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조선의 국모다(중)
제2권 아아 병인년!
이수광
----- 차 례 -----
작가 소개
제 7장 피어라, 무궁화야
제 8장 시체는 산을 이루고, 피는 내를 이루다
제 9장 구름재의 서릿발
제10장 서경(西京)에 부는 바람
제11장 강도(江都)와 전운(戰雲)
제12장 적, 그리고 사랑
제7장 피어라, 무궁화야
1
해가 서산으로 살핏이 기울고 있었다.
삭정이를 줍고 솔가지를 꺾어 불을 지피자 금세 부엌 안에
매캐한 연기가 가득찼다. 조선이는 눈을 부비고 부엌에서 나와
치맛자락으로 눈물을 찍어 냈다. 2월이었다. 날씨가 따뜻했다.
(이이는 왜 아직도 돌아오지 않는 것일까?)
조선이는 우둑히 산 밑을 내려다보았다. 해가 기울고 있는
산자락 밑으로 어느 숯막에선가 저녁 짓는 연기가 모락모락 피어
오르고 있었다. 첩첩산중이었다. 산을 넘으면 또 산이 있고, 그
산을 넘으면 또 산이 있다. 마을이라고 해야 숯을 굽는 숯막
두어 채가 고작이었다.
조선이는 남편이 돌아오고 있을 길목을 눈으로 어림해 보았다.
남편 이창현은 봉양장에 나가서 아직도 돌아오지 않고 있었다.
봉양 장터 주막에서 술을 마시고 배론에 있다는 신부들 소식도
들으려는 것이다.
배론은 행정상으로 제천국 봉양면 구학리가 된다. 치악산
동남쪽 기슭의 구학산과 백운산의 험준한 산악지대에 있는데 그
땅의 모양이 배 밑바닥 같다고 하여 배론으로 불리고 있었다.
배론에는 신학당이 있어서 신(申) 쁘리티 신부와 박(朴)쁘티
니꼴라 신부가 신학생 네 명을 가르치고 있었다.
일찍이 신해교난(辛亥敎難)이후 교민들이 피난을 해와 농사도
짓고 옹기도 구우며 살고 있었다. 1801년 신유(辛酉)박해 때
황사영이 한성에서 찾아와 토굴에서 8개월 동안 숨어 살며
황사영 백서를 쓰다가 치명 순교한 곳이기도 했다. 이 사건으로
연루되어 치명 순교한 사람만도 16명이 되는 곳으로, 최양업
신부의 시신이 묻힌 곳이기도 했다.
조선이 내외가 월림리에 움막이라는 방 두 칸을 들인 것도
그들이 윌림리에 도착한 지 사흘이 채 못되었을 때였다.
교인들이 나서서 움막을 짓는 것을 내 일처럼 도와 주었다.
산에서 소나무를 베어다가 서까래를 치고, 황토에 짚을 섞어
반죽해 바람벽을 바르고, 골짜기를 넓고 편편한 돌을 주워다가
구들을 놓았다. 그렇게 집 모양이 갖추어지자 교인들이 모두
와서 축복의 기도를 해주었다.
"여기도 부럭이골 못지 않게 살 만하구려."
교인들이 와서 기도를 해주고 돌아가던 날 남편 이창현은 산을
올려다보며 한숨을 뱉듯이 그렇게 말했었다. 어쩐지 공허함이
실려 있는 목소리였다.
"살아서는 진천, 죽어서는 용인에 묻혀야 한다는 말도
있잖아요?"
"진천이 더 좋소?"
"그런 것은 아니고요."
조선이의 미소도 유쾌하지만은 않았다. 잔잔하게 미소를
그리는 조선이의 눈가에 그늘이 지는 것을 이창현은 문득문득
발견하곤 했다.
대처에서는 박해가 더욱 심해 지고 있다고 하였다. 간간이
교우들의 입을 통해 들리는 소문에 의하면 베르뇌 주교가
서소문에서 치명했다고도 하고 광주 돈토리에서도 신부들이
경군들에게 잡혀 갔다고도 했다. 워낙 깊은 산골이라 그런지
배론만은 아직 조용했다. 그러나 언제 박해의 바람이 배론까지
불어 닥칠지 알 수 없어 교우들은 불안해 하고 있었다.
"아무래도 더 깊은 산골로 들어가야 할 걸 그랬나 봐......."
남편 이창현은 그날 해가 떨어진 뒤에야 돌아와서 쓸쓸하게
말했다.
"여기서 배론서 30리 길은 되잖아요."
"아주 인적이 없는 곳에 들어가서 살까?"
"성사는 어떻게 하구요?"
"신부님들이 잡혀 가면 성사인들 볼 수 있겠어?"
"그래도 공소 옆에서 살아야지요."
조선이가 우울하게 대답했다. 월림도 깊은 산골이었다.
골짜기에 드문드문 움막 같은 집들이 있기는 했으나 대개
숯막이었고 사람은 재를 하나씩 넘어야 겨우 볼 수 있었다.
화전을 일구고 사는 사람들이거나 숯을 구워 파는 사람들이었다.
그런 사람들 외에는 하루 온종일 사람을 만나지 못해 적적하기는
한량없었다.
"신부님들은 아직 배론 공소에 계시나요?"
조선이는 화제를 바꾸었다.
"주막집 교우에게 들었는데 학당에 계시다는군. 신 신부님이
아프신 모양이야."
"내인은 공소로 성사를 받으러 갈까 봐요."
"외인들의 감시가 심해."
"그럼 다음에 가지요."
"그럽시다."
이창현의 입에서 낮게 한숨이 새어 나왔다. 조선이는 눈을
말똥말똥 뜨고 생각에 잠겼다. 아무래도 남편은 천주교에 입교한
것을 후회하고 있는 것 같았다.
"여보."
조선이는 남편 옆에 바짝 다가가서 누웠다. 뒷곁에서 바람이
부는소리가 들렸다. 바람 소리가 스산했다.
"응?"
"천주교에 입교한 것을 후회하세요?"
"아니."
남편의 대답은 기운이 없었다.
조선이는 입을 다물었다. 산골짝 어디에선가 부엉이 우는
소리가 들렸다. 뒤이어 잡목숲을 흔드는 음산한 바람소리가 다시
들려왔다.
"내일은 불을 놓고 발을 일궈야 하겠어요."
문득 조선이가 말했다.
"밭을?"
남편이 깜짝 놀라 소리를 질렀다.
"밭을 일궈야 감자라도 심어서 먹지요."
조선이의 말에 남편은 대꾸가 없었다. 부럭이골에서도 손발이
부르트도록 일군 밭을 버리고 도망쳐 온 처지에 다시 밭을
일구자고 하니 울컥 화가 치미는 모양이었다. 그러나 먹고
살아야 할 일을 궁리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아이들을 생각해서라도 밭을 일궈야 해요."
"어디에 밭을 일궈?"
"집 뒤에 넓은 땅이 있잖아요?"
"거기엔 돌이 많던데......."
"돌이야 골라내지요."
"......."
"천주님은 긍휼한 자를 돌보신댔어요."
"......."
"제가 얘기 하나 해드릴까요?"
"무슨 얘기?"
"아셀라 동정녀의 얘기요."
조선이는 남편의 신앙심을 격려하기 위하여 최양업 신부에게서
들은 '아셀라'라는 영세명을 갖고 있는 처녀의 얘기를 하기
시작했다. 최양업 신부는 5년 전 부럭이골에 들렸다가 점촌을
거쳐 문경 새재의 한 주막에서 점심식사를 한 것이 식중독이
되어 선종을 했는데 부럭이골에 전교를 하러 와서 신자들에게 그
얘기를 해주었던 것이다.
최양업 신부는 1849년 4월 15일 상해의 마레스까 남경 주교의
집전으로 서품된 두번째 신부였다. 최양업 신부는 그해 12월 3일
의주의 변문으로 조선에 들어온 뒤 조선 제4대 교구장인
장베르뇌 주교의 지시로 진천군 백곡면 삼박골에 기거하면서
배티에서 미사를 집전했다. 그리고 조선인 신부의 장점을 살려
경기, 충청, 경상, 강원도 일대를 두루 다니며 전교에 온 열성을
바쳤다.
최양업 신부가 전교를 하거나 미사를 집전할 때는 신자들이
떼를 지어 몰려왔다. 그 무렵은 가해박해가 끝난 지 얼마 되지
않은 때여서 조선에는 신부가 몇 사람 없었다.
최양업 신부는 신자들이 무리를 지어 몰려다니면 외교인들에게
알려질 것을 걱정하여 만류했으나 그들은 아무것도 두려워 하지
않았다. 최양업 신부가 공소(公所:천주교 신자들이 모여 기도를
하는 강당. 평소에는 신부가 주재하지 않았으나 신부가 와서
미사를 집전하게 되면 성당이 된다)나 교우촌에 도착하면
신자들은 남녀노소의 구별이 없이 깨끗한 옷을 입고 달려왔다.
최양업 신부가 조금이라도 늦게 도착하면 그들은 무슨 변이라도
당한 줄 알고 안절부절 했다.
최양업 신부가 미사를 드린 뒤에 떠날 준비를 하면 강당은
그들의 눈물과 통곡소리로 가득했다. 어떤 신자들은 최양업
신부를 떠나지 못하게 하려는 듯이 소매를 잡고, 최양업 신부의
옷자락에 그들의 애정의 흔적을 남기려는 듯이 눈물로 흠뻑
적셨다. 그리고 최양업 신부를 따라나서며 보이지 않을 때까지
손을 흔들었다. 어떤 때는 최양업 신부의 떠나는 모습을
오랫동안 지켜보기 위해 산등성이로 올라가기도 하고 20리, 30리
밖에까지 따라나오기도 하였다.
아셀라는 최양업 신부가 경상도 지방에서 전교활동을 할 때
만난 처녀였다.
아셀라는 과부의 딸이었다. 아셀라의 어머니는 일찍이 경기도
제물포에서 태어났으나 아버지가 어떤 일로 나라에 죄를 짓게
되어 경상도 남쪽 지방의 관노로 끌려왔다. 그것은 아셀라의
어머니가 8세 때였다.
아셀라의 어머니는 관노로 성장하여 그 지방의 목사의 소실이
되었다. 그러나 아셀라의 아버지가 아셀라를 낳은 지 닷새 만에
병으로 죽자 본부인에 의해 시골로 내쫓겼다.
아셀라의 어머니는 두 아들과 딸을 데리고 화전을 일구어 밭을
개간했다. 그녀는 매우 부지런한 까닭에 곧 부자가 되었다.
그리고 그 무렵 열심인 교우의 감화로 천주교에 입교하고 두
아들과 딸도 영세를 받게 하였다.
그 무렵 그 지방에 부임한 목사는 매우 탐욕스러운 사내였다.
그는 1전(田)에 엽전 7푼만 내게 되어 있는 세금을 농민들에게
14푼 씩이나 부과하고 차츰차츰 세금을 올려 25푼까지 내게
하였다. 농민들은 과중한 세금 때문에 탄식했으나 목사는 세금을
내지 않는 농민들을 잡아다가 옥에 가두고 곤장을 때려서
죽이는가 하면 그 부녀자를 잡아서 겁탈하기도 하였다.
목사의 학정은 날로 심해 져 마침내는 법적으로 세금을 물지
않는 과부들에게까지 세금을 물게 하였다. 이에 온 지방의
과부들이 들고 일어나 관청으로 달려가,
"훌륭한 목민관을 아들로 둔 여인이 누구인가? 도대체 그
여인의 옥문이 어떻게 생겼기에 그토록 훌륭한 아들을 낳았는지
옷을 벗겨 보자!"하고 아우성을 쳤다. 목사는 그때서야 당황하여
과부들에게 잘못했다고 빌고 다시는 그런 일이 없게 하겠다고
약속을 하여 과부들을 돌려보냈다. 그러나 그 약속이 거짓말임을
알게 된 과부들은 다음날 목사의 어머니가 지나가는 길목에서
기다리다가 가마를 나꿔채고 목사의 어머니를 가마에서 끌어내
옷을 벗기고 희롱을 했다.
목사는 창피해서 며칠 동안 방 안에 틀어박혀 있다가 과부들을
모조리 잡아다가 옥에 가두었다. 그리고 재산을 받치는 과부들만
골라서 풀어 주었다.
아셀라의 어머니는 그 소란에 참여하지 않았는데도 옥에
갇혔다가 재산을 모두 받치고서야 풀렸다.
그들은 다시 화전을 일구기 시작했다. 아셀라의 두 오빠와
어머니는 열심히 일을 하고 기도생활을 해나갔다. 아셀라도 어린
나이였으나 낮에는 일을 하고 밤에는 기도를 했다.
아셀라는 8세에 언문을 떼었다. 그녀는 열심히 공부하여
스스로 동정을 지키기를 원하였다. 그녀는 총명했고 새벽
이슬처럼 맑은 영혼을 소유하고 있었다. 아셀라는 틈만 나면
이웃마을의 소녀들을 찾아다니며 전교를 했다. 하루는 아셀라가
제 나이 또래의 소녀들에게 성교의 도리를 설명하는 것을 옆에서
듣고 있던 완고한 노인이 그녀에게 물었다.
"그 교가 무슨 교이냐?"
이에 아셀라는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
"이 교는 천주교라 하는데 우주만물을 창조하신 하느님을
섬기는 교입니다."
"어째서 천주님이라고 부르느냐?"
"천지만물을 창조하셨으니 하늘의 주인이시기 때문입니다."
"그 교는 무엇을 가르치느냐?"
"사랑을 가르칩니다. 부모를 사랑하고, 형제를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고 가르칩니다."
"그 교의 도리가 참으로 옳다."
노인은 아셀라의 얘기를 듣고 성교에 입교했다. 아셀라는 12세
때에 수난절이 되자 천주교에 대한 책과 약간의 식량만 가지고
산으로 올라갔다. 그리하여 예수가 수난을 당하기 전 광야에서
금식하며 기도를 했듯이 산속 토굴에서 금식을 하며 낮과 밤을
가리지 않고 40일 동안 기도를 했다. 아셀라의 어머니와 두
오빠가 산속을 헤매면서 아셀라를 찾았으나 아셀라를 끝내 찾지
못했다. 그들은 아셀라가 호랑이에게 물려 갔으려니 생각하고
슬피 울었다.
아셀라가 산 속으로 들어갔던 재의 수요일은 1월(음력)이었다.
아셀라는 추위와 배고픔을 참아야 했고 밤이면 산짐승들이
돌아다니는 소리에 무서워 떨었다. 그러나 아셀라는 기도로써 그
모든 것을 물리칠 수 있었다.
아셀라가 돌아온 것은 성 금요일 밤이었다. 옷은 헤어지고
얼굴은 더러웠으나 눈빛을 더할 수 없이 맑았다. 아셀라의
어머니와 두 오빠는 아셀라를 야단칠 수가 없었다.
최양업 신부는 그해 부활절에 예천의 건아기 공소에서
아셀라를 만났다. 아셀라로부터 고해를 받고 첫 성체를 영해
주었다. 아셀라는 기쁨에 넘쳐서 동정을 지키겠다는 자신의
계획을 최양업 신부에게 밝혔다.
최양업 신부는 조선에서 여인의 동정을 지키는 것의 어려움을
설명하고 혼배(혼례)를 권면했다. 여인들이 동정을 지키다가
외인들에게 겁탈을 당할 우려도 있었고, 조선의 실정으로는
부모에게도 불효가 되는 것이었다. 그러나 아셀라는 어린
소녀임에도 불구하고 동정을 지키겠다는 각오가 완고하여 최양업
신부는 마침내 이를 주교에게 보고했다. 주교도 아셀라를 불러
권고도 하고 권면을 했으나 아셀라가 뜻을 굽히지 않으므로
파문(破門)의 처벌을 내렸다.
파문의 처벌은 천주교 신자에게 가장 무서운 벌로 성사정지를
의미하는 것이다. 이에 아셀라는 어머니에게,
"사랑하는 어머니, 이제는 저를 자식이라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저는 예수를 잉태하신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딸이
되고자 합니다. 이 세상의 삶은 한낱 먼지와 같은 것이고
지나가는 나그네에 지나지 않습니다. 저는 이제 제 자신을 우리
주 천주께만 의탁합니다. 어디에 숨어 있는지, 무엇을 하는지
조금도 걱정하지 마십시오. 천주께서 어머니를 긍휼히 여기실
것입니다."라는 편지를 남기고 다시 산 속으로 들어갔다. 그러나
아셀라의 어머니와 오빠들은 온 산을 샅샅이 뒤지기 시작했고,
2개월 후에야 호랑이 굴 속에서 아셀라를 찾아냈다. 아셀라는 그
무서운 굴 속에서 조용히 책을 읽거나 기도를 하고 있었다.
아셀라는 어린 나이였지만 그 굴 속에서 말할 수 없는 신비와
위안을 느끼고 있었다.
그러나 그 위안은 어머니와 오빠들이 아셀라를 찾아냄으로써
깨어졌다. 아셀라는 울면서 애원했으나 소용이 없었다. 오빠들은
강제로 아셀라를 끌고 집으로 돌아왔다.
"네가 미쳐도 단단히 미쳤구나. 우리 잡안에 성사정지
처분까지 받게 하더니 이젠 미치기까지 한단 말이냐? 너는
마귀가 씌운 것이 틀림없어."
아셀라는 어머니에 의해 캄캄한 광 속에 갇혔다. 그러나 광
속에 갇혀서도 아셀라의 신앙에 대한 열정은 조금도 식지
않았다. 아셀라는 모든 것을 인내하면서 신심수업(信心修業)을
해나갔다.
그녀는 밭일도 열심히 했다. 아셀라의 어머니는 몸을 돌보면서
일을 하라고 아셀라에게 간곡히 부탁하기까지 했으나,
"천주께서도 엿새는 열심히 일하고 하루는 쉬셨어요. 또한
주일을 거룩히 지내라 하시지 않았나요? 노동은 신성한 것이니까
신심을 쌓고 덕을 쌓아야지요. 그러니 열심히 일을 해야
해요."하고 아셀라는 말했다.
아셀라의 어머니는 아셀라의 마음을 잡아 주려고 시집을
보내기로 했다. 그것은 아셀라가 열 여섯 살이 되던 해의
일이었다. 다행이 아셀라가 사는 이웃 마을에 근면한 청년이
살고 있어서 혼담이 오가게 되었고 마침내 택일까지 하게
되었다.
아셀라는 그 얘기를 듣고 다시 산 속으로 달아났다.
아셀라와 혼인을 하기로 한 청년은 외교인이었다. 그는
아셀라가 자기와 혼인을 하지 않으려는 것을 알고는 몹시 화를
냈다. 그는 아셀라의 집에 친척들을 데리고 와서 행패를 부렸다.
또 아셀라는 몇 번이나 납치하려고 시도했으나 번번히 실패했다.
이 외교인 청년은 어느 날 아셀라가 한 나무 밑에서 기도하는
것을 발견하고 욕심을 채우려고 하였다. 한밤중이었다. 아셀라는
울면서 저항했으나 옷을 모두 벗기우고 말았다.
"제 몸을 더럽히려고 하지 마세요. 제 몸은 이미 거룩한
천주께 바쳤습니다."
아셀라는 청년에게 잠깐만 시간을 달라고 사정을 한 뒤 그렇게
말했다. 그리고 단정하게 무릎을 끓고 조용히 기도하기
시작했다.
외교인은 아셀라가 기도하는 모습을 보고 욕심이 사라졌다.
그는 아셀라에게 사과하고 돌아갔다. 그러나 아셀라를 아내로
맞으려는 생각은 버리지 않아 집요하게 혼인을 요구해 왔다.
다행하게도-청년에게는 불행한 일이었으나-아셀라에게는
끈질기게 청혼을 하던 외교인 청년은 사흘걸이에 걸려 얼마 후에
세상을 떠나게 되었다. 그는 죽기 전에 아셀라를 불러 자기가
괴롭힌 것을 사과하고 대세(죽기 전에 받는 영세)를 받았다.
아셀라는 그의 영혼을 위해 진심으로 기도했다.
아셀라의 고난은 자신이 속해 있는 천주교로부터 오히려 더
극심하게 왔다. 최양업 신부는 아셀라에게 성체를 영하지
못하도록 지시했다. 천주교 교인에게 있어서 예수의 성체를
모시는 것은 가장 거룩한 의무였다. 박해시대에는 공식적인
성당이 없기도 했지만 신부들이 신자들을 찾아다니며 고해성사를
받고 성체를 모시게 하였다. 신부가 조선에 없을 때는 몇 년이고
성체를 모시지 못하는 일도 허다했다. 그러한 까닭에 신부가
어느 마을에 있다는 소문이 퍼지면 1백 리 떨어진 곳에서도
찾아와 미사를 드리고 성체를 모셨으니, 어쩌다가 신부가 떠난
뒤에도 도착한 신자들은 울면서 돌아갔다. 신자들이 1년에 한
번이라도 미사를 드리고 성체를 모실 수 있는 것은 그들에게는
커다란 축복이었다.
그러한 시기에 성사를 거절당한다는 것은 가장 혹독한
형벌이었다.
이러한 장애가 계속되는데도 불구하고 동정을 지키려는
아셀라의 계획은 조금도 흔들이지 않았다. 이따금 흐느껴 울면서
자신의 슬픈 처지를 생각했으나 곧 기도로써 평화를 찾았다.
밤이 되면 호젓한 개울이나 산을 찾아가서 밤을 새우며 조용히
기도했다. 그녀가 기도를 할 때는 개울의 물 흐르는 소리도 숨을
죽이고 바람조차 일지 않아 나무와 숲, 공기까지도 그녀의
아름다운 기도 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듯하였다.
아셀라는 그러는 동안 병을 얻게 되었다. 그녀는 고열에
신음하면서도 낮에는 밭일을 하고 밤에는 기도를 했다. 아셀라가
얼마나 자기의 육체를 가혹하게 부리는지, 어떻게 병든 몸으로
눕지도 않고 살아갈 수 있었는지 아무도 그것을 알지 못했다.
그러나 한가지 분명한 것은 그러한 단련 속에서 아셀라의 영혼이
점점 아름다워지고 있었다는 사실이었다.
이듬해 아셀라는 병이 회복되었다.
최양업 신부는 어느 날 아셀라 처녀가 사는 마을 근처에서
전교를 하게 되었다. 그때 아셀라는 신부가 이웃마을에 왔다는
소식을 듣고 성사받기를 청했다. 그러나 최양업 신부는
아셀라에게 성사를 줄 수가 없었다. 아셀라는 주교로부터 파문
처분을 받고 있었던 것이다. 그것은 죽을 병에 걸리지 않는 한
파문 처분을 내린 주교만이 풀 수 있게 되어 있었다.
아셀라는 슬퍼하면서 교우 처녀에게,
"나도 너처럼 아프면 얼마나 좋겠니? 그러면 병자성사를 받을
수 있을 텐데......."하고 울면서 말했다. 아셀라는 병이
들더라도 열렬하게 성사를 받고 싶었던 것이다.
새벽에 아셀라는 갑자기 발병을 했다. 그녀는 열이 40도까지
올라가 무서운 고열에 신음했다. 최양업 신부는 도리없이
아셀라의 고해를 들어야 했고 다음날은 성체를 영해 주었다.
극심한 고통 속에서도 아셀라는 주 예수 그리스도와 동정 성모
마리아의 이름만 계속해서 불렀다. 그녀는 혼수상태가 계속되고
온 몸에 열꽃이 피었다. 사람들이 그녀에게
종부성사(終傅聖事)를 받으라고 권했으나 그녀는 때가 아니라고
거절했다.
하루가 지난 저녁, 아셀라는 옆에 있는 사람들에게 최양업
신부를 불러달라고 청했다. 사람들은 아직 임종할 때가 아니니
이튿날까지 기다리라고 하였다. 그러나 아셀라는 간청했다.
"그렇군요. 이 밤중에 신부님을 오시라고 하는 것은 염치없는
짓이지요. 신부님인들 얼마나 고단하시겠어요. 그렇지만
신부님을 꼭 뵈어야 하겠으니 천주의 사랑을 위해서 모셔다
주세요."
아셀라는 울면서 애원을 했다.
최양업 신부는 신자들의 전갈을 받고 아셀라에게 달려가서
종부성사를 주고 아침에는 성모허원(聖母許願) 미사를 드렸다.
아셀라는 빈사 상태에 있었으나 세수를 시켜 달라고 한 뒤
깨끗한 옷으로 갈아입고 사람들의 부축을 받아 공소까지
들어와서 공손이 무릎을 끓고 노자성체(路資聖體)를 받아
모셨다. 사람들은 울면서 아셀라를 위해 기도했다.
아셀라는 하루종일 임종 상태에 있었으나 정신은 오히려
맑아져 갔다. 최양업 신부가 그 까닭은 묻자 아셀라는 죽음을 잘
준비할 수 있도록 천주께 기도하였더니 들어 주셨다고 말했다.
아셀라는 그리하여 죽어가면서도 기도를 계속할 수 있었다.
최양업 신부는 죽음이 목전에 있는데도 의연한 아셀라에게
감동하여 죽음이 괴롭지 않느냐고 물어 보았다. 그러자
아셀라는,
"지금 이 시간에 제가 풍부히 받은 여러 가지 은혜를 천주와
성모께 마땅한 감사를 드리지 못하는 것 외에는 아무 괴로움이
없습니다."하고 대답하였다. 최양업 신부는 다시 아셀라에게
물었다.
"병이 다 나으면 맨 먼저 무엇을 하겠소?"
"저는 이 병든 육체를 떨쳐 버리고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께로 가서 제가 드려야 할 감사를 드리고 싶을 뿐입니다."
아셀라는 겸손히 대답했다. 최양업 신부는 아셀라의 놀라운
신앙심에 감동하여 마지막 인사를 나누고 다음과 같은 부탁을
하게 되었다.
"아가씨가 세상을 떠난 뒤에 아가씨의 영혼의 안식을 위해
미사를 드려줄 터이니, 그 대신 아가씨도 천국에 가거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와 그 거룩하신 어머님 앞에 나를 기억해 주오."
아셀라는 말할 수 없이 평온한 얼굴로 '그렇게 하겠다'고
대답했다.
아셀라는 그날 저녁 숨을 거두었다. 1853년 9월23일의
일이었다. 아셀라의 나이는 그때 겨우 열 여덟 살이었다.
최양업 신부는 그 처녀의 모습을 또 한 번 보려고 그 집에
다시 갔다. 최양업 신부는 그 처녀의 얼굴에 퍼져 있던 천상의
아름다움을 결코 잊을 수가 없었다.
그것은 아셀라가 죽은 지 이틀이 지났을 때의 일이었다.
사람들의 눈에는 그때까지 눈물이 마르지 않고 있었다.
최양업 신부는 아셀라가 죽을 때 느끼는 것 같은 겸손과
천주에 대한 강한 사랑의 감동을 두번 다시 체험할 수가 없었다.
그는 가는 곳마다 아셀라의 얘기로 신자들을 격려하고 전교를
했다.......
조선이는 최양업 신부로부터 들은 아셀라의 얘기를 무엇
때문에 남편에게 했는지 알 수 없었다. 어쩌면 그것은 남편을
격려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박해에 대한 불안을 느끼고 있는 자기
자신에 대한 격려인지도 몰랐다.
남편은 조용했다.
조선이도 아셀라의 얘기를 끝내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이따금 바람소리 사이로 산짐승이 집 뒤에까지 내려와
돌아다니는 소리를 듣고는 하다가 잠이 들었다.
이튿날부터 조선이 내외는 화전을 일구기 시작했다. 불을 놓은
곳부터 돌을 거둬 내고 풀뿌리를 뽑았다. 조선이는 손바닥이
찢어지고 이창현은 손이 부르텄다.
2월 중순 경이 되자 날씨가 더욱 따뜻해 졌다.
조선이 내외는 감자 반 말을 구해다가 심었다. 남편도 우울한
마음이 풀려 가는지,
"올 여름엔 감자만 먹고 살겠군."하고 웃었다.
하루 일과를 끝내고 골짜기로 씻으러 갈 때는 조선이를 업어
주기도 하였다.
"아이고 숭해요."
"숭하긴 아무도 보는 사람이 없는데."
"정말?"
조선이는 행복에 겨워 그런 대꾸를 했다. 산이 깊어 좀처럼
사람이 올라오지 않는다. 여름이면 한낮에도 골짜기에서 멱을
감을 수 있을 것 같았다.
2
박달이 한양의 우포도청에 들어가 법국 신부를 잡겠노라고
하고 포졸들과 함께 제천 땅 배론을 향해 길을 떠난 것은 음력
2월 초순의 일이었다. 한양에서는 불이 나고 고종의 국혼이
선포되어 어수선했다. 그래도 박달의 얘기를 들은 우포도대장은
포교 한 사람과 포졸 10명을 붙여 주어 배론으로 떠나게 하였다.
날씨는 2월인데도 살을 에일 듯이 추웠다. 한동안 날씨가
따뜻하여 봄이 오는가 싶었으나 눈발이 날리고 매서운 추위가
닥쳤다. 박달은 퇴락한 초가마을이 저녁 남빛 속에 잠겨 있는
것을 보고 마음이 울적했다. 어느 마을이건 가난의 때가
덕지덕지 묻어 피폐한 농천 실정을 엿볼 수 있었다.
박달은 부르튼 발로 걸음을 느릿느릿 떼어 놓았다. 한양을
떠난 지 나흘째였다. 간간이 소달구지도 얻어 탔으나 한양에서
제천까지 내쳐 걷는데는 다리가 성하지 못했다. 종아리에 알이
배이고 발뒤꿈치에 물집까지 생겼다.
(제길 서학군 잡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군......)
박달은 포졸들과 함께 히히덕거리며 걸음을 재게 놀리는
옥년의 실룩대는 궁둥이를 흘려보며 눈살을 찌푸렸다. 다행히
날이 저물고 있었다. 골짜기 저쪽으로 남빛 어둠이 엷게 깔리고
집집마다 저녁 짓는 연기가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것을 보면 밤이
되는 것은 금방일 것 같았다. 그러나 밤이 되어도 제천읍까지는
걸어야 했다. 읍까지는 아직도 30리길이 훨씬 더 남아 있었다.
그러나 제천이 가까워졌다고 생각하자 박달은 부르튼 발이지만
새로운 기운이 솟는 듯했다.
"어서 좀 와요. 웬 걸음이 그렇게 느려요?"
옥년이 포졸들에게 뒤쳐지며 박달을 재촉했다. 얼굴엔
천연덕스러운 미소까지 감돌고 있었다. 한성 우포도청 포졸들과
행동을 같이 하면서 논다니 짓을 한 과거지사를 숨기기로 한
탓에 옥년은 박달에게 이놈아 저놈아 하는 대신 억지 미소를
짓고 있는 것이다.
"내가 몸이 약해 진 모양이야."
박달은 멋적게 웃음을 흘렸다.
"원, 별소리를 다 하네."
옥년이 눈을 살짝 흘겼다.
"오늘은 제천읍에 유숙할 작정인가?"
"내친 김에 배론까지 간다는 걸."
"배론까지?"
"제천에서 배론까지 30리 길이 더 될 거야."
"......"
"다리가 많이 아퍼?"
옥년이 걱정을 해주는 체 살갑게 물었다.
"임자두 다리가 아플 텐데."
"나는 괜찮아. 조금 피로하긴 하지만......."
옥년이 박달의 팔을 부축했다.
"오늘 걸은 것만 해도 1백 리가 넘을 거야. 포졸들이라 그런지
걸음이 여간 빠르지 않은 걸......."
박달이 고갯마루에서 박달과 옥년을 기다리고 있는 포졸들을
쳐다보며 힘없이 중얼거렸다.
"그러니 경군이지 괜히 경군인지 알아?"
박달은 고개를 끄덕거렸다. 법국 신부를 잡아서 포교가 된다고
해도 제대로 서학군이나 도둑을 잡으러 다닐 수 있을지 걱정이
되었다.
포교는 장두식이라는 사람으로 기골이 장대하고 눈이 매섭게
생긴 사내였다. 벌써 서학군을 다섯이나 잡아 새남터에서 목을
베게 했다고 했다. 이번에 박달이와 옥년이로 하여금 서학군을
한 두름만 잡게 되면 변장으로 승차할지도 모른다고 좋아하고
있었다. 그런 까닭으로 박달이와 옥년이에게 대접이 극진했다.
"걸음이 느리시구만."
장 포교는 포졸들과 함께 고갯마루의 마루나무 밑에서 박달과
옥년을 기다리다가 입가에 씨익 웃음을 날렸다. 포졸들은 모두
변복을 하고 있어서 흡사 장돌뱅이가 무리를 지어 다니는 것
같았다. 포졸들도 옹기종기 둘러서서 박달과 옥년을 기다리고
있었다.
"예, 모처럼 먼 질을 걸었더니 발에 물집이 생긴 것
같아서요."
"어느 발이오?"
"왼쪽입니다."
"어디 내가 봅시다."
박달은 주저하다가 미루나무 밑에서 등을 기대고 앉아 짚신을
벗고 버선을 벗었다. 발뒤꿈치 쪽에 살구씨만한 물집이 생겨
있었다.
"고개를 외로 꼬시오."
박달은 장 포교가 시키는 대로 외로 고개를 틀었다. 그 사이에
장 포교가 박달의 발을 쳐들더니 손톱으로 물집을 터뜨렸다.
박달이 따끔한 통증 때문에 얼굴을 찡그리자 장 포교는 엄지
손가락으로 눌러 재빨리 물기를 빼 버렸다.
"어떻소?"
"조금 난 듯합니다."
"조금 쓰리겠지만 곧 괜찮아 질 거요. 앉은 김에 잠시 쉬었다
갑시다."
장 포교가 박달의 옆에 앉았다. 옥년도 박달 옆에 털썩 주저
앉고 포졸들도 여기저기 앉아서 곰방대를 피워 물었다. 박달도
장죽에 불을 붙여 담배연기를 뻑뻑 빨아댔다.
날은 조용히 저물고 있었다. 시끄럽게 지저귀던 새들도 깃을
접고 바람도 일지 않았다. 앙상한 미루나무 가지들은 남빛
하늘에 고요히 머리를 헹구고 있었다.
"참 조용하구만."
장 포교가 저 아래 마을을 굽어보며 말했다. 마을 어디에선가
송아지를 찾는 어미소의 울음소리가 음매 하고 들려왔다.
"오늘 배론까지 가실 건가요?"
옥년이 제 다리를 가만가만 주물러대다가 장 포교에게 물었다.
"우리는 그랬으면 좋겠는데 바깥 양반이 더 걷겠소?"
장 포교가 턱짓으로 박달을 가르켰다.
"우리 바깥 양반뿐만 아니라 나도 더 걷지 못하겠어요."
"그럼 제천읍에서 쉴까?"
"그랬으면 오죽 좋겠어요?"
"서학군을 잡는 일이야 한시가 급한 일이지만 우선 사람이
살아야지....... 오늘 걸음도 적은 걸음이 아니었으니......."
장 포교가 엉덩이를 털고 일어나 포졸들에게로 걸어갔다.
포졸들에게도 제천읍에서 쉰다는 것을 알리는 모양이었다.
"잘되었지요?"
옥년이 비로소 눈웃음을 치며 박달에게 물었다.
"잘되고 말고지. 임자도 다리가 엥간히 아플 거야."
"종아리에 알이 다 배었어요."
옥년이 다리를 길게 뻗었다.
"어디?"
박달이 옥년의 종아리를 손으로 만졌다.
"아이고, 저이들이 보는데......."
옥년이 재빨리 박달의 손을 뿌리쳤다.
"보면 어때서?"
"숭해요."
"숭할 것도 쌨네. 서방이 제 아낙 다리 주물러 주는 게 무슨
숭이야?"
"평소에도 좀 그렇게 제 계집 아끼지."
옥년이 밉지 않게 눈을 흘겼다. 박달이 서학군을 잡으로
나서고서부터 싹싹해 진 것이 여간 미덥지 않았다.
"앞으로 임자를 끔찍히 여길 테여."
"흥."
"다리 내, 주물러 줄 테니까."
"그만둬요. 임자도 피곤한데 이따가 밤에나 주물러 주시구려."
옥년은 얼굴이 붉어지는 것을 느끼며 고개를 떨구었다.
그들이 제천읍에 당도한 것은 사방이 캄캄하게 어두웠을
때였다. 그들은 사람들의 왕래가 적은 주막집에 들어가 주모에게
밥을 지으라 이르고 술을 가져 오게 했다. 먼 길을 걸어
포졸들도 지쳐 있는 듯했다.
이내 술이 먼저 나왔다. 포졸들은 술을 권커니 자커니 하고
마시더니 주막집 주모가 지은 밥을 먹고 봉놋방에 쓰러져 잠이
들었다. 박달과 옥년도 그들과 함께 누워 잠을 청했다. 옥년이
마른 흙 냄새가 풍기는 벽을 향해 눕고 박달이 그 옆에 누웠다.
옥년은 좀처럼 잠이 오지 않았다. 종아리에 알이 배어 땡기고
아팠으나 정신은 오히려 말똥말똥했다. 남자들은 코까지 골면서
자고 있었다. 박달도 다리를 주물러 준다더니 드르렁 드르렁
코를 골면서 세상 모르고 자고 있었다. 저도 고단한 모양이었다.
(이런 위인을 내가 서방이라고 믿고 살고 있으니......)
옥년은 혀를 차면서 박달을 향해 돌아누웠다.
(그래도 서방은 있어야 해......)
옥년은 어둠 속에서 그렇게 생각했다. 병든 사내든, 사내
구실을 못하는 사내든 서방이 있어야 든든했다. 박달도 옥년에게
이년아 저년아 하고 말 뽄새를 사납게 하기는 해도 속마음은
그렇지가 않았다.
옥년은 박달의 겨드랑이 밑으로 바짝 파고 들었다. 박달이
믿음직했다. 박달의 가슴 위에 손을 올려 놓고 이런저런 공상에
잠겼다. 박달이 포교 관복을 입은 모습을 떠올려 보기도 했다.
포교의 지위는 얼마나 높은 것일까. 자세히는 몰라도 집은
행랑채가 딸린 기와집일 것이고 하인도 여럿 거느리고 있을 것
같았다. 옥년은 그런 생각을 하자 온몸이 구름을 탄 듯
즐거웠다. 그때 박달이 손을 뻗어 옥년의 치마 속으로 밀어
넣었다.
(아!)
옥년은 눈앞이 환해 지는 기분이었다. 박달의 손이 허벅지를
어루만지고 둔부를 쓰다듬었다. 옥년은 박달의 손에 제 몸을
내맡겼다. 방 안에 여러 사람이 자고 있어서 불안했으나 박달의
손을 뿌리치고 싶지 않았다.
밖에서는 차가운 바람이 불고 있었다. 옥년은 박달의 가슴
속으로 더욱 바짝 파고 들었다.
박달의 바지 앞이 불끈 솟아 옥년의 아랫배를 찌르고 있었다.
옥년은 박달의 괴춤으로 손을 밀어 넣었다.
또 찬바람이 불고 문풍지가 울었다. 옥년은 을씨년스러운
바람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봉양에 있을 때도 문풍지가 우는
소리에 잠을 이루지 못했었다. 옥년은 원래 경기도 안성이
고향이었다. 아버지는 얼굴도 본 일이 없고 어머니는
남사당(男寺黨)패를 쫓아다니며 허드렛일을 했었다. 어머니는
줄을 타지도 못했고 춤이나 소리를 할 줄도 몰랐다. 그래도
어찌어찌 사당패를 따라다니며 끼니를 연명했다. 그러나 그마저
여의치 않게 되자 걸개짓을 하고 다녔다.
어머니는 숙맥이었다. 사람들은 어머니를 천치라고 불렀다.
콩인지 보리인지 도무지 구별을 하지 못했다.
한동안 걸인들이 어머니를 데리고 다녔다. 걸인들은 사내들만
대여섯 되었는데 비렁뱅이 짓을 해서 어머니를 먹였다. 밤이면
그 걸인들이 어머니의 치맛자락을 함부로 걷어올렸다.
그런 어머니에게도 소원은 있었다. 그것은 등걸잠을 자지
않아도 되는 움막 한 칸과 한 사내만을 섬기며 살고 싶은
것이었다.
그러나 옥년의 어머니는 옥년이 외에 누구의 씨인지도 모르는
아이를 셋이나 낳았다. 그러나 그들은 모두 한 돌을 넘기지
못하고 죽었다. 첫째 아이는 옥년이 아홉 살일 때인데 낳은 지
이틀 만에 죽었고, 둘째 아이는 옥년이 열 한 살이 되던 해에
낳았으나 이레 만에 죽었다. 둘 다 사내 아이였다.
셋째는 계집 아이인데 여덟 달 동안이나 살아 있었다. 옥년이
열 일곱 살이 되었을 때인데 그때 옥년이도 뱃속에 아이를 갖고
있었다. 옥년은 셋째 동생을 업어서 키웠으나 소용이 없었다. 그
아이도 비실비실 말라서 죽었다. 사람들은 아이들이 굶어
죽었다고 했다.
어머니도 죽을 뻔한 일이 여러 번 있었다. 그러나 어머니는
용케 살아나고 또 살아나고 하였다.
옥년은 죽은 아이를 낳았다. 그리고는 두번 다시 아이를 갖지
못했다.
옥년이 모녀가 박달의 움막을 찾아 들어갔을 때는 어머니는
부스럼병을 앓고 있었다. 온몸의 살이 곪아 터져 진물이 흘렀다.
박달은 그런 옥년의 모녀를 내쫓지 않고 겨울을 나게
해주었다.
옥년은 그런 박달이 고마웠다. 박달이와 함께 살림을 하는
것도 싫지 않았다. 육신이 멀쩡해도 집 한 칸 없이 유리걸식하는
삶에 지쳐 있었다.
유리걸식을 하는 사람들은 가을이 와서 찬바람이 불기
시작하는 것이 가장 무서웠다. 찬바람이 불면 길바닥에 뒹구는
나뭇잎처럼 사람들이 굶어 죽고 얼어 죽었다.
그것은 해동을 해도 마찬가지였다. 춘궁기가 닥치기 때문에
허기진 배를 채울 수 없어 질병으로 죽는 사람들이 허다했다.
옥년도 몇 번이나 죽을 고비를 넘겼다. 어머니가 그랬듯이
한끼의 때거리를 위해 아무 때나 치마끈을 풀었다. 그것만이
옥년이 갖고 있는 유일한 생계수단이었다.
남자들의 코 고는 소리가 점점 커졌다. 방바닥은 따뜻했으나
발냄새가 코를 찔렀다. 옥년은 좀처럼 잠이 오지 않았다. 박달의
품속으로 파고 들며 억지로 잠을 청했으나 점점 정신이
말똥말똥해 지고 있었다.
옥년은 새벽녘이 되어서야 겨우 잠이 들었다
옥년이 잠이 깬 것은 날이 훤히 밝았을 때였다. 갑자기 왁자한
소리에 놀라서 눈을 뜨자 방 안이 덩그러니 비어 있고 간밤에
포졸들과 박달이 덮고 자던 이부자리만 모양새 사납게 나뒹굴고
있었다. 옥년은 눈을 부비고 술청을 지나 주막 앞으로 나갔다.
사람들이 주막 앞에 잔뜩 몰려와 웅성대고 있는데 우거(牛車)에
양인 두 사람이 붉은 용수를 쓰고 포승줄에 묶인 채 앉아
있었다. 그러나 구경꾼들이 몰려들자 구경을 하라고 웃으며
스스로 용수를 벗었다. 법국 신부들이었다. 낯선 포졸들은
그들을 한성으로 압송하기 위함인지 창검을 들고 사나운 기세로
주막 앞에서 쉬고 있었다.
(저들이 법국 신부인 모양인데 우리가 한 발 늦은 것이
아닐까......)
옥년은 두 다리에 맥이 풀리는 기분이었다. 그 포졸들은
변복을 하고 있지 않아 옥년과 함께 온 변복한 포졸들과 뚜렷이
구별되었다. 사람들은 우거를 둘러싸고 손가락질도 하고 침을
뱉기도 하면서 웅성거리고 있었다.
"저들이 양이 오랑캐라지?"
"천주학을 하는 사교의 우두머리라는군. 남녀가 한 방에서
기거한대요."
"아이고 망측해라."
"그 동안 봉양 땅 배론에 숨어 있었대요."
"포졸들은 경군인가?"
"의금부에서 전 승지 남종삼을 잡으로 나온 나졸들이라오.
그런데 남종삼이 도망을 치는 바람에 양이 오랑캐를 대신
잡았다는구려."
장 포교와 포졸들은 의금부 나졸들 주위를 기웃거리기도 하고,
우거에 가까이 가서 법국 신부들을 살피며 소태 씹은 표정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의금부의 나졸들에게는 말을 건네지
않았다. 옥년은 법국 신부를 제 손으로 잡지 못한 것이 몹시
아쉬웠다. 그러나 달리 어찌할 재간이 없어 우거에 가까이 가서
신부들을 살폈다. 용수를 벗은 신부들은 구경 나온 사람들을
향해 환하게 웃고 있었다.
"배론에 법국 신부가 또 있소?"
옥년은 신부 하나에게 넌지시 물었다.
"그대는 누구인가?"
신부가 눈을 빛내며 옥년을 쳐다보았다.
"내가 누구인지 알아서 무엇하오?"
"그러면 어찌하여 법국 신부가 배론에 또 있냐고 묻소?"
법국 신부는 얼굴이 하얗고 눈빛이 파랬다.
"나라에서 금하는 법국 신부들을 잡아 상을 받으려고 하오."
"불쌍한 영혼이로고......."
신부가 빙긋이 웃었다.
"나보다도 그대가 더 불쌍하지 않소? 그대는 한성으로
압송되면 회자수의 칼 아래 목숨이 떨어질 터인데 어찌 살아
있다고 할 수 있겠소?"
"우리는 죽은 뒤에 다시 살아날 것이오. 치명의 화관을 입어
그리스도께 가게 되면 그대를 위해 기도하리다."
"그리스도가 누구요?"
"참 천주요."
"참 천주?"
옥년은 눈살을 찌푸렸다.
그때 앞이 소란하더니 의금부 나졸의 수령인 듯한 자가 말
위에 올라타 호령을 했다. 우거가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말을 탄 자는 융복패영(戎服貝纓)을 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지체가 높아 보였다.
"법국 신부를 의금부에서 잡아갔으니 우리는 잔당이나 잡을
수밖에 없겠어. 우리가 조금만 빨리 왔어도 법국 신부를 잡는
건데......."
장 포교가 억울한 듯 침을 퉤 뱉았다.
그들이 주막에서 국밥으로 아침을 먹고 봉양 삼거리 주막에
도착한 것은 얼추 한낮이 지났을 때였다. 그러나 그들이 주막에
도착했을 때는 주막이 덩그라니 비어 있었다.
"이것들이 도망을 쳤군."
"아니 그럼 우리가 헛걸음을 했다는 게요?"
포졸들은 눈빛을 이글거리며 웅성거렸다. 주막은 이미
살림도구까지 깨끗하게 없어져 주인이 달아난 것이 분명했다.
"이젠 어떻게 할 참이오?"
"이 집말고는 서학군 집이 또 없소?"
포졸들은 옥년을 다그쳤다.
옥년은 당황했다. 봉황 삼거리 주막집 주인이
달아났으리라고는 생각조차 못했다.
"저는 이제 모릅니다."
옥년은 쭈삣쭈삣 대꾸했다. 옥년이 주막집에서 일을 한 것은
불과 한 달 정도에 지나지 않았다.
"이런 고약한 년이 있나?"
장 포교가 옥년의 어깨를 잡아 패대기를 쳤다. 옥년은 마당에
엉덩방아를 찧고 나뒹굴었다.
"이년아, 잘 생각해 보아!"
장 포교가 봇짐 속에서 육모 방망이를 꺼냈다.
"정말 쇤네는 모릅니다."
"네 놈은 아느냐?"
장 포교가 박달을 향해 육모 방망이를 겨누었다.
"모, 모릅니다, 나으리."
박달이 얼굴이 창백하게 질린 채 굽신거렸다.
"허면 경군을 어째서 여기까지 끌고 왔느냐? 경군에게
다리품이나 팔라고 끌고 왔다는 말이냐?"
"소인은 자세히 모르옵고 제 아낙이 여기 오면 서학군을 잡을
수 있다 하기에......."
"에라 이 등신 같은 놈아!"
장 포교가 육모 방망이로 박달의 등짝을 후려쳤다. 박달이
어이구구 하고 비명을 지르며 마당에 나뒹굴었다.
"듣거라!"
"예."
"네 연놈들이 무엇으로 생계를 삼았는지 이실직고 하여라."
"소인은 나뭇짐을 장에 내다 파는 것으로 생업을 삼았사옵고
아낙은 논다니 짓을 하여 생계를 연명했습니다."
"내 그럴 줄 알았다. 천하에 못된 것들이 경군을 우롱했구나!"
"송구하옵니다."
박달은 몸을 떨며 연신 머리를 조아렸다. 여차하면 장 포교의
육모 방망이에 뼈도 못 추릴 것이라는 생각을 하자 다리가
후들후들 떨렸다.
"네 이년!"
이번엔 장 포교가 육모 방망이를 옥년에게 겨누었다.
"말씀하십시오."
이번엔 옥년이 몸을 부를 떨며 대답했다.
"네 정령 논다니 짓을 했느냐?"
"그러하옵니다."
옥년은 서슴없이 대답했다.
"몇 년이나 했느냐?"
"10년은 족히 했을 것이옵니다."
"허, 맹랑한 계집이로구나. 어째 방뎅이 흔드는 푼수가 다르다
했더니......."
"......."
"네 아비의 이름이 무엇이냐?"
"아비가 누구인지 모르옵니다."
"저런 불학무식한 년을 보았나. 아비의 이름 석 자도 모른단
말이냐?"
"모르옵니다. 걸인으로 떠돌던 어미의 몸에서 태어난 천한
계집이라 짐승이나 다를 바 없사옵니다."
"쯧쯧......."
장 포교가 혀를 찼다.
"그럼 이 마을에 서학군이 또 있는지 없는지 모르겠느냐?"
"쇤네는 기억이 나지를 않습니다."
"이런 고연 년이 있나......."
장 포교가 낭패라는 듯이 또 혀를 찼다. 그때 포졸 한 사람이
장 포교의 귓전에 무엇인가 속닥이질을 했다. 장 포교가 고개를
끄덕거렸다.
"이왕 이렇게 된 거 할 수 없지....... 네 년은 양식을 찾아서
밥을 짓고 너희들은 마을을 수색해서 서학군을 잡되 소란을
피우지 말고 조용히 하여라."
"예."
포졸들이 허리를 굽신하고 밖으로 몰려 나갔다. 옥년은 재빨리
일어나 주막을 뒤져 양식을 찾고 박달은 아궁이에 불을 지폈다.
다행히 집 뒤 장독간에 쌀 항아리가 하나 있었다. 주막집 주인이
미처 가지고 도망갈 수 없었는지 술청의 항아리엔 술까지 남아
있었다.
포졸들은 밤이 되어서야 돌아왔다. 그러나 서학군은 잡지
못했는지 빈손으로 돌아와 전대 하나를 장 포교에게 바쳤다.
그들은 밥과 술을 먹은 뒤 이번엔 박달까지 데리고 나갔다.
주막엔 장 포교와 옥년만 남게 되었다. 장 포교는 옥년에게
술을 따르라고 한 뒤 곰방대에 불을 붙여 연기를 뻑뻑 빨아댔다.
그러더니 그 얼굴로 어떻게 논다니 짓을 했느냐, 논다니 짓을
해서 돈푼이라도 모았느냐고 시덥잖은 소리를 하다가 옥년을
안아서 제 무릎에 앉혔다. 옥년은 저항하지 않았다. 한 번의
때거리, 한 번의 잠자리를 위해 치마를 벗어 던진 일도 한두
번이 아니었다. 하물며 포교의 객고를 풀어주기 위해 옷을 벗는
것이 무어 어려운 일이겠는가. 그러나 한가지 다짐해 두어야 할
일이 있었다.
"나으리."
옥년은 허겁지겁 제 치마 속으로 손을 집어 넣는 장 포교의
손을 꽉 움켜쥐었다.
"왜 그러느냐?"
장 포교가 옥년을 방바닥에 쓰러트렸다.
"우리도 나으리 일행에 끼워 주십시오."
"일행?"
"예. 우리 서방에게 포졸 한 자리 주십시오."
"박달에게 말이냐?"
"예."
"그런 불학무식한 자에게 어떻게 포졸 자리를 주겠느냐?"
"나으리."
"이 손 놓지 못하겠느냐?"
옥년의 치맛자락은 이미 허리 위로 걷어 올려져 가고 속곳이
밑으로 흘러 내려갔다. 옥년은 재빨리 제 속곳을 끌어올렸다.
그러자 장 포교의 우악스러운 손이 옥년의 손을 힘껏 뿌리쳤다.
옥년의 속곳이 다시 밑으로 끌러 내려졌다.
"나으리."
"어허!"
장 포교가 몸이 달아서 안절부절 했다.
"나으리, 저희 사정 한 번 보아 주십시오."
"좋다. 대신 서학군 잡는데 간자 노릇을 톡톡히 해야 한다,
알겠느냐?"
"이르다 뿐이옵니까?"
옥년은 비로소 헤실대고 웃었다.
"고약한 년이로다."
장 포교가 제 옷을 벗고 후다닥 옥년에게 달려들었다. 옥년은
두 다리를 벌리고 장 포교를 제 몸 속 깊숙이 받아들였다.
포졸들은 밤이 이슥해서야 돌아왔다.
옥년은 박달이 옆에 누워 자신이 서학군 간자(間者) 노릇을
하게 되었고, 박달이 포졸이 되게 되었다는 전후 사정을
가만가만 속삭여 주었다. 장 포교가 몸이 달아 안절부절
하더라는 대목에서는 박달도 킥킥대고 웃고 옥년도 새삼스럽게
그때 모습을 생각하며 웃었다.
"임자가 애를 많이 썼네."
"내가 애쓴 게 뭐 있어?"
"포졸 자리 따는 게 어디 수월한 일이라야지......."
"그렇다구 애쓴 것두 없어."
옥년은 공연히 얼굴이 붉어지며 부끄러워졌다.
이튿날도 포졸들은 아침부터 서학군을 잡으러 나갔다. 장
포교만이 주막에 남아서 전대를 챙겼다. 전대엔 차츰차츰 돈이며
패물이 그득해 져 갔다. 옥년이 비로소 그들이 서학군을
잡는다는 핑계로 도적질을 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사흘째 되는 날 포졸들은 과부 하나를 포박지어 끌고 왔다.
과부의 집에서 서학군의 것이 틀림없는 십자가와 책이 나왔다는
것이었다. 장 포교는 먼저 과부를 마당에 엎드리게 하고 육모
방망이로 엉덩짝을 두들겨 혼쭐을 내놓았다.
"우리는 한성 우포도청에서 서학군을 잡으러 내려온 경군이다.
사실대로 토설하지 않으면 물고를 낼 터이니 그리 알아라!
알겠느냐?"
장 포교의 말에는 이미 서릿발 같은 냉기가 묻어 있었다.
"예, 예......."
과부는 혼쭐이 나서 연신 머리를 조아렸다.
"네 년이 천주학을 하고 있으렸다?"
"아, 아닙니다. 쇤네 같은 무지랭이가 어떻게 천주학을
하겠사옵니까?"
"이년아, 바로 말해라!"
장 포교가 눈짓을 하자 포졸 하나가 육모 방망이로 과부의
엉덩짝을 힘껏 내려치기 시작했다. 과부가 아이구구 소리를
지르며 제 엉덩이로 손을 가져갔다. 엉덩이가 벌써 살이 터져
피가 흐르고 있었다. 옥년은 눈쌀을 찌푸렸다. 과부의
비명소리에 가슴이 섬칫했다.
"네 년이 천주학을 아니 한단 말이냐?"
"나으리, 살려 주십시오."
과부의 눈에서 눈물이 주르르 쏟아졌다.
"그럼 천주학을 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란 말이냐?"
"그러하옵니다."
"네 식구가 몇이냐?"
"쇤네는 식구가 없고 혼자 몸이옵니다."
"이 마을에 천주학을 하는 집이 몇 호나 되느냐?"
그 물음엔 과부가 선뜻 대답을 하지 못했다. 그러자 포졸들이
과부를 엎드려 놓고 또다시 엉덩짝에 육모 방망이질을 했다.
과부의 엉덩이에서 퍽퍽 하는 소리가 들릴 때마다 옥년은 몸을
움찔움찔했다. 마치 자기 자신이 포졸들에게 육모 방망이로
엉덩짝을 얻어맞는 것처럼 불안했다.
"마, 말하겠습니다. 말할께요."
과부가 마침내 입을 열기 시작했다.
포졸들은 바짝 긴장하여 과부의 입에서 토설되는 서학군들의
이름을 적기 시작했다.
3
그 시간 조선이는 아이들과 함께 저녁 신공을 드리고 있었다.
옥희는 말이 느려서 기도를 잘 따라하지 못했으나 옥순이는
또랑또랑한 목소리로 기도를 따라했다. 조선이가 저녁 신공을
끝낸 것은 얼추 한 시간이 지났을 때였다. 그녀는 아이들을
재우고 혼자서 성교책을 읽기 시작했다.
날씨가 차가웠다. 금방 봄이 올 듯 따뜻하던 날씨가 변덕을
부렸다. 뒷산 골짜기에는 며칠 전에 내린 눈이 아직도 그대로
남아 있었고 나뭇가지들은 찬바람에 몸을 떨고 있었다. 조선이는
성교책을 한 시간쯤 읽은 뒤 잠자리에 들었다. 집 뒤의 밭을
개간하느라고 몸이 고단했다. 그러나 쉽사리 잠이 오지 않았다.
조선이는 엎치락뒤차락하다가 얼핏 잠이 들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갑자기 삽짝 밖이 소란해 지면서 남자들의 왁자한
말소리가 들렸다.
조선이는 벌떡 일어나 옷을 주워 입고 불을 켜려고 했다.
그러나 방문이 먼저 벌컥 열렸다.
조선이가 놀랄 사이도 없이 장정들이 우르르 들이닥치더니 그
중 하나가 조선이의 가슴팍을 발길로 내질렀다. 조선이는
엉덩방아를 찧고 방바닥으로 나뒹굴었다.
창졸지간의 일이었다. 조선이는 아이들이 자지러지게 울어대는
소리에 놀라 허겁지겁 몸을 일으켰다. 그때 장정들의 발이
이번엔 조선이의 복부를 걷어찼다. 조선이는 창자가 끊어지는
것처럼 고통스러웠다.
(천주님!)
조선이는 자신도 모르게 눈물을 주르르 쏟으며 방바닥에
뒹굴었다. 사방은 캄캄했다. 밤이 얼마나 되었는지 알 수
없었다. 방바닥을 엉금엉금 기는데 육모 방망이가 엉덩이를
사정없이 내리쳤다. 조선이는 또다시 방바닥을 데굴데굴 굴렀다.
"묶어라!"
장정의 굵직한 목소리가 들렸다. 장정들이 그녀의 팔을
뒤로해서 오라를 지었다. 장정들은 어느새 횃불을 밝히고 방
안을 뒤지고 있었다.
"어머니!"
"어머니!"
아이들이 울면서 달려와 조선이에게 매달렸다. 장정들이
아이들을 방바닥으로 내팽개쳤다. 아비규환이었다.
"네 이년!"
장정 하나가 조선이에게 불호령을 했다. 조선이는 비로소
고개를 들고 장정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뉘시오? 야심한 시각에 민가에 들어와 이 어인 행패요?"
조선이는 눈물을 흘리며 장정을 쏘아보았다.
"우리는 한성에서 서학군을 잡으로 내려온 경군이다."
"호패가 있소?"
"이년아, 우포도청 포교도 호패를 가지고 다닌다더냐?"
"그러면 경포구려. 경포께서 이 누추한 촌부의 집에는 어쩐
일이시오?"
"네 년이 서학을 한다기에 잡으러 왔다."
조선이는 입술을 깨물었다. 아이들이 울부짖고 있었다.
배론에서 신부 두 사람이 잡혀 갔다는 풍문은 월림에서도
들었었다. 그러나 신부를 기거하게 하고 신학당까지 열게 해준
장낙소(張樂韶) 회장이 풀려났다고 하는 바람에 조정에서
서학군을 잡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서양인 신부만 잡아들이는
모양이라고 생각했었다. 게다가 한양에서 내려온 의금부
나졸들이 신부들을 우거에 태워 압송해 갔다는 얘기까지 듣고
피난할 생각도 하지 않고 아침 저녁으로 신부들을 위하여
기도하고 있던 참이었다.
"네 서방은 어디에 갔느냐?"
경포가 서릿발 같은 기세로 조선이를 쏘아보았다.
조선이는 대꾸하지 않았다.
"네 서방이 어디에 있느냐고 묻지 않았느냐?"
그때 카랑카랑한 목소리와 함께 방망이 하나가 조선이의
어깨를 후려쳤다. 조선이는 어깨가 부서져 나가는 통증도 잊고
소리가 나는 쪽을 쳐다보았다. 여자 하나가 앙칼진 눈으로
조선이를 쏘아보았다. 경포와 포졸들도 깜짝 놀란 듯한
표정이었다.
"댁은 누구요?"
"내가 누구인지 알아서 뭣할려구?"
여자가 방망이로 다시 후려치려는 것을 경포가 재빨리 막았다.
"얘, 그만두어라. 네가 나설 일이 아니다."
"이런 년은 주리를 틀러야 합니다."
"옥년아 그만두래두......."
경포가 웃으며 말했다. 옥년이라는 여자가 머쓱하여 뒤로
물러섰다.
"박달아."
"예?"
박달이 앞으로 나섰다. 눈이 음퍽 들어간 사내였다.
"네가 다루어 보아라."
"예."
박달이 허리를 굽신하고 육모 방망이를 꼬나들었다. 조선이는
고개를 돌려 아이들을 쳐다보았다. 아이들은 변복을 한 포졸들의
손에 머리 끄덩이를 잡힌 채 울부짖고 있었다.
"네 서방은 어디에 갔느냐?"
"모르오."
조선이는 고개를 흔들었다. 이창현이 집에 없는 것이
천만다행이었다.
"방망이 맛을 보아야 이실직고 하겠느냐?"
"......."
"어허, 이년이 사람을 우습게 보네."
포졸들이 웃음을 터뜨렸다. 박달이라는 사내가 방망이를
들고도 쩔쩔 매는 것이 우스운 모양이었다.
"이년아, 빨리 토설하지 못해?"
방망이가 허공을 가르며 조선이의 어깨를 후려쳤다. 조선이는
어깨가 부서져 나가는 것 같은 통증을 다시 느끼며 처절한
비명을 질러댔다.
"멈추세요!"
그때 옥순이 울음을 그치고 앙칼지게 소리를 질러댔다. 경포가
멈칫하여 옥순이를 쏘아보았다.
"우리 아버지는 강계 포수를 따라 멧돼지를 잡으러 갔어요.
열흘 후에나 돌아온댔어요."
옥순이의 말이 야멸찼다.
"그 말이 정말이냐?"
경포가 허리를 굽혀 옥순에게 물었다.
"네."
옥순이 대답을 했다. 거짓말이었다. 이창현은 사흘 전 진천군
백곡에 갔던 것이다. 그곳에 숨어 있는 강깔래 신부에게 제천의
두 신부가 의금부 나졸들에게 잡혀 한양으로 압송되고 있다는
사실을 알리러 갔던 것이다.
"고것 영악스럽기두 하네."
"......."
"너 거짓말을 하면 잡아간다?"
"네."
옥순이는 울먹이면서 대답을 했다.
"그럼 이것이나 끌고 가자."
경포가 잠시 생각에 잠기는 체하더니 포졸들에게 지시했다.
"아이들은 어떻게 할까요?"
"아이들은 내버려 두어. 관가까지 끌고 가려면 공연히
욕만본다구......."
경포의 지시에 포졸 하나가 조선이의 어깨를 잡아 일으켰다.
조선이는 아이들을 데리고 가게 해달라고 사정을 했으나 경포는
네 서방이 돌아와서 건사할 것이다, 하고 듣지 않았다. 조선이가
아이들을 두고 떠날 수 없다고 울부짖자 경포가 육모 방망이로
등짝을 후려치고 포졸들이 발길질을 해댔다.
조선이는 울면서 봉양 삼거리 주막까지 끌려갔다. 봉양 삼거리
주막엔 이미 10여 명이 남녀 교우들이 잡혀와 오라에 묶여
있었다.
포졸들은 조선이를 술청에 가두어 놓고 술을 마셨다. 모두들
교우들의 집에서 적몰한 재산을 나누는 데 혈안이 되어 있었다.
조선이가 경포가 있는 방에 불려 간 것은 새벽녘이
가까워서였다. 포졸들이 술이 취해 코를 골며 자고 있었다.
"경포를 잘 모시면 풀려날 수도 있어."
박달이라는 사내가 조선이의 오라를 풀고 경포의 방으로 밀어
넣으며 한 말이었다. 조선이는 그때서야 경포가 자신의 몸을
원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리 와서 술을 따라라!"
경포는 이미 눈자위가 붉어져 있었다.
조선이는 경포에게 가까이 가서 조심스럽게 술을 따랐다.
"나이가 몇이냐?"
"스물 일곱입니다."
"음, 아주 좋은 나이로구나. 아이가 둘이지?"
"예."
조선이는 조심스럽게 대꾸했다. 어떻게 하든지 도망을
쳐다한다는 생각을 했으나 마땅한 궁리가 떠오르지 않았다.
경포는 기골이 장대했다. 그를 쓰러뜨리기는 커녕 욕만 당하지
않더라도 다행일 것 같았다.
"그럼 허리 아래 살집도 좋겠구나."
경포가 조선이의 허리를 덥썩 안아서 제 무릎에 앉혔다.
조선이는 눈앞이 캄캄해 왔다. 경포의 손이 저고리 앞섶을
헤치고 가슴에서 농탕질을 하고 있었다.
(옳지!)
그때 조선이의 눈에 상 밑에 있는 육모 방망이가 보였다.
"나으리, 우선 이 술잔부터 내세요."
조선이는 경포의 무릎에서 빠져 나오면서 나직하게 말했다.
"내 말을 들을 터이냐?"
"예, 어차피 이리된 몸, 목숨이나 부지시켜 주십시오.
어린것들이 불쌍하지 않습니까?"
"그렇구 말구. 흉한 꼴 당하느니 고분고분 말 들어서 네 목숨
부지하고 어린 것들 돌보아라."
"예."
조선이는 살갑게 눈웃음을 쳤다. 경포가 큰 기침을 하고는
술잔을 들어서 벌컥벌컥 마셨다. 조선이는 그 틈을 놓치지 않고
상 밑의 육모 방망이를 들어서 경포의 머리를 후려쳤다. 경포가
어이쿠, 하는 소리를 지르며 상 위로 엎어졌다.
조선이는 재빨리 뒷문으로 빠져 나가 주막의 싸리 울타리를
헤치고 어둠 속으로 내달렸다.
4
천주교에 대한 박해는 점점 극렬해 져 갔다. 대원군은 수결을
놓기 전까지는 주저하고 망설였으나 일단 수결을 놓은 뒤에는
폭풍이 몰아치듯 사납게 밀어붙였다.
