 천지를 진동시켰다.
여포룰 호위하는 장수로는 첫째가 장요인데 자가 문원이었고, 둘째가 장패로
자를 선고라고 했으며 태산 화음 사람이었다. 이 두 장수 외에 학맹, 조성, 성렴,
송헌, 후성의 다섯 장수가 여포의 좌우에 늘어서 있었다. 그 장수들의 뒤로는 5
만의 군사가 북 소리를 우렁차게 울리며 따르고 있어 그 위세가 당당한 듯 보였
다.
조조가 여포에게 소리쳤다.
"내가 너와는 아무런 원한을 맺은 일도 없거늘, 어찌하여 내 땅을 침범하였는
가?"
여포도 손가락으로 조조를 가리키며 큰 소리로 말을 받았다.
"모두 한나라 땅이다. 너만 차지할 땅이 아니지 않느냐. 어찌 네 땅이라고만
우기는가?"
여포는 원래 말솜씨가 좋은 장수가 아니다. 더 이상 길게 말을 할 필요가 없
다는 듯 휘하 장수 장패에게 나아가 싸우라고 명했다.
조조는 악진을 보냈다.
두 장수가 맞부딪쳐 한바탕 싸움이 일어 30여 합이나 찌르고 막았다.
그러나 어느 한쪽도 기우는 쪽이 없었다.
이에 조조편에서 하후돈이 달려나와 가세했다. 여포 쪽에서도 장요가 질세라
내달아 하후돈을 막았다.
네 장수가 서로 뒤엉키며 부딪치자 성미 급한 여포가 방천화극을 움켜쥐고 적
토마를 박찼다. 여포가 방천화극을 들고 질풍처럼 달려나오자 그 기세에 눌려
하후돈, 악진이 말머리를 돌려 달아났다. 여포가 두 장수를 뒤쫓으며 그 여세를
몰아 조조 군사를 닥치는 대로 찌르고 베었다. 과연 천하의 맹장다웠다. 여포가
광풍처럼 몰아치니 조조군은 3,40여 리를 물러났다.
첫 싸움에서 여포군에게 대패한 조조는 그의 진영에서 여러 장수들에게 대책
을 물었다.
우금이 먼저 조조 앞에 나와 계책을 말했다.
"제가 산 위에서 바라보니 복양 서쪽에 군사가 적은 진영이 하나 있는 것이
보였습니다. 우리가 싸움에 젔으므로 그들은 방심하고 있을 것입니다. 이때 야습
을 감행하여 그 진지를 빼앗는다면 우리 군사는 사기가 드높아지고 여포의 군사
는 크게 두려워할 것입니다."
조조는 우금의 말을 좇아 장수 조홍, 이전, 모개, 여건, 우금, 전위등 여섯 장수
를 앞세우고, 어둡기를 기다려 마보군 2만을 이끌고 진격했다.
한편 여포는 승전을 축하하며 잔치를 열어 군사들을 위로하고 있었다.
이때 진궁이 무언가 근심스런 표정을 지으며 여포에게 타일렀다.
"서쪽에 있는 진은 우리의 본영입니다. 오늘 싸우느라 많은 군사를 빼갔으므로
방비가 허술합니다. 조조군이 오늘 밤 야습이라도 감행하지 않을까 걱정이 됩니
다."
여포는 진궁의 말을 천연덕스럽게 받아넘겼다.
"조조는 군사를 능수능란하게 부리는 사람입니다. 우리의 방비가 허술한 곳을
노리고 있을지도 모르니 대책을 세우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진궁의 간곡한 말에 여포도 고개를 끄덕였다. 진궁의 말이 어긋남이 없었기 때
문이었다. 만일을 대비하여 진궁의 말에 따르기로 하였다.
여포는 고순, 위속, 후성 세 장수를 불러들여 영을 단단히 내렸다.
"서채의 방비가 너무 허술하다. 너희들은 급히 군사를 거느리고 가서 조조의
야습에 대비하라!"
한편 조조는 어둠이 깔리자 군사를 내몰았다. 원래 많지 않은 군사에다 방심
하고 있던 여포의 군사였다. 불의의 기습에 조조의 군사에게 짓밟히고 흩어지니,
조조는 쉽게 서쪽 진을 함락했다.
진궁의 진언에 따라 여포가 보냈던 고순의 군사가 당도하고 보니, 이미 서채
는 적의 수중에 들어간 뒤였다. 고순의 군사는 빼앗긴 진영을 되찾기 위해 조조
군에게 공격을 개시했다.
조조군은 야습을 하여 진을 빼앗자, 설마 다시 적군이 야습해 오리라는 것은
꿈에도 생각지 못하고 있었다. 방비가 느슨해진 틈을 타 기습을 해오니 조조군
에도 적지 않은 혼란이 일었다.
밤이 깊어 사경쯤 되었을 때, 싸움을 하는 가운데 어디가 적이고, 어디가 아군
인지 구분도 되지 않는 혼전이었다. 그렇게 뒤엉켜 싸우다 보니 어느새 동이 훤
히 터 오고 있었다.
그때 서쪽에서 북 소리가 요란하게 울리며 한 떼의 군마가 짓쳐 들어오고 있
었다.
"한 놈도 살려 보내지 말라!"
서채를 점령당했다는 급보를 받고 여포가 군사를 이끌고 달려온 것이었다.
"여포가 군사를 이끌고 이곳에 이르렀습니다."
조조는 여포가 어느 새 친히 군사를 이끌고 쫓아 들어오는 것을 보고 소스라
치게 놀랐다.
태산의 험악한 산길을 넘어 기습을 감행했던 조조군은 그곳 지리에도 어두웠
다. 조조는 여포군까지 가세하자 중과부적이라 급히 군사를 내몰아 달아나기 시
작했다.
고순, 위성의 군사들이 도망가는 조조군을 뒤쫓았다. 그러자 이번에는 여포군
이 조조군의 앞길을 가로막았다.
우금과 악진이 나가 여포군을 맞아 싸우는 동안 조조는 황망히 북쪽으로 말을
몰아 달렸다.
조조가 산 모퉁이를 돌 무렵이었다. 이번에는 장요와 장패가 기다리고 있었다
는 듯 말을 내몰았다. 조조는 다시 조홍과 여건에게 그들을 맞아 싸우게 했으나
이미 만반의 대비책을 갖춘 그들을 당할 수가 없었다. 조조는 하는 수 없이 다
시 서쪽을 향해 말머리를 돌렸다. 그 순간 요란한 함성과 함께 학맹, 조성, 성렴,
송헌이 조조의 앞길을 막았다.
조조의 장수들이 그들을 맞아 필사적인 싸움을 벌이는 동안 조조도 활로를 찾
아 칼을 휘두르며 달아나기 시작했다.
그러자 이번에는 '딱딱'하는 군호를 신호 삼아 화살이 비 오듯 쏟아지기 시작
했다. 진퇴양난이었다. 조조는 다급했다. 좌우를 둘러보았으나 이미 뒤따르던 장
수들은 보이지 않았다.
"게 아무도 없느냐? 나를 구해다오!"
담이 큰 조조였지만 무의식중에 비명을 질렀다.
그러자 마군들 속에서 한 장수가 뛰쳐 나오며 소리쳤다.
"주공께서는 염려 마십시오."
양손에 무게 80근이나 되는 창을 휘두르며 길을 헤쳐 나온 장수는 다름아닌
전위였다. 그가 쌍철극을 한 번 휘두를 때마다 피가 튀니, 말도 사람도 피를 뒤
집어써 마치 붉은 불덩이가 달려오는 듯했다.
"주공께서는 어서 말에서 내리십시오. 잠시 땅에 엎드려 화살을 피하십시오."
조조에게 화살이 쏟아지자 전위는 우선 화살부터 피하도록 조치했다.
"오, 전위인가."
조조는 전위의 말대로 급히 말에서 뛰어내려 땅에 엎드렸다. 그러자 전위도
말에서 몸을 날리더니 조조를 감싸며, 쌍철극 대신에 손에 창을 쥐고 풍차처럼
돌렸다.
날아오던 화살은 전위의 창에 부딪쳐 꺾어지거나 튕겨나갔다.
"먼저 저놈부터 목을 베라!"
이를 본 여포군 중 한 무리가 활쏘기를 멈추고 전위에게 달려들었다.
전위는 조조 앞에 서서 날아오는 화살을 막으며 자신은 성큼성큼 걷기 시작했
다. 전위는 10여 개의 단검을 손에 쥐더니 그를 따르는 부관에게 말했다.
"적군이 열 보 정도, 등 뒤로 달려들거던 나에게 말하라."
날아드는 화살을 막아 내느라 뒤돌아볼 여유가 없기 때문이었다.
전위는 쏟아지는 화살을 무릅쓰고 돌진했다. 여포의 군사 10여 명이 전위의
뒤를 쫓아 말을 몰았다. 그들이 열 걸음쯤 다가오자 부하가 소리쳤다.
"장군! 적이오!"
전위는 몸을 홱 돌이키며 단검 하나를 던졌다. 선두에서 말을 달려오던 기병
하나가 말에서 굴러 떨어졌다.
"이번에는 다섯 발자국 안에 들거든 말하라!"
전위가 다시 부하에게 명했다. 그 사이 여포의 기마 몇 기가 전위의 등 뒤 다섯
발자국쯤 되는 곳으로 달려오고 있었다.
"다섯 보요!"
부하가 소리치는 것과 동시였다.
전위가 던지는 단검은 공간을 가르며 날았다. 순식간에 전위가 뿌린 단검에
10여 명의 기병이 말에서 굴러 떨어졌다. 뒤따르던 군졸들이 이를 보고 질겁을
하며 주춤하더니 말머리를 돌려 달아났다.
전위가 다시 쌍철극을 들고 말 위에 올랐다. 여포의 네 장수 학맹, 조성, 후성,
송헌이 거느린 군사를 향해 전위가 쌍철극을 휘두르며 돌진했다. 전위의 무서운
기세를 당하지 못한 네 장수는 말을 물렸다. 네 장수가 검을 먹고 물러나자 앞
을 가로막던 군사들도 겁을 집어먹고 흩어지니 마침내 전위가 길을 열었다. 이
에 뿔뿔이 흩어졌던 조조의 장수들과 군사들도 다시 모여들어 조조를 호위하여
본진으로 돌아갈 길을 열기 시작했다.
그러나 얼마 안 있어 저물녘이 되자 함성이 일면서 등 뒤에서 한 무리의 군마
가 나타났다. 여포가 군사를 이끌고 벽력 같은 소리를 지르며 조조를 뒤쫓는 것
이다.
"조조는 게 섰거라!"
조조의 군사는 모두 어젯밤부터 격전을 치른 터라 몹시 지쳐 있었다.
장수들도 싸울 엄두를 내지 못하고 서로 얼굴만 바라보고 있었다. 사면초가였다.
조조는 하는 수 없이 여포의 공격을 피해 달아나기 시작했다. 이대로 가면 조조
는 영락없이 여포에게 사로잡힐 형세었다. 그러나 하늘이 도왔음인지 남쪽으로
부터 한 떼의 인마가 달려왔다. 조조를 찾아나선 본진의 하후돈이 수십 기의 병
마를 이끌고 온 것이었다. 그는 여포를 맞아 성난 호랑이처럼 한바탕 격전을 벌
였다.
양군은 일진일퇴를 거듭하며 치열한 전투를 벌였다. 때마침 소나기가 억수처
럼 쏟아져 양군은 각기 군사를 거두어 진영으로 돌아갔다.
구사일생으로 살아나 진영으로 돌아온 조조는 먼저 자기의 목숨을 구해 준 전
위에게 큰 상을 내렸으며, 그를 영군도위에 명했다.
"그대가 없었던들 나는 이곳에 돌아오지 못하고 불귀의 몸이 되었을 것이오."
조조는 전위에게 치하했다. 조조는 다른 장수들과 군사들에게도 각기 공에 따라
비단과 금을 내렸다.
한편 여포는 싸울 때마다 연전연승을 거두어 복양성의 주인이 되었다.
근거도 없이 떠돌던 그에게 더할 나위 없는 행운인 셈이다. 군사들도 조조군을
통쾌하게 물리쳐 사기가 드높았다.
여포는 진으로 돌아오자 진궁을 불러 조조를 칠 작전을 의논했다. 진궁의 말
을 좇아 서쪽 진영에 군사를 보내어 조조군을 크게 무찌르게 되자 여포는 이제
진궁을 매우 중요하게 여기게 된 터였다. 여포가 자기에게 의견을 묻자 진궁은
생각해 둔 계책 하나를 얘기했다.
"복양성 안에 전씨라는 가문이 있습니다. 알고 계시는지요?"
"전찌라 . 이곳의 이름난 부호 말인가요?"
"그렇습니다. 은밀히 그 부호를 부르십시오."
"군자금 때문이오?"
"그런 하잘 것없는 일 때문이 아닙니다. 그런 부호들로부터 재화를 거뒤들이는
것은 우리의 재산을 성급히 탕진해 버리는 것과 다름이 없습니다. 일만 잘 이루
어진다면 재화는 그쪽에서 먼저 싣고 오게 할 수도 있습니다."
" ."
여포는 진궁의 속마음을 헤아릴 길이 없었다. 진궁은 여포에게 귀엣말로 속삭
였다. 진궁의 말을 듣자 여포는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그로부터 며칠이 지난 뒤었다.
종부로 보이는 한 허름한 사내가 장대 끝에 삶은 닭을 보자기에 싸서 매단채
조조의 진문앞을 어슬렁거리고 있었다.
문지기가 이것을 놓칠리 없었다.
"웬놈이냐?"
그를 붙들어 문초했다.
"이것을 장군님께 바치고 싶소."
그 농부는 보자기에 싼 닭을 내보였다. 문지기가 호통을 치며 그를 쫓으려 했으
나 듣지 않았다.
하는 수 없이 문지기가 조조에게 이 사실을 고했다. 기이하게 여긴 조조는 그
를 들게 하여 호통을 쳤다.
"너 이놈, 이곳을 어슬렁거리며 밀정 노릇을 하자는 게 아니냐. 만약 그렇다면
네 목을 벨 것이다."
그러나 조조는 그가 밀정이 아님을 알 수 있었다. 밀정 같으면 문지기에게 수
작을 부칠 리가 없었다. 그러자 그 사내는 절을 하며 예를 올린후 주위를 돌아
보며 말했다.
"장군님, 주위의 사람을 물리쳐 주십시오. 저는 복양성의 이름 있는 분의 부탁
을 받고 온 사자입니다."
조조는 복양성이란 말에 경계하면서도 귀가 솔깃했다.
주위에 가까운 장수들만 남겨 두고 모두 물리쳤다. 그 사내는 닭을 싼 보자기
를 매단 대나무를 쪼개더니 그 속에서 한 장의 서찰을 꺼냈다. 서찰을 펼쳐 보
니 복양성에서 첫손 꼽는 부호 전씨가 보낸 것이 아닌가. 전씨라면 조조도 잘
알고 있는 명문이었다.
서찰의 서두에는 여포의 횡포에 시달리는 백성들의 고통이 적혀 있었다. 모두
여포의 악정을 벗어나 딴곳으로 떠나려 한다는 사연도 씌어 있었다. 또한 복양
성의 동태도 낱낱이 적혀 있었다.
여포는 지금 여양으로 떠나고 없습니다. 성 안에는 장졸 몇 사람이 지키고 있
어, 텅 빈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이때를 틈타 장군께서는 이 성을 취하십시오.
저희들은 기회를 보아 성 안에서 소동을 일으키며 '의'자를 쓴 흰 기를 성벽 위
에 세우겠습니다.
장군님은 그것을 신호로 진격하십시오.
복양성의 맞대결 조조와 여포의 장계취계
무매한 여포의 꾀를 무시하고 복양성을 탈환코자 일전일패를 반복하는 조조는
야습을 기하다 불더미 속에서 가까스로 전위에게 구출된다. 조조의 장례식을 접
한 여포는 그때를 이용해 조조군을 섬멸코자 했으나 오히려 복병을 만나 간신히
목숨만을 구한다.
조조는 서찰을 읽고 난 뒤 크게 기뻐하며 말했다.
"하늘이 나에게 기회를 주시는 구나. 이제 복양성은 내 수중에 들어온 것이나
다름없다."
조조는 사자라는 농군에게 상을 내리고 답서를 써 보냈다. 조조가 의심도 없
이 그 밀서를 믿어 버린 데는 전씨를 알고 있었음에도 그 원인이 있지만, 여포
의 사람 됨됨이를 잘 아는 탓도 있었다. 여포가 이런 계략까지 꾸밀 지모가 되
지 못한다고 여겼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책사인 유엽이 조조에게 충고했다.
"만일을 생각해서 군을 셋으로 나누어 그 중 한 대로만 진격 하심이 어떨는지
요? 여포가 비록 꾀가 없다 하나 진궁은 그렇지 않습니다."
조조 또한 그 말이 옳다고 여겨졌다. 만약을 대비하여 유엽의 말대로 군대를 셋
으로 나눈 후 복양성으로 향했다.
조조는 성으로 가까이 다가가면서 성벽 위를 살폈다.
"봐라, 저기 흰 기가 보인다."
크고 작은 여러 개의 적의 정기가 펄럭이고 있는 가운데, 한 구석 서문 위쪽
에 큰 백기가 꽂혀 있었다. 그 깃발에는 뚜렷이 '의'자가 새겨져 있었다. 지난번
밀서에 씌어 있는 그대로였다. 거기다가 과연 여포의 모습도 보이지 않았다.
조조는 회심의 미소를 머금었다.
조조군이 복양성으로 오자, 성문이 열리더니 두 장수가 달려나왔다. 전군은 후
성이, 후군은 고순이 이끌고 있었다.
조조는 전위를 내보내 후성을 치게 했다.
후성은 전위를 맞아 부딪쳤으나 그의 상대는 아니었다. 몇 합 싸우지도 못한
채 달아나기에 급급했다.
전위는 내친 김에 적교(성으로 통하는 올리고 내리는 다리)까지 뒤쫓아 고순
과도 한바탕 접전을 벌였다. 고순 또한 전위의 기세에 눌린 듯 후성과 함께 성
안으로 달아났다.
성 안으로 후퇴하느라 혼란한 가운데 몇 명의 군사가 조조 진영으로와 밀서를
전했다. 지난번에 조조 진영을 찾았던 농군이 군복을 입고 찾아온 것이었다.
조조가 펴보니 틀림없이 지난번의 필적과 같았다.
오늘 밤 초경의 별이 떠 있을 무렵, 성 위에서 징 소리가 울릴 것이오. 이를
신호로 군사를 움직이십시오. 안에서 성문을 열어 복양성을 장군께 바치겠소.
"됐다. 때는 왔다."
조조는 밤을 기다리며, 총공격을 위한 군사의 배치를 시작했다.
하후돈과 조인에게 군사를 주어 두 부대로 편성시킨 뒤 성문 앞에 대기토록 하
였다. 선봉에는 하후연, 이전, 악진이 맡도록 하고 중군은 전위등 네 장수로 하
여금 성을 에워싸게 했다.
밤이 되자 조조는 네 장수의 한가운데에서 기를 세운 채 성 안으로 육박해 들
어가기로 했다.
그러나 이때 선봉의 이전은 성 안의 공기가 너무나 조용하여 의아스럽게 여겼
다.
"주공께서는 성 밖에 계십시오. 저희들이 먼저 성 안에 들겠습니다."
조조는 못마땅한 얼굴로 그를 나무랐다.
"병기를 놓치면 승기를 잃게 된다."
그날 밤이 되자 조조는 앞장 서 성을 향해 말을 몰았다.
초저녁이라 달은 떠오르지 않았으나 하늘에는 별빛이 더욱 찬연했다. 뿐만 아
니라 조조를 뒤따르는 군마의 발굽 소리가 요란했다.
이때 성 위에서 은은히 징 소리가 들리더니 성문 위에 횃불이 훤히 밝혀지며
성문이 활짝 열리고 순식간에 적교도 내려졌다.
전씨가 전한 밀서의 내용과 어긋남이 없었다.
"성문이 열렸다. 기회를 놓치지 말고 쳐들어가라!"
조조가 좌우를 보며 외쳤다. 조조는 물론 다른 장수들도 앞다투어 문 안으로
몰려들었다.
조조가 말을 박차며 성문 안으로 달려가 곧장 관아 앞에 이르렀다. 그러나 인
기척 하나 없었다. 그때서야 조조는 급히 말을 세웠다. 조조는 주위를 둘러보았
다. 그를 맞으려 전씨나, 농군도 나와 있지 않았다.
조조는 급히 말머리를 돌리며 외쳤다.
"군사를 물려라, 적의 계략이다!"
그러나 때는 이미 늦었다. 성 안에서는 조조의 일성을 신호로 일시에 요란한
함성이 울려 퍼지는가 했더니 포성이 울렸다. 그와 함께 4대문에서 홀연 불길이
치솟고 징 소리, 북소리가 요란한 가운데 군사들의 함성이 강물을 뒤집고 바닷
물이 들끓듯 요동쳤다.
"와아……!"
조조가 군사를 물리라고 소리쳤지만, 이미 노도처럼 안으로 밀려들던 군사들
이라 갑자기 성을 빠져 나갈 수가 없었다.
그러자 성벽 위에서는 밑 빠진 하늘에서 우박 떨어지듯 돌덩이가 쏟아져 내렸
다. 이어 관아의 건물 뒤쪽에서 수천이 넘는 횃불이 날아왔다. 횃불은 군마와 투
구 할 것 없이 사방으로 어지럽게 떨어졌다.
말과 군사들은 순식간에 혼란의 소용돌이에 빠져드니 제대로 싸워 볼 엄두도
내지 못한 채 서로 부딪고 짓밟으며 아우성쳤다.
돌덩어리와 횃불의 빗발이 멎었는가 싶자 이번에는 성 안 네 개의 문이 일시
에 열리면서 여포의 군대가 동문과 서문에서 쏟아져 들어왔다.
"한 놈도 살려서 보내지 말라!"
나가지도, 들어가지도 못하고 우왕좌왕하던 조조군은 그물 속의 물고기처럼
어이없이 섬멸되었다. 죽는 자와 생포되는 자가 부지기수였다.
조조는 황망히 북문을 향해 말을 몰았으나 그곳에선 다른 군대가 불쑥 나타나
가로막았다.
또다시 남문으로 말머리를 돌렸으나 남문은 이미 불바다가 되어 있었다. 다시
서문으로 달려나가자 이번에도 양쪽에 매복해 있던 군사들이 나타났다.
그때 조조의 부장 전위는 다리를 건너 조조를 찾아 나섰다. 전위는 타오르는
불길을 헤집고 닥치는 대로 베고 찔렀다. 조조는 서문에 매복한 군사들이 나타
나자 어찌할 줄 모르고 좌우를 살피고 있었다.
전위가 불길 속에서 조조를 찾아 헤메고 있을 때 말을 몰아 달려온 장수가 있
었다.
"전위가 아니오."
"오, 이저이군요. 주공을 못 보셨소?"
"나도 지금 찾고 있는 중이오."
전위는 그때 적의 계략에 빠진 걸 알고 성 밖 적교까지 나갔다. 그러나 뒤돌
아보니 조조가 보이지 않아 다시 성 안으로 들어가다 이전과 마주쳤던 것이다.
전위는 이전에게 성 밖에서 구원해 줄 것을 당부한 뒤 조조를 찾기 시작했다.
성 안은 어디를 보아도 온통 적병이요, 불이요, 검은 연기뿐이었다. 조조 자신
도 이제는 자기가 달리고 있는 곳이 남쪽인지 서쪽인지 짐작할 수조차 없었다.
다만 보이는 것은 적병이요, 불길이었다.
그러자 저편 어두운 골목에서 한 무리의 횃불이 어둠을 밝히면서 나타났다.
보나마나 적군임이 분명했다.
'이제는 끝장이구나!'
그렇다고 몸을 되돌려 도망칠 수도 없었다. 눈앞에 적군을 두고 도망을 친다
면 자기가 적이라는 걸 알려 주는 꼴밖에 되지 않는다. 조조는 이를 악물고 얼
굴을 숙이고 태연히 그들 옆을 스쳐 지나가려 하였다. 어찌 알았으랴, 군사들에
게 횃불을 들리고 말을 몰아오는 사람은 적장 여포가 아닌가. 방천화극을 옆구
리에 낀 채 왼손에는 적토마의 고삐를 잡고 유유히 다가오는 모습이 조조의 눈
에 커다랗게 들어왔다.
조조는 얼굴을 손으로 가리고 여포 옆으로 지나쳤다. 그러자 여포가 창을 내
밀어 조조가 쓰고 있는 투구의 정수리를 '땅!'하고 가볍게 쳤다.
"조조가 어디로 달아났는지 모르느냐?"
여포는 조조가 자기의 부하 장수라고 여겼던 모양이었다.
조조는 가슴이 섬뜩하였으나 정신을 가다듬고 목소리를 달리하여 반대편을 가
리키며 말했다.
"저쪽에 황색 말을 타고 가는 놈이 조조입니다."
여포는 그 말을 듣자 급히 황색 말을 향해 달려갔다. 조조가 기회를 놓치지
않고 말머리를 돌려 동문을 향해 말을 달렸다.
"어째, 저놈이 수상쩍다."
여포가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고 중얼거렸을 때 조조의 모습은 자욱한 연기 속
으로 사라진 뒤였다. 조조는 혼비백산하여 말을 달렸다.
조조는 '호구를 벗어났다'함은 이를 두고 하는 말이구나 하고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나 여기가 어디인가? 동쪽인지, 서쪽인지 분간하기가 어려웠다.
그때였다.
"주공!"
한 장수가 조조에게 다가와 헐떡이며 불렀다. 온몸에 피를 뒤집어쓴 채 양손
에 철극을 들고 있는 전위었다. 전위가 조조를 호위하여 길목마다 혈로를 열고
성문 부근까지 당도하였다.
그러나 성문은 맹렬한 불길 속에 휩싸여 있었다. 성 위에서 불붙은 마른 풀
더미를 떨어뜨리니 땅바닥은 물론 성벽도 불길이 붙어 그 열기는 천지를 녹일
듯했다. 말은 열풍을 두러위하며 사납게 맴돌 뿐 앞으로 나가려 하지 않았다. 투
구에도 안장에도 불똥이 떨어져 내렸다. 조조는 절망에 찬 목소리로 탄식했다.
"이곳으로도 나갈 수가 없을 것 같구나."
그러자 전위가 불보다 더 붉어진 얼굴로 사방을 둘러보더니 결연히 말했다.
"주공, 돌아갈 길은 없습니다. 제가 앞서서 빠져 나갈 것이오니 바짝 뒤따르십
시오."
전위는 철극 끝으로 불붙은 나무며 짚단과 연기를 헤치며 달려나갔다. 그러나
살아날 길은 그곳밖예 없었다. 조조도 창을 움켜잡으며 화염속으로 뛰어들었다.
눈썹도, 투구 밖으로 나온 머리칼도 불에 타고 있다고 생각되었을 때, 조조와
그의 말은 성문 바깥쪽으로 거의 빠져 나와 있었다.
이때였다. 성루의 한쪽 모퉁이가 불에 타서 허물어졌다. 커다란 들보가 불기를
내뿜으면서 떨어지더니 조조가 탄 말의 궁둥이를 때렸다. 말은 비명을 지르며
쓰러졌고, 조조는 땅바닥에 나뒹굴었다. 이어 나뒹군 조조의 몸 위로 불붙은 들
보가 또 넘어졌다.
"앗!"
조조는 넘어진 그대로 들보를 손으로 막았다. 무예로 단련된 잽싼 움직임이
아니었더라면 영락없이 들보에 깔릴 순간이었다. 조조는 손바닥과 팔뚝에 큰 화
상을 입었다.
갑옷에는 불이 옮겨 붙었는지 몸에서도 연기가 솟았다. 조조는 그만 화염 속
에서 정신을 잃고 말았다.
전위가 말을 달리다 보니 조조가 화염 속에 쓰러져 있으므로 급히 달려가 조
조를 일으켜 자기의 말 위에 태웠다.
이때 조조를 찾아 나선 하후연이 전위를 발견하고 달려왔다. 그들은 말을 달
려 가까스로 진영으로 돌아왔다.
악몽과 같은 싸움은 새벽녘까지 계속되었다.
장수들도 군사들도 하나씩 둘씩 진영으로 돌아왔다. 살아 남은 장수나 군사들
도 모두 피와 흙으로 얼룩져 있었다.
그나마 살아서 돌아온 사람은 다행이었다. 군사의 반 이상이 죽거나 포로가
되었다. 조조마저 전위와 하후연의 부축을 받으며 말안장 위에 실려서 돌아오자
전군의 사기는 무덤 속처럼 무겁게 가라앉고 말았다.
여러 장수들이 조조의 진막으로 몰려들었다. 진막 안에 있던 장수들도 모두
무거운 침묵을 지키고 있었다.
치료를 하러 왔던 전의가 조용히 걸어나갔다. 전의의 얼굴도 수심에 싸여 있
었다. 장수들은 전의의 얼굴을 보고는 모두 불길한 예감에 휩싸였다.
그때였다. 돌연 진막 안에서 조조의 떠나갈 듯한 웃음소리가 들려 왔다. 장수
들은 그 뜻밖의 웃음소리에 놀라 조조가 누워 있는 침상으로 달려갔다.
조조는 오른팔에서 어깨, 허벅지까지 모두 흰 천으로 감겨 있었다. 얼굴의 반
쪽도 그랬다. 머리털도 불에 그을려 있었다. 장수들은 조조의 때아닌 웃음에 영
문을 알 수 없다는 듯 서로 얼굴을 마주보았다.
"모두들 걱정하지 말라!"
한쪽 눈으로 장수들을 둘러보며 조조는 여전히 껄껄 웃고 있었다.
"생각해 보면 적군이 강해서 이렇게 된 것은 아니다. 나는 불에 졌을 뿐이다.
여포 따위의 계략에 빠졌으니 실로 부끄러운 일이다. 그러나 나는 그놈에게 계
교로서 보답할 생각이다. 두고 보아라."
조조가 생각해도 실로 어처구니없는 일이었던지 절로 너털웃음이 터져 나왔던
것이다. 여포에게 지모가 없다는 것만 생각하고 가벼이 군사를 움직였던 자신의
행동을 뉘우쳤다.
그때 곽가가 조조에게 말했다.
"급히 저들을 물리칠 방책을 강구해야 합니다."
그러자 조조가 계책을 내었다.
"장계취계(적의 계략을 역이용함)를 베풀기로 하되, 내가 화상을 크게 입어 오
늘밤에 죽었다고 거짓 소문을 퍼뜨리고 발상의 행차를 보여라. 그러면 여포는
반드시 공격해 올 것이다. 그러면 일단 마릉산에 가매장을 한다며 장례를 치르
는 척하면서 동편과 서편에 군사를 매복시킨 다음 여포 군이 그곳에 오면 반쯤
지나가도록 내버려 두었다가 들이쳐서 두 토막으로 낸 뒤 급히 공격하여 섬멸토
록 하라."
"실로 좋은 계책이십니다."
그제야 여러 장수들은 무릎을 치며 웃었다.
이에 군사들에게 영을 내려 발상을 하고 조조가 죽었다는 말을 퍼뜨리게 하였
다. 장군의 깃대 끝에도 모두 주장을 매달았다.
조조가 죽었다는 소식은 세작에 의해 복양성에 있는 여포에게 어김없이 보고
되었다. 어포는 조조가 성문을 빠져나가다 커다란 들보에 깔렸다는 부하 장수의
말을 들었던 터라 조금도 의심치 않았다. 첨자를 풀어 알아보게 하니 조조의 군
사들은 이미 장례식을 치르기 위해 마릉산으로 갔다는 것이었다.
여포는 마음이 급해 앞 뒤 헤아릴 겨를도 없이 즉시 휘하의 군마를 이끌어 마
릉산으로 향했다. 이 기회에 조조의 세력을 송두리째 섬멸할 심산이었다.
여포가 마릉산 반쯤 지나 조조의 진영 가까이 이르렀을 때였다.
돌연 산등성이와 계곡, 숲 속에서 징 소리, 꽹과리 소리가 천지를 떠나갈 듯이
울리더니 사방에서 매복했던 군사들이 짓쳐 나왔다.
"아차, 계략이었구나."
복병의 기습에 휘말린 여포의 군사들은 조조의 협공에 우왕좌왕하다 쓰러져
갔다.
여포는 가까스로 목숨만을 부지하여 복양성 안으로 달아났다. 전날의 대승도
보람없이 참담한 패전을 맛본 여포는 복양성을 굳게 지키기만 할 뿐 더 이상 성
밖에 나오지 않았다.
조조는 갖은 방법을 다 써 복양성에 있는 여포를 성 밖으로 끌어내려 했다.
그러나 조조의 책략에 질렸는지 대문을 굳게 걸어 잠그고는 꼼짝도 하지 않았
다.
한동안 병기 부딪치는 소리와 군마들의 발굽 소리도 들리지 않는 고요한 나날이
계속되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이 지방에 평화가 온 것은 아니었다. 설상가상으로 전
쟁 이상으로 백성들을 슬프게 하고 전 농토를 폐허화시킨 대란이 일어났다.
어느 날, 한 조각의 구름도 없이 활짝 개인 하늘 한 켠에서부터 점점이 검은 솜
을 띄워 놓은 듯한 이상한 기운이 감돌았다. 그 검은 기운은 금새 온 하늘에 번
졌다.
"메뚜기다, 메뚜기 떼다!"
하늘에 떠도는 검은 솜과 같은 무리를 보더니 농부들은 얼굴이 파랗게 질려
외쳤다.
메뚜기 떼의 내습이었다. 메뚜기 떼는 사막에서 불어오는 바람에 실려 있는
모래 알갱이보다도 훨씬 더 많았다. 하늘을 가리고 땅을 덮은 메뚜기 떼가 휩쓸
고 지나간 자리에는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 곡식은 물론 나뭇잎이나 풀잎조차
남기지 않았다.
메뚜기들은 이렇게 한 지방을 완전히 황무지로 만들고, 다른 지방으로 이동하
는 것이었다.
백성들도 굶주림에 시달렸다. 농부들은 유민이 되어 동으로 서로 무리지어 떠
돌았다.
산동 지방에는 곡가가 천정부지로 올라 쌀 한 섬(열 말에 해당됨)의 값이 50
관(된 꿰미)이나 되었으며 종내에는 기아로 인해 사람을 잡아먹는 일까지 생겼
다.
이런 지경인지라 군량이 바닥 나지 않을 수 없었으니 조조도 여포도 어떻게 손
을 써야 할지 대책이 서지 않았다.
조조는 하는 수 없이 군사를 거두고 잠시 견성으로 돌아가 메뚜기 떼로 인한
대기근을 넘기고 다음 기회를 기다리기로 하니 이제 복양성의 싸움은 자연히 중
단되고 소강 상태로 들어갔다
이 때 서주태수 도겸은 나이가 이미 예순 세 살이었다. 거기다가 중병을 얻어
자리에 눕게 되니, 누구에게 이 서주를 물려주어야 하는가 근심에 싸여 있었다.
'역시 유비 현덕밖에 마땅한 사람이 없구나.'
도겸은 이렇게 마음을 정하고 휘하 장수 미축과 진 등을 불러 후사를 의논했
다.
"지난날 조조가 서주에서 군사를 물린 까닭은 여포가 그의 근거지 연주를 침
범하였기 때문이오. 또한 메뚜기 떼의 내습으로 복양성 싸움을 일시 중단했으나
다시 군사를 일으켜 서주를 또 침범할 것이오. 그때 여포가 또 조조를 치면 좋
으련만 일이란 항상 우리 쪽으로 유리하게 벌어지는 것은 아니지 않겠소. 더욱
이 이렇듯 중병이 들어 나의 목숨도 언제 끝날지 모르니 내 생전에 확실한 후계
자를 정해 놓고 싶소."
태수 도겸의 마음을 잘 알고 있는 미축이 주저치 않고 진언했다.
"생각컨데 조조는 반드시 내년 봄이 되면 또다시 쳐들어올 것이 분명 하온데
서주를 지킬 만한 사람은 역시 소패의 유비 공밖에 없을 듯합니다. 지난번에는
두 번씩이나 태수님의 청을 사양하였지만 그때는 태수께서 건강하셨기 때문으로
생각되옵니다. 그러나 지금은 태수께서 병환이 위중하시니 유비 공을 다시 불러
청하신다면 유 공도 더 이상 사양하지는 못할 것입니다."
미축의 말을 듣고 도겸은 매우 기뻐하며 즉시 사자를 유비한테 보내도록 하였
다.
유비는 사자를 만난 직후 관우, 장비와 함께 서주로 달려와 태수 도겸을 문병
하였다. 도겸은 마른나무처럼 여윈 손을 내밀어 유비의 손을 잡으며 청했다.
"오늘 현덕 공을 청한 것은 다름이 아닙니다. 이 늙은이의 병이 점점 깊어져
이제는 위독한 지경에 빠졌소. 유 공이 한실의 성지를 지키며, 천하를 위하여 이
곳 성주의 패인(인뒤웅이)을 받아 주신다면 내 지금 눈을 감아도 여한이 없겠
소."
그러나 유비는 변함없이 패인을 받지 않고 반문했다.
"태수께는 두분의 자제 분이 계십니다. 그러하거늘 어찌 저에게 물리시려 하옵
니까?"
"장남 상, 차남 응이 있기는 하나, 둘 다 중임을 감당할 만한 그릇이 아니오.
내가 죽은 후에라도 이 아이들을 보살펴 주시기만을 바랄 따름입니다. 결코 태
수의 자리에 앉혀서는 아니 되오."
유비는 도겸이 그렇게 말하자 그의 깊은 마음을 헤아릴 수 있을 것 같았다.
도겸의 말에는 이 난세에 백성들을 따뜻이 보호하고 두 아들을 위해서도 유비가
맡아야 한다는 뜻을 담고 있었다. 그제서야 유비도 거절하지 않은 채 되물었다.
"하오나 이 중임을 저 한 사람으로는 감당하지 못하겠습니다."
"정 그러시다면 제가 공을 도울 수 있는 한 사람을 천거하겠소. 북해의 사람으
로 성은 손씨요 이름은 건이며 자는 공우라고 하오. 그 사람이면 능히 공을 도
울 수 있을 것이오."
말을 마친 도겸은 옆에 있는 미축을 보고 간신히 입을 열었다.
"유 공은…당세의 영걸이니… 그대는 잘 보필하도록 하오."
그러나 유비는 패인을 받지 않았다.
도겸은 말을 마치자 답답하다는 듯 손을 들어 유비를 가리키더니 그만 숨을
거두었다.
모든 서주의 사람들은 도겸의 죽음을 슬퍼하였다. 도겸의 휘하 장수들은 도겸
의 유언에 따라 관인을 바쳤으나 끝내 사양하며 받지 않았다.
다음 날이 되자 서주의 백성들이 관아의 문전에 모여들어 엎드려 눈물을 흘리
며 유비에게 진언하였다.
"태수께서 생전에 소원하시던 바이며 또한 저희 백성들의 소원입니다. 만일 유
사군께서 서주를 다스려 주시지 않는다면 저희들은 마음 놓고 살지 못합니다.
부디 거두어 주십시오."
관우와 장비도 재삼 유비에게 권하였다.
이에 유비는 해질녘에야 마지못해 잠시나마 서주를 다스릴 것을 허락 하였다.
유비는 손건을 청해 미축과 함께 종사관으로 삼고 진 등을 참모에 명함과 동시
에 그 동안 거느리고 있던 소패의 군사들을 서주 성 안으로 불러들였다.
유비는 곳곳에 방을 붙여 백성들을 안심시키는 한편, 도겸의 장례를 성대하게
치르고, 도겸의 유표를 조정에 올렸다.
유비는 이제야 비로소 한 주의 태수가 되었다.
군사의 힘에 의한 것도 아니요, 책모를 써서 얻은 자리가 아니었다. 지극히 자
연스럽게 찾아온 운명으로 받아들인 자리였다.
탁현의 한 한촌에서 몸을 일으켜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끝내 절의를 지키고,
공을 서두르지 않았다. 관우, 장비가 답답하게 여길 정도로 처신해 온 유비였다.
그러나 이에 이르기까지 먼길을 우회해 온 것 같지만 그의 이러한 처신은 오히
려 지름길이 되었던 것이다.
한편 메뚜기 떼의 내습으로 산양의 연성에 들어가 있던 조조는 도겸이 죽고
유비가 태수가 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크게 노했다.
"죽은 도겸이 나의 원수임을 유비도 알고 있는 터에 지난날에는 원군까지 끌
고 와 도겸을 편들더니, 이제는 유비 그가 화살 한 개도 쏘지 않고 앉아서 서주
를 몽땅 차지했단 말이지? 내 반드시 유비를 먼저 죽인 후에 도겸의 시체를 육
시하여 아버지의 한을 풀어 드리리라!"
조조에게 서주는 언젠가는 마땅히 자기가 취해야할 땅이라고 믿고 있었었다.
그런데 생각지도 않은 유비가 가로채고 들어앉았으니 조조가 펄펄 뛸 만했다.
조조는 우선 서주 정벌부터 서둘렀다. 그러자 순욱이 간하였다.
"옛적에 고조께서는 관중을 보전하시었고, 광무제는 하내를 확보하여 근거를
굳건히 하였습니다. 이로써 천하를 완전히 바로잡자는 뜻에서였습니다. 때문에
나아가면 싸움에 이기고 물러가도 견고히 나라를 지킬 수 있었던 것입니다. 처
음엔 비록 어려움이 많았으나 마침내 대업을 완성한 것입니다. 주공께서는 처음
연주에서 거사하셨습니다. 이 황하, 제수의 땅은 천하의 요새로서 참으로 옛날
관중, 하내와도 비교될 만한 곳입니다. 지금 만약 서주를 취하려 하실 때 작은
병력으로 임하면 성사되기 어려울 것이요, 그렇다고 많은 군사를 일으키면 이곳
이 빌 것입니다. 또한 여포가 그 허를 노릴 것이므로 연주를 잃을 우려가 있습
니다. 만일 주공께서 서주를 빼앗지 못하신다면 어디로 가시렵니까. 지금 도겸은
죽었으나 이미 유현덕이 지키고 있습니다. 거기다가 서주의 백성들이 모두 유현
덕을 따르고 있으니, 반드시 그를 위해 죽음도 마다 않고 싸울 것입니다. 주공께
서 연주를 버리고 서주를 취하시는 것은, 큰 것을 버리고 작은 것을 취하는 것
이요, 또한 근본을 버리고 지엽을 구하는 것이요, 편안함을 버리고 위태로운 것
을 택하는 격입니다. 두 번 세 번 헤아려 움직이시기 바랍니다."
조조가 고개를 가로 저으며 순욱의 말에 반문했다.
"공의 말도 일리는 있소. 그러나 올해는 이전에 없던 흉년이 들어서 군량도 부
족한데 이런 곳을 지키고만 있는 것을 상책이라고 할 수는 없지 않겠소?"
"저에게 하나의 방책이 있습니다. 우선 동쪽 지방인 여남에서 영주에 걸친 일
대의 군마를 양성하는 것입니다. 그 지방에는 아직 황건적의 잔당이 적지 않게
남아 있습니다. 그 도적들을 쳐서 뺏은 양곡으로 우리 군사의 군량미로 삼는다
면 조정에서는 이를 오히려 가상히 여길 것입니다. 또한 백성들이나 천하의 영
주들도 우리들을 챙송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일석이조가 아니겠습니까?"
조조의 말을 듣고 보니 순욱의 말이 그럴 듯했다. 조조는 남의 의견이 좋으면
주저 없이 받아들였다.
"좋다. 여남으로 가자! 도둑도 쫓아 버리고 군량도 챙기자. 참말로 좋은 계책
일세."
며칠 후 연주 땅을 하후돈, 조인에게 지키게 하고, 그이 병마는 동쪽으로 이동
하고 있었다. 그 해의 12월에 먼저 진 땅을 치고 이어 여남과 영천으로 나아갔
다.
황건적 잔당의 두목 하의와 황소는 양산을 중심으로 다년간 백성들의 고혈을
착취하고 있었다.
"뭐야, 조조가 왔다고? 조조는 연주가 근거지가 아닌가. 이는 필시 조조의 이
름을 파는 거짓 조조임이 분명하다. 숨돌릴 틈 없이 단번에 섬멸해 버려야 한
다!"
조조가 군사를 이끌고 오자 하의와 황소는 황건적들을 양산으로 집결시켰다.
조조는 그들과 일전을 벌이기 전에 먼저 전위에게 명했다.
"전위는 정찰을 하고 오라."
전위는 말을 달려가더니 금세 돌아와 보고를 하였다.
"적의 무리가 마치 메뚜기 떼 같았습니다. 그러나 오합지졸이라서 규율도 대오
도 제대로 갖추지 못하고 있습니다. 정면에서 강궁(센 활)과 경노(굳세고 튼튼한
활)로 쏘게 하십시오. 제가 기회를 보아 옆쪽을 찔러 맹공을 가하겠습니다."
전위의 말에 따라 조조는 강궁과 경노를 쏘게 했다. 화살이 어지럽게 도적들의
머리 위로 떨어지자 그들의 대오는 더욱 산만해졌다. 전위가 이때를 틈타 군사
를 이끌고 나가자 하의가 부장을 내보내 전위를 막도록 했다. 그러나 하의의 부
장은 전위와 몇 번 부딪치지도 못한 채 전위의 창에 찔려 말 아래에 나뒹굴고
말았다. 전위가 여세를 몰아 군사를 내몰았다. 도적들은 무수한 시체를 버리고
사방팔방으로 흩어졌다.
조조는 단번에 양산을 빼앗아 진을 쳤다.
다음 날이 되자 황건적의 또 다른 우두머리 격인 황소가 한 떼의 군마를 이
끌고 나타났다. 황소가 진을 치고 나자 진두에 나타난 한 장수가 있었다. 이 사
나이는 말도 타지 않은 채였다. 키는 일곱 자가 실히 되어 보였고, 손에는 쇠몽
둥이를 들었는데, 머리에는 황건을 두르고 칠흙 같은 수염을 바람에 흩날리고
있었다.
"이놈들아, 내가 누군 줄 아느냐. 이 고장에서 소문이 자자한 절천야차 하만이
바로 나다. 조조란 놈은 어디 있느냐. 진짜 조조라면 썩 나와서 한판 붙자!"
하만은 고래고래 고함을 질렀다.
이를 지켜보고 있던 조홍이 벽력같이 소리를 지르며 앞으로 나섰다. 조홍도
말에서 내려 칼을 뽑아들고 하면에게 다가갔다.
"이 무식한 도둑놈아! 조 장군은 너 같은 시골 장수하고는 싸우시지 않는다.
내 칼이나 제대로 막아라."
조홍이 춤추듯 칼을 휘두르며 덤벼들자 하만도 장검을 휘두르며 무섭게 돌진
하였다.
하만의 무예는 가볍지 않았다. 조홍을 맞아 싸운지 4,50합이 되었다.
조홍이 점차 뒤로 밀리는 듯 형세가 되었다. 이에 조홍은 기운이 다한 듯한 소
리를 크게 지르며 장검을 내리친 후 슬며시 몸을 빼어 달아났다. 하만이 씩씩대
며 기세를 올려 숨쉴 틈도 주지 않고 그 뒤를 쫓았다.
그러자 조홍이 갑자기 몸을 홱 돌리더니 몸을 훌쩍 솟구쳐 뒤집자마자 하만을
칼로 내리치고 이어 땅에 내려서 무릎을 꿇으며 칼을 후리니, 칼은 하만의 몸을
두 동강으로 가르고 말았다. 조홍이 타도배작계(칼을 끌며 도망하다 갑자기 돌아
서 치는 검법)를 써 하만을 거꾸러뜨린 것이었다.
이 사이에 이전이 말을 달려 적진에 뛰어들었다. 믿었던 하만이 죽고 기습을
받아 허둥대던 적장 황소는 이전의 손에 사로잡히는 몸이 되고 말았다.
조조의 군사들은 때를 놓치지 않고 들이닥쳐 황건적들을 닥치는 대로 죽였다.
황건적들은 원래가 오합지졸인지라 달아나기에 바빴다. 노략질한 금은보화며 양
곡을 고스란히 남겨 둔 채 줄행랑을 치고 말았다.
전세가 이 지경이 되자 하의는 2, 3백 명의 부하를 거느린 채 갈파 방면으로
도망가고 있었다.
그가 정신없이 말을 달리고 있는데, 돌연 산모퉁이에서 깃발도 기치도 없는
한 무리의 군마가 우르르 달려나왔다.
선두의 한 장사가 손에 장검을 들고 하의의 앞길을 막았다. 그 장사는 키가
여덟 자요, 허리통이 몇 아름이나 되어 보였다. 그 장사는 무턱대고 발길질을 하
여 하의를 말에서 떨어뜨렸다.
땅바닥에 떨어져 구르던 하의가 장창에 몸을 의지하며 일어서는 순간, 그 장
수가 비호같이 달려들어 꽁꽁 묶어 버렸다. 하의를 따르던 도둑의 무리들은 그
모양을 보자 부들부들 떨며 일제히 장사 앞에 무릎을 꿇고 고개 숙여 항복하였
다.
장사가 부하 군졸과 항복한 도둑의 무리를 이끌고 돌아가려고 서두를 때였다.
"잠깐, 너희들도 황건적이냐?"
하의를 뒤쫓던 전위가 말을 달려오며 그 광경을 보고 쌍철극을 비껴들고 큰
소리고 외쳤다.
전위의 물음에 그 장사는 태연한 어조로 대답했다.
"황건적 5, 6백여 명을 사로잡아 성채에 묶어 두었다. 왜 그러느냐?"
"그렇다면 빨리 황건적을 나에게 바쳐라."
"하하하, 별놈 다 보겠네. 만약 내 손에 있는 칼을 빼앗는다면 황건적을 네게
내어 주마. 그러나 그 전에 네놈의 목이 먼저 떨어진다는 걸 알아라."
장사가 전위에게 이렇게 빈정되자 전위는 화가 머리끝까지 치솟았다.
"오냐. 네놈이 무얼 믿고 분별없이 지껄이는지 어디 한 번 해 보자!"
전위가 쌍철극을 휘두르며 장사에게 돌진했다. 장사 또한 큰 칼을 뽑아들고 맞
받아 싸웠다.
두 사람이 어우러져 싸우는 모습은 마치 두 마리의 용이 포효하며 뒤엉킨 것
과 같았다. 쌍철극과 큰 칼이 불을 뿜으며 부딪친 지 반나절에 이르도록 승부가
나지 않았다.
전위가 먼저 말을 뒤로 물리면서 제의하였다.
"잠깐, 목이 마르구나. 한숨 돌리고 다시 싸우도록 하자,"
장사 또한 전위의 말에 동의했다.
잠시 물러서서 쉬고 난 후 장사가 먼저 입을 열었다.
"많이 쉬었으니 다시 시작하자!"
"나도 기다린 바이다."
두 사람은 다시 어울렸다. 고함 소리는 구름 속에 사무쳤고, 칼과 쌍철극은 수
없이 맞부딪쳐 불꽃을 튕겼다.
날이 어둑어둑 저물어 왔으나 두 사람은 일진일퇴를 거듭할 뿐 여전히 승부가
나지 않았다. 그야말로 용장호투의 대결이었다. 싸우는 두 사람은 갈수록 불을
뿜는데 오히려 그들이 타고 있던 말이 지쳐서 움직이려 하지 않았다 싸움이 이
토록 결말이 나지 않자, 전위의 부하 하나가 급히 조조의 본영으로 달려가 이
일을 알렸다.
'전위와 하루 종일을 싸우고서도 승부를 가리지 못하는 장사가 있다는 말인
가?'
전위는 악래라는 별호로 불릴 만큼 조조의 휘하에서는 으뜸 가는 용사가 아닌
가. 그와 일대 일로 종일토록 맞겨뤄 끄떡도 않는 장사가 나타났다니 조조가 놀
라는 것도 무리가 아니었다.
조조는 휘하 장수들을 거느리고 급히 갈파로 달려갔다.
한편 전위와 장사는 타고 있는 말이 제대로 움직이지 못할뿐더러 날이 어두워
오므로 이번에는 장사가 먼저 입을 열었다.
"날이 어두웠다. 오늘은 이만 싸우는 게 어떠나?"
"그렇다면 내일 결판을 내도록 하자."
전위 또한 바라던 바였다. 두 사람은 말을 돌려 돌아갔다.
다음 날이 되자 장사는 다시 나타나 전위에게 싸움을 걸어 왔다. 물론 전위도
흔쾌히 응해 싸웠다.
전위는 낯선 장수가 자기와 맞서 싸우고는 있으나 속으로는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도적의 두목을 사로잡은 것으로 보아 황건적이 아님은 분명했다.
'이 장사는 도대체 누구일까?'
장사 또한 전위의 뛰어난 무예에 감탄하고 있었다. 지금까지 자기와 싸워 무
릎을 꿇지 않는 자가 없었기 때문이다.
두 사람의 싸우는 모습을 조조는 주의 깊게 지켜보고 있었다.
전위의 무용은 이미 알고 있는 터였다. 그러나 장사 또한 평범한 무용이 아니
었다. 조조는 내심 기뻐했다.
두 사람의 싸움은 어제처럼 쉽게 결말이 나지 않았다. 휴식을 취하기 위해 돌
아온 전위에게 조조가 일렀다.
"오늘은 짐짓 패하여 달아나는 척하며 진으로 쫓겨오도록 하라."
조조의 말에 전위는 그 뜻을 알아차리고 조조의 명을 따랐다.
다시 싸우기를 30여 합, 전위는 슬며시 말머리를 돌려 달아나기 시작했다. 장
사는 급히 전위를 추격하여 조조의 진문 앞까지 쫓아왔다. 이때 조조의 군사들
은 활과 석궁을 쏘아 장사를 쫓아 보냈다.
조조는 급히 군사를 5리 밖으로 물렸다. 진문 앞에는 깊은 함정을 파놓고 쇠
갈퀴를 가진 군사를 매복시켰다.
다음 날, 다시 전위에게 1백여 기를 주어 장사와 싸우게 하였다.
"못난 놈아, 오늘도 달아나려고 나왔느냐?"
장사는 빈정대며 껄껄 웃더니 말을 재우쳐 달려들었다.
전위는 힘을 다해 싸우지 않고 창으로 두어 번 찌르는 채하다가 다시 말머리
를 돌려 달아나기 시작했다. 장사는 마음놓고 뒤쫓기 시작했다. 어제는 뒤쫓으면
서도 마음으로는 경계심을 품었던 장사였다. 조조의 진문에 이르기 전에 전위는
옆쪽으로 방향을 돌려 달렸다. 장사가 앞으로 달리면 금세 따라잡을 수가 있었
다. 장사는 의기양양하게 곧장 달려갔다.
다음 순간 땅이 푹 꺼지며 장사는 말과 함께 함정에 빠져 나뒹굴었다. 매복하
였던 군사들이 일시에 달려들어 꽁꽁 묶은 뒤 쇠갈퀴로 그를 끌어 올렸다.
장사는 결박당한 채 조조 앞으로 끌려왔다.
조조는 재빨리 교의에서 내려서며, 짐짓 군사들을 나무랐다.
"천하의 호걸을 묶어오는 법이 어디 있느냐. 공손히 예를 다해 모셔 와야 할
것이거늘……."
군사들을 물리친 조조는 친히 장사의 결박을 풀고 손을 잡아 일으킨 뒤, 의복
을 가져오게 하여 갈아입도록 했다. 장사에게 조조는 친히 교의에 앉도록 권한
뒤 물었다.
"장사의 관향은 어디이며, 존함은 어떻게 되시오?"
조조의 은근하고 다정한 목소리에 장사가 대답했다.
"저는 초국, 초현 사람으로, 성은 허 이며 이름은 저, 자는 중강이라 합니다."
"우리가 도적들을 뒤쫓고 있었는데 어찌하여 그들을 잡아갔소?"
"지난 번 황건적이 난리를 일으켰을 때 나는 일족 수백 명과 함께 성을 방비
하고 있었습니다. 일전에 황건적이 무리를 지어 우리 성을 넘보는 줄 알고 그들
을 사로잡았을 뿐입니다."
"황건적의 출몰이 한두 번이 아니었거늘, 어떻게 적은 인원으로 그 성을 지킬
수가 있었소?"
"전에 황건적 일당이 성을 침범해 와 나는 일족을 시켜 돌멩이를 모아 놓게
했습니다. 내가 돌팔매질로 그들을 한 놈씩 거꾸러뜨렸더니 도적들은 겁을 먹고
물러갔습니다. 또 하루는 도적들이 쳐들어왔을 때, 때마침 양곡이 떨어졌던 터라
그들과 잠시 화친하여 밭 갈던 소와 양곡을 교환하자고 하였지요. 도적들이 양
곡을 가지고 와서 소를 몰고 나갔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그만 소를 놓쳐 버려
소들이 다시 마을로 돌아왔습니다. 나는 그 소들 중 두 마리의 꼬리를 양손으로
잡아 1백여 보 가까이 소를 끌어다 주었지요. 그런데 도적들은 이를 보더니 소
도 내팽개친 채 달아났습니다. 그 이후 황건적들은 더 이상 우리 마을에 나타나
지 않았습니다."
조조는 그의 말에 귀를 기울이며 매우 놀라는 기색을 감추지 못하다 신중한
자세로 고쳐 앉으며 입을 열었다.
"바로 그 장사라면 나도 소문을 들은 지 오래 되었소. 나는 그대 같은 장사가
필요하오. 공을 높여 쓸 터인즉 나와 함께 일해 보지 않겠소?"
허저로서도 뜻밖의 제의였다. 이미 사로잡힌 몸으로 조조의 권유를 마다할 이유
가 없었다.
"기꺼이 그 말씀에 따르겠습니다."
허저는 일족 수백 명을 거느리고 조조의 휘하에 들어왔다.
조조는 허저에게 도위 벼슬을 내리고 후한 상을 내렸다. 황건적의 두목 하의
와 황소의 목을 베고 사로잡은 황건적의 잔당은 여남, 영주의 땅에서 농사를 짓
도록 했다. 이로써 조조에 의해 여남고 영주 땅에는 다시는 황건적이 날뛰는 일
이 없었다.
서주를 얻은 유비현덕 천하호걸 전위와 허저
서주태수 도겸이 죽으며 유비에게 서주를 맡긴다. 이에 조조는 서주를 치고자
하였으나. 순욱의 간언으로 황건적이 들끓고 있는 기름지 여남과 영주 땅을 차
지하기 위해 발병한다. 황건적을 쉽게 물리친 조조는 뜻하지도 않게 천하 무적
의 영웅 허저를 얻는다.
조조는 본거지 견성으로 돌아갔다. 성을 지키고 있던 조인, 하후돈 등이 성 밖
까지 나와 맞이하였다. 조인과 하후돈은 조조를 맞아 그곳의 형세를 전했다.
"근자에 염탐꾼들이 알려오는 말에 의하면 연주의 여포 휘하에 설란과 이봉이
라는 자가 있다고 합니다. 이들은 군사를 이끌고 연주성 밖으로 나가 노략질만
을 일삼는다고 합니다. 또한 성 안의 장수들도 가혹하게 조세를 징수하면서 횡
포를 부려 왔다고 합니다. 이에 백성들의 원한이 하늘에 사무쳐 있습니다. 주공
께서 승전한 군사를 이끌어 연주성을 공격한다면 일격에 성을 취할 수 있을 것
입니다."
조조는 그 말을 듣자 쉽게 차지할 수 있는 연주성을 놓치고 싶지 않았다. 조
조는 즉시 군사를 이끌고 연주로 쇄도하였다.
설란, 이봉은 조조의 대군이 파죽지세로 몰려온다는 말을 듣고 몹시 당황하면
서도 성 밖으로 나아가 진을 쳤다.
허저가 조조 앞으로 나아가 아뢰었다.
"제가 장수 두 놈을 사로잡아 주공께 처음으로 드리는 선물로 삼고자 합니다."
조조 휘하에 든 이래 아직 공을 세우지 못한 허저가 성큼 나서며 말했다. 조조
는 크게 기뻐했다.
"그 말 장하도다. 어서 가서 싸워라."
허저가 큰 칼을 들고 말을 달려나오자 이봉은 화극을 번뜩이며 달려나갔다.
허저와 이봉이 말머리를 맞대고 부딪쳤다. 이봉이 허저를 알 리 없었다. 하룻강
아지 범 무서운 줄 모르는 꼴이었다. 불과 2합을 넘기지 못하고 허저의 칼에 맞
아 고꾸라졌다.
이 광경을 지켜 보던 설란은 얼이 빠졌는지 말머리를 돌려 도망가다 적교에
이르렀을 때 이전이 그들을 가로막았다.
설란은 성으로도 돌아갈 수 없음을 알고 거야로 향했다.
그러나 설란은 끝내 몸을 피하지 못했다. 조조의 장수 여건이 난군 속에서 달
아나던 설란을 뒤쫓아가면서 쏜 화살이 설란의 목을 꿰뚫으니 주인 잃은 말만
달아날 뿐이었다.
뒤따르던 졸개들은 뿔뿔이 흩어지고 항복하고 말았다.
연주성은 이렇듯 별로 힘들이지 않고 조조의 수중으로 들어왔다.
"이 기세를 몰아 복양도 무너뜨리자!"
조조는 말을 몰아 여포가 있는 복양성으로 육박해 갔다.
조조는 허저를 선봉으로 하후돈과 하후연은 좌군, 이전, 악진은 우군으로 삼고
자신은 중군을 이끌었다. 조조가 위풍 당당히 복양으로 진병하자 여포가 나아가
조조를 맞으려 했다.
그러자 모사 진궁이 여포에게 다가가 말했다.
"나가서 그들과 부딪치면 불리합니다. 성 밖에 나가 있는 여러 장수들과 군사
들을 불러모은 다음에 움직이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그러나 여포는 진궁의 말을 가볍게 받아넘겼다.
"공은 무슨 소리를 하는 거요. 내가 그들을 두려할 것 같소?"
여포는 단숨에 조조군을 격멸하여 연주를 되찾을 심산이었다.
여포는 곧 성 안의 모든 군사를 대동하여 성 밖으로 나가 포진하였다.
과연 여포의 용맹은 조금도 달라진 데가 없었다. 해를 거듭함에 따라 기승분
전(말 위에서 분전해 싸움)의 능력은 이제는 가히 입신의 경지여서 문자 그대로
만부부당(만사람이 당하지 못함)이었다. 그야말로 싸움을 하기 위해 신이 만들어
낸 불사신의 사람 같았다.
"음-. 이제야말로 나의 적수가 나타났구나."
허저가 여포의 모습을 보자마자 소리쳤다. 이름만 들어온 여포를 직접 보니
그는 호기가 불끈 치솟았다.
허저는 여포를 향해 큰 칼을 춤추듯 내두르며 돌진하였다. 여포와 허저는 만
나자마자 말 한 마디 주고받을 사이도 없이 창과 칼이 허공에서 불꽃을 튕기며
맞부딪쳤다. 여포의 화극이 허저의 겨드랑이를 스치는가 싶으면 어느 새 허저의
큰 칼이 여포의 앞가슴을 파고들었다. 말과 사람이 한데 어울려 20여 합을 겨루
니 마치 두 마리의 용이 하늘로 오르는 듯 하였다. 양편 군사는 서로 적이라는
것도 잠시 잊은 듯 숨을 죽이고 손에 땀을 쥔 채 이 광경을 넋을 놓고 바라보았
다. 이때 조조가 전위를 불러 허저를 돕도록 했다.
"허저 혼자서 여포를 잡지는 못할 것이니 허저를 도와 주라."
이번에는 전위까지 가세했으나 여포의 방천화극은 조금도 흔들림이 없었다.
"과연 여포로다 하후돈과 하후연도 나가 여포를 사로잡으라!"
일찍이 사수관 싸움에서부터 여포의 용맹을 보아 온 조조인지라 한두 장수로 여
포를 잡을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이전과 악진도 나가라!"
조조가 명하자 이전, 악진도 달려나갔다. 허저와 전위는 정면에서, 하후돈과
하후연은 왼쪽에서, 이전과 악진은 오른쪽에서, 이렇게 조조의 여섯 장수가 여포
한 사람을 에워싸고 맹공을 가하였다.
아무리 여포가 천하의 맹장이라 하나, 한꺼번에 당대의 맹장 여섯이 숨돌릴
틈도 없이 공격을 해대는 데야 당할 도리가 없었다.
여포는 위험을 느꼈음인지 방천화극을 크게 휘둘러 틈이 나자 적토마를 돌려
복양성 안으로 들어가려 했다.
