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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영화,리뷰,

이토록 매혹적인 아랍이라니

by Casey,Riley 2021. 12.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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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원호 지음 / 부키
아랍인의 역사와 문화는 아라비아반도 중심의 사막 지역에서 시작되었다. 한국과는 너무나도 다
른 환경 속에서 수천 년간 형성된 그들의 문화를 단번에 이해하기란 쉽지 않다. 그래서 지난 18
년간 5개 아랍 국가에서 직접 경험한 생생한 삶의 이야기를 역사, 문화와 연결 지어 독자들이 아
랍의 진짜 얼굴을 경험할 수 있도록 이 책을 쓰고 그렸다. 독자들은 이 책을 통해 뉴스 속 아랍
이 아닌, 매혹으로 가득 찬 아랍의 진짜 얼굴과 흥미로운 아랍인 이야기를 만나볼 수 있을 것이
다.

이토록 매혹적인 아랍이라니
손원호 지음


▣ Short Summary
2003년 4월, 군 제대를 두 달 앞두고 휴가를 이용해 이집트 정부 초청 장학생 시험을 봤고 합격했다.
그리고 9월, 아무런 정보도 준비도 없이 비행기에 몸을 싣고 무작정 이집트로 향했다. 오히려 머리가
백지상태라서 였을까. 나는 아무런 거부감 없이 이집트의 새로운 문화를 받아들였고, 생생한 배움의
기쁨에 흥분된 마음을 가라앉히지 못했다. 고대문명의 발상지 이집트에서 처음으로 아랍인들을 만났고
그들에 대해 끊임없이 질문들을 쏟아 냈다. 그토록 위대했던 파라오의 후손들은 현대에 어떠한 생각을
하며 살아가고 있나? 그들이 믿는 이슬람은 어떠한 종교인가? 그들이 쓰는 아랍어는 어떻게 시작되었
나? 집주인부터 동네 상인들까지 만나는 모든 이집트인을 스승으로 삼아 그들의 삶을 통째로 배우려
했다.
이집트에서 6개월 연수를 마치자 나는 한국으로 돌아가지 않고 곧장 예멘으로 향했다. 아랍 민족의 근
원지라 할 수 있는 아라비아반도가 궁금해졌기 때문이다. 그중에서도 외세의 영향을 가장 덜 받은 예
멘이라는 나라가 매혹적으로 보였다. 9개월간 예멘 전통 복장을 입고 아라비아반도의 향취를 느끼며
그들의 삶에 동화됐다. 중세 도시의 느낌이 고스란히 남아 있는 올드 사나 지역에서 낙타를 몰고 가는
예멘인을 보고 있노라면 묘한 신비감이 들었다. 나는 그 보물 같은 장면들을 놓치기가 아까워 틈만 나
면 붓을 들고 화폭에 그려 넣었다.
대학원을 졸업하고 사회생활을 하면서도 아랍 세계에 대한 끌림은 계속되었다. 2012년 이라크로 발령
을 받고서 바그다드로 향했다. 고대 메소포타미아인의 후손인 바그다드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며 그
들의 생각과 문화를 함께할 수 있다는 것 자체가 기쁨이었다. 그들은 지난 수십 년간 독재, 미국의 침
공, 종파 갈등으로 입은 깊은 상처들을 다시 끄집어낼 때면 내 앞에서 눈물을 흘렸다. 하지만 바그다
드의 옛 영광을 이야기할 때는 눈을 번쩍였다. 중세 이슬람제국의 중심이자 《아라비안나이트>의 배경
이 되는 이라크의 수도 바그다드, 그곳을 둘러싼 신비한 옛 이야기들은 현재의 슬픔을 잊고 행복한 시
간 여행을 할 수 있는 ‘마법의 양탄자’가 되어 주었다. 2016년 나는 다시 아라비아반도에 위치한 아랍
에미리트로 건너갔다. 그곳에서 또 다른 아랍인, 수천 년간 거친 사막 지대에서 지내 온 원조 아랍인
들과 함께 지냈다.
이집트 연수로 시작된 아랍 세계에서의 나의 긴 여정은 여전히 계속되고 있다. 그 과정에서 나는 그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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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토록 매혹적인 아랍이라니

의 깊은 곳에 내재된 DNA, 그리고 그 DNA가 형성된 역사적 배경을 알고 싶다는 강한 끌림을 느꼈다.
그것을 알아야 왜 내가 그토록 아랍 세계에 이끌려 왔는지 해답을 찾아낼 수 있을 것 같았다. 많은 사
람이 역사 공부를 선택한 나에게 끊임없이 물음표를 던졌지만 내 생각은 확고했다. 아랍인의 과거를
알고 그 바탕에 있는 것들을 알아야 현재에 대한 올바른 해석이 가능하지 않을까?
아랍 세계를 오랜 기간 경험하고 공부하자 다른 사람에게도 이 사막 도시들의 이야기를 들려주고 싶어
졌다. 아랍 세계는 지리적으로 광대할 뿐 아니라 헤아릴 수 없는 역사적 깊이로 인해 우리가 모르는
신비한 이야기들이 넘쳐난다. 이 책을 통해 인간 아랍인을 가슴으로 느끼고, 그들이 만들어 온 매혹적
인 역사와 현재를 여행하며 아랍 세계에 빠져들 수 있기를 바란다. 바로 내가 그랬던 것처럼….

▣ 차례
프롤로그
첫 번째 일기 : 이집트
카이로에는 시샤 향기가 흐른다 / 실은 술에 꽤 관대한 나라
피라미드, 세상에서 가장 완벽한 예술품 / 지식을 사랑한 왕의 도시, 알렉산드리아
아기 예수가 숨어 살던 마을 / 이집트 호텔에 한글 기념비가 있는 까닭
두 번째 일기 : 예멘
예멘의 걸크러시, 시바 여왕을 꿈꾸며 / 어학원 사람들의 동상이몽
엄청나게 뜨겁고, 믿을 수 없이 관대한 사람들 / 4000년간 아랍인이 사랑한 동물 이야기
나의 살던 고향은… 푸르른 예멘
세 번째 일기 : 사우디아라비아
그들의 인생 표본, 무함마드 / 로렌스, 아랍을 사랑했던 영국 신사
100년 전 영국 땅을 밟은 사우디 소년 / 석유가 준 축복, 석유로 인한 저주
마침내 빗장이 열리다
네 번째 일기 : 이라크
이라크 땅, 폭탄 테러의 서막 / 바벨탑의 흔적과 아브라함이 살던 집
아라비안나이트의 도시, 바그다드 / 사담 후세인, 그는 나쁜 놈인가 좋은 놈인가
폴리매스 학자들의 나라
다섯 번째 일기 : 아랍에미리트연합
아랍인의 너그러움, 마크루마 / 커피 향을 타고 시간을 거스르다
두바이 사막 위에 그린 상상화 / 아랍의 시간, 카이로스
8000년 된 진주, 그 안에 숨겨진 이야기 / 그들이 자이드를 아버지라 부르는 이유
에필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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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토록 매혹적인 아랍이라니

