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지 제3권
나관중 저, 김홍신 역
권머리에
유비는 부전불화로 조조에게 맞서고...
조조군과 유비군은 여포군에 크게 패해 소패성을 잃는다. 이에 조조가 계략으
로 맞서 공략하자 여포는 원술에게 그의 딸을 인질로 보내 응원군을 청하나 조
조군의 포위망을 뚫지 못한 채 실패한다. 결국 휘하 장수를 박대한 여포는 조조
에게 함비성마저 함락당하고 비굴한 죽음을 맞이한다.
조조와 유비는 허도로 개선하여 황제를 배알한다. 유비는 황제로부터 황숙의
칭호를 얻고 조조는 점차 천자를 멸시하기에 이르고 허전 사냥터에서 자신의 무
례함을 드러내며 황궁을 옥죄어 든다.
이에 천자는 극구 동승에게 조조를 칠 것을 은밀히 명하는 밀지를 내리니 동
승은 충의지사 왕자복.충집.오석.오자란.마등.유비.길평 등과 뜻을 모아 혈서를
쓴다.
유비는 조조를 속이기 위해 채소밭을 가꾸며 지내다 원술이 공손찬을 멸하자
조조에게 공손찬과의 옛 형제의 정을 내세워 군사 5만을 빌려 원술을 공략한다.
이로써 원술은 유비군에게 전멸당하고 황제를 칭하던 원술은 초라한 죽음을 맞
이한다.
원술의 죽음으로 뜻하지 않게 전국의 옥새를 얻은 조조는 유비의 속셈을 알아
차리고 유비를 멸하고자 한다. 조조가 원소군과 대치하는 가운데 유비는 조조와
대적함이 불리하다는 것을 깨닫고 부전불화의 계책으로 맞서고, 사로잡은 적장
을 보내 조조와 화해를 꾀한다.
한편 동승은 길평의 약재로 조조를 죽이고자 뜻을 모으나 노비 진경동의 밀고
로 멸문지화를 당하고 임신한 동 귀비까지 살해된다. 이어 조조는 동승과 결탁
한 유비를 멸하고자 군사를 내어 야습을 결행하려던 유비군을 궤멸시키고 유비
군은 하룻밤 사이 뿔뿔이 흩어진 채 기주로 쫓겨 원소에게 몸을 의탁한다.
조조의 계략으로 하비성을 빼앗긴 관우는 충의로서 한나라에 승복하는 것이
며, 유비가 있는 곳을 알게 되면 언제든지 떠나겠다는 조건을 내세워 조조에게
항복한다.
유비는 원소에 의탁한 가운데 조조와의 싸움을 부추겨 백마벌판에서 안량 문
추를 선봉장으로 조조군과 대적하여 첫 싸움을 승리로 이끈다. 이에 조조는 허
도에 있는 관우를 불러들여 원소군과 대적하게 한다.
유비가 원소군에 가담한 사실을 모르는 관우는 조조에게 진 신세를 갚기위해
단칼에 안량 문추의 목을 베고 조조군은 전날의 패배를 설욕하며 원소군을 물리
친다. 그러나 유비는 관우가 조조군에 가담함으로써 원소로부터 의심을 받고 죽
음에 이를 위기를 맞는다. 이때 관우는 여남 땅에 출전하여 손건을 만나게 되고
유비가 하북의 원소에게 머무르고 있음을 알게 된다.
손쉽게 난을 평정한 관우는 개선하여 떠날 일을 준비하고 조조에게 하직 인사
를 올리려 하나 조조는 피객패를 내걸어 관우와의 대면을 피한다. 이에 관우는
서신을 남기고 떠나던 중 다섯 관문에서 여섯 장수의 목을 베고 가까스로 하북
경계에 이르러 손건을 만나 여남으로 발길을 돌린다.
하후돈은 눈알을 씹어 삼키고 유비는 소채성을 잃다
여포는 유비를 공격하고 하후돈은 싸움 도중 한쪽 눈이 화살에 맞아 화살과
함께 뽑혀 나온 눈알을 씹어먹음으로써 적의 간담을 서늘하게 한다. 그러나 조
조군은 크게 패하고 유비군도 소패성을 함락당한 채 유비만 간신히 성을 빠져
나온다.
유비가 조조에게 보낸 답서가 여포의 손에 들어가 소패를 공격하라는 명령을
내린 다음 날이었다.
여포는 급히 학맹을 불러 명했다.
"급히 회남으로 가 원술에게 지난번 혼담은 조조의 방해를 받아 약속을 지키
지 못했으나 아직 그 혼인을 원하고 있다고 전하라."
여포는 학맹을 은밀히 원술에게 보내 이 같은 뜻을 전하게 했다.
여포가 혼사를 다시 성사시켜 원술에게 순치지교를 원하는 이면에는 그와 동
맹을 맺어 조조를 치겠다는 뜻이 숨어 있었다.
원술 또한 원래부터 여포와 동맹을 맺어 조조를 치겠다는 목적으로 그 혼사를
계획했다.
그러나 여포가 신의가 없으니 믿음이 생기지 않았다. 그리하여 여포의 사자인
학맹에게 이렇게 답서를 보냈다.
따님을 먼저 회남으로 보내신다면 충분히 호의로써 답하겠소.
원술의 대답은 여포의 딸을 먼저 인질로 보내라는 조건이었다.
여포는 원술로부터 이런 답서를 받고 마음을 정하지 못하고 망설이고 있었다.
여포는 소패의 유비에게는 그다지 두려움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그가 두려워
하고 있는 것은 조조였다. 그런데 유비를 공격하면 당연히 조조를 적으로 만드
는 셈이 아닌가.
그런데 원술이 여포를 믿지 못하겠다고 나서니 여포로서도 당황할 수밖에 없
었다. 원술은 여러 가지 어려운 조건을 내걸고 심지어는 딸을 인질로 보내라는
불손한 태도로 나왔다. 여포로서는 참을 수 없는 굴욕이었다. 여포는 원술과의
혼약은 가망이 없다고 단념하기에 이르렀다.
'이렇게 된 바에야 내 스스로 유비를 쳐서 그를 깨뜨려야겠다.'
여포는 이튿날 스스로 말을 몰아 군사를 이끌었다. 여포는 휘하 장수들을 둘
러보며 소리쳤다.
"이런 손바닥만한 성 하나를 가지고 며칠씩이나 공격하여 무너뜨리지 못한단
말이냐. 일거에 무너뜨려라!"
여포는 장졸들을 독려하며 사기를 돋우었다. 그를 태운 적토마는 이미 소패성
아래까지 다가가고 있었다.
그러자 성벽 위에 유비가 모습을 드러내더니 여포에게 말했다.
"여 장군께서는 무슨 연유로 이렇게 군사를 이끄시었소. 일찍이 이 비와 장군
과는 은혜로움과 친분은 있었으나 원수진 일은 없었소. 앞서 조조로부터 천자의
칙명으로 군사를 동원하라는 명에 부득이 따르겠다는 답서를 보냈을 뿐이었소.
그러나 어찌 당장 장군과의 교분을 버리고 까닭 없이 해를 가하려 하겠소. 장군
과 이 비가 싸워 서로 병력을 축내면 이를 기뻐하는 자가 누구이겠소. 원컨대
현명하게 깊이 헤아려 보시기 바랍니다."
여포는 유비가 사리를 들어 설득하자 말 위에서 잠시 망설였다. 유비와 싸워
힘을 낭비하는 것도 그렇지만 그의 머릿속에는 조조가 떠나지 않고 있기 때문이
었다.
유비와 싸워 힘을 빼는 동안에 언제 조조가 들이닥칠지 모를 일이었다. 그래
서 그는 장수들에게 소패성의 포위를 풀지 않도록 하고 그 자신은 서주성으로
돌아가 버렸다.
한편, 소패성을 빠져 나간 간응은 허도로 가서 밀서가 여포의 손에 넘어가 소
패가 위급하다고 조조에게 전했다.
"사정이 이러하오니 일각이라도 급히 원병을 청하는 바입니다."
조조는 즉시 모사들을 소집하고 소패의 급변을 전하며 말했다.
"유현덕의 위급함을 보고도 버려 둔다면 그것은 신의를 저버리는 것이 될 것
이오. 지금 원소는 북평 토벌에 여념이 없어 염려될 것이 없지만 나의 배후에는
장수 유표의 세력이 있어 항상 허도를 노리고 있소. 그러나 여포 또한 그대로
방치해 둘 수 없는 나의 적이오. 그 역시 장차 세력을 키운다면 반드시 장래의
화근이 될 것이오. 그러므로 일부 병력으로 하여금 허도를 지키게 하고 나는 유
현덕을 도와 여포의 뿌리를 뽑아 버릴까 하오. 공들의 생각은 어떠하오?"
여러 모사들을 대신하여 순유가 일어나 아뢰었다.
"유표와 장수는 지난번에 패했으니 결코 가볍게 군사를 일으키리라 생각지 않
습니다. 그러나 여포의 효용이 절륜한데다 만일 여포가 원술과 합류하고 사수와
회남으로 종횡한다면 그때는 돌이킬 수 없는 화근이 될 것입니다."
곽가가 순유의 말에 동의했다.
"여포는 이제 승상께 거역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아직 따르는 무리가 없으니
이때 도모하심이 좋을 듯싶습니다."
모사들의 주장이 또한 한결같음을 보고 조조는 진병할 준비를 서둘렀다. 먼저
하후돈에게 명하여 하후연.여건.이전과 함께 군사 5만을 주어 서주로 향하게 했
다.
조조는 직접 대군을 거느리고 뒤를 따랐다.
한편 소패성을 포위하고 있던 고순에게 이 소식이 전해졌다. 그는 즉시 여포
에게 이 소식을 알렸다. 여포는 몹시 당황했다. 그가 염려하던 조조의 진병이
이토록 빨리 이루어질 줄은 몰랐던 것이다. 이제 조조와의 정면 충돌은 피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여포는 휘하의 세 장수에게 명했다.
"후성.학맹.조성은 각기 20여 기를 거느리고 달려가 고순과 합류하여 소패성
에서 30리쯤 떨어진 곳에서 기다리다 먼길을 오느라고 지친 조조군을 섬멸하
라."
여포도 남은 군사를 이끌고 그들의 뒤를 따랐다.
그때까지 소패를 에워싸고 있던 여포의 일부 군사들은 조조군을 맞기 위해 소
패에서 60리나 떨어진 곳으로 물러났다.
소패성 안에 있던 유비는 여포군이 물러나자 조조 군사가 오고 있음을 알았
다.
"허도의 원군이 서주의 경계에 이르렀구나."
유비는 손건.미축.미방 등은 성을 방비케 하고 자신은 관우.장비 두 아우를
거느리고 성 밖으로 나가 각기 나누어 조조의 군사를 영접하기 위해 진영을 폈
다.
유비가 여포군의 후미에서 싸울 준비를 하고 있는 동안, 이미 여포군의 선봉
과 조조군의 선봉에서는 먼지를 뿌옇게 일으키며 싸움이 벌어지고 있었다.
이때, 조조군의 선봉 하후돈은 여포군의 대장 고순과 맞닥뜨리자 창을 추켜들
고 달려나갔다. 고순 역시 하후돈을 맞아 싸우기 위해 나아갔다.
두 장수는 한바탕 불꽃 튀는 접전을 벌였다.
두 말이 어지럽게 어우러지면 싸우기 4, 50여 함에 이르자, 고순은 역시 하후
돈을 당해 내지 못하고 말머리를 돌려 자기의 진영으로 달아나기 시작했다.
"이놈 게 섰거라!"
하후돈이 달아나는 고순을 그대로 놓아 줄 리가 없었다. 급히 말을 달려 고순
의 뒤를 바짝 쫓았다.
"큰일났다. 고 장군이 위험하다."
이를 본 고순의 부하 조성이 급히 활에 살을 메겨 당겼다.
"아앗!"
화살은 흐르는 별처럼 날아가 하후돈의 왼눈에 박혔다. 외마디 비명과 함께
그의 얼굴 반쪽은 선혈이 낭자했다. 하후돈이 안장 위에서 몸을 뒤로 젖힌 채
떨어지는가 했으나, 그 순간 등자를 힘차게 밟고 이를 악물고 한 손으로 자기
눈에 박힌 화살을 뽑았다. 그러자 화살에 박힌 눈알까지 함께 뽑혀 나왔다. 알
이 빠진 눈에서는 피가 쉴새없이 흘러내렸다.
하후돈은 눈알이 꽂힌 화살촉을 높이 쳐들면서 큰 소리로 외쳤다.
"이 눈알은 아버지의 정기요, 어머니의 피니 어찌 땅에 버리겠느냐?"
하후돈은 뽑혀 나온 그 눈알을 입에 넣고 씹어 삼킨 다음, 창을 추켜들고 나
는 듯이 말을 달렸다.
그 모양을 바라보던 조성은 간담이 서늘해졌다.
"네놈이로구나!"
하후돈은 피가 흘러내려 붉게 물든 입으로 외치고는 남은 한쪽 눈으로 조성을
노려보며 달려들었다.
조성은 하후돈의 눈알에 화살이 박히자 그가 말에서 굴러 떨어지기를 기다렸
었다. 그런데 뜻밖의 광경이 벌어져 얼이 빠진 상태였다.
어느 새 말을 달려온 하후돈의 창에 조성은 비명 지를 틈도 없이 목이 잘려
말 아래로 굴러 떨어졌다.
이같이 처참한 광경을 지켜 본 양편의 군사들은 하후돈의 담력에 기가 질려
모두 얼이 빠진 듯했다.
이때 고순이 다시 군사를 이끌어 하후돈을 덮쳤다. 하후돈이 아무리 용맹스러
운 맹장이라 하나 이미 눈알 하나가 빠져 나간 지경이었다. 왼쪽 눈에서는 피가
솟구쳐 나왔고, 한쪽 눈마저 피로 뒤덮이니 앞도 제대로 볼 수 없었다. 그런 터
에 고순이 대적하니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고순이 그런 하후돈을 추격하자 동생 하후연이 달려나와 형을 구해 겨우 달아
났다.
"이 기회를 놓치지 마라!"
승세를 탄 고순군이 숨쉴 틈도 주지 않고 공세를 펴니 하후돈은 크게 패하고
말았다.
하후연은 다친 형을 부축하여 이전.여건의 진영으로 갔다. 그러나 고순의 공
세가 이전.여건의 진까지 이어지니 그들은 제북까지 군사를 물렸다.
이때 여포가 군사를 이끌고 와 형세를 살핀 후 장요.고순을 격려했다.
"기세를 몰아 바로 뒤쫓아 섬멸하라."
여포는 기세를 올리며 곧장 소패까지 진격해 들어가 군사를 셋으로 나누었다.
고순과 장요의 두 부대는 유비.관우 진영을 공격케 하고 여포 자신은 장비와 맞
붙었다. 평소부터 미워하던 장비를 여포 자신이 치기 위해서였다. 그러자 관우.
장비도 말을 몰아 그들을 맞으러 나아갔고, 유비는 양군을 뒤에서 받치기로 했
다.
양군은 서로 마주 보며 어지러이 화살을 날리다가 다시 성 밖에서 힘을 다해
검을 부딪치며 싸우는데 어느덧 울려대던 북마저 찢겨 나갔다.
그러나 역시 여포군에 비해 유비군은 풍전등화와 같은 작은 세력이었다. 관
우.장비가 용맹스럽게 그들을 맞아 싸웠으나 여포가 군사를 나누어 유비군의 뒷
면을 치고 나오니 더 이상 버틸 수가 없었다.
앞뒤로 적을 맞은 유비군은 소패성을 향해 달아났다. 이때 겨우 수십기를 이
끈 유비도 소패성으로 향했다.
이를 발견한 여포가 소리치며 달려왔다.
"귀 큰 놈아, 게 섰거라!"
유비가 성문 앞 해자에 이르자 적교는 이미 들어올려져 있었다.
"적교를 내려라!"
유비가 외치자 성 안의 군사들은 문을 열고 적교를 내렸다. 유비가 말을 달려
다리를 건너려 할 때였다. 뒤쫓아온 여포가 질풍처럼 달려 함께 다리를 건너게
되었다. 이를 보고 성 안의 군사들이 활을 겨누었다. 그러나 유비와 여포의 사
이가 너무 가까워 화살이 조금만 빗나가도 유비를 맞힐 판이었다. 군사들은 활
을 쏘지 못하고 주저하고 있었다. 그렇다고 군사들은 성문을 닫을 수도 없었다.
그런 틈새에 여포가 이미 성문 안으로 들어섰다.
성 안으로 들어온 여포를 유비군의 20여 기가 맞아 싸웠으나 그의 방천화극이
한 번씩 춤을 출 때마다 몇 사람씩 한꺼번에 말 위에서 굴러 떨어졌다.
이 사이에 고순.장요의 군사들도 한꺼번에 성 안으로 밀어닥쳤다. 누대와 성
각은 순식간에 불을 토하며 소패성은 완전히 여포군에게 짓밟히고 있었다.
소패성 안의 유비군은 뿔뿔이 흩어져 한 목숨 보전하기에 급급했다.
유비는 미처 가솔들이 있는 집에 들를 사이도 없이 겨우 혈혈단신 서문으로
빠져 달아났다.
마침내 소패성을 점령한 여포는 유비의 집으로 가 보았다. 집 앞에 이르자 황
망한 중에도 미축이 나와 그를 맞이했다.
"대장부는 남의 처자에게 함부로 해를 가하지 않는다고 들었습니다. 오늘날
여 장군과 함께 천하를 다투는 사람은 조조이지 저의 주군 유현덕이 아닙니다.
주군 현덕은 장군이 지난날 원문에서 화극을 쏘아 원술로부터 구해 주신 은혜를
잊지 않고 있습니다. 결코 장군을 배반할 뜻은 추호도 없었습니다. 다만 근자에
부득이한 사정으로 조조에게 의탁하다 보니 이번 일이 생긴 다름입니다. 부디
장군께서는 이를 살펴 주시기 바랍니다."
여포는 미축의 정중하고도 간곡한 청을 듣자 감복하지 않을 수 없었다.
"현덕과 나는 오래 전부터 친교를 맺어 왔다. 어찌 그의 처자를 해치겠느냐.
현덕의 처자는 그대에게 맡길 터인즉 서주정으로 옮겨가 잘 지키도록 하라."
미축은 여포에게 고마움을 표하고 유비의 처자를 수레에 태워 서주로 옮겼다.
여포는 고순.장요 두 장수를 소패성에 남겨 성을 지키게 한 후 다시 군사를
이끌고 산동 연주 경계에까지 전진하며 유비군의 패잔병을 소탕했다.
한편 유비는 그를 따르는 수하 한 명 없이 홀로 허도로 향하고 있었다.
이때 손건 역시 간신히 소패성을 빠져 나와 그 역시 따르는 수하 없이 허도를
향하여 말을 달리고 있었다. 관우.장비는 겨우 수백의 군사를 거느리고 각기 산
속으로 몸을 피했다.
유비가 필마단기로 말을 달리고 있던 중 뒤에서 누군가가 뒤쫓아오는 사람이
있었다. 유비가 보니 그는 다름아닌 손건이었다.
"무사하시니 천만 다행이십니다."
손건은 유비를 보자 노상인 것도 잊은 듯 방성 통곡했다.
"나는 지금 두 아우의 생사도 모르고 가솔들마저 모두 잃었으니 이제 어찌했
으면 좋겠나?"
유비가 탄식하자 손건이 대답했다.
"한탄만 하실 때가 아닙니다. 우선 허도로 가 조조를 만나 장래를 도모해야
합니다."
유비가 생각해 보아도 달리 길이 없었다. 손건의 말을 좇아 산길을 택해 허도
로 향했다. 간신히 목숨만을 부지해 온 터여서 먹을 게 있을 리 없었다. 도중에
마을이 나타나면 끼니를 구해야 할 처지였다. 그러나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았음
에도 유비의 소문은 이미 곳곳의 마을에 널리 퍼져 있었다.
마을 사람들은 유비가 왔다는 말만 들어도 서로 다투어서 음식을 바치며 한
번 얼굴만이라도 구경하려고 그의 처소로 몰려들었다. 그들이 지나가는 길에는
마을 사람들이 쫓아 나와 길가에서 유비에게 절을 하며 눈물을 흘렸다.
그러던 어느 날 밤이었다. 날이 저물어 깊은 산 속에서 외딴집을 발견한 유비
가 그 집에 하룻밤 묵어 가기를 청하자 한 젊은이가 나와 절하며 맞았다.
어딘지 모르게 친근감이 드는 얼굴이었는지 유비가 절하는 그를 보고 물었다.
"그대의 성명은 무엇이오?"
"부끄러운 말씀이오나 저의 조상은 한실의 혈통을 이어받은 유씨로 소생은 유
안이라 하옵고 사냥으로 살아가고 있을 뿐입니다."
손건이 옆에서 유안에게 일러 주었다.
"이 어른은 유비 현덕 공이시오. 여포에게 패해 허도로 돌아가시는 길이오."
유안은 그 말을 듣더니 깜짝 놀라며 유비에게 큰절을 올렸다.
그날 밤.
유안은 고기를 구워 유비에게 대접했다. 잔뜩 시장했던 유비와 손건은 주인에
게 감사하며 물었다.
"무슨 고기인가?"
"이리 고기입니다."
유안의 말에 유비와 손건은 별다른 생각 없이 그 고기를 배불러 먹고 잠자리
에 들었다.
다음 날 아침이었다.
유비가 길을 떠나기 위해 말을 끌어내려 뒤꼍으로 가다 문득 부엌을 보니 한
젊은 여자의 시체가 보였다.
"이게 어찌 된 사연인가?"
유비가 깜짝 놀라 주인 유안에게 물었다.
유안이 멈칫거리며 입을 열지 않다가 유비가 재차 재촉해 물으니 그제야 눈물
을 흘리며 대답했다.
"소생의 처이옵니다. 평소 흠모해 온 유 예주께서 제 집에 이르렀으나 전란과
기근이 겹쳐 마땅히 대접해 드릴 음식이 없었습니다. 하는 수 없어 제 아내를
죽여 그 고기를 구워 바친 것입니다. 유 예주님을 속인 죄, 너그러이 살펴 주십
시오."
유비도 그 말을 듣고 유안의 지극한 정성에 마음이 아파 하염없이 눈물을 흘
렸다.
유비가 유안을 위로하며 권했다.
"어떤가, 나와 함께 가지 않겠는가?"
유비의 말에 유안이 거절하며 말했다.
"어디까지라도 주공으로 모시고 십사오나 노모가 계시니 후일을 기다릴까 합
니다."
유비는 하는 수없이 유안의 말대로 후일을 기약하고 치하의 말을 남긴 뒤 길
을 떠났다.
이것은 섬긴다는 것이 자기의 모든 것을 다 바치는 것을 뜻했던 그 시대의 일
이었다. 거기다가 아내란 남편의 소유물처럼 인식되었던 시대였기에 가능했다.
뿐만 아니라 기근과 전란이 이어진 극한 상황의 그 시대에서는 식인의 사례를
어렵지 않게 접할 수 있었다. 이런 모든 상황이 복합된 상태에서 일어난 일이라
반드시 과장이나 꾸며 댄 이야기로만 단정할 수는 없을 것이다.
유비는 다음 날 그곳을 떠나 양성 부근에 이르렀다. 이때 갑자기 저쪽에서 흙
먼지를 일으키며 달려오고 있는 한 떼의 군마가 보였다.
유비는 그 군사가 조조군임을 알고 마주 달려나갔다. 유비는 손건과 함께 조
조가 있는 중군기 쪽으로 향했다.
유비는 조조에게 소패성을 잃고 두 아우와 가솔들까지 적진에 남기고 겨우 목
숨만을 부지해 온 그간의 사정을 말하며 눈물을 흘렸다. 조조도 그 말에 동정의
눈물을 감추지 못했다.
유비가 조조에게 아내를 죽여 자신을 대접한 유안의 얘기를 들려 주자 조조는
크게 감격했다.
"노모를 잘 봉양할 수 있도록 이것을 전해 주시오."
조조는 금 1백 냥을 내려 손건에게 준 뒤 유안에게 전하게 했다.
조조는 다시 군사를 몰았다. 조조와 유비가 제북에 이르자 먼저 와 기다리고
있던 하후연이 조조군을 맞았다. 하후연은 형 하후돈이 눈을 잃어 병상에 누워
있음을 아뢰었다. 조조는 몸소 하후돈의 병상을 찾아가 위로한 뒤 그를 먼저 허
도로 보내 치료하게 했다.
조조는 탐마를 보내 여포가 어디 있는지 알아보게 했다. 오래지 않아 탐마가
돌아와 보고했다.
"여포의 세력을 확대하기 위해 태산의 산적들을 받아들여 연주와 그 밖의 여
러 고을을 침범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소패성은 어찌 되었는가?"
"현재 여포의 수한인 고순.장요가 지키고 있습니다."
"그럼 먼저 소패성을 탈환하도록 해야겠다."
조조는 즉시 조인에게 군사 3천을 주어 소패를 치도록 했다. 조조는 유비와
함께 산동의 경계로 나아가 소관의 산적들부터 치기로 했다.
소관에서는 태산을 근거지로 활동하고 있는 산적들의 수령인 손관.오돈.윤례
등이 수하 3만을 집결시켜 조조군을 가로막고 있었다.
"산악전이라면 우리들의 장기가 아닌가. 조조의 약졸 따위에게 질 수 없다."
그들은 이렇게 큰소리치고 있었다.
"허저, 저 도적들의 머리를 베어 오라!"
조조는 허저에게 명을 내렸다. 허저는 지체하지 않고 군사를 이끌어 적진을
향해 돌진했다.
허저가 달려오자 손관.오돈을 비롯한 네 장수들이 제법 기세 좋게 일제히 달
려나왔다. 네 장수를 맞아 허저가 필사적으로 싸웠다. 싸움이 길어지자 큰소리
치던 태산의 네 장수는 점차 허저의 지칠 줄 모르는 칼부림에 밀려나기 시작했
다. 그러더니 끝내 버티지 못하고 흩어져 달아났고, 이 모양을 본 조조가 군사
를 휘몰았다.
대장 넷이 꽁무니를 빼는 터에 도적 떼들이 조조의 대군을 당해 낼 리가 없었
다.
"달아나는 놈을 그대로 두지 말라."
조조군은 그들을 뒤쫓아 도륙했다. 시체는 계곡을 메우고 산봉우리를 붉게 물
들였다.
그때 조조 휘하의 조인은 사잇길을 골라 소패성에 이르러 뒷문을 공격하고 있
었다.
이때 여포는 서주에 돌아와 있었다. 연주에서 돌아오자마자 쉴 틈도 없이 소
패에서 파발이 달려왔다.
"소패가 조조군의 습격을 받고 있습니다."
"소패는 서주의 입구가 아닌가! 내 친히 나가 그들을 깨뜨려야겠다."
여포는 소패로 군사를 이끌어 가기 위해 준비를 서둘렀다. 여포는 진대부에게
성을 지키게 한 후 그의 아들 진등과 함께 출진키로 했다. 이들 부자에게 의지
하고 있는 여포의 마음은 변함이 없었다.
출진하기 전 진대부와 진등 부자는 으슥한 방에 들어가 소곤거렸다.
"아버님, 여포의 멸망도 이제 얼마 남지 않은 듯합니다."
아들의 말에 진대부가 입을 열었다.
"지난날 조 공께서 내게 이곳의 일은 모두 맡긴다고 하였으니, 빈틈없이 시행
해야 할 것이다."
"다행히 소자는 여포를 따라 소패로 가오니 밖의 일은 제가 알아서 처리하겠
습니다. 여포가 쫓겨 다시 이곳으로 도망쳐올지도 모릅니다. 그때 아버님은 미
축과 함께 성문을 닫고 열어 주지 마십시오."
"그러나 그때는 곁에 있는 너를 살려두지 않을 것이다. 이를 어찌했으면 좋겠
느냐?"
진대부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물었다.
"그 일은 조금도 걱정스러운 심려치 마십시오. 저는 그때쯤 여포 곁에 있지
않을 것입니다."
진등이 웃으며 대답했다.
"그러나 여포가 가솔과 심복 또한 많으니 내가 성문을 열지 말라고 하여도 그
들이 말을 듣지 않을 것이다. 이를 어찌하면 좋겠느냐?"
진대부가 아들을 향해 또 한 가지의 걱정거리를 털어놓았다. 진등은 여전히
웃음을 머금은 채 아버지를 안심시켰다.
"그 또한 소자가 세운 계획이 있습니다. 여포가 소패로 진병하기 전에 심복과
가솔들을 하비성으로 옮기도록 하겠습니다."
진대부.진등 부자가 말을 마치고 밖으로 나오자 진병 준비를 마친 여포가 잔
뜩 짜증을 냈다.
"뭘 하다 이제야 나타나는가?"
출진 준비도 끝나 밖에서 이미 군사들이 대열을 갖추어 대기하고 있는 중이라
여포가 진등에게 나무라듯 말했다.
"실은 가친께서 수비의 중임을 심려하고 계시어 그 일에 대해 의논을 하였습
니다."
여포는 미간을 찌푸리며 다시 물었다.
"진대부는 어찌하여 서주성이 걱정된다고 하는가?"
"서주는 형세가 4면으로 공격을 받을 수 있으며, 조조의 대군이 에워싸듯 포
진하고 있습니다. 만일 만에 하나라도 있는 힘을 다해 공격해 오는 조조군에게
포위당할 경우를 생각지 않을 수 없습니다. 성 안의 가솔들이나 금.은 그리고
군량을 미리 하비성에다 옮겨 놓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그렇게 해 두면 설사
서주성이 포위당한다 해도 하비에 군량이 있으므로 다시 이성을 취할 수 있을
것입니다. 주공께서는 이 점을 헤아리십시오. 가친께서는 이를 걱정하시고 계셨
습니다."
여포가 들으니 하나도 어긋남이 없는 말이었다. 의심은커녕 속으로 그들 부자
의 빈틈없는 생각에 감탄까지 해 가며 진등의 말을 따랐다.
"과연 원룡의 말이 옳소."
여포는 송헌.위속을 불러 당부했다.
"그대들은 내 가솔과 금은 병량, 군량미 등을 모두 하비성으로 옮기도록 하고
그곳을 지켜라."
여포는 서주와 하비성에 대한 만반의 준비가 끝났다고 여기고 소패로 향해 진
군하였다. 그때 급보가 또 전해졌다.
"소관이 위급합니다."
여포가 그 소식에 당황한 빛을 띠었다.
"그렇다면 소관부터 먼저 구해야 하지 않겠는가?"
그러자 진등이 여포에게 간했다.
"제가 먼저 가 형세를 살피고 오겠습니다. 장군께서는 뒤에서 서두르지 마시
고 서서히 진격하십시오."
"어찌하여 서둘지 말라 하는가?"
"소관의 방비는 진궁과 장패가 맡고 있으나 그 휘하 군사 대부분이 손관이나
오돈의 병졸들입니다. 그들은 원래가 산적들입니다. 이로운 일이 있으면 언제든
지 그쪽을 따르고 또 불리하면 흩어집니다. 그러니 제가 먼저 그곳의 움직임을
살핀 후 장군께서 오시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여포가 들으니 진등의 말에 일리가 있었다.
"잘 알겠소. 그렇게 하도록 하시오."
여포는 진등이 시킨 대로 행군을 느리게 하여 소관으로 향했다.
이보다 앞서 출발한 진등은 소관에 이르자 진궁.장패를 만나 전황을 물은 다
음 조용히 따지듯 일렀다.
"주공께서는 공들이 힘써 싸우지 않는다고 못마땅히 여기시어 이곳에 당도하
면 그 책임을 물어 벌을 내리시겠다고 하였습니다."
진궁과 장패는 뜻밖의 말에 얼굴을 마주 보다가 진궁이 입을 열었다.
"지금 조조가 이끄는 군세가 매우 크니 경솔히 나가 싸우다가는 낭패를 당할
뿐이오. 이곳은 우리가 목숨을 바쳐서라도 굳게 지킬 터인즉 주공께서는 소패를
지키는 것이 상책이라고 잘 말씀해 주시오."
진궁이 간곡한 어조로 진등에게 말했다. 진궁의 말이 하나도 틀림없고 여포군
에게는 실로 훌륭한 계책이 아닐 수 없었다. 가슴이 뜨끔해진 진등은 그저 건성
으로 고개만 끄덕이며 얼버무려 버렸다.
"잘 알겠소. 주군께 두 분 의견을 잘 말씀드리겠소."
그날 밤 진등이 관루에 올라 적진을 바라보니 조조의 군사들이 소관아래 가까
이까지 와 있었다.
진등은 마음 속으로 쾌재를 부르며 불빛이 관 위에 보이거든 즉시 공격하라는
내용의 서신을 화살에 매달아 조조 진영으로 쏘아 보냈다.
이튿날, 진등은 진궁과 작별하고 말을 달려 여포에게 돌아왔다. 진등이 오기
를 기다리고 있던 여포가 물었다.
"그곳의 형세가 어떻소?"
진등이 짐짓 미간을 찌푸리며 답했다.
"우려했던 대로였습니다. 손관.오돈은 원래 도적 떼들이라 염려했던 대로 소
관을 조조에게 바치려 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진궁에게 일러 단단히 지키도록
해 두었습니다. 장군께서는 급히 출발하시어 어두워지면 진궁과 힘을 합해 손
관.오돈을 치시고 소관을 구하십시오."
"알겠소. 공이 아니었더라면 소관을 조조에게 내주었을 뻔했소."
여포는 진등을 의심하기는커녕 공로를 치하하여 진등을 다시 소관으로 보냈
다.
"공은 다시 소관으로 가시오. 그리고 어두워지면 진궁과 함께 성루에서 횃불
을 올리고 건문을 열어 두시오, 횃불을 신호로 하여 내가 성으로 들어가겠소."
진등은 모든 일이 생각했던 대로 되어 가자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서둘러 떠
난 진등은 소관에 당도하자마자 급히 말에서 뛰어내려 진궁에게 숨을 헐떡이며
말했다.
"오늘 조조의 대군이 갑자기 공격지를 바꾸어 서주로 향했소. 속히 군사를 거
느려 서주로 향하라는 주군의 명입니다. 장군이 조조군의 후미를 치면 주군께서
는 군사를 내어 선봉을 쳐 앞뒤에서 적을 무찌르자는 말씀이셨소."
"그럼 이 소관은 어찌할 작정이오?"
"소관보다 서주성이 더 위급하오."
진궁은 의아한 마음이 들어 물었으나 진등은 그런 진궁에게 대답도 없이 재촉
만 할 뿐이었다.
주군의 명을 거역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하는 수 없이 진궁은 소관을 버리고
군사들을 점고하여 서주성을 향해 진군하기 시작했다.
성채는 텅 비다시피 했다. 진등은 자신의 계책대로 진궁이 서주를 향해 출발
한 것을 확인한 후 성루에 불을 질렀다. 봉화불이 오르는 것을 본 여포는 소관
을 향하여 급히 군사를 몰고 갔다.
이때 진궁 또한 서주를 향해 급히 군사를 몰아 가고 있었으니 양 군사는 도중
에서 맞닥뜨릴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칠흑 같은 어둠이 온누리를 뒤덮고 있는
터여서 양군은 서로를 조조군으로 오인했다. 한바탕 처절한 싸움이 일었다. 자
기 편인지 적인지 살필 겨를도 없이 뒤엉켜 싸웠다.
이것을 본 것은 여포뿐만이 아니었다. 지난 밤에 진등이 보낸 화살에 매단 편
지를 받아 보고 조조 또한 진등의 신호를 기다리고 있던 참이었다. 조조는 성루
의 봉화불을 보고 즉시 군사를 이끌고 소관성으로 달려갔다.
조조는 소관성으로 가는 도중 아군끼리 싸우는 여포군을 닥치는 대로 베고 지
르며 급습했다.
여포는 새벽녘까지 싸우다 그제야 밤새도록 싸운 상대가 조조의 군사가 아니
고 진궁의 군사임을 알고 급히 군사를 수습했다. 그러나 때는 이미 늦었다. 손
관을 비롯한 태산의 도적들은 뿔뿔이 흩어져 달아나 버렸고, 아군끼리의 싸움에
서 이미 수많은 사상자를 냈다. 거기다 조조의 급습에 의한 사상자마저 겹치고
보니 그 수가 헤아릴 수조차 없을 지경이었다.
여포는 망연자실했다. 탄식할 겨를도 없이 당장 서주가 걱정이 되었다.
"우선 서주로 돌아가 의논하도록 하자."
여포는 그렇게 말하고 군사를 수습하여 진궁과 함께 서주로 향했다.
자기의 성이었기에 여포가 마음놓고 성문까지 접근했으나 이게 어찌된 일인
가. 성루 위에서 비 오듯 화살이 쏟아지는 것이 아닌가!
"이놈들, 이게 무슨 짓이냐! 너희들의 주인 여포다."
여포가 성을 향해 버럭 소리를 질렀다. 그러자 쏟아지던 화살이 그치더니 망
루에 한 사람이 나타나 소리쳤다.
"이 성은 원래 우리 주공의 성이었는데 네놈이 도적질한 것이다. 이제 당연히
옛 주인의 손으로 돌아갔으니 너는 다시는 이 성에 들어올 생각을 하지 말라."
여포가 눈을 부라리며 망루를 쳐다보았다. 그는 바로 미축이었다.
"진대부는 어디 있느냐?"
"내가 이미 죽였다."
미축이 거짓으로 대답했다. 진등이 여포와 함께 있으니 그의 몸을 보호하기
위해 거짓으로 대답한 것이었다. 여포는 그제야 진궁을 돌아보며 물었다.
"진등은 어디 있는가?"
여포의 물음에 진궁은 어이가 없다는 듯 입을 열었다.
"장군께서는 아직도 헤아리지 못하고 계십니까? 이 모든 일들이 그 간사한 놈
이 꾸민 일입니다. 어찌 이곳에 남아 있겠습니까?"
"그럴 리가 없다. 진등을 찾아보라."
여포는 군사들에게 명해 진등을 찾아보게 했으나 그는 이미 그림자도 보이지
않았다."
"으음, 내 이놈을 잡아 효수하리라."
그제야 진등의 간계를 깨달은 듯 여포는 이를 갈았다.
"주공께서는 급히 소패성으로 가시는 것이 좋겠습니다. 고순.장요 두 장수가
있으니 그곳에서 조조를 막는 편이 낫겠습니다."
여포가 생각해도 그 길밖에는 다른 방도가 없었다. 여포는 진궁의 말을 좇아
소패로 말을 몰았다. 그렇게 한참을 달리던 여포는 맞은편에서 달려오고 있는
한 떼의 군마와 만났다. 뜻밖에도 소패성을 지키고 있어야 할 고순.장요의 군사
들이었다.
놀란 것은 여포뿐만이 아니라 고순.장요도 매한가지였다.
여포 쪽으로 달려온 고순.장요도 영문을 알 수 없다는 듯이 물었다.
"아니, 주공께서 어인 일이십니까?"
"너희들이야말로 대체 어찌하여 소패도 지키지 않고 군사를 몰고 이리로 오는
가?"
"진등이 와서 이르기를, 주공께서 적에게 포위당해 몹시 위급하니 속히 가서
구출하라기에 이렇게 오는 길입니다."
진궁이 입을 열었다.
"이 모두가 진등 그놈이 꾸며 낸 일입니다."
여포는 화가 치솟아 할 말을 찾지 못할 지경이었다. 다시 한 번 이를 부드득
갈며 외쳤다.
"내 기어이 이놈의 고기를 씹고야 말리라!"
여포는 맹렬한 기세로 소패를 행해 말을 달리기 시작했다. 여포가 소패로 달
려와 보니 성루 높이 벌써 조조의 기가 나부끼는 가운데 진등이 매우 흡족한 표
정으로 펄펄 뛰는 여포를 굽어보고 있지 않은가.
이미 진등과 내응한 조조는 고순.장요가 성을 비울 줄 알고 그 틈에 성을 취
하도록 조인을 매복시켜 두었던 것이었다.
치솟는 화를 억누를 수 없었던 여포가 진등을 향해 대뜸 욕부터 퍼부었다.
"이 배은망덕한 역적 진등아, 내가 네놈의 고기를 씹으러 왔다."
진등이 그런 여포를 손가락질하며 꾸짖었다.
"나는 원해 한나라의 신하이다. 어찌 너 같은 역적을 섬길 수 있겠느냐?"
여포가 군사들을 둘러보며 소리쳤다.
"모든 군사는 죽기로 작정하고 이 성을 빼앗아라! 물러서는 자는 내가 목을
베리라!"
여포가 단숨에 소패성을 무너뜨릴 기세로 공격을 서둘 때였다. 뒤쪽에서 돌연
히 함성이 일면서 한 떼가 인마가 달려들었다.
얼른 보아도 군사의 수도 많지 않은데다 잡군으로 편성된 혼성군임을 알 수
있었다. 그러나 앞선 장수는 고슴도치 같은 수염에다 고리눈을 부릅뜬 장비였
다.
군세가 허술한 것을 보자 고순이 앞장 서 말을 달려 장비를 맞았다. 그러나
고순이 장비를 당할 리 없었다. 몇 합을 부딪친 뒤 고순이 주춤거리고 물러서는
사이에 장비의 사모창이 춤을 추자 피보라가 일었다.
이를 보고 여포가 말머리를 돌려 장비쪽으로 달려갔다. 장비군과 여포군이 뒤
엉켜 한바탕 치열한 싸움을 벌이는데 멀리서 또 한 차례 거센 함성이 일었다.
조조가 이끄는 대군이었다. 여포는 군사가 얼마 되지 않는 장비군을 단숨에
쳐부술 작정이었으나 조조의 대군이 밀려오자 잠시 멈칫거렸다. 여기서 더 싸우
다가 소패성의 군사까지 등 뒤에서 몰려 나오면 그야말로 앞뒤로 적을 맞는 것
이 될 수밖에 없었다. 여포는 사태가 그 지경에 이른 것을 알자 군사를 이끌어
동쪽으로 달아났다. 조조군이 급히 여포의 뒤를 쫓으며 닥치는 대로 도륙했다.
여포는 그들의 추격을 벗어나기 위해 힘을 다해 달렸다. 간신히 조조의 추격
을 벗어났을 때는 말도 사람도 기진맥진해 있었다. 여포가 겨우 한숨을 돌리려
할 즈음이었다. 갑자기 앞쪽에 있는 언덕 위에서 한 떼의 인마가 앞을 가로막았
다.
"여포는 어디를 가려느냐? 내 칼부터 받아라!"
앞장 선 장수는 긴 수염을 휘날리며 청룡언월도를 비껴든 관우였다. 여포는
간담이 서늘해질 수밖에 없었다. 이미 장비한테 혼이 났던 터에 범 같은 장수
관우를 만났으니 기가 꺽이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여포 또한 전장에서 단련
된 맹장이 아닌가. 화극을 들어 관우의 청룡도와 맞 부딪쳤다. 그러나 관우와
싸우며 지체하다가 조조와 장비군이 곧 뒤쫓아 올 것이므로, 짐짓 싸우는 체하
며 혈로를 뚫기에 바빴다.
관우에게 몇 합 거센 공격으로 뒷걸음치게 한 뒤 길을 열자 여포는 잽싸게 말
을 몰았다.
진궁과 함께 간신히 길을 열어 달아날 곳은 이제 마지막 남은 하비성 뿐이었
다. 때마침 하비성에서 후성이 군사를 이끌어 와 뒤따르는 관우의 추격을 막아
주었다. 그 틈에 여포와 진궁은 무사히 하비성 안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지난날 소패성에서 각각 흩어졌다 다시 만나게 된 관우와 장비는 서로 얼싸안
고 눈물을 흘리며 재회를 기뻐했다.
"나는 그 동안 해주의 길가에서 형님의 소식을 물어 보며 머물고 있었네. 그
러나 형님께서 조 공과 함께 여포를 치러 오신다는 말을 듣고 달려나온 걸세."
관우가 그동안 지낸 이야기를 하지 장비도 입을 열었다.
"저는 망탕산에 들어가 있었습니다. 오늘에야 소식을 듣고 나오는 길입니다."
두 사람은 부하들을 거느리고 유비를 만나러 조조의 본진으로 향했다. 유비를
만난 관우와 장비는 엎드려 절하며 울었다. 유비도 두 아우의 손을 잡아 일으키
며 기쁨의 눈물을 흘렸다.
유비는 두아우를 이끌어 조조를 뵙게 했다. 조조가 두 사람을 반갑게 맞으며
함께 서주성으로 들도록 했다.
유.관.장 삼 형제가 서주성에 이르자 미축이 눈물로 그들을 맞았다. 유비는
가솔들까지 안전하다는 것을 알게 되자 더욱 기뻐하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이때 진등 부자가 나와 조조를 맞으니 조조는 그들의 노고를 침이 마르도록
칭송하며 기쁨을 가누지 못했다.
조조는 성대하게 잔치를 베풀었다. 자신은 가운데에 앉고 진대부 부자를 오른
쪽에 앉혀 그 공을 치하했으며, 왼쪽에는 유비를 앉게 했다.
잔치가 끝나자 조조는 진대부에게 열 고을의 녹을 더 보태 내리고 진등에게는
복파장군의 벼슬을 내렸다.
진궁의 의각지게 여포는 딸을 등에 업고 탈출을...
하비성을 포위당한 여포의 신하 진궁은 여러 모로 진언을 하지만 여포의 우유
부단함으로 치일피일 결정을 미룬다. 결국 원술에게 응원군을 청하자 그의 딸을
인질로 보내라 하고, 여포는 딸을 등에 업은 채 한밤중을 이용해 적진을 통과하
려 한다.
서주를 점령한 조조는 이제 하비성을 공략할 일을 의논했다. 이번에야말로 여
포를 처치하지 않고는 허도로 돌아가지 않겠다고 마음 속으로 굳게 다짐하고 있
었다.
여러 모사들 가운데 먼저 입을 연 사람은 정욱이었다.
"여포에게는 이제 하비성밖에 없습니다. 너무 급히 공격해 들어가면 지모가
부족한 여포는 어떤 무모한 짓을 저지를지 모릅니다. 가장 경계해야 할 것은 그
가 원술과 힘을 합치는 일입니다. 그러니 날랜 군사를 보내 회남으로 가는 길을
지키게 했다가 그들의 연락을 중도에서 끊어 버리도록 해야 합니다. 또한 산동
에는 아직 장패와 손관의 무리들이 있습니다. 그들도 방심해서는 아니 됩니다."
조조는 정욱이 말을 듣고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공의 생각이 바로 내 생각이오. 내가 우려하는 것도 여포와 원술이 결탁하는
것이오."
조조는 잠시 말을 중단했다가 유비를 돌아보며 다시 말을 이었다.
"나는 산동 쪽의 길목을 방비하며 하비성을 치겠소. 현덕 공은 회남으로 통하
는 길을 맡아 주셨으면 하오."
조조의 말에 유비는 쾌히 응낙했다.
"승상께서 내리신 영인데 어찌 감히 거역하겠습니까?"
이튿날 유비는 미축과 간옹을 서주에 남겨 두고 관우와 장비, 그리고 손건을
데리고 회남으로 가는 길목을 지키기 위해 떠났다.
조조도 산동의 장패와 손관 무리를 방비하면서 하비성 정벌을 위해 출발했다.
유비는 회남 경계에 이루자 요로의 지세를 고려하여 방책을 만들고 관문을 설
치했다. 통나무로 경비소를 세웠으며, 망루를 만들어 대로는 물론, 산골짜기의
오솔길까지도 감시하게 하였다.
한편 하비성의 여포는 식량도 넉넉한데가 깊은 사수가 성을 둘러싸고 있어 안
심하고 있었다. 어쩌면 자연이 만들어 준 요해만으로도 넉넉히 성을 지켜 낼 수
있다고 생각했다. 여포의 느긋함을 보다못한 진궁이 여포에게 권했다.
"조조군은 지금 먼길을 와 싸움으로 밤낮을 지새운 터입니다. 아직 영채도 제
대로 갖추지 못했습니다. 거기다가 날씨마저 춥습니다. 당장 역습을 가한다면
일로써 노를 치는 '이일대로'가 될 것입니다. 즉 쉬면서 기운을 차린 우리 군사
가 지친 적을 치면 병법대로 반드시 크게 이길 수 있습니다."
그러나 진궁의 간곡한 간언에 여포는 머리를 저었다.
"우리 군사는 이미 여러 번 패퇴한 뒤라 아직 사기가 오르지 않았소. 좀더 그
들이 공격해 오는 것을 기다렸다가 단번에 치고 나가면 조조군의 태반은 사수에
빠뜨릴 수 있을 것이오."
진궁이 성을 나가 싸울 것을 두 번 세 번 거듭 권해도 여포는 끝내 진궁의 계
책을 물리쳤다.
여포는 또 한 번의 좋은 기회를 헛되이 버리고 만 것이다.
그러는 사이 며칠이 지나자 조조의 군사들은 책을 두르고 망루를 세우며 튼튼
히 진영을 내렸다. 굳건한 영채를 세워 자리를 잡게 되자 조조는 무슨 생각에서
인지 무리를 거느리고 성 아래로 와 여포 보기를 청했다.
"여 장군은 나와서 내 말을 들으라!"
조조가 그를 만나기를 원한다고 하자 여포가 성벽 위로 올라 조조를 내려다보
았다.
조조는 여포를 보자 짐짓 부드럽게 입을 열었다.
"듣자하니 봉선이 다시 원술과 사돈이 되려 한다기에 사실인가 알아보기 위해
여기까지 온 것이오. 원술로 말하면 자칭 황제라며 존호를 써 대죄를 범했소.
공은 이전에 역적 동탁을 친 큰 공이 있거늘 어찌하여 이전의 공을 버리고 스스
로 역적이 되려고 하시오? 이제 성이 무너지는 날이면 그때는 후회해도 늦을 것
이오. 뿐만아니라 후세까지 역적의 악명을 남기게 될 것이오. 공이 일찍 항복하
여 한실을 받듣다면 나와 함께 제후의 자리를 그대로 지킬 수 있을 것임을 명심
하시오."
조조가 엉뚱하게도 원술과의 혼인을 들먹이며 여포를 달래려 했다. 조조가 감
언이설로 그를 사로잡을 궁리를하고 있다는 걸 깨닫지 못한 여포는 마음이 흔들
렸다.
그때까지 묵묵히 듣고만 있던 여포가 대꾸했다.
"잠시 생각해 본 뒤에 알려 주겠소. 승상은 잠시 군사를 물려 주시오."
이때 옆에 있던 진궁이 여포의 뜻밖의 태도에 놀라 펄쩍 뛰더니 조조를 내려
다보며 소리쳤다.
"조조 이 간사한 도적놈아, 쓸데없이 혓바닥만 놀리지 말고 썩 물러가라!"
진궁은 그 말과 함께 재빨리 활에 살을 재어 조조를 향해 쏘았다.
화살은 소리를 내며 날아와 조조의 투구에 맞고 부러졌다. 조조는 매섭게 눈
꼬리를 치켜올리며 욕설을 퍼부었다.
"진궁, 네놈의 목을 베어 흙발로 짓밟을 것이다!"
여포를 힘들이지 않고 항복시키려던 계획이 수포로 돌아가자 조조는 즉시 공
격 명령을 내렸다. 조조의 군사가 성으로 공격해 오자 진궁은 여포에게 계책을
내었다.
"조조의 군사는 먼 곳에서 와 오래 버티지 못할 것입니다. 장군께서는 마보군
을 이끌고 성 밖으로 나가 진을 치십시오. 저는 나머지 군사를 거느려 성을 지
키고 있다가 조조가 장군을 공격하면 군사를 이끌고 그 뒤를 치겠습니다. 또 그
가 만약 성을 공격하면 장군이 그의 뒤를 치십시오. 이렇게 한다면 열흘이 지나
지 않아 조조군의 군량이 바닥날 것입니다. 그때 힘을 합해 일시에 저들을 치면
어렵지 않게 섬멸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것이 병법의 의각지세로 지금 조조군
을 물리칠 유일한 방책입니다."
여포가 들으니 그럴 듯한 말이었다. 금세 전의가 일어 즉각 성밖으로 나가 싸
울 준비를 하도록 했다. 날씨가 추워 장병들은 모두 전포 속에 솜옷을 입고 나
가야 했다.
여포도 내실로 들어가 아내 엄씨에게 속옷과 털옷 등 추위에 견딜 수 있는 옷
을 준비하라고 일렀다.
엄씨는 남편의 거동을 수상쩍게 여기며 물었다.
"어디를 가실 작정이십니까?"
"성 밖으로 나가 조조군과 싸울 작정이오."
여포는 그렇게 말하며 진궁이 말한 의각지세의 이야기를 들려 주었다. 그러자
엄씨가 놀란 얼굴로 펄쩍 뛰었다.
"저희만 성에 남겨 두고 당신 혼자 나가셨다가 무슨 일이라도 당하시면 첩이
어찌 당신을 다시 섬길 수 있겠어요?"
엄씨가 눈물을 이렇게 말하자 여포의 마음은 또 흔들렸다. 여포가 그렇게 우
물쭈물하고 있는 사이 사흘이나 흘러갔다.
진궁이 다시 찾아왔다.
"하루라도 빨리 성밖에 나아가 의각지세를 만들지 않으면 반드시 어려운 지경
에 빠지게 될 것입니다."
"진궁, 나 또한 그렇게 생각하나 아무래도 멀리 나가 싸우는 것보다는 성에서
굳게 지키는 것이 이로울 것 같소."
여포가 주저하고 있자 진궁이 새로운 소식을 전하며 채근했다.
"요즈음 허도 쪽에서 수많은 군량을 조조 진영으로 가져오게 했다고 하는데
그들이 곧 도착할 것이라 합니다. 장군께서 병력을 이끄시면 그 양도(군량 수송
도로)도 끊으실 수 있습니다. 이것이야말로 일거양득이 아닐 수 없습니다. 조조
군에게는 치명적인 타격이 될 것입니다."
여포도 그 말에는 마음이 움직였는지 진궁의 말에 따르기로 했다.
"음, 과연 모책이오."
여포는 다음 날 군사를 이끌어 성 밖으로 나가기로 하고 준비를 단단히 하게
했다.
그날 밤이었다.
여포는 초선이 있는 방으로 갔다. 초선은 휘장을 내리고 훌쩍거리고 있었다.
여포가 어찌된 일이냐고 묻자 초선은 해당화가 비에 젖은 둣 발갛게 부은 눈으
로 눈물을 흘리며 대답했다.
"이제 다시는 이 세상에서 장군을 뵙지 못할 것이라 생각하니 울어도 울어도
한없이 슬플 따름입니다. 앞으로 누굴 의지하며 살아갈까요?"
"무슨 말을 하느냐, 나는 이대로 건재하지 않느냐? 이 성에는 아직 겨울을 보
낼 만한 양식도 있으며 1만이나 되는 군사도 있다."
"저도 부인께 들어 알고 있습니다. 장군께서는 저희들을 버리고 성 밖으로 나
가신다지요?"
"성 밖을 에워싸고 있는 조조군을 치기 위해 나가는 것이다."
"장군께서 나가시고 없는 성을 진궁이나 고순이 어찌 지킬 수가 있겠습니까?
만약 이 성이 무너진다면 그때는 후회해도 소용 없는 일입니다. 예전에 장안에
서 장군과 헤어졌을 때는 다행히 방서가 이 몸을 숨겨 주어 장군과 만날 수 있
었으나, 이제 또 헤어지다니! 나가시려거든 부디 이 몸은 잊어 주시기 바랍니
다."
초선이 여포의 가슴에 눈물진 얼굴을 파묻으며 말했다.
초선의 애처로운 울음소리에 싸우기로 작정했던 여포의 마음이 또다시 흔들리
기 시작했다.
"알았으니 슬퍼하지 마라. 성 밖으로는 나가지 않겠다. 나에게 화극과 적토마
가 있는 한 천하의 그 누구도 이 여포에게 덤빌 수 없다."
여포는 이렇게 말한 후 초선과 함께 잠자리에 누워 밤을 지냈다.
이튿날, 여포도 조금 계면쩍었던지 진궁을 불러 목소리를 죽여 가며 말했다.
"내가 알아본 바로는 허도로부터 군량미가 온다는 것은 아무래도 거짓인 것같
소. 조조가 워낙 간계가 많은 자라 나를 밖으로 꾀어 내기 위해 거짓 소문을 퍼
뜨린 것임에 틀림없소. 경솔히 움직이지 않는 것이 좋겠소."
진궁은 여포의 말을 듣자 이제는 더 이상 그의 마음을 돌릴 수 없다고 생각했
다.
그는 밖으로 나오며 홀로 탄식했다.
'아아, 이제 우리는 죽어도 묻힐 땅조차 없겠구나!'
그로부터 여포는 밤낮을 가리지 않고 술에 빠져, 초선과 아내 엄씨의 방을 넘
나들며 지냈다. 진궁의 말을 물리치기는 했으나 무거워진 마음의 근심을 이렇게
술로 달래고 있었다.
어느 날 모사 허사와 왕해가 찾아왔다.
두 사람 모두 진궁의 부하이므로 여포가 경계하며 물었다.
"무슨 일로 왔느냐?"
왕해가 먼저 입을 열었다.
"듣자오니 회남의 원술은 그 후에도 세력이 막강하다 합니다. 장군께서는 이
전에 그와 혼인을 하기로 한 적이 있으니 도움을 청해 보십시오. 만약 그의 구
원군만 온다면 우리가 앞뒤에서 공격하여 조조군을 쉽게 깨뜨릴 수 있을 것입니
다."
여포는 그 말에 귀가 번쩍 뜨이는 듯했다. 어둠 속에서 한 줄기의 광명을 발
견한 듯 곧 원술에게 보내는 글을 써 두 사람을 가게 했다.
이 때 허사가 여포에게 청했다.
"병력을 동원하여 적진을 뚫고 나아갈 길을 열어 주었으면 합니다."
여포는 장요와 학맹 두 장수를 불러 각각 5백여 기를 이끌게 하여 회남의 경
계까지 호송토록 했다.
그날 밤 이경, 장요는 5백여 기를 이끌어 앞에서 호위하고 학맹은 나머지 5백
여 기를 거느리며 뒤를 따랐다. 장요와 학맹은 감쪽같이 조조의 포위망을 뚫었
다.
유비가 지키는 길목을 지날 무렵 군사들이 그들을 발견하고 뒤쫓았으나 아슬
아슬하게 그들의 추격을 뿌리칠 수 있었다.
학맹은 회남으로 그들을 호위하며 갔으나 장요는 다시 되돌아오다가 유비의
군사들에게 길이 막혔다.
"적장은 어디로 가려 하는가?"
귀에 익은 듯한 깨진 징 소리 같은 굵직한 목소리였다.
그는 바로 다름아닌 관우였다. 이때였다. 하비성 쪽에서 고순과 후성이 장요를
돕기 위해 한 떼의 인마를 거느리고 달려나왔다.
관우와 장요가 외길에서 부딪쳐 한바탕 싸움이 일어날 순간이었다. 그러나 구
원병이 달려나오자 장요는 그들 구원군 속에 뒤섞여 하비성으로 달아났다.
관우는 내심 장요와는 싸우고 싶지 않은 터인지라 하비성 쪽으로 치닫는 그들
을 짐짓 뒤쫓지 않았다.
그 무렵 원술은 수춘성에 머물고 있었다. 지난번 조조에게 빼앗겼던 수춘성을
조조가 허도로 회군할 때 다시 탈환하여 그곳을 근거지로 삼고 있었다.
여포의 사자 허사와 왕해가 찾아와 혼사 이야기를 꺼내자 다 듣기도 전에 지
난날의 일이 생각나 우선화부터 냈다.
"조조군의 공격으로 위급한 지경에 이르니 또 혼사 이야기를 꺼내는가. 지나
날 나의 사자까지 죽이면서 나와의 혼인을 거절하지 않았더냐? 네 주인은 어찌
그리 뻔뻔스러우냐?"
"지난 일은 조조의 간계에 빠졌던 탓이니 폐하께서는 통촉해 주시옵소서."
허사는 천자를 자칭하는 원술에게 '폐하'라고 부르며 아첨했다. 허사가 다시
말을 이었다.
"이제 폐하께서 지난 일 때문에 우리를 구해 주시지 않는다면 이는 입술이 밉
다 하여 이가 외면하는 격이 될 것이옵니다. 이는 곧 순망치한의 화가 될까 근
심스러우니, 폐하께도 복이 되지 못할 것입니다."
"봉선이 번복이 심해 도무지 믿을 수가 없다. 지난번에도 말한 바 있으나, 먼
저 그 딸을 보내면 그 다음에 출병하겠다고 전하라."
원술은 조조가 여포를 치고 나면 다음에는 자기를 향해 군사를 이끌것임을 알
고 있었다.
급히 군사를 보내 조조를 꺾어야 할 처지였으나 원술은 지난 일만을 되새기며
작은 감정을 삭이지 못하고 출병을 뒤로 미루었다.
그러나 허사와 왕해는 원술이 여포의 말을 물리치지 않는 것만으로도 다행스
럽게 여겼다. 두 사람은 원술에게 절을 하고 물러난 뒤 서둘러 길을 떠나 돌아
왔다.
그들은 유비가 지키는 길목을 빠져 나가기 위해 밤이 되기를 기다렸다. 이경
무렵이 되자 유비의 영채 곁을 발소리를 죽이며 허사와 왕해가 먼저 지나갔다.
이어 그들은 호위하던 학맹과 그의 수하들이 지나가려 할 때 우렁찬 고함 소
리가 들려 왔다.
"어디를 함부로 지나가려 하는가?"
순식간에 한 무리의 군사가 달려나와 길을 가로막았다. 바로 장비였다. 학맹
이 칼을 빼들고 장비와 어우러져 싸우려 했다. 그러나 단 1합에 사로잡히는 몸
이 되고 말았다.
그를 따르던 군사들도 장비가 거느린 군사들에게 모두 사로잡히거나 목숨을
잃고 말았다.
허사와 왕해는 그 틈에 간신히 몸을 피해 하비성으로 도망쳤다.
그날 밤, 장비는 비록 사자는 놓쳤으나 사로잡은 학맹을 유비에게 인도했다.
유비는 사로잡은 학맹을 조조에게 끌고 갔다.
조조가 학맹을 문초했다.
"너는 무슨 일로 원술에게 다녀오느냐?"
학맹은 체념한 채 허사와 왕해를 보호하여 원술에게 다녀온 전후 사정을 실토
했다.
조조는 학맹의 자백을 듣고 크게 노하며 진문 앞에서 학맹의 목을 효수했다.
"만약 이후에 방비를 허술히 하여 여포나 그의 군사를 놓치는 자가 있으면 군
율에 따라 목을 베리라!"
조조는 각 영채에 이같이 서릿발 같은 영을 내렸다. 모든 장졸들은 조조의 추
상 같은 영에 아연 긴장했다.
유비도 관우.장비를 불러 다시 한 번 조조의 영을 깨우쳤다.
"우리가 회남으로 통하는 정로를 지키고 있으니 쥐새끼 한 마리도 놓쳐서는
아니 될 것이다. 군령을 어김에는 멀고 가까움이 없이 그 죄를 물을 것이다."
그러자 장비가 볼멘소리를 했다.
"내가 학맹을 생포하여 바쳤건만 상을 주기는커녕 도리어 엄한 군령으로 사람
을 협박만 하니 나는 매우 아니꼽소."
유비가 투덜대는 장비를 타일렀다.
"수많은 대군을 거느린 조 승상이 아닌가. 엄한 군량이 아니고는 이들을 거느
릴 수 없다. 아우는 부디 함부로 경거망동하지 않도록 하게."
관우.장비는 유비에게 방비에 허술함이 없도록 지키겠다고 다짐한 뒤 물러났
다.
한편 하비성에 돌아온 허사와 왕해는 원술의 말을 전하기 위해 곧 여포를 만
났다.
"원술은 따님이 먼저 수춘성에 도착한 연후라야 출병하겠다 합니다."
여포는 허사의 말에 걱정스런 얼굴로 되물었다.
"조조가 성을 에워 싸고 있으니 어찌 딸아이를 보낼 수 있겠느냐?"
허사가 여포의 물음에 답했다.
"이미 학맹이 붙잡혔으니, 조조는 필시 우리들의 내막을 알아 내어 미리 손을
쓰고 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장군께서 손수 이 포위망을 뚫지 않으면 누가 뚫
을 수 있겠습니까?"
허사의 말에 여포도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물었다.
"오늘 밤이라도 당장 딸아이를 보내는 것이 어떻겠는가?"
"아니 됩니다. 오늘은 흉신의 진일로 흉살이 든 날입니다. 내일이 길일이니
내일 술해시 사이에 나가시도록 하십시오."
허사의 말에 여포는 다음 날 딸을 원술에게 보내기로 했다. 여포는 장요와 고
순에게 군사 3천여 기를 주며 말했다.
"내가 직접 2백여 리 밖까지 딸아이를 데려다 주겠다. 그 다음에는 그대들 둘
이서 수춘성까지 데려다 주고 오도록 하라."
이튿날 밤 이경 무렵이 되자 여포는 딸에게 솜옷을 입히고 그 위에 갑옷을 입
힌 후 자기 등에 업고 단단히 잡아 맸다. 이어 방천화극을 추켜들고 적토마에
올라 성문을 연 후 앞장 서서 달렸다.
차가운 달은 교교히 사수의 강물을 비치고 있었다.
여포의 뒤를 장요.고순이 이끄는 3천여 기의 군사가 발걸음을 죽이며 뒤따르
고 있었다. 천하의 맹장 여포고 사랑하는 딸을 등에 업은 몸인지라 단 한 사람
이나마 적군의 시선이 두려웠다.
조조의 진을 지나 이들이 유비의 영채에 이르렀을 때였다.
돌연 북 소리, 징 소리와 함께 크게 함성이 울리더니 횃불이 대낮처럼 밝혀진
가운데 관우와 장비가 길을 막으며 소리쳤다.
"멈춰라, 네놈들은 어디로 가는 누구의 군사들이냐?"
여포는 못 들은 체하고 고개를 외면하 채 말을 달렸다. 그들과 싸우다 딸이
다치기라도 하면 큰일이었다. 될 수 있는 한 싸움을 피하면서 다만 벗어날 길을
찾아 달아나기에 바빴다.
그때 유비가 한 무리의 군사를 이끌고 달아나는 여포를 알아보고 달려들었다.
그러자 장요와 고순이 거느린 군사와 유비군 사이에는 일대 혼전이 벌어졌다.
마음대로 싸울 수로 없고, 겹겹이 둘러싼 포위망을 뚫을 수도 없게 된 여포는
참으로 진퇴양난이었다.
이때 다른 길을 지키고 있던 조조군의 서황과 허저까지 합세해 왔다.
"여포를 놓치지 마라!"
"여포를 놓치면 군법을 시행한다."
서황과 허저까지 가세하니 여포도 어찌할 수 없었다. 더욱이 등에 사랑하는
딸까지 업었는지라 천하의 여포로서도 하는 수 없이 적토마에 채찍을 가해 단숨
에 하비성으로 되돌아오고 말았다.
여포가 하비성으로 되돌아가자 유비도 군사를 거두었다. 서황.허저도 각기 자
기의 진영으로 돌아갔다.
여포의 군사는 단 한 명도 포위망을 뚫지 못한 채 사상자만 내고 물러난 꼴이
되고 말았다.
여포는 포위망이 의외로 견고함을 알고 답답하고 침울한 마음을 성에 틀어박
혀 술로써 달래고 있었다.
그런데 하비성을 겹겹이 둘러싸고 있는 조조도 평온치만은 않았다.
'이 성을 포위한 지도 이미 두 달이나 흘렀다. 그럼에도 성은 함락되지 않고
있다. 성을 둘러싼 물이 깊이 성벽이 높으니 성을 넘어 문을 여는 일이 쉽지 않
구나. 만약 후방에서 적이라도 일어난다면 큰일이다. 이 혹한 속에서 위급한 지
경을 맞게 된다.'
싸움은 이미 겨울철로 이어져 동사하는 군마의 수도 만만치 않았다. 양초 또한
넉넉할 리가 없는데 눈은 산과 들을 뒤덮고 있었다. 눈을 헤치며 먼길을 돌아
회군하기도 어려운 지경이었다.
조조는 난공불락의 성을 바라보며 홀로 근심에 싸여 있는데 눈보라 속을 헤치
며 급한 전갈이 날아들었다.
그 급보는 조조가 염려했던 불길한 소식이었다.
여포와 친교가 있는 하내태수 장양이 여포를 구원하지 위해 군사를 일으켰습
니다. 그러나 그의 부장 양추가 그를 죽였습니다. 양추가 그의 목을 승상께 바
치러 오던 중 장양의 심복이었던 휴고가 원수를 갚는다 하여 또한 양추를 죽였
습니다. 휴고는 무리를 이끌고 대성으로 달아났습니다. 승상께서는 언제 또다시
우환거리가 될지 모르니 깊이 헤아려 주십시오.
그 소식을 접한 조조가 말했다.
"결국 휴고는 장양의 유지를 받들어 여포에게 합세할 것이다. 그를 그대로 두
면 필시 우환거리가 될 것이다."
조조는 즉시 장수 사환에게 명했다.
"즉시 군사를 거느리고 대성으로가 휴고를 쳐라."
조조의 명을 받고 사화니 눈길을 헤치며 대성으로 향해 갔다. 사환이 대성으
로 떠난 후 조조는 여러 장수들을 불러 놓고 말했다.
"하비성을 공격하는데 너무 많은 시간을 보내고 있소. 장양은 다행히 죽었다
하나 북으로는 원소하는 근심거리가 있소. 또 동으로는 유표, 서로는 장수가 있
소. 그들은 이 조조가 원조가 원정에서 힘이 빠질 때를 기다리고 있을 것이오."
조조는 그 동안 근심해 오던 일들을 털어놓았다.
"또한 허도를 너무 오랫동안 비워 두었소. 후방에서 일어날지 모르는 크고 작
은 변란에 대비하여 허도로 돌아가 잠시 쉴까 하오."
조조의 말에 순유가 급히 일이나 만류했다.
"우리 군사들이 겪고 있는 고통이 크다 하나 성 안의 적군이 겪는 불안과 고
통 또한 우리에 비할 바가 아닐 것입니다. 거기다 여포가 몇 번이나 패하기만
하여 그의 기백이 꺾여 있는 형편입니다. 여포가 그같이 괴해 있으니 군사들의
사기가 오를 리 없습니다. 그에게 모사 진궁이 있으나 여포가 그의 계책을 제대
로 쓰지 않아 기회를 여러 차례를 정하지 못한 이때를 기해 급히 공격한다면 능
히 여포도 사로잡을 수가 있을 것입니다."
순유가 철군을 반대하며 이렇게 역설하자 곽가도 순유편을 들며 말을 꺼냈다.
"제게 하비성을 함락시키는데 20만 대군 못지않은 계책이 하나 있습니다."
그러자 순욱이 곽가에게 웃으며 말했다.
"혹시 기수와 사수의 물을 이용하자는 말이 아니오?"
곽가가 순욱의 말에 고개를 끄떡이며 웃으며 말했다.
"바로 그렇소이다. 이 하비성이 함락되지 않은 것은 적에게 사수.기수라는 지
형의 이점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 두 강의 흐름을 거꾸로 우리가 이용한다면 적
은 필시 단숨에 무너질 것입니다."
조조도 그 말을 듣자 불현 듯 떠오르는 생각이 있었다. 그것은 사수와 기수
두 강에 둑을 쌓아 두 강의 물줄기를 한데로 터놓고 그 물줄기를 돌려 하비성을
물 속에 잠기게 하는 것이었다.
"그렇소. 바로 그거요."
조조는 크게 기뻐하며 즉시 군사를 동원하여 두 강의 둑을 끊어 하비성으로
물길을 돌려 놓게 하였다.
조조군은 모두 높은 언덕 위에 올라 하루가 다르게 변모하는 하비성을 내려다
보았다.
하비성은 순식간에 물바다가 되었다. 오직 동문만 물에 잠기지 않았을 뿐 다
른 문들은 모두 물에 잠겼다.
자신의 성채만 굳게 믿고 있던 여포에게 부장 하나가 이 사실을 알렸다. 그러
나 술에 취해 있던 여포는 죄 없는 부장만 큰 소리로 꾸짖을 뿐이었다.
"나에게는 명마 적토마가 있어 물 위를 평지 걷듯 한다. 무얼 그리 걱정하느
냐?"
그리고는 매일 밤낮없이 초선과 엄씨를 오가며 술만 마셔댔다.
이렇게 밤을 샐 때마다 두 자, 넉 자, 성벽을 둘러싼 물은 불이 나기만 했다.
성 안 군데군데 물이 스며들어 바닥은 흙탕물이 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매일 주색에 젖어 있던 여포가 문득 거울에 자기의 얼굴을 비춰보고 깜짝 놀
랐다. 마지막 하나 남은 하비성을 겹겹이 에워싸인 채 기대했던 원술마저 등을
돌린 터에 매일같이 술과 여자, 그리고 근심과 한숨으로 날을 보내고 있으니 천
하의 여포라 한들 어찌 몰골이 초라해지지 않을 수 있었겠는가.
초췌해진 자신의 몰골에 여포 스스로도 크게 놀랐던 것이었다. 그는 거울을
내동댕이쳤다.
"내가 주색에 빠져 몸이 망가졌구나. 오늘부터 술을 끊어야겠다."
여포는 크게 충격을 받아 당장 술을 끊고 성 안에 영을 내렸다.
"오늘부터 일체 술을 삼가라. 만일 이 군령을 어기는 자는 지위의 높고 낮음
을 가리지 않고 목을 베리라."
그런데 엉뚱한 일이 벌어졌다.
여포가 영을 내린 며칠 후 후성의 말 열다섯 필이 하룻밤 사이에 없어졌다.
후성이 급히 이 이을 알아보니 마구간에서 말을 돌보던 두 사람이 짜고 말을 성
밖으로 빼돌려 유비에게 바쳐 상금을 받으려 했다는 것이었다.
후성은 이들의 수작을 눈치채고 사로잡아 죽인 후 말을 되찾아왔다.
"말을 되찾았으니 참으로 다행이오. 한턱 내도록 하오."
