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티븐 슈워츠먼 지음 / (주)비즈니스북스
이 책은 세계 최대 사모펀드 그룹인 블랙스톤(Blackstone)의 성장 비결을 알려준다. 저자는 바닥과 천장을 끊임없이 오가는 경기 순환 주기 속에서 블랙스톤이 35년간 축적해온, 리스크를 피하고 수익을 극대화하는 투자 프로세스 및 원칙을 소개함으로써, 시장의 변동성에 휩쓸리지 않고 더 큰 수익을 계획하는 투자자와 기업가에게 투자 기회를 어디서, 어떻게 찾아야 할지 청사진을 제시해 준다.
투자의 모험
▣ 저자 스티븐 슈워츠먼
세계 최대 사모펀드 그룹인 블랙스톤의 공동 창립자, 회장 겸 CEO다. 그의 이름 앞에는 ‘월스트리트의 황제’, ‘사모펀드의 제왕’, ‘미국 최고의 자본가’, ‘미-중을 잇는 제2의 헨리 키신저’ 등 다양한 수식어가 붙어 저자의 영향력이 투자뿐만 아니라 경제와 외교까지 걸쳐 있음을 알 수 있다.
1985년 슈워츠먼은 자본금 40만 달러를 가지고 블랙스톤을 공동 창업했는데 2020년 4월 기준으로 5,380억 달러가 넘는 자금을 운용하는 투자회사로 업계 1위를 지키고 있다. 또한 전 세계 정상들이 자문을 구하려는 CEO 중 한 명이며, 중국판 ‘로즈 장학제도’라고 할 수 있는 ‘슈워츠먼 장학제도’를 창설 하는 등 수십억 달러를 사회에 환원하는 자선 활동가이기도 하다. 이런 업적들은 평생에 걸쳐서 새로운 영역을 배우고 탁월함의 경지에 이르려는 의지, 기업과 사회에 영향을 주는 동시에 원하는 인생을 살려면 무엇이 필요할지 성찰하는 태도와 추진력 그리고 포기하지 않는 끈기가 바탕이 됐다.
▣ Short Summary
세계 최대 사모펀드 그룹인 ‘블랙스톤(Blackstone)’을 지금의 초대형 투자금융회사로 키운 주역은 창업자 겸 CEO인 스티븐 슈워츠먼 회장으로, 그는 블랙먼데이, 저축대부조합 파산과 부동산 시장 폭락, 닷컴버블 붕괴,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와 글로벌 금융위기 같은 침체기를 겪으면서도 손대는 거래마다 거의 손실을 내지 않고 승승장구하여 ‘월스트리트의 황제’, ‘사모펀드의 제왕’으로 불리며 세계 투자 자들의 선망을 받는다. 그는 항상 남다른 기회를 발견하면 가진 모든 것을 던져 그 기회를 잡았다. 그리고 결코 포기하지 않았다. 그에게 투자란 더 큰 기회를 찾아가는 모험이었기 때문이다.
이 책은 세계 최대 사모펀드 그룹인 블랙스톤의 성장 비결을 알려준다. 저자는 바닥과 천장을 끊임없이 오가는 경기 순환 주기 속에서 블랙스톤이 35년간 축적해온, 리스크를 피하고 수익을 극대화하는 투자 프로세스 및 원칙을 소개함으로써, 시장의 변동성에 휩쓸리지 않고 더 큰 수익을 계획하는 투자 자와 기업가에게 투자 기회를 어디서, 어떻게 찾아야 할지 청사진을 제시해 준다.
저자는 투자의 성공 여부는 대부분 경기 순환 주기의 어느 시점에 들어가느냐에 따라 결정되며, 이는 순환 주기가 어떤 사업의 성장 궤적과 자산 가치, 잠재적 수익률의 성장 궤적에 결정적인 충격을 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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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 있기 때문이라 말하며, 시장의 천장을 파악하는 기준으로 다음의 세 가지를 꼽는다. ‘① 매수자들이 과도한 자신감에 빠져 있고 이번에는 다르다고 믿는다. ② 금융 전망이 지나치게 낙관적이고 타인자본이 넘쳐난다. 레버리지 수준은 평균치를 넘어, 10배 혹은 그보다 더 높은 수준으로 올라가기도 한다.
③ 시장 성장 수준을 초과하는 수익을 달성한 투자자들의 수가 점점 늘어난다.’
한편 시장의 바닥은 천장보다 포착하기 힘들고 대부분의 투자자들은 경기침체의 심각성을 과소평가하 는데, 수익을 극대화하기 위해서는 너무 빠르게 대응하지 않는 것이 정말로 중요하다고 말한다. 또 시장이 플러스로 전환할 때라고 해도 자산 가치가 원래 수준을 회복하기까지는 더 많은 시간을 필요로 하기 때문에 최저점에서 적어도 10퍼센트 이상 회복했을 때 투자하라고 조언한다.
그리고 신용 조건이 느슨하고 시장이 상승세에 있을 때 개인들은 특별한 투자 전략이나 투자 프로세스 없이도 우연히 돈을 벌 수 있지만, 강세장에서 돈을 버는 것은 오래가지 못하기에 자기 규율과 건전한 리스크 평가를 통해 지속적으로 수익을 만들어내는 똑똑한 투자자가 되어야 한다고 강조한다.
한편 저자는 용감함으로 무장한 투자자는 대부분 30~40대에 무너지며, 50대 이후에도 건재하다면 문제를 피해가는 방법과 투자에 있어서 보수적이거나 공격적일 때를 매우 잘 알고 있기 때문이라고 설명 했는데, 그의 이런 기조는 투자 대상을 결정할 때 집단 토론을 통해 예상 가능한 모든 리스크를 평가 하고 거래의 강점을 강화하는, 블랙스톤 고유의 투자 의사결정 프로세스에도 반영되었다.
▣ 차례
이 책에 쏟아진 찬사 한국어판 서문 프롤로그 - 최고는 타고나는 게 아니라 만들어지는 것이다
제1부 성장의 원칙 - 방향을 정하고 장애물을 뛰어넘다제1장 크게 생각하라 그리고 포기하지 마라제2장 모든 것은 연결되어 있다제3장 상황을 주도해 자신을 드러내라제4장 어떤 일이든 직접 해봐야 내 것이 된다제5장 리스크 없는 거래란 없다제6장 인생의 가장 큰 교훈은 인내와 고통 속에 있다
제2부 투자의 원칙 - 실패하지 않는 시나리오를 짜다제1장 경쟁은 적고 기회는 많은 영역을 찾아라제2장 열린사고를 유지하고 드문 기회를 포착하라제3장 고객의 문제를 해결하면 나의 문제도 해결된다제4장 절호의 기회를 놓치지 마라제5장 경기 순환 주기에 올라타라제6장 어떻게 올바른 의사결정을 할 것인가제7장 돈을 잃지 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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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장 블랙스톤의 인재 전략
제3부 경영의 원칙 - 한 손은 기회를 움켜쥐고 한 손은 위험을 막아내다제1장 확장하라 그리고 구석구석을 살펴라제2장 현명한 리더는 기꺼이 도움을 청한다제3장 기업가정신의 이상과 현실제4장 균열의 시그널에 촉을 세워라제5장 리스크를 줄이는 최고의 방법은 시간을 끌지 않는 것이다제6장 모험을 멈추지 마라
제4부 성공의 원칙 - 내가 탁월함을 추구하며 배운 교훈들제1장 주어진 상황의 친구가 되어라제2장 위기를 레버리지 삼아 기회로 바꿔라제3장 주변을 돌아보고 가진 것을 나눠라제4장 국가가 부를 때는 응답하라제5장 선순환을 만들어라제6장 탁월함을 추구하는 사람들과 함께하라
에필로그 - 평생 배우고 탁월함을 추구하는 사람은 무한히 성장한다 감사의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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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장의 원칙 - 방향을 정하고 장애물을 뛰어넘다
크게 생각하라 그리고 포기하지 마라 성공은 얼마나 원하느냐의 문제다: 할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필라델피아에 있는 아버지가 운영하던 포목점의 고객들은 충성심이 높았다. 아버지는 그 가게를 운영하는 게 즐겁고 행복했지만, 사업을 확장 하겠다는 야심은 없었다. 지금에야 나는 그때의 아버지를 이해한다. 반면 어머니는 조금도 가만히 있지 않을 정도로 부지런하고 야망이 있었다. 이런 어머니가 아버지를 보완하는 역할을 했다. 어머니는 우리 가족의 이름을 세상에 알린 분이다. 어느 날 요트 항해법을 배우겠다고 결심하고 6미터짜리 요트를 사서 항해법을 배우고는 우리를 요트 경주에 데리고 나갔다. 이때 어머니가 키를 잡았고 아버지는 어머니의 지시를 따랐다. 그리고 어머니는 많은 트로피를 땄다. 쌍둥이 동생들과 나는 늘 어머니의 승부욕을 우러러봤다. 시대를 잘 만났더라면 어머니는 분명 대기업의 CEO가 되었을 것이다.