이토록 매혹적인 아랍이라니
손원호 지음

이집트
이집트 호텔에 한글 기념비가 있는 까닭
2018년 12월 아내와 딸을 데리고 이집트로 여행을 떠났다. 15년 만에 다시 찾은 이집트였다. 출국 전
부터 아내는 피라미드를 본다는 기대감에 부풀어 있었다. 여행 첫날, 우리의 첫 행선지는 역시 기자의
피라미드였다. 피라미드를 구경한 뒤 우리는 점심 식사를 위해 피라미드에서 700미터가량 떨어진 한
호텔로 향했다. 초록빛 잔디와 곳곳에 보이는 나무들, 높이 솟아오른 대추야자 나무가 조화를 이루며
멀리 보이는 푸른 하늘과 거대한 피라미드가 한 폭의 그림을 완성했다. 아내가 말했다. “그런데 정말
특이해. 정원과 분수만 봐도 꼭 유럽인들이 만들어 놓은 작품 같아. 이런 서구식 호텔에서 이집트의
피라미드를 바라보고 즐길 수 있다니….”
호텔에 들어오면서 멀찌감치 로비 소파 옆에 작은 동상이 세워져 있었다. 호기심에 확인해 보니 1863
년부터 1879년까지 이집트를 통치했던 ‘이스마일 파샤 Ismail Pasha’의 동상이었다. 호텔 종업원에게
물어보니 이 호텔의 최초 건립자라고 했다. 순간 의구심이 들었다. 이집트는 1517년부터 오스만제국의
지배를 받으며 전통적인 이슬람 체제를 유지했던 국가였다. 그런데 어떻게 이런 서구식 호텔을, 그것
도 이집트의 왕이 건립한 것일까?
이집트 땅을 밟은 나폴레옹: “ 내 사전에 불가능이란 없다.” 프랑스령의 외딴 섬 코르시카에서 태어나
프랑스 황제까지 등극했던 나폴레옹(1769~1821)의 명언이다. 불가능을 몰랐던 그는 1798년 7월, 이
집트 알렉산드리아에 상륙했고, 상륙 3주 만에 이집트를 지키고 있던 오스만제국의 맘루크 군단을 물
리치고 카이로에 입성했다. 당시 프랑스의 가장 큰 맞수는 영국이었다. 나폴레옹이 카이로 땅을 밟은
이유도 영국을 견제하기 위해서였다. 이집트를 차지하면 영국 식민 통치의 중심인 인도를 공략할 수
있다고 계산한 것이다. 하지만 영국도 가만히 있지 않았다. 같은 해 8월, 카이로 하구의 아부르키만에
서 넬슨 제독이 이끄는 영국 함대가 프랑스군을 전멸시켰다. 결국 1799년 나폴레옹은 조용히 이집트
를 탈출했고, 남겨진 프랑스군도 1801년 이집트에 항복하고 물러났다.
이후 이집트는 다시 오스만제국의 이슬람 세력권으로 넘어갔다. 그러나 4년이라는 짧은 점령 기간에도
불구하고 프랑스의 민중 혁명 사상이 이집트로 흘러들었다. 정부에 순종적이던 이집트 국민의 의식이
깨이기 시작했다. 민중들은 이집트 총독을 자신들의 손으로 직접 선택하자고 외쳤다. 1805년 5월, 이
들은 총독 후르시드 아흐메드 파샤에 맞서 봉기를 일으켰다. 결국 오스만제국 정부가 이집트 민중의
요구를 받아들여, 후르시드가 이집트 총독 자리에서 물러났다. 그리고 이집트 역사상 처음으로 민중이
선택한 사람이 이집트 총독으로 선택되었다. 그는 오스만제국이 이집트 보호를 위해 파견했던 알바니
아인 장군, 무함마드 알리였다.
이집트의 서구화: 무함마드 알리는 나폴레옹이 이끈 프랑스군을 보고 느끼는 바가 많았다. 지도자로
올라선 알리는 이슬람에 갇혀 있던 이집트를 변화시키기 시작했다. 각종 행정 제도와 행정 기구를 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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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토록 매혹적인 아랍이라니