장수들이 후성에게 치하했다. 후성에게는 이전에 담가 두었던 술 대여섯 말이
있었다. 말을 되찾은 기념으로 그 술을 마실까 하다 문든 여포가 내린 금주령이
생각났다.
후성은 술을 걸러 우선 대여섯 병을 가지고 여포의 부중으로 찾아갔다. 후성
은 잃었던 말을 되찾은 일을 아뢴 후 가져온 술을 내놓으면서 덧붙였다.
"장군의 위엄에 힘입어 잃었던 말을 되찾자 여러 장수들이 치하하러 제 집으
로 왔습니다. 마침 이전에 담가 둔 술이 있어 그 술을 걸러 왔습니다. 감히 마
음대로 마실 수가 없어 먼저 장군께 첫잔을 올린 후 함께 마실까 합니다."
그러자 여포가 버럭 고함을 질렀다.
"내가 술을 금하라고 영을 내리지 않았더냐?"
여포는 후성이 공손하게 바치는 술병을 걷어찼다. 술병은 박살이 났고, 후성
은 술을 흠뻑 뒤집어썼다. 술냄새가 코를 찔렀다. 강한 술냄새는 여포의 화를
더욱 돋우었다.
"내가 술을 끊고 금주령을 내렸거늘, 이러한 때 술을 빚어 하찮은 일로 장수
들과 술판을 벌이겠다니, 나에게 거역하겠다는 것이냐?"
여포는 좌우를 둘러보며 후성의 목을 베라고 명했다.
기겁을 한 여포의 시신 하나가 이 사실을 다른 장수들에게 알렸다. 송헌.위속
등 여러 장수들이 달려와 땅에 엎드려 후성의 죄를 용서하도록 간청했다.
여러 장수들이 간곡히 청하자 여포의 노기가 좀 수그러들었으나 그대로 용서
하지는 않았다.
"내 명을 어겼으니 마땅히 죽어야 하나, 그대들을 보아 목숨만은 살려둔다.
매 백 대를 쳐 그 죄를 대신하라!"
여포가 다시 명했다. 그때 또 여러 장수들이 빌어 매 오십 대만 치도록 했다.
매 오십 대를 맞은 후에야 후성은 풀려 나왔다. 후성은 피로 물든 찢어진 옷 속
으로 살갗을 허옇게 드러냈다.
그 모양을 본 여러 장수들의 마음은 몹시 언짢았다. 송헌과 위속이 집으로 가
후성을 위로하자 후성은 눈물을 흘렸다.
"상처가 어떻습니까?"
위속이 민망한 듯이 입을 열었다.
"나도 무인이오. 이까짓 매로 어찌 눈물을 흘리겠소?"
"그럼 아파서 흘리는 눈물이 아니라는 말이오?"
위속이 다시 묻자 후성은 머리맡을 둘러보고 위속과 송헌뿐임을 알자 다시 입
을 열었다.
"공들이 아니었다면 나는 오늘 살아 남지 못했을 것이오. 여 장순이 원망스러
운 것은 우리 무인을 지푸라기처럼 가벼이 여기고 처첩의 교태에는 정신을 차리
지 못한다는 점이오. 이렇게 가다가는 끝내는 보람없이 목숨만 버릴 게 뻔한 이
치요. 그것이 한탄스러워 절로 눈물이 나온 것 뿐이오."
후성의 말에 위속도 한탄했다.
"조조의 군사는 성을 에워싸고 있고 성은 기수의 물에 점점 잠기고 있소. 우
리들의 목숨은 이미 죽은 거나 다름없소."
송헌이 두 사람의 말을 듣고 있다가 눈을 빛내며 말했다.
"그대들의 말에 나도 동감이오. 아예 의롭지도 어질지도 못한 여포를 버리고
떠나는게 좋지 않겠소?"
송헌의 말을 위속이 받았다.
"그냥 도망치는 것은 장부가 할 짓이 아니오. 그보다는 여포를 묶어서 조조에
게 바치면 이보다 더 좋은 일이 어디 있겠소?"
지금까지 듣고만 있던 후성이 몸을 벌떡 일으키며 말했다.
"나는 말을 되찾아온 죄로 매를 맞았소. 공들이 여포를 묶을 생각이라면 나는
여포가 의지하고 있는 적토마를 훔치겠소. 내가 먼저 적토마를 타고 조 공께로
가 이 일을 알리겠소."
"그러나 성 주위는 흙탕물로 차 있으니 어떻게 나가겠소?"
"아직 동쪽 성문만은 산자락에 이어져 있어 물이 차지 않았소. 내가 그 문을
지키고 있으니 공은 걱정하지 않아도 되오."
세 사람은 이렇게 말을 맞추고 밤이 되기를 기다렸다.
사경 무렵이 되었다. 후성은 마구산으로 다가갔다. 군졸은 몸을 웅크린 채 졸
고 있었다. 후성은 발걸음을 죽이며 다가가 여포가 제 몸보다 더 아끼는 적토마
를 타고 동문으로 향했다.
동문을 지키고 있던 위속이 그를 기다리고 있다가 문을 열어 주었다. 후성이
문 밖으로 달려나가자 위속은 뒤쫓는 척하며 말을 달리다가 되돌아왔다. 설혹
일이 잘못되어, 여포에게 문책당할 일에 대비하여 군졸들의 눈을 속이기 위해서
였다.
미련한 여포의 죽음 유 황숙 그리고 황제 폐하 만세!
조조는 마침내 하비성을 접수하고 사로잡은 적장들의 죄를 묻는다. 전날 조조
의 간특함 때문에 그를 버리고 여포에게로 갔던 진궁, 조조의 안타까움에도 불
구하고 떳떳이 죽음을 택한다. 오랏줄에 꽁꽁 묶인 여포는 가련하게도 살려 달
라 소리치는데...
하비성으로부터 후성이 적토마를 달려 조조의 진영에 도착했을 때 조조는 깊
이 잠들어 있었다.
부장이 그를 급히 깨우자 조조는 휘장을 젖히고 나오면서 다급한 목소리로 물
었다.
"무슨 일이냐?"
"하비성에서 후성이라고 하는 여포의 장수가 항복해 와 승상을 뵙겠다 하옵니
다."
조조는 귀가 번쩍 뛰었다. 후성이라면 여포의 장수로 그 이름은 조조도 듣고
있던 터였다. 조조는 지체없이 그를 불러들였다.
후성이 항복해 온다는 것은 크게 기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이를 기화로 하
비성을 무너뜨릴 수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언뜻 조조의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
다.
후성은 조조 앞에 이르자 바닥에 엎드려 절하며 투항하게 된 연유를 이야기하
고 타고 온 적토마를 바쳤다.
"무엇이, 적토마를?"
조조의 기쁨은 실로 컸다. 후성이 투항해 온 것은 진퇴양난의 어려운 궁지에
몰린 조조에게 하늘이 내린 기회가 아닌가. 거기다가 적토마까지 받고 보니 그
기쁨은 비할 데가 없었다. 탐나던 명마를 얻게 됨은 물론이요, 적토마 없는 여
포는 한 쪽 날개를 잃은 독수리에 지나지 않음이 아니던가.
"위속과 송헌, 두 사람이 성 안에서 내응키로 하였습니다. 승상께서 일거에
성을 공격하신다면 문을 열 것입니다. 성 안에 백기가 꽂힐 때를 기다려 공격하
십시오."
조조는 더욱 기뻐하며 즉시 격문 수십 장을 써 화살에 달아 하비성 안으로 쏘
아 보냈다.
이제 천자의 밝은 조서를 받들어 대장군 조조는 여포를 치려 한다. 만일 대군
에 항거하는 자 있으면 그 일족은 모두 주살할 것이다. 그러나 성안에 있는 자,
위로는 장수로부터 아래로는 이름 없는 백성에 이르기까지 누구든지 여포를 사
로잡거나 목을 바치는 자에게는 높은 벼슬과 상을 내리겠다. 이 방문을 모든 사
람에게 널리 알리고 각기 명심하길 바란다.
성 안의 군사들과 민심을 동요시키기 위한 격문이었다.
새벽녘이 되자 구름은 붉게 물들어 동쪽 하늘로 흐르고 있었다. 격문을 매단
화살이 수없이 성 안으로 날아들었다. 그와 함께 북 소리와 군사들의 함성이 지
축을 흔들며 수많은 조조의 군사가 일제히 성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한참 깊은 잠에 빠져 있던 여포가 요란한 함성에 놀라 두리번거리며 깨어났
다. 벌어진 사태에 또 한 번 크게 놀란 여포는 화극을 든 채 황망히 성 안을 뛰
어다니며 군사들을 배치시켰다.
"어젯밤에 적토마가 없어졌습니다."
여포는 대뜸 눈을 부릅떴다.
"무엇이?... 적토마가 없어지다니 그게 무슨 말이냐?"
여포는 장수들을 불러 사실을 물어 보왔다. 그제야 후성이 적토마를 훔쳐 동
문으로 빠져 나간 사실을 알게 되었다. 여포는 화가 머리끝까지 치솟아 고함쳤
다.
"위속은 물론 적토마를 지키지 못한 장수와 군졸들을 모두 참하리라."
그러나 여포는 당장 조조군을 물리치는 일이 더 급해 위속을 벌할 시간이 없
었다.
조조군은 어느 새 만들어 두었는지 수많은 ㄸ목을 타고 탁류를 건너와 성벽
위를 기어올랐다. 앞쪽의 뗏목에 탄 군사들이 성벽을 기어오르면 뒤쪽의 뗏목에
선 수많은 화살을 성 안으로 쏘아댔다.
여포는 성벽을 기어오르는 조조군을 찌르기에 바빴다. 성벽을 기어오르는 적
은 찌르고 또 찔러도 끝이 없었다. 한낮이 지날 무렵에는 양군의 시신에서 흘러
내린 피로 성벽이 붉게 물들고 있었다.
이윽고 해가 중천에 머무는 한낮이 되자 조조군도 공격에 지쳤는지 군사를 뒤
로 물렸다.
꼭두새벽부터 물 한 모금 마실 틈 없이 싸운 여포였다. 조조군의 공격이 뜸한
사이 지친 몸을 잠시 문루에 두고 어느 새 깜빡 잠이 들고 말았다.
이때 그의 동정을 엿보며 다가오는 한 장수가 있었다.
싸울 동안에도 여포 주위를 맴돌고 있던 송헌이었다. 송헌은 가까이에 있는
군사들을 물리쳐 쉬게 했다. 그런 다음 이쪽을 바라보고 있는 위속에게 눈짓했
다.
송헌은 먼저 여포의 화극부터 훔쳐 숨겨 버렸다.
송헌과 위속은 잽싸게 여포의 몸을 밧줄로 두 겹 세 겹으로 묶었다. 여포가
천하장사였지만 송헌과 위속 또한 장수들이었다. 그가 잠든 틈을 타 몸을 결박
하니 온몸이 꽁꽁 묶여 버렸다.
여포가 깜짝 놀라 깨어나더니 주위의 군사들을 소리쳐 불렀다. 군사 몇이 달
려왔으나 송헌과 위속이 칼을 빼들고 그들을 치려 하니 모두 물러나고 말았다.
그때 위속이 심복에게 백기를 흔들게 했다. 위속의 심복이 망루에서 힘껏 백
기를 흔들어대니 이것을 보고 있던 조조군이 다시 함성을 지르며 성을 공격했
다.
"이미 여포를 사로잡았으니 어서 성 안으로 드시오."
위속이 동문을 활짝 열어젖히며 소리쳤다. 그러나 조조군의 장수 하후연은 그
말이 곧이들리지 않는 듯 말을 멈추고 성 안을 살폈다.
송헌이 그것을 보자 여포의 화극을 그에게 던지며 성문을 활짝 열었다. 하후
연이 보니 여포의 방천화극임에 틀림없었다. 그때서야 하후연이 성 안으로 말을
몰았다. 하후연이 성 안으로 말을 몰자 군사들도 밀물처럼 성 안으로 밀려들었
다.
성 안은 가마솥 끓듯 혼란스러웠다.
대장 여포가 사로잡혔음을 알자 성 안의 군사들은 한순간에 무너지기 시작했
다. 우왕좌왕하다 목이 달아나는 자, 재빨리 무기를 버리고 항복하여 목숨을 애
걸하는 자가 태반이었다.
고순.장요는 이미 싸움이 기운 걸 알고 휘하를 거느리고 서문으로 향했다. 그
러나 물이 깊어 성 밖으로 빠져 나가지 못해 조조군에게 붙잡히고 말았다.
남문에 있던 진궁은 밀려드는 적을 맞아 죽기를 다해 싸웠다. 그러나 조조 휘
하의 영장 서황을 만나 그 또한 사로잡히는 몸이 되고 말았다.
해가 기울 무렵, 난공불락을 자랑하던 하비성도 완전히 조조의 손안에 떨어지
고 말았다.
다음 날 아침이 되자 성의 동쪽과 서쪽 누문에는 조조군의 깃발이 아침 햇살
을 가득 받으며 펄럭이고 있었다.
조조는 성 안에 고여 있는 강물이 빠지도록 둑을 다시 막게 하고 방을 붙여
백성들을 안심시켰다.
그런 다음 주각인 백문루의 누대에 높이 앉아 사로잡힌 1천여 명의 포로들을
끌어오게 했다.
조조의 곁에는 유비가 관우.장비의 시립을 받은 채 앉아 있었다.
첫 번째로 여포가 끌려 나왔다. 7척이 넘는 장대한 기골이었으나 왜소해 보일
만큼 온몸이 밧줄에 꽁꽁 묶여 있었다.
백문루 아래 돌에 꿇어앉히자 밧줄이 심하게 옥죄이는지 조조를 쳐다보며 애
원했다.
"이토록 욕되게 하지 않아도 되지 않소? 우선 묶은 밧줄을 조금 느슨하게 해
주시오."
조조가 쓴웃음을 지으며 대꾸했다.
"호랑이를 묶을 때는 느슨하게 묶지 않는 법이다."
여포는 조조 주위에 늘어선 장수들 중 후성.위속.송헌이 있는 것을 보았다.
여포는 그들을 보자 눈이 시뻘게지더니 물었다.
"내 그대들을 섭섭하게 대하지 않았는데 어찌하여 나를 배반했느냐?"
후성이 입가에 비웃음을 날리며 대꾸했다.
"그 넋두리는 평소 장군이 사랑하던 처첩들에게나 하실 말씀이오. 우리 장수
들은 장군으로부터 곤장을 맞거나 가혹한 속박을 받은 기억밖에 없소."
후성의 말에 여포는 힘없이 고개를 떨구었다. 그럴 동안 고순이 군사들에게
이끌려 왔다.
조조는 그에게 물었다.
"너는 무슨 할 말이 없느냐?"
조조가 그에게 말할 기회를 주었으나 고순은 아무 말이 없었다. 조조는 고순
에게 살 수 있는 기회를 준 것이었으나, 고순이 대답을 안 하여 그를 목베게 했
다.
이어 장수 서황이 진궁을 끌고 왔다.
"공대! 그대와는 실로 오랜만일세. 그간 별고 없었는가?"
조조가 입가에 반가움과 냉소가 뒤섞인 웃음을 머금으며 물었다. 진궁이 고개
를 쳐들며 답했다.
"보는 바와 같다. 그대의 마음이 바르지 않기에 그대를 버리고 떠난 것인데
어찌 아는 체를 하는가?"
"나를 보고 바르지 않다고 했는데 그렇다면 여포는 어떤 자인가?"
"여포는 우매하고 포악스러운 장수이나 정직하다. 그대같이 간교하거나 음흉
하지 않아 거짓 정의를 앞세워 황실을 범할 그런 간웅은 아니다."
조조가 정색을 하며 다시 물었다.
"그대는 스스로 지모가 많다 하지 않았더냐? 그런데 오늘 이렇게 오랏줄에 묶
인 패장이 되었음은 무슨 까닭인가?"
"승패는 시운에 달려 있는 법, 단지 여기 있는 이사람이 내 말을 따라 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진궁은 옆에 웅크리고 있는 여포를 턱으로 가리키며 말을 이었다.
"그렇지만 않았다면 그대 따위에게 사로잡혀 이러한 욕을 당하지는 않았을 것
이다."
"그럼 그대를 어떻게 하면 좋겠나?"
"오직 죽음이 있을 뿐이다. 어서 내 목을 쳐라!"
조조는 진궁이 이렇게 말하자 가슴에 한 가닥 회한이 일었다. 조조가 동탁을
죽이려다 실패하고 장안을 탈출하여 달아나던 중 중모현에서 붙들렸을 때 자기
를 살려 주고 벼슬을 버리고 함께 달아났던 그 진궁이 지금은 패군지장이 되어
조조 앞에 묶여 있는 것이다.
성고 땅에서 여백사 일가를 엉뚱하게 오해한 나머지 모두 죽이고도 태연히 말
하는 조조에게 그같이 간특하고 잔인한 자는 자기의 주인이 될 수 없다며 홀홀
이 떠나 버렸던 그 진궁이 아닌가.
조조는 진궁의 마음을 돌릴 수 있을까 하여 다시 물었다.
"그대에게는 노모와 처자가 있지 않은가. 그들은 어떻게 하겠나?"
조조의 말에 진궁은 잠시 고개를 숙였다. 그러나 다시 고개를 들어 결연히 대
답했다.
"내가 듣건대 효로써 천하를 다스리려는 자는 남의 어버이를 살상하지 않으
묘, 천하를 어진 정치로 다스리려는 자는 남의 후사를 끊지 않는 법이라 했다.
노모와 처자의 생사는 오직 그대의 마음에 달렸을 뿐이다. 나는 이미 사로잡힌
몸, 어서 죽기만을 바랄 뿐이다."
조조는 진궁을 살려 주고 싶었다. 아니 그보다는 차마 죽일 수가 없었다고 해
야 맞는 말이었다. 그의 가슴 속에 남아 있는 진궁과의 사사로운 정은 그가 생
사를 넘나들 당시에 싹튼 것이어서 그만큼 더욱 강했다.
진궁은 조조의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조조가 마음에 품고 있는 갈등을 어렴풋
이 엿본 듯 자리에서 일어났다. 층계 아래 한 구석에 웅크리고 있는 여포에게
차가운 눈빛을 던진 다음, 뚜벅뚜벅 사형장을 향해 긴 돌층계를 내려갔다.
조조는 좌우에게 그를 붙들게 하며 그도 자리에서 일어나 뒤따랐다. 그러나
진궁은 끝내 그들을 뿌리쳤다. 조조는 그의 뒤를 몇 걸음 뒤따르다 눈물을 흘리
며 명을 내렸다.
"진궁의 노모와 처자를 허도로 보내 정중히 모시도록 하라. 이를 게을리하는
자는 목을 베리라."
진궁은 그 말을 들으며 목을 내밀어 칼을 받았다. 진궁의 죽음과 조조의 애틋
한 슬픔을 본 여러 장수들과 군사들도 모두 눈시울을 붉혔다. 조조는 진궁의 시
신을 거두어 후하게 장사지내게 했다.
뒷날, 사람들이 그의 꿋꿋한 기상과 절의를 기려 노래했다.
죽고 삶에 두 마음 푸지 않았네.
대장부 지조 장하기 그지없구나!
주인 바꾸지 않는 그 도리 금석처럼 굳었으나
아까운 동량재 부질없이 받들더니
어머니와 하직하는 마음만 가슴이 메이도다.
백문루 아래에서 목숨 잃던 날
그대처럼 충절 지닌 신하 몇이나 되나!
진궁이 떳떳이 죽음을 택한 그 순간이었다. 여포는 조조가 내려가고 없자 유
비를 보고 처량한 목소리로 애원했다.
"유 공은 높은 자리에 앉고, 나는 층계 아래 무릎을 꿇고 있는데 나를 위해
한 마다라도 해 주시지 않으려오?"
그 말을 듣자 유비는 가볍게 머리를 끄덕였다. 여포는 유비가 자기의 말을 받
아들인 걸로 알고 조조가 다시 문루에 오르자 큰 소리로 말했다.
"승상에게 항시 걱정거리가 되어 온 이 여포는 이렇게 항복하지 않았습니까?
이제는 나를 살려서 부장으로 삼으신다면 천하대사를 도모하는 데 어려울 게 없
지 않겠습니까?"
여포의 애원에 조조는 옆에 있는 유비를 돌아보며 목소리를 낮춰 물어 보았
다.
"유 공, 저 애걸하는 소리를 들어 줘야 하겠소, 아니면 처단해야 하겠소?"
조조의 물음에 유비가 차갑게 말했다.
"승상께서는 지난날 정건양과 동탁의 일을 잊으셨습니까?"
유비가 던진 뜻밖의 말에 여포는 얼굴색이 흙빛으로 변했다. 자기를 위해 변
호 한 마디라도 해 줄 걸로 알았던 여포였다. 유비가 조조에게 지난날 자기가
배반했던 주인을 들먹이자 여포는 집어삼킬 듯이 그를 노려보며 울부짖듯 소리
쳤다.
"닥쳐라! 내가 원문에 창을 쏘아 살려 준 일과 너의 처자를 살려 준 은혜도
잊었다는 말이냐? 네놈이야말로 신의가 없는 놈이다!"
이때 조조가 결연히 외쳤다.
"당장 여포를 끌어 내어 목을 치도록 하라!"
여포는 끌려나가면서도 유비에게 고래고래 욕설을 퍼부었다.
"이 귀 큰 당나귀 같은 놈아! 지난날 패주하였을 때도 너를 받아들인 일을 잊
었느냐?"
그러자 그런 여포를 큰 소리로 꾸짖는 소리가 들려 왔다.
"여포, 부끄럽지도 않은가. 죽게 되면 당당히 죽을 일이지 무슨 말이 그리 많
으냐?"
사람들이 소리나는 쪽을 보니 그는 도부수들에게 이끌려 오는 장요였다.
조조의 명을 받든 무사들이 밧줄을 들고 여포에게 다가갔다. 여포는 그때까지
도 살려 달라며 날뛰었으나, 끝내 무사들에게 이끌려 밧줄에 목이 매인 채 죽고
말았다. 여포의 시신은 길거리에 효수되었다.
후세 사람이 그날 백문루에서 죽은 여포를 위해 시를 지었다.
홍수로 불어난 물에 하비성이 잠기고
천하의 영웅 여포 사로잡힐 때
천리를 달리는 적토마는 어디 갔나
방천화극 한 자루만 남았구나
호랑이가 묶여 애원하니 처량하구나
매는 배불리 먹이면 소용 없네
계집만 귀히 여기고 준궁의말 물리치더니
귀 큰 아이만 은혜 모름을 탓하네.
조조는 여포의 목을 매 죽인 후에야 계하에 끓어앉은 장요를 보고 문초하기
시작했다.
"음, 어딘가 낯이 익은 것 같군!"
"복양성 안에서 만나지 않았더냐?"
지난날 진궁의 계교에 빠져 목숨마저 잃을 뻔했던 일이 떠오르자 조조는 그를
알아보았다.
"그대도 잊지 않았군."
조조가 웃으며 말했다.
"너무 원통하여 잊을 수가 없다."
"무엇이 그렇게 원통한가?"
"그날 불길이 좀더 크게 일었더라면 오늘 네놈 같은 역적은 없었으리라!"
조조가 장요의 말에 화가 치솟아 소리쳤다.
"닥쳐라! 패장의 주제에 감히 나를 모욕할 셈이냐?"
조조는 금방이라도 그를 벨 듯이 칼을 빼들었다. 그러나 장요는 조금도 동요
하는 기색 없이 목을 빼어 칼을 기다렸다.
그때였다. 유비가 일어나 조조의 팔을 붙잡았다.
"그는 하비성에서 유일하게 마음이 곧고 바릅니다. 살려서 바르게 쓰시지요."
그러자 관우도 나와 조조 앞에 무릎을 꿇으며 청했다.
"그가 충의지사임을 평소부터 알고 있었습니다.. 바라건대 그를 살려 주십시
오."
조조는 칼을 내던지며 껄껄 웃었다.
"나 또한 문원(장요의 자)의 충의를 알고 있소. 그를 한번 시험해 본 것 뿐이
오."
조조는 손수 장요의 결박을 풀어 주고 새 옷을 입힌 다음 자리를 높이 앉혔
다. 조조가 이토록 정중히 대할 뿐만 아니라 유비와 관우가 그를 위해 간곡히
청하자 장요도 감사히 여기며 항복했다.
조조는 장요를 관내후로 봉하여 중랑장으로 삼고 그에게 장패를 설복시켜 휘
하로 삼도록 하라고 일렀다. 장요도 이미 마음으로 항복한 터라 순순히 조조의
명에 따르기로 했다. 그러나 장요도 장패를 만나러 떠나기도 전에 장패는, 이미
여포가 붙잡혀 죽고 장요도 조조에게 투항했다는 소문을 듣자 거느리던 무리를
이끌고 투항해 왔다.
조조는 그에게 후한 상을 내렷다. 장패는 손관.오돈.윤례를 설복시켜 한 편으
로 끌어들였다. 그러나 창희만은 투항하지 않았다.
조조는 장패를 낭야상에 봉하고 손관 등에게도 벼슬을 높여 청주와 서주 일대
의 바닷가를 지키게 했다.
조조는 하비성을 점령하고 여포를 효수한 뒤, 모든 뒷일이 끝나자 허도로 향
해 개선길에 올랐다.
허도로 돌아가는 조조의 대군이 하비성을 떠나 서주에 이르렀을 때였다. 고을
주민들은 길가에 몰려 나와 향을 피우고 조조를 비롯한 장졸들에게 환호성을 보
냈다.
조조가 그들 앞을 지나려 할 때 한 무리의 촌로들이 길가에 무릎을 꿇은 채
간청했다.
"여포의 악정에서 벗어나 다시 화평을 되찾게 된 것은 더할 나위 없는 기쁨입
니다. 그러나 현덕 공께서 이 고을을 떠나시는 것이 아닌가 하여 근심하고 있습
니다. 바라건대 현덕 공께서 다시 서주를 다스리게 하여 주십시오."
촌로들의 간청에 조조는 말 위해서 부드럽게 대답했다.
"그대들의 뜻은 갸륵하나, 유공은 이번 싸움에서 공이 크신 분이다. 먼저 천
자를 알현하고 난 뒤에 서주로 돌아와도 늦지 않으리라."
그 말을 듣고 연도에 나온 백성들은 함성을 우리며 다시 한 번 조조에게 감사
하며 물러났다.
조조는 민심 속에 깊이 뿌리박고 있는 유비에 대한 사람들의 신망에 문득 놀
라움을 금치 못했다. 그 놀라움은 어느 새 그에 대한 경계심과 시기심이 되어
그의 마음 속에 자리잡기 시작했다.
'역시 유비는 무서운 인물이구나. 그를 내 장중에 가둬 놓으리라.'
조조는 다시 한 번 마음 속 깊이 다짐했다.
조조는 거기장군 차주로 하여금 서주를 다스리게 한 후 다시 허도로 길을 떠
났다.
며칠 뒤 조조는 허도로 개선했다.
조조는 공에 따라 장수와 장졸들에게 상을 내려 허도의 주민들에게는 사흘 동
안 잔치를 베풀게 했다. 그리하여 허도에서는 며칠 동안 밤낮을 가리지 않고 축
제가 벌어졌다.
조조는 승상부 가까운 곳에 집을 마련하여 유비를 머물게 하고 천자께 그의
군공을 상주했다.
이튿날, 조조는 조복을 입고 천자를 배알하러 가는 길에도 유비에게 권해 함
께 수레를 타고 갔다.
허도의 주민들도 집집마다 향을 피우고 길을 청소하여 두 사람이 탄 수레가
지나갈 때는 길 옆에 엎드렸다.
유비는 조복을 갖추어 입고 궁궐에 입궐하여 전각 아래 층계에서 엎드려 천자
를 배알했다.
헌제는 유비의 성이 유씨인 것을 알자 전상에 오르게 한 후 옥음을 내렸다.
"그대의 선조는 어느 곳의 뉘신가?"
헌제의 물음에 유비는 감격한 나머지 가슴이 막혀 한동안 고개를 들지 못했
다. 문득 고향 누상촌에서 자리를 짜며 노모와 함께 보냈던 지난날이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유비는 마음을 가다듬고 천자의 물음에 정중히 아뢰었다.
"신은 중산정왕의 후예로 현손인 유웅의 손자이며, 유홍의 자식이옵니다. 중
조 되시는 유정께서는 한때 탁현의 육성정후에 봉해졌사옵니다."
천자는 유비의 말을 듣고 놀라운 듯이 다시 물었다.
"그렇다면 그대는 우리 한실의 일족이 아닌가?"
헌제는 급히 조정의 세보를 가져오게 하여 존정경으로 하여금 유비의 선조에
대한 세보가 적힘 대목을 읽어 보게 했다.
"효경 황제께서는 열네 분의 왕자를 두셨으며, 그 일곱째 분이 주산정왕 유숭
입니다. 승은 육성정후 정을 낳고, 정은 패후 앙을 낳았으며, 유앙은 또한 장후
유록을 낳고 유록은 기수후 유연을 낳았습니다. 유연은 흠양후 유영을 낳고, 유
영은 안국후 유건을 낳았습니다. 유건은 광릉후 유애를 낳고, 유애는 교수후 유
헌을 낳았습니다. 유헌은 조읍후 유서를 낳고, 유서는 기양후 유의를 낳고, 유
의는 원택후 유필을 낳고, 유필은 영천후 유달을 낳았습니다. 유달은 풍령후 유
불의를 낳고 유불의는 제천후 유혜를 낳았습니다. 유혜는 동군 범령 유웅을 낳
고, 유웅은 유홀을 낳았으되 홍은 벼슬에 오르지 아니하였습니다. 유비는 그 유
홍의 아드님이십니다."
한실 대대의 세보가 이어져감에 유비는 효경 황제의 일곱째 왕자의 휴예라는
것이 밝혀졌다.
즉, 경제의 일곱째 왕자 중산정왕의 후예는 지방관으로서 조정을 나온 이후
수대는 지방의 호족으로서 번영을 누렸다. 그러나 여러 제후국이 흥망성쇠를 거
듭하는 사이 언제부터인가 가문을 잃고 토민으로 전락하여 유비의 양친대에 이
른 것이었다.
"세보에 따르면 그대는 바로 집의 아저씨가 되오. 짐에게 현덕과 같은 황숙이
있었다니 놀라운 일이오."
헌제는 유비를 편전으로 들라 하여 황공하옵게도 숙질간의 예를 갖춘 다음 조
조를 불러 함께 주연을 베풀었다.
천자는 여느 때와는 달리 잔을 거듭하여 용안을 붉게 물들이며 흡족해 했다.
따지고 보면 가까운 촌수도 아니며 혈통 또한 바로 이어진 혈통이 아니었으나,
한실의 종친인 것만으로도 천자는 유비를 가까이 두리라 작정했다.
'조조가 권세를 쥐고부터는 무엇 하나 내 마음대로 되는 게 없다. 조조가 나
를 젖혀 두고 마음대로 국사를 주무르기 때문이다. 비록 촌수가 멀다 하나 숙부
뻘이 되는 이런 영웅을 만나게 되었으니 뒷날 도움받을 수 있겠구나.'
그렇게 생각한 헌제는 유비를 더욱 정중히 대하며 좌장군에 의성정후로 봉했
다. 이후 조정에서나 백성들에게 '유 황숙'이라 불려지게된 것도 이런 연규에서
였다.
그러나 유비가 이렇듯 천자에게 종친으로서의 융숭한 대접을 받으며 두터운
신임을 받는 것을 달가워하지 않는 사람들이 있었다.
승상부에서 대권을 한 손에 움켜쥐고 있는 조조와 그의 휘하 여러 장수들이었
다.
조조가 승상부로 돌아오자, 순욱을 위시한 모사들이 입을 모아 조조에게 간했
다.
"듣자옵기로, 천자께서는 유비를 숙부라 부르며 신임을 두터이 한다합니다.
장차 승상께 이롭지 못한 일이 아닌가 하여 모두 걱정하고 있습니다."
조조는 개의치 않는다는 듯이 가볍게 웃으며 말했다.
"반드시 그렇지만은 않은 것이오. 유비가 황숙으로 대접받는 것은 어쩔 수 없
소. 그러나 내가 황제의 조명을 받드는 이상, 내가 내리는 명을 그도 받들지 않
을 수 없을 것이오. 뿐만 아니라 내가 그를 허도에 붙들어 둔 것은, 천자를 곁
에서 모시게 한다는 명분을 내세워 그를 내 손아귀에 묶어 두기 위함이오. 그러
니 공들은 너무 염려하지 마시오. 그보다 내가 걱정하는 것은 다른 데에 있소."
순욱과 유엽 등은 자기들의 말을 가볍게 일축하며 불쑥 다른 말을 꺼내자 그
일이 궁금해졌다.
"다른 걱정거리라니 그게 무엇입니까?"
"대위 양표는 원술과 친척간이니 그를 어찌했으면 좋겠소? 그가 원술과 내통
하며 허도라도 넘본다면 반드시 큰 화가 될 것이오. 그를 그대로 두는 것은 환
부를 그대로 방치하는 것과 같소."
"그러나 아직 나타난 죄가 아무것도 없는데 어떻게 그를 죽인다는 말씀입니
까?"
"그것은 그렇게 어려운 일만은 아닐 것이오."
조조는 이윽고 태위 양표가 원술과 내통하여 허도를 넘본다고 소문을 퍼뜨린
뒤 그를 붙잡아들이고 만총을 시켜 문초케 했다.
때마침 북해태수 공융이 허도에 와 있었는데 이 소문을 듣고 조조를 찾아가
진언했다.
"양 공은 4대에 걸쳐 올바르게 조정에서 일해 온 명문의 집안입니다. 그가 원
씨와 친척이라는 이유만으로 벌을 준다는 것은 온당치 않습니다."
조조는 공융의 말에 차갑게 대답했다.
"이는 조정에서 행하는 일이오."
그러나 공융도 쉽게 물러나지 않았다.
"승상께서는 옛 주공과 다를 바 없습니다. 만일 성왕이 소공을 죽였다면, 그
런데도 주공이 나는 이를 모른다 하면 이치에 맞지 않는 일이 아닙니까?"
공융이 사리를 밝혀 끈질기게 그 부당함을 말하니 조조가 역정을 냈으나, 하
는 수 없이 양포를 풀어 주는 대신 벼슬을 빼앗고 멀리 시골로 쫓아 버렸다.
이때 의랑 조언은 평소부터 조조가 권력을 전횡하는 것을 매우 못마땅히 여기
고 있었다. 조언은 조조가 멋대로 대신을 옥에 가둔 일과 내쫓은 일을 널리 알
리고 이를 탄핵하는 상소문을 올렸다.
조조가 이를 알고 크게 노해 조언을 잡아들여 그를 죽였다. 조정의 백관들은
이후부터는 그런 조조를 두려워해 감히 입을 여는 자가 없었다.
어느 날이었다.
승상부에 모사 정욱이 찾아와 조조를 은근히 충동질했다.
"승상의 위명은 돋는 해와 같이 세상에 떨치고 있습니다. 이제 승상께서 하실
일을 하셔야 합니다."
"하여야 할 일이란 무엇인가?"
조조가 시치미를 떼고 물었다.
"그야 왕패의 개혁을 결행하시는 것을 말합니다. 왕도가 쇠퇴한지 오래 되어
천하는 제각이고 민심은 흉흉합니다. 새로운 패업을 백성들도 고대하고 있을 것
입니다."
정욱의 말에는 분명히 조정을 뒤엎자는 반의가 깔려 있었다. 그러나 조조는
그것을 굳이 부정하지는 않았다.
"아직은 이르오."
정욱의 말에 이렇게 대답했을 뿐이다. 그러나 정욱이 거듭 말했다.
"이제 여포도 죽고 천하는 주인을 잃은 배와 같습니다. 모두 갈 바를 몰라 변
란과 혼미만 거듭되도 있을 따름입니다. 이럴 때 승상께서...."
"말을 함부로 하지 마시오."
조조가 정욱의 말을 가로막았다.
정욱이 입을 다물자 조조가 이미 생각한 바가 있는 듯 입을 열였다.
"조정에는 아직도 구신들이 많이 남아 있소. 기회가 무르익기 전에 경솔히 움
직이면 화를 자초할 것이오. 우선 백관들의 동정을 살펴보는 것이 좋겠소. 천자
께 청해 사냥을 가자고 하여 그들의 태도를 엿볼 것이오."
그 말과 함께 조조는 사냥 준비를 하도록 일렀다. 즉시 사나운 사냥개, 매,
좋은 말 그리고 활과 화살을 준비하여 성밖에 대기시킨 후 자신은 대궐에 입궐
했다.
"오랜만에 허전으로 납시어 친히 신들과 함께 사냥을 즐기심이 어떻겠습니까?
마침 맑고 좋은 날씨가 이어져 야외의 대기도 한결 상쾌한 듯하옵니다."
갑작스런 조조의 청에 황제가 거절의 뜻을 밝혔다.
"경의 뜻은 잘 알겠소만 사냥은 제왕이 즐길 바 못 되오. 짐도 그래서 사냥은
좋아하지 않소."
천자의 말에 그대로 물러날 조조가 아니었다. 옛날 일을 들어 황제에게 다시
청했다.
"아니옵니다. 성인은 사냥을 하지 않았을지 모르나 옛 제왕은 사계절에 걸쳐
이를 행하였습니다. 지금 사해가 어수선합니다. 이럴 때일수록 폐하뿐만 아니라
공경들도 때로는 맑은 바람을 접하며 심신을 단련하고 위엄을 천하에 떨치시는
것이 좋은 것입니다."
조조가 재차 권하니 천자로서도 마다할 수가 없었다. 마음이 내키지는 않았으
나 조조의 위압에 마지못해 사냥을 따라나서기로 했다.
천자는 소요마를 타고 보석을 아로새긴 보조궁과 촉을 황금으로 만든 금비전
화살을 메고 의장을 갖추어 궁문을 나섰다.
유비와 관우.장비도 옷 속에 엄심갑을 받쳐 입고 활과 화살을 안장에 매단 채
무기를 들고 씹기의 날랜 군사를 거느려 황제의 뒤를 따랐다.
조조가 사냥에 몰이꾼으로 동원한 병사는 10만에 이르렀다. 기마, 보졸의 대
열은 꾸불꾸불 궁문에서 도성을 뚫고 군성지를 지나 채운양에 이르는 2백 리를
메웠다.
거리에는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백성들이 구름처럼 모여 이 장관을 구경하
고 있었다.
이날 조조는 발톱이 노랗고 그 빠르기가 번개 같다는 조황비전마를 타고 화려
한 사냥복 차림으로 천자 옆에서 나란히 말을 몰아 나아갔다. 조조는 천자와 겨
우 말머리 하나 정도의 거리밖에 두지 않았다. 그 뒤를 따르는 것은 모두 조조
의 심복 장수들이었고, 문무백관들은 훨씬 뒤에 떨어져 뒤따르고 있었다.
문무백관들은 감히 헌제 옆에 근접하기도 어려웠다. 문무백관들은 조조가 그
렇게 위세를 부리자 속으로 불쾌하게 여겼지만 아무도 감히 입밖에 내지는 못했
다.
이윽고 궁정 지정의 사냥터인 허전에 이르자, 허전 2백 리 둘레는 10만의 몰
이꾼으로 메워졌다.
헌제가 말을 달려 허전에 이르니 유비는 말에서 내려 헌제가 지나는 길가에
물러서 있다가 겨우 천저를 뵈올 수 있었다.
"오늘은 황숙께서 사냥하는 솜씨를 보고 싶소. 황숙께서도 말에 오르시오."
"황송하옵니다."
유비는 천자에게 절을 올린 후 말 위에 올랐다.
이때 몰이꾼의 함성에 놀란 토끼 한 마리가 풀숲에서 튀어 나왔다. 천자가 유
비에게 토끼를 가리켜보이며 일렀다.
"황숙께선 저 토끼를 쏘아 잡으시오."
유비가 말을 몰아 도망가는 토끼를 뒤쫓으며 활에 화살을 메겨 쏘았다. 흰 토
끼의 등에 화살이 꽂히며 토끼는 풀 위에 나뒹굴었다.
"훌륭하오!"
그때서야 천자는 궁문을 나설 때부터 찌푸렸던 미간을 활짝 펴며 유비를 칭찬
했다.
"저쪽 언덕으로 한번 가 보도록 하오."
일행이 천자가 가리킨 곳을 향해 말을 달릴 때였다. 언덕의 등성이를 돌아가
는데 '바스락' 하는 소리와 함께 가시밭을 헤치며 불쑥 한 마리의 사슴이 튀어
나왔다.
천자는 손에 든 보조궁에 금비전을 메겨 쏘았으나 화살은 사슴의 뿔을 스치며
지나갔다. 두 번, 세 번 연달아 쏘았으나 화살은 계속 빗나가고 말았다.
언덕 아래로 도망쳤던 사슴이 몰이꾼의 함성에 놀라 다시 이쪽으로 뛰어왔다.
"이번에는 승상께서 쏘아 보시오."
천자가 활과 화살을 조조에게 건네 주며 말했다.
조조는 천자의 보조궁에 금비전을 메겨 들고 사슴을 향해 쏘았다. 금비전이
사슴의 등에 깊히 박히자 사슴은 외마디 비명 소리와 함께 풀 위로 쓰러졌다.
공경 백관들은 금비전이 사슴의 등에 꽂혀 있자 모두가 천자가 쏘아 맞힌 것
으로 알았다.
"황제 폐하 만세!"
그리하여 모두들 천자를 향해 만세를 불렀다.
그때 어이없는 일이 벌어졌다.
조조가 급히 말을 몰아 천자의 앞을 가로막더니 사람들의 환호성을 받으며 얼
굴 가득히 웃음을 띠고 활과 금비전을 두 손 높이 쳐들어 화답하는 것이 아닌
가.
그 순간 모든 군신들의 얼굴빛이 흙빛으로 변했다. 갑자기 만세 소리가 그쳤
다. 유비의 등 뒤에서 이 모양을 지켜 보던 관우가 봉의 눈을 부릅뜨며 누에 같
은 눈썹을 치켜세우고 조조를 노려보며 손을 칼집으로 가져갔다.
당장이라도 말을 달려 한칼에 조조의 목이라도 벨 듯한 기세였다. 이를 본 유
비가 깜짝 놀라며 눈짓으로 관우의 노여움을 달랬다. 관우는 유비의 눈짓과 표
정을 보고 가까스로 노기를 억눌렀다.
그때 문득 조조가 유비를 바라보았다. 유비는 관우의 행동을 조조가 눈치챌까
재빨리 웃음을 지으며 다가가 치하했다.
"승상의 활솜씨는 신기와 같아 따를 자가 없을 듯하옵니다."
유비의 칭찬에 조조는 거리낌없이 소리내어 웃으며 말했다.
"이는 오로지 천자 폐하의 홍복일 따름이오."
조조는 그제야 말머리를 돌려 헌제에게 치하를 돌렸다. 그러나 따지고보면 그
처럼 오만불손한 말도 없을 것이다. 자기 같은 유능한 사람이 있으니 천자는 복
이 많다는 말이 아닌가.
조조는 천자의 보조궁과 금비전을 끝내 돌려 주지 않고 자신의 허리에 꿰찼
다. 사냥이 끝나자 허전의 들에서는 한바탕 잔치가 벌어졌다. 화톳불을 놓아 그
날 사냥한 짐승을 굽고 군신들에게 술을 내렸다. 그러나 군신들은 흥이 깨진
듯, 즐거운 분위기가 아니었다. 잔치가 파하자 천자는 서둘러 환궁하였다.
그날 밤 유비는 가만히 관우를 불러 물었다.
"오늘 허전에서 어째서 그와 같은 위험한 행동을 취했는가? 아무도 눈치를 채
지 못해 다행이네만, 근자에 볼 수 없었던 그대답지 않은 과격한 행동이 아닌
가?"
"조조는 기군망상하며 기회를 엿보아 패도를 행할 간웅입니다. 그가 그와 같
은 야심을 벌써 노골적으로 내보인 것입니다. 그를 죽여 나라를 구하고 역적을
제거하려 했는데 어찌하여 만류하였습니까?"
잠시 후 유비가 우선 머리를 끄덕여 같은 새각임을 표한 후 조용히 입을 열었
다.
"아우의 장한 뜻을 몰라서 하는 말이 아닐세. 그러나 '쥐를 잡으려다 독을 깬
다'는 속담이 있네. 그것이 염려되어서였네. 그때 조조와 천자와는 말머리 하나
사이로 가까이 있었지 않는가. 그리고 그 주위로는 조조의 심복들이 에워싸고
있었지 않았는가. 만약 아우가 한때의 분함을 참지 못하고 경솔히 움직였다가
실수라도 한다면 조조는 죽이지 못하고 천자만 상하게 할 수도 있었네. 만일 그
렇게 됐다면 그 모든 죄를 어떻게 감당할 수 있었겠나?"
관우가 유비의 말을 듣고 보니 모두 옳은 말이었다. 그러나 마음 속에 들꿇고
있는 분한 마음을 달래지 못해 탄식했다.
"오늘 저 간웅 조조를 처치하지 못했으니 언젠가는 나라에 큰 화근이 될 것입
니다."
"허전에서 설사 조조의 목을 베었더라도 그에게는 10만의 군사가 있지 않은
가. 우리도 허전 땅에서 조조와 함께 흙이 되었을 것이네. 그렇게되면 제2의 조
조가 또 나타날 것일세. 아직은 기다려야 하네. 장비라면 모를까 그대까지 그토
록 성급하게 생각해서야 되겠는가. 가까운 사람에게라도 행여 그런 말을 비쳐서
는 안 되네."
유비가 다시 한 번 관우를 달랬다.
황제의 밀조와 열 사람의 충의지사
조조로부터 모욕을 받은 천자 헌제는 조조의 횡포로부터 그를 구해 줄 사람을
찾는다. 그러다 역적 토벌의 뜻을 비밀히 전하기 위해 꾀를 쓰는데.... 국구의
입궐을 눈치챈 조조는 퇴궐하려는 그를 붙잡고 천자가 하사한 옥대와 어의를 내
놓으라 한다.
유비와 관우가 허전에서 있었던 이야기를 주고받고 있을 때, 헌제는 대궐로
돌아오자마자 분함을 참지 못해 눈물을 흘리며 복 황후에게 자신의 처지를 호소
하고 있었다.
"짐이 제위에 오르고부터 이때까지 만난 자들은 모두 간웅들뿐이구려. 동탁이
그랬고, 이각.곽사 또한 간사한 무리들이었소. 그리하여 그대와 나는 여느 사람
이 겪지 못한 고초를 겪어 오지 않았소. 그러다가 조조를 얻었을 때는 이 사람
이야말로 사직을 바르게 지켜 줄 신하라고 믿었더니, 이제 보니 대권을 회롱하
여 마음대로 위세를 부리고 있소. 짐은 근자에 그가 괴이한 모사를 꾸미고 있는
것을 수차에 걸쳐 목격한 바 있소. 짐은 조조를 볼 때마다 가시방석에 앉아 있
는 듯하오. 오늘은 또 허전의 사냥터에서 나에게 하는 군신들이 치하를 가로막
아 그가 대힌 받는 무례한 짓을 저질렀소. 이는 임금과 신하 간의 예절이 이미
없어진 거나 한가지요. 머지않아 그가 역모를 꾸밀 것이 분명하니, 우리의 목숨
은 실로 바람 앞의 등불이 되고 말았소."
헌제의 애끓는 하소연에 복 황후가 한숨을 쉬며 헌제를 위로했다.
"만조의 백관들이 모두 국록을 받고 있는데도 이 국난을 구할 만한 사람이 한
명도 없다는 말씀입니까?"
황후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이었다. 한 사람이 불쑥 밖에서 들어서면서 말했
다.
"폐하께서는 조금도 심려치 마십시오. 제가 믿을 만한 인물 한 사람을 천거하
겠습니다."
황제가 놀라 그를 보니, 그는 복 황후의 친정 아비인 복완이었다. 황제는 눈
물을 닦을 생각도 잊은 채 그를 보고 물었다.
"황장(임금의 장인)도 조조가 그 동안 권세를 마음대로 휘두르고 있음을 알고
계시오?"
복완이 대답했다.
"사냥터에서의 일을 누가 보지 않았겠습니까? 지금 조정에서 일하는 자들은
모두가 조조의 친족이거나 심복들입니다. 그러니 폐하의 인척된 이가 아니면 누
가 충성을 다해 역적을 토벌하려 하겠습니까? 신은 이제 늙고 힘이 없어 그 일
을 도모하기가 어렵습니다. 다만, 국구(황제의 장인)이신 거기장군 동승(동귀비
의 아버지)만은 믿을 만한 인물로 사려되옵니다."
복완의 말에 헌제는 밝은 얼굴이 되어 그를 청해 오도록 했다.
"국구께서 여러 번 나라의 어려움을 당할 때마다 힘써 도운 것을 짐도 들은
바 있소. 즉시 입궐토록 하여 이 일을 도모했으면 하오."
복완은 서두는 헌제를 일깨웠다.
"아니 되옵니다. 지금 폐하의 주위에는 온통 조조의 눈과 귀가 도사리고 있습
니다. 만일 이 일이 새어 나가면 큰 화가 미칠 것입니다."
"그럼 짐은 어찌하면 좋겠소?"
"신에게 한 가지 방책이 있습니다. 옷을 한 번 새로 지어 옥대 하나를 곁들어
동승에게 은밀히 하사하십시오. 그 옥대의 안쪽 비단을 뜯고 그 안에 밀조를 넣
은 후 표가 나지 않게 꿰매시면 어느 누구도 모를 것입니다. 폐하께서 직접 동
승을 불러 그 옥대 속에 밀조가 있음을 넌지시 알리고 그걸 집으로 가져가서 읽
어 보게 하십시오. 그렇게 하시면 폐하의 밀조는 귀신도 모르게 동 국구에게 전
해질 것입니다."
"참으로 좋은 묘안이오."
천자는 복완의 모계에 감탄하며 곧 손가락을 깨물어 흰 비단에 피로써 조서를
썼다. 복 황후는 손수 옥대 속받침에 조서를 넣어 꿰매니 감쪽같았다.
이튿날 천자는 은밀히 칙명을 내려 동승을 불렀다.
'무슨 일로 부르실까?"
동승은 사냥터에서 일어났던 일을 알고 있었다. 그 뒤 천자에게 무슨 일이라
도 생기지 않을까 하고 걱정하고 있던 차에 천자의 칙명을 받아 동승은 급히 천
자를 배알했다.
"동 국구께선 요즈음 건강은 어떠시오?"
부름을 받고 황망히 달려온 동승에게 천자는 태연히 이렇게 물었다. 주위의
군신들로 하여금 이상한 낌새를 느끼지 않게 하기 위함이었다.
"성은을 입사와 이렇게 건강하옵니다."
"그건 무엇보다 다행스러운 일이오. 실은 어젯밤, 복 황후와 함께 이야기를
주고받던 중 지난날 이각.곽사에게 쫓기던 때의 고초를 돌이켜보게 되었소. 그
리고 그때 국구께서 세운 공로를 다시 생각하게 되었소. 눈물겨웠던 그때를 돌
이켜보고 문득 오늘날까지 경에게는 아무런 은상도 내리지 못했음이 떠올라 늦
게나마 위로할 양으로 오늘 특별히 이렇게 부른 것이오."
"황송할 따름입니다."
천자의 뜻밖의 말에 동승은 몸둘 바를 몰랐다.
천자는 동승을 데리고 전각을 나가 어원을 거닐며 그 동안 낙양에서 장안으
로, 그리고 이 허창에 천도한 지난 일들을 얘기하기 시작했다.
"돌이켜보건대, 몇 차례나 나라에 위급한 때가 있었소. 그러나 종묘사직을 보
존할 수 있었던 것은 오로지 경과 같이 충절한 신라가 있었기 때문이오."
황제는 동승에게 거듭 치하하며 그를 위로했다.
황제는 그와 함께 태묘(역대 황제의 위패를 모신 곳)의 돌계단을 오른 후 공
신각에 올라 몸소 향을 피우고 그 앞에서 세 번 절을 올렸다.
황제가 동승을 여기까지 이끈 것은 조조의 눈과 귀를 피하기 위함이었다. 공
신각은 한나라 역대 조종(왕의 조상)의 제사를 모시고 있는 영묘였다. 좌우의
벽에는 한나라 고조로부터 24대에 걸친 역대 황제의 초상이 걸려 있었다.
중앙에 걸린 한 고조 유방의 초상을 보며 천자가 동승에게 물었다.
"동 국구, 짐의 선조는 어디에서 몸을 일으켜 어떻게 국가 창업의 기틀을 닦
으셨소?"
황제가 엄숙한 얼굴로 이렇게 묻자 동승이 머리를 조아리며 대답했다.
"폐하, 어찌하여 신을 회롱하십니까?"
헌제가 정색을 하며 일렀다.
"성조에 대한 일이거늘 어찌 추호라도 허튼말을 하겠소? 어서 말해 주시오."
그제야 동승도 정색을 하며 입을 열었다.
"고조 황제께옵서는 사상의 정장에서부터 몸을 일으키시었습니다. 3척의 검
하나로 망탕산에 있던 백사(흰뱀)를 베시고 의로운 군사를 일으키시었습니다. 3
년 만에 진나라를, 다시 5년 만에 초나라를 멸망시키고 대한 4백 년, 만세의 기
업을 이룩하셨습니다."
그 말을 듣던 천자의 눈에는 눈물이 고여 있었다.
"... 폐하. 어찌하여 그토록 슬퍼합시니까?"
황제는 동승의 물음에 탄식했다.
"경이 말한 대로요. 조종은 그와 같은 영웅이셨건만 그 자손인 짐은 이토록
나약하고 겁이 많으니 어찌 한스럽지 않겠소."
천자는 다시 한 고조의 좌우에 걸린 초상을 가리키며 다시 물었다.
"고조 황제의 좌우에 있는 분들에 대해서도 들려주시오."
그제야 동승은 천자가 딴 뜻이 있어 자신에게 묻고 있다는 것을 어렴풋이 짐
작했다.
동승이 다시 입을 열었다.
"장량과 소하이옵니다 .장량은 유막 안에서 계책을 세워 1천 리 밖에서 이기
셨습니다. 소하는 나라의 법을 세워 백성을 다스리고, 밖으로는 제방을 튼튼히
하여 나라를 굳게 지켰사옵니다. 고조께서는 항상 그 공덕을 치하하시며 두 분
을 곁에 시립하게 하셨습니다. 그리하여 두 분을 건업의 2대 공신이라 추앙하며
고조 황제의 초상이 있는 곳에는 반드시 그 좌우에 두 충신의 초상도 함께 모시
게 했습니다."
"과연 저와 같은 두 충신은 참다운 사직지신이라 아니할 수 없소."
"그러하옵니다."
동승은 천자의 말에 문득 자신이 책망을 받고 있다는 생각에 마음을 졸였다.
헌제는 좌우를 살펴보았다. 시종들이 멀리 떨어져 있음을 보고 동승에게 넌지
시 일렀다.
"국구께서도 장량과 소하처럼 짐의 곁에 그려지도록 해 주시오."
"황송할 따름입니다. 우둔한 신은 아무런 공도 세우지 못했습니다. 감히 어지
그 일을 감당하겠습니까?"
"국구께서는 지나친 겸양의 말씀이시오. 국구께서 서도에서 어가를 구한 공을
한시도 잊지 않고 있소. 무얼 가지고 그 공을 갚아야 할지 모르겠소. 국구께선
짐의 이 도포와 옥대를 두르시오. 그러면 항상 짐의 곁에 있음과 다름이 없을
터이오."
헌제는 자신이 입고 있던 도포와 옥대를 벗어 하사했다. 동승은 분에 넘치는
영광에 감복하여 고개를 들지 못했다. 헌제는 동승에게 귀엣말로 조용히 말했
다.
"경은 돌아가서 금포 옥대를 자세히 살피어 부디 저의 뜻을 저버리지 말아 주
시오."
동승은 헌제의 말에 정신이 번뜩 들었다. 천자가 내린 어의와 옥대가 예사로
운 것이 아님을 알았기 때문이었다.
동승은 어의와 옥대를 받은 후 궁중에서 물러나왔다.
그런데 어느 새 천자와 동승의 거동이 조조의 귀에 들어갔다.
"황제께서는 국구 동승과 함께 공신각에서 오랫동안 얘기를 나누고 있습니
다."
조조가 그 말을 듣자 심상치 않음을 느꼈는지 서둘러 행차 준비를 시키더니
급히 대궐로 향했다. 조조는 궁문 밖에서 수레에서 내린 후 궁궐로 들어갔다.
동승은 이때 궁문을 물러나와 막 나서려던 참이었다. 조조는 마침 대궐을 나
서는 동승과 궁문에서 마주쳤다. 동승은 조조의 모습을 보자 깜짝 놀라 얼굴색
이 변했다. 동승은 몸을 숨길 겨를도 없었다. 순간 한쪽으로 비켜서며 조조에게
허리를 굽혀 예를 올렸다.
"국구께서는 어인 일로 대궐에 오시었소?"
조조가 매서운 눈길로 동승을 살펴보며 물었다.
조조는 이미 그가 입궐한 것을 알고 있다는 것은 은연중에 암시했다. 그렇게
함으로써 동승이 함부로 서툰 거짓말을 꾸며 대지 못하도록 하자는 것이었다.
동승은 그가 이미 자신이 입궐한 사실을 알고 있는 이상 천자가 내리신 어의
와 옥대를 숨길 수 없음을 알았다. 동승은 조조에게 사실대로 얘기했다.
"폐하의 부름을 받아 입궐하였습니다. 황송하옵게도 어의와 옥대를 하사하시
어 황은에 감격한 채 퇴궐하는 중이옵니다."
"그래요? 그건 근자에 없었던 명예로운 일이오. 그런데 어떤 공로가 있었기에
그런 영광을 누리게 되셨소?"
"지난번 장안에서 천도하였을 때 폐하를 받들어 모신 공로라고 하셨습니다."
"그때의 은상을 지금에 내리신다는 말씀이오? 늦은 은상이나 전례에 없었던
일이오."
"덕 없고 공 없는 미천한 신에게는 과분한 일이라 감격하고 있사옵니다."
"그러실 것이오. 이 조조도 경처럼 그런 은혜를 누리고 싶소. 그 어의와 옥대
를 잠깐 보여 주시오."
동승은 오늘 천자의 거동과 표정이 예사롭지 않았음을 깨닫고 있었다. 더욱이
옥대를 주면서 조용히 일렀던 천자의 말이 생각났다. 하사하신 어의와 옥대 안
에 천자의 밀조라도 감추어져 있을지 몰랐다. 동승은 이런 생각이 들자 섬뜩하
여 잠시 머뭇거렸다.
"여봐라. 국구 어른의 옥대를 받아 오라!"
동승이 머뭇거리고 있자 조조가 좌우를 보며 소리쳤다. 동승은 하는 수 없이
어의와 옥대를 건네 주었다.
조조는 어의를 받아 털어 보더니 햇빛에 비추어 보기도 하며 꼼꼼히 살펴보았
다.
한동안 어의와 옥대를 살펴보던 조조는 껄걸 웃으며 어의를 입고 옥대를 둘렀
다.
"어떤가. 잘 어울리느냐?"
"잘 어울리십니다. 크지도 작지도 않음이 마치 승상께서 입으시던 옷인가 하
옵니다."
조조는 흐뭇하다는 듯이 웃으며 동승을 돌아보며 말했다.
"국구께서는 이 도포와 옥대를 나에게 선사하시지 않겠소? 그 대신 다른 것으
로 사례하겠소. 이 조조에게 양보하시오."
조조의 무례한 청에 동승의 얼굴빛이 달라졌다.
"천자께서 하사하신 것입니다. 어찌 함부로 남에게 줄 수가 있겠습니까? 따로
이와 똑같은 것을 제가 한 벌 지어 올리겠습니다."
동승이 거절하자 조조는 이제 대 놓고 동승에게 재우쳐 물었다.
"그렇다면 이 의대 속에 천자와 국구 사이의 어떤 비밀을 감춰 둔 게 아니
오?"
조조의 말에 동승은 또 한 번 가슴이 뜨끔했다. 입술이 타 들어가면서도 마음
을 가다듬어 태연히 대답했다.
"그렇게 말씀하시니 하는 수 없습니다. 어의도 옥대도 기꺼이 승상께 바치겠
소이다."
동승이 그렇게 말하자 조조는 웃음을 머금으며 어의와 옥대를 벗어서 건네 주
었다.
"어찌 함부로 천자의 하사품을 가로챌 수 있겠소. 우스갯소리로 한번 해 본
소리요."
조조는 당황해할 것으로 알았던 동승이 선선히 어의와 옥대를 바치려하자 그
제야 의심을 풀었다.
조조에게 돌려받은 도포와 옥대를 받아들고 동승은 호랑이 굴을 빠져 나온 듯
이 놀란 가슴을 쓸어 내리며 발길을 서둘러 집으로 돌아왔다.
집에 돌아온 동승은 서재로 가 옥대를 살펴보았다. 영롱한 흰 구슬에 꽃과 용
이 새겨져 있었고, 뒤를 받친 것은 자줏빛 비단이었다.
그러나 아무리 살펴보아도 눈에 띄는 특별한 것은 없었다. 동승은 다시 도포
를 살펴보았다. 그러나 도포 역시 마찬가지였다. 밤늦도록 도포와 옥대를 번갈
아 가며 이리저리 살피던 동승은 아무것도 발견할 수가 없자 혼자 생각에 잠겼
다.
'천자께서 어의와 옥대를 내리시며 잘 살피라 하시지 않았던가. 그러나 아무
것도 찾을 수가 없으니 이게 어찌된 노릇인가. 혹시 내가 지나치게 생각하는 것
은 아닐까?'
동승은 이렇게 생각하며 어의와 옥대를 탁자 위에 올려놓았다. 동승은 어의와
옥대를 하사하실 대의 천자의 말씀과 용안의 표정을 다시 떠올려 보았다. 천자
가 간곡한 당부의 말씀을 하실 대의 모습에는 분명 여느 때와는 다른 무엇이 있
는 듯했다.
어느 새 밤은 깊어 갔다. 동승은 아무리 들여다보며 자세히 살폈으나 역시 눈
에 띄는 게 없었다.
때마침 창틈으로 바람이 불어 왔다. 옆에 놓인 촛불이 바람에 흔들리며 타 들
어가던 심지에서 불똥이 튀어 옥대 위로 떨어졌다. 튄 불똥에 옥대가 타 들어갔
다. 깜짝 놀란 동승이 손으로 눌러 껐으나 옥대에는 이미 조그만 구멍이 나 있
었다.
동승은 천자의 하사품을 태웠으므로 송구스런 마음으로 크게 당황하여 손가락
으로 구멍 난 자국을 매만지고 있었다. 그러자 문득 타 들어간 곳에 하얀 천이
보이고 그곳에 군데군데 빨간 핏자국 같은 것이 보였다. 자세히 살펴보니 꿰맨
자국도 역력히 보였다.
동승은 손칼로 옥대의 꿰맨 자리를 타기 시작했다. 그 속에서 흰 비단에 피로
쓴 천자의 밀조가 나왔다.
동승은 가슴을 두근거리며 밀조를 읽어 내려갔다.
짐이 듣건대, 인륜에서 크게 치는 것은 부자의 도리가 우선이며, 존비에서 특
히 꼽는 것은 군신의 도리가 무거움이라 하였다. 그러나 근래 조조는 나라의 대
권을 회롱하여 군주를 속이고 억압하며 사사로이 무리를 이루어 조정의 기강을
무너뜨리고 있도다. 그가 내린 벼슬과 그가 주는 상벌을 나는 알지 못하노라.
짐이 밤낮으로 걱정하고 두려워하는 것은 그 때문에 장차 천하가 위태로워지지
않을까 하는 것이다.
경은 곧 나라의 대신이요, 짐의 가까운 친척이니 고조께서 이 나라를 창업하
길 때 어려우셨던 일을 잊지 않도록 하라. 그리하여 충의열사를 규합하여 간사
한 무리를 멸하고 종묘사직의 위태로움을 미연에 방지하도록 하라. 이는 조종의
크나큰 다행이라 하노라.
이에 창황히 손가락을 깨물어 흐르는 피로 조서를 써 경에게 주노라. 거듭 신
중히 행하여 짐의 뜻이 헛되지 않도록 하라.
건안 4년 봄 3월 조
동승은 천자의 조서를 읽고 난 후 하염없이 눈물을 혈서 위에 떨구었다.
그는 잠자리에 들었으나 밤새 잠을 이루지 못했다. 천자가 그토록 상심하고
있다는 것 알고도 당장 조조의 세력에 밀려 어떻게 해야 할지 계책이 떠오르지
않는 자신이 부끄러웠다.
아침이 되자 다시 조서를 펼쳐 놓고 조조를 죽일 궁리를 거듭했으나 묘책이
떠오르지 않았다. 그렇게 생각에 잠겨 있다가 어젯밤 뜬눈으로 밤을 새웠던 터
라 그만 깜박 잠이 들고 말았다.
시랑 벼슬에 있는 왕자복이라는 사람은 동승의 둘도 없는 친구였다.
왕자복은 동승의 집을 평소에 자기 집처럼 드나들었으므로 집사람들의 안내도
받지 않고 서재 쪽으로 갔다.
왕자복이 서재에 와 보니 동승이 책상에 엎드려 잠들어 있었다.
'아니, 어인 일로 지금까지 자고 있을까?'
왕자복이 의아하게 여기며 서재 안에 들어와 그의 등 뒤로 다가갔다. 그러자
동승이 흰 비단을 팔꿈치 밑에 깔아 놓고 있는 것이 보였다. 얼른 보니 '짐'이
라는 글자가 눈에 띄었다. 깜짝 놀라 왕자복은 조심스럽게 그 비단을 끌어 내
읽어 본 후 그것을 옷소매 속에 감추었다.
동승이 깨어난 건 그로부터 몇 각이 지난 뒤였다. 눈을 떠 보니 왕자복이 앞
에 앉아 있자 동승은 깜짝 놀라 당황하며 계속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그러나 황
제의 조서는 보이지 않았다.
"국구께선 혹시 이걸 찾고 계십니까?"
왕자복이 그런 동승을 보며 소매에서 천자의 조서를 꺼내 보였다.
"아니? 언제...."
동승이 놀란 눈으로 왕자복을 보았다. 왕자복은 그런 동승을 보며 이윽고 자
리에서 몸을 일으키며 말했다.
"국구께서 조 공을 죽이려 하니, 나는 이걸 승상부에 바쳐야겠소."
동승은 황급히 그의 소매를 붙들며 눈물을 글썽이며 간했다.
"그렇게 하시면 이제 한실은 끝장을 면키 어려울 것이오. 형께서도 누대에 걸
쳐 한실의 은혜를 입은 조신의 한 사람이지 않소. 행여 나에 대한 노여움이 있
다면 그것은 한낱 사사로운 원한에 지나지 않을 것이오. 형은 그 때문에 대의를
저버려서는 아니될 것이오."
왕자복은 동승의 말을 듣더니 조용히 웃었다.
"국구께선 안심하시오. 내 어찌 한실을 저버릴 수 있겠소. 내가 한 말은 국구
의 마음을 한번 떠 본 소리요. 그러나 국구께서 소생에게도 이 일을 감추어 혼
자서만 노심초사하심은 섭섭하기 그지없습니다."
동승은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노여워 마시오. 아직 나 자신도 분명한 계책이 서지 않아 근심하고 있는 중
이오."
"우리 조상도 대대로 한실의 녹을 받아 왔소. 내겐들 어찌 충성심이 없겠소?
작은 힘이나마 소생도 그대의 한 팔이 되어 돕겠소. 기필코 조조 그 역적을 엄
살토록 합시다."
왕자복의 말에 동승이 감격하여 그의 손을 잡으며 말했다.
"실로 한실을 위해 다행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왕자복이 동승에게 자신의 생각을 털어놓았다.
"그렇다면 이 일은 말로써만 할 것이 아닙니다. 함께 밀실에 들어가서 비록
삼족이 멸문의 화를 당할지라도 황제께 충성을 다할 것을 의장으로 써서 맹세함
이 어떻겠소?"
동승은 왕자복이 그같이 말하자 더욱 감격했다.
두 사람은 밀실로 들어가 의맹의 피를 서로 마셨다. 그런 다음 비단 한 필을
꺼내 동승이 먼저 거기에 의맹의 뜻을 쓰고 서명하였다. 왕자복도 성명을 쓰고
그 아래 손가락을 깨물어 피로 지장을 찍으니 조조도 문제 없다는 듯한 기세였
다.
"이로써 형과 나와의 의맹은 맺어졌으나 우리와 뜻을 함께 할 다른 동지들이
있으면 좋지 않을까요?"
"제가 생각하고 있는 사람이 있습니다. 오자란 장군은 소생의 좋은 친구입니
다. 그는 충성심이 두터운 인물이니 의로써 설득하면 반드시 힘이 줄 것입니
다."
동승의 물음에 왕자복이 한 사람을 천거했다.
그러자 동승도 생각한 바를 밝혔다.
"문무백관들 중에도 교위 충집과 의랑 오석이 있습니다. 두 사람 모두 한실의
충신입니다. 좋은 날을 택해 의논해 보았으면 하오."
두 사람이 이야기를 주고받다 밤이 깊어지자 왕자복은 동승의 집에 머물렀다.
다음 날도 서재에서 은밀히 의논을 하고 있는데 한낮이 되자 가신이 손님이
찾아왔다고 알려 왔다.
동승이 그들을 맞으러 갔다가 서재로 들어서며 말했다.
"호랑이도 제 말을 하면 온다더니 바로 그들이 찾아왔소."
"그들이 누굽니까?"
왕자복이 물었다.
"어젯밤에 말한 의랑 오석과 교위 충집입니다."
동승의 말에 왕자복은 귀엣말로 속삭였다.
"두 사람의 본심을 확실히 알 때까지는 소생은 병풍 뒤에 숨어 있도록 하지
요."
왕자복이 병풍 뒤에 몸을 숨기자 동승은 그들을 반갑게 맞아들였다.
"잘 오셨습니다. 오늘은 무료하던 참이라 책을 일고 있었는데, 이렇게 오시니
참으로 반가울 뿐이오."
"조용히 글을 읽으시는데 방해가 되지 않았는지요?"
"아닙니다. 글읽기에도 싫증을 내고 있던 중이었소. 그러나 사서는 언제 읽어
도 재미있군요."
"춘추입니까, 사기입니까?"
"사기입니다."
"지난번 천자께서 허전에 사냥을 나가실 때 국구께서도 호종하셨지요?"
"그렇소이다."
"그날 일을 어떻게 생각하시오?"
뜻밖에도 자기가 묻고 싶은 말을 오석이 꺼내자 동승은 귀가 번쩍 띄었으나
내색하지 않고 태연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허전에서의 사냥은 근래에 드문 유쾌한 날이었소. 오랜만에 쌓인 근심 걱정
을 모두 산야에 뿌려 버렸으니 어찌 유쾌하지 않았겠소."
동승이 천연덕스럽게 이렇게 대꾸하자 오석과 충집이 불만스러운 어조로 되물
었다.
"유쾌한 날이었다는 말씀은 본심이 아니시겠지요? 저희들은 지금도 가슴이 찢
어질 듯합니다. 어지 유쾌한 날이었다 하십니까? 허전의 사냥은 한실의 치욕입
니다."
"어찌하여 한실의 치욕이라 하십니까?"
동승은 시치미를 떼고 물었다. 이번에는 충집이 언성을 높였다.
"그럼 국구께서는 그날 조조가 저지른 무도한 짓을 보고도 아무렇지 않았다는
말씀이십니까?"
"조금 언성을 낮추시오. 조조는 천하에 제일 가는 자요. 벽에도 귀가 있다 하
지 않았소?"
동승이 주의를 주었으나 충집은 조금도 개의치 않았다. 더욱 열을 내어 떠들
었다.
"조조가 뭔데 그를 두려워해야 한다는 말이오? 그가 강대한 힘을 가졌다 하나
하늘이 돕지 않는 간웅일 따름이오. 우리가 미력하나 충성을 본의로 삼으며, 종
묘사직을 지키는 조정의 신하임에는 틀림없소. 이에 비해 조조는 역적일 뿐이
오. 조정의 신하가 어지 역적을 두려워하겠소."
동승이 충집의 말을 듣고 넌지시 마음을 떠 봤다.
"경들은 그런 말을 본심으로 하는 것입니까?"
"본디 이런 말은 함부로 입에 담을 일이 아니지 않습니까?"
"그러나 아무리 통분을 품고 있다 한들 세력이 막강한 조조를 어떻게 도모할
것입니까?"
"의를 받들면 하늘의 가호를 받을 것이오. 은밀히 때를 기다려 그 틈을 노려
야 합니다. 설사 아무리 튼튼한 교목일지라도 거세게 부는 의로운 바람 앞에는
쓰러지지 않을 수 없을 것이오. 실은 오늘 국구의 의종을 알아보려고 이렇게 찾
아뵙게 된 것입니다."
오석의 말소리는 점점 높아졌다.
이때였다. 병풍 뒤에서 이들의 말을 엿듣고 있던 왕자복이 갑자기 모습을 드
러내며 소리쳤다.
"그대들은 조 공을 음해하려는 모반자들이 아니오? 내 그대들을 고해 바쳐 곧
이곳으로 승상부의 군사들을 부를 것이오. 동국구께선 증인이 되어주시오."
충집.오석은 갑작스런 왕자복의 출현에 깜짝 놀랐다. 그러나 이내 차갑게 왕
자복을 바라보며 말했다.
"충신은 목숨을 두려워하지 않는 법이다. 언제라도 이 한 목숨 한실에 바치고
싶으니 그대 마음대로 하라."
충집이 검에 손을 댔다. 왕자복이 밖으로 나가기만 하면 단번에 벨 듯한 기세
였다. 그때서야 동승이 웃으며 두 사람 사이에 끼여들었다.
"시랑 자복이 그대들을 한번 떠 본 것이오. 실은 나와 시랑 자복도 그 일을 의
논하고 있던 중 공들의 방문을 받은 것이었소."
동승은 그들을 밀실로 청하여 들어오게 한 뒤 황제의 밀조를 두 사람 앞에 보
였다.