달릴 수 있을 때까지는 계속 달려라: 고등학교 2학년 때 학생회장으로 선출되면서 나는 처음으로 혁신 가가 된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경험했다. 나는 다른 학생회장들과 별반 다를 게 없는 그저 그런 학생회장으로 이름을 남기고 싶지 않았고, 그것을 충족시켜 줄 수 있는 위대한 발상을 줄기차게 탐색 했다. 그러다 어느 날 마침내 그 위대한 발상이 떠올랐다. 당시 미국에서 가장 인기 있는 그룹인 리틀 앤서니 앤드 임페리얼스를 초대해 학교에서 공연을 하는 것이었는데, 이는 전혀 가망이 없어 보였다.
그들은 브루클린에 살았으며 결정적으로 우리는 그들에게 줄 공연비가 없었다. 그렇지만 밑져봐야 본전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성사만 된다면 정말 대단한 사건이 될 게 분명했다. 어쩌면 방법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고 그 방법을 어떻게든 알아내고 싶었다. 그것이 내가 해야 할 일이었다.
50년도 더 된 일이라 자세한 내용은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전화기를 붙잡고 씨름을 했다. 친구들의 아버지들의 아는 사람들의 아는 사람들이 동원되었고, 마침내 리틀 앤서니 앤드 임페리얼스가 필라델피아 애빙턴 고등학교에 왔다. 그들의 음악을 들으며, 그들이 무대에서 움직이는 걸 보며, 모든 사람이 신나는 시간을 보냈다. 뭔가를 정말 간절히 바라면 결국에는 해결책을 찾아낼 수 있다. 무에서 유를 창조할 수 있다. 어느 순간엔가 소망하던 것이 이뤄진다.
모두 원하지만 아무나 해낼 수 없는 일에 도전하라: 이후 나는 예일 대학교에 들어갔다. 그곳 기숙사 식당은 작고 아담했다. 그래서 점심이나 저녁을 먹은 뒤에 곧바로 공부하러 내 방이나 도서관에 가지 않고 다른 학생들과 뭉개고 앉아서 대화를 나누곤 했다. 그러다 이른바 ‘상류사회’라는 것에 눈길이 갔다. 학교에서 가장 유명한 학생들, 즉 스포츠 팀의 주장들, 교지 편집장들, 아카펠라 그룹의 리더들이 회원인 클럽들 말이다. 어쩐지 비밀스러워 보이는 이 클럽들은 ‘해골과 뼈’, ‘두루마리와 열쇠’, ‘늑대 머리’, ‘책과 뱀’ 같은 이름을 내걸고 있었다. 그런데 이런 클럽에 가입하려면 우선 그 클럽의 닫힌 문 안에서 일어나는 모든 것에 대해 발설하지 않겠다는 서약부터 해야 한다. 특히 ‘해골과 뼈’는 가장 배타 적인 클럽이었다. 나는 3학년이 되기 전에 이 클럽 회원들의 관심을 끌고 싶었다. 그래서 나는 데이븐 포트 발레회라는 이름의 동아리를 만들었다. 당시 세계에서 가장 위대한 발레단은 뉴욕 시립발레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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었는데, 나는 뉴욕으로 가서 책임자를 만났다. “저는 예일 대학교 발레회에서 왔습니다. 뉴욕 시립발레 단이 뉴헤이븐에 와서 공연을 해주셨으면 해서 초대하려고 합니다. 우리 학생들은 초청 공연비를 마련할 돈이 없습니다만 미래의 관객이자 후원자들입니다.” 나는 계속 설득했고 결국 그 책임자는 무너졌 다. “좋아요. 하지만 발레단 전체가 갈 수는 없고 소그룹을 보내죠.” 이렇게 해서 뉴욕 시립발레단 소속의 공연단이 학교에 와서 공연을 하게 됐다.
뉴욕 시립발레단과 관계를 맺은 뒤 나는 한 걸음 더 나아갔다. “뉴욕 시립발레단의 정식 공연을 공짜로볼 수 있게 해주실 수는 없을까요?” “그럴 수는 없어요. 티켓을 팔아야 발레단이 운영되니까요. 그렇지만 드레스 리허설을 할 때는 얼마든지 학생들을 데리고 와도 됩니다. 편의를 봐주지요.” 이렇게 해서 〈호두까기 인형〉의 드레스 리허설 때 극장에는 예일 대학교 남학생들과 세븐 시스터스 여학생들로 가득 찼다. 그리고 공연이 끝나갈 무렵 나는 학생 발레 기획자가 되어 있었다.
똑똑한 혼자보다 함께하는 여럿이 낫다: 4학년 때 나는 예일 대학교 학생 모두가 가장 큰 쟁점이라고 여기는 문제를 본격적으로 다루기로 마음먹었다. 여자가 교내 기숙사에서는 밤을 보낼 수 없도록 정한, 무려 268년이나 된 낡은 규칙을 바꾸기로 결심한 것이다. 전통적인 방식의 접근법은 학교 관계자와 협의해서 ‘이성 방문자에 관한 기숙사 규칙’을 바꾸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렇게 해서 어떤 결과가 나올지는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다른 접근 방법이 필요했다. 나는 학생들과 함께 투쟁을 시작했다.
학교당국이 반대 이유로 내세울 근거의 목록을 작성한 다음 이것을 토대로 설문지를 만들었다. ‘당신은이 규칙이 바뀔 때 학업을 중단할 것이라고 생각합니까?’, ‘여자가 주변에 많이 있으면 산만해서 공부를 할 수 없을 것이라고 생각합니까?’ 등이다. 그런 다음 대학 내 11개 기숙사를 하나씩 맡아줄 학생 11명을 모아 점심시간에 각 기숙사 식당에서 학생들에게 설문지를 나눠 주게 했다. 우리는 예일 대학생 전원으로부터 설문을 받았고 응답률은 100퍼센트에 가까웠다. 이 설문 조사 결과를〈예일 데일리 뉴스〉의 부편집장이었던 친구 리드 훈트에게 보냈다(훗날 그는 클린턴 정부의 연방통신위원회 위원장이 되었다). “리드, 기숙사 규칙 변경 관련 설문 조사 결과야. 폭탄이니까, 잘 요리해봐.”