럽식으로 개편했고 인재들을 유럽으로 보내 신문물을 배워 오도록 했다. 서구식 학교를 세우고 교과서
제작을 위해 전문 번역 기관을 설립했다. 그의 개방 정책은 일본의 메이지유신보다 거의 반세기나 빨
랐다. 무함마드 알리가 집권한 1805년부터 서구를 모방한 이집트의 근대화가 시작됐다.
메나하우스 호텔 로비에 세워져 있는 동상, 이스마일 파샤는 무함마드 알리의 손자다. 이스마일 파샤
는 1863년에 이집트 총독이 되었다. 그는 선대들처럼 친서구 정책을 추진했으나 사치와 허영이 지나
쳤고 프랑스 것이라면 사족을 못 썼다. 그리고 1867년 파리 만국 박람회를 다녀온 후 카이로의 도로
가 골목길이 많아 미로 같다며 건물들을 철거하고 파리의 거리처럼 만들었다. 특히 수에즈운하와 관련
된 그의 일화는 유명하다. 당시 이집트는 프랑스와 협력하여 수에즈운하를 건설 중이었다. 육지를 파
서 지중해와 홍해를 잇는 물길을 만드는 획기적인 프로젝트였다. 그러나 정작 그가 관심을 둔 것은 운
하 개통 행사였다. 남북으로 길게 뻗은 운하의 중앙에 자신의 이름을 따서 ‘이스마일리아’라는 신도시
를 세우고 유럽식 도로, 호텔, 백화점, 식당 등을 채워 넣었다. 수에즈운하 개통식에 초대한 유럽 명사
들을 위해서 궁전을 짓고 관광객을 위한 오락과 편의 시설에 천문학적인 비용을 쏟아 부었다.
1869년 드디어 수에즈운하가 개통되었다. 유럽인들이 더 자주 드나들면서 이집트는 유럽 여행객들 사
이에서 따스한 겨울을 보낼 수 있는 이른바 ‘핫플레이스’로 떠올랐다. 이스마일 파샤는 유럽 관광객들
을 위해 카이로와 피라미드 사이에 도로를 깔았다. 복잡한 카이로보다 평온하면서도 장엄한 분위기를
연출하는 기자의 피라미드 지역을 선호하는 유럽인들이 늘어났다. 이러한 분위기에 맞춰 이스마일 파
샤는 기자의 피라미드 바로 앞에 개인용 오두막을 하나 지었다. 사막 사냥을 즐기거나 고위급 손님을
모실 때 이용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그는 이 오두막을 그리 오래 즐기지 못했다. 이집트 근대화를
위해서 무분별하게 지출한 탓에 국가 재정이 파탄에 이른 것이다. 결국 이집트의 재정은 영국과 프랑
스의 공동 관리 하에 들어갔다. 양국의 간섭 속에서 이스마일 파샤는 1879년에 퇴위했다.
그가 퇴위한 후 4년이 지난 1883년, 신혼여행으로 이집트를 찾은 영국인 부부, 프레더릭과 제시가 이
스마일 파샤의 오두막을 사들여 2층짜리 저택으로 확장하고 고대 이집트 제1왕조의 창시자인 메네스
Menes의 이름을 따서 메나하우스 Mena House라고 이름 붙였다. 그러나 2년 후 프레더릭이 갑자기
사망하자 제시는 1885년 영국인 부부, 휴와 에설 로크킹에게 메나하우스를 팔았다. 로크킹 부부는 영
국인 건축가 헨리 파바르거를 고용해 메나하우스를 80개의 객실을 가진 고급 호텔로 변신시켰다. 영국
가구를 호텔에 채워 넣고, 예술가들을 위한 아틀리에, 도서관을 만들고 프랑스 요리사와 이탈리아 사
진사를 고용하는 등 수준 높은 유럽풍 호텔을 완성했다.
메나하우스에서 울려 퍼진 대한 독립: 제2차 세계대전(1939~1945)이 끝나갈 무렵인 1943년 11월,
미국, 영국, 중국 세 강대국 정상은 전후 질서를 논의하기 위해 모였다. 모임 장소는 당시 유럽인들 사
이에서 큰 인기를 구가했던 중동의 관광 명소, 카이로였다. 그리고 카이로 회담의 본부가 바로 메나하
우스 호텔이었다. 당시 영국 총리 윈스턴 처칠이 약 100여 명을 이끌고 카이로를 찾았다. 미국 대통령
프랭클린 루스벨트는 60여 명, 중국의 국방 최고위원장 장제스는 30여 명과 함께 이집트 땅을 밟았다.
1943년 11월 23일 저녁, 장제스는 루스벨트가 묵고 있던 숙소로 찾아갔다. 장제스는 한국에 독립 권
한을 줘야 한다고 주장했고, 루스벨트는 중국의 영토 확장 의도를 의심하면서도 한국의 독립에는 동의
했다. 이어서 처칠도 동의하게 되어, 마침내 1943년 12월 1일, ‘한국 독립’ 조항이 카이로 선언에 포함
되어 발표되었다. “미국, 영국, 중국은 한국 인민의 노예 상태에 유의하여 적절한 절차(in due course)
를 거쳐 한국을 자주독립케 할 것을 결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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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토록 매혹적인 아랍이라니

1945년 8월 15일 정오, 일왕 히로히토는 라디오를 통해 무조건 항복을 발표했고, 한국인들은 마침내
광복을 맞이했다. 그해 12월, 미국, 소련, 영국 세 강대국의 외무장관이 모스크바에 모여 한국 독립에
대한 구체적인 논의를 시작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카이로 선언의 ‘적절한 절차 in due course’라는 문
구를 빌미로 한국의 즉각적인 자주독립이 아닌 신탁 통치라는 결론에 도달했다. 이후 한국은 미 소
군정 시대를 거쳐 남과 북이 분열하는 비극을 맞았다. 카이로 선언이 한국의 자주독립을 이뤄 주지 못
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카이로 땅에서 세 강대국이 모여 최초로 한국의 독립을 논하고 국제 사회에
이를 공개 선포한 것만으로도 큰 역사적 의의가 있지 않을까.
1953년 한반도에서 휴전 협정이 맺어진 바로 그해, 이집트는 기존의 친서구 왕정을 폐지하고 아랍 민
족 중심의 이집트공화국을 수립했다. 그리고 62년이 지난 2015년, 한국 광복 70주년과 한국-이집트
수교 20주년이 또다시 기분 좋게 일치했다. 10월 1일, 이집트 교육부 장관과 문화부 장관을 비롯한 카
이로 선언 당사국인 미국, 영국, 중국의 이집트 주재 대사 등 고위 인사들이 메나하우스 호텔을 찾았
다. 정원에 설치된 카이로 선언 기념비의 제막식을 축하하기 위해서였다. 300여 명의 사람이 정원을
꽉 채웠고 이들은 모두 한 마음으로 카이로 선언을 통해 이루지 못한 한반도의 평화 통일을 염원했다.
역사가 흘러서 여기까지 왔다.

사우디아라비아
석유가 준 축복, 석유로 인한 저주
정말 물보다 석유가 더 쌀까?: 산유국에 살면 좋은 점이 하나 있다. 휘발유를 넣을 때 가격 때문에 고
민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한국에서는 휘발유 1리터당 평균 1500원이지만 사우디나 아랍에미리트와
같은 중동 산유국에서는 약 500원 정도이기 때문이다. 그럼 아랍 산유국의 기름값은 정말 물값보다 쌀
까? 에비앙이나 페리에 같은 값비싼 수입 브랜드 물과 비교하면 기름값이 물값보다 싼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실제 값보다 중요한 건 수천 년간 건조한 사막에서 살아온 아랍인들의 마음속에는 ‘그 무엇보
다 소중한 것은 물’이라는 진리가 뿌리 깊게 새겨져 있다는 사실이다.
1938년의 기적: 현재 석유 매장량이 가장 많은 지역은 중동으로, 전 세계 석유 매장량의 48퍼센트를
차지하고 있다. 그럼 이 축복의 주인은 누가 되는 걸까? 당연히 석유가 묻힌 땅을 소유한 주인이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석유가 묻힌 땅의 주인들은 수천 년간 자신의 땅에 석유가 매장되어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또 알고 나서도 채굴하는 방법을 몰라 그 축복의 수혜를 받지 못했다.
그런데 어느 날 기술력을 앞세운 영국, 미국 등 서구의 석유 기업들이 땅속에 묻힌 석유를 끌어 올려
주겠다며 앞다투어 중동 땅으로 몰려왔다. 땅 주인들은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아무 일도 하지 않고
가만히만 있어도 서구 기업들이 대신 땅을 파 석유를 생산하여 판매한 금액의 반을 떼어서 주겠다는데,
나쁠 게 없지 않은가? 중동의 산유국들은 서구 기업들과 줄줄이 계약을 맺었고, 얼마 지나지 않아 중
동 유전 지대의 대부분을 영국과 미국 기업들이 선점하게 되었다. 특히 1960년대까지 세계 석유 업계
는 ‘세븐 시스터스Seven Sisters’라고 불리는 일곱 개의 영미계 석유기업이 독점했다.
사우디도 같은 과정을 거쳤다. 1932년, 제1대 왕 압둘아지즈 빈 압둘라흐만 알사우드는 아라비아반도
의 90퍼센트에 해당하는 거대한 지역을 통합하고 ‘사우디아라비아왕국’의 건국을 선포했다. 활력 넘치
는 사막의 전사 압둘아지즈는 1925년 이슬람 성지 메카와 메디나가 위치한 헤자즈 지역을 차지한 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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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토록 매혹적인 아랍이라니

