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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영화,리뷰,

나는 조선의 국모다 4권

by Casey,Riley 2023. 6.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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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는 조선의 국모다 4권
 

  제18장
  불새, 높이 날다
  날씨가 점점 쌀쌀해 지고 있다. 해가 기울면서  대궐의 빽빽한 침전과 누각 사
이를 내달리는 바람소리가 여우 울음소리처럼 음산해졌다.
  (하늘이 나를 시새움하는 거야......)
  민비는 교태전 서온돌에 앉아  넋을 놓고 있었다. 10월이었다. 해가 일찍 떨어
져 유시초(오후 5시)밖에  되지 않았는데도 방안이 어둠침침했다. 그러나 민비는 
어두워진것 조차 느끼지 못하고 있었다. 민비의  눈앞에는 방긋방긋 배냇짓을 하
던 공주의 얼굴만 어른거리고 있었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것 같은 공주였다.  그 공주가 내어난 지 8개월 만에 
죽은 것이다. 허망한 일이다.  그러나 민비는 공주의 죽음에만 집착하고 있을 수 
없었다. 이미 민승호는 병조판서로 돌아와 있었고  대원군은 어떻게 하든지 민승
호를 외직으로 내리치려고  하고 있었다. 대원군의 심복인  천하장안이 민승호의 
비행을 조사하고 있다는 풍문도 들렸다.   
  (이젠 내가 먼저 선수를 쳐야 해......)
  고종은 이미 최익현을 동부승지에 제수한다는 어명은  내려놓고 있었다. 그 어
명을 도승지 민겸호가 받들고 포천으로 떠난  것이다. 민겸호가 돌아오면 최익현
이 어떤 태도를 취할지 속속들이 알 수  있는 것이다. 최익현은 사헌부 장령으로 
제수받았을 때 이미  시폐 사조를 통박하는 사직 상소를 올렸었다.  그가 동부승
지에 제수되어 출사를 하게 되면 대원군에게 강력한 적이 되는 것이다.
  “게 누구 있느냐?”
  민비는 문득 고개를 들고  밖을 향해 찢어질 듯이 소리를 질렀다.  방 안이 너
무 어두웠다. 이 일 저 일 생각하느라고 잡인의 출입을 금지시켰던 것이다.
  “박 상궁 대령해 있사옵니다.”
  “방에 불을 켜라! 벌써 사방이 어두워지지 않았느냐?”
  “분부 받자옵니다.”
  장지문이 열리고 박 상궁이 조심스럽게 들어와 불을 켰다.
  “대전에서는 아무 소식이 없느냐?”
  “예”
  박 상궁은 조심시스럽게 대답했다.
  “알았다!”
  민비가 고개를 끄덕이자 박 상궁의 발소리를  죽이며물러갔다. 공주가 죽은 지 
열흘도 안 된 것이다. 민비는 신경이 날카로워져 있었다.
  “중전마마.”
  밖에서 제소상궁인 김 상궁이 아뢰는 소리가 들렸다.
  “무슨 일이냐?”
  “도승지 민겸호 대감께서 드셨사옵니다.”
  “어서 뫼셔라.”
  민비는 반가웠다. 왕명을 받들고 포천으로 간 민겸호가 돌아 온 것이다.
  “예를 갖출 필요는 없소.”
  이윽고 민겸호가 들오와  절을 하려는 것을 민비가  손을 내저어 그만두게 했
다. 민겸호가 민비의 앞에 와서 무릎을 꿇고 앉았다.
  “그래 최익현은 어찌 지내고 있습니까?”
  “포천에서 학문에만 정진하고 있사옵니다.”
  “출사하겠다고 하오?”
  “전하의 성의에는 감읍하오나 출사하지  않겠다고 사직 상소를 올렸사옵니다.

  “사직 상소를?”
  “예. 방금 전하께 올렸사옵니다.”
  “어떤 내용이요?”
  ‘아뢰옵기 황공하오나 전하께 올리는 상소문이라......“
  “보지 못했다는 말이오?”
  “그러하옵니다.”
  “에이......”
  민비가 혀를 찼다. 최익현이  올린 상소문을 먼저 보지 못한 것이 안타까웠다. 
그러나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전하께서는 그 상소문을 보고 무어라 말씀이 계셨소.”
  “아무 말씀이 없으셨사옵니다.  상소문을 품속에 갈무리하신 뒤  다시 꼼꼼히 
읽어 보신다고 하셨습사옵니다.”
  “그 자리에 누가 누가 있었소?”
  “영돈령부사 홍순목, 좌의정 강노, 우의정 한계원 대감이 계셨사옵니다.”
  “대원군은 없었소?”
  “오늘은 입궐하지 않으셨사옵니다.”
  “잘 되었소. 그만 물러가시오.”
  “예.”
  민겸호가 절을 하고  물러가자 곧 이어 고종이 사정전에서 퇴전하였다.   민비
는 재빨리 보료에서 일어나 고종을 맞이 했다. 
  “중전, 최익현이 사직 상소를 올렸소.”
  고종이 용포 소매 자락속에서 최익현의 상소를  꺼냈다. 민비는 불빛을 비춰가
면서 최익현의 상소를 읽기 시작했다.
  신 최익현 북향하여  사배를 올리고 삼가 아뢰나이다. 신이 연정에  소명을 받
고 벼슬 반열에 나섰으나 얼마  되지 않아 견책 차면하였으나 신의 무상함은 이
미 전하꼐서도 아시는 바이옵니다.
  신은 이를 다행히 여기고  향리에 물러가서 쉬면서 고생을 달게 하고  녹사(낮
은 벼슬) 하는 것도 감히 바라보지 못하였거늘 왕명을 출나바는  승지 벼슬을 내
리신다니 놀랍고 황송하여 죽을 곳을 모르겠사옵니다.
  또한 근년에 이르러 정사는 옛 법을 피하고 대신이나 관리들은 건백하는 의견
이 없고 대간과 시종은 비난을 면하려고만 하여 정의는 소멸되고 속론만 무성한 
실정입니다. 이에 아첨하는  무리가 세를 피고 곧은 선비가 사라져  가혹한 세금
과 학정으로 민생은 어육과 같이 된지 오래이옵니다.
  사정이 이러한데도  정치가 민심을 어루만져 구휼한지  않으니 하늘의 재변이 
위에서 나타나고 땅의  변괴가 아래서 일어나 우, 양, 한,  서가 모두 정상적이지
를 않사옵니다.
  신은 늙고 병든 아비를  부양해야하는 까닭에 감히 사직하오니 체임하여 주시
옵소서.
  동부승지직을 사임하는 상소였다.  민비는 최익현의 상소문을 두  번이나 되풀
이해서 읽었다. 최익현의 상소는  고종의 친정에 대해서 전혀 언급이 없었다. 실
망스러운 일이었다. 다만 국정의 어지러움을 실랄하게  통박하고 있어서 그 화살
이 대원군에게 향하고  있다는 것은 조금만 신경쓰면  간파할 수 있는 내용이었
다.
  “중전이 보기에  어떻소? 최익현의 상소가 아버님을  공격하고 있는 것 같은
데......”
  고종이 민비의 눈치를 실피며 물었다. 이미  이러한 상소문이 놀라오리라고 각
오하고 최익현을 동부승지에 제수했는데도  막상 일이 닥치자 고종은 두려운 빛
을 보이고 있었다.
  “전하. 최익현의 상소는  비록 언사가 과격하긴 하나 시의적절한 것이옵니다.

  “시의적절하다구요?”
  “이 상소문을 의정부에 보내어 논의케 하소서.”
  “알겠소. 내 그렇게 하리다.”
  최익현의 상소문은 이튼날  아침 의정부로 보내졌다. 영의정은  홍순목이 사직
하여 영돈사령부사로 물러나 앉아 자리가 비어 있었고 좌의정 강노와 우의정 한
계원이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그들은 최익현의 상소를 보자 금세  얼굴이 붉으
락푸르락해 져 상소문을  양사로 보내 회람케 하는 한편 곧장  고종을 배알했다. 
그러나 그들이 말도 꺼내기 전에 고종의 엉뚱한 비답이 내려졌다. 
  “동부승지 최익현의  상소는 충곡에서  우러나온 것이다. 묘당이나  옥당에서 
이를 반박하고자 하는 일이 있다면 언로를 막는  일이 될 것이다. 아울러 최익현
의 충곡을 가상히 여겨  과인은 최익현에게 호조참판을 제수하여 다시 부르고자 
하노라!“
  좌의정 강노와 우의정 한계원은 핏기가 싹  가셨다. 최익현을 탁핵하러 국왕을 
배알하러 왔다가 오히려 혹을 붙인 격이었다. 
  “이럴 수가!”
  “최익현이 충신이라면 우리는 간신이라는 얘기가 아닙니까?”
  “우리 모두 사직을 청합시다!”
  좌의정 강노가  강경한 주장을 폈다. 고종은  이미 교태전으로 돌아가 있었다. 
교태전은 중궁의 거처이므로 민비를 만나러 간 것이다.
  신 좌의정 삼가  아뢰나이다. 최익현의 상소 중에 신들의 실정을  통박한 대목
이 있는지 라 신 등은 책임을 지고 사직코저 하오니 윤허하여 주시옵소서.
  우의정 한계원도 같은  내용의 사직 상소를 올렸다. 그들의 사직  상소는 도승
지 민겸호를  통해 교종에게 바쳐졌다.  고종은 대조전 동온돌에  앉아서 민비와 
함께 사직 상소를 읽었다.
  “어찌하는 것이 좋겠소?”
  고종은 민비에게 물었다.
  “전하께오서는 어찌 하시겠사옵니까?”
  “과인은 이들의 사직을 윤허하고 싶지 않소.”
  “그럼. 그렇게 하시옵소서.”
  민비의 대답은 간단했다.  이미 최익현을 호조참판에 제수한다는  어명이 포천
으로 전해 졌을 터였다.
  “도승지는 들으라.”
  “예.”
  “최익현의 상소는  충절에서 비롯된 것이니 좌의정과  우의정은 개이치 말라 
하라.”
  “삼가 명을 받자옵니다.”
  도승지 민겸호가 의정부로 물러가 왕명을 전했다.  좌의정 강노와 우의정 한계
원은 어리둥절했다. 왕명의  깊은 뜻을 헤아리가 위해 머리를 짜  보았으나 아무
리 생각해도 진의를 파악할 수가 없었다.
  이 때 영돈령부사 홍순목이 사직을 청하였다.  고종은 홍순목의 사직도 방아들
이지 않았다.
  이에 사간원과 사헌부가 일제히 사직 상소를  올렸다. 그러자 고종은 기다렸다
는 듯이 사직을 윤허했다. 놀라운 일이었다.
  “좌의정과 우의정은 대체 무엇들을 하고 있는 게야?”
  대원군은 운현궁에서  몸을 부르르 떨며  호통을 쳤다. 최익현의  상소가 처음 
올라왔을 때  대원군은 대수롭지 않게  여겼었다. 최익현의 상소  내용이 대원군 
자신을 겨냥한 것이 전혀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고종이 사간원과 사헌부의 
사직을 가납하고 나서자 일이 심상치  않게 돌아가고 있다는 것을 눈치 챈 것이
다. 대원군은 누군가 자신의 목을 죄고 있는 듯한 기분이었다.
  “저하.”
  “저하. 심려를 끼쳐 드려 송구하옵니다.”
  대원군의 불같이 역정을 내자 강노와 한계원은 무릎을 꿇고 몸을 부들부들 떨
었다.
  “대체 공들은 무엇을 하고 있었기에 방약 무도한 최익현을 논죄하지 않소?”
  “저하. 승정원과 홍문관에서도 사직을  청했사오나 주상전하께오서 모두 가납
하셨사옵니다.”
  “뭣이?“
  “또 경연에서 강관인 이슨보와 권정호가 최익현을 논죄하여야 한다고 아뢰었
으나 주상전하께오서 역정을 내셨다 하옵니다.”
  “역정을 내?”
  “대원군은 어이가 없었다.  최익현의 상소를 퇴척해야 마딴한  고종이 오히려 
상소를 가납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하옵니다.”
  “참으로 답답한 일이 아니오? 최익현의 상소는 그대들을 논박하고 있는데 그
대들은 어찌 수수 방관하고 있소?”
  “송구하옵니다!”
  “돌아들가시오! 돌아들가서 일을 수습하시오!  이까짓 일 하나 처리 못해서아 
어찌 한 나라의 국정을 책임맡고 있는 정승이라 할 수 있소?”
  대원군은 버럭 화를 냈다.
  좌의정 강노와 우의정 한계원은 서둘러 운현궁을  물러나왔다. 따지고 보면 최
익현의 상소는 대신들을 겨냥하고 있지 대원군을  겨냥하고 있는 것은 아니었다. 
그들은 조정으로 돌아오자  대책을 짰다. 그러나 뚜렷한 대책이 있을  리가 없었
다.
  삼사의 상소문은  국왕앞에 수북히 쌓여  갔다. 그러나 고종은  그들의 상소를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최익현이 올린 상소문 한장은 조정을 벌짐처럼  들끊게 했다. 그러나 최익현은 
포천에 엎드린채 미동도 하지 않고 있었다.
  그것은 여흥 민문도 마찬가지였다. 민비의 지시에  의해 민승호를 비롯하여 민
규호, 민겸호, 민태호 등은 살얼음을 딛는  것처럼 불안했다. 그러한 와중에도 민
승호는 병권만은  완벽하게 장악했다. 미구에  어떤 일이 닥칠지  모르는 까닭에 
병권을 소홀히 할  수 없었다. 이러한 싸움에는 국왕의 심중도  중요하지만 병권
을 누가 장악하느냐에 따라 달라지는 것이다.
  삼사의 상소문은  격렬했다. 최익현을 참해야한다는  주장에서부터 역신이라는 
주장까지 다양했다 그러나 왕은 이들의 상소가 빗발쳐도 꿈적하지 않았다.
  (내 나이 벌써 스물  둘이 아닌가? 스물 둘이라면 이름뿐인 왕이 아니라 실질
적인 국왕의 권한을 행사해야 한다!)
  고종은 몇번이나 그와 같은 생각을 되풀이  했다. 언제까지나 아버지인 대원군
에게 질질 끌려다닐 수는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일말의 불안감이 없는 것도 아
니었다. 열 두살  어린 나이에 국왕이 되어서 겪은 일들은  필설로 형언하기어려
운 것들이었다. 그 세월이 10년이었다. 돌이켜보면 아득하기도 했고 어제 일처럼 
새로운 것들도 있었다.
  앞으로의 일들도 결코 만만치 않을 것이다. 그러나  그의 옆에는 경륜 높은 재
상에 못지  않은 왕비 민씨가 있었다.  그녀의 총명은 이미 젊은  왕을 능가하고 
있었다. 그가 10년이나 경연에서  배운 학문보다 민비의 학문이 더욱 높았다. 고
종은 그 점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고 깊이 신뢰하고 있었다.
  “오늘도 최익현을 탄핵하는 상소가 빗발치고 있구려.”
  “오늘은 누가 상소를 올렸사옵니까?”
  “형조참의 안기영과 전 정언 허원식이오.”
  “내용은 어떻사옵니까?”
  “최익현은 본래 방약 무도한 자로 임금을 기만했으니 마땅히 국문을 해야 한
다고 했소.”
  “당치 않은 일입니다. 전하 이들을 파직하고 귀양을 보내도록 하소서.”
  “알았소.”
  고종은 즉각 도승지를 불러 안기영과 허원식을  유배하라는 어명을 내렸다. 그
러자 성균관 유생들이 일제히 권당을 했다. 권당은  왕명에 대한 가장 강력한 항
거수단으로 유셍들이 성균관을 나와 고행으로 돌아가는 것이었다.
  “성균관이 권당라고?”
  고종은 도승지  민겸호의 보고를 받자  신색이 하얗게 변했다.  고종은 온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러하옵니다.”
  “권당을 발론한 자들은 즉시  원지에 유배하고 권당에 참여한 자들은 낱낱이 
조사하여 정거 처분을 내리도록 하라!”
  고종의 지시는 서릿발 같았다. 정거는 과거에  응시하는 자격을 박탈하는 것이
었다. 한 번 정거 처분이 내려지면 평생 동안  과거에 응시 할 수 없으니 성균관 
유생들에게는 청천 벽력 같은 왕명이었다.
  그것뿐이 아니었다. 최익현의  상소를 반박하기 위해 상소를  올렸거나 사직을 
청한 대소 신료들은  졸지에 벼슬을 잃는 꼴이 되었다. 고종이나  민비가 의도하
지 않았는데도 저절로 물갈이가 된 셈이다. 그  대표적인 예가 새로 임명된 사헌
부 장령 홍시형으로 그가  사헌부 장령에 임명되자마자 최익현을 두둔하는 사직 
상소를 올렸다.
  신이 전 승지  최익현의 상소문을 읽어 보니  과연 정직하였고 훌륭한 시대에 
어진 관리가 바른 말을 올렸다고 볼 수 있음이옵니다.
  그러나 안기영과 허원식 따위들이 꼬리를 물고 일어나서 전하의 귀와 눈을 가
리우고 바른 신하를 모해하고 있으니 통탄할 일이옵니다.
  고종은 홍시형의 상소를 보고 흡족한 마음이  들었다. 홍시형의 상소가 구절구
절 옳다는 비답을 내리고 대뜸 부수찬에 임명했다.
  대원군은 최익현의 상소를 조야가 분분한데도 입궐을  하지 않고 있었다. 일말
의 불안감이 없는 것을  아니었으나 아들이 아버지를 내리치리라고는 상상도 하
지 않고 있었다.  게다가 조정의 대소 신료들은 약속이나 한듯이  최익현의 처벌
을 강력하게 주장하고 있었다.
  (며칠이나 버티려고......)
  대원군은 운현궁의 사랑에서 장침을 베고 누워  한가로운 생각에 잠겼다, 고종
은 성격이 모질지가 못하다, 그러한 성격으로는  빗발치는 상소를 감당하지 못할 
것이다.
  그러한 가운데 10월이 가고  11월이 왔다. 음력 11월이면 이미 겨울이 아닌가. 
밖의 날씨는 을씨년스러웠다.  잿빛 구름장이 무겁게 하늘을 덮고 칼날  같은 바
람이 북한산을 치고 내려와 문풍지를 흔들어대고 있었다.
  11월 3일 대원군은 좌의정 강노의 방문을 받고 땅이 꺼지는 듯한 절망감을 느
꼈다.
  "대체 최익현이  나와 무슨 원한이 있기에  이다지 방자한 상소문을  올린다는 
말인가?"
  호조참판에 제수되고도  입조하지 않고 포천에 엎드려  있던 최익현이 또다시 
상소를 올린 것이다.  이번에는 전보다 더욱 강경한 것으로 대원군의  퇴진을 직
접적으로 기론하고 있었다.
  삼가 성상전에 북향 사배하고 엎드려 아뢰나이다.
  현재 나라의 페단이 없는 곳이 없으나 더욱 큰 것을 든다면 황묘의 철거로 군
신의 윤리가 무너진 것이요.  서원의 혁파는 사제간의 의리가 끊어진 것이요. 죽
은 자가 양자 가는 것은 부자간의 윤리가  무너진 것이요. 호전을 사용하는 것을 
중화와 오랑캐와의 구별이 문란해 진 것이옵니다.
  이에 학문하는 유림의 사기를  크게 떨러트려 학문이 진작되지 못하고 퇴보하
였으며 국적이 신원되어 충신과 역적이 모호하게 되었나이다.
  이는 모두 전하께서 하신 일이 아니라 전하의 보령이 유충하여 전정하시기 전
에 있는 것이니  신하들이 성상의 총명을 가리우고  위엄과 복을 마음대로 부린 
탓이옵니다.
  이제 전하께서는 몸소 백관을 진퇴시키되 그 어떤 자리에도 있지 않고 친친의 
열에 속한 사람은 그 지위를 높이고 그의 녹을 중하게 하시되 나라 정사에는 일
체 간여하지 말게 하시옵소서.
  신의 성상께서  내리시는 호조참판 직을 엎드려  사직하며 황송함이 간절하믈 
이기지 못해 죽음을 무릎쓰고 말씀올리나이다.
  천열에 속하는 자는 대원군을 지칭하는 것이었고 녹을 후하게 주어 나라의 정
치에 간여하지 말게 하라는 것은 대원군을  물러나게 하라는 것이었다. 대원군은 
좌의정 강노와  우의정 한계원으로부터 그와  같은 보고를 받자  대경 실색했다. 
최익현이 그와 같은 강골이라고는 생각조차 못했던 일이었다.
  “저하.”
  “최익현이 이다지도 방자할 줄이야! 도대체 최익현이 무엇을  믿고 이렇게 나
오는 것이오?”
  대원군은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저하. 주상전하를 배알하십시오.”
  “주상전하를 배알하다니요?”
  “저하는 주상전하의 생친이 아니옵니까? 주상전하를 뵈옵고 최익현을 극형에 
다스리라고 주청하십시오. 아들이 어찌 아비의 말을 따르지 않겠사옵니까?”
 “......”
  조의정 강노가 대원군을  재촉했다. 그러나 대원군은 설레설레  고개를 흔들었
다.
  “좌상.”
  “예. 저하”
  “우상도 들으세요.”
  “예”
  “나는 입궐하지 않겠소!”
  대원군이 결연한 어조로 내뱉았다.
  “저하. 조정의 여론이  물끓듯 하옵니다. 이제는 최익현을 지지하는 상소까지 
올라오고 있는 실정입니다.”
  “좌상, 상소에 실정이 거론되는  자는 마땅히 대죄를 빌어야 하는 법이오. 내
가 주상의 생친이라고 해서 입궐한다면 천하의 웃음거리가 될 것이오.”
  대원군이 단호한 어조로  내뱉았다. 좌의정 강노와 우의정  한계원은 그때서야 
대원군이 아무리 궁지에  몰리더라도 입궐하지 않으리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이 
시점에서 대원군이 입궐을 하는 것을 아버지가 아들에게 머리를 숙이는 꼴이 되
는 것이다. 대원군의 자존심이 그것을 허락하지 않고 있었다.
  좌의정 강노와 우의정 한계원은  대궐로 돌아오자 다시 강경한 상소문을 몰렸
다. 이에 대해 사간원과 사헌부도 격렬한 상소문을 올렸다.
  최익현의 상소는 임금의 어의룰  방자하여 언사가 흉악하기 짝이 없으니 의금
부로 하여금 잡아다가 국문케 하여 왕부의 위엄을 세우소서.
  고종의 비답은 간단했다.
  최익현의 상소는 신하된 자로 그 언사가 미록 흉악하다고는 하나 향곡의 어이
석은 백성에 지나지 않으니 굳이 옥사를 벌일 필요는 없다.
  놀라운 일이었다. 고종은 최익현을 감싸고 돌고 있었다.
  좌의정 강노가 고종의 비답을  받고 절망감을 느끼고 있을때 민비는 병조판서 
민승호와 밀담을 나누고  있었다.  최익현의 상소는 마침내 대원군의  퇴진을 거
론하고 고종의 친정을 주장하고 있었다. 민비와  민승호는 기쁨을 감추고 사태의 
추이를 예의  주시 했다. 최익현의 상소로  조정은 걷잡을 수 없는  혼란에 빠져 
있었다. 최익현을 극형에 처해야 한다는 상소문이  하루도 빠지지 않고 승정원으
로 날아들었다.
  “이 사람들이 진정으로 나라를  근심하고 임금에게 충성을 하기 위해 상소를 
올린 것인지 위심스럽군요.”
  민비는 최익현을 탄핵하라는  상소가 빗발치자 쓴웃음을 지었다.  속에서는 대
원군을 밀어내야한다는 투지가 불타고 있었다.
  “그들은 한치 앞도 내다보지 못하는 어리석은 무리들입니다.”
  “그런 인물들이 조정의 정무를 맡고 있었으니 나라가 이 꼴이 되었던 것입니
다."
  민비가 차갑게 대꾸했다. 고종의  친정은 시대의 순리다. 한 나라의 임금이 둘
이 될 수 없듯이 성년이 된 고종의 대신들과 나란히 직간하는 것을 업으로 하는 
삼사가 일제히 반발을 하고 있는 것이다. 어떤 정책에 의한 반발이 아니었다. 임
금이 임금의 권리를 되찾겠다는데도 신하된 자들이 명분도 없이 반발을 하고 있
었다.
  “중전마마. 이제는 친정을 선포하는 일만이 남았습니다.”
  민승호는 화제를 바꾸었다.
  “수고하셨습니다. 오라버님.”
  민비가 고개를 끄덕거렸다. 민비의 아름다운 얼굴에도  기쁜 표정이 넘치고 있
었다.
  “모두가 중전마마의 영명하신 지혜로 이루어진 일입니다.”
  “여러분들이 애쓴 덕분이지요. 그러나 아직도 할 일이 많이 남아 있습니다”
  “할 일이라니요?”
  민승호가 어리둥절하여 민비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민비의 얼굴은  어느새 차
갑게 굳어 있었다.
  “먼저 최익현을 하옥시켜야 합니다.”
  “중전마마. 최익현을 하옥시키다니요?”
  민승호가 깜짝 놀라서 민비를 쳐다보았다. 최익현은  고종의 친정을 직접 거론
한 인물이었다. 서슬  퍼런 대원군의 위세에 눌려 조정의 간관들조차  숨을 죽이
고 있을 때 최익현은 과감하게 친정을 요구하는 상소문을 올린 것이다.
  물론 그  이면에는 민문의 전폭적인  지원과 유림이 절대적인  지지가 있었다. 
민승호는 민규호와 민겸호를 번갈아가며 포천에 보내 최익현을 회유했고 나중엔 
이유원 대감까지 보내 최익현을 설득했었다.
  최익현이 그토록 강경한  상소문을 낸 것은 민승호의  고작 때문이라고 볼 수 
있었다. 물론 최익현 나름대로의  명분, 고종이 친정을 해야 한다는 당위성도 상
소를 낼 수 있었던 배경이었다. 그런데 민비가  이제 와서 헌신짝 버리듯 최익현
을 하옥시키라고 하고 있는 것이다.
  “오라버님, 제 말씀을 명심해 들으십시오. 최익현을 이 시점에서 하옥하지 않
으면 누군가에게 살해됩니다. 그렇게 되면 우리의  계획이 수포로 돌아가지 않습
니까?”
  “최익현을 누가 살해합니까?”
  “누군 누구겠어요? 최익현을 미워할 사람들이 하나 둘이 아닐 거라고 생각합
니다.”
  “허면 대원군이?”
  “대원군도 예외는 아니겠지요.  대원군에게는 귀신의 목도 잘라  온다는 천하
장안이 있지 않습니까?”
  “......”
  “대원군만이 아닐 것입니다.  조정의 대신들도 최익현을 죽이려고  안달을 할 
것입니다. 그대로 두면 최익현은 어느 귀신에게 잡혀 갈지 모릅니다.”
  “그렇군요. 중전마마. 제가 아둔하여 그 점을 헤아리지 못했습니다.”
  민승호는 진심으로 탄복했다.
  “하오면 어떻게 최익현을 하옥합니까?”
  “지금 최익현을 탄핵하는  상소가 빗발치고 있습니다. 그들의  상소를 가납하
는 척하며 최익현을 하옥시키면 최익현을 보호하는 것도 되고 상소를 올리는 무
리들도 다독거리게 되어 일거 양득이 됩니다.”
  민비가 입꼬리에 미소를 달고 엷게 웃었다.
  “과연 현명하신 처사이옵니다.”
  민승호는 거듭 감탄을  했다. 민비는 구중 궁궐 안에서 사태의  핵심을 정확하
게 꿰뚫어보고 있었다. 
  “최익현에 대한 것은 내가  처리할 터이니 오라버님은 병권을 확실하게 장악
하도록 하십시오.”
  “병권을요?”
  “만사는 불여 튼튼이라고 했습니다. 어떤 무리들이  어떤 짓을 저지를지 모르
니 병사들이 동요하지 못하도록 하고 장신들을 철저하게 감시하십시오.”
  “예.”
  “며칠이 고비입니다. 이 고비만 넘기면 어려움은 없을 것입니다.”
  “......”
  “또 한가지는 대궐 수비를 엄히 해야 할 것입니다.”
  “대궐 수비를요?”
  “수문장들을 모두 오라버님의 수하로 바꾸십시오.”
  “예.”
  “이는 속히 해치워야 합니다.”
  “중전마마 오늘 밤중으로 해치우겠사옵니다.”
  “또 대원군이 오라버님을  부르시면 절대로 가지 마십시오.  대원군이 불러서 
오라버님이 가시면 그 자리가 곧 오라버님의 무덤이 될 것입니다.”
  “명심, 또 명심하겠사옵니다.”
  “알았으면 속히 물러가 시행하십시오.”
  “예.”
  민승호가 허리를 굽히고 물러갔다. 민비는 민승호가  물러가는 것을 보다가 낮
게 한숨을 내쉬었다.  민승호에게 얘기한 대로 일은 막바지를 향해  치달리고 있
었다. 불과 이틀에서 사흘이면 모든 것이 결판이 날 것이다. 그러나 한가지 우려
되는 일이 있었다.  그것은 운현궁 사가에 있는 대원군이 입궐하여  고종을 만나
면 모든 일이 수포로 돌아가는 것이다.
  고종은 심약했다.  아버지인 대원군이  최익현을 효수하고 민문을  처벌하라고 
하면 그렇게 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서둘러야 해......)
  민비는 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밖에 누구 있느냐?”
  “예.”
  문밖에 있던 박 상궁이 재빨리 대답을 했다.
  “사정전으로 행차한다. 옥교를 놓아라.”
  “예.”
  박 상궁이 대답을 했다.  민비는 장지문을 열고 고랑마루로 나섰다. 바람이 찼
다. 북한산에서  찬바람이 휘몰아쳐 내려와  전각과 누각 사이를  누비고 다니며 
음산한 소리를 냈다. 11월 4일 해어름이었다.
  “중전마마 듭시오!”
  사정전에는 좌의정 강노와 우의정 한계원이 고종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아 있었
다. 대전별감 김 내관이 민비의 출현을 알리자  그들은 황망한 표정으로 몸둘 바
를 몰라했다. 전례가 없는  일이었다. 대비조차 발을 사이에 두지 않고서는 신하
들을 마주하지 않는다. 그만큼 궁궐의 내외는 엄격하게 금지하고 있었다. 
  사정전은 임금이 정사를 보는  곳이다. 비록 국모요, 왕비라고 해도 행차를 해
서는 안 되었다.  그러나 민비는 그러한 금기를 깨트리고 사정전에  나타난 것이
다. 파격이었다. 고종도 확연히 놀란 표정으로 민비를 쳐다보고 있었다.
  “경들은 잠시 물러가 있으요.”
  민비의 입에서 싸늘한 옥음이 떨어졌다. 좌의정  강노와 우의정 한계원은 고개
도 들지 못한 채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신 좌의정 분부 받자옵니다.”
  좌의정 강노가 먼저 몸을 일으켜 뒷걸음으로  물러갔다. 우의정 한계원도 조심
조심 뒷걸음으로 사정전에서 물러나갔다. 
  “중전, 어인 행차요?”
  고종이 화로에 손을  쥐며 민비에게 물었다. 민비는 재빨리 고종  옆으로 다가
가서 살포시 앉았다.
  “전하, 감히 드릴 말씀이 있사옵니다.”
  “감히 드릴 말씀이라니요?”
  “최익현을 귀양 보내는 벌에 처하소서.”
  “최익현을 귀양 보내요?”
  “자세한 것은 묻지 마시고 의금부에 명을 내려 최익현을 서둘러 귀양 보내시
옵소서.”
  “나는 무슨 영문인지 모르겠소.”
  “전하, 자세한 것은 중궁전에서 말씀 올리겠나이다.”
  “알겠소.”
  “그럼 신첩 물러가옵니다.”  
  민비가 가볍게 허리를 숙여 보이고 사정전을 물러나갔다.
  “게 누구 있느냐?”
  고종은 민비가 치맛자락을 끌고 사정전에서 나가자 내관을 불렀다.
  “도승지를 들라 해라.”
  “예.”
  대전별감 김 내관이 문밖에서 머리를 조아렸다.
  이내 도승지 민겸호가 들어왔다. 고종은 민비가  일러준 대로 의금부에 최익현
을 귀양 보내는  법조문을 적용하라는 어명을 내렸다. 그 자리에는  좌의정 강노
와 우의정 한계원이  다시 들어와 배석해 있었다. 그들은 고종이  최익현을 귀양 
보내라는 지시를 내리자 속으로 미소를 지었다.
  (우리가 이겼어.....!)
  그들은 그렇게 생각했다.  좌의정 강노는 북인출신이고 우의정  한계원은 남인
출신이었다. 그들은 누대에 걸친 당쟁으로 벼슬길에  나서지도 못하고 있다가 대
원군에게 발탁되어 정승의  반열에 오른 사람들이었다. 대원군에  대한 충성심이 
남다를 수밖에 없었다.
  “최익현을 귀향 보내는 일로 끝날 일이 아니지 않소?”
  그들은 퇴궐하자  운현궁으로 대원군을  찾아갔다. 그러나 대원군은  최익현을 
귀양 보낸다는 데도  만족한 기색이 아니었다. (내가  최익현을 제거하려는 것을 
눈치 챘다는 말인가?) 대원군은 이해할 수가 없었다. 불안하고 조바심이 났다.
  “내일 경연 때 저희들도 참석할까 하옵니다.”
  “경연예요?”
  “경연에서 최익현의 처벌을 강력히 주장하겠사옵니다.”  
  “글쎄.......”
  대원군은 연죽을 끌어  당겨 입에 물었다. 사태가 그렇게 간단해  보이지 않았
다.
  “경연에서의 일은 죄를  묻지 않는 법이옵니다. 제가  주상전하를 훈계하겠사
옵니다.”
  대원군은 잠자코 연죽만 빨고 있었다. 포천으로  보낸 천하장안이 어떻게 하고 
있을지 궁금했다. 어쩌면 지금쯤 최익현의 목을 베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저하, 저하께오서 지금이라도 주상전하를 배알하시는 것이 좋을 듯하옵니다.

  잠자코 침묵만을 지키고 있던 우의정 한계원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최익
현의 상소가 처음 올라왔을 때도 한계원은 그런 주장을 했었다.
  그는 최익현의 뒤에 거대한  비밀세력이 도사리고 있을 것이라고 추측했고 그 
세력을 민비와 민승호로  보고 있었다. 이것은 단순한 권력 싸움이나  당쟁이 아
니었다. 그는 최익현의 상소가 골육 상쟁을 내포하고 있다고 본 것이다.
  “저하!”
  “당치 않소!”
  “이는 엄밀히 따지면 부자간의 일이옵니다. 최익현이  친열을 거론한 이산 저
하께서 몸소 나서야 할 것으로 보옵니다.”
  “듣기 싫소!”
  대원군이 눈을 질끈 감았다. 안면이 부르르 떨렸다.
  “저하, 최익현의 뒤에 사주하는 세력이 있사옵니다.”
  “사주하는 세력?”
  “저하만이 그 세력을 물리칠 수 있사옵니다.”
  “아비와 자식은 천륜이요, 지아비와 지어미는 인륜이라고 했소, 누가 감히 천
륜을 갈라놓을 수 있겠소?”
  대원군은 아들을 믿고 싶었다. 아들이 아버지를  내치는 그러한 불호는 저지르
지 않으리라고 생각했다.
  “저하, 그러시면 병조판서라도 부르십시오.”
  “승호를?”
  “승호가 민문의 두령이 아닙니까?”
  “일없소!:
  대원군은 불쾌한  표정으로 내쏘았다. 심사가 잔뜩  뒤틀려 있었다. 지나간 10
년, 누구 하나 그의 명을 그스르는 자가 없었었다. 그런데 최익현이 올린 상소문 
한 장이 그를 실각의 위기에 몰아 놓고 있는 것이다.
  “저하, 저희들이 다시 주상전하를 뵈옵고 최익현을  의금부에 하옥한 뒤 추국
하라고 청하겠습니다.”
  “최익현을 능지 처참하도록 하겠사옵니다.”
  대원군은 대꾸가 없었다.
  운현궁을 나온 좌의정 강노와 우의정 한계원은 영돈령부사 홍순목과 합세하여 
대궐에 들어가 고종의 알현을 청하였다. 고종은 그들을 대전으로 불러 들였다.
  “밤이 야심한데 무슨 일로 알현을 청하는 것이오?”
  고종은 민비와  나란히 앉아 있었다. 홍순목과  한계원, 강노등은 전례가 없는 
일이었으나 찾아온 목적을 말하지 않을 수 없었다.
  “최익현의 상소는 극악하기가 짝이  없는지라 용서해 줄 수가 없는 문제이옵
니다.”
  홍순목이 먼저 입을 열었다.
  “이미 귀양 보내는 법조문을 적용하였소.”
  “전하, 최익현은 역적이옵니다.”
  “최익현이 무엇때문에 역적이오?”
  “신 등은 그 상소를 미처  보지 못하고 고약한 몇 마디 말을 듣게 되어 차자
를 올리게 되었습니다.”
  “영돈령부사, 영사께서는 최익현의  상소물 중에 어느 귀절이  고약하여 역모
로서 다스리자는 것이오?”
  고종의 옆에 앉아  있던 민비가 서늘한 목소리로 물었다. 홍순목은  가슴이 뜨
끔했다.
  “전하께서 비답을 내리실  때 임금에게 압력을 가했다고  했사옵니다. 그러나 
전하께서 아실 것이옵니다.”
  “영사의 입으로 말씀해 보시오!”
  민비의 목소리가 날카로워졌다.  홍순목은 등줄기로 식은땀이 흐르는  것을 느
꼈다.
  “전하께서 비담을 내리실  때 임금에게 압력을 가했다고  했사옵니다. 그러니 
전하께서 아실 것이옵니다.”
  “영사의 입으로 말씀해 보시오!”
  민비의 목소리가 날카로워졌다.  홍순목은 등줄기로 식은땀이 흐르는  것을 느
꼈다.
  “전하께서 알고 계시는데  신 등이 굳이 어느  조목이라고 말씀 올릴 까닭이 
있사옵니까?”
  그러나 홍순목도 만만치 않았다. 홍순목은 홍  대비의 아버지로 고종이나 대원
군조차 만만히 볼 수 없는 인물이었다.
  “나는 영사의 입으로 말하라고 하였소!”
  “최익현은 호조참판을 사직하는  상소에서 의리와 윤리가 파괴되었다고 흉악
한 문구를 사용하였사옵니다.”
  “의리와 윤리를 파괴하였다는 구절은 전에도 있었소.”
  “옛날에도 간혹  있기는 하였으나  지금은 태평성대이옵니다. 이러한  시대에 
어찌 그와 같은 흉악한 문구를 사용할 수 있겠사옵니까?”
  “그 귀절 때문에 이미 귀양을 보내는 처분을 하였소.”
  민비는 한마디로 일축해 버렸다.
  “이런 죄인에게 어찌 일반적인 귀양을 보내는 것으로 그치옵니까?”
  “죄인을 귀양 보내는 것이 어찌 중벌이 아니라는 말씀이오?”
  “의금부에 추국청을 설치하여 최익현을 추국해야 하옵니다.”
  “그럴 수는 없소!”
  민비는 차갑게 말했다.
  “신 등은 최익현을 추국하라는 어명이 계시기  전에는 물러갈 수 없사옵니다.

  “경들이 그렇게까지 간절히 주청하니  먼 섬으로 귀양을 보내는 처분을 내리
겠소”
  고종이 지루한 표정으로  퉁명스럽게 대꾸했다. 그러나 대신들은  계속해서 최
익현을 추국할 것을 요구했다.
  “이 흉칙하고 고약한 죄를  지었는데도 사형 법조문을 적용하지 않는다면 장
차 역적들을 어찌  다스리시겠사옵니까? 신 등은 윤지를 받들  수가 없사옵니다.

  “그러하옵니다. 이것은 온 나라의 신하들이 한결같이 바라는 일이옵니다.”
  “신 등은 전하께서 가납하실 때까지 물러가지 않겠사옵니다.”
  좌의정 강노와 우의정 한계원도 홍순목에게 합세하여 최익현을 사형에 처하라
고 주장하였다. 만만찮은 반발이었다. 민비는 이들이 대원군의 사주를 받은 것이 
분명하다고 생각했다.
  (강한 것에는 강하게 부딪쳐야 해......)
  민비는 입술을 지그시 깨물고 대신들을 노려보았다.  이제는 한판 승부를 벌여
야 할 때라고 생각했다.
  “전하!”
  민비가 낮게 기침을 하면서 고종에게 눈짓을  보냈다. 고종이 고개를 끄덕거려 
알았다는 표시를 하고 느릿느릿 입을 열었다. 
  “경들은 들으시오!”
  대신들은 일제히 고종의 용안을 우러러보았다.
  “대왕대비마마께서 수렴 청정을 철회하신 후 지금까지 국태공께서 정사를 협
찬해 오셨소. 과인이 이미 오래 전에 성년에  이르렀으나 여러 이유로 친정을 미
루어 왔소 허나 더  이상 친정을 미루는 것은 종묘 사직에  불충이요, 국가의 대
계에 백해 무익하다는 것이 중신들의 한결된 주장인  바, 이제 국태공을 대롱 봉
하여 여생을 편히  지내게 하고 과인이 만기를 친재할 것이오,  이는 대왕대비전
의 엄중한 지시가 있는지라 나는 감히 그  영을 어기지 못하겠소. 경들은 그렇게 
아시오.”
  엄청난 선언이었다. 영돈령부사  홍순목을 비롯하여 좌의정 강노와  우의정 한
계원은 고종의 어명이 천동수리처럼 귓전을 울리는 것을 느꼈다. 
  이로 정연한 말이었다. 국왕은  15세만 넘어도 친정을 한다. 그런데 20세가 넘
은 고종이 친정을 하겠다는데 누가 감히 막을  수 있겠는가. 그것은 당연한 일이
었다.
  “이 일은 내일 아침 조보에 실어 중외에 널리 알리도록 하시오!”
  고종의 음성은 냉랭했다. 왕명이었다. 대신들은 왕명을 받으면 곧장 복명을 아
뢰어야 한다. 그러나 그들은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모하고 몸만 부들부들 떨고 있
었다. 
    대원군은 겨울비가 음산하게 흩날리는  뜰을 우두커니 내다보았다. 동짓달이
었다. 음산하게 흩날리는 빗방울 속에 겨울의 차가운 냉기가 느껴졌다.
  (이제 북풍 한설이 몰아치겠지.....)
  겨울에는 바람이 북쪽에서 분다. 북쪽에서 부는  오랑캐 바람이니만치 살을 에
일 듯이 차갑다. 대원군은  자신에게 불어 닥칠 바람이 북풍 한설  못지 않게 매
서우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벌써 10년인가.....?”
  지나간 10년의 세월이  주마등처럼 머릿속으로 달려왔다. 온갖  조롱과 멸시를 
받으면서도 아들 하나를  국왕의 자리에 앉히기 위해  노심 초사하던 10년 전의 
일들이 어제 일처럼 생생하게 되살아오고 있는 것이다.
  (국왕이 친정은 당연한 것이야.......)
  고종이 친정을 하겠다는데 어찌해 볼 도리가  없었다. 그러나 나라는 경영하는 
일은 고종의 능력으로 어려우리라고 생각했다. 고종이  친정을 하면 나라는 다시 
철종조의 혼란으로 되돌아  갈 것이 불을 보듯 뻔했다. 그것만은  어떻게 하든지 
막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밖에 누구 있느냐?”
  대원군은 밖을 향해 소리를 질렀다. 벌써 사방이 어둑어둑해지고 있었다. 이제
는 더 이상 머뭇거리고 있을 수가 없는 일이었다.
  “불러 계시옵니까?”
  집사 유원식이 황급히 달려와 머리를 조아렸다.
  "이놈들은 아직도 돌아오지 않았느냐?“
  대원군이 이놈들이라고 말을 하는 것은 천하장안을 가리키는 것이었다.
  “예.”
  “대권에서는 연통도 없고?”
  “예.”
  “에이 고약한 놈들 같으니 무엇을 이리 꾸물거리고 있다는 말이냐?”
  대원군이 버럭 역정을  냈다. 천하장안에게는 민승호를 잡아오라고  일렀고 대
권의 내시 이민화에게는 대내 사정을 소상히 알아내어 오라고 영을 내렸으나 아
직까지 아무 소식이 없는 것이다.
  “물러가 있거라!”
  대원군은 유원식에게 짜증을  부렸다. 목소리가 낮았는데도 집  안이 적막하여 
자신의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렸다.
  (흥, 최 충신이라고?)
  대원군은 입술을 비틀며 코웃음을 쳤다. 고종은  11월 4일 밤에 친정을 선포하
고 그 사실을 조보에 실어 중외에 알렸다.  그리고 11월 5일 경연이 파하자 대신
들의 의견을 받아들이는 체하고  최익현을 의금부에 하옥한 뒤 추국하라는 지시
를 내렸다. 대신들은  11월 5일에도 최익현을 사형에 처하라는  법조문을 적용하
라고 촉구했다. 그러나 고종은 대신들에게 오히려  역정을 내고 최익현에게 제대
로 신문조차  하기도 전에 제주도에 위리  안치하라는 영을 내렸다.  11월 9일의 
일이었다.
  대신들은 격렬히 항의했다. 이에 대해 고종은 11월 11일에 영돈령부사 홍순목, 
좌의정 강노, 우의정 한계원에게 파면하는 법조문을 적용했다.
  최익현은 11월 12일 제주도로 위리 안치되었다.  최익현은 실은 우거가 도성을 
떠날 때 최익현을 따르는 사대부들이 몰려 나와  전송을 했다. 백성들은 그를 충
신이라고 부르며 눈물을 뿌렸다.
  대원군은 그 애기를 전해  듣고 배알이 뒤틀렸다. 어처구니 없는 일이었다. 만
동묘를 복설하고 서원 철폐를  폐지하라는 최익현이 주장은 그가 아무리 당대의 
충신이라고 해도 공허한 염불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서원이 단순하게 학문하는 
선비들이 모이는 곳이라면 애초부터 철폐할 필요가  없었다. 그러나 서원은 복마
전이었다. 백성들의 고혈을 짜는 되먹지 않은 양반들의 온상이었다. 그것을 최익
현이 모른다면 유림을 대표하여 조정을 공격할 자격이 없는 것이다.
  (내가 서정을 개혁하기 위해 얼마나 노력했거늘......)
  대원군은 배신감에 치를 떨었다.
  (이는 주상의 음모가 아니야......)
  대원군은 민비를 생각했다.  원자가 대변불통증상에 걸렸을 때  쇠붙이를 써야 
한다면 격렬하게 반발하던  민비를 생각하자 머리 끝이 쭈뼛해 왔다.  이제 겨우 
스무 살을  갓 넘긴 젊은 왕비였다.  그 젊은 왕비가 정국을  소용돌이치게 하고 
있는 것이다.
  (민문이 똘똘 뭉쳤겠지....)
  그것은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는 일이었다.
  대원군은 민문의 얼굴들을 차례차례 머릿속에  떠올렸다. 민승호, 민규호, 민겸
호, 민태호... 그들의 면면을  차례차례 짚어 보았으나 그들의 힘만으로는 부족할 
성싶었다.
  그때 내시 이민화가 사복 차림으로 헐레벌떡 달려왔다.
  “어찌 이리 늦었느냐?”
   대원군은 찌르듯 날카로운 눈빛으로 이민화를 쏘아보았다.
  “송구하옵니다. 저하. 대궐의 경비가 삼엄하여 간신히 빠져 나왔습니다.”
  대원군은 단도 직입으로  물었다. 이민화는 그가 대궐에 심어 놓은  심복 내시
였다.
  “이 일은 누가 주도했느냐?”
  “아뢰옵기 황공하오나 중전마마와 죽동 대감께오서 주도하셨사옵니다.”
  죽동 대감은 병조판서  민승호를 말하는 것이다. 중전  민비의 오라버니이므로 
놀랄 만한 일은 아니었다.
  “가담한 자는 누구냐?”
  “가오실 대감 이유원, 한성 판윤 박규수, 홍인군 대감.....”
  “흥, 그놈들이 의정을 맡을 놈들이구나!”
  대원군이 입술을  삐쭉거리면 내뱉었다.  그만하면 의정부를 구성할  인물로는 
손색이 없었다. 박규수는  만만치 않으나 대원군의 중형인  흥인군과 이유원이라
면 민승호 일파가 얼마든지 주무를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또 누가 있느냐?”
  “공주판서 민치상 대감, 대왕 대비마마의 일족인 조성하 형제, 사영 김병기.....

  이민화의 보고에 대원군은  뒤통수를 한 대 얻어 맞은 듯한  기분이었다. 조성
하 형제는 대원군이 낙척한 종친  노릇을 하고 있을 때 대원군을 형님처럼 따르
던 인물들이었다. 그들이  자신에게서 떨어져 나갔다는 사실에  대원군은 아차하
는 기분이 되었다. 
  “풍양 조씨의 하찮은 졸개들이 간에 붙었다. 쓸개에 붙었다 하는구나!”
  대원군은 기가 찼다.  이유원을 비롯하여 형인 이최웅,  박규수, 그리고 조성하 
형제들이 하나같이 등을 돌렸다는 것이 믿어지지 않았다.
  “아뢰옵기 황송하오나 큰 서방님도.....”
  “서방님이라니?”
  “송구하옵니다.”
  “재면이 말이냐?”
  “그러하옵니다”  
  “이, 이런 죽일 놈....!”
  대원군이 눈을 부릅뜨고  주먹을 움켜쥐었다. 재면이란 대원군의  장자 이재면
을 말하는  것이다. 대원군이 항상 둔우라고  질책을 하던 그 아들이  배신을 한 
것이다.
  “알았다! 날이 어두우니 그만 돌아가도록 하라!”
  대원군은 등을 돌리고 방으로 들어왔다. 분노로 두 다리가 후들거렸다.
  “대감 마님, 소인들 돌아왔습니다.”
  그러나 밖이 웅성웅성하면서 천하장안의 목소리가 들리자 대원군은 다시 대청
으로 나왔다. 천하장안은 비를 맞아 후줄그레한 모습으로 웅크리고 있었다.
  “어찌 되었느냐?”
  대원군은 그들의 추레한 모습을  보고서 민승호를 잡아 오는 것이 실패했다는 
것을 알았으나 냉큼 소리를 질렀다. 
  “아뢰옵기  송구하오나 죽동  대감 댁은  병사들이 삼엄하게  호위를 하는지
라.....”
  “민승호를 잡아 오지 못했다는 말이냐?”
  “그러하옵니다. 하인 놈들에게 핍박만 받고 돌아왔습니다.”
  “핍박을 받다니?”
  “하인 놈 중에 이창현이란 자가 있사온데 이제는 국태공이 아니라 야로에 지
나지 않으니 병판대감 댁에 와서 행패를 부리지 말라고 했사옵니다.”
  “에이 못난 놈들  같으니! 그러한 봉변을 당하고도 그냥 돌아왔다는  말이냐?