충집과 오석도 천자의 혈서를 대하자 쉴새없이 눈물을 흘렸다. 동승이 충집과
오석에게 흰 비단을 내밀어 서명할 것을 청하자 두 사람은 망설임 없이 붓을 들
었다.
두 사람이 연판장에 이름을 적자 왕자복이 말했다.
"두 분께선 잠시 기다려 주시오. 내가 가서 오자란을 데리고 오겠소."
왕자복이 나간지 얼마 되지 않아 오자란을 데리고 왔다. 인사를 나눈 후 오자
란도 의장에 이름을 적고 뜻을 함께하기로 했다.
동승의 기쁨은 컸다. 순식간에 네 사람의 동지를 얻게 된 셈이었다. 그들을
후원 별당으로 청해 술을 대접하며 앞일을 의논했다.
그때 집에서 부리는 하인이 알렸다.
"서량태수 마등 공께서 임지로 돌아가신다며 인사차 오셨습니다."
하인의 전갈에 혀를 차며 못마땅해했다.
"하필이면 이런 때에 오다니...."
왕자복과 오석이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
"떠난다고 인사차 왔다니 만나지 않을 수도 없겠구려."
동승은 머리를 저으며 하인에게 일렀다.
"내가 지금 몸이 불편하여 만날 수 없다고 전하라."
문지기가 동승의 말을 그대로 마등에게 전했다. 그러나 마등은 대로하여 벽력
같이 고함을 질렀다. "너는 어찌하여 내게 거짓을 고하느냐? 내가 지난 밤에 동
화문 밖에서 동 극구 어른이 비단 도포에 옥대를 차고 퇴궐하는 모습을 보았는
데 갑자기 무슨 병이란 말이냐? 내가 소일삼아 온 것도 아니며, 공무 급히 달려
온 것인데 왜 막으려 하느냐?"
하인이 동승에게 다시 와 분노한 마등의 말을 그대로 전했다.
"하는 수 없구려. 그럼 별실에서 잠깐 만나 보고 오겠소."
동승이 마지못해 별실에서 그를 맞았다. 마등은 화가 잔뜩 난 얼굴로 동승을
보자 대뜸 따지듯 물었다.
"황제를 뵙고 서량으로 돌아가는 길에 인사나 드릴까 하고 찾아왔소이다. 그
런데 어찌하여 문전박대를 하시오?"
"천한 몸에 갑자기 병이 나 누워 있던 참이라 오히려 실례라 여겼습니다. 영
접에 소홀한 죄 너그러이 용서해 주십시오."
그러나 이미 술을 몇 순배 마신 동승이었다. 동승의 불그레한 혈색을 쏘아보
던 마등이 동승의 변명에 빈정대듯 말했다.
"내가 보기에 대감 얼굴은 봄빛이 가득하군요. 참으로 혈색이 좋은 병자외
다."
동승은 입을 열지 못했다. 마등이 자리를 박차고 일어서며 탄식했다.
"나라의 주석(국가의 기둥)은 아니었구나. 쓸모 없는 이끼만 낀 흔한 돌덩어
리였단 말인가...."
동승은 그 소리에 귀가 번쩍 띄었다. 마등이 말이 심상치 않아 속으로 감격을
숨긴 채 마등을 붙들었다.
"장군, 나라의 주석이 아니라 함은 무슨 말씀이시오?"
"국구께서는 허전 사냥 때 조조가 하던 짓을 보지도 못하셨소? 그 일을 생각
하면 나는 지금도 가슴이 터질 것만 같소. 그런데 공은 황제의 가까운 인척이면
서도 역적을 물리칠 생각은 하지 않고 술만 자시고 계시니 대체 누가 이 나라를
구한다는 말이오?"
동승은 마등의 말에 감격했으나 아직은 그의 속마음을 알 수 없어 짐짓 정색
을 하며 다시 물었다.
"조 승상은 나라의 동량(나라의 인재)이요, 온 조정이 다 조 승상의 힘에 의
지하거늘 공은 어찌하여 그런 말을 하시오?"
"조조 그 역적놈을 믿고 있다는 말이오?"
동승이 말에 마등은 벌컥 화를 내며 소리쳤다.
동승은 주위를 살폈다.
"벽에도 귀가 있다 하였소. 목소리를 좀 낮추시구려."
마등은 동승의 말에 아랑곳하지 않고 더욱 언성을 높였다.
"사는 것만 탐하고 죽음을 두려워하는 자와는 더 이상 말할 필요도 없소이
다."
마등은 그렇게 말하며 밖으로 걸음을 옮겼다. 동승은 그제야 그의 본심을 알
고 그를 붙들어 세웠다.
"공은 잠깐 기다리시오. 이 이낀 돌덩이가 보여 드릴 게 하나 있소이다."
동승이 그의 소매를 이끌어 서재로 안내한 다음 황제의 밀조를 보여 주었다.
황제의 밀조를 본 마등은 머리털을 곤두세우며 이를 갈다가 입술이 깨물려 입
안에 가득 고인 피가 입술 사이로 흘러 나왔다. "나와 뜻을 함께 한 동지가 있
다는 것을 알고 기뻤소이다. 그러나 일을 거듭 신중히 하기 위해 무레함을 무릅
쓰고 장군의 마음을 헤아려 본 것입니다. 장군께서 함께하신다면 대사는 이미
절반은 성취한 바나 다름없습니다."
동승은 마등에게 연판장에 서명할 것을 청하고 오자란.충집.오석을 소개했다.
마등이 의장에다 피로써 서명한 후 입을 열었다.
"대사를 결해하는 날이 오면 나는 즉시 서량의 군사를 이끌고 달려와 밖에서
호응하겠소."
동승은 일행에게 앞날을 축원하는 조촐한 잔치를 벌였다. 마등은 맹세의 표로
술잔 속에 피를 떨어뜨려 들이켰다.
"이 몸은 이제 이 맹약에 목숨을 걸겠소. 그리고 열 사람이 되는 날에 대사를
일으킵시다."
마등의 말에 동승이 입을 열었다.
"좋으신 말씀이나 충의지사란 그렇게 많은 것이 아니오. 합당치 않은 자가 끼
여들면 오히려 그로 인하여 해를 당할 수도 있습니다."
그 말에 마등이 동승에게 제의했다.
"그렇다면 충의지사를 우리가 고르면 될 것이오. 공께서는 조정의 열좌원행로
서부를 보여 주셨으면 합니다."
마등이 말한 열좌원행로서부란 조정 관원의 신상을 기록한 명부였다. 동승이
즉시 그 명부를 가져오자 명단을 차례로 넘기며 이름을 꼽아 보았으나 좀처럼
마음에 맞는 인물이 나타나지 않았다.
그때 한 사람씩 손으로 이름을 짚어 보고 있던 마등이 소리쳤다.
"여기 바로 이분이오."
마등의 외침에 모두 마등이 가리키고 있는 손끝의 이름을 바라보았다.
풍운을 떨쳐 몸을 일으키는 영웅들
동승을 만나 의장에 맹서한 유비는 그날 이후 은인자중하며 농사를 짓는다.
이에 관우.장비는 답답함을 이기지 못해 성화를 부리고, 어느 날 유비는 조조의
갑작스런 부름을 받는다. 술잔을 기울이며 조조는 유비의 마음을 떠 보려 당세
의 영웅을 논한다.
마등이 가리킨 명부에는 유씨 종친들의 명단이 나열되어 있었다. 마등이 무릎
을 치며 다시 말했다.
"예주의 자사 유현덕의 이름이 여기 있지 않소? 왜 이분과 상의하지 않으셨
소?"
그러자 동승이 고개를 저었다.
"그 사람이 황제의 종친으로 황숙이라고는 하나 지금은 조조 아래에서 벼슬을
지내고 있지 않소. 그런 인물이 어찌 우리와 뜻을 같이하겠소?"
"그렇지 않습니다. 다른 열 사람보다 이 한 분을 맞게 되면 우리들의 맹약은
천근의 무게를 더할 것이오. 현덕뿐만 아니라 그의 의제도 언젠가는 조조를 주
살하고야 말겠다는 뜻을 가지고 있을 것이오."
"장군께서는 어떻게 그걸 아십니까?"
마등의 말에 동승이 물었다.
"내가 전에 허전의 사냥터에서 그들의 행동거지를 살펴보았소. 방약 무도한
조조가 폐하를 가로막고 대신해서 백관들의 만세를 받을 때 현덕의 의제 관운장
이 칼을 빼어 그를 죽이려 했소. 그러자 유현덕이 눈짓으로 그를 말렸소. 유현
덕이 말린 것은 조조를 살리기 위해서가 아니라 주위에 조조의 심복과 10만의
군사가 있었기 때문일 것이오. 유현덕은 은진자중하고 있음이 틀림없소. 그를
만나 청한다면 반드시 우리와 뜻을 같이할 것이오."
마등의 말을 듣고 있던 오석이 끼여들었다.
"이 일은 너무 서둘러서도 아니 될 것입니다. 의논을 거듭한 끝에 결정을 내
려야 할 것입니다."
모두 오석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날은 우선 유비의 마음부터 알아보기로
결정하고 헤어졌다.
다음 날 밤이었다. 동승은 황제의 밀조를 가슴 깊이 감추고 유비의 공관으로
향했다.
깜깜한 밤중에 거기장군 동승이 왔다는 말에 유비는 의아해하면서도 별실로
맞아들였다.
"국구께서 이런 밤중에 저를 찾으시니 필시 곡절이 있을 것입니다. 무슨 연유
인지 말씀해 주십시오."
유비는 곧 조촐한 주안상을 차려 동승에게 대접하며 말했다.
"조조의 눈을 피해 일부러 야밤을 기다려 찾아오게 되었소이다."
동승이 그렇게 말하자 유비가 정색을 하며 동승을 바라보았다. 동승이 유비에
게 물었다.
"지난번 사냥터에서 운장이 조조를 칼로 베려 하였소. 그런데 공께서는 눈짓,
손짓으로 그를 말리셨는데 그 까닭이 무엇이오?"
유비의 얼굴에 논란 빛이 역력했다.
"그걸 공께서 어떻게 아셨습니까?"
"다른 사람은 보지 못했을 터이나 나는 보았소."
유비는 동승을 살펴보았다. 이 밤중에 자신을 찾아와 이런 말을 하는 동승의
진의를 엿보지 위함이었다. 그러나 사냥터에서 있었던 일을 그가 보았다니 더
이상 꾸며 댈 수도 없을 뿐만 아니라 은밀히 밤중에 찾아와 얘기하는 것으로 보
아 자기를 위해하려는 것은 아닌 듯했다. 그러나 유비는 마음을 놓을 수가 없었
다.
"아우는 원래 대쪽같은 성미라, 그날 조 승상께서 하신 일이 폐하를 업신여기
는 것이라 생각하고 울컥했던 것 같습니다."
유비의 말에 동승이 문득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통곡했다.
"국구께서는 어찌하여 그토록 슬피 우십니까?"
"실로 부끄러울 따름이오. 여러 대신들이 모두 관운장 같은 마음만 갖고 있었
다면 조정이 이 지경이 되지는 않았을 것이오."
유비가 그런 동승을 보며 짐짓 말머리를 돌렸다.
"승상부에는 조 승상께서 계시고 조정에는 극구 같은 분이 계시므로 천하가
태평하지 않습니까. 국구께서는 무엇을 근심하고 계십니까?"
이 말에 동승은 노기 띤 얼굴로 분연히 말했다.
"공은 내가 조조의 부탁이라도 받고 염탐이나 하러 온 줄 알고 경계하고 계신
것 같소이다. 공은 천자의 아저씨뻘이 아니오. 소생 또한 외척 끝머리에 있는
사람이오. 어찌하여 나를 의심하려 드시오?"
동승이 그같이 말하자 유비도 그제야 마음을 열며 동승의 손을 잡고 말했다.
"국구의 참뜻을 몰라 큰 결례를 하였습니다. 부끄러울 따름입니다."
유비가 머리를 숙이며 사과하자 동승은 그제야 황제의 조서를 내밀어 보였다.
"공께서는 이것을 보시오."
등불 아래에서 밀조를 읽고 난 유비는 분함을 참을 수 없어 주먹을 불끈 쥐었
다.
동승은 유비가 밀조를 읽고 나자 다시 의장을 꺼내 보였다.
의장에는 여섯 사람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
첫머리에는 거기장군 동승, 둘째는 공부시랑 왕자복, 셋째는 장수교위 충집,
넷째는 의랑 오석, 다섯째는 소신장군 오자란, 여섯째는 서량태수 마등이었다.
유비가 그들의 이름을 본 후 동승에게 말했다.
"국구께서 조서를 받든 이상 제가 어찌 견마지로를 아끼지 않겠습니까?"
유비가 붓을 들어 의장의 일곱 번째에 '좌장군 유비'라고 썼다. 붓을 놓고 나
서 수결을 한 후 의장을 동승에게 주자 동승은 의장을 받으며 말했다.
"이제 동지 세 사람을 더 얻어 열 사람만 되면 대사를 도모할까 생각 중이
오."
동승의 말에 유비가 가만히 일깨웠다.
"서두르지 말고 서서히 뜻을 모으고 사람을 찾도록 합시다. 경거망동하여 이
일이 밖으로 새어 나가지 않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유비가 들떠 있는 동승을 진정시켰다. 어디에선가 닭 우는 소리가 들렸다. 이
야기를 주고받다 보니 어느 새 새벽녘이었다. 별실 밖 처마에는 희뿌연 안개가
서려 있었다. 거기에 관우.장비 두 사람이 그때까지 시립해 있었다. 동승은 유
비의 두 의제를 보자 마음이 든든해졌다.
동승과 헤어진 유비는 혼자 생각에 잠겼다.
'드디어 조조를 치기 위해 칼을 빼든 것이 아닌가. 이제부터 그의 날카로운
눈을 속이는 것이 중요하리라.'
그날 이후 유비는 집 밖으로의 외출을 삼가했다. 집 뒤뜰 빈터에 채소밭을 만
들고 그곳에 손수 물을 주며 씨를 뿌렸다. 다음 날도, 또 그 다음 날도 유비는
서재에 있거나 아니면 채소밭에서 일을 했다.
관우와 장비는 누상촌의 도원을 생각하며 여기저기서 열매를 맺고 떨어지는
복숭아꽃을 멀건히 바라보고 있었다.
조금 전부터 무엇이 못마땅한지 잔뜩 부운 얼굴로 있는 장비를 쳐다보며 관우
가 한가롭게 말을 걸었다.
"아우의 얼굴을 보니 무엇인가 몹시 못마땅한 것 같으이."
"근자에 큰형님께서는 뒤뜰에서 농사꾼 흉내만 내고 있지 않습니까?"
장비가 볼멘소리로 투덜거렸다.
"그 일 때문인가?"
"밭에다 손수 물을 주고 거름을 주는가 하면 괭이를 들고 밭을 가꾸시니...,
농사일을 하시고 싶다면 차라리 누상촌으로 가시는 게 좋지 않겠소?"
동승이 다녀간 이후 왜 유비가 밭을 가꾸며 그 일에만 매달리고 있는지 그 이
유를 알 리 없는 관우와 장비였다.
"군자의 말씀에 청경우독이라고 이르셨네. 비 오는 날에는 책을 가까이 하고
맑은 날에는 밭을 가꾸시니 군자의 생활을 실천하고 계시지 않은가."
관우가 장비의 볼멘소리를 달랬으나 그 또한 답답하기가 장비 못지않았다.
"벌써부터 은자가 되셨소?"
장비는 심통이 절절 흐르는 목소리로 빈정댔다.
"나에게 불평을 늘어놓아도 소용 없는 일이네."
"형님, 그러면 나와 함께 말씀이나 드려 봅시다."
장비 못지않게 울적한 심사를 달래고 있던 관우인지라 장비와 함께 후원으로
갔다.
"형님께서는 천하 일을 제쳐 두고 어찌하여 농부들의 흉내만 내고 계십니까?"
관우와 장비가 물었다.
"두 아우는 보고만 있게...."
유비는 그렇게 말할 뿐이었다. 그러자 관우가 다시 물었다.
"어리석은 저희들은 도무지 뜻을 헤아릴 수 없어 오늘은 형님의 심중을 여쭙
고자 이렇게 찾아온 것입니다."
옆에 있던 장비도 참지 못해 관우를 거들었다.
"농사를 짓는다면 굳이 피를 나누어 마시고 의형제를 맺어 여기까지 깃발을
메고 올 필요가 있었겠습니까? 주제넘은 말씀 같습니다만 형님의 속뜻을 우리들
은 알 수 없습니다."
유비는 두 아우의 말에 근엄한 얼굴로 다시 타일렀다.
"내가 이르지 않았는가. 두 아우가 알 바 아닐세."
유비가 이렇게 말하자 관우.장비도 더 이상 입을 열 수가 없었다. 유비가 그
까닭을 말하지 않는 것은 깊은 뜻이 있으리라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생각해 보
면 유비의 농사꾼 흉내는 동승이 다녀간 다음 날부터 시작된 일이었다.
관우.장비는 필시 그와 어떤 연관이 있는 이유 때문에 농사꾼 흉내를 내고 있
으리라 짐작했다.
그런 일이 있은 지 며칠 후였다. 관우와 장비가 잠깐 볼일이 있어 외출을 하
고 오자 유비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두 사람은 크게 당황하며 가신에게 물었
다.
"주군께서는 어디에 가셨느냐?"
"상부에 가셨습니다."
"뭐? 조 공께서 불러서 나가셨다는 말이냐?"
"그러하옵니다. 조 승상께서 급한 용무가 있다 하시며 사람을 보내셨습니다."
관우.장비는 얼굴을 마주보았다. 언제나 바윗덩이처럼 행동이 무겁던 관우조
차 당황했다. 관우가 가신을 다그쳤다.
"누가 주군을 모시러 왔던가?"
"조 승상이 심복인 허저와 장요 두 장군이 수레를 가지고 왔습니다."
"형님, 이러고 있을 게 아니라 우리가 승상부로 들어가 보는 것이 어떻겠습니
까?"
"자네 말대로 하세. 서둘러 가세."
관우.장비는 허도의 큰길로 말을 몰아 나는 듯이 달려갔다.
이보다 수시각 앞서 유비가 후원 채소밭에서 채소에 물을 주고 있는데 갑작스
레 허저와 장요가 찾아와 조조의 청함을 전했다.
"무슨 일로 부르시오?"
유비가 마음 속으로 저으기 놀라며, 사자로 온 허저와 장요에게 물었다.
"무슨 용무인지 저희들은 모르겠습니다. 다만 명을 받들어 모시러 왔을 뿐입
니다."
동승과 모의한 일이 있는지라 유비는 두려움이 앞섰으나 그렇다고 조조의 청
함에 응하지 않을 수도 없었다. 내심 살얼음을 밟는 심정을 숨기며 승상부로 향
했다. 두 아우와 동행하지 못한 것이 마음에 걸렸다.
유비가 조조의 저택에 이르자 기다리고 있던 조조가 유비를 맞았다.
"요즈음 집에서 큰 일을 하고 계시다고 들었습니다."
조조의 말에 유비는 가슴이 뜨끔했다. 얼굴색이 변한 채 입을 열지 못하고 있
는데 조조는 다정하게 유비의 손을 잡고 안채의 뜰로 이끌었다.
"요사이 농사일을 하신다고요? 어떠시오, 하실 만하오?"
유비는 그제야 한숨을 내쉬며 가슴을 쓸어내렸다. 유비도 입가에 웃음을 띠며
말했다.
"별로 하는 일도 없어 소일삼아 하는 일입니다."
유비는 새삼 요며칠 동안 취한 자신의 거동이 현명한 것이었음을 깨달았다.
그가 집안에 틀어박혀 채소밭을 가꾸고 있었음을 조조가 훤히 알고 있기 때문이
었다. 그만큼 유비의 움직임을 은밀한 눈과 귀를 통해 살피고 있었음이 아닌가.
조조는 몹시 유쾌한 듯 입가에 웃음을 머금으며 말했다.
"실은 매화나무에 매실이 영근 것을 보고 이야기나 나눌까 하여 유 공을 뵙자
고 한 것이오. 이 매실을 보니 문득 지난 해 장수를 정벌하러 갔을 때의 일이
생각났소. 그때 행군 도중에 물이 모자라 장졸들이 더 이상 행군도 못할 지경에
이르렀소. 그래서 나는 한 꾀를 생각해 냈었소. 채찍을 들어 앞을 가리키며 조
금만 더 가면 매화숲이 있다고 거짓으로 소리쳤었소. 장졸들이 그 말을 듣자 매
실의 신맛을 생각하게 되었고 자연히 입 안에 군침이 가득 돌지 않았겠소? 군침
이 입 안에 돌게 되매 잠시 갈증을 잊고 행군을 계속할 수 있었던 것이오. 이제
매화나무에 매실이 탐스럽게 열린 걸 보니 감회가 새롭구려. 마침 담근 술이 잘
익었는지라 매실을 안주로 하여 저 정자에서 귀공과 함께 술잔을 나누고 싶었
소."
유비도 이제는 마음을 놓고 조조에게 감사의 예를 표하며 그가 이끄는대로 따
랐다.
조조는 매화숲으로 유비를 안내했다. 매화숲을 한동안 걸어가니 작은 정자가
나타났다. 정자에는 술과 안주가 마련돼 있었고, 쟁반에는 먹음직스런 매실이
가득 담겨 있었다.
두 사람은 술상을 가운데 두고 마주 앉았다. 술이 몇 순배 돌아가고 두 사람
모두 얼굴에 술기운이 감돌 무렵이었다. 갑자기 하늘이 검은 구름으로 뒤덮이더
니 금세라도 소나기가 퍼부을 것 같았다.
"용이다! 용이 하늘로 오르고 있다!"
술 시중을 들던 하인 하나가 놀라 소리쳤다. 그가 가리키는 곳을 보니 검은
구름이 뒤엉켜 먼 산등성이 위로 떠오르는 모양이 마치 등천하는 한 마리 용과
흡사했다.
갑자기 후두둑거리며 장대같이 굵은 빗방울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유 공께선 용의 조화를 알고 계시오?"
조조가 유비에게 불쑥 이렇게 물었다. 조조가 무슨 생각에서 이 같은 물음을
던지는지 유비는 그 뜻을 얼른 알 수가 없어 얼버무렸다.
"이야기를 들어 본 적은 있으나 자세히는 알지 못합니다."
"용은 본래 크고, 작아지기와 위로 오르기와 아래로 숨기를 자유자재로 하오.
크게 될 때는 구름을 일으키고, 강물을 뒤집으며 바닷물을 말아 올리기도 하오.
또 작아질 때는 콩알만해지기도 하고, 또 자기 몸을 숨길 때는 콩알 속에 숨을
수도 있소. 그 솟아오름은 대우주를 종횡하며 날고 잠길 때는 물 아래 엎드리되
잔물결조차 일으키지 않소. 이제 봄이 완연하니 용도 때를 만나 기지개를 켜며
하늘로 오르는 것이오. 용과 마찬가지로 천하의 영웅도 뜻과 시운을 얻어 사해
를 종횡함이 이와 같은 이치이오."
"용을 실재하는 것이라 믿고 계십니까?"
유비가 문득 조조에게 물었다.
"있다고 하면 있고, 없다고 하면 없을지도 모르지요. 조금 전 구름기둥이 저
산등성이를 스치며 마치 용이 용솟음치는 듯이 보였소. 변화무쌍한 자연의 변화
에 그 누가 흔적을 잡아 실증해 보일 수 있겠소? 현덕 공께서는 용을 보셨소?"
조조가 유비를 바라보며 다시 되물었다.
"많은 이야기만 들었을 뿐 아직 이것이 용이다 하는 실물은 보지 못했습니
다."
유비는 조조가 영웅을 용에 비유하자 슬며시 딴 곳으로 말머리를 돌리기 위해
그렇게 말했다. 그러나 그런 유비의 속마음을 헤아리지 못할 조조가 아니었다.
유비의 말에 조조가 머리를 가로저으며 말했다.
"나는 보았소."
"용을 보셨다는 말씀입니까?"
"그렇소. 그러나 그 용은 신비의 용이 아니오. 하늘을 나는 용이 아닌 땅 위
의 용이오. 풍운을 만나 몸을 일으키는 영웅들 말이오. 유 공도 그 중의 한 용
이라 말할 수 있겠지요."
유비는 조조가 하고 싶었던 말을 꺼내자 속으로 잔뜩 경계했다.
"당치도 않으신 말씀이십니다. 소생은 날으는 신통력도 없고, 사물을 파악할
지혜도 없으며 은현자재(숨었다 나타났다를 자유자재로 함)하는 재주도 없습니
다. 만약 용이라 하여도 머리에 토자가 붙는 토룡이나 될까요?"
유비의 말에 조조가 정색을 하며 말했다.
"지나친 겸손이시오. 그러면 유 공께선 천하를 편력하셨으니 필시 당세의 영
웅이 누구인가 알고 계실 것입니다. 그들이 누구인가 말해주시오."
유비는 조조의 끈질긴 물음에서 벗어나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나 난간에 기대
며 말했다.
"오, 이제 비도 멎었군요."
유비가 대답을 하지 않고 딴청을 부리자 조조도 다그쳐 물을 수가 없었다.
이때 유비가 하늘을 쳐다보며 입을 열었다.
"구름을 보니 또 한 차례 비가 올 것 같군요."
유비는 비가 오긴 전에 자리를 피하자는 뜻으로 한 말이었다. 그러나 조조 또
한 유비처럼 딴청을 피웠다.
"이런 대의 비는 정취가 있어서 좋소. 옛 말에 우정이란 말도 있지 않소."
유비가 다시 술상 앞으로 다가갔다. 조조는 유비가 다시 술상 앞에 앉자 기다
렸다는 듯 웃으며 말했다.
"대장부가 나아가는 길은 대장부가 아니며 이해하기 어렵소. 유 공께선 대장
부시니 이를 잘 알고 계실 거요. 유 공께선 천하의 대장부가 누구라고 여기시
오?"
조조는 어느 새 앞서 나눈 화제로 다시 말머리를 돌리고 있었다.
"저는 아는 사람이 많지 않습니다. 다만 승상의 은혜로 조정의 벼슬을 받았을
뿐입니다."
"유 공이 천하의 대장부, 즉 영웅을 만나지 못했다면 들은 바는 있을 것이오.
세간에서는 누구를 두고 영웅이라 하는지 말씀해 보오."
끈질긴 조조의 질문이었다. 끝내 유비의 속마음 캐내고야 말겠다는 태도였다.
유비도 더 이상 피할 도리가 없다고 여기고 물음에 답했다.
"들은 바에 의하면 회남의 원술이 병사에도 정통하고 군사와 군량도 넉넉하다
하니 영웅이라 할 만하지 않습니까?"
유비의 말에 조조가 차디차게 웃었다.
"그 자는 이미 살아 있는 용이 아니오. 무덤 속의 백골일 뿐이오. 언젠가는
이 조조에게 꼭 사로잡힐 거요."
"그럼 하북의 원소를 꼽을 수 있지 않겠습니까? 4대에 걸쳐 다섯 번이나 3공
을 배출하였고, 지금 기주 땅에 범처럼 웅크리고 있는 그의 휘하에는 모사용장
이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다고 합니다. 그의 가슴 속에 어떤 대계가 들어 있
는지 헤아릴 길은 없습니다만 원소야말로 당금의 영웅이라 하여도 무방하지 않
을까요?"
"하하하, 유 공께선 그렇게 생각하시오?"
조조는 가볍게 웃고 나서 다시 말을 이었다.
"원소는 겉으로 위풍 당당하나 담이 작고 꾀를 부리기를 좋아하지만 결단성이
없는 필부요, 대사를 도모하려고 하면서도 몸을 사리며, 소리에 사로잡혀 목숨
까지 바치려는 위인이오. 그런 자가 어지 당금의 영웅이라 하겠소."
"그렇다면, 스스로 강하팔준이라 일컬으며 구주에 이름을 떨치고 있는 유경승
이야말로 영웅이 아니겠습니까?"
"아니오, 유표는 한낮 허명일 뿐 실속이 없으니 영웅이 아니오."
유비가 다시 말을 이었다.
"아, 또 한 사람이 있습니다. 강동 일대를 손아귀에 넣고 있는 혈기 넘친 손
백부 손책은 어떻습니까?"
조조는 한 마리로 잘라 고개를 가로 흔들었다.
"그 어린 것이 무슨 영웅이란 말이오. 다만 제 아비의 이름을 빌었을 뿐이외
다."
"익주의 유계옥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유계옥? 아 유장 말이군. 유장은 비록 황실의 혈통이기는 하나 죽어도 주인
곁을 떠나지 않는 충실한 개와같은 사람이오. 어찌 영웅의 그릇이라 하겠소."
"장수.장로.한수 등은 어떻습니까?"
"그들은 입에 담을 가치조차 없는 소인배들이오."
조조가 손등을 쓸며 껄껄 웃었다. 누구의 이름을 거명하여도 조조는 일언지하
에 부정했다. 그러나 그의 날카로운 두 눈은 유비의 얼굴에서 잠시도 떠나지 않
았다.
"저는 지금까지 거명한 자를 빼고는 실로 아는 바가 없습니다."
유비는 집요한 조조의 질문에서 벗어나기 위해 이렇게 말했다. 그러나 조조는
화제가 딴 곳으로 흐르도록 두지 않았다.
"무릇 영웅이란 가슴에 큰 뜻을 품고 머릿속에는 뛰어난 계략을 그득하게 지
니고, 우주도 포용하는 호기와 천지를 삼키겠다는 의지를 품은 자를 말함이오."
"당세의 사람 가운데 누구를 그런 사람이라 하겠습니까? 제가 보기에 그런 인
물은 없는 것 같습니다만."
유비가 얼핏 조조를 살펴보며 말했다. 조조는 그런 유비를 지켜 보더니 결연
히 말했다.
"아니 그런 인물이 있소."
조조는 손가락으로 유비를 가리키고 다시 자기의 얼굴을 가리켰다.
"바로 사군과 나요. 당금 천하의 영웅이라 할 만한 사람은 유공 그대와 나말
고 또 누가 있겠소?"
천하의 영웅은 그대와 나, 이 한 마디에 유비는 깜짝 놀랐다. 지금까지 조조
의 물음을 용케 피해 왔고 생각한 순간이었다.
뿐만 아니었다. 그 동안 농사꾼 흉내를 내면서까지 숨겨 왔던 자시의 속마음
을 조조가 이미 헤아리고 있다고 생각하니 놀라움을 넘어 그것은 커다란 충격이
었다. 유비는 순간 손에 들고 있던 젓가락을 바닥에 떨어뜨리고 말았다.
이때였다. 푸른빛 감도는 눈부신 광채가 정자 앞 매화나무 숲 위로 번뜩이는
가 싶더니 폭포수 같은 소나기와 함께 뇌성이 크게 일었다.
젓가락을 떨어뜨려 자기의 속마음을 내비친 것 같아 가슴을 조였던 유비는 뇌
성이 일자 천천히 젓가락을 주우며 말했다.
"우렛소리에 놀라 그만 젓가락을 떨어뜨리는 추태를 보였습니다."
뇌성을 핑계대어 짐짓 자신이 겁쟁이였음을 거짓 고백하였는데, 이는 조조의
판단을 흐려 놓기 위해 그렇게 꾸며 댄 말이었다.
날카로운 눈길로 유비를 바라보고 있던 조조가 유비의 말에 그만 긴장이 풀렸
는지 활짝 웃는 얼굴로 말했다.
"대장부가 우렛소리를 두려워하시오?"
"옛 성인들도 사나운 우레와 모진 바람에는 으레 낯빛이 달라진다고 하였는데
어찌 두렵지 않겠습니까?"
유비가 정색을 하며 말했다. 뇌성은 그 동안에도 몇 번인가 크게 일었다. 유
비는 그때마다 몸을 떨었다. 때마침 일어난 뇌성을 이용한 유비의 임기응변은
조조의 의심을 풀게 했던 것이었다.
유비의 원모(먼 장래를 위한 계책)까지는 읽지 못한 조조가 마침내 의심을 풀
고 자기에게 유리한 쪽으로 헤아렸다.
'우렛소리가 두려워 벌벌 떤다면 그도 별것 아닌 필부가 아닌가.'
조조는 이렇게 생각하며 다시 한 번 껄껄 웃었다. 조조는 내심 한 가지 걱정
거리가 줄어든 안도감에 기뻐했다.
후세 사람들은 이때의 일을 시로 남겼다.
어쩔 수 없이 범의 굴에 갔다가
영웅을 이야기하며 목숨 잃는가 놀랐는데
우렛소리 맞춰 절묘하게 두려운 척하니
놀랍도다, 오히려 믿음 얻은 그 임기응변이여!
조조는 흐뭇한 마음으로 유비에게 술잔을 권하고 유비 또한 조조에게 술잔을
권하니 자못 화기애애한 가운데 몇 순배의 술잔이 오고 갔다.
그때 남원의 반월문 앞에서 마치 우렛소리 같은 고함 소리가 들려 왔다.
"열어라! 빨리 열지 않으면 문을 부술 테다."
원문을 지키는 무사들이 깜짝 놀라 달려가니 커다란 반월문이 흔들리고 있었
다. 원문의 지붕에서 기왓장이 우수수 떨어지더니 박살이 났다.
"이게 무슨 짓이오? 그대들은 뉘시오? 여기가 감히 어디라고 행패를 부리는
거요?"
그러자 원문의 저쪽에서 고함 소리가 들려 왔다.
"지금 지껄이고 있을 틈이 없다. 어서 문을 열라. 오늘 승상의 초치를 받아
이곳에 와 계신 유현덕 공의 아우들이다."
"승상부의 허락을 받고 오셨소?"
"허락은 뭐 말라죽은 허락이냐. 정 문을 열지 않겠다면 이 문을 돌로 부수고
라도 들어가겠다."
문 안의 무사들은 장비의 그 소리에 기겁을 했다. 무사들이 막 문을 열려고
하는데, 관우와 장비를 뒤쫓아온 관리와 군졸들이 달려왔다.
"문을 열지 말라. 승상의 허락도 없이 떼를 쓰는 이 두 사람을 들여보내서는
안 된다."
"네놈들이 죽고 싶으냐!"
장비가 고리눈을 부릅뜨며 군졸 몇을 내동댕이쳤다. 그들이 겁을 내고 달아난
사이에 장비는 아름드리 돌을 번쩍 들어올려서 문짝에다 냅다 던졌다. 반월문은
두 쪽이 났다.
관우.장비는 반월문 안으로 들어가 매화나무 숲을 질풍처럼 달렸다. 관우와
장비는 그날 성 밖으로 사냥을 나갔다가 돌아와 보니 허저와 장요가 와 유비를
데리고 갔다는 것이었다. 황망히 승상부로 달려와 알아보았더니 후원에 있다고
하여 혹시 무슨 변이나 있지 않은가 하여 급히 달려오는 길이었다. 헐레벌떡 달
려와서 보니 유비는 조조와 마주 앉아 술을 마시고 있는 것이 아닌가.
조조가 두 사람을 보고 나무라듯 물었다.
"관우와 장비가 아닌가. 청하지도 않았는데 무슨 일로 왔는가?"
관우는 창졸간에 대답이 궁하여 멈칫거리다가 둘러대었다.
"승상께서 저의 형님을 모셔 술을 드신다기에 칼춤이라도 추어서 흥을 돋우어
드릴까 무례를 무릅쓰고 찾아온 것입니다."
궁색하게 변명을 하자 조조는 크게 웃고 나서 말했다.
"홍문의 연회장도 아닌데 어지 항장과 항백을 쓸수가 있겠소. 아니 그렇소.
유 황숙?"
유비도 따라 웃으며 답했다.
"승상께서는 경거망동한 두 아우를 용서해 주시기 바랍니다."
관우.장비가 왜 이곳까지 뛰어왔는지 조조가 모를 리 없었다. 유비의 두 아우
가 유비를 섬기는 충절을 내심 부러워했다.
조조가 말한 홍문회란 초한이 서로 다툴 때, 항우가 유방을 제거하기 위해 홍
문이란 곳에서 베푼 연회를 두고 한 말이었다. 그러나 항우는 막상 유방을 만나
그의 말을 듣고는 유방을 죽이지 않았다. 이를 안타까이 여긴 범증이 칼춤을 추
는 척하며 유방을 죽이려 연회장에 들여보낸 초군의 장수가 항장과 항백이었다.
조조는 홍문의 연회가 아님을 밝혀 유비를 죽이고자 한 것이 아님을 빗대어
말한 것이었다.
일이 그렇게 되자 관우.장비는 할 말을 잃고 잠시 머뭇거렸다. 조조는 관우.
장비의 그런 모습을 보더니 크게 웃으며 하인들에게 명했다.
"어서 술을 가져다가 저 두 번쾌에게 올려 놀란 가슴을 가라앉혀 드려라."
하인들이 그에게 술을 가져다 주자 관우와 장비는 조조에게 사례하고 잔을 받
았다.
번쾌는 저 유명한 홍문의 연회에서 칼춤을 추는 척하며 유방의 목을 노리는
항장과 항백을 역시 칼춤으로 가로막아 유방을 구해 낸 한나라의 명장이었다.
얼마 후 술자리가 파하자 유비는 조조에게 작별을 고했다. 돌아가는 길에 관
우가 입을 열었다.
"사냥 갔다가 돌아와 보니 형님이 안 계시길래 크게 놀랐습니다."
유비는 술을 마시다가 우렛소리에 놀라 젓가락을 떨어뜨렸던 일을 두 아우에
게 얘기했다.
"우렛소리에 놀라 젓가락을 떨어뜨리셨다구요? 형님께서 정말 우렛소리에 놀
라시지는 않으셨을 테고.... 그 까닭을 알고 싶군요."
관우.장비는 의아로운 얼굴로 유비를 바라보았다. 유비가 빙그레 웃으며 말했
다.
"내가 그 동안 밭에서 채소를 가꾼 것은 조조에게 나에게는 큰 뜻이 없음을
보여 주기 위함이었네. 그런데 조조는 나의 마음을 떠 볼 속셈으로 이런저런 얘
기를 하다 나를 가리키며 당금의 영웅은 자기와 나밖에 없다고 했네. 나는 속으
로 몹시 당황하여 그만 젓가락을 떨어뜨렸네. 그가 정말로 나를 그렇게 여긴다
면 언젠가는 그의 칼에 죽든가 아니면 나를 영영 이곳에 붙들어 두려고 할 걸
세. 그런데 내가 당황한 모습을 보였으니 그것을 보고 조조가 또 새로운 의심을
품지 않을까 염려되었네. 내가 그의 말에 크게 놀랐다는 걸 그가 알게 되면 그
만큼 내 본심을 드러내는 꼴이 되고 그의 의심은 더 커지지 않겠나. 그런데 때
마침 우렛소리가 들렸네. 나는 얼른 우렛소리에 놀라 젓가락을 떨어뜨린 척하며
떨어진 젓가락을 주웠네. 실로 위험한 순간을 우레 때문에 모면할 수 있었네."
그 말을 듣자 관우와 장비는 감탄할 마지않았다.
"형님의 깊은 생각에 저희들은 감탄할 따름입니다."
그리고 잠시나마 유비가 농사일을 하는 것을 보고 마땅치 않게 여겼던 자신들
이 부끄러워졌다.
조조는 그 다음 날도 유비를 청하였다. 이번에는 후원이 아니고 승상부에서
가까운 아담한 방이었다. 그날은 별다른 뜻없이 조조가 그를 가까이 여겨 청한
것이었다.
두 사람이 마주 앉아 술을 마시고 있는데 측근 하나가 들어와서 아뢰었다.
"원소의 동정을 살피러 갔던 만총이 돌아왔습니다."
조조는 곧 만총을 불러들였다. 유비가 그 자리에 있었으니 어제 이후 그에 대
한 의심이 사라졌으므로 이제는 자기의 사람으로 여기고 있는 듯했다.
"하북의 정세는 어떠한가?"
조조가 만총에게 물었다.
"하북에는 이렇다 할 일이 없었으나, 북평의 공송찬이 원소에게 패하여 죽었
습니다."
유비가 깜짝 놀라 길게 탄식했다.
"북평의 공손찬이? 그토록 큰 세력과 지반을 갖고 있었으며 덕망도 겸비한 사
람이 어찌하여 하루 아침에 패망하였다는 말인가!"
유비가 허공에 시선을 던진 채 탄식하자 조조는 자못 의아스럽다는 듯이 물었
다.
"유 공은 어찌하여 공송찬의 패망에 그토록 놀라시오? 흥망은 병가지상사라고
하지 않았소?"
"공손찬으로 말하자면, 저에게는 은인이자 벗이었습니다. 지난날 황건적의 난
이 일어났을 때 변변한 변장기와 병력이 없던 소생이었습니다. 그리하여 소생은
두 아우와 공손찬의 군막에 들어가 적지 않은 신세를 진 바 있습니다."
조조는 유비의 말을 듣고 고개를 끄덕인 추 만총에게 물었다.
"공손찬이 원소에게 패한 경과를 자세히 말하라."
유비도 만총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만총의 이야기는 대략 다음과 같았다.
당시 공손찬은 기주 땅의 요지에 역경루라는 이름의 성곽을 지어 일족을 모두
그곳에 옮기게 하여 살고 있었다. 역경루라는 성곽은 그 규모가 어머어마하며
공손찬의 위세가 왕성한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사실은 공손찬이 이 역경루를 짓게 된 것은 실로 어처구니없는 그의
허세였다. 원래 공손찬은 원소보다는 더 큰 세력을 지니고 있었다 할 정도였다.
그러나 원소가 세력을 키워 가는 동안 자만에 빠진 공손찬은 세력 키우기를 게
을리했다. 그러다 보니 공손찬의 영토는 원소에게 야금야금 잠식당해 갔다.
싸움이 거듭될수록 원소에게 패하자 공손찬은 나가 싸우는 대신 우리를 하여
대공사를 시작했다. 높이가 열 장이나 되는 성곽을 쌓아 원소의 기세를 꺾으려
하였다.
공손찬은 높이 쌓은 역경루에 많은 군량을 쌓아 놓고 군사 30만을 거느린 채
성에서 굳게 지키기만 했다.
역경루 외의 다른 성이 원소에게 포위당하자 신하들이 그곳을 구원하자고 청
했으나 공손찬은 듣지 않았다.
"만일 한 사람을 구해 주었다가는 다음 싸우는 사람들도 또 내가 구해 주기만
을 바라고 아무도 목숨을 걸고 싸우려 들지 않을 것이다."
오히려 공손찬은 핀잔만 주었다.
이런 일이 거듭되자 공손찬에 대한 신망은 점차 사라지고, 군사들의 사기도
떨어지니 도망병이 늘어만 갔다.
사태가 이 지경에 이르니 원소와 싸움이 벌어질 때마다 공손찬은 가만히 앉아
여러 성을 잃게 되었다. 장졸들은 공손찬이 구해 주지 않는다는 것을 안 다음엔
공손찬의 바람과는 달리 목숨을 걸고 싸우기는커녕 오히려 제대로 한번 싸워 보
지도 않고 도주하거나 항복했기 때문이었다.
생각다 못해 공손찬은 글을 써서 허도로 구원을 청하는 사자를 보냈다. 그러
나 미리 감시를 게을리하지 않았던 원소군에게 사로잡히고 말았다. 공손찬은 다
시 흑산적의 장연에게 횃불을 신호삼아 안팎으로 원소를 치자는 글을 보냈으나
글을 전하러 갔던 사자도 원소군에게 사로잡히고 말았다.
원소는 그 사자를 거꾸로 이용했다. 원소는 밤이 되기를 기다려 횃불을 올려
신호를 보냈다.
공손찬은 횃불을 보자 그것이 장연이 보내는 신호인 줄 알고 자기의 계책대로
일이 잘 진행된다고 좋아하며 친히 군사를 이끌고 출진했다. 그러나 미리 매복
한 군사들이 사면에서 밀려와 닥치니 공손찬은 군사를 태반이나 잃고 간신히 성
안으로 물러갔다.
혼쭐이 난 공손찬은 역경루의 방비를 더욱 튼튼히 하고 그 안에 잔뜩 웅크린
채 성 밖으로 나가지 않았다.
공손찬이 꼼짝도 않으니 원소는 역경루를 공격할 방도가 없었다. 워낙 견고한
성곽이라 섣불리 공격을 하다가는 병력만 잃을 우려가 있었다.
원소는 꾀를 내어 공손찬의 성 안으로 땅굴을 파게 했다. 마침내 누각 밑까지
굴을 파자 원소군은 그 굴을 통해 성 안으로 들이닥쳤다. 일시에 기습을 가해
불을 지르고 공손찬의 군사들을 찌르고 베었다. 때를 맞추어 성 밖에서도 총공
격을 감행하였다.
공손찬은 안팎으로 몰아닥친 원소군으로 인해 꼼짝달싹 못했다. 마침내 처자
를 먼저 죽이고, 자신도 목을 매어 죽고 말았다.
공손찬을 무너뜨리자 원소의 영토는 더욱 넓어지고 병마 또한 증가되었다. 뿐
만 아니라 근자에는 그의 아우인 회남의 원술도 천자 행세를 하며 사치가 극에
달해 마침내 백성과 부하들이 외면하기에 이르렀다. 그렇게 되니 원술은 하는
수 없이 형 원고에게 옥새를 바치고 천자를 양보한 후 하북으로 근거지를 옮길
작정이라고 했다. 그런데 이 두 세력이 합쳐지면 만만치 않은 큰 세력이 될 것
이며 따라서 이 세력을 도모하기가 매우 힘들 것인즉 속히 그들에 대한 대책을
세워야 한다는 것이 만총의 의견이었다.
유비는 공손찬의 비참하고 허망한 죽음을 듣자 쏟아지는 눈물을 감출 수 없었
다.
공손찬과는 20여 년 전 노식의 초당에서부터 시작된 교유였다. 탁현에서 돗자
리를 짜다 큰 뜻을 품고 몸을 일으킨 이후 그에게 크고 작은 도움을 받아 왔던
유비였다. 지난날 공손찬이 황제에게 자신을 천거했던 일을 떠올리며 유비는 슬
픔에 잠겼다.
유비는 공손찬 휘하에 있던 조자룡이 생각났다. 그가 어떻게 되었는지 궁금하
기 그지없었다. 조조는 만총의 얘기를 듣고 깊은 생각에 잠겨 있었다. 유비는
공손찬의 죽음을 슬퍼하는 가운데 문득 한 가지 묘한이 떠올랐다.
'그렇다. 조조가 나를 가두어 두고 있는 둥지에서 내 몸을 빼낼 기회는 바로
지금이 아닌가. 이 기회를 놓치면 언제 다시 그에게서 내 몸을 빼낼 수 있을지
알 수 없는 일이다.'
유비가 목소리를 가다듬어 조조에게 간청했다.
"승상께 감히 청이 있습니다. 허락해 주시기 바랍니다."
생각에 잠겨 있던 조조가 유비의 말에 정신이 든 듯 그를 바라보았다. 유비의
얼굴이 전에 없이 결의에 차 있어 조조도 정중히 말을 받았다.
"황숙께서, 무슨 청이오?"
"저에게 약간의 군사를 거느리게 해 주십시오."
"그 군사로 무엇을 어떻게 하시겠다는 것입니까?"
조조가 눈을 빛내며 날카롭게 유비를 쏘아보았다.
"방금 만총의 보고를 듣자하니 회남의 원술이 형 원소에게 옥새를 넘겨 주고
형제가 힘을 합해 중원으로 그 세력을 뻗치려 하고 있는 듯하옵니다. 승상께서
도 방심할 수 없는 조짐이 아니겠습니까?"
"그건 그렇소. 황숙에게 좋은 계책이라도 있소?"
"원술이 회남을 버리고 하북으로 가려면 반드시 서주 땅을 지나야만 됩니다.
소생이 한 떼의 군마를 거느려 중도에서 길을 끊는다면 원술을 사로잡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황숙께선 왜 갑자기 그런 생각을 가지셨소?"
조조는 유비의 말이 옳은 것이라 여겼다. 그러나 군사를 달리는 유비의 속셈
에 의심이 일어 다시 물었다.
"원술.원소에게 타격을 주게 된다면 소생의 은혜로운 벗인 공손찬의 영혼을
조금이라도 위로할 수 있지 않을까 하고 생각한 것입니다."
유비의 말에 조조는 고개를 끄덕였다. 공손찬의 죽음을 슬퍼하는 유비를 조금
전에도 바라보고 있던 조조였다. 또한 유비를 한때는 공손찬의 사람으로 알고
있었던 터였다.
유비가 계책까지 내놓으며 원술을 치겠다고 나서자 조조는 의심을 지우고 흡
족해하며 선뜻 응낙하였다.
"좋소. 내일 폐하께 아뢰고 당일로 기병하도록 하시오."
다음 날 조조는 유비에게 정병 5만을 주고 주령과 노소를 동행하게 하였다.
유비가 황제께 하직 인사를 고하자 황제는 눈물을 머금은 채 궁문까지 전송하
였다.
유비는 그 동안 머물던 숙소로 돌아와 급히 진병을 서두르며 관우.장비에게
지체하지 말고 출발하도록 일렀다.
"유 황숙이 허도를 떠난다고?"
놀란 사람은 동승이었다. 동승은 10리 밖까지 말을 달려 유비를 뒤쫓았다. 유
비는 좌우를 물리친 후 동승에게 나직한 목소리로 아뢰었다.
"국구께서는 제가 떠나더라도 마음을 놓으십시오. 지난번 약속을 저버릴 현덕
이 아니올시다. 지금 비록 황도를 떠나지만 마음은 잠시도 폐하의 곁에서 "떠나
지 않을 것입니다. 다만 일이 조조의 눈과 귀로 새어 나가지 않도록 경솔한 행
동을 삼가십시오."
동승과 작별한 유비는 다시 행군을 계속했다. 장비가 유비 옆으로 말을 몰고
오더니 물었다.
"형님, 이번 출진은 전에 없이 몹시 서두르시는 것 같습니다. 왜 이토록 급히
서두르십니까?"
유비는 장비를 보고 조용히 웃으며 답했다.
"허도에 있는 동안 나는 하루도 마음을 놓은 적이 없었다. 나는 그 동안 새장
속에 갇힌 새요, 그물에 걸린 물고기와 다름이 없었다. 만약 조조의 마음이 조
금이라도 변한다면 나는 속절없이 그의 손에 죽을 수밖에 없지 않겠느냐? 이제
그의 그늘을 벗어났으니 물고기가 대해로 돌아가고 새장의 새가 푸른 하늘로 나
는 것과 같다. 그러니 어찌 서두르지 않겠는가."
장비는 물론 옆에 있던 관우도 비로소 유비의 뜻을 알아차리고 고개를 끄덕였
다. 유비는 관우와 장비에게 명하여 주령.노소의 군사를 재촉하게 했다.
한편 전량을 조사하기 위해 조조 곁을 떠났던 곽가와 정욱이 돌아와 보니 조
조가 이미 유비에게 군사를 주어 서주로 떠나보냈다는 말을 듣게 되었다. 그들
은 깜짝 놀라 서둘러 승상부로 달려갔다.
"승상께서는 어찌하여 유비에게 군사를 주어 보냈습니까?"
"원술이 원소에게 가는 길을 막기 위해서요."
조조가 이렇게 대꾸하자 정욱이 입을 열었다.
"지난날 유비가 예주목으로 있을 때, 그를 제거하라고 말씀드린 바 있었으나
승상께서는 그를 살려 두셨습니다."
"그랬네. 나에게 몸을 의탁하러 온 영웅을 주이면 웃음거리가 된다고 했었
지."
"승상께서는 그의 속임수에 넘어가시어 군사까지 주어 보냈으니 이는 호랑이
에게 날개를 달아 산으로 내보낸 것이며 용을 바다로 들게 한 격입니다. 이제
다시 그를 우리 안에 가두기는 어렵게 된 것입니다."
곽가도 입을 열어 정욱의 말에 동조했다.
"옛 말에 이르기를 '한때 적을 잘못 놓아 주면 만세에 걸쳐 그 화가 미친다'
고 하였습니다. 그러니 승상께서 마음 속 깊이 헤아리시기 바랍니다."
"호랑이에게 날개를 달아 주었다는 말인가?"
조조는 혼자말처럼 중얼거렸다. 얼굴에는 동요의 빛이 역력했다. 그때서야 일
이 잘못되었음을 알게 된 조조는 때늦은 후회를 했다.
"그런데 내가 속임수에 넘어갔다는 말은 무슨 말이냐?"
조조는 짐짓 그렇게 물었다.
"유비는 결코 무골 호인이 아닙니다."
"나도 그가 범상한 인물은 아니라고 여겨 왔다."
"그가 왜 허도에 있는 동안 거름통을 지고 채소밭을 가꾸었겠습니까? 그것이
다 승상을 속이려는 위장술이었습니다."
"그럼 원술을 치겠다는 그의 말을 그가 이곳에서 몸을 빼기 위한 수작이었다
는 말이로군."
"그렇습니다."
조조는 급히 허저를 부르게 하여 그에게 날랜 군사 5백을 뽑아 유비를 뒤쫓도
록 했다.
"긴요한 일이 있으니 유비에게 즉시 군사를 돌려 허도로 회군하라고 일러라."
조조의 명을 받은 허저는 곧 유비를 뒤쫓았다. 유비 일행이 허도를 떠난 다음
날이었다.
행렬의 후방에서 흙먼지가 자욱하게 일어나는 것을 보고 유비가 두 아우에게
일렀다.
"저들은 필시 우리를 뒤쫓는 조조의 군사임에 틀림없다. 이곳에 즉시 진을 치
고 저들을 맞을 준비를 하라."
5만의 군대는 곧 행군을 중지하고 진을 쳤다. 관우.장비는 무기를 든 채 유비
곁에서 호위했다.
이윽고 허저와 5백의 군사가 당도하였다. 허저가 말에서 내려 진막 안에서 유
비와 마주한 후 군례를 올렸다.
유비가 허저에게 낮지만 엄한 목소리로 물었다.
"장군은 무슨 일로 이곳까지 오셨소?"
허저가 보니 일찌기 허도에서 본 자상하고 부드러운 모습이 아니었다. 양쪽에
무기를 들고 자신을 노려보고 있는 관우.장비의 얼굴도 험악하게 보였다. 허저
는 슬며시 두려운 마음이 들었으나 조조의 명을 고했다.
"승상의 분부이십니다. 긴히 상의드릴 말씀이 있으니 장군께서는 회군하시라
는 말씀이었습니다."
"참으로 이상한 일이오. 내가 친히 천자께 상주하였고, 또한 승상의 동의를
받아 당당히 허도를 떠나 여기까지 왔소. 원래 '장수가 군사를 이끌어 밖으로
나와 있을 때는 경우에 따라서는 임금의 명에 따르지 않을 수도 있다'하였소.
그런데 지금 장군을 보내어 다시 회군하라니 납득하기 어려운 일이 아니겠소?
혹시 장군도 곽가.정욱과 같이 구걸을 일삼는 무리와 한통속이 아니오?"
"옛? 장군께서는 무슨 말씀을 하십니까?"
"내가 허도를 떠나기 전에 곽가.정욱이 찾아와 뇌물을 요구하였소. 나는 대꾸
도 하지 않고 떠나왔소. 그들은 그 보복으로 승상께 있는 말 없는 말 전부 고하
여 장군으로 하여금 나를 뒤쫓게 한 것이 분명하오."
유비는 껄껄 웃으며 말을 이었다.
"그래도 믿지 않고 회군을 강요하겠다면 그 얘기는 저 관우.장비와 함께 의논
하시오. 나는 승상의 말씀도 자세히 들었으므로 또다시 의논할 일이 없소."
유비의 엄포에 허저는 얼굴색이 변했다. 그도 천하를 주름잡던 장수였으나 관
우.장비가 손을 칼집에 대고 노려보고 있는 이상 어쩔 도리가 없었다. 유비의
이 같은 대답에 허저는 마음 속으로 헤아려 보았다.
'승상께서는 평소에 유비와 교분이 두터울 뿐만 아니라 이번에 내가 받은 영
도 싸움을 해서라도 반드시 끌고 오라고 한 것은 아니었지 않은가? 빨리 돌아가
들은 대로 고하고 다시 명령을 받음이 옳겠다.'
이렇게 생각한 허저는 유비와 헤어져 급히 허도로 돌아와 사실대로 조조에게
보고하였다.
조조는 크게 화를 내어 즉시 곽가와 정욱을 불러오게 하고 그들에게 유비가
말한 사실을 따져 물었다.
곽가는 답답하다는 얼굴로 조조에게 말했다.
"승상께서는 또 유비에게 속으셨습니다. 이제는 저희까지 이간시키려들지 않
습니까?"
조조는 유비의 말이 거짓이었음을 알게 되었지만 곽가와 정욱을 달래고자 껄
껄 웃으며 위로했다.
"내가 주령과 노소 두 사람을 동행케 했으니 유비가 끝까지 나를 저버리지는
못할 것이다. 세월은 불러도 돌아오지 않고, 과실은 되돌려도 옛 자리로 돌아와
있지 않는다는 말이 있다. 이미 보내 놓고 뉘우친들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
조조는 그렇게 말하며 유비를 더 이상 뒤쫓지 않았다. 다만 유비가 다시 자기
의 휘하에 들어오기를 기대하고 있을 뿐이었다.
한편 유비가 허도를 떠난 이후 조조를 죽이기 위해 의맹을 맺었던 사람들은
기세가 꺾여 있었다. 서량태수 마등도 더 이상 그일을 진전시키지 못하고 있다
가 변방이 위급하다는 전갈을 받자 급히 군사를 이끌고 서량으로 돌아갔다.
원술의 죽음 전국옥새는 조조에게로
서주를 지나던 원술은 유비의 군사를 맞아 대패하고 겨우 몸을 피해 달아난
다. 한때나마 황제를 참칭했던 그는 물 한 모금 얻어 마시자 못하여 피를 토하
고 길바닥에 쓰러져 초라한 죽음을 맞는다. 한편 원술을 물리친 유비는 조조의
군사를 돌려 보내지 않고....
때는 건안 4년 6월.
유비가 서주에 도착하니 서주자가 차주가 이곳을 다스리고 있었다. 차주는 지
난번 조조가 하비성을 정벌하고 유비와 함께 허도로 회군할 때 임시로 서주를
맡아 다스리게 했던 태수였다.
유비가 승상부의 군대를 이끌고 온 것을 보자 조조의 명을 받고 온 것으로 여
긴 차주는 성에서 나와 그를 맞이했다.
차주는 그날 밤에 성대한 잔치를 베풀어 오랜 행군의 피로를 위로하였다. 유
비는 잔치 자리에 나가기 전, 차주를 청해 조용한 방으로 들어가 얘기를 꺼냈
다.
"승상이 나에게 5만의 군사를 주신 것은 원술이 형 원소에게 옥새를 바치러
가는 것을 중도에서 치기 위함이오. 그러니 은밀히 원술의 동태와 회남의 정세
를 탐색했으면 하오."
유비가 협력을 청하자 차주는 이 도한 승상의 명에 의한 것으로 여겨 두말 없
이 승낙하였다.
"힘껏 돕겠습니다."
두 사람이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데 서주에 남아 유비의 가솔들을 돌보며 오직
다시 만날 날만을 고대하던 미축과 손건이 찾아와 이드로가 함께 잔치 자리로
갔다.
잔치가 끝나자 유비는 오랜만에 어머니와 처자가 있는 그의 옛 집으로 돌아갔
다. 유비는 먼저 노모가 계시는 방으로 가 무릎을 꿇고 절했다.
"어머님, 이 비가 돌아왔습니다."
"오오, 내 아들이 돌아왔구나."
노모는 유비의 손을 어루만지고, 어깨를 쓰다듬더니 마침내 그 얼굴을 가슴에
끌어안았다.
노모는 금세 눈물을 글썽이었다. 요즈음은 시력도 귀도 모두 약해지고 혼자서
는 걸을 수도 없었다. 그러나 여러 가신과 시녀들의 극진한 공양을 받아 부족함
이 없는 편안한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유비가 노모에게 천자를 배알했던 일을 들려 주었다.
"기뻐해 주십시오, 어머님. 지난번 허도에서 천자를 배알하였을 때 천자께서
는 저희 집 가계를 친히 물으시었습니다. 소자가 소상히 아뢰었더니 천자께서는
즉시 조정의 세보를 찾아보신 다음, '유현덕의 조상은 한실의 후예로 현덕은 짐
에게는 아저씨뻘이 되는 사람이다'라고 여러 대신들이 있는 자리에서 말씀하셨
습니다. 이제 저희 집안도 오랜만에 햇빛을 보게 되었습니다. 어머님, 부디 만
수무강하시어서 우리 유씨 문중의 마당에 꽃이 피는 날을 지켜 보십시오."
"오오, 아들아 대견하구나."
노모는 기쁨에 겨워 눈물을 흘리며 감격하였다.
한편 며칠이 지나자 원술의 동태를 살피던 탐마가 돌아와 알렸다.
"원술은 사치가 극에 달해 자연 백성에게 무거운 세금을 매기며 폭정을 폈습
니다. 그렇지 않고는 도저히 호화로운 거전과 후궁 등을 유지할 수가 없었기 때
문입니다. 그리하여 민심은 그를 떠났고, 내분이 일기 시작하였습니다. 뇌박과
진란 등의 자수가 그를 버리고 숭산으로 떠나 버렸고 거기다가 수해까지 겹쳤습
니다. 견딜 수가 없게 된 원술은 기사회생의 계책으로 하북의 형 원소에게 황제
의 칭호와 옥새를 비치고 의탁하기 위해 인마를 수습하고 황제 노릇 할 때 소유
하고 있던 온갖 물건을 수레에 싣고 곧 이곳 서주를 지날 것이라 합니다."
유비는 이 소식을 듣자 중도에서 원술을 치기 위해 관우.장비.주령.노소와 함
께 5만의 군사를 거느리고 원술이 지나갈 만한 길목을 지키고 있었다.
"오래잖아 원술의 선봉 기령이 군사를 이끌고 그곳에 당도했다.
"기다린 지 오래다!"
장비가 먼저 말을 휘몰았다. 오랫동안 싸움터를 떠나 있던 장비였다. 온몸에
좀이 쑤실 지경이었던 장비인지라 기령을 보자 참새를 본 솔개처럼 대뜸 말부터
몰아 갔다.
장비가 장팔사모를 휘두르며 기령에게 달려가자 기령 또한 피하지 않고 제법
힘을 뽐내며 장비의 창을 막으며 공격했다. 그러나 10여 합이 해 못 돼 장비가
벽력 같은 소리를 내지르며 사모창을 휘두르자 기령은 말에서 굴러 떨어지고 말
았다.
장비가 기령의 시체를 적진 속에 던져 보내자 혼비백산한 기령의 군사들이 뿔
뿔이 흩어졌다.
기령이 맥없이 무너지자 원술이 몸소 군사를 거느리고 뛰쳐나왔다. 유비는 구
사를 세 갈래로 나누었다. 주령.노소는 왼쪽, 관우.장비는 오른쪽을 맡게 하고
유비 스스로는 중근을 거느려 학의 진을 만들었다.
유비가 문기 아래의 마상에 있는 원술을 보자 말 채찍으로 가리키며 큰 소리
로 꾸짖었다.
"이 대역무도한 놈아. 내가 황제의 조서를 받들어 너를 치러 왔다. 마땅히 대
항하지 않고 순순히 항복하면 죽음만은 면할 수도 있으리라."
"자리나 짜고 짚신이나 삼던 농사꾼 녀석이 누구 앞에서 감히 큰소리를 치느
냐. 내 너를 사로잡아 목을 치리라."
맞받아서 욕을 하며 원술은 군사를 몰아 덤벼들었다. 유비가 잠시 그 기세에
눌린 듯하며 군사를 슬쩍 물렸다. 유비의 유인책임을 알 리 없는 원술이 기세
좋게 유비 진영으로 돌진해 왔다. 그러자 왼연에서는 주령과 노소, 오른편에서
는 관우와 장비가 군사를 이끌고 달려들었다. 유비도 말머리를 돌려 마주 오는
원술군을 주살하니 원술군은 더 이상 견뎌 내지 못하고 우왕좌왕하며 무너지기
시작했다. 창에 찔리고 칼에 맞아 쓰러지는 군사는 원술군뿐이었다. 순식간에
시쳐는 들을 덮고 흘린 피는 내를 이루었다.
원술은 급히 말머리를 돌렸다. 싸움이 이 지경으로 몰린데다 설상가상으로 원
술의 후방에서는 원술을 떠나 승상으로 갔던 지난날의 부하 뇌박.진란이 이끄는
무리들이 원술이 싸우는 틈을 타 군량과 재화 등을 마구 약탈하고 있었다.
"이런 불충한 역적놈들!"
원술은 대로하였다. 비명을 지르는 부녀자들을 구출하고자 그들부터 공격하며
미친 듯이 싸웠다. 문득 제 정신을 차려 주위를 둘러보니 어느 새 선봉은 무너
졌고, 중군도 크게 흔들리고 있었다.
이미 목숨을 보전키 위해 도망간 군사의 수도 부지기수였다. 저물어 가는 들
판에는 즐비하게 넘어져 있는 아군의 시체만 보일 뿐이었다.
자신의 생명까지도 위급하다고 느낀 원술은 하북행을 단념하고 다시 수춘성으
로 돌아가기로 작정했다. 그러나 가는 도중에 또다시 도적 떼의 기습을 받게 되
자 부득이 강정까지 와 오도 가도 못할 지경이 되고 말았다.
원술이 남은 군사들을 점고해 보니 겨우 1천여 명에 지나지 않았다. 기막힌
일은 그나마도 남아 있는 자라고는 살이 뒤룩뒤룩 찐 일족과 노약자들뿐이었다.
때는 바야흐로 더위가 기승을 부리는 6월이었다. 양식도 떨어져서 남아 있는
보리 30섬을 군사들이 나누어 갖고 나니 일족들은 먹을 것이 없어 굶어 죽는 자
가 많았다.
원술도 보리죽을 먹으며 사흘을 견뎠으나 그나마 바닥이 났다.
"수춘으로 가야지, 수춘으로 가서 다시 나라를 일으켜야지...."
원술은 헛소리를 되뇌이며 다시 수춘으로 향했다. 이 처량한 패잔병들의 행렬
은 이미 군대가 아니었다. 갈 데 없는 거지 떼들이었다. 10리를 가면 열 사람
이, 50리를 가면 오십 명이 줄어들었다.
입고 있던 의복까지 도적들에게 빼앗겨 거의 벌거숭이가 된 몰골로 걸음을 옮
기고 있었다. 한때는 황제라고 칭했던 몸이었으나 지금은 너무나 처참한 행색이
었다. 이제 원술의 곁에는 조카인 원윤밖에 남아 있지 않았다.
"저기에 농가가 보입니다.. 저 집에서 잠시 쉬었다 가시지요."
숨을 헐떡이며 염천하의 들판에서 간신히 걸음을 옮기며 원술을 부축하고 있
는 원윤 자신도 금방 쓰러질 듯이 보였다. 두 사람은 가까스로 그 농가의 처마
밑에 당도했다.
"짐에게 꿀물을 다오!"
농부에게 원술이 쉰 목소리로 말했다. 그러자 농부가 차디차게 웃으며 비아냥
거렸다.
"꿀물을 달라고? 있다면 핏물밖에 없소."
기진맥진한 가운데도 부아가 치민 원술은 외마디 비명처럼 소리를 질렀다.
"저런 무례한 놈을...."
몸을 일으켜 한 소리 지른 원술은 그대로 땅바닥에 쓰러졌다. 쓰러진 원술은
피를 한 말이나 토하더니 그대로 죽어 버렸다.
원윤은 원술이 지니고 있던 옥새를 거둔 후 그 시신과 유족들을 이끌고 여강
으로 달아나다가 광릉 땅에서 서구라는 자의 습격을 받아 몰살당하고 말았다.
죽은 원윤의 몸에서 뜻밖에도 옥새를 발견한 서구는 즉시 허도로 가서 조조에
게 바쳤다. 조조는 크게 기뻐하며 건달 소구를 고릉태수에 보하였다.
결국 옥새는 돌고 돌아서 조조의 손에 들어갔다.
한편 유비는 원술이 죽은 것을 알자 조정에 표문을 올리고 조조에게도 따로
글을 보냈다. 이어 주령과 노소를 허도로 돌아가게 했다. 조조의 군사 5만은 서
주와 그 일대를 지키지 위한다는 구실을 대고 돌려 보내지 않았다.
주령과 노소 두 장수는 허도로 돌아와 이 같은 사실을 고했다.
"나의 군사를 허락도 없이 서주에 남기고 왔단 말이냐? 네놈들은 누구의 부하
냐? 당장 네놈들의 목을 베리라!"
그러자 순욱이 조조에게 간했다.
"승상께서 유비에게 전권을 맡기셨으니 군의 지휘군도 당연히 유비가 쥐게 된
것입니다. 두 장수는 유비의 부하로 출정하였기 때문에 그의 명령에 좇지 않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승상께서는 굽어 살피시기 바랍니다."
순욱의 말을 듣고 노기를 가라앉힌 조조는 그들을 용서해 주었다. 순욱이 다
시 뒷일을 고했다.
"차주에게 글을 보내 유비를 치라고 이르시는 것이 좋겠습니다."
"그것도 좋은 방책이오."
조조는 즉시 차주에게 몰래 사자를 보냈다. 차주는 조조의 균지(재상의 명)를
받자 진등을 불러 그 일을 의논했다. 여포를 서주성에서 몰아 낼 때 진대부.진
등 부자의 힘이 컸으며, 조조에게 충성을 바치고 있는 그에게 의논하면 어렵지
않으리라 여겼다.
진대부의 아들 진등은 그 후에도 서주에 머물러 있으면서 성주인 차주를 보좌
하고 있었다.
어느 날 차주의 부름을 받고 성에 들자, 차주는 좌우를 물리친 다음 낮은 목
소리로 말했다.
"승상으로부터 유비를 죽이라는 밀서가 왔네. 만약 일을 그르치면 큰 일이니
그대에게 묘책이 없는가?"
진등이 내심 깜짝 놀랐으나 시치미를 떼고 대답했다.
"그것은 어렵지 않은 일이외다. 지금 유비는 사방으로 흩어진 백성들을 불러
모아 환심을 사려고 성 밖에 나가 있습니다. 그러나 수일 내에 돌아올 것입니
다. 장군은 군사들을 옹성(성문을 지키기 위해 성 밖에 쌓은 작은 성)에 매복시
켜 두었다가 그가 돌아오기를 기다려 영접하는 체하고 나가 그를 치십시오. 나
는 성루 위에 있다가 활을 쏘아 그를 뒤따르는 군사들을 무찌르겠습니다."
"좋은 계책이오."
차주는 기뻐하며 즉시 그 준비를 서둘렀다.
같은 날, 진등은 집으로 돌아와 부친 진대부에게 차주와의 일을 자세히 이야
기하고 부친의 눈치를 살폈다.
진대부의 유비에 대한 호감은 예전과 조금도 달라지지 않았다.
"유비는 어진 사람이다. 우리 부자가 조조로부터 은록을 받고 있으나 유비를
죽일 수는 없다. 너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저도 차주에게 본심으로 대답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렇다면 이 일을 유비에게 가만히 알려 주어라."
"사람은 보내면 마음이 놓이지 않으니 밤이 되기를 기다려 제가 직접 다녀오
겠습니다."
밤이 되자 진등은 말을 타고 성 밖으로 나갔다. 밤길을 한동안 달려가다 관우
와 장비를 만나게 되었다. 진등은 그들에게 차주가 꾸민 계획을 알려 주었다.
"이런 쥐새끼 같은 놈. 내 당장 성으로 달려가 차주 그놈에게 물고를 내고 말
겠소."
장비가 이를 갈며 날뛰었으나 관우가 그를 제지하며 계책을 내놓았다.
"이런 일은 형님에게 알릴 것까지도 없네. 다행히 형님은 뒤에 처져서 오시니
까 우리가 처리하도록 하세. 저편에서 옹성에 군사를 매복시켜 놓고 우리를 기
다린다니 밤이 되기를 기다리세. 우리가 조조의 군사로 가장하고 그놈을 마중
나오게 하여 불시에 기습을 감행하도록 하세."
장비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이 아우는 형님의 말씀을 따를 따름입니다."
허도에서 서주로 내려올 때의 조조의 군사를 거느리고 왔으므로 조조의 기호
를 앞세워 가장할 수 있었다.
밤이 되자 관우는 그 기호를 앞세우고 서주성의 해자 앞까지 와서 큰소리로
외쳤다.
"빨리 성문을 열러 주시오!"
"그대들은 어디서 온 군사들이기에 한밤중에 성문을 열라 하시오?"
성 위에서 묻는 말에 관우는 목소리를 바꾸어 대답했다.
"나는 조 승상께서 보낸 장문원(장요의 자)이라는 사람이오. 화급한 일이니
어서 성문을 여시오. 우리가 의심스러우면 승상께서 내리신 이 기호를 보시오."
관우는 기병에게 기호를 크게 흔들게 하였다. 성문의 위병으로부터 이와 같은
보고를 받았으나 차주는 그들을 의심하여 얼른 문을 열지 않았다. 차주가 망설
이고 있자 이미 성 안에 들어와 진등이 그를 부추겼다.
"성문을 여십시오. 저들이 조 승상의 기호를 흔들고 있으니 의심할 바가 없습
니다. 만약 장요가 화가 나 그대로 돌아가 승상께 이 일을 고한다면 그때는 어
떻게 하시겠습니까?"
그러나 차주도 신중한 사람이었다. 진등이 은근히 겁까지 주며 부추겼으나 좀
처럼 문을 열지 않았다.
"날이 밝은 다음에 문을 열어도 늦지는 않소. 아무런 예고도 없이 들이닥친
인마에게 무턱대고 성문을 열어 줄 수는 없소."
날이 밝으면 일이 수포로 돌아갈 것이었다. 해자 앞에서 성문만 올려다보고
있는 관우는 애가 탔다. 관우는 얼른 한 가지의 꾀를 생각해 내고 다시 성난 목
소리로 소리쳤다.
"왜 성문을 열지 않는 거요? 유비가 이 일을 알면 큰일이오. 얼른 성문을 열
지 않으면 이대로 돌아가는 수밖에 없소. 조 승상께 이실직고해도 좋다면 마음
대로 하시오."