사흘 뒤 문제의 그 규칙은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고, 내 이름은 교지 1면을 장식했다. 기사의 제목은 “슈워츠먼 주도의 설문 조사, ‘이성 방문자에 관한 기숙사 규칙’ 철폐를 원해”였다. 학교는 싸움을 원하지 않았다. 이 일을 통해서 나는 언론의 힘에 대한 첫 번째 교훈을 얻었다. 그 뒤 ‘해골과 뼈’는 내게 회원 가입을 제안했고, 나는 다가오는 6월에 있을 졸업 기념행사의 책임을 맡았다. 이는 내가 예일 대학교 졸업식의 공식적인 얼굴이 된다는 뜻이었다.
모든 것은 연결되어 있다 꿈을 현실로 만들기 위한 첫 번째 재료: 예일 대학교 졸업 직전 나는 장차 무엇을 할 것인지 고민하고 있었고, 답을 구하기 위해 애버럴 해리먼에게 편지를 썼다. 해리먼은 1913년 예일 대학교 졸업생으로 ‘해골과 뼈’ 회원이었으며 미국 외교가의 ‘현자들’ 중 한 명이었고 뉴욕 주지사를 역임했었다. 해리먼은 답장을 보내 자기 집으로 찾아오라고 했다. 그의 집에서 내가 정계에 발을 들여놓을 가능성에 대해 잠시 얘기를 나눈 뒤 해리먼이 불쑥 이렇게 물었다. “젊은이, 자네는 독립을 할 수 있을 정도로 돈이 충분히 많은가?” “그렇지 않습니다.” “그렇군. 그 조건이 자네 인생에서는 매우 중요한 것이네. 자네에게 충고하는데 말이야. 정치에 관심이 조금이라도 있다면 일단 세상에 나가서 최대한 돈을 많이 벌게. 그돈이 자네를 독립적인 존재로 만들어줄 거야. 정치를 하겠다는 결정은 그때 가서도 얼마든지 내릴 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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있다네. 만일 내 부친이 유니언 퍼시픽 철도의 사장이 아니었다면 자네는 지금 나와 이렇게 얘기를 나누고 있지 않을 걸세.” 그러면서 온통 모험이 연속이었던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나는 그의 이야기에 사로잡혀 시간이 얼마나 지났는지도 몰랐다. 그는 인생의 어떤 시점에서 자기가 어떤 사람인지 깨달아야 한다고 말했다. 이 시점이 빠르면 빠를수록, 잘 깨달으면 깨달을수록 다른 사람들이 조장한 헛된 꿈이 아니라 자기에게 맞는 기회들을 제대로 추구할 수 있다고 했다.
무엇이든 그 분야의 최고가 되는 것을 목표로 하라: 월스트리트에서 첫 면접을 볼 때였다. 지각할까봐 일찍 나섰는데, 면접장에 도착하고 보니 1시간이나 남아 있었다. 주위에 있다가 오전 9시가 되자, DLJ 본사로 들어갔다. 30분쯤 뒤에 직원의 안내를 받아서 빌 도널드슨을 만났다. ‘DLJ’ 가운데 ‘D’에 해당되는 사람이었다. 이 만남을 주선한 사람은 예일 동문인 래리 노블이었다. 빌이 물었다. “DLJ에서 일하고 싶은 이유가 무엇인지 얘기해보세요.” “솔직히 DLJ가 무엇을 하는지 잘 알지는 못합니다. 그렇 지만 당신이 여기서 이 젊은 사람들을 데리고 일하는 것을 보니 멋지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래서 전당신이 하는 것이면 무엇이든 다 하고 싶습니다.” 빌은 빙그레 웃었다. “다른 어떤 이유보다 좋은 이유 같군요.” “회사를 둘러보고 내 파트너들을 몇 명 만나볼래요?” 나는 그렇게 했다.
2~3일 뒤에 그는 전화해서 내게 일자리를 주겠다며, 초봉은 1년에 1만 달러인데 괜찮겠냐고 물었다.
“괜찮은 정도가 아니라 최곱니다. 그런데 문제가 하나 있습니다.” “뭐죠?” “전 1만 500달러를 받고 싶습니다.” “잠깐만…, 뭐라고요?” “1만 500달러를 받고 싶다고요. 예일 대학교를 졸업한 다른 사람이 1 만 달러를 받는다고 들었는데, 같은 해에 졸업한 사람들 중에선 연봉을 제일 많이 받고 싶거든요.” “1 만 달러보다 더 많이는 지급할 수 없어요. 1만 달러입니다.” “그럼 가지 않겠습니다.” “안 오겠다고요?”
그러자 그가 껄껄 웃기 시작했다. “알겠습니다. 생각 한번 해보죠.” 이틀 뒤 그가 다시 전화했다. “좋습 니다. 1만 500달러!” 이렇게 해서 나는 증권업계에 발을 들여놓았다.
누군가는 반드시 당신의 가치를 알아본다 / 일의 노예가 아니라 주인이 되는 길을 찾아라: DLJ에 취직 하고 6달이 지났을 때 나는 훈련 소집 통보를 받았다. 그런데 빌은 훈련을 받으러 떠나기 전에 한번 보자고 했고, 그렇게 만난 자리에서 내가 물었다. “그때 왜 저를 채용했던 겁니까?” “그땐 언젠가 당신이 우리 회사의 최고책임자가 될 것이라는 예감이 있었죠.” “네에?” “난 이런 일에 관해선 정확한 육감을 가지고 있거든요.” 나는 월스트리트는 정말 미친 곳이라고 생각하면서 훈련소로 향했다.
시간이 흘러 나는 1970년 7월에 루이지애나에 있던 포트 폴크 훈련소에서 나왔고, 8월말에는 보스턴에 있는 하버드 비즈니스스쿨(경영대학원) 강의실에 앉아 있었다. 이후 하버드 비즈니스스쿨에 있으면서 나는 비록 DLJ에서의 출발이 형편없긴 했지만, 그래도 금융 분야가 적성에 맞다는 걸 확인했다. 이후 나는 6곳의 회사에 지원했고, 리먼브라더스가 내게는 더 매력적으로 느껴져 그곳에 입사했다.
어떤 일이든 직접 해봐야 내 것이 된다 일을 배울 때는 잭 웰치처럼: 리먼브라더스에서 2년차가 되었을 때 새로운 회장 겸 CEO가 왔다. 피트 피터슨이었다. 그런데 리먼브라더스에 와서 그는 회사가 재무 관련 문제를 안고 있음을 깨달았다. 심지어 그게 다가 아니었다. 내가 하버드 비즈니스스쿨 시절에 썼던 논문에서 회사를 망하게 만들 수도 있다고 예측했던 내부 암투의 분위기가 무르익었던 것이다. 다행히 피트에게는 파트너 조지 볼이 있었다. 두 사람은 국제적인 인맥을 동원해 이탈리아 상업은행을 설득했고, 마침내 이 은행에서 회사의 생존을 보장받을 수 있는 자금을 제공받기로 했다. 리먼브라더스가 기운을 회복했을 때 피트는 전 직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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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 상대로 아이디어를 구했다. 나는 일주일 뒤에 계획서를 만들어 제출했고, 피트가 전화를 해서 보자고 했다. 그리고 그렇게 만난 자리가 끝나갈 무렵 그가 이렇게 말했다. “자네는 유능한 청년인 것 같으 니까. 앞으로 자네와 나는 함께 일을 해야만 하네.” 피트가 했던 말의 요지는 자기가 비록 똑똑한 사람 이긴 하지만 금융이나 투자은행업에는 아무런 경험도 없다는 것이었다. 피트의 말에 나는 내 실력이더 좋아질 때까지 기다려 달라고 제안했다. 피트는 나의 솔직함을 좋은 뜻으로 받아들였다. 2년쯤 지난 뒤에 그가 다시 불러 자기 팀의 일원이 되어달라고 했고 나는 그렇게 했다. 우리는 서로에게 잘 맞는 짝이었다. 나는 피트가 놓친 것이 뭔지 알았고, 그의 방식대로 하지 않을 만큼 젊었다.