후, 현대 국가 건설 작업에 착수했다. 새로운 정부 기관을 설립하고, 단일 통화인 리얄을 도입하는 동
시에 기본적인 인프라 구축에 나섰다. 그러나 당시 사우디에는 ‘국가’라는 개념 자체가 없는 수많은 아
랍 부족이 자신의 둥지를 지키기 위해 경계의 눈빛을 하고 있었다. 사우디 지형의 90퍼센트를 차지하
는 사막 지대에는 오스만제국도 통제하지 못했던 아랍 유목민 ‘베두인’ 집단이 살아가고 있었다. 일단
압둘아지즈 앞에 놓인 숙제는 부족민에게 ‘국가’의 개념을 주입시켜 하나로 결속시키는 것이었다. 그는
국민이 생활할 수 있도록 보조금을 주고 충성심을 높이는 방법을 생각해냈지만, 그러기에는 자금이 없
었다. 어쩔 수 없이 압둘아지즈는 건국 초기에 영국과 미국에서 긴급 자금을 지원받아 나라를 유지했
으나 거기에도 한계가 있었다. 해가 갈수록 부채는 늘어갔고 만성적인 재정 적자에 허덕일 수밖에 없
었다.
그때 생각지도 못한 기적이 일어났다. 1938년 3월, 미국 카속사(California-Arabian Standard Oil
Company)가 한창 탐사 활동을 하던 사우디 동부의 담맘 7번공에서 대규모 유전이 발견된 것이다. 카
속은 미국 텍사코와 소칼의 합작 기업이자, 오늘날 사우디아라비아 국영 석유 기업인 아람코의 전신이
다. 당시 영국의 보호령 아래 있던 이라크, 이란, 쿠웨이트 등에 진출하기 어려웠던 미국은 그나마 영
국이 큰 관심을 두지 않던 사우디 땅에 진출했던 것인데 그야말로 ‘잭폿’이 터진 것이다. 이후 독일,
일본, 이탈리아 등 다른 국가들이 뒤늦게 압둘아지즈 국왕에게 잘 보이려 애를 썼지만 이미 늦었다.
1939년, 사우디는 미국 카속사에 우선권을 주었고, 카속사는 113만 제곱킬로미터에 달하는 지역을 추
가로 확보했다. 압둘아지즈 국왕은 오일머니 덕분에 계획했던 국가 사업들을 차근차근 추진해 나갈 수
있었다. 수십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사우디는 아랍 국가 중에서 대표적인 친미 국가인데, 이 둘의 관
계는 1930년대 석유로 맺어진 인연에서 시작되었다.
1973년의 추억: 2020년 가을, 샤르자대학교에서 ‘아라비아반도 역사’ 수업을 들을 때였다. 수업 시간에
무함마드 무니스 교수는 1973년의 추억을 끄집어냈다. “1973년을 기억하나? 우리 아랍인들이 똘똘 뭉
쳤던 시절이지. 20세기 초, 갑자기 유대인들이 팔레스타인 땅에 들어와 옛 조상의 땅이라며 우겼고
1949년 팔레스타인 땅 위에 이스라엘이라는 국가를 세워 버렸어. 수천 년간 그 땅에서 살아온 우리
아랍 민족들은 단합하여 수차례 이스라엘과 전쟁을 치렀어. 그러나 이스라엘 뒤에는 항상 미국이 있어
서 이길 수가 없었지. 특히 1967년에 발발한 전쟁의 결과는 아랍인들에게 참으로 치욕적이었어. 이스
라엘이 이집트의 시나이반도, 시리아의 골란고원, 요르단강 서안을 점령해 버렸으니 말이야.

그로부

터 6년이 지난 1973년 4월, 이집트 대통령 안와르 사다트가 빼앗긴 땅을 되찾기 위해 이스라엘을 상
대로 이집트 주도의 연합 공격을 구상했지. 그때 중요한 역할을 한 사람이 바로 사우디의 3대 국왕 파
이살이야. 나는 감히 그때 파이살의 결심을 ‘위대하다’고 표현하고 싶네.”
아랍인들에게 ‘1973년과 파이살 국왕’은 잊을 수 없는 역사적 키워드다. 당시 이집트 대통령 사다트는
파이살 국왕에게 이스라엘을 상대로 시리아와 함께 전쟁을 일으킬 것이라며, 같은 아랍 민족 국가로서
도와 달라고 간청했다. 그러나 이집트가 사우디에 요청한 것은 군사 지원이 아니었다. 전쟁은 이집트
와 시리아가 할 테니, 사우디는 다른 아랍 산유국을 설득해서 친이스라엘 국가들에 대해 석유 공급량
을 감축하거나 중단해 달라는 것이었다. 이스라엘을 지원하는 미국을 총으로만 상대할 수 없음을 인정
하고, 그 대신 석유를 무기로 사용하자는 발상이었다. 파이살 국왕 입장에서는 정치적, 경제적 파트너
였던 미국을 상대로 석유를 무기화하는 것은 결코 쉬운 결정이 아니었다. 그러나 파이살 국왕은 오랜
고심 끝에 결국 사다트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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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토록 매혹적인 아랍이라니

