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은강 지음 / 메이트북스
진정한 친구 없이 마음이 텅 비어 있다면, 관계 맺기에 서툴다면, 이 책을 마치 한 편의 소설을 읽듯 편하게 읽어보자. 세상에 혼자 왔지만 세상에서 많은 사람들을 만나 좋은 추억을 가득 담아가는 것이 바로 인생이라는 깨달음을 얻은 저자는 관계 때문에 힘들어하는 당신에게 좋은 친구를 사귈 수 있다는 따뜻한 메시지를 전한다. 외롭고 힘들었을 당신은 이 책을 통해 세상의 좋은 것은 다 사람을 통해서 온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왜 나는 진정한 친구 하나 없는 걸까
▣ Short Summary
회사를 그만둔 지 10여 년이 지났다. 매일 출근하지 않아도 되고 누군가를 억지로 만나지 않아도 되는 나날이었다. 시간적으로 자유로웠고, 앞으로는 관계에서 오는 스트레스도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게 아니었다. 나라는 인간 자체로 살아야 했던 지난 십 년이 내겐 관계에 대해 더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었던 시간이었다. 참 많은 변화가 있었다.
원래 나는 관계 맺기에 서툰 사람이었다. 그러한 콤플렉스 때문에 인간관계를 원활하게 하는 데 도움이 될 만한 책이 나오면 계속 사서 읽었다. 끊임없이 다른 사람들의 삶을 기웃거리며 정답을 찾고 싶어했다. 그러면서 조금씩 사회에 물이 들었다. 제법 적응해가는 것도 같았다. 그럼에도 마음 깊은 곳에 담겨 있는 생각의 뿌리는 항상 이것이었다. ‘다른 사람은 다른 사람이다’, ‘다른 사람은 절대 나와 같지 않다’라고 생각했다. 그러다 보니 누구에게나 선을 그었고 차갑다는 소리를 들었다. 결국 나는 글로 배운 만큼 세월과 사람에게서도 배워야 했다.
요즘은 어딜 가든 혼자 있는 사람들이 많다. 혼밥도 잘 하고 혼영, 혼행도 많이 한다. 이것만 보면 다들 독립적이고 관계에 연연해하지 않는 것 같다. 하지만 인터넷 게시판을 보면 ‘마음을 열 친구가 없어서 외롭다’는 사람들이 넘쳐난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거리가 너무 멀어진 것이다. 친구가 있지만 어쩌 다가 혼밥을 하는 것과 친구가 없어서 혼밥을 할 수밖에 없는 것은 다르지 않을까. 내가 그랬던 것처럼 다른 사람과 친해지는 법은 누구든지 끊임없이 배우고 익혀야만 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분명한 것은 세상 모든 사람과 친구가 될 만큼 관계 맺기의 달인이란 있을 수 없다는 것이다. <한끼줍쇼>라는 TV 프로그램을 보라. 나름 유명한 연예인이 인사를 건네도 ‘당신이 나랑 무슨 상관이냐’는 냉대가 돌아 오는 일이 많다. 누구도 관계의 달인이 될 수도, 될 필요도 없다. 우리는 그저 내 인생에 어울리고 나에게 편안한 관계 맺기의 방법만 찾으면 된다.
나는 관계에 능수능란한 사람이 아니다. 다만 더 이상 사람과의 관계 때문에 힘들어하지 않는다. 이책은 내가 생각하는 이상적인 관계 맺기에 어떻게 도달했는지에 대해 쓴 것이다. 이 책이 불과 어제까 지만 해도 외롭고 힘들었을 당신에게 조금이라도 위안이 되었으면 좋겠다.
▣ 차례 프롤로그 _ 관계 맺기에 서툰 그대 그리고 나에게
- 2 - 왜 나는 진정한 친구 하나 없는 걸까
1장 나는 왜 관계가 힘들까?
2장 좋은 사람에겐 이유가 있어 3장 쉿, 이런 관계는 조심해!
4장 관계 맺기에 정답은 없지만 5장 사람은 사람 때문에 따뜻해져
에필로그 _ 언제나 밝고 따뜻한 태양처럼
- 3 - 왜 나는 진정한 친구 하나 없는 걸까
1장 나는 왜 관계가 힘들까?
도대체 어떻게 다가가야 하는 거지?_ 뻣뻣했던 어린 시절의 기억 나에게 첫 사회생활이었던 초등학교 시절에서 제일 먼저 떠오르는 장면은 이것이다. 1학년 미술 시간 이었는데 나는 언니가 쓰던 작은 크레파스를 가져왔다. 12색 아니면 많아봐야 20색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짝꿍인 아림이는 36색 아니 50색쯤 되는 커다란 3단 크레파스를 꺼내 놓고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그걸 보며 나는 아림이에게 “저 색깔 좀 빌려줄래?” 혹은 “크레파스 좀 같이 써도 돼?” 같은 말을 건네고 싶었다. 몇몇 색을 빌려 쓴다면 내 그림이 훨씬 예뻐질 것 같았다. 하지만 그 말이 죽어도 입에서 나오지 않았다. 그 애와 나는 아직 제대로 이야기를 나누어 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다른 아이들은 소곤거리며 서로의 것을 나누어 쓰는데, 나는 그 애의 크레파스를 흘끔흘끔 보기만 할 뿐이었다.
그리고 내겐 그 순간이 ‘누군가에게 다가가거나 무언가를 부탁하는 건 너무 어려운 일이다’라는 사실의 표본으로 뇌리에 남았다.