그가 복양성의 해자(성 밖으로 둘러 판 못) 앞에 이르자 성문 위 문루에서 싸
움을 지켜 보고 있던 부호 전씨가 급히 적교를 올리게 하였다.
적교가 올라가면 그 앞으로 깊은 해자가 가로놓여 있어서 성 안으로 들 수가
없었다.
전씨는 지난번 조조에게 거짓 밀서를 써서 조조가 참패하도록 만든 장본인이
었다. 여포가 명하므로 어쩔 수 없이 밀서를 썼으나 조조가 이 싸움에서이기면
일족의 참살을 면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리하여 싸움의 형세를 보아 가며 살아
날 궁리를 펴고 있던 차, 여포가 패하자 그를 성 안으로 들지 못하게 할 계략을
꾸몄던 것이다. 비록 성 안에 진궁이 있다하나 전씨는 명문이요, 부호로서 그를
따르는 자의 수가 많았다. 여포가 군사를 이끌고 성을 비우자 일족들과 수족들
을 동원해 성을 자기 손에 넣을 수 있었다.
"문을 열어라. 빨리 적교를 내려라!"
여포는 성 밖에서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그러자 전씨가 성루에 모습을 드
러내며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다.
"그렇게는 못 하겠네."
전씨는 여포를 내려다보며 비웃으며 말하였다.
"어제의 내편이 오늘은 적이 된다네. 나는 처음부터 나에게 득이 되는 곳을 택
한다고 하지 않던가. 그리고 당신이 전에 나보고 조조에게 항복하라고 하지 않
았는가. 나는 이미 조 장군한테 진정으로 항복하였다네. 하하하."
여포는 그제서야 전씨가 자신을 배반한 것을 알고 한바탕 욕설을 퍼부었으나
소용없는 일이었다. 그렇다고 이제는 물밀 듯 밀려드는 조조의 군사들 때문에
성 밖에서 더 이상 머뭇거릴 수도 없는 일이었다. 여포는 하는 수 없이 정도 방
면으로 말머리를 돌려 달아나기 시작하였다.
진궁은 이를 알고 깊이 탄식해 마지않았다.
"전씨를 믿도록 만든 것은 바로 나다. 이것이 나의 큰 실책이었구나."
그는 급히 성의 동문으로 가 성 안의 여포 가족들을 이끌고 정도로 떠난 여포의
뒤를 따랐다.
복양성을 힘들이지 않고 되찾은 조조는 이번에 복양성을 되찾는 데 큰 공을
세운 전씨에게 지난날에 저질렀던 죄를 용서해 주었다.
복양성을 되찾아 조조가 한숨을 돌리자 모사 유엽이 다가와 진언했다.
"여포의 용맹은 천하가 다 아는 바와 같습니다. 그는 오래지 않아 다시 군사를
일으켜 싸우려 들 것입니다. 여포가 힘을 추스리기 전에 먼저 쳐 후환을 남기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조조는 유엽의 말을 듣고 그의 말을 따르기로 했다. 여포는 언젠가는 자기가
쳐 없애야 할 적이었다. 유엽에게 복양성을 방비케 한 후 자신은 정도현으로 여
포를 뒤쫓았다.
정도에 이른 여포는 그때 장막, 장초 형제만을 데리고 성을 지키고 있었다. 여
포의 다른 휘하인 고순, 장요, 후성, 장패 등은 군사들을 거느리고 양곡을 구하
러 나간 뒤였다.
정도에 당도한 조조는, 여포군에게 싸움을 걸었으나 응하지 않자 멀리 40리나
떨어진 산기슭에 진을 쳤다.
조조가 머물고 있는 제군은 당시 보리의 수확 철이었다. 조조는 보리를 추수
하여 군량미로 쓰기 위해 군사들에게 보리를 베게 하였다. 여포가 이 소식을 듣
고 군사를 이끌고 조조의 진으로 갔다. 여포군도 식량에 어려움을 겪던 터라 조
조에게 보리를 빼앗길 수 없는 처지였다.
40리나 되는 길을 급히 달려와 보니, 조조의 진 왼편에는 숲이 있었다. 복병을
숨기기 좋은 장소였다. 몇 번인가 조조의 계략에 넘어가 혼이 난 적이 있던 여
포는 이번에도 틀림없이 숲 속에 군사를 매복시키고 있을 것으로 여겨 군사를
물리고 말았다.
조조는 여포가 군사를 물렸다는 것을 알고 장수들에게 명했다.
"여포는 숲 속에 복병이 있다고 생각하고 되돌아갔을 것이니 그것을 역으로
이용하여 계략을 써야겠다. 복병이 있는 듯이 보이도록 숲 속에 더 많은 기를
세우라. 그리고 진의 서쪽에 있는 긴 둑에다 복병을 숨겨 두어라. 여포는 반드시
내일 다시 와 불을 지를 것이다. 그때 둑의 복병들이 퇴로를 끊으면 가히 여포
를 사로잡을 수 있으리라."
그리하여 본진에는 50여 고수와 부근에서 끌어들인 마을 사람들에게 여포군이
오면 북을 치고 함성을 지르도록 하였다. 숲에는 수없이 많은 기치를 꽂게 하되,
군사들은 둑 뒤에 매복시킨 후 여포군이 오기만 기다리게 했다.
이때 여포는 진궁과 함께 조조군을 깨뜨릴 궁리를 짜고 있었다.
"조조는 책략에 능한 자입니다. 섣불리 군사를 모으는 것은 아주 위험합니다."
진궁의 말에 뜻밖에 여포가 계책을 내놓았다.
"화공을 쓰면 어렵지 않게 적을 물리칠 수 있을 것이오."
진궁도 여포의 말이 그럴싸하게 느껴졌다. 화공을 쓴다면 숲 속의 복병도 어
쩔 수 없으리란 생각에 진궁도 여포의 말에 찬동했다.
여포는 진궁, 고순에게 성을 지키도록 한 뒤 대군을 동원하여 조조의 영채 가
까이로 갔다.
여포가 숲 쪽을 바라보니 숲에는 무수한 깃발이 바람에 나부끼고 있었다. 여
포는 군사들에게 명을 내려 숲에 불을 지르게 했다. 그러나 불길에 놀라 숲에서
뛰쳐나오는 군사는 한 사람도 보이지 않았다.
여포는 순간 주춤하였으나 다시 군사를 물릴 수도 없었다.
조조의 본진으로 방향을 바꾸어 진격하자 갑자기 조조의 진지로부터 천지가
떠나갈 듯한 북 소리가 들려 왔다.
여포가 어리둥절해하고 있는 사이, 영채의 뒤쪽으로부터 한 떼의 군마가 달려
나왔다.
여포가 그들을 향해 말을 몰자 이번에는 포성이 울리더니 제방 뒤에서도 한
떼의 군마가 쏟아져 나왔다.
여포가 적이 놀라며 그들을 보니 선두에는 하후돈, 하후연, 허저, 전위, 이전,
악진 등의 장수들이었다. 며칠 전에 그들에게 쫓겨 달아난 여포는 때아닌 복병
들과 그들이 함께 몰려오자 하는 수 없이 급히 말머리를 돌리고 말았다. 여포의
부장 성렴은 이전이 쏜 화살에 맞아 목숨을 잃었다.
여포가 달아나고 부장 성렴까지 목숨을 잃으니 부하 군사들은 지리멸렬 하였
다. 어찌할 바를 모르고 개미 떼처럼 뿔뿔이 흩어지거나 목숨을 잃었다.
여포는 이곳에서 수많은 군사를 잃어 그를 따르는 자의 수는 헤아릴 정도였
다.
군사들이 도망쳐 진궁에게 이 사실을 알렸다.
"군사를 그렇게 많이 잃었다면 이 성도 지킬 수가 없다. 급히 떠나야겠다."
진궁은 이렇게 탄식하더니 여포의 가족을 이끌고 서둘러 정도성을 빠져 나갔
다.
조조군은 여세를 몰아 일사천리로 성 안으로 짓쳐 들어왔다. 성 안에는 장막,
장초가 있었으나 이미 기울어 버린 대세였다.
장초는 스스로 목숨을 끊었고, 장막은 허겁지겁 원술에게 달아나 구차한 목숨
을 의탁했다.
이제 정도성마저 조조의 수중에 들어오니 산동 일대가 모두 조조의 세력권에
머물게 되었다.
정도에서 크게 패한 여포는 도주하는 동안, 흩어졌던 장수들과 진궁을 만났다.
장수가 근거지를 잃으면 따르던 군사들도 가뭄에 강물 줄 듯 줄어든다. 여포의
군졸들은 제각기 살 길을 찾아 뿔뿔이 흩어졌다.
또다시 애타는 심정을 안고 각지를 떠돌아 다니는 신세가 된 여포였다.
"기주의 원소를 찾아가면 어떨까?"
여포는 그를 뒤따라온 진궁에게 물어 보았다. 진궁은 선뜻 대답을 하지 못하
고 있었다.
여포가 천하의 역적 동탁을 죽인 공적을 지녔으며 뛰어난 명장이간 하나 각지
의 군벌이나 영주들은 그를 반겨 주지 않았다.
어제의 적도 오늘의 동지가 되는 것에는 난세에는 흔히 있는 일이긴 하지만
의부와 주군 등 두 사람이나 죽인 바 있는 무절제함은 야망에 불타고 있는 군벌
들에게도 달갑지 않는 일이었다.
진궁 또한 이러한 사실을 잘 알고 있었기에 여포가 원소를 들먹였을 때도 자
신 있게 입을 열 수 없었던 것이다.
아무튼 한 번 교섭이나 해 보자고 하여 사람을 보내어 원소의 마음을 떠보았
다.
원소는 모사 심배에게 의견을 물었다.
"아니 될 일입니다. 여포는 천하의 호걸이지만, 반면에 승냥이와 같은 성정을
갖고 있습니다. 만약 그가 세력을 만회하여 연주를 탈환한다면 다음에는 이 기
주를 노릴 것이 뻔합니다. 오히려 조조와 손을 잡고 여포와 같은 난적을 제거하
는 편이 주공에게는 이로운 계책이 될 것입니다."
원소는 심배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너의 말이 그럴 듯하다."
원소는 즉시 부하 장수 안량에게 5만여 명의 군사를 주어 조조군에 협력케 하
는 한편, 조조에게 친선의 뜻을 담은 글을 보냈다.
이 소식은 여포에게도 전해졌다. 여포는 크게 당황하여 진궁에게 의견을 물었
다.
"근자에 서주의 태수가 된 유현덕을 찾아가면 어떨까요? 유현덕은 서주의 백
성들에게 존경을 받고 있다는 소문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거절하지 않는다면
서주보다 더 좋은 곳은 없지요."
여포는 진궁의 말을 좇아 유비에게 사람을 보냈다.
유비는 여포의 일족이 서주에 와 거두어 주기를 청한다는 말을 듣자 휘하의
장수들을 모은 후 말했다.
"당세의 영웅이 의지할 곳이 없다니 가여운 일이구나. 그를 맞도록 해야겠다."
유비는 관우, 장비를 데리고 몸소 나아가 맞으려 했다.
그러자 미축이 나서며 극력 만류했다.
"아니 됩니다. 여포가 어떤 인물인가는 알고 계실 것입니다. 원소도 그를 받지
않았습니다. 지금 서주는 태수께서 다스린 이후 아래위가 일치하여 평온하게 국
력을 기르고 있습니다. 무엇이 답답하여 승냥이와 같은 여포를 맞아들입니까?"
옆에 있던 관우, 장비도 미축의 말이 옳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유비는 미축의 말에도 수긍하기는 했으나 다시 입을 열어 속마음을 털어놓았
다.
"미축의 말과 같이 여포의 사람됨을 모르는 바 아니다. 그러나 지난번에 만약
여포가 조조의 연주를 치지 않았더라면 서주는 조조의 화를 면할 수 있었겠느
냐? 설사 여포가 쫓기는 신세가 되어 나에게 구원을 청한 것도 하늘의 뜻인지도
모른다. 나는 여포의 궁박한 처지를 모른 척할 수는 없노라."
유비도 내심으로는 여포의 절도 없음을 몹시 못마땅히 여기고 있었다. 그러나
천하의 맹장을 적으로 돌린다는 것은 득책이 아니라고 여겼다.
미축은 유비가 이미 여포를 맞아들이기로 작정하였음을 알았다.
"그렇게 말씀하신다면 어쩔 수 없군요."
미축도 더 이상의 말은 하지 않았다.
장비는 관우를 돌아보며 투덜댔다.
"앞으로 형님이 착하게 대할수록 그 교활한 놈은 그걸 약점으로 이용하려 할
거요. 그 여포놈을 나가서 맞이하다니……."
그러나 장비도 이렇게 투덜거렸으나 하는 수 없이 유비를 따라 성 밖 30리까
지 나가서 여포를 맞았다.
여포는 유비가 먼 곳까지 몸소 나와 맞자, 감격하였던지 황급히 말에서 내려
유비에게 예를 갖췄다.
유비와 여포는 말머리를 나란히 하여 성으로 돌아왔다. 둘은 관아에 이르자
서로 예를 갖춰 인사를 나눈 후 자리에 앉자 여포가 먼저 입을 열었다.
"나는 본디 왕 사도와 함께 뜻을 같이하여 동탁을 없애고 사직을 바로잡으려
하였소. 그런데 뜻밖에 이각, 곽사의 변을 만나 관동을 정처 없이 떠돌았으나 아
무도 나를 받아 주지 않았소. 때마침 조조가 까닭도 없이 서주를 침공하는 것을
유 공께서 구원하시었소. 그때 이 여포는 연주를 공격하여 조조의 힘을 분산시
키려 하였으나, 도리어 간교한 책략에 넘어가 장수와 군사를 꺾인 패장이 되고
말았소. 이제 유 공께 몸을 던져 함께 조조를 치고자 하는데 유 공의 의향은 어
떠신지요?"
여포의 물음에 유비가 대답하였다.
"도공께서 세상을 떠나신 후에 서주를 맡아 다스릴 사람이 없는 고로 이 비가
잠시 고을을 맡아 일을 보고 있을 따름입니다. 이제 장군께서 이곳으로 오셨으
니 서주 이 땅을 넘겨 드리는 것이 합당하다 생각합니다."
유비는 이렇게 말하더니 태수의 패인과 관인을 가져오게 하여 여포 앞에 내밀
었다.
여포는 얼른 손을 내밀어 집으려 했다. 그러다가 유비의 등뒤에서 눈을 부릅
뜨고 관우, 장비가 그를 지켜보자 움찔했다.
여포는 깜짝 놀라 억지로 웃음을 띠며 말했다.
"나는 한낱 용부에 지나지 않습니다. 어찌 한 주를 다스리는 주목이 될 수 있
겠습니까?"
여포는 손을 흔들며 사양하였다. 그러자 여포의 곁에 있던 진궁이 입을 열었
다.
"손님이 어떻게 주인을 누를 수 있겠습니까. 부디 그런 말씀은 거두어 주십시
오."
진궁의 말에 유비는 더 이상은 권유하지 않았다. 주연을 베풀어 여포를 대접
한 후에 숙소를 마련해 주고 가솔들이 편안하게 머물 수 있는 집을 마련해 주었
다.
다음 날 여포는 답례로 유비를 자기의 숙소로 청하였다. 유비는 관우, 장비와 함
께 참석하였다.
술이 몇 순배 오가고 분위기가 무르익었을 때 여포는 유비, 관우, 장비를 후당
으로 안내하였다. 후당에 일동이 좌정하자 여포가 입을 열었다.
"유 공께 아내를 소개하고 싶은데 어떻게 생각하시오? 아내를 이리로 나오게
하겠소이다."
"아니오. 그러실 것 없습니다."
유비는 두 번 세 번 사양하였다.
그러다 여포가 말했다.
"현제(어진 아우)께서는 너무 사양 마시게. 우리는 이미 형제와 다름없지 않는
가."
여포의 이 오만불손한 말에 성미 급한 장비가 불같이 소리를 지르고 말았다.
"괘씸하구나. 네가 누구길래 감히 우리 형님을 뭐니 하고 부르느냐. 우리 형님
은 황실의 후예로 금지옥엽(임금의 자손이나 집안)이시다. 자 나가자. 내 네놈과
더불어 3백 합을 싸워야겠다."
장비는 고리눈을 부릅뜨고 수염을 곤두세우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유비는 당황하여 장비를 꾸짖었고, 관우는 장비를 달래며 간신히 그를 밖으로
데리고 나갔다.
유비는 부드러운 미소를 띠며 여포에게 말했다.
"어리석은 아우가 술에 취하여 망발을 하였습니다. 용서하십시오."
"……."
여포는 얼굴을 잔뜩 찌푸린 채 대답을 하지 않았다. 그러나 섣불리 입을 열
수도 없는 일이었다. 유비의 너그러운 겸양이 아니었더라면 어떤 일이 벌어졌을
지도 알 수 없는 일이었다.
그렇게 되니 자연 주연이 길어질 리가 없었다. 곧 주연이 파하고 여포는 현덕
을 대문 밖까지 전송하자, 아직도 분이 풀리지 않았던 장비가 장팔사모를 옆구
리에 끼고 말을 달려 닥달치면서 고함을 쳤다.
"이놈, 여포야 어서 나오너라. 나와 싸워 보자!"
유비가 깜짝 놀라 장비를 크게 꾸짖었다.
"익덕, 이게 무슨 짓이냐? 어이하여 때와 장소를 가리지 못하고 무례한 행동을
자행하느냐!"
관우는 사납게 날뛰는 장비가 탄 말의 재갈을 잡으며 가까스로 장비를 진정시
켰다.
다음 날, 여포가 시무룩한 얼굴로 유비를 찾아왔다.
"유 공께서는 이 여포를 버리지 않으시나, 아우님들이 마땅치 않게 여기므로
이제 다른 데로 갈까 합니다."
"그게 무슨 말씀이오. 장군이 나를 버리고 가신다면 내 죄가 너무 큽니다. 못
난 아우의 무례한 소행을 다른 날에 다시 사과하겠소이다. 이곳과 가까운 곳에
소패라는 소읍이 있습니다. 만약 장군께서 협소하게 여기시지만 않는다면 우선
그곳에라도 머무시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양곡과 마초는 제가 보내도록 하겠습
니다."
여포는 유비의 말에 반색을 하며 말했다.
"유 태수께서 베푼 고마움을 보답할 길이 없소이다. 그렇게만 해 주신다면 더
이상 바람이 없겠소이다."
여포는 유비에게 고맙다는 인사말을 거듭 남기고 가솔과 수하 군사를 데리고
소패로 갔다.
한편 자나깨나 서주 정벌만을 생각하고 있던 조조는 여포를 유비가 맞아 소패
에 자리잡게 했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다.
'아차 한 발 늦었구나. 이는 유비가 필시 여포를 유사시에 써먹기 위함이리라.'
조조는 생각이 이에 미치자 곧 휘하 장수들을 모아 놓고 서주 칠 궁리를 의논했
다. 그러나 곽가를 위시한 모사들은 한결같이 지금은 서주를 칠 때가 아니라고
만류했다.
"지금 서주를 친다면 유비와 여포는 필시 한마음이 되어 주공께 대항할 것입
니다. 이는 곧 그 둘을 단결하게 만들 것이며 이는 결코 우리가 원하는 바가 아
닐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을 아직 이대로 버려 둔다면 여포는 결코 유비의 사람
이 되지 않을 것임은 예전의 정원, 동탁을 보아도 알 수 있습니다. 유비와 여포
는 필연코 분란을 일으킬 것인즉 그때 상처 입고 갈라진 그들을 잡기가 어찌 어
렵겠습니까?"
조조는 이치에 맞는 곽가의 진언에 따라 서주 공격을 잠시 뒤로 미루고 말았
다.
그런 뒤 산동을 평정한 사실을 그럴 듯한 문장으로 꾸며 조정에 표문을 올렸
다. 조정에서는 그의 공적을 가상히 여겨 조조를 건덕장군 비정후로 봉하였다.
이에 조조는 드디어 산동을 확실한 기반으로 삼아 웅비할 수 있는 발판을 마련
할 수 있게 되었다.
이 무렵 장안의 정세는, 혼란스러운 조정은 이름뿐이고 실권은 동탁의 휘하에
있던 이각, 곽사의 수중에 들어가 있었다.
이각은 스스로 대사마가 되고, 곽사는 대장군이 되어 조정의 권력을 장악하고
동탁에 못지않은 폭정을 펴며 천자를 능멸하고 대신들을 업신여기며 백성들을
학대했다. 그래서 백성들 입에서는 '역적 하나가 죽으니 어느 새 두 역적이 조정
에 생겼구나.'하는 한탄이 떠돌았다.
날이 거듭될수록 이각, 곽사 무리들의 행패가 이처럼 심해지자 그들을 제거할
생각을 품고 있던 태위 양표와 대사농 주전이 조조의 표문을 접한 후 은밀히 헌
제를 배알했다.
두 백관은 이각, 곽사의 횡행이 심해지자 이전부터 그들을 제거할 생각을 품
고 있었다.
"지금 조조는 군사 20만을 거느리고 있으며, 그 휘하에는 용맹이 뛰어난 무장
과 지모가 특출한 모사들이 수없이 많습니다. 만약 이 사람을 얻어서 사직을 온
전히 하고 이각, 곽사를 쳐없엔다면 이보다 더 다행한 일은 없을 것이옵니다."
헌제는 그들의 말에 울먹이며 대답했다.
"짐은 그 두 역적놈의 능멸을 받아온 지 오래이오. 만일 그 두 놈을 주살할 수
만 있다면 이보다 더 기쁜 일이 어디 있겠소?"
양표가 부복하며 목소리를 낮추어 말했다.
"신에게 한 가지 계책이 있사옵니다. 먼저 두 역적을 이간시켜 서로 싸우게 한
후에 조조에게 조서를 내리시어 그를 장안으로 불러들이십시오. 두 역적이 싸워
힘이 약해졌을 때 조조로 하여금 그들을 평정시키도록 하십시오."
"그러나 두 역적을 무슨 수로 싸우게 한다는 말이오?"
"염려 마십시오. 곽사의 아내는 본디 질투심이 강하다고 합니다. 사람을 시켜
서 곽사의 아내에게 반간지계(이간시키는 계교)를 쓴다면 두 역적 사이에는 반
드시 죽고 죽이는 분란이 일어날 것이옵니다."
양표의 말에 헌제는 마침내 그 계책을 시행토록 하고 조조에게 밀조를 내렸
다.
헌제의 내략을 받은 양표는 마음 속으로 반간지계를 위한 궁리를 짜며 집으로
돌아가 내실로 들어갔다.
"근자에도 곽사의 영부인과 가끔 만나고 있소?".
양표는 아내에게 이렇게 말문을 연 뒤 마음 속의 계책을 털어놓았다.
다음 날, 양표의 아내는 대장군 곽사의 부중을 찾아가 곽사의 아내를 만났다.
"이토록 귀한 선물을 주시다니 어떻게 보답해야 할지……."
양표의 아내는 곽사의 아내에게 선물을 주며 환심부터 샀다.
두 사람은 한동안 얘기를 주고받다가 문득 양표의 아내가 슬픈 기색을 하자 곽
사의 아내가 의아해 물었다.
"부인, 왜 그토록 슬픈 얼굴을 하십니까? 무슨 근심이라도 있으신 게로군요."
"미안합니다. 사실은…저, 부인을 뵈오니 부인께서만 까맣게 모르고 계시는 것
같아 그만……."
"예? 모르다니요. 그게 무슨 말씀인가요. 어서 말씀하세요."
곽사의 아내는 양표 아내의 손목을 잡고 흔들면서 다음 말을 재촉했다. 곽사
의 아내는 이미 입술의 덫에 걸려들고 있었다.
양표의 아내는 짐짓 동정을 금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부인께서는 정말 아무것도 모르고 계십니까?"
"무슨 말씀인지……, 어서 속시원히 말씀해 보시지요."
"예, 사실은 곽 장군께서 어여쁜 이사마(이각) 부인과 정분이 두텁다는 소문이
들립니다. 만약 이사마께서 그 일을 아시게 된다면 곽장군께서는 필시 해를 입
게 될 것이옵니다."
"어쩐지 태도가 이상하다 여기고 있었습니다. 외박이 잦은 데다 늦게 귀가하기
가 일쑤였습니다만 그런 부끄러움을 모르는 짓을 하고 다녔군요. 부인이 말씀해
주지 않았다면 저는 영영 그 사실을 모르고 지낼 뻔했습니다. 다시는 그런 짓을
못 하게 해야지요."
곽사의 아내는 질투에 눈이 어두워서 사실 여부를 알아보기도 전에 눈물을 철
철 흘리며 슬피 울었다.
양표의 아내는 슬며시 자리에서 일어났다. 곽사의 부인은 그 이후 병든 사람
처럼 방 안에만 틀어박혀 있었다.
며칠 후 곽사는 이각의 초대를 받아 집을 나서게 되었다.
곽사의 아내는 의심이 더럭 났다.
"어디를 가시려고 의관을 갖추십니까?"
"이사마가 청하는군. 연회가 있다 하오."
"가지 마십시오."
"아니, 친구의 초대인데 왜 못 가게 말리시는 거요?"
"이사마는 틀림없이 당신에게 원한을 품고 있을 것입니다."
"그게 무슨 말이오?"
"이사마는 본디 성품이 음흉한 사람입니다. 무슨 흉계를 꾸밀지 어떻게 알아
요. 더욱이 예로부터 두 영웅은 한 자리에 설 수 없다고 하였습니다. 만약 그가
음식에 독이라도 탄다면 소첩의 신세가 어떻게 되겠습니까?"
곽사는 아내의 말에 코웃음쳤다.
"말조심하오. 이사마는 내게 그럴 사람이 아니오."
곽사는 아내의 말을 가볍게 들어 넘기며 아내를 뿌리치려 하였다.
그러나 아내는 가슴에 매달리며 울음까지 터뜨렸다. 그런 아내를 뿌리치고 갈
수도 없어 머뭇거리는 동안 결국 정한 시간이 지나 그날 밤의 연회에는 참석하
지 못했다.
다음 날, 이각의 집에서는 하인을 시켜 연회에 오지 않아 섭섭했다는 전갈과
함께 술과 안주를 보내 왔다. 주방을 통하여 술과 안주를 받은 곽사의 아내는
불현듯 한 가지 계교가 떠올랐다. 음식에 독약을 넣은 후에 곽사에게 가져갔다.
"오, 맛있게 차렸군."
곽사가 수저를 들자 그의 아내가 황급히 말렸다.
"밖에서 들어온 음식을 어떻게 함부로 드신다는 말씀이십니까?"
그리고는 고기 한 점을 집어 마당에 있는 개에게 내던졌다. 마침 그곳에 엎드
려 있던 개가 덥석 고기를 받아 삼켰다. 얼마 안 있어 개는 갑자기 깽깽거리며
길길이 날뛰다 사지를 쭉 뻗고 그만 피를 토하며 그 자리에서 죽어 버렸다.
"에그머니나!"
곽사의 아내는 남편에게 매달리며 호들갑을 떨었다.
"그거 보세요. 소첩이 뭐라고 여쭈었습니까. 이각의 집에서 음식에 독을 넣어
보낸 거예요."
"음-."
곽사는 눈앞이 캄캄해졌다. 방금 벌어진 사실에 신음만 토했다. 이런 일이 있
고부터 곽사는 이각을 경계하게 되었다.
한 달쯤이 지난 어느 날, 조정에서 퇴궐하여 집으로 돌아가던 곽사는 이각과
마주치게 되었다.
"곽 장군, 지난번에는 청해도 오지 않아 매우 섭섭했소. 오늘은 우리집으로 함
께 갑시다."
이각은 곽사의 손을 잡아 끌 듯이 집으로 청했다. 곽사는 이러저런 구실을 대
며 응하지 않으려 했으나, 이각이 워낙 완강히 이끄는지라 하는 수 없이 이각을
따라갔다.
객청에는 이윽고 정성스럽게 마련한 산해진미가 그득한 술상이 차려졌다. 곽
사는 이각과 마주앉아 내키지 않는 술을 억지로 들었다.
밤이 으슥하여 만취한 곽사가 집으로 돌아온 후 일은 묘하게 꼬여들기 시작했
다. 하필이면 그날따라 곽사가 복통을 심하게 일으킨 것이다.
곽사의 아내는 이각의 집에서 술과 요리를 먹었다는 말을 듣자 기회를 놓치지
않고 빈정거렸다.
"참으로 딱하십니다. 그토록 조심하도록 말씀드렸는데도 이사마를 믿다가 이런
봉변을 당하십니까?"
곽사의 아내가 해독약을 가져오고 소금물을 먹이는 등 법석을 떨고 난 뒤에야
겨우 복통이 가라앉았다.
두 번씩이나 이런 일을 당한 곽사의 얼굴엔 마침내 살기등등한 노기를 띠었
다.
"내 지금까지 목숨을 걸고 제놈과 대사를 도모했거늘 이제 아 까닭도 없이 나
를 죽이려 들다니! 좋다. 이사마 이놈, 내가 네놈에게 당하고 있을 성싶으냐!"
창백해진 얼굴로 내뱉듯 외친 곽사는 곧장 수하의 갑병들을 거느리고 이각의 집
으로 향했다.
그러나 이 소식은 지체없이 이각의 귀에 들어갔다. 이각으로서는 청천 벽력과
도 같은 소식이었다. 그러나 당장 곽사의 군사들이 들이닥칠 판이었다.
"뭐라고? 곽사가 군사를 거느리고 나를 치러 온다고? 이놈이 나를 없애고 저
혼자 권력을 잡을 욕심이구나. 그래서 근자에는 나를 멀리했구나. 하룻강아지 범
무서운 줄 모른다더니!"
이각도 지체하지 않고 군사를 이끌고 곽사를 치러 나갔다.
두 장수가 거느린 군마는 수만 명이 넘었다. 이 수만 명이 장안의 밤거리에서
서로 죽이고 죽는 혼전을 벌이니 도성은 순식간에 수라장으로 변했다.
도성이 수라장이 되자 원래 기강이 제대로 서지 않았던 다같은 동탁의 휘하
졸개들이었던 이각, 곽사의 군사들은 이때를 틈타 싸움보다 민가에 뛰어들어 닥
치는 대로 노략질을 했다.
이때 이각의 조카로 이섬이란 자가 있었다. 그는 한 무리의 군사를 거느리고
궁궐을 에워쌌다. 그는 이각과 곽사가 싸우고 있는 틈을 타 헌제가 있는 궁성으
로 들어가 두 채의 수레를 끌어내었다. 한 채에는 황제를 태우고 또 한 채데는
복 황후를 태웠다. 그리고 가후와 좌령으로 하여금 수레를 돌보게 한 뒤 궁녀들
은 걸려서 후재문으로 내몰았다.
"이사마의 조카가 천자를 수레에 싣고 어디론가 끌고 가고 있습니다."
곽사는 이런 급보를 받고 몹시 당황하였다.
황제를 옹위하고 있는 편이 이런 싸움에서 유리하다는 것을 곽사가 모를 리
없었다.
"내가 미처 생각지 못하였구나. 빨리 가서 천자의 수레를 빼앗아라!"
곽사가 명하여 후재문 밖으로 군사들을 보냈으나 이미 늦었다.
그때쯤 이섬의 군사들에게 이끌려 나왔던 천자와 황후의 수레는 이미 성 밖을
빠져 나와 큰길로 질주하고 있었다. 곽사의 군대들은 그 모습을 보자 마구 활을
쏘아대었다.
이섬 일행의 후비군들도 곽사의 군대를 향해 활을 쏘아대니 무수한 궁인들만
화살에 맞고 칼에 찔려 죽어 나갔다.
이섬은 혼란한 틈을 타 천자와 황후의 수레를 옹위하여 이각의 본진으로 들어
갔다.
먼저 싸움을 걸었으나 황제를 이각에게 빼앗긴 곽사는 자칫하면 역적이라는
소리만 듣게 될 판이었다. 화가 치솟은 곽사는 군사를 거느리고 궁궐로 들어갔
다. 평소에 눈 밖에 있던 조신들을 베어 죽이기도 하고 궁녀둘을 겁탈하기도 했
다. 금은보화를 노략질한 곽사는 후궁의 궁녀들을 모조리 잡아다가 자기의 진지
로 끌고 갔다.
곽사의 행패는 이에 그치지 않았다.
이제는 주인 없는 빈집이 되어 버린 궁궐에 불을 질렀다. 화염은 충천하고 궁
녀들이 울부짖는 소리는 장안 거리를 뒤흔들었다.
한편, 황제와 황후를 납치해 오기는 했으나 진중에 두기는 불안하다는 생각에
이각은 그들을 미오성으로 옮기게 했다.
황제와 복 황후는 미오성의 으슥한 방에 유폐되었다. 이섬이 항상 감시를 하
고 있어 황제는 마음대로 바깥 출입을 할 수가 없었다. 뿐만 아니라 외부와는
일체 왕래가 차단되어 이각이 식량을 대어 준다고는 하나 양이 모자라고 그마저
끊어지는 때가 많았다.
황제의 측근들은 굶주림으로 고통받고 있었다. 그들의 얼굴은 날이 갈수록 파
리해져 갔다.
황제는 하도 딱하여 사람을 보내어 이각에게 호소하였다.
"쌀 5휘와 쇠뼈 다섯 마리 분만 보내도록 하라. 측근들에게 먹이고자 한다."
황제의 전갈을 받고 이각은 버럭 소리부터 내질렀다.
"조석으로 밥을 대어 주는데, 뭐가 부족해 또 쌀과 쇠뼈를 보내란 말이냐."
이각은 일부러 썩은 고기와 상한 곡식을 보냈다. 이런 것들로 밥을 짓고 반찬
을 만드니 썩고 상한 냄새가 코를 찔러 먹을 도리가 없었다.
"아아, 이 역적놈이 짐까지 능멸하는구나."
황제가 분이 나서 음성을 높이자 시중 양표가 급히 아뢰었다.
"이각은 잔인무도한 놈입니다. 사태가 이에 이르렀으니 폐하께서는 잠시 노여
움을 참으십시오. 그놈의 비위를 건드려서는 아니 되옵니다."
황제는 아무 소리 없이 고개를 떨구고 눈물만 흘리니 쏟아지는 눈물이 용포
소매를 흥건히 적셨다. 주위의 신하들도 이를 보고 눈물을 흘렸다.
후세 사람들이 그 난세를 시로 지어 한탄했다.
광무제께서 다시 일으킨 한나라
위아래를 열두 황제가 이어갔네.
환, 영제 덕이 없어 나라가 기울고
환관이 권세를 잡으니 말세가 되었네.
어리석은 하진이 삼공이 되어
쥐 같은 내시 없애려고 간웅 들이고
승냥이와 수달대신 범과 이리가 드네.
서주의 더벅머리 음란하고 흉포하네.
왕윤은 붉은 마음 미인에게 의탁하여
동탁 여포 서로 싸우게 하네.
괴수를 죽이면 천하 태평이련만
이각, 곽사 울분 뉘 알았으랴.
서울은 가시덤불 다투어 나고
여섯 궁은 굶주림에 겹친 싸움 걱정
민심도 멀리 가고 천명 또한 떠나
영웅들은 제각기 산하를 나누어 갖네.
뒷날 왕은 이를 보고 행하고
나라 다스림을 등한히 하지 말라.
억울한 백성의 간과 뇌가 땅에 흩어지고
원한 맺힌 피 강과 산에 흐르는구나.
반간지계 승냥이와 이리 떼 소굴
승승장구하는 조조에 힘입어 헌제는 그에게 밀조를 보내고 조정에선 이각과
곽사의 폭정에 못 이겨 그들을 이간시키고자 계책을 쓴다. 비록 계책은 적중했
지만 무고한 백성들의 억울한 희생이 따랐으며 천자를 서로 차지하려고 물고 물
리며 싸우는 난상을 이룬다.
양표는 창자가 끊어지는 듯한 슬픔 속에 쌓여 있었다. 반간지계를 써 오늘날
의 이 난리를 만든 사람은 다름아닌 양표 자신이었다. 계책이 적중하여 곽사.이
각이 서로 피를 흘리며 싸우게 만든 것은 성공이라 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로
인해 엉뚱한 화가 황제와 홍후에게까지 미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한 터였
다.
황제와 양표가 깊은 시름에 싸여 있는데 홀연 사방에서 군사들의 말발굽 소리
와 함성이 일었다.
황제는 눈물에 젖은 얼굴을 들고 좌우를 둘러보았다.
"소신이 살펴보고 오겠나이다."
시신 한 사람이 밖으로나가더니 부리나케 돌아와 아뢰었다.
"큰일 났습니다. 곽사의 군대가 성문밖에 몰려와서 황제를 넘겨 달라며 북을
울리고 징을 치고 있사옵니다."
곽사는 이각이 황제를 겁박하여 간 것을 알고 군사를 이끌어 뒤쫓아와 이각에
게 싸움을 걸었다. 황제는 더욱 크게 놀라며 말했다.
"앞문에는 승냥이요, 뒷문에는 이리로구나. 두 역적은 짐의 몸을 가운데 놓고
서로 빼앗으며 으르렁거리고 있구나. 아아, 짐은 어디에 몸을 두어야 하는가?"
이 무렵, 성문 밖에서는 한바탕 싸움이 끝났는지 고함과 아우성이 멎었다. 문
득 곽사의 군에서 한 장수가 말을 달려나와 외쳤다.
"역적 이각에게 말한다. 천자는 천하의 천자이시니라. 무슨 까닭에 폐하를 겁
박하여 이곳으로 오좌를 옮겨 모셨느냐. 나 곽사는 천하 만민을 받았다.
"곽사 네놈은 어찌하여 망발을 하느냐? 폐하께서는 네놈이 변란을 일으키자
난을 피하시어 스스로 이곳으로 용가를 옮기신 것이다. 그러므로 나 이각은 지
금 폐하의 옥좌를 수호하고 있는 것이다. 너희들은 그래도 폐하께 칼을 앞세우
고 활을 겨누겠느냐?"
"닥쳐라! 너는 지금 감히 페하를 유폐하는 대역죄를 범하고 있다는 걸 모르겠
느냐. 즉시 폐하의 옥체를 우리에게 넘기지 않으면 너의 목이 잘려 나갈 줄 알
아라."
"닥치거라 이놈. 딴 소리 할 것 없이 우리 서로 칼로써 겨룰 따름이다. 기다려
라, 내가 먼저 너의 목을 베어 주마!"
이각은 장창을 비껴들고 곽사에게로 말을 몰았다.
곽사도 이에 질세라 장검을 휘두르며 말을 달려나와 맞부딪쳤다. 칼날창이 번뜩
이고 두 마리의 말, 여덟 개의 말굽이 흙먼지를 일으키며 숨가쁘게 움직였다. 창
으로 찌르고, 칼로 치고 후리며 어지럽게 어우러졌지만 형세는 막상막하, 좀처럼
승패가 날 것 같지 않았다.
성 안에서 황급히 말을 타고 뛰쳐 나와 두 사람을 가로막는 사람이 있었다.
"잠깐, 두 분 장군께서는 싸움을 멈추시오."
그는 태위 양표였다. 양표는 장창과 장검을 가로막으며 말했다.
"두 분은 싸움을 멈추고 군사를 거두어 돌아가시오. 어명이요, 어명을 거스리
는 사람이 바로 역적이 아니겠소."
양표의 말에 이각.곽사는 할 말을 찾지 못했다. 서로 역적이라고 비방하던 차
에 어명을 내리니 우선은 따르는 수 밖에 없지 않은가. 곽사와 이각은 하는 수
없이 군사를 거두어 각기 진영으로 돌아갔다.
다음 날, 양표는 주전을 비롯한 조정 대신 60여명과 의논한 후 곽사와 이각을
화해시키기 위하여 먼저 곽사의 진영을 찾았다.
양표가 곽사에게 화해를 종용하자 곽사는 귀도 기울이지 않았다.
"뭐요, 무조건 화해하라고? 허튼 소리 작작하시오."
곽사는 화를 벌컥 내며 군사들에게 명을 내려 양표를 따라온 주전 이하 60여
명의 대신들을 모조리 포박하였다.
"이게 무슨 짓이오? 좋은 뜻으로 두 장군을 화해시키러 온 대신들을 왜 묶는
거요."
양표가 펄쩍 뛰며 곽사에게 항의 했다.
"닥쳐라! 이각은 천자까지도 볼모로 잡고 큰소리 치고 있으니 나도 또한 대신
들을 볼모로 잡아 둘 생각이다."
곽사는 오히려 오만하게 양표에게 쏘아붙였다.
양표도 얼굴이 굳어지며 말했다.
"조정의 두 기둥인 장군들께서 한쪽은 천자를 감금하고, 또 한쪽은 대신들을
볼모로 잡고 있으니, 그렇게 하여 어찌하실 작정이오?"
"닥치지 못할까! 감히 나를 훈계하려 드느냐."
곽사가 노기로 얼굴이 붉어지며 허리에 찬칼을 뽑으려 했다. 중랑장 양밀이
황급히 곽사의 손을 잡았다.
양밀의 만류로 곽사는 칼을 거두기는 하였으나 결박한 조신들은 풀어 주지 않
았다.
다만 양표와 주전 두 사람만이 진영 밖으로 쫓겨나왔다.
늙은 대신 주전은 여러 차례 하늘을 우러러 한탄을 하더니 양표를 바라보고
울먹이며 말했다.
"양 태위나 나나 사직의 신하로서 임금을 보필하지 못하니 무슨 면목으로 살
아가겠소."
그는 양표를 끌어안고 통곡하다가 길에서 혼절하여 쓰러져 버렸다. 그 뒤 주
전은 집에 돌아간 지 얼마 아니 되어 숨을 거두고 말았다.
양표가 전갈을 받고 달려가 보니 주전의 이마는 무참하게 깨져 있었다. 기둥
에 머리를 부딪치고 분사한 것이었다.
이날 이후 이각과 곡사의 양군은 50여 일에 걸쳐 매일같이 싸움을 계속하니
애매한 군사들과 백성들만이 죽어 나갔다.
그들에겐 전쟁이 직무요, 생활이었다. 의미도 없고 대의명분도없이 매일매일
싸움만 일삼았다. 그러니 늘어나는 것은 길바닥을 즐비하게 메우는 시체뿐이었
다.
어느 날 시중 양기가 헌제에게 다가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이각의 모신에 가후라는 자가 있사옵니다. 신이 엿보건대 그는 폐하를 잊지
않고 있는 듯하옵니다. 충이 무엇이며 무엇이 불충인지도 능히 알고 있는 사람
으로 보입니다. 언제든 기회가 있으시면 은밀히 부르시는 것이 좋겠습니다."
그런 며칠 후 가후가 용무가 있어 황제가 유폐되어 있는 방으로 들어오게 되
었다. 황제는 좋은 기회로 여겨 좌으를 물리치고 눈믈을 흘리며 가후에게 말했
다.
"경은 한조를 불쌍히 여기어 짐의 목숨을 구해 줄 수 없는가?"
헌제가 뜻밖에 이렇게 말하자 가후는 깜짝 놀랐다. 이어 방바닥에 무릎을 꿇
고 절을 하며 예를 올린 후 입을 열었다.
"그건 신이 행하고자 하던 바이옵니다. 그러나 폐하께서는 소신이 아닌 다른
사람에게는 절대로 발설하지 마옵소서. 신이 방책을 마련하겠습니다."
가후는 눈을 빛내며 조용하고 결의에 찬 목소리로 말했다.
황제는 눈물을 거두고 그에게 감사의 뜻을 전했다.
가후가 자리에서 막 일어서려 할 때였다. 발소리도 요란하게 이각이 방 안으
로 들어왔다.
허리에는 장검을 찬 채 황제의 용안을 한참 동안 노려보았다. 황제는 사색이
되었다.
이각은 황제의 얼굴을 보면서 한바탕 껄걸 웃더니 입을 열었다.
"곽사는 신하라고 할 수 없는 놈입니다. 그놈은 조신들을 감금하고 불측하게도
폐하의 옥체까지도 겁박하려 하였습니다. 아마도 신이 없었다면 폐하도 그놈에
게 끌려가셨을 것입니다."
이각은 이섬을 시켜 천자를 유폐시켜 놓은 뒤 자신이 무슨 공훈이라도 세운
듯 자랑스럽게 말했다. 신하가 황제를 대하는 예의는 이미 안중에도 없는 오만
불손한 행동이었다. 그러나 헌제는 지금 그걸 이각에게 내비칠 처지가 못되었다.
오히려 그런 이각에게 고맙다고 치하할 수밖에 없었다.
"고마운 일이오. 내 경의 공을 잊지 않을 것이오."
이각이 한바탕 수선을 떨고 나간 지 얼마 되지 않아 이번에는 황보력이라는
인물이 황제를 알현하려 들어왔다. 그는 이각과 같은 고향 출신으로 이를 잘 알
고 있는 터여서, 그에게 곽사. 이각을 찾아가 화해를 시켜 보라고 분부했다.
"신이 힘껏 애써 보겠나이다."
칙지를 받든 황보력은 먼저 곽사의 영채로 갔다. 그가 간곡한 말로 곽사를 달
래며 화해를 권하자 곽사는 못 이긴 체 말했다.
"만약, 이각이 폐하를 돌려보난다면 나도 대신들을 놓아 주겠소.":
황보력은 곽사에게 다시 다짐을 둔 뒤 이번에는 이각을 찾았다.
이각은 원래 좌도와 사술을 즐겨했다. 평소에도 해괴하고 요망스런 술법을 펴
그의 진중에는 항상 무녀를 두었으며, 북을 치게 하고 신내림을 하게 하여 무녀
들의 말을 따랐다.
황보력이 기각의 진중에 들어섰을 때도 굿판을 벌여 놓은 듯 어디선가 북소
리, 징소리가 요란하게 들여 오고 있었다.
황보력은 이각과 마주 앉자 입을 열었다.
"폐하께서는 제가 서량 사람으로 장군과 동향이라 하여, 특히 저더러 두 분을
찾아 뵙고 화해를 권하라고 하명하시었소. 곽 장군은 이미 칙지를 받들겠다고
약속하셨는데 공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이각은 그 말을 듣자 못마땅한 기색으로입을 열었다.
"나에겐 여포를 쳐 물리친 큰 공이 있소. 또한 정사를 보살핀 지 4년여에 갖가
지 공적이 많았던 것도 천하가 다 아는 바요. 그러나 곽아다로 말하면 한낱 말
도적에 불과했소. 그런 놈이 감히 공경들을 가두어 놓고 나에게 맞서 보겠다 하
니, 내 그를 용서치 않을 것이오. 그대도 눈이 있거든 나의 주변을 둘러보시오.
나에겐 책사맹장이 얼마나 많은가를 알게 될 거요."
"그렇지 않소이다. 옛날 유궁국의 후예가 자신의 활재주만 믿으며 환난이 일어
날 것을 생각지 못해 멸망했소. 근자에 이르러서도 동 태사의 권력과 세력이 얼
마나 강성했는지는 공도 잘 아실 것이오. 그러나 여포가 그의 은혜를 입었음에
도 불구하고 도리어 그를 배반하여 그 머리를 도성문에 효수하지 않았소. 비록
세가 강하다 하더라도믿을 것이 못됨을 이로 미루어 보더라도 알 수 있소. 강하
고 센 것만이 믿을 수 있는 것은 아니오. 장군은 나라의 상장으로서 임금님께서
내리신 절월을 쥐고 계시고, 이미 자손들과 일가친척들이 다 높은 벼슬에 있으
니 나라의 은혜가 크다 아니할 수 없소. 그런데 지금 곽 장군은 조신들을 겁박
하였고, 장군은 지존을 겁박하고 계시니 과연 누가 가볍고, 누가 무겁다 하겠
소?"
황보력의 말에는 앞뒤로 한 치의 어긋남이 없이 사리가 정연했다. 이각은 할
말을 찾지 못하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칼을 빼들었다.
"황보력 이놈. 천자가 나를 욕보이려고 네놈을 보낸 모양이구나. 내가 먼저 네
놈의 목부터 베어 버리겠다."
이때 기도위 양봉이 급히 이각을 말렸다.
"고정하십시오. 곽사를 아직 없애지 못한 터에 천자의 칙사를 먼저 죽이면 곽
사에게 군사를 일으킬 명분과 구실을 주게 될 뿐만 아니라 제후들도 모두 곽사
를 도울 것입니다."
"그러하옵니다. 칙사를 죽이면 이는 우리 스스로 곽사를 돕게 되는 일이 됩니
다."
옆에 있던 가후도 양봉을 거들어 달래자 이각은 거친 숨을 몰아쉬면서 가까스
로 칼을 거두었다. 그 사이에 가후가 황보력의 소매를 잡아 밖으로 나가게 했다.
밖으로 나온 황보력은 분이 치솟아 큰 소리로 외쳤다.
"이각이 임금의 조칙을 받들지 않으니, 그럼 임금을 죽이고 그 자리에라도 앉
겠다는 심산인가!"
"큰일날 소리, 말조심 하시오. 화를 당할까 두렵소이다."
시중 호막이 그의 말을 막았으나 황보력은 더욱 큰 소리로 호막을 꾸짖었다.
"호경재! 그대 역시 조정의 신하가 아니던가. 어찌하여 적도에게 붙으려 하는
가. 임금이 욕되면 신하는 죽는 법이니라 하였거늘, 내 비록 이각의 손에 죽는다
해도 그것이 신하된 도리가 아니겠는가?"
황보력은 죽기라도 작정한 듯 이각에 대한 욕설을 멈추지 않았다.
"이각은 천자도 능히 시해할 놈이다. 하늘을 거스른 짐승 같은 놈은 죽어도 제
명에 죽지 못할 것이다."
황보력이 이렇게 떠들어대자 그 일은 신하를 통해 헌제에게 알려졌다. 헌제는
그가 이각에게 죽임을 당할까 봐 걱정이 되어 그에게 명하여 고향으로 돌아가
몸을 피하도록 했다.
하지만 황보력은 그냥 떠나지 않고 서량 출신 군사들을 선동하여 이끌고 고향
인 서량으로 돌아갔다.
본디 이각이 거느린 군사는 태반이 서량 사람들이었고, 거기다가 강족(오랑캐)
의 군사들도 가담하고 있었다.
황보력은 서량으로 돌아온 이후에도 공공연히 이각을 비나하며 욕기를 서슴지
않았다.
"이각은 모반을 꾀하고 있다. 그를 따르는 자는 후에 역적으로 몰려 큰 화를
면치 못하리라."
황보력의 욕설과 악담은 서량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쳐, 자연 군사들의 마음에
ㄷ 동요가 일었다. 많은 서량 군사들의 사기는 하룻밤 사이 눈에 띄게 저하되었
다.
이각의 귀에 이러한 소문이 들어가지 않을 리 없었다. 격노한 이각은 호분(조
위) 왕창에게 황보력을 잡아 오도록 명했다.
그러나 왕창 또한 무도한 이각에게 반감을 다지고 있던 사람이었다. 그는 황
보력이 충의지사임을 알고 추적하는 시늉만 하고 돌아와 거짓 보고를 올렸다.
"황보력이 벌써 어디로 내뺐는지 행방을 알 길이 없사옵니다."
한편, 가후 또한 이각의 군세를 약화시킬 심산으로 강족 출신의 군사들을 꼬
드기고 있었다.
"천자께서는 그대들의 충성심과 오래 싸움에서 겪은 신고를 헤아리시고, 그대
들을 고향으로 돌아가게 하라는 밀조를 내리셨다. '반드시 후한 상을 내리시리
라'고 말씀하신 적도 있다."
가후는 강족에게 이각이 아직 아무런 상도 내리지 않은 점을 이용하여 이 같
은 말을 하고 다녔다.
이각의 처사에 불만을 품고 있던 강족들은 가후의 말에 귀가 솔깃해질 수밖에
없었다. 가후의 말을 듣자 많은 강족 추신 군사들이 무리지어 진지를 이탈하여
고향으로 돌아갔다.
일이 제대로 돌아간다고 회심의 미소를 띠고 있던 가후는 어느 날 다시 황제
에게 나아가 낮은 목소리로 아뢰었다.
"이각은 탐욕스럽기는 하나 지모가 얕은 자입니다. 이제 진영을 떠나 달아나는
군사들이 많아 그도 기가 꺽여 있을 것입니다. 이때 그에게 중한 작위를 내리시
면 그도 흡족해 할 것입니다. 그에게 작위를 내리시어 달래어 보심이 어떻겠습
니까?"
가후의 말을 좇아 황제는 이각에게 대사마의 벼슬을 내렸다.
이각은 진영 내의 군사들이 날이 밝을 때마다 줄어드니, 근심이 커져갔다. 더
욱 그를 안타깝게 만든 건 군사가 줄어드는 이유를 헤아릴 수 없었다는 것이었
다.
"말해 보라. 어젯밤에도 있던 군사들이 왜 고향으로 갔는지, 그 이유가 무엇인
가?"
장수들에게 물어 보았으나 그들도 신통한 대답을 못하고 고개만 숙이고 있을
뿐이었다.
이럴 때 생각지도 않았던 은작이 황제로부터 내려온 것이었다.
대사마란 큰 벼슬을 받은 이각은 그 동안 무거웠던 얼굴이 활짝 펴지며 기쁨
을 억누르지 못했다. 이미 스스로 대사마라고 칭하고 있었던 이각이었다. 그러나
스스로 칭한 것이라 아무래도 개운치 않았던 이각은 천자가 조칙을 내려 명실공
히 대사마로 봉하니 기쁘지 않을 수 없었다.
"이것이 다 무당들이 그 동안 나를 위해 기도를 올린 덕이다."
그는 무당에게 금은보화의 좋은 상금을 많이 내렸다. 그러나 지금까지 목숨을
걸고 싸웠던 수하 군사들에게는 아무런 상도 내리지 않았다.
기도위 양봉은 섭섭하다 못해 화가 머리끝까지 치솟았다. 그는 송과라는 동료
를 찾아가 울분을 털어놓았다.
"그 동안 목숨을 바쳐 가며, 창칼과 돌덩이 속에서 싸웠는데 그 공로가 한낱
무당에게도 미치지 못한다는 말인가!"
송가 또한 양봉과 다를 바 없었다.
"이를 말인가. 이는 사리를 밝게 헤아리지 못함이 아닌가. 이토록 암우한 자에
게 무엇을 더 바라겠는가."
"그렇네. 후에 역모에 가담했다는 더러운 이름만 남기겠네."
이야기가 이에 이르자 송과가 격한 어조가 되어 말했다.
"차라리 우리가 저 역적을 죽이고 천자를 구출하세."
송과의 말에 양봉은 용기가 치솟았다.
"좋은 말일세. 그럼 자네는 진중에 불을 질러 신호를 하게. 내가 군사를 이끌
고 밖에서 호웅함세."
양봉과 송과 두 사람은 그날 밤 이경에 거사하기로 약속하고 각기 진영으로
돌아갔다.
그러나 불행하개도 두 사람의 거사 계획을 엿들은 군사 한 놈이 이각이 내릴
상금과 출세에 눈이 멀어 이 사실을 이각에게 알렸다.
"장군님. 양봉과 송과가 반역을 꾀하고 있습니다."
뜻밖의 밀고에 까짝 놀란 이각이 분을 참지 못하고 우선 송과를 잡아들여 불
분곡직하고 목을 쳤다.
이런 사실도 모른 채 양봉은 성 밖에서 군사를 이끌고 송과의 신호만 기다리
고 있었다. 밤이 깊어 이경이 지나고 삼겅이 되어더 이각의 진영에서는 불길이
오르지 않았다.
그때였다. 기다리던 신호 대신 이각의 군마가 양봉의 진영으로 짓쳐 들어왔다.
당황한 건 양봉이었다. 양봉은 사경 무렵까지 이각군이게 결사적으로 항전했
으나 만반의 대비를 하여 온 이각군에게 당알 수가 없었다.
하는 수 없이 소수의 군사를 거두어 서안으로 달아나 버렸다.
이각군은 양봉군을 물리친 후 한숨을 돌렸다. 그러나 따지고 보면 강병도 떠
나가고 부하들마저 흩어졌으니 기뻐할 일도 아니었다. 오히려 군사는 줄어들고
세력은 약해졌을 뿐이었다.
한편 곽사의 군사들도 끝도 없는 지루한 싸움에 염증을 내고 있었다.
이런 와중에 이각은 어느날 급보를 받게 되었다.
"섬서성의 장제가 대군을 이끌고 와 두 장군을 화해시키겠다고 합니다. 만약
이에 응하지 않으면 응하지 않는 쪽을 쳐없애겠다고 하옵니다."
그 동안 섬서 지방에서 군사를 길러 온 장제가 대군을 거느려 오니 진퇴양난
에 처한 것은 이각이었다. 이각·각사가 함께 뭉쳐 있을 때의 군대가 아닌 쇠약
해진 군대였다. 거기다가 양봉과 싸우느라 많은 군사들을 잃었고, 고향으로 돌아
가 버린 군사 또한 많았다.
이각은 하는 수 없이 자기 편에서 먼저 장제의 진중으로 사람들을 보내 화해
할 것을 수락했다.
일이 이에 이르자 곽사 또한 화해를 수락하는 수밖에 없었다.
지루하게 이어지던 이각·곽사의 싸움은 이렇게 끝이 났다. 볼모의 고통을 받
던 조신들도, 유폐되었던 헌제도 풀려났다.
헌제는 장제에게 그 공을 치하하고 표기장군에 봉하였다.
"장안은 이제 황무지가 되었사오니 홍농으로 행차하심이 좋을 듯합니다."
장제가 황제에게 권유하였다. 헌제는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짐도 오래 전부터 동도(낙양) 땅을 그리워하였소. 이제 동도와 가까운 곳으로
가게 되었으니 천만다행이오."
계절은 가을도 끝나가는 무렵이라 찬바람이 소맷자락을 파고들었다.
황제와 황후가 탄 수레는 긴 창을 나란히 든 어림군의 경호를 받으며 끝이 보
이지 않는 광막한 들판 길을 따라 홍농을 향해 나아갔다.
신풍을 지나 패릉교에 이르러 황제의 어가가 막 패릉교 다리 위를 지날 무렵
이었다. 어디선가 함성이 울리더니 전방에 한 무리의 군마가 나타나 앞길을 가
로막으며 물었다.
"수레에는 누가 타고 있소?"
시중 양기가 수레 앞으로 말을 몰아나서며 소리쳤다.
"성상의 거도 행차신데 누가 감히 길을 막는가?"
상대편에서 두 장수가 나서며 대답했다.
"우리는 곽 장군의 영을 받들어 이 다리를 지키며, 간세(첩자)의 왕래를 막고
있소. 우리가 직접 폐하를 뵈어 확인해야 하겠소."
그 말에 양기가 수레의 주렴을 높이 걷어올리자 헌제가 그들을 내려다보며 꾸
짖었다.
"짐이 여기에 있는데 그대들은 왜 물러가지 않는가."
황제를 직접 바라본 군사들은 즉시 만세를 부르며 양쪽으로 쭉 갈라섰다. 황
제의 수레가 다리 위를 지나자 두 장수는 곽사에게로 급히 말을 달려 이 사실을
고했다.
"폐하의 수레가 패릉교를 지났습니다."
"이런 못난 놈들! 장제가 대군이라 어쩔 수 없어 그의 말을 들었거늘, 기회를
보아 다시 황제를 겁박하여 미오로 돌아갈 작정이었다. 너희들이 어째서 함부로
보냈단 말이냐."
노기가 뻗친 곽사는 즉시 두 장수를 참한 다음 군사를 회동하여 천자의 뒤를
쫓았다.
다음 날 황제의 수레가 화음현(서안부)에 이르렀을 때였다. 수레 뒤쪽에서 요
란한 함성과 말발굽 소리가 어지럽게 들려 왔다. 뒤쫓는 군사들의 기치로 보아
곽사군임이 분명했다.
"어가는 잠시 멈추어라!"
곽사군은 황제의 수레를 뒤쭟으며 고함쳤다.
황제는 곽사가 또다시 군사를 거느려 뒤쫓는 것을 보자 몹시 실망하여 눈물을
흘리며 군신들에게 말했다.
"간신히 이리의 소굴에세 벗어났다 했는데, 이번에는 승냥이 굴에 들어가게 되
었으니 이 일을 어찌하면 좋겠는가?"
군신들은 황제의 탄식에 안색을 잃고 어찌할 바랄 모르고 있느데, 추격병들은
점점 가까워지고 있었다.
이때 갑자기 한 갈래 큰 북 소리가 울리더니 앞쪽 산기슭에서 한 장수가 말을
달려나왔다. 뒤따르는 군마는 약 1천 명이 됨직했다.
불현듯 나타난 장수는 큰 깃발을 세우고 있었는데 '대한양봉'이란 글자가 씌었
었다.
"아니,양봉이라면…."
그 깃발을 보자 군신들은 모두 놀라며 반가워하였다. 이각을 배반하고 그와
싸우다 장안에서 모습을 감춘 양봉이 아닌가.
양봉은 송과와 손을 잡고 이각을 치려다가 일이 탄로나 송과가 붙잡혀 죽는
바람에 이각에게 패하자 군사를 이끌고 서안으로 달아나던 중 종남산 아래 진을
치고 있었다. 그러다 뜻밖에도 천자의 어가가 행차하신다는 소리를 듣고 군사를
이끌고 마중 나온 것이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곽사의 무리와 마주치게 된 것이
었다.
홀연 뜻밖의 군사들이 나타나자 곽사도 새롭게 진용을 짜고 싸울 태세를 갖추
었다.
곽사의 부장 최용이 먼저 말은 달려나오며 외쳤다.
"주인을 배반하고 쫓겨간 양봉은 어디 있느냐? 어서 나오지 못할까!"
화가 머리끝까지 치민 양봉이 죄우를 둘러보며 외쳤다.
"공명, 어서 나가 저놈의 목을 베어 오너라!"
양봉의 부름을 받은 장수가 커다란 도끼를 들고 달려나오더니 나는 뜻이 말을
몰았다.
그는 최용을 맞자 커다란 도끼를 휘두르며 단 1합에 최용의 목을 찍어 말 밑
에 떨어뜨렸다. 실로 무서운 용맹이었다.
양봉이 그때를 놓치지 않고 가가 꺾인 곽사의 군사를 휘몰아쳤다.
도끼를 든 그 장수는 선두에서 곽사군을 향해 도끼를 내리치고 휘두르며 달렸
다. 그의 도끼가 움직일 때마다 붉은 피가 주위를 붉게 물들였다. 곽사의 군사들
은 달아나기에 바빴다.
"어가를 겁박하여 도망치려는 곽사의 잔당을 한 놈도 남기지 말고 소탕하라!"
양봉은 공명에게 명했다.
그 장수는 피로 물단 붉은 도끼를 휘두르며 나는 뜻이 말을 몰아갔다. 어가를
방패삼아 몸을 감추고 있던 곽사와 그의 부하들은 공명이 달려오자 겁에 질려
다투어 20여 리나 달아났다.
이윽고 차을 거둔 양봉은 군사들을 수습하여 어가를 향해 배례하며 황제에게
예를 올렸다.
양봉은 투구를 벗어 손에 들고 천자의 어가 아래에 끊어 엎드렸다.
"폐하의 옥체를 괴롭혀 드려 죄송스럽기 그지없사옵니다."
천자는 어가에서 내려 친히 양봉의 손을 잡으며 치하했다.
"위급한 짐을 구해 준 공의 은혜, 결코 잊지 않을 것이오."
황제가 다시 양봉에게 물었다.
"큰 도끼를 휘두르며 적장의 목을 벤 장수는 누구인고?"
양봉은 그 장수를 불렀다.
"예. 하동 양군출신으로 이름은 서황, 자는 공명이라 하옵니다."
황제는 공명에게 옥음을 내려 치하의 말을 잊지 않았다.
그날 밤, 천자의 어가는 화음의 영집에 있는 양봉의 진영에 가 그곳에서 머물
렀다. 장군 단외가 황제께 음식과 의복을 올렸다. 실로 오랜만에 황제는 배부리
먹고 따뜻한 침상에서 편안한 잠을 잘 수 있었다.
그러나 다음 날 아침이 되자, 곽사가 숨돌릴 틈도 주지 않고 군사를 수습하여
쳐들어왔다. 곽사는 비록 패하기는 했으나 양봉의 군사가 많지 않읍을 알고 있
는 터라, 흩어졌던 군사들을 다시 모아 달려온 것이었다.
서황이 도끼를 휘두르며 그들을 맞아 싸웠다. 그러나 곽사의 대군이 그를 사
방면에서 에워싼 채 밀려들자 시시각각 위험한 지경으로 빠져들고 있었다. 양봉
이 천자의 어가를 지키고 있었으나 대군 앞에는 어찌해볼 도리가 없었다.
황제는 어제의 기쁨도 하루 만에 절망으로 바뀌어 한숨만 쉬고 있었다. 그러
나 하늘은 결코 천자를 그대로 내버려 두지는 않았다.