박달과 옥년은 우포도청 포졸과 간자가 된 뒤 서학군을 잡는
일에 신명을 올렸다. 한성에서는 이미 장안에 서학군을 모조리
잡아들여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목을 베었다. 또 그 시체를
수구만 밖에 버렸는데 높이가 언덕과 같고 성 안의 도랑이 모두
붉은 핏물이 되어 흘렀다고 했다.
박달은 서학군을 잡는데 야릇한 쾌감까지 느꼈다. 그것은
옥년도 마찬가지였다. 서학군이라는 것이 드러나기만 하면
달려가 육모 방망이로 곤죽을 만들고 재물을 빼았었다. 그들을
군(郡)이나 목(牧)으로 보내면 그 곳에서 문초를 하고 목을
베었다. 중죄인이거나 조정에서 벼슬을 한 일이 있는 관리는
감영(監營)으로 보내어 조사받게 하였다. 나중엔 이도 번거로워
선참후계(先斬後啓)를 했다. 조정에서는 대왕대비 조씨가 교지를
내려 양인 신부들과 서학군을 샅샅이 잡아들이고, 고발한
자에게는 상을 주고, 숨긴 자는 죽이며, 황해도와 충청도
바닷가에서 청국배에 왕래하는 자는 먼저 잡아 죽인 후 조정에
알리라는 강경한 영을 내렸던 것이다. 이는 서양인과 내통하는
자에 대한 선참후계의 영이었으나 지방의 포졸들은
서학군에게까지 악용했다.
옥년은 간자 짓을 척척 해냈다. 서학군 마을은 병인박해가
일어나기 전에 이미 대개 근동의 외인들에게 알려져 있기
마련이었고, 서학군이 아니라도 하더라도 '네가 서학군과
내통하고 있지 않느냐?'하면 자기는 서학군이 아니고 이 마을의
아무개 아무개가 서학군이라고 고하는 자가 태반이었다.
한 번은 이런 일도 있었다. 충청도 서산 어느 마을에
들이닥쳤을 때 한 사내가 김(金) 생원이라는 사람이
서학군이라고 그들 일행에게 밀고를 했다. 그들은 한밤중에 김
생원 집에 쳐들어가 김 생원 부부를 묶고 닥달을 하다가
물고(物故)를 내고 말았다. 김 생원이 포졸들의 육모 방망이를
한 대 맞더니 급사(急死)를 한 것이다.
"이 일을 어쩌지?"
"이 작자가 왜 급살로 죽은 거야?"
포졸들은 서로 얼굴을 쳐다보며 웅성거렸다.
"일이 이 지경이 되었으나 어쩌겠나? 아는 사람은 우리밖에
없으니 저것들도 마저 해치우고 재물이나 나누세."
장 포교가 은밀히 속삭였다. 포졸들도 그게 좋겠다고 고개를
끄덕거렸다.
밤이 왔다. 포졸들은 김 생원의 부인과 딸을 육모 방망이로
머리를 때려 타살한 뒤 뒤안에 묻었다. 밀고자는 서산을
떠나다가 산 속에 들어가 목을 베었다. 그리고 그들은 다시
충청도를 향해 길을 떠났다.
진천에 천주교인들이 많다는 것이 풍문으로 떠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병인박해의 시작은 한성부에서 이선이(李先伊)와 최형(崔炯),
그리고 전장운(全長雲)을 잡아들이면서 본격적인 막이 올랐다.
이선이는 홍봉주의 하인으로 불란서인 신부 장베르뇌 주교가 그
집에 머물고 있었다. 이선이는 주인의 영향을 받아 천주교에
입교하여 신자가 되었으니 신앙이 깊지 못해 포도청에서 혹독한
문초를 받게 되자 나흘 만에 배교를 하여 홍봉주와 장베르뇌
주교를 밀고하고 말았다. 이선이가 한성부에 체포된 것은 1866년
음력 1월 5일. 홍봉주와 장베르뇌 주교가 체포된 것은 1월 9일의
일이었다.
또 1월 11일에는 이선이의 밀고로 중림동에서의
정의배(丁義培), 불란서 신부 백(白) 브르뜨니에르,
우세영(禹世英)이 체포되었다. 광주 둔토리에서는 이틀 후에
서(徐)볼류, 김(金)도리 신부가 체포되었다.
음력 1월 21일엔 남종남, 홍봉주를 서수문 밖 형장에서 목을
베고 장베르뇌 주교, 백쁘르뜨니에르 신부, 서볼류 신부, 김도리
신부를 새남터 형장에서 목을 베었다.
1월 22일엔 제천 배론에서 박(朴)쁘띠니꼴라 신부가 체포되고
1월 23일엔 전장운과 최형이 서소문 밖 형장에서 목이 잘렸다.
박쁘띠니꼴라 신부, 정의배, 우세영은 1월 25일 새남터에서
회자수의 칼 아래 목이 베어졌다. 같은 날 충청도 내포에서는
안다블뤼 주교, 황석두(黃錫斗)가 체포되고 민(閔)유앙 신부,
오(吳)오매뜨르 신부는 스스로 자수하여 순교의 길을 걷게
되었다.
음력 2월 6일 제천 현감 유남규(柳南珪)는 남종삼의 아내
이소사(李召史)와 두 딸, 그리고 어린 아들을 체포하여 경상도
창령현(昌寧縣)의 노비로 보냈다는 장계를 의정부에 보내 왔다.
2월 7일엔 안다블뤼 주교, 오오매뜨르 신부, 민유앙 신부,
황석두를 보령으로 압송하게 하여 백성들에게 양이 오랑캐를
전국적으로 구경시키려 했으나 안다블뤼 주교가 2월 14일
처형시켜 달라고 강력하게 청원하였으므로 그대로 시행했다.
음력 2월 14일(양력 3월 30일)은 예수 수난일로 안다블뤼
주교는 예수가 십자가에 못박혀 죽은 그 날 순교하기를 원했던
것이다. 천주교에서는 이 날(예수가 죽은)을 성(聖)
금요일이라고 하여 거룩히 지내고 있었다.
다음은 안다블뤼 주교 등이 순교하던 장면을 기록해 놓은
"한국천주교회사"(유홍렬 저) 하권에서 인용.발췌한 것이다.
....... 드디어 안 주교들은 그들의 뜻대로 1866년 양력 3월
30일, 즉 예수 수난 첨례날에 충청도 수영이 있는 보령의
바닷가에서 거룩한 피를 흘리게 되었는데 그때의 광경은 다음과
같았다. 즉 수영 바닷가의 모래사장에 자리를 잡고 앉은 충청도
수사(水使) 앞에 형틀을 벌여 놓고, 만일을 염려하여
포수군(砲手軍)으로 하여금 총을 재어 가지고 수사 앞에 서 있게
하고 그밖에 구경꾼을 막기 위하여 2백 명의 군인으로 하여금 그
주위를 에워싸게 하였다. 이러한 사형장으로 안 주교들이
끌려나오게 되었는데, 그 광경을 구경하던 사람들 중에 몇
교우가 있게 되어 다음과 같은 말을 전하게 되었다.
즉 군인들이 주교에게 조선의 법대로 관장에게 절을 하라고
하니, 주교는 '서양의 법에 없는 일은 못하겠다.'라고
대답하였다.
이에 관장이 크게 노하여 군인에게 명하여 억지로 절을 시키게
한 후, 주교로 하여금 먼저 칼을 받게 하였는데, 주교는 구세주
예수와 함께 통하기 위하여 고난의 길을 받게 되었다. 즉,
군인이 첫번째 칼로 주교의 목을 찍은 후, 그가 사람을
죽임으로써 받게 될 품값을 정하지 않은 것을 생각하고 칼질을
멈추고 관장에게 그 뜻을 아뢰었다. 관장은 적은 값을 주겠다고
하고 망나니는 더 받겠다고 하여 양편 사이에 있어서 인색한
자와 탐내는 마귀가 각각 욕심을 채우려고 승강이를 거듭하여,
순교하는 주교의 사정을 생각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목이 반쯤
베어진 주교의 온몸이 오랫동안 두고 부르르 떨게 되었는데, 그
사이에 품값이 정해 져서 망나니가 다시 칼을 두 번 휘둘러치게
되니 안 주교는 조선에 나온 지 21년 만에 48세로 천당의 진복을
얻게 되었다.
안 주교의 뒤를 이어 오오매뜨로 신부는 두 번 내려친 칼날에
피를 흘리고, 민유앙 신부와 황석두, 장낙소(張樂韶)는 각각
첫번째 칼날에 순교하게 되었다.
이러한 사실이 이(李)리텔 신부의 조선 탈출로 동년 9월에
파리 외방전교회 소속의 신학교에 전해 졌는데 때마침 소풍을
다녀온 파리 신학생들은 조선에서 9명의 신부가 박해를 받고
피를 흘렸다는 소식을 듣고 감격에 넘쳐 성당으로 달려가 촛불을
환하게 켜놓고 성가를 부르며 아홉 차례에 걸쳐 울며 기도했다고
한다.
5
조선이가 어둠 속을 정신없이 내달려 월림리의 집으로 돌아온
것은 날이 이미 훤하게 밝았을 때였다. 조선이는 간단한 행장을
꾸려서 허겁지겁 산으로 도망쳤다. 행여라도 경포 일행이
뒤따라와 덮치는 것이 아닌가 하여 가슴이 조마조마했으나
다행히 경포 일행은 추격하는 기색이 없었다.
조선이는 밤이 되어서야 집으로 내려왔다. 마을의 다른
교우들을 찾아보니 교우들은 절반이 잡혀 가고 집을 떠나고 하여
마을이 텅텅 비어 있었다. 월림리 안말은 예부터 이씨들이
세거했고 웃말은 정씨들이 세거했었다. 천주교가 들어오기
전에는 사소한 일로도 티격태격하며 살았으나 교인이 된 뒤부터
형제들보다 더 가깝게 지내고 있었다. 그러나 경포 일행이
휩쓸고 지나가자 마을은 큰 변이라도 만난 듯 적조해 지고
말았다.
조선이가 예천 부럭이골에서 월림으로 이사온 것은 불과 한 달
전의 일이었다. 부럭이골에서는 황가라는 사내로 인해 교우들이
수난을 겪었고 월림에서는 경포로 인해 하마터면 몸을 더럽힐
뻔하기까지 하였다. 그러나 천주님이 도운 탓으로 구렁텅이에서
빠져 나올 수가 있었다.
조선이는 그날 밤 새우잠을 잤다. 금방이라도 경포가 들이닥쳐
지난 밤처럼 가슴팍을 발길로 내지를 것 같아 가슴이
선뜩선뜩했다.
그러나 그날 밤은 아무 일도 없었다. 이튿날도 마찬가지였다.
사흘째 되는 날 이창현이 돌아와 조선이는 진천 땅 백곡의
삼박골로 피곤한 걸음을 떼어 놓았다.
그러나 삼박골이 배터 삼거리와 멀리 떨어져 있지 않고
내왕하는 사람들이 많아 용진골로 옮겨서 터를 잡았다.
그들이 진천 땅 백곡에 터를 잡은 것은 강깔래 신부가
삼박골에 숨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강깔래 신부는 외인 지방인 문경으로 피신해 있다가
연풍(延豊)을 거쳐 삼박골에 은신해 있었다.
그때 우포도청 간자가 된 옥년은 진천에 도착해 서학군을
찾아다니고 있었다. 날씨는 점점 따뜻해 지고 있었다. 한길에
나른한 봄볕이 졸기 시작하고 산과 들에 오얏꽃과 살구꽃이
화사하게 피었다. 옥년은 먼저 삼박골로 찾아 들어갔다.
삼박골은 풍광이 수려한 마을이었다. 그러나 화전을 일구거나
천수답 몇 마지기가 고작인 마을엔 촌노들만 몇 사람 해바라기를
하고 있을 뿐 수상한 기색은 보이지 않았다.
옥년은 헛걸음을 치고 정삼이골로 넘어갔다. 정삼이골로
넘어가는 산중턱에 숯막이 몇 개 있었다. 옥년은 숯막에
들러볼까 하다가 그만두고 정삼이골로 들어가 방문을 파는
척하며 마을 동정을 살폈다. 그러나 정삼이골에도 특별히 수상한
기색은 눈에 띄지 않았다.
옥년은 용진골로 넘어갔다. 용진골에는 옹기가마가 몇 개
보였다. 기해박해 이후 서학군들은 옹기 굽는 일을 많이 했기
때문에 서학군들이 숨어 있을 가능성이 많았다.
"아이고, 다리 아파라. 여기서 좀 쉬어 가야지......."
옥년은 마을에서 제법 번듯해 보이는 초가집 앞에 할머니 둘이
해바라기를 하고 앉아 있는 것을 보고 그 앞에 털썩 앉았다.
"어디서 오우?"
흰머리가 듬성듬성한 노파가 옥년을 살피며 넌지시 물었다.
"충주에서요."
옥년은 이마의 땀을 훔치는 체하며 노파들을 살폈다.
"멀리서도 왔구먼......."
"물건 좀 구경하실래요?"
"구경은 뭐, 먼 데 얘기나 좀 들려 주구려."
"먼 데 얘기라니오?"
"들리는 풍문에 한성에서 서학군을 잡느라고 난리라던데 정말
그렇소?"
"어디 한성뿐인가요? 전국이 난리에요."
옥년은 혀를 끌끌 차며 제천에서 법국 신부들이 잡힌 얘기를
대충했다. 그리고는,
"나두 서학을 좀 배워 볼까 했는데 시절이 이렇게 무서워서야
어디 엄두를 내겠어요?"
노파는 잠자코 듣고 있을 뿐 더 대꾸를 하지 않았다.
"여기도 서학군이 있나요?"
"서학군이 어디 있어? 이 마을엔 서학군이 하나도
없구먼......."
"하기야, 이런 마을에 서학군이 있을 리 없지."
"서학군은 왜 찾우?"
"그냥이오."
옥년은 인사를 하고 용진골을 한 바퀴 돌아보았다.
(아니, 저 계집애는.......)
옥년은 백곡으로 내려가려다가 양지 쪽 밭머리에서 냉이를
뜯고 있는 어린 소녀를 발견하고 걸음을 멈추었다. 그 옆에는 네
살인지 다섯 살인지 알 수 없는 계집애 하나가 뒤뚱거리며
밭고랑을 뛰어다니고 있었다. 봉양 삼거리 주막에서 장 포교를
육모 방망이로 때리고 달아난 여자의 딸이었다.
(저것들이 이 곳으로 도망을 쳤군.......)
옥년은 어린 계집애 둘이 하는 짓을 개천에 숨어서 살폈다.
얼마 지나지 않아 허여멀건한 사내 하나가 마을에서 내려와
계집애 둘을 데리고 돌아갔다. 옥년은 천천히 그들 뒤를
따라갔다.
그들은 마을을 벗어나 산으로 올라가고 있었다. 옥년은
조심스럽게 뒤를 밟았다.
(저기로군!)
산중턱에 움막이 하나 세워져 있었다.
옥년은 그 집을 확인한 뒤에 서둘러 진천을 향해 달려갔다.
벌써 해가 기울기 시작하고 있었다.
조선이는 개 짖는 소리를 들은 것은 밤이 이슥했을 때였다.
그녀는 서둘러 남편을 흔들어 깨웠다.
"왜 그래?"
남편이 졸린 눈을 부비며 조선이에게 물었다.
"개가 짖고 있어요. 누가 오고 있나 봐요."
조선이는 걱정이 되어 남편의 귓속에 소근거렸다.
"산짐승이 내려와서 짖는 거겠지......."
용진골은 차령산맥의 우람한 골짜기가 남서쪽으로 내리뻗은
곳에 위치하고 있어서 산이 높고 숲이 울창했다. 밤에는
호랑이같은 산짐승이 내려와 닭이나 개를 물어가기도 하고
멧돼지가 내려와 논밭을 짓밟아 놓기도 해서 마을 사람들은
좀처럼 밤마실을 하지 않았다. 병인박해가 일어났어도 아직까지
이렇다할 고난을 겪지 않은 것도 그 까닭이었다.
"신부님을 잡으러 온 것은 아닐까요?"
"신부님은 삼박골 이 진사댁에 계신데 뭘......."
"교우들이 한 사람이라도 잡히면 큰일예요. 감영에 끌려가
곤장을 맞으면 신부님 계신 곳을 토설하지 않을 수 없을
텐데......."
"당신도 곤장을 맞게 되면 토설할 거야?"
"죽으면 죽었지 어떻게 신부님 계신 곳을 토설하겠어요?"
조선이가 눈을 흘겼다. 그때 이창현이 흐흐 하고 웃더니 이불
속에서 몸을 일으키고 바지를 주워 꿰었다.
"어디 가시게요?"
"소피를 보아야겠소."
"자리에 들기 전에 보지......."
조선이가 웃음을 깨물며 말했다. 이창현이 바지춤을 여미며
밖으로 나갔다. 조선이는 이불 속에서 이창현이 돌아오기를
기다렸다. 산에서 바람이 부는지 나뭇잎들이 우수수 흔들렸다.
그때 이창현이 헐레벌떡 뛰어 들어왔다.
"여보! 포졸들이 오고 있소! 횃불 한 무리가 이리로 올라오고
있소!"
조선이는 가슴이 철렁하여 이불 속에서 벌떡 일어나 치마
저고리를 주워 입었다. 이창현이 허겁지겁 옥희를 들쳐업고
산으로 내달렸다. 조선이는 옥순이의 손을 잡고 이창현의 뒤를
따랐다.
횃불은 7, 8개가 넘어 보였다. 조선이 내외는 산중턱에
이르러서야 가쁜 숨을 진정시키며 그들의 집을 둘러싸고 있는
횃불의 무리를 비감한 심정으로 내려다보았다. 가슴이 타는 것
같았다. 아이들은 영문도 모른 채 아버지와 어머니의 품에 안겨
몸을 떨고 있었다.
"신부님께 알리세요."
"신부님께?"
"저들이 우리를 잡으러 온 것을 보면 신부님께도 갈지
모르잖아요?"
"글쎄......."
"어서 알리세요. 강 신부님까지 잡히면 어떻게 해요?"
조선이가 재촉을 했다. 그래도 이창현은 조선이 곁을 떠날
생각을 하지 않고 있었다. 그는 아내와 아이들을 산 속에 남겨
두고 떠나기가 싫었다.
"당신도 함께 갑시다."
"이 밤중에 아이들을 데리고 어떻게 삼박골까지 가겠어요?
저들이 내려가면 아이들 데리고 집에 가서 있을께요."
"위험하지 않을까?"
"전에도 그랬는데 어때요?"
용진골은 박해가 심해 지자 마을에 수상한 사람이 나타나면
즉각 이웃에게 알려 피신하다록 하였다. 며칠 전에도 진천
관아의 포졸들이 한떼 들이닥쳤는데 조선이 내외와 교인들은
산으로 부랴부랴 피했다가 돌아왔던 것이다. 포졸들은 마을을
한바퀴 둘러보고 삼박골을 거쳐 돌아갔을 뿐이었다.
"그럼 잘 살핀 후에 내려가......."
이창현이 마지못해 조선이의 어깨를 두드리고 산길을 내달리기
시작했다. 그는 삼박골로 가는 지름길을 알고 있었다.
조선이는 집이 있는 곳을 내려다보며 낮게 한숨을 내쉬었다.
포졸들의 왁자한 소리가 들리더니 이내 횃불의 무리가 마을을
향해 내려가기 시작했다. 마을에 다시 개 짖는 소리가
요란해졌다.
(여기도 포졸들이 들락거리니 이젠 어디로 가야 하나?)
조선이는 앞길이 막막하여 슬퍼졌다. 이제 진천 용진골을
떠나면 걸인 노릇을 해야 했다. 수중에 가지고 있는 돈이 하나도
없었다.
조선이는 마을에서 횃불이 하나도 보이지 않자 아이들을
데리고 집으로 갔다. 포졸들이 마을을 거쳐 돌아갔으려니 여겼던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그녀의 착각이었다. 그녀가 방문을 열고
들어서자마자 육모 방망이가 어둠을 가르며 그녀의 어깨죽지를
후려쳤다. 그녀는 외마디 비명을 지르며 나동그라졌다. 그러자
나동그라진 그녀의 가슴과 복부로 무수한 발길이 쏟아졌다.
그녀가 혼절했다가 정신을 차린 것은 누군가 그녀에게 찬물을
뒤집에 씌웠기 때문이었다.
"네 이년!"
그녀가 정신을 수습하자마자 경포의 날카로운 호령이 귓전으로
날아왔다.
"네 서방은 어디로 갔느냐?"
"모르오."
조선이는 세차게 머리를 흔들어 대답했다. 경포는 낯이 익은
사내였다. 경포의 얼굴을 확인한 조선이는 맥이 탁 풀렸다. 봉양
삼거리 주막에서 수청을 들라는 그 사내였다. 그 경포의 머리를
육모 방망이로 때리고 달아난 뒤였으므로 살아날 방법이 없다고
생각했다. 이미 조선이의 팔은 뒤로 묶여 있었다.
"이 마을에는 서학군이 얼마나 있느냐?"
"하나도 없소!"
"이런 고이연 년!"
경포의 발길이 우악스럽게 조선이의 가슴팍을 내질렀다.
조선이는 가슴이 컥하고 막히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여기가 서학군 마을이라는 것을 내 모를 줄 아느냐?"
조선이는 대답을 하지 않았다. 아이들은 어디로 데리고 갔는지
기척이 없었다.
"아이들은 어디 있소?"
"서학군 집을 찾으러 갔다."
"아이들이 서학군 집을 어찌 안다고 그런 짓을 하오."
"네 년이 관여할 일이 아니다."
경포가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조선이는 어리둥절하여 경포를
쏘아보았다. 경포의 얼굴에 야릇한 미소가 번지더니 포졸들에게
밖에 나가 있으라고 눈짓을 하였다. 포졸들이 서로 얼굴을
쳐다보며 고개를 끄덕거리고는 밖으로 나갔다.
경포가 바치춤을 까내렸다.
"무슨 짓을 하려는 게요?"
조선이는 깜짝 놀라서 소리를 질렀다.
"몰라서 묻느냐? 네년이 일전에 내 머리를 때리고 달아났으니
그 응보를 받아야 할 것이다."
"안 되오!"
"되고 안 되고는 내가 작정하는 것이다."
경포는 황급히 뒤로 물러나는 조선이를 덮쳐 치맛자락을
걷어올리려고 하였다.
"경포는 들으시오!"
조선이는 재빨리 경포를 향해 일갈을 떠뜨렸다. 경포가
멈칫하여 조선이를 쏘아보았다.
"나라의 녹을 받은 경포가 아녀자에게 욕을 보이면 국법에
의해 목이 베일 것이오. 내 몸에 손 끝 하나라도 댄다면
관가에서 문초를 받을 때 관장에게 낱낱이 고해 받치겠소!"
"이, 이런......!"
경포의 얼굴이 헬쓱하게 질렸다.
"나를 복용하려면 차라리 죽이시오. 경포가 나를 죽이지
않겠으면 내가 혀를 깨물고 자진하겠소."
"독한 년 같으니......."
경포가 침을 퇘 뱉고 밖으로 나갔다. 조선이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으나 아이들이 어떻게 되었는지 알 수가 없어 답답했다.
포졸들은 그녀의 집을 샅샅이 뒤지더니 적몰할 물건이 변변치
않자 집을 부수기 시작했다.
6
이창현이 삼박골의 강깔래 신부에게 포졸들이 들이닥쳤으니
산으로 피신하라고 전하고 허겁지겁 용진골로 돌아온 것은 날이
서서히 밝아 오고 있을 때였다.
그는 집으로 들어서면서 아내 조선이와 아이들이 보이지 않자
가슴이 철렁했다.
집 안은 엉망이었다. 가재도구가 넘어지고 옷가지들이
여기저기 흩어져 있었다. 포졸들은 신발도 벗지 않은 채 집을
뒤진 모양으로 방바닥에 흙투성이었다.
(어떻게 된 것일까?)
그는 공연히 강깔래 신부에게 달려갔다는 생각이 들었다.
삼박골의 강깔래 신부한테 다녀오지만 않았더라도 아내와
아이들과 헤어지지 않았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자 가슴이 타는 것
같았다. 차라리 꿈이었으면 싶었다. 악몽이라면 잊어 버리면
그만이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그 일은 악몽이 아니었다. 그는
아내와 아이들이 산에서 내려오지 않은 것인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금방이라도 아내와 아이들이 환하게 웃으며 집으로
들어설 것만 같았다.
(산엘 올라가 봐야지.......)
그는 집을 나왔다. 아내와 아이들이 산 속에서 그를
기다리다가 깜빡 잠이 들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러나 아내와
아이들이 그를 기다리고 있던 산에는 아무도 없었다. 산에는
골짜기와 마을을 휘둘러보았으나 흔적조차 보이지 않았다.
(포졸들에게 잡혀 간 게 분명해.......)
그는 참담한 마음을 억누를 길이 없었다. 두 다리에 맥이 풀려
풀숲 위에 한참 동안을 쭈그리고 앉아 있었다.
산은 조용했다. 해는 이제야 용덕산 위로 불그스름하게
떠오르기 시작하고 있었다. 골짜기는 아직 남빛에 잠겨 있었다.
바람이 일지 않아 숲은 조용했다. 일출 직전의 고요였다.
이따금 새들이 나뭇가지 사이로 날아다니며 지저귀는 소리가
들렸다. 골짜기에서 물이 흘러 내리는 소리도 들렸다. 산은 점차
잠에서 깨어나며 수선스러워지고 있었다.
(혹시 교우의 집에 숨어 있는 것이 아닐까?)
용진골에는 교우가 두 집 있었다. 두 집 모두 옹기를 굽기도
하고 나무를 해 그것을 저자에 내다 팔아 생계를 유지해 나갔다.
이창현도 몇 번 옹기를 지게에 지고 진천읍에까지 나가서 옹기를
팔았었다.
(그래, 교우의 집에 있는지도 몰라.......)
그렇게 생각하자 새로운 희망이 솟아났다. 그는 서둘러 산에서
내려와 옹기가마 옆의 교우의 집으로 달려갔다.
"밤에 포졸들이 들이닥친 것만 알지 누가 잡혀 갔는지는
모르겠소."
옹기가마에 불을 지피던 김석민(金石民)이 어두운 낯빛으로
대답했다.
"우리도 골짜기로 도망가서 숨어 있었어요."
김석민의 아내가 혀를 차며 거들었다.
"우리 아이들 우는 소리도 듣지 못하셨습니까?"
"못 들었소."
김석민이 대답했다. 그도 불안한 기색으로 팔장만 끼고
있었다. 포졸들이 드나들기 시작했으므로 옹기를 구으며 사는
일도 얼마가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우리도 찾아봐요."
김석민의 아내가 말했다.
"그래."
김석민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들은 교우 주영달(周永達)네
집으로 달려갔다. 그러나 주영달네 집에도 이창현의 아내와
아이들은 숨어 있지 않았다. 그들은 주영달네 가족까지 합하여
용진골을 찾아다녔으나 마을 사람들도 포졸들 때문에 겁이 나서
집에 숨어 있어서 자세히 알지 못한다고 했다.
"우리 천주님께 기도해요."
교인들끼리 따로 모이자 그들은 조선이와 아이들을 위해
기도를 시작했다. 그러나 이창현은 도무지 기도가 되지 않았다.
그는 입으로는 중얼중얼 기도를 하면서도 머리 속으로는
망나니의 칼 아래 목이 떨어지는 조선이와 아이들을 생각하며
몸을 떨었다.
"아무래도 제가 진천읍에 나가 봐야 하겠습니다."
이창현은 기도가 끝나자 교인들에게 말했다.
"진천읍에 나가서 어떻게 하시게?"
"관가에 가서 아내와 아이들이 잡혀 왔는지 물어 봐야지요."
"그러다가 형제님까지 잡히시면 어쩔려구요?"
교인들은 이창현이 관가로 간다고 하자 이구동성으로
만류했다.
"아내와 아이들이 잡혀 갔다면 저 혼자 남아서 무엇을
하겠습니까?"
이창현은 어금니를 깨물었다. 이런 일이 닥치리라는 것은 어느
정도 예상하고 있던 일이었다. 그러나 막상 아내와 아이들이
무지막지한 포졸들에게 잡혀 갔다는 생각을 하자 견딜 수가
없었다.
"그럼 아침이라도 들고 가요."
"아닙니다. 제가 떠난 뒤에 기도를 더해 주십시오."
이창현은 교우들과 헤어져 진천읍을 향해 걸음을 서둘렀다.
해는 어느덧 용덕산 위에 높이 솟아 부챗살처럼 고운 빛을
마을과 들에 뿌리고 있었다.
1) 장낙소(張樂韶)는 장주기(張周基)라고도 알려져 있으며
천주교 103위 성인 품에 올라 있다.
2) 아셀라의 이야기는 샤를르 달레의 "조선교회사"에 나오는
바르바라 동정녀를 소재로 했으나 이름도 바꾸고 내용도 약간
바꾸었다. 그러나 샤를르 달레의 "조선교회사"에 나오는
바르바르 동정녀의 아름다운 영혼의 정신을 최대한 살리려고
노력했다.
3) 샤를르 달레의 "조선교회사"는 박해시대에 조선에 들어와서
활약하던 프랑스 신부들의 편지를 한국인으로서는 두 번째
신부인 최양업 신부가 박해를 받은 천주교인들의 이야기를
집대성, 프랑스 외방선교회 소속의 샤를르 달레 신부에게 보낸
편지를 달레 신부가 책으로 출판한 것이다. 한국에서는
"한국천주교회사"로 안응렬(安應烈 : 한국 외국어대 교수,
주불참사관 역임)과 최석우(崔奭祐 : 신부. 한국교회사연구소
소장)의 역주로 발행되었다.
4) 동명의 "한국천주교회사"는 성균관대 대학원장을 역임한
유홍렬(柳洪烈)교수의 역서로 달레의 "조선교회사"를 상당부분
인용하고 있다.
5) 바르바라는 영세명만 기록에 남아 있을 뿐 우리 이름은
기록에 없다.
제8장 시체는 산을 이루고, 피는 내를 이루다
1.
조선이는 한나절이 가까웠을 때 진천 관아의 동헌으로 끌려
나갔다. 동헌 앞마당에는 벌써 포졸들이 주장(朱杖)대를 들고
좌우에 정령해 있었고 또 아래는 여러 가지 형틀과 형구(刑具)가
놓여 있었다. 조선이는 피 묻은 형구와 주장대를 들고 서 있는
포졸들을 보자 겁부터 덜컥 났다. 가슴이 뛰고 다리가
후들거렸다. 그때 옥졸들이 조선이를 형틀 앞에 앉히고 큰
소리로 외쳤다.
"사학(邪學) 죄인 조선이 대령이오!"
조선이는 비로소 고개를 들고 동헌을 올려다보았다. 동헌엔
융복을 입고 주립을 쓴 진천 현감이 앉아 있었고 그 밑에 6방
관속이 서 있었다.
조선이는 동헌에 앉아 있는 현감과 6방 관속들, 그리고 좌우에
정렬해 있는 주장대를 든 포졸들, 피 묻은 형구를 보자 소름이
오싹 끼쳤다.
"네 이름이 무엇이냐?"
현감은 풍채가 당당했다. 나이는 얼추 마흔이 가까운 듯했다.
"조선이라 하옵니다."
조선이는 또박또박 대답을 했다.
"네가 사학 죄인이 맞느냐?"
현감의 목소리는 낮고 조용했다.
"사학 죄인이 아니옵고 사학을 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옵니다."
"방자한 것 같으니......."
현감의 목소리가 찌르듯 날카로워졌다.
"네 사방은 누구냐?"
"이창현이라 하옵니다."
"네 서방도 사학을 하느냐?"
"그러하옵니다."
"사학을 누구에게 배웠느냐?"
"돌아가신 어머님께 배웠사옵니다."
"네 서방은 어디에 있느냐?"
"어디에 있는지 모르옵니다."
"서방이 어디에 있는지도 모른단 말이냐?"
"모르옵니다."
"자식도 있느냐?"
"여식이 둘 있사옵니다."
"여식은 어디에 있느냐?"
조선이는 고개를 들고 자신을 잡아온 경포들을 쳐다보았다.
경포들은 한쪽에 모여 서서 조선이의 문초를 지켜보고 있었다.
"제 여식이 어찌 되었는지 경포들이 알고 있사옵니다."
조선이는 박달의 처 옥년을 힐끗 쳐다본 뒤에 진천 현감을
향해 대답했다.
"이 여인네의 여아들은 어디에 있느냐?"
진천 현감이 경포들에게 큰 소리로 물었다.
"어린아이들은 국법으로 다스리지 않기에 백곡에서
돌려보냈사옵니다."
"어찌하여 백곡까지 끌고 왔는가?"
"백곡에 법국 신부가 있다는 풍문이 있어 그를 알고자
했나이다."
"백곡에 정령 법국 신부가 있는가?"
"그렇게 믿고 있사옵니다."
"허면 어찌하여 법국 신부를 잡아들이지 않았는가?"
"법국 신부는 정삼이골에 숨어있다고도 하고 삼박골에 숨어
있다고도 하나 정확한 소재는 모르고 있사옵니다. 저 여인네를
문초하면 법국 신부의 소재를 알 수 있을 듯합니다."
경포의 목소리는 우렁우렁했다. 현감이 다시 얼굴을 찡그리고
있다가 경포에게 물었다.
"그대들의 관속은 어디인가?"
"소인은 우포도청 포교로 이름은 장두식입니다. 여기 있는
사람들은 모두 소인 수하의 포졸들입니다."
"여인은 누구인가?"
"이 여인은 사학 죄인을 잡아들이는 간자입니다."
"간자?"
현감이 미간을 잔뜩 찌푸렸다. 그는 자신의 관내에 경포가
들어와 있다는 사실이 불쾌했다. 그는 진천 현감으로 부임한
아래 꾸준히 서학군들을 잡아들이어 문초를 하고 감영으로
보냈었다. 벌써 진천 관내에서 잡아들인 서학군만 해도 50여
명이나 되었다. 그 중 배교를 한 20여 명은 돌려보내고 30여
명은 한성으로 장계를 올린 뒤 청주와 공주 감영으로 보내어
사형을 받게 했던 것이다.
그의 이름은 김병렬(金炳烈). 학문은 열심히 했으나 재물이
없어 지방 관직 하나 얻지 못하고 빈둥대다가 고종이 즉위한
뒤에야 겨우 진천 현감으로 부임할 수 있었다.
그는 처음부터 서학군을 잡아들일 생각은 전혀 갖고 있지
않았었다. 그는 서학을 두둔하지도 않고 박대하지도 않았다.
그러나 대왕대비 조씨가 추상 같은 교지를 내려 서학군들을
잡아들이라고 하고 서학군 체포에 소홀한 현감을 셋이나 파직을
하자 발등에 불이 떨어진 듯 당황하여 서학군들을 잡아들이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러한 판국에 법국 신부가 진천 관내에 숨어 있다면 정신을
바짝 차려 잡아들여야 했다. 경포 앞에서 어물어물하고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조선이는 듣거라. 진천 관내에 법국 신부가 있다는 말이
사실이냐?"
"소인은 모르는 일이옵니다."
"경포가 있다고 하지 않느냐?"
"그러면 경포에게 하문해 보십시오."
"네 말로 듣고 싶다. 법국 신부가 있느냐 없느냐?"
"소인은 모르옵니다."
"있다는 말이냐? 없다는 말이냐?"
"소인은 모른다고 대답하였사옵니다."
"이런 발칙한 것 같으니....... 여봐라! 그년에게 볼기 다섯
대를 쳐라!"
"예!"
현감이 벌컥 화를 내자 포졸들이 조선이에게 우르르 달려들어
태형(苔刑)틀 위에 엎어 놓고, 팔을 옆으로 뻗게 하여 묶은 뒤
두 발까지 묶고는 주장대로 볼기를 후려치기 시작하였다. 그럴
때마다 포졸들이 하나요, 둘이요... 하고 크게 소리를 질렀다.
조선이는 주장대가 엉덩이를 후려칠 때마다 살점이 떨어져
나가는 것처럼 고통스러웠다. 그러나 이를 악물고 참으면서
천주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그리스도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하고 자비를 구하는 기도를 바쳤다.
"다섯이오!"
포졸들이 큰 소리로 외치자 주장대로 볼기를 치던 포졸이
제자리로 돌아가 정렬했다.
"네 다시 묻는다. 법국 신부가 진천 관내에 있느냐?"
"모르오."
"허면 법국 신부를 본 일이 있느냐?"
"있소."
"언제 보았느냐?"
"대답할 수 없소. 그는 우리 영혼의 아버지와 같은 존재요."
"네가 서학을 제대로 알기나 하느냐?"
진천 현감 김병렬은 조선이의 대답이 완고하자 조선이를
가만히 쏘아보았다. 정상이 가련했다. 머리는 흩어져 산발이
되고 고통을 인내하느라고 그러는지 얼굴엔 땀이 비오듯 흐르고
있었다. 그러나 주장대로 볼기를 치는 것은 가장 약한
형벌이었다.
"어찌 천주를 모르고 성교를 믿겠사옵니까?"
"허면 천주가 무엇이냐?"
"천주는 우주 만물을 창조하신 분입니다."
"그럼 야소는 누구냐?"
"야소는 예수 그리스도를 일컫는 말로 천주의 아들입니다."
"허면 너희들이 성모 마리아라 부르는 여인은 누구냐?"
"그분은 예수 그리스도를 낳으신 분입니다."
"동정이라 하던데 어찌하여 예수라는 사람을 낳을 수 있다는
말이냐?"
"천주이시기 때문에 동정녀라고 하여도 아이를 잉태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
"혹세무인이로다. 어찌 동정의 몸으로 아이를 낳을 수 있다는
말이냐? 너는 네 서방과 교접을 하지 않고서도 자식을
낳았느냐?"
조선이는 얼굴이 붉어져 어찌할 줄을 모르다가 현감을 똑바로
쏘아보았다.
"사또의 말씀은 아녀자를 희롱하는 것으로밖에 여겨지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교인들이 우리 천주교를 힐책할 때 그 점을
가장 의심하는지라 그 점을 먼저 자세히 말씀올리겠사옵니다."
진천 현감 김병렬은 조선이의 당돌한 말에 속으로 고개를
끄덕거렸다. 아녀자로서는 드물게 조선이의 말이 또렷하게
논리가 정연했다. 비록 태형틀 위에 묶여서 엎드려 있는
신세라고 해도 범상하지 않은 기상이 엿보였다.
"이 나라 이 민족의 시조이신 단군 왕검이 어떻게
태어나셨습니까? 그분은 천제인 환인의 손자가 아닙니까? 천제의
아드님이신 환웅께서 하늘에서 내려와 웅녀와 교합하여 낳은
분이 단군이라는 것은 사또께서도 익히 알고 계실 것입니다.
이처럼 하늘에는 천제가 계시고, 천제의 아들인 환웅께서는
하늘에서 내려와 단군을 낳으셨습니다."
"그것은 신화가 아니냐?"
"그렇습니다. 그러나 우리 조상이 누구라는 것을 설명하기
위한 신화입니다. 우리는 대체 어디에서 왔겠습니까? 우리의
조상을 거슬러 올라가면 그 끝이 있을 게 아닙니까? 사또께서는
바람이 어디에서 불어 온다고 생각하십니까? 우리는 바람이 불어
오는 소리를 듣고서도 그 바람이 어디에서 불어와 어디로 불어
가는지 모릅니다. 그런데 사또께서는 바람이 불어 오는 곳을
아십니까? 모르실 것입니다. 이와 같이 우리를 낳게 하고 죽게
하는 것이 있습니다. 과연 그것이 무엇일까요? 그것은 처음이요,
끝이신 우리 천주뿐입니다. 바로 절대자이신 천주이십니다."
"네가 말을 썩 잘 하는구나. 네 말대로 천주가 있다손치더라도
나라에서 금하는 사학을 꼭 해야 하겠느냐?"
"그러하옵니다."
"사학을 굳이 하겠다면 네 목이 달아날 것이다. 그래도
하겠느냐?"
"제 목숨은 태어날 때부터 저의 것이 아니라 천주의 것입니다.
이제 천주께 부질없는 목숨을 되돌려 드린다고 해서 무엇이
아깝겠습니까?"
"목숨이란 하나밖에 없는 것이다. 죽으면 한 줌 흙으로
돌아가는 것인데 어찌하여 소중히 여기지 않느냐?"
"우리는 천주를 공경함으로서 영생을 얻기 때문입니다."
"듣기 싫다! 배교를 할 테냐, 안 할 테냐?"
"못하옵니다."
"법국 신부가 있는 곳을 말하겠느냐, 안 하겠느냐?"
"못하옵니다."
"정녕 못하겠느냐?"
김병렬이 동헌에서 벌떡 일어섰다.
"못하옵니다."
"참으로 축생 같은 계집이로다. 내 정상이 가련하여 혹독히
다루려 하지 않았더니 방자하기 이를 데 없구나! 여봐라! 저
죄인에게 물볼기 스무 대를 치도록 해라!"
"예!"
조선이는 눈을 질끈 감았다. 포졸들이 조선이의 몸에 찬물을
쏟아 붓고 물볼기를 치기 시작했다.
(오, 천주시여......)
조선이는 입술을 깨물었다.
조선이는 포졸대의 주장대가 엉덩이에 떨어질 때마다 박해로
순교한 사람들을 생각하면서 고통을 인내했다. 박해가 시작되자
전국 곳곳에서 교우들이 배교를 하지 않고 순교의 길을 택하고
있었다. 나라에서는 어리석은 백성들이 혹세무인의 사교에 빠져
있다고 보고 배교하는 자는 살려 주라고 하고 있었다. 그러나
수많은 사람들이 망나니의 칼을 두려워하지 않고 순교의 길을
택하고 있었다. 심지어는 내가 서학군이다, 천주를 증거하고
떳떳이 죽겠다...하고 관가를 찾아오는 사람들이 많아 방백
수령들이 놀라기까지 하였다.
(천주학이 대체 무엇이건데 이 사람들이 스스로 죽음의
구렁텅이로 찾아오는 것일까?)
관장들은 천주교인들이 두려워지기까지 하였다. 천주교인들의
죽음조차 두려워하지 않는 용기에 숙연해 질 때도 있었다.
홍야신도라는 사람은 60세로 5년 전부터 눈이 보이지 않았으나
포졸들이 들이닥치자 내가 서학군이니 잡아 가시오, 하고 스스로
말하였다. 그는 공주 감영에 갇힌 뒤 5일 동안이나 물 한모금
마시지 않고 있다가 배교하면 풀어 주겠다고 하였으나 끝내
거부하여 교수형을 당했고, 손차선(孫次善)이란 사람은 덕산
군수가 온갖 형벌을 가하여 배교하라는 하였으나 배교치 않았다.
이에 덕산 군수는 손차선을 배교시킬 생각으로,
"네가 너의 이빨로 너의 살을 물어뜯지 않으면 배교하는
것으로 간주하고 풀어 주겠다."하고 말하였다.
손차선은 크게 통곡하고 말하기를,
"나는 만 번 죽어도 배교할 수는 없습니다. 사또는 어찌하여
저를 배교자로 치부하려 하십니까? 사또께서 은전을 베풀어 제
육신을 살려 주시겠다는 뜻은 고마운 일이오나 그렇게 되면 제
영혼은 지옥불의 형벌을 벗어날 길이 없습니다. 그러나 사또께서
굳이 증거를 원하신다면 저의 육신 또한 천주님의 것이오나
신덕의 증거를 보이기 위하여 감히 명을 따르나이다."하고 양쪽
팔의 살을 한 입씩 물어 뜯어 피가 흐르게 하였다. 이에 덕산
군수도 배교시키는 것을 체념하고 공주 감영으로 손차선을
보내어 두 여자 교우와 함께 교수형을 받게 하였다.
손차선과 함께 죽은 여자 두 교우 중 하나는 김수산나로
경기도 안성에 살던 심요한의 아내였다. 병인박해가 일어나자
남편의 집을 떠나 천안 해사동의 친정집으로 피난하였으나
그곳에서도 박해가 닥쳐 과부 친정어머니를 비롯하여 여러
교우들과 함께 포졸들에게 잡혔다. 그들 중 다른 교우들은
배교하겠다고 서약을 하여 풀려나고 늙은 어머니는 포졸들이
끌고 가기가 귀찮아서 풀어 주었다. 그리하여 포졸들이 두
여자만을 잡아서 천안 군청으로 끌고 갔는데 천안 군수는
김수산나에게 두 달된 어린 딸이 있는 것을 보고 측은히 여겨
배교하라고 달래기도 하고 꾸짖기도 했으나 김수산나는 듣지
않았다. 이에 천안 군수는 김수산나를 공주 감영으로 보냈고,
공주 감영에서는 여러 차례에 걸쳐 혹독한 형벌을 가해도 듣지
않자 3월 31일 성수난 토요일에 손차선과 함께 목을 베었다.
이들의 시체가 들에 버려지자 교우들이 찾아가 묻었다.
장낙소(張樂韶)는 배론 신학당의 집주인인데 신뿌르띠 신부와
박쁘띠니꼴라 신부와 함께 포졸들에게 잡혔다. 이에 신부들은
포졸들에게 돈을 주고 장낙소를 놓아 주게 하였다. 장낙소는
그때 나이가 64세나 되는 노인이었다.
그러나 그는 그 집을 떠나 피신하지 않고 소를 빌려 타고 두
신부의 뒤를 따라갔다. 5리쯤 앞서가던 두 신부는 장낙소가
따라오는 것을 보고 포졸들을 시켜 꾸짖어서 돌려 보냈다.
장낙소는 신부의 지시를 거역할 수 없어 울면서 집으로
돌아갔다. 그러나 양식이 떨어져 30리쯤 떨어진 노루골로 양식을
구하러 갔는데 다른 포졸들에게 잡혀 제천 군수에게 끌려왔다.
제천 군수는 장낙소가 노인이고 인물이 사악해 보이지 않아,
"네가 한 번만 배교하겠다고 하면 살려 주겠다."하고
달래었다. 그러나 장낙소가 한사코 배교하지 않겠다고 하므로
한성의 포도청으로 압송했다.
그리하여 포도대장은 장낙소를 구류간에 가두고 온갖 형벌을
가하다가 음력 2월 7일에 죽이기로 결정하였으나 안다블뤼
주교와 두 신부가 충청도 보령으로 형행을 받기 위하여 떠난다는
소리를 듣고 자신도 함께 데리고 가서 효수해 달라고 청하여 2월
14일 성금요일에 함께 치명하게 되었다.
황석두는 덕산군 거들리에서 안다블뤼 주교와 함께 경포들에게
잡혔는데 포졸들이 놓아 주는데도 불구하고 안다블뤼 주교를
수행하여 같은 날 망나니의 칼 아래 숨이 끊어졌다.
(그분들이야말로 진정 성인들의 반열에 오를 수 있는
분들이야.......)
조선이는 순교한 교인들의 얘기를 전해 들을 때마다 벅찬
감동을 느꼈다. 그리고 그들처럼 순교할 수 있게 되기를 간절히
기도해 왔었다.
"열 대요!"
양쪽에 도열해 있는 포졸들의 소리가 귓전으로 아물아물하게
들려왔다. 그녀의 엉덩이는 이미 피떡이 되어 살점이 문드러져
있었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조선이는 눈을 감고 주모경(主母經)을 외우기 시작했다.
"열 한 대요!"
주장대가 조선이의 엉덩이 위에서 춤을 추었다. 물에 젖은
치마였다. 치마가 엉덩이에 찰싹 달라붙어 있었으나 엉덩이의
살이 터져 피가 흐르자 시뻘겋게 물이 들었다. 태형틀 밑으로도
핏물이 떨어져 흥건하게 괴었다.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히 빛나시며.......)
조선이의 눈에서 눈물이 주르르 흘러 내렸다.
(그 나라가 임하시며.......)
그러나 기도를 멈추지는 않았다. 기도만이 고통을 잊게 할 수
있었다.
"스무 대요!"
그때 포졸의 외침이 조선이의 귓전에 뚜렷이 들렸다. 조선이는
눈을 떴다. 포졸들이 숙연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조선이는
동헌에 앉아 있는 현감을 쳐다보았다.
"어떠냐? 이래도 배교하지 않을 터이냐?"
현감이 눈을 부릅뜨고 다그쳤다.
"못하옵니다."
조선이는 완강하게 도리질을 했다.
"저 년을 형틀에서 끌어내어 주리를 틀도록 하여라!"
포졸들이 우르르 달려들어 조선이의 팔목을 묶은 밧줄을 풀고
태형틀에서 끌어내린 뒤 두 손을 뒤로 묶었다. 그리고는
양무릎을 묶은 뒤 주릿대를 두 다리 사이에 끼웠다.
조선이는 머리를 세차게 흔들었다. 긴 머리카락이 눈을 가리고
있었다.
"어떠냐? 배교를 하겠느냐?"
조선이는 현감을 쏘아보았다.
"못하옵니다."
"주리가 얼마나 무서운 형벌인지 알고 있느냐?"
"모릅니다. 죽음이 두렵지 않거늘 무엇이 두렵겠습니까?"
"정녕 네 년이 간땡이가 부었구나! 형졸들은 무엇을 하느냐?
어서 주리를 틀어라!"
"예!"
현감의 분부가 떨어지지가 바쁘게 포졸들이 조선이의 정강이에
주릿대를 틀기 시작했다. 조선이는 두 다리가 부서지는 것 같은
통증을 느끼며 외마디 비명을 지르고 혼절을 했다. 포졸이
땅바닥으로 처박힌 조선이를 살피고는 기절했다고 보고를 했다.
"저 년에게 물을 한 양동이 끼얹어라!"
"예!"
포졸들이 물 한 양동이를 퍼다가 조선이에게 퍼부었다.
조선이는 신음을 하면서 눈을 떴다. 사람들이 모두 거꾸로
보였다. 시야가 안개처럼 흐릿했다.
"저 년을 일으켜 앉혀라!"
포졸들이 조선이를 일으켜 앉혔다. 그러나 조선이가
기우뚱하고 쓰러지자 산발한 머리를 잡아 일으킨 뒤 쓰러지지
못하도록 머리카락을 움켜쥐고 치켜들었다.
"이래도 배교를 못하겠느냐?"
현감이 조선이를 다르쳤다.
"못하오."
조선이는 간신히 웅얼웅얼 대답했다. 목소리가 입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그러자 현감이 몸을 앞으로 기울여 귀를 세우고
있다가 포졸들에게 물었다.
"저 년이 뭐라고 대답을 했느냐?"
"못한다고 하였사옵니다."
포졸 하나가 냉큼 대답을 했다.
"저런 고약한 년이 있나? 네 년이 정령 배교를 못하겠느냐?"
"못하옵니다."
조선이는 눈앞이 어두워 지는 것을 느끼며 혼신의 힘을 다해
대답을 했다.
"저, 저런 죽일 년!"
현감이 몸을 부르르 떨며 소리를 질렀다. 그때 포졸 하나가
현청으로 황급히 달려들어와 형방에게 낮게 귓속말로 전했다.
형방이 눈을 크게 뜨더니 현감에게.
"사또, 이 사학 죄인의 서방이 현청 앞에 와 있다가
합니다."하고 보고를 했다.
"뭐라구?"
현감이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형방에게 물었다.
"저 사학 죄인의 서방놈이 현청 앞에 와 있다고 합니다."
"혼자서?"
"예."
"제 발로 걸어 들어왔단 말이지?"
"예. 사학 죄인 조선이가 현청에 와 있느냐고 묻고는 그렇다고
대답을 하자, 자기가 사학 죄인 조선이의 장정이니 자기도 잡아
가두라고 하였습니다."
"허어, 이것들이 본관을 희롱하는 수작이구나. 끌고
들어오너라!"
"예."
포졸이 후다닥 밖으로 뛰어나갔다.
조선이는 가물가물해지는 의식을 억지로 붙잡으며 동헌 마루를
쳐다보았다. 형방인 듯한 자와 포졸, 그리고 현감이 무엇이라고
귓속말을 하고 포졸 하나가 후다닥 밖으로 뛰어나갔으나 흐릿한
시야 때문에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의식도 가물가물하여 그들이
무슨 얘기를 하는지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눈꺼풀이 천근처럼
무겁게 내려 감기고 있었다.
"네 이름이 무엇이냐?"
그때 웅성거리는 소리와 함께 잔뜩 위엄을 차린 현감의
목소리가 들렸다.
조선이는 눈을 감았다. 눈꺼풀이 무거워 견딜 수가 없었다.
"소인 이창현이라 하옵니다."
그때 낯익은 목소리가 조선이의 고막을 천둥처럼 때렸다.
조선이는 눈을 번쩍 떴다. 자신의 의식이 온전하지 못해 잘못
들은 것이려니 여겼다.
"너도 사학을 하느냐?"
"그러하옵니다."
조선이는 가슴이 철렁했다. 고개를 돌려 옆을 보자 이창현이
포박을 당해 끓어 엎드려 있었다. 조선이는 갑자기 가슴이
컥하고 막히는 느낌을 느꼈다. 남편 이창현의 얼굴을 대하자
자신도 모르게 눈물이 비오듯이 흘러 내렸다.
2
비가 오고 있었다. 구류간의 앙상한 판자벽을 들이치며 봄비가
쏴아하고 내리고 있었다.
죄수들은 잠자리에서 일어나 눈을 뜨고 구류간의 창살 사이로
밤비가 내리는 것을 흐릿한 눈으로 내다보고 있었다. 비가 오고
있기 때문인지 땀 냄새와 비린내로 악취가 배어 있던 구류간의
탁한 공기가 한결 맑아진 듯했다.
조선이는 빗발이 구류간 판자벽을 들이치는 소리에 눈을 떴다.
한밤중이었다. 사방이 칠흑처럼 캄캄했다. 시간이 얼마나
되었는지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엉덩이와 정강이의 극심한
통증 때문에 잠이 들었다가도 눈이 떠지고, 눈이 떠졌다가도
자신도 모르게 잠이 들곤 했었다.
죽음 같은 밤이었다. 그러나 조선이 같은 사학 죄인들에게는
밤이 오히려 더욱 편안했다. 동헌에 끌려나가 모진 고문을
당하지 않아도 되고 잠시나마 잠이 들면 극심한 고통을 잊을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사흘째였다. 조선이는 동헌에 끌려나가 사흘째 태질을 당하고
주리가 틀렸다. 이제는 현감의 문초도 법국 신부가 어디
있느냐는 것 한가지뿐이었다.
조선이는 구류간에서 끌려나갈 때와 들어올 때면 옥졸들에게
부축을 당해야 했다. 혼자서는 똑바로 일어설 수도 없고 걸을
수도 없었다. 그러나 가장 견딜 수 없는 것은 옥순이와 옥희에
대한 생각이었다.
(아아, 이것들이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을까?)
조선이는 아이들 생각을 하면 가슴이 미어지는 것 같았다.
옥졸들에게 사정하여 남정네들 구류간에 갇혀 있는 남편
이창현에게 들은 얘기에 의하면, 남편 이창현도 아이들이 어떻게
되었는지 알지 못하고 있었다. 남편이 삼박골 강깔래 신부에게
달려갔다가 오자 집 안은 이미 풍지박산이 나 있었고 아이들은
보이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그는 오히려 아이들이 조선이와 함께
포졸들에게 끌려온 줄 알고 스스로 관아를 찾아왔다는 것이었다.
(경포의 말에 의하면 백곡에서 돌려 보냈다고 했는데.......)
아이들은 갈 곳이 없었다. 기껏해야 용진골 움막으로 되돌아
갔을 것이 분명했다. 그런데 어떻게 하여 남편과 아이들이
만나지 못했을까, 아이들이 혹시 길을 잘못 든 것이 아닐까.
백곡에서 길을 잘못 들면 배티리도 갈 수 있고 삼박골이나
정삼이골로도 갈 수 있었다.
(집에 돌아가 있었으면.......)
집에 돌아가 있으면 밖에서 비를 맞지 않아도 될 것이다.
이밤중에 산이라도 헤매며 비를 맞고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하자 가슴이 천 갈래 만 갈래 찢어지는 것 같아 조선이는 자신도
모르게 두 손을 모아 간구를 했다.
(천주님, 우리 아이들을 긍휼히 여기소서.......)
아이들 때문에 배교를 하고 싶은 생각이 문득문득 일어날 때도
있었다. 베드로도 예수님을 세 번이나 모른다고 하지 않았는가.
그런데 나 같은 하찮은 존재가 어떻게 천주님을 증거할 수
있겠는가. 그런 생각이 자꾸 머리 속에서 들고 일어나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런 생각이 일어날 때마다 조선이는 세차게
고개를 흔들어 그 생각을 뿌리쳤다.
남편 이창현도 가열차게 배교를 거부하고 있었다.
조선이는 다시 잠을 청했다. 내일이면 청주 감영으로
이송된다고 했다. 잠이라도 자두지 않으면 청주까지 끌려가는
일이 고달플 것이 틀림없었다.
아이들은 천주께서 잘 인도하실 것이다. 조선이는 그렇게
위안을 하고 잠을 잤다.
비는 이튿날까지 계속해서 내렸다. 조선이는 옥졸이 들이미는
식사 공궤를 마치고 구류간을 나왔다. 남자 구류간을 지날 때
옥졸들에게 사정을 하여 겨우 이창현과 몇 마디 얘기를 할 수
있었다. 이창현은 식사 공궤를 넣어 주는 옥문에 매달려 침울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여보!"
조선이는 옥졸들의 어깨에 부축을 당한 채 남편의 얼굴에 손을
가져 갔다. 남편도 가혹한 문초를 당해 봉두난발을 하고 있었다.
"슬퍼하지 마세요."
조선이는 어쩌면 이것이 남편과 마지막이 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슬퍼하지 않소."
남편이 침통하게 대꾸했다.
"아이들은 천주께서 보살펴 줄 거예요."
"나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소."
"당신을 위해 천주께 기도할께요."
"나두 당신을 위해 기도하겠소."
남편의 얼굴에 눈물이 주르르 흘러내렸다. 조선이는 목이 꽉
메어 왔다. 어느 사이에 조선이의 두 뺨에도 눈물이 주르르
흘러내리고 있었다.
옥졸이 걸음을 떼어 놓기 시작했다. 조선이는 손을 들어
남편의 얼굴을 다시 만진 뒤에 제 얼굴의 눈물을 닦았다.
이창현은 조선이가 옥졸들에게 이끌려 구류간을 나가자
구류간에 쓰러져 오열했다. 조선이는 얼마나 극심한 문초를
당했는지 허리가 빠져 제대로 걷지도 못하고 있었다.
그러나 눈물과 땟물로 얼굴이 범벅이 되었는데도 눈빛이
맑았다.
조선이는 그날 밤에 청주에 도착하여 청주 감영 구류간에
갇혔다. 진천에 우거를 타고 왔기 때문에 그나마 빨리 도착할 수
있었다.
청주는 일찍부터 충청북도를 다스리는 관찰사가 상주해 있었고
충청 감영으로 명칭이 바뀐 뒤에도 충청북도의 수도 역할을 한
탓에 각 지방의 중죄인들이 이곳으로 끌려와 사형선고를 받고는
했다.
조선이는 청주 감영에 끌려온 뒤 이틀 동안 아무 문초도 받지
않았다. 청주 감영의 구류간은 이미 천주교 교인들로 넘쳐나고
있었고, 그런데도 불구하고 교인들이 계속 이송되어 와서
관장들이 교인들을 문초하느라고 진저리를 치고 있었다. 이에
청주감영은 서교인들에게 배교할 것을 요구하여 배교하는 자는
놓아 보냈다. 그러나 배교를 하지 않는 자는 혹독하게 문초를
하여 옥사하게 하거나 서운동(西雲洞) 형장으로 보내어 죽였다.
조선이는 그곳에서도 배교를 하지 않아 다시 공주 감영으로
보내 졌다. 그리도 다음날 공주 감사 앞에서 문초를 받았다.
"네 이름이 무엇이냐?"
"조선이라 하옵니다."
"어디서 살았느냐?"
"여러 곳을 옮겨 다니면서 살아 딱히 어느 마을에서 살았다고
말씀을 올릴 수가 없습니다. 마지막으로 살았던 곳은 진천의
용진골이라는 곳입니다."
조선이는 또박또박 대답을 했다.
"어찌하여 한 곳에 붙어 살지 않고 이리저리 옮겨 다니며
살았느냐?"
"나라에서 성교를 사학이라고 금하고 있는 탓에 관가의
나졸이며 경군들에게 들키지 않도록 숨어 살아야 했기
때문이옵니다."
"허면 경군이나 나졸들이 나타날 때마다 정든 집을 버리고
유리걸식을 했다는 말이냐?"
"정녕 그러하옵니다."
감사가 낮게 한숨을 내쉬고 조선이를 측은한 듯이
내려다보았다.
"너의 아비가 누구냐?"
이윽고 감사가 다시 입을 열었다.
"아비의 이름은 백성 민(民) 자에 집우(宇) 자를 씁니다."
"아비는 무엇을 하는 위인이냐?"
"아비는 한때 덕산 현감을 지냈사옵니다."
"허먼 내가 덕산 현감을 지낸 조민우의 딸이냐?"
"그러하옵니다."
감사는 고개를 흔들며 혀를 찼다.
"네 아비는 학문이 높고 성품이 강직해 칭송을 받는 청백리가
아니었느냐? 내 일찍이 그를 흠모했거늘....... 그 여식이
혹세무인의 사학 죄인이라니 안타깝기 그지없구나......."
조선이는 비로소 고개를 들고 감사를 쳐다보았다. 그러나
감사의 얼굴을 본 기억이 전혀 없어 다시 고개를 숙였다.
"네 정령 서학을 하고 있느냐?"
"그러하옵니다."
"배교할 생각은 없느냐?"
"없사옵니다."
"네 본관은 어디냐?"
"풍양이옵니다."
"허... 그럼 조 대왕대비 마마와 같은 일문이 아니더냐?"
"그러하옵니다."
감사가 얼굴을 찡그렸다. 그는 낭패한 기색으로 입맛만 쩍쩍
다시고 있었다.
"내 다시 한 번 묻겠다. 정녕 배교할 생각이 없느냐?"
"없사옵니다."
"에이 고약한 일이로다. 어느 놈이 이 여인네를
잡아왔는고......?"
감사가 무슨 까닭인지 혀를 차고는 옆의 사령들을 불러
귓속말로 의논하였다. 그러더니 조선이를 다시 하옥시키라
명하였다.
조선이는 까닭을 알 수 없었으나 우선은 매를 맞지 않고
옥으로 돌아온 것이 다행스러웠다.
그날도 공주 감영에서는 교인들에 대한 혹형이 계속되었다.
옥과 감영이 담 하나 사이밖에 되지 않아 태질을 당하는 소리가
옥에까지 고스란히 들려왔다. 교우들은 그 처절한 비명소리가
들릴 때마다 자신이 당하는 것처럼 가슴이 뛰고 조마조마했다.
밤이 되었다.
조선이는 사학 죄인 조선이 나오너라, 하는 옥사장의 소리에
벌떡 일어나 옥을 나왔다.
"감사 나으리께서 특별히 내보내라고 당부하셨다. 네가 배교를
하던 하지 않던 상관하지 않을 터이니 충청도에서는 다시 잡혀
들어오지 말라고 하셨다."
옥사장은 조선이에게 돈까지 열 냥을 주었다.
"무슨 연유로 이런 은전을 베푸는 것입니까?"
"네가 풍양 조씨라고 하지 않았느냐? 풍양 조씨면 대대로
세도를 누린 명문인데다 지금도 위로는 대왕대비께서 계시고
정승 판서의 대열에 계신 분들이 여럿이니 감사께서 그를 감안한
것이다."
옥사장의 말이었다. 그러나 조선이는 감사가 자신의 성이
대왕대비와 같은 풍양 조씨이기 때문에 풀려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 때문에 석방되는 것이라는 사실을 눈치챘다.
조선이는 옥에서 무사히 풀려나긴 했으나 감회가 착잡했다.
무엇보다 진천 관가에서 옥고를 치르고 있을 남편을 생각하자
가슴이 미어지는 것 같았다.
그러나 아이들이 걱정이 되어 조선이는 공주에서 나와
공산성(公山城)을 넘어 조치원을 향해 걸음을 서둘렀다. 진천
관가와 청주 감영에서 모진 고문을 당해 제대로 걸을 수조차
없었으나 그래도 걸음을 서둘렀다.
공산성 앞의 황새바위는 공주 감영에서 사형 판결을 받은
죄수들이 죽임을 당하는 형장이었다. 그곳에서는 이미 수백 명의
교인들이 망나니의 검날 아래 죽음을 당해 그 앞으로 흐르는
제민천은 교우들의 피가 흘러 언제나 붉은 빛으로 흘렀다고
했다. 조선이는 공산성을 지나면서 저절로 고개가 수그러졌다.
죽음은 비참한 것이었다. 그러나 독실한 신앙을 갖게 되면
죽음이나 어떤 형벌도 두렵지 않게 되는데 조선이가 그랬다.
조선이는 진천 관가에 이를 때까지만 해도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을 정도의 신앙심을 갖고 있지는 못했었다.
그러나 진천 관가에서 수많은 교우들이 박해를 받으며
순교하는 모습을 생각하며 기도를 하자 자신도 모르게 가슴 속에
뿌듯하게 차오르는 것이 있었다. 그것은 진실한 신앙에 대한
확고한 믿음이었다. 조선이는 확고한 믿음이 자신의 가슴 속에서
움틈으로서 새로운 세계에 눈을 뜬 것 같았다. 마치 어둠 속에서
빛을 본 듯한 기분이었다.
조선이는 닷새 만에 진천에 도착했다. 도중에 우거를 세내어
타고 온 탓에 그다지 힘은 들지 않았다.
그러나 용진골은 이미 풍지박산이 나 있었다. 포졸 1백여 명이
양인 신부를 잡는다고 삼박골, 정삼이골, 용진골을 샅샅이
뒤지고 교인들을 잡아간 뒤로 외인들이 교인들의 재산을
약탈하고 불을 질러 시커먼 숯검정만 남아 있었다. 그것뿐이
아니었다. 교인들은 숯가마 속에 죽어 있기도 했고 옹기가마
속에 들어가 죽은 시체도 있었다. 어떤 시체는 밧줄로 온몸을
결박된 채 죽어 있었다. 외상(外傷)이 전혀 보이지 않는 것을
보면 그 시체들은 굶어 죽은 것 같았다.
(아아, 어쩌자고 이 나라에 이런 일이 일어나고 있는 것일까?)
조선이는 참담했다. 그러나 죽은 영혼을 위한 기도와 매괴
신공을 5단 바치고 시체들을 수습하여 매장하기 시작했다.
그러면서도 아이들의 시체를 찾아보았으나 다른 아이들의 시체는
두 구(具)가 있었지만 옥순이와 옥희의 시체는 보이지 않았다.
(우리 아이들은 어떻게 된 것일까?)
조선이는 이마에 흐르는 땀을 씻으며 산골짜기를
내려다보았다. 몸이 몹시 피곤했다. 그러나 해가 기울고 있어서
매장을 서두르지 않을 수 없었다. 옹기가마가 있어서 매장을
하는 도구는 많았다. 그러나 혼자서 하는 것이라 구덩이를 깊게
팔 수도 없고 시체를 옮기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었다.
조선이는 그날 밤 옹기가마 안에서 잤다. 밤이 되자 피 냄새를
맡은 산짐승들이 옹기가마까지 내려와 잠자리가 어수선했다.