  “송구하옵니다.”
  “내가 네 놈들을 믿고 있었던 것이 잘못이다. 입궐 차비나 갖추어라.”
  대원군은 짤막하게  영을 내렸다.  천하장안이 민승호의 하인에게조차  멸시를 
당했다는 사실은 어처구니가  없었다. 고종이 친정을 선포한 지 열흘도  채 되지 
않는 것이다. 민문 일파가 철저하게 계획을 세운 것이 분명했다.
  “예!”
  천하장안이 일제히 대답을  하고 차비를 준비하기 시작했다.  대원군은 내당으
로 들어가 조복으로 갈아 이기 시작했다. 
  “입궐 하시옵니까?”
  부대부인 민씨가 옷을 갈아 입는 것을 도와  주는 시늉을 하며 물었다. 부대부
인의 목소리는  여느 때처럼 차디찼다.  조경호에게 시집간 딸이  의문의 죽음을 
당한 뒤부터 부대부인은 대원군을 내심으로 경멸하고 있었다. 
  “부인.”
  대원군은 조복을 갈아  입으며 부대부인 민씨를 불렀다.  부인에게까지 경멸을 
당한다는 사실이 자신도 모르게 서글퍼졌다.
  (내가 이토록 인심을 잃은 것인가?)
  아들이 등을 돌리고 부인까지 등을 돌렸다는  사실이 대원군은 참담했다. 이런 
일은 일찍이 상상조차 못했던 일이었다. 
  “말씀을 하시지요.”
  부대부인이 차갑게 대꾸했다.  정이라고는 눈꼽만치도 깃들어 있지  않은 메마
른 목소리였다.
  “부인은 내가 이렇게 되기를 바랐을 터이니 흡족하겠구려.”
  대원군이 입술을 실룩거리며 빈정거렸다.
  “당치 않으신 말씀입니다.”
  “생각해 보니 나는 사방에 적만 만들고 있었던 모양이오.”
  대원군의 목소리가 페부에서 우러나오는 것처럼 묵직했다.
  “내가 부인의 가슴에 못을 박았소?”
  “그야 대감께서 더 잘 아시겠지요.”
  “....”
  “흥선이 천하의 오입쟁이라는  것은 성안이 다 아는 사실, 부인은  이제 노여
움을 푸시오. 나도 이제 자중하리라.”
  “.......”
  “조경호에게 시집 간 딸이 의문의 죽음을 당한 것은 내가 한 짓이 아니오.”
  “.......”
  “믿어 주시오.  부모와 자식은 천륜이 아니오?  세상에 그 어떤  부모가 자기 
자식을 독살한다는 말이오?”
  “......”
  “그렇군. 내가 서교도를 박해한 것도 부인의 가슴에 못을 박았겠군.”
  “......”
  “그 점에  대해서는 달리 할 말이  없소. 그 일은 내가  아니더라도 누군가는 
했을 것이오.”
  대원군은 낮게 한숨을 내쉬고 내당에서 나왔다.  부대부인이 몸을 돌리고 소리 
죽여 흐느껴 울기 시작하고 있었다.
  대원군은 천하장안이 준비한 사인 남여를 탔다.  빗속의 입궐이지만 행차는 어
느 때나 다름없이 위풍당당했다. 
  조복은 현복사모에 기린옥대를  띠고 쌍초선을 비꼈다. 호위하는  군사들과 천
하장안이 앞 뒤에  섰다. 구종 별배들은 행인도 별로 없는데  벽제소리를 호기롭
게 질렀다. 대원군에게는 어쩐지 그 소리가 겨울비보다 더 공허하게만 들렸다. 
  남여가 구름재를 넘고 서소문을 지났다. 빗발은 점점 굵어지고 있었다. 사방은 
임 캄캄하게 어두워져 있었고, 만호 장안은 이제서야  하나 둘 불을 밝히고 있었
다.
  “아버님, 조경호에게 시집 간 누이가 죽은 까닭이 무엇이옵니까?”
  대원군은 남여에 앉아 눈을 질끔 감았다. 얼마  전 사정전에서 고종이 묻던 말
이었다.
  (어느 놈이 주상에게 고자질을........ )
  그때 대원군은 가슴이 철렁했다. 누군가 딸을  죽인 포악한 아버지라고 고종에
게 고해 올린 것이 분명했다. 그것은 부자지간의 골을 깊게 하려는 음모였다.   
  “갑자기 배가  아프다고 하면서 죽었다고  하옵니다. 아마 급체를  한 것으로 
보입니다.”
  “누가 독살을 한 것은 아닙니까?”
  “독살을 하면 구규에서  피를 흘리고 죽습니다. 누가 감히 주상의  누이를 독
살하겠사옵니까?”
  “누이는 천주학을 했습니다.”
  “천주학을 했다고 해서  주상의 누이를 독살할 정도로  간이 큰 자는 없습니
다.”
  대원군은 가슴의 덜컥  내려앉는 것 같은 기분을 느꼈다. 고종의  눈빛이 자신
을 의심하고 있는 것 같았다. 
  “하인 이연식은 포청에 끌려가 죽었사옵니까?”
  “국태공의 자리에 있는  몸이옵니다. 어찌 제 밑에 있는 하인이라고  해서 감
싸고 돌 수 있겠사옵니까?”
  “.......”
   고종이 대원군을  똑바로 응시했다. 대원군은  입술이 바짝바짝  타들어 가는 
느낌이었다. 고종의 눈빛은 마치 그러한 이치라면  천주학을 하는 딸이라도 죽이
는 것이 당연하겠군요. 하고 묻고 있는 것 같았다.
  “전하, 법을 세우는 일은 상벌이 엄격해야 하옵니다.”
  “누님은 독살되지 않으셨다는 말씀이군요?”
  “그렇사옵니다. 주상전하도 아시다시피 주상의  모친도 천주학을 하고 있사옵
니다. 조경호에게 시집 간 주상전하의 누이가  독살되었다면 모친 또한 독살되어
야 마땅하옵니다. 의심을 버리시옵소서.”
  그때 마친 대신들이 사정전으로 들어오는 바람에 고조오가의 대화는 그것으로 
끝이 났다. 그 이후 두면  다시 그 문제를 거론한 일은 없었다. 그러나 대원군은 
언제나 그 일이 가슴 속에 찜찜하게 남아 있었다.
  대원군의 남여는 어느덧 대궐의 전용 협문에  이르렀다. 밤이건 낮이건 대원군
이 수시로 드나들 수 있는 협문이었다.
  “국태공께서 납시었다! 군사들은 어서 문을 열어라!”
  벽제소리를 치던 별배가  군사들에게 다가가서 소리를 질렀다.  그러자 군사들
의 우르르 몰려와 협문을 가로막았다.
  “문을 열 수 없소!”
  “뭣이? 국태공 저하의 입궐을 네 놈들의 가로막아?”
  “......”
  이런 무엄한 놈들이 있나?  네 놈들의 뭣이건대 국태공 저하의 입궐을 가로막
는다는 말이냐?“
  그러나 군사들은 대꾸없이 대원군의 남여를 가로막고  있었다. 그들은 이미 창
칼까지 빼어들고 있었다.  남여에서 그 광경을 보고 있던 대원군은  가슴이 묵지
근하게 저려 왔다. 그러나 이대로 돌아갈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주상전하를 배알하러 왔다! 궐문을 열어라!”
  대원군은 낮았으나 위엄을 갖추러 소리를 질렀다.
  “아니 되옵니다.”
  군사들의 대답은 한결 같았다.
  “주상전하를 배알하러 왔다고 하지 않느냐?”
  “주상전하께오서 만나지 않겠다는 전갈이 있었사옵니다.”
  “뭣이?”
  “국태공 저하의  통용문을 폐쇄하라  하셨사옵니다. 이는 어명이니  받드셔야 
하옵니다.!”
  대원군은 눈을 질끈 감았다. 갑자기 가슴이 컥하고 막히는 기분이었다. 어명이
라는 바람에 기세 등등하던 별배들과 천하장안도 기가 죽어 있었다.
  “돌아가자.”
  대원군은 힘없이 영을 내렸다. 속에서는 불이  일어나고 있었으나 왕명에는 항
거할 수가 없었다. 게다가 아들이 국왕이었다. 세인들에게 아들과 권력다툼을 벌
이는 추한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았다. 참담한 일이었다. 대원군의 남여를 멘 하
인들과 군사들 그리고 천하장안과 구종 별배...   누구 하나 입을 열지 모하고 겨
울비가 음산하게 흩뿌리는  어둠 속으로 떠나고 있었다. 조선 팔도를  벌벌 떨게 
한 거인이 역사의 전면에서 뒤안으로 사라져 가는 순간은 이처럼 날씨까지 구슬
펐다.
    눈보라가 살을 에일 듯이 매섭게 불어대고 있었다.
  대원군은 눈보라 속에서 제수를 진설하고 향을  피웠다. 그리고는 눈물을 글썽
이면 배례를 올린 뒤 술을  따랐다. 여기는 충청도 덕산, 대원군이 10년 만에 아
버지인 남연군의 무덤을 찾아온 것이다.
  (아버님, 이제야 소자가  돌아왔습니다. 10년 만에 야인이 되어 아버님  곁으로 
돌아왔습니다.)
  대원군은 입 속으로 부르짖었다. 열 일곱 살인가  열 여덟 살때 천하의 명당이
라는 지관의 말을  쫓아 덕산군 가야산에 무작정 남연군의 장지를  썼었다. 지관
이 본 풍수가 옳았는지 어쨌는지 알 수 없었으나 서슬 퍼런 안동 김문의 박해를 
피래 다니다가 기어이 둘째 아들 재황을 조선의 제 26대 국왕으로 등극시키는데 
성공했던 것이다. 그때  얼마나 감격스러웠는지 대원군은 남몰래  눈물을 흘리기
까지 했었다.
  (아버님, 저는 이제 아버님의 영전 앞에 한 점 부끄러움이  없사옵니다. 당신이 
손자가 이 나라  국왕이 되어 조선 팔도를  다스리는데 무슨 여한이 있겠사옵니
까?)
  대원군은 남연군이  무덤을 오랫동안 떠날  수가 없었다. 지난  10년의 세월이 
주마등처럼 머릿속을 스쳐 가고 스쳐 오고는 하였다.  그러나 회한이 없을 리 없
었다. 속으로는 한 점 부끄러움이나 후회가 없다고  다짐을 하면서도 두 볼을 타
고 흘러내리는 뜨거운 눈물을 억제할 수가 없었다.
  대원군은 그날 양주의 직곡 산장으로 은거했다.
  “내가 이제 여기서 난이나 치련다.”
  대원군은 그렇게 다짐을 했다. 한성에서 기생도 데려오고 찬모도 데려왔다. 하
인들로는 천하장안을 비롯해  유원식이 따라왔다. 서장자 이재선도  틈틈이 찾아
왔다. 그러나 쓸쓸하기 짝이 없는 나날이었다.
  대원군은 난을 치기 시작했다. 석파란이었다. 대원군의 석파란 솜씨는 이미 달
인의 경지에 올라 있었다.
  한성에서 들려오는 소식들은 모두 우울한 것뿐이었다.
  그러나 대원군은 잊으려고 했다.  아들에 대한 원망, 최익현에 대한 미움..  모
든 것을 잊고 몸이나  정양하려고 했다. 어쨌거나 고종은 그의 아들이었다. 그러
나 민씨 일파가 친족정치를 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면 가슴이 터질 것 같았
다.
  “영의정에 가오실 대감이 제수되었사옵니다.”
  서장자 이재선이  이따금 양주까지 와서  조정의 소식을 전해주곤  했다. 적실 
장자인 이재면은 좀처럼 찾아오지도 않았다.
  “이유원 말이냐?”
  “그러하옵니다. 세 번이나 사양을 하다가 입조했다고 하옵니다.”
  “흥.”
  대원군은 코웃음을 쳤다.  이유원은 함경도 관찰사를 지내고  우의정까지 지낸 
인물이었다.
  “좌의정엔 흥인군 대감이 제수되었사옵니다.”
  “종친에 대한 배려로군.”
  “우의정엔 전 한성 판윤 박규수 대감이 제수되었사옵니다.”
  “박규수?”
  난을 치던 대원군의 손이 멈칫했다.
  “예.”
  “유림을 대표해서 뽑은 것이겠지......”
  대원군은 아들 재선의  얼굴에서 눈을 떼고 다시 난을 치기  시작했다. 예상했
던 대로였으나 조각을  하는 솜씨가 제법이지 싶었다. 그러나 그것이  아들의 솜
씨가 아니라 민비의 솜씨라는 데 슬며시 배알이 뒤틀렸다.
  “도성에 올라가거든 이민화에게 다녀가라고 해라.”
  “내관 말씀입니까?”
  “그래.”
  대원군은 무겁게 대답을 했다. 문득 소실의  자식이라고 하여 벼슬길에도 나서
지 못하는 재선이 안쓰러워졌다. 지금 그를  따르는 피붙이라고는 재선밖에 없었
다.
  “재선아.”
  “예.”
  문득 허균이 지었다는  홍길동전이 생각났다. 홍길동 역시  서출의 자식이라고 
하여 과거를 볼 수도 없었의려니와 아버지를 아버지라고 부를 수가 없었다.
“ 왜 아버지라고 부르지 않느냐? ”
“ 법도가 그렇지 않사옵니까? ”
“ 부자지간에 법도가 무슨  소용이 있느냐? 그까짓 사람이 만든 법도가 천륜을 
가를 수 있다는 말이냐? ”
“ ,,,,,,. ”
 재선이 입술을 지긋이  깨물었다. 눈에는 자신도 모르게 이슬같은  것이 맺혀서 
눈앞이 부옇게 흐려 보였다.
 대원군은 그런 재선의 모습을 보자 가슴이 뭉클해 져 왔다.
“ 내가 밉겠지? ”
“ 제가 어찌 아버님을 ,,,,,,. ”
“ 괜찮다.  내가 그동안 자식들을 너무  엄혹하게 가르쳤어, 자식들을 따뜻하게 
부애로 가르쳤어야 했는데 ,,,,,,. ”
 대원군이 낮게 한숨을 내쉬었다. 지난 일을  후회하고 있는 듯한 쓸쓸한 낯빛이
었다.
“ 조금만  참고 기다려라. 네가 비록  서출의 자식이라고 하나 벼슬에  나갈 수 
있는 길을 열어 주마. ”
“ 아버님 ! ”
“ 돌아가 쉬어라. ”
“ 예. ”
 이재선이 주먹으로 눈물을  훔치고 물러나갔다. 대원군은 난을 치다  말고 물끄
러미 허공을 응시했다. 어디선가  산이 우는 소리가 들렸다. 대원군은 난을 치다 
말고 밖으로 나갔다.  뜰을 지나 대문 밖으로 나서자 유리알처럼  매끄러운 초겨
울 하늘을 이고 있는 도봉산이  보였다. 산은 거하고 말이 없었다. 그 잿빛의 연
봉들을 보면 볼수록 의연하기만 했다.
 ( 산도 보는 사람에 따라 모습을 바꾸는가? )
 들판은 잔뜩 얼어붙어  있었다. 이미 가을걷이가 끝난 황량한  들판이 사금파리 
조각처럼 반짝이고 있는 것은 얼음이 얼었기 때문일 것이었다.
“ 대감마님. ”
 어느새 천하장안이 뒤를 따라왔다. 대원군은  대꾸없이 논둑길을 휘적휘적 걸었
다. 목표를 정해 놓고 걷는  걸음이 아니었다. 그러나 날씨가 찬 탓에 걸음이 빨
라지고 있었다.
“ 대감마님. ”
 안필주가 대원군을 따라잡으며 히죽거리고 웃었다.
“ 어디로 행차하시옵니까? ”
“ 어디로 가는 네 놈이 알 바 아니다. ”
“ 주막거리로 행차하시렵니까? ”
 대원군은 걸음을 멈추었다.
“ 소인들이 안내를 합지요. ”
“ 그래라. 모처럼 걸직한 탁주 맛이나 보자꾸나. ”
 대원군이 다시  걸음을 떼어 놓았다.  천하장안은 히죽거리고  웃으며 대원군을 
수행했다. 대원군이 낙척한  총친이었을 때도 그들은 대원군을  그림자처럼 따라
다니며 수행했었다. 이제 대원군이 야인이 되자 그들은  다시 할 일이 생긴 것처
럼 신명이 났다.
 이내 그들은 양주 읍내로 들어섰다. 주막은 삼거리에 있었다
“ 아이고 어서 오세요. ”
 주막으로 들어서자 주모가 반색을 하며 뛰어 나왔다.
“ 날씨가 차네. 방이 있는가? ”
 천희연이 손을 호호  불며 주모에게 물었다. 대원군은 습관적으로  주위를 살폈
다. 술청 한쪽 구석에 일가족인 듯한 걸립패가 옹송거리고 앉아 있었다. 옷이 헤
어지고 땟국에 절어 있는 ㄹ것으로 보아 굶주리고  있는 것 같았다. 얼굴들이 부
석부석했다.
“ 그러믄입쇼. 아주 따끈따끈한 방이 있습니다. ”
 주모가 호들갑을 떨며  대원군 일행을 방으로 안내했다. 대원군은  남루한 옷을 
입고 있는 처녀의 해사한 얼굴을 힐끗 쏘아보고는  방으로 들었다. 그 처녀가 어
디서 본 듯한 느낌이었다.
 (그래. 이제 보니 민치록의 딸을 닮았군......! )
 대원군을 씁쓸하게 웃었다.  비록 남류한 옷가지가 가리고는 있으나  처녀의 눈
빛이 쏘는 것처럼 강렬한 것이 중전 민비를 닮아 있었다.
“ 걸인들인가? ”
“ 유민들입죠. ”
“ 아직도 유민이 있나? ”
“ 해마다 윤질이 돌고 흉년이 드는데 왜 유민이 없겠습니까? 농사라고 지어 봐
야 죄  양반들 차리고... 저렇게 유리  걸식하다가는 길바닥에서 얼어  죽고 굶어 
죽고는 하죠....... ”
 주모가 혀를 찼다. 주모의 말대로 방은  따뜻했으나 내실인 모양으로 황토 흙벽
에 메주가 주렁주렁 걸려 있고 주모의 옷가지들이 함부로 나뒹굴고 있었다.
 대원군은 얼굴을 찌푸렸다. 오랜만에 맡아 보는  황토 흙벽의 알싸한 냄새와 메
주 뜨는 냄새가 퀴퀴하여 고약스럽기는 했으나 고향으로 돌아온 듯한 안온한 기
분이 들었다.
“ 대감마님 한잔 받으시지요. ”
 이내 술상이 들어왔다. 장순규가 먼저 대원군의 잔에 술을 따른 뒤 킁킁거렸다.
“ 왜 그러느냐? ”
“ 메주 뜨는 냄새가 고약하지 않습니까? ”
“ 그게 사람 사는 냄새야. ”
“ 그야 그렇습죠. ”
 장순규가 멋적은  듯이 머리를 긁적거렷다.  대원군은 서민적이고  소탈한 데가 
있었다.
“ 천가야. ”
“ 예. ”
“ 밖에 있는 걸림패들에게 먹을 것을 갖다  주라고 일러라. 행색이 굶주리고 있
는 것 같지 않느냐? ”
“ 예. ”
 천희연이 고개를 숙여 보이고 밖으로 나갔다.  대원군은 묵묵히 술잔을 들어 입
으로 가져 갔다. 10년 만에 마셔 보는 탁주였다. 한때는 막걸리 대감이라는 별호
까지 얻었던 대원군이었다. 벌컥벌컥 한 사발을 마신  뒤 버릇처럼 수염을 쓱 문
질렀다.
“ 대감마님. ”
 탁주잔을 비우는  대원군에게 장순규가 히죽거리고  웃으며 다시  술을 따랐다. 
대원군은 고개를 들고 장순규를 쳐다보았다.
“ 왜? ”
“ 참으로 오랜만이지를 않습니까? 대감마님께서 낙척한 종친으로 계실 때는 이
런 술자리도 자주 마련했었고 투전이며 오입까지 같이 하지 않았습니까? 그때가 
벌써 10년이나 전의 일입니다. ”
 장순규의 아득히 회상에  젖는 말에 대원군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렇
다. 천하장안과  술자리를 같이한 지가 어느덧  10년이지 않는가. 도성의 골목이 
좁다하고 상가집과 투전판을 휩쓸고  다니던 일이 어제 일처럼 선명하게 머릿속
에 떠올라 왔다.
 ( 그때는 그래도 썩은 정치를 바로 잡으려는 원대한 야망이 있었지..... )
 대원군은 다시 술잔을 입으로 가져가며 그렇게  생각했다. 썩은 정치를 바로 잡
으려는 원대한 포부가 있었기에  권신들이 조롱을 하고 상가집 개라는 손가락질
을 받았어도 견딜 수가 있었다. 그러나 이제는 모든 것이 끝나지 않았는가. 민승
호의 하인놈이 빈정거리던 말처럼 이제는 한낱 야로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 그 동안 적조했구나. ”
 대원군은 천하장안을 돌보지 않은 것이 마음에  걸렸다. 그가 임금보다 더한 권
세를 휘두르면서도 천하장안에게 변변한 벼슬자리 하나  주지 않았던 것이다. 물
론 천하장안은 시정의  불한당들이었다. 그러나 대원군이 벼슬자리를  줄 마음만 
있었다면 얼마든지 그렇게 할 수 있었다.
“ 저희는 그래도 신명나는 세월이었습니다. ”
“ 내가 너희들에게 아무것도 해주지 못했어. ”
 대원군은 진심으로 후회를 했다.
“ 저희들은 처음부터 대감마님께 무엇을 바라고 모신 것은 아니었습니다. ”
 장순규가 우직한 목소리로 대답을 했다.
“ 고맙구나. ”
 대원군은 술잔을 들어 술을 벌컥벌컥 마셨다.  천하장안도 각자의 잔에 술을 부
어 돌아앉아 마셨다.
“ 대감마님. ”
“ 무엇이냐? ”
“ 이번 일은 모든 중전마마가 꾸몄다는  소문이 파다하옵니다. 저자에서는 중전
마마를 악독한 소부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
“ 소부? ”
 대원군이 눈을  희번득거렸다. 저자에서 회자되고  있는 악독한  소부라는 말이 
참으로 적절하다고 생각했다. 민비는 확실히 표독한 면이 있었다.
“ 언제 환저하시겠사옵니까? ”
“ 나는 곧은골에서 죽을 것이다. ”
“ 대감마님께서는 할 일이 태산 같지 않사옵니까? ”
“ 세월이 나를 버렸지 않느냐? ”
“ 저희들이 세월을 잡아다가 대감마님께 바쳐 올리겠습니다. ”
“ 네 놈들이? ”
 대원군이 입꼬리를 뒤틀며 고개를 흔들었다.
“ 시중에서  회자되는 대로 대감마님께서는 악독한  소부의 독기를 가슴앓이를 
하고 있사옵니다. 저희들이  특효약을 지어 올릴 테니 당분간 저희들을  찾지 마
시옵소서. ”
“ 무슨 계책을 꾸미고 있는 게로구나. ”
“ 지금은 말씀 올릴 일이 아니옵니다. ”
“ 허튼 짓을 해서는 안 된다. 너희들은  국태공 이하응의 손발이라는 사실을 명
심해야 하느니라. ”
“ 명심하고 있사옵니다. ”
 그때 문이 덜컹 열리고 주모가 개기름이 흐르는 얼굴을 들어 밀었다. 
“ 무슨 일이냐? ”
 천희연이 눈을 부릅뜨고 주모에게 호통을 쳤다. 
“ 아이고 깜짝이야. 웬 목청이 그리 큰지 애 떨어질 뻔했네. ”
“ 들지도 않은  애가 왜 떨어지느냐? 공연한 수작  부리지 말고 냉큼 물러가거
라. ”
“ 아따 성미도  급하시긴... 저기 술청에 있는 걸패의 노인이  나으리를 좀 뵙겠
다고 해서 왔습니다. ”
 천희연이 대원군을 힐끗  쳐다보았다. 어떻게 하는 것이 좋겠느냐는  무언의 질
문이었다.
“ 노인이 왜 나를 보자고 하느냐? ”
“ 글쎄요. 동냥질이나 하려는 못된 수작이 아닐까 합니다마는...... ”
“ 들라 해라. ”
 대원군은 허공을 노려보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어디선가 개짖는 소리가 사납게 
들리고 있었다.
 이내 걸립패의 노인과  해사한 얼굴의 처녀가 방으로 들어왔다.  천하장안이 서
로 눈짓을 하고 자리를 비켜 주자 노인과 처녀가 깊숙이 절을 했다. 
“ 너희들은 어디 사는 누구냐? ”
“ 소인은 전라도 완주에 사는 사람으로 7년째 흉년이 들어 농토를 버리고 유리 
걸식을 하고 있사옵니다. 제 옆의 계집은 여식이옵니다. ”
“ 나를 보자고 한 연유가 무엇이냐? ”
“ 나으리께서 저희들에게 먹을  것을 주시어 굶주림을 면하게 하여 주셨사오니 
인사를 드리지 않으면 사람의 도리가 아니지라...... ”
“ 그것뿐이냐? ”
“ 송구스러운 말씀이오나 저희들은 고향으로 돌아가고  있는 중이옵니다. 몇 푼 
노자라도 던져 주시면 여식을 맡기겠사옵니다. ”
“ 허면 딸을 팔겠다는 말이냐? ”
 대원군은 주먹을 움켜 쥐었다. 딸을 팔겠다는  노인의 말에 수염이 부들부들 떨
렸다.
“ 아뢰옵기 송구하오나 여식은 제가  데리고 있는 것보다 나으리 같은 어진 양
반에게 의탁하는 것이  여식을 위하여도 좋은 일인가 하옵니다. 부디  저희 부녀
의 원을 들어주시옵소서. ”
“ 네 정녕 딸을 팔려느냐? ”
“ 오직 나으리께 의탁하고자 하옵니다. ”
“ 네 의향은 어떠냐? ”
 대원군은 다소곳이 앉아 있는 처녀에게 물었다.
“ 나으리를 성심껏 모시겠사옵니다. ”
 처녀의 대답은 의외로 또렷했다.
“ 내가 누군지 아느냐? ”
“ 나으리가 누군지 소녀가  어찌 알겠습니까마는 범상하신 분이 아니시라고 여
겨지옵니다. ”
“ 나를 따르겠느냐? ”
“ 거두어 주시옵소서. ”
“ 알았다. ”
 대원군은 고개를 끄덕거렸다. 처녀의 눈빛이 그를 빨아들일듯이 강렬했다.
 ( 역시! )
 그날 저녁 대원군은 목욕을 하고  새 옷으로 단장을 한 처녀를 보자 가슴이 찌
르르 울리는 기분이었다. 처녀는 미색도 가려했다. 
“ 네 이름이 무었이냐? ”
“ 해월이옵니다. ”
“ 해월이라,,,,,. ”
 대원군은 기분이 흡족했다.  젊디 젊은 처녀의 살냄새가 향긋하게  풍겨 대원군
은 모처럼 춘정이 동했다. 이미 오십 고개를 넘어선 대원군이었다.
“ 이리 가까이 오너라. ”
 대원군의 목소리가 소년처럼 떨려 나왔다.  해월이 무릎걸음으로 대원군에게 가
까이 다가가 앉았다. 대원군은 손수 해월의 옷고름을 푸르고 저고리를 벗겨냈다. 
가슴이 뛰었다. 해월을 금침위에 쓰러뜨리고 야수처럼 짓밟기 시잣했다.
 해월은 대원군을 자신의  몸 속에 적극적으로 받아들였다. 자신이  몸으로 박아
들이는 사내가 누군지도 알지 못한 채 해월은 감탕질 소리를 내며 입을 쩍쩍 벌
렸다.
 대원군은 해월을 거칠게 다루었다. 그의 눈에는  해월이 해월로 보이지 않고 악
독한 며느리 민비로 보이고있었다. 
“ 네가 청백지신이 아니로구나! ”
 한순간 대원군의 밑에 깔려서 요분질을 해대는 해월을 쏘아보며 싸늘하게 일갈
했다.
“ 송구하옵니다. ”
“ 저잣거리의 들병이냐? ”
“ 소인은 양반아치의 소실이었사옵니다. ”
“ 양반아치? ”
“ 염종수라고 하온데 이 세상 사람이 아니옵니다. ”
“ 네 나이 몇이냐? ”
“ 스물 셋이옵니다. ”
“ 요물이로다. ”
 대원군은 염종수가 누구인지  얼핏 생각이 나지 않았다. 그러나  해월은 천하의 
절색이었다. 스물 세  살의 나이인데도 색기가 흐르는 얼굴이 묘한  매력을 풍기
고 있었다.
“ 나으니. ”
 해월의 입에서 단내가 풍겼다. 그녀의 몸은 버들가지처럼 흐느적거렸다.
“ 오냐. ”
 대원군은 다시 해월을 품에 안았다.
 이튿날 대원군은 누구보다도  일찍 일어났다. 그는 해월을 품에  안음으로써 새
로운 의욕이 솟구치는 것을 느꼈다.
 그날부터 양주  곧은골의 대원군 산장으로 수상쩍은  사람들이 속속 모여 들기 
시작했다.

                                               4

 눈발이 희끗희끗 날리기 시작했다. 민비는 무거운  몸을 이끌고 고종과 함께 아
미산을 거닐었다. 모든 일이 계획대로 완벽하게  이루어져 민비는 기분이 흡족했
다. 최익현의 상소가 처음 올라온 음력 10월  25일부터 고종이 친정을 선포한 11
월 4일까지의 열흘은  민비에게는 피를 말리는 듯한 나날이었다.  그러나 고종의 
친정은 싱거우리만치 일방적인 승리로 끝이났다.
 대신들의 완강한 반발이  의외였으나 무력까지 동원하여 반발을 하리라던 대원
군은 상소 한 장  올리지 않고 양주로 내려가 버렸던 것이다.  아들에 대한 불만
을 그렇게 나타낸 것이었으나 그것은  임금에게 올린 상소 한 장의 효과도 없었
다.
“ 전하, 6조를 순행하신 소감이 어떠시옵니까? ”
 민비가 한 손으로 허리를 받치고 고종에게  살갑게 물었다. 민비는 고종의 친정
을 의욕적으로 출발하게 했다. 고종이 명실 상부한  친정을 하게 된 이상 선정을 
베풀어 청사에 성군의 이름을 길이 남기게 하고  싶었다. 그런 까닭으로 오늘 아
침에 광화문 앞의 6조 관청을 순행하게 했던 것이다.
“ 나는 오늘 처음으로 서린방 전옥서를 보았소. ”
 고종이 잔뜩 부른  민비의 배를 살피며 웃음을 깨물었다. 민비가  잔뜩 부른 배
를 쓸어안고 걷는 모습이 우습기도하고 사랑스럽기도 했다.
 서린방 전옥서는  형조관할의 감옥이었다. 다른 말로는  서린옥이라고도 불렀으
며 좌포도청과 담장 하나를 사이에 두고 있었다.
“ 전옥서를 보셨다니 느낌이 새로우셨겠군요. ”
“ 그렇소. 전옥서에는 많은 죄수들이 갇혀 있었소. ”
“ 전하. 죄수가 없는 나라가 치도가 잘 이루어진 나라입니다. 백성을 덕으로 다
스리소서. ”
“ 그렇잖아도 전옥서를 보고 그런 생각을 했소. ”
 고종이 눈발이 어지럽게  날리는 하늘을 쳐다보며 고갱를 끄덕거렸다.  벌써 섣
달이었다. 잿빛의 우중충한 하늘에서 눈발이 자욱하게 날리고 있었다.
“ 전하. ”
“ 말씀을 하시오. ”
 고종이 민비를 사랑이  가득 담긴 눈빛으로 돌아보았다. 아버지  대원군을 보지 
않은 지  벌써 한 달이 넘고  있었다. 고종은 친정도 친정이녀리와  눈빛 사나운 
아버지를 다시 보지  않게 된 것이 무엇보다 다행스러웠다. 그것은  임금이 불효
자라는 것을 내외에 알리는 무모한 짓이었다.
“ 왜구가 심상치  않사옵니다. 그들의 서계에 황상이나 황조니 하는  발칙한 말
을 쓰고 있는 것을 보면 음모가 있는 듯싶사옵니다. ”
“ 음모가 있다니요? ”
“ 남쪽 변방에 포군을 배치하여 왜구를 방비하심이 옳을 듯 싶사옵니다. ”
“ 국방을 튼튼히 하라는 말씀이구려. ”
“ 그러하옵니다. 남쪽과 북쪽 모두 소홀히 할 수 없사옵니다. ”
“ 알겠소.  기왕의 포대는 정비를 하라  영을 내리고, 상주목과  전라도 남관진, 
함경도 자성군에도 포군을 증설하라고 영을 내리겠소. ”
“ 또한 팔도 각지에 암행어사를 보내어 민정을 살피셔야 하옵니다. ”
“ 암행어사요? ”
“ 백성들의 삶이  어떤지 목민관들이 과연 선정을  베풀고 있는지 알아야 바른 
정치를 할 수 있사옵니다. ”
“ 알겠소. 내 사정전으로 돌아가는 대로 팔도에 암행어사를 보내겠소. ”
“ 전하. 또 한가지는 충신과 학문이 높은 신하를 가려 써야 하옵니다. ”
“ 충신을 가려 써야 한다는  것은 알겠으나 어떤 신하가 충신인지 가리기가 어
렵지 않소? ”
“ 전하, 김옥균, 김홍집을 가까이 두소서.  김옥균은 알성시에 장원을 한 인물이 
아닙니까? ”
“ 김옥균을 홍문과 교리에 제수하겠소. ”
“ 또한 왕명이 칼날 같아야 할 것이옵니다. ”
“ 왕명이 칼날 같아야 한다는 것은 무슨 뜻이오? ”
“ 하늘에는 해와  달이 하나뿐이옵니다. 이 나라의 해와 달은  전하와 신첩이옵
니다. 누구도 전화와 신첩을 대신할 수 없사옵니다. ”
“ 알겠소. ”
 고종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민비와 고종은 아미산을 한  바퀴 돌아 고종은 사정전으로 가고 민비는 교태전
으로 돌아왔다. 날은 이제 겨우 신시초 ( 오후 3시 ) 를 지나고 있었다.
 민비는 교태전으로 돌아오자  사방침에 비스듬히 기대어 누웠다. 모든  것이 제
대로 돌아가고 있어서 흡족했다. 고종의 사랑은  그녀에게 완전히 기울어 있었고 
새로운 체제도 무리없이  구축되어 있었다. 민승호가 병권을  장악하고 있으므로 
천하의 대원군이라고 해도 옴짝달싹 할 수 없었다.
 ( 사람들은 내가 대원군을 내친 것을 며느리의 여란이라고 그러겠지...... )
 그러나 대원군은 대정을  고종에게 반환해야 했으나 그렇게 하지  않았다. 그는 
성격이 너무 강한  인물이었다. 고종이 제26대 조선의 국왕으로 등극했을  때 그
런 까닭으로 임금의 생친은 정칭  간여하지 말게 해야 한다는 주장이 당시의 실
세들인 안동  김문에 의해 제시되었었다.  그러나 대왕대비 조씨는  안동 김문의 
세도를 꺾기 위해 대원군에게 대정을 협찬케 했을 뿐이었다.
 그것은 정도가 아니었다.
 ( 아이가 어쩜 이렇게 순할까? )
 민비는 회임을 한 지 8개월이 되었다. 이맘때면  뱃속의 아이가 발로 차거나 움
직여야 했으나 뱃속의 아이는 전혀 그런 움직임을 보이지 않고 있었다.
 ( 나는 대원군에게 대립을 한 게 아니야. )
 민비는 다시 엉뚱한 생각에 잠겼다. 유교적  관점에서 보면 그것은 엄청난 패륜
이었다. 민비는 스스로를 패륜을 저지른 ㄹ여자가 아니라고 생각했다.
 ( 설사 내가 대원군과 대립을 했다고  해도 패륜이 아니야. 그것은 오히려 유교
가 잘못하고 있는 거야...... )
 신라시대에는 여왕이 셋이나  있었다. 그러나 조선에 와서는 어찌된  일인지 남
자들은 처첩을 여럿을 거느려도 잘못이 되지 않으나 여자는 투총만 하여도 칠거
지악이라고 하여 내치곤 하였다. 잘못된 관행이었다. 공자의 말씀을 따르는 유교
가 언제부터 그렇게 변질되었는지  알 수 없었으나 반드시 혁파하리라고 생각했
다.
 그날 밤이었다. 민비는 저녁 수라를 마치자 대왕대비전으로 갔다. 대왕대비전에
서 어의가 지어  올리늘 탕제를 마시고 나이많은  어의들에게 발을 사이에 두고 
진강을 듣는 것이 요즈음의  저녁 일과였다. 진강은 일종의 태교였다. 그 자리에
는 언제나 대왕대비 조씨도 임어했다. 
 그때였다. 천지를 진동하는 광음이 울려  퍼지면서 대왕대비전이 우르르 흔들렸
다. 아른아른한 졸음기를  느끼며 어의의 진강을 듣고 있던 민비는  화들짝 놀랐
다.
“ 이게 무슨 소리냐? ”
 대왕대비 조씨가 놀라서  소리를 질렀다. 궁녀들이 웅성거리며 밖으로  뛰어 나
갔다.
“ 불이다! ”
“ 중궁전에 불이 났다! ”
 그러나 궁녀들이 되돌아  오기도 전에 궁녀들과 내관들, 무예청  병사들이 다급
하게 외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민비는  얼굴이 창백하게 질려  궁녀들의 부축을 
받으며 자경전을 뛰어 나왔다. 불은 교태전의  부속건물인 순희당에서 일어나 교
태전으로 삽시간에 번지고 있었다.
“ 중전마마 자기유황이 폭발했사옵니다. 어서 옥체를 피하소서! ”
 박 상궁이  다급하게 외쳤다. 자기유황은 강력한  폭발물이었다. 이미 순희당은 
지붕이며 전각이 날아가 여기저기 불똥이 튀고 있었다.
“ 주상전하는 어디에 계시느냐? ”
 민비는 울부짖는  궁녀들과 내관들을 붙잡고 물었다.  불길은 맹렬했다. 화광이 
하늘 높이 치솟고 불길은 노도처럼 내달리며 석지당과 자미당으로 옮겨 붙고 기
얼이 자경전까지 휩쓸고 있었다. 궁녀들과 내관들이  우왕 좌왕하며 불길을 잡으
려고 했으나 소용이 없었다.
“ 중전마마 어서 피하소서! ”
“ 주상전하는 어디 계시느냐? ”
“ 중전마마 불길이 노도 같사옵니다! ”
“ 주상전하가 어디 계시는지 묻고 있지 않느냐? ”
 민비는 충천하는  불길을 바라보며 발을 동동  굴렀고 궁녀들은 기어이 울음을 
터트렸다. 궁녀들은 소란중에 민비에게 어떤 위해가  미칠까 우려했고 민비는 지
아비인 고종의 안위가 걱정스러웠다. 
“ 중전마마, 상감마마께서는 안전하시다고 하옵니다. ”
 그때 대전별감인 김 내관이 어깨를 산자로 흔들면서 달려와 보고를 했다. 
“ 오, 그게 사실이냐? ”
 민비는 비로소 얼굴에 화기가 돌았다.
“ 그러하옵니다. 주상전하께서  교태전에 납시었다가 나오신 뒤에  곧바로 불이 
난 줄 아뢰오. ”
“ 천우 신조로다. ”
 민비는 감격을 했다. 교태전은  민비의 처소인 중궁전이 아니가. 고종이 자신을 
찾아 교태전에 왔다가 자기유황이  터져 봉변을 당했다면 그것으로 끝장인 것이
다. 조선의 제27대 국왕에는 이 귀인이 낳은 왕자 완화군이 등극하게 될 것이다. 
생각만 해도 몸서리가 처지도록 끔찍한 일이었다.
“ 중전마마, 어서 몸을 피하소서! ”
“ 알았다. ”
 민비는 그때서야  제수각으로 자리를 옮겼다.  불길은 계속해서  행각으로 옮겨 
붙고 있었다. 민비는 제수각의 방에 들어가 앉았다가 궁녀들이 올리는 응이 ( 율
무차 ) 를  마시고 제수각 대청으로 나왔다. 제수각에  한가하게 앉아 있을 수가 
없었다.
 ( 누군가 나를 태워 죽이려는 짓이야! )
 민비는 어금니를 꽉 깨물었다. 불길은  악마가 혓바다가을 날름거리듯이 무서운 
기세로 번지고 있었다.
“ 중전마마, 다행히 불길을 피하셨군요. ”



 퇴궐했던 민승호가 허겁지겁 달려와서 민비 앞에 부복했다.
“ 도대체 대내에서 이런 일이 일어나다니 어찌된 일이오? ”
“ 황송하옵니다. 화약이 터지는 큰 소리가  들렸다는 것으로보아 누군가 일부러 
저지른 소행이라고 생각하옵니다. ”
“ 그러기에 내가 무어라고 했습니까? 운현궁을 철저하게 감시하라고 하지 않았
습니까? ”
“ 차마 이런 일을 저지르리라고는 생각조차 못했사옵니다. ”
“ 어떻게 하든지  범인을 잡아야 합니다. 도성을 이 잡듯이  뒤져서라도 범인을 
색출하세요! ”
 민비는 이를 갈았다. 민승호는 그 와중에도  군사를 풀어 민비를 경호하게 하고 
고종이 있는 사정전을 철통같이 지키게 했다.  소란중에 누군가 고종을 시해하거
나 민비를 시해할  우려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불행중 다행으로  그런 일
은 일어나지  않았다. 불길은 새벽녘에야 겨우  잡혔다. 교태전을 비롯하여 삼백 
예순 여간을 모조리 태운 대화재였다. 
 민비는 이튿날부터 무거운 몸을 이끌고 범인 색출에 나섰다.
 대궐 밖은  좌우포도대장에게 영을 내려  수사에 나서게  했다. 좌우포도대장은 
임시로 사용하는 중궁전에 불려가 호된 질책을  받았다. 장안에는 다음날 아침부
터 포졸들이 쫙  깔렸다. 기찰과 순라가 삼엄하여 장안에는 살벌한  기운이 감돌
았다.
“ 대원군이 중전마마를 시해하려고 중궁전 마루 밑에 화약을 묻었다는군. ”
“ 대원군이 보복을 하는 모양이야. ”
“ 그래도 천우 신조로 중전마마는 무사하시대. ”
“ 에그 세상이 어찌 되려고 이렇게 숭악한 일이 자꾸 나는 건지...... ”
 장안에는 흉흉한 소문이  나돌았다. 민비는 그럴수록 좌우포도대장을 다그쳤다. 
그러나 시간이 흘러도 좌우포도대자아은 범인을 색출해 내지 못했다.
“ 궐내에도 바깥의 범인과 연통한 자가 있을 것이다!  외인이 어떻게 구중 궁궐 
깊은 곳까지 들어와 자기유황을 묻는단 말이냐?”
 민비의 한마디는  그대로 법이었다. 내명부에  형틀이 설치되고  대원군의 심복 
노릇을 하던 내명부의 내관과 여관들이 속속 잡혀와 잔혹한 고문을 당했다.
 ( 중전마마는 내명부의 물갈이를 하고 계시는 거야! )
 나이 든 상구아들은  스물을 갓 넘긴 민비의 지모에 혀를  내둘렀다. 민비가 낳
은 원자의 대변불통증상 때문에  대원군과 강력하게 맞서던 민비를 보았던 상궁
들은 민비가 단순히 범인 색출을 하기 위해 궁녀와 내관들을 잡아다가 고무나을 
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민비의 눈에 서릿발이 서려 있었다. 내명
부들은 민비와 눈이 마주치면 소름이 끼치는 듯한 전율을 느꼈다.
 대신들은 입을 다물었다.
 중전 민비가 도에 지나친 행동을 하는 것을 알고 있었으나 내명부의 일이라 누
구도 입을 열어 간하지 않았다.
 그러는 동안 창덕궁으로의 이어가 결정되었다.  민비는 경복궁이 중건을 시작하
면서부터 화재가 끊임없이 일어나는  것은 경복궁 터가 풍수상의 길지가 아니라 
흉지이기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풍수란 대체 무엇인가. 풍수란 문자 그대로 바람
과 물을 말하는  것이 아니냐? 그런데도 크고 작은  화재가 자주 일어나는 것은 
경복궁 터에 수맥이 없어 불의  기운을 막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 아니냐고 강변
했다.
 대신들은 할 말이 없었다. 경복궁 터는  태조 때부터 천하의 대명당이라고 알려
진 곳이었다. 그러나 경복궁이 중건되면서부터 일어난  화재는 대신들을 꼼짝 못
하게 만들었다.
 왕실은 12월 20일 창덕궁으로 이어를 했다.

 다시 묵은 해가 가고 새해가 밝았다. 1874년 갑술년이었다.
 민비는 2월 8일에 원자를  순산했다. 창덕궁 관물현이 산실청이었다. 고종은 원
자의 탄생을 경축하기  위해 사면령을 내리고 증광시를 실시케 했다.  우의정 한 
계원이 판중추부사에 제수되고  백성들의 각종 신역이 60일간  면제되었다. 왕자
의 이름은 척으로 지어졌다. 뒷날의 순종황제였다.

                                   5

 신미양요와 고종의  친정 선포, 경복궁의  화제로 어수선했던  1873년에 비교해 
1874년은 조용히 시작되었다. 고종은 음력 2월  24일 김옥균을 홍문관 교리에 제
수했다. 3월  1일에는 춘당대에서 실시된  전시에서 김윤식이 뽑혔고  3월 4일엔 
유학 황학주등 3백 98명이 화양동서원을 복설해 달라고 상소를 올렸으나 불허했
다. 유학은 벼슬을 하고 있지 않은 유생들을 말하는 것이었다.
 음력 5월 22일 일본은 유구국  ( 오끼나와 ) 을 침공했다. 이 소식은 청나라 예
부를 통해 곧장 조선으로 알려졌다. 이 소식은  청나라 예부를 통해 곧장 조선으
로 알려졌다. 이 무렵  일본에서는 정한설이 여론을 등에 업고 나돌았다. 일본은 
1868년 이미 명치유신을 끝내고  근대화를 이룩하여 국력이 나날이 신장되고 있
었다.
 1873년 8월 17일  10월 15일 일본 각의는 사신을 파견하기로  결정했다. 대원군 
집정시대에도 수차례의 서계를  보내어 조선을 개국시키려고 하였으나 조선측의 
완강한 반대에 부딪쳐 뜻을 이루지 못했었다.  이에 무력을 사용해서라도 조선을 
개국시켜야 한다고 이타가키 다이스케, 에토 신페이, 고토 쇼오지로 등은 강력히 
주장하게 되었고, 이들의 의견이 받아들여지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10월 15일 
태정대신 ( 총리급 일본 관직  )을 대리하는 우대신 ( 부총리급 ) 이와쿠라 도모
미가 시기  상조라고 거부하자 강경파의 일본대신들은  모조리 내각에서 사퇴했
다.
 일본은 대원군의 퇴진을 3월에야 공식 확인하게  되었다. 부산의 초량진에서 주
재하고 있던 외무성 권소록 오쿠 기세로부터 온 보고였다.

 조선은 지난 해 10월  대정면이 일어나 국왕의 생친인 대원군이 하야하고 국왕
과 왕비가 권력을  장약하게 되었다. 새로이 영의정이 된 이유원이나  우의정 박
규수 등은 다행히  배외주의자가 아니다. 그 동안 일본과의 교섭을  담당하고 있
던 동래부사는 대원군의  심복이었으나 곧 경질 될 거으로 보인다.  태정대신 산
조 사네토미는 오쿠 기세의  정보를 확인하기 위해 일본 외무성 2등서기관 모야
마시게루를 급파하기에 이르렀다. 일본에 정한론이  대두된 것은 1868년 5월이었
다. 그들은 왕정복고를 이룩하고  조선에 이를 알리기 위한 서계를 보냈다. 그러
나 조선은 강력한  척왜정책으로 이를 물리쳤고 일본  조야는 벌집을 쑤신 듯이 
소란스러워졌다. 일본의 국서를  거부하는 조선을 응징해야 한다는  것이 그들의 
주장이었다. 사신을 조선에  보내어 조선이 서계를 받아 들이지 않는  까닭을 추
궁하고, 조선이 이에  응하지 않으면 그 구실로 공격하여 신주의  위엄을 조선에 
과시해야 한다. 일본 조야의 강경론자들의 주장이었다. 신주라는 것은 일본을 말
하는 것으로 조선을  병합하려는 야욕을 그때 이미 내보이고 있었다.  일본은 이
에 그치지  않고 1870년에도 조선에 사신을  파견하겠으니 받아들이라고 요구했
다. 그러나 조선은 이것도  거절했다. 일본의 정한론 강경파들은 일제히 들고 일
어났다. 일본에 정한론이 일어나게 된 배경에는  급속한 근대화로 내정이 혼란했
고 대이창현은 날이 갈수록 걷잡을 수 없이 강해 져 가고 있는 박상궁의 욕망에 
기가 질렸다.
죽동에 이르자 해가 완전히 떨어져 명문대가 집들의 처마 밑으로 어둑어둑 땅거
미가 깔리고 있었다. 이창현이 도포 소맷자락을  펼치고 행랑채로 들어가자 청지
기가 죽동 대감 민승호가 산사(山寺)에서 돌아와 그를  찾는다고 귀뜸을  해주었
다. 이창현은 민승호가 기거하는 사랑채 대청 앞에서 허리를 굽혔다.
 "대감마님, 소인을 찾으셨사옵니까?"
 "그래."
 민승호가 장지문을 열고 밖을 내다보았다.
 "무슨 심부름이라도 시킬 일이 있으시온지요?"
 이창현은 의아한 표정으로  민승호의 얼굴을 살폈다. 방안이 어둑한  탓에 빈승
호의 낯빛도 어두워 보였다.
 "오늘 대궐에서 나왔느냐?"
 “예. 박 상궁이 중전마마의 봉서를 가지고 왔습니다.”
 “ 이 함도 박 상궁이 가지고 왔느냐?”
 민승호가 비단 보자기에 싸인 함(函) 하나를 들어 보였다. 이창현은 어리둥절했
다.
 “소인은 잘 모르겠사옵니다.”
 “그럼 이 함을 누가 가져다 놓았느냐?”
 “소인은 외출을 하여 지금 들어온 탓에......”
 이창현은 면구스러운 기색으로 고개를 숙였다.
 “어디를 다녀왔느냐?”
 민승호의 언성이 높아졌다.
 “소인 잠시 왕십리 사기에 다녀왔사옵니다.”
 “왕십리 사가?”
 “사라라기보다 그저 움막이나  다름없습니다. 비어 있는 때가 더  많아서 그런
지 가끔 비렁뱅이들이 들어와 제 집처림 기거를  하는 탓에 자주 살피곤 합니다.

 “나가서 누가 이함을 가져다 놓았는지 알아 보도록 해라.”
 “예.”
 이창현이 허리를 숙여 보이고 사랑채를 돌아 대문께로 향해갔다.
 민승호는 비단 보자기에  싸인 함을 다시 내려다보았다. 함은  무엇이 들었는지 
묵직했다.
 (중전마마께서 보내신 것이가?)
 민승호는 함이 대궐에서 온 것이려니 생각했다.  봉서를 대궐의 박 상궁이 가져
왔으므로 함도 박 상궁이 봉서를 가지고 올 때 함께 가져 왔으려니 여겨진 것이
다.
 대궐과 죽동 민승호의 집에는 하루에 한  번씩 비밀스럽게 봉소가 오고갔다. 모
친상(민승호의 생모)을  당해 민승호가 관례대로  병조판서 직을 사임하고  집에 
들어앉아 있게 되자 민비는 봉서를 보내 자문을 구하고 있는 것이다.
 “대감마님.”
 이창현이 사랑채로 뛰듯이 걸어와 허리를 숙였다.
 “누가 가져 왔다고 하더냐?”
 “절에서 보낸 듯하다고 하옵니다.”
 “절에서?”
 민승호가 고개를 갸우뚱했다.  절이라면 민승호가 방금 돌아 온  도봉산의 흥덕
사(興德寺)를 말하는 것이다. 민승호는 그 절에 생모의 위패를 봉정하고 열 살된 
아들의 무병장수까지 기원하고 돌아온 참이다.
 “절에서 보낸 것이 아닐 거야.”
 민승호가 고객를 흔들었다. 그때 내당에서 양모(민비의 생모)가 민승호의 열 살
된 아들의 손을  잡고 사랑채로 걸어왔다. 이창현은 섬돌 아래  내려서서 허리를 
숙였고 민승호는 방에서 대청으로 나와 양모를 맞이했다.
 “어떻게 불공을 잘 드렸나?”
 한창부부인(韓昌府夫人) 이씨가 민승호에게  인자한 미소를 흘려보냈다. 민치록
의 딸 민비가 왕비로 간택됨으로써 하루 아침에 부부인에 봉해 진 이씨였다.
 “예.”
 민승호는 한창부부인에게 공손히 인사를 올렸다.
 “그 함은 어디서 온 건가?”
 “자세히는 모르겠사옵니다.  봉서와 함께 있기에  이 집사에게  물어보고 있던 
참입니다.”
 “아까 대궐에서 항아님이 다녀가셨네. 중전마마의  봉서를 가지고 왔다 하시면
서 다른  살밍 보면 안 된다고  하기에 사랑에 들여 놓으라고  했네. 자상하기도 
하시지. 우리 중전마마께서 이런 것까지 챙겨 보내시다니....”
 한창부부인 이씨는 비단 보자기에  싸인 함이 민비가 보낸 것으로 생각하고 있
었다. 민승호는  고개를 갸우뚱했으나 이씨 부인의  말을 반박하고 싶지 않았다. 
민비으 얼굴이 머릿속에  뽀얗게 떠울라 왔다. 지난 여름 민비는  단호하게 말했
었다. 여흥 민문은  어떠한 일이 있어도 재물을 탐하거나 척분이라는  지위를 이
용해 축재하지 말라고.  그런 민비가 봉물을 보냈다는 것이 얼핏  이해되지 않았
다.
 “사랑으로 오르시지요.”
 민승호는 한창부부인 이씨를 자신의 거처인 사랑으로 청했다.
 “그러세.”
 민승호가 먼저  사랑으로 으로고 한창부부인 이씨가  따라 들어왔다. 열  살 난 
아들도 호기심이  가득한 눈빛을 하고  따라 들어왔다. 민승호는  푸른색의 비단 
보자기를 풀렀다. 문득 사랑채 바까ㅊ에 이창현을  혼자 두었다는 생각이 들었으
나 함 속의 봉물이 무엇인지  살핀 뒤에 물러가라고 해도 늦지 않으리라고 생각
했다.
 민승호는 함을 감싼 비단 보자기를 풀렀다.  그러자 옻칠을 곱게 입힌 나무상자
가 나타났다. 함에는 열쇠구멍잉 있고 그 옆에는  색실이 달린 열쇠가 매달려 있
었다. 민승호는  손수 열쇠를 구멍으로 밀어  넣었다. 한창부부인 이씨와 아들이 
눈빛을 빛내며 나무상자 곁으로 바싹 다가왔다.
 (색실이 고운 것을 보면 여자들의 노리개가 들어 있겠군....)
 민승호는 열쇠를 돌려 보았다. 그러나 의외로 열쇠가 잘 돌아가지 않았다.
 (열쇠가 맞지 않는 것인가?)
 민승호는 짜증이 나기 시작했다. 방안은 이미  어둠침침하여 열쇠 구멍이 잘 들
여다보이지 않았다. 날이  어두워졌는데도 계집종들이 불조차 켜놓지  않고 있는 
것이다.
 “이 집사!”
 민승호는 이창현을 큰 소리로 불렀다.
 “예.”
 밖에서 이창현의 대답이 들렸다.
 “들어와 불을 켜게. 날이 어두우면 방에 불을 켜야 할 게 아닌가?”
 “예.”
 이창현이 민승호의 짜증스러운 목소리에 황급히  사랑방으로 들어왔다. 그때 열
쇠가 오른쪽으로 한바퀴 돌았다.
 (아!)
 민승호는 열쇠가 돌아가자 짧은 탄성을 내뱉었다.
 그 순간 요란한 폭음과 함께 유황냄새가 확 풍기면서 뜨거운 것이 얼굴을 강타
했다. 민승호는  재빨리 얼굴을 감싸쥐며 처절한  비명을 질러댔다. 그러나 그의 
비명소리는 거대한 폭발음이 한 입에 삼켜  버렸다. 그것은 이창현도 마찬가지였
다. 이창현이 민승호의  날카로운 고함에 놀라 서둘러 불을 켜기  위해 사랑방으
로 들어오는 순간 유황냄새와 함께 뜨거운 불덩어리가 그를 향해 날아왔던 것이
다. 그는 처절한 비명을 지르며 쓰러졌다.  순식간의 일이었다. 천장과 벽이 무너
져 내리고 방바닥이 거대한 웅덩이처럼 푹 패였다. 
 "자기황이 터졌다."
 "불이다!"
 폭발음을 듣고 하인들이  하얗게 질린 얼굴로 달려왔다. 집 안이  금세 발칵 뒤
집혔다. 
 "대감마님이 돌아가셨다!"
 "아기씨와 한창부부인 마님도 돌아가셨어!"
 하인들이 달려왔을  때는 민승호의 사랑채는 이미  목불 인견의 참상으로 변해 
있었다. 유황냄새가  자욱한 가운데 천장과  사면 벽이 무너져  내리고 문짝들은 
박살이 난 채 화염에 휩싸여 있었다.
 하인들은 피투성이 민승호를 사랑채 마당으로 끌고 나왔다. 
 그러나 민승호는 이미 처참한 몰골로 숨이  끊어져 있었다. 그의 아들도 살점이 
탄 채 죽었고 한창부부인 이씨는 겨우 숨이 붙어 있었으나 위독했다.
 11월 28일의 일이었다. 민승호는 불과 45세의 일기로 짧은 영화의 막을 내렸다.
 이 일은 즉각 대궐로 알려졌다. 
 "이런 참변이 있는가? 어느 놈의 나의 친정 오라버니를 죽였다는 말이냐?"
 민비는 넋을 잃었다. 슬픔 때문에 밤새 한 잠도 자지 못했다.
 "이 중신의 정중하고  너그러운 자태와 순박하고 독실한 몸가짐으로 얼마나  충
성을 다해 왔는가? 그런데 뜻밖에 부고가 날아드니 놀랍고 슬픈 마음을 달랠 길
이 없구나."
 고종은 민승호의 장례를 후히 지내 주게  하여 민비의 슬픔을 위로하려고 했다. 
그러나 11월 30일 한창부부인 이씨까지 죽자 민비의 슬픔은 더욱 켜졌다.
 "이것은 반드시 운현궁의 짓이야!"
 민비는 슬픔을 가누지 못하면서도 치를 떨었다.
 "어떤 일이 있어도 범인을 체포하여 사지를 찢어 죽여야 할 것이다!"
 민비는 형조판서와 포도대장을 중궁전으로 불러  범인을 잡으라고 호통을 쳤다. 
그러나 민승호를 죽인 범인은 경복궁 교태전 마루 밑에 자기황을 묻어 폭파시킨 
범인처럼 잡히지 않았다.
 "의금부에서는 무엇을  하는가? 의금부에서도 범인을  잡아야 할 것이 아닌가? 
그대들은 누구의 신하인가?"
 민비는 의금부 당상관들까지 불러서 호통을 쳤다.
 이날 사헌부 장령을 지낸 손영로(孫永老)가 다시 대원군의 환거(還去)를 청하고 
영의정 이유원을 논박(論駁)하는 상소를 올렸다.
 “아니 대원위가 얼굴에 인두껍을  썼음이 아닌가? 폭약을 보내 처남을 살해하
고 그것도 모자라 상소를 올려 임금을 협박해?”
 민비는 옆에서 보기에 민망할  정도로 펄펄 뛰었다. 고종도 대노했다. 민승호의 
집에 폭약을 보내  살해한 범인이 운변 인물이라는 것은 정황이  뚜렸했다. 물증
이 없을 뿐이었다.  조선조 창업 5백년에 정적을 제거하는 데  화약인 사용된 것
은 이것이  처음이었다. 고종은 손영로를 전라도  진도부(珍島府) 금갑도(金甲島)
로 귀양 보냈다. 민비는 영의정 이유원을 추궁했다. 의금부 당상들도 중궁전으로 
불려와 범인 색출이 더디다고 질책을 받았다.
 (중전마마께서도 저리도 무서운 분을 줄이야.......)
 의금부 당상들은  중궁전에 불려 가기만 하면  얼굴이 새파랗게 질려서 돌아왔
다. 의금부는 국가의  대옥(大獄)을 맡아 보는 관아로  주로 역모에 관한 사건을 
다루었다. 포도청에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권세가  당당할 뿐 아니라 의금부 당
상들도 산전 수전  다 겪은 노련한 수사관들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민승호의 집 
폭파사건의 범인을 잡을 수가 없었다.
 민승호의 집  사랑채에서 자기황이 터졌을  때 살아난  사람은 이창현뿐이었다. 
그러나 그는 자기황이  폭발할 때 실명(失明)을 하여  눈이 보이지 않았다. 눈의 
상처 때문인지 말도 하지 못했다.
 민승호의 집 폭사사건이 민비의  성화에도 불구하고 미궁에 빠져 있을 때 12월 
17일 흥인군 이처응의 집에 다시 불이 나는  사건이 발생했다. 민심은 흉흉해 졌
다. 출처 불명의 소문들이 그럴사하게 포장되어 장안에 나돌았다. 민승호의 집을 
폭파한 범인이 민규호의 사주를 받았다느니 흥인군 이최응의 집에 불을 지른 것
이 대원군이 교사한  짓이라는 소문 등이었다. 그러나 심증만 있지  물증은 없었
다.
 이창현이 입을 열기 시작한 것은 해가  바뀌었을 때였다. 그란 이창현도 범인이 
누군지 알지 못했다.
 그때 장가라는 사내가 자기황을 잘 다룬다는 고변이 좌포도청에 들어왔다.
 좌포도청은 즉각 장가를 잡아 들여 고문을  했다. 그러나 장가라는 사내는 신철
균으 문객(門客)이라는 사실  외에는 좌포도청 혹독한 문초에도 끝내  입을 열지 
않고 버티다가 옥사를  했다. 이에 의금부가 나서서 신철균을 잡아  들여 국문하
기 시작했다. 그러나 신철균도  입을 열지 않았다. 의금부는 신철균을 더욱 가혹
하게 고문했다.
 신철균은 마침내 의금부의 고문에 못이겨 경복궁의 화재와 민승호의 집 폭사사
건, 흥인군 이최응의 집 방화사건을 모두 자신이 교사했다고 자백했다.
 고종은 신철균을 효수해야 한다는 의정부의 계언에 수결을 놓았다.
 신철균은 새남터에서 군문(軍門)  효수되었다. 신철균의 목이 회자숭의 칼에 의
해 떨어질 때 구경꾼들 중에 젊은 소부가 있었다. 해월이었다.
 해월은 흰 소복을 입고 있었기 때문에 사람들의 눈에 유난히 잘 띄었다.
 (국태공 저하는 역시 사람 하나는 잘 보셔!)
 해월은 정인(情人)이  죽었는데도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고 있었다. 오히려 그 
일을 예상하고 있었다는 듯이 새침한 얼굴에 냉소까지 머금고 있었다.
 “갑시다.”
 해월의 뒤에 서 있던 네 사내가 해월을  재촉했다. 해월은 서늘한 눈을 들어 핏
빛으로 노을이 지고 있는 샛강을 응시하다가  걸음을 돌렸다. 피냄새를 맡았는지 
까마귀 떼가 까악까악 하는 흉칙한 소리를 지르며 하늘을 선회하고 있었다.
 (역시 대원군의 짓인가?)
 금위대장 조영하는 변복을 하고 천하장안이 에워싸고 형장을 빠져 나가는 젊은 
소부의 뒷모습을 응시하며 신음을 삼켰다.
 (하늘이 내린 인물들이야....)
 조영하는 속으로 혀를  내둘렀다. 신철균을 효수하는 자리에 수하는  보낸 대원
군이나 대원군의 수하들이 나타날 줄  알고 변복을 한 뒤 감시하라는 분부를 내
린 중전 민비나 지략이 막상막하라는 느낌이 들었다.
 “저 네 놈을 잘 감시해라.”
 조영하는 금위영 군관에게  지시를 내리고 대궐을 향했다. 민비에게  보고를 하
기 위해서였다.
 “이제 되었습니다. 운현궁이 또  무슨 계교를 꾸밀지 모르니 잘 감시하십시오.