말을 마친 관우는 뒤에 늘어선 군사들에게 되돌아갈 것을 짐짓 큰 소리로 명
했다.
차주는 하는 수 없이 갑옷에 투구를 쓰고 스스로 군사 1천을 거느린 다음 비
로소 성 밖으로 적교를 내리게 했다. 차주는 군가를 이끌고 적교를 단숨에 건너
가 큰 소리로 물었다.
"문원은 어디 계시오?"
이때 성 안에서 나온 군사들의 횃불빛에 긴 수염의 대춧빛 같은 관우의 얼굴
이 얼른 비쳤다. 관우는 곧장 청룡도를 휘두르며 차주를 향해 달려들었다.
"차주 이놈, 네가 감히 우리 형님을 모살하려 드느냐!"
관우가 쏜살같이 말을 달려와 단칼에 차주의 목을 베어 떨어뜨렸다.
"역적 차주는 이미 내 손에 목이 떨어졌다. 너희는 죄가 없으니 항복하면 살
려 주겠다."
관우가 차주의 목을 들어 보이며 외치자 차주의 군사들은 모두 무기를 버리고
투항해 왔다.
차주의 수급을 들고 돌아오는 관우가 도중에서 유비를 만나 자초지종을 자세
히 이야기했다.
유비가 깜짝 놀라며 말했다.
"큰일을 저지르고 말았구나. 차주는 조조가 믿는 신하가 아닌가. 또한 서주의
성주이기도 하다. 이를 죽였으니 조조의 분노가 클 것이다."
조조의 세력을 알고 있는 유비는 걱정이 태산 같았다. 유비가 성문 밖에 서서
주위를 둘러보니 장비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장비가 또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는지 군사들에게 물어 보고 있는데 성문 안에서 장비가 말을 몰아왔다.
놀랍게도 그의 온몸은 피투성이가 되어 있었다.
"아우는 어디서 무엇을 하다 왔는가?"
유비가 장비의 몰골에 심상치 않은 느낌을 받고 장비를 보며 물었다.
"차주의 처자와 그 일족의 목을 베고 왔습니다."
유비가 장비의 무자비한 처사를 꾸짖었으나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허도의
조조에 대한 유비의 두려움과 걱정은 더욱 커졌다.
차주를 죽인 후 유비가 관부에 들자마자 진등을 청해 물었다.
"조조의 성품으로 보아 반드시 자기가 대군을 이끌고 쳐들어올 것이오. 좋은
계책이 없겠소?"
이번 일이 불가피하였다고 하더라도 아직은 조조와 정면으로 대립하는 것을
원치 않는 유비였다. 유비가 근심어린 얼굴로 진등에게 이 일을 의논하자 진등
이 말했다.
"근심하지 아십시오. 한 가지 길이 있습니다."
"그게 무엇입니까. 말씀해 주시오."
"이 서주 교외에 시화와 금기(거문고와 바둑)를 즐기면서 여생을 보내고 있는
고사가 계십니다. 환제 때 궁정에서 상서 벼슬을 지냈으며 인품이 고결하고 재
산도 많은 분이오."
"대체 뉘시오?"
"유 공께서 평소 스승처럼 받들어 모시던 분이신데 어찌 그분을 잊으셨습니
까?"
유비는 그제야 생각이 나는 듯 말했다.
"오, 그렇다면 정현? 정강성 선생을 말하는 것이오?"
"그렇습니다."
"그런데, 공은 지금 왜 그분을 들먹이시오?"
"황숙께서 조조에 대한 근심을 없애려 하신다면 방금 말씀드린 정강성 선생을
찾아가심이 좋을 듯합니다."
원래 정강성은 이름이 현인데 학문을 좋아하고 재주가 많은 선비로, 일찍이
마융의 문하에서 글을 배웠다. 마융은 조금 별난 데가 있는 학자로서, 글을 가
르칠 때에는 방에다 붉은 장막을 드리웠다. 장막 앞에는 제자를 앉게 하고 뒤에
는 아리따운 가기들을 앉히고 좌우에는 시녀들을 둘러서 있게 했다. 젊은 제자
들은 누구나 글공부를 하다 아리따운 가기와 시녀들에게 곁눈질을 하게 마련이
었다. 그러나 정현은 3년 동안 공부를 하면서 한 번도 한눈을 팔지 않았다. 정
현이 학업을 마치고 돌아가려 할 때 마융은 정현에게 감탄하며 말했다.
"나에게 학문의 심오함을 얻은 사람은 정현 그대 한사람뿐이다. 학문을 하는
사람은 학문에 못지않게 그 자세 또한 중요하다."
정현은 마융에게 가르침을 받고 집으로 돌아온 뒤에도 학문에 전념하였다. 가
솔들에게도 틈틈이 학문을 가르치며 가까이 하도록 하니 시비들까지도 모시 시
경을 읊을 정도였다.
어느 날 시비 가운데 하나가 정현의 마음을 상하게 하자 정현은 그를 마당에
꿇어앉혔다. 이를 본 다른 시비가 모시의 구절에 비유하여 그를 놀렸다.
"어쩌다가 진흙 속에 빠졌느뇨?"
그러자 꿇어앉은 시비 역시 시를 빌어 대답했다.
"한 마디 드리려다 노여움만 산 탓이네."
주인 정현의 인품이 집안의 시비들에게까지 전해져서 이렇듯 시비들조차 시를
읊는 풍류와 멋을 알고 있었다.
정현은 환제 때 상서 벼슬을 지내다 십상시의 난이 일자 관직을 버리고 고향
에서 학문과 농사로 세월을 보내고 있었다.
유비가 그를 스승으로 섬긴 것도 그 당시였다.
후에 서주목이 된 뒤에도 종종 그를 찾아가서 가르침을 청하며 공경해 마지않
았다.
"내가 그분을 스승으로 모신 것은 그렇다 하더라도 이번 일로 왜 그분을 찾으
라 하시오?"
"정강성 선생과 하북의 원소는 궁중에서 벼슬하고 있을 때부터 친히 사귀어
왔습니다."
"그럴 테지요."
"지금 조조가 두려워하고 있는 사람은 하북의 원소밖에 없습니다. 원소는 기
주.청주.병주.유주의 네 주를 다스리며 정병 1백여 만과 문관.무장.모사가 수없
이 많습니다. 또 하북 천지의 재화와 아직도 궁중 벼슬아치들의 비호를 받고 있
는 일문일족 등 견줄 바 없는 큰 세력입니다. 친히 정강성 선생을 찾아가 원소
에게 보낼 글을 써 달라 청하십시오. 정강성의 글을 보면 원소는 필시 공에게
호의를 보일 것입니다."진등의 말을 듣자 유비가 문득 한숨을 쉬었다.
"그대의 계략이 깊으나, 그 계략을 성사시키지는 못할 것이오."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생각해 보시오. 원소가 아직 나와 왕래가 없을 뿐더러 이번에 내가 그의 아
우를 죽게 하였으니 어지 나를 도와 주려고 하겠소?"
"그러니까 정강성 선생을 중간에 넣어 다리를 놓게 하자는 것입니다."
진등이 끝내 유비에게 권하니 유비도 그 말에 따르기로 했다. 유비는 곧 진등
과 함께 정현의 집을 방문하였다. 정현은 무릎을 꿇고 청하는 옛 제자를 향해
불쑥 한 마디 내뱉았다.
"그대와 같은 인자를 위해 뜻하지 않게 오랜만에 세속의 일을 하게 되었네 그
려."
정현은 곧 붓을 들어 원소에게 글을 썼다.
부디 사사로운 원한을 잊고 유현덕에게 협력하시기 바라오. 청사(역사)는 소
소(밝고 뚜렷함)하고 만대불멸이며, 오늘의 시운은 대의의 길을 걷는 사람에게
돌아가고 있소. 이 시기에 유현덕을 얻는다는 것은 원씨 문중에 큰 덕을 얻음이
라 믿고 나도 흔쾌히 권하는 바이오."
유비는 절을 하며 감사함을 표한 뒤 물러났다. 유비는 정현의 글을 손건에게
주며 급히 원소에게 전하게 하였다. 하북으로 말을 달린 손건은 먼저 원소에게
고하였다.
"바라건대, 장군의 위명으로써 허도의 역도 조조를 토평하시어 크게는 한실을
위하고 작게는 저희 주군 현덕을 위해 궐기하시어 바랍니다."
손건은 두 번 절하고 나서 간곡하게 고개 숙여 청했다. 그러나 원소는 냉랭한
얼굴로 손건을 바라보며 말했다.
"현덕은 낯가죽이 두꺼운 뻔뻔스러운 위인이구나. 그는 나의 아우 원술을 죽
게 하지 않았는냐. 아우의 원수를 갚겠다고 잔뜩 벼르고 있는 터다. 내가 어찌
그를 돕겠느냐."
"아니옵니다. 장군께선 그 원한을 조조에게 돌려야 합니다. 조조 그 역적은
무슨 일에나 조명을 빌어 함부로 명하며 이를 거스르면 천자를 거역한 죄로 다
스리려 합니다. 저희 주군 현덕께서는 이번에도 마음에 없는 출진을 하시었습니
다. 불운하게도 싸우다 보니 원술 공께서 비운을 당하시게 되었습니다. 현덕 공
께서는 조조의 무도함과 간특함을 더는 참을 수가 없어 저로 하여금 장군을 뵙
게 하신 것입니다."
손건이 조조를 비방하고 나서자 원소는 그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그럴 동안
유비에 대한 화도 조금 누그러졌다.
"조조는 원래가 간악한 재주를 가진 자이다. 너의 주인은 그것도 모르고 그에
게 몸을 의탁했더란 말이냐?"
원소의 화가 다소 누그러진 걸 느낀 손건은 정현의 서한을 공손히 올렸다.
"이 서한은 현덕 공의 스승이신 정강성 선생께서 장군께 드리는 것입니다."
"정 상서의 글이라고?"
원소는 손건을 물러가 있게 한 후 정현의 글을 읽었다. 그 글을 보자 원소의
마음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그는 혼자말로 중얼거렸다.
"현덕이 내 아우를 죽게 하였는데 내가 어찌 그를 돕는단 말이냐? 그러나 정
상서의 글 또한 물리칠 수 없지 않은가?"
원소 또한 지금의 북부만으로 만족하고 있는 사람은 아니었다. 장차 중원으로
군사를 일으켜 조조의 세력을 쓸어 버린 후 천하를 넘보려는 야망을 불태우고
있었다. 정현까지 그의 휘하에 유비를 거두는 편이 유익하다고 글을 전해 오자
그는 생각에 잠겼다. 사사로운 원한을 우선하여 득이 되는 일을 스스로 물리칠
필요가 없다는 것쯤은 그도 헤아리고 있었다.
다음 날, 원소는 휘하의 문무백관을 한 자리에 모았다.
"조조를 정벌하기 위해 군사를 일으키려 하는데 공들의 생각은 어떠시오?"
하북에서 첫손에 꼽히는 영걸이며 식견 또한 높기로 이름난 전풍이 먼저 들고
일어났다.
"여러 해를 두고 계속되는 전란에 백성들의 고통이 막심합니다. 게다가 곳간
에는 비축한 군량이 없으니 다시 대군을 일으켜서는 아니 될 줄 압니다. 우선
사람을 보내 천자께 표문을 올려 공손찬 토벌에서 승리한 사실을 고하고 허도의
동정을 지켜 보십시오. 만일 윤허를 받지 못했을 때는 조조가 우리를 가로막아
천자를 받드는 길을 방해하고 있다고 상주하십시오. 그런 다음 군사를 일으키시
어 조조의 잘못을 들어 그를 치도록 하십시오. 그때는 군사를 여양에 주둔시키
십시오. 그리고 하내에 전선을 늘리고 병기를 보초하는 한편 정병을 변방의 각
처에 보내 조조를 지치게 하면 3년 안에 뜻을 이루실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전풍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또 한 사람이 일어났다.
"주공께서 신령스러운 위세로 하북 일원의 강성한 무리였던 공손찬을 평정하
시었습니다. 이제 군사를 일으키시면 조조를 치는 일은 손바닥 뒤집듯 쉬운 일
입니다. 어찌 헛되이 시일을 지연시킬 필요가 있겠습니까?"
전풍의 말을 반박하고 나선 사람은 위군 출신으로 이름은 심배, 자는 정남이
라는 원소가 아끼는 모사였다.
그러자 또 한 사람이 일어나 심배의 의견을 논박하고 나섰다.
"지금 한 그 말은 우선 듣기에는 용맹스러운 듯하니, 적을 이기는 데에는 힘
만 강하다고 되는 것은 아닙니다. 조조는 법령이 이미 서있고 사졸의 조련도 잘
되어 잇다. 하니, 가만히 않아서 꼼짝 못하고 패망한 공손찬과는 다릅니다. 지
금 천자께 표문을 올리자는 상책을 버리고, 명분도 서지 않는 군사를 일으키는
일은 주공에게는 결코 이롭지 못할 것입니다."
그는 광평 사람 저수였다. 이 말에 심배가 화를 버럭 내며 일어섰다.
"저수, 그대는 조조를 몹시 두려워하는 모양인데, 그가 그토록 두렵소이까?"
심배가 저수에게 쏘아붙이고 나서 옆자리에 있는 곽도의 얼굴을 보았다. 모사
곽도는 평소에 저수와 사이가 나쁘기 때문에 당연히 자기의 주장을 찬동해 주리
라 여겼기 때문이었다. 그러자 곽도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조조를 치는 일을 누가 감히 명분 없는 일이라 하겠습니까? 무왕이 주를 치
고 월왕이 오나라를 쓰러뜨린 것은 모두가 때를 놓치지 않았기 때문이었습니다.
헛되이 태평스런 날만을 바라면서 천하의 움직임을 수수방관한 나라치고 백 년
의 기틀을 마련한 예가 있었습니까? 주공께서는 속히 대업을 정하도록 하셔서
정 상서의 말씀대로 유현덕과 함께 대의를 받들어 도모하는 게 좋을 듯합니다.
조조를 토멸하신다면 이는 위로는 하늘의 뜻에 순응함이며 아래로는 백성들의
뜻에 따르는 것입니다."
이 사람의 주장을 들으면 그 주장이 합당한 것 같고, 저 사람의 의견을 들으
면 그것도 일리가 있는 것 같았다. 전풍.심배.저수.곽도, 네 사람의 열띤 토론
을 들으면서 원소는 얼른 마음을 정하지 못하고 있었다.
이때 허유와 순심이 뒤늦게 나타났다.
'저 두 사람 또한 식견이 높으니 어떤 생각인지 들어 보자.'
원소는 이렇게 생각하고 이들에게도 의견을 물었다.
"정 상서로부터 유현덕을 도와 조조를 치는 게 좋겠다는 서한이 왔소. 군사를
일으키는 것이 좋겠소, 아니면 일으키지 않는 것이 좋겠소? 그대들의 생각을 말
해 보오."
두 사람의 대답은 한결같았다.
"지금이야말로 많은 군사로 적은 무리를 물리치고 강한 힘으로써 약한 것을
꺾을 때입니다. 또한 한실의 역적을 쳐서 황실의 법통을 세울 때입니다. 주공께
서는 군사를 일으키시는 것이 옳겠습니다."
원소는 두 사람이 그같이 말하자 비로소 마음을 정했다.
"그대들의 의견이 바로 내 뜻과 같소."
원소가 출병을 결정하자 기병할 것을 주장했던 곽도.심배는 개가를 올리며 물
러났고, 반대한 전풍.저수 등도 묵묵히 자리를 떠나 출정의 명을 기다렸다.
원소는 손건을 서주로 돌아가게 하여 유비에게 접응할 채비를 빈틈없이 하게
하고 정현에게도 자초지종을 전하도록 일렀다.
원소는 심배.봉기를 통군(총지휘)으로 삼았다. 또 전풍.순심.허유를 모사로
삼고, 안량과 문추를 장수로 삼아 기마군 15만과 보군 15만, 도합 30만의 대군
을 일으켜 여양을 향해 출진토록 했다.
원소군이 출진 준비를 마치자 곽도가 원소에게 진언했다.
"주공께서 군사를 일으켜 조조를 정벌함에 앞서 조조의 그릇됨과 죄악을 낱낱
이 들추는 격문을 만들어 대의명분을 세우십시오. 그리하여 그 격문을 각 고을
에 돌려 그 죄를 성토하면 모든 사람들이 우리의 기병에 찬동할 것입니다."
원소는 곽도의 말을 좇아 기실(서기) 진림으로 하여금 격문을 짓게 했다.
진림은 자가 공장이었다. 그의 뛰어난 글재주는 이미 천하에 널리 알려져 있
었으며, 환제 때에는 주부(문서계)를 지냈다. 그는 지난날 조정에서 하진이 조
정으로 전국의 군웅들을 불러들여 십상시들을 제거하자고 했을 때 이를 반대했
던 바로 그 사람이었다. 그의 말을 듣지 않다 하진이 죽고 동탁이 조정으로 들
어오자 그는 기주로 몸을 피했던 것이다. 그러다 원소가 기주로 돌아온 후 그를
기실로 삼았던 것이다.
진림은 원소의 명을 받자 격문을 써내려 갔다.
무릇 현명한 군주는 위기를 미리 헤아려 변란을 다스리며 충신이 권세를 세움
은 어려울 때를 대비하기 위함이라 하였다. 때문에 비상한 사람이 있어야 비상
한 일이 일어날 수 있으며, 비상한 일이 있은 뒤 비상한 공로를 세울 수 있음이
라. 따라서 비상한 일은 진실로 비상한 사람에 의해서만 착안되는 것이다.
지난날 진나라가 강했으나 2세 황제가 나약해서 조고가 대권을 쥐고 생과 살
을 제 마음대로 하니 사람들이 그를 두려워하여 감히 바른말로 간하지 못했다.
그러다가 2세 황제는 망이궁에서 조고에게 죽음을 당하고 마침내 진나라는 무참
히 망하니 그 치욕이 오늘에까지 전해져 깊이 세상의 교훈이 되고 있다.
그 후 한의 여후 말년에 이르러 나라 권세를 거머쥔 여산과 여록이 안으로는
남군, 북군까지 거느리는 병권을 잡고 밖으로는 양과 조 두 나라를 다스리며서
천자에게 고하지 않고 조정의 온갖 대사까지 제 마음대로 행하니 상하의 질서가
서지 않으매 천하가 다 한심해하였다. 이에 강후 주발과 주허후 유장이 분노하
여 군사를 일으켜 역적들을 죽이고 태종을 세웠다. 이리하여 왕도는 다시 흥하
여 그 빛남이 널리 나타났으니 이는 권세를 세워야 할 책임이 대신에게 있으므
로 그 대신이 권세와 위엄을 세워 나라의 어지러움을 구한 뚜렷한 본보기가 아
니겠는가.
사공 조조의 할아비 중상시 조등은 고자로서 좌관 서황 등과 손잡고 요사스럽
게 못된 짓을 일삼돈 자이다. 옳고 그름의 구별 없이 행패를 일삼고 백성들을
못 살게 굴며 재물을 긁어모으기에만 급급했던 것이다.
조조 애비 조숭은 원래 거리를 떠돌던 부랑아였으나 고자 조등의 양자로 들어
와 뇌물을 바쳐 벼슬을 산 자이다. 긁어모은 재물로 세도 있는 자에게 아첨하며
벼슬을 높이니 마침내 태위에까지 오르게 되었다.
그의 아들 조조는 어떠한가? 그는 더러운 고자 내시의 자손으로 원래부터 덕
과는 담을 쌓은 채 교활하고 그릇된 짓으로 남을 속이며 화를 불러 남을 괴롭히
기를 좋아하며 세상의 불행을 즐기는 자이다. 막부(본래는 장수가 집무하는 곳,
여기서는 원소 진영 또는 원소를 가리킴)는 정병을 거느리고 역당(십상시)을 소
탕하였다. 그러나 뒤이어 동탁이 국권을 농락하여 나라를 혼란에 빠뜨리매, 막
부는 다시 칼을 빼어들고 동하에서 군사를 일으켜 천하 영웅들을 끌어모을 때
어리석은 자는 버리고 쓸 만한 자는 등용하니 이에 조조와도 함께 일을 도모하
기로 하였다. 그에게 군사를 준 것은 매와 개도 주둥이로 물어뜯고 발톱으로 할
퀴는 재주가 있음을 믿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본디 경솔하고 어리석으며 계략이
없어 가벼이 나아가고 쉽게 물러나다가 수차 싸움에 패하고 빈번이 군사만 잃었
다. 그러나, 막부는 그때마다 조조에게 다시 군사를 보내어 구원해 주었고, 또
한 천자께 아뢰어 동군태수를 제수케 하고 연주자사에까지 오르게 하였다.
이렇게 호패를 씌워 주어 위풍을 돋우게 한 것은 적과 싸워 승리했다는 소식
이나 알려 올까 하는 바람에서였다. 그러나 조조는 일단 힘을 얻자 멋대로 발호
하여 온갖 못된 짓을 다해 백성들을 못 살게 굴고 어진 사람과 착한 이를 잔인
하게 해쳤다. 구강태수 변양은 영특하고 재주 있기로 천하에 따를 자 없었으나
바른말만 하고 아첨하지 않다가 조조의 눈 밖에 나 마침내 목이 잘리어 길거리
에 효수당하고, 처자를 비롯하여 그 일가족이 도륙당했다. 이때부터 천하의 뜻
있는 선비들은 통분하고 백성들의 원망 소리는 하늘에까지 닿았다. 그러므로 조
조는 서주에서 도겸과 싸울 때 더 많은 군사임에도 오히려 도겸에게 패하여 여
포에게 복양 땅을 빼앗기고 동쪽 변방을 떠돌며 의지할 곳마저 잃었다.
막부는 나라의 근본인 원줄기(임금)를 강하게 하고 곁가지에 제후들의 힘을
견제하고자 모반하는 무리에 들지 않고, 다시 깃발을 세우고 갑옷을 입고 나서
들이치니 징 소리 북 소리 진동하는 곳마다 여포의 무리는 여지없이 무너져 달
아나고야 말았다.
그 뒤 천자께서 환도하실 때 뭇 도적이 거가를 범하였다. 그때 막부는 영지인
기주에 있었는데 북변 공손찬의 침범으로 기주를 비울 수 없어 종사중랑 서훈을
보내 조조로 하여금 먼저 낙양으로 가서 불탄 종묘사직을 손보아 돌보며 어린
황제를 정성껏 보좌하도록 하였다. 그러나 조조는 온갖 횡포를 다 부려 천자를
겁박하여 도읍을 허창으로 옮기게 한 후 황실을 모독하고 국법과 기강을 문란케
하고 스스로 높이 앉아 3대를 거느려 나라 정사를 좌지우지하였다. 벼슬을 주고
상을 내림이 모두 그의 마음 하나에 달렸고, 사람을 죽이고 벌 주는 일 또한 그
의 세 치 혀끝에서만 행해지고 있다.
그의 마음에 드는 자는 오족까지 부귀를 누리게 하고 미움을 받은 자는 삼족
을 멸했다. 모여서 떠들면 드러내 놓고 죽이고, 숨어서 공론하는 사람은 아무도
모르게 죽여 버리니 백관들은 입을 다물고 다만 눈짓으로 뜻을 통하며, 상서는
다만 조회에 낙오자를 기록할 뿐이고, 공경은 그저 인원만 채울 뿐이었다.
태위 양표는 일찍이 사도와 사공을 지내는 등 인신으로서 최고의 지위를 누렸
을 뿐만 아니라 나라에도 공로가 많았지만, 한번 조조의 눈 밖에 나 억울한 죄
를 입고 갖은 고문을 당하다가 오형을 당했다.
또 의랑 조언은 평소에 바른말로 직간하여 옳은 길을 제시하기 때문에 천자께
서도 귀를 기울이사 때로는 뉘우치시기도, 때로 공경하시기도 했다. 그러나 조
조는 권세를 빼앗고 언로를 막기 위해서 조언을 잡아 죽였을 뿐만 아니라 천자
께 아뢰지도 않았다.
또한 양호왕(이름은 유무, 한 문제의 형님, 경제의 아우)은 선제(경제)와 동
북형제간이니 그분의 능은 존귀한 황족의 분묘인 만큼 높이 받들어져야 하고 그
주위의 나무까지도 엄숙히 보호해야 마땅하건만, 조조는 군사와 관리를 거느리
고 가서 능을 파헤쳐 널(관)을 부수고 시신을 발가숭이로 드러내면서까지 황금
과 보옥을 약탈하니 천자께서 눈물을 흘리시고 선비와 백성들이 다 슬퍼하였도
다.
또 조조는 발구중랑장이니 모금교위니 하는 벼슬을 제수하고 그들로 하여금
닥치는 대로 무덤 속을 파헤치게 하여 보물을 노략질하니 몸은 비록 삼공의 자
리에 있으면서도 행실은 도둑질을 일삼고 나라를 욕되게 했으며 백성을 해치고
귀신에게까지도 악독한 짓을 서슴지 않았도다. 법은 없는 것 없이 다 있어 형벌
이 너무나 가혹하며 세상살이 곳곳마다 함정을 파고 그물을 친 듯 백성들은 손
을 들면 그물에 걸리고 발을 움직이면 함정에 빠지게 되어 있었다.
그리하여 조조의 영지인 연주.예주의 백성들은 즐거움을 잊은 지 오래였고,
천자가 계신 도읍에는 한숨과 원망 소리만 드높을 뿐이다. 세상의 모든 책을 모
조리 들추어 보아 무도한 신하를 찾아 낸들 욕심 많고 잔인하고 가혹하기로는
조조만한 자가 일찍이 어디 있었음이랴.
나는 간특한 외적을 치기에 바빠 조조를 미처 가르칠 겨를이 없었을 뿐만 아
니라 그저 너그러운 마음으로 용서하고 개과천선하기를 바랐다. 그러나 조조는
도리어 늑대 같은 야심을 품고 속으로는 역적질할 음모를 꾸미며 나라의 동량지
신을 휘어잡아 황실을 무능케 하고 충신들을 내쫓거나 죽이고 홀로 악독한 영웅
이 되었다.
지난날 내가 북을 울려 북방 공손찬을 쳤을 때 모질게 맞서며 악착스런 적은
겹겹이 포위당하고도 1년이나 항거하였다. 조조는 내가 공손찬을 격파하지 못하
고 시일을 끌자 몰래 글을 공손찬에게 내어 내통하였다. 겉으로는 나를 돕는 체
하면서 속으로는 나를 치려 한 것이었으나 사자가 우리에게 잡혀 흉계가 드러나
고 말았다. 그런 터에 조조는 공손찬마저 죽게 되자 칼날을 감추었으며, 간사한
꾀를 쓰지도 못하고 또한 우리를 해치지도 못했던 것이다.
이제 조조는 오창에 군사들을 주둔시키고 우리 군사가 강을 건너기가 어려울
것이라는 것만 믿고 싸울 채비를 서두르며 감히 우리의 대군가 대결하려 한다.
나는 한나라 황실의 위령을 받들며 천하를 바로잡으려 하노니 장창을 든 군사
백만에 말탄 씩씩한 장수의 무리가 수천이다. 또한 옛날 중황.육.획(고대의 용
사)과 같은 날래고 용감한 장사가 좋은 활과 강한 무기를 들고 힘껏 분발하니
병주의 고간은 태행산을 넘었고, 청주의 원담은 이미 제수와 탑수를 건넜다. 대
군이 뱃머리를 나란히 하여 황하로 나아가는 동시에 형주의 유표는 완성과 염성
으로 내려가 조조의 뒤를 끊고 무찌른다면 마치 타오르는 불로 마른 쑥덤불을
사르듯, 푸른 바닷물을 뒤엎어 달아오른 숯불을 끄는 것과 같이 적을 섬멸할진
대 그 누구라 죽어 없어지지 않고 견딜 자기 있으리오.
더구나 조조의 군사와 벼슬아치들로서 가히 싸울 만한 자는 모두가 나의 영지
인 유주와 기주 출신으로 더러는 나와 뜻을 함께 했던 자들이다. 그들 모두는
그 일가 친척을 그리워하며 이곳으로 돌아오고 싶은 마음에 고향을 그리며 오늘
도 북쪽 하늘만 바라보고 있다.
또한 그 나머지 군사들은 연주.예주 땅 출신이거나 여포와 장양을 따르던 무
리로 주인을 잃은 후 위협에 못 이겨 억지로 여기는 터이다. 우리가 한번 북을
올리고 흰 깃발을 휘두르며 항복을 권하는 날이면 마치 바람에 쓸리듯 모두 항
복해 흙더미가 무너지듯, 둑이 터지듯 할지니 그렇게 되면 우리는 실로 칼에 피
한 방울 묻히는 일도 없으리라.
이제 한나라 황실은 쇠퇴하여 기강은 흐트러지고 조정에는 천자를 보필하는
신하가 없어 역적과 맞설 만한 세력이 없는지라 도성 안의 충의로운 신하도 이
제는 모두 머리를 숙이고 날개를 접은 채 어찌할 바를 몰라 움츠리고 있다.
비록 충성심이 있는 신하라 할지라도 흉악하고 음흉한 역적에게 억눌려 있으
니 어찌 그 일편단심을 펼 수 있으리오.
또 조조는 휘하의 사병 7백으로 항상 궁궐을 에워싼 채 겉으로는 천자를 호위
한다는 구실을 대면서도 실제로는 천자를 꼼짝 못하도록 가둬 놓고 있으니 조조
의 역적질 마음이 여기에서 싹튼 것이 아닌가 참으로 두렵도다.
이제야말로 충신이라면 간과 뇌를 땅에 쏟으며 몸을 바칠 때이며 열사는 나라
를 위해 큰 공을 세우려 모일 때이니 누가 모든 힘을 다 기울이지 않을 수 있겠
는가.
조조는 또 어명이라 칭하고 정해진 제도라고 사칭하며 사람을 각 지방으로 보
내어 군사들을 모집하고 있다.
나는 멀리 변방의 주와 군이 그 속임수를 모르고 참인 줄로 알아 출병할까 걱
정된다. 이는 억조 창생의 뜻에 거역하고 역적에게 가담하게 되는 짓이라, 곧
스스로 이름을 더럽히고 천하의 웃음거리가 될 뿐으로 명석한 선비가 취할 바가
아니로다.
오늘 유주.병주.청주.기주 4주의 군사가 일제히 나아가리니 이 글이 형주에
이르거든 형주는 즉시 군사를 일으켜 건충장군 장수와 힘을 합쳐 성세를 드날리
도록 하라.
그 밖의 모든 주와 군도 각기 의병을 일으켜 경계로 나아가 크게 무위를 떨쳐
아울러 종묘사직을 바로잡는다면 이야말로 앞서 말한 비상한 공이 아니고 무엇
이겠는가.
조조의 목을 얻는 자에게는 5천 호후의 벼슬을 내리고 상금 5만 전을 내릴 것
이며 조조의 장수나 군사 관리라도 항복해 오는 자에 대해서는 지난날의 그 죄
를 묻지 않을 것이다.
이 은덕과 믿음을 벼슬과 상을 걸고 천하에 널리 선포함으로써 천자께서 갇혀
위기에 처하심을 알리노니 영이 내리는 즉시 따르도록 하라.
진림의 격문을 본 원소는 매우 기뻐하며 그 격문을 각 주군에게 돌리게 하고
각 지방의 관문이나 나루터, 길목 등에 빠짐없이 방을 붙이게 했다.
허도에도 이 격문이 날아들었다.
그 무렵 조조는 심한 두풍을 앓고 있었다.
장수들이 이 격문을 조조에게 보여 주자 조조는 머리털이 곤두서고 온 몸에
식은땀을 비 오듯 흘렸다. 오히려 땀을 흘리자 두풍이 씻은 듯이 나았다.
조조는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누가 이 글을 썼느냐?"
옆에 있던 조홍이 대답했다.
"소문에는 진림이란 놈이 썼다 합니다."
조조가 그 격문을 보고 크게 화를 낼 걸로 짐작한 장수들은 가만히 조조를 지
켜 보았다. 그러나 조조는 껄껄 웃으며 말했다.
"글줄깨나 쓴다는 자라도 결국에는 군의 책략에는 미치지 못한다. 진림의 글
이 비록 훌륭하나 원소가 군사를 부리는 힘이 그에 따르지 못하지 않느냐. 내가
그 본때를 보일 것이다."
조조는 그렇게 말하며 원소와 싸울 일을 의논하기 위해 모사들을 불러 들였
다.
허장성세와 부전불화
원소와 조조군은 서로 탐색전만 벌일 뿐 2개월여 동안 싸움 한 번 없이 세월
을 보낸다. 유비는 조조와 적대함이 불리하다는 걸 깨닫고 조조와 화친하지도,
싸우지도 않겠다는 부전불화의 계책으로 맞선 채 적장 왕충을 사로잡아 조조와
의 화해를 꾀한다.
그 무렵, 북해태수 공융은 장군에 임명되어 허도에 머무르고 있었다.
조조가 원소군을 맞아 싸울 의논을 하고 있을 때 공융도 함께 그 자리에 있다
가 먼저 입을 열었다.
"원소하고는 결코 경솔하게 싸워서는 아니 됩니다. 그의 조건을 절충하여 받
아들이는 한이 있더라도 이번에는 자중하시어 화해하시는 것이 상책일 듯합니
다. 왕성한 세력에 맞부딪쳐서 패망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입니다."
그러자 순욱이 반박하고 나섰다.
"원소는 명문의 호족으로, 지난날 조정 벼슬아치의 일족입니다. 시대의 변화
를 달가워하지 않고 옛날의 영화만을 고집하고 있는 무리들만이 그를 지지하고
있을 뿐입니다. 이러한 보잘것 없는 자와 화친할 필요가 있겠습니까. 마땅히 싸
워 무찔러야 합니다."
공융이 순욱의 말이 끝나자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렇지 않습니다. 하북의 땅은 기름지고 그 백성은 근면합니다. 겉으로 보이
는 것 이상으로 실속이 있고 강하다고 보아야 합니다. 뿐만 아니라 원소의 일문
에는 자질이 뛰어난 인물이 많습니다. 휘하에는 심배.봉기 등 용병에 능한 자,
전풍.허유 등 지모가 뛰어난 자, 안량.문추 등 용맹스런 장수들이 있습니다. 또
한 저수.곽도.고람.장합.순우경 등도 천하에 알려진 뛰어난 명장들입니다. 어찌
그의 세력을 가볍게 여길 수 있겠습니까?"
순욱이 냉소를 머금으며 공융의 말을 받았다.
"그렇지 않습니다. 적을 가볍게 보는 것과 적의 허를 아는 것은 다릅니다. 원
소는 없고 기름진 땅을 다스리고 있어 부강하다고 하나 그 군주인 자신은 진취
적이지 못합니다. 그는 사대주의에 물들어 있으며 새사람과 새로운 생각을 받아
들일 아량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나라 안의 법도 문란하고 질서가 없습니다. 그
신하가 많다 하나 정연하지 못합니다. 또한 그의 신하인 전충은 강직하나 웃사
람에게 거역하는 버릇이 있고, 허유는 탐욕스러우나 슬기가 없습니다. 심배는
고집이 세고 꾀가 없소이다. 봉기는 용기는 있으나 남의 계책을 받아들일 줄을
모릅니다. 이러한 자들이 모여 있으니 자칫하면 의견이 맞지 않아 내분이 일어
나기 십상입니다. 또한 안량.문추의 용맹도 필부의 용맹이므로 한 번의 싸움으
로 그를 사로잡을 수 있을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30만의 대군이 무엇이 두렵
겠습니까? 그들이 자진해서 군사를 이끌어 온다는 것이 우리로서는 다행입니다.
지금 일거에 그들을 무찌르지 않고 화친을 청한다면 원소를 더욱 오만하게 만들
뿐입니다. 그렇게 되면 훗날 더욱 큰 우환거리를 남기게 될 것입니다."
순욱의 열변에 공융은 입을 다물고 말았다. 조조가 껄껄 웃었다.
"순문약이 과연 그들을 꿰뚫어보고 있음이오."
조조도 마침내 원소와 대결할 것을 결심했다.
그날 밤 허도는 밤이 새도록 불빛이 휘황하였다. 전후 양영의 관군 20만, 말
은 굽을 구르며 소리 높이 울고 철갑이 부딪치는 소리가 요란했다.
조조는 새벽이 되자 무장을 한 채 궁궐에 들어가 황제에게 상주하였다. 궁궐
에서 나온 조조는 유대를 선봉으로, 왕충을 후비군으로 삼아 군사 5만을 주며
명했다.
"유 장군과 왕 장군은 즉시 서주로 가 유비를 치시오! 특별히 승상의 기호를
그대들에게 줄 터인즉 반드시 내 기호를 앞세워 내가 친히 온 것처럼 하고 유비
를 공격하도록 하시오."
원래 유대는 연주자사였으나 조조가 연주를 정벌하자 조조에게 투항하여 그의
편장이 된 자였다. 왕충도 별다른 무공이 없는 장수였다.
조조가 두 장수에게 서주 출진을 명하자 정욱이 못미더운 듯 조심스럽게 조조
를 보고 간했다.
"유비를 상대로 하여 싸우자면 유대와 왕충 두사람으로는 지용이 부족합니다.
믿음직스러운 장군 한 사람을 더 딸려 보내는 것이 좋지 않겠습니까?"
"그들이 유비의 맞수가 되지 못함은 나도 잘 알고 있고. 그래서 나의 승상기
를 주어 내가 출진한 것처럼 꾸며 유비를 속이자는 것이오. 유비가 나를 알고
있으니 내가 직접 군사를 이끈다고 여기면 함부로 싸우려들지 않을 것이오. 내
가 원소군을 깨뜨리고 서주로 갈 동안 허장성세로 유비를 속이자는 것이오."
조조는 그렇게 말하며 껄껄 웃었다.
정욱은 조조의 기지에 감탄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번 싸움에서 가장 중요한
곳은 원소와 부딪칠 여양이었다. 여양만 궤멸시키면 서주는 손바닥 위의 물건이
나 다름없다. 반면 서주에 중점을 두어 훌륭한 장수와 병력을 보내면 원소는 서
주에 많은 구원병을 보낼 것이다. 이렇게되면 서주도 무너뜨리지 못하고 여양도
정벌하지 못하는 격이 되어 그야말로 두 마리 토끼를 다 놓치는 꼴이 되지 않겠
는가.
조조는 두 장수가 떠나기 전에 그들을 불러 다시 한 번 다짐시켰다.
"섣불리 나아가지 말라. 내가 원소를 격파할 때까지 굳게 지키기만 하면 된
다."
조조의 다짐을 받고 유대와 완충이 떠나자 조조는 친히 20만 대군을 거느리고
여양을 향해 진군하였다.
여양에 이르자 조조는 원소의 대군과 80리의 거리를 두고 영채를 세우되 호를
깊이 파고 보루를 높이 쌓아 방비부터 튼튼히 했다. 먼저 와 진을 치고 있는 원
소군에게 조조가 함부로 공격을 가할 수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원소군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거늘 어찌하여 공격해 오지 않는다는 말인
가?'
양군이 서로 상대가 먼저 공격해 오기만을 기다리는 사이, 어느덧 두달이 지
났다. 8월에 도착하여 10월까지 2개월 동안 서로 노려만 보고 있었다.
그 무렵, 원소가 군사를 내몰지 않았던 것은 그 나름의 사정이 있었다. 원소
의 대장 중 봉기가 이곳에 출진한 이후 병이 들어 거동이 불편하였다. 뿐만 아
니었다. 떠나기 전에 순욱이 예견한 대로 원소군의 장수들끼리 자중지란을 일으
키고 있었다. 봉기가 병이 들어 대신 심배가 지휘를 맡게 되었는데 평소부터 심
배와 사이가 나빴던 허유는 사사건건 심배의 명을 따르지 않고 트집을 잡았다.
저수 또한 원소가 자신의 계책을 받아들이지 않은 것에 불만을 품고 있었다. 그
는 조조군을 치기 위해 군사를 일으키는 것에 반대했던 터라 조조군을 치기 위
해 공격을 서둘러야 한다고 말할 입장도 아니었다.
그러나 문제는 원소였다. 부하 장수들이 제각각 목소리를 높여 자기 주장만을
고집하자 원래 우유부단한 원소 또한 결단을 내리지 못하니 먼저 와서 충분한
휴식을 취한 유리한 조건을 살리지 못하고 변변한 공격 한 번 없이 군량만 축낸
채 두 달이나 허송세월을 보내고 있었다.
'원소가 이곳까지 오기는 했어도 타고난 우유부단으로 싸움을 걸어오지 않았
구나. 두고 보면 미구에 내분이 일어날지도 모른다.'
조조는 이렇게 판단했다. 조조는 지난날 여포의 장수로 있다가 투항해던 장패
를 불러 청주와 서주 방면을 지키게 하고, 우금.이전은 황하 상류에 주둔케 했
다. 또 조인에게 대군의 지휘권을 주어 과도에 머물러 그들을 지휘하게 한 후
자신은 일단 허도로 돌아갔다.
허도로 돌아온 조조가 서주의 전황에 대해 묻자 한 관원이 아뢰었다.
"유대와 왕충은 서주에서 1백리쯤 떨어진 곳에 진을 쳤다 하옵니다. 그런 후
승상의 분부에 따라 중군에 승상기를 세워 놓고는 주로 하북 방면의 전황에만
관심을 두고 있는 모양입니다."
"유비는 어떻게 대응하고 있는가?"
"보고에 의하면 유비도 나와서 싸우려 하지 않고 그들 역시 하북의 소식에만
신경을 쓰고 있는 것 같다고 하였습니다."
이 말을 들은 조조는 어처구니가 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중얼거렸다.
"어리석은 자들 같으니, 임기응변이 무엇인지도 모른단 말이냐? 함부로 나가
서 싸우지 말라고 일렀더니 언제까지나 꼼짝도 않고 있을 작정인가? 나 조조가
직접 출진하였다면 1백 리나 되는 거리를 두고 몇 달이 지나도록 꼼짝도 않을
리 없을 거라고 오히려 현덕이 의심할 게 아닌가?"
조조는 급히 서주로 사자를 보내어 유대와 왕충에게 진격하라는 영을 전했다.
유대와 왕충은 진중에서 의논하였다.
"승상께서 성을 치라고 재촉하시니 먼저 장군이 나가 공격하시오."
유대가 왕충에게 말했다. 그러나 왕충은 고개를 저었다.
"허도를 떠날 때 승상께서는 친히 장군에게 계책을 일러 주시지 않았소. 장군
이 먼저 싸우면서 적군의 동태를 살펴야 할 것이오."
"나는 총대장이라는 책임을 맡고 잇소. 어찌 경솔하게 진두에 서겠소. 장군이
선봉에 서시오."
유대의 말에 완충이 다시 말을 받았다.
"장군과 나는 관작으로 보아 동격이오. 어째서 나에게 이래라저래라 지시를
하는 거요? 아예 우리 두 사람이 함께 출진토록 합시다."
"그것은 더욱 안 될 말씀이오. 차라리 제비를 뽑아 선봉과 후진을 정하는 것
이 어떻겠소?"
"그것 좋은 방법이오."
그리하여 두 사람은 제비뽑기를 하였다. 완충이 '선'을 뽑아 하는 수 없이 군
사 반을 이끌어 서주성으로 진격했다. 유비는 적군이 몰려온다는 보고를 받고
즉시 진등을 불러 대책을 물었다.
"원본초가 여양까지 진군했으면서도 그 모사들이 서로 뜻이 맞지 않아 아직
싸움을 하지 않는다 하니 조조는 지금 과연 어디에 있는지 알 수가 없소. 소문
에 의하면 여양의 조조 중군에는 승상기가 없다 하고 지금 이리로 오는 적군은
승상기를 앞세우고 있다 하니 이것이 어찌된 이유일까요?"
진등은 전부터 공격군의 승상기에 대해 의심을 품고 있었다. 필시 조조의 계
략일 것이라도 단정하고 진등이 말했다.
"조조는 원래 속임수가 많은 사람입니다. 조조는 반드시 하북에서 원소와 대
결하고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승상기를 오히려 이곳으로 보내 마치 조조 자신
이 이곳 서주에 온 듯 허자성세를 부리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우선 적군가
한번 싸워 보는 것이 좋겠습니다. 대책은 그 후에 세워도 늦지 않을 것입니다."
유비는 진등의 의견에 따라 곁에 선 관우가 장비를 돌아보며 물었다.
"두 아우 중 누가 나가서 과연 진중에 있는지를 알아보겠소이다."
싸움이라면 항상 남보다 먼저 나서기를 좋아하는 장비였다. 장비가 나서자 유
비는 선뜻 응락하지 않았다.
"그대는 너무 성미가 급하고 거칠기만 하니 보낼 수가 없다. 이 일은 신중을
기해야 한다."
"이 아우를 믿지 못하신다는 말씀입니까? 마약 조조가 있다면 그놈이 멱살을
잡아 이곳으로 끌고 오겠습니다."
장비가 언성을 높였다. 유비가 그런 장비를 나무랐다.
"그래서 내가 그대를 조급하다 하지 않는가. 조조는 마음 속으로 역심을 품고
있지만 명분상으로 항상 천자의 칙지를 받들어 행동하고 있다. 그러므로 지금
내가 그를 친다면 조조는 나를 조정에 거역하는 역적이라 부를 것이다."
"그렇다면 그들이 공격해 와도 수수방관하고 자멸을 기다리시겠다는 것입니
까?"
장비가 볼멘소리를 하였다.
"원소가 구원하러 오면 이 위기를 헤쳐 나갈 수 있지만 그것도 믿을 수가 없
고, 또한 조조와도 섣불리 맞설 수 없다. 실로 이번 일에 나의 운명이 걸려 있
구나."
유비가 이렇게 말하자 장비가 다시 불통거렸다.
"형님께선 어찌하여 그런 나약한 말씀만 하십니까?"
"적을 알고 나를 앎은 장수된 자의 도리이다. 결코 공연한 근심을 하는 것이
아니다. 성 안에 있는 군량미는 몇 달이 가면 바닥이 날 것이다. 또한 군사의
대부분이 조조에게 빌려 온 군사들이 아니냐? 그들은 조조군과 싸우기보다는 허
도로 돌아가기를 원하고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조조와 싸운다는 것은 계란으로
바위를 치는 격이 아니겠느냐? 바라는 것은 오직 원소의 구원뿐이다."
유비의 말에 여러 장수들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잠자코 앉아 있던 관우
가 입을 열었다.
"형님의 근심은 당연한 것입니다. 그러나 앉아서 적을 기다릴 수도 없으니 제
가 나가 동정을 살피고 오겠습니다."
관우가 나서자 유비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대가 간다면 내가 마음을 놓겠네."
유비가 승낙하자 관우는 3천 군사를 이끌고 서주성을 나섰다. 초겨울인 10월
의 하늘은 잿빛으로 흐려 있고, 거위털 같은 눈송이가 어지럽게 날리기 시작했
다. 3천 인마는 눈발 속을 헤치며 왕충의 군사를 맞았다.
관우가 말위에 올라 청룡언월도를 비껴든 채 왕충을 보고 소리쳤다.
"그대들은 어디서 온 군사들인데 감히 이곳을 침범하느냐?"
완충이 뛰쳐나오며 대거리했다.
"승상께서 여기가지 오셨거늘 너희는 어째서 항복을 하지 않느냐?"
그 말에 관우는 휘날리는 눈발 속에서 모란꽃 같이 붉은 입을 벌리고 껄껄 웃
었다.
"승상께서 오셨다면 잠시 진 밖으로 나오시도록 일러라. 이 관운장이 드릴 말
씀이 있다."
왕충도 지지 않고 맞받았다.
"승상께서 어찌 너 따위 천한 자와 가벼이 만나려고 하시겠느냐?"
관우가 짐짓 크게 노한 척하며 말을 몰아 달려나갔다. 왕충도 장창으로 춤을
추며 마주 나와 맞섰다. 관우는 몇 합을 부딪는 척하며 얼른 말머리를 돌려 달
아났다.
"게 섰거라!"
왕충은 신이 나 관우를 뒤쫓았다. 한동안 쫓고 쫓기다 어느 산기슭을 휘돌아
갈 때였다.
관우가 갑자기 말머리를 홱 돌려 세우더니 우렁찬 고함 소리와 함께 청룡도를
휘두르며 덮쳐들었다. 왕충은 원래 관우의 적수가 되지 못한데다가 달아나는 관
우를 영문도 모른 채 쫓기만 하던 터란 관우의 반격을 피할 수가 없었다.
왕충은 깜짝 놀라 얼른 말머리를 돌려 달아나기 시작했다.
"이놈 게 섰거라!"
큰 소리와 함께 관우는 청룡도를 왼손으로 옮겨 쥔 다음 오른손을 뻗어 왕충
의 갑옷 깃을 움켜잡았다. 관우는 왕충을 말 안장에서 끌어내려 옆구리에 끼더
니 본진을 향해 달렸다. 마치 어린아이를 잡아 겨드랑이에 끼고 가는 듯했다.
왕충이 관우에게 사로잡힌 채 적진으로 끌려가는 걸 보자 군사들은 사방으로
흩어지며 달아났다. 관우는 사로잡은 왕충을 서주로 끌고 와 유비앞에 무릎을
꿇게 했다.
유비가 왕충을 보며 호통을 쳤다.
"너는 대체 누구이며 지금 무슨 관직에 있기에 조 승상이라고 사칭하느냐?"
왕충이 몸을 떨며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어찌 감히 제가 조 승상이라 사칭할 수 있겠습니까? 승상의 명을 좇아 의병
으로 허장성세하며 마치 승상께서 여기 온 것처럼 꾸몄을 뿐입니다."
유비는 짐짓 얼굴색을 부드럽게 하며 왕충에게 좋은 의복과 술과 음식을 주고
당분간 그를 감금하도록 명했다.
그런 다음 관우와 장비를 불러 유대를 사로잡을 일을 의논했다.
"이번에는 유대를 사로잡아야겠는데 누구를 보내야 하겠는가?"
관우가 웃으며 말했다.
"역시 형님의 뜻은 거기에 있었군요. 왕충과 마주쳤을 때 일격에 거꾸러뜨리
지 않은 것은 형님의 뜻이 부전불화에 있는 것이 아닌가 하여 그를 죽이지 않고
사로잡은 것입니다. 조조와 '화친하지도 않으며 싸우지도 않겠다'는 것이 형님
의 계책이 아닙니까?"
유비가 관우의 말에 빙긋 웃으며 대답했다.
"그렇다네. 장비가 나가겠다고 할 때 말린 것은 장비의 과격한 성품으로는 왕
충을 죽이기가 십상이라 여겼기 때문일세. 왕충이나 유대를 죽여 보았자 우리에
게는 아무런 득이 없네. 살려 두고 그를 이용하여 조조와 화해하게 될 때 쓰자
는 것이 내 생각일세."
유비와 관우가 주고받는 이야기를 듣고 있던 장비는 은근히 치미는 부아를 삭
이기에 무던히도 애를 썼다.
자기가 유비의 속뜻을 미처 헤아리지 못해 공을 세우지 못했 뿐만 아니라 이
제는 자기의 어리석음까지 둘이서 은근히 빗대고 있지 않은가.
"관우 형님이 왕충을 사로잡았으니, 이번에는 제가 유대를 사로잡아 오겠소."
그러자 유비는 다시 한 번 장비의 성급함을 들먹였다.
"아우의 뜻은 잘 알겠으나 유대는 왕충하고는 다르다."
"어떻게 다르다는 말씀입니까?"
"유대는 전에 연주자사를 지낸 사람으로, 호뢰관에서 동탁을 칠 때는 그도 당
당히 한 진의 군사를 거느렸던 제후였다. 그가 지금은 선봉 노릇을 하고 있으나
가볍게 볼 상대가 아니다."
장비는 유비가 끝내 자기를 못미더워하니 속이 부글부글 끓었다.
"유대가 호뢰관에서 싸웠다는 것은 저도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제가 볼 때
그깟놈은 아무것도 아닙니다. 즉시 달려가서 이 장비가 놈의 모가지를 움켜쥐고
돌아오겠습니다."
"만약 죽였다간 큰일을 그르치게 될 터이니 어찌 걱정이 앞서지 않겠느냐?"
"글세, 염려 마십시오. 저도 털끝 하나 다치지 않고 운장 형님처럼 그를 산
채로 잡아 오겠소. 만약 그 자를 죽이게 되면 내 목을 내놓겠소."
왕충은 원래 관우의 적수가 되지 못한데다가 달아나는 관우를 영문도 모른 채
쫓기만 하던 터란 관우의 반격을 피할 수가 없었다.
왕충은 깜짝 놀라 얼른 말머리를 돌려 달아나기 시작했다.
"이놈 게 섰거라!"
큰 소리와 함께 관우는 청룡도를 왼손으로 옮겨 쥔 다음 오른손을 뻗어 왕충
의 갑옷 깃을 움켜잡았다. 관우는 왕충을 말 안장에서 끌어내려 옆구리에 끼더
니 본진을 향해 달렸다. 마치 어린아이를 잡아 겨드랑이에 끼고 가는 듯했다.
왕충이 관우에게 사로잡힌 채 적진으로 끌려가는 걸 보자 군사들은 사방으로
흩어지며 달아났다. 관우는 사로잡은 왕충을 서주로 끌고 와 유비앞에 무릎을
꿇게 했다.
유비가 왕충을 보며 호통을 쳤다.
"너는 대체 누구이며 지금 무슨 관직에 있기에 조 승상이라고 사칭하느냐?"
왕충이 몸을 떨며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어찌 감히 제가 조 승상이라 사칭할 수 있겠습니까? 승상의 명을 좇아 의병
으로 허장성세하며 마치 승상께서 여기 온 것처럼 꾸몄을 뿐입니다."
유비는 짐짓 얼굴색을 부드럽게 하며 왕충에게 좋은 의복과 술과 음식을 주고
당분간 그를 감금하도록 명했다.
그런 다음 관우와 장비를 불러 유대를 사로잡을 일을 의논했다.
"이번에는 유대를 사로잡아야겠는데 누구를 보내야 하겠는가?"
관우가 웃으며 말했다.
"역시 형님의 뜻은 거기에 있었군요. 왕충과 마주쳤을 때 일격에 거꾸러뜨리
지 않은 것은 형님의 뜻이 부전불화에 있는 것이 아닌가 하여 그를 죽이지 않고
사로잡은 것입니다. 조조와 '화친하지도 않으며 싸우지도 않겠다'는 것이 형님
의 계책이 아닙니까?"
유비가 관우의 말에 빙긋 웃으며 대답했다.
"그렇다네. 장비가 나가겠다고 할 때 말린 것은 장비의 과격한 성품으로는 왕
충을 죽이기가 십상이라 여겼기 때문일세. 왕충이나 유대를 죽여 보았자 우리에
게는 아무런 득이 없네. 살려 두고 그를 이용하여 조조와 화해하게 될 때 쓰자
는 것이 내 생각일세."
유비와 관우가 주고받는 이야기를 듣고 있던 장비는 은근히 치미는 부아를 삭
이기에 무던히도 애를 썼다.
자기가 유비의 속뜻을 미처 헤아리지 못해 공을 세우지 못했 뿐만 아니라 이
제는 자기의 어리석음까지 둘이서 은근히 빗대고 있지 않은가.
"관우 형님이 왕충을 사로잡았으니, 이번에는 제가 유대를 사로잡아 오겠소."
그러자 유비는 다시 한 번 장비의 성급함을 들먹였다.
"아우의 뜻은 잘 알겠으나 유대는 왕충하고는 다르다."
"어떻게 다르다는 말씀입니까?"
"유대는 전에 연주자사를 지낸 사람으로, 호뢰관에서 동탁을 칠 때는 그도 당
당히 한 진의 군사를 거느렸던 제후였다. 그가 지금은 선봉 노릇을 하고 있으나
가볍게 볼 상대가 아니다."
장비는 유비가 끝내 자기를 못미더워하니 속이 부글부글 끓었다.
"유대가 호뢰관에서 싸웠다는 것은 저도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제가 볼 때
그깟놈은 아무것도 아닙니다. 즉시 달려가서 이 장비가 놈의 모가지를 움켜쥐고
돌아오겠습니다."
"만약 죽였다간 큰일을 그르치게 될 터이니 어찌 걱정이 앞서지 않겠느냐?"
"글세, 염려 마십시오. 저도 털끝 하나 다치지 않고 운장 형님처럼 그를 산
채로 잡아 오겠소. 만약 그 자를 죽이게 되면 내 목을 내놓겠소."
유비는 장비를 격동시킨 후 단단히 다짐을 받고서야 군사 3천을 주어 성을 나
서게 했다. 장비는 아직도 화가 풀리지 않은 듯 씩씩거리며 군사를 이끌었다.
한편 유대는 왕충이 사로잡힌 것을 알자 영채를 더욱 굳게 지키고 나오지 않
았다. 장비는 날마다 유대의 영채 앞으로 나아가 욕설을 퍼부었다. 그러나 유대
는 장비의 용맹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진영 안에 틀어 막혀 굳게 지킬 뿐 싸
움에 응하지 않았다.
'이놈이 바위 밑에 들어간 게처럼 꼼짝도 하지 않고 있으니 어찌하면 좋은
가?'
장비는 우대가 진영만 지킬 뿐 싸울 의사가 없음을 알았다. 그렇다고 함부로
군사를 이끌어 쳐들어갈 수도 없었다. 이쪽보다 몇 배나 많은 군사로 방비만을
튼튼히 하고 있는 유대인지라 무모하게 덤벼들었다간 사상자만 낼 것이 뻔했다.
거기다가 유대를 산 채로 사로잡아야 하니 여느 싸움과는 달랐다. 장비는 유
비에게 다짐까지 했던 터라 그답지 않게 골똘히 궁리를 하다가 느닷없이 군사들
에게 영을 내렸다.
"모두들 듣거라. 저놈들이 나와서 싸우려 들지 않으니 오늘 잠 이경에 야습을
가하겠다. 준비를 단단히 하도록 하라."
그는 군사들에게 이렇게 영을 내린 후 아침부터 술을 마시기 시작했다. 술 한
동이를 다 마셔 버린 장비는 몇 동이를 한꺼번에 가져오게 하였다. 군사들은 걱
정이 태산 같았으나 장비의 영을 거역할 수가 없었다. 만취가 된 장비는 군막을
돌아다니며 주정까지 부리기 시작했다. 군사들의 조그만 실수를 트집잡아 매질
을 시작하는가 했더니 그 중 허물 있는 한 무리의 군사들을 따로 가두어 두고
혀 꼬부라진 말로 호통을 쳐댔다.
"오늘 밤 출병할 때 저놈들의 못을 쳐서 혈제를 올리겠다."
장비의 으름장에 군사들이 간곡히 용서해 줄 것을 청했으나 막무가내였다. 오
히려 묶인 군사들에게 더욱 심한 매질을 해대었다.
그날 저녁 주위가 어두워질 때였다. 묶인 군사들의 동료 하나가 살금살금 다
가오더니 그들의 밧줄을 풀어 귀엣말로 속삭였다.
"자네들이 무슨 죄가 있는가. 장비 그놈이 술에 취해 애꿎은 자네들만 죽이려
하지 않는가. 쥐도 새도 모르게 달아나게. 만약 들키더라도 내가 결박을 풀어
주었다는 말만은 하지 말게."
이미 초주검이 되어 꼼짝없이 죽게 될 걸로 알았던 그 군사들은 동료에게 고
맙다는 말만을 되풀이했다.
"두고 보게. 내 이 원한을 꼭 갚고야 말겠네."
자기들을 풀어 준 동료가 바로 장비가 보낸 군사임을 까마득히 알 리 없는 군
사들은 동료에게 장비를 향한 한서린 말까지 남기며 정신 없이 달아났다.
장비는 군막 안에서 여전히 술을 마시고 있는데 감시병 하나가 헐레벌떡 달려
와 고했다.
"저희들이 태만하여 큰 과실을 범했습니다. 죽을 죄를 지었습니다."
감시병은 군막 안에 묶어 둔 군사가 달아났다고 보고하며 감히 장비를 쳐다보
지도 못한 채 벌벌 떨고 있었다.
"알았다. 물러가라."
장비는 그 군사를 내보낸 후 자축이라도 하듯 술 한 사발을 더 들이킨 후 막
사를 나와 밤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하늘에는 별이 유난스레 총총히 빛났다.
한편 구사일생으로 달아난 군사들은 장비의 진영을 빠져 나온 후 곧장 유대의
진영으로 달려갔다. 장비에 대한 원한도 앙갚음하고 기밀을 유대에게 알리면 상
도 받을지 모르겠다는 생각에서였다. 장비의 계교대로 되어 가고 있는 셈이었
다.
"장비가 오늘 밤 이경에 야습을 감행할 것이오니 장군께서는 단단히 준비를
하옵소서."
유대가 그 군사들을 날카로운 눈빛으로 살펴보았다. 손과 발이 상처투성이였
고 얼굴은 항아리처럼 부어 있었다.
그러나 유대는 탈주병을 보고 호통쳤다.
"이놈! 거짓을 고해 우리 진지를 교란할 작정이 아니었더냐? 그런 얕은 꾀에
넘어갈 내가 아니다."
"천부당만부당한 말씀입니다. 죽어 혼백이 되어도 장비란 놈의 목이 떨어지는
것을 보고야 말겠다는 결심으로 죽음을 무릅쓰고 도망쳐왔습니다. 결코 거짓이
아닙니다."
"여봐라. 저놈들을 발가벗겨 보아라."
유대가 좌우에게 명하였다. 탈주병들은 즉시 벌거숭이가 되었다. 얼굴과 손발
뿐이 아니라 온몸이 멍들었고 결박당했던 자국이 역력했다.
'거짓말은 아닌 모양이구나.'
유대는 탈주병들의 말대로 일단 적의 야습에 대비하게 하는 한편 장비의 야습
을 역이용할 계책을 세웠다. 진영 안을 텅 비우고 거짓으로 군사들이 있는 듯
꾸민 뒤 진영밖에 군사들을 매복시켰다가 야습해 오는 장비를 때려 잡자는 계책
이었다.
장비는 이때쯤 휘하 부장들에게 군령을 내리고 있었다.
"군사를 셋으로 나누어 진격한다. 한 갈래는 사잇길로 나아가고, 또 한 갈래
는 산을 넘어 진영 뒤쪽으로 가라. 또 한 갈래는 적의 진영 앞쪽으로 나아가되
날랜 군사 30여 명만 뽑아 영채로 숨어 들어가 여기저기에 불을 놓도록 하라.
그 불을 신호로 매복했던 군사들은 일시에 내달아 적을 치도록 하라."
장비의 명에 의해 밤안개 속을 2천의 군사가 먼저 떠나갔다. 그들은 적의 영
채 뒤로 돌아가서 매복할 군사들이었다.
이경이 조금 지났을 무렵이었다. 그때 방책의 망루에 있는 초병이 소리쳤다.
"적이다. 야습이다!"
안개 속에서 물결치듯 군호 소리가 들렸다. 다음 순간 진지의 정면에 불길이
솟아올랐다. 마른 나무에 불을 붙여 영채 안으로 던지자 진영의 여기저기서 불
길이 일어났다. 동시에 허공에서 날아온 무수한 화살이 영채 안에 떨어졌다.
"장비란 놈은 용맹은 있어도 지모는 없는 놈이다. 쳐들어오는 적을 일거에 무
너뜨리도록 하라."
유대는 이미 야습이 있을 것으로 알고 만반의 준비를 하고 있던 터라 당황하
지 않고 소리쳐 영을 내렸다.
유대는 무기를 들고 진문 쪽으로 달려나가며 독전하였다. 유대의 지휘하에 전
장졸이 일제히 덤벼들자 야습한 장비군은 여기저기로 뿔뿔이 흩어지며 달아났
다.
"물러서지 말라. 죽기를 다해 싸워라."
장비가 후진에서 고함쳤으나 장비군은 달아나기에만 바빴다. 장비도 달아나는
군사들과 함께 말머리를 돌려 도망치기 시작했다.
"장비란 놈, 이제 그놈의 목은 내 수중에 있다. 적을 한 놈도 살려 보내지 말
라."
유대는 장비군이 도망가자 이렇게 외치며 그들을 뒤쫓았다. 마침내 영채의 진
문을 열고 영채 밖으로 와르르 몰려 나갔다.
'옳거니, 걸려들었구나.'
장비는 유대가 영채 밖으로 말을 달려나오자 속으로 쾌재를 부르며 말머리를
돌렸다. 도망가는 적을 뒤쫓아 어느 새 영채를 벗어난 유대는 장비가 말머리를
돌리며 덤벼들자 순간 이상한 낌새를 느꼈다. 이때까지 장비와 함께 달아나기에
만 급급했던 적군도 장비와 함께 갑자기 뒤돌아서 공격해 왔기 때문이었다.
유대는 즉각 영채 안으로 군사를 물리려 하였다.
그러나 이미 때는 늦었다. 정면으로 공격해 온 장비군은 전병력의 3분의 1에
불과했다. 3분의 2에 이르는 주력부대는 영채의 배후와 측면의 산을 넘어가 있
었으며, 유대가 빠져 나간 영채를 급습한 후였다.
'속았구나.'
유대가 당황하여 우왕좌왕하고 있는 사이 장비는 말을 몰아 달려가 그의 목덜
미를 잡더니 땅바닥에 내동댕이쳤다. 적의 계략에 넘어가 혼란에 빠진 군사들은
그나마 대장마저 장비에게 사로잡혀 버리자 무기를 버리고 항복해 왔다.
장비는 유대의 영채를 불살라 없앤 후 유대와 그 군사들을 데리고 서주성으로
향했다.
이 소식을 보고받은 유비는 환히 웃으며 말했다.
"익덕은 늘 거칠고 성급하기만 하더니 이제는 지모까지 써 전과를 올렸구나.
이제 그도 장수로서의 기량을 갖추었다 하겠다."
유비는 관우와 함께 친히 성문 밖까지 나가 장비를 맞이했다. 장비가 어깨를
으쓱거렸다.
"형님 두 분께서는 나를 늘 시끄럽고 거칠기만 하다고 나무라셨는데, 오늘도
그렇소?"
"익덕, 이제야말로 훌륭한 대장감이 되었네!"
유비가 웃으며 칭찬했다.
관우도 옆에서 빙그레 웃었다.
"자네의 공을 인정하겠네. 그러나 형님께서 자네에게 자극을 주시지 않았더라
면 아마 유대의 목은 벌써 잘려 나갔을 것이 아닌가?"
"하긴 형님 말씀도 맞소."
장비가 너털웃음을 터뜨리자 유비.관우도 함께 웃었다. 유비는 장비 뒤에 밧
줄로 꽁꽁 묶여 있는 유대를 보자 황망히 말에서 내려 그의 결박을 풀어 주며
말했다.
"내 아우가 너무 무례하게 대했나 봅니다. 너그러이 용서해 주시오."
유비는 유대를 성 안으로 맞이하여 먼저 잡혀 온 왕충과 함께 극진히 대접하
였다.
"적진에서 술과 요리의 향응을 받는다면 것은 수치스러운 일이라 생각하실지
모르나, 그런 거북한 마음은 거두어 주시기 바라오."
정중한 말로 위로하며 잔을 권하는 유비에게서 패군의 장수를 대하는 기색은
찾아볼 수가 없었다.
그들은 유비가 그토록 공대하자 권하는 잔을 물리치지 않고 마셨다. 유비가
다시 말을 이었다.
"전에 서주태수 차주를 죽인 것은 그가 나를 죽이려 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승
상께서는 그 일로 내가 승상을 거스른 것으로 여기시어 두 분 장군을 보내신 것
같습니다. 그러나 나는 승상의 큰 은혜를 입은 몸입니다. 밤낮으로 은혜 갚을
생각만 하고 있는데, 어찌 감히 승상을 거스를 수 있겠습니까? 두 분께서 허도
로 돌아가시거든, 부디 이 비를 위해 잘 말씀해 주십시오."
유대와 왕충은 유비의 정중하고도 간곡한 말을 물리칠 수가 없었다. 이에 두
사람도 공손한 태도로 입을 모았다.
"저희 목숨을 살려 주신 은혜를 어찌 잊겠습니까. 기회를 보아 승상께 유 공
의 참뜻을 전하도록 하겠습니다."
이튿날, 유비는 두 사람에게 사로잡은 군사들도 모두 되돌려 주고 서주성 밖
까지 나아가 전송했다.
'현덕은 승상을 배반할 마음이 조금도 없다. 또한 장수치고는 실로 도량이 넓
고 덕이 많은 인물이구나.'
유비의 인품에 감격한 유대와 왕충은 황망히 군사를 정돈하여 허도를 향해 떠
났다. 그러나 그들이 10리도 채 못 갔을 때 갑자기 북 소리가 울리더니 장비와
그 군사들이 뛰쳐나와 길을 막으며 소리쳤다.
"우리 형님은 도무지 사리를 모르신다. 적장을 사로잡아다가 도로 놓아 주는
법이 어디 있단 말인가? 나는 너희들을 보내 줄 수 없다."
유대와 왕충은 때아닌 장비의 출현에 아연할 뿐이었다. 말 위에 앉은 채 몸을
떨고 있었다. 장비가 고리눈을 부릅뜬 채 장팔사모를 휘두르며, 그들을 향해 덤
벼들려고 할 때였다. 누군가 장비 뒤쪽에서 나는 듯이 말을 달려오며 고함쳤다.
"장비는 무례하게 굴지 말라!"
유대와 왕충이 그를 보니 관우였다.
둘은 그제야 마음을 놓았다.
"형님이 두 분을 보내셨거늘 자네가 어찌하여 가로막는가?"
"지금 이들을 놓아 주면 후일 다시 쳐들어올 거요."
"다시 쳐들어오면 그때 다시 사로잡으면 되지 않는가."
유대와 왕충도 입을 모아 장비에게 말했다.
"승상께서 저희 3족을 멸한다 하여도 다시는 오지 않을 것입니다. 부디 장군
께서는 용서해 주시오."
"설사 조조가 몸소 온다 하여도 갑옷 한 조각 무사히 보내지 않을 텐데 하물
며 너희들이야 말하여 무엇하랴. 내 이번에는 두 분 형님들의 뜻을 받들어 너희
들의 목을 잠시 그대로 붙여 보내는 것이니 특히 그것을 잊지 말라."
유대와 왕충은 장비의 말에 사색이 되어 허겁지겁 그곳을 떠났다. 관우와 장
비가 서주성으로 돌아와 유대와 왕충을 혼을 빼 돌려 보낸 전말을 듣고도 유비
는 매우 어두운 얼굴로 말했다.
"조조가 필시 다시 오리라."
이 말을 듣고 옆에 있던 손건도 근심스런 얼굴빛이 되었다.
"서주는 공격을 받기 쉬운 곳이므로 오래 있을 곳이 못 됩니다. 오히려 군사
를 소패와 하비성에 나누어 주둔시켜 서주에 호응하는 형세를 이루어 조조에게
대비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그럴 듯한 의견이오."
유비도 조조의 대군을 서주성에서 맞는다면 불리할 것으로 여기고 있었다. 유
비는 곧 관우로 하여금 하비성을 지키게 하고 감 부인과 미 부인도 하비성에 머
물게 하였다.
손건.간웅.미축.미방으로 하여금 서주를 지키게 하고 유비는 장비와 함께 소
패에 주둔하였다.
아깝다 기설학인 북치는 재사 예형
조조는 유비 토벌에 앞서 장수를 끌어들이고, 유표에게 손을 뻗친다. 유표와
친교가 있는 예형을 사절로 보내어 그를 항복시키려 하는데 예형은 조조 앞에서
도 독설을 서슴지 않는다. 이에 화가 난 조조는 그로 하여금 조정의 고수 노릇
을 시키는데...
허도로 돌아간 유대와 왕충은 승상부로 가 조조를 배알하고 아뢰었다.
"현덕에게는 아무런 야심이 없는 듯하였사옵니다. 오로지 조정을 공경하고 승
상께 대해서도 거스르기는커녕 은혜 갚을 일만을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유대와 왕충은 입을 모아 유비의 허물 없음을 변호했다. 그들의 목숨을 살려
준 은혜를 갚기 위함도 있었지만 그들이 싸움에 진 것에 대한 변명이기도 했다.
그러나 조조는 그들의 말을 듣자 대번에 눈꼬리를 치켜올렸다. 얼굴에 노기가
충만하여 소리쳤다.
"닥쳐라, 네놈들은 조조의 휘하냐 현덕의 신하이냐? 나의 승상기를 앞세우고
또한 나의 군사를 거느리고 무엇 때문에 서주에 갔었더냐?"
그는 다시 좌우를 둘러보았다.
"군사를 이끌고 출정하여 나의 이름을 욕되게 한 자는 일벌백계의 뜻으로 각
영문으로 끌고 다닌 후에 목을 베어야 한다."
조조의 명령은 추상같았다. 그러자 옆에 있던 공융이 조조의 노기를 달래며
말했다.
"본디 유대와 왕충은 유비의 적수가 되지 못하였습니다. 그 결과를 두 사람의
죄로만 돌려서 이들의 목을 베신다면 다른 장수들의 사기에 영향을 미칠까 두렵
습니다. 이는 결코 인심을 얻는 일이 아닙니다."
공융의 말에 조조는 치솟던 노기를 가라앉혔다. 조조는 두 사람을 살려 주는
대신 그 관직을 빼앗고 내쫓았다.
조조는 유비가 괘씸하기 짝이 없었다. 이미 유비는 자신을 거슬러 차주를 죽
이고 서주성을 취하지 않았던가. 거기다가 원소와 손을 잡고 공공연히 자기에게
반기를 들고도 어리석은 유대와 왕충을 슬쩍 놓아 주어 발뺌을 하려 들었다. 조
조는 유비가 세력을 더 키우기 전에 싹을 자르리라 작정하였다.
조조가 유비 토벌을 입에 담자 공융이 또다시 입을 열었다.