조선이는 이튿날 정삼이골로 가보았다. 그러나 정삼이골에는
강깔래 신부와 교우들이 보이지 않았다. 외인들의 말에 의하면
포졸들이 들이닥치기 전 교인들이 모두 문경 새재 쪽으로 갔다고
하였다. 정삼이골도 포졸들이 들이닥쳐 큰 고난을 겪은 것
같았다.
조선이는 기진한 몸을 이끌고 배티 삼거리로 내려와서 인가에
들어가 아침을 구걸하여 먹고 진천읍을 향해 걸음을 떼어 놓기
시작했다. 남편과 아이들의 소식을 알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진천읍에 도착하기도 전에 조선이는 길가에 앉아서 쉬고 있던 한
떼의 포졸들과 마주쳤다.
"어디서 오는 길이냐?"
포졸들은 헤지고 흙먼지를 뽀얗게 앉은 조선이의 옷차림을
보고는 하나 둘씩 일어나서 조선이를 에워쌌다.
"용진골에서 오는 길이오."
조선이는 조용히 대꾸했다. 이제는 포졸들이 두렵지가 않았다.
"어디로 가는 길이냐?"
"진천 관아로 가오."
"우리 장부가 그곳에 갇혀 있소. 장부의 소식을 알려고 하오."
"네 장부가 무엇을 했기에 진천 관아에 갇혀 있느냐?"
"성교를 믿소."
"성교? 그럼 사학 죄인이 아니더냐?"
"그렇소."
조선이는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포졸들이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서로의 얼굴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그럼 너도 서학을 하고 있느냐?"
"그렇소."
포졸들이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포졸들은 저희들끼리 이마를
마주대고 저거 실성한 계집 아니야? 실성하긴...... 옷 입은
꼴이며 얼굴 좀 보라구. 실성하면 어때? 목사의 분부가 추상
같으나 저거라도 끌고 가세... 하더니 재빨리 조선이에게
달려들어 홍사로 포박해 버렸다.
홍주목(洪洲牧)의 포졸들이었다.
조선이는 홍주 포졸들에게 잡혀서 홍주로 끌려갔다. 홍주는
충청도 바닷가에 위치해 있었다. 포졸들이 우거를 빌렸지만
홍주까지 가는데 자그마치 나흘이나 걸렸다.
홍주 포졸들은 법국 신부가 진천에 있다는 소문을 듣고
달려왔다가 허탕을 치고 돌아가던 길이었다. 홍주 목사는 서학군
체포에 유달리 극성스러운 사람이었다.
조선이는 다음날부터 홍주 목사 앞에 불려 나가 혹독한 고문을
받았다. 홍주 목사의 문초는 두 가지뿐이었다. 하나는 배교를 할
것이냐였고 둘은 법국 신부가 어디 있느냐는 것이었다.
조선이는 어깨뼈가 부서지고 등뼈가 하얗게 드러났다.
허벅지는 살점이 너덜너덜해 질 정도로 쇠꼬챙이에 난자되었다.
(아아, 천주여 이 죄인을 긍휼히 여기소서.......)
조선이는 입술을 깨물며 울었다. 극심한 통증으로 배교한다는
말이 목구멍까지 올라오기도 했으나 그때마다 울음섞인 목소리로
천주성가를 불렀다. 이벽이 지은 천주공경가였다.
이와 세상 벗님네야
이내 말씀 들어보소
집안에는 어른 있고
나라에는 임금 있네
내 몸에는 영혼 있고
하늘에는 천주 있네
부모에는 효도하고
임금에는 충성하네
삼강오륜 지켜가자
천주공경 으뜸일세
이내 몸을 죽어서도
영혼 남아 무궁하리
인륜도덕 천주공경
영혼불멸 모르면은
살아서는 지옥이라
천주 있다 알고서도
불사공경 하지 마소
알고서도 아니 하면
죄만 점점 쌓인다네
죄 짓고도 두려운 자
천주 없다 시비 마소
아비 없는 자식 봤나
양지 없는 음지 있나
임금 용안 못 뵈었다
나라 백성 아니런가
천당 지옥 가보았나
세상 사람 시비 마소
있는 천당 모른 선비
천당 없다 어이 아노
시비 마소 천주공경
믿어 보고 깨달으면
영원 무궁 영광일세
영원 무궁 영광일세
밤에는 옥졸들이 조선이에게 학춤형을 가했다. 학춤형은
영조대왕이 국법으로 금지시킨 가혹한 형벌이었으나 옥졸들은
사사로이 그 짓을 계속하고 있었다.
학춤형이라는 것은 죄수의 옷을 벗긴 뒤 팔을 뒤로 묶고, 두
팔 사이에 굵은 밧줄을 넣어 죄수를 허공에 배달아 학(鶴)
모양이 되게 한 후 대나무 회초리로 사정없이 후려치는
고문이었다.
조선이도 그런 학춤형을 몇 번이나 되풀이 당한 뒤 구류간에
내던져졌다.
조선이는 오랫동안 구류간에 처박혀 있었다. 이따금
가느다랗게 신음소리를 내뱉고는 했으나 아무도 그녀를 돌보아
주지 않았다.
시간이 흘러갔다. 얼마나 많은 시간이 흘러갔는지 조선이는
알지 못했다. 어느 날 사람들이 웅성거리며,
"사학 죄인이 죽었소!"
"사학 죄인의 몸에 구더기가 들끓고 있소!"하는 소리가
귓전으로 희미하게 들렸다. 그러나 눈을 뜨거나 몸을 움직일
수가 없었다. 조선이는 자기 자신이 꿈을 꾸고 있는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옥졸들이 구류간으로 들어와 조선이에게 가마니를 덮어 씌우고
둘둘 말아서 홍주 읍성(邑城) 수구문 밖에 버렸다.
그날 밤 조선이는 그윽한 장미 향기 냄새를 맡고 눈을 떴다.
한밤중이었다. 하늘엔 별빛이 초롱초롱하고 바람이 훈훈했다.
싱그러운 흙냄새가 코 끝에 진동을 했다. 조선이는 가마니를
들추고 몸을 일으켰다. 멀리 홍주 읍성의 수구문이 보였다.
조선이는 홍주 읍성을 향해 걸음을 떼어 놓기 시작했다. 그때
기이한 일들이 일어났다. 그녀의 ㅆ은 몸에서 새 살이 돋아나기
시작하더니 구더기들이 후두둑 떨어져 나갔다.
조선이가 살아서 돌아오자 홍주목의 포졸들은 두려워하면서
조선이에게 접근하기를 꺼렸다. 조선이가 스스로 걸어서
구류간으로 들어갔다.
"예이 요사스러운 인간이구나!"
그 일은 홍주목사에게도 보고되었다. 홍주목사는 형방의
보고를 받자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고 있다가 형방이 자세한
보고를 하자 얼굴을 찡그렸다.
"형방이 직접 보았느냐?"
"예, 사학 죄인 조선이의 몸에 있던 상처까지 깨끗하게
아물었사옵니다. 포졸들이 두려워하면서 가까이 가기를 꺼리고
있사옵니다."
"그것이 잡술을 부린다는 말이냐?"
"잡술인지는 알 수 없사오니 사학 죄인의 몸에서 기이한
향기까지 풍기고 있사옵니다."
"그래?"
홍주목사는 고개를 갸우뚱했다.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을 하다가 몸소 구류간에 가서 확인해 보기로
하였다.
"음......."
형방의 얘기대로였다. 홍주목사는 구류간에 석상처럼 단정하게
앉아 있는 조선이의 몸에서 기이한 향기가 풍기는 것을 느꼈다.
조선이는 깨끗했다. 며칠 전까지만 해도 뼈가 드러나고 살점이
찢어질 정도로 혹독한 고문을 받은 조선이의 몸이 상처 하나
없이 아물어 있었다.
(괴이한 일이로다.......)
홍주목사는 낮게 신음을 삼켰다.
"듣거라!"
그러나 홍주목사는 구류간을 나오자 형방에게 단호한 목소리로
지시했다.
"사학 죄인 조선이가 잡술을 부리는 것이 틀림없구나.
명일오시에 사형 판결을 받은 다른 죄수들과 함께 대들보형으로
처형하라!"
"예."
형방이 떨리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대들보형(刑)은 병인박해 때 천주교 신자들을 사형시키는 일이
너무 많아 집행하는 일이 번거로워지자 대들보 형틀이라는 크고
무거운 형구를 만들어 한꺼번에 여러 사람이 두부(頭部)를 때려
죽이는 잔인한 사형법이었다.
3
사학 죄인들의 머리에 대들보 형구가 떨어질 때 옥년은 눈을
질끈 감았다. 끔찍했다. 비명소리도 없었다. 퍽하는 소리가
들렸을 때는 구경꾼들마저 숨을 죽이고 있었다.
"가지."
박달이 옥년이 소매를 잡아 끌며 낮게 속삭였다. 옥년은 눈을
뜨고 대들보 형틀을 보았다. 사학 죄인들의 머리 위에 대들보
형구가 떨어져 있었고, 그 밑으로 피가 낭자하게 흐르고 있었다.
옥년은 재빨리 손으로 입을 틀어막고 고개를 돌렸다. 피비린내가
역하게 풍기면서 구역질이 올라올 것 같았다.
"가자니까."
박달이 옥년을 재촉했다.
포졸들은 대들보 형구를 치우고 사학 죄인들의 시체를
거적때기에 둘둘 말아서 소달구지에 싣고 있었다. 홍주 읍성
수구문 밖에 버리려는 것이다.
"어서 가자니까."
박달이 짜증스러운 말투로 옥년을 재촉했다. 옥년은 소달구지
밑으로 흘러내리는 핏물을 응시하다가 형장을 나왔다. 홍주목
동헌 뜰에는 아직도 다섯 명의 사학 죄인들이 홰나무에 묶인 채
사형을 기다리고 있었다. 대들보 형틀에 의해 한꺼번에 사형을
당할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아름드리 홰나무 밑에서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교난 피해 이리저리 떠돌던 몸이
천주 은총 충만하여 화관을 쓰네
옥년은 그들의 노래 소리가 쟁쟁하게 귓전을 울리고 있는 것
같았다.
(도대체 천주학이 무엇이길래 저들은 죽음조차 두려워하지
않는 것일까?)
옥년은 서학군들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들은 대부분 각
관아에서 모진 고문을 받아 배교를 하거나 사형을 당하거나
선택을 해야 했다. 배교자들도 헤아릴 수없이 많았으나 끝끝내
배교하지 않고 죽음을 택하는 서학군들도 수없이 많았다. 옥년은
처음에 고문을 감당하지 못해 배교하는 자들이 기쁘고, 배교를
하지 않아 사형을 당하는 사람들이 불행한 사람들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생각이 점점 달라지고 있었다. 기이하게
배교하는 자들이 초라해 보이고 사형을 당하는 자들이 더 당당해
보였다.
배교자들은 거의 모두 어깨를 축 늘어뜨리고 돌아갔다.
어떤자는 석방되자 마자 천주님을 배신했다면서 땅을 치고
통곡을 하기까지 했다.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이었다.
"주막에 가서 술국이나 뜨고 진천으로 가자구."
홍주목 관아를 나서자 박달이 장터 쪽으로 옥년을 잡아
끌었다. 옥년은 박달에게 이끌려 한갓진 주막으로 들어갔다.
"여기 술 한 됫박하고 국밥 두 그릇 말아 주시오."
박달이 술청의 평상에 올라앉고 주모를 향해 호기 있게 소리를
질렀다. 박달은 포졸이 되고, 장 포교를 따라다니며 재물을
적몰한 탓에 돈이 많았다. 돈이 많자 사람도 당당해 지고
있었다.
"임자도 한 잔 받아."
옥년은 대꾸하지 않았다. 기분이 이상했다. 자꾸 대들보
형구에 머리가 으깨어져 죽은 조선이의 얼굴이 떠올라 왔다.
탁주가 나오자 박달이 제 잔에 먼저 탁주를 따르고 옥년의
잔에도 가득 부었다. 안주는 푸성귀 한 접시였다.
"어째 심사가 울적해 보이네."
옥년은 박달의 말에 대꾸하지 않고 탁주 사발을 들어 반쯤
마신 뒤 입가를 훔쳤다.
"달거리를 하나?"
"뜬끔없이 달거리는... 달거리 끝난 지 얼마나
되었다구......."
옥년이가 눈을 흘겼다.
날씨가 더욱 따뜻해 지고 있었다. 며칠 전만 해도 집집마다
복사꽃이며 살구꽃이 흐드러지게 피고, 바람이 불 때마다 꽃들이
자욱이 날리더니 어느 사이에 봄꽃이 모두 지고 잎사귀들이
무성해 지고 있었다. 봄은 오는가 했더니 어느새 가고 있었다.
논에서는 벌써 써레질이 끝나 흰 옷을 입은 농부들이 모내기를
하는 곳도 있었다.
(인생이 남가 일몽이라고 하더니.......)
옥년은 탁주 사발을 들어 벌컥벌컥 마셨다.
남가 일몽(南柯一夢)은 중국 당나라 때 이공좌(李公佐)가 지은
소설 남가기(南柯紀)에서 유래한 말이었다. 당나라의
순우분이라는 사람이 어느 따뜻한 봄날 느티나무 밑의 남쪽 가지
밑에서 낮잠을 자다가, 꿈에 괴안국(槐安國) 왕의 사위가 되어
온갖 부귀영화를 누렸는데 잠을 깨었더니 한낱 꿈이었다는
줄거리였다. 일장춘몽(一場春夢)이라고도 했다.
"술이 고팠나?"
박달이 옥년을 넌지시 쳐다보았다. 옥년은 제 잔에 탁주를
따랐다. 이내 국밥이 나왔다. 박달은 국밥에 고춧가루까지
듬뿍쳐서 땀을 뻘뻘 흘리며 먹었으나 옥년은 국밥을 뜨는 둥
마는 둥하고 탁주만 세 사발을 들이켰다.
홍주에서 진천으로 가는 것은 예산과 온양을 거쳐 가는 것이
지름길이다. 옥년은 박달과 함께 넓은 신작로를 걸어서 길을
떠났다. 이제는 발바닥이 길 떠나는 일에 익숙해 있어 고달프지
않았다.
그날 저녁 그들은 예산에 도착했고, 다음날은 온양, 그
다음날은 안성에 이를 수 있었다. 안성은 예로부터 배가
유명했다. 안성 초입에 들어서자 가장 늦은 봄꽃인 배꽃이
집집마다 만개해 있었다.
옥년과 박달은 안성 장터 주막에 유숙했다. 박달과 둘이 앉아
술을 마시고 객방에 들어가 잠을 잤다. 이튿날 옥년과 박달은
아침 일찍 주막을 나서서 걸음을 재촉했다.
날씨가 궂었다. 비가 오려는지 하늘이 낮고 찌뿌퉁했다.
그러나 빗발은 그들이 진천 관내에 들어서기도 전에 후두둑대기
시작하였다. 살매 들린 바람이 밭머리의 미루나무 잎사귀를
검푸른 빛으로 흔들어댔다.
"어허, 이거 꼼짝없이 비를 맞게 생겼네."
박달이 사방을 휘둘러보며 걱정스러운 투로 말하였다.
"농사 짓는 사람들이 얼마나 좋아할까."
옥년은 빗발이 떨어지는 하늘을 쳐다보며 대꾸했다. 비가
세차게 쏟아졌으면 싶었다. 무엇인가 가슴 속에 더부룩하게 자리
잡고 있는 것이 비에 씻겨 내려갔으면 싶었다.
"뛰어서 갈까?"
"숨차게 뛰긴 왜 뛰누?"
"그럼 비가 장해 질 것 같은데 고스란히 맞을 거야?"
"비 맞으면 몸도 깨끗해 지고 좋지. 어젯밤에 보니 니놈
몸에서 고약한 냄새가 나더라. 겨우내내 씻지 않았으니 비 맞고
좀 씻으렴."
옥년은 파안대소하며 농을 하였다.
"이년아, 네년 배꼽에도 때가 끼었더라."
박달도 실실 웃으며 농을 던졌다.
빗발이 점점 굵어지더니 하얗게 장대질을 하기 시작했다. 진천
읍내가 내려다보이는 재에 올라섰을 때에는 옥년과 박달의 옷은
걸레처럼 흠뻑 젖었다.
"이러고 있으니 우리가 꼭 비 맞은 생쥐 꼴이구나."
옥년과 박달은 바위 밑에 나란히 웅크리고 앉았다.
"생쥐나 되면 다행이게."
"그럼 생쥐도 못 된단 말이야?"
"생쥐거녕 벌레만도 못한 것 같다."
옥년이 어깨를 부르르 떨며 대꾸를 했다.
"추우냐?"
"이르다 뿐이니?"
"옷을 벗어서 짤까?"
"짜면 뭘하니? 도루 맞을 텐데......."
"그럼 그냥 내려갈까?"
"흥, 계집이 춥다는데 고작 그 말밖에 못하니?"
"그럼 어떡하란 말이냐?"
"에라, 이 숙맥아."
옥년이 팔꿈치로 박달의 옆구리를 내질렀다. 박달이
어이쿠하며 옆으로 나동그라졌으나 싫은 내색을 하지 않았다.
오히려 옥년의 엎에 바싹 다가와서 옥년을 냉큼 안았다.
"아이고 차가워라."
박달이 몸을 부르르 떠는 시늉을 했다.
"차갑기는!"
옥년이 눈을 흘겼다.
"어디?"
박달의 손이 옥년의 치맛자락을 들쑤시고 허벅지로 기어
들어왔다. 옥년은 얼굴을 붉히며 박달의 샅으로 손을 가져 갔다.
"이게 누구 해니?"
"내 몸에 달렸으니 내 해지."
"어찌 니 해니 내 해지. 이놈은 내 속에 들어와야 제 구실을
하니 내 해다......."
박달이 쿨쿨대고 웃었다. 옥년은 박달의 무릎 위로 제
엉덩이를 올려놓으며 눈을 질끈 감았다. 비가 점점 장하게
퍼붓고 있었다.
옥년과 박달이 진천 읍내에 도착한 것을 그날 밤이
늦어서였다. 옥년과 박달은 주막의 객방 하나를 얻어 누웠다.
박달은 국밥에 술 한 되를 마시고는 금방 쓰러져 잠이 들었다.
옥년은 잠이 오지 않아 엎치락뒤치락했다. 비는 말짱하게 개어
있었다.
(우리네 삶도 한낱 버러지에 지나지 않아, 바람이 불면
먼지처럼 날아갈 인생이라고 하더니.......)
그 말은 조선이의 남편 이창현이 한 말이었다. 그들이 믿는
천주교의 욥기에 나오는 말이라는 것이었다.
"인생은 땅 위에서의 고역이요, 그의 생애는 품꾼의 나날 같지
않은가? 달마다 돌아오는 것은 허무한 것일 뿐, 고통스러운
밤만이 꼬리를 문다네. 누우면 언제나 이 밤이 새려나 하고
기다리지만, 새벽은 영원히 올 것 같지 않아 밤이 새도록
뒤척거리기만 하는데, 나의 몸은 구더기와 때로 덮이고 나의
살갗은 굳어졌다가 터지곤 하네. 나의 나날은 베틀의 북보다 더
빠르게 덧없이 사라지고 만다네. 잊지 마십시오. 이 목숨은 한낱
입김일 뿐입니다. 그의 수명은 하루살이와 같은데도 꽃처럼
피어났다가는 쓰러지고 그림자처럼 덧없이 지나갑니다."
욥이라는 서양사람이 마귀에게 시험을 당할 때 친구가
빈정거리자 친구에게 대답 겸 천주에게 기도를 한 것이라고
하였다. 옥년이는 어쩐지 이창현의 말이 가슴을 치는 것 같았다.
우리네 인생은 그의 말처럼 한낱 입김에 지나지 않고 하루살이와
비교해 무엇이 다르겠는가. 그런 생각을 하자 자신이 살아
있다고 해도 살아 있는 것처럼 여겨지지 않았다.
옥년은 성이 없었다. 아버지가 누구인지 모르는 탓에 성을
붙일 수가 없었다.
어머니는 백치였다. 먹고 자고, 나이가 든 뒤에는 남자들의
노리개 짓밖에 한 것이 없었다. 먹는 것도 대부분 버럭질을 해서
먹었고 잠은 등걸잠을 잤었다. 그것은 버러지나 다름없는
인생이었다.
옥년의 삶도 어머니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어머니가 콩과
보리를 구별하지 못한다고 하여 숙맥으로 불리었으나 옥년은
글자를 아는 것이 없었다. 그녀가 알고 있는 것은 음식과 술,
따뜻한 잠자리와 남자뿐이었다. 어머니와 다른 것이 별로
없었다.
(우리네 인생은 정녕 무엇인가?)
옥년은 처음으로 인생에 대해 깊게 생각해 보았다. 무엇인가
사람을 나게 하고 죽게 하는 것이 있을 것 같았다. 그러나
그것이 무엇인지 알 수 없었다. 옥년은 앞치락뒤치락 하다가
새벽녘에야 겨우 잠이 들었다.
이튿날 아침 일찍 옥년과 박달은 진천 관아를 찾아갔다.
옥년은 새 옷을 갈아 입고 머리를 빗어 가르마를 곱게 탄 뒤
비녀를 꽂았다. 박달도 깨끗한 옷으로 갈아 입었다.
날씨는 화창했다. 비에 씻긴 산과 들이 초록빛으로 선연했다.
"이 사람 경포 박달이 아니야?"
"경포는 무슨 경포......? 신관 사또께서 잡아들이라는
작자야."
"맞아. 신관 사또께서 연놈을 잡아들이라고 하지 않으셨나?
여보게들 이 연놈을 놓치지 말고 잡게."
그러나 그들이 진천 관아에 이르자 피수를 서던 포졸들이
저희들끼리 한참을 수군거리다가 갑자기 우르르 달려들어 옥년과
박달을 포박했다.
"아니, 왜들 이러시오? 나는 우포도청 포졸이요."
박달이 어리둥절하여 포졸들에게 항의했다.
"신관 사또의 추상 같은 분부시네."
"신관 사또?"
"그래. 구관은 파직이 되고 신관 사또께서 사흘 전에
부임하셨네."
"그런데 왜 우리를 묶는 거요?"
"동헌으로 가보면 알게 되겠지."
포졸들은 다짜고짜 옥년과 박달의 등을 떠밀고 동헌으로 끌고
갔다. 동헌엔 이른 아침인데도 천주학쟁이들에 대한 문초가
살벌하게 진행되고 있었다.
"우포도청 포졸 박달과 그의 처 옥년이 대령이요!"
포졸들이 옥년과 박달을 끓어앉히고 현감에게 보고를 했다.
"여봐라. 저 연놈에게 각기 볼기 30대씩을 쳐라!"
현감은 신문도 하지 않고 명을 내렸다. 포졸들이 또다시
우르르 달려들어 옥년과 박달을 형틀에 묶고는 철썩철썩 볼기를
치기 시작했다. 옥년은 온몸을 비틀며 소리를 지르고
울부짖었으나 소용이 없었다. 포졸들의 태질은 그녀의 펑퍼짐한
엉덩이를 사정없이 내리치고 있었다.
(아이구, 이게 무슨 날벼락이람.......)
옥년은 엉덩이의 살점이 터지고 피가 튀었다.
"열 대요!"
포졸들이 일제히 소리를 지르며 태질의 숫자를 세는 소리가
그때서야 뚜렷이 들렸다. 태질은 계속되었다.
"스무 대요!"
옥년은 입술을 깨물며 으으하는 신음소리만 흘렀다. 스무 대가
넘어서자 제 정신이 아니었다.
"서른 대요!"
포졸들이 일제히 소리를 질렀다. 태질이 멎었다. 옥년은
신음소리를 내뱉으며 울었다. 엉덩이의 살점이 너덜너덜하게
찢어져서 피가 흘러 내리고 있었다. 가랭이가 끈저거렸다.
"죄인 박달은 우포도청 포졸을 사칭하여 죄 없는 양민을
함부로 죽이고 재산을 적몰하여 그 민폐가 막심하니 진천 관내의
백성들 원성이 하늘을 찌를 듯하였다. 황공하옵게도 나랏님께서
이 일을 근심하시니 어찌 신료된 자로서 방관할 수 있겠는가.
이에 죄인 박달을 일벌백계의 교훈으로 삼고저 명일 오시에 진천
장터에서 참수할 것이니 관내 백성에게 두루 알려 구경하도록
해라."
청천벽력 같은 명령이었다. 옥년은 눈앞이 캄캄해 져 왔다.
"예!"
포졸들이 일제히 대답을 했다.
"형방은 죄인 박달의 참수 준비를 차질없이 하고 옥사장은
박달을 하옥해라."
"예!"
옥년은 가까스로 정신을 수습하여 박달이 묶여 있는 형틀을
돌아다보았다. 포졸들이 축 늘어진 박달을 형틀에서 끌어내리는
것이 보였다. 박달은 태질 때문에 정신을 잃었는지 포졸들이
떠메다시피하여 구류간으로 끌고 가고 있었다.
(아, 이게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일까?)
옥년은 형틀에 묶인 채 머리를 흔들었다. 마치 꿈을 꾸고 있는
기분이었다.
"그 계집의 이름이 무엇이라 하느냐?"
"옥년이라 하옵니다."
형방이 대답을 했다.
"아비는 누구냐?"
"아비가 누구인지도 모른다고 합니다."
"누군지도 몰라?"
"예."
"아비가 누군지도 모르다니... 버러지보다 못한 인생이
아니냐?"
"그러하옵니다."
"고약한 일이로다. 사람이 저를 낳아 준 아비의 이름도
모른다니 동방예의지국에서 어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느냐?"
현감이 혀를 찼다. 옥년은 얼굴을 찡그렸다. 아비가 누군지
모르는 것은 그녀의 탓이 아니었다. 그러나 버러지보다 못한
인생이라는 현감의 말이 비수처럼 가슴을 찔러대는 것 같았다.
"여봐라!"
"예!"
"저 년은 불학무식한 계집이니 하옥시킬 필요없다! 버러지를
참수시켜 어디에 쓰겠느냐? 볼기를 30대 쳤으니 관가 밖으로
내쳐라!"
"예!"
포졸들이 우르르 달려들어 옥년을 형틀에서 끌어내렸다.
옥년은 엉덩이가 쓰리고 화끈거리는 것을 느끼며 똑바로
일어서려고 했다. 그러나 몸이 말을 듣지 않아 그대로 풀썩
꼬꾸라졌다.
"어서 끌어내라!"
형방이 포졸들을 재촉했다. 그러자 포졸들이 옥년의 어깨
한쪽씩을 잡고는 관아문 밖으로 질질 끌고 나갔다.
옥년은 포졸들에 의해 진천 동헌 밖에 내던져진 뒤에도 한참
동안이나 그대로 엎드려 있었다. 비참했다. 엉덩이의 고통보다도
아비가 누구인지도 모르는 자신의 처지, 버리지보다 못한
인생이라는 현감의 말이 가슴을 후벼 파고 있었다.
옥년은 소리를 내어 울었다.
(어머니는 나에게 왜 아버지의 성조차 가르쳐 주지 않았을까?)
옥년은 입술을 깨물었다.눈물이 주르르 쏟아지고 있었다.
옥년은 기다시피하여 주막으로 돌아와 누웠다. 내일은 박달이
참수형을 당한다고 생각하자 가슴을 저미는 것처럼 아팠다.
박달은 그녀의 남자였다. 배운 것도 없고 가진 것도 없어 이년아
저년아 하고 드잡이질을 하고 지냈었다. 그것이 박달이 나름의
애정 표현이었다. 그 소리를 두번 다시 듣지 못하게 된다고
생각하자 옥년은 다시 눈앞이 부옇게 흐려지며 눈물이 쏟아졌다.
밤이 왔다. 옥년은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박달이에게 좀 더 다정스럽게 굴 것을 그랬다는 후회가
일어났다. 그녀가 박달이에게 이놈아 저놈아 하고 걸핏하면
욕지거리를 내뱉은 것도 후회스러웠다.
박달이가 미워서 그런 말을 내뱉은 것은 결코 아니었다.
박달이를 그녀는 진심으로 사랑했다. 술청에서 논다니 짓을 할
때도 언제나 박달이 생각만 했었다.
그런데 박달이 참수형으로 죽음을 당하게 되는 것이다.
원래 참수형은 감영이 있는 곳에서 하는 것이 원칙이었다.
그러나 어쩐 일인지 진천 현감은 관내 장터에서 참수형을
집행하겠다고 선언을 한 것이다. 한성에서 박달을 참수형에
처하라는 지시가 내려온 것이 분명했다.
옥년은 새벽녘에야 잠깐 잠이 들었다. 그러나 날이 번하게
밝자 주모에게 탁주 한 사발을 청하여 마신 뒤 장터로 갔다.
박달의 관이라도 마련해야 했다. 그녀는 비틀대는 걸음으로
장터를 돌아다니기 시작했다. 무엇부터 해야 할지 막막하기만
했다.
다행히 목수간이 장터 외진 곳에 있었다. 옥년은 돈을 후하게
주고 관을 맞춘 뒤 소달구지도 하나 빌렸다. 그렇게 소달구지를
빌린 다음에는 대장간에 가서 삽과 곡괭이를 샀다.
(이제 준비는 다 되었어.......)
옥년은 낮게 한숨을 내쉬었다.
장터 네거리에는 벌써 사람들이 꾸역꾸역 모여들고 있었다.
날씨가 화창했다. 농번기라 일손들이 바빴으나 장터에서
참수형을 집행한다는 소문이 퍼져 나가자 사람들이 구름떼처럼
몰려들었다.
"우리 인간은 흙에서 나왔으니 흙으로 돌아가는 것이오."
사학 죄인 이창현의 말이 또다시 가슴에 절절하게 와닿았다.
사람들이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리더니 한 떼의 포졸들이
몰려와 네거리에 진을 쳤다. 형틀이 준비되고 언월도를 든
회자수의 모습도 보였다. 회자수는 눈이 부리부리하고 수염이
더부룩했다. 눈빛은 쏘는 듯이 강렬했다.
네거리에 높직한 단이 만들어졌다. 사형을 집행하는 관리가
앉는 자리였다.
다시 사람들이 웅성거리더니 말을 탄 현감이 포졸들을 이끌고
나타났다. 그는 융복에 붉은 주립을 쓰고 큰 칼을 옆에 차고
있었다. 형방과 함께 현감이 단 위의 의장에 올라가 앉아
포졸들이 질서정연하게 그의 옆에 시립했다.
태양이 뜨거워지기 시작했다. 옥년은 군중들 틈에 섞여 임시로
마련된 형장을 바라보았다. 이내 한 떼의 포졸들에게 둘러싸여
박달이 끌려나오기 시작했다. 사람들이 웅성거리며 혀를 찼다.
박달이 웃통을 벗겨져 있고, 양쪽 겨드랑이에 긴 장대를 넣어
묶고, 포졸 둘의 앞뒤에서 그 장대를 자신들의 어깨에 메고 오고
있었다. 박달의 양쪽 귀에는 화살이 꽂혀 있었다. 박달은 눈빛이
흐릿하여 이미 정신이 나가 버린 것 같았다.
(아.......)
옥년은 눈을 질끈 감았다가 떴다. 포졸들이 박달을 형장에
내려놓고는 꿇어앉혔다. 형방이 단 위에 서서 무엇인가 큰
소리로 판결문을 읽기 시작했다.
포졸들이 형방의 판결문 읽기를 기다려 박달의 머리를 잡아
당겨 목을 길게 늘어뜨리고, 회자수가 박달의 얼굴에 회를 뿌린
뒤 덩실덩실 춤을 추었다. 사람들은 숨을 죽이고 있었다.
회자수는 탁주를 입에 가득 물고는 언월도에다 푸우하고 내뱉은
뒤 다시 형장을 돌면서 춤을 추었다.
옥년은 시야가 암암했다. 태양은 중천에 있었다. 희디흰
햇살이 깃발처럼 형장에 하얗게 나부꼈다.
그때 공기가 파르르 몸을 떨었다. 사람들의 입에서 탄성 같은
한숨소리가 새어 나오고 회자수의 언월도가 박달의 목 위로
떨어졌다. 피는 새빨갰다. 사람들은 눈을 가렸고 몸소리를 쳤다.
갑자기 오한이 사람들의 어깨 위로 엄습해 왔다.
그 뒤론 조용했다. 기묘할 정도로 사방이 조용한 가운데
어디선가 낮닭이 홰를 치는 소리가 들렸다. 옥년은 그때서야
흐릿하던 사물이 뚜렷하게 시야에 들어왔다.
"다 되었사오이다."
포졸들이 목청을 높여 소리를 질렀다. 그 소리가 끝나자 포졸
하나가 소반에 박달의 머리를 얹고 나무 젓가락 두 개를 받쳐
현감에게 가져 가 보았다. 현감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죄인의
죽음을 확인하는 절차였다.
현감과 형방이 포졸들에게 둘러싸여 돌아가기 시작했다.
(아!)
옥년은 숨이 컥하고 막혔다. 가슴이 답답해 울음조차 나오지
않았다. 사람이 이토록 허무하게 죽을 수 있는 것일까. 이것은
꿈이지 현실이 아니야... 옥년은 그렇게 생각했다.
사람들이 박달의 몸통을 들어서 관에 실었다. 쟁반에 얹혀
있던 머리도 관 속에 함께 넣었다.
(만약에 천주님이라는 분이 계시면 이 사람을 천국으로 데리고
가소서.......)
옥년은 마음 속으로 그렇게 빌었다. 그리고 그때서야 옥년은
눈물이 주르르 쏟아졌다.
"이제 갑시다."
소달구지의 주인이 얼굴을 찡그리고 옥년에게 말했다. 옥년은
고개를 끄덕거렸다.
"이랴!"
소달구지가 장터를 떠나기 시작했다. 옥년은 삐걱거리는
소달구지를 따라 절룩대며 걸음을 떼어 놓기 시작했다. 흰 옷을
입은 사람들은 그때서야 장터에서 흩어지고 있었다.
4
진천 현감 이명세(李明世)는 동헌 마루에서 담장 쪽을
우두커니 쳐다보고 있었다. 그는 담장 앞에 휘휘 늘어진
수양버들이 석양빛을 받아 연두빛으로 살랑거리는 것을 보고
낮게 한숨을 내쉬었다.
진천에 신관 사또로 부임한 지 사흘, 처음으로 백성들을
토색질한 우포도청 포졸 박달을 처형하고 난 뒤라 기분이
개운하지 못했다. 그의 나이 이제 27세, 왕가의 성씨를 갖고
있는 전주(全州) 이씨들만이 볼 수 있는 종친과(宗親科)에
급제한 뒤 처음으로 얻은 벼슬 자리였다.
종친과의 시관은 위인이 몽롱하여 어(魚)와 노(魯)를 구분하지
못한다는 흥인군(興寅君)과 이최응(李最應)과 영의정을 지낸
심순택(沈舜澤)이었다. 그들은 여러 번 명관(命官)에 임명
되었는데 연로하여 문권을 잘 구분하지 못해 재수가 좋은 사람은
합격하고 재수가 나쁜 사람은 떨어졌다. 그래서 두 사람이
과거를 주재하면 학문이 짧은 사람들은 서로 좋아서 날뛰었다.
나라에서 통과(統科)를 실시하려면 이 두 사람을 명관에
임명했고 공정한 과거를 실시하여 인재를 뽑으려면
김병시(金炳始)와 김홍집(金弘集)을 썼다. 김병시는 공정한
사람이었고 김홍집은 당대의 문장가였다. 평안감사를 지낸
박규수(朴珪壽)도 이따금 누구의 솜씨인지 알아 맞추어 사람들을
놀라게 하였다.
종친과도 일종의 통과였다. 통과는 벼슬길에 올리기 위해
사람을 정해 놓고 보는 과거로 초시(初試)엔 1만 냥에
매관매직이 이루어졌으나 종친들은 돈을 내지 않고도 과거에
합격하여 벼슬길에 나아갔다. 대원군은 척족정치에 환명을 느낀
나머지 전주 이씨라면 멀고 가까움을 떠나 통과를 보게 하여
벼슬 자리를 주고 있었다.
이명세도 종친인 탓에 통과를 보고 벼슬길에 나설 수 있었고
첫 부임지가 진천이었던 것이다.
진천 현감은 파직한 것은 진천 현감이 우포도청 포교와
결탁하여 진천군 배티 일대의 서학 교인들을 습격, 교인들을
신문도 하지 않고 닥치는 대로 죽이고 재산을 빼앗은 탓이었다.
포졸들은 서학 교인들뿐이 아니라 일반 백성들까지 마구 죽이고,
돈을 빼앗은 뒤 불을 질러 원성을 높았다. 그러잖아도 포졸들이
서학군을 잡는다는 핑계로 백성들을 수탈하여 백성들이
농사철인데도 불구하고 농사를 짓지 않고 포졸들만 피해
다니느라고 전전긍긍하고 있었다.
대원군은 이 사실을 알게 되자 대노하여 백성들을 수탈한
포졸들을 가려 목을 베라 명을 내린 뒤 진천 현감을 파직했던
것이다. 우포도대장은 자신의 수하인 포교와 포졸들이 백성들을
수탈했다는 사실이 밝혀지자 때마침 서학군들을 잡아 한성으로
압송한 장두식 포교를 문초하였다. 그리고 진천 배티 일대에서
백성들을 주살한 자가 박달이라고 대원군에게 보고했던 것이다.
자신의 수하인 포교까지 사건에 관련되었다면 대원군에게 문책을
당할 것이 분명했기 때문에 박달이 우포도청 포교를 사칭했다는
거짓 보고를 했던 것이다.
이명세는 박달의 끔찍한 죽음을 생각하고 얼굴을 찡그렸다.
박달의 처형은 우포도대장의 강력한 지시에 의한 것이었다.
죄인을 사형시킬 때는 문초를 한 뒤 본적지의 감영으로 보내어
사형에 처하는 것이 관례였으나 박달은 읍의 장터에서 참수를
당했다. 그것도 우포도대장의 지시에 의해서 한 일이었다.
(그런데 이 일을 대원군에게 상주했다는 계집아이는 누굴까?)
배티에서의 학살이 대원군에게 알려진 것은 여덟 살 난
계집아이에 의해서라고 하였다. 그 아이의 이름은 이옥순, 사학
죄인의 딸이라고 했으나 국법에 어린 아이를 벌주지 않게 되어
있어 형벌도 받지 않았다고 하였다. 배티 용진골에 살고 있는
계집아이였다.
(그런데 그 아이가 어떻게 한성까지 가서 대원군에게 이 일을
알린 것일까?)
이명세는 이해가 되지 않았다. 진천에서 한양까지는 3백 리
길이 넘는 먼 길이었다. 그 길을 여덟 살 난 어린 계집아이가
갔다는 것이 이해가 되지 않았다.
"사또."
그때 포졸 하나가 황급히 동헌으로 달려와 머리를 조아렸다.
"무슨 일이냐?"
이명세는 동헌 마루에 양반다리를 하고 앉아서 포졸을
건너다보았다.
"계집아이 하나가 아문 밖에서 사또 뵙기를 청하고
있사옵니다."
"계집아이?"
"예."
"무슨 일로?"
"사학 죄인인 아비와 어미의 소식을 알고 싶다고 하옵니다."
"몇 살이나 되어 보이느냐?"
"여덟 살쯤 되어 보입니다."
"음."
이명세는 낮게 신음을 토했다. 여덟 살이라는 말에 대원군에게
포졸들의 만행을 상주한 계집아이의 이름이 뇌리를 스쳤기
때문이었다.
"데리고 들어오너라."
"예."
포졸들이 새삼스럽게 머리를 조아리고 물러갔다. 이명세는
포졸들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응시하다가 고개를 흔들었다.
이옥순이라는 계집아이가 벌써 한성에서 내려왔을 리가
없으리라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이내 포졸이 계집아이를 데리고 동헌으로 들어왔다. 이명세는
계집아이를 유심히 살펴보았다. 계집아이는 여덟 살이라고는
하지만 조숙해 보였다. 검정 치마와 흰 저고리는 황토 먼지가
더덕더덕 묻어 있어 오랜 시간 동안 길을 왔음을 알 수 있었다.
"사또, 사학 죄인 이창현의 딸 이옥순이 문안드리옵니다."
계집아이가 맨 땅에서 큰 절을 했다. 뜻밖에 절을 하는 태도가
의젓하여 진천 현감 이명세는 내심 긴장하였다.
"나를 보자고 했다고?"
"그러하옵니다."
"무슨 연유로 나를 보자고 했느냐?"
"사학 죄인인 아비와 어미를 방면해 주십사고 왔사옵니다."
"네 아비와 어미가 어찌 되었기에......?"
"아비와 어머는 포졸들에 의해 여기 진천 관아로
끌려왔습니다."
계집아이는 목소리가 또렷했다.
"네 어미의 이름이 무엇이냐?"
"조선이라 하옵니다."
"네 식구는 그뿐이냐?"
"동생이 하나 있었는데 죽었사옵니다."
계집아이의 얼굴에서 갑자기 눈물을 주르르 쏟아졌다.
"무슨 연유로?"
"지난 달 포졸들이 용진골을 습격하여 어미를 잡아갈 때
동생이 울자 시끄럽다고 목을 졸라 죽였사옵니다."
"그 말이 정녕 사실이냐?"
"그러하옵니다."
"그 포졸의 얼굴을 아느냐?"
"깜깜한 밤중이라 모르옵니다."
"음."
이명세는 자신도 모르게 눈을 질끈 감았다. 잔인한
놈들이었다. 그때 포졸이 동헌 마루로 가까이 올라와 계집아이의
어미 조선이는 홍주까지 끌려가 대들보 형틀로 죽고 아비
이창현은 청주 감영에서 사형 판결을 받은 뒤 공주 감영에서
죽음을 기다리고 있다고 은밀히 속삭였다.
"한성까지는 어떻게 하여 다녀왔느냐?"
"갈 때는 걸어서 갔사옵고 올 때는 대원군께서 친히 노자를
주시어 말을 세내어 타고 왔사옵니다."
"대원군께서 친히 노자를 주셨다고?"
"그러하옵니다."
"무슨 말씀을 하시며 주시더냐?"
"어린 것이 무슨 죄가 있겠느냐, 사학이 나쁘다... 하고
말씀하셨사옵니다."
"너도 사학을 하느냐?"
"그러하옵니다."
"네 아비와 어미를 만나고 싶으냐?"
"예."
"네 아비와 어미는 사학 죄인이다. 네 어미는 이미 홍주옥에서
처형을 당해 죽었다."
계집아이의 눈에서 또다시 눈물으 주르르 쏟아졌다. 이명세는
낮게 신음을 내뱉고 계집아이를 쏘아보았다. 계집아이는
한참동안이나 서럽게 울다가 그치고 이마와 양쪽 어깨에 십자
표시를 그렸다.
"지금 한 짓이 무엇이냐?"
"성호경이라 하옵니다."
"왜 그것을 하느냐?"
"돌아가신 어머니가 천당 진복을 누리기를 기도하는
것이옵니다."
"천당이 있다고 생각하느냐?"
"소녀는 믿사옵니다."
"음."
"소녀의 아비는 어찌 되었사옵니까?"
"네 아비는 공주 감영에서 사형을 기다리고 있는 처지다.
그래도 만나겠느냐?"
"예."
이명세는 난처했다.
"제 아비를 만날 수 있는 길을 가르쳐 주십시오."
"네 아비는 이미 사형 판결을 받았다. 지금쯤은 이미 형이
집행되었을지도 모른다."
이명세는 계집아이를 지그시 쏘아보았다. 아이가 영특하기도
했지만 기묘한 분위기가 느껴지고 있었다.
"우포도대장께서 사또께 드리라는 서찰도 가지고 왔사옵니다."
"서찰을?"
이명세는 가슴이 철렁했다.
"네가 우포대장을 만났느냐?"
"예."
"우포도청에 갔었느냐?"
"우포대장이 운현궁에 오셨사옵니다."
"어디 꺼내 보아라."
계집아이가 가슴 속에서 누런 서찰 하나를 꺼냈다. 포졸이
계집아이에게 가서 서찰을 받아서 이명세에게 올렸다. 이명세는
떨리는 손으로 그것을 받아서 펴들었다. 나는 새도 떨어뜨린다는
우포대장의 서찰이었다.
이 서찰을 가지고 가는 여아를 소문없이 죽이도록 하라.
이것은 대원위저하의 분부시다.
진천 현감 이명세는 서찰을 읽고 얼굴을 찡그렸다. 우포대장이
계집아이를 죽여 없애라고 명을 내린 것은 대원군으로부터
명령을 받은 것 같았다. 이명세는 자신도 모르게 소름이 오싹
끼쳤다.
"이 서찰의 내용이 무엇인지 아느냐?"
"모르옵니다."
"이 서찰의 내용은 너를 아비가 있는 공주 감영까지 데려다
주라는 것이다. 내일 아침 일찍 포졸들을 시켜 공주 감영까지
데려다 줄 터이니 오늘은 주막에 가서 쉬도록 해라."
이명세는 거짓말을 했다.
"예."
계집아이가 이명세에게 허리를 깊숙이 숙인 뒤 동헌 뜰을
걸어나가기 시작했다. 진천 현감 이명세는 포졸을 불러 귓속말로
계집아이 뒤를 따라가 주막을 알아낸 뒤 한밤중에 죽여 없애라고
명을 내렸다.
"알겠느냐? 실수 없이 죽여야 하느니라."
"예."
포졸이 황급히 고개를 숙이고 계집아이 뒤를 따라나갔다.
이명세는 그들이 동헌 뜰에서 보이지 않자 지고 있는 서쪽
하늘로 우울한 시선을 보냈다. 기분이 울적했다. 이명세는
대원군의 차가운 눈빛을 생각하자 가슴이 서늘해 져 왔다.
대원군은 한 번 결심을 하면 질풍노도처럼 밀어붙이는
인물이었다. 서월 철폐, 경복궁 중건, 천주교 탄압 등 일단 칼을
뽑으면 주저함이 없었다.
진천 현감을 파직하고 우포도청 포졸을 참수하라는 명을 내린
것은 그다운 짓이었다. 여덟 살 어린 계집애가 사학 죄인인
아비와 어미를 살려 달라고 대원군에게 상주(上奏)했을 때
관용을 베푸는 체하고는 내막적으로 그 계집아이를 죽이라고
명을 내린 것이다.
대원군의 명을 거역할 수 없는 일이었다. 이미
'대원위분부'라는 한마디는 조선팔도를 벌벌 떨게 하고 있었다.
옥년이 박달의 시체를 산에 묻고 주막으로 돌아온 것은 밤이
이슥했을 때였다.
옥년은 박달의 시체를 산에 묻고 나서도 한동안 그 자리를
떠날 수가 없었다. 박달의 죽음이 거짓말 같기만 했다. 그러나
엉성하게 만들어진 박달의 봉분, 박달의 관을 묻을 때 그녀의
옷에 묻은 붉은 핏자국이 박달의 죽음을 새삼스럽게 일깨워 주곤
하였다.
소달구지를 끌던 인부가 돌아가고, 봉분이 다 만들어지자
옥년은 박달의 봉분 앞에 쓰러져 목을 놓아 울었다. 어머니가
죽었을 때보다도 더 크고 진한 슬픔이 가슴 밑바닥에서 목을
타고 올라왔다. 옥년은 목이 붓도록 울었다. 그리고 그렇게
울다가 기진하여 봉분 앞에 쓰러져 잠이 들었다.
옥년이 잠이 깬 것은 기온이 내려가 몸이 선뜩선뜩해 지는
것을 느끼고서였다. 눈을 뜨자 사방이 캄캄했다. 그녀는 몸을
일으켜 사방을 휘둘러보았다. 밤이슬이 축축하게 내리는 가운데
어디선가 접동새가 피를 토하듯이 울고 있었다. 의붓어미 시샘에
죽은 소녀가 새가 되었다는 전설을 갖고 있어서인지 접동새
울음소리가 온 산을 찌렁찌렁 울리고 있었다.
(이젠 산을 내려가야 해.......)
옥년은 박달의 무덤을 향해 두 번 절을 했다. 박달의 무덤을
두고 차마 걸음이 떨어지지 않았으나 억지로 진천 읍내를 향해
어기적어기적 걸음을 떼어 놓았다.
그녀가 유숙한 주막엔 어린 소녀가 먼저 방을 차지하고 잠들어
있었다. 옥년은 주모에게 탁주를 한 사발 청해 마시고 방에
들어가 누웠다. 방에서 자고 있는 소녀가 누구인지 알고 싶지도
않았고, 방에 불을 켜놓지 않아 얼굴을 볼 수도 없었다.
(허망해, 모든 것이 허망해.......)
잠이 오지 않았다. 박달의 웃는 얼굴만 자꾸 눈에 선했다.
박달이 금방이라도 이년아, 하고 소리를 지르며 방으로 들어설
것 같기도 했고 박달이 옆에 누워 코를 골면서 잠을 자고 있는
듯한 생각도 들었다.
접동새 울음소리는 주막의 방에서도 들렸다.
옥년은 잠을 이루지 못했다. 술청에 나가 주모를 깨워 다시
탁주 한 사발을 더 마시고 방으로 들어와 누웠다. 그러자 다시
눈물이 쏟아졌고 박달을 생각하다가 깜박 잠이 들었다.
옥년은 치맛자락이 끌리는 듯한 소리를 비몽사몽 중에 들었다.
얼핏 눈을 뜨자 치맛자락이 눈앞을 지나가면서 기이한 꽃향기가
풍겼다. 그녀는 벌떡 몸을 일으켰다.
(내가 잘못 보았나?)
그러나 옥년이 벌떡 일어났을 때는 방 안에 아무도 없었다.
사방이 칠흑처럼 캄캄하기만 했다. 옥년은 다시 몸을 눕히고
눈을 감았다. 사람이 기운이 쇠해 지면 헛것이 보인다고 하더니
자신이 헛것을 본 모양이라고 생각했다.
그때 또다시 기이한 꽃향기가 풍겨 왔다. 옥년이 번쩍 눈을
뜨자 하얀 옷을 입은 여인이 어둠 속에 조용히 서 있었다.
(아!)
옥년은 가슴이 쿵쾅거리고 뛰었다. 무엇 때문인지 알 수
없었다. 여인은 세상 어떤 여자보다도 존엄해 보이고 있었다.
마치 천상의 여인 같았다. 다만 알 수 없는 것은 여인의 눈에서
한 줄기 눈물이 흘러 내리고 있었다.
그때 여인의 모습이 시야에서 사라졌다.
(귀신이 조화를 부리나?)
옥년은 사방을 휘둘러보며 몸을 부르르 떨었다. 갑자기
뒤통수가 서늘했다. 그때 술청에서 인기척이 들렸다. 옥년은
바짝 귀를 기울였다. 그러나 금세 인기척이 조용해 지면서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옥년은 다시 눈을 감았다.
시간이 얼마나 되었는지 알 수 없었다. 접동새 울음소리도
그친 것을 보면 삼경(三更)에 이른 것 같았다. 사방은 조용했다.
옆에서 잠을 자는 아이의 숨소리가 규칙적으로 들렸다.
그때 방문이 조심스럽게 열렸다. 옥년은 눈을 게슴츠레하게
뜨고 방문이 있는 쪽을 쏘아보았다. 돈은 이제 20전 쯤 남아
있을 뿐이었고 침입자가 그녀의 몸을 겁간한다고 하더라도
두렵지 않았다. 남자라면 이골이 날 정도로 상대한 옥년이었다.
그러나 옥년은 자신도 모르게 목침으로 손을 가져가 움켜
쥐었다.
사내가 방으로 들어섰다. 사내는 어둠이 눈에 익기를
기다리는지 한동안 우두커니 서 있었다. 옥년은 잠이 든
체하느라고 숨을 고르게 했다.
사내가 몸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사내는 벽 쪽에 떨어져 누운
아이에게로 접근하고 있었다.
(왜 저러지?)
옥년은 의아했다. 아이는 네 활개를 펴고 자고 있었다. 사내가
아이를 향해 몸을 웅크렸다. 그때 갑자기 아이가 숨이 막히는
듯이 괴로워하기 시작했다. 입에서 끅끅하는 신음소리가 새어
나오고 다리를 버둥거렸다.
(아!)
옥년은 깜짝 놀랐다. 사내가 아이의 목을 조르고 있었다.
옥년은 자신도 모르게 벌떡 일어나서 목침으로 사내의 뒤통수를
후려쳤다. 사내가 아이쿠 하면서 방바닥으로 나뒹굴었다.
"불이야! 불이야!"
옥년은 사내가 일어나려고 하자 재빨리 악을 쓰고 소리를
질러댔다. 사내가 벌떡 일어나더니 옥년의 가슴팍을 발길로
내지르고 후다닥 달아났다. 옥년은 사내가 달아난 뒤에도 계속
소리를 질렀다. 그때서야 사람들이 웅성거리며 옥년의 방으로
달려왔다.
"대체 무슨 일이오?"
"아닌 밤중에 불이 나다니 무슨 소리요?"
"도적이 들었어요. 아이를 죽이려고 목을 졸랐어요."
사람들이 웅성거리더니 등잔불을 켰다. 아이는 소리 죽여 울고
있었다.
(어떻게 이런 일이.......)
불빛에 드러난 아이의 얼굴을 보자 옥년은 가슴이 천 갈래 만
갈래 찢어지는 것 같은 기분이 되었다. 아이는 그녀로 인해 진천
관아에 끌려가고 결국은 홍주목에서 대들보 형틀에 의해 사형을
당한 이창현과 조선이의 딸 이옥순이었다.
(무엇이 이렇게 우리의 운명을 실타래처럼 엉키게 하는
것일까?)
사람들이 어떻게 된 영문이냐고 재촉을 했을 때야 옥년은
가까스로 정신을 수습하고 괴한이 침입한 사실을 얘기했다.
사람들은 반신반의하면서 혀를 차기도 하고 웅성거리기도 하면서
밖을 내려다보았다. 그러나 밖에 아무 인적이 없다고 하면서
각자의 방으로 돌아갔다.
옥년은 망연했다.
옥순도 옥년을 망연히 쳐다보고 있었다.
이내 옥순이 괴나리 봇짐을 챙기기 시작했다.
"어디로 갈려고 그러니?"
옥년은 그때서야 옥순에게 질문을 던졌다. 괴나리 봇짐을
챙기는 옥순의 행동이 괴이했다.
"충청도 바닷가로 가요."
"거기는 왜?"
"모르겠어요. 성모님께서 그리고 가라고 하셨어요."
"성모님이 누군데?"
옥순이 옥년을 물기 젖은 눈으로 쳐다보았다. 옥년은 그
시선을 대하자 가슴이 찌르르 울렸다.
"외인은 얘기해도 몰라요."
옥순이 괴나리 봇짐을 어깨에 짊어졌다.
"그럼 이 밤중에 길을 떠난단 말이니?"
"지금 떠나지 않으면 누가 또 나를 죽이러 올 거예요."
옥순이 밖으로 나가 짚신짝을 발에 꿰었다. 옥년이 보고
있으려니 옥순은 안에 들어가 주모를 부른 뒤 밥값이 얼마냐고
물었다. 주모도 놀라서 이 밤중에 어디로 가려느냐, 날이 새면
떠나거라 하고 만류했으나 옥순은 듣지 않았다. 주모는 마침내
옥순에게 밥값을 받지 않고 떠나 보내며 봇짐 속에 주먹밥까지
두 덩어리 싸서 넣어 주었다.
옥년은 어이가 없었다. 마치 귀신에 홀린 듯한 기분이었다.
그러나 다음 순간 옥년은 재빨리 길 떠날 차비를 시작했다.
"아이고 오늘은 귀신이 조화를 부리나? 왜 밤중에 떠나는
사람들이 이리 많누......?"
옥년이 길 떠날 행장을 차리고 주모를 부르자 주모가 앞가슴을
여미며 얼굴을 찡그리고 나타났다.
"밥값이 얼마에요?"
"길 떠나시게?"
"예."
"괴이쩍기도 하지. 밤중에 줄줄이 길을 떠나니......."
"얼마에요?"
"돈은 관두구 그냥 걸음이나 재촉해요. 댁두 가슴에 피멍이
맺혔을 텐데......."
주모가 혀를 찼다.
"고맙습니다."
옥년은 고개를 숙여 인사를 하고 주막집을 나섰다. 옥순을
따라잡는 것은 금방이리라고 생각했다. 무엇 때문에 길을 떠나는
것인지, 무엇 때문에 옥순을 따라잡아야 하는 것인지는 알 수
없었다.
주막집을 나서서 안성 쪽으로 방향을 잡아 길바닥에 달빛이
사금파리 조각처럼 하얗게 깔려 있었다. 옥년은 달빛을 밟으며
걸음을 재게 놀렸다.
진천 관내를 벗어나기 바로 전에 괴나리 봇짐을 지고 타박타박
걸어가는 옥순이 보였다. 옥년은 걸음을 더욱 서둘렀다.
옥순이 뒤를 돌아다보며 걸음을 멈추었다.
"어디로 가세요?"
"모르겠어, 그냥 길을 나선 것뿐이야."
"아저씨가 죽은 거 알아요, 주막에서 다 들었어요......."
옥년이 걸음을 떼어 놓기 시작했다. 옥년도 옥순과 보폭을
맞추며 걷기 시작했다. 뿌연 달빛이 신비스럽게 흐르는 산골짝
어디에선가 또 접동새가 울고 있었다.
"저 새 이름을 아세요?"
"접동새래. 의붓어미 시샘에 소녀가 피를 토하고 죽었는데 그
자리에서 핏빛처럼 붉은 진달래가 피고 소녀는 새가 되어 이 산
저 산 옮겨 다니며 저렇게 슬피 운다는 거야."
"우리도 죽으면 저렇게 새가 되겠군요."
옥년은 옥순의 말에 가슴에 묵지근한 통증이 느껴졌다. 그래,
우리도 죽으면 저렇게 새가 되는 걸 꺼야. 산 사람이 보고
싶어서, 죽음이 억울해서 이 산 저 산 옮겨 다니며 피를
토하듯이 우는 걸 꺼야......."
옥년은 목이 메어 왔다.
진천 관내를 벗어나자 재가 나타났다. 박달과 함께 안성에서
비를 맞으며 넘어오던 영마루였다.
"너 이름이 무어니?"
옥년은 고갯길을 오르기 시작했다.
"이옥순."
"내가 누군지 아니?"
"알아요. 경포들하고 같이 다니던 아줌마예요."
옥년이 눈을 질끈 감았다가 뗐다. 옥순은 옥년이 누군지 알고
있었다. 그런데도 아무 내색도 하지 않고 달빛을 도와 밤길을
가고 있는 것이다.
"내가 무섭지 않아?"
"무섭지 않아요."
"내가 너를 죽일지도 모르는데?"
"모든 것은 천주님 안배하시기에 달렸어요."
"천주님?"
"그분은 우주 만물 삼라만상의 창조주예요. 그분의 섭리에
따라 우리는 살고 죽는 거예요."
"그럼 너희 서학군들이 포졸들에게 끌려가 도륙을 당하는 것도
천주님 뜻이란 말이니?"
"네."
"천주님은 어째서 그 많은 사람을 죽게 놔두시는 것이니?
서학군들은 모두 천주님의 백성이라며?"
"그래요. 모두 천주님 백성이죠. 천주님은 조선에서 더 큰일을
하시기 위해 시련을 주시는 거예요. 조선은 복 받은 나라가 될
거라고 강깔래 신부님께서 말씀하셨어요."
"조선이 복 받은 나라가 된다고......."
"이 땅에서 수많은 성인들이 태어날 거라고 하셨어요."
"성인이 뭔데?"
"성인은 살아 있을 때 신덕을 높이 쌓았거나 순교를 한 뒤에
일정 기간이 지나면 복자 품에 오르게 되고, 복자 품에 오른
뒤에 다시 일정 기간이 지나서 공적이 인정되면 로마 교황청에서
성인 품에 올려요. 성인 품에 오르는 것은 천주교인으로서 가장
영광스러운 일예요."
"성인이 되면 뭐가 좋은데......?"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게 되죠, 성인들의 전구로써 미천한
백성들이 구원을 받게 되구요."
옥년은 옥순의 말이 전혀 이해가 되지 않았다.
"넌 말을 참 잘하는구나."
"난 내 입으로 말하는 것이 아니에요. 내가 하는 말은 성령의
은총으로 하는 거예요."
"성령?"
"이따금 내 몸 가득히 성령을 느낄 때가 있어요. 우리가 지금
온몸으로 달빛을 밟고 걷고 있듯이......."
안성에 이르렀을 때는 날이 번하게 밝아 오고 있었다. 옥년과
옥순은 안성읍을 지나 냇가에 앉아 주먹밥 한 덩어리씩을 먹은
뒤 다시 길을 재촉했다. 옥순은 청주로 가자고 했으나 충청도
바닷가로 가려면 평택과 온양을 거쳐 예산, 홍주로 가야 한다는
옥년의 말을 듣고는 그렇게 하기로 하였다.
평택에 이른 것은 그날 밤이 캄캄해 졌을 때였다. 옥년과
옥순은 주막에 들지 않고 인가의 헛간을 빌려 잠을 잤다.
옥순은 잠자리에 들기 전 무릎을 꿇고 앉아서 오랫동안 기도를
했다. 옥년은 옥순이 하는 짓을 물끄러미 바라보기만 했다.
옥순은 먼저 괴나리 봇짐에서 십자고상(十字苦像)을 꺼내어
눕혀 놓고 제 이미와 양쪽, 그리고 가슴을 찍어 성호를 그은 뒤
매괴 구슬을 꺼내어 중얼중얼 기도를 시작했다. 그 기도는 거의
두 식경(食頃)이나 걸렸다.
이튿날 그들은 아침 일찍 길을 떠났다.
"나 같은 사람도 성교를 믿을 수 있니?"
옥년은 그날 밤 점심때가 되어서야 옥순이에게 넌지시 말을
붙였다.
"성교는 누구나 믿을 수 있어요."
"그럼 성교를 믿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지?"
"교리를 배워야 해요."
"난 언문도 모르고 죄를 많이 지었어."
"죄는 회개하면 돼요."
"회개?"
"자기가 지은 죄를 진심으로 성찰하고 다시는 그런 짓을 안
저지르는 거예요."
"그러면 용서받을 수 있어?"
"용서받게 될 거예요."
"너두 나를 용서할 수 있니?"
"전 이미 용서했어요."
"내가 니 어머니를 죽게 했는데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가 모두 용서하라고 그러셨어요."
"니 동생도 나 때문에 죽은 거나 마찬가지잖아?"
"내 동생을 위해서 기도를 해주세요."
옥순의 눈에서 눈물이 주르르 흘러 내렸다. 옥순이 옥년을
용서한다고는 하지만 감정을 다스리기가 어려운 것 같았다.
"다리 아프지 않아?"
"아퍼요. 인간은 누구나 오욕칠정을 느끼니까요."
"난 네 말이 점점 어렵게 들리는구나."
"쉬었다 가는 게 좋겠어요."
옥순이 길섶의 자갈더미에 털썩 주저앉았다. 옥년도 옥순의
옆에 앉았다. 화창한 날씨였다. 늦은 봄의 볕이 멀고 가까운
산과 들에 제법 따갑게 쏟아지고 있었다. 곧게 뻗은 한길에는
잎사귀가 무성한 미루나무가 한가롭게 녹향을 뿜고 있었다.
들판에는 군데군데 모를 내는 농부들도 보였다.
"충청도 바닷가에 가서 어떻게 할 꺼니?"
옥년은 다리를 주무르며 옥순을 물끄러미 건너다보았다.
"모르겠어요. 성모님이 인도해 주실 거예요."
옥년은 씁쓸하게 웃었다. 옥순의 행동거지가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점심은 다행히 논둑에서 얻어 먹을 수 있었다. 남정네들이
점심을 먹고 논둑에 앉아서 곰방대를 물고 있을 때 옥년과
옥순은 아낙네들에게 먼 길을 가는 길이라고 사정을 말하면 밥이
남으면 조금만 달라고 했던 것이다. 아낙네들은 옥년과 옥순에게
장정 밥그릇으로 한사발씩을 퍼주었다.인심이 후했다.
그날 저녁 그들은 천안에 도착했다. 그들은 천안에서는 주막에
들었다. 옥순은 그날 밤에도 잠자리에 들기 전 기도를 했다.
옥년은 돌아 누워서 옥순이 기도를 하는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처음엔 무슨 소리인지 잘 알아 들을 수 없었다. 그러나 오랫동안
귀를 기울이자 옥순이 같은 주문을 반복하고 있는 것을 알게
되었고 가만가만 따라하자 옥년도 기도 한가지를 외우게 되었다.
은총이 가득하신 마리아여
기뻐하소서
주께서 함께 계시니
여인 중에 복되시며
태중에 아들 예수 또한
복되시도다
천주의 성모 마리아여
이제와 우리 죽을 때에
우리 죄인을 위하여 빌으소서
성모송(성모頌)이라는 기도였다.
이튿날 길을 걸으면서 옥년은 가만히 그 기도를 외워 보았다.
옥순이처럼 이마와 양쪽 어깨, 그리고 가슴을 찍어 십자 표시도
그려 보았다.
"칼은 칼인데 날이 없구나."
그때 옥순이 깔깔대고 웃으며 보았다.
"그게 무슨 소리니?"
옥년은 어리둥절하여 옥순을 보았다.
"옛날에 어떤 외인이 밤중에 공동묘지를 지나게 되었대요.
비가 부슬부슬 오는 밤이었죠. 한참 가는데 뒤통수가 선뜩하고
누가 따라오는 것 같더래요. 그래서 뒤를 돌아보니까 어떤
여자가 하얀 옷을 입고 펄럭펄럭 쫓아 오더래요. 그래서 이
사람은 겁이 덜컥나서 도망을 치다가, 천주교 사람들이 십자
성호를 긋는 것을 생각하고 재빨리 성호를 그었대요. 그러자
하얀 옷을 입고 펄럭거리며 따라오던 귀신이 칼은 칼인데 날이
없구나 하면서 돌아가더래요."
"그래서?"
"이 사람이 십자 성호를 그은 것은 귀신에게서 칼이 되는
셈이에요. 그러나 십자 성호를 그을 때는 성호경을 외워야
하는데 성호경을 외우지 않았으니 칼은 칼이지만 날이 없는 칼이
된 셈이죠."
"너 아는 것이 참 많구나."
"우리 신부님께 들은 얘기예요."
옥순이 웃었다.
그들은 밤에 온양에 도착했다. 그들이 공주 감영의 파옥(破獄)
소식을 들은 것은 이튿날 길을 떠나기 위해 주막에서 나섰을
때였다. 온양 읍내가 포졸들에 의해 발칵 뒤집혀 있었다.
포졸들은 집집마다 돌아다니며 파옥을 하고 달아난 사학
죄인들을 잡으려고 혈안이 되었고 곳곳에 방(榜)이 나붙어
있었다.
5
이(李)리텔 신부가 조선이의 딸 이옥순과 옥년을 만난 것은
공주의 진밭"長田"이라는 산골에서였다.
이리텔 신부와 권(權)페롱 신부는 병인박해가 시작되자 곧바로
진밭의 산골 교우촌으로 숨어 가까스로 박해를 피할 수 있었다.
그러나 고생은 막심했다. 교우촌은 인가가 불과 네 집밖에
없었고 두 신부가 숨어 살던 집은 과부 혼자서 여섯 아이를
카우는 가난한 집이었다. 게다가 양력 5월로 접어 들며 가뭄이
계속되어 먹을 것이 없었다. 교우들은 풋보리를 베어 죽을 끓여
신부들에게 대접했다. 그러나 외국 신부들은 풋보리죽을 먹고
영양실조에 걸려 쓰러지고 말았다. 외국 신부들은 풋보리죽만은
먹기가 어려웠다.