홀연 동남쪽에서 뜻하지 아니한 함성이 일었다. 한 장수가 먼지를 일으키며
군사를 몰아 천자에게로 달려왔다. 막 천자의 어가를 향해 군사를 휘몰던 곽사
는 때아닌 협공을 받고 흔들렸다.
양봉과 서황이 이에 힘을 얻어 결사적으로 대드니 곽사는 우왕좌왕하다 다시
군사를 물릴 수밖에 없었다.
또 한 번 위급에서 목숨을 구한 황제는 그 장수를 불러 치하했다.
그는 동 귀비의 아버지인 노장 동승이었다.
"폐하, 이제는 마음을 놓으십시오. 신은 양 장군과 힘을 합쳐 기필코 이각.곽
사의 무리를 치겠습니다."
동승이 그같이 말하자 헌제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동도로 향할 것을 명하였
다. 동승.양봉도 우선 천자를 동도에 편히 모시는 일이 급선무였다.
어가를 양쪽에서 호위하며 홍농으로 향했다.
두 번째 싸움에서도 패한 곽사는 패주하던 도중에, 역시 황제의 어가를 탈취
하기 위해 말을 몰던 이각을 만났다.
이각이 황제를 겁박하고 있던 때는 서로 팽팽히 맞섰으나, 지금은 같은 처지
가 되자 둘은 무턱대고 으르렁댈 수만은 없었다. 또한 이각은 이각대로 황제의
어가를 뒤쫓던 곽사가 패주해 오자 경위가 궁금했다.
"황제의 어가는 어찌 되었소?"
이각은 우선 황제의 어가에 대한 행방부터 물었다.
"양봉과 동승이 황제의 수레를 이끌고 홍농으로 갔소. 만약 그것들이 산동에
이르러 자리를 잡으면 우리는 끝장이오. 필시 천하의 제후들에게 명해 우리 두
사람을 사로잡으라고 할 것이오. 그렇게 되면 우린 삼족이 살아남기 어려울 것
이오."
곽사의 말을 듣고 보니 그건 자명한 이치였다. 이에 이각이 말했다.
“지금 장제가 군사를 거느려 장안에 머물러 있으나 가볍게 움직이지 못할 것입
니다. 그 틈을 이용해 우리가 홍농으로 진격하는 게 어떻겠소, 천자를 죽여 없
앤 후 천하를 반분하는 것이 낫지 않겠소?”
곽사는 이각이 제의하자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둘은 군사를 합쳐 천자를 뒤
쫓기 시작했다. 급히 나온 군사라 양곡이 제대로 준비되어 있을 리 없어 가는
도중 필요한 것은 모두 약탈하니 애꿎은 백성들의 피해만 컸다.
이각·곽사의 군사가 뒤쫓고 있다는 소식을 들은 양봉과 동승은 동간
이란 곳에서 그들을 맞기로 했다.
이각·곽사가 이번에야말로 황제의 어가를 탈취하리라 굳게 마음먹고 계책을
세웠다. 그리하여 이각은 왼쪽데서 군사를 몰아 쳐들어가고, 곽사는 오른쪽에서
군사를 지휘하여 산과 들에 수많은 군사를 풀어 진격하기로 했다.
“우린 저들과 비교도 안 될 만큼 많은 군사를 이끌었으니 일시에 밀어붙인다
면 저들을 무너뜨릴 수 있소.”
양봉과 동승도 각기 한쪽씩을 맡아 싸웠으나 워낙 중과부적이었다.
양보은 이각.곽사의 순사 대부분이 여기저기서 긁어모은 잡군인 것을 깨닫고
그들을 혼란시킬 계책을 썼다.
“보물이나 재물을 모두 길에 버리십시오.”
양봉은 천자에게 간곡히 아뢰었다.
황후는 주옥.관.목걸이, 천자는 부책.전적 등을 어가 밖으로 내던졌다. 궁인과
무장들은 옷과 금띠를 벗고 끌르고 하여 길에 뿌렸다.
어가를 뒤쫓던 군사들이 모두 주린 이리처럼 땅 위에 떨어진 재물에 정신이
팔려 군졸들은 줍느라고 수라장을 이루었다.
양봉은 이 틈을 타 가까스로 천자가 탄 수레를 보존하였다.
이각.곽사는 군사를 홍농으로까지 이끌고 왔다. 군사를 풀어 부녀자를 겁탈하
고 재물을 약탈하니 홍농은 때아닌 생지옥이 되고 말았다.
양봉.동승은 그들과 싸움을 벌이며 황제의 어가를 섬북으로 향하게 했다.
섬서의 북부라면 아직 미개한 묘족들이 살고 있는 지방이었다.
“이제는 하는 수 없습니다. 백파수 일당에게 밀조를 내리시어 그들을 부르시
옵소서. 그들을 시켜 이각.곽사의 무리를 물리치는 것이 남은 단 하나의 계책입
니다.”
양봉는 헌제에게 간하였다. 양봉과 동승은 뒤따르는 이각.곽사에게 사람을 보
내어 화평을 맺자고 제의했다. 한편으로 밀지를 하동으로 보내어 이전에 흑산적
의 무리였던 백파의 두목 한섬.이락.호재 세 장수에게 구원을 청했다.
그 중 이락은 산중에서 무리를 모아 산적질을 일삼았던 자였으나, 위급한 사
정이라 그에게라도 원병을 청할 수밖에 없었다.
세 장수는 황제가 지난날의 죄를 면해 주고 벼슬을 내린다고 하자 휘하의 무
리를 이끌어 왔다.
황제의 어가는 급한 대로 산적들의 호위를 받으며 홍농으로 향했다.
도중에 곽사·이각의 연합군과 마주쳤다. 이각·곽사의 군대에도 토비산적이
많이 섞여 있었다.
양군 사이에 맹수와 맹수끼리 물고 늘어지듯 끝없는 싸움이 이어녔다. 처참한
광경이었다. 태양도 피보라 때문에 검게 흐려지는 듯했다.
곽사는 양봉.동승이 이끌고 온 군사들을 살폈다. 그들이 산적질이나 일삼던 도
둑의 무리라는 것을 알자 곽사는 한 꾀가 떠올랐다. 얼마 전 어가에서 내던진
보물과 재화들을 사용하여 저들의 얼을 빼자는 생각이었다. 그때 병사들에게 몰
수애 두었던 재물을 싸움터에 뿌렸다.
과연 이락 등의 부하들은 길 위에 내던져진 보물이나 재화를 보자 대오고 뭐
고 소용이 없었다. 그걸 줍느라 혈안이 되어 있었다. 이각.곽사는 계책이 맞아
들어가자 총공격령을 내렸다. 군사는 양편으로 나누어 들어가며 닥치는 대로 주
살했다.
관군으로 급조된 산적들은 무수히 목숨을 버리거나 산 자는 허둥지둥 달아나
기에 바빴다. 이 싸움에서 두목 호재는 목숨을 잃고 이락은 다시 방향을 바꾸어
도망가는 어가를 쫓아 겨우 목숨만을 보전하여 달려갔다.
천자의 어가는 길을 재촉하여 황하의 강 기슭의 당도하였다. 이락은 벼랑을
타고 내려가 어렵게 배 한척을 구했다. 그러나 안벽은 병풍처럼 깎듯이 세워진
험한 지세였다. 천자는 밑을 내려다보기만 하고 절망에 가까운 신음 소리를 낼
뿐이었고 황후는 흑흑 흐느낄 뿐이었다.
양봉 등의 시신들은 사색이 되어 있었다. 이각.곽사의 군사들은 추격을 멈추지
않고 뒤따르고 있었다. 거기다가 천자의 군대는 이제 헤아릴만치 그 수가 줄어
있었다.
이때 황후의 오라버니 되는 복덕이 수십 필이나 되는 비단을 풀었다. 그 비단
으로 천자와 황후를 칭칭 감아 묶고, 암벽 위와 아래에 비단띠를 연결하여 그
위를 타고 내리도록 하였다.
이윽고 천자.황후를 합해 겨우 대여섯이 작은 배에 올랐다. 그 밖의 군사와 늦
게 뒤쫓아온 궁인들이 필사적으로 뱃전에 매달렸다.
그러자 이락이 칼을 빼들었다.
"이러다간 모두 죽을 뿐이다."
이락은 그들의 손가락, 손목을 가리지 않고 무참히 잘라 버렸다. 뱃전에 일렁
이는 물보라는 붉게 물들었고, 잘린 손가락이나 손목이 물결에 휩쓸려 다녔다.
천자를 따라 머나먼 길을 싸움터를 전전하며 여기까지 천자를 모시고 왔던 궁
인들은 결국 황하의 물고기밥이 되고 말았다.
천자는 쏟아지는 눈물로 볼은 적시며 호곡하였다.
"애통한지고. 짐이 다시 조묘에 오르게 되는 날에는 반드시 그대들의 넋도 제
사 지내 주마."
황후도 이 참혹한 광경에 사색이 되어 눈물을 닦아 내고 있었다.
가까스로 강을 건너 뭍에 올랐을 때는 천자의 어의도 흠뻑 젖어있었다. 황후
는 배멀미 때문인지 몸을 가누지도 못하여 오라버니 복덕이 업고 내렸다.
강을 건너고 보니 황제와 가까운 측근 10여 명뿐이 남지 않았다.
갈대숲에서 불어 오는 늦가을 바람이 몹시 세찼다. 흐린 날씨여서 젖은 옷들
은 좀처럼 마르지 않아 모두 입술이 파랗게 질려 있었다.
거기다가 어가도 버리고 없어, 천자는 걸어서 거는 수밖에 없었다. 익숙하지
않은 발걸음이라 곧 발바닥이 부르터 피가 흘러내렸다.
이를 보다못한 양봉이 어디선가 낡은 달구지 하나를 빌려 왔다. 멍석을 깔아
천자와 황후를 오르게 했다.
초저녁 무렵, 이을고 대양이란 마을에 당도하였다.
쫓기는 몸이라 조석을 마련할 길이 없는 일행은 어느 허름한 기와집에 자리를
정했다. 이를 본 한 노파가 조밥을 지어 바쳤으나 천자와 황후는 목구멍으로 넘
기질 못했다.
다음 날이었다. 황제는 그 동안 자기를 보호해 준 이락을 정북장군으로, 한섬
을 정동장군으로 삼아 길을 나섰다.
이때 두 사감의 대신이 수레 앞에 나타나 엎드려 절한 후 통곡했다.
어지러운 싸움의 소용돌이 속에서 뿔뿔이 흩어졌던 태위 양표와 태복 한융이
었다. 두 사람은 약간의 군사를 거느리고 천자 일행을 찾아 헤매다 여기에서 겨
우 만난 것이었다.
그들을 다시 만난 황제와 황후는 재회의 반가움에 눈물을 지었다.
한동안 눈물을 흘리며 슬픔을 달래던 태목 한융이 천자 앞에 꿇어 엎드리며
말했다.
“이각이나 곽사 두 역적은 아직까지 제 말을 제법 듣는 편입니다. 그런 옛
인연에 의지하여, 이 길로 되돌아가 그들에게 군사를 거두어들이도록 권고해 보
까 합니다. 폐하께서는 너무 심려 마시고 옥체를 잘 보존 하십시오.”
한융은 눈물을 흐리며 아뢴 후 혼자서 적진을 향하여 떠났다.
양표는 천자에게, 안읍현에 임시로 거처할 것을 권했다. 그러나 안읍이라 해서
거처할 만한 마땅한 집이 있는 것은 아니었다.
하는 수 없이 어느 초가집 한 채를 빌어 거처하는데, 문짝도 없어 가시덤불을
꺾어 사방을 두렀다. 장수와 군사들은 가시덤불 밖에서 야영을 했다.
그 무렵 이런 헌제를 더 괴롭힌 것은 바로 이락과 한섬 이었다.
산적의 본성을 슬슬 드러내기 시작한 이락과 한섬의 무리가 행하는 방자함에,
헌제는 눈살을 찌푸린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강을 건넌 후부터는 황제에 대한 예의도 아예 무시했다. 어느 날은 칼을 찬
채 뚜벅뚜벅 황제 앞에까지 나아가 황제에게 강요했다.
"폐하, 이놈의 졸개들도 저렇게 폐하를 위하여 고생해 온 놈들이니 마땅히 관
직을 내려 주십시오. 어사라거나 교위라거나 아무런 관직이라도 좋으니 하나씩
내려 주십시오."
너무 어처구니 없는 오만불손에 시신들이 이를 가로막자 이락은 시신을에게
욕지저리를 했다. 그정도는 차라리 약과였다. 비위에 거슬리면 황제 앞에서 시신
은 발로 차거나, 귀를 잡아당겨 밖으로 끌어내기 일쑤였다.
천자는 이락의 그런 행패를 알고 있었기에, 그가 하자는 대로 무엇이든지 들
어 주었다.
관직을 하사할 때는 옥새가 있어야 했는데, 필묵이나 종이는 이럭저럭 갖출
수 있었으나 옥새를 지니고 있지 않았다.
옥새를 마련할 때까지 기다리라고 명했으나 이락은 듣지 않닸다.
"가시나무를 꺾어 오겠으니 그 나무에 옥새를 새기십시오."
이락이 이 같은 억지를 부리니 천자는 하는 수 없이 나무에다 송곳으로 그리
다시피하여 손수 도장을 새겨 그의 졸개들에게 관직을 내렸다.
이락은 황제께 올리는 음식도 막걸리와 잡곡밥을 올렸다. 그러나 헌제는 이를
꾹 참았다.
한편 이각과 곽사를 찾아간 한융이 간곡히 그들을 달랬다.
"이미 황하를 건너간 황제를 뒤따라간들 무슨 소용이 있겠소. 황제께서 거느린
군사라고 하여도 이제 손가락으로 헤아릴 지경인데다, 그 참상은 두 눈으로 볼
수 없는 지경이오. 두 장군이 뒤쫓게 되면 황제께서는 다시 피난길에 오르게 되
실 것이고, 그러다 혹 잘못되어 병이라도 드시면 이는 두 장군의 이름을 욕되게
할 뿐이오. 그러니 여기서 추적을 멈추시면 황제께서 두 장군께 높은 벼슬을 내
리시겠다고 약조하셨소이다."
한융이 갖은 말로 그들을 달래자 이각과 곽사는 마지못한 듯 군사를 물렸다.
한융의 말처럽 천자가 병이라도 얻는 날에는 그들에게 화살이 돌아올 것이 뻔했
다. 게다가 그대로 물러나면 높은 벼슬을 내리겠다고 하니 굳이 뒤쫓을 필요가
없다는 생각이었다.
이각.곽사는 인질로 잡아 둔 백관과 궁녀들까지 모두 풀어 주었다.
그 해에는 엎친 데 덮친 격으로 크나큰 흉년까지 들었다.
백성들은 초근목피, 풀뿌리와 나뭇잎으로 간신히 목숨을 부지했으며, 길가에는
굶여 죽은 사람의 시체가 즐비했다.
그런 참에 하내태수 장양은 헌제에게 쌀과 고기를 보내 왔고, 하동태수 왕읍
도 얼마 되지 않는 의복을 보내 왔다. 천자와 황후는 그로써 한동안 굶주림과
추위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이곳 황폐한 임시 행궁에도 이각.곽사군에서 방면된 백관들과 궁인들이 찾아
와 천자의 마음은 든든했다. 그러나 갑자기 늘어난 식구들 탓에 얼마 안 되던
식량이 금세 바닥이 났다.
"낙양으로 돌아갔으면 좋으련만…."
천자는 가끔 혼자말로 이렇게 탄식했다.
그러나 이락은 그럴 때마다 반대하고 나섰다. 원래 비천한 신분이었던 이락은
천자가 낙양으로 옮겨 가면 그만큼 자신의 입지가 좁아질 것을 염려해서였다.
"낙양에 간다한들 굷주리기는 마찬가지오."
이락이 그렇게 반대했으나 조신들은 모두 낙양으로 옮길 것을 청원하였다.
"이런 궁벽한 땅에 오래도록 어가를 멈추게 할 수는 없습니다. 낙양은 예로뷰
터 천자의 도읍입니다. 나양으로 되돌아가 사직의 체통을 바로 세워야 합니다."
그러나 이락이 끝내 반대하니 천자의 낙양행은 번번이 좌절되고 말았다. 조신
들은 몰래 의논하여 헌제를 낙양으로 모시기로 했다.
어느 날 밤, 이락이 졸개들을 이끌고 마을로 술과 여자를 찾아 나선 틈을 타,
양봉과 동승은 헌제를 호위하며 낙양으로 출발했다.
자기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기어이 어가가 낙양으로 향하자 이락은 이각과 곽
사에게 졸개를 보내 헌제를 납치할 마음을 품게 되었다.
어가는 몇날 몇밤을 새워 가며 험한 길을 숨차게 달려 이윽고 기산이라는 곳
에 이르렀다. 이때는 이미 밤도 사경 무렵이 되었다.
어둠이 휩싸인 산 속 여기저기에서 횃불이 나타나고 함성이 일었다.
"이각·곽사가 여기서 기다린 지 오래다. 수레를 멈추어라!"
양봉은 놀라는 천자를 달랬다.
"그럴 리가 없습니다. 어찌 이각이나 곽사가 이런 곳에 나타나겠습니까. 헤아
리건대 이락이 쫓아와 거짓으로 이각의 흉내를 내는 것입니다."
양봉은 뒤따르는 군사들을 둘러뵤며 외쳤다.
"서황은 어디 있느냐? 어서 저 무리들을 막아라!"
서황은 양봉의 명을 받자 큰 도끼를 휘두르며 말을 달려나갔다. 서황이 말을
달리며 소리쳤다.
"이 짐승들아, 게 섰거라. 여기서부터 앞길은 낙양의 도성문이다. 짐승 따위가
지나는 길이 아니다."
"네 이놈, 오늘날까지 불쌍히 여겨 살려 두었더니…."
이락이 이를 갈며 마주 나왔다.
서황은 이제까지 그들의 행패를 보고도 참아 왔던 분통을 한꺼번에 폭발시키
려은 듯 도끼를 번쩍 치켜들었다.
이락이 칼을 휘두르며 다가오자 서황의 도끼가 횃불에 본뜩였다. 그와 함께
이락의 몸뚱이는 두 동강이 나고 말았다.
서황은 그런 이각을 거들떠보지도 않고 졸개들을 향해 짓쳐 나갔다.
졸개들은 도끼에 맞아 피를 뿜으며 나뒹굴었다. 남은 무리들은 서황의 도끼를
피해 황급히 어둠 속으로 뿔뿔이 달아나기에 바빴다.
낙양에서 허창으로 조조의 이호경식지계
낙양성에 도착한 천자는 왕성을 수리하기도 전에 이각.곽사의 침입에 또다시
피난길에 오르고 조조권의 입성으로 비로소 난은 평정된다. 조조는 낙양성을 복
구하느니 허창(허도)으로 천도할 것을 주창해 후일 위의 기반을 세우고 조정을
손아귀에 넣는다.
죽을 고비 벗어나기를 몇 차례, 황제를 모신 수레가 낙양에 이르는 길목인 기
관에 이르자 태수 장양이 마중 나와 비단과 음식을 바쳤다. 황제는 장양에게 대
사마의 벼슬을 내렸으나 장양은 굳이 사양하고 군사를 이끌어 야왕으로 떠났다.
황제를 모신 어가근 이윽고 낙양에 당도하였다. 수레는 무사히 낙양에 이르렀
으나 시위한 백관들도 너무나 처참하게 변한 낙양을 보며 눈물을 흘렸다.
천자는 망연자실하여 눈물을 흘렸다. 궁전은 이미 잿더미가 되었고, 궁궐 담장
은 허물어져 있었다.
그 융성했던 영화가 흔적도 없이 불에 타 버린 옛 터는, 이제 잡초만이 우거
진 끝간데없는 허허벌판일 뿐이었다.
다만 돌이 나뒹굴면 그곳은 누대였고, 물이 있으면 주란의 다리나 수정의 옥
지였음을 미루어 짐작할 뿐이었다.
관아도 민가도 무성한 잡초 속에 불에 그을린 나무나 주춧돌만 남아 있었다.
가을도 지나 이미 겨울로 접어든 폐허 도읍지에는 닭이나 개짖는 소리조차 들
리지 않았다.
"이곳이 온덕전 터가 아닌가? 여기는 상금문이 세워졌던 곳이지..."
그래도 천자는 감회어린 옛 궁궐의 자취를 그리면서 반나절을이 넘도록 성터
를 거닐었다.
백관들은 불을 지피기 위해 땔나무를 하러 성 밖으로 나가야만 했다. 무너진
담과 우거진 잡초에는 죽은 시체가 널려 있었다. 이 참담한 옛 궁터를 읊은 시
가 있었다.
억새 뒤덮인 피묻은 무덤가엔 흰뱀이 죽었고
사방에 어지러이 널린 붉은 깃발들
진 사슴(지나라) 뒤엎어 일으킨 사직
초패왕의 추마(초나라) 넘어뜨려 영토 빼앗았다.
나약한 임금에는 간신,
사직 시들면 도적이 들끊네.
동도.서도, 두 서울 난리 치른 곳에 도착하니
무쇠 같은 사람도 황폐한 그 모습에 눈물 흘리네.
천자는 황량한 낙야의 모습을 보며 너무나 허망한 감회에 사로잡혔다.
"이곳에는 살고 있는 백성들도 없단 말인가?"
천자는 따르는 시종에게 물었다. 그러자 그 중의 한 시신이 대답했다.
"옛 성문 밖에 다 쓰러져 가는 초가집 수백 호가 남아 있는 것 같습니다. 그들
도 연이은 흉년과 질병 때문에 몹시 곤궁한 생활을 하고 있사옵니다."
천자는 조서를 내려 흥평이란 연호를 건안 원년(A.D186년)으로 고쳤다.
흉년은 이 해에도 이어져, 낙양성 안의 가호가 수백 호에 지나지 않았으나 먹
을 것을 찾아 성을 떠났다.
조신들은 우선 정사를 돌볼 보잘 것 없이 초라한 가궁을 폐허 위에 세웠다.
가궁이 세워졌으나 천자의 수라상에 올릴 양식을 걱정해야 했다.
상서랑 이하의 관리들은 모두 맨발이 되어 폐원의 기와와 돌을 가려내고 밭을
일궜다. 나무껍질을 벗겨 떡을 만들고, 풀뿌리를 끓여 국을 만들어 그날 그날을
연명했다.
어느 날 태위 양표가 천자께 진언했다.
"이전에 폐하께서 명을 내리신 바 있었으나 난리 중이라 경황이 없었습니다.
근자에 산동에 있는 조조는 많은 양장모사를 휘하에 두고 있으며, 길러 놓은 군
사도 20만에 이른다고 합니다. 이때 천자께서 조칙을 내리시어 그에세 사직을
지키도록 하십시오."
'이미 조서를 내려 그를 부르지 아니했던가. 새삼 다시 물을 게 뭐 있겠느냐?
어서 사람을 보내도록 하라."
양표는 천자의 말에 따라 즉시 칙사를 산동에 보내 조조에게 조서를 전하도록
했다.
그 무렵 조조는 천자가 낙양으로 돌아왔다는 소식을 듣고 있었다.
천자가 폐허가 된 낙양에 귀환하여 궁박한 생활을 이어 가고 있다는 얘기를
듣고 그의 마음에도 조용히 파문이 일고 있었다.
"눈에 보이지는 않으나, 무언가 크게 움직이고 있다. 시시각각 쉼없이 움직이
는 천하가 아닌가. 대장부로 자처하는 자, 진실로 보람 있는 대의를 세워야 할
때가 아닌가."
조조는 하늘을 우러르며 중얼거렸다.
산동의 기온은 아직 만추였다.
성루 위를 뒤엎은 채 밤하늘을 밝히고 있는 희뿌연 은하는, 천하에 풍운을 일
으키고 있는 일군의 군마처럼 보였다.
조조, 그도 이제는 백면 강개한 젊은이가 아니었다.
산동 일대를 평정한 후 일약 건덕장군 비정후에 봉해졌으며, 사십줄에 들어선
그가 거느린 양병만도 20만, 유막에 거느린 모사 용자의 수도 이제 그의 대망을
실행하는 데 부족함이 없었다.
'이제부터다.'
그는 지금의 작은 성에서, 작은 영화와 인작에 만족하여 머무를, 그런 사람은
아니었다.
그의 군사는 지금의 안일보다는 끊임없이 진공을 지향하고 있었다. 그의 성은
지금의 안온함에 빠져드는 일락의 침상이 아니었으며, 내일을 향한 전진을 위한
발판이었다. 그의 포부는 바다보다도 더 넓었다.
다음 날 조조는 모사 순욱을 불렀다.
"소식을 들으니 천자께서 낙양으로 환궁하셨다 하오. 그러나 폐허가 된 낙양에
서 천자를 지키는 군사도 변변히 갖추어지지 않은 형편이라 마치 황야에 버려진
미아와 같을 것이오. 이를 그대로 두고 방관할 수만은 없는 일이 아니오. 어떻게
생각하시오?"
조조의 물음에 순욱이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분연히 입을 열었다.
"이전에 진나라 문공은 주의 양왕을 천자로 받들어 섬김으로써 여러 제후들이
그를 따랐습니다. 또한 한 고조께서는 의제를 위해 장례를 치름으로써 천하의
민심을 얻게 되었습니다. 지금 천자께서 궁박한 처지에 계실 때 장군께서 뜻있
는 군사를 이끌어 천자를 받드신다면, 만인의 우러름 속에 큰 일을 성취하실 수
있습니다. 만약 머뭇거리다 기회를 놓치시면 다른 자가 나설까 염려되는 바입니
다."
순욱은 춘추 시대의 패자인 진문공과 한 고조의 일을 일깨우며 진병할 것을
주장했다.
순욱의 말에 조조는 크게 기뻐했다. 순욱의 뜻이 자신과 같았기 때문 이었다.
그때 조조의 동생인 조인이 급한 걸음으로 조조에게 다가왔다.
"방금 현성에서 파발군이 왔습니다. 낙양에서 보낸 천자의 칙사가 오고 있답니
다.'
그러자 순욱이 다시 입을 열었다.
"이는 필시 천자께서 주공께 조서를 내리신 것임이 분명합니다. 지난번 산동
평정의 표문을 올려 주공께 건덕장군 비정후에 봉한 것을 기화로 주공께 낙양성
을 옹위하고 천자를 받들라는 조서일 것입니다."
"음―."
조조는 내심 마음 속에 그리던 천하가 저절로 다가옴을 느끼고 있었다. 조조
는 군사를 일으킬 만반의 준비를 하도록 휘하 장수들에게 명했다. 천자의 조서
가 아니더라도 이미 군사를 회동하기로 결심하고 있던 터였다.
칙사가 산동으로 내려간 지 한 달 가량 지난 어느 날이었다.
낙양의 조신들은 예기치 못한 급보를 접하고 모두 얼굴이 파랗게 질려 있었
다. 이각.곽사의 연합군이 그 후 대군을 정비하여 다시 낙양으로 쳐 들어온다는
급보가 전해진 것이었다.
천자 역시 놀람은 조신들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지난 여름부터 가을에 걸쳐
그들 무리들에게 쫓겨다니던 일들이 악몽처럼 되살아났다.
"조조에게 보낸 사자가 아직 돌아오지 않았는데, 이제 짐은 어디로 또 몸을 피
해아 한단 말이오?"
천자는 저주스런 운명을 한탄하며, 대신들에게 대책을 물으니, 그 목소리는 어
느덧 통곡으로 변했다.
동승이 머리를 조아리며 진언했다.
"하는 수 없는 일입니다. 이 가궁을 버리고 조조에게 의탁하여 몸을 피하심이
상책인가 하옵니다."
그러자 양봉과 한섬이 나섰다.
"조조에게 이지하신다 하나 조조 또한 아직은 진심을 헤아릴 길이 없습니다.
그보다 신들이 죽기를 작정하가고 그들과 싸워 이각의 무리들을 막아볼까 하옵
니다."
그러자 동승이 거느린 군사가 얼마 되지 않음을 조심하여 말했다.
"그 기개는 가상하오만, 성곽은 무너져 방비할 만한 담장도 없고 병력도 얼마
되지 않는데 어떻게 그들을 막는다는 말이오? 만약 그들에게 패하는 날이면 어
떻게 되겠고? 그보다는 어가를 모시고 조조가 있는 산동으로 가는 것이 어뗳겠
소?"
그때 밖에서 몇 사람의 무신이 달려왔다.
"폐하 위급합니다. 이미 적의 선봉은 가까이 육박해 오고 있습니다. 우선 피하
셔야 되겠습니다."
천자는 그 말에 놀러 옥좌에서 몸을 벌떡 이으켰다. 일이 이토록 위급한 지경
에 이르니 이제 어가를 이끌고 피신을 하는 수밖에 없었다.
대신들이 급히 천자를 가궁의 뒷문으로 모신 후 어가에 몸을 실게 했다. 가궁
에서는 일시에 어가를 뒤따르는 자와 허둥지둥 보따리를 챙기는 자들로 해서 혼
란에 빠져들었다.
어가는 남쪽으로 향해 정신 없이 달려가고 있었다.
그러나 문무백관들은 탈 말이 없어 걸어 갈 수밖에 없었다.
일행이 낙양성을 벗어날 무렵, 이각.곽사의 군대는 이미 흙먼지를 일으키며 황
제의 뒤를 바싹 뒤쫓고 있었다.
흙먼지와 비명에 휩싸인 채 천자의 어가는 앞으로 치닫고 있었다.
그때였다,
문득 어가 앞쪽에 펼쳐진, 광야를 가로지른 언덕 끝쪽에서 홀연히 뭉게뭉게
흙먼지가 일며 수많은 군마의 말발굽 소리가 들려 홨다.
"벌써… 앞에도 적이?"
어가를 호송하던 궁인들이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천자도 놀라움으로 넋을 잃
을 지경이었다.
실로 진퇴유곡이었다. 이제 갈 곳도 물러날 곳도 없엇다. 어가를 따르던 대신
들은 모두 얼이 빠져 체념했고 더러는 살 길을 찾아 달아날 궁리를 하고 있었
다.
그런 가운데 저편에서 무장이 아니 문관 차림의 한 사람이 말을 달려 오고 있
었다. 이윽고 그는 숨을 몰아쉬며 말에서 뛰어내려 어가 앞에 꿇어 엎드렸다.
그는 바로 산동으로 조조에게 조서를 전하러 갔던 사신이었다.
"폐하 이제야 돌아왔습니다. 조조 장군은 어명을 받들어 군사를 거느리고 산동
을 떠났습니다. 오는 도중 이각.곽사의 무리가 조정을 침범한다는 소식을 듣고
먼저 하후돈을 선봉장으로 하여 10여 명의 장수들이 정병 5만을 거느리고 서둘
러 당도하게 된 것입니다. 이제 폐하께서는 심려하지 마십시오."
"아니, 그럼. 저건 우리를 도우러 온 산동의 군사란 말이지?"
"그러하옵니다."
어가를 둘러싸고 있던 사람들은 사자의 말을 듣자 지옥에서 부처라도 만난 듯
금세 활기를 되찾으며 기뻐서 어쩔 줄 몰랐다.
이어 말굽 소리도 요란히 한 떼의 군마가 어가 앞으로 달려왔다.
하후돈.허저.전위등을 선봉으로 한 산동의 맹장들이 어가를 보자 군견례를 올
렸다. 하후돈이 10보 정도 앞으로 나와 황제께 고하였다.
"보시는 바와 같이 소신들은 먼길을 급히 달려오느러 갑주를 입고 칼을 차고
있어 삼가 폐하를 배알할 옷차림을 갖추지 못했습니다. 이에 군기로써 직주함을
용서하옵소서."
과연 산동의 용장 하후돈은 그 명성에 걸맞게 말씨가 명석하고 태도 또한 훌
륭했다.
천자는 믿음직스런 그의 용태를 흡족히 여겼다.
"먼길 마상에서 시달리며 왔는데 어찌 옷차림을 묻겠소. 오늘 짐의 위급함을
구하느라 이렇게 달려와 준 노고와 충절에 대해서는 반드시 후한 상을 내려 보
답할 것이오."
하후도, 이하 장수들은 천자의 말에 삼가 재배했다.
어가를 에워싼 무신과 궁인들도 이구동성으로 '만세!'를 외쳤다.
그때 동편으로부터 또 한 떼의 군마가 몰려오고 있었다. 하후돈이 곧 말을 몰
고 달려가 그들을 살피다가 다시 돌아왔다.
하후돈은 근심어린 얼굴이 된 황제에게 아뢰었다.
"동편에서 오고 있는 군사는 조 장군의 보군들이옵니다. 조 장군의 아우님인
조홍을 대장으로, 이전·악진을 부장으로 한 후비군입니다. 이각.곽사의 무리들
을 당하기 어려울까 염려하여 길
을 재촉하여 달려온 것입니다."
헌제는 더욱 기뻐하며 만면에 희색을 띠었다.
이윽고 조홍의 후비군이 당도하고 조홍도 어가 앞에 나아가 배알했다.
"신의 형님 조조는 적군이 폐하 가가이 온 것을 알자 저로 하여금 선봉 하후
돈을 돕도록 하여 이렇게 제가 한 발 앞서 달려왔습니다."
"경의 형, 조조야말로 진정 짐의 사직지신이로다."
헌제는 조조를 치하하고 조홍으로 하여금 어가 앞에서 군사를 이끌도록 했다.
그리하여 낙양에서 이각.곽사의 무리들에게 쫓겨가던 어가는 단번에 8만 대군
의 호위를 받으며 위풍도 당당히 귀환길에 올랐다.
그런 사정을 알 리 없는 이각.곽사의 군대는 전방에 생각지도 않은 대군이 몰
려오자 어리둥절 했다.
그러나 이미 때는 늦었다. 그때쯤은 이미 헌제의 명을 받은 하후돈.조홍의 마
군과 보군이 공격 포진을 펼치며 짓쳐 오고 있었다.
하후돈.조홍은 군사를 둘로 나누어 일제히 이각.곽사의 군을 덮쳤다.
조조의 산동군은 이미 오랫동안 조련을 거친 정예군이었다. 거기다가 조조의
상장들은 많은 싸움터에서 용맹을 떨친 장수들이 아닌가. 황제를 사로잡기에만
급급하여 여기저기서 끌어모은 이각.곽사의 잡군들은 여지없이 조조군에게 짓밟
혔다. 1만여 명의 군사들을 시체로 만든 뒤 이각.곽사는 황급히 군사를 돌려 달
아났다.
그날 저녁이 되자 천자는 무사히 낙양에 입성하고, 하후돈의 군사는 성 주위
에 화톳불을 피워 놓고 주둔했다.
다음 날, 조조도 대군을 이끌고 낙양에 당도하였다.
위풍당당한 그 위세만으로도 적은 운무(구름과 안개)가 흩어지듯 소리 없이
자취를 감추고 말았다.
"조 장군이 입성했다!"
하루 아침에 인심은 태양을 우러러보듯, 조조에게 쏠렸다. 조조의 명성은 그
위세를 업고 구름 위로 오른 듯했다.
조조가 낙양에 입성하던 날, 그의 근위병은 모두 붉은 투구에다 붉은 실을 수
놓은 전포를 입고 있었다. 거기다가 붉은 자루의 창을 들고, 붉은 기치를 나란
히 세운 채 팔괘의 길서를 본떠 대로를 지었다.
그 한가운데 대장 조조를 에워싸고 한 번의 북 소리에 여섯 걸음씩 전지하니
그 장관은 보는 이로 하여금 저절로 위압감을 갖게 했다.
"과연 장수 중의 장수로군!"
대신들도 이렇게 중얼거렸다.
그러나 조조는 천자 앞에서는 신하의 예를 조금도 흐트리지 않았다. 입성하자
마자 천자 앞에 나아갔으나 함부로 전상에 오르지 않았다. 천자의 허락이 내리
기 전까지는 전계 아래에 최대한 꿇어 엎드려 황제를 뵈었다.
조조가 헌제에게 아뢰었다.
"신은 일찍이 국은을 입은 몸으로 목숨을 바쳐 이에 보답할 것을 마음에 새겨
두고 있었습니다. 지금 이각.곽사의 무리들이 하늘을 거스른 큰 죄를 짓고 있아
오나 저들을 맞아 남김없이 쓸어없애겠습니다. 불초의 휘하 장병 20만은 모두
신의 뜻을 본받고 있는 충량들이오니 부디 마음 편안히 하시고 옥체를 잘 보존
하소서."
조조의 말에 헌제는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오, 그대야말로 진정 사직을 위한 신하가 아니더냐."
헌제가 조조를 치하하자 주위에선 만세 소리가 드높이 울려 퍼졌다.
헌제는 조조를 사예교위의 가절월을 주고 녹상서사의 벼슬을 내렸다. 조조는
이제 당당한 정승의 지위에 오른 것이다.
조조는 만세 소리에 휩싸인 채 퇴궐하고, 황궁도 오랜만에 활기를 되찾았다.
한편 뜻하지 않은 조조의 출현으로 크게 패한 이각.곽사군은 이제 적군으로
몰리게 될 판이었다. 일이 다급해진 이각.곽사는 군사를 서둘러 수습했다.
"조조의 군사는 한낱 외방의 잡군에 지나지 않는다. 그들은 먼 길을 급히 오느
라 군마가 모두 지쳐 있다."
이각.곽사는 이렇게 의견을 모으고 조조군에게 공격의 고삐를 늦추지 않고 있
었다.
그러나 모장 가후만은 이를 만류했다.
"그를 만만히 보아서는 안 됩니다. 조조는 당대에 드문 효장(사납고 날랜 장
수)일 뿐만 아니라, 그의 휘하에는 뛰어난 책사와 무장들이 많습니다. 군사들
역시 뛰어난 자들만 뽑은 정병들입니다. 차라리 역을 버리고 순리를 쫓아 항복
함만은 못합니다.
가후의 말에 이각은 벌컥 화부터 냈다.
"싸우기도 전에 방자하게 불길한 말을 서슴지 않다니. 네놈이 우리의 예기를
끊으려고 작정이라도 했단 말이냐?"
이각은 그 말과 함께 칼을 빼들었다. 주위에 있던 정수들이 그런 이각을 가까
스로 말렸다. 목이 달아날 판이었으나 겨우 목숨을 건진 가후는 그날 밤 미련없
이 그들의 진을 빠져 나와 행방을 감추어 버렸다.
다음 날 이각은 이섬.이별 두 조카를 선봉으로 하여 조조군에게 싸움을 걸었
다. 그렇지 않아도 이쪽에서 먼저 쳐들어갈 참이었던 조조는 오히려 제발로 찾
아오자 즉시 허저를 불렀다.
"허저, 빨리 나아가 저놈들을 잡아오라!"
이에 허저가 말을 달려나가는데 그 빠르기가 주인의 손등을 떠난 매와 같았
다. 이섬에게 다가간 허저는 2, 3합을 부딪는가 십더니 어느 새 그의 목을 떨어
뜨렸다. 이별이 흠칫 놀려 말머리를 돌렸다.
"이놈 게 섰거라!"
허저의 외마디 호통과 함께 그마저 목이 떨어졌다. 허저는 떨어진 두 사람의
목을 들고 진으로 되돌아왔다.
허저의 용맹 무쌍하고 늠름한 모습에 가까이 있던 적들도 그를 쫓을 엄두를
내지 못했다. 조조는 허저의 등을 쓰다듬어 주며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그대야말로 나에게 살아 있는 번쾌일세."
번쾌는 유방이 한을 세우는 데 큰 공을 세운 맹장으로, 조조는 허저를 그에
비유하여 칭찬했다.
조조는 하후돈.조인에게 각기 군사를 이끌게 하여 조우군으로 편성한 뒤 자신
은 직접 중군을 이끌었다.
이각은 크게 호기를 부리며 내보낸 이섬.이별이 제대고 한 번 싸우지도 못하
고 넘어지니 기세가 꺾일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조조가 직접 보검을 빼들고 총
공세를 펴니 그 기세가 하늘을 찌를 듯했다. 조조가 공세를 멈추지 않고 몇날
몇밤을 그렇게 추격하니, 죽고 상하는 자도 많았지만 항복하는 자는 그 수를 헤
아릴 수도 없었다.
겨우 목숨을 건진 이각.곽사는 살아 남은 졸개들을 이끌고 병든 들개처럼 처
량한 꼴이 되어 깊은 산중으로 숨고 말았다.
헌제는 조조가 이각.곽사군을 대파하자 한층 더 조조를 믿고 의지하게 되었다.
이로써 조정의 권세는 자연 조조의 것이 되고 말았다.
조조는 베어 낸 적군의 우두머리들을 거리에 효수케 하고, 영을 내려 민심을
안정 시켰다. 그리고 군사의 계율을 엄정히 하여 성 밖에 주둔시켰다.
조조가 이각.곽사군을 무지르고 헌제의 신임을 한몸에 받아 조정의 권세를 오
로지하게 되자 양봉이 어느날 밤 한섬에게 조용히 말했다.
"조조가 이제 큰 공을 세우고 낙양성을 평온케 하니 앞으로 대권은 그의 손에
넘어갈 것이오. 이제 그의 세상이 되면 지난날 목숨을 걸고 우리가 어가를 보
필한 보람을 어디서 찾겠소? 차라리 따로이 훗날을 기다려 도모함이 어떻겠소?"
"귀공도 그렇게 생각하시오?"
금문에 나가고 있는 한섬도 양봉과 같은 생각인 듯 맞장구를 쳤다.
"조조는 그들의 훈공을 첫번째로 내세구고 우리들은 안중에도 없을 것이오."
두 사람은 이런 얘기를 주고받다가 서로 의견을 맞추고 천자 앞에 나가 아뢰
었다.
"이각.곽사군을 쳐부쉈지만 아직 그들 두 놈의 목을 친 것은 아닙니다. 살려
두면 뒤에 또 무슨 일을 꾸밀지 모르므로 이때 그들을 사로잡아 후환을 없애야
합니다. 신 등이 그 뒤를 쫓아가 목을 잘라 오겠습니다."
헌제는 이각.곽사에 대한 원한이 뼈에 사무칠 뿐만 아니라 그들에게 쫓겨다니
며 갖은 고생을 다한 터여서, 양봉.하섬을 가상히 여기고 아무 생각 없이 선선히
허락하였다.
양봉.한섬은 군사를 이끌고 대량(하남성)으로 말을 몰아 떠나버렸다.
그들이 떠난 다음 날 헌제는 조조에게 시신을 보냈다. 의논할 일이 있어 그를
어전에 들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칙사는 조서를 받들고 조조의 진영으로 갔다.
조조는 헌제의 칙사가 왔다는 말을 듣고 예를 갖춰 맞이한 다음 자신의 군막
으로 안내했다.
칙사는 미목이 수려하고 얼굴에 광채가 그득한 것이 예사사람 같지 않았다.
'흉년과 변란 통에 백성들이나 벼슬아치를 가릴 것 없이 모두 궁기가 완연한
데 어지하여 이 사람 홀로 그런 기색이 없는가.'
조조는 속으로 이렇게 생각하며 그에게 물었다.
"공의 얼굴에는 유난히 정기가 넘쳐 흐르고 있소. 어떤 음식을 먹기에 그렇
소?"
"특별한 음식을 먹는 것은 아니옵고, 30년째 채식만 하고 있습니다."
조조는 칙사의 대답에 한동안 고개를 끄덕이다 다시 물었다.
"지금 어떤 관직을 받고 있소?"
"효렴(각 지방에서 추천을 받아 관리가 됨)에 오른 뒤 원소와 장양의 휘하에
있었습니다. 천자께서 낙양으로 환궁하셨다는 말씀을 듣고 찾아와 뵈었더니 정
의랑의 벼슬을 주셨습니다. 저는 제음현 정도 사람으로 자는 공인이며, 이름은
동소라 합니다."
조조는 그의 이름을 듣자 반색을 하며 그를 반겼다.
"그대의 이름은 들은 바 있소. 다행히 여기서 이렇게 뵙게 되니 반갑기 그지없
소."
조조는 동소를 위하여 흔쾌히 술자리를 마련하고 그 자리에 순욱도 불러들였
다.
그런데 술이 몇 순배 돌기도 전에 급한 전갈이 날아들었다.
"조정의 명이라 하며 한 떼의 군사가 동쪽으로 갔다 하옵니다."
조조는 자신의 군사에게 그런 명을 내린 적이 없어 이상히 여겨, 그들을 알아
보라고 지시했다.
그러자 옆자리에 있던 동소가 그런 조조를 만류했다.
"그들은 아마 이각의 휘하였던 양봉과 산적 출신 한섬일 것입니다."
"그들이 왜 떠난다는 말입니까?"
조조가 까닭을 몰라 물었다.
"장군의 성망을 시샘하는 소인배들의 망동입니다. 대량으로 간다고 들었습니
다."
"이 조를 시샘한다는 것은 무슨 뜻입니까?"
조조는 동소의 말이 에사롭지 않다는 생각에서 이렇게 물었다.
어쩌면 그들이 자신의 속마음을 꿰뚫어본 것이나 아닐까 하는 염려 때문이었
다.
"하잘것없는 소인배들입니다. 그들을 걱정하실 필요가 없습니다."
동소가 주너없이 말했다.
"이각.곽사의 무리도 아직 소탕되지 않았는데, 장차 어찌 되겠습니까?'
동소가 조조의 말에 가볍게 웃으며 말했다.
"그 또한 근심하실 일이 못 됩니다. 발톱없는 호랑이이며, 날개를 잃은 독수리
일 따름입니다. 머지않아 그들은 장군의 손에 잡히는 몸이 될 것이니 개의치
마십시오."
조조는 동소의 시원스런 대답에 흡족했다. 술잔을 권하며 이번에는 조정에 대
한 일로 화제를 바꾸었다.
동소가 다시 입을 열었다.
"장군께서는 의로운 군사를 일으켜 나라를 어지럽히는 폭도들을 진압하여 천
자를 보좌하고 게십니다. 이는 저 춘추 시대의 제나라 환공.진나라 문공.진나라
목공.송나라 양왕.초나라 자왕, 즉 다섯 패자에 버금가는 공적입니다. 그러나 아
직도 전통이나 파벌이 있고, 소심한 관료들은 제각기 다른 눈, 다른 마음이 있어
모두 한 마음으로 장군을 따르지 않는 자도 있을 것입니다. 그리하여 장군께서
군사를 거느리고 이곳에 오래 머물면 좋지 않은 일이 생길까 우려됩니다."
동소의 뜻밖의 말에 조조가 물었다.
"그렇다고 당장 낙양을 떠날 수도 없는 일이 아닙니까?"
"낙양 땅은 정사를 개혁하는 데 적합한 장소가 못 됩니다. 따라서 천자가 계실
도읍을 허창으로 옮기는 것이 좋습니다. 환도한 지 얼마되지 않아 다시 허창으
로 옯긴다면 모두 불편을 느껴 기꺼이 따르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큰 뜻을
이루기 위해 많은 공을 들여야 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이치입니다. 장군께선
이를 행하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동소가 조조에게 간했다.
조조는 동소의 말에 뛸 듯이 기뻐하며 그의 손을 잡았다.
"실로 나도 그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소. 그러나 대량에서 양봉이 틈을 엿보고
있고, 백관들이 조정에만 있으니 무슨 일이라도 생기지 않겠습니까?"
"그것도 걱정하실 일이 못 됩니다. 양봉에게는 글을 보내 그를 안심시켜 놓으
십시오. 그리고 백관들에게는 도성에 양식이 없으니, 양곡이 풍부한 노양이 가까
운 허창으로 천도한다고 설들하면 대신들도 따르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조조는 동소의 거침없는 말이 하나도 사리에 어긋남이 없음에 놀랐다. 이윽고
동소가 작별을 고하자 조조는 다시 그의 손을 잡으며 말했다.
"앞으로 내가 도모하는 일에 많은 깨우침을 주시오."
동소가 가고 난 뒤 조조는 그날로 휘하의 장수들을 불러 천도에 대한 의견을
물으며 의논하기 시작했다.
조정에는 시중 태사령에 왕립이란 자가 있었다. 그는 일찍부터 천문에 밝았다.
어느 날 종정으로 있는 유애에게 왕립이 입을 열었다.
"천문을 보니, 지난 봄부터 태백성이 은하를 꿰뚫고 있으며, 형성(화성)의 운행
도 그쪽으로 향해 천관에서 만나려 하고 있소. 이는 금과불이 뒤바뀌는 형상으
로 반드시 새로운 천자가 출현함을 뜻하는 것이오."
"새로운 천자가 나타나다니 그게 무슨 말이오?"
유애가 깜짝 놀라며 반문했다.
"내 생각으로는 한의 천기와 운수는 다하고 새로운 기운이 진위 땅에서 일어
나려는 것이라 여겨지오."
왕립은 천자에게도 은밀히 이 사실을 아뢰었다.
"천명에도 이르고 떠남이 있으며 오행에도 흥하고 쇠하는 이치가 있습니다. 화
생토라 화를 대신하여 토가 흥할 것으로 보이니, 이는 곧 한을 대신하여 천하를
차지할 곳은 토를 대신한 위땅이 될 것이옵니다."
위 땅은 조조의 근거지인 중원 일대의 영토를 말한다.
왕립이 천자에게 고한 이 말은 곧 조조의 귀에도 들어갔다. 조조는 순욱을 데
리고 누대에 올라가 은밀히 물었다.
"순욱. 왕립이라고 하는 자가 천문을 보고 천자에게 고한 말은 무슨 뜻인가?"
"이는 곧 하늘의 계시인지도 모릅니다. 한실은 화를 그 본 바탕으로 천하를 이
룩했습니다. 그런데 주공께선 토에 속해 있습니다. 허창의 방위는 바로 토성 땅
이므로 도읍을 그리로 옮기시면 반드시 조씨 가문은 융성하실 것임을 뜻합니다.
이것은 바로 동소와 왕립의 말이 일치하고 있습니다."
"으음―. 그런데 순욱. 그렇다면 왕립이라고 하는 자에게 사람을 보내 그 말을
함부로 입 밖에 내지 말라고 함구령을 내려야겠네."
조조는 왕립에게 가만히 사람을 보내 쐐기를 박아 놓는 것을 잊지 않았다.
"조정에 대한 그대의 충성은 내 모르는 바 아니나 천도는 깊고도 오묘한 것이
니 함부로 말하지 않는 것이 마땅할 것이다."
천하에 용맹을 떨치고 내노라 하는 영웅 호걸들도 끝없는 대륙, 높고 낮은 산
과 들, 대자연의 위력 앞에서는 모두가 허약하기 이를 데 없고 하잘것없는 왜소
한 미물임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황하나 대강(양자강)에 홍수가 난다거나, 몽고에서 부는 황진, 메뚜기 떼가 내
습하여 한순간에 자연을 황폐화시키는 것을 보며 살아 온 그들이었다. 큰 미와
눈, 그리고 엄청난 자연의 재해 앞에는 무력하기 짝이 없는 것이 인간임을 체험
하며 살아 온 그런 문화 속의 영웅이었다.
그 체험을 바탕으로 자연히 뿌리깊이 박혀 온 사상은 인간은 오묘한, 보이지
않는 운명의 지배하에놓여 있다는 생각이었다.
운명은 인지로는 헤아릴 수 없으나, 그 섭리를 하늘은 알고 있으며, 자연은 이
를 예언한다고 믿어 온 것이었다.
그 때문에 역리는 천문이나 당시에는 최고의 학문이었다. 뿐만 아니라 정치·
병법·윤리에 이르기까지 음양의 이원과 천문지사의 학리는 그것을 기본으로 하
였다.
조조는 한동안 모사들과 천도에 관한 이모저모를 헤아려 본 뒤에 도디어 마음
을 굳혔다. 다음 날 조조는 대궐로 들어가 헌제에게 아뢰었다.
"신이 깊이 생각하옵건대 낙양은 이미 황폐하여 그 복구가 용이하지 않사옵니
다. 게다가 양식도 옮겨 오기 힘듭니다. 거기에 미하면 하남의 허창은 땅이 기름
지고 풍요로울 뿐 아니라 물산도 풍부합니다. 원하옵건대 도읍을 그곳으로 옮기
시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깊이 헤아려 주시기 바랍니다."
헌제가 어떻게 조조의 말을 물리칠 수가 있겠는가. 여러 대신들은 조조가 천
도를 거론하자 아연했으나, 조조의 위세에 눌려 감히 입을 열지 못했다.
드디어 날을 잡아 어가가 허창으로 출발하는 날이 되었다.
조조는 군사를 거느려 철통같이 천자를 호위했고, 그 뒤를 백관들이 따랐다.
그런데 출발하여 몇 리를 가지 않아 어느 능성에 이으렀을 때였다.
돌연 앞쪽 언덕 위에 크게 함성이 일더니 한 무리의 군사들이 들이닥쳤다. 그
들은 대량 땅으로 갔다던 양봉과 한섬의 군사였다.
조조를 가로막은 군사들 앞으로 한 장수가 문득 나서더니 큰 소리로 꾸짖었
다.
"게 섰거라 조조야. 황제를 탈취하여 어디로 가려느냐."
조조가 격노하여 말을 달려 가 보니 양보의 장수 서황이었다. 제법 위풍이 늠
름해 비록 적이기는 하나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저 서황을 대적하여 한번 겨뤄 보라!"
조조는 허저에게 명해 서황을 맞아 싸우게 했다.
허저가 기다렸다는 듯 독수리처럼 세차게 말을 몰아 그와 부딪쳤다. 허저는
조조가 '당대의 번쾌'라고 칭찬했던 장수였다. 그러나 서황도 무예가 절륜했다.
"여기가 어디라고 겁도 없이 나서느냐!"
허저가 외치자 서황도 지지 않고 소리쳤다.
"싸우다 등이나 돌리지 마라!"
두 용장이 싸우기를 50여 합에 이르렀으나 승부가 나지 않았다. 말은 땀으로
흠뻑 젖었으나 두 사람은 지친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얼마 동안 양 진영은 모두 숨소리를 죽이고 이들의 싸움을 지켜 보기만 했다.
조조는 이 싸움을 지켜보다 무슨 생각에서인지 갑자기 명을 내렸다.
"징을 울려라!"
고수는 일제히 퇴각의 징을 쳤다.
조조는 군사들을 물린 뒤 모사들을 불러모아 놓고 말했다.
"징을 쳐 군사를 거둔 것은 서황 때문이었소. 내가 양봉.한섬 따위는 족히 말
할 것도 못 되는 무리이나 서황은 참으로 비범한 장수이기에 내 차마 죽일 수
없었기 때문이요. 내가 원하는 바는 힘으로써 항복받기 보다는 계교를 써서 그
를 우리 사람으로 만들고자 함이오. 누구 서화을 내 사람으로 끌어올 만한 계책
을 가진 사람은 없소?"
그러자 행군종사(행군중의 집사) 만총이 나섰다.
"주공께서는 걱정하지 마십시오. 저는 서황과 동향일 뿐 아니라 이전에 만난
적도 있습니다. 오늘 밤 군졸로 가장하여 그의 진으로 들어가 잘 타일러 서황
의 마음을 사로잡아 보겠습니다."
조조는 기뻐하며 허락했다.
만총은 그날 밤, 군졸로 변장한 후 양봉의 군사들 틈에 끼여들어 서황의 진영
을 엿보았다. 서황은 갑주도 벗지 않고 장막을 드리운 채 홀로 앉아 있었다. 만
총은 다짜고짜 군막 안으로 들어서며 절을 했다.
"서 공, 그동안 평안하셨소?"
뜻밖에, 불쑥 군막 안에 들어선 낯선 사람을 서황이 한동안 지켜 보다 그가
만총임을 알아봤다.
"누군가 했더니, 그대는 산양 땅의 만백령이 아닌가?"
백령이란 만총의 자였다.
"옛 정이 생각나서 내 불현 듯 이렇게 찾아왔네."
"그래 지금은 무얼하고 지내기에 그런 행색으로 예까지 왔는가?"
"나는 조 장군을 모시고 있네. 오늘 뜻밖에도 싸움터에서 자네를 보고 한 마
디 이르고 싶은 말이 있어 위험을 무릅쓰고 이곳에 왔네."
"무슨 긴한 말이기에 이토록 위험한 길을 왔는가?"
서황은 만총에게 자리를 권하며 찾아온 연유를 물었다.
"사실은 오늘 조 장군께서 징을 쳐 군사를 물리신 것은 자네를 살리기 위해서
였네. 자네의 용맹과 지략을 보고 마음 깊이 자네를 아끼고 있네. 조 장군은 당
대의 영웅일세. 사람을 볼 줄 알고, 귀하게 여길 줄 아는 호걸일세."
"갑자기 울린 징 소리는 그 때문이었나?"
"그렇다네. 자네 같은 인물이 어찌하여 양봉.한섬 같은 암우한 자들에게 몸을
굽히고 있나? 인생은 백 년에도 미치지 못하는 짧은 세월이네. 한 번 잘못으로
인한 오명은 천 년이 지나도 지워지지 않네. 자네는 어리석은 무리를 버리고 밝
은 분을 찾아 우리와 함께 큰 일을 도모해 봄이 어떠한가?"
그 말에 서황은 고개를 숙여 생각에 잠기다 한숨을 내쉬면 말했다.
"양봉이 큰그릇이 못 된다는 건 나도 알고 있네. 또한 조 장군의 영매함도 익
히 들어 알고 있네. 그러나 어찌 주종의 의리를 이제 와서 저버릴 수 있겠나?"
만총은 다시 서황을 어우르고 달랬다.
"옛말에 이르기를 '지혜로운 새는 나물를 골라 둥지를 틀고, 현명한 신하는 주
인을 가려 섬긴다'고 하지 않던가. 섬길 만한 주인을 만났고, 그 주인이 자네를
아께 귀히 쓰려고 하는데도 사사로운 정분에 얽매여 그냥 지나쳐 버린다면 어
찌 남아 대장부가 할 일인가?"
서황이 잠시 생각에 잠기다 결심한 듯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알았네. 자네 말에 따르겠네."
서황이 뜻대로 움직여 주자 만총은 슬며시 욕심이 생겼다.
"이왕이면 조 장군에게 가는 예물로 양봉.한섬의 목을 베어 가면 어떨까? 조
장군의 기쁨이 더욱 클 걸세."
그러나 서황은 그 말에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주군으로 섬겨 왔던 사람의 목을 베어 적진에 갈 마음은 없네. 그것은 의가
아니니 나는 결코 그런 짓은 할 수 없네."
"자네야말로 참으로 의기 남아일세. 자, 그럼 지체할 것 없이 이대로 떠나세."
만총은 더 이상 권하지 않고 서둘렀다. 서황은 수십 기의 졸개를 거느리고,
만총의 안내로 조조의 진영으로 향했다. 서황이 군사를 데리고 조조 진영으로
달아났다는 소식은 곧이어 양봉의 귀에 들어갔다. 양봉은 크게 노해 펄쩍 뛰며
곧 1천여 기를 이끌고 서황의 뒤를 쫓았다.
한동안을 급히 뒤쫓으니 저만치 달려가는 서황이 보였다.
"주인을 배반한 서황, 게 섰거라!"
양봉이 크게 소리치며 말에 채찍을 가했다. 쫓고 쫓기며 그들이 어느 산비탈
에 이르렀을 때였다. 갑자기 '펑!' 하고 산이 떠나갈 듯한 폭음이 울렸다.
이어 산 위아래에서 일제히 횃불이 오르더니 복병들이 여기저기서 쏟아져 나
왔다.
"네놈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꼼짝 말고 게 섰거라!"
조조가 군사를 이끌고 나타나며 양봉을 보고 외쳤다. 앞만 보고 치닫던 양봉
이었다. 깜짝 놀라 군사를 돌려 조조의 협공을 헤쳐 나가기 위해 안간힘을 다했
다. 때마침 한섬이 나타나 조조군과 어지러운 싸움을 벌이는 틈을 이용해 양봉
은 겨우 목숨을 건져 달아날 수 있었다.
조조는 어둠 속을 헤매는 적군에게 세찬 공격응 가했다. 양봉.한섬의 군사들은
태반이 항복하고 말았다. 양봉과 한섬은 얼마 남지 않은 군사를 이끌고 남양의
원술에게 의탁하기 위해 말을 달렸다.
조조가 군사를 이끌어 진영으로 돌아오니 만총이 서황을 데기고 당도해 있었
다. 조조는 크게 기뻐했다.
"근자에 이르러 가장 큰 기쁨이다."
조조는 서황을 크게 반기며 그가 아끼는 장수와 똑같이 후대하였다.
이제 조조에게는 거리낄 것이 없었다. 천자의 어가를 이끌어 일사천리로 새로
운 도읍 허창, 허도에 당도했다. 그곳에는 옛 궁문 전각 있었고, 성 아래쪽 시가
지도 제법 정돈되어 있었다.
조조는 먼저 궁중을 정하고 종묘를 건조하는 한편, 성대(조정의 주요 관원들이
모이는 곳)와 사원 등 아문을 배치하고 성곽과 부고도 수축하여 허도의 면모를
일신시키고 동승 등 13인을 열후에 봉했다.
조조는 스스로 대장군 무평후가 되어 천도를 간한 동소를 낙양령에 등용하고,
서황을 이끌어 온 만총을 허도령으로 발탁하였다.
또한 순욱은 시중 상서령, 순유를 군사로 삼았고, 곽가는 나마제주로, 유엽은
사공 연조, 모개.임준은 전농 중랑장을 삼아 돈과 양식을 독촉해 받는 직책을 맡
게 하였다. 정욱은 동평상, 범서은 동소와 함께 낙양영으로 삼았다.
하후동.하후연.조인.조흥은 모두 장군의 칭호를 내리고, 여건.이전.악진.우금.서
황 등이 교위에, 허저.전위는 도위에 봉했다.
그 밖에 장졸들에게도 그 공과 재주에 따라 그에 합당한 벼슬을 내렸다. 조조
가 몸소 이 일을 집행하니 조정은 모두 그의 휘하들로 메워졌고, 대권도 자연히
그의 손에 들게 되었음은 물론 이었다.
조정의 중요한 일은 이제 그를 거쳐서야 헌제에게 상주할 수 있게 되었다. 그가
조정을 출입할 때는 갑주를 입은 정병 3백이 활과 창을 번쩍이며 뒤다랐다.
천도에 이어 대권을 한 손 에 쥔 조조는 후당에다 크게 잔치를 베풀고 모사와
장수들을 불러모아 앞일을 의논했다. 조조는 항상 가슴 속의 우환거리로 여기고
있던 유비 문제부터 거론했다.
"유비는 서주에 군사를 머물게 한 뒤 서주태수가 되더니, 이제는 여포를 소패
에 두고 돌봐 주고 있는 모양이오. 여포와 유비가 힘을 모아 쳐들어오면 이는
실로 큰 우환덩어리가 아닐 수 없소. 공들은 이에 대해 묘책이 있으면 말해 주
기 바라오."
허저가 선뜻 나서며 말했다.
"군사 5만만 주신다면, 제가 가서 여포의 목과 현덕의 목을 말안장 양쪽에 매
달고 돌아오겠습니다.
그러자 순욱이 허저의 말을 가로막았다.
"허 장군은 자신의 용맹만을 믿는 것 같으나 용맹만으로 되지 않는 것도 있습
니다."
조조가 입을 열었다.
"상서령이 자세히 말해 보시오."
조조는 천도를 주장했던 순욱에게 일렀다. 순욱이 진병을 만류하는 데는 그만
한 까닭이 있다고 여겼기 때문이었다.
"지금 도읍을 새롭게 정한 터에 함부로 군사를 움직이는 것은 좋지 않습니다.
그 동안 막대한 건축과 병비시설 등에 많은 재정을 투입했기 때문에 당장 대군
을 이끄는 데는 무리가 따릅니다."
"으음―, 그래서?"
"제가 생각하고 있는 한 계책은 곧 두 호랑이가 한 먹이를 두고 서로 다쿠게
하여 잡아먹게 하는 '이호경식지계'입니다. 유비는 지금 서주에 있으나 아직 천
자의 조명을 받은 적이 없습니다. 주공께서는 천자께 아뢰어 유비에게 서주목
의 벼슬을 내리되, 밀서를 동봉하여 유비로 하여금 여포를 죽이게 하는 것입니
다. 만약 이 일이 뜻대고 되면 유비는 자기 한 팔을 스스로 자르는 격이 됩니다.
여포가 없다면 유비를 치는 일은 어렵지 않은 일입니다. 설령 일이 잘 안 되더
라도 이번에는 유비가 자기를 죽이려 했다는 것을 안 여포는 유비를 죽이려 들
것입니다. 이가 곧 서주란 먹이를 두고 두 범을 다투게 하는 이호경식지졔입니
다."