"지금은 엄동설한이어서 함부로 군사를 움직일 시기가 아닙니다. 내년 봄을
기다려서 출진하셔도 늦지 않을 것입니다. 그 동안 먼저 나라 안을 더욱 공고히
다져 두어야 할 것입니다. 살피건대 형주의 유표와 양성의 장수는 몰래 제휴하
여 조정에 대해서도 불손한 태도를 보이고 있습니다. 승상께서 먼저 사람을 보
내시어 그들을 끌어들이십시오. 형주.양성을 승상의 세력하에 거두어들이신다면
천하의 제후들도 승상의 위세에 머리를 굽힐 것입니다. 유비의 토벌은 그 이후
에 도모하셔도 늦지 않습니다."
조조가 공융의 말을 듣고 생각에 잠겼다. 장수와 유표가 근거지로 삼고 있는
양성과 형주는 서주와는 가까운 거리였다. 만약 공융의 말대로 그들을 자기 휘
하에 끌어들일 수만 있다면 서주를 취하는 일은 어렵지 않을 것이다. 그렇게 되
면 엄동설한에 위험을 무릅쓰고 군사를 이끌 필요가 없지 않은가.
조조는 공융의 말을 좇기로 하고 유엽을 양양으로 보내 장수를 달래 보도록
했다.
유엽은 장수를 만나기에 앞서 그의 모사 가후를 먼저 찾아갔다. 가후는 유엽
을 보낸 조조의 뜻을 헤아려 보면서 반가이 맞았다.
유엽은 양양으로 오게 된 목적을 말하기 전에 우선 조조의 위세와 그가 천하
에서 제일 가는 영웅임을 말했다.
가후는 당세의 뛰어난 모사 중의 한 사람이었다. 유엽의 말을 듣지 않아도 천
하를 헤아리는 식견이 높았으므로 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입을 열었다.
"유 공께서는 일단 제 집에 머무르십시오. 때를 보아 공의 말대로 이 일을 승
상께서 바라시는 방향으로 이루어 보겠소."
가후는 유엽을 자기 집에 머물게 한 뒤 장수에게 그 일을 의논하며 조조에게
투항하기를 권했다.
"조 공이 이렇게 사람까지 보냈으니 그에게 투항하는 것이 좋은 방책일 것입
니다."
가후가 이렇게 권했으나 장수는 선뜻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있었다. 지금까지
조조와 팽팽히 맞서고 있던 터에 불쑥 투항하다는 것이 마음에 내키지 않았다.
더구나 조조의 아들 앙과 조카 안민, 대장 전위까지 죽인 것을 생각하니 더욱
망설여지는 장수였다.
이때, 공교롭게도 원소로부터 같은 목적을 지닌 사자가 와서 원소의 서한을
내놓았다. 장수가 글을 읽어 보니 원소의 서한 역시 자기와 힘을 합해 조조를
치자는 것이었다.
한꺼번에 두 곳에서 사자가 왔으므로 장수는 더욱 혼란스러웠다. 그러자 가후
가 원소의 사자를 보고 그에게 물었다.
"원소 공께서는 근자에 군사를 일으켜 조조와 싸웠다는 소문을 들었소이다만,
그 결과를 알지 못하고 있소이다. 승패는 어찌 되었소이까?"
"엄동설한이라 잠시 싸움을 중지했습니다. 주공 원소께서는 항상 형주의 유표
장군과 양성의 장수 장군 두 분을 모두 현인이라고 일컬어 오셨는데, 이번에 두
분께 청을 드리러 온 것입니다. 장군께서는 저의 주공과 힘을 합해 역적 조조를
치시는 것이 어떠실런지요."
가후가 원소의 사자 말에 차디차게 웃었다.
"그대는 가서 원본처에게 자신의 골육인 원술도 용납하지 못했는데 어찌 천하
의 선비를 용납할 수 있겠느냐고 전하시오."
가후는 사자가 보는 앞에서 원소의 서한을 찢어 버린 후 원소의 사자를 쫓듯
이 내몰았다. 장수가 안색이 달라지며 물었다.
"조조보다는 원소의 세력이 강하오. 그의 서한을 찢고 사자를 쫓아 보냈으니,
만약 그가 쳐들어오면 어찌하겠소?"
그러자 가후가 태연히 대답했다.
"어차피 남의 밑에 들 것이라면 원소보다는 조조를 택하는 것이 유리합니다."
그러나 장수는 고개를 저으며 마음을 정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렇지 않을 것이오. 그대는 지난날 나와 조조와의 싸움을 잊었소? 아직도
그 응어리가 남아 있을 것이오. 지금 만약 조조의 권유에 따른다면 후일에는 반
드시 해를 입을 것이오."
"하하, 대망을 품고 있는 조조가 어찌 과거의 패전 따위에 원한을 갖겠습니
까? 조조를 따라야만 하는 까닭이 셋이 있습니다."
"조조를 따라야 하는 세 가지 이유라니, 그게 무엇이오?"
"첫째는 조조가 천자를 모시고 천자의 조서를 받들어 천하를 평정하고자 하는
터이니, 그에게는 대의명분이 있습니다. 둘째는 원소는 강성하고 우리는 약하
니, 우리가 적은 군사를 거느리고 가서 따르더라도 필시 후대하지는 않을 것이
지만, 조조는 약하여 우리가 그를 따른다면 반드시 후대할 것입니다. 셋째, 조
조는 천하를 얻겠다는 큰 뜻을 품고 있는 까닭에, 반드시 사사로운 원한을 버리
고 덕을 세상에 널리 밝히려 할 것입니다. 이 세 가지가 장군께서 조조를 따라
야 할 이유입니다. 장군께서는 조금도 주저하지 마십시오."
가후의 명쾌한 대답에 장수는 더 이상 반론의 여지를 찾지 못했다. 장수는 가
후의 말에 따르기로 하고 유엽을 불러들였다.
유엽은 조조의 덕을 입에 침이 마르도록 칭송하고 나서 장수의 기우를 풀어
주었다.
"승상께서 만일 지난날의 원수진 일만을 생각하고 계신다면 무엇하러 저를 보
내어 장군과 정리를 맺으려 하시겠습니까? 승상께서는 보다 큰 뜻을 도모하시는
영걸이십니다. 그런 사사로운 원한은 잊으신 지 이미 오래입니다."
유엽의 말에 마침내 뜻을 정한 장수는 곧 그의 말을 좇아 다음 날 가후 등을
데리고 허도로 가 조조 앞에 나아갔다.
장수가 계하에 엎드려 절을 하자 조조는 황망히 장수를 부축해 일으키며 손을
잡아 이끌었다.
"지난날 나의 작은 과실을 마음에 품어 두지 마시오."
조조는 큰 잔치를 베풀어 장수를 극진히 환대한 후 그를 양무장군에 봉하고,
가후를 집금오(황실 경비대장)로 삼았다.
장수가 귀순하자 조조는 유표에게 손을 뻗칠 계획을 세웠다.
형주의 유표는 각처에 할거하는 군웅 중에서도 특히 돋보이는 존재였다. 그는
양자강 기슭의 비옥하고 광활한 땅을 다스리고 있었으며 군마도 강대했다. 지난
날 강동의 손견과 같은 걸출한 인물도 그 영토에 침입했다가 패한 후 비명 횡사
당했던 터였다.
귀순한 장수가 공을 세워 보기 위한 생각에서였는지 조조에게 이렇게 말했다.
"유경승(유표의 자)에게는 제가 글을 쓰겠습니다. 그와는 다년간 친교가 있는
터입니다."
조조는 크게 기뻐하며 장수에게 글을 쓰게 했다.
"유경승은 이름난 선비들과 사귀기를 좋아합니다. 문명이 높은 분을 골라 보
내시면 말을 들을 것입니다."
가후의 말에 조조는 순유를 돌아보며 물었다.
"누구를 보냈으면 좋겠소?"
"공문거(공융의 자)가 좋을 듯싶습니다."
조조는 순유를 공융에게 보냈다. 순유가 공융을 만나 조조의 명을 전하자 공
융은 고개를 저었다.
"그 일이라면 나보다 열 배나 재주가 많은 인물이 있소. 바로 내 친구 예형이
바로 그요. 이 사람은 마땅히 천자를 보필해야 할 인물이오. 예형이라면 특사로
보내도 상대방을 능히 감당할 수 있으며 승상의 이름도 욕되게 하지 않을 것입
니다."
"예형이란 사람은 도대체 어떤 인물이오?"
"재주와 학문이 높고 말재간 또한 대단합니다만, 타고난 성품이 까다롭고 괴
벽스럽습니다. 또한 가세마저 가난하여 가까이 지내는 사람이 없습니다. 제가
천자께 표문을 올려 그를 천거하겠소."
공융은 헌제에게 표를 올려 예형을 천거하였다.
예형은 평원 사람으로, 자는 정평이라 했다. 책을 보면 금방 깊은 뜻을 알아
내며, 한 번 눈여겨본 문장은 곧 외웠으며, 한 번 들은 것은 결코 잊는 법이 없
었다. 그의 본성은 도와 합치하고 묘안을 짜는 것이 흡사 신기에 가까워 이미
젊은 나이에도 널리 이름이 알려져 있던 터였다.
공융이 천자께 그를 천거하는 표를 올렸을 때 나이 겨우 스물네 살이었다. 그
러나 예형으로서는 평소에 조조를 별로 훌륭한 인물로 보고 있지 않았다. 그래
서 그에 대한 비판적인 언사를 서슴지 않았다. 조조 또한 예형의 이런 태도를
소문으로 들어 알고 있었다.
공융의 표문이 올라오자 헌제는 그 표문을 조조에게 넘겨 주었다. 조조는 헌
제로 하여금 그를 불러들에게 하니 예형은 천자의 명이라 거역할 수 없어 승상
부에 나타났다.
그런데 나타난 예형의 몰골이 그야말로 가관이었다. 봉두난발에 집에서 입고
지내던 때묻은 옷을 그대로 걸쳐, 그의 곁에 있으면 역겨운 냄새가 풍겨 나왔
다.
예형이 조조 자신에게 비판적이었다는 소문을 들었던 터라 그를 보는 조조의
눈초리가 곱지 않았다. 더욱이 그의 꼿꼿한 태도와 잔뜩 쏘아보는 듯한 눈길이
조조의 마음을 더욱 뒤틀리게 했다.
예형이 승상부에 들어온 이후에 자리도 권하지 않고 그를 노려보고 있는데 예
형이 불쑥 한 마디 내뱉았다.
"아아 사람이 없구나. 천지가 넓고 넓은데 어찌 이리 사람이 없다는 말인가!"
예형은 조조와 문무백관이 늘어앉은 좌중을 훑어보며 탄식하듯 말했다. 조조
가 그 말을 듣고 쓴웃음을 지었다.
"내 수하의 수십 인이 모두 당대의 영웅들인데 어찌하여 너는 사람이 없다고
하느냐?"
"하하하."
예형은 조조의 물음에 박장대소하더니 다시 입을 열었다.
"그렇게 인물이 많습니까? 바라건대 대체 당대의 영웅들이 누구누구인지 알고
싶군요."
"재미있는 위인이군. 그러면 오른쪽 줄부터 차례차례로 일러 줄 터이니 잘 보
고, 잘 들어서 기억해 두라. 먼저 순욱.순유.정욱.곽가는 지모가 깊고 용병이
뛰어나 옛날의 소하도 미치지 못하는 인재이다. 그 다음의 장요.허저.악진.이전
은 그 용맹을 당할 사람이 없다. 무제 때의 명장 잠팽이나 광무제 때의 명장 마
무도 그들을 따르지 못할 것이다. 저기 우금과 서황은 선봉장으로 특히 뛰어나
며 하후돈은 천하의 기재이다. 여건.만총은 종사로서 따를 사람이 없고, 조자효
는 세상이 다 아는 상장이다. 이래도 인물이 없다고 하겠는가?"
"하하하, 하하하."
예형은 조조의 말에 안하무인격으로 소리내어 웃었다.
"승상께서는 잘못 보셔도 크게 잘못 보시었소."
"내가 잘못 보았다니 그 이유를 자세히 말해 보아라."
"그들은 나도 알고 있으니 말씀드리겠습니다. 먼저 순욱에게 쓸 만한 것은 얼
굴뿐이니 조문이나 문병을 다니게 할 사람이오, 순유는 묘지기나 시킬 사람이외
다. 정욱은 문지기를 시키는 것이 제격일 것이며, 곽가는 글이나 읽고 풍월이나
읊게 할 사람이요, 장요는 북이나 치고 징이나 치게 한다면 잘 할 거요. 허저는
소와 말, 돼지 따위를 치게 하면 되겠고, 이전은 서한이나 전하고 격문을 나르
게 하면 제격일 것이며, 만총은 술이나 마시거나 술찌기나 먹게 하고 술통이나
두들기게 하면 걸맞을게요. 서황은 개백정감이고, 우금은 널판때기나 지고 담이
나 쌓게 할 인물이며 하후돈은 애꾸눈이므로 안질을 고치는 의사의 약통이나 들
고 다니게 하면 그런대로 쓸 만할 거요. 그 밖의 사람에 대하여 말을 하자면 입
만 아프지만, 옷을 입기 위한 옷걸이와 같고 밥을 먹기 위한 밥통과 같으며 술
을 마시기 위한 술단지, 고기를 먹기 위한 고깃주머니와 같을 뿐이외다. 때로
손과 발을 움직이고 가끔 입으로 소리를 낸다고 해서 인간이라고는 말할 수 없
소. 버마재비도 수족을 움직이고 지렁이도 소리를 내는데 그들을 어찌 모두 사
람이라 하겠소."
예형은 말을 마친 후 혼자 손뼉을 치며 웃었다. 너무나 지나친 독설에 좌중은
노여움을 삭이느라 숨소리가 거칠어졌다.
관후대도를 내세우던 조조도 속으로는 끓어오르는 노기 때문에 가슴이 타는
것 같았다.
조조가 쓴 약이라도 삼킨 듯한 얼굴로 노기를 달래며 언성을 높였다.
"그러면 그대는 대체 무슨 재능이 있는가?"
예형은 히죽 웃더니 턱을 치켜올리고 한두 번 숨을 쉬고 난 다음 자못 양양하
게 입을 열었다.
"천문 지리에 통하지 않음이 없고 삼교 구류에 걸쳐 깨우치지 않은 것이 없소
이다. 위로는 임금을 섬기면 가히 요.순에 이르게 할 수 있으며, 아래로는 공자
와 안자에 짝할 만하오. 가슴 속에는 나라를 다스리고 백성을 평안하게 하는 경
륜이 꽉 차 있어서 사사로운 욕심은 더 담을 여지가 없소. 그러니 나를 어찌 속
된 무리들과 함께 섞어 말할 수 있겠소?"
울화를 참지 못하고 장요가 벌떡 몸을 일으켰다.
"멋대로 지껄이게 내버려 두었더니 못 하는 말이 없구나. 입만 살아 있는 썩
은 선비놈아, 내 칼 한번 받아라."
그러나 조조가 그를 만류했다.
"마침 조정에는 고수 하나가 빠졌으니, 아침 저녁 하례 때와 향연에 고수 노
릇을 하도록 하라."
조조는 뜻밖에 예형에게 북치는 일을 맡겼다. 예형을 웃음거리로 만들겠다는
조조의 속셈이었다. 그러나 예형은 사양하지 않고 북치는 일을 쾌히 응락하고
승상부를 물러났다.
그날 예형을 천거한 공융은 언제 자리를 떴는지 보이지 않았다. 공융도 일이
이 지경에 이를 줄은 몰랐던 것이다. 그는 후회와 걱정으로 자리를 지키다 홀연
히 승상부를 빠져 나왔다.
예형이 사라진 뒤 좌중에서는 그를 욕하고 비난하는 소리가 일시에 쏟아졌다.
그 중에서도 장요는 분을 삭이지 못한 채 조조에게 되물었다.
"왜 그놈을 살려서 보내셨습니까?"
"그 자의 허명은 일찍이 천하에 알려져 있다. 그런 자를 이 자리에서 죽인다
면 세상 사람들은 내가 도량이 좁은 사람이라며 욕할 것이 아닌가. 그놈이 못
하는 게 없다고 큰소리쳤으니 북이나 치게 하여 욕이나 뵈줄 것이네."
조조의 말에 장요도 그 말뜻을 알아듣고 입을 다물었다.
다음 날 궁중의 성대에서 조하의 연회가 베풀어졌다. 조조는 고수들을 불러
북치기를 명했다. 조조의 명에 의해 악사와 고수들이 줄줄이 당상에 나타나 춤
을 추고 북을 치며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물론 예형도 그들 중에 끼여 있었
다.
그러나 다른 고수들은 모두 연주자의 예복인 두건을 쓰고 깨끗한 노란색 옷을
입었으나 예형만은 누추한 평상복을 입고 있었다.
그는 자신이 맡은 북을 치게 되자 '어양삼과'를 쳤다. 그 음절이 어찌나 절묘
하고 손놀림 또한 신묘하던지 만좌한 백관들은 넋을 잃을 지경이었다.
그러나 무곡이 끝날 즈음에 제 정신을 차린 여러 무장은 이구동성으로 예형의
무례함을 꾸짖었다.
"거기 있는 고수는 듣거라. 궁궐의 하례에는 다들 연주복을 입게 되어 있거
늘, 너는 어찌하여 더러운 옷을 그대로 입고 있느냐?"
이 소리에 예형은 얼굴을 붉히며 부끄러워할 줄 알았으나 태연히 일어나 허리
띠를 풀면서 중얼거렸다.
"옷이 더럽다면 벗어야지."
예형은 그 자리에서 옷을 훌훌 벗어 던지니 알몸이 되고 말았다. 백관들은 어
이가 없는 가운데도 민망하여 고개를 돌렸다. 알몸이 된 예형이 천천히 다시 바
지를 주워 입었다.
참다못하여 조조가 호통을 쳤다.
"묘당에서 어찌 그처럼 무례할 수 있느냐!"
예형은 북을 바닥에 내려놓고 장승처럼 서서 조조를 정면으로 바라보며 답했
다.
"임금을 속이는 무례와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이 몸을 그대로 드러내는 무례,
어는 쪽이 더 무례한지 생각해 보시오. 나는 겉도 없고 속도 없는 정직한 사람
임을 드러냈을 뿐이외다."
"닥쳐라 이놈!"
조조는 마침내 그가 자기를 빗대어 말하자 더 이상 화를 참을 수 없어 큰 소
리로 말했다.
"너는 입을 열면 자신만이 맑고 깨끗하다 하는데, 그럼 누가 혼탁하며 결백하
지 않다는 말이냐?"
조조의 노기를 보고도 예형은 동요의 기색이라곤 없었다. 오히려 조조를 보고
언성을 높였다.
"승상이 어진 사람과 어리석은 사람을 분간하지 못하니 이는 눈이 흐린 것이
요, 충성된 말을 따르지 않으니 이는 귀가 흐린 것이요, 옛날과 지금에 대해 아
는 것이 별로 없으매 이는 몸이 흐린 것이요, 제후들을 받아들이지 못하니 이는
뱃속이 흐린 것이요, 항상 찬탈할 마음을 품고 있으니 이는 마음이 흐린 것이
요, 나와 같은 천하의 명사를 북을 치게 만드니 이는 지난날 양화가 공자를 업
신여기고 장창이 맹자를 헐뜯는 것과 같소. 이 모두는 곧 천하를 취하려는 사람
이 할 짓이 아닌 것 같소."
예형이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고 내뱉는 호담한 혹평에 조조의 안색은 창백해
졌다. 문무백관은 숨을 죽인 채 침묵을 지키고 있었다.
공융 또한 안절부절 못하고 있었다. 조조가 당장이라도 칼을 뽑아 예형의 목
을 칠 것 같았다. 공융은 조조에게 다가가 나직이 말했다.
"예형의 지병이 또 발작한 것 같습니다. 그 죄가 무거우나 너그러이 용서해
주십시오."
그러나 뜻밖이었다. 조조는 공융의 말을 듣는 둥 마는 둥, 손을 들어 예형을
가리키며 조용히 말했다.
"너는 형주의 유표와 교분이 있는가?"
"다년간의 사귐이 있긴 있소이다."
"그렇다면 형주를 다녀오도록 하라."
예형은 고개를 가로 흔들었다.
"싫소이다."
"왜 싫은가?"
"무슨 일로 나를 보내려는지 이미 알기 때문이오. 그건 내가 할 일이 아니
오."
"아직 말도 하지 않았는데 그대는 어떻게 알 수 있다는 말인가?"
"형주의 유표를 설복시켜 승상의 문전에 말고삐를 매게 한다면 승상은 몹시
기뻐할 것 아니오?"
"그렇다. 유표와 만나 이해를 따져 설득한 후 이 조조에게 귀순시킨다면 그대
에게 높은 관직을 주리라."
"하하하, 쥐가 관목을 입고 갓을 쓴다면 꼴이 볼 만하겠군."
"나는 그대의 목숨을 잠시 더 빌려 주겠느니라, 즉시 출발하라."
이어 조조는 무관을 불러 일렀다.
"이 자에게 좋은 말을 주고 그를 호위토록 하라."
예형은 가지 않으려 하였으나 조조는 말 세 필을 준비시키고 사람을 둘이나
붙여 좌우에서 붙들어 가게 했다. 또한 문무백관들로 하여금 동문 밖에 술상을
차려 놓고 그를 전송하게 했다. 조조는 이렇게 하여 귀찮기만 한 예형을 유표에
게 보내 버렸다.
한편 동문에서 술상을 차려 놓고 예형을 기다리고 있던 문무백관 중 순욱이
백관들에게 타일렀다.
"예형이란 놈이 동문에 오더라도 모두 아무런 대꾸도 하지 말고 잠자코 있도
록 합시다."
이윽고 예형이 동문에 이르렀다. 순욱이 미리 당부하였으므로 순욱을 비롯한
문무백관들은 그를 거들떠보지도 않은 채 입을 다물고 있었다. 그러자 예형이
소리내어 통곡하기 시작했다.
예형이 통곡하자 순욱이 묻지 않을 수 없었다.
"그대는 무엇 때문에 곡을 하는가?"
"송장들 사이를 지나가면서 어찌 곳을 하지 않고 지나가겠소?"
예형의 응수에 모두 입을 모아 공박했다.
"우리들이 송장이라면 그대는 머리가 없는 미치광이가 아니오?"
"나는 한조의 신하이고 그대들은 조조의 신하가 아닌가. 어찌하여 나를 보고
머리가 없다 하는가?"
"당신만 한조의 신하라는 말이오? 우리도 한조의 신하요."
"하하하. 조조는 한을 거스르는 반역자다. 그대들이야말로 반역자들 편에 있
으므로 그 머리는 내일을 기약할 수 없는 것이 아닌가?"
예형과 순욱의 말을 듣고 있던 장수들이 창과 칼을 번뜩이며 외쳤다.
"왜 그놈을 살려 두시오? 그놈을 이리 넘기시오. 능지처참하겠소."
순욱도 그를 단칼에 베어 죽이고 싶은 마음이었다. 그러나 조조도 참고 그를
형주로 보내는데 그가 함부로 죽일 수는 없는 일이었다.
"쥐 같은 놈 때문에 어찌 칼을 더럽히겠소."
그 말을 듣자 예형의 독설은 계속 이어졌다.
"나는 쥐라도 오히려 사람의 성정을 가졌거니와, 그대들은 똥통 속에서 꾸물
거리는 구더기가 아니더냐?"
여러 장수들이 분함을 못 이겨 이를 갈았다.
며칠 후 예형은 형주에 당도하였다. 그의 재주와 평판을 알고 있는 유표는 융
숭하게 그를 대접했다. 허도에 비하여 형주는 좁은 시골이어서 삽시간에 예형의
재주는 알려졌다.
어느 날, 유표가 많은 선비들을 모아 놓고 천자에게 올리는 문장을 지어 보도
록 했다. 그 때 그곳에 도착한 예형은 다른 사람들이 지어 놓은 문장을 땅바닥
에 내동댕이쳤다. 어안이 벙벙한 유표를 본척만척, 예형은 보란 듯이 붓을 들어
달필로 문장을 써내려 갔다.
유표는 예형의 문장을 보자 무릎을 치며 탄복하였다.
"실로 문장과 언론이 형(예형)을 빼놓고는 이뤄지지 않도다. 명불허전(명성이
헛되지 않음)이로다."
그러나 그것도 잠깐이었다. 그의 버릇인 기괴한 언동이 또 시작되었다. 예형
이 번번이 유표의 결점만을 꼬집어 내니 예형을 극찬했던 유표도 드디어 참지
못하고 분통을 터뜨리고 말았다.
'강하태수 황조, 그는 남달리 성미가 고약하지. 그렇다, 그 자에게 이놈은 보
내 버려야지.'
유표는 이렇게 생각하고 그를 황조에게 보내기 위해 구슬렸다.
"황조도 만나면 반가워할 것이오. 강하는 경치가 아름다운 곳이므로 며칠 노
닐다 오시지오."
예형이 강하로 떠난 후 누군가가 유표에게 물었다.
"예형이 주공을 비꼬고 놀렸는데도 어찌하여 죽이지 않고 황조에게 보내는 것
입니까?"
유표는 웃으면서 그 물음에 대답했다.
"예형이 여러 차례나 조조를 희롱하였지만 조조가 죽이지 않은 것은 인망을
잃을까 두려웠던 것이다. 예형을 죽이면 그만 높여 주고 자기는 그만큼 욕만 먹
게 된다. 그래서 그를 내게 보내어 내 손을 빌어 그를 죽이게 하고, 나로 하여
금 뛰어난 선비를 죽였다는 누명을 씌우려 함이었다. 그리고 내가 다시 그를 황
조에게로 보낸 것은 조조에게 나도 지혜가 있음을 보여 주기 위함이다. 하하
하."
유표의 말에 듣고 있던 사람들은 고개를 끄덕이며 그의 식견에 감탄해 마지
않았다.
예형이 강하에 가 있는 동안 조조의 적인 원소 쪽에서도 유표에게 사자를 보
내 우호관계를 맺자고 제의해 왔다. 형주는 졸지에 조조와 원소, 양쪽에서 끌고
당기는 처지에 놓이게 되었다.
유표는 여러 모사들을 모아 놓고 이 일을 의논했다.
"조맹덕의 편에 서는 게 좋겠소, 아니면 원본초의 뜻에 따르는 것이 좋겠소?"
종사중랑장인 한숭이 일어나 말했다.
"지금 두 영웅이 서로 대치하고 있으니 만약 장군께서 큰 일을 도모하실 의향
이 있으시면 이 시기를 이용하여 적을 무너뜨리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그러나
천하 대사에 뜻이 없으시다면 어느 편이건 주군께 이로운 편을 따르는 것이 좋
습니다."
"두 사람 중에 택해야 된다면 어는 쪽을 택해야 하겠소?"
"조조는 군사를 잘 부릴 뿐만 아니라 천자를 받든다는 대의명분이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에게는 많은 인재가 있습니다."
"그러나 원소는 조조에 비해 강대한 세력을 가지고 있지 않소?"
"원소를 따르게 되면 그는 자기의 강한 군세만 믿고 있기 때문에 장군을 중하
게 여기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조조는 반드시 장군을 중하게 여겨 소홀히 대
하지 않을 것이니다. 뿐만 아니라 그가 싸움에 패하여 승상의 자리를 잃게 되었
을 때 장군께서는 그를 대신할 기회도 잡으실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유표는 단안을 내리지 못하고 있다가 이튿날 다시 한숭을 불러 말했
다.
"우선 그대가 허도로 가 그곳의 실정을 알아본 후 결정하였으면 하오."
유표가 이렇게 말하자 한숭은 잠시 머뭇거리다 입을 열었다.
"장군께서 천자에게 순종할 뜻을 가지고 계시어 조조와 제휴해 나가실 의향이
시라면 모르겠으되, 그렇지 않으시다면 소생은 매우 어려운 지경에 빠질지도 모
릅니다."
"어려운 지경에 빠진다 함은 무슨 소리요?"
"소생이 허도로 가면 조조는 반드시 소생을 자기의 휘하로 끌어들이려 할 것
입니다. 만약 천자께 고해 소생에게 관직이라도 내리신다면 저는 천자의 명이므
로 거역할 수가 없습니다. 그렇게 되면 저는 천자의 신하가 되므로 장군을 따를
수가 없게 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한숭이 유표를 깨우쳤으나 유표는 듣지 않았다.
"나는 나대로 생각이 있으니 그대는 허도에 가 살펴보도록 하시오."
한숭은 내키지 않았으나 유표의 명을 받들어 형주의 토산물과 많은 보화를 수
레에 싣고 허도로 떠났다.
조조는 한숭을 반가이 맞아들이며 그에게 시중의 벼슬을 내리고 영릉태수에
봉했다. 한숭이 우려했던 대로 조조는 그에게 높은 벼슬을 내려 자기 쪽으로 마
음을 기울게 했다. 조조는 한숭을 융숭히 대접하면서도 형주에 대한 이야기는
한 마디도 입에 담지 않고 그대로 형주로 돌려 보내 유표를 달래게 했다.
그가 떠나간 후 순욱이 의하해 여겨 조조에게 물었다.
"승상께서는 어찌하여 한숭을 그대로 보내셨습니까? 그는 필시 허도의 사정을
염탐하러 왔을 것입니다. 그런 그에게 벼슬까지 내리셨습니다. 또한 유표에게
보낸 예형으로부터 아무런 소식이 없는데도 어찌하여 그 일을 그에게 묻지 않으
셨습니까?"
그러나 조조는 조용히 웃으며 순욱에게 말했다.
"한숭이 허도를 염탐해 간 것은 오히려 잘된 일이오. 우리의 가볍지 않은 형
세를 알고 갔으니 오히려 환영할 만한 첩객이라 할 수 있을 것이오. 또 예형은
유표의 손을 빌어 그를 죽이고자 함이었소. 무엇을 더 물어 볼 필요가 있었겠
소?"
순욱은 머리를 끄덕이며 조조의 생각에 감탄했다.
한편 형주로 돌아간 한숭은 유표에게 나아가 허도의 활기찬 모습을 전하며 조
조의 편에 들기를 권했다.
"생각하옵건대 주군의 자제분 중 한 분을 조정으로 내보내시어 벼슬 길에 오
르도록 하였으면 합니다. 그렇게 하신다면 조조도 의심을 품지 않을 것이며 장
래 주군의 가세도 더욱 번성하실 것입니다."
한숭이 조조의 덕을 칭송한 뒤 이런 말까지 덧붙이자 유표의 눈꼬리가 치켜올
라갔다. 그의 아들을 조정에 내보내라는 말은 기실 인질로 보내라는 말과 같았
기 때문이었다.
유표가 한숭을 노려보며 소리쳤다.
"네놈은 두 마음을 갖고 있구나. 이놈을 묶어 당장 목을 베라!"
그러자 한숭도 유표에게 할 말이 있다는 듯 당당히 말했다.
"장군께서 저를 저버리셨지 제가 장군을 저버리지는 않았습니다."
옆에 있던 모사 괴량도 한숭을 거들었다.
"그가 허도에 가기 앞서 미리 말씀드린 바가 있습니다. 게다가 조정으로부터
관직을 받았으므로 한숭의 목을 벤다면 조정에서도 이를 좋지 않게 볼 것입니
다."
유표는 그제야 한숭이 떠나기 전에 한 말이 생각났다. 유표는 가까스로 노기
를 가라앉히고 한숭을 용서했다. 그 때 강하에서 사람이 와서 소식을 전했다.
"예형이 황조에게 주살되었습니다."
"어떤 연유로 죽임을 당하였는가?"
유표는 예상한 일이었지만 그 경위가 궁금하여 물었다.
강하에서 온 사자가 전하는 말은 다음과 같았다.
예형이 황조에게 갔을 때도 처음에는 융숭한 대접을 받았다. 예형도 그에 보
답하기 위해 재주를 부리고 붓을 휘둘러 훌륭한 시문을 지었다. 그가 쓰는 시문
은 강조할 것은 강조하고, 생략할 것은 생략해서 조금도 빈틈이 없는 글이었다.
"참으로 잘 쓰시었소. 이것이야말로 내가 말하고 싶었던 것이오."
그 때마다 황조는 입에 침이 마르도록 예형을 칭찬했다. 그러나 그 칭찬도 오
래 가지 못했다.
어느 날 황조가 예형과 더불어 술을 마시던 중 술이 몹시 취했을 무렵이었다.
황조가 예형에게 질문을 던졌다.
"오랫동안 허도에 계셨다는데, 허도에서는 지금 누구 누구를 참다운 영웅이라
생각하고 있소?"
그러자 예형의 대답은 간단명료했다.
"어른으로는 공문거(공융)와 양덕조란 작은아이를 빼면 다른 인물은 없소."
황조가 조바심에서 다시 예형에게 물었다.
"그럼 나는 어떻소. 이 황조 말이오."
그러자 예형이 껄껄 웃으며 말했다.
"그대 말인가? 그대야 사당 안에 있는 귀신 같은 이요."
"사당 안의 귀신이라니? 그게 대체 무슨 뜻인가?"
"제사를 받아 먹지만 별로 영험이 없는 귀신이란 말이오."
"뭣이?"
"하하하. 제삿상이나 넘보는 허수아비 주제에 화를 내다니..."
황조는 발끈해서 칼을 뽑자마자 예형을 쳤다. 온몸에 피를 뒤집어쓴 황조는
그의 시체를 내다 버리게 했다.
유표는 막상 그가 죽었다는 말을 듣자 새삼 그의 아까운 재주가 생각나 탄식
해 마지않았다. 유표는 가신들을 시켜 그를 앵무주에 후히 장사지내도록 했다.
조조도 예형이 죽었다는 소문을 듣게 되었다. 그는 쓴웃음을 지었다.
"썩은 선비놈이 자기의 칼날 같은 세치 혀로 스스로를 찔러 죽였구나. 마땅히
후일의 귀감이 되었으리라..."
조조는 예형의 죽음을 슬퍼하거나 아깝게 여기지는 않았다. 오히려 예형의 죽
음을 기화로 유표가 항복해 오지 않음을 트집잡았다. 어쨌든 자기가 파견한 사
신이 형주 땅에서 유표의 부하 손에 죽었다는 것을 빌미삼아 그를 치려 했다.
조조가 형주를 치기 위해 군사를 이끌려 하자 순욱이 말렸다.
"원소와의 싸움이 끝나지 않았고, 서주에는 현덕이 건재합니다. 이 때 다시
형주를 치는 것은 뱃속의 병은 그냥 두고 손가락이나 발가락 끝을 먼저 치료하
는 것과 같습니다. 먼저 병의 근원인 원소부터 정벌하고 다음에 현덕을 제거해
야 합니다. 강한(형주)의 유표는 그 뒤에 도모하여도 늦지 않을 것입니다."
유표가 항복해 오지 않은 것에 울컥했던 조조는 순욱의 말을 듣고 생각을 바
꾸었다. 순욱의 말대로 다시 강하로 원정을 가면 원소가 그 틈을 노려 허도로
들어올지도 모를 일이었다. 조조는 순욱의 말을 좇아 군사를 내는 일을 뒤로 미
루었다.
그 즈음 조조의 순욱에 대한 신뢰는 컸다. 그 옛날, 아직 낙양 황궁의 한낱
경리에서 몸을 일으켜 불과 십수년 만에 오늘날의 조조가 되기까지에는 그를 둘
러싼 모사 양장의 힘이 컸다고 할 수 있다. 그 중에서도 순욱은 특히 탁월한 공
적을 쌓고 있었다.
"공은 나의 장량이오."
조조가 특히 순욱에 대해서 이렇게 말하는 것은 그만한 까닭이 있었던 것이었
다.
조조가 오늘날의 성공을 거둔 중대한 기략의 근본은 헌제의 신변을 재빨리 허
도로 옮긴 사실에 있었다. 그것도 순욱이 때를 놓치지 않고 조조에게 권한 때문
이었다.
"천자를 받들어 인망을 좇는 대순이야말로 주군의 운명을 개척하는 대도입니
다. 다른 사람이 앞지르기 전에 속히 결행하십시오."
순욱이 조조에게 간곡히 건의하자 조조는 그의 말이 옳음을 알고 허도행을 결
심했던 것이었다.
당시는 다른 군웅들이 서로 다투기에 여념이 없을 때였다. 그러나 무엇보다
첫째로 천자를 선점하는 데 착안한 젊은 순문약의 혜안은 그만큼 탁월한 것이었
다.
원소의 모신들도 그 계책을 권유한 바 있으나 원소의 우유부단함으로 인해 그
기회를 놓치고 말았다.
원소가 한의 명문일 뿐만 아니라 강대한 세력을 지녔으면서도 지금 한낱 한
외방의 군주로 머물고 있는 것은 그 때 그 기회를 놓친 탓이었다.
순욱은 내치에 있어서도 눈부신 공적을 쌓고 있었다. 허도를 중심으로 둔전정
책을 채택한 것도 그랬다. 지방 양민 중에서 인망 있는 사람을 뽑아 호장으로
두어 농경을 장려하게 했다. 전란중에 있으면서도 산업을 진흥하여 오곡의 증산
량만 하여도 해마다 1백만 석을 넘을 정도였다.
이처럼 허도는 군사.경제에 걸쳐 눈부신 발전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다만 한
가지 허도의 번창에 비해 조정은 날로 그 기운이 쇠약해져 갔다.
조조의 무권정치가 상부라는 형태로 그 위세가 더해가면 갈수록 헌제는 점점
실권을 잃어 갔다.
헌제가 이렇게 이름만의 천자로 위상이 흐려짐은 곧 한의 몰락을 뜻하고 있었
다.
상노와 애첩 의기 높은 태의 길평
동승과 태의 길평은 조조를 죽이기로 뜻을 모은다. 어느 날 애첩과 가노 진경
동이 놀아나는 것을 본 동승은 경동을 내치고, 이에 앙심을 품은 경동은 조조에
게로 달려가 이들의 모의를 고자질한다. 조조는 병을 핑계로 길평을 불러 그의
죄를 문초하고...
한편, 조정이 돌아가는 모양을 침통하게 여기고 있던 국구 동승은 밤낮으로
애를 태우고 있었다.
'어떻게 하면 조조를 죽이고 황실의 권위를 옛날과 같이 회복할 수 있을 것인
가?'
동승은 침식을 잊은 채 궁리를 거듭해 보았으나 별다른 묘안이 떠오르지 않았
다. 왕자복 등의 동지들과도 밤을 새우며 의논해 보았으나 결과는 마찬가지였
다.
그러던 중 동승은 건안 5년(A.D. 200년) 정월 초하루, 조정에서의 신년 하례
때 매우 교만스런 조조의 횡포를 보고는 분통이 터져 그만 병이 들어 눕게 되었
다.
헌제는 동승이 몸져누웠다는 말을 듣자 태의 길평으로 하여금 치료하게 했다.
길평은 원래 낙양 사람으로 이름은 태, 자가 칭평이었는데 사람들은 흔히 '길
평'으로 불렀다. 한의학을 깊이 깨달아 당시 제일의 명의로 알려져 있었다.
길평은 어명을 받들어 동승의 집에 들어선 후 잠시도 동승의 곁을 떠나지 않
고 약을 지어 병을 치료했는데 그 정성이 지극했다. 길평이 지어 주는 약을 먹
은 동승은 하루하루 건강이 회복되었으나 선뜻 자리를 털로 일어나지는 못했다.
동승의 병은 원래 마음의 병이라 약만으로 쾌유될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동승은 길평의 치료를 받는 중에도 속으로 다 삭이지 못하고 가끔 깊은 한숨
을 토해냈다.
길평은 동승을 괴이쩍게 여겼으나 감히 내색하지 못하고 까닭도 묻지 못한 채
그저 세월만 보내고 있었다. 동승의 몸이 쇠약해진 것만은 틀림없으나 단순히
쇠약하여 생긴 병도 아니며, 그렇다고 병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그로부터 한 달쯤 지나 명절인 대보름이 되었다.
길평이 집에 돌아가고자 동승에게 하직을 고하니 동승은 불편한 몸으로 술을
내어 그 동안 길평의 극진한 치료에 감사를 표했다. 동승은 길평과 작별의 정을
나누며 겨우 몇 잔의 술을 마셨건만 마신 지 얼마 되지 않아 어느 새 피곤해져
오는 잠을 주체 못하고 깜박 졸음에 빠져들게 되었다.
아무리 마음의 병이라고는 하나 아직 병이 다 낫지 않은 터에 마신 몇 잔의
술은 그 동안의 노심초사로 쌓였던 피로와 함께 동승의 늙은 몸을 가누지 못하
게 하였으리라.
그 때였다. 왕자복을 비롯한 동지 네 사람이 얼굴 가득히 기쁜 빛을 띠고 큰
소리로 웃고 떠들며 집 안으로 들어왔다.
"국구, 기뻐하십시오. 이제 우리 일을 성취할 때가 왔습니다."
그 말에 동승이 맨발로 달려나가 그들을 맞아들이며 물었다.
"그게 무슨 말이오? 어디 좀 자세히 말씀해 주시오."
"형주의 유표와 하북의 원소가 동맹하여 50만 대군을 일으켜 열 갈래로 길을
나누어 허도를 향해 쳐들어오고 있습니다. 또 서량의 마등은 병주의 한수와 연
결하여 서량군 72만을 일으켜 북쪽으로부터 짓쳐 내려오고 있습니다. 그러자 조
조가 당황하여 이쪽저쪽으로 군사를 나누어 보냈습니다. 이로 인해 허도의 방비
가 허술해져 상부의 경비병을 합쳐도 1천 명에 지나지 않는다 합니다. 얼마나
좋은 기회입니까? 우리들 다섯 집안의 사람들만 동원해도 1천여 명은 훨씬 넘을
것입니다. 때마침 오늘은 대보름이라 상부에서도 잔치를 벌여 지금쯤은 술에 만
취가 되어 있을 것입니다. 이제야 하늘이 내리신 기회가 온 것입니다. 어서 진
두에 서서 일거에 조조를 칩시다."
왕자복은 동승을 병실에서 이끌었다. 동승이 밖으로 나가 보니 어는새 그들이
거느리고 왔는지 많은 군사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걸 본 동승은 힘이 솟아 갑
옷을 입고 말에 올라 보검을 들고 질풍처럼 상부를 향해 쳐들어갔다.
동승은 칼을 들고 곧바로 조조가 잔치를 벌이고 있는 후당으로 들어갔다.
"역적 조조는 내 칼을 받아라!"
동승은 대갈일성, 조조의 목을 칼로 힘껏 내리쳤다.
동승이 자기의 고함 소리에 깜짝 놀라 눈을 떠 보니 한바탕 꿈이었다. 동승이
밤낮으로 조조 죽일 일만 생각하다 보니 그 일이 꿈 속에 나타난 것이다. 동승
은 꿈에서 깨어나면서도 '역적 조조'란 말을 헛소리처럼 중얼거리고 있었다. 그
런데 난감한 일은 태의 길평이 그런 동승을 내려다 보고 있었던 것이었다.
"이제야 국구께서 어찌하여 병을 얻었는지 알겠습니다. 국구의 병은 조조 때
문이었군요."
동승은 깜짝 놀라 말문을 열지 못했다.
길평이 그런 동승을 바라보며 조용히 거들었다.
"국구께서는 너무 심려치 마십시오. 제가 비록 한 사람의 의원에 불과 하나
저 역시 한나라의 백성입니다. 국구께서 탄식하시는 걸 보고 까닭은 묻지 않았
으나, 이제 꿈을 꾸며 하시는 말씀을 들으니 그 연유를 알 것도 같습니다. 참다
운 의원은 나라의 병도 고친다고 합니다. 제게는 그런 힘이 없으나 하고자 하는
의지는 있습니다. 부디 숨기지 말고 말씀해 주시면 이 길평이 반드시 힘이 되어
드리겠습니다. 비록 구족이 멸함을 당한다 하더라도 기꺼이 국구 어른의 뜻을
따르겠습니다."
동승은 그런 길평을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길평은 동승이 아직 그의 진심을
믿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알자 손가락을 깨물어 맹세의 뜻을 보였다.
동승은 그제야 감격의 눈물을 흘리고는 그에게 혈서로 된 황제의 밀조를 보이
며 말했다.
"아직 거사하지 못한 것은 유현덕과 마등이 없기 때문이었습니다."
길평은 밀조를 받들더니 이윽고 옷매무새를 고치며 흐느껴 울었다.
"역적 조조를 하루 아침에 제거할 묘책이 있습니다. 그의 목숨이 제 손안에
있는 것과 같습니다."
"그게 무슨 말씀이오? 좀 더 자세히 들려 주시오."
동승이 반색을 하며 길평에게 물었다.
"조조는 건강하나 단지 하나 두풍이라는 지병이 있습니다. 그 지병이 발작하
면 골수에 고통이 스미게 됩니다. 그럴 때 약을 지어 주는 사람은 저 이외에는
없습니다. 기다리면 두풍이 도져 그가 나를 부를 때가 있을 것입니다. 그 때 두
풍약에 독을 타서 먹게 하면 모든 일이 끝납니다. 군사를 일으켜 전쟁을 할 필
요도 없습니다."
실로 놀라운 말이 아닐 수 없었다. 칼 한 번 쓰지 않고 조조를 죽일 수 있다
니 이보다 더 감격스러운 것이 어디 있겠는가.
"만약 그렇게만 된다면 그 일은 천자는 물론, 한나라의 사직을 구하는 일이
될 것이오."
두 사람은 갑자기 입을 다물었다. 그 때 방 휘장 밖에서 바람도 없는데 무슨
기척이 들리는 듯했기 때문이었다. 한동안 숨을 죽이고 있었으나 그 소리는 다
시 들리지 않았다.
길평은 동승에게 그 말을 남긴 뒤 자기 집으로 돌아갔다. 겨울이 지나 매화나
무 꽃봉오리가 벌어질 무렵이 되자 동승의 집에도 봄을 맞은 생기가 감돌았다.
길평과 조조를 제거할 모의를 한 후 요즈음 들어 동승의 몸이 쾌차하였는지 아
직 이른 봄의 후원을 산책하는 모습을 종종 볼 수 있었다.
동승의 피부는 윤기가 흘렀으며, 얼굴에는 다시 화색이 완연했다.
그날 밤도 동승은 식사 후 후원에 나와 매화나무 위에 걸려 있는 초저녁 달을
바라보며 길평이 한 말을 곱씹고 있었다. 훈훈한 미풍이 매화나무 사이를 감돌
았다.
그 때 동승은 문득 후당 쪽에서 얼핏 들려 오는 인기척을 들었다. 동승은 괴
이쩍게 여겨 발소리를 죽이며 후당 쪽으로 향했다. 시첩들이 기거하는 후당 한
곳에서 한 쌍의 남녀가 정을 나누고 있는 소리가 들려 왔다. 동숭이 다가가 보
니 어둡고 으슥한 곳에서 하인 진경동과 젊은 애첩 운영이 한몸이 되어 있는 것
이 아닌가.
동승은 피가 거꾸로 솟는 듯 노기가 끊어올랐다.
"이 고약한 것들!"
자기가 병들어 누워 있는 동안 두 사람이 이렇게 놀아났다고 짐작하니 눈에
불똥이라도 튈 듯했다.
주인 동승의 고함 소리에 깜짝 놀라 두 사람이 떨어졌다. 동승은 경동의 목덜
미를 움켜잡으며 외쳐댔다.
"게 누구 없느냐? 당장 이것들을 끌어 내어 죽여라!"
동승의 외침에 놀라 그의 부인도 달려나왔다. 그의 부인이 극구 동승을 말렸
다.
"그런 일로 그들을 죽인다면 우리만 부끄러워질 뿐입니다."
동승도 그 일이 밖으로 알려지는 것이 달가울 리 없었다. 동승은 그들에게 각
기 매 40대씩을 때리게 한 후 그들을 후각의 방 안에 가두어 놓도록 했다.
그런데 그날 밤, 진경동은 힘을 다해 문고리를 비튼 후 갇힌 방에서 벗어나
도망을 쳤다. 그는 높은 돌담을 뛰어넘자 칠흑 같은 어둠 속을 뛰어 갔다.
"어디 두고 보자, 이 늙은이야."
그는 미동답지 않은 대담한 눈초리로 주인집을 뒤돌아보며 이런 말을 내뱉았
다.
경동은 원래 동승의 집에 돈 때문에 팔려온 노예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나 타
고난 용모가 준수하여 동승도 가까이하며 귀여워해 주었고, 가족들도 모두 그를
아꼈다. 그러나 경동은 지난날 주인집에서 베푼 은덕을 생각하기에 앞서 애첩에
게 빠져 둘 사이를 갈라 놓은 동승에 대한 원한만을 품게 되었다.
거기에다 매맞은 것에 대한 앙심을 품고 무서운 보복을 다짐하며 달려 간 곳
은 승상부였다.
밤중에 상부의 문을 요란하게 두드리는 소리에 놀란 관원들이 뛰어든 진경동
의 소리에 귀를 의심했다.
"승상을 뵈옵게 해 주십시오. 천하의 변고를 아뢰러 왔습니다. 승상을 해치려
고 모의를 꾸미는 자가 있습니다."
파수 보는 군사는 곧 이 일을 조조에게 알렸다. 조조가 조용한 방으로 경동을
불러들인 후 물었다.
"너는 누구이며 어인 일로 이 한밤중에 나를 찾아왔느냐?"
"저는 동 국구댁의 가노 진경동이라 하옵니다. 근일, 왕자복.충집.오자란.오
석.마등 등이 저의주인집에 자주 모여 흰 비단을 꺼내 놓고 때로는 눈물을 흘리
며 무엇인가 의논들을 하는 때가 많은데 필시 이는 승상을 해치고자 하는 음모
인 듯하였습니다."
"어찌하여 너는 그런 주인의 중대사를 자세히 알고 있느냐? 너도 그 한패거리
가 아니냐?"
조조가 짐짓 겁을 주며 묻자 경동은 얼굴이 파랗게 질리며 고개를 저었다.
"당치도 않은 말씀이십니다. 소생은 아무것도 몰랐습니다. 다만 며칠 전 태의
길평님의 심부름을 하던 중 어느 날 승상님께 독약을 드시도록 한다는 말을 얼
핏 듣게 되어 귀를 기울였을 뿐입니다. 놀라운 나머지 몸이 떨려 그로부터는 주
인의 얼굴을 바로 보는 것도 두려웠습니다."
조조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좌우에게 엄중 단속했다.
"일이 명백히 드러날 때까지 저 아이를 부중에 숨겨 두도록 하라. 또 오늘밤
의 일은 일체 입 밖에 내지 말라."
생각하면 하늘의 도움이 아닐 수 없었다. 만약 진경동이 이 일을 알려 주지
않았더라면 자신은 틀림없이 길평의 약을 마시고 불귀의 객이 되어 버렸을 터였
다. 조조는 서늘해지는 간담을 달래며 모반을 캐낼 준비를 했다.
그로부터 며칠 동안 승상부에는 싸늘한 공기가 흐르고 있었다. 조조는 며칠째
입을 다물고 방 안에서만 지내며, 밖에서는 대신들을 만나지도 않았다.
그런 어느 날 새벽녘이었다. 길평의 집으로 조조의 사자가 말을 달려와 명을
전했다.
"지난 밤부터 승상께서 두풍이 일어나 매우 고통스러워하십니다. 곧 내진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경동이 조조에게 고자질한 사실을 길평이 알 리 없었다. 다만 길평은 속으로
'역적놈이 이젠 죽을 때가 되었구나!'라고 생각하며 준비해 둔 독약을 감춘 채
종자 한 사람과 함께 나귀를 타고 승상부로 향했다.
조조는 길평을 보자 병상에 누운 채 약을 달여 달라고 명했다. 옆방으로 물러
간 길평은 이윽고 쟁반에 뜨거운 탕약을 받쳐들고 왔다. 길평이 독약을 넣은 탕
기를 들고 와, 조조가 누워 있는 침상 아래 무릎을 끓고 말했다.
"약을 드십시오."
이미 약에 독이 들었다는 것을 알고 있는 조조는 얼른 약을 마시지 않았다.
초조해진 길평이 조조에게 약을 재차 권했다.
"약은 뜨거울 때 드시고 땀을 내야 약효가 있습니다. 식기 전에 어서 드십시
오."
그러자 조조가 자리에서 몸을 일으키더니 태연스레 말했다.
"그대도 책을 읽었을 테니 예절을 알고 있을 것이오. 임금이 병이 나서 약을
마실 때는 신하가 먼저 맛을 보고 아비가 병이 나서 약을 먹을 때는 그 자식이
먼저 맛을 보는 것이 예절이라 하였소. 그대는 나의 가까운 신하인데 어찌 한
모금 마신 다음에 권하지 않는가?"
조조의 말에 길평은 가슴이 섬뜩했다. 일이 잘못되어 조조가 이미 이 일을 눈
치채고 있음을 알았다. 조조가 무섭게 자기를 노려보고 있는 것도 심상치 않았
다.
"약은 병을 고치는 것이므로 환자가 먹어야 할 것이지, 다른 사람이 먹을 필
요가 무엇이겠습니까?"
길평이 이렇게 말하며 한 손으로 약탕기를 들고, 한 손으로는 조조의 귀를 잡
고 입에다 약을 부으려고 했다.
그러나 이미 마음 속으로 단단히 준비하고 있던 조조였다. 조조는 손으로 탕
기를 밀쳐 내며 발을 쳐들어 길평의 턱을 걷어차니 약탕기가 방바닥에 떨어져
약이 쏟아졌다. 그러자 얼마나 독이 강한지 약물이 방바닥에 깔아 놓은 천에 스
며들어 천의 색이 금세 변했다.
그러자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이 무사들이 우르르 달려나와 길평을 꽁꽁 묶어
버렸다.
"두풍이란 말은 거짓이었다. 내가 네놈을 시험하기 위해 부른 것이었다. 네놈
이 날 죽이려 한 것이 틀림없구나."
조조는 정자로 나와 앉아 이윽고 계하에 결박된 길평을 꿇어앉히도록 했다.
"힘센 옥졸 스물을 뽑아 형틀 위에 저놈을 묶고 문초할 준비를 하라!"
조조는 이렇게 명한 뒤 길평을 독기 서린 눈으로 내려다보며 물었다.
"너는 일개 의원의 신분으로, 네놈 혼자서 나에게 독약을 먹이려 하지는 않았
을 것이다. 너를 부추긴 배후의 인물을 대라. 그러면 네 한 목숨만은 살려 줄
것이니라."
그러나 길평은 조금도 두려워하거나 동요하지 않고 태연했다. 오히려 조조의
말에 껄껄 웃으며 말했다.
"하하하, 천자를 능멸하는 가증스런 역적놈아! 너를 죽이려 원하는 사람은 천
하에 넘칠 만큼 많다. 내 어찌 일일이 그런 사람의 이름을 다 댈 수 있겠는가?"
조조는 길평에게 다시 물었다.
"다시 한 번 묻겠다. 너에게 독약을 넣도록 부추긴 자가 누구인가?"
"내가 너를 죽이고자 한 것인데, 누가 나에게 시켰다고 하는가? 죽는 것만이
소원이다. 단칼에 죽여라."
조조가 화를 참지 못하고 옥졸들에게 명했다.
"이 늙은 놈이 입을 열 때까지 매를 치고 주리를 틀어라."
명령을 받은 옥졸들은 번갈아 가며 길평을 내리치고 주리를 틀었다. 살갗이
찢겨 나가고 뼈가 드러나 그의 온몸은 피범벅이 되었다. 그 흐르는 피가 계단
아래를 붉게 물들이고 있었다.
보고 있는 사람들이 처참한 광경에 고개를 돌렸다. 그러나 길평은 끝내 입을
열지 않았다.
"그만 해 두고 그를 옥에 가두어라."
조조는 이미 반 송장이 된 길평을 옥에 가두게 했다.
이튿날이 되자 조조는 후강에 연회를 펼치고 여러 대신들을 초대하였다. 왕자
복 등 네 사람은 조조가 의심할까 봐 불안한 가슴을 어루만지며 참석하였으나
동승만은 병을 핑계로 나오지 않았다.
술이 몇 순배 돌고 잔치 분위기가 무르익었을 때였다. 조조가 일어나 여러 대
신들을 향해 말했다.
"우리 무인들은 가무만으로는 흥이 일어나지 않으실 테니, 흥을 돋우기 위해
색다른 것을 보여 드리겠소."
조조는 옆에 있는 시신에게 귀엣말로 명을 내렸다. 조조의 말에 무슨 재미있
는 여흥이라도 있을 걸로 기대하고 있던 대신들이었다.
이윽고 연회장에 나타난 것은 옥졸들에게 이끌려 나오는 큰칼을 쓴 길평이었
다.
연회장의 분위기는 일순간 무덤 속처럼 음산한 분위기로 돌변했다. 계하에 끌
어다 놓은 길평은 얼른 보아 누구인지 알아볼 수 없을 지경으로 처참했다. 만조
백관들의 눈이 휘둥그래졌다.
조조가 그를 가리키며 큰 소리로 말했다.
"경들은 알지 못할 것이오만, 이 자는 나라를 거스르고 나를 해치려 한 자요.
그러나 천벌이 내려 실패했는데 이제 그가 무슨 말을 하는지 들어 보시오."
조조는 옥졸들에게 명해 매를 치게 했다. 길평은 어제의 매로 사지가 성한 데
가 없는 지경이라 옥졸들이 몇 대를 치자 기절했다. 옥졸들은 그에게 물을 끼얹
었다.
정신이 든 길평은 눈을 부릅뜨고 이를 갈며 조조를 꾸짖었다.
"역적 조조놈아, 어째서 나를 빨리 죽이지 않느냐?"
"듣자하니 너와 공모한 놈이 여섯이라 하니, 네놈까지 합하면 일곱 놈이 된다
는 말이냐?"
"이 역적놈아 내가 말하지 않았더냐, 너를 죽이고자 하는 이가 어찌 일곱뿐이
겠느냐?"
"감옥살이가 괴로워 빨리 죽고 싶거든 그 일곱의 이름을 대라!"
"너의 간악함은 동탁보다 더하다. 이제 두고 봐라. 온 천하가 너의 고기를 씹
고자 할 것이다."
길평은 의식이 있는 동안은 조조에게 욕만 퍼부었다. 다음 순간 살이 찢어지
고 뼈가 바스러지는 곤장 소리만 요란했다. 길평의 몸뚱이는 금세 터진 살로 흐
물흐물해졌다.
길평이 매에 못 이겨 혼절하면 물을 끼얹었고, 다시 정신이 들면 매질이 이어
졌다. 그래도 길평은 입을 열지 않았다. 조조는 끝내 길평이 실토를 하지 않자
그를 다시 옥에 가두게 했다.
그 광경을 지켜 보고 있던 왕자복과 나머지 세 사람은 짐짓 태연한 얼굴을 가
장하고 있었으나 마음은 더없이 괴롭고 두려웠다.
만좌한 대신들은 그 처참한 광경을 보고 술이 깨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조조
가 비록 길평으로부터 이름을 듣지 못했으나 자기를 거역한 자에 대해 내린 경
고의 뜻은 이루었다고 여겼다.
대신들이 천천히 자리를 떠나자 조조는 왕조복을 비롯한 네 사람을 불러 앉혔
다.
왕자복.오자란.충집.오석은 몸을 떨며 그 자리에 눌러앉았다. 그들 네 사람
뒤로는 이미 많은 무사들이 에워싸고 있었다.
조조는 차디찬 냉소를 지으며 그들 앞에 다가갔다.
"공들은 그리 서둘러 갈 필요가 없지 않겠소? 이제부터 자리를 옮겨 주연을
벌이도록 할 것이오. 여봐라! 빈객을 저쪽 각으로 모시도록 하라!"
무사들이 그들을 안내하여 조조가 가리킨 각문으로 들어갔다. 네 사람의 발은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다. 이윽고 그들이 자리에 앉자 조조가 성큼성큼 다가와
앉으며 물었다.
"근자에 공들은 국구의 집에서 대체 무슨 일을 의논하고 있었소?"
떨고 있던 왕자복이 마음을 가다듬고 태연한 목소리로 답했다.
"특별히 의논한 일은 별로 없었습니다. 평상시의 교제에 불과했을 뿐입니다."
조조가 냉소를 머금고 다시 물었다.
"평상시의 교제인데, 어찌 흰 비단에 웬 글씨를 썼으며, 또 무엇을 읽어 보고
있었소?"
왕자복 등 네 사람은 그 말에 가슴이 섬뜩해져 머뭇거렸다. 조조가 천자께서
내리신 밀서까지 알고 있다면 일은 이미 심상치 않다고 여겼기 때문이었다.
"진경동을 불러들여라!"
조조는 밖으로 고개를 돌려 소리쳤다.
경동이 방으로 들어오자 그들은 더욱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동승의 집에 자
주 드나들다 보니 그를 알아볼 수 있었던 것이다. 충집이 그런 가운에서도 목소
리를 낮추어 물었다.
"너는 대체 어찌하여 여기에 있느냐?"
그러자 조조가 충집의 말을 가로막았다.
"여기 증인이 있는데도 시치미를 뗄 작정이오?"
왕자복이 진경동을 보고 또다시 물었다.
"네가 무엇을 보았다는 말이냐?"
"사람들의 눈을 피해 여섯 사람이 모여 비단에다 글을 쓰시지 않았습니까?"
왕자복은 진경동이 나타날 때부터 그가 이 일을 밀고했으리라 짐작하고 있었
다.
그렇다고 지금에 와서 순순히 실토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왕자복은 동승에게
서 진경동이 자신의 애첩과 놀아나다 도망쳤다는 얘기를 들은 적이 있어 그 일
을 경동에게 뒤집어씌웠다.
"이놈은 국구의 가노로 시첩과 정을 통한 놈입니다. 주인의 추궁을 피하려고
우리에게 뒤집어씌우는 것이니 그 말을 믿으시면 아니 됩니다."
"그렇다면 길평이 나를 독살하여 한 것이 동승의 사주를 받고 한 일이 아니라
면 누가 시켰다는 말이냐?"
조조가 그들에게 추궁했으나 왕자복 일행은 모르는 일이라고 시치미를 뗐다.
조조가 그런 그들에게 다시 엄포를 놓았다.
"사실 그대로를 자백하면 지금이라도 용서할 수 있다. 그러나 뒤에 이 일이
밝혀지면 그 화가 일문 삼족에 미칠 것이다."
조조는 그들을 어르고 달랬으나 왕자복 일행은 끝내 입을 열지 않았다. 끝까
지 부인하는 그들을 조조는 옥에 가두어 버렸다.
이튿날, 조조는 여러 대신들과 무사들을 이끌고 국구 동승의 집으로 향했다.
동승이 몸소 문 밖에 나가 조조를 맞아들였다. 조조는 동승을 보자 대뜸 따져
물었다.
"국구에게는 내가 보낸 초대장이 오지 않았소이까?"
"초대장은 받았지만 몸이 불편해 즉시 불참하겠다는 뜻을 서면으로 알렸소이
다만..."
"지난 밤, 백관이 모두 연회에 모였는데, 국구 한 사람만 얼굴이 보이지 않았
소. 어떠한 연유로 불참하였소?"
"작년부터 도진 고질병이 낫지 않아 거동이 불편하여 그만 결례를 했소이다."
조조는 성난 눈으로 동승을 매섭게 쏘아봤다.
"경의 고질병은 아마 길평을 시켜 나에게 독약을 먹이면 낫는 병이었겠지요."
조조가 집으로 불쑥 찾아올 때부터 내심 마음을 조이고 있던 동승이었다. 조
조의 입에서 길평이란 말이 나오자 가슴이 뜨끔했으나 황망히 고개를 저었다.
"옛?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조조는 동승을 힐끗 쳐다보며 비꼬는 투로 말했다.
"국구께서 그 일을 모른다고 하시지는 않겠지요? 어서 바른대로 말해 보시
오."
"그 일이라니요? 늙고 병들어 집 안에만 틀어박혀 있는 노인이 무엇을 안다는
말씀입니까?"
국구가 강력히 부인하자 조조는 좌우에게 명하여 데리고 온 길평을 대면케 했
다.
길평은 30여 명의 옥리와 군사들에게 끌려 나와 객당의 계단 아래에 꿇어앉았
다.
동승은 길평의 처참한 몰골을 보자 가슴이 에이는 듯했다.
그러나 길평은 간신히 호흡을 가다듬더니 매섭게 조조를 노려보며 소리쳤다.
"하늘을 속이는 역적놈아, 언젠가 천벌을 받을 줄 알아라! 이 이상 나를 문초
해서 무엇을 얻겠다는 거냐?"
조조가 다시 동승을 노려봤다.
"왕자복.오자란.오석.충집 네 사람은 이미 붙잡아 하옥하였으나 다른 한 사람
을 잡지 못하였소. 국구께선 마음에 짚이는 데가 없으시오?"
동승은 정신이 아찔할 뿐이었다.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고개를 가로 저었
다.
조조는 다시 길평을 다그쳤다.
"나에게 독약을 먹이도록 사주한 자가 누구냐?"
"조정을 파괴한 적인 네놈을 하늘을 대신해서 처단하려 했을 뿐이다."
"이 혓바닥이 긴 흉물아, 그렇다면 너의 한 손가락 끝이 잘린 것은 무슨 까닭
이냐?"
"바로 이 손가락을 깨물어 역적 조조를 반드시 죽이겠다고 천지신명께 맹세한
것이다."
조조가 노기를 띠고 그를 노려보더니 옥졸들에게 명했다.
"저놈의 나머지 아홉 손가락을 모조리 잘라 버려라!"
길평의 손은 피범벅이 되었다. 잘린 손가락이 계단 아래 떨어졌다.
"자, 아직도 손가락을 깨물어 맹세하고 싶은가. 할 테면 얼마든지 해 보아
라."
그래도 길평은 수그러들지 않았다.
"손가락은 잘렸어도 나의 입은 아직 있다. 입으로는 도적을 삼킬 수도 있고
혀가 있느니 네놈의 죄를 꾸짖을 수도 있다."
길평이 조조를 바라보며 외쳤다.
조조가 그 소리를 듣자 호통을 치며 명했다.
"네 이놈! 그래도 바른말을 하지 않겠다는 것이냐. 여봐라, 저 자의 혀를 뽑
아 버려라!"
조조가 악귀처럼 대갈하자 옥졸들은 길평을 땅바닥에 눕혔다. 혀를 자르기 위
함이었다. 차마 눈뜨고 볼 수 없는 광경이 벌어지려는 찰나였다.
문득 길평이 옥졸들을 향해 말했다.
"기다려라. 혀를 뽑아서는 나도 견딜 수가 없다. 이 오랏줄을 풀어 다오. 그
러면 내 모든 것을 자백하겠다."
길평의 말에 조조는 의아했다. 그가 갑작스럽게 자백하겠다는 것이 이상했으
나 그의 말을 믿어 보기로 했다.
"원하는 대로 풀어 줘라!"
수십 명의 옥졸들이 길평을 둘러싸고 있었고 반 송장이 된 그 몸으로 무엇을
하랴 싶었다.
조조의 명에 옥졸들은 밧줄을 풀어 주었다.
밧줄이 풀리자 길평은 대궐 쪽을 향해 큰절을 올렸다.
길평이 대궐 쪽을 향해 절을 올리자 조조가 몸을 일으켰다. 그의 행동이 수상
쩍었기 때문이었다.
길평이 눈물을 흘리며 대궐 쪽을 향한 채 통곡했다.
"신 불행히도 여기서 생을 마칩니다. 참으로 통분스럽기 그지없사오나 천운이
어찌 악역에 폐하겠습니까? 이 몸이 비록 귀신이 되더라도 금문을 수호하고 있
겠사오니 때가 오기를 넓으신 마음으로 기다려 주십시오."
"쳐라! 그놈의 목을 쳐라!"
조조가 갑자기 벽력같이 소리쳤다.
그러나 조조가 길평에게 속았음을 알고 소리칠 때였다. 길평은 옥졸들이 내리
치는 칼에 앞서 곁에 있는 돌계단을 향해 힘껏 몸을 던져 머리를 부딪쳤다.
죽기를 작정하고 혼신의 힘을 다해 몸을 던져 부딪치니 길평의 머리는 으깨어
지고 말았다.
이를 지켜 본 사람들은 한 순간 그 끔찍한 모습에 호흡이 멈춰졌다. 조조는
길평의 몸을 갈기갈기 찢어 길거리에 내팽개쳤다. 건안 5년의 일이었다.
그의 기개를 기리고 죽음을 애도하여 지은 시가 있다.
한나라 기울어 일어나지 못하니
마침내 길평이 나타났네.
간사한 역적 없애고자 한 맹약
손가락 깨물어 했네.
참혹한 형벌 매워도 바른말 쉬지 않고
스스로 머리 찍어 죽었어도 혼백은 살아
열 손가락 잘려 나가 흐르는 피 속에
천 년이 흘러가도 그 이름 되새기네.
길평이 돌계단에 머리를 찧어 자결하자 주위에는 한동안 정적이 감돌았다. 그
정적을 깨뜨리고 조조가 옥졸들을 향해 소리쳤다.
"진경동을 끌어 내라!"
경동이 끌려오자 조조는 동승을 노려보며 물었다.
"국구는 이 사람을 알고 계시지요?"
동승이 진경동을 보자 눈에 핏발을 세우며 꾸짖었다.
"저놈은 도망친 종놈이오. 그의 목을 베어야겠으니 넘겨 주시오."
동승의 말에 조조가 차갑에 웃으며 말했다.
"그는 나에게 모반을 알려 준 자요. 소중한 증인인 그를 어찌 죽이려 하시오?
당치않은 말이오."
동승은 경동을 보고서야 일의 경위를 알게 되었다. 그러나 동승도 버틸 수 있
을 때까지는 버텨 보자는 생각이었다.
"승상께서는 어찌 몹쓸 죄를 짓고 도망친 종놈의 말만 믿으려 하시오?"
"왕자복과 그 일당들이 사로잡혔고, 그들이 이미 고백을 하였거늘 국구께서는
어찌 어리석게도 끝까지 거짓말을 하려 드시오?"
조조의 질타는 더욱 세차지기만 했다. 티끌만한 인정이나 한 방울의 눈물도
아랑곳하지 않는 듯한 그 얼굴은 그야말로 악귀 바로 그것이었다. 경동과 대면
시켜 동승을 심문하는 단계에 이르자, 그의 모습은 불덩이인지 사람인지를 분간
못할 만큼 열화와 같았다. 매서운 다그침과 내장을 후벼내는 듯한 말과 몸짓은
그 부하들도 차마 그를 바로 보지 못할 정도로 혹독했다.
끝까지 조조의 매서운 문초를 피하는 동승을 조조는 더 이상 내버려 두지 않
았다. 동승을 결박한 후 그를 난간 기둥에 묶도록 했다.
조조는 이어 옥졸들을 시켜 서원, 거실을 비롯하여 집 안을 샅샅이 뒤지게 했
다. 옥졸들은 서원에서 드디어 천자의 혈조와 옥대를 찾아 냈고, 연서한 혈판의
장도 찾아냈다.
"흥! 쥐 같은 무리들이 감히 이따위 짓을 하다니..."
조조가 혈조와 의장을 본 후 소리내어 웃었다. 조조는 부하들에게 명했다.
"동승의 일가는 물론, 하인까지 한 놈도 남김없이 옥에 가두도록 하라."
조조의 부하들이 동승의 가솔과 하인들을 개 끌듯 끌고 가니 통곡과 울부짖음
이 애절하여 차마 들을 수가 없을 지경이었다.
조조는 다음 날 부중으로 모사들을 불러모은 후 그들에게 이 일의 앞뒤를 얘
기하고 그 증거물을 보게 했다. 그들은 한결같이 놀라며 조조의 안색을 살폈다.
조조가 모사들을 둘러보며 입을 열었다.
"천자가 오늘날까지 무사함은 오로지 이 조조의 공로가 아니겠소? 지난날 이
각.곽사의 난을 진압하고 새 도읍을 건설하여 황실의 체통을 바로잡기 위해 얼
마나 분골쇄신하였소? 그런 내게 감히 칼을 대려는 무리가 있으며, 더욱이 천자
또한 나를 제거하려고 혈조를 내렸으니, 이게 될 말이오? 이는 그냥 좌시하고
넘길 수만은 없는 일이오. 두 번 다시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지금의 천자
를 폐하고 덕망이 높은 새 천자를 옹립할까 하오."
조조가 말을 마치고 모사들을 살펴보았다. 동승의 역모를 꾀함으로써 천자의
폐위를 자신이 공공연히 입에 담을 수 있게 된 점은 조조로서는 어떤 의미로는
전화위복이었다.
조조가 폐위를 말한 후 모사들의 얼굴을 주의 깊게 살펴본 것은 그들의 반응
을 엿보기 위함이었다.
정욱이 일어나 조조의 뜻에 반대하고 나섰다.
"허도의 중흥은 명공의 공훈임에 틀림없습니다. 그러나 명공께서 천하에 그
위세를 떨칠 수 있게 되신 것은 한실을 받들었기 때문입니다. 만일 명공의 깃발
위에 천자로 상징되는 조위의 뒷받침이 없었다면 명공의 오늘은 없었을 것입니
다. 아직 천하가 평정되지 않은 이때 명공께서 천자를 폐위하신다면, 그날부터
명공의 부군에는 이미 대의명분이 사라집니다. 그와 함께 천하가 명공을 보는
눈은 돌변하여 버릴 것입니다."
정욱의 말을 들은 조조는 그 말이 옳다고 여겨 고개를 끄덕였다. 동승의 일로
분노에 차 앞뒤를 가리지 않았음을 깨닫고 천자를 폐하는 일은 뒤로 미루기로
하였다.
조조는 천자를 폐하는 일을 뒤로 미룬 대신 그날로 동승의 일가일문, 그 밖에
왕자복.오자란.충집.오석 등의 가솔들을 모두 참형에 처하니 이를 지켜 본 백성
들은 끔찍한 조조의 잔인함에 한결같이 몸을 떨었다. 그날 죽은 사람은 모두 7
백여 명이나 되었다.
동승을 비롯한 다섯 사람은 물론 그들과 끈이 닿은 사람 모두를 죽였으나 아
직도 분을 삭이지 못한 조조는, 동승의 딸인 동귀비를 죽이기 위해 큰 칼을 찬
채 궁중으로 갔다.
동귀비는 황실에 들어오기 전 규수로 있을 때부터 빼어난 미인으로 소문나 있
었다.
궁궐의 부름을 받아, 입궁한 이래 천자의 총애를 받으며 이윽고 회임(아기를
가짐)되는 기쁨을 안고 있었다.