교우들은 남은 것을 모두 팔아서 쌀 두 말을 사다가
신부들에게 먹게 하여 겨우 회복시켰다.
이리텔 신부는 파리 외방전교회 소속으로 1830년 7월 20일에
출생하여 1859년 7월 29일에 외방전교회로 들어간 뒤 1860년 7월
29일에 파리를 떠나 조선에 들어와 활약하고 있었다. 그때
조선에 들어와 있던 파리 외방전교회 소속의 신부는 모두
12명이었는데 9명이 순교하여 3명만 남아 있었다. 강깔래 신부는
진천 삼박골에 숨어 있다가 포졸들이 들이닥치자 문경 새재
쪽으로 피신한 뒤에 다시 삼박골에 들어와 숨어 있었다. 그는
진밭골 교우촌에 숨어 있던 이리텔 신부의 연락을 받고 밤길을
달려 공주로 와서 두 신부와 해후하게 되었다.
옥순은 강깔래 신부를 보자 울면서 그의 발에 엎드려
친구(親口)했다.
"천주의 안배하심이로다."
강깔래 신부는 옥순이 살아 있는 것을 보고 감동에 젖어서
옥순을 안아 일으켰다. 강깔래 신부는 진천 삼박골에 숨어
있으면서 교인들을 통해 조선이의 비참한 죽음과 그의 딸 옥희의
죽음을 들어서 알고 있었다.
"그래 어떻게 하여 이리텔 신부님을 만났느냐?"
강깔래 신부의 물음에 옥순은 울면서 서울로 대원군을 찾아
갔던 일, 우포도대장의 서찰을 가지고 진천 현감을 만난 뒤 밤에
주막에서 괴한의 침입으로 목이 졸려 죽을 뻔한 일을 모두
얘기했다.
"진천 현감이 파직을 당했다더니 너로 인하여 그리된
것이구나."
"그런데 괴한이 왜 저를 죽이려 했는지 모르겠사옵니다."
"그 편지가 우포도대장이 준 것이 아니더냐? 편지의 내용을
읽어 보았느냐?"
"봉인한 편지라 읽어 보지 않았습니다."
"아마 그 편지에 너를 죽이라고 씌어 있었을 것이다."
강깔래 신부는 깊은 탄식을 했다.
"그런데 어떻게 하여 여기까지 왔느냐?"
"진천 주막에서 잘 때 꿈에 성모 마리아께서 충청도 바닷가로
가라고 하셨습니다. 저는 그 말씀을 듣고도 몹시 피곤하여
말씀대로 따르지 않았는데 밤에 괴한이 제 목을 눌러 죽이려고
했습니다. 저는 그때서야 비로소 성모 마리아의 말씀을 듣지
않아 일어난 변이라고 깨달았습니다. 그리하여 괴한이 물러가자
밤길을 도와 이리로 왔습니다."
"정녕 천주께서 너를 돌보시는구나."
강깔래 신부는 옥순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그는 가슴이
뻐근하고 눈시울이 뜨거웠다. 이처럼 감동적인 말을 그는 일찍이
경험한 일이 없었다.
"이리텔 신부는 어떻게 만났느냐?"
"저희는 바닷가로 간다는 것이 길을 잘못 들었습니다.
그리하여 공주에 이르렀는데 그만 여기까지 오게 되었습니다. 이
아래 교우의 집 헛간을 빌려 잠을 잤는데 우리를 수상하게 여긴
교우가 밤중에 우리를 영탐하다가 제가 매괴 신공을 드리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래서 그 교우의 안내로 이리텔 신부님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강깔래 신부가 잠자코 고개를 끄덕거렸다. 기묘한 해후였다.
그날 밤 세 신부는 중요한 회의를 했다. 그들은 조선에
있어서의 가혹한 박해를 알리고 9명의 신부가 순교한 탓으로
새로운 신부들을 보내 줄 것을 파리 외방전교회에 청하기 위해
신부 한 사람을 청국으로 파견하기로 결정했다. 그리하여 주교와
부주교가 이미 순교한 탓에 수석 신부의 위치에 있던 권페롱
신부의 지시에 의해 이리텔 신부가 청국으로 떠나게 되었다.
그러나 문제는 바다를 건너는 데 필요한 배였다.
옥년은 신자들의 비난을 받고는 떠나갔다. 강깔래 신부가
회개하는 자는 모두 예수의 제자라고 말하였으나 신자들은
옥년을 죽이려고까지 하였다. 옥년은 결국 울면서 진밭을
떠났다.
밤새 세 신부는 미사를 집전했다. 그들은 조선에서의 박해를
끝내 줄 것과 순교한 영혼들이 천국에 들어가게 해달라고
미사중에 간절히 기도했다. 아울러 청국에 갈 수 있는 배를
마련해 달라는 기도도 했다.
그 무렵엔 경복궁의 대화재로 대원군은 모든 배를 징발하여
경복궁 중건에 필요한 자재를 나르는 데 사용하고 있었다. 또
외인들과 함부로 교섭할 수도 없는 처지였다. 다행히 그때
한성의 잔혹한 박해를 피하여 살아 남은 몇몇 교우들이 이
사실을 청국에 알리고자 배를 준비해 놓고 있다는 소식이
들렸다.
신부들은 한성으로 교인을 보내어 한편 배의 비용을
준비하라고 교인들에게 지시했다.
6월 29일 마침내 모든 준비가 되자 이리텔 신부는 신부들과
작별한 뒤 옥순을 데리고 길을 떠나게 되었다. 그들은 밤에만
길을 걸어 온양을 거쳐 8일 만에 방하실골에 이르렀다. 포졸들은
사방에 널려 있었고 기찰도 엄격했다. 그러나 11명의 용감한
교인들이 목숨을 버릴 각오를 하고 이리텔 신부를 호위하여
해안에 도착해 배에 탈 수 있었다.
그 배는 아주 작은 배였다. 배는 널판지와 나무 못으로
만들어졌고 갈대풀을 엮어 돛으로 삼고, 닻줄도 짚을 엮어서
꼬은 새끼여서 이리텔 신부는 그 배로 과연 청국까지 갈 수
있을지 걱정이 되었다. 항로를 알 수 있는 것은 기껏해야 조그만
나침반 하나뿐이었다. 이리텔 신부는 배가 조선 연안을 벗어날
때까지 사흘 동안이나 배 밑창에서 숨어서 지냈다.
배는 마침내 섬과 섬 사이를 돌아서 큰 바다로 나섰다.
망망대해였다. 이리텔 신부는 비로소 갑판에 서서 떠나온 조선
땅을 돌아보았다.
감개가 무량했다. 이제 조선을 떠나면 다시 돌아올 수 있을 지
알 수 없는 일이었다. 그것은 옥순도 마찬가지였다. 옥순은
입술을 지그시 깨물고 조선 땅을 지켜보고 있었다.
이리텔 신부는 옥순을 북경의 한 천주교회에 보내어 수녀회에
입회시킬 작정이었다. 만약에 그것이 뜻대로 이루어져 옥순이
수녀가 된다면 조선에서 최초의 수녀가 되는 영광을 안게 될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 천주께서는 옥순의 가족에게 온갖 시련을
주고 옥순을 혈혈단신으로 만들어 청국으로 가게 하는 것이
아닐까. 이리텔 신부는 그런 생각을 했다.
"옥순아."
이리텔 신부는 옥순의 어깨에 가만히 손을 얹었다.
"네?"
"너는 장차 어떻게 할 생각이냐?"
"아직 생각을 한 일이 없습니다. 돌아가신 어머니와 동생을
위해서 조용히 기도생활을 하며 살고 싶습니다."
"음."
이리텔 신부는 낮게 고개를 끄덕거렸다. 옥순은 나이가
어린데도 불구하고 말하는 데 있어서 논리가 정연하고 막힘이
없었다.
(이 어린 소녀에게는 분명히 천주의 성령께서 섭리하고
계신다.......)
이리텔 신부는 막연히 그런 분위기를 느꼈다.
(어쩌면 성인이 될지도 모르겠군.......)
난세에는 영웅이 많이 출현한다. 그와 마찬가지로
박해시대에는 성인들이 무수히 나타난다. 16세기 로마의
박해시대에 태어난 성인들, 성(聖) 이나시오, 성 프란치스코
사베리오, 성 필립보 네리, 맨발의 갈뫼회를 만든 십자가의 성
요한, 성 데레사.......
그 중에 이나시오 성인과 필립보 성인은 극명하게 대조되는
사람들이었다. 이나시오 성인은 "여성수련"같은 저명한 저술
활동을 하여 성인 반열에 올랐고 필립보 네리 성인은 로마에서
고아들을 돌보아 성인이 되었던 것이다.
(이 아이는 영성적으로 큰 인물이 될 것이다.......)
이리텔 신부는 그렇게 생각했다. 그러자 가슴이 뿌듯해 왔다.
그때 갑자기 큰 바람이 일기 시작하고 파도가 높아졌다. 배는
나뭇잎처럼 위태롭게 출렁거렸다. 11명의 교인들은 배가
뒤집어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무조건 애를 써야 했다. 그러나
그 돌풍은 두 시간 만에 멎어서 이리텔 신부를 안심시켰다.
이튿날 육지가 보이지 않아 조각배나 다름없는 범선은
망망대해에서 파도를 헤치며 앞으로 나갔다. 뱃사공들은 다소
두려운 생각을 갖고 있었으나 열심한 교인들이라 기도로 위안을
찾았다. 바다로 나간 지 사흘째 되던 날 청국배를 몇 척 볼 수
있었다. 열심한 교인들이며 뱃사공들은 중국이 가까워졌다고
하면서 환호성을 질렀다.
밤에 다시 바람이 불었다. 그러나 바람은 중국 쪽으로 불었기
때문에 배는 상당히 멀리까지 나갈 수 있었다.
새벽녘에 바람이 더욱 강하게 불고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파도는 점점 거칠어져 뱃전을 사납게 때렸다. 사방이 칠흑처럼
캄캄한 가운데 바다가 끓어올라 뱃전을 때리고 비는 장대질을
하듯이 하얗게 쏟아졌다.
"폭풍우다!"
"배가 뒤집어지지 않게 돛을 내려!"
"물이 들어온다! 물을 퍼내! 모두 물을 퍼내......."
사람들은 공포와 불안에 떨면서 폭풍우와 결사적인 싸움을
했다. 집채 만한 파도가 배를 금방이라도 조각낼 것 같았다.
사람들은 몇 번이나 파도에 휩쓸려갈 뻔 하면서도 폭풍우와
싸웠다. 그 무서운 싸움은 새벽까지 계속되었다.
사람들은 점점 용감해 졌다. 선장은 밤새도록 자기 자리를
지키며 키를 잡았고 사공들은 물을 퍼냈다. 이제 불과 여덟 살의
옥순까지 허리를 밧줄로 묶어 놓고 비를 맞으며 물을 퍼내는
일을 거들었다.
폭풍우가 그친 것은 동쪽 하늘이 붉게 물들기 시작했을
때였다. 사람들은 모두 녹초가 되었으나 폭풍우에 밀려 어디로
가고 있는지, 어디쯤 와 있는지 서로 불안한 표정으로 얘기를
주고 받았다.
그때 망망대해의 수평선에 검은 점이 하나 보였다. 그 검은
점은 가까이 왔는데 이리텔 신부는 그 돛을 보고 유럽배라는
것을 알았다. 그는 조선에서 나올 때 몰래 품속에 간직하고 나온
불란서 국기를 꺼내어 게양하게 했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그
배를 쌍말로에 선적을 둔 크고 훌륭한 불란서 상선이었다.
상선의 선장은 나뭇잎처럼 작은 배에 불란서 국기를 펄럭이는
것을 보고 매우 놀라워했다. 그의 명령으로 상선에도 깃발이
올랐다. 이리텔 신부는 초조하게 깃발이 오르는 것을 지켜
보다가 자신도 모르게 경례를 했다. 그것은 불란서 국기였다.
이리텔 신부는 형언할 수 없는 감동을 맛보았다. 가엾은
선교사. 이역만리에 복음을 전파하러 불란서를 떠난 지 어느덧
6년, 동교 선교사들인 9명의 신부는 이미 조선에서 죽었고 2명은
아직도 박해의 기운이 수그러들지 않고 있는 조선에 남아
있었다. 그는 6년 동안 동포인 불란서인을 본 일이 없었다.
이리텔 신부는 고향에 돌아온 듯이 눈물을 주르르 흘렀다.
상선은 나뭇잎처럼 작고 기이한 배에 예의를 표시하기 위해
길게 무적을 세 번 울렸다. 이리텔 신부는 그 배에 도움을
청하기 위해 가까이 가려고 했다. 그러나 크고 훌륭한 돛을 세
개나 갖고 있는 그 배는 순풍을 만나 순식간에 저 멀리로 지나가
버렸다.
아쉬운 일이었다.
얼마 후에야 육지가 보였다. 그러나 역풍이 불고 있어서
육지로 나아갈 수가 없었다.
7월 7일 아침에 이리텔 신부 일행은 겨우 산동 해안에 도착할
수 있었다.
이리텔 신부는 즉각 천진(天津)으로 가서 불란서 순양함대를
지휘하던 로즈 재독을 만났다. 그는 조선에서 천주교 주교 2명과
신부 7명이 죽음을 당한 사실을 로즈 재독에게 말하고 조선의
천주교인들을 구해 달라고 부탁하였다.
조선에서 천주교 신부 9명이 죽음을 당한 사실은 중국에
거류하고 있던 서양인들에게는 커다란 충격이었다. 더욱이
불란서는 천주교가 국교(國敎)나 다름없는 나라였으므로 로즈
제독은 함대를 이끌고 조선으로 가겠다고 하였다. 그러나 때마침
월남(越南)에서 반란이 일어나 로즈 제독은 함대를 이끌고
인도지나로 출동했다가 돌아와 9월 18일에야 조선으로 나가게
되니 이것이 저 유명한 병인양요(丙寅洋擾)였다. 월남에서
일어난 반란은 프랑스 쪽에서는 반란이지만 월남 쪽에서는
독립전쟁이었다.
이리텔 신부는 치푸로 돌아와 로즈 제독을 기다리게 되었다.
그 무렵 이리텔 신부는 중국까지 안내했던 교인들이 돌아가기를
원했으므로 이리텔 신부는 이들에게 여비를 충분히 주어
조선으로 돌아갈 수 있도록 해주었다.
옥순은 북경의 한 천주교 수녀회에 맡겨졌다. 그 수녀회의
수녀들은 조선에서의 박해와 옥순이 겪은 비참한 고난을 듣고
눈물을 흘리며 조선의 천주교 교인들을 위해 기도했다.
"이제 너는 천주교 모친 동정 성 마리아에게 네 모든 것을
바쳐야 한다."
이리텔 신부는 옥순을 가만히 안아주었다. 옥순의 눈에서
눈물이 주르르 흘러내렸다.
"수녀회에 들어가면 어른이 될 때까지는 나오지 못할 것이다.
아마 고향이 무척 그리워질 게다."
"......."
"고향이 그리워지면 기도를 해라. 특히 조선에서 죽은 불쌍한
사람들을 위해... 천주께서는 네 기도를 듣고서야 조선에서의
박해를 그치게 할 것이다."
"네."
옥순이 울먹이며 대답했다. 이리텔 신부는 눈앞이 부옇게
흐려지는 것을 느꼈다. 수녀들도 모두 흐느끼며 울고 있었다.
이리텔 신부는 옥순과 헤어졌다. 그리고 곧바로 북경과 상해,
치푸를 오가면서 맹렬한 외교활동을 전개했다. 그는 조선의
박해를 북경 주재 불란서 임시 대리공사 벨로네에게 알리고,
벨로네는 청국의 총리각국사무아문(總理各國事務衙門)에 강력히
항의를 하는 한편 압력을 가했다.
청국은 당황했다. 이미 청국은 영국과 프랑스의 연합군에
패배하여 황제가 열하로 몽진을 하는 사태까지 일어났었다.
조선이 청국의 속국이라고는 하나 조공(朝貢)만을 바치고 있을
뿐 독립된 나라이니 간섭할 수 없다고 하였다.
이에 대리공사 벨로네는,
"그렇다면 프랑스와 조선이 전쟁을 한다고 하더라도 귀국은
간섭하지 말라."하고 통보를 했다.
청국은 이에 더욱 놀랐다. 조선은 사실상 청국의 속국이었고
조공까지 바치고 있는 터였으므로 조선이 국난을 당하는 것이
바람직하지 않다고 생각하며 비밀리에 예부(禮部*를 통해 조선에
국서를 보냈다. 국서의 내용은,
"불국 신부를 9명이나 살해한 것은 명백한 잘못이며 그로
인하여 불란서 함대가 조만간 조선을 침공할 것이니 화친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우리 청국은 영불연합군에 패하여 신교의
자유를 허락했으니 우리의 예를 따르라."하는 것이었다.
조선은 긴급히 어전회의를 열어 청국에 다음과 같은 내용의
답서를 보냈다.
"불란서 신부들은 조선의 국경에 몰래 침입하여 무리를 모아
흉악한 일을 도모하므로 조선의 법에 따라 처형했소이다."
아울러 청국과 불란서가 이와 같이 빠르게 조선의 실정을 알고
있는 것은 반드시 법망을 빠져 나간 불순한 무리가 고해 바친
것이므로 이를 잡아 극형에 처해야 한다고 결정했다. 그리하여
사학 죄인들의 무리는 남녀노소가 불문하고 그들의 6촌까지 잡아
죽이라는 명을 전국에 내렸다. 이로 인하여 이리텔 신부를
안내하여 청국까지 갔다가 돌아온 김계교, 장치선, 최인서,
김창실, 이재의등이 체포되어 죽음을 당했다. 이것은 병인년의
제2차 박해의 시작이었다.
6
공주 감영 파옥사건은 충청도 일대에 커다란 파문을 일으켰다.
충청감사는 이 일이 조정에 알려질까 봐 쉬쉬하면서 충청도
일대에 포졸들을 풀어 검거 선풍을 일으켰다. 곳곳에서 천주교
교인들이 체포되고 검문이 실시되었다.
이창현은 공주 감영 구류간을 나오자 산길을 걸어 홍주로
향했다. 아내 조선이의 소식을 알기 위해서였다. 공주 감영
구류간에 갇혀 있던 조선이가 홍주목으로 끌려간 것을 알고
있었으나 그 뒤의 행적은 알길이 없었다.
그는 밤에만 걸었다. 두 달 가까이 이곳 저곳으로 끌려다니며
모진 고문을 당해 걸음조차 떼어 놓기 어려웠으나 아내의 소식이
궁금했다. 어쩌면 아내가 이미 죽었을지도 모른다는 불길한
생각, 아내가 온갖 고문을 당했으리라는 생각이 자꾸 뇌리를
스쳐 견딜 수가 없었다.
공주 감영 파옥사건은 화적(火賊)떼에 의해 일어난
사건이었다. 계룡산 일대를 무대로 온갖 불한당 짓을 저지르던
화적떼가 두목의 동생이 포졸들에게 잡혀 공주 감영 구류간에
갇히자 무리들을 이끌고 구류간을 습격했던 것이다. 그들은
두목의 동생을 구한 뒤 옥졸들을 위협하여 구류간에 가두고 있던
사학 죄인들을 모두 풀어 주었다. 포졸들이 뒤를 쫓을까 봐
우려해서였다. 그 일로 말미암아 옥졸이 셋이나 칼에 맞아 죽고
넷이 큰 부상을 당했다. 다섯은 술을 마시고 자다가 화적들에게
잡혀 구류간에 갇혔다.
관찰사는 파옥사건이 터지자 감영의 모든 포졸들을 풀어
화적떼와 사학 죄인들을 뒤쫓게 했다. 사학 죄인들은 화적떼에
의해 목숨을 건지게 되자 뿔뿔이 흩어져 달아났다. 그들은 깊은
산 속으로 숨어 들어가 포졸들의 추적을 피했다. 그러나 더러는
인가에 내려와 먹을 것을 구하려다가 포졸들에게 체포되기도
했다. 굶주림이 극심했다. 그러나 천주교 교리에 의해 그들은
조그만 것이라고 남의 것을 훔치지 못했다.
그들은 인가에 들어가 먹을 것을 달라고 사정했다. 인가에서는
사학 죄인들이 먹을 것을 구하러 오면 화가 미칠 것을
두려워하여 먹을 것을 주지 않고 내쫓았다. 사학 죄인들은
걸인이나 나환자보다 더욱 비참하게 생활하며 산으로 산으로
숨어 들어갔다. 죽음보다 굶주림에 대한 공포가 더욱 극심하게
그들을 사로잡았다.
구류간에서의 생활 때문이었다. 감영의 구류간은 높은
담장으로 둘러싸인 울 안에 널판지로 만든 마루방이었다.
겨울에는 살을 에일 듯이 춥고 여름에는 숨이 턱턱 막힐 정도로
무더웠다. 음식은 아침 저녁으로 주는 한 주먹의
좁쌀밥뿐이었다. 어느 때는 그것조차 주지 않아 하루종일
굶주려야 했다.
이창현이 공주 감영 구류간으로 끌려 들어갔을 때도 죄인들의
모습은 기아 때문에 해골처럼 앙상했다. 얼굴은 퀭한 눈만 남아
파리했고 살은 뼈에 달라붙어 있었다. 고문 때문에 생긴 상처는
곪아 터지고 썩어서 참혹했다.
옥살이는 비참했다. 해가 뜨면 옥졸(獄卒)이 와서 문을 열어
주어 앞뜰에 나가 바람을 쏘이게도 해주었으나 잠시뿐이었다.
해가 지면 사람들을 구류간으로 몰아 넣고 차꼬를 채운 뒤
빗장을 질렀다. 그 위에는 어떠한 일이 있더라도 밖으로 나가지
못했다.
이창현이 있던 구류간에는 천주교 교인들이 빽빽하게 잡혀
들어와 있어 발을 뻗고 누울 수도 없을 정도였다. 옥중의
괴로움에 비하여 고문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상처로부터 흐르는
피와 고름 때문에 마룻바닥은 위에 깔아 놓은 망석이 썩고 그
곳에서 악취가 풍겼다. 그리하여 청결하지 못한 환경 때문에
구류간 안에 전염병이 돌고 그 전염병으로 인해 교인들이 또
죽어갔다.
그러나 가장 무서운 것은 굶주림과 목마름이었다. 교인들은
멍석 자락을 뜯어서 씹기도 했고 심할 때는 옥 안에 들끓고 있는
이를 잡아 먹기도 했다.
이창현은 공주를 빠져 나와 청양을 거쳐 예산으로 갔다.
예산에서는 모내기를 하는 농부들은 만나 이틀 동안 모내기를
거들어 주고 쌀 두 되를 얻어서 생쌀을 씹으며 홍주목으로
들어갔다. 그러나 홍주목 관가에 들어가 조선이의 행방을 물을
수 없어서 읍내를 빙빙 돌다가 전라도에서 올라온 품앗이
농군들을 만나 그들과 어울렸다. 그들은 모내기가 일찍 시작되는
중부지 방으로 올라와 모내기 품을 판 뒤 다시 아랫녘으로
내려가서 농사를 짓는 뜨내기들이었다.
이창현은 그들과 함께 홍주 일대에서 열흘 동안 모내기를
거들고 약간의 품삯을 받았다. 밤에는 주막을 찾아 다니며
사람들의 얘기를 귀담아 들었다. 그러다가 홍주목에서 사형을
당한 시체들은 모두 홍주 읍성 북쪽의 수구문 밖에 버린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곳에 버려진 시체들은 시일이 어느 정도
흐르면 포졸들이 인근 농부들에게 품삯을 주고 야산에
매장한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천주님, 제발 제 아내를 무사하게 도와 주소서.......)
이창현은 몇 번이나 그런 기도를 하면서 홍주 읍성 북쪽의
수구문을 찾았다. 그러나 이창현이 찾아갔을 때 버려진 시체는
한 구도 없었다.
홍주목에서는 사형이 사흘에 한 번 꼴로 열렸다. 한동안
대들보 형구로 죄인들의 머리를 으깨어 사형을 시켰으나 이내
교수형으로 바꾸었다. 대들보 형구에 의한 사형은 집행을 하는
관리들에게조차 끔찍했던 것이다.
이창현은 교인들이 교수대에서 사형을 당하는 것을 몇 번이나
보았다. 가슴이 터질 듯이 아펐다. 사형을 당하는 교인들의
목숨이 버러지보다 못한 것 같았다.
(천주님, 당신은 정녕 어디에 계십옵니까?)
이창현은 교인들이 사형을 당하는 광경을 지켜볼 때마다 마음
속으로 이렇게 울부짖었다.
교인들의 시체는 포졸들이 인근 농부를 동원하여 매장하고
있었다. 그러나 농부들이 매장을 하는 것을 꺼려 시체가
며칠씩이나 수구문 밖 시궁창에 버려져 있기도 했다. 포졸들은
시체를 매장하는 인부를 찾기 위해 골몰했다.
이창현은 시체를 매장하는 일을 자원하고 나섰다. 마땅히 할
일도 없이 사형장 주변이나 시체를 버린 수구문 일대를 배회하고
다니는 것도 한계가 있었고, 무엇보다도 조선이의 소식을
탐문하기에 안성맞춤인 자리였다. 게다가 누군가 교인들의
시체를 묻어 주어야 했다.
이창현의 조선이의 소식을 알게 된 것은 시체를 매장하는
인부가 된 지 열흘쯤 되었을 때였다. 이창현은 포졸 하나를
눈여겨 두었다가 그에게 접근했다. 그 포졸의 이름은 김상보로
항상 우울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무엇인가 걱정거리가 있는 것
같기도 했고 사형이 집행될 때면 으레 끔찍한 장면을 보지
않으려고 고개를 돌렸다.
어느 날 이창현은 김상보를 주막으로 청했다. 술이 몇 순배돌
때까지 아무 얘기도 하지 않고 있다가 이창현은 마침내
김상보에게 조선이라는 사학 죄인을 아느냐고 조심스럽게 물어
보았다.
"알지, 조선이는 젊고 참한 아낙네였으니까......."
김상보가 갑자기 침통한 낯빛을 하면서 말했다. 얼굴에
안쓰러워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그 여자가 어떻게 되었는지 알고 계십니까?"
"알고 있네."
"어떻게 되었습니까?"
김상보가 이창현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이창현이 왜 그런
질문을 하는지 탐색을 하고 있는 표정이었다.
"사형 당했네, 대들보 형틀로......."
이윽고 김상보가 고개를 떨어트리며 말했다.
이창현은 눈시울이 뜨거워져 있었다. 어느 정도 예상하고 있던
일이었으나 막상 김상보로부터 조선이가 죽었다는 얘기를 듣자
억장이 무너지는 것 같았다.
"조선이와 어떻게 되는 사이인가?"
김상보가 낮게 한숨을 내쉬고 물었다. 이창현은 그때서야
정신이 번쩍 들어 김상보를 쳐다보았다.
"먼 친척되는 사람입니다."
"그렇지 않을 거야."
"예?"
"내가 자네를 가만히 살펴보았으나 자네도 서학군이야."
"무, 무슨 당치 않은 말씀을......."
"개의치 말게. 내가 자네를 잡아들일 생각을 했으면 벌써
잡아들였네. 그러니 숨길 필요 없네."
"나는 서학이 무엇인지도 모릅니다."
이창현이 황급히 부정했다. 그러자 김상보가 빙긋이 웃고는
술잔을 들어 입으로 가져 갔다.
"자네는 조선이의 남정네야. 그렇지 않은가?"
"그, 그렇습니다."
"그리고 서학군이지?"
"예."
이창현은 주먹을 움켜쥐고 대답했다. 여차하면 김상보를
때려눕히고 달아날 생각이었다.
"내 어머니와 내자가 서학군일세."
김상보가 쓸쓸하게 내뱉았다.
"예?"
"나는 서학군은 아니지만 그 도리가 나쁘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네. 만약에 그 교에서 조상들에게 제사만 지내게 했다면
나도 받아들었을 걸세......."
"......."
"여보게. 나는 서학군들이 죽음을 당하는 것을 무수히 보았네.
처음엔 그들이 대역 죄인이라고 생각했지만 차츰차츰 생각이
바뀌었네. 서학군들이 무슨 죄를 지었나? 도둑질을 했나 살인을
했나? 아니면 부녀자를 겁탈했나? 그들이 지은 죄라고는
나라에서 금하는 천주학을 했다는 것뿐이네."
"공연히 나를 떠보려고 그러지 마십시오."
"자네가 내 말을 믿든 안 믿든 조선이가 어디 묻혔는지 알고
싶으면 수구문 밖에 사는 덕칠이라는 놈을 찾아가 보게. 뱀을
잡는 땅군일세. 얼굴이 험악하긴 해도 심성은 고운 놈일세."
김상보가 침울한 빛으로 이창현을 응시하며 말했다.
"그리고 조선이의 시체를 찾게 되거든 내게 좀 들리게."
"무슨 연유로요?"
"조선이의 유품이 내게 있네."
"유품이요?"
"염주 같은 것일세. 조선이가 사형장을 끌려갈 때 내 앞에서
떨어트리기에 주워 가지고 있었네."
이창현은 눈을 지그시 감았다. 김상보가 염주 같은 것이라고
말하는 것은 매괴가 분명했다.
"난 먼저 가겠네. 나를 믿을 수 있겠으면 꼭 한 번 들리게."
김상보가 탁주를 벌컥벌컥 들이키고 일어섰다. 이창현은
김상보를 잡지 않았다. 김상보가 자신을 떠보는 것 같기도 했고
진실을 가지고 말하는 것 같기도 해서 종잡을 수 없었다.
이창현은 남은 술을 다 마시고 주막을 나왔다. 다리가
휘청거렸다. 아내가 대들보 형틀에 의해 머리가 으깨어져
죽었다고 생각하자 가슴이 뻐근했다. 그는 읍내를 벗어나 인적이
없는 야산으로 올라갔다. 그리고 그때서야 땅에 주저앉아 소리를
내어 엉엉 울었다.
아내의 숨이 끊어질 때의 고통스러워 하는 모습이 가슴을
후벼파는 것 같았다.
이튿날 이창현은 오후까지 주막의 봉놋방에서 잠을 잤다.
밖에는 비가 부슬부슬 내리고 있었다. 이창현은 저녁 나절이
되어서야 주막을 나와 홍주 읍성 북문 쪽의 수구문을 향해
걸어갔다. 비 때문에 길바닥이 질척거렸다. 짚신짝에 황토가
묻어났다.
(아이들은 어떻게 된 것일까?)
아이들의 소식도 전혀 알 길이 없었다. 그러나 아이들이
관가에 붙잡혀 간 것은 아니므로 진천의 어느 교우가 보살펴
주어도 살아 있기는 하리라고 생각했다.
덕칠이라는 사내는 수구문 밖에서도 한참을 지난 야산
언덕배기에 살고 있었다. 돌과 흙을 섞어서 쌓은 담에는
호박넝쿨이 무성하게 뻗어 있어고 초가는 흙벽이 앙상하게
드러나 있었다. 집이 옹색했다.
"계십니까?"
"......."
"계십니까?"
이창현이 삽짝을 열고 마당에 들어서서 두 번이나 소리를
지르자 더벅머리 사내가 부스스한 얼굴을 내밀었다.
"어서 오시우, 기다리고 있었수다."
사내가 이창현을 아래 위로 훑어 보고 방에서 나와 짚신을
발에 꿰었다. 험악하게 생긴 얼굴과 달리 목소리가 부드러운
사내였다.
"기다려요?"
이창현은 어리둥절했다. 사내가 이창현을 향해 빙긋 웃더니
코를 횡 풀었다
"아침에 김 포졸님이 댕겨 갔어유."
"김상보 포졸 말인가요?"
"예, 노형이 찾아올지 모르니 잘 좀 안내해 드리라고 하고는
갔어요. 참 좋은 양반예유."
더먹머리 사내가 앞장을 섰다. 이창현은 멍청하게 서 있다가
더벅머리 사내의 뒤를 따라가기 시작했다. 그가 덕칠이라는
사내였다.
"여기유."
그가 잡목숲으로 한참을 올라가다가 걸음을 멈추었다.
평분(平賁)이었다. 그 앞에 '사학 죄인 조선'라는 목패가 세워져
있었다.
"나는 가겠수."
사내가 휘적휘적 걸어 야산을 내려가기 시작했다. 이창현은
조선이의 평분 앞에서 못박힌 듯 한참 동안 그대로 서 있었다.
아내가 이 땅 속에 묻혀 있다니... 이창현은 목이 메이고 입술이
비틀려 왔다.
이창현은 '사학 죄인 조선'라고 씌어 있는 목패 앞에 앉아서
울음을 터뜨렸다. 그 목패는 사형장으로 끌려나올 때 가슴에
달고 있던 목패였다.
"관이라도 마련해야지요. 밀례를 하시던가......."
어느 틈에 올라왔는지 덕칠이 탁주 한 호리병과 김치 보시기를
옆에 내려 놓았다.
"한 잔 드시우."
덕칠이 사기 대접에 술을 따랐다.
"고맙소."
이창현은 덕칠이 따라 주는 술을 벌컥벌컥 들이켰다.
"어떻게, 고향으로 모셔 가겠소?"
"글쎄요."
"그렇지 않으면 이 곳에다 분을 만드시던지......."
"비용이 얼마나 들까요?"
"비용이랄 게 뭐 있겠소? 읍내 목수간에서 관이나 하나
깎아오면 되지."
"......."
"오늘 밤은 내 집에서 자시오. 돌아가신 분에 대한 얘기도
나눌겸......."
"폐를 끼쳐서 송구합니다."
"그런 소리 마시오. 사학 죄인이든 뭐든 죽은 사람에 대한
대접은 소홀히 하는 게 아니오."
이창현은 그날 밤 덕칠의 집에서 잠을 잤다. 비는 밤에도 계속
내려 잠자리가 어수선했다.
이튿날에도 비가 계속해서 내렸다. 그러나 빗발이 굵지 않아
이창현은 홍주읍에 나가 베옷을 산 뒤 관을 하나 깎아서 지게에
져오고 덕칠은 삽과 한지를 준비했다. 그리고 점신 나절이
지나자 평분을 팠다.
"가마니에 둘둘 말아 묻어서 시신이 몹시 상했을 거요."덕칠의
말이었다.
이내 흙 속에서 가마니가 나왔다. 가마니는 두 장으로 시신을
둘둘 말아서 시신이 보이지 않았다. 이창현은 떨리는 손으로
가마니의 흙을 털어 낸 뒤 가마니를 들추었다.
(아!)
이창현은 눈시울이 뜨거워져 왔다. 아내의 시신을 의외로
깨끗했다. 머리에 대들보를 맞아 참혹한 형상으로 죽었으리라고
생각했던 아내의 시신이었다. 이창현은 자신도 모르게 무릎을
꿇었다.
"이런 일은 없는데......."
덕칠이 놀라서 중얼거렸다.
(천주님, 감사합니다.)
이창현은 입술이 비틀리고 눈물이 주르르 쏟아졌다.
"내 자리를 비켜 드리리다."
이창현이 조선이의 옷을 벗기고 베옷으로 갈아 입히려고 하자
덕칠이 저만치 떨어지며 곰방대를 피워 물었다. 이창현은 때에
절고 핏자국이 군데군데 엉켜 있는 조선이의 옷을 벗기고
베옷으로 갈아 입혔다. 이제는 슬프거나 서럽지 않았다. 그는
오히려 죽은 아내에게 감사를 하고 싶은 마음이었다.
(얼마나 몸가짐이 단정한 여인이면 죽은 뒤에까지 나에게
깨끗한 몸을 보이려고 시체가 상하지 않은 것일까.......)
이창현은 조선이의 시체를 몇 번이나 살피며 그렇게 생각했다.
조선이의 몸은 수많은 고문을 당했는데도 상처가 깨끗했고,
대들보 형구에 의해 머리가 으깨어졌을 텐데도 머리에 상처하나
없었다. 다만 조선이의 옷에 여기저기 핏자국이 남아 있어
고문을 받은 사실을 증거하고 있었다.
(이것은 천주께서 기적을 베푸어 주신 거야.......)
이창현은 베옷을 입힌 조선이를 안아서 관에 눕히고
영적(靈蹟)이 작용하고 있는 것을 느꼈다.
이창현은 묘혈을 깊게 판 뒤 관을 안치했다. 그리하여
봉분까지 완전히 만들어진 것은 날이 어둑하게 저물고 있을
때였다.
"이제 끝났구먼."
"그 동안 정말 고마웠소. 내 평생 이 은공을 잊지 않으리다."
"그러시구려. 당신네들 서학하는 사람들에게 쉬이 좋은 세상이
올 것 같지는 않지만......."
이창현은 덕칠이라는 사내와 작별을 하고 포졸 김상보를
찾아갔다. 김상보는 이삿짐을 꾸리고 있었다.
이창현이 놀라서 물었다.
"어디로 이사를 가십니까?"
"아무래도 우리도 떠나야 할 것 같네. 조마조마해서 여기서는
살 수가 없네."
김상보 포졸은 이창현에게 조선이의 매괴 구슬을 내주면서
침통하게 말했다. 이창현은 김상보 포졸과 헤어졌다.
이창현은 다음날 아침 일찍 홍주목을 떠나 열흘 만에 진천에
도착했다. 봄에 포졸들이 들이닥쳐 수많은 교우를 잡아가고
죽이고 한 탓에 진천의 교인촌은 쑥밭이 되었으나 삼박골에는
7월에도 몇몇 교우가 숨어 있었다.
"봄에 포졸들이 1백여 명이나 들이닥쳤네."
옥희의 죽음을 전해 준 사람은 이 생원이라는 사람이었다.
삼박골 전교회장직을 맡고 있었다.
"그럼 그때 죽었다는 말입니까?"
"옥순이의 말에 의하면 어떤 포졸이 목을 졸라 죽였다고
하네."
"어떻게 그 어린 것을......."
이창현은 말문이 콱 막혔다. 가슴이 터질 것 같았다.
"사탄이지. 그게 어디 사람이 했다고 할 수 있겠나?"
이 생원이 눈을 지그시 감고 비통하게 말했다.
"옥순은 어찌 되었습니까?"
"강깔래 신부님이 공주 진밭이라는 곳에서 보았다고 하는데
어찌 되었는지 모르네."
"강깔래 신부님은요?"
"그분도 진밭에 계신 것으로 알고 있네."
이창현은 진천을 떠나 공주 진밭으로 향했다. 가족들 중에
이미 둘이나 죽어 비감한 마음을 억누를 길이 없었다. 그러나
그가 진밭에 도착했을 때는 교우들이 모두 어디론가 떠나고 빈
집들만 남아 있었다.
(아아 나는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한단 말인가?)
이창현은 하늘을 우러러 보고 탄식을 했다.
1) 친구는 존경의 표시로 엎드려서 발에 입을 맞추는 것을
의미한다. 1984년 5월,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김포공항에서
내려 1만여 명이 순교의 피를 흘린 한국땅에 친구한 것이
대표적인 예가 된다.
2) 이리텔 신부의 조선탈출기는 "한국 천주교회사"(샤를르달레
원저, 안응렬 최석우 주) P.452~454에 상세히 기록되어 있다.
3)전구(轉求)는 천주교 용어로 나를 대신하여 성모 마리아와
성인들이 예수에게 전해 달라는 의미의 기도다.
4) 손차선은 손자선이라는 기록도 있다.
5) 천주공경가는 한국천주교 "성지(聖地)" 1권에서 발췌한
것이다.(주관신부 김병상, 책임감수 오기선 신부)
6) 박해 시대는 우리가 알지 못하는 영적(靈蹟)이 많이
일어난다. 파리외방전교회에 보낸 권페롱 신부의 편지에도
'영적을 많이 본 것 같도다.......'하고 증언하고 있다.("한국
천주교회사"유홍렬 저. 하권 84쪽)
제9장 구름재의 서릿발
1
여름이 오고 있다. 입 안을 파랗게 물들일 듯이 푸르른 여름이
오고 있다.
민비는 보고 있던 책장에서 시선을 거두고 낮게 한숨을
떨구었다. 여름이 오고 있다는 생각이, 고종이 한낱 무수리
출신의 궁녀에 빠져 있다는 생각이 민비의 가슴을 아프게 하고
있었다. 그 생각을 할 때마다 민비는 가슴으로 묵지근한 통증이
훑고 지나가는 것 같은 기분을 느꼈다.
그러나 누구에게도 내색할 수 없었다. 나이가 어려도 국모요,
중전이었다. 한 나라의 왕비로서 체통을 지켜야 했다. 투총을
해서도 안 되고 할 수도 없었다. 여염 사대부가에서도 투기는
칠거지악(七去之惡)이라고 하여 엄히 다스리고 있었다.
고종은 민비와 국혼을 치르지 전부터 궁녀 이씨를 가까이 하고
있었다. 열 입곱 살의 무수리 출신이었다. 민비는 그 사실을
처음 알았을 때 날카로운 비수로 가슴을 찔린 것처럼 쓰라렸다.
민비는 그때부터 시름에 잠기기 시작했다. 처음 얼마 동안은
궁중생활을 익히기에 여념이 없어 그 생각을 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하루 이틀 시일이 흐르자 외로움이 밀려오기 시작했다.
궁중생활은 오히려 사가(私家)보다 더욱 쓸쓸했다.
그녀의 주위엔 언제나 사람들이 들끓고 있었다. 궁중엔
내명부(內命婦)가 수백 명이나 되었고 6,70대의 노상궁에서부터
7, 8세의 아기 내인(內人)들까지 모두 그녀의 수하였다. 그러나
마음 속의 근심이나 외로움을 토로할 수 있는 궁녀들은 아무도
없었다. 그녀가 믿는 궁녀는 사가에 있을 때 몸종으로 데리고
있던 간난이뿐이었다. 그 간난이가 그녀의 마음을 나눌 수 있는
여자는 못 되었다. 고종은 어젯밤에도 무수리의 방에서 잠을
잤다. 민비는 그 생각을 하면서 잠을 이루지 못했다.
고종은 국혼을 치르고 나서 민비와 겨우 두 번 잠자리를 같이
했을 뿐이었다. 그 뒤에는 대조전(大造殿) 대청을 사이에 두고
동온돌(東溫突)과 서온돌(西溫突)에 따로 떨어져 잠을 자거나
무수리의 처소에 가서 잠을 자고는 했다. 동온돌은 동쪽 방으로
왕의 침실이고 서온돌은 왕비의 침실이었다. 이 두 개의 방을
합쳐 대조전, 또는 곤전(坤殿)이라고 불렀고 안주인의 별칭을
따라 중궁전(中宮殿)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궁중법도는 엄격했다. 대부분 노상궁들인 직숙상궁들은 왕과
왕비가 동침을 하는 날조차 엄격하게 택일을 하여 길일(吉日)이
되어야만 합방을 하게 했다. 그래야 왕비가 왕의 바른 정력을
얻어 수태를 한다는 것이었다.
민비는 그 말에 아무 반발도 하지 않았다. 직숙상궁들은
대부분 나이가 많은데다 오랜 궁중생활을 한 탓에 무시못할
위엄까지 은근히 풍기고 있었다. 비록 왕비의 자리에 있다고
해도 어린 민비로서 그들의 인도대로 따를 수밖에 없었다.
수라도 왕과 왕비가 따로 들었다. 고종과 함께 동온돌 방에서
수라를 들기는 했으나 상은 각각 따로 받았고 수라 담당 상궁이
상머리를 떠나지 않고 시중을 들었다.
법도가 엄격했다. 민비는 궁중생활의 엄격함 때문에 처음엔
숨조차 쉴 수가 없었다. 궁중 어느 곳에서도 혼자 떨어져 있을
수가 없었다. 그러나 아침 수라가 끝나고 나면 약간의 시간이
있었다. 민비는 그 시간을 이용해 책을 읽거나 후원을 산책했다.
고종은 아침 수라가 끝나고 나면 정전(正殿)에 나가
문무백관들의 조참(朝參)을 받기도 하고 희정당에서 대소정무에
임어(臨御)하기도 했다. 대왕대비 조씨가 수렴청정을 거둔 후
고종이 친정을 하고 있었으나 형식뿐이었고 실질적으로 대원군이
정사를 좌지우지하고 있었다.
(사람의 운명이란 이상한 거야.......)
민비는 인현왕후를 생각하며 쓸쓸하게 한숨을 떨구었다.
숙종이 장희빈에게 빠져 있을 때 인현왕후는 적막한 나날을
보내야 했다. 공규(空閨)의 세월이었다. 게다가 천품이 어질고
착한 인현왕후는 장희빈의 모함을 받고 사가(私家)로 쫓긴 뒤
3년 동안이나 쓸쓸하게 살다가 복위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복위의 기쁨도 잠깐, 인현왕후는 폐비시절에 얻은 병으로 책 한
권을 남기고 죽은 것이다. 그 책이 인현왕후였다. 민비는 그
책을 읽을 때마다 인현왕후의 전철을 밝지 않으리라고 모질게
결심을 했다.
(이씨라는 무수리는 어떤 여자일까?)
민비는 이따금 고종의 승은을 입고 총애를 받고 있는 궁녀
무수리가 궁금했다. 아직 영보당에 기거하는 무수리를 한 번도
본 일이 없었다.
승은(承恩)을 입었다고 하는 것은 임금과 잠자리를 같이
했다는 뜻이었다. 그러나 승은을 입은 것을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고종의 침실에는 잠을 잘 때도 직숙상궁이 넷이나 방
밖에서 숙직을 했고 어보를 옮길 때는 수십 명의 상궁과
내관들이 시종에 나서곤 하였다. 또 궁녀가 임금의 침실로
불려올 때는 수십 명이나 되는 상궁들의 따가운 시선을 한 몸에
받아야 했다.
오로지 임금 하나를 바라보고 대궐에 들어온 궁녀들이었다.
평생을 대궐에서 왕과 비빈들의 시중을 들다가 죽어야 하는
처지였다. 요행히 왕의 눈에 들어 승은이라도 입게 되면
다음날로 귀한 몸이 되지만 그렇지 못할 경우 처녀의 몸으로
늙어 죽는 것이다. 동료 궁녀 하나가 왕의 눈에 들어 침천으로
불려가면 선망과 질시의 눈초리들이 서릿발 같았다.
그러나 무수리 이씨는 영보당에 기거하고 있었다. 고종의
승은을 입어 특별상궁에 봉해 져 있었다. 대원군의 지시에 의해
귀인(貴人)이나 소의(昭儀)에도 책봉되지 않고 상궁의 지위에
머물러 있었다. 그러나 영보당 이씨가 왕자를 생산하면 후궁에
봉해 질 것이 틀림없었다. 그 일은 경계하지 않으면 안 되는
일이었다.
민비는 고종과 영보당 이씨가 알몸으로 껴안고 뒹구는 망칙한
상상을 할 때면 자신도 모르게 얼굴이 화끈거리고 숨이
가빠왔다. 아직 남자와 여자의 그 일에 대해서는 뚜렷한 느낌을
가질 수 없었다. 그것은 부끄럽고 고통스러운 일이었다.
친영례를 올리고 초야를 치르던 날 민비는 고종을 자신의 몸 속
깊숙히 받아들이면서 몸을 떨고 신음을 했다. 하체의 통증이
의외로 격렬했다. 민비는 이를 물로 하체가 찢어지는 것 같은
고통을 견디어야 했다.
두번째도 통증은 계속되었다. 그러나 그 일이 끝나고 나면
고종이 떨어져 누웠을 때 민비는 무엇인가 모를 아련한 느낌,
감미로운 그 무엇이 자신의 내부에서 꿈틀거리고 있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대화는 전혀 없었다. 어쩐지 서먹서먹하여 고종을 대하기가
어려웠다. 고종도 그런 것을 느끼고 있었는지 민비를 마주보려고
하지 않았다. 두 사람 사이에 무엇인가 두터운 벽이 가로막고
있는 듯한 기분이었다.
(내가 너무 긴장했던 것이 아닐까?)
고종은 그 후로 민비를 가까이 하려고 하지 않았다.
고종은 변해 있었다. 선머슴처럼 활발하던 고종은 내성적으로
변하여 좀처럼 말을 하는 일이 없었다. 고종은 무엇엔가 잔뜩
겁에 질려 있는 것 같았다. 소심하고 문약하기 짝이 없었다.
민비는 그러한 고종이 영보당 이씨에게 승은을 내린 것이 얼핏
이해되지 않았다. 언젠가는 그 일을 규명해 보리라고 생각하면서
책장으로 시선을 떨어뜨렸다.
이 미인(美人)의 아름다움에는 연꽃도 따르지 못하나니
물 속의 궁전에 바람이 불면 비취처럼 향기를 뿜네
정(情) 때문에 한(恨)이 차서 가을 부채로 얼굴을 가리고
헛되이 밝은 달을 바라보며 임금을 기다리네
서궁추원(西宮秋怨)이라는 제목의 당(唐)나라 시인
왕창령(王昌齡)의 칠언절구(七言絶句)였다. 시의 내용이 그녀의
처지와 흡사했다.
민비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가슴이 답답하여 책을 읽고 있을
수가 없었다.
"중전마마, 어디 행차하시나이까?"
지밀상궁이 재빨리 따라 일어나 허리를 숙였다.
"후원이나 거닐어야겠구나."
"차비하겠습니다."
지밀상궁이 허리를 숙이고 뒷걸음으로 물러갔다.
"박 상궁 밖에 있느냐?"
"예, 중전마마."
문밖 대청에서 박 상궁의 목소리가 들렸다. 사가에서 몸종으로
데리고 있던 간난아이였다
"박 상궁도 함께 가자꾸나."
"예, 중전마마."
민비는 서온돌방을 나서 대청으로 나왔다.
시녀상궁(侍女尙宮)과 무수리들이 벌써 월대 양쪽으로 갈라서서
수행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무수리들은 분홍색 저고리를 입고 상궁들은 하늘색 저고리를
입고 있었다. 상궁과 무수리들은 직급에 따라 옷의 색이 달랐다.
민비는 대조전 정문을 나와 집상전(集祥殿) 쪽으로 걸음을
떼어 놓았다. 집상전 옆의 옥천(玉泉)을 건너면 조그만 숲이
있고, 자경전(慈慶殿)을 지나면 부용정(芙蓉亭)과
춘당지(春塘池)가 있었다. 춘당지는 대궐에서 가장 큰
연못이었다. 부용정은 2층 누각으로 건축된 아름다운 정자였다.
민비는 집상전 뒤의 숲으로 가까이 갔다. 숲이 청정했다.
초여름의 햇살이 싱싱한 녹향을 뿜어대는 숲과 전각의 지붕
위에서 깃발인 듯 펄럭거리고 있었다.
민비는 저절로 당시 한 수가 머리 속에 떠올랐다. 민비는 녹음
짙은 숲을 바라보며 당시를 암송하기 시작했다.
낙양성 동쪽에 핀 복사꽃과 오야꽃은
분분히 날아서 어느 집에 떨어지려는가
낙양의 소녀들은 얼굴이 변할까 보아
떨어진 낙화를 보고 장탄식을 하네
올해 꽃이 지면 그 아름다운 얼굴도 꽃처럼 지려니
명년에 이 꽃이 만발하면 누가 있어 꽃처럼 아름답게 피겠는가
송백이 꺾여서 땔나무 되고
뽕밭이 변해서 바다가 되는 것을
우리는 보지 않았는가
유희이(劉希夷)의 시였다.
그때 희정당에서 김(金) 내관이 어깨를 잔뜩 늘어뜨리고 춤을
추듯이 우쭐우쭐 걸어오고 있는 것이 보였다. 김 내관은 중궁전
별감으로 아침에 고종을 따라 희정당에 갔었다.
"주상전하께서는 어디 계시는가?"
민비는 환하게 미소를 지으며 김 내관을 응시했다.
"희정당에서 정무를 보고 계시옵니다."
"오늘 정무는 무엇이오?"
"호서지방의 기민에 관한 것이옵니다."
"호서지방의 기민?"
민비는 이마를 살짝 찡그렸다. 호서지방은 작년의 흉년과 아직
하곡이 생산되지 않아 수많은 기민이 발생하였다는 장계가 전라
감영으로부터 올라와 있었다.
"그러하옵니다.
"그래, 논의는 어찌 되었소?"
"국태공 저하의 주청대로 결정되었사옵니다."
국태공은 대원군을 일컫는 말이었다.
"어떻게요?"
김 내관이 얼굴을 찌푸렸다. 희정당에서 논의된 기민 구휼
논의를 아직 솜털도 가시지 않은 어린 왕비에게 낱낱이 보고해야
할 일이 난감했다.
"국태공 저하께서 호서지방의 21개 읍(邑) 진(鎭)의 기민 11만
6천 3백 56호(戶)에 미조(米租) 9천 4백 92석(石)을
분급하겠다고 하였사옵니다.
미조는 탈곡을 하지 않는 벼를 말하는 것이었다. 호서지방에
기민이 11만 명이 넘는다는 것은 백성들이 그만큼 굶주리고
있다는 뜻이었다.
"대신들이 찬성했소?"
"일부는 찬성했고 일부는 반대했사옵니다."
"시원임대신들이 반대를 했겠구려?"
"그러하옵니다."
김 내관은 자신도 모르게 머리를 조아렸다. 나이 어린 왕비가
희정당에서 논의된 일을 훤히 알고 있는 것이 신기하기까지
했다.
"대왕대비마마께서도 임어하셨소?"
"예."
"대왕대비마마께서는 무어라 말씀이 있으셨소?"
"중전마마."
"말해 보구려."
"신에게 해라 하고 말씀하시옵소서. 중전마마의 말씀을
받자옵기가 민망하옵니다."
민비가 가만히 미소를 지었다.
"김 내관은 내 아버님과 연배가 비슷한데 어찌 해라를 할 수
있겠소? 김 내관을 보면 마치 돌아가신 아버님을 뵙는 것 같소."
"중전마마."
김 내관이 감격한 표정으로 머리를 조아렸다.
"어서 말씀을 해보구려."
"대왕대비마마께서는 재정이 빈약하고 경복궁 중건 역사가
한창이니 기민 규휼을 할 수 없다고 하셨사옵니다. 그러나
국태공 저하께서는 기민을 구휼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강경하게
주장하셨사옵니다."
"주상전하께서는 말씀이 있었소?"
"주상전하께서는 말씀이 없으셨사옵니다."
"알았소. 물러가도록 하오."
고종이 대왕대비 조씨와 대원군 사이에서 아무 말이 없었다는
것을 뚜렷한 식견이 없는 것이라고밖에 할 수 없었다. 민비는 한
시간 쯤 후원을 산책하다가 대조전으로 돌아왔다.
점심수라시간이 가까워져 있었다.
오후가 되자 민비는 경복궁 중건에 대한 논의가 중회당에서
이루어지고 있다는 얘기를 김 내관으로부터 전해 들었다.
중희당에 모인 대신들은 영의정 조두순을 비롯해 좌의정 김병학,
영돈령부사 김좌근, 홍인군 이최응 등이었고. 대원군은 이들에게
원납전을 다시 거두어 들이고 사대부가의 묘역에 있는 나무나
함경도에 있는 거목들을 베어서 재목으로 쓰고 사대문을 지나는
사람들에게 문세를 받아들이라는 영을 내렸다고 했다.
(대원군은 역시 과감한 인물이야.......)
민비는 경복궁 중건 역사를 재개하는 것을 찬성했다. 진시황이
만리장성을 쌓은 뒤에 내란에 의해 죽기는 했지만 경복궁의
중건은 왕실의 위엄을 되살리는 일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민비의
앞날과도 밀접한 관계가 있었다. 항간에서는 고종이 민비를
중전으로 맞아들일 때 대화재가 일어난 것은 불길한 징조라고
수군거리고 있었다. 그러한 입방아를 막는 것은 대원군이
경복궁을 보란 듯이 번듯하게 중건하는 것뿐이었다.
"김문에서는 반대를 하지 않던가?"
"영돈령부사 김좌근, 좌의정 김병학 대감 등이 백성들에게
과중한 부담이 된다고 반대를 했사옵니다."
김 내관의 대답이었다.
"그래서 어찌 되었는가?"
"국태공 저하께서는 원납전을 다시 거둬 들인다고
하셨사옵니다. 원납전을 1만 냥을 내면 상민들이라고 해도
벼슬을 주고 10만 냥을 내면 방백 수령 자리를 주시겠다고
하셨사옵니다."
"......."
"또 4대문을 왕래하는 사람들에게 문세(門稅)를 거두고
전결(田結)의 세금까지 인상하신다고 하셨사옵니다."
"그럼 경복궁 중건도 계속되겠군......."
"그러하옵니다."
"사학 죄인들에 대해서는 아무 논의가 없었소?"
"국태공 저하께서 사학 죄인들을 토벌하느라고 민심이 흉흉해
져 있으니 농사철만이라도 사학 죄인들을 다스리는 일을
중지하라고 하셨사옵니다. 얼마 전 충청도 진천에서 한 여아가
운현궁을 찾아와 포졸배들이 어린아이들까지 마구 죽이고 있으니
서학군을 죽이는 일을 금지해 달라고 청했다고 하옵니다."
"포졸들이 어린아이까지 죽인다는 말이오?"
민비는 가슴이 아릿하게 저렸다.
"그러하옵니다."
"세상에 어찌 이런 무법한 일이 있소?"
"부대부인 마님께서 그 얘기를 듣고 크게 통곡하셨다고
하옵니다."
"그렇겠지......."
민비는 고개를 끄덕거렸다. 부대부인은 민씨가 서학군을
긍휼히 여기라고 신신당부하던 일이 머리 속에 떠올라 왔다.
"국태공 저하께서는 진천 현감을 파직하시고 포도대장을 불러
사학 죄인들을 잡아 들인답시고 백성들을 토색질하는 자들을
엄벌하라고 분부를 내리셨다고 하옵니다."
민비는 김 내관의 말에 가만히 고개를 끄덕거렸다. 대원군은
확실히 백성들을 사랑하고 있었다. 원납전을 거두어 들이며
문세를 징수하는 일도 사실상 양반과 토호들을 상대로 하는
정책이었다.
"지방 백성들 형편은 어떻다고 하오?"
"아뢰옵기 황송하오나 흉년과 질병으로 백성들이 굶주리고
있다고 하옵니다."
"사학 때문에 억울하게 죽임을 당하는 백성들은 없소?"
"중전마마, 배교를 하는 백성들은 살려 준다고 하옵니다."
"허면 배교만 하면 방면해 준다는 말이오?"
"그러하옵니다. 주상전하께서 척사윤음을 반포한 것은
혹세무민에 빠진 백성들을 구하기 위함이지 백성들을 해치려는
뜻이 아니라 하옵니다."
척사윤음은 헌종 때 검교제학(檢校堤學)으로 있던 대신
조인영(趙寅永)이 지은 것으로 유교를 숭상하고
사학(邪學:천주교)의 그릇됨을 알리는 임금의 글로, 백성들을
설득하는 것으로 되어 있었다.
윤음은 원래 임금이 새해가 되면 팔도의 백성들에게 농사를
권장하기 위해 내리는 글이었으나 기해년 들어 천주교 박해의
수단으로 이용되었고, 병인년에도 그 예를 따라 척사윤음을
반포한 것이다.
......오호라, 중용(中庸)에 가로되, 천명(天命)을 성(性)이라
하고, 상서(尙書)에 가로되, 황상제(皇上帝)가 사람에게 내려와
항성(恒性)이 있게 된다 하니, 사람의 성되는 자 그 덕(德)이
넷이 있어 가로되 인의예지(仁義禮智)요, 그 윤(倫)이 다섯이
있어 가로되, 부자(父子), 군신(君臣), 장유(長幼), 붕우(朋友),
부부(夫婦)이다. 무릇 하늘을 받들고 상제(上帝) 오륜(五倫)의
밖에 있으랴, 불행히 흉적(凶賊) 승훈(承薰)이라는 자가 서양의
책을 사다가 천주학이라 일컬으니, 선왕의 법(法)이 아니다.
(중략) 이제 내가 나의 마음을 펴서 말하는 것은, 나의 말이
아니라 하늘의 사람을 다스리는 법이오, 옛날 성인의
가르침이니, 너희는 받들고 받들에서, 아비는 자식을 가르치고,
형은 동생을 가르쳐서, 그 사교(邪敎)에 빠진 자는 길을 열게
하고, 아직 빠지지 않은 자는 경계하고, 훈계하여도 복종치 않는
자는 반드시 죽음으로써 벌할 것을 생각하게 하여, 다시는
용납하지 못하게 하면 어찌 좋지 않겠느냐? 오호라, 책에 말하지
않았느냐? 백성이 허물이 있음은 내 한 사람에게 책임이 있다
하니, 이제 사교가 마음대로 퍼지게 됨을 진실로 나의 어리석고
잘 이끌지 못한 허물인 것이다. 돌이켜 스스로 꾸짖어 슬퍼할
따름이다. 애통하여 타이르노라.
조인영이 쓴 글이었으나 형식은 임금이 백성을 설득하는
것으로 되어 있었다. 일종의 담화문이었다.
이에 대해서는 정하상(鄭夏祥)이 상재상서(上梓相書)를 올려
척사윤음의 부당함을 조목조목 반박했으나 이로 인해 정하상은
끝내 죽임을 당했다. 상재상서는 당시의 우의정
이지연(李止淵)에게 올리는 호소문이었다.
......엎드려 생각하옵건대 맹자(孟子)가 양자(楊子),
묵자(墨子)를 물리친 것은 그 외람됨이 유교에 해로운 것을
두려워하였기 때문이고, 한유(韓愈)가 불교를 배척한 것은 그
유혹됨이 백성을 어지럽게 할 것을 두려워하였기 때문이외다.
옛적에 군자가 법을 세워 못하게 하는 데에는 반드시 그
의리(義理)가 어떠하며 그 해로운 점이 어떠한가를 생각한
연후에 금할 것을 금하지 않을 것은 금하지 않았소이다. (중략)
무당, 풍수, 산명(算命), 관상 등의 사람에 있어서는 헛되이
여자와 어린이를 속에 재물을 낚으나 이를 봄이 예사와 같건마는
성교에 이르러서는 홀로 포용(包容)의 은혜를 입지 못함이 무엇
때문이리요. 집에 해가 되오리까. 나라에 해가 되오리까. 그
일을 보고 그 행함을 살피면 가히 그 사람의 어떠함과 그 도의
어떠함과 알 것이외다. 저희들이 일찍이 반역을 꾀하였사오이까?
도둑질을 하였사오이까? 간음을 하였사오이까? 살인을
하였사오니까? (중략) 엎드려 빌건대 촛불을 들어 굽어보사,
도리의 참됨과 거짓됨과 나쁨과 옳음을 자세히 밝히신 후에
위로는 조정을 다스리시고, 아래로는 백성을 거느리시와, 한 번
바른 길로 돌아가, 잡아들임을 늦추어 금하고, 옥에 갇힌 자를
석방하여, 한 나라의 백성과 더불어 편안히 생업을 즐기며 같이
태평을 누리게 하시기를 천만 번이나 바라나이다. 또
아뢰오나이다. (중략) 이른바 사대부(士大夫)의
신주(神主:木主)라는 것도 성교에서 금하는 바이외다. 부모의
이름이 무엇이 중대한 것이리요, 목수가 만든 것에 분묵으로써
칠하고 점친 것을 가지고 참된 부모라고 말할 수 있사오리까.
올바른 이론이 근거가 없고, 양심이 허락하지 않으므로 오히려
죄를 사대부에게 얻을지언정 죄를 천주께 얻기를 원치 않나이다.
상대상서의 내용은 천주교가 그릇됨이 없으니 박해를 그치게
하고 평화롭게 살게 해달라는 것이었다. 문장이 수려하고 이론이
정연하여 남인(南人) 계열의 학자들은 돌아가면서 읽는
명문이었다.
(서교도 박해가 이 나라에 큰 화를 미치겠군.......)
민비는 김 내관이 물러가자 이르고 곰곰히 생각에 잠겼다.
2
날이 점점 더워지고 있었다.
대궐의 숲은 초록빛으로 무성해 지고 매미가 시끄럽게
울어댔다. 농사철 내내 가뭄이 들어 농민들을 애타게 했던 비도
장마철이 되자 시원하게 쏟아져 가뭄이 말끔하게 해갈이 되었다.
그러나 장마철이 지나가자 불볕 더위가 기승을 부리고 있었다.
대궐도 녹음이 우거졌으나 덥기는 마찬가지였다. 풀잎 하나
까딱하지 않는 더위가 며칠째 계속되어 짜증스럽게 했다.
(어디로 가지.......)
고종은 중희당을 나서자 걸음을 멈추고 녹원을 우두커니
쳐다보았다. 날씨가 후덥지근했다. 공기는 건조했고 더위는 숨이
막힐 것 같았다.
그러나 15세의 고종을 더욱 짜증나게 하는 것은 대원군이었다.
아버지 대원군은 고종이 등극한 지 1년이 되면서부터 사정없이
개혁을 단행하고 있었다. 서원 철폐로 인하여 전국의 유림을
들끓게 하더니 천주교 박해, 경복궁 중건으로 한순간도 쉴 짬이
없었다. 고종은 따분했다. 대원군은 모든 것이 강압적이었다.
(영보당에나 갈까?)
영보당에는 고종이 총애하는 상궁이 있었다. 나이가 열
일곱이라 누이처럼 포근한 느낌이 들면서도 사랑스러웠다.
"중궁을 멀리 해서는 안됩니다."
그러나 대원군의 당부를 생각하자 선뜻 영보당으로 걸음이
떨어지지 않았다.
"조강지처를 멀리하면 반드시 응보를 받습니다."
그것은 당부가 아니라 엄한 명령이었다. 고종은 자신도 모르게
대조전으로 걸음을 떼어 놓기 시작했다. 아버지 대원군은 거역할
자신이 없었다. 아버지의 차고 날카로운 눈빛이 뒤통수를
쏘아보고 있는 듯한 기분이었다.
대조전에는 중전이 있었다. 이제 불과 열 여섯 살이었다. 3년
전만 해도 아줌마라고 부르며 중전을 따랐다. 그러나 이제는
중전이 따분했다. 영보당에는 이 상궁 외에는 사람이 얼마
없었으나 중궁전에는 항상 사람이 들끓었다. 고종은 사람들의
이목을 끄는 것이 싫었다.
그는 느릿느릿 대조전으로 걸음을 떼어 놓았다. 녹원에서
줄기차게 울어대던 매미들도 더위에 지쳤는지 궐 안이 갑자기
조용했다. 희디흰 햇살만 궐 안의 잿빛 기와 지붕과 녹원,
그리고 마른 대지 위에 작렬하고 있었다.
"중전은 아니 계시느냐?"
대조전 서온돌은 덩그라니 비어 있었다.
"예. 중전마마께서는 경복궁에 납시었사옵니다."
"경복궁에?"
고종은 가슴이 답답한 기분이 들었다. 경복궁은 역사가 한창
진행중이었다. 이 더운 날씨에 중전이 그곳에 갔다는 것이
믿어지지 않았다.
고종은 서온돌 방에 들어가 보료 위에 앉았다. 중전의
방이었다. 방 안에서 여자의 희미한 살냄새와 화장품 냄새가
풍겼다.
"내 잠시 여기서 쉬겠노라."