1973년 10월 6일 이집트는 계획한 대로 시리아와 협력해 이스라엘을 공격했다. 일명 ‘10월 전쟁’이라
고 불리는 제4차 중동전이 발발한 것이다. 며칠 후 사우디의 파이살 국왕은 계획했던 석유 무기화 전
략을 실행에 옮겼다. 10월 16일에는 사우디를 주축으로 중동의 산유국들이 쿠웨이트에 모였고, 아랍 5
개국(사우디, 이라크, 아랍에미리트, 카타르, 쿠웨이트)과 이란의 대표들은 매월 5퍼센트의 석유 감산
을 결정했다. 단 아랍에 우호적인 국가들은 이 결정에 영향을 받지 않는다는 조건을 두었다. 산업 발
전을 위해 석유가 절실했던 유럽, 일본, 한국 등 세계의 수많은 국가가 너나 할 것 없이 ‘친아랍 성명’
을 발표하며, 이스라엘이 1967년에 점령한 지역에서 철수할 것을 촉구했다. 아랍 국가들은 석유라는
정치적 무기를 이용해 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전 세계가 아랍의 손을 잡도록 유도한 것이다.
이로 인해 석유 가격이 급등했다. 전 세계의 소비자들은 석유 공급이 중단될 수 있다는 불안감에 석유
물량 확보에 나섰다. 산유국들은 이전에 만져 보지 못한 엄청난 돈을 쓸어 담았고, ‘아랍 부자’의 이미
지도 이때 생겨났다. 국제 유가는 1970년 1.85불에서 1973년 12월 11.65불로, 4년 사이에 거의 일곱
배가 올랐다. 한창 산업 발전에 매진하던 한국도 경제 성장률 하락과 소비자 물가 급상승에 휘청거렸
다. 특히 이스라엘 군사 지원을 감행했던 미국은 아예 석유 공급 중단이라는 직격탄을 맞아
1973~1975년 GDP(국내총생산)가 6퍼센트나 감소했다고 하니, 가히 ‘오일쇼크’라 불릴 만하다. 그러
나 나의 친구 알리는 이 표현에 대해 고개를 저었다. “아랍인의 입장에서는 쇼크가 아니라 승리였어.
아랍 세계가 이렇게 세계의 이목을 집중시키며 정치적 힘을 발휘하는 동시에 경제적 성장을 이루었던
적이 있었던가!”
‘오일승리’ 덕분에 사우디아라비아는 1972년 97억 달러였던 GDP를 1981년 무려 1843억 달러로 약
스무 배가량 끌어올렸다. 파이살 국왕의 과감한 결단으로 사우디아라비아는 약 10년 사이에 중동 최고
의 부자 나라로 등극하게 됐다. 오일쇼크로 산유국들의 힘은 막강해졌고, 영미계 석유 기업들은 상대
적으로 입지가 좁아졌다. 한때 세계 석유 가격을 일방적으로 결정하는 위치에 서 있던 그들이었으나
시대의 흐름에 따를 수밖에 없었다. 석유가 매장된 땅의 주인들은 석유 수익 중 서구 기업의 몫을 점
차 줄여 나갔다. 사우디아라비아 정부도 정치적 영향력과 경제력 상승에 탄력을 받아 1974년 6월, 미
국 소칼이 소유하고 있던 사우디 석유 기업 아람코의 지분 중 60퍼센트를 취득했고, 1980년에는 나머
지 지분 40퍼센트도 사들여 아람코를 100퍼센트 사우디 왕실 소유로 만들었다. 오늘날에도 국영 석유
회사 아람코는 사우디 GDP의 70퍼센트를 차지하며 사우디 경제의 주축이 되고 있다.
석유는 축복일까 저주일까: 석유를 통해 벌어들이는 돈은 노동을 통해 벌어들인 돈과 다르다. 노력 없
이 저절로 생긴 돈이라고 봐도 무방하다. 국가를 하나의 개체로 본다면 석유 수익은 한마디로 ‘불로소
득’인 것이다. 국가로서는 석유 하나로 천문학적인 돈이 저절로 들어오니 굳이 국민이 내는 세금에 의
지하지 않아도 되고, 국민으로서는 내가 번 피 같은 돈을 정부에 갖다 바치지 않아도 되니 얼마나 좋
은가? 이에 더해 국가는 남아도는 돈으로 국민에게 각종 보조금과 사회보장제도를 제공할 수 있으니
국민은 국가를 향해 불만을 품지 않는다.
사우디 재정 수익의 80퍼센트 이상이 석유 판매 수익이다. 그러나 석유 산업에 관여하는 사우디 노동
력은 10퍼센트도 되지 않는다. 나머지 사람들은 무엇을 하는 것일까? 거대화된 국가는 각종 공공 부문
에서 국민이 일할 수 있는 자리를 마련했고, 국민은 그 자리를 하나씩 꿰차고 앉아 국가의 부를 창출
하는 데 큰 기여를 하지 못하는 수동적인 노동자가 되었다. 이러한 사회적 현상이 산유국에 사는 사람
들 개개인에게 숨어 있던 게으른 본성을 자극한 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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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토록 매혹적인 아랍이라니

물론 사우디 정부도 이를 해결하기 위해 노력을 해 왔다. 특히 정부나 공공기관의 일자리가 부족해지
자 1985년부터 ‘사우디화 Saudization’라는 자국민 의무 고용 정책을 시행해 왔다. 사우디에 외국 회
사를 설립할 경우 전체 인원의 10퍼센트에서 많게는 60퍼센트 이상을 사우디 자국민으로 채워야 한다.
사우디의 실업률을 낮추는 동시에 자국민이 외국 기업으로부터 기술력을 전수받을 수 있는 묘수를 짜
낸 것이다. 말은 그럴듯했지만, 기대했던 효과는 돌아오지 않았다. 절실함을 가지고 구한 것이 아니라
아무 노력 없이 주어진 것이기 때문에 더욱 그럴 것이다. 어쩌면 석유라는 자원이 절실함에서 비롯되
는 ‘헝그리 정신’을 말살시켰기 때문은 아닐까?
석유가 축복이 될 기회는 오는가: 14세기 아랍 역사학자 이븐 칼둔은 한 국가나 문명을 일으켜 세운
가문은 보통 1대에서 시작되어 4대에서 종말에 이른다고 보았다. 특히 3대부터는 경험이 아닌 학습을
통해 전 세대의 것들을 모방하기 때문에 이전 세대에 비해 뒤처진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다. 2017년 무
함마드 빈 살만 왕세자가 사우디아라비아 왕국의 왕세자로 책봉되었다. 사우드 가문 1대와 2대를 지나
드디어 3대 통치 시대가 열린 것이다. 수백 년 전 이븐 칼둔이 당부했던 말을 새겨들은 것일까? 왕세
자는 과거의 국왕들을 모방하지 않고 급변하는 세계의 흐름에 맞추기 위해 노력하는 듯 보인다. 2016
년에 왕세자가 발표한 ‘사우디 비전 2030’을 보면, 지난 5년간 이루지 못한 경제 다각화를 성공시켜
미래에 사우디 국민이 석유 없이도 행복한 삶을 누릴 수 있게 하겠다는 큰 포부가 담겨 있다. 특히 4
차 산업혁명 시대를 따라잡기 위해 IT, 신재생에너지, 인공지능 같은 첨단 과학기술 기반 산업을 육성
하고 있다.
하지만 이러한 행보를 조금만 더 빨리 시작했다면 어땠을까 하는 아쉬움이 있긴 하다. 비전 2030을
추진하기 위한 자금의 원천은 결국 석유 수익인데, 이미 유가는 2014년에 정점을 찍은 후 미국의 셰
일오일 공급 과다로 인해 곤두박질치고 있다. 게다가 코로나19 팬데믹으로 수요가 줄어들면서 유가는
더욱 하락하고 있고, 온실가스 감축 등 환경 규제가 심화되면서 세계 각국이 태양광, 풍력 등 신재생
에너지 개발에 열을 올리면서 화석연료에서 신재생에너지로 시장의 중심축이 이동하고 있는 것이다.
어쩌면 비전 2030은 사우디에게 마지막 남은 기회일지도 모른다. 나는 최근 몇 년간 비전 2030을 중
심으로 변화되고 있는 사우디의 모습에 큰 기대를 걸고 있다. 내가 아랍인들을 좋아하고 역사를 통해
사우디 선조들이 보여 준 용감함과 호전적인 기질에 반했기 때문일까? 그래도 확실히 말할 수 있는 것
은 현재 사우디 정부의 새로운 정책들이 적어도 과거를 답습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창조 정신을 기반
으로 한 개방적이고 진취적인 새로운 사우디가 성공적으로 탄생하기를 소망한다.