자기에게 미구에 닥칠 불행에 대한 육감이었던지 그날 동귀비는 어쩐지 마음
이 뒤숭숭하고 안정되지 않았다.
대궐의 후원은 아직 이른 봄이라서 휘장 안 화병의 꽃은 단단한 봉오리를 터
뜨리지 않고 있었다.
"귀비, 안색이 좋지 않은데, 어디 불편한 데라도 있으시오?"
헌제가 때마침 복 황후와 함께 그녀의 후궁을 방문하였다. 헌제는 복 황후와
함께 동승에게 내린 밀조 이야기를 하다 동귀비를 찾은 것이었다. 조금씩 불러
오기 시작한 동귀비의 배와, 얼굴을 번갈아 보며 헌제가 걱정스런 눈빛으로 묻
자 동귀비는 얼굴을 붉혔다.
"말씀해 보시오. 어디 불편한 데는 없소?"
헌제가 다시 한 번 묻자 동귀비는 마지못한 듯 작은 입을 열어 나직이 말했
다.
"이상하게 이틀 밤이나 연이어 아버님 꿈을 꾸었습니다."
그 말을 듣자 헌제와 복 황후는 문득 어두운 표정을 지었다. 동귀비의 친정
아비인 동승으로부터 소식이 없어 걱정을 하고 있던 중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때였다. 후궁의 벽문을 박차고 돌연히 모습을 나타낸 조조와 무사들이 옥랑
(옥으로 만든 복도)을 지나 이쪽으로 오고 있었다.
헌제는 조조와 무사들을 보자 어쩐지 섬뜩해져 안색이 달라졌다.
"폐하, 동승이 모반한 사실을 알고 계십니까?"
조조가 우뚝 선 채로 물었다. 헌제는 얼른 입을 열지 못했다.
"동탁은 이미 죽지 않았소."
헌제가 기지를 발휘해 죽은 동탁을 끌어대었다. 헌제가 능청스럽게 죽은 동탁
을 끌어대며 우물거리자 조조는 더욱 노기가 치솟아 매섭게 천자를 쏘아보며 말
했다.
"동탁이 아닙니다. 거기장군 동승의 일입니다."
헌제는 기어이 일이 잘못되고 말았음을 깨달았다. 떨려 오는 다리를 가까스로
지탱하며 시치미를 뗐다.
"동 국구가 어쨌다는 말이오? 짐은 무슨 말인지 도무지 알아들을 수가 없소."
"폐하께서는 몸소 손가락을 깨물어 옥대에 혈조를 써서 그에게 내린 일을 벌
써 잊으셨단 말입니까?"
천지가 무너지는 듯한 소리였다. 그 일까지 알고 있는 조조에게 다른 말을 할
수도 없는 헌제였다. 헌제는 현기증이 일며 용안이 백지장처럼 창백해졌다.
조조가 그런 천자를 노려보다가 무사들에게 명했다.
"모반을 하면 구족을 멸한다 하였다. 그것은 이미 널리 알려진 조정의 법도이
다. 여봐라! 동귀비를 끌어내라."
천자와 복 황후는 그저 몸을 떨 뿐이었다. 그런 가운데도 헌제는 신하인 조조
에게 간곡히 애원했다.
"동귀비는 지금 잉태한 지 다섯 달이나 되었소. 바라건대 승상께서는 그의 무
거운 몸을 보아서라도 불쌍히 여겨주시오."
그러나 조조는 천자의 말에 귀도 기울이지 않았다.
"하늘의 도움으로 동승의 음모가 사전에 알려졌기에 망정이지, 그렇지 않았다
면 나는 지금 살아 있는 목숨이 아닙니다. 그런데도 저 여인을 살려 두어 후환
을 남기란 말씀입니까?"
복 황후도 천자를 거들며 조조에게 간청했다.
"나는 잉태를 하지 못하는 몸입니다. 천자께서도 그렇게 말씀하시니 부디 너
그러이 보살피시어 동귀비를 냉궁(가두는 방)에 가두었다가 분만한 후에 죽여도
늦지 않을 것입니다."
조조는 복 황후를 노려보며 소리쳤다.
"아기를 낳게 하여 그 아기로 하여금 에미의 원수라도 갚도록 하자는 말씀입
니까?"
이를 지켜 보고 있던 동귀비는 이미 모든 걸 체념한 듯 눈물을 흘리며 조조에
게 말했다.
"중한 죄를 지었다면 죽음을 기꺼이 받겠습니다. 다만 죽이더라도 살이 드러
나지 않게 시신만은 온전히 보존토록 해 주십시오."
동귀비의 말에 조조는 무사들에게 명해 흰 비단을 가져오게 하여 스스로 목을
매 자결하도록 했다.
헌제가 이를 보고 동귀비에게 말했다.
"그대는 죽어 비록 구천에 가더라도 부디 짐을 원망하지 말아주오."
헌제의 두 눈에서는 참고 참았던 눈물이 비 오듯 쏟아졌다. 복 황후도 목을
놓아 울었다. 헌제의 그런 모양을 보고 있던 조조가 못마땅한 듯,
"어찌하여 아녀자나 어린 아이처럼 눈물을 흘립니까?"
하고 소리치더니 이어 무사들에게 잔뜩 성난 목소리로 명했다.
"동귀비를 궁문 밖으로 끌어 내라."
무사들은 조조의 영에 동귀비를 끌어 낸 뒤 흰 비단으로 목을 졸라 죽였다.
뒷날 이 슬픈 광경을 한탄한 시가 있다.
봄날의 궁궐에 천자의 사랑도 두텁더니
슬프도다, 태자를 잉태한 채 죽음을 맞는구나.
천하의 황제도 그를 구하지 못하니
용안을 숙여 눈물만 흘리네.
그날 동승과 평소 가깝게 지냈다는 이유만으로 환관 몇십 명을 가려냈는데,
그들은 붙들리는 대로 칼에 맞았다.
조조는 동귀비를 죽인 후에도 마음이 놓이지 않아 감궁관을 불러 영을 내렸
다.
"지금부터 황실의 외척, 종친을 가리지 말고 내 허락 없이는 궁궐 출입을 하
지 못하도록 하라. 만약 이 말을 어기거나 외척, 종친의 출입을 허락한 자도 똑
같이 목을 베리라."
조조는 즉시 그의 수하 군사 3천여 명을 어림군으로 삼아 궁문을 지키게 하
고, 조흥을 그 대장으로 임명했다.
조조가 이토록 철저히 궁중을 방비하니 그로부터 천자는 외부와는 차단된 채
철저히 감금당한 신세가 되고 말았다.
유비의 참패 다시 서주에서 기주로
조조는 동승과 모의한 유비를 치기 위해 군사를 일으킨다. 소패성의 유비.장
비는 이에 앞서 야습을 감행하려 하나 조조는 이를 눈치채고 결국 유비.관우.장
비는 각각의 싸움에서 모두 참패한다. 갈 곳이 없는 유비는 원소에게 몸을 의탁
한다.
피비린내나는 회오리바람이 허도를 휩쓸고 지나가자 우선 한숨 돌린 것은 조
조보다도 문무백관과 궁궐에 기거하는 사람들이었다.
허도에 표면적으로는 한동안 고요가 감돌기 시작하자 조조는 동승의 일로 미
루었던 마등과 유비의 일을 거론했다. 두 사람이 다 동승과 함께 모의에 가담한
사실이 조조로서는 참을 수 없는 일이었다. 조조는 정욱을 불러 그 일에 대해
의논했다.
"아직 동승과 함께 모의했던 유비와 마등이 살아 있으니 그들을 정벌하지 않
을 수 없다. 현책이 없겠는가?"
정욱이 고개를 저으며 답했다.
"마등이 군사를 거느리고 서량에 주둔하고 있는데 군사들은 용맹스럽기로 이
름나 있습니다. 현덕 또한 서주의 요지를 차지하여 하비, 소패의 성에 군사를
나누어 협공을 취할 수 있도록 의각세를 이루고 있습니다. 세력이 크지는 않으
나 가벼이 볼 수 없는 처지입니다."
"그렇다고 그들을 그냥 둘 수는 없는 일이오."
"하북의 원소가 문제입니다. 원소는 얼마 전부터 관도에 군사를 더욱 증강시
키고 있다는 소식입니다. 지금 승상의 가장 큰 적은 누가 뭐라 해도 원소입니
다."
"그 수족인 현덕을 먼저 치는 것은 그 한팔을 꺾는 것과 다름없소."
"아닙니다. 결코 허도를 비워서는 아니 됩니다. 그보다는 좋은 말로 글을 써
서 서량의 마등을 안심시킨 후 그를 허도로 불러들여 죽여야 합니다. 그런 다음
현덕에게도 계책을 써서 그의 예기를 꺾은 다음 유언비어를 퍼뜨려 현덕과 원소
사이를 이간시켜야 합니다."
정욱의 말에 조조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그러나 내 생각은 다르오. 유비는 마등과 달리 인걸이오. 그를 치지 않고 두
면 인재들이 모여들어 날개를 달게 될 거요. 그렇게 되면 때는 이미 늦소. 지금
이 그를 쳐야 할 때요. 원소의 세력이 강대하다 하나 그는 마음이 우유부단하여
쉽게 결단을 내리지 못할 거요. 나는 그를 걱정하고 싶지는 않소."
조조는 유비를 먼저 치자는 주장을 굽히지 않았다. 정욱과 그 일에 대한 의논
을 주고받고 있는데 마침 곽가가 들어왔다. 조조는 곽가를 보자 그에게도 의견
을 물었다.
"마침 잘 와 주었소. 나는 유비가 있는 동쪽으로 군사를 내어 치고 싶은데 원
소가 있으니 걱정이오. 그대 생각을 듣고 싶소."
"우선 현덕을 정벌해야 합니다. 현덕은 서주를 다스린 지 얼마 되지 않아 아
직 군사들의 마음을 잡지 못한 상태입니다. 한편 원소는 기세를 올리고는 있으
나 휘하 장수들이 서로 뜻이 맞지 않아 자중지란이 일고 있습니다. 또한 원소
자신의 우유부단함 때문에 신속히 군사를 움직일 수 없을 것입니다. 승상께서
군사를 일으키신다면 유비의 서주를 일격에 평정하실 수 있을 것입니다."
"그대의 말이 바로 나의 뜻이오."
곽가의 말에 조조가 반색을 하며 말했다.
조조는 즉각 뜻을 정하고 모든 장수들을 한 자리에 모아 놓고 군령을 내렸다.
"20만 군사를 일으켜 다섯 길로 나누어 서주를 공격하라!"
조조군의 진병은 바람처럼 전차되어 서주에도 전해졌다.
이 소식을 가장 먼저 접한 것은 손건이었다. 그는 수하로 하여금 하비성에 있
는 관우에게 이 사실을 먼저 알리게 하고 자신은 소패성의 유비에게 달려갔다.
"혈조의 비밀이 탄로나 국구 동승 이하 일족들이 무참하게 최후를 마쳤다는
소식을 들었소. 따라서 언젠가는 조조가 군사를 일으킬 줄 짐작하고 있었소. 그
러나 이렇게 빨리 닥칠 줄은 몰랐소. 어찌했으면 좋겠소?"
유비가 근심하며 말하자 손건은 유비를 재촉했다.
"원소에게 보낼 글을 급히 써 주십시오. 그에게 구원을 청하는 길밖에는 다른
방책이 없습니다."
유비가 생각해 봐도 지금으로선 그 방책밖에 달리 길이 없었다. 손건은 유비
의 서찰을 받아 밤낮을 가리지 않고 하북을 향해 달렸다.
손건은 하북에 이르러 먼저 원소의 중신인 전풍을 만나 함께 원소에게 가서
유비의 서찰을 전했다.
원소는 어찌된 셈인지 몹시 초췌한 얼굴로 의관도 갖추지 않고 있었다. 전풍
이 원소의 이런 몰골에 걱정스런 기색으로 물었다.
"주공께서는 어디가 편치 않으십니까?"
원소가 힘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아무래도 내가 오래 살 것 같지가 않구려."
"주공께서는 무슨 말씀을 그렇게 하십니까?"
전풍이 놀라 다시 물었다.
"그럴 이유가 있소. 내게는 다섯 아들이 있는데 그 중 막내가 가장 나를 기쁘
게 해 주는 아들이었소. 그런데 지금 그 막내놈이 창병을 앓아 다 죽게 되었으
니..., 다른 일이 감히 손에 잡히지가 않는구려."
타국의 사자가 서서 기다리고 있었으나 원소는 자식놈의 병 한탄만 하고 있었
다. 전풍이 그에게 유비의 서찰을 전했으나 그는 읽어 볼 생각도 않고 있었다.
전풍이 기다리다 못해 다시 간했다.
"지금 유현덕의 사신이 전해 온 사실입니다만 조조가 지금 대군을 이끌고 서
주로 진군하고 있다 합니다. 조조가 군사를 이끌었으니 지금 허도는 빈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주공께서 이때를 틈타 허도를 공격하시면 위로는 천자를 모실 수
있으며 아래로는 만민을 구할 수 있습니다. 지금 이야말로 하늘이 내리신 기회
입니다. 주공께서는 밝은 헤아리심으로 결단을 내려 주십시오."
전풍이 간곡히 원소에게 간했으나 원소의 반응은 어정쩡하기만 했다.
"그렇긴 하오. 그러나 내가 말 한 바와 같이 지금 내 아들의 목숨이 위태로운
지경이오. 그 아들은 내 생명과도 같소. 어찌 다른 곳에 마음을 쓸 수 있겠소?"
전풍이 다시 원소에게 다그쳤다.
"속담에도 하늘이 내리는 것을 취하지 않으면 오히려 하늘의 벌을 받는다 하
였습니다.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천하는 지금 제 발로 주공의 수중으로 굴러 들
어오는 것과 다름없습니다."
그러나 원소는 고개를 저으며 심드렁하게 말했다.
"구슬을 잃은 뒤 후회하면 무슨 소용이겠소? 내 아들 중 막내가 가장 영특한
데, 그 애한테 무슨 일이라도 일어나면 어쩌겠소? 내 마음이 편치 않으면 싸운
다 해도 별로 이로운 일이 없을게요."
전풍은 입을 다물어 버렸다. 손건은 서주의 위기를 구하기 위해 원소에게 애
타게 호소하던 전풍의 호의에 고마움을 느꼈을 뿐이었다. 손건은 원소라는 인물
의 됨됨이를 보고 나자 더 이상 구원을 청해도 소용 없는 일이라는 것을 알았
다.
손건이 전풍에게 눈짓을 하고 물러나자 원소도 미안하였는지 손건에게 당부했
다.
"돌아가거든 유 공에게 내가 군사를 일으키지 못하는 연유를 잘 말씀드려 주
시오. 만약 서주를 버리지 않으면 안 될 경우라면 언제라도 이곳으로 오라고 하
시오. 그때는 이곳에서 힘을 합칠 수 있도록 조처하겠소."
전풍과 손건은 별수없이 원소의 방을 물러나올 수밖에 없었다. 전풍이 발걸음
을 옮기다 손에 든 지팡이로 땅을 치며 한탄했다.
"분하도다! 분해. 어린아이의 병 따위로 천재일우의 기회를 놓치다니... 이러
다가 언제 큰 일을 이룰 수 있단 말인가. 참으로 애석하구나."
잠시도 머무를 여유가 없는 손건은 그길로 다시 말을 몰아 서주로 돌아갔다.
서주에 돌아온 손건은 그가 보고 들은 대로 유비에게 전하는 수밖에 없었다. 유
비는 원소마저 구원병을 보낼 수 없음을 알자 침통한 마음으로 대책을 물었다.
"일이 이렇게 되었으니 걱정이구려. 어찌했으면 좋겠소?"
장비가 그런 유비를 보며 우렁찬 목소리로 말했다.
"형님, 그렇게 침울하게 계실 것이 아닙니다. 기왕에 일이 이 지경이 되었으
니 오로지 죽음을 각오하고 싸울 뿐입니다."
"자네 말도 맞네만, 이 작은 성을 향해 20만의 대군이 몰려온다지 않는가?"
"20만이거나 1백만이거나 염려하실 필요가 없습니다. 그들의 병마는 모두 허
도에서 먼길을 쉬지 않고 달여왔을 것입니다. 이곳에 와 진을 펼치더라도 한 며
칠은 제대로 움직이지도 못할 것입니다."
"그것이 어쨌다는 것인가. 그들은 이 성을 몇 겹으로 에워싸고 장기전을 펼
것이다."
"그러니까 그 준비를 하기 전에 기습을 하여야 합니다. 먼길을 달려온 여독이
풀리기 전에 제가 정병을 이끌고 가 기습을 감행하겠습니다."
유비는 장비의 말을 듣자 귀가 솔깃했다. 지금으로선 조조의 군사를 앉아서
맞는 것보다 장비의 말대로 피로한 조조군에게 기습을 가함으로써 군세에 크게
손상을 줄 수도 있는 일이었다.
유비는 장비의 말을 따르기로 하고 우선 그의 의기부터 북돋웠다.
"정말 탄복했네. 자네는 용맹 하나만 뛰어나지 다른 재주는 없는 줄 알았는데
이제 보니 그렇지 않네그려. 요전에는 계책을 써 유대를 생포하더니, 이제 또
말을 들이니 병법에도 맞는 말을 하네그려. 자, 그럼 익덕의 말을 따르기로 하
세."
유비는 조조군에게 기습을 가하기로 하고 성을 나섰다.
이때 조조의 군사는 소패에 당도하기 직전이었다. 행군을 서둘러 소패에 다다
를 즈음 불현듯 광풍이 일며 아기 두 개가 부러져 나갔다.
적군을 눈앞에 두고 결전을 벌이려는 때에 아기가 둘씩이나 부러지자 조조는
행군을 멈추었다. 석연치 않은 마음이 들어 순욱을 불러 논했다.
"이것은 길조인가, 흉조인가?"
"바람은 어느 쪽에서 불어 왔으며 부러진 아기의 색깔은 무엇이었습니까?"
"바람은 동남쪽에서 불어 왔으며 진홍빛 깃발이었네."
"동남풍에 진홍빛, 그렇다면 염려하실 일이 못 됩니다. 이것은 병법의 한 대
목에 있듯이 적으로부터 야습이 있을 징조입니다."
그때 선봉장인 모개가 말을 달려와 조조에게 고했다.
"조금 전 동남풍이 강하게 불어와 진홍빛 깃발을 부러뜨렸습니다. 주공께서는
무슨 징조라 생각하십니까?"
"공은 무슨 징조라 여기오?"
"저의 어리석은 생각으로는 분홍 깃발이 동남풍에 부러짐은 적군이 밤을 기다
려 기습을 가할 징조로 여겨집니다. 여기에 대비함이 좋을 듯 합니다."
"하늘이 나를 돕는 것이오. 진을 펴 기습에 대비하도록 해야겠소."
순욱과 모개가 한결같이 그 같은 말을 하자 조조는 기습에 대비한 포진을 펴
게 했다. 군사의 수가 적은 유비군이라 앉아서만 기다리지 않고 능히 기습을 감
행할 수도 있다고 여긴 조조였다.
조조는 군사를 아홉 부대로 나누고 한 대를 진영에 두고 나머지 여덟 부대는
8편으로 그 진을 둘러싸게 하여 매복시켰다.
한편 이런 사실을 알 리 없는 유비는 장비를 내보낼까 하다 조조군이 워낙 대
군이라 군사를 2대로 나누기로 했다. 유비 자신은 왼쪽을, 장비는 오른쪽을 맡
게 하여 행군했다.
손건은 그들이 떠난 소패성을 지키기로 했다. 유비군은 교교한 달빛 아래 하
무를 입에 문 채 발소리를 죽이며 적진에 접근했다.
"적군의 동태는 어떻더냐?"
척후병을 풀어 정찰하게 했던 군사가 돌아오자 장비가 물었다.
"보초병까지 곯아떨어졌습니다."
"음, 그렇던가? 그러면 공격을 서둘러야겠다."
자기의 계책이 맞아떨어진 줄 알고 장비는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장비는 먼
저 기병으로 하여금 조조군의 진을 덮치게 했다. 생각대로 진은 방비도 허술했
다. 그런데 이게 어찌 된 일인가. 적의 진지에는 중군도 보이지 않았으며 조조
의 진영도 보이지 않았다.
군막과 기치와 화톳불만 보일 뿐 군사가 보이지 않자 장비도 문득 이상한 생
각이 들었다. 급히 군사를 물리려 했다. 그러나 그때 홀연 사방에서 불길이 치
솟는가 했더니 함성이 여기저기에서 일었다. 사방팔방에서 조조의 군사들이 밀
려 나왔다. 장비가 시도한 기습작전은 반대로 기습을 당하는 꼴이 되었다.
장비군의 대오는 분열되고 군사들은 이리저리 흩어지기 시작했다. 장비는 장
팔사모를 휘두르며 닥치는 대로 적을 거꾸러뜨렸다. 그러나 한두곳에서 쏟아지
는 적군이 아니었다. 동쪽에서는 장요, 서쪽에서는 허저, 남쪽에서는 우금이,
북쪽에서는 이전이 달려나왔다. 또 동남쪽에선 서황의 기마대가, 서남쪽에서는
악진의 노궁대, 동북쪽에서는 하후돈의 무도대, 서북쪽에서는 하후연의 비창대
가 달려나왔다. 이렇게 8면에서 유비.장비군을 에워싸고 포위망을 좁혀 왔다.
'이제는 이 한 목숨 바쳐 이들과 부딪칠 뿐이다.'
장비는 이렇게 결심하고 좌충우돌, 이리 부딪고 저리 부딪쳤다.
그러나 중과부적이었다. 적에 비해 워낙 군사가 적었다. 거기다가 유비군은
원래가 조조의 군사가 아닌가.
부하들 가운데 목숨을 잃지 않은 자는 도망을 가거나 무기를 버리고 적에게
투항했다. 장비도 여러 곳에 부상을 입어 피투성이가 되었다.
장비는 닥치는 대로 적을 베던 중 서황이 앞을 가로막자 그와 한바탕 싸움을
벌였다. 그러자 뒤쪽에서 악진이 다가왔다. 장비는 불 같은 숨을 거칠게 내쉬며
간신히 한 가닥 혈로를 뚫었다. 그런 중에서도 장비는 말을 달리며 부하들을 둘
러보고 통탄을 금치 못했다. 그를 뒤따르는 부하들은 겨우 20기도 못 되었다.
장비는 소패로 돌아가려 했으나 조조군이 그 길을 끊었다. 서주나 하비로 돌
아가려 하나 이미 조조군이 그 길도 가로막고 있을 것이 뻔했다. 장비는 하는
수 없이 망탕산 방면으로 말머리를 돌렸다.
유비 또한 장비와 크게 다를 바 없었다. 장비보다 늦게 조조의 진에 이르자
홀연히 등 뒤쪽에서 함성이 일며 한 떼의 군마가 달려나왔다. 기습을 당한 유비
군은 크게 흔들렸다. 앞쪽에서는 하후돈이 공격해 왔다.
유비는 닥치는 대로 그들과 싸웠으나 싸울수록 불리하다는 것을 알고 있는 그
인지라 혈로를 뚫기에 바빴다. 그러는 동안 이끌었던 군사의 태반을 잃었다. 유
비가 간신히 한 고비를 넘기며 말을 달리고 있는데 이번에는 하후연이 공격해
왔다.
유비는 말을 달려 소패성으로 향했다. 그때쯤 그를 뒤따르는 군사는 불과 30
여 기밖에 되지 않았다.
유비는 강 건너에 있는 소패성이 보이는 곳에 이르자 말을 세우고 말았다. 소
패성 쪽에서 새빨간 불길이 하늘로 치솟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소패성도 이미
조조에게 떨어졌음을 알고 유비는 말머리를 돌렸다. 관우가 있는 하비로 향했으
나 그곳 또한 조조군이 길을 막고 있었고, 서주 역시 그와 다름없었다.
유비는 갈 길을 잃고 망연자실했다.
어느 새 날이 밝아 오고 있었다. 산과 들에는 이곳 저곳 할 것 없이 뭉게뭉게
연기가 자욱했다. 그리고 그곳은 조조의 군사로 메워져 있었으며, 그들은 아침
밥을 짓고 있었다.
유비는 당장 몸을 의탁할 곳을 찾아야 했다.
'그렇군. 우선 기주로 가 원소와 앞일을 도모하자.'
지난번 원소에게 보냈던 손건이 찾아오면 언제든지 받아주겠다고 했다던 원소
의 말을 문득 생각해 냈다.
그로부터 들에도 눕고, 산에서 눈을 붙이면서 들쥐 고기를 먹고 풀뿌리를 씹
으션서 간신히 청주부에 당도했다.
성 아래에 이르자 유비는 성 위를 보고 소리쳤다. 수문장이 그가 유비임을 청
주자사 원담에게 알렸다.
청주자사 원담은 원소의 장남으로 평소부터 유비를 공경해 오고 있던 터라 유
비가 왔다는 말에 성문을 열어 몸소 나아가 맞았다.
"이미 부친으로부터 말씀을 듣고 있었습니다. 이제 마음을 푹 놓으십시오."
유비는 지금까지의 경위를 얘기하고 원소에게 의지하러 왔다는 뜻을 밝혔다.
원담은 유비에게 숙소를 마련해 준 뒤 곧 부친 원소에게 이 사실을 알렸다.
이미 약속한 바이니 주저하지 말고 유현덕을 이리로 모시도록 하라.
원소에게서 바로 회신이 오자 원담은 군사를 내어 유비를 호위토록 하였다.
원소는 즉시 유비를 마중할 군사를 보내어 그를 맞아들였다. 원소도 몸소 기주
성 밖 30여 리 지점인 평원까지 나와 유비를 맞았다.
원소가 몸소 마중까지 나오자 유비는 황황히 말에서 내려 절을 하며 예를 올
렸다.
"유랑하는 패장이 무슨 공이 있다고 예까지 친히 나오셨습니까? 너무나 과분
하여 몸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유비는 말에 오르지도 않고 그대로 걸어서 성 안으로 들었다. 성 안에 들자
원소는 다시 자리를 마련하여 유비에게 지난날의 일을 사과하며 변명했다.
"자식 사랑에 너무 빠져 있다고 웃으시겠지만 그 무렵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
소. 그 뒤로 그 일이 마음에 걸리더니 오늘 이렇게 뵙게 되어 실로 마음이 가벼
워짐을 금할 수 없습니다. 이곳은 하북 여러 주의 부중입니다. 마음을 놓으시고
편안히 지내시기 바랍니다."
유비가 예를 올리며 고마움을 표했다.
"이전부터 찾아뵙고 싶었으나 기회가 없었습니다. 이제 외롭고 궁한 몸이 되
어 문하에 투항하고자 합니다. 조조의 공격으로 처자까지 버리게 되었으나 원
공께서는 항상 선비를 물리치지 않으신다 하여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왔습니다.
바라건대 이 몸을 물리치지 않으신다면 은혜는 언제까지나 잊지 않겠습니다."
원소는 유비에게 깍듯이 대하며 후한 대접을 해 주었다.
원소가 유비를 두텁게 대한 것은 자신이 적으로 여기고 있는 조조에게 서슴없
이 반기를 든 유비가 그만큼 반가웠고, 조조가 끝내 거느리지 못한 유비를 자신
의 휘하에 거느리고 수족처럼 부리고 있음을 천하에 보여주려 함이었다.
소패.서주 두 성을 단판 싸움으로 점령한 조조의 기세는 하늘 높은 줄 모르는
듯했다.
서주제는 유비 휘하의 간옹.미축 두 사람이 지키고 있었으나 조조의 대군 앞
에 성을 지켜내기란 애초부터 불가능한 일이었다. 끝내 성을 버리고 달아나니
진대부.진등 부자가 남아 성문을 열어 조조를 맞았다.
'이전에는 나에게 은작을 받더니 다시 현덕을 섬기지 않았는가. 이제 다시 성
문을 열어 나를 맞다니...'
조조가 이런 생각으로 진대부.진등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이곳 서주를 자기
쪽으로 끌어들이려면 백성들을 안정시켜야 했다. 진대부.진등을 문책하여 백성
들의 마음을 불안하게 하고 싶지 않다는 판단 아래 조조는 그 일을 뒤로 미루었
다.
조조는 힘들이지 않고 서주를 손에 넣게 된 것이 그들에게도 공이 있음을 상
기하고 진대부.진등에게 말했다.
"그대들은 힘을 다해 영내의 백성들을 선무(점령지의 주민에게 정부의 뜻을
이해시켜 안심시킴)하도록 하시오."
진대부.진등은 조조의 명에 엎드려 절하며 말했다.
"분부, 어김없이 받들겠습니다."
그날로부터 두 사람은 성 안의 백성들을 달래고 안심시키는 일에 착수했다.
유비를 깊이 따르던 백성들은 갑작스런 변고로 불안에 떨었으나 조조의 정령과
진대부.진등의 선무로 빠르게 안정을 되찾아 갔다.
서주가 안정을 되찾자 조조는 하비성을 무너뜨리기 위해 모사들을 불러모아
의논했다. 조조는 신중을 기하기 위해 일단 이 지방의 정세에 밝은 진등에게 하
비성의 사정을 물어 보았다.
"하비성은 승상께서도 잘 아시는 바와 같이 관운장이 굳게 지키고 있습니다.
이미 현덕은 이러한 경우를 예상했음인지 두 부인과 노소 일족을 관운장에게 맡
겼습니다. 하비성이 원래 난공불락의 요새라는 것은 승상께서도 잘 알고 계실
것입니다. 관운장이 그 성에서 유현덕의 가족을 돌보고 죽기로 싸울 것임은 틀
림없습니다."
조조가 진등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하비성은 나에게는 인연이 많은 성이오. 그러나 지난날 여포와 싸웠을 때와
는 달리 이번에는 장기전을 치를 수가 없을 것이오. 원소가 이미 북쪽에서 대군
을 움직이고 있기 때문이오. 이번 싸움은 속전속결이 되지 않으면 안 될 것이
오."
조조는 순욱을 돌아보며 물었다.
"하비성을 하루빨리 떨어뜨릴 방책이 없겠소?"
순욱이 잠시 생각에 잠겨 있다가 말했다.
"관우를 성 안에 두고는 백 번을 공격해도 성공하지 못할 것입니다. 관우를
어떻게 하여 성 밖으로 유인해 내느냐가 문제입니다."
"관우를 성 밖으로 끌어 내기 위해서는 어떻게 하는 것이 좋겠소?"
"공격을 가해 포위망을 좁혔다가 후퇴하는 방법을 쓸 수밖에 없습니다. 관우
가 지금까지 많이 보아 온 이 계략에 넘어가지 않을 우려가 있으나 싸움을 되풀
이하다 보면 걸려들지도 모릅니다."
조조는 순욱의 의견에 좇아 군사 배치를 정한 다음 자기의 생각을 털어놓았
다.
"사실대로 말하면, 나는 오래 전부터 관운장의 무예와 의리를 높이 보아 왔
소. 도량이 넓은 군자의 풍모를 지녔으되 무예는 그를 당할 자가 없을 것이오.
그를 어떻게 해서든지 내 수하로 만들고 싶소. 이번 싸움이야말로 나의 뜻을 이
룰 수 있는 호기가 될 것이오. 싸워서 성을 무너뜨리기보다는 그에게 항복을 권
해 보는 것이 어떻겠소?"
조조의 말에 모사들은 서로 얼굴만 마주 바라보았다. 관우를 죽이는 것도 쉽
지 않은데 그를 사로잡으라니 어려운 명이 아닐 수 없었다.
곽가가 조조에게 불가함을 아뢰었다.
"관운장은 충절과 신의가 두터운 사람입니다. 그가 성을 버리고 항복한다는
것은 도저히 기대하기 어려운 일이라 여겨집니다. 섣불리 설득하려 들었다가는
도리어 그에게 죽임을 당하기 십상입니다."
이때 장요가 앞으로 나섰다.
"그 일은 제가 한번 나서 보겠습니다. 저는 일찍이 관 공과 사귄 적이 있습니
다."
그러자 정욱이 그런 장요을 지켜 보더니 입을 열었다.
"문원이 비록 운장과 사귄 적이 있다고는 하나, 그는 다른 사람의 말만 듣고
는 투항하지 않을 사람입니다. 그보다는 계책을 써 그를 궁지에 빠뜨린 뒤 문원
이 가서 달래도록 하면 그때는 그도 하는 수 없이 승상께 투항하게 될 것입니
다."
"음-. 범을 함정에 빠뜨린 뒤 달래자는 말이구려. 그래, 그 계책이란 무엇이
오?"
조조가 반색을 하며 정욱에게 물었다.
"관운장을 사로잡으려면 1만 병의 군사를 풀어도 어려운 일입니다. 지혜와 모
략을 쓰지 않고는 그를 당해 내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유비의 군사 중에서 항복
한 군사들을 하비성으로 보내십시오. 그들을 보내되 여기서 도망쳐간 것처럼 꾸
미는 것입니다. 그들을 우리의 첩자로 이용하여 내응토록 하고, 이번에는 군사
를 보내 하비성을 공격했다가 패하는 척하며 도망가도록 합니다. 운장이 뒤쫓아
오면 성에서 될수록 멀리 떨어지도록 유인하되 날랜 기병을 보내 돌아갈 길을
완전히 끊도록 합니다. 오도가도 못하게 된 관운장에게 그때 사람을 보내 달랜
다면 그도 어쩔 수 없이 손을 들고 말 것입니다."
조조는 정욱의 말에 무릎을 치며 말했다.
"그야말로 적을 함정에 가둘 수 있는 계략이오."
조조는 곧 항복한 군사들 중 이미 충성스런 아군이 된 군사 수십 명을 가려
뽑아 그들을 하비성으로 들여보냈다.
그들이 관우에게 조조군으로부터 도망쳐온 자초지종을 그럴 듯하게 부풀려 말
하니 관우는 지난날 서주에 있던 군사들이 돌아왔으므로 의심하지 않고 성 안에
그대로 머물게 했다.
충의를 내세운 관우의 3조약
조조의 계략으로 함정에 빠진 관우는 세 가지 조건을 내세우고 항복한다. 조
조는 관우를 자기 사람으로 만들고자 온갖 호의를 베풀지만 관우는 두 형수님
모시기에 정성을 쏟는다. 이에 조조는 관우에 대한 공경과 숭배의 정을 더욱 깊
게 한다.
한편, 관우는 성 안에서 심란히 있는 가운데 흩어졌던 수하 군사 10여명이 돌
아오자, 묵묵히 바라보고 있다가 그들 중의 하나에게 물었다.
"어떻게 하여 달아났는가?"
"서주성에 들어온 조조군은 승리감에 도취되어 크게 잔치를 벌였습니다. 술에
취한 군사들은 그 동안의 강행군에 지쳤는지 모두 인사불성이 되어 쓰려졌습니
다. 그 틈을 타 몸을 빼낼 수 있었습니다."
"너희들을 추격한 군대는 없었느냐?"
"하후돈이 이끄는 군사 중 일부가 뒤쫓았으나 그들도 끝까지 추격하지 않고
그냥 돌아갔습니다."
관우는 그의 말을 듣고는 더 이상 의심을 하지 않았다.
다음 날이었다. 하후돈이 군사 5천여를 거느리고 하비성 아래에 나타났다. 하
후돈은 성 가까이까지 다가와 싸움을 걸었으나 관우는 좀처럼 싸움에 응하려 들
지 않았다. 성 안에 있는 유비의 가족들을 보호하고 있는 관우인지라 함부로 성
문을 열고 나가 응전할 리 없었다.
하후돈은 군사들을 시켜 관우의 화를 돋우기 위해 욕설을 퍼부으라고 명했다.
이에 군사들이 성 아래에서 욕설을 퍼부어댔다.
"야, 이 수염이 긴 시골뜨기야, 너는 어찌 그리도 겁이 많으냐? 장수가 싸움
을 겁내다니 고향에나 돌아가 시골 아이들 콧물이나 닦아 줘라!"
"너의 주인 현덕도, 장비도 우리 승상의 위풍에 넋이 빠져 도망쳤는데 너는
빈둥빈둥 성 안에 죽치고 앉아 무얼 어쩌겠다는 거냐? 어서 나와 항복하는 게
어떠냐?"
하후돈의 군사들이 별별 욕설로 관우의 화를 돋우자 굳게 입을 다물고 형형한
눈으로 그들을 바라보던 관우도 그만 노기가 뻗쳤다.
"내 이 버러지 같은 놈들을 그냥 둘 수가 없구나."
관우는 얼굴을 붉게 물들인 채 말 위에 올라 3천 군사를 이끌고 성 밖으로 달
려나왔다.
"조무래기는 필요없다. 대장은 나와 내 칼을 받아라."
관우가 청룡언월도를 햇빛에 번쩍이며 말을 달려나오자 하후돈이 마주 나왔
다. 10여 합을 겨루고 하후돈이 슬그머니 말을 물리자 관우가 하후돈을 뒤쫓았
다. 원래부터 관우를 꾀어 낼 셈이었던 하후돈은 그를 맞아 싸우는 척하다 다시
도망치기를 되풀이했다.
관우가 부하 3천을 질타하며 하후돈 군사를 뒤쫓다 보니 어느 새 성밖 20여
리나 달려나왔다. 정신 없이 하후돈을 쫓던 관우도 그제야 문득 정신을 차리고
말을 세웠다.
그 순간이었다. 갑자기 귀를 찢는 듯한 포향이 들렸다. 그와 함께 좌우에서
군사들이 함성을 지르며 달려나왔다. 서황과 허저가 이끄는 조조의 복병들이었
다.
관우가 가운데 길로 말머리를 돌리자 이번에는 복병들이 화살을 쏘아댔다. 메
뚜기 떼가 날아드는 것처럼 화살이 어지럽게 날아들었다. 무예로 천하를 누른다
는 관우였지만 화살이 그같이 어지럽게 날아드는 길을 뚫을 수는 없었다.
관우가 길을 다른 쪽으로 잡자 서황과 허저가 이를 보고 달려왔다. 관우는 그
들을 맞아 싸웠다. 관우가 사력을 다해 그들을 공격하여 길을 뚫었으나 다시 하
후돈이 기다리고 있었다. 관우가 싸우고 있는 동안, 조조의 대군이 그를 겹겹이
에워싸니 어느 새 관우는 우리 안에 갇힌 격이 되고 말았다.
날도 이미 저물어 들판에는 어둠이 깔리고 있었다. 관우가 문득 주위를 살펴
보니 맞은편에 토산이 보였다. 관우는 군사를 이끌어 산위에 군사를 머물게 했
다.
관우가 산 위에 오르자 조조군은 그 산을 에워쌌다. 잠시 군사를 정돈하고 하
비성을 바라보니 성에서는 거센 불길이 솟으며 밤하늘을 붉게 물들이고 있었다.
앞서 성 안에 들어갔던 조조군의 포로들이 성 안에 불을 놓아 하후돈의 군사를
끌어들였던 것이었다. 난공불락을 자랑하던 하비성도 이렇게 하여 조조 손에 떨
어지게 되었다.
'계략에 빠졌구나. 이제 무슨 낯으로 주군을 뵐 수 있다는 말인가.'
관우는 이렇게 생각하고 날이 새면 최후의 일각까지 싸워 죽기로 작정했다.
말과 군사들에게는 최후의 일전을 위해 충분한 휴식을 취하도록 했다.
날이 희뿌연히 밝아오자 관우는 산 아래를 살펴보았다. 긴 뱀이 산허리를 감
듯 조조의 군사들이 산을 감고 있었다.
관우가 갑옷을 조여 맨 후 군사와 무기를 정돈하여 산 아래로 군사를 이끌려
할 때였다. 문득 말을 달려 산 위를 오르는 사람이 보였다. 관우가 눈을 부릅떠
그를 살펴보니 바로 장요가 아닌가. 관우는 그를 보고 소리쳤다.
"문원이 나와 맞서겠다는 것인가?"
관우와 장요는 싸움터에서 만나 적이면서도 서로 경모의 마음을 갖고 있는 사
이였다. 조조에게 사로잡혀 죽게 되었을 때도 관우가 조조에게 청해 그를 살려
주었던 터였다. 그러나 관우는 그가 이미 조조 수하의 장수이므로 경계의 마음
을 늦추지 않은 채 그를 노려보았고, 장요는 칼을 말 아래로 던지며 말했다.
"아닙니다. 지난날의 정을 생각하여 특별히 형을 뵈러 온 것입니다."
관우는 그가 칼을 던지며 조용히 말하자 굳었던 얼굴을 누그러뜨리며 그를 맞
았다. 서로 예를 나누자 관우는 자리를 마련해 함께 앉았다.
"나에게 항복을 권하러 온 것이오?"
"아니오. 지난날 형께서 나를 구해 주셨는데 어찌 내가 형이 곤경에 처한 것
을 보고 가만히 있을 수 있겠습니까?"
"그럼 어찌하여 이곳으로 왔다는 말이오?"
관우가 언성을 높이며 그를 노려보자 장요는 부드러운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형께서도 이미 아시겠지만 현덕 공도 익덕도 행방이 묘연한 채 생사를 알 길
이 없습니다. 지난 밤에 조 공께서 이미 하비성을 손에 넣으셨으나 군사나 백성
들은 하나도 해하지 않았습니다. 또한 현덕 공의 가솔들에게는 호위병까지 붙여
보호하고 있습니다. 형께 이 일을 알려드려 형의 근심을 덜어 드리고자 이렇게
온 것입니다."
듣고있던 관우가 문득 눈을 부릅뜨더니 언성을 높였다.
"그렇다면 역시 항복을 권유하려 온 셈이구나. 비록 위급한 처지에 놓여 있다
하나 목숨을 아까워할 내가 아니다. 그대는 급히 이곳을 떠나라. 나는 내려가
죽기를 작정하고 조조와 싸우겠다."
그러자 관우의 부릅뜬 눈을 보고 장요가 껄껄 웃었다.
"하하하, 형의 말대로 한다면 형은 세상 사람들에게 두고두고 웃음거리가 될
거요."
"충의를 위해 죽는 것이 어찌하여 웃음거리가 된다는 말인가?"
"만일 여기서 싸우다 죽으면 형은 세 가지의 죄를 짓는 것이오."
"죄가 셋이나 된다고? 그게 무슨 말인가?"
관우는 노한 가운데에도 장요의 말을 되물었다. 장요가 이때를 기다렸다는 듯
조용히 말을 이었다.
"형께서 싸우다 죽은 뒤 현덕 공이 아직 살아 있다면 어떻게 하시겠소? 그렇
게 되면 형께서 도원의 결의를 어기는 결과가 되고 말 것이오. 형께서는 생사를
함께 하기로 맹세하지 않았습니까? 그 맹세를 어기는 죄가 첫번째 죄요, 둘째로
는 현덕 공의 가솔은 형께서 돌보기로 하셨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죽음을 맞는
다면 현덕 공의 두 부인은 어찌 될 것입니까? 이는 현덕 공의 믿음을 저버리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그 두 번째가 될 것입니다. 또 하나는 형께서는 무예가
출중하고 경전과 사서에도 밝으십니다. 그런 무예와 학문을 지녔으면서도 현덕
공을 도와 한실을 받들어 쓰러져 가는 사직을 바로잡고 조정의 위급함을 도우려
하지 않음입니다. 헛되이 필부처럼 자기 한 몸만을 생각하며 물불을 가리지 않
고 뛰어드시려 하니 이를 어찌 충절이라 할 수 있으리오. 이 또한 죄가 되고도
남음이 있습니다. 형께서 이와 같이 죄를 범하려 하시니 이 아우가 답답하여 말
씀드리는 것입니다."
관우는 머리를 숙인 채 한동안 생각에 잠겨 있었다. 뜻밖에 그가 나타나 한
말을 되씹어 보니 모두 옳은 말이었다. 또한 그의 말 속에는 우정어린 진정이
차 있었다. 관우가 이윽고 장요를 보며 물었다.
"그대는 내게 세 가지의 죄를 말했소. 그러면 어떻게 해야 내가 그 죄를 짓지
않을 수가 있겠소?"
"형께서 보시다시피 사방이 조 공의 군사로 뒤덮여 있습니다. 그들과 싸운다
면 죽는 길밖에 없습니다. 그것은 결코 의로운 죽음이 되지 못하니 차라리 항복
하여 뒷날을 도모하는 것이 어떻습니까? 그렇게 하면 세 가지 이로운 점이 있습
니다. 일단 조 공에게 항복했다가 유현덕공의 소식을 알게 되거든 그리로 가십
시오. 그것이 한 가지 이로움이요, 또한 두 부인도 무사히 보호할 수 있으며 삼
형제의 맹세도 지킬 수 있으니 이것이 두 번째 이로움입니다. 뿐만 아니라 세
번째는 큰 일을 위해 몸을 바칠 수가 있으니 세 가지 이로운 점이란 바로 이것
입니다."
장요의 말에 관우가 고개를 끄덕이며 잠시 생각에 잠겼다. 이윽고 관우가 입
을 열었다.
"그대가 내게 세 가지 이로운 점을 말하니 그렇다면 나도 세 가지 조건을 내
놓겠소. 승상이 이 세 가지 약속을 지키겠다고 하면 나는 갑옷을 벗고 항복하겠
소. 그러나 이를 지키지 못하겠다면 차라리 세 가지 죄를 짓더라도 싸우다 죽겠
소."
"승상께서는 도량이 넓으시니 기꺼이 받아들이실 것입니다. 바라건대 그 세
가지 조건을 말씀해 주십시오."
장요는 관우가 세 가지 조건을 내걸자 밝은 얼굴로 물었다. 일단 관우의 입에
서 그 정도의 말을 이끌어 낼 수 있게 된 것이 반가웠다.
"첫째, 나와 유 황숙은 쓰러져 가는 한실을 바로잡기로 했으니, 나는 한나라
의 황제에 항복하는 것이지 조조에게 하는 것이 아니오. 둘째는 두 부인에게 유
황숙의 봉록을 그대로 내려야 하고 지위의 높고 낮음을 떠나 외부인의 출입을
삼가야 하오. 세 번째는 유 황숙이 계시는 곳을 알게 되면 천리 만리를 가리지
않고 즉시 그곳으로 달려갈 것이오. 이상 세 가지 중에서 단 한가지라도 지킬
수가 없다면 나는 결코 항복하지 않을 것이오. 그대는 승상께 이 말을 전하고
그 회답을 내게 알려 주시오."
장요는 관우의 말을 듣자 '그렇게 하겠노라'며 곧장 산 아래로 말을 달려 조
조에게 관우의 말을 전했다.
"황제께 항복하는 것이지 승상께 항복하지 않는다는 것이 첫째 조건이었습니
다."
조조가 껄껄 웃으며 말했다.
"내가 한의 승상이니, 내가 바로 한나라이다. 그 일은 어려울 것이 없다."
"두 부인에게 유 황숙의 봉록을 내리고, 아무도 그 문앞을 출입하지 말라는
것이 두 번째 조건입니다."
"봉록은 내가 배를 더해 주겠다. 또 외부인의 출입은 지금도 엄히 막고 있으
며 가법을 지키게 하고 있으니 더 이상 말할 필요가 없다. 그러니 다음 세 번째
조건이 뭔지 말하라."
조조는 장요에게 세 번째 조건을 재촉했다.
"유현덕이 어디 있는지 알기만 하면 아무리 멀어도 반드시 그를 쫓아 가리라
고 했습니다."
장요가 세 번째 조건을 말하자 조조는 금세 얼굴이 굳어지며 고개를 가로저었
다.
"그렇다면 관운장을 내 곁에 두는 의미가 없지 않은가?"
조조가 이렇게 말하자 장요는 생각해 둔 말이 있는 듯 입을 열었다.
"승상께서는 옛날 진나라의 예양이 한 말을 잊으셨습니까? 그는 '주군이 나를
평범한 사람으로 대하면 나 또한 평소의 예로 대할 것이며 그렇지 않고 국사(나
라에서 쓰는 선비)로 대하면 나 또한 국사가 되어 갚으리라'고 하였습니다. 유
현덕이 관운장에게 대하는 것보다 승상께서 더 두터운 은의를 베푸시면 관운장
이 어찌 승상을 따르지 않겠습니까?"
장요가 그렇게 조조를 설득하자 조조는 고개를 끄덕이더니 얼굴이 다시 밝아
졌다.
"그대의 말이 옳소. 내 세 가지 조건을 다 들어 주겠다고 하시오."
장요는 조조의 승낙을 받자 곧 산으로 말을 달렸다. 장요는 관우에게 조조가
세 가지 약조를 조건 없이 받아들였다고 전했다. 관우는 그가 내세운 조건을 받
아들인 조조에게 고마움을 표시하기는커녕 다시 입을 열어 청했다.
"그러면 승상은 군사를 거느려 잠시 물러나라 하시오. 내가 가서 두 형수를
뵈옵고, 이 일을 고한 연후에 항복하겠소."
장요가 조조에게 돌아가 이 말을 전했다. 항복하는 자가 군사를 물리라고 하
니 그건 마치 명령을 하는 것이나 다름없는 무리한 청이 아닐 수 없었다. 그러
나 조조는 군사들에게 영을 내려 10리 밖으로 물러나도록 했다. 순욱이 이를 보
자 조조에게 만류했다.
"아니 됩니다. 관운장이 우리에게 속임수라도 쓰시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그러나 조조는 태연히 말했다.
"관운장은 의가 깊은 사람이니 결코 속임수를 써서 달아나지는 않을 것이오.
또 그럴 위인이라면 도망가도 아까울 게 없지 않소?"
조조는 군사를 10리 밖으로 퇴각시켰다. 조조가 군사를 물리자 관운장은 군사
를 이끌고 하비성으로 들어갔다.
관우는 백성들이 동요 없이 안온한 것을 보자 곧장 부중으로 들어갔다. 감.미
두 부인은 관운장이 왔다는 소식을 듣고 황급히 그를 맞이했다. 관우는 계단 아
래에 엎드려 절했다.
"두 분 형수님을 놀라게 한 죄가 큽니다."
두 부인은 한동안 눈물을 짓더니 관우에게 물었다.
"황숙께서는 어디 계십니까?"
"송구스럽게도 아직 어디 계신지를 알지 못했습니다."
"그럼 큰아주버님은 앞으로 어떻게 하실 작정이십니까?"
관우는 두 형수에게 지난 밤에 있었던 일을 들려 주었다.
"저는 성 밖으로 나가 죽기를 각오하고 싸웠으나 그들에게 쫓기는 몸이 되었
습니다. 마침내 작은 토산으로 몰려 최후의 일전을 준비하고 있던 중 적장 장요
가 와서 항복을 권했습니다. 저는 세 가지 조건을 내걸었습니다. 조조는 그 조
건을 전부 들어 주었고, 두 형수님을 만나겠다 하니 군사까지 물려 주었습니다.
그러나 아직 두 형수님의 뜻을 듣지 않은 터라 조조에게 가기 전에 먼저 이렇게
뵈러 온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 세 가지 조건은 무엇이었습니까?"
감.미 부인이 관우에게 물었다.
관우가 조조에게 내걸었던 세 가지 조건과 나머지 일들을 자세히 전하자 감.
미 부인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어젯밤 조조의 군사들이 성 안으로 들어왔을 때 우리는 죽음을 각오하고 있
었습니다. 그러나 집 안으로 군사 하나 들지 않았으며 조금도 해하려는 기색이
없었습니다. 큰 아주버님이 앞뒤를 살피시어 하신 일을 저희에게 물을 것까진
없습니다. 다만 조조에게 몸을 맡기면 설령 황숙의 거처를 알게 된다 하더라도
따라갈 수 없게 되지 않을까 그것이 걱정입니다."
두 부인은 그것이 끝내 염려가 되는 듯 정색을 하며 걱정스런 얼굴로 관우를
바라보았다.
"그 일은 결코 염려하지 마십시오. 그때는 제게 생각이 있습니다. 제가 두 분
형수님을 모시고 가서 황숙을 뵙게 해 드리겠으니 그때까지 참고 기다려 주시기
바랍니다."
관우는 단호하게 말하며 두 부인을 안심시켰다. 그러자 두 부인은 관우의 지
극한 정성에 감복하며 말했다.
"그렇다면 우리는 염려 마시고 알아서 처결하십시오. 우리 같은 아녀자에게
물으실 필요가 없습니다."
감 부인과 미 부인의 그 같은 말을 듣자 관우는 이윽고 잔병 10여 기를 거느
리고 조조의 진문을 찾아갔다. 관우가 항복하기 위해 진으로 온다는 소식을 듣
자 조조는 몸소 원문 밖으로 나와 그를 마중했다.
조조의 파격적인 후대에 관우가 당황할 정도였다. 관우는 말에서 내려 절하며
말했다.
"패군지장을 죽이지 않고 맞아 주시니 그 은혜에 감사할 따름입니다."
조조가 황망히 답례를 했다.
"평소부터 관 공의 충의를 흠모해 왔던 바요. 오늘 다행히 이렇게 만날 수 있
게 되었으니 평생의 바람이 헛되지 않았소이다."
"문원이 대신하여 세 가지 약조를 당부하였고, 또한 승상이 쾌히 허락하셨다
하오니 승상께서는 약조를 지켜 주시기 바라겠습니다."
관우는 조조에게 다시 세 가지 약조에 대해 언급했다. 직접 다짐을 받아 두기
위해서였다.
"내가 이미 승낙을 하였소. 어찌 신의를 저버릴 수 있겠소."
조조가 잘라 말했다.
"머지않아 황숙께서 계신 곳만 알게 되면 저는 즉시 떠나겠습니다. 불을 밟고
물을 건너는 한이 있더라도 그때는 승상 곁에 머물러 있을 수 없을 것입니다.
그때 뵙지 않고 떠나더라도 허물치 마십시오."
"유현덕이 살아 있다면 공을 보내 드리겠소. 다만 전란 중에 혹 목숨이라도
잃지 않았는지 걱정이오. 관 공은 마음을 넓게 먹고 천천히 수소문해 보도록 하
오."
조조는 조용히 그렇게 말했으나 씁쓸한 감정은 감출 수 없는 듯 얼굴이 굳어
있었다. 그 씁쓸한 감정을 지워 버리기 위해서인지 조조는 관우를 이끌며 힘차
게 말했다.
"자, 저쪽 후원에 주연 준비가 되어 있소. 이리로 오시오."
조조는 앞장 서서 잔치 자리로 인도했다.
다음 날이 되자 서주지방을 평정한 조조는 허도 개선길에 올랐다. 관우는 두
형수를 수레에 모시고 자신이 거느렸던 사졸 20여 명과 함께 잠시도 수레 곁을
떠나지 않고 행렬을 뒤따랐다.
허도로 가는 도중 날이 저물면 역관에서 묵어가곤 했다. 그럴때마다 조조는
두 부인과 관우를 한 방에서 자게 했다. 아직 젊고 아름다운 두 부인과 풍채가
좋은 관우가 한 방에서 기거하는 동안 남녀로서 어울리기를 은근히 고대했기 때
문이다. 그렇게 되면 유비와 관우는 군신의 예를 벗어나게 되고 그로 인해 둘
사이가 틀어지게 될 것을 바랐던 조조였다.
그러나 관우는 방 밖에다 촛불을 밝힌 다음 초저녁부터 이튿날 날이 밝을 때
까지 문 밖에 시립해 있었다. 밤을 새우고도 지치거나 싫증을 내는 기색이 조금
도 없었다.
조조는 관우의 그러한 성품에 감복하여 전보다 더욱 공경하는 마음을 품게 되
었다.
허도로 오자 조조는 관우에게 저택을 주어 거처하게 했다. 관우는 그 저택을
두 집으로 나누어 안채에는 두 부인을 모셨고, 바깥채에는 자신과 사졸들이 기
거하며 두 부인을 보호했다. 관우는 한가한 틈을 타 책을 읽으며 틈틈이 저택을
둘러보기도 했다.
조조는 허도로 돌아온 후 일단 그 동안 밀려 있던 조정의 일을 정리하기 시작
했다. 정치에 대해서도 남다른 정열을 기울여 대처했다.
그즈음 허도를 중심으로 한 새로운 문화가 꽃피고 있었고 백성들의 생활도 점
차 윤택해져 가고 있었다. 산업과 농정의 개혁으로 백성들의 복리가 현저하게
증진되고 있었다.
겨우 정무도 일단락을 짓고 틈이 생기자 조조는 시신을 불러 관우의 동정을
물었다.
"두 부인의 거처만 지키고 계십니다. 가끔 저택 밖을 지나는 사람이 들여다보
면 책을 읽고 있는 모습이 보인다고 합니다."
시신이 관우의 근황을 말하자 조조는 고개를 끄덕이며 혼자 중얼거렸다.
"영웅의 심정, 그 얼마나 번민이 많을 것인가."
조조가 관우의 근황을 물은 며칠 후였다. 조조는 관우에게 입궐하는 수레에
함께 타자고 권했다. 조정으로 들어간 조조는 관우에게 천자를 뵈옵게 했다. 관
우는 계하에서 천자에게 엎드려 절을 올렸다. 천자도 관우의 이름을 알고 있었
고, 더욱이 항상 마음에 두고 있는 유 황숙의 의제라고 아뢰니 각별히 눈여겨보
면서 분부하였다.
"미더운 장수이오. 합당한 관직을 주도록 하오."
조조의 주선으로 관우는 그 자리에서 편장군에 임명되었다.
관우는 시종 묵묵히 천자의 은혜에 감사하며 물러 나왔다.
다음 날 조조는 관우가 편장군의 벼슬을 받은 것을 축하하는 잔치를 베풀었
다. 이 잔치에 관우를 상빈의 자리에 앉히는 예를 갖추어 관우로 하여금 여러
장수와 모사들을 보게 했다.
잔치가 끝나자 조조는 일부러 근신 몇에게 분부했다.
"관 공을 모셔다 드리게."
조조는 비단과 금은 그릇과 패물들을 관우에게 실어 보냈다. 그러나 관우는
그 어는 하나도 자기가 갖지 않고 모두 두 부인에게 바쳤다.
조조는 나중에 이 말을 듣고 더욱더 관우의 곧은 마음에 감복했다.
관우에 대한 그의 경애와 아끼는 마음은 날로 깊어 갔다. 사흘을 걸러 작은
잔치요, 닷새마다 큰 잔치, 이런 식으로 향응의 기회를 만들며 관우와 만나는
것을 낙으로 삼았다. 무장이 훌륭한 무인을 흠모하는 정도를 나타내는 말로 '말
을 타면 금을 주고 말에서 내리면 은을 선사한다'는 비유가 있다. 조조의 관우
에 대한 흠모는 그에 비할 바 아니었다.
조조는 이어 허도 안에서 고르고 또 고른 미녀 10명에게 요염한 아양을 떨게
하며 은근히 얼렀다.
"관 공만 설복하면 너희들 소원을 모조리 들어 주마."
관우도 싫지는 않은 듯 보기 드물게 대취하여 가가대소했으나 술이 깨자 곧
10명의 미인도 모두 두 부인의 시중을 들게 했다.
어느 날 관우가 불쑥 승상부에 나타났다. 두 부인이 기거하는 저택에 비가 새
니 손 좀 봐 달라고 관리에게 부탁을 하러 온 것이었다.
"알겠습니다. 곧 승상께 말씀드려서 수리해 드리지요."
관리에게 대답을 듣고 관우가 천천히 돌아가는 것을 조조는 흘깃 누대에서 보
았다.
"관 공이 아닌가?"
조조는 근신에게 관우를 불러 오게 하여 손수 잔을 들어 술을 권했다. 조조는
관우가 입고 있는 전포가 닳아 해진 것을 보았던 터라 술자리에서 마련해 둔 전
표를 그에게 주며 말했다.
"장군이 입고 계신 녹색 전포가 낡았소이다. 날씨가 화장해지니 남루한 것이
눈에 띕니다. 이것을 입도록 하십시오. 관 공의 치수에 맞게 맞추어 놓은 것이
오."
조조가 준 전포는 화려한 비단 전포였다.
"허-, 이건 너무 호사스럽군요."
관우는 비단 전포를 받아 한 손으로 들고 돌아갔다. 그런데 다음 날 조조가
문득 관우의 옷을 보니 자기가 준 비단 전포는 안에다 입고 겉에는 여전히 넝마
같은 녹색 전포를 입고 있었다.
"새 옷을 아끼느라 헌 전포를 껴입으시다니 운장은 어찌 그리 검소하시오?"
조조가 웃으며 묻자 관우는 자기의 소매를 흘깃 내려다보며 말했다.
"네, 이것은 일찍이 유 황숙께서 주신 전포입니다. 비록 누더기가 되었지만
조석으로 이것을 입고 벗을 때마다 황숙과 친히 만나는 것 같아 마음이 편안합
니다. 승상께서 좋은 옷을 주셨으나 황숙이 주신 옷도 버릴 수가 없어 그래서
껴입고 있습니다."
관우의 말에 조조는 감탄했다.
"관 공은 참으로 의로운 사람이오."
조조는 입으로는 그렇게 칭찬을 했으나 마음은 씁쓸하기 그지없었다.
'도대체 어떻게 해야 운장의 마음을 내게로 돌릴 수 있다는 말인가. 실로 의
형제의 정이 두텁기가 끝이 없구나.'
조조는 속으로 이렇게 탄식하고 있었다. 그때 두 부인의 시중을 들고 있는 안
채에서 사람이 와 아뢰었다.
"두 부인께서 슬피 울고 계십니다. 관 공께서 들어가 보셨으면 합니다."
"무슨 일이 생겼느냐?"
"까닭을 알 수가 없습니다."
관우는 그 말을 듣자마자 함께 얘기를 나누고 있던 조조에게 한 마디 인사도
없이 달려가 버렸다.
본디 이런 무례한 짓을 당하고 가만히 있을 조조가 아니었으나 혼자 앉아 망
연히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실로 충직한 충의지사이다. 아첨도 없고 가식도 없는 오로지 충의 그 일념뿐
이로구나. 어떻게 해서든 저런 인물을 심복으로 만들고 싶다."
조조는 마음 속으로 자기와 유비를 비교해 보았다. 어느 점으로 봐도 유비보
다 못한 것은 없었으나 다만 한 가지 관우만한 충신이 있는지 없는지를 반문해
보았다. 그러나 그것만은 유비에게 '미치지 못한다'고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
다. 유비에 대한 부러움보다 차라리 시샘과 미움이 까닭 없이 일었다.
'기어이 관우를 내 덕으로써 복종시키고야 말리라.'
한편, 두 부인의 부름을 받은 관우는 헐레벌떡 집으로 돌아왔다. 안채로 드니
두 부인이 서로 얼싸안고 아직껏 울고 있었다.
"어인 일로 이렇게 슬피 우십니까?"
관우가 물으니 감 부인과 미 부인은 비로소 옷매무새를 고친 후 눈물을 닦으
며 말했다.
"내가 간밤에 유 황숙께서 깊은 함정 속에 빠져 있는 꿈을 꾸었습니다. 잠을
깨어 미 부인과 얘기해 보니 아무래도 황숙은 이 세상에 계시지 않은 것 같습니
다. 아마도 그 함정은 황숙께서 돌아간신 것을 뜻하는 것이 아닌가 생각하니 흐
르는 눈물을 막을 길이 없사옵니다."
"무슨 일인가 했더니 꿈을 꾸시고서 유 황숙을 걱정하시는군요. 어떤 흉몽도
꿈은 어디까지나 꿈에 불과합니다. 이는 틀림없이 형수님께서 평소 지나치게 형
님을 염려하신 나머지 꿈까지 꾸시게 된 것입니다. 너무 근심하지 마십시오."
관우는 두 부인의 슬픈 마음을 달래느라 짐짓 너털웃음까지 지어 가며 말했
다. 아무리 정중하게 예우를 받으며 어떠한 속박도 없이 살고 있다지만 어쨌든
여기는 적국의 수도였다. 두 부인이 꿈을 꾸고 소스라쳐 운다고 그 어린 마음을
탓할 수가 없는 관우였다.
"조금만 더 참으십시오. 맹세코 머지않아 황숙을 만나실 수 있도록 이 관우가
힘쓰겠습니다. 그날까지만 고생하신다 생각하시고 아무쪼록 두 형수님께서는 몸
조심하시기만 바랍니다."
관우는 좋은 말로 두 형수를 달래었다. 관우는 두 형수를 달래는 동안 스스로
도 슬픔을 이기지 못하여 끝내 눈물을 쏟고 말았다.
뜰에 어느 새 조조의 근신이 들어와 있었다. 관우가 안채로 황망히 들어갔고,
또 두 부인이 관우를 불렀으므로 조조도 의아하게 여겨 동정을 살피려 한 것이
었다.
관우가 조조의 군신과 마주치자 근신은 당황해하며 절을 올리더니 말을 꺼냈
다.
"볼일이 끝나시면 바로 오시라는 말씀을 전하러 왔습니다. 승상께서 술상을
준비하고 기다리고 계십니다."
관우는 두 형수께 하직하고 다시 승상부의 관저로 돌아갔다.
"자리를 떠서 결례를 했었습니다."
"오늘은 장군과 함께 밤새도록 마시고 싶소."
"다시없는 영광입니다."
술을 마셔도 마음이 즐겁지 않고 조조를 대하고 있는 동안에도 유비를 잊지
못하는 관우였다. 그러나 여기서 조조의 기분을 더욱 상하게 했다가는 이롭지
못하리라 여겨 태연히 술잔을 받고 있는데 눈이 충혈되고 눈시울이 젖어 있는
걸 본 조조가 놀라 물었다.
"관 공께서는 눈물을 흘린 모양이구려."
"두 분 형수님께서 유 황숙을 근심하여 슬퍼하시기에 저도 그만 슬픔이 일었
나 봅니다."
감추지 않고 관우는 그렇게 솔직히 얘기했다. 조조는 관우에게 유비를 잊게
하기 위해 주연을 베풀었는데 그 자리에서 관우가 또 유비 얘기를 꺼내자 심사
가 뒤틀렸다. 그러나 조조는 불편한 마음을 억누르고 관우를 위로하며 연거푸
술을 권했다.
"관 공께선 이 술을 드시고 마음을 달래도록 하시오."
술이 거나하게 취했을 때였다. 관우는 수염을 쓰다듬으며 탄식했다.
"살아서 나라를 위해 제대로 큰 일 한 번 해 보지 못하고, 이제 형님과 함께
죽기로 했던 맹세까지 저버렸구나. 어찌 얼굴을 들고 살아갈 수 있으리오."
관우는 술을 마실수록 시름이 커지고 울적해질 뿐이었다. 조조는 관우의 말에
더욱 불쾌해졌다. 처음부터 편치 않았던 마음을 억누르고 그를 위로해 주는데도
관우가 감사해하기는커녕 또 유비 이야기를 꺼냈기 때문이었다. 조조는 다시 한
번 화를 억누르며 짐짓 그 말을 못 들은 체하고 관우가 쓰다듬는 수염을 보며
말머리를 돌렸다.
"관 공의 수염은 정말 길고 아름답소. 운장의 수염은 몇 개나 되오?"
관우의 수염은 유명했다. 길고 아름다운 그의 턱수염은 이 허도에서도 소문이
자자했다.
"아마 이 허도에서 으뜸 가는 멋들어진 수염일걸."
허도 사람들은 관우의 수염을 보고 이렇게 말하곤 했다.
조조가 관우의 수염을 칭찬하자 그도 그 말에는 즐거운 듯 수염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허허, 일어서면 수염끝이 허리를 덮으니, 잘은 몰라도 수백근은 되겠지요.
가을이 되면 대여섯 올씩 묵은 털이 빠집니다. 겨울이 되면 털의 윤기가 메마르
는 듯합니다. 그래서 엄동설한에는 얼지 않도록 주머니에 넣고 지내다가 손님을
대할 때는 주머니를 풀어 놓습니다."
어색해질 뻔했던 분위기가 수염 이야기로 밝아지자 조조도 유쾌히 웃었다.
"관 공은 수염을 매우 소중히 가꾸시는구려. 공이 취하면 수염도 술로 씻은
듯이 윤기가 흐르오. 지금이 마침 겨울이니 내가 비단 수염 주머니를 하나 지어
드리겠소."
다음 날, 입궐할 일이 있어 조조는 관우를 동반하였다. 조조는 어저께 약속한
비단 주머니를 그에게 선사하였다.
천자가 보니 관우가 비단 주머니를 가슴에 매달고 있으므로 이를 이상히 여겨
물었다.
"가슴의 주머니는 무엇인가?"
관우가 주머니를 끌러 보이며 아뢰었다.
"신의 수염이 너무 길어 승상께서 친히 비단 주머니를 내렸습니다."
헌제가 그 수염을 유심히 보았다. 남달리 장대한 대장부의 배 아래까지 내려
온 칠흑처럼 검고 긴 수염을 보자 헌제도 미소지으며 감탄했다.
"실로 아름다운 수염이오. 그대는 미염공이오."
천자가 그렇게 말하자 그 후부터 뭇 사람들은 관우를 미염공이라 부르기 시작
했다.
또 하루는 연회가 끝난 후 조조가 몸소 관우를 배웅했다. 그때 문득 조조가
관우의 늙고 야윈 말을 보고 그 까닭을 물었다.
"공의 말이 어찌하여 이렇게 야위었소?"
"워낙 제 몸이 무거워 말이 제 무게를 이기지 못합니다. 그래서 이렇게 여윕
니다."
조조가 그 말을 듣더니 시신을 시켜 말 한 필을 끌고 오게 했다. 온몸이 불길
처럼 붉은데다 체구가 크고 힘차 보이는 말이었다.
"미염공, 이 말을 본 기억이 있으시오?"
관우는 그 말을 넋을 잃고 바라보다 이윽고 무릎을 쳤다.
"이 말은 여포가 타던 적토마가 아닙니까?"
"그렇소."
"아니 이 귀한 말을 제게 주시려 하십니까?"
조조가 말 안장과 고삐를 갖추어서 관우에게 주었다. 관우는 거듭 절하며 고
마움을 표하였고, 얼굴에는 희색이 만면했다. 일찍이 그가 이처럼 기뻐하는 것
을 본 적이 없는 조조였다. 조조가 웃으며 물었다.
"미녀 열을 보내고 금은보화를 보내도 이처럼 여러 번 절하며 사례한 적은 없
었소. 그런데 어찌하여 사람도 아닌 한낱 짐승 한 마리에 그토록 기뻐하시오?"
그러자 관우는 조금도 주저함이 없이 대답했다.
"저는 이 말이 하루에 천 리를 간다고 들었습니다. 오늘 다행히 이 말을 얻었
으니 형님의 거처를 알게 되었을 때는 단숨에 달려가 뵈올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 어찌 기쁘지 않겠습니까?"
조조는 관우의 말에 놀라며 후회하였다. 그의 마음을 사로잡으려고 그토록 두
터이 대하며 정성을 베풀었는데 그에게는 아무런 소용이 없지 않은가. 유유히
적토마를 이끌고 가는 관우의 뒷모습을 보며 조조는 지그시 입술을 깨물고 있었
다. 어떠한 근심도 지나치게 얼굴에 드러내지 않는 조조였으나 그날만은 진종일
침울하였다.
뒷날 사람들이 관우의 충절을 시로 지어 기렸다.
기울어져 가는 3국에 영웅이 나타났네.
두 군데로 나뉘어졌어도 의기만은 드높아라.
간교한 승상과 장수는 거짓으로 대하는데
어찌 운장의 거짓 항복 조조가 알 수 있으랴.
그 일이 있은 지 며칠 후 조조는 장요를 불렀다.
"내가 운장을 그토록 후히 대접했는데, 그는 늘 현덕만을 생각하고있으니 어
찌 된 일이오?"
장요는 관우를 달래 데려온 이래 조조가 번번이 뜻을 이루지 못하고 있음을
알고 있어 송구스런 맘뿐이었다.
"제가 가서 그의 뜻을 살피고 오겠습니다."
조조가 승낙하자 장요는 며칠 후 관 공을 찾아갔다.
"제가 형님을 승상께 천거했습니다만 이제 허도 생활도 어는 정도 안정이 되
셨겠지요?"
이런 얘기 저런 얘기를 주고받다가 장요는 슬며시 관우의 마음을 떠보았다.
그러자 관우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공의 우정이나 승상의 호의는 마음 속에 깊이 새기고 있지만 마음은 항상 유
황숙 곁에 있소. 여기 있는 이 관우는 매미의 허물일 뿐이오."
"허허..., 대장부는 무릇 사소한 일에 구애되지 말고 무겁고 가벼운 것을 가
려 처신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유 황숙께서도 결코 승상 이상으로 형을 대우하
지 않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어찌하여 형께서는 떠날 생각만을 하고 계십니
까?"
"승상의 높은 은혜는 잘 알고 있소. 그러나 그것은 모두 귀한 물건을 주는 형
식으로밖에 나타나지 않았소. 이 관우와 유 황숙의 맹세는 물질적인 것이 아니
라 마음과 마음에서 우러난 것이었소."
"아니 그렇지 않습니다. 조 공 역시 마음에서 우러난 진정이었습니다. 형을
흠모하는 마음은 결코 현덕 공에게 견주어 뒤지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유 황숙과 나는 생사를 맹세한 사이이며 또한 두터운 은의를 입었는
데 어찌 저버릴 수가 있겠소. 그렇다고 승상의 은의를 저버리는 것도 무인의 도
리가 아니오. 반드시 응분의 공을 세워 오늘의 은혜에 보답한 연후에 떠날 것이
오."
"그럼... 만약 현덕 공이 이 세상 사람이 아닐 때에는 어떻게 하시겠소?"
"황천에라도 따라가겠소."
장요는 관우의 철석 같은 마음을 움직이게 할 수 없음을 깨달았다. 장요는 관
우와 작별하고 돌아와 숨김없이 조조에게 고했다.
"승상의 높으신 은혜는 마음에 새기고 있으나 그렇다고 마음을 돌려 두 주군
을 받들 생각은 추호도 없다 하였습니다. 그러나 떠나더라도 반드시 승상께 공
을 세워 은혜에 보답한 연후에 떠난다 하였습니다."
장요의 말을 들은 조조는 길게 탄식하며 말했다.
"주인을 섬기되 그 근본을 잊지 않으니 그는 진실로 천하의 의사이다. 그가
떠나감을 막을 수 없음이 안타깝구나."
곁에 있던 순욱이 조조에게 꾀를 내어 아뢰었다.