고종은 익선관을 벗고 화문석 돗자리 위에 누웠다. 상궁들이
황급히 베개를 대령했으나 물러가라 이르고 목침을 베고 눈을
감았다. 아버지의 얼굴도 또 선하게 눈앞에 떠올라 왔다. 그는
얼굴을 찡그렸다.
황해(黃海)가 시끄러워졌다. 불란서 신부 9명을 죽인 것이
청나라에 알려지고 불란서 함대가 조선을 내침할 것이라는
국서가 조정에 전해 지자 대원군도 바짝 긴장해 있었다. 이미
음력 2월엔 독일 상인 옵페르토가 충청도 서산군 대산면
조도(鳥島)를 거쳐 해미현 조금진(調金津)에 정박한 뒤 해미현감
김응집(金應集)에게 통상을 요구했으나 거절당하여 돌아갔고,
7월에 다시 강화도의 교동도(喬洞島)에 이르러 한강 어귀를
탐사한 뒤 월곶리(月串理)에 도착해서 통상을 요구해 왔었다.
그러나 대원군은 일언지하에 거절하여 그들을 되돌려 보냈다.
7월 9일엔 미국 국적의 상선 한 척이 황해도 황주목의 삼전면
송산리(松山理)에 도착하여 조정을 바짝 긴장시켰다. 배의
이름은 제너럴 셔먼 호로 선주는 미국 상인 프레지톤이었고
선교사인 로버트 토마스 목사가 동행하고 있었다. 선장은 덴마크
인 페이저였다.
이에 앞서 미국 상선 서프라이스 호가 풍랑을 만나 표류하다가
철산부 선천포 선암리에 이르게 되었다. 철산 부사
백낙연(白樂淵)은 이들이 불란서인인 줄 알고 바짝 긴장했으나
조사결과 미국인이라는 것이 밝혀져 그들에게 의복, 식량, 담배
등을 주고 그들의 요청에 따라 육로로 해서 북경으로 보내
주었다. 선장 이하 8명의 선원들은 말을 타고 의주로 가서
극진한 대접을 받은 뒤 돌아갔다. 제너럴 셔먼 호는 평화적인
통상을 목적으로 하여 조선에 들어온 것이지만 군선에 못지 않은
무장을 하고 있어서 치푸에서 출발할 때 이미 평양 일대의 옛
무덤을 도굴하거나 약탈을 하러 가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심까지
사고 있었다.
셔먼 호가 송산리에 닻을 내리자 황주 목사 정대식(丁大植)은
우후(虞候) 신영한(申永翰), 통역관 이용숙(李容肅), 군관
지명신(池命臣)을 거느리고 달려가 셔먼 호가 조선에 들어온
까닭을 추궁했다. 이에 토마스, 프레지턴, 페이지 등은 중국
통역 이팔행(李八行)을 데리고 나와,
"우리들은 영국, 미국, 청나라 사람들로 장사를 하기 위해
왔다."하고 말하였다.
"조선의 해안에 외국배가 들어와 장사를 하는 것은 나라에서
금하고 있다. 속히 돌아가라."
"우리는 귀국의 쌀, 종이, 인삼, 황금을 사려고 한다."
"우리는 어느 나라와도 통상을 하지 않는다."
"여기서 통상을 허락해 주지 않으면 우리는 한성으로
들어가겠다."
"어디서 왔는가?"
"천진을 떠나 치푸에서 왔다."
"배가 무장을 하고 있는 것을 보면 상선이 아니라 군선이다.
무력 시위를 하는 저의가 무엇인가?"
"겉으로 보기엔 군선 같지만 상선이다. 우리가 무엇 때문에
조선을 해치겠는가? 통상만 끝나면 바로 돌아가겠다.
토마스 목사와 프레지턴, 페이지 등은 끝내 정대식 황주
목사의 얘기를 듣지 않았다.
한편 평안도 용강(龍岡)현령 유초환(兪初煥)도 물에 익숙한
장리(將吏)를 보내어 이들이 조선에 들어온 진실한 까닭을
알아보게 했다. 그러자 셔먼 호의 승무원들은 평양의 방위
태세와 보물이 있는지 여부를 물어 그들의 목적이 불순한 데
있다는 사실을 드러냈다. 셔먼 호는 7월 9일 송산리 앞바다를
떠나 황주 송림리(松林里) 포구로 올라오게 되니 조정은 이
급보를 받고 긴급히 대책을 숙의했다. 그러나 뚜렷한 대책을
세우지 못하고 우왕좌왕하다가 백성들이 외국배에 접근하는 것을
금지하고 국방을 엄히 하라는 지시만 내렸다.
고종은 정치가 싫었다. 정사를 보는 것은 하루도 마음 편안
날이 없는 일이었다. 청국 예부에서 국서가 왔을 때도 조정은
발칵 뒤집혀 며칠 동안이나 어전회의를 계속해야 했다. 대원군은
대신들의 회의를 하는 자리에 반드시 고종을 임어하게 했다.
대신들에게 국왕의 위세를 업고 군림하기 위해서였다.
그는 개혁주의자였다. 그러나 전횡이 심하여 바른 정견을
말하는 사람이 옆에 있을 수 없었다. 기득권층의 반발도 만만치
않았다. 대원군은 여론을 유도하는 선동정치를 했다. 경복궁
중건에 반대하는 여론을 천주교 탄압의 피바람으로 잠재우고
서정을 차례차례 혁파해 나갔다. 서원 철폐와 풍속 개량, 인재의
고른 등용, 양반들에게까지 세금을 부과한 것은 백성들로부터
열렬한 지지를 받았다. 그러나 경복궁 중건은 대화재 이후
백성들의 원성을 사고 있었다. 경제를 부흥시켜야 했으나 원시
농경 사회나 다름없는 농촌 경제를 부흥시킬 정책은 제시하지
못한 채 경복궁 중건으로 백성들에게 부담만 가중시키고 있었다.
고종은 아버지가 싫었다. 아버지는 자애로운 구석이라고는
전혀 없이 위압적으로 군림하고 있었다.
제너럴 셔먼 호는 벌써 대동강 어귀에 정박해 있었다.
대원군에 의해 처형된 법국 신부들을 죽인 까닭을 묻고 있었으나
다행히 법국 배는 아니었다.
고종은 이런저런 생각을 하면서 오수(午睡)에 빠져 들었다.
그 시간 민비는 경복궁 근정전을 둘러보고 있었다. 근정전은
인정전을 대신하여 국왕의 정사를 볼 정전이었다. 비록 기둥과
대들보, 서까래만 놓아서 집의 골조만 세워져 있었으나 규모가
거대하고 웅장했다.
(아, 역시 대원군은 위대한 인물이야.......)
대역사였다. 경복궁의 넓은 궁지 여기저기에 가가(假家)
세워져 있고 공방들이 즐비했다. 재목은 산더미처럼 쌓아 놓고
대목과 소목들이 다듬고 있었다. 인부들은 볕에 얼굴이 벌겋게
그을리고 땀을 뻘뻘 흘리고 있었다.
"어떻습니까 중전마마? 이만하면 왕실의 위엄이 서지
않겠습니까?"
대원군은 친히 경복궁 건설현장을 민비에게 안내하면서 만족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중전이 여자의 몸으로 경복궁 건설현장에
나온 것은 뜻밖이었다.
"참으로 대역사이옵니다. 아버님."
"조선은 왕실이 허약합니다. 이를 혁파하지 않으면 누란의
위기가 닥칠 것입니다."
"그래서 아버님께서 만난을 무릅쓰고 경복궁을 중건하는 것이
아니옵니까?"
대원군은 얼굴을 찡그렸다. 며느리 민비의 만난(萬難)이라는
말이 귀에 거슬렸기 때문이었다. 도대체 만난이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혹시 홍문관(弘文館) 교리(校理) 이성삼(李成三)의
상소를 두고 말하는 것이 아닐까. 홍문관 교리 이성삼은 지난
봄에 경복궁 중건을 반대하는 격렬한 상소를 올렸었다.
"홍문관 교리 이성삼의 상소를 두고 하시는 말씀이옵니까?"
중전이요, 국모라고 해도 어린애였다. 게다가 사사로이는
며느리인지라 대원군의 눈빛이 싸늘해 지면서 민비를
노려보았다.
"그것이 아니오라 역사의 어려움을 두고 드린
말씀이었습니다."
"어려운 역사지요."
대원군은 고개를 끄덕거렸다. 자신이 잘못 짚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이 어린 중전이 무엇을 알겠는가. 그는 민비를
경회루로 안내했다.
"이곳이 경회루가 들어설 연못입니다."
"경회루요?"
"그렇습니다. 연못은 동서로 4백 자 남북으로 3백 40자를 팔
예정입니다. 연못 안에는 방형의 섬을 들어 앉힌 뒤 중루에
팔각지붕에 누각을 세울 예정입니다. 바깥 기둥은 방형 석주, 안
기둥은 원형 석주를 세울 것인데 아래가 넓고 위가 좁아
입체감까지 느낄 수 있게 하였사옵니다."
"역사가 끝나면 참으로 장관일 것이라고 여겨지옵니다."
"그렇습니다. 대원군 필생의 역작이 될 것입니다."
대원군이 파안대소를 터뜨렸다. 민비는 가만히 얼굴을
찡그렸다. 이마로 땀방울이 송글송글 맺혀 있었다. 날씨가
후덥지근했다.
(이 양반은 언제까지나 상감의 위에 계실 분이야.......)
고종은 15세였다. 5년이 지나면 명목상이 아닌 실질적인
친정을 해야 하지만 대원군이 권력을 내놓을 것 같지 않았다.
민비는 언젠가는 대원군과 생사를 다투게 될 싸움을 할지도
모르다고 생각했다.
민비가 경복궁 중건 현장을 세세히 돌아보고 창덕궁으로
돌아온 것은 해가 설핏이 기울고 있을 때였다.
(저 이는 흥인군.......)
민비는 연을 내려 대왕대비전을 향해 다가가 걸음을 멈추었다.
"중전마마."
흥인군 이최응이 승정원에서 바쁘게 나오다가 민비를 발견하고
허리를 깊숙히 숙여 인사를 했다.
민비는 공손히 머리를 숙여 답례를 했다. 흥인군 이최응
대원군의 형으로 민비에게는 시백부(媤佰父)가 되는 사람이었다.
"중전마마. 그 동안 별고 없으셨는지요?"
"흥인군 덕분에 잘 지내고 있사옵니다. 대감께서도 댁내 두로
별고 없으시온지요?"
"예. 중전마마의 성려에 힘 입어 두루 평안하옵니다. 어디
행차하시는 길이시온지요?"
"경복궁엘 다녀옵니다."
민비가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눈이 부시게 아름다운
미소였다. 흥인군 이최응은 중전처럼 아름다운 여인을 두고 상궁
이씨를 총애하는 고종이 얼핏 이해가 되지 않았다.
중전의 나이가 아직 어린 것은 사실이었다. 그러나 점점
화사하게 피고 있지 않은가. 얼굴은 도화빛이고 입술은 앵두
같았다. 얼마나 귀엽고 아름다운 여인인가.
"경복궁엘요?"
"예."
민비의 대답은 다소곳했다.
"그 먼 곳엘 연도 타지 않고 다녀오시다니요?"
"이 앞에서 내렸사옵니다."
"그러셨군요."
흥인군이 비로소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보다 흥인군께오서는 어찌 자주 뵈올 수 없사옵니까?"
"소인처럼 낙천한 종친이 무슨 면목으로 궐 출입을 자주
하겠사옵니까?"
그것은 대원군에 대한 불만을 은근히 털어놓은 것이었다.
대원군이 흥인군에게 정승 자리 하나 내주지 않아 불만이
많았다.
"당치 않으신 말씀이옵니다. 흥인군께오서는 저에게
시어른이시니 제가 문안을 올려야 마땅한 일이옵니다. 허나
대궐의 법도가 그렇지 못하여 송구할 따름입니다. 아무때나
중궁전에 들려 주시면 시원한 화채라도 대접해 올리겠사옵니다."
"중전마마의 은혜가 태산 같사옵니다."
"사사로이는 작은댁 며느리입니다. 내일이라도 중궁전에 들려
화채도 드시고 종친들 이야기라도 하여 주시면 귀를 씻고
듣겠사옵니다."
"중전마마의 분부 명심하여 받자옵겠습니다."
흥인군 이최응의 얼굴이 환해 지면서 허리를 숙였다.
"저는 대왕대비전에 문안드리러 가는 길이라 이만 하직코자
하옵니다. 내일 뵙겠사옵니다."
민비도 새삼스럽게 허리를 숙여 인사를 했다. 흥인군은
대원군과 사이가 좋지 않았다. 임금의 생부인 대원군은 막강한
권력을 휘두르고 있었으나 흥인군은 한직에 머물러 있어 불만이
많았다.
(사람을 모으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한 일이야.......)
고종은 여전히 상궁 이씨를 총애하고 있었다. 잘못하면
인현왕후처럼 간계에 빠져 왕비의 자리에서 내쫓길 수도 있었다.
그것을 미연에 방지해야 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이 고종의 총애를 받는 일이었고 다음은 심복처럼 부릴 수
있는 수하들을 규합하는 일이었다.
(길게 잡아야 5년이면 대원군도 섭정의 자리에서 물러나게 될
거야.......)
5년이면 고종의 나이가 20세였다. 당연히 친정을 해야 할
시기인 것이다. 물론 지금도 고종은 형식적으로 친정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고종은 허수아비였고 모든 정사는 대원군이
처리하고 있었다. 춘추시대 중국 진나라 시황제의 부친으로
국태공이라는 자리에 올라 막강한 권세를 휘두르던
여불위(呂不韋)처럼 '대원위분부'라는 한마디에 삼천리 강토가
벌벌 떨고 있었다.
민비는 대왕대비전을 향해 천천히 걸음을 떼어 놓기 시작했다.
천주교 박해와 경복궁 중건을 계기로 모든 권력이 대원군에게
쏠리고 있었다. 놀라운 추진력이었다. 안동 김문과 풍양 조씨
일문도 대원군의 위세 앞에서 바짝 긴장하여 숨을 죽이고
있었다.
"중전마마 드셔 계시옵니다."
민비가 대비전 대청으로 올라서자 발 앞에 앉아 있던 상궁
장씨가 재빨리 일어서며 대왕대비 조씨에게 고했다.
"드시라 이르게."
안에서 대왕대비 조씨의 카랑카랑한 목소리가 들렸다.
"중전마마. 어서 드시옵소서."
장 상궁이 발을 걷었다. 대왕대비전에는 조성하 형제가 앉아
있다가 황망히 몸을 일으키며 허리를 숙였다.
"이리 앉으시게."
민비가 대례를 올리자 대왕대비 조씨가 함박웃음을 지으며
옆자리를 가리켰다.
"황송하옵니다."
민비는 옆으로 약간 비켜 앉았다. 마주앉지 않는 것이
웃어름에 대한 예의였다.
"중전마마. 신 조성하 형제 문후 드리옵니다."
민비가 자리에 앉아 조성하 형제가 절을 했다.
"일찍이 홍원식 형제가 단수묘아하다는 얘기를 들었는데 이제
보니 두 분은 홍원식 형제를 능가하는 것 같습니다."
민비는 활짝 웃으며 조성하 형제를 칭찬했다. 조성하 형제는
대왕대비 조씨의 조카가 되었다. 일찍이 철종이 승하했을 때
승후관의 벼슬에 있던 조성하가 대왕대비 조씨에게 귀띔을 하여,
대왕대비 조씨가 옥새를 차지하고 일등 공신이라고 할 수
있었으나 대원군은 조성하에게
통정대부우승지(通政大夫右承旨)라는 한직에 임명했을 뿐이었다.
조성하는 그 일에 대해 은근히 불만을 품고 있었다.
"풍양 조씨 일문의 준재들이오."
대왕대비 조씨가 기쁜 표정으로 말했다. 조카들에 대한 칭찬이
싫지 않았던 것이다. 대왕대비 조씨는 민비가 영의정 조두순의
손녀딸을 누르고 국모로 간택되자 대원군에 대한 짙은 배신감을
느끼고 수렴청정까지 철회했었다. 그러나 소용없는 일이었다.
대왕대비 조씨는 대원군에게 우롱을 당한 뒤에야 대원군에게
모든 권력을 빼앗겼다는 사실을 실감했다. 그러나 내색을 겉으로
드러내 보일 수는 없는 일이었다. 대왕대비 조씨는 그대신
자라는 싹이나 마찬가지인 민비와 손을 잡기로 속으로 결심했다.
"요즈음 황해가 시끄럽다는데 사실인가요?"
민비는 조성하 형제에게 깍듯이 공대를 했다.
"그러하옵니다."
조성하가 공손히 대답을 했다.
"그들은 아직도 황해에 있나요?"
"그러하옵니다."
대왕대비 조씨는 조용히 미소만 짓고 있었다.
"그들이 원하는 것은 무엇인가요?"
"중전마마. 그들은 조선과 통상을 하기를 원한다 하옵니다."
"통상이면 서로 장사를 하자는 것인가요?"
"그러하옵니다."
"그쪽에서는 우리에게 무엇을 팔겠다고 합니까?"
"자세히는 알지 못하오나 서양 비단이라고 합니다."
"비단이라면 우리나라에서도 많이 나는 것이거늘."
민비는 가만히 고개를 흔들었다. 비단이라면 조선에서도
생산되고 중국에서 들여올 수도 있다. 그것을 굳이 서양인들과
교역을 해야 할 이유는 없는 것이다.
민비가 대왕대비전에서 나와 대조전으로 돌아오자 고종이
서온돌에서 낮잠을 자고 있었다.
(아!)
민비는 자신도 모르게 얼굴에 홍조를 띠었다. 사랑하는
지아비였다. 그러나 그 지아비가 영보당 이 상궁을 총애하고
자신을 멀리하고 있었다. 민비는 그리움과 원망이 담긴 눈빛으로
고종을 내려다보다가 부채질을 하기 시작했다.
3
대원군은 별이 총총한 하늘을 우두커니 쳐다보았다. 머리 속이
심란했다. 서해에 이양선(異樣船)이 자주 출몰하고 있는 것이
수상쩍은 일이었다. 아무래도 서학군 탄압이 지나친 것 같았다.
대원군은 뒷짐을 지고 대청마루를 서성댔다.
"대감마님!"
그때 하인 하나가 황급히 사랑채로 달려왔다. 대원군은
물끄러미 사랑채로 달려오는 하인 이연식을 노려보았다.
이연식은 서학군이었다. 대원군은 일찍부터 그 사실을 알고
있었으나 부인 민씨의 낯을 보아서 모른 체하고 있었다.
그것뿐이 아니었다. 조경호(趙慶鎬)에게 시집을 간 딸도
서학군이었다.
"무슨 일이냐?"
"경복궁에 또 불이 났사옵니다."
"뭣이?"
대원군은 안광을 무섭게 폭사시켰다. 고종의 국혼이 거행되던
지난 봄의 대화재 이후 경복궁엔 크고 작은 화재가 그치지 않고
일어나고 있었다.
"이번엔 얼마나 탔다더냐?"
"다행히 기찰하던 포교가 일찍 발견하여 곤령합이 약간 탔다고
하옵니다."
"불은 껐다더냐?"
"예. 완전히 껐다고 하옵니다."
"알았다. 물러가라."
"예."
이연식이 허리를 굽히고 물러갔다. 대원군은 뒷짐을 지고
골똘히 생각에 잠겼다. 경복궁 중건 현장에 화재는 단순한
실화가 아니라고 생각되었다.
(안동 김문의 짓인가?)
대원군은 안동 김문의 얼굴을 차례차례 머리 속에 떠올려
보았다. 김병학은 현재 좌의정의 자리에 올라 있었다. 연로한
영의정 이경재가 퇴임을 하게 되면 그 자리를 이어 받게 될
것이므로 굳이 대원군을 적으로 돌리지 않을 것이다. 중전
간택문제로 대원군과 틈이 벌어지기는 했으나 그 정도는
아니었다.
(사영 김병기 짓인가?)
안동 김문 중에서 가장 뛰어난 인물은 김병기였다. 언젠가
대원군이 태산을 깎아서 평지를 만들겠다고 했을 때 김병기는
태산은 태산이지 그것을 어떻게 깎아서 평지로 만드냐면서
자리를 박차고 뛰어나간 일까지 있었다.
태산은 노론을 의미하는데 당대의 학문이나 권세에서 남인을
압도하고 있었다. 남인은 오랫동안 벼슬길에 나서지 못해 학문을
제대로 닦지 못했고 선비다운 풍모도 거의 없었다.
(안동 김문에서 이런 짓을 저질렀다면 김병기 일거야.......)
오랫동안 김병기를 잊고 지내 왔었다. 대원군은 김병기의
얼굴을 머리 속에 떠올리자 몸을 부르르 떨었다.
"게 누구 없느냐?"
대원군은 별채를 향하여 소리를 질렀다.
"대감마님 부르셨사옵니까?"
또다시 이연식이 황급히 달려와 허리를 숙였다.
"좌상을 모셔 오너라. 내가 술이나 한 잔 하잔다고 여쭈어라."
"예."
이연식이 물러갔다. 대원군은 안채에 들러 술상을 준비하라고
일렀다.
밤이 되었는데도 날씨가 후덥지근했다. 바람 한 점 없는
날씨였다.
"야밤에 오시느라고 수고하셨소."
김병학은 한 식경쯤 지나서야 운현궁에 도착했다. 대원군이
기생 이월(李月)이와 춘심(春心)이를 불러다 놓고 죽엽주 세잔을
마셨을 때였다.
"신선이 따로 없으십니다, 대감."
김병학이 먼저 농을 던졌다.
"날씨가 너무 무덥습니다. 아무래도 기우제를 드려야 할 것
같습니다."
대원군도 빙긋이 웃었다.
"사학 죄인들의 원성이 하늘에 이르렀기 때문이겠지요."
"또 아픈 데를 찌르는구료."
"따지고 보면 제 불찰도 큽니다. 그때 극간을 했어야 하는데
오히려 대감을 윽박질렀으니......."
김병학의 얼굴에 알지 못할 회한이 스치고 지나갔다.
"이미 엎질러진 물입니다."
대원군이 정색을 했다.
"허면 앞으로도 계속 서학군을 잡아 죽이실 요량입니까?"
"영초도 찬성을 했지 않소? 아니 찬성이 아니라 나를
윽박지르기까지 했지......."
"그때는 제가 어리석었다고 하지 않습니까?"
"어디 영초뿐이던가요? 그때 대신 넷이 나를 한무리로
윽박질렀지 않소?"
"이제라도 늦지 않습니다. 서해에 양이 선박이 자주 출몰하는
것도 그 까닭이니 관용을 베풀어야 할 것입니다."
"영초."
"예?"
"나를 웃음거리로 만들 작정이오?"
"어찌 그런 말씀을... 법국 군선 7척이 조만간 조선으로
쳐들어온다는데 그 일을 감당할 자신이 없기에 드리는
말씀입니다."
"싸워야지요. 자주 국방이 대체 무엇이오?"
"법국 군선은 쉽게 생각할 군선이 아니라고 합니다."
대원군이 눈을 지그시 감았다. 김병학의 말은 옳은 말이었다.
영불 연합군에 청나라 같은 대국이 패했다면 그들 군선의 위력이
얼마나 큰지 짐작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러나 조선은 청국의
속국이었다. 그것만도 억울한데 서양 오랑캐들에게 핍박을
받는다는 것은 결단코 용납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것은 그렇구 요즈음 사영은 어떻게 지내오?"
"그야 대감께서 잘 아실 텐데요?"
"요즈음 경복궁 중건 현장에서 화재가 자주 발생하는 것을
좌상도 알고 계시겠지요?"
"예, 알고 있습니다."
"누구의 짓이라고 생각합니까?"
"대감!"
"내가 서정을 개혁하자 기득권층이 반발을 하는 것이겠지요."
"설마하니 사영을 의심하십니까?"
"사영도 예외는 아니지요."
"사영은 그런 소인배가 아닙니다."
"그럼 김문 중에 누구일까요?"
김병학은 떨리는 손으로 술잔을 들어 입으로 가져 갔다.
대원군이 안동 김문을 의심한다고 생각하자 등골이 오싹해 져
왔다. 잘못하면 안동 김문이 멸문지화를 당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오늘 종로 네거리에 벽서가 나붙었습니다."
"벽서요?"
김병학은 해연히 놀랐다. 벽서(壁書)는 지방에서 부정과
비리가 심한 탐관오리의 가렴주구를 폭로하는 농민들의 소극적
저항운동이었다. 민란이 일어나기 직전에 많이 대두되었다.
"내용은 무엇이옵니까?"
"출가한 내 딸과 하인이 사학 죄인이라는 것이오."
"음."
김병학은 마른 침을 꿀꺽 삼켰다. 대원군의 하인 중에
서학군이 있다는 것은 별문제가 아니었으나 대원군의 출가한
딸이 서학군이라면 크게 공론화 될 것이고, 잘못하면 대원군의
실각까지 부를 수도 있는 문제였다.
"노론이 조직적인 반발을 하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까?"
"글쎄요."
김병학은 얼굴을 찡그렸다. 섣불리 대답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다.
"안동 김문을 잘 다스려야 할 것 같소."
"명심하겠습니다."
"어느 시대 어느 국가에서나 급진적인 개혁은 기득권층의
반발을 불러일으키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오."
"그렇습니다. 대감."
"나는 이미 수천 명의 사람들을 죽였소. 여기서 내가 몇
백명을 더 죽이지 못할 것 같소?"
그것은 안동 김문에 대한 협박이요, 위협이었다.
(정녕 무서운 인물이다.......)
김병학은 집으로 돌아오며 온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러나 김병학이 더욱 놀란 것은 이튿날 오후의 일이었다.
우포도청에 대원군의 하인 이연석이라는 자가 잡혀 들어가고
조경호에게 출가한 딸이 독약을 먹고 죽었다는 소문이 장안에
파다하게 퍼졌기 때문이었다.
-안동 김문은 숨조차 쉬지 말고 칩거하라!
김병학은 그날로 장안에 거주하는 안동 김문에게 모조리
사람을 보내어 근신하라고 지시했다. 대원군은 선동정치의
대가였다. 자신의 딸까지 희생시켰으므로 언제 어떻게 안동
김문에 복수의 칼을 휘두를지 알 수 없는 일이었다.
벽서도 안동 김문에서 내붙였다고 할 수만은 없는 일이었다.
대원군은 서원 철폐를 단행하여 유림으로부터 미움을 받고
있었다. 그들이 벽서를 내붙였거나 대원군 스스로 내붙인 뒤
안동 김문에 뒤집어씌우고 있는지도 알 수 없는 일이었다.
김병학은 조만간 피바람이 불어 닥칠지도 모른다는 예감에
온몸을 부르르 떨었다.
(이럴 때 법국 군선이 내침을 하면 국면이 전환될
텐데.......)
김병학은 그런 생각을 했다. 대동간 어귀에 닻을 내리고 있는
미국 배만으로는 국면의 전환이 어려울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배는 상선이었다.
그러한 때에 운현궁에 자객까지 들었다.
(기어이 안동 김문에 칼을 대려는 것이군.......)
김병학은 대원군의 사저 운현궁에 자객이 들었다는 소리를
듣고 깊은 탄식을 했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대원군은 아무
위해도 당하지 않았다.
4
사영 김병기는 좌의정 김병학으로부터 날아온 한 통의 서찰을
받고 온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는 식솔들과 함께 경기도
여주(驪州)에 낙향해 있었다. 병조판서가 그의 마지막
관직이었다.
......사영, 사영이 역모의 죄를 범하지 않으리라는 사실을
나는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습니다. 사영은 우리 안동 김문의
수장이자 마지막 보루입니다. 우리 안동 김문의 형제들은 사영이
건재해 있는 그 사실만으로도 든든하게 여기고 있습니다.
그러나 흥선대원군 이하응은 만만한 상대가 아니니 자중해야
하리라고 생각합니다. 우리 안동 김문은 부귀와 영화를 누릴만치
누렸고 나름대로 이씨 왕실에 충성을 다 바쳤습니다. 물론 우리
김문에서 입신공명한 사람이 많다 보니 삼정을 문란하게 한 자도
적지 않았습니다.
금일 흥선대원군 이하응의 사저 운현궁에서 폭약이
터졌습니다. 시정에서는 이 일을 두고 우리 안동 김문에서
일으킨 흉거라고 하나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흥선대원군 이하응은 여론을 움직일 줄 아는 정치가입니다.
경복궁을 중건할 때의 일을 사영은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그와 같이 운현궁에 스스로 폭약을 터뜨려 우리
안동 김문을 음해하여 제거하려는 계획일지도 알 수 없습니다.
그렇지 않고서야 포졸들이 삼엄한 경비를 하는 운현궁에 누가
들어가서 폭약을 장치할 수 있겠습니까. 나는 그리 생각하고
있습니다.
지금 내가 겉으로는 좌의정에 있기는 해도 좌불안석입니다.
이제는 흥선대원군에게 대소사를 협조하고 우리 김문의 화를
면하는 도리밖에 없습니다.
그러니 사영께서도 자중자애하시고 매사 주의하십시오.
이 서찰을 본 뒤에 바로 태워 없애시기 바랍니다.
김병기는 그 편지를 몇 번이나 되풀이해서 읽었다. 대원군의
사저 운현궁에 자객이 들고 폭약이 터졌다는 것은 김병기도
들어서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이 김병학의 말대로 흥선대원군
이하응의 흉계라면 무서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그는 몸서리를
쳤다.
(나를 광주 유수로 내보내고 이세보를 여주 목사에 임명했을
때 이하응은 나를 제거하려고 했어.......)
이세보는 철종의 종부형제(從父兄第)로 경평군(景平君)에
봉군되어 있었다. 그러나 안동 김문에 잘못 보여 죽을 뻔한 일이
여러 번 있었다. 특히 영의정 김좌근의 세도 아래서 안동 김문의
수장 노릇을 하던 김병기는 이세보의 학문과 인품을 질시하여
수차례나 모해하려고 했으나 철종과 가까운 인척인 관계로 화를
모면할 수 있었다.
이세보는 고종이 즉위하던 해에야 이름을 인응(寅應)으로
바꾸고 과거에 등제하였다. 그리고 여주 목사가 되어 광주
유수인 김병기를 감시하게 되었던 것이다.
김병기는 광주 유수에 뒤이어 병조판서에 제수되었으나 실권은
금위대장 이장렴, 총융사 이방현, 우포도대장 신명순 같은
장상(將相)들이 쥐고 있었다. 그때 훈련대장엔 홍인군 이최응이
제수되어 있었다. 김병기와 안동 김문에 대한 감시역이었다.
이세보는 현재 병조판서의 자리에 있었다. 과거에 등제한 지
3년밖에 안 되었는데도 판서의 자리에 오른 것은 대원군의
신임이 각별했기 때문이었다.
그는 아버지 김좌근을 생각했다. 아버지는 나주 기생 양씨에게
빠져 시정의 조롱을 받았으나 학문이 출두했고 거인다운 풍모가
여실했다. 대원군이 김좌근을 사임시키면서 '철종실록'을 편찬케
한 것으로 보아도 아버지의 학문을 알 수 있었다. 그가 저지른
가장 큰 실정의 하나는 김병학, 조두순, 정원용과 함께 천주교에
대한 박해를 강경하게 주장했던 점이었다.
대원군은 용맹 과감한 사람이었다. 천주교인에 대한 박해에
소극적이다가 4명의 시원임대신(김좌근, 정원용, 조두순,
김병학)의 주장을 받아들이자 거리낌없이 천주교 말살정책을
폈다.
안동 김문에 대한 배려도 마찬가지였다. 아직은 안동 김문을
노골적으로 핍박을 하고 있지 않으나 일단 결심을 하면 무서운
피바람이 불어 닥치리라는 것은 삼척동자라도 짐작할 수 있는
일이었다.
(영초라도 자괴감을 느끼고 있겠지.......)
김병학은 고종의 국혼이 선포되고 재간택이 실시될 때까지
자신의 딸이 중전에 간택되리라고 믿고 있었다. 그러나 막상
재간택이 끝나고 보니 엉뚱하게도 인현왕후의 후손 민치록의
딸이었다.
(당했구나!)
놀란 것은 김병학뿐이 아니었다. 안동 김문은 철퇴로 뒤통수를
얻어맞은 느낌이었다. 그때는 이미 고종의 즉위한 지 3년이
되었고 군사와 병사를 동원할 수 있는 요직의 장상 자리는
야금야금 대원군 쪽으로 차지하여 김문은 힘을 쓸 수가 없었다.
(오로지 영초의 따님에게 희망을 걸었는데.......)
김병기는 속수무책으로 당한 일이 분통했다.
대원군의 사저 운현궁에 자객이 들고, 폭약이 터진 것도
김병학이 지적했듯이 대원군의 음모라고 볼 수 있었다.
대원군은 그날 잠을 자다가 꿈이 괴이하여 누워서 자는 것처럼
이불을 펴놓고 다락에 올라가 숨어 있었는데, 자객이 갑자기
침입하여 비수로 이불을 찌르고 달아났다는 것이었다.
"이것은 반드시 귀매의 짓이다."
대원군의 아들과 하인들이 놀라서 운현궁을 샅샅이 뒤졌으나
자객을 발견하지 못했다. 대원군은 자객을 발견하지 못했다는
소리를 듣고 엉뚱하게 태연한 얼굴로 귀매(鬼魅)의 짓이다. 라고
했다는 것이다. 귀매란 귀신과 두억시니를 말하는 것이었다.
폭약이 터진 것은 다음날의 일이었다. 대원군은 어쩐지 불긴한
생각이 들어,
"괴이한 일이다. 어찌 이리 심신이 편하지 않은 것일까."하며
사랑을 나와 뜰을 산책했다. 그때 방 안에서 폭음이 터지고
대들보가 무너져 내렸다. 화약이 폭발한 것이다.
대원군이 황급히 하인들에게 지시하여 별채 사랑과 산정(山亭)
아궁이를 살피게 하니 말(斗) 만큼만 화약 덩어리가 숨겨져
있었다. 다행히 불줄(도화선)에는 불이 붙어 있지 않았다.
"이런 변고가 있나. 할아버지와 아들, 손자가 한 날 한 시에
태어났으니......."
대원군은 파안대소를 했다. 별채의 사랑은 아들 재면(載冕)이
거처하고 있었고 산정은 손주 준용(埈鎔)이 쓰고 있었다. 조,
자, 손(祖, 子, 孫)3대가 한꺼번에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다는
의미였다.
대원군이 이 사건을 빌미로 안동 김문을 제거하려 한다면 안동
김문은 이제 꼼짝없이 앉아서 죽음을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내가 이제 더 무슨 영광을 바라겠는가?)
김병기는 쓸쓸하게 웃으며 사랑을 나와 마당으로 내려섰다.
마당에 모깃불을 피우고 있어서 밤인데도 후덥지근한 느낌이
들었다. 7월이었다. 모기가 극성을 부리고 있었다. 그는
김병학의 서찰을 모깃불 위에 던졌다.
(양이 오랑캐들을 어떻게 물리치려는지.......)
서찰이 완전히 타버린 것을 확인한 뒤 김병기는 뜰을 거닐기
시작했다. 황주목에 양이의 배가 들어오고, 그 배가 마침내
대동강 어귀까지 진출했다는 것은 김병기도 들어서 알고 있었다.
그는 내당 쪽으로 천천히 걸음을 떼어 놓았다. 내당엔 젊은
소실이 술상을 차려 놓고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5
대궐 어느 숲에서 접동새 우는 소리가 들렸다.
민비는 그 소리에 잠깐 귀를 기울였다. 대궐은 조영했다.
접동새 울음소리가 이따금 숲을 울리고 공기를 흔들어대고 있을
뿐이었다.
여자들은 조용조용히 민비의 몸을 씻기고 있었다. 섬세하고
부드러운 손이었다. 민비는 눈을 감은 채 여자들의 손에 자신의
몸을 맡겨 놓고 있었다.
세수간(洗水間)에서는 물소리만 들리고 있었다. 목욕탕이 따로
없고 옻칠한 함지에 물을 가득 받아서 하는 목욕이었다.
"중전마마. 다 되었사옵니다."
세수간 상궁이 고개를 숙여 말했다. 민비는 눈을 뜨고
함지에서 몸을 일으켰다. 세수간 상궁이 그녀의 몸에 묻은
물기를 수긴(수건)으로 닦았다.
"중전마마. 다 되었사옵니다."
몸이 가쁜했다. 후덥지근한 날씨에 속옷이 축축하게 젖었으나
목욕을 하자 날아갈 것처럼 상쾌했다. 상궁들이 그녀의 몸에
옷을 입히기 시작했다. 아래는 솟곡과 모시 속치마이고 위에는
간삼을 걸쳤다. 여름인 탓에 내의인 적삼도 모시였다.
속저고리는 미색이었다.
겉옷은 위에다 분홍색의 소고의(여자가 입는 짧은 저고리)를
입고 밑에는 남치마를 입었다. 그것이 밤에 왕비가 입는
평복이었다.
"참으로 어여쁘시옵니다."
옷고름에는 소삼작(小三作) 노리개 세 줄을 달았다. 노리개
끝에 산호가 매달려 있었다.
"고맙습니다."
민비는 지밀상궁에게 치하를 했다.
"중전마마. 소인에게 해라를 하소서. 공대하는 말씀을 감당할
수 없사옵니다."
"지밀상궁은 나에게 어머니와 다름없습니다. 신분이 다르다고
어찌 해라를 하겠습니까?"
"그러하시면 소인은 큰 벌을 받게 됩니다. 부디 해라를
하소서."
"알겠소."
"상감마마께오서 여삼추같이 기다리실 것이옵니다. 어서
납시옵소서."
"수고들 했구나."
옷을 다 입자 지밀상궁이 민비를 재촉했다. 민비는 상궁들에게
치하를 하고 조신한 걸음걸이로 세수간을 나섰다. 무수리들이
일제히 민비의 뒤를 따랐다.
"중전마마 납시옵니다."
세수간에서 동온돌까지는 잠깐이었다. 대조전 대청으로
올라서자 대전 상궁이 동온돌에 고했다.
"모셔라."
동온돌에는 이미 비단금침이 깔려 있었다. 지밀상궁은 민비를
동온돌로 인도한 뒤 오봉(五峯) 촛대에 꽂힌 황촉을 하나씩 끄고
퇴거(退去)했다.
민비는 옷고름을 푸른 뒤 차례로 옷을 벗고 금침에 들어가
누웠다. 고종도 어둠 속에서 옷을 벗고 금침에 들어와 누웠다.
민비는 온몸이 긴장이 되었다. 이제 조금 있으면 고종이
자신의 몸을 안아 주리라고 생각하자 가슴이 뛰고 얼굴이
화끈거렸다. 그러나 고종은 아무 기척이 없었다.
(어떻게 된 일이지......?)
민비는 어둠 속에서 고종의 손이 자신의 나신을 향해서
뻗쳐오기를 기다렸다. 그래서 세수간에서 상궁들의 시중을
받으며 정성스럽게 몸을 씻은 것이다. 그러나 고종은 시간이
일각일각 흘러가고 있는데도 손을 뻗칠 기색이 전혀 없었다.
이상한 일이었다.
고종이 끙하고 몸을 뒤채더니 벽을 향해 돌아누웠다. 민비는
신경이 바짝 곤두섰다. 잠이 오지 않았다. 여자의 나이 열
여섯이면 결코 적은 나이가 아니었다. 게다가 이미 고종에 의해
사내가 무엇인지 알게 된 민비였다.
아직은 운우의 쾌락을 자세히 몰랐다. 그러나 운우지정을 나눈
사내가 옆에 누워 있다는 사실은 괴로운 일이었다. 그의 몸을
자신의 몸 속에 받아들이고 싶은 욕구가 민비의 마음 속 깊은
곳에서 꿈틀거렸다.
민비는 낮게 한숨을 내쉬었다. 고종이 총애하는 이 상궁은
이럴 때 어떻게 할까 하는 생각이 얼핏 뇌리를 스쳤다. 어쩌면
이 상궁 쪽에서 먼저 고종을 현혹할지 알 수 없는 일이었다.
민비의 뇌리로 어렵지 않게 고종과 이 상궁이 나신으로 껴안고
있는 모습이 떠올라 왔다. 그러자 민비는 자신도 모르게 얼굴이
화끈거렸다.
고종이 다시 몸을 바로 눕혔다. 그 바람에 고종과 자영의
둔부가 닿았다. 자영이 속치마를 입고 누웠듯이 고종도 속바지를
입고 있었다.
장지문 밖에서 노상궁의 바른 기침소리가 들렸다. 직숙을 하는
상궁들이었다. 우물 정(井)자의 외곽 방에서 노상궁들이 이밤도
잠을 자지 않고 직숙을 하고 있었다. 민비는 그녀들이 신경에
거슬렸다. 직숙 상궁은 여덟 명인데 모두 6, 70대의
노인들이었다. 그림자처럼 조용조용히 움직이는 여인들이었다.
그들이 기침소리를 낸 것은 의미가 있는 것 같았다.
고종이 잠이 들었는지 코를 고는 소리가 들렸다. 민비도 잠을
청했다. 그러나 쉽사리 잠이 오지 않았다.
어느 숲에서인지 또 접동새가 우는 소리가 들려왔다. 밤이
이슥해 있었다. 접동새 우는 소리에 공기가 파르르 떨리고 있는
것 같았다.
댓돌 어디쯤에서인지 풀벌레도 울었다. 민비는 조심스럽게
간삼의 저고리를 풀렀다. 가슴이 답답했다. 고종의 옆에 누웠기
때문인지 후덥지근했다.
민비는 새벽녘에야 겨우 잠이 들었다. 민비가 눈을 뜬 것은
누군가 자신의 가슴을 만지고 있는 듯한 느낌 때문이었다.
(아.......)
고종이었다. 고종이 민비의 옆에 바싹 다가와 가슴을 만지고
있었다. 잠결인 것 같았다. 그러나 민비는 온몸이 긴장이
되었다.
고종의 손이 민비의 가슴을 애무하다가 저고리를 벗겨 냈다.
민비는 잠이 든 듯 가만히 있었다. 그러는 동안 속치마의
어깨끈이 벗어지고 속곳이 무릎 밑으로 끌어 내려졌다.
민비는 숨이 가빠왔다. 무릎이 떨리고 하체가 비틀렸다.
고종은 이미 완전히 나신이 되어 있었다.
민비는 두 팔로 고종을 안았다. 고종이 그녀의 나신에 자신의
몸을 실었을 때 그녀는 이미 고종을 자신의 몸 속에 받아드일
준비가 되어 있었다.
고종이 그녀의 몸에서 흥건히 땀을 흘리며 떨어져 누운 것은
채 20분도 되지 않았을 때였다. 가쁜 숨을 고르고 있는 고종의
몸을 수건으로 닦아 주며 민비는 절정의 행복감을 느꼈다.
"중전."
고종이 입을 연 것은 민비가 고종의 옆에 나란히 누웠을
때였다.
"예."
"대궐에 들어와서 몹시 적조할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모두 내가 부덕한 소치지요."
"당치 않으신 말씀이옵니다."
"중전에게 부탁이 하나 있소."
"부탁이라 하오시면......."
민비는 고종의 얼굴을 살피며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중전도 내가 상궁 이씨를 총애하고 있는 것을 알고 있을
거요."
"......."
"본래 궁녀가 승은을 입으면 빈이나 소의, 또는 귀인에
봉해지는 것이 대궐의 관례지 않소? 헌데 웃전에서는 아직 아무
분부도 없으니 중전께서 대왕대비전에 여쭈어 주오."
고종의 말에 민비는 눈썹이 파르르 떨리는 것을 느꼈다.
그랬던가, 그래서 고종이 상궁 이씨의 처소에 들지 않고
동온돌에 기수를 배설하게 하였던가, 하는 생각을 하자 배신을
당한 기분이었다.
(이 상궁이 사주를 한 거야.......)
민비는 어둠 속에서 두 눈을 날카롭게 빛냈다.
(그년을 죽여 버려야 해.......)
민비는 이를 갈았다.
"중전. 내 부탁을 들어 주겠소?"
"전하. 전하께서 하시고자 하는 일인데 무엇이 어렵겠습니까?
허나 남의 이목도 있고 하니 기다려야 할 줄로 아옵니다. 궁녀가
승은을 입으면 특별상궁이 되고 왕자나 공주를 생산해야 비로소
빈에 책봉되는 것이옵니다."
"내가 왜 그런 것을 모르겠소?"
"허면 어찌 신첩에게 부탁을 하는 것이옵니까?"
"미안하오."
"전하의 부탁이오니 대왕대비마마께 주청하기는
하겠사옵니다."
"고맙소."
고종이 비로소 기쁨에 넘친 표정을 지었다.
"전하. 그리하고 신첩의 부탁도 들어 주소서."
"무슨 부탁이오?"
"신첩은 전하의 아낙입니다. 비록 왕비요, 국모라고는 하지만
여염으로 따지면 지아비의 아낙일 뿐입니다."
"......."
"전하. 이 상궁을 총애하는 것만치 중전도 사랑해 주소서.
신첩은 전하의 아낙입니다. 전하께서 사랑해 주지 않으면 누가
사랑해 주겠사옵니까?"
"중전두 사랑하고 있소."
고종이 멋쩍음 웃음을 흘렸다.
"전하두."
민비는 부러 눈을 흘기는 시늉을 했다.
고종이 옆으로 돌아누우며 민비의 가슴에 손을 얹었다. 민비의
가슴이 어둠 속에 하얗게 빛나고 있었다. 마치 탐험을 기다리는
미지의 처녀림처럼 희디흰 가슴이었다.
고종이 윗몸을 일으켰다.
어디서 달빛이라도 새어드는 것일까. 고종의 나신이 그녀를
향해 내려와 겹쳐졌다. 가슴과 가슴이 밀착되었다. 그녀의 손이
어둠 속을 더듬어 고종의 머리를 감싸안았다.
(아!)
민비는 고종이 자신의 가슴을 한 입 베어 무는 것을 느꼈다.
자신도 모르게 등이 활처럼 휘어지면서 몸이 뜨거워졌다. 민비는
눈을 질끈 감고 그녀의 하체 깊은 곳에서 파문처럼 전신으로
번져가고 있는 황홀한 전율을 음미하기 시작했다.
1) 조인영의 척사윤음. 정하상의 상재상서 "한국 천주교회사"
상권에서 발췌했다.(유홍렬 저)
2)민비의 궁중생활은 "조선조 궁중풍속 연구"를 참고로
했다.(김용숙 저)
3)제너럴 셔먼 호의 침입은 "한국 천주교회사" 하권을 참고로
했다.(유홍렬 저)
제10장 서경(西京)에 부는 바람
1
황주목을 떠난 제너럴 셔먼 호는 11일 밤에 대동강을 거슬러
올라가 평양부 초리방 일리 신장포(新場浦)에 닻을 내렸다. 이에
평안도 관찰사 박규수(朴珪壽)는 군사들을 이끌고 나서 셔먼
호와 대치하게 되었다. 7월 12일 아침의 일이었다.
(저들이 상선이라고 하는데도 배가 무장을 하고 있으니 어쩐
일인가.......)
박규수는 침통했다. 그의 아명은 규학(珪鶴)이었다. 그의
어머니가 그를 잉태했을 때 집에서 기르던 학이 그의 어머니를
인도했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었다.
그는 학행(學行)이 뛰어난 19세에 이미 그보다 두 살이 연하인
순조(純租)의 세자 익종(翼宗)과 교유하면서 익종이 순조의
대리청정을 하고 있을 때 익종에게 주역(周易)을 강의하기까지
했다. 익종은 세자의 신분으로 계동(桂洞)에 있는 박규수의
집으로 친림(親臨)하여 박규수와 밤이 새도록 국사를 논의했다.
익종은 대리청정하면서 현재(賢才)를 등용하고 형옥(刑獄)을
신중히 하는 등 성군으로서의 면목을 보였다. 그러나 불과
21세에 요절함으로써 박규수에게 커다란 슬픔을 안겨 주었다.
박규수는 그 이후 학문에만 정진하여 청아한 중년문사로 명성을
떨쳤다.
박규수가 벼슬길에 나선 것은 1840년(헌종 14년)의 일로
증광시에 급제하여 정언(正言), 병조좌랑 등 내직을 역임하다가
부안 현감을 거쳐 사헌부 지평(地平)의 청관(淸官)을 역임한 뒤
고종 1년에 병조참판, 고종 2년에 대호군과 대제학을 역임하고
외직 중에도 가장 중직인 평안도 관찰사로 나가 있었다. 철종
11년에는 열하부사(熱河副使)로 연경(燕京)까지 다녀온 일이
있어 외국 문물에 대한 식견도 남다른 데가 있었다. 조선의
개화사상이 박규수로부터 비롯되었다고 할 수 있을 정도로 그는
서양 문물에 지대한 관심을 기울이고 있었다.
"어떻게 할까요?"
중군(中軍) 이현익(李玄益)이 큰 칼을 어루만지며 박규수에게
물었다.
"먼저 저들에게 물러가라고 이르시오. 우리 조선이 외국과
통상을 하지 않는 것을 알면서도 부중까지 들어온 것은 명백한
침략 행위요."
"알겠습니다."
이현익이 우렁차게 대답을 했다. 대동강 연안에는, 서양 배가
출몰했다는 소문을 들은 백성들이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었고,
군사들도 잔뜩 집결해 있었다.
"서윤!"
박규수는 평양부 서윤(庶尹) 신태정(申泰鼎)을 불렀다.
"중군과 함께 가서 살펴보시오."
"예."
이현익과 신태정이 박규수에게 읍을 하고 강가로 달려
내려갔다. 강가에 나룻배가 몇 척 대어져 있었다. 중군 이현익과
서윤 신태정은 나룻배를 타고 셔먼 호로 접근했다. 셔먼 호는
상선이라고 해도 거대하고 웅장했다. 이현익과 신태정은 셔먼
호에 가까이 접근할수록 그 위용에 압도되는 것을 느꼈다.
그들은 군관 방익진(方益鎭)까지 거느리고 셔먼 호로
올라갔다.
셔먼 호에서는 선교사 토마스, 청국인 조능봉(趙凌奉),
조반량(趙半良), 이팔행(李八行)등이 나와서 그들을 맞이했다.
"이 배는 어느 나라 배인가?"
서윤 신태정은 그들에게 질문을 하고 중군 이현익과 군관
방익진은 셔먼 호의 무장을 살폈다. 셔먼 호에는
대완구(大碗口)가 두 개 소완구(小碗口)가 또 두 개였고
선원들은 장총으로 무장을 하고 있었다. 장총 끝에는 대검까지
꽂혀 있었다.
"미국 배요."
"조선에는 무엇하러 왔는가?"
"교역을 하기 위해 왔소."
"그러면 이 배가 상선인가?"
"그렇소."
"상선이라면서도 무장을 하고 있지 않은가?"
"이 배는 틀림없이 상선이오. 무장을 하고 있는 것은 자위를
하기 위해서요."
"우리는 서양과 교역을 하지 않으니 돌아가시오."
그때 토마스가 통역들을 젖히고 앞을 나섰다. 그는 1895년
9월에 조선에 들어와 백령도(白翎島)에 두 달동안이나 머물러
있었으므로 어느 정도 조선말을 할 수 있었다.
"우리는 조선을 해치려고 온 것이 아니오."
서윤 신태정은 서양인이 조선말을 하자 신기한 듯이 토마스를
쳐다보았다.
"그대는 누구인가?"
"나는 로버트 토마스라는 사람으로 선교사요."
"그렇다면 신부인가?"
"아니 신부가 아니고 예수교의 목사요. 당신네 나라 조선에
복음을 전파하러 왔소."
"우리는 천주교든 야소교든 포교를 허락하지 않고 있다.
그러니 속히 돌아가라."
"천주교 신부 아홉을 죽였다는데 사실이오?"
"그렇다."
"그들을 살해한 이유가 무엇이오?"
"천주교는 조선의 풍속을 더럽히고 조상에게 제사를 지내지
않는다. 이러한 까닭으로 나라에서 금하고 있는데도 그들은 포교
활동을 했기 때문에 사형을 당한 것이다. 그러니 그대들도 속히
돌아가라."
"정 그렇다면 식량이나 좀 공급해 주시오."
토마스 선교사가 체념한 표정으로 말했다.
"무엇이 필요한가?"
"쌀 두 가마, 소고기 50근, 닭 25마리, 달걀 50개가
필요하오."
"좋다. 그것은 곧 보내 줄 테니 속히 떠나도록 하라."
"알겠소."
토마스가 고개를 끄덕거렸다. 서윤 신태정과 중군 이현익,
군관 방익진은 즉시 관찰사 박규수에게 돌아와 접촉결과를 보고
했다.
"식량과 식수를 즉시 공급해 주라!"
박규수는 셔먼 호의 요청을 쾌히 수락했다. 서양 배와의 무력
충돌은 가능하면 피하고 싶었다.
그러나 셔먼 호는 해가 지도록 떠나가지 않았다.
(날이 밝으면 떠나겠지.......)
박규수는 강언덕에서 셔먼 호를 내려다보며 그렇게 생각했다.
셔먼 호는 위용이 당당했다. 일개 상선이 갖고 있는 위용이
저러할진대 그 나라의 부(富)와 병(兵)은 또 어떠할 것인가 하는
생각을 하자 박규수는 가슴이 답답해 왔다.
이튿날 아침 셔먼 호가 움직이기 시작하더니 오히려 강을
거슬러 올라와 만경대(萬景臺) 밑에 있는 두로섬 앞 포구에 닻을
내렸다.
(오만무도한 자들이 아닌가......?)
박규수는 내심 분노를 느꼈다.
"대감. 저들이 오히려 두로섬에 정박했습니다."
"대감, 군사들에게 저들을 물리치라고 명을 내려 주십시오!"
서윤 신태정과 중군 이현익이 분노하여 박규수에게 출동하게
해달라고 요구했다.
"비가 오고 있지 않느냐, 비가 이렇게 억수같이 쏟아지고
있는데 그대들 같으면 망망대해로 나갈 수 있겠는가?"
박규수는 신태정과 이현익을 힐책했다. 밤부터 소나기가
장대질을 하듯이 퍼붓고 있었다. 벌써 대동강은 물이 불어
급류처럼 요란하게 흘러 내려가고 있었다.
박규수는 한성으로 파발을 띄웠다.
......금 7월 9일 서양인 5명, 청국인 13명, 흑인 5명이 탄
미국 국적의 상선 한 척이 황주목에서 교역을 요구하다가 여의치
않자 급기야 11일 아침 평양부까지 들어왔으므로 본 관찰사는
이들에게 식량과 식수까지 공급해 주면서 회선할 것을
명하였으나 듣지 않고 13일에는 만경대 아래 두로섬까지 들어와
본부 병력을 풀어서 엄중히 감시하고 있습니다. 이들은 대완구와
소완구 각각 두 문으로 무장하고 있습니다. 조처할 바를 속히
명하여 주십시오.
조정은 박규수의 장계를 대하자 한바탕 소란이 일어났다.
무엇보다 상선에 대완구와 소완구가 각각 두 문(門)이나 된다는
데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대원군의 의견대로 척이(斥夷)의 회답을 보냈다.
......서양인과 교역을 금하는 국법에는 추호도 변함이 없다.
관찰사는 반드시 저들을 회선시키되 무력충돌을 일으키지 않고
좋은 말로 설득하여 되돌려 보내라.
박규수는 얼굴을 찡그렸다. 그는 다시 서윤 신태정과 중군
이현익을 셔먼 호로 보냈다.
"그대들이 끝내 회선하지 않고 말썽을 피우면 절차에 따라
그대들을 포박하여 문초하겠다. 속히 조선에서 떠나라."
신태정이 토마스에게 강경한 어조로 항의하자 토마스와
조능봉은 중국으로 돌아가자고 하고 선장인 페이지와 프레지턴은
물건을 교환이라도 해야 한다며 옥신각신하였다.
그때 영국인 선원 호가스가 비단, 유리그릇, 천리경(千里鏡),
자명종(自鳴鐘)등을 이현익에게 보여 주며 자랑을 했다.
이현익은 천리경이 몹시 부러웠다. 그것은 군사용으로도
유익하게 쓰일 수 있을 것 같았다. 천리경을 눈에 대고 대동강
연안을 살피자 흰 옷을 입은 백성들의 모습이 뚜렷이 보였다.
(참으로 진기한 물건이군.......)
박규수는 이현익으로부터 보고를 받고 은근히 서양인들과
통상을 해보고 싶었다. 그러나 작금이 조정 분위기로 서양인들과
교역을 하겠다고 주장하는 것은 무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대원군의 서정개혁에 적극적으로 참여해 왔고, 대원군을
국태공에 봉해야 한다고 주장한 것도 그였다. 대원군과는
대원군이 서정에 참여하기 전부터 남다른 인간관계를 맺고
있었다.
박규수는 서양인과 통상을 하는 것이 좋지 않겠느냐는 뜻을
비치는 파발을 조정으로 보냈다. 그러나 조정에서는 조선인으로
외국 배에 숨어 들어가는 자가 있으면 모두 잡아 죽이라는
엉뚱한 명을 내렸다.
박규수는 실망했다.
조선 병사들과 셔먼 호의 대치는 계속되었다.
이러한 대치가 계속되는 가운데 7월 15일 토마스와 3명의
서양인들이 무장을 하고 상륙하여 만경대에 올라가 경치를
구경하고 다시 옥현지 쪽으로 가려고 하였다. 이에 평양 서윤
신태정이 군사들을 동원하여 가로막았다.
16일 이들은 다시 강을 거슬러 올라가 한사정 앞에 닻을
내렸다. 저녁 때에 그들은 소선(小船:보트)을 셔먼 호에서
내리고 6명이 노를 저어 강을 탐사했다. 이에 중군 이현익이
작은 배를 타고 그들을 쫓기 시작했다.
해질녘의 대동강 강상에서 일대 추격전이 전개되었다. 강
연안에는 조선의 군사들과 수천의 백성들이 운집하여 이를
구경하고 있었다. 백성들은 환호성을 지르며 중군 이현익을
격려했다. 박규수도 군진에서 나와 이들의 추격전을 지켜보았다.
"서라! 서양 오랑캐들은 거기 섰거라!"
이현익은 칼을 뽑아 들고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그러나 서양
보트와의 거리는 점점 멀어지고 있었다.
(저것이 문명의 차이라는 것이군.......)
박규수는 기분이 씁쓸했다.
그때 백성들이 와하고 함성을 질렀다. 서양 보트가 갑자기
속력을 떨어트리고 중군 이현익의 소선을 바짝 쫓아가고 있었던
것이다.
(웬일일까......?)
박규수는 의아했다. 이해할 수 없는 현상이었다.
그때 서양 보트가 갑자기 방향을 돌려 이현익의 소선으로
달려왔다. 이현익 등이 아차하고 놀랐을 때는 이미 서양 보트가
소선의 옆에 닿았고 선원들이 총을 겨누고 이현익에게 달려들어
무장을 해제시켜 버렸다. 눈깜짝 할 사이에 일어난 일이었다.
"서윤은 어서 나가 중군을 구하라!"
박규수가 다급하게 외치자 서윤 신태정이 군사들을 이끌고
달려갔으나 이현익은 이미 셔먼 호로 끌려 올라간 뒤의
일이었다.
"중군을 석방하라!"
"중군을 석방하라!"
신태정은 셔먼 호에 가까이 다가가서 소리를 질렀으나 셔먼
호에서는 아무 대꾸도 없었다. 오히려 신태정이 밤새도록 소리를
지르자 공포까지 쏘아댔다. 그리하여 요란한 총성이 대동강
강상에서 한동안 메아리쳤다.
(꽤심한 놈들......!)
박규수는 미국 상선이 하는 짓을 보고 분노했다. 중군을
납치한 것은 무도하기 짝이 없는 짓이었다.
"중군을 석방하라. 중군을 납치하는 것은 조선을 업신여김이
아닌가?"
이튿날 아침 한서정에서 평양 서윤 신태정과 셔먼 호의
토마스와 교섭이 시작되었다.
"교역을 허락하시오. 교역을 허락하면 당신네 중군을 석방할
것이오."
"금일 이내에 석방하지 않으면 조선 군사들이 그대들 배를
공격할 것이다! 그래도 좋은가?"
"그렇게 되면 당신네 중군은 죽임을 당할 것이오."
"어쨌든 하루의 기한을 주겠다! 오늘 해가 질 때까지 석방하지
않으면 그대들 배를 공격할 것이다!"
협상은 결렬되었다.
박규수는 해가 질 때까지 기다렸다. 그러나 셔먼 호에서는
해가 져도 중군을 석방하지 않았다.
박규수는 한성으로 파발을 띄웠다. 그러나 한성에서는 곧바로
회답을 보내지 않아 다음날도 그냥 보낼 수밖에 없었다.
셔먼 호는 7월 19일 강을 타고 올라가면서 강 연안을 향해
함부로 대포를 쏘고 총질을 해댔다. 백성들은 분노하기
시작했다. 지금까지는 서양 배에 대한 호기심 때문에 강 연안에
하얗게 나와서 구경을 했던 백성들이었다. 그러나 호기심이
분노로 바뀌어 거대한 함성이 되었다.
"중군을 돌려 보내라!"
"양이 오랑캐들은 평양성에 들어와서 중군을 억류한 까닭을
밝히라!"
백성들은 돌멩이를 던졌다. 성을 지키던 군사들은 관찰사의
지시가 내리지 않았는데도 총을 쏘고 활을 쏘았다.
셔먼 호는 황강정(黃江亭)에 닻을 내리고 강 연안을 향해
대포를 쏘아댔다. 천지를 진동하는 폭음이 터지면서 물기둥이
치솟았다. 백성들은 혼비백산하여 흩어졌다.
셔먼 호에서 보트가 내려졌다. 서양인 다섯 명이 타고 있었다.
백성들은 다시 모여 들었다.
셔먼 호에서 내려진 보트는 식수를 구하기 위해 오탄(烏灘)의
여울을 거슬러 올라가 물골을 찾으려던 참이었다.
"오랑캐를 죽여라!"
"오랑캐가 우리 중군을 잡아 갔다!"
돌팔매질이 더욱 심해 졌다. 병사들도 다시 총을 쏘고 활을
쏘아댔다. 다급해진 셔먼 호의 선원들은 보트를 버리고
양각도(羊角島)로 상륙하여 헤엄을 쳐서 셔먼 호로 돌아갔다.
백성들은 서양인들이 버리고 간 보트를 취하고 천세를 부르며
환호성을 질렀다.
게다가 퇴직한 군교(軍校) 박춘권(朴春權)은 군졸들과 더불어
야음을 틈타 셔먼 호를 기습하여 중군 이현익을 구출했다.
그러나 중군을 따라갔던 군관(軍官) 유순원(諭淳遠)과
통인(通引) 박치영(朴致永)은 셔먼 호에서 뛰어내린 것까지는
확인할 수 있었으나 그 뒤에는 어디로 갔는지 알 수 없었다.
중군 이현익은 파직되고 통진(通津)부사 양주태(梁柱台)가
중군에 임명되었다. 중군 이현익을 구출하는 데 공을 세운 퇴직
군교 박춘권은 오위장(五衛張)의 벼슬에 올랐다가 곧 평안도
병마 우후(虞候)로 승진했다.
이때 셔먼 호는 양각도 서쪽으로 물러가 정박하고 있었는데
철산 부사 백낙연이 평양으로 달려와 박규수는 백낙연에게
중군을 겸임하도록 하였다.
박규수는 가능한 미국 상선 셔먼 호를 충돌 없이 회선시키고
싶었다. 셔먼 호는 한 척을 파선시키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었으나 그 일로 인하여 외교적 마찰이 생기는 것을 미연에
방지하고자 했던 것이다.
백낙연은 중군의 직책을 맡자 강변의 방비를 더욱 엄중히
하면서 신태정을 셔먼 호에 보내어 회선할 것을 촉구했다.
그러나 셔먼 호는 22일 양각도 서쪽을 닻을 내린 뒤 작은 보트를
타고 민가를 습격하여 조선인 7명을 죽이고 5명을 부상하게 만든
뒤 식량과 식수를 약탈하여 달아났다.
박규수는 더 이상 셔먼 호의 만행을 지켜보고 있을 수 없게
되었다.
"이제는 우리는 참고 있을 수가 없구나! 중군과 서윤은 즉각
공격을 개시하여 서양 오랑캐들을 쳐부수도록 하라!"
추상 같은 명령이었다. 중군 백낙연과 서윤 신태정은
기다렸다는 듯이 군사들을 이끌고 강변으로 나가 공격을
시작했다. 그러나 셔먼 호의 반격도 만만치 않았다. 셔먼 호에는
대완구와 소완구가 각각 두 문씩이나 있어서 그것을 쏘아댈
때마다 온 평양 부중이 떠나갈 듯이 진동을 했다. 조선 군사들은
불화살로서 셔먼 호를 공격했다. 그러나 불화살들은 셔먼 호에
닿지도 않을 뿐더러 셔먼 호는 교묘한 항해술로 불화살을 피해
갔다.
"퇴로를 차단하라!"
박규수는 직접 진중에 나가 군사들을 독려했다. 셔먼 호는
마침내 포탄이 떨어지고 상류에서 떠내려 보내는 불붙은
짚더미를 피하다가 여울에 좌초하여 움직일 수 없게 되었다.
전투는 점점 치열해 졌다. 셔먼 호는 계속 총을 쏘면서 저항을
했다.
23일에는 셔먼 호가 조금 움직여 아래 쪽으로 내려오게
되었다. 조선의 군사와 백성들도 셔먼 호를 따라 이동했다.
24일이 되었다. 셔먼 호는 맹렬한 저항을 해왔다. 조선
군사들쪽에서도 피해가 속출했다. 정오에는 백성도 한 사람
그들의 총을 맞고 죽었다. 성민들은 분노했다. 유황을 뿌린
나뭇단을 작은 배에 싣고 셔먼 호로 띄워 보낸 뒤 일제히
불화살을 쏘아댔다.
마침내 셔먼 호에 불이 붙었다. 백성들이 일제히 환호성을
질러댔다. 불길을 셔먼 호에 옮겨 붙어 맹렬하게 타오르고
있었다. 그때서야 토마스와 중국인 조능봉 등이 뱃전으로
뛰어나와 살려달라고 빌었다. 조선군 병사들은 그들을 끌어내어
강변으로 보냈다.
강변에는 흥분한 백성들이 구름처럼 모여 있었다. 그들은
강변에 있던 군사들과 함께 강변으로 끌려나온 토마스 일행을
때려 죽였다.
2
그때 역관 오경석과 기인 유대치는 부벽루에 있었다. 그들은
평양부 대동강에 외국 상선이 나타나 조선 군사들과 대치하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한성에서 허겁지겁 달려와 사태의 추이를
지켜보고 있던 참이었다.
평양 부중의 군민들은 셔먼 호가 불이 붙자 하나로 뭉쳐
환호성을 지르고 있었다. 장관이었다. 셔먼 호는 불덩어리가
되어 시커먼 연기를 피워 올리고 있었고 유황 냄새와 화약
냄새가 코를 찔러댔다.
"대단하군."
오경석이 감탄을 했다. 성민들의 소란과 함성이 부벽루까지
들렸다.
"배 한 척에 온 성민이 동원되어 저 난리니 큰 문제요."
유대치가 짐짓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날씨는 후덥지근했다. 울창한 숲에서는 늦여름을 아쉬워하는
매미가 요란하게 울어대고 있었다.