 민비는 금위대장  조영하의 보고를 받자 이미  예상하고 있었던 일이라는 듯이 
담담하게 대꾸했다.
 “중전마마. 죽동 대감 댁 폭파사건은 분명히  운변 인물의 짓이라는 것이 드러
났사옵니다. 천하장안을 잡아 국문할 수 있도록 윤허하여 주사옵소서.”
 조영하는 머리를 조아리고 민비의  환심을 사기 위해 천하장안을 잡아 들일 수 
있도록 윤허하여 달라고 주장했다.
 “천하장안은 대원군의 수족입니다.”
 “중전마마. 신이 천하장안을 잡아 들이자고 주청하는 것도 그 까닭이옵니다.”
 “아니 됩니다.”
 “모르는 소리에요. 큰  나무가 보기 싫다고 해서 베어 버리면  그 나무에서 열
리는 과실이나 그늘도 얻기 어렵습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현명한 고양이는 쥐를 
막다른 골목으로 몰아  넣지 않습니다. 그러면 고양이가 쥐에 물리는  우스운 꼴
이 일어납니다.”
 민비는 조용히 웃고 있었다.  처연해 보이는 웃음이었다. 대원군을 궁지로 몰아 
놓으면 민비가 역습을 받으리라는 사실을 우려하고 있는 것 같았다.

 1) 고종의  친정 선언은 11월 4일  밤 원로대신들이 고종을 접견하고  최익현의 
사형을 강력히  주장하면서 새벽이 될  때까지 고종을 몰아붙일  때 선언되었다. 
그러나 고종의 명에 의해 왕조실록과 승정원일기에는 기록되지 않는다.

 2) 대원군이 조경호에게 시집간 딸을  독살했다는 것은 「한국 천주교회사」(유
홍렬 저)에 언급되어 있다.

 3) 민비는 고종의 친정이 성공하자 내명부의 물갈이를 실시했다. 이때 경복궁에
서 자기유황이 터져 의금부에서 내관과 여관들을 잡아다가 문초하겠다고 하였으
나 대궐내에 형틀을 설치하고 스스로 범인 색출에  나섰다. 그리고 그는 범인 색
출보다 내명부의 물갈이에 온 힘을 쏟았다.

 4) 해월은  「매천야록」에서 신철균, 염종수, 안기영의  소실로 나온다. 그런데 
이들은 모두 역모에  관련되어 죽게 됨으로써 해월이 방부(남편을  잡아 먹는)하
는 여자라는 소문이 파다하게 나돌게 된다. 해월(염종수의 첩으로만 기록되어 있
다.)은 미모가 뛰어난 여인이었다. 염종수는 자신이 철종의  외삼촌이라고 거짓말
을 하고 다니다가 체포되어 죽었다.

제19장
우국지사(憂國志士)들

 1875년 새해가 되자  민비는 세자 책봉을 서둘렀다. 민비가 낳은  원자 척은 아
직 돌도 되지 않았으나 고종의 친정을 도모하고 원자를 낳았다는 기쁨만으로 만
족할 수가 없었다. 자신이 낳은 왕자가 세자가  되지 않으면 원자를 낳았다고 해
도 중전의 자리가  위태롭게 되는 것이다. 민비는 그 강박관념에서  좀처럼 벗어
날 수가 없었다. 대원군은 실각한 뒤에도  계속해서 민비를 제거하려고 절치부심
하고 있었다.
 (오라버니의 집에 자기황을 폭발시킨 것은 누가 뭐래도 대원군의 짓이야..........)
 그것은 금위대장 겸 무위소 도통사로 임명되어 있는 조영하의 보고로도 뚜렷이 
알 수  있는 일이었다. 세간에는  민규호가 민승호를 죽였다는  소문이 나돌기도 
했으나 그것은 근거없는  억측일 뿐이었다. 대원군은 여론을 다룰 줄  아는 선동
정치의 대가인 것이다.
 민비와 고종은 영의정 이유원을 세자 책봉도감으로 삼고 좌의정 이최응을 세자
부(世子傅)로 임명했다.  이에 앞서 우의정직을 사임한  박규수의 후임에 김병국
(金炳國)을 임명하고 제주도에 유배시킨 최익현을 방면했다. 최인현의 방면은 정
원(政院), 옥당(玉堂), 양사(兩司), 시원임대신(時原任大臣)이  일제히 반대를 했으
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세자 책봉은 2월 18일 인정전(仁政殿)에서 성대하게 거
행되었다.
 그러나 민비를 곤혹스럽게  하는 정보가 청국을 통해 들어왔다.  그것은 청나라
에서 왕자의  어머니가 왕비거나 후궁이거나  가리지 않고 장유(長幼)의  순서에 
따라 세자를 책봉하려 한다는 것이었다.
 (곰 같은 되놈들! 제 놈들이 무엇이건대 조선의 왕실까지 간섭을 해....!)
 민비는 피가  나도록 입술을 깨물었다. 그러나  민비는 화를 내는  대신 대책을 
세워야 했다.
 “영상, 영상께서 세자책봉 주청사로 청국에 다녀오셔야 하겠습니다.”
 민비는 영의정  이유원을 중궁전으로 불러들였다. 세자를  완화군으로 책봉하게 
할 수는  없었다. 그렇게 되면  대원군을 몰아내며서까지 고종의  친정을 도모한 
일이 모두 수포로 돌아가는 것이다.
 (세자 책봉을 어찌 이리 서두르시는가....?)
 영의정 이유원은  머리를 조아린 채 대답을  하지 않았다. 세자  책봉 주청사의 
임명이 고종의 뜻인지 민비의 뜻인지 헤아릴 수 없었던 것이다.
 “전하께서 그리 하라고 하셨습니다.”
 “신 묘당에 돌아가 논의하겠사옵니다.”
 “묘당에서 논의할 일이  아닙니다. 이는 왕명이니 지체 없이  거행하셔야 합니
다.”
 “원자께서 아직 돌도 되지 않으셨사옵니다.”
 “세자의 자리는 막중한  자리입니다. 영상은 노숙한 정승인데 어찌  그만한 사
리를 모릅니까?”
 “송구하옵니다. 중전마마.”
 “영상. 나는 정궁(正宮)입니다. 정궁의 몸에서  낳은 원자가 세자로 책봉되어야 
하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민비의 목소리는 한마디 한마디가 명쾌했다.
 “삼가 명을 받자옵겠습니다.”
 영의정 이유원은 도리없이  민비의 지시를 수렴했다. 민비의 지시를  거부할 명
분이 전혀 없었다.
 “빠른 시일 내에 차비를 해서 청국에  다녀오셔야 합니다. 예조에 명을 내려서 
사신의 준비를 갖추도록 하겠습니다.”
 “신 중전마마의 명을 받자와 반드시 소임을 다하고 돌아오겠습니다.”
 “영상. 분명히 알아 두세요.”
 민비가 단호하게 말했다.
 “나는 원자가 세자로 책봉되지 못하면 내 목숨을 버릴 것입니다!”
 민비가 얼음처럼 싸늘하게 외쳤다. 영의정 이유원은  민비의 말에 흠칫 몸을 떨
었다. 민비가  목숨을 버리겠다고 하는 것은  단호한 결의를 표명하는 말이었다. 
마치 너도 죽을 각오를 해라, 하는 뜻이 숨어 있는 비수 같은 말이었다.
 (중전마마는 무서운 분이야..............)
 예학을 숭상하는 조선에서는 내외가 엄격했다.  특히 궁궐에서는 외인이 내명부
를 가까이 하는  것을 엄격하게 금지하고 있다. 수렴청정을 하는  대비들조차 발
을 치고 대신들을 마주한다. 그러나 민비는 이미  그 모든 것을 혁파하고 묘당이
거나 옥당이거나 가리지 않고 대신들을 불러다가 분부를 내리고 있었다.
 영의정 이유원은 완고한  유학자였다. 일찍이 함경도 관찰사를 지낸  탓에 로서
아와 자주 접촉을 하여 그만해도 국제적 감각을 갖고 있었으나 궁중법도를 무시
하고 대신들을 휘몰아치는 민비가 마뜩찮았다.
 (궁중마마가 이토록 대가 세니............)
 영의정 이유원은 꿇어  엎드린 채 그런 생각을 했다. 이유원의  늙은 눈에는 새
파랗게 젊은 왕비가 국왕보다 더욱 강인해 보였다.
 “청나라가 조선의 상국이라는  체면을 유지하고 있으려면 원자를 세자에 책봉
해야 할 것입니다.”
 “중전마마.”
 “들으세요. 영상! 이는 내가 청나라를 협박하려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예.”
 “명색이 중전입니다. 중전이  낳은 원자를 세자로 책봉해 주지  않는다면 청국
을 상국으로 섬기지 않겠습니다.”
 “중전마마.”
 “병인양요 때 청국이 무어라고  했습니까? 또 신미양요 때는 무어라고 했습니
까? 법국이 조선을 원정하겠다고  했을 때도 청국은 스스로 말하기를 조선은 청
국의 속국이  아니라고 했고, 신미양요  때도 청국은 미리견에게  조선인 속국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나는 그때 이미 청국에 사대(事大)의 예를 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이제 와서 청국이 세자 책봉이  이러니 저러니 할 수는 없
는 것입니다.”
 영의정 이유원은 민비의 목소리가 가을 아침 서릿가루가 날리는 것처럼 차갑게 
느껴졌다. 민비의 목소리가 울부짖듯, 가슴에 맺혀 있는 울분을 토해내듯 비장해
서가 아니었다. 민비의 말 한마디 마디가 이로(理路) 정연해서 당대의 재상인 이
유원도 감히 반박할 엄두가 나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나 이빨 빠진 호랑이라고 해서  건드리고 싶지는 않사옵니다. 영상께서는 
어떻게 해서든지 청국 예부를 잘  설득해서 세자 책봉의 허락을 받아 오시기 바
랍니다.”
 민비의 얘기는 그것으로 끝이 났다. 영의정  이유원은 대궐을 나와 의정부 관아
로 향했다.  날씨는 눈발이라도 날릴 듯이  찌푸등했다. 의정부 관아는 광화문을 
마주보고 오른편에 위치에 있었다. 대원군이 경복궁을  중건한 뒤 광화문 앞에 6
조 관아를 번듯하게 세워 각 관아는 한 나라의 도성다운 위용을 갖추고 있었다.
 “무슨 말씀이 계셨소이까?”
 영의정 이유원이 의정청으로  들어서자 좌의정 이최응과 우의정 김병국이 기다
리고 있었다. 이유원은 회의용의 다탁에 좌정했다.
 “어떤 일이 있어도 원자마마의  세자 책봉의 윤허를 받아 오라는 엄명이 계셨
소.”
 “청나라에서는 적서(嫡庶)를 따지지  않고 장유를 가려 세자에  책봉하라는 국
서를 보내지 않았습니까?”
 우의정 김병국이 근심스럽게 물었다. 청나라에서  완화군을 세자에 책봉해 버리
면 무서운 정쟁이 시작될 것이라는 예감이 들어 불안했다.
 “그보다도 중전마마는 청국에 사대의 예를 버릴 것 같은 생각이 들었소.”
 “사대의 예를 버리다니요?”
 “지난 번에 죽동  폭사사건이 있었을 때도 중전마마께서 그런  말씀을 하셨소.

 “어떤 말씀을요?”
 “이제는 조선도 사대의 예를 버리고 자주 독립을 해야 한다고.... 나는 그때 무
심결에 흘려 들었는데....”
 “허어!”
 김병국이 눈을 둥그렇게 뜨고 탄식을 했다.  자주 독립은 대원군조차 입에 올리
기를 삼가하던 말이었다.
 “그건 그렇고 나는  조만간 청나라로 떠나야 하오. 두 분  대감은 일본의 서계
를 받아들일 것인지 말 것인지 그 문제를 잘 결정하도록 하시오.”
 “일본과의 교통은 시대의  흐름이라는 것이 세간에 자자합니다. 아직  전체 사
림이 반발을 하고 있으나 더 늦출 수는 없을 것입니다.”
 좌의정 이최응이 모처럼  입을 열어 대꾸했다. 그는 이미  민비로부터 일본과의 
개국을 전향적으로 추진하라는 지시를 받고 있었다.
 “일본은 아직도  오만하기 짝이 없습니다.  일본에 정한론이  팽배하지 않습니
까? 일본의 서계를 받아들여서는 안됩니다.”
 김병국이 반대를 하고 나섰다. 
 “주상전하께서도 일본과의 개국은 필연적이라고 하셨소.”
 이유원이 김병국을 힐난하듯 말했다. 김병국의 개국 반대는 요지부동이었다.
 “전하께서 서교도를  가혹하게 다루지 말라고  윤지를 내리셨다는데 사실입니
까?”
 “그렇소.”
 “서교도는 혹세무민의 사도가 아닙니까? 그 일은 섭정을 하신 대왕대비마마께
서 엄명을 내려  사도를 뿌리뽑으라 하셨습니다. 대왕대비마마의  언문교지의 묵
향이 아직도 선연한데 서교도를 그냥 두라는 것입니까?”
 “사학을 뿌리뽑는다고 1만 명이 옥사를 했지 않소?”
 이최응이 눈을 부릅떳다.  김병국은 1만 명이나 옥사를 했다는 바람에  더 이상 
반박을 하지 않았다.
 이튿날 영의정 이유원은 청나라로 떠나 좌의정 이최응은 비밀리에 부산으로 떠
났다.
 “내가 알기에 일본과의  개국은 거부할 수 없는 시대의  흐름입니다. 판중추부
사 박규수 대감의 말씀을  들어 보면 오히려 때 늦은 감이  있습니다. 스스로 천
황(天皇)이라 칭한다니 가소롭기 짝이 없는 일입니다. 그러나 서양문물을 일찌감
치 받아들여 군대가  매우 강성하다고 합니다. 일본은 군대가 강성해  지면 이런
저런 구실을 붙여 조선을 노략질해 왔습니다. 나는  일본과 개국을 하는 것이 썩 
내키지 않으나 시대의 흐름이 그렇다고 하니  거역할 명분이 없습니다. 일본은 6
년 전부터 조선과  교통하기를 원했으니 세자 책봉의 문제도  이면(裏面)에서 거
론해야 할 것입니다. 일본은 지금 오끼나와 정벌을  하고 철병을 하기에 앞서 여
러 가지 조건을  내세우고 있다고 합니다. 이때 조선이 일본에게  수교를 해주는 
조건으로 청국에 압력을 넣어 달라고 부탁하면 조선과 수교를 할 욕심으로 일본
이 거절하지 못할 것입니다.
 민비가 좌의정 이최응에게 지시한 말이었다.  민비는 영의정 이유원을 세자책봉 
주청사로 청국에 보내는 한편  좌의정 이최응을 보내 세자책봉에 일본까지 이용
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이 일은 대원군 계열의 전 왜학훈 안동준에게 탐지되어 대원군으로부터 
신랄한 비난을 받았다. 민비는 허겁지겁 이최응을  귀경시킨 뒤 안동준에게 공물
(公物)을 축내고 변정(邊情)을  소란케 했다는 죄목을 뒤집어  씌워 처형해 버렸
다.
 민비는 음력 4월 5일 또다시 왕자를 낳았다.  그러나 그 왕자는 열사흘 만에 죽
었다. 민비는 이로써 두 왕자와 공주를 잃는 슬픔을 맛보아야 했다.
 일본은 이  해에도 조선과 수교하려는  움직임을 보였다.  일본은 쇄국주의자인 
대원군이 정계에서 물러나 있을 때 조선과 수교를 하려고 모리야마 시게루를 조
선에 파견했다. 모리야마  시게루는 일본 외무대신 테라지마  무네로리와 대마도 
도주(島主) 무네 시게마사가 조선의 예조판서에게  보내는 문서를 휴대하고 있었
다. 그러나 이들  문서에는 조선측에서 문제를 삼고 있던  황(皇)과 칙(勅)이라는 
말이 그대로 들어 있어서 외교적인 타결은  전혀 불가능했다. 그것뿐만이 아니었
다. 일본의 태정대신(太政大臣) 산조 사네토미는 모리야마가 일본을 출발하기 전 
비밀훈령을 내렸는데 그것은 다음과 같은 것이었다.

1. 조선이 스스로 독립국이라고 칭하여 일본과  조선의 군주를 대등한 위치에 두
고 교섭을 하자고 주장하면 곧 상신하여 지령을 기다릴 것.

2. 조선이 스스로 청국의 속국이라고 칭하며  청국의 허락을 받지 않으면 교섭을 
할 수 없다고 할 때도 즉각 상신하여 지령을 기다릴 것.

3. 조선이 독립국이라고  칭하던 청국의 속국이라고 칭하건 어느  경우에라도 조
선 국왕과  태정대신이 대등하다고 인정하는 조건에서  옛 친선관계를 재개하고 
싶다고 제안하면 받아들일 용의가 있다고 답할 것.

 이것은 일본 천황을  조선 국왕의 상위에 놓고 국교를  재개하라는 명령이었다. 
일본의 이와같은 태도는  일본이 청국과 대등한 위치에 있고, 청국의  영토인 오
끼나와를 정벌하는 시점에서 청국의 속국이라고 자청하는 조선을 일본까지 속국
으로 무시하고 있는 것을 드러내고 있는 셈이었다.
 모리야마는 부산에  도착하자 새로  임명된 동래부사 황정연(黃正淵)과  활발한 
접촉을 시도했다. 그러나  협상은 지지부진했다. 모리야마는 일본에 구원을 요청
하는 다급한 전문을 보냈는데 그것은 다음과 같은 것이었다.

 교섭은 계속하고 있으나  해결될 전망은 그다지 보이지 않습니다.  조선의 유생
들은 배외주의자인 대원군의 환궁을 촉구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만에 하나 실각
한 대원군이 도성으로  돌아오게 되면 교섭은 더욱 요원해 질  것입니다. 그러므
로 조선 해안을 측량한다는 구실로 군함 2,3척을  보내어 무력 시위를 하게 해주
십시오.
 그러나 일본에서는 아무런  훈령을 보내 오지 않았다. 이에  모리야마는 일본으
로 돌아가고 동래부사 황정연은 조정에 교섭결과를  장계로 알리게 되었다. 동래
부사 황정연이 올린 장계는 다음과 같은 것이었다.
 일본의 사신에게 서계의 부당한  점을 알리고 아국이 납득할 수 있도록 조처할 
것을 요청하는 교섭을 거듭하여  몇개 항을 아국의 요청에 따르겠다고 하였으나 
다른 몇 개 조항은 저들의  조정에서 훈령을 받아야 한다고 하므로 쉬이 타결될
것 같지는 않습니다.
 지금까지 타결이 되지 않는 항목은,
 1. 서계가 대마도주를  거치지 않고 일본 외무경 사도종칙의 이름으로  되어 있
사온데 이는 왜와 교린 3백년에 전무한 일이라 허교하기가 불가합니다.
 2. 교린하자는  저들 스스로 왜주를  높이어 천황이라 칭하는  것은 선린하자는 
자의 예의가 아니기에 불가합니다.
 3. 서계 접수차 하는 연회의 절차에 대해서도  저들은 교린을 청하는 자의 도리
로 스슷로를 낮추어야  할 것인데도 아국과 동등한  대우를 요구하고 있으니 이 
또한 불가합니다.
 이상의 세 가지 하아목에 있어서 일본은 무례한 요구를 하고 있으므로 신의 생
각으로는 이를 반드시 바로 잡은 연후에야 허교를 하여야 한다고 사료되옵니다.
 동래부사 황정연의 장게를  놓고 고종은 시원임대신들을 모두 불러들여 어전회
의를 열었다. 이때는 영의정 이유원도 세자책봉  주청사로서의 소임을 무사히 마
치고 돌아와 있었다. 민비의 우려와 달리  청국은 상국으로서의 관대함을 보이려
고 그랬는지 민비가 낳은 왕자 척에게 세자 책봉을 허락한다는 조칙을 내렸다.
 “경들도 동래부사 황정연의 장계를 보았으니 이를 어찌 처결해야 할지 말씀들
을 하여 보시오”
 고종이 용상에 좌정하여 대신들 을 굽어보며 의향을 물었다.
 “신 영의정 이유원 아뢰옵니다. 동래부사  황정연의 장계를 살피건대 세가지가 
불가하다는 것은 이치에  합당한 것으로 사료되옵니다. 동래부사  황정연에게 윤
음을 내리시어 그대로 처결하게 하시옵소서.”
 영의정 이유원이 먼저 자신의 의견을 개진했다.
 “허면 세 가지 불가한 항목을 바로 잡은 뒤 교린하자는 말씀이요?”
 “그러하옵니다.”
 “왜주가 세 가지 불가한 항목을 바로 잡지 않으려 하면 어찌하는것이 좋겠소?

 “전하, 일본과의 교린은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처지에 와 있사옵니다. 비록 세 
가지 불가 항목이 바로 잡히지 않아도 교린을 허락해야 할 것으로 아옵니다.”
 “신 우의정 김병국 아뢰옵니다.”
 그때 우의정 김병국이 머리를 들고 고종을 향해 입을 열었다.
 “말씀하시오.”
 고종이 용상에 비스듬히 기대어 우의정 김병국을 살폈다.
 “신의 좁은 생각으로는 세 가지 불가 항목이 바로 잡힌다 해도 일본과 교린을 
하는 것은 크게 득이 되지 않을 것으로 보옵니다.”
 김병국의 말에 원임대신인 김병학,  홍순목, 한계원 등이 일제히 동조하는 눈빛
을 보냈다.
 “전하, 신이 듣기에 일본은 덕천 막부가  쓰러지고 명치라는 자가 왕권을 회복
하였는데 이를 명치유신이라고  한다고 하옵니다. 그러나 이  명치유신이 일어난 
배경을 살펴보면 해괴하기 짝이 없는 연유가 있다고 하옵니다.”
 “해괴하기 짝이 없는 연유가 있다고요?”
 고종이 상체를 내밀며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대신들의 얼굴에도  일제히 술렁
거리는 빛이 떠올랐다. 그것은 미세한 공기의  파장처럼 대신들의 눈에서 눈으로 
전달되었다.
 “일본이 유신을  단행한 것은 본래  농민들로부터 비롯되었다고  하옵니다. 그 
무렵 일본 농민들은 덕천 막부의 학정을 견디다 못해 새로운 농민운동을 전개했
사온데 그것이 일신일신우일신에서  나온 말로 새롭게, 새롭게,  날마다 세롭게... 
라는 뜻이 있사옵니다.”
 “맞소. 대학에 그런 말이 있소.”
 고종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대신들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김병국을 주시했다.
 “명치라는 자는 일본 농민들의 이러한 운동을 이용해 일신일신어일신 하고 우
일신을 어일신으로 바꾸어 강력한 왕권을 회복했다고 하옵니다.”
 “그것이 어찌 해괴하다는 말씀이오? 어일신이라면 임금과 함께 새롭게 하자는 
뜻이 아니오?”
 “예. 임금을 따라 날마다 새롭게 하자는 뜻이옵니다. 허나 이 명치라는자는 제 
아비를 참살한 대역죄인이라고 하옵니다.”
 “우상, 왜주가 정녕 아비를 참살했다는 말씀이오?”
 고종이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대신들은  웅성거리며 서로의 얼굴을 힐끔거리다
가 다시 김병국을 주시했다.
 “그러하옵니다.”
 “그렇다면 왜주는 난신적자가 아니오?”
 “전하! 그러한 까닭으로  조선이 일본과 교린을 하는 것은  세가지 불가항목이 
바로 잡힌다고 하여도  허락하여서는 아니될줄로 아옵니다. 옛  성현이 이르기를 
효도를 다하지 않는  자와는 가까이 하지 말라 하였사옵니다. 하물며  아비를 참
살한 왜주와 교린을 허락한다면 장차 백성들에게 무엇이라고 설득을 하겠사옵니
까? 이는 효성이 지극하고 어진 백성들을 다스리는  법도가 아닌 줄로 아옵니다.

 “전하, 우상의 간언이 합당한 줄로 아뢰오.”
 “전하, 그러하옵니다. 왜국과 교린은 합당치가 않사오니 서계를 물리치라 하시
옵소서.”
 “알겠소. 우상의 말씀을 듣고 보니 왜주는 참으로 황당하기 짝이 없는 자구려. 
그러면 동래부사 황정연에게........”
 “전하!”
 우의정 김병국의 의견에 원임대신들이 일제히 찬성을 하고 고종이 그 의견대로 
윤허하려고 하자 판중추부사 박규수가 큰 소리로 외쳤다.
 “신 판중추부사 박규수 아뢰오!”
 고종이 의아한 표정으로 박규수를 살폈다.  고정은 대왕대비 조씨로부터 박규수
의 인품과 학문에 대해서 자세히 들은 일이  있었다. 박규수는 원래 대원군 계열
의 사람이었다.  박규수는 나이 마흔이 되어서  관직에 나선뒤 정언, 병조좌랑등 
내직을 역임한 뒤 외직인 부안  현감을 지내고 다시 내직으로 돌아와 사헌부 지
평등 청관을 역임했다.
 그러나 박규수가  괄목할 만한 활동을 한  것은 진주민란이 일어나서 안핵사로 
파견되어서의 일이었다.  박규수는 진주민란의  원인이 삼정의 문란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자세희 밝히고 이를 근절하지 않는 한 지방관리들의 부패와 탐학이 계
속되어 나라가 도탄에 빠진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러한 박규수의 주장은 집정초
의 대원군과도 일치하는  것이어서 대원군은 박규수를 병조참판, 대제학, 공조판
서를 역임시킨되 평안도 관찰사에 임명하고 삼정의 문란을 바로 잡아 서정을 개
혁하려 했던 것이다.  그러나 대원군이 완강한 쇄국정책을  강행함으로써 박규수
와 틈이 벌어지게 되었던 것이다.
 “신이 세계 정세를  살피건대 삼면이 바다로 둘러싸인 조선으로서는 밀려오는 
외세를 감당하기가  어려워 법국이건 미리견이건 개국하지  않으면 안될 입장에 
있사옵니다. 일본의 왜주가 슷스로를 존대하여 황상이니  조칙이니 하는 말을 서
계에 사용하고 있음은 오랜  교린에 위배되는 행위이나 청국에서는 이미 일본을 
인정하고 일본과 사신 왕래를 하고 있는
실정이옵니다. 이러한  사실로 미루어 보건대  개국은 필연적인 대세라고  할 수 
있사옵니다. 병인양요대  강화도가 함락되고  신미양요때 어재연 장군의  순절이 
있었다고 하나 강화도가  유린된 것은 모두 양이의  군선 몇척 때문인가 하옵니
다. 이제 우리도 양이나 왜국이라고 하여 오랑캐로만  볼 것이 아니라 배울 것은 
배워야 할 줄로 아옵니다. 왜주가 비록 아비를 참살한 대역죄인이요, 난신적자라
고는 하나 아비를 참살한 축생 같은 자의 부덕은 버리고 일본의 좋은 것만을 취
한다면 교린하여 잃을 것이 없다고 사료되옵니다.“
 박규수의 말에 고종은 감탄하는 빛을 얼굴에 띠었다.
 “신 좌의정 이최응 아뢰오.”
 이때 좌의정 이최응이  다시 입을 열었다. 홍순목과 김병국등이  박규수의 말을 
반박하려는 순간이었다.
 “판중추부사 박규수 대감의 말씀은 시의에  적절한 것이옵니다. 조선이 사대의 
예를 바치고 있는 청국 또는  일본을 비롯해 양이 여러나라와 이미 개국을 하였
고 예부에서 조선에 객국울 권면하고 있음을 통촉해 주시옵소서.”
 고종은 가민히 대신들 을 훑어보고 있었다.  대원군이 집정을 하고 있을때는 대
신들의 의견이 분분한 일이 없었다.
 “신 이조판서 민규호 아뢰옵니다.”
 그때 민승호 폭사사건이 있은 후 이조판서에 제수된 민규호가 입을 열었다.
 고종은 그때서야 정신이  번쩍난듯 민규호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지난  밤 민비
가 무조건  민규호의 말을 가납하라고  일러주던 말이 생각났던  것이다. 고종은 
대신들의 의견이 상반되자  어떤 것을 취해야 할지  내심 당황하여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었다.
 “전하, 일본은 이미  군선을 부산 앞바다에 보내어 조선을  위협하고 있사옵니
다. 이떼에 일본과 교린을 허락하지 않으면 임진년과  같은 큰 병란이 있을까 우
려되옵니다. 판부사 대감의 말씀을 쫓아 교린을 윤허하여 주시옵소서.”
 “전하, 윤허하여 주시옵소서.”
 영의정 이유원이 동조하고 나섰다.
 “경들은 들으시오. 과인이 생각에도 일본과의 교린은 필연적인 시운인것 같소. 
그러나 동래부사 황정연의 장계대로  서계의 세가지 불가항목을 바로 고치지 않
고 서계를 접수하는 것  또한 이치에 맞다고 볼수 없소. 지금  날이 몹시 더우니 
대청에 나가서 쉬어야 하겠으니 경들이 충분히 논의해서 결정토록 하오.”
 고종은 서계의 접수를 대신들에게 미루었다. 음력 5월 10일의 일이었다.
 민비는 이때 왕자  척을 돌보고 있었다. 왕자 척은 돌이  지나고 세자까지 책봉
되었으나 병치레가 심했다. 돌을 지났는데도 일어서지를 못했다.
 (어째서 내가 낳은 왕자는 몸이 이다지도 허약한가?)
 민비는 가슴을 저미는  듯한 슬픔을 느꼈다. 첫번째 낳은  왕자는 대변불통증상
으로 사흘 만에 죽었고  두번째는 공주를 낳았으나 돌도 지내지 못하고 8개월만
에 죽었다. 세번째가  세자 척이고 네번째가 태어난지 보름도 못되고  죽은 왕자
였다. 애통하기 짝이 없는  일이었다. 민비는 왕자 척이 병치레를 할때마다 가슴
이 덜컥덜컥 내려앉고는 했다.
 게다가 대원군이 실각한 지 불과 1년 남짓 되었을 뿐인데도 대원군을 청환하라
는 상소가 빗발 치고 있었다.
 집안에 어려운 일이 생기면 부모에게 알려  말씀을 따라야 하고, 나라가 백척간
두에 서게 되면 국가의 원로를 모시어 경륜을  들어야 합니다. 작금에 왜국이 남
쪽 변방을 소란케 하여 민심이  날로 흉흉해 지고 있으니 양주 직곡산장에 계시
는 국태공 저하를 청환하시어 국가 백년대계를 의논하소서.
 경상도 유생들의 상소였다.
 “나랏님이 성년이 되시면  마땅히 만기를 친재하시는 것이 법도인데 어쩌자고 
유생들은 이러한 상소를 올려 전하의 성총을 흐리게 하는 것인가.”
 민비는 승정원으로 상소가  빗발치듯이 올라오자 깊은 탄식을 했다.  고종이 친
정을 시작한 지  이제 겨우 1년 남짓  되는 것이다. 그 동안  고종이 폭군이라도 
되어 학정이라도 한듯 유생들이  상소로써 대원군을 다시 돌아오게 하라고 하는 
것이 서글펐다.
 고종은 밤늦도록 국정을 보살피고 있었다.  백성들의 원성이 자자하던 당백전을 
폐지하고 문세도 철폐했다. 그런데도 상소는 계속 쏟아지고 있었다.
 왜국은 아비를 참살한 명치라는  자가 서야 오랑캐의 풍속을 배워 양이와 같아
진 지가 오래이옵니다. 조선은 지난 3백년  동안 통신사를 보내어 어리석은 왜국 
백성들을 깨우쳐 왔는데 이제 와서 발칙하기 짝이 없는 서계를 접수하라고 하고 
교린을 하자고 하니  실로 오만하기 짝이 없는 일이라고 할  것이옵니다. 국태공 
저하께서 대정을 맡아 보실 때는 방자한 왜국의 서계를 단호히 물리쳤사온데 이
제 조정에서 가양이를 불러들이는 논의를  하고 있다니 이 어찌 통탄할 일이 아
니겠사옵니까? 돈수백배하고 아뢰오니  국태공 저하를 환저케 하시어 왕실의 화
합을 도모하시고 외환에 방비하도록 하시옵소서.
 경상도의 유생  유도수로부터 비롯된 상소는 유림  전체로 파급되었다. 이상철, 
이학수등이 잇따라 상소를 올렸다.
 “시세를 분별하지 못하고  언로를 내새워 국론을 분열시키는 유생들의 상소는 
심히 그릇된 행위다. 유생들을 원지에 유배하라!”
 고종은 단호하게  어명을 내렸다. 아버지  대원군을 또다시  궁중으로 불러들여 
국정을 맡기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유생들의 상소는 그치지 않았다. 5월에 들자 
경기도 유생 조충식, 영남유생  최화식, 전라도 우생 조병만이 잇따라 상소를 올
렸으며 한성의 임도준, 강원도의  이병익, 평안도의 이수 등이 상소를 올려 대원
군을 환저케 하라는 여론이 비등해 졌다.
 “중전마마, 이는 필시  양주에 칩거하고 있는 대원군이 유생들을  선동하고 있
음이 분명하옵니다.”
 이조판서 겸 무위도통사인 민규호가 중궁전을 찾아와 고했다.
 “대원군이?”
 민비는 눈꼬리를 살짝 치켜올렸다. 대원군이  선동정치에 뛰어난 인물임에는 분
명했다. 그러나 이제는 양주에 칩거하여 권력을 향유하고 있지 못했다.
 “유생들을 선동한다고 해서 대원군에게 무슨 득이 있겠소?”
 “중전마마, 대원군은  비록 양주에 칩거하고  있으나 아직도  조정 대신들에게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사옵니다.”
 “음”
 민비는 입술을 깨물고  생각에 잠겼다. 조정 대신들을 굳이  분류한다면 아직도 
대원군 겨열이 요직을  두루 장악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러나 이 
나라는 국왕이 다스리는 나라였다. 국왕만 강력하면  신하나 백성들은 그다지 문
제될 것이 없었다.
 (일본의 서계가 조선의 입장에서 보면 받아들이기 어려운 점이 있는  것도 사실
이야...)
 민비는 생각을 계속했다.
 (그런데 대원군을 환저케  하라는 상소가 빗발치고 있으니 해괴한 노릇이  아닌
가.....?)
 상소문의 문구는 단순히  대원군을 환저케 하라는 것에 그치지  않고, 고종에게 
불효한 임금이라고 몰아치고 며칠내에 돌아오게 하라는 강경한 비난까지 서슴없
이 내뱉고 있었다.
대원군은 정계에서 실각한  이후 스스로 양주의 직곡산장으로  은거한 것이었다. 
비록 타의에 의해 야인이 되어 직곡산장에 은거한 것이었으나 민비나 공종 쪽에
서 양주로 내친  것이 아니었다. 유생들의 상소는 핵심을 제대로  알지도 못하고 
터무니없는 주장을 하고 있을 뿐이었다.
 (대원군이 유생들을 사주한 것인가?)
 민비는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었다.
 (설령 대원군이 사주했다고 해도 손을 쓸 수는 없어.........)
 민비는 너그럽게 생각했다.
 “중전마마.”
 민규호가 생각에 잠겨 있는 민비를 불렀다.
 “대원군을 단순히 주상전하의 생친이요,  중전마마의 시아버님으로 생각하여서
는 아니되옵니다.”
 민규호는 민비의 마음을 꿰뚫어 보고 있었다.
 “경복궁 교태전의 화재, 민승호  대감 폭사사건, 흥인군 대감댁의 화재를 생각
하시면 대원군의 인물됨이 어떠하리라는 것을 짐작하시리라 믿사옵니다.”
 민비는 민규호의 말에  가슴이 찌르르 울리는 것을 느꼈다.  민승호와 어미니의 
죽음, 어린 조카의 죽음을 생각하자 가슴이 타는 것 같았다.
 민승호는 불과 45세를  일기로 세상을 마쳤다. 권모술수도 능하고  성격도 유순
하며 대원군을 실각시키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었다.  그런 민승호가 자신의 경
륜을 미쳐 펼쳐 보지도 못한채 비명에 죽은 것이다.
 (이것으로 대원군과  나의 은원은  끝내여 해, 더  이상의 희생은  필요하지 않
아..........)
 민비는 민승호의 폭사사건이 있은 후 더  이상 사건을 확대하지 않았다. 신철균
을 참형에 처한뒤 대원군의  수족이나 다름없는 천하장안을 잡아다가 국문을 했
으면 대원군이 연루되었다는것을 충분히 밝힐 수  있었을 것이었다. 그러나 민비
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대원군과 대립을 가능한  피하고 싶은 것이 민비의 생각
이었다. 민승호의 죽음으로 대원군이 자신에 대한  보복을 끝내기를 기대했던 것
이다.
 그러나 아무것도 모르는  유생들은 상소문을 올려 고종을 탄핵하고  있었다. 무
엇인가 대책을 세우지 않으면 안된다고 생각했다.
 “그러면 어찌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민비가 민규호를 서늘한 눈빛으로 쳐다보았다.
 “유생들을 국문하여 배후를 밝히심이 옳을 줄로 아옵니다.”
 “배후가 대원군이라는 것이 명약관화한 일인데 국문을 합니까?”
 “대원군이 배후라는 것은 심증만 있지 물증이 없사옵니다.”
 “허면 물증을 찾아내어  대원군이라는 것이 밝혀지면 어찌 처결하시겠습니까?

 “.......”
 민규호는 민비의 단도직입적인  질문에 말문이 꽉 막혔다. 대원군을  배후로 밝
히는 것에만 골똘했지 대원군의 처리에 대해서는 깊이 생각해 보지 않았던 것이
다.
“대원군에게 사약을 내리시겠습니까?”
 “........”
 “그도 아니면 대원군을 제주도로 위리안치하겠습니까?”
 “........”
 “들으세요! 승호 오라버님이  비명에 돌아가신 후 민문의 실질적인  두령은 이
조판서 대감 한  분뿐입니다. 대원군이 비록 우리 민문을 적대시하고  있으나 주
상전하에게는 생친이요, 나에게는  시아버지이고, 어린 세자에게는 할아버지입니
다. 비록 대역죄를  짓고 모반을 도모했다고 해도 그에게는 사약을  내릴수도 없
고 원지에 유배할 수도  없다는 사실을 왜 모르십니까? 더욱이 임금에게 충성을 
하고 부모에게 효도를 하는 것을  근본으로 삼고 있는 이 나라에서 어찌 대원군
에게 위해를 가할 수 있겠습니까? 이는 당치 않은 일입니다.”
 민규호는 머리를 푹 숙였다.  민비의 말이 비수처럼 가슴을 찌르는 기분이었다. 
놀랍게도 민비는 궁중에 들어 앉아서도 새상물정을 훤하게 꿰뚫어 보고 있었다.
 “유생들의 상소가 잇따라 올라오고 있으니 뭔가 대책이 있어야 하겠지요.”
 민비가 낮게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민비도 가슴이 답답했다.
 “유생들의 상소는 왕부의 위엄을 실추시키고 있사옵니다.”
 “그러면 이리 하십시오. 먼저 상소를 올리는 우두머리들을 처벌하십시오.”
 민규호가 고개를 숙여 보이고 물러갔다.
 다음날 고종은 경연석에서  허무맹랑한 상소로 왕부의 위엄을 실추시키는 자는 
엄벌에 처하겠다고 선언했다.  그러자 이번에 조정의 원로대신들이  일제히 반발
하고 나섰다.
 예부터 선비라 함은 임금에게  바른 말씀을 아뢰는 것을 스스로의 본분으로 알
고 있사옵니다. 이제  성상께서 충간하는 유생들을 엄벌에  처하겠다고 말씀하시
니 이는  언로를 막는 일이 될  것입니다. 그들의 상소가 비록  사리에 합당하지 
않고 거친 언사를 사용하고 있다고 하더라도 어진 임금께서는 순한 말씀으로 그
들을 깨우쳐야지 형벌을 남용하여서는 아니될 것이옵니다.
 김병학, 홍순목, 한게원, 우의정, 김병국 등이 연명으로 고종을 성토했다.
 “경들은 들으시오! 유생들의 상소는 국론을 오도하고  분열케하고 있으니 이는 
망국지변이나  다름없소!  경들은 순한 말로 유생들을 깨우치라 하고  있으나 그 
뒤에 사주하고 있는 자가 있음이 분명하오! 앞으로는  국태공의 정양처에 조정의 
동정을 알리고 국태공의 지시를 받아 조정의 대소사를 논하려는 자는 두 임금을 
섬기려고 하는 자로 알고 극형으로 다스릴것임을 명심하시오!”
 연명으로 상소를 올린 빈청(의정부)에 고종의 추상 같은 비답이 내렸다.
 대신들은 고종의 비답을 보고는 얼굴이 창백해  졌다. 고종의 비답은 전에 없이 
강경하여 그들은 더 이상 주청하지 못하고 황황히 물러나오고 말았다. 
 대원군의 환저를 촉구하는 상소는 그것으로 매듭이 지어졌다. 기묘한 일이었다. 
대신들의 상소와 유생들의 상소는  예부터 임금의 정사를 감시하는 언로의 역할
을 해왔다.  조선조는 임금의 전횡을 막기  위해 삼사(홍문관, 사헌부, 사간원)을 
두어 임금의 정치에  시시비비를 가리는 기능을 하도록 하였다. 그런데  이 제도
를 악용하여 대원군을 환저케 하라는 ( 내가 배란기를 잘못 꼽은 거야... )
  그런데 박상궁은 수태를 한  것이다. 배란기를 잘못 헤아린 것이 분명했다. 박
상궁은 수태를 한 사실이 드러나자 재빨리  승은을 입었다고 둘러댔다. 제조상궁
은 긴가민가했으나  승은을 입었다고 하자  더 이상 박상궁을  추궁하지 않았다. 
승은을 입었다고 하는  것은 임금과 잠자리를 같이 했다는 뜻이다.  임금과 잠자
리를 같이 하여 수태를 했다면  제조상궁은커녕 왕비인 민비조차 손을 댈 수 없
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박상궁이 엉겁결에 둘러댄  변명에 지나지 않았다.  그 변명이 
발각되면 박상궁은 혀를 뽑히고 사지를 잘리는  능지처참형에 처하게 될 것이다. 
물론 궁녀의 신분으로 외간남자와 사통을 해도 같은 형벌을 받게 된다.
  ( 어떻게든 도망을 쳐야 할 텐데... )
  박상궁은 입술이 타는 것 같았다. 제조상궁이 알고  민비가 알게 된 이상 도망
을 치지 않으면  끔찍한 죽음을 당하게 된다.  도망을 쳐야 한다. 그러나 경비가 
삼엄한 대궐에서 도망을 치는 것은 불가능하다. 궁녀가  궐외 출입을 할 때는 내
명부에서 발행하는 내명첩을 받아야 한다.
  그때 민비가 부른다는  무수리의 전갈이 왔다. 박상궁은 사색이 된  얼굴로 무
수리를 따라 가서 민비 앞에 부복했다.
  "이 봉서를 죽동에 전달해라."
  민비가 연상에서 봉서 한 통과 내명첩을 집어 들고 박상궁 앞으로 내던졌다.
  "중전마마."
  "여러 말 듣고  싶지 않다. 너에 대해서는 내명부에서 따로  처분이 있을 것이
다."
  민비의 목소리는 여전히 차가웠다.
  "삼가 명을 받들겠사옵니다."
  박상궁은 봉서와 내명첩을 받아 들고 중궁전을  물러 나왔다. 내명부에서 따로 
처분이 있을 것이라고  했으나 우선은 목숨을 부지하게 되어 기뻤다.  일단 궐외
로 나가서 어디론가 달아나면 그뿐이다.
  박상궁은 행장을  수습하여 장독교(가마)에 올라탔다.  종6품 정궁의 상궁이었
다. 궐외 행차에는 가마와 교꾼이 배정되었다. 박상궁은 죽동에 도착하자 민영익
에게 민비의 봉서를  올렸다. 봉서를 읽는 민영익의 얼굴이 파랗게  질리는 것을 
보고 내심 의아한 생각이 들었으나 박상궁은 흉중에 계획한 말을 조심스럽게 꺼
냈다.
  "아뢰옵기 송구하오나 이왕 궐외 출입을 하였으니 사가에 잠시 다녀올까  합니
다. 내명부의 교꾼들을 잠시 이 댁에 머물게 하여 주십시오. 부탁 올리겠습니다."
  "그러시지요. 심려하지 마시고 다녀 오십시오."
  "매번 부탁을 올려 송구하옵니다."
  "하하. 항아님께서 부탁이라니 당치 않습니다. 어서 다녀 오십시오."
  "그럼 ..."
  박상궁은 머리를 숙여  보이고 재빨리 민영익 앞을 물러 나왔다.  민영익은 민
승호가 죽은 뒤 민비의 친정에 양자로 들어와  날로 위세가 높아지고 있었다. 박
상궁은 죽동 민영익의 집을 나오자 장의를 뒤집어쓰고 왕십리를 향해 걸음을 서
둘렀다. 이미  사방은 캄캄하게 어두워져 있었다.  박상궁은 청계천 냇둑을 따라 
내쳐 뛰었다. 금방이라도 누군가 뒷덜미를 잡아챌 것 같아 가슴이 조마조마했다.
  만호 장안은 5월의 싱그러운 풀냄새가  그득했으나 조용했다. 이따금 선들바람
이 불어 지열에 달아 오른 더위를 식히고  있었다. 박상군은 동대문 근처에서 수
구문으로 방향을 틀었다. 이마에서 땀이 송송 배어 났다.
  이창현은 민승호의 집  폭사사건 때 두 눈을  잃어 왕십리 움막에서 기거하고 
있었다. 이내 수구문을  지났다. 언덕을 내려가자 논바닥에서 개구리가 개골개골 
울어 대는 소리가  들렸다. 한길 근처의 초가집들에 불빛이 가물거리고  어느 집
에선가 개가 영악스럽게 짖어 댔다.
  이창현의 움막은 불이 꺼져  있었따. 아니 불을 켜지 않은 것인지도  알 수 없
었다. 박상궁은 삽짝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어느 집에선가 다시 개 한 마리
가 짖기 시작했고, 그것이 신호라도 되는 듯이 마을의 개들이 일제히 짖어 댔다.
  (망할 놈의 개새끼들 !)
  박상궁은 입 속으로 뇌까리며 봉당으로 올라섰다.  그때 등뒤에 인기척이 느껴
졌다. 박상궁이  모골이 송연해 지는 듯한  기분을 느끼며 몸을 돌리는  순간 쉭 
하는 소리와 함께 칼날이 그녀의 오른쪽 어깨에서 왼쪽 허리께를 사선으로 베었
다.
  (아 !)
  박상궁은 비명소리도  지르지 못하고 검은 그림자를  부릅뜬 눈으로 쳐다보았
다. 그때 비린내가 확 풍기면서 피가 왈칵 쏟아졌다. 박상궁은 재빨리 자신의 가
슴을 움켜쥐었다. 손가락 사이로 뜨거운 것이 콸콸 흘러내리고 있었다.
  (아, 어떻게 해...)
  박상궁은 소리도  지르지 못하고 눈만  부릅뜨고 있었다. 자신이  어떻게 해야 
할지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았다. 자신이 이제 죽는다는  공포감과 두려움뿐이었
다. 그때 검은 그림자의 칼이 그녀의 가슴을 깊숙이 찔러 왔다.
  “헉!”
  박상궁은 숨이 컥 하고 막히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무엇인가 뜨거운 것이 목
구멍을 향해 왈칵 치밀고 올라 왔다. 박상궁은 그것을 힘껏 뱉어 냈다.
    3
  모리야마 시게루의 요청을 받은 외무대신 테라지마는 조선에 3척의 군함을 파
견하기로 결정했다. 일본이  파견하기로 결정한 군함은 운양호,  춘일호, 제2정묘
호였다. 이중 운양호는  영국으로부터 구입한 근대 장비를 갖춘  245톤급의 대형 
포함이었다.
  운양호는 5월 25일 예고 없이 부산항에  입항했다. 이에 왜학훈도 현석운은 모
리야마를 찾아가 항의했다.
  “군선이 예고도 없이 조선 영토에 입항할 수 있는가 ?”
  “이것은 교섭을 독촉하기 위한 것뿐이다. 초량진에  우리 대표가 상주하고 있
으니 당연한 일 아닌가?”
  “군선은 그대들 대표를 보호하기 위한 것인가?”
  “그렇다.”
  “그렇다면 우리가 그 배를 살펴봐도 좋은가?”
  “좋다. 우리는 조선측에 우리의 군선을 보여줄 용의가 있다.”
  모리야마는 현석운이 운양호에  승선하는 것을 쾌히 승낙했다.  현석운은 조선 
수군 17명을 이끌로  운양호에 승선했다. 운양호는 거대한  철선이어서 기껏해야 
범선밖에 볼수 없었던 현석운과 조선 수군으로서는 꼭 한번 보고 싶었던 군선이
었다.
  그러나 일단 운양호에 승선한 현석운 일행은 근대적인 장비를 갖춘 일본 군함
의 위용에 아연하지 않을 수 없었다. 운양호는  크기부터 거대했고 배 전체가 철
로 제조되어 웬만한 화포를 맞아도 끄ㄷㄱ조차 하지  않을 것 같았다. 게다가 그 
배는 소총으로 무장한  일본 정예 병사들이 수백 명이나 되고  군기도 삼엄했다. 
그러나 현ㅅㄱ운 일행이 더욱 놀란  것은 거대한 철선이 석탄을 이용한 불의 힘
으로 가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이 배가 강화도를 거쳐 한강으로 들어간다면 도성이 순식간에  유린될 위기헤 
처하겠군...)
  현석운은 운양호의 위력에  압도되는 듯한 긴장감을 느꼈다.  그때 운양호에서 
함포사격 연습이 일제히 시작되었다. 현석운 일행은  함포사격의 포성에 놀라 혼
비백산했다. 그들은 도망을 치듯이 운양호에서 하선했다.
  일본이 부산 앞바다에서 함포사격 연습을 한 것은 치밀한 계획에 의해 의도된 
것이었다. 비록 바다를 향해 함포사격을 해댄  것이었으나 포성에 놀란 동래부와 
부산포의 백성들은 서둘러 피난짐을 싸기까지 하는 소동을 일으켰다.
  운양호는 이어서 동해안을 따라 북상하며 조선을  위협했다. 그들은 함경도 영
흥만까지 진출했다가  부산으로 돌아와 조선과의 교섭이  실패로 돌아가자 일단 
나가사키로 회항했다.
  일본은 조선과의 소교협상이  지지부진하자 운양호의 함장 이노우가 가오루에
게 무력도발을 지시했다. 그러나 표면상으로는 청국의  우장 해안에 이르는 해로
를 측량한다는 구실을 내세웠다. 운양호가 나가사카를  출발해 강화도 연안에 이
른 것은 1875년 음력 8월 20일 (양력 9월 19일) 의 일이었다.
  이에 앞서 대원군은  양주 진곡산장에서 운현궁으로 환저했다.  최익현의 상소
로 실각한 지 2년이 채 못 되어서의 일이었다.
  유생들은 대원군의 환저를  촉구하는 격렬한 상소문을 올렸었다.  그러나 고종
은 대원군의 환저를 청하지도  않았을 뿐더러 조정의 소식을 대원군에게 알리는 
신하들조차 역적의 죄를 묻겠다고 단호한 명을 내려놓고 있었다.
  (내가 저를 어떻게 해서 왕위에 앉혔는데 모른 척해... ?)
  대원군은 그 소식을 듣고 주먹을 불끈 쥐었다.
  (어떻게 나에게 이럴 수가 있는가. 나이 어린 중전의 치마폭에 빠져 애비도 몰
라보는 용졸한 인간 같으니...)
  대원군은 표독한 민비보다 아들인 고종이 더욱 미웠다.
  (어쨌든 더 늦기 전에 운현궁으로 돌아가야 해, 나라가 누란의 위기에 처해 있
으니... )
  대원군도 일본이 부산표에서 무력도발을 해왔다는 소식을  듣고 있었다. 더 이
상 양주에서  머물러 있고 싶지 않았다.  그는 민비 일족이나 조정  대신들이 이 
난국을 어떻게 타개할지 지켜볼 요량이었다. 게다가  왜구는 무력을 앞세워 화친
을 요구하고 있으므로  진정 이웃 나라로서 교린을  하려는 것이 아니라 침략을 
하려는 의도가 부명한  것이다. 조정 대신들이 이 점을 간파해야  한다고 생각했
다.
  “의장을 갖춰라! 어떻게 하든지 왜구의 무리가 이  강토를 침략하려는 음모를 
분쇄해야 한다!”
  대원군은 비장하게 외쳤다.
  이내 행차가 마련되었다.  대원군은 남여를 탔다. 호위하는 군사들과 구종별배
들이 따르고 벽제 소리가 드높았다.
  날씨는 뜨거웠다. 음력  6월 장마가 끝나자 본격적인 무더위가  시작되고 있었
다. 대원군의 남여가 지나는 산과 들에서는 매미가 시원스럽게 울어 댔다.
  쌍초선을 비꼇으나 대원군은 이마와 겨드랑이에서 땀을 흥건히 흘렸다.
  대원군은 남여에 흔들리며  뒤를 돌아다보았다. 대원군의 남여를  따라 초라한 
가마 한 채가 따라 오고 있었다. 해월의 가마였다. 해월은 가마 위에 새초롬하게 
앉아 있었다.
  (역시 절색이야... )
  대원군은 가마에서 흔들리는 해월의 미태를 살피며  뜻모를 미소를 지었다. 신
철균이 죽은 뒤 해월이 다시 진곡산장으로 불러내린 대원군이었다.
  (크게 쓰일 날이 있을 것이다. 내가 어찌 너 같은 계집을 여섯 달 씩이나 데리
고 살았는지 아무도 모를 것이다. )
  대원군은 속으로 웃었다.
  도성이 가까워지면서 연도에  흰 옷을 입은 백성들이  많아졌다. 구종별배들의 
벽제소리에 놀라 황망히 고개만 숙이거나 뻣뻣하게 고개를 들고 구경을 하는 백
성들오 있었다. 그러나 대원군은 백성들을 탓하지 않았다.
  대원군이 운현궁으로 환저하자 주변 인물들이 다시  몰려들기 시작했다. 그 중
에는 고종이 친정을  해야 한다고 상소를 올린  최익현을 규탄하는 주장을 하여 
형조참의에서 파직당하고 귀양을 갔던 안기영도 운현궁의 아재당을 찾아와 인사
를 올렸다.
  “저하, 그동안 얼마나 노고가 크셨사옵니까? ”
  대원군은 고개를 들어 안기영을 살폈다. 안기영은  대원군보다 한 살이 위였으
나 혈색이 좋고 눈이 부리부리했다.
  (민씨들을 몰아낼 만큼 이 자가 담력이 있을 것인가? )
  대원군은 운현궁으로 돌아온 뒤에도 계속해서 칩거하고  있었다. 그가 기껏 출
입하는 곳이라고는 마포나루 근처에 지어 놓은 아소당을 오가며 난을 치는 것이 
고작이었다.
  (나는 10년 전에도 강태공처럼 세월을 낚고 있었어... )
  이제 다시 세월을 낚아야 한다고 생각하자 대원군은 가슴 속으로 찬바람이 부
는 것 같은 기분을 떨쳐 버릴 수가 없었다. 우수의 세월이었다. 고종은 대원군이 
환저했는데도 찾아오지도 않고  대궐로 입궐하라는 어명을 내리지도  않았다. 그
것은 민비도 마찬가지였다. 아들과  며느라가 아버지가 정양처에서 돌아왔는데도 
인사를 드리러 오지 않는 것이다.
  (그래, 이제 아들과 며느리가 아니야. )
  대원군은 어금니를 꽉 깨물었다.
  “저하, 조정에서는 일본과 교린을 할 듯싶사옵니다. ”
  대원군이 물끄러미 건너다보기만 하자 안기영이 불쑥 입을 열었다.
  (성격이 조급하겠군... )
  대원군은 이맛살을 찌푸렸다. 큰 일을 하기에는  어렵지 않겠느냐는 생각이 들
기도 했으나 현재로서는 안기영만한 인물이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쨌든 좀더 두고 보기로 하지... )
  대원군은 속으로 그렇게 생각했다.
  “술이나 같이 하세.”
  이윽고 대원군이 빙긋 웃으며 입을 열었다.
  “술이요? ”
  안기영이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대원군을 쳐다보았다.
  “게 누구 있으냐? ”
  대원군이 밖을 향해 소리를 질렀다.
  “예. ”
  그러자 장지문 밖에서  나긋나긋한 여인의 목소리가 들렸다.  계집종의 목소리
가 아니었다. 안기영은  장지문 밖에 있는 여인의 목소리를 듣기만  했는데도 가
슴이 울렁거리는 것을 느꼈다.
  “전 형조참의께서 오셨다. 주안상을 올려라! ”
  “예. ”
  여인의 목소리가 다시 들렸다.
  (국태공 저하께서 사람이 그리우신 모양이군, 나 같은 당상관에게 주안상을 다 
내리시다니... )
  안기영은 대원군의 지시에  감복했다. 형조참의도 적지 않은 벼슬이기는 했다. 
형조에서 가장 높은  벼슬로 판서가 있고 그밑에  참판이 있었으나 그들은 대개 
임금을 보좌하는 일을  하고 있었고 실무는 참의였던  그가 모두 담당하고 있었
다. 한때  세도가 당당했으나 대원군의 운현궁에  오면 말석에도 끼지 못하였다. 
운현궁에는 항상 정승과 판서를  지낸 원로대신들을 비롯해 현직에 있는 가라성 
같은 대신들이 출입하고 있었다.
  대원군이 실각을 하기 전에는 꿈도 꾸지 못할 일이었다.
  이내 주안상이 들어왔다.  주안상을 들고 들어온 여자는 의외로 갓  20을 넘긴 
아리따운 소부였다. 송화색의  노랑 저고리에 다홍치마를 입었는데  얼굴이 절색
이었다.
  (아! )
  안기영은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경국지색이라는 말이  있다더니 이 여인을 두
고 이르는 말이  아닌가, 안기영은 자신의 눈빛이 흔들리는 것도  의식하지 못한 
채 여인을 넋을 잃고 바라보았다.
  “전 형조참의 어른이시다. 인사를 올리도록 해라. ”
  “예. ”
  대원군의 분부를  받은 여인이 절을 하기  위해 두 팔을 이마에  올렸다. 그때 
여인의 노랑 저고리가 위로 올라가며 겨드랑이의 흰 살이 살짝 드러났다.
  “해월이 전 형조참의 어른께 인사 올립니다. ”
  해월이 다소곳이 절을  하기 시작했다. 안기영은 깜짝 놀라 황망히  맞절을 했
다.
  (도대체 누구길래 나에게 절을 하라고 하는 것일까... )
  안기영은 숨조차 쉴 수 없었다.
  그러나 안기영을 감탄하게  만든 것은 그것뿐이 아니었다.  대원군은 해월이라
는 소부를 시켜 안기영에게 술까지 따라 주었다.
  안기영은 그날 마포나루 옆의 아소당에서 대취하여  집으로 돌아왔다. 그는 집
에 돌아와서는 해월의 몸에서 풍기던 희미한 살 냄새 때문에 잠을 이룰 수 없었
다. 대원군이 무엇 때문에 자신을 융숭하게 대접을  해주는지 알 수 없었으나 대
원군을 위해서라면 무엇이든지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안기영은 그날부터 대원군의 운현궁을 수시로 출입했다.
  그러는 동안 여름이 가고 가을이 왔다. 이  해의 추석은 어느때보다도 빨리 왔
다. 음력 8월 20일, 양력으로는 9월  19일이었다. 강화도의 동남쪽인 초지진 앞바
다에 거대한 철선이 한 척 나타났다.
  “철선이다! ”
  “이양선이다! ”
  운양호를 먼저 발견한  것은 강화도 근해에서 고기잡이를  하던 어선들이었다. 
이미 병인양요와 신미양요를  겪은 강화도 어민들이었다. 이양선이  나타난 것이 
두렵지는 않았으나 그들은 쏜살같이 노를 저어 초지진의 초지 첨사에게 알렸다.
  초지 첨사는  병사들을 지휘하여 철선을  감시했다. 그러나 철선이  어느 나라 
배인지도 알 수 없어 긴장해 있을 때에 철선에서  단정 (보트) 이 나와 초지진으
로 접근해 왔다.
  “이양선이 분명하니 문정을 하라. ”
  초지 첨사는 병사들에게 지시했다. 병사들이 곧장  나룻배를 타고 단정으로 달
려갔다. 그러나 단정에는 통역이 없었다.
  “단정에는 통역이 없습니다. ”
  “어느 나라 배인지 알아 볼 수 있었는가? ”
  “배는 이양선의 모양을 하고 있었으나 사람들은  이양인이 아닌 듯 했습니다. 