"관 공은 승상께 공을 세워 은혜를 갚은 후에 떠난다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그에게 공을 세울 기회를 주지 않는다면 그는 떠날 수도 없을 것입니다."
조조는 순욱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조정의 권세를 마음대로 휘두르는 조조였으나 관우를 휘하로 만드는 일만은
그의 뜻대로 되지 않았다.
천신 같은 관운장 안량.문추의 목을 베다
유비와 관우가 서로의 행방을 모르는 채, 관우는 조조군의 출전 장수로 싸움
터에 나와 원소군의 장수 안량.문추의 목을 벤다. 이에 유비는 원소의 의심을
받지만 간신히 위기를 넘기고, 관우에게 보낼 서신을 쓰나 전달하기가 여의치
않다.
유비는 하북의 수도 기주성에 몸을 의탁한 후 상객의 예우를 받으며 불편 없
이 지내고 있었다. 그러나 그의 심기는 한시도 편한 날이 없었다.
'나의 처자는 어찌 되었을까? 나의 두 의제는 어떻게 되었는가?'
안부를 알 길 없는 의제와 가솔들에 대한 근심으로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위로는 나라에 충성을 다하지 못하고 이 한 몸만 편히 있다니... 참으로 부
끄럽구나.'
유비는 등불 아래에서 쓰라린 마음을 주체하지 못하고 얼굴을 가린 채 밤을
새우는 날이 허다했다. 햇볕은 만물에 생기를 불어넣어 봄동산의 복숭아꽃과 오
얏꽃은 붉은 꽃봉오리를 터뜨리고 있었다. 복숭아꽃이 핀 것을 보니 가슴은 더
욱 무너지는 듯했다. 지난날 도원에서 맺었던 삼형제의 의맹이 떠올랐기 때문이
었다.
우러러보니 한 점의 봄 구름이 한가롭게 떠 있었다. 유비는 멍하니 무심한 하
늘을 응시하고 있었다. 그때 어느 새 그에게 다가왔는지 원소가 넋을 잃고 있는
유비를 향해 물었다.
"공은 어찌하여 얼굴에 그토록 수심이 가득하오?"
"의제들의 소식도 알 수 없으며 아내와 가솔들이 역적 조조에게 붙들려 있습
니다. 위로는 나라에 보답하지 못하고 아래로는 내 집안조차 보호하지 못하고
있으니 어찌 근심이 없겠습니까?"
유비의 말에 원소가 입을 열었다.
"공께 의논할 일이 있는데 기탄없는 의견을 주시겠소?"
"예, 짧은 소견이지만 그렇게 하지요."
"실은 자식놈의 병도 나았고, 산과 들의 눈도 녹았으니 다년간 숙원하였던 허
도로 군사를 일으켜 일거에 조조를 무찌를 결심을 했소. 그런데 신하인 전풍이
나에게 간하기를 지금은 공격보다 수비를 해야 할 시기라고 하오. 지금의 기주
를 지키며 군마를 조련하고 산업을 권장하며 기다리라는 것이오. 그러면 조조는
2,3년 사이에 반드시 파탄을 일으켜 자멸할 것이니 그때를 기다려 조조를 치자
는 것이오. 공은 이 말을 어떻게 생각하시오?"
원소는 자식의 병이 다 나았다는 말과 함께 쑥스러운 얼굴로 이렇게 물었다.
"때는 지금이라 믿습니다. 그 까닭은, 물론 조조의 군마는 날래고 그가 군사
를 부리는 솜씨는 뛰어납니다. 그러나 최근에는 그도 자만에 넘쳐 조정의 중신
들과는 소원해지고 있습니다. 특히 얼마 전에는 국구 동승 이하 수백 명을 허도
의 거리 한복판에서 참수시킨 일도 있어 민심도 그에게서 떠나고 있습니다. 명
공께서 그런 역적을 토벌하시지 않으면 대의를 잃게 될까 두렵습니다."
유비는 이렇게 말하며 전풍의 말에 귀가 솔깃해져 결단을 내리지 못하는 원소
를 충동질했다.
원소가 잠시 생각에 잠기는 사이 유비가 다시 말을 이었다.
"유생(유교를 닦는 선비)의 의견에 솔깃하여 지금의 기회를 놓치신다면 그 후
환은 백 년에 이어질 것입니다."
유비가 거듭 조조의 정벌을 부추기자 원소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공의 말씀이 옳소! 곧 군사를 일으키도록 하겠소."
원소는 마침내 허도 정벌를 위한 군령을 내렸다. 그러나 전풍은 다시 원소를
만류했다.
"아니 됩니다. 조조의 병력이 점점 막강해지고 있는 이때 허도를 정벌한다면
이기기가 어렵습니다. 때를 기다려야 합니다."
원소는 전풍의 말에 울컥 화를 내었다.
"공은 하북의 중신으로 있으면서 우리 하북의 군병을 그토록 빈약한 것으로
여기는가? 뿐만 아니라 그대들은 글줄이나 깨우쳤다고 군사일을 가벼이 보아 나
로 하여금 천하의 대의를 저버리게 할 작정인가?"
원소가 노하여 전풍의 목을 베려 했다. 유비가 간곡히 만류하자 원소는 그를
죽이는 대신 옥에 가두었다.
원소는 마침내 조조와 대결할 것을 결심했다. 조조의 세력과 권력이 점차 커
지니 이 정도에서 그 싹을 자르지 않으면 머지않아 터무니없이 큰 나무로 자랄
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질투와 초조, 그리고 유비의 진병에 대한 권고가 그토록
우유부단한 원소를 궐기케 했다.
원소는 하북 4주 방방곡곡에 격문을 보내 조조의 죄목 열 가지를 열거하고 군
사를 일으킬 것을 명했다.
각각 일족의 병마와 노궁을 총동원하여 백마의 벌판으로 모여라!
백마의 벌판이란 하북.하남의 경계에 있는 광야를 가리킨다. 원소의 명을 받
은 4주의 군사는 속속 싸움터로 집결했다.
이번 출진을 앞두고 여러 장수들은 자신이 무공을 세울 천재일우의 기회로 삼
으니 그 기세가 사뭇 당당했다.
그러나 유독 저수만은 다른 장수들과 달랐다. 저수는 전풍과 평소에도 친분이
두터운 사이였다. 그 전풍이 원소의 출병을 만류하다 하옥되는 것을 보자 떠나
기 전날 밤에 일가 친척들을 불러모았다.
"이번 싸움은 천에 하나도 승산이 없다. 요행히 아군이 이기면 그야말로 일약
천하를 호령하겠지만 패하면 살아 돌아오기는 어려우리라."
저수는 이렇게 말하며 집안에 있는 재산 모두를 일족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일가 친척들은 저수의 불길한 말이 심상치 않음을 알고 모두 눈물을 흘리며 배
웅했다.
그때 백마현의 국경에는 소수이지만 조조의 상비군이 있었다. 그러나 원소의
대군이 도착하니 그들은 상대가 되지 못하고 사방으로 흩어져 버렸다.
원소군의 선봉장은 기주의 맹장으로 이름을 떨치고 있는 안량이었다. 안량이
군사를 이끌어 여양 방면까지 돌입하자 저수가 진언했다.
"안량의 용맹은 가히 쓸 만하지만 성품이 편협하며 미덥지가 못합니다. 선봉
을 두 사람에게 맡기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원소는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안량은 내 상장이다. 공은 그의 뛰어난 용맹을 알 리 없으니 입을 다물라."
원소의 대군이 진격하여 여양에 이르자 동군 태수 유연이 위급한 사태를 허도
에 알렸다.
조조는 급히 여러 모사와 장수들을 소집하여 원소를 물리칠 일을 의논했다.
이 소문은 관우의 귀에도 들어갔다. 관우는 유비가 원소의 휘하에 있음을 알지
못하고 있는 터라 조조에게 나아가 말했다.
"평소의 후은을 보답고자 하오니 이번 싸움에 부디 저를 선봉으로 써 주십시
오."
조조가 베푼 은혜에 보답할 좋은 기회라 여겨 관우는 이렇게 청했다.
조조가 잠시 기쁜 얼굴로 바라보았으나 웬일인지 황급히 그의 청을 물리쳤다.
"아직 장군에게까지 수고를 끼칠 일이 아니오. 더 큰 일이 있으면 장군을 불
러 청하겠소."
조조는 관우에게 공을 세우게 하고 싶지 않았다. 공을 세우면 그가 자기를 떠
날 것이므로 그 기회를 주지 않기 위함이었다. 조조가 자신의 청을 딱 잘라 거
절하므로 관우는 더 할 말이 없어 승상부를 나오고 말았다.
조조는 군사 15만을 세 갈래로 나누어 진군케 했다. 가는 도중 다시 동군태수
유연에게서 위급을 알리는 전갈이 왔다.
조조는 몸소 군사 5만을 이끌고 먼저 백마의 벌판으로 달렸다.
조조는 나지막한 토산을 등지고 진영을 세운 후 멀리 있는 적진을 바라보았
다. 끝없이 펼쳐진 벌판에는 안량의 정병 10여 만이 철형으로 대형을 이룬 채
마치 들불을 놓은 듯 다가오고 있었다.
조조가 저으기 놀라며 문득 한 장수를 소리쳐 불렀다.
"송헌, 송헌은 어디 있는가?"
그는 지난날 여포를 사로잡아 조조에게 바쳤던 여포의 휘하 장수였다.
"그대는 이전에 여포의 휘하에서 용맹을 떨친 장수라고 들었다. 지금 보니 안
량이 제 세상 만난 듯이 달려오고 있으니 그대가 가서 저놈의 목을 베어 오라."
조조가 자신을 특별히 불러 명하므로 송헌은 공을 세울 좋은 기회라고 여겼
다. 조조의 명이 떨어지자마자 홀연히 말을 몰아 호기롭게 내달았다. 안량은 칼
을 비껴들며 문기 아래에 잠시 말을 멈추고 적진을 살피고 있었다. 그때 적진에
서 한 장수가 내달아오자 안량은 벽력같이 소리치며 말에 박차를 가해 마주 달
렸다. 송헌이 호기롭게 창으로 안량을 찌르며 부딪쳤다.
그러나 송헌은 안량의 상대가 못 되었다. 어우른 지 3합도 안 되어 안량의 우
렁찬 기합 소리와 함께 송헌의 머리가 말 아래로 나뒹굴었다. 원래 안량은 이민
족 출신의 무인이었다. 안량은 기마전에 능했으며 독특한 검술을 썼다. 민첩한
몽고말을 타고 달리면서 종횡무진 누비는 그는 재빠른 칼솜씨와 천하 무적의 용
맹을 떨치는 장수였다.
송헌이 안량의 한칼에 무너지자 조조가 소리쳤다.
"여봐라, 안량 하나를 당해 내지 못한다는 말인가? 그래, 저놈을 무찌를 자가
없다는 말인가?"
"저에게 명해 주십시오. 친구 송헌의 원수를 갚고야 말겠습니다."
위속이 나섰다. 그는 송헌과 함께 여포를 사라잡아 조조에게 투항했던 장수였
다.
"위속인가? 그대가 친구의 원수를 갚겠다고 하니 말릴 수가 없구나. 어서 가
라!"
위속이 긴 창을 비껴잡고 곧장 내달았다. 안량의 진 앞에 이른 위속이 안량에
게 마구 욕설을 퍼부어댔다.
"이 오랑캐놈아! 내가 친구의 원수를 갚으러 왔다. 썩 나와서 내 창을 받아
라!"
안량이 곧바로 말을 달려나왔다. 누런 먼지가 자욱한 가운데 7, 8합 만에 안
량의 고함 소리가 일며 인마가 함께 칼을 맞고 쓰러졌다.
"참으로 무서운 장수로다!"
호담한 조조도 간담이 서늘한지 혀를 차며 탄식했다.
"이제는 누가 가서 겨루겠는가?"
조조의 물음에 서황이 나섰다.
"오, 서황인가?"
조조를 비롯한 여러 모사들이 그에게 기대를 걸었다. 서황은 흰털을 날리는
말을 타고 눈부신 은색 도끼를 들고 달려나왔다. 허도 제일의 용장으로 이름난
약관의 장수였다.
"서황이 나왔다.!"
안량과 서황의 칼과 도끼가 맹렬히 부딪치며 불꽃을 튀겼다. 2, 30여합 칼과
도끼가 부러져 나갈 듯 어우러졌으나 안량의 맹렬한 공격에 용맹 무쌍한 서황도
점차 밀리기 시작했다. 마침내 서황도 도끼를 적에게 내던지고 말을 물려 되돌
아오고 말았다.
어느덧 날이 어두워지기 시작했다. 조조는 부득이 진을 20리쯤 물리고 그날의
어려운 고비를 간신히 모면하였다. 그러나 송헌.위속 두 장수를 잃고 불명예를
안은 채 안량 한 사람의 이름만 떨치게 했으니 생각할 수록 어이없는 일이었다.
조조가 근심에 사로잡혀 있는데 정욱이 그에게 방책을 아뢰었다.
"안량을 능히 무찌를 사람은 관운장밖에 없을 것입니다. 이때야말로 관운장을
진으로 부르시면 어떻겠습니까?"
"그렇지만 그가 공을 세우면 그는 그것을 기회로 내게서 떠날 것이오. 나도
그것을 생각지 않는 바가 아니었으나 그런 이유 때문에 그를 부르지 않고 있는
것이오."
조조는 못마땅스럽다는 듯이 말하며 정욱을 바라보았다.
"그렇지만은 않습니다. 만약 유비가 살아 있다면 그는 반드시 원소에게 의지
하고 있을 것입니다. 이제 관운장을 시켜 안량을 무너뜨린다면 원소는 필시 유
비를 의심하여 죽여 버릴 것입니다. 유비가 죽는다면 관운장은 승상 곁을 떠나
지 않을 것입니다."
정욱의 말에 조조는 무릎을 치며 탄복했다.
"과연 기막힌 계교요."
조조는 즉시 사자를 보내 관우로 하여금 급히 오게 했다.
조조의 부름을 받은 관우는 기쁨을 감추지 못하고 무장을 갖춘 후 두 형수에
게 작별 인사를 드렸다. 잠시 다녀오겠다는 말만 듣고도 두 부인은 벌써 눈물을
글썽거리며 당부했다.
"큰 아주버니께서는 이번에 가시거든 부디 유 황숙의 소식을 알아보도록 하십
시오."
"조금도 염려하지 마십시오. 제가 염두에 두고 있는 것도 실은 그것입니다.
머잖아 상봉하실 수 있도록 하겠으니 슬퍼하지 마십시오."
작별 인사를 마친 관우가 청룡언월도를 움켜잡고 일어서니 두 부인은 바깥문
까지 나와 전송했다. 관우가 적토마에 올라타고 백마현을 향해 달렸다.
관우는 그날로 백마현에 이르자 조조는 기뻐하며 관우를 맞았다.
"부르심을 받고 승상께서 주신 이 적토마를 타고 한달음에 달려왔습니다."
관우가 조조에게 절하며 말했다. 조조는 관우를 맞아 요 며칠간 있었던 참패
를 숨김없이 그에게 알린 후 말을 이었다.
"원소군의 선봉 안량의 용맹을 당할 자가 없어 이 일을 의논하려고 운장을 부
른 것이오."
조조는 술상을 차려 관우에게 대접했다.
"제가 싸움터를 한 바퀴 돌아보고 오겠습니다."
관우가 이렇게 말하자 조조는 물론 여러 장수들이 토산 위로 올라갔다. 관우
는 팔장을 끼고 싸움터를 두루 살펴보았다.
벌판에 가득찬 양군의 정예병은 마치 메밀 껍질을 가지런히 깔아 대지에 진형
도를 그린 것처럼 보였다.
적진은 창.검이 숲을 이루며 오색 기치가 수없이 펄럭이고 있어 그 위세가 엄
청났다. 조조는 적진을 가리키며 말했다.
"저것이 하북의 인마요. 그 군세가 대단하지 않소?"
조조의 말에 관우가 대수롭지 않다는 듯이 고개를 저었다.
"내 눈에는 흙으로 만든 닭이나 와륵으로 만든 개로밖에는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자 조조가 또 한 곳을 가리키며 말했다.
"보시오. 저기 비단 일산 아래 황금 갑옷과 투구를 쓰고 칼을 찬 체 말 위에
앉은 자가 안량입니다. 안량이라는 말만 듣고도 아군 사졸들은 지레 겁을 먹고
도망을 갑니다."
관우는 조조가 가리키는 곳을 일별하더니 말했다.
"제가 보기에는 안량도 자기 목을 팔려고 표식을 세워 놓은 어리석은 자에 지
나지 않습니다."
듣기에 어이가 없을 정도의 큰소리였다. 조조가 그런 관우에게 타이르듯이 말
했다.
"아니오. 적군의 왕성한 사기를 가볍게 볼 처지가 아니오. 오늘은 장군께서
지나치게 호언을 하시는 것 같소. 평소의 장군과는 다르오."
"그럴 수밖에 없습니다. 여기는 싸움터입니다."
"그렇다라도 너무 적을 얕보시는 것이 아니오?"
그러자 관우가 몸을 벌떡 일으키며 소리쳤다.
"결코 호언이 아님을 보여 드리겠습니다. 제가 비록 재주는 대단치 않으나 적
진으로 달려가 안량의 머리를 베어 승상께 바치겠습니다."
장요가 관우의 호언을 듣다못해 걱정스러운 듯 말했다.
"군중에는 원래 농담을 하지 않는 법입니다. 관 공께서는 적을 너무 가볍게
보아서는 아니 될 것입니다."
관우는 장요의 말에는 대꾸도 하지 않은 채 사졸을 시켜 적토마를 끌어오게
하더니 청룡언월도를 비껴들고 말 위에 올랐다. 말 위에 오른 관우는 질풍처럼
산비탈을 내달렸다. 부릅뜬 봉의 눈에 누에 같은 눈썹을 치켜세운 채 곧장 상대
편 진으로 달려갔다.
오랫동안 전쟁터를 떠나 있었던 적토마는 오늘 비로소 제 주인을 만났다는 듯
이 꼬리를 치며 우렁차게 울었다.
"물러나라! 길을 막아 아까운 목숨을 버리지 말라."
관우는 청룡도를 들어 좌우의 적병을 베며 말을 달렸다. 그 무서운 기세에 대
군이 대항할 엄두도 못 내고 비켜서는 한가운데를 풀을 베듯 헤치며 달렸다. 안
량이 대장기 곁에서 뛰쳐나오려 하자 관우가 그의 모습을 보고 번쩍 번개가 치
듯 달려들었다.
"안량이란 놈이 바로 네놈이냐!"
관우가 소리쳤다.
"오냐, 네놈은..."
안량이 다음 말을 이을 겨를도 없었다. 눈앞에 적장이 보였는가 싶자 어느 새
그의 코앞에 다가와 있었던 것이었다. 놀란 안량이 황급히 칼을 휘두를 찰나 관
우의 청룡언월도가 '윙!'하는 소리와 함께 안량을 향해 날아들었다.
안량은 칼 한번 써 보지 못한 채 번쩍이는 언월도에 의해 단번에 갑옷과 투구
가 두 동강이 나고 말았다.
몸에서 내뿜는 피가 10척이나 치솟는가 싶더니 안량의 몸뚱이는 철썩하고 땅
바닥에 떨어졌다. 관우는 그 머리를 잘라 유유히 안장에 매달았다. 몸을 날려
적토마 위에 오른 관우는 비호같이 적진을 달리니 마치 무인지경을 달리듯 했
다.
원소군은 군기도, 군고도 버린 채 혼란에 휩싸여 좌충우돌하기 시작했다.
조조가 이 광경을 지켜 보고 있다가 전군에게 총공격령을 내렸다.
"이때다. 한 놈도 남기지 말고 모조리 주살하라."
조조의 군사가 달아나는 적을 마구 베며 뒤쫓으니, 하북의 군사는 대패한 채
싸움은 끝나고 말았다. 장요.허저 등도 그 동안의 참패를 분풀이라도 하듯 적진
을 유린했다.
하북군은 죽은 자의 수가 부지기수요, 빼앗은 말과 무기가 엄청났다.
그럴 동안 관우는 유유히 말을 달려 이미 조조의 본진으로 돌아와 있었다. 조
조가 진으로 돌아오자 안량의 머리를 그에게 바쳤다.
여러 장수들이 일제히 관우를 칭송하여 마지않는 가운데 조조도 감탄을 금치
못하며 말했다.
"장군의 용맹은 실로 인용이 아니라 신위(신의 위엄)이외다. 어떻게 생각하시
오?"
관우는 머리를 저으며 겸양의 말을 했다.
"아닙니다. 저 같은 사람은 아무것도 아닙니다. 제 의제인 연인 장비는 대군
속에 들어가서 적장의 목을 베어 오기를 마치 주머니 속에서 물건 꺼내기보다
수월하게 합니다."
관우가 무심중에 겸양의 뜻으로 그렇게 말했으나 조조는 간담이 서늘해짐을
느꼈다. 그러나 이를 내색하지 않은 채 얼핏 웃음 띤 얼굴로 여러 장수들에게
경고해 두기를 잊지 않았다.
"자, 모두들 명심해 두오. 연인 장비라는 이름을 허리띠 끝이나 옷섶 안에라
도 적어 두고 그를 만나거든 함부로 덤비지들 마오."
한편 안량이 쓰러지자 안량 휘하에 있던 군대는 지리멸렬 패주를 계속했다.
후진의 지원으로 간신히 어지러운 패잔병을 수습하기는 했으나 그로 인해 원소
의 본진에도 적지 않은 동요가 일었다.
"대체 안량과 같은 호걸의 목을 베어 버린 자가 누구인가? 필시 범상치 않은
자일 것이다."
원소는 불안한 낯으로 좌우를 보며 말했다. 그러자 옆에 있던 저수가 대답했
다.
"아마 그는 현덕의 의제 관우라는 자일 것입니다. 관우말고는 그리 쉽게 안량
의 목을 벨 자가 없습니다."
원소는 저수의 말에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그럴 리가 있겠소? 지금 현덕은 일신을 이 원소에게 의탁하고 이번 싸움에
종군하고 있거늘, 어찌 그의 의제가 우리의 장수를 친다는 말이오?"
원소가 믿지 않자 저수는 안량 휘하의 군사 하나를 불러 물었다.
"안량을 친 장수는 어떤 장수더냐? 본 대로 소상히 말해 보아라."
"얼굴이 붉고 수염이 긴 장수였습니다. 큰 언월도로 단칼에 안량 장군을 베고
는 태연히 그 머리를 붉은 말 안장에 매달더니 나는 듯이 말을 달려갔습니다."
군사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있던 원소는 노발대발하여 좌우에게 불호령을 내
렸다.
"현덕을 잡아 오라!"
원소의 명에 의해 군사들이 유비의 진지로 달려가 불문곡직하고 그의 두 팔을
비틀어 원소 앞으로 끌고 왔다.
원소는 그를 보자 길길이 뛰며 대뜸 욕설을 퍼부었다.
"이 배은망덕한 놈! 엉큼하게도 조조와 내통하여 내 귀중한 용장을 자네 아우
관우의 손에 죽게 하다니..., 안량의 목숨은 이제 살릴 수 없으니 네 목이라도
베어 안량의 영혼이나마 위로해 주어야겠다. 여봐라! 이 배반자의 목을 내가 보
는 앞에서 베어 버려라."
유비는 전혀 모르는 일이라 두려운 기색 없이 침착하게 일갈했다.
"진정하십시오. 평소에 사려 깊은 명공께서 어찌하여 오늘은 이토록 격분하십
니까? 조조는 그전부터 이 비를 죽이려 하고 있었습니다. 어찌 그 조조를 도와
지금 몸을 의탁하고 있는 은인의 군에 불리한 짓을 하겠습니까? 또 얼굴이 붉고
수염이 길다고는 하지만 세상에 관운장을 닮은 장수가 없으란 법도 없습니다.
또한 조조는 이름난 병략가이므로 일부러 그런 자를 찾아 내어 우리 쪽의 자중
지란을 꾀했는지도 모릅니다. 명공께서는 어찌 일개 군졸의 말만을 듣고 저와의
정리를 끊으려 하십니까?"
무장으로서의 중요한 자격의 하나는 과단성이다. 그 과단성은 예리한 직감이
있어야 생긴다. 원소의 단점은 바로 이 직감이 무디다는 것이다. 유비는 자신의
말에 원소의 마음이 흔들리고 있음을 알고 말을 이었다.
"서주에서 패한 이래 외로운 몸을 장군의 비호에 맡긴 후 아직 처자는 물론
일족의 소식조차 들은 바가 없습니다. 그렇거늘 어떻게 운장과 내통을 할 수 있
겠습니까. 이 비의 일상 생활은 명공께서 항상 보고 계시지 않습니까?"
원소는 그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듣고 보니 옳은 말이오. 저수가 나를 미혹케 하여 이렇게 되었소. 현덕 공은
너그러이 살펴 주시오."
원소는 유비를 상좌에 청하고 저수로 하여금 사죄하게 한 후 그 자리에서 패
전 만회의 작전을 상의 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시립한 여러 장수들 가운데 한 장수가 문득 앞으로 나서며 소리쳤다.
"형 안량을 대신할 다음 선봉은 아우인 저에게 맡겨 주십시오."
그를 보니 키가 8척이요, 얼굴은 해태 같고 송곳니가 허옇게 입술을 물고 있
는데 머리카락과 수염이 붉은 험악하게 생긴 장수였다. 평소에는 무뚝뚝하고 별
로 말이 없는 하북의 명장 문추 그였다.
문추도 안량에 못지않은 맹장이었다. 안량처럼 기마전에 뛰어나고 특히 말 위
에서 쏘는 화살은 백발백중이었다. 그는 항상 싸움터에서 반궁과 칼을 들고 다
녔으나 칼은 거의 쓰지 않았다. 칼을 쓰기도 전에, 적은 반궁의 희생이 되고 마
는 것이었다.
원소가 크게 기뻐하며 그를 격려했다.
"아, 역시 문추인가. 그대가 아니고 누가 안량의 원수를 갚겠는가? 어서 가
역적 조조를 무찔러라!"
원소는 어병 10만을 주었다. 문추는 그날로 황하까지 나아갔다.
이때 조조는 진을 물려 하남에 포진하고 있었다. 문추는 조조가 진을 물리자
공격의 고삐를 늦추지 않았다.
"적은 별반 싸울 마음이 없다. 전전긍긍 그저 진을 지키고 있을 뿐이다. 어서
공격하라."
문추는 병마 10만을 이끌어 수많은 배에 나누어 싣고 강을 건너 황하의 해안
으로 진격했다. 문추의 거칠 것 없는 진격을 보자 저수가 걱정하며 원소에게 아
뢰었다.
"아무래도 문추의 전법은 위태로워서 보고 있을 수 없습니다. 임기응변의 묘
미도 없이 무턱대고 진격만 하면 이기리라 생각하고 있습니다. 제가 살피건대,
우선 관도와 연진 양쪽으로 군사를 나누어 승리하는 대로 서서히 밀고 나가는
것이 상책이 아닌가 합니다. 경솔히 황하를 건넜다가 만일 아군에게 불리한 전
황이 생긴다면 몰살을 면키 어려울 것입니다."
그러나 원소는 저수의 충언에 벌컥 화를 내었다. 얼마 전 유비의 목을 베려
한 것도 그의 말을 듣다가 생긴 일이었다. 유비에게 사죄까지 시킨 이후라 그이
말이 미덥지 않게만 들렸다.
"듣지도 못했는가. 군사는 신속을 으뜸으로 삼는다고 하지 않는가? 함부로 혀
끝을 놀려 아군의 사기를 미혹시키지 말라!"
원소가 꾸짖으며 그의 말을 일언지하에 물리치자 저수는 묵묵히 밖에 나와 탄
식했다.
"윗사람은 제 뜻만 세우려 들고, 아랫사람은 공명심에만 들떠 있구나. 유유히
흐르는 황하여, 내 너를 건너야 하는가?
저수는 그날부터 병을 핑계대고는 진무에도 나오지 않았다. 원소도 그에게 지
나치게 말했음을 뉘우치고 있었으나 그를 달래고 싶지도 않았다.
원소가 다시 군사를 일으켜 조조군을 향해 진격하자 유비가 청했다.
"평소에 크신 은혜를 입고 있으면서 보답할 길이 없었습니다. 바라건대 저를
문추 장군과 함께 출진케 해 주십시오. 명공의 은혜를 갚기 위함이 그 하나요,
두 번째는 안량을 벤 자가 운장인지 확실히 살펴 진위를 가리고 싶습니다."
"공의 뜻이 그러하다면 어찌 말리겠소."
원소가 기뻐하며 유비의 출진을 선선히 응낙했다. 이 말을 전해 들은 문추가
홀로 말을 타고 중군으로 달려와 원소에게 말했다.
"선봉 대장으로 저 하나로는 염려되심이옵니까?"
"그럴 리가 있는가? 어찌하여 그 같은 말을 하는가?"
"현덕은 전부터 싸움에는 약하다고 알려져 있지 않습니까. 그에게 선봉을 명
하신 까닭이 무엇인지 도무지 알 수가 없습니다."
"그것은 현덕의 재주와 능력을 시험해 보자는 뜻일세."
"그럼 저의 군사 3만을 나누어 주고 2진에 그를 두어 뒤따르라 하겠습니다."
"그렇게 하도록 하게."
원소는 문추가 말하는 대로 유비의 배치를 일임했다.
이런 경우에도 원소의 성격 한 단면이 드러난다. 전쟁에 대해서도 그 자신의
독창과 결단은 하나도 없이 우유부단 바로 그것이었다. 다만 그는 조상 대대로
명문이라는 유산과 그로 인한 자존심만을 앞세웠다. 그의 수려한 풍모는 평상시
에 권위를 나타내기에는 그럴싸했으나 전쟁터에서는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전
쟁터에서는 지휘자의 현명한 판단과 선견지명이 실로 군의 운명을 좌우하지 않
는가.
문추는 원소의 명이라 하여 유비에게 3만의 군사를 주어 뒤따르게 하고, 자신
은 우세한 병력 7만을 이끌어 전진을 개시했다.
한편 조조는 관우가 안량을 한칼에 베는 것을 본 후로부터 그를 더욱 중히 여
겼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그를 내 유막에서 떠나게 해서는 안 된다.'
조조는 관우의 훈공을 천자께 상주한후, 조정의 주공(주조공)을 시켜 제후로
봉한다는 도장을 새기게 했다.
봉후의 도장이 새겨지자 그는 장요에게 명해 관우에게 전하게 했다.
"... 이것을 소생에게 전하라 하던가?"
관우는 먼저 조조의 은의에 감사하면서 무심코 도장에 새겨진 글자를 보았다.
수정후지인, 즉 수정후에 봉한다는 사령이었다. 그 글자를 보자 관우가 고개를
저었다.
"뜻은 고마우나 사양하겠소. 도로 가지고 가시오."
"받지 않겠다는 말씀이시오?"
"그렇소."
장요가 간곡히 권했으나 관우는 끝내 사양했다. 하는 수 없이 장요는 봉인을
도로 가져와 조조에게 관우의 말을 그대로 전했다.
조조가 잠시 생각에 잠기다가 장요에게 물었다.
"도장을 보기 전부터 사양하던가, 아니면 새겨진 글자를 보고 사양하던가?"
"도장에 새겨진 글자를 한동안 보고 난 이후였습니다."
"그렇다면 내 잘못이었다."
조조는 무엇을 생각했음인지 즉시 주조공을 불러 도장을 다시 파도록 명했다.
새로 부어온 인문(도장에 새겨진 글씨)에는 한나라라는 한자가 더 붙어 있었다
즉, 한나라의 수정후지인이라고 여섯 글자를 새긴 것이었다.
다시 그것을 장요를 시켜 전달하니 관우는 이를 보고 파안대소했다.
"승상은 참으로 내 마음을 잘 짐작하시오. 만일 나와 같이 신하의 길을 실천
하는 분이라면 우리들과도 좋은 의형제가 될 수 있었을 터이오."
관우는 그렇게 말하며 이번에는 쾌히 관인을 받들었다.
이때 일선에서 황급히 파발마가 달려와 급보를 전했다.
"원소의 대장인 문추가 황하를 건너 연진까지 진격해 진을 세웠습니다."
조조는 당황하는 기색 없이 영을 내려 연진의 백성들을 서하라는 땅으로 옮긴
후 군사를 이끌었다.
"마초, 군량, 짐을 실은 말을 앞세우고 군사들은 뒤쳐져 가도록 하라!"
행군 도중 조조는 뜻밖의 영을 내렸다. 영에 따라 선봉대를 뒤로 보내고 후군
을 앞세운 이상한 행군이 시작되었다.
여건이 의아하게 여겨 조조에게 물었다.
"어찌하여 마초나 군량을 앞세우고 군사를 뒤따르게 하십니까?"
"군량과 마초를 뒤따르게 하면 적군에게 빼앗기는 일이 많아 앞에 세웠다네."
여건은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다시 물었다.
"만약 앞세운 군량과 마초가 적의 공격을 받으면 또한 빼앗기지 않겠습니까?"
조조가 그 물음에도 태연히 대답했다.
"그건 그때 적군이 와 보면 알게 될 걸세. 너무 걱정할 일이 아니네."
여건은 조조의 대답을 듣고도 궁금증을 지울 수가 없었으나 명을 따르지 않을
수 없었다. 군량과 마초를 실은 치중대(짐 실은 말)가 앞장 서자 대열은 황하
언덕을 따라 연진으로 나아갔다.
조조가 치중대를 뒤쫓아 뒤따르고 있는데 저 멀리 앞쪽에서 돌연 함성이 일었
다. 뒤이어 급보가 전해졌다.
"큰일났습니다. 하북의 대장 문추가 이끄는 군사가 밀어닥쳐 우리 군사는 마
초와 군량을 모두 버리고 사방으로 흩어지며 달아났습니다. 후군과의 거리가 멀
어 급히 구원할 수도 없으니 이를 어찌하면 좋겠습니까?"
예상했던 대로였다. 전투 장비를 갖추지 않은 치중대이니 적의 공격을 받자
모두 뿔뿔이 흩어질 수밖에 없지 않은가.
그러자 조조가 태연히 말채찍을 들어 남쪽 언덕을 가리키며 후군에게 명했다.
"잠시 저 언덕에 올라가 적을 피하도록 하라."
조조의 명에 군사들은 급히 그 언덕으로 기어 올라갔다. 조조답지 않은 명령
이었다. 적군이 진격해 오는데 싸워 보지도 않은 채 허둥지둥 피신부터 하는 조
조가 아닌가.
군사들이 언덕 위에 오르자 조조는 또다시 뜻밖의 명을 내렸다.
"무거운 투구와 갑옷들을 벗고 잠시 쉬도록 하라. 말들도 풀을 뜯도록 모두
풀어 주어라."
군사들은 모두 영문을 몰라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러나 조조가 내린 영이니
따를 수밖에 없었다.
그러는 동안 문추의 군사들이 점점 조조군 가까이 달려오고 있었다. 다급해진
건 조조 휘하의 장수들이었다.
"적군이 가까이 왔습니다. 급히 말을 거두어 백마현으로 군사를 물려야겠습니
다."
그러자 순유가 장수들에게 말했다.
"적군에게 이미 미끼를 놓고도 어찌 도망칠 생각을 하는 거요."
순유의 말에 조조가 그에게 눈짓하며 조용히 웃었다. 조조의 웃음을 더 이상
말하지 말라는 뜻으로 새긴 순유가 입을 다물었다.
문추의 군사는 이미 적의 군량과 마초를 빼앗은 터라 신이 났다. 그들은 대오
도 갖추지 않은 채 일사천리로 앞으로만 진격해 왔다. 문추의 군사들이 보니 선
봉부터가 군대랄 것도 없는 조조의 군사들이었다. 뿐만 아니었다. 후진도 가까
이 와서 보니 사방으로 흩어져 있는데 투구와 갑옷도 입지 않은 채였고, 군마도
여기저기에 흩어져 있는 것이 아닌가. 군량과 마초를 빼앗은 문추의 군사들은
흩어져 있는 군마를 획득하기 위해 뿔뿔이 흩어졌다.
대와 대의 구별도 없이 제각기 흩어지고 뒤섞여 문추군은 저절로 어지러운 잡
병들이 되고 말았다.
"자, 이때다. 전군은 모두 언덕을 내려가 적을 섬멸하라!"
조조가 명을 내렸다. 전군이 표범같이 언덕 밑으로 내려가 적을 치는 한편,
언덕 한구석에 놓인 봉화에 불을 올렸다. 패하여 도망치는 척하며 실은 들과 야
산과 강가 숲 속에 잠복하고 있던 조조군의 선봉대는 봉화를 보자 땅에서 솟아
난 듯 삼면칠면에서 일제히 일어나 문추군을 향해 공격을 개시했다.
조조도 말을 몰아 벌판을 질주하면서 외쳤다.
"낮에 버린 군량과 마초는 적을 큰 그물로 몰아넣기 위한 미끼였다. 그물을
죄어서 고기 새끼 한마리도 놓치지 마라."
문추의 군사 사이에 일대 혼란이 일어났다. 이미 군령도 통하지 않는 난군이
된데다 사면에서 일어난 조조군에 의해 갈피를 잡지 못하고 우왕좌왕하니 같은
군사들끼리 서로 밟고 밟히기까지 했다.
홀로 사력을 다해 싸우던 문추는 그때서야 조조의 계략에 빠진 것을 깨닫고
급히 말머리를 돌렸다. 조조가 이를 보고 소리쳤다.
"하북의 명장 문추가 저기 있다. 그를 사로잡으면 안량을 무찌른 공과 다름없
다."
조조가 이렇게 외치니 장요와 서황이 말을 달리며 크게 외쳤다.
"문추, 네가 가면 어딜 가겠느냐. 게 서지 못할까."
문추가 그 소리에 뒤를 힐끗 돌아보더니 말 위에서 쇠반궁 위의 굵은 화살을
쏘았다. 화살이 장요의 얼굴을 향해 날아오자 장요는 잽싸게 고개를 숙였다. 화
살은 투구의 끈을 끊었다.
"이놈 문추야, 게 섰거라!"
장요가 노기 충천하여 곧장 그에게로 달려가려는 찰나였다. 문추가 쏜 두 번
째 화살이 몸을 피할 사이도 없이 날아와 그의 면상에 꽂혔다. 그와 동시에 달
리던 말이 앞발을 꺾는 바람에 장요는 '쿵!'하고 땅바닥에 나뒹굴고 말았다.
문추는 재빨리 말머리를 돌리더니 장요를 향해 말을 달렸다. 장요의 목을 베
어 갈 모양이었다.
"이 간덩이가 부은 원소의 개야!"
서황이 재빨리 말을 달려 문추의 앞을 가로막았다. 서황이 장기로 삼는 무기
는 언제나 큰 도끼였다. 서황은 도끼를 수레바퀴처럼 휘두르며 문추를 향해 달
려들었다. 문추는 몇 걸음 뒤로 물리며 철궁을 안장에 끼고 칼을 빼들었다. 대
검과 큰 도끼가 30여 합 불꽃을 튀겼다. 서로가 만만치 않음을 알자 서황은 말
머리를 돌렸다. 장요를 구한 서황은 뒤이어 달려온 군사의 구원을 받으며 본진
으로 달려가 버리고 말았다. 힘이 난 문추가 기세를 돋우며 서황과 장요를 뒤쫓
았다.
그런데 홀연 앞쪽에서 기병 10여 명이 기를 휘날리며 달려오고 있었다.
그 기에는 '한수정후 운장관우'라고 먹으로 글씨가 씌어져 있었다.
그 중에서 한 장수가 긴 수염을 휘날리며 말을 달려나오는데 청룡언월도를 비
껴들고 있었다.
"이놈, 게 섰거라!"
말은 준족으로 유명한 적토마이고, 그 말을 탄 사람은 틀림없는 관운장이었
다.
"오냐, 바로 네놈이었구나. 전날 나의 형 안량을 친 놈이!"
문추도 관우를 보자 대검을 휘두르며 덤벼들었다. 번뜩이는 청롱언월도, 바람
을 가르는 문추의 대검! 서로 접전하기를 수십 합이었다. 그 고함 소리에 청룡
도와 대검이 부딪칠 때마다 튀는 불꽃은 황하의 파도를 일으킬 듯했다. 하늘의
마귀와 땅의 신이 하늘과 땅을 싸움터로 삼아 맞붙은 싸움이었다.
그러나 문추가 아무리 하북의 맹장이라 하나 관우와 더 이상 싸울 장수는 못
되었다. 위험을 느낀 문추가 슬며시 말머리를 돌려 도망치기 시작했다.
대검으로써는 그를 당할 수가 없다고 여긴 문추가 도망가는 척하다 쇠반궁으
로 철궁을 쏠 작정이었다. 그러나 관우에게는 그 작전도 효과가 없었다. 그를
뒤쫓으며 둘째 화살, 셋째 화살을 피한 관우였다. 관우가 탄 말이 적토마인지라
네 번째 화살을 쇠반궁에 올려놓기 전에 관우는 이미 바싹 문추의 등쪽으로 다
가가 있었다. 관우의 청룡도가 번쩍하고 빛나는가 싶더니 어느 새 문추의 목이
말 아래로 떨어졌다. 목 없는 주인을 등에 실은 채 한동안 문추의 말은 황하 하
류로 달려갔다.
"적장 문추의 머리를 관운장이 떨어뜨렸다."
조조는 그 소식을 접하자 중군을 이끌어 문추의 군사를 덮쳤다. 조조군이 울
리는 북 소리, 징 소리, 뿔피리 소리에 문추군은 이미 싸울 엄두를 내지 못하고
뿔뿔이 흩어졌다. 관우에 의해 문추의 목이 떨어질 때부터 이미 겁에 질려 있던
군사들이라 제대로 싸움이 될 리 없었다.
창칼에 쓰러지는 자, 도망가다 황하에 떨어져 빠져 죽는 자..., 이렇게 새벽
까지 하북군의 태반이 속절없이 조조군의 밥이 되고 말았다.
그때 유비는 출진 때부터 문추에게 따돌림을 받아 후진을 이끌고 있었다. 간
신히 도망쳐온 선봉의 병사들부터 하북군 제 1진의 참패 소식을 전해 듣고 전군
에 영을 내렸다.
"후진도 안심할 수 없다. 엄중히 진영을 지키도록 하라!"
유비는 목숨을 건져 도망쳐온 패주병들에게 물어 보았다.
"문 장군을 친 적장은 누구이더냐?"
"지난번 안량 장군을 친 수염이 길고 얼굴이 붉은 적장이었습니다."
그 말을 들은 유비는 날이 새자 한 부대를 이끌고 전선 가까이까지 말을 몰았
다.
황하의 지류는 넓은 평야에 작고 큰 호수를 무수히 매달고 있었다. 때마침 붉
은 해가 떠오르자 짙은 안개가 걷히며 산도 호수도 선명하게 그 모습을 드러냈
다.
조조군의 섬멸전은 아침까지 이어지고 있었다. 아직도 강 건너 저쪽에는 많은
군사들이 이리 쫓고 저리 쫓으며 포효하고 있었다.
"바로 저 흰 깃발을 꽂은 무리 중에 그놈이 있습니다."
길잡이로 데려온 패주병이 깃발이 펄럭이는 곳을 가리켰다. 깃발 아래에는 유
난히 풍채가 좋은 한 장수가 있었다.
유비는 잠시 눈을 똑바로 뜨고 주시하였다. 그러자 글씨가 뚜렷이 보였다. 글
씨 밑에 있는 관우의 이름을 보자 유비는 눈을 감고 천지신명께 감사했다.
'아!... 의제 운장이 살아 있었구나. 천지신명께 감사를 올리나이다.'
유비가 눈앞에 관우를 두고도 만날 수 없어 안타까운 마음으로 바라보고 있는
데 급한 전갈이 왔다.
조조군이 후방의 호수를 건너 퇴로를 끊는다는 전갈이었다. 유비는 황급히 후
진으로 돌아온 후 그 후진도 위태로움을 느껴 다시 20리쯤 퇴각했다. 그제야 원
소의 원군이 겨우 강을 건너왔다. 유비는 원군과 합류하여 관도 땅으로 향했다.
그때 원소는 관도에 이르러 영채를 세우고 있었다. 유비가 그곳에 이르기 전
에 관우에 의해 또 문추의 목이 떨어졌다는 소식이 원소에게 전해졌다.
과도.심배 두 대장이 그 소식을 듣자 분연히 원소 앞에 나아가 진언했다.
"괘씸하기 짝이 없는 일입니다. 세상에 이럴 수가 있습니까? 이번에 문추를
친 놈도 역시 현덕의 의제 관우라고 합니다."
"그것이 사실인가?"
"이번에는 '한수정후 운장관우'란 기를 들고 싸움터에 나왔다고 하였습니다."
그런 일이 벌어지고 있는 줄도 모르고 유비가 군사를 이끌고 당도했다. 원소
는 유비가 돌아왔다는 말을 듣고 그를 불러 오게 하였다.
유비가 원소 앞에 이르자 거듭되는 아군의 참패에 속을 끓이고 있던 원소는
유비를 보자마자 외쳤다.
"대이(큰 귀) 공, 이번에는 변명의 여지가 없을 것이오. 저 자를 끌어 내 목
을 베라."
유비가 놀라 외쳤다.
"명공께서는 무슨 일로 이러십니까?"
원소가 노기등등하여 외쳤다.
"네 동생놈을 시켜 이제 또 내가 아끼는 장수를 죽였다. 그러고도 무슨 할 말
이 있느냐?"
유비는 이번에는 원소의 말에 가슴이 섬뜩하였다. 관우가 조조의 진영에 있음
을 몸소 눈으로 보았기 때문이었다. 유비는 가만히 마음을 달래며 원소에게 말
했다.
"잠깐만 기다려 주십시오. 명공께선 스스로 조조의 술책에 넘어 가시렵니까?"
"네 목을 자르는 것이거늘, 어찌 조조의 술책에 넘어간다 하는가?"
"조조가 운장을 시켜 안량.문추를 치게 한 것은 오로지 명공의 심화를 돋우어
이 비를 죽이기 위함입니다. 이 비를 미워하는 조조가 명공의 손을 빌려 저를
죽이기 위한 계책입니다. 바라건대 명공께서는 깊이 헤아려 주시기 바랍니다."
유비가 짐짓 얼굴을 밝게 하여 조용히 말했다. 원소는 잠시 생각에 잠겨드니
어느 새 조금 전의 노기가 사라진 얼굴이 되었다.
"그 말을 들으니 나에게도 오해가 있었소. 만일 한때의 화풀이로 공을 죽였더
라면 원소는 어진 이를 멀리한다 하여 천하의 비웃음을 받을 뻔하였소."
노기가 풀리자 원소는 정중히 유비를 좌상으로 청한 뒤 곽도.심배를 꾸짖어
물리쳤다.
유비가 거듭 감사하며 입을 열었다.
"명공께 이토록 관대한 은혜를 입고도 갚을 길이 없으니 부끄러운 몸 어찌할
바를 모르겠습니다."
유비가 감사의 말을 하자 원소가 어두운 얼굴로 물었다.
"이렇게 패전을 거듭한 까닭은 귀공의 의제인 운장이 적군 솟에 있기 때문이
오. 무슨 방도가 없겠소?"
"그렇게 말씀하시면 저도 책임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한번 귀공의 힘으로 그를 이쪽으로 청할 수는 없겠소? 만약 그가 온다면 안
량.문추가 있는 것보다 열 배는 더 든든할 것이오."
"제가 지금 여기 있는 것을 운장에게 알려 주기만 하면 그는 밤을 새워서라도
이리로 달려올 것입니다."
"어찌하여 공은 그런 묘계를 지금까지 헌책하지 않았소?"
"의제와 저 사이에 소식이 두절되어 있을 때도 의심을 받아 왔었습니다. 만일
은밀히 의제에게 서신이라도 보냈더라면 당장 화를 입지 않았겠습니까?"
"잘 알겠소. 이젠 의심치 않을 테니 즉시 그에게 서신을 보내도록 하시오."
유비는 그날 밤 등불에 심지를 돋우고 붓을 들어 관우에게 보낼 글을 쓰고 있
었다.
'아... 다시 만날 날이 가깝구나!'
유비의 가슴은 어느 새 관우를 만날 수 있다는 기대에 젖어 있었다. 유비가
글을 썼으나 관우가 적진에 있는지라 그것을 전하는 일이 쉽지 않았다. 서신을
전할 마땅한 사람도 없었다. 이에 궁리를 거듭하는 가운데 며칠이 흘러갔다. 유
비가 관우에게 보낼 서신을 전하지 못해 애를 태우고 있는데 원소가 그런 유비
를 달랬다.
"패전을 거듭한 후 싸움은 장기전의 양상을 띠고 있소. 잠시 군사를 물렸다가
다시 일전을 겨루는 것이 좋겠소. 그럴 동안 운장에게 보낼 사람을 구하도록 합
시다."
유비는 하는 수 없이 원소의 말을 따를 수밖에 없었다.
떠나가는 관운장 천리길을 닫다
유비의 거처를 알게 된 관우는 조조에게 하직인사를 올리려 하나, 조조는 피
객패를 내걸고 두문불출한다. 이에 관우가 감.미 두 형수를 모시고 길을 떠나자
조조는 그의 신의를 부러워하며 뒤쫓아가 마지못해 그를 전송한다.
관우 때문에 크게 패한 원소는 군사를 물려 무양의 요새로 진영을 옮겼다.
원소가 군사를 물리자 조조는 하후돈에게 관도 길목을 지키게 한 후 자신은
일단 허도로 돌아갔다. 조조는 그 동안 싸움에 지친 군사들을 위로하며 잔치를
베풀었다. 조조는 여러 고관들이 모인 자리에서 관우의 공훈을 특히 치하한 후
여건을 돌아보며 순유를 칭찬했다.
"연진 싸움에서 내가 짐짓 양초를 앞세우고 말을 풀어 놓은 것은 적을 끌어들
이기 위해 계략을 쓴 것이었네. 그런데 순유가 이미 내 뜻을 알아채고 있더군."
조조의 말을 듣자 자리에 있던 사람들은 새삼 감탄을 금치 못했다. 술자리가
무르익어 흥이 오를 무렵이었다.
여남에서 파발마가 달려와 변을 알렸다. 여남에는 전부터 유벽과 공도라고 하
는 두 비적이 있었다. 본래는 황건의 잔당들이었다.
일찍이 토벌을 위해 조홍을 보냈는데 비적의 기세가 강성하여 조홍은 큰 타격
을 받고 계속 퇴각 중이라는 보고였다.
"급히 원군을 보내지 않으면 여남 지방은 그들의 손에 떨어지게 되므로 두고
두고 큰 화근을 남기는 결과가 될 것입니다."
이 소식이 전해진 것은 주연이 벌어지던 자리인지라 이 문제로 여러 고관들의
의견이 오고 갔다.
관우가 문득 일어나 조조에게 청했다.
"원컨대 저를 파견해 주십시오. 견마지로(개나 말이 하는 수고)를 다하여 그
들을 물리치겠습니다."
"운장은 이번 싸움에서 지대한 공훈을 세웠소. 그런데 나는 아직 공에게 아무
런 대접도 하지 못하고 있는데 어찌 또 노고를 끼치게 할 수가 있겠소?"
조조가 싸움을 자청하는 관우를 보며 의심쩍다는 듯이 물었다. 관우는 속마음
을 내색하지 않은 채 태연히 말을 이었다.
"필부는 옥좌를 감당키 어렵다는 말처럼, 소생 또한 안일하면 병이 생기고 맙
니다. 농부가 괭이를 손에서 놓으면 약해지듯이 소생에게도 무사안일은 몸을 해
치는 것과 같습니다."
관우의 천연덕스런 말에 조조는 마음 한 구석에 의심이 없는 것도 아니었으나
쾌히 응낙했다. 이번 싸움의 공훈이 큰 그의 청을 들어줌으로써 또 한 번 그에
대한 자신의 믿음을 보여 주자는 생각에서였다.
조조는 관우에게 5만의 군사를 붙였으며 우금.악진을 부장으로 삼게 했다.
다음 날 관우가 여남으로 떠나자 순욱이 조조에게 관우를 보낸 것을 걱정하며
말했다.
"운장을 보낸 것이 염려됩니다. 그의 마음이 항상 유비에게 가 있으니 출정
중에라도 그의 소식을 듣게 되면 그리로 갈 것입니다. 어찌하여 그를 출정토록
하셨습니까?"
순욱의 말에 조조도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나도 그것이 마음에 걸리오. 그러나 유비의 두 부인을 두고 그가 떠날 리는
없소. 그러나 이번에 한 번 더 공을 세우고 돌아오면 다시는 내보내지 않도록
하겠소."
여남 땅에 이른 관우는 오래 된 사찰에 본진을 세워 싸울 태세를 갖추고 있었
다. 그날 밤이 되자 보초소대가 첩자로 보이는 수상한 두 사람을 발견하고 그들
을 붙잡아 왔다. 관우가 끌려온 두 사람을 보니 그 중의 한 사람이 뜻밖에도 손
건이었다.
"아니, 이게 누군가?"
깜짝 놀란 관우가 손수 그의 오라를 풀고 좌우의 군사를 물리친 다음, 둘은
마주 앉았다.
"공과 헤어진 후 소식을 듣지 못하고 있었는데 이곳에서 만났구려. 그래 무슨
일로 이곳으로 오게 되었소?"
"서주를 떠난 이후 저도 이 여남으로 쫓겨와 떠돌아다니던 중 다행히 유벽이
거두어 주어 그에게 의탁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장군께서는 어쩌다가 조조에게
가게 되었습니까? 또 감.미 두 부인께서는 어떻게 되셨습니까?"
손건이 묻자 관우는 그 동안에 있었던 일을 소상히 손건에게 들려 주었다. 관
우는 얘기를 끝낸 후 손건에게 다시 물었다.
"공은 혹시 가형 현덕의 행방을 알고 계시오? 지금 어디에 계시오?"
"근자에 소문을 듣자하니 현덕 공은 하북의 원소에게 가 계신다고 하였습니
다. 저도 그리로 가고 싶었으나 아직 기회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원소가 유벽에
게 꽤 많은 물자와 재화를 보내 왔습니다. 그 대신 하북과 동맹을 맺고 조조군
을 치라는 조건이었습니다. 내일 유벽과 공도 두 사람은 싸움터에 나가 짐짓 패
한 체하여 달아날 것입니다. 장군께서는 허도에서 급히 두 부인을 모시고 이곳
으로 오십시오. 두 부인을 모시고 원소에게 투항하면 현덕 공을 뵈올 수 있을
것이오."
유비가 무사하다는 소식을 들은 관우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감격에 겨워 한
동안 입을 열지 못했다.
관우가 이윽고 마음을 가다듬고 손건에게 물었다.
"유벽과 공도가 어찌하여 도망을 친다는 말이오?"
"비록 도적의 두목이긴 하나 유벽과 공도는 전부터 마음 속으로 깊이 공을 흠
모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번에 운장께서 출정하였다는 말을 듣고 오히려 기
뻐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한편 원소와의 맹약도 있어 싸우지 않을 수 없을 테
니, 공은 그들을 적당히 공격하십시오."
"알겠소. 이미 형님의 거처를 안 이상 나는 밤낮을 가리지 않고 갈 것이오.
그러나 내가 안량.문추를 죽였으니 형님께서 그 일로 무슨 변이나 당하시지 않
았을까 그것이 걱정이오."
"그럼, 이 손건이 먼저 하북으로 가서 미리 그 주위의 사정을 염탐해 보겠습
니다. 공은 두 부인을 모시고 오십시오. 그러면 중간까지 마중을 나가겠습니
다."
"한시라도 빨리 주군의 무사한 모습을 뵙고 싶소. 단 한 번 그 얼굴을 뵙는
것만으로도 관우가 소원을 이루는 것이오. 그 이후에는 죽어도 목숨이 아깝지
않을 것이오."
관우가 금방이라도 눈물을 흘릴 듯한 얼굴이 되어 말했다.
그날 밤이 되자 관우가 몰래 뒷문으로 손건과 또 한 사람을 내보냈다.
이튿날, 관우가 군사를 이끌어 나가자 유벽과 공도도 나란히 진두에 나타났
다.
"너희들은 어찌하여 조정을 거스르려 하느냐?"
관우가 그들을 꾸짖었다.
"너는 주인을 배반하지 않았느냐? 네가 나를 책망하니 가소롭구나."
공도와 유벽도 관우의 말에 대꾸하며 화를 돋우었다. 거짓으로 관우와 공도가
험한 말을 주고받으며 화를 내지만 군사들은 알 리 없었다.
공도의 말에 관우가 다시 화를 내며 소리 높여 외쳤다.
"내가 언제 주인을 배반하였다는 말이냐?"
"유현덕이 지금 하북의 원본초에게 가 있는데, 너는 지금 조조의 휘하에서 굽
신거리고 있지 않느냐?"
관우는 그 말에는 대답도 하지 않은 채 몹시 화가 난 듯한 표정을 짓고는 청
룡도를 휘두르며 말을 달렸다. 공도가 그런 관우를 보더니 두려움을 느낀 척하
며 말머리를 돌려 달아났다.
그렇게 한동안 쫓고 좇기며 달아나던 공도가 몸을 돌려 관우에게 가만히 말했
다.
"옛 주인의 은혜를 잊어서는 안 될 것이오. 이제 여남을 공에게 내드릴 것이
니 급히 이곳을 평정하고 허도로 돌아가시오."
공도와 유벽은 그 말을 끝내자 말을 달려 달아났다. 관우는 뒤쫓아오는 군사
들을 이끌며 그들을 추격했다. 관우가 군사를 거느려 맹추격을 하자 공도와 유
벽군은 크게 두려워하는 것처럼 사방으로 뿔뿔이 흩어졌다. 관우는 힘들이지 않
고 여남을 평정하고 백성들을 위로하여 동요하지 않도록 한 다음 곧장 허도로
돌아왔다.
관우가 여남을 평정하고 돌아오자 조조는 성 밖에까지 나와 관우를 영접했다.
관우를 위해 성대한 잔치를 베풀고 군사들의 노고를 치하했다. 조조가 권하는
술잔을 사양하지 않고 마신 관우는 잔치가 끝나 집으로 돌아가자 문 밖에서 두
형수에게 절하며 문안을 드렸다.
"방금 여남에서 개선하였습니다. 그 동안 별고 없으셨습니까?"
그러자 감 부인이 물었다.
"아주버님은 두 번이나 싸움터에 나갔다 오셨는데, 이번에는 황숙의 소식을
들으셨는지요?"
감 부인.미 부인은 벌써 눈물을 글썽이며 말을 잇지 못했다. 관우는 술기운을
토해 내면서 망연한 표정이 되더니 대답했다.
"아직 아무런 소식도 듣지 못했습니다. 너무 상심하지 마시고 좀더 기다려 주
십시오."
그 말에 미 부인도 감 부인도 주렴 뒤에 엎드려 한동안 소리내어 울면서 말을
이었다.
"필경 주인께서는 어디선가 싸우시다 돌아가신 게지요? 그렇지 않다면 어찌
이리 소식 한 번 듣지 못한다는 말씀입니까? 큰아주버님께서는 우리 두사람이
괴로워할까 봐 숨기고 계신 것일 테지요."
관우는 두 형수의 통곡을 더 이상 듣고 있을 수만은 없어 슬며시 절하며 물러
나왔다. 그때 관우를 수행하여 여남을 다녀온 늙은 군사 하나가 안쪽의 문을 지
키고 있었다. 그 군사는 두 부인의 통곡 소리를 듣다못해 슬며시 다가가 아뢰었
다.
"두 부인은 이제 울음을 거두십시오. 주인께선 지금 하북의 원소에게 가 계십
니다."
이 말에 두 부인은 울음을 그치더니 서로 얼굴을 마주 보았다. 감 부인이 그
군사에게 물었다.
"그대가 어찌하여 아느냐?"
"이번에 관 장군을 따라 여남에 갔을 때 그렇게 말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그 말에 기쁨을 감추지 못한 두 부인은 급히 관우를 불러들이게 했다. 관우에
게 이 사실을 숨긴 까닭이 무엇인지 묻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황숙께서는 아주버님을 저버린 적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아주버님은 조조의
은혜에 얽매여 그 새 지난날의 의를 잊으셨다는 말입니까? 어찌하여 우리에게
황숙이 원소에게 가 계시다는 사실을 숨기십니까?"
관우는 누군가가 이 사실을 두 부인에게 얘기했다는 것을 알고 당황했다. 그
러나 그 사람이 누구인가를 알아보기 전에 두 부인의 책망이 매서워 머리를 조
아리며 사실을 밝혔다.
"형님이 원소에게 가 계시다는 것은 사실입니다. 감히 두 형수분께 말씀드리
지 않은 것은 혹시라도 이 일이 새어 나갈까 두려워서였습니다. 이런 일은 서서
히 도모해야지 급히 서두르면 아니 됩니다."
두 부인은 관우의 말에 그제야 부드러운 얼굴이 되어 다시 궁금증이 이는 듯
물었다.
"아주버님은 그 일을 누구한테서 들으셨습니까?"
"손건을 만나 그의 입을 통해 들었습니다. 손건이 하북으로 가서 다시 그곳의
동정을 엿본 후 제가 두 형수분을 모시고 가면 마중 나오기로 했습니다."
"그러면 언제 이 허도를 탈출할 계획이신가요?"
그러자 관우는 황망히 고개를 돌려 뜰안을 살펴본 후 말문을 열었다.
"아직은 알 수가 없습니다. 형님을 만나는 날까지 잠자코 계십시오. 낮말은
새가 듣고 밤말은 쥐가 듣는 법입니다. 아무 말도 입 밖에 내지 마십시오."
관우가 이렇게 말하자 두 부인은 관우를 성급히 오해했다는 거에 몸둘바를 몰
라하며 말했다.
"아주버님이 알아서 처결토록 하시오."
관우는 두 형수가 그렇게 말하자 안심하고 안채를 물러나왔다.
한편 관우의 부장이 되어 여남에 출정했던 우금도 유비가 원소에게 있다는 것
을 알고 있었다. 어는 날 조조에게 나아가 이 사실을 조용히 알렸다. 이 말을
듣고 조조는 장요를 불러 물었다.
"근자에 운장의 동정은 어떤가?"
"술도 사양한 채 문간방에서 글만 읽고 있습니다."
며칠 후 장요가 이렇게 대답하자 조조는 관우의 속마음을 떠 보도록 일렀다.
장요가 관우에게 갔을 때 관우는 유비를 찾아갈 방도만 궁리하고 있었다.
"듣자하니 형이 이번 싸움터에서 현덕 공의 소식을 알게 되었다기에 그 일을
축하하러 왔습니다."
장요의 말에 관우는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다. 관우는 더 숨길 필요가 없다고
여겨 솔직하게 속마음을 털어놓았다.
"비록 옛 주인이 계시는 곳을 알았다고는 하나, 아직 뵙지를 못하니 무엇이
기쁘겠소?"
그러자 장요가 넌지시 물으며 관우를 바라보았다.
"형과 현덕 공의 교우를 저와 형과의 교우에 비한다면 어떠합니까?"
"나와 공과의 사이는 친구의 교분이오. 그러나 황숙과 나는 친구의 교분에다
형제요, 또한 군과 신의 의를 더했으니 어찌 함께 비하겠소?"
관우가 주저없이 대답했다. 장요가 다시 물었다.
"이제 현덕 공이 하북에 있음을 알았으니 형은 그리로 가시겠소, 아니면 여기
계시겠소?"
"지난날의 약속이니 어찌 스스로를 배반하겠소. 마침 공이 찾아오셨으니 아무
쪼록 공이 승상께 잘 말씀드려 내 뜻을 전해 주시오."
관우는 장요에게 이렇게 말하며 자기의 마음을 전하게 했다. 장요는 그의 철
석 같은 마음에 감탄하는 한편 내심 걱정이 되었다. 그러나 조조에게 돌아간 장
요는 사실대로 전할 수밖에 없었다.
"그의 마음은 벌써 하북의 유현덕에게 가 있습니다."
조조는 묵묵히 그 말을 듣더니 미간을 찌푸리며 탄식했다.
"그를 끝내 붙들지 못한다는 말인가?"
조조가 말없이 생각에 잠겨 있다가 문득 밝은 얼굴이 되어 혼자서 중얼거렸
다.
"그렇지. 내게 그를 붙잡아 둘 계교가 한 가지 있다."
조조는 그날부터 부문 기둥에 패를 내걸었다. 함부로 출입하는 것을 엄금한다
는 패였다.
한편 장요가 돌아가고 난 후 관우는 상부에서 조조의 연락이 있을까하여 기다
렸으나 며칠이 지나도 아무런 소식이 없었다.
그런 어느 날 문간방에서 집으로 돌아오는 도중있었다. 어둠 속에서 한 사람
이 다가왔다.
"우 장군께 이것을 전합니다. 나중에 보시기 바랍니다. 보신 후 답장을 준비
해 두십시오."
그 사람은 한 통의 서찰을 슬쩍 손에 쥐어 주고는 바람같이 사라져 버렸다.
관우가 깜짝 놀란 가운데도 서찰을 품에 감춘 채 방까지 들어와 그제야 서찰을
꺼내 보았다. 놀랍게도 그 서찰은 유비가 쓴 것이었다. 관우는 단숨에 읽어 내
려갔다.
<그대와 나는 일찍이 도원에서 의를 맺은 형제 사이였네. 내가 본래 불초한데
다가 또한 때마저 이롭지 못한 탓인가. 이제는 맹세도 헛되고 옛 은의는 잊혀지
고 끊어진 듯하네. 만일 그곳에서 그대로 부귀를 누리고 공명을 얻고자 한다면
그대에게 보답한 바 없는 나로서는 적으나마 이 비의 머리를 선물하여 그대로
하여금 큰 공을 이루도록 하겠네. 몇 자 글로써 어찌 할 말을 다하겠나. 하남의
하늘을 바라보며 죽기를 각오하고 그대의 회신을 고대하겠네.>
관우로서는 실로 야속하고 원망스러운 유비의 글이었다. 부귀, 영달 그런 것
때문에 의를 저버릴 관우라고 여기다니, 가슴이 무너져 내리는 것 같았다. 관우
는 통곡하며 탄식할 뿐이었다.
'형님을 찾지 않은 것은 계시는 곳을 몰랐기 때문입니다. 어찌 부귀를 탐하여
옛 맹세를 저버린다는 말입니까?'
그날 밤 관우는 잠을 이루지 못했다. 그리고 그 이튿날도 문간방에 홀로 앉아
있는데 집을 지키는 군사 하나가 와 알렸다.
"친구분께서 오셨습니다."
관우가 그를 청해 맞고 보니 일전에 유비의 서찰을 전해 준 바로 그 사람이었
다.
관우는 좌우를 모두 물린 뒤 그에게 물었다.
"공은 뉘시오."
"원소의 가신 진진이라는 사람입니다. 형님께서 귀공을 기다리심이 간절하십
니다. 공의 의향은 어떻습니까?"
"내 마음이야 조급하기 짝이 없소. 그러나 처음과 끝이 한결같지 않은 자는
군자라고 할 수 없소. 내가 처음 조조에게 올 때 나의 뜻을 뚜렷이 하였으니 떠
날 때도 내 뜻을 분명히 알릴 것이오. 내가 써 둔 서찰을 귀공께서는 우선 형님
께 전해 주시오. 나는 조조에게 하직 인사를 하고 두 형수분을 모시고 가겠소."
관우가 이렇게 말하자 진진이 물었다.
"만일 조조가 장군과의 작별을 허락하지 않으면 어찌하시겠습니까?"
관우가 결연한 어조로 대답했다.
"그때는 육신을 버리고 혼백이 되어 형님에게로 갈 것이오."
관우가 그렇게 말하며 자신이 써 둔 글을 진진에게 펼쳐 보였다.
<듣기에 의로움은 진정을 저버리지 않으며, 충성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고 하였습니다. 관우는 어려서부터 책을 읽어 예와 의를 익힌 바 있습니다. 저
양각애와 좌백도의 옛일(전국시대 사람, 친구 사이로 함께 벼슬길에 올라 초나
라로 가다 큰 눈을 만나 동사할 지경에 이르렀다. 이에 좌백도가 자신의 옷과
양식을 양각애에게 모두 주고 자신은 빈 나무 등걸속에 들어가 죽었다)을 읽을
때는 세 번이나 감탄하며 울었습니다. 지난번 하비성을 지킬 때 안으로는 곡식
이 바닥나고 밖으로는 구원 오는 군사가 없으므로 저는 오직 적을 베다 죽을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두 형수님이 곁에 계시므로 형님의 뜻을 저버리고 감
히 제 한 몸만을 버릴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잠시 조조에게 몸을 의탁하고 형
님과 만날 날을 고대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다가 근래 여남에 가서야 비로
소 형님의 소식을 알게 되었습니다. 곧 조조를 만나 조조에게 작별을 고한 뒤
두 형수분을 모시고 돌아가겠습니다. 만약 이 관우가 딴 마음을 품었다면 신령
과 사람이 아울러 저를 죽임으로써 벌을 내릴 것입니다. 붓과 종이로는 마음 속
의 진정을 다 쓸 수가 없습니다. 형님을 우러러 뵈올 날이 이제 머지않았으니,
바라옵건대 이 관우의 참마음을 헤아려 주십시오.>
관우의 글을 받아든 진진은 급히 허도를 떠났다. 진진이 떠나자 관우는 두 형
수에게 유비에게서 서찰이 왔음을 알리고 조조가 있는 승상부로 갔다.
그러나 조조는 관우가 하직을 청하러 올 줄을 알고 이미 문 앞에 '근사방객고
문(방문객의 문 두드림을 삼가함)'이라고 쓴 피객패를 내걸고 있었다. 손님은
대문에 이 피객패가 붙어 있을 때는 어떤 볼일이 있어도 잠자코 돌아가는 것이
예의였다.
관우는 잠시 동안 문 앞에서 서성거리다가 하는 수 없이 발길을 돌렸다. 다음
날도 아침 일찍이 와 보니 여전히 그 패가 그의 방문을 막고 있었다. 다음 날은
저녁때를 택하여 부문에 가 보았다. 그러나 문은 초저녁부터 닫혀 있었다.
관우는 집으로 돌아와 우선 하비성에서부터 자신을 따랐던 사람들 20여 명에
게 명했다.
"일간 두 부인께서 이곳을 떠날 것이니 비밀히 출발 준비를 하라."
관우는 출발 준비를 할 때 두 형수에게는 물론 하인들에게도 엄명을 내렸다.
"이 집 안에 있는 가구는 물론, 전에 조조가 나에게 선물한 금은과 비단도 모
두 봉하여 남겨 두되 한 가지도 가지고 가서는 안 된다."
출발 준비를 하는 동안에도 관우는 매일의 일과처럼 부문에 나가 보았다. 그
렇게 헛걸음하기를 7, 8일이나 했다.
'도리가 없다. 장요를 찾아가 의논해 보자.'
그러나 장요도 병을 핑계로 만나 주지 않았다.
'이는 필시 조 승상이 나를 가지 못하게 하려는 것이다. 그러나 떠나기로 작
정한 이상 내 어찌 이곳에 더 머물 수 있으랴.'
관우는 그날 밤 붓을 들어 조조에게 보내는 글 한 통을 썼다.
<관우는 일찍이 황숙을 섬겼으며 생과 사를 함께하기로 맹세했으니 하늘과 땅
이 이를 지켜 보았습니다. 지난날 하비성을 잃었을 때 승상께 새 가지 청을 드
린 바, 승상께서 허락하셨습니다. 이제 알고 보니 옛 주인은 원소의 군중에 의
탁하고 있다 하니, 지난날의 맹세를 생각하건대 어찌 저버릴 수가 있겠습니까?
승상께서 베푸신 은혜가 긴하나 잊기 어려운 것이 옛 주인과의 은의입니다. 이
에 특별히 글을 올려 하직을 고하오니 엎드려 바라건대 너그러이 헤아려 주시기
바랍니다. 아직 다 갚지 못한 은혜는 후일로 기약하겠습니다.>
관우는 사람을 시켜 글을 승상부로 전하게 했다. 조조에게서 그 동안 받은 금
은 보배를 일일이 봉하여 곳간에 넣은 다음, 방의 벽에는 한수정후의 인뒤웅이
를 끌러 걸어두었다.
올 때 입었던 그 차림뿐, 가지고 가는 것이라고는 청룡언월도와 적토마, 그리
고 그 동안 즐겨 읽던 <춘추> 책 한 권뿐이었다.
한 대의 수레가 집으로 오자 두 부인을 오르게 한 후, 종자 20여 명으로 하여
금 수레 옆과 뒤를 호위하게 했다.
관우 자신은 적토마에 올라 청룡언월도를 들고 북쪽 성문으로 향했다. 북문에
이르자 성문의 파수병들이 수레를 가로막았다.
"수레에 손을 대는 자는 단칼에 목이 날아가리라!"
관우가 눈을 부릅뜨고 칼을 비껴들며 호령하자 파수병들은 기가 질려 슬금슬
금 뒤로 물러났다.
북문을 나오자 관우는 종자들에게 일렀다.
"필경 날이 새자마자 추격대가 올 것이니라. 뒤쫓는 자가 있으면 내가 그들을
모두 막을 테니, 부디 두 부인께서 놀라시는 일이 없도록 하라."
그렇게 일러 놓고 관우는 뒤로 처졌다. 그리고 북대가의 관도(국도)를 유유히
말을 몰아가고 있었다.
한편 관우와 감.미 부인이 머물렀던 저택에는 새벽녘이 되자 한바탕 소동이
일었다. 시각마다 순찰을 도는 순라대원이 여느 때처럼 관아의 거리를 돌고 나
서 감.미 부인이 묵는 안채 앞에 이르렀다.
"이상한 일이로군. 중문이 열려 있는데 인기척이 없지 않은가?"
뚜벅뚜벅 문 안으로 들어갔던 순라대원이 놀란 얼굴로 소리쳤다.
"큰일났네 그려. 텅 빈 집이야!"
순라대원들은 출입이 금지된 안채로 뛰어들었다. 그러자 그곳에는 열 명의 아
리따운 여인들이 벙어리처럼 우두커니 방을 지키고 있었다.