어느 날 그는 제너럴일렉트릭(GE)의 CEO 레지날드(레그) 존스와 점심을 먹는 자리에 나를 불렀다. 레그는 자기가 아끼며 훈련시키고 있는 젊은 이사를 피트가 만나보면 좋을 것 같아 데리고 나왔다면서 내게도 소개해주었다. “인사하게. 이 친구가 잭 웰치야.” 이어서 피트가 말했다. “레그가 잭을 이 자리에 데리고 온 건 잭이 GE의 차기 CEO이기 때문이네. 레그는 우리가 잭에게 금융에 대해 여러 가지를 가르쳐줬으면 하는데, 그 일을 자네가 해주면 좋겠네.” “알겠습니다.”
월스트리트와 재계는 좁은 세상이다. 좋은 학교나 큰 회사에서 출발해 또래에서 최고인 사람들과 함께 우여곡절을 겪으며 걸어가다 보면 어느 사이엔가 그들을 만나게 된다. 예일 대학교, 하버드 비즈니스 스쿨, 예비군, 사회 초년생 시절 월스트리트에서 만났던 많은 친구들이 지금도 여전히 친구로 남아 있다. 그들과 맺었던 관계는 상상도 못 했던 온갖 방식으로 내 인생을 풍성하게 만들어주었다.
인생의 가장 큰 교훈은 인내와 고통 속에 있다 상대방이 원하는 것에 귀를 기울여라: 1980년대 초는 내게 좋기만 했던 시절이 아니었다. 나는 인수합 병을 맡고 있는 사업부의 책임자로 승진해서 우리 회사의 최대 고객들 몇몇에게 자문을 제공했다. 그무렵 피트는 리먼브라더스의 CEO이자 회장으로 10년이라는 세월을 함께하면서 결국은 구렁텅이에 빠져 있던 회사를 살려냈다. 비록 금융을 잘 알지는 못했지만 정계와 재계에 뻗어 있는 폭넓은 인맥이 그의 강력한 힘의 원천이 되어주었다. 피트는 나보다 스물한 살이나 많았지만 우리 둘 사이에는 업무상 밀접한 관계가 구축되어 있었다. 우리는 서로를 보완했다. 그는 사람들을 하나로 묶어내고, 나는 거래의 싹을 찾아내서 키우고 성사시켰다. 회사 주변에서는 피트와 나를 한 팀으로 여겼다. 그러나 리먼 브라더스라는 암투의 성에 있는 사람들을 지나치게 신뢰했던 피트의 성격이 결국 그를 구렁텅이 속으로 밀어 넣어버렸고, 결국 피트는 물러났다. 그 뒤에 나도 그만두었다.
투자의 원칙 - 실패하지 않는 시나리오를 짜다
경쟁은 적고 기회는 많은 영역을 찾아라큰 회사든 작은 회사든 창업은 원래 어렵다: 리먼브라더스에서 자유의 몸이 되어 다시 함께 일할 수있게 된 피트와 나는 창업에 대한 이야기를 진지하게 하기 시작했다. 우리가 가진 주된 자산은 전문적인 기술과 경험 그리고 명성이었다. 창업을 이야기하면서 피트와 나는 소유주나 CEO가 여러 세대에 걸쳐 굳건하게 이어갈 그런 강력한 생존력을 지닌 금융회사를 만들자고 했다.
새로운 부의 영역, LBO 투자에 눈을 뜨다: 피트와 내가 이런저런 의견을 나눌 때 우리가 잡을 수 있는 사업 분야 후보 하나가 계속해서 화제에 오르곤 했다. 바로 기업을 담보로 하는 차입매수(LBO, 사들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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려는 기업의 자산을 담보로 금융회사에서 빌린 자금을 이용해 해당 기업을 인수하는 것)였다. LBO 투자는 인수합병과 다르게 새로운 고객을 끊임없이 붙잡지 않아도 된다. 만일 투자자들을 상대로 어떤 펀드에 가입해서 한 10년쯤 묵혀두게 설득할 수만 있다면, 관리 수수료를 받으면서 매수한 회사를 개선해 우리와 투자자들 앞에 거대한 수익을 만들어낼 수 있다. 설령 그사이에 경기가 후퇴한다고 해도 얼마든지 버틸 수 있으며 운이 따라주기만 한다면 더 많은 기회를 포착할 수 있다. 경기가 후퇴할 때는 사람들이 공황 상태에 빠져 자기가 가진 우량 자산을 헐값에 마구 팔아치우기 때문이다.
회사명은 짓는 것보다 알리는 것이 중요하다: 회사 이름을 놓고 논의한 끝에 우리는 마침내 블랙스톤 (Blackstone)으로 정했다. 그리고 3개의 사업부(인수합병 사업부, LBO 사업부, 신사업부)로 구성된 회사로 성장시킬 계획도 마련했다. 우리는 각자 20만 달러씩 투자했고, 파크 애비뉴 375번지에 약 84평의 사무실을 구했다. 피트는 CEO 경험을 두 번이나 했다. 그렇기에 자기는 회사를 운영하는 번거로운 일은 이제 딱 질색이라면서 나더러 사장의 직책을 갖고 CEO의 직무를 수행하라고 했다. 그렇게 해서
1985년 10월 29일, 우리는 《뉴욕 타임스》에 전면 광고를 내고 우리를 세상에 알렸다.
열린사고를 유지하고 드문 기회를 포착하라 과거의 영광은 미래의 수익을 보장하지 않는다: 우리는 무려 400통이 넘는 유쾌한 편지로 회사를 차렸 음을 알렸는데, 이 편지에는 우리가 세웠던 기록을 담았으며 피트와 내가 어떤 사업들을 함께했는지도 상기시켰다. 그리고 우리의 계획을 소개하고 일거리를 달라고 부탁했다. 그런 다음 우리는 사무실에 앉아서 기다렸다. 나는 전화벨이 쉴 새 없이 울려댈 것이라고 기대했다. 그러나 기대는 빗나갔다. 전화 벨은 울리지 않았다. 간혹 울려도 그저 축하하며 행운을 빈다는 말뿐이었다.
그러다 마침내 리먼브라더스에 있을 때 함께 일한 적 있는 제약회사 스퀴브 비치-너트에서 우리에게 보수 5만 달러짜리 자문을 의뢰해 왔다. 예전이었다면 그 정도 금액은 단 한 건의 거래에 붙는 법무 관련 수수료보다 적은 것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생명줄과도 같은 돈이었다. 그리고 또 다른 작은 일거 리가 들어왔다. 리먼브라더스 시절의 고객으로 작은 철강회사인 암코에서 의뢰한 일거리였다. 그렇게 들어온 돈으로 임대료와 기본 경비를 충당할 수 있었지만 벼랑 끝에 서 있기는 마찬가지였다.