  “무엇하러 왔는지 알 수 없는가? ”
  “그들이 손짓으로 물 마시는 시늉을 하고 있는 것을 보면 물을 찾아온 것 같
습니다. ”
  “물을 찾으로 온  것은 흉계가 분명하다. 더 이상 접근하지  못하도록 경고하
기 위해 화승총을 몇 발 놓아라! ”
  초지 첨사는 병사들에게 경고 사격을 지시했다.  몇몇 병사들이 재빨리 화승총
에 불을 당겼다. 요란한  총성이 울리자 국적을 알 수 없는  단정이 재빨리 철선 
쪽으로 후퇴했다.
  “이양선이 도망갔다! ”
  초지진 성루에  서 있던 병사들은  일제히 환호성을 울렸다.  단정이 철선으로 
돌아간 것을 도망간  것으로 생각한 모양이었다. 그러나 한식경이 채  지나지 않
아 산처럼 거대한 철선이 초지진으로 육박해 왔다.
  “이양선이 다시 온다! ”
  “이번엔 철선이 온다! ”
  병사들은 바짝 긴장했다.  어느 사이에 적의 내침을 알리는 북소리가  둥둥 울
리기 시작하고 봉화불이 높이 솟았다.
  초지진의 조선군  병사들이 철선의 정체를 파악하기도  전에 운양호의 함포가 
일제히 불을 뿜었다.  천지가 진동을 하면서 날아온 포탄이 바위를  때리고 작렬
했다. 초지진의 조선군 병사들도 일제히 대완구를 쏘아 댔다. 그러나 운양호에서 
날아온 포탄은 순식간에  초지진의 조선군 포대를 초토화시켰다.  조선군 포대는 
겨우 응사하는 시늉을  하다가 궤멸되고 말았다. 운양호의 함포는  110밀리 포구
경을 갖고 있었다.
  운양호는 순식간에 초지진 포대를 쑥밭으로 만든  뒤 곧장 영종도로 진격했다. 
일본의 본격적인 무력도발이 시작된 것이다. 그러나  조선군의 영종도 방위는 허
술하기만 했다. 그들은  자신들을 공격하는 군선이 어느 나라 배인지도  모른 채 
공격을 당하고 있었다.
  영종방어사 이민덕은 병사들을 지휘하여  국적을 알수 없는 철선을 향해 맹렬
한 포격을  해댔다. 피아간에 탄우가 빗발치고  포연이 자욱하게 솟았다. 그러나 
조선군의 대완구는 일본의 철선에 미치지 못하고  물기둥만 하얗게 일으켰다. 애
시당초 상대가 되지 않는 전투였다. 일본군의 운양호는 근대적인 군함이었다.
  (이럴수가! )
  조선군들은 아연실색했다. 운양호에서 쏘아대는  함포는 여지없이 조선군 포대
에 떨어져 영종도  방어진을 초토화시켰다. 병사들의 몸뚱이가  흙무더기와 함께 
튕겨져 오르고 포대가 순식간에 날아갔다.
  영종 방어사 이민덕은 부하들과 함께 패주했다.  운양호는 조선군 포대를 궤멸
시킨 뒤  육전대를 투입하여 영종도를  침략했다. 영종도 성안은  일본군에 의해 
불바다가 되었다. 일본군 육전대는 닥치는 대로  민가를 불지르고 노략질을 자행
했다. 그러나 조선군 병사들은 이민덕을 따라  모조리 달아나서 영종도는 아수라
장이 되었다. 일본군은 살인과  방화, 약탈을 하고는 닥치는 대로 부녀자들을 겁
탈한 뒤 유유히 사라졌다.
  이것이 운양호  사건이었다. 일본은 영종도에서  대표 36문, 화승총  130여 정, 
그리고 백성들의 재물을 약탈하여 전리품으로 싣고  갔다. 일본군의 피해는 경상
자 2명이었고, 조선군은 백성들을 제외한 병사들만 35명이 전사했다.
  이 운양호 사건에 대한 장계는 8월  26일에야 조정에 당도했다. 경기도 관찰사 
민태호의 보고에 의해서였다. 고종은 경복궁 사정전에서 중신회의를 열었다.
  “경기도 관찰사 민태호의 장계를 경들도 알고  있을 것이오. 강화도 초지진이 
궤멸되고 영종도가 유린되었다고 하는데도 어느 나라 군선인지도 모른다니 참으
로 막막하기 짝이 없구려. ”
  고종이 먼저 대소신료들을 굽어보며 무겁게 운을  떼었다. 병인양요 때와 신미
양요 때는 그래도 어느 나라 군선이 내침을  했는지는 알고 있었다. 그러나 영종
도가 유린되었는데도 어느 나라 군선의 짓인지 알 수 없어 고종은 답답했다.
  “송구하옵니다. 전하. ”
  좌의정 이최응이 머리를 조아리며 사죄의 말씀을 올렸다.
  “군선에서 쏘는 대완구의 위력이 막강하다 하던데 이양선이 아니겠소? ”
  고종이 마땅치 않아 하는 기색으로 이최응에게  하문했다. 영의정 이유원은 지
난 4월에 사직하여 조정에 출사하지 않고 있었다.
  “전하, 신도 그리 생각하고 있사옵니다. ”
  이최응이 다시 맥빠진 대답을 했다. 고종은 우의정 김병국을 굽어보았다. 우의
정 김병국이라면 영종도를 유린한 군선이 어느 나라 배인지 알 수 있을 것 같았
다. 그러나 김병국은 묵묵부답 머리만 조아리고 있었다.
  (도대체 조정의 대신들이 왜 이런 것도 모르는 것일까? )
  고종은 민비의 얼굴을 잠깐 생각했다. 민비는  이럴 때 대신들에게 무엇이라고 
지시를 해야 할지 알고 있을 것이 분명했다.
  “전하, 영종도를 유린한  철선이 어느 나라 군선인지는  중요하지가 않사옵니
다. 신미양요 이후 우리 조정은 해마다  군사를 양성하고 포대를 구축했사온데도 
경구의 영종도가 군선  한 척에 유린되었다는 것은 실로 통탄할  일이옵니다. 이
는 우리의 방비가 허술한 것으로  우선 영종 첨사 이민덕을 치죄하고 대책을 세
워야 마땅할 줄 아옵니다. ”
  판중추부사 박규수의 직언이었다.
  “그러하옵니다. 영종 첨사 이민덕을 파지가소서. ”
  대신들이 일제히 박규수의 직언에 동조하고 나섰다.
  “영종 첨사 이민덕을 파직하오! ”
  고종은 좌의정 이최응에게 간단히 지시했다.
  “아울러 인천을 방어영으로  승격시키고 영종을 인천 방어영에 이속시키도록 
하시오! ”
  “황공하옵니다”
  “신 박규수 아뢰오,  영종도가 유린된 것은 단순히 외국 군선의  분탕질로 그
치지 않을  것으로 사료되옵니다. 위국  군선이 영종도를 유린했을  때는 반드시 
그 목적이 있을 것으로 사료되는 바 미구에 이국 군선이 다시 내침을 하든가 목
적을 알리러 올것이 예상되니 속히 그 방비책을 세워야 할 것이옵니다. ”
  “외국 군선이 다시 온다구요? ”
  “그러하옵니다. 외국  군선이 도적이라면  물라도 어찌 영종도를  분탕질하는 
것으로 그치겠사옵니까? ”
  “허면 어떻게 방비책을 세워야 하오? ”
  “전하. 우선 어명을  내려 우리 군사들에게 전국의 방어진을 굳게  지키게 하
시고 일본의 서계를 받아들여야 할 것으로 아옵니다. ”
  “일본의 서계를 받아들이라고요? ”
  “그러하옵니다. 지난 달에도 부산포에서 일본의 철선이  대표를 마구 쏘아 대
며 백성들이 크게 동요한 일이 있었다고  하옵니다. 전후사정을 살피건대 영종도
에 나타난 군선은 이양선이 아니라 일본의 철선이 아닐까 하옵니다. ”
  “음”
  고종이 신음처럼  짧게 탄식을 했다.  얼핏 박규수의 말이  옳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허나 일본의 서계는 세 가지  불가 항목을 고치고 있지 않으니 받아들일 수
가 없지않소. ”
  “전하. 조정의 공론이  그러했으나 이제는 시기를 더 이상 늦출  수가 없사옵
니다. 시기를  자꾸 늦추다 보면 영종도  유린보다 더 참혹한 치욕을  겪을 수도 
있음이옵니다. ”
  박규수가 불만이 가득한  음성으로 내뱉았다. 그는 이미  영종도를 공격하여민
가를 약탈하고 불을 지른 것이 일본이라는 것을 간파하고 있었다.
  “신 우의정  김병국 아뢰옵니다. 이양선인지  외국의 어느 군선인지  알 길이 
없으나 그들이 물러갔다고 하여 경계를 늦출  수는 없사옵니다. 인천을 방어사영
으로 승격시킨 것이나 연해에 대하여  엄중히 신칙하는 영을 내린 것은 모두 외
적을 물리치자는 것입니다. 안으로 정사를 잘하는  요점으로 말씀 올리면 규율을 
세우며 탐오를 징계하고  사치를 금지하는 것인데 그  근본은 오직 학문에 열과 
성을 다하는 것입니다.  전하는 오로지 학문에 전념하여 날마다 경연을  열고 덕
을 닦아야 할 것이옵니다. 이처럼 공부를 열심히  하고 덕을 닦는다면 외적을 물
리치는 것도 저절로 될 것이옵니다. 전하께서는 힘 쓰기기 바랍니다. ”
  엉뚱한 발상이었다. 외적이 침입을 했는데 학문을  열심히 하라고 주장하고 있
는 것이다. 고종은 잠시 박규수와 김병국의 얼굴을 번갈아 굽어보았다. 박규수와 
김병국 두 사람 다 경륜이 만만치 않은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두 사람의 의견이 
각기 달랐다. 고종은 어느 쪽의 의견을 취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신 좌의정 아뢰오. ”
  그때 흥인군 이최응이 입을 열었다.
  “우의정 김병국 대감의 의견이 사리에 합당하옵니다. ”
  고종이 잠자코 고개를 끄덕거렸다. 생각해 보니까  우의정 김병국의 생각이 옳
은 것 같았다. 아니 학문을 열심히 하고 덕을  닦으라는 데 무슨 할 말이 있겠는
가.
  “안으로 정사를 잘하고 밖으로 외적을 물리치는 데 있어서 학문을 열심히 하
고 덕을 닦아야 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내가 어찌 명심하지 않겠는가. ”
  고종은 핵심을 벗어난 지시를 내렸다.
    4
  그러나 운양호 사건이  그것으로 일단락 될 수는 없었다. 일본은  치밀한 계획
에 의해 영종도를 노략질했으나 예상외로 조선측에서 아무 반응이 없자 일본 여
론에 불을 질렀다.
  대일본제국의 국기를 달고 있는 일본 군함에 포격을 한 것은 일본을 무시하는 
행위다. 운양호가  우장을 향해 항해하던  중 강화도 부근에  정박하여 음료수를 
얻고자 한 것뿐인데 포격을 했으니 조선에서 일본에 대해 선전포고를 한 것이나 
다름없다.
  일본 조야에 순신간에  정한론이 일어 났다. 그렇잖아도 6년  동안이나 조선과
의 수교를 원했으나 이루어지지  않아 일본인들 사이에 은근히 조선을 정벌해야 
한다는 기운이 싹 트고 있을 때였다.
  그들은 지난 해  4월 이미 유구국을 정벌했었다. 유구국은  대청의 영토였으나 
과감하게 정벌을 한  뒤 배상금까지 두둑하게 받아 냈던 것이다.  일본 국민들은 
빼앗은 영토를 되돌려 주는  것이 불만스러웠으나 아직도 청나라와 전쟁을 하기
에는 힘이  약하다고 생각했다. 청나라를  치기 위해서는 조선을  쳐서 교두보를 
마련해야 한다는 것이 군사전문가들의 상식이었다.
  -조선을 치자!
  -조선을 쳐야 아시아를 수중에 넣을 수 있다!
  일본은 호전적으로 외쳤다.  여론이 국민들을 부추기고, 국민들은 일본 조정을 
무능하다고 규탄하기 시작했다.  일본 조정의 강경론자들은 여론을  이용하여 정
한론에 불을 질렀다.
  10월 12일,  일본은 다시 부산의 초량리에서  무력도발을 시도했다. 일본 군함 
맹춘호에서 해군 병사 70여명을 상륙시켜 민가에 불을 지르고 조선군 12명을 살
해한 것이다.
  왜관훈도 현석운이  왜관에 항의했으나  모리야마 시게루는, “일본  병사들은 
해군성의 관할이므로 외무성 관리인 우리로서는 그들을  저지할 권한이 없다. ” 
하고 비웃었다.
  이 일은 곧장  조선 조정에 알려졌다. 조선 조정은 일본과의  교섭이 지리멸렬
한 점을 추궁하여 동래부사 황정연을 홍우창으로  바꾸었다. 한편 좌의정 이최응
은 11월에 들어서자 고종에게 일본의 서계를  받아들이라고 강력히 요청했다. 그
것으로 박규수를 더욱 힘을  얻었고 영의정을 사직한 이유원조차 서계를 받아들
이라고 고종에게 주창하자 고종은 마침내 이를 봉납하라고 지시했다. 이유원, 이
최응, 박규수 이들은 개국 3재상이라고 부른는 데는 이러한 이유가 있었다.
  동래부사 홍우창은  일본의 서계를 받아들이라는 조정의  지시를 받고 부산의 
동래부에 부임했다.
  “우리 조정에서는  귀국의 서계를  받아들이기로 결정했소. 귀국에서는  속히 
서계를 다시 올리도록 하시오. ”
  그러나 모리야마 시게루의  반응은 냉담했다. 얼굴에는 홍우창을  가소롭게 여
기는 듯한 조소까지 번지고 있었다.
  “조선이 이제서야 서계를 받겠다니 우스운 꼴이 되었소. ”
  “우스운 꼴이 되다니 그게 무슨 소리요? ”
  홍우창은 어리둥절하여 모리야마를 쏘아  보았다. 모리야마와의 협상이 처음이
긴 했으나 의외로 냉담한 사실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이제는 조선이 서계를 받고 안 받고는 중요하지가 않소. ”
  “그럼 무엇이 중요하오? ”
  “조선은 일본 군함에  대해 함부로 발포를 했소. 일본은 이  문제를 조선측에 
따지기로 했소. ”
  “조선이 일본 군함에 발포를 했다는 것이 무슨 소리요? ”
  “조선은 강화  초지진에서 음료수를 구하러  간 우리 운양호에  포격을 했소. 
이것은 우리 일본을 모독한 행위이므로 용납할 수가 없소. ”
  홍우창은 어이가 없었다.  강화도와 영종도에 이양선이 내침했다는  사실은 이
미 온나라 안에 파다하게 퍼져 있었다. 그러나  그것이 일본의 짓이라고 공식 확
인한 것은 처음이었다.
  (뻔뻔한 놈들! )
  홍우창은 입술을 깨물고  동래 왜관에서 나와 즉각 그 사실을  조정에 알렸다. 
그러나 조선 조정은 의논만 분분할 뿐 뚜렷한 대책을 세우지 못했다.
  “우리는 강화도에 들어온  배가 일본의 배인 줄 몰랐소. 게다가  일본은 영종
도에 침입하여 우리 조선군을 35명이나 살해했소. ”
  홍우창은 모리야마에게 다시 따졌다.
  “우리 배에는 일장기가 걸려 있었소. ”
  “일장기가 무엇이오? ”
  “일장기는 대일본제국의 국기요. ”
  “국기가 무엇이오? ”
  “국기는 우리 대일본제국을 상징하는 깃발이오. ”
  홍우창은 어리둥절했다. 조선엔 그때까지도 국가가 없었다.
  “조선은 우리 대일본제국의 국기를 모독했소. ”
  홍우창은 입을 다물었다. 국기가 무엇인지도 모르는  판에 국기 모독 운운하는 
말을 납득할 수가 없었다.
  “그러면 일본은 어떻게 할 생각이오? ”
  “우리는 조선이 운양호에 포격을  한 적대행위를 따지기 위해 전권단을 파견
하여 배상을 요구할 것이오. ”
  “배사이요? 아니 우리 조선군이 포격을 해서 일본이 어떤 손해를 보았소? 배
상이라니 당치 않은 얘기요. ”
  “아무튼 우리  일본 정부에서는 전권단을 파견할  것이니 조선에서도 준비를 
해놓은 것이 좋을 것이오. ”
  “무슨 준비를 말하는 것이오? ”



“조선에서도 전권단을  구성해야 할  것이오” 모리야마는 오만하게  선언했다. 
홍우창은 입맛이 썼으나  자신의 권한으로는 어찌해볼 도리가  없었다. “전권단
을 언제 올  것이오?” “모르겠소” 모리야마는 실눈을 뜨고  내뱉았다. 홍우창
은 모리야마와 헤어져  동래부로 돌아오며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는  일본 외
무성의 하부 관리에 지나지 않는 모리야마조차 조선을 가소롭게 보고 있는 사실
이 불안했다.  홍우창은 모리야마와 회담한  사실을 자세히 적어  조정으로 올려 
보냈다. 그러나 조정에서는 아무런 지시도 내려오지  않은채 좌의정 이최응이 영
의정에 제수되었다는  소식만 들려왔다. 홍우창은 우울했다.   날씨는 이미 살을 
에일 듯이  추워져 있었다. 음력 11월이면  엄동설한이었다. 부산은 조선 반도의 
남쪽이라 한겨울에도 눈대신 빗발이 자주 뿌렸다.  11월 29일이면 한성 장안에는 
물고리가 얼어붙고 북풍한설이  몰아칠 때였으나 부산은 빗발이  뿌리고 있었다. 
동래부사 홍우창은 모리야마로부터 11월  29일 아침 일본 외무성의 통보를 받았
다. ‘대일본 정부 외무성은 천황폐하의 명에  의하여 조선군이 운양호에 발포한 
사실을 엄중히 따지고 그 손해배상을 청구하기 위해 특명전권변리대사을 보려는 
백성들과 일본과 수호조약을 맺으려는 조정을 규탄하는 유생들로 인산인해를 이
루었다.
  “저 이가 대원군을 실각시킨 면암 최익현이래!”
  “도끼를 들고 피끓는 상소를 올리는 것을 보니 충신은 충신인 모양이야.”
  “도대체 왜놈들과 수호조약을 맺으려는 까닭이 뭐래?”
  “왜놈들이 강화부에 철선을 끌고 와서 위협을 하고 있다잖아? 수호조약을 맺
지 않으면 병사들을 이끌고 도성으로 쳐들어 온다는 거야.”
  백성들은 광화문 앞에서  꿇어 엎드려 절규하는 최익현을 보고 혀를  찼다. 최
익현은 나흘 낮과  밤을 물 한 모금 마시지  않고 고종의 비답을 기다리고 있었
다.
  “최익현을 흑산도로 위리안치하라!”
  1월 28일 아침. 고종은 의정부에 영을 내렸다. 최익현의 상소가 좌충우돌 대신
들을 비난하는 데 그치지 않고 임금까지 질책하고 있다는 이유였다.
  최익현은 1월 29일  의금부 나졸들에 의해 흑산도로 귀양길에  올랐다. 최익현
과 함께 수호조약 체결을 규탄하던 유생들과 백성들도 의금부에 의해 강제로 해
산되었다. 그리고 격론  끝에 일본 전권대신 구로다가 제시한 조약  초안을 신헌
에게 되돌려 보내고 신헌 스스로 판단하여 처리하라고 위임했다.
  신헌은 조정의 위임을 받자 난감했다. 오경석의  보고에 의하면 도성에는 수호
조약 체결을 반대하는 상소가 빗발치고 있다는  것이었다. 왕명에 의해 접견대신
으로 파견되기는 했으나 조약을  체결하는 권한을 위임받게 되면 대역죄로 몰릴 
수도 있는 것이다. 신헌은 고종에게 사양하는 장계를 올렸다.
  신 삼가 외뢰옵니다. 금번 전하께오서 일본의  조약 초안을 보오시고 시원임대
신들의 공론으로 가부를 정하지  않고 오로지 신에게 전권을 위임하시었으나 신
은 미천한 무신이요, 조약 체결도 잘 알지  못하여 감당할 여력이 없사오니 거두
어 주시업소서.
  그러나 고종은 신헌의 장계에 불가하다는 회답을  보냈다. 고종이 신헌에게 전
권을 위임한  것은 사역원 당상  오경석의 주청에 의해서였다.  오경석은 조정의 
논의가 시일만 끌 뿐 결론을 내리지 못하고 우왕좌왕하고 있자 차라리 신헌에게 
전권을 위임하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고종은 오경석의 주청을 받아들여  접견대관 신헌에게 다음과 같은 영을 내렸
다.
  이번에 일본 사신이 와서 수호를  청하는 것은 좋은 관계를 맺으려고 하는 것
이지만 나라의 안전과  관계되는 바가 없지 않다. 경은 문무를  겸비하고 일찍부
터 명망이 드러났기 때문에 조정에서는 경이 아니면 처리할 사람이 없다고 논의
하였다. 임기응변에 대하여  전임시키지 않을 수 없으니 형편에 따라  경이 처결
하라. 나는 경을 든든한 긴 성과 같이 믿고  있으니 경은 나의 지극한 뜻을 체득
할 것이다.
  접견대관 신헌은 고종의  지시를 받자 낮게 한숨을 내쉬었다. 온  나라가 뒤숭
숭한데도 조정은 조약에 대한 모든 책음을 그에게 떠넘기고 있었따.
  결국 2월 3일 조선과 일본은 역사적인  조일수호조규를 맺었다. 일본에서 전권
대신 구로다, 부사 이노우에가 서명하고 조선에서는 접견대관 신헌, 부사 윤자승
이 서명한 것이었다. 그 조약의 골자는 다음과 같은 것이었다.
  전문
  대일본국과 대조선국은  오래 전부터 우의를 두텁게  하며 지내왔으나 최근에 
이르러 정의가 미흡하여 옛  수호를 다시 하고자 일본국 정부는 특명전권변리대
신 육군 중장겸 개척장관 흑전청륭과 특명부전권변리대신 의관 정상형을 간발하
여 조선국 강화부에 파견하고  조선국 정부는 판중추부사 신헌과 도총부 부총관 
윤자승을 선발하여 각각 군왕의 윤지를 받들어 회담한 조관을 개열간좌한다.
  제1관. 조선국은 자주국이므로 일본국과 평등한 권리를 누린다.
  제2관. 양국은 사신을 상대국의 수도에 보내어 외교통상의 사무를 보게 한다.
  제3관. 양국에 왕래하는 공문은 일본은 국문으로  쓰기로 하되 10년 동안은 한
문으로 번역한 것을 조선에 제출하여야하고 조선은 진문을 사용하기로 한다.
  제4관. 조선국 부산  초량에 일본 공관을 세우고 양국 인민  통상 지구를 설치
하며 조선국은 2개의 항구를 개항하여야 한다.
  제5관. 조선국은  2개의 개항 시기를 병자년(1876)  정월에서 계산하여 20개월 
이내로 한다.
  제6관. 일본국의 배가 태풍을 만나 지정된  항구 이외로 대피하면 이를 허락하
여야 하고 파손된 배가 있으면 즉시 수리를 해주되 비용은 선주가 부담한다.
  제7관. 조선국  근해는 암초가 많아  항해하기가 위험하므로  일본국이 조선국 
해안을 측량하여 양국 선박이 위험하지 않게 한다.
  제8관. 일본국은 조선국이  지정한 각 항구에 일본국의 상민을  관리하는 관리
를 두고 양국의 교섭 안건이 있으면 상민이 주재하는 지방관이 협의하여 결정한
다.
  제9관. 양국은 지정  지역에서 자유로이 무역을 할 수 있으며  양국 관리는 간
섭하지 않는다. 단 양국 상민은 서로를 존중하고  정당한 거래를 하여야 하며 속
임수가 있을 때에는 엄격하게 조사하여 보상케 한다.
  제10관. 금후 일본국 상민이 지정 항구에서  조선인에게 범죄를 저질렀을 경우 
일본 관리가 심판하고 조선국도 이와 같이 한다.
  제11관. 양국은 이미 조약을 맺었으므로 양국  상인들이 편리하게 통상 장정을 
설정한다. 이는 지금부터 6개월 후에 양국이  따로 위원을 임명하여 조선국 한성 
또는 강화부에서 회담하여 결정한다.
  제12관. 위에서  의정된 11관의 조약은 오늘부터  양국이 준수토록 한다. 이를 
양국이 위임한 대신이 각각 조인하고 1부씩 교환함으로써 증거로 삼도록 한다.
  전문과 12관으로 되어 있는 병자수호조약이 체결됨으로써 일본 전권단은 득의
만면하여 다음날 일본으로  돌아갔다. 이로써 강화도에서 감돌던  전운은 걷혔으
나 조선 조정은 일본의 무력에 굴복했다는 자괴감 때문에 초상집 같은 분위기였
다. 병자수호조약은 이 나라 역사상 최초의  근대적인 국제조약이었으나 여러 가
지 불평등 요소를  안고 있어서 후세의 사가들로부터  따가운 비판을 받아야 했
다. 그러나 외교에  문외한이었던 조선으로서는 일본의 함포사격으로  살벌한 기
운이 감도는 회담장에서 이만한 조약을 체결한 것은 오히려 커다란 성과라고 할 
수 있었다.
  사가들이 불평등조약이라고 거론하는 것은 개항, 치외법권  인정 등 조선에 불
리한 것을 들어  말하고 있는데 최외법권 인정은  훗날 민비 시해의 주모자들이 
일본에서 재판을 받게 되는 불리한 조항이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이로부터 6개월 후에 조인되는 ‘수호조규부록’의 불평
등에 있었다.  일본은 이 부록에서 수출입세(관세)  면세를 요구하여 관철시켰던 
것이다. 조선은 1877년 부산을 개항한 뒤  수출입세 면세의 불평등을 시정하려고 
요구하였으나 일본이 거부함에  따라 고육지책으로 조선인들에게 수출세를 징수
하였다. 이로 인하여 조선인들은 일본인들과 교역하는  것을 꺼리게 되었고 일본
인들은 교역을 할 수 없게  되자 군함을 파견하여 육전대를 상륙시키고 부산 일
대에 함포사격을 해댔다. 금방이라도 일본군들이 전쟁을  일으킬 것 같은 험악한 
분위기가 계속되자 조선 조정은 조선인들에게 징수하던 수출세를 철폐하였다.
  5
  조정의 분위기는 일본 전권단이 돌아간 뒤에도  암울했다. 개국을 주장한 사람
들이나 척화를 주장한 사람들이나 모두 일본의 무력시위가 거세었다는 접견단의 
보고에 침통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강화수호조규가 불평등했다는  것은 일본
이 함포로 전쟁불사 위협을 했다는 사실에서도 충분히 입증이 되었다.
  2월 5일 조정의  시원임대신들은 강화수호조약이 일본의 위협속에서 진행되었
다는 사실이 자신들의 책임이라면서 일제히 사직상소를 올렸다.
  “일본이 총칼로 위협을 하는  가운데 수호조약이 맺어진 것이 어찌 대신들의 
책임이겠사옵니까? 우리 나라가 힘이 없는 탓입니다.”
  민비는 고종을 향해  수심이 가득한 얼굴로 말했다. 민비는 두돌이  지난 세자 
척이 잘 걷지도 못하고 병치레가 잦아 늘  우울해 있었다. 오늘도 세자는 기침이 
심하여 어의들이 탕제를 지어 올리느라고 한바탕 소란을 피운 뒤에야 잠이 들었
던 것이다.
  “대신들의 사직상소를 반려할까 하는데 중전의 생각은 어떻소?”
  “당연히 그렇게 하셔야  하옵니다. 일본은 서양 문물을 받아들인 지  불과 20
년 만에 유신을 했다고 하옵니다.”
  고종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민비와 얘기를  하고 있으면 대화가  막힘이 없어 
좋았다. 어디선가 부엉이가 우는 소리가 부엉부엉 하고 들렸다.
  “유신이라면 정조대왕께서도 단행하려고 하셨소.”
  고종은 부엉이 울음소리가 들리는 쪽으로 잠시  고개를 돌렸다가 입을 열었다. 
민비도 부엉이 울음소리를 듣고  있는지 새침한 표정으로 아미산 쪽을 쳐다보고 
있었다.
  “신첩도 그리 듣고 있었사옵니다.”
  “중전은 일본과의 수호조규를 어떻게 보고 있소?”
  “사세 부득한 일이 아니옵니까?”
  “일본이 전과 같지 않다 하는데 조선을 핍박할 일은 없겠소?”
  “힘이 강성한 나라는 힘이 약한 나라를  핍박하기 마련이옵니다. 앞으로 그런 
일이 비일비재할 것이라고 사료되옵니다.”
  “과연 그렇겠구려.”
  고종이 눈을 질끈 감았다. 고종은 미구에 닥칠  일에 두려움을 느끼고 있는 것
이 분명했다. 고종이나  민비가 척화론자들의 척왜 주장을 모르고 있는  것이 아
니었다. 오히려 척화론자들의  주장이 개국론자들의 주장보다 더욱  설득력 있게 
들리기까지 하였다.
  “내일 접견대관 신헌과 부관 윤자승이 전하의  어전에 복명할 것입니다. 그때 
자세히 하문해 보소서.”
  “내 그렇게 하리다.”
  고종이 고개를 끄덕거리며 황촛불이 일렁거리는 민비의 얼굴을 가만히 응시했
다. 아름답다. 민비의 나이 벌써 스물일곱이  아닌가. 침전에는 여인의 몸에서 풍
기는 방향이 물씬했다.
  “이번 회담에서 역관 오경석과  현석운이라는 자가 있어서 공을 세웠다고 들
었사옵니다. 그들을 신첩이 따로 만나볼까 하옵니다.”
  “그렇게 하구려.”
  고종은 손수 의대를  벗기 시작했다. 밤이 얼마나  되었는지 종로에서 인정(인
경)을 치는 소리가 들리고  대궐의 외전에 순라를 도는 무위영 병사들의  시윗소
리가 들렸다. 민비는 문갑의 황촉을  끄고 고종 옆에 옷을 벗고 누웠다. 비가 오
려는지 궐 밖의 인정소리가 대궐 안까지 들려오고 있었다.
  “비가 올 것 같구려.”
  고종이 누운 채 민비에게  말했다. 민비는 고종의 옆으로 바싹파고 들었다. 꽃
샘 바람인가.  대전 뜰에서 바람이 앙상한  나무가지를 흔들고 지나갔다. 민비는 
어쩐지 그 바람소리가 한겨울  삭풍처럼 가슴을 쓸쓸하게 훑어 내리는 기분이었
다.
  죽은 아버지가  생각나고 핏덩이로 죽은 원자와  8개월밖에 살지 못하고 죽은 
공주의 얼굴도 생각났다.  그 어린 생명들의 피울음 소리가 귓전으로  들이는 것 
같아 민비는 무겁게 한숨을 내쉬었다.
  “중전.”
  고종이 부르는 소리가 민비의 귓전으로 따스하게 뿌려졌다.
  “예.”
  “중전은 요즈음 무슨 근심이 있는 듯하구려.”
  “신첩은 왕실의 안위를 생각하고 있사옵니다.”
  “왕실의 안위라니요?”
  “세자가 몸이 너무 허약하여 근심이 떠나지를 않사옵니다.”
  “그렇지, 우리 세자는 몸이 너무 허약한 것이 탈이야......”
  “대왕대비마마께오서 세자의 장수를  기원하는 큰 불사를 일으키라고 하셨사
옵니다.”
  “불사라면 부처님께 세자의 장수를 빌겠다는 말씀이 아니오?”
  “그러하옵니다.”
  “그것 참 좋은 생각이구려. 이 나라 일만  이천 사찰에서 일제히 세자의 무병
장수를 기원하는 불사를 일으킨다면 부처님께서도 감복을 하실 것이오.”
  “그렇긴 하오나 국고가  고갈되었다 하옵니다. 호조에서 올린  문권에 의하면 
1년 세입은 50여  만 냥에 불과한데 지출은  140만 냥에서 150만 냥이나 된다고 
하옵니다.”
  “국고가 고갈되다니! 어찌 이런 변고가 있나?”
  “내일은 의정 당상들에게 국고를 튼튼히 할  계책을 마련하라 하십시오. 국고
가 비어서야 어찌 종묘사직이 온전히 보전되겠사옵니까?”
  “중전에게 좋은 계책이 있소?”
  “먼저 도신들에게 엄히  명을 내려 축재하는 일이  없도록 해야 할 것이옵니
다. 국고가 비어  있는데도 도신들이나지방 방백수령들의 곳간이  그득하다면 이
는 왕부의 위엄이 서지 않는 망국지변이옵니다.”
  “과연 중전은 총명하기 짝이 없소.”
  “전하께오서는 성군이  되셔야 하옵니다.  전하는 신첩의 하나뿐인  지아비가 
아니옵니까?”
  “고맙소. 중전”
  “전하께서 일월처럼 빛나야 지어미되는 신첩의 자리도 보전이 되옵니다.”
  “내 반드시 유념하리다.”
  고종이 민비를 덥석 끌어안았다.
  봄날 밤이었다. 밖에서는  한겨울 삭풍 같은 꽃샘 바람이 불고  있었으나 고종
의 침전에서는  얼음이라고 녹일 훈풍이  불고 있었다. 고종은  이제 스물여섯의 
젊은 사내였고 그의 옆에는 꽃처럼 아리따운 왕후가 농익은 과육처럼 단내를 풍
기며 누워 있었다.
  고종은 격렬한 정염을 느꼈다.
  늘 같은 일과였다.  고종이 낮에 국사를 처결한 일이 이러이러  했노라고 민비
에게 얘기하면 민비는 전하  내일은 이리 하십시오, 전하 내일은 저리 하십시오, 
하고 계책을 일러 주는  것이다. 고종은 그럴 때마다 아 정말  그렇게 하면 대신
들이 수긍하겠구나, 왕후는 정말 현명한  여자야...하고 탄복을 했다. 민비의 계책
을 들을 때면 고종은 찬물 속에 햇살이 비치듯 머리속이 맑아지곤 하였다.
  이튿날 고종은 사정전에 나가 승지들이 바쳐 올리는 문권에 수결을 놓고 신헌
과 윤자승을 불러들여 인견했다.
  “이번에 경들의 노고가 컸소.”
  “나라 일이 편안치 못한데 신 등이 어찌 감히 수고하였다 하겠사옵니까?”
  신헌은 고종의 치하에 사양하는 예를 올렸다.
  “일본 전권대신과 주고 받은 말을 보고받았는데 언사가 뛰어났소.”
  “전하의 위엄에  의지하여 조정의 계획대로 함으로써  전하의 분부를 욕되게 
하는 일을 면하였사옵니다.”
  “장계로 보고한 것 외에 일본 사신을 접견하면서 주고 받은 말 중에 들을 만
한 것이 있소?”
  “신이 지금  어영청을 맡고 있으나  정병이 많지 못하옵니다.  금위영도 이와 
같습니다. 훈련도감이  좀 크기는 하지만 정병을  낸다면 얼마 되지 않사옵니다. 
지방에도 지휘할 군사가 없는 실정이옵니다.
  우리 군사가  영락했다는 것은 오랑캐의  눈에도 들어 갔사옵니다.  신은 무인 
출신 장수이옵니다. 걱정스러운 것을 보고도 말씀을  올리지 않는다면 신의 죄는 
백 번 죽어도  마땅하옵니다. 지금 천하의 대세를 보건대 각국에서  무력을 사용
하였고 앞뒤로 수모를 받은 것도 이미 여러  차례나 되옵니다. 우리 조선의 군사
가 이토록 허약한 것이 각국에  알려지면 또 어떤 일이 닥칠지 신은 걱정되옵니
다.
  엎드려 바라건대 전하는 삼천리  강토를 가지고 있는데 어찌하여 지켜낼 방도
가 없겠사옵니까? 이것은  하지 않는 것이지 할 수 없는  것이 아닙니다. 바라건
대 전하께서는 성지를 분발하시어 시급히 군사를 조현하고 정병을 양성하시어미
구에 닥칠지도 모를 큰 환난에 대비하시옵소서.”
  칠십을 바라보는 접견대관  신헌의 충간은 비장하기까지 하였다.  그는 접견대
관으로서 일본군의 위력을 보았기 때문에 폐부에서 우러나오는 충간을 할 수 있
었다.
  “경의 말씀이 매우 타당하오.”
  그러나 고종은 늙은  장수인 신헌의 간곡한 충언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 그
는 경의 말이 매우 타당하다는 한마디로 신헌과 윤자승의 접견을 끝내 버렸다.
  1) 영의정 이유원은 세자책봉 주청사로  청국에 가지 못한다. 영의정 이유원은 
12월부터 사임을 청하기 시작해  2월까지 정사를 보지 않는데 매일같이 사임 상
소를 올리고 고종은  매일같이 조정에 들어와 일을 하라는 비답을  내린다. 이들
은 나라의 정사는 보지 않고 영의정을 못 하겠다느니 영의정을 하라느니 옥신각
신하여 귀중한 개화시대를  허비한다. 이유원뿐이 아니라 좌의정에  임명되는 이
최응, 우의정에 임명된 김병국까지 이러한 사임상소를  계속 올려 조정의 업무는 
한동안 마비된다.
  이유원이 세자책봉 주청사로  청나라에 갔다는 것은 각전방자의 「민비암살」
을 원용했다. 당시 조선에서는 대부분 그렇게 믿고 있기도 했다.
  2) 민비는 고종의 총애를 받는 궁녀들에 대해서는 철저하게 탄압을 했다. 이는 
투기라기보다 사랑의 적에  대한 탄압이라고 보는 것이 더욱 타당하다.  세상 어
느 여인이 사랑하는 남자를 다른 여자에게 뺏기고 싶겠는가.
  3) 병자수호조규는 수호조약이라고도 불린다.
  제 20장
  남도의 꽃바람
  병자수호조약이 일본의  강압에 의해 체결됨으로써 굳게  닫혔던 쇄국의 문이 
타의에 의해 열리게 되었다. 조선은 좋든 싫든  일본을 통하여 물밀듯이 밀려 들
어오는 개화의 물결에  휩쓸리지 않으면 안 되었다. 조선은 수구와  개화의 일대 
전환기에서 5백 년을 면면히  이어온 이씨왕조가 새 시대의 조류를 제대로 흡수
하지 못하고 몰락의 구렁텅이로 서서히 발을 들여  놓고 있었다. 이미 개화의 풍
랑은 울타리 밖을 둘러싸고 문을  열라고 함성을 지르고 있었고 박규수 등 개화 
1세대들의 주장에 의해 일본에게 문호를 개방했으나 수구세력의 반대도 점점 격
렬해 지고 있었다.
  그러나 조선은 병자수호조약에 명시된 조규에 의하여 일본에 수신사를 파견하
지 않으면 안 되었다. 고종도 접견대관 신헌과  부사 윤자승의 보고로 서양 문물
을 받아들인 일본이 비약적으로  발전했다는 사실을 희미하게나마 알게 되어 마
음이 움직였다. 이에 따라 조정의 논의는 다시 분분해 졌다.
  조정은 척화론자들과 개국론자들의  주장을 절충하여 일본에 수신사를 보내기
로 하되 수신사의 격을 낮추기로 하였다. 그리하여 예문관(조선조 때  제찬, 사명
에 관한 일을 맡아  보던 기관) 응교 김기수를 예조참의로 승차시켜  수신정사로 
삼고 역관 현석운 등 75명으로 사절단을 구성하여 일본에 파견했다.
  김기수 일행은 4월 4일 도성을  떠나 4월 29일 부산에서 일본 기선을 타고 요
코하마로 출발했다.
  이 해(1876년)는 국제적으로  큰 변화가 일어 나고  있었다. 청국은 지난 해에 
동치 황제가 죽어 서태후의 섭정시대를 열었고,  영국의회는 빅토리아 여왕의 인
도 황제 겸임을 결의 하여 공식적으로  인도를 식민지화시켰다. 이집트와 이디오
피아는 전쟁을 벌여 이이오피아가 대패하고 터어키에서는 청년 터어키당의 쿠데
타가 발생하여 술탄 압들 아지스 황제가  폐위되었다. 이리하여 세르비아와 몬테
니그로가 터어키에 선전포고를  하여 발칸전쟁이 시작되었다. 러시아에서는 <토
지와 자유>라는 이름의 지하혁명조직이 결성되어 붉은 혁명의 태동을 예고했다.
  한편 인도는 몇 년째  대기근이 휩쓸어 1878년까지 2백 50만명이 아사하는 인
류 최악의 비극이 일어났다.
  이 해에  마크 트웨인(미국작가)은 「톰소여의 모험」을  발표했고 톨스토이는 
「안나  까레리나」를, 투르게네프(러시아작가)는  「처녀지」를 각각  발표했다. 
프랑스의 조각가 로댕은 청동시대를, 독일의  작곡가 브라암스는 교향곡 제1번을 
발표했다. 또 독일의 과학자  오토는 오토 사이클 기관을 제작했고, 피셔는 메틸
렌 블루를 발견하여 화제를 낳았다.
  세계는 은자의 나라 조선이  잠들어 있는 사이에 이처럼 19세기에서 20세기로 
넘어가며 문화와 과학을  현대화시키고 있었고, 그것이 전  산업으로 파급되면서 
왕정시대에서 국민시대로 전환되고 있었다.
  김기수의 수신사 일행은 이러한  시기에 일본을 방문하여 20일 동안 머무르면
서 일본 정부의  극진한 대접을 받았다. 특히 수신정사인 김기수는  일본 정계의 
내노라 하는 실력자들인 이토  히로부미, 이노우에, 산조와 면담을 하는 한편 전
신, 철도, 각종 공장 등 산업시설까지 두루 시찰한 뒤 5월 10일 일본의 천황까지 
만나고 5월 27일 동경을 떠나 그해 윤 5월 7일에 부산에 도착했다.
  수신정사 김기수는 부산에서 먼저 장계를  올린 뒤 음력 6월 1일 한성에 도착
하여 고종에게 귀국 보고를 했다. 김기수는 자신이  일본에서 보고 들은 것을 고
종에게 상세히 보고했다. 고종은 김김수가 철도와  전신에 대하여 얘기하자 그런 
것도 있었는가, 하고 거듭  탄복을 했다. 뿐만 아니라 김기수가 일본의 근대화된 
군대에 대해서 얘기하자 아아 일본이 그토록 강성해 졌는가, 하고 탄식을 했다.
  6월 5일 일본은 외무성 이사관인 미야모도  고이치를 제물포에 파견했다. 병자
수호조약의 부록인 통상조약을 조인하기 위해서였다.
  척화론자들의 강경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미야모도는 한성으로 당당히 입성했
다. 조정의 논의는 물끓듯 했으나 경기 중군의  숙소인 청수관을 일본 사신인 미
야모도의 숙소로 쓰게 하고  의정부 당상 조인희를 파견하여 병자수호조약 부록
과 통상조약을 조인하게  했다. 그리하여 7월 6일 마침내 병자수호조약  부록 11
관과 무역장정 11칙이 조인되었는데  조선에 가장 불평등했던 것은 부록보다 무
역장정으로 제7칙이 대표적인  것이었다. 그것은 일본 정부의 모든  선박은 조선
에 입항하거나 퇴항할  때 불납 항세를 한다는 소위 관세면제의  혜택이었다. 조
선 조정이 국제적 외교에 무지한 탓이었다.
  그러나 조선 조정은 조선을 향해  불어 닥치고 있는 개화의 바람이 무력을 앞
세우고 있다는 사실만은 절감하고 있었다. 그들은  수신정사 김기수의 보고에 의
해 일본이 조선통신사를  보낼때보다 훨씬 강대해 졌다는  것을 알고 그에 대한 
대책을 세우기에  분주했다. 나라와 나라의  조약이 힘을 바탕으로  하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다는 것을 개화파라고 해서 모를 리가 없었다.
  조정은 무위소에 신식군기인 자기황과 칠연총(7연발총)  그리고 수차를 제작하
게 하였다. 어떻게 하든지 일본의 군대와 맞서기 위한 안간힘이었다.
  12월 27일, 우의정을 지낸 박규수가 노환으로 죽었다. 박규수는 역관 오경석과 
함께 이땅에 개화의  씨를 뿌린 사람이었기에 개화파의 충격은 컸다.  그러나 개
화파에 박영효, 홍영식, 유길준  등이 가담함으로써 기존의 김옥균, 김홍집, 김윤
식 등 이미 조정에 출사한 인물들과 함께 커다란 세력을 형성하게 되었다.
  개화 1세대라고 할 수 있는 오경석은 강화도의 병자수호조약에서 맹활약을 했
고 괴승이라고까지 불리는 이동인은 일본의 선진문화를 배우겠다고 부산으로 해
서 밀항을 하기  위해 준비하고 있었다. 조선은 이들 개화  선각자들과 수신사로 
일본에 갔던 사람들에 의해 바깥 세계의 경이적인 근대화에 눈을 뜨게 되었다.
  그러나 조선의 지배층인 대부분의  사대부들과 일반 백성들은 우물 안 개구리
나 다름없을 정도로 개화에 무지했다.
  조선 조정은 영의정에  이최응, 좌의정에 김병국, 우의정에 민규호를 임명했으
나 민규호는 1878년 우의정으로 임명된 지 일주일  만에 병으로 죽었다. 불과 43
세의 나이였다.
  옥년은 쩍 하고 하품을 한 뒤 늘어지게 기지개를 했다. 1878년 9월, 부산의 동
래부. 일본 상인들을  상대로 술집을 연 옥년은 건넌방에서 왁자하게  술을 마시
고 있는 일본인들의 말이 알듯 모를 듯하였다.  그들이 입에 거품을 물고 떠들어 
대는 부당 과세니, 무세니,  무역장정 11칙이니 하는 말들이 생소하기 짝이 없었
다.
  일본인들은 교활했다. 특히 부산 동래에서 장사를  하는 일본인들은 대부분 대
마도 출신으로 저울 눈금까지  속이면서 부당이득을 취하려고 혈안이 되어 있었
다. 그것은 일본의 농상무서이 작성한 상황연보(1880년 제4항)에도 잘 나타나 있
었다.
  부산에는 예전부터 대마도 해변의  무뢰한들이 이주하여 남의 땅에서 삶을 도
모하는 자가 많았는데 항상  조선인들을 경멸하고 매매할 때에 부정한 도량계를 
사용해 그들의 눈을 속여 매매하려고 하여 조선인들은 이를 매우 싫어하게 되었
다. 우리의  정상적인 경로를 거친  상인들이 이를 걱정해서  백방으로 경계하고 
이들의 악폐를 근절하기 위하여  상법회의소를 설립한 것이 1880년 12월의 일이
다...... (한일합병사 63쪽)
  건넌방에서 술을 마시고 있는 일본인들은 무엇 때문인지 잔뜩 분개해 있었다.
  옥년은 다시 늘어지게  하품을 한 뒤 어두운 하늘을 쳐다보았다.  밤비라도 내
리려는지 하늘은  별빛 하나 없이  캄캄했다. 이따금 뒷곁의  오동나무 잎사귀를 
흔들고 지나가는 바람에도 축축한 물기가 실려 있었다.
  “오잇!”
  건넌방에서 옥년을 부르는 일본인의 술 취한 목소리가 들렸다.
  “하이!”
  옥년은 졸음을 쫓아 버리듯이 냉큼 대답하고  건넌방으로 건너갔다. 일본인 상
대로 장사를 시작한 지 어느덧 2년, 옥년은  웬만한 일본말을 알아 들을 수 있게 
되었다.
  “사시미 한 접시를 더 들여 와라.”
  미곡 수입을  하는 마쓰다가 벌건  얼굴로 소리를 질렀다.  그들은 사타구니가 
훤히 들여다보이는 일본 전통 의상인 하오리 차림이었다.
  “하이.”
  옥년은 웃으며 대답을  하고 주방으로 나와 준비해  놓은 회 한접시를 소반에 
받쳐 들고 건넌방으로 들어갔다.
  “이 집에는 기생이 없는가?”
  마쓰다가 호기있게  물었다. 마쓰다는 옥년의  집에 여자가 없다는  것을 뻔히 
알면서도 묻고 있었다.
  “없습니다.”
  “그러면 그대가 술을 따르라.”
  “하이.”
  옥년은 무릎을  꿇고 앉아서 마쓰다에게  술을 따랐다. 마쓰다는  옥년의 단골 
손님이었다. 처음에는 말이 통하지 않아서 필담으로 술을 팔았었다.
  옥년은 교자상에 둘러앉은  일본인들에게 차례로 술을 따랐다.  일본인들은 만
족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거리며 술잔을 받았다.
  “대일본제국을 위하여!”
  마쓰다가 술잔을 먼저 높이 쳐들었다.
  “대일본제국을 위하여!”
  다른 일본 상인들도 일제히 술잔을 들어 건배를 하고는 술을 마셨다.
  일본인들이 술자리를 파한  것은 새벽이 가까워서였다. 옥년은  건넌방의 술자
리를 치우고 이부자리를 깔았다. 마쓰다가 일본인들과  함께 숙소로 갔다가 되돌
아와 있었다. 옥년은  마쓰다가 술을 마시면 으레 일행들 몰래  되돌아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탓하지 않았다.
  “사이상!”
  옥년이 이부자리를 깔자마자 마쓰다가 뒤에서 옥년을  덥석 끌어 안았다. 옥년
은 거짓으로  웃음을 깨물며 마쓰다를  향해 돌아앉았다. 마쓰다가  옥년의 치마 
속으로 허겁지겁 손을 밀어 넣으며 옥년을 쓰러트리려고 하고 있었다.
  “마쓰다상.”
  옥년은 마쓰다의 손을  치마 속에서 빼내며 벽으로 몸을 피했다.  밖에는 빗발
이 추적거리기 시작하고 있었다. 마쓰다의 몸에서도 비 냄새가 풍겼다.
  “사이상!”
  마쓰다가 벌겋게 취한 얼굴로 옥년의 손을 잡았다.
  “왜 이래요?”
  옥년은 거부하는 시늉을 했다.
  “내가 싫은가?”
  “싫기는요. 담배 좀 줘요.”
  “담배?”
  “하이.”
  옥년은 생긋 웃으며 저고리의 옷고름을 풀렀다.  새우젓처럼 작은 마쓰다의 눈
이 게슴츠레하게 풀어지며 옥년의 가슴을 더듬이질했다.
  “요시.”
  마쓰다가 후다닥 일어나 제 옷에서  필터가 달린 담배를 꺼내 옥년의 입에 물
려 주고 성냥을 켜서  불을 붙여 주었다. 옥년은 마쓰다가 물려  준 담배를 입에 
물고 연기를  폐부 깊숙이 빨아  들였다가 내뱉었다. 담배도  성냥도 조선에서는 
일본인을 통해서가 아니면 구하기 힘든 것이었다. 그것뿐이 아니었다. 비록 동래
부내의 일본인  거류지(사방 10리)에 국한되긴  했으나 양복에 하이칼라  머리를 
상륙시켜 서양 오랑캐의 앞잡이라는  말과 함께 옷차림이 편리해 보인다는 조선
인들의 상반된 반응을 얻었다.
  그러나 일본 상인들의 활약은  우물 안 개구리나 다름없던 조선인들에게는 충
격적이었다. 일본의 주요 수출품으로는 동,  도기그릇, 홍견, 해기, 사탕, 과자, 소
면(국수), 홍분(화장품), 당목(광목보다 고운  실로 짠 면직물) 등이었다. 이 중에
서 조선인들에게 가장  인기가 있는 것은 비단과 화장품, 면직물로  소비성 물품
들 뿐이었다. 그런  까닭으로 최익현은 일본과 통상을 하는 것은  일본의 조악한 
상품을 수입하고 우리의 목숨이나  다름없는 쌀을 내주는 것이므로 통상은 불가
하다고 통렬한 상소를 올리기까지 했던 것이다.
  “담배가 좋은가?”
  마쓰다가 옥년을 덥썩  안아 이부자리 위에 눕혔다. 옥년은 담배  연기를 마쓰
다의 얼굴에 내뱉으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마쓰다는  어느 사이에 훈도시 차림이 
되어 옥년의 저고리를 벗기고 치마를 들추고  있었다. 옥년은 헐떡거리는 마쓰다
에게는 상관하지 않고 마쓰다와 필담을 나누던 때를 생각하고 피식 웃었다.
  여애남유야.
  마쓰다에게 처음 술을  판 것은 손짓 발짓을 해가면서였다. 그러나  술이 어느 
정도 취하자 마쓰다가  필기도구를 가져오라고 하여 그렇게  썼다. 여애남유야는 
너에게 사랑하는 남자가  있느냐는 뜻이었다. 옥년도 한문에  정통하지 못했지만 
상인인 마쓰다가 머리를  짜내며 쓴 한문도 뜻이 아리송했다. 그러나  옥년은 마
쓰다의 눈빛으로 묻고 있는 뜻을 알 수 있었다. 
  - 없어요.  옥년은 요염하게 웃으며 붓을 놀렸다.
  - 몇 살인가?
  - 스물 여섯 살입니다.
  물론 그것은 거짓말이었다.
  - 너는 몸을 팔기도 하는가?
  - 그렇습니다.
  - 나와 같이 자겠는가?
  - 행하만 주면 자겠습니다.
  - 행하가 무엇인가?
  - 돈입니다.
  필담은 그것으로 끝이었다. 마쓰다는 양복 주머니에서  조선 돈을 꺼냈고 옥년
은 마쓰다를  향해 스스로 옷을  벗었다. 조선인들이 왜인  또는 가이양인이라고 
경멸을 했지만 옥년은  마쓰다에게서 아무런 반감을 느낄 수 없었다.  오히려 왜
인을 자신의 몸으로 받아들인다는  야릇한 기분 때문에 가슴이 설레기까지 했던 
옥년이었다.
  옥년은 한 손으로 마쓰다의 머리를 끌어안고  한손으로는 담배를 피웠다. 밖에
서는 빗소리가 점점 커지고 있었다. 오동나무  잎사귀를 때리는 빗소리와 바람소
리가 귓전을 음산하게 울렸다.
  “너의 몸은 따뜻하다.”
  마쓰다가 서둘러 옥년의 저고리를 벗겨 냈다.
  “그런데 냄새가 난다.”
  “뭐라구요?”
  옥년은 깜짝 놀라서  정색을 하고 마쓰다를 쳐다 보았다. 마쓰다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얼핏 이해할 수 없었다.
  “조선 여자는 목욕을 하지 않는다.”
  “목욕이요?”
  “그래. 그래서 사이상의 몸에서 냄새가 나는 것이다.”
  “목욕을 왜 안 해요?”
  옥년이 당황하여 얼굴을 붉혔다. 갑자기 수치심이 얼굴을 화끈거리게 했다.
  “조선은 너무 더럽다.”
  마쓰다가 욕망이 사라진  얼굴로 책상다리를 하고 앉았다.  옥년도 이부자리에
서 일어나 저고리 앞섶을 여몄다.
  “내 나라를 모욕하지 말아요!”
  “너희 조선이 더러운  것은 사실이다. 길에는 소똥이 즐비하고 집  앞에는 어
느 집이나 거름더미가 있다.”
  “일본은 더 더럽다.”
  옥년은 반말로 내 뱉었다.
  “뭐라구?”
  “조선은 길가에  소똥도 많고 거름더미도  많다. 그런데 일본은  무엇 때문에 
이 더러운 나리를 찾아오는가? 더러운 곳에 무엇이 들끓는지 아는가?”
  “무엇이 들끓는가?”
  “더러운 곳에 들끓는 것은 구더기에 파리떼뿐이다.!”
  마쓰다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아사노.”
  “아사노가 무엇인가?”
  “조야다. 조선은 야만이란 뜻이다.”
  “너는 견자다”
  “견자가 무엇인가?”
  “개새끼란 뜻이다.”
  마쓰다의 얼굴이 벌겋게 상기되었다.
  옥년은 피식 웃었다. 마쓰다에게 욕을 하여 통쾌했다.
  “좋다!”
  마쓰다가 옥년을 갑자기 쓰러트렸다.
  옥년은 눈을 질끈  감았다. 마쓰다의 되먹잖은 수작이 불쾌했으나 더  이상 싸
우고 싶지 않았다. 어쨌거나 마쓰다는 옥년이 놓칠 수 없는 손님이었다.
  ( 이 쪽바리가! )
  옥년은 입술을 깨물었다.  마쓰다가 허겁지겁 그녀의 저고리  옷고름을 푸르고 
치맛자락을 들추고 있었다. 옥년은  마쓰다가 하는 대로 그냥 버려 두었다. 어차
피 숱한 사내들에게 몸을 맡기고 살아온  처지였다. 마쓰다가 왜인이라고 새삼스
럽게 거부하고 싶지 않았다.
  마쓰다의 손에 의해 옥년의 젖가슴이 드러나고 속곳이 벗겨져 나갔다.
  ( 아! )
  옥년은 입을  벌리고 짧게 신음을  토했다. 마쓰다의 입술이  그녀의 젖무덤을 
마구 유린하고 있었다. 그 움직임은 분노 때문인지 거칠면서도 사나웠다. 마쓰다
의 손은 옥년의  허리를 지나 풍만한 엉덩이를 쓰다듬고 있었다.  마쓰다는 입술
과 손을 교묘하게 움직여 그녀를 자극하고 있었다.
  ( 쥐새끼 같은 놈.... )
  옥년은 전신을 바짝 긴장시켰다. 마쓰다의 애무에  자신의 몸이 흩어지고 있는 
것은 어쩐지 수치스러운  일인 것처럼 생각되었다. 마쓰다와 처음 이  짓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니었다.  조선인들은 일본인들을 경멸하고 있다. 마찬가지로 옥년도 
일본인들에게 술을 팔면서도  그들을 섬나라 왜놈이라고 주저없이  경멸했다. 옥
년이 마쓰다와 관계를 하는 것은  마쓰다에게 돈을 받는 것도 받는 것이지만 무
엇보다도 마쓰다에게서 진기한 물건을  사들여 조선인들에게 몇 갑절의 비싼 값
으로 팔기 때문이었다.
  마쓰다의 애무는 전에  없이 정성스럽게 계속되었다. 마쓰다의  애무라면 옥년
은 얼마든지  처리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오늘은 그렇지가 않았다. 
마쓰다의 애무가 집요해  지면서 옥년은 감미로운 느낌이 점점 강해져  갔다. 옥
년은 들고 있던 담배를 재떨이에 비벼 껐다.  마쓰다가 얼굴을 들고 옥년을 내려
다 보았다. 마쓰다의 얼굴은 웃고 있는 것 같았다.
  옥년은 다시 눈을 감았다. 그때 마쓰다가 혀를 그녀의 입 속으로 밀어 넣었다. 
옥년은 무엇인가 자신의 입 속을  가득 채우는 듯한 기분을 느끼며 그것을 세차
게 흡입했다. 이미 마쓰다가 일본인이라는 생각은  그녀의 뇌리에서 사라지고 없
었다.
  ( 이, 이런 나쁜 놈.... ! )
  옥년은 허리를 비틀며  신음을 안으로 삼켰다.  마쓰다가 몸의  중심부로 옥년
을 눌러 왔다.  옥년은 자신도 모르게 마쓰다의  목을 힘껏 끌어 안았다. 그녀의 
뇌리에 박달의 얼굴이 희미하게 떠오르기 시작했다.  박달의 얼굴이 안개처럼 흐
릿했다.
  