조조는 순욱의 말에 크게 감탄하여 고개를 끄덕였다. 그야말로 칼 한번 빼지
않고 서주를 우려낼 수 있는 계책이었다. 조조는 그날로 천자께 아뢰어 유비를
정동장군 의성정후로 봉하고 서주목으로 삼는다는 조서와 함께 따로 한 통의 밀
서를 보냈다.
그 무렵 유비는 천자가 허창으로 천도했다는 소식을 듣고 있었다. 이는 낙양
으로 입성한 조조가 천도하도록 일을 꾸몄다는 것도 어렵지 않게 헤아릴 수 있
었다.
그렇다면 이제 천하는 조조의 손에 넘어간 것과 다름없는 일이었다.
원소와 원술, 그리고 공손찬, 또한 소패에 머물고 있는 여포가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이제 조조에게 천하의 대권을 고스란히 넘겨 준 격이 되고 말
았다.
일이 이렇게 되자 유비는 일단 천도를 축하해 주기 위한, 표문을 올리기로 하
고 사자를 보내기로 했다.
그런데 뜻밖에도 천자에게서 사자가 온다는 전갈이 왔다.
유비는 군의 경계에까지 나가 칙사를 맞았다. 유비는 칙사를 성 안으로 맞이
해 들인 후 크게 잔치를 벌였다. 칙사는 술대접을 받는 자리에서 한껏 위세를
부리며 말했다.
"사군께서 이 같은 천자의 은혜로운 명을 받게 되신 것은, 실은 조 장군께서
천자께 천거하신 덕분입니다."
"고맙소이다. 조 장군의 덕을 잊을 수 없소이다."
유비는 사자에게 고마움을 표했다.
도겸으로부터 패인을 물려 받기는 했으나 조정으로부터 명을 받지 않아 꺼림
칙했던 유비였다. 그런데 황제가 서주태수를 명하는 조서를 내리자 몹시 기뻤
다. 유비는 사자에게 다시 한 번 감사의 뜻을 표했다.
잔치가 끝느가자 사자는 다시 유비에게 한 통의 밀서를 건네 주었다.
유비는 사자가 준 조조의 개인적인 서신을 재빨리 펼쳐 보았다.
"잠시 여유를 주십시오. 따로 상의를 하여 방책을 마련하겠습니다."
조조의 서신을 읽어 본 후 유비가 가만히 말했다.
"유 사군께서는 조 장군의 은의를 잊지 않도록 하십시오."
칙사는 유비한테 한 번 더 당부한 후에 숙소로 돌아갔다.
유비는 관우·장비에게 조조가 보낸 서신을 보여 주었다. 서신을 보고 장비가
불쑥 입을 열었다.
"여포란 놈은 원래 의롭지 못한 놈이니, 이를 기화로 아예 죽여 버리는 것이
좋겠습니다."
그러나 유비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닐세. 그는 의지할 곳이 없어서 내게 의지해 왔네. 그를 죽인다면 나 역시
의롭지 못한 사람이 되고 만는 것일세."
"그러나 의롭지 못한 자를 살려 둔댔자 별로 좋은 일은 아닐 것입니다. 나라에
끼치는 해독은 누가 책임집니까?"
"차차 의로운 사람이 되도록 온정을 가지고 설득하겠네."
"그렇게 간단히 의로운 사람이 될 수 있다고 여기십니까? 두고 보시오. 그 자
때문에 좋지 않은 일이 생길 테니…"
장비는 여포를 죽이자고 거듭 말했으나 유비는 끝내 그의 말을 듣지 않았다.
관우 또한 장비와 다름없는 생각이었으나 유비가 이미 마음을 정한 터라 더 이
상 말은 꺼내지 않았다.
다음 날이 되자 여포가 서주성으로 찾아왔다.
그는 유바가 조정으로부터 정식으로 서주목의 인수를 받았다는 소식을 듣고
경하하러 온 것이었다.
"유 공께서 천자의 명을 받들어 서주목이 되셨다기에 축하의 말을 전하려고
찾아왔습니다."
유비는 허리를 굽혀 고마움을 표히했다. 그때 불쑥 장비가 칼을 빼들고 여포
를 죽이려 덤벼들었다.
유비가 깜짝 놀라 장비를 꾸짖으며 말렸다.
"익덕, 어찌하여 나만 보면 죽이려고 눈에 불을 켜느냐?"
여포도 놀라 소리쳤다.
"너같이 의리부동한 놈은 죽여 없애야 한다고 조조가 우리 형님에게 부탁해
왔다."
장비가 씨근덕대며 대뜸 여포에게 퍼부어댔다. 유비는 다시 장비를 쏘아보며
소리쳤다.
"장비는 칼을 거두지 못하겠느냐?"
유비가 장비의 칼을 뺏으며 호령을 거듭하자 그제야 장비는 시무룩한 얼굴이
되어 발을 쿵쿵거리며 나가 버렸다.
유비는 여포를 청해 들였다. 장비의 무례한 행동을 거듭 사과한후, 유비는 조
조에게 온 서신을 보이며 입을 열었다.
"장비가 한 말은 사실이오. 그러나 나는 그런 마음을 추호도 갖고 있지 않으니
공은 노여움을 푸시오."
"고맙소이다. 진정 고맙소이다."
여포는 유비가 서신까지 보여 주자 눈물을 흘리며 다시 말을 이었다.
"살피건대, 이는 분명히 조조가 사군과 나 사이를 이간시키려는 간교인가 합니
다."
"그렇습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맹세코 이 비는 그런 불의를 저지르지는 않
을 것입니다."
유비가 여포를 안심시키가 여포는 다른 때보다 더 유비의 넓은 도량에 감격하
며 물러갔다.
그 모양을 가만히 엿보고 있던 조조의 사자는 씁쓸한 얼굴이 되어 중얼거렸
다.
"실패로군. 이래 가지고는 이호경식지계도 아무런 소용이 없지 않은가……."
호랑이를 내몰아 이리를 삼키는 계교
유비와 여포를 충동질해 어부지리를 얻으려던 조조는 그 계책이 실패하자 다
시 유비로 하여금 원술을 치게하여 반목을 부채질한다. 유비·관우가 원술을 치
러 화음에 간 사이 장비는 하룻밤 줄주정으로 여포에게 서주성을 내주고 패장이
되어 유비를 뒤따른다.
장비는 유비의 호통에 그 자리를 물러났으나 부글거리는 마음을 달래지 못해
투덜거리고 있었다.
여포가 돌아갈 때도 유비가 몸소 성문 밖까지 배웅하는 모습을 보자 더울 속
이 끓었다.
'겸손한 것도 분수가 있지.'
유비가 여포를 배웅하고 오자 장비는 기어이 참지 못하고 불퉁거렸다.
"형님, 사람이 좋은 것도 지나치면 화를 당합니다. 왜 여포를 죽이지 않으셨습
니까?"
장비의 말에 여태까지 입을 다물고 있던 관우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유비가 정색을 하며 말했다.
"조조가 노리는 것은 여포와 내가 서로 피를 흘리며 싸우도록 만드는 것이네.
사람이 서로 싸우면 필경 두 사람 중에 어느 한 사람, 아니면 두 사람 다 힘이
약해지게 되네. 이를 이용한 어부지리를 얻자는 게 조조의 속셈이네. 그러니 그
런 계교에 넘어가서야 되겠나?"
"왜 그런 계책을 꾸미는 것일까오?"
"두 사람이 힘을 합쳐 자기를 칠까봐 두려운 것일세."
관우가 그 말을 듣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형님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한 어리석음 이제야 깨우쳤소."
그러나 장비는 아직도 못마땅한 둣 투덜거리고 있었다.
"그렇다고 해도 여포란 놈은 뒤에 반드시 분란을 일으킬 것입니다. 그 놈은 죽
여 없애야 합니다."
"그건 장부가 취할 태도가 아니네."
유비가 장비를 달랬다.
다음 날 유비는 조조의 사자가 머물고 있는 역관을 찾았다.
"주공의 뜻은 언제든지 따르겠으나, 여포 또한 가벼운 인물이 아니므로 기회를
보아 시행하도록 하겠습니다."
사자는 그날로 허창으로 돌아갈 채비를 차렸다. 유비는 사자편에 천자에게 감
사하는 상주문을 올리고, 조조에게는 따로 사자에게 말한 내용으로 답장을 써
보냈다.
사자는 허도로 돌아갔다. 그리고 유비가 제발로 찾아온 여포를 죽이지 않았음
을 고했다.
조조는 순욱을 불러 의논했다.
"과연 유비는 다르오, 재치있게 슬쩍 그 책략을 패했소. 어떻게 하면 좋겠소?"
"그렇다면 또 하나의 계교가 있습니다. 즉 이리로 하여금 호랑이를 몰아 내는
책략으로 '구호탄랑지계'가 그것입니다."
"어떻게 한다는 말이오?"
"은밀히 원술에게 사람을 보내 '유비가 천자께 은밀히 표를 올려 남군을 빼앗
고자 한다'고 전하게 합니다. 그러면 원술은 유비를 치려들 것입니다. 그럴 때
주공께서 유비에게 조서를 내려 원술을 치도록 하십시오. 천자의 명이라면 유비
는 따르지 않을 수가 없을 것입니다."
"이번에는 원수과 유비를 싸우도록 한다는 말인가?"
"두 사람이 싸우게 되면 전력을 기울이지 않을 수가 없을 것입니다. 그렇게 되
면 자연히 호랑이 굴인 서주성이 방비가 허술해져 빈 것이나 다름없게 됩니다.
비어 있는 호랑이 굴을 이리가 그대로 놓아둘 리 있겠습니까? 여포는 본디 의리
를 모르는 자입니다. 그 기회를 놓치지 않고 서주성을 취할 것입니다."
"으음―, 과연 신묘한 계책이오. 하지만 원술과 공손찬이 동맹을 맺고 있지 않
소. 또한 공손찬은 유비와 '형님, 아우'의 사이인데 이들이 가만 있을 리 없지 않
소."
"원술과 공손찬이 동맹을 맺은 것은 큰 뜻이 있어서가 아니라 자기의 근거지
를 지키기 위한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유비 또한 서주태수가 된 이래 공손찬의
휘하에 머물고 있는 처지가 아닙니다. 따라서 공손찬은 쓸데없이 싸움에 끼여들
려 하지 않을 것입니다."
조조는 순욱의 계교에 무릎을 치며 희색이 만면했다.
다음 날 조조는 원술이 있는 남양으로 급사를 보냈다. 다른 한편으로는 서주
성에도 위조한 조서를 보냈다.
서주의 유비는 천자로부터 다시 사자가 왔다는 말을 듣고 성 밖에 나와 조서
를 받들었다.
유비가 조서를 보니 '원술을 토벌하라'는 명이었다.
유비는 측근을 불러 대책을 논의했다. 미축이 조서를 보더니 말했다.
"이 또한 조조의 책략입니다. 이 책략에 넘어가서는 아니 됩니다."
"비록 조조의 책략이라곤 하나, 천자의 명으로 내려온 것이니 따르지 않을 수
가 없지 않은가?"
순욱이 유비가 천자의 명이라면 물리치지 않으리라는 예견은 그대로 적중되었
다. 유비는 천자의 명을 거역하지 않기 위해 내키지 않는 싸움 이었으나 곧 군
마를 점고하고 떠날 준비를 했다.
그때 손건이 나서며 입을 열었다.
"뒷일에 대한 대비가 중요합니다. 누구에게 서주성을 지키도록 하시겠습니까?"
유비는 관우와 장비를 불렀다.
"두 아우 중에 누가 이 서주성을 지키겠느가?"
관우가 말했다.
"제가 성을 지키겠습니다."
"그야 아우라면 안심이긴 하지. 그러나 그대와는 조석으로 매사를 의논해야 할
터이니 내 곁에 있어야 하오."
유비가 그렇게 말하자 장비가 불쑥 나섰다.
"형님, 제가 남겠습니다. 안심하고 출진하십시오."
장비가 나서며 안심하라고 말했지만 유비는 선뜻 응락하지 않더니 걱정스런
얼굴로 입을 열었다.
"아우가 성을 지킨다면 내가 마음이 놓이지 않네. 아우의 불 같은 성미는 달려
나가 적을 치는 데는 맞으나, 성 안에서 성을 지키기에는 맞지 않을 것 같아서
그러네."
"두고 보십시도. 어느 누구도 근접 못하도록 지키겠습니다"
"그것 뿐만이 아니네. 아우는 술에 취하면 혈기가 지나쳐 군졸들에게 매질을
하지 일쑤이니 걱정이네. 또 남의 말을 듣지 않고 매사를 경솔히 처리하려 드니
어찌 마음이 놓이겠나?'
장비가 다시 입을 열었다.
"이 아우는 지금부터는 술을 끊겠습니다. 또한 매질도 하지 않을 것이며 남의
말을 들어 일을 처리해 나가겠습니다."
장비는 말을 마치자 늘 허리춤에 지니고 다니는 백옥 술잔을 꺼내 땅바닥에
팽개쳤다. 그 술잔은 장비가 어느 싸움터에서 노획한 전리뭄이었는데 야광주를
갈아서 만든 명품의 마상배였다.
"이건 하늘이 장비에게 내린 은상이다."
장비는 항상 그 술잔을 품에 지니고 다니며 자랑하던 술잔이었다.
장비가 술잔까지 깨뜨리며 결의에 찬 결심을 보이자 유비도 다소 마음을 누그
려뜨렸다.
"장군께서 그렇게 말씀은 하시가, 그 주사는 뒤 귀처럼 태어날 때부터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오?"
미축이 그런 장비를 놀리는 것처럼 꾸며 장비의 다짐을 떠보았다.
그러자 장비는 눈을 부릅뜨며 화를 냈다.
"무슨 당치 않은 말씀이오. 나는 형님과 지금까지 지내오면서 한 번도 형님의
신의를 거스른 적이 없소. 공은 어찌하여 나를 가볍게 보시오."
유비는 그래도 장비가 못미덥다는 둣 다시금 말했다.
"아우의 마음은 잘 알았네. 그렇다면 진원룡을 이곳에 머물게 할 테니 만사 그
와 의논하여 일을 처리하게."
유비는 진등에게도 단단히 일러 일이 그릇됨이 없도록 당부한 뒤 그를 머물게
했다.
이윽고 유비는 3만여의 마보군을 거느리고 서주를 떠나 남야으로 향했다.
그 무렵 원술은 하남 땅에서 착실히 그 세력을 키워 가고 있었다. 하루가 다
르게 그 세가 커지니 명문인 원씨 일족 중에서도 가장 호방담대한 위세를 과시
하고 있었다.
유비가 원술을 치기 위해 남양으로 향할 즈음, 원술도 조조가 보낸 사자를 맞
이하고 있었다.
원술은 조조가 보낸 서장을 읽어 보았다.
유비가 천자에게 상주하여 연래의 야망을 이루고자 남양 침략의 허락을 청하
였소. 귀공과 나는 오랜 친구가 아니오. 어찌 이 사실을 모른 척하고 있을 수 있
겠소. 비밀리에 급히 알리는 바이니, 바라건대 한 치의 방심도 없기를 바랄 뿐이
외다.
읽기를 마친 원술은 대뜸 얼굴을 붉히며 입에 거품을 뿜었다.
"몇 해 전까지만 해도 짚신이나 삼고, 돗자리나 짜던 필부가 아닌가. 근자에
멋대로 서주를 차지하고 태수를 자칭하며 제후들과 동렬에 서겠다는 것도 해괴
한 일이거는, 내 이놈을 쳐서 버릇을 가르치려 했는데 제가 도리어 나를 치겠다
는 말인가, 내 이놈을 짓밟아 천하에 본보기를 보이리라!"
원술은 크게 노하여 상장 기령에게 10만의 군사를 주어 유비를 치게 하였다.
한편 유비의 군사도 남양을 향하다 두 군사는 임회군의 우이에서 서고 대하게
되었다.
원술군의 상장 기령은 산동 사람이었다. 그는 일찍부터 힘이 센 장사로 끝이
세 갈래 난 50근이 되는 날카로운 칼을 잘 쓰는 장수로 이름을 떨치고 있었다.
기령은 유비군을 맞아 진두에 나서며 소리쳤다.
"촌놈 유비는 듣거라! 제 분수도 모르고 무슨 연고로 우리 대국을 침범하는
가?"
기령의 말에 유비도 지지 않고 외쳤다.
"나는 천자의 조서를 받들고 있거늘 네 어찌 자청하여 역적의 오명을 쓰려 하
느냐. 감히 맞선다면 죽음만이 있을 뿐이다."
기령의 부하 중에는 순정이라는 부장이 있었다. 그는 유비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말을 박차며 달려나왔다.
"꼼짝 말고 게 섰거라!"
그러자 관우가 80근 청룡언월도를 휘두르며 그를 막았다.
"너 따위 졸개를 상대하실 우리 주군이 아니다."
순정은 느닷없이 나타난 관우를 맞아 칼과 칼을 맞부딪쳤다. 순정의 몸은 땀
투성이가 되었다. 순정은 관우와 부딪다 점점 밀려 개울가에까지 밀렸다.
"에잇"
다음 순간 관우의 힘찬 기합 소리가 터져 나오는가 했더니 청룡도가 번쩍하고
빛을 발했다. 순정의 몸은 두 동강이 나 '풍덩' 하고 물보라를 일으키며 강물에
잠겼다.
그러자 기령이 번개같이 말을 몰아 관우를 맞았다.
"일개 이름없는 조무래기 장수야, 감히 어디라고 나서느냐!"
기령이 무게 50근이나 되는 삼첨도를 휘둘러 관우를 내리쳤다. 그러나 관우는
청룡도를 휘둘러 기령의 삼첨도를 가볍게 막아냈다.
"네놈에게 이 청룡도의 맛을 보여 주마."
기령도 원술이 자랑하는 상장이었다. 관우와 맞싸운지 30여 합이나 어우러졌
으나 승부가 나지 않았다. 결국 기령은 말머리를 돌렸다.
유비가 일시에 군사를 몰아 달아나는 기령을 뒤쫓았다.
기령은 순정마저 죽고 없는 터라 군사를 물려 회음하구까지 물러나 진을 쳤
다. 유비군을 만만히 보고 단숨에 쳐부수겠다고 나선 기령이었다.
그러나 관우에게 혼이 나 진을 굳게 지키고 화살만 날릴 뿐, 좀처럼 싸우려
들지 않았다. 원래 기령군보다 군사가 적은 유비군은 섣불리 총공격을 감행할
수도 없었다. 유비군과 원술군은 서로 적진의 형세만 관망하며 대치하고 있었다.
한편 유비가 출정하고 나자 장비는 모든 잡무를 진등에게 맡기고 자기는 군무
에 관한 일만 보았다.
아침 저녁 망루에 올라 경비 상태를 점고했다. 장형인 유비가 싸움터에서 고
생한다 하여 자신은 갑옷도 벗지 않고 자리에 들었다.
장비는 매일 어김없이 성 안을 두루 살폈다. 장비의 열성에 장졸들도 솔선수
범했다. 성 안에서의 군무였지만 야영을 하듯 땅 위에서 잠을 자고 조식을 하며
근무지를 떠나지 않았다.
"모두 수고들이 많구나."
장비는 흡족하여 장졸들을 칭찬하며 다녔다. 하루 이틀이 지나자 장비는 장졸
들의 노고에 말로만 공치사나 뿌리고 다니는 것 같아 어쩐지 마음이 개운치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장비는 봉인해 둔 술창고에서 큰 술통 하나를 꺼내 장
졸들이 있는 가운데 갖다 놓았다.
"활줄을 항상 팽팽하게 매어 놓으면 줄이 늘어진다. 때로는 활줄을 풀어 둘 때
도 있어야 한다."
장비는 충실히 임무를 수행하고 있는 장졸들의 노고를 치하하기 위해 술자을
돌리게 하였다. 그러나 그것이 화근이었다.
"장군, 마셔도 괜찮겠습니까?"
부장들은 장비의 기색을 살피며 모두들 선뜻 술통에 손을 대지 못하고 있었
다.
"모두들 마셔라. 그 동안 밤낮없이 군무를 충실히 이행한 데 대한 상으로 베푸
는 술이다. 오늘만은 술 마시는 걸 허락하겠다."
그러나 성 안의 초소가 한두 군데가 아니었다. 여기도 한 통, 저기도 한 통,
이렇게 하여 성 안은 온통 술 냄새가 진동했다.
그러자 장졸들이 술을 한 사발 떠와 장비에게 내밀었다.
"장군님, 한 잔만 드십시오. 실은 장군님이 술을 드시지 않고 계시니까 저희들
이 잔을 들 수 없습니다."
장비가 초소를 순시하는 동안 장졸들이 권유했다. 입맛을 쩝쩝 다시던 장비는
그 말에 그만 술잔을 무리치지 못하고 받아 마셨다.
'한 잔쯤이야 어떠랴?'
장비는 이렇게 자위하며 한 잔을 마셨으나, 일단 술이 입 안으로 들어가자 참
을 수가 없었다.
"그 큰 잔으로 넘치게 한 잔 다오."
술이란 처음 한 잔이 문제가 된다. 장비는 일단 술을 딥에 대자 벌컥벌컥 연
거푸 두세 잔을 마셨다. 이렇게 되면 이제 끊어진 둑이었다.
"자, 술을 더 가져오너라"
술을 가지러 갔던 군사가 빈손으로 돌아왔다.
"창고지기가 이제 더 이상 술통을 내어 줄 수 없다고 합니다."
"뭐야? 괘씸한 놈 같으니. 이 장비의 명령이라고 하라. 만약 안 된다고 하면
소대를 이끌고 가 술창고를 점령해 버려라, 하하하."
장비가 한참 흥을 돋우고 있는데 술 창고지기의 보고르 받고 부장 조표가 기
겁을 하여 헐레벌떡 달려왔다.
조표는 이미 만취해 있는 장비를 보자 어이가 없어 멍하니 서 있었다.
장비는 그때 여러 관원들에게 큰 술잔을 돌리고 있었다. 때마침 조표가 그 자
리에 나타났으므로 그에게도 술잔을 돌리게 했다. 그러나 조표는 술을 거절했다.
장비는 벌컥 화를 냈다.
"어찌하여 네놈만 마시지 않겠다는 말이냐?"
장비는 충혈된 눈을 부릅뜨며 조표를 노려보았다. 그 서슬에 조표는 마지못해
술잔을 들이켰다. 술을 마신 조표가 자리를 뜨려하자 장비가 이를 제지했다.
"어디고 가려느냐, 술좌석이 파하지도 않았는데 자리를 뜨려 하니 이 장비를
어떻게 보고 그러느냐."
"저는 정말로 술을 마시지 못합니다.
"조금 전에는 마시지 않았느냐. 자 술잔을 받아라."
그러나 조표는 술잔을 받으려 하지 않았다. 장비의 얼굴이 점점 더 붉어지더
니 고리눈을 부릅떴다.
"이놈 명령을 어기려 드느냐? 저놈을 끌어 내어 곤장 1백 대를 쳐라."
장비가 군사를 불러 조표를 끌어내리게 했다. 보다못해 진등이 급히 일어나
급히 일어나 장비한테 간했다.
"주공께서 떠나실 때 하신 말씀을 잊으셨소? 부하들에게 매질을 하지 않겠다
고 약속하지 않았소?"
"그대는 문관이니, 문관 일이나 잘 돌보시오. 쓸데없이 아무 일에나 나서지 마
시오."
장비가 진등에게까지 벌컥 화를 내자 조표는 더욱 안절부절이었다. 장비에게
용서를 빌어 이 자리를 모면하 생각으로 얼른 입을 열었다.
"익덕 공, 술을 마시지 못한다는 건 거짓이 아니오. 내 사위의 체면을 보아서
라고 이제 그만 용서해 주오."
"네놈의 사위가 누구길래 그러느나?"
"여포가 제 사위입니다."
조표가 그만 해서는 안 될 말을 하고 말았다. 여포란 말에 장비는 속이 뒤틀
릴 대로 뒤트려 고리눈을 다시 부릅뜨며 소리쳤다.
"막상 네놈에게 곤장을 칠 작정은 아니었다. 그런데 네놈이 여포를 믿고 이토
록 방자하게 구니 이젠 용서치 못하겠다. 너를 치는 것이 바로 여포를 치는 것
이다!"
장비는 군사들에게 명하여 다시 조표를 끌어내리니 군사들은 몸둘 바를 몰라
쩔쩔매고 있었다.
장비가 곤장 쉰 대를 쳤을 때, 군사들은 더 이상 보고만 있을 수 없어 간곡히
만류하자 그제야 곤장을 놓았다.
술자리가 파하기 전에 조표는 군사의 부축을 받고 돌아갔다. 조표의 마음 속
에는 장비에 대한 앙심이 부글부글 끓어오르고 있었다.
조표는 집에 돌아오자 서찰을 써 소패에 있는 여포에게 몰래 사람을 보냈다.
소패성까지는 불과 40여 리의 멀지 않은 거리였다.
때마챔 여포는 잠든 지 얼마 되지 않은 때였다.
심복인 진궁이 조표의 부하로부터 자초지종을 듣고 난 뒤 서찰을 들고 여포의
침실로 들어갔다.
"장군, 하늘에서 온 희소식입니다."
여포는 조표의 서찰을 읽어 보았다.
지금 서주성은 장비 혼자 지키고 있으며, 오늘은 군사들과 함께 술에 취해 곯
아떨어져 있기 때문에 서주성을 칠 더없이 좋은 기회라는 내용이었다.
조표의 글을 보고 여포는 얼마 전 장비가 자기를 죽이려고 칼을 빼든 일이 생
각나 주먹을 불끈 쥐었다.
진궁 또한 가만 있지 않았다.
"이곳은 오래 머물 곳이 되지 못합니다. 지금이 서주를 빼앗을 절호의 기회입
니다. 이 기회를 놓치면 후에 크게 후회할 날이 올 것입니다."
진궁의 재촉하는 둣한 말에 여포는 갑옷을 꿰입고 말에 올랐다.
적토마는 오랜만에 갑옷을 입고 방천화극을 비껴든 주인을 태우고 밤길을 달
렸다.
여포의 뒤에는 그가 거느리는 군사 5백 기가 뒤따르고 있었으며, 고순에게 후
군을 이끌게 했다.
여포는 삽시간에 서주성에 이르렀다. 여포는 성문 아래에 이르자 큰 소리로
외쳤다.
"문을 열라. 유 사군께서 급한 일로 사람을 보내셨다."
조표는 여포에게 서찰을 보낸 뒤 여포가 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미 성문
을 지키는 군사들은 자기의 부하들로 비치해 놓고 있었다. 밖에서 성문을 열라
고 외치는 소리가 들리자 그가 곧 여포임을 알아차리고 성문을 활짝 열었다.
밤은 깊어 사경 무렵이었다. 그날따라 달이 휘영청 밝았는데 성위에서는 인기
척 하나 없이 고요했다.
장비는 그 후에도 상당히 많은 술을 마셨는지 코를 골로 있었다.
여포의 군사들은 봇물이 터지듯 성 안으로 밀려들어왔다.
여포군이 함성을 지르며 성내로 밀려들자 장비도 그 소란통에 그제서야 잠이
깨었다. 창칼이 어지럽게 부딪는 소리에 깜짝 놀라 벌떡 일어났으나 이미 만취
한 장비는 몸이 제대로 움직여지지 않았다.
'아뿔사 큰일났구나!'
장비는 급히 달려갔다. 그러나 이미 때는 늦었다.
성 안은 위아래 할 것 없이 혼란에 빠져 있었다. 발 아래에 넘어져 있는 시체
는 모두 자기 편 군사들이었다.
'음―, 여포로구나.'
그렇게 생각이 들자 정신이 번쩍 들어 말 위에 뛰어올라 장팔사모창을 들고
성 안의 광장으로 나아갔다.
그곳에는 조표의 부하들과 여포의 군사들이 한통속이 되어 날뛰고 있었다. 장
비는 그들을 향해 나아가 사모창을 휘둘렀으나 어찌하랴, 아직 취기가 가시지않
고 있었다.
장비가 비록 술에 취했다 하나 여포는 장비의 용맹을 알고 있는 터라 함부로
덤벼들 수 없었다. 그보다도 서주성을 점령하는 것이 더 급한 일이었다.
서주성의 군사는 술에 취한 데에다 기습까지 당해 지리멸렬이었다. 게다가 그
들을 이끄는 장수마저 없으니 적에게 베이는 자보다 항복하는 자가 더 많았다.
"장군, 어서 피하십시오."
그럴 때 부장 18기가 장비를 혼란 속에서 호위하며 동문에 혈로를 열어 그곳
을 빠져 나왔다.
조표는 장비가 동문을 향해 도망쳤다는 말을 듣고 군사 1백여 기를 이끌고 뒤
쫓았다.
"이놈 장비, 네놈의 목을 쳐 원한을 풀겠다. 게 섰거라!"
"저건 조표가 아니냐?"
장비가 문득 목소리를 듣고 뒤쫓는 군사가 조표임을 알자 갑자기 말을 홱 되
돌려 달려나갔다.
장비가 취했다고는 하나 조표는 그와 상대가 될 리 없었다. 장비는 조표가 배
반하여 여포를 성내로 끌어들였다고 생각하니 화가 나 견딜 수가 없었다.
이를 부드득 갈며 미친 둣이 달려간 장비는 단 3합 만에 조표의 목을 쳐버렸
다.
조표가 이끈 1백여 명의 군사들도 장비의 사모창 앞에 낙엽 구르듯이 뒹굴었
다. 붉은 피가 여기저기서 튀어 달을 가리는 듯했다.
몸이 온통 땀과 피로 얼룩진 장비는 그제야 정신이 들었다.
"아아!"
장비는 혼자 깊은 탄식을 내뱉었다. 장비는 성을 빠져 나온 얼마 되지 않는
군사를 이끌고 쓸쓸히 유비가 있는 회남 땅으로 향했다.
이 무렵, 여포는 드디어 마수를 드러내어 서주성을 수중에 넣은뒤, 백성들을
안심시키기 위해 곳곳에 방을 내 걸었다.
나는 오랫동안 현덕 공의 은의를 받아왔다. 이제 일이 이 지경에 이르렀으나,
이는 유비 공을 거스른 거사가 아니라 성 안의 사사로운 싸움을 진압하기 위함
이었다. 이적의 무리를 쫓고 장차 있을 화근을 뽑기 위함이다. 모름지기 군민 모
두 나의 다스림 속에 안심하고 조속히 평화로운 일상 생활에 전념해 주기 바란
다.
여포는 또 친히 성의 후각에 나아가 장졸들에게 엄명을 내렸다.
"부녀자나 포로들을 함부로 다루지 말라. 만약 군율을 어기면 목을 베리라."
여포는 군사 1백여 명을 풀어 유비의 집을 지키게 하여 아무도 근접하지 못하
도록 하였다. 지난날 유비가 자기에게 베푼 은혜에 보답하는 것을 보여 백성들
의 환심을 사기 위한 것이었다.
한편 유비는 그날도 회음에 진을 편 채 대치하고 있었다.
해질 무렵이 되자 초병이 급보를 전했다.
"한 떼의 군마가 보입니다."
유비가 자세히 보니 땅거미 지는 광야 저쪽에서 석양을 등지고 터벅터벅 이쪽
을 향해 오는 한 무리의 인마가 보였다.
"장 장군과 18기 의 부장들이 오고 있습니다."
관우가 보낸 정찰병이 외쳤다.
"뭐야, 장비라고?"
유비와 관우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불현 듯 불길한 예감이 들기는 유비나
관우 다 마찬가지였다.
얼마 후 장비와 그의부장, 그리고 장졸들이 패잔병의 비참한 몰골을 하고 유
비의 진문 앞에 도착했다.
장비는 말에서 내려 고개를 숙이고 울먹이며 조표와 여포가 서로 내통하여 서
주를 야습한 경위를 고했다.
"살아서 얼굴을 뵈올 면목이 없습니다. 다만 죄를 빌기 위해 부끄러움을 무릅
쓰고 예까지 왔을 뿐입니다."
장비의 말을 듣고 있던 유비가 한숨을 내쉬며 탄식했다.
"성을 얻었다고 기뻐할 것도 없고, 성을 잃었다고 근심할 것도 아닐터, 다만
천의가 우리에게 있다면 다시 그 모든 것이 돌아오리라.
"형님의 가족들은 어떻게 되었느냐?"
관우가 고개를 숙인 장비에게 물었다.
"모두 성 안에 계실 것입니다."
장비가 기어드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관우가 격노하여 발을 구르며 장비를 나무랐다.
"성을 떠나올 때 술을 삼가라고 그토록 간곡히 당부하지 않았더냐, 너 또한 그
렇게 다짐하지 않았어냐. 그런데 어찌 장형의 가족까지 여포의 손에 맡기고 혼
자서 도망쳤더란 말인가!"
관우의 고함 소리에 고개를 숙잍 채 눈물을 글썽이던 장비가 갑자기 칼을 빼
들고 제 목을 찌르려 했다. 유바가 이를 보고 깜짝 놀라며 급히 칼을 빼앗았다.
"그 칼로 제 목을 쳐 주십시오. 제 어찌 살기를 바라겠습니까."
유비는 장비의 등을 두드리며 말했다.
"옛 사람이 이르기를, '형제는 수족과 같고 처자는 의복과 같다'고 하였다. 옷
은 해지면 다시 지을 수 있으나 손발이 끊어지면 어찌 이을 수가 있겠느냐? 잊
었는가 장비, 우리 셋은 도원에서 의를 맺어, 형제의 서약을 하고 죽기를 같이하
자고 하지 않았더냐. 비록 성과 가솔을 잃었다 하나, 그 일로 어찌 형제의 의를
끊겠느냐? 가솔이 갇혀 있다고 하나 여포가 죽이지는 않을 테니 그들을 구해 낼
희망은 있네. 방도를 찾아보기로 하세. 한때의 실수로 목숨까지 버릴 수야 없지
않은가?"
유비가 눈물을 흘리며 말하자 관우.장비도 유비의 넓은 도량과 인자함에 감격
하여 목이 메었다.
장비가 서주성을 여포에게 빼앗기고 회남으로 오자 그 소식은 원술에게도 전
해졌다. 원술은 뛸 듯이 기뻐하며 여포에게 급히 사람을 보냈다.
만일 공께서 현덕의 후진을 공격하여 남양군을 도와 현덕을 함께 물리 친다면
양곡 5만 석, 군마 1백 필, 금은1만 냥, 비단 1천 필을 주겠소.
원술은 사자를 통해 여포에게 이 같은 제의를 하였다.
여포는 원술이 제시한 재물에 욕심이 났다. 원술의 제의에 두말 없이 응하기
로 하고 고순에게 5만의 군사를 주어 유비의 후미를 치게 했다.
유비는 우이의 진영에서 그 소식을 듣고 급히 관우.장비를 불러 들였다.
"어떻게 하면 좋겠는가?"
"설사 협공을 받는다 해도 기령이나 고순 따위의 무리야 죽기로 작정하고 싸
운다면 두려울 것이 없을 듯합니다."
관우.장비가 이구동성으로 이렇게 말했으나 유비의 생각은 달랐다.
"아닐세, 이번만은 심사숙고해야 할 걸세. 아무래도 이번 출진은 앞뒤가 순조
롭지 않았네. 지금 저들과 싸우는 것은 파손당한 배를 풍랑 속으로 내모는 것과
같이 어리석은 짓일세."
유비는 그렇게 말하고 퇴각을 명했다.
그날은 큰비가 내렸다. 회음강의 하구는 큰물이 넘쳐 기령군도 유비군을 뒤쫓
지 못했다. 유비는 우이 진지를 떠나 광릉지방으로 퇴각했다.
고순의 군사가 우이에 도착한 것은 다음 날이었다.
우이는 강물이 범람할 뿐, 인마는커녕 진채의 흔적조차 보이지 않았다.
"적은 이 고순의 이름만 듣고도 혼비백산해서 도망을 간 것이다. 얼마나 가소
로운 일인가?"
고순은 어처구니없는 허세를 부리며 기령의 진지로 향했다.
유비군이 군사를 몰아 도망갔으므로 원술과의 약속은 지킨 셈이었다. 고순은
기령을 만나 약속한 물건을 내놓으라고 채근했다.
"우리 주군과 공의 주군과의 약속입니다. 제가 원술 장군을 만나 의논하여 일
을 처리하겠으니 공은 일단 군사를 이끌고 회군하십시오."
기령의 말에 고순도 더 이상 할 말이 없어 회군한 후 여포에게 이 사실을 고
했다.
여포는 고순의 말을 듣자 은근히 원술의 태도가 미심쩍게 생각되었다.
"우리를 속이는 것이 아니냐?"
정히 의심하고 있을 때 원술이 보낸 서찰이 당도했다.
비록 고순의 군사가 왔었다고는 하나 유현덕을 없애지는 못하였소. 현독은 지
금 광릉에 숨어 있소. 그의 목숨을 벤다면 약속한 재물을 드리겠소. 대가를 치르
지 않고 어찌 재물을 재촉하시오
서찰을 본 여포는 원술이 자기를 속였음을 알고 화가 머리끝까지 치솟았다.
여포는 군사를 일으켜 원술을 쳐야겠다고 펄펄 뛰었다.
"원술이란 놈이 나를 속였구나, 내 이놈을 당장에 징벌하리라!"
그러나 진궁이 나서며 그를 말렸다.
"고정하십시오. 원술이 자리잡고 있는 수춘 지방은 양곡이 풍부할 뿐만 아니라
병력 또한 많습니다. 그보다는 패주한 유비를 잘 구슬러 소패에 머물게 하여 이
쪽 편으로 끌어들이는 것이 좋습니다. 기회가 오면 군사를 일으켜 현덕을 선봉
으로 삼아 원술을 치도록 하십시오. 원술을 친 다음 원씨 일족의 강자인 원소를
도모한다면 천하는 이미 주공의 손아귀에 든 거나 다름없습니다."
진궁의 말을 들으니 여포는 귀가 솔깃했다. 그의 말에 따르기로 하고 사람을
시켜 유비에게 서주로 돌아와 달라는 서찰을 보냈다.
이튿날, 여포의 사자는 광릉을 향해 떠났다.
유비는 그때 얼마 되지 않는 군사만을 거느리고 광릉의 산사에 몸을 숨기고
있었다.
난세의 흔한 예지만, 한 발자국 발을 헛딛으면 그 전락은 실로 눈 깜짝할 사
이에 천길 낭떠러지로 떨어지는 법이다. 삼일제후라는 말은 당시의 흥망부침 속
을 표류한 수많은 영웅들에게 그대로 들어맞는 말이었다.
유비는 광릉으로 가다 원술군의 기숩을 받아 군사의 절반을 잃었다.
군량도 부족하여 그나마 남아 있던 군사들도 자취를 감추고 있는 지경이었다.
그때 여포의 사자가 왔다.
유비는 여포가 보낸 글을 보고 매우 기뻐했다. 그러나 관우.장비는 여포를 달
갑게 여기지 않았다.
"그 자는 원래 표리부동한 자입니다. 믿어서는 안 됩니다."
그러나 유비는 두 아우의 말을 가로막았다.
"그가 모처럼 호의를 베풀어 나를 부르는 것인데 어찌 의심하려 드느냐?"
유비는 기어이 서주로 돌아갈 것을 고집하니 관우.장비도 하는 수 없이 뒤따
랐다.
유비가 서주에 이르자 여포는 유비가 내심 의심하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
에 사람을 딸려 그이 가족을 보내 주었다.
유비는 어머니와 아내 감 부인, 미 부인 그리고 자식들을 두 손으로 맞으며
반가워했다.
아내 감 부인은 유비를 맞으며 아뢰었다.
"여 장군은 군사들을 시켜 우리집을 호위케 했으며 시져들을 통해 필요한 물
건을 부족함 없이 보내 주었습니다."
"그것보게, 내가 말한 대로가 아닌가?"
유비는 관우·장비에게 말했다.
유비가 서주성으로 향하자 잔비는 여포와 마주하기 싫어서 한사코 유비의 가
족들을 호위하며 소패로 갈 것을 고집했다.
유비는 하는 수 없이 관우와 함께 서주성으로 향했다.
여포는 성문 밖까지 나와 유비를 맞았다.
유비가 고마움을 표하자 여포가 입을 열어 변명부터 늘어놓았다.
"소생은 결코 서주를 탈취한 것은 아닙니다. 아우 되는 장비가 술에 취해 함부
로 사람이 죽도록 매질을 하니 혹시라도 잘못될까 하여 잠시성을 지키고 있었을
뿐이오."
"이 비는 일찍이 서주를 장군에게 양보한 바 있었습니다. 이제 마땅한 성주를
얻었으니 만족할 따름입니다."
여포는 본심과는 달리 짐짓 성을 사양하는 체하였으나, 유비는 그대로 물러나
소패로 돌아오고 말았다.
관우·장비는 불평이 대단하였으나 유비는 그들을 달랬다.
"몸을 굽혀 분수를 지키며 천시를 기다려야 하네. 즉 하늘이 내린 기회를 기다
리는 걸세. 교룡이 연못에 잠겨 있음은 하늘에 오르기 위함이네. 결코 천명을 거
슬러가며 무리를 해서는 좋은 결과를 맺을 수 없네."
여포는 유비의 환심을 사기 위해 식량과 비단을 보내왔다. 이로 인해 유비와
여포는 한동안 화해가 이루어졌다.
한편, 원술은 여포를 이용해 유비를 크게 물리치자 수춘에서 수하 장수를 모
아 놓고 잔치 자리를 벌이고 있는데 군사 하나가 들어롸 알렸다.
"강동의 손책이 여강태수 육강을 정벌하고 왔습니다."
원술은 그 소리에 크게 기뻐하며 손책을 물러들여 치하하고 자기 옆자리에 앉
히고 연회에 참석시켰다.
이때 오의 장사태수 손견의 장남 손책도 어느덧 장성하여 스물한 살의 청년이
되어 있었다.
"그는 강동의 맹장이었던 애비(손견)보다 낫다. 기린아란 이를 두고 하는 말일
게다."
세상 사람들이나 아버지를 보좌하던 신하들 중에는 이렇게 말하며 그의 성장
에 기대를 거는 사람이 많았다. 손책이 이렇게 성장한 것은 열일곱의 어린 나이
로 아버지 손견의 시신을 곡아의 벌판에 붇고 참담한 패군을 이끌고 돌아온 뒤
부터였다.
그 후 널리 어진 이들을 모으고 군사를 양성하며 가문의 재기를 꾀하기 위해
노력했다. 그러나 계속되는 역경을 헤쳐 나가는 데는 역부족이었다. 마침내 더
이상 장사 땅을 지킬 수 없게 되자 노모와 가족을 친척집에 맡기고 떠나아 했
다.
"때가 되면 모시러 오겠습니다. 얼마 동안 시골에 피신해 계십시오."
손책은 노모에게 작별을 고하고 제국을 떠돌아다녔다.
홀로 다짐한 큰 뜻을 가슴에 간직한 채 각 나라의 인정이나 지리, 군사들을
살피며 다녔다. 이른바 천하의 맹장이 되기 위한 수행의 고초를 샅샅이 겪으며
편력한 것이다.
그리고 2년쯤 전부터 회남의 수춘성에서 원술의 식객으로 머물고 있었다.
원술과 선친 손견은 원래 교분이 있었다. 그러나 그보다는 손견이 유표와 싸
우게 된 것도, 그리하여 끝내 곡아 땅에서 전사하게 된 것도 실은 원술의 사주
가 그 동기였다. 그런 인연으로 하여 원술은 손책을 동정하여 아들처럼 돌보아
주며 그를 회의교위로 삼았다.
회의교위가 된 손책은 원술의 명에 의해 군사를 이끌고 경현대수 조랑을 쳐
공을 세웠다. 손책의 용맹을 높이 한 원술은 다시 여강을 치게 하자, 여강의 태
수 육강을 정벌하고 돌아온 것이었다. 원술의 기쁨은 컸다.
원술은 지난날 동탁을 치기 위한 동맹군에서 빠져 나와 손견의 도움으로 남양
태수 장자를 쳐 자기의 근거지를 삼았다.
이후 착실히 세력을 넓혀 이제 구강.양주.여강까지 그 휘하에 두게 되었다. 거
기다가 손견이 이미 죽고 없어 이제 장강 남동에 까지 눈길을 주며 그 야망을
불태우고 있던 참이다. 장강은 광활한 중국 대륙을 양분하고 있는 동맥이었다.
그 두 갈래 흐름이 바로 북쪽의 황하와 남쪽의 양자강이다. 오는 그 장강의 흐
름에 따라 나뉘어져 강동이라 불리워지고 있었다.
이날의 잔치에서도 원술은 이제 스스럼없이 천하를 논할 정도로 온갖 거드름
을 다 피웠다.
손책은 잔치가 끝나기 전에 자기의 군영으로 돌아왔다. 원술의 오만스런 태도
에 마음이 상했을 뿐만 아니라 이제 그가 지난날 선친의 땅이었던 강동을 넘보
고 있다고 느끼자 울적한 마음을 달랠 길이 없었다.
'아버지는 천하를 종횡하시던 불세출의 영웅이셨거늘, 나는 아직도 월술의 식객
이 되어 그의 거드름이나 지켜 보고 지내야 한다는 말인가?'
손책은 앞일을 짚어보며 답답한 마음을 하소연했다. 평소에는 책을 읽고 거동
이 조용하며 사람들을 슬기로 대하여 그를 만난 사람들은 모구 그를 따랐다.
그런 가운데도 틈틈이 무예를 닦고 산야로 수렵을 나가 심신의 연마를 게을리
하지 않았다.
원래 병가의 상속자였기 때문에 어릴 때부터 무예 전반을 통하고 있던 손책이
었다. 거기다가 7척이 넘는 거한으로 검술과 완력은 이미 아버지 손견을 뛰어넘
고 있었다.
다음 날, 손책은 울적한 마음도 달랠 겸 몇몇 종자를 데리고 복우산에서 사냥
으로 하루를 보냈다.
사냥이 끝나고 잠시 바위에 걸터앉아 장엄한 석양의 저녁놀을 바라보고 있었
다.
원술의 주부 수춘성에서 회남 일대의 도시와 마을이 눈앞에 내려다보였다.
굽이치는 강은 회하의 강줄기이다.
회하는 좁았다. 장강의 유역과 비교가 되지 않았다. 손책은 곧 강동의 하늘을
생각하며 절로 깊은 탄식을 내뱉었다.
"아아, 언제 장강의 물결 위에 나의 큰 뜻을 펼쳐 볼 날이 온단 말인가? 곡아
의 어머님, 어느 때 부끄럼 없는 아들로서 아버님의 무덤에 가 벌초할 날이 있
겠습니까?"
그러자 근처에서 쉬고 있던 한 사람이 바스락 소리를 내며 다가왔다.
"무슨 부질없는 한탄만 하고 계시로 그대는 앞길이 양양한 젊은이가 아니시
오? 저 석양은 내일이 없는 석양이 아니오."
손책이 놀라 그를 보니, 단양 고장 사람 주치였다. 자를 군리라고 하며 이전에
아버지 손견 수하의 종사관이었다.
"오오. 주치공이시오? 오늘도 하루 해가 저물었소. 산야에서 사냥을 한들 무얼
하겠소. 나는 날마다 이렇게 허송 시월하는 것이 하늘과 땅에 송구할 따름입니
다."
주치는 손책의 의중을 헤아리고 있었다. 그도 깊게 탄식했다.
"역시 그러셨군. 세월은 유수와 같소. 울분에 찬 탄식, 소생도 마땅히 그뜻을
헤아리고 있소이다. 그토록 생각이 지극하시다면 사내 대장부로 어찌 선친의 유
업을 계승할 용단을 내리려하지 않으시오?"
"나는 일개 식객에 지나지 않습니다. 아무리 원술이 나를 귀여워해 주고 사냥
을 할 활을 준다고는 하나 대사를 일으킬 병마는 즈지 않소."
"그러하나…. 그 온상에 묻혀 계시면 아니 되오. 그대를 아껴 주며, 호의호식과
사치스러운 생활, 이런 것은 모두 그대를 약하게 만들 뿐입니다."
"그러나 원술의 극지한 정도 배신할 수는 없지 않소?"
"그런 우유부단을 스슷로 끊어 버리지않으면 아니 되오. 팽배한 천하의 풍운을
보시오. 지금 이때 허약한 푸념으로만 지내신다면 앞으로 어찌 큰 뜻을 도모하
실 수 있겠소이까?"
"그렇소, 나도 그것을 통감하고 있소. 어떻게 하면 지금의 이 편안한 온상을
박차고 남아의 기상을 펼 수 있는 길을 열겠소? 만약 그대가 그 길을 안다면 깨
우쳐 주시오."
"그대의 숙부 중에 불운한 부이 계시지요? 지난날 단양의 태수였던…."
"예. 외삼촌 오경을 두고 하시는 말씀입니까?"
"그렇소. 오 공은 지금 단양 땅도 잃고 몰락했다는 소문을 들었소. 그 역경에
처한 숙부님을 구해야겠다는 핑계를 대고 원술에게 군사를 빌리십시오."
손책은 주치의 말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눈을 크게 뜨고 저녁 하늘을 나르는
새 떼를 쳐다보며 생각에 잠겼다.
그때 근처 나무 밑을 서성이며 두 사람의 이야기를 열심히 엿듣고 있던 사람
이 있었다.
그 사람은 두 사람이 잠시 말을 멈추자 뚜벅뚜벅 발소리를 내며 손책 앞으로
모습을 드러내었다.
"자, 무엇을 주저하시오. 선친의 유업을 받들어 일어나시오. 나에게 1백 명 정
도의 무사가 있으니 언제든지 그들을 데려가시오."
그는 원술의 모사인 여남 세양땅 사람인 여범이었다. 자를 자형이라고 했으며,
손책과 함께 원술에게 투신해 온 사람이었다. '자형은 뛰어난 모사이다'라고하며
그의 문중에서는 일찍부터 그의 재능을 칭송하고 있었다.
손책은 이 지기를 얻게 되어 대단히 기뻤다. 손책은 그를 한 자리에 청하여
물었다.
"그대도 나와 같은 뜻을 가지고 있소?"
여범은 손책의 불 같은 눈동자를 보며 말했다.
"귀공은 장강을 건너야 하오."
"알겠소. 어찌 남의 땅 작은 연못에 갇혀 어합지졸들와 함께 무위도식으로 허
송세월을 보내겠소?"
"그러나 손 공, 짐작견대 원술은 결코 군사를 빌려 주지 않을 것이오. 그때는
어찌하실 작정이오?"
"염려 마시오. 일단 뜻을 세운 이상, 이 손책에게도 생각이 있소."
손책이 결연히 말했다.
"원술에게서 어떻게 군사를 빌리시렵니까?"
여범과 주치는 손책의 흉중을 헤아릴 길이 없어 따지듯 물었다.
"나에게는 선친께서 물려주신 전국의 옥새가 있소. 그 옥새를 맡기고 군사를
빌려 달라고 하면 거절하지 않을 거요."
"뭐요? 옥새?"
옥새라면 천자의 도장으로 국토를 전하고 대통을 계승하는 데 없어서는 안 될
조정의 보기가 아닌가. 그런데 그 옥새는 낙양의 십상시란통에 분실되었다는 소
문이 떠돌았다.
"선천에게 물려받아 항상 소중히 간직하고 있는데 어느 땐가 원술이 그것을
알고 몹시 탐이 나는 모양이었소."
"이제야 알겠군. 귀공을 친자식처럼 애지중지하는 연유를 …."
"그의 야심을 알면서 모르는 척했었소. 그렇지 않았으면 오늘날까지 무사히 그
의 비호를 받을수 없었을는지도 모르오. 말하자면 이 몸을 지킬 수 있었던 것은
이 옥새 덕이라 해도 좋소."
"하지만 원술은 워낙 교활나 사람이라 웨만큼 굳은 약속을 하지 않으면 돌려
주지 않을 우려가 있습니다."
"나는 상자 안에 든 옥새보다 대지를 택하겠소. 나의 대망은 천하에 있소."
손책의 기개를 보고 두 사람은 마음이 흡족했다. 그날 세 사람은 앞으로의 일
을 정한 후 헤어졌다.
손책과 태사자 두호랑이가 다투다.
손책은 먼저 유요를 치기로 하고 우저에 진을 치는제 호적들의 도움으로 우저
성안 군량고에서 불이나 쉽게 그들을 물리친다. 그러나 동래의 태사자를 만나
일대일로 하루 낮 동안을 싸우벼 그것도 모자라 서로의 무용을 자랑한다.
다음날, 손책은 원술을 찾아가 통곡을 하며 말했다.
"소자가 선친의 원수를 갚지 못해 한이 맺힌 터입니다. 그런데 이제는 외숙부
오경이 양주의 유요에게 침략을 받아 몸담을 곳도 없는 역경에 처해 있다고 합
니다. 또한 곡아에 두고 온 노모
와 가솔들이 모두 비운의 구렁텅이에 빠져 있다고 합니다. 어느덧 3년이나 폐를
끼쳤고, 그 은혜도 갚지 못한 채 이런 소청을 드리는 것이 염치없는 일입니다만
바라건대 얼마간의 군사를 제게 빌려 주십시오. 강을 건너가 숙부와 가솔들을
구하고 선친의 영을 위로한 후 다시 돌아오겠습니다."
손책이 이렇게 말한 후 얼굴이 굳어져 있는 운술에게 전국의 옥새가 들어 있
는 작은 상자를 공손히 내밀었다.
원술이 그 상자를 보자 금세 얼굴이 붉어졌다. 감출 수 없는 기쁨으로 만면에
희색을 띤 것이다.
"이 옥새를 담보로 맡겨 두고 가겠습니다. 제 소청을 들어 주십시오."
그러나 원술은 끓어오르는 기쁨을 내색하지 않으려는 듯 목소리를 낮춰 입을
열었다.
"이렇게 옥새까지 내놓고 간곡히 청하니 군사 3천과 말 5백 필을 주겠다. 곡부
를 평정한 뒤에 속히 돌아오도록 하여라. 네가 돌아오면 옥새를 돌려 줄 터이니
잠깐 내게 맡겨 두어라. 또한 너의 벼슬로는 대군을 지휘하는 데 어려움이 있을
것이다. 표를 올려 너를 절충교위에 진구장군으로 삼을 터이니 곧 군사를 이끌
어 출발하라."
원술은 손책이 청하지도 않은 벼슬까지 내렸다. 손책의 환심을 사 그의 마음
이 변하지 않도록 방지하기 위함이었다.
손책은 좋은 날을 택해 군사를 수습하여 강동으로 떠났다.
손책이 수춘성을 떠나 한나절을 달려갔을 때였다. 그의 뒤를 따르는 군마가
있었다.
그들은 아버지 때부터 그를 섬겼고, 손책이 떠돌이 시절 때도 그의 곁을 떠나
지 않았던 정보.황개.한당이었다. 그들은 손책이 군사를 빌려 강동 땅으로 향했
다는 걸 알자 원술의 눈을 피해 말을 몰아 뒤따라온 것이었다. 손책은 원술에게
그들도 함께 가기를 청할까 했으나 원술의 의심을 살까 두려워 감히 말을 하지
못했던 터였다.
손책은 그들을 보자 새삼 죽은 선친이 생각나 한동안 목이 메었다. 세사람도
감회가 새로워 눈물을 쏟고 있었다.
"대견스럽습니다. 이제 큰주인의 대업을 이어받으셔야지오."
"고맙소. 이제 이 책의 마음은 한없이 든든하오."
그들은 한동안 벅찬 감회를 나눈 뒤 길을 재촉했다.
그들이 말을 달린 지 며칠이 지나서였다. 일행이 역양 땅에 이르자 저편에서
한 떼의 군마가 다가왔다.
선두의 한 젊은 무사가 손책을 향해 손을 흔들며 달려왔다.
"손 공!"
가까이 다가왔을 때 보니, 거동이 부드럽고 날래 보이는데가 용모가 수려하며
얼굴은 옥같이 희고 풍채도 당당하였다. 그는 손책과 같은 연배의 청년이었는데
가까이 다가올수록 어딘가 낯익은 얼굴이었다.
"아니, 이건 공근이 아닌가. 어떻게 이곳에 왔는가?"
손책이 그제서야 반색을 하며 그의 손은 잡았다.
그는 여강 서성 사람으로 이름은 주유였다. 자는 공근이라고 하며 손책과는
소년시절부터 죽마고우일 뿐 아니라 형제의 의를 맺은 사이였다. 나이는 같으나
손책이 생일이 빨라 주유가 형이라 불렀다.
주유는 증조부, 종조와 그의 선친에 이르기까지 모두 벼슬을 지낸 세도가의
집안에서 태어났다. 손책의 선친 손견이 동탁을 치기 위해 거병했을 때, 가솔을
서성에 머물게 했는데 그때 주유를 만나게 되었었다.
이후 손책이 원술에게 의지하여 서성을 떠나자 둘은 헤어졌다.
그러다가 이제 손책이 군사를 거느리고 강동으로 출발했다는 소식을 듣고 거
느리던 군사 약간을 이끌고 온 것이었다.
"역시 친구가 좋군. 정말 잘 와 주었네. 힘껏 도와 주게."
"이 유가 견마지로를 다해 형님과 함께 대업을 도모할까 합니다."
"내가 공근을 얻었으니 이제 대사는 이룬 것이나 다름없네."
두 사람은 말머리를 나란히 하여 행군하였다.
손책이 주치와 여범을 소개했다. 주유는 그들과 인사를 나눈 후 손책에게 물
었다.
"형님께서는 강동에 두 장씨가 있다는 것을 아시오?"
"두 장씨라니 누구를 말함인가?"
"초야에 묻혀 있는 두 현인으로 한 사람은 장소라고 하고, 한 사람은 장굉이라
고 합니다. 그래서 강동의 2장이라고도 합니다."
"그런 인물이 있었는가?"
"큰 일을 성취하시려면 그 두 현인을 초빙하여 막료로 삼아야 할 것입니다. 장
소는 군서를 읽어 천문 지리에 밝습니다. 장굉으로 말하면 재지종횡하고 제경에
통하여 일단 입을 열면 강동, 강남의 백가라 하더라도 그를 능가할 사람은 없습
니다."
"어떻게 하면 그 현인들을 모실 수 있겠는가?"
"권력으로도 안 되며 산더미 같은 재물에도 움직이지 않을 것입니다. 의기상통
이라는 말이 있지 않습니까? 직접 형님이 가셔서 예를 갖추고 깊은 경외를 표하
며, 형님이 품은 큰 뜻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혹시 일어날지 모를 것입니
다."
손책은 기뻐했다. 강동에 이르자, 먼저 장소가 사는 시골로 가 그가 은거하는
집을 찾았다.
손책이 직접 찾아와 방바닥에 끓어 엎드리자 마침내 장소의 마음도 움직이기
시작했다.
"원컨대 철없는 저를 꾸짖으시고 선친의 대업을 이루게 해 주십시오."
좀처럼 바깥 세상으로 나오지 않으려던 은사 장소는 손책의 간곡한 말과 열의
에 감동되어 손책의 사람이 되었다.
또 장소화 주유를 사자로 앞세워 장굉도 설득시켰다.
이렇게 하여 손책의 진중에는 원하던 두 현인이 가담하게 되었다.
손책은 장소를 무군 중랑장으로 삼고, 장굉을 참모 정의교위로 삼아 일군의
위용을 갖추었다.
손책은 숙부 오경을 괴롭힌 양주자사 유요부터 치기로 했다.
유요는 자를 정례라고 하며 동래현의 모평 사람이었다. 양자강 연안의 호족이
며 명문으로 한실의 혈통을 이어받았다. 연주자사 유대는 그의 형이며, 태위 유
총은 그의 백부였다.
그는 이전에는 양주자사로 수춘에 머물렀으나 원술에 쫓겨 가동에 와서 곡아
를 점령하고 있었다.
손책이 군사를 이끌고 곡아로 온다는 소식은 유요에게도 전해졌다. 유요는 곧
장수들을 불러들여 의논했다.
부장인 장영이 나섰다.
"군사 약간을 주신다면 제가 우저에 진을 펼쳐 그가 대군을 이끌고 오더라도
감히 얼씬거리지도 못하게 하겠습니다."
우저는 양자강을 끼고 뒤로는 산악을 등져, 장강의 요해지라고 일러지는 요충
지였다.
유요는 우저의 성채에 군량 수십만을 석을 보내고, 장영에게는 대군을 주어
방비를 맡기려 하였다.
그러자 돌연 끝자리에 있던 한 장수가 소리쳤다.
"저를 선봉으로 내보내 주십시오. 불초 소생이 반드시 적을 격파시키겠습니
다."
모두 그 사람을 돌아보니 그는 동래 황현 사람 태사자였다. 지난날, 북해 싸움
때 황건적에 포위된 공융을 구한 후 지금은 유요의 휘하에 와 있었다.
유요는 선봉을 자원한 태사자를 보자 일언지하에 그의 청을 물리쳤다.
"그대는 아직 어리니 장수가 되기 어렵다. 내 곁에 머물러 달리 분부를 거행토
록 하라."
태사자는 얼굴을 붉히며 입을 다물었다. 그는 아직 갓 서른 살의 젊은이였다.
아직 유요의 휘하에 든 지 얼마 되지 않아 유요가 한 마디로 거절하자 매우 무
안해하는 기색이었다.
장영은 군사를 거느리고 우저의 요새에 들어가 저각이라는 곳에 군량을 넉넉
히 비축해 놓고 손책의 군사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보다 앞서 손책은 군선 수십 척을 정비하여 장강으로 진주하여 뱃머리를 나
란히 하고 강물을 거슬러 왔다. 손책이 배를 타고 진격해오자 장영은 궁노수들
에게 명해 화살을 퍼붓도록 했다.
"날아오는 화살에 겁먹지 마라. 모든 군선은 저 강기슭에 바싹 대가."
손책을 비롯한 정보.황개.한당.주유 등 여러 장수들은 각각 자기 선루 위에 올
라 지휘하기 시작했다.
우저에서 날아오는 화살은 햇빛을 가릴 정도로 새카맣게 덮쳐 왔다.
"모두 나를 따르라!"
군섯이 강기슭에 닿자 손책은 배에서 육지로 날렵하게 뛰어내려 무리진 적병
속으로 칼을 뽑고 달려들었다.
"주군을 엄호하라!"
다른 배에서도 속속 군사들이 뛰어내렸다.
아군의 시체를 넘어 한 자를 점령하고, 또 시체를 넘어 열 간의 땅을 넘령하
는 가운데 전군의 상륙이 이루어졌다.
그날 가장 눈부신 활약을 한 것은 노장 황개였다.
양군은 우저의 개울가에 진을 벌리고 맞부딪쳤다.
손책이 말을 달려 진두에 나서자 적장 장영이 손책을 큰 소리로 꾸짖으며 말
을 달려나왔다.
"손책, 이 젖비린내 나는 아이야. 하룻강아지 범 무서운 줄도 아직 모르느냐?"
그러자 손책의 장수 황개가 말을 몰아 나가 그를 맞았다.
"네 이놈, 누구한테 하룻강아지라 하느냐? 큰소리만 치지 말고 네 목이나 내어
놓아라!"
황개의 분마(빨리 달리는 말)가 장영의 말에 부딪쳤다.
두 사람이 한데 어우러져 몇 차례 칼과 칼을 부딪쳤다. 장영이 유요가 믿어온
장수였다고는 하나 황개에게는 역부족이었다. 몇 차례의 칼부림이 있자 장영은
불리함을 깨닫고 말머리를 돌렸다.
"이놈 게 섰거라!"
황개의 고함 소리를 뒤로 하고 자영은 황급히 자기 군영 쪽으로 달아나기 시
작했다. 장영의 전군은 둑이 무너진 꼴이었다.
손책이 그 기세를 틈타 군사를 이끌어 몰아붙였다.
그런데 장영이 우저의 요새로 도망쳐와 보니 성문 안 군량 창고 쪽에서 검은
연기가 치솟고 있었다.
"저, 저것이 무슨 연기냐?"
장영이 놀라 당황하며 소리쳤다.
"불이야!"
"어떤 놈이 우리 군량고에 불을 질렀다."
군사들이 제각기 한 마디씩 떠들어대며 검은 연기와 함께 창고에서 쏟아져 나
왔다. 장영은 갈팡질팡하는 군사들을 이끌고 우저를 버리고 산기슭을 향해 달렸
다.
이를 본 손책이 그들을 앞질러 기다리고 있다가 닥치는 대로 칼로 베었다. 장
영은 간신히 손책의 칼을 피해 산 속 깊이 몸을 숨겼다가 가까스로 남은 군사를
수습하여 곡아로 돌아갔다.
손책은 대승를 거두었다. 그러나 그날의 대승은 손책 자신이 생각해도 기적적
인 것이었다.
'도대체 성내에서 누가 불을 질러 우리를 지원한 것일까?'