나는 확실히 관계 맺기에 젬병이었다. 반 아이들이 노래를 부르며 돌다가 선생님이 외치는 숫자에 맞게 모이는 게임을 하면 언제나 혼자 남았다. 누구에게 다가가지도, 누구를 불러오지도 못했다. 엄마가 ‘사람이 붙임성이 있어야지’ 같은 말을 할 때면 먼 외계어처럼 들리곤 했다. 중ㆍ고등학교에서도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그때그때 주변의 아이들과 장난을 치거나 우스갯소리를 하긴 했지만 한마디로 내겐 ‘단짝’ 친구가 없었다. 매일 만나야 하고 뭐든지 털어놓는, 그런 친밀한 사이를 만들지 못했다. 친구가 되고 싶은 아이, 마음에 드는 아이가 있어도 어떻게 다가가야 할지 몰랐다.
학교를 졸업하고 나서는 좀 나아질까 싶었지만 성인이 되어서도 관계 맺기의 어려움은 계속된다. 이젠 동성 친구뿐만 아니라 이성 친구, 나아가 애인, 인생의 동반자까지 선택해야 하는 과제가 닥쳐온다. 그럼에도 여전히 어떻게 다가갈 것인지, 다가오는 사람은 어떻게 대할 것인지 마땅한 대처법을 알지 못한다. 점점 사람 만나기가 두렵고 가벼운 우울 증세까지 느껴진다. 크레파스를 빌리지 못해 전전긍긍 하던 아이도 어느 순간 깨닫게 되었다. 이 세상에 사는 한 관계의 연속이었다.
문득 나보다 30년은 일찍 사회생활을 시작했을 아빠의 서재에도 언제나 인간관계에 관한 책들이 가득 했었음을 기억해냈다. 아빠는 퇴근 후 그런 책들을 꺼내 열심히 읽곤 했다. ‘그렇구나. 평생 배워야 하는 것이구나.’ 그렇게 마음을 다잡으니 오히려 홀가분해졌다. 물론 그 과정이 순탄치는 않았다. 그러다가 관계의 기본이자 힌트 같은 영화를 만났다. 영화 <바그다드 카페>. 이 영화에는 미인도, 대단한 배우도 나오지 않는다. 외모도, 성격도 모두가 조금씩은 부족하다. 영화의 배경조차 숨이 턱 막힐 것 같은 사막이다. 카페 주인 브렌다는 특히 무뚝뚝하고 불친절한 여인이다. 그럼에도 우연한 여행자 야스 민은 아무렇지도 않게 그녀에게 다가간다. 그녀들은 자신들의 있는 그대로를 드러내면서 서서히 아름 다운 조화를 이루어간다. 사실 나는 항상 완벽하고 훌륭한 상대가 하늘에서 뚝 떨어져서 부족한 나를 알아서 채워주고 맞추어주길 기대했다. 물론 그것은 대단한 착각이었다.
다른 사람에게 어떻게 다가가느냐고? 그걸 미리 고민하는 자체가 문제였다. 내 마음이 가는 대로 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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것이 정답이었다. 그때 내가 아림이의 크레파스를 탐냈던(?) 순간은 오히려 나와 아림이가 친해질 수있었던 절호의 기회가 아니었을까.
2장 좋은 사람에겐 이유가 있어
온라인 인연들_ 블로그에서 인스타그램까지 나에게 최초의 소셜미디어는 블로그였다. 일이 바쁘지 않아 무료했던 어느 날, 나는 남들이 다 한다는 블로그를 만들어보았다. 그냥 뭔가를 끄적거릴, 온라인 일기장의 용도였다. 좋아하는 풍경이나 배우의 사진을 올려놓았고, 좋아하는 한글 단어를 닉네임으로 썼다. 참 소박했다.
그러던 어느 날 이웃이라는 것이 생겨났다. 나를 이웃으로 신청한 그들은 안부게시판에 서로 알고 지냈으면 좋겠다는 내용의 글을 남기며 내가 쓴 글에 간단한 댓글을 달아주었다. 그때 깨달았다. ‘모니터 너머에 사람이 있었구나’ 하는 것을! 나도 이웃들의 블로그에 놀러갔다. 안부 글이나 댓글을 남겼다.
처음엔 예의바르게, 그런데 점점 어이없는 댓글을 내 딴에는 재미로 달게 되었다. 그러다가 내 댓글보다 좀더 독한 댓글을 다는 사람들이 하나둘 나타났다. 어느덧 경쟁이 붙은 이 댓글쟁이들은 하루에도몇 번이나 그저 댓글을 달기 위해 서로의 블로그를 오고가게 되었다. 누군가는 우리들의 댓글 공박이 재미있다며 다른 게시판에 퍼가도 되느냐고 묻기도 했다. 결국 TV 예능프로그램에서 보았던 ‘당연하 지’ 게임을 인용한 댓글달기 게임까지 시도해서 무려 100개에 육박하는 댓글을 남기는 기록을 만들었다. 서로 얼굴도 모르는 사람들이 보여준 놀라운 팀워크였고 온라인 인연의 시작이었다.
그렇게 활발했던 블로그 활동이 잠잠할 무렵, 이번에는 페이스북이 등장했다. 블로그보다는 무언가 주최 측의 간섭이 많은 느낌이었다. 그래도 페이스북을 하지 않으면 시대에 뒤떨어지는 것 같은 느낌에 일단 시작했다. 자연스럽게 친구 신청이 들어왔다. 그런데 뜻밖의 이름이 등장했다. 옛 상사였다. 하지만 함께 일하는 내내 서로가 ‘우린 왜 만났을까?’ 하는 의문을 일게 한 관계였다. 내가 회사를 떠나는 데에도 이분이 크게 일조를 했었다. 그런데, 왜? 웬만하면 친구신청을 다 받아들였지만 그분만은 거절 했다.