이라크
아라비안나이트의 도시, 바그다드
2012년 주이라크 한국대사관에서 근무할 때, 매일 아침 클래식 음악을 들으며 하루를 시작했다. 테러,
극심한 경제 불황 등 이라크의 암울한 환경 때문에 삭막해진 나의 마음을 달래는 시간이었다. 특히 <
셰에라자드 Scheherazade>라는 곡을 들을 때면 잠시 현실을 잊어버리고 찬란한 이슬람 문명이 꽃피
던 중세의 바그다드를 머릿속에 그렸다. 러시아인 니콜라이 림스키 코르사코프가 작곡한 <셰에라자드
>는 아랍의 고전 ‘천일야화’중 일부 이야기를 음악으로 만든 것이다. <셰에라자드>의 제4악장 ‘바그다
드의 축제’를 듣고 있노라면, 바그다드 땅에 묻혀 있던 과거의 영광이 다시 세상으로 올라와 내 사무실
을 가득 채우는 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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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토록 매혹적인 아랍이라니

아라비안나이트에 등장하는 바그다드: 천일야화는 우리에게는 18세기에 영어로 번역된 《아라비안나이
트》로 더욱 친숙하다. 세계의 설화 문학 사상 가장 큰 반향을 일으킨 작품이기도 하다. 천일야화에는
샤리야라는 페르시아 왕이 등장한다. 왕비의 부정을 목격한 그는 큰 배신감을 느끼고 모든 여성을 불
신하게 되어 급기야 여성 혐오증에 빠지고 만다. 분노에 찬 그는 매일 새 처녀를 맞이하고 이튿날 죽
이는 끔찍한 일을 반복한다. 그러던 어느 날 이를 보다 못한 재상의 딸 셰에라자드가 자진하여 왕의
침실로 들어가게 된다. 그는 죽음에서 벗어나기 위해 매일 밤 왕에게 재미있는 이야기들을 들려준다.
왕은 셰에라자드가 들려주는 이야기를 1001일 동안 듣고 나서 여성 혐오증과 그것에서 비롯된 악벽을
고치고 그녀와 혼인하기에 이른다.
천일야화는 고대 페르시아(이란), 아랍, 인도, 그리스, 이집트 등 여러 지역을 거쳐 이야기가 전해지면
서 변형과 추가 작업이 이어졌다. 15세기에야 완성된 이 작품은 작자 미상으로 남아 있다. 천일야화는
가공의 세계와 실재의 세계, 역사 속 실존 인물과 가공의 인물이 뒤섞인 구성을 보여 준다. 실존 인물
중 천일야화에서 가장 자주 등장하는 사람은 이슬람 아바스 왕조 제5대 칼리파 하룬 알라시드(재위
786~809)이며 그가 통치했던 바그다드가 배경이 되는 이야기가 다수 등장한다.
중세의 뉴욕, 바그다드: 하룬 알라시드가 다스렸던 아바스 왕조는 어떠한 제국이었을까? 570년 이슬람
의 선지자 무함마드가 태어났다. 어린 나이에 부모를 여의고 그의 숙부 아바스가 대신 무함마드를 도
맡아 키우게 되었는데, 숙부 아바스의 후손들이 세운 왕조가 바로 아바스 왕조다. 750년, 아바스 가문
을 이어 온 자손들은 이라크 중부 ‘쿠파’ 지역을 점령하고 이 지역을 중심으로 아바스 왕조
(750~1258)를 세웠다. 이후 이들은 광대한 이슬람제국을 약 500년간 다스리게 된다.
아바스 왕조 초기의 수도는 다수의 시아 주민들이 살고 있는 쿠파 지역이었다. 그러나 제2대 칼리파
알만수로는 새로운 수도를 물색하던 중 티그리스강 유역의 작은 마을을 눈여겨보게 되었다. 이곳은 모
기로 인한 전염병이 없고, 온화한 겨울과 시원한 여름밤을 즐길 수 있으며 물이 풍부하고 육상 무역과
해상 무역이 가능한 교통의 요지였다. 알만수르는 이곳을 제국 최고의 전략적 도시로 키울 수 있을 것
이라 확신하고 천도를 추진했는데, 그곳이 바로 바그다드다. 그는 중동 각지의 기술자, 측량기사, 구조
공학자 등을 포함해 약 10만 명의 인력을 끌어 모아 수년에 걸쳐 새로운 도시를 건설했다.
766년, 지름 약 3.2킬로미터에 달하는 원형의 요새 도시 바그다드가 완성됐다. 도시를 둘러싼 성곽만
해도 외벽, 중간벽, 내벽 삼중으로 구성되어 높이가 34미터나 되었다. 바그다드의 원형 도시는 물이
가득 찬 해자가 외벽 바깥쪽을 둘러싸고 있어 일반인의 성곽 접근이 어려웠다. 네 개의 묵직한 거대
철문을 통해서만 드나들 수 있었다. 각각의 문은 다마스쿠스, 바스라, 쿠파, 코라산 문이라고 명명되었
는데, 문을 통해 나간 방향으로 계속 가면 도달할 수 있는 지역의 이름을 붙인 것이었다. 사방으로 뚫
린 이 네 개의 문을 통해 바그다드는 전 세계 사람들과 교류하며 ‘세계화’를 실현했다.
도시의 중앙에는 칼리파의 왕궁이, 그 옆에는 대사원이 있었고, 도시 내에는 칼리파와 관료 외에 약
4000명의 병사가 거주했다. 한편 막대한 세금이 모이는 바그다드에는 상인, 직공 등 서민이 성 외각에
모여들어 시장과 거주지를 조성함에 따라 활기찬 상업 지구가 생겨났다. 또한 바그다드는 이슬람, 기
독교, 힌두교, 조로아스터교 등 종교를 막론하고 전 세계인을 환영했기에 멀리 인도와 스페인에서도
사람들이 찾아와 살기 시작했다. 바그다드는 원형 도시에만 머물지 않고 계속 확장되어 마침내 인구
150만 명의 바닷길과 비단길로 연결되는 유라시아의 경제 중심지가 되었다. 바그다드의 찬란함은 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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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토록 매혹적인 아랍이라니