어려운 일, 경쟁자가 적은 일에 뛰어들어라: 사업을 시작한 지 9개월이 지났다. 어느 날 나는 일식당 에서 혼자 저녁을 먹고 난 직후에 전화를 한 통 받았다. 대규모 철도회사인 CSX의 CEO 헤이즈 왓킨 스였다. 1978년 나는 CSX가 소유한 어떤 신문사의 매각에 관여했었는데, 그때를 기억하고 있던 왓킨 스는 나를 혁신자이자 문제 해결사로 기억했고, 그런 그가 일을 의뢰해온 것이다.
CSX는 해양 운송 부문으로 진출하길 원했다. 그래서 컨테이너 회사인 시랜드 코퍼레이션(이하 시랜드)
에 인수 가격을 넉넉하게 제시하며 인수하겠다는 우호적인 제안을 했다. 시랜드의 경영진은 이 제안을 받아들이고 싶었지만, 텍사스의 신경질적인 투자자 해럴드 시먼스에게 발목이 잡혀 있었다. 시먼스는 시랜드를 소유하는 데 전혀 관심이 없었지만 이 회사가 외부 인수될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주식을 매집해왔다. 그러고는 자기가 원하는 가격을 제시받을 때까지 매각을 보류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는 시세보다 확실히 높은 가격에 주식을 팔고 싶어 했다. 금융업계에서는 이렇게 경영권을 담보로 보유 주식을 시가보다 비싸게 파는 행위를 ‘그린 메일’(green mail)이라고 부른다.
CSX가 맨 처음 제시한 가격은 6억 5,500만 달러로 합리적인 금액이었다. 시먼스는 시랜드 주식을 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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퍼센트 가지고 있었다. 우리는 그를 설득하려고 온갖 수단을 동원했다. 나중에는 그를 직접 만나러 우리 측 변호사를 대동하고 날아갔다. 그가 말했다. “당신이 뭘 원하는지 알아요. 하지만 분명히 말했잖소. 나는 주식을 팔지 않는다니까.” “그 말을 할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이 후한 제안을 거부하는 주주들을 위해 제가 할 수 있는 범위에서 특별한 조치를 준비했습니다. 만일 당신이 현금을 원하지 않는다면, 현물출자, 즉 만기일이 설정돼 있지 않는 우선주로 대체해버리겠습니다.”
그 제안이 뜻하는 것은 그가 현금을 받을 수도 있지만, 만일 그것을 거부하면 그의 자산을 심각한 부채로 돌려놓겠다는 것이었다. 그가 CSX를 인질로 잡고자 한다면 나 역시 그에게 똑같이 해주겠다는 선전포고였다. 주식공개매입 방식을 이용해서 시랜드를 인수하고 그를 쫓아내버리겠다는 엄포를 놓았던 것이다. 이렇게 되면 그의 우선주는 상장되어 거래될 수도 없어서 쉽게 주식을 팔수 없을 터였다.
또 그 주식은 자본 구조에서 기업부채(사채)보다 뒤로 밀리게 되어, 혹시 회사가 잘못될 경우에는 다른 채권자들보다 후순위로 밀린다. 또 만기일이 정해져 있지 않아서 주식을 현금화할 수도 없었다.
시먼스는 내 얼굴을 잠시 쳐다보더니 자기 변호사를 보며 물었다. “이 사람들이 진짜로 그렇게 할 수있소?” 그 변호사는 머리를 까닥거리면서 대답했다. “얼마든지 할 수 있죠.” 그러자 시먼스가 나를 바라보더니 고함을 질렀다. “내 사무실에서 썩 꺼져!” 나와 내 변호사는 사무실에서 나와 공항으로 돌아 왔다. 그리고 공중전화로 비서에게 전화해서 시먼스가 방금 자기 주식을 팔겠다고 전화했다는 말을 확인했다. 이 계약은 우리에게 돌파구가 되어주었다. 그 건으로 CSX로부터 받은 돈은 블랙스톤이 처음 으로 받은 주요 거래의 수수료였다. 그리고 블랙스톤이라는 이름이 인수합병 세계에 널리 알려졌다.
변화는 한 번의 설득으로 이뤄지지 않는다: 1986년 가을, 창립 1주년 기념일이 다가올 무렵 피트와 나는 이제 제1호 바이아웃 펀드(LBO 자금으로 활용되는 투자 펀드) 조성에 나설 때라고 판단했다. 우리의 제1호 펀드에는 10억 달러 투자금을 조성해야 한다는 게 내 생각이었다. 이 정도 규모는 월스트리 트에서도 유례가 없을 정도로 큰 것이었다. 피트는 이런 나를 보고 잠꼬대하지 말라며 핀잔을 줬다.
사람들을 설득하려면 끊임없이 주장하고 매력을 보여주어야 한다. 나는 여러 차례 피트를 설득했고, 마침내 피트도 동의했다. “자네가 그렇게까지 주장한다면 나도 자네 의견을 따르겠네.”
고객의 문제를 해결하면 나의 문제도 해결된다 길이 보일 때까지 계속 걸어야 한다: 우리는 제안 내용을 가다듬어서 투자 계획서를 만들어 연기금펀드, 보험회사, 기금운용회사, 은행 및 그 밖의 금융기관 그리고 몇몇 부유한 가문 등 잠재적인 투자자들 약 500곳에 보냈다. 일일이 전화하기도 하고 추가 내용을 담은 편지를 보내기도 했다. 그런데 이번 에도 우리 사무실의 전화는 조용하기만 했다. 우리는 완벽하지 않고 반쯤만 완성된 투자 계획서를 가장 가망이 높은 사람들, 즉 우리가 가장 잘 아는 사람들에게 보내는 실수를 저질렀다. 그들은 너그럽지 않았다. 그들은 너무도 쉽게 우리의 제안을 기각했다. 구체적으로 설명해달라는 요청은 딱 두 건뿐 이었다. 자기 투자금이 전체 펀드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각각 10퍼센트와 5퍼센트를 초과하지 않는 조건에서 메트라이프와 뉴욕라이프가 각각 5,000만 달러와 2,500만 달러를 투자하겠다고 했다.
피트는 두 주를 기다린 다음에 더 전화해보고 접근 방식을 조정해보자고 했다. 이번에는 내가 그의 의견에 따랐다. 두 번째 투자 설명서는 어쩐지 느낌이 좋았고 잠재적인 투자자와의 만남도 18건이나 잡혔다. 그렇게 6개월 동안 우리는 우리를 만나줄 것 같은 사람들을 거의 다 만났다. 하지만 메트라이프와 뉴욕라이프 두 곳으로부터 조건부 투자 약정을 받은 것 말고는 단 1달러의 투자 약속도 받지 못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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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프루덴셜까지 찾아갔을 때는 처음에 작성했던 18곳의 목록도 거의 바닥이 나고 있었다. 참고로 프루덴셜은 LBO 세계에서 1위의 투자자였고, 우리는 이 회사에 있는 사람들을 잘 알지 못했기에 일정을 뒤로 미뤄두었었다. 그 무렵 우리의 투자 설명은 완벽에 가까울 정도로 다듬어져 있었다. 프루덴셜의 부회장이자 최고투자책임자(CIO) 가넷 키스는 뉴저지의 뉴어크에서 함께 점심을 먹자고 했다.