"어찌 된 일이오? 이곳에 기거하던 두 부인과 하인들은 모두 어디로 갔소?"
순라대원이 묻자 그 중 한 여인이 말없이 북쪽을 가리킬 뿐이었다. 이 열 명
의 여인은 조조가 관우에게 보냈던 여인들이었다. 관우는 이들에게 두 부인의
시중을 들게 했는데 떠나면서 집에 남겨 둔 것이었다.
그날 아침 조조는 무슨 예감이라도 들었든지 여느 때보다 일찍 모사들을 불러
놓고 관우에 대해 의논을 하고 있었다. 그때 수하 하나가 와서 관우가 써 놓고
간 서신을 바쳤다.
조조는 그 서신을 읽고 놀란 목소리로 탄식했다.
"운장이 기어이 떠나고 말았구나!"
이어 순라대의 보고가 들어왔다.
"수정후의 인뒤웅이, 금은보화와 비단 등속, 그리고 여인 열 명을 그대로 둔
채 관 공과 두 부인이 원래 데려왔던 자들과 짐만을 가지고 떠났습니다."
또 얼마 있지 않아 북문을 지키던 수문장이 말을 달려와 고했다.
"관 공이 북문을 위협하여 빠져 나갔습니다. 수레와 기병 20여 명과 함께 북
쪽으로 갔습니다."
연이어 들어오는 보고에 모여 있던 이들이 모두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조조
가 침통한 얼굴로 잠시 입을 다물고 있는데 한 장수가 나서며 아뢰었다.
"제게 철리 3천만 내려 주십시오. 관운장을 사로잡아 승상께 바치겠습니다."
조조가 그를 보니 원비장군 채양이었다. 조조의 장수들 중에 장요와 서황이
관우와 교분이 두터웠고 나머지 장수들도 모두 관우를 경복하는 터였다. 그러나
유독 채양만은 평소에 관우를 가벼이 여기고 있었으므로 그를 추격하겠다고 나
선 것이다. 그러나 조조는 채양을 꾸짖어 물리쳤다.
"나에게는 무정한 사람이나 관 공은 역시 대장부다. 옛 주인을 잊지 않으며
오고 감을 분명히 하지 않았느냐. 너희들은 마땅히 그를 본받아야 하리라."
그러나 정욱이 정색을 하고 나섰다.
"관 공에게는 세 가지 죄가 있습니다. 승상께서 그토록 관대히 대하시면 우리
장수들의 사기가 저하될까 두렵습니다."
"관 공의 죄라는 것이 무어요?"
"첫째로 은혜를 잊은 죄요, 둘째로 하직 인사도 하지 않고 몰래 집을 빠져 나
간 죄입니다. 다음으로 하북의 사자와 비밀리에 밀서를 주고받음이 그 죄입니
다."
"그렇지 않소. 관 공은 처음부터 내게 떠나는 것을 허락받은 몸이었소. 약조
를 해 놓고 굳이 그 이행을 회피해 온 것은 이 조조지 그가 아니었소."
"그러나 그가 원소에게 가는 것을 그냥 둔다면 그것은 호랑이에게 날개를 달
아 주는 격입니다. 지금 죽여 화근을 없애야 할 것입니다."
"그렇다고 뒤따라가 그를 죽인다면 천하의 사람들은 모두 조조를 가리켜 신의
가 없다고 할 것이오. 장부와 장부의 약속이니 그를 뒤쫓지는 마시오."
조조는 정욱의 말에 다시 한 번 다짐을 둔 뒤 장요에게 탄식 섞인 분부를 내
렸다.
"운장이 금은을 봉해 두고 인마저 두고 떠나니 재물이나 벼슬로도 그의 뜻을
돌릴 수가 없구나. 실로 공경할 만한 인물이오. 아직 떠난지가 얼마 되지 않았
으니 멀리 가지는 못했을 것이오. 떠나기 전에 내가 그를 피했다는 것이 부끄럽
소. 내가 이 기회에 차라리 나의 참다운 정을 보이고 신의 있는 작별을 고하고
싶소. 그대가 뒤쫓아가 내가 전송하러 나오니 잠시 기다리라 이르시오. 떠나는
관 공에게 노자와 전포를 내려 오늘을 기념할까 하오."
장요는 명을 받들어 홀로 말을 달렸다.
이어 조조는 관우가 노자로 쓸 금은과 포의를 준비토록 한 후 수십 기만 거느
리고 장요의 뒤를 따랐다.
관우의 적토마는 하루에 천 리를 달린다는 명마였다. 그러나 두 부인이 탄 수
레와 함께 가기 때문에 빨리 달릴 수가 없었다.
장요가 홀로 말을 타고 뒤쫓으니 얼마 달리지 않아 관우를 만날 수 있었다.
"운장, 잠깐만 기다려 주시오!"
관우가 그 소리에 놀라 돌아보니 장요가 뒤쫓아오고 있었다. 관우는 이미 이
런 일이 있을 것이라고 짐작했던 터라 두 부인이 타고 있는 수레 옆으로 가 일
렀다.
"너희들은 수레를 모시고 먼저 가거라."
관우는 두 부인이 놀라지 않게 부드럽게 이른 뒤 말머리를 돌렸다. 청룡도를
비껴든 관우가 마주 오는 장요를 가로막으며 말했다.
"역시 문원이었구려. 그대는 나를 데려가려고 쫓아오는 길인가?"
장요는 관우의 물음에 손을 내저었다.
"아니오. 내가 여기까지 온 것은 승상께서 몸소 형을 전송코자 하시어 알리러
온 것이오. 형은 승상께서 오실 때까지 잠시 머물러 주시오."
"승상이 여기를?... 그러나 철기를 거느리고 오신다면 나는 죽기로 싸울 따름
이오."
관우는 말을 마치고 몸을 돌리더니 패릉교 한가운데로 달려가 말머리를 돌려
세웠다. 그가 다리 위 한복판을 가로막고 서는 것은 많은 군사와 싸우더라도 다
리 위에서는 사면으로부터 포위당할 염려가 없기 때문이었다.
그때 조조가 철기 수십을 거느리고 달려오는 것이 보였다. 관우가 보니 조조
의 뒤를 따라 허저.서황.우금.이전 등의 장수들도 뒤따르고 있었다. 모두 갑옷
을 입지 않고 패검 외에는 무기도 들고 있지 않았다.
조조는 관우가 말을 탄 채 다리 위에 있는 것을 보고 그가 자신을 경계하고
있음을 알았다. 그는 장수들에게 명했다.
"그대들은 말을 멈추고 좌우로 늘어서도록 하라."
관우는 장수들의 손에 병장기가 없음을 보았는지라 경계하는 기색을 풀고 부
드러운 얼굴로 조조를 대했다.
"운장은 어찌 그리 서둘러 떠나시오?"
관우는 말 위에 앉은 채 절을 하며 예를 표한 뒤 조조의 원망 섞인 물음에 답
했다.
"일찍이 승상께 아뢰었던 대로, 옛 주인이 계신 곳을 알게 되었으니 급히 떠
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부디 허락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나도 재상으로서 사람들로부터 신의를 얻고자 하는 사람이오. 약조한 일을
어찌 저버릴 수 있겠소?"
"크신 은공 언제인들 잊을 수 있겠습니까? 하오나 옛 주인 계신 곳을 알고도
머물러 있을 수만은 없었습니다. 승상께 하직 인사를 하기 위해 여러 번 승상부
로 갔으나 뵙지 못해 글로 인사를 대신하였습니다. 그 동안 승상께서 내리신 금
은은 모두 곳간에 봉해 두고 인수도 걸어 두고 왔으니 바라건대 지난날의 약조
를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관 공의 방문이 있을 것으로 알고 미리 피객패를 걸어 둔 것이었소. 관 공을
붙들어두고자 하는 충정이었으니 과히 허물치 마시오. 내가 여기까지 온 것은
장군이 먼길을 가는데 불편이 있을까 염려되어 약간의 노자나 드리고 작별할까
함이오."
조조의 말이 끝나자 한 장수가 관우에게 황금이 가득 담긴 쟁반을 바쳤다. 그
러나 관우는 선뜻 받으려 하지 않았다.
"머물러 있는 동안에 승상으로부터 과분한 대접을 받았습니다. 아직 은혜를
다 갚지 못한 몸이니 이 황금은 부디 공 있는 군사들에게 나누어 주십시오."
"장군이 세운 큰 공의 만분의 일이라도 보답고자 하는 것이오. 어찌 이렇게
굳이 사양하려 하시오?"
"보잘것 없는 작은 수고입니다. 제발 잊어 주십시오."
관우는 끝내 조조가 주는 황금을 사양했다. 조조가 웃으며 말했다.
"관 공 같은 천하의 장부를 내가 복이 없어 붙들어 두지 못함이 한스럽소. 여
기 비단 전포 한 벌을 가져왔소. 나의 정표로 여기고 사양하지 마시오."
한 장수가 말에서 내려 비단 전포를 두 손으로 들고 와 관우에게 바쳤다. 관
우도 차마 그것까지는 사양하지 못했다. 관우는 만일을 경계하며 말에서 내리지
도 않고 청룡도 끝으로 비단 전포를 걸어 어깨에 걸쳤다.
"승상께서 내리신 전포이니 고맙게 받겠습니다. 다음에 뵈올 날을 기약하며
오늘은 이만 길을 재촉하겠습니다."
관우는 이렇게 인사말을 남기고 적토마를 몰아 북쪽으로 떠나갔다. 관우가 유
유히 말머리를 돌려 떠나는 걸 본 허저가 볼멘소리를 했다.
"오만불손하기 짝이 없습니다. 어찌 떠나는 걸 보고만 계십니까?"
다른 장수들도 제각기 한 마디씩 불평을 늘어놓았다.
"은혜로운 전포를 칼끝으로 받다니..."
"승상께서 지나치게 관대하게 대하시니 그가 예의조차 지키지 않고 있습니다.
그를 왜 사로잡지 않으십니까?"
조조가 그들을 만류하며 타일렀다.
"그는 단기이고 우리는 수십 명이다. 어찌 그 정도의 경계도 하지 않겠느냐?
내 이미 그를 보내기로 하였으니 뒤쫓지 말라."
조조는 장수들을 거느리고 다시 허도로 향했다.
"적이건 아군이건 무인다운 정신을 접하는 것만큼 보람 있는 일도 없다. 그대
들도 그와 같은 인물을 만났다는 것을 은덕으로 여기라. 그의 심지는 본받을 만
한 것이리라."
조조는 관우를 떠나보낸 것이 못내 아쉬운 듯 탄식해 마지않았다. 관우 또한
조조와 같은 대인을 만났기에 의로운 무인으로서의 기개를 펴며 옛 주인 유비에
게 되돌아갈 수 있었던 것이다.
관우는 조조가 뒤쫓아와 시각이 뜻밖에 지체되었으므로 서둘러 말을 몰았다.
그러나 20여 리를 뒤쫓았으나 수레가 보이지 않았다. 관우가 당황하여 이곳 저
곳을 말을 달리며 수레를 찾아 헤매고 있는데 문득 산 위에서 외치는 소리가 들
려 왔다.
"관 장군께서는 잠깐만 기다려 주십시오."
관우가 흘낏 산 위를 바라보니 산 위에서 1백여 명쯤 되어 보이는 군졸들을
거느리고 이쪽을 향해 달려오는 장수가 있었다. 그 장수는 아직 스물 안팎의 젊
은 장수로 머리에는 누런 띠를 두르고 있었고 손에는 창을 들고 있었다. 관우는
청룡도를 치켜들며 마주 오는 그에게 물었다.
"그대는 누구인가?"
젊은 장수는 관우 앞에 이르자 훌쩍 말에서 뛰어내려 땅바닥에 엎드려 절하더
니 입을 열었다.
"소생은 양양 태생으로 이름은 요화, 자는 원검이라 하옵니다. 천하가 난리
속에 휩쓸리자 고향을 떠나 강호를 유랑하는 사이 5백여 명의 부랑자들을 모아
도적질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패거리 중에 두원이란 자가 있는데 산을
내려갔다가 두 부인이 탄 수레를 이끌고 왔습니다."
"수레를 너희들의 산채로 끌어갔다는 말이냐?"
관우가 눈을 부릅뜨며 물었다. 당장이라도 산으로 말을 몰아갈 듯한 기세였
다.
"잠깐만 기다려 제 말을 들어 주십시오. 수레를 호위하고 있는 자들에게 물으
니 그 두 분은 뜻밖에도 한의 유 황숙의 부인들이며, 또 장군께서 호송해 왔다
고 하였습니다. 저는 그 말을 듣자 곧 부인을 산 아래로 모시려 하였습니다. 그
러나 두원이 흉칙한 속셈까지 드러내며 반대하길래 제가 그 놈을 죽였습니다.
그 목을 베어 장군께 바쳐 지은 죄를 빌고자 합니다."
요화는 그를 따르는 무리들이 가지고 온 목 하나를 관우 앞에 내놓았다. 관우
가 요하를 노려보며 물었다.
"산적의 두목인 그대가 어찌하여 한패거리의 목을 베어 나에게 갖다 바치는
가?"
관우의 말에 요화가 다시 몸을 굽히며 대답했다.
"유 황숙님과 관 장군님의 충절과 무용은 저도 이미 들은 바 있습니다. 아무
리 도적질로 살아간다지만 아직 한 조각 밝은 마음을 지니고 싶기로 이렇게 달
려왔습니다."
"그렇다면 두 부인은 어디 계신가?"
"잠시 기다려 주십시오. 곧 모시고 오겠습니다."
요화는 그렇게 말하고 나서 말 위로 뛰어오르더니 산 속으로 달려갔다. 얼마
지나지 않아 1백여 명의 졸개들에게 두 부인의 수레를 호위하게 한 채 요화가
앞장 서 산길을 내려왔다.
수레가 보이자 관우는 말을 달려갔다. 말에서 내린 관우가 수레 앞에 나아가
엎드려 절하며 문안을 드렸다.
"두 형수분을 놀라게 해 드려 죄스럽습니다. 이젠 안심하십시오."
두 부인은 아직도 두려운 듯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만약 요 장군이 없었다면 우리는 변을 당했을 것입니다. 요 장군에게 감사의
말을 전해 주시기 바랍니다."
두 부인의 말을 들었으나 아직 그를 믿지 못하는 관우였다. 그러자 부인을 호
위해 왔던 군사들이 그 동안 있었던 일을 알렸다.
"한패거리인 두원이 두 부인을 서로 하나씩 차지하여 아내로 삼자고 하였습니
다. 요화는 들은 척도 않고 저희들에게 부인은 어떤 분이며 어디로 가는 길인가
하고 자초지종을 물었습니다. 저희들의 이야기를 듣고 난 요화가 두 부인을 산
아래로 모셔다 드리려 하니 두원이 듣지 않았습니다 .그러자 요화가 그를 베어
버렸습니다."
그 말을 듣고 관우는 요화에게 허리를 굽히며 감사를 표했다.
"두 부인이 무사함은 실로 그대의 공이오."
요화는 관우의 치하에 송구해하는 가운데도 조용히 청했다.
"바라옵건대, 소생도 언제까지나 산 속에서 도적으로 살고 싶지 않으니 관 장
군의 휘하로 거두어 주시기를 감히 청해 볼까 합니다. 여기 1백여 명의 보졸이
있으니 수레라도 호위하게 해 주십시오."
관우는 두 부인을 구해 준 것은 감사했으나 요화의 간곡한 청을 들어 주는 것
만은 아무래도 내키지 않았다. 그들이 황건의 잔당이라는 것이 꺼림칙하기 때문
이었다. 황건의 무리를 이끌고 다녔다는 소문이라도 퍼지면 자신은 물론 옛 주
군인 유비의 명예도 더럽혀질까 걱정이 되었다. 관우는 그 청만은 거절했다.
요화는 또 노자에 보태 쓰라고 금은, 비단을 바쳤다. 관우는 이것도 사양했으
나 그 뜻이 고마워 넌지시 이들에게 일러 두었다.
"오늘 받는 고마움은 꼭 기억해 둘 것이오. 언젠가는 재회할 날이 있을 것이
오. 이 관우이건, 현덕 공이건 어딘가에 자리를 잡았다는 소문을 듣거든 꼭 찾
아 주시오."
관우가 이렇게 말하니 요하는 거듭 송구해하며 절을 올린 다음, 부하들을 거
느리고 산 속으로 사라졌다.
관우는 다시 수레를 재촉하여 길을 떠났다. 길은 먼데 가을 해는 짧았다. 해
가 기울자 일행은 어느 마을의 장원(벼슬아치가 소유한 땅)에 이르러 하룻밤 묵
어가기로 하였다.
관우가 주인을 불러 청했다. 머리와 수염이 학처럼 흰 한 노인이 나와 관우를
맞으며 물었다.
"장군의 성함이 어떻게 되시오?"
관우는 허리를 굽혀 예를 표했다.
"저는 유 황숙의 아우되는 관우라는 사람입니다."
"아니, 그럼 안량.문추의 목을 벤 운장 공이란 말씀이오?"
노인은 놀라는 한편 기뻐하며 관우에게 물었다.
"그렇습니다."
"그럼 수레에는 누가 타고 있습니까?"
"유 황숙의 두 부인께서 타고 계십니다."
노인은 더욱 놀라워하며 이들을 정중히 안으로 맞아들였다.
두 부인이 수레에서 내리자 노인은 딸과 손녀를 불러 부인의 시중을 들게 했
다.
"귀빈이므로 잘 모셔야 한다."
노인은 딸과 손녀에게 일렀다.
노인은 옷을 갈아입은 후 두 부인이 있는 초당 위로 나와 인사를 했다. 관우
는 두 부인의 옆에 손을 모은 채 시립해 있었다.
노인이 그런 관우를 보고 괴이쩍게 여기며 말했다.
"장군가 현덕 공과는 의형제 사이이니 두 부인은 형수가 되지 않소. 먼길에
피로하셨을 텐데 쉬지도 않고 왜 그렇게 예의만 지키고 있소?"
"세 사람이 결의형제를 맺었으나, 의와 예에 있어서는 군신의 관계여야 한다
고 굳게 맹세했습니다. 아직까지 군신의 예를 어긴 적이 없습니다. 노인장에게
는 그것이 이상하게 보이십니까?"
관우가 웃으며 대답했다.
"아니, 천만의 말씀이오. 이상하게 여긴 내가 잘못이오. 실로 드물게 보는 충
절이오."
노인은 딸과 손녀를 불러 두 부인을 안으로 모셔 가 대접토록 한 후 자신은
초당에서 관우를 대접했다.
관우는 그제야 노인의 이름을 물었다.
"나는 성은 호, 이름은 화라고 합니다. 환제 때 의랑이라는 벼슬을 지냈습니
다만, 지금은 벼슬길을 떠나 고향에서 지내고 있습니다."
노인은 이렇게 자기 소개를 하다 문득 생각난 듯 덧붙였다.
"내 자식은 호반이라고 하는데 지금 형양태수 왕식의 종사관으로 있습니다.
만약 장군께서 그곳을 지나시겠거든 내 아들에게 글 한 통을 전하고 싶습니다."
"그건 어렵지 않은 일입니다. 마침 그 부근을 지나야 하니 글을 써 주십시
오."
노인과 밤새 이런 얘기를 주고받는 동안 날이 밝아 왔다.
여섯 장수의 못을 베며 오관을 돌파하다
오직 유비를 만나겠다는 일념 하나로 관우는 길을 떠나지만 가는 곳마다 길을
가로막는 데에는 도리가 없다. 다섯 관문을 지나면서 관우는 부득이 여섯 장수
의 목을 베고 만다. 마침내 원소의 땅에 들어서게 됐으나 유비는 이미 여남으로
몸을 옮긴 이후였다.
다음 날이 되자 관우는 두 형수를 수레에 오르게 하고 호화 노인의 글을 받은
후 서둘러 길을 떠났다. 호화 노인의 집을 떠난 후 이제 덮개마저 찢겨진 수레
는 서늘한 가을 바람을 맞으며 낙양으로 향하니 이로부터 관우는 다섯 관문을
지나게 되었다.
이윽고 일행은 낙양에 이르는 한 관문에 당도했다. 그 관문은 동령관이라 불
렸는데 공수라는 자가 군사 5백을 거느리고 이곳을 지키고 있었다.
관우는 관문 앞에서 수레를 멈추게 한 뒤 먼저 말을 달려 고갯마루에 이르자
큰 소리로 외쳤다.
"나는 하북으로 가는 나그네요. 이곳을 지나도록 해 주시오."
그러자 수비대장 공수가 나서며 관우에게 예를 올린 뒤 말했다.
"당신은 운장 관우 장군이 아니시오?"
"그렇소."
"수레를 모시고 어디로 가시오?"
"승상께 하직 인사를 고하고 하북에 계신다는 옛 주군 현덕 공을 찾아 가는
길이오."
"하북의 원소와 승상과는 서로 적입니다. 그리로 가시려면 승상의 통행증이
있어야 합니다."
"급히 떠나느라 그만 잊어 버리고 왔소."
"통행증이 없으면 관문을 통과할 수 없다는 것은 장군께서도 잘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그러나 떠나올 때 승상께서 친히 전송까지 해 주시었소이다."
"그러시다면 기다리십시오. 승상께 사람을 보내어 확인한 후에 보내 드리겠습
니다."
"무슨 말이오? 급한 걸음인데 헛되이 시각을 지체하며 기다릴 수는 없는 일이
오."
"하오나 국법을 어길 수는 없습니다."
"그럼 그대는 나는 보내 주지 않겠다는 말인가?"
관우의 언성이 높아졌다. 그러나 공수도 지지 않고 맞섰다.
"그대가 꼭 이곳을 지나가려거든 그대 외의 모든 사람을 여기 인질로 두고 가
라!"
공수의 말에 관우는 마침내 격분하여 청룡도를 번쩍 쳐들었다. 유비의 두 부
인을 인질로 두라는 말에 관우는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단번에 그를 벨 듯했다.
공수도 그 기세에 눌려 급히 관문 안으로 들어가 북을 올려 군사를 부른 뒤 갑
옷까지 받쳐 입고 관문으로 다시 나왔다.
'관우가 용맹스러운 장수라 하나 그는 혼자나 다름없지 않은가. 나에게는 5백
여 명이나 되는 부하가 있다.'
공수는 이렇게 생각하고 관우에게 호통을 쳤다.
"네놈이 감히 어딜 지나가려 하느냐?"
그 소리에 관우는 수레를 뒤로 물리도록 일렀다. 수레가 멀리 물러난 것을 본
관우는 눈을 부릅뜨더니 곧바로 말을 달려 공수에게로 향했다. 공수도 졸개들이
지켜보고 있는 가운데 창을 추켜 세우고 마주 나왔다. 그러나 무모하기 짝이 없
는 짓이었다. 공수가 창으로 관우를 겨냥하여 돌진했으나 관우의 청룡도가 번뜩
이자 단 1합 만에 두 토막 난 시체가 되어 말 아래로 굴러 떨어지고 말았다.
공수를 뒤따라 나온 군사들은 이 광경을 보고는 어안이 벙벙했다.
기가 질린 군사들이 이윽고 정신을 차려 달아나자 관우가 그들을 향해 외쳤
다.
"너희들은 달아나지 말라. 내가 공수를 벤 것은 그가 나를 죽이려 했기 때문
이다. 너희들에겐 아무런 죄가 없다. 너희들은 승상께 내 말을 전하도록 하라."
군사들은 관우의 말을 듣고 꿇어 엎드릴 뿐이었다. 관우는 수레를 호위하여
관문을 지나 길을 재촉했다.
그날은 흰 진눈깨비가 내렸다. 이튿날도 또 다음 날도 관우 일행은 수레 자국
을 길게 남기며 관도를 향해 달렸다.
이윽고 멀리 낙양의 성문이 보였다. 낙양도 물론 조조의 세력권이었다. 이곳
은 낙양태수 한복이 성을 지키고 있었다. 태수 한복은 관우가 동령관의 수비대
장 공수를 죽이고 관문을 지나갔다는 급보를 받았다.
한복은 장수들을 불러 이 일을 의논했다.
"관운장이 승상의 통행증을 지니고 있지 않다면, 이는 필시 몰래 몸을 빼내
가는 것임에 틀림없습니다. 우리가 그를 막지 못하면 처벌을 면치 못할 것입니
다."
아장 맹탄이 목소리를 높여 말하자 한복도 고개를 끄덕이더니 근심스런 얼굴
로 말했다.
"관운장은 단번에 안량.문추의 목을 벤 용맹스런 장수이다. 어찌 힘으로 그를
당할 수 있으랴. 마땅히 계교를 써 그를 사로잡아야 할 것이다."
"제게 한 계책이 있습니다."
맹탄이 생각해 둔 계책이라도 있는 듯 주저없이 말했다.
"우선 논각(대나무로 얽어 만든 목주)으로 관 입구를 틀어막도록 하십시오.
관운장이 오면 제가 군사를 이끌고 나가 싸우는 체하다 그를 유인하겠습니다.
태수께서는 녹각 뒤에 숨어 기다리다 궁수들로 하여금 그를 쏘게 하십시오. 관
운장이 화살에 맞아 쓰러질 때 그를 사로잡아 하도로 보내면 반드시 태수께서
큰 상을 내리실 것입니다."
한복은 맹탄의 말에 따르기로 하였다. 급히 녹각을 세우고 평상시의 경비병
외에 정병 1천과 궁수를 녹각 뒤에 매복케 했다.
낙양 성문에 이런 일이 벌어진 줄도 모른 채 이윽고 관우가 낙양 성문 앞에
이르러 소리쳤다.
"나는 한수정후 관우요. 북쪽으로 가고자 하니 문을 열어 주시오."
한복이 나서며 물었다.
"그럼 승상의 증빙 문서를 보여 주시오."
"급히 떠나오느라 미처 얻지 못하고 왔소이다."
"내가 승상의 명을 받들어 이 성을 지키는 것은 간세(간첩 또는 범법자)들이
내왕하는 것을 살피기 위함이오. 만약 증빙하는 서류가 없다면 그대는 몰래 달
아나는 것이 분명하오."
관우가 한복의 냉랭한 언성을 듣자 노하여 언성을 높였다.
"그대 또한 내 손에 죽고 싶으냐?"
관우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사방에서 징 소리가 요란히 일었다.
"이놈들 미리 계략이라도 꾸몄다는 말이냐?"
관우는 일단 말머리를 돌려 물러났다. 맹탄이 이를 보고 쌍칼을 휘두르며 말
을 달려나왔다.
"저놈을 사로잡아라!"
관우는 다시 수레를 뒤로 물리게 한 후 뒤쫓아오는 맹탄을 맞았다. 맹탄도 한
복의 부장으로 낙양에서는 이름을 떨친 장수였다. 그러나 관우에게는 도끼에 대
드는 버마재비나 다름없었다.
맹탄이 3합을 겨루다 말머리를 돌려 달아났다. 관우를 유인하기 위함이었다.
그러나 관우가 탄 말이 적토마인 걸 알 리 없는 맹탄이었다. 순식간에 뒤쫓아온
관우의 청룡도가 그의 등 뒤에서 번뜩이자 비명 한 번 지르지 못하고 그의 몸은
두 동강이 나고 말았다. 관우는 그 기세를 타고 관문을 향해 말을 달렸다.
태수 한복은 관문 옆에 말을 세우고 있다가 참새 떼를 쫓는 독수리처럼 군사
들을 뒤쫓아오는 관우를 향해 화살을 날렸다.
'윙'하고 바람을 가르며 날아간 한복의 화살은 관우의 왼쪽 팔에 정확히 꽂혔
다.
"이놈!"
관우는 화살이 날아온 쪽을 보며 고함을 질렀다. 관우와 시선이 마주친 한복
은 찔끔하며 놀랐다. 관우는 말을 달리며 왼쪽 팔에 박힌 화살을 입으로 물어
뽑았다. 그 사이에 한복은 급히 말머리를 돌려 관문 안으로 달아나려 했으나 적
토마가 어느 새 그의 등 뒤를 덮쳐들었다.
그와 동시에 관우의 청룡도가 번쩍 하며 고함 소리와 함께 한복의 목이 말 아
래로 굴러 떨어졌다. 주위에 있던 군사들은 간담이 서늘하여 적토마의 말발굽에
서 벗어나기에 바빴다.
관우가 쉬지 않고 군사들을 베고 찌르니 군사들은 제각기 달아나거나 무기를
버리고 무릎을 꿇었다.
관우는 멀리 있는 수레를 불렀다.
관우가 수레를 호위하며 관문을 지나가는데 감히 앞을 가로막으려는 군사는
없었다. 관우는 낙양 시가를 지나 교외에 이르자 그때서야 헝겊을 찢어 왼팔을
동여맸다.
관우는 도중에 기습을 당할까 염려하여 밤잠도 자지 않고 수레를 호위하며 길
을 재촉했다. 수레 안의 두 부인은 이 하루 밤낮을 고치 속의 누에처럼 서로 부
둥켜안은 채 두려움에 질려 눈을 감고 있었다.
그로부터 닷새 동안 낮에는 깊은 숲이나 연못가에서 잠을 자고 밤을 틈타 수
레를 이끌었다. 하북으로 가는 길목인 기수관에 이른 것은 저녁 무렵이었다.
기수관은 이전에 황건적의 우두머리였다가 뒤에 조조에게 투항한 변희라는 자
가 지키고 있었다. 그는 유성추(철퇴)를 잘 쓰는 장수였다.
변희는 관우가 관문마다 장수를 죽이며 온다는 보고를 받자 한 계책을 세웠
다. 관문 앞에는 한나라 명제가 지었다는 진국사란 절이 있었다. 변희는 이 절
에 도부수 2백여 명을 숨겨 놓고 관우를 절로 유인한 뒤 술잔을 던지는 것을 신
호로 삼아 일제히 덤벼들도록 했다.
이날 밤, 관우는 산기슭에 있는 관문을 무사히 지났다. 날이 이미 어두웠으므
로 하룻밤 묵어가기로 하고 진국사에 당도하니 돌연 종이 울리며 승려들이 몰려
나왔다. 관우가 경계하는 눈초리로 그들을 보자 이 절의 주지가 무릎을 꿇고 아
뢰었다.
"먼 여행길에 얼마나 피로하시겠습니까! 하잘것없는 사사인지라 겨우 비바람
을 피할 수 있을 뿐입니다만 마음 편히 쉬었다 가셨으면 합니다."
주지의 말과 함께 다른 중 하나가 수레에 타고 있는 두 부인에게 차를 바쳤
다. 관우는 뜻밖의 환대에 오히려 의아심을 품었으나 그들이 중의 신분이고, 또
두 부인에게 차를 바치자 감사해하며 예를 표했다. 그런데 뜻밖인 것은 그것만
이 아니었다. 그들 가운데 관우와 같은 고향 사람으로 보정이란 승려가 있었다.
"장군께서는 고향인 포동을 떠난 지 몇 해나 되십니까?"
보정이 관우를 반기며 물었다.
"벌써 20년 가까이 되었소."
"장군의 고향집과 저의 생가와는 강 하나를 사이에 두고 있었습니다."
관우도 오랫만에 고향 사람을 만나 감회에 젖으며 그를 반겼다.
그때 변희가 패검을 철거덕거리며 다가왔다. 보정과의 이야기를 가로막으며
변희는 관우에게 공손히 예를 표한 후 말했다.
"장군님의 높으신 이름을 누구인들 공경하지 않겠습니까. 오늘 이렇게 뵙게
되니 실로 큰 영광이옵니다. 이제 장군께서 유 황숙에게 돌아가신다니 놀라운
충의지심이 아닐 수 없습니다."
변희가 관우를 이렇게 칭송하자 관우는 공수.한복을 부득이 목을 베게 되었노
라고 말했다. 변희에게 은근히 경고하기 위함이었다. 관우의 말에 변희가 또 좋
은 말로 관우의 비위를 맞추었다.
"말씀을 듣고 보니 그들은 죽어 마땅합니다. 제가 승상을 뵙거든 장군님의 부
득이한 사정을 말씀드리겠습니다."
변희가 그렇게 말하며 관우를 방으로 청했다. 보정이 방으로 관우를 안내하면
서 문득 관우에게 손으로 자기가 찬 계도(승복을 재단하는 데 쓰이는 칼)를 가
리키며 눈짓 손짓을 했다. 관우가 무심코 보정의 그 같은 행동을 보자 마음 속
에 짚이는 데가 있었다. 관우도 눈짓으로 알았다는 표시를 하고 입을 다물었다.
변희가 와 잔치를 벌이자 관우는 부하들을 불러 방 밖을 지키도록 일렀다. 그
런 다음 변희가 술잔을 들어 권하자 관우가 대뜸 그에게 물었다.
"그대가 나를 청한 것은 나를 대접하기 위해서인가, 아니면 다른 뜻이 있어서
인가?"
관우의 뜻밖의 질문에 변희가 당황하여 대답을 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때 관
우는 법당과 통해 있는 문 뒤에 늘어뜨려진 휘장 뒤에 도부수들이 숨어 있는 낌
새를 엿보고 그에게 호통을 쳤다.
"나는 너를 좋은 사람으로 여겼는데, 네 어찌 감히 이런 무례한 짓을 할 수
있느냐?"
그제야 변희는 비밀이 탄로난 것을 알았다. 변희는 술잔을 내던지며 소리쳤
다.
"속히 나와 이놈을 쳐라!"
변희의 외침과 함께 휘장 뒤에 숨어 있던 도부수들이 일제히 나와 관우에게
덤벼들었다. 그러나 이럴 줄 알고 경계심을 품고 있던 관우가 어느 새 칼을 뽑
아들고 그들을 베고 찔렀다.
방 안의 촛불은 피보라로 흐려졌다. 관우는 방문을 박차고 법당으로 뛰쳐나가
며 벽력같이 소리쳤다.
"죽기를 서두르는 자들은 모두 나오라!"
변희는 그 틈을 타 법당을 빠져 나와 낭하로 달아나고 있었다. 관우가 그를
보자 이번에는 청룡도를 들고 뒤쫓았다. 관우가 뒤쫓자 변희는 소매 속에 감추
었던 유성추를 꺼내며 몸을 홱 돌려 유성추를 날렸다. 유성추는 정확하게 관우
의 면상을 향해 날아들었다. 그 순간 관우는 청룡도로 유성추를 쳐 내고 곧장
변희를 뒤쫓아 단번에 그를 베고 말았다. 관우는 두 부인이 염려되어 수레 있는
쪽으로 급히 발걸음을 옮겼다. 어느 새 변희의 군사들이 수레를 에워싸고 있었
다. 그러나 피가 뚝뚝 떨어지는 청룡도를 들고 관우가 달려오는 것을 보자 그들
은 간담이 서늘해져 뿔뿔이 흩어졌다.
변희의 군사들을 쫓은 후 관우는 보정에게 고마움을 표했다.
"스님의 깨우침이 아니었더라면 나는 물론 우리 모두가 불귀의 객이 되고 말
았을 것입니다. 크신 은혜 어떻게 보답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보정이 합장하며 말했다.
"소승도 이제 이곳에 머물 수 없게 되었습니다. 변희의 부하들이 몰려 올 테
니 옷과 발을 수습하여 떠도는 구름이 될까 합니다. 언젠가 다시 만날 때가 있
을 테니 장군께서는 부디 몸조심하십시오."
관우는 보정과 작별 인사를 나눈 뒤 수레를 이끌어 형양을 향해 길을 떠났다.
승려들도 관우와 보정을 전송했다.
형양대수 왕식은 원래 한복과는 인척간이었다. 한복이 관우의 손에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관우를 암살하기로 작정했다.
왕식은 관우가 형양으로 온다는 말을 듣자 수하를 시켜 관문 입구를 지키게
했다. 이윽고 관우가 관문 가까이에 이르자 왕식은 수하의 연락을 받고 관 밖까
지 친히 나와 반가이 맞았다.
"장군께서는 어디로 가시는 길입니까?"
왕식이 시치미를 떼고 물었다. 관우는 정중히 몸을 굽혀 예를 표하며 대답했
다.
"하북에 계신 형님을 찾아가는 길입니다. 이 관문을 지나가겠으니 허락해 주
십시오."
관우가 청하며 왕식의 주위를 살폈다. 몰래 군사라도 숨겨 두고 기습하지 않
을까 염려해서였다. 그러나 왕식은 웃으며 선선히 허락했다.
"그렇게 하십시오. 그러나 장군께서는 먼길을 달려오셨고, 두 부인께서도 수
레를 타고 오시느라 피곤하실 것입니다. 우선 상 안에 드시어 역관에서 쉬신 다
음 내일 떠나셔도 늦지 않을 것입니다."
왕식이 이렇게 말하자 관우도 마음이 움직였다. 모두 피곤하던 터였으로 관우
는 두 형수를 모시고 성 안으로 들어갔다. 역관에는 이미 모든 준비가 되어 있
었다.
"조촐한 술자리가 마련되었으니 장군께서는 나오시라고 합니다."
왕식이 사람을 시켜 관우를 청했다. 그러나 관우는 두 형수 곁을 떠날 수가
없어 사양하였다. 왕식은 사람을 시켜 술과 음식을 보내왔다. 관우는 내일 또
길을 재촉해야 했으므로 두 형수에게 저녁을 권했다. 호위하는 수하들도 모두
편히 쉬게 하고 말에 마초를 배불리 먹인 다음 자신도 방에 들어가 갑옷을 벗었
다.
이때 왕식은 종사로 있는 호반을 불러들여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관운장은 승상을 저버리고 달아났을 뿐만 아니라 오는 길을 막는 태수와 장
수들을 죽였으니 그 죄가 무겁다. 그러나 그의 무례가 출중하여 맞서기가 어려
우니 꾀를 써 그를 죽여야겠다. 그대는 오늘 밤 군사 1천을 이끌어 역관을 에워
싸우도록 하라. 그리고 군사 하나에 횃불 하나씩을 마련케 하였다가 삼경이 되
거든 일제히 횃불을 던져 불을 지르도록 하라. 관우 일행은 누구든 상관 없이
모조리 불태워 죽여야 한다. 집에 불이 붙으며 나도 군사를 이끌고 가 접응할
것이니라."
왕식의 명을 받들어 호반은 관우 일행이 잠들기를 기다렸다. 그리고 기름칠한
나무를 준비하고 마른 섶을 울타리 안팎에 운반해 두었다.
밤은 점점 깊어 갔다. 모두 잠에 곯아떨어졌는지 방 안의 불이 꺼졌으나 오직
한방에만 불이 밝혀져 있었다. 호반이 그 방에도 불이 꺼지기를 기다렸으나 좀
처럼 방 안의 불은 꺼지지 않았다. 호반은 문득 의아한 생각이 들어 살금살금
다가가 방안을 들여다보았다.
방 안에는 촛불 아래 불그레한 얼굴에 칠흑 같은 수염을 길게 기른 풍채 좋은
한 사람이 책을 읽고 있었다. 멀고 험한 길을 가는 사람답지 않게 초연히 책을
읽고 있는 그 모습을 보자 호반은 자기도 모르게 탄성을 지르고 말았다.
'참으로 하늘이 내린 사람이로다!'
조금 전부터 인기척이 나 귀를 기울이고 있던 관우가 자리에서 몸을 일으키며
방문을 열었다.
"거기 있는 자는 누구냐?"
관우의 위압적인 목소리에 호반은 자기도 모르게 무릎을 꿇었다.
"왕 태수의 종사관 호반이라고 합니다."
호반은 숨기지 않고 자신의 신분을 밝혔다. 호반의 말에 관우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물었다.
"그렇다면 혹시 그대는 허도 성 밖에 사는 호화 노인의 자제분이 아닌가?"
"그러합니다만...."
관우는 짐 속에 들어 있는 한 통의 서한을 꺼내 호반에게 주었다. 호반이 받
아 읽어 보니 분명 아버지가 보내신 글이었다. 집안의 안부를 전하며 관우에 대
한 자세한 소개가 써 있었다. 이미 관우의 풍채와 높은 품격을 존경하게 된 호
반이었다. 아버지의 서한을 읽고 난 호반이 길게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만약 가친의 서한을 보지 않았다면 소생은 천하의 충의지사를 죽였을지도 모
릅니다."
호반의 말에 관우가 놀라 물었다.
"그게 무슨 뜻으로 하는 말이오?"
호반은 관우의 물음에 왕식의 계교를 소상히 밝혔다.
"왕식이 나쁜 맘을 품고 장군을 해하려 하고 있습니다. 몰래 사람을 시켜 이
역관을 에워싸게 하고 밤 삼경이 되면 일제히 불을 지르라 하였습니다. 제가 가
서 성문을 열어 놓을 테니 장군께서는 급히 부리는 자들을 수습하시어 이곳을
떠나도록 하십시오."
관우는 그 말을 듣고 크게 놀란 가운데도 황망히 갑옷을 꿰입은 후 청룡도를
들고 적토마를 탔다. 수하들을 조용히 깨우고 두 형수가 수레에 오르자 관우는
수레를 이끌어 역관을 빠져 나왔다. 관우가 뒤돌아보니 과연 집 주위에는 군사
들이 손에 횃불을 들고 명을 기다리는 듯 도열해 있었다.
관우가 수레를 재촉하여 성에 이르자 성문은 이미 열려 있었다. 호반이 열어
둔 것임에 틀림없었다. 일행은 숨쉴 틈도 없이 성을 빠져 나갔다. 호반은 관우
일행이 무사히 성문을 빠져 나가자 집에 불을 지르게 했다.
관우가 수레를 호위하여 몇 리를 갔을 때였다. 홀연 등 뒤에서 수많은 횃불이
밤을 밝히며 관우를 뒤쫓는 한 떼의 기병이 있었다. 왕식이 거느리는 군사들이
었다.
"관운장은 게 서지 못할까!"
관우는 그가 왕식임을 알고 말머리를 돌려 세워 그를 꾸짖었다.
"이놈! 내 원래 너를 적으로 대한 것이 없는데 어찌하여 나를 불에 태워 죽이
려 했느냐?"
왕식은 관우의 물음에는 대꾸도 하지 않고 창을 휘두르며 달려들어 죽음을 재
촉했다. 관우는 청룡도를 움켜쥐고 달려오는 그를 맞았다. 관우는 청룡도를 횃
불에 번뜩이며 위로 치켜들더니 그대로 왕식을 향해 내려쳤다. 왕식은 제대로
한 번 부딪지도 못한 채 두 토막이 나 말 아래로 굴러 떨어졌다.
태수 왕식이 기세 좋게 달려가던 때와는 달리 맥없이 말 아래로 굴러 떨어지
자 뒤따르던 군사들은 겁에 질렸다. 관우가 그들을 향해 청룡도를 휘두르며 달
려나가자 허둥지둥 달아나기에 바빴다. 관우는 그들을 뒤쫓지 않고 다시 수레를
호위하며 길을 재촉했다.
며칠 후, 관우 일행은 활주의 경계에 이르렀다.
활주태수 유연은 지난번 원소군과 동군에서 싸울 때 위급한 처지에 놓여 관우
의 도움을 받은 적이 있었다. 관우가 적장 안량을 죽임으로써 싸움을 승리로 이
끌 수 있게 되었던 터였다.
유연은 군사를 거느리고 성곽 밖까지 나와 관우를 맞았다. 관우가 말 위에서
몸을 굽혀 인사를 했다.
"태수께서는 그간 별고 없으시었소?"
유연 또한 공손히 답례하며 물었다.
"공은 지금 어디로 가시는 길이오?"
"승상께 작별 인사를 나눈 뒤 형님을 찾아가는 길이외다."
"유현덕 공이 하북의 원소에게 몸을 의탁해 있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원소
는 승상과 칼을 맞대고 있는 적인데 승상께서 공을 보내실 리가 없지 않습니
까?"
유연이 관우의 말에 이렇게 물었다. 그 역시 조조를 섬기는 사람이라 관우를
호락호락 보낼 수만은 없었다.
관우가 그런 유연을 노려보며 대답했다.
"지난날 승상께로 가기 전에 미리 약조를 받은 바가 있소. 승상도 약조를 지
키기 위해 친히 배웅까지 해 주시었소."
관우가 그같이 말하자 유연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관우를 잘 알고 있는 유연
이었다. 그의 인품으로 보아 거짓으로 하는 말이 아님을 알 수 있었다. 또한 관
우가 세운 공으로 보더라도 조조도 능히 그를 보내 줄 수 있으리라 여겼다.
유연은 길을 비켜 주며 일렀다.
"이 앞에는 큰 강이 가로막고 있습니다. 공은 어떻게 그 강을 건너려 하시
오?"
그 말에 관우도 난감한 얼굴이 되었다. 유연이 그런 관우를 보고 다시 말했
다.
"황하 나룻가 길목을 하후돈의 부장 진기가 지키고 있습니다. 아무도 장군께
서 그곳을 지나시는 것을 허락하지 않을 것입니다."
관우가 유연에게 청했다.
"바라건대, 태수께서 배를 빌려 부시오."
유연은 관우의 청에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배는 있습니다만 그 말씀만은 들어 드릴 수가 없소이다. 조 승상으로부터 받
은 명도 없는데다가 후일 이 일이 알려지면 벌을 내리실 것이 분명하외다."
유연이 난감한 얼굴이 되어 말했다. 관우는 화가 치밀었으나 수레에 있는 두
형수를 생각하며 다시 한 번 지난 일까지 꺼내며 부탁했다.
"나는 전에 안량.문추를 죽여 그대를 위기에서 구해 준 적이 있소. 그런데도
배 한 척 빌려 주지 못하겠다는 말이오?"
"하후돈 장군이 이 일을 알면 나를 그냥 두지 않을 것입니다."
관우는 유연의 겁먹은 소리에 쓴웃음을 지으며 입을 다물었다. 관우는 그의
목을 단칼에 쳐 배를 빼앗고 싶었으나 화를 억눌렀다. 그가 길을 막지 않은 것
만도 고맙게 여기며 그대로 수레를 앞세워 진기의 진지로 향했다.
황하의 나루터에 이르자 좌우에 군사를 거느린 채 얼굴이 험상궂은 한 장수가
길을 막았다.
"멈춰라! 거기 오는 사람은 누구인가?"
"한수정후 관우외다."
진기는 관우의 대답을 듣고서도 동요하지 않고 재우쳐 물었다.
"어디로 가시오?"
"형님을 만나러 하북으로 가는 길이오."
"그렇다면 승상의 공문을 보여 주시오."
관우가 언성을 높여 대답했다.
"당신도 한나라의 신하요, 나 또한 한나라의 신하이거늘 어찌 조 승상의 지시
를 받겠소."
진기도 관우의 말에 언성을 높였다.
"나는 하후돈 장군의 명을 받들어 이 나루터를 지키고 있소. 비록 그대에게
날개가 있다 하더라도 이곳을 지나게 하지는 않을 것이오."
관우가 눈을 부릅뜨며 진기를 노려봤다.
"너는 내가 길 막은 자들을 모조리 죽였다는 사실을 알고 있느냐, 모르고 있
느냐."
그러나 진기도 관우의 말에 코방귀 뀌듯 대꾸했다.
"네가 감히 여기까지 오다 죽인 장수들은 이름도 없는 하찮은 장수들이었다.
감히 나까지 죽일 수 있다고 생각하느냐?"
"그렇다면 안량.문추보다 세다는 말이냐? 헛되이 죽음을 자처하지 말고 길을
비켜라."
관우가 노하여 외쳤으나 진기는 원래 겁이 없는 장수였는지 느닷없이 칼부터
빼들었다. 진기가 말을 달려 관우에게 덤벼들자 그의 좌우에 늘어섰던 군사들도
뒤따랐다. 두 필의 말이 한순간 어우러지는가 싶었다. 진기의 기세 하나만은 하
늘을 찌를 듯했으나 그 칼이 관우를 향해 찔러 들어가기도 전에 관우의 청룡도
가 번쩍이더니 목을 날리고 말았다. 이에 뒤따르던 군사들이 그 모양을 보자 주
춤거렸다. 관우가 그들을 향해 소리쳤다.
"내 앞을 가로막는 자를 죽였을 뿐이다. 너희들은 아무런 죄가 없으니 달아날
것 없다. 급히 배를 내어 우리가 건널 수 있게 하라!"
관우의 말에 목숨만은 건지게 된 졸개들이 급히 배를 구해 왔다. 관우는 두
형수에게 배에 오르도록 한 뒤 무리를 이끌어 황하를 건넜다.
황하를 건너면 거기서부터는 원소의 땅이었다.
하남 강변에 이르른 관우는 한숨을 내쉬며 드넓은 하늘을 우러러보았다. 돌이
켜보면, 허도를 떠나온 후 다섯 관문을 지나며 여섯 수장의 목을 베지 않았는
가.
허조를 떠나온 후 거쳐온 다섯 관문은 너무나 머나먼 대장정이었다.
먼저 양양을 거쳐 패릉교로, 이어 동령관으로 가는 도중에서 기수관으로, 그
리고 활주(황하나루)에서 황하를 건넜던 것이었다.
후세 사람들은 다섯 관을 지나며 여섯 장수의 목을 벤 관우에 감탄해 시를 지
었다.
인.금을 봉하고 승상을 하직한 후
의형을 찾기 위해 먼길을 떠났네.
적토마를 타니 천리길이요
청룡도를 들어 다섯 관 지나니
장하도다 그 충의, 하늘을 찌르는구나.
영웅의 기상, 강산을 뒤흔드네.
혼자서 여섯 장수를 베는 그 무예
지필에 남겨 천추만대 전하리.
황하를 건너자 두 부인은 벌써 유현덕과의 재회를 마음 속에 그리며 그리움에
가득 찬 길을 서두르고 있었다.
관우는 황하를 건너 다시 길을 떠날 준비를 재촉했다. 아직고 유현덕을 만나
기 위해 먼길을 가야 했다. 앞길에 어떤 험난한 일이 그를 기다리고 있는지 알
수 없는 일이었다.
관우는 말 위에서 길게 탄식했다.
'오는 도중 만부득이 했으나 너무나 많은 사람을 죽였구나. 조 승상이 이를
알면 나를 은의도 저버린 자로 여기겠다.'
두 부인이 탄 수레에는 주렴이 드리워졌고, 수레는 다시 바람 부는 들판을 가
르며 길을 가고 있었다. 그런데 저쪽 맞은편에서 홀연 한 사람이 말을 달려오며
외쳤다.
"운장께서는 잠시만 멈추시오!"
가까이 다가오는데 보니 이게 누군가 그는 바로 여남에서 헤어진 손건이었다.
서로 뜻밖의 만남을 기뻐하는 가운데 관우가 뒷일이 궁금하여 물었다.
"마중을 온다 하여 기다린 지 오래 되었소. 이토록 늦게까지 소식이 없었던
것은 무슨 까닭이오?"
"실은 원소의 진영에 여러 가지 내분이 일어나 그 때문에 여남의 유벽.공도의
뜻에 따라 하북으로 갔던 제 계획이 뒤틀리고 말았습니다. 그렇지 않았으면 원
소를 설복시켜 유 황숙을 여남으로 가시게 한 후 저는 운장을 기다려 마중을 갈
계획이었습니다."
"그렇다면, 형님께선 지금도 무사히 원소 밑에 계시오?"
"아닙니다. 지금은 하북에서 몸을 빼 여남으로 가셨습니다."
"그럼 형님께선 여남에 계시다는 말씀이오?"
"그렇습니다. 장군께서 이런 사실을 모르고 원소한테 가셨다가 혹시 해를 입
으실까 걱정하시어 황숙께서 나를 보내신 것입니다. 그러니 장군께선 여남으로
가시어 황숙을 뵙도록 하십시오."
지난번 관우가 문추를 베고 허도로 돌아간 뒤, 유벽과 공도는 패한 척 하며
관우에게 내주었던 여남 땅을 도로 찾았다. 유벽과 공도는 손건으로 하여금 하
북으로 가게 하여 원소와 동맹을 맺어 조조를 칠 계책을 세우려 했다.
그리하여 손건이 하북에 당도해 보니 장수와 모사들이 서로 시기와 질투로 반
목을 일삼고 있었다. 뛰어난 모사인 전풍이 옥에 갇힌 채였고, 저수도 파직당했
을 뿐만 아니라 곽도와 심배는 서로 세력 다툼만 일삼고 있었다. 원소는 의심이
많고 우유부단하여 주견을 세우지 못하고 있었다. 이에 손건은 그가 천하를 도
모할 인물이 아님을 알고 유비와 의논해 하북에서 몸을 빼내기로 하였다. 그리
하여 유비가 여남으로 떠나자 손건이 관우를 맞으러 나온 것이었다.
손건은 이어 유비가 원소 휘하에 있을 때 두 번이나 죽임을 당할 뻔했던 일도
이야기했다. 수레 안에서 이야기를 듣고 있던 두 부인은 소리내어 흐느꼈고 관
우도 눈물지었다.
일행은 방향을 바꾸어 여남을 향해 출발했다. 그런데 얼마 가지 못해 홀연 뒤
쪽에서 먼지를 일으키며 한 떼의 인마가 뒤쫓아오고 있었다. 수레를 이끄는 길
이라 군사의 추격을 따돌릴 수가 없었다. 관우는 손건으로 하여금 수레를 지키
게 하고 홀로 뒤쫓는 군사를 맞으러 갔다.
그들은 하후돈이 이끄는 기병 2백여 명이었다. 하후돈은 조조의 장수들 중에
서도 첫손 꼽히는 장수라 관우도 그들을 가볍게 여길 수가 없었다. 관우는 청룡
도를 힘주어 잡고 대적할 태세를 갖추며 그를 얼렀다.
"그대가 나를 뒤쫓는 것은 승상께서 보이신 크나큰 도량을 그르치고 있다는
것을 아시오?"
하후돈은 관우의 말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험한 기세로 고함을 쳤다.
"승상에게서 너를 보내 주라는 명이 내리지 않았으며, 또한 네가 예까지 오면
서 했던 무례한 행동을 아신다면 마음이 달라지실 게다. 너는 다섯 관을 함부로
짓밟고 여섯 장수를 죽였으며, 더욱이 나의 부장 진기까지 죽였다. 어찌 이리
무례할 수가 있느냐. 내 특히 너를 잡아 승상께 바쳐 죄를 다스리고자 이렇게
달려온 것이다."
하후돈이 왼쪽 눈을 부릅뜨더니 곧장 그의 어골창을 내뻗으며 관우에게 달려
들었다. 쨍그렁-. 하후돈의 어골창과 관우의 청룡언월도가 맞부딪치자 불꽃이
튀었다. 적토마가 크게 울음소리를 내며 하후돈의 말을 덮칠 듯이 나아가자 하
후돈은 말머리를 돌리며 관우의 옆구리를 향해 어골창을 찔렀다.
호랑이를 보고 용이 노하고, 용을 보자 호랑이가 울부짖는 듯한 싸움이었다.
한동안 불꽃 튀는 병장기의 부딪침이 일었는데 말을 달려 뛰어들며 큰소리로
외치는 사람이 있었다.
"두 분은 잠시 싸움을 멈추시오."
그는 조조가 보낸 사자였다. 사자는 말 위에 앉은 채로 조조가 친필로 서명한
공문을 하후돈에게 주었다.
"승상께서는 관 장군의 충의심을 가상히 여기시어 관문이나 나루를 모두 무사
히 지나가도록 하셨습니다. 군사들이 길을 막지 않을까 염려하시어 특별히 저를
보내신 것입니다."
하후돈은 공문을 볼 생각도 하지 않고 사자에게 물었다.
"그렇다면 승상께서는 여섯 장수를 죽이고 다섯 관을 짓밟은 사실을 알고 계
시는가?"
"그것은 아직 모르고 계십니다."
공문은 그보다 앞서 승상부에서 내린 것이라고 사자가 덧붙여 말했다.
"그렇다면 내가 저 자를 사로잡아 허도로 간 연후에 승상의 처분을 기다리도
록 할 것이다."
하후돈이 기세 등등하게 말하자 관우는 화가 치솟았다.
"내가 네놈을 두려워할 것 같으냐?"
그 말과 동시에 청룡도로 그를 내리찍었다. 하후돈도 창으로 청룡도를 막으며
관우를 맞았다. 또 한바탕 청룡도와 창이 어우러졌다. 그런데 또 한 필의 말이
나는 듯이 달려오더니 말 위의 사람이 소리쳤다.
"두 장군께서는 잠시 무기를 거두시오. 승상의 명이오."
두 사람은 병장기를 거두고 그를 바라보았다. 하후돈이 그 사람에게 물었다.
"승상께서 관우를 사로잡아 오라고 하시지 않던가?"
사자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아닙니다. 승상께서는 관문의 장수들이 관우 장군의 길을 끊을까 봐 염려하
시어 공문을 내리신 것입니다."
"승상께선 저 자가 여러 장수들의 목을 벤 사실을 알고 계시는가?"
"그것은 모르고 계십니다."
하후돈은 군사들로 하여금 관우를 에워싸게 했다.
"승상께서 아직 그 일을 모르고 계시니 그를 놓아 줄 수 없다. 저 자를 놓치
는 일이 없도록 하라!"
하후돈은 이번에야말로 관우를 사로잡을 기세로 관우에게 덤벼들었다. 두사람
이 다시 어우러져 싸우는데 또 한 사람이 질풍같이 말을 달려왔다. 그는 장요였
다.
"운장과 원양(하후돈의 자)은 이제 싸움을 그치시오. 승상의 명을 거를 셈이
시오?"
그 말에 두 사람은 제각기 말을 세워 장요를 바라보았다.
"승상께서는 동령관의 공수가 운장의 길을 막다가 참살되었다는 급보를 받고
다시 저를 보내셨소. 도중에 또 다른 곳에서 운장을 가로막고 길을 끊으실까 염
려하시어 저를 보내신 것입니다. 장수들의 목을 벤 일로 길 막는 일은 없도록
하고 각처의 관소에 이를 전하라 하시었소."
장요의 말에 하후돈도 관우를 포위했던 군사들을 물린 뒤 푸념을 늘어 놓았
다.
"관우가 죽인 진기는 원비장군 채양의 조카로 그가 특히 나를 믿고 부탁한 부
하요. 그런데 그가 관우에게 죽임을 당했으니 내가 어찌 가만히 있을 수 있겠
소?"
하후돈의 불평을 장요가 달랬다.
"채양 장군에게는 내가 잘 말씀드려 설득할 테니 너무 걱정마오. 승상께서 큰
도량을 베푸신 명이니 어기지 마시고 운장을 보내도록 하십시오."
장요가 그렇게 타이르자 하후돈도 하는 수 없이 군사를 거두어 돌아갔다. 하
후돈이 물러나자 장요가 관우에게 물었다.
"운장은 이제 어디로 가려 하십니까?"
"소문을 들으니 형님께서는 원소의 곁을 떠나셨다 하오. 천하를 떠도는 한이
있더라도 형님을 찾을 작정이오."
관우는 장요에게 거짓으로 꾸며댔다. 행선지를 알려 주면 혹시 또 무슨 일이
있을까 염려해서였다. 그 말에 장요가 넌지시 말했다.
"현덕 공이 있는 곳을 모른다면, 운장께서는 나와 함께 승상에게로 돌아가는
것이 어떻겠소?"
그 말에 관우는 조용히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장수가 길을 정하고 한 걸음을 내딛었소. 어찌 다시 발길을 돌릴 수가 있겠
소. 그대는 돌아가서 승상께 내가 부득이하여 관을 지키는 장수를 죽였다고 말
씀이나 잘 전해 주시오."
관우가 손을 모아 장요에게 작별 인사를 하자 장요도 말머리를 돌렸다. 그러
는 사이 손건이 이끈 수레는 이미 멀리 가고 있었다. 그러나 적토마가 수레를
따라잡기란 어렵지 않은 일이었다.
관우는 손건에게 조금 전에 있었던 일을 들려 주며 여남으로 가는 길을 재촉
했다. 며칠을 갔을 때였다. 이번에는 앞을 가로막는 관문도, 뒤쫓는 자도 없어
순탄했으나 큰 비를 만나게 되었다.
비를 맞으니 수레 안으로도 빗물이 떨어졌다. 관우가 주위를 둘러보니 멀리
산 밑에 장원 한 채가 눈에 띄어 하룻밤 묵기를 청하려고 그 곳으로 갔다.
주인을 부르니 한 노인이 나타났다. 관우가 자기 소개를 하고 하룻밤 묵기를
청하자 노인은 반갑게 맞으며 말했다.
"나는 대대로 이곳에서 살아 온 곽상이란 사람입니다. 장군의 높으신 이름을
익히 듣더니 이렇게 뵙게 되었습니다. 어서 드시지요."
곽상은 두 부인을 후당으로 청해 편히 쉬게 한 뒤 양을 잡고 술을 데워 극진
히 대접했다. 곽상은 관우와 손건에게 술상을 따로 마련해 마주 앉았다.
군사들은 뜰에서 불을 피워 젖은 옷을 말리며 마필을 돌보았다.
날이 어두워지자 한 청년이 같은 또래의 젊은 친구 4, 5명을 데리고 오더니
초당으로 올라왔다. 곽상은 그 청년을 불러 일렀다.
"얘야, 장군께 절하고 뵙도록 해라."
곽상이 관우에게 그 청년을 가리키며 말했다.
"변변치 않은 제 자식놈입니다."
그러자 그 청년은 절도 하지 않은 채 관우를 쓱 홅어보더니 그냥 휙 나가 버
렸다.
관우가 청년의 공손치 못한 태도를 보며 곽상에게 물었다.
"어디 갔다 오는 길입니까?"
곽상이 관우의 물음에 한탄하며 말했다.
"우리는 대대로 농사를 짓고 글을 읽으며 지내 오는 집안입니다. 자식이라곤
단 하나뿐인데, 농사일이나 글공부는 하지 않고 마냥 사냥만 하며 나다니고 있
습니다. 이 늙은이의 근심이 있다면 그건 저 자식놈 때문입니다."
관우가 곽상을 위로했다.
"그렇게만 생각하실 일이 아닙니다. 지금처럼 어지러운 세상에서는 무예를 잘
익히면 공명도 이룰 수 있습니다. 너무 근심하지 마십시오."
"무예라도 지성으로 익힌다면 그래도 사람 구실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
나 저 아이는 오로지 못된 친구들과 어울려 노는 데만 정신이 팔려 있습니다.
어찌 이 늙은이가 걱정하지 않겠습니까?"
곽상은 한숨을 내쉬었다. 관우도 그런 노인을 보니 측은한 생각이 들었다. 곽
상은 밤이 깊어서야 자기 방으로 돌아갔다. 관우는 손건과 함께 잠자리에 들어
잠을 청했다.
그때 뒤뜰 마구간에서 적토마의 울음소리가 들리고 떠들썩한 고함 소리와 비
명 소리가 들려 왔다. 관우가 군사들을 불렀으나 아무 대답이 없었다. 하는 수
없어 관우가 손건과 함께 칼을 빼들고 뒤뜰로 나가 보았다. 뒤뜰에는 곽상의 아
들이 신음 소리를 내며 땅바닥에 쓰러져 있는데 군사들과 젊은이들이 뒤엉켜 싸
우고 있었다.
"웬일이냐?"
관우가 크게 꾸짖으며 노려보자 군사 하나가 달려와 대답했다.
"저 젊은이는 적토마를 훔치러 왔다가 말발굽에 채여 저 지경이 되었습니다.
저희들은 말의 비명 소리를 듣고 달려오는데 이 젊은이들이 몰려와 싸움이 벌어
졌습니다."
그 말을 듣자 관우도 노했다.
"쥐새끼 같은 도적놈들이 감히 남의 말을 훔치려 들었다는 말이냐?"
적토마는 관우가 생명보다 더 귀하게 여기는 말이었다. 관우가 칼을 들어 그
말 도적을 베려 했다. 그러자 곽상이 황급히 관우의 발 아래에 엎드리며 용서를
구했다.
"어리석고 못난 자식이 장군께 저지른 죄, 죽어 마땅합니다. 그러나 그것도
자식놈이라 늙은 처가 늘 걱정하며 어여삐 여깁니다. 원컨대 장군께서는 인자하
신 마음으로 용서해 주시기 바랍니다."
곽상의 간곡한 애원에 관우는 차마 칼을 쓸 수가 없었다. 노기를 누르며 노인
에게 조용히 말했다.
"말씀대로 저 아이가 어르신네의 속을 많이 썩일 것 같습니다. 내 어르신의
낯을 보아 용서하겠소."
관우는 부하들에게 말을 잘 지키도록 이른 뒤, 젊은이들을 꾸짖어 보냈다.
다음 날이 되자 곽상은 늙은 아내와 함께 초당에 나와 관우에게 백배 사죄하
며 아들을 살려 준 것에 사례했다.
"이렇게 좋은 부모가 계신데도 고마운 줄을 모르는 자식이로군. 이리 불러 주
시오. 내가 훈계해 보리다."
관우의 말에 노부부는 기뻐하며 아들을 부르러 갔으나 그 망나니 아들은 벌써
집을 나가고 없었다. 하인들의 말로는 새벽녘에 그의 패거리들과 함께 집을 나
갔다는 것이었다.
관우는 그런 망나니 아들을 둔 곽상 부부가 안됐으나 그와 작별을 고하고 길
을 떠나지 않을 수 없었다.
관우는 손건과 함께 수레를 호위하며 길을 가다 산길로 접어들었다. 그러자
홀연 산에서 1백 여명은 족히 되어 보이는 졸개들을 이끌고 두 사람이 말을 달
려왔다. 말을 탄 두 사람 중의 하나는 황건 띠를 머리에 두르고 전포를 입고 있
었다. 또 하나는 바로 곽상의 아들이었다.
"나는 천공장군 장각의 부장 배원소이다. 이 산을 무사히 넘고 싶으면 그 적
토마를 놓고 가라. 그러면 길을 비켜 줄 것이다."
머리에 황건 띠를 두른 자가 언성을 높여 말했다. 관우가 그 꼴을 보더니 껄
껄 웃다가 가라앉은 목소리로 그에게 물었다.
"참으로 무지하고 미친 도적놈이로구나. 네놈이 장각의 밑에서 도적질을 했다
면서 어찌 유현덕.관운장.장비 삼 형제의 이름을 모르느냐?"
황건을 쓴 자가 관우의 말에 놀란 얼굴을 하더니 다시 물었다.
"나는 얼굴이 붉고 수염이 긴 자가 관운장이라는 소문은 들었으나 아직 보지
는 못했다. 그런데 너는 누구냐?"
관우는 그 말에 대답하지 않았다. 다만 청룡도를 세우고 말을 멈춘 후 턱의
비단 주머니를 끌러 긴 수염을 보여 주었다. 황건을 쓴 자가 관우의 수염을 보
더니 말에서 급히 몸을 내렸다. 다음 순간 곽상의 아들을 말에서 끌어내린 후
덜미를 잡아 꿇어앉게 하고 그 자신은 관우의 말 앞에 엎드려 절했다.
"제 이름은 배원소라 하며 일찍이 황건의 무리에 가담한 적이 있습니다. 그러
나 장각이 죽은 이후에는 주인 없이 떠돌다가 무리를 모아 이 산 속에서 지내고
있습니다. 그런데 아침 일찍 이놈이 와서 자기 집에 천리마를 가진 나그네가 묵
고 있으니 그 말을 빼앗자고 하였습니다. 이놈의 권유를 받아들여 그 말을 빼앗
고자 왔습니다만 설마 장군님을 뵙게 될 줄은 생각도 못했습니다. 죽을 죄를 지
었습니다."
배원소는 망나니의 목덜미를 잡아 길바닥에 내동댕이쳤다. 망나니는 겁먹은
얼굴로 절을 꾸벅꾸벅 해대며 살려 달라고 애걸했다.
관우는 눈을 부릅뜨며 그런 곽상의 아들을 노려보다 그를 타일렀다.
"네 아버님의 낯을 보아 목숨만은 살려 주겠다. 앞으로 마음을 새롭게 가다듬
고 부모님께 순종하라."
곽상의 아들은 머리를 싸매고 쥐구멍이라도 찾는 듯 황급히 달아났다.
관우는 자기를 알아보는 배원소가 의아히 여겨져 부드러운 어조로 그에게 물
었다.
"나를 본 일이 없다면서, 어찌 나를 알아보게 되었느냐?"
배원소가 허리를 굽히며 공손히 대답했다.
"여기서 20리쯤 되는 곳에 와우산이 있습니다. 그곳에는 관서 태생의 주창이
란 자가 살고 있는데 덕 벌어진 어깨를 하고, 검붉은 얼굴에는 이무기처럼 휘어
오른 수염을 가진 자입니다. 기골이 장대한 그는 힘이 장사라 능히 천 근의 무
게를 들어올릴 수가 있습니다. 원래 황건적 장보의 부장이었는데 그가 죽은 후
부하들을 이끌어 산 속에서 지내고 있습니다. 그가 장군의 높으신 이름을 제게
들려 주어 항상 뵙고 싶었으나 길이 없어 장군을 뵙지 못함을 늘 한탄하였습니
다."
"자고로 호걸은 산 속에서 몸을 숨기며 지낼 것이 못 된다. 그대들은 이제 손
을 씻고 바른 길로 나서 스스로를 해하는 일이 없도록 하라."
관우가 배원소와 그 무리들에게 타일렀다. 배원소가 거듭 절하며 관우의 말에
따를 것을 맹세했다.
그때 한 무리의 인마가 이쪽을 향해 달려오고 있었다. 배원소가 그들을 보더
니 관우에게 알렸다.
"저기 앞서 오는 사람은 필시 주창일 것입니다."
관우가 보니 과연 배원소의 말처럼 얼굴이 검고 키가 큰 자가 창을 들고 달려
오고 있었다.
"과연 관 장군님이 틀림없구나!"
주창은 관우를 보자 놀라는 한편 기쁨에 겨운 얼굴을 하더니 말에서 뛰어내려
엎드렸다.
"주창이 장군님께 절하며 뵙습니다."
"그대는 어디서 나를 보았는가?"
"지난날 황건의 장보를 따라다녔을 때 장군의 존안을 뵈었습니다. 그러나 도
적의 무리에 가담해 있기에 감히 장군을 따르지 못하는 것이 한이었습니다. 다
행히 이 자리를 빌어 우러러 뵙게 되었으니 장군께서는 저를 버리지 마십시오.
보졸이라도 시켜 주신다면 기꺼이 말고삐라도 이끌며 장군을 따르겠습니다. 장
군을 모시다 죽는다면 더 이상 큰 기쁨이 없겠습니다."
주창의 간곡한 청에는 그의 진정이 어려 있었다. 관우도 그 정성에 마음이 움
직여 부드럽게 물었다.
"만약 그대가 나를 따른다면 이끄는 무리들은 어떻게 할 셈인가?"
"모두 장군님의 위명을 듣고 있어 저처럼 장군님을 따르고자 할 것입니다. 만
약 그렇지 않은 자가 있다면 그 또한 그의 뜻에 따를 뿐입니다."
주창의 말이 끝나자 그가 이끌고 온 무리들은 모두 한결같이 그를 따르겠다고
외쳤다. 관우는 말에서 내려 수레 앞으로 가 두 형수에게 이 일을 의논했다.
"저들이 한결같이 나를 따르겠다고 하니 두 형수님께서는 어떻게 하였으면 좋
겠습니까?"
관우의 물음에 감 부인이 대답했다.
"아주버님께서는 허도로 떠난 후로 예까지 오는 동안 몇 번이나 위험한 고비
를 넘기셨지만, 아직 한 번도 군마가 아쉽다는 말씀은 없으셨습니다. 지난번에
는 요화가 따르겠다고 하였으나 거절하셨습니다. 그런데 주창의 무리만은 거두
려 하시니 어인 일이십니까? 그러나 우리들은 여자들이라 아무것도 모르니 부디
아주버님이 알아서 처리하십시오."
감 부인은 이렇게 말하며 관우에게 넌지시 거절의 뜻을 바쳤다. 그들이 아무
래도 산적들이라 꺼림칙하여 믿지 못하겠다는 뜻도 있으나 보다 근본적인 이유
는 유 황숙의 명예를 더럽힐까 염려해서였다.
관우는 감 부인의 말에 머리를 끄덕이며 말했다.
"형수님의 말씀이 옳습니다."
관우는 수레 앞을 물러나온 뒤 주창에게 말했다.
"내가 무정한 것은 아니나 두 분 형수님께서 선뜻 허락을 않으시니 어쩔 수가
없구나. 그대들은 잠시 산 속에 되돌아가 머물러 있도록 하라. 내가 형님을 찾
아뵈온 후 곧 그대들을 부르러 올 것이니라."
"저는 지금까지 제 한 몸을 잘못 던져 녹림(산적)이 되었으나 이제 장군을 뵈
오니 이는 마치 우물 속에서 하늘을 우러러보는 것과 같습니다. 어찌 장군을 뵈
온 후 다시 그릇된 길로 돌아갈 수 있겠습니까? 만약 부하들과 함께 따르는 것
이 여의치 않으시다면 그들을 모두 배원소로 하여 거둬들이도록 하겠습니다. 허
락하여 주십시오."
주창이 그렇게까지 청하니 관우는 그 열성에 마음이 움직였다. 관우가 다시
부인에게 주창의 청을 전하고 의견을 물었다. 감 부인도 그 청까지는 거절하지
못했다.
"생각하는 것이 기특하니 데려가도록 하십시오."
관우가 주창에게 따를 것을 허락했다. 그런 후 그의 졸개에게 모두 배원소를
따라 산으로 돌아가 기다리도록 했다. 그러나 배원소 또한 관우를 뒤따르기를
원하던 터였다.
"저 또한 장군님을 따르고 싶습니다."
그러자 이번에는 주창이 그런 배원소를 달래며 타일렀다.
"자네가 이들을 맡아 주지 않는다면 모두 흩어져 또 무슨 악행을 저지를지 모
르네. 내가 관 장군을 따라갔다가 있을 곳이 정해지면 곧 달려와 데려가겠네.
그러니 잠시만 머물러 주게."
주창이 그렇게 당부하자 배원소는 할 수 없이 졸개들을 이끌어 산으로 돌아갔
다.
주창은 오랜 소원을 이루자 나는 듯이 가벼운 발걸음이 되어 앞장 서서 여남
으로 향했다. 일행이 며칠 동안 길을 가자 목적지인 여남의 경계가 눈앞에 들어
왔다.
책,영화,리뷰,
삼국지 제3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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