모르는 사람을 알아가는 것이 블로그였다면 페이스북의 역할은 이렇듯 조금이라도 인연이 있던 사람들을 다시 연결시키는 것이었다. 그렇다 보니 위의 에피소드처럼 달갑지 않은 사람이 친구로 추천되는 일이 종종 생겼다. 익명성 아래 까불 수 있었던 블로그와는 달리 페이스북은 시어머니, 시아버지, 시누이, 시동생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놀아야 하는 느낌이기도 했다. 계속 눈치가 보였다고나 할까. 나는 그점이 불편했다. 슬슬 발을 빼려던 차에 문득 한 가지 기능을 이용해보기로 했다. 사람을 찾아보기로한 것이다. 고등학교 시절 나와 펜팔로서 편지를 주고받았던 독일 친구의 소식이 궁금했다. 고 3이 되면서 공부에만 전념해야 했기에 나는 눈물을 머금고 그와의 연락을 끊었다. 고 3이 되면 왜 펜팔 친구 에게 편지를 못 쓴다는 것인지 그는 이해하지 못했지만 어쨌든 나를 존중하는 의미에서 내 의견을 받아주었다. 그걸 보면 정말 속 깊은 친구였다.
결국 그를 찾아냈다. 어릴 때 얼굴 그대로였다. 메시지를 보냈다. 목요일에 보냈는데 토요일 아침 답장이 도착했다. 어릴 적 꼼꼼하고 정확했던 성격 그대로 내 메시지를 늦게 읽은 이유, 자신의 페이스북 이용 성향, 자신의 현 상황까지 장문의 글을 그 작은 메시지 창 안에 꼼꼼히 담아 보내왔다. 이 친구에 대한 이야기는 나중에 다시 하겠지만, 그를 찾아준 것만으로 마크 주커버그는 내게 은인이다. 블로그, 페이스북을 거쳐 요즘엔 인스타그램을 이용한다. 1년에 한 번을 못 보는 친구도 그곳에서는 안부를 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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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 수 있다.
결국 모든 소셜미디어는 좋은 것을 나누고 싶고, 잘한 것은 칭찬 받고 싶고, 또 아픈 일은 위로하고 위로받으며 교류하고자 하는 인간의 욕망을 채워주는 역할을 한다. 그렇게 인간다움을 지향하는 목적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면 소셜미디어 활동이 인생의 낭비라고 매도되는 일은 없을 것이다. 하지만 시도 때도 없이 들락거리며 댓글을 확인하느라 눈앞의 사람에게 소홀하거나 사생활을 시시콜콜 생중계 하는 것은 지나친 일이 아닐까. 또 아쉬운 것은 온라인에서 알게 된 친구를 오프라인에서 만나는 경우도 있지만 오프라인에서 친해진 사람들까지 이제는 대개의 경우 온라인으로만 연락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굳이 통화를 하면 촌스러워 보일 지경이다. 매일 ‘좋아요’를 누르느라 자주 본 것 같지만 실제로는못 본 지 수년 넘은 친구들아, 너희들 그 사진처럼 정말 잘 살고 있는 거니?
혼자 가서 둘이 걷는 길, 카미노_ 매일 만나고 매일 헤어지던, 축소판 인생십 년 전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 순례길을 TV로 처음 보았을 때 나는 곧바로 상사병에 걸렸다. 풍경에 완전히 매혹되었다. 가고 싶었다. 정말 가고 싶었다. 그곳이 국내였다면 앞뒤 재지 않고 갔을 것이다. 그런데 너무 멀었고 비용도, 시간도 문제가 되었다. 끙끙 앓았다. ‘어떡하지? 가고 싶다. 어떡하지?
정말 가고 싶다.’ 이런 말도 안 되는 선문답을 혼자 반복했다. 그때의 내 비정상적인 열정을 누군가 지켜보았다면 사람이 저렇게 이상해지나 싶었을 것이다. 그런 간절함 때문인지 얼마 가지 않아 갑자기 직장을 잃게 되었고 나는 잠시 많이 흔들렸다. 내가 생각이 깊은 사람이었다면 다음 단계의 삶을 성실히 준비하기 위해 새 직장을 알아보거나 과감히 창업이라도 했을 것이다. 그런데 그때 신은 나와 함께 했던 것 같다. “걱정하지 말고 떠나거라.” 그렇게 신은 내 등을 떠밀었다.
한 달 넘게 스페인 북부의 길을 걸었다. 철저히 혼자였다. 낯선 외국에서 외로움은 증폭되었다. 가장 당혹스러웠던 첫날밤의 이야기는 나의 산티아고 순례기인 『그 길 끝을 기억해』에도 실려 있다. 출발 지였던 생장피에드포르에서 나는 여러 사람이 묵는 더럽고 시끄러운 방을 못 견디고 방에서 나와 식탁에 엎드려 잤다. 낯선 이방인들에 대한 경계심이 극에 달했고, 그 눅눅하고 퀴퀴한 공기를 함께 호흡 하는 것도 정말 싫었다. 그런데 아침식사 시간에 마주한 그들은 뜻밖에도 선량하고 순박했다. 그런 이미지의 전환은 그 이후에도 여러 번 일어났다. ‘정말 무례한 인간’이라고 생각했는데 ‘그냥 별 생각이 없는’ 평범한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다.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에도 나오듯 간사함이나 사악함보다는 오해와 태만이 이 세상에서 더 많은 갈등을 불러일으킨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산티아고 순례길이 놀라웠던 것은 일상에서라면 꽤 오랜 시간이 걸려야 깨달을 수 있는 것을 아주 짧은 기간 안에 체험하고 느끼게 되었다는 것이다.