내가 이야기를 시작하자마자 가넷은 샌드위치를 집어 들고 한 입 베어 물었다. 내가 말을 이어가는 동안 그는 계속 샌드위치를 베어 물고 씹고 삼키며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그가 샌드위치를 4분의 3쯤먹었을 때 나는 말을 다 마쳤다. 그러자 그는 나머지 4분의 1을 내려놓았다. 그리고 이렇게 말했다.
“흥미롭습니다. 1억 달러는 우리 몫으로 남겨두세요.” 만일 프루덴셜이 우리에게 투자하는 게 멋진 발상이라고 생각한다면, 다른 투자자들도 마찬가지일 터였다. 우리는 계속 우리의 길을 걸어갔다.
해답은 항상 상대방의 문제 속에 있다: 프루덴셜이 투자 약정을 한 뒤에 피트는 시모다 컨퍼런스(일본과 미국의 재계를 대표하는 인물들이 모이는 자리)에 강연자로 초청되어 일본으로 갔는데, 그는 우리 펀드의 투자금을 조성하는 데 이 강연을 활용하겠다고 했다. 1987년에는 일본의 제조업 부문 기업들이 미국의 자산을 많이 사들이고 있었고, 일본의 증권회사들이 미국 자본시장에 널려 있는 기회를 잡으려고 이런 흐름에 편승할 것이라는 예상에서였다. 우여곡절 끝에 우리는 니코증권의 1억 달러를 포함해총 3억 2,500만 달러의 투자 약정을 받고 미국으로 돌아왔다.
마침내 제1호 펀드를 성사시키다: 여러 달 동안 나는 당시 미국에서 규모가 가장 큰 연기금펀드인 제너럴모터스(GM)의 연기금펀드에 투자 설명을 하고 있었고, GM도 1억 달러를 투자하게 되었다. 그리고 나의 오랜 친구인 잭 웰치가 CEO로 있는 GE도 3억 5,000만 달러를 투자하겠다고 했다. 그런데 투자 약정금 합계가 8억 달러 가까이 되자 추가 약정금이 쌓이는 속도가 줄어들기 시작했다. 나는 애초에
10억 달러를 목표로 정했다. 그러나 맨 처음 투자 계획서를 발송한 뒤로 1년이 지났다.
금융계 속설에 시간은 모든 거래에 상처를 입힌다는 말이 있다. 기다림이 길어질수록 반갑지 않은 일로 상처를 입을 가능성이 커진다는 말이다. 마침 1987년 9월까지 주식시장은 새로운 고점을 기록하고 있었는데, 언제 추세가 바뀔지 몰랐고 바뀐 추세에 발목이 잡히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피트와 나는 빠르게 법률적인 세부 사항들을 매듭짓고 펀드를 출발시키기로 결정했다. 우리는 10월 15일 화요일까지 모든 투자자가 서명을 하고 모든 것이 완료되도록 강하게 밀어붙였고, 결국 그렇게 했다.
1987년 10월 19일, 주말이 끝난 월요일 아침에 나는 사무실로 출근했다. 그때는 이미 펀드 가입이 마감되었고 투자가 완료된 상태였다. 그런데 그날 다우지수가 508포인트 떨어졌다. 이는 주식시장 역사상 하루 하락 비율로는 가장 큰 것이었다. 만일 우리가 하루나 이틀 뒤에 투자금 모집을 마감했더라면 블랙먼데이의 하강 기류에 꼼짝없이 빨려 들어갔을 것이다. 투자 약정이 모두 취소되고 우리가 기울인그 모든 노력이 물거품이 될 수 있었다. 서둘렀던 덕분에 살아남았다. 이제 우리에겐 투자하는 일만 남았고 우리는 그럴 준비가 되어 있었다.
절호의 기회를 놓치지 마라 나만이 할 수 있는 해결책을 찾아라: 블랙스톤을 출범시킬 때부터 피트와 나는 적대적인 거래, 즉 상대 기업의 동의 없이 우리의 이익만을 위해 기업을 인수하거나 합병하는 거래는 절대로 하지 말자고 약속했다. 기업이라는 조직은 존경받아 마땅한 사람들로 구성되어야 한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기업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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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수한 뒤 이익만을 좇아 비용을 낮추고 돈을 빼내가면 결국 기업은 무너지고 만다. 그러면 직원과 가족은 물론이고 그 회사가 속한 공동체까지 상처를 입는다. 당연히 우리의 명성도 추락하고 품위 있는 투자자들은 발을 뺄 것이다. 그러나 매수한 기업을 보다 우량한 회사로 개선하는 데 투자한다면, 직원 들은 회사를 더 튼튼하게 만듦으로써 이득을 볼 뿐 아니라 투자회사의 명성도 높아져서 훨씬 더 큰돈을 벌 수 있는데, USX를 상대로 하는 거래가 우리의 이런 신념의 시금석이 될 예정이었다.
USX는 철광석과 석탄과 코크스를 공장으로 실어온 다음 완성된 제품을 소비자들에게 보내기 위해 5대호의 화물선들과 남쪽에 있는 바지선들, 그리고 이 두 지점을 연결하는 철도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는데, 그들은 이 운송 체계를 매각해서 자금을 마련하길 원했지만, 한편으로는 이 이 운송 체계에 대한 통제력을 잃어버릴까 봐 두려워했다, 한편 우리에게는 이 운송 체계가 힘든 시기를 돌파하는 데 매우 좋은 자산으로 보였다. 지금은 철강 노동자의 파업으로 철도와 바지선이 한가해 이익이 발생하지 않고 있지만 파업은 언젠가는 끝날 것이고, 그러면 철도와 배는 다시 상당한 수익을 창출할 게 분명했다.
따라서 그 거래는 양쪽이 모두 만족할 수 있었다. 그러나 여기에는 USX가 우려하는 부분을 우리가 충분히 존중할 것이라는 신뢰가 바탕에 깔려 있어야만 한다.
그래서 우리는 운송 사업부 지분의 51퍼센트를 우리가 갖고, 나머지를 USX가 보유하는 방식의 동업 관계를 제안했다. USX로서는 50퍼센트가 넘는 지분을 매각함으로써 이 운송 사업부의 부채에 책임을 지지 않아도 되며, 따라서 본사의 재무 상태를 한층 건전하게 유지할 수 있고 주가도 부양할 수 있다.
그러나 이 매각 때문에 USX에 꼭 필요한 운송망에 대한 통제권을 상실하지는 않을 것이라는 확신을 심어주기 위해 우리는 다음과 같이 제안했다. 5인으로 구성되는 이사회의 두 명은 우리가 추천하고 두명은 USX에서 추천하며, 나머지 한 명은 중재자 역할을 하기로 하되 누구로 할 것인지는 합의를 통해 정하고 그가 모든 이사회에 참석해서 캐스팅 보트를 행사하게 하자고 했다. 그러자 USX 측은 우리가 제시한 가격 6억 5,000만 달러를 흡족하게 받아들였다. 이제 돈을 마련해야 했다.
비록 8억 5,000만 달러의 투자금을 조성해두고 있었지만, 될 수 있으면 그 돈으로 여러 건의 거래를 하려고 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투자자를 찾아 나섰고, 단 두 개의 은행만이 이 거래에 약간의 관심을 보였는데, JP모건과 케미컬뱅크였다. 나는 둘 중 JP모건을 원했다. 하지만 그들은 유례가 없이 높은 이자율을 제시했을 뿐 아니라 대출금, 즉 우리가 발행할 채권에 대해 보증을 서주지 않겠다고 했다.