손책이 그 일을 기이하게 여기며 생각에 잠겨 있을 때였다.
돌연 손책의 뒤편 산길에서 약 3백 명은 됨직한 군사들이 북과 징을 울리며
나왔다. 선두에 두 사람의 선봉이 있었는데 그들이 손을 흔들며 외쳤다.
"이보시오. 활을 쏘지 마시오. 우리는 손 장군의 편입니다."
손책이 장수들에게 일러 공격을 멈추게 한 뒤 그들이 가까이 다가오기를 기다
렸다.
선두의 두 장수 중 한 사람은 옻칠을 한 듯한 검은 얼굴이었다. 큼직하고 오
뚝한 코, 수염은 누런데 날카로운 송곳니 한 개가 입을 벌릴 때마다 엿보였다.
보기만 해도 험상궂고 사나운 얼굴이었다.
또 한 장수는 밝은 눈동자에 눈썸이 짙으며, 키가 훤칠하고 사지가 쭉 뻗은
대장부였다. 두 사람은 손책 앞에 다가오자 예의를 갖추지도 않은 채 무뚝뚝한
목소리로 물었다.
"손 장군이 뉘시오?"
"그대들이야말로 대체 누구요?"
손책이 한 발 앞으로 나서며 되물었다. 그러자 코 큰 검은얼굴의 사나이가 먼
저 대답했다.
"아, 당신이 손 장군이오? 우리 둘은 구강 심양호에 사는 호적의두목인데 나로
말하면 장흠, 자를 공혁이라 부르고, 여기 이 사람은 내 아우뻘 되는 주태, 자가
유평이라는 놈입죠."
"그렇다면 네놈들은 호적이란 말이냐?"
"그렇습니다. 호수에다 배를 띄우고 사는데, 양자강을 왕래하는 배를 습격해
왔습죠."
"나는 양민 편이다. 양민을 괴롭히는 도적은 바로 내 적이다. 도대체 백주에
버젓이 내 앞에 나타난 이유가 무엇인가?"
"우리는 지난날 난세를 당한 노력질로 살아 왔습죠. 그러나 이제 손견 장군의
아들이 온다 하니 이참에 손을 씻고 참다운 무인으로 살아 보자고 아우 유평과
의논을 했습죠."
"음―."
손책은 그들의 말을 듣고 가볍게 웃었다.
"그렇다고 빈손으로 무작정 병사가 되겠다면 그건 너무 염치 없는 짓같아 무
슨 그럴 듯한 공을 세우기로 했지요. 그래, 그저께 밤부터 우저 성채 뒷산에 기
어올라가 숨어 있다 성 안에 군사들이 빠져 나가자 안에서 불을 질렀죠. 성 안
에 불을 지른 뒤 우왕좌왕하는 장영군을 모조리 죽이고 이렇게 달려 나온 것입
죠. 자, 대장님 우리들을 대장님 깃발 아래 넣어 주시겠습죠?"
손책은 장흠과 주태를 얻게 되어 크게 기뻐하며 그들을 거전교위로 삼았다.
허락을 받은 두 사람은 기쁨을 감추지 못하면서 춤을 추었다. 그들은 적의 군
량 창고에서 군량을 탈취해 오고, 부근의 좀도둑이나 건달들을 불러모아 손책군
의 휘하에 가담시켰다. 손책군의 군사는 항복한 장영의 부하들까지 가담하니 이
제 4천을 헤아리는 병력이 되었다.
한편 철통같이 믿었던 방어선의 하나인 우저 성채가 불과 반나절 만에 무너졌
다는 소식을 들은 유요는 아연실랙했다.
"대체 우리 군사들은 무얼 했다는 말이더냐?"
그럴 때 장영이 패잔병과 함께 유요의 진으로 도망쳐왔으니 그는 분노가 치밀
어 대뜸 칼을 빼들었다.
"무슨 낯으로 뻔뻔스럽게 살아 돌아왔는가? 내 손으로 죽여 본을 보이겠다."
모사인 책융.설례가 급히 나서며 유요를 말렸다.
"아니 됩니다. 적을 눈앞에 두고 장수를 베면 이는 적을 이롭게 하는 결과가
될 뿐입니다. 이번 일을 만회하기 위해 다시 한 번 기회를 주는 것이 좋을 듯합
니다."
유요는 제신들의 간곡한 만류로 장영에게 영릉성을 맡겨 수비를 견고히 하도
록 하고 신정령 남쪽에 진을 쳤다.
손책도 군사를 휘동하여 신정사 북쪽에 영채를 세우고 그 고장 사람을 불러
물었다.
"이 근처 산에 후한 광무제를 모신 사당이 있다 하는데 지금도 그 사당이 있
는가?"
"예, 사당은 있습니다만 아무도 돌보지 않아 황폐한 채로 벌려져 있을 뿐입니
다."
"그곳은 산의 꼭대기인가?"
"꼭대기에서 조금 내려온 중턱입지요. 그곳에 올라가면 파양호에서 양자강의
흐름을 내려다볼 수 있고, 강남.강북도 한눈에 들어옵니다."
"내일 나를 그곳으로 안내하시오. 내가 가서 사당을 정히 하고 간소한 제라도
올릴 것이오."
그러자 장소가 손책을 말렸다.
"묘의 제를 올리는 것도 좋으나 싸움이 끝난 후에 하셔도 되지 않겠습니까?"
"아니오. 급히 가 보고 싶어졌소."
"무슨 까닭이라도 있으십니까?"
"어젯밤 꿈을 꾸었소. 광무제가 내 머리맡에 서서 손짓을 하시는가 했더니, 솔
바람 불 듯 시정 봉우리로 무지개빛을 그으며 사라지셨소."
"그러하오나 지금, 산 남쪽에는 유요가 본진을 치고 있습니다. 도중에 마일 복
병이라도 만날까 걱정이 됩니다."
"아니오. 우리에게는 신명의 가호가 있을 것이오. 신의 부름에 따라 묘를 돌보
러 가는 것이니 무엇이 두렵겠소."
다음날, 손책은 정보.황개.한당.주태 등 장수 13명을 거느리고 신정 산 위로 올
라갔다.
일행이 점점 산을 오름에 따라 팔방으로 시야가 넓어졌다. 구름에서 구름까지
잇닿은 대륙, 그리고 장강천리의 물은 시작도 끝도 없이 굽이굽이 흐르며 유구
한 자태를 드러내고 있었다. 그 물은 또 연안 도처에 있는 무수한 호수와 늪으
로 잇닿아 있었다. 황토 대륙의 구석구석에 그 물줄기가 스며들고 있었으며, 그
주변에 옹기종기 마을이 있었다. 그 마을이 조금 많이 운집한 곳이 형이요 성이
었다.
이윽고 사당 앞에 이르렀다. 손책은 말에서 내려 주변의 낙엽을 쓸고 제물을
올린 후, 향을 피우고 사당 앞에 엎드려 빌었다.
"존엄하신 신령이여, 원컨대 저에게 망부의 유업을 잇게 하여 주소서. 불원간
강동 땅을 평정하오면 반드시 사당을 중수하고 춘하추동으로 시제를 올리겠나이
다."
이렇게 축원을 끝낸 손책은 좌우를 보며 말했다.
"내 이왕 여기까지 왔으니 남쪽으로 가 적의 진지를 엿보고 오겠소."
그러자 장수들이 대경실색하며 말렸다.
"아니됩니다. 적에게 발각될 우려가 있습니다."
장수들이 놀라 말렸으나 손책은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
"예까지 와서 이대로 진영으로 간다면 유감천만이 아닌가?"
"우리는, 겨우 13기에 지나지 않는 적은 병력입니다."
호담한 용장들이었지만 모두가 근심스런 얼굴빛이 되었다.
"은밀하게 접근하기에는 오히려 소수의 병력이 좋은 법이 아니오? 두렵고 위
험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돌아가도 좋을 것이오."
그런 말을 듣고 보니 돌아갈 사람도, 더 간할 사람도 있을 리 없었다.
손책이계곡으로 재려와 말에게 물을 먹이고, 또 하나 재를 돌아 남쪽 평야가
보이는 곳에 이르렀을 때였다.
그 부근까지 나온 유요의 척후병이 손책 일행을 발견했다.
"손책으로 보이는 대장이 불과 10여 기를 델리고 바로 저 산중턱에까지 와 있
습니다."
척후병은 급히 본진에 뛰어들며 급보를 전했다.
"그럴 리가 있는가?"
유요가 반신반의하고 있던 차에 또 다른 척후병이 뛰어들어와 똑같은 급보를
전했다.
"그렇다면 그건 손책이 우리를 유인하려는 계략이다. 경솔하게 행동하지 말고
좀더 지켜 보자."
겁이 많은 유요가 이렇게 말하며 움직이려 들지 않았다.
그러자 막장 중의 한 하급 장수가 뛰쳐나와 외쳤다.
"하늘이 주신 기회입니다. 이때 손책을 붙잡지 않으면 어느 때를 기다리려 하
십니까?"
그는 지난번 선봉에 나설 것을 자청했다가 유요에게 꾸짖음만 들었던 태사자
였다.
"태사자 또 그대가 나서는가?"
유요가 태사자를 홀깃 보더니 입을 다물어 버렸다. 그러나 태사자는 유요의
명이 떨어지기도 전에 갑옷을 꿰입고 말 위에 앉아 외쳤다.
"누구든지 뜻이 있는 자는 나를 따르시오."
그러나 아무도 그를 따르는 사람이 없었다. 그러자 좌중에서 또 한 사람의 이
름 없는 무장이 나서 말을 끌어 내었다.
"태사자야말로 참다운 용장이십니다. 혼자 보내서는 아니 됩니다."
다른 장수들은 그가 가소롭다는 듯 모두 껄걸 웃기만 했다.
한편 손책은 마침 적진을 살피고 난 후 돌아가려고 말머리를 돌리고 있들 때
였다.
"도망가지 마라, 손책!"
홀연 고갯마루 쪽에서 고함 소리가 나며 두 장수가 바람처럼 달려오고 있었
다. 손책의 부장들은 그를 맞아 싸울 준비를 하고 있었다. 태사자가 다시 소리치
며 달려왔다.
"누가 손책인가?"
그러자 손책이 대뜸 앞으로 나서며 말했다.
"네놈은 누구냐?"
"동래의 태사자가 바로 나다. 손책을 사로잡으려고 왔다."
큰 소리로 얼러댔다.
"내가 바로 손책이다. 너희 두 놈이 함께 덤벼도 두려울 것이 없다. 내가 너희
들을 두려워한다면 천하의 손백부가 아니다."
태사자도 지지 않고 맞받았다. 손책의 뒤에 있는 장수들을 안중에도 없다는
말투였다.
"뒤따르는 13기가 한꺼번에 덤벼도 좋다. 손책은 준비되었는가?"
그 말과 함께 태사자는 창을 비껴들고 손책을 향해 달려들었다. 손책도 창을
들고 그를 맞았다.
창과 창, 말과 말, 불꽃이 튀며 어우러졌다. 그러나 어느 한쪽도 밀리는 기색
이 없었다.
그렇게 싸우기를 50여 합이 되었으나 승부가 가려지지 않았다. 장수들은 모두
놀라 취한 둣이 바라볼 뿐이었다. 그의 창솜씨가 이토록 절륜할 줄 몰랐던 태사
자는 손책의 뒤에 있는 부하 장수들로부터 손책을 유인해 내야겠다고 생각했다.
태사자는 슬쩍 말을 돌려 숲 속으로 들어갔다.
손책은 그를 뒤쫓으며 그 등을 향해 창을 던졌다. 던진 창은 태사자의 몸을
살짝 스치고 땅에 꽂혔다. 태사자는 등골이 오싹했으나 말을 박차며 더욱 깊은
숲 속으로 말을 몰았다.
'손책의 사람됨은 일찍이 들은 바 있지만 소문보다 훨씬 영민하고 용맹한 자
다.'
태사자의 속셈을 알 리 없는 손책도 그를 뒤쫓으며 역시 마음 속으로 크게 놀
라고 있었다.
'이건 명금(고운 목소리로 우는 새와 뛰어난 무예의 비유)인걸. 사로 잡아 내
새장 속에서 길러야겠다. 어떻게 이렇게 뛰어난 무사가 유요 따위를 섬기고 있
었단 말인가?'
손책이 이렇게 생각하며 태사자를 뒤쫓으며 소리쳤다.
"동래의 태사자라고 우쭐대던 자가 꼴사납게 도망을 치다니 부끄럽지도 않은
가?"
손책이 그의 비위를 거슬려 격동시키려 했다.
손책의 말을 못 들은 척하고 달러던 태사자는 이윽고 재를 돌아 뒷산 기슭에
이르자 말머리를 돌렸다. 손책을 뒤따르는 장수들이 없는 걸 확인한 태사자가
입을 열었다.
"손책! 예까지 쫓아오느라고 수고했네. 그 용기가 가상하여 이쯤해서 승부에
응해 주겠다. 그런데 내게 덤빌 용기가 있느냐?"
손책이 조금 전 자기를 쫓으며 말로 모욕을 준 데 대해 되받으며 태사자가 여
유 있게 가슴을 폈다.
"또 도망이나 치지 말라!"
손책이 대검을 뽑아 그를 향해 휘둘렀다. 그러자 태사자가 다짜고짜 차을 쑥
내밀어 손책의 양미간을 향해 팔을 뻗었다.
번개 같은 공격이었다. 이를 피한 손책의 몸놀림 또한 눈 깜짝할 사이였다. 손
책은 순간적으로 말갈기 속으로 얼굴을 묻었다. 창은 투구의 덮개를 찰칵 하고
소리를 내며 스쳤다.
보통 장수들 같았으면 칼에 맞았거나 아니면 손책의 양미간에 차이 꽂혔을 형
세였다. 그러나 태사자의 창을 피한 손책이 이번에는 태사자의 가슴을 향해 칼
로 찔렀다.
"야앗!"
"어엇!"
정적이 감돌던 산 속에는 두 사람이 내뿜는 열기와 기합 소리에 나뭇잎이 흔
들리고 있었다.
기마전의 어려움은 말고삐를 익숙하게 다루어, 수시로 아래위로 조종하며, 적
의 배후로 돌아야 하는 점이었다. 그런데 태사자는 천하에 보기드문 명기수로
불릴 만했다. 꼬리 쪽을 노리고 들어가려 하면 빙그르르 말을 돌리며 뛰어오르
게 하여 어느 새 상대편의 말 뒤로 다가왔다. 그 모양은 마치 파도 위의작은 배
위에서 칼부림을 하는 듯했다.
양쪽이 다 상대를 헤아려 싸울 뿐 아니라 무예 또한 백중세였다. 무려 1백여
합을 싸웠으나 승부는 나지 않고 쌍방이 비 오듯 하는 땀과 가쁜 숨소리만 내뿜
을 뿐이었다.
"얏!"
기합 소리는 주변 숲에 메아리쳐 백수도 숨어 버릴 지경이었으며, 떨어지는
것은 펄펄 날리는 나뭇잎뿐이었다.
손책은 점점 용맹스러웠고, 태사자는 더욱더 사나워졌다.
양쪽 다 비길 데 없이 엄청난 체력의 소유자였다. 이때 손책의 나이 스물하나,
태사자의 나이 서른이었다. 실로 잘 어울리는 호적수였다.
'이제 결판을 내기 위해 정면으로 붙지 않으면 안 된다.'
손책이 이렇게 생각하고 있을 때 태사자도,
'싸움을 끄는 동안에 부하 장수들이 쫓아오면 위험하다.'
하고 생각하며 승부를 재촉했다. 그 순간이었다.
'탁!' 하고 양쪽 등자와 등자가 부딪친 것은 두 사람의 뜻이 우연잖게 일치된
때문이었다.
"얏!"
앞쪽으로 날아든 창을 손책은 날쌔게 피하며 자루를 껴안았고, 상대에게 내려
친 손책의 칼을 태사자가 아슬아슬하게 피하여 그 손목을 잡았다. 그런 상태로
밀고 당기다 보니 두 사람은 요동하는 말 등에서 보기좋게 굴러 떨어지고 말았
다.
주인을 땅바닥에 떨군 말들은 어디론가 달아나 버렸다. 엎치락뒤치락 태사자
와 손책은 맨주먹으로 맞붙어 뒹굴었다. 갑옷은 걸레 조각처럼 너덜거렸고 투구
끈과 띠가 끊어졌다. 손책이 한순간 비틀거리면서 태사자의 등에 있는 단검을
빼어 찔렀다.
"그렇게는 안 될걸."
태사자는 손책의 투구를 얼른 벗겨 단검을 막았다.
한편 유요가 이때 군졸로부터 급보를 받았다.
"태사자께서는 손책과 싸우고 있는데 언제 승부가 날지 모릅니다. 빨리 가서
합세하면 생포할 수 있겠습니다."
유요는 보고를 듣자마자 군사 1천여 명을 거느리고 급히 말을 몰았다.
태사자와 손책이 한참 혈전을 벌이고 있을 때였다. 북 소리와 함성이 일며 유
요의 군사가 숲에까지 다다랐다.
손책이 싸우던 중에 얼른 보니 유요의 군사들이 몰려와 당황했다. 그러자 때
맞춰 정보·황개 등의 부하 장수들도 말을 몰아왔다.
태사자가 손책의 투구를 던지며 구원군으로 온 군사의 말에 날쌔게 뛰어올랐
다. 손책도 정보가 이끌고 온 그의 말에 뛰어올랐다.
손책과 13기의 장수글, 그리고 유요의 1천여 군사가 숲 속에서 혼전을 벌였다.
그러나 손책군은 중과부적이었다. 점차 몰려 좁은 골짜기까지 밀려 가는데 홀연
히 신정묘 근처에서 함성이 일어났다.
"손 장군을 구하라!"
손책의 장수 주유가 군사를 이끌고 온 것이었다. 주유는 손책이 돌아오지 않
자 부하 5백을 거느리고 찾아나서다 유요의 군사와 싸우고 있는 손책을 발견한
것이었다.
이미 해도 기울고 있었다. 거기다가 갑자기 먹구름이 몰려오더니 억수 같은
비가 쏟아져 내렸다. 이거야말로 하늘의 도우심이었는지 모른다. 양군은 억수 같
은 빗줄기 때문에 제대로 싸울 수가 없어 군사를 물렸다.
양군이 물러나고 안마의 울부짖음도 사라진 후, 산골의 하늘에는 저녁 무지개
가 걸려 있었다.
다음 날이 되자 손책은 좌우를 보며 외쳤다.
"오늘이야말로 유요의 목을 베고 태사자를 사로잡아야겠다.!"
손책은 날이 밝기가 무섭게 군사를 이끌어 산을 넘어 적진 앞으로 진군하였
다.
손책은 전날 태사자로부터 빼앗은 단검을 창 끝에 높이 매달아 군사들에게 소
리치게 하였다.
"이 칼을 보라. 태사자의 단검이다. 만약 도망치지 않았더라면 네놈은 찔려 죽
었을 것이다.!"
태사자를 조롱하여 그를 격동시킬 속셈이었다. 그러나 유요의 군사들 중에도
깃대가 높이 세워졌다. 그 끝에는 손책의 투구가 매어 있었다.
"봐라, 손책의 머리가 여기 있다! 무사가 되어 머리를 적에게 넘겨 주는 자가
다 있느냐?"
태사자가 진두로 말을 몰고 나와 낭랑한 목소리로 받아넘겼다.
군사들이 지켜 보는 가운데 태사자의 미웃움을 되돌려 받은 손책은 젊은 의기
에 분을 참지 못해 말을 박차려고 햇다.
정보가 옆에서조용히 손책을 가로막았다.
"주공께서 나설 일이 아닙니다. 제가 나가 사로잡겠습니다."
정보가 말을 달여 태사자에게 나아갔다. 태사자가 정보를 보고 버럭 소리를
질렀다.
"태사자는 자네 같은 소인배를 벨 칼을 갖지 않았다. 가서 손책더러 나오라고
일러라!"
"이 허풍선이 풋내기 놈이!"
정보는 화가 치솟아 창을 비껴들고 말을 거세게 몰았다. 두 장수의 싸움이 한
바탕 불꽃을 튀기며 어우러졌다. 30여 합이나 치고 막으며 겨루었으나 승부가
나지 않았다.
그때였다. 유요의 진영에서 별안가 퇴각하라는 북과 징 소리가 요란히 울렸다.
어리둥절한 태사자는 차을 거두고 급히 말머리를 돌렸으나 불만스럽기 짝이 없
었다. 그래서 유요를 보자 대뜸 항의부터 했다.
"참으로 분할 뿐입니다. 오늘이야말로 손책을 서로잡을 작정이었는데... 도대체
어찌 된 일입니까?"
유요가 낭패한 얼굴이 되어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지금 막 급보가 왔다. 주유가 곡아를 점령했다는 소식이다. 진무란 놈이 주유
와 함께 군사를 이끌고 성을 습격했다고 한다."
"옛? 본성이?"
태사자도 깜짝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태사자가 들어 보니 적은 일부 병력을 곡아로 향하게 한 모양이었다. 게다가
주유와는 동향인 진무란 자가 강을 건너와 주유와 합세, 유요의 본진을 급습하
였다고 한다.
근거지인 곡아를 잃은 유요가 당황하여 퇴각 신호를 보낸 것도 무리는 아니었
다.
"이렇게 된 마당에는 말릉까지 후퇴하여 설례와 책융과 합쳐 막아내는 수밖
에 없다."
그렇게 말한 유요가 전군에게 명해 밤사이에 진지를 뽑아 철수하니 태사자도
그 뒤를 따를 수밖에 없었다.
한편 손책이 그들을 뒤쫓으려 하자 장소가 간했다.
"지금 뒤쫓으면 적은 죽기를 다해 싸울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 군사의 피해도
적지 않을 것이니 차라리 오늘 밤에 야습을 가하면 섬멸할 수 있을 것입니다."
손책도 그 말을 옳게 여겼다. 밤이 되기를 기다려 군사를 다섯 갈래로 나누어
유요의 군사를 들이쳤다. 도망가다 지쳐 야영을 하던 유요의 군사들은 때아니
기습에 싸울 생각도 잃고 혼비백산하여 달아났다. 미처 달아나지 못한 군사들은
손책군의 말발굽에 짓밟히니 유요군은 죽거나 상하는 자가 부지기수였다.
태사자는 죽기를 작정하고 싸웠으나 혼자 힘으로 역부족이었다. 겨우 군사 10
여 기를 이끌고 말을 몰아 경현으로 몸을 피했다.
유요를 물리치고 곡아성을 점령한 손책은 위풍도 당당히 성 안으로 들었다.
손책은 곡아성을 함락하는 데 공훈을 세운 진무를 맞았다. 그를 보니 키가 7척
이나 되었으며, 얼굴이 누렇고 붉은 눈알을 지녀 첫눈에도 그가 범상치 않음을
엿보게 했다.
그는 여강 송자 사람으로 자를 자열이라고 했다.
손책은 그를 높이 여겨 교위로 삼았다.
유요의 패잔병 일부는 설례가 지키고 있는 말릉성으로 도망쳤다. 손책은 진무
를 선봉으로 삼아 말릉성을 치게 했다.
진무는 부하 10여 기를 이끌고 적진에 뛰어들어 단숨에 적병 50여 명을 목베
었다. 간신히 목숨을 건져 성 안으로 들어간 설례는 성문을 굳게 닫고 나오지
않았다.
이때 유요거 책융과 함께 우저를 동격하러 떠났다는 급보가 들어왔다.
손책은 그들을 한번에 쳐없앨 속셈으로 친히 대군을 이끌고 우저에 이르자 유
요와 책융이 진두에 나와 손책과 맞섰다.
"패장 유요는 어찌하여 항복하지 않느냐?"
손책이 벽력 같은 소리를 내지르자, 한 장수가 창을 비껴들고 나왔다. 적의 부
장 우미였다.
그러자 우미가 어찌 손책의 적수가 될 수 있으랴? 우미가 한껏 호기를 부려
창으로 손책을 찌르며 나왔으나 3합도 버티기 전에 손책이 번개같이 손을 내뻗
어 그의 목덜미를 움켜잡으니 손책에게 사로잡히는 몸이 되고 말았다.
손책은 우미를 겨드랑이에 꿰차고 유유히 진으로 돌아왔다.
이것을 본 유요 휘하의 부장 번능이 그를 구하고자 달려나왔다.
번능이 자기 진을 향해 말을 몰아 돌아설 즈음, 손책의 등을 노려 차으로 찌
르려 하였다.
"주공, 뒤를 살피십시오."
손책의 군사들이 황급히 소리쳤다.
손책은 고개를 홱 돌렸다.
"이놈 어디를 넘보느냐?"
손책은 목청을 돋우어 고함을 질렀다. 그 목소리가 어찌나 우렁찼던지 마치
큰 우레 소리 같았다. 손책의 등을 찌르려고 숨을 죽이며 다가가던 번능이 깜짝
놀라 그만 말 위에서 굴러 떨어졌다. 번능은 두개골이 깨어져 그 자기에서 즉사
하고 말았다. 손책은 겨드랑이에 끼고 있던 우미를 힘주어 옥죄이니 눈알이 튀
어나왔다.
"의좋게 저승에나 가거라!"
손책은 우미의 가슴팍에 일격을 가하고는 그의 시체를 번능의 시체 위에 던졌
다. 그 후 손책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진지로 들어가 버렸다. 과연 역발산기개세
의 힘과 용맹이었다.
최후의 일전으로 시도했던 우저의 기습도 참패로 끝났을 뿐 아니라 믿었던 우
미·번능 두 장수까지 손책에게 어이없는 죽임을 당하자, 유요는 넋이 나간 채
얼마 남지 않은 군사를 거느리고 책융과 함께 형주의 유표에게 몸을 의탁하고자
달아났다.
이날의 싸움에서 손책은 적을 목벤 것만도 1만이 넘었다. 유요의 군사 태반이
항복해왔다.
한편 손책은 연안의 패잔병을 소탕해 가며 설례가 지키고 있는 말릉성으로 육
박해갔다.
손책을 성 주위에 파놓은 해자까지 나가 설례에게 유요가 이미 형주로 달아났
으니 항복할 것을 권했다. 그러나 유요의 부하 중에는 아직 항복을 수치로 여기
는 자도 많았다. 그들 중에 장영·진횡등의 장수는 죽기를 마다하지 않고 싸우
기를 맹세한 유요의 잔당들이었다.
장영이 성의 망루에서 적의 동정을 살피고 있는데 손책이 다가와 항복을 권하
자 장영은 황급히 활을 겨냥하여 화살을 날렸다. 워낙 가까운 거리였기에 몸을
피할 사이 없이 화살은 손책의 좌측 허벅지에 적중했다. 손책이 신음 소리를 내
며 말 위에서 굴러 떨어졌다.
"앗, 주공께서 화살에 맞았다."
손책군의 장수들이 일제히 달려가 손책을 부축하여 급히 진영으로 돌아왔다.
그날 밤 손책은 진영을 5리쯤 물린 후 화살을 뽑고 상처에 금창약을 발랐다.
다행히 허벅지인지라 상처는 가벼웠다.
새벽이 되자 진영 곳곳에 조기가 내걸렸다.
"급소를 맞아 손 장군은 애석하게도 운명하셨다!"
손책의 진중에는 장졸들의 슬픈 통곡 소리가 울려 퍼졌다. 장졸들은 아직 발
인은 정해지지 않았으나 불원간 가까운 산에 가장을 할 거라고 수군대고 있었
다.
이 소식이 곧 장영의 귀에 들어 갔다.
"그러면 그렇지. 내 화살을 맞고 살아 남은 놈이 있을 리 없지."
장영은 무릎을 치며 기뻐했다. 이에 설례는 부하들을 풀어 알아보도록 했다.
군사들이 마을에 숨어들어 염탐했다. 그런데 그날 아침, 부근의 부락민들이 튼튼
한 관 하나를 끙끙거리며 들고 진문으로 들어가는 것이 보였다.
"틀림없습니다. 선책이 죽었음이 분명합니다. 관을 떠메고 진문으로 나갔습니
다. 장사도 곧 임시로 지낼 모양으로 은밀히 준비하고 있다 하옵니다."
염탐한 군사가 달려가 보고 들은 대로 고했다.
그날 밤이었다. 하늘에는 별이 총총했다.
한 떼의 군마가 소리 없이 강물이 흐르듯 벌판을 누비듯이 지나가고 있었다.
피리를 불고 장례 때 북을 두드리며 징을 치니 그 소리가 애끊는 듯 슬프기 어
둠 속을 흘렀다. 그 뒤에는 횃불을 밝힌 가운데 관을 운구하고 있었다. 관의 앞
과 뒤를 호위하는 여러 장수들도 이따금 하늘을 우러르며 깊은 탄식을 토해내고
있었다.
죽은 선책의 유해를 암매장한다는 것을 미리 탐지한 설례는 장영.진횡 두 장
수를 내보내 손책군을 치게 했다. 장영.진횡은 군사를 이끌고 그날 밤에 닷없이
장례 행렬을 기습했다. 손책군의 장례 행렬을 순식간에 뒤덮어 버릴 기세였다.
그러나 설례가 군사를 이끌고 오자 장례 행렬은 급히 5열로 나눠져 질서정연
한 전투 진용을 잦추었다.
"한 놈도 남기지 말고 사로잡으라!"
손책의 진용에선 추상 같은 호령이 떨어졌다.
놀란 쪽은 설례였다.
"아차, 계략이었구나."
장영이 탄식했으나 때는 이미 늦었다. 갑자기 손책의 복병들이 곳곳에서 나타
났다. 이렇게 되자, 기습을 당한 건 오히려 장영의 군사들이었다. 이쪽 저쪽에서
어지럽게 밀려들어 공격을 하니 도무지 정신을 차릴 수 없게 된 장영의 군사들
은 뿔뿔이 흩어졌다.
"성 안으로 물러가라!"
장영이 외치며 말머리를 돌려 황망히 성 쪽으로 말을 몰았다.
그러자 숲 속에서 한 장수가 부하들을 이끌고 나타났다.
"손랑이 예 있다. 말릉성은 이미 내 수중에 있거늘 네놈들은 어디로 갈 셈이
냐?"
말릉성이 적의 수중에 들어갔다는 말에 장영이 깜짝 놀라 한동안 얼이 빠져
있었다. 그러나 손책이 거느린 군사가 몇 안 되는 걸 알고 칼을 휘두르며 앞으
로 나섰다. 손책의 말이 어느 해 장영의 말 엉덩이를 들이받았다.
"이 어리석은 놈!"
손책이 호통과 함께 칼을 내리치니 장영의 몸은 붉은 피를 뿜으며 두동강이
나고 말았다.
이때 진횡은 장영이 손책의 한 칼에 두 동강이 나자 급히 말머리를 돌리는데
손책의 장수 장흠이 활에 화살을 메겨 당겼다. 이에 진횡이 등에 화살을 맞고
그대로 말 아래로 굴러 떨어졌다.
죽었다던 손책이 나타나 장영을 주살하고 진횡도 죽자 장영의 군사들은 무기
를 버리고 꿇어 엎드렸다. 군사들이 그 지경이니 모사인 설례가 살아 남을 리가
없었다. 그도 난전 속에서 누구의 창엔가 찔려 목숨을 잃고 말았다.
손책은 그 길로 말릉성으로 휘달으니 미리 성 안에 들어가 있던 부하들이 성
문을 열어 그를 맞아들였다.
손책은 승전고를 울리며 만세 삼창을 외치니 장강의 강물에 어둠이 걷히고 봉
황산, 자금산 봉우리에 아침 해가 밝게 비치기 시작했다.
손책은 즉시 군사들을 엄하게 단속하여 백성들을 안심시키고 방을 내걸어 질
서를 회복하니 모든 백성들은 손책을 진심으로 흠모하고 칭송을 아끼지 않았다.
손책이 이처럼 용맹을 떨치니 세상 사람들은 그를 항우와 비견하여 '소패왕'이
라 부르기도 하고 또는 '강동의 손랑'이라 부르기도 하였다.
강동 소패왕의 출기불의
강동을 평정한 순책은 다시 오군을 치러 남하하여 동오의 덕왕이라 자칭하는
엄백호를 단숨에 무찌른다. 적의 마음을 다른 쪽으로 돌려 빈 곳으로 나아간다
는 출기불의의 계략으로, 엄백호를 도우려는 회계 태수 왕랑까지 멸하고 동쪽
지방을 장악한다.
유요가 믿고 있던 장영·진횡·설례마저 손책군에게 목숨을 잃자 그 수하 군
사들은 감히 손책에게 맞설 엄두를 내지 못했다. 그렇게 되니 강동의 긴린아 손
책은 가히 소패왕에 걸맞는 위세를 떨치게 되었다.
그러나 그때까지도 손책의 군세 앞에 꺾이지 않는 한 세력이 남아 있었으니
태사자가 바로 그였다.
그 무렵 태사자는 경현성에서 정병 2천여 명을 새로이 수습하고 복수전을 준
비하고 있었다. 그가 섬기던 유요는 패주하여 어디로 갔는지 행방이 묘연했으나
그는 절개를 꺾지 않었던 것이다.
어제는 구강을 거슬러 올라가고, 오늘은 말릉으로 내려오다가 날이 새자 다시
경현으로 군사를 이끌고 가는 손책은 강동의 남과 북을 종횡하며 말고삐를 늦추
지 않았다.
"비록 작은 성이긴 하나 북쪽 일대는 늪지대이며 뒤에는 산을 등지고 있다. 게
다가 성 안의 군사는 겨우 2천 명이라지만 끝까지 항복하지 않는 군사들이라면
아마 죽음까지도 각오한 사람들일 것이다. 함부로 접근하지 말라."
손책은 경현에 이르렀으나 결코 자기 편의 우세를 자만하지 않고, 그는 휘하
장수들에게 엄명을 내렸다. 또한 군사를 멀찍이 배치하고 신중하게 성 안의 동
정을 살폈다.
손책이 군사를 몰아 들이치지 않는 이유 중의 하나는 태사자의 무용을 아껴
될 수 있는 한 사로잡아 자기 사람으로 만들고 싶은 생각에 변함이 없었기 때문
이다.
손책은 주유를 불러 성을 함락시킬 방책을 물었다.
"한 장수에게 날랜 장졸 열 명을 주어 성 안으로 잠입시키는 것입니다. 그들에
게 불에 잘 타는 나무와 기름먹힌 헝겊을 가져가게 하여 성 안의 여러 곳에 불
을 지르게 하는 것입니다."
"전 높은 성벽을 어떻게 기어오른다는 말인가?"
"방법을 강구하면 못 오를 것도 없습니다."
"누구를 보내면 좋겠는가?"
"진무가 적임인가 합니다."
"진무는 내 휘하에 온 지 얼마 되지도 않았고, 앞으로 큰일을 해낼 수 있는 대
장인데 그를 사지에 보낸다는 것은 아까운 일이오. 그리고 그보다 더 아까운 것
은 비록 적이긴 하나 태사자란 인물이오. 그를 사로잡아 내 사람으로 만들고 싶
소만..."
"그러시다면 이렇게 하면 어떻겠습니까? 성 안에서 불길이 보이기 시작하면
동시에 서·남·북 삼방에서 즉각 공격해 들어가되 동문만 병력을 허술히 배치
하는 것입니다. 태사자는 분명 그 동문을 공격하며 나올 것이비낟. 태사자가 성
문을 빠져 나오면 그 뒤를 추격케 합니다. 그리고 동문 밖 30여 리쯤에 미리 복
병을 배치해 두어 그곳에 다다르면 뒤따르는 군사들을 죽이고 다시 20리 쯤에
군사를 매복시켜 둔다면 반드시 태사자를 사로잡을 수 있을 것입니다."
손책이 들어보니 좋은 계교였다. 주유의 말을 좇아 진무가 거느릴 열명의 결
사대를 모집했다.
손책은 임무를 수행하고 살아 돌아오는 군사에게는 일약 1백 명을 거느리는
부장으로 승진시키고 많은 상도 내리겠다고 약속했다. 그러자 너도나도 결사대
에 지원했다. 그 중에서 열 명의 날랜 군사를 뽑은 진무는 바람이 많이 부는 밤
을 기다렸다.
마침내 기다리던 날이 왔다. 그날은 바람이 세차게 불어올 뿐만 아니라 달도
먹구름에 가려 있었다. 기름에 ㅈ거신 헝겊, 불에 잘 타는 잡목을 군사 등에 지
웠다. 진무는 홀가분한 차림으로 성벽 밑까지 기어 숨어들어 갔다.
성벽은 돌담이 아니라 뜨거운 열로 구운 전이라고 하는 일종의 기와로 쌓아올
린 것이었다. 성벽은 몇 백년의 세월을 거쳐서인지, 기와 틈 사이에는 잡초가 자
라고 있었고 새들이 집을 짓는 등 황폐한 벽이 되어있었다.
"자, 다들 잘 들어라. 내가 먼저 올라가 밧줄을 내려 줄 테니 너희들은 거기
엎드린 채 감시를 하라."
진무는 부하에게 주의를 준 다음, 기와의 틈 사이에 단검을 박아 칼로 사닥다
리를 만들었다. 그런 다음 한 걸음 한 걸음 밟으며 단신으로 성벽을 기어올라갔
다.
무사히 성 위에 오른 진무는 밧줄을 내려 결사대가 오르게 했다. 진무와 결사
대는 간신히 성 안에 잠입하여 여기저기 흩어져 불을 질렀다.
"불이야!"
성을 지키던 문지기들이 여기저기서 한꺼번에 비명을 질러댔다.
"진정하라, 적의 계략이다. 당황하지 말고 불을 꺼라."
원래 태사자의 군사들은 대부분 여기저기서 끌어모은 산과 들의 나무꾼이나
농군들이라 규율이 제대로 서지 않았고 군령도 먹혀들지 않았다. 때문에 태사자
는 군사들을 질타하며 지휘하고 있었지만 성 안은 이미 아수라장이 되고 말았
다.
그날따라 바람마저 거세게 불어 불길은 점점 드세게 타올랐다. 한쪽을 끄고
있는 동안 또 다른 쪽에서 불길이 치솟았다. 불은 삽시간에 성 안 구석구석까지
번져갔다.
뿐만 아니라 성의 서·남·북쪽에서 적군이 들이닥쳤다. 모진 바람을 타고 고
함 소리, 북 소리, 징 소리가 한꺼번에 울려오니 성 안의 군사들은 얼이 빠질 지
경이었다. 태사자의 군사들은 불을 끌 엄두도 내지 못한 채 가마솥의 콩처럼 팔
짝팔짝 뛰며 갈팡질팡하기 시작했다.
태사자는 성 안의 형세를 살피다 외쳤다.
"동문을 열고 돌진하라!"
태사자는 급히 말을 타고 진두에 서더니 부하 장수들에게 소리쳤다.
"성 밖으로 나가 단번에 손책과 승부를 내겠다. 적은 성을 포위하려고 전군을
서·남·북 3면으로 나누었다. 동문이 허술하니 그곳으로 돌진하도록 하라!"
불길에 휩싸였던 군사들이 동문을 통해 밖으로 쏟아져 나왔다.
태사자가 성 밖으로 나와 30여 리쯤 달리다 보니 뜻밖에도 한 떼의 군사들이
앞길을 가로막았다.
"저기 태사자가 온다!"
손책의 군사들은 이 말을 신호로 태사자를 향해 화살을 퍼부었다.
싸움에 별로 경험이 없는 태사자의 군사들은 매복군이 쏘아대는 화살에 맞아
죽거나 부상을 당하는 등 막심한 타격을 입었다.
"적의 중심부를 쳐라!"
태사자는 혼자 분전하며 외쳤으나 그를 따르는 군사는 이제 손으로 꼽을 지경
이었다. 그는 더욱 말을 빨리 몰았다. 그가 20여 리를 더 달려 뒤를 보니 따르는
군사는 보이지 않고 추격군의 함성만 들렸다. 어느 새 그는 혼자가 되었다.
"태사자를 놓치지 마라!"
태사자는 어둠 속에서 들려오는 고함 소리를 듣고 다시 급히 말을 몰았다.
이 지방에는 원래 늪이나 호수, 작은 웅덩이가 많은 곳이었다. 장강의 물이 호
수로 들어가고 그 호수의 물이 다시 벌판의 무수한 웅덩이로 흘러들기 때문이었
다. 그 늪과 호수와 벌판에는 갈대가 무성했다. 그 때문에 태사자는 길을 잃고
말았다.
갈대 숲을 맴돌던 태사자의 말은 발을 헛디디며 웅덩이에 빠졌고 태사자는 곤
두박질하며 갈대밭에 나뒹굴었다. 그때였다. 이미 지칠대로 지친 태사자에게 복
병들이 우르르 달려들어 온몸을 꽁꽁 묶어 버렸다.
"분하다!"
손책의 본진으로 끌려가며 태사자는 이를 부드득 갈았다.
이윽고 그는 손책의 본진으로 끌려와 참수를 기다리며 눈을 감고 있는데 누군
가 군사들을 꾸짖는 노한 음성이 들려왔다.
"너희들은 어찌 이리도 무례하게 장군을 포박하였느냐?"
태사자가 놀라 눈을 떠보니 그는 다름아닌 손책이었다. 태사자는 다시 눈을
감으며 태연히 말했다.
"어서 내 목을 베시오."
"공은 왜 그토록 죽기를 서두르시오?"
"이렇게 된 바에야 잠시도 수치를 당하기 싫으니 부질없는 말은 그만 두고 어
서 내 목을 쳐 주시오."
"나는 자의 충절을 익히 알고 있소. 공의 패전을 보고 쾌재를 부를 생각은 추
호도 없소. 공은 자신을 패장으로 비하하나 그 패인은 그대가 초래한 것이 아니
라 유요가 우둔한 탓이었소. 애석하게도 공은 좋은 주인을 만나지 못했던 것이
오. 구더기들 틈바구니에서 어찌 누에가 고치를 만들고 실을 뽑을 수 있겠소."
손책은 묵묵히 고개를 떨구고 있는 태사자에게 다가와 친히 그의 결박을 풀어
주면서 말했다.
"나는 공이 참된 대장부임을 알고 있소. 나는 공과 함께 큰 일을 도모하고자
하오."
손책은 자기의 전포를 벗어 태사자에게 입혀 주었다. 자기의 장하에 사로잡혀
온 패장에게 항복을 권유하는 적장이 아니라 오랫동안 만나지 못했던 옛친구를
대하는 듯한 손책의 따뜻하고 정중한 태도에 태사자도 마침내 마음이 움직였다.
"높으신 이름 일찍부터 들어 알고 있습니다. 이번에 여러 차례 장군과 싸우다
보니 실로 당금의 영웅임을 알았습니다. 소인을 거두어 주신다면 힘을 다해 장
군을 돕겠습니다."
손책은 태사자의 손을 덥석 잡고 자기의 장막 안으로 데리고 갔다.
"지난번 신정의 싸움에서는 피차 힘껏 싸웠는데 그때 좀더 싸움이 계속되었더
라면 공이 이 손책을 이겼으리라 생각하오?"
손책이 웃으며 묻자 태사자도 가볍게 웃으며 응수했다.
"글쎄요, 어찌 되었을까요?"
"그러나 이것만은 확실할 것이오. 내가 만일 졌다면 나는 그대의 오라를 받았
을 거요."
"당연하지요."
"그랬다면 공은 나를 살려 주었을까요?"
"아닙니다. 공의 목은 없어졌을 것입니다. 설사 제게 그럴 마음이 있었더라도
유요가 살려 둘 리가 없지 않습니까?"
태사자는 조금도 주저함이 없이 당당한 어조로 말했다.
"하하하, 그렇군요."
손책은 껄걸 웃으며 태사자를 상좌에 앉히고 주연을 베풀었다. 손책은 태사자
에게 술을 권하여 입을 열었다.
"앞으로는 여러 모로 공의 지략을 빌릴까 하는데 좋은 계책이 있으면 주저말
고 말씀해 주시오."
"패군지장은 군사에 관한 일을 논하지 않는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태사자는 겸손하게 대답했다.
"그건 그렇지 않소. 옛날의 한신을 보시오. 한신도 항복한 장수 광무군에게 계
교를 묻지 않았소?"
그 말에 태사자가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입을 열었다.
"그럼 대단찮은 계교이나 유막의 일원이 된 징표로 한 가지만 말씀드릴까 합
니다. 유요의 휘하 군사들은 지난번 싸움에서 패한 이후 주군을 잃고 떠돌아다
니고 있습니다. 그 중에는 뛰어난 장수와 아까운 군사가 많습니다."
"음-. 그들을 어떻게 하자는 말씀이오?"
"이 태사자를 사흘 동안만 자유롭게 놓아 주시면 제가 가서 그 남은 무리들을
달래 명공의 방패가 될 만한 정병 3천 명을 모아 돌아오겠습니다. 명공께서는
나를 믿어 주시겠습니까?"
어렵게 사로잡은 자기를 풀어 달라는 말이었다. 그러나 손책은 주저하지 않고
선뜻 허락했다.
"그거야말로 내가 바라던 바요. 다만 오늘부터 사흘째 되는 날 오시까지는 반
드시 돌아와야 하오."
그날 밤 손책은 태사자에게 한 필의 준마를 주어 진중에서 풀어 주었다. 이튿
날 아침이 되자 여러 장수들이 그 사실을 알고 아연 실색했다.
"아마, 태사자는 돌아오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 안의 호랑이를 산 속에 풀어 준 격이라며 장수들은 볼멘소리를 드높였
다. 그러나 손책은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며 태연히 말했다.
"두고 보시오, 자의는 신의가 있는 사람이오. 그렇기 때문에 그의 목숨을 아껴
살려 둔 것이오. 만일 신의를 저버리고 다시 돌아오지 않을 인물이라면 다시 돌
아오지 않아도 아까울 게 없소."
손책이 이렇게 타일렀으나 장수들은 그래도 미심쩍은 기색들이었다.
사흘째가 되자, 손책은 영문 앞에 긴 막대를 세워놓고 군사들에게 해 그림자
를 보게 했다.
이러한 해시계는 진의 시황제가 진중에서 사용한 것이 시초라고 한다. 송사에
는 하승천이 표후일영을 관장한다고 기록되어 있으며 명대에는 귀영대라는 것이
있었다. 모래 땅 대신 마룻바닥을 쓰거나 또 벽에 비치는 그림자를 기록하는 방
법도 있었다.
"오시입니다."
드디어 태사자와 약속한 시각이 되자 진막 안으로 해시계를 보던 군사가 들어
와 큰 소리로 외쳤다.
"남쪽을 보라!"
손책이 손으로 가리켰다. 과연 태사자는 3천 명의 장병을 이끌고 촌각도 어기
지 않고 저편 벌판 끝에서 흙먼지를 날리며 돌아오고 있었다.
손책의 밝은 헤아림과 태사자의 신의에 탄복한 장수들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
에 두 손을 들어 환호하며 그를 맞았다.
이제 강동은 손책의 세력하에 평정되었다. 손책의 군세는 날로 증강되어 거느
리는 군사도 어느 새 수만을 헤아리게 되었다. 손책은 그 세력을 이끌고 선친의
영토였던 강동으로 내려가 백성들을 지켜 주니 민심은 자연히 안돈되었다.
손책의 기업은 이제 그 일단계를 넘어섰다고 해도 좋았다. 그리하여 손책은
그의 모친을 비롯한 가솔들을 그의 근거지로 모셔 오기로 했다.
그의 노모와 일족은 하늘처럼 믿던 손견이 황조와의 싸움에서 죽은 후 오랫동
안 곡아의 벽지에 틀어박혀 온갖 고생을 다하고 있었다. 손책은 많은 장수와 군
사를 보내 주렴(구슬을 꿰어 만든 발) 가마에 비단 덮개를 씌운 수레를 호위하
게 했다.
이윽고 손책은 오래간만에 어머니의 손을 잡고 강동의 본성인 선성으로 모시
었다.
"어머님! 이젠 안심하시고 이곳에서 여생을 편안히 보내십시오. 아들 책도 이
젠 어른이 되었습니다."
머리가 희끗희끗해진 노모는 웅대한 성 안을 그저 두리번거리며 바라보다 기
쁨의 눈물을 흘리며 탄식했다.
"네 아버지가 살아 계셨더라면..."
손책은 강동이 안돈되고 가솔들까지 옮겨오자 지체하지 않고 아우 손권에게
일렀다.
"네게 장수 주태를 딸려 주겠으니 선성을 지키며 나를 대신하여 어머님을 잘
모시도록 하라."
아우 손권에게 선성을 맡긴 손책은 다시 군사를 거느리고 오군을 공격하기 위
해 남으로 향했다.
그는 싸워서 얻은 땅에서는 즉시 치안을 회복하여 민심을 얻는 것을 첫째 과
제로 삼았다. 법을 바로잡고 재난에 허덕이는 백성을 구호하며 산업을 진흥시키
는 한편 양민을 괴롭히는 범법자들에겐 엄벌을 가했다.
"손랑이 온다!"
백성들은 이런 말만 들어도 황급히 길가에 엎드려 절하고, 불량민들은 간담이
서늘해져 자취를 감추었다.
"손랑은 백성을 사랑하고 신의 있는 인재를 잘 쓰는 장군이다."
지금까지 성을 버리고 벼슬도 마다하고 산과 들로 피했던 수많은 관리들도 이
런 소문을 듣고 속속 고향으로 돌아와 벼슬하기를 원했다. 손책은 그들 중에서
인재를 골라 그 지방을 다스리게 했다.
이렇듯 백성들에게 선정을 베풀자 그가 가는 곳이면 어디서나 백성들은 소를
잡고 술을 장만하여 성대하게 대접했다.
그 즈음 오군은 '동오의 덕왕'이라고 자칭하는 엄백호란 자가 점거하고 있었
다. 그는 오군의 오성과 가흥에 그의 부장들을 보내 지키게 하던 중 손책이 쳐
들어온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다.
엄백호는 아우 엄여에게 명해 손책을 막게 했다. 엄여는 풍교까지 군사를 끌
고 나와 손책을 맞기 위해 영채를 세웠다.
"하찮은 작은 성이니 단숨에 빼앗아 버리자!"
손책은 몸소 진두에 서서 일격에 성을 무너뜨릴 심산이었다. 그러나 장굉이
선두에 나서는 손책을 만류했다.
"주공께선 삼군을 이끌고 계십니다. 저토록 보잘 것 없는 작은 성을 치는데 어
찌 몸소 싸우려 하십니까? 부디 장군께서는 자중하소서."
장굉이 굳이 만류하자 손책도 그 말에 따라 대장 한당에게 선봉을 맡겼다. 한
당은 그 길로 풍교 다리 위로 말을 몰아 정면에서 치고 진무와 장흠 두 장수는
작은 배를 타고 풍교 뒤쪽으로 돌아가 화살을 쏘며 닥치는 대로 적을 무찌르면
서 협공을 가했다. 이에 엄여는 견디지 못하고 말을 돌려 도망쳤다.
손책은 숨돌릴 겨룰도 주지 않고 오성의 성문까지 급히 추격했다. 성 안으로
들어간 적들은 성문을 닫고 싸우려 들지 않았다. 손책은 군사를 수·륙 앙면 두
갈래로 나누어 오성을 완전히 포위했다.
하루는 손책이 앞을 다투어 성을 공격하는 부하 장병들을 지휘하며 성문 앞까
지 가서 큰 소리로 항복하라고 외쳤다.
그러자 성루에서 한 장수가 상반신을 내민 채 왼손으로는 기둥을 붙들고 오른
손으로 성 아래 손책을 가리키며 심한 욕설을 퍼부었다. 손책의 등 뒹에서 이를
본 태사자가 화살을 뽑으며 말했다.
"저놈의 왼손등을 꿰뚫어 버리겠습니다."
말이 끝나기도 전에 시윗소리가 났다. 번개처럼 날아간 화살은 보기 좋게 적
장의 왼손을 맞추어 성루에 대롱대롱 매달았다. 외마디 비명과 함께 서까래에
매달려 몸부림치는 그 장수를 보자 손책은 감탄해 마지않았다.
"참으로 훌륭한 솜씨로다!"
손책의 군사들도 태사자의 활 솜씨에 탄복해 일제히 함성을 지르니 그 함성은
오성을 압도하고도 남았다.
이 꼴을 본 엄백호는 간담이 서늘해졌다.
"저토록 활을 잘 쏘는 장수가 있으니 어찌 대적할 수 있으리오."
엄백호는 혀를 내둘렀다. 손책군과 싸워봤자 승산이 없음을 깨닫고는 부하들
과 의논한 후 아우 엄여를 강화 사절로 손책군에게 보냈다.
손책은 엄여를 막사로 맞아들여 술과 음식을 대접하며 은근히 물었다.
"이 책한테 어떤 조건으로 화해를 구한다는 말이오?"
"강동의 땅을 평등하게 반분하면 어떻겠습니까? 형님의 뜻은 그러한 듯합니
다."
그 말을 듣자 손책은 대로하여 눈꾸리를 추켜 세우며,
"쥐새끼 같은 놈들이 어찌 감히 나와 똑같이 나라를 나누자고 하는가? 무엄하
기 짝이 없구나. 이놈을 당장 끌어 내 참하라."
하고 호령했다.
깜짝 놀란 엄여가 벌떡 일어나 칼을 뽑아들었다. 그러나 다음 순간 손책이 번
개같이 칼을 번뜩여 엄여의 목을 한칼에 베어 버렸다.
손책은 한 구석에서 와들와들 떨고 있는 엄여의 종자에게 엄여의 머리를 가리
키며 일렀다.
"돌아가 엄백호에게 본 대로 말하라."
종자들은 주인의 머리를 안고 도망쳤다. 엄백호는 아우의 머리를 보자 손책의
서릿발 같은 기세에 두려움이 앞섰다. 아우의 복수는커녕 회계 땅으로 물러나
태수 왕랑에게 의지하여 계책을 세워야겠다고 작정했다. 그는 오성을 버리고 황
망히 밤중에 성을 빠져 나갔다. 손책은 군사를 몰아 엄백호를 쫓는데 황개는 가
홍을, 태사자는 오성을 점령하니 그 밖의 여러 작은 고을은 저절로 평정되었다.
어제까지 '동오의 덕왕'이라 큰소리 치던 엄백호는 초라한 꼴이 되어 삼십육계
줄행랑을 놓다가 도중에 추격군에게 심한 타격을 받으며 간신히 회계 땅에 이르
렀다.
회계태수 왕랑은 엄백호가 온다는 말을 듣고 군사를 일으켜 그를 도와주려고
했다. 그러자 신하 중에 우번, 자는 중상이라는 자가 왕랑에게 간했다.
"손책에게 때가 온 것입니다. 시운을 거스르는 어리석은 싸움은 이롭지 않습니
다. 더욱이 손책은 백성들을 편안케 하고 엄백호는 모질고 독하니 마땅히 엄백
호를 사로잡아 손책에게 바치고 이 싸움은 피하셔야 합니다."
"그럼 손책이 와도 팔짱을 끼고 앉아 있으란 말인가?"
"손책과 화친을 맺어 나라의 안전을 도모하십시오. 그것이 순리를 따르는 길입
니다."
"쓸개 빠진 소리 말라. 손책 따위에게 회계의 왕랑이 어찌 몸을 굽힌단 말인
가?"
"그렇지 않습니다. 손책은 의를 존중하고 인정을 베풀어 근래에 가는 곳마다
혁혁한 인망을 모으고 있습니다. 거기에 비해 엄백호는 포악무도 할 뿐 선정을
베푼 적이 없습니다. 주군께서 도와 주셔도 언젠가는 망해 버릴 위인입니다."
"이놈, 네놈이 무얼 안다고 내 앞에서 이죽거리느냐? 꼴도 보기 싫다. 썩 물러
가라."
왕랑이 우번에게 호통을 쳤다. 우번은 하는 수 없이 물러나고 말았다. 우번이
성에서 나간 이후 대세의 흐름을 읽지 못한 왕랑은 군사를 일으켜 엄백호를 맞
았다. 엄백호와 함께 산음현의 얕은 산기슭에 군사를 풀어 진을 치고 손책과 대
치했다.
회계태수 왕랑은 몸소 말을 몰고 나왔다.
"이 애송이 손책아, 내 앞으로 썩 나오너라."
그러자 손책은 기다렸다는 듯이 말을 이끌어 진두에 나섰다.
"내가 의로운 군사를 이끌어 온 것은 절강 땅을 평안케 하려함이다. 그런데 어
찌하여 네놈은 도적을 감싸 주며 나에게 맞서려는가?"
왕랑도 질세라 손책을 향해 외쳤다.
"네 이놈, 아직도 욕심을 버리지 못하였느냐? 오군을 빼앗고도 아직도 모자라
이 회계까지 넘보느냐? 내가 너를 맞아 싸우는 것은 특히 엄백호의 분을 풀고자
함이다."
왕랑의 말에 손책은 대로하여 즉시 창을 겨누며 달려가려 하자 태사자가 급히
나섰다.
"주공께서 나서실 일이 아닙니다."
태사자는 날쌔게 말을 달려 왕랑에게 창을 들이댔다. 왕랑이 태사자의 무용을
알 리 없어 함부로 칼을 휘두르며 달려나왔다. 그러나 태사자의 창을 당해 낼
수는 없었다. 몇 번 부딪치자 이미 형세가 흔들리기 시작했다. 왕랑의 휘하 장수
주흔이 주군의 위기를 구하려 달려나왔다.
그러자 손책군에서 황개가 나가 주흔에게 창을 겨누며 다가갔다. 양군은 천지
가 떠나갈 듯한 북 소리와 함성을 지르며 각자 자기들 장수의 사기를 돋구었다.
그때 돌연 왕랑의 진 뒤쪽에서 혼란이 일어나더니 한 떼의 군마가 달려나왔
다. 주유·정보가 거느린 군사가 어느 틈에 뒤로 돌아 협공을 가한 것이었다.
갑자기 왕랑군 전체에 어지러운 동요가 일어났다. 왕랑은 손책과 주유의 협
공을 받자 사태가 불리함을 깨닫고 황급히 군사를 돌려 회계성으로 달아났다.
손책은 여세를 몰아 성문 아래까지 추격해 네 문을 일시에 공격하기 시작했
다. 왕랑이 위급함을 느껴 죽기를 무릅쓰고 나가 싸우려 했으나 엄백호가 붙들
었다.
"손책군이 강하다고는 하나 해자가 있으니 성벽 위까지 기어오를 수는 없을
것입니다. 구덩이를 깊이 파고 보루를 높이 쌓아 성벽을 더욱 견고하게 하고 싸
우지 마십시오. 저들은 한 달 내에 군량이 떨어질 것인즉 그때는 스스로 퇴각할
것입니다. 그때 굶주려 달아나는 적들을 일시에 공격한다면 대승할 수 있을 것
입니다."
왕랑이 그 말을 들으니 이치에 닿는 말이었다. 왕랑은 더욱 축대를 높이 쌓고
성문을 굳게 걸어 잠근 채 성 밖으로는 얼굴도 내밀지 않았다.
왕랑이 성문을 닫고 꿈쩍도 하지 않으니 손책도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아무
리 거센 공격을 퍼부어도 성 안의 군사는 요지부동이었다.
"이렇게 날짜만 흘러가니 며칠 내로 군량이 떨어질 것 같은데 어떻게 하면 좋
겠는가?"
손책이 휘하의 장수들을 불러모은 후 대책을 물었다. 그러자 손책의 숙부 손
정이 한 가지 계책을 내놓았다.
"왕랑이 지금 회계성이 견고한 것에 의지하여 성을 굳게 지키기만 하니 성을
빼앗기가 쉽지 않네. 듣건대 회계의 군량미 태반을 여기서 수십리밖에 안 되는
사독에 저장해 두고 있다 하네. 왕랑은 회계성을 지키기에 급급하여 사독의 방
비를 허술히 할 터인즉 군사를 보내어 방비가 허술한 사독을 진다면 능히 점령
할 수 있고 군량도 얻을 수 있을 것이며 또한 꿈쩍도 않는 성 안의 군사를 밖으
로 끌어 낼 수 있지 않겠는가? 이것이 바로 적이 방비하지 않고 있는 곳을 치고
뜻하지 않는 곳으로 나간다는 출기불의라는 계책일세."
손책은 숙부의 말에 무릎을 쳤다.
"실로 묘안이십니다."
손책은 숙부의 의견을 좇아 그날 밤 진중의 여기저기에 화톳불을 피우게 했
다. 휘황한 불빛 아래 일부러 수많은 깃발을 늘어세웠다. 군사처럼 만든 수많은
허수아비까지 세워놓고 마치 당장이라도 많은 군사들이 회계성으로 쳐들어갈 채
비라도 하고 있는 것처럼 꾸몄다.
주유가 손책에게 다가와 고했다.
"사독을 치면 왕랑은 틀림없이 군사를 끌고 나올 것입니다. 그때 군사를 매복
시켜 기습을 가하면 크게 이길 수 있을 것입니다."
주유의 말에 손책은 웃으며 말했다.
"이미 그 모든 계책과 채비를 갖추었으니 회계성은 오늘 밤 안으로 우리의 손
안에 떨어질 걸세."
손책은 곧 군사를 남쪽으로 몰았다.
손책의 군사가 움직인다는 말을 듣고 왕랑은 망루에 올라가 적진을 살펴보았
다. 그런데 적진에는 평소와 다름없이 곳곳에 화톳불이 타오르고 세워놓은 깃발
들이 정연하게 바람에 나부끼고 있었다. 왕랑은 내신 손책이 물러가는 척함으로
써 자기를 성 밖으로 유인하기 위한 것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주흔이 왕랑의 마음을 엿본 듯 의혹을 일시에 날려버렸다.
"손책은 지금 물러간 것이 분명합니다. 적진에 불을 피우고 기를 세워 놓은 것
은 우리를 속이기 위함입니다. 지금 성 밖으로 나가 저들을 쳐야 합니다."
주흔의 말에 엄백호가 거들어 한 마디 했다.
"놈들은 필시 사독을 치러 갔을 것입니다. 먼저 군사를 이끌고 그들을 뒤쫓으
면 나도 곧 뒤따르겠습니다."
그 말에 왕랑이 깜짝 놀랐다.
"사독은 우리의 금은보화는 물론, 군량을 보관해 둔 곳이요. 그곳을 적이 점령
하면 우리는 싸우기도 전에 패배한 것이나 다름없소. 공이 먼저 적군의 뒤를 추
격하시오. 그러면 나도 곧 뒤따를 것이오."
왕랑이 엄백호를 재촉하니, 그는 주흔과 함께 군사 5천을 이끌고 손책의 뒤를
추격하기 시작했다. 엄백호와 주흔이 말을 달리기 20여 리, 날은 이미 초저녁이
되었다. 그들이 말을 달려가니 앞쪽 숲 속에서 돌연 북 소리가 울리며, 수많은
횃불을 든 군사들이 여기저기서 튀어나와 사방을 대낮처럼 환히 밝혔다.
복병이 나오자 엄백호는 급히 말머리를 돌렸다. 그러자 누군가 말을 몰아 나
오며 앞을 가로막았다. 엄백호가 횃불에 비친 그 장수를 보니 바로 손책이 아닌
가! 주흔이 먼저 칼을 겨누고 손책에게 달려들었다. 그러나 어찌 주흔이 손책의
적수가 되랴. 주흔은 불과 2, 3합도 못 되어 손책의 창에 찔려 비명 소리와 함께
말 아래로 굴러 떨어지고 말았다.
손책이 그대로 여세를 몰아 ㅈ거군을 시살하니 이미 손책의 군세 앞에 겁을
먹은 엄백호는 혈로를 뚫어 도망치기에 바빴다. 군사들은 대장이 그 모양이니
무기를 땅에 항복하며 한 목숨 살려 주기만을 애원했다. 엄백호는 간신히 목숨
을 부지하여 여항으로 도망쳤다.
한편 왕랑은 회계성에서 잠도 자지 않고 성을 지키고 있었다. 날이 새고 보니
적진에는 화톳불이 꺼진 채 적군은 한 사람도 보이지 않았다.
"적의 계략이었구나!"
왕랑이 이렇게 탄식하고 있을 때 급보가 전해졌다.
"사독이 점령당했습니다."
왕랑은 급히 성을 뛰쳐나와 사독으로 향했다. 그러나 가는 도중 곳곳에서 손
책군의 복병을 만나 마침내 왕랑의 군사는 여지없이 섬멸당하고 말았다.
왕랑은 구사일생으로 사지를 빠져 나와 해우로 달아났다. 왕랑 마저 도망쳐
이미 텅 비어 버린 회계성을 손책은 힘들이지 않고 점령한 후 항복하는 적은 살
려 주고 방을 붙여 백성들을 안심시켰다.
다음 날이었다. 한 장수가 찾아와 엄백호의 목을 바치며 손책을 만나길 청했
다. 그 장수는 키가 8척이요, 네모난 얼굴에 입이 무척 컸다.