세상의 어떤 일은 이렇게 도미노 게임처럼 내가 직접 나서지 않아도 한 가지 사건이 다른 사건의 원인이 되고 또 그 다음 사건의 원인이 되는 식으로 마침내 새로운 결과를 만들어내기도 하는 모양이다.
이것이 현실생활에서 일어나려면 꽤 오랜 시간이 걸리겠지만 카미노에서는 지극히 짧은 시간 동안 벌어진다. 그래서 더욱 놀랍게 와닿는 것이리라.
나를 그곳으로 떠나게 한 가장 큰 힘은 눈부신 자연의 아름다움이었다. 그러나 막상 그곳에서 하루하루 보낼 때 나를 기쁘게 한 것은 그곳에서 만난 사람들이었다. 브라질의 안토니엘라, 독일에서 온 수산나, 에우나테의 장 아저씨, 산토스 신부님, 한국인 수사들……. 처음 보는 사람들이었지만 서로가 서로의 선의를 알아보고 그 여린 마음을 이해하면서 나는 세상에 대한 강한 긍정을 몸에 새기게 되었다.
이런 체험을 그 어디에서 또 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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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스페인에서 막 돌아왔을 때는 그곳에 다시 갈 생각이 전혀 없었다. 충분히 고생했다고 생각했다. 피레네 산맥을 오를 때는 정말 죽을 것 같았고 발목도 꽤 오래 시큰거렸다. 그런데 얼마 전부터인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길을 또 걸을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상상하게 되었다. 물론 10년 전보다 나는 세상의 때가 묻어 두려움도 많아졌고 몸도 무거워졌다. 그렇지만, 그래서, 더 겸손하게 그길을 걷게 되지 않을까. 이제는 고독이 아니라 고통으로 눈물지을 수도 있겠지만 그래서 더 감사하게 순간순간을 느끼게 되지 않을까. 혼자 가도 둘이 걷게 되는 그 길을 생각하면 언제나 가슴이 따뜻해진 다.
3장 쉿, 이런 관계는 조심해!
모두가 나의 행복을 바라는 건 아니야_ 이아고는 왜 오셀로를 파괴했나?
사람이 다른 사람의 좋은 일에 진정으로 기뻐하기란 쉬운 일이 아닌 것 같다. 나는 어떤가? 실은 나도 다른 사람의 좋은 소식에 곧바로 기뻐해주는 대신 ‘아, 뭐지? 잠깐만, 내 표정이 지금 괜찮은 건가?’ 고민하다가 억지 미소를 지을 때가 종종 있다. 나는 아직 행복하지 못한데, 나는 아직 성공하지 못했 는데 나와 가까운 사람이 행복해 보이고 성공한 것 같으면 조바심과 불안감이 생긴다. 이건 어쩌면 당연한 것이다. 자신의 처지와 남의 행복을 비교하지 않더라도 진심으로 남을 축복하는 일은 사실 쉽지 않다.
조지 와인버그는 『셰익스피어에게 묻다』라는 책에서 이아고라는 캐릭터를 내세운다. 이아고는 『오셀 로』에서 주인공 오셀로의 가까운 친구이자 부하이지만 오셀로를 불행하게 하기 위해 오셀로와 부인 데스데모나의 사이를 이간질한다. 그로 인해 결국 오셀로와 데스데모나 두 사람은 죽게 된다. 이아고는 오셀로에게 무언가 원한이 있어서 복수하기 위해 그런 일을 저지른 것일까. 하지만 오셀로는 딱히 이아고에게 잘못한 것이 없다. 그 점이 무서운 것이다. 아무런 이유도 없이 그는 오셀로의 모든 것을 파괴했다. 그는 그저 오셀로가 행복해하는 모습을 보는 것이 불편했고, 자신의 역량으로 한 가정을 무너 뜨렸다.
우리의 현실에도 이런 사람이 없지 않다. 심지어 결혼 후 행복하게 사는 친구가 부러워 친구와 그녀의 아기를 죽여 버린 여자도 있었다. 이렇게 죽음으로까지 몰아가지는 않는다 하더라도 이아고처럼 우리의 평온한 삶을 파괴하려는 의지를 가진 사람이 우리 주변에 전혀 없다고는 누구도 장담할 수 없다.
이아고 같은 이들은 겉보기에는 차분하고 이성적이고 배려하는 사람처럼 여겨진다. 하지만 그들의 가치관은 뿌리 깊게 부정적이어서 타인의 행복은 물론 자신의 행복조차 받아들이기 힘들어한다. 같이 망하고 같이 죽겠다는 심보라고나 할까.