그런데 케미컬뱅크는 JP모건과는 정반대였다. 협력적이었다. 첫 만남 때 케미컬뱅크의 CEO 월트 시플 리와 기업 대출 책임자 윌리엄(빌) 해리슨, 내 나이 또래의 투자은행 업무 전담 직원 제임스(지미) 리는 나를 반갑게 맞아주었다. 그들은 우리 제안서를 공부하고 우리가 필요로 하는 것을 파악했으며 대출을 어떻게 구성할 것인지도 멋지게 뽑아두고 있었다. 우리가 부담해야 할 이자율도 파업이 끝나고 운송 사업이 활발해질 경우에는 대폭 낮추는 것으로 계획해두고 있었다. 합리적인 조치였다.
우리는 USX의 운송 사업부를 분할 매수해서 트랜스타라는 이름을 붙였다. 블랙스톤은 1,340만 달러를 자본금으로 넣었으며 USX는 밴더파이낸싱으로 1억 2,500만 달러를 제공해서 우리가 운송 사업부의 매수 대금을 치르는 데 보태게 했고 케미컬뱅크가 나머지 금액을 조성했다. 결국 이 거래는 경이적인 거래로 판명되었다. 우리가 예측한 대로 철강 시장이 되살아났기 때문이다. 또 운송 사업도 활기를 되찾았다. 그리고 2년이 채 지나지 않아 트랜스타의 우리 투자금은 네 배로 불어났다. 2003년에 우리는 마지막까지 가지고 있던 트랜스타 주식을 모두 팔았는데, 그때까지 투자금은 26배나 불어났다. 그 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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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년 동안 우리는 거의 모든 거래를 케미컬뱅크와 함께했고, 함께 성장했다.
경영의 원칙 - 한 손은 기회를 움켜쥐고 한 손은 위험을 막아내다
현명한 리더는 기꺼이 도움을 청한다 정반대 성향의 동료를 옆에 둬라: 회사가 빠르게 성장하면서 무결점을 추구하는 문화를 유지하며 기업 확장을 관리해야 하는 부담은 점점 더 커졌다. 2000년이 되자 피트는 70대 후반이 되었고 워싱턴에서 외교협회(CFR)를 운영하며 국내외 경제 쟁점들에 초점을 맞추는 데 시간의 대부분을 보냈다. 처음 블랙스톤을 창업할 때 그는 투자 분야에 관여하고 싶지 않다고 말했었다. 그저 투자금을 조성하는 데 도움을 주고 자문 역할만 하겠다고, 그렇지만 내가 도움을 청할 때는 어떤 식으로든 돕겠다고 말이다.
그런데 모든 영역의 모든 일을 다 하겠다고 달려드는 내 모습을 보고 그는 이렇게 말했다. “스티브, 계속 그러다가는 돌연사한 시신으로 발견될 거야. 자네는 일을 너무 많이 해.”
피트의 말이 맞았다. 회사를 날마다 구석구석 살피고 관리하는 일이 힘에 부치기 시작했다. 내게는 도움이 필요했다. 헤드헌팅 업체로부터 받은 후보자 명단 중에서 하나가 눈에 띄었다. 토니 제임스였다.
DLJ에서 토니는 기업금융과 인수합병 사업부를 이끌었으며 이 회사의 사모펀드 사업을 처음 시작한 인물이기도 했다. 나는 그를 집으로 초대해서 저녁을 함께 먹었고, 그 후 몇 주에 걸쳐 자주 만나 이야 기를 나누었다. 곧 우리 둘의 친분은 통상적인 채용 과정을 넘어설 정도가 되었다. 그리고 마침내
2002년 토니는 파트너이자 최고운영책임자(COO)로 블랙스톤에 합류했다.
위대한 조직은 힘을 독점하지 않는다: 나는 타고난 경영자가 아니다. 그렇지만 오랜 세월에 걸쳐 경영 자로서의 자질을 가다듬으며 조금씩 더 나아졌다. 그러나 토니는 나와는 정반대다. 그는 위대한 경영 자다. 나는 토니를 단계적으로 블랙스톤 안에 녹아들게 했다. 우선 그에게 최고운영책임자 직책을 맡겼고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난 뒤에 대표 직책을 맡게 했다. 그가 녹아드는 데는 1년이 걸렸다. 그 시간이 지나고 나자 모든 사람이 그의 역량을 온전하게 이해했고 그의 리더십을 인정했다. 시간이 지나면서 그는 회사 전체를 운영하면서 투자 사업들을 지휘했으며, 날이 갈수록 규모가 커지는 조직이 맞닥 뜨릴 수밖에 없는 일상적인 관리 문제들을 매끄럽게 처리했다.
회사의 일상적인 관리와 경영에 대한 권한과 책임이라는 무거운 짐을 토니에게 넘겨주고 나니 얼마나 홀가분한지 몰랐다. 그제야 나는 내가 사랑하는 거래 체결 업무에 온전히 전념할 수 있었고 활기를 되찾았다. 토니는 회사 기능들 각각에 규율과 질서를 확립했다. 우리가 예전에는 단 한 번도 해본 적이 없는 것이었다. 토니와 같은 큰 그릇의 인물을 영입해서 권한을 부여하면 회사가 제도적인 틀을 튼튼히 갖추게 되고, 월스트리트 역사상 가장 큰 거래들을 체결할 수 있는 역량과 강점을 갖게 된다.
성공의 원칙 - 내가 탁월함을 추구하며 배운 교훈들
위기를 레버리지 삼아 기회로 바꿔라 현명하게 지출하면 더 큰 이익으로 돌아온다: 글로벌 금융위기에 대비해 블랙스톤은 이런저런 조치를 취해왔다. 그러나 금융위기의 후폭풍이 몰고 온 피해까지 피할 수는 없었다. 2008년 가을, 수익이 계속 줄어들고 있던 터라 우리는 주주들에게 지급하는 배당금과 관련해 어떤 결심을 해야 했다. 참고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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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업공개를 준비하던 과정에서 우리를 돕던 주관회사들은 처음 2년 동안 배당금을 지급한다고 해야 청약자들을 많이 모을 수 있다고 주장했다. 청약자는 애초에 우리가 계획했던 것보다 15배나 몰려들었지만 어쨌거나 우리는 처음 2년 동안 배당금을 지급하겠다고 약속했다. 그러나 금융위기의 한가운데서 우리의 수익만으로는 주주에게 배당금을 지급할 수 없었다. 배당금을 깎거나 약속한 전액을 지급하기 위해 돈을 빌려와야 했다. 그렇지만 나는 돈을 빌리고 싶지는 않았다. 그리고 만약 배당금을 깎아서 지급하면 투자자들이 좋아하지 않을 게 분명했다.
나는 이 문제를 다음번 이사회 안건으로 상정했다. 이사회에서 나는 “기업공개 직전에 30억 달러를 투자했고 2년 동안은 투자금을 빼내갈 수 없는 중국이 좋아하지 않을 것으로 예상되나, 지금은 우리가 했던 약속을 지켜서 배당금을 지급하는 것보다 자금을 보존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주장했다. 그런데 최근 공익위원 자격으로 이사회에 합류한 딕 젠레트가 가장 먼저 반대 의견을 내놓으며, 우리가 배당금을 깎아 지급한다면 그들과의 신뢰는 무너질 것이라고 말했다. 나를 가르쳤던 교수이자 당시 하버드 비즈니스스쿨의 학장이었던 제이 라이트가 딕의 이런 논리에 동의했다.