시 좁고 지저분한 도로가 미로처럼 형성되어 있던 런던이나 파리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였다. 산업
혁명 이전 세계의 최대 도시였던 바그다드는 한마디로 ‘중세의 뉴욕’이었다.
하룬 라시드와 아라비안나이트: 알만수르가 바그다드라는 하드웨어를 갖춰 놓자 그 이후의 칼리파들은
소프트웨어를 채워 넣기 시작했다. 특히 바그다드의 번영은 아바스 왕조 5대 칼리파 하룬 알라시드 시
대에 최고조에 달하여 동로마제국의 콘스탄티노플을 뛰어넘는 세계 최대의 도시가 되었다. 하룬 알라
시드는 정치적, 경제적인 업적도 이뤘지만, 무엇보다 학문과 예술을 장려하여 문학, 철학, 시, 수학,
천문학, 의학 등을 발전시켰다. 특히 인도와 페르시아를 거쳐 바그다드로 넘어 온 설화 모음집에 자신
이 등장하는 이야기들을 추가하여 이를 아랍어로 번역했다. 이것이 훗날 천일야화의 초안이 된다. 오
늘날 많은 이슬람 역사가가 그를 ‘문화 군주’라 일컫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천일야화는 국제 무역 도시로서 바그다드의 면모도 잘 보여 준다. 천일야화 스토리 중 <신드바드의 모
험>이 대표적이다. 이 이야기의 배경 역시 하룬 알라시드 시대인데, 신드바드는 바그다드 남부를 통해
바스라 항구까지 나아가 인도양, 벵골만, 세일론 섬 등을 일곱 번이나 항해하며 막대한 부를 얻는다.
실제로 당시 이라크 상인들은 ‘다우선’이라는 범선을 이용해 남부 바스라 항구를 통한 바닷길을 이용했
고 이들의 활발한 해상 무역 덕분에 이슬람제국의 인도양 향로가 융성했다. 지금도 바스라는 이라크
제3도시이자 최대 항구 도시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아바스 왕조의 영광도 서서히 사라지고 만다. 13세기 즈음 몽골제국 칭기즈칸
의 손자인 훌라구가 10만 대군을 이끌고 페르시아를 단번에 쓸어버린 후 바그다드로 진격했다. 1258
년 1월, 몽골군은 바그다드에서 칼리파군을 물리치고 40일간 약탈, 방화, 살육을 저지르며 바그다드를
쑥대밭으로 만들었다. 이후 이슬람 세계의 중심축은 카이로와 이스탄불로 옮겨 갔다. 바그다드는 옛
영광의 빛을 잃은 채 평범한 도시로 남게 됐다. 오늘날 이라크인들은 각종 테러와 경제 위기로 인해
혹독한 삶을 이어 가고 있다. 하지만 바그다드를 생각하면 여전히 천일야화 땅, 신비한 이야기로 가득
찬 도시가 떠오른다. 부디 과거의 번영이 그 땅에 다시 찾아오기를 바랄 뿐이다.

아랍에미리트 연합
두바이 사막 위에 그린 상상화
중동의 맨해튼 두바이: 100년 전만 해도 아랍에미리트의 선조들은 작은 어촌 마을이나 사막 오아시스
주변에 모여 부족 단위로 살아갔다. 국토 면적의 ‘99퍼센트’가 사막 지대인 아랍에미리트에서는 대추
야자 농사, 진주 잡이, 소규모 어업 외에는 할 수 있는 산업이 없었다. 그러던 1950년 아부다비에서
처음으로 석유가 발견되었다. 1971년 아부다비, 두바이 등 일곱 토후국이 모여 국가를 설립했고 이후
50년 만에 세계적인 석유 부국으로 변모했다. 특히 21세기 중동의 허브로 불리는 도시 두바이는 화려
한 건축물들을 통해 지난 50년간의 기적을 형상화하여 보여 준다. 차를 타고 두바이 도심 속을 달리면
개성이 넘치는 각양각색의 건축물들을 볼 수 있는데, 뉴욕의 맨해튼이 떠오를 만큼 화려하다. 옆의 건
물들이나 주변 지역과 외관적인 통일성을 이루지 않아 오히려 더 유쾌하고 역동적인 느낌이다.
세계에서 가장 높은 빌딩, 부르즈칼리파도 이러한 자유로운 아이디어의 산물이다. 바로 옆에는 세계
최대 쇼핑몰인 두바이몰이 있고 그 앞에서는 최대 150미터까지 치솟는 분수 쇼를 볼 수 있다. 이 세
가지가 창출하는 경제적 시너지 효과는 실로 엄청나다. 높이가 825미터에 달하는 부르즈칼리파의 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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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토록 매혹적인 아랍이라니