“설마요? 제 주변엔 그런 사람 없어요!” 이 글을 읽는 당신이 이런 항변을 해준다면 정말 다행이다. 하지만 모든 인간이 남의 행복에 대해 진심으로 기뻐하는 일은 어렵다는 것을 일단 받아들여야 한다. 앞에서는 웃으며 축하해준다고 해도 돌아서서는 우울해할지 모른다. 그러니 섣불리 자신의 성공이나 행복을 함부로 떠벌리지 않았으면 한다. SNS는 어느 틈에 자랑질의 공간이 되어버렸지만 그것으로 인한 폐해와 위험성에 대해 인지해야 한다. 심지어 가족조차 당신의 성공과 행복을 기뻐하지 못할 수도 있다. 나의 행복과 기쁨은 어차피 나의 일이다. 과시하거나 자랑하는 것을 삼간다고 해서 행복과 기쁨의 총량이 줄어들지는 않는다. 도시의 밤, 아파트에 가득한 노란 불빛을 보면 세상은 고요한 행복이 이끌 어가고 있음을 느낄 수 있다. 진짜 행복이란 이렇게 조용하게 그리고 따뜻하게 언제나 우리 곁에 있는 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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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도 모르게 왕따가 되었을 때_ 깊이가 결여된 그들을 향한 대처법 요즘처럼 단톡방 내 커뮤니케이션이 중요한 시대에 한 지인이 내게 이런 경험을 들려주었다. 취직을 하면서 모임에 자주 못 나가게 된 그는 대신 단톡방에 올라오는 소식은 빠짐없이 읽고 자기 의견도 올리곤 했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자신이 올린 글에는 아무도 대꾸를 하지 않더라는 것이다. 다른 사람이 글을 올리면 답변이 이어지고, 자신이 한마디 하면 다시 정적이 흐르고…… 이 정도면 누가 보아도 단톡방 내 왕따현상이 아니냐며 지인은 허탈해했다.
이런 식의 왕따행위는 의외로 많은 곳에서 쉽게, 공공연히 일어난다. 눈에 띄는 가해나 공격이 아니니 가해자는 태연할 수 있고, 피해자도 딱히 항의할 여지가 없기 때문이다. 마치 보이지도 않고 증거도 남지 않는 독가스와 같다고나 할까. 싸우기라도 했다면 어색한 공기가 당연한 것인데 아무 일도 없었 음에도 싸늘한 기운이 감도는 것은 더 견디기가 힘들었다. 그렇다고 “도대체 나한테 왜 그래요?”라고 물어본들 돌아올 답은 뻔했다. “네? 저희가 뭐요? 저희는 아무것도 안 했는데요?”
모임의 구성원 전부가 나를 싫어하고 왕따를 주동하는 것이 아니라 일부가 그런 행동을 하는 것이라면, 나는 나의 방식대로 계속 존재하는 것을 택할 것이다. 이때 굳이 왕따 주동자들과 친해지려는 노력은 하지 않는 것이 낫다. 나에 대해 호감이 없는 사람들과 친해지는 비법이란 없다. 그들이 그랬듯이 나도 그들을 그저 깔끔하게, 하얀 백지처럼 무시해주는 수밖에. 대신 나의 에너지는 정상적인 사람들에 게만 집중할 것이다. 사실 멀쩡한 성인을 이유 없이 왕따시키는 사람은 어디에서든 혼자서는 살 수 없는 약하고 불행한 사람이다. 자신이 혼자서 버틸 수 없으니 다른 사람을 홀로 두는 방식으로 고통을 주려고 하는 것이다. 그런 유치한 행동에 휘둘리는 것은 스스로 생각해도 한심한 일이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단편소설 중 『침묵』이라는 작품이 있다. 주인공 오사와는 학창시절 자신에 대해 나쁜 소문(컨닝, 폭행)을 퍼뜨린 라이벌 때문에 반 친구들 모두로부터 왕따를 당하게 된다. 아무도 그에게 말을 걸지 않고 피하기만 한다. 당연히 오사와는 그 일을 주동한 라이벌에 대한 증오로 불타오르고 모두에게 사실은 그게 아니라고 해명하고 싶어 견딜 수 없어 한다. 그러던 어느 날, 오사와는 우연히 지하철에서 라이벌과 마주친 후 이런 사실을 깨닫는다. 어떤 종류의 ‘인간’에게는 깊이라는 것이 결여 되어 있어서 고작 타인을 괴롭히고 모함하는 일에서 승리감과 쾌감을 느끼기도 한다는 것을. 얼마나 한심하면, 얼마나 얄팍하면 고작 이런 일에 행복해한다는 말인가. 세상에는 의미와 깊이 있는 일이 얼마나 많은데! 그 깨달음 이후 오사와는 남은 학기를 굳건히, 홀로 견디어낼 수 있었다. 자신은 그런 얄팍한 인간들과 다르다는 자부심으로 말이다. 누군가 당신을 왕따시킨다면 그저 이렇게 생각해보라. 겨우 이 정도 일에 기뻐하는 인간들에게 질 수는 없다고. 그리고 내 인내심은 저들의 비겁함보다 훨씬 강하다고.
4장 관계 맺기에 정답은 없지만
아무리 보아도 보이지 않는 것들_ 우리는 모두 다른 위치에 있다 한때 큰언니네 카페에서 알바를 한 적이 있다. 커피머신으로 아메리카노를 비롯한 각종 커피 음료 만드는 것을 배우고 과일과 얼음을 갈아내는 스무디 만드는 것도 배웠다. 서툴지만 카푸치노 거품 내는 것도, POS로 계산하는 것도 배웠다. 그런데 가장 많이 배운 것은, 세상에는 참 다양한 사람이 있다는 사실이었다.
귀엽고 인상 좋은 몽골 출신 여대생이 처음 서빙 알바로 왔다. 우리는 함께 팀워크를 이루어 일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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했다. 며칠은 서로 즐겁게 일했다. 그런데 어느 날 손님에게 나가야 할 음료와 음식이 나왔는데도 그녀가 태평하게 선반을 닦고 있었다. 나는 다른 손님의 주문을 받고 있었기에 그녀를 불렀다. “뭐해? 이거 나가야지!” 내 말에 그녀는 돌아서서 갑자기 눈꼬리를 올리며 이렇게 말했다. “이게 제가 할 일이에 요!” 단호한 말투와 시선이었다. 그녀는 아마도 내가 자신과 동급인 알바생이니 이래라 저래라 할 권한이 없다고 생각한 듯 했다. 그녀의 시선에서는 내가 참 유하고 만만해 보였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렇 지만 설령 내가 그녀보다 후배였다고 해도 손님에게 음식 나가는 일은 선반 닦는 일보다 중요했다. 결국 사장님에게만 잘 보이면 되고, 같은 알바생은 기로 누르면 된다고 믿었던 그녀는 사장님 동생인 나의 밀고(?)로 가게를 떠나야 했다. 걱정은 되지 않았다. 그녀는 워낙 야무져서 금방 어디에서든 일자리를 찾았을 것이다.