  빗소리가 점점 커지고 있었다. 새벽부터 내리기  시작한 차가운 가을비는 밤이 
되었는데도 그치지  않고 줄기차게 내리고  있었다. 쏴아 하는  빗소리가 앙상한 
흙벽을 들이치고 차가운 비바람이 부엌문을 덜컹대고  흔들어 댔다. 옥년은 목간
통에 몸을 담그고 눈을 감고 있었다. 엉성한  문틈으로 새어 들어온 비바람이 이
마를 선뜩하게 하고 있었다. 어젯밤 마쓰다와의 관계가 다시 생각났다. 마쓰다와 
욕을 하면서 싸운 탓인지 알  수 없었으나 그것은 뜻밖에도 강렬한 느낌으로 옥
년의 몸속에 남아 있었다.  마쓰다로부터 받은 모욕, 조선은 더럽다는 말과 야만
이라는 말도 머릿속에서  지워지지 않았다. 그러나 마쓰다와의  관계는 기분좋은 
것이었다. 아니 그것은 끈적거리는 쾌락을 그녀의  몸속에서 오랜만에 끄집어 낸 
것이었다.
  ( 나는 이제 마쓰다의 조선인 처가 되는 것인가? )
  옥년은 고개를 갸우뚱했다.  마쓰다는 옥년이 몸만 깨끗이  씻는다면 마쓰다의 
여자로 데리고 살겠다고 했었다. 마쓰다의 여자라는  말이 처라는 뜻이냐고 옥년
이 묻자 마쓰다는 그렇다고 대답을 했다.
  옥년은 마쓰다로부터 그 제안을 받고 한나절  동안이나 골똘히 생각을 했었다. 
일본인의 처가 된다는  것은 어딘지 모르게 께름칙한 데가 있었다.  무엇보다 조
선인들로부터 일본인의  처라는 손가락질을 받을 생각을  하자 암담하기까지 했
다. 그러나 옥년이 자신이 살아온 길을 천천히  되돌아 보자 지금까지 살아온 나
날은 늘 버러지처럼 손가락질을 받고, 길가의  질경이처럼 짓밟히며 겨우 목숨을 
연명해 온 비천한 삶이었다. 이제 와서 일본인의  처가 된다고 해서 무엇이 달라
지겠는가, 옥년은 그렇게 생각했다.
  마쓰다를 놓치는 것은  불행이다. 마쓰다는 조선인들처럼 양반도  따지지 않고 
전에 무엇을 했는지도  알려고 하지 않는다. 마쓰다가 원하는 것은  오직 목욕뿐
이다.
  옥년은 다시 몸을 씻기 시작했다. 마쓰다는  일본의 오오사카라는 도시에 일본
인 처와 아이들이  있다고 했다. 그런데도 마쓰다는 조선에 조선인  처를 두려고 
하고 있는 것이다.  마쓰다는 원산이 개항되면 그곳에 마쓰다 상사의  지점을 차
리겠다고 했다. 마쓰다 상사는  일본에 본점이 있었다. 부산에 마쓰다 상사의 지
점이 개점을 한  것은 불과 1년 전의  일이었다. 그러나 일본에서 들여  온 여러 
가지 상품 때문에 마쓰다 상점은 그것을 사려는 조선인들로 미어터지고 있었다.
  ( 조선에서 그거 하나는 잘했어..... )
  옥년은 목간통에 몸을 비스듬히 눕히고 홍건히  미소를 지었다. 조선에서는 일
본인들에게 통상을 허락하면서도 일본인들이 여자와 아이들을 거류지로 데려 오
는 것을 엄격하게 금지했다. 아울러 일본인이 다닐  수 있는 것도 동래부에서 조
선 이수로 10리 이내로 제한했다. 그런 까닭으로  마쓰다가 조선에 또 하나의 처
를 두려고 하고 있는 것이다. 엄격히 따지면 그것은 처가 아니라 첩이다. 그러나 
본처가 없는 첩이니까 조선에서는 본처라고 해도 상관이 없을 것이다.
  ( 흥! 첩이면 어때? 등 따습고 배 부르면 그만이지.... )
  옥년은 입술을  삐죽거렸다. 옥년이 강원도  춘천을 떠난 것은  쇠돌이 아버지 
영재가 옥년에게  쇠돌이를 맡기고 떠난 지  두달이 못 되었을 때였다.  그날 밤 
큰 소동이 일어났다.  쇠돌이 아버지와 윤상오가 정참봉의 집에서 무슨  짓을 했
는지는 알 길이 없었으나 횃불을  든 정 참봉의 하인들이 마을 사람들의 집집마
다 돌아다니며 쇠돌이 아버지를 내놓으라고 소란을  피웠고, 쇠돌이 아버지와 가
까이 지냈던 남정네들은 영문도 모르고 정 참봉의 집에 끌려가 매타작을 당해야 
했다.
  옥년은 쇠돌이 아버지가 동학에  몸을 담겠다고 춘천을 떠나고 사흘이 되어서 
정참봉의 하인들에 의해  정 참봉의 집으로 끌려갔다. 옥년이 쇠돌이를  맡고 있
었기 때문이었다. 정 참봉은 쇠돌이 아버지가 자식  새끼를 찾으러 올 것이 분명
하다고 하면서 하인들을  시켜 옥년을 물곤장을 때린 뒤 광속에  가두었다. 옥년
은 쓴 웃음이  나왔다. 서학인들을 잡으러 다니면서  매도 많이 때려 보았고, 또 
진천 관아에서는 곤장을  서른대나 맞고 내쫓기기까지 했었다.  그것뿐이 아니었
다. 동냥을 하러  다닐 때도 걸핏하면 주먹으로 얻어맞고 발길질에  채이곤 하였
다. 아침부터 재수없게 기집년이 동냥질을 하러  다닌다며 물바가지를 퍼붓는 아
낙네도 있었고, 아이들은 그녀의 뒤를 졸졸  거리고 쫓아다니며 희롱하고 돌팔매
질을 해댔다. 정 참봉이 옥년을 광 속에 가두거나 매를 때려도 두렵지 않았다.
  정 참봉은 눈에 핏발이  서 있었다. 정 참봉이 눈을 치뜨고  보는 가운데 쇠돌
이 아버지가 정 참봉 부인의  옷을 벗기고 희롱했으므로 오장이 뒤집힐 것은 당
연했다. 양반은  천민의 부녀자를 희롱해도  흉이 되지 않으나  양반이 천민에게 
희롱을 당하면 큰 흉이 되는 세상이었다. 정참봉이  미쳐 날뛰고 있는 것은 조금
도 이상할 것이  없었다. 옥년은 광속에 갇혀 있었으나 정참봉이  미쳐 날뛸수록 
고소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옥년은 한 달만에야 정참봉의 광에서 풀려났다.  마을에 암행어사가 내려와 민
정을 살피고 있다는 소문이 나돌자 정참봉이 부랴부랴 옥년을 풀어 주었던 것이
다.
  옥년은 춘천의 살림살이를 정리한 뒤 쇠돌이를  업고 남으로 남으로 내려왔다. 
그것이 벌써 몇 년 전의 일이었다. 그 동안 여러 가지 사건이 있었다. 부산의 동
래부 왜관에  나와있던 일본이 서계 문제로  옥신각신하더니 급기야 강화도에서 
운양호 사건을  일으켰고 마침내는 일본 상인들이  동래부까지 진출하게 되었던 
것이다.
  옥년은 동래부에 술집을 열었다. 그것은 조선인들을  상대로 하는 초라한 술집
에 지나지  않았으나 일본인들이 갑자기 몰려옴으로써  제법 번창하게까지 되었
다. 옥년의  술집이 일본인들의 거류지 안에  있었기 때문이었다. 옥년은 목간통 
안에서 몸을 일으켰다. 계절풍이 부는 것인지  비바람소리가 더욱 거칠어지고 있
었다.
  
  2
  
  어둠스레한 석양 무렵, 옥년은 호들갑스럽게 불러대는  생선 장수 박서방의 목
소리에 퍼뜩 눈을 떴다. 내가 그새 잠이  들었나? 옥년은 천 근처럼 무거운 눈꺼
풀을 비비며 목소리가  들린 곳을 허둥지둥 찾았다. 그러나 침침한  눈에 들어온 
것은 반쯤 열린 장지문 사이로  보이는 술집 앞의 말쑥하게 키가 큰 미루나무뿐
이었다.
  “누구 왔나? ”
  옥년은 어둠스레한 술청을 살피며 중얼거렸다.
  “해도 기울지 않았는데 웬 낮잠이야? ”
  그때 부엌에서 박 서방의 눅눅한 목소리가 들렸다.
  “박서방이야? ”
  옥년은 입을 쩍 벌리고 늘어지게 하품을 했다.
  “내말고 이 집 부엌 출입할 사람이 또 있나? ”
  박 서방이 부엌에서 나오며 히죽이 웃었다. 박  서방의 이빨이 때에 절은 핫바
지만치나 누랬다. 옥년은 얼굴을 찡그렸다.
  “물이 어때? ”
  “어떻긴? 아무려면 썩은 생선 갖다가 팔까? ”
  “전번에 가져 온 생선은 물이 갔다고 그러던데.... ”
  “생선이란 본디 먹기 바로 전에 닥달을 해야  하는 거야. 닥달을 해놓고 한나
절이나 두었으니 물이 안 가? ”
  “그럼 어떻게 해? ”
  “어떻게 하긴 뭘 어떻게 해? 생선을 물속에 그냥 두었다가 일본놈이 술 마시
러 오면 그때 닥달해야지 ... ”
  박 서방이 툇마루  끝에 걸터앉았다. 옥년은 비녀를 뽑아 부스스  흘러내린 머
리카락을 뒤로 쓸어 넘겨 묶으며 박서방에게 눈을  흘겼다. 박 서방의 눈이 치맛
자락 사이로 드러난 옥년의 허벅지에 머물러 있었다.
  “뭘 보누? ”
  “남의 살 좀 본다. 보라고 내 놓은 것 아니야? ”
  “박 서방 마누라 살이나 잘 챙겨. 실눈 뜨고 남의 살 곁눈질하지 말고...”
  “생선값은 언제 줄꺼야? ”
  “왜 이래? 요즈음 돈에 궁짜가 들었어? ”
  “돈만 궁짜 들은지 알아? ”
  “마누라가 달거리를 하나? ”
  옥년이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 박 서방은  옥년의 농짓거리에는 대꾸하지 않고 
곰방대를 꺼내 입에 물었다.
  “왜놈 유황이나 꺼내봐.”
  “유황이 아니라 성냥이라니까....”
  “성냥이고 유황이고 꺼내 놓기나 해.”
  “옥년은 마쓰다가 두고 간 성냥과 담배를 꺼내서 박 서방에게 내밀었다.
  “이게 뭐야? ”
  “왜놈 담배.”
  “이게 담배라구? ”
  박 서방이  눈이 휘둥그래져서 담배 한  개비를 꺼내 들고 이리  저리 살폈다. 
옥년은 피식 웃으며  자신이 먼저 담배 한 개비를  꺼내 입에 물고 성냥을 켜서 
불을 붙인 뒤 박 서방을 향해 연기를 길게  내뿜었다. 박 서방이 손을 휘휘 저어 
담배연기를 쫓았다.
  “그거 참 신기하네.”
  박 서방이 믿어지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담배를 이리저리 살피다가 불을 붙여 
연기를 빨았다.
  “어때? ”
  옥년이 으스대며 물었다.
  “좀 싱거운 걸....”
  박 서방이 맥빠진  소리로 대답했다. 담배맛을 감상하고 있는지 박  서방의 얼
굴이 자못 심각해 보였다.
  “이왕 왔으니 생선이나 닥달해 놓고 가.”
  “임자가 하지 그래.”
  “아따, 담배도 줬잖아? ”
  “이깐 담배 한 대 가지고 날 부엌데기로 만들 참인가? ”
  “누가 알아? 담배보다 더한 것을 줄지 ...”
  “아이구 박 서방 몸달겠네.”
  “얼래? ”
  옥년은 박 서방을 향해  앙살을 떨었다. 날이 점점 어두워지고 있었다. 9월 초
사흘밖에 되지 않았는데도  해가 한결 짧아져 오시가  지나서 툇마루 끝에 햇살 
한 줌이 수선거리는 것을 보다가 잠깐 눈을 붙였는데 이미 저녁이었다.
  “살이 좀 붙었나? ”
  박 서방의 손이  문지방을 넘어 옥년의 허벅지에 얹혀졌다. 옥년은  박 서방의 
손을 떼어내는 대신 치맛자락을 끌어 내렸다. 멀리  어둠이 짙어 가고 있는 텃밭
에서 쇠돌이를 업은 할멈이 소쿠리에 깻잎을 따서 담고 있었다.
  “이불까지 덮어 주는구먼.”
  박 서방의 눈이 몽롱하게 풀어지며 해벌쭉 웃었다.
  “초저녁에 이불은...”
  옥년이 밉지 않게 눈을  흘겼다. 박 서방이 한 손에 들고  있던 담배를 툇마루
에 비벼끄고 귀뿌리에 꼽았다.
  “생선이나 좀 닥달해.”
  “오늘도 왜놈들이 몰려오나? ”
  박 서방의 손이 좀  더 안쪽으로 침입해 들어왔다. 옥년은 박  서방의 어깨 너
머로 텃밭을 응시하며 무릎을 바짝 오므렸다.
  “왜놈 군선이 들어왔다는 걸.”
  옥년은 대수로운 일이 아니라는 듯이 대꾸했다.
  “방으로 들어갈까? ”
  “저기 할멈이 있잖아? ”
  “할멈은 깻잎 따기 바쁜데 왜 할멈을 파누? ”
  “날이 어두워졌으니 텃밭에서 나올 거야. ”
  옥년이 허리를 비틀었다.  허벅지에 박 서방의 손을 끼고 있었으나  눈은 계속 
텃밭을 더듬고 있었다.
  “방으로 들어와.”
  옥년이 마침내 견디지 못하겠다는 듯이 박 서방의 귓전에 뜨거운 입김을 뿌렸
다.
  “방엔 왜? ”
  “그럼 손장난만 하고 말거야? ”
  박 서방이 흐물흐물 웃기  시작했다. 으레 하는 수작이었다. 옥년은 박 서방의 
수작을 훤히 알고  있었기 때문에 눈을 하얗게 흘기며  박 서방의 손을 떼어 냈
다. 그러자 박 서방이 냉큼 문지방을 넘어 방으로 들어왔다.
  “방에는 안 들어올 것 같더니? ”
  옥년은 입술을 삐죽 내밀며 장지문을 닫았다.
  “내 맴이지.”
  “그거 두 쪽 달았다고 유세 부리나? 어디 잘난 그것 좀 보자구.”
  “아따 왜놈만 상대해 가지고는 성이 안 차는 모양이지? ”
  “왜놈 물건이야 어디 물건 같아야지.”
  옥년은 재빨리 박  서방의 핫바지 허리띠를 잡아챘다. 그러자 박  서방의 핫바
지가 스르르 흘러 내려갔다.
  “아따 물건 한번 실하네.”
  “소시적엔 창호지를 뚫었느니라.”
  박서방이 옥년을 덥석  안아서 옥년이 낮잠을 자던  이부자리위에 쓰러트렸다. 
옥년은 그때서야 피우던 담배를 재떨이에 비벼 껐다.
  “왜이리 서둘러? ”
  옥년이 허겁지겁 달려드는 박 서방을 달래듯이 흐물거리고 웃었다.
  “밑물은 했겠지? ”
  박 서방이 옥년의 치마 속으로 손을 넣어  속곳을 밑으로 까내렸다. 옥년은 궁
둥이를 뭉싯거리다가 흠짓했다.
  “아따 농 한 번 해본기라.”
  박 서방이 옥년의 발목에 걸려 있는 속곳을 발끝으로 벗기고 치맛자락을 옥년
의 허리로 걷어 올렸다. 옥년은 대꾸하지 않고 눈을 감아 버렸다. 어둠속이라 박 
서방의 얼굴이 보이지 않았으나 전신으로  소름이 돋는 듯한 기분이었다. ( 왜놈
도 나를 무시하더니 이젠 천하  잡놈인 조선 뱃놈까지 나를 무시하네... ) 옥년은 
입술을 가만히  깨물었다. 부우웅. 바닷가에서 일본  철선의 뱃고동 소리가 길게 
들려왔다. 마쓰다의 말에 의하면 전라도와 충청도  해안을 측량하고 돌아온 일본 
해군성 군함이라고  했다. 일본 상인들은  조선 조정에서 부산  두모진에 세관을 
설치하고 부산항을 통해 수출입되는  물품에 과세를 하기 시작하자 매일같이 몰
려 다니며 웅성거렸다. 그들의 말에 의하면  병자수호조약에 관세를 무세로 하기
로 조약을 맺었으므로 조선 조정에서 세금을 징수하는 것은 조약 위반이라는 것
이었다. 옥년은 조선  조정에서 관세를 징수하는 것이 무엇 때문에  소란의 이유
가 되는지 잘 알 수 없었다. 그러나  일본인들이 웅성거리며 몰려 다니기 시작하
자 무엇보다 술이 잘 팔려서 좋았다. 마쓰다는  언제나 일본인들을 한 무리씩 끌
고 와서 술을 마셨다. 어둠이 더욱 짙어졌다. 옥년은 박 서방이 

  “공사님이시다. 인사를 올려라.”
  술이 한 순배씩 돌자 마쓰다가  옥년을 불러 일본 관리에게 술을 따르라고 지
시했다.
  “하이.”
  옥년은 일본 관리를 향해 무릎을 끓고 눈웃음을 치며 청주를 따랐다.
  “일본인인가? ”
  일본 관리가 놀란 눈빛으로 마쓰다를 돌아보며 물었다.
  “아닙니다. 마쓰다상의 조선인 내자입니다.”
  일본 관리의 왼쪽에 앉아 있는 상인이 웃음  띤 얼굴로 대신 대답했다. 나가오
카라는 상인이었다.
  “조선인 내자? ”
  “그렇습니다.”
  “그러면 조선인 현지처라는 말인가? ”
  “그렇습니다. 일본인들은 조선에 처와 아이들을 데리고  올 수가 없지 않습니
까? 궁여지책으로 마쓰다상이 조선인 내자를 구한 것입니다.”
  “그거 참 절묘한 계책이군.”
  마쓰다는 흐뭇한  표정으로 웃고 있었다.  옥년은 일본 관리가  술잔을 단숨에 
비우자 다시 정종을 따랐다.
  “나는 유까다(욕의)를 입고 있어서 우리 일본 여인인 줄 알았어...”
  일본 관리는 새삼스럽게 옥년의 몸을 살피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옥년은 술을 
마실수록 윤기를 더해 가는 일본 관리의 눈을  보며 속으로 코웃음을 쳤다. 일본 
관리의 눈은 이미 색정적으로 이글거리고 있었다.
  “그보다도 공사님. 조선이  무역장정의 무세 조항을 어기고  세금을 징수하고 
있습니다. 공사님은 일본을 대표하고 있으니 조치를 취하셔야 합니다.”
  “그렇잖아도 우리 군함이 동해안 수심 측량을 끝내고 동래부에 입항했소.”
  “그러면 무력시위를 해서라도 조선의 세금 징수를 막아야 하지 않습니까? ”
  “외무성에 전신을 보냈소. 무력시위는 내가 단독으로 결정할 수 없소.”
  “조선에 있는 우리 상인들은  공사님이 조치를 취해 주시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습니다.”
  “마쓰다상, 조선에서의 일본 공사 업무는 대승적으로 보아야 하고, 우리는 아
직도 원산과 인천을 개항시키지 못했소. 원산과  인천을 조속히 개항시키려면 어
떤 방법이 좋은지 외무성은 깊이 생각하지 않을  수 없소. 쓸데없는 분쟁은 조선
의 원산과 인천을 개항시키는 데 불리하오.”
  “원산은 언제 개항이 됩니까? ”
  “내년이면 개항되오.”
  “그렇다고는 해도 조선에 세금을 내는 것이 싫습니다.”
  마쓰다가 투정을 부리듯이 말했다.
  “자자, 우리 술이나 마십시다.”
  일본 관리가 술잔을 높이 들었다.
  “공사님, 미곡은 언제나 거래를 할 수 있게 됩니까? ”
  이번엔 나가오카가 일본 관리에게 질문을 던졌다.  일본 관리는 불쾌한 표정으
로 들었던 술잔을 내려놓았다.  미곡은 쌀을 말한다. 조선 조정은 일본과의 교역
을 허락하면서 쌀만은 조선의 식량이 모자란다는  이유를 들어 거절했다. 해마다 
가뭄과 수해가 들어 쌀 수확이  크게 줄기도 했으나 조선은 관리의 녹봉까지 쌀
로 지급하는  실정이라 쌀이 대량으로 일본으로  수출되면 경제파탄이 예상되어 
거절했던 것이다. 일본은 몇 년동안 계속된 가뭄으로  쌀 수확이 크게 줄어 도시
에서 쌀 값이 몇 배나 뛰는 등 쌀  파동을 겪고 있었다. 조선에서 쌀을 수입하여 
일본에 팔면 몇 배의 이익을 얻을 수 있어 상인들은 어떻게 하든지 조선의 쌀을 
수입하려고 했고, 외무성은  조선에서 쌀을 수입하여 일본의  쌀값을 안정시켜야 
했기 때문에 미곡 거래 문제는 중요한 외교  현안의 하나였다. 그러나 일본 상인
들은 비밀리에 쌀을 수입해 가고 있었다.
  “곧 단안이 있겠지요.”
  일본 관리가 씁쓸한  기색으로 대답한 뒤 술잔을 비웠다. 좌중의  분위기는 갑
자기 딱딱하게 굳어져 있었다.
  “공사님을 초대했으니 장사에 관한 얘기는 그만두고 술이나 마십시다.”
  상인들 중에 가장 연장자인 데지마가 잔잔하게 웃으며 일행을 둘러보았다.
  “어이, 노래를 부르는게 어때? ”
  데지마가 옥년에게 노래를  시켰다. 옥년은 마쓰다를 쳐다보았다. 마쓰다도 분
위기가 딱딱해 진  것을 깨달았는지 고개를 끄덕거렸다. 옥년은 낮게  기침을 한 
뒤 이팔 청춘가 한자락을 뽑았다.
  이팔 청춘에 소년몸 되어서 문명의
  학문을 닦어를 봅시다
  세월이 가기는 흐르는 물 같고
  사람이 늙기는 바람결 같고나
  진나라 진시황도 막을 수 없었고
  한나라 무제도 어쩔 수 없었다
  천금을 주어도 세월은 못 사네
  못 사는 세월을 허송을 할까보냐
  
  옥년이 노래를  불러도 분위기는 달아  오르지 않았다. 일본  공사라는 관리는 
상인들이 권하는 술만 몇 잔 거푸 마신 뒤  자리를 떴다. 일본 관리가 혼자서 자
리를 뜨자 상인들은  일제히 분노를 터트리며 술을 마셨다. 그들은  1년 전 일본
에서 발발한 서남전쟁이 사이고  다카모리의 패배로 끝난 것까지 아쉬워하는 투
로 말했다. 일본의 서남전쟁은 정한론을 부르짖던  사이고 다카모리가 자신의 주
장이 관철되지  않자 군사를 이끌고  궐기한 사건이었다. 그러나  일본 정부군에 
의해 서남전쟁은 불과  한 달 만에 진압되었다. 일본 상인들은  차라리 서남전쟁
이 승리하여 일본 국민들에게 팽배해 있던 조선을 정벌했으면 하고 바라고 있었
다. 동래부에  있는 일본인들은 매일같이  옥년의 술집으로 몰려와  일본 정부와 
일본관리를 비난했다. 그들이  공사님이라고 깍듯이 모시던 사내가  일본 대리공
사 하나부사 요시모토라는 것을 옥년은 그때서야 겨우  알 수 있었다. 그러나 일
본 대리공사 하나부사는 일본 상인들의 요청에도 불구하고 일본 정부와 관세 징
수 사태를  협의하기 위해 일본으로  돌아갔다. 그러자 일본  상인들은 분개하여 
철시를 하고 과세 반대 시위를 감행했다. 그들은 무명천에 붉은 글씨로
  “동래부에 세관 설치를 반대한다.! ”
  “조선 조정은 수출입세를 철세하라! ”
  라고 써서 동래부 관아  앞에서 시위를 했다. 음력 9월 14일의 일이었다. 그들
은 항의의 표시로  검은 비단 하오리에 하카마의 정장 차림이었다.  신발은 조오
리(짚신)를 신고 있었다. 조선인들은 일본인들의 시위를 호기심이 가득한 눈빛으
로 쳐다보았다. 양복을 입은 일본인들 사이에  어쩌다가 하오리에 하카마를 입고 
있는 일본인들을 본 적은  있었으나 1백 35명이나 되는 대규모의 일본인들이 똑
같은 옷차림으로 동래부  관아에서 항의를 하는 것을 보는 것은  처음이었다. 조
선인들은 구름같이  몰려들어 일본인들이 항의하는 것을  신기한 듯이 쳐다보았
다. 그들은 수세같은 것은 관심조차 없었다.
  일본인들의 시위는 계속되었다.
  조선 조정은  동래부사 윤치화의 장계를  받고 수세를 강행할  것을 지시했다. 
조선은 그때서야  관세를 징수하지 않는 것이  불평등조약이라는 것을 깨달았던 
것이다.
그러는 종안 10월이 갔다. 날씨는 점점 추워지기 시작했다. 11월이 되자 일본 대
리공사 하나부사 요시모토가  군함을 이끌고 동래부로 들어왔다.  일본 상인들은 
일제히 환성을 지르며  하나부사 요시모토 일행을 환영했다.  하나부사 요시모토
는 군함으로 하여금 동래부에 함포사격을 하게  하는 한편 육전대를 상륙시켰다. 
동래부 앞바다에 정박한 일본  군함으로부터 매일 같이 함포사격이 실시되고 육
전대가 동래부 부중을 누비고 다니자 조선인들은 두려워하며 피난짐을 꾸렸다.
  일이 여의치 않게  되자 동래부사 윤치하는 황급히 장계를 올렸다.  조선 조정
은 일본이 군함을 이끌고 와서 무력시위를 한다는 장계를 받자 두모진에 설치했
던 세관을 철폐하고 수세를 중지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일본 상인들은 환성을  지르며 날뛰었다. 두모진에 세관을 설치한 지  불과 두 
달 남짓 되어서의 일이었다.
  마쓰다는 대리공사 하나부사를  옥년의 술집으로 초대했다. 전날과  달리 그들
은 기분이 좋아서  유쾌하게 떠들고 마셨다. 강제로 세관을 설치하고  관세를 징
수하는 조선을 무력시위로 굴복시켰기 때문에 기고만장해 있었다.
  “하나부사 공사님, 이왕에  무력으로 조선을 굴복시켰으니 다시  한번 강화도
로 군함을 끌고 가서  인천을 개항시키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쇠뿔도 단숨에 빼
는 것이 좋지 않겠습니까?”
  나가오카가 아첨하는 웃음을 지으며 하나부사에게 술을 따랐다.
  “조선을 개항시키는 것은 우리 군함 몇 척이면 충분하지요.”
  “하면 이 기횡에 아예 개항을 시키시지요.”
  “정부에서도 노력하고 있습니다. 원산과 인천의 개항은 시간 문제입니다.”
  하나부사 공사가 술잔을 비웠다. 옥년은 재빨리  하나부사 공사의 술잔에 청주
를 따랐다. 
  “조선인들의 꼴이  우습지 않습니까? 함포사결 몇  번에 동래 부사의 얼굴이 
파랗게 질리고 조선인들이 피난 보따리를 쌌습니다.”
  데지마도 유쾌한 듯이 웃으며 술잔을 비웠다.  옥년은 데지마의 잔에도 청주를 
따랐다.
  “조선은 지나치게 미개합니다.”
  마스따도 거들었다.
  “내각에서 유구국을 정벌하듯이 조선도 정벌해야 합니다.”
  “조선을 정벌해요?”
  “우리에게는 천황폐하의 용맹한 군대가 있지 않습니까? 조선은 고깃덩어리나 
마찬가지입니다. 이 고깃덩어리를 먼저 차지하기 위해  여러 나라가 각축을 벌이
고 있습니다. 우리가 먼저 차지하지 못하면  이 먹음직스러운 고깃덩어리를 다른 
나라에 빼앗기게 됩니다.”
  “그렇습니다. 지금 조선을 노리고  있느 것은 여러 나라입니다. 저 멀리 유럽
의 프랑스와 영국을  비롯해 미국, 러시아까지 조선이라는  고깃덩어리를 차지하
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습니다. 여러분도 알다시피 조선은 동아시아의  전략 요
충지입니다. 조선을 러시아에  뺏기면 일본의 안보까지 위태롭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지금 당장 군대를 동원하여 조선을 정벌해야 되지 않습니까?”
  “문제는 그렇게 간단한 것은 아닙니다. 일본이  조선에 군대를 파견하면 당장 
청나라와 러시아도 군대를 파견하게 되어 큰 전쟁이 일어나게 됩니다.”
  “아니 청나라와 러시아가 무었 때문에 조선에 군대를 파견합니까?”
  “러시아는 부동항이  필요합니다. 러시아의 극동함대가  있는 블라디보스톡은 
겨울엔 얼음이 얼어서 사용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조선을 수중에 
넣어 부동항을 얻으려는 것입니다.”
  하나부사 공사의 말에 상인들은  그때서야 이해가 간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거
렸다.
  “허나 우리  정부는 청국과 러시아를 물리치고  반드시 조선을 대일본제국의 
속국으로 만들 것입니다.”
  하나부사 공사가 단호하게 말했다.
  상인들은 흐뭇하여 술을 마시기 시작했다.
  가을밤은 길었다. 동래부 성 위에서 인정소리가  은은하게 울리기 시작했을 때 
일본 상인들은 약속이나 한 듯이 하나씩 자리를 떴다. 모두들 취해 있었다. 마쓰
다까지 옥년을 향해 의미심장한 눈웃음을 치고 자리를 떴다.
  옥년은 자세를 고쳐  앉았다. 일본 상인들이 하나부사 공사를 혼자  남겨 놓고 
자리를 뜬 까닭이 무엇인지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다. 그러나 내색하지 않고 다
소곳이 고개를 숙였다.
  하나부사 공사는 무릎을 세운 채  고개를 숙이고 앉아 있는 조선 여인을 지그
시 응시했다. 
  얼굴이 미색은 아니었다.  그러나 조선 여인 특유의 매력이 그  몸에서 느껴졌
다. 나이는 서른이  훨씬 넘어 보였다. 나이  때문인지 무르익은 여체가 터질 듯 
풍만했다. 어쩌면 술기운  때문인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면서 하나부사  공사는 낮
게 헛기침을 했다. 
  “나으리, 안방으로 들어가실까요?”
  이윽고 옥년이 고개를 들고 하나부사 공사를 향해 요염하게 웃음을 뿌렸다.
  “음.”
  하나부사 공사는 고개를 끄덕거렸다.
  옥년이 먼저 자리에서  일어나 옆방으로 하나부사 공사를  안내했다. 하나부사 
공사는 흡족했다.  옥년에게 안내되어 들어간 방은  화사한 금침이 깔려 있었고, 
춧불까지 은은하게 밝혀져 있었다.
  “나으리.”
  하나부사 공사가 보료 위에 않자 옥년이 바로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 옥년
의 몸에서 살 냄새가 울컥 풍겼다.
  “일본은 조선을 정벌할 모양이죠?”
  옥년이 색기가 흐르는 목소리로 물었다. 
  “일본말은 모두 알아 듣는가?”
  하나부사 공사는 흠칫하여 긴장된 표정을 지었다.
  “대충은 알아 듣습니다.”
  “허면 조선을 정벌하리하는 것도 알아 들었는가?”
  “조선을 고깃덩어리라고 하면서 서로 먼저 물어 뜯으려 한다는 말도 알아 들
었습니다.”
  “너희 조선은 망해  가고 있다. 이웃나라가 칼을 들고 도적질을  하려고 하는
데 집안 싸움만 하고 있지 않는가?”
  “일본은 3백 년 전에도 조선을 정벌하려다가 실패했습니다.”
  “일본은 3백 년 전의 실패를 되풀이하지 않을 것이다.”
  “일본은 그렇게 군대가 막강한가요?”
  “막강하다 뿐인가? 일본은  조만간 세계 어느 나라보다도 막강해  질 것이다. 
일본군대는 천하무적을 목표로 양성하고 있다. 이  군대를 앞세워 대동아의 패자
가 될 것이다.”
  “군대를 앞세워 이웃나라를 정벌하는 것은 하책에  지나지 않습니다. 옛 역사
를 돌이켜보아도  군대를 앞세워 이웃나라를 침략한  나라는 반드시 실패했습니
다.”
  “일본은 그렇지 않을 것이다.”
  하나부사 공사의 얼굴이 벌겋게 상기되었다.
  “일본이 조선을 정벌해도 잠시뿐일 것입니다. 조선은  결코 정복되지 않을 문
화를  가지고 있습니다.”
  “너는 색주가의 여인 같지 않은 높은 식견을  가지고 있구나. 어디서 그와 같
은 공부를 했는가?”
  하나부사 공사가 정색을  하고 물었다. 하나부사 공사는  색주가의 여인이라고 
만만히 보았던 옥년에게서 예상하지  못했던 얘기가 나오자 자신도 모르게 긴장
되는 것을 느꼈다.
  “나으리, 이제 그런  대화는 그만두시지요? 가을밤이 길다고 해도  인정이 울
었습니다.”
  “너 같은 여인이 색주가에 있다는 것이 못내 믿을 수 없는 일이로군.”
  “나으리는 조선을 정벌하십시오.”
  “그럼 너는 무엇을 하겠느냐?”
  “저는 나으리를 정복하겠습니다.”
  옥년의 얼굴에 색정적인 미소만이 아닌 뜻모를 웃음기가 번졌다.
  “나으리.”
  옥년이 저고리의 옷고름을 풀렀다. 옥년의 저고리  속에는 뜻밖에 아무것도 걸
치지 않아 옷고름을  푸르자 허연 젖무덤이 그대로 쏟아져 나왔다.  하나부사 대
리공사는 눈빛이 크게 흔들렸다.
  “너는 조선을 사랑하지 않느냐?”
  하나부사 대리공사는 꿈틀대는  욕정을 자제하며 간신히 그렇게  물었다. 옥년
의 젖무덤이 도발하듯이 자신을 노려보고 있는 기분이었다.
  “어찌 조선을 사랑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도 조선을 정벌하라고 한단 말이냐?”
  “일본이 조선을  정벌한다고 해도 아쉬울  것이 없는 탓이지요.  일본은 썩어 
가고 있는 조선을 탐내고 있는 승냥이에 지나지 않습니다.”
  “마치 조선이 망하기를 기다리고 있는 듯하군.”
  “그런가요?”
  옥년은 후후 하고 웃음을 깨물었다. 마치 사냥한  먹이를 앞에 놓고 만족한 미
소를 짓고 있는 듯한 모습이었다.
  (그래, 썩은 땅을 마음대로  유린하여라. 이 나라 조선이 어디 나 같은  비천한 
계집의 것이라더냐......)
  옥년은 속으로 뇌까렸다.  조선이 일본인들의 군화발에 짓밟힌다고  해도 아쉬
운 것이 하나도 없었다. 어차피 이 나라는 임금의 나라이고 양반들의 나라였다.
  “그럼 나으리를 제 포로로 만들겠습니다.”
  옥년이 눈웃음을 치며 하나부사 대리공사의 머리를 와락 끌어 당겨 가슴에 안
았다. 하나부사 대리공사가 무어라고 항변을 할 여유도 없는 순식간의 일이었다. 
하나부사 대리공사는 물컹한 살덩어리가 얼굴을 압박하는 것을 느끼며 아랫도리
를 뒤로 뺏다.
  “어떠셔요?”
  옥년은 이미 두 다리를 벌리고 궁둥이를 하나부사 대리공사의 무릎 위에 올려 
놓고 있었다.
  “나는 오늘 너의 포로가 되고 싶구나.”
  “그래요?”
  “너의 몸은 잘 익은 과일처럼 단내가 나는구나.”
  “듣기 좋은 말씀이군요.”
  옥년이 높은 소리로  웃으며 하나부사 대리공사를 이불위에  쓰러트렸다. 하나
부사 대리공사는 옥년의 치마 속으로 손을 넣다가  다시 한번 깜짝 놀랐다. 옥년
의 치마 속에는 맨숭맨숭한 속살뿐이었다.
    3
  옥년은 측간에서 돌아 나오다가 잠시 서쪽 하늘을 쳐다보았다. 
  어느 새 짧은  겨울 해가 서쪽으로 어둠스레하게 기울고 있었다.  차가운 날씨
였다. 해가 기울어 밤이 되면 얼음이 얼기  시작할 것이다. 기묘년(1879) 정월 초 
닷새였다.
  (봄이 얼마 납이 않았는데 아직도 날씨가 이렇게 차니......)
  옥년은 혼자말로 중얼거리며  몸을 부르르 떨었다. 옥년의  술집은 성업중이었
다. 하나부사 일본 대리공사가 군함을 이끌고 와서  한바탕 소란을 피우고 간 뒤 
일본 상인들의 무역은 아연 활기를 띠고 있었다.  그와 함깨 일본 상인들의 옥년
의 술집 출입도 더욱 잦았다.
  일본 상인들은 옥년을  좋아했다. 조선인들이 왜인들을 두려워하며  물건을 사
고 팔려고 하지 않을 때면 옥년을 데려다가  거간을 하게 했다. 조선인들 쪽에서
도 일본이들과 직접 거래를 하는 것이 싫어 옥년을 종종 중간에 내세웠다.
  옥년은 일본인들의 취향에  맞게 집까지 수리했다. 방을 세 개나  들이고 방마
다 장판 대신 다다미를 깔고 화로를 놓았다.  부엌에는 쇠돌이를 보아 주던 할며
ㅁ을 부엌할멈으로 두고 생선을 박 서방에게  조달하도록 했다. 일본인들은 생선
을 좋아했다. 그것도  익히지 않은 생선을 편육처럼 얇게 저민  것을 사시미라고 
하면서 좋아했다.
  생선은 싼 값에 얼마든지 구할 수 있었다.  부산은 고기를 잡는 일을 생업으로 
삼는 사람들이 절반이 넘었다.
  “객승 문안드리오.”
  그때 걸걸한 목소리가 옥년의 귓전을 때렸다. 옥년이  깜짝 놀라 술집 앞을 살
피자 죽립을 깊숙이 눌러  쓴 중이 술집 앞을 살피고 있었다.  몸이 장대한 중이
었다.
  “무슨 일이신지요?”
  옥년은 중 앞으로  미적미적 걸어가며 궁금한 낯빛을 했다. 중이  술집을 기웃
거리고 있는 것이 괴어쩍었다.
  “날이 저물어 하룻밤 유숙할 수 있을지 여쭙고자 하오.”
  목소리가 우렁우렁했다.
  “이곳은 스님이 유숙할 만한 곳이 못 되옵니다.”
  “떠도는 중이요. 헛간이라도 있으면 하룻밤 빌려 주구려.”
  “스님, 이곳은 색주가이옵니다.”
  “허허, 색주가이면 어떻고 무간지옥이면 어떻겠소?  떠돌이 중이긴 하나 색을 
보시하라고는 하지 않을 터이니 그 점은 안심을 놓구려.”
  “스님의 말씀을 듣자 하니 산전수전 다 겪으신 듯합니다.”
  옥년은 입꼬리에 미소를 달았다. 중의 입심이 만만치 않다고 생각했다.
  “상우 방풍이라... 위로는 비가  새고 옆으로는 바람이 들이쳐도 상관이 없소.