"문제라니?"
오경석은 매미소리에 잠깐 귀를 기울였다가 유대치의 얼굴을
물끄러미 응시했다.
"배 한 척에 평양 부중의 온 성민과 군사가 동원되어
파선시켰으니 문제라는 말이오, 더구나 군선도 아닌 일개 상선에
지나지 않는 배를......."
"그래서 조선이 개화되어야지."
"개화요?"
"개화가 아니면 개명이라고나 할까?"
오경석의 말에 유대치가 미간을 찌푸렸다. 개화니 개명이니
하는 말은 오경석으로부터 처음 발설된 것이었다.
오경석은 박규수의 역관으로 중국을 수없이 왕래하였고,
영불연합군의 북경 점령 후의 중국의 실정을 직접 목격하였으며,
또한 서양에 관한 중국의 신서적을 구입하여 탐독했기 때문에
서양의 사정에 밝았다. 유대치는 오경석을 통해 중국의 한의서를
구해 읽고 신서적을 대하게 되어 서양 문물에 눈을 뜨기
시작하고 있었다.
"법국 군선이 내침한다는 말이 파다한데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법국 군선은 반드시 내침한다고 보아야 하네."
"내침을 하면 어디로 할까요?"
"아마도 강화도가 되겠지......."
"강화도는 천연의 요새라고 하던데 법국 군선과 좋은 일전을
벌이겠군요."
"그렇지 않을 거야. 일개 상선 하나가 평양 부중이 이
소란인데 불란서 군선이 들이닥치면 강화가 버티기 어려울
걸세."
"그러면 조정은 어떻게 대책을 세울까요?"
"모르지, 나라의 흥망은 하늘이 정하는 법이니까......."
"강화로 내려가 보아야겠군요."
"왜? 법국 군선과 싸움이라도 할 참인가?"
"나는 아직 서양인을 한 번도 본 일이 없습니다. 그들이
어떻게 생겼는지 볼 작정입니다."
"그런가?"
오경석이 웃었다. 유대치는 오경석을 힐끗 쳐다보고 다시
대동강을 내려다보았다. 능이라도 주변의 하늘이 붉으스레해
지면서 서서히 황혼이 내리기 시작하고 있었다.
"대인은 어디로 행차하십니까?"
"나야 관찰사 어른께 매인 몸이 아닌가."
"박규수 대감 댁에 쓸만한 준재들이 자주 드나든다면서요?"
"준재라고 꼽는다면 김홍직과 김윤식을 일컬음이겠지......."
"어떤 사람들입니까?"
"총명한 사람들이야......."
"그들도 서양에 관심이 많습니까?"
"내 일간 소개하겠네."
"저 같은 의원을 아는 체나 하겠습니까? 그들은 내로라하는
명문세가의 자제들은 아닙니까?"
"그들이 백의정승을 몰라 본다면 복이 없음이 아닌가?"
오경석이 어깨를 흔들며 웃었다. 유대치도 싱겁게 웃었다.
백의정승은 그의 별호였다.
그들이 북벽루를 내려온 것은 사방이 캄캄해 졌을 때였다.
"백의정승이라 불리는 유대치입니다."
오경석은 그날 밤 유대치를 박규수에게 소개했다. 박규수는
60대의 노인으로 풍채가 당당했다. 수염은 하얗게 빛나고 눈매는
온화했다.
"이양선을 파선시켰음을 감축드립니다."
"오 역관에게 많은 얘기 들었네. 의원이라고?"
"예, 청계천에서 조그만 약국을 하나 경영하고 있사옵니다."
"의원이라면 사람의 병을 고치는 것이 업이지. 그러나 진정 한
의원이라면 나라의 병도 고쳐야 하네."
"......."
"오 역관 비록 중인 출신이라도 해도 남다른 재주를 갖고 있고
사람을 보는 안목이 뛰어나네."
"......."
"자네들이 힘을 합쳐 인재를 육성하게. 조만간 우리 조선에도
새로운 세상이 열릴 것이네."
"......."
"새 술은 새 부대에 담아야 하는 법, 자애하면서 때를
도모하게."
"외람된 말씀이오나 그때가 언제가 되겠습니까?"
유대치는 박규수에게 공손히 물었다. 학문이나 경륜에 있어서
박규수는 이미 일가를 이루고 있었다. 연암 박지원의 혈손다운
면모가 여실해 유대치는 저절로 고개가 수그러졌다. 박지원은
당시의 사회적 모순에 대해 날카로운 비판을 가한 실학자였고,
특히 상공업과 과학기술의 진보를 장려한
이용후생학파(利用厚生學派)의 중심 인물이었다. 박규수는
이러한 선대의 학문을 계승하여 부국강병을 꾀하고 있었다.
"10년 안쪽이 되지 않겠나?"
박규수가 눈을 지그시 감고 말했다.
"그러면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합니까?"
"우선 해국도지를 읽게, 그리고 눈을 크게 떠야 하네."
"해국도지(海國圖誌)"는 위원(魏源)의 역서로 서양 각국의
역사, 지리, 종교, 과학 등을 상세히 해설한 책이었다.
"삼가 명심하겠습니다."
유대치는 깊이 고개를 수그렸다.
오경석 역관의 말대로 불란서 함대가 조선에 나타난 것은 음력
8월 12일의 일이었다.
이에 앞서 제너럴 셔먼 호가 대동강에서 격침되자 김계호는
다음과 같이 대원군에게 상소를 올렸다.
......평안도 도관찰사가 대동강에서 불 지른 배는 법국
군선이 아니라 미국의 일개 상선에 지나지 않습니다. 법국은
예로부터 성교를 국교로 하여 나라를 발전시켰고, 조선이 법국
신부 아홉을 죽인 사실에 대해 그 까닭을 밝히려 반드시 병선을
보내올 것입니다. 원컨대 대원위 저하께오서는 성교의 자유를
허락하시고 법국과 화친을 도모하소서. 법국은 강한 나라이오니
병선이 휘몰아쳐 오면 큰 변란이 닥칠까 우려되나이다.
대원군은 김계호의 상소를 보고 불같이 역정을 내어
천주교인들을 모조리 잡아 죽이라는 강경한 명령을 재차 내리고
문신들에게 척사윤음을 지어 바치게 하여 전국에 배포하였다.
불란서 함대는 로즈 제독의 지시에 의해 8월 10일 기함(旗艦)
프리모게 호가 포함(砲艦) 데롤레드 호와 타르디프 호를
거느리고 치푸를 떠나 8월 12일에 조선 연안에 도착하였다.
13일에 로즈 제독이 한성으로 가는 길을 알아보기 위해
데롤레드호를 파견하자 이리텔 신부는 통역의 신분으로 동행하게
되었다.
데롤레드 호는 인천 앞의 물치도를 지나 강화도와 통진 사이에
있는 물골로 들어가 갑곶진(甲串津)에 닻을 내렸다. 여기서
사관(士官) 10여 명이 뭍에 내려 강화섬을 정찰하였다.
날씨가 쾌청했다. 하늘이 구름 한 점 없이 매끄러운 가운데
넓은 들에 논밭이 펼쳐져 있었고 초가 마을은 야산 밑에
옹기종기 흩어져 있었다. 지극히 평화롭고 목가적인 정경이었다.
강화읍은 서북 방향으로 10리 쯤 떨어진 곳에 있었고
산성이었으나 수비는 허술해 보였다. 포대(砲臺)도 몇 개
보였으나 보잘 것이 없어 보였다.
백성들이 군함을 보고 두려워 하면서도 가까이 와서 구경을
했다. 특히 데롤레드 호가 돌아갈 때는 수많은 백성들이 해안에
나타나서 거대한 철선이 돛대도 없이 화살처럼 빠르게 달려가는
것을 보고 신기하게 여겼다.
강화 유수 이인기는 이 사실을 즉각 조정에 보고하고 중군
이일제로 하여금 초지진의 방어를 엄중히 하게 하였다.
대원군은 강화 유수로부터 서양 군선이 나타났다는 보고를
받자 13일에 통진 부사에 이공렴을 임명하고 한성에 올라와 있던
경기도 연안 군수들로 하여금 각각 그 지방에 내려가 방어를
철통같이 하도록 지시했다.
영종 첨사 심영규는 물치도에 정박해 있던 데롤레드 호로 가서
그들을 문정하려고 했으나 그들은 손을 내저어 배에 오르는 것을
거절했다. 14일에 그들은 팔미도 일대를 정찰했으나 기함
프리모게 호가 초지진 부근에서 암초에 부딪쳐 난지도로 돌아가
정박했다. 15일 포함 데롤레드 호와 타르디프 호는 풍덕
유천리에 정박했다. 이에 부평 부사 조병로와 영종 첨사
심영규는 프리모게 호에 이르러 다시 문정을 시도했다. 프리모게
호에서는 청국인 한 사람이 뱃머리에 나와서 문정에 응했다.
"이 배는 어디서 오는 배인가?"
"우리는 먼 남쪽 나라에서 왔소."
"조선에는 무엇 때문에 왔는가?"
"조선을 정벌하러 왔소."
"당신들과 우리는 원래 원수진 일이 없는데 무엇 때문에
정벌하려고 하며 정벌하려는 곳은 어디인가?"
"정벌하려는 곳은 당신네 나라 도성이다. 당신들이 우리
선교사 9명을 죽였으니 당신들 9천 명을 죽일 것이다."
"이게 무슨 말인가? 우리나라에서 당신네 사람 9명을 죽이지
않았는데 어째서 그런 소리를 하는가?"
"우리는 이미 다 알고 있다. 당신은 우리를 속이고 있다."
"당신의 이름은 무엇이고 나이는 몇 살인가?"
"성은 서가고 이름은 창복이다. 나이는 16살이다."
"청나라 사람인가?"
"그렇다."
"배의 선주는 누구고 어느 나라 사람인가?"
"불란서 사람이다. 함장은 누구인지 말할 수 없다."
조병로와 심영규는 이 사실을 조정에 보고하고 조처할 바를
명해 달라고 하였다. 이에 대원군은 외국 배를 보고도
방관하였다는 죄로 강화 중군 이일제를 파직시키고 강화 유수
이인기를 엄중 문초케 하였다. 또한 통역관 2명을 보내어 그들을
설득하여 돌아가게 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데롤레드 호와 타르이프 호는 강화도 월곶진을 거쳐
통진의 한강 하류에 이르렀다. 이에 통진 부사 이공렴은
병사들을 지휘하여 나룻배로 한강 어귀를 봉쇄하였다. 데롤레드
호와 타르디프 호의 한강 진입을 저지하기 위해서였다.
(이 조그만 배들로 어떻게 거대한 군선을 막을 것인가.......)
통진 부사 이공렴은 불란서 군선을 보자 눈앞이 캄캄했다.
불란서 군선은 돛도 없이 월곶진 앞바다를 쏜살같이 빠르게
누비고 있었다. 마치 거대한 산이 움직이고 있는 것 같았다.
"병사들은 들으라! 법국 군선이 한강 어귀로 진입하는 것을
결사적으로 저지하라!"
이공렴은 강 언덕에서 군도를 뽑아 들고 병사들에게 명령했다.
강 언덕에는 대완구 포대와 소완구 포대가 발사 준비를 하고
있었다.
강상에서도 뱃전에서 점점 육박해 오는 불란서 군선을 향해
소완구를 겨누고 있었다.
"발사!"
이공렴은 군도를 힘껏 내리그었다. 강상에 있는 소완구 포대에
대한 발사 신호였다. 그것을 기다렸다는 듯이 폭음이 터지고
소완구가 화약 연기를 자욱하게 뿜어냈다. 강 언덕에 나와 있던
백성들이 환호성을 질러댔다. 불란서 군선 앞에서 잇달아
물기둥이 솟고 있었다.
이공렴은 긴장하여 불란서 군선을 응시했다. 소완구 철환이 한
개라도 불란서 군선이 맞아 파선이 되었으면 싶었다. 그러나
소완구 철환은 불란서 군선 가까이 이르지도 못하고 물기둥만
하얗게 일으키고 있었다.
(사정거리가 너무 짧아.......)
이공렴은 조선군 병사들이 소유한 소완구가 위력이 없다는
사실을 절감했다.
쾅!
그때 불란서 군선 쪽에서 요란한 포성이 들렸다. 그 소리가
어찌나 큰지 산천이 부르르 진동을 하는 것 같았다. 이공렴은
놀라서 재빨리 불란서 군선을 쳐다보았다. 그러나 이공렴이 더욱
놀란 것은 불란서 군선의 한강 진입을 막기 위해 일자진(一字陣)
형태로 늘어서 있던 조선 군선에 포탄이 정확히 떨어졌기
때문이었다. 조선 군선은 함포 사격 한 번에 두 척이 한꺼번에
날아가고 일자진이 무너져 버렸다.
(가공할 위력이군.......)
이공렴은 우왕좌왕하는 조선 군선을 바라보며 암담한 생각이
들었다. 애초에 군선이랄 것도 없는 배들이었다. 경복궁 중건에
필요한 자재를 실어 나르기 위해 배들이 모조리 징발되었는데 다
쓸만한 범선조차 준비되어 있지 못했다. 여기저기서 동원한
나룻배에 병사들을 태우고 최근엔 사용한 일이 거의 없는 소완구
몇 개를 실었을 뿐이었다.
쾅!
쾅!
불란서 군선에서 잇달아 함포 사격이 시작되었다. 또다시
산천이 진동을 하고 조선 배들은 산산이 부서져 튕겨 오르고
물기둥이 수십 장(丈)씩 솟았다.
"대완구 발사 준비!"
이공렴은 다시 군도를 높이 쳐들었다. 강상에서 불란서 군선을
저지하려던 방어선은 제대로 힘 한 번 쓰지 못하고 와해된
것이다. 이제는 강 언덕에 설치되어 대완구로 불란서 군선을
저지시킬 수밖에 없었다.
"대완구 발사!"
병사들이 철환에 불을 댕겨 대완구에 장착했다.
쾅!
쾅!
대완구가 불을 뿜으며 불란서 군선을 향해 철환을 쏘아댔다.
그러나 대완구의 철환도 불란서 군선에 이르지 못하고 물기둥만
하얗게 일으키고 있었다.
(아!)
이공렴은 절망했다. 그때 불란서 군선에서 강 언덕을 향해
함포 사격을 해댔다. 요란한 폭음과 함께 포탄이 대완구 옆에서
작렬했다. 흙무더기가 공중으로 치솟고 커다란 구덩이가 패였다.
백성들이 비명을 지르며 뿔뿔이 달아났다.
함포 사격은 계속되었다. 대완구 포대가 불란서 군선의 함포
사격에 흔적도 없이 부서져 버렸다. 함포 사격이 어찌나
치열한지 포대가 있던 강 언덕은 땅이 완전히 뒤집혀 있을
정도였다.
이공렴은 막막하여 병사들에게 후퇴를 명령했다.
불란서 군선은 유유히 통진을 지나 김포로 거슬러 올라갔다.
김포(金浦) 군수 정기화(鄭夔和)는 불란서 군선이 김포로
올라오자 죽을 각오로 하고 가로막고 문정을 시도했다. 이미
통진 부사 이공렴으로부터 불란서 군선의 위력을 들은
정기화였다.
"이 배는 어느 나라에서 온 배인가?"
데롤레드 호에서 검은 옷을 입은 서양인이 뱃머리로 나왔다.
이리텔 신부였다. 병사들도 언뜻 보였는데 흰 색과 붉은 색이
화려하게 조화를 이룬 군복을 입고 검은 모자를 쓰고 있었다.
"이 배는 불란서의 황제 나폴레옹 3세의 해군 함정이다."
서양인은 조선말이 유창했다.
"그대가 책임자인가?"
"나는 통역의 신분으로 왔다."
"그 배의 책임자는 누구인가?"
"인도지나함대 사령관인 로즈 제독이다. 그의 휘하에는 7척의
함정이 있다."
"그를 만나게 해달라."
"당신 같은 지방 관리는 그를 만날 수 없다."
"조선에 온 연유는 무엇인가?"
"산천을 구경하려고 왔다."
"우리 조선은 서양인의 출입을 금하고 있다."
"우리는 조선의 산천을 구경하러 왔을 뿐 해치려고 온 것이
아니다. 우리는 당신네를 한 형제로 본다."
"돌아가라!"
"돌아갈 수 없다."
불란서 군선은 계속 한강을 거슬러 올라가 저녁에는 양천현의
염창목까지 올라왔다. 이에 양천 현령 윤수연도 뱃길을 막고
문정을 했다.
"불란서인들은 어찌하여 남의 나라에서 소란을 일으키는가?"
"우리는 조선이 산천을 구경하고 있을 뿐이다."
이번에는 이리텔 신부가 뱃머리에 나와서 문정에 응했다.
"속히 그대들의 나라로 돌아가라."
"한가지 묻고자 한다. 조선은 무엇 때문에 성교를
박해하는가?"
"그것은 조선 내정의 일이다."
"성교를 믿는 사람들이 살인을 했는가. 도둑질을 했는가?"
"내정의 일이라 답할 수 없다."
"우리 불란서 신부를 아홉이나 살해했으니 조선의 정부는
책임을 져야 할 것이다."
"그것은 본관의 소관 사항이 아니다."
"조선은 성교 박해를 중지해야 한다. 그것은 야만적인
살상행위다."
"그대는 신부인가?"
"그렇다."
"법국 신부 아홉이 조선에서 죽었다고 조선에 전란을 일으키러
왔는가?"
"그럴 생각은 없다. 조선에서 죽은 우리 신부들은 영광스러운
순교자가 되었다. 우리는 그들보다 조선에서 박해를 받아
죽어가고 있는 조선의 형제 자매들을 불쌍히 여길 뿐이다.
그들은 잡혀서 죽고 박해를 피하여 도망 다니다가 굶어 죽고
있다. 벌써 조선에서 죽은 교우가 수천 명이나 된다. 이 얼마나
비참한 일인가?"
이리텔 신부는 윤수현과 얘기를 하다가 주먹으로 눈물을
씻었다.
"나는 이들과 소속이 다르다. 이들은 지금 식량을 보내 달라고
요구한다."
"무엇이 필요한가?"
"소고기, 닭, 계란, 콩, 야채 등이다."
윤수연은 이리텔 신부가 요청한 식량을 충분히 공급해 주었다.
그러나 데롤레드 호와 타르디프 호는 8월 18일 마침내 양화진을
거쳐 샛강까지 들이닥쳤다.
3
불란서 함대가 샛강까지 진출하자 조정은 발칵 뒤집혔다.
태조 이성계에 의해 조선에 창업된 지 4백 76년, 고종 즉위
3년, 불란서 군선이 강화도 앞바다를 거쳐 샛강까지 이른 것은
초유의 일이었다. 대궐은 어수선하고 장안은 일대 혼란이
일어났다. 언제나 그렇지만 나라가 누란의 위기에 빠지면 가장
먼저 살길을 찾아 피난을 가는 부류가 지배층이었다.
불란서 함대가 샛강에 이르자 가장 먼저 피난 보따리를 싼
것도 사대부 명문세가들이었다. 그들을 바리바리 피난짐을 싣고
한성을 떠났다. 그 뒤를 중인(中人)신분이 따르고
상민(常民)들이 따랐다. 그리하여 성안을 빠져 나가려는
백성들로 4대문이 미어터지고 길이 메였다.
(이 나라에 충신열사가 많다는 말이 모두
거짓이었던가.......)
대원군은 장탄식을 했다. 조선을 창업할 때 백성들을 지배하기
위한 이념으로 내세운 것은 유학이었다. 그리고 그 유학은
선조들과 명현들에 의해 검토되고 계승되고 오늘에 이르고
있었다. 무엇보다도 유학의 근간은 충(忠)과 효(孝)와
예(禮)였다. 서학을 사학이라고 하여 내친 것도 따지고 보면
조상에게 제사를 지내지 않는 서학인들이 불효하고 풍속을
해친다고 보았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그 유학을 으뜸 학문이라고
숭상하는 사대부 명문세가들이 다투어 피난을 가고 있는 것이다.
대원군은 장신(將臣)들을 중회당으로 소집했다. 일단 발등에
떨어진 불부터 끄고 보아야 했다.
"공들은 들으시오! 평소에 군사를 어찌 조련했기에 법국
군선이 샛강까지 이르도록 방치했소? 이러고도 어떻게 일국의
장상들이라고 할 수 있소?"
대원군은 먼저 장신들에게 눈을 부릅뜨고 질책을 했다.
"샛강은 도성의 턱 밑이오! 게다가 샛강을 통해 올라오던
물자가 끊어지니 백성들이 무엇으로 연명할 수 있겠소?"
장신들은 고개를 숙인 채 대답이 없었다. 숨조차 쉴 수 없는
무거운 분위기였다.
고종은 용상에 묵묵히 앉아 있었다.
그는 어젯밤 왕비 민자영으로부터 들은 얘기가 생각났던
것이다.
"전하, 법국과 화진을 맺으심이 어떠하시옵니까?"
어젯밤에도 대궐은 어수선했다. 궁녀들은 여기저기 모여서
수군거리고 웃전에서는 남한산성으로 몽진을 가야 한다는 말까지
입에 담고 있었다.
"화친을 맺어요?"
고종은 어리둥절하여 민비를 쳐다보았다. 아직까지 법국과
화진을 맺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대신은 없었다.
"법국은 청국 황제를 열하까지 내쫓은 강대국입니다."
"그렇기는 합니다만......."
"이제 청국은 대국이 아니옵니다. 조선이 비록 작은 나라이나
언제까지나 청국에 예속되어 있는 것은 바람직한 일이 아닙니다.
우의정 유후조가 왕비 책봉에 관한 주청사로 청국에 갔긴 해도
이젠 그런 일도 폐지하고 조공도 바치지 말아야 합니다."
"중전, 청국은 우리의 상국이오, 그런 말을 함부로 입에
담으면 큰 벌을 받게 되오."
"전하는 신첩의 지아비입니다. 지아비이기에 믿고 말씀드렸을
따름입니다."
"......."
"우리가 법국과 화친을 맺어서 나쁠 것이 무어 있겠습니까?
법국은 과학이 발달하고 기술이 뛰어 나서 군선도 산처럼 크고
돛도 없이 불의 힘으로 간다지 않습니까? 우리도 그것을 배워야
합니다."
"......."
"청국이 법국에 패한 것도 대완구 때문이라고 합니다. 청국
대완구보다 법국 대완구가 훨씬 뛰어나다고 합니다."
고종은 민비의 말에 입에 다물어지지 않았다. 열변이었다.
서양 문물에 대해 민비는 뜻밖에 많은 것을 알고 있었다.
"중전은 그런 얘기를 어떻게 다 알고 있소?"
"해국도지라는 책을 읽었습니다."
"해국도지?"
"서양 여러 나라의 지리, 역사, 문화에 대해 자세히 써 있는
책입니다."
"잡학이구려."
고종은 히쭉 웃고 말았다. 그러나 지금 가만히 생각해 보자
민비의 말이 타당한 것 같았다.
"자 이제 대책들을 말해 보오. 법국 군선을 어찌 막아야
하겠소?"
대원군은 좌중을 휘둘러보았다. 그러나 의정부의 대신들과
장신들은 약속이나 한듯이 한결같이 입을 꾹 다물고 있었다.
(대신들이 어찌 중전만도 못할까.......)
고종은 기이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저하."
그때 영의정 이경재가 입을 열었다. 저하란 대원군은 일컫는
말이었다.
"영상께서는 어떤 방책이 있으시오?"
대원군이 반색을 하는 얼굴로 이경재를 쏘아보았다. 고종은
노대신 이경재의 얼굴을 물끄러미 응시했다.
"양이 오랑캐의 군선이 강화도의 갑곶진에 정박하고 있는 만큼
밀물을 이용해 경장(京江)으로 들이닥치는 사태를 우려하지 않을
수 없사옵니다.
"허면 어찌 해야 되겠소?"
"어영 중군 이용회로 하여금 훈국 기마부대 2백, 보병 7백을
거느리고 샛강을 방비하게 하고 훈련대장 이경하는 금위대장
신관호와 함께 대궐과 남대문, 서대문, 서소문을 각각 지키게
하옵시고 좌우 포도청에 명하여 전란을 틈타 약탈과 방화를
일삼는 자를 엄중히 처벌하게 하소서."
"영상대감의 말씀이 옳소."
대원군이 영의정 이경재의 말에 고개를 끄덕거려 수긍했다.
(싸우자는 말이군.......)
고종은 법국과 화친을 맺는 것이 어떠냐고 의견을
내세우려다가 그만두었다. 아버지인 대원군과 맞서기가
두려웠다.
"또한 방을 붙여 법국 병사들과 싸울 장정들을 모아야
합니다."
"옳소!"
대원군이 다시 맞장구를 쳤다. 대원군은 이미 불란서 군선과
전쟁을 하기로 마음 속에 결심을 굳힌 것 같았다.
"전하, 어용 중군 이용회로 하여금 샛강을 방비하게 하고자
하옵니다. 윤허하여 주시옵소서."
대원군이 고종에게 머리를 숙이고 주청을 했다.
"그리하오."
고종은 대원군의 시선을 외면하여 윤허를 내렸다. 언제나 같은
식이었다. 대원군이 대소신료들에게 의견을 구하거나 자신의
의사로 결정한 뒤 고종에게 윤허를 청하면 고종은 그리하오,
하고 간단하게 대답을 했다. 사소한 일들은 "대원위분부"라는
말로 처리되었다.
어전회의는 그것으로 끝이 났다. 어영 중군 이용희(李容熙)가
왕명을 받고 훈련원 기마병사 2백 명과 보병 7백 명을 거느리고
샛강 나루에 방어선을 쳤다. 훈련대장 이경하는 금위대장과 함께
도성의 각 문에 병사들을 배치하여 방어선을 치고 좌우
포도대장은 포졸들을 이끌고 기찰에 나섰다.
(법국 신부들을 죽인 것이 화근이었어.......)
이조판서에서 물러나 있던 김병기는 올 것이 오고 말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그것은 바라고 있던 일인지 알 수
없었다. 이제 대원군은 불란서 군선을 퇴치하는 일에 골몰하여
안동 김문에 신경을 쓸 여가가 없을 것이다.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대원군과 우리 사이에 은원은 없었어.......)
대원군이 집정을 한 뒤에 안동 김문에 대해 특별히 박해를
가하지 않은 것도 사원이 없기 때문이었다. 대원군의 큰아들
재면은 안동 김문의 권세를 잡고 있을 때 과거에 통과하여 대교
벼슬까지 지냈었다. 사사로운 원한이 있을 수 없는 것이다. 다만
김병기가 지나치게 굴강하여 대원군과 사소한 마찰을 일으킨
것이 고작이었다.
불란서 군선은 19일부터 하행을 하기 시작했다. 19일 오전에
닻을 내리고 행주(幸州)를 지나 20일에는 김포 서쪽의
감암(甘巖)으로 내려가 정박했다. 감암 일대에서 그들은 지리를
측량하고 지도를 그린 뒤 계속해서 남하했다.
대원군은 이틀만에 도성의 각 문과 샛강의 경비를 풀게 하고
새로 임명된 훈련대장 이남식(李南軾)을 샛강에 보내 병사들을
위로한 뒤 음식을 내려 주었다.
불란서 군선은 21일 풍덕을 지나고 22일에 염하를 거쳐
프리모게 호가 머물고 있는 물치도로 돌아가서 남양만으로
물러갔다.
23일 왕비 책봉 문제로 북경에 갔던 전 우의정 유후조가
돌아왔다. 고종은 처음으로 유후조가 복명하는 자리에서 자신의
의견을 개진했다.
"유주청사, 원로에 고생이 많으셨소. 북경에서 법국 군선에
대해 들은 얘기가 있으면 말씀해 보시오."
"전하. 이번에 샛강까지 왔다가 물러간 법국 군선은 법국
인도지나 함대 소속으로 로즈라는 자가 대장입니다. 법국의
인도지나 함대의 병력만으로도 능히 작은 나라와 전쟁을 치를 수
있다하옵니다."
"허어."
고종이 입을 딱 벌렸다. 대원군과 대소신료들도 유후조의 말에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청국과 법국과의 관계는 어떠하오?"
"아뢰옵기 황공하오나 청국은 법국과 긴밀히 지내고 있는
듯하오나 영국과 법국과의 전쟁에서 패한 후 국토가 다서
유린되었는 줄 아옵니다."
"유린되었다 함은 국토를 뺏겼다는 말이오?"
"그러하옵니다."
"백성들의 고초가 심하겠구려?"
"그러하옵니다."
"또 다른 이야기는 없소?"
"북경에서는 법국 인도지나 함대와 조선이 전쟁을 하리라는
소문이 파다하옵니다."
"인도지나 함대가 우리 조선을 내침하는 저의가 무엇이라고
하오?"
"사학을 하는 법국 신부를 잡아 죽인 일이 법국에 알려졌기
때문이라 하옵니다."
"누가 그 일을 알렸다고 하오?"
"조선에 들어와 사학의 무리를 이끌던 법국 신부로 이름은
이리텔 신부라고 합니다. 그 자가 지난 7월 조선을 탈출하여
로즈라는 대장에게 알렸다고 하옵니다."
"음."
고종이 신음을 삼켰다. 대원군과 대소신료들은 고종의 얼굴을
조심스럽게 살피고 있었다. 고종이 대신들에게 직접 하문을 하고
답변을 들은 것은 처음 있는 일이었다.
(저 아이가 벌써 정사를 다룰 수 있다는 말인가.......)
대원군은 속으로 그렇게 생각했다. 아직까지 어리게만 보아온
고종이었다. 대원군은 착잡한 심정을 금할 길이 없었다. 고종이
명실상부한 친정을 하게 될 날이 의외로 빨리 닥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대원군은 운현궁으로 들어와 여러 가지 생각에 잠겼다.
(나라를 경영하는 것은 경륜이 필요한 일이야.......)
대원군은 혼자서 그런 생각을 했다. 고종이 친정을 하기에는
아직도 어리다고 생각했다. 고종의 옆에 당대의 여걸, 비록
16세의 어린 소녀이긴 하나 민비가 있다는 사실에는 조금도
생각이 미치지 못했다.
그날 밤 유후조는 한밤중에 입궐하라는 고종의 어명을 받았다.
유후조는 부랴부랴 관복을 입고 숙직 승지를 따라 편전으로
입궐했다. 편전에는 고종과 민비가 나란히 앉아 있었다.
"야심한 시각에 경을 불러 미안하구려, 왕비 책봉이
청황제에게 윤허를 받았다하여 중전께서 사례코자 불렀으니 과히
허물치 마오."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유후조는 무릎을 꿇고 앉아 머리를 조아렸다.
"우선 중전이 내리는 술을 한 잔 받구려."
"전하. 신 성은이 망극하여 몸둘 바를 모르겠나이다."
"경은 사양치 마오."
민비가 앳된 목소리로 말하고 섬섬옥수로 옥배에 손수 술을
따랐다. 지밀 상궁이 그 잔을 유후조에게 가져 왔다. 유후조는
술잔을 받아 몸을 옆으로 돌리고 조심스럽게 마셨다.
국화주였다.
"청국에 다녀왔다니 몇 가지 궁금한 일이 생각나는구려."
"하문하옵소서."
"청국에서는 법국과 통상을 하고 있다는데 그 실정이
어떠하오."
"청국이 법국과 통상을 하는 것은 전쟁에 패했기 때문인 줄
아옵니다."
"청국은 법국하고만 통상을 하고 있소?"
"청국은 법국, 영국, 미국, 일본, 덕국 등 여러 나라와 국교를
같이 하고 있사옵니다."
"허면 청국은 그들과 국교를 같이 하여 얻는 것이 무엇이오?"
"소신이 보기에는 얻는 것은 별로 없사옵고 서양인들이 오히려
청국 백성들에게 여러 가지로 횡포를 부리고 있다고 하옵니다."
"음."
민비가 낮게 신음을 토했다. 실망한 기색이 역력했다. 고종은
민비의 옆에서 무료한 표정만 짓고 있었다.
"청국에서도 서학을 사학이라고 부르고 있소?"
"청국에서는 포교의 자유를 허락하고 있사옵니다."
"법국 군선의 위력이 대단하다고 하던데 북경에서는
무엇이라고 하오?"
"군선에 대해서는 자세히 알지 못하옵니다."
"법국과 화친을 맺는 방법은 없소?"
"불가하옵니다. 중전마마."
"어째서 불가하오?"
"서양인들이 화친을 맺고자 하는 것은 자국의 이익을 얻기
위해서이옵니다. 조선에는 굴욕적인 일이 될 것이옵니다."
"내가 보기에는 농상공업을 중흥시키지 못하면 사직이
위태로울 것이라고 생각되오, 농상공이 월등히 발전한 서양 여러
나라에서 병기를 만드는 기술을 배우지 않고서야 어떻게 법국
군선을 물리칠 수 있겠소?"
"송구하옵니다. 중전마마."
"굴욕은 잠시 뿐인 것을......."
"때가 아니옵니다. 중전마마. 서양과 화친을 하고자 하는 말을
입에 담으면 큰 화를 당하게 되옵니다."
"알겠소."
중전 민비가 입을 다물었다. 유후조는 비로소 자신을
입궐하라고 한 것은 고종이 아니라 16세의 어린 중전 민비라는
사실을 간파했다.
(어린 나이에 중궁전이 저토록 총기가 넘치니.......)
유후조는 대궐에서 사저로 돌아오며 몸이 떨리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가을이 깊어 가고 있었다. 하늘에는 별이 초롱초롱
빛나고 바람이 서늘했다. 그러나 몸이 떨리는 것은 나뭇잎을
우수수 흔들고 있는 바람 때문만이 아닌 것 같았다.
(내가 지나치게 영민한 아이를 며느리로 맞아 들인 것이
아닐까......?)
대원군은 이튿날 아침 대조전에 심어 놓은 상궁들로부터
민비와 유후조와 만났다는 보고를 받고 허탈했다. 대원군은
천하장안(天下張安)의 여동생들을 대조전의 상궁으로 시립케
하였으며, 신자 이민화를 동사청 내시로 두어 내명을 출납하면서
궁중의 동정을 낱낱이 탐지하게 하고 있었다. 그것뿐이
아니었다. 대원군은 집사중에서 영민한 자들을 뽑아 의정부에
윤광석, 이조에 이계환, 호조에 김완조, 병조에 박봉래, 형조에
오도영등을 파견하여 6조를 실질적으로 조종하고 있었다.
또 지방에도 전라 감영의 백낙서, 낙필 형제, 경상 감영에서
서은노등 각 도의 감영과 유수까지 간자를 두어 감시하고
조종하였다.
(며느리가 총명한 것은 화근이 될 수 없어.......)
대원군은 고개를 흔들었다. 아들이 고종이
신인무의(信人無疑)하여 실망하고 있던 참이었다. 며느리가
총명하여 아들을 보필한다면 그것은 복(福)이지 화(禍)가
아니었다. 게다가 고종이 이 상궁에게 빠져 있어 민비가 적막한
궁중생활을 하고 있었다. 민비가 정사에 관심을 가져 적막한
궁중생활을 견디어 내는 것도 좋은 일이라고 생각했다.
4
불란서 군선의 내침으로 인한 전운은 대궐까지 휘몰아쳐 왔다.
궁녀들은 모이기만 하면 수군거리고 조정 대신들은 부산하게
움직였다. 민비는 상궁들과 내관을 통해 시시각각 급박해 지고
있는 염하(鹽河:강화해협)의 소식을 들었다. 불길한 일이었다.
청국은 영불연합군에 의해 이미 청황제가 열하까지 몽진을 간
일도 있었다. 청국은 대국이었다. 청국에 비하면 조선은 얼마나
작은 나라인가. 불란서라는 서양의 대국과 굳이 전쟁을 해야 할
필요가 있을까. 민비는 혼자 묻고 고개를 흔들었다.
어리석은 일이었다.
병자호란도 새롭게 일어나는 청국의 기운을 무시하고 케케묵은
명분만 앞세워 척화론을 내세운 대신들의 주장에 의해 전쟁을
했다가 결국은 남한산성까지 몽진을 가고 삼전도에서 임금이
무릎을 꿇고 항복을 하는 국치를 당했던 것이다. 생각해 보면
조정 대신들의 생각은 단순하기 짝이 없었다.
조선을 창업할 때는 명을 상국으로 섬겼고 인조(仁租)대에
와서는 청국에 항복을 하고 청국을 상국으로 섬기고 있었다.
그러나 그때는 국력이 미치지 못하여 불가피하게 청국의 속국이
되었을 뿐이었다. 게다가 효종(孝宗)은 이완, 송시열등과 함께
병자호란의 국치를 씻기 위하여 북벌(北伐) 계획까지 세웠었다.
적어도 중원(中原) 정벌(征伐)의 야심만만한 패기는 갖고 있었던
것이다.
따지고 보면 중원의 넓은 땅이 조선의 것이었던 적도 있었다.
중원(中原)의 광활한 대지는 동쪽으로 뻗어 장백산에 이르고,
북으로는 요동(邀東), 남으로는 반도를 이루고 있었다. 역사는
도도히 4천 3백 년을 이어 왔고, 고구려의 광개토대왕은 18세의
어린 나이에 왕이 되었으면서도 요동을 평정했었다. 그러나
작금의 사람들은 도도히 흐르는 역사도 잊고 국치도 잊고
있었다.
(어째서 남자들은 병자호란의 수치를 잊고 청국에게는 깎듯이
사대의 예를 다하면서 서양인들이 화친을 맺고자 하는 것은
결사적으로 반대를 하는 것일까?)
서양인들은 단순하게 교역을 원하고 있었다. 청국처럼
군신(君臣)의 관계를 원하고 있는 것이 아니었다.
민비는 대조전을 나와 종묘 쪽의 숲을 향해 걸음을 떼어
놓았다. 박 상궁을 종묘 쪽으로 불렀던 것이다.
민비는 그 숲을 좋아했다. 대궐의 다른 숲과 달리 그 숲엔
아름드리 상수리나무들이 빽빽하게 들어차 있었다.
날씨가 좋았다. 하늘은 눈이 시릴 듯이 맑고 대궐의 숲은
울긋불긋 단풍이 들어 추색(秋色)이 깊었다. 대궐의 뜰에는
오상고절(傲霜孤節)이라는 국화가 색색으로 피어 차고 맑은
향기를 뿜고 있었다. 이제 찬비만 한 차례 뿌리고 나면 춥디
추운 겨울이 닥쳐 올 것이다. 사가에 있을 때 겨울이 얼마나
추웠던가, 하고 생각하자 민비는 저절로 몸이 떨렸다. 밤이면 언
하늘이 갈라지는 소리가 들리고 문고리가 손에 쩍쩍 달라
붙었었다.
"중전마마."
그때 박상궁이 총총걸음으로 달려왔다.
"너희들은 잠시 물러나 있거라."
민비는 전도(前道)를 하는 궁녀들에게 지시했다. 궁녀들이
고개를 숙인 채 뒤로 물러섰다.
"알아보았느냐?"
"예, 수표교의 백의정승은 평양으로 떠난 지 오래되었다고
하옵니다."
"평양에?"
"예."
"평양에는 무슨 일로 갔다고 하더냐?"
"자세히는 모르옵고 역관 오경석을 만나러 갔다고 하옵니다."
"오경석? 오경석은 또 무얼 하는 위인이냐?"
"평안도 관찰사 박규수를 따라 연경까지 다녀온 사람이라고
합니다. 역관이옵니다."
"그럼 유대치, 오경석, 박규수가 모두 한 무리겠구나."
"그러하옵니다."
민비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그들이 한 무리라면 연배로 보아
박규수가 수령이 될 것이다. 박규수의 집에는 청년재사인
김홍집과 김윤식이 문객으로 드나든다는 풍문도 있었다.
"김옥균에 대해서도 알아보았느냐?"
"김옥균은 강릉 유수인 김병기의 자제라고 하옵니다. 얼마전에
김병기가 강릉 유수를 그만두었는데 부친을 따라 강릉에서
수학하고 지금은 도성에 돌아와 있다고 하옵니다."
"최익현은?"
"최익현은 동부승지 이항로의 수제자로 유림의 추앙을 받고
있다고 하옵니다."
민비는 고개를 끄덕거렸다. 이항로 같은 인물이라면 최익현
같은 제자를 키울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다.
"김 상궁에 대해서도 알아보았느냐?"
"예."
"누구의 여식이냐?"
"남산골에 사는 김학진이라는 자의 여식인데 대원위 저하께서
투전판을 쫓아 다닐 때 사귄 인물이라고 합니다."
"그래?"
민비는 얼굴을 찡그렸다. 대원군다운 행동이었다.
"장 상궁은?"
"장 상궁은 대원위 저하의 집사로 있던 장순규의 누이라고
합니다. 대원위 저하의 분부만 잘 받들면 상감마마의 시첩이
되게 해준다고 하여 궁궐로 들어왔다고 하옵니다."
"시첩?"
"그러하옵니다."
민비는 기가 막혔다. 시첩(侍妾)이란 말에 분노에 앞서 어이가
없었다. 상감마마의 시첩이 되게 해주겠다는 것은 고종의 후궁이
되게 해주겠다는 뜻인 것이다.
(명색이 국태공인데 어떻게 시정잡배와 같은 짓을 하고
있을까?)
민비는 시부(媤父)인 대원군에게 깊은 실망을 했다.
"수고했구나. 박 상궁은 사가의 오라버니에게 부탁하여 계속
유대치의 행방을 알아보도록 하여라. 거기에 쓰이는 비용은 내가
모두 대겠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비밀리 해야 하느리라. 네
오라버니가 공을 세우면 장차 중히 쓰겠다. 알겠느냐?"
"예."
"됐다. 남의 눈도 있고 하니 그만 물러가거라."
"예."
간난이 고개를 숙이고 물러갔다. 민비는 궁녀들을 데리고 숲을
한 바퀴 돌아서 대조전으로 돌아왔다.
늦가을 해가 설핏이 기울고 있었다.
"중전마마."
민비가 보료에 앉아서 책을 읽고 있을 때 문 상궁이 밖에서
불렀다.
"무슨 일이냐?"
"대전별감이 뵙기를 청하옵니다."
"그래?"
대전별감은 김 내관을 지칭하는 것이다. 민비는 보료에서
일어나 대청으로 나왔다. 허리가 구부정한 김 내관이 뜰에
시립해 있었다.
"무슨 일이오?"
민비는 김 내관을 조용히 응시했다.
"중전마마. 법국 군선이 물러갔다 하옵니다. 방금 중궁전에
이뢰라는 주상전하의 전교가 있었사옵니다."
"법국 군선이 물러가요?"
"그러하옵니다."
"참으로 기쁜 소식이구려. 어찌된 연유인지 자세히 말해
보시오."
"방금 어영 중군 이용희 장군의 파발이 당도했다고 하옵니다."
"허면 이용희 장군이 법국 군선을 격파했다는 말이오?"
"격파한 것은 아니옵고 법국 군선이 스스로 물러갔다고
하옵니다."
"괴이한 일이로다. 어찌 스스로 물러갔을까......?"
"의정부에서는 이용희 장군의 샛강 방비가 엄중한 것을 보고
법국 군선이 물러간 것이라고 추측하고 있사옵니다."
"아무튼 다행한 일이오. 웃전에는 고했소?"
"주상 전하께오서 중궁전에 먼저 아뢰라는 전교가
있었사옵니다."
"그럼 어서 이 기쁜 소식을 대왕대비마마께 전해 올리시오."
"분부 받자옵니다."
김 내관으로 허리를 숙인 뒤 대왕대비전을 향해 총총히
걸어가기 시작했다. 김 내관의 어깨가 산(山)자 형태로 흔들리고
있었다. 궁중법도에 내관은 어깨를 들지 못하게 되어 있었다.
오랜 세월 어깨를 들지 못해 어깨가 굳어 버린 모양이었다.
(법국 군선이 스스로 물러가다니 어찌된 일일까?)
민비는 김 내관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응시하며 고개를
갸유뚱했다.
고종은 어두워져서야 중희당에서 돌아왔다.
민비는 고종과 함께 저녁 수라를 들었다. 고종과 나란히
앉아서 각기 외상을 받아 저녁을 먹었다.
(부부가 이렇게 따로 상을 받아 저녁을 먹다니.......)
민비는 팥밥을 떴다. 고종은 언제나 그렇지만 백반에만 수저를
댔다. 임금의 수라상엔 항상 백반과 팥밥이 같이 올라와 임금의
입맛에 따라 수라를 들게 했다.
"저녁 수라는 전하와 겸상으로 하겠다. 소주방에 그렇게
일러라."
이튿날 민비는 대전 상궁인 김 상궁에게 그렇게 지시했다.
소주방은 임금의 수라를 지어 올리는 곳이었다.
"마마. 궁중의 법도가 그렇지 아니하옵니다."
김 상궁이 난색을 표시했다.
민비는 눈꼬리를 바짝 치켜 세우고 김 상궁을 노려보았다. 김
상궁은 대원군이 들여보낸 궁녀였다. 장 상궁은 김 상궁의 옆에
시립하여 입을 다물고 있었다. 긴장하고 있는 기색이었다.
"법도라니? 누가 그렇게 만든 법도라고 하더냐?"
민비의 목소리에 서릿발이 서렸다.
"아뢰옵기 황송하오나 여염 사대부가에서도 내외가 겸상을
아니하고 있는 것으로 아옵니다."
"닥쳐라!"
"대원위 저하께서 아시면 무엇이라 하문하실지......."
"여기는 지엄한 궁궐이다. 누가 궁궐의 일을 바깥에 알린단
말이냐? 네가 그런 짓을 하느냐?"
"아, 아니옵니다."
"궁궐의 일을 바깥에 알리는 방정맞은 나인은 목이 열 개라도
부지하기 어려울 것이다! 네가 정령 그런 짓을 하지 않았다면
누가 그런 짓을 했느냐?"
"중전마마. 소인 결코 그런 짓을 하지 않았사옵니다."
"그럼 장 상궁 네 짓인 게로구나?"
"아, 아니옵니다."
장 상궁이 사색이 된 얼굴로 고개를 흔들었다.
"그래?"
민비는 노기 띤 음성으로 내뱉고 장 상궁을 쏘아보았다. 장
상궁은 과년한 처녀였다. 키가 훤칠했으나 하관이 길고 살빛이
검었다. 고종의 후궁이 되기를 바라는 것은 어불성설일 것
같았다.
"김 상궁은 무엇을 하고 있느냐? 네가 감히 중전의 명을
거역할 것이냐?"
민비는 장 상궁에게서 시선을 거두어 김 상궁을 노려보았다.
민비의 눈에서 파랗게 불꽃이 일어나는 것 같았다. 김 상궁은 그
눈빛을 대하자 온몸이 부르르 떨렸다. 16세의 어린 왕비였다.
그러한 왕비에게 저토록 무시무시한 구석이 있으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한 일이었다.
"분부 받자옵니다."
김 상궁은 황급히 머리를 조아리고 소주방으로 달려갔다.
"장 상궁!"
민비가 장 상궁을 쏘아보았다.
"예, 중전마마."
장 상궁은 바짝 긴장했다.
"네 아비가 운현궁의 집사라지?"
"예."
"내가 누구인지 알고 있느냐?"
"......."
"이 나라 조선의 국모이니라. 명심해 두어라!"
"예. 중전마마."
장 상궁이 허리를 깊숙히 숙였다.
"물러가거라!"
"중전마마. 소인 물러가옵니다."
장 상궁이 다시 한 번 머리를 깊숙히 숙이고 물러갔다.
민비는 장 상궁이 물러가는 것을 흘겨본 뒤 보료에 앉았다.
비로소 큰 일을 해낸 것 같은 안도감이 들었다.
그러나 그날 밤 영종 첨사 심영규부터 불란서 군선 7척이 조선
연해에 침입했다는 장계가 올라오자 조정은 다시 들끓었다.
조정은 부랴부랴 중신회의를 소집하고 장신들을 모아 불란서
군선에 대적할 준비를 했다.
(법국 군선의 1차 침입은 우리 조선군의 방비 상태를 점검해
보는 것에 지나지 않았어.......)
민비는 그 급보를 받고 골똘히 생각에 잠겼다. 조정도
위기감이 감돌고 있었다. 불란서 군선은 불과 세 척으로
양화진까지 거슬러 올라와 조정을 바짝 긴장하게 했었다. 그런데
일곱 척이 들이닥친 것이다. 그 군선이 샛강까지 올라오게 되면
도성이 위태롭게 될 것이 분명했다.
(어떻게 하던지 법국 군선이 샛강으로 올라오는 것을 막아야
해.......)
불란서 군선은 돛도 없이 화살처럼 빠르게 달릴 뿐 아니라
군선에 장치되어 있는 대완구의 위력은 샛강에서 도성까지
포탄을 발사할 수 있을 정도로 위력이 막강하다고 하였다.
민비는 잠을 이루지 못하고 불란서 군선을 퇴치할 방법을
골몰히 연구하기 시작했다. 고종도 중희당에서 장신들과 회의를
거듭하고 있었다.
1) 토마스 로버트는 개신교 선교사로 제너럴 셔먼호를 타고
조선에 들어와 선교를 하려다가 변을
당했다.(한국명:최난헌(崔蘭軒))
2) 조선왕조에서는 대신들의 임명과 해임이 지나칠 정도로
자주 있었다. 예를 들어 1866년 3월에만 형조판서가 5번이나
바뀌고 5월에는 공조판서가 3번이나 바뀐다. 이러한 실정에서는
정사를 제대로 볼 수 없었을 것으로 여겨진다.
제11장 강도(江都)와 전운(戰雲)
1
불란서의 로즈(Roze) 제독은 1차로 조선연안을 정찰한 뒤
치푸로 돌아가서 강화도를 점령하기로 결정했다. 로즈 제독은
식민지성(植民地省)으로부터 조선의 강화도를 점령해도 좋다는
공문을 받았다. 불란서 해군사령부에서도 같은 내용의 전문이
도착했다.
로즈 제독은 프리킷함정 게르에르(Guerriere)호, 코르벳함정
라쁠라스(Laplace)호, 프리모게(Primauguet)호, 통보함정
데롤레드(Deroulede)호와 켠찬(Kienchen)호, 포함(砲艦)
타르디프(Tardif)호, 르브르통(Lebrethon)호 등 7척으로
인도지나 함대를 구성하고, 이리텔 신부들과 함께 8일만에 다시
조선에 들어오게 되었다. 인도지나 함대는 불란서 정예 해군 2백
명을 거느리고 있었으나 로즈 제독은 일본에 들려 요코하마에
주둔하고 있던 불란서 해병대 4백 명까지 차출하여 진함 7척과
병사 6백 명으로 조선을 침입하였다.
불란서 함대는 음력 9월 4일 충청도 원금산(元金山) 앞바다를
거쳐 5일에는 물치도 앞바다에 닻을 내리고 그 중 1척을 내보내
강화도를 정찰하게 하였다. 이에 영종 첨사 심영규는 그날로
중군 김종화(金鍾華)를 보내 불란서 함정을 문정하도록 했다.
그러나 1차 침입과 달리 불란서군은 총칼로 위협하면서 경력
김종화 일행을 접근조차 못하게 하였다. 같은 날 강화 유수
이인기는 중군 이용희에게 갑곶진의 방비를 철저하게 하라고
지시했다.
강화도는 8일 만에 다시 긴장감이 감돌기 시작했다. 성곽에는
병사들이 속속 집결하기 시작했고 백성들은 피난 준비를
서둘렀다.
강화도는 벼베기철이었다. 농민들은 아침부터 들판에 나가
누렇게 고개를 숙인 벼를 베고 있었다. 황금 들판이었다.
전국적으로 큰 가뭄과 수재가 닥쳤으나 수리시설이 잘 되어 있는
강화는 근래에 보기드문 풍년이 들었다. 그러나 백성들은 풍년이
든 논과 집을 버리고 무리를 지어 피난을 떠났다. 불란서 함대는
갑곶진에 분견대(分遣隊)를 상륙시켰다. 이에 초지 첨사
주기수가 그들의 상륙을 저지하려고 했으나 불란서 군대는
통역도 없었고 대화에 응하려고도 하지 않으면서 강화 읍성
남문을 향해 진격해 왔다.
강화 유수 이인가는 남문에서 급보를 받고 경력 김재헌을 다시
파견했다. 불란서군은 경력 김재헌이 병사들을 데리고 불란서
함대로 접근하는 것을 방해했다. 김재헌이 수없이 대장을 만나러
왔다고 했으나 불란서군은 칼을 뽑아 들고 삼엄한 기세로
김재헌의 앞을 가로막았다.
"길을 열어라! 나는 너희들의 대장을 만나러 왔다! 너희들의
대장에게 안내해라!"
김재헌은 불란서 병사들이 앞을 막자 몸으로 뚫고 앞으로
나갔다. 조선의 병사들도 공포에 떨면서 김재헌의 뒤를 따랐다.
이때 강화 유수부의 경력 김재헌이 유수 이인기를 통해 조정에
올린 장계는 다음과 같은 것이었다.
내막을 물어 보기 위해 나가는 길인데 저놈들 수십 명이
중도에서 길을 막고 당현고개의 길 옆에 있는 촌마을 집으로
끌고 갔습니다. 그리하여 내막을 물어 보러 오게 된 사유를 글로
써서 보이니 그들은 손을 내저으며 모르겠다고 말하면서 갑곶진
해문에 있는 농가로 끌고 갔는데 그들 수백 명이 칼과 총을 각각
휴대하고 모여 들어서는 쭉 늘어섰습니다. 그리하여 글로 써서
묻기를,
"당신들은 수만 리 풍파를 헤치고 왔는데 앓는 사람은
없습니까?"라고 하니 그들은 없다고 대답하였습니다. 계속해서
글로 써서 묻기를,
"당신들은 어느 나라 사람인지 알 수 없는데 무슨 일 때문에
여기까지 왔습니까?"라고 하였으나 저것들은 또 대답이
없었습니다.
그들 자체로 쓴 글을 우리에게 보여 주었는데 저것들의 글이
우리나라의 글과는 같지 않았습니다. 얼마 안 가서 저것들이
우리들더러 배에 올라가자고 하기 때문에 그들을 따라 그들에
배에 올라갔는데 수를 헤아릴 수 없는 양이 오랑캐들이 좌우에
늘어섰으며 2층에 있는 배칸으로 끌고 들어갔습니다. 그
방안에는 등불과 촛불이 환하게 켜져 있었는데 양이 오랑캐 한
놈이 한가운데 앉아 있고 그 곁에 우리나라 사람 옷차림을 한
사람이 의자에 앉아서 우리나라 말을 하면서,
"강화 유수입니까?"라고 하였습니다. 그리하여 대답하기를,
"아닙니다. 지방관리입니다."라고 하자 그는 묻기를,
"누가 당신을 보냈습니까?"라고 하므로 대답하기를,
"나는 지방관으로서 내막을 알아보기 위해 여기까지
왔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그는 묻기를,
"금년 봄에 당신네 나라에서는 무엇 때문에 서양 사람 9명을
죽였습니까?"라고 하므로 대답하기를,
"실로 봄에 그런 일이 있었습니다. 당신네 나라 사람이 수도에
잠복해 있으면서 여인들을 강간하고 남의 돈과 재물을 빼앗고
암암리에 반역음모를 꾸몄으므로 나라의 법에 비추어 사형죄에서
벗어날 수 없었기 때문에 처형하였습니다. 대체로 우리나라
사람이 만약에 당신네 나라에 들어가 이와 같이 법에 어긋나는
행동을 하였다고 하면 당신네 나라에서도 응당 사형에 처하였을
것입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저놈들은 말하기를,
"지금 당신의 말은 너무나 터무니 없는 중상모략입니다.
신부는 결혼조차 하지 않는 사람인데 어떻게 부녀자들을
강간하겠습니까? 지금 당신을 죽이겠습니다."라고 하므로
대답하기를,
"죽어도 두렵지 않습니다. 그러나 역관으로서 내막을 물어
보러 온 사람에 대해서 죽이는 일은 예로부터 없었습니다.
당신들은 빨리 배를 돌려 돌아갈 것입니다."하자 그놈들이 칼을
빼들고 죽일 듯이 위협을 하면서 가라고 독촉을 했기 때문에
부득이 도로 육지에 올라와 해문 안에 이르렀습니다. 그런데 한
무리의 추악한 놈들이 칼과 창을 뽑아 들고 길 가운데에서
막아섰으며 또한 음식물을 요구하였습니다. 때문에 소 3마리를
주도록 하겠다는 내용으로 글을 써서 보였는데 그들은 흡족하게
여기지 않고 끝끝내 길을 막아서 열어 주지 않았습니다.
그리하여 멀리 떨어져 있는 나라 사람들을 너그럽게 대해
주어야 하는 뜻으로부터 소 5마리, 돼지 5마리, 닭 10마리를
주도록 하겠다는 내용으로 글을 써서 보였더니 그들은 그제서야
길을 열어 주었습니다.
그들의 배 3척은 갑곶진에 정박해 있고 10여 척의 종선을 타고
다니며 제멋대로 육지를 상륙해서 백성들의 집 제물을 뺏고 온
산과 들을 마구 싸다녔습니다.
배 모양이며, 연통이며, 기계들은 지난 번에 왔던 배 모양과
같았으나 배 안에 있는 오랑캐들은 얼마나 되는지 알 수
없었습니다.
강화 읍성으로 돌아온 김재헌은 즉시 이 사실을 유수
이인기에게 보고했다. 이인기는 대원군에게 장계를 올려 불란서
군선이 강화도 앞바다에 정박해 강화부를 유린할 태세를 보이고
있고, 일단의 병사들이 민가를 습격하여 방화와 약탈을 일삼고
있다고 보고했다. 아울러 불란서 군선이 신부 9명을 죽인 일에
대한 보복을 하기 위해 강화부로 쳐들어왔으며 불란서 군선에는
서양인과 내통한 조선인도 있다고 보고하였다.
대원군은 강화 유수 이인기로부터 급보가 날아오자 훈련대장
이경하, 총융사 신관호로 하여금 샛강을 굳게 지키게 하였다. 또
이원희를 총융사 중군으로 삼았다.
강화 유수 이인기는 사태가 심상치 않음을 깨닫고 행궁
장령전에 모셔 두었던 숙종과 영조대왕의 어진을 서문 밖에 있는
백련사로 ㅇ겼다.
한편 불란서 해군 중령 도스리가 지휘하는 분견대는 갑곶진을
거쳐 동성을 깨트리고 성루에 올라가 조선군의 방어태세를
점검했다. 의외로 조선군의 방어는 허술해 보였다. 도스리는 이
사실을 즉각 로즈 제독에게 보고했고 로즈 제독은 8일 아침
본대를 거느리고 남문으로 진출했다.
강화 읍성 남문에서는 불란서군들이 진격해 오자 바짝
긴장했다. 불란서군들은 대오가 정견했다. 남색 바지에 붉은색
군복을 입고 진격을 하는 불란서군의 모습은 차라리
아름답기까지 했다.
(아!)
조선군들은 마치 환상을 보는 듯했다.
"공격하라!"
조선군은 불란서군이 가까이 진격해 오자 일제히 활을 쏘고
화승총을 쏘았다. 그러나 사정거리가 불란서군들에게 미치지
못했다.
불란서군들은 성벽 앞에서 대오를 2열로 정비했다. 대완구를
앞줄에 나란히 세우고 뒷줄에 보병들이 장총을 들고 섰다.
이내 불란서군들이 대완구를 발사하기 시작했다. 천지를
진동하는 굉음과 함께 성벽이 와르르 무너져 내리고 조선군
병사들의 몸뚱이가 공중으로 튀어올랐다. 순식간의 일이었다.
남문성 일대는 금세 불길에 치솟고 초연이 자욱했다. 포탄은 성
안까지 날아와 민가들이 박살났다. 성 안의 백성들은 허둥지둥
인근 산으로 달아났다. 아비규환의 지옥이었다.
조선군 병사들은 우왕좌왕했다. 강화 남문 수문장은 군사들을
독려해 싸우려고 했으나 불란서군의 포탄과 총탄을 빗발처럼
조선군 병사들을 향해 날아오고 있었다.
이인기는 그때 이궁에 후퇴해 있었다. 그는 경력 김재헌을
불러 서문 밖 백련사에 있는 어진을 다시 인화보의 진사로
모시게 했다.
불란서군은 무기가 우수했다. 활과 화승총으로 불란서군을
상대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조선군 병사들은 다투어 달아났다. 불란서군은 남문 성루에서
조선군이 모두 달아나자 도끼로 남문을 부수고 물밀듯이 읍내로
진격해 들어갔다.
읍내는 텅텅 비어 있었다. 민간인들도 군사들도 보이지
않았다. 그들은 단숨에 유수부까지 진격하여 강화읍을 점령했다.
이때 조정에서 판서를 지낸 이시원과 군수를 지낸 이지원 형제는
불란서군에게 강화읍이 함락되자 분을 참지 못해 극약을 먹고
자결했다. 남문장 이춘일과 조광보는 남문에서 전사했다.
이 일은 그날로 조정에 알려졌다. 조정은 강화읍이
불란서군에게 함락되었다는 급보를 받자 망연자실했다.
강화도는 천연의 요새였다. 그런 까닭으로 강화도가
불란서군에게 유린되었다는 급보를 받자 조정은 발칵 뒤집혀
대책회의에 골몰했다. 대궐은 뒤숭숭하고 장안은 벌집을 쑤신
것처럼 큰 혼란이 일어났다. 그 중에도 서학을 하는 죄인들이
서양 군선을 데리고 왔다는 흉흉한 소문이 삽시간에 도성으로
퍼져 나갔다.
"중신들은 들으시오. 강화부가 유린되었다는 급보를 대신들도
받았을 터이니 속히 대책을 세우시오."
대원군의 음성은 전에 없이 침통했다. 강화도가 천연의
요새였기 때문에 조선에서는 나라의 진귀한 보물과 옥새를 두어
간직하고 있었다. 또 국난이 일어나면 임금이 피난을 하는
곳이어서 일개 섬을 유수로 승격시키고 병사를 두어 지키게 했던
것이다. 그런 강화도가 불란서군에게 유린되었다는 것은 참담한
일이었다.
"어서 대책을들 세우시오!"
대원군은 대신들을 위압적으로 쏘아보며 언성을 높였다.
황당한 일이었다. 불란서 군선은 7척밖에 되지 않았으나 화력이
막강했다. 그를 물리칠 대책을 세워야 할 터인데 대신들은
꿀먹은 벙어리처럼 묵묵부답으로 머리만 조아리고 있었다.
(통탄할 일이로다. 대신들이 어찌 이렇게 기백이 없단
말인가?)
대원군은 탄식을 했다. 고종은 겁에 질린 표정으로 용상에
앉아 있었다.
"도승지."
"예."
도승지는 조석원이었다. 조석원의 얼굴도 창백하게 질려
있었다.
"강화 유수 이인기는 어찌 되었다는가?"
"강화 유수 이인기는 법국 군사들에게 패하여 가까스로 부중을
빠져 나왔다고 하옵니다."
"그러면 어진은 어찌 되었다는가?"
"아뢰옵기 황송하오나 어진만은 간신히 인화보로 옮겨 모셨다
하옵니다."
"허면 강화도의 수비대는 무엇을 하고 있었다고 하오?"
"한성근은 문수산성을 지키고, 양헌수는 정족산성에 배치되어
있사옵고, 이기조는 광성진을 지키고 있었다고 하옵니다.
그쪽에도 법국 군사들의 상륙 움직임이 있어서 강화부를 구하러
갈 수 없었다고 하옵니다."
"강계 포수도 8백 명이나 있지 않았는가?"
"그러하옵니다."
"에이 장수들이 어찌 그리도 나약하다는 말인가?"
대원군은 혀를 찼다. 나라를 지키는 장수들이라면 목숨을
초개같이 버릴 줄 알아야 한다. 그러나 강화부에 있는 장수들은
제 목숨을 부지하기에 바쁜 위인들 같았다. 대원군은 그들에게
깊은 실망감을 느꼈다.
"신 우의정 유후조 아뢰오."
그때 유후조가 마침내 입을 열었다.
"말씀하시오."
대원군이 유후조를 지그시 쏘아보았다. 유후조는 남인 계열의
학자였다.
"총융사 신관호로 하여금 훈련원 기병 1백 명, 보병, 2백 명,
좌우 두 영의 아병(牙兵) 60명, 여러 군관의 부하 병사 30명을
거느리고 염창목으로 나가 샛강을 방비케 하소서. 또 이동현,
이장렴을 각각 좌우 포도대장으로 삼아서 도성의 안팎을 방비케
하고 4대문에 글을 붙여 의병을 모으소서."
"허면 누구를 강화부로 보내는 것이 좋겠소?"
"기보연해순무사인 훈련대장 이경하에게 명하여 금위영에
작전본부를 두고 한강 연안은 중군 이용희에게 맡기소서."
"좋소."
대원군은 고개를 끄덕거렸다. 시간이 촉박했다. 강화부를
유린한 불란서군이 언제 도성으로 쳐들어올지 알 수 없는
일이었다.
그는 장신들을 중희당으로 소집했다.
"장신들도 서양 오랑캐가 강화부를 유린했다는 급보를 받았을
것이오! 이에 주상전하께서는 다음과 같이 어명을 내리셨소."
장신들은 이미 갑옷과 투구를 쓰고 전선으로 출진할 준비를
갖추고 있었다. 조정도 전시체제로 바뀌어 있었다.
"먼저 강화 유수 이인기와 중군을 파직하고 강화 유수에
이장렴, 중군에 박희경을 제수한다."
도승지 조석원이 재빨리 왕명을 대리하는 대원군의 분부를
승정원 일기에 기록하기 시작했다.
"다음 윤허를 김포 군수에, 민종호를 교하 군수에, 정형기를
양천 현령에, 이지수를 교동 중군에, 한성부 좌윤 정규응을
소모사로 삼아 군대를 모으게 하고 한성부 좌윤에는 백희수를
임명한다."
대원군의 명령은 추상 같았다.
기보연해순무사(畿輔沿海巡撫使)로 임명된 이경하는 어전에 나가
국왕이 내리는 상방검과 갑옷을 하사받고 출진 준비를 서둘렀다.
기보연해순무사는 기호지방의 해안방위사령부에 해당되는
직책이었다.
이용희는 기보연해순무사의 중군이었다. 중군은 전투사령관에
해당되는 직책이었다.
이용희는 대장 9명, 군관 52명, 군병 2천 명을 거느리고
강화도로 내려가기 시작했다.
강화읍을 점령한 불란서군은 즉시 전리품 약탈에 들어갔다.
강화읍 이궁에는 수많은 무기와 보물이 숨겨져 있었다. 휘어도
부러지지 않는 검을 비롯해 각종 투구와 갑옷, 동과 철로 만든
각종 구경의 대포는 80문이 넘었다. 그러나 그것들은 한결같이
정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화승총은 수백 정이 있었으나 녹이 슬어 있었고 화약고는
세개가 있었는데 어마어마한 양의 화약이 쌓여 있었다.
불란서군은 화약고를 모두 폭파시켜 버렸다. 화약고가 터지는
폭음은 천지가 진동하는 것처럼 요란했다.
이궁에는 목재로 만든 제기와 놋그릇, 가위, 부채, 군용
비스켓 크기의 은괴가 18만 프랑 어치나 있었다.
장서(藏書)는 매우 귀중해 보였다. 질이 좋은 종이에 그림을
곁들인 한문 인쇄본이 2, 3천 권이나 되었다. 표지는 초록색과
진홍색 비단으로 덮여 있었고, 동판으로 제본이 되어 있었다.