그녀의 빈자리를 채우기 위해 새 알바생을 구하면서 이번에는 내가 직접 면접을 보기로 했다. 꽤 아름 다운 외모의 한국인 여대생이었다. 시급이나 근무시간을 이야기했더니 다 좋다며 내일부터 근무하겠다고 했다. 나는 안심했다. 그러나 다음날 그녀는 오지 않았다. 전화를 걸어도 받지 않았다. 그녀 이후또 다른 프랑스 소녀가 비슷한 행동을 했다. 귀엽고 환한 표정으로 ‘오케이’ 하고는 잠수를 탔다. 이유는 알 수 없었다. 알바생 하나 구하는 것이 뭐 그리 어려울까 생각했던 나는 애가 타기 시작했다. 결국 키가 크고 늘씬한 핀란드 출신 교환학생이 약속을 지키고 출근해주었다. 바람맞히지 않고 와준 것만으 로도 고마웠지만 그렇다고 단점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언제나 재잘거리는 그녀의 장단에 맞추다가 나는 넋을 놓아버리곤 했다. 그랬다가 사장님인 큰언니에게 내가 혼나기도 했다. 어쨌거나 정말 쉽지 않았다.
장강명의 단편소설 『알바생 자르기』에는 알바생의 고충뿐만 아니라 중간관리자의 이러한 난처함이 고스란히 드러난다. 회사의 최은영 과장은 혜미라는 알바생을 관리하게 된다. 혜미는 싹싹하지도 않고 눈치도 부족하다. 하지만 가정형편이 어려워 보이는 그녀에 대해 은영은 동정심을 품고 있었다. 그러 다가 계속 실수가 이어지는 혜미에 대해 회사 내에서 안 좋은 의견이 나오면서 갈등이 불거진다. 혜미는 퇴직금과 4대 보험을 언급하면서 계산적인 모습을 보이고 그때 은영은 문득 정나미가 떨어지는 느낌을 받는 것이다. 자기에게 내가 어떻게 했는데? 공사를 구분하지 못할수록 냉정할 때 냉정하지 못하고, 너그러워야할 때 너그럽지 못하다. 마침내 은영의 머릿속에서 혜미는 수많은 알바를 거친 ‘선수’이고 순진한 상사의 뒤통수를 칠 수 있는 ‘악마’로까지 전이된다.
씁쓸하지만 은영의 입장도, 혜미의 사정도 이해가 간다. 나는 은영이기도 했고 혜미이기도 했으니까.
사실 그전까지는 카페 일이라고 하면 언제나 손님과 주인만을 떠올렸다. 그런데 그곳에는 수없이 페달을 밟아대는 알바생들이 있었다. 그들은 수시로 교체될 수 있는 존재지만 없어서는 안 되는 존재이기도 했다. 그들은 다른 얼굴이지만 같은 얼굴이기도 했고 공간을 채우는 젊은 에너지면서 또 가장 아프고 피곤한 세대의 모습이기도 했다. 아무 죄 없이 셰프의 벼락같은 짜증을 들어야 했던 한 알바생이 있었다. 그때 충분히 위로하지 못했던 것이 미안하다. 하지만 셰프도, 셰프를 고용한 큰언니도 각자의 사정이 있었다. 다만 그때는 보이지 않았을 뿐이다. 은영의 입장에서는 혜미가 보이지 않고, 혜미의 입장에서는 은영이 보이지 않는다. 아무리 보아도 보이지 않는 것들이 세상에는 있다는 것, 그래, 그것도 내가 배운 것이다.
어쨌든 이어가야 할 관계들_ 관계 유지를 위한 4가지 법칙 누구나 관계를 맺고 산다. 그리고 그 관계 때문에 행복할 때도 있지만 여러 가지 스트레스를 받기도 한다. 그런데 그렇게 관계에 대해 고민하며 상담을 청하는 이들에게 몇몇 사람들은 이런 식으로 조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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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다. “그런 사람은 만나지 마세요”, “그런 모임 뭐 하러 해요? 당장 나오세요” 이렇게 쉽게 끊고, 끝내고, 떠나보내고 할 수 있다면 누가 고민을 하겠는가. 세상에는 함부로 끊을 수 없고 어쨌든 이어가야할 관계들이 있다. 만나고 싶지 않지만 그래도 관계를 이어가야 하는 사람들에게는 다음과 같이 대응 해보자.