"그대는 뉘시오?"
"저는 회계 여요에 사는 사람으로 성명은 동습이라 하옵고, 자는 원대라 합니
다."
그의 기상이 자못 당당했으므로 손책은 그를 별부사마로 삼고, 그의 공을 치
하했다.
엄백호가 죽고 왕랑도 성을 버리고 도망쳤으니, 이제 동쪽 지방도 평정되었다.
손책은 숙부 손정에게 회계성을 맡기고, 주치를 오군의 태수로 삼아 그곳을 다
스리게 한 후 군사를 거두어 강동으로 돌아왔다.
명의 화타 그리고 여포의 활솜씨
손책이 동쪽 지방을 평정하는 사이 몰아닥친 도적 떼에게 창으로 찔린 주태는
상처가 깊어 손책은 명의 화타를 불러 그를 치료케 한다. 한편 손책은 원술에게
전날의 옥새를 돌려 달라 하고, 원술은 소패와 서주를 얻기 위해 유비를 공격하
려 계략을 세운다.
손책의 아우 손권이 주태와 함께 선성을 지키고 있던 어느 날이었다. 산적 떼
들이 손책이 선성에 없는 틈을 타 사방에서 몰려들어 기습을 감행했다. 산적 떼
에다 손책군에 패해 쫓겨다니던 패잔병들이 가세했던 터라 그 수가 엄청났다.
손권이 주태와 함께 성을 지키고 있었으나 밤중에 당한 기습이라 중과 부적이
었다. 하는 수 없이 주태는 갑옷도 입지 못한 채 맨발로 손권이 탄 말을 옹위하
며 덤벼드는 산적들을 닥치는 대로 베어 나갔다.
주태의 무서운 기세를 두려워해 도적들이 주춤하는 사이 혈로를 뚫었으나 말
탄 도적 하나가 달려와 주태의 등을 찔렀다. 그러나 쓰러진 사람은 주태가 아니
고 바로 그 도적이었다. 주태가 혼신의 힘을 다해 몸을 돌려 그 창을 거머쥐고
도적을 말에서 떨어뜨린 것이다. 주태가 재빨리 그 말을 빼앗아 타고 손권의 뒤
를 따랐다. 도적들은 그 사이에도 창으로 주태를 공격해 와 온몸이 상처투성이
가 되었으나 도적에게 빼앗은 창을 휘둘러 뒤쫓는 도적들을 쫓고 혈로를 뚫어
간신히 손권과 함께 선성을 빠져 나왔다.
가까스로 손권을 구하기는 했으나 주태 자신은 온몸에 상처를 입었다. 급히
의원을 불러 상처를 돌보게 했으나 워낙 깊은 상처가 많아 목숨마저 위태로운
지경이었다.
급히 달려온 파발마로부터 이 소식을 전해 들은 손책은 강동으로 말을 몰았
다. 강동으로 돌아온 손책은 노모와 손책이 무사하여 다행이었으나 주태의 상처
가 심한 것을 보자 안타까운 마음 금할 길이 없었다.
"주태의 상처가 저토록 심해 목숨마저 위태로운 지경이니, 그를 살릴 명약이라
도 없겠소?"
그러자 엄백호의 몸을 베어 가지고 왔던 동습이 나서며 말했다.
"제가 지난날 해적들을 만나 싸우던 중 심한 상처를 입은 적이 있었습니다. 그
때 회계의 우번이라는 군리가 한 명의를 데리고 와 치료를 받기 시작한 지 보름
만에 완치된 일이 있습니다. 우번을 청해 의논해 보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우번이라면 자를 중상이라고 하는 사람을 말함이오?"
"알고 계십니까?"
"그 중상은 왕랑의 신하였는데 장사로 있는 장소가 내게 쓸 만한 인물이라며
권한 적이 있었소. 중상은 지금 어디에 있소?"
"왕랑에게 항복을 권유하다 쫓겨난 이후 지금은 초야에 묻혀 지낸다고 들었습
니다."
손책은 장소와 동습을 보내 우번을 청해 오게 했다. 우번이 당도하자 손책은
예를 다해 그를 맞으며 공조(주·군의 벼슬아치)로 삼았다. 손책은 우번에게 주
태의 위급함을 말하며 명의를 불러 주기를 청했다.
"주공께서는 근심하지 아십시오. 제가 곧 그 명의를 찾아 데려 오겠습니다."
"도대체 그 명의가 누구요?"
"그 사람의 성명은 화타, 자는 원화라고 하는 패국, 초군 사람으로 실로 신의
라 할 수 있습니다. 제가 가서 모셔오도록 하겠습니다."
우번은 그날로 길을 떠나 하루를 넘기지 않고 화타와 함께 돌아왔다. 손책이
그를 보니 백발 동안의 모습이 참으로 청아하여 마치 신선을 대하는 듯했다.
손책은 화타를 극진히 대접하고 주태의 상처를 보게 했다.
"한 달쯤이면 완쾌되겠군..."
화타는 주태의 상처를 훑어 보고 조용히 웃으며 혼자말처럼 중얼거렸다. 화타
가 곧 주태에게 약을 지어 주고 상처를 돌보기 시작한 지 한 달이 되자 상처는
정말 깨끗이 나았다.
주태는 물론 손책도 화타의 신령스런 의술에 놀라 크게 기뻐하며 그에게 후한
상을 내려 보답했다.
화타는 일명 화부라고도 하는데 그의 신통한 의술에 대해서는 이미 정사에도
기록되어 있어 잠깐 그에 대해 살펴보기로 한다.
화타에게 특히 놀라운 것은 그가 마취약을 쓴 외과의학의 개조였다는 점이다.
그 밖에도 그는 내과·산부인과·소아과·침구 등 각 분야에서 뛰어난 재능을
발휘했다.
또한 화타는 약의 처방에도 정통해 있었다. 병상에 따라 여러 가지 생약을 합
쳐 달여먹게 했다. 그리고 그 조제는 적당한 눈짐작일 뿐 저울 같은 건 전혀 쓰
지 않았다. 약을 줄 때도 몇 마디 주의를 줄 뿐, 그 밖에는 아무런 주문도 없이
병을 낫게 하였다.
침이나 뜸에도 정통해 있어 몇 군데만 놓으면 그대로 병이 나았다.
환자의 병이 체내에 있어, 침이나 약으로 치료할 수 없을 경우에는 서슴없이
절개수술을 했다. 마불산이라는 마취약을 먹이고 난 후 칼로 환부를 도려내 치
료를 하는 것이었다.
「위서」에는 그의 진단과 치료의 구체적인 임상례까지 기록되어 있다.
이세라는 관리가, 수족의 힘이 빠지고 입이 마르며 사람들과 말을 하려면 초
조해지고 소변 보기가 힘들다고 호소해 왔다.
"뜨거운 음식을 드시오. 그때 땀이 나게 되면 병은 다 나은 거요. 그러나 만약
땀이 나지 않으면 앞으로 2,3일밖에 살지 못할 거요."
화타가 이렇게 일러 주어 이세는 뜨거운 음식을 먹었으나 땀이 나지 않았다.
결국 그는 3일 뒤에 죽고 말았다.
어느 해, 순시관인 돈자헌이라는 사람이 병에 걸렸다가 완쾌되었다. 그러나 다
시 재발할까 우려하여 화타에게 진맥을 봐 달라고 했다.
"아직 완쾌되지 않았소. 무리하지 마시오. 특히 방사는 금물이오. 만약 방사를
하게 되면 혀가 빠져 죽게 될 것이오."
그런데 돈자헌의 아내가 남편의 병이 나았다는 말을 듣고 멀리서 그의 임지로
찾아왔다. 그리고 그날 밤, 잠자리를 함께 했다. 그랬더니 과연 3일 후에 돈자헌
의 병이 재발하여 죽고 말았다.
어떤 군의 태수가 병이 들었다. 화타가 보기에 이 병은 환자가 화를 터트리기
만 하면 나을 것 같았다. 그래서 태수에게 치료비만 듬뿍 받아 내고 별 치료도
없이 엉뚱하게 태수를 우롱하는 서신만 써놓고 갔다. 태수는 마침내 몹시 화를
냈다.
사람을 시켜 집으로 돌아가는 화타를 죽이려 했으나, 태수의 아들이 화타의
치료법을 귀뜸받았으므로 자객을 몰래 불러 말렸다. 태수는 그것도 모르고 분통
이 터져 새까만 피를 2, 3되나 토한 순간, 그의 병은 씻은 듯이 나아 버렸다.
화타는 병의 치료나 외과적 수술뿐 아니라 병에 대한 예방이나 건강증진에 대
해서도 뛰어난 식견을 가지고 있었다. 유명한 '오금놀이'가 그것이다.
그는 제자 오진에게 '오금놀이'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사람의 몸이란 언제나 움직여 주어야 한다. 지나친 운동은 피해야 하지만 적
당한 운동은 소화력을 촉진시키고 혈액의 순환을 원활히 하여 병을 예방할 수
있다. 그것은 마치 문짝이 늘 움직임으로써 녹이 슬지 않는 것과 같다. 그러므로
옛사람들은 도인술이나 유연한 체조를 하며 관절을 움직이고 언제까지나 젊음을
간직할 수 있도록 힘썼다. 나에게도 그와 비슷한 술이 있는데 그것을 '오금놀이'
라고 한다. 즉 호랑이·사슴·곰·원숭이·새 등 다섯 동물의 동작을 흉내내는
것인데, 이것을 하게되면 병을 예방하고 건강을 증진시킬 수 있다."
오진이 화타의 말을 듣고 그대로 실행한 결과 그는 아흔 살이 넘어도 귀나 눈
이 어두워지지 않았고 이도 빠지지 않았다.
화타에게는 침을 잘 놓는 반아라는 제자가 있었는데 이 제자가 어느 날 화타
에게 건강 증진약을 지어달라고 하자 칠엽청점산을 지어 주었다.
이 약은 칠엽 부스러기 한 되, 청점 부스러기 열네 냥의 비율로 조절한 것이
었다. 오장을 강화시키고 몸을 가볍게 하며 머리카락을 언제까지나 검게 유지하
는데 특호가 있는 약이었다. 반아가 그 약을 계속 복용했던 바, 그는 백 살이 넘
도록 장수했었다.
이 밖에도 화타의 의술과 일화에 대한 기록은 많다. 이로 미루어 보아 명의
화타는 심한 상처를 입고 중태에 빠진 주태도 능히 회복시킬 만큼 뛰어난 의술
의 달인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주태의 상처가 완치되자 손책은 곧 군사를 일으켜 지난날 선성에 쳐들어왔던
강남 일대에 남아 있는 산적들을 모조리 섬멸했다. 강남 지방은 드디어 모두 손
책에 의해 평온을 되찾았다.
이로써 강남·강동의 81주는 이제 모두 새 인물 손책의 통치하에 든 것이다.
군사는 강하고 땅은 비옥하여 양곡과 물산이 풍부하니 소패왕 손랑의 지반은 더
욱 확고하게 되었다.
손책은 여러 장수들에게 각처의 오해지를 지키게 하는 한편 널리 어진 선비들
을 모으고 백성들에게 선정을 폈다.
이어 손책은 세 사람의 사자로 하여금 각기 길을 나누어 떠나도록 했는데 그
중 한 명에게는 강동·강남을 모두 평정한 그 동안의 경과를 조정에 알리게 했
다.
한편으로는 조조에게도 따로 사자를 보내 친교를 맺는 등 눈을 천하로 돌렸
다. 또한 일찍이 몸을 의탁했던 회남의 원술에게도 사자를 보내 옥새를 돌려 달
라는 서찰을 보냈다.
손책은 원술에게 많은 공물과 곁들여 전에 빌린 3천 명의 군사와 5백 마리의
말을 돌려 보냈다.
그 무렵, 원술은 회남을 중심으로 강소, 안휘 일대에 걸쳐 더욱더 세력이 강대
해졌다. 원술은 마음 속 깊이 스스로 황제가 되겠다는 집요한 야망을 품고 군비
와 세력 확장에 각별히 힘을 기울이고 있었던 것이었다.
이때 손책으로부터 옥새를 돌려 달라는 사자가 도착한 것이었다. 원술은 손책
의 사자에게 적당한 말로 구실을 대어 빈손으로 돌려 보낸 후 휘하의 참모들을
불러모았다.
원술의 주위에 장사 양대장, 도독 장훈·기령·교유를 비롯 상장 뇌박·진란
등 기라성 같은 중신 30여 명이 모였다.
"오늘 그대들을 부른 것은 다름이 아니라 손책이 갑자기 전국의 옥새를 돌려
달라고 하기 때문이다. 손책은 내게 군마를 빌려 오늘날 강동 땅을 모두 차지했
다. 그러나 지난날의 신세를 갚기는커녕 거짓말을 하여 군사까지 빌려간 채 깜
깜 무소식이더니 무례하게도 이제 와서 이같은 요구를 해 왔다. 내 그를 어떻게
처치하면 좋겠는가?"
문무백관들은 모두 원술의 야망을 헤아리고 있었다. 그리하여 한결같이 입을
모았다.
"모름지기 군사를 일으켜 배은망덕한 손책을 응징해야 합니다."
그러자 장사 양대장이 나서며 그 말을 가로막았다.
"강동을 치자면 험한 장강을 건너야 합니다. 더구나 지금 손책의 군세는 강하
고 군량 또한 넉넉합니다. 그러하니 지금은 자중하여 먼저 지난날 까닭없이 싸
움을 걸어온 유비를 제거하고 아군의 부강을 도모한 후에 손책을 쳐도 늦지 않
을 것입니다."
"소패의 유비를?"
원술이 갑작스런 양대장의 말에 의아한 듯 그를 쳐다보며 물었다.
"소패의 유비는 세력이 작으므로 무찌르기 어렵지 않습니다만 여포가 서주에
범처럼 버티고 있습니다. 그것이 문제입니다. 그러나 제게 한 가지 계책이 있습
니다."
"그 계책이란 무엇인가?"
"먼저 주공께서 지난날 여포에게 약속까지 하시고 작파하신 군량 5만 석, 금은
1만 냥, 말과 비단 등의 물건을 지금이라도 보내도록 하십시오. 그리하여 그 일
로 틀어진 그의 마음을 우리 쪽으로 돌려 놓으십시오. 그렇게 되면 소패가 공격
당하더라도 여포가 나서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리 되면 유비를 사로잡는 일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닐 것입니다. 소패를 취한 후에 다시 여포를 친다면 서주도
우리 손으로 들어오게 됩니다."
양대장의 말에 원술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하여 소패와 서주가 내 밥상 위에 오르기만 한다면 군량미 5만 석쯤
은 오히려 싼 대가가 아닌가? 마땅히 시행해야 함이로다."
원술은 기쁨을 감추지 못하며 기꺼이 한윤을 사자로 하여 밀서와 양곡 등을
여포에게 보냈다.
양곡을 받은 여포는 크게 기뻐했다. 양곡과 금음보화를 받은데다가 더욱이 유
비를 원술이 대신 쳐 준다면 서주는 영영 자기의 손안에 들어온다는 생각에서였
다. 여포는 한윤을 융숭하게 대접하며 원술의 뜻을 받아들였다.
한윤이 원술에게 돌아와 여포의 뜻을 전했다. 원술은 지체하지 않고 기령을
대장으로, 뇌박과 진란을 부장으로 삼아 대군을 일으켜 소패의 유비를 치게 했
다.
한편 원술이 군사를 일으켜 소패로 쳐들어온다는 소식을 접한 유비는 급히 장
수들을 불러모아 회의를 열었다. 소패가 작은 고을이어서 전에 원술과 싸우다
잃은 군사들도 아직 다 회복하지 못하고 있던 유비였다.
유비가 근심스런 표정으로 좌우를 살피며 대책을 묻자 장비가 나섰다.
"그깟놈 원술이 두려울 게 무엇이오? 제가 그놈을 사로잡아 오겠소."
자신의 술주정 때문에 서주성을 빼앗겼다고 자책해 오던 장비가 기다렸다는
듯이 자청했다. 그러자 손건이 조용히 입을 열어 장비를 제지하며 말했다.
"아니 되옵니다. 지금 소패에는 군량도 부족합니다. 군사 또한 보잘 것 없는
터에 그들을 맞아 싸운다면 패할 것이 분명합니다. 급히 여포에게 서신을 보내
위급함을 전하고 원병을 청하십시오."
여포라면 이를 가는 장비가 아닌가. 장비는 손건의 말에 버럭 성을 내며 소리
쳤다.
"여포 그놈이 우리에게 원병을 보내 주리라고 생각하오? 그 도둑놈에게 원병
을 청하느니 차라리 죽기를 각오하고 싸우는 것이 좋겠습니다."
유비가 생각에 잠기다 단안을 내렸다.
"손건의 말이 옳다."
유비는 곧 한 통의 서찰을 써 여포에게 보냈다.
이 비가 오늘날 소패에 머물게 된 것은 장군의 너그러운 은덕에 힘입은 덕분
입니다. 그러나 원술이 이전의 사사로운 원한을 품고 군사를 이끌어 이 소패를
치겠다고 합니다. 이제 원술의 군사가 곧 소패에 다다르매, 장군의 구원이 없으
면 온전히 지켜 내지 못할 것입니다. 바라건대 군사 몇 천을 보내 주시어 이 비
의 위급함을 면케 해 주신다면 그 은혜 또한 가슴에 새기겠습니다.
유비의 간곡한 서신을 받자 여포는 우선 진궁을 불러 의논해 보기로 했다. 원
술의 예물을 받은 후 원술이 유비를 치더라도 개입하지 않기로 묵계한 여포였
다.
그러나 날이 갈수록 여포에게도 한 가닥 의심이 일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여
포가 이처럼 의문을 떨치지 못하고 있던 중에 유비의 간곡한 서신을 받게 된 것
이었다.
"진궁! 이제 와서 내게 양곡을 보낸 원술의 숨은 속셈이 무었이라고 생각하
오?"
"주공을 견제해 놓고 유비를 치자는 속셈입니다."
"나도 그렇게 보고 있소."
여포가 고개를 끄덕이자 진궁이 다시 말을 이었다.
"유비가 소패에 있는 것은 주공에게 전부가 될망정 아무런 해도 되지 않습니
다. 그러나 그 반대로 원술이 소패를 취한다면 그는 북방 태산 호걸들과 결탁하
여 서주성을 넘보게 될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어찌 주공께서 안심하고 베개를
높이 하여 잠자리에 들 수 있겠습니까? 그러니 유비를 도와 소패를 지키는 것이
상책입니다."
여포는 진궁의 생각도 그러함을 알자 곧 소패로 은밀히 구원병을 보내는 한
편 자신도 몸소 군사를 거느려 양군의 중간에 출진했다.
한편 원술의 장수 기령은 군사를 노도와 같이 이끌어 와 소패의 동남 쪽에 이
미 진영을 치고 있었다. 낮에는 수많은 모닥불을 피워놓고 북을 울리니 군사들
의 함성 소리가 천지를 진동시키는 듯했다.
가령이 진을 펴자 유비도 겨우 5천 남짓의 군사나마 성 밖으로 이끌고 나가
진을 쳤다.
한윤이 이미 대가를 치르고 여포의 약속을 받아 온 터라 기령은 괘념치 않고
있었다. 그런데 뜻밖에도 여포가 유비를 도우러 출진했다는 소식을 듣자 여포의
배신에 깜짝 놀라 항의하는 사자를 여포에게 보냈다.
이때 여포는 양군의 틈바구니에 끼인 셈이 되었는데 조금도 걱정스러운 빛이
없이 유유자적했다.
기령이 보낸 사자가 여포에게 이르러 신의가 없음을 항의할 때에도 여포는 그
저 껄걸 웃기만 하며,
"나의 한 가지 계책으로 원술과 유비를 다 좋게 해줄 터인즉 기령 장군은 안
심하라고 하여라."
하고 사자에게 한 통의 서신을 주어 기령에게 전하게 했다. 여포는 또 한통의
글을 유비에게도 보내게 했다. 서신은 같은 날, 같은 시각에 자기의 진영으로 각
각 초대한다는 내용이었다.
초대의 서신을 받자 유비는 곧 떠날 채비를 했다. 관우와 장비가 한사코 만류
했다.
"가지 마시지요. 필시 여포란 놈이 무슨 꿍꿍이 수작을 부리고 있음에 틀림없
을 것입니다."
그러나 유비는 두 아우의 말을 듣지 않고 정색을 하며 말했다.
"나는 오늘날까지 그에게 신의와 겸양을 다해 왔네. 의심받을 만한 일을 하지
않았는데 그가 나를 해칠 까닭이 없지 않은가?"
"정히 가시겠다면 저희들만이라도 형님을 따르겠습니다."
유비가 말을 타고 출발하니 관우·장비가 그 뒤를 따랐다.
여포의 진에 당도하자 장비의 얼굴이 굳어지며 이따금 사나운 눈알만 좌우로
무섭게 굴릴 뿐이었다. 관우도 엄한 얼굴로 유비 뒤에 꼿꼿이 서 있었다.
이윽고 여포가 이미 마련해 둔 주안상 자리에 앉으며 유비에게도 자리를 권했
다.
"내 이번에 귀공의 위급을 구해 드리겠으니 훗날 그 은혜를 잊지 말기 바라
오."
여포의 말에 관우와 장비의 얼굴이 노기로 벌겋게 달아오르고 있었다. 그러나
유비는 고개를 숙이며 사례했다.
"장군의 높으신 은혜를 어찌 잊겠습니까?"
그때 여포의 가신이 와 아뢰었다.
"회남의 기령 장군께서 도착하셨습니다."
유비가 놀라 급히 자리를 뜨려 하며 여포에게 말했다.
"손님이 오신 모양이니 나는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여포가 그런 유비를 보며 껄걸 웃으며 말했다.
"오늘은 내가 일부러 귀공과 기령을 같은 자리에 초대한 것이오. 함꼐 상의할
일도 있으니 괘념치 말아 주시오."
그러나 기령은 적의 대장이며 지금 그와의 싸움을 앞두고 있는 유비로서는 불
안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때 마침 기령이 여포의 군영으로 들어오던 중 상좌에
앉아 있는 유비를 보자 그 또한 깜짝 놀랐다.
"아니?"
기령은 대경 실색을 하며 그 자리에 걸음을 멈추었다. 유비·관우·장비 적장
세 사람이 나란히 그 자리에 있지 않은가! 기령이 놀란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기령은 몸을 돌려 부리나케 밖으로 내달으려 했다.
그 순간 여포가 일어나 그의 팔굽을 잡는가 하더니 어린 아이를 끌어 안 듯
덥석 안았다.
"이게 무슨 짓이오? 장군께서는 이 기령을 죽이려 하십니까?"
기령이 깜짝 놀라며 물었다.
"내 어찌 장군을 죽일 리 있겠소. 염려 마오."
"그럼 저 당나귀 같이 귀 큰 자를 죽이렵니까?"
여포가 고개를 흔들었다.
"현덕 공은 나 여포와 형제의 사이요, 그 형제가 위급함에 처해 있어 그를 구
하러 왔을 뿐이오."
여포는 유유자적 여유 있는 태도로 입을 열었다.
"나는 원래 싸움을 좋아하지 않는 사람이오. 그리하여 오늘은 양편 모두를 위
해 화해를 시키려는 거요. 이 여포가 두 집 싸움을 말리려는데 귀공께선 내가
마땅치 않으시오?"
기령은 어리둥절할 수밖에 없었다. 다른 사람이면 모르되 여포가 화해를 시키
기 위해 스스로 중재를 맡고 나서다니 더 한층 의심스러워졌다.
"화해라고 하시는데..., 그래 어떳게 화해를 시키려는 겁니까?"
"하늘의 판결에 맡길 따름이오."
여포가 기령을 막사 안으로 이끌어 유비와 대면시켰다. 유비도 기령을 마지못
해 아는 체하기는 했으나 여포의 속셈을 알 수 없어 의심스럽기는 서로가 마찬
가지였다.
유비와 기령은 서로 곁눈질을 하며 애써 의연한 태도를 취할 뿐이었다. 여포
가 그런 두 사람을 좌우에 앉히고 술자리를 마련했다. 여포의 권유에 못 이겨
몇 순배의 술의 돌자 여포가 입을 열었다.
"두 분께서는 이 여포의 얼굴을 봐서라도 각기 군사를 물리심이 어떻겠소?"
아직 여포의 본심을 알 수 없어 유비는 여포의 황당한 말에 입을 다물고 가만
그를 지켜 볼 뿐이었다. 기령 또한 그 뜻밖의 말에 금방 자리를 박차고 일어설
듯한 기세였다.
"나는 주군의 명을 받들어 10만 대군을 이끌고 왔소. 저 유비를 사로 잡지 못
하면 살아서 돌아가지 않을 각오로 이 싸움터에 나온 몸이오. 어찌 그냥 군사를
물린단 말이오?"
"그건 나도 알고 있는 바요."
"그런데 어찌 화해를 권한다는 말씀이오. 내가 굲사를 돌리는 것은 유비를 사
로잡거나 그의 머리를 창으로 꿰는 때뿐일 것이오."
유비는 기령의 말을 묵묵히 듣고 있었으나 관우와 장비의 눈은 이글이글 분노
로 타오르고 있었다. 장비가 끝내 참지 못해 칼에 손을 얹으며 호통을 쳤다.
"가만히 듣자 하니 안하무인격으로 방자하게 지껄여대는구나. 비록 우리가 적
은 군사이긴 하나 네놈들 같은 구더기나 메뚜기 따위와는 다르다. 일찍이 황건
의 불한당 1백만을 불과 수백 명으로 무찌른 걸 네놈이 모르고 하는 소리냐?"
당장 칼을 빼어 덤벼들 듯하자 관우가 장비를 껴안으며 만류했다.
"여 장군이 우리를 청하였으니 장군의 말을 더 들어 보아야 하지 않겠나? 좀
더 두고 보다가 끝내 우리의 뜻에 맞지 않으면 그때 진으로 돌아가서 싸움을 해
도 늦지 않을 것이네."
관우의 말에 여포도 양쪽을 제지시키며 언성을 높였다.
"내가 양편을 초대한 것은 어디까지나 화해를 시키기 위함이었소. 여기서 서로
다투라고 초대한 건 아니었소."
그러나 기령 또한 장비에게 욕을 먹고 나니 몹시 성이 나 씨근덕댔다. 장비
또한 고리눈을 부릅뜨며 수염을 거꾸로 곤두세웠다.
이를 본 여포도 크게 노해 장졸들에게 소리쳤다.
"어서 내 화극을 이리 가져오라!"
여포가 수하로부터 화극을 받아 움켜잡자 유비나 기령 모두 안색이 흙빛으로
변했다.
그의 무예를 모르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가 노하면 무슨 짓을 할는지 알
수 없는 일이었다. 관우·장비도 잠시 긴장한 채 그를 지켜 보았다.
여포는 화극을 꽉 움켜쥐고 좌중을 노려보며 큰 소리로 외쳤다.
"오늘 내가 양편을 불러 싸우지 말라고 하는 것은 하늘의 뜻이니 그 명을 거
스름은 곧 하늘을 거스르는 것이오."
여포는 갑자기 화극을 든 채 원문(군영의 문) 밖 멀리 떨어진 곳까지 단숨에
달려 땅에 큰 창을 거꾸로 꽂고 돌아왔다. 그런 다음 유비와 기령에게 엄숙하게
말했다.
"보시오. 예서 저 원문까지의 거리가 백오십 보는 넉넉히 될 것이오."
모두 여포가 가리키는 곳으로 시선을 돌렸다. 무엇 때문에 저런 곳에 창을 세
웠는지 의아해 할 따름이었다.
"이제 저 창의 가지를 겨누어 내가 활을 쏘겠소. 내가 맞추면 천명을 받으러
화해하고 돌아가시오. 맞추지 못하면 그건 싸우라는 하늘의 뜻인지도 모르오. 그
렇게 되면 나도 깨끗이 손을 떼고 일체 간섭을 하지 않겠소. 만약 내 말을 거역
한다면 내가 그에게 저 화극을 겨누겠소."
유비나 기령 모두 예상치도 못한 제안이었다. 그러나 기령은 속으로 생각했다.
'백오십 보가 넘는 거리에서 여포가 어떻게 창의 가지를 쏘아 맞힌다는 말인
까? 맞히지 못하면 그때 싸워도 늦지 않으리라.'
그리하여 여포의 말에 따르는 척하며 기령이 쾌히 응낙하니 유비 또한 마다할
수 없었다.
"그럼 하늘에 맹세하는 뜻으로 술을 한 잔씩 더 돌리도록 함이 어떻겠소?"
여포는 자리에 앉아 술 한 순배를 더 돌리고 자신도 한 잔을 든 다음 활을 가
져오게 했다. 유비는 마음 속으로 여포가 쏜 화살이 창의 가지를 맞히기만을 가
만히 빌었다.
활은 방궁형의 작은 활이었으나 나무에 얇은 쇠판을 붇이고 옻칠로 죄인 것이
므로 활의 세기가 강하기로는 강궁에 못지않았다.
여포는 붉은 비단 전포 소매를 걷어 올리고 시위에 화살을 메긴 후 한쪽 무릎
을 꿇고 성큼 활줄을 당겨 시위를 놓았다.
"퍽!"
화살은 일직선으로 선명한 미광을 그으며 날아가니 저쪽 창의 작은 곁가지에
'착!'하고 소리를 내며 꽂혔다.
"맞았다!"
막사 안팎에서 장수나 병졸할 것 없이 모두 우레와 같은 함성을 질러댔다. 후
세 사람들이 여포의 신기를 시로 지어 칭송했다.
온후의 활솜씨 세상에 드문 신기로세
원문을 향한 화살로 위기를 넘겼네.
해를 쏘아 떨어뜨린 후예도 감탄할 그 솜씨
원숭이도 울렸다는 유기를 꺾으려 하네.
호근현 시위 소리힘차게 일자
떠난 화살 깃처럼 날아가네.
표범의 꼬리처럼 요동치며 창에 맞으니
10만의 웅병이 갑주를 벗네.
여포는 껄걸 웃으며 활을 던지고 기령과 유비의 손을 붙들며 말했다.
"자, 약속했으니 두 분은 하늘의 뜻에 따르도록 하시오. 이제 군사를 거두어
돌아가시오."
여포는 군사들에게 명하여 다시 술을 가져오게 했다. 커다란 잔에다 술을 따
른 후 두 사람에게 권했다. 유비로서는 당장의 승산 없는 싸움을 피하게 되어
여간 다행스러운게 아니었다. 한편으로는 남의 도움에 의한 것이어서 심사가 편
치는 않았으나 여포가 권하는 술잔을 받아 마셨다.
그러나 기령은 한동안 입을 다물고 있었다. 여포의 귀신 같은 활솜씨에 놀라
고 있을 때가 아니란 생각이 들었다. 그는 시무룩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여 장군의 말씀을 좇기로 하겠습니다. 그러나 원 장군께는 뭐라고 말씀을 드
려야 할지 참으로 내 처지가 난감합니다."
"내가 글을 써서 공로에게 보낼 떼니 근심하지 마시오."
여포가 수하에게 명하여 서찰을 주니 기령은 하는 수 없이 여포의 서신을 갖
고 먼저 떠나갔다.
그를 보낸 후 여포는 유비에게 거드름을 피우며 의기양양하게 말했다.
"만일 내가 구하지 않았더라면 공은 아무리 좌우에 훌륭한 아우가 있다하나
위급을 면키 어려웠을 것이오."
여포가 그렇게 말하자 유비는 여포에게 절하여 고마움을 표한 후 관우·장비
와 함께 소패로 돌아갔다.
소불간친지계 갈라지는 유비와 여포
원술은 유비를 공격하기 위해 계략을 꾸미는데 이름하여 소불간친지계라. 이
는 친분이 두텁지 못한 이는 친분이 두터운 이를 이간하지 못한다는 뜻이다. 즉
여포와 사돈지간이 된 후 유비를 치겠다는 것인데 진규의 진언으로 여포는 딸의
신행을 급히 되돌리게 한다.
기령이 하는 수 없이 회남으로 돌아가 원술에게 전후의 사정을 자세히 고하고
여포의 서신을 전했다.
원술은 펄펄 뛰며 여포의 서신을 찢어 버렸다.
"엉큼한 놈, 그 많은 양곡을 받고도 어린 아이들 속이는 장난 같은 짓거리로
유비를 두둔하다니……. 오냐, 내 몸소 대군을 이끌어 서주고 소패고 한꺼번에
짓밟아 주리라!"
원술이 화가 복받쳐 발을 구르며 소리치자 면구스렂 얼굴로 고개를 숙이고 있
던 기령이 원술에게 조심스레 간했다.
"아니됩니다. 여포의 용맹은 천하에 정평이 나 있습니다. 용맹뿐인가 했더니
지모 또한 가볍지 않았습니다. 게다가 지금 군사를 이끄신 서주 땅은 기름져 병
마는 살찌고 백성은 편안하니 우리에게 불리한 점이 많아 섣불리 손을 댔다가는
병력의 손실이 클 것으로 여겨지오니 계책을 써야 합니다."
"그렇다면 유비가 소패에 뿌리박고 있는 한 이 원술은 남으로도 서쪽으로도
뻗어갈 수가 없지 않은가?"
원술이 여전히 노기에 찬 목소리로 반문했다.
"제게 한 계책이 있습니다. 제가 듣기로는 여포에게 그의 처 엄씨와의 사이에
딸이 하나 있는데 혼인할 나이에 이르렀다고 합니다. 마침 주공께도 슬하에 배
필을 맞아야 할 장성한 자제분이 계시지 않습니까? 주고으이 아드님과 혼인 이
야기를 건네 보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이른바 가깝지 않은 이가 가까운 사이를
이간시킬 수 없다는 '소불간친지계'를 써 보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만약 여포가
이를 받아들인다면 유비를 살려 두지는 않을 것입니다."
원술이 여포의 사돈을 맺어, 유비와 여포를 갈라놓은 후 여포로 하여금 유비
를 치게 하자는 뜻이었다. 원술은 기령의 말에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원술은 즉
시 한윤에게 글을 써 주고 예물을 갖추어 여포에게 보냈다.
청혼의 사자로 서주에 이르른 한윤이 여포에게 찾아온 까닭을 밝혀 말했다.
"이번 장군께서 화해의 수고를 아끼지 않으심에 대해 주공께서는 진실로 경의
와 감사를 드리고 계십니다. 이에 장군의 따님을 며느리로 맞아 길이길이 영화
를 함께 나누며 '진진의 의(진, 진 두 나라 황제가 사돈을 맺어 화목하게 지냈던
일)'를 맺고자 하오니 부디 허락해 주시길 바랍니다."
"제 어미와 의논한 후 회답을 드리겠으니 잠시 쉬며 기다리시오."
여포는 뜻밖의 청혼이라 얼른 입을 열지 못하다가 일단 한윤을 역관에 머물게
했다.
여포에게는 두 아내와 첩이 있었다. 엄씨는 정실이었다. 그 후 조표의 딸을 맞
아 둘째부인으로 삼았으나, 일찍 죽어 소생이 없었다. 셋째는 첩으로 이름을 초
선이라고 하였다.
초선이라면 그가 장안에 있을 무렵부터 열렬히 짝사랑에 빠졌던 여인 이름이
었다. 그로 인해 동탁을 죽이고 당시의 조정에 대란을 일으키게 한 도화선이 된
여인이었다. 그러나 그의 첩이었던 셋째부인 초선 왕윤의 양딸이었던 박명한 초
선과 이름만 같았지 딴 사람이었다. 나이도 다르고 성품도 달랐다. 그러나 용모
는 이전의 초선을 쏙 빼어 닮았다.
여포는 장안의 이각, 곽사의 반란 통에 죽어간 초선을 그 이후에도 못내 그리
워하고 있었다. 그래서 여러 고을을 샅샅이 뒤져 용모를 빼닮은 지금의 여인을
찾아 내었다. 이후로는 이름도 '초선'으로 부르며 못다 이룬 사랑을 쏟고 있었다.
그 초선에게는 소생이 없었으며 자녀라고는 정실인 엄씨가 낳은 딸뿐이었다.
여포가 아내 엄씨에게 원술의 청혼을 의논하자 엄씨가 입을 열었다.
"제가 귓결에 듣기로 원 공로는 회남에 머문 지 오래되어 군사도 많고 양식도
많다고 들었습니다. 또한 조만간 천자가 될 분이라고 합니다."
"천자가 되다니……, 그 말은 누구에게 들었소?"
"누구랄 것도 없이… 시녀들끼리 그렇게 수군대는 걸 들었습니다."
"그의 손에는 전국의 옥새가 있소. 그걸 두고 말하는 것이오."
"만일 원술이 천자가 되면 우리 딸아이는 장차 황후가 되는 것이 아닙니까?
그런데 그에게는 아들이 몇이나 됩니까?
"하나밖에 없소."
"그렇다면 더 생각할 것도 없지요. 만약 황후가 되지 못한다 해도 그화 사돈이
되면 우리 서주는 안전하게 되는 게 아니겠어요?"
여포는 원술의 청혼에 기뻐하고 있던처에 아내 엄씨까지 찬동하고 나서자 이
혼약을 맺기로 작정했다. 여포는 한윤을 청해 극진히 대접하고 허혼의 뜻을 전
했다. 사자 일행에게는 금은보화를 주어 노고를 치하하고 원술에게는 많은 예물
까지 실어 보내도록 했다.
자기의 청혼을 승낙한다는 여포의 전갈을 받은 원술은 서둘러 혼인예물을 갖
춰 한윤을 다시 서주로 보냈다. 여포는 혼인예물을 받고 한윤을 극진히 대접히
여 역관에서 쉬게 했다.
다음 날이었다. 여포, 원술 양가의 혼사 관계로 한윤이 왔다는 말을 듣고 여포
의 모사 진궁은 그를 만나기 위해 역관으로 갔다. 두 사람은 첫 대면의 예를 주
고받은 뒤에 진궁이 좌우의 사람들을 물리친 후 한윤에게 은근히 물었다.
"도대체 누구시오? 원 장군에게 여 장군과 혼약을 맺으라고 가르쳐 준 이가
어느 분이시오? 이는 유비의 목을 노리고 한 계책이 아니오?"
진궁이 불문곡직하고 한윤게게 묻자 한윤은 깜짝 놀라 주위를 살펴보며 사정
했다.
"공은 이미 헤아리고 계셨구려. 그러나 절대로 입 밖에는 내지 마시기 바랍니
다."
"나야 입 밖에 낼 리 있겠소? 그러나 혼인이 늦어져 다른 사람이 알게 되면
일이 어떻게 될지 누가 알겠소?"
"그럼 어떻게 하는 게 좋겠습니까? 말씀해 주시기 바랍니다."
한윤이 진궁의 옷깃이라도 붙들 듯이 다가가며 간곡히 물었다.
"내가 여 장군을 만나 따님을 빨리 보내 드리라고 말씀드리지요."
한윤이 가슴을 쓸어재리며 진궁에게 치하의 말을 했다.
"그렇게만 해 주신다면 원 공께서도 귀공의 은덕을 결코 잊지 않으실 것입니
다."
진궁은 한윤과 이런 얘기를 주고받은 후 여포를 만났다.
"제가 들으니 장군께서 원 공로와의 혼인을 허락하셨다는데 참으로 잘하신 일
입니다. 그런데 혼례는 언제 치르실 예정이십니까?"
"아니, 아직 택일은 하지 않았소."
여포가 바쁠 것이 없다는 투로 느긋하게 말했다.
"세상의 관례로는 정혼된 날부터 혼인날까지의 기간을 신분의 높고 낮음에 따
라 각기 정해진 시기를 네 가지로 나누고 있습니다. 천자의 화촉 식전은 1년, 제
후는 6개월, 무사, 대부라면 3개월, 서민은 1개월이지요."
"원 공로는 전국의 옥새를 가지고 있으니 조만간 천자가 될지도 모르오. 그러
므로 천자의 예를 따르는 것이 좋지 않겠소?"
여포가 진궁의 말을 듣더니 넌지시 말했다.
"아니 됩니다."
"그럼 제후의 예를 따르라는 뜻이오?"
"그도 아니 됩니다."
"대부의 예호 해야 한다는 말이오?"
"그것도 아닙니다."
여포의 안색이 변했다.
"그럼 내 딸을 출가시키는데 공은 나에게 서민의 예로 해야 한다는 말이오?"
"그런 말씀이 아닙니다."
"알 수 없는 일이로군. 그럼 대체 어떻게 하라는 말이오?"
여포가 답답하다는 듯이 목소리를 높여 물었다.
"집안의 사사로운 일이라고는 하나 천하의 용장 된 이는 항상, 만사에 풍운을
살피셔야 합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하라는 말이오?"
"효용(사납고 날쌤)을 견줄 수 없는 주군과 전국의 옥새를 소유하고 부국 강
병을 자랑하는 원가가 인척으로 결연되는 일입니다. 이 혼인을 시기하지 않을
제후들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런 일을 두려워했다가는 딸아이를 영영 출가시키지도 못하겠소."
"그러니까 만전을 기함이 좋을 듯합니다. 만일 혼례식을 늦추어 잡았다가 신행
길을 노려 도중에 복병을 두어 신부를 납치라도 해 가는 일이 생기면 어찌하시
렵니까?"
여포가 그 말을 듣자 고개를 끄덕이며 물었다.
"그대 말이 옳은 듯하오. 그럼 어떻게 하는 것이 좋겠소?"
"길일을 기다릴 게 아닙니다. 게다가 지체도 관례도 따질 필요가 없습니다. 다
른 제후들이 알기 전에 하루 속히, 따님을 원가의 수춘까지 보내시되 따님을 그
곳의 별관에 묵게 해놓고 좋은 날을 골라 천천히 혼례를 올리신다면 만에 하나
라도 낭패보는 일은 없을 것입니다."
"실로 공대의 말이 옳소. 내게 말해 주지 않았더라면 어찌 될 뻔했겠소? 그런
데 원가의 사자에게 이 일을 알려야 되지 않겠소?"
"그러실 필요가 없습니다. 실은 오늘 아침 저 혼자 생각으로 역관을 찾아가 은
밀히 한윤을 만났습니다. 그리고 이 일에 대히 그와 의논해 두었습니다."
"그래, 공은 한윤에게 어떤 말을 하고 왔소?"
"신부의 신행을 세상의 관례대로 했다가는 혹 불미스런 일이 일어날까 염려된
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니 나도 주군께 권하겠으니 귀국에서도 즉각 혼인을 서두
르라 이르고 돌아왔습니다."
여포는 진궁의 말을 듣자 기쁨을 감추지 못하며 진궁에게 치하한 뒤 후각으로
성큼성큼 발을 옮겼다. 여포는 부인 엄씨에게 재촉하여 그날부터 밤낮을 가리지
않고 혼인 준비를 시켰다.
많은 장렴(세간)과 폐백을 준비하고 비단으로 옷을 지었으며 수레와 거개도
아름답게 장식했다.
마침내 신행날 아침이 되었다. 여포는 송헌과 위속 두 장수에게 군사를 주어
신부와 한윤을 배행하도록 했다.
먼동이 틀 무렵부터 서주 성 안에서는 풍악 소리가 요란했다. 새들이 지저귀
는 아침 햇빛과 함께 성문이 열렸다. 신부를 태운 호화로운 마차는 수많은 시녀,
시동과 무사의 대열에 호위되어 마치 한 줄기 구름이 피어오르듯 성 밖 10여 리
에 걸쳐 잇대어 나왔다. 여포도 친히 성 밖까지 나와 시부와 한윤을 환송했다.
이 무렵, 진등의 아버지 진규는 늙어 벼슬을 버리고 아들의 집에서 노환으로
앓고 있던 중이었다. 갑자기 길거리에세 요란한 풍악 소리가 들리자 계집종에게
물었다.
"웬 풍악 소리냐?"
"여 장군의 딸을 원술의 아들에게 시집보내는 신행의 행렬입니다."
계집종은 서주성을 나선 신부의 행렬이 먼 회남으로 떠나는 것을, 지금 성 안
의 사람들이 환호하며 전송하고 있다고 알려 주었다. ㅓ
진규는 그 소리를 듣자 깜짝 놀랐다.
"음-. 이건 분명 원술이 여포와 사돈을 맺어 가까워진 다음 여포와 유비를 이
간시켜 현덕을 치려는 소불간친지계로구나. 아아, 현덕 공이 위험하구나.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다."
진규는 병든 뭄을 벌떡 일으켰다.
"나를 당나귀에 태워 서주성까지 데려다 다오."
진규는 병든 몸을 이끌고 서주성에 들어가 여포를 만났다. 뜻밖에 병들어 누
워 있다던 진규가 찾아왔으므로 여포가 놀라 물었다.
"대부께서는 어인 일로 불편한 몸을 이끌고 오셨습니까?"
"주군의 임종이 임박했으므로 오늘 미리 애도의 뜻을 표하려고 왔습니다."
진규의 천연덕스러운 말에 여포는 자기 귀를 의심했다.
"아니,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장군 스스로가 저승으로 자꾸만 걸음을 옮기고 계시다는 말씀이오."
여포는 진규의 말에 심상치 않은 곡절이 있다는 것을 알고 그제서야 정색을
하고 물었다.
"이 경사스러운 날에 그런 말씀을 하시니 이 봉선이 까닭을 헤아릴 길이 없습
니다. 부디 자세히 깨우쳐 주십시오."
여포가 한껏 예를 갖추며 말하자 진규는 주저하지 않고 입을 열었다.
"지난번에 원술이 금은보화를 보내며 유현덕을 죽이라고 했을 때 공을 활을
쏘아 화해시켰습니다. 그런데 원술이 이제 사돈을 맺자는 것은 따님을 인질로
삼은 다음, 유현덕을 쳐 소패를 수중에 넣겠다는 뜻입니다. 유현덕이 원술에게
공격당해도 이번엔 사돈지간이니 장군께서 유현덕을 도우실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소패가 원술의 땅이 되면 위험한 것은 이 서주입니다. 소패 땅을 차지
한 원술은 군사를 빌려 달라, 군량을 빌려 달라는 부탁을 할 것입니다. 만일 원
술의 부탁을 물리친다면 그때는 사돈간의 의를 저버린다하여 싸움을 일으킬 것
이며 따님의 목숨까지도 위태롭게 될 것입니다.
또한 원술의 청에 응한다면 장군은 지쳐 쓰러질 것이며 또한 사방에 원수를
만들게 될 것입니다. 원술은 공이 빌려주는 군사와 군량으로 여러 성을 공격할
것이니 어찌 제후들이 공을 원망하지 않겠습니까? 그것뿐이 아닙니다. 듣자하니
원술은 옥새를 가지고 황제를 참칭하려 든다고 하니 이는 분명 역적 행위입니
다. 원술과 사돈이 되면 장군은 역적의 친척이 됩니다. 이로 인해 천하 사람들은
장군을 멀리하게 되며 용서하지 않으려 할 것 입니다. 이 어찌 살아 있는 목숨
에 죽음을 재촉하는 길이 아니라고 말씀하시겠습니까?"
"음-."
여포는 진규의 말을 듣고 정신이 아찔해옴을 느끼며 깊은 신음 소리를 삼켰
다.
'진궁이란 놈의 말을 듣다 일을 크게 그르칠 뻔했구나.'
여포는 이렇게 생각하고 급히 장요를 불러 딸의 신행을 되돌리게 했다. 여포
의 명을 받은 장요가 급히 기마 5백을 이끌어 30리나 달려서야 가마 행렬을 만
날 수 있었다.
여포는 함께 되돌아온 사신 한윤을 감금했다. 그리고는 원술에게 따로 사신을
보내 '아직 혼수가 다 갖추어지지 않았으니 기다려 달라'는 서신을 전하게 했다.
진규는 그날 저녁까지 성 안에 있다. 당나귀를 타고 집으로 돌아오면서 중얼
거렸다.
"아, 이제야 다행히 유현덕의 위급은 넘겼다만……."
다음 날 진규는 조용히 병상에 누워 눈앞에 일고 있는 원술과 여포의 전운을
생각하니, 유비의 위치가 위험천만하게 생각되었다.
'여포는 앞문의 범이요, 원술은 뒷문의 승냥이와 같구나. 그 두 틈바구니에 끼
여 언젠가는 그 어느 한쪽에게 먹히고 말 것이 분명하다.'
진규는 이런 생각으로 근심하다 붓을 들어 서신을 쓴 후 여포에게 전하게 했
다. 그 서신에는 여포에게 보내는 헌책이 적혀 있었다.
근자에 원술이 옥새를 손에 쥐고 있다 하여 천자의 자리를 넘보고 있음은 명
백히 천조를 거스리는 일입니다. 이때 장군께서는 사로잡은 한윤을 허도의 조정
에 바침으로써, 순역을 명백히 해두심이 옳지 않은가 합니다. 그렇게 되면 조조
도 장군의 공을 인정할 것입니다.
그리하여 장군은 관군이 되어 조조의 군사를 좌익으로 삼고 유현덕을 우익으
로 삼아 대역의 적인 원술을 토벌하셔야 합니다. 지금이 바로 그때입니다. 광세
의 영명을 떨치고 동시에 일대의 대계를 가름할 이 시기를 놓쳐서는 아니 됩니
다.
여포는 진규의 서신을 받고 어쩔 줄을 몰라 망설이고 있는데 부인 엄씨가 나
타났다.
"뭘 그리 골똘히 생각하고 계시옵니까?"
여포가 들고 있던 진규이 서신을 엿본 엄씨는 다시 입을 열었다.
"다 죽어가는 병자의 말에 흔들려 모처럼의 가연을 파가하실 작정이십니까?"
아직도 원술과의 사돈 맺는 일에 미련을 떨쳐버리지 못한 여포는 아내 엄씨의
말에 더욱 마음이 흔들려 결단을 내리지 못한 채 정각을 향해 나갔다. 무슨 일
인지 알 수 없으나 관원들이 그곳에서 떠들고 있어 여포가 알아보게 했다.
시신이 다가와 아뢰었다.
"소패의 유현덕이 어디선가 말을 사들이고 있다 하옵니다."
그 소리에 여포는 웃었다.
"무장이 말을 사들이는 것은 당연한 일인데 뭘 그렇게 야단스럽게 떠들어대는
가. 나도 좋은 말들을 사 모르려고 며칠 전에 송헌과 위속을 산동으로 보내지
않았는가?"
여포는 대수롭지 않은 일로 여겼다. 그러부터 사흘 후에 산동지방으로 군마를
사러 갔던 송헌 일행이 돌아왔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송헌이 마치 패전 당한 장
수처럼 갑주가 찢겨지고 몸에 상처까지 입고 있었다. 여포가 말을 사러 갔던 일
에 대해 물었다.
"그래 군마는 많이 구해 왔는가? 어서 준마 대여섯 필을 이리 끌고 와 보도록
해라."
여포가 이렇게 명하자 송헌 등이 무릎을 꿇더니 머리를 땅에 조아리며 말했
다.
"저희들이 명을 받들어 산동으로 말을 사러 가니 마침 좋은 말이 있어 3백필
을 구해 돌아오다 소패의 경계에 이르렀을 때였습니다.
이때 한 떼의 도적 떼가 나타나 그 중 2백여 필의 준마를 약탈해 갔습니다.
저희들은 어제도 오늘도 필사적으로 놈들의 행방을 찾았지만 도적 떼의 행방을
알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부득이 나머지 말만 끌고 일단 돌아온 것입니다."
여포의 이마에는 어느 새 핏발이 서 있었다.
"뻔뻔스러운 놈, 귀중한 군마를 빼앗기고 돌아왔다는 말이냐? 도적을 만나면
그 자리에서 잡아 와야 하거늘 말까지 빼앗기고 어찌하여 빈손으로 들어왔느
나?"
"백번 지당하신 말씀이십니다. 하지만……."
송헌은 노기 띤 여포의 목소리에 기가 질려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 도적 떼들은 여느 좀도적이나 산적이 아닌 듯했습니다. 하나같이 건장한
놈들 뿐인데 모두 복면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 중에서도 유난히 장대한 두목인
듯한 자는 저희들을 마치 어린애처럼 집어던지는 통에 감히 얼씬도 할 수 없었
습니다. 거기다가 모두 날렵하기 이를 데 없어 말을 빼앗아 타자마자 두목의 호
령 한 마디에 바람같이 사라져 버렸습니다. 그들의 행동이 비상하고 의심쩍어
알아보니 그 복면의 도적 떼는 실상 소패 유현덕의 의제 장비와 그 부하들이었
습니다."
"무어야? 그놈이 장비였다고……?"
"틀림없이 장비였습니다."
여포는 송헌의 말에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더니 좌우에게 명을 내렸다.
"모든 군마는 소패로 진격할 준비를 하라!"
여포는 명을 내린 후 갑옷을 입고 적토마 위에 올라 군사를 이끌었다.
유비는 뜻밖에도 여포가 대군을 이끌고 소패로 쳐들어온다는 말을 듣고 깜짝
놀랐다. 그가 군사를 이끌고 오는 이유를 알 수는 없었으나 그대로 있을 수만도
없는 일이었다. 유비도 성 밖에 나가 군사를 벌여 세우고 양군이 서로 마주보며
포진한 가운데 유비가 말을 타고 나와 여포에게 물었다.
"여 장군은 어인 일로 출병하셨습니까?"
그러자 여포는 손가락으로 유비를 가리키며 큰 소리로 꾸짖었다.
"지난날 이 여포가 원문의 창을 쏘아 위급한 궁지에서 네놈의 목숨을 구해 주
었거늘, 그 보답이 이거냐? 내 군마 2백 필을 장비를 시켜 약탈케 하다니, 그러
고도 네놈이 시치미를 뗄 작정이냐?"
유비로서는 도무지 영문을 알 수 없었으나 장비라는 말이 나오자 뒤의 장비를
한 번 힐끗 쳐다보고는 여포를 향하여 은근하게 말했다.
"이 유비가 며칠 전 말이 모자라서 사람을 사방으로 보내어 약간의 말을 사들
인 적은 있습니다만 감히 장군의 말을 빼앗다니 참으로 알 수 없는 일입니다."
그러자 장비가 창을 들고 나와 유비 앞을 막아서며 소리쳤다.
"그래, 내가 네 말을 뺏었다. 그게 어쨌다는 거냐?"
장비가 한바탕 여포와의 싸움을 작정한 듯 으름장을 놓자 여포도 가만히 있을
리 없었다.
"이 고리눈을 가진 도적놈아, 네놈이 번번히 나에게 대들었다만 이번에야말로
네 목을 쳐 주마."
"고약한 놈, 군마 2백 필이 뭐 그리 대단하냐? 네놈은 우리 형님의 서주성을
송두리째 빼앗지 않았더냐?"
장비의 악담이 끝나자마자 여포는 분을 참지 못해 화극을 움켜잡고 달려나왔
다. 장비 역시 장팔사모를 휘두르며 달렸다.
여포는 장비를 향해 화극을 휘둘렀다. 장비는 말을 뒷발로 곧추세우더니 빗나
간 상대방의 창 끝을 쏘아보며 대거리하였다. 여포가 화극을 다시 바로잡고 말
머리를 돌리자 장비도 쌍날 칼을 단 장창을 비껴들고 횃불같이 이글거리는 눈으
로 여포의 가슴을 노려보며 달려들었다. 여포가 방천화극으로 장비의 장팔사모
창을 받아넘겼다. 과연 여포와 장비의 싸움은 당대 용장의 대결다웠다.
장비는 여포라는 사나이가 아주 싫었다. 여포에게 서주성을 빼앗겼던 원한까
지 사무쳐 여포만 보면 아무 일 없는 평소에도 울컥울컥 화가 머리끝으로 치솟
았다. 마찬가지로 여포 쪽에서도 늘 장비의 얼굴만 보면 구역질이 날 것처럼 불
쾌했다.
이처럼 서로 미워하는 양 호걸이, 이제 싸움터에서 맞부딪쳤으니 그 싸움의 치
열함은 말로 다 형언할 수가 없었다. 찌르면 막고 막으면 후비고 찔렀다. 그렇게
창을 맞대기를 1백여 합, 비 오듯 하는 땀은 말 등에 떨어지고, 쌍방의 외침은
구름에 메아리쳤다. 해는 이미 서산에 기울고 있었다.
유비는 장비가 행여 실수할까 조바심이 나서 징을 쳐 일단 군사를 거두어 성
안으로 들어가니 여포는 소패성을 단단히 에워쌌다.
"여포 이놈아! 내일 또 맞서자."
장비는 퇴각의 징 소리가 울리므로 말을 돌려 성 안으로 돌아왔다. 장비가 소
패성에 돌아오자 유비는 장비를 불러 나무랐다.
"또 아우가 일을 저질렀군. 대체 훔친 말은 어디다 두었나?"
"성 밖 앞의 사원에 매어 두었습니다."
"정당치 못한 수단으로 얻은 말을 나의 외양간에 매어 둘 수는 없네. 관우, 그
말을 전부 여포에게 돌려 보내고 전후 사정을 고하여 싸움을 그만두도록 청해
보라. 지금은 여포와 싸울 때가 아니다."
유비의 명에 따라 관우는 2백 필의 말과 함께 사람을 여포의 진으로 보내 화
해를 청했다.
여포도 막상 듣고 보니 유비가 시켜 말을 빼앗은 것이 아님을 알게 되었고,
말까지 되돌려 받았으므로 분을 가라앉히고 퇴각하려 하자 진궁이 옆에서 여포
를 충동질했다.
"지금이야말로 유비를 죽일 때입니다. 죽이지 않으면 반드시 후환이 있을 것입
니다. 서주의 인심은 날로 주공을 떠나 유비에게 쏠리고 있습니다. 그러니 그를
없애지 않으면 반드시 화를 입게 될 것입니다."
여포는 진궁의 말에 앞뒤를 가릴 여유도 없이 금세 마음이 바뀌었다. 서주성
의 인심이 유비에게 쏠리고 있다는 진궁의 말에 불끈하여 그대로 숨돌릴 틈도
없이 소패성을 공격했다.
이튿날도 종일토록 거센 여포의 공격을 받자 소패성은 당장 위태로운 지경에
이르고 말았다. 마침내 더 이상 견딜 수 없게 되자 유비는 손건, 미축 등과 의논
했다.
맨 처음으로 손건이 입을 열었다.
"이렇게 된 바에는 별 도리가 없습니다. 일단 성을 버리고 허창으로 가 조조에
게 의지했다가 때를 엿보는 수밖에 없습니다. 조조는 여포에게 깊은 원한을 가
지고 있더 우리를 물리치지는 않을 것입니다."
유비 역시 다른 뾰족한 방법이 없었다. 손건의 말에 따르기를 작정하고 좌우
를 보며 말했다.
"누가 선봉이 되어 여포의 포위를 뚫겠느나?"
"제가 죽기로 싸워 포위를 뚫겠습니다."
장비가 나섰다. 유비는 장비에게 선봉을 맡겨 길을 뚫게 했다. 관우에게는 뒤
쫓는 여포군을 막도록 하고 자신은 중군이 되어 노약자와 가솔을 이끌기로 했
다.
그날 밤 삼경이 되어 유비는 달이 뜨자마자 북문을 열고 말을 달렸다. 북문을
지키고 있던 여포의 부장 송헌, 위속이 장비를 가로막았다.
그러나 어림없는 일이었다. 성을 여포에게 고스란히 내 주게 된 원인이 자기
에게 있으므로 죽기를 작정하고 싸우는 장비를 당할 수 없어 그들은 끝내 많은
군사를 잃고 길을 내 주고 말았다.
유비는 그 틈을 타 중군을 거느리고 성을 빠져 나왔다. 그 뒤를 적장 장요가
급히 추격했으나 관우가 유비의 뒤에서 그들을 맞아 싸웠다. 관우의 청룡언월도
가 한 번씩 바람을 가를 때마다 수십명의 군사가 쓰러지니 함부로 접근하지 못
했다. 그 틈을 타 유비는 가솔들을 이끌고 무사히 소패성을 빠져 나올 수 있었
다.
여포는 소패성을 버리고 유비가 이미 달아났으므로 더 이상 유비를 뒤쫓지 않
았다. 그대로 소패성에 들어가 민심을 안정시키고, 고순에게 소패성을 지키게 한
후 군사를 거두어 서주성으로 돌아갔다.
호궁 부인과 조조의 호색 본심을 드러낸 진대부
조조는 장수가 천하를 도모하려 한다는 사실을 알고 공격하려 하나 장수는 겁
을 먹고 항복한다. 호궁 부인에게 푹 빠진 조조는 장남과 조카, 명장 전위까지
잃는다. 여포와의 청혼을 위해 원술의 사신으로 갔던 한윤을 벤 조조는 원술을
치려는 계획을 진행시킨다.
소패성을 빠져 나온 유비는 허창에 이르러 성 아래에 군사를 머물게 한 후,
먼저 손건을 조조에게 보냈다. 손건은 조조에게 유비가 여포에게 소패성을 빼앗
기고 쫓겨오게 된 경위를 자세히 설명하고 그의 수하로 들어가고 싶다는 유비의
뜻을 간곡하게 전했다.
조조는 지난날 황건적의 난 때부터 보아온 유비를 항상 경계해 오고 있었다.
언젠가는 천하를 향해 비상할 교룡의 면모를 가진 듯한 유비를 가슴에 새기고
있던 그였다. 그런데 뜻밖에도 여포에게 쫓겨 스스로 자기의 울타리 안으로 들
어온 것이 아닌가. 조조는 이를 좋은 기회로 여겼다. 그리하여 유비 일행을 쾌히
맞아들이기로 했다.
"현덕은 나의 형제나 다름없소. 내 어찌 형제의 어려움을 모른 척할 수가 있겠
소?"
조조는 손건에게 이렇게 말하며 사람을 딸려 보내 자기의 뜻을 유비에게 전하
게 했다.
다음 날 유비는 관우, 장비와 군사들을 그대로 성 밖에 머물게 하고 손건, 미
축만 데리고 성 안으로 들어갔다. 조조는 그들을 빈객의 예로 맞아들인 후 상좌
를 권하며 위로하였다.
유비는 그 동안 서주성에서 있었던 일을 조조에게 설명했다.
"여포 그 자는 원래 의를 모르는 놈입니다. 유 공과 힘을 합쳐 그 자를 치면
될 것이니 너무 심려치 마시기 바랍니다."
조조는 잔치를 베풀어 유비를 극진히 대접했다. 유비는 호의에 감사하며 날이
저물 무렵 승상부를 물러나왔다.
유비가 물러나자 조조와 함께 유비를 접대했던 순욱이 조조에게 은근히 권했
다.
"저 사람이야말로 장차 두려운 영웅이 될 것입니다. 반드시 주공의 벅찬 상대
가 될 것이니 세력을 더 키우기 전에 없애는 것이 좋겠습니다."
순욱은 유비를 보자 한눈에 그가 범상치 않음을 알고 자기가 품고 있는 생각
을 그대로 조조에게 말했던 것이다. 그러나 조조는 순욱의 말에 그냥 고개만 끄
덕일 뿐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순욱이 가자 때마침 곽가가 들어왔다. 이번에는 조조가 곽가에게 의견을 물었
다.
"순욱이 유비를 없애 버리라고 하는데 그대의 의견은 어떤가?"
곽가는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이내 머리를 설레설레 흔들었다.
"안 될 말입니다. 그가 아직 무명인 시절을 모릅니다. 그러나 오늘에 이르러서
는 의기, 인애의 인물로서 유현덕의 이름은 상당히 알려져 있습니다. 만일 지금
형세가 궁하여 주공께 의탁하러 온 현덕을 죽여 버린다면 어진 이를 해쳤다 하
여 천하의 현재는 주공에 대한 존경심을 갖지 않을 것입니다. 천하의 지모 있는
인재들이 그 소문을 듣고 의심을 품어 주공께 의지하지 않을 터인즉 그때는 누
구와 더불어 평정하시렵니까? 한 사람의 현덕을 두려워한 나머지, 사해의 신망
을 잃는다는 것은 현명한 처사가 되지 못합니다. 부디 깊이 헤아리시기 바랍니
다."
조조는 곽가의 말에 얼굴이 밝아지며 입을 열었다.
"그대의 말이 실로 내 뜻에 맞는 바이오. 지금은 한 사람의 호걸이라도 내게
필요한 때이오. 나에게 의지하러 온 호걸을 죽였다간 천하의 웃음거리밖에 더
되겠소?"
다음 날이 되자 조조는 천자께 표를 올려 유비를 예주목(하남성)으로 주청하
였다. 이때 정욱이 조조에게 간했다.
"유비는 여포나 원술과 같은 도배가 아닙니다. 그들은 내버려 두더라도 절로
망하겠지만 유비는 다릅니다. 지금 손을 쓰는 것이 좋습니다."