책들은 도금한 구리 경첩이 달려 있는 대리석판이었고, 그
대리석판에 금박으로 된 글자가 상감되어 있었다. 그 판들은
모두 비단방석으로 보호되어 있었고, 전체가 동으로 된 함속에
넣어져 다시 붉은 칠을 한 목재상자 속에 넣어져 있었다. 그
정사각형의 판을 펼치면 12페이지의 책 한 권이 되는 것이다.
불란서군들은 그 모든 전리품들을 군선으로 날랐다.
2
이창현은 강화 이궁에서 읍내를 비감한 심정으로
내려다보았다.
강화는 풍년이었다. 들에는 벼들이 누렇게 고개를 숙이고
있었고 산들은 타는 듯이 붉었다. 군데군데 벼를 베다가
내팽개치고 농민들이 피난을 떠난 논바닥도 보였다. 음력
9월이었다. 찬바람이 불 때마다 한길의 나뭇잎들이 떨어져
이리저리 쏠려다니며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불란서군은 텅텅 비어 버린 읍내를 평온하게 점령하고 있었다.
읍내가 썰렁했다. 이국 군대가 점령하고 있어서인지 옹기종기
모여 있는 집들은 그림처럼 조용했다.
(이것이 전쟁인가......?)
전투는 강화 읍성 남문에서 잠깐 벌어졌을 뿐이었다. 패전한
조선 군사들은 어디로 달아났는지 흔적조차 보이지 않았다.
"강화는 참 좋은 곳이군요."
이리텔 신부가 이창현의 옆에 와 서며 낮게 말했다. 이리텔
신부도 잠을 이루지 못하고 있었다. 불란서 군선이 조선에
내침하게 된 것은 이리텔 신부가 조선을 탈출하여 로즈 제독에게
알리게 됨으로써 비롯된 일이었다. 그는 자신의 포교지에서
학살당하는 불쌍한 조선 교인들을 구출하기 위해서 불란서
군선의 출동을 요구한 것이었다. 그러나 그것이 조선의
교민들에게 어떤 영향을 미칠지 알 수 없어 괴로워하고 있었다.
"신부님. 군선이 왜 샛강으로 올라가지 않는 것입니까?"
"식민지성에서 강화도를 점령하라는 지시만 내렸다고 합니다."
"강화도를 점령해서 어떻게 할려구요?"
"우리 신부 아홉 명을 죽인 일에 대한 응징을 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신부님. 그러면 조선의 교인들은 어떻게 되는 것입니까?"
"강화도를 점령하고 있으면 조선에서 반응이 있을 것입니다.
그때 로즈 제독은 천주교인을 학살하라는 지시를 내린 대신 셋을
우리에게 보내 달라고 하는 한편 수교조약을 맺을 전권대사를
보내라고 할 것입니다."
"수교조약이오?"
"불란서와 조선이 형제처럼 지내자는 조약이지요. 그 조약엔
반듯이 성교를 보호한다는 조약이 들어가게 됩니다."
이창현은 이리텔 신부의 말에 고개를 끄덕거렸다.
불란서군은 강화 이궁에서 수많은 책과 보물을 군선으로
옮기고 있었다. 그들의 책과 보물을 실어 나르는 수레가
남문에서 갑곶진까지 꼬리를 물고 이어지고 있었다.
이창현은 그 행렬을 바라보면서 마치 자신의 물건을 도둑 맞는
것처럼 기분이 씁쓸했다. 이상한 일이었다. 그는 이리텔 신부와
함께 치푸를 떠날 때만 해도 불란서 군선이 강화도를 점령하고
조선의 도성 한성으로 진격하여 포악무도한 대원군을 죽여
주었으면 하고 바랐었다.
그들은 불구대천의 원수였다. 아내 조선이를 대들보 형틀에
의해 죽게 하고 어린 딸 옥희까지 목졸라 죽게 한 자들이었다.
아내와 어린 딸의 비참한 죽음을 생각할 때마다 이창현은 가슴이
미어터지는 것 같았다.
그러나 불란서군들이 강화 읍성을 점령하고 전리품을 노획해
군선으로 싣고 가는 것을 보자 자신도 모르게 반발심이
일어났다.
"신부님, 저들이 왜 이궁의 것을 가져 갑니까?"
"그것은 저들이 군인들이기 때문이오."
"군인들이라 해도 법국을 대표하는 군인들이 아닙니까? 저들이
진정으로 조선과 수교를 맺기를 원한다면 전리품을 가져가서는
안될 것입니다."
"그래도 백성들의 것을 약탈하지는 않고 있소."
이리텔 신부도 착잡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신부님께서 좀 막아 주십시오."
"나에게는 그런 권한이 없소."
"말씀이라도 해주십시오. 조선의 것을 가져 가는 것은
약탈행위라고......."
"군인들을 화나게 할 필요는 없소."
이리텔 신부가 매정하게 거절했다. 이창현은 이리텔 신부의
대답에 가슴이 묵지근하게 저려 왔다. 이리텔 신부도 결국
서양인이었던가, 하는 생각이 들어 가슴 속이 허전했다.
불란서군이 강화읍을 점령한 지 이틀째 되는 날 밤에 비가
왔다. 이창현은 갑곶진 들판의 야영지에서 빗발이 을씨년스럽게
내리는 밖을 내다보았다. 날씨는 점점 추워지고 있었다. 이제
얼마 안 있으면 겨울이 닥치리라고 생각하자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옥순은 무엇을 하고 있을까?)
그는 불란서 파리에 있을 옥순을 생각했다. 옥순은 북경
천주교회의 수도원에서 불란서의 파리로 보내 졌다고 하였다.
이창현이 이리텔 신부의 소개로 북경의 천주교회를 찾아가자
불과 사흘 전에 불란서로 떠났다는 것이었다.
(이것이 하느님의 섭리인가?)
이창현은 망연자실했다. 그러나 불란서까지는 찾아갈 수
없었다. 이리텔 신부도 이창현이 불란서로 옥순을 찾아가는 것을
반대했다. 현재의 조선 형편으로 옥순을 데리고 온다고 해도
박해를 받지 않고 키울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럴 바에야 불란서의
수도원에서 좋은 교육을 받게 하는 것이 훨씬 바람직하다는 것이
이리텔 신부의 말이었다.
이창현은 공주 진밭에서 옥순이 중국으로 떠났다는 소식을
들은 뒤 가슴이 미어지는 듯한 슬픔을 감내할 길이 없었다. 불과
몇 달 사이에 아내 조선이와 어린 딸 옥희를 잃고 옥순까지 천리
먼 길인 중군으로 떠나게 되는 사단을 겪게 되자 삶의 의욕조차
일어나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육로로 해서 중국 북경으로 갔다. 북경까지 가는
데는 자그마치 두 달이 걸렸으나 그는 오로지 옥순을 만나겠다는
일념으로 모진 고통을 참았다.
그는 노자까지 없어서 구걸을 하면서 멀고 먼 여행을 했다.
여름철이라 노숙을 하기도 했고 교인들은 만나 노자를
융통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대부분의 날을 굶주리면서 북경을
찾아가 이리텔 신부를 만났다.
"형제님!"
이리텔 신부는 거지꼴로 찾아온 이창현을 포옹하고 눈물을
글썽거렸다.
"형제님이 이 먼 곳까지 찾아온 것은 기적입니다."
"저는 오로지 제 딸을 찾기 위한 일념으로 왔습니다."
"옥순은 여기 없습니다. 천주님의 안배로 프랑스로
떠났습니다."
"어떻게 그럴 수가!"
이창현은 땅바닥에 주저앉아 통곡을 했다. 두 달 동안 모진
고생을 하면서 북경까지 찾아왔는데 딸이 없다고 하자 슬픔을
억누를 길이 없었다.
그러나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이창현은 이리텔 신부와 함께
기거하다가 로즈 제독을 따라 불란서 군선을 타고 강화까지 오게
되었던 것이다.
(우리는 언제 만나게 되는 것일까? 어쩌면 영영 만나지 못하게
되는 것이 아닐까?)
옥순은 이제 여덟 살이었다. 여덟 살의 어린 나이에 말도
통하지 않는 서양 사람들에게 섞여 외로운 생활을 하고
있으리라는 생각을 하자 갑자기 눈앞이 흐릿해져왔다.
어쩌면 불란서 파리에도 비가 오고 있을 것이다. 옥순도
늦가을 비가 을씨년스럽게 내리는 소리를 들으며 잠을 이루지
못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조국에 있을 아버지를 생각하며 울고
있는 것은 아닐까.......
어쩌면 병이 들었을 지도 모른다. 낯선 땅에서 낯선 음식을
먹게 되면 풍토병이 생기니까.
어머니도 보고 싶을 것이다. 그 아이는 제 어머니가 대들보
형틀에 의해 끔찍하게 죽은 것을 알고나 있을까.
아내가 머리 속에 떠올라 왔다. 아내는 대들보 형틀에 머리가
으깨어졌을 때 얼마나 고통스러웠을까.
옥희도 생각났다. 방글방글 웃고 있는 옥희의 앳된 얼굴을
생각하자 이창현은 가슴이 먹먹하고 눈시울이 뜨거워져 왔다.
이창현은 소리를 죽여 흐느껴 울었다.
갑자기 밖이 소란해 지더니 불란서 군사들이 이리텔 신부를
데리러 왔다. 이창현은 이리텔 신부를 따라 야영지의 사령관이
있는 곳으로 갔다. 그곳엔 뜻밖에 조선인 한 사람이 불란서
병사들에게 에워싸여 있었다.
이리텔 신부는 젊은 조선인을 보자 형제님, 하며 끌어 안았다.
젊은 조선인은 7월에 이리텔 신부를 충청도 바닷가에서 치푸까지
태우고 가면서 온갖 고생을 했던 최인서였다.
이리텔 신부는 최인서를 데리고 게르에르 호에 있는 로즈
제독에게 갔다. 이창현도 따라갔다.
"어떻게 여기까지 왔소?"
로즈 제독이 최인서에게 묻고 이리텔 신부가 통역을 했다.
"통진에서 나룻배를 타고 왔습니다."
"조선의 형편은 어떻소?"
"조선의 조정에서는 8도에 사람을 보내어 군대를 모으고
밤낮으로 무기를 만들고 있습니다. 해안의 곳곳에 군대를
주둔시키고 김포 읍내를 3천 명이나 되는 군대가 있습니다.
그들은 조만간 통진으로 내려올 것입니다. 또 한강의 하류 10리
쯤 되는 곳에 수많은 배를 가라앉혀 법국 군선이 샛강으로
올라오는 것을 방비하고 있습니다."
최인서의 말대로 조선 조정에서는 불란서 군선과 일전을 벌일
준비를 착착 진행시키고 있었다. 불란서군에게 유린당한
강화부를 탈출하기 위해 용직을 충정도로, 이관연을 전라도로,
이휘재와 김우수를 경상도로, 이민도를 황해도로, 선우업을
평안도로, 이주하를 강원도로, 마행일을 함경도로 보내 군사를
모집하고 보부상의 두령격인 왕민열과 강인학까지 장돌뱅이들을
거느리고 나가서 싸우게 하였다.
이때 부호군 기정진과 유린의 거두 이항로가 상소를 올려
양경항의척사를 강경하게 주장했다. 대원군은 이를 가상히 여겨
기정진을 동부승지에 이항로를 공조참판에 발탁했다. 옛부터
나라에 어려운 일이 있을 때면 산림(山林:재야)에 묻혀 있는
학문 높은 선비를 발탁하여 국정을 일신하는 예가 종종 있었다.
그러나 세월이 흐르면서 재야에서 발탁한 선비가 이름만 명현일
뿐 청신하고 경륜이 없어 오히려 재야의 비난을 샀는데 이항로의
상소는 백년이래 가장 깐깐한 상소라는 평판이 자자했다.
기정진과 이항로의 상소는 천주교를 물리치고 서양인과
화친하면 안 된다는 것이 주요 골자였다.
"통진에는 어느 정도의 군대가 있소?"
"군대의 숫자는 알 수 없으나 대장은 한성근이라는
사람입니다."
로즈 제독은 각 함선의 사령관들을 소집했다. 통진은 갑곶진
맞은 편의 육지였다. 염하(강화협해)를 사이에 두고 갑곶진과
통진이 마주보고 있으므로 통진을 그냥 두면 후방이 위험하게 될
것이라는 결론이 내려졌다.
로즈 제독은 이튿날 1백 20명의 분견대를 통진 방면의 육지에
상륙시켰다.
한편 조선군 순무영 초관 한성근은 광주에서 선발한 선포수
50명을 거느리고 통진부의 외성인 문수산성을 지키고 있었다.
선포수는 사격술이 뛰어난 사냥군이고 초관은 군사 1백 명을
거느리고 위관급 계급이었다.
불란서 분견대가 군선에서 내려 통진부 외성인 문수산성을
향해 진격해 오는 것을 발견한 한성근을 군사들에게 명하여
화승총을 쏘도록 지시했다. 불란서 분견대는 느닷없는 기습에
당황하여 질서정연하게 행군을 하다가 흩어졌고 3명의 전사자와
많은 부상자를 냈다. 그러나 불란서 분견대가 기습을 당한 것을
발견한 군선이 일제히 함포 사격을 해대자 조선군을 뿔뿔히
흩어져 달아날 수밖에 없었다. 불란서 군선의 함포 사격은
조선군 병사들이 상상을 할 수 없을 정도로 막강했다.
불란서군 분견대는 문수산성을 점령하고 통진부로 *짓쳐
들어갔다. 통진 부사 이공렴은 제대로 전투조차 하지 못하고
겨우 인부를 챙겨 부성을 탈출했다.
불란서 분견대는 전사자를 낸 탓에 흥분하여 통진부의 관청을
습격하고 민가에 불을 지르고 약탈을 자행했다.
이 소식은 즉시 조선의 조정에 보고되었다. 조정과 도성은
다시 벌집을 쑤신 듯이 들끓었다. 피난민들이 줄을 잇고 한성
부중은 하루가 다르게 인적이 비어 갔다. 이번에도 사대부
명문세가들이 다투어 피난을 갔다. 불과 며칠 사이에 한성
부중에 있는 민가가 7천 호나 피난을 떠나 빈 집이 되었다.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단 말인가? 나라가 위급한데
어찌 사대부들이 먼저 피난을 간단 말인가?)
대원군은 눈앞에 캄캄해 왔다. 통탄할 노릇이었다. 불란서
전함의 침입이 왜란이 호란에 버금가는 국난임에 틀림이 없었다.
그러나 국난이 닥치면 대대로 나라의 녹을 받고 신분상 온갖
혜택을 누리던 사대부가 먼저 나가서 싸워야 할 텐데도
사대부들은 비굴하게 도망만 치고 있었다.
"좌윤은 들으시오!"
대원군은 부르르 몸을 떨며 소리를 질렀다.
"예!"
한성부 좌윤 백희수가 대답했다.
"한성 부중을 빠져 나간 모든 사대부들의 명단에 선 자를 써
넣으시오!"
"선 자라 하였습니까?"
백희수가 놀라서 물었다. 선(仙)은 신선이라는 뜻이니
죽었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었다.
"그렇소. 잠영록으로 일일이 대조를 해서 점검하시오!"
잠영록은 사대부들의 명단이 기록되어 있는 문서였다.
"알겠습니다."
"이 일은 추호도 어김이 없이 시행하여 매일매일 보고 하시오.
내 이들을 결코 중용하지 않을 것이오!"
"저하. 분부 거행하겠습니다."
백희수는 운현궁을 물러나와 즉시 잠영록을 들고 호구조사에
나섰다.
"아니, 저 분은 전 병조판서 김병기 대감이 아니신가?"
그날 저녁 도성을 순찰하던 백희수는 동대문에서 가솔들을
이끌고 도성으로 들어오는 김병기를 발견하고 깜짝 놀랐다. 다른
사람들은 피난을 가느라고 아우성인데 김병기는 사지나 다름없는
도성으로 돌아오고 있는 것이다.
"대감!"
백희수는 황급히 말에서 내려 김병기에게 달려갔다.
"좌윤이 아니신가?"
"김병기도 백희수를 발견하고 놀란 표정을 지었다.
"대감 다른 사대부들은 피난을 가느라고 법석인데 대감께서는
어인 까닭에 도성으로 돌아오십니까?"
"우리 안동 김씨들은 대대로 국은을 입은 몸이니 사직과
존망을 함께 하는 것이 당연한 도리라고 생각하네."
"과연 사영 대감이십니다."
백희수는 진심으로 감탄을 했다. 대원군이 일찍이 아들을
낳으려면 사영 김병기처럼 웅특해야 한다고 말하고 안동 김문이
김병기를 떠받치고 있는 까닭을 그제서야 알 것 같았다.
(역시 김병기로군.......)
대원군도 백희수로부터 보고를 받고 탄복했다.
(이것으로 대원군과 우리 안동 김문의 불편한 관계도 모두
해소되었어.......)
그 자리에는 좌의정 김병학도 있었다. 김병학은 대원군이
백희수의 보고를 받으며 기쁜 표정을 짓는 것을 보고 내심
쾌재를 불렀다.
(사영다운 생각이었어.......)
김병학은 중희당에서 나오며 오랜 체중이 가신 듯한
기분이었다. 대원군의 집정으로 살얼음판을 걷듯 몸을 사리고
움추렸던 안동 김문이었다. 그 동안 대원군으로부터 안동 김문이
한 사람도 목숨을 잃지 않은 것은 그가 줄타기를 하듯 안동
김문을 은밀하게 보호해 왔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이 서찰의 내용은 무엇일까?)
중희당 모퉁이를 돌아 의정부를 향해 갈 때 대전별감 김
내관이 어영 중군 이용희에게 보내라면서 건네 준 서찰이었다.
조정은 바쁘게 움직이고 있었다. 통진 부사 이공렴을 파직하고
신재지를 통진 부사에 새로 임명했다.
양주 목사 임한수에게는 2백 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여석현을
지키게 하고 중군 권용에게 군사 1백 명을 거느리고 행주를
방어하게 하였다. 아울러 수원 군사 5백 명, 광주 군사 2백 명,
양주 군사 1백 명을 도성으로 집결하게 하였다. 또 연안과
백천의 쌀을 강화도로 보내어 군량미로 쓰게 하고 돈 1만 냥과
쌀 1천 석을 순무영으로 보냈다.
한편 천주교 대한 박해도 계속하여 이의송, 김예뿐, 이봉익,
김중은, 박영래를 또다시 목 베어 죽였다.
통진부에서는 한성근과 이장렴, 양헌수 등이 유격전을
전개하여 불란서군을 괴롭히고 있었다.
김병학은 순무사 이경하에게 대전별감 김 내관이 건네 준
서찰을 보냈다.
이경하는 좌의정 김병학이 보낸 서찰을 받고 잠시 깊은 생각에
잠겼다. 서찰에는 지(持)자 단 한 자 밖에 씌어 있지 않았다.
중궁전에서 보낸 서찰이었다. 시간을 끌라는 뜻이었다.
(중전마마께서 병법에 통달해 있다는 말인가......?)
중전은 이제 16세였다. 16세의 소녀가 증원군이 도착할 때까지
시간을 끌라고 서찰을 보냈다는 사실이 도무지 믿어지지 않았다.
불란서군은 군선의 위력이 막강했다. 군선에서 쏘아대는
함포는 수 리(理) 밖에 있는 성까지 무너뜨리고 있어서
유격전만을 전재하고 있던 참이었다. 불란서군과 일전을
벌이려면 유능한 포수군과 대완구가 필요했다.
순무영 중군 이용희가 통진에 도착하고서도 불란서군과 접전을
벌이지 못하고 있는 것은 그런 까닭이었다.
(장차 조선을 움직일 여걸이야.......)
이경하는 서찰의 글자를 몇 번이나 되풀이 해서 읽은 뒤
통진의 이용희 장군에게 보냈다.
이용희 장군은 순무사 이경하의 서찰을 받고 고개를
끄덕거렸다
(역시 이경하 대감이야.......)
그는 서찰을 보낸 사람이 이경하라고 생각했다.
이경하는 대장(大將)과 포장(捕蔣)을 겸관(兼管)하면서
형살(刑殺)을 자행하지 않는 날이 없었다. 그래서 대원군은
이경하를 가리켜 '이경하는 다른 장기는 없고 오직 사람을 잘
눅이는 것으로 쓸만한 인물이다'라고 평한 일이 있었다. 그러나
이경하는 사학 죄인이나 불법으로 화폐를 만드는 죽을 죄를 지은
죄인만 죽였다. 그는 낙동염라(駱洞閻羅)라고 불리며 한성의
차안을 유지하고 8도를 진압하였다.
순무사 중군 이용희는 밤에는 들판 여기저기에 횃불을 피우고
낮에는 옷을 입힌 허수아비들을 들판에 늘어 놓고 꽹과리를
쳐대게 하였다. 불란서군의 화약과 포탄을 허비하게 하기
위해서였다.
불란서군은 계속해서 포격을 해댔다. 군사들이 잠을
이룰만하면 조선군이 나타나 꽹과리를 쳐대는 바람에 그들을
짜증이 나고 지치게 되었다. 그러나 철수하기 전에 강화해협에
있는 조선의 배를 모조리 침몰시키고 광성진을 습격하여 불을
지른 뒤 교동부(喬桐府)에 함포 사격을 해댔다.
대원군은 종로에 척화비(斥和碑)를 세웠다.
서양 오랑캐가 침범해 왔는데도 싸우지 않고 화친하기를
주장하는 것은 나라를 파는 일이 될 것이다 하는 내용이었다. 또
대원군은 척이보국(斥夷保國)의 4대 원칙을 정하고 8도에
하달했다. 그것은 다음과 같은 내용이었다.
1. 일시적인 고통을 참지 못하고 양이와 화친을 하게 되면
나라를 망하게 하는 일이 될 것이다.
1. 일시적인 해독을 이기지 못하고 양이와 교역을 하면 나라를
파는 일이 될 것이다.
1. 오랑캐가 경성에 침입한다고 도성을 버리고 달아나는 것은
나라를 위태롭게 하는 것이 될 것이다.
1. 잡술과 육갑을 부려 오랑캐를 쫓는다 하는 것은 설사
그일이 옳다고 해도 후일에 사학보다 더욱 심한 폐가 될 것이다.
대원군의 척이보국은 일단 서양과 교역을 반대하여 쇄국정책을
쓰는 듯이 보이고 있었으나 그 무렵의 서양 각국의 식민지
정책을 노골화하고 있었던 것을 감안할 때 오히려 타당한
것이라고 볼 수 있었다.
순무영 중군 이용희는 통진부에 진을 치고 불란서군의 화력을
탐지하는 데 골몰했다. 그때 불란서군은 인천 물치도까지 물러가
있으면서 수시로 육지에 상륙하여 약탈과 방화를 자행했다. 또
강화부 갑곶진에는 해병대를 상륙시켜 놓고 있었다.
이용희는 강화도로 들어가 불란서군과 싸우고 싶었으나
강화해협을 건널 배가 없었다. 이용희는 조정에 대, 중선(大,
中船) 20척과 선포수 지원을 요청했다.
대원군은 즉시 선박의 보급을 지시했다. 포수들도 계속
보강되어 통진부는 며칠 사이에 5천 명의 군사가 모여 들었다.
이용희는 보급이 완전히 이루어질 때까지 지연작전을
계속썼다. 그리고 불란서군에게 별무사 지홍관을 보내 담판을
하는 척하기까지 했다.
-옛말에 이르기를 천리를 거스리면 반드시 망한다고 하였다.
그런데 서양인들이 아국의 국경을 넘어와 조선옷을 입고,
조선말을 하고, 조선 이름을 사용하면서 무지한 백성들을
현혹하여 재물을 빼앗고 풍속을 어지럽히니 어찌 이 나라
국법으로 다스리지 않겠는가. 이를 트집 잡아 양선이 쳐들어
옴은 사리에 맞지 않는 일이다. 그런데도 귀국은 군선으로
아국의 내해를 침입하였으니 어찌 천벌을 받지 않겠는가. 하늘이
두려우면 속히 조선의 내해에서 물러가라.
이에 대해 로즈 제독은 다음과 같은 내용의 편지를 썼다.
-우리는 불란서국 나폴레옹 3세 황제폐하의 신하들이다.
조선은 불란서 성직자 9명을 살해했으니 그 책임을 면할 수
없다. 우리 황제폐하께서는 조선에서 성직자 9명이 살해되었다는
소식을 접하고 그에 상응하는 벌을 주기 위해 우리 함대를
파견했다. 그러므로 우리 성직자를 죽이자고 주장한 대신 3명을
우리에게 보내고 또 이러한 사실을 교섭하기 위한 전권대신을
보내라. 그렇지 않으면 조선은 우리 불란서와의 전쟁을 각오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순무영 중군 이용희에게서는 아무런 응답이 없었다..
그ㄸ 이용희는 이미 천총(千總) 양헌수 장군으로 하여금 밤을
이용해 포수군 8백 명을 거느리고 강화해협을 몰래 건너
정족산성(鼎足山城)에 진을 치게 해놓고 있었다.
불란서군은 천주교인들을 통해 조선군이 정족산성을 매복하고
있다는 정보를 입수했다. 불란서군은 이에 정족산성의 조선군을
토벌하기 위해 올리비에(Ollivier) 대령을 지휘관으로 하여 1백
60명의 해병대를 출동시켰다.
3
불란서군은 새벽 6시에 갑곶진의 야영지에서 대오를 이루고
정족산성을 향하여 행군하기 시작했다. 정족산성은 이미
불란서군이 1차로 기습을 하여 다수의 승군(僧軍)을 사살하고
돌아온 일이 있었다. 정족산성을 재차 공격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불란서군은 질서정연하게 행군했다. 날씨가 좋았다. 군대가
찬우물 고개를 넘어 때 붉은 해가 둥실 떠오르면서 어둠이
걷혔다. 기온은 쌀쌀했다. 겨울이 문턱까지 다가와 있었다.
정찰대는 앞에 서고 분견대 본진은 가운데에 그리고 뒤에는
탄약과 병사들의 짐을 실은 말들이 따랐다. 이창현은 최인서와
함께 정찰대에 끼었다. 불란서군은 정족산성까지 안내해야 했다.
불란서군은 한 시간마다 10분씩 휴식을 취했다.
"강화도는 참 살기가 좋은 것 같습니다."
최인서가 이창현을 쳐다보며 말했다.
"예."
이창현은 한길 옆의 야산과 들판을 살피며 대답했다. 한길
옆에 듬성듬성 서 있는 미루나무도 잎사귀가 모두 떨어져
앙상했다.
"강화는 땅이 비옥해서 벼, 보리, 담배, 옥수수, 고구마,
배추, 인삼이 잘 된다고 하더군요."
정족산성이 있는 온수리(溫水理)까지는 50리(里)길이었다.
최인서는 군대를 따라 행군하는 것이 무료했는지 이창현에게
말을 붙였다.
"......."
"여기엔 순무도 나온답니다."
"순무요?"
"순무는 강화도에서만 재배된다고 하는데 맛이 흡사 배추 밑동
같습니다. 거 왜 김장배추 뿌리 있지 않습니까? 그걸 깎아서
먹으면 맛이 일품인데 순무 맛이 그렇다고 합니다."
"그럼 순무는 깎아 먹는 채소입니까?"
"아니지요. 김치를 담궈 먹습니다."
야산을 하나 넘고 불란서군은 다시 쉬었다.
"최형은 어디서 사셨습니까?"
"나는 원래 서소문 밖 애오개에 살다가 작년 10월에 운막리로
이사했습니다. 대원군의 성교 탄압이 어찌나 극심한지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성교는 일곱 살 때인가 여덟 살 때 배웠습니다."
"강화는 어떻게 오게 되었습니까?"
"나는 이리텔 신부님을 치푸까지 모시고 갔었지요. 그때 나는
조선으로 먼저 돌아왔는데 불란서 군선이 강화해협에 들어
왔다는 소식을 듣고 이리텔 신부님도 오셨으리라고 생각했지요.
치푸에 있을 때 이리텔 신부님이 불란서 군선을 이끌고 조선으로
가겠다고 하셨으니까요."
불란서군들이 다시 행군을 하기 시작했다.
"그럼 제 딸도 보셨겠군요?"
"딸이라니요?"
"이리텔 신부님을 따라서 중국으로 간 아이가 있지 않습니까?"
"옥순이 말인가요?"
최인서가 놀라서 이창현을 쳐다보았다.
"예."
"아, 정말 기구한 인연이군요. 옥순이 아버지를 여기서
만나다니......."
최인서가 믿어지지 않는다는 표정을 지었다. 이창현은
새삼스럽게 옥순의 얼굴이 머리 속에 떠오르자 콧등이 찡해
왔다.
불란서군이 정족산성 밑에 도착한 것은 정오가 가까운
시각이었다. 온수리 마을은 주민이 모두 떠나 덩그라니 비어
있었다.
불란서군은 정족산성 진입로에서 행군을 멈추었다.
"산성으로 들어가는 문이 두 곳에 있군요."
"동쪽 문은 산꼭대기에 있어서 올라가기가 쉽지 않아요.
매복이 있을지도 모르구요."
"우리가 결정할 일이 아닙니다."
이창현은 최인서의 말에 건성으로 대꾸했다.
"조선군은 패해야 합니다. 우리 교인들을 너무 많이
죽였어요."
"......."
"난 불란서군이 강화뿐이 아니라 도성까지 쳐들어 가서
대원군과 조정의 대신들을 죽여 버렸으면 좋겠어요."
"......."
"그들은 포악한 자들입니다!"
최인서가 단호한 어조로 내뱉았다. 이창현은 최인서의 말에
아무 대꾸도 하지 않았다.
이창현도 조선군이 불란서군에 패했으면 싶었다. 그러나
불란서군을 위해 앞장을 서고 싶지는 않았다.
올리비에 대령은 장교들을 집합시키고 오랫동안 회의를 했다.
그러더니 정찰대의 장교에게 남쪽 성문으로 돌아 가라고
지시했다. 정찰대가 분견대의 본진에 앞서서 산성 남쪽을 향해
가기 시작했다. 이번엔 이리텔 신부도 정찰대에 합류했다.
정찰대는 이내 정족산성 남문 앞에 이르렀다. 이창현은 불란서
정찰대와 함께 산 밑에서 성을 쳐다보았다. 성은 협곡 안에
있었는데 능선을 따라 거대한 돌성"石城"이 축조되어 있었다.
산성 안에 있다는 절은 울창한 송림에 가려 보이지 않았다.
성벽의 높이는 얼추 12자나 되어 보였다. 천험의 요새로
보였다.
한길은 절의 입구 3, 4백 미터 앞에서 끊어지고 오솔길이
산성까지 이어졌다.
그때 무장한 조선 병사 한 사람이 송림에 나타났다. 정찰대의
불란서 병사들이 조선군 병사를 향해 일제히 총을 쏘았다.
조선군 병사는 재빨리 달아났다. 불란서군 병사 3명이
추격했으나 조선군 병사는 눈깜짝 할 사이에 산성으로 달아나
버리고 말았다.
불란서군은 산성 2백 미터 앞에서 대오를 정비했다.
산성에서는 처음에 잠깐 고함소리가 들렸으나 이내 물 속처럼
조용해졌다.
천총 양헌수 장군은 그때 정족산성의 동문에 있었다.
동문이라고 해야 숲속에 있는 조그만 월동문(月洞門)이었고 성의
정문은 남문이었다. 그는 불란서군이 산성의 남문으로 향했다는
보고를 받자 즉시 남문으로 향해 달려갔다.
(왔구나!)
불란서군은 산성 2백 미터 전방에 도착해 있었다. 오솔길이
가득 메워져 있는 것을 보면 적은 숫자는 아니었다. 그러나
불란서군의 진영에 대완구가 보이지 않자 안심이 되었다.
대완구만 가지고 오지 않았다면 불란서군의 총이 아무리
우수하다고 하더라도 싸워 볼만 하다고 생각했다.
"별군관!"
양헌수 장군은 별군관 이현규를 불렀다.
"예, 장군님!"
"적이 바짝 다가오면 그때 총을 쏘시오. 우리는 탄약이
넉넉하지 않소."
"명심하겠습니다."
별군관 이현규는 불란서군을 향해 총을 겨누고 있는 병사들을
돌아보며 힘차게 대답했다. 성벽에는 총안(銃眼)이 뚫려 있었다.
병사들은 총안을 통해 적이 가까이 다가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때 불란서군 진영에서 경쾌한 나팔소리가 들려왔다.
"이게 무슨 소리요?"
"진격 나팔인 것 같습니다."
"사격준비!"
별군관 이현규의 말대로였다. 불란서군이 갑자기 함성을
지르며 산성을 향해 달려오기 시작했다. 나팔소리는 계속되고
있었다. 한 번도 들어 보지 못한 음조였다. 양헌수 장군은
경쾌한 나팔소리에 맞춰 달려오는 불란서군을 노려보면서 한순간
지극히 아름답다고 생각했다.
군복 상의는 짙은 남색이었다. 바지는 피처럼 붉은색이었다.
그들이 나팔소리에 맞춰 성문을 향해 달려오는 모습은
한순간이기는 하지만 한무리의 꽃이 움직이는 것처럼 아름답기
짝이 없는 것이었다.
"제1대 사격!"
양헌수 장군은 마침내 군령을 내렸다. 조선군 병사들은 양헌수
장군의 명령이 떨어지자마자 일제히 사격을 시작했다. 금세
초연의 성루에 자욱하게 퍼지고 총성이 골짜기를 진동했다.
총탄이 불란서군을 향해 빗발치듯 날아갔다.
"제2대 사격!"
조선군 병사들의 총은 단발이었다. 제1대가 총을 쓰고 뒤로
빠지면 제2대가 앞으로 나가서 사격을 했다. 그 동안 제1대는
탄약을 장진하는 것이다.
불란서군은 조용하던 성 안에서는 총탄이 빗발치듯 날아오자
길바닥에 납짝 엎드렸다. 그러나 조선군 병사들의 사격은
맹렬했다. 여기저기서 불란서 병사들이 쓰러져 뒹굴고 비명을
질러댔다.
불란서군은 특공대를 조직해 오른쪽 성벽을 향해 진격하게
하고 본대는 성문을 향해 진격해 나갔다. 그러나 조선군
병사들의 사격은 더욱 맹렬해 지고 있었다.
불란서군은 바짝 엎드려서 조선군을 향해 응시했으나 성벽에
뚫려 있는 작은 구멍으로 총을 쏘는 조선군을 맞출 수가 없었다.
불란서군의 총탄은 성벽에 맞고 헛되이 튕겨 나갈 뿐이었다.
"앞으로 나가라!"
"진격하라!"
불란서 장교들은 병사들을 독려했으나 명령이 이행되지
않았다. 오히려 병사들은 죽음의 공포에서 벗어나기 위해 총을
쏘며 후퇴했다.
마침내 불란서군 진영에서 퇴각 나팔이 울려 퍼졌다.
조선군은 불란서군이 퇴각하기 시작하자 산성에서 나와 맹렬한
사격을 했다.
불란서군도 결사적으로 응사했다.
이번엔 조선군이 퇴각했다. 그렇게 세 차례 격렬한 총격전이
전개되자 불란서군은 전의를 상실하고 말았다. 조선군도 탄약이
떨어져 가고 있어서 불란서군의 퇴로를 차단하지 못했다.
(탄약이 충분하지 못한 것이 천추의 한이다.......)
양헌수 장군은 퇴각하는 불란서군의 행렬을 보면서 가슴을
쳤다.
불란서군은 부상자를 부축하여 퇴각하기 시작했다. 사상자와
부상자를 뺀 나머지 병사들은 80명밖에 되지 않았다. 조선군이
퇴로를 차단하고 공격했더라면 단 한 명도 살아 남지 못할
정도로 불란서군은 대파되었다.
이리텔 신부는 침통한 표정이었다. 패잔병의 대열은 비참했다.
불란서군은 정족산성에서 멀어지자 들것을 만들어 부상자를
태우고 갑곶진까지 계속 걸어갔다. 탄약과 점심, 다수의
무기까지 조선군에게 뺏긴 불란서군은 점심도 먹지 못하고
패주했다.
로즈 제독은 야영지에서 2킬로미터나 떨어진 곳까지
불란서군들을 마중나왔다. 제독은 올리비에 대령으로부터 자세한
보고를 받은 뒤 부상자들을 위로하고 기함 게르에르 호로
돌아갔다.
그날 밤 로즈 제독은 조선에서의 철수를 결정했다. 조선
정부와 더 이상 교섭을 할 희망도 없고 날씨도 점점 추워지고
있었다. 음력 10월 4일, 불란서 함대는 마침내 강화읍의
장령전과 남문 안 미가에 불을 지르고 갑곶진에서 철수하기
시작했다.
이에 순무영 중군 이용희는 별군관 이기조에 포병 50명을
거느리고 덕포진에서 매복하고 있다가 불란서 함대가 지나갈 때
포사격을 하도록 지시했다. 불란서 함대도 일제히 함포 사격을
해댔다. 피아간에 격렬한 포격전이 전개되었다. 불란서군은 함포
사격을 하면서 물치도까지 철수했다.
이로써 강화읍에는 불란서군이 완전히 철수하게 되었다.
순무영 중군 이용희는 정족산성의 양헌수 장군에게 강화읍으로
나와 강화 유수가 부임할 때까지 유수 업무를 대행하도록 했다.
10월 6일 조정에서는 강노를 강화 위유사(慰諭使)로 삼아
백성들을 위로하고 나라의 돈 1만 냥을 하사하여 전란으로 집과
농토를 잃은 백성들에게 나눠 주게 하였다.
4
이창현이 최인서와 함께 강화도 갑곶진의 불란서군 야영지에서
이리텔 신부와 헤어진 것은 불란서군이 정족산정 전투에서
대패하여 철수하기로 결정한 날 밤이었다.
이창현도 최인서도 이리텔 신부를 따라 중국에 가고 싶은
생각이 전혀 없었다. 조선에 남아 있으면 포졸들에게 잡혀
목숨을 잃을 것이 분명했다. 그러나 낯선 땅에서 낯선 사람들과
어울리고 싶지 않았다. 정족산성의 조선군 군사들은 이미 양헌수
장군의 지휘를 받으며 불란서군이 흘린 핏자국을 따라 추격해
오고 있었다. 불란서군은 정족산성에서의 패배로 침통한
분위기에 휩싸여 있었다. 그들은 따라가고 싶지 않았다.
이리텔 신부는 이창현과 동료 최인서에게 은 덩어리 하나 씩을
주고 작별을 했다. 게르에르 호의 로즈 제독은 담배와 성냥을 한
갑씩 주었다.
이창현과 최인서는 한밤중에 야영지에서 빠져 나와 강화
읍내로 들어갔다. 강화 읍내는 폐허처럼 조용했다.
이창현은 읍내를 지나 남산 숲에 들어가 은신했다. 불란서군이
철수한 뒤에 조선군이 읍내로 들어오면 불란서군과 내통해
들어온 뒤에 집을 찾아오는 피난민들처럼 읍내로 들어갈
작정이었다.
그들은 남산 숲에서 잠을 잤다. 날씨가 쌀쌀하여 제대로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나뭇잎을 주어 모아서 깔고 누웠는데도
냉기가 살 속으로 파고 드는 것 같았다.
이창현은 옆으로 누워 몸을 바짝 웅크렸다. 시간은 몹시
더디게 흘러갔다. 반대로 밤공기는 더욱 차가워졌다. 이창현은
몇번이나 눈을 감았다가 뜨곤했다.
불란서군은 이튿날 아침부터 철수하기 시작했다.
이창현과 최인서가 산중턱에 앉아서 불란서군들이 철수하는
것을 내려다보았다. 불란서군들은 질서정연하게 철수하고
있었다.
"군율이 잘 지켜지고 있군요."
최인서가 어깨를 부르르 떨며 말했다. 아침 기온이 싸늘했다.
"무기가 좋더군요. 총도 조선 군사들 것보다 월등히
좋습니다."
이창현은 바닥에 떨어져 있는 나뭇잎을 주워 입에 물고
대꾸했다. 그들의 총은 사정거리가 5백 보나 되었다.
"난 불란서군들이 이렇게 철수할 줄은 몰랐습니다. 공연히
벌집만 건드린 셈이 되고 말았어요."
최인서가 불만스럽게 내뱉았다.
"벌집을 건드려요?"
"보나마나 대원군은 천주교인들을 더욱 가혹하게 죽일
것입니다. 벌집을 섣불리 건드리면 벌떼가 달려 들어 사람을
쏘니까요."
"어디 천주교인을 죽이는 것이 대원군 혼자서 하는 일인가요?
조정 대신들 모두가 한가지로 우리를 죽이려 하고 있습니다."
"그래도 책임은 대원군이 져야 할 것입니다."
이창현은 입을 다물었다. 날이 밝아 오면서 숲에서 새들이
호르르 호르르 울고 있었다.
"우리 목숨은 이제 칼날 위에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
"살아 있다고 해서 살아 있는 것이 아니지요."
최인서가 잡초를 쓰러트리고 그 위에 벌렁 누웠다. 이창현은
불란서의 해독제독 로즈에게서 얻은 담배를 입에 물었다.
불란서군은 담배도 편안하게 만들어서 피우고 있었다. 불만 해도
그랬다. 조선에서는 부싯돌을 쳐서 담뱃불을 붙였으나
불란서군은 조그만 나무에 유황(硫黃)을 달아서 부싯돌 대신
사용했다.
"거기 있는 양반들 서학군이 아니오?"
그때 이창현의 등 뒤에서 굵직한 사내의 목소리가 들렸다.
이창원이 깜짝 놀라 뒤를 돌아보자 젊은 사내가 약초 망태를
허리에 차고 씨익 웃고 있었다. 수염이 더부룩한 사내였다.
"뉘시오?"
이창현은 재빨리 사내의 행색을 살폈다. 최인서도 벌떡 일어나
사내를 쏘아보고 있었다.
"약초 캐는 의원이오."
사내가 지팡이로 풀숲을 헤치며 가까이 왔다.
"의원?"
"의원이라고 하지만 돌팔이요. 강화에 큰 싸움이 났다고 해서
구경차 왔소."
사내가 이창현의 옆에 와서 털썩 주저앉았다. 이창현은
어리둥절하여 최인서를 쳐다보았다. 최인서도 뭐 이따위 자식이
있어 하는 뚱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거 담배요?"
사내가 이창현의 손에서 푸르스름한 연기가 퍼져 나가고 있는
담배를 가리켰다. 이창현은 아차하고 후회를 했으나 어쩔 수가
없었다.
"그렇소."
이창현은 퉁명스럽게 대꾸했다.
"어디 구경 좀 합시다."
사내는 넉살이 좋았다. 이창현의 손에 있는 담배를 빼앗듯이
나꿔 채서 입에 물고는 연기를 빨아댔다.
"거 참 신기하구먼."
유대치가 기이하다는 표정을 얼굴에 그렸다. 최인서는 잔뜩
부어 사내를 노려보고 있었다. 여차하면 사내를 때려 눕히기라도
할 기세였다.
"서양인들은 담배조차도 편리하게 만드는군....... 우리
통성명이나 합시다. 나 유대치라는 사람이오."
"......."
"수표교에서 의원 짓을 하고 있지요."
"......."
"나 서학을 나쁘게 생각하는 사람이 아니오. 서학을 하는
사람들도 다 같은 우리 조선인인데 그렇게 죽여서야 쓰겠소?
가슴에 피멍이 맺힐 일이지......."
"......."
"담배를 보니 서양 배에서 나온 것 같소. 서양인들과 함께
있었소?"
"그렇다면 어쩌겠소?"
최인서가 눈을 부릅뜨고 유대치에게 화를 냈다. 유대치의 말이
불란서군과 내통하지 않았느냐는 뜻으로 들렸기 때문이었다.
"화 낼 것 없소. 나도 이양인들이 어떻게 생겼는지 알고
싶어서 강화까지 왔으니까....... 우리 조선은 아직도 깊은 잠
속에서 깨어나지 못하고 있소. 서양 문물을 한시 바삐
받아들여야 하는데 쇄국만 고집하고 있으니 큰일이오."
"대원군은 척이보국을 내세우고 있소."
"보국은 당연히 해야 하는 일이오. 대원군도 옳은 일을 많이
하고 있소. 서원 철폐, 사색당쟁 근절, 풍속 개량, 비변사 폐지,
부정부패 척결....... 철종대에 삼정이 문란하여 일어난 민란이
그로 인하여 씻은 듯이 사라지지 않았소? 대원군의 유일한
실책은 경복궁 중건과 당신네들 서교도들 탄압이오."
"그가 조선을 위해 무엇을 했던 우리에게는 철천지 원수일
뿐이오."
이창현의 말에 유대치가 침통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거렸다.
"법국 군선은 다시 온다고 하오?"
"모르겠소. 다시 오리라고 생각은 하지만......."
"그 배는 돛도 없이 갑디다."
"그렇소. 불의 힘으로 가는 배요. 배 안에 기관이 있어서 불을
때면 증기가 폭발하여 그 힘으로 가오."
"법국 군선의 대완구도 보았소?"
"보았소."
"위력이 어떻던가요?"
"조선의 대완구 다섯 배는 될 거요. 대완구도 천리경으로 적을
살핀 뒤에 쏠 수 있게 되어 있소."
"천리경이 무엇이오?"
"그걸 들여다보면 10리 밖에 있는 개미새끼까지 자세히
보이오."
"허, 마치 요지경 같구먼....... 이럴 게 아니라 우리 술이나
한 잔씩 마시면서 얘기합시다."
유대치가 약초 망태에서 호로병과 마른 북어 두 마리를
꺼냈다. 그는 옆에 있는 바위 위에 마른 북어를 얹어 놓고
지팡이 손잡이 부분으로 두드린 뒤 찢어서 최인서와 이창현에게
나눠 주었다.
"아침들은 자셨소?"
"못 먹었소."
"그럼 이걸로 요기나 하시오."
유대치가 다시 약초 망태에서 한지에 싼 주먹밥 두 덩어리를
꺼냈다.
"이걸 먹어도 되겠소?"
"드시오. 먹자고 사는 것 아니오."
유대치가 씨익 웃고 자신은 호로병을 기울여 술을 한 모금
마셨다. 이창현은 최인서와 함께 주먹밥을 먹기 시작했다.
주먹밥은 간이 알맞게 배어 있었다.
"목이 멜 텐데 이것도 한 모금씩 하시오."
유대치가 호로병을 이창현에게 건네 주었다. 이창현은
호로병의 술을 한 모금 마신 뒤 최인서에게 건네 주었다. 술맛이
텁텁했다.
"어떻소?"
유대치가 짖궂게 웃으며 물었다.
"걸쭉합니다."
이창현이 웃으며 대답했다. 유대치가 점점 좋아지고 있었다.
"강화 농주요."
"술을 잘 담갔군요."
"어젯밤에 술감이라는 마을에 들어갔더니 병자가 있더군요.
그래 진맥을 하고 약초 몇 첩 지어 주니까 고맙다고 이 술을
줍디다."
"......."
"이 술은 한 대접만 마셔도 혀가 돌아가지 않아요. 여기
사람들은 입에 쩍쩍 달라 붙는다고 그러지요."
유대치의 말 그대로였다.
이창현이 주먹밥 한 덩어리를 다 먹고 농주를 세 모금 마셨을
뿐인데도 얼굴이 금세 화끈거려 왔다. 최인서도 눈주위가
불그스레했다.
"당신들은 어떻게 하여 법국 군선에 오를 수 있었소?"
"거기엔 우리를 가르친 신부가 타고 있었소."
"당신들이 법국 군선을 끌고 왔소?"
"아니오. 나는 법국 군선이 강화해협에 나타났다는 소식을
듣고 밤중에 배를 타고 갑곶진으로 건너와 신부를 찾았소. 말이
통하지 않았지만 중국인 통역이 제독을 만나게 한 뒤 신부를
만나게 해주었소. 여기 이형은 법국 군사들 야영지에서 만났소."
유대치가 이창현을 쳐다보았다. 당신은 어떻게 불란서 군선에
타고 있었느냐는 듯한 눈빛이었다.
"나는 딸을 찾기 위해 북경에 갔다가 이 신부를 만나서 함께
왔소."
"군선을 타고 왔소?"
"그렇소."
"딸을 찾는다고 했는데 무슨 뜻이오?"
이창현은 입을 다물었다. 옥순에 대한 얘기를 유대치에게 하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최인서가 옥순이 이리텔 신부를 따라
중국으로 간 일이며 이창현의 아내 조선이가 포졸들에게 잡혀
비참하게 죽은 내력을 대신 얘기하자 몇 번이나 혀를 찼다.
"우리 상통하고 지내지 않겠소? 나에게는 좋은 친구들이 많이
있소."
"뭘 하는 친구들이오?"
"이 나라를 개화시키려는 선각자들이오."
"개화?"
"개화라는 것은 서양 문물을 받아들여 이 나라를 살기좋은
나라로 만든다는 뜻이오. 쇄국의 반대라고 보면 될거요."
"그럼 우리 성교도 받아 들이오?"
"서양 문물을 받아 들이는데 그 뿌리나 마찬가지인 서교를
받아 들이지 않으면 어쩌겠소?"
"당신들도 교가 있소?"
"없소. 우리에게 교가 있다면 이 나라의 개화뿐이오."
"그럼 성교를 어찌 생각하오?"
"우리는 어떤 교도 좋다 나쁘다 하지 않소. 포교는 각자
자유요. 따지고 보면 당신네 서학이 박해를 받고 있는 것도 이
나라가 개화되지 않았기 때문이오."
"옳은 말이요."
최인서가 눈빛을 빛내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유대치의 말에
공감을 하고 있는 것 같았다.
오후가 되자 불란서군이 완전히 철수를 하고 정족산성에 있던
양헌수 장군이 군사들을 이끌고 읍내로 들어왔다.
그날 밤 이창현은 최인서. 유대치와 함께 약초를 캐는
의원으로 변장을 하고 강화 읍내로 내려왔다. 읍내는 그때서야
조선군이 입성했다는 소식을 듣고 사람들이 꾸역꾸역 돌아오고
있었다. 이창현인 최인서, 유대치와 함께 읍내의 주막에서 잠을
잤다.
이튿날은 빗발이 뿌리기 시작했다. 차가운 빗줄기였다.
아침을 주막에서 먹은 뒤 이창현은 유대치와 함께 갑곶진
나루를 향해 갔다. 불란서군들이 한 달 동안 야영을 하고 있던
갑곶의 들판은 썰렁하게 비어 있었다.
(이제 이리텔 신부를 다시 만나진 못하겠지.......)
이창현은 해협을 건너는 뱃전에 앉아서 강화섬을 시린
눈빛으로 쳐다보았다.
"나는 제물포로 가야겠소."
최인서는 통진부에서 길을 바꿨다.
"노형은 어디로 가시오?"
유대치가 작별을 하고 떠나는 최인서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이창현에게 물었다.
"글쎄요......."
이창현도 최인서가 빗줄기 사이로 멀어지는 것을 바라보며
얼굴을 흐렸다. 어디로 가야 할 것인가. 진작부터 생각을 했으나
마땅하게 갈 곳이 없었다.
"갈 곳이 있소?"
"하늘 아래 이 몸 하나 의탁할 곳이 없으려구요."
"나를 따라가지 않겠소?"
"......."
"의원이라는 것이 그래두 밥술을 얻어 먹는 직업이오."
유대치가 김포쪽을 향해 성큼성큼 걸음을 떼어 놓았다.
이창현은 우두커니 잿빛 하늘을 쳐다보다가 유대치의 뒤를 따라
걷기 시작했다.
불란서군은 10월 6일 강화해협에서 완전히 철수했다. 이에
조선 조정은 양화진, 행주목, 녹번이 고개에 설치했던 방어진과
교하, 파주에 배치했던 군사들을 거두었다.
불란서군은 10월 8일 물치도 앞바다에 모였다가 세어도
앞바다로 떠나고 다른 한 척은 팔미도 방향으로 사라졌다.
조선 조정은 10월 11일 동지사 이풍익에게 불란서 함대가
침입한 사실과 이를 격파한 사실을 청국에 보내 고하게 하였다.
1) 불란서군의 내침으로 일어난 병인양요는 조선과 불란서
어느 쪽도 결정적인 승패 없이 막을 내렸다. 불란서군은 상해로
돌아가자 미국과 영국으로부터 조선에서 패하고 돌아왔다는
비난을 받았다. 미국은 불란서에 조선 원정을 공동으로 하자고
제안했으나 불란서는 응하지 않았다.
2) 불란서군이 강화에서 약탈해 간 것은 조선 왕조의 보물과
왕조실록 등 귀중한 역사적 가치가 있는 것들이었다. 모두
외류장각에서 약탈한 것이다.
3)10월 15일 호군 김병준은 상소를 올려 서양 오랑캐의 침입을
막는 것은 천주교인을 박멸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에
대원군은 형조, 사헌부, 사간부, 좌우 포도청 8도 및 4도의
진영에 명하여 천주교인들을 모두 잡아 죽이게 하였다.
4) 불란서군의 내침은 천주교인들로 인하여 비롯되었다.
5) 김재헌의 보고는 "이조실록"에서 발췌하였다.
제12장 적, 그리고 사랑
1
해(年)가 바뀌었다.
1867년, 고종 4년이었다. 민비는 정초의 어수선한 분위기가
어느 정도 가라앉자 다시 영보당 이 상궁에 대한 문제를
심각하게 생각하기 시작했다. 지난 해는 분주하기 짝이 없는
해였다. 민비 개인으로서는 여자의 최고 지위인 왕비의 자리에
올랐고 마침내 한 남자의 여자가 되었다. 어떻게 생각하면 그 두
가지 일은 민비로서 평생 잊을 수 없는 일들이었다.
그녀가 고종의 왕비요, 한 남자의 여자가 되던 병인년은
조선의 역사에도 커다란 족적을 남길 만한 사건들이 유난히
많았던 해였다. 서원의 철폐, 경복궁의 대화재, 천주교 탄압의
피바람, 불란서 군선의 내침.......
천주교의 탄압과 병인양요는 민심을 크게 술렁거리게 했다.
그러나 양헌수 장군이 정족산성에서 불란서군을 크게 격파하고
불란서 군선이 물러감으로써 민심은 다소 안정이 되었다.
이제는 대궐도 조용했다. 대원군은 경복궁 중건 역사의 독려로
분주했다. 그는 정초도 쉬지 않고 일을 하고 있었다. 철인 같은
인물이었다.
고종은 대원군에게 끌려다니다시피 하면서 정사를 보고
있었다. 고종은 아버지인 대원군을 두려워했다. 아버지와 아들
사이가 점점 틈이 벌어져 갔다. 대원군은 아들인 고종을
신인무의하다고 질책했다. 고종은 그 소리를 듣고 대조전에
돌아와 오랫동안 울었다. 고종을 모시던 상궁들이 황망하여 몸둘
바를 몰라 쩔쩔 매었다.
그 뒤로 고종은 대원군과 눈을 마주치려고 하지 않았다.
민비는 영보당 이 상궁에게 고종이 자주 찾아가는 것을
그때서야 이해했다. 고종은 대원군의 눈빛으로부터 벗어날
안식처가 필요했다. 영보당 이 상궁은 고종의 안식처였다.
민비는 그 일 때문에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고종이 이
상궁의 처소에서 기수를 배설 할 때면 밤을 세우기 일쑤였다.
잠이 오지 않았다. 눈을 감고 있으면 고종과 이 상궁이 알몸으로
껴안고 뒹구는 모습만 머리 속에 떠올랐다. 민비는 점점 얼굴이
수척해져 갔다.
그러던 어느 날 민비는 영보당 이 상궁이 세배를 드리러
온다는 전갈을 받고 깜짝 놀랐다. 생각조차 못했던 일이었다.
그리고 영보당 이 상궁이 느닷없이 세배를 드리려 하는 저의를
알 수 없어 한참동안 생각에 잠겼다.
이 상궁과는 그 동안 딱 한 번 얼굴을 대면했을 뿐이었다.
불란서 군선이 물러간 지 얼마되지 않는 지난 해 11월이었다.
민비가 대왕대비전에 문안을 드리고 오는데 애연정 정자를
돌아오던 궁녀가 황급히 고개를 숙이고 옆으로 비켜섰다. 뒤에는
무수리까지 하나 거느리고 있었다. 민비는 일반 궁녀겠거니 하고
무심히 보았다.
"중전마마."
그때 박 상궁이 민비의 걸음을 멈추게 했다.
"이 상궁이옵니다."
박 상궁이 옆에 서서 낮게 소근거렸다.
"내명부냐?"
"특별상궁이옵니다."
"특별상궁이라니?"
"아뢰옵기 황송하오나 전하의 승은을 입고 있는
궁녀이옵니다."
민비는 그때서야 이 상궁이라는 궁녀의 모습을 자세히 살폈다.
고종의 총애를 받는 궁녀가 있다더니 저 계집이구나, 하는
생각이 빠르게 머리를 스쳤다.
"네가 이 상궁이냐?"
민비는 고개를 잔뜩 숙이고 있는 이 상궁의 머리를 쏘아보며
물었다. 목소리가 떨렸다.
"예."
이 상궁이 모기소리처럼 낮게 대답했다. 이 상궁도 긴장을
하고 있는지 어깨가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고개를 들어 보아라."
민비는 이 상궁의 얼굴을 보고 싶었다. 이 상궁이 얼마나
예쁘게 생겼는지 자신의 얼굴로 직접 확인하고 싶었다.
"고개를 들라시지 않느냐?"
박 상궁이 쌀쌀하게 호통을 쳤다. 이 상궁이 그때서야
조심조심 고개를 들었다.
(평범한 얼굴이야.......)
이 상궁은 얼굴이 동그스름하여 복스럽게 생긴 얼굴이었다.
결코 미인이라고는 할 수 없는 얼굴이어서 민비는 안도감을
느꼈다.
(재황은 이 계집애의 어디가 좋아서 총애를 하는
것일까.......)
민비는 얼핏 그 점이 이해되지 않았다. 용모에 있어서 이
상궁을 능가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생기자 관대한 마음이
생겼다.
"용모가 가려하구나. 마음도 그처럼 예쁘겠지......."
민비는 한마디를 던지고 중궁전으로 향했다. 그리고는 이
상궁을 다시 만난 일이 없었다.
"중전마마."
박 상궁 간난이가 민비를 불렀다. 민비는 그때서야 정신이
번쩍 들었다.
"영보당 이씨 대령했사옵니다."
"들라고 해라."
민비는 자세를 바로 하고 앉았다.
이내 장지문이 열리고 영보당 이 상궁이 조심스러운 걸음으로
서온돌로 들어섰다. 민비는 이 상궁의 거동을 차갑게
쏘아보았다.
이 상궁이 천천히 큰절을 올렸다. 정초의 세배였다. 거동이
다소곳했다.
"음."
민비는 억지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대조전에는
여러 상궁과 무수리들이 이 상궁의 출현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었다. 그들에게 중전이 투총을 한다는 입질거리를 만들고 싶지
않았다.
이 상궁은 몇 달 사이에 몰라보게 숙성해 있었다.
"중전마마. 새해 하례드리옵니다. 부디 소원 성취 하소서."
덕담은 웃사람이 먼저 하는 것이 궁중의 법도였다. 그러나
민비는 내색하지 않았다.
"이 상궁도 소원이 있으면 성취를 이루도록 해라."
민비의 목소리에는 나이답지 않게 위엄이 서려 있었다.
"예."
"너를 본 지가 참으로 오래되었구나. 그 동안
무병했겠지......."
"중전마마의 하해 같은 배려로 잘 지냈사옵니다. 그간 문후
올리지 못해 송구하옵니다."
"괜찮다. 궁중의 법도가 그렇지 않으니 어쩌겠느냐?
낮것이라도 들겠느냐?"
낮것은 점심을 말하는 것이었다.
"아니옵니다. 소인이 어찌 중전마마 안전에서 낮것을
들겠사옵니까? 분부 거두어 주시옵소서."
"여염으로 말하면 정실과 후실이다. 못 들 것도 없지 않느냐?"
"소인 감당할 자신이 없사옵니다. 통촉해 주시옵소서."
"아니다. 너는 내게 세배를 온 손님. 낮것조차 대접을
아니하면 중전이 그릇이 작다고 말이 있을 터....... 박 상궁!"
민비는 밖에 있는 박 상궁을 불렀다.
"예. 중전마마."
"여기 이 상궁에게 낮것을 올리도록 해라."
"분부 받자옵니다. 중전마마."
박 상궁이 물러가는 기척이 들렸다. 민비는 무릎을 세우고
앉아 있는 이 상궁을 다시 자세히 살폈다. 나이는 민비보다 한
살이 위였다. 그래서 그런지 숙성한 여인의 체취가 은은하게
풍기는 것 같았다.
옷차림은 무늬 있는 옥색 비단 저고리에 남색 비단 치마를
입고 있었다. 머리는 어엿머리에 온첩지를 달고 있었다. 상궁
중에 가장 지위가 높은 제조상궁이 하는 복식이었다.
"궁에 들어온 것은 언제냐?"
"소인이 여덟 살 때이옵니다."
"사가의 어른들은 생존해 계시느냐?"
"양주 군수를 지내신 아버님께서 호열자가 창궐했을 때
돌아가셨사옵니다."
"음. 호열자가 창궐했을 때는 전국에서 많은 백성이 죽었지,
40만 명이 죽었다고도 하니까....... 노리개가 좀 있느냐?"
"노리개라 하오시면......?"
"이런 것 말이다."
"소인 궁인 신분이라 노리개를 갖고 있지 못하옵니다. 또
노리개가 있다고 하여도 궁중 법도에 의해 패용하지
못하옵니다."
"너는 승은을 입은 궁녀가 아니냐? 내가 몇 가지 줄 터이니
전하를 모실 때 어여쁘게 보이도록 하라."
"중전마마."
"사양하지 마라."
민비는 곁에 두었던 노리개 상자에서 소삼작 노리개 두 묶음과
반지 두 개 그리고 비취 비녀 두 개를 이 상궁에게 꺼내 주었다.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이 상궁이 몸둘 바를 몰라 하며 눈물을 글썽거렸다.
고종에게도 받지 못했던 귀한 선물이었다.
민비는 이 상궁이 감격해 하는 모습을 가만히 살피면서 속으로
미소를 지었다.
(나는 이 나라의 왕비야.......)
이 상궁 같은 하찮은 궁녀에게 투기하는 모습을 아랫것들에게
보여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고종은 그날 밤에도 이 상궁의 처소의 찾아갔다. 민비는
여전히 잠을 이루지 못하고 엎치락뒤치락했다. 고종은
국왕이기에 누구의 처소에서 잠을 자던지 흠이 되지 않았다.
국왕은 무치라고 하였다. 또 왕실의 번영을 위해 수많은 자식을
낳는 것은 왕실의 홍복이라고 하여 권장까지 하고 있었다.
게다가 궁중의 있는 수백 명의 궁녀들이 모두 왕의 여자들이라고
해도 틀린 말이 아니었다.
(적자생존이지.......)
그 많은 궁녀들 중에 왕과 하룻밤을 같이 지낼 수 있는 여자는
극히 드물었다. 평생 동안 그런 기회가 오지 않아 대부분의
궁녀들의 가슴 속에 한을 갖고 살고 있었다.
그러나 왕비는 달랐다. 왕비는 처음부터 왕의 여자로 선택되어
궁궐에 들어오는 것이다. 여염집으로 말하면 지아비와 지어미의
관계인 것이다. 당연히 왕과 침실을 같이 써야 할 권리를 갖고
있었다. 그러나 궁중은 그렇지 못했다.
(이 상궁이 회임을 하여 원자라도 낳으면 나는 인현왕후처럼
될지도 모르는 일이야.......)
그것은 민비가 가장 두려워하는 일이었다.
인현왕후는 민비에게 증조고모였다. 요화 장희빈이 원자를
생산하여 인현왕후는 장희빈의 간계로 폐비되어 감고당에서
거처하다가 3년이 지나서야 복위되었다. 그러나 그때 얻은
병으로 끝내 죽고 말았던 것이다. 숙종의 우유부단한 성격과
조정 대신들의 암투도 작용했지만 인현왕후가 원자를 생산하지
못한 것이 가장 큰 원인이었다. 민비는 자신이 인현왕후의
전철을 밟을 수는 없다고 마음 속에 깊이 다짐했다. 민승호가
민비를 찾아온 것은 정월 보름이 지났을 때였다. 민비는
민승호와 함께 춘당지를 향해 걸어갔다. 대조전은 답답했다.
"오라버님. 사가는 어찌 지내는지 궁금하군요. 사가를 떠난 지
벌써 1년이 되었으니......."
춘당지는 한겨울이라 쓸쓸했다. 부용정도 나뭇잎만 수북히
쌓여 스산해 보였다.
"사가는 두루 평안하옵니다."
민승호가 조용히 대답했다. 민비는 민승호와 함께 부용정으로
들어갔다. 전도하는 궁녀들은 연못가에 떨어져 있었다. 하늘은
낮고 찌푸퉁했다. 눈이라도 흩뿌릴 듯이 음산한 날씨였다.
"어머님은 평안하시구요?"
민비의 눈이 허공을 쫓았다. 민승호는 민비가 내심을 말하지
않고 허공을 쓸쓸히 바라보는 것에 마음이 쓰였다.
"예."
민승호는 다시 조용히 대답했다.
"조카들도 많이 컸겠지요. 언제 한 번 궁궐에 데리고
들어오십시오. 조카들이 보고 싶습니다."
"그러잖아도 아들 놈이 중전마마 뵙기를 소원하고
있사옵니다."
"잘 키우십시오. 우리 여홍 민씨의 대를 이을 귀한 손이
아닙니까?"
"예."
민비는 민승호의 어린 아들을 머리 속에 떠올리며 그런 아들을
낳았으면 하는 생각이 떠올랐다.
"오늘의 내가 있는 것은 모두 오라버님 덕분입니다.
오라버님께서도 정승의 반열에 오르셔야 할 줄 믿습니다."
"아직은 경륜이 없습니다. 과거에 통과한 지 2년밖에 안
되없습니다."
연못엔 얼음이 얼어 있었다. 그러나 보름이 지났으니 멀지
않아 봄이 오리라고 생각했다.
"이항로 같은 이는 상소문 한 장으로 대원군을 사로잡아
동부승지가 되었습니다."
"이항로는 유림의 명망 높은 학자입니다. 또 이항로의
주전론은 1백 년 이래 가장 깐깐한 상소라는 평판이
자자합니다."
"오라버님은 이 나라 국모의 오라버님입니다. 어찌 초야의
일개 학자와 비교를 하십니까?"
"......."
"오라버님은 반드시 정승의 반열에 올라야 합니다. 자영에게는
오라버님밖에 믿을 사람이 없습니다."
"대원군 저하는 여흥 민씨들을 탐탁하게 여기지 않습니다."
민승호가 비로소 목소리를 낮추어 본심을 털어 놓았다.
"어째서요?"
"외척의 득세를 경계하기 위해서라고 합니다."
"그야 당연한 일이지요. 외척의 득세를 해서야 정치가
바로되지 않습니다."
"그것은 겉으로의 말이고 사실은 전하의 생친이라는 것을
빌미로 천년 만년 정권을 놓치 않으려고 하는 것입니다."
"당치 않습니다."
"중전마마. 대원위 저하는 여불위 같은 인물입니다."
"여불위요?"
"어린 진시황의 아버지로서 진나라를 다스린 인물 말입니다.