첫째, 그런 사람과는 일일이 대화에 깊이 참여하지 않는다. 나를 괴롭히는 누군가가 있다면 한 공간에 있더라도 가능한 한 말을 섞지 않는다. 한 공간에 있는데 어떻게 그럴 수 있느냐고? 사람에게는 누구나 여러 가지 모습, 여러 가지 얼굴이 있다. 그 달갑지 않으나 끊을 수 없는 사람에게는 내 안의 가장 조용하고, 가장 바쁘고, 가장 무심한 자아를 끄집어낸다. 그리고 ‘영혼 없는 마네킹’의 모습으로 대하는 것이다. 하소연을 시작하면 마침 걸려온(아니 걸려온 듯한) 전화를 받으며 조용한 곳으로 이동한다 거나, 꼼짝없이 이야기를 들어야만 하는 상황이 되면 고개만 끄덕이며 나만의 무념무상에 빠지는 것이 다. ‘난 당신이 싫다’는 속내를 보이지 말라. 굳이 그럴 필요는 없다. 또 이건 내가 종종 했던 실수인데 상대를 이해해보겠다고 이야기에 깊이 빠져도 안 된다. 골치만 더 아파진다. 결코 이해할 수 없다. 내시간은 소중하므로 정말 가치 있는 것에만 시간을 기울여야 한다는 것을 명심할 것.
둘째, 그와 나는 다른 존재임을 받아들인다. 공감은 호감의 시작이다. 그러니 공감할 수 없고 이해할수 없는 사람을 좋아하기는 어렵다. ‘아, 나와 다르구나!’ 하는 판단이 내려지면 곧바로 ‘우주선을 타고’ 나의 별로 귀환하라. 그런 사람은 나와 다른 행성에 살고 있다고 생각하라. 그런 사람일수록 멀리서 보면 별처럼 예쁘게 보인다. 너무 가까이에서 보니까 달처럼 울퉁불퉁한 표면까지 보게 되는 법이다.
안 그래도 싫은 감정이 더 커지지 않도록 최대한 거리를 유지하라.
셋째, 그런 상대가 하는 나에 대한 평가를 마음에 담아두지 마라. 간혹 달갑지 않은 상대가 해준 칭찬은 받아들이고, 비판은 불쾌해하며 주변에 하소연하는 사람이 있는데 칭찬조차도 듣는 순간 싹 잊어야 한다. 어떤 평가든 그 사람에게서 나온 것이라면 가슴 속에 담아둘 가치가 없는 것으로 간주한다. 언제나 원점에서 상대를 만나야 한다. 이번이 내 인생에서 처음 보는 순간인 것처럼. 그래야 견딜 수 있다. 그에 대한 정보도 가능한 한 기억에 남겨두지 않는다.
넷째, 이 방면에 능숙한 주변인을 롤 모델로 정해서 따른다. 아무래도 자신이 직접 볼 수 있는 사람을 따라하면 좋다. 누구나 주변에 어떤 사람들과도 두루두루 친하고, 적당히 잘 지내는 사람 한 명 정도는 있지 않은가. 그런 사람이 그나마 불편한 사람, 딱히 좋아하지 않는 사람 앞에서 어떻게 처신하는지 관찰하고 그 태도를 흉내 내라.
5장 사람은 사람 때문에 따뜻해져
가면 하나쯤은 준비해둘 것_ 속마음은 조금 더 깊이 넣어둬!
나는 그동안 온갖 감정과 내면의 변화를 고스란히 얼굴에 드러내고 살아왔지만 이제는 그것에 대해 후회하고 있다. “왜요? 솔직한 게 좋잖아요?” 이것이 내가 품고 있던 변명이기도 했다. 하지만 사회에서 사는 인간으로서 가면을 쓰지 않는 것은 자신에게 위태롭고 모두에게 무례한 일일 수 있다. 살다 보면 간혹 우리는 듣고 싶지 않은 말을 다른 사람들로부터 듣게 된다. “어머 왜 이렇게 살이 쪘어요?” 살이찐 건 사실이지만 그렇게 확인사살을 해야 할까. “이거 왜 이래? 이렇게밖에 못해?” 밤새워 작업한 건데 노력을 먼저 인정해주면 안 되나. “ 씨는 착하니까 이해해주겠지?” 양보나 이해는 내가 알아서 하는 건데 왜 당신이 강요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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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순간 표정은 금방 경직되기 쉽다. 더 나아가 발끈해서 얼굴이 달아오르거나 결국 몇 마디 좋지 않은 말들을 내뱉을 수도 있다. 미리 준비해놓은 가면이 없다면 이어지는 몇 마디 말에 결국 폭발하게 된다. 하지만 다시 생각해보라. 저 말들이 그리 대단한 말인지. 내 인생에 그리 큰 영향을 끼치는 것인지. 내가 그렇게 연연해야 할 것들인지.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는 ‘밝고 건강한’ 가면을쓱 꺼내야 한다.
각자 좋아하는 연예인의 표정을 떠올려보라. 항상 자신 있게 웃는 김혜수나 정유미에 빙의해서 대응하는 것도 좋다. 사실 나는 개그우먼 김신영 식의 대응법을 더 선호한다. “아이고, 선생님! 무슨 말씀을 그렇게 하세요?” 일단 밉지 않게 거부의 반응을 보인다. 그러고 나서 이 상황이 더 이어지는 것을 얼른 차단한다. “자, 여기까지만 말씀드리고…….” 사실 이런 멘트를 굳이 날릴 필요도 없다. 불편한 말을 들었을 때는 그냥 먼 산을 보며 씩 웃는 것으로 충분하다. 진정한 포커페이스는 무표정이 아니라 웃는 얼굴이라는 말도 있다. 그저 웃는다. 그저 웃는 걸로 족할 수 있다.
가면의 목적은 내 감정이 극단으로 치닫지 않게 하는 것이다. 그리고 내 감정을 제3자에게 쓸데없이 보이지 않기 위함이다. 나의 모든 감정을 모두에게 항상 다 보일 필요는 없다. 내가 이성을 잃고 화내는 모습을 본 누군가는 분명히 ‘아, 그 사람 성질이 보통이 아니야’라고 이야기할 것이다. 내 인생에서천 분의 일도 안 되는, 한 순간의 모습을 상대방은 나의 전부로 기억해버리는 것이다. 나로서는 억울한 일이지만 상대는 자신이 본 것이 그것뿐이니 틀린 것도 아니다. 결국 나를 위해서 가면을 써야 하는 것이다.