"지금은 천하의 영웅들이 모여들게 해야 할 때요. 그를 죽여 천하의 민심을 잃
어서는 아니 되오. 이에 대해서는 곽가와 뜻을 정했소."
조조는 정욱의 말도 물리치고 유비에게 군사 3천, 양식 1만 석을 주어 예주
임지로 떠나게 했다.
조조는 떠나는 유비에게, 소패로 군사를 보내 이전에 흩어진 옛 부하들을 불
러모아 여포를 공격하기 위한 채비를 하도록 일렀다. 유비를 소패와 서주에서
멀지 않은 곳인 예주에 머물게 하여, 유비로 하여금 여포를 정벌케 하자는 것이
조조의 속셈이기도 했다.
예주에 다다른 유비는 여포에게 쫓길 때 흩어졌던 지난날 휘하의 군사들을 다
시 불러모으고 조조에게서 얻은 군사와 합하니 적지 않은 군세를 이루었다. 그
러나 혼자의 힘으로 아직 여포를 칠 정도는 아니어서 사람을 조조에게 보내 함
께 여포를 칠 날을 정하기로 했다.
그런데 조조의 계획이었던 여포의 정벌이 실현되기도 전에, 뜻밖에도 엉뚱한
곳으로부터 허도에 전운이 몰려오기 시작했다.
조조가 유비의 사자를 맞아 날짜를 정하고 여포를 치기 위해 군사를 일으키려
할 즈음 급보가 날아든 것이다.
"동탁의 옛장수였던 장제가 관중에서 군사를 일으켜 남양을 공격하던 중 화살
에 맞아 죽었습니다. 이에, 그의 조카 장수가 세력을 계승하여 가후를 모사로 삼
고 형주 태수 유표와 결탁하여 완성에 진을 쳤습니다. 그들은 장차 허도를 쳐
천자를 납치하고 천하를 넘보려 한다 합니다."
조조는 그 급보를 듣고 크게 노했다. 조조는 여포를 치려던 군사들을 이끌고
곧장 달려가 장수부터 치고 싶었으나 아무래도 그의 마음에 걸리는 것은 서주의
여포였다.
'만일 내가 장수를 치러 가 장기전에라도 접어든다면 여포는 반드시 그 틈을
타 허도로 쳐들어올 것이다.'
그런 염려 때문에 조조가 출진을 망설이며 순욱을 불러 의논했다.
순욱은 주저없이 아뢰었다.
"염려하실 일이 아닙니다. 여포는 지모에 어둡고 욕심이 많은 자입니다. 주공
께서는 서주의 여포에게 사람을 보내어 그의 관직을 올려 주고 은상을 주어 현
덕과 화해하도록 권해 보십시오. 우선 눈앞의 이익에 기뻐하며 딴마음은 먹지
않을 것이옵니다."
"참으로 좋은 계책이오."
조조는 고개를 끄덕였다. 곧 봉군도위 왕칙을 사자로 하여 그 뜻을 여포에게
전하게 했다. 여포를 평동장군에 봉하고 예물을 잔뜩 주며 유비와 화해하라는
글을 보낸 조조는 장수를 정벌하기 위해 15만의 대군을 이끌고 완성으로 향했
다.
조조가 이끈 대군의 깃발과 창검은 백 리나 이어졌고, 군사들의 사기는 하늘
을 찌를 듯했다. 조조는 군사를 3대로 나누어 하후돈을 선봉장으로 삼아 육수에
이르러 진을 펼쳤다.
때는 이미 봄도 무르익어 가는 건안 2년의 5월이었다. 연록색 버드나무들은
그 간들간들한 가지를 늘어뜨리고, 육수의 강물엔 그림 같은 도화 꽃잎들이 가
득히 떠 있었다.
장수는 막상 조조가 몸소 대군을 이끌고 오자 간담이 서늘해져 모사 가후에게
의견을 물었다.
"어찌하면 좋겠소, 승산이 있겠소?"
"없습니다. 조조의 군세가 워낙 강해 전력을 다해 공격해 온다면 당할 길이 없
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되겠소?"
"항복이 있을 뿐입니다. 항복하여 조조를 안심시킨 후 때를 보아 도모하는 길
밖에 다른 방책이 없습니다."
명민한 가후는 역시 헤아림이 빨랐다. 장수도 조조의 대군을 대적할 수 없다
고 여겨 하는 수 없이 가후의 말에 따랐다. 가후는 싸움도 하기 전에 백기를 앞
세우고 자신이 사자가 되어 조조의 진으로 향했다.
조조가 가후를 만나 보니 항복하러 온 사자이지만 태도가 당당했으며, 청산유
수와 같은 언변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조조는 가후의 인품과 재주에 탄복하
여 그를 자기의 모사로 쓰고자 했다.
"공은 장수를 떠나 나와 함께 대의를 도모할 생각은 없으시오?"
조조가 목소리를 낮춰 정중히 그에게 말하자 가후가 공손히 대답했다.
"분에 넘치는 말씀입니다만, 장수가 제 의견이라면 따르지 않는 것이 없으니
어찌 은혜를 저버릴 수 있겠습니까? 더구나 저는 지난날 이각의 휘하에서 이미
천하에 죄를 지었기에 더욱 처신을 자중하고 있습니다. 승상의 두터운 정은 잊
지 않겠습니다."
가후는 조조의 권유를 완곡히 물리친 후 장수에게 돌아갔다. 다음 날은 장수
가 가후와 함께 직접 조조를 찾아와 항복했다.
힘들이지 않고 장수의 항복을 받게 되자 조조의 기쁨은 컸다. 조조는 두 사람
을 후하게 대접한 뒤 군사 약간을 거느리고 완성으로 들었다. 나머지 군사들은
성 밖에 그대로 주둔케 했는데 워낙 대군이라 진지가 10여리에 이르렀다.
장수는 날마다 조조를 위해 연회를 베풀었다.
어느 날 밤 장수와 함께 밤늦게까지 주연을 즐기다가 침전으로 들어가던 중
따르는 사람에게 넌지시 물었다.
"성 안에 혹시 기녀가 없느냐?"
이때 조카 조안민이 조조의 시중을 들고 있었다. 조안민은 조조의 심중을 눈
치채고 나지막한 목소리로 조조에게 고해 바쳤다.
"지난 밤에 호궁 소리가 나 관사 옆을 살펴본즉 한 아리따운 부인이 호궁을
켜고 있었습니다. 알아보니 장수의 숙부 장제의 처로, 장제가 죽은 뒤에 이 성으
로 옮겨 와 장수가 돌보고 있다고 합니다."
조조는 취한 척하고 몸을 비틀거리며 말했다.
"음-. 죽은 장제의 처라고? 그러면 과수댁이란 말이렷다. 그렇다면 네가 가서
빨리 데리고 오라."
조안민은 무사를 거느리고 가 장제의 처를 데리고 왔다. 조조가 보니 과연 빼
어나게 아름다운 여인이었다. 사람들을 물리고 그 여인을 방으로 들게 한 뒤 조
조가 목소리를 낮춰 다정하게 물었다.
"그대의 성명은 어떻게 되시오?"
"첩은 돌아가신 장제의 아내로… 추씨라고 합니다."
우수에 찬 아름다움이었다. 난초꽃을 방불케 하는 눈이 긴 속눈썹으로 덮인
채 바르르 떨렸다. 추씨의 갸냘픈 대답에 조조는 어쩔 줄 몰랐다.
"부인은 내가 누구인지 알겠소?"
"승상의 크고 높은 명성은 일찍부터 듣고 있었사옵니다. 오늘 이렇게 뵙게 되
어 영광이옵니다."
추씨가 이렇게까지 말하자 조조는 그 여인이 자기의 뜻을 받아들이는 것으로
짐작하며 허세를 떨기 시작했다.
"장수의 항복을 왜 선선히 받아들인 줄 아시오? 그건 부인 때문이었소. 그렇
지 않았다면 내 마음 하나로 장수 일족을 멸할 수 있었다는 걸 아실거요."
부인은 어깨를 움츠리고 두 볼에 홍조를 띠며 아뢰었다.
"다시 목숨을 부지하게 된 은혜에 감사할 따름입니다."
추씨가 머리를 숙이며 사례했다.
"오늘 저녁 그대를 만난 건 하늘의 뜻인가 하오. 나의 이 열정을 어떻게 생각
하시오. 내 열정을 받아 준다면 내 반드시 그대에게 부귀영화를 누리도록 해 주
겠소."
추씨가 가늘고 흰 목을 들어 조조를 쳐다봤다. 조조는 백옥같이 흰 살결과 수
줍어하는 가운데도 입가에 맴도는 은은한 미소에 그만 넋 빠진 사람처럼 이끌려
갔다. 그날 밤 그들 남녀는 밤이 새도록 뜨거운 정을 나누었다. 새벽이 되자 추
씨는 조조의 품으로 기어들면서 소곤거렸다.
"이곳에서 제가 너무 오래도록 머물다보면 필시 시조카 장수의 의심을 사게
될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소문이 남의 입에 오르내릴 것이니 어찌하면 좋겠습
니까?"
"하하, 쓸데없는 걱정 마시오. 내일이라도 성 밖에 있는 내 진지로 거처를 옮
기겠소."
다음 날 조조는 추씨에게 약속했던 대로 거처를 성 밖의 진으로 옮기게 했다.
그리고 그의 장막 밖을 전위에게 지키게 하여, 그의 허락 없이는 누구든 장막에
들지 못하도록 하였다.
조조는 장막 안에서 매일 밤낮을 가리지 않고 추씨의 몸을 탐했다. 이로 하여
조조는 허창으로 돌아갈 생각도 잊은 채 몇날 며칠이 흘러갔다. 그러나 추씨가
조조에게 이끌려간 지 여러날이 되자, 그 일이 장수에게 알려지지 않을 리가 없
었다.
장수는 얼굴이 붉으락푸르락 해지며 울화통을 터뜨렸다.
"조조, 그놈이 내 얼굴에다 침을 뱉어도 유분수지……."
장수는 즉시 모사 가후를 불러 이 일을 의논했다.
"조조 그 자가 무장한 군사를 시켜 숙모를 자기 진영으로 끌고 가 밤낮없이
희롱하고 있소. 세상 사람들이 이를 알면 나를 보고 뭐라고 하겠소? 이제 나는
조조에게 더 이상 몸을 굽히지 않겠소. 그대가 이 울분을 풀 계교를 세워 주시
오."
"지당하신 말씀입니다."
가후는 잠시 생각에 잠기다 다시 입을 열었다.
"그러하오나 이런 일은 결코 밖으로 새어 나가서는 아니 됩니다. 내일 조조가
장막에서 군무를 볼 때 은밀히 시행하십시오."
가후는 그렇게 말한 후 장수에게 귀엣말로 계교를 일러 주었다.
다음 날이었다. 성 밖에 있는 조조의 중군으로 장수가 찾아와 근심스런 얼굴
로 말했다.
"항복한 뒤라 그런지는 몰라도 군사들 중에 도망가는 자가 많아 걱정입니다."
장수는 짐짓 큰 일이라도 벌어졌다는 듯이 엄살을 부렸다. 그러나 장수의 속
셈을 알 리 없는 조조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 장수에게 말했다.
"그런 건 걱정할 일이 아니지 않소. 성 밖 네 문에 감시대를 세우고 성 안팎을
순시케 하여 도망병을 발견하면 즉각 목을 베시오. 그렇게 하면 도망병은 더 이
상 생겨나지 않을 것이오."
"그렇게도 생각하였습니다만 항복한 군대라 승상의 허락도 받지 않고 순찰다
를 함부로 움직일 수도 없는 일이고 하여……."
장수가 말끝을 흐리며 조조의 눈치를 살폈다. 그러자 조조는 장수가 무엇 때
문에 자기를 찾았는지 그 이유를 헤아리고 선뜻 승낙했다.
"염려 하지 말고 장 공의 군대를 움직이시오. 내가 부하들에게 일러두겠소."
추씨에게 흠뻑 빠져 있는 조조였다. 장수가 자기의 숙모 일에 대해 언급하지
않는 것만으로도 다행스럽게 여겨 별 생각 없이 이렇게 허락하니 장수는 속으로
쾌재를 부르며 돌아갔다.
장수는 지체하지 않고 조조의 진중에 군사를 4대로 나누어 주둔시켰다. 그런
후 그들은 가후의 계책에 따라 때를 기다리며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그러나 조
조의 장막을 지키는 전위의 용맹이 두려워 함부로 움직일 수가 없었다.
장수는 성 안에서 용맹스러움으로는 첫손 꼽히는 호거아를 불러 물었다. 호거
아는 붉은 머리에 눈초리가 독수리처럼 매서운데다 힘이 장사라 5백 근이 되는
짐을 지고 하루에 7백 리를 달린다는 장사였다. 그러나 그도 전위만은 어쩌지
못한다며 걱정스러운 얼굴로 아뢰었다.
"제가 전위를 두려워하는 까닭은 그가 가지고 있는 두 자루 철극 때문입니다."
"그러나 어떻게 해서든 전위를 제거하지 않으면 조조를 칠 수 없네."
가후의 간곡한 말에 호거아가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한 꾀를 냈다.
"장군께서 내일 그를 청하여 술을 대접하도록 하십시오. 그는 술을 좋아하니
마다하지 않을 것입니다. 전위를 고주망태가 되도록 취하게 하면 제가 중군으로
숨어들어 그의 쌍철극을 훔쳐 내오겠습니다. 쌍철극만 없으면 그도 두려울 것이
없습니다."
장수는 호거아의 말에 기뻐하며 군사들에게 은밀히 명을 내려 활과 화살을 정
비하고 갑옷을 입도록 했다.
이런 음모를 알지 못한 채 일찍이 조조에게 괴력을 과시하여 '은나라 주왕울
호위하던 악래'에 비유되던 전위는 조조의 장막 앞에서 무료하게 창을 들고 서
있었다. 이때 장수의 모사 가후로부터 정중히 청하는 전갈을 받았다.
다음 날 가후가 마련한 술자리에 참석한 전위는 밤 이경 무렵까지 술을 마셨
다. 조조의 군막을 지킨 뒤부터 술을 입에 대지 못했던 전위는 만취가 되어서야
자기의 장막으로 돌아왔다.
호거아는 수행하는 졸개들 속에 끼여 조조군 진영으로 몰래 들어갔다. 그의
손에는 어느 새 전위의 쌍철극이 쥐어져 있었다.
조조는 그날 져녁도 추씨와 함께 술을 마시고 있었다. 그의 취한 귀에도 장막
밖에서 말발굽 소리와 어지럽게 수선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조조는 시신을 불러
알아보게 했다.
"장수의 부대가 순찰을 돌고 있다 하옵니다."
조조는 마음놓고 다시 술잔을 기울였다. 이윽고 삼경쯤 되었을 때 갑자기 장막
밖에서 함성이 일었다.
조조는 다시 시신을 보내 알아보게 했다.
"군사의 실수로 말꼴을 실은 수레에 불이 붙어 여럿이 달려들어 불을 끄고 있
다 하옵니다."
조조는 그 말을 듣자 안심하고 추씨와 더불어 잠자리에 들었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조금 후에 사방에서 불길이 치솟고 함성 소리와 징 소리가 요란했다.
조조는 그제야 깜짝 놀라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전위, 전위는 어디 있느냐?"
조조는 급히 옷을 꿰입으며 전위를 불렀으나 대답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그
때 술에 취해 곯아떨어졌던 전위도 지독한 연기 냄새와 요란한 징소리, 고함 소
리가 어렴풋이 들려 벌떡 일어나 취한 중에도 황망히 쌍철극을 찾았으나 보이지
않았다.
이때 진영의 주위는 이미 검은 연기에 휩싸였다. 전위가 주위를 두리번거리니
장수의 군사들이 원문 부근까지 다가오고 있지 않은가.
전위는 쌍철극을 찾지 못해 주위에 있는 졸개의 칼을 빼들었다. 말 탄 군사들
이 긴 창을 들고 진중을 향해 달려오고 있었다.
전위는 그들을 맞아 칼을 휘둘렀다. 때마침 늦은 봄이라 술에 취한 전위는 위
통마저 벗어던지고 잠들었던 터이라 갑옷은커녕 옷도 걸칠 틈이 없었다. 전위는
칼을 휘두르며 달려나가, 순식간에 20여 명을 죽였다.
"전위다!"
"악래다!"
비록 쌍철극은 없다하나 전위가 순식간에 기병 20여명을 찌르고 베니 장수의
군사들도 간담이 서늘해져 잠시 주춤하였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뿐 이번에는 보졸 부대가 밀어닥쳤다. 그들이 모두 긴 창
을 들고 밀려드니 마치 창의 갈대숲을 이룬 듯했다. 전위가 그들을 맞아 싸우던
중 그의 칼이 부러지고 말았다. 칼이 부러지자 적군의 창을 빼앗아 휘둘렀다. 창
마저 부러지자 이번에는 양 팔에 적병 하나씩을 잡고 빙글빙글 돌려대면서 싸우
기 시작했다. 적병 몇이 나가떨어지자 전위의 무서운 용맹에 기가 질린 듯 감히
더 이상 접근하려 들지 않고 멀찌감치 물러났다. 그대신 전위를 빙 둘러싸고 활
을 쏘아대기 시작했다. 반 벌거숭이가 된 전위의 몸에 화살이 소나기처럼 쏟아
졌다. 그래도 전위는 진문을 지키겨 끄덕도 않고 서 있었다. 이미 전위의 몸에는
고슴도치처럼 화살이 꽂혀 있었다. 적병 하나가 등뒤로 다가가 등에다 창을 내
질렀다. 천하의 악래 전위도 그 창에는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선혈을 내뿜으며
외마디 비명 소리와 함께 땅바닥에 나뒹굴고 말았다.
수문장 전위가 쓰러졌으나 겁에 질린 적병들은 얼른 진문에 발을 들여놓지도
못했다.
한편 전위가 결사적인 싸움을 벌이며 적군을 막고 있는 사이, 조조는 잽싸게
말 위에 올라 적진을 빠져 나가고 있었다. 그를 뒤따르는 부하 한명 없이 단지
조카 조안민만이 신발도 신지 못한 채 맨발로 쫓아가고 있었다.
얼마 되지 않아 조조가 진중을 빠져 나간 걸 안 장수는 그를 뒤쫓았다. 추격
대는 쉴새없이 화살을 쏘아댔다. 조조는 날아온 화살에 오른팔이 맞았고, 말에도
몇 대의 화살이 꽂혔다. 말은 화살을 맞았으나 다행히 조조의 채찍질을 받으며
쓰러지지 않고 달렸다. 그 말은 대완 지방에서 난 명마였다. 그들이 간신히 육수
강변까지 이르렀을 때 조카 조안민은 적의 추격대에 사로잡혀 갈갈이 찢겨지는
몸이 되고 말았다.
조조는 부상당한 말을 몰아 육수의 강물에 뛰어들었다. 사력을 다해 건너편
기슭에 당도한 조조가 강기슭에 오르려 할 때 날아온 화살 하나가 말의 눈을 꿰
뚫었다. 조조는 넘어지는 말과 함께 나뒹굴고 말았다.
조조의 몸도 피로 얼룩졌고 쓰러진 말도 피투성이였다. 아무리 명마라 하지만
눈에 화살이 박힌 채로는 다시 일어나지 못했다.
조조가 간신히 강기슭을 기어올랐을 때였다. 강변쪽에서 말을 달려오는 젊은
이가 있었다. 조조가 어찌할 줄 몰라 당황하고 있는데 귀에 익은 목소리가 들려
왔다.
"아버님, 이걸 타십시오."
어둠 속에서 큰아들 조앙의 목소리가 들려 왔다. 장남이라 이번의 출진 때 경
험삼아 데리고 왔는데, 그도 구사일생으로 여기까지 도망쳐 온 것이었다.
"마침 잘 와 주었구나, 너는 어찌하겠느냐?"
"저는 염려하시지 마십시오. 아버님 목숨을 보전하시어 큰 일을 이루십시오."
조조는 급히 말 위에 뛰어올라 뒤도 돌아보지 않은 채 다시 달렸다. 조조가
불과 백보도 달리기 전에 무수한 적의 화살을 맞아 젊은 나이에 목숨을 잃고 말
았다.
'내가 죽으면 천하도 없고 우리 일족도 멸망할 뿐이다. 내 반드시 너의 복수를
해 주마.'
조조는 말을 달리며 눈물을 흘렸다.
장남 조앙의 목숨을 대가로 겨우 사지에서 벗어난 조조는 그의 소식을 듣고
달려온 부하 장수들을 만났다. 조조는 장수들로 하여금 흩어진 군사들을 다시
수습하게 했다.
이때 하후돈 휘하의 청주병 한 무리가 찾아와 엎드려 울면서 조조에게 고해
바쳤다.
"우금이 반란을 일으켜 주공을 거스렸습니다."
"내 발등 에 불이 떨어진 틈을 타 반란을 도모하다니, 괘씸하기 짝이 없는 놈
이로구나. 내 이놈부터 징벌하리라."
조조는 격노하여 즉각 우금을 무찌르라고 군사를 보냈다.
청주병은 동탁이 죽은 이듬해, 조조가 산동에서 황건적 잔당을 토벌하여 잔당
수만을 흡수해 조련시킨 조조의 정예병이었다. 그러나 사실인 즉, 하후돈이 이끌
었던 청주병들은 장수군에게 쫓겨 도망가던 중 도적의 습성을 버리지 못하고 혼
란을 틈타 고을에 들러 백성들의 재물을 야탈한 것이었다.
그때 펑로교위 우금은 백성들의 재물을 약탈하는 청주병들을 보자 자기의 군
사를 이끌어 백성들을 구해 주었다. 이에 우금의 칼을 피해 도망친 청주병들은
조조에게 달려와 우금이 반란을 도모한다고 모함했다. 이런 사실을 알지 못한
조조는 크게 노해 때마침 모여든 하후돈, 이전, 허저, 악진 등의 장수에게 우금
을 막도록 한 것이다.
한편 자기가 의심을 받고 있는 지를 알지 못하는 우금은 조조의 진이 보이는
곳에 이르자 뒤쫓는 장수군을 맞을 준비붙 했다. 군사들로 하여금 영채를 세우
게 하고 노궁수들을 진 앞에 늘여 세운 후 명을 내렸다.
"참호를 파고 진을 굳게 지켜야 한다."
이때 우금의 진에 머물고 있던 순욱이 의아하게 여겨 물었다.
"청주병들이 먼저 승상에 이르렀으니 필시 장군이 모반했다고 말했을 것이오.
그런데 승상께 먼저 그 동안의 사정을 아뢰지 않고 왜 진지 설치부터 하시오?"
앞 뒤 사정을 헤아린 순욱이 우금에게 이렇게 말했으나 우금은 개의치 않았
다.
"지금은 그럴 틈이 없소. 적군이 곧 추격해 올 터인데 미리 대비하여 그들부터
물리쳐야 하지 않겠소? 설령 숭상께서 나를 오해하고 계신다 할지라도 나에 대
한 해명은 작은 일이요, 적을 물리치는 일은 큰 일이니 먼저 큰 일부터 한 후
작은 일을 하는 것이 순리일 것이며 신하된 자의 도리일 것이오."
과연 얼마 있지 않아 우금의 말대로 장수의 군대가 들이닥쳤다. 이미 방비를
단단히 해 두고 적을 기다리고 있던 터라 기세 좋게 앞으로만 내닫던 장수군은
화살 세례를 받자 크게 동요되었다.
이를 본 우금이 말을 몰아 장수군을 치자 본진에 있던 다른 장수들도 여세를
몰아 적을 공격했다. 장수군이 어지럽게 흩어지는 가운데 수많은 사상자를 내며
1백여 리나 쫓겨나게 되었다.
가후의 계책에 따라 조조를 급습했으나 조조의 군대를 무찌르기에는 미약한
장수군이었다. 장수는 조조군에게 크게 패해 이제 얼마 남지 않은 군졸들을 이
끌고 조조와는 사이가 좋지 않은 유표에게 의지하기 위해 형주로 떠났다.
장수를 깨뜨린 조조가 군사를 수습하고 장수들을 점고했다. 우금은 그제야 조
조에게 나아가 청주병을 죽인 연유를 고했다.
"청주병들이 함부로 양민을 괴롭히며 재물을 약탈하여 백성들의 원성을 사고
있기에 제가 그들을 죽였습니다."
"그렇다면 어찌하여 나한테는 말도 없이 진지를 만들었느냐?"
"소장의 옳고 그름을 따지는 것은 자기 몸 하나를 지키는 사사로운 일입니다.
그러나 적군인 장수를 대비함은 우리 군을 지키고 나아가 주군을 지키는 일입니
다. 사태가 위급하므로 저를 위한 변호는 뒤로 미루었습니다."
우금이 주저없이 대답하니, 조조는 그제서야 만면에 웃음을 띠었다.
"장군은 그러한 혼란 속에서도 군사를 정비하고 영채를 세웠으며, 모함을 두려
워하지 않고 적을 맞아 물리쳤소. 이야말로 명장의 풍모를 천하에 떨쳐 보인 것
이오."
조조는 우금을 치하하며 금으로 만든 그릇 한 벌을 내리고 익수정후에 봉했
다. 또 우금을 모함한 청주병들은 모두 처벌하고 거느린 군사를 단속 못한 하후
돈을 크게 꾸짖었다.
조조는 상벌을 분명히 하고 다시 한 번 군율을 엄정히 강조했다. 그 연후에
조조는 자기 대신 죽은 전위 등을 위해 제단을 크게 만들어 그들의 넋을 위로했
다.
"전위! 내 절을 받아 주오."
조조는 소리 내어 슬피 울며 손수 잔을 들어 제주를 따랐다.
"이번 싸움에서 맏아들과 조카를 잃었으나 그것만으로는 크게 상심하지 않는
다. 그러나 나에게 충성을 다 바친 전위를 죽게 한 것은 참으로 비통하고 원통
하다."
그렇게 말한 조조는 다시 한 번 슬피 울었다. 여러 장수들은 가족들의 죽음보
다 전위의 죽음을 더 슬퍼하는 조조를 보고 감격하여 목이 메었다. 조조는 다음
날, 도읍인 허창으로 회군했다. 자신의 호색으로 큰아들 조앙과 조카 안민을 죽
게 하고 명장 전위를 잃은 것을 생각할 때 조조의 가슴은 찢어질 듯 아팠다.
허창에 돌아오니 때마침 좋은 소식이 조조를 기다리고 있었다. 장수를 치기
위해 서주의 여포를 달래느라 벼슬과 황금을 주어 왕칙을 사자로 보냈었는데 그
왕칙이 여포의 사자 진등을 대동하고 돌아와 있었다. 더욱이 원술이 여포와 혼
인을 맺기 위해 여포에게 사자로 보냈던 원술의 신하 한윤까지 포박하여 왔으니
장수로 인해 답답했던 조조의 가슴이 확 트이는 듯했다.
진등은 조조에게 그가 한윤을 포로로 이끌고 온 경위를 아뢰었다.
"여 장군은 승상께서 베푸신 은혜를 입어 조정으로부터 평동장군의 인뒤옹이
를 받들고 그지없이 감격하고 계십니다. 이에 원술과의 혼인을 파기하고 앞으로
승상과의 우의를 두텁게 하시겠다는 뜻으로 한윤을 묶어 보내신 것입니다."
조조는 여포가 원술의 청혼을 거절하고 한윤까지 묶어 보내자 기쁘지 않을 수
없었다. 원술과 여포를 갈라놓아 적으로 만들게 되었으니 조조로선 큰 짐을 덜
게 된 셈이었다. 조조는 곧 형리에게 명하여 허도의 네 거리에서 원술의 사자
한윤을 목베게 했다.
여포가 보낸 서신의 내용은 지금은 자칭 서주목이지만 정식으로 이를 임명해
달라는 것이었다.
조조는 쾌히 이를 응락했다. 이제 원술과의 혼인은 파기 되었으므로, 여포의
요구를 들어 주고 그를 움직여 원술을 치자는 조조의 계획은 무르익고 있었다.
조조는 그날 밤 진등을 청해 잔치를 벌였다.
주연이 벌어지고 술이 몇 순배 돌아가며 그와 말을 나누게 되자 조조는 진등
의 사람됨을 보고 내심 기뻐했다. 진등은 이미 여포와 천하를 논할 인물이 아님
을 은연중에 내비치고 있었다. 진등이 조조에게 가만히 고했다.
"승상께서는 제가 여포의 사자이므로 소생을 믿지 않으시겠습니다만, 저와 부
친께서는 서주성에 살고 있기 때문에 여포의 객신이 되었을 뿐입니다."
진등은 허도에 와 조조를 본 순간 마음이 그에게 기울어지고 있었다. 조조 또
한 매사 헤아림에 밝은 진등에게 감탄하고 있던 중이었다.
"여포는 원래 늑대나 이리 같은 자로 무용은 뛰어나나 지모가 없으며, 경솔합
니다. 그대로 두면 고양이를 키워 불별없는 표범을 만드는 셈이 되니 승상께선
하루라도 빨리 그를 도모하심이 좋을 것입니다."
진등이 끝내 본심을 드러내자 조조 또한 더 망설일 것이 없었다.
"나도 모르는 바가 아니오. 그를 오래도록 방치해서는 안 될 것이오. 다행히
공과는 이제 지기가 되었으니 앞으로 공의 부자가 나를 도와 주어야 할 것이오.
공의 춘부장 진대부의 명성은 나도 이미 들은 바 있소. 잘 말씀드려 주시오."
조조도 속마음을 숨김없이 털어놓았다.
"후일 승상께서 여포를 치실 때 저희 부자는 서주에 있으면서 내응하겠습니
다."
진등의 말에 조조는 크게 기뻐하며 진등에게 잔을 권했다. 진등 부자가 서주
에서 호응해 준다면 여포를 사로잡는 것쯤은 어렵지 않는 일이라 여겨졌다.
조조는 이에 진등에게 관릉태수의 벼슬을 내리고, 그의 부친 진규에게는 2천
석의 녹을 내렸다.
진등이 서주로 떠나는 날, 조조는 친히 배웅하며 말했다.
"서주 일은 오직 공에게 의지하겠소."
진등은 조조에게 염려 말라며 허리를 굽혀 절한 뒤 서주로 돌아갔다. 진등이
서주로 돌아오자 여포는 진등에게 그간의 일을 물었다. 진등은 조조가 천자께
표를 올려 여포에게 정식으로 서주목의 벼슬을 내리게 하겠다고 약속했노라 전
하고 아울러 그들 부자에게도 벼슬과 녹을 내렸노라고 말했다. 그러자 여포는
벽력같이 소리쳤다.
"네 이놈! 내가 서주목의 임명을 받아오라 했거늘, 너희 부자 벼슬과 봉록만
받아오지 않았느냐? 원술과 혼인을 파기하고 조조와 친교를 맺으라는 네 아비의
말을 따랐는데 이제 네놈들의 욕심만 차렸으니 너희 부자가 필시 나를 조조에게
팔아먹은 것이 아니고 무엇이냐!"
여포가 화를 참지 못하고 칼을 빼 진등의 목을 치려 했다. 진등이 깜짝 놀랐
으나 짐짓 태연한 척하며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허허허… 장군께서는 어찌하여 하나만 알고 둘은 헤아리지를 않으십니까?"
"뭣이 어째? 그게 무슨 뜻인가?"
"조조를 만났을 때 저는 여 장군을 호랑이에 비유하였습니다. 즉 호랑이는 배
가 고프면 사람을 물어뜯으니 고기를 넉넉히 주어 주리지 않도록 하라는 뜻이었
지요. 즉 장군께서 원하시는 바는 전부 들어 주어야 한다는 의미였습니다."
"그랬더니 조조가 무어라고 하던가?"
여포가 이 말에 대한 조조의 반응이 궁금한 듯 급히 되물었다.
"그러자 조조는 여 장군을 매에 비유하였습니다. '여우와 토끼를 잡기 위해선
매의 배를 굶주리게 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즉 매는 배가 고파야 부릴 수가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그 여우와 토끼는 누구를 가리키는 것이냐고 물었
습니다."
"그래 그들은 누구라고 하던가?"
여포가 눈을 번쩍이며 물었다.
"기주의 원소, 회남의 원술, 강동의 손책, 형주의 유표, 익주의 유장, 한중의 장
로가 바로 그들이라는 것이었습니다."
실로 놀라운 진등의 임기웅변이었다. 여포의 어리석음을 알고 있는 진등이 꾸
며낸 말에 여포가 기쁨을 감추지 못하고 껄걸 웃었다. 조조가 그들보다도 자신
을 높여 본다는 것만으로도 기분이 좋아진 여포는 칼집에 칼을 꽂으며 말했다.
"조 승상이 이 봉선을 알아보고 있구나."
여포는 그제서야 목을 베려 했던 진등에게 그 동안의 노고를 치하하며 위로했
다.
원술, 또 한 사람의 천자
옥새를 가진 원술은 드디어 그의 야심을 드러내고, 한윤의 참수 소식에 노발
대발하여 여포를 공격한다. 이에 여포는 진등의 계략에 의지하는데 정작 진등은
원술의 공격에도 태연자약하기만 하다. 여포의 독촉에 마침내 진등은 여포가 깜
짝 놀랄 계책을 낸다.
한편 여포가 청혼을 거부하고 오히려 사자 한윤을 조조에게 보낸걸 알게 된
원술은 그걸 지켜 보고 있지만은 않았다.
그 즈음 회남 땅의 원술은 이미 한윤이 허도의 네 거리에서 참수 되었다는 소
식을 들었다.
"이 승냥이 같은 자가 이토록 방자하게 굴다니... 내 이놈의 목을 베고 그 고
기를 씹으리라."
원술은 노발대발하며 즉각 20여만의 대군을 동원하고 이를 7로로 나누어 진격
하게 하였다. 제1로는 대장군 장훈이 중군을 거느려 서주대로로, 제2로는 상장
교유가 이끌어 소패로, 제3로는 상장 진기가 기도로 진격케 했다. 또 제4로는
부장 뇌박으로 하여금 낭야로, 제5로는 부장 진란을 갈석으로, 제6로는 항장 한
섬을 하비로, 제7로는 엿시 항장 양봉으로 하여금 준산으로 진격케 하고 전군을
좌,우로 나누어 모두 서주를 향해 진격했다.
원술은 또 연주자사 김상을 태위로 심아 군량과 마초를 운반하며 전군을 뒷바
라지 하도록 명했다. 그러나 김상은,
"나는 거짓 황제의 명을 받들 수 없소."
하고 그 일을 마다하자 원술은 그 자리에서 김상의 목을 벤후 기령으로 하여금
대신케 했다.
원술 자신은 이풍 양강,악취를 수하 장수로 삼아 군사 3만을 거느리고 형세에
따라 전군을 돕기로 했다. 원술은 여포의 전위군을 마치 나뭇잎을 밟듯하며 노
도와 같이 밀어붙였다.
이에 여포는 사색이 되어 급히 중신들을 불러모았다.
"일이 이 지경이 되었으니 누구든 서주성은 구할 수 있는 계교가 있으면 말해
보시오!"
이에 진궁이 발끈 성을 내며 소리 높여 말했다.
"이제는 아셨을 것이오. 일이 이 지경에 이른 것은 순전히 진규 부자 때문입
니다. 그들은 지신의 벼슬과 봉록만 구하고 그들늬 말을 듣고 따른 여 장군에게
는 오늘와 같은 화를 당하게 했을 뿐입니다. 그러니 그들의 목을 베어 원술에게
바치고 전후 사정을 소상히 전한다면 그도 노여움을 풀 것입니다."
눈앞에 원술의 대굼을 두고 있는 여포였다. 황망한 중에 진궁의 말을 듣고 앞
뒤 가릴 여유 없이 그의 말을 따르기로 했다. 여포는 즉각 진규,진등 부자를 옥
에 가두게 했다.
그러나 이끌려 온 진등은 크게 소리내러 웃을 뿐이었다. 여포가 진 등의 뜻밖
의 웃음에 영문을 알 수 없다는 얼굴로 물었다.
"너의 목을 베려 하거늘, 무엇이 그토록 우습다는 말인가?"
"장군은 어찌 그다지도 겁이 많으십니까? 내가 ㄹ보기엔 원술의 7로군은 마치
일곱 개의 썩은 풀더미와 같사온데 장군은 무엇을 그리 걱정하십니까?"
"날보고 겁쟁이라니, 그렇다면 그대에게 적을 물리칠 계책이라도 있단 말이
냐?"
여포는 눈을 부릅뜨고 진등을 노려보았다. 여포의 말에 진등은 여전히 태연자
약한 태도로 말했다.
"계책이 있사오나, 그 계책을 쓰고 안 쓰고는 장군의 마음에 달려 있습니다.
아무리 좋은 계책이라도 쓰지 않으면 한낱 공염불일 뿐 입니다."
여포는 진등에게 계책이 있다고 하자 귀가 솔갯해졌다.
"말해 보라, 만약 적을 물리칠 마땅한 계책이 있다면 목숨은 살려 주겠노라."
"듣자 하니 회남의 대군은 20만이라 합니다. 그러나 그들은 오합지졸에 지나
지 않습니다. 원술은 근자에 갑자기 제위에 오르고자 하는 야심으로 급히 군사
를 긁어모았습니다. 더욱이 제6로의 한섬과 제7로의 양봉은 원래 한의 구신들로
천자의 어가를 모시거 낙양으로 돌아온 자로 공이 자못 컷습니다. 고로나 조조
의 세력이 워난 커지자 조조가 두려운 나머지 달아나 만두득이 원술에게 잠깐
몸을 의지하고 있을 뿐이외다."
"그건 그렇소만..."
"원술 또한 그들을 필시 가볍게 대접했을 것이므로, 이들 두 사람도 원술에게
충성을 바찰 생각은 없을 것입니다. 먼저 이로써 그들을 회유하여 내응의 밀약
을 맺는 것입니다. 그들은 원술군의 내부에세 그 군사를 교란시키도록 하고 다
시 사자를 예주목사로 가 있는 유현덕에게 보내어 그의 힘을 빌어 오는 일입니
다. 현덕의 성품이 의를 버리지않는 사람이라 장군의 어려운 처지를 보고 모른
체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리하여 우리가 정병으로 성을 굳게 지키고 기병을
내어 들이치는 한편 양봉,한섬과의 내응지계를 펼친다면 원술을 사로잡을 수도
있습니다."
진등의 청산유수 같은 일장 연설을 취한 듯이 듣고 있던 여포는 금세 마음이
달라졌다. 곧 그들 부자의 목을 베는 대신 그 일을 맡겼다.
"그대는 한섬,양봉과는 장 아는 처지이니 밀서를 직접 전하라."
여포는 허도에 표를 올려 원술과의 싸움을 알리는 한편 유비에게도 서신을 띄
워 구원군을 청했다.
그무렵 원술이 다년간 가슴에 품에왔던 야망을 곤공연히 드러내기 시작했다.
게다가 손책이 맡겨 둔 전국의 옥새까지 있으니 야심에 불탄 마음은 초조한 지
경에 이르렀다.
마침내 천자의 자리에 오르기로 작정하고 휘하를 불러모았다.
"옛날 한나라의 고조는 사상이란 작은 마을의 일개 정장이란 신분이었으나 4
백 년의 제업을 창업하시었소. 그러나 이제 천운이 다하여 천하는 마치 가마솥
의 물이 끓듯 소란하여 제후들이 다 제각각 날뛰는 꼴이 되고 말았소. 우리 가
문은 4대에 걸쳐 삼공을 지내며 백성들의 공경을 받아왔소이다. 이제 나의 대에
이르러서는 천하의 인심이 쏠리고, 힘도 갖추었으므로 하늘의 명에 따라 구오
(황제)의 자리에 오르려 하매 그대들의 뜻은 어떠하오."
주부 염상이 일어나 간했다.
"자고로 천도를 거역하여 번영을 누린자는 없습니다. 옛날 주공은 후직에서
문왕레 이르기까지 덕을 쌓고 공을 쌓아 천하를 삼분할 때 그둘을 차지했습니
다. 그러나 여전히 은의 주왕에게는 신하 노릇을 하였습니다. 아무리 원씨 가문
이 수대에 걸쳐 번성하였다 하나 그 미덕이 주나라의 성대에는 미치지 못합니
다. 한 한실이 마무리 미약하다 한 주왕과 같은 악역은 하고 있지 않습니다. 어
찌 함부로 나설 수 있겠습니까?"
염상의 말이 이어질수록 원술의 낯빛은 점점 험악해져 같다. 원술은 점차 너
기 띈 음성으로 변했다.
"우리 원씨 가문은 원래 진의 혈통이다. 진은 대순의 후예다. 목,화,토,금,수
의 오행이 이어받는 순서로 치면 화에 속했던 한의 다음은 당연히 토가 아닌가.
그러니 토에 해당하는 순 임금의 후예가 이어받아야 마땅하다. 또 옛말에 이르
기를 '한을 대신할 자는 도고'라고 하였다. 도고의 도는 내 자인 공로의 로와
연결된 뜻이니 그 말에 들어맞는다. 뿐만 아니라 내게는 전국의 옥새가 있다.
이는 하는이 내리신 것이라, 내가 천자가 되지 않는 것이야말로 하는을 거스르
는 결과가 된다. 나는 마음을 이미 정한 바이니 더 이상 말하지 말라. 만약 내
뜻을 거역하면 목을 베리라."
원술은 신하들 가우데 두 번 다시 이런 말을 하는 자가 나오지 않도록 엄포를
놓았다. 그러자 다시는 입을 여는 신하는 없었다.
원술은 장수들의 입을 억지로 틀어막은 후, 날을 잡아 연호를 중씨라 정했다.
뿐만아니라 그는 천자가 타는 용봉련을 타고 남과 북 교외에 나가 천지신명께
천자가 된 제례를 올렸다. 그가 풍방의 딸을 황후로 삼고 그의 아들을 동궁으로
책봉한 후 여포의 딸을 동궁비로 삼으려 사신을 서주로 보냈던 것도 바로 그 무
렵이었다.
원술이 이토록 천자가 되기 위한 만반의 준비를 하고 있는 중에, 여포가 한윤
을 죽인 것도 참을 수 없는 일인데다 여포가 조조와 결탁한 것은 더욱더 두고
볼 수 없는 일이었다.
한편 여포가 척후를 보내니, 원술의 7로군은 하루 50리를 달려 서주로 진격해
오며 마구 약탈을 일삼는다는 것이었다.
여포는 진둥이 말한 '내응지계'가 급히 이루어지기를 속타게 기다렸다.
그때 진등은 여포의 서신을 지닌 채 하비에 이르러 한섬의 육군이 오기를 기
다리고 있었다.
이윽고 한섬이 군사를 이끌고 와 진을 치자 진등이 한섬을 보러갔다.한섬은
예기치 않은 진등의 방문에 깜짝 놀랐다.
"도대체 어쩐 일로 적장인 나를 찾아오셨소?"
이에 진등은 몸가짐을 바로하며 명쾌히 대답했다.
"무슨 당치 않은 말씀이시오? 나는 여포의 신하가 아니라 조저의 신하입니다.
서주 땅에서 산다 하여 사람들은 흔히 그렇게 말하지만 서주 역시 한나라 황제
의 영토가 아니오?"
그렇게 말을 꺼낸 진등은 청산유수 같은 달변으로 천하의 시국을 논하다 불현
듯 탄식했다.
"귀공 같은 분은 참으로 애석한 바 있소."
진등이 불쑥 그렇 말하자 한섬이 놀란 얼굴로 되물었다.
"아니 그게 무슨 말씀이시오? 어찌하여 소생더러 애석하다 하십니까, 원컨대
깨우쳐 주시기 바랍니다."
"귀곤께서는 지난날 천자께서 관중에서 환행하실 때 어가를 모시고 충성을 다
한 청덕한 국사가 아니었소? 그럼에도 불구하고 스스로 황제라 칭하는 원술의
편에 섰으니, 불춘불의의 오명을 슷로 청하고 있지 않소. 지난날의 충의가 이로
인해 수포로 돌아가고 말 것이오, 한두 해의 의식을 해결하기 위해 만세 이르는
악명을 서슴지 않으니 어찌 애석한 일이 아니겠소. 더욱이 원술은 천성적으로
의심이 많은 사람이오. 훗일 언젠가는 장군을 해치고야 말 것입니다. 지금이라
도 계책을 세워야지 뒷날 후회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소?"
"사실은 소생도 그간 원술의 방자함에 진저리가 나 한실로 돌아가고 싶은 마
음 간절했습니다. 그러나 아무런 연줄이 없으니 실로 답답할 뿐입니다."
한섬은 본심을 진등에게 털어놓았다. 일이 이쯤되면 제 한섬은 손아귀에 든
작은 새일 뿐이었다. 진등은 마음 속으로 기뻐하며 그제서야 여포의 서신을 품
속에서 꺼내 주며 다시 입을 열었다.
"제7군의 양봉 장군과 귀공과는 일찍부터 두터운 교분을 나눈 사이가 아니오?
그와 행동을 같이하면 어떻겠소?"
한섬이 그 말을 듣자 고개를 끄덕였다.
"잘 알겠소, 양봉도 내 말을 따를 것이오."
"그럼 서주를 공격하는 날을 기해 귀공과 양봉 장군이 후방에서 봉화를 올려
반기를 드시오. 동시레 여 장군도 정예군을 이끌고 원술군을 단숨에 몰아칠 것
이오. 그렇게 하면 원술의 목을 베는 것은 반나절도 걸리지 않을 거요."
한섬과 말을 맞춘 진등은 여포에게 돌아와 이 사실을 알렸다.
"과연 그대는 하늘이 이 봉선에게 내린 은인이오."
여포는 진등 에게 이렇게 치하했다. 한섬과 양봉이 내응하기로 하자 여포는
절로 힘이 났다. 적장 다섯에 맞춰 군대를 5대로 나누어 그들에게 맞서게 했다.
제1군은 고순을 대장으로 삼아 소패로 가 적장 교유를 맞도록 하고 제2군은
진궁이 기도로 가 적장 진기를 맡게 했다. 제3군은 장요와 장패로 하여금 낭야
로 가 적장 뇌박으, 제4대는 송헌,위속으로 하여금 갈석으로 가 진란을 막게 했
다. 여포 자신도 일군을 거는리고 큰길로 나가 원술의 대장군 장훈을 맡가로 했
다. 각 대의 군사는 1만으로 하였으며 나머지 군사는 서주성을 지키게 했다.
여포는 성 밖 30리쯤에 진영을 펼치고 선봉인 적장 장훈을 기다리고 있었다.
장훈이 군사를 이끌고 오다 여포가 그를 맞아 기다리고 있는 걸 보자 덜컥 겁부
터 났다. 그는 말머리를 돌려 20여 리나 군사를 물린 뒤에야 진을 쳤다.
서주성으로 향하던 한섬과 양봉의 군사들은 장훈이 이끈 군대를 만나 합류하
였다. 그런데 그날 밤 이경 무렵이었다. 한섬과 양봉은 갑자기 장훈의 진영 여
기저기에 불을 질렀고, 한순간에 장훈의 진영에는 대혼란이 일어났다.
이를 지켜 보고 있던 여포는 한섬이 약속대로 장훈을 협공한 것을 알았다.
"이때다!"
여포가 군사를 휘몰아가자 장훈의 군사는 그렇지 않아도 혼란스럽던터라 여지
없이 무너졌다. 여포가 여기저기 흩어지는 적을 짓밟으며 패주하는 장훈을 추격
했다. 새벽녘이 되어서 장훈을 구원하러 온 기령이 나타나자 장훈은 그들과 힘
을 합해 여포군에 대항했다.
여포군과 기령군이 한동안 싸움을 벌이고 있는데 양봉과 한섬이 두 길로 나누
어 여포군을 도와 기령군을 협공했다. 기령은 더 이상은 견디지 못하고 달아나
는데 여포는 기세를 올리며 무인지경 달리듯 그들을 뒤쫓았다. 그렇게 추격을
계속하고 있을 때였다. 맞은편 산골짜기에서 한 무리의 군사가 달려나오더니 잽
싸게 앞장 선 깃발들이 좌우로 열렸다. 그와 동시에 가운데로 힌 떼의 군마가
달려나왔다.
여포가 보니 사방에 요란한 정기가 나부끼는 가운데 일월기(해와 달을 그려
제왕의 기상을 나타낸 기),용봉번이 바람에 펄럭이고 있었다. 그 가운데는 누런
비단과 황금으로 꾸민 황일산을 받쳐 쓰고 천자의 의장인 금과,은부와 황월백모
를 든 근위병을 좌우레 거느리고 황금갑주를 입은 원슬이 나타났다.
"주인을 배반한 배은망덕한 놈아!"
원술은 여포를 오만스럽게 내려다보며 버럭 소리를 질렀다.
여포는 원술의 천자 행세에 속이 뒤틀려 있던 참이었다. 그런데다 원술이 욕
설까지 퍼붓자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었다. 그러나 여포는 입도 뻥긋하지 않고
화극을 움켜쥐고 말을 달렸다. 중군의 전부를 단숨에 뚫자 양기와 악취가 말을
달려나왔다.
"너희들 쥐 같은 무리들이 감히 나설때가 아니다."
여포는 그들을 꾸짖더니 말머리를 높이 세우고 악취의 말을 옆으로 피하면서
방천극을 내리쳤다. 그러자 사람과 말ㅇ이 함께 피투성이가 되어 뒤로 나가떨어
졌다.
여포는 달아나는 양기를 쫓아 그의 등으로 다가갔다.
"여포야! 게 멈추어라!"
양기가 쫓기소 있자 원술의 대장 이풍이 창을 들고 제법 기세 좋게 달려나왔
다. 여포는 양기에게로 향했던 화극을 이풍에게로 돌렸다. 이풍은 겨우 3합을
어우르다 화극에 손을 찔리자 창을 팽개친 채 그대로 달아났다.
여포가 이를 놓치지 않고 군사를 이끌어 원술근을 무찔렀다.
이때 한섬,양봉의 두 부대가 갑자기 산골짜기에서 나타나 원술의 중군을 협공
했다. 양쪽에서 적을 맞게 된 원술의 군사들은 순식간에 쿤 혼란에 빠져 허둥대
다 제대로 싸움한번 해보지 못하고 달아나기 시작했다. 금은보화,백모황월 등은
챙겨갈 겨를도 없었다.
원술은 여포에게 쫓겨 고원의 20여 리 길은 목숨만 부지한 채 말을 달렸다.
그러자 고원의 저쪽에서 한덩이의 구름처럼 한 떼의 군마가 달려왔다.
그 군마의 선두를 달려오던 장수가 원술을 가로막았다. 대춧빛 어굴에 봉의
눈을 가졌으며, 수염이 가슴을 덮은 채 손에는 80근의 청룡도를 비껴들고 있었
다. 원술이 깜짝 놀라며 그를 보니 바로 관우가 아닌가.
"감히 황제를 참창하는 방자한 원술이 바로 네놈이냐! 이 관우의 칼을 받아
라."
관우의 호통에 혼이 나간 원술은 다투어 도망가는 대장기 속에 감싸여 장신
없이 말에 채찍을 가했다.
관우는 원술을 뒤쫓으며 가로막는 자들을 무 베듯 하며 원술의 등에 바짝 다
가갔다. 관우가 청룡도를 휘둘렀으나 간발의 차이로 원술의 투구 끝을 스쳤다.
원술의 황제관은 이그러진 채 그의 머리에서 굴러 떨어지고 말았다.
가까스로 복숨을 보전한 원술은 참담한 패배를 당한 채 가령을 후군으로 남기
고 근거지인 회남으로 돌아갔다.
여포는 원술의 잔당을 소탕하고 의기양양하게 서주로 개선했다. 그리고 크게
잔치를 베풀어 관우와 양봉,한섬을 대점하고 군사들에게도 술과 고기를 주고 상
을 내렸다.
"이번 싸움에서 대승을 거둘 수 있게 된 것은 첫째는 진규,진등 부자의 공이
요, 둘째는 한섬,양봉 공이 적 내부에서 호응해 줌 공이오. 그리고 셋째는 예주
의 유현덕 공이 옛 우의를 저버리지 않고 원군을 보내 준 덕분이오."
여포는 이렇게 치하하며 승리를 자축하는 술잔을 들었다.
다음 날 관우는 여포에게 작별을 고하고 군사를 이끌어 예주로 돌아갔다. 여
포는 한섬에게는 기도의 목사로, 양봉을 낭야의 복사로 명하며 그들을 서주에
머물게 하려 했으나 진대부가 만류했다.
"장군의 주위에는 인재가 많이 있습니다. 한 마리의 낯선 닭을 닭장에 넣으면
그 안의 닭들이 혼란을 일으키고, 싸움이 잦아지는 예를 볼 수 있습니다. 오히
려 두 사람은 신동으로 보내십시오. 그리하여 산동지방의 지반을 굳힌다면 한구
해 사이에 산동에 있는 모든 성들이 장군의 손안에 들게 될 겄입니다."
여포가 들으니 그 또힌 듣기 좋은 말인데다 이번 싸움에 공이 많은 진등의 아
비가 하는 말이라 두말 없이 따랐다.
이리하여 두 사람을 기도와 나야로 보내 그곳에 머물도록 하면서 조정의 명을
기다리도록 했다.
진등은 그 일을 두고 불만스러웠는지 어느 날 조용히 아버지 진규의 의견을
물었다.
"왜 두 사람을 서주에 있게 하여 후에 여포를 칠 때 쓰도록 하지 않셨습니
까?"
그러자 진대부가 말했다.
"그 방법은 상수가 아니다. 그들은 천성이 천하므로 우리 부자를 편들기보다
는 날이 갈수록 여포에게 아첨하려 들 것이다. 그리하여 여포의 앞잡이가 된다
면 그건 호랑이에게 뿔을 달아 주는 꼴이 되지 않겠느냐?"
진등은 그 말을 듣자 아버지 진대부의 현명한 헤아립에 감탄했다.
여름도 지나 가을이 다가오고 있었다. 오동잎이 지기 시작하더니 회남의 강물
에도 가을빛이 물들기 시작했다. 붉은 짐자리가 맑은 하늘에 무리를 지어 난아
다니고 있었다.
원술은 날이 흐를수록 분한 마음을 억느를 수가 없었다.
'여포란 놈, 한섬,양봉 그 배신자 놈들!'
원술은 어떻게 하면 지난번 패배를 설욕할까 궁리를 하고 있었다.
드디어 그가 생각해 낸 것이 손책이었다. 궁한 김에 떠올린 생각아었다. 그러
나 지난날 그가 손책에게 했던 행동을 생각하지 못한 원술이었다. 다만 어릴 적
부터 그를 손아래에 두고 길러온 탓인지 아직도 그를 가볍게 여기고 있었다.
원술은 손책에게 사자를 보내 밀서를 전하게 했다.
강동에서의 그대의 성공을 진심으로 기뻐하고 있소. 그대 또한 나와의 옛정을
잊지 않으리라 믿소. 근자에 그대의 오나라는 점점 번창하여 문무의 영웅호걸도
많이 모여든 것으로 알고 있소. 이에 나와 힘을 합쳐 여포를 치고 그의 영토를
취하여 오의 위세를 다시 한 번 떨침이 어떻겠소? 이는 그대를 위해서도 백년대
계가 될 것이라 믿소.
원술의 밀서를 지닌 사자는 강을 건너 오나라에 가 손책을 만났다.
"여포에게 패한 원수를 갚으려 하니 군사를 빌려주십시오. 일찍이 장군께서도
우리 회남의 군사를 빌려 강동을 평정하지 않았습니까?"
사자의 말을 듣고 원술의 서신을 읽어본 손책은 크게 노했다.
"원술은 일찍이 내가 맡겨 놓은 나의 옥새만 맏고 황제를 참칭했으니 바로 대
역부도한 역적이다. 그렇지 않아도 내 군사를 일으켜 역적을 치려하거는 어찌
역적을 도울 수 있겠는가?"
손책은 원술의 사자를 호통을 쳐 돌려 보냈다. 원술은 손책의 답장을 받자 그
히 펼쳐 보았다.
노군, 어찌하여 내 전국의 옥새는 돌려 주지도 않고 제위를 참칭하며 세상을
어지럽히려 드는가. 어느 날엔가 반드시 나와 만날 것 이니, 바라건데 복을 씻
고 나를 기다리시오.
원술은 노기가 솟구쳐 답신을 발기발기 찢었다.
"애송이놈이, 감히 짐을 능멸하다니... 내 이놈부터 쳐야겠다."
원술은 즉각 오나라로 출병한 준비를 서두르기 시작했다. 그러나 장사 양대장
이 간곡해 만류하자, 가까스로 분을 참고 때를 기다리기로 했다.
손책은 원술에게 도전장이나 다름없는 답신을 보낸 이후 그가 군사를 일으킬
경우를 대비하고 있었다. 실은 강동에 근거지를 삼아 세력을 키워 왔다고는 하
나 아직 오래지 않은 터라 원술의 군세에 비할 바가 못되었다. 손책은 장강 연
안 일대에 전선을 띄우로 강과 나루를 엄히 지키게 했다.
이때 허도의 조조로부터 사자가 와 천자의 조서를 전했다. 그를 회계태수로
봉하는 동시에 즉각 회남에 진병하여 황제를 참칭하는 원술을 치라는 명이었다.
손책은 그렇지 않아도 언젠가는 원술을 쳐 빼았긴 옥새를 되찾을 작정 이었
다. 그런 판에 조정의 명까지 받았으니 이제 당당한 대의명분까지 엊게 된 셈이
다. 이에 손책은 군사를 일으키기로 하고 사자를 돌려 보낸 후 휘하의 참모를
불러모아 의논했다. 손책의 중신인 장사 장소가 아뢰었다.
"원술이 여포와의 싸움에서 패했다고는 하나 가벼이 보아서는 아니 됩니다.
회남은 풍요로은운 땅인데다 원씨 일족은 몀망과 전통이 있는 가문입니다. 거기
에 비하면 우리 오나라는 이제 기업의 토대를 닦은 지 얼마 되지 않아 재력과
군사에서 아직 부족합니다."
"이미 조칙을 받들겠다고 했는데 지금와서 명을 어길 수는 없지 않겠는가?"
"그렇습니다. 그러니 이번에는 조조에게 급히 사자를 보내십시오. 우리는 강
을 건너 원술의 측면을 칠 것이니, 허도에서 대군을 내려 원술의 정면을 치도록
하는 것입니다. 즉 조조군에게 주력전을 하도록 맡기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
는 어디까지나 원병이라는 입장을 취하십시오. 이렇게 하면 원술과의 싸움에서
이길 수 있을 것입니다. 또 설령 우리에게 위급한 일이 닥친다 해도 조조에게
원병을 청할 수 있을 것입니다."
"과연 헌책이오."
손책은 장소의 의견에 감탄하며 사자를 허도로 보내기로 했다.
하편 허도로 돌아와 있던 조조는 사당을 지어 장수와의 싸움에서 목숨을 잃은
전위의 위패를 모시게 하고 제사를 지냈다. 그리고 그의 아들 전만을 중랑으로
등용후 자기 부중에서 키우게 했다. 조조의 휘하 장수들은 이를 보고 감복하지
않는 자가 없었다. 그를 위해 죽음을 마다하지 않겠다고 제각기 마음속으로 다
짐하는 것이었다.
그럴 때 오나라의 손책으로부터 급사가 왔다. 조조는 손책의 뜻을 받나들이기
로 하고 군사를 일으킬 채비를 하고 있는데 첩자로부터 원술이 양식이 떨어져
진류 땅으로 노략질 하러 갔다는 보고가 들어왔다. 조조는 이 기회를 놓지고 싶
지 않았다.
이제 조조까지 그를 치기 위해 군사를 일으키게 되니, 원술은 사방에 적을 둔
셈이 되었다. 동북에서는 저저, 서북에서는 유비, 손책이 조조와 동맹을 맺고
남북에서 그를 공격할 참이었다.
세력이 커졌다고 오만해진 황제를 참칭하여 자초한 화였다.
때는 건안 2넌의 9울이었다. 조조의 대군은 수도인 허도를 떠나 원술이 있는
회남 땅으로 향했다. 군량과 병장기를 실은 수레만도 1천여 채가 되었다.
허도를 떠나기 전 조조는 예주의 유비와 서주의 여포에게 서찰을 띄워 이 싸
움에 끌어들였다. 조조의 격문을 받고 유비는 관우,장비를 비롯한 정예병을 이
끌고 예장의 경계까지 나아가 조조군을 맞았다.
조조는 유비를 보자 반색을 하며 반겼다.
"귀공의 두터운 신의와 어렇게 지체없는 출동에 만족하는 바이오."
맹군의 기와 기를 교환하고 그 깃발 아래 잠시 휴싯을 취하는 동안 유비는 사
람 목 둘을 조조에게 바쳤다.
놀란 조조가 물었다.
"이게 누구의 목이오?"
유비가 조용히 답했다.
"하나는 한섬이고 하나는 양봉입니다."
이들 두 사람은 조조가 낙양에서 군사를 이끄고 황제를 모시러 갔을 때 반발
하여 자신을 떠난 자들이었다.
"어떻게 이놈들의 목을 베었소?"
그들이 여포에게 내응하여 산동에 부임하고 있다는 걸 알고 있는 조조였다.
엉뚱하게도 유비가 그들의 목을 베어 왔으므로 궁금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들 두 사람에게 여포가 각각 기도와 낭야 현을 맡겼는데 이 자들은 그곳에
당도하자마자 노략질을 일삼았으며, 부녀자를 간음하는 등 백성들의 원성이 자
자했습니다. 이에 백성들의 원성을 무마하고, 이도를 바로잡고자 두 아우를 시
켜 술자리에 유인해 술을 마시다가 술잔을 던지는 것을 신호로 목을 베었습니
다. 그들의 군사들은 모두 항ㅇ복했습니다. 그러나 승상의 명 없이 두 사람의
목을 벤 죄, 벌을 내려 주십시오."
"공이 이도를 바로잡고 양민에게 가한 폐해를 없애려 그들을 제거한 것인즉,
사사로은 싸움과는 다릅니다. 어찌 벌을 청하시오? 여포에게는 내가 잘 말해 두
겄소."
조조는 유비를 좋은 말로 안심시켰다. 우비는 그들 두 사람의 목을 베어 저저
를 기쁘게 했으며 투항해 온 부하들은 자기의 부하로 삼았다.
조조는 유비군과 함께 서주로 향했다. 서주의 경계에 다다르자 여포가 마중
나와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조조는 여포의 환대를 치하하며 그를 좌장군에 봉한 후, 허도에 돌아가는 즉
시 인수를 보내 주기로 약속했다.
여포는 조조의 말에 흡족해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그렇게 되니 유비가 자기
의 사람인 양봉,한섬을 죽인 일 따위는 더 이상 염두에 두지 않았다.
조조는 이어 여포의 군사를 왼쪽에, 유비의 군사를 오른쪽에, 그리고 자신은
중군을 이끌기로 했다. 하후돈과 우금으로 하여금 선봉을 삼은 뒤 수춘성으로
향했다.
조조는 이어 여포의 군사를 왼쪽에, 유비의 군사를 오른쪽에, 그리고 자신은
중군을 이끌기로 했다. 하후돈과 우금으로 하여금 선봉을 삼은 뒤 수춘성으로
진격한다는 소식은 원술에게도 전해졌다. 뱃심이 두둑하다는 원술이었지만 그가
상대할 군사들이 워낙 만만치 않은 산대였다. 그러나 가만히 앉아서 적을 가다
릴 수만은 없었다. 원술은 대장 교유를 선봉으로 삼아 군사 5만을 이끌고 조조
의 선봉을 막게 했다. 두 군사는 수춘 경계에서 맞닥뜨렸다. 원술의 선봉장 교
유가 먼저 말을 몰아 나왔다.
조조군에서도 선봉장인 하후돈이 교유를 맞아 말을 달려나왔다. 그러나 불과
2,3합을 겨우 버틴 교유는 하후돈의 창에 찔려 맥없이 나뒹굴고 말았다. 이미
대군 앞에 기가 질려 있던 교유의 장졸들은 교유가 단번에 적장의 창에 쓰러지
자 뿔뿔이 흩어져 성 안으로 도망치기 바빴다.
싸움은커녕 '걸음아 날 살려라'며 도망가는 그들을 조조의 군사들이 시살하니
원술은 변변한 싸움도 못해 보고 대패하고 말았다.
원술은 하는 수 없이 중군을 이끌고 성 안으로 들어가 수춘성 여덟 문을 굳게
닫고 말았다.
그러자 공격군은 숨통을 조이듯 차츰차츰 수춘성을 육박했다. 여포는 동쪽에
서, 유비는 서쪽에서 공격하고 조조는 회남 평야를 눈아래 바라보며 중군을 이
끌고 있었다.
원술은 휘하의 참모들을 모아 대책을 협의했으나 별 다른 방책이 나오지 않았
다.