그는 그렇잖아도 중국은 지금 우리 주식의 주가가 폭락해서 당황하고 있을 텐데, 여기에 배당금까지 삭감당한다는 건 그들로서는 최악의 상황일 거라고 했다. 또 중국은 우리의 주식을 샀을 뿐만 아니라 우리의 여러 펀드에도 투자를 해왔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면 앞으로 수십억 달러의 투자금이 더 들어올 것이고 합작 사업도 얼마든지 많이 이뤄질 텐데, 단 한 분기의 현금유동성을 확보하려고 장기적인 관계를 위태롭게 만드는 것은 상식에도 어긋난다고 주장했다.
나는 두 사람을 높이 평가하며 말했다. “이건 단순한 문제가 아닙니다. 하지만 두 분이 정말로 그렇게 생각한다면 배당금을 삭감하지 않겠습니다. 전 이 결정이 마음에 들지 않지만 성의를 다해 5,000억 달러를 지급하도록 합시다.” 그 후 여러 해가 흘러 우리는 중국에서 점점 더 많은 사업을 하게 되었고 내가 벌이는 자선 활동도 점점 더 커졌다. 그때 가서야 나는 당시 그 배당금 지급이 우리가 지출했던 현금 지출 중 가장 훌륭한 지출이었음을 절실하게 깨달았다.
위기 이후 등장하는 낯선 기회를 주목하라: 토니는 블랙스톤 투자자 몇 명과 대화를 나눈 뒤 새로운 사업 아이디어를 떠올렸다. 우리의 모든 자산군에 걸쳐 있는 전략인 동시에 연간 12퍼센트의 수익률을 (이는 우리의 통상적인 연간 수익률보다는 낮은 수준이다) 꾸준하게 보장하는 새로운 전략이었다. 나는 우리 회사의 여러 사업부 책임자들을 한자리에 모았다. 토니가 떠올린 아이디어를 바탕으로 뉴저지 주정부 연금펀드에 제시할 제안 내용을 정리하기 위해서였다. 금융위기의 여파 속에서 당국은 은행들 에게 보유 자산을 팔라고 압력을 가하고 있었는데, 그 펀드의 운용자들이 은행들이 팔라고 압력을 받는 자산들에 투자하는 것을 우리가 살펴봐주길 바랐다.
이는 흥미로운 요청이었다. 그러나 기업가로서 나는 금융이 매우 단순한 사업임을 이미 깨우치고 있었다. 어떤 사람이 당신에게 뭔가 새로운 것을 알아봐달라고 요청할 때, 그가 그것을 알고 있는 지구상의 유일한 사람일 가능성은 ‘0’이다. 즉 당신이 그런 요청을 받는다는 건 거대한 기회가 다가왔다는 말이다. 그런데 당신에게 그런 요청을 하는 사람은 그 사실을 모른다. 그들은 그저 자기에게 필요한 것만 바라볼 뿐이다. 만일 그런 필요성이 일리가 있고 당신이 그 필요성을 충족시킬 적절한 상품을 만든 다면, 당신은 그 상품을 보다 넓은 시장에 내놓을 수 있다. 당신의 경쟁자들은 도대체 당신이 어떻게 그런 생각을 하고 그런 상품을 만들었는지 어리둥절해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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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각의 사업부 대표들이 자기가 가지고 있던 아이디어를 내놓을 때마다 먼저 나온 아이디어보다 더 좋아 보였다. 그런데 세 번째 사업부가 투자 기획안을 발표할 때 나는 깜짝 놀랐다. 이런 종류의 거래가 제시된 것을 그때까지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예전에는 골드만삭스에게만 갔던 거래 요청들이 이제는 우리에게 들어오고 있었다. 컨테이너선과 셀타워(Cell Tower)가 있는 토지에서부터 광산과 극히 소수 집단에서만 이뤄지던 대여 제품들에 이르기까지 온갖 거래 요청들이 다 들어왔다. 이런 상황에서 관건은 이런 요청들이 기존의 우리 펀드 안에 자리를 잡도록 해주는 것이었다.
블랙스톤 초기에 있었던 일인데, 리먼브라더스 신입사원 시절부터 친구였던 스티브 펜스터가 마이클 (마이크) 블룸버그라는 전도유망한 기업가와의 만남을 주선했다. 마이크는 설립한 지 얼마 되지 않은 금융 데이터 회사에 필요한 자금을 찾고 있었다. 나는 그 회사가 크게 성공할 것임을 알았지만 당시 우리에게는 적절한 투자 대상이 아니었다. 우리는 블랙스톤에 투자한 투자자들에게 5년이나 7년 안에 투자 수익을 안겨주겠다고 약속했기 때문이다. 마이크는 자기 회사를 절대로 팔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고, 평생 함께 갈 동업자를 원했다. 그러나 그의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은 것은 커다란 실수였고, 나는그 뒤로 결코 잊지 못했다. 1억 달러가 80억 달러로 늘어날 수 있었는데 그 기회를 놓친 것이다. 언젠가 마이크 같은 기업가들에게 또 전통적인 사모펀드 모델에는 맞지 않는 기회들에 투자할 수 있을 정도의 유연함이 블랙스톤에도 생기길 기대했는데, ‘택티컬 오퍼튜니티스’(Tactical Opportunities, 전술적 기회, 이하 택티컬)라고 이름 붙인 우리의 새로운 펀드는 이 오랜 바람이 실현된 결과였다.
우리는 신규 사업을 놓고 늘 하던 대로 세 개의 검증 테스트를 적용했다. 투자자들에게 거대한 보상을 안겨주어야 했고, 블랙스톤의 지적 자본에 보탬이 되어야 했으며, 그 사업을 책임질 완벽한 적임자가 있어야 했다. 그 모든 새로운 기회의 경제적 잠재력에 대해서는 의문의 여지가 없었다. 그리고 지적 자본에 대해서도 택티컬은 더할 나위 없이 좋은 기회였다. 금융위기 이후 마구 뛰어나오는 비정상적인 기회들 속에서 새로운 패턴들을 포착하기 위해 우리 모두가 갖가지 새로운 방법으로 배우고 생각하기 에도 매우 좋은 기회였다. 우리는 이 새로운 펀드의 투자위원회에 우리의 여러 주요 자산군 책임자들은 말할 것도 없고 나와 토니까지 포함시켰다. 우리는 우리의 전문성을 모아 투자회사들이 길게 줄을선 이 낯선 거래들을 철저하게 분석하고 싶었던 것이다.
이 펀드를 이끌어갈 책임자로 그동안 런던 지사에서 일하다 막 뉴욕으로 돌아온 데이비드 블리처를 임명했다. 이 펀드는 워낙 특이했기에 회사 안팎에서 평범하지 않은 질문들을 하고 투자 설명을 할 수있는 노련한 경험자가 필요했다. 그동안 블랙스톤의 유럽 지역 사업을 성공적으로 수행했던 데이비드는 결국 택티컬을 270억 달러가 넘는 사업으로 바꿔놓았다. 금융위기 이후 그렇게 5년이 지났을 때우리는 경쟁자들을 멀리 따돌렸고 더 많은 투자금을 조성해서 더 많은 거래를 체결했다. 비록 금융위기 때 아무런 상처를 입지 않은 건 아니었지만(예를 들면 도이치텔레콤에 지분 투자를 했다가 엄청난 손실을 기록했던 것), 새롭고 흥미로운 여러 방향으로 전진해나갔다. 비록 그동안 치러온 많은 경쟁 속에서, 경기 순환 주기의 장점에서 체결한 거래들의 설거지를 하느라 여전히 정신없이 바쁘긴 했지만 말이다.
- 15 ? 투자의 모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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