국태공이란 게 대체 무엇입니까? 전횡이 여간 극심하지
않습니다."
"오라버님."
"예."
"오라버님의 말씀이 지나칩니다. 오라버님의 말씀이 외인의
귀에 들어가면 목이 열 개라도 붙어 있지 못할 것입니다."
"중전마마!"
"말씀을 삼가하셔야 할 줄 아옵니다."
"제 목숨은 중전마마에게 달렸습니다. 중전마마를 위해 신명을
바칠 뿐입니다."
"그럼 저를 위해 목숨을 바치겠다는 말씀입니까?"
낮고 찌푸퉁한 하늘에서 그예 눈발이 날리기 시작하고 있었다.
"그러하옵니다."
"제가 무엇으로 오라버님을 믿을 수 있겠습니까?"
"저는 중전마마의 오라버니입니다. 중전마마의 친가는 저로
인해 대가 이어집니다."
"허나 우리는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았지요."
"피가 무엇이 중요합니까? 중전마마와 저는 오누이입니다.
중전마마가 중전으로 간택되실 때처럼 힘을 합쳐야 합니다."
"눈이 내리기 시작하는군요."
"중전마마."
"마치 하늘에서 흰 꽃이 날리는 것 같습니다."
"중전마마께서는 대궐 안에서의 일을 도모하십시오. 저는
밖에서의 일을 도모하겠습니다."
"무슨 말씀입니까?"
민비가 몸을 똑바로 돌려 민승호를 쏘아보았다.
"이 상궁을 죽여야 합니다."
"......."
"이 상궁은 장차 중전마마에게 큰 화근이 될 것입니다."
"당치 않은 말씀입니다. 오라버님의 목숨이 도대체 몇 개나
된다고 그런 엄청난 말씀을 입에 담습니까?"
"중전마마!"
"다시는 그런 말씀 입에 담지 마십시오."
"중전마마. 제가 올리는 말씀은 모두 중전마마를
위해서입니다. 이 상궁이 회임이라도 해보십시오. 후궁이
중전보다 늦게 왕자를 생산하면 큰 문제가 되지 않으나 중전보다
먼저 생산을 하면 원자가 됩니다. 그 원자가 세자로 책봉되면
어찌 그 일을 감당하시렵니까?"
민비는 온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렇다. 그것은 민비가 가장
두려워하고 있는 일이었다.
"모든 책임은 제가 질 것입니다."
"오라버님의 말씀 한마디라도 외부에 흘러 가면 삼족을 멸하게
됩니다."
"명심하고 있습니다. 조금도 심려하지 마십시오."
민승호가 허리를 깊숙히 숙였다.
눈발은 점점 어지럽게 날리고 있었다. 민비는 잿빛 하늘을
가득 메우고 쏟아지는 흰 눈송이들을 잠깐 응시하고는 걸음을
돌렸다. 나뭇가지며 대궐의 크고 작은 전각들의 기와 위에도
눈이 하얗게 쌓이고 있었다.
고종은 대조전에 돌아와 있었다. 민비는 머리의 눈을 털고
동온돌방으로 들어갔다. 고종은 보료에 비스듬히 기대 앉아
있다가 민비가 들어오자 자세를 바로 하고 앉았다.
"전하."
민비는 함박웃음을 지으며 고종의 앞에 앉았다.
"어디 다녀오시는 길이오?"
"춘당지에 다녀옵니다. 눈이 많이 오고 있사옵니다."
"그렇구려."
"오늘도 정무를 보셨사옵니까?"
"정무랄 것도 없고 아버님과 한가로이 얘기를 나누었소."
"어떤 얘기옵니까?"
"왕정양을 병조참의에 발탁하기로 하였소."
"왕씨를요?"
민비는 깜짝 놀라서 고종을 쳐다보았다. 조선왕조 창업 이래
왕씨가 벼슬에 나선 일은 한 번도 없었다. 더구나 정3품의 병조
참의라면 파격적인 인사가 아닐 수 없었다.
"중전의 생각은 어떻소?"
"신첩 아직 거기까지는 생각이 미치지 못했사옵니다."
민비는 솔직하게 시인을 했다. 대원군은 역시 그릇이 큰
인물이라고밖에 할 수 없었다.
"하긴 나도 깜짝 놀랐소. 5백 년 사직이 이어 오면서 왕씨를
발탁한 일이 없었으니 어찌 놀라지 않겠소."
"아버님은 또 그의 아들 왕성협도 홍문관 교리에 발탁하겠다고
하셨소."
"그저 놀라운 일입니다."
민비는 너무 놀라서 입을 다물고 말았다. 대원군다운
짓이었다. 고종이 등극한 해의 6월에는 북인의 임백경을
발탁하여 세인을 놀라게 하더니 고종 3년 2월에는 남인의
유후조를 병조참의에 발탁하여 우의정까지 승차시키고 한계원,
강노, 임상준의 사색을 두루 등용하여 조정의 인사를 새롭게
하고 있었다.
눈은 밤에도 계속해서 내렸다.
저녁 수라를 마친 후 민비는 고종을 졸라 밖으로 나왔다.
고종은 아직 소년이었다. 눈이 펑펑 쏟아지는 하늘을 보면서
감격을 하기도 하고, 손수 눈을 뭉쳐 던지기도 하였다. 궁녀들도
각 처소에서 나와 눈을 바라보고 있었다.
민비는 고종과 함께 눈밭 위를 뛰어다니고 싶었다. 눈을 뭉쳐
눈싸움도 하고 눈사람도 만들어 보고 싶었다. 그러나 대궐은
법도가 엄격한 곳이었다. 민비는 암암한 하늘에서 어지럽게
내리는 흰 눈송이들을 바라보며 흥건한 미소를 지었다.
오늘 밤 고종을 내 몸 속 깊이 깊이 받아들이리라. 고종을 내
혼자만의 소유로 하리라....... 민비는 축복처럼 쏟아지는
눈송이들을 바라보며 그런 생각을 했다.
"중전."
고종이 민비의 옆에 와 손을 잡았다. 민비는 가슴이 후르르
떨리는 것을 느끼며 고종의 가슴이 쓰러지듯 기대었다.
(이 상궁이 원자를 생산하기 전에 내가 먼저 원자를
생산해야해.......)
민비는 고종의 가슴에 안겨서 그런 생각을 했다. 그러나
그것은 민비의 뜻대로 되는 일이 아니었다.
2
민비가 우려하던 영보당 이 상궁이 회임을 한 것은 그해
8월이었다. 어의가 진맥을 한 결과 명년 윤 4월이 산달이었다.
이에 앞서 대원군은 1월에 왕정양을 병조참의에 임명하여 고려
왕씨 등용의 길을 열었고 3월엔 일본에 국서를 보내 정한설을
강력히 반대했다. 이때 일본은 명치유신을 단행하고 서양 문물을
받아들여 근대국가로서의 틀을 갖추고 있었다. 5월에는 백성들의
원성이 자자한 당백전의 주조를 중지시키고 영의정에 김병학,
좌의정에 유후조를 임명했다. 또 윤질이 횡행하여 전국에서
수많은 백성들이 죽어갔다. 북도의 변민들은 겸황과 중세를
견디다 못해 월경 도주하는 백성들이 속축했다. 나라 안은 고종
4년이 되었는데도 어수선했다.
"겸황이라니요? 도대체 정치를 어찌 하였기에 백성들
그지경에까지 이르렀다는 말씀입니까?"
대왕대비 조씨는 대원군의 전횡에 노골적인 불만을 터뜨렸다.
겸황이 무엇인가. 겸황이란 흉년이 들어 논밭에서 먹을 것이
생산되지 않는 상태를 말하는 것이다.
"경복궁 중건과 병인양요로 백성들의 삶이 말이 아닙니다.
굶어 죽는 백성들이 허다하다고 하옵니다."
민비는 대왕대비 조씨에게 바짝 접근했다.
"변고입니다. 어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다는 말입니까?"
"5월에는 윤질까지 횡행하여 길거리에 백성들의 시체가 늘어져
있다고 하옵니다."
"경복궁 중건이 문제예요. 거기에 드는 비용만 없애도
백성들이 굶주리지는 않을 것입니다."
마침내 경복궁 중건을 중지해 달라는 상소가 올라왔다. 선전관
이혁주로부터 올라온 것이었다.
신 이혁주 삼가 성상께 엎드려 비옵나이다. 경복궁 중건의
대역사가 시작된 지 햇수로 어언 3년째, 대소 화재로 물자가
탕진되고 국가의 재정이 궁핍해 진 지 오래입니다. 이에
백성들의 삶은 더 이상 역사를 감당할 여력이 없는지라
빈사지경에 이르렀사옵니다. 경복궁 중건의 대역사가 왕부의
위엄을 찾고 사직을 튼튼히 하자는 것임을 온 천하가 모르는
바는 아니나 어진 임금의 도리는 몸소 절용(節用)하고
애민(愛民)하는 것이 있사온지라 경복궁 중건 역사를 중지하여
주시옵소서. 원납전, 당백전, 결전 등 각종 세전(稅田)의 폐해는
필설로 형언할 수 없사옵고 도성과 전국 방방곡곡에는 피골이
상접한 백성들의 해골이 서로서로 머리를 맞대고 누울 지경이
되었사오니 엎드려 비옵건대 성상께서는 경복궁 역사의 중지를
명하시어 이 나라 만 백성의 짓눌린 숨통을 틔워 주시옵소서.
이른바 절용애민의 상소였다. 그러나 문구가 흉칙하여
대원군은 이혁주를 경상도 단성으로 유배시켜 버렸다.
민비는 그러한 시기에 영보당 이 상궁의 회임 소식을 박
상궁으로부터 듣고 가슴이 철렁했다. 마침내 불길한 예감이
실현되고 있는 것 같아 불안했다.
"중전마마."
"듣고 있다. 어서 말해라."
"이 상궁이 회임을 하자 대왕대비마마께서 크게 기뻐하신다고
하옵니다."
"대왕대비마마께서 무슨 연유로 기뻐하신다는 말이냐?"
"왕실의 손이 끊긴 지 2대째라 이 상궁이 회임한 것을 큰
경사라고 하고 있사옵니다."
"흥!"
민비의 입에서 자신도 모르게 코웃음소리가 흘러 나왔다. 이
상궁이 회임을 했다고 해서 반드시 원자를 생산한다는 법이 없는
것이다.
"중전마마. 전하께서는 비밀리에 사람을 풀어 박유봉이란
인물을 찾고 있사옵니다."
"박유봉? 박유봉이 도대체 누구냐?"
"애꾸라 하옵니다."
"아니 전하께서 무엇 때문에 애꾸를 찾고 계신다는 말이냐?"
"그 사람이 관상을 잘 보아 길융화복을 귀신같이 알아
맞춘다고 하옵니다. 원래는 애꾸가 아니었으나 자신의 운이
애꾸가 되어야만 벼슬길에 오르고 귀하게 된다고 하면서 스스로
눈 하나를 빼 버렸다고 하옵니다."
"그래?"
민비는 이마를 살짝 찡그렸다. 박유봉이란 인물이 괴팍한
인물이 틀림없으나 스스로 눈을 빼냈다는 말이 귀에 거슬렸다.
그것은 끔찍한 일이었다.
"그 자는 전하께서 어릴 때 장차 조선의 국왕이 된다고 하여
대원위 저하를 놀라게 했다고 하옵니다."
"그 자가 그렇게 점을 잘 본다는 말이냐?"
"예."
"간난아."
"예. 중전마마."
"너도 박유봉이라는 인물이 어디 살고 있는지 알아보도록
해라."
"소인이 직접 염탐하옵니까?"
"아니다. 이제는 너도 상궁이 아니냐? 상궁이 여염을
돌아다니며 염탐할 수 없는 일, 믿을 만한 사람을 시켜라. 어디
그럴만한 사람이 없겠느냐?"
"한 사람 있사옵니다."
"그 사람이 누구냐?"
"이창현이라는 사람으로 백의정승 유대치의 문하에 있는
사람입니다."
"그래. 그럼 그 사람을 시켜 박유봉이 어디 살고 있는지 알아
보도록 해라."
"예. 중전마마."
박 상궁이 고개를 숙이고 물러갔다.
박 상궁은 사흘 후에 박유봉의 소식을 알아 가지고 왔다.
박유봉은 벌써 고종의 부름을 받고 영보당에 다녀갔다는
것이었다.
"박유봉이 무엇 때문에 이 상궁의 처소에 다녀갔다더냐?"
"영보당 이 상궁의 뱃속에 있는 아기가 여아인지 남아인지
알아보라는 전하의 어명이 계셨다 하옵니다."
"아니, 그럼 박유봉이 뱃속에 있는 아기까지 여아인지
남아인지 알 수 있다는 말이냐?"
"예. 중전마마."
허면 이 상궁의 뱃속에 있는 아기가 왕자라고 하더냐,
공주라고 하더냐?"
"왕자라 하옵니다."
"왕자?"
민비는 박 상궁의 말에 가슴이 덜컥 내려앉는 기분을 느꼈다.
"전하께서 영보당 이 상궁의 뱃속에 있는 아기가 왕자라는
말을 듣고 크게 기뻐하셨다고 하옵니다."
"뱃속에 있는 아기가 왕자인지 공주인지 귀신도 모르는 법,
박유봉이란 자의 방자함이 하늘에 이르렀구나."
민비는 자신의 가슴 속에서 싹트는 불안을 달래기라도 하듯이
쌀쌀맞게 내뱉았다. 후궁의 몸에서 왕자를 낳은들 무엇을
하겠는가. 이 상궁이 고종의 총애를 받고 있다고 해도 한낱
무수리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민비는 다시 잠을 이룰 수 없게 되었다.
그러는 동안 경복궁의 근정전과 경회루가 완공되었다.
11월이었다. 날씨는 차가웠으나 경회루는 지극히 아름다웠다.
연못은 크고 넓었다. 길이가 동서로 4백자, 남북으로 3백 4십
자였다. 바람이 일 때마다 경회루의 아름다운 누각이 물 위에
떠서 출렁거렸다.
대원군의 이하응은 고종 내외와 함께 경회루를 돌아보았다.
(이것이 과연 인간의 솜씨라고 할 수 있겠는가?)
민비는 감탄했다. 경회루는 장엄했다. 날씨가 쌀쌀하기는
했으나 봄이 되면 꽃들이 피어 더욱 아름다워질 것이다.
고종은 이 상궁의 회임 이후 민비를 더욱 자주 찾았다. 회임한
이 상궁과 잠자리를 삼가하라는 대왕대비 조씨의 권고
때문이었다. 회임한 여자와 동침을 하면 유산이 될 위험이 있기
때문이라고 했다.
민비는 그 까닭으로 늘 고종과 잠자리를 같이 했다. 민비는
고종과 잠자리를 같이 하는 것은 기쁜 일이었으나 이 상궁이
왕자를 낳을 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면 가슴 속으로 찬바람이
불고 지나갔다.
다시 해가 바뀌었다.
1868년. 고종 5년이었다. 민비는 18세가 되었다. 그러나
민비의 얼굴은 점점 수척해 갔다. 이 상궁의 회임 때문에 잠을
이루지 못하는 날이 많았다.
이 상궁은 윤 4월이 해산달이었다. 벌써 이 상궁의 배는 눈에
띄게 불러오고 있었다.
(제발 이 상궁이 공주를 낳아야 할텐데.......)
민비는 그 한 가지만을 간절히 빌었다. 날은 점점 따뜻해 져
가고 있었다. 이 상궁의 해산달이 피를 말리듯 다가오고 있었다.
그러나 영보당 이 상궁이 해산을 하기도 전에 충청도 덕산에서
기절초풍할 파발이 먼저 날아왔다. 대원군의 생부 남연군 구의
봉분이 파헤쳐졌다는 것이었다. 이른바 남연군 묘
파묘사건이었다.
"이, 이런......! 세상에 어찌 이다지 무도한 자들이 있다는
말인가?"
영의정 김병학은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무엇이? 어느 놈이 감히 아버님의 무덤을 파헤쳤다는
말이냐?"
대원군은 눈을 부릅뜨고 소리를 질렀다. 남연군 구는 대원군의
생친이니 고종에게는 조부가 된다. 고종도 그 얘기를 듣고 몸을
떨었다. 고종뿐이 아니라 민비와 대소신료들까지 서양인들의
만행에 분노했다.
남연군 묘 파묘사건은 독일인 옵페르토에 의해 저질러진
사건이었다. 옵페르토는 유태계 독일인으로 이미 조선의 서해를
두 번이나 침입하여 통상을 요구했으나 조선의 거부로 뜻을 펴지
못하고 상해로 돌아간 일이 있었다. 그는 그때 상해에서 우연히
조선을 탈출한 권폐롱 신부를 따라간 조선인 천주교인들과도
만나게 되었다.
옵페르토는 조선인 천주교인들로부터 남연군의 무덤이 충청도
덕산군에 있다는 얘기를 듣고, 그 무덤에 보물이 묻혀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그는 제3차 조선 원정을
계획했고 권페롱 신부와 조선인 천주교인들을 접촉하여 그
방법을 오랫동안 숙의했다. 권페롱 신부는 이리텔 신부에 이어
조선을 탈출했으나 조선에 남아 있는 불행한 천주교인들 때문에
괴로워하고 있었다. 옵페르토가 자신의 장사를 위해 조선을
개방시키는 데 혈안이 되었다면 권페롱 신부는 포교의 자유를
얻기 위해 자신의 신명을 바칠 각오를 하고 있었다.
그들은 수차례의 접촉 끝에 남연군의 무덤을 도굴하기로
합의했다. 권페롱 신부는 남연군의 시체로 포교의 자유를
흥정하려고 했고 옵페르토는 남연군의 무덤을 도굴하여 보물을
노략질하려고 했다.
그리하여 그들은 1868년 4월 15일 1천 톤급의 기선 차이나호와
소형 기선 한 척을 이끌고 조선 원정에 나섰다. 선장은 뭘레르,
원정대장은 옵페르토였다. 여기에 상해에서 통역관을 하고 있던
미국인 젠킨스, 권페롱 신부가 공동으로 참여했고 조선인
천주교인 최선일 등이 길잡이를 자임하고 나섰다. 선원은 12명의
서양인과 25명의 마닐라인들이 동원되었고 호위병으로는 청국인
용병을 고용했다.
그들은 음력 4월 17일에 아산망에 도착했다. 길잡인인
최선일의 안내에 따라 홍주목 행섬도에 닻을 내리고 다음날 새벽
그레타 호로 갈아 타고 삽교천을 따라 올라가 오전 11시에
구만포에 내리게 되었다. 이들은 육지에 상륙하여 조선인들에게
로서아 군대라고 속인 뒤 부대를 편성하여 일대는 그레타 호에
남아 호기심 가득한 조선인들을 현혹하고 일대는 쏜살같이 덕산
군수 이종신이 옵페르토 일행에게 문정을 시도했으나 그들은
총을 쏘아 군사들을 도망가게 하였다.
옵페르트 일행은 그날 오후 5시에 가동에 도착했다. 가동은
풍수상의 명당으로 양쪽에는 높은 산이 우뚝 솟아 있고 숲이
울창했다.
그들은 서둘러 남연군의 무덤을 파헤치기 시작했다.
삽교천에서 덕산에 이르는 하천은 한 달에 한 번밖에 없는 밀물
때만 30시간 정도 배를 타고 다닐 수 있었다. 그 나머지 한 달은
물이 빠져 배가 다닐 수 없었다. 시간을 끌면 물이 빠져
그레타호도 움직일 수 없게 되는 것이다. 서두르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는 동안 조선인들도 가동으로 몰려와 옵페르트
일행을 수상스러운 눈으로 살피고 있었다.
그러나 옵페르트 일행은 남연군의 무덤을 도굴하는 데 끝내
실패했다. 그들은 봉분을 파헤치는 데만 5시간을 소비했다.
게다가 봉분을 파헤치자 거대한 석벽이 나타났다. 옵페르트
일행은 그 석벽을 깨트리는 데 5, 6시간이 소모되리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러나 그렇게 오랜 시간을 허비할 수가 없었다.
옵페르토 일행은 이미 예정했던 시간을 12시간이나 넘기고
있었다.
옵페르토는 아쉬웠으나 권페롱 신부를 설득하여 배로
돌아가기로 했다. 더 이상 머뭇거리다가는 생명이 위험해 질
수도 있었다. 게다가 상륙지점에 남겨 놓은 배가 어찌되었는지도
걱정스러웠다. 권페롱 신부는 남연군의 무덤을 파지 못한 것을
한탄했으나 옵페르토의 말에 따르지 않을 수 없었다.
그들은 19일 오전 6시에 덕산에서 하리후포(下里候浦)로
내려와 민가를 습격하고, 20일에는 행섬도에 이르러 차이나호로
갈아 타고 동검도를 향해 떠났다.
서양인들에 의해 남연군의 무덤이 파묘되었다는 급보를 받은
충청관찰사 민치상은 즉각 조정으로 장계를 올리는 한편 군사를
풀어 옵페르토 일행을 추격하게 하였다. 그러나 옵페르토 일행은
이미 동검도 방향으로 떠난 뒤였다.
충청관찰사 민치상의 장계는 4월 21일 조정에 도착했다.
대원군은 즉시 중신회의를 소집하여 홍주 목사 한응필을
가승지로 임명하여 변란의 전후사정을 상세히 조사하게 하였다.
아울러 덕산 군수를 변란에 대비하지 못한 책임을 물어
파면했다.
이때 옵페르토 일행은 동검도에 도착해 있었다. 이에 영종
첨사 신효철이 중군과 교리를 보내어 문정을 하자 그들은 비리분
수군독오라고 말하고 통상조약 맺기를 원한다는 내용의 편지를
대원군에게 보냈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은 것이었다.
덕산에서 남연군의 무덤을 파헤친 것은 실로 유감스러운
일이오. 허나 그것은 조선국과 통상조약을 맺기 위해 불가피한
조치였소. 우리는 총칼로 귀국과 전쟁을 하여 사람을 상하게
하지 않고 평화롭게 교역을 하게 되기를 바라오. 조선
정부에서는 우리의 이러한 사정을 잘 헤아려 책임있는 대신을
보내어 조약을 맺기를 바라오. 만약에 우리의 이러한 평화적인
제안을 거절하면 귀국은 수 개월 이내에 나라를 위태롭게 하는
국난에 직면하게 될 것임을 명심하시오. 또한 대원군은 자신의
권력이 언제까지나 지속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할
것이며 좋치 못한 대신들의 영향에서 벗어나 속히 조약의 초안을
검토하여 이에 대한 회답을 보내시오.
안하무인의 편지였다. 그러나 조정은 의견이 분분했다.
남연군의 무덤이 파헤쳐진 중대한 사건이 발생했는데도 조정은
그들은 문책하지 않고 경기도 관찰사를 보내어 조선의 해안에서
물러갈 것을 촉구하기로 했다. 불란서군의 월등한 화력 앞에서
속수무책이었던 조정은 일개 장사치에 불과한 옵페르토
일행에게도 전의를 상실하고 있었다.
"전하. 참으로 조정이 허약하지 않습니까? 남연군은 전하의
조부되는 어른이십니다. 임금의 할아버지되는 분의 무덤을
파헤쳐 놓고 통상을 요구하는 무뢰배를 어찌 치죄하지 않는
것입니까?"
중전 민비는 고종에게 강력하게 항의했다. 서양인들에게
호의적이었던 민비도 이때만은 분노로 몸을 떨었다.
"아버님께서 그리 결정하셨소."
고종은 민비의 항의에 우울하게 대꾸했다. 가슴이 답답했다.
영의정 김병학이나 좌의정 유후조도 옵페르토 일당에 대한
치죄를 거론하지 않고 있었다. 불란서군의 막강한 화력에 기세가
꺾인 조선 조정은 옵페르토 일당이 물러가기만 한다면 그 사건을
불문에 붙일 것 같았다.
"그리는 아니됩니다."
"아니 되다니요?"
"남연군의 무덤을 파묘한 자들은 단순한 장사꾼이 아닙니다.
도굴범입니다. 그들을 잡아서 참수해야 합니다."
민비의 목소리는 단호했다.
"우리는 아직 그들이 누구인지도 모르고 있소."
"그들이 누구인지는 문제가 아닙니다. 왕부의 위엄을 세워야
합니다."
"허면 중전께서는 어찌해야 된다고 생각하오?"
"능지처참을 해야 합니다. 경기도 관찰사에 어명을 내려
그들을 남김 없이 잡아 들이라고 하십시오."
"그럼 군사를 다시 동원해야 하오?"
"영종 첨사 신효철에게 관찰사가 명하여 그들을 잡아 들이게
하면 될 것입니다."
"알겠소."
"또한 서양인들이 남연군의 무덤을 파묘한 것은 조선인
천주교인들이 내통하였기 때문입니다. 이 일에 관련된 자들을
잡아들여서 전하께서 친히 친국을 하십시오."
"친국이요?"
고종이 놀라서 민비를 쳐다보았다. 친국은 임금이 직접 죄인을
문초하는 것으로 역모나 종사에 관련된 일만 다루었다. 이때는
의금부에 추국정까지 설치되었다.
한편 동검도 앞바다에 닻을 내린 옵페르토 일행은 20명의
정찰대를 조직해 동검대에 상륙시켰다. 그들은 해안을 지나
동검도성에 이르렀다. 옵페르토의 정찰대는 동검도성 서문
앞에서 조선군 병사들에게 성문을 열라고 소리를 지르며 마구
총질을 해댔다. 영종 첨사 신효철은 전령을 보내어,
"서양인은 성에 들어올 수 없으니 돌아가라."하고 요구했다.
그러나 옵페르토 일행은 돌아가지 않고 성 밖을 돌아다니며
송아지를 훔치고 노략질을 서슴지 않았다. 영종 첨사 신효철은
마침내 조선 군사들에게 공격 명령을 내렸다.
이때 동검도성에는 조선 군사 1백 50명이 매복하고 있었다.
그들은 신효철의 명령이 떨어지자마자 일제히 사격을 해댔다.
조선 군사가 쏘아대는 총탄이 옵페르토 일행을 향하여
빗발치듯이 날아갔다. 옵페르토 일행은 혼비백산하여 해안으로
달아났다. 그러나 조선 군사들의 갑작스러운 발포로 2명의
선원들이 목숨을 잃고 다수의 선원들이 부상을 당했다.
옵페르토는 전의를 잃고 상해로 달아났다.
신효철은 옵페르토 일행의 선원 시체 두 구의 목을 베어
동검도성에 효수한 뒤 다시 도성으로 올려 보냈다. 대원군은
신효철의 공적을 인정해 수군절도사에 임명하고 서양인들의
수급을 여러 군영의 장신에게 돌려보게 한 뒤 8도에 돌려 온
백성이 보게 하였다.
옵페르토 일행의 남연군 묘 파묘사건은 비열하기 짝이 없는
추잡한 사건이었다. 이들의 만행은 상해에 있는 서양인들로부터
빗발치는 비난을 받았다. 상해의 미국 영사관은 옵페르토 일행의
만행에 가담한 미국인 통역관 젠킨스를 기소했다. 옵페르토는
독일인이었기 때문에 미국 법정에 증인으로 소환되었다.
이 사건으로 권페롱 신부도 격렬한 비난을 받아야 했다. 그는
조선을 탈출한 뒤 수차례에 걸쳐 조선에 다시 들어와 포교
활동을 하려고 했으나 끝내 입국하지 못하고 만주에서 병으로
죽었다. 이 사건은 조선에서 활발한 선교활동을 하고 있던
파리외방전교회 소속의 불란서 신부들의 도덕성에도 치명적인
손상을 입혔다.
민비는 남연군 묘 파묘사건을 자신의 입지 확보에 이용했다.
조정은 옵페르토 일행이 물러가자 영보당 이 상궁의 출산에
관심이 집중되고 있었다. 민비는 영보당으로 쏠리는 관심을
천주교인 탄압으로 이끌었다. 고종은 천주교인들을 잡아 들여
몸소 친국을 했다. 추국청이 설치되고 매일같이 피가 튀고
살점이 찢어지는 고문이 자행되었다. 최인서, 최선일 장치선 등
수많은 천주교인들의 피가 의금부 추국청을 흥건하게 적셨다.
민비는 매일같이 고종으로부터 친국 결과를 보고받고 어찌어찌
친국을 하라고 가르쳤다. 조정은 바짝 긴장했다. 대원군은 전에
없이 아들이 몸소 친국을 하자 눈이 휘둥그래졌다. 영의정
김병학을 비롯한 조정 대신들도 고종의 친국을 예의주시했다.
(아기가 탄생할 날이 얼마 남지 않았는데 이처럼 피를
흘리다니.......)
영보당 이 상궁은 잔뜩 부른 배를 쓰다듬으며 불안한 생각을
떨쳐 버릴 수가 없었다.
(이번 옥사엔 뒤에 누군가 있어.......)
김병기는 고종이 몸소 친국을 하는 것을 보고 그렇게
생각했다.
(대원군이 그 사실을 눈치 채지 못하고 있으면 조만간
실각하게 될 게 틀림없어.......)
김병기는 고종의 뒤에 있는 인물로 민비와 민승호를 꼽았다.
대원군을 거세할 인물들이 대원군의 턱 밑에서 자라고 있었다.
고종이 친국을 하는 천주교인들에 대한 피의 고문은 며칠째
계속되었다. 그러는 동안 윤 4월이 오고 이 상궁의 산월이
목전에 닥쳤다. 왕실은 숨을 죽인 듯이 이 상궁의 출산을
고대하고 있었다 3대에 걸쳐 왕실에 후사가 없어 대원군과
고종은 이 상궁의 출산을 학수고대했다. 그러나 이 상궁은
뱃속의 아기가 공주이기를 간절히 바랐다. 후궁이나 궁녀의
몸에서 태어난 아기는 원자라고 해도 종종 역모사건에 휘말려
죽음을 당하곤 했었다. 그러잖아도 궁중 암투가 치열한 것이
현실이었다.
게다가 중전 민비는 이제 겨우 18세였다. 아직 회임했다는
말을 듣지는 못했으나 석녀가 아닌 이상 조만간 회임을 할 것은
엄연한 사실이었다. 중전 민비가 왕자를 생산하면 원자가
아니더라도 세자에 책봉될 것은 뻔한 일이었다. 그렇게 되면
그녀가 원자를 낳았더라도 역모사건에 휘말리거나 아기가 귀신도
모르게 죽게 되는 것이다. 이 상궁은 그런 까닭으로 뱃속의
아기가 공주이기를 간절히 바랐다.
음력 윤 4월 9일이 되자 이 상궁은 진통을 하기 시작했다. 이
상궁의 사가에서 친정 어머니가 산모 뒷바라지를 하기 위해
궁중으로 들어오고 산실청은 부산하게 움직였다.
권초관도 이미 임명되어 있었다. 권초관이란 궁궐에서 아기를
출산할 때 산석을 말아서 산실 문실주에 매다는 직책이었다.
얼핏 보면 직책으로 보았으나 중신들 중에 가장 신분이 높고
복이 많은 정승이 선출되는 것이 관례였다. 특히 아들을 많이
낳은 중신이 권초관에 뽑혔다.
(영보당 아이가 딸을 낳아야 할텐데.......)
대원군 이하응은 중희당에 앉아서 그런 생각을 했다. 이
상궁이 아들을 낳는다고 해서 세자로 책봉할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그러나 고종의 생각은 달랐다. 고종은 이 상궁이 아들을
낳기를 바라며 대조전 월대를 오락가락했다. 그는 이제
17세였다. 이 상궁이 왕자를 낳는 것이 자신의 어깨를 무겁게
짓누르고 있는 대원군의 중압감에서 벗어나는 길이라고
생각했다. 그가 조선의 제 26대 국왕으로 등극한 지 어느덧
4년이었다. 그는 아직도 나라를 어떻게 다스려야 하는지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었다. 정무는 여전히 생소했고 대소신료들이
주청을 하면 대원군의 눈치부터 살폈다. 대원군이 고개를
끄덕거리거나 정무를 결정하면 그리하오, 하고 윤허를 내리는
것이 고작이었다.
"중전마마!"
윤 4월 10일이었다. 9일 하루를 초조하게 보낸 민비에게 박
상궁이 황급히 달려왔다.
"어찌 되었느냐?"
민비는 가슴이 뛰는 것을 느끼며 박 상궁을 쏘아보았다.
밖에는 여름을 재촉하는 빗발이 장대질을 하고 있었다.
"이 상궁이 왕자를 생산했사옵니다."
"그래?"
민비는 가슴이 철렁했다. 기어이 올 것이 오고 말았다는
생각과 함께 눈앞이 캄캄하고 다리가 휘청거리고 떨려 왔다.
3
민비는 쓸쓸했다. 자신도 모르게 눈앞이 부옇게 흐려져 오는
것을 재빨리 수습하고 허공을 노려보았다. 왕자를 생산한
산실청이 축하 분위기에 휩싸여 있으리라는 것은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러한 민비의 심중을 아는지 모르는지 박
상궁은 철없이 부채질까지 하고 나섰다.
"이 상궁이 왕자 아기씨를 생산하자 전하께서 크게 기뻐하시고
산실청까지 납시어 이 상궁을 치하했다고 하옵니다."
"그랬을 테지......."
민비는 입술을 앙다물었다.
"부대부인께서 산실청에 드셨다고 하옵니다."
"부대부인께서?"
"예."
"이 상궁이 왕자를 낳았다고 해도 부대부인의 손자가 아니냐?
그 또한 당연한 일일 것이다."
민비는 무심한 척 가볍게 대꾸했다.
그때 민승호를 대하자 비로소 소리를 내지 않고 울었다.
민승호가 유일한 친정 식구였다. 비록 양자로 입적하여 피
한방울 섞이지 않은 오누이였으나 의지할 곳은 민승호뿐이었다.
"중전마마"
한참 동안을 민비가 울도록 잠자코 침묵만 지키던 민승호가
입을 열었다. 민승호의 목소리도 비감했다.
"......."
"중전마마 심기를 편안히 하시옵소서."
"......."
"이럴 때일수록 심기를 가다듬고 전하의 총애를 받으셔야
하옵니다."
"고맙습니다 오라버님."
민비는 비로소 눈물을 거두고 억지로 미소를 지었다. 어차피
일어난 일이라면 수습하는 것이 상책이었다.
"중전마마."
"말씀하십시오. 오라버님."
민비는 애잔하게 웃으며 민승호를 마주보았다.
"밖에는 비가 오고 있습니다."
"예. 저도 비 오는 소리를 듣고 있습니다."
민비가 빗소리에 귀를 기울이듯 고개를 갸웃하게 숙였다.
그녀의 귀밑으로 솜털이 보송보송했다.
"언젠가 사가에서 제가 이런 말씀을 드린 일이 있습니다.
밖에는 봄이다 하구요."
민비가 잠시 생각하는 표정을 지었다. 사가라면 그녀가 자란
감고당을 말하는 것이다. 고종이 소년왕으로 등극한 지 2년,
민비는 감고당에서 고종의 여자가 되는 꿈만 꾸었다.
"예."
민비가 아련한 추억 속으로 잠겨 들며 대답했다. 벌써 2년
전의 일이었다. 그때 대원군은 김병학의 딸과 고종을 정략적으로
결혼시키려고 했었다. 그러나 민승호는 부대부인 민씨와 힘을
합쳐 민비를 외척의 발호 염려가 없다는 구실을 내세워 국모로
간택되게 했던 것이다.
"그때 중전마마께서는 봄이 아직 이르다 하셨지요."
"예."
"이번에도 저는 같은 말씀을 드리고자 합니다. 중전마마,
밖에는 비가 오고 있습니다."
민비는 민승호의 얼굴을 우두커니 쳐다보았다. 민승호가
말하는 뜻을 어렴풋이 짐작할 수 있었다.
"......."
"중전마마. 이 상궁이 왕자 아기씨를 생산한 것은
중전마마에게 괴로운 일이나 어찌 눈물만 흘리며 세월을
보내겠사옵니까? 다행히 전하의 총애가 중전마마에게 모아지고
있습니다."
"......."
"중전마마께서도 조만간 회임(懷妊)을 하실 것입니다."
"고맙습니다. 오라버님의 위로가 큰 힘이 되고 있습니다."
민비는 고개를 숙이고 입술을 깨물었다.
"중전마마."
민승호가 목소리를 잔뜩 낮추었다.
"예. 오라버님."
"이제 산실청으로 납시어야 하옵니다."
"산실청으로요?"
민비가 깜짝 놀라서 민승호를 쳐다보았다. 민비의 얼굴이
핼쓱해 졌다.
"중전마마는 이 나라의 국모이십니다. 전하의 일점 혈육이
탄행하셨으니 이 상궁에게 가서 치하를 해주셔야 하옵니다."
"어떻게 그런 일을......저는 못하옵니다."
민비가 고개를 홱 돌렸다. 민비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 했다.
"중전마마."
"그럴 수는 없습니다. 궁중의 내명부가 모두 제 뒤에서 수군
거릴 텐데 어떻게 그 수모를 감당합니까?"
"중전마마. 그것이 궁중의 법도요, 사대부가의 부인네들이
취해야 할 도리이옵니다."
"못하옵니다!"
민비가 몸을 벌떡 일으켰다. 민비의 눈에서 파란 안광이 뿜어
졌다.
"중전마마. 저를 믿으시옵소서."
민승호가 간절히 애원을 했다.
"어떻게 상궁 나부랭이에게 왕비가 찾아가서 인사를 하라고
합니까?"
"중전마마. 와신상담이라고 하지 않습니까?"
"......."
"속은 쓰리나 겉으로는 미소를 잃지 않아야 합니다."
"그러잖아도 영보당 이 상궁의 아랫것들이 나까지 업수히
여기고 있습니다!"
민비가 보료 위에 털썩 앉았다. 민비의 눈에 눈물이 글썽했다.
분노 때문이었다.
"중전마마."
"......."
"저는 요즈음 최익현, 김병기 등을 은밀히 만나고
있사옵니다."
"그들을 만나야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최익현을 만만히 보아서는 안 되옵니다."
"만만히 볼 건덕지도 없습니다."
"최익현은 이항로의 제자로 23세에 명경과에 급제한 뒤 성균관
전적, 사헌부 지평, 사간원 정언, 이조정랑의 청직을 역임한 뒤
신창 현감을 지내다가 2년 전에 모친상을 당하여 벼슬에서
물러나 있는 큰 제목입니다. 이항로의 뒤를 이을 유림의
촉망받는 사대부이옵니다."
"그만하면 쓸 만한 인물이긴 하군요."
민비는 비로소 귀가 솔깃해 졌다.
"중전마마. 전에도 말씀 올렸지만 중전마마를
위해서이옵니다."
"알겠습니다."
민비가 만족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거렸다. 민비의 얼굴은
어느덧 평정을 회복하고 있었다. 민비의 얼굴에 흐르던 눈물은
깨끗이 마르고 얼굴엔 온화한 기운이 감돌고 있었다.
민비는 민승호가 물러가자 얼굴의 화장을 다듬고 박 상궁에게
노리개와 비취비녀를 보석상자에 담아 오게 하였다.
(내가 이 상궁 따위에게 질 수는 없어.......)
민비는 영보당 이 상궁의 산실청으로 가면서 어금니를 꽉
깨물었다. 밖에는 비가 세차게 뿌리고 있었다. 그러나 민비는
개(蓋)를 씌운 연을 타고 산실청으로 갔다.
"중전마마 납시오!"
박 상궁이 산실청에 큰 소리로 고하자 궁녀들이 우르르
뛰어나와 머리를 조아렸다. 민비는 궁녀들을 한눈으로 쓸어보고
부대부인 민씨에게 다소곳이 인사를 했다. 산실청 마루에
부대부인 민씨가 서 있었다.
"어머님께서도 납시어 계셨군요. 진작 찾아뵙지 못해
송구하옵니다."
민비의 목소리는 차가웠다.
"아닙니다. 제가 찾아뵙고 예를 올려야 하옵니다. 그것이
궁중의 법도이옵니다."
"송구하옵니다."
"당치 않은 말씀입니다. 비가 이렇게 억수같이 내리시는데
행차를 하실 줄은 몰랐습니다. 어서 드십옵소서."
부대부인 민씨가 옆으로 비켜섰다.
민비는 앞에 서서 산실청으로 들어갔다. 영보당 이 상궁은
산석에 누워 있었다. 민비가 들어서자 황급히 몸을 일으켜 예를
바치려고 하였다.
"중전마마, 어서 오시옵소서. 일어나 예를 올려야 마땅하오나
몸이 부실하여 송구하옵니다."
민비의 눈썹이 파르르 떨렸다. 영보당 이 상궁이 산모라는
핑계로 인사조차 올리지 않는 것이다.
"당치 않은 소리, 이 상궁은 산모가 아니더냐? 그냥 누워서
조리하도록 하라."
민비는 손을 내저어 이 상궁을 누워 있게 하였다. 이 상궁은
부기가 잔뜩 올라 있었다.
"송구하옵니다. 중전마마."
이 상궁이 몸을 일으킬 듯하다가 다시 누웠다. 목소리에
기운이 하나도 없었다. 산고가 몹시 심했던 모양이었다. 민비는
이 상궁의 얼굴을 살피며 한순간 안쓰러움을 느꼈다.
왕자는 이 상궁 옆에서 자고 있었다. 아직은 핏덩어리였다.
"중전마마. 잘생긴 아기씨가 아니옵니까?"
부대부인 민씨가 잠들어 있는 아기를 보고 흐믓한 미소를
지었다.
"그렇군요. 정말 귀골입니다."
핏덩어리 왕자를 두고 민비는 부대부인 민씨와 잠시 덕담을
했다. 이 상궁은 눈을 감은 채 그들의 얘기를 다소곳이 듣고
있었다. 왕자를 낳았어도 그녀의 신분은 궁녀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이제는 중전마마께서도 왕자를 생산하셔야지요."
부대부인 민씨가 민비에게 자애로운 음성으로 말했다. 민씨는
민비와 약속을 한 것이 있었다. 그것은 천주교에 대한 포교의
자유였다.
"예. 어머님 말씀 명심하여 반드시 원자를 생산하겠사옵니다."
다부진 말이었다. 이 상궁은 눈을 감은 채 그 소리를 듣고
있다가 머리털이 곧추서는 것 같은 기분을 느꼈다. 민비는
의도적으로 자신이 낳은 아이를 원자(元子)라고 부르지 않고
왕자라고 부르고 있었다. 세자의 자리를 빼앗기지 않겠다는
단호한 의지의 표현이었다.
"장하신 생각입니다."
부대부인 민씨가 민비를 치하했다. 민비는 환하게 미소까지
짓고 있었다.
"어머님, 제가 왕자를 한번 안아 보겠습니다."
"그러시겠습니까?"
부대부인 민씨가 강보에 싸인 아기를 안아서 민비에게 건네
주었다. 민비는 강보에 싸인 아기를 받아서 조심스럽게
흔들었다. 아기에게서 비린내와 함께 젖냄새가 물씬 풍겼다.
(이 아기에게 세자의 자리를 뺏기면 나는 파멸이야......."
민비는 속으로 그런 생각을 했다. 그러나 겉으로 내색하지
않고 자애로운 미소를 얼굴 가득히 띄웠다.
"어머님, 정말 잘생긴 왕자이옵니다. 왕실의 큰 경사인 듯
싶습니다."
"모두가 중전마마의 홍복입니다."
"어찌 저만의 홍복이겠습니까? 이 나라의 조선의 홍복입니다."
"그렇습니다. 중전마마."
"이 상궁이 종묘사직에 큰 공을 세웠습니다. 이 상궁, 내가
인사가 늦었네만 왕자를 생산하느라고 노고가 많았네.
"황공하옵니다. 중전마마."
"주상전하의 일점 혈육이니 귀하게 키워야 할 것이네."
민비의 목소리가 다시 칼날처럼 날이 섰다.
"중전마마의 분부 명심하여 받자옵겠습니다."
민비는 이 상궁에게 노리개와 비취비녀까지 하사한 뒤
중궁전으로 돌아왔다. 빗발이 더욱 거세어지고 있었다. 그러나
한 가지 큰 일을 마무리했다는 생각에 민비는 가슴 속이
뿌듯했다. 왕자를 생산한 연적 이 상궁에게 억지로 치하를 하는
일은 죽기보다 싫은 일이었다. 그러나 싫은 일이라도 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민비는 중궁전으로 돌아오자 월대에 서서 비가 내리는 하늘을
오랫동안 쳐다보았다. 가장 중요한 것은 이 상궁이 낳은 왕자가
세자로 책봉되기 전에 원자를 생산하는 일이었다.
(나는 반드시 원자를 생산해야 해.......)
민비는 어두워지는 하늘을 쳐다보면서 가슴이 타는 것 같은
기분을 느꼈다.
이 상궁이 낳은 왕자는 왕실의 귀여움을 한 몸에 받고 있었다.
오랫동안 손이 끊어졌던 왕실이어서인지 비천한 신분의
무수리에게서 낳은 왕자인데도 왕실의 사랑은 민비가 보기에
민망할 정도였다.
대원군은 이 상궁이 낳은 왕자를 볼 때마다 군왕의 재목이라고
칭찬을 했다. 민비는 그 소식을 듣고 섬뜩한 느낌이 들었다. 이
상궁이 마치 자신의 자리를 야금야금 좀먹어 들어오는 것
같았다.
목멱산에 사는 박유봉이 고종의 부름을 받고 영보당으로
들어온 것은 7월 장마가 얼추 끝났을 때였다.
"박유봉이 왕자 선의 관상을 보았다고 하더냐?"
민비는 긴장하여 박 상궁에게 물었다. 이 상궁이 낳은 왕자의
이름이 선이었다.
"그러하옵니다."
"왕자의 관상이 어떻다고 하더냐?"
"왕자마마의 골격이 갖추어지지 않아 관상을 볼 수 없었다고
하옵니다."
"그래?"
민비는 고개를 갸우뚱했다. 왕자의 나이가 어려서 관상을 볼
수 없었다는 말을 이해할 수 없었다.
"박 상궁. 네가 박유봉에게 잠시 다녀오도록 해라."
"박유봉에게요?"
"왕자 선의 관상이 어떤지 소상히 알아 오너라."
"중전마마. 박유봉은 왕자마마의 골격이 갖추어지지
않아......."
"아니다."
민비가 재빨리 박 상궁의 말허리를 잘랐다.
"하오시면?"
"그것은 한낱 핑계거리에 지나지 않는다. 박유봉이 그런 말을
한 것은 필시 왕자 선의 관상이 심상치 않기 때문일 것이다.
너는 속히 박유봉에게 가서 왕자 선의 관상이 어떤지 소상히
알아보고 오너라."
"예."
박 상궁이 허리를 숙이고 서둘러 물러갔다. 민비는 박 상궁이
돌아오기만을 학수고대했다. 박유봉, 일목거사(一目居士),
한눈으로도 세상을 꿰뚫어 본다고 해서 일목요연이라는 말을
만들어 낸 기인, 그의 예측대로 눈이 하나뿐인데도 박유봉은
남양부사를 거쳐 수사(水使)까지 벼슬에 올랐었다. 결코 범상한
인물이 아니었다. 그러한 박유봉이 왕자의 관상을 보고서도 말을
하지 않았다는 것은 믿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박 상궁은 그날 해가 기울어도 돌아오지 않았다.
민비는 초조해 지기 시작했다. 대궐에서 목멱산까지는
한나절이면 충분히 다녀올 수 있는 것이다. 민비는 그날 밤을
꼬박 세웠다. 그러나 박 상궁은 이튿날도 돌아오지 않았다.
민비가 하루종일 눈이 빠지게 기다렸으나 박 상궁은 해가
기울어도 돌아오지 않고 있었다.
(어떻게 된 걸까?)
민비는 불길한 생각을 떨쳐 버릴 수가 없었다.
박 상궁은 사흘째가 되어서야 돌아왔다.
"어찌하여 이리 늦었느냐?"
민비는 박 상궁을 차갑게 노려보았다. 박 상궁은 잔뜩 고개를
숙이고 있어서 얼굴 표정을 알 수가 없었다.
"마마. 송구하옵니다."
"어찌하여 이리 늦었느냐고 묻지 않느냐?"
"마마, 주위를 잠시 물리쳐 주시옵소서."
박 상궁이 울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게 누구 있느냐?"
민비는 바깥을 향해 날카롭게 소리쳤다. 박 상궁의 동태가
심상치 않아 보였다.
"예."
서온돌 문밖에서 상궁들의 나직한 목소리가 들렸다.
"교태전에 잡인의 출입을 엄금하고 너희도 잠시 물러가
있거라."
"예."
상궁들이 황급히 물러가는 소리가 들렸다. 박 상궁은 상궁들이
물러가는 소리를 듣고서야 나직하게 입을 열었다.
"마마. 소인이 이리 늦은 것은 박유봉을 만나고 돌아오다가
과객당에게 큰 봉변을 당하였기 때문이옵니다."
"봉변을 당하다니?"
"박유봉이 출타를 하여 날이 어둡기까지 기다려 만나고
돌아오다가 우락부락한 장정놈들에게 왕십리까지
끌려갔사옵니다. 그놈들은 어느 허름한 집으로 저를 끌고가
겁간하려고 했사옵니다. 제가 한사코 소리를 지르며 저항을 하자
놈들이 몽둥이로 내려치는 바람에 혼절하였사옵니다."
"도성에서 과객당이 횡행을 하다니 도대체 좌우 포도청은
무엇을 하고 있다는 말이냐?"
"다행히 제가 지르는 소리를 듣고 행인이 뛰어 들어와 놈들을
물리쳤사옵니다."
"행인이?"
"그 행인은 힘이 장사인데다 몸이 비호같이 빨라서
과객당너댓을 단숨에 때려 잡았습니다. 그러나 저는 과객당
놈들에게 뭉둥이로 얻어 맞아 운신을 할 수가 없었사옵니다.
제가 쓰러져 신음을 하자 행인은 저를 업고 그 사람의 집에
데려가서 치료해 주었습니다."
민비는 박 상궁의 얼굴을 가만히 살폈다. 그러고 보니 박
상궁의 얼굴 꼴이 말이 아니었다. 눈 밑에는 시퍼렇게 멍이 들어
있었고, 오른쪽 뺨 밑으로는 핏자국까지 맺혀 있었다.
"크게 욕을 보았구나."
민비는 가슴이 떨리는 것을 느끼며 박 상궁을 위로했다.
"온몸을 몽둥이로 맞아 걸을 수조차 없었으나 마마께서 심려가
크실 것 같아 이제나마 달려왔사옵니다. 마마 통촉해
주시옵소서."
"네가 그와 같은 곤욕을 치르고 있는 줄은 꿈에도 몰랐구나."
"송구하옵니다. 중전마마."
"그래, 너를 도와 준 그 행인은 무엇을 하는 장사라더냐?"
"장통방 유대치의 약국에서 의술을 배우는 사람이옵니다."
"유대치?"
"예. 전에 말씀을 올린 이 창현이라는 장사이옵니다."
"내가 후일 사례를 하도록 하마."
"황송하옵니다."
"갔던 일은 어찌 되었느냐?"
민비는 박 상궁을 조용한 눈빛으로 살폈다. 박 상궁에게
진작부터 물어 보고 싶었던 말이었다.
"중전마마."
박 상궁이 새삼스럽게 주위를 살피고는 무릎걸음으로
다가왔다.
"그래 박유봉이 무엇이라고 하더냐?"
민비는 안총을 빛내며 박 상궁을 재촉했다.
"왕자마마의 골상이 단명할 살이라고 하였사옵니다."
"뭣이?"
"왕자마마의 골상은 왕재의 상이나 단명할 상이라고 하옵니다.
그런 까닭으로 주상전하 앞에서 왕자마마의 골상을 바로 말씀
올릴 수 없었다고 하옵니다."
"어째서 바로 말씀 올릴 수 없었다고 하더냐?"
민비는 가슴이 뛰기 시작했다.
"중전마마. 신하된 자가 어찌 왕자마마의 단명을 입에 담을 수
있사옵니까? 이는 크게 불충이 되는 것이옵니다."
"옳지!"
민비는 무릎을 탁 쳤다. 박유봉이 이 상궁이 낳은 왕자 선의
관상을 고종에게 말하지 못한 것을 비로소 이해할 수 있었다.
"주상전하께오서는 진노를 하셨다고 하옵니다."
"진노를 하시다니?"
"주상전하께오서는 왕자마마를 사랑하시어 원자로 삼으신다고
하옵니다."
"그것은 대원군이 반대를 하는 일이 아니냐?"
민비는 눈썹을 치켜세웠다. 왕자 선의 얘기만 들어도 민비는
신경이 곤두섰다.
고종은 왕자 선을 원자로 세우려 하고 있었다. 이 상궁을
귀인에 봉하고 핏덩이에 지나지 않는 왕자 선을 완화군에
봉하자고 대원군을 조그고 있었으나 대원군은 허락하지 않고
있었다. 이 상궁이 낳은 왕자는 서자(庶子)였다. 원자는 중궁의
몸에서 태어난 적자(嫡子)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 대원군의
생각이었다. 그러나 그 이면에는 민비를 적으로 돌리지 않으려는
대원군의 치밀한 계산이 숨어 있었다.
"하오나 상감마마께서는 왕자마마를 극진히 사랑하시는지라
박유봉이 어전에서 왕자마마의 단명을 입에 담을 수 없었다고
하옵니다."
"그래?"
민비의 얼굴에 미소가 흥건히 떠올랐다. 박 상궁은
어리둥절하여 민비를 쳐다보았다.
"박유봉이도 이젠 죽은 목숨이구나."
"죽은 목숨이라니요?"
"왕자의 단명을 입에 담아도 죽고 입에 담지 않아도 죽을
목숨이다. 박유봉이 진정 역술에 능통한 자라면 그것을 알아야
할 것이다."
박 상궁은 민비의 얼굴을 우두커니 쳐다보았다. 민비의 말이
무슨 뜻인지 전혀 짐작할 수 없었다. 그러나 민비는 그에 대해서
다시 말이 없었다.
고종은 얼마 후에 박유봉을 다시 영보당으로 불러 들였다.
그러나 박유봉은 왕자의 골상에 대해서 언급이 없었다.
"어떠냐? 왕자의 골상이 이제는 볼 만하지 않느냐?"
"전하. 왕자마마의 상이 귀골임에는 틀림이 없사옵니다."
"허면 이제 비로소 골격을 갖추었다는 말이 아니냐?"
"아니옵니다. 아직도 골격이 완성되지 않았사옵니다."
"그럴 리가 있느냐? 네가 아버님의 사주를 받고 거짓되이 입을
놀리고 있는 것이 아니냐?"
고종의 낯빛이 싸늘하게 표변했다. 박유봉은 가슴이 철렁했다.
벌써 궁중에서는 암투가 시작되고 있었다. 민비 쪽에서는 사람을
보내어 왕자의 관상을 물어 보고 있었고 대원군은 왕자의 관상에
대해서 고종에게 발설하지 말라는 엄명을 내려놓고 있었다.
고종은 성격이 단순했다. 궁중 암투에 대해서 전혀 낌새를
알지 못했다.
"전하. 그렇지가 않사옵니다. 소신을 믿어 주시옵소서."
"네가 아버님을 자주 만나고 있는 것을 알고 있다."
박유봉은 대원군이 안동 김문의 수모를 받으며 부랑배처럼
떠돌던 시절부터 교분을 나누고 있었다. 그는 고종이 왕이
되리라는 사실을 예언했고 그로 인하여 대원군에 의해
남양부사를 거쳐 수사 벼슬까지 지냈던 것이다.
"황공하옵니다."
"네가 아버님으로 인해 남양부사를 지내고 수사 벼슬까지 하지
않았느냐?"
"모두가 전하의 성덕이옵니다."
"그것이 아니다. 너는 아버님에게는 바른 말씀을 올려도
나에게는 거짓을 아뢰고 있어, 꼴도 보기 싫으니 썩 물러가라!"
고종의 옥음은 추상 같았다. 박유봉은 식은땀을 흘리며
영보당을 물러나왔다. 우유부단한 고종이 저토록 진노를 하는
것은 처음이었다.
(고종은 나에게 화를 내고 있는 것이 아니라 대원군에게 화를
내고 있는 거야.......)
대원군의 성격은 강퍅했다. 그러나 고종은 천성이 어질고
착하기만 했다. 아버지인 대원군으로부터 훈도를 받을 때
엄격하게 받아 부애(父愛)를 느끼지 못하고 있었다.
이튿날 구례 사람 유제관(柳濟寬)이 박유봉의 집을 찾아왔다.
그는 무과에 급제하여 박유봉과 교분을 나누며 지내고 있었다.
그러나 그가 박유봉의 집을 찾아왔을 때 박유봉은
구규(九窺)에서 피를 흘리며 죽어가고 있었다. 유제관이 놀라서
물으니 박유봉은 팔을 들어 대궐을 가리키고는 죽었다. 민비가
예측한 대로였다.
유제관은 박유봉이 대궐에서 사약을 받은 것이라고 직감했다.
구규(인체의 아홉 구멍)에서 피를 흘리고 죽은 것은 사약을 받고
죽었을 때 나타나는 현상이었다. 그러나 대궐의 누가 박유봉을
죽게 했는지는 유제관도 알 길이 없었다.
4
경복궁이 완공된 것은 음력 5월이었다. 대궐은 두 가지 경사가
겹친 셈이었다. 대원군은 광화문에 우뚝 솟은 경복궁의 위용을
볼 때마다 가슴 뻐근한 희열을 느꼈다. 경복궁은 대소신료가
완강한 반대를 했고 화재가 끊임없이 일어나 민심을 흉흉하게
했었다. 무엇보다도 토목공사의 비용이 막대해 국고를 비롯하여
원납전을 거둔 돈이 8백 만 냥이 넘었고 역부도 수십만 명이
동원되었다. 조선조 창업 5백 년에 두 번째의 대역사였다.
게다가 광화문과 종로에 6조 관청까지 번듯하게 세워
명실상부하게 한 나라의 도성으로서 위용을 갖춘 것이다.
이어(移御)는 7월 2일로 결정되었다. 이에 앞서 왕실의 짐을
실을 우마차가 연사흘 길을 메웠다. 백성들은 틈만 나면 7월
염천 더위도 잊고 왕실이 이사하는 행렬을 구경했다.
7월 2일도 날씨는 찌는 듯이 더웠다. 고종의 어가는 아침 일찍
창덕궁을 떠났다. 백성들은 원동과 안국동에 나와 고종의 어가가
지나가는 것을 보았다. 임금의 행차였다. 행렬이 어마어마 했다.
수백 명의 근장군사들이 삼엄하게 호위를 하고 있었다.
"천세!"
"천세!"
원동을 하얗게 메운 백성들이 먼저 천세를 부르기 시작했다.
천자의 나라에서는 만세를 부르고 그 속국에서는 천세만을
불렀다.
고종의 어가 뒤에는 국모인 민비의 보련이 따르고 있었다.
역시 근장군사들이 삼엄하게 호위를 하고 있었다. 그러나 고종의
어가와 달리 근장군사들이 삼엄한 호위를 하는데도 궁녀들이
전후좌우에서 호위를 하고 있었다. 당연히 백성들의 관심은
민비에게 집중되었다.
"중전마마의 가마야."
"중전마마께서는 춘추 이제 열 여덟이시라지?"
"중전마마께서는 서시를 능가하는 미인이시라지?"
백성들은 불볕 아래서 입을 모아 수군거렸다. 수백 명
궁녀들의 몸에서 풍기는 지분 냄새가 연도에 구름처럼 운집한
백성들의 코를 진동했다.
"저기를 봐. 용안은 꽃처럼 어여쁘고 자태는 달처럼 곱지
않아?"
"어쩌면 저리도 고우실까?"
민비는 그날따라 화용월태처럼 아름다웠다. 이마는 반듯하고
눈빛은 서늘했다. 이따금 크고 서늘한 눈으로 백성들을 살피고는
했다. 그럴 때마다 백성들은 탄성에 가까운 신음소리를
내뱉았다. 아름다움과 왕비라는 지위에 대한 흠모였다.
"기이한 일이지, 그 소녀가 국모가 되다니......."
백의정승 유대치는 군중들 틈에 섞여 민비의 보련을 지그시
응시하고 있었다. 유대치가 민비를 본 것은 이번이 두번째였다.
처음엔 고종이 신왕으로 옹립되던 날이었다. 그날 민비는
김옥균을 따라와 유대치에게 가르침을 청했었다. 그러나
유대치는 몇 마디 얘기만 건넸을 뿐 민비가 청계천 약국을
찾아오는 일을 거절했다. 사대부가의 규수가 중인 신분의 자신을
찾아와 가르침을 청한 것이 당돌하기도 했을 뿐 아니라
번거로웠던 것이다.
(내가 사람을 잘못 봤어.......)
유대치는 나이 어린 민 규수가 왕비로 간택되었다는 소식을
듣고는 자신의 무릎을 쳤다. 그 소녀가 왕비가 되리라고는
생각조차 못했던 일이었다.
"중전마마를 알고 계십니까?"
이창현이 의아한 표정으로 유대치를 응시했다. 그는 민비보다
민비의 보련 바로 옆에서 전도하는 박 상궁을 눈으로 쫓고
있었다.
"임금께서 보위에 오르시던 날 내 집을 찾아왔었네."
"중전마마께서요?"
"그때는 나이 어린 규수에 지나지 않았어."
"무엇 때문에 찾아오셨습니까?"
"세상 돌아가는 이치를 가르쳐 달라고 하더군."
"세상 돌아가는 이치요?"
"규수가 당돌하다 싶어 그냥 돌려 보냈네."
유대치가 수표교 쪽으로 휘적휘적 걷기 시작했다. 이창현은
입을 다물고 유대치의 뒤를 따라 걷기 시작했다.
"중전마마는 대가 센 분이야."
"대가 세다니요?"
"여자가 섭정을 할 때마다 외척의 발호가 극심하고 나라가
어지러웠네. 정치는 대신들이 해야 해."
"이 나라는 임금이 다스리는 나라입니다."
"그것을 혁파해야지."
"여자가 섭정을 한들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누가 다스리든
백성들 삶만 편안하면 되는 것입니다."
이창현이 다부지게 내뱉았다. 유대치를 따라다니기 시작한 지
1년 남짓되는 동안 이창현도 어느덧 유대치의 개화사상에
동화되고 있었다.
"자네 중전마마를 알고 있나?"
"모릅니다."
"중전마마가 서교의 포교를 자유롭게 해주실 것이라고
생각하나?"
"그리 생각하고 있습니다."
유대치가 설레설레 고개를 흔들었다. 그들은 종로의 좌포청
뒷골목을 지나 청계천에 이르렀다. 청계천 냇가에서 아낙네들이
빨래를 하고 있었다. 이창현은 유대치와 함께 수양버들 그늘
밑에 잠시 다리를 쉬었다. 물가에 이르자 비로소 바람결이
시원했다.
"어쨌거나 경복궁 중건은 대역사였어. 대원군 집정시대의 한
횟을 굿는 일이 될거야."
"민폐가 너무 컸습니다. 백성들의 원성을 산 노역, 겹친
흉년과 돌림병, 원납전, 당백전... 이혁주의 상소대로 백성들은
백골을 나란히 하고 길바닥에 뒹굴 지경입니다."
"그래도 역사는 대원군을 긍정적으로 평가할 거야."
"어째서 대원군의 업적을 긍정적으로 평가합니까? 대원군이
동방의 진시황이라는 말이 파다하지 않습니까?"
이창현이 분노에 가득찬 음성으로 내뱉았다.
"대원군의 업적을 들라고 하면 첫째 경복궁 중건을 들 수
있네. 경복궁은 국가의 재정이 취약해 각종 민폐가 많았지만
임진왜란 때 소실된 경복궁을 완전히 중건하여 나라의 도성이
비로소 도성다운 위용을 갖추었네."
"천주교인들을 학살한 것도 큰 업적으로 남을 것입니다."
이창현이 입술을 실룩하며 비아냥댔다. 유대치는 그 말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둘째는 서원의 철폐일세."
하고 냇둑에 걸터앉았다. 어느 아낙네가 빨래를 하다가 말고
청승맞은 노랫가락을 뽑고 있었다. 소리를 뽑는 청으로 보아
여염집 아낙네는 아니지 싶었다.
"셋째는 철종 말년에 횡행하던 민란을 가라앉혔네."
"철원으로 가라앉힌 것입니다. 바른 정치로 가라앉힌 것이
아닙니다."
유대치가 이창현을 힐끗 쳐다보고 고의춤에서 짧은 담뱃대를
꺼내 부싯돌을 쳐댔다. 이창현이 우울한 눈빛으로 유대치의 옆에
앉았다.
"이 담뱃대를 보게, 대원군은 풍속까지 개량하고 있지
않는가?"
"대원군을 좋아하십니까?"
"대원군은 공이 있는 사람은 반상을 가리지 않고 등용하고
있네. 천주교 탄압은 어디 대원군만의 짓인가?"
"그럼 안동 김문의 짓인가요."
"천주교 탄압에 큰 역할을 한 사람은 정원용, 조두순, 김병학,
김병국 같은 조정의 시원임대신들일세. 그러나 그 뒤에는 이
나라 유림이 버티고 있음을 알아야 하네. 그들이 서학을
물리치라고 아우성을 쳤지 않은가? 묘당과 옥당의 온 벼슬아치를
비롯해 삼남과 기호지방의 유림이 벌떼처럼 들고 일어나는데
대원군 혼자서 어떻게 감당을 하겠나? 또 서학도 잘못된 것이
있네. 어째서 서학은 조상의 제사를 금지하고 있는가? 조상의
제사를 지내지 않고서야 어찌 바른 종교라고 할 수 있나?"
"우리 천주교는 미신을 믿지 않습니다."
"조상의 제사를 지내는 것이 미신인가? 교리를 가르치는
신부들이 조선의 실정을 모르고 큰 오해를 하고 있음일세. 우리
조선인들이 조상의 제사를 지내는 것은 귀신을 숭배하는 것이
아니라 조상의 음덕을 기리는 것일세. 문화와 풍속을 모르고
전교를 하니 아까운 민서들만 죽이는 것이야......."
"대치 선생은 부인과 아이들을 잃지 않아서 그런 말씀을
하시는 것입니다. 저는 대원군과 결단코 한 하늘 아래서 살지
않겠습니다."
이창현이 몸을 부르르 떨며 외쳤다. 유대치는 낮게 한숨을
내쉬었다.
"대원군을 죽일 셈인가?"
"대원군을 죽이지 않고서는 눈을 감지 않을 것입니다."
"이창현이 단호하게 내뱉았다. 유대치는 이창현을 나무람
하려다가 그만두었다. 이창현은 대원군에게 골수에 맺힌 원한을
갖고 있었다.
"나는 약국으로 가겠네. 어디 다녀올 데가 있다고 했지?"
"예."
"점심을 먹고 가지 그래."
"아닙니다. 그 댁에서 먹을 수 있습니다."
"어느 댁인데?"
"죽동 민승호 대감 댁입니다."
"민승호?"
유대치가 깜짝 놀라서 이창현을 쳐다보았다. 민승호는
중전마마의 오라버니였다. 권력의 핵심에 있는 인물인 것이다.
민승호가 이창현에 의해 포섭된다면 박규수와 함께 개화당은
막강한 지원 세력을 얻게 되는 것이다.
1) 박유봉의 죽음은 고종으로부터 사약을 받은 것으로
"매천야록(梅泉野錄)을 남긴 황현(黃玹)은 기록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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