벽에는 거대한 LED 스크린이 설치되어 있다. 중요한 이벤트가 있을 때마다 건물 외벽 스크린을 통해
영상과 메시지를 보여 준다. 2020년에는 한국과 아랍에미리트의 수교 40주년을 기념하여 휘날리는 태
극기의 모습이 외벽을 가득 채웠다. 2020년 12월 30일에는 방탄소년단의 멤버 뷔의 생일 축하 영상이
3분간 방영되어 케이팝의 위상이 어느 정도인지 실감했다.
아랍어와 건축물의 조화: 두바이 시티워크 지역에는 아랍어의 멋과 현대 건축미를 융합한 예술 작품이
있다. 인공 열대우림 식물관, 그린플래닛이다. 기하학적 미가 돋보이는 구조물 전면에 튀니지 프랑스
계 문자 예술가 엘씨드가 힘 있는 필체로 아랍어를 그려 넣었다. 곡선으로 표현된 아랍어 글자들이 서
로 얽힌 듯하면서도 균형미가 있어 엘씨드만의 에술 감각이 돋보인다. 특히 해 질 녘이 되면 벽면이
은색 빛을 발광하는데 이로 인한 빛의 산란 때문에 글자들이 떠올라 춤을 추는 것처럼 보인다. 벽면에
새겨진 아랍어는 두바이 통치자 셰이크 무함마드 빈 라시드 알막툼이 지은 <긍정의 에너지>라는 아랍
시다. 거리를 지나치는 수많은 사람이 벽면에 새겨진 시를 보고 밝은 미래를 꿈꿨으면 하는 통치자의
바람이 담긴 게 아닐까.
전통이 형상화된 건축물: 오늘날 아랍에미리트 국민은 과거에 선조들이 겪었던 힘겨운 삶과 희생을 기
억하며 살아간다. 각 토후국의 통치자들도 국민을 향해 “옛 선조의 고난과 역경이 있었기 때문에 지금
의 우리가 존재할 수 있는 것”이라며 부단히 역사를 상기시킨다. 그러나 정작 이들에게는 선조들을 기
억할 만한 유형 문화재가 거의 남아 있지 않다. 실제로 에미리트인들이 조상으로부터 물려받은 것은
‘고난의 삶을 통한 인내와 끈기’라는 정서적 유산뿐이다. 어떻게 하면 과거를 잊지 않고 살아갈 것인
가? 이를 위해 두바이의 통치자 셰이크 무함마드가 혁신적인 아이디어를 냈다. 무형의 자산을 형상화
해 현대 건축물에 반영하는 것이다.
첫 번째 상징물은 다우선이었다. 과거 아랍에미리트 지역에서는 수많은 사람이 바닷속 진주를 찾다가
목숨을 잃었다. 바람을 이용하는 아랍 범선인 다우선은 부족과 가족을 먹여 살리기 위해 죽음도 마다
하지 않았던 선조들의 희생정신을 그대로 나타내 주는 상징물이다. 두바이 하면 떠올리는 대표적인 건
축물인 부르즈 알아랍은 세계에서 유일한 7성급 초호화 호텔이다. 총 15억 달러가 투입되어 1999년에
완공된 부르즈 알아랍은 페르시아만 해안으로부터 280미터 떨어진 인공 섬 위에 위치해 있다. 건축가
톰 라이트는 아랍 전통 범선인 다우선의 모습을 본 떠 이 건물을 설계했다. 겉으로 보기엔 첨단 기술
적인 세련미를 과시하고 있지만 역사를 알고 바라보면 아랍에미리트 선조들이 지녔던 희생정신과 과거
에 대한 노스탤지어의 메시지를 읽을 수 있다.
두 번째로 건설한 상징물은 선조들에게 일용할 양식이 되어준 대추야자 나무다. 2001년 6월, 두바이
앞바다 해저면에 엄청난 양의 암석과 모래가 쏟아졌다. 해안을 간척해 총면적 560만제곱미터에 달하
는 인공 섬, 팜주메이라 Palm Jumeirah를 조성하기 위해서였다. 건축에 사용된 암석과 모래로 높이 2
미터 두께 0.5미터의 벽을 쌓으면 지구를 세 바퀴나 돌 수 있을 정도라고 한다. 마침내 완성된 팜주메
이라를 상공에서 내려다본 사진을 보고 전 세계 사람들은 감탄했다. 마치 대추야자 나무가 바다 위에
떠 있는 듯한 팜주메이라를 보면 과거 아랍에미리트의 정체성과 오늘날 아랍에미리트의 발전을 한눈에
느낄 수 있다.
과거-현재-미래가 소통하는 모뉴먼트: 2013년 두바이 시내 한복판에 사각형의 건축물이 지어지기 시
작했다. 2017년 구시가지와 신시가지 경계선에 모습을 드러낸 것은 세로 150미터, 가로 105미터의 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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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토록 매혹적인 아랍이라니

바이 프레임 Dubai Frame이라는 ‘대형 액자’였다. 두바이 프레임은 사람이 직접 액자 안으로 들어가
엘리베이터를 타고 정상으로 올라가면 통유리로 된 전망대가 나오는 획기적인 예술 작품이다. 전망대
에서 북쪽을 바라보면 두바이의 옛 모습을 간직한 구시가지가 보인다. 몸을 180도 돌려 남쪽을 바라보
면 초현대식 건물들이 즐비하게 서 있는 신시가지가 눈에 들어온다. 하나의 액자로 두 가지 그림을 감
상할 수 있다.
두바이 정부는 남쪽 액자 속에 더 나은 미래 도시 풍경을 담기 위해서 그림을 채워 나가고 있다. 그
계획의 일환으로 최남단에 위치한 도시 제벨 알리에서는 2021년 10월에 개최 예정인 엑스포 준비가
한창이다. 영국인 건축가 아시프 칸이 이슬람 전통 건축 양식인 마슈라비야(아랍 전통 양식의 격자무
늬 목조 창살)에서 영감을 받아 초경량 탄소섬유로 지은 21미터 높이의 대형 격자형 문이 특히 볼거리
다. 하늘에 그림을 그린 듯한 이 문의 초현실적 이미지에 걸맞게 엑스포 현장의 건축물의 대부분은 미
래 지향적인 분위기를 풍긴다. 이것들이 10월 엑스포에 방문한 사람들에게 풍부한 영감을 제공해 줄
것이다.
반면 북쪽 두바이의 옛 모습은 앞으로도 고이 간직될 예정이다. 100년 전 선조들의 삶의 향기를 머금
고 있는 민속 마을 바스타키아의 미로 같은 골목, 1799년에 건설되어 두바이 통치자의 궁전으로 사용
되었던 알파히디 요새와 그 지하에서 볼 수 있는 역사 전시장, 바닷물이 유입되어 형성된 운하 두바이
크릭과 그 위를 떠다니며 인도, 아프리카와의 교역에서 큰 역할을 했던 다우선과 작은 배 아브라 Abra,
두바이 크릭을 끼고 형성된 데이라 Deira 지역의 금 시장과 향료 시장까지 …. 두바이 통치자 셰이크
무함마드는 이런 과거의 유산과 전통이야말로 아랍에미리트의 정체성을 완성 시켜 주며 두바이 미래
비전의 밑거름이 되는 정신적 유산이라고 믿고 있다. 이것이 그가 도시 한복판에 두바이 프레임을 세
운 이유가 아닐까? 한 국가의 정체성과 비전은 과거, 현재, 미래의 끊임없는 대화를 통해 발현되는 것
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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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토록 매혹적인 아랍이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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