  “혹여 독각대왕이 아니십니까?”
  “어찌 중을 귀신이라고 하오?”
  “스님의 말씀이 치인설몽이 아닙니까?”
  “치인설몽이라......”
  중이 죽립을 비스듬히 위로 치켜 올리고 옥년을 살폈다.
  “내 말이 허황하다는 말이구려... 부인의 학문이 정심한 듯합니다.”
  “과찬이십니다.”
  옥년은 부끄러운 듯이 고개를 숙였다. 중에게서  칭찬을 받자 어깨가 들썩거려
졌다.
  “어떻게 누옥이라도 하룻밤 유숙할 수 있도록 하시겠습니까?”
  “스님의 청을 거절하면 무간지옥에 떨어질 것이 분명한즉 어찌 거절할 수 있
겠습니까?”
  “허허......”
  중이 소탈하게  웃었다. 옥년은 중을  인도하여 내실로 쓰는  방으로 들어오게 
했다. 옥년이 쇠돌이와  같이 쓰는 방이었다. 아궁이에  불을 지핀 탓에 방 안이 
훈훈했다.
  “이 방은 규방인 듯하군요.”
  중이 죽립을 벗으며 난색을 표시했다. 아랫목에는  이부자리가 깔려 있고 벽에
는 옥년의 치마와 저고리들이 함부로 걸려 있었다.
  “색주가의 여자니 내외하실 일은 없을 것입니다.”
  “방이 또 있지 않소?”
  “웃방은 부엌할멈이 쓰는 방입니다.”
  “함지사지로군......”
  중이 빙긋이 웃었다. 죽을 곳에 빠졌다는 말이어서 옥년도 피식 웃었다.
  “스님의 법명은 어찌 되십니까?”
  “떠도는 중이 무슨 법명이 있겠소?”
  저녁상을 차려  올리자 중은 허겁지겁  수저를 뜨기 시작했다.  옥년은 저녁을 
먹는 중의 앞아  앉아서 이것저것 캐물었다. 중은 눈빛이 형형하고  기골이 장대
하여 단순히 떠도는 중이 아닐 것 같았다.
  “그럼 속명은 어찌 되십니까?”
  “이동인이라고 하오.”
  중이 멈칫하여 옥년을 쳐다보다가 대답했다.
  “어느 절에 계시는데요?”
  “한성의 봉원사에 승적을 두고 있소.”
  “허면 도성에서 이 먼 곳까지는 어찌하여 오셨습니까?”
  “일본엘 가려고 하오.”
  “일본에를요?”
  옥년이 깜짝 놀라서 이동인을 새삼스럽게 쳐다보았다.
  “스님께서 일본을 무엇 때문에 가시려고 합니까?”
  “일본에 가서 득도를 하려고 하오.”
  이동인이 밥 한 그릇을 깨끗이 비운 뒤 수저를 놓으며 대답했다.
  이동인이 한성에서 유대치와 김옥균에게 일본에 밀항하여 선진문화를 배워 오
겠다고 도성을 떠난  것은 지난 섣달이었다. 박규수가 죽은 뒤  개화당은 의기소
침해 있었다.  게다가 역관 오경석마저 시름시름  앓고 있어 언제 죽을지  알 수 
없었던 탓에 개화당은 잔뜩 위축될 수밖에 없었다.
  이때 이동인은 일본에 밀항을 해서 일본이 어떻게 개화하고 어떻게 군함을 제
조하였는지 소상히 알아  오겠다고 홀연히 선언했다. 개화당이  봉원사의 승방을 
드나들면서 탁상공론만 해야  아무 송용이 없다는 것이었다.  김홍집은 이동인의 
밀항을 반대했고 유대치,  김옥균, 오경석 등은 적극적으로  찬성을 했다. 유대치
와 김옥균은 오히려 이동인에게 여비까지 마련해 줄 정도로 이동인의 밀항에 적
극적으로 찬성했다.
  이동인은 도성을 떠나기전  이동의 오경석의 집을 찾아갔다.  일본으로 밀항하
면 살아서 돌아올지도  알 수 없으려니와 오경석이  그때까지 살아 있을지도 알 
수 없는 일이었다.
  “대감, 다녀오겠습니다.”
  이동인은 병석에 누워 있는 오경석에게 정중히  합장을 했다. 오경석의 병상은 
아들 오세창이 지키고 있었다. 15세의 미소년이었다.
  “대감이라니... 중인에게는 당치 않으신 말씁입니다.”
  “사역원 당상관이 아니십니끼?  중인 신분으로 당상관에 오르는 일이 쉽겠습
니까?”
  “속절없는 일입니다. 이  나라의 진정한 개화를 못 보고 죽는  것이 한스러울 
뿐입니다.”
  “대감의 금석학은 이미 일가를 이루고 있지 않습니까? 그 한가지만으로도 큰 
공을 이루셨습니다.”
  “그보다 어떻게 일본으로 밀항을 하시렵니까?”
  “부산 동래부에 일본 동본원사의 절이 하나 있어 포교활동을 하고 있다고 하
옵니ㄷ다.”
  “그럼 스님들을 통해 밀항을 하시렵니까?”
  “예.”
  “헌데 스님깨서는 일본말을 하십니까?”
  “일본도 한문을 쓰고  있는 나라니 우선은 필담으로  대화를 하고 이 다음에 
일본말을 배우겠습니다.”
  “과연 장하십니다.”
  “소승은 일본에 가서  반드시 군함 만드는 법을 배워 오겠습니다.  군함이 없
고서야 어찌 자주 개국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그렇습니다. 우리가 개화하고 개국하자고 하는 것은  오로지 이 나라의 자주
와 독립을 위해서입니다.  지금처럼 일본의 총칼이 두려워 문을 여는  것은 망국
지사입니다. 우리가 병자수호조약으로 나라의 문을 연  것이 이나라의 해악이 되
어서는 안 됩니다.  척화라는 무리들이 아무 지식과 경륜도 없으면서  허기와 도
언으로 척왜를  부르짖고 있으나 우리는  개화에 박차를 가해야  합니다. 조선은 
잠자고 있습니다. 잠자고 있는 민중을 깨워야 이 나라는 살 길이 열릴 것입니다.

  오경석은 쿨럭쿨럭 기침을 하면서도 열변을 토했다.
  “명심하겠습니다.”
  이동인은 죽음의  그림자가 어른거리는 오경석의 얼굴을  살피며 굳게 약속을 
했다. 조선은 아직  어둠 속의 미몽을 헤매고  있었다. 이 어둠을 걷어내는 일에 
자신과 같은 선각자가  신명을 바쳐야 한다고 생각하자 가슴이 뻐근해  왔다. 이
동인은 그런 각오로 섣달의 눈보라를 헤치고 부산까지 내려온 것이다.
  “도를 깨우치는데 일본까지 가야 합니까?”
  “이 닙에 일본 상인들의 출입이 잦다던데 일본에 갈 수 있도록 주선 좀 해주
시겠소?”
  이동인은 동문서답을 했다.
  “그거야 어렵지 않은 일입니다만......”
  옥년은 말꼬리를 감추며 이동인의 얼굴을 그윽한 눈빛으로 살폈다.
  “주선만 해주신다면 사례는 크게 하겠소.”
  “무엇으로 사례를 하시렵니까?”
  “무엇이든지 시주께서 원하시는 것을 사례하리다.”
  “스님도 아시다시피 저는 색주가에 몸을 담고  있는 여인입니다. 이 보잘것없
는 몸으로 여러  사내와 음사를 치르었으나 아직  스님은 겪어 보지 못하였습니
다.”
  “허허... 욱신의 보시를 원한다는 말씀이오?”
  “제게 스님에게 공양을 드리는 것이 아니라 스님에 저에게 보시를 하는 것입
지요. 어떻습니까? 스님께서는 몸이라도 보시하셔서  밀항을 하시겠습니까? 옛날
의 고승들은  도를 깨우치기 위해 제  눈을 파내고, 제 수족을  자르기도 했다고 
합니다. 육신이란 껍데기에 지나지 않지 않습니까?”
  “과연 그렇소. 내  비록 수행하는 불자의 몸이나 진정 도를  깨우친다면 무엇
을 아까워하겠습니까?”
  “그러면 금침을 깔겠습니다.”
  “그러시지요.”
  이동인은 고개를  끄덕거리고 눈을 감았다.  그러나 옥년은 금침을  깔 생각이 
없는지 이동인을 우두커니 쳐다보다가 입을 열었다.
  “스님.”
  이동인이 눈을 떴다. 이동인의 얼굴은 지극히 평화롭고 안온했다.
  “세 치 혀로 스님을 농락했으니 허물치 마십시오.”
  이동인이 빙그레 웃었다.
  “어찌 소승을 농락했다고 하십니끼?”
  “제가 스님을 떠보느라고 황음한 말을 지껄였는데도 스님의 얼굴은 명경지수
와 같이 맑았습니다. 스님께서는 반드시 큰 도를 깨우칠 분이라고 생각합니다.”
  “수행하는 불자를 부끄럽게  하지 마십시오. 소승은 부인의  지란지실에서 지
란지교를 나누었을 뿐이오.”
  “스님, 청이 하나 있습니다.”
  “말씀을 하시지요.”
  “소인의 아이를 거두어 주십시오.”
  “아이라니요?”
  “소인에게는 뜻 아니한 사정으로  아이를 맡긴 사람이 있는데 거두어 키우기
가 난감합니다.”
  “중이 어찌 아이를 거두겠소?”
  “혹여 마땅한 절이 있으면 맡겨 주십시오.”
  “아이의 이름이 어떻게 됩니까?”
  “금석이라고 합니다.”
  “금석이라... 아비되는 사람은 무엇을 하고 있습니까?”
  “어미는 죽었고 아비는 동학에 몸을 담겠다고 떠났는데 도무지 만날 길이 없
습니다.”
  “음.”
  이동인이 낮게 신음을  삼켰다. 옥년은 쇠돌을 자신이 맡아 기르게  된 이야기
를 이동인에게 자세히 설명했다.
  “양반 토호들의 행패가 극에 이르렀습니다.”
  이동인이 얼굴을 찡그리고 혀를 찾다.
  “제가 거두고 있는 것은 상관이 없으나 이렇게 색주가에 있는 몸이라 아이를 
잘 키울 여력이 없습니다.”
  “그러면 제가 일본에 다녀 온 뒤에 아이를 거두기로 하지요.”
  이동인이 마침내 고개를 끄덕거려 쇠돌을 맡기로 하였다. 
  이동인은 옥년의 술집에서 사흘을 머무른 뒤 옥년의 소개로 일본 상인 마쓰다
를 만났고, 마쓰다를 통해  동본원사 승려들을 만날 때 접촉하게 되었다. 옥년은 
이동인이 동본원사의  승려들을 만날 때  친히 통역까지 해주었다.  그러나 다음 
날부터는 그럴 필요가  없었다. 이동인이 승려들을 만날 때는 필담을  하면서 일
본말을 배우려 했기 때문이었다.
  동본원사 승려들은 이동인을  만나는 것을 좋아했다. 조선에서  포교를 하려면 
조선인을 사귀어야 하는 것이  당연한 일이기도 했지만 무엇보다 이동인의 호쾌
한 기상과 달변이  동본원사의 승려들을 사로잡았다. 게다가 이동인은 박식했다. 
동본원사의 승려들은  기쁜 마음으로 이동인에게 일본어를  가르쳐 주고 밀항을 
알선해 주었다.
  1879년 8월, 이동인은  일본어를 배우기 시작한 지 8개월 만에  부산에서 일본
인으로 변장을 하고 일본 기선을 탔다. 날씨는 서서히 가을로 접어 들고 있었다. 
윤기 없이 매끄러운 하늘이 높고 맑아지고 바람이 서늘해 져 갔다.
  (아아 이제야말로 일본을 보게 되었구나!)
  이동인은 푸른 파도를 가르면서 살같이 빠르게 앞으로 나가는 기선의 갑판 위
에서 크게 심호흡을 했다. 처음 타보는 화륜선이었다. 기선의 크기도 어마어마했
지만 이러한 배가  망망대해를 흔들리지 않고 달릴  수 있다는 것이 신기하기만 
했다.
  이동인이 탄 배는 나가사키에 먼저 정박했다.  이동인은 나가사키를 거쳐 일본
의 천년 고도인 쿄오토의 동본원사를 찾아갔다.  서툴기는 했지만 이동인은 일본
어도 구사할 수  있었고 승려의 신분이라 곳곳에서 융숭한 대접을  받았다. 이동
인은 동본원사의 주지로부터 경웅의숙을 설립한 후쿠자와 유기치를 소개받아 만
났다. 후쿠자와  유기치는 비천한  사무라이 가문의 출신이었으나  나가사키에서 
네델란드어를 배운 뒤  에도막부의 통역관으로 발탁되어 활동을  하다가, 에도막
부가 쓰러지고 메이지 유신이 일어나자 경웅의숙을 설립하고 탈아론을 주장하여 
일본인들에게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었다.  탈아론은 아시아에서 벗어나자는 사상
으로 일본의 개화운동에  불을 지피고 일본인들이 조선으로, 중국으로, 마침내는 
제2차세계대전의 중요한 분수령이  되는 태평양전쟁까지 감행하게 되는 근대 일
본의 사상적 밑거름이 되는 것이었다. 물론  그것은 군국주의화되어 버린 일본의 
군벌에 의해 어느 정도 변색된 것이기는 했다. 
  이동인은 일본에서 신문명에  눈을 떴다. 보고 듣는 것이 모두  신기하고 새로
운 것들 뿐이었다. 국민들은  활기에 넘치고 부유하게 살았다. 이미 일본에는 양
반이나 천민 같은 신분을 가르는 계급은 존재하지 않았고 공장에서 쏟아져 나온 
상품이 넘치고  있었다. 일본의 새로운  수도인 도쿄에는 이미  1869년에 철도가 
건설되어 수많은 사람을 태우고 열차가 달렸다. 그것뿐이 아니었다. 큰 도시에는 
전기가 들어와 밤이면 거리와 골목이 대낮처럼 환했다. 경이로운 일이었다.
  (내가 정녕 꿈을 꾸고 있는 것인가?)
  이동인은 자신의 눈이  믿어지지 않았다. 마치 별천지에 와 있는  듯한 기분이
었다.
  그러나 이동인이 일본으로 밀항을 한  그 해에도 조선은 크고 작은 사건이 빈
발했다. 음력 1월  24일 사헌부 집의 권종록은 재용절약,  기강확립, 외화수입 등 
시폐개혁을 논하는 상소를 올렸다. 고종은 이 상소를 보고, 
  “현 시국의  폐단을 절절하게 기술하였으므로 과인은  참으로 기쁘게 생각한
다. 명심하여 폐단을 바로 잡겠노라.” 하고 비답을 내렸다.
  2월 4일엔 흑산도에 위리안치한  최익현을 방면했고 3월 25일엔 일본 군관 60
명이 동래부 관아를  습격하여 부사 윤치화와 포졸들을 부상시켰다.  4월 22일엔 
인천에 상륙한 일본인들이 민가를  노략질하여 정식 공사로 임명된 하나부사 일
본 공사에게 항의했다.
  6월엔 일본에서 상륙한 윤질(콜레라)이 전국을 휩쓸어 8월까지 계속되었다. 조
선 조정은 중범이외는 죄수를 석방하도록 했다.
  8월 15일엔 전 영의정 김병학이 죽었다. 고종은 비통하게 여기면서,
  “과인이 임금  자리에 올랐을 때 10년을  하루같이 충성스럽게 보필하였는데 
이제 그가 죽었다는  소식을 들으니 절통한 슬픔을 비길 데가  없노라.”하고 김
병학의 장례를 후히 치르고 녹봉을 3년 동안 계속 보내라고 의정부에 지시했다.
  8월 27일엔 하나부사  일본공사와 덕원부사 김기수 사이에 원산항 개항세목이 
조인되었다. 이로써 부산하에 이어  원산항까지 개항됨으로써 조선은 침략자들에
게 완전히 문호를 개방하는 꼴이 되고 말았다.
  날씨가 차가워졌다. 옥년은 책에서 시선을 거두고 잠시 허공을 쳐다보았다. 매
서운 바람이 귀곡성 같은 음산한 비명소리를  지르면서 허공을 내달리고 있었다. 
그러잖아도 추운 겨울이 한겨울 삭풍 때문에 더욱 추운 느낌이 들었다.
  일본인들은 이제 원산으로  몰려가고 있었다. 새로운 항구의  개항으로 일본인
들은 일확천금의 꿈에 부풀어 있는 것이다.
  (괴승 이동인은 어째서 돌아오지 않는 것일까?)
  옥년은 이동인광의 대화가 생각났다. 이동인이 부산에 온 지 1년, 부산을 떠나 
일본으로 말항한 지 어느덧 넉 달이 되어 가고 있었다.
  (이동인은 이 나라 조선을 개회시키기 위해 일본으로 간다고 했어......)
  개화란 꽃이 핀다는  말이다. 조선의 개화라른 것은 조선을 꽃  피운다는 말인 
것이다. 옥년은 고개를 갸우뚱했다.  일본에서 서양 문명을 배워 조선을 꽃 피운
다는 말을 얼핏 이해할 수가 없었다.
  옥년은 다시 책으로  시선을 떨어트렸다. 옥년이 지금 읽고 있는  책은 시경이
었다. 시경은 오경의 하나로 중국 춘추시대의  민요를 중심으로 집대성한 최고의 
시집이며 주나라의 시까지 수록되어 있었다. 전부터  구전으로 전해 져 내려오는 
것을 공자가  3백 11편을 추렸다는 말이  읽는 책이었다. 옥년의  공부는 마침내 
시경까지 읽을 수 있는 경지에 이르렀던 것이다.
  옥년은 한때 죽음을  생각한 일이 있었다. 죽음이 옥년을 유혹한  적은 수없이 
많았었다. 어머니를 따라다니며 거렁뱅이 노릇을 하고  비천하게 살았을 때도 그
랬고 박달이 죽었을 때도 죽음을 생각했다. 산다는 것은 고통스러운 일이었다.
  그러나 죽으면  모든 것이 끝이었다.  옥년은 어떻게 해서든지  살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옥년은 책을 읽을수록 생각이 깊어졌다. 한낱  버러지나 다름없는 자신의 생애
가 어떤 의미가 있는지도 생각했고,  풀 한 포기, 꽃 한 송이가 존재하는 이유도 
생각했다. 그러기 위해서 옥년은 수없이 책을 읽었다. 색주가의 술집이라고 해서 
손님이 항상 들끓고 있는 것은 아니었다. 옥년은  손님이 없을 때면 손이서 책을 
놓지 않았다. 낙엽이  바람에 쓸려다니는 가을밤, 바람이 불고 비가  오는 밤, 눈
이 사락사락 내리고 깊고 푸른 밤... 옥년은 헤아릴 수 없는 많은 책을 읽었다.
  “아씨.”
  문득 바람소리에 섞여 문밖에서 옥년을 부른  부엌할멈의 소리가 들렸다. 옥년
은 옆에 누워 있는 쇠돌이 얼굴을 힐끗 쳐다보고 문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왜요?”
  “밖에 거렁뱅이가 하룻밤만 재워 달라고 합니다.”
  “거렁뱅이 재워 줄 데가 어디 있어요?”
  “사정이 딱해 보입니다.  그냥 내쫓으면 아무래도 얼어 죽을 것  같은데 부엌
이라도 재워 주는 것이 어떨까요?”
  “할멈 좋을 대로 해요.”
  옥년은 내키지 않았으나  그렇게 대꾸했다. 옥년은 거렁뱅이들을 싫어했다. 거
렁뱅이들을 볼 때마다 마치 자신의 옛날 모습을 보는 것 같아 짜증이 났던 것이
다.
  옥년은 지금 왕풍의 군자간역을 해석해놓고 그 뜻이 맞는지 헤아리고 있었다.
  싸움터에 나가신 임
  어느때 돌아오실지 기약이 없네
  닭은 우리에 들어가 졸고
  해는 서산으로 지고 있네
  양과 소마저 돌아오는데
  싸움터에 나가신 임
  어찌 그립지 않겠는가  
옥년은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었다. 시의 내용은  사랑하는 남자를 더욱 절절하게 
그리는 것이 분명한데 더 이상 그 뜻을 헤아리 수가 없었다.
  옥년은 책을 덮고 촛불을 껏다. 밤이 이미 깊이 있었다.  
  이튿날 옥년은  부엌에서 잠을 자고  나온 거렁뱅이를 보고  가슴이 철렁했다. 
처음엔 그 거렁뱅이가  누구인지를 알지 못했었다. 다만 어쩐지 낯이  익은 거렁
뱅이라는 생각을 했을 때 옥년의 얼굴이 섬광첨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이 사람은 옥순의 아버지야!
  옥년은 몇  번이나 거렁뱅이 사내를 자세히  살폈다. 다행히 그는 소경이었다. 
옥년이 자세히 얼굴을 살피고 있어도 옥년을 알아보지 못했다.
  이름이 어떻게 되시오?
  옥년은 방망이질을 하는 가슴을 억누르며 거렁뱅이 사내에게 이름을 물어보았
다. 혹시라도 자신이 착각을 한 것이 아닐까 해서였다.
  이창현이라고 하오.
  언제부터 눈이 보이지 않았소?
  몇 년 되었소.
  식솔들은 없소?
  처자와 딸 하나는 죽고 하나 남은 딸은 먼 곳에 가 있소.
  아침은 자셨소?
  못 먹었소.
  좀 기다리구려. 할멈에게 차려 주라 할 테니......
  옥년은 입을 다물 수가 없었다. 놀란 눈으로  떨이지고 헤어진 옷을 입고 아궁
이 앞에 웅크리고 앉아 있는 이창현을 한참동안이나  넋을 잃고 쏘아 보았다. 기
묘한 인연이었다.
  옥년은 이창현에게 더 이상 말을 붙이지 못하고 안방으로 황급히 돌아왔다.
  부엌에서 잔 걸인에게 아침을 차려 줘요.
  옥년은 부엌 할멍에게 이창현에게 밥을 주라고 시켰다.
  예.
  어디 갈 곳이 없으면 겨울 날 때까지라도 우리 집에 있으라고 하구요.
  예. 
  그날 밤 옥녕는 모처럼 꿈을 꾸었다. 캄캄한  어둠 속에서 옥손이 애절하게 옥
년을 부르고 있었다.
  아줌마.....
  아줌마.....
  옥년은 그 소리에 몇 번이나 잠에서 깨었다.
조선의 새벽
  궁녀들이 웃음소리가 홍진이  일어나듯 까르르 하고 자지러졌다.  세자와 궁녀
들이 투호놀이를 하고 있는 것이다.  투호놀이는 두 사람이 서로 번갈아가며 청, 
홍의 화살을 병 속에 던져 넣는 놀이였다.  고종은 대신들의 정기 알현을 받으며 
연신 중희당 뒤에  화원으로 귀를 기울였다. 궁녀들의 웃음소리가 꽃이  피듯 부
드러운 것은 새해 들어 일곱  살이 되는 세자가 병 속에 투호살을 던져 넣은 것
이 분명했다. 영의정 이최응은  계속해서 시정의 개선할 점을 아뢰고 있었다. 새
해 들어 임금과 대신들의 공식적인 첫 인견이었다.
  신이 새해의 첫 인견에서 감히  정승으로 말씀을 올리는 것은 옛 규례를 따르
려는 것이 아니라 지나쳐 버릴 수 없는 생각이 다른 사람들보다 갑절이 되어 말
씀을 올리옵니다.
  경은 기탄없이 말씀하시오.
  신 같은 보잘것없는 사람이  오래도록 영의정의 직책을 담당하였으니 몹시 황
송하고 부끄러워여러 말씀을 올릴 수가 없사옵니다.  그러나 전하가 진실로 성군
이 되기를 바란다면 어찌 깊이 생각하고 반성하지 않을 수 있겠사옵니까?
  경은 뜬금없이 과인에게 반성을 하라고 하는데 대관절 그 연유가 무엇이오?
  지금 조정의 기강이 화평하다고 말할 수 없고,  풍속이 순박하다고 말할 수 없
으며, 선비들의 기풍이 단정하다고 말할 수 없사옵니다. 또한 공물과조세가 많이 
지체되지만 사펴보고 독촉하는 일이 없고 사치하는 풍속이 점점 심해 지고 있사
오니 마땅히 경계해야 할 일이옵니다.
  그렇소. 사치하는 것은 마땅히 경계해야 할 일이오.
  대궐에서 지방에 이르기까지 대전에서 내전에 이르기까지 재용을 절약해야 하
는 것도 크게 생각해야 할 일이옵니다.
  고종은 얼굴을 찌푸렸다.  영의정 이최응이 대전에서 내전까지  재용을 절약해
야 한다는 것은 민비가 세자의 무병장수를 축원하기 위하여 명산 대찰에 불사를 
일으켜 국고를 1만 냥이나 사용한 것을  말하ㅡㄴ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민비가 
대비들의 의견을 받들어서 한 일일 뿐 아니라 고종도 쾌히 허락한 일이었다.
  나라의 기강이 서지 않고서야 어찌 나라를  경영하겠소. 또한 재용을 절약하는 
경의 말씀은 폐단을 적절히 지적한 것이니 과인이 어찌 다르지 않겠소?
  고종은 영의정 이최응의 말에 명심하겠노라고 대답했다.
  좌의정 김병국이 입을 열었다.
  공납인과 장사치는 도성에  사는 성민들의 고락과 관계되는  바입니다. 물건을 
바꾸어다가 팔아 주기도 하고 소용되는 물품을 구해 들이느라 성의와 노력을 다
하고 있으므로 이들을 나라가 돌보아 주어야 할 것입니다.
  고종은 좌의정  김병국을 물끄러미  굽어보았다. 대신들과의 공식  인견에서는 
언제나 임금이 행할 바를 대신들이 자유로이 고해 올리고 있었다.
  아우러 군사는 도성의 방비를 맡고 백성을 보호하는 막중한 일을 하고 있사옵
니다. 그런데 요즈음 나라의 재용이 고갈되어  공납인들과 장사치들이 값을 받지 
못한 것이 적지  않으며 군사들 또한 녹미를 받지  못한 것이 몇 달이나 되옵니
다.
  고종은 멀뚱히  허공을 쳐다보았다. 나라의  재정이 바닥난 것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었다. 그러나 마땅한 대책이 없어 고종은 답답하기만 했다.
  전하께오서 이를 불쌍히 여기시고 대궐의 돈 10만 냥을 내리시어 군사들이 식
량을 근심하던 일은 많이 풀어졌으나 아직도 군사들이 주리는 일이 허다한 실정
이옵니다. 대체로  나라의 재정이 이렇듯  텅 비었으니 위에서  아래에 요구하는 
것이나 아래서 위에 바라는 것이 오직 재용의 절약이옵니다.
  절약해서 쓴는 것은  재물을 생기게 하는 근본일 것이오. 경들의  말씀이 이처
럼 절절한데 내 어찌 명심하지 않겠소. 두번  세번 명심하여 재용을 아끼고 절약
하겠소.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이번의 과거가 공평하게 치르어지지 않았다는 말이 자자하게 들리고 있소.
  고종은 김병국의 직간이 끝나자 무거운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그것은 민비가 
고종에게 당부한 말이었다.
  신들의 죄가 크옵니다.
  과거란 모름지기 학문을 열심히 한 선비를  뽑아서 나랏일을 맡기는 시험이오. 
누차에 걸쳐 과거를 공정하게  치르라고 신칙했는데도 이러한 일이 또 일어났으
니 이 어찌 답답한 일이 아니겠소? 생원  진사 과거와 초시의 1소, 2소 시관들은 
모두 관리 문권에서 지워 버리도록 하시오.
  황송하옵니다. 1소, 2소의  시관들은 김영수, 윤승구, 정원화  , 정범조, 김윤식, 
유종식 등이온데 이들을 모두 관리대장에서 지워 버리는 법조문을 적용하겠사옵
니다.
  수고들 하였소, 세자와 중전이 후원에서 투호놀이를  하는 모양인데 경들도 합
께 가보는 것이 어떻겠소?
  삼가 명을 받자옵니다.
  모두가 일어나오.
  고종이 먼저 보료에서 일어나 앞서고 대신들이  조심스럽게 뒤를 따랐다. 대전 
내시는 고종의 앞에  서서 시위 무사들이 핏빛  철릭에 황초립을 쓰고 자우에서 
호위하고 있었다. 그들은 허리에 삼업하게 운검을 차고 있었다.
  상감마마 납시오.
  후원에 이르자 대전  내시가 여자처럼 엷은 음색으로 민비를 향해  외쳤다. 민
비와 세자를  둘러싸고 꽃물결처럼 움직이던 궁녀들이  일제히 옆으로 갈라서며 
허리를 숙였다.
  전하. 벌써 인견이 끝나셨사옵니까?
  민비가 화사하게 웃으며 고종을 맞이했다.
  그렇소, 오늘은 인견을 일찍 파했소.
  고종은 점점 요염해  져 가는 민비의 얼굴을 바라보며 흥건한  미소를 지었다. 
밤낮으로 대하는 민비인데도 가슴이 울렁거릴 정도로 아름다웠다.
  아바마마 어서 오시옵소서.
  세자 척이 투호살을 든 채 고종에게 인사를 올렸다.
  오냐. 투호놀이를 하는 게로구나.
  예.
  그래. 학문도 중요하지만 대통을 이을 막중한 몸이니 건강해야 하느니라.
  황송하옵니다.
  세자의 대답이 제법 의젓했다.
  중전마마. 신 영의정 이최응 문후 여쭈옵니다.
  신 좌의정 김병국 문후 올립니다.
  영의정 이최응과 좌의정 김병국이 차례로 허리를 굽혀 인사를 했다.
  어서들 오세요. 정사를 돌보느라고 영일이 없을 줄 압니다.
  전하께오서 두 대신들을 의지하는  것이 유비가 제갈량을 의지하듯 하시니 궁
중의 아낙네도 든든하기 짝이 없스빈다.
  중전마마. 말씀을 받자옵기가 황갑하오니다.
  영의정 이쵱으이 사양하는 인사를 올렸다.
  시간은 오시가 가까워지고  있었다. 하늘은 잿빛으로 흐려  금방이라도 누발이 
날릴 것  같았다. 그러나 대조전  후원에서는 국왕과 왕비의  즐거운 웃음소리가 
드높았다. 영의정 이최응은 노안에 미소를 띠고  투호놀이를 즐기는 젊은 국왕과 
왕비이기 때문이 아니라 젊은 부부라는 사실 때문에 더욱 아름답게 보이는 것이
다.
  민비는 투호살이 병  속에 들어갈 때마다 박수를 치고 고종을  바라본다. 진주
분을 발라 약간 창백해 보이는 얼굴이며 버들  같은 누썹, 오똑한 콧대와 봉곳항 
입술... 그러나 민비가 아름다운 것은 깊이를 알 수 없는 저 신비한 눈이다.
  고종을 바라보고 웃을 때마다 민비의 눈에서는 애정이 듬뿍둠뿍 묻어 나고 사
랑이 넘친다.....
  문득 영의정 이최응의 시선이  대조전 모퉁이를 돌아오는 영보당 소속의 무수
리에게 쏠렸다. 무수리가 황망히 중궁전 상궁에게  무엇인가 말을 전하자 중궁전 
상궁의 얼굴이 흙빛이 되어 종종걸음으로 민비를 향해
다가갔다. 민비는 이제 막 투호병에 살을 던져 넣으려는 참이었다.
  중전마마.
  민비가 머칫하여 중궁전 상궁을 쏘아 보았다.
  무슨 일이나?
  영보당의 전갈이 옵니다. 
  영보당에서 무슨 전갈이냐?
  아뢰옵기 황송하오나 영보당에 큰 변고가 있다 하옵니다.
  변고?
  민비의 목소리가 풀잎처럼 떨렸다.
  완화군 마마께서 급사하셨다고 하옵니다.
  뭐라고? 완화군이 죽었다는 말이나?
  그러하옵니다.
  중궁전 상궁이 자신의 죄이기나 하듯이 모둘  바를 몰라했다. 영의정 이최응은 
가슴이 덜컥 내려 앉는
듯한 기분을 느끼며  고종의 용안을 살폈다. 변고였다. 완화군이  죽다니, 그토록 
건강하여 대원군이  지극히 총애하던 왕자였는데...  공종의 낯빛이  창백해 지며 
몸을 부르르 떨었다.
  괴변이로다. 어제까지 멀쩡하던 완화군이 급사를 하다니  이런 망칙한 일이 어
디에 있는가?
  아뢰옵기 황송하오나 완화군 마마께오서는 천연두로.....
  천연두?
  민비가 눈꼬리를 치켜 올렸다. 천연두는 두차  또는 역질이라고도 하는데 고열
과 오한이 갑자기 일어나
체온이 떨어져 죽는 병이었다. 지난해 도성에  창궐한 천연두가 대궐까지 침범하
여 완화군의 목숨을 빼았은 것이다.
  지난 번 중전마마께서 내리신  탕제를 복용하고 잠시 회복하는 듯하였으나 그
만....
  중궁전 상궁은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왕자들의 수가 어찌 이리도 짧다는 말인가? 하늘이 원망스럽구나.
  민비가 눈물이 글썽한 눈으로 탄식을 했다.
  중전이 보낸 탕제를 먹고 완화군이 회복되는 듯하다가 죽었다고?
  영의정 이최응은 엉뚱한 생각을 했다. 영의정  이최응의 머릿속에 민비가 낳은 
첫 왕자의 대변불통  증상 때문에 대원군과 격렬한  대립을 하던 민비의 얼굴을 
떠올랐다. 그때 민비는 대원군이 산삼으로 원자를 죽였다고 이를 갈았었다.
  설마......
  영의정 이최응은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었다. 저  아름다운 여인이 어린 생명을 
독살할 리가 없어.... 영의정
 이최응은 자신의 머릿속에 떠오르는 불길한 생가이 가슴이 쿵쾅거리고 뛰었다. 
  완화군이 어찌 죽었다고?
  대원군은 완화군이 죽었다는 소식을 전해 듣고 눈을 부릅떴다.
  역질이라고 하옵니다.
  이재면이 무릎을 꿇은 채 공손히 대답했다.
  역질? 역질이라면 천연두를 말하는 것이 아니냐?
  대원군의 눈빛이 찌르듯이  날카롭게 이재면의 얼굴을 꿰뚫었다.  이미 대원군
의 전신에서는 감히 쳐다보지도 못할 기도가 목사되어 이재면을 찍어 누르고 있
었다.
  예. 지난 섣달에 도성에 역질이 창궐했는데  지엄한 궁궐까지 침범했다고 하옵
니다. 이미 도성에서도 수많은 인명이 목숨을 잃었사옵니다. 
  아니다. 이는 분명 표한 소부의 짓이다!
  아버님.
  내가 듣기에 중저넹서 탕제를 내렸는데 완화군이 그것을  먹고 죽었다고 한다! 
종묘 사직에 어찌 이런 참담한 일이 있을수 있단 말이냐?
  탕제를 먹고 죽었다고 하심은.....
  독상를 했다는 말이다!
  아버님, 어찌 그런 말씀을 하시옵니까?
  세상에 모두 그렇게 알고 있지 않느냐? 물러가서 천하장안ㅇ을 들라고 해라.
  예.
  대원군은 이재면이 물러가는 뒷모습을 쏘아 보다가  주먹을 불끈 쥐었다. 완화
군은 대원군이 유난히 귀여워하던 왕자였다. 그런  왕자가 천연두를 앓다가 덧없
이 죽었다는 사실이 믿어지지 않았다.
  전하께서 중전의 치마폭에 바져 있으니 이를 어쩐다는 말인가?
  대원군은 쥐었던 주먹을 슬그머니 푸어 놓았다.  완화군의 죽음은 대워군의 가
슴 속에 품고 있던 생각에 중대한 차질을 빚게  하는 것이었다.  그는 고종과 두 
아들을 번갈아 생각했다.  그러나 고종이나 두 아들이 모두 그를  흡족하지 못하
게 했다. 고종은  중전의 치마폭에 빠져 있고 재면은 아버지인  자신보다 중전쪽
을 따르고 있었다. 재선은 소실이기 때문에 중용한 일을 맡을 수가 없었다.
  이제 남은 것은 준용이뿐이 아닌가?
  대원군은 세 아들이  모두 싫었다. 이제 남은 것ㄷ은 재면의  아들 준용뿐이었
다. 고종이  낳은 세자도 있었으나 대원군은  어쩐지 자기 손주가 아닌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민비와의 반목 때문이었다.
  대원군이 민비에 의해 실각한 지 어느덧 7년이 가까워지고 있었다.
  세상은 점점 변하고 있었다.
  일본과 수호조약을 맺더니 급기야  부산이 개항되고 원산이개항되었다. 일본의 
조악한 상품들은 부산과 원산을 통해  쏟아져 들어와 인 나라 경제를 좀먹고 있
었다. 대원군은 일본 상품들이 쏟아져 들어오는 것이 불길하기만 했다.
 대원군이 거쳐하고 있는 아소당은 강바람이  유난히 드세었다. 그러나 대원군은 
아소당을 떠나지 않았다. 
그는 강태공이 그랬듯이  다시 한번 세월을 낚고 있었다. 야인으로  돌아온 지 7
년, 이제 그는 국왕의 생친인 대원군으로 다시  한번 손수 나라를 경영하려는 야
심에 불타고 있었다. 무서운 야망이었다. 
  해월이 그것이 잘해야 할 텐데...
  큰 거산나 음모의  뒤에는 항상 여자가 있게 마련이었다. 대원군은  해월을 조
종하여 안기영을 움직일 생각이었다. 
  먼저 사람을 모아야 힐 텐데 안기영이 그 일을 제대로 할수 있을지...
  대원군은 한가닥 불안한  그림자를 떨쳐버릴 수가 없었다.  안기영은 형조참의
까지 지낸 인물이었으나 심지가 깊다고 볼 수는  없었다. 그는 지금 대원군의 서
자 이재선과 긴밀히 회동하며 거사를 준비하고 있었다.
  다행해 고종과 시원임대신들이 일본과 통상을 하는 개국정책은 전체 유림으로
부터 맹렬한 반대를 받고 있었다. 어떤 계기만  만들어 주면 그들외 반일 감정은 
폭발할 것이 분명했다.
  대원군이 고종을 왕위에 앉힐 수 있었던 것은 대왕대비 조씨가 있었기 때문에 
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성공할 수 있었다. 물론 그것은  당대의 명재상인 정원
용, 조두순 등과  대원군이 일찍부터 교분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일이
었다.
  그러나 지금은 대왕대비 조씨가 돌아앉아 있었다.  대왕대비 조씨의 협력을 얻
을 수 없는 한 군사를 동원할 수밖에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대원군은  이 일을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고 미적거렸다.  그는 고종이 
지금이라도 자신을 불러들여, 아버님 다시 한번 정사를 맡아 주십시오. 아버님이 
없으면 소자가 삼천리  강토를 다스릴 수가 없사옵니다. 그 동안  왕비의 미태에 
빠져 아버님을 멀리한  소자의 불효를 용서해 주십시오...하고 부르러  오기를 간
절히 고대하고  있었다. 그렇게만 되면  경우에 따라 고종을  폐위하려는 거사를 
계획할 필요도 없는 일이었다.
  완화군을 죽이다니...
  민비는 교활한 여자였다. 세자가 허약한데 완화군이  무럭무럭 자라고 있는 것
은 민비에 위협이 되는 일이
었다. 완화군의 죽음이 민비의 짓이라고 단언할 수밖에 없었다.
  10년 가는 세도는 없다고 했어.....
  대원군은 아소당의 외원을 거닐며 세월을 보냈다.  그것도 짜증이 나면 묵화도 
치고 글씨도 썼다. 묵화는  대개가 난으로 추사 김정희에게 배운 솜씨였다. 김정
희의 필체가 당대를 압도하고  있으므로 대원군의 석파란을 치는 솜씨와 글씨도 
일세를 풍미할 만했다.
  그 동안 민문도  적지않은 변화가 있었다. 민비의 양팔이라고 할  만한 민승호
가 자기황이 터져 죽고 민규호는 병으로 죽었다.
  지금은 민태호가 민문의  두령 노릇을 하고 있었다. 그의 아들  민영익이 민비
의 친정인 민치록의 양자로 들어갔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민태호의 아들 민영익
이 20세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이조판서의 직위에 오르면서 실질적인 민문의 두
령 노릇을 하고 있었다.
  지난해엔 김병학도 죽었다.
  대원군이 집정을 하면서 우인처럼  동지처럼 생사 고락을 같이 했던 김병학이
었다.
  세상이 이토록 무상한 일이......
  대원군은 허망했다. 하늘이  자신을 버리는 것이라고 생가했다. 그러나 대원군
은 좌절하지 않았다.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고 하지 않는가. 대원군은 가슴 속
에 한을 품을 채 세월을 낚고있었다.

 음력 3월 23일 조선 조정은 예조참ㅇ의 김홍집을 수신사에 임명하여 일본에 파
견하기로 결정했다. 조선  조정은 일본과의 조약 중 조선에 불리한  조항을 개선
하기 위하여 김홍집을 파견하기로 결정했던 것이다.
  김홍집은 3월 23일 수신사에  임명되고 5월 28일 국왕인 고종에게 하직인사를 
한 뒤  도성을 떠났다. 김홍집의  수신사 일행에는 한학당상  이용숙을 비롯하여 
군관 윤웅렬, 서기  이조연, 반당 지석영등이 끼어  있었다. 반당 특별수행원으로 
낀 지석영은 일본에 가서  두묘제조법을 배워 조선에서는 처음으로 종두를 실시
하게 되는 인물이다.
  김홍집은 6월 25일 일본 기선 천세환호로 부산을 출발하여 7월 6일 도쿄에 도
착했다. 김홍집은 고종으로부터 위임받은 네 가지 조항 인천 개항철회, 부산항구
에서의 관세 실시, 미곡 수출금지 헤제 불가. 일본 공사가 요구한 미국과의 통상
거부를 가지고 일본과 협상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일본은 겉으로는 김홍집의 수
신사 일행을 융숭하게 대접하는 척했으나 김홍집이 교섭하려고 하면 회피하기만 
했다. 이러한 일본  정부와는 달리 일본 신문은 김홍집의 수신사  일행에게 동정
적이었고 김홍집의 일거수 일투족을  상세히 보도하여 여론의 비상한 관심을 모
았다.
  특히 동경일일 신문은 김홍집이  도착했을 때부터 그날 그날의 동정을 상세히 
보도했다. 김홍집 일행이  왕복 경비로 10만 원을 지참 사용하고  있다던가 식량
으로 쌀 45가마, 팥 7가마, 건어 30묶음과 식기 까지 가지고 왔다는 사실을 보도
했다.
  또 김홍집이  리본과 교섭하려는 내용에 대해서도  동정적으로 보도하고 있었
다.
  이번의 조선국  수신사가 본국 정부에 요청하는  주요안건은 3개 조항인게 그 
첫째 인천의  개항을 사절하자는 것이도 둘째는  미곡수출을 금지하자는 것이며 
셋째는 해관세칙을 개정하자는 것이다.

    첫째, 인천항 문제는 막부 말엽의 일본도  국내 쇄항론자들의 반대로 똑같은 
경험을 체험한 바 있으니,
  조선 조정의 목전의 곤경도 충분히 짐작하고 잘 절충해야 할 것이다.
    둘째, 미곡수출의 금지  문제도 막부 말엽의 일본 정부가 외국과  더불어 문
호개방을 담판할 때 미곡을 
  금수 품목에 삽입했었으니,  일본도 이러했거늘 조선국이 이제  똑같은 주장을 
한다고 무엇이 나쁠 것인가.

    셋째, 해관세칙의 개정을  요구하는 것도 일본은 이미  외국과의 통상무역을 
통하여 잘 체험한 바이라,
  조선 조정이 그 개항장의 시설과 외교상의 경비를 다소라도 보충하기 위해 이
를 유구함은 결코 루리한
  일이 아니다.

  동경일일 신문은 김홍집의 인상에 대해서도 찬사를 보냈다. 
    수신사 김공은 매우 침착한 인물로서 조선국 조정이 그 인선에 얼마나 신중
햇는가를 짐작하게 한다.
  학문이 유력하며 글씨도  잘 쓰고 한문의 문장도 매우 훌륭하다.  또한 만사에 
스스로 정중함은 물론이요,
  용모도 지극히 태연하고 평온하며 안색과 미우도 청수하고 고결하다.....

  김홍집은 7월 8일 일본  외무성이 권고한 미국과의 통상조약 체결를 거부하고 
미곡수출 금지 문제와 해관세칙 개정에 관한  문서를 외무성 관리에게 전달했다. 
그러나 일본 외무성은 이에 대한 확답 없이 차일피일
김홍집과의 담판을 피했다.
  김홍집은 일본 정부와의 담팡니  이루어지지 않자 그들이 주최하는 연회에 불
참하였다. 그리하여 일본 외무성을 당황하게 한  뒤 7월 16일 공자묘에 참배하고 
청나라 공사관을 찾아가 공사 하여장과 참찬관 황준헌을 예방했다.
  그리고 7월  17일부터 일본의 정부 요인들을  만나기 시작하여 이노우에 일본 
외상, 이토 히로부미를 만나고 7월 26일엔 일본 천황까지 예방했다. 그러나 김홍
집이 일본에  요구한 미곡수출 금지와  관세 징수는 보류되었다.  김홍집의 외교 
행가은 성공도 실패도 아닌 보류로 현안을 미루어 놓는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개화파의 한 사람인  김홍집이 일본을 방문하으로써 얻은 성과는 결코 
적지 않았다. 김홍집은  요코하마에 도착하여 기차를 타고  도쿄에 도착함으로써 
새로운 문명에 눈을 떴고 창국  공사 하여장을 통해 일본이 세게 각국과 조약을 
맺고 활발하게 서양 문물을 받아들이는 것을 직접 보았다.
  특히 황준헌은  사의조선책략이라는 책자 한 권을  김홍집에게 선물했는데 이 
책은 조선을 커다란  소용돌이에 휘말리게 하였다. 조선책략  이라고도 줄여서도 
부리는 이 책은  러시아가 조선을 침략할 우려가 있으므로 조선은  청국, 일본과 
동맹을 맺고 미국과 연합하여 러시아를 견제하자는 내용이었다.
  김홍집은 8월 4일  도쿄를 출바해 8월 11일 부산에 도착해  귀로에 올랐다. 이
날 또 한 사람의 개화파인  이동인은 새로 개항한 언산을 통해 존서으로 돌아왔
다.
  8월 20일 수신사 김홍집은 고종 앞에 나가 귀국 복명을 했다. 
  부산 동래부의 관세 징수를 어찌 매듭지었는가?
  이미 별지 문권에 대략 보고를 올렸지만 일본에 조약을 수정하는 문제가 있어
서 선뜻 정할 수가 
없사옵니다.
  인천 개항에 관한 문제는 어찌 매듭지었는가?
  하나부사가 강화조약의 조문을 들어 요구했으나 거부했사옵니다.
  김홍집은 이어서  도쿄와 요코하마를 잇는 일본의  철도에 대해서도 상세하게 
보고를 했다. 고종은 물론
그 자리에 배석했던 홍순목, 강노, 한계원, 이최응, 김병국은 일본이 철도까지 놓
았다는 사실에 깊은 탄식을 했다. 일본의 발전은 놀랍기만 했다. 지난 번 김기수
가 일본에 갔을 때와는 전혀 다른 양상이었다. 완고한
대신들도 개화가 필연적이라고 공감하게 된 배경이었다.
  로서아가 룬사를  동원하여 우리 두만강을 건너  중국 산동으로 쳐들어간다고 
한다는데 그 말이 사실인가?
  로서아가 군함 16척을  동원하여 청나라를 위협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옵니다. 
이미 청나라는 연해주의
해삼위를 로서아에게 넘겨 주었고 우수리강 연안도 넘겨줄 듯싶사옵니다.
  청나라가 어찌하여 영토를 로서아에게 뺏기는가?
  로서아는 청나라보다 큰 나라로  군사가 많기도 하지만 청나라는 기강이 해애
해 지고 백성들이 게으를 뿐
아니라 관리들이 탕오하여 군사를 양성하지 않은 탓인 줄 아옵니다.
  청나라가 그와 같이 되다니 어찌 타산지석으로 삼지 않겠는가? 일본의 형편은 
어떤가?
  일본은 학교를 세워 백성들을 가르치고 있었습니다.
  일본의 남쪽 섬에세는 연기가 난다고 하는데 정말 그런가?
  일본의 남쪽에 화산이 있기 때문에 항상 지진이 일어나고 있사옵니다.
  지진이 얼마나 크게 일어나는가?
  대체로 10년을 사이에 두고 큰 지진이 일어나 많은 사람들이 죽는다고 하옵니
다.
  일본은 66개 주를 다 통합하였는가?
  66개 주를 폐지하고 36개 현을 두었으며 현에는 합을 둔 것이 우리 조선의 감
사제도와 비슷하옵니다.
  부세를 많이 경감했다고 하는가?
  참으로 그렇습니다. 일본의  백성들이 이익에 관계되는 정사는  반드시 조치를
취하여 시행하고 있사옵니다.
  군사를 훈련시키는 방법은 어떠한가?
  규율이 자못 엄숙하고 무기가 뛰어나서 조선과는 비교가 되지 않사옵니다.
  일본도 로서아를 두려워하고 있는가?
  그러하옵니다. 일본의 대신들은 로서아가 남진해 올  것을 가장 큰 걱정거리로 
여지고 있사옵니다.
  일본이 17개 나라와 통상을 하고 있는가?
  그러하옵니다.
  그들의 무기가 뛰어나다고 하니 서양 각국과 대적할 수 있는가?
  그들이 배운 것이 서양의  군사 기술이므로 서양을 따라가지 못한다고 자인하
고 있사옵니다.
  군사 기술에서 다시 화란을 따라 배워야 한다고 하였는데 화란은 어떤 나라인
가?
  화란은 서양에서도 아주 작은 나라로 영코가 조선의 4분의 1밖에 되지 않는다
고 하옵니다.
  그처럼 작은 나라가 무슨 방법으로 그와 같이 되었는가?
  나라가 크로 작은 데 관계없이 무기가 정예한 것은 그 나라가 자체의 힘을 키
우고 실질적인 것에 힘을 쓰고 있기 때문이옵니다.
  그곳 저자의 시장과 백성들이 사는 형편은 어떻던가?
  보이는 것이 모두 번화하고 풍성하였사옵니다.
  그들이 농사에 힘써서 올가을에 큰 풍년이 들었다는데 무슨 곡식을 중하게 여
기는가?
  그들도 쌀을 중하게 여기옵니다.
  일본의 동정을 살피건대 조선에 대하여 악의를 느낄 수 없었는가?
  현재의 상태에서  보면 아직은 악의를  갖고 있지 않았사옵니다.  신이 청나라 
공사 하여장에게 물어
보았는데 하여장도 가까운 시일  내에는 일본이 조선을 침략하지는 않을 것이라
고 하였사옵니다.
  그러면 언젠가는 조선을 침략하겠다는 뜻이 아닌가?
  “신이 어찌 그 문제를  장담하여 입에 올릴 수 있겠사옵니까? 다만 인국이라
고 하더라도 방비를 허술히 하면  반드시 침략을 당하는 것이 고금의 이치인 줄
로 아옵니다. 전하께오서 바른 정치를 펴시고  군사의 조련을 엄숙하게 하오시면 
두려워할 일이 없을 줄로 아옵니다.“
  “옳다. 경들은 수신사의 말을 명심하여 바른 정치를 펴도록 하시오.”
  고종은 중신들에게  김홍집의 말을  명심하여 시행하라고 지시했다.  김홍집은 
황준헌이 지은 「사의조선책략」을 고종에게 바쳤다.
  고종은 「사의조선책략」을 몇  번이나 되풀이해서 읽었다. 지적  호기심이 강
렬한 민비도 「조선책략」을 읽었다. 민비는 「조선책략」을  읽은 뒤 수신사 김
홍집을 중궁전으로 불러들여 발을 치고 김홍집을 인견했다.
  “경이 가지고 온 조선책략은 매우 유익한  책이었소, 로서아가 그토록 강대한 
나라요?”
  “로서아가 근래에  매우 강대한 나라가 되었기  때문에 청국도 속수무책으로 
영토를 빼앗기고 있사옵니다.”
  김홍집은 엎드린 채 민비의 하문에 나직하게  대답했다. 중궁전은 구중 궁궐의 
지란지실이었다. 고종이 친히  김홍집에게 왕비를 알현하라는 지시를  했어도 조
심스럽지 않을 수가 없었다.
  “청국도 그러한데 조선처럼 작은 나라야 말할 나위가 없겠구려.....”
  “연전에 궁본소일이 연회를 열어  참석한 적이 있었는데 그들도 로서아를 경
계하고 있었사옵니다.”
  “수신사가 보기에 그 책이 어떻소?”
  “신이 보기에는 황준헌이 여러 조항으로 변론하고 분석한 것이 우리 조선 실
정과 크게 다르지 않사옵니다. 대체로 로서아는 먼  북쪽에 있고 성질이 또 추운 
것을 싫어하여 언제나 남쪽으로 내려오려고 합니다.  그런데 다른 나라가 통상을 
하자고 하는 것은 이익을 보려는데 지나지 않으나 로서아는 우리 조선의 영토를 
욕심내고 있사옵니다. 우리 조선의 백두산 북쪽은 바로 로서아의 국경입니다. 설
사 큰 바다를 사이에 둔 먼 곳이라도 순풍을 만나면 한 척의 돛배로 오갈 수 있
는데 더구나  두만강이 두나라의 경계로  되어 있사옵니다. 보통  때에도 숨쉬는 
소리까지 서로 통할  수 있는데 얼음이 얼어 붙으면  배를 타지 않고도 건너 올 
수가 있사옵니다. 지금  로서아는 병선 16척을 해삼위(블라디보스톡)에 집결시켰
는데 배마다 3천  명을 수용할 수 있다고 하옵니다. 만약  추위가 지나가게 되면 
틀림없이 남쪽으로 향할 것이 우려되오니 마땅한 방비가 있어야 할 것으로 아옵
니다.”
  “내가 보기에 이 책은 청국의 입장에서 쓰인 것 같소.”
  “옳으신 하교이시옵니다.  황준헌이 이 책을  쓴 목적은 분명히  저희 나라의 
입장을 대변하여 쓴 것이옵니다. 그러나 로서아가  청국과 일본만을 노린다고 하
여 어찌 방비를 하지 않겠사옵니까?”
  “조선도 방비를 해야 하오?”
  “그러하옵니다. 지금 조선의 형세를 살피면 성곽과 무기, 군사와 군량이 옛날
보다 못하옵니다. 이러한 군사로는 국가의 방비를 온전히 할 수 없사옵니다.”
  “허면 어찌 방비해야 하겠소? 수신사의  의견을 허심탄회하게 말씀해 보시오.