얼마 전 영화 <그린 북 Green Book>을 남편과 같이 집에서 보았다. 1960년대 미국, 아직도 흑인들의 인권이 백인과 동등하지 못했던 시절, 백인 운전사 토니와 흑인 피아니스트 돈 셜리 박사가 남부 지방을 함께 순회하면서 일어난 일들을 그린 영화였다. 영화에서 돈 셜리 박사는 천재 피아니스트로 이곳 저곳에서 초빙을 받지만 흑인이라는 이유로 무시를 당한다. 그 옆에서 분노를 참지 못하고 폭력을 저지른 토니에게 돈 셜리 박사는 자신이 어떻게 그날까지 살아왔는지, 어이없던 나날들을 어떻게 견디어 왔는지 이야기한다. “The dignity always prevail(품위가 언제나 이긴다).” 아무리 부당한 대우라도 묵묵히 견디어낸 돈 셜리 박사의 품위는 결국 전체 흑인에 대한 이미지까지 바꿔낸다. 영화가 끝난 후 남편과 나는 동시에 ‘dignity’라는 단어를 읊조렸다. 가면이 품위를 지켜낼 수만 있다면 그것은 옳은 선택일 것이다.
인연의 신비가 우리를 구해줄 거야_ 인생을 이끌어가는 놀라운 힘내 인생에서 두 번째 직장에 들어갔을 때의 일이다. 안국역에 있는 어느 빌딩 2층의 사무실로 면접을 보러 오라는 연락을 받았다. 잔뜩 긴장한 채 입구부터 양탄자가 깔려 있어 내 발걸음 소리조차 들리지 않는 적막한 사무실로 들어갔다. 그때 요정처럼 깜찍한 여성이 내 앞에 나타났다. “면접 보러 오셨죠?
성함이?” 나는 떨리는 목소리로 내 이름을 이야기했다. 그러자 그녀는 문득 “아, 그럼 혹시 선배 알아요?” 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나는 동기들 외에는 그다지 인맥이 넓지 못했기에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 수밖에 없었다. 그녀는 살짝 실망하는 듯했으나 어쨌든 안쪽에 앉아 있던 이사님 앞으로 안내 해주었다. 이사님과 면접을 보고 집으로 돌아온 지 며칠 뒤 나는 합격 통보를 받았다.
그 요정 같던 여성은 나의 사수가 되었고 25년이 넘도록 친분을 유지하고 있다. 사수 언니가 언급했던, 정작 나는 얼굴도 모르던 그 선배는 훗날 함께 모임을 하게 되었으며 내 책에 추천사를 써주기도 했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그 회사에서의 합격 경쟁률이 300대 1에 가까웠다고 한다. 그런데 만약 그 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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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님이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을 선택했더라면 어떻게 되었을까. 만약 그랬더라면 내가 백수탈출을 못하고 끝나는 정도의 문제가 아니었다. 사수 언니와 나는 함께 일하지 못했을 것이고, 나는 훗날 언니가 잠깐 살았던 뉴질랜드에도 갈 일이 없었을 것이고, 내 삶에서, 또 언니의 삶에서 일어난 갖은 사건ㆍ 사고에 대해 서로 위로를 주고받을 일도 없었을 것이다. 그 이후로는 언니처럼 내게 자연스럽게, 아무 렇지 않게, 선배라는 권위의식 없이 다가와준 사람이 거의 없었던 것을 보면 내 인생에서 언니와의 인연은 참으로 대단하고 또 고마운 것이었다.
물론 굳이 왜 만났을까 싶은 인연도 있었다. 그것도 내 쪽에서 미련을 가지며 매달리거나 집착을 했던, 깊이 베이고서야 정신을 차릴 수 있었던 악연들 말이다. 그러나 좋은 인연만으로 인생이 채워진다는 것은 어차피 불가능한 일이 아닐까. 그런 악연이 혼재했기에 나는 인생의 어두움과 배신을 배울 수 있었고, 그래서 내게 소중한 인연들을 알아챌 수도 있었다. “내 곁에는 항상 좋은 사람들만 있어!” 이런 말을 하는 사람들은 좀 이상해 보이지 않는가. 그러니 너무 불쾌하거나 두고두고 원망할 필요는 없는것 같다. 내가 집중하는 것은, 인연 그리고 나아가서 그 인연들이 만들어내는 신비다.
“하느님을 사랑하는 이들, 그분의 계획에 따라 부르심을 받은 이들에게는 모든 것이 함께 작용하여 선을 이룬다는 것을 우리는 압니다”(로마서 8장 28절). 이 구절을 미사 강론 중에 들었을 때 나는 잠이확 깼다. 선한 사람들, 선한 의지가 모이면 아름다운 선의 결과가 나온다니, 얼마나 멋진가. 1 더하기 1은 단순히 2로 끝나는 것이 아닌 것이다. 그저 상대를 도와주고 싶어서 도와주었을 뿐인데 자신에게도 기대하지 않았던 보상이 돌아오기도 한다. 순수한 마음의 힘, 그것이 만들어내는 인연의 신비는 놀랍다. 경제가 침체되고 취업이 어려워진 탓인지 매사에 계산적으로 대하는 사람들이 늘어났다. 하지만 이런 상황일수록 우리는 인연의 신비를 믿어야 한다. 그저 믿고 한 발을 내밀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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