그런데 또다시 날벼락 같은 파발이 날아왔다. 오나라의 손책이 장강을 건너
수츤성으로 쳐들어온다는 급보였다.
원술은 이제 정신을 가누지 못할 지경이었다. 조조의 17만 대군이 지르는 함
성은 만산을 뒤엎는 듯했다. 원술은 문무의 여러 휘하들을 모아놓고 침울한 분
위기 속에서 대책을 거듭 물었다.
그러자 장사의 양대장은 입을 열었다.
"수춘은 요 몇해 동안 물난리와 한발로 백성들이 허기져 있습니다. 때무에 다
시 군사를 일으키시면 백성들의 원망만 살뿐입니다. 군사를 수춘에 남겨 싸우지
말고 적군의 양식이 떨어질 때까지 지키기만 하십시오. 적군의 군량이 다하면
반드시 변란이 일어날것입니다. 그 동안 폐하는 아뢰옵기 황송하오나 어림군을
이끌어 잠시 회수를 건너 피하심이 좋겠습니다. 몬저 그곳의 익은 곡식을 얻고,
또한 적의 날카로은 칼 끝을 피했다가 뒷날을 도보하도록 하십시오."
원술에게 피신할 것을 권유하는 양대장의 말에 반대하고 나서는 사람은 아무
도 없었다. 몇해 동안 가뭄과 물난리로 인해 백성들이 굶주리고 있었다.병자가
속출했으며 겨을철 군량도 걱정스러운 참이었다.
이럴 때 전쟁이 터졌으니 장졸들의 사기가 오를 리 없었다. 수춘성을 버리고
피신을 가자는 양대장의 말은 원술로서는 참을 수 없는 노릇이었으나 사태가 너
무나 위급했다.
원술은 긴 침묵 끝에 머리를 끄덕였다. 즉걱 대대적인 탈출 준비를 서둘렀다.
원술은 이풍,악취,양강,진기의 네 장수에게 군사10만을 주어 수춘성을 지키게
했다.
원술은 구궐창고에 있는 금은보화는 물론 군수 물자와 문서 등을 모두 싣고
나머지 군사들을 이끌고 회수를 건넜다.
조조의 군사가 수춘성 아래까지 진격해 온 것은 원술이 빠져 나간 바로 그 무
렵이었다. 그러나 이제 수춘성의 공격을 눈앞에 둔 조조에게도 큰 어려움이 기
다리고 있었다.
수춘에 가까울수록 수해가 극심하여 새로운 군량을 마련할 수가 없었다. 17만
의 군사가 날마다 먹어대는 양식은 엄청났다. 허도를 떠나올 때 군량을 1천여
대의 수레에 실어 왔으나 워낙 대군이라 양식이 달렸다. 원래 원정군의 군량은
원정하는 적지에서 생산되는 양곡까지 계산에 넣고 가는 것이다. 그러나 수춘의
교외 1백 리 주위는 아직도 홍수의 흔적이 생생했다. 전답은 진흙으로 뒤덮였으
며, 백성들은 초근목피로 연명하고 있었다.
"무슨 방법으로 이 대군의 군량을 충당해야 하는가?"
조조의 병참부는 고심하기 시작했다. 군량의 책임관인 와후는 이 지방 일대의
수해 상황을 살펴본 후 망연자실할 뿐아었다.
"당장 성을 함락하라!"
초조해진 조조는연신 싸움을 재촉 했다. 그러나 성을 굳게 지키고 있는 원술
휘하의 이풍 등의 장수들은 성뭉늘 귿게 닫아걸고 ㅆ우려 들지 않았다. 게다가
수춘성은 천자를 자창했던 원술의 본성이었다. 성은 높고 견고해서 아무리 거센
공격으 퍼부어대도 끄덕도 하지 않았다.
성을 에워싼 지 한 달이 가까워오자 조조의 진중에는 군량이 바닥났다. 한는
수 없이 조조는 오나라의 손책에게 10만 석의 곡식을 빌렸지만 그것으로도 며칠
을 견뎌낼 것 같지 않았다.
어느 날 관량관 임준 맡에서 창고 일을 맡고 있는 왕후가 조조를 찾아와 근심
스런 얼굴로 아뢰었다.
"군사는 많은데 이제 님은 양곡은 얼마 되지 않습니다. 어떻게 하면 좋을까
요?"
그 물음에 조조가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입을 떼었다.
"오늘부터 군량미 배급하는 되를 바꾸도록 하라. 작은 되루 바꾸면 양이 많이
줄어들 것이 아닌가? 이른바 조삼모사의 지혜를 빌리는 것이다."
조조가말힌 조삼모사는 고전에 나오는 옛이야기를 일컬어 한 말이었다. 옛날
에 저공이라는 사람은 애완동물로서 원숭이를 많이 가르고 있었다. 그러다 먹이
가 모자라서 아침에 3개, 저녁에 4개씩 도토리를 주고 있었다. 원숭이들은 배가
차지 않는다고 낀낀대기 사작했다. 그래서 한 가지 계책을 고안해 낸 저공은 이
번에는 아침에 4개, 저녁에 3개씩 도토리를 주기로 했다. 그러자 원숭이들은 대
우가 달라진 것으로 알고 온순해졌다고 한다.
조조는 이 이야기를 생각해 내고 왕후에게 일렀던 것이다. 잔재주로 속임수를
쓰는 일이지만 우선 어려운 때를 넘겨 모자는 생각이었다.
"그랬다가는 군사들의 불평이 대단할 텐데요."
"그때는 나도 생각이 있다."
조조는 까닭 모를 웃음을 지으며 와후에게 말했다.
왕후는 조조의 말에 따라 그날 저녁부터 작은 되로 군량미를 공급했다. 1인당
5홉씩 주던 군량미에서 1홉 5작씩을 줄였다.
그런데 풀뿌리까지 섞여 있는 비상시의 군량이니 군사들의 창자가 채워질 리
없었다. 자연히 여기저기서 불만 섞인 소리가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조조는 그
런 군사들의 말에 은밀히 귀를 기울였다.
"승상께서 이거 너무하지 않나, 우리를 속이며 양식을 줄이고 있다."
군사들 사이에서 이런 불만이 삽시간에 쏟아졌다. 군사들의 불만은 모두 조조
에게 쏮아졌다. 그러자 조조는 조용히 왕후를 불렀다.
"군사들의 불평이 대단한가?"
"모두 다 승상께서 저희들을 속였다며 야단법석입니다."
"내가 자네에게 한 가지를 빌려 그들을 진정시키려 하네."
"소생에게 무엇을 빌리시겠다는 것입니까?"
"이렇게 된 이상 자네의 목을 내게 빌려 주게. 그대가 죽지 않으면 군사들을
수습할 길이 없네."
"옛? 저는 아무 잘못이 없습니다."
"알고 있네. 그러나 그대가 죽음을 마다하면 17만의 군사들을 달랠 길이 없으
니 결국 그들은 난동을 일으킬 것이다. 천하를 위하는 일이니 그리 알게. 그대
신 그대의 처자식은 이 조조가 평생을 돌보아 줄 것이니 조금도 걱정하지 말게.
살신성인이란 이를 두고 한 말이네."
와후가 사색이 되어 다시 애원하려 하자 조조는 잠시 괴로운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다음 순간 조수부에게 명하여 와후를 군문 밖에 끌어 내에 여러 군사
들이 보는 앞에서 목을 쳤다.
"그 목을 즉각 효수하라!"
왕후의 머리는 장대에 매달려 진중에 걸렸다. 조조는 그 아래에 방문을 내걸
게 했다.
군량 관리 책임자 왕후는 사복을 채우기 위해 고의로 작은 말을 써서 군량을
도적질했으므로 군법에 의해 처단한다. 우리 군의 급식분배는 공평하게 지켜지
고 있다. 모든 군사들은 동요하지 않도록 하라.
반문을 본 군사들은 그제야 와후에게 모든 원한을 돌렸다.
"그렇다면 작은 되를 사용한 것은 승상의 명이 아니었군. 나쁜 녀석 같이니라
구."
"도적질은 제가 하고 승상을 팔았군..."
군사들은 더 아상 불평하지 않았다. 군사들의 분위기가 금새 달라진 것을 본
조조는 즉각 휘하 장수들에게 명을 내렸다.
"오늘 밤부터 3일 내에 수춘성을 함락하라! 만일 성을 점령 못할 경우에는 그
대들의 목을 베겠다."
그날 밤 조조는 솔선햐여 성 아래 해자 앞에 나아가 군사들의 의기를 돋구었
다.
"자, 모두들 한꺼번에 해자를 메우고 건너가라! 마른 풀을 쌓아 성문 망루를
불살라 버려라!"
조조군이 거세게 성을 공격하자 원술의 군사들도 가만히 있지 않았다. 돌을
떨어뜨리며 화살을 빗발처럼 쏘아대기 시작했다. 화살에 맞고 돌에 짓눌린 자의
시체로 해자가 메워질 듯했다.원술군의 격렬한 반격에 조조군은 잠시 주춤거렸
다. 그때 몸을 움추린 채 진격 하지 않은 두 사람의 비장이 조조의 눈에 띄었
다.
"비겁한 놈!"
조조는 큰 소리로 그들을 질티하며 목을 쳐버렸다.
"먼저 아군의 비겁한 자들부터 처치하겠다."
저저는 두 사람의 목을 근사들에게 쳐들어 보이며 외쳤다. 조조는 말에서 뛰
어내려 스스로 흙을 나르고 돌을 던져넣어 해자를 메웠다. 이를 본 군사들이 함
성을 지르며 물밀듯 성문을 향해 돌진했다.
한 무리의 군사들이 성벽을 타기 시작했다. 성에 의지하고 있던 원술군은 성
을 에워싼 조조군의 목숨을 건 결사적인 공세를 끝내 견뎌내지 못했다.
성벽을 기어올라 성 안으로 뛰어든 조조군이 마침내 성문을 열었다. 드디어
방죽의 한 귀퉁이가 무너진 것이었다. 공격군의 군마가 홍수처럼 흘러들기 시작
했다. 이풍,진기,악취,양강 등은 조조군에 의해 사로잡히고 원술의 많은 군사들
이 항복하고 말았다.
"저 자들은 천자를 참칭한 역적을 도운 자들이다. 모두 목을 쳐 저잣거리에
효수하라!"
사로잡은 적장 넷의 목을 모두 베고 원술이 세운 대궐과 전각에 모조리 불을
지르니 수춘성 안은 불바다가 되고 말았다. 더욱이 조조는 전과 달리 장졸들에
게 약탈을 허용하여 한때 자칭 천자 원술의 거성으로 번창했던 수춘성은 거짓
천자의 일장춘몽과 함께 잿더미로 변해 버렸다.
조조는 수춘성을 점령한 뒤 그 여세를 몰아 회수를 건너 원술을 치려고 했다.
그러자 순욱이 조조에게 간했다.
"아직 우리에게 식량 문제가 해결되지 않았습니다. 여기에서 더 진군하면 군
사들도 피로 하고 백성들의 원성도 커질 것이므로 반드시 이롭지 않을 것입니
다. 짐시 허도로 구사를 돌리시어 보리가 익은 내년 봄에 다시 도모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조조는 순욱의 말도 옳다고 여겼으나 내친 김에 원술을 요절내고 싶었다. 한
동안 저저가 마음을 정하지 못하고 있는데 허도로부터 뜻밖의 파발이 놀라운 소
식을 전했다.
"장수가 형주의 유표와 결탁하여 군세를 회복하고 남양과 강릉에서 난을 일으
켜 조홍 장군이 이를 맞았으나 패전을 거듭하고 있습니다."
조조는 급보를 받고 깜짝 놀랐다. 장수와 유표가 허도를 넘본다면 큰일이 아
닐 수 없었다. 이에 조조는 허도로 회군하면서 손책에게 급사를 보내 서신을 전
하게 했다.
공은 전선을 동원하여 장강을 가로막듯이 포진해, 상류에 있는 형주의 유표에
게 암암리에 위협을 가해 주시오. 나는 장수를 치기 위해 회군하겠소.
조조는 형주의 유표를 손책으로 하여금 형주에서 꼼짝 못하도록 묶어 두는 일
을 잊지 않았다.
조조는 또 또나기 전에 여포와 유비에게도 당부했다.
"이제까지의 교분을 생각하여 소패와 서주를 지키며 순치지교로서 새로이 결
의를 하여 주시오."
조조는 두 사람에게 서맹의 잔을 나누게 하고 서로 싸우지 않도록 다짐을 해
두었다. 조조는 손책에게 유표를 견제하게 한 다음 여포를 구슬려 유비로 하여
금 소패에 머물도록 하게 한 것이었다. 조조에게 좌장군이란 벼슬까지 받은 여
포엿다. 이를 쾌히 승낙하고 서주로 돌아왔다. 조조는 여포가 서주로 돌아가자
유비를 가만히 불러 다음에 공격할 차례를 넌지시 일러 주었다.
"공을 소패에 머물게 한 것은 호랑이 사냥을 준비하기 위함이오. 이른바 '굴
갱대호'의 계교를 말하는 것이오. 호랑이란 여포를 말함이오. 진대부와 진등 부
자기 호랑이를 잡기 위해 함정을 파고 있소. 그들 부자와 상의하여 빈틈없이 일
을 준비하여 주시오."
이렇게 조조는 뒤에 행할 계책까지 빈틈없이 주비를 해놓은 다음 허도로 돌아
갔다.
그런데 뜻밖에도 단외와 오습이란 자가 이각과 곽사를 토벌하여 그 목을 베어
왔다. 그들은 하잘것없는 잡근의 야장 이었으나 살병을 지휘하여 그들을 토벌하
였다고 했다. 뿐만 아니라 이각의 일족 1백여 명을 모조리 생포하여 허도로 끌
고 온 것이었다.
장안의 대란 이래 무리를 이끌고 몸을 피신한 이들이 깨끗이 제거되자 조조는
기쁘기 그지없었다.
공경백관들도 뜻밖의 경사라 하여 기뻐했다. 조조는 생포한 역적의 목을 베어
각 문에 나누어 효수케 하니 뱃성들은 니를 보고 모두 기뻐하였다.
헌제는지난날 자기를 괴롭히던 이각,곽사가 효수되자 어전에 즐어 뭄무백관들
을 모아 태평연을 베풀었다. 또 그들의 목을 벤 단외는 탕구장군에, 오습은 진
로장군으로 삼아 장안을 수비하게 했다.
단외 오습은 천자가 내린 관직을 받고 성은에 감사하며 장안으로 떠났다.
조조의 십승 원소의 십패
공손찬을 치기 위해 본사와 양식을 빌려 달라는 원소의 서신을 받고 조조는
대책을 논의한다. 조조는 곽가의 십승십패설을 듣고 원소가 공손찬을 치도록 군
량미 등의 군수품을 보내는 한편, 원소가 공손찬을 치는동안 여포를 도모하기
위해 유비에게 사지를 보낸다.
때는 바로 건안 3년 4월, 허도로 돌아온 조조는 장수 토벌을 서들렀다.
조조는 헌제에게 나아가 아뢰었다.
"장제의 조카였던 장수가 다시 힘을 길러 남양에세 형주 지방에 걸쳐 준동하
고 있습니다. 머지않아 아곳 허도 까지 넘본다 하니 마땅히 그를 토벌토자 하오
니 윤허해 주시기 바랍니다."
조조의 말에 헌제는 쾌히 승낙했다. 장수는 동탁의 잔당일 쭌아니라 허도까지
넘본다고 하니 헌제는 친히 어가에 올라 저저를 외문 밖 큰길까지 전송하였다.
조조는 순욱으로 하여금 허도를 지키게 하고 장도에 올랐다.
마침 때는 초여름이라 들에는 보리가 잘 여물고 있었다. 조조군이 시골길로
진군하자 보리밭에서 일하고 있던 농부들이 다투어 달아났기 때문에 보리를 베
는 사람이 보이지 않았다.
이편 저편 가릴 것 없이 군사들에게 걸핏하면 약탈을 당해온 백성들이었다.
조조의 군사가 나타나자 역시 농군들은 뿔뿔이 달아났다.
"촌장과 촌로들을 부르라!"
조조는 이렇게 명하고 촌장과 촌로들을 불러모은 후 엄슥히 타일렀다.
"백성들이 애써 땀과 정성으로 가꾼 보리를 추수할 무렵, 내가 부득이 진병을
한 것은 천자의 명을 받들어 백성들을 괴롭히는 역적을 치기 위함이다. 그러나
염려하지 말라. 내가 이끈 모든 군사들에게 지위의 높고 낮음을 가리지않고 보
리밭을 짓밟거나 양민의 재물을 약탈하거나 괴롭히는 자는 목을 베도록 군령을
내려 놓았다. 그러니 안심하고 보리 수확을 계속하라."
조조의 말에 촌로들은 기뻐하고 그를 칭송하지 않은 이가 없었다. 백성들은
조조군이 지나갈 때는 무릎을 꿓고 전송하였다.
군사들은 보리밭을 지나갈 때 반드시 말에서 내려 보리가 행여 상할세라 보리
이삭을 손으로 헤치며 말을 끌고 갔다. 말을 함부로 보리밭을 짓밟지 못하게 하
기 위함이었다.
그런데 하필이면 조조가 말을 타고 보리밭을 옆을 지나갈 때였다. 말발굽 소
리에 놀란 비둘기 한 마리가 푸드득 날개 소리를 내며 날아갔다. 이에 말이 놀
라 길길이 날뛰며, 보리밭으로 뛰어들어 쑥대밭을 만들었다.
"전군 행군을 중지하라!
조조가 갑자기 명을 내리고 행군주부를 불렀다.
"방금 나는 실수를 저질러 내가 내린 군령을 스스로 어렸다. 군법에 비추어
그 죄가 무엇에 해당하는가?"
행군주부는 난감하여 기어드는 목소리로 답했다.
"어찌 감히 승상의 죄를 논할 수 있겠습니까?"
"그렇지 않다. 내 입으로 내린 군령이다. 한번 정한 법은 지위가 아무리 높아
도 벌을 받아야 한다. 그런데 내 스스로 어겼으니 어찌 아랫사람을 다스릴 수가
있겠느냐?"
조조는 칼을 빼어 자기 목을 찌르려 하였다. 장수들이 깜짝 놀라 급히 말렸
다.
"승상께서 어찌하여 이러십니까?"
곽가가 나서 조조에게 간했다.
"춘추의 가르침에도 '법이라 하여도 존귀한 데는 미치지 못한다.'하였습니다.
승상께서는 대군을 통솔하시는 존귀한 몸, 승상의 생사는 군사 전체의 사활과
이어집니다. 어찌 못숨을 끊으시려 하십니까?"
조조는 곽가의 말을 즞고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춘추에 그러한 고례가 있었다는 말인가? 그러나 벌을 받지 않을 수는 없는
일이 아닌가. 그렇다면 부모께서 주신 머리카락을 잘라 단죄의 뜻을 대신하여
법에 복종의 증표로 삼으리라."
조조는 자기의 머리카락을 단검으로 싸둑 잘라 행군부에 주어 3군에게 보이며
전하게 햇다.
"승상께서 말이 놀라 보리밭을 밟았기로 스스로 목을 베려 하셨으나 모든 장
수들의 만류로 머리카락을 대신 자르셨다. 승상께서도 아러시거늘 그댜들은 더
말하면 무엇하겠는가?"
이를 지켜 본 부하들은 물론니뇨, 이말을 전해들은 장졸들은 모두 두려움에
떨며 감히 입을 여는 자가 없으니 대군이 지나가도 한 포기의 보리도 꺾이지 않
았다. 뒷날 사람들은 시를 지어 그때의 일을 전하고 있다.
십만의 군사 마음 모두 십만일세.
한 사람의 명령으로 다스리기 어려워
머리카락을 잘라 목베는 죄 대신하니
보라, 조조의 놀라움 속임수를.
행군은 5월에서 6월로 이어졌다. 6월의 찌는 듯한 나날이었다. 특히 하남의
복우산맥을 넘는 일은 험난한 행군이었다.
햇볕에 바짝 달아오른 뜨거운 바윗길을 걸어서 산을 넘어야하는 행군이었으나
수많은 군사들에게 먹일 물이 없었다.
"물, 물을 마시고 싶다!"
군사들의 하소연은 바로 신음 소리였다. 갈증과 피로로 쓰러지는 군사들도 많
았다. 그러자 조조가 갑자기 말 위에서 채찍으로 산 뒤쪽을 가리키며 소리쳤다.
"조금만 참아라! 저 산만 넘어가면 매화나무 숲이 그득하다. 그곳에가면 얼마
든지 맛있는 매실을 따먹을 수 있으며 물 또한 거기에 있다. 걸음을 빨리하라!"
갈증에 허덕이고 있던 군사들은 매실 소리를 듣자 귀가 번쩍 띄었다. 군사들
은 시디신 매실 맛을 연상하자 저절로 입 속에 침이 돌아 그것으로나마 목을 축
일 수가 있었고 새로운 힘이 솟았다.
'매산은 갈증을 멎게 한다.'
고전에 밝은 조조가 읽은 책 중에서 문득 이런 귀절이 떠올라 이를 이용한임
기응번이었다. 놀라운 임기응변이 아닐 수 없었다. 후세의 병법가들은 그것을
조조 특유의 병법 중의 하나라고까지 말하고 았다. 갑옷을 태우는 듯한 무더위
에 기발한 갈증 해소책으로 새각해 낸 것이 이 매실라는 과일이었다.
그 무렵 장수는 조조가 대군을 이끌고 복우산맥을 뒤덮을 듯한, 조조군이 일
으키는 흙먼지는 이미 남양의 완성에서도 보였다.
이에 장수는 유표레게 구원군을 청하는 사자를 보내는 한편 군사 가후에게 성
을 맡기고 출진했다.
"먼길을 오느라 적은 지쳐 있다. 대군이라고는 하나 지쳐있는 적군이 어찌 힘
을 쓸 수 있을까 보냐."
장수는 장선,뇌서 두 장수를 거느리고 조조군을 맞았다.
"이 인의의 가면을 쓰고 검은 욕심만 채우는 놈아, 네놈이 바로 양의 탈을 쓴
늑대가 아니더냐?"
장수가 말을 몰고 나와 조조를 손가락질하며 욕설을 퍼부었다.
조조가 크게 노하며 허저를 내보냈다.
"저놈의 주등아리를 놀리지 못하도록 냉큼 목을 쳐라!"
허저가 말을 달려나가니 장수는 부하 장선을 내보냈다. 그러나 장선은 애초부
터 감히 허저의 산대가 돨 수 없었다. 2, 3합을 부딪치기도 전에 허저의 칼에
맞은 그의 몸뚱이는 말 아래로 그러 떨어졌다.
조조는 허저가 장선과 싸워 결과가 어떻게 되리라는 것을 이미 짐작하고 있는
터였다. 두 사람의 싸움이 결말이 나기 전에 벌써 군사를 내몰았다. 군세에서도
조조군에게 미치지 못하는 장수군이었다. 노도와 같이 밀려드는 그 기세에 장수
의 근사는 조조군에게 여지없이 짓밟히고 말았다. 장수는 패군을 이끌고 남양성
으로 들어가 성문을 굳게 닫고 나오지 않았다.
장수를 뒤쫓던 조조는 군사들로 하여금 성을 에워싼 채 핻\자의 물수덩이를
메우게 하고, 흙가마니,나무,짚단 등을 얹어 층계처럼 쌓게 했다. 그리고 그 위
에다 높은 사닥다리를 걸쳐 성 안을 넘보게 했다.
조조 역시 매일 말을 타고 성 주위를 살패며 둘러보았다. 조조가 성 주위를
둘러본 후 서문의 성벽 쪽에 병력의 태반을 집중시켰다. 그러나 성을 들러싼 해
자가 너무 깁어 근사들이 해자를 메우는 데만 사흘이나 거렸다.
모퉁이에 장작을 쌓고, 그것으로 층계를 삼아 군사들에게 올라가도록 명을 내
렸다.
군사들은 서문의 장작 층계로 기어올라 성 안으로 활을 쏘는 한편 섶나무에
물을 붙여 성 안으로 던지며 공격의 고삐를 늦추기 않았다.
장수는 당황했다. 가후를 불러 황급히 물었다.
"형주의 구원병은 오지 않는데 이대로 가다가는 성을 지켜 내지 못할 것 같
소."
장수는 사색이 되었다. 그러나 가후는 얼굴에 동요의 빛도 없이 침착한 어조
로 말했다.
"너무 심려 마십시오. 이 성은 지킬 수가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조조를 사로
잡을 수도 있습니다."
"아니 그게 무슨 말이오?"
장수로서는 얼른 맏어지지 않는 말이었다. 이 성은 엄마 있지 않아 적에게 떨
어질 지경으로 위급한 상화에 놓여 있었다. 가후에게 꾀를 빌려 여러 번 위기를
넘겼던 장수였지만 그러나 이번에는 믿에지지 않는다는 표정이었다.
가후가 가만히 장수에게 설명했다.
"이번 싸움을 망루에서 자세히 살펴보니, 조조는 공격하기 앞서 이 성을 여러
번 둘러보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가 가장 주의를 많이 기울인 곳은 동남편입
니다. 그곳은 방책도 낡았고, 수리한 지가 얼마 되지않아 벽돌도 헌것과 새것이
뒤섞여있습니다. 말하자면 성루에 약점이 있는 곳입니다."
장수는 더욱 알 수 없는 말이었다.
"그런데 어찌하여 반대편인 서문을 공격하는 것아오?"
"그것은 음흉한 조조의 속임수입니다. 서문을 공격하는 척하여 방비의 주력을
그쪽으로 돌리게 해놓자는 것입니다. 즉 위격전살지계를 쓴 것으로 서문을공격
하는 체하다 갑자기 동남쪽을 돌파할 속셈입니다."
"그렇다면 어찌하면 좋겠소?"
"크게 심려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꾀는 꾀로 대하면 그뿐입니다. 내일 정예병
을 뽑아 배불리 먹인 후 거벼운 차림으로 동남쪽 구석에 숨겨 놓겠습니다. 그런
한편 백성들을 군사로 위장하여 서문쪽으로 보내 적의 계교에 빠진 듯이 보여
주도록 하십시오. 밤이 되면 틀림없이 조조는 동남쪽을 치게 될 것입니다. 그때
성 안까지 조조군을 유인하여 기다리고있던 복병들이 포 소리를 신호삼아 일시
에 나가 그들을 맞아 싸은다면 조조를 사로 잡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가후의 말에 장수는 감탄해 마지 않았다.
"과연 하늘이 내린 계책이오."
한편, 높은 사닥다리에서 성 안의 움직임을 엿보던 군사가 조조에게 은밀히
알렸다.
"지금 장수는 군사들을 모두 우리가 공격하는 서북편에 모으고 있습니다. 동
남쪽은 텅텅 비어 있습니다."
가후의 계략을 알 리 없는 조조는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나의 계략에 넘어간 것이다."
조조는 삽과 곡괭이, 갈고리, 그 밖에 성벽을 뚫고 넘는데 필요한 연장은 갖
추어 만반의 준비를 해놓고 낮에는 서북쪽을 더욱 맹렬히 공격하게 하니 성 안
의 군사들도 그쪽에만 와자지껄하며 들끓고 있었다.
이윽고 밤이 되었다. 군사를 은밀히 동남쪽으로 이동시킨 조조는 구덩이를 메
운 곳을 건너 허술한 성벽을 허물고 녹각(나무를 뾰족히 깎아 만든 장애물)을
헤치니 성벽은 어렵지 않게 뚫을 수가 있었다. 그럴 동안에도 성 안은 주위가
컴컴할 뿐 횃물 하나 보이지 않았다. 조조가 말을 멈춰 주위를 휘돌아 보는 순
간이었다.
갑자기 한 소리의 포향이 들려 왔다. 그러자 포향 소리를 신호로 삼아 사방에
서 복병들이 손에 손에 횃불을 들고 쏟아져 나오며 외쳤다.
"조조는 어대 있느냐? 조조를 잡아라."
조조는 대경실색하였다.
'아뿔사, 내가 속았구나. 복명이다. 퇴각하라!"
조조는 소리치며 급히 말머리를 돌렸다. 그러나 장수가 봄소 날랜 군사만 이
끌고 조조근을 돞쳐오니 싸움은 이미 결판난 것이나 다름없었다. 조조는 황망히
뒤도 돌아보지 못하고 성 밖으로 말을 달려 수십 리를 달아났다.
조조는 밤 오경 무렵까지 장수근에게 쫓겨 밤새 패주했다.
장수는 새벽녘에야 군사를 이끌고 성 안으로 돌아왔다. 조조는 그제서야 정신
을 차리고 군사를 점검해보니 전사한 군사가 5만이었다. 그 밖에 잃거아 빼았긴
치중은 헤아릴 수 없었으며, 장수들 중 여건,우금까지도 부상당한 정도이니 조
조는 다시 장수를 칠 엄두를 내지 못하고 있었다.
조조가 패주하자 가후가 장수에게 말했다.
"조조의 군세가 크게 꺾여 돌아가려 하고 있습니다. 유표에게 급히 서신을 보
내고 퇴로응 끊게 하시면 이번에는 조조를 사로잡을 수 있습니다."
가후의 말에 장수는 유표에게 사자를 보냈다. 유표는 서신을 받아 보고 조조
를 사로잡을 더없는 좋은 기회로 여겼다. 그러자 탐마가 급히 달려오더니 유표
에게 고했다.
"손책이 강 어귀에 군사를 출동시켰습니다."
모사 괴량이 그말을 듣더니 유표에게 일렀다.
"손책이 강 어귀에 군사를 낸 것도 필시 조조의 계략일 뿐입니다. 이제 조조
가 다시 패했다 하니 이 기회에 그를 치지 않으면 후일 반드시 후회할 것입니
다. 지금 바로 군사를 일으키십시오."
유표는 괴량의 말을 듣자 황조에게 형주를 지키게 한 뒤 군사를 이끌고 조조
의 퇴로를 끊기 위해 안중현으로 말을 달렸다. 장수는 유표가 군사를 움직인 것
을 알자 기세를 돋구워 가후와 함께 나와 조조를 추격하기 시작했다.
조조가 퇴각하던 도중 양성을 지나 육수를 지나게 되었다. 지난 해 이곳 양성
에서 장수와의 싸움에 대패하여 육수 강변으로 달아나 겨우 목숨을 건졌던 조조
였다. 오늘 그가 다시 장수와의 싸움에서 등을 돌리고 퇴각하던 중 그 육수 강
변에 이르자 조조는 갑자기 말 위에서 방성 통곡을 했다.
영문을 몰라 여러 장수들이 깜짝 놀라 까닭을 물었다.
"지난 해 이 땅에서 장수를 치려다 이곳에서 전위를 잃었다. 그를 생각하면
어찌 슬프지 않을 수 있겠는가?"
조조는 3군을 잠시 맘추게 하고 소와 말을 잡아 크게 제사를 지내며 전위의
혼백을 달랬다. 조조는 몸소 제단에 향을 사르며 끝내 소리높여 통곡했다. 3군
의 여러 장수들도 조조의 애절한 곡소리에 감동하여 번갈아 배례했다. 전위의
제사가 끝나자 맏아들 조앙, 조카 조안만 뿐만 아니라 그때 전사한 여러 군사들
의 제사도 지냈다. 또한 그때 화살에 맞아 죽은 대완마까지도 함께 향을 피워
주며 원혼을 달랬다.
초여름 보리밭을 밟으며 의기 충전하여 정벌의 길에 올랐다가 가을이 되어 참
담한 패배를 당항 채 사기가 꺾여 돌아가는 장졸들이었다. 그러나 조조가 이름
없는 군사들의 죽음까지 슬퍼하며 애도하는 것을 보자 장졸들은 의분이 일었다.
다음날이었다.
홀연 허도의 순욱이 보낸 사자가 달려와 저저에게 아뢰었다.
"형주의 유표가 장수를 도우려 안중현에 군사를 풀어 매복하고 있으니 경계하
십시오."
조조는 그 사자에게 답서를 보내 주며 말했다.
"내가 행군을 서두르지 않는 것은 장수가 뒤따르기 좋으라고만 하는 짓이 아
니다. 내게도 이미 생각이 있으니 그리 알라."
조조는 사자를 돌려 보낸 뒤 궁사를 이끌어 안중현의 경계에 이르렀다. 그곳
에는 과연 유표의 군대가 요해처를 차지하고 조조를 기다리고 있었다. 또한 장
수가 뒤를 바짝 추격해왔다.
"저들에게 지의 이가 있다면 우리도 지의 이를 취하지 않으면 안 된다. 내가
천천히 행군하는 것은 오히려 적의 추격을 끌어들일 심산이었다. 이미 계책이
마련되어 있으니 그대들은 과히 염려치 말라."
조조는 한쪽 산을 의지하며 진을 쳤다. 때마침 해질 무렵이었다.
조조는 군사들의 움직임이 적에게 즈러나지 않을 밤을 기다려 산에 외줄기의
깊은 통로를 파게 하였다. 통로가 만들어지자 전군의 반 이상을 그 통로에 숨
겨 두었다. 조조는 일부의 군사를 그곳에 남겨 둔 채 자신은 한 떼의 군사를 이
끌고 산 모퉁이에 매복했다.
날이 새고 안개가 건히자 조조의 진영을 살파고 있던 유표,장수의 군사들은
조조군이 군사가 의외로 적은 것을 보고 안심했다.
"그럴 수밖에, 이미 많은 군사가 전사했고 고행이 거듭된 패잔병의 퇴각이 아
닌가. 도중에 도망병이나 부상병 또한 많았을 테니 군세가 엄청나게 줄어든 것
일게다."
유표의 장수들은 이렇게 짐작하며 진지를 나와 험한 산길로 뛰어들어 조조군
을 덮쳤다.
그러자 홀연 조조가 산모퉁이에서 군사를 이끌고 달려나왔다. 때를 같이햐여
통로 속에 매복한 군사들도 갑자기 땅 속에서 솟은둣 튀어나왔다. 조조 스스로
는 유표군의 뒤로 돌아 공격하고 매복병의 한 갈래는 장수군을 급습했다. 또 한
갈래는 마주오는 유표군을 치니 장수와 유표군이 오히려 포위된 형국이 되고 말
았다.
유표,장수의 군사들은 며칠 전의 패전으로 퇴각하는 조조군을 가볍게만 여겼
다. 장수군과 뒤늦게 가세한 유표군은 조조군의 군세가 적은 것만을 보고 산 속
험지까지 추격했던 것이었다. 그러나 그들을 맞가 위해 준미하고 있던 조조군이
땅에서 솟고, 앞과 뒤에서 일시에 덮쳐드니 장수,유표군은 마침내 조조군을 당
해 내지 못해 패주하고 말았다.
조조는 패주하는 유표군을 뒤쫓으니 그들은 산을 넘어 달아나고 말았다. 조조
는 산 속의 험로를 벗어나 넓은 들판에 진을 쳤다.
장수도 패군을 수습하여 달아나던 중 유표와 만났다.
"조조의 간계에 도리어 우리가 당할 줄이야 어찌 짐작이나 했겄소?"
유표가 장수를 보자 한탄했다. 장수가 부함을 참지 못하고 말했다.
"그들을 너무 가볍게 본 게 잘못이었습니다. 다시 공격햐여 조조를 사로잡읍
시다."
유표가 장수의 말에 동의하고 양 군사는 다시 안중현에 집결하여 조조의 동정
을 살피기로 했다.
그때 조조는 이번에야말로 장수,유표군을 섬멸할 작정으로 군사를 수습하고
있었다. 그런데 다시 허도에서 순욱의 놀라운 급보가 전해졌다.
하북의 원소가 조조가 없는 허도의 빈틈을 노려 군사를 일으킨다는 소식이었
다.
"원소가 허도를 넘본다고..."
조조는 이 소식에 크게 놀라지않을 수 없었다. 원소라면 장수나 유표와는 달
랐다. 원소는 몀문의 후광을 업고 있을 뿐만 아니라 기주라는 비옥한 근거지를
차지하여 광대한 세력을 길러 외지 않았는가. 조조는 자신의 세력이 더욱 커질
때까지는 그와느 대적을 미루어 오던 터가 아니었던가. 그런 원소가 허도를 넘
보고 군사를 일으킨자면 큰일이 아닐 수 없었다.
조조는 유표,장수 따위는 안중에도 없다는 듯이 허도를 향해 행군을 서둘렀
다.
한편 장수와 유표는 조조가 급히 허도로 향해 그 뒤를 추격하려 했으나 가후
가 그들을 말렸다.
"아니 됩니다. 추격하면 큰 낭패를 당하게 될 것입니다."
가후의 말을 유표가 가로막았다.
"지금 쫓지 않으면 기회만 잃을 뿐입니다."
유표가 장수를 부추겨 양 군사는 조조군을 추격했다. 그들이 말을 달려 10여
리쯤 갔을 때엿다. 저저의 후미 군대가 그들을 기다리고 있다가 유표,장수의 군
대를 거세게 몰아쳤다. 추겨겨에만 급급해 있던 유표와 장수는 조조군의 기습에
어이없이 무너지고 말았다.
패주해 온 유표,장수가 가후에게 힘없이 탄식했다.
"공의 말을 듣지 않다 끝내 낭패를 당하고 말았소."
그러자 이번에는 가후가 뜻밖의 말을 했다.
"이제야말로 추격할 때입니다. 반드시 대승을 거둘 것이오."
장수,유표가 한결같이 놀라서 반문했다.
"지금 패하여 오는 길인데 어찌하여 다시 뒤쫓으라 하시오?"
장수와 유표는 의아하여 다시 물었다.
"이번에는 크게 이길 것입니다. 만약, 그렇지 못할 경우에는 내목을 베어도
좋습니다." 가후가 그렇게까지 권하므로 주저하고 있던 장수는 다시 조조군을
뒤쫓았다. 그러나 유표만은 가후의 말을 믿지 못해 조조를 뒤쫓지 않으려 했다.
조조의 군사는 뒤ㅉㅊ는 장수군에게 크게 패해 군마와 수레, 짐짝들을 모두
버리고 산지 사방으로 흩어져 달아났다. 장수는 이때야말로 저저를 사로잡을 기
회로 여겨 더욱 거세게 추격했다.
그때 홀연 산 뒤에서 한 떼의 군마가 달려나와 그들의 앞을 가로막았다. 장수
는 또 한 번 조조가 계략을 쓰는가 두려워 말머리를 돌렸다. 그러나 이번에는
많은 적군을 죽이고 사로잡았을 뿐만 아니라 수많은 전리품을 거두어 돌아왓다.
유표가 이를 보자 가후에게 물었다.
"참으로 묘한 일이오. 앞서는 우리의 정예군을 이끌고 추격했는데도 패할 거
라고 하였소. 그런데 이번에는 패주한 군사를 이끄는 데도 이길거라고 했소. 그
런데 둘 다 들어맞은 셈이오. 어째서 형세가 다른 데 이와 같은 두 번의 장담이
다 들어맞았는지 그 까닭을 헤아려 주시오."
유표의 물음에 가후가 까닭을 밝혀 주었다.
"조금도 이상할 게 없는 일이지요. 첫 번째의 추겨겨은 적으로서도 반드시 날
랜 군사를 뒤로 돌려 방비했을 것입니다. 추격애만 장신이 팔려 있는 군사들이
미리 대비하고 있던 군사들을 당해 내기란 어렵습니다. 그래서 나는 우리 군사
가 패할 줄 알았습니다. 그리고 저저가 저토록 급히 허도로 회군하는 데는 까닭
이 있을 것입니다. 그리하여 일단 추격군을 격퇴하고 나면 급히 돌아가느라 방
비할 여유가 없을 것입니다. 이번에는 방비가 없는 틈을 타 공격하였으니 능히
이길 수 있음은 당연한 일이 아닙니까?"
유표와 장수는 가후의 탁월한 식견에 감복하지 않을 수 없었다. 장수와 유표
는 가후에게 다시 고견을 물었다.
"그럼 앞일은 어떻게 도모하면 좋겠소?"
"유 장군께서는 형주로 돌아가시고 장 장군께서는 양성으로 돌아가시되 이와
입술의 사이가 되어 서로 도우며 훗일을 도모하도록 하십시오."
가후의 말에 유표와 장수는 각기 군사를 이끌고 근거지로 돌아갔다.
한편 조조는 허도를 향해 급히 말을 모는 중에 후군이 공격을 받고 있다는 전
갈을 받았다. 추격군이 크게 패하고 돌아간 뒤라 유표,장수군이 다시는 뒤쫓지
않을 것으로 여겼던 조조는 크게 당황했으나 급한 중에도 후군을 구원하기 위해
군사를 돌렸다. 그러나 조조가 당도해 보니 그때는 이미 장수가 군사를 거두어
간 뒤였다.
이때 후군에 속해 있는 한 군사가 조조에게 말했다.
"만약 그때 산너머에서 저희들이 모르는 한 떼의 군사들이 나타나 도와주지
않았다면 저희는 모두 사로잡히고 말았을 것입니다."
"그 장수는 어디 있느냐?"
조조의 말에 대열의 맨 뒤쪽에서 호걸풍의 한 무장이 창을 옆구리에 끼고 앞
르로 나왔다.
"그대는 누구인가?"
그 무장은 조조에게 허리를 굽혀 절하며 말했다.
"한때는 진위중랑장을 지냈으며 그 후 고향인 여남에 돌아가 있었습니다. 아
름은 이통, 자는 문달이라 하옵니다."
조조는 그의 어굴은 처음으로 대하나 이름은 듣고 있었다.
"어찌하여 이곳에 오게 되었는가?"
"승상께세 장수,유표와 싸우고 계신다는 소문을 듣고 힘이 될까 하여 달려왔
을 따름입니다."
조조는 큰 횡재라도 한 것처럼 ㄱ뻐했다. 회군하던 중 뜻하지 않은 좋은 장수
를 얻고 곤경에 빠진 후군까지 무사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조조는 이통에게
치하의 말을 한 뒤 그를 건공후에 봉하고, 여남에서 유표,장수를 막도록 했다.
이통은 조조에게 감사하며 절한 뒤 여남으로 물러갔다.
조조는 허도로 돌아온 뒤 이번에 구원병을 보내 준 손책을 위해 그의 공을 천
자께 아뢰 토역장군에 봉하고 오후의 작위를 내렸다. 손책을 자기 사람으로 망
들어, 유표를 치게 하려는 속셈이었다. 조조는 강동으로 사자를 보내 손책에게
조서를 전하는 동시에 형주의 유표를 치라는 황제의 칙명을 별도로 내리게 했
다.
조조가 장수와 유표에 대한 대비책을 세운 뒤 원소의 동태를 살폈으나 원소
쪽에서 별다른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그때서야 조조는 승상부에 출부하여 여러
대신들의 인사를 받았다. 그러자 순욱이 들어와 조조에게 물었다.
"승상께서 지난번 안중까지 퇴각하셨을 때, 일부러 더디게 진군하면서 적을
두려워하지 않은 까닭이 무엇 때문이었습니까?"
"그때는 기진맥진한 상태에 빠져 있던 우리군에 비해 장수는 필사의 대비를
하고 있었던 때이오. 왜냐하면 그들은 남양을 읽으면 갈곳이 없기 때문이오. 비
록 성을 공격하는 데는 실패했지만, 내게 그들을 공격할 힘이 남아 있었으나 공
격하지 않은 것은 바로 그 때문이었소. 그 대신 그들을 성 밖으로 멀리 유인해
내어 사로잡을 계획으로 천천히 행군했던 것이오. 뒤에 유표가 가담하여 이번에
는 우리 군사거 활로를 열지 못하면 막다른 길에 이르를 지경이었소. 이것이 오
히려 우리 군사들에게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결사적인 싸움을 하게 만든 이유
가 됐소. 따라서 나는 그들을 이길 수 있다는 확신을 갖게 된 것이었소."
순욱은 조조의 뛰어난 군략에 감탄했다.
"승상이야말로 참으로 병법가 손자의 오묘한 이치를 토득한 사람이라 아니할
수 없습니다."
어느 새 제비가 돌아가고 기러기가 날아오는 계절이 되었다.
허도의 역관에는 사람과 물건이 붐볐다. 여러 고을에서 거둬진 햇곡식과 채
소, 단맛이 물씬 니는 과일 등이 장터로 몰려들었다. 또한 외국사신들이 조공으
로 가져온 비단과 비마로 길은 북적거렸다.
그때 뭄비는 인퍼와 비마 속에 한 떼의 호화로운 의상을 입은 사람들이 역관
앞에 당도했다.
"기주 원소 공의 사지로 온 대인들이다."
역관 사람들이 이런말을 주고받으며 그들을 극진해 대했다. 일반 백성들 사이
에서는 워소라면 모르는 이가 없었다. 한 황실의 명문 후예에다 지금은 기주뿐
아니라 4주에 걸쳐 1백만이 넘는 군사를 거느리고 있는 원소였다. 백성들 사이
네도 이미 그 위세가 널리 알려져 있었던 것이다.
막 대궐에서 퇴청한 조조가 승상부에 돌아와 한숨을 돌리고 있을 때였다. 모
사 곽가가 들어와 한 통의 서신을 전했다.
"원소의 사자가 와 승상께 서신을 전해 달라고 하였습니다."
조조는 원소의 서신이라는 말에 다소 긴장하며 그의 서신을 받아 읽었다. 서
신의 내용은 뜻밖에도 공손찬을 치려 하니 군사와 양식을 빌려 달라는 내용이었
는데 그 문투가 마치 아랬사람을 대하듯 교만했다.
조조가 불쾌한 얼굴로 곽가에게 물었다.
"지난번 허도를 비웠을 때에는 엄큼하게 빈집을 노리는 도둑처럼 허도를 넘보
지 않았소? 이제 내가 허도로 돌아오니 또 엉뚱한 소리를 하는구려. 내가 그를
쳤으면 좋겠으나 힘이 모자라니 장차 어떻게 했으면 좋겠소?"
곽가는 저저의 격정이 가라읹기를 기다려 조용히 아뢰었다.
"너무 심려하지 마십시오. 그는 두려운 존재가 아닙니다."
"그의 힘이 강대하거늘 어찌 두려워하지 말라는 것인가?"
"옛날 한 고조가 항우를 이긴 것은 힘이 강해서가 아님은 주공께서도 아시는
바입니다. 항우가 고조에게 멸망당한 것은 힘을 믿고 지혜를 가벼히 여긴 탓입
니다. 고조는 항상 은인자중헤 최후의 승리를 거두게 된 것입니다."
"그건 그렇소."
"원소란 인물과 승상을 견주어 볼 때 승상에게는 10승이 있고,원소에게는 10
패의 결점이 있습니다. 원소가 지금은 세력이 강하다 하나 승상께서는 반드시
이길 것입니다."
"열 가지의 이길 것과, 열 가지의 패할 것니라는 결점은 무엇이오?"
"첫째로 원소는 필요 이상의 번거로운 예와 쓸데없는 허식을 좋아하지만 승상
께서는 항상 실질적인 알맹이만 취하시고 그 다음은 자연의 순리에 따르시니 이
는 도에서 원소를 이기심입니다."
"그 둘째는 무엇이오?"
"원소는 움직이면 천자를 거스르는 것이 되오나 승상께서 움직이십은 항상 천
자의 명에 따를는 것이니 이는 순리, 곶 의로써 이기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다음은 무엇이오?"
"셋째로원소는 잘못에도 관대함만이 인정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이로 인
해 백성들은 잘못을 저지르고도 관용을 기대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승상께서는
엄격하게 상벌이 분명하니 백성들은 두려워하면서도 동시에 큰 기쁨을 갖는 것
입니다. 이는 다스림에서 이기시는 것입니다.
넷째로 원소는 대범한 것 같지만 사실은 소심하고 시기심이 않으며 사란을 곧
잘 의심합니다. 또 사람을 쓰는데도 친척을 너무 중용합니자. 그러나 승상께서
는 멀고 가까움이 없이 스스럼없이 사람을 대하시며 관찰력이 예리하십니다. 때
문에 사람을 의심하지 않고 오직 재주에 따라 사람을 씁니다. 이는 도량에서 원
소를 이기는 것입니다.
다섯째로 원소는 꾀함이 많은 반면 결단력이 없으나 승상께서는 계채을 정하
면 망설임 없이 신속히 결행하십니다. 이는 '꾀함에서의 승리'입니다.
여섯째로 원소는 스스로 명문이라 하여 명사나 허명을 좋아합니다. 그러나 승
상께서는 참다운 인재를 오직 지성으로 대접하시니 이는 덕으로 이기심입니다.
일곱째로 원소는 가까운 이에게 다정히 대하나 먼 데 있는 사람에게는 마음을
쓰지 않습니다. 그러나 승상께서는 샅샅이 누구에게나 마음을 쓰심니다. 곧 어
짊입니다.
여덟째는 '밝음의 승리'입니다. 원소는 모략 중상하는 말을 들으면 의혹을 알
으켜 마음이 흔들리지만 승상께서는 모략을 맏지 않고 물리쳐 밝게 헤아려 행하
시니 이는 명철함이 나으신 점입니다.
아홉째로 승상께서는 법을 펴심이 엄격하고 밝으시나 원소는 옳고 그름이 자
신의 마음에 따라 변해 뒤죽박죽이 됩니다. 이는 문리에서의 이김입니다.
열번째로 무의 승리입니다. 원소는 허세를 부리지만 병법에는 어둡습니다. 그
러나 승상ㄲ서는 적은 근사로 많은 군사를 꺾으며, 군사를 부리는 용병술이 귀
신 같으시나 원소는 거기에 따르지 못합니다. 승상께서는 이 10승의 승산이 있
으니 원소를 무찌름에 어려움이 없으실 것입니다."
곽가의 말은 실로 청산유수와 같았다. 조조늬 면전이었건만 조조와 원소의 장
단점을 한치의 어긋남도 없이 예리하게 분석한 말이었다.
"공의 말은 지나치오 내게는 과분할 뿐이오."
조조는 겸양했으나 얼굴에는 잔잔한 미소를 띠었다. 옆에 있던 순욱도 입을
열어 말했다.
"곽봉효가 말씀드린 '10승 10패' 설에는 저도 동감입니다. 원소의 군사가 많
다 해도 두려워할 것이 못됩니다."
"알았으니 공들은 물러가 계시오."
그날 밤 조조는 홀로 앉아 깊은 생각에 잠겼다.
곽가가 자신을 원소에 비해 열 가지의 이김을 넌하지 않았더라도, 조조 스스
로도 원소에 대한 우월감이 없지 않았다. 그러나 조조의 우월감은 어디까지나
원소와 1대1로 비유했을 때의 우월감이었다. 일찍부터 저저는 그의 힘으로는 어
쩔 수 없는 원씨 가문에 대한 미묘한 감정을 지울 수 없었다.
원씨 일문의 벌족 중에응 회남의 원술도 있고, 또한 그의 근거지가 광대한 지
역인 만큼 일찍부터 어진 선비를 길러 지모와 지용을 갖춘 현신도 적지 않았다.
그러나 조조를 괴롭히는 것은 그것보다도 원소의 가문이었다. 그의 가문은 일
개 궁내관의 아들로서 그의 아버지가 일찍 낙향하여, 소년 시절부터 마을의 부
랑아에 지나지 않았다. 원소가 낙양의 도성에서 준부의 중책에 있었을 때 조조
는 겨우 성문을 순시하는 말직에 있었다.
이후 원소는 천하의 풍운에 밀려 지방으로 물러나고 조조는 그 풍운을 타고
약진을 거듭하여 승상까지 되었다. 그러나 원소는 아직도 은년중에 보수파의 지
지를 등에 업고 있었다.
반면 아직 신진세력인 조조는 그에게 충성을 다하는 직계 부하를 제외하고는
그를 향한 보이지 않는 질시와 반감 또한 만만치 않았다. 천하에는 아직 조조를
가리켜 '자천의 승상'이라는 수군거림이 사라지지 않고 있는 것이다.
조조의 무력에는 두려움을 가지고 있으나, 그 권위에는 심복하고 있지 않는
것이다. 그런 미묘한 민심에 어두운 조조가 아니었다.
그는 아직 자신의 성공에 대해 다분히 충족되지 않은 불만을 지니고 있었다.
적을 무력으로 무찌를 수는 있었으나 민심을 무력으로 얻을 수는 없는 일이었
다. 뿐만 아니었다. 산동과 하남의 경계에 근거지를 두고 있는 여러 군벌과 대
치하고 있는 지금이 아닌가. 그에게는 매일매일 전투와 정치 투쟁이 기다리고
있었다.
이 허도를 중심으로 서쪽으로는 형주,양양의 유표와 장수가 있다. 또 동쪽으
로는 원술, 북쪽에는 백만 대군이라고 호온하는 원소가 있다. 거의 사방팔방이
적으로 둘러싸여 한시라도 마음을 놓을 수 있는 곳은 한 곳도 찾아볼 수 없었
다. 그가 품은 대망은 벌써부터 거센 도전을 받고 있는 셈이었다.
다음 날 아침이 되자 조조는 모사 순욱과 곽가를 물러 다시 의견을 물었다.
"원소의 무례함을 어찌했으면 좋겠소?"
"원소를 치는 것은 때를 기다려야 합니다. 지금은 사방에 적을 두고 있습니
다. 어느 한쪽도 섣불리 공격했다가는 이 허도가 위험합니다."
곽가가 순욱의 말이 끝나자,
"여포를 잊어서는 아 됩니다. 그는 지금은 주공의 말을 듣고 있다 하나 그 역
시 항상 허도를 넘보고 있습니다. 그런데 원소가 북으로 공손찬을 치러 간다고
하니 일단 원소의 요구를 들어 주어 그가 공손찬을 치게 내버려 두십시오. 그럴
동안 우리는 여포를 쳐 동남을 평정한 뒤 원소를 치는 것이 상책입니다. 만약
지금 원소를 공격하게 되면 그 틈을 타 여포가 허도를 노릴 것이 분명합니다.
그때는 우리의 손실이 매우 클것입니다."
순욱은 다시 입을 열었다.
"곽봉효의 말과 제 소견이 같습니다. 원솔 이용하여 여포를 먼저 치는 것이
좋을 듯힙니다. 여포와 원소가 군사를 일으키고 있는 동안에는 달리 허도를 범
할 만한 자가 없습니다."
곽가와 순욱 두 사람의 말을 듣자 조조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순욱이 다
시 입을 열었다.
"여포는 당대의 명장으로 기름진 서주를 근거지로 삼고 있으니 가볍게 보실
수 없습니다. 유비에게 미리 알려, 그의 답을 들으신 후에 군사를 일으키시는
것이 순서일 것입니다."
조조는 순욱의 말대로 유비에게 사자를 보내기로 했다. 지난번 회군때 유비에
게 일러 둔 말도 있어 사자를 보내면 즉시 여포의 도태를 파악 하리라 여겼다.
이튿알 조조는 원소의 사자를 승상부로 불러 후히 대접한 후 원소에게 공손찬
을 칠 때 군사를 일으켜 돕겠다는 답서를 전하게 했다.
조조는 또 원소에게 군량미,마필 그 밖에도 많은 군수품을 마련하여 보냈다.
뿐만 아니었다. 천자께 주청하여 원소를 대장군에 태위로 봉하고 기주,청주,유
주,병주의 4주를 함께 다스리게 했다.
조조의 답서를 사자로부터 받은 원소는 단숨에 읽어 내려갔다.
장군께서 금번 북평 정벌을 결심하신 장도에 저도 필승을 기원하는 바입니다.
군량미와 마필 등 군수품을 가능한 한 후방에서 원조하겠습니다. 하남에 대해서
는 조금도 심려 마시고, 바로 북평의 공손찬을 토벌하시어 만민의 안도를 도모
하시기 바랍니다. 단지 한 가지, 불초 소생도 허도의 수호를 맡고 있어 병력이
필요하므로, 부득이 군사를 보내지 못함을 양해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원소는 조조의 답서를 읽은 후 크게 기뻐했다. 조조의 답서는 자기가 보낸 문
투에 비해 마치 웟사람을 대하듯 공손하기 그지없었다.
거기다가 벼슬 또한 조조에게 비해 낮은 편이 아니었다. 조조가 많은 군수품
을 보내오자 원소는 드디어 공손찬을 치기로 하고 군사를 일으켰다.
조조가 천자를 끼고 세력을 키워가는 것이 늘상 못마땅하게 여겨 언젠가는 조
조를 치리라 자정하고 있던 원소였으나, 이렇게 하여 한동안은 서남에 대한 경
계심을 풀었다.
한편, 여포는 서주에 있으면서 밤마다 미녀를 끼고 술에 젖으며 낮에는 진등
부자에게 둘러싸여 있었다. 여포는 무슨 일이든지 진등 부자에게 의논했고, 이
들은 또 어디든지 여포를 침이 마르도록 칭찬했다.
이 모양을 지켜 보는 진궁은 항상 비위에 거슬려 어느 날 기회를 엿보아 여포
를 일깨웠다.
"진등 부자가 장군 앞에서는 온갖 아첨을 다 떨고 있으나 그들의 속마음을 알
수 없으므로 장군께서는 경계하시는 것이 좋겠습니다."
여포가 못마땅한 표정이 되어 진궁을 꾸짖었다.
"어찌하여 어진 이들을 참소하는 그 같은 말을 하는가?"
"그들 부자를 현인이라 생각 하고 계십니까?"
"이 봉선에게는 충성스런 신하라 할 수 있소."
여포가 그렇게 말하니, 진궁은 더 이상 입을 열지 못하고 그앞을 조용히 물러
났다.
'충성스런 말을 듣지 않으니, 필시 화가 미치리라.'
진궁은 이렇게 중얼거리며 사저에 틀어박혔다. 진궁은 마음 속으로는 여포를
떠나고 싶었으나 쉽게 결단을 내릴 수가 없었다. 섬기던 주인을 버리면 세상 사
람들이 손가락질하지 않을까 두렵기도 했다.
'그래, 사냥이나 하며 호연지기나 기르자.'
답답한 마음으로 나날을 보내던 진궁은 무듣 이런 생각을 하며 군사몇을 데리
고 소패 근처로 사냐을 나갔다. 그때 홀연히 역마한 필이 급히 달려가는 것이
보였다. 그 사자는 자기 일행을 보자 갑자기 허둥대기 시작했다. 문듣 의심이
들었다. 진궁이 말을 몰아가니 그는 채찍을 가해 더욱 말을 재촉했다. 진궁은
달아나는 그를 향해 활을 당겼다. 화살은 그 자의 발은 맞추고 그는 말에서 굴
러 떨어졌다. 진궁은 할을 내동댕이치고 그 자에게 달려갔다.
"그대는 어디에서 어는 사자인가?"
진궁이 그 사자에게 물어 보았다.
그러자 진궁 일행이 여포의 수하임을 아는지 더욱 당황해 하며 입을 열지 않
았다.
진궁은 칼을 빼들었다. 그제서야 그가 입을 열었다.
"허도에서 온 사자입니다."
"허도? 그래 누구에게 가는 사자이냐?"
"예주의 유현덕 공에게 왔다 가는 사자입니다." 진궁이 그 자의 몸을 뒤지게
하였더니 뜻밖에도 유비로부터 조조에게로 가는 밀서 한 통이 나왔다.
진궁은 밀서와 함께 그사자를 여포에게 데리고 갔다. 여포에게 자초지종을 말
하고 밀서를 주었다.
여포가 심상치 않음을 느끼고 사자에게 조용히 따져 물었다.
"그래, 무슨 일로 너를 보냈ㄴ냐?"
"조 승상님의 분부로 유 예주께 글을 ㅂ내라 하시기에 그 글을 전하고 답서를
받아가지고 돌아가는 길입니다. 그러나 답서의 내용이 무엇인지는 알지 못합니
다."
그 말에 여포는 밀서를 뜯어 보았다.
여포를 치라는 명공의 분부를 밪들고 어찌 잠시라도 소홀 할 수 있겠습니까.
다만 이 비에게 군사가 적고 장수 또한 적에 가볍게 움직이지 못하였을 뿐입니
다. 만약 승상께서 크게 군사를 일으키신다면 저 또한 기꺼이 선봉이 되겠습니
다. 승상의 크신 면을 다시 기다리며 군사를 추스리고 단속하겠습니다.
여포가 밀서를 보고 크게 널라며 이를 부드득 갈았다.
"조조,유비, 이 자들이 감히 이럴 수가 있느냐!"
요포는 그 자리에서 사자의 목을 벤 후 진궁에게 명을 내렸다.
"소패성을 단숨에 쳐부수고 현덕을 사로잡아 오라!"
진궁과 장패는 여포의 명을 받고 곧 소패를 칠 준비를 했다. 그러나 아무리
소패가 작은 성이라지만 곧바로 소패로 쳐들어갈 수는 없었다.
진궁은 먼저 부근 태산에 있는 손관,오돈,창희,윤례 등의 도적 두목을 불러모
았다. 그런 후 그들에게 이런 말로 선동했다.
"산동의 여러 주군을 쳐서 교란하라. 그리고 마음껏 약탈하라!"
그리고 고순과 장요를 소패로 보내어 유비를 치게 하였다. 또 송헌과 위속에
게는 서쪽으로 나아가 여남과 영주의 각지를 공격하게 했다. 여포는 주력 부대
를 거느리고 이들 전군에 호응키로 했다.
한편 유비는 여포가 군사를 이끌어 삼면을 밀물처럼 쳐들어온다는 소식을 듣
고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아뿔사, 답신을 가지고 돌아가던 사자가 도중에서 여포군에게 사로 잡혀 일
이 탄로나고 말았구나."
유비가 급히 무리를 모아놓고 의논했다. 손건이 몬저 입을 열었다.
"먼저 조조에게 이 사실을 알리는 것이 좋겠습니다."
유미의 생각 또한 그랬다.
"누가 급히 허도로 가겠소?"
그러자 계단 아래에서 굵은 목소리가 들려 왔다.
"제가 다녀오겠습니다."
그의 유비와는 동향인 막빈(빈객으로 있는 모사) 간웅이었는데 자는 헌화였
다. 유비는 즉시 조조에게 위급을 알리는 서신을 써서 간웅에게 주었다. 간웅이
허도로 말을 달려가자 유비는 성을 지킬 준비를 서들렀다.
"관우는 서문을 지키고, 장비는 동문을, 손건은 북문을 맡아라!"
그리고 유비는 스스로는 남문을 맡기로 하고 미축과 그의 아우 미방에게 중군
을 지켜 가솔을 보호하게 했다. 유비의 둘째부인인 미 부인은 바로 미축,미방
형제의 동생이므로 그들에게 가솔을 보호하게 한 것이다.
여포군 중 소패성에 먼저 이른 것은 고순이 거느린 군대였다.
유비가 망루에 올라 소리쳤다.
"나와 봉선은 아무런 원한이 없는데 장군은 어찌하여 이렇게 군대를 이끌고
왔는가?"
고순이 화를 내며 외쳤다.
"유현덕, 네놈이 조조와 손을 잡고 우리 주공을 해치려 하지 않았더냐? 이미
그 일은 발각되었으니 어서 포박을 받아라!"
고순은 말을 마치기 무섭게 성을 공겨하기 시작했다. 유비는 성문을 닫은 채
성 밖으로 나가지 않았다.
다음 날이었다. 장요는 관우가 지키는 서문을 공격해 왔다.
관우가 성위에서 장요를 보고 외쳤다.
"공은 장요가 아니시오? 어찌하여 장 공 같은 사람이 여포같은 역적에게 몸을
맡겼소?"
관우의 말에 장요가 잠자코 고개를 숙였다. 관우는 그가 비록 적이기는 하니
충의의 기개가 있음을 알고 더 이상 욕설도 하지 않았으며 나가서 싸우지도 않
고 오직 굳게 지키기만 하였다.
장요는 군사를 이끌고 동문으로 물러갔다. 그때였다. 별안간 장비가 달려나와
장요의 뒤를 쫓기 시작했다.
관우가 이를 보고 급히 그 뒤를 쫓아 장비를 성 안으로 불러들였다.
"어째서 적을 눈앞에 두고도 추격하지 말라 하시오. 그럴 바에야 차라리 싸움
을 걷어치우는 게 낫겠소."
모처럼 사모창을 꼬나쥐었던 장비인지라 싸움을 말리는 관우의 제지에 볼멘소
리로 투덜댔다.
관우가 그런 장비를 달랬다.
"그는 비록 적이긴 하나 무예가 뛰어나고 인의의 사람으로 보였기 때문이네.
내가 한 말을 듣고 그는 부끄럽게 여겨 스스로 물러난 것일세. 그런 그를 구태
여 뒤쫓는다는 것도 무장으로서의 자세가 아닐세."
관우의 말을 듣고 장비도 고개를 끄덕이며 성문을 닫아 걸고 굳게 지킬 뿐이
었다. (3권에서 계속)
책,영화,리뷰,
삼국지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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