  “조선책략에 있는  대로 우선은 청국, 일본,  조선이 합심하여야 하고 다음엔 
미국과 조약을 맺어 연합을 한 뒤 나라를 부강하게 해야 하옵니다.”
  “알겠소. 내  서둘러 미국과 조약을 맺도록  조치하겠소. 헌데 미국과 연락할 
방법이 없으니 어찌하는 것이 좋겠소?”
  “중전마마, 일본에 있는 청국 공사 하여장에게  밀사를 보내시어 조약을 맺을 
수 있도록 중재를 하라고 하시면 될 것이옵니다.”
  “밀사?”
  “봉원사에 이동인이라는 승려가 있사온데  그를 보내시면 되옵니다. 아뢰옵기 
송구하오나 그는 연전에 일본에  밀항을 하여 1년 남짓 체류하면서 세계 각국의 
물정을 소상히 알아 가지고 왔을 뿐
아니라 일본의 정계 요인들과 긴밀히  접촉하여 맡은 바 임무를 잘 해낼 것으로 
보옵니다.”
  “그러면 내명첩을 봉원사로 보낼  터이니 승려 이동인으로 하여금 대궐로 들
어올 준비를 하라고 하오.”
  “중전마마. 분부 받자옵겠사옵니다.”
  “수신사.”
  민비가 옥이 구르는 듯한 목소리로 김홍집을 불렀다.
  “예. 중전마마.”
  “전하는 심기가 약한  분이오니 수신사 같은 젊은  준재들이 잘 보필해야 할 
것이오.”
  “황송하옵니다.”
  “내 듣자니 수신사는 김윤식, 홍영식, 유길준, 김옥균, 서재필, 서광범 등 젊은 
준재들과 교분을 갖고  있다고 하오. 혹여 나의 척족들이 방자하여  물욕을 탐하
는 자가 있을지도 모르오. 내 항상
그를 걱정하고 있으나 나는  구중 궁궐에 있는 몸, 그 세세한  내막을 알길이 없
소. 혹여 그런 말이 들리거든 지체없이 소를 올려 탄핵하도록 하오.”
  “신, 김홍집 명심하겠사옵니다.”
  김홍집은 민비에게 감복하여 머리를 조아리고 중궁전을 물러 나왔다.
  김홍집은 그날로 가마를 몰아 봉원사로 달려갔다. 마침 봉원사에는 김옥균, 박
영효 등이 몰려와 이동인이 일본에서  구해 온 성냥과 사진을 보면서 개화에 대
한 활발한 토론을 벌이고 있었다.
  “중전마마께서 나를 인견하시겠다는 말씀입니까?”
  “그렇습니다. 대사를 밀사로 임명하여 일본에 파견하시겠다고 합니다.”
  “조정 대신들이 반대를 하지 않을까요? 미국에서 통상을 요구한 것을 그들은 
거절했고 도원이 수신사로 일본에 갔을 때도 중요한 임무의 하나가 미국과의 통
상거부였지 않소?”
  “시생이 가지고 온 조선책략이 중전마마의 마음을 움직인 듯 합니다.”
  “음, 중전마마께서 부른다면 밀사로 못갈 것도 없지.”
  이동인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이튿날 이동인은 봉원사로 명소패를  가지고 온 민영익을 따라 대궐에 들어가 
민비를 만났다. 민비는 고종과 함께 대조전동온돌에 앉아 있었다. 민비와 고종은 
이동인에게 세계 정세에  대하여 자세히 물은 뒤  국서를 써주고 일본으로 떠날 
것을 지시했다. 이동인은  그날로 세인들의 눈을 피하여 원산에 가서  배를 기다
리는 하편  김홍집에게 조정의 반응이  어떤지 알려 달라고  부탁했다. 미국과의 
수교조약을 맺는 중대한 일에 왕명이 있다고 해도 조정 대신들의 반응을 살피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고종은 이동인이 도성을 떠난  뒤에야 조정 대신들과 미국과의 수교조약을 맺
는 일에 대해서  논의하였다. 영의정 이최응 등은 미국과 원수진  일이 없으므로 
미국과 수교조약을 맺는 것이 좋겠다고 찬성했다.
  「중신들의 의견이 모두 일치되었습니다.  전하께오서는 시생에게 국서를 보내
어 미국 특사 슈펠트가 조속한 시일내에 조선에 들어와 조약을 맺기로 하교하셨
사옵니다. 그러나 시생의 국서가 언제 하여장 공사에게  당도할 지 알 수 없사오
니 먼저 대사께서  도일하여 수교를 할 수  있도록 하공사에게 도움을 청하도록 
하십시오.」
  이동인은 김홍집의 편지를 받자  즉시 도일했다. 1880년 10월 8일이었다. 그는 
일본에서 하여장  청국 공사를 만나  고종의 옥새가 찍힌  국서를 전달했다.그는 
수신사인 예조참의 김홍집의 국서가 곧 올 것이나 조선의 국왕이 미국과 조약을 
맺고 싶어하니 슈펠트를  조속한 시일 내에 조선에 보내 달라고  요구했다. 하여
장은 김홍집에게 했던 것처럼  청국, 일본, 조선이 친하고 미국과 연합하여야 러
시아의 침략을 막고  부강해 질 수 있다는 「조선책략」의 요지를  설명했다. 이
동인은 다시 한번 하여장에게 미국과의 수교조약  알선을 의뢰하는 한편, 일본에
서 사귄 외국사절들과 만나면서 고종이 맡긴 또  하나의 임무, 외국 전함을 구입
하는 문제를 협의하고 다녔다.
  그는 특히 주일  영국 공사관의 어니스트 사토를 만나 긴밀히  협의했다. 어니
스트 사토는 이동인이 지난  1차 방일때 사귄 친구로 이동인에게 회중시계를 사
주러 도쿄에서 요코하마까지 같이 갈 정도로 친밀한 사이였다.
  “아니 언제 일본에 도착했습니까?”
  어니스트 사토는 영국 공사관을 방문한 이동인을 친절하게 맞이해 주었다.
  “조선의 국왕 전하의 밀명을 받고 왔습니다.”
  “그럼 밀사란 말입니까?”
  “그렇습니다. 미국과의 수교조약  알선과 군함 구입에 대한  밀명을 받았습니
다.”
  “국왕이 배외정책을 철회했습니까?”
  “예. 이미 국왕 전하는 개화당입니다.”
  “놀라운 일입니다. 조선이 이제 큰 발전을 하게 돌 것입니다.”
  “해가 바뀌면 개화당의 주요 인사들이 조정의  요직을 차지하게 될 것입니다.

  “그때가 되면 영국과도 수교하게 하여 주십시오.”
  “물론입니다. 조선은 이제 세계의 모든 나라와 수교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이동인이  일본에 체류하면서 벌인 밀사로서의  역할은 일본에 낱낱이 
탐지되었다. 일본은 당황하여  하나부사공사를 시켜 조선이 이동인을  시켜 미국
과 수교하려는 것은  옳지 않다는 내용의 외교문서를  보내기로 하였다.일본인들 
중에는 이동인을 쥐도  새도 모르게 죽여 버리자는 사람도 있었다.  그러나 조선
의 국왕 밀사인 이동인을 도쿄에서  암살하면 배일 감정이 격해 질 것이라는 이
유를 들어 이동인의 암살을 허락하지 않았다.  이동인은 그러한 사실을 까마득히 
모른 채 12월 8일 귀국했다.
  이동인은 부산에 도착하자 먼저 동래부에 있는  옥년의 술집을 찾아갔다. 날이 
어둡기도 했지만 이동인은 오랫동안 잊고 있던 옥년이 보고 싶었던 것이다.
  “이 술집은 나날이 발전하는 것 같습니다.”
  이동인은 옥년에게 극진한 저녁을 대접받은 뒤 치하의 인사를 했다.
  “1년 반 만에 뵙는군요. 어떻게 도를 깨우치셨습니까?”
  옥년을 얼굴을 붉히며 이동인에게 물었다.
  “떠돌이중이 어떻게 도를 깨우치겠소?”
  “도를 깨우치러 일본에 가신다고 하지 않았나요?”
  “그랬지요.”
  “그런데 무슨 도를 깨우치러  가셨길래 도성에서 대사를 잡으러 예까지 내려
옵니까?”
  “도성에서 나를 잡으러요?”
  이동인의 얼굴빛이 흙빛으로 변했다.
  “예. 수상쩍은 무리들이 동래부 부중에 들어와 돌아다니고 있습니다.”
  “관군 같아 보이던가요?”
  “관군 같지는 않고  대원군 밑에 있는수하들인 모양입니다. 이틀 전  제 집에 
와서 술을 마셨는데 척양  척왠., 이동인이라는 중이 양이 오랑캐에게 조선을 팔
아 먹으려고 한다는 등..노여움이 이만저만 아니었습니다.”
  “시세를 모르는 무리들이 왕조의 멸망을 재촉하는군.....”
  이동인이 씹어 뱉듯이 내뱉았다. 이동인의 눈빛이 흉맹해 지고 있었다.
  “왕조의 멸망을 재촉하다니요?”
  “그들이 말하는 척양 척왜라는  것은 서양을 배척하고 일본을 내치자는 얘기
요.”
  “스님께서는 일본에 가서 무슨 일을 하셨습니까?”
  “나라를 구하는 일을 했지요.”
  “이제 보니 큰 스님이셨군요.”
  “그밖에 나를 찾아 온 사람은 없었소?”
  “도성에서 약국을 경영한다는 분이 오셨는데 오늘쯤 또 들를 것입니다.”
  “음, 대치장인 모양이군.”
  “무엇하시는 분입니까?”
  “세상을 고치는 의원이오.”
  이동인이 껄껄대고 호타하게 웃어 젖혔다. 이동인의  말대로 대치 유홍기가 동
래부에 내려온 것은  12월 초의 일이었다. 그는 이동인을 대원군이  죽이려 한다
는 소문을 듣고 곧바로 동래부로 내려와 이동인의 소식을 탐지하고 있었다.
  “나를 찾는 의원이 오면 내게 알려 주시오.”
  “예.”
  그러나 그날 밤  유대치는 이동인을 찾아오지 않았다. 이동인은 날이  밝자 행
장을 수습하여 동래부의 부사를 찾아갔다.
  “그대는 누구인데 나를 만나자고 하는가?”
  동래부사 심동인은 행색이 남루한 이동인을 매서운 눈빛으로 쏘아 보았다.
  “나는 왕명을 받고 일본에 다녀오는 밀사요,  서둘러 교군과 가마를 대령하시
오.”
  “네 놈이 미친 놈이 아니냐? 성상께서 어찌 너 같은 하찮은 승려에게 왕명을 
맡긴다는 말이야?”
  “네 이놈!”
  이동인이 눈을 부릅뜨고 동래부사 심동인에게 호통을 쳤다.
  “왕명을 수행하는 밀사에게  하찮은 승려라니! 네 놈이 죽을 때가  되어 눈이 
뒤집힌 모양이구나.”
  “여봐라! 저놈이 실성한 모양이니 하옥시켜라!”
  “예.”
  동래부사 심동인이 영을 내리자 동래부의 포졸들이 재빨리 달려들어 이동인을 
포박했다. 이동인은 빙그레 미소만 짓고 있었다.
  그날 밤 동래부로  유대치가 찾아왔다. 이동인은 동래부사  심동인에게 고종의 
국새가 찍힌 증명서를 내보이고 말 두 필을  얻어 도성을 향해 달려갔다. 이동인
이 동래부를 찾아가 소란을 피운 것은 대원군이 보낸 자객들의 시선을 따돌리고 
유대치를 만나 도성으로 돌아오기 위한 계책이었다.
  이에 앞서  김홍집이 일본에서 가지고 온  「조선책략」은 고종이 중신들에게 
돌려 보라고 권한 뒤  수십, 수백 권이 필사되어 시중에 나돌았다. 「조선책략」
을 읽은 유림은 흥분했다.
  먼저 병조정랑 유원식이  상소를 올려 「조선책략」을 배척하고,  천주교의 잔
당을 뿌리뽑고 서원을 복구하라고 요구했다. 고종은  상소문을 잘 보았다고 비답
을 내렸다가 의정부의 제안으로 유원식을 귀양 보냈다.
  김홍집은 유원식이  상소로써 자시을 탄핵하자 곧바로  사직을 청하는 상소를 
올렸다.
  유원식이 상소를 올린  것은 10월 초하루였고, 유원식이 귀양을 간  것은 10월 
초이틀, 김홍집이 사직 상소를 올린 것은 초사흘이었다.
  음력 10월이면 초겨울이었다.  날씨는 며칠째 음산하게 겨울비를  뿌리다가 때
아닌 천둥번개까지 쳐댔다.  고종은 천둥번개가 휘몰아치자 대신들을  향하여 다
음과 같이 지시했다.
  “요즈음 음산한 비가 철에 맞지 않게 자주 내리더니 우르릉거리는 우뢰의 재
변까지 내리고 있다. 하늘의  마음에 무슨 노여움이 있기에 이러한가. 덕이 없는 
과인이 만백성의 위에 군림하여  밤낮으로 마음을 놓지 못하면서 감히 안일하게 
지내지 않았지만, 하늘을 대하는 정성이 형식에  있고 수양하고 반성하는 방도를 
입으로만 하였으니 우뢰가  울지 않을 때에 우뢰를  울게 하여 과인은 경고하는 
것이다. 마음이 송구해서  무슨 말을 하겠는가? 오늘부터 다시 음식  가짓수를 3
일간 줄임으로써 공경하고 두려워하는 성의를 보일 것이다.”
  11월 12일 김홍집은  유림의 탄핵에도 불구하고 예조참판으로  승차하였다. 이
날 하나부사 일본 공사가 군함 천성호를 타고 인천에 입항하고 뒤이어 입경함으
로써 김홍집은 다시 수관겸 반접관에 임명되어 일본 사신을 접대하게 되었다.
  하나부사 일본 공사는 명치 천황의 국서를 고종에게 전달한 뒤 이동인에 대한 
일본의 입장을 밝혔다.
  “조선이 반행인(승려)인 이동인을 일본에 밀사로  파견하여 미국과 수교를 맺
으려 하는 것을 본국 정부도 잘 알고  있습니다. 본국에서는 이동인의 밀행이 뜻
한 대로 성과가 있기를 기원하는 바이며, 만일  일이 여의치 않게 되면 본국에서 
적극적으로 나서서 도와  줄 용의가 있습니다. 이렇게 하는 것이  미국과의 조약
에 있어서 경솔한 우를 범하지 않을 것이며,  전함을 구입하는 데 유리할 것입니
다.”
  고종은 얼굴빛이 하얗게  질리며 발 뒤에 앉아 있는 민비를  돌아보았다. 이동
인의 파견은 중신들에게도  비밀로 했던 극비사항이었다. 일본  공사를 인견하는 
자리라 영의정 이최응과 좌의정 김병국, 예조참판  김홍집이 통역과 함께 배석해 
있었다. 임금이 정사를 보는 중희당에 비록 발을  치기는 했으나 민비가 나와 앉
아 있는 것은 처음 있는 일이었다.
  “전하. 중신들과 상의하여 결정한다고 말씀하십시오.”
  고종의 귓전에 민비의 목소리가 가느다랗게 들렸다.  고종은 비로서 용안에 화
색이 돌았다.
  “그 문제는 우리 중신들과 상의하여 결정할 터이니 그리 아시오.”
  고종은 민비가 불러 주는 말을 그대로  하나부사 공사에게 말하였다. 하나부사 
공사는 의아한 눈빛으로 고종의 뒤에 있는 발을  쳐다보았다. 발 뒤에 여인의 그
림자가 어른거리고 있었다. (조선의 왕비인가?)
  하나부사 공사는 기분이  개운치 않았다. 그러나 잘 알겠다고 대답을  한 후에 
대궐을 물러나올 수 밖에 없었다.
  민비가 중회당에서 일본  공사를 본 것은 일본에 대한 관심  때문이었다. 민비
는 고종의 밀사 이동인으로부터 일본이 개화된 얘기를 듣고 두 눈으로 일본사람
의 복색을 확인하고 싶었다.
  하나부사 공사의 복색은  특이했다. 이동인이 가져 온  사진에서 일본사람들의 
옷차림을 보기는 했으나  두 눈으로 본 것은 처음이었다. 하나부사  공사는 양복 
차림이었고 오른쪽 어깨에서 왼쪽 허리에 붉은 비단  천을 감고 있었다. 왼쪽 가
슴엔 이름을 알 수 없는 장식품(훈장)이 주렁주렁 매달려 있었다. 머리는 경망스
러워 보일 정도로 짧았다. (편리하기는 하겠군.....)
  민비는 속으로  감탄을 했다. 그러나  어딘지 모르게 단정해  보인다는 느낌도 
들었다. 민비는 민영익을  통해 이동인을 중궁전으로 불러들였다. 일본에 대해서 
자세히 알기 위해서였다. 민비는 지적호기심이 강한 여자였다.
  이동인은 민비 앞에 꿇어 엎드려  일본이 개화하게 된 배경을 자세히 고해 올
렸다. 민비는  이동인으로부터 일본의 수도 도쿄에  주재하고 있는 각국 공사들, 
기차와 군하메 대해서 묻고,  이동인은 유럽 문명의 중심인 파리, 런던의 시가지 
사진과 그쪽 사람들의 사진까지 보여 주면서 민비에게 상세히 설명을 했다.
  “그러니까 이 나라들이  발전을 한 것은 모두  산업을 장려했기 때문이 아니
오?”
  “그러하옵니다. 이들 나라에서는  바느질까지 손으로 하지 않고  기계로 하고 
있사옵니다.”
  “바느질을 기계로?”
  민비의 놀라움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예. 일본만 해도  재봉틀이라는 기계로 옷을 대량 생산할 뿐  아니라 방직공
장을 세워 천까지 짜고 있사옵니다.”
  “참으로 경이로운 일이 아닌가?”
  “그러하옵니다. 중전마마, 이것을 한 번 살펴보시옵소서.”
  이동인은 일본에서 가져  온 체온계를 꺼내 앞에 놓았다. 그러자  중궁전 상궁
이 조심스럽게 체온계 상자를 들어다가 민비의 연상 위에 놓았다.
  “대사, 이것이 무엇이오?”
  “그것은 검온계라고 하옵니다.”
  “검온계?”
  “다른 말로는 체온계라고도 하옵니다.”  
  “채온계?”
  민비가 체온계를 내려다보며 고개를 갸우뚱했다.
  “채온계가 아니고 체온계이옵니다.  몸체 자, 따뜻할 온자,  셈계 자를 쓰옵니
다.”
  “허면 이것이 무엇을 하는 데 쓰는 물건이오?”
  “중전마마, 이것은 사람의 몸  온도를 재는 데 쓰는 기계이옵니다. 사람의 몸
은 항상 일정한 온도를 유지하고 있는데 병이 든 사람은 온도가 높아져 병이 있
는지 없는지를 알려고 할 때 이 기계를 쓰옵니다.”
  “대사, 무슨 말인지 알아 듣지 못하겠구려.”
  “중전마마, 사람의 체온은 항상 36.5도를 유지하고 있는데 병이 들어 열이 높
아지면 38도도 올라가고 39도도 올라가게 됩니다.  사람의 온도가 38도를 넘으면 
병이 위중한 것이옵니다.”
  “36.5도?”
  “그러하옵니다. 중전마마께서도 한번 시험하여 보시옵소서.”
  “이것을 어떻게 시험하는 것이오?”
  “아뢰옵기 송구하오나 이것을 잠시  입에 물고 있다가 빼어내어 눈금을 살피
시어 36.5도가 되면 중전마마께서는 건강하신 것이옵니다.”
  “어디?”
  민비가 호기심이 가득한 눈빛으로 체온계를 입에 물다가 깜짝 놀라 소리를 질
렀다.
  “에그 차가워!”
  민비가 몸을 부르르 떠는 시늉을 했다.
  “대사는 무엄하구나!  어느 안전이라고  체온계를 덥히지도 않고  중전마마께 
올리는가?”
  그러자 중궁전 상궁이 이동인을 향해 대뜸 호통을 쳤다.
  “아뢰옵기 송구하오나 체온계를  열을 재는 것이옵니다. 따뜻한  물에 덥히면 
소용이 없는 것입니다.”
  “그래도 그렇치....”
  상궁이 당황하여 얼굴을 붉혔다.
  “괜찮다. 정녕 신기한 물건이로구나.”
  발 뒤에서 민비의 고운  목소리가 들렸다. 민비의 체온은 이상이 없었다. 이동
인은 민비에게 회중시계까지 바치고 중궁전을 물러나왔다.
  그날 이후 이동인은 고종과 민비의 총애를 받으며 대궐을 더욱 자주 출입하게 
되었다. 이동인은 고종과 민비에게 개화사상을 심어주는  선각자 노릇을 하고 있
었고, 척족의 일원인 민영익, 민겸호, 민태호등과도 교분을 두텁게 했다.
  12월 21일은 대원군의  생일이었다. 대원군은 대궐에 들어가 고종을 배알했다. 
아버지가 생일을  맞으면 아들이 찾아와서  인사를 올려야 한다.  그리고 고종은 
국사가 바쁘다는 핑계로 대원군을  중회당으로 들라고 하여 형식적인 인사를 올
렸다.
  “전하, 늙은이를 잊지 않고 찾아 주시기 감격할 따름입니다.”
  대원군도 형식적인 감사의 인사를 표시했다.
  “아버님, 자주 찾아뵈어야  하는데 국사가 다난하여 불효를  저지르고 있습니
다.”
  “이 나라 주상이 아니십니까?  바쁘시면 이 늙은이 같은 것은 잊으셔도 서럽
지 않사옵니다.”
  대원군의 목소리는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이제나마 아버님의 생신을 감축드리옵니다.”
  “주상께서 일본과 수호하는 것은 크나큰 잘못이옵니다.”
  “중전이 아버님의 생신이라고 하여 잔치에 쓸 돈 1만냥, 정주 3통, 무명과 베 
각각 1백 9동을 보냈다고 하옵니다.”
  대화는 겉돌았다. 대원군은 고종이 민비를 입에 올리자 분노가 복받쳤다.
  “중전께서 이 늙은이를 그리 생각하고 있다니 그저 감격할 뿐입니다.”
  “아버님께서는 이제 여생을  편히 지내십시오. 나라를 경영하는  어려운 일을 
소자에게 맡기시고  북창삼우(거문고,술,시)를 벗하며 노년을  여유롭게 보내십시
오.”
  대원권은 할 말이 없었다. 고종의 말은 얼핏  듣기에는 자신을 생각해 주는 뜻
이 있는 것 같았지만 기실은 정치에 간섭하지 말라는 뜻인 것이다.
  (아아, 내가 아직도  기력이 철철 넘치는데 강태공처럼  세월이나 낚아야 한단 
말인가?)
  대원군은 힘없이 대궐을 물러나왔다.
  이날 조선은 3군부를 폐지하고 통리기무아문을 설치하여 본격적인 개화정책을 
추진해 나갔다. 통리기무아문은 외교정책을 추진하는 기구였으나, 광범위한 권한
을 부여하고 총리에 영의정을  겸임케 함으로써 백성들보다 조정이 먼저 개화되
는 실정을 보였다. 통리기무아문의 명칭과 관장하는  업무는 다음과 같은 것이었
다.
  1. 사대사 : 청나라에 대한 외교와 접대
  2. 교린사 : 청나라 외의 외국사신 왕래 및 전송
  3. 군무사 : 중앙과 지방의 군사 조련 및 통솔
  4. 변정사 : 국경의 일과 이웃나라의 동정 염탐
  5. 통상사 : 외국과의 무역
  6. 군물사 : 신식 병기의 제조
  7. 기계사 : 각종 기계의 제조
  8. 선함사 : 중앙과 지방의 함선 제작 및 통솔
  9. 기연사 : 국내 해안에 들어오는 선박에 대한 검문
 10. 어학사 : 통역, 각국의 언어와 문자에 대한 일
 11. 전선사 : 인재를 선발해 관청에 등용하는 일
  통리기무아문의 총리엔  영의정 이최응이 임명되었고,  당상관으로는 경기감사 
김보현, 지사 민겸호, 상호근 김병덕,  윤자덕, 이재긍, 조영하, 대호군 정범조, 신
정희, 행호군 민영익, 예조참판 김홍집  등이 임명되었다. 명실상부한 개화정책의 
산실이었다.
  그러나 새로운 것을 배척하고  현실에 안주하려는 기득권 세력의 반발도 거세
게 일어났다.  해가 바뀌어 신사년(1881년)이 되자  전국의 유생들이 개화정책을 
탄핵할 움직임을 보이기 시작했다. 유생들 사이에  궐기를 호소하는 통문이 나돌
고 「사의조선책략」에 대한 비판이 격렬해 지기 시작했다. 
  이러한 가운데 조정에서는  신사유람단을 구성하여 일본에 파견,  신문물 제도
를 시찰하기로 하였다.  그대표에는 어윤중을 임명하고 수행원으로는 박정양, 이
상재, 홍영식, 윤치호, 유길준, 엄세영, 심상학등이었다. 이때 윤치호의 나이는  불
과 17세였다.
  그러나 신사유람단을 임명해 놓고도  조정은 유림의 반발을 우려해 이들을 일
본으로 보내지 못했다. 
  “나라를 경영하는 일이 이토록 어려울 줄이야......”
  고종은 정사가 끝나면 파김치가 되어 대조전으로 돌아오곤 했다.
  “전하께서 심기가 너무 유약하시기 때문이옵니다.”
  민비는 고종을 위로했다. 고종은 대가 센 인물이 아니었다.
  “심기가 유약하다구요?”
  “전하께오서는 옥체가 많이 상하셨사옵니다.  이제부터는 신첩이 중회당에 나
가서 전하를 보필하여 정사를 볼까 하옵니다.”
  “중전이 정사를?”
  “신첩의 마음은 오로지 전하의  옥체가 동주 철벽처럼 굳건해 지시기를 바라
는 마음뿐이옵니다. 신첩이 비록 아녀자이긴 하나  전하의 고충을 함께 나누려고 
합니다.”
  “허허....”
  고종은 어처구니없어서 헛웃음을  날렸다. 민비가 총명한 여자라는  것은 고종
이 익히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그러나 임금이  정사를 보는 곳에 왕비가 나와서 
참견을 한다는 것은 전례가 없던 일이었다.
  “전하. 신첩은 단순한 아녀자가 아니옵니다. 이 나라 조선의 국모이옵니다.”
  “그렇기는 하지요.”
  “전하의 뒤에 발을 치고 앉아서 전하를 돕겠사옵니다.”
  “중전, 그것은 사대부가의 부인으로서 갖추어야 할 덕목이 아니오. 더구나 중
전은 이 나라의 국모이기에 만천하 부녀자들의 표상이 되어야 하오.”
  “전하. 그렇기에 신첩이  전하를 돕고자 하는 것이옵니다. 지어미의 본분이라
는 것은 지아비를 바르게 받드는 것이옵니다.”
  “대신들의 반대가 격심할 것이오.”
  “전하 이 나라는 지금 혼미하옵니다. 도처에  도적이 횡행하고 지방에는 왕장
(왕명)이 미치지 못하고 있사옵니다. 이를 바로 잡지 못하면 사직의 보전이 어려
울까 근심스럽나이다.”
  “음.”
  고정이 낮게 신음을  삼켰다. 민비가 정사에 간여하는 일은 함부로  결정할 수
가 없었다.
  “전하. 이리 오시옵소서.”
  민비가 함박미소를 지으며  고종의 익선관(임금이 평상복 차림으로 정무를  볼 
때 쓰는 관)을 벗겨 연상 위에 놓고 고종을 무릎 위에 눕혔다. 고종은 편안한 기
분이 되어 민비의 무릎을 베고 눈을 감았다.
  “전하.”
  “......”
  “신첩은 오래 전부터 전하를 보필해야 한다고 생각해 왔사옵니다.”
  “.....”
  “전하는 신첩이 사랑하는  지아비이옵니다. 지아비의 고충을 덜어  드리는 것
이 마땅한 도리라고 생각했사옵니다.”
  고종은 대꾸가 없었다. 눈을 감은 채 편안하게  민비가 속삭이는 말을 듣고 있
었다.
  “사대부가의 법은 아녀자가 바깥일에 참견하지 못하게 되어 있사옵니다.”
  “.....”
  “저는 이 일이 불합리하므로 반드시 혁파되어야 한다고 생각하옵니다.”
  “아녀자에게 벼슬이라도 내려야 하오?”
  고종이 빙그레 웃었다. 고종은 민비에게 농을 치고 있었다.
  “당장은 어렵겠으나  장차는 아녀자에게도 과거를 볼  기회를 주어야 하옵니
다.”
  “아녀자에게 과거를?”
  고종이 눈을 크게 뜨고 민비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그러하옵니다.”
  “허면 아녀자에게도 벼슬을 내려야 한다 이 말이오?”
  “서양에서는 그렇게 한다고 하지 않사옵니까?”
  “서양은 서양이고 조선은 조선이지....”
  고종이 낄낄대고 웃음을  터뜨렸다. 아녀자에게 과거시험을 보게  하고 벼슬을 
내린다는 생각을 하자 우스워서 견딜 수 없는 모양이었다.
  “전하. 그것은 신첩의 소망이기도 하옵니다.”
  “중전, 중전은 어찌하여 그런 생각을 하게 되었소?”
  “아녀자도 사람입니다. 학문을  하게 하고 벼슬에 등용하면  결코 남자들에게 
뒤지지 않을 것이옵니다.”
  “외국과 수교를 하는 것조차 반대를 하는 나라요.”
  “신첩은 언젠가는 실현될 일이라고 보옵니다.”
  “글쎄....”
  고종이 고개를 흔들었다.
  “전하.”
  “그래서 중전이 나와 함께 저사를 보겠다는 것이오?”
  “신첩은 나라 경영의 어려움을 전하와 함께 하고자 할 뿐입니다.”
  “말씀이 고맙기는 하오.”
  “전하.”
  “말씀을 하시지요.”
  “의대를 벗으시고 편히 누우십시오.”
  “그럴까?”
  고종이 몸을 일으켰다. 민비는 오봉촛대로 가까이  가서 소맷자락을 휘둘러 촛
불을 껐다.
  “중전.”
  어둠 속에서 고종이 민비를 불렀다.
  “예?”
  “중전께서 옷을 벗겨 주시겠소?”
  “예.”
  민비는 얼굴을 붉히며 고종에게 가까이 가서 곤룡포를 벗기
었다. 괴승 이동인이 선물로 바친 회중시계가 밤 10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중전."
  어둠 속에서 고종이 다시 민비를 불렀다.
  "예?"
  민비는 돌아서서 옷을 벗으려다가 말고 고종을 향해 몸을 돌렸다.
  고종의 어수가 민비의 어깨로 왔다가 가슴께를 더듬었다.
  "전하."
  민비의 목소리가  떨렸다. 고종의 어수가  견마기를 벗겨 내고  평상복인 분홍 
저고리의 옷고름을 풀었다. 민비는 호흡이 가빠왔다.
  "중전."
  고종의 어수가 민비의 어깨를 쓰다듬다가 다시  가슴께로 왔다. 이번엔 고종의 
어수가 민비의  치마고름을 잡아 매듭을  풀었다. 민비는 스스로  어깨에 걸쳐져 
있는 분홍치마의 가는  끈을 밀어 냈다. 그러자 눈처럼 하얀  치마허리가 화사한 
치맛자락과 함께 허리를 타고 밑으로 흘러 내렸다.
  "중전."
  고종이 속옷 차림인  민비를 덥석 안았다. 민비는 까치발로 고종의  품에 안겼
다. 민비의 몸이 서서히 더워지고 있었다.
  "전하."
  민비는 신음처럼 외쳤다. 고종이  민비를 안아서 금침 위에 눕혔다. 민비의 몸
은 가냘프면서도 탄력이 넘치고  있었다. 민비의 나이 어느덧 서른 한 살이었다. 
그녀의 육체는 고종에 의해 길들여지고 고종에게  익숙해져 있었다. 고종의 어수
가 스치는 곳마다 관능이 불길처럼 일어나고 전신으로 물결치며 흘러갔다.
  "전하."
  고종의 어수가 멈칫했다.
  "신사유람단은 아니 보내십니까 ?"
  "지금 유림의 동태가 심상치 않소."
  "전하.유림은 내외 실정에 어두워 반대를 하는 것입니다."
  "그래도 유림이 계속해서 장안에 집결하고 있소. 이러한 때에 신사유람단을 일
본에 보내면 기름을 지고 불로 뛰어 드는 일이 될 것이오."
  "전하. 계책을 세우셔야지요."
  "계책?"
  "무지몽매한 백성들이  아닙니까 ? 민심이  사나우면 계책을 세우셔야 하옵니
다."
  "중전에게는 계책이 있소 ?"
  "그러하옵니다. 신사유람단에  암행어사 직첩을 내리어 동래부에  집결하게 한 
뒤 일본으로 떠나게 하면 되옵니다. 수행원들도  모두 동래부에 집결하도록 하십
시오."
  "과연 현책이오! 중전의 지혜가 진정 일월처럼 빛나는구려."
  고종은 민비의 말에 탄복을 했다.
  "과찬이시옵니다. 신첩은 오로지  전하의 짐을 덜어 드리는  일에 신명을 바칠 
뿐이옵니다."
  "내가 이토록 총명하고 아름다운 왕비를 얻었으니 어찌 성군이 되지 않겠소 ? 
중전의 학문과 계책이 재상들을 능가하는 것 같소."
  "당치 않으시옵니다. 전하야말로 일월처럼 빛나는 학문을 가지고 계시옵니다."
  "허허..."
  고종이 기꺼운 표정으로 웃으며 민비의 가슴 위로 손을 가져갔다.
  민비는 눈을 감았다. 대궐 밖 어느 민가에서 개 짖는 소리가 희미하게 들렸다. 
이 밤에 행인이라도 있는가. 만호 장안이 고요하게  잠든 이 밤에 밤길을 재촉하
는 행인은 어디로 가는 것일까.
  고종의 어수가 조심스럽게 민비의 속적삼 매듭을 푸르기 시작했다.
  창호지는 희붐하면서  푸른 빛을 띠고  있었다. 달이라도 대궐의  누각과 침전 
위에 뜬 것일까.  아니 이처럼 밝은 달이  뜨려면 보름이 되어야지, 보름은 아직 
닷새나 남아 있지 않은가.
  신사년 정월  아흐레가 되는 날이었다.  창호지가 희붐한 것은  어디선가 눈이 
사락사락 내리고 온 천지가 눈빛으로  하얗게 변하여 그 빛이 창호지로 스며 들
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대궐밖 민가에서 개  짖는 소리가 가까이 들리면 언제나 
날이 궂었었다.
  민비는 그런 생각을 하면서 고개를 뒤로 젖혔다.
  날이 아침부터  잿빛으로 잔뜩 흐려  있었다. 하늘이 낮게  가라앉으면 언제나 
먼 곳의 소음이 가깝게 들렸다.
  "게 누구 있느냐 ?"
  민비는 밖을 향해  소리를 질렀다. 고종이 어수로 민비의 속적삼  매듭을 풀다 
말고 멈칫했다.
  "예. 윤 상궁 대령해 있사옵니다."
  윤 상궁은 지밀상궁이다.  임금이 왕비와 동침을 할 때도 옆방에서  숙직을 한
다.
  "밖에 눈이 오고 있느냐 ?"
  "예. 서설이 내리고 있사옵니다. 대궐의 누각이며 침전이 온통 흰  눈으로 덮여 
있사옵니다."
  "오늘은 숙직을 하지 말고 물러가라."
  "중전마마. 대궐의 법도가  그렇지 아니하여... 황송하오나 분부를 거두어  주시
옵소서."
  "별일이야 있겠느냐 ? 내가 특별히 부탁을 하는 것이니 물러가 쉬도록 하라."
  "황송하옵니다."
  이내 장지문 밖에서  치맛자락을 끄는 소리가 들렸다. 민비는 그  소리가 멀리 
사라지자 비로소 머리로  손을 가져 가 쪽을  진 머리를 푸르고 백옥서  북잠(비
녀)을 뽑았다. 그러자  삼단처럼 치렁치렁한 머리카락이 베개 위로 쏟아졌다.  칠
윤(칠흑같은 윤기)이 흐르는 머리였다.
  "전하. 밖에 눈이 내리고 있다고 하옵니다."
  "그렇소. 나도 들었소."
  고종은 상체를 일으켜  민비의 속적삼 고를 푸르고 앞섶을 젖혔다.  그러자 민
비의 크고 둥근 가슴이 뽀얗게 드러났다.
  "눈이 푸짐하게 내리고 있으니 풍년이 들 것이옵니다."
  "어디 농사만 풍년이 들겠소 ?"
  "아이..."
  고종의 입술이 밑으로 내려가 민비의 희고 뽀얀 가슴에 닿았다.
  민비는 눈을 감고 고종의  머리를 감싸안았다. 그녀의 몸으로 그 어떤 느낌이, 
마치 소리없이 내리고 있는 눈의 포근함 같은 것이 잦아 들어왔다.
  "전하..."
  그녀의 몸은 흰 눈처럼 녹아 가고 있었다.

1) 완화군의 죽음은 민비의 독살설이  유력하게 나돌았다. 그러나 민비가 독살했
다는 증거나 기록은 전혀 없다.

2) 민비가 정사에 간여하기 시작한  것이 언제인지는 자세히 알 수가 없다. 그러
나 고종의 친정  이후 왕조실록을 보면 왕궁에서  직접 임명했다는 부분이 더러 
나온다. 이 왕궁에서의 임명이라는 부분이 민비가  임명한 것이라는 추측을 가능
케 한다.

    제 22장
    가슴에 한을 품고

  1

  고종은 발 한 장을 사이에 두고 편전의 중앙에서 남향으로 앉고 민비는 발 안
에서 동쪽에  가까운 남향으로 앉았다.  이는 대왕대비 조씨가  수렴청정을 하는 
형태를 그대로 본뜬  것이다. 민비는 발 안에서 설레이는 가슴을  억누르며 조용
히 발 바깥의 동정을 살폈다.
  오늘은 임금이 의정부의  정승들을 정기 접견하는 날이었다.  영의정 이최응과 
좌의정 김병국이  편전에 엎드려 있고  기사관(임금의 시정을 기록하는  벼슬)이 
연상을 놓고 좌측에  앉아 기록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내시감은  오른쪽에 구부
정하게 서서 임금의 지시를 받들고 호종하기 위해 대기하고 있었다.
  "통리기무아문에 의정부의 규례대로  도상을 두고 현임과 원임 정승이  겸하는 
문제를 논의해서 들여 보내도록 하시오."
  먼저 고종이 이최응에게  윤지를 내렸다. 통리기무아문의 모든  업무를 의정부
에서 관할하라는 지시였다.
  "삼가 명을 받자옵겠습니다."
  이최응이 머리를 조아려 대답했다.
  민비는 고종이 정사에 대한 지시를 내리는 것을  가만히 지켜 보고 있었다. 조
금 쑥스럽기도 했지만 고종도  뒤통수가 근질거리는지 자꾸 뒤를 돌아보려 하고 
있었다.
  "신정희를 훈련대장으로, 이재면을 금위대장으로, 민태호를 병조판서에  제수할
까 하는데 경들의 생각은 어떻소 ?"
  "전하께서 거론하는 세 사람은  마땅히 그 임무를 해낼 만한 인물이므로  삼가 
교지를 받들겠사옵니다."
  고종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이재면은 고종의 형이고 민태호는  민비의 척족이
었다.
  "전하. 신사유람단의 어윤중에게 암행어사의 직첩을 내리시옵소서."
  그때 발 뒤에서 기침소리가 낮게 들리고 민비의 나지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제 신사유람단의 인선을 모두 마치었는데 이제는 속히 일본으로 떠나게  해
야 할 것 같소."
  고종이 정신이 번적 든 듯 신사유람단의 파일에 대한 얘기를 꺼냈다.
  "전하."
  김병국이 머리를 조아린 채 입을 열었다.
  "지금 유림의 동태가  심상치 않사오니 신사유람단의 파견을 후일로  미루심이 
어떠하옵니까 ?"
  "신사유람단의 파견은 시급을 요하는 중대사요, 신사유람단의 어윤중에게 동래
부 암행어사의 직첩을 내리어 일본으로 더나게 하겠소."
  "황송하옵니다."
  "신사유람단의 모든 수행원들도  암행어사를 수행하는 서리로 변복을 하여  떠
나게 하시오."
  "황송하옵니다."
  좌의정 김병국은 거듭 머리를 조아리며 복명을  하겠다고 대답을 했다. 신사유
람단에 암행어사의 직첩을 내리는 것은 절묘한 계책이라고 할 수밖에 없었다.
  이로 인하여 암행어사의 직첩을 받은 신사유람단은 눈보라를 헤치고 비밀리에 
동래부로 향했다.
  민비는 만족했다. 비록 발을 사이에 두고  정무에 간여한 것이었으나 처음으로 
정치에 참여했던 것이다. 신사년 음력 1월 11일의 일이었다. 이때부터 민비의 정
치 참례는 관례화되다시피 했다.
  1월 17일엔 함경감사 김유연이 부임지로 떠나기 위해 하직인사를 드리러 편전
으로 들어왔다.
  "함경도는 우리  왕조가 창업된 고장으로 특별히  중요한 지역이라 아니할  수 
없소. 또  6진은 로서아 땅과 가까워  어리석은 백성들이 월경을  자주하니 매우 
근심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소. 지금 특별히 경을 함경도의  도백으로 제수하는 
것은 일찌기 함경도를  다스릴 때 선정을 베풀어  백성들에게 칭송을 받은 일이 
있고 그들을 무마시켜 안착시켰기 때문이오."
  "신이 1차 감사로 나갔을  때 마땅히 이룬 공적이 없는데도 재차 막중한 임무
를 부여받았으니 몸둘 바를 모르겠사옵니다."
  함경감사 김유연이 사양하는 인사를 올렸다.
  "감사로서 다시 임명한 것은 전례가 많은 일인데 왜 굳이 사양하오 ?"
  "옛날 인조대왕 때의 이명, 정조대왕  때의 이명식과 같은 사람들이 그런 사람
들인데 신같이 변변치 못한 사람이 어찌 그 일을 감당하겠사옵니까 ?"
  "경은 더 이상 사양하지 마시오."
  "황송하옵니다."
  김유연이 복명하겠다는 뜻으로 다시 머리를 조아렸다.  그때 발 뒤에서 민비의 
목소리가 꿇어 엎드린 김유연의 귓전을 때렸다.
  "우리 백성들 중에 로서아에서 돌아온 사람들은 필경 그들의 형편을 잘 알  것
이오. 만약 지혜  있고 학문 높은 사람이 있다면 반드시  통리기무아문에서 발탁
하여 쓸 것이니 경은 널리 살피도록 하시오."
  "신 명심하여 널리 살펴보겠사옵니다."
  김유연은 공연히 뒷골이 서늘해 지는 듯한 기분을 느꼈다.
  1월 23일 예조판서  이재긍이 죽었다. 이재긍은 영의정 이최응의  아들로 고종
과 사촌지간이었다. 민비는 고종을 통해 다음과 같은 지시를 내렸다.
  "이 중신의  단정하고 엄숙한 자태와 청렴스러운  지조에 대해서 과인이  몹시 
사랑하였는데 불행하게도 병으로 갑자기  죽으니 무슨 말로 그 슬픔을 형용하겠
는가. 죽은 예조판서  이재긍의 빈소에 나라에서 관을 실어 보내고  시호를 내리
는 특전을 내리라."
  민비는 또 영의정 이최응의 집에 우승지를 보내 위로케 하고 영의정이 슬픔을 
당했으므로 좌의정에게 의정부의 일을 관할하도록 했다.
  1월 25일  고종이 의정부의 건의를  받아들여 예조판서에  신응조를 임명했다. 
신응조는 대원군의 동서였다.  민비는 예조판서에 전 동래부사  홍우창을 임명하
도록 하였다. 그리하여  신응조는 예조판서에 임명된 지 하루도 못  되어 교체되
었다.
  2월 8일은 세자의  생일이었다. 고종은 시원임대신들을 불러들여  세자에 대해 
환담을 나누고 생일잔치를 베풀었다.
  2월 9일 통리기무아문에서 제의하였다.
  "청나라에서 무기 제조법을 배워 오는 문제에 대해서는 이미 지시가  있었사옵
니다. 삼가 교지를  받들어 올려야 하나 일본공사 역시 총,  포, 선박구입 문제에 
대하여 협조하겠다고 아국에 국서를 보낸 일이 있오니 일본의 무기에 대해서 배
워 오는 것도  나쁘지 않으리라고 생각하옵니다. 본 아문의 관리로  추천받은 이
원회를 참획관으로 삼고 이동인을  참모관으로 삼아서 떠나 보내는 것이 어떻겠
사옵니까 ?"
  "어찌 그 일을 뒷날로 미루겠소 ? 서둘러 시행토록 하시오."
  고종은 즉시 이원회와  이동인을 일본으로 떠나 보내도록  지시했다. 이동인은 
민비로부터 군함 구입에 대한 밀명을 받고 있었다.
  그러나 이동인의 행방이 묘연했다.
  "아니 이동인의 행방이 묘연하다니 도대체 그게 무슨 소리인가 ?"
  민비는 이동인의 행방을 알 수 없다는 보고를 받자 펄쩍 뛰었다.
  "이동인은 통리기무아문의 관리로 임명되었사온데 이틀 전부터 행방이  묘연하
다고 하옵니다."
  명소패를 가지고 나갔던  동부승지 민영환이 부복하여 대답했다.  민영환은 민
겸호의 아들로 18세에 병과에 급제하여 조정에  출사해 있었다. 민비에게는 조카
나 마찬가지였다.
  "이동인이 봉원사 출신의 승려니 봉원사에 가보거라."
  "이미 봉원사에도 다녀왔사옵니다."
  "허면 개화당 인사들은 알 것이 아니냐 ?"
  "송구하옵니다만 개화당  인사들도 이동인의 행방을  찾느라 부산히  움직이고 
있사옵니다."
  "허면 이동인을 마지막 본 인사가 누구라고 하느냐 ?"
  "김홍집이라고 하옵니다."
  "김홍집이라면 예조참의이자 통리기무아문의 당상관이 아니냐 ?"
  "그러하옵니다. 시정에는 김홍집이 이동인에게 자객을 보내어 암살했다는 소문
이 돌고 있사옵니다."
  "뭣이 ?"
  "소문은 여러 가지가 있사옵니다.  이동인이 주상전하의 총애를 받고 외국과의 
수호를 적극적으로  도모한다고 하여 운변에서 죽여  없앴을 것이라는 소문까지 
돌고 있사옵니다."
  "운현궁에서 이동인 하나를 죽여서 무슨 득이 있겠느냐 ? 그럴 리가 없다."
  "허면 김홍집이... ?"
  "김홍집이 무엇 때문에 이동인을 척살하겠느냐 ?"
  "이동인은 최근에 미국보다 영국과 먼저 수교를 해야 한다고 주장하여  미국과 
수교를 해야 한다는 김홍집과 대립하고 있었다고 하옵니다."
  "그래도 이동인을 김홍집이 죽인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다. 이동인을 천거한 
사람이 김홍집이요, 이동인과 김홍집은 같은 개화당 인물이다."
  "허면 누가 ?"
  민영환이 고개를  들고 의아한 눈빛으로  민비를 살폈다. 민비는  지금 허공을 
노려보며 깊은 생각에  잠겨 있었다. 칠윤의 머리  아래 뽀얗게 흰 얼굴, 오똑한 
콧날, 봉곳한 입 언저리와 어딘지 모르게 강해  보이는 턱선이 오히려 요염해 보
이기까지 했다.
  "하나부사가 의심스러워..."
  먼 허공을 더듬던 민비가 민영환에게 얼굴을 돌리며 낮게 한숨을 내쉬었다.
  "하나부사라면..."
  "이동인을 참모관에 임명한  다음 날 통리기무아문에 군함 구입문제와  신식무
기 구입에 대한 문제를 일본에 위임해 달라는 하나부사의 외교문서가 들어왔어."
  "......"
  "일본에서는 이동인을 싫어했던 거야."
  민영환은 민비의말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대궐에 일본의 간자(첩자)가 있는 게 분명해."
  "중전마마. 어찌 그런 일이 있겠사옵니까 ?"
  "그렇지 않고서야 대궐에서 논의된 일을 하나부사가 어찌 알고 있다는  말이냐 
?"
  "일본이 이동인을 죽일 이유가 없지 않사옵니까 ?"
  "조선과 수호를 하려는 나라 중에 조선을 돕기 위해 하는 나라가 어디  있느냐 
? 어느 나라를 막론하고 제 나라에 이득을  가져 가기 위해 하는 짓이다. 일본이 
조선과 수호를  하고 통상을 하는 것도  모두 제 나라를 위해서야.  이동인 같은 
선각자가 있으므로 일본의 조선정책에 불리하다고 생각하고 일찌감치 화근을 제
거해 버린 거야..."
  민비의 지적은 날카로운 데가 있었다.
  그것은 유대치의 약국에  모인 개화당 인사들도 마찬가지였다.  유대치의 약국
에는 김옥균을 비롯하여 개화당의  중요 인물이 모두 모여 이동인의 행방불명을 
침통한 표정으로 의논하고 있었다.
  "동인 스님의 행방이 묘연한테 도대체 어찌된 일인가 ?"
  박규수가 죽고, 오경석이 죽고, 이동인이 행방불명이 되자 개화당의 좌장은 유
대치였다. 그러잖아도 백의정승이라는  별호를 들으며 개화당을 이끌어  오고 있
는 유대치였다.
  "시중에 도원이 자객을 보내어 죽였다는 소문이 파다하게 나돌고 있습니다."
  김옥균이 분개한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도원이 ?"
  유대치가 깜짝 놀란 듯한 표정을 지었다. 도원이라면 김홍집을 말하는 것이다.
  "도원은 옛날과 같지 않습니다."
  "소문은 한두 가지가 아닙니다."
  박영효가 낮게 헛기침을  하며 주의를 환기시켰다. 김옥균이  김홍집을 비방하
는 듯한 말투였기 때문이었다.
  "한두 가지가 아니라니 ?"
  "민영익이 죽였다는 소문도 있고 운현궁에서 죽였다는 소문도 있습니다."
  "걱정이로군. 세상이 이렇게 어수선하기만 하니..."
  유대치가 짧게  탄식을 했다. 이동인의  행방불명은 개화당에 큰  손실이 아닐 
수 없었다.
  "중전마마가 정치게 간여하고 있다는데 큰 문제이옵니다."
  "중전마마야 그럴 만한 분이 아닌가 ?"
  "관리들이 바른 정치를 하고 있지 않습니다. 사대당이 어전에서는 바른 정치를 
운운하면서 제 집  곳간에 재물을 쌓아 두고 있다고 하옵니다.  사대당을 조정에
서 몰아내야 합니다."
  김옥균이 다시 분개하여 주장을 했다. 김옥균은  요즈음 피를 보고서라도 사대
당을 몰아내야 한다는  강경한 주장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주장은 홍영식을 
비롯해서 개화당의 대부분 인사들이 동조하고 있었다.
  "국왕까지 폐위할 작정인가 ?"
  유대치는 개화당 인사들이 모두 돌아가자 김옥균에게  정색을 하고 물었다. 국
왕폐위 문제는  이동인이 제일 먼저  거론한 문제였다. 이동인은  일본에 체류할 
때 국가통치 제도에 대한 문제를 상세히 살폈고 그 중에서도 대통령이 통치하는 
미국의 제도가 가장 뛰어나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러나 이동인의 국왕폐위, 대통령 선출에 대한 주장은 김홍집, 홍영식 등으로
부터 맹렬한 비판을  받았다. 특히 김홍집은 국왕폐위론은  대역죄나 마찬가지라
고 이동인을 몰아붙인 뒤 개화당까지 멀리하기 시작했다.
  "어찌 국왕을 폐위할 수 있겠습니까 ?"
  "허면 어찌하려는 것인가 ?"
  "정치는 대신들이 해야할 것으로  압니다. 국왕은 상징적인 존재가 되어야하지
요."
  "허허... 대역 죄인이 나왔구먼."
  유대치가 껄껄대고 웃음을  터뜨렸다. 김옥균의 생각이 틀려서가 아니었다. 김
옥균의 생각이 자신의 심중에 있는 생각과 너무나 일치했기 때문이었다.
  "이동인 스님의 생각이 너무나 앞서 가고 있습니다."
  "앞서 가고 말고..."
  유대치가 고개를 끄덕거렸다.  이동인이 행방불명이 된 것이  기이했으나 어쩌
면 다행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요즈음 민영익과 자주 만난다지 ?"
  "백의정승께서도 알고 계시는군요."
  김옥균이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김옥균은 당시 8학사라는 명성을  듣고 있던 
이중칠, 조동희,  홍영식, 김흥균, 홍순형, 심상훈,  어윤중과 함께 민영익의  집을 
빈번히 출입했다.  명문가의 쟁쟁한  신진 사대부들이었으나 시의에  아첨한다는 
비난도 듣고 있었다.
  "시생은 그만 돌아가겠습니다."
  김옥균이 작별을 고했다.
  "조심하시게."
  유대치는 사립문까지 나와서 김옥균을 전송했다.
  밖에는 눈이 하얗게  내리고 있었다. 유대치는 자욱하게 날리는 흰  눈발 사이
로 멀어져 가는 김옥균의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었다.
  정국이 점점 혼미해져  가고 있었다. 정국은 혁신의 기운이라곤 찾아볼  수 없
이 구태를  답습하고 있었다. 유생들은  김홍집이 가지고  온 <사의조선책략>에 
대한 노골적인 비판을  가하기 위해 통문을 돌리고, 급기야 경상도  유생 이만손
은 광화문 앞 육조거리에 소청을 차리고 유생들의 서명을 받아 만인소를 올림으
로써 개화정책에 찬물을  끼얹고 일대 반격을 개시했다.  영남만인소라고 불리는 
상소문의 내용은 다음과 같은 것이었다.

  방금 수신사 김홍집이  가지고 온 황준헌의 <사의조선책략>이라는 책이 떠돌
아다니는 것을 보니 저도 모르게 머리털이 곤두서고 가슴이 떨리었으며 이어 통
곡하면서 눈물을 흘렸습니다.
  병인년에 사학의 무리를  크게 토별한 이래 10년도  못되어 사교가 다시 널리 
퍼지게 되었는데 흉악하고  너절한 말이 이제 다시 낭자하게 퍼져서  주공, 공자
의 말보다 낫다고 하며 정자와 주자의 글과 같다고 하니 이 얼마나 성현을 모함
하고 나라를 욕되게 하는 일입니까 ?
  아, 예로부터  임금이 준 옷을 입고  임금이 주는 밥을 먹으며  선비의 자리에 
있는 자가 나라를 욕되게 하는  글을 가지고 와서 적의 세력을 선전하여 임금의 
마음을 위협하고 있으니 통분하여 눈을 감을 수조차 없습니다.
  생각컨대 우리 왕조는 역대 성인들이 서로 이어 가면서 유교를 숭상하고 도리
를 중시하여 오늘날의 경사를  이루었으나 3대 이후로 이처럼 융성한 때가 없었
습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야소교라는 것이 해외의  양아들에게서 나온 결과 예
의나 염치는 말할 나위도 없고  윤리와 떳떳한 법이 일체 없어졌으니 하나의 짐
승일 뿐이고 하나의 개돼지일 뿐입니다. 정조,  순조, 헌종에 이르기까지 선대 임
금이 이루어 놓은  법을 어기지 않았으며 요망하고 현란한  무리들(서교도)은 반
드시 모가지를 잘랐습니다.
  황준헌이라는 자는 중국인으로 일본의 앞잡이가 되어 야소교를 믿어 자진하여 
유교의 적이 되는 길을 열고  짐승과 같이 되고자 하니 이 어찌 짐승과 같은 자
가 아니겠습니까 ?
  삼가 바라옵건대 황준헌의 요사한 책은 불살라 내리고 친중국, 결일본, 연미국
의 계책은  단호히 배격하시옵소서. 비록  로서아가 아국을 침략하게  될 조짐이 
있다고 하더라도 어찌 이역만리의 오랑캐로부터 구원을 받을 수 있겠사옵니까.
  친중국이라 하는 것은 예부터  사대의 예를 지키고 공맹의 나라로 숭상하였으
니 당연한 일이나  결일본, 연미국은 고금에 없는 계책이라 이를  버리고 더럽고 
요사스러운 무리들이 간계를 부릴 수 없도록 하소서.

  이만손의 상소는 유생들의 배외정책에  불을 붙여 이해 8월까지 나라 안을 온
통 들끓게 하였다. 이것은 수백 년에 걸쳐  유학을 정학으로 알고 숭상해온 유림
이 새로운 문명의 등장으로 위기감을  느낀 데서 비롯된 것으로 전체 유림의 마
지막 저항이라고 볼 수 있었다.
  고종은 유림의 저항이 이토록 거세어지자 다음과 같은 비답을 내렸다.
  "간사한 것을 물리치고 바른 것을 지키는데 어찌 너희들의 말을 기다리겠는가. 
황준헌의 <사의조선책략>은 애당초  깊이 파고들 나위도 없지만 너희들도 잘못 
알고 있다. 만약 이를 빙자하여 또 다시  시그럽게 글을 올리면 조정을 비방하는 
것이니 어찌 선비로서 우대한다 하여 엄하게  처벌하지 않겠는가. 너희들은 명심
하고 물러가라."
  고종과 민비의 개화정책이 확고부동하다는 것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었다.

  2

  유생들의 상소가 올라오자  누구보다 놀란 사람은 김홍집이엇다.  김홍집은 이
만손의 상소문에 자신의 이름이  거론되자 3월 2일에 예조참관의 직을 사임하였
다. 그러나 고종은 이를 허락하지 않고  계속해서 예조참판과 통리기무아문의 일
을 보도록 지시했다. 그뿐 아니라 3월 3일에는 특별지시를 내려,
  "지난 번 비답을 보았으면  훤히 알고 있을 터인데도 불구하고 경상도  유생들
이 또 다시 상소를 올린다는 핑계로 잔당을 모으고 있으니 이 어찌 해괴한 일이 
아닌가 ?  잔당을 규합하는 선비의 수괴를  형조에서 체포하여 귀양을 보내도록 
하라."
  고 하였다. 이어서  3월 6일에는 명소패를 어기고 출사하지 않고  있는 김홍집
을 통신사의 직에서  파면하였다. 유림의 반발에 대한 고종과 민비의  대응도 강
경하기만 했다. 15일에는  승정원에서 한성부 당하관에게 왕명을  전하는 명소패
를 보내어 대궐의 시위 무사들로 하여금 유생들을 도성 밖으로 내쫓게 하였다.
  그러나 유림의 상소에  이어 무과 급제자인 황재현, 홍시중이 또  상소문을 올
려 조정을 들끓게 하였다. 황재현은 상소문에서,
  "오늘의 대세는 중국은 천하를  지휘하지 못하고 바다를 사이에 두고 있는  로
서아, 불란서, 미국, 영국 같은 나라가 조선을  침략하게 되면 알을 쌓아 놓은 것
이나 다름없이 위태로울 뿐이니 어진 정치를 하고 군대를 길러서 서양 오랑캐의 
침략에 대비해야 할 것입니다."
  하는 내용이었고 홍시중의 상소는,
  "신은 힘 꼴이나 쓸 줄 아는 비천한 무관으로 어찌 감히 나라의 큰 계책에  참
여할 수 있겠습니까  ? 그러나 왜인들이 우리 나라의  환근이 된 지 오래였으며 
임진년과 같은 변란이 거듭될까 근심이 되어 삼가 아뢰고자 하옵니다."
  하고 운을 뗀 뒤,
  "임금의 총애와 녹봉을  탐내는 무리들은 무사안일주의에 빠져 있고  요행수를 
바라는 무리들이 꼬리를 물고 일어나고 있습니다. 요사스러운 종교(천주교)를 되
지 않게 설교하여 임금의 뜻을 왜곡시키고 은밀한 뇌물과 진기한 물건으로 임금
의 물욕을 유인하여 왜관을 청소하고 음식대접을 성대하게 하며 땅을 떼어 주고 
항구를 열어 주는 데까지 이르렀습니다. 갓과  옷차림은 짐승들처럼 변하였고 발
걸음은 개돼지들과 섞이게 되어 사람이 사람답지 못하고 나라가 나라 구실을 못
하게 되었으니 이런 무리의 죄는 목을 베어 죽이는 것이 마땅합니다."
  하였다. 이에 대해서 승정원에 일제히 상소문을  올려 홍시중의 상소는 극도로 
무엄하고, 황재현의 상소는 극도로 흉악하므로 죄를 주기를 청하였다.
  고종은 황재현과 홍시중의 상소를 의정부에서 검토하라고 지시하였다.
  의정부에서는 황재현과  홍시중의 상소를 검토한  뒤 홍순목,  한계원, 이최응, 
김병국 등이 연명으로  차자(신하가 임금에게 올리는 글)를 올려  황재현을 의금
부에서 잡아다가 신문을 할 것과  홍시중을 형조로 하여금 엄하게 고문을 한 위 
귀양 보낼 것을 청했다. 고종은 그대로 시행하라고 지시했다.
  황재현에 대한 의금부의 신문은 특별한 의미가  있었다. 그것은 유생들의 상소
가 대원군의 사주로 비롯된 것이라고 보는 민씨 척족에 의해 의금부에 추국청이 
설치되어 이만손, 강진규에  대한 가혹한 고문을 실시하고 있는 것과  맥을 같이 
하고 있었다.
  강진규는 대사헌 한경원의 상소에서 거론된 인물이었다. 대사헌 한경원은,
  "경상도 유생 이만손의 무지막지한 상소는 참판을 지낸 강진규가 지은  것으로 
이만손은 글도 모르는 자입니다. 상소문을 올린 유생  두목 이만손과 전 참판 강
진규를 다같이 엄벌에 처하시기를 바라옵니다."
  하였던 것이다.
  황재현에 대한 의금부의  신문은 며칠째 계속되었다. 그러나  황재현은 완강히 
배후를 부인했다.
  "저 해는 언제나 없어지겠는가 하는 말은 무슨 뜻이냐 ?"
  의금부의 추국관은 한계원이 임명되어 있었다.
  "그것은 지금 백성들이 고을  원의 학정에 시달리면서 하는 말을 옮긴  것뿐이
오."
  "저 해란 임금을 말하는 것이 아니냐 ?"
  "모르오."
  "네가 써 놓고도 모른다는 말이냐 ?"
  "나는 백성들의 말을 옮겨 적었을 뿐이오."
  "그러면 이 흉악무도한 상소문을 올리게 한 것은 누구냐 ?"
  "상소문을 올리는 데 누구와 의논을 한다는 말이오 ?"
  "네 놈을 사주한 배후가 있지 않느냐 ?"
“ 없소.”
  황재현은 완강히 배후가 없다고 버티었다.
  의금부에서는 다시 황재현의 신문 결과를 어전에 나가 보고했다.
  “ 신들이 황재현을  문초하니 공술하기를, 소인이 어리석은  천민이라는 것을 
헤아리지 않고 감히 백성의 말로  만번 죽음을 무릅쓰고 곧바로 고한 것은 고을 
원을 선택하여 민심을  감복시키고 나라를 이롭게 하자는  의도였습니다. 상소문
을 작성하는 데는 누구의 사주를 받은 일이  없습니다. 하였기에 주리를 틀고 형
장 30대를 치면서 문초하였으나 죄를 범한 실태를 자복하지 않고 있사옵니다.”
  “ 의금부 추국관은 어찌 이런 일도 하나 시원스럽게 매듭을 짓지 못하오?”
  민비는 발 뒤에서 날카롭게 호통을 쳤다.
  “ 신 등이  미거하여 죄상을 제대로 알아내지 못하고 있사옵니다.  다시 기한
을 주시면 기어코 황재현 등의 죄상을 밝히겠사옵니다.”
  “ 의금부 추국관은 이 일을 유야무야하지 마시오.  이 일을 간단히 매듭을 지
으면 유생들이 벌떼처럼 들고 일어날 것이오.”
  “명심하여 거행하겠사옵니다.”
  “이만손, 강진규의 배후는 밝혔소?”
  “아뢰옵기 황송하옵니다만은 아직.....”
  “도대체 의금부 당상관들은 무엇을  하고 있는 게요? 이만손의 상소로 온 나
라가 들끓고 있지 않소?  이만손과 강진규의 여죄를 추궁하되 더 드러나지 않으
면 속히 목을 베어서 여론을 잠재우도록 하시오!”
  “중전마마. 이만손의 상소가  비록 흉악하다고 하더라도 언로를 막는 것은.....

  “당치 않소! 이러한 때에 왕명을 제대로 세우지 못하면  나라 꼴이 어찌 되겠
소? 우리는 개국을  하였고. 남쪽 변방에서는 일본이 욱일승천하는  기세로 조선
을 향해 올라오고 있고 북에서는 로서아가 또 우리  조선을 노리고 있소! 이처럼 
나라가 누란의 위기에 처해 있는데 유생들은 케케묵은 공자와 맹자만 들추고 있
으니 이 나라를 어디로 끌고 가려는 것이오?”
 “........”
  “병인년,신미년, 병자년의 예를 보더라도 우리는 외국의 군선 몇 척에 농락을 
당했소.”
  “.....”
  “그런데도 양이라고 하여 배척만 할 것이오? 다행히 주상전하께서 젊고 총명
한 신하들의  의견을 수렴하여 통리기무아문을 설치하고  나라의 융성을 꾀하고 
있는 이때 명색이 선비라는 자들이 반대만 해야겠소? 유생들을 엄혹하게 다루시
오! 유생들을 제대로 다스리지 못하면 도둑조차 잡기 어려울 것이오!”
  한계원은 머리를 숙인 채 대답을 하지 않앗다.  개국이 되어야 한다는 것은 한
계원 자신도 뼈저리게 느끼고 있었다. 그러나 70  평생을 신조처럼 여겨 온 유학
을 버리고 서양 문물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사실이 한계원으로서는 발 밑이 꺼지
는 듯한 아득한 절망감을 느끼게 하고 있었다.
  “이는 왕명이  제대로 서지 않기  때문입니다! 왕명이 서지 않고서야  나라를 
어떻게 경영합니까?”
  민비의 목소리는 천둥소리 같았다. 한계원은 몸을 부르르 떨었다. 민비의 지적
은 적절한 것이었다. 도성에서 멀어질수록 왕명이  지켜지지 않고 관리들이 전황
을 일삼으며 토색질을 하기에 혈안이 되어  있었다. 전라도에서 올라오는 조세곡
은 군산, 목포  등지에서 배로 올라오는데 관리들은 배가 바다에  침몰했다는 거
짓 장계를 올리고 조세곡가지 착취하기에 여념이 없었다. 그것은 경상도, 충청도
도 마찬가지였는데 특히 충청 감영에서 조세곡을 실어 보낸  조운선(세금으로 거
둔 곡식을  운반하는 배) 9척이 침몰했다는  장계를 올리고 세곡을 올려  보내지 
않아 병사들이  요식(병사들의 급료)을 받지  못해 굶주리는 사태까지  일어나고 
있었다.
  3월 초 엿새 선혜청에서 올린 장계에 의하면,
  “근래에 기율이  해이하여 조세곡의 운반선이 연이어  세곡을 싣고 침몰되는 
것이 근년처럼 심한 적이  없습니다. 한 개 창고의 쌀을 운반하는  데 침몰된 배
가 9척이라고 하니  작간질이 아니고서는 이럴 수가 없습니다.”한  것으로도 관
리들의 세곡 농간질이 얼마나 심한지 알 수 있는 일이었다.
  왕명을 엄격히 하고 나라의 기율을  바로 잡아야 한다는 민비의 추상 같은 지
시는 당연한 것이었다.
  민비는 왕부의 위엄을 되찾으려고 고심하고 있었다.  나라의 기강이 해이해 지
자 조세의 징수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아 국고가 바닥이 나고 도처에서 화적떼
가 들끓었다. 도적떼들은  무리를 지어 다니며 도성은 물론 멀고  가까운 고을과 
마을에 이르기까지 몽둥이를 휘두르거나 칼부림을 해대서 백성들을 불안에 떨게 
하였다.
  고종이 손수 엄한  지시를 내려 좌우 포도청과 8도, 4유수부에  도적을 근절하
라고 지시했으나 도적들의  약탈 행위는 그치지 않았다. 이에 따라  철종 말년에 
횡행하더 정감록을  필두로 한 도참설과  참언이 민간에 흉흉하게  나돌았다. 그 
중에 대표적인 것이  목자지망 존읍지흥이었다. 이씨는 망하고  정씨가 흥한다는 
뜻이었다.
  민비는 대궐에 있는 여자인데도 불구하고 이러한 사실을 간파하고 있었다.
  민비가 유림 1만 명의  서명을 얻어 상소문을 올린 이만손과 강진규를 단호하
게 처벌하려고 하는 것은 무너져  가는 왕조의 권위를 세우려는 속뜻이 있는 것
이다.
  민비가 다시 입을 열었다.
  “역적 이만손, 강진규를 사형에 처하도록 하시오!”
  “예.”
  고종은 일언반구  말이 없었다. 편전에 나와  앉아 있는 것이 썩  내키지 않아 
하는 낯빛이었다. 의금부  추국관 한계원은 편전을 물러나와  의금부로 향하면서 
비감한 심정을 떨쳐 버릴 수가 없었다. 이제는  민비가 정치에 직접 간여하고 있
는 것이다. 물론  민비의 정치 감각은 노회한 한계원이 보기에도  국왕인 고종보
다 앞서는 것은  사실이었다. 그러나 민비가 여자라는 사실에 한계원은  웬지 모
를 불만을 느끼고 있었다.
  그러나 민비는 매일매일 바쁘게 움직이고 있었다.  민비는 음력 2월 28일에 실
시한 과거에서 급제한 이원증을 홍문관 교리로, 서공순을 부교리로, 박영교를 수
찬으로, 이우면을 부수찬으로 손수 임명하였다.
  민비는 통리기무아문을 실질적인 통치기관으로  만들기 위해 심혈을 기울였다. 
임금의 정기 접견에는 통리기무아문의  당상관들을 참여케 하고 긴급한 일이 있
을 때는 직접  편전으로 들어와서 보고하도록 지시했다.한 번 정치에  발을 내딛
자 민비는 대신들이 깜짝 놀랄 정도로 빠르게 개혁을 단행해 나갔다.
  또 민겸호를  내세어 일본군과 같은  신식 군대의 조련에도  나섰다. 무위영에 
별기군을 창설하여 훈련에  나섰다. 별기군은 수신사 김홍집의  종사관으로 따라
갔던 윤웅렬을 중심으로  창설되었으나 나중엔 민영익과 우범선이,  중심이 되어 
운영하였다. 훈련은 일본 육군 소위 호리모도 레이죠가 맡았다.
  별기군의 창설은 비록 오영에서  선발한 80명과 양가의 자제로 무과에 급제한 
자 등 1백  명에 지나지 않았으나 획기적인 일이었다. 별기군은  머리를 짧게 깎
고 초록색의 군복에 착검한 신식소총을 들고 훈련에 임했다.
  훈련장은 서대문 밖의 모화관이었다. 별기군은 제식훈련부터 시작했다. 초록색 
군복을 입은 별기군이 착검한  소총을 어깨에 메고 4열 종대로 행군하거나 이찌
(하나), 니(둘).. 이찌, 니... 하고 노래를 부르듯  구령을 외치며 발을 맞추어 행군
하는 모습은 구경꾼들의 감탄을 자아내게 했다.
  확실히 세상은  변하고 있었다. 이동인에 의해  자기황(성냥)이 들어오고 일본 
상인들에 의해 석유가  수입되어 집집마다 석유불을 켤 수 있게  되었다. 별기군
이 창설되어 훈련하는 모습이  낯설기는 하였으나 민간에서는 큰 반발을 보이지 
않았다.
  별기군에 반발을 보이는  것은 구식군대와 유림이었다. 그들은  만인소를 올린 
이만손과 강진규가 사형판결을  받았다가 원지로 유배되었는데도 계속해서 상소
를 올렸다.
  “참으로 끈질긴 유림이 아닌가?”
  민비는 넌더리를 냈다.
  유림의 상소는 2월에  시작되어 7월까지 계속되었다. 특히 윤 7월  6일 이항로
의 계열인 강원도  유생 홍재학, 경기도 유생 신섭, 충청도  유생 조계하, 전라도 
유생 고정주 등은 광화문 앞에 엎드려 상소문을 올렸다.
  이른바 황준헌의 책이란 것을 가지고 돌아와서 전하에게도 올리고 조정대신들
에게 돌려 보이면서 <이 책의 계책은 우리 조선 실정과 부합된다> 하였으니 이
것이 과연 하늘을 이고 땅을  밟고 사는 사람의 입에서 나온 말이라고 할 수 있
겠사옵니까?
  대체로 물은 낮은 곳으로 흘러가고  불은 건조한 것에 붙으며 간사한 것은 간
사한 것끼리 통하는 것이 고금의 이치이옵니다.
  만약 전하의 지시를 받고  간 사신(김홍집)이 사교(천주교)를 배척하기를 찬서
리가 내리듯이 단호하게  대했다면 어찌 감히 이런 책을 지어  바치겠습니까. 만
약 전하의 정사를  보필하는 재상(이최응 등)들이 엄정한 처사로  범접하지 못하
게 했다면 이른바 사신이라는 자가  어찌 그 책을 전하에게 바칠 수 있겠사옵니
까?
  이런 것으로 본다면 전하의 사신과 재상은 전하의 신하가 아니라 바로 서교도
의 심복으로 구라파와 내통한 것이나 다름이 없습니다.
  전하가 진실로 천리를  따르기를 원한다면 기무아문을 폐지하고,  무당과 중들
의 기원을 중지시키고, 어질고  준수한 사람을 골라 부리고, 군사에 관한 정사를 
밝게 하여야 할 것입니다.
  네 유수도 유생들이 올린 상소에 대하여 내린 비답을 보았는데 신 등은 다 읽
어 보기도 전에 가슴을 치고 통곡을 금할 수가 없었습니다.
  전하는 무슨 까닭에 온 나라의 선비들이 충정으로 올리는 상소를 내치고 언로
를 막아 귀양을 보내는 것입니까? 이것이 충간을 하는 신하의 말을 따르는 임금
의 도리입니까? 전하께서는 오만하게 스스로 성인인 체하는 것입니까?
  이항로의 제자인 김평묵의  문하생인 강원도 유생 홍재학의  상소문으로, 임금
에게 올리는 상소문으로서는 전례없이 문구가 흉악했다.
  하늘이 총명하다는 것은 우리  백성들이 총명한 것으로부터 알게 되고 하늘이 
두렵다는 것은 우리 백성들을 두려워 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예로부터 민심은 천심이라고 하였습니다.
  로서아가 비록 날로 강대해 지고  있다고 하나 원수진 일이 없는데 무슨 까닭
으로 우리 강토를 침범하겠습니까? 이는 우리 백성들을 위협하여 미국과 화친을 
하려는 것에 불과합니다.
  저 미국은 사교의 나라입니다. 그와 더불어 통상왕래를  하게 되면 자기 집 뜰
에다 범을 기르고 도적을 집안에 끌어 들이는 것이나 무엇이 다르겠습니까?
  이른바 동인이란 사람은  어디에서 왔는지 모르겠습니다. 홍집은  우리나라 사
람으로 일본으로 밀항했던 자라고  하였는데 그를 대뜸 참모관으로 특별히 선발
하였으므로 갑자기 도망을 갔는데 홍집이 감히 모른다고 할 수 있겠사옵니까?
  신은 초야의 비천한 선비로  학식도 변변치 못하나 나라를 걱정하는 마음으로 
망녕된 말을 하였으니 무슨 벌이든 달게 받겠사옵니다.
  경기도 유생 신섭이 올린 상소였다.
  이에 대해 고종과 민비는  의금부에 추국청을 설치하여 신문을 하라고 의정부
에 지시했다. 홍재학의 상소는 전례없이 고종을 비난하여, 오만하게 자기 스스로 
성인인 체하느냐,, 하고 꾸짖고 무당과 중들이 궁중에 출입하는 것을 금지하라고 
하여 민비까지 비난하고 있었다.
  의금부의 추국관에는  영의정 이최응이  임명되어 홍재학과 신섭을  신문했다. 
그러나 이최응이 병환으로 추국관을 사임하자 홍순목이 임명되었다.
  윤 7월 20일 홍재학은  의금부의 가혹한 고문을 이기지 못하고 자신이 어리석
은 소견으로  임금을 비방했다는 자복을  했다. 의금부는 이에  따라 홍재학에게 
사형 판결을 내라고 참형에 처하였다. 이로써  만인소로 시작하여 5개월 동안 전
국을 휩쓴  유생들의 상소사건은 다소  잠잠하게 되었다. 그러나  최익현과 함께 
이항로의 고제로 유림에  쟁쟁한 명성을 날리고 있던  김평묵 서신 사건이 터져 
김평묵을 의금부에서 잡아다가  엄한 고문을 한 뒤 귀양을 보냈다.  김평묵 서신 
사건은 <여러 집사들에게>  하는 제목으로 시작되어 홍재학,  신섭 등의 상소는 
정당하고 엄동설한에도 푸르고 싱싱한  소나무처럼 기상이 높다고 칭찬을 한 뒤 
자신도 유생들과 뜻을 같이 하고 있으나 늙고 병들어 달려가지 못한다고 한탄하
였다.
  김평묵은 뒤이어, 그대들의 상소가 온 나라 안에  전파되면 여우와 쥐 같은 무
리들은 간담이 서늘해 질 것이고  귀신과 도깨비 같은 무리들은 종적을 감출 것
이라고 유생들을 부추기기가지 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상소 사건의 대미는 김홍집이  장식하였다. 김홍집은 유생들의 상소에 
자신의 이름이 거론되자  사직하는 상소를 올려 통신사  직에서 파면된 뒤 다시 
김포로 귀양까지 갔으나 고종과  민비는 김홍집의 개화정책을 높이 평가하여 통
리기무아문의 경리사 당상관으로 임명하고 있었다.
  그러나 홍재학 등의 상소에서  또다시 김홍집의 이름이 거론되자 김홍집은 경
리사를 사직하는 상소를 올렸던 것이다.
  지금까지 유생들이 소를 올려 신을 성토하고 날조하여 신을 비방하니 신은 이 
큰 모욕을 감당할 길이 없사옵니다.
  황준헌의 「사의조선책략」은 우리가 사대의 예로  받드는 큰 나라(청국)의 사
신 (청국공사 하여장)에게 받은  것이니 신이 사사로이 받지 않을 수가  없는 것
이었습니다.
  또 하나는 이동인에 대한 문제입니다.
  이동인은 본래 우리나라의 중으로 옷차림을 변장하고 밀항을 했으니 국법으로 
따지면 응당 즉시 잡아서 사형에 처해야 할  것입니다. 신이 정신병에 걸리지 않
은 이상 어찌 그를 불러들여 몰래 상종할 리가 있겟사옵니까? 
  지난 번에는 신을 규탄한 것이 한 도였는데 이제는 전 도에 확산되어 신의 마
음은 두렵기 짝이  없습니다. 이제 신은 영원히 벼슬을 사직하여  시골에 은거함
으로써, 사람들의 노여움을 가라앉히고 여생을 편히 보전할까 합니다.
  어찌 감히 벼슬에  나가 신의 지조를 거듭  상실하겠습니까.전하께오서는 신의 
처지를 헤아려 주시기 바라옵니다.
  고증은 김홍집의 사직  상소를 보고, 부당한 말에  귀 기울일 필요 없다. 여러 
번 신칙(단단히 일러서 경계함)이 있었으니 빨리 상경하여 과인을 보필하라... 하
고 사직을 허락하지  않았다. 김홍집의 상소를 보고 누구보다 놀란  사람들은 개
화당 사람들이었다. 특히  김옥균은 김홍집이 이동인을 모른다고  하고 국법으로 
따지면 참형에 처해야 한다고 상소를 올린 것에 분개하기까지 했다.
  “도원이 이럴 수 있습니까?  도원이 동인 스님을 모른다니 말이 되지를 않습
니다!”
  김옥균은 유대치를 찾아와 분노를 터뜨렸다.
  “도원이 나름대로 사정이  있겠지. 그래도 도원만치 조정에서  활약하고 있는 
사람이 없지를 않는가?”
  “도원이 동인 스님을 모른다고 한 이상 두번  다시 상종을 할 수가 없습니다. 
이제는 그 사람과 자리를 같이 하지 않겠습니다!”
  “장차 큰 일을 하려는 사람이 그만한 일로 분개해서는 안 되네.”
  “큰 일을 하려면 지조가 분명해야 합니다.”
  “살얼음 같은 정국이야.”
  유대치는 김옥균을 달래었다. 그는 개화당의 젊은  인재들이 반목하는 것이 달
갑지가 않았다.
  “전 도원처럼 문장만 그럴 듯한 사람이 싫습니다.”
  김옥균이 단호하게 내뱉았다.  유대치는 얼굴을 찡그리고 우두커니  천장을 쳐
다보았다. 김옥균의 치기가  지나친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퍼뜩  뇌리를 스쳤
다. 신중하지 못하면 대사를 그르칠 염려가 있었다.
  “고균은 우리 조선이 시급히 해야 할 일이 무엇이라고 보는가?”
  유대치는 슬그머니 화제를 바꾸었다.
  “양병입니다.”
  김옥균이 대뜸 자신의 속내를 내비쳤다.
  “양병이라면 얼마나 해야 된다고 보는가?”
  “10만 군사는 양병해야 될 것으로 봅니다.”
  “하면 10만 군사를 양병하려면 재용을 어디서 마련할 것인가?”
  “아직 그 생각은 하지 못했습니다.”
  김옥균이 낙담한 얼굴로 대답했다. 10만 군사를  양성하는 것은 막대한 비용이 
필요한 것이다.
  “홍영식과 어윤중이 돌아오면 고균도 일본을 한번 둘러보게.”
  “일본을요?”
  “일본을 알아야 하네. 직접 눈으로 보고 배우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는 것
일세.”
  김옥균이 묵묵히 고개를 끄덕거렸다.
  고종을 가까이 모시려면  일본을 다녀오는 것이 필수적이었다.  김홍집이 고종
의 두터운 신임을 받고 있는 것도 모두 그 까닭이었다.
  “김윤식이 영선사에 임명되었으니 조만간 청나라로 떠날걸세.”
  김윤식이 영선사에  임명된 것은 지난  7월이었다. 김윤식은  신식기계 학습을 
배운다는 명목으로  청나라의 군사기술을 배우기 위해  유학생을 선발하고 있었
다. 조정에서는 일본에 암행어사로 위장시켜 신사유람단을  보내 시찰케 하는 한
편 청나라에도 영선사를 보내 군사기술을 배워 오게 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우리는 일본과 청나라의 군사와  신문물을 배워 부국강병하게 
되는 계기가  되는 걸세. 다행히  주상전하와 중전 마마께서  영민하시어 개국에 
온 힘을 쏟고 있으니 얼마나 다행한 일인가?”
  “예, 다행한 일입니다.”
  김옥균은 유대치의 말에 의기소침하여 대답했다.  김홍집, 김윤식, 홍영식 등이 
이미 고종의 각별한  신임을 얻어 정계에 두각을  나타내고 있는 사실이 씁쓸했
다. 김옥균 자신도  과거에 급제한 뒤에 성균관 전적, 시간원  정원, 홍문관 교리
를 지냈으나 그들처럼 고종의 신임을 얻지는 못했던 것이다.
  (일본을 시찰하는 것은 내가 반드시 해야 할 일이야....!)
  김옥균은 유대치의 약국을 나오며 착잡한 마음에 사로잡혔다.
  1) 이동인의 행방불명은 대원군에 의한 암살설, 김홍집에  의한 암살설, 민영익
에 의한 암살설  등이 나돌았으나 그다지 설득력이 없다. 이동인은  오히려 조선
의 자주 외교정책을 반대하려는 일본에 의해 암살되었을 가능성이 더 크다.
    제23장 이 강산 낙화유수
  1
  이창현은 주머니를  더듬어 연죽을 찾아  입에 물었다. 살갗을  스치는 바람이 
차가웠다.
  그는 천천히 성냥을 켜서 연죽에 불을 붙인  뒤 연기를 빨아댔다. 주위는 조용
했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 알수가 없었다.  귓전이 먹먹하도록 나래를 치며 
끼륵거리던 갈매기도  깃을 접었는지 모래톱을 때리는  파도소리만 한결 높아져 
있었다.
  (몇 시나 되었을까?)
  이창현은 연신 담배연기를  뿜어대면서 시간을 어림해 보았다.  이창현은 눈이 
보이지 않는 탓에 감각으로 시간을 짐작했다. 아침에 일어나면 햇살의, 따스함으
로, 밤이 되면 차가운 공기의 흐름으로 대충 시간을 짐작했다. 처음엔 낮인지 밤
인지 조차 구별하지 못했고, 날씨가 흐렸는지 볕이 화창한지도 알지 못했다.그러
나 시간이 그를 자연에 적응하게 만들어 주었다. 
  (오늘이 며칠일까?)
  이창현은 담배 연기 때문에 기침을 쿨럭쿨럭  하면서 귀를 쫑긋거렸다. 어디선
가 인적이 느껴진  것이다. 그러나 보이지 않는 눈을 꿈벅거리며  귀를 쫑긋거려
도 인적을 찾을 수가 없었다. 
  (내가 잘못 들었나?)
  이창현은 고개를 갸웃했다. 우병규를 만나기로 했으나  아직까지 오지 않고 있
었다. 우병규는 이리텔 신부의  소식을 알고 있는 사람이었다. 이리텔 신부는 병
인년에 헤어진 후 지금가지 소식조차 듣지 못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 이리텔 신
부가 정축년 9월에  황해도 장연을 거쳐 서대문 밖까지 와  있다는 것이었다. 그
러나 자세한 내막을 아직 알 길이 없었다. 그는  우병규를 한 번도 만난 일이 없
었다. 그러나 우병규를  만나게 해주겠다는 교인에 의해 이곳에 약속을  정한 것
이다.
  (오늘은 8월 초사흘일 거야.)
  이창현은 혼잣말로 묻고 혼잣말로 대답하였다. 음력  8월 3일이라도 윤달이 끼
어 있었던 탓에 날씨는 이미 깊은 가을로 접어 들어 있었다. 
  이창현은 보이지 않는 눈을 꿈벅거리며 바다를  어림해 보았다. 바다는 3백 보
쯤 앞에  있었다. 이창현이 앉아 있는  바위 언덕에서 소나무 숲을  지나 비탈을 
내려가면 곧바로 바다였다.
  이창현은 이따금 죽음을  생각했다. 파도가 모래톱을 때리는  해안으로 내려가 
곧장 바닷속으로 들어가면 죽음을 만나리라.  내가 죽으면 천당으로 가겠지.... 그
리운 아내  조선이가 있는 곳, 그리고  포졸들에게 목졸려 죽은 어린  딸 옥희가 
있는 곳... 기화요초가 만발하고... 죽음과  고통이 없는 그곳.... 세외선경... 죽으면 
그곳에 갈 수 있으리라는 생각을 했다. 아내와  옥희가 까르르 웃고 아득하게 그
를 부르는 아내의 정겨운 목소리...
  그러나 바다 건너에 옥순이 있다는 생각을 하자 이창현은 세차게 고개를 흔들
었다. 이리텔 신부만 만나면 딸을  얼마든지 찾을 수 있을 것 같았다. 고종이 친
정을 하고서부터 천주교에 대한 박해도 많이 수그러져 있었다.
  (오늘은 나타나지 않을 모양이군.....)
  이창현은 우병규가 오지 않으리라는 생각을 하자  허전해 졌다. 이창현은 다시 
회상에 잠기기 시작했다.
  이창현이 민승호의 집  폭발사고 때 부상을 당하고  처음 의식을 회복했을 때 
사방이 칠흑처럼 캄캄해 아무것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한밤중이었다. 검은 상
포처럼 널려 있는 어둠 탓인지 방안이 죽은  듯이 조용했다. 기이할 정도의 어둠
과 정적이었다. 이창현은 눈을 뜬 채 얼핏  저승으로 가지 못한 원귀가 떠돈다는 
황천이 이런 곳일까.  황천이 이렇게 눈물이 미어져 나오도록 적막한  곳일까 하
는 생각을 했다.
  그러나 그것은 일순간의 일이었다. 의식이 점점  명료해 지자 이창현은 자신의 
몸과 머리가 온통 광목천으로 감겨져 있는 것을  깨달았고, 민승호의 집 폭발 사
건으로 자신이 부상을 당했다는 것을 기억하게 되었다.
  “정신이 드나?”
  누군가 이창현의 어깨를 흔들었다. 이창현은 그때서야  두 눈으로 맹렬한 고통
을 느끼며 신음을 질렀다.
  “진정하게, 이만하길 다행일세.”
  “눈,눈이 아파 견딜 수가 없습니다.”
  “이만한 것도 천행이야. 대감마님은 그 자리에서 돌아가셨네.”
  “대감마님?”
  “한창부부인 마님과 도련님은 사지가 날아가고  내장이 터져나와... 생각만 해
도 몸서리가 처지는 일이야...”
  “.....”
  이창현은 이를 악물었다. 두 눈의 통증이 격렬해 이빨이 딱딱 부딪쳤다.
  “중전마마께서 어의를 보내셨네.”
  “.....”
  “자네는 실명을 해도 목숨은 붙어 있을 거라 하였네.”
  이창현이 왕십리의 움막으로 옮긴 것은  민승호의 집 폭사 사건이 있은 뒤 한 
달이 조금 지났을 때였다. 상처는 점점 아물어 갔으나 눈은 보이지 않았다. 이창
현은 그때 죽음을  생각했었다. 그러나 박 상궁이 찾아와 위로를  해주자 죽음에 
대한 생각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모두가 부질없는 짓이야....)
  이창현은 박 상궁을 생각하자 가슴이 터질 것처럼 뻐근해 왔다.
  박 상궁이 죽던  날 이창현은 지팡이를 짚고 왕십리 일대를  산책하고 있었다. 
그 무렵 눈이  보이지 않게 된 이창현은 하루  온 종일 집안에만 틀어박혀 있었
다. 초여름이었다. 5월 어느  날 이창현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바깥 바람을 쏘
이고 싶었다. 낮인지 밤인지 알 수 없었으나  이창현은 지팡이를 짚고 움막을 나
왔다.
  거리는 조용했다. 그만해도 행길인 왕십리 큰길까지  조심스레 행보를 해 보았
으나 인적이 전혀 없었다. 이따금 어느 집에서  개 짖는 소리가 음산하게 들려왔
다. 5월인데도 바람이 시원했고 어느 나무 그늘  밑에 서 있자 이슬이 내리는 것
을 느낄 수 있었다.
  (아하 밤이 깊었군.....)
  이창현은 비로소 큰길에 인적이 전혀 없는 까닭을 알 수 있었다.
  이창현은 지팡이로 길바닥을  두드리며 움막으로 걸음을 되돌렸다.  갑자기 박 
상궁이 찾아올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 가슴이 설레었다.
  박 상궁의 곱상한  얼굴과 탄력이 넘치는 몸뚱이가 생각났다. 박  상궁은 아내
와는 전혀 다른  느낌의 여자였다. 아내가 새벽이슬처럼 청초한 여자라면  박 상
궁은 밤꽃처럼 눅진눅진한 체취를 갖고 있는 여자였다.
  게다가 박 상궁은  나이가 어리고 궁궐의 여자였다. 그 여자와  사통을 하다가 
발각이 되면 박  상궁은 물론 이창현까지 능지처참을 당할 것이  분명했다. 그런
데도 박 상궁은 죽동 민승호의  집에 봉서를 가지고 올 때마다 이창현의 움막에 
들려 자고 가고는 했다.
  물론 이창현으로서도 박 상궁이 찾아오는 것이 싫은 것은 아니었다.
  이창현도 박 상궁이 좋았다. 아내는 죽었고 여자가  그리울 때 박 상궁과 잠자
리를 같이 하는 것은 가슴이 시리도록 좋았다.  다만 죽은 아내에 대한 죄스러움
이 가슴 밑바닥에 앙금처럼 남아 있기는 했으나 죽은 아내도 이해해주리라고 생
각했다.
  움막은 조용했다. 이창현은  집에 이르자 지팡이로 사립문을 열었다. 어디선가 
비린내가 풍기는 것 같았다.  이창현은 지팡이로 마당을 두드리며 들어 섰다. 고
양이가 생선이라도 물어다 놓은 것일까. 눈이 보이지  않게 되자 냄새를 맡는 후
각과 소리를 듣는 청각만이 유난히 발달해 있었다.
  (이게 뭘까?)
  지팡이 끝에 옷자락  같은 것이 감지되었다. 이창현은 걸음을 멈추고  숨을 깊
게 들이쉬었다가 내뱉았다. 어느 집에서 빨랫줄에  널어 놓은 여인네의 치맛자락
이라도 바람에 날려 온 것일까.
  이창현은 그런  생각을 하면서 조심스럽게  지팡이 끝을 옮겨  보았다. 지팡이 
끝에 물컹한 것이 느껴졌다. 
  (설마?)
  이창현은 머리 끝이 곧추 서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지팡이 끝에 닿는 물체가 
사람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퍼뜩 뇌리를 스쳤다.
  “누구요?”
  이창현은 지팡이를 거두고 마당에  누워 있으리라고 여겨지는 물체를 향해 낮
게 소리를 질렀다.  혹시라도 비렁뱅이가 잠잘 곳을 찾아 왔다가  마당에서 쓰러
져 잠이 들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누구 있소?”
  이창현은 목청을 돋구어 소리를 질렀다. 그러나 상대방은 아무 대꾸가 없었다. 
이창현은 귀를 바짝 기울였다. 어디선가 개 짖는 소리가 사납게 들려왔다. 그 소
리 외에는 사방이 쥐 죽은 듯이 조용했다.
  이창현은 다시 지팡이로  물체를 건드려 보았다. 먼저 치맛자락 같은  것이 느
껴지고 다음엔 딱딱하지 않은 물체가 지팡이  끝에 감지되었다. 이창현은 지팡이
로 물체를 더듬어 갔다.
  (여자인 모양인데.....)
  그때 서늘한 바람이 불면서 비린내가 왈칵 풍겼다.
  (이건 피 냄새 같아....)
  이창현은 지팡이를 쥔  손이 후들후들 떨렸다. 비로소 코 끝에  풍기는 냄새가 
피비린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마당에 쓰러져 있는 것은 시체였다.
  이창현은 습관적으로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그러나 그는  아무것도 볼 수 없었
다. 마을 여기저기서 개  짖는 소리만 여우 울음소리처럼 음산했다. 이창현은 소
맷자락으로 이마를 훔쳤다. 이마로 식은 땀이 흥건하게 솟아나고 있었다.
  이창현은 지팡이를 놓고 시체 앞에 엎드렸다.  손으로 더듬어 시체를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피 냄새가 풍기는 것을 보면 누군가 칼을 맞고 죽은 것이 분명했다.
  (이럴 때 눈이라도 보였으면....)
  이창현은 답답함을 떨쳐 버리기라도 하듯이 손을  뻗쳤다. 그의 예상대로 고급
스러운 치맛자락이 만져졌다.
  (설마 살아있는 것은 아니겠지?)
  이창현은 치맛자락에서 손을 떼었다. 여자가 살아  있다면 함부로 여자의 몸에 
손을 댈 수  없는 것이다.이창현은 여자를 향해  귀를 바짝 갖다 댔다. 숨소리를 
들어 보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여자는 죽은 듯이 조용했다.
  이창현은 다시  여자를 향해 손을 가져  갔다. 이번엔 땅을 더듬어  손이 있을 
곳을 찾아보았다. 다행히  여자의 손이 잡혔다. 여자의 손은  부드럽고 따뜻했다. 
손목의 맥을 짚자 맥이 전혀 없었다. 
역시 죽었어.
이창현은 손목을 놓고 여자의 다리와 몸을  더듬었다. 여자의 둔부에서 허리께로 
손을 옮기자 끈적거리는 것이 손바닥에 느껴졌다.
이건피야!
이창현은 오싹 소름이 끼쳐 왔다.
도대체 누가 여기서 죽었을까?
이창현은 여자의 몸에서 손을 떼고 망연히 생각에  잠겼다. 여자의 얼굴을 볼 수 
없으므로 누가 죽었는지 알  수 없었다. 일년내내 찾아온 사람이 없는 집이었다. 
민승호가 살아 있을 때는 민승호의  가신들이 더러 이창현을 부르러 올 때도 있
었다. 그러나 남자들이 이창현을 부르러 왔지,  여자가 온일은 한번도 없었다. 게
다가 민승호가 죽고 나자 이창현을 찾는 사람은 박 상궁 하나뿐이었다. 
 박상궁이 죽은 것인가?
박상궁이 다녀간 지 한  달이 가가워지고 있었다. 박 상궁은 한  달에 두세 번씩 
꼬박꼬박 이창현에게  다녀가곤 했는데 이번엔 한  달이 가까워지도록 발걸음을 
하지 않은 것이다. 지금쯤 박 상궁이 다녀갈 시기였다. 그런데 어떻게 박 상궁인
지 아닌지 알 수 있지..
 이창현은 박 상궁의  특징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 무엇인가  박상궁의 신분이나 
특징을 나타낼  만한 것이 있으리라고  여겨졌다. 그러나 박상궁의  특징이 전혀 
생각나지 않았다. 
참 내가 정표로 준 묵주가 있지.
언젠가 박상궁이 정표를  하나 달라고 때를 쓰고 졸라서 묵주를  준일이 있었다. 
묵주는 천주교 신자들이  기도를 바칠 때 쓰는 구슬이었다. 박  상궁에게도 묵주
신공을 바치는 법을 가르쳐 주었더니 상궁은 좋아라 하며 향낭에 넣었었다.
 향낭은 대개 궁궐의 왕비나 후궁들이 찼다.  그러나 박상궁은 민비의 총애를 받
고 있어서인지 사향냄새가 나는 향냥을 차고 노리개도 많이 갖고 있었다. 
그래 묵주가 있는지 보면 알거야..
이창현은 재빨리 여자의 치맛자락을 뒤집어 향낭을 찾아 보았다.
아!
이창현은 향낭이 손에  잡히자 가슴이 뜀박질을 하듯이 뛰는 것을  느꼈다. 이창
현은 재빨리 향낭을 풀러 속을 살폈다.
 박 상궁이었어..
이창현은 온 몸의 맥이 풀리는 것을 느꼈다.  향낭엔 한지에 싸인 사향가루와 함
께 묵주가 들어 있었다.
박 상궁이 이렇게 죽다니..
이창현은 박 상궁의 시체를  쓸어안고 오열을 했다. 허망했다. 박 상궁은 자신을 
찾아왔다가 죽은  것이다. 그러나 언제까지나  박 상궁의 시체를  끌어안고 울고 
있을 수만은 없었다.  박상궁을 죽인 자가 자신을 죽이러 올지도  모른다는 생각
을 하자 이창현은 겁이 덜컥 났다. 이창현은  부랴부랴 행장을 수습하여 길을 떠
났다. 박 상궁의  시체를 묻어 줄 힘도  없었고 여가도 없었다. 이창현은 옷가지 
몇 점을 챙겨괴나리 봇짐을 만들고  민승호의 집에서 가신 노릇을 하며 받은 돈
과 박 상궁이 어디선가 챙겨온  금붙이만 전대를 만들어 허리에 차고 길을 떠났
다. 그것이 벌써 7년이나 전의 일이었다.
 이창현은 전대에 있던 돈이 모두 떨어지자  구걸을 하기 시작했다. 아무것도 볼 
수 없는 몸으로는 일은커녕 구걸을 하는 것 조차 용이한 일이 아니었다. 
 이창현이 부산의 동래부까지  내려온 것은 지난 해 겨울이었다.  이창현은 주막
의 할멈에게 밥이나 한 술 얻고 헛간을 빌어 등걸잠이라도 잘 요량이었다.
 그런데 주막집 주인이 겨울을 나게 해주었고,  겨울을 지나고 해동을 하자 떠나
려는 이창현을 굳이 머물게 했던 것이다. 
 치아현은 그 까닭을 알 수 없었다.
 이창현은 다시  쿨럭쿨럭 기침을 했따. 바람이  더욱 서늘해 져  몸이 으슬으슬 
떨렸다.
 “아저씨!”
 그때 쇠돌이의  목소리가 언덕에서 들려왔다.  이창현은 연죽의  담뱃재를 바위 
위에 털어 내고  몸을 일으켰다. 이내 쇠돌이의 가쁜 호흡소리가  들리면서 쇠돌
이가 그의 옷깃을 잡았다.
 “쇠돌이구나.”
 이창현은 받은 기침을 하면서 지팡이를 잡았다.
 “아줌마가 모시고 오래요.”
 “날이 어두워졌니?”
 “예.”
 “얼만큼?”
 “벌써 캄캄해 졌어요.”
 이창현은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러고 보면 추위 못지 않게  시장기도 느껴졌다. 
우병규는 결국 오지 않을 모양이었다. 
 “가자.”
 “저를 잡으세요.”
  이창현은 한손으로 쇠돌의 손을  잡고 한 손으로는 지팡이로 길바닥을 두들기
면서 걸음을 때어 놓았다 바닷바람은 싸늘해 차가워지고 기온이 더욱 낮아져 있
었다. 옥년의 술집까지는 7백  보 남짓 되었다. 옥년은 술집이 번성을 하자 ‘청
솔옥’이라는 간판을 내걸고 술을 치는 여자까지  셋을 두었다. 일본인들이 조선
으로 밀려 들어오면 올수록 옥년의 술집은 번창하였다. 
 “날이 어두워지면 일찍 들어와야지. 애를 꼭 부르러 보내야 하나?”
 쇠돌의 손에 이끌려 이창현이  들어오는 것을 본 옥년이 혀를 차듯 궁시렁거렸
다. 이창현은 대꾸를 하지 않고 신을 벗고 툇마루로 올라섰다. 내실에 딸린 툇마
루였다.
 “저녁 차려 놨어요.”
 옥년이 한마디  더하고 정주간으로 횡하니  들어갔다. 이창현은  정주간을 향해 
멀뚱히 서 있다가 쇠돌과 함깨 내실로 들어갔다.  내실은 군불을 많이 때서 후끈
거렸다. 이창현은 바닷바람에 언 몸을 녹이듯 아랫목에 주저않았다. 
 “저녁 잡수세요.”
  쇠돌이 이창현의 앞으로 상을 밀어 놓았다. 
 이창현은 상을 더듬어 수저를 들고 국을 한  숟가락 떠서 입에 넣었다. 국은 무
를 숭숭 썰어 놓고 다진 쇠고기를 넣어 끓인 것이었다. 
 쇠돌은 저녁을 먹자 소학을  외기 시작했고 이창현은 목침을 베고 누워 쇠돌이 
소학을 외우는 소리에 가만히 귀를 기울였다.
 “곡례왈유자상시무광하고 입필정방불경청이라..곡례에  이르기를 어린아이에게
는 항상 거짓된 것을 보이지 않으며 서있을 때는 바른 방향을 향하여 서게 하고 
귀를 기울여 듣지 않도록 해야 한다
  소학의 내편에 있는 글이었다. 
 학기왈고지교자가유숙하고 당유상술유서국유학이라 학기에 이르기를 오래 전에
는 작은 마을에 숙이라는 학교가  있고 큰 마을에는 상이라는 학교가 있으며 주
에는 서라는 학교가 있고 나라의 도읍에는 대학이라는 학교가 있었다 한다.
 쇠돌의 소학 외기가  끝난 것은 이창현이 얼핏 잠이 들었을  때 였다. 이창현은 
쇠돌이 부스럭대며 책을 챙겨 밖으로 나가는 소리에 선잠을 깨었다. 
 밖에는 찬바람이 불고  있었다. 고샅을 달려오는 바람에 문풍지가  울고 뒷곁에
는 나뭇잎이 쓸려다녔다.
 기방에서는 가야금  타는 소리와 왁자한  사내들의 웃음소리가  들리고 있었다. 
사내들의 웃음소리에 섞여 여자들의 간드러진 웃음소리도 들렸다.
 이창현은 다시 선잠을 잤다.
 그러나 가야금 타는  소리와 여자들의 간드러진 웃음소리가 귓전을 어지럽히게 
하여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매일같이 되풀이 되는 일과였으나  이창현은 여전
히 그 소리에 익숙하지 않았고 익숙할 수가 없었다. 
 그 소리가 조선 여자들이  일본인들에게 몸을 팔고 있는 소리라고 생각했기 때
문이 아니었다. 수치심이나 부끄러움 같은 도덕적인  것과는 무관한 거부 반응이 
그의 몸에서 소름처럼 돋아나고 있을 뿐이었다.
 그렇다고 그가 여자들을 미워하고  있는 것은 아니었다. 여자들, 주인인 옥년을 
비롯하여 기생인  추선,연심,부용은 일본이들에게 술과  웃음을 팔면서 살아가고 
있었다. 그것을  탓할 필요는 없었다. 오히려  이창현이야말로 그들이 술을 파고 
몸을 팔아 번 돈으로 구차한 목숨을 연명하고 있었다.
 조만간 홍주로 떠나야 할텐데.
 이창현은 몸을 뒤척이며 그렇게 생각했다.
 바람소리가 더욱 스산했다. 밤이  깊었는데도 바람이 그칠 기색이 전혀 없었다. 
바람이 불대마다 우수수  나뭇잎이 몸을 떨고 문풍지  우는 소리가 가슴을 메었
다. 이창현은 몇번이나 선잠이  들었다가 깨고 선잠이 들었다가 깨곤 했다. 뒤숭
숭한 날씨였다. 그러다가 이창현은 달디단 잠 속으로 빠져 들었다.
 이창현이 새벽잠을  깬 것은 밖에서 빗발이  추적대는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이창현은 옆으로 돌아  눕다가 훔칫했다. 그의 엉덩이 뒤에 누군가 모
로 누워 잠을 자고 있었다. 
  옥년이군.
 이창현은 입 언저리에  미소를 매달었다. 남자들의 술시중을 드는  것이 피로했
는지 옥년은 코를 골면서 자고 있었고 술냄새까지 풍겼다. 
 이 여자는 무엇때문에 나를 돌보고 있는 것일까?
 이창현은 옥년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옥년은 기이한 여자였다. 부엌할멈에서부
터 쇠돌이를 비롯하여 추선이,연심이,부요이들이 모두 한결같이 거렁뱅이 출신들
이었다. 정작 술집 주인인 옥년에게는 딸린 식구가 하나 없었다.
 팔자가 부박한 계집이라 서방  하나 있는 것은 망나니한테 죽고 소시적에 낳은 
아이는 굶어 죽었다.
 사람들이 옥년의 과거 행적에  대해서 물을라치면 남의 얘기 하듯 그렇게 얼버
무리고 마는 것이었다. 
 이창현은 조심스럽게 옥년의  엉덩이로 손을 가져 갔다. 앞  못보는장님 주제에 
주인 여자의 몸을 탐하는 것이 걸끄러운 노릇이었으나 이미 무관한 사이가 아니
었다. 옥년은  여름철이면 그의 목물까지  해주고 겨울이면 목간통에  물을 데워 
그의 몸을 씻어 주기까지 했다. 분에 넘치는 호강이었다.
 아저씨 연장이 남다른 모양이지요?  그렇지 않으면 산전수전다 겪고 숱한 사내
에게0 이골이 난 우리 아씨가 아저씨를 서방님 받들 듯 하겠어요?
 추선이의 말이었다. 그러나 이창현은  추선의 말에 고객를 흔들었다. 옥년은 색
을 밝히기 위해 그를 돌보고 있는 것이 아니었다. 
이창현은 옥년의 엉덩이를 쓰다듬던 손을 가슴께로  가져갔다. 몸을 반쯤 일으켜 
속적삼의 고를 풀어 젖가슴을 꺼내 놓고 치마를 허리 위로 들추었다. 옥년이 끙, 
하는 신음소리를 내면서 몸을 반듯이 했다.
 이창현은 그 서슬에 놀라 몸을 훔칫했다.  옥년이 잠에서 깬것이 아닐까하여 신
경을곤두세우고 귀를 기울였으나 옥년은 또다시 가늘게  코를 골고 있었다. 이창
현은 주섬주섬 옷을 벗고 옥년의 위로 올라가 엎드렸다.
 아이고 귀찮아.
 옥년이 그때서야 잠투정을  하면서 돌아 누우려고 하였다. 이창현은  재빨리 옥
년을 끌어 안았다.
 귀찮다니까.
옥년이 그를 떠미는 시늉을 하였다.
 미안하오.
 이창현은 옥년의 젖무덤으로  입을 가져갔다. 그는 재빨리 옥년의  밍밍한 살덩
어리를 한 입 가득 베어 물고 세차게 흡입했다.
 아이 참.
 옥년이 짜증스러운 기색으로 이창현을 뿌리쳤다.
 이놈의 기물이 잔뜩 성을 내었소.
 이창현이 머쓱한 기색으로 대꾸했다.
 그놈의 기물은 잠도 안 자나?
 임자가 옆에 온것을 눈치 챈 모양이요.
 옥년은 그때서야 눈을  뜨고 이창현을 쳐다보았다. 이창현은 무릎을  꿇고 앉아 
우물쭈물하고 있었다.
 그놈 눈치 한 번 빠를세
 이놈이 원래 그런 놈이오
어디봅시다.
옥년이 잠결이면서도 이창현의 샅으로  손을 가져가 이창현의 기물을 덥썩 잡았
다.
 어떻소?
 이게 무엇하는 물건예요?
 옥년이 짐짓 농을 치기 시작했다. 옥년도  이제는 잠이 완전히 달아난 모양이었
다. 옥년의 말 속에는 끈적거리는 관능이 묻어났다. 
 어디에 소용되는 기물인지 모르겠소?
 깜깜한 밤중이라 도통 모르겠네요.
 손으로 기물을 잡고도 모르오?
 민대가리가 둥근 것을 보니 절간 스님 백호친 머리 같기도 하구.
 절간 스님도 이문을 출입했나?
 강 건너는 나룻배올시다. 행하만 주면 그만이지 골라서 태우겠수?
 그럼 이몸도 한 번 태워 주구려.
 에고, 털 고삐를 두른 것을 보니 송아지 말뚝일세.
 옥년이는 넌실난실 웃으며 두 팔로 이창현의  머리를 감싸 안았다. 이창현은 그
때서야 옥년에게 자신의 몸을 바싹 밀착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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